0001 / 0192 ---------------------------------------------- 프롤로그 *** 나는 중, 고등학교시절 왕따를 당했다. 집단폭행을 당하거나 강제 성추행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나를 싫어했었다. 그 때,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나는 공부도 제법 잘하는 편이었고 성격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고 생각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참 늦게도 알았다. "아. 김수희? 걔 꼬리치기 전문이잖아." "맞아. 어우 재수 없어 진짜." 대학교에 들어와서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동기들이 나누던 대화를 몰래 엿들었을 때의 그 참담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난 억울하다. 그 때까지만해도 난 모태솔로였다. 아아, 안 돼. 이런 걸 변명이랍시고 하다니. 슬프다. 어쨌든 다른 여자들이 보기에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꼬리가 백만 개쯤 달린 여우라고 했다. 23살때까지는 내가 그런 줄도 몰랐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의도하지 않았었는데 경제력을 갖춘 남자들이 접근해왔다. 사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명품 백을 사다준다거나 필요한 화장품을 사준다거나.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거부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 수록 오히려 그런 걸 즐기게 됐던 것 같다. 내 대학시절 동기들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어쩌면 꼬리가 백만 개쯤 달린 불여시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6살이 되고나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마도 진수를 만나게 되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사람은 돈도 없고 딱히 잘생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건 확실했다.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행복해 죽을 것 같지는 않았어도 언제나 편안하고 좋았다. 그의 품에 안겨있을 때는 참으로 즐거웠던 것 같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대쉬를 받고 선물공세를 받을 때보다, 단칸방에서 그와 함께 오손도손 밥을 먹는 게 더 좋았다. 나는 26살부터 27살 그 무렵의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날. 내 인생이 망가졌다. 과거에 나를 좋아한다고, 심지어 사랑한다고 병적으로 쫓아다녔던 남자가 나를 찔렀다. 가질 수 없으면 같이 죽잔다. 내가 들었던 말은 그 말 밖에 없었다. 으슥한 밤거리였고 뭔가 날카롭고 뾰족하며 차가운 것이 나를 찔렀다. 한 번이 아니었다. 아팠다. 흐흐흐, 하는 기분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끈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해. 너를 사랑한다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네가 나쁜 거야. 날 허락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남자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온 몸에 힘이 풀렸다. '안 돼...'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싫어...' 나는 살고 싶었다. 아까 진수가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 오늘 일찍 퇴근해서 된장찌개 끓여놨어. 얼른 와. 보고 싶어. 진수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나는 그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 한 마디 해야만 했다. '살고... 싶어.' 나는 아직 진수에게 사랑한다고 단 한번도 말해준 적이 없다. 진수가 눈에 아른 거렸다. 사실 그렇게까지 사랑한다고 느끼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이 오니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차가운 날붙이가 내게 선사하는 뜨거운 고통보다 진수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그 허무함과 절망감이 날 더 아프게 했다. 아팠다. 남자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사랑해."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나는 죽는다. 그건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는 하고 싶었다. 나를 찌른 남자를 향한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 대신, 또 비명을 지르는 대신 다른 한마디를 겨우 꺼냈다. "진수야 사..." 그 이후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정말로 잠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죽지 않은 것 같다. 저 높이 보이는 천장. 아마도 최신식이라 짐작되는 간접 LED등. 뉴에이지풍의 따뜻한 멜로디의 선율.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 코 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수 냄새. 다 좋다.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 집이 아니잖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납치를 당한 것 같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소리를 빽 질렀다. "으애앵! 응애애! 응애!" 뭐야. 이거. 말이... 안 나와. 멍해졌다. 말도 안 나온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됐다. 믿을 수 없다. 이건 꿈이다. 눈을 꾹 감아봤다. 그리고 다시 떴다. 여전히 꿈이다. 손을 꼬집어 봤... '손이 잘 안 움직여.' 손이 잘 안 움직였다.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아기가 되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계집아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도록 해라." 그 당시엔 몰랐는데 저 인간이 내 아버지란다. ============================ 작품 후기 ============================ 본격 극 남존여비에서 살아남기 나아가 세상 바꾸기 나아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기. 로맨스 판타지라 쓰고 생존물이라 읽는 정체 불명의 모호한 로맨스 판타지. 시작합니다. 0002 / 0192 ---------------------------------------------- 정말 이상한 세계와 그보다 더 이상한 오빠라는 꼬맹이들 *** "또 계집아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도록 해라."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약 3일 정도가 지났다. 나는 아마도 요람이라 짐작되는 곳에 누운 채 3일을 보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만 하면 응애! 응애! 하고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아예 입을 꼭 다물었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병원을 데려 가봐야 하는 것 아니겠냐면서 호들갑을 떨어서 이제 가끔씩 때 되면 울어준다. 이제 난 나를 안다. '나는 환생비스끄리무리한 걸 했고 갓 태어난 아가다.'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다 있나 싶다. 그런데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나의 엄마라는 사람과 언니라는 사람을 봤다. 거울을 본 적은 없지만 똘망똘망하다느니 귀엽다느니하는 말은 몇 번 들었다. 한국어는 아니었다. 한국어가 아닌 건 알겠는데 무슨 뜻인지는 자연스레 알게 됐다. 하기야 다시 태어난 마당에 뭐가 일어난들 이상하지 않겠어. 다시 며칠이 지났다. 나는 현실에 순응했다. 차라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가라서 다행이다. 살해당한 충격에 이어 이런 일이 벌어졌다. 만약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이었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라는 사람이 내 옆에 앉았다. "네가 사내아이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봐요. 어머니가 될 것 같으신 분. 저는 엄연히 여자아이... 는 아닌가. 속이야 어찌됐든 여자아이가 맞습니다만. 며칠간 푹신하고 보드라운 비단요람에 싸인 상태로 바깥을 관찰한 결과, 이 세상은 평범한 세상은 아니었다. 있을 건 다 있다.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하여튼 집안에 있는 건 지구와 비슷했다. 좋다. 생활환경은 익숙하니까. 환생을 했는데 여기가 아니라 저기 중세 시대의 어디로 떨어지면 정말 답 없었을 거다. 엄청나게 비위생적이었을 거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똥...아니. 볼 일을 치르는 건 일상다반사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TV 와 컴퓨터가 없는 세상은 절망이다. 또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아버지라는 인간을 한 번 더 봤다. 어린 아이의 뇌를 갖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기억력이 매우 나빠졌다. 하지만 그 인간의 얼굴은 뇌리에 또렷하게 박혔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일단 잘생겼다. 앞머리를 세워올린 짧은 스포츠형 머리카락. 이마가 훤히 드러났는데 그 이마마저 잘생겼다. 일자의 짙은 눈썹. 무심한 듯 나를 내려다보는 시크한 검은 눈동자. 오똑한 코. 건강함이 감도는 붉은 입술에 종이를 데면 베어버릴 듯한 날렵한 턱...아니. 그냥 잘생겼다. 잘생겼다라는 말을 몇 번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잘생겼다. 그런데 잘생긴 건 잘생긴 건데 매우 개차반이다. "죄송한 줄 알면, 다음번엔 사내아이를 낳도록 노력해라." 저게 말이야 막걸리야. 날 낳은 게 죄송해? 어째서? 나는 외치고 싶었다. '왜 때문이죠?' 하지만 그 말은 안나오고 응애애! 하는 가여운 울음소리만 나왔다. "시끄럽군. 계집아이는 이래서 문제야." 아뇨. 저기요. 제가 조카 키워봐서 아는데요. 남자애든 여자애든 애기 땐 다 울거든요? 그리고 울면 시끄럽거든요? 그리고 나는 상황봐서 좀 울어줘야겠다 싶을때만 울거든요? 아 겁나 억울해. 억울해졌다. 나는 아주 어쩌다가 한 번씩, 그 인간의 얼굴을 봤다. 언제나 시크하고 도도하게 나를 내려다 보는 그 아버지란 작자는 정말... 잘생겼다.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해야만 했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비록 아직 걸음마도 못 뗐지만 나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것도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괴상한 곳 이었다. 이 때까지만해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설사 이유를 알았다 하더라도 21세기를 살아온 내게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곳인건 확실했다. 하기야, 21세기 지구에도 남존여비 사상으로 점철된 나라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아랍권 국가만 하더라도 아버지나 오빠에 의한 딸 혹은 여동생 명예살인이 정당화되며 일부 다처제가 허용되는 국가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는 그보다 더 심하단다.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주님. 맘마 드실 시간이에요." 내가 살던 시대와 아주 비슷하긴 한데, 여기엔 대통령이 아니라 왕이 있단다. 왕도 있고 제국도 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나의 아버지란 사람이 왕이란다. 그것도 성군. 나라를 엄청나게 잘 다스리고 있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나는 공주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거다. 그냥 표면적으로만 놓고 보면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게 맞다. "수진. 나랑 놀아줘!" 젠장. 저 목소리. 또 들려온다. "네. 왕자님." 나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아니면 내 손에 쥐어주기라도 하든가. 나를 담당하는 가사 도우미 수진은 나를 그냥 버려뒀다. 왜냐하면 왕자님이 놀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서러워서 진짜. 인간적으로 밥은 줘야 할 거 아냐?' 공주의 처절한 배고픔 보다는 왕자의 심심함을 달래주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딸 바보? 여동생 바보?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 어머니란 사람이 푸념처럼 중얼거린 말에 의하면, 여성은 남성의 씨를 받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단다.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여긴 한국이 아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 여기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내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곳이다. 과학기술도 굉장히 많이 발달한 곳인 것 같고 전쟁도 없는 것 같다. 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해있는지 알 수가 없다. 보통 배불러지고 인구 많아지고 잘살게 되면 여성의 인권이 높아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니었던가. '치사하고 더러운 세상!' 지금 당장 무슨 힘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실현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일단 둘째 문제로 하고서 말이다. 나는 일명 '맘마'가 담긴 젖병을 쳐다봤다. '내가 치사하고 더러워서 여기 바꾸고 만다!'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절대 배고파서 이런 결심한 거 아니다. *** 아마도 나의 이복 오빠 중 한명이라는 꼬맹이자식이 말했다. "내 말 안 들을 거야? 감옥 가고 싶어?" 물론 나한테 말한 건 아니고 나를 돌봐주는 가사 도우미 수진에게 한 말이다. 수진은 동네 북이다. 내게는 이복오빠가 3명이 있단다. 그 중 둘째와 셋째는 진짜 망나니다. 내가 배고픈 건 상관 않고 시시때때로 찾아와 수진에게 놀아달라고 졸라댔다. 둘째인 김환석은 올해로 5살. 셋째인 김환성은 올해로 4살이란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갔다. 김환성은 그래도 내게 상당히 호의를 보이는 오빠라는 꼬맹이다. "형! 얘 봐! 지렁이처럼 꿈틀 대!" "못생긴 달팽이다!" 두 꼬맹이는 낄낄대고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지만 못 알아 들은 척 하고 방긋방긋 웃었다. 나는 내 위치와 처지를 안다. 여긴 남존여비의 세상이다. 신분제도 있다. 공주여도 얄짤 없다. 오빠한텐 까불면 안 된다. 까르르- 웃었다. "형! 얘 웃어! 귀엽다!" 그 때, 둘째인 김환석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따위한테 귀엽다라는 말 쓰는 거 아니야. 버릇 나빠져." 빠직. 만약 내 이마에 힘줄이 있다면 튀어나왔을 거다. 여자 따위라니. 그리고 성별을 불문하고 아기는 귀엽지 않은가. 김환석의 엄한 목소리에 김환성은 수긍했다. "아 맞다. 미안 형아." 이딴 것에 순순히 순응하지 말란 말이다. 그래도 난 방긋방긋 웃었다. 꺄르르- 웃음도 토해줬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겨우 26살의 어린 아가다. 아주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 받을 수 있다. 첫째 타겟은 김환석이다. 열심히 엉금엉금 기었다. 김환성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중 하나, 김환성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빨간색 스포츠카 모형을 집어들었다. 어후, 무거워. 뭐가 이렇게 크고 무겁냐.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또 열심히 엉금엉금 기어서 김환성에게 전해줬다. 꺄르르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야, 형. 얘 근데. 귀...는 아니고 그러니까 좀 뭐라 그래야 돼? 강아지 같아." "그럴 땐 개라고 하는 거야." 그딴 못된 거 가르치지 마라. 강아지 같다와 개같다는 어감이 분명 다르다고! 아니 그건 틀린 거야! 어쨌든 나는 비록 걸음마도 못하는 핏덩이 아가지만 얘들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 형인 김환석이 자기 옷으로 내가 김환성에게 전해준 장난감을 슥슥- 닦았다. "여자는 천박해. 병균 옮아." 죽여...가 아니라. 크흠,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나 깨끗하다고. 엉엉. 내가 서러워도 얘네 내 편으로 만들고 만다. 황당한 건, "형아는 천재야." 라면서 김환성이 감탄하고 있다는 거다. 한숨만 나온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걸음마까진 힘들고 이제 갓 일어서게 되었을 무렵. 나는 아버지란 인간과 처음으로 마주보게 됐다. *** 아버지란 작자가 말했다. "일찍 걷기 시작하는 군." 좋아. 내게 관심을 가졌어. 나는 최대한 이쁘게 웃어 보였다. 꺄르르-하고 내가 의도한 건 아닌데 내가 들어도 귀여운 소리가 튀어 나왔다. 나의 어머니라는 강서영씨가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참 의젓해요." "그래봐야 계집아이일 뿐이지." 좋아. 아버지 당신. 잘생겨서 봐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선을 넘었어. 이제부터 당신의 호칭은 개차반이다. "예하흐안! (개차반!)"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일어섰다가 넘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아버지란 작자를 향해 걸어갔다. "당신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빠를 알아 보나봐요." 풀썩. 넘어졌다. 어이씨, 이제 슬슬 무릎이 쑤셔오네. 또 일어섰다가 풀썩. 다시 풀썩. 7번 정도 넘어졌을 때 나는 개차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예하흐안! (개차반!)" 말로는 욕하고 행동으론 사랑을 표현했다. 개차반의 다리에 매달려 꺄르르 웃었다. 비웃으면 안 된다. 생존본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정말 그런지는 좀 더 확인을 해봐야 겠지만 일단 분위기로 보아,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가 '죽어'라고 말하면 죽어야 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 남자들 중에서도 정점이라는 왕이었고. 잘못 걸리면 죽는 건 일도 아니다. 21세기 한국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여튼 여긴 그랬다. 개차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말했다. "오늘은 사내아이를 잉태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그 말에, 우리의 강서영씨는 활짝 웃었다. 마치 성은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네! 저 꼭 노력할게요." 노력은 개뿔. 그게 어디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냐! 여기 과학도 발달한 것 같은데 왜! 왜 이따위야. 순간 화가 치솟았지만 나는 내 처지를 안다. 나는 온 몸으로 애교를 방출했다.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일어서있거나 넘어지는 거나 자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나는 머릿속으로 애교를 많이도 연습했다. 나이 먹어서 하면 추태지만 아기가 하면 귀엽잖아.... 아마도 귀여울 거다. 아직 거울은 못 봤지만. 나는 열심히 말했다. 표정은 최대한 사랑스럽게 지었다. "나흔 새히! (나쁜 새끼!)" 개차반이 강서영씨를 쳐다봤다. "이 계집애가 뭐라고 하는 거지?"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저거 보세요. 방긋방긋 웃고 있네요." "귀찮군. 떼내라. 나는 이만 가볼테니." 이름하여 내 애교 대폭발 작전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많다. 아직 나는 어리다. 아직 걸음마도 시작 못했다. '아직 시작도 안했어.' 그 날 밤. 나는 얼굴 화끈화끈한 신음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강서영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요물이네. 사실 화끈화끈하진 않았고 조금 즐겼다. 하지만 나의 비루한 몸뚱이는 그 신기한(?) 장면을 미처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내 인생 최초의 희망이자 구원의 동아줄이 되어주실 나의 큰 오라버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 덕택에 나는 이 세계에 대한 걸 조금 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저는 선추코를 사랑합니다 헤헿 0003 / 0192 ---------------------------------------------- 정말 이상한 세계와 그보다 더 이상한 오빠라는 꼬맹이들 *** "이 아이가 제 동생인가요?" 나를 처음 본 남자 사람 생명체 중에 이토록 따뜻한 말을 해준 사람은 단언컨대 없었다. "방긋방긋 웃는 게 정말 이쁘네요." 김환석과 김환성은 그냥 꼬맹이들이다. 4살 5살이니 그냥 귀여운 수준. 그런데 이 남자 사람 생명체는 그래도 좀 남자냄새가 나는 것이 보는 내가 흐뭇할 지경이다. 물론, 난 변태 아니다. 나는 1살이 채 되지 않은 풋풋하고 귀여운 아가다. 이 첫째 오빠라는 녀석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였다. 아버지란 개차반의 유전자가 워낙 훌륭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 명의 오빠들은 참 잘생겼다. 무슨 묘사가 필요하랴. 그냥 잘생겼는데. 이름은 김형석. 첫째 왕비의 아들이란다. 이, 이봐. 날 그렇게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안지 말라고. 13살한테 심쿵하고 싶지 않아. "귀여워요." "감사합니다. 왕자님." 나의 어머니인 강서영씨는 가슴을 가리고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참고로 강서영씨는 세 번째 왕비다. 강서영씨가 밖으로 나갔고 나는 이 잘생긴 꼬맹이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게 됐다. 내가 육체나이가 워낙에 어려저서 그런지 조금 두근대긴 한다. 이거 경찰서 갈 일 아니다. 그냥 단순히 설레는 거다. 누구라도 이렇게 품에 안겨서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면 설렐걸? 진짜야. 내가 26살 나이와 신체를 갖고 돌아왔더라도 이러고 있으면 조금 설렜을 수도 있어. 정말이야. 아니 정말이에요. 나 변태 아닙니다. 믿으세요. 흠.흠. 그냥 농담이고, 확실히 잘생긴 건 맞다. 그런데 나를 안아든 요 녀석이 우수에 가득찬 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내아이로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텐데." 그리고 혼자서 독백을 이어갔다. 내겐 일말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어리고 풋풋한 1살의 귀여운 아가니까. "아가야. 이 세상은 여자들이 살기에 너무 힘든 세상이야. 오빠는 내 동생에게 그런 험난한 세상을 살게해야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프구나." 어쭈. 13살 주제에 제법이야. 오빠는 나를 안아든 상태로 침대에 앉았다. 나는 13살 꼬맹이에게 손을 뻗으며 꺄르르- 웃어줬다. 이 정도의 팬서비스는 해줘야지. 나의 애교가 마음에 들었는지 오빠는 피식 웃고는 내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여자는 이 세상을 움직일 힘이 없어. 그러나 나는 네가 그런 힘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단다." "어흐해허! (너잘생겼어!)" "나도 뭐... 껍데기만 남자지. 같은 처지여서 슬프네." 그 때, 강서영씨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제 1 왕자 아닌가요?" "마력 한 웅큼 없는 저는, 만약 왕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버려졌거나 죽었겠죠." "그런 말씀 마세요. 마음 강하게 가지세요. 왕자님은 누가 뭐래도 이 왕국의 첫째 왕자입니다. 저는 언제나 왕자님을 응원하고 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이 왕자란 귀염둥이는 마력이란 걸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단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은 마력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력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며 끼히? 끼히잇? 하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듣기엔 괴상하고 남들이 듣기엔 귀여운 뭐 그런 소리다. 귀염둥이가 말했다. "앞으로 또 한 동안 어머니를 뵙지 못하겠네요. 저는 그 사실만으로도 많이 외롭고 슬플 것 같습니다." "......." 강서영씨는 그 말에 상당히 감격한 듯 했다.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이 시대에는 저정도의 말만 해도 희대의 로맨티스트가 되겠구나 싶다. 워낙에 여성인권이 바닥인 곳이니까. 귀염둥이가 나가고 난 뒤 강서영씨는 휴지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나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독백을 시작했다. 아니. 내가 뭐 임금님 귀 당나귀 외친 거기 대나무야? 왜 자꾸 나한테 얘기를 해? 그러다 내가 다 알아들으면 어쩌려고. "첫째 왕자님은 이제 또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겠지요." 마력은 없지만 신분은 제 1 왕자인 김형석. 볼모로 잡기에 아주 쉽고 간편한 대상이란다. 제국에서도 대우 자체는 섭섭치 않게 해주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린 나이에 가족들 품에서 떠나 볼모 생활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터. 그러고보니 13살 감성에 어울리지 않는 우수에 가득찬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흐해허!(잘생겼어!)" 어차피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잘 걷지도 못하는데 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엄청난 잘생김과 잘남과 따뜻한 마음씨에 감탄하는 것 뿐.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나의 두 오빠는 여전히 귀찮고 짜증이 났다. 그래도 둘째인 김환성은 나한테 마음을 많이 열었다. 나를 귀여워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역시 꼬맹이다. "물어왓!" 김환성이 외쳤다. 나는 꺄르르- 웃으면서 네 발로 열심히 기었다. 걸음마도 가능하긴한데 아직은 기는 게 더 빠르고 편하다. 김환성이 던진 작은 헝겊인형을 주워들고 꺄르르 웃으며 김환성에게 가져다줬다. 김환성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구. 잘했는데? 아주 뛰어난 개야." 김환석은 그 옆에서 시크한 눈으로 환성을 쳐다봤다. "개라는 표현도 아까워."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개새끼?" 야이. 뭐 이딴 것들이 다 있어. 내가 열심히 늬들 비위 맞춰주면서 지금 속으로 칼을 갈면서 꺄르르 웃고 있는 거 안 보여? 몰라? 아. 모르지 참. 어쨌든 나는 졸지에 개새끼소리를 들었다. "어이오 애해히!(너희도 개새끼!)" 말은 저래해도 나는 방긋방긋 웃었다. 웃음이 내 필살기다. 이것말고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게 슬프고 가슴아프지만 나는 나름대로 노력 중이다. 이들에게도 호감을 쌓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더 개차반인 왕이란 작자한테는 어림도 없을 거다. 내 주위의 사람에게도 호감을 얻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 김환성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게 지시했다. "야. 그거 아냐. 월! 월! 이렇게 해야지." 이 쪼끄만 자식이. 자꾸 뭐래. 그딴 거 시키면 누가 할까보냐. "워!오오! (월월!)" ...했다. 하고 말았다. 엉엉. 내 자존심. *** 어머니인 강서영씨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 나는 강서영씨가 책을 읽을 때마다 칭얼대며 무릎에 앉기를 원했다. 나도 보기 위해서다. 내 세상의 전부인 이 방 안에선, 바깥 세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강서영씨가 읽는 책을 같이 보면서 지식을 좀 쌓을 수 있게 됐다. 글은 읽을 수 있냐고? 말도 알아듣는데 글은 못 알아볼까. 그리고 기회가 왔다. 종이와 펜을 발견했다. 이 순간, 이유는 모르겠는데 진수가 너무 보고싶었다. 발달이 안 된 어린 아이의 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난 기억력이 매우 나쁘다. 그러나 진수의 얼굴은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 보고싶어. 삐뚤빼뚤하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지만 어쨌든 글씨는 맞았다. 나는 분명 한글을 쓰려고 했는데 이상한 글자가 나왔다. 하여튼 내가 읽을 수 있는 걸로 보아 글씨가 맞긴 맞았다. 그리고 강서영씨는 굉장히 놀랐다. "설마..." 들고 있던 토끼인형을 -아마도 내게 주려고 했던 것 같다- 땅에 떨어 뜨렸다. "네가 쓴 거니?" "꺄하!" 나는 종이를 들어올리고 밝게 웃었다. 이거 보라는 듯 또 글자 썼다. - 엄마. 강서영씨는 입을 쩍 벌렸다. - 이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못 뗀 아이가 글씨를 쓴다니. 아. 이거 너무 천재성을 드러내면 좀 그런가. - 마니마니. 그래서 일부러 맞춤법도 좀 틀려줬다. 이 정도만해도 내가 결코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겠지. 이 세상은 남자 중심의 사회다. 여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간 얻은 지식에 의하면 '마력'이라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내게도 마력이라는 건 없는 것 같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살아야 한다. 사실 내가 뭐 뛰어난 천재라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 정도면 충분히 천재처럼 여겨질 수 있을 거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지...?" 내가 살면서 최고의 개차반이라 인정한 남정네의 목소리다. '개차반!' 개차반의 목소리였다. 다른 말로 내 아버지. 왕이었다. 왕이 내가 쓴 글씨를 발견했다. 이봐. 어서 감탄해봐. 나는 여타 다른 여자생물체와는 달리 엄청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 이 말이지. "이 글씨는 이 계집아이가 쓴 것인가?" 강서영씨가 대답했다. "...네."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군." 야. 1살짜리가 글씨를 쓴다는 것 자체, 아니 일단 글씨 비슷하게 그렸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뭐 그딴 반응을 보여? 너는 천재였어? 앙? 나는 몰랐다. 쟤 천재 맞았다. 여긴 다른 세상이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쟤도 1살때 부터 글 썼단다. 뭐 저런 사기적인 인간이 다있어? 나는 속으로는 욕하면서 그래도 저 작자에 다리춤에 매달렸다. 팔을 마구 뻗으며 꺄르르 웃어줬다. 누가봐도 귀여울 장면이다. "귀찮군." 개차반은 발을 슬쩍 털어내서 나를 떨쳐버렸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하지만 굴하지 않으리.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서리라. 이 인간은 내 최대 난관이지만 이 인간을 잡으면 내가 내 뜻을 펼치기도(?) 좋을 거다. 두고 봐라. 당신 언젠가 꼬시고 만다. "꺄흐히히!" 나는 밝게 웃으며 또다시 개차반에게 기어갔다. "울지 않는군. 계집아이라 빽빽대며 시끄럽게 굴 줄 알았는데." "당신을 닮아 아주 영특한 것 같아요." "그래봐야 계집이지." 저 개차반은 여전히 날 무시했다. 너. 기다려라. 내가 금방 꼬셔줄게. 그리고 3년이 지났다. 다시 말해 난 4살이 됐다. 이제 7살이 된 둘째 오빠, 김환성이 내 방을 찾아왔다. 강서영씨가 말했다. "왕자님. 그건 좀..." "흥. 네가 상관할 일 아냐." "......." 야. 배는 달라도 네 어머니거든. 넌 어떻게 되먹은 게 첫째오빠랑 그렇게 다르냐. 이 재수없는 자식이. 강서영씨는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말했다. "안 해줘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갑이다. 그건 확실했다. 그래.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너 딱 걸렸다.' 조련. 시작해보자. 꼬맹이가 졸라대기 시작했다. "아바마마께서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저도 혼난단 말이에요. 아바마마 너무 무서워요." 나에겐 절대 핑계가 있다. 아바마마다. 개차반이고 남성우월주의로 점철된 자식이지만 어쨌든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죄송해요 오라버니.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아바마마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요." "딱 한번만 해줘!"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 땐 그때고!" 꼬맹이는 꼬맹이답게 억지를 부렸다. 이 누나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꼬맹아. 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 꼬맹이는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초코바는 안 돼." 어이고, 두야. 나 그런 거 관심 없거든. 아참. 참고로 말하면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초코바 마음대로 못 먹는다. 아버지란 작자가 규제를 엄격히 하고 있다. 하루에 1개 이상 못먹게 한다. 김환성은 아주 비장했다. "절대 줄 수 없어. 이것 만큼은."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하려는 거 그렇게 거창한 거 아니다. 내가 하려는 건 그냥 글씨쓰기 숙제 대신해주는 거다. 김환성이란 요 꼬맹이는 몸으로 하는 건 굉장히 잘했는데 글씨쓰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듣기로는 검술의 천재라나 뭐라나. 어쨌든 머리는 별로 안 좋은게 확실했다. "여기에 싸인만 하면 돼요." "빈 종이잖아?" "싫으면 말구요." 빈 종이다. 나는 계약 사기를 치기로 했다. 아무 내용도 안 적었다. 나중에 적으면 된다. 당연히 사기다. 말도 안 되는 거다. 어차피 이걸로 거창한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일단 왕자의 사인을 받아놓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글씨 조금 대신 써주고 자필 사인을 얻어낸 거다. 강서영씨가 지금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그건 나중에 '엄마 사랑해요!'라면서 안기면 되는 문제다. 쉽네 이거.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났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한진수...?' 그토록 보고싶어 했던 얼굴이, 여기에 있었다. 0004 / 0192 ---------------------------------------------- 그는 나의 약혼자라 합니다. *** 내가 처음부터 진수를 좋아했다거나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우린 뜨겁진 않고 미적지근한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진수를 좋아하는 것보다, 진수가 나를 좋아하는 게 훨씬 컸다고 생각했다. 그 싸이코의 칼에 찔렸을 때 나는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진수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어떤 고통보다도 진수를 잃을 것 같다는 허무함이 나를 무던히도 괴롭혔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마음속으로 진수를 보고 싶다고 수천 번은 외쳤다. 다른 말을 하거나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엔 진수를 떠올리고자 하는 그 마음이 너무 컸었다. '틀림 없어. 진수야.' 틀림 없다. 정말 진수다. 내 기억속의 진수보다는 훨씬 어렸다. 나이는 어림잡아 17살정도 되어 보인다. 나의 사랑스런 첫번째 오라버니 김형석 또래로 보였다. 그러니까 나보다는 13살 정도 많아 보인다. "이 아이가 제 약혼녀군요." 그러나 기억속 진수와 눈 앞의 이 남자는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달랐다. 그래서 가슴이 아파왔다. 얼굴은 진수와 똑같은데. '진수야...' 강서영씨가 내게 속삭였다. "상희야. 어서 인사하지 않고 뭐하니? 네 지아비 되실 분인데." 나는 엉겁결에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상희다고 해요. 나이는 4짤이어요." 나는 말을 굉장히 빨리 시작했다. 당대 여아들 중에서는 최고로 빠른 속도란다. 발성기관과 구강구조가 잡히자마자 나는 말을 시작했으니 굉장히 빠르다고 볼 수 있겠다. 쓰는 어휘 역시 4살 꼬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겉모양은 이래도 속은 이제 30살이 되어간다. 그래서 아버지란 작자도 나를 보며 가끔 놀라곤 한다. 계집애 치고는 제법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엣헴. "오빠. 머싯쪄여. (오빠. 멋있어요.)" 근데 아직 발음은 잘 안 된다. 제길. 편하게 발음하면 발음이 샌다. 한진수가 말했다. "나는 한진수다." 이름이... 한진수란다. 한진수.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름. 그러나 그 진수는 아니다. 진수라면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쿵.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에 난 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서영씨는 내심 짐작했다는 듯 별 말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나는 어려. 어리니까 물어봐도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최대한 귀엽게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꽉 말아쥐었다. 눈물 나오지 말라고 아프게 꽉 쥐었다. "물론 너와 결혼은 하겠다. 이미 약혼은 성사됐고. 하지만 내게 사랑받을 생각 따윈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강서영씨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한진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이건 이상하거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만약 아버지란 작자가 있었어도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일부다처제가 일상화된 곳이고, 바람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세계다. 그러니까 한진수의 입장에서 이 말은 '내일은 김치찌개를 먹을 거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다. 내 입장에선 그래도 결혼을 해주겠다라고 말해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말도 안 되지만 그게 바로 이 세상이다. 나는 밝게 웃었다. "헤헷, 나 저 오빠랑 겨돈해? (헤헷, 나 저 오빠랑 결혼해?)" 나는 내 처지를 안다. 남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나는 남자들의 노리개로만 살아가고 싶지 않다. 내가 이 곳에서 떨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유가 있다면, 이 곳을 바꾸라고 그래도 누군가 선심 써서 왕의 딸로 태어나게 해주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봐야 4살 꼬맹이다. 발음도 제대로 안 되는. "기뻐!" 기쁘지 않다.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른들이 말하는 배꼽인사다. 한진수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강서영에게 인사하고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강서영씨로부터 한진수에 대한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한진수는 뛰어난 남자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 뛰어나다함은 바로 마력을 많이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뜻했다. 그건 다른 말로 재능이었다. 한진수는 천재라고 했다. 마력의 절대량도 높고 순도도 높으며 회복률이 굉장히 높아 이 세계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100년에 한 두명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란다. 저쪽 세계의 진수와는 많이 달랐다. 저쪽의 진수는 좀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8년이 넘도록 나를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중에는 애인이란 이름으로, 더 나중에는 남편이란 이름으로. 정말 맹했다. 내 입으로 이런말 하긴 좀 그런데 어쨌든 나 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마음이 이상해.' 정말 우연히 이름이 같고 얼굴이 같다. 말도 안 되지만, 나는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있는 중이다. 말도 안 되는 일 하나쯤 더 생긴다고 해도 못 믿을 거 없다. '이상해.' 불을 껐다. 잘 시간이다. 나는 소리죽여 울었다... 라고 하고 싶었는데 4살의 이 몸은 내 마음대로 컨트롤하기가 좀 힘들었다. 자꾸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갔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대놓고 울기로 했다. 강조하지만 나는 어린 아가다. 여전히 왕자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우리의 송수진양이 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공주님!" "귀신봐쪄! 귀신이 막 나를 막막 쫓아와쪄! (귀신 봤어! 귀신이 막 나를 쫓아왔어!) 힝!"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럽지 않다. 절대 부끄럽지 않다. 이건 정말 절대 무조건 하여튼 부끄럽지 않은 거다. 그래. 부끄럽지 않다. 나는 아가니까. 나는 아가니까! ...엉엉. 망했어. 쪽팔려. *** 송수진양은 나를 굉장히 조숙한 아이로 봤다고 했다. 어유, 우리 공주님. 맨날 어른인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또 아가시네. 귀엽기도 하셔라, 하고 나를 꽉 껴안아준 그 이후로부터 나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쪼코렛! 쪼코렛 주떼여! (초콜릿. 초콜릿 주세요!)" 그럴 때면 마음 약한 송수진 양은 초코바 혹은 초콜릿을 주곤 했다. 그리고 난 이걸 고이 잘 숨겨놨다. 둘째 오빠 김환성을 조련할 아주 훌륭한 도구다. 김환성은 벌써 7살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콜릿에 죽고 산다. 개차반이 억지로 강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초코바에 강렬한 집착을 보이는 새로운 생명체다. "오다버니. 저는 강아지 가튼 거에여. (오라버니. 저는 강아지 같은 거예요.)" 김환성은 진지한 얼굴로 정정해줬다. "개같은 거야." 야이 오빠라는 자식아. 이런 걸로 진지해지지 마. "오다버니가 강아지같이 귀여워해주면은, 나는요 오다버니한테 쪼코렛을 주껀데! (오라버니가 강아지같이 귀여워해주면, 나는 오라버니한테 초콜렛을 줄건데!)" 아. 내 손발. 내 손발 어디갔어. 말하는 내가 오그라든다. 마치 뜨겁게 달궈진 맥반석 위에 던져진 말린 오징어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4살 꼬맹이다. 우리의 송수진양은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김환성은 근엄한 얼굴을 하다가 헤- 하고 풀려버렸다. "초콜렛? 그게 진짜야?" "응! 나는 초콜렛이 이~따만큼 이써여." "내 동생은 강아지만큼 귀여워!" "강아지만큼?"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초코바가 걸렸을 때에만 눈치가 백단으로 변하는 김환성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강아지보다 훨~씬 더 귀여워." "헤헷. 우디 오빠가 더 머시쪄여." 아. 내 자존심. 망했어. 망했다고. 7살 꼬맹이 비위 맞춰줄라고 정말 갖은 애를 다 쓴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아. 어떡하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송수진씨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내 내정된 약혼자인 한진수가 제국으로 마력수련을 하러 떠난다고 했다. 지구식으로 말하자면 유학에 가까웠다. 내 첫째오빠인 김형석은 제국에 볼모로 잡혀갔지만 한진수는 공부를 위해 떠나는 거다. "우리 공주님 약혼자께서는 제국 마력학원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하셨다고 해요." "마뎍학원?" "네. 공주님은 아직 모르시겠지만 제국 내 마력학원은 세계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이거든요." 알아. 나도. 나도 책 많이 읽었어. 내 비록 여자라는 누추한 신분을 갖고 있지만 나름대로는 공주이기 때문에 책 정도는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대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였고 나는 강서영씨에게 부탁해 책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다. 그 중 대다수가 어린이 동화 혹은 어린이 세계 명작이라는 게 좀 짜증났지만. "우리 공주님. 내일은 이쁘게 단장하셔야 겠어요." "이쁘게? 나 이쁘게 해주꺼야?" "그럼요! 우리 공주님 지아비 되실 분 환송파티가 있는데 공주님이 제일 예뻐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와아! 신난다!를 외쳐주었다. 내가 이러면 송수진양은 굉장히 행복해 한다. 하기야 송수진양 눈에 내가 얼마나 이쁘겠어. 말 잘들어 애교 잘 피워. 게다가 둘째 오빠 김환성을 쥐락펴락해. 송수진양의 눈에는 내가 아마 보물일 거다. 아참. 내 위로는 굉장히 많은 이복언니들이 있다. 4년 동안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또 짜증 나는 게 오빠라곤 위로 딱 두 명있는데 왜 그 수많은 언니들한테 안 가고 꼭 내 방에 와서 '물어왓!'을 시키는 거냐고. 제기랄. 짜증나네. 다른 얘기지만 잠깐 해보자면 나랑 같이 놀면 재밌단다. 당연하지. 내가 늬들 비위 맞춰주느라고 얼마나 고생하는데. 김환석은 쿨하고 시크한 척 하지만 그래봤자 꼬마다. 겉으로 내색은 안해도 나한테 분명 호감을 갖고 있다. 당연히 남녀로서의 호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호감. 방문이 열렸다. 망할 놈의 둘째 오빠 김환성이다. "물어왓!" "오빠!" 나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가 아니고 오라버니!" 김환성은 실실 웃었다. 아니 웃었다는 말도 아까워. 쪼갰다.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와 헝겊인형을 던지며 물어와가 뭐냐. 너 진짜 죽고 싶냐. 나쁜 자식. 엉엉. 김환성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도 괜찮다니까?" "그대도 체통과 품위가 있자나여!" "그런 발음으로 말해봤자 그런 거 하나도 안 느껴지거든? 발음 안 돼?" "너무해여. 오빠당 안노라." 김환성은 꼴에 내 오빠라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내 반응을 보는게 재미있단다. 당연하지. 너 좋아하는 반응 보여주는 건데. "다른 애들은 재미없어. 내가 뭐라 말하면 잔뜩 쫄아서 눈치만 막 본다니까?" 그게 당연한 거야 꼬맹아. 여긴 그런 세상이잖아. 나도 너희들 재미있게 만들어주지만 선은 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꼬맹아. 네가 누나의 이 절박한 심정을 아니? 아니. 아마 모르겠지. 제길. "그럼 나 간다!" 아니. 도대체 왜 온거야. 이 자식아. 너 검술인지 뭔지 열심히 하느라 바쁘다며. 진짜 바쁜 거 맞냐? 하지만 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세요." 문이 벌컥 다시 열렸다. "그럼 진짜 다시 온다?" "......." 문이 닫혔다. 그리고 또 열렸다. "물어왓!" 헝겊인형을 던졌다. 아오. 저 자식. 그냥 죽여버릴... 흠. 그게 아니라 패버리고 싶다. 진짜. 김환성은 낄낄대며 웃다가 나갔다. 나는 송수진양을 쳐다봤다. 우리 중요한 얘기 하고 있었다고.내 약혼자님의 환송파티 얘기. 자. 그럼 그 얘기를 시작해보실까? 송수진양이 나를 쳐다봤다. 애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게 뭔가 불안하다. 어. 어. 가까이 오지마. 오지 말라고. 송수진은 나를 껴안았다. 볼로 내 얼굴을 마구 비볐다. "공주님. 너무 귀여우셔요." 저리가. 젠장. 숨막혀. 우리에겐 중요한 얘기가 남아있잖아! *** 한진수는 고려왕국의 촉망받는 인재다. 한진수 스스로도 그걸 안다. 제국 마력학원에 수석입학하는 쾌거도 이뤄냈다. 이제 1주일 후면 제국으로 출발한다. 바라고 바라왔던 일이다. 그런데 캥기는 게 있다. '그 꼬맹이...' 이상했다. 느낌이 정말 이상했다. '내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거렸다. 사랑하는 여인같은 거 있을 리 없다. 약혼녀는 이미 내정되어 있고 왕국의 엘리트로서 교육받고 커오느라 여자같은 건 신경 쓸 수도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는 살아오면서 여자를 만나본 적이 거의 없다. 여자에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라고 말을 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낯이 익은 거지?' 그리고 낯이 익었다.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 꼬맹이를 본 이후로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다. '내일... 환송파티에 나오겠지. 그래도 내 약혼녀니까.' 한진수는 그제서야 뭔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은 요상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제길. 기분이 정말 이상하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은 환송파티가 있는 날이다. 제대로 자두지 않으면, 왕국의 많은 어르신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할 거다.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환송파티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이 글은 아마도(?) 하루 1편 늦어도 2일 1편은 연재 될 듯합니다. 0005 / 0192 ---------------------------------------------- 그는 나의 약혼자라 합니다. *** 이 곳의 파티는 내가 생각하는 파티의 모습은 아니었다. 화려한 건 맞다. 저 천장 높이 떠있는 황금빛 샹들리에가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고 아마도 대리석이라 짐작되는 바닥은 그 빛을 받아 번쩍이며 빛났다. 반투명한 크리스탈 재질의 원형 탁자들 수십개가 놓여 있고 그 위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수많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오케스트라의 감미롭고도 힘찬 음악이 이 홀 전체를 감싸안고 춤을 추는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뭔가 춤을 춰야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한국이라면, 상위 1퍼센트의 재벌가 아들들은 이런 파티를 즐기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아들들'이라는 거다. 아니. 저 시커먼 남정네들끼리 뭐하는 짓이야... 는 아니고 사실 다들 미남이다보니 눈은 즐겁다. 흐흐. 원칙적으로 파티 자체는 남자들끼리 진행된다고 했다. 홀 가장자리에는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대기실이 있었는데 이 곳이 바로 여자들의 자리다. 여자들은 감히 파티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다소곳하게 대기해야한다고 했다. 이게 이 곳의 파티문화란다. 아니 이럴거면 왜 3시간동안 옷을 입혔다 벗겼다 난리를 친건데. 나도 모르게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뭘 기대한 건 아니지만 4살짜리한테 3시간동안 인형놀이 시키고, 거기에 또 2시간 넘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게 말이 되냐? 앙? 삐뚤어 질테다. "공주님은 정말 조숙하시군요. 소문은 들었지만...소녀는 감탄했답니다." 대략 14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들어보니 무슨 남작가의 딸내미라는 것 같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나는 지난 생에서 그걸 배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여자가 아니다. 아가다. 방긋방긋 웃었다. "언니 이뿨!" 이름은 에밀리아라고 했다.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남작인 찰스의 7번째 딸이란다. 이 곳이 이상한 곳이란 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뭔가가 뒤죽박죽인 세상이다. 일단 왕국의 이름은 고려다. 거기에 귀족들은 공작, 후작, 남작, 자작 등의 명칭을 갖는다. 또 한국식 이름도 있고 서양식 이름도 있다. 이러다간 중국식 일본식이름도 다 나오겠네...는 사실이다. 역사책에도 분명 그런 이름들이 많이 나타나 있었으니까. "공주님은 겨우 1살때에 글을 떼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글...?" 이냔아. 머리 치워라. 우리 진수 안 보인다. 진수 좀 보자. 이제 멀리 간다는데. "네. 글씨요." "헷." 나는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 밝게 웃었다. 약간 바보 같은 모양새를 보여줬다. 자. 이 정도면 됐지. 비켜라 이냔! 나는 진수를 좀 더 봐야겠다. 진수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한국에서와는 달랐다. 이쪽 육체를 갖게 되면서 보는 눈이 달라져서 잘생겨졌다...라는 것도 일단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한국에선 그렇게 잘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본 진수는 정말 멋있다.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라 특유의 아우라가 있다. 콩깍지가 씌였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내 눈엔 그래 보였다. '예전과는 정말 반대가 되어버렸네.' 한국에서는 진수가 날, 먼발치에서 오랫동안 쳐다봤다고 했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사귀고 난 이후로도 언제나 진수가 내게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고백해왔었다. 나는 속으로는 기뻐도 겉으로는 티를 많이 안냈다. '정신차려. 쟤는 한진수가 아냐.' 유리창 하나만 넘어가면 진수의 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냐. 쟤는 진수가 아니라고.' 이 유리창 하나만 넘어가면 진수가 '어디 갔다 이제 왔어?'하고 따뜻하게 물어줄 것 같은데. '진수가 아니라니까!' 이 유리창 하나만 넘어가서 내가 '미안해. 좀 늦었지. 얼른 밥먹자.'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정신 차려.' 이 유리창 하나만 넘어가서 내가 '사랑해' 하고 말해주고 싶은데. "공주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리아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아, 아냐. 나는 완전 튼튼해!" 있지도 않은 알통을 들어올렸다. 그 때, 진수에게 누군가가 접근하는 게 보였다. 진수 옆에는 진수와 키가 거의 비슷하고 뽀얀 피부를 가졌으며 또다시 잘생긴 녀석이 하나 붙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티를 마시는데 제법 태가 났다. 저 상태로 사진을 찍어 잡이 메인사진에 올려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중간중간 진수를 끈적끈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단발보다 약간 짧은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는 모양새하며, 혀로 입술을 살짝살짝 핥는 것 하며. 뭐랄까. 약간 여성같은 느낌의 남자라고나 할까. '어, 어딜 가까이 붙는 거야!' 그 남자는 진수의 뒤로 걸어가 어깨동무를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앉아 있는 진수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냐. 저건 우정이야. 저건 남자들이 흔히 하는 스킨십이라고.' 저 남자가 진수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뭔가 야릇한 모양새긴 했다. 굳이 말을 저런식으로 해야 하냐고. 무슨 중요한 얘기길래! 아씨. 뭔가 불안해. 진수가 일어섰다. 진수가 피식 웃는 게 보였다. 진수가 피식 웃자 남자는 또 밝게 웃었다. 그리고는 또 진수를 덥썩 안았다.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원래 남자들 안 저렇잖아. 아냐. 여긴 남자들 위주의 이상한 세상이야. 저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래. 그런 걸 거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난데없이 그 말이 떠올랐다. '미쳤어? 아무리 이 세상이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괜히 불안했다. '물론 너와 결혼은 하겠다. 하지만 내게 사랑받을 생각 따윈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진수가 또 피식 웃었다. 그러자 남자는 또 행복한 모습으로 활짝 웃었다. "에밀리아 언니." "언니는 빼시고 에밀리아라고 불러주세요. 공주님." "응 언니! 힝... 자꾸 언니가 나와. 응!" 내 모습이 귀여웠는지, 에밀리아도 방긋 웃고 말았다. "에밀리아도 내 약혼자님 알아?" "그럼요. 제국 마력학원 수석 입학에 빛나는 왕국의 자랑이신걸요." "그럼 약혼자님 옆에 저 남자는..." 에밀리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라. 요것 봐라. 쪼끄만게 혹시 뭐 질투라도 하는 거야? 하는 듯한 미소였다.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날 마냥 꼬맹이로 보는 것 같다...는 사실이지. 망했어. 젠장. *** 곽기현은 일어섰다. 10년지기 친구인 한진수의 뒤로 걸어가 한진수의 목을 감싸안았다. "우씨. 진수야. 너 약혼녀 왔다. 짜증나. 진수는 내건데!" 한진수는 피식 웃었다. "개소리하면 죽는다." "개소리라니. 이 엉아는 진심인데. 아. 우리 이쁜 진수를 공주님한테 빼앗기지 않을 방법 같은 건 없을까?" "......." "야. 진수야. 우리 그 공주님 보러 갔다올까?" "... 뭣하러?" "에이. 그래도 너 결혼할 사람인데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가면 좋지. 가자. 가자." 한진수가 일어섰다. 그러자 곽기현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진수를 쳐다봤다. "수상해. 원래대로면 계집따윈 관심 없어. 이러고 안 갈 놈인데. 왜 갑자기 가겠다는 거야? 그 새 마음이 변했어? 나 진짜 질투한다?" 한진수는 또 피식 웃었다. 하여튼 기현이놈이랑 같이 있으면 심심하진 않다. "까불지 말고. 말 그대로 한 번 보고나 오는 거니까."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다. 괜히 심장이 뛴다. 겨우 4살짜리 보러 가는 건데 왜 설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설레는 게 아니다. 미래에 결혼할 사람이라 그냥 조금 기대가 되는 것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 에밀리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 이쪽으로 오고 계세요." "으, 응!" 나도 좀 당황했다. "안녕하시어요. 김상희라고 해여." 최대한 발음을 똑바로 해보려고는 했으나 -김환성이나 송수진양 앞에선 일부러 발음을 더 짧게 한다- 역시 아주 똑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이야. 공주님. 이쁘시네. 아. 이거 좀 경계해야겠는데요." 경계? 날 왜 경계해? 당신이? 어째서? 왜죠? 왜때문이죠? 진수는 말 없이 날 쳐다보기만 했다. "......." 남자는 또 말했다. "저는 곽기현입니다. 곽씨 후작가의 막내아들이에요. 나이는 17살. 진수랑 동갑이요. 라이벌끼리 처음 인사하네요." "라이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라이벌이 뭔지 모른다는 것처럼. 그러자 곽기현이란 녀석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음. 그러니까 경쟁자라는 뜻이랍니다." 경쟁자라니. 너. 잊고 있나본데. 나 쟤 약혼녀야. 야. 한진수.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부정도 안 하는 거야. 한진수는 여기에 왜 온건지도 모를만큼 어이없이 또 나가버렸다. 나한테 이 남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런데 곽기현이 한진수에게 또 팔짱을 꼈다. 한진수는 딱히 뿌리치지는 않았다. 기분이 정말 묘했다. 이상했다. *** 세계는 마력으로 움직이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에도 역시 마력석이 필요하다. 마력석에는 마력을 채워야 사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력석에 마력을 채우는건 오로지 남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남자만 마력을 타고타기 때문이다. 제국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 곽기현이 말했다. "계집애 주제에 그래도 제법 똑똑하네." "......." "우릴 보고도 그렇게 기죽지도 않고. 공주라서 다르긴 다른가? 그래도 다른 계집애들보다는 좀 나은 것 같긴 하더라." 곽기현은 혼자서 실컷 떠들었다. 원래 익숙하다. 혼자 떠들고 한진수는 가끔 피식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게 일상적인 대화패턴이었다. 그러다가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마." "뭐라고?"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고." "무슨 소리야 그게?" "어쨌든 내 아내가 될 사람이고 현재 왕국의 공주다. 그렇게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할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야." "야. 너 왜 그래?" 곽기현은 오히려 한진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 발언은 여자에게 해도 되는 발언이다. 그렇게 모욕될 것도 없다. 게다가 지금은 단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던가. 어차피 운전수에게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 한진수는 창 밖을 쳐다봤다. 곽기현이 어이없어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실 곽기현의 말이 예의에 크게 벗어난 건 아니었으니까. 보통때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거다. '나는 도대체 왜...' 이유를 모르겠다. 순간 화가 났다. '도무지...모르겠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제 7살이 됐다. 발음도 제법 잘 된다. 둘째 망나니 -전체 왕자 서열로는 셋째고 망나니 중에는 둘째다. 첫째 오빠는 망나니가 아니니까. - 김환성이 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야! 똥개! 나 드디어 나이트가 됐다!" "오라버니!" 나는 활짝 웃었다. 노크 따윈 밥 말아 먹었니? 나도 이제 7살 어엿한 숙녀라고. 하지만 본심과는 상관없이 기쁘게 웃어줬다. 그리고 총총걸음으로 걸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의 망나니를 꽉 껴안아줬다. "소녀는 기뻐요!" "그럼! 그렇지? 나는 역시 대단해. 암. 그렇고 말고." 그래. 대단한 너는 이제 10살 꼬맹이이며 왕국 최연소 나이트가 되었지. 그래. 대단한 건 대단한 거야. 그 대단한 꼬맹이가 내게 물었다. 군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안 돼요. 어제도 하나 드렸잖아요." "그래도...줘. 초코바 줘. 초코바 줘." "싫어요." "왜! 나 사고도 안치고 똥개새끼라고도 안 부르는데!" "그래도 싫어요." 자. 넌 내 노예...가 아니고 초코바의 노예다. 하지만 이것만해도 엄청난 거다. 왕자가 달라는데 공주가 대놓고 싫다고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김환성도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를 만나게 됐다. 복도에서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김서희입니다. 잠시 할 말이 있어 들렀습니다." 나는 처음 보는 여자다. 이쁘다. 좋은 유전자를 물려 받은 것 같다. 아마 내 수많은 언니들 중 한명이겠지. 여긴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이 태어나는 세상이고 오빠는 세 명뿐이지만 언니는 아주 많다고 했으니까. 나는 7살이 되면서 언니라는 사람들을 몇 번 봤었다. 아마 내가 모르는 언니들도 많을 거다. 그런데 김환성의 표정이 싹 변했다. 10살짜리라고는 생각이 안 될 정도로 냉기가 폴폴 풍겼다. 솔직히 좀 무서울 정도였다. "너 뭔데? 왜 끼어들어?" ============================ 작품 후기 ============================ 선추코좀 주세여 엉엉. (비츄는 선추코를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고한다) 0006 / 0192 ---------------------------------------------- 어서와. 딸바보는 처음이지? *** 이름 김서희. 나이 12세. 나보다 5살이 많고 김환성보다 2살 많은, 나의 배다른 언니란다. 나는 도대체 내 배다른 언니가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꼬맹이도 완전히 처음 보는 꼬맹이다. 그래도 역시 개차반의 유전자를 물려 받아서 미모는 제법 괜찮았는데 눈꼬리가 찢어져 있어서 약간 사나운 인상이기도 했다. "너 뭔데? 왜 끼어들어?" "우연히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저 아이가 감히 제 3왕자님께 너무 무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김환성이 인상을 더 찡그렸다. 대놓고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다. "뭐가?" "저 아이의 발언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처음에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던 김서희는 김환성의 싸늘한 태도에 질렸는지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러니까 넌 내 똥개새끼가 버릇없다고 훈계하는 거냐?" 야. 김환성. 죽고 싶냐. 똥개새끼. 그거 하지 말라고 그랬지. 똥개도 서러운데 똥개새끼가 뭐냐. 오늘 처음 보는 이복 언니 앞에서 똥개새끼 소리 듣고싶지 않아. 엉엉. 그런데 난 따질 수도 없는 것이, "아이씨. 재수가 없을라니까. 야. 내가 안 혼내고 가만히 있는데 네가 뭔데 나서? 너 진짜 한 번 맞아볼래?" 라고 말하는 왕국 최연소 나이트. 셋째 망나니의 기세가 너무 무서웠다. 여태까지 내 앞에선 저런 모습을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다. 소문에 의하면 독기로 똘똘 뭉쳐 있는 아이라 최연소 나이트가 될 수 있었다는데 여태까지 실감이 안 났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무서운데 저 여자애는 아마 느끼는 압박감이 더 심할 거다. "꺼져. 너 내 눈앞에 또 띄면 그 땐 죽여버릴 거야. 알았어?" "죄송...합니다." 김서희는 허리를 푹 숙였다. 마치 왕과 신하처럼. 위계질서가 확실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곳은 지구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 내가 떨어진 세상은 이런 세상이다. 김서희가 나가려고 했다. "아 잠깐." "...예?" "너 나 없을 때, 내 똥개 괴롭히면 진짜 가만히 안 둔다. 내 똥개는 내 거야. 나만 괴롭혀." "... 명심할게요." 아니. 그딴 거 명심하지 말고 명령도 하지마. 내가 왜 똥개냐고. 나 똥개 아니라고. 내겐 김상희라는 예쁜 이름이 있다고. 이 자식아. 김서희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약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무감각한 김환성은 그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12살 꼬맹인데... 왜 애를 저렇게 만들어 놔?'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따지진 못했다. 김환성과 아주 많이 친해진 건 친해진 거지만 그래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어가는 순간, 나도 저런 취급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오라버니. 저를 언제까지 똥개라고 부를 거예요?" 김환성은 몸을 빙그르 돌린 다음에 활짝 웃었다. 잇몸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아까 있었던 일이 어쩌면 꿈이 아닐까 싶었다. 이중인격인가. "평! 생!" "...진짜 평생...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요?" "그러어엄! 난 똥개가 좋아." 이대로면 물어왓! 을 시킬 거 같다. 이거 느낌이 불안하다. "물어왓!" 그 느낌은 유효했다. 주머니에서 헝겊인형을 꺼낸 김환성이 그걸 던졌다. "오라버니. 저거 물어올까요, 초코바 하나 드릴까요?" 순간, 셋째 망나니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고민하는 폼만 보아하면 어떻게 하면 우주를 정복할 수 있을까, 정도 되는 스케일의 대단한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망나니가 결정을 내렸다. "둘 다!" ...제길. 망했다. *** 사실 셋째오빠 김환성은 그냥 망나니다. 그런데 둘째오빠 김환석은 망나니에 나쁜놈이다. 김환성은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지 김환석은 귀여운 구석도 별로 없다. 정말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강아지란 표현도 아깝다며 개라고 부르라던 놈이다. 덕분에 똥개새끼라는 별명도 생겼지. 바드득. '그나마 요즘은 똥개새끼 아니고 똥개라고 부르지만.' 어쨌든 항상 시크한 척 하고 옆구리엔 책을 껴놓고 다니는 저 도도한 녀석은, '도대체 왜 내 방에서 책을 읽는 건데?' 내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꼭 내 방에서 책을 읽는다. "오라버니. 녹차를 타왔어요." "......." 그래도 난 이 놈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아직 7살이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바깥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대충이나마 구상은 하고 있다. 내 주변사람들, 특히 남자들부터 어떻게 공략하고나면 어떤 식으로든 방법은 생길 거다. 야. 내가 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친히 녹차를 타줬으면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줘야 하지...않겠지. 그래. 여긴 그런 것따윈 없는 곳이니까. "...다음부턴 물을 더 넣도록 해." "입맛에 안 맞으세요?" 녹차가 거기서 거기지. 이 나쁜 놈아. "어. 맛 없어. 그냥 시녀 시켜." "그래도 오라버니. 소녀의 정성이..." "필요 없어." 정말... 가차 없구나 너. "뭘 그렇게 보세요?" "......." 자세히 보니 수학책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 곳에서의 수학책을 본 적이 없다. 압도적으로 많은 본 게 어린이 동화책이고 그 다음이 역사책, 그 다음이 좀 이상한 로맨스 소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들끼리 나와서 꽁냥꽁냥하는 그 거. 내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책은 그게 거의 다였다. 그런데 여기... 수학이 엄청 쉽다. 나는 공부를 못하진 않았다. 전교 1등 쯤 하는 수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했다. 적어도 수학은 반에서 5등 이내에 들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옛날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지금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세기의 천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곳의 문물은... 마력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어.' 다시 말해, 마력이 발달한 대신 그 외 다른 학문의 완성도는 현저히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거다. 뭐든지 뿅하면 다 되는 마력이 있는데 굳이 수학 같은 학문을 발전 시킬 필요가 크게 없었다는 것 같다. '아. 아는 척 하고 싶다.' 아는 척 하고 싶기는 한데, 그랬다가는 미운털 박힐 수도 있다. 김환석과도 그래도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렇다고 또 함부로 나서기는 어렵다. 나는 여자고 저 놈은 남자니까. "오라버니는 정말 똑똑하신 것 같아요." 김환석은 무표정하려 애썼다. 그래도 입가가 씰룩거리는 것이 미소가 피어오르려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는 듯 했다. 이럴 때 보면 가끔 귀엽기도 하다. 강조하지만 이럴 때만. "소녀는 어찌하면 오라버니의 똑똑함을 배울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 "그건 알지만 소녀도 오라버니께 지식을 배워보고 싶답니다." "네 머리로?" 겨우 네까짓 머리로? 마력도 못 써서 머리 회전도 느린 네가? 라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그것도 진심이 철철 담긴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콧김이 뿜어져나올 것 같다. 그래도 며칠 뒤. 나는 김환석과 '0'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기엔 '0'이라는 개념이 없다. 숫자 0. 사실 우리야 매일같이 쓰고 익숙해서 그렇지, 이 0이라는 개념도 만들어진 지 1500년밖에(?) 안 됐다고 알고 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을 꺼내들면서 -이걸 증명하는 게 수행평가로 나왔었다 - 이 곳엔 전혀 없는 개념인 '루트'. 즉 ''를 고안함으로써 김환석이 나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너 아주 멍청한 똥개새끼는 아니었구나." 야. 이거 엄청 혁신적인 거라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를 더 해놓는 건데. 열심히 공부해놨으면 더 많이 알려주고 더 많이 호감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저는요. 오라버니처럼 꼭 똑똑해지고 싶답니다." "꿈 깨."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기회가 왔다. "뭘 하고 있지?" 개차반이다. 오랜만에 듣는 개차반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그리고 난 실제로 엄청 반가운 척을 했다. "아바마마. 소녀는 아바마마를 뵈어서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뻐요!" 나는 거울 보며 연습한 눈웃음을 열심히 짓고 방실방실 웃으면서 개차반에게 뛰어갔다. 그의 허리춤도 오지 않는 작은 키를 가진 나는 개차반의 다리에 매달려서 정말 똥개처럼 얼굴을 그 다리에 비벼대며 애교를 피워댔다. 자. 어떠냐. 지구식 애교다. 여기 딸내미들은 애교 못 부리잖아. 너 무서워서. 어때. 반응을 보여봐. 반응을 보였다. "...귀찮군." 나를 슬쩍 차서 던졌다. 저 놈 입장에서 슬쩍 찬 거고, 나는 약 1미터 내지 2미터는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쁜 새끼. 엉엉. 난 자존심도 버리고 모든 걸 버렸는데 넌 실제로 날 버렸어. 이 자식이. 네가 그러고도 아빠냐. "헤헤. 소녀는 아버님이 정말 좋아요." 저 개차반은 나한테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서 김환석에게만 관심을 가졌다. "그래.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 그래도 단언컨대, 이 사건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다. 김환석은 나쁜놈이긴한데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개차반에게 말해줬다. 개차반은 약간이나마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렇단 말이지." 개차반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또 방실방실 웃었다. 그 때, 하필이면 김환성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똥개가 꼬리를 흔들고 있다!" ...죽이고 싶다. "너희가 저 아이의 방에 들락날락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네. 똥개랑 놀면 재밌어요." "과연..." 개차반은 계속해서 날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이 곳 여자들과 약간 다르다. 그렇게 기죽지 않고 먼저 다가선다. 애초에 이 곳 여자들은 워낙에 억눌려져 있어서 이런 걸 할 줄 모른다. 대신 조심해야 할 것은 선을 넘지 말아야한다는 것. 어쨌든 나는 이들이 보기에 새로운 종족(?)임에는 틀림 없다. 개차반이 말했다. "흥미롭군."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내게 왕국 최고의 수학자라는 학자가 찾아왔다. *** 왕국 최고의 수학자 치고는, 지나치게 수학을 못했다. 이 곳은 수학이 정말 발달이 안 된 나라였다. "허... 그 것이 정말입니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것을 발견하신 겁니다. 제가 증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수가... 허... 이럴 수가..." 내가 알려준 건 별 거 아니다. 중학교 때 다들 달달 외우는 2차 방정식 근의 공식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없던 개념이었던 것 같다. 좋아. 등비 수열. 등차 수열의 합 공식 같은 거랑 뭐 씨그마랑 구분구적법, 미적정도만 대충 떠올리는대로 말해놓으면...! '좋았어!' 좋다. 이들은 '개념'자체가 없어서 그렇지 머리회전은 나보다 훨씬 빠르다. 애초에 마력이란 것이 두뇌를 활성화시켜주는 듯 했다. 그러니까 일단 개념만 잡아주면 증명이나 확인 같은 건 알아서 해준다는 소리였다. 마치 명령어만 주면 그 명령을 알아서 잘 실행하는 슈퍼컴퓨터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개차반과 함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내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 것은. 무려 7년의 내 인생 처음. 아. 감격...이 아니지. 아이씨. 정신차려. 이런 걸로 감격하기엔 너무 슬프잖아. 개차반과의 식사자리에서 요 수학자란 아저씨는 내 칭찬을 어마어마하게 해줬다. 왕국 최고의 천재가 나타났다고 했다. "공주님이 고안하신 발상은 여지껏 그 누구도 해지 못했던 발상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남자로 태어나셨다면 분명 영웅이 되셨을 겁니다." 개차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감상은 짤막했다. "그렇군." 좋았어. 기회다.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저 작자도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인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내가 7년동안 준비해온 멘트가 있다. 기회가 없어서 사용 못했을 뿐. "영웅이 되면은요!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요?" 푸우웁-! 저 수학자 아저씨는 마시던 물을 뿜었다. 사래라도 들린 건지 캑캑거렸다. 수학자 아저씨야 사실 상관 없다. 저 개차반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한데. "당돌한 계집아이군." 다행히 화가난 것 같지는 않다. 오케이. 작전 성공. 내가 이 '아빠'라는 단어 사용해보려고 얼마나 눈치를 봤는데. "저는 아빠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요!" 그리고 나는 분명 봤다. 정말이다. 진짜로 봤다. 저 개차반. 지금. 피식 웃었다. 웃었다고! 개차반이 말했다. "나와 결혼하려면 백만 년은 이르다 어린 계집." ...그게 딸한테 할 소립니까. "그러면은요. 백만 살이 되면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요?" 아깐 피식 웃었고 이번엔 씨익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크하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한참이나 계속 됐다. 나는 조용히 고기 스프를 떠먹었다. 들어는 봤나. 딸 바보라고. 어서와. 딸 바보는 처음이지. 0007 / 0192 ---------------------------------------------- 어서와. 딸바보는 처음이지? *** 이른바 '백만살이 되면은요,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요?' 사건. 나는 그 날밤 이후로 잠들기 전에 약 4차례 정도 이불에 하이킥을 하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개차반과 종종 식사를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강서영씨는 그런 내가 못내 대견한 듯 내 볼에 뽀뽀를 하곤 했다.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응? 엄마는 내가 자랑스러워요?" "그 분과 식사를 같이 한다는 건 아주 뜻깊은 일이야." 이봐요. 어머니. 당신은 그러니까 내가 왕국 최고의 수학자와 학자들로부터 천재라고 칭찬을 받고 있는 그 사실보다는 오로지 그 개차반과 함께 밥을 먹는 것 따위가 가장 뜻깊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라 이 말입니까? "엄마, 해보렴 엄마." ...김환성은 언제나 왈왈! 을 시킨다. 그런데 강서영씨는 매일 '엄마'를 시킨다. 이유는 그렇게 멀리있지 않았다. 8살이 되면 엄마가 아니라 '어마마마'라고 불러야 한단다. 남자들은 8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에겐 먼 나라 얘기다. 아니, 전 세계의 나라들이 아마 그럴테니까 먼 나라도 아니고 먼 우주 얘기 쯤 될 것 같다. 여자는 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집안에서 '소녀식'이라는 걸 한다고 하는데 별 게 있는 게 아니고 나 이제 8살 되었습니다, 하고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집안의 여식들끼리 함께 차를 마시는 게 다란다. "엄! 마!" 나는 강서영씨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이런 행동만으로도 강서영씨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해는 한다. 강서영씨를 비롯한 나의 수많은 어머니들, 아니 이 곳 여자들은 아마도 외로움에 쩔어...아니. 사무치는 외로움을 한가득 살아가고 있을 거다. 누가 그랬다. 여자들은 사랑 받을 때 행복한 거라고. 여긴 사랑은 개뿔도 없는 곳이다. 극 여존남비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행복했을 텐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물어왓!" 야이. 개... 분위기 한참 좋은데. 김환성. 너. 내가 언젠가. 죽인다. 기필코 죽이고 말거야. 엉엉. 더 수치스러운 건 난 저 헝겊인형에게 쪼르르 달려가고 있다는 것. "어라. 어머니도 있었네?" "왕자님 오셨어요?" "응. 똥개랑 놀려고." 김환성은 나를 일컬어 전혀 거리낌없이 똥개라 부르며 왈왈! 을 시켜댔지만 강서영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았다. 존귀하시고 높으신 왕자님께서 천박한 공주와 놀아주신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오라버니!" 너. 기필코 죽이고 말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젠장. "오라버니 오셨어요!" 나는 헝겊인형을 손에 든 채 김환성의 -얘는 나보다 키가 많이 크다- 허리를 꽉 붙잡고 방방 뛰었다. 김환성은 헤헤하고 웃었다. "너 진짜 똥개 같다. 완전 못생긴 똥개." 나는 김환성을 놓고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예쁘다고 해주셔요." "예뻐야 예쁘다고 해주지."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예쁘다고 해주실 때 정말 기쁘답니다." 좋아. 오늘밤도 이불에 하이킥을 좀 해주겠네.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어쩌고 저째? 수희야. 아니 상희야. 너 참 갈 때까지 갔구나. "예쁘다고 해줄까?" "네!" 방긋방긋 웃었다. "예쁘게 못생겼네." 기필코 못생겼다는 말은 포기 않는구나 너. "아참. 너 밥 먹으러 오래."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강서영씨는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밥 먹으러 와라'라고 말하는 잔심부름에 왕자가 직접 나섰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와! 오라버니랑 밥 먹어요?" "응. 너랑 나랑 아버지랑. 아참. 그리고 어머니도 오세요." 강서영씨는 화들짝 놀랐다. 손사래를 쳤다. "제, 제가 어찌..." 저게 정상적인 여자의 반응이다. 적어도 이 세계에선 그랬다. 나도 지금은 7살의 탈을 쓰고 있어서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나이를 좀 더 먹으면 거절해야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지만. "괜찮아요. 아버지가 허락하셨어요." "저, 저기 그렇다면 잠시... 화장. 아니, 아니 그게 그러니까... 네. 얼른 준비하고 가겠습니다." 강서영씨는 감개무량한 얼굴과 표정으로 행복해했다. 얼씨구. 눈가를 닦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밥 한 번 같이 먹어주는 걸로도, 심지어 자기 남편인데도 저렇게 행복해하고 있는 게 참 안쓰럽긴 했다. 개차반 그 놈이 나쁜 놈이야 역시. 개차반. 강서영씨. 김환성. 그리고 나. 이 넓은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은 건 딱 4명 뿐이다. 개차반이 말했다. 아주 진지하고 고요한 음성이었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뭐지?" 나는 고기스프를 떠먹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김환성이 대답했다. "똥개요." "틀렸다." 어이없는 건 둘 다 진지한 표정이라는 거. 초등학교 3학년도 그 문제는 알겠다! 하긴 뭐. 여긴 지구가 아니니까. "계집. 네가 말해봐라." 강서영씨는 찔끔 놀랐다가 이내 개차반의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과 걱정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강서영씨. 아무리 여자 인권이 바닥이라지만 겨우 이런 질문 같은 것에 그렇게 쪼니까... 아니. 위축당하니까 남자들이 여자를 얕잡아 보는 거예요, 는 개뿔. 사실 나도 좀 무섭다. 이게 뭐랄까. 남자들은 남자들 특유의 뭔가가 있다. 그들은 항시 마력을 운용하고 있다는 데,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어도 여자들을 억누르고 위축시키는 뭔가가 분명 있었다. 세상이 이따위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소녀가 열심히 생각해 볼게요." "......." 나는 스푼마저 내려놓고 열심히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맞추기 힘들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거 너무 쉽게 맞추면 오히려 역효과다. 저쪽에서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냈으면 이쪽도 열심히 생각해주는 척 하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라고 포장은 하지만 사실 그건 아니고 잘 보이려고 하는, 내 필사의 의지지. 제길. 서러워. 식사가 거의 파했을 무렵, 나는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답은 혹시... 사람이 아닐까요?" "......." 개차반은 나를 쳐다봤다. "계집아이가 제법이군. 정말 제법이야." 나는 벌떡 일어섰다. 강서영씨를 지나쳐 개차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바마마. 아주아주 어려운 문제를 맞췄으니 선물을 주시어요." 강서영씨는 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안 돼. 상희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거니. 선물을 달라니! 여자는 남자한테 그런 말을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야! 강서영씨의 절규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실제로 강서영씨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어머니야. 괜찮아요 괜찮아. 개차반이 피식 웃었다. "선물?" "네! 저에겐 아주아주아주 커다란 선물이 있답니다." 김환성이 한마디를 보탰다. "초코바 10개!" 그딴 거 필요 없어. 너나 많이 드세요. "무슨 선물을 원하지?" "쓰담쓰담해주세요!" 마침 의자 아래로 내려와 있어서 눈에 보이는 솥뚜겅 같은 손 -지금의 내 눈엔 충분히 크고 무거운 손이다- 아래로 파고들어 거기에 머리를 비볐다. 아 처량하다. 정말 처량해. 쓰담쓰담? 아. 아. 뭐라 말로 할 수 없지만 정말 내가 불쌍하고 아련하다. 그에 반해 개차반은 또 호탕하게 웃고 있다. 강서영씨는 불안해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고 김환성도 낄낄대고 웃었다. "쓰담쓰담이래. 쓰담쓰담이래. 쓰담쓰담!" 낄낄이 아니라 깔깔대고 웃는데 저 얼굴 한대 패주고 싶다. 어쨌든 개차반은 계집아이치고 소원이 너무 거창하구나, 하고 한껏 거드름을 피운다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는 걸로 겁나 생색내네. 는 내 속마음일 뿐이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로 아빠란 개차반을 쳐다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아빠!" 강서영씨는 이제 울 것 같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 아빠라니. 왕자들도 7살 이후로는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여기서 아빠라 하는 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적어도 강서영씨한테는 그럴 거다. "상희는요. 아빠가 너무너무 좋아요." 자. 나는 7살이다. 7살이야. 그래 7살이니까 괜찮아. 내가 속이 울렁거리는 건 착각일 거야. 7살이야. 정말 나는 7살이야. 수없이 속으로 세뇌했다. 강서영씨를 힐끗 보니 제발 그만둬, 상희야. 부탁이야. 라고 내게 외치는 것 같다. 그러나 개차반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봐요. 강서영씨.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봐요. 이 인간이 기분 나쁘면 이렇게 웃고 있을 리 없잖아. 물론 당신의 머릿속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시퍼렇게 질려있으면 안쓰럽잖아. 개차반은 웃음을 멈췄다.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송장처럼 굳어 있지?" "아, 아니어요." 아니긴 뭘 아니야. 내가 봐도 송장 같은데. "확실히 이 계집아이의 행동은 별난 구석이 있지." 김환성이 또 첨언했다. 쓸데없이. "똥개니까요!" "하지만 나는 기분이 매우 좋군. 이 아이가 여아가 아니라 남아였다면 나라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거야. 누군가 그러더군. 영웅이 되었을 거라고." 나는 개차반의 말을 잘랐다. 못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웅이 되어서 아빠랑 결혼했어야 했는데!" 강서영씨는 기절 직전. 왕의 말을 자르다니. 이건 정말 큰일 날 일이다. 상식선에서는 그렇다. 말 그대로 미친 짓이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선을 정해놨다. 이 작자와 식사를 한 두번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용납될만한 선에서만 입을 연다. 물론 이 줄타기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개차반은 내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오늘은 그대의 침실로 찾아가겠다. 준비하고 있도록 해라." 강서영씨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전. 왕궁에는 시녀들이 아주 많다. 12명의 왕비. 그리고 30명에 달하는 공주들을 위해 그들은 매일같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 중에서도 김상희 전담 도우미인 송수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 생각해봐. 왕께서 공주를 따로 부르셨다니까!" 송수진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 왕이 직접 김상희를 불러 밥을 먹자고 했단다. 이런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적어도 이번 왕 대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쓸모없는 여아를 독살할 수도 있는 거지." "이상한 소리하지 마! 말이 씨가 되는 거 몰라? 우리 공주마마님이 얼마나 예쁘고 착하신데!" "아니. 왜 그렇게 열을 내? 네가 그렇게 열을 내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알지? 너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화를 내는 거잖아?" "......."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송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는 그런 존재다. 마음에 안들면, 식사자리에 불러서 독살할 수도 있는 존재. 딸이고 뭐고 없다. 왕이 물론 그런 나쁜 심성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과거 역사책을 살펴보면 그런 선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보통 왕자에게 맞먹으려드는 공주들이 그렇게 독살 당해왔다. 하지만 며칠 뒤. 송수진은 어깨를 펴고 다녔다. 그녀가 모시는 공주님인 김상희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왕자들과도 아주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파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문이 공주들에까지 들어갔다. 공주의 숫자는 정확하게 33명. 12살. 33명의 공주들 중 한명인 김서희가 작게 말했다. "얼마 후면, 그 계집아이의 소녀식이 거행돼요." "그 때. 본 때를 보여줘야 겠어요. 어디 한낱 계집애 따위가 고귀한 왕자님들과 함께 어울릴 생각을 하는 건지." "네 언니. 정말 꼴불견이더라구요. 버릇도 없고. 이럴 때야말로 공주들이 나서서 훈계를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8살이 되면 어엿한 소녀이니까요.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도록 언니들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서희공주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나서야해요." "맞아요. 소녀식 때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우리 공주들의 역할이에요." 다시 며칠이 지났다. 아우레스력. 1003년 12월 31일. 김환성이 키득대고 웃었다. "형아. 그거 알지? 똥개 내일 소녀식이래." "...그렇군." 1004년. 1월 1일. 김상희의 소녀식 거행이 예정되었다. 0008 / 0192 ---------------------------------------------- 살벌한(?) 소녀식 *** 소녀식이 거행됐다. 나는 그 동안-무려 7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12명의 어머니들과 32명이나 되는 언니들과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내 밑으로 여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났다는 것 같은데 그 아이는 보지 못했다. 소녀식이라는 건 그렇게 중요한 행사는 아니었다. 그나마 내가 왕족이라서 소녀식 구색이라도 갖추는 거지, 일반 사람들은 소녀식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단다. 내 세계는 굉장히 좁았다. 책으로 간접경험을 하기는 했으나, 나는 내 방. 그리고 개차반이 이용하는 식당과 굉장히 제한된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움직여본 적이 없다. 내겐 마음대로 움직일 권리도 없었으니까. 처음 둘러보게 된 왕성은 참... 무지막지하게 컸다. 쓸데없이 커서 빈방도 많았단다. "공주님. 인사드리세요. 넷째 왕비님이세요." 아. 벌써 힘들다. 여왕들의 방은 서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예 건물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그 건물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200미터 이상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건물 내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움직여야했다. 아참. 혹시라도 오해할지 몰라서 첨언하자면 중세시대 배경의 성을 떠올리면 좀 곤란하다. 현대식 건물이다.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엘레베이터도 있다. 이 모든 게 과학기술이 아니라 마력으로 구동된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점이지만. '아... 진짜 힘들어 죽겠네.' 나의 이 비루한 몸뚱이는 3시간의 여정을 버티기엔 너무 힘들었다. 마지막. 12번째 왕비와 만나 인사를 나누자 정말 녹초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송수진양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헤벌쭉 헤벌쭉 웃었다. "이제 공주마마님들을 만나실 차례에요. 공주님은 총명하고 아름다우시니까 다른 공주님들도 예뻐하실 것이 틀림 없어요." 그건 네 생각이고. 송수진씨. 당신은 참 착한데 좀 세상물정을 몰라. 내 위로 32명의 언니들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약 20명은 날 싫어할 걸? 소녀식 이후로는 행동반경이 좀 넓어진단다. 그리고 공주들끼리 교류도 어느정도는 허락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을 거다. "수진. 도우미들 사이에서도 내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면서?" "그럼요! 공주님이 만약 왕자님이셨다면 정말 세계를 바꾸셨을 지도 모르는 대천재라고들 하던걸요!" 그럼 얘기 끝이다. 좀 안타깝게도 나는 7살이 아니다. 세상물정을 모르기엔 내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아빠랑 결혼 할래요' 라고 말했던 건 절대 내가 아니다. 비록 밤마다 이불에 하이킥을 하고는 있지만 그건 절대 내가 아냐. 아니라고 엉엉. 소녀식의 하이라이트는 언니들과의 대면식에 있었다. 15세 이하의 공주들이 함께 참여하는 자리. 내 밑으로 태어났다는 여동생은 당연히 없을 테고, 또 당연하게도 나는 막내다. "언니들 안녕하세요?" "네가 그 총명하다는 상희구나? 아. 너는 물러가도 좋아. 공주들끼리의 만남을 가져야 하니." 와. 바글바글하네. 32명의 언니들이란 건 참. '정말 호의적이지 못하네.' 정말로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미 왕궁에 소문이 파다하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두 명의 왕자님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 사실상 나는 왕자들의 방으로 가지 못한다. 그래서 왕자들 -왕자라고 쓰지만 망나니들이라고 읽는다- 이 내 방으로 온다. 간단한 과자들과 따뜻한 차. 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이 자리. 인사를 나누는 데에만 20분은 넘게 걸릴 것 같다. 그런데 7번째 공주에서 뭔가 좀, 꼬투리를 잡혔다. "너는 위아래도 없니?" "...네?" 7번째 공주는 화장실에 갔다온 참이란다. 참고로 나한테 아무도 말 안해줬다. 척보니 나이는 13살 전후가 될 것 같다. 어차피 내가 보면 꼬맹이들이다. 나도 꼬맹이지만. 제길.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머리로는 긴장 안해도 돼, 라고 생각한다. 요 녀석들은 아무리 봐도 꼬맹이들이니까. 문제는 내 몸도 꼬맹이라는 것. 게다가 숫자가 무려 31명이다. 저 중에 나한테 호의적인 여자애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내가 개차반이랑 밥도 같이 먹는다는 소문까지 돌았겠지.'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어휴 진짜. 이 꼬맹이자식들.' 사건은 이랬다. 내가 7번째 공주 말고, 8번째 공주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는 거다. 아니. 뭐. 어쩌라고. 누가 7번째 공주고, 누가 8번째 공주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누가 나서서 소개해준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일렬로 앉아 있길래 일렬로 돌아가면서 인사했는데. 아마도 이 왕궁 내에, 소녀식이라는 건 일종의 규율과 룰이 있는 것 같다. 신참(?)의 기를 꺾어놓고 위계질서를 세우고 싶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무섭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소롭기도 한,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공주식 일진놀이라고 하면 표현이 될까. "정말 죄송해요. 몰랐어요." "너. 내 이름이 뭐야?" "7번째 공주님. 강희영 공주님이셔요." 그러자 강희영은 문득 당황한 기색을 내비췄다. 혹시 몰라 열심히 달달 외워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은 아니고 공주들 이름을 32명이나 외워야했는데 이게 얼마나 고역인지 아무도 모를 거다. 난 겨우 7살의 두뇌를 갖고 있다고. 강희영 공주는 테이블로 씩씩대며 걸어가서 아마도 뜨거울 것이라 짐작되는 차가 담긴 컵을 집어들었다. 에이. 설마. 나한테 물 끼얹으려고? 저거 지금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고 있잖아? 에이. 설마. 아니겠지...는 맞았다. 아니. 뭐 이런 개념 없는 계집애들이 다 있어?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다른 언니들도 말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서로 간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피하지 않아보려고 했는데, 결국 피했다. 드레스는 젖었지만 얼굴에 닿지는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같으니라고. 감히 피해?" 강희영은 씩씩대며 다가와 내 뺨을 때렸다. 이쯤되자 나는 이제 무섭다기보다는 열불이 뻗쳤다. 아오. 내가 진짜. 이 꼬맹이를 쥐어팰 수도 없고. '참자. 참자. 참자. 참는 게 이기는 거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이 곳은 남존여비의 세상이다. 지금이야 망나니들과 -첫째 오빠는 제외- 개차반에게 이쁨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언제 끝날 지 모른다. 문제를 일으키면 절대 안 된다. 문제를 일으켜도 될 때. 그 때가 온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강희영은 내 뺨을 때린 뒤 씩씩대며 말했다. "너. 뭘 잘못했는지 읊어봐." "언니께서 던진 물을 피했어요." "또?" "...잘 모르겠어요. 가르침을 주시면 꼭 고치도록 할게요." 강희영은 허- 하고 웃었다. 그러자 저 멀리 있는, 그러니까 서열상으로 약 25번째 이후쯤 되는 것 같은 공주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야. 최시연. 여기로 와봐." 최시연. 내 기억이 맞다면 23번째 공주다. "너. 교육 똑바로 안 시킬래?" "...죄송해요 언니." 얼씨구. 교육은 무슨. 나 방금 오늘 처음 여기 왔거든요. 무슨 말인고 하니, 언니들에게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하면 안 된단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알아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야한다고 했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여기가 무슨 군대야? 군대냐고? 23번째 공주 최시연도 뺨을 맞았다. 이거 참. 분위기 한 번 아름답네. 겨우 10대 초중반 여자애들이 뭐 이리 군기를 잡는지 모르겠다. "야. 너 뭐 잘못했는지 말해보라니까? 빨리 대답 안할래?" 대답할 시간 줬냐? 줬냐고. 이 꼬맹이 자식아. 아오. 결국 최시연은 뺨을 한대 더 맞았다. 그리고 최시연이 대신 대답했다. "언니 성함을 부를 때, 예의에 어긋나게 불렀어요." 7번째 공주님. 강희영 공주님이셔요.라고 대답했던 게 잘못 됐단다. 강 희자 영자 공주님이라고 해야하는데 실수로 강희영 공주님이라고 해서 이 사단이 났단다. 첫째 공주 황세아가 손뼉을 두어번 쳤다. "조금 있으면 어마마마들 들를 시간이니까 적당히 하도록 해. 교육은 시연이가 제대로 하도록 하고." 엄마들이 나타나면 또 어린이들로 돌아가겠지. 아. 볼도 얼얼하고. 짜증도 나고. 이럴 때 우리 망나니는 안타나나나. 예전에 김서희가 내게 뭐라 했을 때, 우리 둘째 망나니가 경고하던 게 기억났다. 좀 짜증나는 망나니긴 한데, 어쨌든 절대갑에 있는 놈이고 아마도 내 편일 거다. '참아야 해. 이들도 내 편으로 만드는 거야.' 지금의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이들도 언젠가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거다. 그건 분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걸렸을 뿐. '그럼 차라리 망나니가 안나타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들이 평소에도 군기를 이렇게까지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기 질투가 뒤범벅된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 질투때문에 더 군기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홀의 문이 열렸다. "물어왓!" 헝겊인형이 날아왔다. 목소리도 들려왔다. "똥개새끼야! 어디 있어?" 둘째 망나니의 목소리가 홀 안에 웅웅 울렸다. *** 둘째 망나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둘째 망나니보다 키가 더 큰 첫째 망나니도 나타났다.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 분위기?" 공주들이 우르르 달려가 인사했다. 제 몇 공주. 누구이어요. 왕자님. 안녕하시어요? 라고 인사하는 게 대부분인데 김환성은 그걸 죄다 무시하건 고개를 간간히 끄덕거리는 걸로 인사를 받았다. 저 망나니는 망나니답게 자기가 누군지조차 말도 안 했다. 몰라? 그건 모르는 놈이 잘못. 이런 논리로 무장된 놈이다. 김환성이 또 고개를 갸웃했다. "너 옷 왜 젖었어?" "... 실수로 넘어져서 차를 뒤집어썼지 뭐예요?" 아이고. 이 꼬맹이들아. 너희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 같다. 김환성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또 깔깔대고 웃었다. 더 짜증나는 건, 내가 아까 이 놈이 던진 헝겊인형을 손에 들고 있다는 것. 저 빌어먹...이 아니라 하여튼 이 헝겊인형 좀 안 던지면 안 되겠니? 부탁이야. 망나니야. 하긴. 네가 내 부탁 들어줄 것 같았으면 애초에 망나니도 아니었지. 첫째 망나니 김환석은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낄낄대고 웃는 김환성과는 달리 김환석은 무뚝뚝하고 차분한 태도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부르신다. 밖에 시녀가 대기하고 있으니 가도록 해." "네 왕자님." 나도 정도는 안다. 여기서 오빠라고 부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환성이 너도 같이 가도록 해." "알았어 형." 나는 개차반의 방으로 향했다. 나도 오예다. 일단 나름대로는, 아주 약간은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 년 착한 척 하네'라고 생각한다면 또 별 수 없지만,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개차반은 도대체 날 왜 부르는 거야?' 확실히 엄청난 특혜다. 시기질투를 받아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이번 왕 대에서, 소녀식 역사상 왕자들이 소녀식을 하는 홀에 들어왔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처음이다. 좀 조용하게 걷는다 싶더니, 김환성이 또 말했다. 헝겊인형이 날아가는 게 보임과 동시에 말이다. "똥개! 물어왓!" ... 아... 패고 싶다. *** 홀의 문이 닫혔다. 김환석은 테이블로 걸어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툼한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놨다. 첫번째 공주 황세아를 가리켰다. "너." "네. 왕자님." 황세아는 빠른 걸음으로 김환석에게 다가갔다. 김환석은 대뜸 발을 들어 황세아의 배를 걷어차버렸다. 황세아는 끼약!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왕자님이 때리는데 공주따위가 비명을 지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왕자가 마력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거다. 마력을 실어 발로 찼으면 공주의 상태가 저렇게 정상일 리 없으니까. "내가 바보로 보여?" "와, 왕자님... 그게 무슨..." 김환석은 테이블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전부 꿇어." 그와 동시에 32명의 공주들이 전부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하는 계집은 살려준다." 공주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결국 제 1공주 황세아가 사실대로 털어놨다. 김환석이 7 공주. 그러니까 상희에게 차를 뿌린 강희영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강희영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바들바들 떨었다. 김환석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강희영과 눈을 마주쳤다. 강희영은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어, 언니가 시키셔서..." "무, 무슨 말이야! 나는 그런 적 없어!" 김환석이 피식 웃었다. 강희영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오늘은 경고만 하는 거야." 그리고 대뜸 주먹을 들어 강희영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났다. 김환석이 주먹을 털털 털었다. "마력은 안 썼어." 김환석은 얼른 일어나려는 -그게 예의니까- 강희영의 얼굴을 발로 지그시 밟았다. "또 이딴 짓 벌이면... 그 땐 정말로 죽일 거야." 그냥 빈말이 아니다. 왕자가 마음먹으면 공주 같은 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이 곳은 그런 세상이다. 공주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남의 똥개새끼를 건드리려면 주인 허락을 맡아야지. 안 그래?"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못 꺼냈다. "정말 죽고 싶은 계집이 있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 그리고 홀을 나가버렸다. 공주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나가는 왕자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 개차반은 역시 개차반이다. 사람 불러놓고선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형아. 뭐하다 왔어?" "똥." 넌 그 똥을 말하는데도 그렇게 무심하고 시크하게 말해야겠니. "심심한데 물어왓이나할까?" 제발. 멈춰 좀! 하지 말라고 말해줘. 첫째 망나니야. 너는 그래도 나이가 무려 11살이지 않니. 이 10살짜리 망나니보다 무려 한 살이나 많잖아. 말려주렴. 부탁이니까. 그런데 잊고 있었다. 김환성은 그냥 망나니인데 김환석은 아주 나쁜 망나니새끼다. 김환석이 날 힐끗 쳐다봤다. "똥개." 문을 열었다. 이건 문 밖으로 따라 나오라는 얘기다. 똥개라는 그 한 단어 속에는 '똥개새끼야. 내가 문을 열었으니 이 쪽으로 어서 걸어와라.'라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셈이다. '설마... 아니겠지...?' 족히 몇백미터는 되어 보이는 복도가 나왔다. 김환석이 있는 힘껏 헝겊인형을 던졌다. 저 자식. 분명히 마력 썼어. 마력 썼다고! 그리고 무심하고 시크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난 저 표정의 의미를 안다. 김환성이 뒤에서 신나서 외쳤다. "물어왓! 똥개!" 그 때. 누군가 헝겊인형을 주웠다. 날 불러놓고 30분 넘게 기다리게 한 개차반이었다. ============================ 작품 후기 ============================ 이거시. 진짜. 남ㅋ존ㅋ여ㅋ비ㅋ 0009 / 0192 ---------------------------------------------- 남자들의 세계란 *** 개차반은 아들들에겐 항상 따뜻하다.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들아. 이건 개가 아니란다." 이봐요. 아버지. 이거라니. 나 사람이라고. 이거라니. 아. 내 자존심 엉엉. 하지만 자존심같은 건 이미 없다. 나는, "아바마마! 아밤마마!" 라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개차반의 다리를 껴안았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예전에는 '귀찮군'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툭 쳐냈을 텐데, 이젠 그냥 가만히 놔둔다. 가끔 기분 좋으면 저 손으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이만하면 엄청난 발전 아니겠어? 겨우 이런 걸로 기뻐해야하는 시대상과 상황이 짜증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김환석이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아버님. 오셨어요?" 김환성은 헤헤 거리면서 개차반을 맞이했다. "아부지!" 8살이 넘으면 아버님 혹은 아바마마라고 불러야하는 게 맞다지만 김환성은 그런 예법따윈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개차반 역시 크게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김환성의 길은 '나이트'로 내정되어 있고 나이트가 된다면 왕실의 예법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까. "환석이도 마력 운용에 제법 익숙해졌구나." "아직 미욱합니다." 김환성이 또 헤헤 웃었다. "내가 던졌으면 저~ 멀리 끝까지 던졌을 텐데." 이 개차반이 나를 부른 이유는 별 거 아니...지 않았다. 그냥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했다는 것은 핑계였고 나한테 편지가 한 통 와있었다. 이게 진짜 문제다. 왜. 어째서. 무려 왕씩이나 되는 인간이 아들도 아니고 딸한테 온 편지를 직접 나한테 전해주는 거냐고.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다. 저 편지. 혹시 무슨 반역모의라든가. 그런 거 아냐? 그런 건 아니겠지. 개차반이 말했다. "네 약혼자로부터 온 편지다." *** 곽기현과 한진수는 제국의 마력학원 기숙에 입학했다. 그리고 같은 방에 내정됐다. 곽기현이 칭얼거렸다. "야. 진수야. 도대체 뭘 쓰길래 그렇게 편지를 수십 번씩 썼다가 지워? 나한테는 편지 한 번도 써준 적 없잖아? 응응?" "있어. 한 번." "한 번밖에 없잖아! 자꾸 그러면 질.투.한.다!" 한진수는 피식 웃고선 곽기현을 살짝 밀쳤다. "으악!" 곽기현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표현상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붕 떠서 날아갔다. 침대에 처박혔다. "이 나쁜자식! 마력을 쓰는 게 어디있어!" "마력으로 저항하면 되잖아." "너랑 나랑 클래스가 같냐! 왕국. 아니, 제국에서도 탑으로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인간이랑 평범이인 나랑 같냐고! 앙?" 곽기현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마치 어린 아이들이 그러하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한진수를 쳐다봤다. "흥이다." "바쁘니까 조용히 해." "다 알아 난. 너 약혼자한테 편지 쓰지?" 한진수가 움찔 멈췄다. "그런 거 아냐." "걔 소녀식한다며. 그래서 편지 쓰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곽기현이 몸을 일으켜 한진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진수 뒤에 섰다. "헤에. 그럼 누구한테 보내는 쓰는 걸까?" "......." "혹시 나한테 쓰는 거야? 러브레터?" "죽는다." "아. 이 시크한 매력이 자꾸 날 빠져들게 하잖아." 곽기현은 킥킥대고 웃다가 이내 아 알았어, 형. 마력으로 때리지 말아줘, 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워서 휘파람을 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제국 내에서도 천재라 칭송받으며 선생들이 가르치는 어려운 내용들 조차 너무 빠르게 습득한다하여 괴물이라 불리는 한진수는 편지 한 장을 작성하는데 무려 6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아침이 됐다. 곽기현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너? 아직도 책상이야?" 한진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그 계집애 번호 모르지?" "......." 곽기현은 멍하니 한진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물었다. "애초에 여자들이 핸드폰을 갖는 것 자체가 말이 되냐? 걔네는 마력이 없어서 핸드폰도 못 쓰잖아. 너 왜 그래? 너 누구야?" *** 나는 개차반으로부터 편지를 전해 받았다. 개차반의 표정이 좀 심상치 않은 게, 정말 반역모의같은 게 있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냐.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겨우 8살이라고. "네 약혼자로부터 온 편지다." 약혼자.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진수다. 한진수한테 온 편지다. 진수와 똑같은 얼굴,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는 그 사람한테서 편지가 왔단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과도 같은 개차반님께서 이 편지를 들고 계신 겁니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공주는 왕에게 무언가를 질문하는 것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 밝게 웃었다. "아바마마께서 저를 불러주셔서 소녀는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개차반이 턱을 살짝 높이 들었다. 안 그래도 나를 내려다보는 놈인데 -키가 크니까- 나를 더욱 더 내려다봤다. 그 우쭐대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니, '당연하지. 영광스럽게 생각해야지.'라고 온 몸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 느끼는 건데, 얘도 한 대 패주고 싶다. "벌써 많이 친해졌나보군." "...그 분께서 소녀를 어여삐 봐주신다면 저는 행복한 일이어요." "확실히 괜찮은 녀석이다." 그런데 왜 표정은 별로 안 좋은지 모르겠다. 그걸 김환성이 캐치해줬다. 망나니인데 오늘은 좀 도움이 되네. "아부지.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썩었...아. 이게 아니지. 표정이 좋지 못해요?" 아참. 이 곳의 신분제는 절대왕정이나 무슨 독재정권처럼 엄청난 신분제라고 보긴 힘들다. 왕자와 왕이라고 해도 공적인 자리 아니면 '했사옵니다'와 같은 말투는 잘 안 쓴다. 시녀들도 공주들한테 약간은 편하게 대한다. 아주 지독한 신분제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약간 어정쩡한 사회다. 어쨌든 김환성의 저런 말투는 문제될 게 없다는 소리다. "썩 내키지가 않는군." "응? 무슨 말이에요?" 뭐야. 이거 설마. 너 벌써 딸 바보 된 거 아니지? 딴 놈한테 딸 뺐기는 게 싫다거나...는 개뿔. 역시 그건 내 착각이자 과대망상에 불과했다. 제길. "그 놈 같은 아들을 낳았어야 했는데." 나도 울고 환성이도 울었다. 참고로 환성이도 천재다. 천재인데 진수에는 좀 못 미치는 천재. 그나마 환석이는 정중하게 대꾸했다. "제가 좀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너희도 충분히 천재의 반열에 들어가니까. 그 놈이 지나치게 잘났을 뿐." 그래. 젠장. 그 놈은 잘났고 나는 한낱 천박한 계집아이다. "소녀는 그러한 분과 약혼이 되어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뻐요." 개차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저도 마치 그럼. 내가 네 혼처를 아주 잘 골라줬다, 라고 생색내는 것 같아서 재수 없었다. 개차반이 말했다. "내일은 학자들과 만찬이 있으니 준비하도록 해라." "네! 아바마마!" 개차반은 이제 나 따위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아바마마의 잘생긴 존안을 봐서 소녀는 아주 기쁘고 행복해요. 소녀는 설렌답니다." 저 자식, 성군이라고 알려진 주제에 아부 엄청 좋아한다. 원래 왕쯤 되면 아부 좋아하나보다. 나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 때, 개차반이 잠깐 불렀다. "잠깐." "네. 아바마마. 말씀하시어요." 개차반은 약 3초 정도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아바마마란 단어는 사전에서 지우도록 한다. 왕명이다." 이자식 뭐래. 시크하고 도도하며, 또 똑똑하기까지 한 김환석이 내게 설명해줬다. "아바마마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도록."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순간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아바마마란 단어를 없애겠다니. 갑자기? 갑자기 왜? ... 답은 정해졌다. 뭐야 쟤. 왜 저러는 거야. 무서워. "아...빠...?" 그 말을 들은 개차반은 또 쿨하게 손을 휘 내저었다. 굳이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귀찮으니 어서 꺼져라'라고 몸으로 말해줬다. ...이거 뭐야. 나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뭐야. 모르겠어. 카오스야. 개차반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날 이후로, 여자들은 아바마마란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왕이라더니. 스케일 한 번 컸다. 아빠소리 듣고 싶어서 아바마마란 단어를 지워버리다니.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 학자들과 나는 가끔씩 만남을 가진다. 나는 그 때마다, 내 얄팍한 지식을 꺼내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내가 화두만 꺼내놓으면 저쪽에서 알아서 잘 해석하고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다는 거다. 내가 이번에 말한 것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개념이었다. "오오...! 공주님은 역시 천재시군요!" "수요와 공급에 대한 법칙이라...! 확실히...!" 이들은 마력에 길들어져 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마력으로 불가능한 게 없는 세계다. 심지어 어떤 놈들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닌다고 했다.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개차반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마력이라는 만능키가 있으니 다른 학문들이 발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머리 자체가 워낙에 좋아서 개념만 던져주면 결과치를 알아서 잘 끌어내준다. 개차반과 학자들과의 식사자리. "폐하. 공주님은 반드시 학교에 입학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도 개인교사라도 붙여야 합니다." "저라도 나서서 열심히 가르쳐보겠습니다." 나는 남자들과 겸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처지이기 때문에... 제길. 말하고도 슬프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라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다들 왕이 '한낱 계집이 무슨 공부냐?'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는지 아주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왕의 대답은 아주 쏘쿨했다. "그대들 뜻대로 하라." 그 자리에서 나는 여지껏 공주들은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수업'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획득 할 수 있었다. 저 자식. 저번에 '아바마마'라는 단어를 그냥 지워버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이제부터 넌 쿨 시크한 개차반이다. 후일 알게된 사실이지만 한낱 계집아이인 나를 두고, 왕궁의 수많은 학자들이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자기들이 가르치겠다고 말이다. 지구에서 가져온 개념들이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 경쟁률을 뚫고서 나를 가르치게 된 사람은 '알렉스'인데 내 인생의 또다른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먼 훗날의 얘기고 일단 내겐 또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났다. "오라버니!" 왕자는 비록 세 명이지만 그 중 두 명은 망나니다. 한 명은 오빠라고 인정해준다. 아. 잘생겼다. 정말 잘생겼어. 내 스타일이야. 제국에 볼모로 잡혀있는 첫째 왕자 김형석이다. 몇 달에 한번 정도는 왕국으로 찾아오는데, 꼭 내 방을 들렀다. 김환석은 내 방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찌나 집중했는지 큰 오빠가 온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잘생기고 흐뭇하고 훈훈한 녀석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그래. 좋아. 이거야 바로! 김형석은 나를 안은 상태로 살금살금 걸어 책을 읽고 있는 김환석의 뒤에 섰다. "어. 형님 오셨어요? 죄송해요. 몰랐네요." 김환석이 김형석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김환석의 연필심이 부러져 있었다. 김형석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냐. 형은 충분히 네 마음을 이해해." "그게 무슨...?" "자. 너도 안아볼래?" "싫습니다. 병균 옮습니다." 김형석이 계속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왜 요 녀석이 나한테 안겼을 때, 연필심이 딱 부러졌을까?" "... 우연입니다. 이 계집애는 똥개새끼일 뿐." ...죽이고 싶다. 이 자식. 기어코 똥개새끼란 단어는 버리지 않는구나. 그 때, 또 방문이 열렸다. 아. 짜증난다. 분명히 또 들리겠지. "물어왓!" 헝겊인형이 날았다. "...는 안되겠네. 형아한테 매달려 있네. 똥개. 형아 언제 왔어요?" 첫째오빠 나이스다. 너는 정말...아. 잘생겼고 듬직해. 넌 최고야 정말. 내 오빠라서 고마워. 저 망나니들과는 다르다고. 엉엉. 내게도 이런 인간이 있어서 다행이야. 김환성이 헝겊인형을 집어 올렸다. "똥개. 산책 가자." "네?" "아부지가 허락해줬어. 왕궁 밖은 안 되고 내가 수련하는 곳까지는 돌아다녀도 된대. 마침 형아도 있으니까 잘 됐네. 다같이 갑시다! 산책하러!" 내 방. 그리고 개차반의 식당. 그리고 몇몇 건물들이 전부였던 내 세상이 조금... 넓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김형석이 김환성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가자." 그걸 본 나도 앙탈을 부렸다. "오라버니 저도 쓰담쓰담 해주셔요!" 오늘 밤. 이불에 하이킥은 또 하겠지만. 그래도 김형석은 아주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누나야 누나. 그 흡족한 미소를 계속 지어주렴. 망나니들을 보며 상처입은 나의 마음이 힐링 되는구나. "저도 이제 아주아주 잘 걸을 수 있어요! 어른이 다 되었답니다!" 새로운 세상 -그래봐야 왕궁 내지만-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귀여운 척 했다. "꺅!" 살짝 넘어지는 척 했다. 첫째 오빠...가 잡아줄 거라 기대했는데 우리의 셋째 망나니 김환성이 날 얼른 일으켜줬다. 마력운용에 엄청난 재능을 보인다더니 과연 몸놀림은 재빨랐다. "오라버니, 감... 꺅!" 제길. 이 자식. 날 일으켜주는 척 하면서 넘어뜨렸다. 그리고선 신나서 낄낄대고 웃는데 진짜 패고싶다. 엉엉. 기필코 죽여버리겠어. 하지만 나의 이 엄청난 살해욕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 녹듯 사라졌다. '세상에...저게 인간이야...?' 김환성의 움직임을 봤다. ... 살려주세요. 오빠. 다시는 망나니라 하지 않을게요. ============================ 작품 후기 ============================ 첫째: 김형석 ← 얘는 망나니가 아님. 오빠인정. 둘째: 김환석 ← 얘가 첫째 망나니. 나쁜놈. 셋째: 김환성 ← 얘가 둘째 망나니. 저도 헷갈린 부분들이 있어서 2,3편에 좀 틀린 곳이 있는데 그건 내일 고치도록 할게요 노블레스에서 올스탯 슬레이어를 연재하고 있는 비츄입니다. 그동안 노블레스에서만 연재하다가 일반란으로 오니 좋네요. 무엇보다도 독자님들 코멘트가 너무나도 상큼해.하트가 막 날아다녀. 이럴수가. 아. 이 곳이 파라다이스인가... 싶네요. 0010 / 0192 ---------------------------------------------- 남자들의 세계란 *** 나는 왕궁안을 걷지...않고 편안하게 이동했다. 마력 바이클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지구에는 없는 물건이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어릴 적 몇 번 타본 퀵보드나 씽씽카처럼 생겼다. 그보다는 훨씬 큰데, 마력으로 구동하는 특수한 이동수단이다. 당연히 마력이 있는 남자만 사용가능한 물건이다. "큰 오라버니는 이걸 어떻게 사용하시는 것이어요?" 아. 훈훈해. 정말 훈훈해. 나 지금 너한테 안겨 있는게 아주 흐뭇하단다. 누나야 누나. 운전대(?) 정 중앙에 박혀 있는 마력 흡수장치에 손을 올린 김형석은 나를 보며 또 흐뭇하게 웃었다. 좋다 이거 정말. 너란 존재는 누나의 유일한 희망이란다. "마력석을 먹었단다." "마력석을 먹어요?" 아. 그러고 보니 책에서 본 것 같다. 큰 오빠처럼 아주 가끔,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태어나곤 한단다. 그러면 이들은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 마력석이라는 것을 섭취한다고 했다. 마력석은 '알론'이라 불리는 특수 광물에 남자들이 자신의 마력을 불어 넣어 만들어지는, 이 세계 최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모든 문물이 바로 이 마력석에 기반하고 있다. 쉽게 말해 지구에서는 청소기 쓰려면 전기를 꽂아야 하는데, 여긴 이 마력석을 꽂으면 된다. 큰 오빠는 내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나는 또 헤헤- 웃었다. 가식적인 게 아니고 못내 흐뭇해져서 웃고 만 거다. 큰 오빠는 또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마력석을 특별한 방식으로 정제하여 섭취하면 임시지만 마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우리 꼬마 아가씨의 궁금점은 이제 풀리셨나요?" 그런데 저만치, 압도적인 빠르기로 앞서나갔던 둘째 망나니 김환성이 끼얏호! 꾸히히히! 라는 괴상망측한 소리를 질러대며 공중으로 뛰었다. 공중 약 10미터 쯤 되어 보인다. 저 높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망나니처럼 뛰어서 빙글빙글 돌았다. 공중에서 한 20바퀴는 돌은 것 같다. 보는 내가 아찔했다. 나는 이 아찔함을 핑계로 우리의 첫째 오빠한테 꽉 안겼다. 그리고 걱정하는 척 했다. "두, 둘째 망..." 망했다. 나도 모르게 속생각이 튀어나올 뻔 했다. 조심해야해. 입 단속. 입 단속! "오라버니! 조, 조, 조심하시어요! 소녀는 간담이 서늘해져요! 소녀를 일찍 죽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오라버니!" "야! 똥개!" 저만치 하늘 높이 뜬 김환성이 나를 보며 외쳤다. 신기한 건 저 하늘 위에 둥둥 떠있다는 것. 그런데 뭔가 불길했다. 불길함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물엇!" 헝겊인형이 날아들었다. "그래도 많이 봐줬어!" 무슨 말이고 하니, 자기는 하늘에 둥둥 떠있기 때문에 나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으므로 물어왓!이 아니고 단순히 물엇! 정도로만 쉽게 말을 해줬으니 너는 나에게 감사하며 또 감사해야한다. 라는 뜻 정도가 되겠다. 너... 언젠가 내가 반드시 패주고 말겠어. 그런데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김환성이 훈련 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까지 몰랐다. 김환성이 왜 천재라고 불리는지. 이 세계의 강함은 보통 마력에 대한 재능으로 결정된다고 했다. 물론 노력으로 그 재능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는데, 일단 보편적으로는 재능이 제일 중요했다. '세상에...' 김환성은 훈련이라고 하지 않고, 이왕에 연무장에 들렀으니 몸이나 풀고 가겠다고 한 건데 내가 보기엔 이건 지옥훈련이다. '총알을 피해...?' 물론 지구의 총은 아닐거다. 설마 진짜 총이겠어싶지만 총알이 일단 내 눈에는 안 보인다. 그리고 내가 무기에 대해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 멀리 보이는 저게 일반 총은 아닌 건 확실히 알겠다. 이름은 잘 모른다. 기관총이나 뭐 따발총이나. 대충 그런 거 있잖아. 영화주인공들이 들고 투다다닷! 막 쏴대면 적들이 마구 쓰러지는 그, 딱 보면 엄청 세보이는 거. 저걸 피하거나 허세인 줄 알았던 검을 뽑아 툭툭 쳐내는데 내 눈에는 김환성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나...엄청 봐주고 있었구나 쟤.' 나는 김환성이 나를 굉장히 많이 어여뻐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이건 상상이상이었다. 김환성은 헝겊인형을 던질 때 있는 힘껏 던지는 척을 했지만 아니었다. 만약 저 놈이 마음먹고 있는 힘껏 던지면 비루한 몸뚱이를 가진 나는 그 헝겊인형 주우러 갔다 오는데 백만년은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짐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저 놈한테 잘 보여야겠다. 물어왓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암. 그렇고 말고. 물어왓은 사랑이야... 아마도. 젠장. *** 이 곳은 남존여비의 세상이다. 여러 번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 그렇다. 그 중 단적인 예가 바로 공주들의 성이다. 일단 왕자들은 김씨다. 공주들은 성이 제각각이다. 나의 어머니인 강서영씨는 강씨다. 그리고 또 나는 김씨다. 뭔가 규칙성이 없다고? 그 말이 맞다. 규칙같은 거 없다. 그냥 왕이 대충 짓거나 그마저도 까먹으면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된단다. 정말 개똥같은 세상이다. 왕족이 이정도인데 일반 서민들은 어떻겠어? 나는 왕궁 밖을 벗어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바깥세상은 정말 끔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핏 듣기로는 밖에서는 대낮에도 강간이 벌어지며 강간을 당했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세상이라고 한다. 비록 똥개취급 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공주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런데 이건...' 나는 몇 번이나 편지를 확인해보고 또 확인해봤지만 역시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 한낱 계집애 따위에게 이 몸이 몸소 나서 펜을 들었으니 그대는 하해와 같은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로 시작하는 이 괴상한 편지를 요약하자면 나처럼 엄청나게 대단하고 멋지신 분이 너에게 편지를 보냈으니까 닥치고 감사해라. 정도가 되겠다. '얘 천재라며.' 그런데 어휘도 풍부하지 않고 문장도 거슬리는 것이 천재가 맞나 싶다. '혹시 김환성처럼 싸움만 잘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그런 것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또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계집따위한테 편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야.' 슬프지만 그게 맞다. 남자가. 그것도 공작가의 자제가 여자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공주여도 이런 대접 꿈에도 못 꾼다. "공주님, 계십니까?" 나는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줬다. 소개하겠다. 내 교육을 맡은 72세. 왕궁 내 최고령자 학자인 알렉스 씨다. 내 도우미인 송수진양에게 들은 얘기인데 이 알렉스씨는... 크흠. 잠깐 헛기침 좀 하고. 큼큼. 이 분은 게이란다. 여긴 뭐... 세상 경험이 별로 없는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게이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아기는 여자를 통해 낳되 정신적인 사랑은 우월한 존재인 남자들끼리 한다나 뭐라나. 아. 확인된 얘기는 아니다. 우리의 송수진씨가 얘기해준 거니까. 애초에 난 송수진씨 얘기는 좀 걸러듣는 편이다. 송수진양은 이렇게 말했다. "어여쁜 공주님을 다른 외간남자한테 보낼 수 없어서 동성애자인 알렉스씨를 교사로 붙이신 거라고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걸러들어야 할 얘기다. 송수진양은 이런 쪽 가십거리를 굉장히 좋아했고 자기 듣고 싶은 쪽으로 듣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알렉스 학자님!" 나는 내 머리 높이 위에 있는 문 손잡이를 잡고 약 30초간 낑낑대어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 문도 오질나게 무겁다. 남자들 위주의 세상이고 걔네는 마력 쓰면 문도 잘 연다. 심지어 김환성은 손도 안대고 연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만 봐도 이 세계가 여자들을 얼마나 대충 생각하는지 알 법한 대목이다. 나는 알렉스씨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알렉스 학자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만물 박사셔요!" "어휴. 아닙니다. 저는 다 늙어가는 퇴물인걸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입이 귓가에 걸리는 알렉스씨를 보며 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곳 남자들은 천재이며 강한 것은 분명한데 또 단순한 구석이 있다. 애초에 나처럼 끼 부리는 여자가 없다보니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8살짜리 끼가 끼 인지 재롱인지는 모르겠다만. 젠장. 나도 끼 부리고 싶다고.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고 싶다...는 나는 8살이다. "공주님이 남자로 태어나셨다면 저 한진수님과도 비견되는 천재로 명성을 날리셨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 알렉스는 편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거 이상하군요. 제가 한 번 살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어차피 자기자뻑밖에 없는 편지거든요. 알렉스는 허허-하고 웃었다. "이거 참. 정성들여 쓴 편지인걸요?" "네?" "참... 누가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복원해드려도 될까요?" "알렉스 학자님은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하면 저도 알렉스 학자님처럼 위대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어서 해봐. 아부는 이미 익숙하니까. 나를 아부왕이라 불러다오. 그 상처투성이의 명성을 얻는 대신 밤마다 하이킥을 하겠지만. 알렉스는 마력을 써서 편지를 복원해줬다. - 날씨가 매우 추우니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 할 것이다. - 네 소녀식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함에 미안하다. - 공주들 사이에 암묵적인 위계질서가 있다고 하는데 처신을 잘하여 부디 별 일 없기를 바란다. 와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내용들로부터 시작해서, - 상히상히상히, 알라뵹뵹♡ - 나는 로리타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젠장. 나 왜이러는 거냐 도대체. - 정말 미치겠군. 내가 도대체 왜 이딴 걸 쓰고 있는 ㅁㅀㅂㅁㄱ재ㅕㅗㅎ지ㅓㅗㅁㄹㅇㄱ호먼ㄱ호머ㅣㄱㅎ 처럼 멘붕의 증거가 보이는 이상한 말까지. 이 아이의 정신세계가 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나는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을테니 아무렇게나 마구 휘갈겨 쓴 것 같다. 막상 복원을 해놓고 보니 알렉스도 민망해했다. "크흠... 아무래도 공주님이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낙서까지도 마구 했던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한진수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건 의외군요." 알렉스가 흐음...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편지를 작성한 시간은 약 6시간 정도로 보입니다. 수많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는 군요. 공주님 정말 사랑받고 계시네요." 뭐야. 이거. 기쁘다기보단 뭔가 이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내가 아닐 거다. 그런데 이 편지들의 내용은 다분히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오래된 연인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뭐야... 너... 한진수 아니잖아.' 진수가 매일 했던 말이 있다.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그렇게 말했었다. 연인들 사이에 다들 하는 말 아니냐고? 아니다. 얘는 심지어 여름에도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슨 과보호냐고 짜증섞인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알렉스가 말했다. "허허. 거참. 제국은 벌써 겨울이 왔나요? 여기는 아직도 무더운데."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알렉스씨가 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더 던졌다. "공주님은 지금 8살이신데... 예전에 뵈었을 때는 분명 4살 이셨을 텐데 참... 그 분도... 으하하핫!" 이 게이 양반아. 거기까지만 말해! 듣고 싶지 않아. *** 왕은 황금색 의자에 앉았다. 중앙에는 레드까펫이 길게 깔려져 있고 그 좌우로 약 30여명의 학자들이 줄을 지어 섰다. 그들은 열과 성을 다해 진심으로 부탁했다. "공주님에게는 마력이 정말 필요합니다." "마력만 있다면 영웅이 되실 인재입니다." "여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시대가 이렇게 된 것은 여성이 마력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공주님이 마력을 사용하신다면 왕국의 크나큰 복이 될 것입니다." 왕이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나보다. "그래." 왕은 시크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오히려 학자들이 당황했다. "예?" 왕은 학자들을 물리려다가 말고 이내 '잠깐!'을 말했다. "그거 위험하지는 않겠지?"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평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먼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은 제시하겠습니다." 아들도 아니고 딸을 사고파는 것은 그리 문제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냥 뺏어와도 사실 할 말 없는데 적절한 보상까지 준다면 왕도 말릴 이유는 없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은?" "부작용이랄 것도 없는 것이... 아무래도 남성의 마력을 꾸준히 섭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은 상관없다.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아." "그것이 아니라 남성성이 나타나게 될 수 있습니다. 성기가 자라나진 않아도 중성화될 확률이 큽니다." "그 말은... 남자처럼 변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오히려 영광된 일이지요." 왕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기각. 그 계획 취소한다. "...예?" 왕이 진지하게 말했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불허." 학자들은 한 방에 모여 얘기를 나눴다. "왕께서는 어째서...?" 알렉스가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딸을 잃고 싶지 않으신 거지요." "그게 무슨...?" 아무리 학자들이어도 이해가 안 됐다. 천박한 여성이 무려 남성이 되는 거다. 물론 완벽한 남성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수염도 날 것이고 키도 커지고 근육도 생길 거다. 좋은 일이 아닌가. "당신들은 상희 공주님을 못봐서 그래요. 나라도 반대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자세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금 제가 새로운 단어를 사전에 추가하려고 추진 중입니다." "새로운 단어요?" 알렉스가 씨익 웃었다. 마력을 사용해서 칠판에 글씨를 썼다.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딸바보.' 학자들 모두가 놀랐다. 평생동안 저런 말도 안 되는 단어는 처음 본다. 기함을 토했다. "그 무슨 해괴망측한 단어란 말입니까!" 한편, 왕국의 제 17 공주. 신수영이 제 33공주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노크했다. 김상희가 밖으로 나왔다. 김상희는 정중히 인사했다. 저번에 소녀식 때 했던 실수도 바로잡았다. "신 수자영자 언니 오셨어요?" ============================ 작품 후기 ============================ 제가 일반란에서 연재하고 있는 또다른 소설 '세상을 노래하다' 를 추천합니다. 양아치가 갱생(?)하여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노래소설을 빙자한 로맨스...감동, 코믹, 러브...라고 주장해보고 싶은 소설입니다. 노래소설입니다. 조아라에는 흔치 않은 것 같더라구요. + 와... 여기 코멘트는 신세계야... 노블레스 독자님들이랑은 분위기가 너무 달라 엉엉엉엉 죠타... 여긴 파라다이스가 틀림업써 0011 / 0192 ---------------------------------------------- 남자들의 세계란 ***11 제 17번째 공주 신수영. 눈매가 동글동글하고 다른 공주들에 비해 젖살이 덜 빠져서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을 갖고 있다. 아빠란 개차반의 유전자가 워낙 좋아서 외모만 놓고보면 다들 연예인 저리가라인데, 그 중에서도 이 아이는 한 대 때리면 울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아이였다. 때려보고싶... 응? 아니. 이게 아니지. "신 수자영자 언니 오셨어요?" "그래. 네 시녀는 어디에 있니?" 내 시녀이자 전속 도우미인 송수진양은 내 옆방에 있다. 내가 만약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인터폰 같은 걸로 그냥 부를테지만, 내겐 마력이 없다. 내 방은 원룸형식의 큰 방 하나와 작은 화장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방은 벽면이 굉장히 얇다. 그 벽면을 세 번 두드리면 송수진양이 이렇게 찾아온다. "공주님. 부르셨어요? 제 17공주님께서도 계셨군요?" 송수진은 고개를 숙였다. 17공주는 고개를 까딱 끄덕이고선 말했다. "나는 홍차로 부탁해." "우리 상희공주님은 뭘로 드릴까요?" "우유!" 녹차 같은 것도 좋지만, 나는 아직 8살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내가 지금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여자들치고 똑똑하다고는 하지만 마력이라는 사기성 짙은 능력을 갖고 있는 남자들보다 똑똑할 수는 없다. 그나마 내가 천재취급 받는 건 지구에 있던 개념을 갖고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단 내게 남은 것은 내 비루한 몸뚱아리 뿐이다. 슬프게도 그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비루한 몸이라도 비루하지 않도록 만들어야지. 카페인 많은 녹차보다는 내 성장발육에 아주 도움이 되는 우유를 먹는 게 좋다. "설탕 넣어드릴까요?" "응!" ...은 거짓말. 그냥 설탕 넣은 우유가 맛있다. 내 몸이 어려져서 그런지 이렇게 달달한 게 좋다. 지금의 몸으로 아메리카노같은 걸 먹으라고 했다간 토부터 할 것 같다. "상희 너는 공주로서의 자각을 좀 더 갖춰야겠어." "네?" "차를 마셔야 기품이 사는 거란다." 얼씨구. 12살 꼬맹이가 기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니? 그냥 우리는 우리 나이대에 맞게 재롱 부리고 끼 부려야 돼. 이 아가씨야. 뭘 모르네. 이 아이가 날 찾아온 까닭은 그렇게 복잡한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신수영이 말했다. "나는 네 편이 되고 싶어." "제 편이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모르는 척 했다. 원래 33명이었던 공주들은 이제 총 34명. 내 위로 32명의 언니가 있고 내가 33번째 공주고 내 아래로 한 명이 더 태어났다. 어쨌든 그 33명 중 약 20여명은 제 1공주인 황세아 파(?)이고 나머지 10여명은 내 파(?) 란다. 이 것들아. 정신차려. 우리들끼리 편 나누고 싸울 때가 아냐. 이 꼬맹이들아. 아니. 공통의 적 남자들이 있는데 왜 우리끼리 치고받아?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뭐...어쩔 수 없나.' 만약 내가 지구에서 온 게 아니고 애초에 여기서 태어났다면 저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방에 찾아온 것을 언니들이 알게 되면... 나는 아마 적이 될 거야." 그래요. 적이 된다 쳐요. 그럼 무슨 문제가 생기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공주들끼리 팀 나누고 이래저래 싸우면 뭐 이득 있니? 아니면 불이익이라도? 그냥 공주들끼리 시기질투하고 좀 심하면 예전처럼 때리고 그러고 말겠지. 어차피 티나게 때리지도 못하는데 어휴 참. 이 아이는 내게, 어떻게 하면 왕자님들의 총애를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물어왔다. "소녀는 언니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겠답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말해주니. 물어왓! 하면 물어와서 헤헤거리고 개차반의 다리에 매달려 재롱 피우고 시크도도 김환석에게 아부하며 꼬리 살랑살랑 거리는 거... 아 말해놓고나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 젠장. 또 생각났다. 백만살이 되고나면은요,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요? 그건 내가 아냐. 내가 아니라고. 으아아아! 이불킥! 이불킥! 이불킥! "하지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특별한 방법이나 비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다. 특별한 방법 있다. 이 시대의 남자들은 단순한 구석이 있다. 워낙에 상위자로 군림하고 있다보니 단순화된 것 같다. 그러니까 끼부리면 어느 정도는 넘어온다. 그런데 그런 방법을 알려준다고해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얘를 덜컥 믿을 수는 없어.' 지금 나는 재롱을 가장한 끼를 부림으로써 우리의 망나니들과 개차반의 환심을 사고 있다. 그런데 이게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라 내가 일부러 의도한 거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모르긴 몰라도 모가지 댕겅 날아갈 거다. 감히 남자들을 조종하려 들은 거니까. 이 세계에선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디 감히 공주따위가. '차라리 우리 둘째 망나니나 좀 나타나면 몸으로라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그러고보니 둘째 망나니 출근할 시간 다 됐다. 나와라, 망나니. 얍! '어라...?' 문이 열렸다. 물어왓!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로 봐서 둘째 망나니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 크다. 둘째 망나니는 그냥 망나니지만 첫째 망나니는 망나니에 나쁜놈을 더해야 한다. 저 놈은 진지하고 시크하게 내 욕을 하는 놈이다. 귀여운 구석도 없는 놈! "환석 오라버니. 오셨어요? 소녀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볼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답니다." 저 놈은 나를 힐끗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이딴 걸로 진지해주지 말아줘. 부탁이야. "죽을 날이 멀지 않았군."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거 죽을 병이다." "오, 오라버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 한 번 얻어맞아 볼래? 나 이제 8살이거든. 하지만 나는 금세 울상을 지었다. 나의 울듯 말듯 당황한 표정을 보자 그제서야 만족한 듯 첫째 망나니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2왕자님. 안녕하시어요? 소녀는 제 17..." "비켜. 걸리적 거려." 와. 저 싹퉁머리 보소. 그래도 왕자라고 대접해주려고 하는데 그냥 툭 밀치고 지나가 버렸다. 아주 그냥 패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신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는 거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진정해 아이야. 저 놈이 아주 성질이 더러운 건 맞지만 그래도 설마 여자를 막 패거나 하지는 않겠...아니. 아냐. 저 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나는 한 번도 못 봤지만. "오라버니.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리겠어요!" 주물러 드릴까요? 하면 안 된다. 그럼 귀찮아 꺼져. 라고 말할게 뻔하다. 그니까 아예 선수를 쳐야한다. 나는 의자를 하나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김환석의 어깨를 조물딱거렸다. 김환석은 내게 신경도 쓰지 않고 역사책을 읽었다. 그래도 집중력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다. 문득, 놈이 말했다. "아우레스력 8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지?" 아우레스력 8년엔 4왕자 스티븐이 3왕자 클리언을 독살한 것이 밝혀져 마력을 폐지당하고 종신형에 처하게 되는, 왕자의 난이 발생했었다. 내 대답에 만족한 듯 망나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읽었다. 이 때가 기회다. "소녀가 열심히 생각해봤는데 환석 오라버니는 정말 아는 게 많은 것 같아요.저어어어어엉말 대단하시어요!" "......." "소녀는 어떻게 하면 오라버니처럼 총명한 아이가 될 수 있을까요?" 아. 팔이 정말 아팠다. 이 나쁜놈은 그만두라고 말도 안 했다. 애초에 마력을 쓰는 놈이다보니까 이 정도로도 여자는 힘들다는 걸 인지 자체를 못하는 것 같다. "꿈 깨라." "역시... 그렇죠? 소녀는 오라버니가 정말 자랑스럽답니다." 나는 헤헤- 하고 웃었다. 야. 이 자식아. 표정관리 좀 똑바로 해라. 너 입가 씰룩거리는 거 다 보인다. *** 제 17공주 신수영은 오늘 충격을 받았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김환석의 악명은 공주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인사를 제외한 다른 말이라도 꺼내면 뺨을 맞을 수도 있다. 실제로 저번, 33공주 김상희의 소녀식 때 제 7공주 강희영은 주먹으로 맞았고 1공주 황세아는 발로 차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놈인데, 33공주와는 곧잘 대화를 나눴다. 사실상 대화로 보기에는 좀 어렵긴 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군." "그거 죽을 병이다." "꿈 깨라." 그러나 신수영이 보기엔 신세계였다. 김환석이 공주와 이렇게 많은 말(?)을 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신수영은 처음 알았다. 거기에 더욱 충격적인 건, "아우레스력 8년엔 4왕자인 스티븐이 제 3왕자님인 클리어님을 독살하였던...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배웠답니다." 이라는 무슨 외계어같은 걸 알고 있었다는 거다. 신수영의 입장에선 충분히 외계어다. 여성에게 교육은 사치다. 여성은 그저 몸 건강하게 커서 아들을 낳으면 된다. 신수영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상희 공주는 아니었다. '언제 저런 공부를...' 김상희는 8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신체 발달도 덜 됐다- 밤 늦게까지 공부한다. 어쩔 수 없다. 마력으로 공부하는 남자들을 따라가려면, 마력 없는 김상희는 결국 노력에 노력을 더해야 한다. 그 이후에 몇 가지 이어지는 질문들을, 김상희는 막힘없이 대답하다가 가끔 하나씩 모르는 것이 나오면 김환석에게 물어봤다. 그리고 김환석을 추켜세워 올려줬다. 신수영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왠지... 김상희는 저 문제의 답도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그 느낌은 맞았다. 김상희는 너무 똑똑한 체 하지 않았다. 적당히 틀려주면서 김환석을 칭찬했다. 남성의 인권이 훨씬 높은 세상에서 남자한테 맞먹으려 들지 않으려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남기 위한 김상희 공주의 처절한(?) 전략이었다. '미, 미쳤어! 어떻게 감당하려고!' 더욱 어이없는 건,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자..." "소녀는 환석 오라버니라고 생각해요!" 하고 공주가 감히 왕자의 말을 끊었다는 거다. 신수영은 두려워졌다. 큰 일이다. 감히 왕자의 말을 끊다니. 그런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이게 뭐지?" "이것은 소녀가 소녀의 약혼자님께 드리려는 편지랍니다." "편지라..." 김환석은 김상희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그 편지를 살펴봤다. 그러더니 북북 찢어버렸다. "마음에 안 들어." *** 이 놈은 좀 단순한 구석이 있다. 자기 칭찬해주면 기분 좋아진다. 둘째 망나니는 어디로 튈지 몰라 오히려 더 어렵다. 그런데 놈이 편지를 발견했다. "이것은 소녀가 소녀의 약혼자님께 드리려는 편지랍니다." 그리고 저 망나니는 내 편지를 살펴봤다. 나 저거 진짜 열심히 썼다. 과거의 한진수가 자꾸 떠올라서 마음이 굉장히 어려웠었다. 그리고 멘붕의 흔적이 보였던 여러 낙서들. 그것때문에 마음이 더 어려워졌다. 그 한진수와 이 한진수 사이에 어떤 연관점이 있는 건 아닐까. 겨우 얼굴 한 번 본 것이 다인, 당시 4살이었던 나를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건, 분명 어떤 연관이 있을 거야.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나를 괴롭게 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 딱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이 또 떠올랐었다. '따뜻하게 입고 다녀.' 그 말이 머리에 맴돌았고 그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그 편지를 작성하는데 6시간 쯤 걸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과거의 한진수와 이 한진수를 헷갈리지 않으려 무던히도 마음을 다잡았고 마음을 강하게 부여잡아야 했다. 그런데 저 망나니가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다. 거기에 한 마디를 더했다. "쓰레기군. 치워." 나는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귀여움 받고 있다고 해도, 왕자한테 욕하는 순간 독살당할 거다. 선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밝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네, 오라버니! 소녀가 쓰레기를 치우도록 할게요." 아무리 속이 쓰리고 아파도 이 편지 주워 담는 수 밖에 없었다. 왕자가 쓰레기라고 말했으니 이건 쓰레기인 거다. 찢겨진 종잇조각을 하나하나 줍는데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간, 8년간 나는 정말 많이 노력했다. 팔자에도 없는 아부해가면서 비위 맞춰주면서, 겨우 8살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고3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울면 안 돼.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런데 오늘따라 서러웠다. 하필이면, 내 편이 되고 싶다고, 어떻게하면 왕자들의 총애를 받을 수 있냐고 나를 찾아온 17공주 앞에서 이런 망신을 당했다. 그냥 망신도 아니고 이건 개망신이야. 엉엉. 나는 자존심도 없고 배알도 없고 그냥 왕자의 애완견일 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정말 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마저도 들었다. '아냐. 마음 약해지면 못 써. 정신차려 김수희.' 그 때, 망할 소리가 또 들려왔다. "물어왓!" 헝겊인형이 날아 들었다.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다. 첫째 망나니야 어차피 집중하고 있을테니 소리는 듣지 못할 테고. 문제는, 저 둘째 망나니의 청력이 일반인의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 정도. 나는 순간 몸이 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몸이 떨려왔다. 추웠다.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17공주 신수영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둘째 망나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랬어?" 둘째 망나니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너. 왜 울어? 누가 울렸어?" 그리고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첫째 망나니가 정말 나쁜 놈인줄로만 알았다. ============================ 작품 후기 ============================ 음. 제 성별에 대해서 많이들 궁금해 하시네요 ㄷㄷ;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공약을 걸어보고자 합니다. 이번편수 추천 5000개 이상 달리면 거짓말 안하고, 25일 00시 쯤 조아라 자유게시판에 제 얼굴(제대로 보이는 걸로) 인증할게요. 약속합니다. 제가 생업으로 삼는 글이 있는지라 -글로 벌어먹고 사는 영세글쟁이라 ㅠㅠ- 연참은 무리에요. + 노블과 코멘트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노블레스 독자님들은 대부분 남성분들이시고, 그래서인지... 한줄 넘어가는 코멘트가 거의 없어요. 근데 여긴... 하... + 공약인증사진은 자유게시판이 아니라 뜰로 옮겼습니다. 0012 / 0192 ---------------------------------------------- 남자들의 세계란 *** 김환석이 제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섰다. "김환성." 김환석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김환성은 당황했다. "혀, 형아?" "형이 있는 자리에서 뭐하는 짓이야?" 순간, 김상희를 옥죄는 듯 한 무거운 분위기가 풀려버렸다. "그, 그게 형아 있는 줄 모르고..." "핑계대지 마." 김환석의 눈에, 눈물을 겨우 참고 있는 김상희가 보였다. 김환석은 김상희를 무시했다. 그리고 신수영에게 말했다. "쓰레기. 치우라고 했잖아." 김상희는 순간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 했다. 아무리 서글퍼도 왕자의 말은 따라야 한다. 그런데 평소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김환석이 또 말을 이었다. "왜 네가 버린 쓰레기를 내 똥개가 치워?" 김환석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셋째인 김환성에 비해서 마력에 대한 재능은 딸리지만 그래도 마력을 썼을 때와 쓰지 않았을 때의 움직임은 확연히 달랐다. 사라졌던 김환석은 신수영 앞에 나타났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내 경고. 그 새 잊었어?" 신수영은 바들바들 떨면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겨우 한 마디 내뱉은 것이 '왕자님'이었다. "와, 왕자님...!" 김환석은 신수영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누가 저딴 쓰레기를 남의 똥개새끼 책상에 올려 놓으라 했지?" 김환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똥개새끼." 상희는 "네 네! 환석 오라버니! 소녀는 여기 있어요!" 라고 밝게 대답했다. 언제 울었냐는 것처럼 눈물을 그새 말라붙어 있었다. "눈 감아." "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김상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돌이켜보면 김환석이 김상희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린 적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뭘 하라고 한 것은 거의 처음이다. 어깨 주물러주는 것도 아부하는 것도 다 김상희가 먼저 나서서 했다. "귀 막아." "네. 오라버니." 김상희는 귀도 막았다. 김상희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차갑기도 한 것 같고, 뜨겁기도 한 것 같은 이상한 것이 눈과 귀를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환석이 마력을 실체화시켜 눈과 귀를 막아버린 거지만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마력이란 건, 여자들은 제대로 느끼지조차 못하는 남자들만의 고유 능력이니까. 시간이 조금 흘렀다. 김상희의 귀에, 김환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똥개새끼. 눈 떠." "오,오라버니! 소녀는 무시무시했답니다." 정말 그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어둠에 갇혀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마력으로 감싸진 걸 모르니까 그럴 만도 했다. "걸리적 거리니까 비켜." 김환석은 김상희를 툭 밀치고 걸어갔다. 와. 저 싸가지. 하고 김상희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평소에도 툭 밀치긴 하는데 오늘은 좀 세게 쳤다. 마력도 강한 놈이 힘 조절을 못할 리도 없고. 이건 고의다. 일부러 세게 친 거야. 나쁜 자식. 남의 편지를 북북 찢는 것도 모자라서 아주 그냥 적반하장이구만. 김상희는 속으로 삭히고 또 삭혔다. 김상희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신수영은...어디에 있지?' 신수영을 찾아봤지만 여기 없었다. "환석 오라버니! 어디 가셔요! 소녀는 오라버니를 조금 더 오래오래 보고 싶은데..." 김환석이 우뚝 멈춰섰다. "시끄러워." "힝. 소녀는... 네. 알았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오라버니의 귀를 어지럽혔다니. 소녀가 잘못했어요." 김환석은 방문을 열고 나가기 바로 직전에 힐끗 뒤를 쳐다봤다. "책상 두 번째 서랍." 그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또 소리가 들려왔다. "오예!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 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첫째 망나니가 귀 막고 눈 막으래서 그러고 있었더니. 무슨 신세계가 펼쳐졌어.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들렸다. 모르긴 몰라도 마력으로 어떻게 한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무섭다. 정신을 차려보니 신수영은 이 자리에 없었고, "오예!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소리가 들려왔다. "화,화, 환성 오라버니!" "아. 힘들었다. 잠깐만. 물어왓은 조금만 이따가 시킬게. 팔이 아파서." 내가 장담하는데 저 망나니는 내가 물어왓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저 황당한 오해를 내가 언젠가는 풀어주고 말겠어.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냐고? "오라버니. 어째서..." "아씨. 다 똥개새끼 너 때문이잖아." 아니. 뭐. 내가 뭐. 뭐. 어쨌다고! 말을 들어보니 김환성이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마력을 방출했는데 거기엔 김환석이 있었다. 상급자 앞에서 마력을 뿜어내는 건 예의가 없는 거다. "손들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알아? 마력도 못 쓰고. 쳇." 김환성은 투덜거렸다. 입술이 댓발 나와서 삐진 척을 한다. 나는 속으로 풉. 웃음이 나왔다. 한진수 다음가는 천재면 뭘해. 싸움 무지하게 잘하면 뭐해. 총알 피하면 뭐해. 무릎 꿇고 손들고 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영락없는 꼬맹이다. 아. 그냥 꼬맹이 아니고 망나니 꼬맹이. 속으로는 고소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내색 안했다. "환성 오라버니가 팔이 아팠다니 소녀의 마음도 정말 너무너무 아파요." 자. 이 때가 기회야. 가랏. "오빠 팔 많이 아프시어요?" "엉. 아파 죽는 줄 알았어. 형아 밉다." 나는 한껏 삐진 꼬맹이의 팔을 주물러 주었다. 좋았어. 오빠단어도 썼어. 썼다고. 내가 해냈어! 나는 매우 걱정이 되는 표정을 연기하면서 망나니의 팔을 주물러 줬다. "그런데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넌 똥개새끼니까 몰라도 돼." 야. 결국 난 똥개새끼냐. "이제 팔 안 아프다. 형아가 마력 쓰지 말라 그런 2시간 지났으니까 이제 써도 돼." 마력이란 건 신체의 피곤함도 풀어주는 것 같다. 한순간에 쌩쌩해졌다.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데 저 2시간을 꼬박 채우는...뭐라고? 2시간이 지났다고? 잠깐 눈 감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둘째 망나니는 팔이 다 회복된 듯 빙글빙글 돌렸다. 뭔가 불안했다. "물어왓!" 헝겊인형이 하늘을 날았다. ... 죽인다. 너도 날아보고 싶냐...는 내 속마음이고. "네, 오빠!" 나는 열심히 달렸다. 젠장. *** 김환성은 투덜거렸다. "형아 미워." "......." "나 삐졌어." "......." "2시간동안 마력 못 쓰면 얼마나 불편한데!" "......." 김환석은 책만 쳐다봤다. 환성에게는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마력에 대한 재능은 환성이 훨씬 앞선다. 환성은 적어도 무력에 관한한, 한진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소문이 나있는 상태다. 다시 말해 싸움은 환성이 더 잘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싸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겨우 13살짜리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카리스마 혹은 기세의 문제였다. 환성은 환석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형에게 대들지 못했다. 환석은 입이 댓발 나온 환성의 머리를 한 번 슥 훑었다. 쓰다듬는 건 아니었고 때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 중간쯤의 어정쩡한 움직임이었다. 김환성은 저도 모르게, "헤..." 하고 표정이 풀어졌다가 '아차!' 하고서 다시 삐진 척을 했다. 환석이 말했다. "17공주는?" 환성은 아주 자랑스레 말했다. "내가 엄청 패놨어. 죽일까 했는데 그럼 아부지한테 혼날 거 같아서 죽이진 않았어." "피는?" "피 안 나게 잘 팼어. 근데 형아. 피는 왜 나면 안 돼?" "......." 환석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똥개새끼가 피 무서워 해. 하찮은 계집이거든." "아하. 똥개인데다가 겁쟁이구나!" 환석은 콜록, 콜록 기침을 했다. 환성이 기겁했다. "형아! 형아 왜 그래!" "가만히 있어. 별 거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환석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네가 왜 기침을 하지?" 남자들은 기침조차 하지 않는다. 적어도 환석 정도의 재능과 마력을 가진 남자는 아프지도 않는다. 기침이 나올 수가 없다. "별 거 아닙니다. 아버님." "사실대로 말해라." "정말 별 거..." "명령이다. 네 몸 상태. 지금 정상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똥개 방에서 나오고 난 다음부터 저러는 거 같아요 아부지." 그리고 김환석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왕궁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제 17공주 신수영이 사형 당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러나 그 누구도 내게 이렇다 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나마 송수진양이 '왕자님께 위해를 끼치려고 했다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해줬을 뿐이다. 사실 우리 송수진씨도 잘 모르는 것 같긴 하다. 나는 사형이 거의 없어지다시피한 21세기 한국에서 왔다. 사형.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거부감부터 든다. 더군다나 내 편이 되고 싶다고 -그게 진심인지는 확인해봐야겠지만- 며칠 전 찾아왔던 아이가 사형을 당했다니 좀 께름칙하다. '그만큼... 조심해야 해.'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절대로 도를 지나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여자 목숨은 남자들에게 별 거 아니다. 마력도 없지만 그깟 딸은, 몇 번이고 또 만들면 된다. 남자들은 마력이 넘친다. 마력이 넘치다보니 밤 일(?)도 매우 잘한다. 임신 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했다. 이 정도면 개차반은 거의 딸 생산 공장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 위에 32명의 공주가 있는 거 보면 알잖아. 그것도 성인이 아닌, 15세까지의 소녀로만 32명이다. 성인까지 치면 더 많을 건데 나는 모른다. 나름대로는 가족이지만 알 필요도 없다 이거지. '어휴. 어쩌다 이런 세계에 태어나서.' 감이 오죠. 33번째 공주인 내가 태어나기 전에 겨우 3명의 남자만 태어났다니까요. 그래서 이 곳은 남자들의 세계라는 거다. 정작 이 세계에 군림할 수 있는 건 남자인데 그 남자가 여자에 비해 극소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넘치고 넘치는 게 여자고 남자들은 그 엄청난 체력을 바탕으로 으쌰으쌰(?)하면 여자들이 쨘! 하고 나타나는 세계니까. '아. 억울해.' 이왕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날 거였으면 좀! 어? 극 남존여비 말고 극 여존남비 세상에서 태어나면 얼마나 좋아.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프네. 그랬다면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지냈을 텐데. 신수영 걔도 참 불쌍해. '신수영이 남자였다면 죽지 않았겠지.' 신수영의 사형소식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지만 그걸로 언제까지 패닉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여긴 지구가 아니다. 지구의 상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 아. 그런데 뭔가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지. 뭐였더라.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 맞아. 두 번째 서랍.' 시크하고 도도하며 망나니에 나쁜놈이기까지 한 김환석씨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이 있었다. 아주 시크하게 '두 번째 서랍'하고 나가버렸었는데 여태까지 잊고 있었다. 그래. 여기에 내가 억울한 게 하나 더 있는 거야. 난 이렇게 모든 걸 깜빡깜빡한다. 아직 8살이라서 그렇다. 나는 마력도 없고 천재도 아닌데 8살의 머리가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어. 이제 한창 무럭무럭 클 나이인데!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럽다. 서러워. 이 머리로 맨날 공부했다고 나는! 마력이 있는 너랑은 다르다고! 김환석 이 나쁜 자식아! 너는 애초에 슈퍼컴퓨터고 나는 그냥 컴퓨...아니 컴퓨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돼? 그래. 2G. 나는 2G 핸드폰 수준인데! 그럼 어? 칭찬 한 번쯤 해줄 수 있잖아. 오구. 어화둥둥 내 동생. 공부 열심히 해쪄?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아. 아니. 바랄 수도 없어. 그냥 '나름 노력하는 구나.' 한마디만 해주면 참 좋을텐데 그것도 없고 남이 쓴 편지를 북북 찢어대질 않나... 나는 그 앞에서 울었고. 아. 쪽팔려. 이불아. 기다려. 언니가 이따 밤에 이불킥 삼백 방쯤 날려줄게. '두 번째 서랍?' 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서랍을 열어봤다. '이, 이건...?' ============================ 작품 후기 ============================ 추천수 5천이 진짜 넘었네요 ㅎㄷㄷ 이럴수가 OTL...아 이게 넘을수도 있는 숫자구나 ㄷㄷ 사진은 제 뜰에 올렸습니다... 0013 / 0192 ---------------------------------------------- 그 아들의 스케일 ***13 며칠 전. 김환성을 밖으로 내보낸 김환석이 입을 열었다. "독을 좀 마셨습니다." 상희에게는 개차반이라고 불리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성군으로 불리는 김훈상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독이라?" "예. 각성을 마친 남자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만." 김환석은 분명 천재다. 그러나 아직 12살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마력각성도 제대로 못한 나이다. 그래서 성인들에 비하면 많이 약하다. 마력각성은 대체적으로 10~17세 사이에 규칙성 없이 나타나는 현상인데 보편적으로 따지자면 15세 전후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왕궁 내에서 누군가가 독을 뿌렸다?" "예." "그 목표는 김상희라는 계집이었고?" "예." "그리고 환성이 녀석 있는 곳에서 얘기를 하지 않은 건 발작을 할 것 같아서 그런 거고?" "예. 비록 제 동생이지만 미쳐서 날뛰면 저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훈상이 김환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김환석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에게는 그리 위협이 되지 않지만 그 하찮은 계집에게는 위협이 되기 때문에 제가 대부분 마시고 일부를 수거해왔습니다." 다시 말해, 김환석이 일부러 독 대부분을 먹었다는 소리다. 김상희한테 해가 될까봐. 사실상 이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김환석은 '하찮은 계집애'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켰다. 더 황당한 건 김훈상도 그 말에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 "...그렇단 말이지." 김훈상은 흐음,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김환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생했다." 그러자 김환석의 몸이 말끔히 나았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배후는 파악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주의 단독 소행이라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왕궁 내로 독을 밀반입할 수 있는 지위와 능력을 갖춘 누군가가 분명 뒤에 있습니다." 김훈상은 검지손가락으로 김환석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이후에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그 작은 머리 너무 열심히 굴리려 들지 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보호를 좀 더 받아도 돼. 아니. 보호를 좀 더 받도록 해라." 김훈상은 환석의 방문을 닫고 나갔다. 손바닥을 펴봤다. 김환석이 전해준, 가루가 담긴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지만, 여자는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큼의 독이라... 그렇다면 목표는 정말로 김상희였다는 뜻인가?' 모르겠다. '김상희를 죽여서 무언가 이득이 되는 누군가가 있나?' 그런 거 없다. 김상희는 한낱 계집아이일 뿐이며 죽여도 좋을 것이 없다. 이득을 보는 세력이 없는데 굳이 이런 짓을 벌였을 리 없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방으로 돌아왔다. 마침, 학자인 알렉스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알렉스." 김훈상은 알렉스의 말을 끊었다. "내가 먼저 질문하겠다." "예." 김훈상의 말을 들은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폐하의 심리상태를 제가 감히 판단해 보자면... 화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알렉스는 말하고 싶었다. 평소엔 똑부러지는 왕이 오늘은 좀 바보 같아 보였다. 자기가 화난 것도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둘째 왕자님께서 큰 일을 당할 뻔 하셔서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이렇게 얘기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큰일은 무슨... 기침 조금하는 건 큰일도 아니구만.' 속으로나마 피식 웃었다. '김상희 공주님한테 큰일 날 뻔해서 화난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이봐요. 왕님. 그 쪽은 지금 김상희 공주님때문에 화난 거라니까요? 알렉스는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말했다간, '내가 한낱 계집아이 때문에 감정이 흐트러질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버럭 소리를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확실히 문제는 문제군요. 어는 누가 감히 왕궁에 독을 밀반입했는지 그 경위를 충분히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근질근질한 곳도 긁어줬다. "공주님이 아닌 왕자님께도 위해를 가했으니 즉결 처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공주님 아니고 왕자님한테 피해가 갔으니까 처분하시죠. 공주따윈 안중에도 없으시니까요. 알렉스는 속으로 허허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공주님 피해입을 뻔 해서 열받았지 않습니까? 그냥 인정 좀 하시지 참.' 며칠 뒤. 17공주 신수영의 사형이 집행 됐다. 12명의 왕비가 11명이 됐다. 왕비도, 공주도 모두 숨을 죽였다. 알렉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상희 공주님." "네?" "상희 공주님은 충격을 많이 받지 않으셨죠?" "......."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를 못했다. "혹시 폐하께서 왔다가신 적 있으신가요?" "네. 며칠 전에 들르셨어요." "정확히 언제였나요?" 김상희는 이를 바득 갈았지만 활짝 웃었다. 그 날, 김상희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었으니까.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안을 훨훨 날아다녔던 그 치욕스런 기억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제가 두번째 서랍을 열었던 날... 그 날 오셨어요." 알렉스가 씨익 웃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무슨 뜻인가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정말 많은 것을 신경써주고 계시는 군요." 김상희는 순간 욕할 뻔 했다. 좀 더 신경 썼다가는 사람 잡겠다 이 양반아!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쩐지 이복언니의 죽음에도 너무 태평하신 것 같다 했습니다. 뭐. 그냥 그렇다구요. 아참. 혹시 머릿속에 뭔가 좀 뭐랄까 차갑고 뜨거운 뭐 이상한 게 휙휙 지나다니는 그런 느낌 들지 않았었나요?" *** 나는 두 번째 서랍을 열어봤다. '편지...?' 편지가 있었다. 그 것도 무려 두 장이나. 하나는 내가 한진수한테 쓴 답장이고 하나는 내가 모르는 편지봉투였다. '분명 내 앞에서 북북 찢었는데...' 이 세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다. 마력이란 게 있으면 마술도 마음대로 막 부리나 싶다. 하기야 잠깐 눈감았다가 떴는데 2시간이 지나있기도 하는데 뭐. 아. 다시 생각하니까 열 올라온다. 그니까. 지금 나 속인 거야? 신수영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울었었는데!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 나쁜 자식. 엉엉... 그래도 아주 뼛속까지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장난은 쳤지만 실제로 내 편지를 찢지는 않았으니까. '이건 도대체...?' 또 하나의 봉투. 그 봉투에는 '똥개새끼.'라고 딱 네 글자가 써져 있었다. 이건 분명 첫째 망나니 녀석이 넣어둔 것일 터. '도대체 뭔 말을 써놓은 거야?' 편지 내용은 정말 별 것 없었다. - 내 생일이 언제지? 그래요. 님 생일 8월 15일인 거 알아요. 공주들 얼굴하고 이름도 외우고 있는 마당에 설마 당신 생일 모를까봐? 왕자의 생일은, 필수로 당연히 외우는 항목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왜 굳이 이런 쇼를 벌여가면서 편지를 넣어놨나 생각해봤는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그니까 지한테도 편지 써달라고 시위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와. 이 첫째 망나니. 시크한척 도도한척은 다해놓고선 진짜 어린애가 맞긴 맞네. 우리의 송수진씨가 내게 물었다. "공주님. 왜 그렇게 웃고 계셔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셔요?" "아냐. 아무것도." "그래도 공주님은 웃고 계시니 다행이어요. 다른 공주님들은 지금... 어휴." 말을 듣자하니, 다른 공주들은 지금 살아도 산 게 아니란다. 나는 모르는 무언가 때문에 지금 나이트들로부터 취조 비스끄리무리한 무언가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그런 거 전혀 못 느끼고 있었는데. 아무튼 그렇단다. "공주님께도 나이트들이 올 수 있어요." "나한테?" "모르겠어요. 확실하지는 않은데... 17공주의 처형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차피 내 방문은 있으나마나다. 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 이제 물어왓! 이나 똥개새끼. 라는 말이 들려올 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망나니들이 아니었다. "아, 아바맘..." 나는 순간 흠칫 놀랐다. 나도 모르게 아바마마라고 말할 뻔 했다. 그건 이제 없는 단어다. 저 스케일 남다른 자식이 사전에서 지웠다. 그렇다고 요즘 같은 분위기에 아빠라고 부를 수도 없어서 이렇게 불렀다. "아... 아버님. 안녕하시어요?" "그래." 으, 으아아악! 뭐야!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사, 살려줘! 이 개차반아! 몸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몸이 둥둥 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차반의 몸 앞에 둥둥 떴다. 나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는데 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개차반은 내 입안을 열심히 살펴보는가 싶더니, "별 이상은 없군." 하고 이상한 말을 해댔다. 그 때,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차갑기도 한 것 같고 뜨겁기도 한 것 같은 요상한 느낌이 내 머릿속을 휙휙 휘젓고 나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느낌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내 몸이 또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허공에 떠서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주시어요!" 내 몸이 천장 위까지 붕 떴다. 그리고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꺄악! 비명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땅바닥에 부딪치기 일보직전. 내 몸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떠올랐다. 저 개차반이 손가락을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나의 몸이 떴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했다. 비명을 몇 번 질렀는지 모른다. 속도도 제각각. 날아다니는 위치도 제각각. 정말 끔찍한 건 방 안에서만 날아다니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창문 아래로 떨어졌다. 참고로 말하면 여기 11층이다. 11층에서 땅으로 떨어지다가 불쑥 튀어올랐다. 이리저리 마구 날아다녔다. 나는 헝겊인형이 아냐! 이 개차반아! 헝겊인형도 이렇게 함부로 다루진 않을 거라고! 나를 이렇게 무참하게 내던지지 말아줘! 명색이 네 딸이잖아! 아참. 딸도 사형시키는 인간이지. 어쨌든. 좀. 그만! "사, 살려 주시어요 아빠!" 그 때. 몸이 멈췄다. 내게 이런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난 두둥실, 아주 편안한 상태로 날아가 침대에 눕혀졌다. 그냥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그리고 개차반은 멋대로 나가버렸다. 누가 개차반 아니랄까봐. 님 매너 똥이다! "이 곳은 취조를 끝낸다." "예. 알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밖에 나이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뭐야. 왕이 왜 직접 취조를 다녀. 모르긴 몰라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오해할 것 같다. 내가 비명을 수십차례쯤 질러댔으니까. 아. 쪽팔려. 쪽팔린다고. 엉엉. 나이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하늘 날아다니며 발광하는 미친 계집애로 생각할 거 아냐! 그런데 생각해보니 취조란다. 난 취조 당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비명 수십 번 지르고 아버님과 아바마마를 -생각해보니 아바마마를 말했을 때 몸이 더 세차게 움직였던 것 같기도 하다- 번갈아가면서 외치다가 아빠를 외쳤던 것 밖에 없는데? 중간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송수진양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렇게 날 뚫어져라 쳐다봐? 너도 내가 불쌍하지? 그렇지? 송수진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듯 아차했다가는 내게 물었다. "공주님." "응?"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어여쁨을 받을 수 있나요?" ... 얘도 한 대 패주고 싶은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뭐라고? 어여쁨? 나 지금 죽다 살아왔어. 놀이공원의 청룡 열차따윈 비교도 안 되는 스릴을 맛봤다고. "저도 폐하께서 그렇게 다정하게 놀아주시면 죽어도 소원이 없을 텐데... 아참. 공주님. 제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절대 비밀이랍니다. 전 죽고 싶지 않답니다." "......." "정말로 우리 공주님은 이쁨을 받고 계시는군요. 아... 정말 부럽다. 공주님은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어땠나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 아니셨나요? 그렇게 행복에 겨운 환호를 하시는 건 처음 봤어요." ...너. 진짜 한 번 죽어볼래. 행복에 겨운 환호라고? 네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였니? 내 살고자하는 의지가 가득 담긴 비명이 환호? 아. 진짜 때려주고 싶다. 아... 쪽팔려. *** 1년이 흘렀다. 그 동안 왕궁 내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사형당하는 풍파가 일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조용히 묻혀 지나갔다. 누가 손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생각만큼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 1 공주님의 성년식이 있습니다."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진행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또?" "제 33공주님의 바깥나들이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김훈상은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았다. "그게 언제지?" 일정을 보고하던 신하 중 한명인 최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공주들의 일정이야 어차피 그냥 대충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었던가. 말 그대로 형식상 보고를 올리는 것 뿐이다. 공주의 일정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일들이 널리고 널렸다. 당장만 해도, 셋째 왕자의 마력각성에 관한 문제도 얘기해야 했다. '왕께서 좀 이상하시군.'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질문에는 답을 했다. "4일 뒤입니다." "그렇군."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이트 둘이 붙어서 호위할 겁니다." "그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김훈상은 거기에 별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그제서야 최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정상이다. 한낱 공주의 행사 따위에, 왕이 신경 쓰기에 왕은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 3일 뒤.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물어왓!" 침대에 누워있던 김상희는 벌떡 일어섰다. 헝겊인형 안 주웠다. "오라버니!" 김환성은 쳇, 어제는 주워왔는데 오늘은 실패구만, 하고 마력을 써서 저 멀리 던진 헝겊인형을 회수했다. 헝겊인형이 두둥실 날아와 환성의 손에 잡혔다. 김상희는 여우짓을 또 했다. 김환성의 가슴팍에 안겨서 오라버니가 와주셔서 소녀는 정말 행복해요! 하고 말했다. 김환성은 자신의 코를 문지르면서 헤헤거리고 웃었다. "맞다. 똥개야." 그래도 많이 변했다. 똥개새끼라고는 안 한다. 1년 사이 김상희가 노력을 많이 했다. 기분 거슬리지 않게 '새끼'라는 단어를 빼도록 구슬리고 또 구슬렸다. 1년만에, 그 노력이 빛을 발했다. "네, 오라버님. 말씀하시어요." "너 내일 바깥 나들이 가지?" "네! 소녀는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 하답니다." 9년만의 왕궁 밖으로의 첫 외출이다. 당연히 떨릴 수밖에 없다. 왕궁 밖의 세계는, 여자 혼자서는 돌아다니기도 힘들 정도의 험악한 세계라고 알고 있으니까. "나도 같이 갈 거야. 나이트니까." 자. 어서 너는 행복하고 즐겁고 감사하다며 말해라, 라고 주장하듯 김환성은 어깨를 쭉 펴고 자신만만한 눈동자로 김상희를 쳐다봤다. 실제로 김상희는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울었다. '왜 하필이면 망나니냐!' 그나마 다행인 건 망나니 말고 그래도 꽤나 정상으로 보이는 듬직한 나이트 하나가 더 붙었다는 것. 어쨌든 바깥 나들이를 가게 됐다. ============================ 작품 후기 ============================ ㅎㄷㄷ... 떡밥들.... 열심히 숨긴다고 숨겼는데 알아차리신 분들 많네요. 너무 티났나...? 0014 / 0192 ---------------------------------------------- 그 아들의 스케일 ***14 한진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곽기현은 한진수에게 포옹을 시도하려다가 하늘을 날았다. 날고싶어선 나는 거 아니다. 한진수가 날려 버렸다. 이젠 이것도 익숙해졌다. 낙천적으로 외쳤다. "오예. 날아간다!" 곽기현은 침대에 고꾸라졌다. 익숙해진 덕분에 이젠 제법 착지도 잘한다. 예전엔 머리부터 고꾸라져서 난감했었는데 착지를 잘하게 된 것도 복이라면 복이었다. "너 또 약혼자가 보내준 편지 읽지? 내가 보내준 편지는 대충 읽고 버리면서!" "버리진 않았어. 시녀가 치웠지." "어쨌거나! 흥.칫.뿡이다! 그 계집애가 뭐가 좋다고." 곽기현은 또 언제나 그렇듯 침대위에 앉아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진수를 째려보는 척 했다. 다분히 과장된 그 태도에 진수는 피식 웃고선 말했다. 표정은 온화했는데 내용은 가차 없었다. "죽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봐." "헹! 너 입가 계속 씰룩거리는 거 짜증나. 그래봐야 걔 지금 9살밖에 안 됐는데. 와 생각해보니 열받네. 누구 편지는 막 그냥 버리도록 내버려두고 누구 편지는 마력으로 보호막 씌워서 깨끗하게 보호하고 밤마다 꺼내보고. 너 그 정도면 중증이야. 너 진짜 그 계집애 좋아해?" "아니. 그럴 리가." 흥. 단순한 약혼자를 네가 그렇게 챙길 리 없잖아. 여자라는 건 그냥 남자를 낳기 위한 도구라고. 프리지아의 대쉬도 그렇게 거절하는 주제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라니까. 기현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늘을 날아 침대에 안착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저 놈이 밤마다 편지 한장을 붙잡고 심각한 얼굴로 정독하는 현상에도 익숙해졌다. '그나저나 프리지아도 자존심 엄청 상했겠어.' 프리지아는 제국의 제 6황녀이며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여자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런 지위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그녀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남자들만큼 많은 양을, 편안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세계 유일의, 마력사용이 가능한 여성. 그리고 황녀이며 아름다운 프리지아가 한진수에게 꼬리를 치고 있다는 사실은 제국 마력 학원 내에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어차피 일부일처제가 통용되는 세상도 아니고, 까짓거 아내 한 명 더 늘어나면 어떻겠냐며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있는데 한진수는 그냥 무시하는 중이었다. 곽기현은 피식 웃었다. '그냥 무시도 아니고 완전 개무시지. 저 자식. 가만 보면 진짜 고자 아냐? 아니면 게이라던가? 앗. 그렇다면 내가 위험한가! 그런 것인가!' 곽기현은 실실 웃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수야. 진수야. 진수야. 프리지아가 안 되면 나는 어때용용용? 응? 알라뵹뵹!" 순간, 한진수가 움찔했다. 마력을 끌어 올렸다. 책상이 부르르 떨리고 침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곽기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야야. 그 상태로 나 때릴 건 아니지? 나 벌써 죽고 싶진 않다고? 내가 사과 했잖아. 어우씨, 1년 전 일로 진짜 되게 그러네." 1년 전, 김상희 공주가 소녀식을 거행하게 되었을 때 한진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거기엔 '상히상히상히 알라뵹뵹뵹♡' 이라는 이 세계 기준으로 아주 해괴망측한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그건 곽기현이 장난을 친 거다. 그러나 곽기현은 알고 있다. '저 나쁜 자식. 내가 그거 썼다 지운거 이미 파악해놓고서 일부러 그냥 보내놓고선 왜 나한테만 뭐라 그러냐? 지 쓰고 싶은 거 내가 대신 써줬으니 고맙다고는 못 할 망정!' 고려왕국을 뛰어 넘어,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중에 천재인 한진수가 몰랐을 리는 없다. 자기가 그냥 보내놓고서 괜히 자기한테 화풀이라며 곽기현은 궁시렁거렸다. "나만 만만하지? 흥. 괜찮아. 진수가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있어. 오히려 그게 네 매력이랄까. 맞다. 근데 9살 되면 바깥 나들이 하지 않아?" *** '드디어...바깥을 나간다.' 내 바깥 나들이가 결정 됐다. 바깥 세상을 살피고 안목을 넓히라는 것이 취지였으나 사실 공주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우리 공주들은 왕의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그다지 특별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공주는 왕자 생산에 실패해서 태어나게 된 잉여스러운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똥개고. 그나마 똥개새끼에서 똥개로 격상되는데 무려 9년 걸렸다. 하. 멀리도 돌아왔다. 엉엉. 내 신세. '그래도 나는 상황이 참 좋지.' 내가 개차반이라 욕하고 망나니들이라 욕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거다. 사실 이들이 나를 대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송수진이 나를 그렇게 부러워하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가슴으로 이해가 안 되어서 그렇지. 너도 비행기 한 번 타봐. 부럽다는 말이 나오나. "가잣!" 뭔가 불길했다. "물어왓!" 헝겊인형이 날았다. 이봐요. 왕자님. 나 지금 레이스달린 치마 입었다고. 근데 달리라고? 에이씨. 알았어. 갔다 올... 어라? 그런데 내 옆에 있던 꽤나 정상적이고 듬직해보이는, 이름을 강기태가 하늘을 날았다. 표현상 날은 게 아니고, 정말로 슝- 하고 날았다. 하늘을 향해 로켓포처럼 쏘아지는 헝겊인형을 향해 슈퍼 로켓포처럼 날아갔다. 공중에서 그걸 낚아챘다. 와... 나이트란 건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여기 있습니다, 왕자님." "에이. 난 똥개새... 아니 똥개 시킨 건데. 왜 네가 가져 왔어?" "왕께서 하명하셨습니다. 물어왓을 시키면 제가 주워 오라고." 헐. 말도 안 돼. 그 개차반이 나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줬다고? 에이. 아닐 거야. 설마. 강기태가 말을 이었다. "밖에서도 이렇게 하다가, 혹시라도 다른 남자에게 잘 못 걸리면 강간당할 수도 있다고... 명색이 공주님인데 그래도 강간당하는 건 너무하지 않냐며 주의를 주셨습니다." 이봐. 그걸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는 것도 실례야. 그냥 내가 이뻐서 도와줬다고 하면 어디가 덧...그래.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개차반에게 고마울 뻔 했는데 역시 고맙지 않다. 그래도 명색이 공주인데 강간 어쩌고를 말하다니. 지구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이런 건! 밖으로 향했다. 나는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왕성의 거대한 정문이 열렸다. 나의 바깥세계 탐험기는 처음부터 스펙타클 했다. "오예! 끼히히히히!" 김환성은 망나니같은 웃음소리를 마구 쏴대면서 하늘로 높이 날았다. 예전에 한 번 타본적이 있는 마력 바이클이다. 문제는 운전자가 김환성이라는 거. 내 첫째 오라버니 어디가셨어. 우리 형석이야 말로 나의 희망이다. 부드럽고 따스한 드라이버. 얘는 운전도 정말 망나니 같이 했다. "오, 오라버니! 소녀의 심장이 두근두근해서 죽어 버릴 것 같아요!" 하늘을 날았다. 나는 건 괜찮은데 빙글빙글 돌았다. 위로 수직상승했다가 수직으로 떨어졌다가 또 옆으로 날았다가 거꾸로 날았다가 온갖 묘기를 다 부렸다. 으. 토나올 거 같아. 나는 살기 위해 김환성을 꽉 껴안았다. '제, 제발...!' 땅이 보였다. 아찔했다.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김환성을 더 꽉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예 팔과 다리로,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리듯 꽉 매달렸다. 그러자 김환성은 더욱더 운전을 험하게 했다. 이 망할 자식아! "오라버니! 소녀의 부탁이어요. 조금만 천천히, 부드럽게 운전해주신다면 소녀는 오라버니를 성심을 다해 사랑하고 말 것이어요!" 한 대 패주고 싶지만 나는 온갖 아부와 달콤한 말을 쏟아줬다. "뭐. 똥개가 정 그렇다면야. 역시 하찮은 계집이라서 이런 것도 무서워 하는 구나. 형아 말이 맞았어. 이런 건 하나도 무서운 게 아닌데." 나는 무서운 것도 아주 잘 하는 위대하고 위대한 오빠다, 라고 강조하는 것 같아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참았다. 그래. 네 똥 굵다. 이 망나니야. '바깥 세상은... 지구랑 정말 비슷하구나...' 오히려 지구보다 좋았다. 마치 미리부터 계획하고 설계하여 만든 신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길은 넓고 한적했다. 서울 시내와는 딴판이었다. 자동차의 숫자도 거의 없다시피해서 드라이브 하기엔 최적의 길인 것 같았다. '하기야... 자동차는 남자만의 전유물이니까.' 그리고 지구와 다른 점은 또 있다. 주위에 여자들 천국이라는 것. 생김새는 각양각색이었다. 서양과 동양의 각종 인종들을 마구 뒤섞어 뿌려놓은 것 같다. '여자들이 정말 많긴 많네.' 김환성이 낄낄대며 말했다. "역시 울 아부지는 대단한 왕이야." 무슨 말인고 하니, 왕자를 무려 3명이나 낳은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보통 여아에 비해 남아가 태어날 확률은 5퍼센트 수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통계로만 따지고 보면 여자 100명이 태어날 때, 남자아이 5명이 태어난다는 소리다. 그런데 우리의 개차반씨는 겨우 34명을 낳는 동안 아들 셋을 낳았으니 대단한 능력자라 할 수 있겠다. "아빠는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분이셔요. 소녀는 그러한 분이 저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못내 감사하고 행복하답니다." "그렇지?" "또한 이토록 멋지고 소녀를 사랑해주시는 오라버니를 제게 선물해주셨으니 저는 정말 행복한 아이어요." "그럼. 그렇고 말고." 김환성은 잔뜩 우쭐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낄낄대고 웃는데 진짜 패주고 싶다. *** 여자만이 가득한 세계. 대부분의 경제활동은 여자가 한단다. 남자들은 왕이나 다름 없으니 편하게 집에서 놀면 여자들이 나가서 일하고 여자들이 돈을 벌어 온다고 했다. 남자는 남자아이만 잘 태어나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나는 여자들의 이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 둘과 함께 대동하는 나는 다른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 수 밖에 없으니까. 이런 건 귀족가의 여식이나 가능 한 거고, 귀족은 전체 인구의 5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공주님. 저희는 수도의 외곽에서부터 안쪽으로 진입하여 총 다섯 군데를 탐방하고 다시 왕성으로 귀환할 겁니다. 가장 먼저 이동하실 곳은 대평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차를 가지고 이동해야 합니다." 걸어서는 몇날 며칠이 걸릴 거란다. 그래서 자동차를 렌트했다. 운전은 우리의 믿음직한 나이트님인 강기태가 맡았다. 자동차 역시 체내의 마력을 필요로하는 물건이고, 당연하게도 나는 운전을 할 수 없다. 나는 바깥을 쳐다봤다. 미국 영화에서나 볼법한, 텅텅 빈 도로와 황량한 광야가 나왔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도로가 보였다. 약 3시간을 내리 달리기만 했다. '아 졸려...' 하지만 왕자님이 깨있는데 내가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 몸은 아직 9살이다. 어제도 밤잠 설쳤다. 잠이 자꾸만 쏟아져 내렸다. 김환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자코 입을 닫고 있었다. 차라리 말이라도 시켜주든가. '안 돼... 버릇없이 잠 들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이 솔솔 쏟아졌다. 결국 나는 졸고야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김환성이 낄낄대고 웃었다. "똥개! 너 침 흘렸어. 똥개는 더럽기까지 하구나?" "오, 오라버니.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어요. 용서 해주시어요." "응? 뭐가?"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천진난만한 표정 뒤에는 망나니가 숨어 있다. 감히 공주가 왕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다니. 아. 미치겠다. 9년 동안 잘 살아왔는데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할 줄이야. 망나니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 "근데 똥개는 죽을 죄 안 지었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해봐. 머리가 나쁜 건 진작에 알고 있지만 말은 제대로 할 줄 알잖아?" "소녀가 감히 오라버니의 어깨에 기대어서 잠을..." 김환성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거 내가 그런 건데? 그럼 내가 죽을 죄를 진 거야?" 말을 들어보니 내가 꾸벅꾸벅 조는 게 불쌍해 보여서 -여기서 낄낄대고 웃었다.- 자기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나 뭐라나.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뭔가 불안했다. "감히 왕자님한테 죄를 지었다고 따지다니!" "소, 소녀는 그런 것이 아니오라..." "자. 죽을 죄를 지었으니까 벌을 받아야지!" "오, 오라버니." 이 자식은 내게 벌이랍시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물어왓!" 헝겊인형이 또 하늘을 갈랐다. 저 높고 찬란한 태양을 향해. 정말 패고 싶다고. 엉엉. 저 자식은 저건 또 맨날 챙겨갖고 다니네. 여기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우리의 강기태씨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열심히 달렸다. 그래도 저 놈 많이 봐주는 거다. 겨우 200미터 정도 밖에 안 날아갔으니까. 나는 헥헥대면서 주어왔다. 그리고 힘든 척 하면서 쓰러지는 척 했다. 다시 말해, 연약하고 가녀린 여자를 연기했다. 그러자 김환성은 깔깔대고 웃었다. 내가 쓰러지는 게 행복하냐 이 망나니야. 강기태씨가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목화농장에 들를 겁니다." "목화농장이오?" "예. 고려왕국에서 여섯 번째로 규모가 큰 목화농장입니다.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농장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곳이 어딘지 안다. 이름은 고려농원. 이 곳에서 재배되는 목화는 품질이 우수하여 다른 나라에 수출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이럴...수가... 이건 말도 안 돼....' ============================ 작품 후기 ============================ 그럴수록 나는 김환성을 '더 꽉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예 팔과 다리로,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리듯 '꽉 매달렸다'. ' 그러자 김환성은 더욱더 운전을 험하게 했다. 캐치하셨나요? +선추코로 응원해주시는 여러분 제가 격하게 아낍니다 ♡ 0015 / 0192 ---------------------------------------------- 그 아들의 스케일 *** 이 세계에서 여자의 인권이 낮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분제가 있는 사회인 것도 맞다. 사실 내 위치는 좀 애매하다. 여자이긴한데 왕족이다. 왕족이라고 딱히 특출나게 좋은 것은 없다. 그나마 남자들에게 존칭을 듣는다는 것 정도. 삼시세끼 밥을 굶지 않고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나는 그게 '특출나지 않은 것'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난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던 거였다. '노예...인가...?' 책으로 이미 접해봤다. 이 곳엔 왕족도 있고 귀족도 있고 평민도 있으며 또 노예도 있다. 그리고 노예의 대부분, 아니 노예 전부는 모두 여자다. 목화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 여자다. 마치 예전 미대륙에서 흑인 노예들처럼, 이 곳 노예들은 처참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똑바로 일 못해? 일어나란 말이야!" 짝!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마도 노예들의 주인이라 짐작되는 남자 하나가 가죽채찍을 휘둘렀다. "게으름 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 저 채찍에 얻어맞은 여자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도대체 뭐가 죄송한데! 이를 악물었다. 여자들의 몰골을 보아하니 꼴이 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 나는 피부도 고왔고 고생이라곤 모르고 -끽해야 남자들 비위 맞추려고 노력했던 것 정도- 살았다. 저들에 비하면 나는 천국에서 산 셈이다. 채찍을 또 휘둘렀다. "일들 열심히 하란 말이야! 그래서 오늘 할당량 채울 수 있겠어?" 누군가를 때린 건 아니었다. 다만 땅을 후려쳤을 뿐이다. 그러나 여자 노예들은 모두 몸을 움찔했다. 나는 노예를 처음 본다. 시녀들 역시 노예와 비슷한 개념이긴 했지만 왕성 내에선 시녀들을 아주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절대적인 신분제와 민주주의 사이의 어정쩡한 신분제.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곳은 아니었다. 여기서 저 남자는 왕이었고 여자들은 노예였다. 김환성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똥개야. 너 똥 마려? 표정 되게 웃긴다." 나는 망나니의 질문에 또 웃을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 이 곳은 저게 당연한 세계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야. "아니어요. 오라버니와 함께 여기에 있는 것 자체로도 소녀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여 긴장이 되고 있답니다."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김환성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강기태씨는 움찔했다. 아마도 공주가 왕자에게 팔짱을 끼는 불경한(?) 행위를 처음 보는 것 같다. 김환성은 헤헤 거리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쭐해졌는지 코를 만지작 거리며 어깨를 활짝 펴고 턱을 높이 들었다. "에헴." 얼씨구. 에헴은 또 왜 하냐, 이 망나니야. 걸음을 옮겼다. 목화밭의 주인을 만나서 잠깐 티타임을 가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거라고 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개를 먹는 걸 보고 야만족이라며 경멸했었지.' 내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라는 외침과 함께 또 채찍 소리가 들려왔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노예라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가 않은데, 그 노예가 심지어 여자다. 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뙤양볕 아래에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채찍질을 두려워하며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 끔찍하게 다가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곳에선 저게 당연한 거다. 그렇지만... 저들에게 아주 잠깐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오라버니. 채찍질 소리가 너무 무서워요. 소녀는 겁쟁이어서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너무 겁이 나서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어요." 이름하여 사슴 눈망울. 나 이거 솔직히 거울 보면서 연습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과 아련한 얼굴로 망나니를 올려다보며 불쌍한 척 하기. 를 줄여서 작전명 '사슴 눈망울'이라고 하기로 했다. 나랑 팔짱을 낀 상태로 아주 위풍당당하게 걷던 김환성은 또 우쭐대며 킥킥대고 웃었다. "하긴. 똥개는 겁쟁이니까. 하여튼 한심하다니까." 한심한 똥개한테 얻어터지고 싶냐. 너. 진짜 내가 언젠가 패고 만다. 김환성이 버럭 소리질렀다. "야! 시끄러워 그만두지 못해?" 어우 귀야. 고막 터질 뻔 했네. 강기태씨가 옆에서 말했다. "왕자님. 그렇게 마력을 담아 말씀하시면 공주님 귀에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괜찮아. 고치면 돼." "......." 이 자식아. 뭐라고? 망가뜨리고 다시 고친다고? 뭐 이딴 놈이 다 있냐 진짜. 관리인 중 한명이라 짐작되는 남자가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이 쪽으로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강기태씨가 앞으로 나섰다. 품 안에서 공문을 꺼내들었다. "저희는..." 간단하게 소개를 마치자 남자가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했다. 아마 저 남자는 평민일 거다. 남자들 사이에서 신분은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왕자는 현대 사회에서 재벌가의 아들쯤 되는 것 같고 저 남자는 중소기업의 사장쯤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어쨌든 왕자가 갑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 같지만 보자마자 절을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야. 너 우리 지나갈때 채찍질 소리 안 들리게 해. 기분 나빠." "알겠습니다. 제가 왕자님께서 오신지 모르고 실례를 했습니다. 워낙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무전기를 꺼내들더니 잠시 휴식하겠다고 말했다. 관리인들에게 전파된 모양이다. 여자노예들은 허리를 피고 이 쪽을 쳐다봤다.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 때까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란 말의 뜻을 몰랐었다. *** 목화밭에서 일을 하던 노예 중 한 명인 '7호'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한 쪽을 바라봤다.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한 명 보였다. 남자 둘과 함께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귀족일거라고 생각했다. 귀족이 아니고서야 저럴 수가 없다. 관리인이 여자 앞에서 고개를 정중히 숙인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귀...족...?' 부러웠다. 적어도 저들은 배 고프진 않을 테니까. "7호야. 뭘 그렇게 봐?" "쉿." 괜히 떠들었다간 겨우 찾아온 휴식시간이 없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꿀 같은 휴식시간을 맞은 노예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잠깐의 수다를 즐겼다. "어제는 14호가 했대." "누구한테?" "모르겠어." 다들 한숨을 쉬었다. 목화밭은 넓다.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온다. 당연하게도 관광객들은 전부 남자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합법적인 섹스에 있었으니까. 그들은 이 곳을 지나면서 여자들을 골라 섹스를 한다. 관리인들도 모른 척 해준다. 남자들에게 돈을 받기 때문이다. "14호 예전에도 계집을 낳았잖아." "차라리 임신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남자아이를 낳게 되면 그 때부턴 얘기가 달라진다. 노예 일을 그만둬도 된다. 그때부턴 이 목화농장에서 관리를 해준다. 그리고 그 남자아이가 장성하면 관리인이 된다. 그게 이 목화농장의 룰이었다. "임신하면 일 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문제는 남자아이를 낳을 확률이 너무 적다는 것. 이들에게 강간을 당한다는 것 자체는 별로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 노예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 동안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들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5호도 이제... 애 나올 때 되지 않았어?" "그렇지. 그래도 만삭인데 채찍으로 때리는 건 너무 했어." 그 때, 멍하니 서있던 5호가 풀썩 쓰러졌다. 옆에 있던 7호가 비명을 질렀다. "5호!"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아마도 영양실조이거나 과로 혹은 상처에 세균이 들어가서 일거다. 7호가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 7호 갑자기 왜 뛰는 거야?" "일단 5호한테 가보자고!" "젖 나오는 애 없어? 일단 젖이라도 먹여야 할 거 같은데." 먹을 게 없다. 그러면 젖이라도 먹여야 했다. 이들이 터득한 생존방식이었다. "7, 7호가 미쳤나봐! 저기가 어디라고..." 7호가 남자 둘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 나는 봤다. 이 쪽을 향해 달려오는 여자를 말이다. 몰골이 앙상했다. 포동포동 제법 살이 오른 내가 보기 미안할 정도로, 삐쩍 말랐다. 삐쩍 말랐는데 배만 볼록 튀어나온 형상이었고 옷은 옷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넝마에 가까웠다. "이 미친년이!" 이 쪽을 향해 달려오는 저 여자에게, 남자가 채찍을 휘둘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둬! 라고 소리칠 뻔 했다. 그런데 우리의 강기태씨가 먼저 움직였다. "왕자님께서 채찍을 휘두르지 말라고 분명 말씀 드렸을 텐데요." 강기태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자 앞에 나타나 채찍을 맨손으로 잡았다. 역시 나이트다. 평민인 남자와 나이트의 무력 수준은 감히 비교할 정도가 못 되니까. 책으로 접한 사실이지만 나이트 한명은 성인 남자 수백명과도 싸울 수 있다고 했다. 여자가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내 발 앞에 얼굴을 묻고 빌었다. "제발 먹을 것 좀 주세요." "......." 먹을 것을 달란다. "제가 배고픈 게 아니어요. 제 친구가 쓰러졌어요. 영양실조에요. 지금 만삭인데 배가 고파 쓰러졌어요. 성녀님. 제발... 먹을 것 좀 주세요. 제발..." 관리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선 어쩔 줄 몰라했다. 채찍도 휘두르지 못하는데 나이트가 무서워 또 움직이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저, 저 미친년이 감히 이 곳이 어디라고...!" 김환성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차버릴까?" 악의는 분명 없다. "그럼 저~만치 날아가서 꼴까닥 죽을 텐데." 그러나 나는 김환성에게 화를 낼 뻔 했다. 친구가 쓰러져서, 그것도 임신한 친구가 쓰러져서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나한테 먹을 것좀 달라 빌고 있는 여자를 보며 차버릴까? 하고 묻는다. 여자들. 그 중에서도 노예는 정말 사람취급도 못받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렇게 몸으로 느낀 적은 처음이다.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 정말... 이건 너무해. 이게... 진짜 뭐냐고... 반은 일부러, 또 반은 저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이유는 많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여자에 대한 연민. 이 세계에 대한 분노 등. "오라버니." 예전에도 느꼈지만 김환성 망나니는 내 눈물에 특히 약하다. 정말 약하다. "뭐야 똥개?" 이상함을 느낀 망나니가 나를 봤다. 표정이 굳었다. 나이트로서의 김환성은 정말 독하다고 했다. 적어도 무력면만 놓고 보자면 천재 중의 천재라고 했다. 11살에 마력각성을 이루었으며 성인 나이트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인 이 망나니가 무게를 잡으면 솔직히 나도 무섭다. 이 마력이라는 것이 이 곳 전체를 무겁게 짓눌러버리니까. "이 계집애 때문에 울어? 이 계집애 그냥 죽일까?" 강기태씨가 또 움찔했다. 왕자가 공주에게 질문을 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사실 이건 질문도 아니고 허락을 구한거다. 죽일까? 하고. 이들의 상식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겠지. 관리인이 말했다. "와, 왕자님. 제가 직접 죽이겠습니다. 이 미친년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오라버니!" 김환성이 흠칫 놀랐다. 두 눈을 꿈뻑거렸다. "아, 아니. 그니까 똥개야. 말을 해 봐. 너 왜 그래? 얘 죽이지 말까 그럼?" "오라버니. 소녀는 오라버니를 정말 성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어요. 오라버니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죠?" "그러엄!" 김환성은 또 활짝 웃었다. 저 자식 조울증인가.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소녀가 한 가지 간청을 올려도 될까요? 오라버니께서 허하신다면 소녀는 오라버니께 진심을 다한 부탁을 하고 싶어요." 그 말에 김환성은 진지해졌다. "물어왓은 포기 안 해. 그건 안 들어 줄 거야." 그거 말고 이 자식아. 제발 좀.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저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는 게 더 슬프지만. "먹을 것을 조금만 주신다면 소녀는 행복할 것이어요." "왜? 배고파? 역시 똥개는 돼지구나."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데, 너는 안 들리니? 일반인을 훨씬 뛰어넘는 청력을 가진 네가? 어째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감각할 수 있는 거야? 네 눈에는 나 밖에 안 보이냐 이 멍청한 망나니야! 피부와 눈으로 실감하게 된 이 세계는 책으로만 접하던 세계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안 되겠다. 망나니 조련을 서둘러야겠어. 이왕에 운 거. 좀만 더 눈물을 흘려보자. 미안해 망나니야. 너는 11살이고 나는 정신연령 35살이란다. 누나가, 아니 이모가 너 좀만 더 조련하자.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둘째 망나니를 조금 더 자극하기로 했다. "소녀는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줄어들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말았어요." 김환성의 표정이 변했다. ============================ 작품 후기 ============================ 몸이 다 낫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조금 빨리 돌아왔습니다. 독자님들의 코멘트와 추천이 정말 사랑스러워 돌아오지 않고 못배기겠네요. 하트가 날아다니는 코멘창이라니. 이럴 수가.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0016 / 0192 ---------------------------------------------- 그 아들의 스케일 *** 약 반년 전. 8월 15일. 둘째 왕자 김환석의 생일파티가 거하게 열렸다. 고려왕국 내의 수많은 귀족들이 참여하여 자리를 빛냈으며 김환석은 생일선물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밤 11시. "형아. 변신 로보트는 나 주면 안 돼?" "가져." "형아. 이거 날으는 헬리곱터도 줘!" "가져." "이 전투 탱크도 줘!" "가져." 김환성은 싱글벙글 웃었다. 형은 이런 장난감에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장난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긴 했지만 김환성은 마력을 사용해 높이 4미터가 넘는 자동 변신 로보트와 실제 헬기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거대 헬기, 가로 5미터, 세로 7미터의 마력운용 전차 -무게 약 40kg-를 쉽사리 허공에 둥둥 띄웠다. 김환성은 신났다. "변신해라 변신로보트 얍!" 말만한다고 변하는 건 아니다. 마력을 소량 주입해야 한다. 높이 4미터의 로보트가 빛을 내며 철커덕- 철커덕- 기계음과 함께 사자형태로 변했다. 쿠와아앙-! 사자가 울었다. 김환성은 그걸 따라하며 쿠와앙-! 하고 울어댔다. "형아. 근데 기분 나쁜 일 있었어? 내가 선물 안 줘서 그래?" "......." "뽀뽀해줄까?" "시끄러워."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보는 형은 아무래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았다. 김환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아! 어디 가!" "똥개새끼 죽이러." 김환성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주, 죽이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그건 반대야." "내 마음이야." "아니, 그래도 죽이는 건 안 되는데..." 김환성은 변신로보트와 거대헬기를 선물해준 형을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벌컥. 문이 열렸다. "오라버니!" 분홍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머리에는 나비핀을 꽂은 김상희가 김환석을 발견하자마자 밝게 웃으며 뛰어왔다. 시각은 11시. 공주의 취침시간은 원래 10시다. 아직까지 잠들지 않은 모양이다. 김환석이 김상희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김상희는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제자리에서 달리기만 했다. "오라버니! 제 몸이 이상해요! 앞으로 갈 수가 없어요!" 김상희는 물론 안다. 속으로 욕하고 있다. 이 첫째 망나니야. 내 몸을 풀어주라고! 라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정말로 당황한 것 처럼 보였다. 김환석이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 김상희는 이게 무슨 뜻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똥줄 좀 더 타라고 말이다. *** 오케이. 좋았어. 왔어. 왔다고. 나는 이 시간을 기다렸다. 이 시크한 척하는 꼬맹이는 분명 밤 늦게라도 찾아올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안자고 이쁘게 차려입고 대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날 찾아왔다. 자식. 누나야 누나.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도 그래봐야 12살. 누나는 네 머리 꼭대기에 있단다. "여, 여기... 이게, 그, 그게 그러니까..." 나는 일부러 더 쭈뼛거리면서 걸음도 아주 천천히 옮기면서 편지를 김환석에게 전해줬다. 오라버니께 편지를 전하려니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여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용기가 나지 않기는 개뿔. 누나는 지금 널 조련하는 중이거든. "그리고..." "......." 좋아. 오늘의 계획은 여기가 클라이막스지. 너는 내 손 안에 있소이다다. "혹여라도 오빠가 제 방에 들리지 않으실까하는 행복한 기대감 때문에..." 좋았어. 말하는 템포도 충분히 느렸고. 얼굴도 붉혔어. 수줍은 척 완료. "......." 너 입가 씰룩거리는 거 다 보여. 싸늘한 척 하지 마. 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째려보는데 왜 입가는 씰룩거리니. "누가 이딴 편지를 받고 싶다고 했나?" 와. 얘 봐라. 너 겁나 받고 싶어 했잖아. 너 진짜 맞고 싶냐. 11시 넘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아참. 내가 말 안한 거 같은데 이 망나니의 방과 내 방은, 내 걸음으로 30분 넘게 떨어져 있다. "소녀는 단지 오빠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똥개 주제에." "감히 소녀가 오빠를 기쁘게 하겠다는 불경한 마음을 품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버리지 뭐. 안녕 편지야. "제가 당장 이 불경한 것을 찢어버리도록 하겠..." 몸이 안 움직인다. 나는 이유를 안다. 저 놈이 마력으로 내 몸을 구속했다. 편지가 아주 조금 찢어졌는데 그 이후로 몸이 안 움직인다. 첫째 망나니는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네 성의를 봐서 가져가주도록 하지.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 "오라버니!" 나는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야. 너 입가 씰룩거리지 말라고. 김환성은 귀엽기라도 하지. 넌 귀엽다기보단 때려주고 싶으니까. 김환석이 나갔다.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아! 이것도 가져도 돼?" "가져." "형아! 이거 슈퍼맨 망토는?" "가져." 어라. 슈퍼맨 망토. 저거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마력 운용을 쉽게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굉장히 도움을 주는 마력도구라고 들었다. 와. 역시 왕자 클래스는 다르구나. 저런 보물을 그냥 막 주고. "형아. 그건 뭐야? 왜 꼭꼭 숨기고 있어? 나 그것도 줘!" "죽는다. 가서 잠이나 자." 슈퍼맨 망토도 막 주는 놈인데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눈이 감겨왔다. 긴장이 풀리니까 잠이 솔솔 왔다. '오늘도... 조련... 완...료...' 잠에 빠져들었다. *** "소녀는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줄어들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말았어요." 나이트인 강기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공주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왕자와 대등하게 대화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저런 불경한 말이라니. 심지어 자동차 안에서는 어깨에 머리를 기댄 상태로 침까지 흘리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강기태에겐 충격의 연속이었다. 40평생동안 이런 괴사는 처음 본다. 더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왕자가 말했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 마력이 너 아프게 했어? 얘가 울어서 그래? 그니까 얘 그냥 죽여버리자니까? 똥개는 날 엄청 사랑하잖아!" 강기태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왕자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공주에게 물었다. '이, 이, 이, 무슨...'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주가 왕자를 싫어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걸 표현한다? 밖에선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다. 공주들은 바깥나들이를 두려워한다. 공주들은 자신들이 그리 중요한 사람들이 아님을 잘 안다. 왕자를 만들다 실패한 실패작들 뿐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고. 나이트들이 목숨 걸고 공주들을 지키는 편은 아니니까. '그런데 왕자님이 직접 호위로 따라오고...' 이건 왕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도대체 모르겠군.' 이번엔 공주가 말했다. "저는 오빠가 가슴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오빠인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소녀는 정말 행복했답니다." "나 가슴 따뜻해! 진짜야." 김환성은 마력을 피워 올렸다. 그러자 가슴팍에서 작은 불길이 일었다. 그걸로 가슴이 따뜻하다는 걸 증명했다. 그게 아니잖아! 김상희는 소리치고 싶었다. '이 놈은 진짜 여자가 이렇게 당하고 있다는 것이 불쌍하다는 것에 대한 자각 자체가 없어.' 김상희는 열심히 울었다.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는 여자를 살짝 껴안아줬다. "오라버니는... 사람이 배고프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슬프지 않은가요?"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노예잖아." 그래봤자 여자 노예인데 배고프고 울면 좀 어때? 라는 말이다. 악의가 없는 건 확실했다. "소녀는 슬프답니다. 소녀는 길가에 강아지가 다쳐서 신음하고 있어도 가슴이 아프고 쓸쓸해요. 오라버니는 그러한 소녀가 미련하고 바보같다 하실지 모르겠지만... 소녀는 눈물이 자꾸만 나요." 김환성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김상희는 김환성을 힐끗 쳐다봤다. '이제 두 번째다.' 김환성에게 와락 안겼다. "오빠!" 그리고 엉엉 울었다. 김환성은 오빠소리를 듣자 씨익 웃다가 이내 당황했다. 우, 울지마!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김상희를 달랬다. "소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그래. 나만 믿어!" 김환성은 어깨를 쭉 폈다. 굉장히 우쭐 거렸다. 턱을 높이들고 말했다. "오빠 믿지?" 오빠란 단어에 미묘하게 힘이 많이 들어갔다. *** 둘째 망나니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요리사 다 데려와!" 바깥으로 나간 12살의 왕자가 갑자기 왕궁에 전화를 걸었다. 12살 왕자가 속한 나이트 제 7대대의 인원들이 혹시 몰라 급파됐다. 왕국을 지키는 진정한 수호자들. 나이트 제 7대대의 32명이 초동부대로 급파되고 이후 42명이 완전무장한 채 출동했다. 총 75명의 나이트가 목화농장에 투입됐다. '진짜... 왕족이란 건 이런 거구나...' 여자같은 가짜 왕족 말고, 남자 왕족은 이런 힘을 발휘하는 거구나 싶어 눈 앞이 아찔해졌다. 한 명 한 명이 수백명을 죽일 수 있는 왕국 최강의 전력 1개 대대가 전화 한통에 급파되다니. 그것도 완전무장한 채로. '미쳤어 진짜...' 그 뿐만 아니라 망나니의 명령에, 왕궁요리사 4명이 헬기로 급파됐고 주변의 요리사 80명과 1톤트럭 12대, 밥차 7대. 이유는 모르겠지만 럭셔리 세단 3대 -아마도 왕자님의 특별 파티라고 오해한 듯 싶다-가 목화농장에 찾아왔다. 아빠란 개차반은 아바마마란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 버리고 왕자란 망나니는 주변 요리사를 호출해서 요리사 80명을 불렀다. 뭐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다 있나 싶다. 그것도 심지어 여자 노예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남자 요리사를 부른다니. 이건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나는 오빠 최고! 라면서 망나니에게 매달렸고 덕택에 우리의 망나니는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우리의 강기태씨는 두 눈을 꿈뻑거리며 상황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그래요. 문화충격이겠죠. 여자 노예를 위해 요리사 80명을 부르다니.' 사실 본질을 따져보면 그건 아니다. 이 망나니는 자신이 '믿음직한 오빠'임을 강조하기 위해 스케일 크게 움직인 것 뿐이다. 어쨌든 결과만 놓고보면 여자 노예를 위해 요리사 80명을 부른 것처럼 됐다. 그리고 착각한 나이트들이 급파됐다가 다시 돌아갔고 말이다. 아무래도 김환성은 '물어왓!' 이후로 또다른 말에 재미가 들린 것 같다. 우쭐대며 또 말했다. "오빠 믿지?" 이건... 믿을 수 밖에 없는 스케일이잖아. 나는 해맑게 웃으며 김환성에게 안겨 애교를 부려댔다. 오라버니 최고! 라는 칭찬은 덤이었다. 여자노예들에게 하루간의 휴식과 풍성한 음식이 주어졌다. 경비는 우리 둘째 망나니가 대주기로 했다. 여자노예들은 내 앞에 엎드려 울면서 감사를 표했다.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어대며 절을 하는데 마음이 짠했다. 김환성이 말했다. "그리고 사장님한테는 슈퍼맨망토 줄게." "아이고 왕자님. 이 귀한 것을..." 슈퍼맨망토는 희귀한 마력도구다. 당연히 가격도 비싸다. 우리의 믿음직한 나이트 강기태씨가 물었다. "사장님. 오늘의 피해는..." 노예들이 쉰다. 그럼 당연히 하루치 손해가 발생한다. 그러자 반쯤 대머리인 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남자들이 마력을 써서 빠르게 일을 해버렸습니다. 보수도 정당하게 지급했구요." 그 말을 듣고 난 또 화가 났다. 남자들은 여자보다 훨씬 더 강하고 할 수 있는 게 많다. 각종 기계들도 사용 가능하다. 여자들이 몇 시간 걸려서 할 일을, 남자들은 몇 분이면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여자들을 부리면서 시킨다. 채찍질하는 그 시간에 남자들이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 이 세계... 진짜 마음에 안 든다. 진짜... 이런 거 너무 싫어. "게다가 이 귀한 슈퍼맨망토까지..." 김환성이 키득대며 말했다. "형아한테 빼앗은 건데 어차피 난 필요 없어." 그래. 넌 천재니까. 이런 거 필요 없겠지. 왕자들은 선물로 이런 것도 받고 참 좋겠다. 아. 생각해보니 화나네. 내 생일 땐 뭐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여자노예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겨우 하루치 휴식과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이것도 내 힘이 아니라 김환성을 조종(?)해서 할 수 있었던 거다. "똥개새끼. 넌 울면 안 돼." "...네?" "똥개를 울리는 건 주인만 하는 거야. 울려도 내가 울려. 그리고..." 아, 안 돼. 여기서는 안 돼. 안 된다고! 참아 이 망나니야! "물어왓!" ... 헝겊인형이 하늘을 갈랐다. 너. 이 자식. 죽이고 말거야. 죽이고 만다고. 여자 노예들도 있는 자리에서 진짜. 내 자존심과 체면은 어떡 하냐고. 젠장. 그렇다고 다들 보는 앞에서 왕자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행복한 얼굴로 달려가서 물어왓은 사랑입니다, 를 주장하는 듯한 상큼한 표정으로 김환성에게 헝겊인형을 전해줬다. 아. 쪽팔려. 쪽팔려 죽고 싶다. 이봐. 날 그렇게 부러운 듯 쳐다보지 말라고...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실 내가 내 처지를 비관할 수는 없는 거지. 노예들 앞에서. '맞아. 나는 저들에 비하면 진짜 행복한 거야.' 지금 당장은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 앞으로도 뭔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내게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를 바꾸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내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다음 날. 아주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두 번째 목적지에서 말이다. '이건...' ============================ 작품 후기 ============================ 우리의 둘째 망나니(12살) 가 새로운 언어를 깨달았습니다. "오빠 믿지?" 0017 / 0192 ---------------------------------------------- 아빠가 좋아, 약혼자가 좋아? ***17 내 두번째 행선지는 고대문서 박물관이었다. 목화농장때와는 다르게, 박물관의 관장이 직접 나왔다. 당연하게도 나 때문은 아니었다. "왕자님께서 직접 방문해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내가 듣기로 고대문서 박물관의 관장이면 사회적으로 꽤나 위치가 있는 사람이다. 물론 나이는 모른다. 남자사람은 약 30세가 넘어가면서부터 노화가 멈추는 편이니까. 과장을 조금 하자면 죽을 때까지 젊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물론 개인마다 차이는 있다. 우리 둘째 망나니 같은 마력운용의 천재들은 정말 젊은 모습으로 죽을 때까지 산다. 어제 봤던 목화농장의 사장같은 경우는 반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둘째 망나니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어쨌거나 둘째 망나니. 강기태씨. 그리고 나는 박물관 안으로 향했다. "왕자님께서 공주의 나들이에 직접 참여하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공주 아닌데?" "예?" 너 설마.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내 똥개야." 닥쳐! 난 네 똥개가 아니야. 난 사람이라고. 영장류란 말이다! "아..." 그리고 당신. 박물관의 관장쯤 되면 엄청 유식한 사람 아냐? 근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끄덕이지 말라고. 제길. 난 사람이라고. 공주라고 엉엉. 나는 박물관 안에 들어섰다. 고대문서를 기록한 박물관. 고어로 기록된 문서들이 꽤나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관광객 몇 명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래. 그렇겠지. 신기하겠지. 감히 여자따위가 박물관에 들어오다니. 그래도 내 옆에 남자 둘, 아니 셋이 있는 것을 보고 귀족가의 여식이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박물관장의 안내를 받았다. "이 쪽은 지금은 해석이 불가능한 고대문서들입니다." 안내에 의하면 지금은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고대문서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내 눈에 낯익은 글자들이 보였다. '한글...?' 한글이다. 해석이 불가능한 언어라길래 도대체 뭔가 싶었는데 한글이라니.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싶다. "아마도 마력의 기원에 관한 심오한 내용이 있을 거라 짐작되는 문서들입니다." 강기태씨가 흥미를 보였다. "어째서 그렇게 유추하고 있죠?" "마력을 사용해도 복원과 해석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이 문서 자체가 지금의 마력보다도 더 상위개념의 어떤 마력에 의해 보호받거나 간섭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마력의 기원 혹은 지금보다 상위등급의 마력에 관한 내용이라 유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너 박물관장 맞기는 맞구나. 김환성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예. 왕자님." "있잖아." "예." "배고파." 김환성은 마력의 기원이나 상위등급의 마력 같은 건 아무래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똥개. 배 안 고파?" 그래. 안 고파. 넌 아까 밥을 그렇게 먹고나서 또 배가 고프니? 그리고 똥개라고 좀 안 하면 안 되냐? 상희라는 이쁜 이름 놔두고 왜 자꾸 똥개래. 내가 언젠간 네 입에서 상희라는 이름 나오게 하고 만다. "오라버니." "응?" "소녀가 오라버니께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뭔데?" "소녀는...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 상위등급의 마력? 마력의 기원? 개뿔. 저건 한글이다. 내가 읽은 바를 곧이곧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오늘의 일기. 날씨: 맑금. 오늘은 아빠랑 싸웟따. 아빠는 나쁘다. 하지만 나는 차칸 어린이이므로 화를 내지 안았다. 박물관에 안치된, 해석 불가능한 고대문서는 어린 아이의 일기장이었다. 그것도 고대 어린아이의 일기장. 또 이런 것도 있었다. -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 최소 3천년 전이라고 하는데, 최소 3천년 전 고대인들도 버릇이 없던 모양이다. 상황을 알게된 내 가정교사 알렉스씨가 헬기를 타고 날아왔다. "아니. 공주님. 정말 사실입니까?" 알렉스씨뿐만 아니라 왕궁학사 3명이 같이 왔다. '처신 잘해야 해.' 나는 너무 뛰어나면 안 된다. 공주따위가 너무 잘난체 해서도 안 된다. 남자들에게 감히 도전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는 없다. 내가 정말 강한 힘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 이 세계에서 그런 건 허락되지 않는다. "소녀가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어째서 저는 이 글씨를 읽을 수 있는 걸까요? 소녀는 너무 두려워요. 소녀 안에 악마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요?" 악마는 아니고 아줌마 들어있다. 알렉스씨는 흥분했다. "공주님의 천재성은 이미 입증되어 있습니다. 해독이 가능하다면 어떤 내용이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나는 곧이곧대로 얘기를 해줬다. 알렉스씨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정말 흥분한 모양이다. "이럴 수가...!" 왕궁학사 3명도 놀랐다.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니...!" "우리는 드디어 해석의 방법을 찾게 된 것 같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분명 가능합니다! 이건 세기의 발견입니다." 솔직히 조금 미스테리하다. 마력으로 인해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이들이 왜 한글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해석한 내용을 읊어주자마자 이들은 고대문서 해석이 가능하게 됐다. 내가 읽어준 것을 바탕으로 해석방법을 찾아내버린 거다. 다시 말해 보자마자 한글을 깨우쳤다고나 할까. "공주님. 공주님은 정말 왕국의 보물이십니다." 그러자 박물관장이 입을 쩍 벌렸다. 우리 강기태씨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왕국의 보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알렉스씨는 좀 개방적이고 여자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긴 하다. 둘째 망나니는 킥킥대고 웃었다. "똥개는 똥개야. 보물 아냐." 닥쳐. 이 망나니 자식아. 이름 모를 왕궁학사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제발 묻지마. 어째서 똥개냐고 묻지 말아줘...는 이미 물었다.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나 저 웃음 싫다. 진짜 싫다. 이제 내가 어째서 똥개인지 기어코 증명하고 말겠지. 김환성이 팔을 들어올렸다. 당연히 손에는 헝겊인형이 들렸다. "잘봐. 왜 똥개인지!" 보지마. 이딴 거 하지 말라고! 싫다고! 박물관 내 정숙 모르냐 이 철부지 왕자야! "물어왓!" 정숙해야만 하는 박물관 내에 '물어왓!'이 메아리쳤다. 헝겊인형이 또 날았다.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뛰었다. ...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망.나.니. 이때까지 난 이 고어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 알지 못했다. *** 곽씨 후작가의 막내. 곽기현은 싱글벙글 웃었다. 방학을 맞이해서 고려 왕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마력으로 구동되는 최고급 세단 뒷 자리. 곽기현은 검지손가락으로 한진수를 콕콕 찔렀다. "간만에 왕국 돌아가네. 그런데 웬 일이야? 집으로 바로 안 가고?" "들를 곳이 있어." "어딘데?" "고대문서 박물관." "거긴 왜?" "몰라도 돼. 넌 내려." "야. 방학이야 방학. 아무리 네가 노력형 초천재라도 좀 놀자 놀아." 곽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엄청난 천재가 심지어 노력까지 한다. 이건 아무래도 반칙이 아닌가 싶다. 천재면 천재답게 좀 놀아야하는 거 아닌가 싶다. "진수야. 난 네 모든 면이 다 좋고 사랑스러운데 이것만 좀 고치자." "뭐?" "공부 좀 그만해. 징그러워." "......." 자동차의 문이 열렸다. 곽기현이 연 건 아니다. 바람이 씽씽 들어왔다. 당연하다. 이 곳은 황야에 만들어진 고속도로이고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고 있는 중이다. 차문을 열면 당연히 바람이 들어온다. 곽기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설마..." 설마가 맞았다. 한진수가 곽기현을 발로 뻥 찼다. 시속 100km로 달리던 자동차 안에서 남자 하나가 튕겨져 나갔다. "진수야아아아!"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한진수우우우우!" 목소리가 이제 거의 들리지 않게 됐다. 운전 기사가 뒤를 힐끗 쳐다봤다. 한진수가 말했다. "그냥 가요." "하지만..." "저래도 안 죽습니다. 우리는 고대문서 박물관으로 갑니다." "알겠습니다." 고려왕국 내. 고대문서 박물관. 시가 3억원이 넘는 초호화 럭셔리 세단이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한진수가 내렸다.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대기하세요." "예." 운전기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한진수의 표정이 약간 상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이...설마. 아니겠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한진수는 언제나 무표정이다. 심지어 곽기현과 농담을 할 때에도 무표정이라서 저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그런 한진수인데 뭔가 상기된 표정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된다. '고대문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가...?' 하기야 제국 내에서도 천재 중의 천재.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엄청난 인재라하니 고대문서에도 관심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진수가 걸음을 옮겼다. *** 물어왓! 이 메아리쳤고 헝겊인형이 날았다. 이 자식. 지금 마력 썼어. 마력 썼다고 망할 망나니같으니라고. 헝겊인형이 총알처럼 대기를 갈랐다. 그냥 가르면 내가 말도 안 한다. 이 헝겊인형은 누군가 조종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마구 날아다니며 내게서 멀어졌다. 거기서 이 헝겊인형! '응...?' 망했다. 헝겊인형을 쫓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이 망나니 자식아! 너 때문이잖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곳에서 힘이 없다. '고대 문서 해독 능력'이라는 키를 갖고 있었지만 이 놈의 천재적인 남자들이 해독하는 방법을 알아 버렸다. 그러니까 그 키는 이제 쓸모없다. 어쨌든 나는 정말 약체 중의 약체다. "이봐. 아가씨. 감히 무슨 짓이야? 천박한 몸을 어디다 갖다대?" 남자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귀족가의 여식은 평민가의 계집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말을 꺼냈다. 이거 어차피 나 혼자서는 해결 못하는 상황이다. "왕자님께서 던지신 것이라..." 왕자 팔아먹어야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왕자가 던진걸 줍다가 부딪쳤으면 핑계라도 되니까. "지금 그걸 핑계라고 들이대는 거야? 앙? 이게 진짜 미쳤나. 앞 안보고 다녀? 건방지게 계집애따위가 감히 남자를 쳐?" 아뇨. 이봐요. 몸뚱이는 산더미만한 당신이 겨우 9살 계집애한테 부딪쳤다고 이렇게 화를 내요?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는 물론 내 생각이고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아무래도 그냥 핑계였던 것 같다. 뭔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이 비슷한 느낌. 여러번 느껴본 적 있다. 지구에서도 그랬다. 내가 좀 야한 옷을 입거나 맨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으면 느껴지던 그 기분 나쁜 시선들. "죄송하면 그 값을 치러야지? 엉?"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루한 몸을 가진 내가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몸집이 상당히 컸다. 나는 감히 여기서 소리를 지를 수는 없다. "처녀 같은데?" 츄릅, 하고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입맛을 다시는 듯한 그런 소리였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비명은 지를 수 없다. 나는 천박한 계집아이니까. 대신 크게 말했다. "소녀를 용서해주시어요." 어쨌든 내 목소리만 들리면 장땡이잖아. 우리 망나니. 이 정도면 충분히 들었을 텐데. 나는 겉으로는 바들바들 떨었다. 물론. 실제로도 무섭다. 아무리 망나니가 올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망나니는 안 나타났다. 망나니는 그렇다치고 어째서 강기태씨까지 나타나지 않는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원래대로라면 강기태씨가 인형을 대신 낚아챘어야 했는데. "그쯤하지?" 망나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기서 결코 들을 리 없는, 그 목소리였다. 저 쿨하고 시크한 목소리. 분명히 익숙한 목소리다. '개차반...? 쟤가 여기 왜...?' 덩치가 인상을 찡그렸다. "넌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 ============================ 작품 후기 ============================ 나? 아빤데 참고로 이 나라 왕이야 ㅋ 0018 / 0192 ---------------------------------------------- 아빠가 좋아, 약혼자가 좋아? *** 개차반이 도대체 여기 왜? 라는 의문은 일단 뒤로 하고서,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빠!" 이름하여 '무서워쪄, 힝. 혼내줘 아빠!'라는 걸 온 몸으로 표현하는 중이다. 아니 사실 진짜로 무서웠다. 이건 가식이 아니라고. 진짜야. 나는 개차반 다리에 매달렸다. 개차반은 언제나 그렇듯 쿨하고 시크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봐. 당신 딸 지금 백주대낮에 그것도 박물관에서 험한 일 치를 뻔 했다고. 뭔가 분노한 표정이라든가 그런 거 없어? 아. 그런 거 없지. 덩치가 인상을 팍 썼다. "너 뭐냐고?" 개차반이 시크하게 말했다. "나 얘 아빤데."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 분명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수십 명의 나이트가 갑자기 나타났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들은 고려왕국 나이트들 중에서도 최정예. 왕 직속 나이트. 왕 친위부대라 알려진 나이트 제 1대대. 스페셜 나이트라 불린다는 그들이다. 대규모 화력전보다는 개인전 위주의 게릴라에 특화되어 침투, 은신, 살인등에 특화된 이들이라고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다. 고려왕국의 스페셜리스트. 제 1대대. 스페셜 나이트 수십 명이 여길 둘러싸고 있었다. "빨리 말 안 해서 미안한데 참고로 나 왕이야." "이, 이, 무슨...!" "얘네는 내 직속 나이트들이고. 안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충성심이 과도한 친구들이거든." 개차반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영락없는 동네 오빠같은 느낌이다. 이봐. 너 왕이잖아. 반바지에 반팔티셔츠가 도대체 뭐냐. 이 왕 뭔가 좀 이상해. 이상하긴 한데 확실히 왕 맞다. 저 스페셜 나이트는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특수집단이다. 그 스페셜 나이트가 지금 수십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저 쿨시크 개차반은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 듯 뚱한 모양새다. 그냥 동네 구경나온 듯한 저 포스는 도대체 뭐냔 말이다. "박물관장 데려와." "예!" 누군가 한 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박물관장과 함께 나타났다. "박물관장." "예, 폐하." "이 박물관 누구 거야?" "저와 친구 한 명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게." "예?" "문서들 말고 건물만 팔어. 시가 2배 쳐준다." "그, 그 무슨..." 이봐. 미쳤어? 아빠 당신. 시가 2배라니. 무슨 부동산 투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개차반은 덩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덩치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성의없이 말했다. "아. 아퍼. 이거 왕 시해혐의네. 여기 문화재 옮기는 즉시 폐쇄해. 감옥으로 지정한다. 얜 오늘부터 옥살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왕궁학사 3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감옥이군요." "안 그래도 감옥을 증축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 곳이 지리적으로 보면 괜찮은 장소이긴 하죠." "규모도 적당하고 보안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좋군요. 예산이 문제인데..." "예산은 폐하께서 사비로 부담하신다는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왕의 사비로 감옥을 짓는다니. 이건 엄연히 공적인 자금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왕이 성군이라고 해도 한 두푼도 아닌 돈을 그냥 낼 리는 없지 않은가. 개차반이 말했다. "세금이라 쳐." 알렉스만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여기 감옥으로 개조합니다. 첫 번째 수감자는 저 남자가 되겠군요." 물론 모함이다. 스페셜 나이트들이 있는 자리에서 왕을 시해하려고 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팔 거야, 말 거야?" "파, 팔겠습니다." 이봐요. 박물관장 아저씨. 당신 웃음 참는 거 다 보여. 저 사람 입장에선 대박난 거다. 사실 이 곳은 박물관의 위치라고 보기엔 좀 힘들다. 도시에서 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야 하니까. 쓸데없이 규모도 커서 유지비도 많이 들 테고. 그런데 시가의 2배를 쳐준다니 저 아저씨 입장에선 날로 먹는 장사다. 그런데 다른 말로 하자면 왕은 엄청 손해보는 거다. '왕이 바보는 아닐 텐데 도대체 왜... 그리고 여긴 왜 있는 거야...?' 어쨌든 새로운 감옥이 생겼다. *** 몇 분 전. 셋째왕자 김환성은 아무 말도 못했다. 자신의 마력보다 더 강한 마력을 가진 누군가가 헝겊인형을 조종했기 때문이다. 강기태 역시 아무 말도 못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왕이니까. "아부지. 아부지도 이제 물어왓 시키는 거에요?" "......." 김환성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부지! 지금 내 똥개 위험하다니까요?" "기다려." 강기태는 또 신세계를 봤다. 공주에게 위험이 닥쳤다고해서 왕자가 안절부절하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김상희 공주와 함께 다니면서 놀라움에 놀라움에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다. "좋아." 이제 좋은 등장이겠군. 김훈상이 말했다. "너희는 여기 가만히 있거라."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김훈상이 멀어지고 나서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아부지 도대체 왜 저래?" 자리에 함께 있던 알렉스가 설명을 해줬다. "극적인 등장을 위해서라고 사료됩니다." "극적인 등장?" 알렉스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위기에 빠진 히로인을 구하는 히어로요. 그런 거 말입니다. 그 말은 삼켰다. 알렉스가 다시 의견을 냈다. "아마 이 곳을 감옥으로 만들어 버리시겠지요." 다른 학자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다면 이 곳을 감옥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명분을 얻고 계신 거군요." "일단 왕족시해 시도가 일어난 곳이니... 명분은 충분하겠군요. 안 그래도 이 곳을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역시 왕은 대단했다. 쓸모없는(?) 딸로 일부러 트러블을 만들고 나서 여길 감옥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발상. "아마 예산은 왕께서 사비로 충당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군요. 역시 왕은 하늘이 내린 성군이십니다." 알렉스만 쓰게 웃었다. 왕이 대단한 게 맞긴 맞는데 아무래도 이건 그거랑은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감옥 만드려고 굳이 행차한 게 아닌 걸 안다. 김상희 공주가 고어를 해석할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부랴부랴, 옷도 안 갈아입고 출발했다. 원래 왕이 어디 나가려고 하면 며칠전부터 계획 세워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상태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번엔 왕 직속 스페셜나이트들만 데리고 빠르게 출발했다. 어디 쳐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수십명을 데리고 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만약 타국이 알았다면 게릴라 전쟁이라도 펼치는 줄 알았으리라. 알렉스는 키득거렸다. '김상희 공주님이 어지간히도 보고 싶으셨나보군. 자각은 못하겠지만.' 다른학자들이 물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웃는 겁니까?" "아닙니다. 폐하의 은덕에 감사한 마음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나는 군요." 너무 빨리 출발하느라 제복도 못 입으시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시고. 알렉스는 그 말은 삼켰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이상한 덩치와 마주쳤을 때, 왕이 이 박물관을 매입하기로 했을 때 또 속으로 생각했다. '저 덩치를 지금 당장이라도 감옥에 처박아 버리고 싶으신 게로군. 여길 바로 감옥으로 만들어 버리실 만큼.'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만 저 왕 지금 흥분했다. 그래서 시가의 2배로 박물관 매입했다. 덕분에 예산문제도 해결됐다. 일석이조였다. *** 한진수는 이상함을 느꼈다. 엄청난 마력들이 느껴진다. 이 정도의 위압감. 일전에 왕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왕께서 이 자리에 있을 리는 없고... 도대체 누구지...' 걸음이 빨라졌다. 이런 기운이라니. 반역을 모의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폐하...?' 그런데 왕이 보였다. 반바지에 반팔. 후줄근한 차림이지만 왕이 분명했다. 왕의 다리엔 김상희 공주가 매달려 칭얼대고 있었다. "아빠가 오셔서 소녀는 너무나 행복해요. 정말이어요. 이게 꿈일까요 생시일까요? 꿈은 아니겠죠? 그렇죠 아버님?" 왕은 귀찮군, 하고 김상희 공주를 슬쩍 밀어냈다. 그러나 김상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왼쪽 다리에 매달려 볼을 비벼댔다. "소녀는 요 3일간 아빠가 정말 보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아빠를 뵈오니 너무나 기뻐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아요." 그랬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제가... 아빠라고 불러서 언짢으셨나요? 죄송해요 아버님. 뜻밖의 장소에서 아버님을 뵌 것이 너무나 기뻐 저도 모르게 그만..." 그 때, 김상희가 한진수를 쳐다봤다. 세상에. 이게 무슨 난리야. 왕에 스페셜 나이트에 이번엔 왕국 최고의 천재 한진수까지. 이 박물관 뭐야 도대체. 김상희는 순간 찔끔 놀랐다. 기억 속 한진수와 똑같은 모습.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과거의 한진수가 떠올라버렸다. 사랑한다고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왔다. 그 미련이 남아서일까. 기어코 눈물 두 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눈물. 왕도 봤다. "......." 김상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한진수 앞으로 걸어가 가슴팍을 손을 얹고 -아직 발육도 안 됐지만- 한진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시어요? 오랜만에 뵈어요." 한진수는 김상희를 무시하고 왕 앞으로 걸어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왕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폐하. 간만에 뵙습니다." "그래. 제국에서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왕국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맞겠지요." "벌써 믿음직스럽군." 둘 사이에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 한진수와 개차반.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아니 뭣보다 왕씩이나 되는 작자가 도대체 이런 박물관엔 왜 온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다짜고짜 사람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건물을 감옥으로 만들어버리는 스케일 큰 짓을 또 벌였다. 정말 스케일 하난 대단한 작자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나는 헝겊인형을 주웠다. 이건 망나니의 것이 아니다. 망나니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비싸보인다. 헝겊인형따위가 비싸봐야 얼마나 비싸겠냐고.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알렉스씨가 엄청나게 귀한 보물이라고 깜짝 놀라는 걸로 봐서 아주 대단히 비싼 물건일 것 같다. 내 앞에, 두 남자가 보였다. 한 명은 아버지요 한 명은 약혼자다. "폐하. 당연히 폐하께서 받으셔야..." "아니. 너야말로 약혼자이지 않느냐? 네게도 자격이 있다." 이번 물어왓은 평범한 물어왓이 아니다. 저 개차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 엄청 비싼 헝겊인형을 던져놓고서 둘 중에 한 명한테 주워주란다. 개차반마저 날 똥개 취급한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이 상황 엄청 살벌하다. 둘 모두 서로가 받아야 한다며 미루고는 있으나, 뭔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건 무슨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아니고. 9살짜리 어린애 두고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고! 이 헝겊인형을 누구에게 줘야 하나. 코카콜라라도 해야 해? 나 어떡해? 쟤들은 장난인데 나는 정말 긴장된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한진수는 그래도 왕 앞이라고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아닌 폐하께 인형을 드리도록 하라." "아니. 네 약혼자에게 주도록 해라." 저들에게 가까이 걸어가는 이 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개차반한테 줄까, 약혼자한테 줄까를 수십 번씩 고민했다. 바로 앞에 두 남자가 보였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이 두 놈은 아무 말도 않고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값비싼 헝겊인형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가 '아빠가 좋아, 약혼자가 좋아?' 로 바뀌었다. 나는 선택했다. *** 곽기현은 터덜터덜 걸었다. "에이씨. 그렇다고 고속도로에서 진짜 차버리냐?" 친구를 원망했다. "아니. 인간적으로 나 한명 더 탔다고 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아니고. 나 안태우면 그래봐야 한 3초 빨리 도착 할텐데, 그렇다고 날 버려?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앙?" 마력으로 구동되는 세단이다. 사람이 많이 타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진다. 물론 거의 차이 없다. 수백km를 이동하고 나면 그래봐야 1,2초 차이 날까 말까다. 그런데 그 차이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 "치사하고 더러운 놈! 내가 이거 평생 안 잊는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봐야 딱 한 번 봤다. 그것도 그 공주가 4살 때 한 번 봤을 뿐이다. 그 이후 5년 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친구가 왜 이러나 싶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 있어.' 친구는 티를내지 않고 있지만 기현이 보기에 진수는 분명 그 공주에게 과도한 관심을 쏟았다. 제국의 제 6황녀 프리지아의 대쉬마저도 철저하게 무시해버릴 만큼 말이다. '그 꼬맹이한테 진짜 뭔가 있는 건가?' 걸음을 옮겼다. '꼬맹이를 한 번 찾아가봐야겠어. 분명 뭔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4살 때 한 번 봤을 뿐인 9살 꼬맹이한테 반했을 리 없잖아.' 같은 시각. 9살 꼬맹이는 헝겊인형을 누군가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 꼬맹이는 속으로 절규했다. '도대체 이 자리에 왜 이 인간들이 있는 거냐고!' 그리고 생각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떠올려야 해.' ============================ 작품 후기 ============================ 오늘은 작가이자 독자인 제가 추천을 하러 왔어요. 노블레스에선 자주 추천해드렸는데 일반에서 추천하는 건 처음이네요. 선별(?)한 작품들 세 개 들고 왔으니 읽어보세요. 전 남자지만 남성향, 여성향 소설 가리지 않고 잡식으로 다 읽습니다. 헤헿. 1. 왕자의 여기사가 되었습니다 (←왕자의 여기사가 되었습니다 띄어쓰기 하셔야 나와요) 프리미엄 작가 중 한 분인 콩뇽님이 쓰신 글입니다. 제 글인 왕딸은 사실... 세계관이 좀 ㅂㄷㅂㄷ 이죠. 제가 쓰고 제가 화나 ㅠㅠ 여자 힘이 없어 ㅠㅠ 그런데 '왕여되'는 좀 다르네요. 스펠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사용하는데 재미있어요. 읽어보세요! 2. 드래곤 에이지 드래곤 에이지는 원래 유료작가로 활동하고 계신 노쓰우드님이 일반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크하고 도도하면서 강한 남주가 등장하는 (로맨스는 아니고), 전투씬이 화려한(두근두근) 멋진 글이에요. 추천합니다. 3. 두번 사는 플레이어 출판작가로 이미 크게 활동하고 계시며, 심리묘사의 달인이신 더페이서님의 작품. 프리미엄 작품입니다. 로맨스물은 아니에요. 요새 대세장르죠. 현대레이드물. 주인공이 회귀하여 플레이어로서 활약하는 이야기입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진행이 인상적인 작품이네요. '왕자의 여기사가 되었습니다' '드래곤 에이지' '두번 사는 플레이어' 각기 다른 재미를 가진 3 작품! 한 번씩 읽어보세요! + 저도 추천했으니 저에게도 츄천버튼을!!!!!!! 0019 / 0192 ---------------------------------------------- 강서영씨의 반란(?) *** 나는 인형은 한진수에게 건넸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 이 박물관. 아니 이 감옥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모르겠다. 착각인지 아닌지. 다만 가만히 있던 유리창 하나가 갑자기 깨져서 좀 놀라긴 했다. 나는 인형을 한진수에게 건네주고 개차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팔을 벌렸다. 안아 달라는 제스쳐였지만 우리의 개차반은 여전히 쿨하게 날 무시하셨다. 나쁜 자식. 나이트들 다 보고 있는데. 아. 쪽팔려. 어쨌든 나도 안아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머쓱해진 팔을 내리고서 방긋방긋 웃었다. "약혼자인 한진수 오라버님께 드리어요. 아버님께서 오라버님께 드리라 명령하였으니 소녀는 그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오라버님께선 저 멀리 제국땅에 계시지만 아버님께선 소녀 옆에 계시니 인형은 한진수님께서, 미천한 계집아이인 저는 아버님께서 받아주신다면 소녀는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내 나름대로는 애교도 듬뿍 담았다. 전생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꼬리 백만 개 달린 여우가 됐는데, 이번엔 정말 마음 먹고 애교 부렸다. 그런데 이게 또 이상하게 하려고 하면 잘 안 된다. 의식적으로 코맹맹이 소리 내려니까 속이 거북하고 메스꺼웠다. 나는 개차반의 다리에 매달렸다. 열심히 깡총 뛰었는데 그래봤자 다리에밖에 못 매달렸다. 그래도 이번엔 '귀찮군'하고 밀어내지는 않았다. 제법 기분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줬다. 어쨌든 '아빠가 좋아, 약혼자가 좋아' 사건은 일단락 됐다. 한진수가 말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세상은 절대왕정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가깝다. 그 왜. 그런 거 있잖아. 재벌가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그런 느낌. 지금이 딱 그렇다. 한진수가 개차반에게 정중히 요구했고 개차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시 얘기를 나눴다. 신기했다. 개차반이 손을 한 번 휘젓자 둘 사이에 무슨 막 같은 게 생겼는데 그러자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손을 한 번 휘젓자 그게 사라졌다. 개차반이 말했다. "예비 사위가 내게 이런 제안을 하다니. 흥미롭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이 허락했다. 허락한 게 뭐냐고? 별 거 아니다. 세 번째 목적지에 한진수가 동행하겠다는 거다. 첫 번째 목적지는 고려농원. 두 번째 목적지는 박물관이었다. 고려농원에서는 여성 인권의 처참함을 몸소 느꼈고 박물관에서는 고대어 해석에 관한 실마리를 얻었다. 지금은 차 안이다. '얘는 진짜 왜! 도대체 왜! 왜! 와이!' 나는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의 둘째 망나니 김환성은 내 왼 쪽에. 진수와 똑같은 얼굴의 한진수는 내 오른쪽에 앉았다. 평소라면 조잘조잘 떠들어댈 김환성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원래부터 말이 별로 없는 한진수 역시 조용했다. 자동차 엔진음은 들리는데, 이상하게 고요했다. 무려 남자님들께서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진짜! 답답해 죽겠네.' 가운데 낑겨서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어 인상을 찡그릴 뻔 했는데 다행히도 우리의 둘째 망나니가 입을 열었다. "졸리면 내 어깨에 기대도 돼." 앞자리에 앉은, 강기태씨의 어깨가 또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만 좀 놀라요 아저씨. 이제 그만 놀랄 때 되지 않았어요? 내가 이렇게되기까지 무려 9년을 고생했다고. 똥개 취급받으면서. 물론 대단한 거긴 하지만 어깨 한 번 빌려준다는 것에 나이트씩 되시는 분이 그렇게 움찔움찔 놀라면 더 서글퍼지잖아요. "제 약혼녀 때문에 왕자님이 그런 수고를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한진수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아무래도 마력을 움직인 모양이다. 내 머리가 저절로 기울어져 한진수의 어깨에 닿았다. 아니, 닿을 뻔 했다. 그런데 머리가 다시 제멋대로 움직였다. 김환성쪽을 향해서. 한진수가 김환성을 쳐다봤다. "왕자님...?" 이를테면 팔씨름 같은 거다. 이 자식들아. 내 머리는 너희들 팔뚝이 아니라고. 그렇게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이 것은 너희의 몸이 아니라 내 머리란 말이다! 어쨌든 승자는 한진수. 한진수는 김환성보다 나이도 많을 뿐더러 마력운용에 있어서도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게다가 듣기로는 노력까지 겸비했다. 우리 둘째 망나니는 전체적인 마력운용이라기보다는 무력 부분에 특화된 녀석이고 직접 주먹질 -혹은 칼질- 하는 게 아니라 순수 마력만을 사용하여 이렇듯 싸우는 것에는 아무래도 한진수에게 밀릴 수 밖에 없다나 뭐라나. 세 번째 목적지는 폭포였다. 김환성과 한진수 사이에서 이게 폭포인지 분수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나마 숨통이 트인 건, 폭포 바로 앞까지 왔을 때였다. 높이 약 320 미터. 너비 약 900미터.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블랙홀같은 위압감을 뽐내는 저 것은 분명 폭포가 맞았다. "와..."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끼얏호! 돈다 돌아! 세상이 돈다! 오예!" 정신차려. 세상이 도는 거 아니고 네가 도는 거야. 도는 아이야. 그리고 그 엄청나게 커다란 폭포 한 가운데로 망나니가 뛰어들었다. 저 하늘 높이 뛰어올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폭포로 떨어져 내렸다. 강기태씨가 말리지 않는 걸로 봐서 아마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력이란 건... 진짜 대단한 거구나...' 일반인, 아니 지구인이라면 저기 빠지면 아마 죽을 거다. 그런데 이 어린놈의 왕자는 저기가 마치 제집 수영장인 양 다이빙을 해대고 있다. 그것도 하늘을 훨훨 날아서. 정말이지. 적응이 되다가도 안 되는 세상이다. 한진수가 말했다. "잠시 약혼녀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한진수가 내 손을 잡고 몇 걸음 옮겼다. *** 이상했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컴컴했다. 아니. 딱 하나 보이는 게 있었다. 컴컴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게 정상인데, 이 어두운 공간에 딱 한 명. 한진수는 눈에 보였다. 이 녀석이 지금 내게 약혼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호칭이 정해진 건 아니다. 이 나이에 여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오라버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라버님... 여긴 도대체..." 여긴 내가 만든 특수한 공간이야. 그러니 안심하도록 해. 그런 말 정도는 해줘도 되잖아. 내가 진짜로 9살 어린 아이였으면 아마 이 이상한 공간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거라고! "질문 두 번 하게 하지 마. 너 도대체 뭐야?" "소녀는..." 솔직히 무서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 무엇보다도 한진수와 똑같은 얼굴에서 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한진수는 내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 나 너 4살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라고! "......." "대답 안 해?" 나도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그 때. 한진수가 허리를 숙였다. 내 코와 한진수의 코가 닿았다. 한진수의 얼굴이 보였다. 한진수의 입김이 내 입가에 닿았다. 순간, 나는 이성을 잃었다. "...소녀에게..." "뭐라고?" "소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시어요." 아... 저질렀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미쳤어. 여긴 한국이 아니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한진수가 하는 모양새는, 딱히 연인에게 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인질을 잡아가둔 조폭의 모양새였다. 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콤한 사랑의 언어가 아닌 위협과 폭력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한진수랑 똑같은 얼굴이랑 목소리로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소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달라고. 한진수는 몸을 일으키고서 나를 쳐다봤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야. 그러지마. 무섭다고.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내가 왜 네게 따뜻하게 대해야 하지?" "...그건..." 개차반, 망나니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걔네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내게 길들여 왔다. 그런데 얘는 아니다. 5년 만에 보는 거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 녀석이 내 약혼자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나는 이 녀석과 결혼을 해야 한다. 한진수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이 녀석과 말이다. "소녀가... 오라버님을..." 전생에서 단 한번도 하지 못했던 말. 사랑한다는 말. 겨우 9살인 내 몸으로 말하기엔 좀 이상한 말이다. 그래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오질 않았다. 이 놈은 그 한진수가 아니야. 저렇게 싸늘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저 놈은, 한진수가 아니라고.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니까. 이상한 건 한진수가 내 말을 천천히 기다려주고 있다는 것. "오라버님을..."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이 매어왔다. 그 때. 이 이상한 세계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내 눈에 보인건 둘째 망나니였다. "아씨. 나 배고파. 기다리려고 했는데 배고파서 안 되겠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왕자님." 한진수가 고개를 숙였다. 김환성이 키득대고 웃었다.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해. 이거 깨는 거 예의 아닌데." 미안한 사람치고 너 너무 당당하고 활달하다. 망나니야. 네가 그래서 망나니인 거야. 어쨌든 뭔가 고마운 느낌이 들어 나는 김환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김환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확신했다. 저 자식. 이 이상한 공간 일부러 깨트린 거야. 틀림없어. 어떻게 확신하냐고. 저 녀석 지금 몸이 하나도 안 젖어있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저건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냈을 때 나오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저 놈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올려서 이 이상한 공간을 깨부쉈다는 뜻이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그 말과 함께 한진수는 사라졌다.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어놓고 그냥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기현이 나타났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시이이익! 날 버리고 가더니 또 가버렸어! 죽일 거야아아!" 내게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꼬마 공주님. 도대체 어떻게 했는데 한진수를 그렇게 꼬셨어? 나랑 얘기... 으아아악!" 곽기현이 날아갔다. 문자 그대로 날아갔다. 빙글빙글 돌아 폭포수 사이에 처박혔다. 김환성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이거. 김환성이 한 짓이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힘이다. 성인 남자 하나를 저렇게 집어던지다니. 미쳤어 이건. "나 똥개랑 밥 먹어야 돼. 미안!" 그게 지금 높이 수백 미터, 너비 수백 미터에 이르는 초거대 폭포에 사람 던져놓고 할 소리냐. 그래도 저기로 물어왓! 안 시키는 게 어디야.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러자 김환성이 팔을 슥 내밀었다. 이거 팔짱 끼라는 뜻이다. "제가 감히 어찌 오라버니의 에스코트를..." "똥개야." 망나니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오라버니. 말씀하시어요." 진지한 표정 짓지마. 너 그럴 때마다 무서워. 물어왓은 사랑입니다, 하고 주장할 것 같은 얼굴이라고. "내 팔을 당장 잡지 않으면 큰 일 날 걸?" 품 안으로 손을 넣는 것이, 저거 진짜 헝겊인형 꺼내들 기세다. 잡는다. 잡는다고! 결국 난 팔짱을 꼈다. 나쁜 자식. 저기로 물어왓 시키면 나 진짜 죽어. 시내의 레스토랑. 김환성이 내게 말했다. "야. 똥개." "네. 오라버니." "너 근데 그거 안 힘들어?" "소녀는 오라버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바보같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어요." "그니까 그거 말이야 그거." 아씨.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너는 대충 말하는 거지만 나는 진짜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고. 너의 입장과 나의 입장은 달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지 모르겠다. 김환성은 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기가 굉장히 똑똑하다는 듯 말했다. "잘 봐." 손가락을 접으면서, "오. 라. 버. 니." 설명을 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네 글자고." 다른 쪽 손가락을 접었다. "오.빠. 이렇게 말하면 두 글자인데 네 글자 말하면 더 힘들잖아. 그렇지?" 강기태씨가 기침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는데 저러다 죽을 것 같다. 마력으로 얼른 속 진정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 저 아저씨는. 처음엔 정말 믿음직했는데 가면 갈수록 좀 덜 믿음직스럽다. "소녀는 전혀 힘들지 않답니다. 오라버니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너무나 행복해요." 김환성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야. 그만둬. 그만두라고. 여기 레스토랑이야. "물어왓!" 그 때, 강기태씨가 연락을 받았다. 나는 황급히 바깥나들이를 마쳐야만 했다. 물어왓도 안 했다. 김환성마저도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김환성은 마력을 사용해서 헝겊인형을 회수한 뒤 말했다. "왕성으로 돌아간다." ============================ 작품 후기 ============================ 조아라 자유게시판에 '곽기현' 실제 사진 올려놨어요. '곽기현' 으로 검색하시면 나올 겁니다. 이름 따온 친구에요. 잠깐. 자네 뭐 잊은 거 없나? (진지) 추천이라든가...코멘트라든가... ☞☜ 아니 뭐... 꼭 달라는 건 아니고... 0020 / 0192 ---------------------------------------------- 강서영씨의 반란(?) *** 강서영씨. 나를 낳을 때의 나이가 17세였고 지금은 26세가 됐다. 저 미모를 누가 애 낳은 아줌마라고 하겠어. 강서영씨는 뭐 딱히 운동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저건 타고난 것 같다. 보통 이 세계에서 25세가 넘어가면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없다고들 한다. 원래부터 여성의 권리나 아름다움따윈 저기 저 멀리 쓰레기통에 던져놓은 세상인데, 젊음마저 없으면 길가의 강아지보다도 못하게 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생각해도 화나고 어이없긴 한데 어쩌랴. 세상이 그렇다. '그런데 내가 봐도 이쁘단 말이지.' 내 어머니라는 강서영씨는 26세라는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써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강서영씨는 이번에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모두가 축복해줬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역시 딸을 낳은 건 별로 축복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들을 낳았다. 그것만으로도 강서영씨는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바깥 나들이를 중지하고 돌아오게 된 것도 무려 왕자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었다. 끼야흐, 끼야흐, 꺄아!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올망졸망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는 이 쌍둥이 아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좋아. 이 느낌이야. '남동생은 시작부터 조련을 해놔야겠고.' 언니들과는 거의 격리되어 있다시피하여 생활하고 있다. 이 아이라도 내가 열심히 키워보리라. 며칠이 흘렀다. 나는 강서영씨의 무릎 맡에 앉아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니가 이토록 어여쁜 아이들을 생산하셨다니 소녀는 참 놀라워요." "우리 상희도 얼른 시집가서 이토록 이쁜 아이들을 낳아야지? 모름지기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단다." 아니 왜. 난 아들보다 딸이 좋다고...는 어쩔 수 없지. 아들을 낳은 왕비는 그 대우부터가 달라지는 법이다. 한진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때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자기한테 무슨 짓을 했냐니. 겨우 9살 꼬맹이인 내가 제국에서도 손꼽는 천재에게 무슨 짓을 했을 리 없잖아. 그 때만 떠올리면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 나는 이제 12살이 됐다. 남자들은 성장이 굉장히 빠르다. 이 세계는 정말 불공평하다. 남자는 성장이 빠른데 노화는 굉장히 더디다. 그에 반해 여자는 성장이 느린데 노화는 빠르다. 뭐 이딴 세계가 다 있나 싶다. 아참.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아들 낳으면 왕이 잘난 탓이오, 딸 낳으면 왕비가 못난 탓이다. 진짜 뭐 이딴 거지같은 게 다 있어. 어쨌든 강서영씨가 낳은 이 두 아이는 일반적인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점이 있었다. '참 똑같이도 크는 구나.' 처음에는 왜인지 몰랐다. 내 쌍둥이 남동생의 이름은 김환혁. 여동생의 이름은 김상아다. 환혁이와 상아는 발육상태가 거의 같았다. "누나누나누나! 짜잔! 내가 매미를 잡아왔어!" "언니언니언니! 짜잔! 나는 사마귀를 잡아왔어!" 지구와는 다르다. 이 두 꼬맹이는 3살임에도 불구하고 정원을 마구 뛰놀 정도의 체력과 나무위를 기어올라 매미를 잡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녀석들이다. '나 잘해쪄?' 를 외치는 듯한 저 눈빛을 보면서 나는 '오구오구. 열심히 뛰어 다녔구나.' 라는 속마음을 아주 열심히 숨기고 녀석들의 머리를 한 대 씩 쥐어박았다. "위험하니까 나무 같은 데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 때려봐야 아플 리 없는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녀석들은 울상을 지었다. 나는 짐짓 엄한 모양새로 옆구리에 양 손을 짚었다. "힝. 누나가 나 때렸다." "힝. 언니가 나 때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생김새도 비슷한 녀석들이 하는 짓도 영락없이 닮아 있어서 귀여웠다. 누군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알렉스씨였다. "상희 공주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벌건 대낮에 왕자님의 머리를 때리면 안되지 않습니까?" "여긴 알렉스 선생님밖에는 없는 걸요."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나는 잔뜩 긴장했겠지만 우리의 알렉스씨는 아니다. '누나는 나 때려도 돼! 나는 누나한테 매 맞는 거 좋아!' 라는 저 이상한 말은 그냥 무시했다. 알렉스씨는 내 할아버지같은 느낌이다. 왕자의 머리를 쥐어박는 걸 보고도 박수를 칠 정도이니, 어쨌든 정상은 아닌 인간이다. 그래서 좋다. "공주님. 오늘 놀라운 소식을 전해드리려 왔습니다." "놀라운 소식이요?" "네. 아주 특별하고도 놀라운 소식입니다. 왕국 역사상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그 때 또 누가 다가왔다. "그 역사상 놀라운 소식. 조금만 있다가 전하면 안 될까요?" 난 눈을 번쩍 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어린아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나의 희망. 나의 사랑. 우리의 첫째 오라버니가 보였다. 내 몸이 12살로 성장하면서 느꼈다. 첫째 오라버니 김형석은 정말 잘생겼다. 보는 내가 흐뭇할 정도로. 흐뭇해! 흐뭇하다고! 이리오렴. 누나가 안아줄게... 라고는 해도 나는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첫째 오빠에게 깡총 뛰었다. 물론 내 점프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 첫째 오빠가 마력으로 날 들어올려 아주 편안한 상태로 날 안아줬다. "우리 벌써 1년 만이지? 그 사이 숙녀가 다 되었구나?" "오라버니! 소녀는 오라버니가 너무 보고 싶어 꿈 속에서도 오라버니의 이름을 불렀답니다." "이그. 상희도 그랬어요? 오빠도 그랬는데." 나의 훈훈하고 따뜻한 첫째 오빠는 내 머리를 두어 번 슥슥- 쓰다듬고는 환혁이와 상아 앞에 섰다. "우리 꼬맹이들도 그새 정말 많이 컸는 걸?" "난 형아 싫어!" 이제 갓 3살이 된 우리의 환혁이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서 심통이 난 듯 매미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마력을 사용하지는 않은 듯, 매미는 허공에서 날개를 펼치더니 나무 위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환혁이를 혼냈다. "그럼 못 써. 네 형님이신데." 그러자 첫째 오빠는 내 머리를 또 쓰다듬으면서, "우리 상희 벌써 어른이 다 되었구나. 어른인데 이렇게 껴안고 있으면 안 되겠지?" 하고 나를 내려놓으려고 해서 나는 거부했다. 김형석의 목을 꽉 껴안았다. 알렉스씨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상아는 다소곳하게 걸어와 허리를 숙였다. "오라버니. 어서 오시어요." 첫째 오빠는 왼 팔에는 나를, 그리고 오른 팔에는 상아를 안아들었다. 우리 막둥이 환혁이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애꿎은 땅만 턱턱 차고 있다. 오빠는 우릴 안은 채 쪼그려 앉아 막둥이와 눈을 마주쳤다. "형아는 우리 막둥이 봐서 아주 기분이 좋은 걸?" "흥." 그래. 바로 이거야. 얼마나 훈훈해. 이렇게 훈훈한 네가 내 오빠라서 다행이야. 망나니같은 누구랑은 정말 달라. 엉엉. 우리 막둥이들. 그러니까 환혁이와 상아는 쌍둥이인데 아주 특별한 쌍둥이다. 둘 모두 마력 사용이 가능했다. 김환성처럼 무슨 천재같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때문에 상아가 환혁이와도 똑같은 발육상태를 자랑하고 있는 거고 말이다. "알렉스씨. 우리 상희한테 놀라운 소식이 있다는 거. 제가 대신 전해줘도 될까요?" "그럼요. 왕자님 뜻대로 하시지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내가 바로 고어 해독의 1등 공신이란다. 우리의 왕이신 개차반께서는 그 공로를 인정했으며 '보배'라는 칭호를 하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보배라니. 훈훈하기 그지없는 요 녀석이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공주님 말고 보배님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뜻이야." 알렉스씨가 첨언했다. "내일은 파티가 있다고 하네요. 왕자님들과 공주님들 모두가 참여하는 가족파티라고 합니다." 내 인생 12년 동안,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다. 그나마 소녀식 때 어머니들을 찾아가 인사하고 언니들을 만났던 기억 밖에 없다. 신수영 공주가 사형당한 이후로 나는 여전히 언니들과는 만날 일이 없었다. '개차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역사책을 열심히 찾아봤어도 왕이 왕비와 공주들까지 불러서 만찬을 기획한 건 단 한번도 없었다. 아니면 있었는데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라 기록을 안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 환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구식으로 치면 몸은 거의 여섯살 내지 일곱살 정도로 커졌는데 정신은 영락없이 3세인가보다. 내가 요즘 요녀석 크는 재미로 산다. "나는 형아 좋아. 근데 싫어!" "그게 무슨 뜻이야?" "누나가 형아만 좋아하잖아! 나도 이렇게 이렇게 막 안기고 싶은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녀석은 태어난지 6개월만에 언어를 습득했다. 그 이후로 나는 금이야 옥이야 요 녀석을 업어 키웠다. 개차반씨도 무슨 생각인지 요 녀석을 나에게 맡기는 것을 가만히 뒀다. 어쨌든 요 녀석은 나를 굉장히 잘 따른다. 환혁이는 물론이고 상아도. 내가 겉은 이래보여도 속은 아줌마 들어있다고. 오구오구 내새끼, 어화둥둥 내새끼.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키웠더니 내 말이라면 아주 껌뻑 죽는다. "그럴리가? 누난 우리 환혁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 저만치 멀리서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김상아가 달려왔다. "언니는 상아가 제일 좋다며! 언니는 상아를 제일 좋아해!" 오구. 내 새끼들. 그래그래. 너희들 다 이쁘다 이뻐. "환혁이랑 상아랑 둘 다 똑같이 좋아." 그 때, 내 방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이란 말이 나왔을 때부터 저렇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느낌. 불안하다. '안 돼!' 안 된다는 건 내 바람일 뿐이고 헝겊인형 세 개가 하늘을 갈랐다. "물어왓!" 저 놈의 물어왓. 나도 3년 있으면 성년인데 아직도 저러고 있다. 저 놈은 15살 성년. 최연소 나이트 제 9대대장을 차지한 괴물 중의 괴물. 그러나 여전히 천방지축의 꼬맹이인 저 녀석. 이름은 김환성. 우리 둘째 망나니다. 환혁이랑 상아는 마력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아직 그 것에 익숙하지는 않았고, 과거에 내가 그랬듯 열심히 달려 헝겊인형 두개를 잡으러 달려갔다. 얘네가 날 보면서 못된 것만 배웠어. 내가 물어왓은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행복한 표정과 행동으로 순순히 헝겊인형을 주워오는 걸 배웠으니 얘네는 이게 좋은 행동인지 나쁜 행동인지 개념 자체가 없다. 그래도 3년간 변화는 있었다. 나는 헝겊인형을 안 줍고 버텼다. "오라버니!" "왜? 오늘은 생리해?" 아오. 저 천진난만한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다. 옆에서 우리 막둥이들이 생리? 그게 뭐야? 하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순간 고민했다. "오라버니. 그런 게 아니오라..." "알았어. 오늘은 봐줄게." 그래도 이제 5번 중 2번 정도는 봐준다. 여기까지 오는데 12년 걸렸다. 좀만 더 하자 상희야. 그럼 5번 중 3번, 4번 나중엔 5번 안하는 날이 오겠지. "어쩐 일이셔요? 소녀의 방에." "똥개랑 놀라고 왔지." 당신 이제 백수 아니잖아. 어엿한 나이트 대대장이잖아. 근데 왜 땡땡이 쳐. "훈련은 재미없어. 똥개랑 놀래." "형아! 여기! 물어왓 했어. 나 잘했지?" "오빠! 여기! 물어왓 했어요. 저 잘했죠?" 환혁이랑 상아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었고 환성이는 제법 자기가 형 혹은 오빠라는 것을 강조하듯 어깨를 쭉 펴고 턱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잘 봐. 내가 이 정도라고. 하고 주장하는 저 모양새를 보아하니 명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오라버니. 소녀 호기심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뭔데?" "오라버니는 제 9대대의 나이트 대대장이시니... 소녀의 작은 주먹 같은 건 전혀 아프지도 않으시겠죠?" "당연하지! 네 주먹이 훨씬 아플걸?"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럴까요?" 김환성쯤 되면 마력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마력이 일어난단다. 가령 무언가 위험한 것이 날아오거나 하면 마력이 알아서 마력의 주인을 보호한다나 뭐라나. 남자에게 참 편리한 세상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을 차단하는 것도 의지로 가능하다고 들었다. 김환성의 크흠, 헛기침 했다. "그, 그건..." 그래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면 맞으면 아프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명치니까. "하긴... 아무리 훌륭한 나이트이며 소녀가 존경하는..." 여기에 포인트를 주기로 했다. 김환성은 오빠소리 참 좋아한다. 내가 그래서 안해주지만. "정말 존경하는 오빠지만 마력 없이 소녀의 주먹을 맞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요." 김환성이 가슴을 쭉 폈다. "그까짓 거. 쳐봐. 나는 하나도 안 아프니까." "아니어요. 소녀는 오라버니를 다치게 할 수 없어요. 오라버니가 아프시다면 저의 마음이 더욱 아프답니다." 뻥이야. 나 네 명치 진짜 오늘만큼은 꼭 때리고 싶어. 걸려 들어라, 망나니야. 내가 이 날을 위해 12년을 칼을 갈았다. "쳐보라니까?" "미천한 소녀가 어찌 감히 하늘 같은 오라버니의 몸에 손을 대겠어요? 소녀는 그런 불경한 짓은 절대 할 수 없어요." 아니. 하고 싶어. 너 명존쎄라고 아니. 명치 존나 세게 치고 싶다의 준 말이야. 너는 어서 내게 명령을 내리렴. 명치를 세게 치라고. 결국 우리 둘째 망나니. 폭발했다. "명령이니까 쳐. 치라고! 쳐! 안 치면 죽는다!" 명령 잘 듣는, 착한 나는 온 힘을 다해 쳤다. *** 김환성은 방문 밖으로 나왔다. 마력을 써서 창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 참고로 김상희의 방은 11층이다. 건물 밖 정원. 김환성은 주위를 살펴본 뒤 마력을 황급히 운용했다. "으아. 죽는 줄 알았네." 동생 앞이라서 죽는 소리는 못 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아팠다. 마력 없는 여자들이란 건 정말 불편하겠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음? 근데 뭔가 이상한데?"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마력의 순도가 좀 높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통은 있었지만 뭐랄까. 갑자기 힘이 강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에이 뭐. 기분 탓이겠지." 11층 창문에서, "오라버니! 소녀에게 가신단 말씀도 없이 그렇게 나가버리시면 소녀는 마음이 아파요." 라는 김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환성은 몸을 띄웠다. 11층 높이까지 단 한번에 날아 올랐다. 밤 11시. 달빛이 새어드는 창가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동생의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환성은 활짝 웃었다. 잇몸까지 훤히 드러나는 밝은 웃음이었다. "내일 봐." 내일은 왕궁 최초로, 가족파티가 있었다. 왕을 필두로 하여 왕자와 왕비, 공주들이 모두 모이는 파티. 김환성은 날개라도 달린 것 처럼 공중에서 앞으로 움직였다. 김상희는 눈을 살짝 감았다. 김환성은 하늘에 둥둥 뜬 상태로 김상희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 옆의 환혁과 상아도 하늘로 둥둥 띄워서 마찬가지로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줬다. "모두 잘 자. 내일 파티 때 봐." "응 형아!" 환혁은 밝게 웃었다가 이내 형을 좋아하는 속마음을 들키기 싫다는 듯, 흥! 하고 토라진 척을 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얼굴이 많이 붉어져 있었다. 김환성은 땅으로 다시 내려왔다. '마력 운용이 확실히 편해졌어. 잠깐이지만 분명 그런 느낌이 들었어.' 걸음을 옮겼다. 이 문제는 차후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은 내일 가족 파티에 집중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의 코멘트는 사랑입니다. ♡ 아. 물론 추천도 설레요 핡핡 ♡ 0021 / 0192 ---------------------------------------------- 강서영씨의 반란(?) ***21 왕궁 최초의 가족파티가 있기 6일 전. 김환석이 말했다. "아버님. 그 계집아이는 계집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일을 했습니다." 김훈상은 턱을 괴고 앉았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충 알겠다. "알아. 고어 해독이라. 이런 능력을 타고 나다니." 약간 뿌듯해 보였다. 그 표정의 뜻은, '역시 내가 낳은 계집이다.' 라는 뜻이었다. 이 곳은 아들 낳으면 왕이 잘난 탓이오 딸 낳으면 왕비가 못난 탓인 세상이다. 딸이 대단한 능력을 타고난 것은 역시 왕이 대단해서다. "그런데 네가 굳이 계집아이의 업적을 내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계집아이의 몸으로 계집아이답지 않은 일을 행한 바.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호오?" 김훈상은 관심을 가졌다. 보상 같은 거. 주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딱 한 가지는 제외했다. "중성화는 시키지 않겠다." 김환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명예를 주는 것은 계집에게 너무 아까운 처사입니다. 가벼운 칭호를 하나 내리시지요." 김훈상은 아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칭호를 뭘 줄까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그냥 학자들보고 알아서 지으라고 하면 되니까. 그런데 제국에 볼모로 잡혀있는 큰 아들에게 문자가 왔다. '왕국의 보배. 나의 사랑하는 아버님께.' 로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였다. 김상희 공주에게 내려질 칭호가 결정 됐다. 보배. 이거 정하는데 5초도 안 걸렸다. 명령을 내렸다. "김상희 공주에게 보배칭호를 내리겠다. 그리고 가족 파티를 주선하도록 하지. 준비 하도록." *** 김상희는 소녀식 이후로,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수영 공주의 사형사건 이후로 공주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김상희 공주가 거처하는 건물. 이 곳은 역사 도서관과 왕궁학자들이 함께 쓰는 '기록의 관'이라는 건물이다. 김상희 공주의 방은 11층에 있다. 아무나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이 뒤로는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비켜주세요. 소녀는 김상희공주를 만나러 왔어요." "안 됩니다. 김환석 왕자님의 엄명입니다." "......." 김상희를 만나러 온 17살 강희아 공주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환석 왕자가 왕의 승인을 얻어 입구를 철통같이 지키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남자들이야 11층까지 단번에 올라갈 수 있지만 여자들은 아니다. 공주들은 나이트의 도움 없이 11층까지 가는 엘레베이터를 사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마력으로 구동되는 게이트를 열 힘도 없다. 나이트의 재가 없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봐. 김상희 공주 나온다." "아이씨, 빨리 말을 해줘야지." 입구를 지키는 두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력을 가진 남자들이라면 모를까, 마력 없는 여자들은 발견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은신상태를 유지하려면 마력이 상당히 많이 필요해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김상희 공주에게 들키지 말라는, 김환석의 명령이 있었다. 덕분에 김상희 공주는 다른 공주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왜 자신에게 찾아오는 공주들이 없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한편, 나이트에 의해 건물 진입을 제한받은 강희아 공주는 자신의 건물로 이동하다가 저만치 멀리서 김환석 왕자를 발견했다. 황급히 길 옆으로 서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시어요? 소녀는 제 9공주 강..." "꺼져." 김환석은 강희아를 무시하고 지나가버렸다. 강희아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온 몸이 굳어 버렸다. 단순히 '말 걸지 마'라는 한 마디를 내뱉었는데 온 몸이 얼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추웠고 몸이 떨렸다. 강희아는 커다란 잘못이라도 지은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멀어져가는 김환석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말도... 안... 돼...!' 그녀의 눈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 보였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라버니!" 소녀식이 끝난 것이 분명한, 그것도 3년 뒤면 성년식을 갖게 될 김상희 공주가 왕자를 보며 총총걸음으로 안기고 있지 않은가. 5살 짜리 어린아이라도 하지 않을 미친 행동을 저 공주가 하고 있는 거다. '말려야 해.' 말려야 했다. 왕에게는 네 명의 왕자가 있다. 첫째는 김형석, 둘째는 김환석. 셋째는 김환성. 넷째는 김환혁이다. 이 중, 김형석은 제국에 볼모로 잡혀있으며 성격 자체가 워낙 온화하고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서 사실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김환성 역시 잘못만 하지 않으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은 왕자에 속했다. 넷째 김환혁의 경우는 아직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다. '저 분은 무려 김환석 왕자님이라고...!' 그런데 저 사람은 김환석이다. 김형석도 아니고 김환성도 아니며 김환혁은 더더욱 아니다. 왕자들 중 가장 조심해야하는 사람. 가장 두려운 사람이 바로 김환석이다. 공주 보기를 벌레 보듯 하며, 신수영 공주의 사형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냉혈한 왕자가 바로 김환석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 김환성에게 잘못 보이면 한 두대 얻어 터지는 정도라면, 김환석에게 잘못 보이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 김환석에게 김상희가 달려가 안겼다. 저건 자살행위다. "김상희 공주!" 강희아는 순간 머릿속이 비어버린 것 같았다. 이미 일이 벌어졌다. 말린다고 열심히 뛰어봤지만 소용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왕궁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 것 같다. 감히 공주따위가 왕자에게 달려가 안기다니. 만약에라도 날붙이 같이 위험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 저 공주는 독살당할 것이다. 강희아 공주는 황급히 달려가 김환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 소녀가 대신 용서를 구합니다. 김상희 공주는 아직 공주들과의 교류가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이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환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김환석은 예의 그 싸늘한 얼굴로 김상희를 노려보더니 김상희를 들고 저 하늘 위로 던져버렸다. '주, 죽일 거야...!' 김상희를 죽일 것이 분명했다. '기록의 관'은 약 15층 건물이다. 15층 건물의 거의 꼭대기까지 날아올랐다. 떨어지면 분명 죽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사고사로 기록되겠지. "네가 뭔데 똥개 잘못을 대신 비냐?" 그러나 김상희 공주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강희아는 소름이 돋았다. 모르긴 몰라도,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공주들로부터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는 해도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김상희 공주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소녀는, 그것이, 그게..." "대답해. 네가 그렇게 가치 있는 계집이냐?" 김환석은 강희아의 어깨에 손을 살짝 댔다. 강희아는 대리석 석상에 쾅! 하고 부딪쳤다. 충격이 제법 컸다. 쿨럭, 쿨럭, 기침이 새어나왔다. "기억해라. 너 따위한텐 잘못을 대신 빌 권리도 권한도 없다는 걸." 김환석이 말을 이었다. "꺼져." *** 나는 첫째 망나니를 발견했다. 애초에 김환석이 나오라고 했으니까 당연한 얘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첫째 망나니가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왕자가 까라면 까야지 뭐. 별 수 있겠어. 나는 이 첫째 망나니가 제일 마음에 안 든다. 시크한척 쿨한척 다 하는 어린 꼬맹인데 아오. 얘 명치를 좀 세게 때려주고 싶다... 는 단순히 내 속마음이고 나는 활짝 웃었다. 나는 멋진 오라버니를 봐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답니다, 라는 가식적인 표정과 웃음으로 망나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안겼다. "오라버니. 공사가 다망하신 건 알고 있지만 소녀를 좀 더 자주 봐주시어요." 라고 거짓말 했다. 그래. 넌 좀 제발 바빠라. 날 자주 볼 필요 없어. 보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소녀가 대신 용서를 구합니다. 김상희 공주는 아직 공주들과의 교류가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이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난 저 공주를 알고 있다. 제 9공주 강희아. 나보다 5살이 많다. 나보다 5살이 많다함은 17살이며 이미 성년을 치른 공주라는 소리다. 아마 어딘가로 시집가겠지.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지. '아...' 내가 공주들과 워낙에 교류가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 김환석은 공주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라나 뭐라나. 하기야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녀석인 건 맞다. 어, 어, 어어어, 어어? 그런데 내 몸이 하늘로 붕 떴다. 이 느낌. 익숙해. 익숙해서 싫어. 네가 개차반이냐! 앙! "꺄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개차반이 가끔 와서 하는 짓이다.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리고, 개차반은 항상 쿨하고 시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 거리며 내가 비명 지르는 걸 즐기는 놈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그 못된 거 배웠나 보다. 하여튼 이 부자들은 정상이 없다. 한 명은 비행 날라리에 한 명은 물어왓 중독자. 이런 못된 거 배우지 말라고. 나는 하늘 높이 날아 11층에 엉덩방아를 찧고 앉게 됐다. "으아으, 내 엉덩이야." 갑자기 사람을 집어던지고 난리야. 내가 진짜 언젠가 패고 만다. 혼잣말로도 이 말은 못한다. 마력을 운용하고 있으면 들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속으로만 욕했다. 분하다. 혼잣말로 욕도 못하다니. '분명 내 말 듣고 있을 거야.' 여기서 욕하면 절대 안 된다.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또 거짓말 했다. 혼잣말조차 거짓말로 해야하는 나의 이 처량한 신세. 아. 눈물. "오라버니가 날려주시어 정말 행복해." 젠장. 행복하기 개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세뇌했다. 나는 행복해. 행복 하다고. 엉엉. "둘째 오빠를 다시 뵙고 싶으니까 얼른 내려가야지." *** 은신을 사용해서 몸을 감춘 나이트들은 자리를 옮기고 쑥덕거렸다. "둘째 왕자님 분명히 웃었지?" "어? 너도 봤어? 나도 봤는데. 착각인 줄 알았는데." 그 둘은 분명히 봤다. 아주 살짝, 아주아주 조금이지만 김환석의 입가가 씰룩거렸었다. 김상희가 안겼을 때 분명 그랬다. "그럼... 자기 웃은 거 안 들키려고 11층까지 집어던진 거야?" "내가 혹시 몰라서 마력 운용해봤는데 다치진 않은 것 같더라." 두 나이트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마력으로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마력보호 없이 15층 높이까지 날아가 11층에 그냥 떨어졌으면 최소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걸." "네가 마력보호 걸었어?" "아니. 나는 아닌데. 네가 걸은 것 아니었어?" "나도 아닌데." "설마..." 두 나이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비 접촉 상태에서 마력보호라니. 그거 마력 엄청 잡아먹는다고." "맞아. 둘째 왕자님이 그런 미친 짓을 했을 리가 없지." 한편, 11층까지 날아갔었던 김상희 공주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싶었더니 옷을 갈아입었다. "소녀는 오라버니께 더 이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옷을 갈아입었답니다." 김환석은 분수대에 앉은 상태로 말했다. 김상희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못생겼어 넌." "저는 비록 못났지만 오라버니와 함께 이 곳에 있을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답니다." 김상희는 김환석 옆에 다소곳하게 섰다. 이 곳에 왜 왔냐고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별로 용건 있어서 부른 적은 없으니까. "며칠 이내로 좋은 소식이 갈 거다." "네...?" "그런 줄로 알아." 김환석은 마치, 네게 생기는 좋은 소식 따위는 전혀 알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모양새로 등을 돌리고 걸어가 버렸다. '아니. 도대체 나한테 좋은 소식이 있다는 걸 왜 직접 말해? 그것도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굳이...?' 김상희도 그 이유는 몰랐다. 설마 지가 무슨 생색이라도 내려고 일부러 찾아온 건 아닐 테고,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봤다. 먼 발치에서, 강희아 공주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말도 안 돼... 둘째 왕자님과 대화를 나누다니...' 그 동안 소문으로만 퍼져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김상희 공주는 워낙에 베일에 가려진 공주다. 그녀에게 접근할 수가 없어서 온갖 소문이 퍼졌다. 중성화의 영광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퍼져있을 정도니까. '설마 진짜 중성화...?'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됐다. 6일이 지났다. 김상희 공주에게 보배칭호가 내려졌으며 그에따라 가족파티가 계획됐다는 걸, 강희아 공주도 들었다. 강희아 공주는 확신했다.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중성화... 그 것이 성공한 것이 틀림 없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왜 김상희 공주가 그토록 베일에 싸여 있었는지. 왜 다른 공주들과 접촉을 하지 않았는지. 그녀는 여지껏 실험체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운 좋게도 그 실험체가 중성화에 성공한 것 같다. 그러니까 왕자님과 대화도 하고, 안기는 불상사를 저질렀어도 사형당하지 않았겠지. '아마... 가족 파티에서는 중성화를 받을 공주들을 뽑을 거야.' 아주 조금이지만 행복해졌다. 마력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바로 내일. 가족파티가 시작 된다. 모르긴 몰라도 중성화에 지원할 계집아이를 또 뽑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가장 먼저 지원하겠어.' 큰 꿈을 품었다. 왕국 최초의 가족 파티가 시작 됐다. ============================ 작품 후기 ============================ 본격_생색은 내고 싶으나_낼 수 없는_ 왕자.JPG + 추천과 코멘 사랑합니다 ♡ 애정 넘치는 코멘트 하나하나 다 읽고 있어요. 정말 큰 힘이 됩니다. 0022 / 0192 ---------------------------------------------- 강서영씨의 반란(?) ***22 왕이 주최하는 왕국 역사상 최초의 가족파티에는 14명의 왕비와 38명의 공주. 그리고 4명의 왕자가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가족파티가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공주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상희 공주가 중성화에 성공한 첫번째 실험체래." "그래서 왕자님들이 많이 아꼈던 거였어." "소녀식 때를 떠올려봐. 왕자님이 왜 그렇게 그 공주를 아꼈겠어?" "맞아요.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돼요." 설명 안 되지 않는다. 김상희는 항상 자기 스스로 내 안에 아줌마 있다라고 말한다. 전생에서는 꼬리 100개쯤 달린 여시로 통했다. 애교 피우는 여자도 거의 없는 이 세상에서, 남자와는 눈도 못마주치는 여자들과는 달라도 아주 다른 김상희가 자신만의 매력으로 왕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공주들은 그걸 모른다. 김상희 공주와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8공주 이선화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중성화라..." 이선화는 제 9공주인 강희아와 상당히 친했다. 동갑이기도 했고 마음이 잘 맞기도 했다. 강희아가 말했다. "소녀는 꼭 중성화에 지원하겠어요." "하지만 중성화라는 건... 아직까지 이론만 존재했었던 거잖아." "그래도 이번에 성공했잖아요. 확실히 김상희 공주는 유별난 구석이 있었어요. 여태까지 격리되어 있던 것도 그렇고 왕자님들과의 교류가 잦았던 것도 그렇고. 다른 공주들과는 확연히 달라요. 중성화에 성공한 것 말고... 이런 대규모의 가족 파티를 벌이는 이유가 또 있을까요?" 이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화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희아 너는 중성화에 지원할 생각이야?" "네. 반드시 하고 말겠어요." "차라리 강서영 왕비님처럼 아들을 낳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3년 전. 강서영 왕비는 쌍둥이를 낳았다. 아들은 물론이고 딸까지도 마력을 갖는 진귀한 풍경이 벌어졌고 덕분에 강서영 왕비의 지위는 굉장히 많이 높아졌다. 신분상승을 위해선 아들을 낳는 게 최고다. 그러나 중성화를 하면 아들을 못 낳게 되지 않는가. 강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들을 낳는 것보다는 마력을 갖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공주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계속 퍼졌다. ***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4명의 왕비와 38명의 공주. 그리고 4명의 왕자가 참여하는 가족 모임. 이름하여 '보배 수여식'이란다. 그러니까 이 거창한 가족모임이 나한테 보배칭호를 주려고 기획한 거란다. 나는 안다. '개차반 입장에서야 별 거 아니겠지.' 개차반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니다. 그냥 수많은 왕비들 -심지어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 와 더 많은 공주들이야 그냥 부르면 네, 하고 오는 약자들이고 4명의 왕자들만 불러모아 파티나 하면 되는 거니까. 내가 우리 개차반씨를 많이 파악했는데, 그 개차반씨는 정말 별 생각 없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보배라는 칭호도 그냥 대충 생각하고 말았겠지. 분명하다. 틀림 없다! 그런데 막상 당하는(?) 왕비와 공주들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은 왕의 눈치를 봐야하는 사람들이다. 속된 말로 잘못 찍히면 그냥 죽어나가는 게 바로 이 세상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가족모임을, 그것도 왕국 최초로 기획했는지 모두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뻔했다. 입장의 차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 평소에 엄청 무서워하는 선배가 별 생각 없이 '너 나좀 보자.'라고 하면 후배는 솔직히 좀 무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선배 수준이 아니라 '너 그냥 죽어라'라고 말하면 사형집행이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인간이 '너네 다 나와'라고 말했으니 눈치 보지 않고 배길 수는 없겠지. 그나마 나는 마음이 편하다. '웬일로 나한테 그런 칭호를 주지?' 이건 많은 의미가 있는 거다. 단순히 칭호를 주는 건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왕이 직접 가족모임을 기획하고 또 직접 칭호를 내린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거다. 저만치 높은 곳에 왕이 가운데. 황금의자에 앉았다. 양 옆에 2명씩. 왕비님들이 앉았다. 나의 엄마인 강서영씨도 저기 앉았다. 저 특별한 왕비들이 누구냐고? 바로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다. 개차반이 말했다. "이번 가족 모임은 김상희 공주 때문에 기획했다." 공주들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애초에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이름부터가 보배 수여식이다. 그렇다면 나를 따로 불러 무언가 표창같은 걸 해주겠지. 솔직히 달갑지는 않다. 나는 공주들과의 교류가 없어 친분이 거의 없는 상태다. 이러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말텐데.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공주들이 날 보는 시선이 좀 묘하다. 뭐랄까. 시기질투라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뭐야. 좀 이상해. 하기야. 지금 당장은 부러울 수도 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기질투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만. "... 와 같은 공로를 인정하여 김상희 공주에게 보배의 칭호를 내린다. 김상희 공주는 내게 가까이 오라." 속마음이야 어찌됐든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 표정을 굳이 육성으로 표현해보자면,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다. 개차반씨는 내 느린 걸음을 보기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꺄아악! 아, 아버님!" 아바마마라는 단어는 이제 사전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아버님이란 단어를 썼다. 그거야 둘째 문제고 내 몸이 날았다. 김환성이 던져대는 헝겊인형처럼 나는 가볍게 날아 개차반의 앞까지 날아왔다. 나는 둥둥 떠서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그 때. 나는 봤다. 개차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젠장. 망했어. 나는 지난 몇 년간 저 표정을 봤다. 나는 체념했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포기해야 했다. "꺄아아아악!" 정신을 놨다.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다. 어찌나 교묘하게 나를 이리 저리 날리는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대로면 진짜 죽겠구나. 그런 마음이 절로 들었다. 물론 개차반이 날 죽이지야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해서 이 속도로 내 머리가 저기 저 대리석 기둥에 부딪치면 난 그냥 죽는 거다. 나 죽이고 나서, '어맛, 실수네.'하고 말하면 나는 정말 개죽음이 되는 거다. "아, 아버님! 소녀가 잘못 했어요. 요, 용서를 해주시어요!" 나는 이리저리 마구 날아다니면서 온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개차반은 날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나는 눈을 감고 있어서 모르는데 저 자식 아마 무심한 얼굴로 입가에는 시크한 미소를 짓고서 손가락을 까딱까딱하고 있을 거다.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엉엉. 평소보다 훨씬 오래, 그리고 다이나믹하게 날아다녔다. *** 김훈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흠. 오늘은 실패인가." 김상희 공주가 아무래도 다른 왕비, 공주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보통 이 정도 마구 날리다보면 아빠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오늘은 안 나온다. 김상희를 초죽음으로 만든 김훈상은, 봐줬다. 이쯤하지 뭐,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김상희가 김훈상의 앞까지 날아왔다. 속도가 굉장히 느려졌고 이내 김훈상 앞에 멈춰섰다. 김상희는 허공에 뜬 상태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김훈상이 땅에 내려줬다. 땅에 내려온지도 모르고 김상희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김환성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오예! 나도 빙글빙글 날아간닷! 돈다 돌아!" 하고 외치며 방금 김상희가 날아다닌 그 코스를 정확하게 따라가며 몸을 날렸다. 마치 탱탱볼이 이리튀고 저리 튀는 것 같았다. "끼얏호!" 하여튼 '보배'칭호의 수여식은 그렇게 끝났다. 보배 수여식을 보면서 왕비들과 공주들은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이 수여식에 도대체 어떤 정치적인 계산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공주들 중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품고 왕자를 독살하려고 했다거나. 있을 리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 알아내고자 이런 파티를 벌여 지켜보고 있는 거라면. 왕궁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공주들은 아직 4년 전 신수영 공주의 처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강희아 공주는 생각했다. '중성화 지원자는 도대체 언제 뽑는 거지...?' 잠깐이지만, 그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설마 정말로 순수한 의미의 가족모임을 아닐 거야.' 분명히 그럴 거다. 정치적인 뭔가가 분명히 있을 거다. 강희아 공주는 조심스레 왕을 올려다 봤다. 김훈상은 턱을 괴고 앉은 상태로 김상희를 다시 둥둥 띄어 올리는 중이었다. "아, 아버님.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어요. 소녀를 가여이 여겨 주세요." 라는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강희아 공주는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저 공포. 잘 알 것 같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 얼마 전 분수대 앞에서 느꼈었다. 김환석 왕자를 마주쳤을 때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희아 공주는 눈을 크게 떴다. 강희아 공주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열심히 달려가는 시간에 아주 무거운 납덩이를 달아버린 것 처럼, 시간이 멈췄다. 한 곳에 시선이 집중 됐다. 김상희 공주가 김훈상에게 안긴 것이다. 3살 어린 아이도 아니고 -비록 3살 어린아이라고 해도 불가능하겠지만- 무려 12살씩이나 된 공주가 왕의 품에 안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자라면 모를까. 물론 김상희 공주의 뜻은 아니었다. 왕이 마력을 움직여서 이렇게 만들었다.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김상희가 김훈상에게 안긴 꼴이 됐다. 김훈상은 별 생각 없이 김상희 공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사실 나름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김훈상은 김상희의 머리를 종종 쓰다듬곤 했었으니까. 김훈상이 뭔가를 말했다. 공주들은 긴장했다. 들리지는 않지만 무슨 끔찍한 말이 오가고 있을까 생각해봤다. 보배라는 칭호 하나 받고 너무 거창한 것 아니냐. 부터 시작하여 중성화를 포기하고 싶은 거냐. 라는 질문 까지. 공주들은 끔찍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아가 개차반에게 안겼다. 정신을 차렸다. 개차반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개차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울면 죽인다." 이 인간은 정말로 죽일 인간이야. "옳지." 개차반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말했다. "아빠가 너무 심했냐?" 이상하다. 아빠란 단어가 굉장히 느리게 들린 건 내 착각인가. 엄청 길게 느리게 발음한 것 같은데. 아니. 아마 착각은 아닐 거다. 이 개차반은 아빠라는 단어에 약간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이 자식아. 내가 다른 공주들 왕비들 있는 자리에서 너한테 어떻게 아빠라고 부르냐. 나는 몸을 위로 쭉 빼서 김훈상의 귓가에 속삭였다. 옛다. 아빠 한 번 해준다. "소녀는 아빠가 해주시는 모든 것이 황홀하고 좋아요." 두 번 황홀했다가는 정말로 죽겠지만. 이 자식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만. 어쨌든 개차반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아주 편안한 상태로 둥둥 띄워 아래까지 날려줬다. 개차반이 말했다. "모두 가족파티를 맘껏 즐기도록 해라." 공주들이 나를 힐끗힐끗 계속 쳐다보기는 했다. 그럴만도 하다. 이해한다. 성년이 되기 전에, 공주들과도 여러모로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텐데. 쌍둥이들 본다고, 또 왕궁학자들을 만난다고 바빠서 그러질 못했다. 우리 막둥이 환혁이는 지금 공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환혁이는 공주들에게 곧잘 '누나, 누나, 누나. 이것두 맛있어. 먹어봐.'하고 붙임성있게 다가가서 수다를 떨고 있는 중이다. 공주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겠지. 무려 왕자님께서 '누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접근 중이니까. 조금 쉽게 비유를 들자면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호랑이쯤 되는 맹수가 귀여운 표정을 짓고 이거 먹어봐, 이거 먹어봐, 하고 권하는 형국 아닌가. 조금 과장하자면 공주들에겐 '안 먹으면 뒤져'라고 들릴 거다. 우리 환혁이는 그렇게 나쁜 아이가 아니라서 안 먹는다고해도 달리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겠지만, 공주들은 우리 환혁이에 대해서 모른다. "그래도 상희누나가 제일 제일 이쁘다 뭐." 환혁이는 나한테 달려와서 안겼다. 역시 환혁이는 내 얼마 안 되는 희망이다. 우리 첫째오빠는 나와 환혁이를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이 둘이 내 삶의 희망이다. 비록 공주들에게는 충격과 공포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났다. 개차반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보배수여식을 맞이하여 내가 소소한 이벤트를 하나 준비했다." 모두가 집중했다. "지금부터 3시간 이내에, 내게 선물을 갖고 와라.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나도 친히 선물을 내리겠다." 누가 개차반 아니랄까봐. 저 자식. 이벤트 내용도 겁나 이기적이다. *** 공주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 것 같다. 중성화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부터 3시간 이내에, 내게 선물을 갖고 와라.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나도 친히 선물을 내리겠다." 공주들은 직감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을, 3시간 이내로 구해오는 공주에게 중성화의 영광을 내려줄 거다. 분명 그랬다. 특히 강희아 공주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그녀는 다른 공주들보다도 마력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무슨 선물을 드려야 하지...' 공주들과 왕비들. 심지어 왕자들까지도 흩어졌다. 3시간 안에, 왕의 마음에 드는 선물을 가져오기 위해서 말이다. 쌍둥이 남매인 환혁과 상아는 정원으로 나갔다. 둘은 싸웠다. "난 짱 큰 사마귀를 잡을 거야." "난 짱 큰 매미를 잡을 거에요!" "내가 훠어어어얼씬 큰 사마귀 잡을 거야." "내가 훠어어어어어어얼씬 큰 매미 잡을 건데요?" "내가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씬 큰 거!" "내가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씬 큰 거!" 3살짜리 두 꼬맹이는 별로 많지도 않은 마력을 운용해가며 정원을 이리저리 뛰놀았다. 3시간이 지났다. 왕자, 왕비, 공주들이 다시 파티홀로 들어섰다. 김훈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됐다. 그럼 누구부터 내게 선물을 줄 테냐?" 강서영 왕비와 강희아 공주가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김훈상은 흐음...하고 턱을 매만지다가, "왕비가 먼저 가까이 오라." 라고 말했다. "그래. 뭘 준비했지?" "저는..." 그리고 보통 놀라는 쪽이 아닌, 놀랍게 만드는 쪽이었던 김상희 공주가 굉장히 많이 놀랐다. 강서영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가, 강서영씨...?' ============================ 작품 후기 ============================ <이번편 요약> 왕: 그냥 파티 한 번 하자 ㅋ 공주들: ...!!! 중성화?! 정치 모략? 조사? 도대체 뭐지...? 김상희: 걍 파티 맞는데여 ㄷㄷ 왕: 선물 내놔ㅋ(아빠라고도 좀 하고 좀;;; 아빠소리 듣게 거참 힘드네;;) 강서영: 나도 뭔갈 해야겠어! 김환성: 끼얏호! 돈다 돌아! 나는 날으는 인간이다! >_< ...? *** 자유게시판 성격상 거기에 인증글을 올리는 건 맞지 않다고 하네요. 그래서 자유게시판 사진은 지우고 제 뜰에 작가 인증사진 올려놨어요. + 잠깐. 자네, 추천이나 코멘트 잊지 않았나? (진지) 왕딸은 추천과 코멘을 받을 때에 연재의지가 솟아오른다네.(매우진지) 0023 / 0192 ---------------------------------------------- 강서영씨의 반란(?) ***23 나는 강서영씨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사실 강서영씨는 예쁘다는 것과 -왕비들은 기본적으로 다 예쁘다- 마력 운용이 가능한 쌍둥이 아가를 낳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렇게 특별할 구석이 없는 평범한 이 세계의 여자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즉, 남자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순종적이며 유혹따윈 모르는 그런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틀렸다. 강서영씨가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무엇을 드려야 할 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저의 태양이시며 저의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니." 개차반 저 자식은 저런 아부를 -강서영씨는 진심이겠지만. 그래서 더 어이 없다.- 매우 당연하다는 듯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앉아있다. 내가 개차반 명치도 언젠가 세게 때리고 만다. "저는 제 모든 것을 드리기로 작정했답니다." "그래서?" "저를 드리겠어요. 오늘 밤. 저의 침실로 와주시어요." 이건 정말 파격적인 거다. 왕이 직접 가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침실로 오라고 했다. 달리 말하자면 왕비가 왕에게 명령을 한 거다. 이 세계에는 유혹의 개념이 없다. 이건 명령이다. 나 빼고,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분명히 그런 거다. 하지만 나는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 이 곳의 남자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여자들이 워낙에 그 숫자가 많고 억눌려져 있어서 아예 유혹이라는 것 자체를 못한다. 인식 자체가 그러니까 유혹의 개념이 없다. 하지만 저건 분명 유혹이다. 이 세계 남자들에게는 매우 특별하디 특별한 것이라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왕비들은 강서영씨를 쏘아보거나 입을 벌렸다. 저렇게 충격적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다니. 역시 내 엄마다. 나이스 샷. 개차반이 뭐 별 거 있냐는 듯 시크하게 말했다. "당신은 원래 내 거고." "그, 그건..." 이봐. 강서영씨. 당황하지 마요. 저 개차반 지금 좋다고 표현한 거야. 절대 싫다고 한거 아니니까 괜히 쫄지 좀 마요. 보는 내가 안쓰럽게. 왕비들도 경악하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아니 뭘 경악하고 그래. 당신들이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 꽤나 괜찮은 선물이었다고? 물론 충격과 공포인 건 알아. 알고 말고. 그러니까 살살 녹여서 다뤄줘야 한다는 걸 전혀 못하고 있지. 개차반이 말했다. "다음." 다음차례는 제 9공주인 강희아였다. 강희아가 준비한 것은 영롱한 빛을 뽐내는 에메랄드 귀걸이였다. 아무래도 마력이 담긴 물건 같았다. 저런 물건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겉모양은 예뻤다. "이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재미있다. 수많은 아내들 중 한 명인 강서영은 약간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저렇게 당돌한 계집아이라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다른 아내였다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는데, 강서영이라면 괜찮았다. 요즘 안 그래도 강서영의 침실에만 들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 다음 물건은 에메랄드 귀걸이였다.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마 저 공주는 정말 힘들게 저걸 구했을 거다. 그러나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어차피 그는 왕이며 저런 물건 같은 거, 쉽게 구한다. 엄청난 아티팩트나 고대 유물도 아니고. 저런 것 쯤은 필요도 없다. 그냥 너나 가져,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예민한 그의 청각신경에 목소리가 들렸다. "이쁘다..." 김훈상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꼴에 계집아이라고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좋군. 다음." 쌍둥이 남매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빠! 저는 이러어어어어엏게 큰 사마귀를 잡아왔어요!" "아버님! 저는 이따아아아아아아아아만큼 큰 매미를 잡아왔어요!" "아빠! 저는 이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엏게 큰 사마귀에요!" "아버님! 저는 이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말을 하던 김상아는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김훈상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마력을 잘 운용해야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 거다." 다른 공주들과 왕비들은 상아를 부럽다는 듯 쳐다봤다. 마력을 타고난 여자. 마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저렇게 왕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물론 왕자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분의 격차는 확실했다. 김환혁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아빠는 뭐가 더 좋아요?" 그러자 김훈상도 진지하게 얘기했다. "둘이 싸움붙여서 이기는 쪽." 사마귀를 잡아온 김환혁이 활짝 웃었다. 아무래도 매미보단 사마귀가 더 세니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만세를 불렀다. "이겼다!" *** 와. 진귀한 물건들을 많이도 구해왔구나. 그런데 참... 가슴이 아프다. 남자들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세계의 남자들이 단순한 것처럼, 이 세계의 여자들도 정말 단순하다. 아니,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어서 그럴 수도 있는 건지, 아니면 이쪽 인간이 아예 이렇게 설계되어서 태어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말 답답하다. '소한테 생고기 주면 좋아하겠냐고! 호랑이한테 풀을 주면 좋아하냐고! 이 아가씨들아!' 좀 황당했다. 여자들은 열심히 선물을 준비했는데 대부분 작은 악세서리 종류였다. 생각해봐. 왕에게 저런 목걸이나 귀걸이따위가 필요하겠어? 필요하겠냐고? 앙? 이 바보들아! 개차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너는 뭘 준비했지?" 좋았어. 작전 실행이다. "소녀는..." 당황한 척. 부끄러운 척. 수줍은 척. 내가 할 수 있는 척이란 척은 다 했다. "어서 말해봐라. 질책은 하지 않을 테니." "소녀가 아버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될까요?" 개차반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내 몸을 붕 띄웠다. 이 자식아. 말 좀 하고 해줘. 놀라잖아! 개차반 앞에 선 나는 두 팔을 벌렸다. 누가봐도 안아달라는 제스쳐다. 내가 지금 윗쪽에 있어서 뒤의 상황이 보이지는 않는데 아마 경악들을 하고 있겠지. 왕자도 아니고 공주따위가 왕에게 안아달라는 시늉을 하고 있으니. '나는 아직 겨우 12살밖에 안 됐어.' 나는 겨우 12살이다. 아직 어린 꼬맹이다. 꼬맹이다. 계속해서 내 스스로를 세뇌했다. 아참. 12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12년 동안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다리 길어지라고 밤마다 스트레칭도 하고 그나마 갖고 있던 요가지식들을 활용해가며 어릴때부터 몸매를 가꾸려고 굉장히 노력한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무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는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인다... 라고는 해도 어차피 나는 12살이다. 그런 노력이 빛이 나는 시기가 아니라는 뜻이며 그 말은 다시 말해 나는 꼬맹이라는 소리다. 나 꼬맹이 맞다고. 내 안에 아줌마 없어! 그래. 나를 잊는 거야. 수많은 사람들의 경악을 뒤로 한 채, 개차반이 나를 안아 들었다. "소녀는 아버님을 전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답니다. 소녀의 목숨보다도 훨씬 더 많이요." 그리고 기습적으로 개차반의 볼에 뽀뽀를 해줬다. 아. 내 입술. 내 순결. 짜증나. 개차반한테 바치다니. 12년간 지켜온 나의 입술 순결을 바쳤다. 나는 어린아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젠장. 내 입술 엉엉. 속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활짝 웃었다. 눈웃음도 쳤다. 참고로 눈웃음은 밤마다 거울보며 연습했다. "소녀는 아버님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요." *** 가족파티가 이루어지고 있는 홀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강서영 왕비의 행동은 이미 파격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파격이 벌어졌다. 공주따위가 감히 왕에게 안겼고 왕에게 뽀뽀를 했다. 제 9공주 강희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정말... 중성화가 맞긴 맞는 거야...?' 강희아가 보는 김상희 공주는 중성화와는 거리가 굉장히 멀어 보였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게다가 감히 왕께 뽀뽀라니. 어떻게 저런 불경한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을...거야...'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 역시 공주들에게 교육을 받지 못한 티가 팍팍 난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저런 불상사는 일어나지도 않았으리라. 강희아만 충격에 빠진 게 아니었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정적에 휩싸였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인 김훈상이었다. "하하하하하하!" 김훈상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색했다. 공주들과 왕비들은 긴장했다. 폭풍 전야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돌하구나 계집." 저만치, 멀리 홀 입구에서 보안을 서던 나이트들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어떻게 김상희 공주가 왕께 스킨십을 할 수 있었지?" "그거야 당연히 왕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지." "역시 그렇지?" 겨우 어린아이. 그것도 계집아이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그게 싫다면 가만히 둘 왕이 아니다. 만약 싫었다면 아마 저 공주는 이 곳. 입구까지 날아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을 거다. 애초에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아예 접근조차 못 한다. 아무리 날고 기는 나이트어도 왕에게 상처하나 내지 못하는 판국인데 마력 운용도 못하는 계집이 왕의 몸을 건드렸다는 건, 왕의 허락이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왕비와 공주들은 엄청 놀란 것 같은데." "나도 많이 놀랐어. 뭔가 좀 많이 변했나보네. 몇 년 전에는 신수영공주도 직접 처형하셨는데..." "뭔가 분위기가 바뀌셨달까...그나저나 신세계군. 이 기분 뭐지?" "너도 그래? 나도 이상하게 뭐랄까. 흐뭇한 기분이랄까. 정말 요상한 기분이 드는군." 김훈상이 말했다. "이 것이 네 선물이냐?" 김상희는 연기했다. "소녀의 선물이... 너무 값어치가 없었다면... 소녀를 오늘 밤 죽여주시어요. 소녀가 잘못했어요." 물론 그녀도 안다. 김훈상이 허락해줘서 뽀뽀가 가능했다. 김훈상은 지금 좋아하고 있다. 당연히 죽을 일 같은 거 없다. 하지만 연기에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말을 이었다. "김상희 공주의 선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내 마음이 흡족하니 이 곳에 모인 모든 이에게 퓨리어스를 하사한다." "폐, 폐하!" 왕비들과 공주들. 심지어 김상희 공주까지도 깜짝 놀랐다. 퓨리어스가 무엇이던가. 한 방울만 마셔도 평생 잔병치레 걱정이 없다는 희대의 성수가 아니던가. 고려왕국은 제국 다음으로 가장 부강한 왕국이다. '프리온 나이트'를 소유한 제국보다 무력은 약하지만 경제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는해도 퓨리어스는 너무 과한 처사였다. 아무리 통이 크다 해도 이건 정말 너무했다. 퓨리어스 한 병이면 작은 왕국 하나 정도는 통째로 사들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보물이었다. 참고로 퓨리어스는 왕의 개인 사재이며 이 곳에 모인 이들에게 한 방울씩 하사한다고 하면 한 병 정도는 필요했다. 말 그대로 작은 왕국 하나 값이다. 첫째 왕자인 김형석이 중재했다. "아버님. 그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퓨리어스는 또 구하면 된다." 김형석은 그 말에 물러났다. 그 말을 해석해보자면, 퓨리어스는 또 구하면 되지만 지금 이 순간, 김상희 공주의 값어치 있는 선물은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왕이 '사랑해마지않는 딸내미가 아빠한테 처음 해주는 볼 뽀뽀'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현명한 왕자인 김형석은 그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이해도 됐다. 그가 보기에도 저토록 사랑스러운 상희공주다. 아버지가 보기엔 더더욱 흐뭇할 터. 저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 이상의 그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하기야.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고려왕국이라면... 퓨리어스를 선사할 수 있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적어도 타국은 모른다. 김형석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버님께서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 건 처음이다.' 저 즐거운 기분을 굳이 깨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특별한 사람을 한 명 초대했다." 이 모임은 보배 수여식이자 가족파티다. 수호자격인 나이트를 제외하면 가족 외의 다른 인물은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런데 특별한 사람이란다. 문이 열렸다. 남자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모두가 주목했다. 김상희의 몸이 굳었다. '한진수가 여길 왜...?' ============================ 작품 후기 ============================ 김훈상: 기분 좋은데 왕국 하나 정도 값쯤은 뿌려줘야지. 뭐? 안된다고? 안되면 되게하면 돼. 까먹었냐? 나 왕이야. 나 뽀뽀받음 ㅋ 아깝지 아늠 ㅋ 잠깐. 거기 너. 코멘트는 썼냐? 귀찮으면 추천이라도 눌러 ㅋ 안하면 비행기 태운다. 0024 / 0192 ---------------------------------------------- 밝혀지는 능력 *** 곽기현은 투덜거렸다. "아니. 중요한 승급시험 앞둔 애가 도대체 거긴 왜 갔어?"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더라. 약혼녀의 보배수여식인지, 가족파티인지 하여튼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게 생겼는데 거길 찾아갔단다. "하여튼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 계집애가 그렇게 좋을 리는 없다. 그건 확실했다. 애초에 이 세계는 '사랑'이란 감정이 굉장히 희귀하다. 잘난 남자이면 잘난 남자일수록 사랑이란 사치스런 감정에 빠져들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친구는 그냥 잘난 것도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잘났다. 그런 친구놈이 겨우 12살의 꼬맹이한테 사랑을 느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상해. 이상해. 진짜 이상해." 곽기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혼잣말을 쉴 새 없이 중얼 거리던 곽기현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한편, 김훈상은 새로이 입장하게 된 한진수를 환영해줬다. 왕국 내 최고의 천재다. 제국에서도 데려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귀한 인물이니만큼 상당히 반갑게 맞이해줬다. 파티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 했다. 비록 김상희는 김훈상더러 아주 이기적인 개차반이라며 속으로나마 욕을 했지만, 어쨌든 김훈상은 굉장히 즐거운 듯 파티를 주도해 나갔다. 김상희는 혼란스러웠다. '한진수는 도대체 왜...?' 도무지 한진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진수를 보면, 과거의 한진수가 떠오른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다. 겉모습과 목소리는 똑같은데 그렇다고 과거의 한진수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또 한진수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한진수가 김훈상에게 요청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김훈상은 턱을 괴고 앉은 상태로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여차하면 한진수에게도 퓨리어스 한 방울 정도는 선물해줄 기세였다. "그래. 뭐냐?" "제 약혼녀와 잠시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한진수는 찔끔 놀랐다. 제 아무리 천재라고는 해도 아직 김훈상을 당할 수는 없었다. 김훈상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진수가 느끼기에 거대한 벽같이 무거운 마력이 한진수의 몸을 짓눌렀다. "왜?"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왕은 태평스레 앉아 있었다. '착각...인가?'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착각처럼 느껴졌다. 한진수가 말을 이었다. "잠시 할 얘기가 있습니다." "둘만? 따로?" 김훈상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모양새다. 한진수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불가하겠습니까?" 김훈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생각해보니 불가할 게 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거다. 안 그래도 제국에서 노리는 인재다. 뭐가 됐든 일단 김상희와 더욱 친하게 만들어서 확실히 사위 삼으면 왕국에도 좋은 일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안들었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아니. 안될 건 없는데." 김훈상은 김상희를 부르기도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 했다. 저만치 멀리서 포도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던 김상희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왔다. 예고 좀 해줘, 이 개차반아! 음료수 다 쏟을 뻔 했잖아! 김상희는 속으로 소리쳤다. 신기하게도 손에 들려있던 잔의 음료수는 전혀 쏟아지지 않았다. 한진수는 그걸 보며 다시 감탄했다. '왕의 마력 컨트롤 능력은 정말... 엄청난 수준이구나. 나 따위는 쳐다도 볼 수 없는 경지다.' 이 세계의 강함은 크게 3 가지로 결정 된다. 타고난 마력의 양과 질. 마력을 활용하는 컨트롤 능력. 마력의 출력을 제대로 뿜어낼 수 있는 신체. 마력의 그릇과 질(순도)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다. 인위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도 있기는 하나 사실상 인위적인 방법은 그다지 효용성이 없다. 마력의 절대량 최대치는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다는 말이다. 이건 '잘'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컨트롤 능력. 이 것은 '마력의 양'과는 다르게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정 경지이상 성장이 가능하다. 컨트롤 능력이 떨어지면 100의 힘을 갖고 있어도 10도 못 끌어다 쓴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컨트롤 능력이 절대량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로 마력의 회복율 역시 컨트롤 능력과 크게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마력의 출력을 감당할 수 있는 신체. 신체 역시 타고난다. 그러나 마력의 양처럼 절대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었다. 신체를 단련하여 일정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가능했다. 굳이 예시를 들어보자면 둘째왕자 김환석은 마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은 뛰어나나 마력의 절대치가 조금 적은 편이며 신체는 보통수준이다. 그에 반해 셋째왕자 김환성은 마력의 절대량과 신체는 뛰어나지만 마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김훈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조금 적은 편' 과 '보통 수준'이라는 거다. 고려왕가의 혈통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본다면 김환석 역시 천재의 수준을 뛰어넘긴 했다. 한진수는 김훈상을 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왕께선... 모든 능력을 다 타고나셨지.' 모든 능력이 완전히 천재급의 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세 능력 모두 평균을 훨씬 웃도는 능력을 가졌다. 세 능력이 골고루 발달한 왕. 그게 바로 현재 고려의 국왕 김훈상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김훈상이 자신보다는 훨씬 강했다. "아, 아버님!" 한진수는 묘한 걸 또 하나 발견했다. 김상희는 지금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대고 있는데, 김상희의 몸을 마력이 감싸고 있었다. 아주 은밀하게 말이다. 바로 옆에서 이렇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로 모를 뻔 했다. '마력 보호...?' 비접촉 상태에서의 마력보호. 저건 마력을 굉장히 많이 잡아먹는 고난이도의 기술이다. 그걸 저런 태평한 얼굴로 하고 있다. 대단한 것도 대단한 거고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기도 했다. '설마... 김상희 공주가 혹시라도 다칠까봐서?'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망상을 떨쳐내기로 했다. 방금도 왕의 컨트롤 능력을 봤다. 저 정도의 인간이 실수를 할 리 없다. 왕에게는 정말로 너무나 쉬운 것이라 그냥 해준 것일 게 분명했다. "꺅!" 김상희는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치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김훈상이 마력으로 보호해주고 있었으니까. 아프지는 않은데 정말 깜짝 놀랐다. "아, 아버님. 소녀의 간이 콩알만해졌어요. 소녀가 또 무언가를 잘못 했나요?" 김훈상이 말했다. 김상희의 입장에선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통금은 9시다." 무슨 말이죠? 말을 좀 알아듣게 해봐. 앞 뒤 다 짜르고 통금은 9시라고 하면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니? 이 개차반아! 김상희는 혼란스러워졌다. *** 통금은 9시다. 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다. 약혼자인 한진수가 난데없이 일대일로 잠깐 만나자고 했단다. 그래서 나는 지금 왕궁 내 정원을 거닐고 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는 맑은 달이 떴다. 별들도 보였다. 아 예쁘다. 그러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어색해 죽을 것 같아. 감히 계집아이인 내가 너한테 먼저 말을 걸 수는 없잖아. 이럴 거면 도대체 날 왜 데리고 나온 거야? 솔직히 나는 개차반이 나한테 '통금은 9시다'라고 말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혼란스럽다. 한진수를 볼 때면 언제나 느끼는 감정이다. 한진수를 볼 때 이상하게 흔들리는 마음. 저건 그냥 얼굴이랑 목소리만 똑같은 거야라고 수십 번씩 되뇌어봐도 소용없는 이 마음의 정체가 뭔지. 이 극한의 남존여비 사회에서 한진수는 왜 자꾸 날 보러 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너." 나는 한진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키가 나보다 한참 커서 고개를 많이 올려야했다. 한진수는 또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나는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한진수의 입에서 놀라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된장찌개 끓여 놓고 있을게." "오, 오라버님?" 한진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확실히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거냐?" "......."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는 된장찌개란 게 없다. 아예 그런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 날. 그러니까 내가 죽었던 그 날. 내가 진수에게 들었던 말이다. 된장찌개 끓여 놓고 있을게. 그리고. "일찍 들어와." 한진수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얼 거렸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을게. 일찍 들어와. 내가 진수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 한진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천재 입에서 흘러나왔다. 손 발이 덜덜 떨려왔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절묘했다. "......."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가만히 있으면 너무 이상하잖아. 나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죽었고 그 때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살아났어.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미친년 취급받기 십상일 테니까. '나는... 뭐라고 해야 해?'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입술을 움직여봤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이 매어왔다.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해주지 못했었는데,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지고 애달픈데, 이 상황...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너무 혼란스럽다. 한진수는 개차반이 으레 그러하듯 날 들어올렸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눈에 뭐가 들어갔냐?" "소, 소녀는..." 도저히 입을 열리지 않았다. 제발. 한진수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분위기. 거기에 이제 똑같은 말까지. 이번이 두 번째다. 따뜻하게 잘 챙겨 입고 다니라던 그 쓸데없던 걱정에 이어서 또 나한테 똑같은 말을 했다. 그것도 내가 들었던 마지막 말을. '그런 주제에... 나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아줘. 제발 부탁이니까...'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정말 필사적으로 참았다. 나는 이 한진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랬다. 한진수는 허공에 나를 둥둥 띄운 상태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멍하니 그냥 한진수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은은한 달빛이 새어들어왔다. 풀벌레 소리가 멎었다. 바람도 멎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울지 마라." 한진수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내 눈가를 닦았다.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기어코 흘러나오고 말았다. 한진수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지하다못해 심각했다.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 한진수가 내게 물었다. "왜 나는 네가 울고 있으면 가슴이 아픈 거냐?" 달빛을 머금은 분수대의 물방울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내 볼에 닿았다. *** 나는 식겁했다. 뭔가 익숙하다. 이 느낌. 문을 열고 싶지 않은 이 느낌. 지난 세월동안 몸으로 익힌 느낌이다. 이 느낌. 정말 안 좋다. 제길. 이거 정말 좋지 않아.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물어왓...?' 그러나 물어왓!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불길하디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김환성이다. 나의 셋째 오빠. 11살에 1차 각성을 마쳤으며 최연소 나이트 대대장의 자리를 꿰찬 우리 둘째 망나니. 그런데 우리 둘째 망나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항상 실실거리며 웃었는데 오늘은 아니다. 심지어 조금 진지하기까지했다. 야. 제발 너 무게잡지마.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어. 너는 돌도 아니고 심지어 바윗덩이라고. 김환성의 입에서 황당한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몇 시냐?" 나는 황급히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8...8시... 58분이어요." "통금이 몇 신데?" "아, 아버님께서는 9...9시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분명 이쁨받고 있다. 그러나 이쁨받는 것과 무서운 건 별개다. 물론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극단적으로 얘기해보자면, 내일이라도 얘가 '너 재수없어, 죽어.' 이러면 죽을 수도 있다. 솔직히 나 지금 진짜 쫄았다. 그런데 이 놈 하는 말이 가관이다. "아. 그랬어? 난 또 8시 인줄 알았지." 그리고 활짝 웃는다. 잇몸까지 드러나는 미소다. 저 자식. 지금 민망한 게 틀림없어. 나중에 시녀인 송수진양한테 들어보니, 쟤는 8시가 통금인 줄 알았다. 그래서 8시부터 이 방에서 죽치고 앉아있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가갈 수도 없었단다. 8시 30분 넘었을 때엔 숨 쉬기도 힘들었단다. 뭐 저딴 망나니가 다 있나 싶다. 그러면서 나한테 하는 말이 또, "일찍 일찍 다녀라. 알겠냐?" 라고 말을 하는데, 야 그러는 너는 밤 10시 넘어서도 내 방 찾아와서 행패 부리잖아. 하고 따지고 싶었다. 난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최대한 빨리 자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피부결도 고와지고 키도 크니까. 내 나름대로의 노력을 알 리 없는 저 망나니는 시도때도 없이 나를 괴롭히며 물어왓을 시켜대는 주제에 어쩐 일인지 통금시간은 철저하게 감시하는 듯 했다. 아주 이중적인 놈이다. 그 사이, 나도 모르는 나에 관한 커다란 사건이 왕궁 한 켠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완벽한 복귀는 아닙니다. 반쯤 써놓은 비축분이 있어서 한편 올려요 ^^;; 아직 정상연재는 힘들 것 같아요. 조금만 신경쓰면 욱씬거리는 통증이 있어서요. 벌써 00시네요. 김환성(15세, 둘째 망나니. 중2병): "독자 늬들. 일찍 일찍 다녀라. 알겠냐? 콱 물어왓시키기전에 ㅡㅡ^" 0025 / 0192 ---------------------------------------------- 밝혀지는 능력 *** 김훈상의 개인서재. 김훈상은 학자들을 만날 때면 곧잘 이 개인서재를 애용했다. 오늘도 학자와 만났다. 76세. 학자임과 동시에 게이이며 김상희 공주를 개인 지도하는 학자인 알렉스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당신이 왕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주 많은 욕을 했을 거요!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훈상이 말했다. "알렉스. 굉장히 불만이 많아 보인다." "별로, 그런, 거, 없습,니다." 김훈상과 알렉스는 상당히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김훈상이 어렸을 적, 제국의 마력학원에 유학가기 전까지 알렉스가 마치 보모처럼 김훈상을 돌봐줬었다. 당시 어렸던 김훈상은 알렉스보고 '학자 아저씨!' 라고 불렀었다. "알렉스. 무엇이 불만인지 똑바로 얘기해." "별로, 그런 거, 없, 다니,까요?" 알렉스는 콧구멍을 넓게 벌리고 입술을 잔뜩 내밀었다. "누가봐도 나 삐졌다고 주장하는 표정이다. 들어볼테니까 불만을 말해봐. 짐작 가는 구석은 있지만." 짐작가는 거 있다. 바로 보배 수여식 때, 퓨리어스를 뿌렸기 때문일 거다. 몇 년 전, 변비가 심하다고 퓨리어스 한 방울만 좀 주시면 안 되겠냐고 열심히 졸랐었는데 안 줬었다. 대외적으로 퓨리어스는 엄청난 보물이었으니까. 당시 이런저런 관계들이 얽혀 있어서 -알렉스와의 친분을 강조하면 안 되었던 일이 있었어서- 안 줬었는데 사실 김훈상은 그 사건 잊어버린 지 오래다. 김훈상이 말했다. "알레스." "예." "퓨리어스 줄까?" 알렉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황급히 표정관리를 했다. 76세 알렉스는 표정이 상당히 풍부했다. "정말요?" "공주들과 마찬가지로 한 방울만 주면 되잖아." "아니, 그런데 그런 보물을..." 알렉스는 눈알을 왼쪽으로 모으고서 흠, 하고 튕기는 척 했다. 이미 기분은 다 풀어졌는데 또 너무 좋아하면 창피하지 않은가. "받기 싫으면 말고." "아니, 누가 받기 싫다고 했습니까?"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그에게 있어 알렉스는 특별하다. 알렉스는 정치싸움에 관여하지 않는 순수 학자파에 속한다. 덕분에 권력도 없고 돈도 없지만 그 덕분에 훈상은 알렉스를 좋아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퓨리어스는 비밀로 해야 할거야." "물론이죠."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선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폐하께서도 이번에는 좀 과했던 감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았으니까." 기분 좋다고 작은 왕국 하나 값을 통째로 뿌립니까? 그건 어디 사는 미친 작자 입니까?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진지하게 말했다. "제국에 소문이 들어가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한 병씩 안 뿌린 게 어딥니까?" "한 병씩 뿌리려다가 참았지." 그래도 왕이란 작자가 생각이 아주 없는 미친 작자는 아니구나, 하고 알렉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는 왕국에도 3병 밖에 없는 퓨리어스 아닙니까?" "......." 알렉스가 본론을 꺼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황당하네요. 상희 공주님 뽀뽀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제가 옛날에 그렇게 달라고 애교 부릴 땐 안주시더니."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김훈상은 의자에 앉았다.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안 준거야." 네 애교따윈 필요 없어.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던 김훈상이 말했다. "들어와." 둘째 왕자. 김환석이었다. *** 알렉스가 밖으로 나가고 서재에는 김환석과 김훈상만 남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냐? 나 지금 바쁜데." 밤 12시다. 이제 정말로 바쁠 때가 왔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재미있다. 김상희의 영향인 것 같기는 한데 왕비인 강서영이 점점 더 마음에 든다. 마력 운용이 가능한 쌍둥이를 낳은 것도 낳은 거지만 하는 짓이 어째 귀엽고 사랑스럽다. 요즘 다른 왕비들은 눈에 안 들어온다. 심지어 보배 수여식 때엔 자기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 때 얼마나 재미있던지. 하여튼 지금은 강서영의 침실로 가야했다. 다시 말해 아주아주 바쁘다. 김훈상이 일어섰다. "바쁜 일 아니면 내일 다시 얘기하자." 보통 왕이 바쁜일 있다고 내일 얘기하자고 하면,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이상 내일 하는 게 맞다. 김환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김상희와 관련된 일이니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발걸음을 옮기던 김훈상이 멈췄다. "김상희?" "예. 그러나 한낱 하찮은 계집아이의 일이니 내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환석은 스스로의 모순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낱 계집아이의 일로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아버지를 찾아와 얘기를 꺼냈다. 중요한 남자의 일도 아니고 겨우 계집아이의 일로 말이다. 심지어 김환석은 둘째 왕자다.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다. 아주아주 바쁘고 급하다고 주장하던 김훈상이 자리에 앉았다. "말해봐." "그 계집아이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돌하고 맹랑한 계집이지." 김훈상은 시크하게 말했으나 김환석은 놓치지 않았다. 김훈상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김환석이 말을 이었다. 김환석을 말을 들은 김훈상은 흐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알아볼 가치는 있겠구나. 알겠다. 이제 가서 자라." *** 강서영은 밤 11시까지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왕께서 오늘은 오시지 않을 것 같다는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보배 수여식때의 상황이 떠올라 낯이 화끈거렸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 그랬다가도 강서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원래 내 거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툭 내뱉듯 퉁명스레 던진 말이었지만 강서영은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감은 밤 11시가 넘어가면서 오히려 불안감으로 변하여 강서영을 괴롭혔다. '내가 너무 버릇없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맞아... 한낱 계집인 주제에 너무... 너무했어 내가.' 자신감이 사그라들었다. 11시 30분이 지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오실 것 같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아무래도 너무 당돌하고 버릇없이 '저를 드리겠어요'라고 말했던 게 화근이었던 것 같았다. '이제 나를 싫어하실 거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슬퍼졌다. 밤 12시가 됐다. 이제는 포기했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도 잠이 안 왔다. 혹시라도 오시지 않을까 싶어 가슴 졸이며 부군을 기다렸다. 밤 12시 30분.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빛나는 황금색 빛줄기가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황금색 빛줄기 사이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왔다. "내게 이 곳으로 오라 명령까지 해놓고 먼저 잠들 생각인 거냐?" 강서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체면도 신경 안 쓰고 달려가 김훈상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대역죄를 지은 죄인처럼 말이다. 김훈상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강서영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하늘로 떴다. 강서영은 놀라지 않았다. '이 느낌... 편안해...' 이런 광경. 몇번 본 적 있다. 김상희가 자주 당하는 일명 '비행기'다. 그런데 조금 느낌이 달랐다. 무언가 포근하고 따스한 것이 몸을 감싸안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허공에 떴다. 김훈상이 강서영의 턱을 손으로 살짝 잡았다. 강서영의 눈과 김훈상의 눈이 마주쳤다. 강서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눈을 내리 깔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내 허락 없이 내게 무릎 꿇지 마라." "그, 그게..."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오른 손으로 강서영의 머리카락을 쓸어서 귀 뒤로 넘겼다. "네 얼굴이 안 보이니까." "......." 강서영은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믿을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르게 됐다. 무릎을 꿇으면 얼굴이 안 보이니까 무릎을 꿇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말은 즉,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강서영의 눈이 붉어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김훈상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강서영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마치 김상희가 그러하듯,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 침대에 저절로 눕게 됐다. 그랬다가 김훈상은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창문이 열렸다. 강서영은 신세계를 맛봤다. 밤하늘을 날아다녔는데 그 비명소리가 하도 커서 '기록의 관' 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깼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꺄아아아아악!" 하도 비명을 질러서 목이 쉬고 정신이 어질어질해져서 아무것도 보지도,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강서영은 다시 침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훈상은 뿌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웃어라." 그래도 무려 왕께서 내린 명령이라 강서영은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열심히 웃었다. 머릿속은 백지화가 되어버렸지만. 며칠 뒤. 김훈상은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계집아이들은 하늘 나는 것을 싫어하나?"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겁니까?" 김훈상은 알렉스를 빤히 쳐다봤다. 무언의 긍정이다. 알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은 원래부터 지나치게 엘리트였다. 지금 시대에 천재인 한진수가 있다면 한 세대 위에는 또 천재인 김훈상이 있다. 너무 지나치게 엘리트이고 마력 운용에 익숙하다 보니까, 마력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지식과 배려가 너무 없다. 다시 말해 개념자체가 없다. 사실 그런 게 있을 필요도 없긴 하지만. "진심으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또 싫어할 겁니다." "......." 김훈상은 아무 말도 못했다. 알렉스가 보기에 김훈상, 약간 충격 받은 것 같았다. "설마 김상희 공주님을 그렇게 여기저기 날려댔던 것도 김상희 공주님이 즐거워한다고 생각하셔서 그랬습니까?" "......." 김훈상은 또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환성이는 굉장히 즐거워 했는데." 알렉스는 황당해졌다. 이 양반아. 김환성 왕자님은 원래 날아다니는 거 좋아하는 왕자님이고. 아마 공주님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겁니다. 이걸 아주 열심히 설명해줬다. 김훈상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왜 위험한 거지? 왜 무서운 건지 납득이 되질 않는군. 설마 너도 내가 그들을 죽일 거라 생각하나?" "그들에게는 마력이 없습니다. 왕께서 얼마나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죠.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폐하께는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런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알렉스는 생각했다. '폐하가... 변하고 있다.' 마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는 정말 바닥 중의 바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딱히 흠잡을 일은 아니다. 원래 이 세계의 사람들이 그렇다. 알렉스가 오히려 독특한 일이다. 애초에 계집아이들에게 관심자체가 없다. "김상희 공주가 무섭다고 한 적은 없습니까?" 김훈상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날려줘서 행복하다고 하던데." 혼잣말로도 그렇게 중얼거리던 걸 들은 적이 있다. 딜레마에 빠졌다. 생각해보니 허공에서 팔다리를 마구 휘젓던 것이 즐거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다. 애초에 김훈상은 그렇게 당황해서 팔다리를 휘저어 본 적이 없다. 그에겐 신세계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드려야해?' 76세 학자 알렉스의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 더 늘었다. *** 아침이 됐다. 와. 진짜 나 어제 밤에 잠 못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마도 강서영씨의 비명소리라고 생각되는데, 낯부끄러워서 정말. 그래. 인정해. 인정한다고. 개차반은 마력의 천재라고 하니까 뭐 당연히, 그,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표현해야 해? 음. 그래. 절륜하시겠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니까 뭐 당연해.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면 어쩌자는 거야?' 솔직히 맘 같아선 코치(?)라도 해주고 싶다. 뭐랄까. 강서영씨의 비명은 그냥 말 그대로 비명 같았다. 이를테면 내가 하늘을 마구 날아다니는, 일명 비행기를 탈 때에 지르는 그런 비명 말이다. '에로 영화같은 거라도 좀 구해다 주고 싶을 정도네.' 에로 영화를 보면 여자배우들이 참... 하여튼 그렇다. 그 뭐랄까, 그런 소리 있잖아. 그런 소리를 음, 많이 연습해서, 그게 그러니까 예쁘게 낸다고 해야 하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하고 어쨌거나 강서영씨의 소리는 아주 잘못된 예시였다. '도대체 뭘 어떻게 얼마나 하면 그런 엄청난 소리가 나는 거야?' 강서영씨의 방에 가보니 강서영씨의 얼굴이 아주 초췌했다. 밤새 뭔가에 시달린 것 같았다. 어휴. 얼굴이 반쪽이 됐구만.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래. 개차반도 좀 작작하지. 내 방문이 열렸다. 아침이 되자마자 한진수가 날 찾아왔다. 더 황당한 건 우리의 개차반씨도 내 방으로 찾아왔다는 거다. 아침부터 갑자기 왜들 이래? 그런데 정말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 어이. 오해하지 말아줘. 기대 하지도 않았지만 역시 상큼한 아침 인사 같은 건 없었다. 개차반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침까지 같이 있었던 거냐?" 내가 지내는 건물. 기록의 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어제 있었던 일도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 설날입니다. 저는 또 장시간 운전을 해야겠군요... ㅜㅜ... 여자분들도 (아니사실은 여자분들이 더 힘든) 힘든 히간 보내실텐데 힘든것 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은 설날 되길 기원합니다!ㅋㅋ♥ "흐.흥... 딱히 하트 받고싶다고 먼저 하트붙인건 아니니까..." 0026 / 0192 ---------------------------------------------- 밝혀지는 능력 *** 어젯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 들지 못했던 이유는 너무나 명백했다. "나는 네가 싫다." 어젯밤 한진수가 내게 했던 말이다. "너 따위가 자꾸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 그러니까. 한진수와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이야.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을게. 일찍 들어와. 그렇게 말한 주제에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그러지... 말아 달라고. 나는 목이 매어 왔었다. 하지만 참았었다. "아..." 오늘따라 달빛이 굉장히 맑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격자무늬 창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은은한 푸른색 도화지에 격자무늬 그림자를 수놓은 것 같았다. 색깔에 온도가 있다면 저 푸르스름한 달빛은 차가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침대 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나도 안다. 내가 한심한 거. 겨우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을게. 일찍 들어와.' 이 말에 흔들려서 아무런 말도 못했었다. 마음 같아선 '나를 보라고. 네가 그렇게 사랑해줬고, 그렇게 아껴줬던 나잖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곳은 한국이 아니니까. 이 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널 단순한 약혼녀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거짓말. 내가 울면 가슴이 아프다며. 나한테 분명히 그렇게 말했잖아. "내 앞에서 함부로 눈물 보이지 마라. 이런 내가 나도 이상하니까. 내게 무슨 이상한 술수를 부려놓은 것이 밝혀진다면 그 땐 정말로 죽일 거다." 이 곳은 다른 세계다. 나는 그 때. 한진수의 말을 들으며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었다. 나의 약혼자이자 제국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세기의 대천재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오자 가슴이 시렸다.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씩씩하게 눈물도 훔쳐 봤다. "내가... 진짜 잘해나갈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거 밖에 없다. 남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거. 무조건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거. 그래도 개차반을 비롯한 왕자들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게 보여서 나름대로는 뿌듯했었는데 오늘 난 내 삶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이 말을 백 번도 넘게 혼자서 중얼거린 것 같다. 이유야 어찌됐든 과거의 한진수와 현재의 한진수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을게. 일찍 들어와.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나는 오늘 내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희망을 찾았다. 나는 미친사람처럼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일찍 못 들어가서 미안해. 계속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그리고 만약, 아주 만약에, 이 곳의 한진수와 그 곳의 한진수가 관련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만약에 같은 사람이라면. "이번엔 내가 일찍 들어갈게."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눈물을 훔쳤다. "이번엔 내가 된장찌개 끓여줄게."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하루가 지났을 때, 나는 소위 말하는 멘붕에 빠졌다. 나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뒤돌아섰던 한진수가 나타났고 또 개차반이 나타났다. 개차반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의 관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뭐, 뭐야 도대체?' *** 제국에서도 내노라하는 천재지만 한진수는 왠지 변명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어째서?" "저는 오늘부로 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중요한 승급시험이 있습니다." '기록의 관' 진동이 멈췄다. "마지막 승급시험이냐?" "예." 김훈상을 뒤따라온 학자 알렉스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파이널 승급 시험을 앞에 둔 제국의 마력 학원 학생이, 별것도 아닌 보배 수여식에 굳이 행차하셨고 또 굳이 작별인사를 하러 들렀다. 이 말이 되는 건가?' 제국의 파이널 승급시험은 굉장히 중요하다. 학원 내 모든 커리큘럼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시험이며 모든 학생들은 이 파이널 승급시험을 위해 다년간 노력해온다. 그런데 그런 시험을 앞두고 굳이 하찮은(?) 약혼녀의 보배 수여식 때문에 여기까지 왔단다. '역시 상희공주님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갖고 있어.' 뭔지는 알렉스도 잘 몰랐다. 하여튼 결과가 그랬다.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승급시험 잘 치르도록 해라. 너는 우리 왕국의 대표나 다름없으니." 한진수는 걸음을 돌렸다. 김훈상이 김상희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 "네. 아버님." "주먹을 쥐어봐라." "이렇게요?" 김훈상은 김상희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소녀 잘했어요? 주먹을 꽉 말아 쥐었어요!" 김상희는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앙증맞게 주먹을 말아쥐고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지구에서 딸 바보 아빠들은 딸이 이렇게 하면 엄청 좋아하고 귀엽다고 머리 쓰다듬고 뽀뽀하고 난리도 아닐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훈상이 말했다. "원래 계집은 이렇게 수다스러운가?" 알렉스가 대답했다. "글쎄요." 알렉스는 말하고 싶었다. 왕 님. 당신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습니까? 입꼬리 움직이는 거 다 보입니다. 입꼬리는 씰룩거리면서 진지하고 시크한 얼굴로 '원래 계집은 이렇게 수다스러운가?'라고 말하면 도대체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김훈상이 말했다. "어이." "네. 아버님." 그리고 기록의 관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아아아악! 을 비롯해서 꺄아아아악! 등과 같은 상당히 다양한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터져나왔고 이제 이 비명소리에 익숙한, 정문을 지키는 두 나이트는 또 피식 웃고 말았다. "김상희 공주 또 날아다니나?" "폐하께서 올라가셨으니." "나도 어릴 땐 아버지께서 많이 해주셨었는데. 그 땐 참 재미있었지." "우리 아버지는 컨트롤 능력이 조금 떨어져서... 벽에 머리를 몇 번 박곤 했었어." "그래서 네가 똘아이구나." 두 나이트는 김상희를 부러워했다. "내가 만약 꼬마아이였다면 정말 행복했을 거야. 폐하만큼 컨트롤 능력이 뛰어난 분이 저렇게 허공을 휘젓게 만들면 진짜 재미있겠지." "계집애들은 무서워한다는 거 같던데?"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저렇게 재미있는 걸 왜? 게다가 폐하께서 실수하실 리도 없고." "폐하께서 김상희 공주를 굉장히 아끼는 모양이야." 김상희는 어지러웠다. 수년간 당해온 건데, 이 기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너무 무섭다. '아빠소리 안 해!' 김상희는 안다. 김훈상은 아빠소리 나올 때 까지 날리고 또 날린다. 하지만 아빠소리도 너무 자주 해주면 약발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시간이 좀 짧았다. "어이." 이봐요. 나 당신 딸이요. 김상희라는 이름도 있는데 왜 맨날 어이, 아니면 야에요? 김상희는 머릿속으로만 따졌다. 김훈상이 진지하게 물었다. "행복하냐?" 김상희가 매일같이 하는 말이 있다. 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해주셔서 행복합니다. 기타 등등. 김상희를 여기저기 마구 날리는 이 행위. 이름하여 '비행기'역시 일단 비명은 지르되 다 끝나고 나면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를 남발했었다. 김상희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의미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답은 어렵지 않았다. '설마... 내가 진짜로 행복해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나 이렇게 맨날 날려댄 거야?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줄 알고? 설마? 설마 진짜 그런 거 아니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김훈상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소, 소녀는 아버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해요." 그건 당연한 거고. 라고 주장하듯 김훈상은 어깨를 쭉 폈다. 턱을 조금 치켜들고 오만한 자세로 말했다. "내가 이상한 말을 좀 들었는데." "말씀하시어요." "계집들은 비행기를 무서워한다는 헛소문이었다. 역시 헛소문이었군." 알렉스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 했다. 너무 잘났다보니, 여자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도 너무 낮았다. 여자와 남자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다르니, 개념 자체가 달랐다. 사실상 따지고보면 알렉스가 이상한 남자에 가까웠다. 김상희가 배시시 웃었다. 오늘 타이밍 잡았다. "아버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소녀는 정말 날듯이 행복하지만..." "하지만?" 김훈상의 표정이 또 진지해졌다. 김상희는 조금 쫄았다. "그, 그것이..." "말해봐." "소녀는 비행기가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순간,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장위의 황금빛 샹들리에가 쿵! 떨어져 내렸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김상희의 머리를 스쳐 땅에 떨어졌다. 알렉스는 이상한 점을 또 발견했다. '굳이 또 비접촉 상태로 김상희 공주님 보호하셨네. 저럴 분이 아니신데. 마력 효율을 엄청 중요시하시는 분이 참.' 김훈상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은 즐겁지만 비행기는 싫다. 이거냐?" "소, 소녀는 싫은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소녀인지라 너무나 무섭고 공포스러워..." 알렉스는 확신했다. 저 왕. 지금 충격 받았다. 제 딴에는 김상희 공주가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해줬건만 아무래도 크나큰 착각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김훈상은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다. 김상희는 비행기를 싫어하고 있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알렉스." "예." "왕명이다." "예." 김훈상은 김상희의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약 10초정도 눈을 감고 생각하던 김훈상이 왕명을 내렸다. "앞으로 거짓말하는 계집은 사형에 처한다." 김상희는 정말로 쫄았다. 막상 당사자다보니까 그렇다. 저 인간은 정말로 사형 시킬 인간이야.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알렉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냥 나는 언제나 솔직한 마음을 원한다. 그렇게 좋게 말하면 어디가 덧납니까?' 김상희의 입장에서는 지금 굉장히 공포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스가 말을 조금 덧붙였다. "감정에 관한한 거짓말은 사형이라고 하시죠?" 김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특별법이 생겼다. 솔직하게 말 안하면 사형이란다. 알렉스는 거기에 세부조항으로 '무서운 건 무섭다고 무조건 말해야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여담이지만 며칠 뒤, 학자들은 이 것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계집들을 숙청하실 생각이신 것 아닐까요?" "확실히 공주들이 너무 많기는 하죠." "어쩌면 감히 폐하께 거짓을 고한 공주가 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알렉스는 굳이 정리해주지 않았다. 김상희 공주가 솔직하게 '나 무서워요' 라고 말하라고 저런 법 만들었다는 건, 말해줘도 믿지 않을 거다. 그냥 이 특별법에 대해 열심히 떠들라고들 내버려 뒀다. 한편, 그 자리에서 법을 만든 김훈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이." "네. 아버님." "이제 날 때려봐. 위치는 여기다." 김상희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감히 공주가 어떻게 왕을 때린단 말인가. 실수로라도 그랬다간 사형감이다. 방금 전에 사형얘기 듣지 않았던가. 거짓말을 하는 계집은 이제 사형이란다. 안 그래도 사형이란 말에 잔뜩 쫄은 상태인데 거기에다가 폭행까지 하라니. "소, 소녀가 어찌 감히..." "왕명이다." 김상희는 울고 싶어졌다.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왕명이라는데 때리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때렸다가는 정말 큰 일 날것 같다. 왕자들과는 다르다. 김상희도 평소에 김훈상의 명치를 세게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이다. 감히 왕의 명치를 때린다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해괴망측한 일이다. 김훈상이 진지하게 말했다. "안 때리면 사형이다." 김상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 작품 후기 ============================ 일반연재란 코멘트 숫자와 추천숫자는 정말 엄청나군요. ㄷㄷ... 조련당하는 느낌. [코멘트와 추천에 비츄(이)가 조련당합니다.] [크리티컬 샷. 하트가 확인됩니다. 치명적인 조련으로 인정됩니다.] [조련당한 비츄(이)가 결국 한 편을 또 토해냈습니다.] ...ㅂㄷㅂㄷ 안돼 비츄야. 너 비축분도 없잖아. 0027 / 0192 ---------------------------------------------- 밝혀지는 능력 ***27 나는 소위 말하는 '멘붕'상태에 빠져들었다. 이건 뭐지. 나를 죽이려 드는 건가. 그냥 죽이긴 좀 미안하니까 핑계 만들고 죽이려드는 건가.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내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졌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실이었다. "소, 소녀가 어찌 감히..." "사형 당하고 싶냐?" 무서우니까 제발 아무때나 사형거리지 말아줘요. 당신 입장에서는 가벼운 말이지만 나는 진짜 무섭다고 이 아빠야! 개차반이 무릎을 조금 굽혔다. 그리고 여기. 여기를 때려봐라. 하고 자신의 명치를 가리켰다. 엄청난 기회인 건 맞다. 명존쎄의 기회다. 그러나 이 기회. 잘 못 잡았다간 인생 종치는 수가 있다. "아버님의 귀한 옥체에 미천하기 그지없는 소녀가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소녀는 결단코 그럴 수가 없어요." 나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다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경험이 있다. 약간 위험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도박이다. "차라리 소녀를 죽여주시어요. 소녀는 차라리 죽겠어요." 순간, 개차반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아저씨도 인내심이 폭발한 것 같다. "안 죽여. 안 죽일테니까 좀 쳐." 좋아. 눈치를 보아하니 한 번 정도는 더 밀당(?)을 해도 될 것 같다. "아버님을 아프게 하느니 소녀는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말겠어요." 안 죽어. 나 절대 안 죽을 거야. 억울해서라도 못 죽지. 나의 속마음을 안다면 아마 까무러치겠지만 내 속마음까지 읽을 수는 없는 개차반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일부러 '아프게 하느니'라고 말했다.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일 것이 분명하다. 개차반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 식스팩 있다." ...어쩌라고. 말을 들어보니 너 따위가 아무리 나를 강하게 쳐봤자 엄청나게 위대하시고 강하시며 심지어 식스팩까지 가진 이 몸은 전혀 아프지도 않다, 라는 허세를 부리는 모양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력을 운용 안하는 상태에서 명치를 맞으면 당연히 아픈 거 아냐? 거긴 급소라고. 하도 황당해서 눈물을 보여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 여기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져 내리면 진짜 금상첨화인데 아쉽게도 나의 연기력은 여기가 한계인 것 같다. "그, 그럼... 소녀가..." 개차반이 폭발했다. "아 그냥 쳐. 왕명이다." '명존쎄'하는 데 무려 왕명이 또 등장했다. *** 김훈상은 둘째 아들인 김환석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네가 말한 것이 사실이더구나." "...예." "환성이도 알고 있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감히 계집아이가 남자의, 그것도 무려 왕자쯤 되는 남자의 명치를 때릴 수 있을 리 없었겠지.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사형을 당해도 싸다. 재미있는 건, 김훈상도 김환석도 김상희를 사형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직 엄청난 능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예. 마력 컨트롤 능력이 예민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봐야 알겠지." 김상희의 능력이 지금 당장 왕국에 큰 보탬이 되는 희귀한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희귀한 건 맞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능력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제국의 6황녀 프리지아가 15세에 1차 각성을 했다고 했었나?"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여자는 단 두 명. 제국의 프리지아와 고려왕국의 쌍둥이 김상아 뿐이다. 프리지아의 경우는 15세에 1차 각성을 맞이했다고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김상희 역시 각성을 할 수 있겠지. 각성 전과 후는 여러모로 많이 다르니까." 김환석과 얘기를 끝마친 김훈상은 학자들을 불러모아 과거 자료를 찾게 했다. 김상희의 능력을 대략적으로 말해준 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혹시 있었는지 알아보라 지시한 거다. 김훈상의 명령이 끝나고 나서 알렉스가 김훈상을 따로 찾았다. "무슨 일이지?" "몇 년전에 제가 '딸바보'라는 단어를 사전에 등재하자고 건의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그게... 여전히 학자들의 반발이 심합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해괴망측한 단어라고..."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넣어." "감사합니다." 지난 몇 년간,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붙었었다. 바로 '딸바보'라는 단어를 정식으로 사전에 등록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어가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냐는 '반 딸바보'계파와 '찬 딸바보'계파로 나뉘었다. 물론 '반 딸바보'계파가 훨씬 많았다. 김훈상이 그 논란을 한 방에 잠재웠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상한 단어를 등재한다한들. 왕국에 이득이 있나?" "...예?" 김훈상이 으쓱대며 말했다. "이 세상에 그런 멍청한 놈들이 존재할 수 없잖아. 딸바보라니. 그런 등신이 세상에 어떻게 있을 수가 있지?" 알렉스는 김훈상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딸바보인데요. 자각을 안 하는 겁니까, 아니면 못하는 겁니까. 김훈상이 비웃었다. "정말 세상에는 해괴한 놈들이 많군." *** 안 돼. 문아. 제발 열리지 마. 나도 이제 3년 뒤면 성인식을 치른다고. 나는 이제 12살이야. 공주로서의 품위... 따윈 없지. "오라버니. 여기 있어요." 그래. 내 품위따윈 없다. 물어왓은 피할 수 없어. 이 헝겊인형. 내가 언젠간 찢어버리고 말리라. "그래. 잘했어." 김환성이 해맑게 웃으며 내 머리를 슥슥 문질러줬다. 동생이 아니라 강아지 취급이다. 그리고선 우쭈쭈, 하며 내 턱을 간지럽혔다. "우쭈쭈." 야. 내 나이가 30이 넘어. 아. 진짜 너도 내가 기필코 명존쎄를 하고 말리라. 하지만 나의 입은 나의 감정을 배신했다. 이 배은망덕한 입술 같으니라고. "오라버니가 쓰다듬어주시면 소녀는 정말 기뻐요." 안 기쁘다. 진짜 안 기쁘다. 내 희망 첫째 오라버니 김형석도 아니고. "역시 그렇지?" 김환성이 또 물어왓을 시키며 내 방에 등장한 이유는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었다. "준비해." "네?" "3일 뒤에 너 바깥나들이 갈 거야."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다른 공주들과 다르게 바깥나들이를 끝마치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더, 나갔다 오자는 말이었다. "그, 그렇지만 아버님께서 허락을 해주셔야..." "허락? 내가 받아왔는데?" *** 몇 시간 전. "아부지. 김상희랑 바깥나들이 갔다오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걔는 그 때 일찍 들어왔잖아요." 왜요? 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김훈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흠. 그것도 그렇군." 이상하다. 이상하게 안 내킨다. 내보내고 싶지 않은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런 묘한 감정. 살면서 처음이다. "그때처럼 제가 같이 갔다 올게요."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김환성은 나이트의 제 9대대장. 현역에서 뛰는 나이트들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천재 중의 천재니까. 김훈상은 결국 바깥나들이를 허락해줬다. 3일이 흘렀다. 김상희는 바깥 나들이를 위해 기록의 관을 나섰다. "김유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녀야말로 이렇게 듬직하고 멋진 나이트께서 함께해주시니 정말 기뻐요." 김유신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다. 보통 나이트들은 공주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존댓말을 써주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치레에 불과했다. 공주들을 대하는 태도나 행동을 보면 공주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조금 달랐다.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공주를 얕잡아보거나 무시하는 느낌은 조금 아닌 것 같은데...' 공주를 얕잡아 보는 나이트들을 보면 느낌이 딱 온다. 특히나 김상희는 그런 걸 더 잘 느꼈다. 괜히 과거에 꽃뱀소리 -물론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들었던 게 아니다. '그냥 무뚝뚝한 사람인가...?' 보통의 일반 공주들은 나이트를 보면 위축된다. 말을 하긴 하는데 긴장하거나 쭈뼛거린다. 하지만 김상희는 조금 다르다.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있게 다가간다. 김상희니까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나이트들은 김상희를 처음 만나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공주의 모습을 신선하게 생각하며 가볍게라도 피식 웃곤 한다. 그런데 김유신은 아예 표정 자체가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상희는 김유신의 정체를 몰랐다. 한편, 알렉스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진짜로 김유신 마스터를 보낸 겁니까? 진정?' 한달음에 왕을 찾아갔다. "정말로 김유신 마스터를 보냈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 "......." 있지요. 아주 많지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바깥나들이에 동참을 시킨단 말입니까. 요즘 할 말이 많은데 못하다보니 주름살이 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까스로 한숨을 참은 알렉스가 다시 물었다. "김상희 공주님의 바깥나들이는 갑자기 왜...?" "환성이가 부탁하더군." 알렉스는 상황이 이해가 됐다. '아이고 두야.' 아무래도 김환성 왕자님은 김상희 공주님과 데이트를 하고 싶으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지난 일인 '바깥 나들이'를 들먹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척 보니 척이다. 왕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고, 자신이 김상희를 아낀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쿨한 척 밖으로 내보내줬을 거다. 쿨한 척 하기는 했는데 이번엔 좀 과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김유신 마스터는 너무 지나친 처사 아닙니까...?" *** 우리의 둘째 망나니, 김환성 오라버니께서 어깨를 계속 들썩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자기 어깨에 기대라는 뜻이다. 그런데 너무 뜻대로 맞춰주면 안 된다. 연애사이에만 밀당 있는 거 아니다. 사람관계에도 적절한 밀당은 필요하다. 아니. 무조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적어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은 그렇다는 뜻이다. "소녀는 하늘같은 오라버니께 그런 실례를 범할 수 없어요." "그럼. 내 어깨는 하늘처럼 넓지." 뭔 소리 하냐. 진짜 명치 맞고 싶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릴 뻔 했는데 김환성이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으으. 아빠란 사람이나 아들이란 사람이나 똑같다. 나는 버텨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퍽!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꺅! 비명을 질렀다. 어우씨. 내 목. 나... 괜찮은 거 맞지? 목 부러진 거 아니지? 아... 살았다. 이 둘째 망나니가 마력을 써서 내 머리를 움직였고 결국 내 머리는 망나니의 어깨에 닿았다. 닿긴 닿았는데 개차반님처럼 세심한 마력컨트롤이 안 되어서 너무 강한 힘을 받았다. 진짜 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두 번 저항했다가는 저승가게 생겼다. 나는 진짜 아픈데 망나니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원래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 법이다. 던지는 사람은 가벼운 장난인데 당하는 개구리는 죽는다. 문제는, 던지는 사람은 정말로 장난이라 개구리가 죽을 거라는 생각. 아니 그런 개념 자체를 못 갖는다는 거. 그렇다고 감히 계집아이 주제에 이러이러하면 아프고 위험하니 하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둘만 있으면 어떻게 분위기 타서 그런 말 할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지금은 저 무뚝뚝한 김유신 나이트가 운전을 하고 있어서 안 된다. 둘째 망나니는 뭐가 그리 뿌듯한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성공했다는 것에 기쁜 듯 했다. 나는 결심했다. 밀당이고 뭐고 얘가 기대라면 그냥 기대야겠다. 살아남기 위해 밀당하는데, 밀당하다가 죽으면 억울하잖아. "편하지?" "오라버니의 어깨는 소녀에게 있어서 든든한 버팀목이랍니다. 그렇지만 소녀는 너무나 과분한 영광을 받게 되는 것 같아서요. 이제 그만 일으켜주시어요." 아. 정말 쪽팔려. 이렇게 오그라드는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내가 밉다. 내가 싫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엉엉. 우리의 목적지는 바로 초대 고려왕국의 왕인 김성찬이 나라를 세우기 전 제사를 지냈다는 우물이었다. '성스러운 우물'이라 불리는 이 곳의 물은 물맛이 매우 좋으며 마력을 활성화 시키는데에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상당히 많은 남자들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남자들이 많다는 말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다. 솔직한 말로 나는 이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왕의 아내들이 일단 기본적으로 굉장히 예쁘다. 왕쯤 되는 남자의 눈높이는 엄청나게 높으니까. 심지어 왕은 잘생겼다. 그들 유전자 반만 물려받아도 예쁜 건 확실하다. 게다가 나는 바깥 생활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피부도 하얗다. '문제는 여기서의 이쁨은 그냥 독이라는 거지.' 지구에서의 아름다은 외모는 하나의 무기이자 경쟁력이다. 여기는 아니다. 예쁘면 잡아먹히기 딱 좋은 사냥감일 뿐이다. 물론 이럴 때엔 믿음직한 우리 둘째 망나니랑 듬직한 김유신 나이트가 함께 있으니 별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김유신 나이트가 말했다. "곧 도착합니다." 성스러운 우물 근처에 도착했다. 이상했다. '여기가 정말 성스러운 우물이 맞나...?' 정말 이상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 바로 올라갑니다. 잠깐, 연참이라서 바로 다음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거 다 보인다네. 다음편으로 가기 전에. 자네 뭐 잊은 거 없나. 추천이라든가...코멘트라든가... 0028 / 0192 ---------------------------------------------- 밝혀지는 능력 *** 이상했다. 분명히 유명한 관광지라고 알고 있다. 단순히 유명한 게 아니라 '성스러운 우물'에서 나온 물은 마력을 운용하는 남자에게 굉장히 좋은 약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항시 남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라버님. 이 곳이 정말 성스러운 우물이 맞나요?" 주위는 휑했다. 만약 여기에 낡은 나무 간판으로 된 '성스러운 우물'이라는 표시가 없었다면 길거리에 흔하게 널린 우물과 구별하지 못했을 거다. 다만 이 곳은 길거리가 아니라, 산 속이라는 것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사실 말이 산 속이지 산 속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지구를 예로 들자면 동네 뒷산 약수터 같은 느낌이랄까. "응. 맞아. 이왕 왔으니까 성수나 좀 마셔야겠다." 우리 둘째 망나니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김유신 나이트는 내 옆에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쳐다봤다. "저... 김유신 나이트님." "예." "김유신 나이트님께서는 성수 안 드시나요? 남자들의 마력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들었답니다." "괜찮습니다." 이 남자. 분명 믿음직스럽긴 하다. 그런데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딱딱하다. 내가 지금 사람이랑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도 아니면 로보트랑 말을 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끼얏호!" 우리 망나니가 또 사고쳤다. "오, 오라버님!" 어휴. 진짜. 저 무개념. 다른 사람들도 공용으로 사용하는 성스러운 우물에 뛰어들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자살이겠지만 저 녀석은 아니다. 그 거대한 폭포에도 맘껏 뛰어드는 놈인데 이깟 우물에 뛰어들었다고 죽을 리 없다. 아마 저 녀석은 우물 안에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성수를 맘껏 흡입하고 있을 거다. 이 때까지는 잘 몰랐다. 김환성이 마력으로 자신의 신체를 둘러 성수가 오염되지 않도록 조절을 했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당시의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나는 속으로나마 저 망나니의 망나니같은 행태를 욕했다. '그나저나 왜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거지...?' 김환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물 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똥개! 너도 물 마실래?" 그 때, 김유신 나이트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폐하께선 공주님의 성수 음용을 금하셨습니다. 왕자님." "에이. 그럼 어쩔 수 없지. 성수 꽤 맛있는데! 내가 똥개 몫까지 마음껏 먹을게! 메롱! 약오르지! 까꿍!" 아니. 전혀 약 안 올라. 나는 너님 망나니가 목욕한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오라버니가 소녀의 몫까지 맘껏 드시어요. 남자에게 굉장히 좋은 물이라고 들었답니다. 소녀는 오라버니께 좋다면 정말 행복해요." ... 이제 내 양심은 포기했다. 내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김환성이 우물 안에서 하늘 높이, 일직선으로 솟구쳤다. 아. 안 돼. 너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그만 둬. 하늘 높이 솟구친 김환성의 몸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그 물방울들이 햇살과 부딪쳐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알록달록 예쁜 무지개 사이로 망나니의 헝겊인형이 날았다. "가랏! 헝거비! 물어왓!" 헝겊인형에는 '헝거비'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까지 생겼다. *** 성스러운 우물은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남자들이 많이 찾는다. 남자의 마력 증진에 큰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껏 시간 내서 왔더니 어째서?" "어느 엄청 돈 많은 부자가 오늘 하루 성스러운 우물을 완전히 독점했다는 것 같아." "뭐야? 그런 게 어디있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왕성에 제시했다고 하던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께서도 허락하셨다고 하더라고." "제길... 그럼 어쩔 수 없지." 소문이 조금 잘못 됐다. 돈 많은 부자가 돈을 내고 왕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왕이 성스러운 우물을 빌렸다. 쉽게 말해 전세 냈다. 그리고 아무도 못 오게 했다. 한편, 알렉스는 한 가지 사실이 떠올라서 왕을 급히 찾았다. "폐하. 중요한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습니다." "뭔데?" "성스러운 우물에서 나오는 성수는 남성에게 매우 이롭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김상희는 못 먹도록 했어." 알렉스는 경악했다. 뭐라고. 지금 왕께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게 사실이야? 정녕 그런 거야? 왕께서 세세하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도 안 돼.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실 분이 아닌데.'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엘리트였다. 미천한 계집의 사정따윈 전혀 신경쓰지도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그게 맞다. '성수가 남성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보고를... 설마 기억하고 계셨던 건가.' 그런 보고 따위,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 안한다. 애초에 계집들이 그 물을 마실 기회가 있을 리도 별로 없고 -입장비가 매우 비싸다- 남자들 입장에서 계집이 그 물을 마시든 말든 별로 상관 없는 일이니까. 김훈상은 그냥 남자도 아니고 무려 왕이다. 그런 왕이 따로 명령을 내렸단다. '뭐...하기야 김유신 마스터까지 옆에 붙였는데. 스스로 자각만 못하고 있지 상당히 중증이시군.' *** 나는 성스러운 우물을 견학만 했다. 사실 별다를 게 없었다. 그냥 동네 뒷산 갔다 온 느낌이다. 다만 왕성과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는 게 특별했을 뿐.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6시간 넘게 이동했다. 그 동안 커다란 강 하나를 봤고 또 산 몇 개를 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 망나니는 점점 더 활기를 띄었다. "오예. 신난다." "오라버니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네가 즐거운 건 상관없어. 하지만 그 즐거움에 취해 내게 물어왓을 시키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오빠야.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인데 얘가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으면 진짜 명치 때려주고 싶다. "내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에 가는 거야." "그 곳이 어디인가요?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시는 곳이라니 소녀도 무척 기대가 되어요." "스타리움!" 나는 두 눈을 꿈벅거렸다. 스타리움. 뭔지 안다.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일종의 결투장이다. 나는 도대체 남자라는 생물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왜 서로 피튀기게 싸우고 치고받는 것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진수도 꽤 좋아했었는데...'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UFC 인지 UFO 인지 하는, 격투기 시합같은 것이 있다. 평소 조용한 편이었던 진수는 그걸 즐겨 봤었다. '이런 잔인한 거 보지 말라고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내가 핀잔을 주면 진수는 1초라도 더 보겠다는 듯, 굳센 의지로 리모컨을 붙잡고 있다가 결국 2초정도 지난 뒤에 채널을 돌리곤 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보고 싶어.' 입은 웃었는데 마음은 울었다. 모르겠다. 즐겁고 행복한 추억임에는 틀림 없는데 왜 서글픈 느낌이 드는 걸까. 나도 내 이중적인 이 마음을 잘 이해 못하겠다. "어. 똥개 너도 스타리움 좋아해?" "소녀는..." 좋아하지 않았다.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결투 따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시 좋아하는구나? 그걸 싫어할 리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망나니는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렸다. 무려 왕자님께서 그렇다는데 감히 공주따위가 '아닌데요?' 라고 말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닌데? 모르면 나대지 마라.' 해주고 싶었지만 역시 참았다. 나는 또 내 양심을 팔았다. "소녀는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건 다 좋아요." 내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김환성은 활짝 웃었다. 잇몸까지 드러난 환한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가 나를 쳐다보더니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얼른 가잣!" 1시간 가량을 더 달렸다. 우리는 대도시에 진입했다. 고려 왕국 내 최대 규모의 스타리움이 있는, '미추홀'이란 도시다. 나는 스타리움의 거대한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예전에 야구장을 몇 번 가본적이 있다. 그 야구장보다 몇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나는 김유신 나이트의 안내를 받아 VVIP석으로 이동했다. 결투장과 가장 가까운 위치다. 역시 이상했다. '주위 남자들이 날 쳐다보지 않고 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근처 옆자리 남자들은 날 쳐다보지 않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 남자들이야 신기하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다. 남자들을 대동한 여자. 아마 귀족가의 여식일텐데, 저들에게 있어서 귀족가의 여식은 좀처럼 보기 힘든 존재였고 당연히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역시 뭔가 이상해.' 이상함을 느끼고 말 것도 할 것도 없이, 우렁찬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순간 귀를 막을 뻔 했다. 이 자식들아! 목소리 좀 작작내! 너희들은 마력이라는 엄청난 것이 있어서 소리를 지르면 천둥이 된단 말이야! 진짜 불공평하다. 남자들은 마력으로 소리를 한껏 키워서 소리를 낸다. 마력이 없는 내 입장에서 들으면 고막이 터질 것 같다. 저희들끼리는 또 마력으로 귀를 보호하니까 상관 없는데 나는 진짜 괴롭다. 아주 잠깐 괴로웠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괜찮아졌다. '이제...좀 괜찮네.'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맨손 격투의 달인! 무투가 김수혁과 서방의 검투사 율리안의 피 끓는 전투가 이제 곧 시작됩니다! *** 김환성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똥개가 뭔가 괴로워하는 것 같다. 그런데 금세 괜찮아졌다. 왜 그런가하고 정신을 집중해봤더니 김유신 나이트가 비접촉 상태에서 김상희의 귀를 보호해줬다. 김환성이 물었다. "왜 마력보호 걸었어?" 그러나 김유신도 이유는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명령입니다." "아부지가 이상한 명령을 자꾸 내리네. 성수도 못 먹게하고. 쓸데없이 마력낭비하게 비접촉 마력보호도 걸라고 그러고." "......." 김유신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속마음은 비슷했다. 도대체 왜 이런 명령들을 내리는 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성수. 그까짓 거 마시면 좀 어떻고 마력보호 같은 거 안 해주면 어떠냔 말이다. 아니. 지금 같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마력보호를 왜 하라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한편, 김상희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사회자의 침 튀기는 해설도 귀에는 잘 안들렸다. 김상희의 세상은 고요했다. '진수가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 때의 한진수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냐. 그 한진수는 이제 없어.' 그리고 이 세상의 한진수가 떠올랐다. '나는 네가 싫다.' '너 따위가 자꾸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이 한진수는 그 한진수일 리가 없다. 내가 사랑했던 한진수라면, 또 나를 사랑했던 한진수라면 나한테 이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진담이든 농담이든,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한진수와 내 한진수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김환성은 제대로 오해했다. "야. 똥개." 김상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안한 게 아니고 못한 거다. 못 들었으니까. 김환성이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김상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해요. 오라버니. 소녀가 감히 오라버니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였어요. 정말 죄송해요." 김환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김상희는 조금 긴장했다. 김상희는 언제나 긴장한다. 아무리 망나니와 친해져도 신분의 격차라는 건 엄연히 존재하니까. 왕자가 공주를 몇 번이나 불렀다.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공주가 왕자를 무시한 거다. 공주에게 그럴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결과는 그렇다. 이 세계는 그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죄가 된다. "소, 소녀가 정말 잘못했어요." 김환성이 말했다. "쟤네가 그렇게 멋있어?" ...네? 하고 김상희는 되물을 뻔 했다. 김환성이 간만에 의욕에 불타올랐다. "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쟤네보다 훨씬 세." 지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뭔가 묻고 싶은데 전후상황을 아예 모르니까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몰랐다.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내가 훨씬 세다니까?" 그리고 김환성이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활짝 웃었다. 김상희는 황당한 말을 들었다. 김환성이 즉석에서 스타리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거다. 김환성이 김상희 앞에서 어깨를 쭉 폈다. 턱을 높이 들었다. 거만한 눈동자로 상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짜야. 내가 더 세." 김상희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러니까 뭘 믿으라고요...? 묻고 싶었다. 고려 왕국 최연소 나이트. 제 9대대장이자 무력에 관한한 이 시대 거의 최고의 천재라는 김환성이 신분을 속인 채 스타리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타리움에는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했다. - 맨 손 격투의 달인! 무투가 김수혁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대단합니다! 현란한 몸놀림! 빠른 속도! 그리고 정확하고 강한 마지막 펀치로 승리를 따냅니다! 그리고 놀라운 소식도 함께 전했다. - 내일 있을 챔피언 전에 도전할 상대는 겨우 15세의 어린 소년입니다! 한편,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김상희에게 말했다. "오빠 믿지?" ============================ 작품 후기 ============================ 강해보이고 싶은 오빠. "진짜야. 내가 더 세." 본격_강한_오빠.avi 0029 / 0192 ----------------------------------------------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나는 정말 황당했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약간의 허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 사실 나는 그 허세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쭈구리(?)처럼 방구석에 혼자 숨어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세라도 조금 갖고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놈의 허세는 도대체 스케일이 얼마나 큰 거야?' 구체적인 숫자로 설명하겠다. 이 스타리움은 총 인원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다. 그 엄청난 크기라는 시드니 축구장의 인원 수용규모가 8만여명인데, 이건 그것보다 더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빈자리도 별로 없다. 거의 꽉 찼다. 망나니의 결투일은 바로 내일. 내일도 역시 스타리움이 꽉 차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저 녀석은 10만명 앞에서 허세를 부리게 될 거라는 소리다. "오라버니..." 솔직히 아닌 말로 나는 김환성이 조금. 정말 조금. 그러니까 아주아주 조금. 매우매우 조금 김환성이 걱정되기도 한다. 물론 정말로 아주아주 조금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 새 정이 조금 들은 것 같다. 나 역시 김환성의 명치를 세게 때려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래도, '아까 그 챔피언이라는 사람은 너무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체급차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아까 경기장에서 무투가 김수혁을 봤었다. 김환성도 나이치고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김수혁이란 남자는 키가 2미터는 훨씬 넘을 것 같았다. 거의 거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덩치도 굉장히 컸다. 아까 엄청난 광경을 하나 봤었다. 김수혁의 상대라는,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칼을 쓰는 남자가 김수혁을 공격했었다. 김수혁은 맨 살로 그 칼을 받아냈다. 그 광경에 다들 열광했었다. '아니. 맨 몸으로 칼도 받아내는 거인인데...' 아무래도 이 아이가 중2병에 걸려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제 겨우 15살 소년이 아닌가. 김환성은 굳이 내 침대에 앉아 - 김환성과 나는 한 방을 쓰게 됐다. 물론 침대는 두 개다. - 저 빌어먹을 헝겊인형을 만지고 있었다. 어서 말을 시켜야해. 말 안시키면 문 열고 물어왓 시킬 거야 저 자식. "응?" "소녀는 오라버니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왜 다쳐?" "소녀는 아까 김수혁이란 사내를 보았어요. 덩치가 오라버니의 두 배는 커보였어요. 무시무시했어요. 그래서 소녀는 너무 무서워요." 네 명치를 때리는 건 나야. "하긴 똥개는 멍청하니까." 똥개 똥개 하지 마라. 듣는 똥개 기분 나쁘...아. 아니지. 아씨 짜증나. 뭔가 세뇌당하는 기분이야. 김환성이 어깨를 쭉 폈다. "내가 더 쎄." *** 김상희는 '스타리움'에 대해서 잘 모른다. 경기 규칙도 잘 모르고 선수 선발이 어떻게 되는지도 잘 모른다.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면 김환성이 치르게 될 경기는 바로 챔피언전이다. 챔피언전. 아무렇게나 무턱대고 신청한다고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잘못하면 목숨도 오갈 수 있는 결투다. '나 챔피언이랑 싸울래요'한다고 해서 챔피언과 싸움을 붙여주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다이렉트로 챔피언전에 참여를 한 거지. 그 15살짜리 꼬맹이가." "도대체 뭘까? 아무리 봐도 김수혁에겐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말이야. 15살이면 이제 겨우 1차 각성을 끝마쳤을 시기인데..." "어쨌든 스티라움측이 받아들였다는 건 뭔가 있다는 거지." 사람들은 내일 있을 경기에 굉장히 흥분했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5살짜리 소년이 경기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스타리움 역사상 이제 겨우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이렉트로 챔피언전에 도전이라니. "그런데 상대가 너무 안 좋네. 김수혁은 벌써 7전 7승이잖아. 지금 기량을 유지하면 당분간 안 질텐데. 최근들어 최강의 챔피언 아냐?" "그렇지. 그래도 어린 아이니까... 조금은 봐주면서 하지 않겠어? 김수혁이랑 싸워서 아직 죽은 사람 한 명도 없잖아. 힘 조절을 그만큼 잘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루가 지났다. 김상희는 발 뒷꿈치를 들었다. 그래도 키가 작아 김환성의 귀에 입이 닿지 않았다. "왜?" "소녀가 오라버니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김상희도 식당에서 사람들의 얘기를 대충 들었다. 사람들은 15살 소년의 안위를 걱정해줬다. 무투가 김수혁이 이길 거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15살 짜리가 도대체 무슨 똥배짱으로 경기에 신청했고 경기장측은 왜 그걸 받아들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들 말했다. "뭔데?" 김환성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 모습을 보던 김유신이 움찔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공주따위의 말을 듣기 위해 왕자님께서 무릎을 굽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상희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소녀는 오빠를 믿어요." 김환성이 크게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함박웃음이었다. 정말 기쁘게 웃었다. 김유신은 김환성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도대체 저 왕자님이 왜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지 모르겠다. 공주가 뭐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근래에 저렇게 행복한 웃음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한편, 왕궁에서는 실시간으로 보고가 올라갔다. 이번 보고 담당은 알렉스였다. 알렉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왕자님께서 폐하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답니다." "무슨 뜻이지?" 짐작가는 게 있다. 하지만 모른 척 했다. 벌써 20년 쯤 전 일이다. 그 당시, 살아계셨던 선왕에게 굉장히 많이 혼났었다. 일국의 왕자가 체통머리도 없이 무슨 짓이었냐고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폐하께서 15세였을 당시 미추홀의 거대 스타리움을 홀로 제패하시고 13전 13승의 기록을 세우셨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다고 합니다만." 김훈상이 정정했다. "그 당시 난 14세였다." 15세이든 14세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 양반아. 알렉스는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왕 정말 잘 컸다. 어릴 때에는 김환성보다 더 막장(?)이었었다. "왕자님께서 폐하와 똑같은 길을 가고 계십니다."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선왕은 자신을 많이 혼냈었지만 자신은 혼내지 않을 생각이다. 알렉스가 물었다. "혹시 역시 내 아들이다, 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 "남자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알렉스는 끄응,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패기도 뭐도 아니다. 그냥 양민학살이다. 고려왕가의 혈통은 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최고의 혈통이다. 이 세계의 강함은 마력으로 결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인들과 고려왕가 사람들은 애초에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패기 아니고 그저 양민학살인데요. 왕자님은 심지어 고려 왕가 나이트의 제 9대대장이신데요. 그 정도면 은퇴한 나이트와 숨겨진 능력자들을 포함한다고 해도 왕국 내에서 서열 100위 안에 드는 엄청난 건데요. 하고 정확한 사실을 짚어주고 싶었다. 참고로 고려왕국의 인구수는 남자수를 기준으로 약 5천만 명이다. 다시 말해 5천만 명 중에 100등 안이라는 소리다. 그것도 이제 15살에 말이다. 퍼센트로 따지자면 0.001퍼센트 안에 드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알렉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스타리움에서 패배하면 혼을 내시겠군.' 20년 전. 스타리움을 제패했던 소년 무투가 김훈상은 현재 스타리움에 도전하고 있는 소년 무투가 김환성의 아버지였다. '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참.' 알렉스는 괜히 슬퍼졌다. *** 경기장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 오늘은 정말 이례적인 이벤트가 펼쳐지는 날입니다! 와아! 함성소리가 크게 터져나왔다. 경기장 전체가 마구 울릴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었다. - 15살 소년. 예. 이름을 상당히 특이하게 지었군요. 15세 검술가 '오빠'와... 사람들이 크하하! 웃었다. 원래 가명을 쓰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이름을 '오빠'와 같은 식으로 지은 사람은 없었다. 오빠란 단어 자체가 희귀한 단어다. 별로 쓰지 않는 단어니까. - 그리고 7전 7승! 무적의 연승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맨손 격투가! 김! 수! 혁!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함성이 터져나왔다. 김수혁은 온 몸에 힘을 주며 근육을 자랑하고 크아아아! 하고 짐승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온 몸의 근육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 엄청난 체구 차이! 과연 우리의 오빠는 챔피언 김수혁을 상대로 얼마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김상희는 괜스레 오기가 생겼다. 평소에 김환성을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괜히 누나마음이 들었다. 분위기 자체가 김환성을 엄청 무시하고 있다. 저 약하고 여리여리한 몸으로 무투가 김수혁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김상희는 괜히 화가 났다. 화도 나는데,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내가 진짜 못 살아. 이름이 오빠가 뭐야. 진짜 웃겨. 그리고 저 가면은 도대체 뭐고... 왕자니까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된다. 뭐 그런 거야? 근데 왜 황금가면이야... 차라리 나한테 가면 골라달라고 하지.' 아이고 두야. 머리가 괜히 아파왔다. 그리고 사회자가 경기 시작을 알렸다. - 그럼! 경기! 시작 합니다! 김수혁이 말했다. "꼬맹아. 칼. 안 뽑니?" 김환성이 피식 웃었다. "내가 칼 뽑으면..." 김환성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김상희는 놀랐다. 김환성이 몸이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이 마력을 끌어올려 상황을 주시했다. 김수혁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너 죽어." 김수혁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움직임을 잡지도 못했다. - 이, 이게 무슨 일인가요! 15세 소년! 오빠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마력 탐지기를 통해 파악 중입니다! 아! 아닙니다! 저쪽! 저쪽에 나타났습니다! 언제 저기까지 이동 한 거죠! 엄청난 이동능력입니다! 작은 체구를 바탕으로 한 스피드를 주력으로 삼는 스타일의 검술가인 것 같군요! 김수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방금. 그 느낌. 너무나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결투가 아니라 마치 사냥을 당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러나 그 느낌은 굉장히 짧았다. 저만치 앞에, 키 작은 꼬맹이가 하나 보였다. - 그런데 검을 뽑지 않는군요! 검술가라고 소개했는데 사실은 무투가 아닐까요! 김환성이 허리를 살짝 굽혔다. 몸을 뒤로 젖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용수철처럼 몸을 앞으로 튕겼다. 오른 주먹을 허리 뒤까지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앞으로 뻗었다. - 오빠! 주먹을 뻗습니다! 가공할만한 스피드! 그러나 스피드가 빠르다고 해서 김수혁 선수의 맷집을 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콰과광! 거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관중들은 술렁거렸다. "무, 무슨 소리야?" "설마 저 주먹에서 저런 소리가 났다고? 무슨 특수한 기파같은 걸 익혔나?" 그래도 다들 김수혁의 승리는 의심하지 않았다. 칼조차도 막아내는 단단한 신체와 마력을 가진 김수혁이다. 저런 꼬맹이의 주먹 따위는 쉽게 막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김수혁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는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김환성이 다시 거리를 벌렸다. - 이, 이럴 수가! 김수혁 선수! 한쪽 무릎을 꿇었습니다! 피를 토합니다! 다, 다, 단지 주먹 한 방에 천하의 김수혁 선수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심판이 경기를 잠시 중단시켰다. 김수혁의 상태를 살폈다. 김수혁이 더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사이 김환성은 VVIP석에 앉아 있는 김상희를 쳐다봤다. 물론 김상희는 그걸 몰랐다. 김상희는 김환성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으니까. 김상희가 만약 김환성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면 분명 느낄 수 있었을 거다. 김환성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때? 오빠 멋있지?' 허세와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능력 없는 남자가 지나친 자신감을 표출하면 그건 정말로 허세가 맞다. 그런데 능력이 출중한 남자가 자신감을 나타내면 그건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감이다. 김환성의 경우가 그랬다. 그의 표정이 김상희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더 세!' 이건 허세가 아니었다. 진짜였다. 김환성은 허세를 현실로 만들었다. 고려왕국 최대의 스타리움인 미추홀 스타리움에서, 김환성은 자신의 무력이 진짜임을 보여줬다. 경기가 재개 됐다. 김수혁의 팬들이 흥분했다. "김수혁! 이겨라!" "저런 꼬맹이한테 진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러나 세상에는 응원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었다. 결과는 김수혁의 완벽한 패배. 김수혁은 김환성의 손 끝 하나 못 건드렸다. 이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챔피언이 되면 우승상금이 두둑하다. 또한 승률배당 시스템을 통하여 또다른 부수익이 발생한다. 이번 같은 경우, 대부분 김수혁의 승리를 예측했기 때문에 김환성에게 들어가는 이득은 거의 천문학적인 수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평생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돈이 들어온다. 그런데 '오빠'는 그 이득을 그냥 포기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 화, 황금가면의 오빠! 모든 이권을 포기하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과, 과거 20년전과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다. 사실 그 소년이 다시 돌아온 거다. 나이를 먹지 않는 불사신이다. 사실은 나이를 속인 거다. 기타 등등. 그런 소문이 돌든 돌지 않든, 김환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금전적인 이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호텔 방에 돌아온 김환성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이 좋아 의기양양이고 사실은 뭔가를 엄청 기대하는 눈치였다. "오빠 세지?" 김상희는 김환성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는 '세다'라는 말은 안 해줬다. 원하는 거 너무 쉽게 주면 안 된다. 적어도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했고 여태까지 그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잘 살아왔다.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혹여 다치면 어쩔까 마음을 졸였어요. 오라버니 걱정 때문에 소녀는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어요." "아니. 그니까 왜?" 김환성은 답답해졌다. 이게 아니다. 그렇게 강한 걸 증명했는데 반응이 어째 이상하다. "소녀를 괴롭히는 게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소녀가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오라버니는 정말 모르실 것이어요." 물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천국과 지옥 왔다갔다 할 것도 없이 경기는 빨리 끝났었다. 어쨌거나 김상희는 그렇게 말했다. 김환성은 즐거운 건지, 오기가 생기는 건지, 그도 아니면 김상희가 울먹거리는 모습에 언짢은 건지. 자기 스스로도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어. 이게 아닌데. 나 진짜 센데...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김유신 나이트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김유신은 김환성, 김상희와 밥을 따로 먹는다. 감히 왕자님과 겸상을 할 수 없다 하여 김유신이 일부러 다른 자리, 다른 시간에 식사를 하기로 한 거다. 김유신을 찾아온 남자가 말했다. "아마 귀족가의 여식을 보호하는 용병인 것 같은데 말이죠.," "......." 김유신은 대답하지 않고 스프를 떠먹었다. "그 여자. 저희가 납치하는 걸로 하죠. 보상은 정말 두둑히 드리겠습니다." 없는 일도 아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골칫덩이인 계집을 처리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계집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였으니까. 귀족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문제였다. 귀족 혹은 용병들은 돈을 얻을 수 있고 상인들은 상품가치가 높은 귀족여아를 -보통은 성노예로 쓰인다- 얻을 수 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니까. 김유신이 스프를 떠먹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세히 얘기해봐." ============================ 작품 후기 ============================ "내가 칼 뽑으면..." "너 죽어." 김상희는 저게 중2병이자 허세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진짜라는 게 함정.) 0030 / 0192 ----------------------------------------------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사실 없는 일도 아니었다. 김유신 역시 알고 있다. 귀족가에서 필요없는 여식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 김유신이 말했다. "조건을 제시해봐." "3억 원을 일시불로 드리죠." 김유신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제의를 한 남자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 "4억 드립니다." 김유신이 또다시 피식 웃었다. 남자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4억이면 충분할텐데요? 일반적인 시세는 2 내지 3억 가량입니다. 특등품이라 4억까지 드리는 겁니다." "특등품이군." "그렇습니다. 저 정도 계집이면 특등품이죠." 특등품이 맞다. 나이도 어리고 예쁘다. 피부도 곱다. 게다가 굉장히 귀한 집안의 여아 같다. 그러면 비싸게 팔린다. 성노예로 1년 정도만 굴리면 투자금은 뽑고도 남을 거다. 그런데 순간 주위가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다시 가격을 불러." 남자는 당황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이건 마력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공간. 일명 '필드'라고 불리는 것이다. 보통 중요한 얘기. 혹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때에 이 필드를 펼치고 얘기를 하게 된다. "4, 4억! 그 이상은 못 줍니다. 그 이상 받으면 나도 안 남아요!" 그런데 이 필드. 뭔가 이상하다. 뭔가 기분이 나쁘다. "이, 이보시오. 이건 도대체..." "왕명에 의거하여 즉결 처분한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툭, 하고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얼굴이 그의 발등에 부딪쳤다. 떼구르르-. 방금까지 말을 하고 있던 그 물체가 바닥에 굴렀다. 주인을 잃은 몸은 망가진 마리오네뜨처럼 아무렇게나 쓰러져 버렸다. 김유신은 떼굴떼굴 굴러와 자신의 발을 건드린 그 둥그런 물체를 아무런 감흥도 없는 눈동자로 쳐다봤다. 허공에 대고 말했다. "치워." 그러자 4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분명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예. 마스터." 필드가 걷혔다. 주위 사람들은 그 누구도 김유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필드가 펼쳐졌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김유신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며칠 전. 김훈상은 김유신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만에 하나라도 말이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왕은 한참이나 고민했다. 김유신은 왕의 그런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적어도 즉위 이후 10년 동안은 보지 못했다. 왕자 시절의 김훈상과 왕이 되고 난 이후의 김훈상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무언가 결정을 하고나면 빠르고 신속하게 명령을 내리고 실천해나가는 왕이 아니었던가. "3000억." "3000억. 알겠습니다." "아니다. 7000억." 김유신은 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누가 한낱 계집애 몸값으로 7000억을 준단 말인가. 김유신도 대략적인 시세는 알고 있다. 보통은 2억 내지 3억 선에서 거래 된다. 그런데 7000억이라니.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김유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0퍼센트였다. 그래도 그는 왕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다. 9000조." 왕이 쐐기를 박았다. 9000조원이란다. "9000조. 알겠습니다." 이제는 황당하지도 않다. 9000조. 실질적으로 9000조를 가진 자산가는 고려왕국에 없다고 봐도 됐다. 왕국 내 최고 부자라 할 수 있는 왕도 9000조원은 없다. 왕이 다시 말했다. "9000조 이하를 제시하는 놈은 그냥 죽여. 아무리 하찮다고 하지만 내 핏줄을 이어받은 계집아이이니 그 정도는 받아야겠지." "예. 알겠습니다." 왕이 또 고심했다. 명령을 다시 내렸다.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왕이 계속 명령을 번복해서 내리는 건. "9999조." "예. 9999조. 알겠습니다." 후에 이 명령을 알게 된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무조건 죽이라고 하시지?' 100원이면 살 수 있는 과자 -심지어 흔한 과자다- 를 1억 원쯤 주고 살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마찬가지다. 계집 하나를 9000조원이나 주고 거래할 상인은 없다. 이건 100프로다. 애초에 고려왕국에 9000조를 가진 개인은 없다. 실현가능성이 말 그대로 0프로다. 그런 주제에 '아무리 하찮다고 하지만 내 핏줄을 이어받은 계집아이' 라는 말은 또 꼭 붙였단다. 그게 왕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싶다. '애초에 9999조는 고사하고 9000조를 가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100조 가진 사람도 없구만.' 세무조사 결과 왕을 제외하고 왕국 내 최고 부자가 개인 현금자산으로 약 30조원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이뻐 죽겠으니까 잘 지켜. 아무도 접근 못하게 해. 날파리 붙으면 죽여. 이렇게 말하시면 어디가 덧나시나? 왜 꼭 하찮은이니 뭐니 번거롭게 그러시나 몰라.'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역시 김훈상은 김훈상이었다. 왕자때에 김환성보다 더 망나니였으면 망나니였지 지금같은 성군은 아니었다. 그 때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재미있다. "내 고귀한 혈통을 이었으니 그 정도 값은 받는 게 맞겠지." 네. 그러시겠지요. 알렉스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또다른 것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마스터 김유신을 내보내다니. 정말... 파격적이군.' 여태까지 수많은 공주들이 바깥나들이를 갔다왔다. 그러나 여지껏 왕실 특수부대인 스페셜 나이트가 호위로 따라붙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페셜 나이트. 그 중에서도 마스터가 붙었다. 마스터는 왕국에 딱 한 명 있다. 고려왕국 소속. 그 대단하다는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들마저도 경계한다는 고려왕국의 제 1대대. 스페셜 나이트의 단장.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달리 말하자면 '마스터'였고 현 시대 마스터의 이름은 김유신이었다. '프리온 나이트들의 유일한 대적자라 불리는 김유신 나이트라니.' 알렉스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너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스터는 폐하의 안위를 보존해야만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괜찮아." "예?"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내가 더 쎄." ***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김유신 나이트일 거다. 저 아저씨. 뭔가 무뚝뚝하고 재미는 없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믿음은 가는 아저씨다. 사실 나도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당최 이 이상한 세계는 외모로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마력이라는 신통방통 만사형통한 능력이 있으니까. "편안히 계신지 확인 한 번 하러 왔습니다." 김환성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응. 좋아. 김유신 마스터도 꿀잠 자도록 해." "예. 주무십시오." 나 역시 일어서서 김유신 나이트를 향해 허리를 숙여보였다. 좋았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 편 하나 더 만들지 뭐. 가자. 상희야. 김유신 나이트가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김유신 나이트님은 정말 멋지신 것 같아요." "그렇지? 마스터니까." 분명히 김유신 나이트는 이 쪽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다. 나는 몰라도 적어도 왕자님이 이 곳이 계시니까 저 쪽은 이쪽 상황에 신경을 계속 쓰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도 다 듣고 있을 거라는 소리다. "그런데 마스터라면...?" 나는 오늘 '마스터'란 단어를 처음 듣는다. 그러나 그 마스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아니, 고려왕국 사람치고 마스터가 뭔지 모르면 말이 안 된다. "서, 설마..." "응?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인데." 야. 너 그런 어마무시한 걸 그렇게 태평스럽게 말하면 어떡해. 헐. 대박. 뭔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진짜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마스터라고? 말도 안 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여긴 왜 왔어. 왕 직속 친위부대...인데 아. 우리 둘째 망나니가 따라붙었으니까 그런가. 개차반이 날 예뻐하는 건 안다. 하지만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까지 붙여줄 정도로 내가 가치있는 계집은 아니다. 난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딱히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게 당연한 세계니까. 어쨌든 나는 정신을 추스렸다. "어쩐지... 소녀는 그 분을 보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답니다." "뭐야? 똥개 너 어디 아파? 심장이 병신됐어?" ...닥쳐. 그냥 대충 뉘앙스로 알아들어주면 안 되겠니. "너무나 멋진 그 분을 보면 소녀는 항상 안심이 되어요. 소녀는 그 분 덕택에 정말 든든하답니다." 모르긴 몰라도 김유신 나이트, 아니 김유신 마스터는 지금 신세계를 맛보고 있을 거다. 세상에 어떤 계집이 이런 말을 했겠어. 옆 방에서 다 듣고 있는 거 알아요. 나는 이제부터 약 2시간동안 당신 칭찬만을 할 거야. 어서와. 이런 당돌한 계집은 처음이지. *** 아침이 됐다. 김유신 나이트가 김상희를 힐끗 쳐다봤다. 김상희도 그걸 느꼈다. 저 눈빛에는 분명 호감이 담겨져 있었다. 김상희가 과거에 괜히 꽃뱀 혹은 불여시라고 불렸던 게 아니다. 사실 김상희가 원했던 건 아니었고 또 당시에는 김상희도 인지하지 못했던 거지만, 김상희는 남자의 마음과 눈빛을 잘 읽어낸다. 재능이나 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거창하긴 하지만 하여튼 그랬다. 과거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엔 이 '눈치'가 굉장히 싫었었는데 여기서는 아니다. 사실 여기서는 이 능력(?) 덕택에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와 줄타기가 가능하지 않았던가. 김환성이 말했다. "어디 들를 데가 한 군데 더 있어." "오늘은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괜찮아. 아부지한테는 내가 말할게." "폐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알았어."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대로라면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성자의 우물도 갔다왔고 스타리움도 갔다왔다. 내 일정은 여기서 끝이다. 다른 공주들도 마찬가지였었고. 한편, 연락을 받은 김훈상은 인상을 찡그렸다. 알렉스가 물었다. "폐하.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짐작가는 구석이 있다. 이미 이 일은 예견되어 있었다. "혹시 셋째 왕자님한테 연락 왔습니까?" "하루 더 늦게 복귀한다더군." 알렉스는 이미 예상했다. "셋째 왕자님이 공주님이랑 오붓한 시간을 계속 보내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럴 리 없지. 왕궁 밖이 그리운 것이다." 아뇨. 그럴 리 있는데요. 김환성 왕자님은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데요. 알렉스는 말을 참았다. 이 똑똑한 왕이 언제쯤 자각이라는 걸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겨우 공주따위의 행사에 관한 보고를 왕께서 직접 받으실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했다가 속으로나마 피식 웃었다. '아. 하긴. 왕자님이 함께 계시니 보고를 직접 받았다는 핑계를 대실 수 있으시겠군. 참. 핑계가 좋아. 아니. 이러려고 일부러 같이 보내셨나?' 알렉스가 정곡을 찔렀다. "왕자님께선 공주님과 데이트를 하고 싶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데이트? 그게 뭐지?" 알렉스가 어깨를 쭉 폈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요즘 신세계를 개척해가는 선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세계에서는 알렉스가 굉장히 특이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제가 새로 만든 단어입니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사전에 등재할까 생각 중인데..." 알렉스는 데이트란 단어에 대하여 설명을 해줬다. 호감이 있는 남자와 여자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도무지 이상한 단어군. 알렉스 너는 요즘 이상한 것에 심취해있는 듯 해." 저번에 딸바보도 그렇고 데이트도 그렇고. 해괴망측한 단어들을 자꾸 만들어 낸다. 애초에 있을 필요가 없는 단어 아니던가. 여자가 마음에 들면 그냥 따라와라, 라고 말하면 된다. 즐거운 시간? 그런 거 모르겠다. 어차피 여자들은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정상 아니던가. 그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다. 알렉스가 말하는 이 '데이트'라는 개념은 기존의 상식을 철저하게 깨부수는 개념이었다. "학자들의 반발이 예상되지만 폐하께서 윤허만 해주시면..." "불허한다. 쓸데없는 것에 너무 열을 올리지 말도록 해. 보다 진취적인 일에 네 재능을 쏟도록 해라." 그런데 새로운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왕의 직속비서에게 바로 연결되는 직통 회선이었다. 긴급할 때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 회선이며, 직속비서의 이름은 강욱현이었다. 강욱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폐하." "무슨 일이지?" "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국에서?" 김훈상은 인상을 찡그렸다. 제국에서 갑자기 연락이라. 그렇게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사실상 국제 관계에 얽혀서 좋은 일은 별로 없다고 봐도 됐다. 특히나 제국에 관련한 일은 그랬다. "김상희 공주와 김상아 공주를... 제국의 황제께서 직접 보겠다 합니다." "김상희와 김상아를? 이유가 뭐지?" 무려 제국의 황제가 어째서 한낱 계집들을 보고자 하는 건지 모르겠다. 김상아는 이해가 된다. 마력을 가진, 세계에서 '유이'한 -프리지아를 포함하여 유이(有二)다- 계집이니까. 제국의 6황녀 프리지아와 더불어 말이다. 그런데 김상희는 왜 부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세한 건 이 서신에 적혀져 있습니다." 제국에서 김상희와 김상아를 불렀다. 그것도 제국의 태양. 황제가 직접 말이다. ============================ 작품 후기 ============================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내가 더 쎄."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0031 / 0192 ---------------------------------------------- 차라리 죽겠습니다. *** 김상아는 4살이다. 물론 여타 다른 여아보다는 훨씬 발육상태가 좋다. 비록 김환석이나 김환성 같은 천재 급은 아닐지라도 일단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덕분에 빨리 컸다. 빨리 컸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여자라는 한계가 있어서인지 쌍둥이 오빠인 김환혁보다는 두 뼘 정도 작았다. 어쨌든 4살 김상아는 지금 매우 신났다. "그럼 상아는 언니랑 같이 가는 거야? 진짜 그런 거야?" 상아는 4살답지 않게 제법 발음이 좋았다. 참고로 상희가 4살일 때에는 발음이 무척 많이 샜다. 김상희가 상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응. 상아는 언니랑 같이 제국으로 가요." "와아! 신난다!" "뭐가 그렇게 신나?" 상희는 요즘 환혁이랑 상아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몰라. 상아는 그냥 언니랑 같이 있으면 짱 좋아! 나는 커서 언니랑 결혼 할래!" 상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모습. 영상으로 저장해놓고 싶다. 나중에 한 10년쯤 지나서, 너 언니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재미있다. 그에 반해 상아의 쌍둥이오빠 김환혁이 조금 뿔 났다. "흥." 상아가 놀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같이 못 가지요?" "시끄러워. 안 가는 거야." 환혁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김상희가 앉은 상태에서 두 팔을 벌렸다. "우리 환혁 왕자님. 여기로 오세요." 이제 상희도 환혁에게 아무렇게나 반말을 하지는 못한다. 김상희는 공주고 김환혁은 왕자다. 아무리 빨리 태어났다고 해도, 그런 건 상관없다. 공주는 왕자보다 한참 밑의 존재다. 하지만 환혁은 그게 싫다. "누나는 왜 자꾸 나한테 왕자님이라고 그래?"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하면서도 쭈뼛쭈뼛 상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가 이내 마력까지 써서 빨리 달려가 상희의 품에 와락 안겼다. 김상희는 짐짓 슬픈 표정을 보이면서 말했다. "소녀는 공주이고 왕자님은 왕자님이어요. 왕자님한테 환혁이, 환혁이하면 소녀는 벌 받는답니다." "누가 누나를 벌 줘? 데려와. 환혁이가 때려줄 거야. 진짜 아프게!" "정말요?" "응. 진짜 엄청 아프게 무지 세게 때릴 거야! 되게 아플걸!" 김상희는 김환혁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줬다. 사실 이 광경 자체가 이 세계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광경이다. 김상희 외 다른 공주라면 엄두도 못 낸다. 실제로 김환혁은 다른 공주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살갑게 굴지는 않는다. 물론 김환석이나 김환성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보기에는 힘들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다. 무려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공주의 품에 안겨 칭얼대는 모습은 아마 고려 왕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없을 거라고, 알렉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언니. 언니. 소녀도 쓰담쓰담 해주셔요." 김상희는 한 쪽 무릎에 김상아를, 또 한 쪽 무릎에 김환혁을 앉히고 양 팔로 공주와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왕자는 조금 뾰루퉁한 표정.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긴 좋은데 제국으로 같이 못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 웃음을 꾹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에 반해 상아는 세상을 다가진 듯 환하게 웃었다. 상아는 또 기분이 좋아졌는지 상희에게 와락 안겼다. 확실히 환혁보다는 상아가 애교가 더 많았다. 상아는 상희의 품에 안긴 상태로 고양이처럼 볼을 부볐다. 김상희도 행복하게 웃었다. 한편, 김환성은 불만에 가득찼다. "왜! 왜! 왜! 형아는 되고 나는 안 돼?" 책상에 앉아있던 김환석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김환성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적어도 무력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김환성이 김환석보다 강하다. 그러나 김환성은 조금 쫄았다. "혀, 형아 화 났어?" "형 앞에서 그렇게 버릇없게 굴지 말랬지." 김환석은 천천히 걸어가 김환성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김환성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김환성은 고려왕국 나이트의 제9 대대장이지만 형 앞에서는 또 어린 -그래봐야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지만- 동생이기도 했다. "형 방에 들어올 때에는 노크 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미,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해서. 내가 나빴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김환성은 김상희와 제국에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훈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환성은 어디로 튈 지 모른다. 사고를 칠 수도 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는데 제국은 아니다. 김훈상이 말했다. "환성이 대신 환석이. 네가 따라가." "...예." 김환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김환성은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왕이 직접 진지하게 명령을 내린 거라 불만을 토하지는 못하고 김환석을 찾아온 거다. 김환성은 아무래도 억울했다. "그래도 나는 힘도 센데. 내가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김유신 마스터도 함께 할 거야. 네가 김유신 마스터보다 더 세?" "그, 그건... 그, 그래도 내가 한 20년 쯤 있으면 내가 더 셀 거다!" 자존심이 있어 아직 약하다는 말은 안했다. "그건 20년 뒤의 일이고. 너는 여기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사실 공주가 제국으로 가는데 왕자가 따라나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왕자가 제국으로 가는데 공주가 시중 겸 따라붙으면 말이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김환석에게는 핑계가 있었다. 이 핑계를 김환석이 만들었다. "아버님. 제국에 계신 형님과 인사도 나눌 겸. 제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그 모습은, 겨우 공주따위는 어떻게되든 상관 없으나 제국에는 첫째 형님께서 계시니 둘째인 제가 찾아뵙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부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알렉스는 좀 황당해졌다. '아니. 누가 봐도 핑계잖아.' 제 3자가 본다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알렉스가 본다면 분명히 핑계였다. 왕은 또 그 핑계를 좋다구나하고 받아들였다. "네가 간다면 김유신을 붙여줘야겠군. 일국의 2왕자가 함께 하니까." "아버님께서 제 신변에 그렇게 신경을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얼씨구. 알렉스는 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고려왕국은 물론 부강한 나라다. 그러나 제국에 비할 수는 없다. 왕국들 전부를 합쳐도, 제국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게 이 세계의 정설이다. 제국에는 프리온 나이트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제국은 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이며 치안 역시 굉장히 좋다. 최소한 고려왕국보다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제 1대대. 스페셜 나이트들의 수장 김유신을 붙여준단다. 아무리 제 2왕자가 간다고 해도 과한 처사다. '하기야... 저번에 겨우 바깥나들이에서도 김유신 마스터를 붙였는데.' 차라리 저럴 거면 그냥 김상희 공주가 걱정 되니까 매우 강한 김유신 마스터를 붙여준다, 라고 말하면 참 좋을텐데. 그런 것도 아니니 알렉스는 답답했다. '아니. 진짜 자각을 못하는 거야? 아니면 애써 외면 하는 거야?' 어쨌거나 김상희 공주와 김상아 공주. 그리고 김환석왕자. 김유신 마스터를 비롯한 호위단이 제국으로 향하게 됐다. *** 와. 여기서는 비행기를 처음 타보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 세계에서는 비행기를 탈 일이 별로 없단다. 그래서 비행기는 부자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란다. 일단 비행기를 움직이려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하고 그 정도 마력을 가진 사람은 비행기 운행 말고도 할 일이 널리고 널렸기 때문에 굳이 파일럿이 되려고 하지 않는단다. 재미있는 건, 우리 고려왕국의 나이트들이 번갈아가면서 운행을 한다는 것 정도. 제국까지는 약 8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야 한다고 했다. 좋아. 나는 이제 또 우리 첫째 망나니님께 교태를 부려야지.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타보며 아주 순진무구한 12세 소녀이자 어여쁜 여동생이어야만 하니까. "오라버니. 저기 보셔요. 집이 아주아주 작아요!" "......." "집이 콩알만해졌어요. 소녀는 너무나 신기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 "오라버니. 저기 보셔요. 구름이 저보다 아래에 있어요." 당연하지. 비행기니까. 하늘을 나는 물건이니까. 나는 당연하기 그지없고, 사실 그렇게 신기하지도 않은 일에 호들갑을 떨었다. "오라버니. 소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요. 어떻게 이렇게 신기한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죠? 하늘을 난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군요." "... 시끄러워. 계집아이라 할 줄 아는 거라곤 수다를 떠는 것 밖에 없냐?" 하지만 나는 봤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우리 첫째 망나니 입술이 꿈틀거린다는 거. 쟤는 항상 웃음을 억지로 참는다. 그래서 가끔 보면 귀여울 때도 있다. 그래. 나는 시끄럽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수다밖에 없지만, 내가 수다 안 떨면 너는 삐질 걸. 분명히. 만약 얘가 진심으로 나를 시끄럽다 생각했으면 '명령이니까 닥쳐'라고 말하든지 그도 아니면 그냥 마력으로 내 입을 봉해버렸을 거다. '내가 또 아무말도 안하면 삐질 거면서.' 이제 김환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 됐다. "오라버니. 만약에 비행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죠? 소녀는 그럼 죽는 건가요? 그런 가요?" "안 죽어." 옳지. 물었다. 물었어. "오라버니는 정말 강한 분이시니 괜찮지만 소녀같이 가엾고 나약한 계집은 죽고 말 것이어요." "안 죽는다니까!" 우리 첫째 망나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아. 위축된 모습을 보여야지. 나는 어깨를 한 껏 웅크리고 잔뜩 쫄은 모습으로 우리 첫째 망나니를 쳐다봤다. 최대한 불쌍한 모습으로. 자. 자. 어서 물어라. 하지만 둘째 오빠는 아무래도 떡밥을 물기엔 내면의 철옹성이 너무 단단한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좀 더 직설적으로 나가는 수밖에. "오라버니. 소녀가 정말 주제 넘는 부탁을 한 가지만 해도 될까요? 오라버니께서 싫으시다면 소녀는 입을 다물겠어요." "...여전히 시끄럽군. 해봐." "만약 이 신기한 비행기가 떨어진다면 소녀가 오라버니의 품에 꽉 안겨도 될까요? 그렇게 죽는다면 소녀는 이 세상에 여한이 없을 것이어요." 나는 사실 '내가 지켜 줄테니까 안 죽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실상 첫째 망나니의 능력. 아니 적어도 김유신 마스터의 능력이라면 날 살릴 수 있을 거다. 만약 환성이었다면 '나는 짱 세니까 내가 살려줄게. 나만 믿어. 음하핫!' 하고 허세아닌 허세를 부렸겠지만 역시 환석이는 쉽지 않았다. 상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상아는 다른 공주들에 비해 비교적 환석을 편하게 대한다. 눈을 비비며 물었다. "오라버니. 왜 웃고 있으셔요?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요?" 우리 첫째 망나니. 정색했다. "안 웃었다." *** 나는 제국에 도착했다. 제국에서도 왕국의 왕자 행렬을 맞이하기 위한 사절단이 도착해 있었다. 만약 나만 왔으면 이렇게 환대받지는 못했을 거다. 내가 알기로 고려왕국은 약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왕국이다. 제국보다 약한 것은 분명 맞다. 그러나 제국에서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운 왕국이다. 흠. 흠. 국제관계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쨌든 중요한 건 제국에서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운 왕국의 둘째 왕자가 직접 왔으니 제국에서도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국에서 마련해준 귀빈 접대용 호텔 -제국의 왕성 내 부지에 마련된- 에 묵게 되었다. 전 세계의 나라를 모두 합친 것보다 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제국이라더니 왕성 부지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우리 첫째 망나니는 17층에 묵게 되었고 나는 5층에 묵게 됐다. 참고로 말하자면 15층 이상이 귀빈이 묵는 곳이고 14층 이하는 그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묵는 곳이다. 여자들은 보통 5층 이하에 기거하게 된다. 그나마 나는 고려왕국의 공주인지라 5층이다. 만약 더 약한 왕국의 공주였다면 이보다 아래에 방이 배정됐을 거다. 그래도 귀빈 대접용 호텔이다보니 5층이라고 해도 그렇게 시설이 나쁜 건 아니었다. 상아와 나. 그리고 시녀로 따라붙은 송수진씨가 잠을 잘 수 있는 침대 3개와 조리시설, 화장실 정도는 딸려 있었으니까. 지구식으로 친다면 4인 가족 정도가 잘 수 있는 평범한 리조트 정도 쯤 되는 것 같다. 약 3일정도 휴식을 취한 뒤, 제국의 황제와 접견을 가지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대체 왜... 왕자도 아니고 공주인 우리를... 제국에서 보고 싶어하는 걸까?'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상아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긴 하다지만 제국에도 제 6황녀 프리지아가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바쁠 것이 분명한 제국 황제가 공주들을 보자고 한 것에는 필히 이유가 있을 터. 나는 혼자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식사가 온 것 같다. 제국은 고려왕국보다 남존여비사상이 더 심하다. 고려왕국도 비슷하기는 했지만 제국은 남녀가 절대로 겸상하지 않는단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밥만 맛있으면 된다. '고기가... 없어?' 밥만 맛있으면 되는데 이건 좀. 너무했다. 아니. 인간적으로 그래도 고기 정도는 줘도 되잖아. 어떻게 순 풀밖에 없어? 웰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고기를 먹고 싶다. 엉엉. 고기를 달라고. 물론! 내 속마음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 그걸 표정으로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려 왕국에서도 감히 반찬으로 투정할 수 없는 게 공주의 위치다. 심지어 여긴 제국이다. 감히 반찬투정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다. 왜. 뭐. 적어도 속으로 투정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우리 송수진씨는 그래도 제법 감격한 것 같았다. "반찬이 제법 정갈하게 잘 나오네요." "응..." 우리 상아는 이러나저러나 별로 상관없는 것 같았다. 마시쪄, 마시쪄를 연발하며 먹는데 참. 귀여워 죽겠다. 워낙에 먹성 좋은 아이고 반찬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리 5층밖에 안 되는, 격 낮은 사람들이 묵는 곳이라고는 해도 아무렇게나 문을 막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그건 망나니뿐이다. 역시나 망나니였다. 우리 첫째 망나니. 첫째 망나니가 말했다. "들어와." 응? 갑자기 무슨 소리래? 여긴 우리 방인데. 나는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 첫째 망나니 뒤로 급사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내 키만큼 높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세상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저게 몇 칸이야 도대체. 한 칸, 한 칸에 음식들이 쌓여있는데 고기부터 해산물까지 없는 게 없다. 김환석이 시크하게 말했다. "오다 주웠으니 먹든지 말든지." 그리고 나가버렸다. 이건 뭐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나는 음식을 부지런히 날라 -우리의 작은 식탁이 미처 수용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음식들이 식탁에 쌓이고 있는 중이다- 주고 있는 시녀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니?" ============================ 작품 후기 ============================ 김환석 : "오다 주웠다." 작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본다) 진짜? ^^ 김환석: ....... *** 공지사항 꼭 봐주세요. 0032 / 0192 ---------------------------------------------- 차라리 죽겠습니다. *** 몇 분 전. 엘레베이터 안. 김환석이 짧게 말했다. "17층." "네. 17층으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엘레베이터를 운용하려면 마력이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엘레베이터를 운전하는 건 남자다. 최근에는 직접 운용보다는 마력석으로 대체하여 동력을 얻는 추세가 강해지긴 했지만 이렇듯 최고급 시설에는 사람이 직접 운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 7층에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김환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닫아." "네. 문 닫겠습니다. 어이. 넌 꺼져." 시녀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원래 여자들은 엘레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한다. 마력석으로 운용되는 타입의 엘레베이터를 사용하려고 해도 남자들 눈치가 보여서 그냥 계단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자들도 엘레베이터를 눈치 살피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바로 투숙객들의 식사를 대령하거나 투숙중인 남자들이 불러서 이동하게 될 때다. 물론 여자 좋으라고 사용하게 허가해준 건 아니다. 기다리는 남자들이 오래 기다릴까봐서다. 김환석이 다시 말했다. "잠깐." 그런데 이런 경우. 엘레베이터 안에 이미 탑승 중인 남성고객이 여자와의 동승을 거부할 경우. 이런 때엔 여자들은 기다려야 한다. 특히나 15층 이상에 투숙중인 VIP의 경우는 그 권한이 더욱 컸다. 엘레베이터를 운전하는 남자는 이 소년이 누군지 알고 있다. "네. 왕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 다시 열어."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들어와." 시녀로 보이는 여자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예쁘게 인사한 다음 웨곤 -식사를 담은 카트-을 밀며 천천히 들어왔다. 환석이 물었다. "5층에 새로운 투숙객에 대해 알고 있냐?" 시녀들은 투숙객들의 얼굴. 그 중에서도 VIP의 얼굴은 필시 외운다. 혹시라도 결례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녀 역시 김환석을 알고 있었다. "네. 왕자님. 고려왕국의 공주라고 들었습니다." 엘레베이터를 운전하는 남자 -표기상 운전남이라 표현하기로 한다- 는 이상함을 느껴야했다. '고려왕국이 우리보다는 여자 대우를 잘해준다고는 하지만... 김환석 왕자는 여자 보기를 벌레보기같이 한다고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틀린 것 같았다. 그의 상식대로라면 시녀는 왕자와 감히 대화조차도 섞을 수 없는 신분의 격차가 있다. 김환석이 질문을 하고 시녀가 대답을 하는 것 뿐이지만, 그마저도 남자의 눈에는 신비롭게 보였다. 김환석의 질문은 좀 이상했다. 5층에 지급되는 식사량. 반찬 종류. 그런 걸 물었다. 운전남은 계속해서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저런 걸 도대체 왜 물어?' 김환석이 말했다. "5층으로." "네. 고객님. 5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5층 문이 열렸다. "..." 김환석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앞장 서서 걸었다. 시녀는 필사의 각오로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 막상 또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괜히 선택 잘못했다가 팔자 꼬이는 수가 있다. 다행히 김환석이 말해줬다. "안 따라오냐?" "지, 지금 가겠습니다. 왕자님." 사실 이 식사는 원래 '일 왕국'의 셋째 왕자가 먹을 음식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평가하는 등급상으로 약소국인 '일 왕국'의 셋째 왕자보다는 '고려 왕국'의 둘째 왕자의 등급이 훨씬 높았다. 시녀는 군말 없이 따랐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무전연락을 취했다. (이 무전기 역시 충전된 마력석으로 운용되는 물건이다.) "일 왕국의 셋째왕자님께 들어갈 식사. 재준비 요청드립니다. 고려왕국 둘째 왕자님께서 가져가시고 계십니다." 김환석 역시 그 말을 들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제 갈길만 갔다. 5층 복도. 이따금씩 마주치는 여자들 -대부분 시녀들-은 김환석이 지나가자 벽면 한쪽에 붙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이 왕자님은 왜 누추한 5층으로 오셨을까...?' 왕자의 이복동생이 5층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그 사실과 왕자가 5층으로 내려오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하니 공주때문에 왕자님께서 5층으로 올 리는 없는 것이다. 그게 상식이었다. "열어." "네. 왕자님." 그리고 시녀는 신세계를 맛봐야 했다. "오다 주웠으니 먹든지 말든지." 그리고 나가버렸다. 호텔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상황에 대한 대비교육을 받은 그녀였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오다 주웠다니. 아니. 오다 주운 것 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은가. 아무리 고려 왕국에 비해 일 왕국이 약소국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왕국이다. 그 왕국의 왕자의 밥을 빼앗아 온 걸 가지고 오다 주웠단다. 심지어 여자한테 그걸 줬다. 이건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중대한 사항이다.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겠어.'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 죽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외교문제로 번진다면 -고려왕국이 일왕국을 무시했다는-, 어쨌든 책임을 질 사람은 있어야했다. 그 책임은 아마도 자신이 지게 될 것이다. 일 왕국 왕자에게 가야할 음식을 실수로 고려 왕국의 공주에게 가져다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머저리 같은 시녀로 역사에 기록되겠지. 그래서 시녀는 설명을 간략하게 했다. 다른 상황은 다 뺐다. 한 가지만 말했다. 이 세상 그 누가 듣는다 해도 기함을 토할, 엄청난 사건. "김환석 왕자님께서 직접 가져다주라 명령하셨습니다." 무려 왕자가 공주의 식사를 신경써준 사건. 이건 정말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한편, 김환석은 자신의 음식을 가져온 시녀에게 말했다. "내 몫으로 항상 2인분을 만들어." "네. 왕자님." "그리고 내가 남긴 찌꺼기는 김상희에게 가져다주도록 해." "네. 왕자님." 시녀는 감동했다. 왕자님께서 주시는 찌꺼기라니. 고려왕국은 정말 살만한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녀는 저녁에 다시 한 번 더 감탄하게 됐다. "이건 5층으로 가져가." 비록 찌꺼기라고 거칠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자신 몫 외에 나머지 1인분에는 손도 안 댄 상태로 5층에 가져다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왕자님...정말 자애로우신 분이시구나.' 시녀는 엄한 상상에 빠졌다. 고려왕국의 왕자들은 다 저렇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참고로 고려왕국에서 김환석은, 공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시녀는 착각에 빠졌다. '정말 멋지신 분이셔...' *** 하루가 지났다. 제국의 황제가 미리부터 일정을 잡아놨기 때문에 나는 곧 황제를 알현하게 될 거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많이 친해졌다 생각하는, 그리고 나를 많이 이뻐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개차반님과 망나니님들을 볼 때에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하물며 이 곳은 남존여비사상이 더 강한 제국. '어디 흐트러진 곳 없지?' 머리끝 부터 발 끝까지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송수진양이 내 머리를 빗기면서 말했다. "공주님은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우셔요." 막상 당사자가 아닌 송수진씨는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오라버님!" 제국 황궁에 볼모로 잡혀있는 우리 첫째. 형석이. 내가 제일 아끼는 아이다. "우리 상희. 제국에서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두 팔을 활짝 벌린 상태로 날 보며 웃는 저 모습. 정말 눈이 호강한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형석에게 안겼다. 형석은 평소와 달리 날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는 다시 땅에 내려줬다. "습관대로 머리 쓰다듬을 뻔 했네." 무슨 말인고 하니, 손질한 머리를 망가뜨릴 수 없다는 거다. 너란 남자. 세심하기까지 하구나. 정말. 하. 넌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야. 엉엉. "오구. 우리 공주님. 그새 또 이뻐졌네? 이렇게 자꾸 이뻐지면 오빠가 시집 어떻게 보내지?" "아이참. 오라버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소녀는 너무나 부끄러워요." 아니. 안 부끄러워. 나 30살이야. 너는 내 조카 내지 어린 동생 뻘이고. 내가 부끄러운 건, 내가 이런 오그라드는 말을 사용한다는 거지, 너의 말이 부끄러운 건 아니란다. 오히려 흐뭇해. 그러니까 계속 해주렴. 어쨌든 첫째 왕자인 김형석 오라버니께선 나를 보러 오셨다. 황제폐하와의 자리에 함께 가기로 했단다. 상아도 두 팔을 벌리고 쪼르르 달려왔다. 상아도 나만큼이나 우리 첫째 오빠를 좋아라한다. "오라버니!" 첫째오빠는 상아를 살짝 안아들고서 이마에 또 가볍게 키스해줬다. 황제와의 독대시간이 가까워졌다. *** 김형석은 고려왕국에서 사신들이 오는데, 그 일행에 환석과 상희, 상아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황제가 상희와 상아를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특별히 요청을 넣었다.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다고 말이다. '환석이는 물론 똑똑하지만 아직 경험이 없어.' 사실 환석이가 문제가 아니다. 황제가 보고자 한 것은 어이없게도 두 공주였다. 마력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는 공주들 말이다. '상아는 너무 어리고... 고려왕국의 풍토에 익숙해져 있어서 실수할 염려가 커.' 사실 말하자면 고려왕국의 풍토가 아니라 '김상희 주변의 풍토'다. 상아는 상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다른 공주들보다 남자들을 덜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녀 스스로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크게 영향을 끼쳤고 말이다. '무엇보다... 상희의 경우 위험해.' 김환석은 크게 걱정 안 되고, 문제는 상희다. 그런데 그 상희는 이제 12살이며 3년 뒤면 성년이다. 사소한 말 실수 하나로도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조금 허황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황제는 그걸 노리는 걸 수도 있다. 공주가 실례를 범하는 상황을 일부러 유도하여 그 것을 빌미로 외교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따내는 것. 많이 행해지는 방법은 아니지만 선례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조건 옆에 있어줘야 해.' 그래서 특별히 황궁에 요청을 넣은 거다. 자국의 왕자와 공주가 혹여 실수를 할 지 모르니, 상황을 총괄하기 위해,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 이 발생했을 때 그 모든 책임을 지기 위하여 알현에 동참하기를 원한다고 요청을 한 거다. 황궁에서도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는지 허락해줬고 말이다. 전후사정은 잘 모르지만 김상희는 김형석이 동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안심이 됐다. 김상희는 황제와 만나게 됐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궁정.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기둥은 황금빛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노란색을 반짝반짝 반사시키고 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한 수십 개의 계단. 그리고 그 위. 황금색 의자에 앉아 있는 왕관을 쓴 남자. 황제였다. "흠. 네가 그 유명한 김상희구나." 어쩐일인지 황제는 오늘은 김상희, 내일은 김상아를 보기로 했다. 김상희가 대답했다. "미천한 소녀의 이름을 고귀하신 태양이신 황제폐하께서 알고 계신다니, 한낱 하찮은 계집에게 크나큰 광영이옵니다." "그런 인사치레는 됐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니. 가까이 와 보거라." 김상희는 긴장했다. 황금 계단 앞까지 걸어갔다. "위로 올라오너라." "미천한 소녀가 어찌 태양의 계단에 더러운 발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어허. 올라오라면 올라오지 않고." 김상희는 김형석을 쳐다봤다. 김형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명령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는 의미였다. 김상희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황제 바로 앞에 도착했다. 김상희는 도착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어라. 얼굴이 안 보이는 구나." 황제의 입장에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상희는 지금 이 순간이 살얼음판 같다. 하다 못해 불손한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도 즉결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이 나라에서 여자의 존재는 겨우 그 정도다. 프리지아 쯤 되면 모를까, 일반 여자들은 정말 그렇다. 정말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서다. "흠. 제법 반반한 아이구나. 그래. 네가 한진수의 약혼녀라지?" "미천하기 그지없는 소녀의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한진수는 제국에서도 탐을 내는 귀한 인재이니 그럴만도 하지." 황제는 기분 좋은 듯 껄껄대고 웃었다. "일어나 보거라." 김상희가 일어섰다. "더 가까이 오너라." 도대체 황제가 왜. 김상희는 도대체 의문들이 가시질 않았다. 무려 황제씩이나 되는 인간이 왜 타국의 공주를 불렀으며 왜 이 계단을 오르게 했으며 왜 또 가까이 걸어오라는 건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황제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나를 때려 보거라." 계단 밑에서 대기하던 김형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폐, 폐하!" 이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황제가 명령해서 계단을 올랐다. 이 정도는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황제가 명령했다고 해서 공주가 황제를 쳤다? 이건 정말 큰 일날 소리다. 제국이 이를 빌미로 고려왕국을 친다고 해도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할 말 없는 중대한 상황이라는 소리다. 김형석은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도대체 황제가 왜...!' 황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 짓을 벌였을 리는 없다. 정말 외교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을까. 김형석도 김상희의 능력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아직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능력이었다. 겨우 그런 능력에 황제가 관심을 가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절대 안 돼. 상희야. 너 가만히 있어. 아무리 시켰다고 해도, 절대로. 절대로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을 문제삼아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인다면. 고려왕국도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수 있다. 아예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 때, 김상희가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공지 확인을 꼭 부탁드렸는데 공지 조회수가 적네요 ㅜㅜ 그래서 공지 내용을 후기로 옮겨왔습니다. ***2월28일 공지 내용*** 독자 여러분. 제게 축하받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제게는 행복한 일이지만 어떤 독자님들에게는 불행한(?) 소식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가 유료 연재(프리미엄) 조건에 부합되어 프리미엄란에서 연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공지 기간을 거친 뒤 아마도 3월 초 정도에 프리미엄란으로 이동하게 될 것 같아요. 프리미엄. 유료연재란이죠. 그런데 이게 마냥 좋아 할 수만도 없는 것이, 제 글이 과연 한 편에 1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 드네요. 제가 한 달에 약 20편 정도를 연재한다고 했을 때, 독자 한 분이 쓰셔야 하는 돈은 약 2천원정도 됩니다. 30편을 연재하면 3천원. 2,3천원이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닌 돈 일지 몰라도,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큰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학생분들 입장에서 3천원이면 정말 적은 돈이 아니죠 ㅠㅠ) '3천원 내고 내 글을 봐!' 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많은 분들이 예쁘게 봐주고 있지만 -정말 감사드려요. 엉엉.- 사실 제 글이 그렇게 잘난 글도 아니고요. '네 글이 정말 한 달 3천원의 가치가 있기는 해?'라고 묻는다면 저는 솔직히 대답할 자신이 없어요. '내 글은 돈 주고 볼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은 할 수 없지만 '돈 주고 봐도 괜찮은 글이 되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라는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고는 성실성 하나밖에 없거든요. 글쟁이가 글을 잘 써야지 성실하기만 하면 뭐하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저 눈물만 ㅠ_ㅠ 돈이 부담되어서 제 글을 더 이상 못 보시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제 글이 돈 주고 볼 가치가 없기 때문에 보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어쨌든 프리미엄란으로 이동해서도, 저는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가 완결되는 그 날까지, 제 글을 예뻐해주시는 독자님들과 함께 호흡하고 이어가고 싶어요. 물론 유료연재 수익역시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제가 글을 안쓰면 저희 가족이 굶어요 ㅠ_ㅠ) 흠흠. 어쨌든 글로 벌어먹는 글쟁이이니 제발 봐달라느니, 봐주지 않으면 굶는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열심히 쓰겠습니다. 여러분들과 좋은 시간을 좀 더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글쟁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어여삐 봐주세요. 모두 행복하세요. ^^ + 아참. 많은 독자님들이 물어봐주셔서 대답을 몇 가지 해드리자면, 1) 몇 편이 1권 분량인가요? → 제 글은 1편당 약 15kb 정도이며 약 17편 정도가 종이책 1권 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몇 편 완결인가요? → 일단 지금 기획상으로는 150편 내외가 될 것 같아요. 변동 가능합니다. 더 적어질 수도 있고 더 많아질 수도 있어요. 3) 프리미엄은 대여인가요 구매인가요? → 프리미엄은 구매입니다. 한 번 사시면 계속 소장하실 수 있어요. 4) 연재주기는 어떻게 되나요? → 3월 첫째주를 제외하고 - 3월 첫째주는 제가 해외에 있어서 연재를 못할 수도 있어요.- 평일 1일 1연재를 기본으로 합니다. 주말에는 쉴 수도 있구요 ^^ 한달 20~30편 내외가 연재됩니다. 5) 종이책이나 이북 계획은 없으신가요? → 종이책이나 이북은 완결 이후에 나올 것 같습니다. 그 때 따로 공지 올리도록 할게요. 선작을 유지하시면 완결 이후 공지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6)결제수단은 카드밖에 없나요? → 문화상품권, 핸드폰결제, 카드결제 등등 다양한 수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0033 / 0192 ---------------------------------------------- 차라리 죽겠습니다. ***33 나는 사실 적잖이 놀랐다. 황제가 자기를 때리란다. 하늘 같은 황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대부분의 공주라면 저 말을 듣자마자 황제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명령을 들을 날이 평생에 한 번이라도 올 지 모른다. 나는 정말 특수한 케이스 중에서도 정말정말 특수한 케이스인 거다. '절대 칠 수 없어.' 내 입으로 말하면 좀 자랑하는 것 같지만, 나는 나름대로 노력 많이 했다. 공부도 많이 했다. 이 세계의 여성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 세계의 여성들은 정말 수동적이다. 남자가 이거 하라고하면 이거 하는 거고, 저거 하라 그러면 저거 해야 한다. 생각 자체를 별로 안 한다. 그걸 탓 할 생각은 별로 없다. 이 세계 자체가 여자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어쨌든 그걸 탓하려는 게 아니고, 적어도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든 바꿔 보기 위해 -사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그 노력 안에는 각종 공부도 포함되어 있다.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어.'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었다지만 공주가 황제를 때린다는 건 이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폐하!'하는 다급한 첫째 오빠의 말이 들려온 걸로 봐서 첫째 오빠도 지금 엄청 똥줄타고 있을 거다. 걱정 마요. 절대 안 때리니까. 다행히도 나는 이런 상황을 이미 겪어 봤다. 경험해 본 것과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대단한 차이가 있다. '우리 개차반씨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우리 개차반도 안 때리면 사형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명령을 내렸었다. 나는 그 때 차라리 죽겠다며 대꾸했다. 그걸 조금 응용했다. "미천한 소녀가 어찌 태양 같은 황제폐하의 옥체에 손 끝하나 댈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제부터 진짜 연기 돌입이다. "차라리... 소녀를 죽여주세요." 문득 내 처지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어찌 잘 살아남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이쁨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정도다. 이 세계를 바꾼다? 아직까지는 꿈도 못 꾸는게 내 실정이다. 이쁨 받기 위해 갖은 애교를 부리고 비위를 맞추며 살아간다. 솔직한 말로 자존심도 많이 상한다. 나도 사람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말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내 반응을 생각하지도 못했는지 황제가 피식 웃었다. "뭐라고?" "소녀가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차라리 소녀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어요." 나는 지금 황제보다 한 계단 아래에 서있는 상태다. 나는 황금 계단에 온 힘을 실어 머리를 박았다. 정말 세게 박았다. '으...제발...!' 황제 앞에서 어설픈 술수는 통하지 않는다. 어설픈 연기를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썼다.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아프지 않았다. 황제의 황금계단은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력계단이라고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황제가 넘어지거나 왕자가 넘어질 때를 대비하여 모든 충격을 계단이 흡수하도록 되어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다가 알아낸 사실이다. 사실상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도박을 했다. 내가 실제로 목숨을 걸었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그 결과. 성공이다. 황제는 허허, 거리고 웃었다. 좋아. 정신 똑바로 차려 김상희. 너는 계속 연기에 몰입해야 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눈물은 멈췄는데 일부러 슬픈 생각을 하면서 더 울려고 노력했다. 다시금 머리를 박았다. 역시 아프지 않았다. 여러 번 더 시도해봤다. 안 아팠다. '제발 눈물아. 나와줘.' 다행히 내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펑펑 울었다. "소녀가 큰 잘못을 저질러 죽고자 하였으나 어쩐 일인지 아프지 않습니다, 폐하.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뒤돌아서 말했다. "오라버니. 소녀를 죽여주세요. 이상하게 소녀는 죽을 수가 없어요. 조국에 피해를 입히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아요." 이제 슬슬 떡밥을 물 때가 됐는데. "됐다. 됐어. 가만히 있어라." 물었다. 황제가 드디어 떡밥을 물었다. 황제가 턱을 매만졌다. "당돌하고 또 귀여운 구석이 있는 계집아이로구나." "......." 나는 고개를 숙이고 펑펑 우는 시늉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늉이 아니고 진짜로 울긴 울었지만. "그리고 아주 똑똑한 아이야. 흠. 이걸 어쩐다." 그 때, 우리의 희망. 내 희망. 나의 사랑. 우리 첫째 오빠가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고려왕국의 국왕 김훈상은 마력을 움직여서 자신을 때리게 만들었습니다." 옳지. 우리 큰 오빠. 압존법도 정확하게 지키는구나. 고려왕국의 경우는 압존법을 딱히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제국은 압존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했다. 왕보다는 황제가 높다. 그러니까 황제 앞에서는 왕을 낮추는 게 맞다. 황제는 껄껄대며 웃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어. 어어. 어라. 이, 이게 아닌데. 나는 하늘을 날았다. 내 주먹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주먹에 뭔가가 닿았다. 황제의 배였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건 승차감(?)부터가 다르다. 나는 확실히 느꼈다. '개차반이... 비행기 태워주는 건 진짜 나를 많이 신경써준 거구나.' 이제서야 알았다. 방금. 아주 짧은 거리를 날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괴로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내 작은 몸을 아무렇게나 막 움켜쥐고서 옮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개차반이 나를 이리저리 날려댈 때에는 그런 느낌은 없었다. 하늘을 나는 것 자체가 무서웠던 것 뿐이다. 몸은 오히려 안락한 느낌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근육통이 느껴질 것 같았다. "확실히 계집에게 재미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구나."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김형석에게 안겼다. "오라버니!" 두 팔로 큰 오빠의 목을 감싸안고 칭얼거렸다. 우리 형석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옳지. 바로 이거야. 이 안락함. 이 편안한 느낌. 너는 왜 하필 내 오빠로 태어난 거니. "잘했어. 네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구나." 솔직한 말로 나는 정말 무서웠다. 황제가 정말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당장 떠올려 봐도, 감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해? 라는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을 거다. 다행히도 황제는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내 능력에 대해 파악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또 의문점이 생긴다. '도대체 왜?' 내 능력은 보잘 것 없다. 마력운용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는 했으나 능력 자체가 뛰어나지 않아 있으나마나한 능력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능력 때문에 황제가 친히 나를 불러 보자고 했고 -이 세계에서 일국의 공주가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본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다.- 심지어 자신을 때려보라고 했다. 엄청나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 정도의 능력은 분명 아닌데. 어째서일까?' 우리 첫째 망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힘드시다. 추접한 짓 그만하고 내려와." "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 우리 상희 공주님 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오빠는 아직도 가슴이 떨려. 정말 침착하게 잘 대처했어." 황금계단이 충격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책에서 읽고, 또 올라가면서 발바닥으로 그걸 느꼈기 때문에 망정이지 몰랐다면 그냥 말로만 죽여주세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라버니께서 뒤에 계셔서 소녀는 정말 든든했답니다." *** 김환석은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안 든다. "오라버니!" 김상희가 칭얼대며 형에게 안겨있는 모습을 보니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별로다. 왜 기분이 별로일까를 생각해봤더니 합당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형님 힘드시다. 추접한 짓 그만하고 내려와." 그래. 그래서 기분이 나빴던 거다. 감히 계집애 주제에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님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김형석이 말했다. "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 우리 상희 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오빠는 아직도 가슴이 떨려. 정말 침착하게 잘 대처했어." 김형석이 하나도 안 힘들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역시 이유는 하찮은 계집애 따위가 형님에게 안겨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형님. 그냥 이 하찮은 계집을 안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힘드실까 걱정 됩니다." 김형석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래?" 김상희는 솔직히 싫었다. 김환석의 품은 전혀 안락하지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오히려 가시방석이다. 불편한데다가 아직 김형석보다 체구도 작아서 폭 안겨있는 느낌이 안 든다. 하지만 김환석의 말대로 김상희는 하찮은 계집이며 딱히 거부할 권리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김환석이 김상희를 받아 들었다. 김환석은 그제서야 기분이 좀 풀리는 걸 느꼈다. "미천한 계집 주제에 감히 형님을 힘들게 하다니." 형석은 앞장 서서 걸어가면서 계속 빙그레 웃었다. 그의 눈엔 동생들이 귀엽게만 보인다. 요즘 들어 환석이가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자기 몫으로 2인분을 요청해서 1인분은 상희한테 준다지?' 이건 엄청나게 파격적인 거다. 일국의 왕자가 하찮은 공주를 신경써 준다니.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김상희 주변에는 파격밖에 없는 것 같다. 황제와의 면담도 파격. 식사 사건도 파격. '그렇게 따지면 왕자의 품에 안겨있는 것도 사실 파격이지.' 정작 본인인 환석이는 별로 자각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만큼 많이 변한거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에는 계집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발로 차거나 욕을 했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젠 안아들고 있다. 겉으로는 틱틱대고 있으나 그래도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황제께서는 도대체 왜 상희를 보자고 하셨을까?' 그 역시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황제에게 '왜 상희를 불렀고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까?'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타국의 왕자가 감히 황제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질문할 수는 없는 거니까. "오, 오라버니. 소녀는 이제 걸을 수 있어요. 내려 주시어요." 김환석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계집.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소, 소녀는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럼 닥쳐." 뒤의 말이 생략 됐다. 형석의 귀에는 환석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닥치고 그냥 안겨 있어.' 라고 들렸다. *** 황궁 내 호텔 앞. 김환석 일행은 여기에 약 3일 정도 더 머물러야 했다. 내일은 상아가 황제를 뵙기로 했고 그 다음날 쯤 왕국으로 되돌아가기로 되어 있으니까. 김상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 사람들이 쳐다봐요. 소녀는 너무나 부끄러워요." 김상희는 여전히 김환석에게 안겨 있는 상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호텔 로비. 시녀들은 저들이 누군지 알아봤다. 속닥거렸다. "설마 시체인가?" "그, 그렇겠지. 시체가 아니고서야 왕자님께서 공주를 안고 있을 리 없잖아."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시체라는 것이 그럴듯 했다. 왕자가 기분이 나빠져 공주를 죽였고 황궁 내에 시체를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아, 아냐. 지금 저 공주 움직였어." "마, 말도 안 돼. 그럼 지금 저 공주 왕자님께 안겨 있는 거야?" 그녀들은 문화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눈을 비벼봤다. 눈을 비벼봤는데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공주가 살아있는 상태로 왕자에게 안겨 있었다. 그제서야 형석이 말했다. "그만 내려주는 것이 좋겠구나. 사람들 이목이 너무 쏠려." 김환석은 저도 모르게 칫, 하고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퉁명스레 말했다. "또 형님 귀찮게 하지 마라. 하찮은 계집 주제에." 이번에도 김형석의 귀엔 다르게 들렸다. 또 형님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안겨. 진짜 김환석의 속마음이야 알 길 없지만 어쨌거나 형석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형석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또다른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호텔까지 자연스럽게 따라와 버렸네.' 또 빙그레 웃었다. 왕자씩이나 되어서 공주를 배웅하러 여기까지 쫓아왔다. 이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주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잘 가라고 하는 게 맞는 거다.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환석이가 안고 왔으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형석은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는 상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참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이야.' 뭔가 마음이 뿌듯해졌다. '보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아져. 어린아이지만서도 어린아이 같지 않고.' 김형석은 몰랐다. 김상희 안에 30대 아줌마 있다는 것을. 한편, 김상희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상아가 달려와 안겼다. "언니! 상아는 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송수진도 김상희를 맞이했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저녁이 됐다. 누군가 찾아왔다. '누구지...?' 김상희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제국의 6황녀. 프리지아라고 해요. 반가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아가 태어나기 전 까지- 마력 운용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여성. 그리고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상희에게는 굉장히 특별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한진수를... 좋아한다는 그 여자.' 제국의 6황녀. 제국의 꽃 프리지아가 김상희를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차라리 죽겠습니다 파트가 끝났습니다. 오전 9시 이전에 보시면 무료. 오전 9시 쯤부터는 유료로 돌입하게 될 것 같아요. 유료화 돌입 기념으로 오전에 한 편 더 올라갑니다. 많은 댓글이 달렸네요. 대부분의 댓글은 그냥 두었지만 직접적인 욕, 비난 코멘트는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이 응원해주셨네요.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 내일 (3월 4일 10시쯤) 에 새로운 편으로 찾아 뵐게요 ^^ 0034 / 0192 ---------------------------------------------- 김상희를 어떻게 생각하냐? (유료시작편 - 기존독자님들은 여기서부터 보시면 됩니다.) *** 며칠 전. 한진수가 김상희를 만나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온 날 밤. 곽씨 후작가의 막내아들이자 한진수의 절친한 소꿉친구인 곽기현은 배시시 웃으면서 한진수에게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그와 동시에 저만치 날아가 침대에 처박히긴 했지만. 이제 이것도 익숙한 곽기현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따지지도 않고 물었다. "그래서. 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그런 거 없어." "아냐. 너 표정이 이상해. 분명히 뭔가 있어. 혹시 김상희랑 싸웠냐?" "그럴 리가." 한진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싫다. 너 따위가 자꾸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널 단순한 약혼녀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돌이켜 생각해봤지만 왜 굳이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약혼녀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냥 철저하게 무시했으면 되었다. '이 이상한 기분은 도대체 뭐냐.' 모르긴 몰라도 그 날, 김상희는 거의 울먹거렸었다. 아니. 이것도 이상하다. 김상희는 분명 웃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는데 한진수는 그 김상희가 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모르겠다. 굉장히 무거운 납덩이를 심장에 매달아놓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뭔가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아냐. 천하의 한진수를 이렇게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은 하나 밖에 없어. 김상희. 그 이상한 계집아이." "닥쳐." "이야. 좋겠다. 제국 황녀한테. 그것도 세계 유일...아니. 이제 유이한 마력 운용 여성에게 고백을 받질 않나. 아직 어리긴해도 예쁘고 당돌한 약혼녀가 있질 않나.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거야?" "......." 어차피 결혼은 해야한다. 왕가와 이미 약속되어 있다. 왕가와의 약속을 깰 수는 없다. '아니. 나는 결혼 따위 하고 싶지 않아.' 그 이상한 계집아이와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다. 머리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누구를 첫째 아내로 할 거냔 말이지. 사실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약혼은 약혼이니. 약혼녀와 결혼을 할 거야." "그럼 김상희를 첫째 부인으로? 그래도 상대가 프리지아인데? 마력운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프리지아의 신분은 훨씬 높아졌어. 게다가 황녀고. 그런데도 김상희를 첫째로 삼겠다는 거야?" "닥쳐. 잠 좀 자게." 한진수는 마력을 사용해서 곽기현의 입과 자신의 귀를 동시에 막아버렸다. 곽기현이 무어라무어라 소리를 질러대긴 했는데 그 소리는 곽기현의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한진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난... 김상희 한 명하고만 결혼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혼은 한 여자하고만 할 거라는 무의식 아닌 무의식이 느껴졌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는 일부일처제 같은 이상한 법이나 제도는 없었다. 오히려 강한 힘을 가진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에게도 그건 좋은 일이었다. 여성은 철저한 약자의 신분이니까. 따지고 보면 프리지아 역시 상당히 훌륭한 신붓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또 이상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을게. 일찍 들어와. 그 때와 똑같았다. 이런 이상한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텅 비어버린, 동굴 같은 머릿속에 누군가가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동굴 안에서 웅웅 거렸으며 또 메아리쳤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 프리지아는 제국의 6황녀다. 여자들 중 신분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마력 운용이 가능한 여자였으니까. 그 능력 자체가 월등히 뛰어나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여자의 몸으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리지아가 특별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고려왕국의 공주 김상희가 제국의 꽃. 프리지아 황녀님을 뵈어요." "같은 여자끼리 너무 그렇게 격식 차리지 말아요. 어차피 우리 다 같은 처지인데." 프리지아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말했다. "수진. 차라도 한 잔 대접하도록 해." "네. 공주님." 우리 상아와도 간단하게 인사를 마쳤다. 겨우 4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지만 그래도 예의를 잘 갖췄다. 오구. 기특해. 내 새끼. "내가 공주님을 찾아온 이유. 말 하지 않아도 알죠?" 짐작은 간다. "제 약혼자에게 고백을 하셨다 들었어요." 이 것 역시 파격이라 할 수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대시를 하다니.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다. '역시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르긴 다른가보다.' 프리지아가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나는 공주님과 잘 지내고 싶어요. 어차피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될 텐데. 미리 얼굴도 익혀 놓고." 프리지아가 찾아왔을 때부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비슷한 말을 할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어차피 일부일처제따윈 없는 세상이고 일부다처제가 당연시 되는 곳이다. 제국의 황녀라고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프리지아는 우리 송수진씨가 타준 페퍼민트티를 마셨다. 나는 프리지아를 쳐다봤다. 황녀라더니. 확실히 예뻤다. 솔직한 말로 나는 이 세계의 한진수가 왜 프리지아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않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잠깐 봤을 뿐이지만 성격도 그리 모나 보이지는 않고 예쁘다. 게다가 마력까지 사용 가능한 여자다. 일반 여자보다 당연히 모든 면에서 특출날 거다. '잘 지내자고 말을 해야해.' 어차피 내가 아닌 나로 살아왔다. 그런데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잘 지내자고 말해. 김상희.' 하지만 이 것만큼은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곳의 한진수는 내가 살던 곳의 한진수가 아니다. 그건 분명히 알고 있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을게. 일찍 들어와. '아...'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제국의 6황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말이 나오질 않는지 모르겠다. 그까짓 거. 그냥 말하면 된다. 그래요. 같은 남편을 두게 될 여자끼리 잘 지내봐요. 그리고 방긋 웃어주면 된다. 모든 게 오케이다. 한진수가 내게 했던 말들 중 하나가 또 떠올랐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 언젠가 내가 장난스레 말했던 적 있다. 다시 태어나도 또 나랑 결혼할 거야? 그렇게 물었었다. 진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었다. '그럼. 당연하지.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 그 당시 나는 '웃기고 있네. 그 때는 더 어리고 이쁜 여자 찾을 거면서.'라고 핀잔을 줬었다. 예전의 추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자꾸만 기억의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지금이 그랬다. 프리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김상희 공주와 잘 지내고 싶어요. 서로 남아를 낳기 위해,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되지 않았으면 해요." *** 곽기현은 호들갑을 떨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너 황궁 들어오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황궁은 외성과 내성으로 분리 된다. 외성까지는 비교적 일반인들의 출입도 자유롭다. 일단 규모가 엄청나다. 황궁 안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도시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곳에는 귀빈들을 모시는 호텔이 있다. 고려왕국의 김환석 왕자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진수는 귀찮다는 듯 곽기현의 입을 다시 막아버렸다. 곽기현이 항의했지만 소용 없었다. 한진수는 세계가 인정하는 이 시대의 천재였고 곽기현은 그의 마력 컨트롤에 저항할 수 없었다. "왕자님 뵈러 왔다고 분명히 말했어." 아오씨. 왕자님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래도 너 수상해. 김상희 보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곽기현은 따지고 싶지만 따지지 못했다.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이 치사한 놈아! 내가 널 죽이고 천국 간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욕도 마음껏 했다. 한진수와 곽기현은 걸음을 옮겼다. '어라. 얘는 갑자기 또 왜 마력을 저렇게 끌어 올려? 누구랑 대판 싸우려는 것도 아니고.' 마력을 운용하는 본인이 아니어서 도대체 뭘 하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한진수의 지금 상태는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다. 한진수쯤 되는 놈이 마력을 완전히 끌어올리면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지금이 그랬다. '저러면 체력소모가 심할 텐데.' 마력을 끌어올린 한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김상희 공주와 잘 지내고 싶어요. 서로 남아를 낳기 위해,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되지 않았으면 해요." 위치는 5층 정도라 짐작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프리지아...?' 프리지아의 목소리였다. 김상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청력을 더욱더 끌어 올렸다. 김상희의 심장소리라 짐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한 건 아니다. 프리지아 바로 앞에서 들리는, 요란하게 두방망이질치고 있는 심장소리. 확실하진 않은 건데, 한진수는 이게 김상희의 심장소리라고 확신했다.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냐?' 한진수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마력을 풀어 버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것 투성이다.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낱 하찮은 계집아이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곽기현이 따졌다. "야. 너 진짜 내 입이 호구냐! 앙? 맨날 내 입을 막..." 입이 또 막혔다. 곽기현은 속으로 또 따졌다. '아오 이 나쁜 새끼! 맨날 나만 갖고 그래!' 곽기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진수는 걸음을 계속 옮겼다. "17층." 17층으로 향했다. 고려왕국의 둘째 왕자. 김환석이 있는 곳이다. 핸드폰을 통해 미리 약속은 잡아 놨다. 시계를 살펴보니 아직 늦지는 않았다. '나는 이 곳에 왕자님을 뵈러 온 거다.' 사실 둘째 왕자 김환석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서로 얼굴은 알고 있고 인사는 하는 사이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계집 따위를 보러온 것이 아냐.' 한진수는 자꾸만 드는 이상한 생각을 애써 외면하고 세뇌했다. 한진수와 곽기현은 김환석을 찾아갔다. 미리 약속을 잡아놓은 대로 김환석은 한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앉아." 김환석은 공주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럴만도 했다. 김환석은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으며 여자 보기를 벌레보듯 봤으니까. 그러나 그건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원래 김환석 자체가 표정이 별로 없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날 왜 보자고 했지?" 곽기현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별 볼 필요도 없는데 왜 굳이 시간 빼서 찾아왔냐? 너 그렇게 한가하지 않잖아.' 한진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조국의 왕자님께서 오셨는데 당연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맞지요." 김환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진수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안 든다. 한진수는 왕국의 인재다. 김환석도 그걸 안다. 왕국에 보탬이 되면 되었지 피해를 줄 녀석은 아니다. 그걸 확실히 아는데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군."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김환석은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뭔가가 뭔지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얘기. 서로 안부를 묻는 얘기를 좀 더 나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김환석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말 하려고 자아성찰을 굉장히 오래했다. "너." "네. 왕자님." "김상희를 어떻게 생각하냐?" 이제야 속이 후련해졌다. 이걸 왜 묻는 건지 스스로도 몰랐지만 어쨌든 속이 후련해졌다는 건 확실했다. 곽기현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와, 왕자님이 왜 저래?' 한낱 계집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왕자님이 직접 묻는단 말인가. 문화 충격. 컬쳐쇼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다. 애초에 계집은 그냥 시집이나 와서 수발이나 잘 들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냐니. 이건 솔직히 말해서 예의에 어긋나는 거다.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진수 성격에 기분 엄청 나쁠텐데.' 한진수가 그렇게 고분고분하기만한 성격은 아니다. 곽기현은 그걸 안다. '그래도 왕자님 앞이니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힐끗 옆을 쳐다봤다. 그런데 또 이상했다. '어라. 화 안난 거 같은데?' 분명 화가 나야 하는 일인데 화를 안 내고 있다. 곽기현은 한진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특히 화가 나면 오른쪽 눈썹이 움찔 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반응이 전혀 없었다. '뭐야. 이 상황은?' 그 때.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어차피 결혼은 해야한다. 왕가와 이미 약속되어 있다. 왕가와의 약속을 깰 수는 없다. 진수: "나는 절대로 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 아님(단호) 야. 비츄. 뭐라고 말 좀 해봐. 진짜잖아. 네가 서술 저렇게 했자나. ㅡㅡ" 작가: ㅋ 0035 / 0192 ---------------------------------------------- 김상희를 어떻게 생각하냐? *** 김환석의 황당한 질문에 대한 한진수의 대답은 꽤나 정석적이었다. "그 계집은 제 약혼녀입니다. 약혼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환석은 순간 인상을 찡그렸다.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약혼녀가 맞다. 이 약혼은 왕인 아버지께서 김상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성사시켰다. 그 말이 맞긴 맞는데 뭔가 미묘하게 원하는 대답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렇군." 트집 잡을 구석이 없었다. 김환석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왜 트집을 잡으려 드는 거지?' 한진수의 트집을 잡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잘해줘야 한다. 왕국의 인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트집을 잡으려 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상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김환석이 좀 더 정상적인 대화를 진행시켰다. "어쨌든 굳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하러 왔다니 고맙군." "별 말씀을요." 곽기현은 말하고 싶었다. '아닌데요. 쟤 왕자님 보러 온 거 아니고 김상희 때문인 것 같은데요.' 곽기현이 물었다. "왕자님. 그런데 왕자님은 김상희를 제법 아끼는 것 같던데요?" 김환석이 곽기현을 쳐다봤다. "내가? 그 계집을?" "네. 보니까 그런 것 같던데." 김환석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봐야 한낱 똥개일 뿐이다." 그 때, 한진수가 움찔했다. 정말 모르겠다. 마음 속에서 뭔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하마터면 '그래도 똥개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말할 뻔 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참아냈다. 김환석이 말했다. "그러는 한진수 너야말로 그 계집을 많이 아끼는 것 같더군." "아무리 그래봐야 한낱 약혼녀일 뿐입니다." 한진수가, 김환석이 그랬듯 똑같은 대사를 단어만 바꿔서 되받아쳤다. 그러자 김환석은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정확하게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기분이 안 좋았다. 사실 한진수의 얼굴을 볼 때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곽기현은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잘은 모르겠는데 김환석 왕자와 한진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씨. 뭐야. 이상해. 분위기 어쩔 거야. 둘 도무 겉으로는 적대감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괜히 긴장됐다. "하하하! 자. 자. 귀하신 분들이 이 곳에 모였는데 하찮은 계집 얘기는 그만 두죠?" 김환석과 한진수가 동시에 곽기현을 쳐다봤다. 곽기현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김환석의 눈빛과 한진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내, 내가 뭘 잘못 했나?' 김환석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네 생각만큼이나 하찮은 계집은 아니다." "...예?" 곽기현은 믿을 수 없었다. 후작가의 막내 아들 앞에서 여자를 두둔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김환석은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똥개 치고는 괜찮다는 뜻이었다." 곽기현은 납득하며 차를 홀짝였다. 그러나 한진수의 예리한 눈은 놓치지 않았다. '왕자님의 귓볼이... 조금 빨개진 것 같다. 내 착각인가.' *** 전날에는 김상희가 황제를 만났다. 이번에는 김상아가 황제를 만날 차례다. 상희는 상아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상아야.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입을 열지 마. 알겠지?" 제국에 오기 전부터 신신당부했던 말이다. 상아는 어리다. 어려서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차라리 말을 아예 안하는 게 좋다. 상아는 상희의 말을 굉장히 잘 따른다. 제국에 온 이후로 거의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상아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우리 이쁜 상아. 긴장하지 말고 조심히 잘 다녀오렴." 왜 자신과 상아를 따로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보는게 황제에게도 시간적으로 이득이 될 텐데. 황제의 1분 1초는 일반 사람들의 1분 1초와는 다르다. 일반 사람들의 1분이 100원의 가치를 가진다면 황제의 1분은 100만원의 가치를 가진다. 정확한 수치라고 보기에는 힘들었지만 하여튼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상할 수 밖에 없었다. 굳이 타국의 공주들을 불러 얼굴을 보고 얘기하다니. '그나마 형석이가 같이 가줘서 정말 다행이야.' 상희는 형석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엄마 미소'. 조금 더 우겨본다면 '누나 미소'정도 쯤 되겠다. 형석도 상아가 걱정 되었는지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우리 첫째 망나니도 좀 배워야 할텐데. 세심하고 부지런하고 다정하고 자상하고.' 하기야 첫째 망나니가 자상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첫째 망나니야말로 망나니의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망나니아니던가.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하고선 초조한 마음으로 상아를 기다렸다. 김상희는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오라버니!" 김형석이 상아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걸어왔다. 형석이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상희와 눈을 마주쳤다. "걱정 많이 했구나, 우리 공주님?"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상아에게 어제와 같은 분부를 내리시면 어쩌나하고 계속 가슴 졸이고 있었어요." 황제는 어제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대뜸 김상아를 마력으로 띄워 가까이 오게 만든 뒤 상아의 팔목을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나서, 흠. 그렇군. 하고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다음 밖으로 내보냈다고 했다. "다행히 별 일 없었어." 형석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황제가 세계의 '유이'한 마력 운용 가능 여성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일이 하나 끝나자 김상희는 또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소녀는 자상하고 다정하신 오라버니와 또 떨어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오라버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으면 소녀는 어떡하죠?" 형석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환하게 웃었다. 아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상희를 쳐다봤다. "그 땐 오라버니가 우리 공주님을 보러 왕국으로 가면 되지요." "오라버니. 소녀 부탁이 한 가지 있어요.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엄. 당연하지. 말만 해보렴. 김형석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꾸했다. "3초만 소녀에게 오라버니를 빌려주시어요. 3초만 시간을 허락해 주시면 좋겠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3초 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계시면 될 것 같아요.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면 안 들어주셔도 괜찮아요. 소녀는 상처받지 않아요." 김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리한 부탁일 리 없지.' 언제나 김상희는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그 위치 내에서 당돌해 보이기는 할 지언정 선을 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언제가 됐든 땅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는 위치라는 걸 분명히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형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절대 눈을 뜨시면 안 돼요." 송수진은 그런 김상희를 부럽다는 듯 쳐다봤다. 어쩜 저렇게 앙큼한 공주님이 있을 수 있나 싶다. 감히 고려 왕국의 첫째 왕자에게 '3초동안 가만히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계집이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김상희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신세계다. 내용을 살펴보면 명령인데 그게 명령같지 않게 느껴진 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공주님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김상희가 걸음을 옮겼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김형석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소녀는 오빠가 정말 좋아요. 너무나 의지가 되어요. 항상 감사해요." 김상희는 말하면서도 흐뭇했다. 사실 김환석과 김환성. 혹은 김훈상에게 애교를 부릴 때에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을 느낀다. 아냐. 이건 내가 아냐. 라고 수없이 되새긴다. 그러나 김형석을 대할때는 느낌이 약간 다르다. '그래. 누나야 누나. 아. 마음 같아선 누나라고 해보라고 시키고 싶다.' 오히려 흐뭇하다. 3초의 시간이 흘렀다. 김상희는 부끄러움을 타는 12세 소녀를 연기했다. 마음 속으로는 '나 누나야. 들어와.'라고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부끄러운 척 연기했다. 누가봐도 부끄러움을 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김형석은 김상희를 높이 안아들었다. 김상희는 깜짝 놀랐다. "오, 오라버니!" "그거 말고." 높이 들려진 김상희의 눈에 환하게 웃고 있는 김형석의 얼굴이 보였다. 김상희는 직감했다. 이 아이도 남자긴 남자구나. 오빠소리가 듣고 싶은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쉽게 줄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밀당은 필수다. "소,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김형석은 조금 아쉽다는 듯 김상희를 다시 내려줬다. 사실 '오빠'라는 단어는 잘 쓰는 단어도 아니고 격식있는 단어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의 사장된 단어다. 옆에서 송수진이 보고 있는데 제 입으로 '오빠라고 해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김형석은 흐뭇해졌다. "우리 공주님. 어떻게 시집 보내지? 겨우 3년 밖에 안 남았네." *** 황제의 밀실. 사실 '밀실'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황궁 내 어딘가에 황제와 그 최측근만이 사용하는 '밀실'이 있다고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규모는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들어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밀실은 분명히 존재했다. 황제가 말했다. "고려왕국의 두 계집아이를 관찰해야 할 거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공이었다. 그랬는데 누군가가 나타났다. "김상아와 김상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누군가가 말했다. "그 계집아이들에게는 현재 김유신이 붙어 있습니다. 접근하기 힘듭니다." 황제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공주를 불렀는데 왕자가 따라올 줄은 몰랐다. 하기야. 제국에 큰 형님뻘인 김형석이 있으니 만나 뵙고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데 막을 명분이 없었다. 둘째 왕자가 움직이니 김유신이 같이 움직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설마하니 김상희나 김상아 때문에 그런 거물이 움직였을 리는 없고 말이다. "지금 당장 붙으라는 말은 아냐. 향후 수 년 이내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알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다른 놈들은 몰라도 스페셜 나이트는 조심해야 해." "최대한 거리를 두고서 관찰하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말했다. "김상아보다는 김상희라는 계집을 더 유심히 살펴야 할거야." "알겠습니다." "1차 각성이 시작되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 1차 각성이 이루어질 지,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제는 1차각성이 이루어질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남자가 사라졌다. 황제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필이면 고려왕가의 계집이라니." *** 한진수가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나는 네가 싫다." 곽기현은 한진수를 쳐다봤다. 아닌데. 프리지아 쯤 되는 여자 진짜 흔치 않은데. 몸매도 훌륭하고 게다가 마력도 있어서 노화도 느리고. 프리지아 어떻게 해보고 싶어서 안달난 애들도 널리고 널렸는데 너 혹시 눈알이 삐꾸냐? 하고 묻고 싶었다. 프리지아는 별로 충격 받지 않은 듯 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이 좋아요. 결국 당신은 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에요. 전 당신과 결혼하고 말겠어요.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넌 내 스타일이 아냐." 곽기현은 이번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프리지아는 애초에 '스타일'을 운운할 사람이 아니다. 그냥 호불호 갈리지 않고 누가 봐도 아름다고 예쁘다. 곽기현 뿐만 아니라 학원생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괜히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아무리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지만 남자도 아니고 한낱 계집에게 '꽃'의 칭호가 붙었다는 건 정말로 아름다워야만 가능한 칭호였다. '애초에 프리지아는 호불호가 갈리는 예쁨이 아니잖아. 그냥 누가 봐도 미인인데.' 일전에 얘기를 나눈 적도 있다. 한진수도 프리지아가 아름답고 예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런 주제에 지금은 '넌 내 스타일이 아냐'라고 말하고 있다. 참 앞 다르고 뒤 다른 놈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는 프리지아가 이쁜 건 정말 이쁘다며? 이쁘면 장땡이지 뭘.' 언제나 그러했듯 한진수는 등을 돌렸다. 프리지아는 그 등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 한편, 한진수는 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그 계집아이가 떠오르는 거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된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능력있는 남자가 여자 여럿 거느리는 건 당연한 거다. 아니 여자들도 오히려 그걸 바란다. 그렇게나 당연한 일인데 자꾸 알지 못할 거부감이 들었다. 프리지아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올 때면 항상, 어김없이 김상희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아직 12살밖에 되지 않은 그 꼬맹이가 말이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송수진이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 성년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계시나요?" ============================ 작품 후기 ============================ 정확하게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기분이 안 좋았다. 사실 한진수의 얼굴을 볼 때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너만 모르는 이야기. part 1 *** "하하하! 자. 자. 귀하신 분들이 이 곳에 모였는데 하찮은 계집 얘기는 그만 두죠?" 김환석과 한진수가 동시에 곽기현을 쳐다봤다. 곽기현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김환석의 눈빛과 한진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내, 내가 뭘 잘못 했나?' 너도 모르는 이야기 part2. +상세설명: 본격_나는 하찮다고 말해도 되지만 너는 안 돼_txt 0036 / 0192 ---------------------------------------------- 그 왕자의 분가 스케일 *** 지난 3년. 그러니까 제국의 태양. 제국의 황제가 나를 불렀을 그 때 이후로 3년 동안 가장 큰 변화를 꼽아 보자면 한진수를 들 수 있겠다. 한진수는 제국의 마력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귀국하는 대신 제국의 나이트로 길을 잡았다. 우리 왕국과 제국의 군사 협조는 제법 긴밀한 편이었는데 제국의 나이트로 오래 활동하게 되면 왕국으로 돌아와서도 요직을 맡기가 굉장히 편하단다. 한진수는 전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수재답게, 지금의 제국이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전 세계의 군대와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엄청난 화력과 무력을 지닌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에 들어가게 됐다. 언젠가 우리 송수진씨가 내게 물었던 적이 있다. "공주님. 그런데 도대체 프리온 나이트가 무엇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난리일까요?" 나야 도서관이라도 자주 사용할 수 있지만 시녀들은 아니다. 시녀들은 시중드는 것 외에, 다른 일들은 거의 아무것도 못한다고 보면 됐다. 이들은 지구와는 달리 별다른 교육도 받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시녀로 커서 시녀로 생을 마감하게 되니까. 정보도 굉장히 많이 제한받는다. 그렇다보니 시녀들은 그 유명한 프리온 나이트에대해서도 잘 몰랐다. "프리온 나이트는 제국내에서 가장 강한 나이트라고 보면 돼. 우리 왕국의 스페셜 나이트처럼." "우와! 그럼 한진수님은 정말 엄청난 분이시군요!" 단순히 엄청나다라고 표현하기에도 좀 그랬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프리온 나이트는 자국민. 그러니까 제국출신의 사람만 뽑는다고 들었다. 사실 프리온 나이트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집단이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뽑히게 되는지, 또 어떻게 수련을 하는지, 또 평소에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프리온 나이트는 확실히 존재하는 집단이었다. '92년 전. 프뤼앙뜨 멸망. 40년 전. 몽베르크 멸망. 16년 전. 도르긱 멸망. 그리고... 4년 전 푸릭스 멸망.' 프뤼앙뜨. 몽베르크. 도르긱. 푸릭스. 최근 멸망한 국가의 이름이다. 특히 4년 전에 멸망한 푸릭스는 제법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였다. 군사규모, 경제규모. 아주 잘난 왕국이라 하기에는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약소국은 절대 아닌 나라였다. 그러나 그 왕국은 불과 30일만에 멸망했다. 바로 프리온 나이트에 의해서 말이다. '프리온 나이트가 전면에 나서는 일은 별로 없지만...' 프리온 나이트는 전면에 나서질 않는다. 평소에는 모습조차 관측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떠한 일이 생기면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집단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국의 창이자 방패였다.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프리온 나이트 80명이 왕국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고 했어.' 프리온 나이트의 숫자는 대략 300명. 이 역시 공식적인 숫자는 아니다. 호사가들이 그냥 이 정도 되겠거니하고 예측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이면 그 자리엔 개미 한 마리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리는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니까. 그러한 괴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 바로 한진수가 들어가게 된 거다. 나는 지난 3년간 한진수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솔직히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한진수가 이 한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은 자꾸만 그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진수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 *** 3일 뒤면 김상희의 성년식이 진행된다. 하지만 김상희는 그 성년식에 딱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상희의 성년식 1주일 후. 왕국의 경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김환석의 결혼식. 공주의 성년식은 여차하면 생략해도 되는 하찮은 행사다. 그냥 으레 해왔기 때문에 해주는, 거의 그 정도 수준. 그러나 왕자의 결혼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주변 국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제국에서도 축하 사절단을 보낸다. 김환석의 첫 번째 아내가 될 여자는 바로 최승욱 공작의 맏딸이었다. 이름은 최지수. 나이는 16세였다. "어이." "오, 오라버니? 언제 오셨어요?" 김상희는 벌떡 일어섰다. 진수가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 순간. 하필이면 김환석이 김상희를 찾아왔다. 시각은 저녁 8시. '아씨. 하필이면 또 왜 쟤야?' 김상희는 얼른 웃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었는데 그걸 몰래 훔쳤다. 김환석은 그걸 발견한 건지 못한 건지, 그냥 터벅터벅 걸어와 김상희의 침대에 앉았다. "야." "네. 오라버니." 김환석은 시크하게 물었다. "왜 우냐?" "우, 울지 않았어요. 소녀의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그만..." 김환석이 피식 웃었다. "공주는 거짓말하면 사형이다." "오, 오라버니!" 제발. 네 입장에서는 장난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진짜 심장이 철렁해. 김상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김환석이 말했다. "걱정마라. 자주 와 줄테니." 김상희는 순간 귀를 의심해야 했다. 솔직히 눈도 의심했다. 왜냐하면 김환석의 모습에서 김환성의 모습을 얼핏 봤기 때문이다. 김환성은 종종 '오빠가 진짜 멋있지?'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으로 매우 우쭐대며 어깨를 으쓱 거릴 때가 있는데, 방금이 딱 그랬다. 물론 분위기 자체가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김상희가 느끼기엔 비슷했다. '뭐야? 나 방금 잘못 본 거 맞지?' 김상희는 차분히 생각해봤다. 무슨 말인가 고민을 해보니 그 답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야. 너. 설마. 지금.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김환석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김상희는 김환석의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궁을 떠나시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아요. 오라버니가 보고 싶으면 소녀는 어떻게 하죠?" 김환석이 오해한 게 맞다. 김상희는 항상 김환석에게 '보고 싶다' 혹은 '와주셔서 감사하다' 등,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매우 자연스럽게 한다. 그래서 김환석은 생각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김상희는 나를 못 보게 될까 두렵겠지. 슬프겠지.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김상희의 방에 왔는데 김상희가 무척이나 외로운 얼굴로 울고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엄청 단순한 문제였다. '날 엄청나게 좋아하는군.' 김환석이 피식 웃었다. 한편, 다음 날 아침. 김훈상이 김환석을 불렀다. 역시 주제는 김환석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들아." "네." "내가 늙어 죽으려면 아직 멀었구나." "네." 김환석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하지만 잠시 참았다. 아버지의 말을 끊을 수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훈상이 말했다. "분가해라." 왕이 왕자에게 분가하라는 말은 별 거 아니다. 왕국 하나를 새로 건립해서 나가라는 뜻이다. 물론 모든 왕국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왕국을 새로이 건립하려면 자본이 굉장히 많이 든다. 또한 제국에게 허락도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돈과 인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비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까짓거 왕국 하나 세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얘기가 진행됐다. 시간이 흘렀다. 김훈상은 몇 번이고 되물었다. "...정말이냐? 정말로 싫어?"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싫을 리 없다. 비록 고려보다 규모는 훨씬 작겠지만 일국의 왕이 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염원이자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꿈의 지위를 왜 마다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김환석이 대답했다. "예.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김훈상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는 아들을 안다. 아들은 제법 야망도 있고 능력도 있었다. 김환성만큼 무력이 강한 건 아니었지만 일국을 세운다면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했는데 거부했다. 아직 능력이 부족하고 아버님 밑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 김환석의 논리였는데 김훈상은 왠지 께름칙했다. 그래서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 환석이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없는 것 같은데. 네가 지켜본 바로는 어때?" 알렉스의 견해는 달랐다. '어제 김상희 공주님 방에 갔다온다음 마음을 굳히신 것 같은데요.' 알렉스는 송수진과 상당히 많이 친해졌다. 주변 학자들에게는 괴짜소리 듣지만 송수진과 친해져서 좋은 점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 생각에는 왕자님이 분가 안하려는 건... 김상희 공주 때문인 것 같은데요.'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갔나? 왕자님이 김상희공주를 아끼는 게 맞기는 맞지만 그 정도는 아닌가? 알렉스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김환석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아직 왕국을 세우기에 나이가 어리긴 했다. 경험도 없었고. 김환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스 역시 뭔가 찜찜했다. 김환석은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오라버니!" 김환석이 피식 웃었다. 김상희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걱정마라. 하찮은 네가 걱정하는 일따윈 일어나지 않을테니." 그리고 등을 돌려 나가 버렸다. 김상희가 송수진에게 물었다. "수진아.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거야?" "공주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걱정하는 일?" 김상희는 열심히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김환석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분가는 나중으로 미뤄졌다. *** 김상희 공주의 성년식과 김환석 왕자의 결혼식 일정이 겹쳤다. 그래서 왕궁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관리들은 주장했다. 성년식은 가볍게 넘기고 결혼식에 집중하자고. 제국에서도 사신을 파견하는 대행사다. 그 준비에 소홀할 수 없었다. 겨우 공주의 성년식 때문에 시간과 인력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알렉스가 주장했다. "김상희 공주의 성년식은 매우 중요한 행사입니다!" "아. 알렉스 학자님. 또 이상한데서 고집 부리시네." 학자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요즘 알렉스가 너무 이상하다. 사실 이상해진지 벌써 몇 년 됐다. 예전부터 '딸바보'라는 해괴망측한 단어를 사전에 등재하자고 주장하질 않나 -심지어 이건 왕에게 로비하여 실제로 등재시켰다. 물론 실생활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필요없는 단어였다- 시녀인 송수진에게 살갑게 대하고 공주들과도 친하게 지내질 않나. 학자로서 격이 떨어지는 행동. 괴짜같은 행동들을 자꾸만 했다. 한 켠에서는 알렉스가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학자인 오광수가 불만스레 말했다. "폐하와 돈독한 친분이 있는 건 알지만... 알렉스 학자님. 쓸데없는 얘기로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는 조금 불만이었다. 알렉스가 왕과 사적으로도 친분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딸바보'와 같이 얼토당토 않은 단어가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던가. 오광수의 입장에서 그런 단어는 정말 쓸모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해괴한 단어였다. 그래서 오광수는 알렉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주의 일에 신경을 쓰기에는 인력과 시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일정이 겹쳤다고 해도, 충분한 인력과 예산이 있다면 괜찮다. 그러나 왕궁에 놀고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들 원래 바쁘다. 거기에 일정이 두 가지나 겹치면 정신없어진다. 왕자의 결혼식에는 절대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 왕자의 결혼식에 집중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일이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그럼 인력 충원해." 관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인력 충원하면 되잖아." "하오나 폐하..."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잠시간의 행사를 위해 인력을 충원한다는 건 왕실 재정에 상당한 무리가 된다. 예산도 이미 잡혀져 있는 상태다. 여기에 예산을 쓰면 다른 곳에 구멍이 생긴다. 김훈상이 말했다. "예산이 많이 부족한가?" "예. 그러한 인력들을 고용하고 꾸준히 유지하려면 최소 연간 300억 이상의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별 거 아니네." "...예?" "연 300억 지원해줄게. 사비로." 왕의 사재로 연간 300억원을 지원해준다고 했다. 김훈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많이 남네.' 원래 둘째 왕자인 김환석 때문에 연간 500억원 정도는 사용할 생각이었다. 최소한 나라의 기틀을 갖추고 제대로 운영할 때까지 10년을 예상했고 10년간 500억. 총 5000억의 예산을 잡았었다. 그런데 거의 절반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아들이 장사를 안하니 남는 장사가 되어 버렸다. 정말 남는 기분이다. "폐, 폐하!" "어, 어찌 그런 결단을...!" 관리들은 감동했다. 역시 성군이 괜히 성군이 아니었다. 역대 왕들 중에서 이렇게 개인 사재를 왕국에 헌납하는 왕들이 있었던가. 어떤 이는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왕의 선행에 감동을 받아 자신도 재산을 일부 국가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하나의 바람이 불었다. 왕을 본받아 관리들이 기부를 하기 시작한 거다. 아름답고 훈훈한 기부의 폭풍이 왕궁을 휩쓸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역시 왕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역시 성군은 성군이었다. 그런데 다들 성군의, 성군다운 행동 때문에 잠시 자각하지 못했다. 딱 한 명. 알렉스만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다들 연 300억원 지원 때문에 잊고 있는데...' 왜 300억원을 지원 해주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김상희 공주님 성년식을 제대로 치러주려고 저러시는 건가? 아니면 진짜 왕국을 사랑하셔서?' 그렇다면 또 의문이 남는다. 왕국을 사랑했다면 진작에 돈을 풀었어도 됐다. 그간 관리들이 인력 부족하다고 그렇게 하소연을 해오지 않았던가. '요즘은 정말 모르겠군.' 김환석 왕자가 분가를 하지 않은 것도, 왕이 300억을 지원해주겠다고 한 것도. 그 명확한 이유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공주님의 성년식이 진행되겠어.' 같은 시각. 시녀들은 서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한진수님께서 오실까?" "그 분은 너무 바쁘셔서 못 오시지 않을까? 최근 3년동안 안 오셨잖아. 사실... 오실 필요도 없으시고." 겨우 약혼녀의 성년식에 무려 프리온 나이트인 한진수가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보배 수여식때는 오셨잖아." "에이. 그 때는 그냥 겸사겸사 오셨는데 행사가 겹쳤던 것 뿐이겠지." "역시 그렇지?" "하긴... 겨우 공주님의 행사 때문에 그런 분이 오실 리 없을 거야." 한진수는 아마 오지 않을 거다. 라고 생각하는 시녀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김상희는 복도에서 새로운 얼굴을 만났다. 처음보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말했다. "너. 제대로 인사 못하겠니? 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김상희는 이 여자를 처음 보지만,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들아. 집 사줄테니 결혼할래?" "ㄴㄴ여" "그럼 그냥 일단 작은 왕국 하나 만들어줄게. 얼마 안해. 5000억 정도?" "ㄴㄴ여." "왜?" "아직 배울게 넘 많아여. 왕국 같은 거 필요 업음여 ㅋ" "레알?" "넹ㅋ" "그럼 걍 그 돈 빼서 왕국에 쓴다?" "넹 ㅋ" 그리하여 왕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으로 기록되었따 합니다. - 끗 - 알렉스: '김환석 왕자님 도대체 왜 분가 안했지...? 아무리 봐도 배울게 많다는 건 핑계 같은데.' 0037 / 0192 ---------------------------------------------- 김상희의 성년식 ***37 "너. 제대로 인사 못하겠니? 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우리 첫째 망나니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 여자의 말이 틀렸다라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었다. 8세 소녀식 이후로 공주는 왕자에게 극존칭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며 보통은 ‘오라버니’ 대신 그냥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8세가 넘어가면 무조건 ‘왕자님’이라고 부르라는 법 같은 건 없었다. 말 그대로 관습이었다. 이 여자는 나를 죽일 듯 째려봤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누구냐고. 우리 첫째 망나니와 약 1주일 뒤 결혼을 하게 될 여자였다. 이름은 최지수. 자. 그럼 이제 나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저 여자의 말이 반드시 틀렸다고 보기에는 힘들지만 또 그렇다고 아주 맞다고도 보기 힘들었다. 약간 애매했다. 따지고 보면 저 여자는 그런 예법 따위가 중요한 건 별로 아니었다. ‘서열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겠지.’ 공주들은 왕자들과는 눈도 못 마주친다. 그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 공주 혹은 여자라는 아가씨들은 황당하게도 저희들끼리는 서열이 아주 군대보다 빡세다. 나야 뭐, 다른 공주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경험한 것은 얼마 안 되지만 공주들 간의 서열과 위계질서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보면 됐다. 그러니까 내가 한숨을 쉬지. 남자들한테는 끽소리도 못하면서 저희들끼리 언니니 뭐니 하면서 군기를 잡는 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김환석의 아내가 된다면 일반 공주들에 비해 꿀릴 것도 없어. 원래대로라면 왕비가 되고도 남았을 여자니까. 그런 만큼 왕궁 내에서 서열을 확실히 잡고 싶겠지.' 그건 비단 공주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 첫째 망나니는 경험부족을 이유로 하여 분가를 하지 않겠다 결정을 했다고 들었다. 아니. 솔직한 말로 그건 무조건 받아들여야하는 거 아닌가?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겠다. 한국에 있을 때에 결혼을 하게 되면 보통 남자는 집을 하고 여자는 혼수를 장만한다.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때만 하더라도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에선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어쨌거나 여자 입장에서 남자가 집을 장만해온다면 솔직히 나쁠 게 없다. 아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나 같은 경우, 진수도 나도 부유한 편이 아니어서 단칸방에서 시작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여자 입장에서 남자가 경제적인 모든 것을 해결해주길 바라기만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집을 해오면 좋기야 좋다. '그런데 집도 아니고. 나라를 해주겠다는데 그걸 왜 마다해?' 진짜 이해가 안 된다. 왜 자기 스스로 복을 차버리는 건지. 흠흠. 너무 이렇게 말하면 속물같이 보이려나. 아니 왜. 좋은 게 좋은 거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만 나는 진수랑 단칸방부터 시작했다. 속물처럼 보일까봐 괜히 자꾸 강조하는 거 아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진짜야. 믿어줘. 엉엉.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이 여자가 이해된다. 이 세계는 한국이 아니고 이 세계에는 이 세계 나름대로의 법칙과 룰이 있다. 이 여자가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서열관계를 확실히 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 이 곳의 관습상 틀렸다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올케언니라고 해야하나?' 지구에서라면 올케언니나 새언니라 부르는 게 맞다. 하지만 여기엔 다른 선택지가 있다. 형님이란 호칭이다. 올케언니와 형님 중에서 무슨 호칭을 사용할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형님'이란 단어를 더 좋아할 것 같았다. 그 단어가 좀 더 존경의 칭호를 담은 표현이었으니까. "형님의 말에 한 점 틀린 부분이 없어요. 제가 조심할게요. 김환석 왕자님을 부를 때에 좀 더 신경쓰고 유의하도록 하겠어요." 내가 한 수 굽히고 들어가자 최지수는 그게 당연한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향한 적의의 눈초리는 변하지 않았다. 얄밉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야 주제 파악을 하는구나." "죄송해요." "그러게 죄송할 짓은 왜 하는 거니? 듣자하니 네가 보배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던데." 내가 보배의 칭호를 가지게 된 것은 꽤나 유명한 일이다. 상당히 이슈가 되었었으니까. "겨우 그런 허울뿐인 칭호를 믿고 그렇게 기고만장한 건 아니겠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예법에 어두워 실수를 하였어요. 앞으로는 정말 조심 할테니 형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세요." 그래그래. 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맞춰줄게. 적을 만들기에는 내가 너무 바빠.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고. '그런데... 불길하다...?' 나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불길한 기분. 나는 이제 이 기분을 거의 예지력이라고 부른다. 다른 건 예측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도 이 거 하나만큼은 예측이 된다. 이딴 거 예측하고 싶지 않다고. 엉엉. "훨훨 날아라, 우리우리 헝거비!" 젠장. 내가 언젠가 기필코. 기필코 저 되도 않는 '헝거비'란 이름을 가진 저 헝겊인형을 반드시 반토막내고 말리라. 물어왓은 점점 더 진화하여 이젠 심지어 운율까지 갖췄다. 이름하여 '훨훨 날아라 우리우리 헝거비!'. 이 노래가 나오면 헝거비는 언제나 허공을 힘차게 가른다. 헝거비가 허공을 갈랐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어. 어. 어라. 헝, 헝거비가 너무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헝거비는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더니 최지수의 복부에 정확하게 꽂혔다. 언제 날아왔는지도 모를 헝거비가 최지수의 배에 꽂혀 있혔다. 단순히 그랬다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퍽!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좋아. 소리가 났다는 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다. 별다른 문제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꺄아아악!"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거다. 그래. 정말 좋게 마음 써서 비명소리가 들린 것도 문제가 아니라고 치겠다. 정말 정말 문제는 최지수가 약 10미터를 날아가 벽에 쾅! 부딪쳤다는 것 정도. 이게 말이 10미터지 정말 엄청난 거다. 사람을 10미터 넘게 던지는 거 본 적 있는 사람? 아마 없을 거다. 10미터 날아가려면 엄청 빠른 자동차에 쾅! 하고 부딪쳐야 10미터 쯤 날아갈 거다. "아이코. 실수. 미안?"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망나니 자식.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있다. 설마 우리 얘기를 들었나? "내가 그래도 실수한 거 깨닫고 마력보호 걸어줬어." 우리 둘째 망나니는 마력보호 걸어줬다면서 생색을 냈다. 아니. 그럼 애초에 안 날렸으면 됐잖아. 마력보호를 걸어줬다고 주장을 하기는 하는데 최지수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비틀비틀 일어서서 몇 걸음 옮기다가 풀썩 쓰러졌다. 아무래도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어라? 넌 뭐야? 공주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구긴 누구야. 네 형 아내가 될 사람이지. 저 놈의 망나니는 형수님 얼굴도 모른다. 아니. 솔직한 말로 자기 동생들 얼굴도 아마 모를 거다. 공주들이 워낙 많으니까. 봤어도 기억도 안 하겠지. "아. 네가 그 계집이야?" 김환성은 전혀 몰랐다는 듯 걸어와서 낄낄대고 웃었다. "이야. 그래도 다행이다. 결혼식 때 얼굴 망가졌으면 형아한테 조금 미안할 뻔 했는데." 김환성은 쓰러져 있는 최지수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잡고 얼굴을 살짝 들어올렸다. 이모저모 열심히 뜯어보는 시늉을 했다. 최지수는 충격이 정말 컸는지 말도 제대로 못했다. "다행히 얼굴은 안 상했네. 역시 내 마력보호는 탁월했어. 피도 안 났고. 난 천재야. 그렇지? 똥개?" 어서 천재라고 대답해, 라고 주장하는 듯한 저 순진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열불이 뻗친다. 어휴. 저 망나니. 진짜 망나니 아니랄까봐. *** 김상희 공주의 성년식은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 되었다. 학자들과 관리들은 이 괴현상을 두고 잠깐동안 갑론을박 토론을 벌였다. "왕께서 도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것에 투자를 하게 만드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도저히 왕의 결정과 행동을 납득할 수가 없었으니까. 알렉스가 허허- 웃고는 말했다. "왕께서 이번에 수백억. 그것도 매년 수백억을 사비로 기부하신다는 사실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죠." "개인으로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죠." 아무리 광고하고 떠들어봐야 어차피 익숙한 광고질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데 이번에 쓸모도 없는 행사인 공주의 성년식에 예산을 많이 쏟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죠. 쓸모도 없는 행사에 어찌..."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쓸모도 없는 행사에 이 정도로 투자를 하실 수 있으시다면... 정말 중요한 행사들에는 더더욱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관리들은 그 설명에 납득했다. 왕이 어디 보통 왕이던가. 과거부터 천재라고 칭송받던 왕이다. 배포부터가 남다른 성군. 최근에도 연간 300억을 지원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왕가재산으로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긴... 겨우 그런 행사의 격을 한층 높이셨으니 정말 중요한 다른 행사들은 더더욱 신경을 쓰시겠군요." 모두들 반성했다. 왕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뛰는 신하 위에 나는 왕 있다고, 왕의 배포는 역시 남달랐다. 신하들 생각으로는 하나를 잘하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했는데, 왕의 생각으로는 하나를 잘하고 또 다른 하나를 '더' 잘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격이 달랐다. 한편, 알렉스는 김훈상을 따로 찾았다. "폐하. 폐하께서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 저는 걱정이 됩니다."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제국 때문이냐?" "예. 폐하가 왕국에 지출하시게 될 예산과 금액. 그리고 이후 행보를 예측해보자면... 제국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왕가재산이라는 것이... 마르지 않는 우물은 아니니까요." 훈상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예상했다. "신경 쓸테면 쓰라고 해." "...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겠지." 알렉스는 김훈상을 쳐다봤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를 상대로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 하긴. 저래야 왕이다. 만약 더 어릴 때였으면, '그 전에 내가 황제 목을 따고 만다!'라고 말했겠지. 그 때 어찌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 때 아무도 못 들어서 다행이다. 옛날과 말투는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사고방식은 별로 안 바뀐 모양이다. '변함이 없으시군.' 김훈상이 다시 말했다. "프리온 나이트의 검이 고려를 향한다면..." 알렉스는 김훈상을 올려다봤다. 무슨 말을 할지 벌써 두려워졌다. "고려는 멸망하겠지만 황제는 몰락한 고려를 볼 수 없을 거다." 왜냐하면 황제의 목은 이미 땅에 떨어졌을 테니까. 김훈상은 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렉스는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폐하의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씀씀이에 있어서 조금 더 주의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늙은이의 지나친 간섭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부디... 그 사실은 절대로 제국에서 알면 안 되니까요." 훈상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 김환성은 최지수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말했다. "다행히 얼굴은 안 상했네. 역시 내 마력보호는 탁월했어. 피도 안 났고. 난 천재야. 그렇지? 똥개?" 이건 김상희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뒤지고 싶니?" 이 말은 김상희에겐 안 들렸다. 안 그래도 충격 때문에 멍해있던 최지수는 더더욱 충격을 받았다. 낯빛이 핼쓱하게 질렸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남의 똥개를 건드리려면 주인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응?" 김환성이 피식 웃었다. "실수로 죽이려다가 형 결혼식 파토나면 안되니까 봐주는 거야. 알아서 기어. 내 똥개 또 건드리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줄 알아. 대답은 필요 없고 알겠으면 눈 두번 깜빡거려." 최지수는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거렸다. 김환성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얼른 천재라고 해!'라고 이상한 말을 해댔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났다. 김환성이 김환석을 찾았다.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얘기해줬다. 주된 골자는 형수될 계집년이 똥개를 훈계하길래 헝거비를 날려줬다 정도. "미친 듯이 패려다가 형 결혼식 때문에 봐줬어." 김환석은 칭찬해줬다. 애초에 김환석은 약혼녀라는 계집의 얼굴도 모른다. 사진을 보기는 했는데, 어쩌면 실제로도 봤을 수도 있는데 기억도 안 난다. "잘했어." 계집애 하나 죽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결혼식 때문에 먼 나라에서 남자 사신들이 오고 있다는 것. 그들을 물 먹이는 행위는 아무래도 좀 곤란하다. 최지수는 충격에 충격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계집으로 태어났으니 남자에게 대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계집의 역할은 그저 남자아이만 잘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결혼 전부터 고난길이 펼쳐질 줄은 잘 몰랐다. 예비 신랑인 김환석이 찾는다길래 곱게 차려입고 찾아갔다. 김환석이 대뜸 말했다. 아. 저게 내 약혼녀구나. 처음 알았다. 김환석이 말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냐?" "저,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 남자가 왜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지. 자신은 딱히 잘못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왕자님이 화가 났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조건 빌어야했다. "죄송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었다. 남자들은 마력을 통해 살기라는 것을 내뿜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그런 게 있는 것 같았다. 괴로웠다. 김환석이 말했다. "꺼져." "네. 물러가겠습니다." 최지수는 방으로 돌아와서 한참을 소리죽여 울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감히 왕자님들에 대한 분노는 할 생각도 못했다. 분노의 대상은 따로 있었다. '이게 다 그 년 때문이야.' 생각해보니 그 건방진 계집아이를 만나고 난 이후로 모든 것이 꼬여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 계집은 셋째 왕자 김환성의 '똥개'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그 똥개를 주인 허락 없이 훈계해서 주인에게 혼이 나게 된 거고. 분노를 하기는 하는데 대상을 김상희로 잡았다. 왕자님들께는 감히 화를 낼 수 없으니 이렇게 됐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쏟아내기라도 해야 했다. '성년식 때 두고 보자고.' 소녀식 때와 마찬가지로 성년식이 끝나면 여자들끼리의 시간을 갖는다. 그건 암묵적인 룰이었다. 어차피 남자들은 여자들이 뭘 하든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고 여자들은 그 시간을 통해 다시금 서열을 확실히 정하게 된다. 곧 김환석과 결혼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녀 역시 성년식 이후 여자들끼리의 만남에 초대되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참히 밟아주겠어.' 하루가 지났다. 김상희 공주의 성년식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너무 화가나. 미칠 것 같아. 하지만 왕자님들은 너무 무서워. 어떡하지? 옳지. 나한테는 끽소리도 못하는 그 하찮은 계집애가 있었지. 나한테 형님이라고 하고.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틀림없어. 이유없이 재수 없는 그 년! 걔는 만만해. 비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저, 정말 만만하니...? 다시 생각 해봐..." 0038 / 0192 ---------------------------------------------- 김상희의 성년식 *** 나도 시녀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우리 송수진씨는 당황했다. "죄, 죄송해요. 공주님. 제가 입을 너무 함부로 놀렸죠?" 그러게. 당황할 짓을 왜 하고 그래요. "괜찮아.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줬으면 좋겠어." 적절한 핑계도 대줬다. "내가 아니라 그 분께 폐가 된다면 나는 수진이라도 화를 낼 거야. 나는 수진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 한진수에게 폐가 된다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송수진은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조심하겠다고 연거푸 사과했다. 괜히 겁 줬나. 나랑 오랫동안 같이 있어서 나한테 물 많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따지고보면 우리 강서영씨가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했지. 아참. 여담이지만 나는 예전에 강서영씨가 지르던 비명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엄청난 소리가 날 수 있는 건지 지금도 미스테리다. 솔직히 좀 궁금하기도 하다. 개차반이 얼마나 엄청난 사내(?)이면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는지. 흠흠. 어쨌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한진수는 내 성년식에 오지 않았다. '섭섭하지 않아.' 이건 당연한 거다. 오히려 약혼녀의 성년식이랍시고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가 왕국까지 찾아오는 게 더 이상하다. 분명히 당연한 건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정말이야. 난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 서운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이 한진수는 그 한진수가 아니니까. 생김새가 닮았을 뿐이니까. '아니.... 단순히 닮은 건 아니야.' 그렇다면 이 세계에 없는 된장찌개라든가 그가 내게 했던 마지막 말 같은 것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아. 또 머리 아파온다. 나중에 생각하자. 오늘은 내가 기뻐야 할 날이니까. 내 드레스를 치장해준 송수진씨가 말했다. "공주님. 오늘 너무너무 이쁘셔요. 저는 공주님이 이렇게 어엿하게 자란 것을 보면 정말 뿌듯하고 감격스럽답니다." "사실은 내가 도중에 죽을까봐 조마조마했지?" 어라. 당신 지금. 움찔 했어. 내가 다 봤다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 보기에 내 행보는 파격에 가까웠으니까. 하여튼 나는 잘 살아남았고 어찌어찌 성년을 맞이했다. 성년식이 시작됐다. *** 공주들은 충격에 빠졌다. 단순히 충격을 넘어서서 소위 말하는 '멘붕(*멘탈붕괴)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집단 멘붕. 아니. 이건 멘붕조차도 넘어선 집단 코마상태였다. "어떻게... 폐하께서 직접 인도를 하실 수가 있지...?" 충격적인 일은 그 것 뿐만이 아니었다. 결혼식 준비로 한창 바쁠 김환석 왕자와 김환성 왕자 역시 김상희의 성년식에 참여했다. 보통 소녀식과 성년식은 여자들의 축제(?)다. 남자들은 아주 잠깐 참여할 뿐. 나머지는 너희끼리 알아서해라. 그런 주의다. "왕자님들께서도 참석하셨어요. 이건 정말..." "폐하께서 김상희 공주를 아끼신다고 들은 것 같아요." 공주들은 잘 모른다. 소문으로 어찌어찌 들을 뿐이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정보가 제한되니까. 아니. 왕이 공주를 예뻐한다는 그 말을 누군가 진짜로 전해준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는다. 이 곳은 그런 세계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다음주에 김환석 왕자님의 결혼식이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시기 위하여 직접 오신 것 아닐까요? 김환석 왕자님의 결혼식은 국가의 중대사니까요." "아... 그럴 수 있겠네요." 한편, 공주들이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고 있든지 말든지 김환성은 신경 안 썼다.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거래가 하나 있었으니까. 김상희는 머리를 짚었다. '아이고. 두야. 망나니야. 우리 둘째 망나니야. 너 진짜 나 죽는 꼴 보고 싶니? 너는 아니? 네 얼굴은 명존쎄를 부르는 얼굴이란 걸.' *** 김환성은 오늘. 김상희의 성년식에서 김상희의 잘못을 짚어줬다. "똥개. 네가 잘못한 게 맞아. 사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할 뻔 했었다. 하지만 필사의 의지로 고개를 부여 잡았다. 왕자님께서 잘못한 게 맞다고 말하는데 고개를 갸웃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가 정말 나빠요. 정말 반성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문제는 네가 형아를 오라버니라고 불러서 그런 거잖아?" "네. 예법에 많이 어긋나는 행위라고 배웠어요." "당연하지." 김상희는 충격에 빠졌다. 김환성은 여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모른다. 모르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개념 자체가 없다. 그런 개념을 가질 필요도 없는 위치의 사람이고. 아예 사는 세계가 다르지 않은가. '망나니가 이제 좀 여자에 대한 개념을 갖춘 건가?' 김상희가 그런 생각에 빠졌을 무렵, 김환성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말고 오빠라고 불렀으면 그런 사단은 안 일어났을 거 아냐?" 아뇨. 그런 거 아닌 거 같은데요. 그것 만큼은 완전 틀린 것 같은데요. 김상희는 말해주고 싶었다. 문제는 김환성이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오빠는 오라버니보다도 더욱더 안 쓰이는 단어다. 거의 사장되다시피한 단어. 이 세계에서 오빠는 여동생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부르는 말이긴 한데, 약간의 친근감을 가진 표현이다. 성별이 곧 권력인 이 곳에서는 어지간하면 쓰이지 않는 말이다. 그 단어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공주가 왕자에게 대놓고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왕자들이 기분 좋을 때. 눈치를 잘 살피고 타이밍을 잘 잡아서 오빠라고 한 번씩. 그것도 다른 사람 몰래 할 수 있는 정도다. 그리고 김상희는 오늘 정말로 뒷목을 잡고 싶어졌다. 이유는 이러했다. "야. 똥개. 너 성년이잖아. 이제." "네. 왕자님." 왕자님이란 말을 듣는 순간 김환성이 아주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공주들이 많았다. 이 똥개가 아무래도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아이씨. 안 그래도 되는데. 그냥 다 쫓아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여기엔 또 형과 아버지가 있다. 마음 내키는대로 경거망동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아주 잠깐 짜증이 치밀었지만 김환성이 다시 생글생글 웃었다. "나 진심으로 묻는 거야. 물어왓하지 말까?" 엄청난 발전이다. 여기엔 충격적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김상희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알아차렸다는 거고 -김상희는 물어왓 할 때마다 행복한 표정으로 그걸 했으니까- 또 하나는 왕자가 공주에게 '하지 말까?'하고 의사를 물어본 거다. 옆에서 대화를 훔쳐듣게 된 공주들은 또다시 멘붕상태에 빠져들었다. '왕자님께서 물어주셨어.' '김상희 공주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어째서 김상희에게 저런 특권이 주어지는 거야?' 김상희는 지혜롭게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왕자님의 행동에 왈가왈부할 수 있겠어요? 저는 그저 왕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워요."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그래. 제발. 그거 좀 하지 마. 나 이제 성인이라고. 생각해봐. 다 큰 어른한테 물어왓! 날아랏 헝거비! 따위를 지껄이면서 헝겊인형을 저 높은 하늘로 날리면. 그걸 주워오는 성인은 어떤 심정이겠니. 제발. 그런 개념을 탑재해주면 안 되겠니, 망나니야. 우리 망나니야. 김환성이 충격적인 제안을 하나 더 했다. "그럼. 안 할게." 김상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5년 만에 둘째 망나니가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거야. 물어왓은 좀 아니었어. 김상희의 속마음이 계속 절실하게 외쳤다. "하지만 사람은 실수라는 걸 하잖아?" 김상희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멘트를 날렸다. "왕자님처럼 대단하신 분도 실수를 하시나요?" 이게 다른 공주들과 김상희가 다른 점이다. 다른 공주들은 기가 눌려서 그저 예, 아니오밖에 말을 못 한다. 이렇게 왕자와 단둘이 대화를 섞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하며 무서워한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공주가 왕자와 얘기를 하고 있으면 부러워한다. 상당히 이중적인 마음인데 하여튼 그랬다. 김환성은 김상희의 아부에 또 어깨를 활짝 펴고 턱을 높이 들었다. 가슴도 넓게 폈다. 우쭐거렸다. "물론 나는 실수 같은 거 안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멘트. 다시 말해 조련에 또다시 성공한 김상희는 웃음을 가리기 위해 따뜻한 우유를 조금 마셨다. "그러니까 조건을 걸게. 내가 그런 실수를 한다면 벌칙으로..." 공주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와, 왕자님께서 벌칙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설마 김상희 공주를 어떻게 하시려고...?' 왕자에게 벌칙을 내리는 공주. 이건 사형당해도 싸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눈으로 보고 있기는 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머리가 이해를 못했다. 눈만 상황을 봤다. "벌칙으로 네가 날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어때?" 김상희는 생각했다. 네 명치를 기필코 매우 세게 치고 말리라. 몇몇 공주들이 들은 걸 확인했다. '오라버니로도 그 난리를 쳤었는데 오빠라고? 날 죽일 셈이냐 넌?' 그렇다고 또 왕자님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기랄. 저 쪽. 최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오늘 쟤. 뭔가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인데. 느낌이 안 좋다. 일단 나는 겉으로는 웃었다. "저는 왕자님의 뜻이라면 언제나 따를 것이어요." "야. 똥개. 물어왓 아참. 이거 하면 안 되지. 실수했네, 나원 참." 김환성이 굉장히 과장된 태도로 입을 가렸다. 누가 봐도 어색했다. 어릴 때부터 한국의 드라마에 익숙해 있던 김상희는 생각했다. 김환성은 무력에 있어선 천재일지 몰라도 연기에는 쥐약이라고 말이다. 연기는 절대 하면 안 되는 아이였다. 저 아이는 발연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어, 하고 김상희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실수를 해버렸네." 마치 어떤 남자가 초등학교 교과서를 무미건조하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김환성이 김상희를 쳐다봤다. "자. 벌칙을 받아야겠어." ***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아. 진짜. 얘를 어떻게 하면 좋니. 아니. 야. 망나니. 솔직히 우리 인간적으로 얘기를 해보자. 그래. 나도 인정할게. 일부러 오빠소리 안했어. 너무 쉽게 주면 안 되니까. 정말 어쩌다가 한 번씩 기분 좋으라고 썼다는 건 인정할게. 그런데 이건 너무 하잖아. 지금 듣는 공주들도 많은데. 그리고 인간적으로 벌칙도 이렇게 이기적인 벌칙이 어디있냐. 이딴 게 무슨 벌칙이야. 아. 진짜 넌 명존쎄다. 명존쎄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야. '그런 주제에 생글생글 웃지 말란 말이야.' 주먹을 불끈 쥐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다행히 우리 개차반씨가 나를 구해주셨다. 나이스 타이밍. "자자. 주목." 김환성은 뭔가 불만이라는 듯 머리카락을 한 번 쥐어뜯었지만 어쩌랴. 너는 망나니지만 쟤는 개차반이야. 그리고 왕이고. 쟤가 너보다 세잖아. 우리 개차반씨가 말했다. "갖고 싶은 거 말해봐라." 공주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을 거다. 안 봐도 뻔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나라면... 빨간 루비를 박은 산호조개의 진주를 달라고 하겠어.' 라든가 '나라면 크롬왕국에서만 생산되는 에메랄드빛 다이아몬드를 달라고 하겠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이 나라 여자들을 욕할 생각은 없다. 계속해서 강조하는 거지만 이건 세계가 여자들을 이렇게 단순하게 만들어버린 거니까. 그리고 그 세계의 왕이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했으니까 말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장기투자가 최고지.' 나는 대답했다. 제발 명치 좀 대주세요. 겁나 세게 때려버리게. 라는 말은 속으로만 했고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를 이렇게나마 먼 발치에서 뵐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저에겐 가장 큰 선물이고 행복이어요." 으. 내 거북한 속. 이런 아부는 아무리 많이하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개차반이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 때려주고 싶었다. 그래. 너 짱 먹어라. 하여튼 우리 개차반씨는 '생각 해보도록'이라고 말하고서 성년식을 진행시켰다. 많은 음식. 그리고 음료가 쉴 새 없이 주어졌다. '이제 시간이 다가오네.' 여자들끼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분명 뭔가 하기는 할 텐데.' 공주들은 크게 걱정이 안 된다. 공주보다도 저 여자. 그러니까 한 쪽 구석에서 나를 계속 힐끔거리며 적의를 내뿜고 있는 저 여자가 신경 쓰인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가왔다. 여자들만 남게 됐다. 성년 이상의 공주들 중 아직 시집을 못 간 공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거기에 한 명이 더 추가 됐다. 곧 왕궁의 식구가 될, 우리 첫째 망나니의 아내가 될 여자 말이다. 그 여자가 말했다. "여러분들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이제야 기회가 왔네요." 그녀의 눈빛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편올라갑니다 ㅎㅎ 잠깐. 다음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네. 선추코를 잊지 않았는가? 0039 / 0192 ---------------------------------------------- 김상희의 성년식 *** 최지수가 말했다. "여기 계신 여러 공주님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봐요." 현재 이 곳에 모여있는 공주들의 평균 연령은 16세다. 보통은 18세 이전에 결혼을 한다. 그래서 이 모임에 남아 있는 공주들의 연령은 15세에서 18세 가량이라고 보면 됐다. 최지수의 나이가 몇 살이라더라. 16살이라고 한 것 같은데. 공주들은 침묵했다. 얼씨구. 최지수의 기세가 점점 더 살아났다. "8살 넘은 공주가 왕자님께 오라버니라고 호칭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얼마나 충격에 빠졌는지 공주님들은 아시나요?" "......." 공주들은 최지수의 눈을 피했다. 쟤네도 나름 억울하기는 할 거다. 애초에 예절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다. 내가 기거하는 기록의 관에는 일반 공주들이 출입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아마 저 아이들에게 있어서 베일에 가려진 공주일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할 수도 없었겠지. 왕자들 눈치가 보여서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까. '하기야. 좀 특별 대우를 받기는 했지 내가.' 왕으로부터 직접 보배의 칭호를 받았고 또한 거창한 성년식 - 그것도 김환석 왕자의 결혼식 전(前) 주에-을 받은 특별한 공주라는 사실은 저들도 안다. 그런데 그 특별함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를 거다. 수진으로부터 전해들은 소문들 중에서 내가 들었던 가장 황당한 소문은 내가 모종의 실험체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모종의 실험이라 함은, 바로 '중성화 작업.' 혹은 '중성화 실험.'이었다. 그리고 그 중성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고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그 소문의 시작이 7년 전이었다지?' 나는 정말 몰랐다. 송수진씨한테 전해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하기야. 쟤네들의 기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상식상 공주가 이쁨을 받으려면 저런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으니까. 적어도 상식선에서는 말이다. 공주들 중 한 명 입을 열었다. 이 곳에 모인 공주들 중 서열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18세 최유선이었다. "영애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요. 우리는 저 아이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교육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뜻이에요." "그건 핑계에 불과해요. 결과적으로 저런 아이가 공주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여기 계신 공주님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저 아이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아. 그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있냐고. 내가 너희들처럼 왕이나 왕자들이 말하면 그저 예 아니면 아니오만 대답해야겠니? 가끔 드는 생각인데 이 곳 여자들. 내가 봐도 너무 답답하다. 이 세계가 여자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자꾸 생각하기는 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해도 답답한 것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내가 왜 이쁨 받는지. 내가 왜 총애 받는지. 좀. 어휴 진짜 답답해 죽겠네.' 아니지. 이 세계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잘못한 게 맞긴 맞다. 나도 매일매일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왔었으니까. 요즘에야 좀 괜찮아졌지만. 나는 최지수가 왜 저러고 있는지도 이해가 된다. 우리 첫째 망나니가 분가를 거부했다. 그러면 저 여자는 이 곳에 와야 했다. 왕자의 아내가 되면 이 곳 여자들과도 분명 부대껴야 한다. (다른 공주들과의 접점이 없는 내가 정말 특별한 경우다.) '기선제압을 하려는 거겠지.' 이 곳 여자들 사이에서 서열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 저렇게 서열을 따지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쟤네도 모를 거다. 나는 이 것을 일컬어 '똥 군기'라고 표현하는데 쟤네들은 이런 짓이 쓸모 없다는 걸 도대체 언제 깨달을까. '그렇다고 니네들 이거 완전 바보 찐따 같은 짓이야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아직은 내 앞가림하기도 벅차다. 저들을 인도(?)해주기보다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사과했다. "제가 못나서... 여러 언니분들께 폐를 끼치고 말았어요. 반성하고 있어요. 다시는 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하겠습니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째 망나니 김환석의 목소리였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 김환성이 김환석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나이를 먹어도, 김환성은 김환석 앞에서 여전히 동생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제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김환석에게는 애교도 곧잘 부렸다. "형아. 아니. 형." 그래도 이제 제법 '형아'라는 말 대신 '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참고로 첫째 왕자인 김형석에게는 아직도 '형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김환석은 김환성을 쳐다봤다. 여전히 시크한 표정이다. "......." "어디 가?" "있어."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안 돼." 김환성은 힝,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잉, 이잉, 하고 어깨를 흔들며 애교를 부려봤지만 역시 씨알도 안 먹혔다. '형이 왜 말을 안 해주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김환성이 생각하는 가장 똑똑한 학자 알렉스를 찾아갔다. 알렉스는 허허거리고 웃었다. "아마 김상희 공주에게 갔을 겁니다." "똥개한테?" "소녀식 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었거든요." "아. 그 때 그거?" 김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형은 나한테 말을 안 해줘? 어디 간다고?"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거야 자기가 김상희 공주 신경 쓴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겠죠.' 지혜롭게 대답했다. "글쎄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알렉스도 모르는 게 있어? 생각보다 안 똑똑하네." *** 문이 벌컥 열렸다. 공주들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이 장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녀들에겐 생생한 공포였다. 7년 전. 그러니까 김상희가 소녀식을 치를 때에 공주들은 김환석을 봤었다. 그 때부터 김환석은 공주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김환석이 걸어 들어왔다. 김상희는 당황했다. 아니. 쟤는 또 여길 왜 왔어. 암묵적으로 금남의 시간이잖아. 김상희가 말을 더듬었다. "와, 왕자님." 김상희의 '왕자님'소리를 듣고나서 김환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워낙에 미세하게 꿈틀거려서 공주들은 몰랐지만 말이다. 김환석이 주위를 둘러봤다. "너희들. 내 경고 잊었냐?"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니다. 공주들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7년 전 소녀식 때의 일. 7년 전 김환석이 이렇게 말했었다. '남의 똥개새끼를 건드리려면 주인 허락을 맡아야지. 안 그래?' '정말 죽고 싶은 계집이 있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 김환석이 피식 웃었다. "너. 내 경고가 말 같지 않아?" 최지수는 이해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7년 전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최지수도 당황했다. "와, 왕자님." 이거 이러다 진짜 큰 일 나겠다. 김상희는 이번에 조금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지금 김환석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진짜로 화났다. 안 돼. 저 놈은 진짜로 죽이고도 남을 놈이야. 저 망나니 성격에 경고를 한 번 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관용을 베푼 거라고. 김상희가 황급히 말했다. "와, 왕자님!" 공주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김상희 공주가 약간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건 안다. 그러나 감히 왕자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 왕자가 김환석 왕자인데 중간에 끼어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도, 도대체 뭘 어쩌려고...' 최지수는 속으로 욕했다. '미친 계집애 같으니라고! 가만히 있어야 할 것 아냐!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머저리 같은 년!' 김상희는 더욱더 황당한 소리를 해댔다. 최지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저 사람은 공주가 아니어요." 심지어 저 공주는 왕자를 가르치려 들고 있지 않은가. 최지수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것 같았다. 감히 하늘 같은 왕자님을 가르치려 들다니. 정말 미쳤다. 저 공주는. 김상희는 확신했다. '저 망나니 자식. 자기 약혼녀도 못 알아보고 있어.'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는데 이젠 확신이었다. 김환석은 아무래도 공주들의 얼굴 따윈 기억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약혼녀 마저도 자신의 동생들 중 한 명이라고 오해를 한 거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인데 얼굴 정도는 기억 해주지.' 사실 그렇게 이상한 일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남자들이 약혼녀의 얼굴을 잘 모른다. 김환석처럼 여자에 관심 없는 남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한진수 역시 엄청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한진수는 파이널 승급시험을 앞둔 상태에서도 김상희를 보러 왔었으니까. 공주들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최지수가 속으로 절규하거나 말거나. 김환석이 말했다. "그러냐?" 공주들은 더더욱 경악했다. '기, 김환석 왕자님께서... 되물으셨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다. 맏언니인 최유선은 침착하려 애썼다. 상황을 정리해봤다. '그러니까... 김환석 왕자님은 이미 밖에서 상황을 다 알고 계신 상태로 들어왔어. 그리고 최지수를 공주들 중 한 명이라 착각하셨어. 그리고 그걸... 김상희 공주가 가르쳐 줬어.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왕자님께선 아무렇지도 않아하셔.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김환석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히 많이 변한 셈이다. 비록 티는 많이 나지 않지만, 김상희의 십수년 간의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은 셈이다. 실제로 김환석은 김상희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화를 내도 될 상황인데 말이다. 아니, 상식적으로 화가 나는 게 맞다. 그만큼 김환석은 김상희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김상희는 압존법도 철저하게 지켰다. "저 여자는 왕자님의 약혼녀에요." 김환석은 고개를 돌려 최지수를 쳐다봤다. 최지수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김환석은 그제서야 저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도 표정은 여전히 시크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봤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도 대충 욕을 했던 것 같기는 했다. 최지수에겐 큰일이었지만, 김환석에게 있어서는 별 거 아닌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지나다닌 길에 몇 개의 돌맹이가 있는지 기억 못한다. 그거랑 비슷했다. 최지수를 기억도 못했다. 김환석이 다시 물었다. "야. 똥개." "네?" "얘 죽여줘?" 김상희는 황당해졌다. 이봐요. 저 사람 당신 약혼녀라니까. ***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송수진이 차를 내왔다. "공주님. 성년식은 어떠셨어요?" "버라이어티했어." "네?" "그런 게 있어. 피곤해. 자고 싶어." "목욕물 데워놨는데 그냥 주무실 거에요?" "응." 목욕이고 뭐고 모르겠다. 일단 좀 자야겠다. 아. 머리 아파. 우리 첫째 망나니는 '첫째 망나니'의 이름값을 톡톡이 했다. 와. 나는 생각도 못했다. 마력폭발이란 걸 일으킬 줄은. 책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첫째 망나니가 마력폭발을 일으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으로 충격파를 만들어 인체의 내장을 뒤흔드는 거라고 하는데, 공주들은 굉장히 괴로워했다. 엄청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조차도 무서워서 다리가 덜덜 떨렸었으니까. 김환석은 확실히 왕자였다. 그 압도적인 카리스마.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공주들은 더했겠지. '그래도 안 죽인 게 어디야.' 김환석이 나를 아끼는 건 알긴 안다. 그러나 김환석이 화를 낸 건 온전히 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환석의 입장에서는, 공주들이 자신의 명령을 무시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래서 화를 더 많이 냈을 거다.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우리 김씨 왕가 남자들 아닌가. 어쨌든 공주들과 최지수는 목숨은 건졌다. 한참동안이나 콜록대며 괴로워하기는 했지만. 약 세 명정도의 공주들이 자기가 죽는 줄 알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살려달라 비는 광경까지 연출 됐다. '나는... 마력보호를 받은 걸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프지 않았다. 아무래도 김환석이 나는 조금 봐준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며칠 전 본, 자기 약혼녀 얼굴도 기억 못해?' 아무리 세계가 이렇다지만, 아무래도 좀 또라이가 아닌 가 싶다. 어머. 미안. 망나니야. 속 마음이 나와 버렸어. '하. 어쨌든 잘 끝났어.' 걱정했던 성년식은 어찌어찌 끝났다. 이제 내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 -미리 정해져 있는 것들 중-은 결혼식 하나가 남았다. 내 결혼식은 약 6개월 뒤다. 한진수 측에서 일정 변경을 공지하지 않는 이상, 6개월 뒤에 결혼을 하게 될 거다. 피곤해 죽겠다. 좀 자야겠다. 그런데, 누군가 찾아왔다. "누나! 누나! 누나!" 이제 7살이 된 우리 환혁이. "나랑 놀자!" 아니. 나 너무 피곤해. 자고 싶어. 성년식에 이어, 이후에 있을 결혼식에 대해서도 생각하다보니 너무 피곤했다. 정말 자고 싶었다. "왕자님 저 너무 졸려요" 환혁이의 표정이 변했다. 나는 말하고 나서도 화들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해버렸다. 김환석 같은 무시무시한 망나니 옆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환혁이가 귀엽게 보였다는 -만만하게 보였다는- 게 핑계라면 핑계였다.방금은 정말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어 버렸다. 아. 진짜 내가 미쳤지. 야. 너 15년 살았다고 벌써 이렇게 긴장 풀리면 어떡해. 아 진짜. 아. 아. 미쳤어 진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환혁이의 굳은 얼굴을 봤다. 환혁이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 앉았다. "명령이야. 나랑 놀아." 솔직한 말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요새 환혁이가 예전과는 약간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환혁이는 왕자고 자신의 위치를 조금씩 자각해가고 있었으니까. '신분의 격차는 어쩔 수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자님이 말씀하시는데 공주가 피곤하다고 말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정한다. 나는 아까 진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정말 놀라운 일이 2시간 뒤에 벌어질 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 작품 후기 ============================ 2연참 했어요 헤헿 ♥♥♥♥ 흥. 따, 딱히 칭찬을 바라는 건 아냐...! 0040 / 0192 ---------------------------------------------- 사형 당할래? *** 나는 환혁이랑 열심히 놀아줬다. 문득 또 서글퍼졌다. 나는 언제나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약 환혁이가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아마 혼을 냈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지구가 아니다. 환혁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가 최고야! 라고 연신 외치면서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보통 애 보는 일을 중노동이라고 말한다. 애가 어디로 튈 지 몰라 항상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 전업주부는 집에서 놀기만 한다? 절대 아니다. 내 주변에 결혼하고 애 낳은 친구들 얘기 들어 보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고 했다. 하여튼 애 보는 일은 힘들다. 그런데 이 애는 그냥 애도 아니고 심지어 남자애다. 남자애인 게 무슨 상관이냐고? 남자는 마력을 갖고 있다. 지치지도 않는다. 나는 환혁이랑 두 시간을 놀아줬다. 진이 다 빠진다. 나는 정말로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공주님. 고생 많이 하셨어요. 어휴. 얼마나 힘드실까 우리 공주님."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건 역시 우리 송수진씨 밖에 없다. "괜찮아. 수진. 수진도 가서 쉬도록 해." "저는 공주님 잠 드는 거 보고 갈게요." 수진은 이불을 덮어줬다. 수진에게 말했다. "고마워." 수진은 사실상 내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위치의 사람이다. 여자이면서 또 시녀다. 도움이 될래야 도움이 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수진에게 많은 도움을 얻었다. 적어도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나랑 같이 얘기할 수는 있잖아.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나는 수진이 없었다면 외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나쁜 생각까지 먹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휴. 별 말씀을 다 하세요. 공주님. 불 끌게요. 편히 주무세요." 수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불을 끄지 못했다. 환혁이 다시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환혁이 말했다. "목 말라. 물 줘." "네. 왕자님." 수진이 황급히 물을 뜨러 갔다. "누나." "네. 왕자님." 비록 몸은 천근 만근 무거웠지만 감히 왕자님을 앞에 두고 누워 있을 수 없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환혁이의 표정이 뭔가 어두웠다. 좀 불길해졌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아까 내 실수 때문인가. '제발... 그건 내가 정말 실수했어. 잊어줘.' 환혁이가 입을 열었다. "누나." "네. 왕자님. 말씀하셔요." 환혁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 뭐라고 말은 했는데 잘 안 들렸다. "죄송해요. 잘 못 들었어요. 목소리가 안 들려요." 그렇게 빨리 말하면 못 알아들어. 나는 너희처럼 마력이 없어. 천천히 좀 말해줄래? 환혁이가 또 뭔가를 말했다. 말했는데 또 못 들었다. 이쯤 되자 나는 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왕자가 두 번이나 말했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또 두 번이나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공주 입장에서는 긴장할 수 밖에 없다. 환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질끈 감은 게 아니고 주먹도 불끈 쥐었다. "미안해!" 그와 동시에 쨍그랑. 소리가 났다. 수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진씨가 실수했다. 쟁반에 물을 받쳐서 가져오고 있었는데 쟁반을 놓쳤다. 나는 수진씨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나도 패닉상태니까. "와, 와, 왕자님?" 왕자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것도 공주에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자가 공주에게 한 일은 무조건 옳다. 옳고 그름이 없다. 왕자가 시키면 공주는 해야 한다. 뭐가 됐든지. 환혁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귓볼도 새빨개졌다. 나는 진심으로 충격에 빠졌다. "미안해, 누나. 환혁이가 나빴어. 진짜 나빴어. 환혁이가 잘못했어!" "와, 왕자님.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돼요. 누가 들어요. 큰 일 나요. 제가 잘못 했어요. 제가 나빠요." 환혁이는 내게 와락 안겼다. 마력이 있어 성장속도가 빠르긴 하다지만 환혁이는 아직 어리다. 겨우 8살밖에 안 됐다. 아직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인다.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작다. "와, 왕자님?" 큰 일이다.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환혁이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달래야만 해! 울면 안 돼! 네, 네가 울면 나는 왕자님을 울린 천하의 몹쓸 계집년이 되고 만다고! 제발! 환혁아! 그러나 내 마음속 외침과는 별개로 환혁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니까 환혁이는! 누나랑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누나가 너무너무 좋아서 막 땡깡 부리고 그랬는데 누나가 환혁이 말 안 들어줘서 나는, 그니까 막 명령같은 거 하고. 막 누나 힘들게 하고. 막 그랬는데. 막 그래서 나는. 그게..." 환혁이는 횡설수설하다가 이내 으아아아앙! 하고 크게 울었다. 나는 환혁이가 귀엽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망했다. 이 정도 울음소리면 정문에 있는 나이트도 들었을 거다. 환혁이는 계속해서 훌쩍거렸다. "나는 누나가 너무너무 좋은데, 누나 괴롭혀서 미안해. 환혁이는 절대로 이제 누나한테 명령 같은 거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맨날맨날 부탁만 할 거야. 환혁이 엄청 후회 했어. 누나한테 명령 같은 거 하는 거 너무 나빠. 진짜 안 그럴 거야." 히끅대며 말하는 환혁이를 보며 나는 가슴이 타들어갔다. 환혁이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나는 쳐죽여도 시원찮을 년이 되어버렸다. 왕자님을 울린 미친 계집아이 말이다. 망했어. *** 소문의 시작은 기록의 관부터 였다. "그거 알아? 김상희 공주가 김환혁 왕자님을 울렸대." "헐. 대박. 그게 진짜야?" 시녀들이 소문에 소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똥개라고 예쁨을 좀 받는가 싶더니 정말 막 나가는구나?" "에이. 그래도 뭔가 속사정이 있겠지." "속사정이건 뭐건 공주따위가 어떻게 왕자님을 울려?" 시녀들은 이 때가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 김상희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았다. 송수진을 제외한 대다수의 시녀들은 김상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김상희가 이들에게 무언가 잘못을 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김상희가 본능적으로 싫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김상희 공주가 예쁘다, 예쁘다하긴 하는데 솔직히 내 눈엔 별로거든?" "아니 이쁜 건 맞지. 이쁘긴한데 매력은 없어. 그냥 예쁘기만 해. 그거 진짜 별로거든." 김환혁을 울린 사건과는 별개로 김상희에 대한 욕을 늘어 놓다가 또 다른 얘기도 했다. "그럼 어떻게 될까? 김상희 공주는 이제 사형 당하려나?" "서, 설마 사형까지 당하겠어?" "혹시 모르지. 7년 전에 공주 처형식 있었잖아.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 없어?" 그 때 송수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못된 년아! 너는 꼭 김상희 공주님이 사형이라도 당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얘기하네! 이 몹쓸 년 같으니라고! 천하에 벼락 맞을 년!" 험담을 하던 시녀 이예진은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넘기기엔 너무 큰 일이잖아요." "너희가 김상희 공주님을 안 좋아하는 거 알아. 근데 뒤에서 이런저런 말은 좀 옮기지 말아 줄래? 김상희 공주님이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천박한 년들 같으니라고!" "아니. 언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솔직히 김상희 공주에 대한 여론 안 좋은 거 아시잖아요." "여론은 개뿔 여론!" 여론 아니다. 시녀들에게는 시녀들의 세계가 있다.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시녀들의 눈으로 보면 시녀들의 세계밖에는 안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이 곧 여론이며, 그들의 생각이 곧 대다수의 생각처럼 느껴진다. 그 딴 건 그저 너희 계집년들 생각이지 절대 여론 같은 게 아냐!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근처에 김환석 왕자님이 지나가고 있다는 알림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래도 아주 매서운 눈길로 이예진을 노려봤다. 이예진 역시 송수진을 노려봤다. 시녀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하루 뒤. 결국 일이 벌어졌다. 나이트의 제 9대대장 김환성 대대장이 나이트 3명을 이끌고 김상희 방을 찾았다. 시녀들은 구석에 숨어 속닥거렸다. "결국 그 때 그 일이 커졌나 봐요. 김상희 공주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잡혀가겠지. 왕자님을 울렸으니."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잡혀가는 건 확실해 보였다. "야. 똥개." 김상희의 방문이 열렸다. 송수진은 기겁했다. 김환성 왕자 뒤에는 나이트가 무려 3명이나 있었다. 이거. 심상치가 않다. "고, 공주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 때 제가 실수로 유리잔을 깨트리는 바람에,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저를 죽여주세요." 김환성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나이트들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시녀 주제에 왕자님을 막아서? 그것도 죽여 달라고? 완전히 미친년이구만.' 나이트 중 한 명이 나섰다. 이깟 건방진 시녀.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제가 죽이겠습니다." 송수진은 고개를 돌렸다. 김상희가 보였다. "공주님.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 행복했어요. 정말 영광이었어요. 저는 공주님이 정말 좋아요. 공주님께서 하시는 노력. 저는 전부 알아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저는 공주님을 언제나 응원하고 또 응원할게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송수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유언이랍시고 했는데 유언이 너무 길었다. 목이 떨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말이다. 김환성이 키득대고 웃었다. "뭐야 이거? 너 여자 좋아해?" 김환성은 깔깔대고 웃었다. 나이트도, 송수진도, 김상희도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 두시간 전. 김훈상이 알렉스에게 말했다. "김상희를 데려와." 알렉스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래도 이거. 큰 일이 날것만 같다. "폐하. 저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예. 저 역시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김상희 공주의 잘못이라고 보기엔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제서야 알렉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김상희를 데려오라는 게, 김상희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딸바보부터 시작해서, 알렉스. 너는 좀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 도무지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군." 김훈상은 여전히 세상에 '딸바보'같은 등신은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 도대체 왜 김상희 공주를 부르시는 겁니까?" "내가 명령했으니까." 알쏭달쏭한 말에 알렉스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김상희 공주의 성년식 때, 왕은 김상희에게 선물을 말하라고 했다. 당시 김상희는 아버님만 있으면 돼요, 라고 말했다고 들은 것 같다. 그래서 김훈상이 그럼 나중에 말하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아. 선물.' 그럼 그렇지. 내가 폐하를 너무 얕잡아 봤어. 그런 소문 때문에 김상희 공주를 죽이시진 않을 거야. 알렉스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 그러니까 폐하께선 김상희 공주에게 선물을 생각해놓으라고 명령을 내리셨고 김상희 공주가 그 명령을 잘 이행했는지 확인하러 부르시는 겁니까?" "그렇지." 아니. 애초에 그 딴 게 명령입니까? 이건 '안 때리면 사형이다'랑 뭐가 다릅니까. 알렉스는 속으로 말했지만 역시 왕 앞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알렉스를 비롯한 수많은 시녀들, 그리고 송수진이 오해하고 있는 동안 왕은 김상희를 기다렸다. 김훈상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이제 김상희에게 선물을 주면 된다. 선물을 생각하라 명령을 내렸었으니 김상희는 그걸 착실히 이행할 거다. 히죽. 이유는 모르겠는데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나는 왜 기쁜 거냐?' 여전히 이유는 몰랐다. 하여튼 뭔지 모르겠는데 기뻤다. 같은 시각. 송수진이 말했다. "고, 공주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 때 제가 실수로 유리잔을 깨트리는 바람에,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저를 죽여주세요." 김환성이 칼을 빼드는 나이트를 제지했다. "야 똥개." "네. 왕자님." "얘 죽일까, 살릴까?" 당연한 걸 묻냐. 아무리 여자라지만 너는 사람 목숨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김상희는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말 못했다. 김환성이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다. "오빠 해봐." 나이트 중 한 명이 칼을 떨어뜨렸다. 지금. 왕자님이 뭐라고 한 거야? 김환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웃으면서 협박했다. "오빠하면 살려주고. 아님 죽이고." 김상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봐. 네 뒤에 나이트가 3명이나 있다고. 그런데 오빠라고 하라고? 나 지금 안그래도 환혁이 울린 소문 때문에 가뜩이나 이미지 안 좋은데. 무려 왕자님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라고? 미쳤어? 진심이야? 네 입장에서는 장난이지만 나는 죽을 맛인데! 저 자식. 내가 진짜 언젠가 패주고 말 테다. 김환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싫으면 그냥 죽이지 뭐." 김환성이 나이트를 막아서던 팔을 내렸다. 나이트가 칼을 빼들었다. 그 칼이 높이 올려졌다. 날이 번쩍 거렸다. 송수진은 이제 죽는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김상희의 입술이 옴짝달싹 움직였다. "오..." 김환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 작품 후기 ============================ 자. 어서 말해. 오빠라고! 0041 / 0192 ---------------------------------------------- 사형 당할래? ***41 지금은 밀당이고 뭐고. 뒤에 나이트가 있고 없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원하는 건 들어줘야했다. 안 그러면 저 망나니. 우리 송수진씨 진짜로 죽일 거다. "오..." 저 망나니. 지금 웃었다. 씨익 웃는 저 모습. 진짜 명존세를 부르는 표정이다. 아오. 내가 이러니 제 명에 못 살고 죽지. "오빠..." "진작 하면 좋잖아? 좋아. 넌 살려줄게." 이 망나니. 요즘들어 조금씩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간다. 예전에는 대놓고 오빠라고 하라고는 못하더니 이젠 사람 목숨을 가지고 오빠를 요구한다. 그깟 호칭이 도대체 뭐라고. 물론 내게도 명분은 있다. 다른 사람 보기에 너무 안 좋다. 그래서 일부러 오빠라고 잘 안 부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줄타기 조금 잘못하면 진짜로 사람 목숨 날아가게 생겼다. 우리 송수진씨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니 어휴. 저 망나니를 한 대 더 때려주고 싶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젖 먹던 힘을 다해 쥐어 패고 말리라. 둘째 망나니가 날 찾아온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아부지가 너 오래." "저, 저를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알겠어요. 바로 준비하도록 할게요." 그렇다면 저 나이트들은 왜 온 거죠? 질문은 하지 못했다. 우리 개차반씨. 다시말해 이 왕국의 하늘인 왕이 부르는데 내 사적인 궁금증으로 몇 초의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재빨리 준비를 끝마치고 김훈상씨를 보러 갔다. 저 개차반. 저 높은 단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데 아주 거만하기 그지없다. 뭐. 그걸 탓하는 건 아니다. 왕이면 좀 거만해도 되지. 특히나 상대가 공주 앞이면 말이다. 저 삐딱한 자세. 누가 봐도 허세인데, 쟤는 허세가 아니다. 쟤는 센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세니까. 왕이라는 작자가 물었다. "그래서 생각은 해봤냐?" "네?" 제길. 또 무슨 생각을 해봤냐는 거야.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선 1초가 한참이었다. 감히 왕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뭘 말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 자식아. 좀 더 설명을 해주고 말해. 제발. 그나마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있다. 내가 환혁이를 울리고 만 것. 그건 이미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져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도 좀 이상한 것이,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김환성이 아니라 나이트들이 나를 포박해서 왔을 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 진짜 모르겠다. 나 여기서 죽는 거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개차반의 표정이 확 굳었다. 아. 망했어. 도대체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벌써부터 두렵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쟤가 '싫증 났으니 죽어.'하고 말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니 두려울 수밖에. '제발...' 그 땐 진짜 내 실수였다. 아무리 상대가 환혁이라지만 귀찮은 티를 내다니. 열 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개차반이 입을 열었다. "내가 선물 생각해 놓으라고 했잖아. 왕명 무시하냐?" ...그거. 왕명이었어요?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도대체 뭘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사실 개차반의 인내심을 긁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하는 걸 너무 덥썩 말하면 안 된다. 나는 인내심을 살살 긁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개차반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선물 말 할래, 사형 당할래?" 말한다. 이 자식아. *** 두 시간 전. 나이트 제 9대대장 김환성이 말했다. "너랑 너. 나 따라와." "어디 갑니까?" 나이트 제 9대대 소속 나이트 중 한 명인 최욱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공식적인 훈련 일정도 없다. 갑자기 따라오란다. "기록의 관 갈거야." "아. 혹시...?" "엉. 김상희한테 갈 거야." 김상희 공주가 그래도 제법 이쁨을 받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만 그것도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나이 어린 왕자를 울렸으니. 죽어 마땅한 죄이긴 했다. 욱현이 바로 옆. 동료인 홍경석에게 속삭였다. "죽이는 건 네가 해라. 피 보는 거 싫다." "아씨. 네가 해." 마력을 활성화중이던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여? 누굴?" "음? 김상희 죽이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남자들간의 신분차이는 남녀간의 신분차이만큼 엄격하지는 않다. 물론 계급 자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남자들끼리는 어느 정도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 굳이 지구와 비교해보자면, 미국의 예를 들 수 있겠다. 미국은 대통령과 환경미화원이 인사로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가볍게 반말로 -물론 미국에는 존댓말의 개념이 거의 희박하지만-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여튼 남자들끼리의 계급은 남녀간의 계급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죽이긴 누굴 죽여? 너 맞을래?" "예?" 나이트 제 9대대장 김환성. 나이는 18세. 어릴 때에는 그저 철부지 어린아이였지만 이젠 아니다. 성년식도 지났다. 게다가 무력에 관한한은 천재라고 불린다. 욱현도 긴장했다. "죄송합니다." "헛소리하면 죽는다 진짜." 욱현은 도대체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 김상희를 죽이려고 가는 거 아니었던가. 그래서 굳이 나이트들을 데리고 가는 거 아니었던가. 억울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환성은 왕자이자 대대장이었고, 결정적으로 주먹도 자신보다 강했으니까. 그러니까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을 수도 없다. "기록의 관 갈거야. 가서 아무도 죽이지 마. 내가 무슨 명령을 내리든 그건 장난치는 거니까 너네도 시늉만 해." "...예?" "아씨. 알았어, 몰랐어? 적어도 기록의관 내에서는 내가 죽이라고 해도 죽이지 말고 시늉만 하라고. 척말이야 척. 그런 척." 욱현은 황당해졌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우리 나이트들을 그냥 겁주기용으로 데려간다는 겁니까?' 욱현 뿐만 아니라 경석 역시 황당했다. 무려 고려 왕국의 나이트를 겨우 그런 용도로 데려간다니. '나이트가 이런 식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나?' 기분이 나빠졌다. 환성도 그 사실을 안다. 남자 입장에서는, 그것도 나이트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나쁜 명령이다. "너네 내가 보너스 줄게. 100퍼센트." 두 나이트는 보너스에 마음이 풀렸다. 무려 100프로다. 조금 귀찮은 일 하고서 100프로 봉급 받으면 정말 많이 남는 장사다.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역시 대대장님은 통 크십니다." 기록의관 근처. 욱현이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진짜 왜 데려가는 겁니까? 보너스까지 줘가면서." "응. 그런 게 있어."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오늘따라 김환성의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김환성이 우쭐대면서 말했다. "너네 오빠라는 단어 알아?" "오빠요?" 오빠. 들어본 단어다. 분명 오라버니 비슷한 단어였는데...하고 경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도 되는 단어다. 잘 쓰이는 단어도 아니고. 그런데 오빠랑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김환성이 또 씨익 웃었다. "와보면 알아." ***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게 있기는 있었다. 퓨리어스 한 방울. 이미 나는 그걸 섭취했기 때문에 아플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퓨리어스가 괜히 보물이라 불리는 건 아니었으니까. 한 병에 어지간한 왕국 하나 값이다. 이 세계 최대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보물을 먹었다. 그걸 또 먹으면 노화도 느려진단다. 나도 여자다. 퓨리어스는 당연히 탐이 난다. 그도 아니면 좀 더 많은 책을 볼 수 있는 기회도 갖고 싶었다. 내가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책 말고는 없었으니까. 그 외에도 공주들과도 교류를 갖고 싶었다. 공주들의 세계. 나는 잘 모르니까. 뿐만 아니라... 한진수에 대한 소식도 알고 싶었다. 이렇다더라 하는 소문 말고. 왕에게 직접 말이다. 하지만 난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그래. 나를 버리는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자. 이제부터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냐. 그러니까 쪽팔릴 거 없어. 제길. 그래도 쪽팔려 엉엉. "저는 아버님을 하루만 빌리고 싶어요. 저에게 있어 아버님은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아냐. 넌 가장 큰 선물이 아냐. 가장 큰 선물은 우리 형석이지. 너는 아니라고. 엉엉.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저 개차반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또 영문을 알 리 없는 말을 해댔다. "이제부터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은 소녀로 통일하기로 한다."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해봤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는' 대신 '소녀는'이라는 말을 사용하라는 거다. 나는 성년식 이후로 '소녀는'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뭔 놈의 왕이 자꾸 이상한 명령을 내려. 저 이상한 개차반이 다시 말했다. "그럼 다시 말해봐." "소녀는 아버님을 하루만 빌리고 싶어요. 소녀에게 있어 아버님은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개차반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저는'이나 '소녀는'이나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냐. 저 자식. 뭔가 이상하다. "당돌한 계집이군. 감히 이 몸을 빌리고 싶어 하다니." "소, 소녀가 아버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 불경한 짓을 저지른 것 같아요. 용서해 주세요." 아니. 불경하지 않아. 분명 넌 속으로 좋아하고 있을 거야. 내가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널 선택했어. 선택이라 쓰고 장기투자라고 읽는 거지. 말이 좋아 장기투자지 아부다. 하. 잠깐만. 눈물 좀 닦고. "나를 빌려서 어쩌려는 거지?" "소녀는 아버님과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요." *** 전후사정을 알게 된 왕궁이 발칵 뒤집어졌다. 학자들 사이에서 또 열띤 논쟁이 오갔다. "뭐라고요! 폐하께서 김상희 공주와 바깥 나들이를 가신다고요! 그게 무슨 해괴한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알렉스도 흥분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긴요! 지금 버젓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김환석 왕자님의 결혼식 준비 때문에 정신없으실 텐데, 어떻게 하루를 뺍니까?" "예산 지원해주셨잖아요. 그 정도 예산이면 하루 빼셔도 시간은 충분하실 겁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립니다." "공주와의 바깥나들이를 왕께서 직접 하시다뇨? 전례가 전혀 없는 일입니다." 알렉스는 답답했다. 이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이들은 수십 평생을 저러한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왔다. 지금와서 저들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초에 이해를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안 하고 있어. 하여튼 고정관념이 이래서 무서운 거라니까.' 알렉스가 말했다. "하여튼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겁니다. 내일 대회의는 모레로 미뤄졌습니다. 따지려면 나한테 말고 폐하한테 따지세요." *** 황제의 밀실. 황제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말했다. "무슨 일이지? 파악 됐나?"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고려왕궁 내에서도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황제는 생각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왕이 직접 공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리는 없다.' 인상을 찡그렸다. "김훈상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확률은?" "거의 0퍼센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왕이 직접 공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공주는 필요 없는 짐짝 같은 것 아니던가. 그런데 김환석 왕자의 결혼식을 앞둔 상태로 그런 시간 버리는 짓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뭔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면밀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제국은 물론 강하지만 그래도 경계하는 왕국이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고려다. 절대적인 화력에서는 밀리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신경 쓰인다. 특히 왕인 김훈상과 스페셜 나이트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들이 있는 이상 김상희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뭐지?' 명령을 내렸다. "조심히. 인력을 더 풀어서 이유를 알아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들키지 않도록 하고. 정보력을 좀 더 동원하도록 해." "들키면 자결하겠습니다." 그냥 별 이유 없이 왕이 공주와 나갔을 리 없다. '분명 뭔가 있다. 그게 도대체 뭐지?' 제국의 정보부가 움직였다. 한편, 김훈상이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냥 가는 건데." 알렉스가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데이트라는 단어를 사전에 넣자고 했잖아요. 알렉스는 기회를 틈타 말해봤지만 김훈상이 거절했다. 안 그래도 '딸바보' 등재 때문에 말이 많다. 별 생각없이 수락해줬는데 아무래도 해괴망측한 단어인 것임에는 틀림 없었다. 알렉스를 편애한다는 소문이 있는 판국이라 좀 조심하는 게 좋을 법 했다. "알렉스. 그런 쓸데 없는 걸 누가 한다는 거냐?" 알렉스는 말하고 싶었다. 지금 당신이 하려는 게 데이트아니면 뭡니까. 좀 더 완곡하게 돌려서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째서 이번에 김상희 공주와 나들이를 하시게 되신 겁니까?" "내가 명령을 내렸거든." "...예?"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발칙한 계집아이가 한다는 말이 나를 하루만 빌려달라더군." 죽음과 삶의 경계. 그 말이 맞긴 맞다. 선물 받을래, 죽을래? 물어봤었으니까. '아. 그래서 폐하께선 넓디넓은 마음으로, 폐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으니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 이런 겁니까? 진짜 그런 겁니까?' 알렉스의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 더 생겼다. 하여튼 김상희 공주의 세 번째 바깥 나들이가 시작 됐다. 왕이 함께 하는. 약간 특별한 바깥 나들이였다. ============================ 작품 후기 ============================ 황제: "분명 뭔가 있어. 정보부 움직여." ...?! (그런 거 없었다고 한다...) 0042 / 0192 ---------------------------------------------- 안 자면 사형이다 *** 나는 바깥 세상에 나와 본 적이 별로 없다. 공식적으로는 총 세 번이었다. 두 번은 바깥 나들이었고 한 번은 제국행이었다. 사실상 제국을 갈 때에는 밖을 구경했다기 보다는 왕궁에서부터 황궁으로 이동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내게 있어서 왕궁 밖 세상은 낯선 세상임에는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서운 척을 했다. "아, 아버님. 저를 떼어놓고 가지 말아 주시어요." 이름하여 연약한 척이다. 아.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주위에 아무도 없구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왕의 호위로 스페셜 나이트들도 따라 붙었을 거다. 그 대단하다는 프리온 나이트마저도 경계하는 능력을 가진 스페셜 나이트들이 뒤에 붙어 있을 거고, 개차반의 말을 빌리자면 그 스페셜 나이트보다 '더 센' 왕이 있는데 별 일이 있어날 리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한 척을 했다. 이 역시 이 세계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행동이다. 여자가 어찌 자신의 감정을 남자에게 말할 수 있을까. 엄청 건방진 일이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상당히 단순한 면이 있어서 이렇게 약간만 약한 척 해줘도 허세에 찌드는 모습들을 보이곤 하지만, 어쩌랴. 여자들은 이런 걸 이용할 줄 모른다. 알려줘도 절대 못 할 거다. 남자가 무서워서 말이다. "소녀는 너무나 두려워요. 아버님께 꼭 붙어 있을래요." 슬쩍 눈치를 봤다. 기분이 좋냐. 안 좋냐. 열심히 파악을 해봤는데 개차반의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조금 위험하기는 해도 좀 더 끼를 부리기로 했다. 슬쩍 개차반에게 팔짱을 꼈다. '제발...!' 내 나름대로는 또 모험이었다. 지금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스페셜 나이트들은 분명 이 쪽을 보고 있을 거다. '스페셜 나이트들이 건방지다고 나 죽이려 드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스페셜 나이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개차반씨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내 손도 힐끗 쳐다봤다. 나와 내 손을 번갈아가면서 보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건방진 계집. 감히 내 몸에 손을 댄 거냐?" 여기까진 예상했다. 네가 아무리 천재여도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다른 이상, 너는 내게 있어서 단순한 개차반이다! 나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단순한 개차반!'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좋아. 예상대로 되고 있어.' 나는 화들짝 놀라는 척을 했다. 얼른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 가라. 필살기. 일단 말도 한 번 더듬어주면 더 당황한 것처럼 보이겠지. "죄, 죄송해요. 저, 저. 아니. 소녀가 아버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소녀가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개차반의 눈에는 내가 엄청나게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막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다. 이 짓도 15년이나 해왔다. 대충 감이 온다. '엄청 진심인 것처럼 보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개차반은 또 피식 웃었다. 기분 나빠보이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15년 내공으로 내가 저 표정을 해석해보자면 '그래. 나는 엄청 믿음직스런 아버지지. 그 마음 이해한다. 건방진 계집.'이란 뜻인 것 같다. 15년 동안 눈치만 살피다보니 표정도 읽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이러다 돗자리까는 거 아냐? 개차반은 엄청 선심쓰듯 말했다. "건방지고 미천한 계집이니 모든 것이 두렵겠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마치 너는 건방지고 또 미천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라 위대하신 내가 옆에 있어야 하겠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 스페셜 나이트들은 특별한 은신법을 사용하여 몸을 숨긴다. 같은 스페셜 나이트가 아니라면 상대가 바로 옆에 있어도 잘 모른다. 그들은 왕과 공주 주위에서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는 중이다.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이름은 김유신. 김유신은 생각했다. '저 계집이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댔다.' 왕이 마력으로 끌어당겨 안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왕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공주따위가 감히 옥체에 손을 댄 거다. '죽여야 하나?' 원래대로라면 즉결처분해도 될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군.' 다른 공주가 그랬다면 김유신은 가차없이 칼을 빼들었을 거다. 그의, 왕에 대한 충성심은 지나칠 정도로 올곧았고 강직했다. 감히 공주가 왕의 팔을 잡았으니 이건 죽여도 되는, 아니 죽여야 한다. 그런데 이 기분. 도무지 설명을 못하겠다. '왕께서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리고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김상희가 자신더러 '정말 믿음직한 나이트셔요.'라고 온갖 칭찬을 늘어놓던 그 때. 김상희의 예측대로 김유신은 그 모든 말들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그 때, 자기가 슬며시 웃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유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께서 기분이 좋으실 리 없지.' 그렇다. 이건 착각이 분명했다. 공주가 왕의 몸에 손을 댔는데 기분이 좋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래. 분명히 착각이야.' 김유신은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스페셜 나이트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 누군가 있다. - 알아보겠습니다. 스페셜 나이트 둘이 사라졌다. 김훈상은 고려왕국의 왕이다. 고려왕국은 제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힘을 가진 왕국이다. 객관적으로 제국보다 약한 것은 틀림없다. 제국의 화력은 전 세계를 전부 합친 것보다 강하니까. 집단전에 특화된 프리온 나이트가 있는 이상, 전쟁에서 제국을 이길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봐도 됐다. 그러나 고려는 약간 특별했다. 고려가 가진 무기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경제력. 고려는 퓨리어스의 유일한 생산국임과 동시에 지리상 각종 무역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덕분에 고려의 경제력은 막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왕국의 힘은 바로 고려왕국의 나이트들이다. 프리온 나이트에 비해 화력은 떨어지지만 그들은 은신, 기습, 침투에 특화된 이들이다. 즉, 게릴라전을 펼치기에 더없이 훌륭한 인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고려왕국 전체를 쓸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황제 스스로도 목숨을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고려 왕국의 나이트가 제국에 몰래 침투하여 게릴라 전을 펼치면 제국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어쨌든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고려왕국의 왕을 누군가 미행한다? 분명히 뭔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김유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왕께서도 알고 계시겠지.' 그런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유신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나 했다. '설마 김상희 공주가 무서워할까봐서 신경써주고 계신 건가?'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튼 김상희를 보고 있으면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김훈상의 반응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누군가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을 거다. 김유신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겨우 알아냈다. '우리를 믿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구나.' 김유신은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감동했다. 왕이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은 그만큼 스페셜 나이트와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유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저 믿음에 보답하고 말리라.' *** 세상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 꽤 많다. 단적인 예로, 길을 지나치면서 몇 명의 사람과 마주쳤는지 길거리에 보이는 가로수가 몇 그루였는지. 그런 것들은 아무도 기억 안 한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문제니까.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거기 서라." 김유신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아예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다. 느껴지는 마력은 겨우 일반인 수준. 길거리의 돌맹이보다도 무가치한 자가 감히 왕을 막아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이건 김유신의 실수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 대단하다는 김훈상조차도 황당해하는 표정이었으니까. 김훈상이 말했다. "넌 뭐냐?" "남자망신 죄다 시키는 새끼. 대낮 길거리에서 계집년을 붙잡고 이동하는 꼴이 쪽팔리지도 않냐?" 김상희는 찔끔 놀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놀라는 척을 했다. 놀라는 척과 더불어 무서운 척도 했다. 김훈상의 뒤로 살짝 숨었다. 김훈상의 팔이 김상희의 앞을 살짝 막아줬다. 자신의 몸 뒤로 끌어당겼다. 김유신도 그걸 분명히 봤다. '왕께서 이상하시다!' 저 남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왕의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남자 망신이라는 말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이 나라 왕이다. 김훈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험한 꼴 보지 않게 처리해." 남자는 이상한 공간에 갇혔다. 필드. 스페셜 나이트의 스페셜 필드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배후있나 캐는 거 잊지 말고." 김상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눈에는 김유신의 모습도 안 보이고 스페셜 필드도 안 보인다. 지금 스페셜 필드 내에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는 있었지만 김상희의 귀에는 그 고함도 안 들렸다. 스페셜 필드 내. 김유신이 말했다. 다짜고짜 말했다. "배후가 누구냐?" "배, 배후라니! 무슨 개소리야!" 남자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거. 느껴지는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이 정도의 필드를 구사한다는 것은, 적어도 일반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최소 귀족 이상. 어쩌면 나이트일지도 모른다. 김유신은 직감했다. 이 놈에게 배후 따위는 없다. 거창한 배후가 있었다면 아마 자결이라도 했겠지. 이 놈은 정말로 여자가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순수하게 분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덜떨어진 놈을 미행으로 붙일 리는 없겠지.' 애초에 미행도 아니었다. 그냥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였고 미행한 것도 아니고 보자마자 대뜸 불만을 말한 것이었으니까. 김유신은 칼을 뽑았다. "뭐, 뭐, 뭐, 뭡니까!"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김유신이 칼을 휘둘렀다. 남자가 풀썩 쓰러졌다. 김유신은 칼을 갈무리했다. 남자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바람결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남자는 홀로 중얼거렸다. "사...사... 살려줘... 사, 살려주세요..." 김유신은 스페셜 필드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나이트 중 한 명이 바닥에 주저앉아 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탁탁 쳤다. "머리 깎으니까 훤칠하고 좋네. 아따. 멋있다." "인마. 그래도 살았다. 우리 대장 성격에 죽였을 텐데. 오늘은 좀 너그럽네. 운 좋은 줄 알아. 상대 봐가면서 덤비고."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해버렸다. *** 황제의 밀실. 황제가 허공에 말했다. "죽었다고?" "예. 스페셜 나이트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우리와의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잘 처리했습니다." "자결이었나?" "예. 다행히 제압당하기 전에 자결했습니다." 황제는 황금의자에 앉았다. '따라붙기가 더 힘들어지겠어.' 미행을 들켰다. 역시 김훈상과 스페셜 나이트는 만만치 않았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조심하며 미행했는데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다. '역시 스페셜 나이트인가.' 그래도 다행이었다. 자결을 했다고 했다. 제국과의 연결고리도 찾지 못할 거다. 위험부담이 조금 늘어나기는 했지만 김상희에 대한 감시는 포기할 수 없었다. 1차각성 이후에 그녀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질 테니까. "김상희를 계속 주시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한편, 김훈상은 앞을 보면서 말했다. "누굴까?" 김상희는 움찔 놀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소, 소녀는..." 김훈상은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김상희가 무어라 무어라 말은 했지만 말이 안 나왔다. 김상희의 입과 귀를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김상희의 귀를 막아버린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자결했다고?" "예. 숫자는 2명. 상당한 훈련을 거친 자들이라 생각 됩니다." "제국일까?"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염두에 둬야할 것 같습니다." 스페셜 나이트가 제압하기도 전에 자결했다고 했다. 사실 웃기다면 웃긴 말이지만, 그 정도 실력자는 드물다. 스페셜 나이트가 제압하기 전에 자결할 수 있으려면, 상당히 움직임이 빨라야 하니까. 그 정도 실력자를 미행으로 쓸 수 있는 단체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당장 떠오르는 곳은 제국. 그러나 제국에서 미행을 붙일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왕가재산을 풀었기 때문인가.' 알렉스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고려는 제국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지나친 비약이야.' 고려왕국의 왕이 밖으로 나왔다면 미행붙일 집단은 많다. 단순히 실력자들이 있었다는 이유로 제국을 의심하기는 힘들었다. 김훈상은 옆을 힐끗 쳐다봤다.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김상희가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아버님! 목소리가 안 나와요! 어쩌죠! 무서워요!' 하고 외치고 있을 거다. 당황한 티가 확 났다. 김상희와 눈이 마주친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김유신은 이번에도 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왕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미행이 따라붙었는데도. 어째서?' 김유신은 또다시 의문으로 가득한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미행이 따라붙는지 더 신경 쓰도록 해. 제국 쪽에 무게를 좀 더 두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김상희 같은 하찮은 계집은 몰라도 되는 얘기이니 발설하지 말고." 김유신은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그런 말 안해도 말 안하려고 했다. 예전부터 왕이 조금 이상하다. 스타리움에서는 김상희의 귀에 마력보호를 걸라고 하질 않나. 어차피 말 안할건데 하지 말란다. 하지만 김유신은 감히 왕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김훈상은 그제서야 김상희를 제약하고 있던 마력을 풀어줬다. "아버님!" 김훈상이 앞장서서 걸었다. 김상희는 종종걸음으로 김훈상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김상희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 한 일이 생겼다. 바로 고려왕국 내. 최고급 중에서도 최고급이라 불리는 '아리시아 호텔'에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우리를 믿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구나.' '반드시 저 믿음에 보답하고 말리라.' ...아냐. 당신. 속고 있어! 0043 / 0192 ---------------------------------------------- 안 자면 사형이다 ***43 아리시아 호텔. 고려 왕국 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상위 1퍼센트만을 위한 초호화 호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왜.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들이 가출했을 때 묵는 그런 곳. 참고로 말하자면 이 곳 하룻밤 숙박비가 약 400만원 쯤 한단다. 만약 여기가 지구였다면, 나는 이 개차반에게 폭풍잔소리를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뭐. 400만원짜리 스위트룸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똥이 황금으로 나오냐! 도대체 그 거액을 주고 왜 이런 곳에서 자는 건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쾌적하긴 하네.' 이 곳은 마력으로 운용되는 최첨단 시스템이 많이 적용되어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로 '풀 오토 쾌적 시스템'이 있다. 온도, 습도등을 자동으로 쾌적하게 맞춰주는 획기적인 시스템이라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이 시스템이 적용된 호텔은 딱 다섯 군데라고 했다. 운용비가 엄청나게 많이 든다나 뭐라나. 또 하나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이 곳엔 남자밖에 없다. 여자들은 미천한 존재라서 취업조차 안 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남자들은 일 거의 안 한다. 대부분의 생산활동은 남아도는 인력이라 할 수 있는 여자들이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남자는 귀족. 여자는 노예인 곳이니까. 그런데 이 곳은 다르다. 여자가 있으면 부정이라도 타는 건지, 전부가 남자다. 딱 한 곳. 로얄 스위트룸을 빼고 말이다. 개차반이 프론트 데스크 앞에 걸어가서 말했다. "로얄 스위트룸." 프론트 데스크의 직원이 개차반을 쳐다봤다. "저... 손님." 우리 개차반씨는 시크한 표정으로 직원을 쳐다봤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개차반의 표정. 뭔가 우쭐대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챌 거다. 15년간 눈치를 보며 살아온 나니까 보이는 표정이다. 쟤 분명. 이유는 모르겠는데 우쭐대고 있다. 어찌보면 김환성이랑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건 내 착각일까? "이 호텔에 계집은 출입 금지입니다." 김훈상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규정이 있다고?" "네." 호텔 직원은 나를 쳐다봤다. 나를 완전히 경멸하는, 바퀴벌레 쳐다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다. 아. 그래. 이해한다. 금녀의 신성한 호텔에 저급한 계집아이가 들어왔으니 기분 나쁠 법도 하지. 만약 나 혼자였으면 쫓겨나도 진작에 쫓겨났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개차반씨는 개차반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걸 온 몸으로 말하는 듯한 여유와 아우라. 나도 얘를 실제로 보기 전엔 그런 게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얘는 그랬다. 하여튼 그런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서 이 곳의 다른 남자들이 개차반한테 시비를 걸지 않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규정 없을 텐데." "손님. 이 곳은 아리시아 호텔입니다." 직원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애쓴다 애써. 기분 나쁜 거 훤히 보인다. 개차반이 말했다. "그런 규정 없으니까 손님이나 받아." "손님. 안 됩니다. 규정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규정. 확실하냐?" "예. 손님." 개차반이 또 피식 웃었다. "고창식 불러와." *** 김훈상이 말했다. "고창식 불러와." 고창식은 이 호텔의 관리인이자 지배인이다. 김훈상과는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김훈상이 이 호텔의 관리자로 채택했으니까. 참고로 말하면 세계 최고의 호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아리시아 호텔은 고려왕가의 재산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의 현대 왕. 김훈상의 개인 사재들 중 하나다. 물론 아무도 모른다. 호텔 지배인과 왕족들. 그리고 몇몇 관리만 알고 있을 뿐이다. 비밀 사재들 중 하나니까. "손님. 지배인님께서는 현재 자리에 안 계십니다." 직원은 답답해졌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 모르겠다. 짜증나는 어린 계집아이를 가지고 온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아마도 어디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귀족이겠지. 살다살다 이런 미친놈은 처음 본다. 이 곳이 어디라고 감히 계집을 데려오는 거야? 이 곳은 아리시아 호텔이라고!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김유신." "네." 직원은 기겁했다. 분명 옆에 아무도 없었는데 남자가 튀어나왔다. '으, 은신인가...?' 이토록 완벽한 은신이 있다니. 그리고 저런 은신을 할 줄 아는 남자를 경호로 데리고 다니는 것 보면 그냥 미친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돈이 썩어나는 미친놈일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이 곳은 돈 많은 귀족들이 오는 곳이긴 했지만. "고창식 끌고와." "네." 김유신이 사라졌다. 주변의 사람들은 김훈상을 힐끗 쳐다봤다. 아무래도 진상손님 하나가 찾아온 것 같다. 그러나 크게 신경은 안 썼다. 어차피 이 호텔은 대부분 귀족 혹은 부호들이 찾는 곳이다. 직원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미친놈. 지배인님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지배인님 찾는 놈들이 하루에도 10명은 넘는다!' 고창식은 어지간한 VIP 아니면 만나주지도 않는다. 콧대 높은 지배인이다. 그리고 그 지배인에게는 24시간 경호가 붙어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쯤 눈물 콧물 쏙 빼고 있을 거다. 약 30초가 지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 안녕하십니까!" 직원이 눈을 크게 떴다. 콧대 높은 관리. 고창식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저 뚱뚱한 몸이 달리는 것. 거의 3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왼쪽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마력까지 사용해서 뛰어오고 있어?' 김훈상 앞에 선 고창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조아렸다. "폐..." 고창식은 말을 잇지 못했다. 김훈상이 마력으로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난 여자를 이 곳에 들이지 말라는 규정 만든 적 없는데." 직원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규정 만든적이 없다느니. 어쩐다느니. 저 인간이 이 곳 사장은 아닐테고. 그가 알기로 이 곳의 가장 높은 사람은 고창식이다. "고창식. 말해봐라. 이 곳에 여자가 오면 안 되나?" 고창식은 울고 싶어졌다. 마력으로 입을 막아놓고 말해보란다. 심지어 '나는 여자 오지 말란 규정 만든 적 없다'라고 말해놓고 '여자 오면 안 되나?'하고 묻는다. 이건 답이 정해져 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저 왕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지금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 눈도 팅팅 붓게 생겼다. 김훈상이 마력을 풀어줬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갑자기 지배인이 나타나서 그런 규정 없단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규정 자체가 정확하게 '글자로' 명시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십년간 지켜온 전통이며 암묵적인 룰이다. '뭐, 뭔가 잘못되고 있어.'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잔말 말고 로얄 스위트룸 내놔." "어, 얼른 드리게!" 도대체 이 남자가 누군데 예약 안하면 절대 안 받아주는 로얄 스위트룸을 내주라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한단 말인가. 후작이상의 엄청난 귀족이라도 되는가 싶다. '도대체 누구길래...' 일단 방은 내줬다. 고창식은 소리치고 싶었다.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란 말이야! 이 자식아! 누구 모가지 달아나는 꼴 보고 싶어!' 이 호텔은 김훈상의 개인 사재다. 쉽게 말하면 김훈상이 사장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사장이 또 이 나라 왕이다. '어휴. 내가 저 자식 짜르고 만다!' 김상희는 쏟아지는 눈길을 뒤로 한 채 42층. 로얄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최상층이다. 바깥이 완전 투명유리로 되어 있어서 밤하늘이 보이는 구조였다. 김훈상이 명령했다. "씻고 나와라." "네. 아버님." 로얄 스위트룸에는 기본적으로 시녀가 제공된다. 오로지 로얄 스위트룸만 그렇다. 로얄 스위트룸의 시녀들 중 한 명인 크리스탈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 여자의 모습을 한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곳은 여자는 절대 못 오는 곳이다. 그 유명한 아리시아 호텔. 그 안에서도 로얄 스위트룸이니까. 남자들도 못 오는 엄청난 곳인데 거기에 여자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뭐지?' 그런데 시중을 들다보니 느꼈다. 이 여자. 진짜 여자다. 남자가 아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자가 아닌데 이 곳에 있다고? 나라가 망하려는 거야? 도대체 뭐야?' 시녀는 소위 말하는 멘붕상태에 빠져들었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못했다. '혹시 마력 사용이 가능한 여자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시녀들은 바깥 얘기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손님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주워듣기는 했다. 그 중에는 제국의 황녀 이야기도 있었는데 제국의 황녀들 중 한 명은 마력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아. 그러면 이 여자는 마력 사용이 가능한 황녀일까? 그런데 아버님...하고 부르는 걸 봤는데.' 황녀가 아버님이라고 부른다면 답은 하나다. 저 남자는 제국의 태양. 제국의 황제인 것이다! '화, 화, 화, 황제!' 시녀는 제대로 오해했다. 잔뜩 긴장했다. 정말 조심스레 정성을 다해서 김상희가 씻는 것을 도와줬다. 김상희가 말했다.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어요." 그리고 그 시녀는 방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다. 다른 시녀가 물었다. "크리스탈. 왜 그래? 왜 울어? 또 손님이 말도 안 되는 변태짓 했어?" 변태들은 그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심지어 자신의 인분을 먹으라는 놈들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고마워'란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시녀로 태어나서 시녀로 컸다. 매일 남자들의 시중을 들고 무시만 받으며 살아왔다. 밤에는 성욕구를 풀어주는 노예로, 낮에는 그냥 노예로 17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제국의 황녀께서는 고맙다고 말해줬다. 단순히 한 마디 뿐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심장을 때리던지. 그게 눈물로 튀어나왔다. 한편, 김상희는 욕하고 싶었다. '방 많은데 왜! 굳이 여기냐고!' 로얄 스위트룸에는 방이 많았다. 테마별로 방이 꾸며져 있었다. 당연히 각 방마다 침대도 놓여 있다. 그리고 각 침대마다 또 효용이 달랐다. 하여튼 로얄 스위트룸은 비싼 값을 했다. 그런데 김훈상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그냥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휙휙 움직였는데, 김상희의 몸이 구속됐고 침대에 눕혀졌다. 김훈상은 그 침대에 걸터앉아 김상희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김상희는 당연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잘 수 있는 계집이 있다면 그건 사형감이다. 왕이 눕지도 않았는데 누워 있다니. '왕께서 왜 저러시지?' 나이트들도 집단 멘붕상태에 빠졌다. 아무래도 왕께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마력으로 공주를 눕히시다니. 그것도 저렇게 편안한 상태로. 정작 김상희는 불편해 죽겠지만 하여튼 나이트들이 보기엔 정말 편해보였다. "안 자면 사형이다." 김상희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했다. 어쩌랴. 안 자면 죽인다는데. 어떻게든 열심히 자야했다. 어떻게 안 자면 사형이냐! 가슴 철렁하니까 아무데나 그렇게 사형 갖다 붙이지 마라, 이 개차반아! 김상희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은신으로 몸을 숨긴 김유신은 왕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심장소리는 크지만 일단 눈은 감고 있는 김상희 공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웃고 있는 건지, 어디에 웃긴 게 있는 건지 김유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평생가도 이해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훈상의 행위를 해석해보자면, 자고 있는 딸래미의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쯤이 되겠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모든 움직임 구속과 -마력을 사용하여- 더불어 안 자면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명령이라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발 좀 어디론가 가버리라고!' 결국 김상희는 한숨도 못 잤다. 김훈상이 말했다. "계집아이 주제에 내 앞에서 잘도 자더군." 김훈상은 뭔가 만족한 듯 보였다. *** 나는 왕궁으로 돌아왔다. 죽을 것 같았다. 하루 밤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기록의 관에 돌아오니 긴장이 풀려 쓰러질 뻔 했다. 그 놈의 개차반. 매일 하는 다짐이지만 언젠가 패고 말리라. 반드시 패주고 말겠어. 송수진씨가 달려와 나를 부축해줬다. "어맛? 공주님? 괜찮으셔요?"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공주님? 괜찮아요?" 요즘 송수진씨와 부쩍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알렉스 학자님이었다. 알렉스학자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대고 웃었다. "저는 그 이유를 알겠군요." "네?" "보통 아버지들은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를 가끔씩 밤새 지켜보곤 합니다. 마력이 활성화 되기 전에는 육체가 약하기 때문이죠.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자하는 행위입니다. 의학과 마력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없어진 풍습이긴 하지만요." 송수진씨가 물었다. "하지만 공주님은 계집아이인걸요?" "그러게요. 그것 참 미스테리군요." 그렇게 껄껄 웃으면서 미스테리라고 말해봐야 전혀 미스테리같지 않거든. 이 아저씨야! 알렉스씨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냥 잠든 딸 얼굴을 밤새도록 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이를테면 사랑스럽다든지." 그럴 리가요. 그 작자는 내게 안자면 사형시킨다고 명령한 작자라고요. 두 번 사랑했다가는 제 명에 못 죽겠네. 다음 날. 나는 김훈상에게 불려갔다. 김훈상이 내게 물었다. "너. 제국에 가고 싶냐?" 나는 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왜 내게 저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왕이 나한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제국에 보낼 거면, '제국에 가라'하고 말하든지 아니면 '기록의 관에 박혀 있어라'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내 의사를 묻고 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개차반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치를 보느라 빠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물었잖아. 제국에 가고 싶냐고." 아씨. 뭐라는 거야. 이유는 좀 말해달라고. ============================ 작품 후기 ============================ "계집아이 주제에 내 앞에서 잘도 자더군." 너 때문에 한 숨도 못 잤다. 0044 / 0192 ---------------------------------------------- 우리 둘째 망나니의 미친 짓 *** 제국의 태양. 황제는 황금의자에 앉아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감시가 많이 힘들어졌다고?" "예. 저번에 들킨 이후로 감시가 심해졌습니다. 특히 스페셜 나이트들이 지척에서 경호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려는... 그 계집이 가치있는 계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건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계집은 왕자들과의 교류가 활발합니다. 때문에 스페셜 나이트들이 각별히 신경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어렵겠다. 김상희 공주가 언제 1차 각성을 할지 모르겠지만 1차 각성 이후에 김상희에 대한 처분이 내려지게 될 거다. 고려는 김상희 공주가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를 거다. 제국 내에서도 아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 "김훈상이 확실히 그 계집의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게 맞겠지?" "확실합니다." 황제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 계집을 제국으로 부르지." "계집을 말입니까?" "그 계집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 들었다." 고대어를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고려왕국의 고대어 해석능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했다. '그냥 내놓으라하면 반발이 있을테니.' 일반 다른 왕국들이라면 그냥 내놓으라고해도 된다. 어차피 한낱 계집아이일 뿐이니까. 그런데 고려는 약간 다르다. 고려의 왕은 밟으면 밟을수록 고개를 더 드는 성격이다.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산다고 해도 싫어하겠지.'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이다. 그 왕에게 여자를 팔라고 하는 건 노예상인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참고로 노예상인은 그다지 대우받지 못하는 하층민들이다. 돈은 많이 벌 지언정, 사람들의 인식이 별로다. '그렇다면 명분은 이 쪽에서 만들어줘야겠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김상희를 제국으로 불러들이되,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시키기로 했다. '마력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특수한 행위를 통해 마력을 증폭시키는 계집이다. 그 희소성을 높이 사 마력학원에 입학시켜준다고 한다면. 김훈상도 거절할 명분은 없을 거야.' 그래서 서신을 보냈다. 김상희 공주를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시키라고 말이다. 김훈상은 그 서신을 받았다. 읽어봤다. '김상희를 입학시키라고?' 김훈상은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저번에는 두 공주를 부르더니 이번에는 김상희를 부른다. 그 때는 황제가 개인면담을 했고 이번에는 마력학원에 입학이다. '어째서지?' 황제의 행동은 심지어 기침하는 것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 그것 하나하나가 외교적, 정치적 계산이 깔려 들어가 있을 확률이 있다. 김훈상이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소한 행동하나하나에도 조심하고 또 생각해야한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고려에는 이득이다.' 제국의 마력학원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 날고기는 천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한 곳에 한낱 계집아이가 들어가게 된다? 그것도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고려왕국에 있어서는 경사나 다름없다. 버리는 패로 커다란 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가치 없는 10원을 투자하여 100만원을 벌어들이는 효과와도 같았다. '뭐가 됐든 배워서 온다면 도움은 많이 되겠지. 그런데 황제가 왜? 김상희에게 좋은 일을 해주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황제가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냥 김상희를 보내라고 했을 리는 없다. '뭔가 있다.' 뭔지는 모른다. 뭔가가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있을 것 같다'라는 것이 즉,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은 안 된다. 황제가 김훈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훈상 역시 황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서로가 적이 되면, 서로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김훈상은 하룻밤 동안 고민을 하고서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 진지하게 묻겠다." "예. 폐하." 알렉스도 간만에 긴장했다. 김훈상의 표정이 오늘따라 진지했다. 왕이 진지하게 나온다면, 신하된 입장에서 신하 역시 진지해야했다. "제국에서 이런 서신이 왔다." 알렉스는 그 서신을 읽어봤다. 김상희를 보내라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김상희를 제국에 보내는 것이 분명히 이득이다." "예. 맞습니다." 필요 없는 계집을 제국을 보내, 제국의 문물을 배워오게 하는 것은 분명 나쁘지 않은 거다. 어차피 밑져도 본전이다. "이제 진심으로 묻겠다." "예. 말씀하십시오." 김훈상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알렉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왕국 하나의 값에 해당하는 퓨리어스를 뿌릴 때에는 고민 한 번 없이 뿌려대던 작자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김훈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도대체 왜 김상희를 보내기 싫은 거냐?" "그, 그건..." 그렇게 분위기 잡아 놓고서 한다는 말이 그겁니까.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이제야 때가 왔다. 왕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나서서 알려준다면 그건 오만이자 교만이고 건방진 행동이지만, 왕이 직접 물었을 때에는 대답해도 된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말해주려고 했다. 그건 당신이 이 세상에는 절대 없는 생물이라 주장하는 등신 '딸바보'가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김훈상이 말을 끊었다. "아니다. 내가 싫을 리 없지." "...예?" "김상희를 불러 와라. 계집의 의중을 물어보겠다." ...애초에 계집의 의중이 뭐가 중요합니까? 설마 저는 아버님이 이 곳에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이런 말을 듣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죠. 설마 그 정도까지 타락하신 건 아닐거라 믿습니다. "분부를 받듭니다." *** 한진수는 침대에 누웠다. "김상희..." 지난 3년간 보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3개월 후에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게 조금 미뤄질 것 같다. 힐끗 옆을 봤다. 옆엔 아무도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친구인 곽기현이 미주알 고주알 떠들어댔을 텐데, 이젠 곽기현도 옆에 없다. 문득 외로워졌다. 외로워지면 외로워질수록 자꾸만 김상희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많이 변했겠지.' 분명히 많이 변했을 거다. 여자 나이 15세면 이제 갓 성년이며 가장 예쁠 나이다. '하...' 달빛이 새어들어왔다. 달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파랗게 보였다. 한진수는 눈을 감아 봤다. 그러면 김상희의 얼굴이 안 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깟 계집아이가 뭐라고 도대체 자꾸 눈에 아른 거리는 건지. 이런 날이면 또 괜스레 스스로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신차려. 한진수.' 언제부터인가 김상희의 얼굴이 자꾸 보고 싶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그랬고 눈을 감고 있어도 그랬다. 심지어 귀를 막기까지 했는데 -그 행동과 김상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딱히 없지만- 그래도 김상희가 자꾸만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김상희의 얼굴이 계속 보고싶었는가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김상희의 성년식 때 가지 못한 이후인 것 같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날, 한진수는 가지 않은 게 아니라 가지 못했다. 바로 프리온 나이트의 장교 훈련때문이었다. 한진수도 입대를 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프리온 나이트는 제법 세분화되어 있는 집단이었다. 한진수의 경우는 기본 훈련을 받은 뒤에 보직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훈련기간에는 외부로의 출입이 절대 불가능하고 연락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한진수는 프리온 나이트의 기본 군사 훈련을 역대 최고 성적으로 수료해냈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프리온 나이트의 작전 지휘과의 장교로 발령을 받을 것이냐. 그도 아니면 제국 마력 학원의 무력 및 전술 관련 최연소 수석교관으로 발령을 받을 것이냐. 그 두 가지를 놓고 고민 했다. 어차피 한진수는 경력을 쌓은 뒤 고려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두가지 모두 각자의 장점이 있다. 아직까지 선택을 하려면 1주일 정도 남았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각하는 그 와중에도 김상희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 프리지아는 여자이면서 마력운용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여자들보다는 인권이 훨씬 높다. 애초에 여자가 하찮아진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녀의 능력 자체가 출중하다고 보기에는 힘들었지만 그녀는 재능의 부족을 노력으로 메꿨다. 제국의 마력학원에서도 당당히 졸업장을 따냈다. 아주 좋은 성적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마력학원을 졸업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대단한 일이다. 천재들이 모이는 곳에서 경쟁을 한 거고, 그 천재들 사이에서도 졸업을 해냈다는 거니까. 참고로 제국의 마력학원은 약 30퍼센트의 인원이 졸업을 하지 못하고 떨어지게 된다. 프리지아가 말했다. "폐하. 저는 마력학원의 교관으로 부임하고 싶습니다." "교관으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프리지아는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 세계는 분명히 남성위주의 사회이며 그 것이 당연한 세계라는 것을 먼저 짚었다. "그러나 비록 하찮은 여성의 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또한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노력을 통하여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 말고도 지식과 무력을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교관은 많을 겁니다. 그 교관님들은 물론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 교관님들이 저보다 더 열등한 환경에서 더 열심히 노력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노력의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는 교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얘기냐?" "그렇습니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생각해보겠다." ***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나. 뭐라고 대답해야해?' 눈치를 열심히 살펴보니,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라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게 또 애매했다. 오늘은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평소대로 하기는 했다. "소, 소녀는 아버님께서 제게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일 것이어요." "아니. 그러니까 가고 싶어, 안 가고 싶어?" 아니. 그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진짜 죽고 싶냐. 아 짜증나. 이런 경우. 대부분 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다. 내가 어떻게 말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보라. 옆에서 강아지 한마리가 왈왈대고 짖는다고 해서 주인이 그 짖음을 알아들을 수 있나? 난 그 정도 수준도 안 된다. 나는 그냥 쟤가 앉아. 하면 앉는 거고 손! 하면 손 내미는 거고, 기다려! 하면 기다려야 한다.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지혜로운 대답을 하나 떠올렸다. "소녀는 아버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님과 떨어지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어요." 아니. 싫지 않아. 오히려 반기는 편이야.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차반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그건 나도 물론 알고 있다." 저 표정은 마치, 하찮은 계집아이 주제에 감히 날 사랑하다니. 아주 건방지구나. 하고 말하는 표정인 것 같았다. 정말.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김환성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만 가봐." 이것봐. 역시 답은 정해져 있었어. 넌 입에 발린 아부를 듣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던 듯 싶다. 실제로 내 제국행이 결정 되었으니까. 어라. 나. 진짜로 제국 가는 거야? 내가 왜? 어째서? 방문이 열렸다. 느낌이 안 좋다. 그런데 오랜만에 내 느낌이 틀렸다. 물어왓! 소리가 안 들려 왔다. 저 자식. 엄청 진화했다. 물어왓! 하고 나서 내가 헝거비를 주워오면, 아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데 그 눈빛의 의미는 '내가 실수로 물어왓을 했으니 넌 벌칙으로 오빠라 불러!' 라는 의미였다. '오늘은 웬일로 물어왓을 안 시키지?' 우리 둘째 망나니. 제 9대대 나이트 김환성이 내게 물었다. "야. 똥개. 너 제국 간다고?" "그렇게 되었답니다. 황제폐하께서 저를 어여삐 여겨주신다는 것 같았어요." 쾅! 방문이 닫혔다. 어래. 쟤 왜 저래. 김환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부지한테 따질 거다!" 헉. 쟤 미쳤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저렇게 오만불손한 태도로 왕한테 따지러 간다니. 이건 애초에 따질 문제도 아니잖아. 야! 거기서! 나는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없다...?" 그 사이, 김환성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서둘러 창문을 쳐다보니 어느새 지상으로 내려간 김환성이 엄청난 속도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고 있었다. 맙소사. 김환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부지!!!" ...어쩌려고 그래. 네가 아무리 왕자라도 감히 왕께 따진다니. 큰 일 나면 어쩌려고. ============================ 작품 후기 ============================ 둘째 망나니가 미쳤다고 합니다 0045 / 0192 ---------------------------------------------- 우리 둘째 망나니의 미친 짓 *** 김상희는 기겁했다. 김환성은 남자가 맞다. 남자는 여자보다 권리 자체가 훨씬 높다. 남자끼리라면, 아무리 신분의 격차가 있다 해도 남녀간의 차이만큼 극심한 격차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김훈상은 왕이다. "내가 아부지한테 따질 거다!" 김상희도 김환성의 이런 격한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말씀을 드리러가는 것도 아니고 따지러 간다니, 쟤가 저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김환성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김훈상은 관리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장 앞에서 김환성은 발을 동동 굴렀다. 회의장 앞을 지키고 있던 나이트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님이 왜 저러시지?' 김환성은 제자리에서 인상을 팍 썼다가 또 좌우로 움직였다가 으, 이건 아닌데. 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마력을 풀풀 풍기시면서...' 왕자님께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본 김환성은 꼬리에 불이 붙은 강아지 같았다. 적어도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왕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거. 회의 언제 끝나?" "1시간 20분 정도 후에 끝날 예정입니다." 그러나 예정은 언제나 예정에 그친다. 특히나 회의 같은 경우는 그 시간 내에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환성 역시 그 사실을 안다. 적어도 2시간은 잡아야 할 거다. "아씨. 기다릴 시간이 없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회의장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김환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나이트는 또 감탄했다. '저렇게 은연 중 새어나오는 마력이 저 정도면, 체내의 마력은 어느 정도지?' 역시 고려왕가의 핏줄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김환성의 현재 나이는 18살. 아직 2차각성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저 정도의 마력을 흘릴 수 있다니. 고려왕가의 핏줄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저러니까 최연소 대대장이 됐지. '저 능력을 완전히 컨트롤하고 갈무리 할 수만 있다면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와도 싸울 수 있을 거야.' 문득 부러워졌다. 그런데 회의장 문이 열렸다. 김훈상이 말했다. "들어와라." "아부지!" 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부리나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장 내에 관리들은 의아한 눈으로 환성을 쳐다봤다. 그들도 느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 엄청난 마력의 근원지가 김환성 왕자님이었구나. 대단하다.' 그러나 김훈상의 생각은 관리들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는 거냐? 마력을 갈무리하는 것이 마력 컨트롤의 첫 번째라고 했거늘. 내 가르침을 벌써 잊은 거냐?" "아부지!" 관리들은 뜨끔했다. 김환성의 대단한 마력량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걸 놓치고 있었다. 고려왕가의 진정한 능력은 강대한 마력이 아니라, 마력을 컨트롤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 폐하의 그릇은 다르다. 단순히 마력량에 놀란 내가 부끄럽구나.' 관리들이 감탄하는 것과 별개로 김환성은 지금 아무 말도 안 들렸다. 김환성이 물었다. "김상희 제국 가요?" *** 회의는 잠시 중단됐다. 대신 토론으로 이어졌다. "불가한 일입니다. 이미 첫째 왕자님께서 제국에 계십니다. 셋째 왕자님께서도 제국으로 가실 수는 없습니다." 김환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니까 왜 안 되냐고!" 김환성의 주장은 황당했다. 나이트의 9대대장 자리 필요 없으니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하여 배움의 길을 걷겠다고 한 거다. 이를테면 난데없는 유학 결정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김환성은 지금 김훈상에게 따지러 온 게 아니라 같이 보내달라고 땡깡부리려고 왔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냐! 이 왕자야!'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관리들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데 또 어이없는 건 왕이 별다른 제지를 안 하고 있다는 거다.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관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는 민감한 사항입니다. 왕자님의, 배움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나, 자칫 잘못하면 두 왕자님께서 볼모로 잡혀있는 상황처럼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만한 사항이었다. "그것은 곧 고려왕국의 외교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다. 중요하디 중요한 인물이 두 명의 왕자가 왕국을 떠나 제국에 속해 있다? 이건 왕국이 제국에게 지나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것은 곧 고려왕국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인식을 낳게 되고, 그렇게 되면 외교력과 정치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국제사회에 있어선 이런 사소한 행동마저도 조심해야했다. 관리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김상희공주는 보내도 상관없는, 쓸모없는 패지만... 왕자님은 아니시지.' 10원을 투자해서 100만원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투자하는 게 좋다. 그러나 100만원을 투자해서 10만원을 얻는 투자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김환성 왕자를 제국에 보내는 건 투자의 가치가 전혀 없는 행위였다. 김훈상이 손을 살짝 들었다. "그 말. 기분 나쁘군." 관리들은 잠시 벙쪘다. 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쁘다는 거지. "우리 고려가 겨우 그 정도로 흔들릴 왕국인가?" 아. 관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실책을 알아차렸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은 너희를 이끌고 있는 나를 믿어라." "......." "내가 이 나라를 책임지겠다." 다른 왕이 그렇게 말했다면 관리들은 속으로 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김훈상은 저런 말을 하기에 충분한 왕이었다. 스스로도 스페셜 나이트에 비견되는 -아니 더 강한- 무력과 지력을 갖추고 있었고 담대했다. 결단력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외교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만함과 자신감 사이. 그 사이의 교묘한 줄타리기를 잘하는 왕이다. 그런데 알렉스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접근했다. '포장이야 어찌됐든 김환성 왕자님을 제국으로 보내시겠다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진짜 보내실 건가? 큰 이득은 없는 것 같은데.' 이득이 없다고는 하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또 이득이 있다고 보기엔 더 어려웠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면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설마 김상희 공주님이 걱정 되서 그러나?' 에이 설마. 아무리 딸바보 왕이셔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진짜 그 정도로 딸등신은 아니시겠지.' *** 김훈상은 김상희를 보내겠다는 서신을 제국으로 전달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약 한달 후에 제국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김환성 역시 함께 움직인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는 서신을 다시 읽어 봤다. "김훈상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고려왕이 왕자를 제국으로 보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도대체 무엇이 있나?" 황제에게도 유능한 신하가 많이 있다. 다들 날고 긴다하는 남자들이다. 그런데 그 남자들은 왜 고려왕이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김환성 왕자가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 것 같습니다." "단순히 그 열정 때문에... 마력학원에 입학하기를 원한다고? 김환성은 이미 고려의 나이트 대대장이 아니던가? 그 자리를 포기하고 오겠다는 건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관리들은 긴장했다. 황제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 이유를 이제 자신들이 찾아야 했다. 못 찾으면 관리로서의 능력이 없는 거다. 한편, 황제는 밀실에 들어섰다. "정말 고려는 김상희의 가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맞나?" "...그렇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남자는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그가 파악한대로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거겠지. 네가 실수를 할 리는 없을 테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보부. 인력이 부족하면 충원해줄테니 말하도록 해." "아닙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김환성 왕자가 움직인다면 스페셜 나이트 중 몇이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마력학원 내에서라면... 감시가 좀 더 쉬워지겠지.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째서 김환성 왕자를 제국으로 보내는 걸까?" 김훈상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다른 왕들과는 다르다. '김훈상. 무슨 꿍꿍이냐.' 한편, 제국의 정보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무래도 김상희 공주에게 뭔가 있는 것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뒤져봐도 답이 안 나왔다. 제국 정보부. 김상희에 관한 정보를 맡은 김국현 국장은 미칠 것 같았다. '젠장. 도대체 뭐냐!' *** 고려왕국에는 커다란 경사가 하나 있었다. 뭐냐고? 바로 우리 첫째 망나니. 이름하여 김환석의 결혼식이었다. 우리 첫째 망나니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신부의 이름은 최지수. 16세. 왕자의 신부로 간택된 만큼 얼굴은 예쁘다. 몸매도 나름 나쁘지 않다. 아참 한 가지만 짚어보자면 이 세계의 여자들은 몸매가 별로다. 피부와 얼굴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은 몸매를 관리하는 법을 잘 모른다. 나야 매일 같이, 얼마 있지도 않은 요가 지식과 몸매관리 비결들을 총동원해가며 열심히 관리 중이지만 다른 여자들은 아니다. 그나마 이 곳 여자들 체형이 서구적이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짜리몽땅한 어린애들처럼 보였을 거다. '나는 밤마다 가슴 마사지도 한다고.' 흠흠. 어쨌든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이게 아니다. 내가 밤마다 가슴 마사지를 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가슴 마사지를 하려고 하는데 우리 첫째 망나니가 내 방에 들이닥쳤다는 게 중요했다. 와이. 어째서. 너. 이 자식아. 결혼식 첫날 밤이잖아. 근데 왜 신부랑 있지 않고 나랑 있는 거냐? 이 망나니야! 신부가 얼마나 뻘쭘하겠어. "어이." "네. 왕자님. 말씀하시어요. 귀를 기울이고 있답니다." 김환석은 나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이봐. 그러지 말라고. 나 진짜 무섭다니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김환석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제국. 가냐?" "저는 아버님의 결정에 따를 뿐이어요." 나는 어떻게 됐는지 아직 모른다. 소식을 못 들었다. 그냥 시녀들이 말하는 소문에 의하면 내 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녀들이 말하는 소문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는 거니까. 첫째 망나니는 또 나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별다른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데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신부한테 가라고! 첫날밤 안 치르냐고!' 여담이지만, 나는 강서영씨의 비명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보배 수여식때, '저를 드리겠어요'하고 말했던 그 날 밤. 기록의 관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던 강서영씨의 비명. 그래. 그건 비명이었지. 결코 신음소리같은 건 아니었어. 어떻게 하면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건지 나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좀... 궁금하기도...훠이. 훠이. 아니다. 취소. 음란마귀야. 물럿거라. 나는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잤다. 새벽 3시까지 김환석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긴장한 상태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망나니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아침이 됐다. 여전히 나는 잠을 못잤다. 망나니가 그제서야 일어섰다. 제발. 가줘. 너는 마력이 있어서 괜찮겠지만 나는 진짜 쓰러질 것 같으니까. 나랑 내 몸이 다르다는 걸 언제쯤 인식해주겠니. '아마...평생 못하...아니. 안하겠지.' 망나니가 대충 한 마디를 던졌다. "편지. 해라." *** 알렉스는 생각했다. '왕자님이 작정하신 모양이군.' 아무래도 왕자님은 최지수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신부가 마음에 안 드는 경우, 남자는 초야를 갖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약간 경우가 달랐다. 아예 김상희의 방에서 하루를 꼬박 새웠다고 들었다. '너 따위 보다는 김상희 공주가 더 중요한 사람이니... 알아서 기라는 뜻인가.' 알렉스는 요즘 신세계를 맛보고 있다. 새로운 학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왕과 왕자들을 살펴보고 있으면 기존의 상식과는 벗어나는 행동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은 알렉스의 학구열을 불태워줬다.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데, 생각의 연결고리에 '딸바보' 혹은 '동생바보' 같은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끼워넣으면 모두 이해가 된다.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갈 길이 멀지만 하여튼 알렉스는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재미있었다. 알렉스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공주님. 그러니까 김환석 왕자님께서 밤 내내 공주님을 쳐다보고만 계셨다는 건가요?" "네. 그러셨어요. 제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닌지 두려웠답니다." 알렉스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부끄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학자님. 김상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 한다니. 부끄러움. 이 단어야말로 첫째망나니와 제일 안 어울리는 단어 아니었던가.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해보니. '설마 진짜...?'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편지 하라고 하셨다고 하셨죠?" "네. 그러셨어요." 김상희는 설마, 설마, 설마를 외쳤다. "제 생각에는 김환석 왕자님께서 밤 내내 머뭇거리신 것 같습니다." 김상희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 했다. 그러니까. 그 망나니가. 부끄러워서 하룻밤 동안 머뭇거린 거라고? 머뭇거림의 스케일 한 번 겁나 크네. 편지 하라는 그 말이 부끄러워서? 에이.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뭔 놈의 머뭇거림 스케일이 6시간이 넘냐? 알렉스가 말했다. "아참. 공주님의 제국행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김환석 왕자님은 이미 알고 계셨어요." "그, 그랬군요." 김상희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하라는 말을 남긴 거구나. 그 망나니가. 그런데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김환성 왕자님과 함께요." 뭐, 뭐라고! 김상희는 소리칠 뻔 했다. 어쨌든 김상희 공주의 제국행이 결정 됐다. 김상희. 그리고 김환성이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신혼 첫날밤) 머뭇머뭇. 머뭇머뭇. 머뭇머뭇. "편지해라" 머뭇거리는데 6시간. 0046 / 0192 ---------------------------------------------- 늦게와서... 미안하다 *** 제국의 마력학원에 신입생 두 명이 편입해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두명은 다른 의미로 굉장히 유명세를 탔다. "그 얘기 들었어? 계집아이가 마력학원에 들어온다던데?" "설마? 그 마력운용이 가능하다는 김상아 공주?" "아냐. 그게 아니고, 김상희라는 이상한 계집아이야." 마력학원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김상아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김상희라니. 그들은 김상희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황제폐하께서 김상희공주를 불러서 직접 봤다는 것 같은데." "에이. 설마." 남자들도 뵙기 힘든 분이 아닌가. 겨우 공주따위가 어떻게 황제폐하를 뵐 수 있겠어. 다들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원 질이나 떨어뜨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학원생들의, 김상희에 대한 인식은 별로 안 좋았다.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적대적이었다. 제국의 마력학원은 남자들. 그 중에서도 엘리트들만 모인다. 그런데 일반 남자도 아니고 천하디 천한 계집아이가 입학을 한다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김상희는 마력이 없는 게 확실해?" "그렇다니까?" "젠장." 불만은 있었지만 황제폐하의 결정이라니 딱히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뜻에 거스를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김환성 왕자님도 입학을 하시는 모양이야."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김상희에 대한 여론은 정말 안 좋았지만 김환성에 대한 여론은 달랐다. "그 고려왕국의 나이트 대대장?" "맞아!" "와. 대박이네. 한진수 이후로 또 천재야?" 적어도 무력에 관한한, 한진수보다도 강할 수도 있다고 알려진 김환성이다. 고려왕국의 나이트라하면 제국의 나이트와도 맞먹는 실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이트 집단을 두 군데 꼽아보자면 바로 제국의 나이트와 고려의 나이트를 들 수 있다. 그러한 곳의 대대장이 직접 학원에 원생으로 입학한단다. "도대체 왜 오시는 거지?" "글쎄..."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려왕국의 커리큘럼을 착실히 이행해도, 아니 전 세대의 천재라 칭송받는 성군 김훈상에게 교육을 받더라도 제국에서 교육받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고려왕국의 두 명 왕자님이 제국에 있게 된 거네." "고려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지? 혹시 뭔가 제국에 약점이라도 잡힌 것 아닐까?" 두 명의 왕자가 제국에 있다. 한 명은 볼모고 한 명은 원생이다. 그러나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둘 모두 볼모라고 볼 수도 있다. 원생으로써 얻는 메리트가 별로 없으니까. 메리트도 없는데 굳이 원생으로 입학했다는 건, "제국에서 그래도 고려왕국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원생으로 입학시켰을 수도 있어." *** 나는 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긴장이 많이 된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미움을 많이 받겠지.' 이미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 나는 황제의 특명으로 인하여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하게 됐다. 나는 굴러온 돌이다. 그냥 굴러들어온 돌도 아니고 자격도 없는 돌이다. 마력 한 웅큼 없는 주제에 엘리트만 모이는 학원에 들어간다. '마음 굳게 먹어야 할 거야.' 자격이 없다면 힘이라도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 힘도 없다. 나는 철저한 약자다. '이 악물고 버텨야지.' 나는 이제 성년이 됐다. 내가 앞으로 부딪칠 세상은 겨우 학원이 아니다. 남존여비로 점철되어 있는, 무서운 세상이다. '겨우 이 정도에 기죽을 수는 없어. 힘내자 상희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왜 나를 불렀을까?' 이유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예전에도 나를 불렀었으니까. '혹시 나한테 반했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 없다. 황제가 날 봤을 때 난 겨우 12살이었다. 그리고 나한테 반했다면 나를 아내로 맞아들였겠지. 한진수의 가문에 양해를 구하고서 말이다. 물론 이 '양해'라는 것에는 막대한 이득. 이를테면 돈이라든가 지위라든가 명예라든가. 하여튼 뭔가 대단한 보상이 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 둘째 망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똥개." "네?" 사실 나는 얘가 나랑 같이 간다는 말을 듣고 좀 황당했다. 얘가 아쉬운 게 뭐가 있어서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을 할까. 나이트의 제 9대대장자리를 때려치고서 말이다. 하지만 막상 같이 가게 되자 마음이 조금 놓이기는 했다. 물론, 학원에 가서도 '날아라 헝거비!'라든가 '물어왓!' 같이 짜증나는 말들을 많이 듣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얘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가서 괴롭히는 놈 있으면 말해." 너. 지금 설마. 나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거니? 네가. 망나니 네가 정말로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나는 아주 잠시, 망나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망나니는 우쭐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제일 세니까." ...아. 그럼 그렇지.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이 망나니에게 내 생활에 대한 이해를 바랄 수 없다. 인간이 개미의 생활과 습성에 대해서 안다면 얼마나 알까? 거의 그런 거다. 개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곤충학자가 아닌 이상에야 일반인들은 개미에 관해서 잘 모른다. 밟으면 죽는다. 그 정도만 안다. 얘가 날 생각하는 것도 그 정도 개념이다. 얘는 여자에 대해 이해할 생각도 없고 의지도 없고 필요도 없는 아이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얘는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지켜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제일 세다'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 거다. "소녀는 오라버님이 함께 계셔서 정말 든든해요. 오라버님이 함께 가시다니. 소녀에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역시 그렇지?" 그러고보니 나는 왜 망나니가 제국에 가게 됐는지 잘 모른다. '개차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 제국의 마력학원은 각 사람의 특징에 맞추어, 혹은 특기 선정 시험을 통하여 특기가 세분화되어 있다. 김상희는 고대어 및 암호해석에 관한 특기를 얻게 됐다. 고대어 및 암호해석. 사실 가장 인기 없는 특기다. 다들 기피하는 특기. 다시 말해 이 반은 열등한 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환성은 '개인 전투' 특기를 받았다. 김상희는 '고대어 및 암호해석' 특기 반에 입학하게 됐다. "안녕하세요? 소녀..." 김상희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고려왕국때의 버릇 때문에 소녀라고 지칭했다. 김훈상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을 '소녀'라 하라고 명령을 내렸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긴장했어.' 15세가 넘은, 성년이 넘은 여자가 자신을 일컬어 소녀라고 부르면 사실 좀 꼴불견이긴 하다. 아니나다를까. 남자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저는... 고려왕국에서 온 김상희입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김상희는 자리에 앉게 됐다. 김상희는 쏟아지는 눈총을 묵묵히 감내했다. 제국의 마력학원에 시녀가 아닌 여자가, 학원생으로 들어온 경우는 이제 겨우 2 번째다. 그리고 마력운용도 못하는 여자가 들어온 건 사상초유의 일이다. 수업시간이 시작 됐다. '어라.' 교관이 들어왔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는 있는데. '역시나 한글이잖아?' 고려왕국에서 고대어를 해독하는 방법을 세계가 공표하지 않은 건가. 고려왕국 학자들은 한글 해석하는 법을 알았을 텐데. 하고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분명히 한글 해독하는 법을 공표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어.' 그렇다면 어째서. 왜 제국의 마력 학원에서는 아직도 풀지 못한 고어라면서 한글을 소개하고 있을까. 왜 일까. 김상희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괜스레 손을 들고 발표하거나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어.' 이제 겨우 첫 날이다. 분위기를 좀 살피기로 했다. 잘난척 하면 절대로 안 된다. 이들은 남자다. 기본적으로 여자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들이다. 사실관계야 어찌됐든 남자들의 인식은 그렇다. 그들 앞에서 잘난척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다. 능력을 드러내려면 은밀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드러내야했다.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쉬는 시간이 됐다. 김상희는 순식간에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됐다. "야. 네 이름이 김상희냐?" "네. 제 이름은 김상희이어요." "도대체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냐?" ...나도 몰라요.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황제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셨다고 들었어요." 황제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라는 말 속에는 '저도 몰라요'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저도 몰라요'라는 말을 돌려서 완곡히 표현한 셈이다. 김상희는 몇 살이냐부터 시작해서 별별 질문을 다 받았다. "계집들은 생리라는 걸 하면 아프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어요." "그게 오줌처럼 찍- 하고 나오는 거야?" 김상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숨을 참아서 일부러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는 이 정도 말 듣는다고해서 얼굴이 빨개지거나 부끄럽지는 않다. 지구로 따지면 얘들은 어린 애들이다. 이런 애들이 성적인 질문을 아무리 한다고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나마 한숨을 내쉬었다. '오줌? 장난 하냐? 오줌으로 맞아보고 싶냐?' 김상희는 쉴 새 없이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열심히 학원생들의 비위를 맞춰줬다. 이 곳은 새로운 세계다. 개차반도 망나니도 없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건방진 계집.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죄송해요. 저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김상희는 이들이 어렵다 어렵다하는 고어 해독을 모두 할 수 있다. 한글이니까. 하지만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황제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 아니었다면 미천한 제가 이 곳에 와서 여러 학원생분들을 뵙는 영광스런 자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어요." 김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살짝 손으로 가리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너희처럼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서 기쁘고 행복하며 또 영광이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어. 뭐야. 얘?' 학원생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다. 보통 여자들은 남자가 말하면 '예' 아니면 '아니오'와 같은 단답의 대답을 한다. 말을 한다 하더라도 겨우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다. 이 계집애. 뭔가 신기하다. 신기한데 기분이 또 묘했다. "제게 이런 영광을 주신 황제폐하께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공식적으로 김상희는 이 반의 막내다.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뜻이다. "오라버님들의 존안을 뵙게 되어 저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요." 김상희는 쉴 새 없이 아부를 퍼부었다. 이 곳의 남자들은 새롭게 접하는 생물체(?)에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느 여자가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오라버님?' 오라버님이라는 말도 거의 처음 듣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단어. 뭔가 괜찮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모두가 김상희를 반기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김상희를 반기는 쪽보다 김상희를 적대하는 쪽의 남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자격 없는 미천한 계집일 뿐이었으니까. 김상희는 넘어졌다. 비명이 나올 뻔 했으나 억지로 참았다. '비명 지르지 말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군가 일부러 발을 걸었다. "이런 거에 자빠지기나 하고. 마력운용을 못한다더니. 그게 진짜였냐?" "죄송해요. 제가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했어요.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어요." "그래. 네 더러운 발이 내 발에 닿으면 소름이 돋아. 짜증나니까 저리 꺼져." "......." 김상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자 우리 속에 갇힌 토끼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이봐. 말이 너무 심하잖아." 김상희의 발을 건 남자는 찔끔 놀랐다. 김상희도 놀랐다. 이럴 리 없다. 이 곳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다른 남자에게 딴지를 거는 남자가 있을 리 없다. 그게 상식이다. '도대체 누가...?' 김상희는 이 곳에 오기 전에 인상착의를 최대한 열심히 외워놨다. 이 자리까지 거저 놀면서 온 거 아니다. 매일매일이 공부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머리는 제법 좋았고 저 남자의 인상착의와 간단한 특징들도 떠올릴 수 있었다. '펜릴왕국의... 윌리엄 제 2왕자.' 제국의 마력학원에서 김상희가 겪게 될 몇가지 커다란 사건들 중 하나가 시작 됐다. "괜찮냐?" 펜릴왕국의 윌리엄 왕자. 그가 김상희의 옷을 툭툭 털어줬다. 김상희는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남자가 여자의 옷을 털어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윌리엄 왕자가 피식 웃었다. "따라와. 좋은 거 보여줄게." 이 반에서 제법 힘이 있는 건지, 다른 남자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김상희는 철저한 약자다. 윌리엄 왕자가 따라오라고 말했으면 따라가야 했다. "네. 왕자님." 김상희가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요즘 추천과 코멘트가 뜸해진 것 같아 앙탈을 부리기로 했습니다. 앙탈의 이름은 연참. 다음편 바로 올라갑니다. 다음버튼 누르시면 돼요 ㅎㅎ 0047 / 0192 ---------------------------------------------- 늦게와서... 미안하다 *** 나는 걸음을 옮겼다. 펜릴왕국의 제 2왕자라는 건 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인상착의를 외우고 있었을 뿐이니까. '무슨 생각이지?' 엘레베이터 앞이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몇몇 남자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저 눈빛들 속에서 호의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반쯤은 호기심이고 반쯤은 적대감이겠지.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타." "네. 왕자님." 좋은 걸 보여준단다. 그게 실제로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감히 반항할 수가 없다. 처음 온 날부터 남자의 말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인다면 안 그래도 쉽지 않을 내 학원생활이 절대 평탄치 않을 테니까. 엘레베이터 안.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계집따위가 뭔데 엘레베이터를 타?" 마력학원의 엘레베이터는 수동으로 구동 된다. 그 말은 즉, 엘레베이터 내에 타있는 남자가 자신의 마력을 사용해서 엘레베이터를 움직인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저 남자의 말을 해석해보자면 내가 내 힘을 사용해서 움직이고 있는 엘레베이터에 하찮은 계집년이 타는 거냐? 라고 욕을 하는 거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얼른 남자를 쳐다봤다. '아. 누구지.' 나는 이 곳에 오기 전, 원생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많이 넣어놨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 이상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지는 못했다. 모든 원생의 정보를 구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매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만약 저 남자가 윌리엄 왕자보다 높은 계급 -학원 내에는 등급을 구분하는 '클래스'라는 것이 있다.- 이라면 나는 정중히 사과를 하고 이 곳에서 빠져나가야했다. 그러나 저 남자가 윌리엄왕자보다 낮은 계급이라면 '정말 죄송해요. 윌리엄 왕자님께서 타라고 하셔서요.'라고 말을 해야한다. '누구지? 윌리엄보다 높을까? 낮을까?' 확률은 반반. 어떻게든 입을 열려고 했는데 윌리엄이 먼저 말했다. "이봐. 내가 운전할게. 그럼 불만 없지?" 남자는 윌리엄을 힐끗 쳐다봤다. 아무래도 윌리엄과 동급정도 되는 클래스의 사람인 것 같았다. 윌리엄이 마력구동장치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같은 원생이 됐는데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자고." 어라. 윌리엄. 저 자식. 뭔가 좋은 놈인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은 놈은 아니다. 좋은 놈이 아니라 이상한 놈이 맞다. 이 세계에서 여자에게 신경을 써주자고 말하다니. 그것도 같은 남자에게. "같은 원생이라니. 저급한 계집아이와 같은 곳에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데." "죄송해요. 숨을 꾹 참고 있도록 하겠어요." 나는 숨을 꾹 참았다. 약간 과장된 태도를 보였다. 나를 보며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자. 봐. 내 얼굴 엄청 시뻘개졌지. 나는 솔직히 잘 이해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남자들은 귀엽다고 생각한단다. 진짜 이해 안되는데 하여튼 그랬다. 이게 이 남자한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 머리가 어지러워온다. 이대로는 진짜 죽겠어. 윌리엄이 나를 툭 쳤다. "야야. 그러다 진짜 죽어." 마력을 살짝 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캑캑대며 기침을 했다. 내 기침조차도 더럽다는 듯 남자는 몸을 슥 피했다. 윌리엄은 피식 웃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계집이네." 그래. 그럴 거야. 이런 계집은 처음이겠지. 예 혹은 아니오밖에 말 못하는 계집들만 봤을 테니까. 하여튼 날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던 남자는 밖으로 나갔고 엘레베이터엔 나와 윌리엄만 남게 됐다. 윌리엄이 말했다. "너. 처녀야?" *** 한진수는 쇼파에 앉은 상태로 주위를 둘러봤다. "프리온 나이트께서 직접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제국 마력학원의 원장. 틸레반은 환하게 웃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학원을 졸업한 졸업생이었다. 하지만 이젠 단순히 졸업생이 아니었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가 됐다. 프리온 나이트들 중 신분이 밝혀져 있는 이들은 몇 없다. 대부분은 비밀에 가려져 있다. 그런 만큼, 신분이 드러난 프리온 나이트는 모든 대외적 활동을 감당하며 최상의 예우를 받는다. 한진수가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예. 그 때는 졸업생신분이었는데 지금은 프리온 나이트가 되셨군요. 제가 다 기쁩니다." "......." 한진수는 이 곳에 부임하게 됐다. 최연소 수석교관이다. "이 곳에 대한 설명은 듣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잘 알고 있는 곳이니까. "저는 제 방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시녀는 몇 명 배정할까요?" "시녀는 됐습니다." 보통 시녀는 무조건 두는 편이다. 시녀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다. 틸레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저 나이라면 성욕이 들끓을 텐데.'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다. 남자가 몇 초면 할 수 있는 걸, 여자들은 몇 시간이 걸린다. 마력 컨트롤 능력이 극에 달한 한진수에게는 시녀가 별로 필요 없다. 그러나 성욕이 걸린 문제라면 다르다. 마력 컨트롤 능력이 뛰어나다고해서 성욕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실상 수석교관쯤 되는 남자의 시녀의 용도는 그것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욕을 풀어주는 용도. '그러고보니 한진수는 프리지아도 마다했었지.'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저 외모에 저 능력. 가지고 싶은 여자는 모두 가질 수 있을 터인데, 한진수는 그런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흉이라고 볼 수도 없다. 원래 육체적인 성욕은 여자에게 풀고, 정신적인 교감은 우월한 생명체인 남자끼리 하는 건 하나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틸레반은 한진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20대 남자가 여자한테는 일절 관심도 안 보여?' 한진수는 걸음을 옮겼다. '김상희. 네가 진짜 여기 있는 거냐?' 그도 모르는 사이 걸음이 빨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나는 직감했다. 이거.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윌리엄 왕자. 아무래도 조심해야하는 게 맞겠다. 조심한다고 해서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최대한 머리를 짜내서 대답했다. "저에게는... 결혼을 약조한 약혼자가 있어요." "아니. 그거랑 상관없이. 물었잖아. 처녀냐고?" 지구라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해서도 안 되는 질문이고. 그러나 여긴 다르다. 저 놈이 좋은 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놈의 말은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수준의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예쁜 편이다. 엄청나게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 받았으니 당연하다. 여자가 예쁘다는 건, 처녀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뜻도 된다. 예쁘면 남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으니까. 제길. 머리로 이해는 한다지만, 역시 기분은 더럽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했다. 마음 같아선 저 얼굴에 죽빵이라고 날려주고 싶지만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처녀가 맞아요." "흠. 그래? 김환성 왕자랑 같이 왔던데?" 아오. 진짜.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상품 품평하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지 말라고. 윌리엄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나를 슥 훑어봤다. 으. 소름 돋는다. 기분 나쁘다. '이 자식.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이 자식의 말에는 뼈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 둘째 망나니는 망나니이긴 하지만 내 몸을 건드린 적은 없다. 지구에서라면 오빠가 여동생의 성을 가져가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그러나 여긴 아니다. 오빠가 정말 원한다면 여동생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끔찍하게도,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김환석이나 김환성도 다른 공주들을 어떻게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한진수도 마찬가지겠지.' 막말로 한진수가 길을 가다가 예쁜 여자를 발견했다면 한 번 자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그 여자가 결혼이나 약혼을 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결혼 상대집안의 눈치는 봐야했으니까. 괜히 가슴이 아려왔다. '여기는... 그런 세계니까.' 나는 건방지지는 않게 그러나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제 약혼자 이외의 다른 남성을 접해보지 못했어요." "그것 참 불쌍하네." 아. 진짜 뭐라는 거야. 내가 힘만 있었으면 이 자식 진짜 패버렸다. 아무래도 수작질을 벌이는 것 같다. "남자맛을 아직 전혀 모르겠어." 나는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했다. 힘으로는 절대 못 이긴다. 소리를 질러봤자 악영향밖에 없을 거다. 신성학 학원에서 계집아이가 소리를 질러댈 수는 없으니까. 누가 도와주러 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나마 우리 둘째 망나니가 있기는 한데 나랑 건물 자체가 다르다. 상당히 멀리있다. 이 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 '내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윌리엄이 비릿하게 웃었다. "네 처녀는 내가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신 차려야 해. 여긴 네 편은 아무도 없어. 나는 최대한 침착을 가장한 채 말했다. "비록 내세울 것 없는 천박한 계집아이지만 제 처녀는 제 약혼자에게 드리는 것으로 약조가 되어있다고 알고 있어요." 손 발이 덜덜 떨려왔다. 이런 상황. 평민들이면 언제든지 마주하는 상황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했다. "그런 거 알 게 뭐야? 따라와." 옥상으로 갔다. 윌리엄이 옥상 문을 닫았다. '싫어...!' 침착해. 침착해 상희야. 괜찮아. 빠져나올 수 있어. '어떻게...?' 윌리엄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씨익 웃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거기 똑바로 누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윌리엄의 표정이 조금 나빠졌다. "누우라니까? 내 말 안들려?" "왕자님.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어요." 윌리엄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 듯 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들어도 이 놈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발정난 개새끼 같았다. '젠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상황.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건 정말 못 참겠다. 단순히 무섭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진수야.' 한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상 이 세계에 와서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차반과 망나니들이다. 한진수는 날 도와준 게 거의 없다. 그런데 한진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과거에, 진수는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지켜줄게. 드라마 속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조폭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웃기지 말라고 저런 조직폭력배들이 날 괴롭히면 네가 날 어떻게 지켜줘? 하고 핀잔을 줬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다. - 그러지 말고 그냥 경찰에 신고해. 그러자 진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 경찰 오기 전에 너 다치면 어떡해? 나 그 꼴은 절대 못 봐.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나는 겉으로는 핀잔을 줬었지만 기분은 좋았었다. 저 말이 진짜든 아니든 진수의 진심은 느껴졌었으니까. 여느 커플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런 듯 안 그런 듯 알콩달콩한 듯, 알콩달콩하지 않은 듯. 오글거리는 듯, 오글거리지 않는 듯한 대화를 많이 나눴었다. 그 날도 진수는 나한테 말해줬었다. - 사랑해. 진수가 떠오르자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학원에 오면 많은 일이 있을 거고 그 모든 일을 당당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날부터 눈물이 삐져나왔다. 윌리엄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어라? 너 우네?" 킥킥대고 웃었다. "그러니까 너 괴롭히고 싶잖아." 윌리엄이 내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반항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힘. 남자에게만 허락된 힘인 마력이 내 몸을 구속했다. '제발...제발...' 상황이 이렇게까지 흐르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진수의 얼굴만 자꾸만 떠올랐다. 이런 내가 나도 밉다. 어떻게 탈출하고 싶다. 내 몸을 진수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내 몸은 이미 마력으로 구속 됐고 반항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진수야. 제발...' 진수가 여기 없다는 거 알지만 진수가 자꾸만 떠올랐다. 이래봤자 소용 없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랬다. 그리고 옥상문이 열렸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 "...죽여 버리겠다." 한진수의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한진수. 각성? +연참 했어요 헤헷 (앙탈 성공) 0048 / 0192 ---------------------------------------------- 늦게와서... 미안하다 *** 제국 마력학원의 교장은 상당히 뿌듯한 상태다. 제자라면 제자일 수 있는 이가 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제국의 영광 프리온 나이트에 입단했다. 그것도 대단한데 또다시 마력학원의 수석교관으로 부임하게 됐다. 신분이 드러난 프리온 나이트는 그 중요도가 대단히 높다는 점에서, 한진수가 이 곳에 부임하게 된 것은 제국 마력학원의 이름을 더욱더 드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게 무슨...?' 땅이 울렸다.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어도 엄청난 무게를 지닌 무언가가 대기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마어마한 중압감이다!' 이 정도의 중압감. 80평생을 살아오면서 거의 처음 느껴본다. 애초에 이 정도의 중압감을 내뿜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프리온 나이트정도. '도대체 뭐냐...!'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악마 같은 것이라도 튀어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교장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교장실 문이 열렸다. "교장 선생님!" "자. 자. 진정, 진정.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지금 파악 중입니다!" 이 곳은 마력학원이다. 전 세계의 수재들이 다 모여 있다. 저 정도의 엄청난 마력이 느껴진다면 모르긴 몰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거다. "학생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했다. "지하 대피시설로 황급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좋아. 잘 대처하고 있어." 교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 곳의 책임자다. "이 힘이 느껴지는 곳은... 윗 쪽인가?" 제국의 마력학원은 넓다. 지구식으로 표현하자면 빌딩만한 건물이 무려 12채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제 8관쪽에서 거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제국에 어서 긴급 지원을 요청하고 강한글. 홍영식. 펠튼. 세 교관은 나를 따라오세요." "교, 교장 선생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는 교장의 자리가 주는 책임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가서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이 힘의 근원지. 저 곳을 찾아가야 했다. '도대체 뭐냐!' 오랜만에 긴장했다.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현역 시절. 전쟁터를 누비던 기억이 떠올랐다. 간만에 피가 들끓어 올랐다. *** 학생들은 서둘러 대피했다. 몇몇 학생들은 이상함을 눈치 챘다. 팔에 소름이 돋았고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건...?' 그런데 또 어떤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힘을 느끼기엔 그 능력들이 너무 부족해서 그랬다. 김환성의 경우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김환성은 씨익 웃었다. "이거 뭐야?" "모두 대피하세요! 지하 대피소는 이 쪽입니다!" 교관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교관들의 입장에서 학생들은 절대 다치면 안 된다. 각국의 중요한 수재들이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외교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매우 농후했다. 제국은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할 거고, 제국의 마력학원은 직접적인 배상을 해야 할 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교관들에게 있어 이들은 훌륭한 제자들이기도 했다. 특히 이 곳 제 3관의 학생들은 더더욱 중요한 학생들이었다. "김환성 학생! 어서 대피하세요!" 김환성이 웃음이 짙어졌다. "내가? 내가 왜?" "그, 그거야 당연히...!" 교관이 당황했다. 사실 저 학생은 이미 학생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교관급이다. 그것도 최소 중간 이상의 교관. 그 유명한 고려 왕국 나이트의 대대장이 아니던가. 물론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려 왕국의 나이트라하면 제국의 나이트와도 어깨를 견주는 -비록 그 성격은 다르지만- 나이트들이다. "어라?" 그런데 김환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교관은 김환성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김환성은 하늘을 날았다. "끼얏호! 신난다!" 김환성은 힘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어디서 느껴본듯한 기분이다. '착각이겠지?' 착각이라고 치부했다. 이 정도의 거대한 힘. 그것도 이토록 불안정한 힘은 처음 본다. 김환성은 비록 나이트의 대대장이었지만 실전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 시대에 이르러 괴물 혹은 마물이라 불리는 것들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그것들과는 별로 싸워볼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이야. 엄청 기대 된다. 기대 돼." 김환성은 절벽이나 다름없는 건물을 일직선으로 달렸다.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태양이 빛났다. 김환성의 그림자가 태양을 덮었다. 김환성은 왼쪽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괴물 자식! 형아 왔... 응?" 괴물은 여기 없었다. 대신 괴물 같은 놈이 하나 있었다. "한진수?" *** 나는 내 스스로가 한심했다. 속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까지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도 여자다. 비록 이 세계에서 살아남겠답시고 남자들에게 애교를 부리고 하고 싶지도 않은 말 해대면서, 자존심 죽여가면서 산다고 해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한 명의 여자이며 또한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비록 그 사람은 이 세계에 없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나를 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니.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나는 무력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단 둘만 남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안 됐다. 이 지긋지긋한, 이 빌어먹을 마력이 내 몸을 완전히 구속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눈물을 펑펑 쏟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한심하게도 말이다.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 나는 봤다. 사람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걸. 김환성이 가끔 마력을 완전히 방출시키면 저런 현상이 나타나곤 했었는데, 저 사람이 저러는 건 처음 본다. '한진수...?' 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아니. 마력이 없는 내 눈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검은색 그림자가 휙휙 지나다니고 가끔씩 붉은 피가 허공에서 마구 떨어져 내리는 것 정도. 그리고 또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끼얏호!" 많이 들은 목소리다. 나는 이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우리. 우리 망나니 목소리다. 언제나 명존쎄를 부르는 놈이지만 오늘 만큼은 반가웠다. "괴물 자식! 형아 왔... 응?" 우리 망나니는 이 상황이 눈에 보이나보다. 역시 나랑은 달랐다. 망나니는 칼을 집어 넣었다. 망나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망나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야. 똥개."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력이 내 입을 막고 있으니까. 눈물만 줄줄 새어나왔다. "야. 똥개. 너. 오빠가 부르는데 대답 안 할래?" "......." "너. 왜 울어?" 망나니가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망나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이 개 좆같은 새끼야!" 옥상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마치 거미줄처럼 말이다. *** 교장은 걸음을 옮겼다. 옮기는 내내 불안했다. 그런데 더 불안해졌다. '거의 비슷한 크기의 힘이 또 느껴진다.' 교장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는 교관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교장님. 하나가 더 늘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트의 도움을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라도 난다면요? 우리는 학생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뭐가 됐든 먼저 부딪쳐야 합니다." "나이트가 1분이면 도착합니다. 위험합니다. 교장선생님." "교관들은 여기 있도록 해요. 나라도 갈테니. 1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교관들도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무래도 불안하다. 이 정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힘의 파동은 처음 느낀다. 힘 자체도 거대한데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길한 기분이 흡사 악마 같았다. 교관 중 한 명인 강한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교장은 옥상에 도착했다. 옥상에 악마는 없었다. 교장은 소리쳤다. "그, 그만 두세요! 수, 수석교관님!"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수석교관이 학생 한 명을 쥐 잡듯이 패고 있었다. 한진수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마력을 완전히 방출하고 있다는 소리다. "제, 젠장!" 교장은 몸을 날리려 했다. 저대로 두면 윌리엄은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몸을 날리지 않아도 됐다. 고려 왕국 나이트 제 9대대장. 괴물이라면 괴물인 김환성이 칼을 뽑아들고 한진수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야. 한진수. 너 비켜." "그럴 수 없습니다." 한진수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김환성을 향한 살기는 아니었다. 윌리엄은 이미 곤죽이 되어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태. 이쯤되면 반쯤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었다. "...비키라고 했어. 명령이야." "그 명령 못 듣겠습니다. 저는 지금 고려의 나이트가 아니라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입니다." 교장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장선생님. 저기 보십시오." 교장이 눈을 돌렸다. 여자가 한 명 보였다. '김상희 공주?' 김상희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윌리엄 왕자가 김상희 공주의 처녀를 빼앗으려고 했나보군.' 거기까진 알겠다. 그런데 저 두 남자가 왜 저렇게 미친 듯이 마력을 방출하며 화를 내고 있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나마 한진수는 약간이나마 이해가 된다. 약혼녀의 처녀는 뭐. 그래도 나름대로 제법 괜찮은 가치였으니까. 그러나 윌리엄을 저렇게 만드는 것에 대한 명분은 절대 안 된다. 보통 이런 경우, 상대 가문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적정한 수준에서 적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건 누가 봐도 한진수의 잘못이다. '심지어 당신은 지금 수석교관이라고.' 수석교관의 신분으로 학생을 저렇게 때리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도 안 되는 일인데, 심지어 합당한 이유도 없다. '김환성 왕자는 왜 또?' 한진수와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교장의 상식으로는 김환성이 왜 분노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상희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약혼자인 한진수면 몰라도 오라비인 김환성에게 있어 김상희의 처녀 같은 건 하등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비키라고 했다." "비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윌리엄이 으음...하고 신음성을 냈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김환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는 내가 죽인다고!" 교장이 외쳤다. "둘 다 그만두지 못하겠습니까!" *** 한진수가 내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진수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 몸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한진수의 얼굴을 보게되자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지켜줄게. - 사랑해. 그렇게 내게 말해주었던 사람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그리고 똑같은 걸음걸이. 똑같은 분위기까지. 울음을 참아보려고 했는데 참을 수 없었다. '정신 차려. 김상희. 이 나약한 계집애야!' 내 몸이 둥둥 떠올랐다. 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한진수의 품에 안기게 됐다. 한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괜찮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 목소리. 또 듣고 말았다. 내가 사랑했던, 하지만 사랑한다고 단 한번도 말해주지 못했던 사람의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이 세계의 한진수 느낌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괜찮아?'가 아니고 '괜찮냐?'라고 물었을 거다. 아니 아예 이런 건 묻지도 않았겠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 나를 향한 애정이 잔뜩 담긴 다정한 목소리였다. "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긴장이 풀리자 머릿속이 비어 버렸다. '왜 이제야 왔어...' 보고 싶었다고. 나 네가 정말 너무 보고 싶었다고. 나는 그 말은 하지도 못한 채 울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한진수가 놀라운 말을 내게 속삭였다. 이 세계에서라면 남자가 여자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 그런 말을 내게 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거기까지 듣고서 난 기절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소제목 변경할게요. '늦게와서... 미안하다' 로 변경하겠습니다! 0049 / 0192 ---------------------------------------------- 그렇지 않으면 펜릴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 온기를 잔뜩 머금은 손바닥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왼쪽 팔로는 강하게 내 허리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잡고 있었고 오른 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나를 안고 있는 손길. 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 익숙한 체취.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 그토록 느끼고 싶었던 한진수만의 분위기. 나는 느꼈다. 이 한진수가 바로 그 한진수다. 정말 보고 싶었다. 사실 잘못은 내가 더 많이 했다. 일찍 들어간다고 해놓고선 들어가지 못했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있겠다던 진수는 나를 하염없이 기다렸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 기다림에 부응하지도 못했고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었다. 난 정말 못된 년이었다. 하지만 나는 따지고 싶었다. 왜 이제야 왔냐고. 나 너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너 말고 다른 남자는 아무도 필요 없다고. 그렇게 다 말해주고 싶었다. '진수야...'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이 매어 왔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해?' 주위엔 김환성과 교관들이 있다. 피범벅이 된 윌리엄 왕자도 있다. 나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사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그 잠깐의 시간이 내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진수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순간만큼은 내게 있어 영원이고 싶은 순간이었다. 우리 둘째 망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한진수." 그 때, 한진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멎었다. 내 귀는 현재 한진수의 왼쪽 가슴에 묻힌 상태. 한진수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깜짝이야. 우리 둘째 망나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으랏차!" 그리고 나는 둘째 망나니한테 안기게 됐다. 좋게 말해서 안긴 거고, 나쁘게 말하면 '캐치'당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캐치볼같은 거 할 때, 야구공인지 테니스공인지 그런 거 막 서로 던지잖아. 나는 그런 공 신세가 되어 하늘을 날았고 우리 망나니는 나를 공 낚아채듯 그렇게 낚아챘다. 별로 멋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봤다. 우리 망나니의 표정을. 역시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은 위대하고 위대한 오빠님밖에 없지? 라고 주장하는 듯한 그 표정을 말이다. 나는 하늘을 날았고 김환성도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나는 다치지 않은 상태로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뭐야...?' 내 눈에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한진수가 보였다. *** 한진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야. 한진수."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처럼 느꼈다. 정신을 차렸다. '나는...' 기억이 안 난다. 어떤 이름도 모를 놈팽이 하나가 약혼녀를 겁탈하려 했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이후로 기억이 안 난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충 짐작은 된다. 김환성은 무력에 관한한 천재지만, 한진수는 다방면에 두루 능통하다. 현재의 상황으로 과거의 상황을 더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렇게 피떡이 된 놈이 하나 있으면 그건 뻔하지 않겠는가. '내가 저 놈을 저렇게 만든 건가?' 그럴 리가. 자신도 자신의 힘을 안다. 일반인들은 감히 항거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는 편이다. 까딱 잘못해서 남자를 죽일 수도 있으니까. 항상 조심해왔는데 여기서 그런 실수를 했을 리 없다. 분명 했을 리 없는데, 자꾸만 상황이 말을 해줬다. 저 남자는 네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내가 어째서...?' 좋다. 그것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다. 그런데 왜? 라는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왜... 저 남자를 저렇게 만든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 남자. 오늘 처음 보는 남자다. 약혼녀를 어떻게 하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교관의 신분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팍에 뭔가가 꿈틀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진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마력을 방출 시켰다.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 거냐!'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한낱 미천한 계집아이가 자신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자신 역시 이 계집을 껴안고 있던 것 같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김상희를 하늘로 날려 버렸다. 한진수 스스로도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이게 바로 한진수가 항상 힘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저도 모르게, 실수만 해도 일반 사람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같은 경우도 만약 김환성이 아니었다면 김상희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파.'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그래. 남자를 내가 때렸다. 이유는 뭔가 있겠지. 어쩌다 보니 계집아이가 내 품에 안겨 있을 수도 있겠지. 좋다. 거기까진 괜찮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계집아이가 내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한진수는 고려왕국의 사람이다. 고려왕국의 사람들은 기감이 특히 발달해 있다. 그래서 첩보활동에도 굉장히 능하다. 한진수는 고려에서도 천재로 통하는 인재. 그런데 김상희가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아예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는 프리온 나이트다. 그 중에서도 신분이 드러나 있다. 신분이 드러난 프리온 나이트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또 표적의 대상이기도 하다. 프리온 나이트의 목숨을 원하는 세력은 당장 떠올려봐도 다섯 군데는 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조심한다. 프리온 나이트가 될 때부터 계속해서 조심해왔다. 그런데 김상희가 안겨 있는 것을 몰랐다. '미치겠군.' 만약 김상희가 자객이었다면? 만약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어떤 집단에 의뢰를 받아 칼이라도 들고 찔렀다면? 그럼 무방비로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한진수.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한진수의 날카로운 기감에 뭔가가 잡혔다. 김환성의 마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왕자가 분노하고 있다.' 어째서? 왜? 한진수는 알 수 없었다. *** 김환성은 아까부터 기분이 나빴다. 이유는 몰랐다.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한진수가 김상희를 껴안고 있을 때부터 그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을 좀 떨어뜨려 놔야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뭉클뭉클 피어올랐었다. 하지만 적당한 명분과 이유가 없어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유도 없이 끓어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이다. 한진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야. 똥개가 헝거비냐?" "예?" 똥개는 김상희를 지칭하는 말임을 알겠다. 그런데 헝거비는 또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얘가 물건이냐고? 그렇게 날려 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 김환성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진짜 모르겠다. 한진수를 보면 자꾸만 짜증이 난다. 김환석은 그나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서 한진수에게 잘해주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러나 김환성은 아니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선다. 김환성은 한진수가 싫었다. 아니. 싫다고 하기에는 또 애매했다. 싫은 건 아닌데, 뭐랄까 하여튼 싫었다. 김환성 스스로도 이게 무슨 마음인지 잘 몰랐다. 한진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왕자님. 혹시 화나셨습니까?" "어. 무진장. 나 지금 열 받았어." "왕자님께서 화 낼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진동하던 땅이 진동을 멈췄다.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 나 왜 화내고 있는 거야? 김환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왜 화가 난건지 머리로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교관들은 당황했다. 그들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그들은 괜스레 긴장했다. 김환성왕자와 한진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김환성은 한진수에게 잘해줘야 한다. 그게 맞다. 한진수는 제국에서도 탐 내는 인재 중에서도 인재다. 아무리 고려왕가의 왕자라고해도 한진수를 막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정당한 명분 없이 말이다. 교장이 말했다. "일단 윌리엄 왕자부터 수습하세요." 반 쯤 시체가 된 윌리엄 왕자를 긴급 후송했다. 이대로 놔두면 진짜로 죽겠다. 김환성이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몰라. 이유 같은 거 없어. 그냥 너 짜증나." "... 왕자님이 절 적대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군요.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저를 향한 분노를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이유 없는 분노를 받아들일 만큼 저 역시 여유롭지 않거든요." 교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 두세요. 두 분 다!" 교장의 중재는 전혀 소용 없었다. 저들의 팽팽한 신경전 -단순한 신경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마력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다. 엄청난 중압감이 느껴졌다.- 을 막으려면 제국의 황제 혹은 프리온 나이트의 대대장 혹은 고려왕가의 왕 정도는 되어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폭주 직전의 기관차 같은 느낌이랄까. '마력학원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맹수 두 마리를 풀어놓은 모양새군.' 교장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깝깝해졌다. 아무리 저 둘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이 곳은 학원이다. 학원에는 교칙이 있고 지켜야할 룰이 있다. 그래야 통제가 된다. 그런데 저 둘은 통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젠장.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동시에 김상희 역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한진수는 그렇다치고 이 둘째 망나니부터 어떻게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는 진짜 대책이 없다. 머리보다는 가슴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놈이니까. 사실 이런 애들이 다루기 제일 어려우면서 또 제일 쉽다. 어려울 땐 제일 어렵고 쉬울 땐 제일 쉽다는 뜻이다. '너무 자주 남발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두 눈 딱 감아야 했다. 마력을 느낄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눈으로 봐도 알 정도였다. 이 둘이 부딪친다면 학원 전체가 박살나고도 남을 거다. "오, 오..." 그래도 쉽게는 안 줬다. 일부러 말 더듬었다. 부끄러운 척 연기도 했다. "오빠..." 순간, 한진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김환성과 팽팽한 마력대결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김환성의 힘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마력을 방출하고 있던 터라,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하마터면 자빠질 뻔 했다. 김상희가 김환성의 팔을 살짝 잡고 아주 미세하게 흔들었다. 시선은 땅 아래로 향했다. 목덜미가 붉어진 게 보였다. "오빠. 소녀는 오빠가 화를 내고 계시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요. 소녀의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아요." 감히 왕자의 행동에 제약을 걸지는 않았다. 왕자보고 '화 좀 내지 마'라고 말하면 그건 불경한 행위가 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단순히 자기가 무섭다고 말하는 거니까. 물론, 일반적인 여자라면 이런 말도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단적인 예로 교장은 눈을 크게 떴다. '공주따위가 감히 왕자에게?' 공주가 자신의 감정을 왕자에게 말한다는 것. 이것 조차도 이미 충격적인 일임에는 틀림 없었다. 하지만 김환성은 이미 김상희에게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있는, 다른 말로 조련이 상당히 많이 진행된 상태다.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오빠소리 들었다. 이 거.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데, 들을 때마다 묘하게 기분이 좋다. 한껏 가슴을 펴고 우쭐대며 한진수를 쳐다봤다. 한진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표정이다.' 뭐가 저렇게 자랑스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김환성의 표정은 분명히 그랬다. 마치 승리자의 표정 같았다. 그리고 한진수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한진수의 시선이 김상희의 손에 닿았다. 김상희가 김환성의 팔을 살짝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교장의 최후통첩이 들려왔다. "두 분다. 그만 두지 않으면 퇴학과 사퇴를 진지하게 고려하겠습니다." *** 전교생의 대피소동은 끝났다. 악마의 등장이니 괴물의 등장이니 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수석교관 한진수와 고려왕국의 셋째 왕자 김환성이 윌리엄 왕자를 곤죽이 되도록 때렸다. 그 덕분에 마력이 방출 되었고 그 어마어마한 마력때문에 교관들이 착각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고려왕국 인물들이라고 해도 한 나라의 왕자를 어떻게 그렇게 때릴 수가 있지?"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있어서는 안 돼. 이건 엄연한 인권모독이라고." 고려왕국은 상당히 힘이 있는 왕국이다. 제국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상당히 쉽게 표적이 됐다. 소위 말하는 강대국의 '갑질'논란이었다. '갑질'은 사람들에게 환대 받지 못한다. 배척의 대상이다. 그 소문이 고려왕국에까지 들어갔다. 김훈상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김상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를까, 이번 일은 김환성과 관련된 일이었다. 공식적인 보고 외에 다른 보고도 들어왔다. 따로 붙인 스페셜 나이트에게 들어온 보고다. 전후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관리들이 말했다. "펜릴왕국에게 적당한 수준의 보상과 화해의 제스쳐를 취해야 합니다." "외교적 문제로 충분히 번질만한 문제입니다." "현재 펜릴왕국 내 반 고려 시위가 일어나고 있을 정도 입니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쓸어버리지 않은 걸로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해." ...예? 관리들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뭔가 어마어마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잘못은 이 쪽이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갑질'을 한 게 맞다. '폐하께서 분노하고 계시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김훈상은 분명 분노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그걸 확실히 느꼈다. 김훈상이 말했다. "제국에 얘기해라." 아니. 갑자기 제국은 왜 튀어나와요? 관리들은 묻고 싶었다. 지금은 제국얘기가 아니라 펜릴왕국에 대한 얘기를 해야했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김훈상의 말을 들은 관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 작품 후기 ============================ 남자들 : '폐하랑 왕자님이랑 도대체 왜 화내고 있는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0050 / 0192 ---------------------------------------------- 그렇지 않으면 펜릴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 김훈상이 말했다. "제국의 마력학원에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관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의 마력학원에 적극적인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상황. 그러니까 윌리엄 왕자와 펜릴왕국에 대한 얘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관리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왕의 말을 기다렸다. 왕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수동 구동식 엘레베이터에 자동 마력 충전식 엘레베이터를 보급하고. 자동식 마력 문물을 보급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김훈상의 이어진 설명에도, 관리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의 마력학원에 투자를 하는 것에 무슨 이득이 있으며 또 펜릴왕국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좀 더 자본을 투입해서 제국의 마력학원과 같은 명문 시설을 고려 내에 설립하라는 게 더 말이 되는 건데.' 백방으로 생각해 봤으나 역시 이득이 없다.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제국의 마력학원에 투자를 하는 것과 고려왕국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지금은 펜릴왕국의 사안을 이야기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제국의 마력학원에는 각국의 엘리트들이 모이니까. 하지만 고려왕국은 딱히 그런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잘 나가는 왕국이다. 어중간한 왕국은 제국의 마력학원에 많은 투자를 하고 뛰어난 인재를 어떻게든 영입하려 노력하지만 어차피 고려에는 인물이 많으며 그런 식으로 투자하지 않아도 인재는 알아서 모인다. '안 그래도 두 왕자가 볼모로 잡혀있다는 인식이 있는데.' 거기다가 고려왕의 특별지시로 제국의 마력학원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다? 제 3자가 보기엔 고려왕국이 제국에 무언가 잘못을 했거나 어떤 뒷거래가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알렉스." "예. 폐하." "내 지원금 중 일부 떼서 투자금으로 돌려. 네게 맡긴다." 알렉스는 고개를 조아렸다. 왕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다른 관리들과 알렉스는 약간 다른 구석이 있었다. 알렉스는 김훈상의 어린 시절을 모두 지켜봤다. 지금의 김환성보다 더 망나니였다는 것은 둘 째 치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쓸데 없는 짓을 일절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처럼 보여도 나중에 보면 분명 어떤 성과가 있었다. 김훈상이 괜히 이 시대의 성군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과연... 그런 생각이시군.'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염려하는 바는 잘 알고 있다." "......." 관리들은, 김훈상의 몸에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밖으로 은연중 새어나오는 마력. 사실 김훈상쯤 되는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마력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밖으로 마력이 새어나온다는 건 김훈상이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펜릴왕국에 사과는 없다." "......." 아무도 나서서 '펜릴왕국에 사과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 "지도에서 지워버리지 않은 걸로도 그들은 내게 감사해야 할 터." 관리들은 생각했다. '펜릴왕국에 사과하라고 주장한 것이 그렇게 기분 나빴던 일인가?' 김훈상의 평소 성정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국 황제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훈상 아니던가. 하지만 알렉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상희 공주님 때문에 엄청나게 화 나셨군. 단단히 벼르고 계신 모양이야. 폐하께서 저렇게 마음 먹은 걸 보면... 일대 파란이 일수도 있겠어.' *** 제국의 황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고려에서 적극적 투자를 검토 중이라고?" "예." "우리 마력학원에?" "그렇습니다." "어째서?" "...파악 중입니다." 아직 학원 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다. 원래 황제는 바쁘다. 겨우 학원에서 일어난 일이 황제에게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 "폐하. 마력학원에서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번 보고는 조금 달랐다. 황제에게 직접 올라왔다. 고려왕국의 둘째 왕자 김환성과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인 한진수와 관련된 내용이라서 그랬다. 황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펜릴 왕국?" "예. 서쪽 변방의 작은 해안도시급 왕국입니다." 황제는 그제서야 고려왕국이 제국의 마력학원에 투자하겠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왕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해라." 아무래도 김훈상은 펜릴왕국에 사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런 술수를 부리고 있을 터. '우리 마력학원에 투자를 하겠으니, 이번 사건을 은폐해달라는 뜻이겠군.'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돈을 들여 마력학원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자동 구동식 엘레베이터 및 에스컬레이터. 이건 돈이 많이 든다. 애초에 충전식으로 운영 되는 거라 일정시기마다 마력을 충전해줘야하며, 그 안에 들어가는 마력석이 꽤 비싸다. 물론 싼 것들도 있다. 그런 것들은 속도가 느리거나 수명이 짧다. 하지만 고려왕가에서 제시한 조건은 아니었다. 최상위급 호텔에서나 사용할 법한 스펙의 엘레베이터를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시설물들 교체와 더불어 신식 기숙사도 새로 지어주겠다고 했다. 새로운 기숙사의 이름은 '고려관' 과 같은 고려의 이름을 따기야 하겠지만 그게 어디 대수인가. '우리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는 장사야.' 황제는 마력학원의 교장 틸레반을 따로이 불렀다. *** 교장 틸레반은 그 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황제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김상희. 역시 뭔가 특이한 계집이다. "그 계집아이에게 확실히 뭔가 있군." 계집아이가 윌리엄이란 놈에게 강간당할 뻔 했단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 라고 묻는다면 또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힘들다. 적어도 반 쯤 시체로 만들 정도로 중대한 잘못이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틸레반이 말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래?" 황제는 김상희의 가치를 안다. 이 것은 제국 내에서도 극비이며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알려져서도 안 될 사실이고. 하지만 틸레반은 모른다. 그래서 황제는 모른 척, 틸레반의 말을 들어줬다. "말해봐라." "예. 아마도 펜릴왕국과 고려왕국 사이에 어떠한 알력다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알력다툼?" "최근 광물 중 하나인 일렌의 독점권을 놓고 작은 대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예. 아무래도 그 때 이후로, 고려는 펜릴을 찍어 누르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흠..." 그 말도 듣고보니 그럴 듯 했다. 고려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김훈상답지 않다. 깨끗이 포기하든 펜릴왕국을 밀어버리든. 둘 중에 하나였겠지." "그 정도로 커다란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김훈상의 명령이라기보다는... 김환성 왕자의 독단행동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그는 나이트의 대대장이었으며 최근의 대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하기야 김훈상이 그런 무역분쟁에 직접 나서서 중재할 리는 없다. 아무래도 사건을 전해들은, 혈기왕성한 김환성 왕자가 펜릴왕국에 시비를 걸기 위해 윌리엄왕자를 두드려 팼을 가능성이 있었다. 틸레반이 다시 말했다. "결과적으로 황제폐하께서 저를 이렇게 비밀스럽게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기분 좋은 듯 하하! 웃었다. "그래. 그렇지. 결국 그렇게 됐지." 황제가 틸레반을 부른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 사건. 없던 일로 덮든지, 그도 아니면 윌리엄 왕자가 먼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조작해달라는 것이었다. 제국 입장에서는 펜릴왕국따위. 고려왕국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나라다. 중요도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소리다. 어차피 그 상황을 목격한 교관은 고작해야 세 명이었다. 그 외 다른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면 윌리엄을 나쁜 놈으로 만들면 일은 편해진다. 제국은 고려의 투자를 받고 고려는 펜릴에 사과해야할 이유가 사라진다. 펜릴왕국에는 비정한 일이겠지만 서로에게 득이 된다. "내가 부른 이유를 정확하게 짐작하고 있겠군." "예." 황제는 피식 웃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김훈상의 머리에서 나온 것 같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완벽한 성군이란 건 없다. 아니. 국제관계에 있어서 성군은 호구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성군보다는 폭군이 되어야 맞다. 적어도 그게 자국에는 이익이 된다. 황제가 보기에 김훈상은 철저하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김훈상을 좋아하지.' 고려왕국은 펜릴왕국을 찍어 누를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될 거다. 순식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었다. 그것도 고려 내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제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말이다. 고려는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니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경고가 될 터. 펜릴왕국은 억울하겠지만 어쩌랴.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힘이 곧 정의다. 펜릴왕국의 잘못이 있다면 힘이 약하다는 것. 그리고 김훈상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한편, 김훈상은 히죽히죽 웃었다. 옆에는 알렉스가 섰다. 알렉스는 김훈상을 힐끗 쳐다봤다. '저렇게 좋으신가?' 보고 있으면 엄청 웃기다. 히죽히죽 웃는데 또 정색을 하면서 안 웃은 척을 한다. 근엄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꾸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는 듯 또 히죽히죽 웃었다. '김상희 공주님. 편지 자주 쓰셔야겠네.' 그랬다. 지금 김훈상이 읽고 있는 것은 김상희의 자필 편지였다. 알렉스는 저 편지 속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김훈상의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제국의 마력학원에 투자... 특히 시설투자를 하시려는 건 김상희 공주님 때문 아냐?' 요즘 그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문. 사실 정해진 이름 같은 건 없지만 일단 '상희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것을 토대로 살펴보면 김훈상의 행위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했다. 국제 관계. 즉, 제국 혹은 펜릴왕국과의 관계. 그리고 김훈상이 투자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득 및 손해를 모두 배제하고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자면, '김상희 공주님 편하게 만들어주려고 시설투자를 대폭 늘렸다면...?' 그러면 또 묘하게 아귀가 맞는다. 엘레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충전식 마력전화. 뿐만 아니라 신축 기숙사 설립까지. '진짜 그런가?' 에이.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성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김상희 공주의 편지를 보며 히죽히죽 웃는 김훈상의 모습을 보면 또 왠지 진짜로 그럴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 때. 펜릴왕국에서 사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편지를 보며 히죽히죽 웃던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1주일 뒤 만나보겠다고 전해." *** 나는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고려왕국이 제국의 마력학원에 대폭적인 지원을 감행했다는 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당한 소식도 들었다. 펜릴왕국의 윌리엄 왕자가 한진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했으며 고려왕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그런 건 못 봤는데...' 나 같은 경우, 정보가 많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정확한 상황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알렉스 학자님이라도 옆에 있으면 물어볼 텐데. 일단 알렉스 학자님한테도 편지를 써놨으니 아마 내 궁금증을 언젠가 풀어주시기는 할 거다. 마력학원 내 기숙사.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4인실에 배정되었으며 남자들과 함께 방을 쓰고 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인데 나와 같은 방을 쓰던 남자들은 계집따위와 같은 방을 쓸 수 없다며 시위에 들어갔고 이 방에는 일절 들어오지 않았다. 지구식으로 표현하면 왕따를 당하고 있는 셈인데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윌리엄 왕자와의 일을 겪고 나니 더 그랬다. 그런데 문이 열렸다. 무서웠다. 그런 일.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 없으니까. "야. 똥개." 우리 둘째 망나니였다. "따라와." 둘째 망나니가 말했다. "좋은 거 보여줄게." ...야. 윌리엄 왕자가 나한테 그 말 한거 알지? 돌이켜보면 그 때도 약간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다. "너 왜 그래? 왜 이렇게 바들바들 떨어?" 나도 몰랐는데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한 것 같다. 윌리엄이 내게 했던 말이었으니까.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가락을 까딱했다. 으악! 뜨거워! 뜨겁다고! 뜨거워! "뜨, 뜨거워요! 오, 오라버니! 소, 소녀를 죽이지 말아주시어요!" 이 자식아. 사람 태워죽일 일 있냐? "추운 거 같아서 따뜻하게 해주려고 했더니." 넌 도대체 정도라는 걸 모르냐? 진짜 명치 때리고 싶다. 아. 물론 머리로는 이해 된다. 이 정도의 힘을 쓰면 내가 따뜻하다고 느낄 거라고 착각하고 있을 거다. 저 녀석 입장에서는 힘을 조금밖에 안 썼을 게 분명하다. 내 입장에서는 타죽을 뻔 했지만. 진짜 뜨거워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날 신경써주셨다. 그러니까 나는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했다. "오라버니께서 절 신경 써주시니 정말 행복해요." 두 번 행복했다가는 타죽겠지만. "오라버니의 마력은 정말 놀라운 것 같아요! 소녀에게는 신세계랍니다." 두 번 놀라웠다가는 또 타죽겠지만. 신세계가 아니라 지옥 갈 것 같지만. 우리 둘째 망나니의 나의 리액션에 매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오빠가 좀 세." 두 번 셌다가는 완전 타죽겠지만. 그만 좀 세줄래? 부탁이니. 망나니가 앞장섰다. "따라와. 좋은 거 보여줄게." ============================ 작품 후기 ============================ "추운 거 같아서 따뜻하게 해주려고 했더니." 나름대로는 신경써주는 김환성. 태워 죽일 뻔 했다는 건 함 ㅋ 정 ㅋ 0051 / 0192 ---------------------------------------------- 그렇지 않으면 펜릴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망나니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휙 몸을 돌렸다. "아씨. 안 오냐? 느려 터져가지고." 어라. 내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 힘. 낯설지 않다. 마력이다. 김환성이 마력으로 날 잡아당겼다. 그리고 아직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내 어깨를 힐끗 보고서는,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안 춥지? 하여튼 계집아이는 피곤하다니까." 한참을 진지한 얼굴로 고민한 망나니가 외투를 벗어서 내 어깨에 덮어줬다. 참고로 이거. 마력 충전식 쾌적시스템이 적용된 신소재 섬유로 만들어진 옷이다. 가격으로 치면 약 1200만원. 망나니가 이쯤 해주면 나도 응당 해줘야 하는 게 있다. 요즘 들어 좀 자주 쓰는 것 같은데,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자주쓰면 익숙해지는데. 옛다. 받아라. "고마워요, 오빠. 오빠가 신경써주시는 여동생은 얼마나 행복한지. 세상을 전부 선물 받은 느낌이어요." 망나니의 광대가 승천했다. 어깨를 들썩거리는데, 어깨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헴." 망나니는 자신감이 매우 충만해진 상태로 보무도 당당하게 앞장서서 걸었다. '여기는... 제 3관 기숙사로 향하는 길인데...' 제국의 마력학원은 12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제 3관은 가장 중요하고 호화스러운 건물이다. 3관에 있는 학원생들이야말로 제국의 마력학원을 떠받드는 중추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둘째 망나니가 공부하고 생활하는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짠." 3관의 경우 기본적으로 2인실을 사용한다. 특별히 추가요금을 내면 1인실 사용도 가능하다고 들은 것 같다. 다만, 1인실 사용에는 로얄티가 상당히 많이 붙는데다가 인맥을 형성하는데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선호되는 방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여긴... 1인실?' 아니다. 1인실은 아니었다. '1인실 두 개를 이어붙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망나니가 말했다. "이제 여기가 네 방이야."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했다. 이 곳은 1인실 두 개를 이어붙인 방이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벽을 텄다. "오라버님..." 아냐. 망나니가 이렇게 신경을 써줬을 리 없어. 그건 망나니가 아냐. 아니나 다를까. 우리 망나니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넌 마력도 없어서 걸어다니기 힘들텐데." 야. 그래도 인간인데. 걸어다니기는 하거든? 하여튼 진짜 개념이 없다. 여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한 개념 말이다. 개념 없는 놈. 제 8관에서 제 3관까지는 도보로 약 15분 정도 걸린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걸을만 하다. '아. 그러고보니 김환성은...' 짜아식. 오늘은 명치를 때려주고 싶다기보다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얘가 여자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얘에 대한 개념이 조금 없었던 것 같다. 내 걸음으로 15분이 걸렸다 함은, 쟤 걸음으로는 3분도 안 걸린다는 소리다. 여차하면 날아서 이동해도 되니까. '나랑 같이 걸으면 엄청 답답하겠네.' 그런데 그런 내색을 한 번도 안했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거. 그거 생각보다 되게 어려운 일이다. 그냥 천천히 걷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이' 천천히 걷는 것 말이다. 김환성이 투덜거렸다. "아부지는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가 몰라." 이야기를 듣자하니 우리 개차반씨가 1인실 두개를 터서 망나니랑 내가 같은 방을 쓰도록 했다는 것 같다. 김환성은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똥개 따위랑 같은 방을 쓴다고 해봤자 나는 전혀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말이야." ...이봐. 너 웃음 참는 거 훤히 다 보이거든. 아무리 봐도 기뻐 보이거든. 그리고 뭔가 핀트가 어긋난 거 같은데. "난 다 컸는데 하여튼 너무 신경써주는 것 같단 말이야." "......." ... 그래. 좋겠다. 네 똥 굵다. *** 고려에 펜릴왕국의 사신이 도착했다. 김훈상이 그 사신을 맞이했다. 황금 단상위에 거만하게 앉아 사신을 쳐다봤다. 다짜고짜 물었다. "왜 왔지? 난 부른 기억이 없는데." "펜릴왕국의 국왕폐하께서 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김훈상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지금. 시비 거는 거 맞지? 사실상 시비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그런데 김훈상은 괜히 기분이 나빴다. 다름아닌 '압존법' 때문이다. 보통 압존법을 정확하게 지키는 제국 같은 경우, 황제 앞에서 자신의 나라의 왕을 말할 때엔 '국왕폐하께서'가 아닌 '국왕 ㅇㅇ가' 라고 낮춰서 말해야한다. 고려는 압존법에 그렇게 철저한 나라는 아니다. 사신이 압존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고려의 풍토를 이해하고 있어서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을 따르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김훈상은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너희에게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고려왕국의 왕자와 고려왕국의 인물이 윌리엄 왕자를 쥐 잡듯 팼으니. 이건 상당히 큰 문제다. "읽기 싫은데." "폐, 폐하!" 고려의 관리들은 김훈상이 펜릴왕국에 매우 적대적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적의를 표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째서 펜릴왕국과 저렇게 척을 지려 하시는 거지?' 예전에 무역분쟁이 있기는 있었으나 겨우 그 것가지고서 저럴 정도로 치졸한 왕은 아니다.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터. "보나마나 사과를 하라는 거겠지." 김훈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신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다. 마력이 그의 몸을 구속했다. "펜릴의 왕에게 가서 전해라. 사신의 목을 베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기라고. 펜릴왕국은 나의 아들과 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라." 충격적이었다. 아들은 그렇다쳐도 딸에게 무릎을 꿇으라니. 저렇게 모욕적인 말을 할 줄이야. 관리들은 설마설마했다. '설마. 그 다음은 말씀하지 않으시겠지.' 왠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다음을 말할 것 같았다. 마지막. 넘어서는 안 될 선. 그걸 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펜릴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관리들은 눈을 꿈뻑 거렸다. 이럴 수가. 진짜 말해 버렸다. 일개 국민도 아니고 한 국가의 왕이 저렇게 말했다.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식적인 발언으로. 이건 조건부 선전포고다. 국가간의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또 의외로, 의외의 사건 때문에 쉽게 벌어지기도 한다. '폐, 폐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현 시점에서 전쟁은 무조건 손해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 김훈상이 쐐기를 박았다. "내 말 명심해라. 내 말은 진심이니.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 윌리엄 왕자는 펜릴왕국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아니! 난 그렇게는 절대 못 해! 차라리 내가 죽어!" 윌리엄 왕자는 고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계집아이의 처녀를 가지고 가려고 했던 것은 잘못이라고 칠 수 있겠다. 그것도 정말 마음 많이 쓴 거다. 윌리엄 왕자의 입장에서는 잘못 축에도 못 낀다. 어쨌거나 그건 잘못이라 치자. 그런데 김환성과 김상희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라니. 그렇게는 절대 못 한다. "왕자님. 그렇게 화를 내실 일만은 아닙니다. 고려에서는 이를 빌미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딴 걸로 무슨 선전포고야! 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건 줄 알아!" "아무래도 고려는 호시탐탐 우리 펜릴왕국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그저 핑계인 것 같습니다." 윌리엄은 혼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씩씩거렸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제국 쪽에 돈을 풀어 증거와 여론을 조작했다. 믿었던 교장마저도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진술을 했다. 힘이 있으면 명분도 생기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신은 김환성 왕자와 고려왕국을 모독한 죄인이 되어 있었다. "맞은 것도 내가 맞았고 잘못도 걔네가 했는데 왜 내가 빌어? 이게 말이나 돼?" "왕자님. 제발 전체적인 상황을 헤아려 주십시오. 왕자님의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국의 운명이 달렸습니다." "......." 윌리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뭔가 잘못 걸렸다. "말해봐.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잖아." "국왕폐하께서도. 그리고 저도. 왕자님께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달리 알고 있습니다." "전쟁따위. 제국에서 허락해주지 않을걸?" "헛소문 조작의 배경이 제국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 윌리엄은 후우-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쉼호흡을 해봤다. 조금씩 진정이 됐다. 이미 일은 터졌다. 치사하게 고려는 이걸 가지고 왕국을 협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 *** 윌리엄 왕자가 내 방. 아니 우리방을 찾아왔다. 우리 망나니는 아까부터 침대에 누워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왕자님. 저 윌리엄 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망나니는 침대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갑자기 윌리엄의 멱살을 붙잡고 하늘로 들어 올렸다. 눈으로 확인도 못했다. 나이트의 대대장이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것만 같은 속도였다. "꺼져. 이 개새끼야. 너만 보면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윌리엄은 한참을 캑캑댔다. 허공에 뜬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는데 저러다 진짜 죽겠다 싶을 무렵 망나니가 윌리엄을 땅에 패대기쳤다. 윌리엄은 콜록콜록 기침을 하다가 일어서서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께 사과하러 왔습니다." "뭘?" "감히 제가 왕자님을 먼저 모독했으며 헛소문을 통해 고려왕국을 모욕했습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정보를 제한 받는다. 핸드폰도, 컴퓨터도 사용이 불가하니까. 그래서 여러소문들을 듣고 그 소문들을 토대로 상황을 유추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내가 그나마 공부를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상황들을 이해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는 것 정도. '제국은 결국 고려의 편을 들어줬고... 이쪽 세상 기준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건가?' 어디까지나 이쪽 세상 기준이다. 윌리엄은 분명 나를 강간하려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윌리엄을 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렇지 않으려고, 당당하려고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망나니가 황당한 말을 했다. "네가 언제?" 윌리엄은 욕하고 싶었다. 네가 배후에서 다 조작한 거 안다고! 어디서 시치미질이야 이 나쁜 새끼야! 하고 말이다. 물론 그 속마음을 안다면, 김환성은 억울하겠지만. *** 윌리엄은 김환성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잘못한 게 없었다. 그깟 계집아이 좀 어떻게 하려한 것이 뭐가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 고려왕국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했다. 빵 한쪼가리 훔쳐먹었다고 사형을 시키는 악덕한 법따윈 없다. 이건 그것보다 더 가혹했다. 계집아이따위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라니. 잘못한 것도 없는 상태에서 왕제에게 무릎을 꿇는 것도 싫은데, 계집아이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고려왕국도 진짜로 그걸 원하는 건 아닐 거야.' 이 사건을 통해 고려왕국의 위신을 다시 한 번 드높이고 -현재 제국에 두 명의 왕자가 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왕국의 힘이 약해진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고 있으므로-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치졸한 외교수작이라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왕자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건,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만큼 숙이고 들어간다는 뜻이니까. 김환성이 피식 웃었다. "너 그런 적 없잖아." 너희가 원하는 게 그거잖아! 소리치고 싶었다. "나 말고 쟤한테 사과해야지." "......." 내가 왜? 난 저 계집에게 잘못한 게 없는데? 그깟 처녀가 뭐 그렇게 대수인데?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묻는다면 이 왕자도 대답은 못할 거다. 김환성은 지금 분명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왕자님. 그건 제게 너무 가혹..." 윌리엄은 주위를 둘러봤다. 뭔가 이상했다. 이건... 소문으로만 듣던 스페셜 필드인 것 같은데. 스페셜 나이트가 사용한다는, 사람을 은밀하게 죽일 때에 사용한다는 그 스페셜 필드인 것 같다. "야. 내가 너 죽여버리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거든?" 윌리엄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확실했다. 여긴 스페셜 필드다. 그것도 고려왕가의 핏줄이 직접 펼친 스페셜 필드. "내 똥개 완전 겁쟁이에 멍청이라 내가 무서운 모습 안 보여주려하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억지는 지금 네가 부리고 있잖아! 내가 무릎까지 꿇었는데. 말하고 싶었지만 또 참았다. 여기서 말 잘못했다가는 진짜 목 날아갈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똥개가 하도 무섭다해서 내가 욕도 끊었는데." 윌리엄은 들었다. "씨발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그리고 구타가 시작됐다. 으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김환성은 표시나지 않게, 티나지 않는 부분만 골라 때렸다. "무릎 꿇을래, 안 꿇을래?" "...절대 안...으아악!"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됐다. 마력을 적절히 운용하여 상처는 나지 않도록 하지만 내장에 충격을 줬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났다. 40분이 지나고 5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다. '도대체 어디 간거지?' 김상희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김환성과 윌리엄이 사라졌다. 조용해졌다. 1시간이 넘게 흘렀다. 윌리엄 왕자가 눈물 콧물을 빼며 죽도록 얻어맞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하, 할게요. 할게요...흐... 흐으윽...!" 그제서야 구타가 멈췄다. 매에는 장사 없었다. "내일. 걔네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 윌리엄은 네, 알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히끅거리면서 울었다. 너무 아팠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몰랐는데 오줌도 조금 지린 것 같았다. 살면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욕과 구타는 처음 당해본다. 김상희는 김환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똥개. 눈 감아." 김상희는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눈은 감고 봤다. 왕자님이 시킨 일이니까. 김환성은 마력으로 창문을 열고 윌리엄의 엉덩이를 뻥! 찼다. 윌리엄이 허공을 가르고 하늘을 날았다. 김환성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눈 뜨고 물어왓!" 헝거비가 허공을 갈랐다. 김상희는 문 쪽을 향해 달렸다. 마력학원에 와서도 물어왓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기필코 네 명치를 후려치고 말리라, 라는 다짐을 하며 창문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 덕분에 윌리엄이 하늘을 나는 건 못 봤다. 참고로 말하자면 윌리엄은 지금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씨. 오늘은 왜 이렇게 멀리 던진 거야?' 김환성은 일부러 김상희를 멀리 보냈다. 그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혼자서 뿌듯해했다. "이런 게 완벽범죄지." "오라버니! 헝거비. 여기 있어요." "그래. 우쭈쭈." 김환성은 또 사리사욕을 채웠다. "아참. 물어왓 안시킨다고 했었는데." 그리고 김상희를 힐끗 봤다. 벌칙을 수행할 차례다. 그런데 또 대놓고 '오빠라고 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김상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김환성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김상희는 험한 꼴 안 봤다. 그래도 김환성은 혹시 몰라 확인했다. 만에 하나, 무서운 모습을 봤을 수도 있으니까. "야. 똥개. 너 나 무섭냐?" "네?" 김상희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배시시 웃었다. 지혜롭게 대답했다. "소녀는 세상에서 오라버니가 제일 좋아요." 여기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이런 립 서비스 따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참고로 네가 내 앞에 있을 때엔 네가 제일 좋고, 첫째 망나니가 내 앞에 있을 때엔 첫째 망나니가 제일 좋은 거야. 알겠니? 김상희는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김환성이 우쭐 거렸다. "그럼. 난 욕 같은 거 하나도 몰라. 하나도 안 무서운 오빠니까." "그럼요. 오라버니는 정말 멋져요. 소녀 곁에 계셔 주셔서 정말 행복해요. 소녀는 오라버니를 의지하고 믿는답니다." 김상희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겉으로는 배시시 웃어줬다. 하루가 지났다. 윌리엄 왕자가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어제밤에는 정말 사과를 해야하나 싶었다.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김상희의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났다. 너무나 화가났다.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이까짓 계집아이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하고 다쳐야 하는지. 왜 일국의 왕자가 벌레만도 못한 계집따위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상희의 얼굴을 보니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성을 잃었다. 어제의 공포는 곧 김상희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주먹을 들어 올렸다. 같은 시각. 수석교관 한진수에 대한 처분도 내려졌다. ============================ 작품 후기 ============================ 내 걸음으로 15분이 걸렸다 함은, 쟤 걸음으로는 3분도 안 걸린다는 소리다. 여차하면 날아서 이동해도 되니까. 김환성: (피식 웃는다.)"3분? 웃기지마. 맘 먹고 뛰면 3초도 안 걸려. 개념 없구나. 너? 어휴. 역시 계집이란." 0052 / 0192 ---------------------------------------------- 딸바보가 분노하면 ***52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나이트 집단을 두 군데 꼽아보자면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와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가 있겠다. 프리온 나이트는 워낙에 베일에 쌓인 집단이라 일단 논외로 치자면, 스페셜 나이트는 그 강력함 외에도 다른 것 때문에 유명하기도 했다. 바로 고려 왕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었다. 스페셜 나이트의 한 명. 이주형은 고민에 휩싸였다. '진짜 죽여야 되나?' 스페셜 나이트들은 고려왕가의 직속 나이트다. 고려의 왕인 김훈상과 직통연결 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상황도 면밀하게 보고하지 않았던가. 김훈상은 윌리엄이든 뭐든 일단 김상희에게 해를 가하려 하면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저 정도로 일국의 왕자를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왕자가 타국의 공주 때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걸로 왕자의 목숨을 빼앗는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이주형은 멈칫해야만 했다. '폐하의 명령은 진심이었나?' 진심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이주형은 그 명령을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왕이 지나가는 말로, 반 쯤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다면 상황이 커진다. 스페셜 나이트가 왕국의 왕자를 죽인다는 건 곧 암살을 의미한다. 선전포고나 다름 없다. '내 행동 하나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어.' 그도 아니라면, '그게 아니면... 폐하께서 일부러 전쟁을 걸고 계신 건가?' 고려왕국 내에서는 성군이라 일컬음 받지만 타국에는 아니다. 자국에게 잘하는 만큼, 타국에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하니까. 이주형이 고민에 휩싸였을 무렵, 다행히도 윌리엄이 주먹을 내렸다. 여전히 분을 참지는 못하는 모양새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교관 한 명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환성이 워낙 특이한 케이스라 교관들도 함부로 못하는 거지, 일반적으로 교관은 학생보다 권위가 훨씬 높다. "너. 나중에 보자." 교관이 있는 곳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오늘은 아직까지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고어에 관한 연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상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여전히 한글이잖아.' 저번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이미 해독이 된 고어라는 설명과 더불어 고어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수업이었다. 그 때 김상희는 바로 알아차렸다. 칠판에 써져 있는 글씨는 다름 아닌 '안녕하세요?'였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그냥 한글인데.' *** 수석교관 한진수는 자질 논란에 휩싸였다. 물론 고려왕가와 한진수를 모독한 윌리엄의 잘못이 크다고는 하지만 -이것 역시 조작된 얘기다.- 그래도 수석교관이 학생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잘못이었다. 교장인 틸레반 말했다. "한 단계 강등... 처분 되었습니다." 최연소 수석교관이었던 한진수는 이제 수석교관이 아니라 차석교관의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벌이 생각보다 약하군요." 한진수는 스스로의 잘못을 안다. 그 날의 일은 자신이 생각해도 잘못한 게 맞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윌리엄 왕자가 먼저 잘못을 했다는 점을 감안했습니다." 한진수는 안다. 윌리엄 왕자가 먼저 잘못한 것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감봉 6개월 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으셔야 할 겁니다. 교관 생활에 상당한 흠집으로 남을 겁니다." "예." 교장은 한진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교장이 본 한진수는 완벽한 천재였다. 매사에 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최연소 수석교관을 자리를 맡았으며 타국 출신으로 프리온 나이트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이번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 그런 짓을 벌였으니까. 한진수는 걸음을 옮겼다. 딱히 목적지가 정해져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걷다보니 8관에 도착했다. 제 8관. 4층. 김상희가 수업을 받고 있는 곳이다. '김상희.' 김상희를 떠올렸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김상희를 안고 있던 그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 때... 어떤 감정을 느꼈던 거지?' 혼란스러웠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심장부근에 아주 작은 애벌레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애벌레가 심장을 살짝살짝 갉아먹는 느낌이랄까. 한진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밀검진을 받아봐야겠군.' 아무래도 몸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을 리 없으니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프리지아?" 제국의 6황녀. 프리지아다. 그녀가 한진수 때문에 교관직을 신청했다는 건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한진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 한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프리지아와 말을 잘 섞지 않는다. 보통 프리지아가 얘기를 하면 한진수는 무시하는 편이다. 그나마 프리지아가 마력을 가진 여자여서 그렇지,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가차없이 쫓아냈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다는 건 무슨 의미지?"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여자에겐 직감이라는 것이 있어요." "직감?" 허무맹랑한 단어다. 직감이란 말. 자주 듣기는 한다. 마력이 뛰어난 어떤 사람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측 비슷한 걸 하게 되는데 그걸 직감이라고 부르긴 한다. 그러나 여자가 직감을 가지고 있다니. 한진수는 피식 웃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저. 곧 암호해독 수업 들어갈 거에요. 참관하시겠어요, 차석교관님?" 수석교관과 차석교관은 직접적인 수업을 맡지는 않는다. 그건 일선 교관들이 할 일이다. 수석 및 차석 교관은 교관들을 관리하는 편이다. 가끔은 수업참관을 통해 분위기를 확인하기도 한다. "김상희 공주도 있어요. 저는 김상희 공주에게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아요. 질문도 할 생각이에요." "...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프리지아가 은근히 몸을 밀착시켰다. 한진수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저도 아직 수업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차석 교관님이 옆에 있어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한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까짓 계집. 그냥 뿌리치면 되는데 이상하게 그러지 못했다. 또 떠올랐다. '김상희.' 이렇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가고 나면 김상희를 볼 수 있다. 김상희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쿵! 심장이 또 뛰었다. 심장이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무거워진 심장이 높은 건물위에서 땅으로 떨어져내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진수의 표정이 또 심각해졌다. '분명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정밀검진을 꼭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이상함을 감출 수 없었다. 뭐야. 얘네들. 단체로 사기를 치는 건가. '어떻게 고어가 죄다 한글이야?' 그래. 한글인 것 까지는 그렇다칠 수 있겠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른 시대의 고어' 혹은 '해독이 불가능한 고어'라고 설명을 하고는 있는데 그것도 전부 한글이라는 거다. '내 눈이 이상한가?' 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내 눈에도 분명 다르게는 보인다. 다른 글씨로는 보인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무슨 소리냐고? 나는 저 글자들을 보면 저 뜻이 자연스레 해석이 된다. 한글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 이걸 내가 말해놓고도 이상하긴 한데, 음. 그러니까. 내 눈은 분명 다른 글자로 인식을 하긴 한다. 그런데 내 머리는 저걸 한글로 인식한다는 소리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다. 젠장. 내 표현력의 한계야. 어쨌거나 중요한 건 나는 암호 혹은 고어라는 걸 모두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시간은 프리지아의 수업인가.' 프리지아는 알게 모르게 무시를 많이 받는 교관이다. 제국의 6황녀인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그녀는 여자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존경받기는 힘들다. 그래도 대단하다고 인정들은 하는 모양이었다. 뭐가 어찌됐든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마력을 갖고 있으며 졸업이 힘들다는 제국의 마력학원을 졸업했으니까. 다른 교관들에 비해 훨씬 쉽게 생각하는 것은 맞지만, 적어도 겉으로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나는 봤다. 프리지아가 한진수에게 팔짱을 끼는 걸. '.......' 순간 나는 한진수를 째려볼 뻔 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한진수. 넌 도대체 뭐야...?' 이 세계에 없는 단어를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 이상하리만치 나를 다정하게 대한다. 아니. 적어도 그 날의 한진수는 내가 알고 있던 한진수가 맞았다. 비록 그 시간이 불과 몇 초에 불과했을 지언정 그 날의 한진수는 내 한진수가 맞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솔직히 내가 어떻게 고어들을 자연스레 해석할 수 있는지보다, 한진수의 존재가 훨씬 궁금했다. 한진수와 내 눈이 마주쳤다. "꺅!" 프리자아가 가볍게 비명을 질렀다. 아주 큰 비명은 아니었지만 이 곳의 학생들은 전부 들을 수 있을만한 소리였다. 한진수가 프리지아를 밀쳐냈기 때문이다. '나랑...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아냐. 그럴 리 없어. 저 한진수가 내 눈치를 살필 리 없잖아.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하기야. 원래 듣기로 한진수는 프리자아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들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프리지아는 예쁘다. 괜히 제국의 꽃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몸매. 저건 진짜 타고났다. 나 역시 타고나긴 했지만 나는 밤마다 가슴마사지를 하는 편이다. 요가도 한다. 몸매 가꾸려고 진짜 노력 많이 한다. 그런데 쟤는 그런 것도 아닌데 몸매가 아주... 흠. 하여튼. 아니. 뭐. 딱히 부러운 건 아니고. 흠흠. 하여튼 한진수는 차석교관의 자격으로 이 수업을 참관한다고 했다. 수업이 시작됐다. 프리지아는 능숙하게 수업을 이어갔다. "혹시 이 고어. 해석할 수 있는 학생 있어요?"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손을 드는 멍청한 짓따윈 하지 않았다.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잘난척을 할 수는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 나는 이들을 모두 당장 내 편으로 만들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개차반과 망나니들도 나름대로 조련에 성공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단순하다. 워낙에 강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다루기 편하다. 초반만 잘 넘어가면, 어떻게든 될 거다. 그리고 그 초반에 나는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프리지아가 나를 지목했다. "김상희 공주. 해석할 수 있겠어요?" 뭐야. 갑자기. 프리지아가 빙그레 웃었다. "고려왕국 내에서 뛰어난 고어해석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들었어요. 그 실력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요. 황제폐하께서도 친히 인정하신 능력이니." 나는 프리지아를 쳐다봤다. 저 미소에 악의는 없는 것 같다. 15년을 살아오면서 눈치를 봤다. 눈치에는 나름대로 자신있다. 프리지아에게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선의가 느껴졌다. 표정이 꼭,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쓰고 조심해야 할 시점이다. 안 그래도 지금 커다란 사건에 한 번 휘말렸기 때문에 더이상 표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먼저 나서서 자랑을 하면 잘난 척이 되지만 교관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 잘난척이 아니게 된다. '여기서 능력을 조금 드러내는 게 좋을까?' 정말 단순한 건데 나는 또 끝없는 눈치싸움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윌리엄. 너 내가 시킨 거 했냐?" ... 맙소사. 망나니다. 누가 망나니 아니랄까봐. 8관의 수업시간에 쳐들어 왔다. 교관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교관을 완전 개무시하고서 우리 교실에 들이닥쳤다. 예의 따위. 알 게 뭐야? 라고 주장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망나니야. 제발. 너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는 거야. 망나니가 충격적인 말을 쏟아냈다. "똥개한테 무릎 꿇고 빌라고 했잖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미친 망나니야! 어떻게 남자가 여자한테 무릎을 꿇어?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이제서야 좀 알겠다. 왜 윌리엄이 아까 그렇게 나를 노려봤는지. 저 망나니가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했기 때문이란다.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김환성 왕자가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계집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에이. 잘못 들었겠지. 설마."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제국학원 차석교관. 한진수의 태도였다. ============================ 작품 후기 ============================ '분명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 아무 이상 없다고 합니다. 0053 / 0192 ---------------------------------------------- 딸바보가 분노하면 *** 프리지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왜 한진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지?' 원래대로라면 이런 경우, 교관이 김환성을 제지해야하는 게 맞다. 만약 이 자리에 한진수가 없었다면 그녀가 나서서 중재를 했을 거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차석교관이 참관하고 있다. 말이 차석교관이지 실제로 수석교관의 자리는 공석. 그러니까 직함만 달라졌을 뿐, 한진수는 수석교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수석교관이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내가 나서야 하나?' 그런데 묘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김상희 때문에 저러는 거야?' 그럴 리 없겠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가정 하나를 해봤다. '설마 한진수도... 윌리엄이 김상희에게 무릎 꿇는 걸 바라는 거야?' 그럴 리 없다. 프리지아가 보는 한진수는 철저하게 이 세계에 맞도록 설계되어 태어난 사람이었다. 여자 따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이다. 남자가 계집에게 무릎을 꿇는 상황 같은 것. 아예 인정따위를 안 할 사람이다. 프리지아가 본 한진수는 분명히 그랬다. '어째서... 안 말리는 거야?' 정말 묘한 마음이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알고 있다. 이 마음의 정체를 말이다. '질투?' 아니. 그런 건 아냐. 고개를 저었다. 질투 같은 거.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아무리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다지만 여자는 여자다. 개개인의 능력이란 날개를 가지고서, 여자의 벽을 넘을 수는 없다. 프리지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프리자아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계집 주제에 질투라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질투 같은 거. 그냥 사전에만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여자가 질투한다? 어불성설이다. 한편, 한진수는 상황을 그냥 지켜만 봤다. '김환성을 말려야 한다.' 아니. 말리고 싶지 않다. 상반된 두 마음이 머릿속에서 치고받고 싸웠다. 자신도 왜 그런지 전혀 모르겠다. 솔직히 한 때는 인정하려고도 했었다. 김상희가 좋다. 그래서 김상희에게 잘해주고 싶다. 이유는 몰라도 하여튼 그랬다. 그렇게 인정하려고 한 순간, 마음속에서 또 다른 마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게 말이 되냐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누군가 그렇게 마음속에 속삭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었다. 프리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석교관님. 중재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한진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프리지아." "네." "건방지게 훈계하려 들지 마." "......." 프리지아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신분의 격차란 이런 거다. 여태까지는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래도 그녀는 한진수가 좋았다. 한진수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다. 어쩌면 동경에 가깝다고 해도 좋았다. "죄송해요." 그런데 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김상희가 말했다면...' 김상희가 말했다면 어쩐지 한진수는 다르게 대답했을 것 같다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기분이 그렇다는 거다. 실제로 김상희가 그렇게 말했다면 '건방지게 훈계하지 마.'라고 말했겠지.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은 하는데 자꾸만 이상한 모습이 그려졌다. '김상희한테는... 따뜻하게 대해줄 것 같아. 단순히 내 착각일까...?' 한편, 김상희는 김상희 나름대로 의문점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한진수가 왜 안 말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여자라고해서 예법이나 예의 모르는 거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보다 훨씬 잘 안다. 그런 걸 잘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사소한 실수 하나만 해도 죽을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훨씬 잘 알고 잘 지킨다. 이 상황은 무조건 김환성이 잘못한 거다. 한진수의 권한으로 막을 수 있다. 이 쪽 세계의 상식에서 보자면, 신성한 수업시간에 교관의 권위를 무시한 양아치 학생 하나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쓰고 있는 거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오, 오라버니." 이러다가 얘 진짜 퇴학당하게 생겼다고 생각한 김상희는 김환성의 팔을 붙잡았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김환성은 의지가 많이 되는 망나니다. 명치를 때려주고 싶은 건 맞는데, 없으면 안 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그런 느낌. "오라버니. 저는 괜찮아요." 학생들은 물론이고 프리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뭔가. 이상하다. 공주따위가 괜찮은 게 뭐? 어쩌라고? 누가 물어보기나 했나?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똥개. 너도 입 다물어." 그럼 그렇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김상희는 면박을 당했다. 당연한 일이다. 감히 공주따위가 주제 넘게 나섰으니까. 그런데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나는 저 개새끼가 너한테 무릎 꿇는 걸 봐야 열 받은 게 풀릴 거 같으니까." "오, 오라버니..." 김환성은 기필코 사과를 받아낼 작정인 것 같았다. 김환성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진수는 여전히 말리지 않았다. 교실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발새..." 김환성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러고보니 욕하면 저 똥개가 무서워하잖아. 말을 순화했다. 새에서 말이 끊겼으니 새로 시작하는 아무 단어나 대충 떠올렸다. "새로운 녀석아. 너 어제는 분명히 사과한다고 지껄였잖아." 도대체 언제?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김환성이 그래도 나름 오빠라고 김상희한테 무서운 모습 안 보여주려고 했었으니까. 스페셜 필드를 펼쳐서 김상희가 안 보이는 데서 죽도록 팼었다. 화장실 갈 때랑 나올 때 마음가짐 다르다고. 윌리엄은 죽어도 사과를 못하겠다고 버텼다. '차석교관도 여기 있어. 날 진짜로 때리진 못할 거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으나 버텼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계집따위에게 무릎을 꿇는 황당한 짓은 절대로 못 한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건 절대 못할 일이다. 김환성이 피식 웃었따. "그렇단 말이지." 아지랑이가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죽여 버린다." 결국,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이 나섰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프리지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토록 완벽하게 은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통틀어도 별로 없다. 이 곳엔 고려왕가의 셋째 왕자 김환성이 있다. 어렵지 않게 저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 스페셜 나이트...?" 고려왕국의 최강 전력이라는 스페셜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진짜 스페셜 나이트라고?" "와. 대박...!"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이 말했다. "왕자님. 그만 두십시오." "말리지 마. 난 저 새끼 죽일 거야." 김환성은 칼을 뽑아 들었다. 진짜로 죽이려는 듯 살기가 흘러 넘쳤다. 이주형이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스페셜 필드 내에 이주형과 김환성만 갇혔다. 스페셜 필드는 밖에서는 안 보인다. 밖에서 보면 두 사람이 그냥 사라진 것 같이 보인다. 김환성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계속해서 피어 올랐다. "나 열받았어. 너도 말리면 가만 안 둬. 말리지 마." "무력으로라도 왕자님을 제압해서 말리겠습니다." 김환성은 정말 진심인 듯 했다. "팔 하나 날아갈 각오는 해라." "폐하의 명령입니다." 움찔. 김환성의 몸이 움찔 거렸다. "아부지의 명령이라고?" 이주형은 정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들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김환성 왕자를 호위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임무는 김상희 공주를 보호하라는 거였다. 사실 이번에 김훈상에게 유선 보고를 올렸을 때 왕창 깨졌다. 이유를 듣자하니 그런 일이 있으면 윌리엄이고 나발이고 일단 족쳐버려지 않고 뭐했냐는 거다. 솔직히 이주형은 억울했다. 왕이 내린 명령은 '김상희를 보호해라'였다. 이주형의 상식에서 그 때의 상황은 하나도 위험하지 않았다. '죽을 위험도 없었는데. 도대체 내가 왜 까여야 해?'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지만 않으면 장땡 아닌가. 그렇게 이해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왕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명령을 새로 내렸다. '김상희의 의지에 반하여 손을 대는 사내놈은 모두 손목을 잘라 버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스페셜 나이트는 스페셜 나이트다. 은밀하게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밀함도 꼬리가 길면 밟힌다. 남자들의 손목을 잘라대면 결국 누가 그랬는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명령을 내리는 건지. 누가보면 김상희가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건 줄 알겠다. '그럴 리 없지.' 어쨌든 이주형은 왕의 명령을 들었다. 김환성도 김훈상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 화를 누그러뜨렸다. 이주형은 정말로 궁금했다. "왕자님. 뭐 하나만 여쭤보면 안 됩니까?" "뭔데?" "도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계신 겁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즐겁지 못한 일입니다만." 어쩌면 왕자가 살인을 즐기는 싸이코는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것 외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놓고 -여자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그 억지를 안 들어주니 죽이겠다! 이건 진짜 싸이코나 할 수 있는 짓 아니겠는가. "그 새끼가 나랑 한 약속을 깼잖아. 나 약속 엄청 중요시 생각하는 거 알지?"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약속 중요시하는 건 김환석 왕자님이신 거 같은데요. 이주형은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뭔가 특별하고 중요한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스페셜 나이트인 자신에게도 말 못할 속 깊은 사정말이다. 그나마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기는 있다. '정말로 펜릴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계신 건가?' 아직까지는 비밀리에 그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진지하게 물었다. "펜릴왕국과의 전쟁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착각하고 있다. 김환성은 그런 외교관계 같은 거 신경도 안 쓰고 있는 상태다. "펜릴? 그게 어디야? 왕국이야?" 이주형은 쓰러질 뻔 했다. *** 김훈상은 소식을 들었다. 윌리엄 왕자가 김상희에게는 절대로 사과하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단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약 23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김훈상은 즉석에서 명령을 내렸다. "제국에 통보해. 전쟁하겠다고." "폐, 폐하." 관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전쟁이 어디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던가. 아니. 이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날 일도 아니다. 그냥 사소하게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전쟁을 해서 얻는 이득이 도대체 무엇이관대 왕이 저러는 지 모르겠다. '토, 통보라니.'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통보라니. 왕이 아무래도 진짜 일을 치를 모양이었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나는 분명한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펜릴왕국의 제 2왕자 윌리엄은 나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이는 곧 나를 무시한 행위가 된다." 관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왕이다." 김훈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특유의 카리스마가 관리들을 압도했다.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왕의 말은 무겁다.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 말은 곧 무거운 생명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왕은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다. 내 말이 생명을 잃으면,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왕의 권위가 추락한 나라는 쇠퇴한다." 관리들은 떠올렸다. 그들의 왕인 김훈상은 펜릴왕국의 사신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정말로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내 말의 권위와 무게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펜릴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 내 아들과 딸에게 사과하지 않겠다면." 관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에게는 이미 사과했다. 그렇다면 결국 딸에게도 사과를 해야 저 분노가 풀릴 거라는 소리다. 이제 겨우 23시간 남았다. 어떻게든 펜릴왕국에 연락을 넣어 사과를 하게 만들어야 했다. 관리들도 지금 당장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 보통의 경우. 전쟁은 득보다 실이 많다. 이번 경우는 실이 더 많은 경우였다. 강제로라도 윌리엄을 무릎 꿇려야 할 판이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김유신 휘하 스페셜 나이트는 출정을 준비해라." "예. 폐하."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김유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24시간 후. 펜릴의 이름을 고려로 바꾸겠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관리들이 벌벌 떨었다. "폐, 폐하!" 이거. 아무래도 보아하니 왕이 직접 움직일 것 같다. 펜릴에게 남은 시간은 23시간. 그렇다면 1시간 만에 펜릴을 치겠다는 소리인데, 그게 가능하려면 스페셜 나이트 전원과 스페셜 나이트보다도 강한 국왕 김훈상이 움직여야했다. 다시 말해, 김훈상이 직접 움직인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된다. 그는 고려의 국왕이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고려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재, 재고해주십시오!" 김훈상이 물었다. "김유신. 나 없이 펜릴을 1시간 내에 지울 수 있냐?" "불가능합니다." 김훈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김유신의 대답으로 답은 결정 됐다. 한편, 알렉스는 침실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상희학의 관점에서 비추어 보자면...' 요즘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이 떠오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딸바보 아빠'였다. '아냐. 그럴 리 없지. 아무리 딸 바보 아빠라도... 딸아이가 강간 당할 뻔 했다고 전쟁을 일으킬 리는 없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이라니. 나도 슬슬 미쳐가나?' 아니. 분명히 그렇긴 한데,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폐하와 스페셜 나이트가 움직인다는 소리는 전면전은 아니라는 소리인데.' 전면전을 하면 많은 피가 흐른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힘과 힘이 부딪치면 피가 흐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스페셜 나이트와 왕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전면전이 아닌, '수뇌부의 목을 직접 따러 가시겠지.' 기습 침투하여 순식간에 펜릴의 왕궁을 장악하겠다는 소리다. 일반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김훈상과 스페셜 나이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도대체 뭘까? 왕께서 노리는 게 뭐지?' 상희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딸 아이 때문에 분노한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대략적으로 설명이 되기는 하는데,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직까지 '상희학'은 이름조차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학설이었다. 당장 다른 학자들에게 말하면 돌 맞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괴짜로 소문나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발표를 하면 학계에서 퇴출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알렉스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김훈상을 찾았다.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런 더러운 일에 직접 움직이려 하시는 겁니까?" 한 나라의 국왕이다. 편한 자리에 있기만 해도 된다. 김훈상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진지해졌다. 알렉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김훈상이 말했다. "알렉스. 나도 진지하게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김상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 뻔 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천불이 치솟는다. 이런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 이상한 게 맞겠지." 알렉스는 순간, 자신의 이론이 들어맞는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상희학. 아주 허무맹랑한 이론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훈상의 개인 책상을 힐끗 쳐다봤다. '저건... 김상희 공주님의 손편지?' 비접촉 마력보호는 원래 마력이 많이 든다. 심지어 그걸 24시간 운용해놓고 있으려면 상당히 세심한 컨트롤 능력이 들어간다. '손편지에 마력보호를 걸어놓으셨어?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알렉스의 학구열이 계속 불타올랐다. 열심히 생각을 해보자 답은 간단했다. '위장 문서로군.' 중요한 기밀문서일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편지지만 말이다. 한편, 고려의 왕 김훈상이 직접적인 선전포고를 하자 펜릴왕국은 난리가 났다. ============================ 작품 후기 ============================ 딸바보가 화나면 전쟁 일어납니다. *** '위장 문서로군.' 중요한 기밀문서일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편지지만 말이다. "알렉스씨. 상희학 더 공부하세요. 아직 갈 길이 머네요." 0054 / 0192 ---------------------------------------------- 진격의 딸바보 *** 고려가 경고가 아닌 진짜 선전포고를 했다. 4년 전, 제국에 의해 푸릭스가 멸망한 사건 이래로 가장 커다란 사건이며 대륙을 강타한 소식이었다. 고려왕국의 국왕 김훈상이 스페셜 나이트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단다. 펜릴왕국은 비상이었다. "저희는 고려를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국왕폐하. 지금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닙니다." 자존심. 물론 상한다. 윌리엄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여론과 증거가 조작됐다. 억울한 건 맞다. 그러나 억울하다고해서 고려가 쳐들어올 거, 안 쳐들어오지 않는다. 펜릴의 국왕은 차분히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를 칠 이유가 없는데 어째서지.' 김상희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는 상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예전의 그 무역 건 때문인가? 독점권을 노리고?' 아니다. 겨우 그 정도로 전쟁을 일으킬 리는 없다. '도대체 어째서냐?' 이유를 알아야 대처라도 할 텐데 이유도 모르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결국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이 계집따위에게 무릎 꿇는 거. 정말 싫다. 고려왕국은 지금 불가능한 걸 하라고 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펜릴은 그 불가능한 걸 결국 해야하는 입장인 거고. 윌리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윌리엄. 방법이 없다. 정말 급하다. 왕명이다. 그 계집에게 무릎꿇고 사죄하도록 해. - 아바마마! 윌리엄은 울먹거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냔 말이다. - 아바바바. 전 정말 너무나 억울합니다. 저는 피해자입니다! - 안다. 나도 네 마음과 상황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굽혀야 한다. 네 행동 하나에 국민 수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 아바마마. 한낱 계집아이의 처녀를 빼앗으려 했던 것이 그렇게 큰 잘못 입니까?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입니까? 저는 그로인해 김환성 왕자와 한진수 나이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으며 엄청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펜릴의 국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윌리엄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서 울었다. 강간 같은 거. 하면 뭐가 어떻냔 말이다. 계집아이가 울면 그만큼 쾌락은 더 커지는 법인데. - 아바마마? 그런데 이상했다. 말이 들리질 않았다. - 아바마마!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목이 터져라 아바마마를 외쳤다. - 아바마마! 그 때, 윌리엄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가 내 딸을 강간하려 했냐? 윌리엄의 몸이 순간 경직 됐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지금 윌리엄은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라 함은 곧 펜릴의 왕이다. 펜릴에서 왕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누군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전화를 가로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고, 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 김훈상은 왕좌에 앉았다. 여긴 고려왕궁이 아니다. 펜릴왕궁이다. 다들 23시간 있다가 김훈상이 쳐들어오는 줄 알았다. 아니. 솔직히 말이 그렇지, 시일이 며칠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어디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던가. 펜릴왕국의 국왕은 무릎을 꿇었다. '김훈상...' 국왕 뿐만이 아니었다. 관리들 모두가 그랬다. 펜릴의 나이트 역시 제압됐다. 놀라운 건, 그 누구도 수갑이나 밧줄등으로 제약당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겨우 20명으로 펜릴궁을 장악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아무래도 스페셜 나이트에 대한 소문이 축소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언제 쳐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저 정도 인원이 움직이면 어딘가에서 티가 나기 마련인데 왕궁까지 침입했다. 그것도 왕이 직접 스페셜 나이트들을 데리고 말이다. 펜릴국왕은 침을 삼키고서 말했다. "당신은 분명 23시간 후에 이 곳을 공격하겠다고 했습니다." "23시간 있다가 쓸어버린다고 했지, 그 때 출발한다고는 안했잖아." 펜릴국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보니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다. 심지어 스페셜 나이트와 싸웠던 나이트들 마저도. 생채기 하나 안 났다. 그 말을 달리 말하자면 완벽하게 제압되었다는 뜻이다. "3시간 남았어. 그 때까지 내 딸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너희 죄다 죽여버릴 줄 알아." 펜릴국왕의 몸이 떨렸다. 저 말. 진심이다. 고려의 왕은 허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아들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모두의 목을 베어버릴 인간이다. 그는 애가 탔다. 그래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과 전화를 하고 있는데, 김훈상이 그 전화를 빼앗았다. "네가 내 딸을 강간하려 했냐?" 이쯤되자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은 진지한 궁금증이 일었다. '설마 진짜로 김상희 공주 때문에 화가 나서 쳐들어 오셨나?'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속으로나마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고려 국왕을 손가락질하며 놀릴 거다. 공주가 아닌 왕자의 일이었다고 해도 전쟁을 일으킬, 적어도 타국의 왕궁을 불법침입하여 점거할 명분은 절대 안 된다. 고려가 아무리 힘이 있는 나라라고 해도 이건 무리수다. '뭔가 내가 모르는 다른 게 분명 있겠지. 계집에게 무릎 꿇으라는 건 분명 왕자가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핑계이자 억지겠지. 다른 걸 이루기 위한.' 분명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아무래도 가슴 한 켠은 불안했다. '진짜로 김상희 공주님때문에 움직이신 건... 정말로...아니시겠지.'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스페셜 나이트들도 반발할 거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동원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정말 그렇다면 스페셜 나이트의 이름이 아까워진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김유신은 긴장했다. 그는 김훈상을 안다. 김훈상 지금 또 굉장히 화가 났다. "내 말이 농담 같냐?" 김훈상이 말했다. "김유신. 내가 예고한 시간이 되면 국왕의 목부터 잘라." "알겠습니다." 윌리엄은 핸드폰을 땅에 떨어뜨렸다. 펜릴왕국의 왕성이 고려에 의해 점거 당했다. *** 제국의 마력학원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 소문 들었어? 펜릴인가? 거기 왕국의 왕자가 고려의 공주에게 무릎을 꿇었다던데?" "에이. 설마." "진짜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고려왕가에서 직접 압력을 넣은 모양이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왕자가 공주한테 무릎을 꿇어?" "진짜라니까? 8관에서 있었던 일이고 그 자리에 내 친구도 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8관에 본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단다. "와. 그게 정말이야? 진짜 쪽 팔린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사실 고려에서 펜릴을 안 좋게 보고 있었나봐. 이 때가 기회다 싶어 잘근잘근 밟은 거지. 왕자가 공주한테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갈 때 까지 갔다고 봐도 될 거야." 김훈상과 스페셜 나이트가 펜릴왕궁에 직접 쳐들어갔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펜릴은 펜릴 나름대로 허술한 경계망과 약한 국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소문내지 않았고 고려는 소문 낼 이유가 없어서 소문내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저기 소문 퍼뜨리고 다닐 만큼 입이 가벼운 스페셜 나이트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제국 정보부는 이번 일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아무래도 스페셜 나이트의 전력에 대한 정보를 수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보고가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제국의 정보부는 굉장히 바빠졌다. "고려왕국과 펜릴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2000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서 이동한다고 해도 3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그러나 비행기나 여타 다른 물체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설마 몸으로 직접 움직였다는 소리인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말도 안 된다! 2000km 를 들키지 않고 이동. 그래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그렇게 지친 상태로 펜릴의 중심부를 친다고? 그걸 우리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도 불가능한 일이다." "스페셜 나이트가 한 차원 더 강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제국의 정보부장 김국현은 고심에 빠졌다. 하나하나. 퍼즐이 맞춰졌다. 이걸 보고를 올려야 되나 말아야 하나를 한참 고민했다. 그러나 누락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중요한 결론이 나왔다. 황제를 찾았다. "결국... 이번 일은 고려의 무력시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000km를 아무런 이동수단도 없이, 몰래 침투하여 펜릴왕궁을 점거했습니다.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우리 제국의 황성에도 침투할 수 있다는 소리겠군." "결국 고려는 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억지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이 됐다. 어째서 고려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계집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헛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된다. 결국 펜릴따위가 아닌 제국을 향한 시위였던 거다. 조심하라고. 건드리면 안 되는 나라라고 말이다. '그래서 김훈상이 직접 움직였군.' 김훈상의 능력. 황제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황제는 흡족해졌다. 제국 정보부에게 상을 내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빠르게 파악하여 납득할 수 있는 결론까지 내렸으니까. '뿐만 아니라 왕자가 두 명이나 우리에게 잡혀 있는 모양새였지.' 그건 고려왕국의 힘이 그만큼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나도는 걸 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인해 그런 얘기는 쏙 들어가게 될 거다. 스페셜 나이트와 김훈상의 능력이 조금 더 알려졌다. '일부러 능력이 더 보여준 거군. 그렇다면 숨기고 있는 능력이 더 있을 수도 있겠어.' 스페셜 나이트는 프리온 나이트에 비해 더 많이 노출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확한 능력치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이번 일로 인해 스페셜 나이트의 강함이 더욱 조명될 거고, 고려왕국이 건재하고 있음을 모든 나라가 알게 될 거다. '김훈상. 역시 만만한 자가 아냐. 이 모든 걸 계산에 넣고 빠르게 움직였음이다.' 김훈상은 역시 대단했다. 황제는 껄껄 웃었다. "훌륭하다. 너희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한편, 김훈상은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해졌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 소녀는 너무 부끄러워서 입으로는 '아빠'라고 부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편지로나마 결례를 무릅쓰고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소녀는 그렇게 부르겠어요. 라고 써있는 편지를 보니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럼. 괜찮고 말고." 저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옆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던 강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말씀 하셨어요? 제가 듣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김훈상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니. 관리들이 봤다면 엄청 놀랐을 거다. 김훈상은 편지를 계속 읽었다. - 아빠가 정말 보고 싶어요. 이번에 큰 아량을 베푸시어 펜릴을 용서해주셨다 들었어요. 소녀는 아빠의 하해와도 같은 넓은 마음씨에 크게 감명받고 말았답니다. 김훈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강서영은 저 편지가 도대체 무엇인데 김훈상을 저렇게 웃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아주 중요한 국가기밀. 매우 중요하디 중요한 이득이 걸려있는 문서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예측했지만 역시 알 수는 없었다. 딸내미의 편지라고는 아예 상상조차 못했다. - 만약 정말로 전쟁이 났다면... 그리하여 만에 하나의 일이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빠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났다면 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매일 매일 엉엉 울었을 것이어요. 여기서 김훈상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펜릴보다 더 센데.' 하지만 그 말은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속으로 생각만 했다. 솔직히 김훈상은 펜릴을 정말로 없애버릴까 했다. 원래 하고자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왔다. 이번에는 조금 참았다. 명분도 약했을 뿐더러, 만약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갑질논란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뒀었다. 마음 같아서는 펜릴 왕국. 진짜로 없애버리고도 남았다. 그런데 편지를 읽고 보니 아무래도 잘한 것 같다. '아빠의 하해와도 같은 넓은 마음씨' 여기에 마음이 다 풀어졌다. 마음이 녹아내린 김훈상이 매우 따뜻한 목소리로 강서영을 불렀다. "서영." "네. 제가 여기 있어요." "잘했다." 강서영은 '네?'하고 되물을 뻔 했다. 하지만 참았다. 김상희에게 보고 배운 게 있다. 삶에 많이 적용 시켜가고 있는 중이다. '딸 하나 잘 낳았다'라는 칭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김상희에게 배운 것을 실천했다. "당신이 칭찬해주실 때마다 저는..." 김상희와 차이점이 있다면 강서영은 몹시 부끄러워한다는 것 정도. "이리와라." 김훈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내가 가지. 누워." 그랬다가 김훈상은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말했다. "벗지마라. 내가 벗길 테니." "......." 강서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붉음보다 더욱 뜨거운 밤이 깊어갔다. *** 저번에는 일이 있어 발표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암호 해독과 고대어 해석 특기로 이 곳에 와있다. '튀지 않는 선에서... 잘난척 하지 않는 선에서 내 능력을 보이는 게 좋아.' 너무 잘난척을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무능력해도 안 된다. 그 사이의 적정한 선. 그 걸 찾아야 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그게 최선이었다. 프리지아가 나를 쳐다봤다. "어때요? 이 정도 고어는 해석할 수 있겠죠? 수업시간에 졸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에요." 나는 경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프리지아가 날 그렇게 쳐다본다는 소리가 아니다. 프리지아는 오히려 날 호의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학생들이 날 경멸했다. 계집따위가 고어를 해석할 줄이나 알겠어? 내 귀에 그런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저 고어가 어려운 건지 쉬운 건지 모른다. 내 눈에는 무조건 한글로 보인다. 이건 아무래도 더 알아봐야할 필요가 있는 문제겠지만 하여튼 내 눈에는 한글로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아마... 별로 어렵지 않은 걸 거야. 어렵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주 쉽지는 않은.' 프리자아는 호의를 갖고 나를 대한다. 모르긴 몰라도 프리지아 역시 눈치라면 수준급일 거다. 이 세계에 마력을 갖고 태어난 계집이니까.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생활을 해왔을 테니까 말이다. '너무 쉽지도 않고 너무 어렵지도 않은, 맞추면 내게 이득이 되는 수준의 그런 문제였겠지.' 무능력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난이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서 그 고어를 해석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프리지아의 표정이 변했다. 프리지아 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 ============================ 작품 후기 ============================ '김훈상. 역시 만만한 자가 아냐. 이 모든 걸 계산에 넣고 빠르게 움직였음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황제폐하 너도 상희학을 좀 공부해보는 게 어때? 0055 / 0192 ---------------------------------------------- 한진수가 질투하면 뭔가가 터진다. ***53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 너무 긴장했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이겠지. 생각해보라. 시험의 눈으로 쳐다보는 수십 명의 '남자들' 앞에서 고대어 해석을 설명해야 한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 수십명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어쩌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자들' 앞이다. 내가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한다면 나는 두고두고 비웃음을 받을 터이고, 완벽하게 해낸다면 계집아이 주제에 잘난 척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내 딴에는 열심히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척을 하면서 해석을 했던 것인데, '고민'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프리지아가 김상희를 쳐다봤다. '별도의 해석작업 없이... 머리로 해석해서 풀이한다고?'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머리 회전이 뛰어난 남자들. 그러니까 마력을 활용하여 두뇌의 활용도를 높인 남자들마저도 별도의 풀이과정 없이 바로 답을 써내려가지는 못한다. 이 세계의 고어라는 게 그랬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은 한글로 보이는데, 얘네들한테는 아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수학같은 거다. 일반 사람들은 수학문제를 풀 때 대부분 풀이과정이 있어야 한다. 복잡한 문제면 복잡한 문제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데 만약 슈퍼컴퓨터의 계산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 그 사람은 아무리 복잡한 계산이 있어도 보는 순간 암산이 된다. 별도의 과정은 필요없다. 애들이 웅성거리는 것도 들렸다. "저걸 암산으로 풀었어? 맞춘 거 맞아?" "교관님 보니까 맞춘 게 맞는 것 같은데." "너 저거 암산 돼?" "당연히 안 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쟤 진짜 마력 없는 거 맞아?" 쟤네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마력도 없는 계집이 암산으로 고어를 해독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중학교때인가, 고등학교때인가. 나를 쫓아다녔던 남자애 중에 하나가 그런 놈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주 재수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천재였다. 애들이 얘한테 수학문제좀 알려달라고 하면 이딴식으로 대답했었다. '응? 그게 왜? 당연한 거 아냐?' 다른 애들 입장에선 결코 당연하지 않은데, 그 놈의 입장에선 당연했었던 풀이. 그 놈은 그냥 수학문제를 보면 아. 이게 답이구나, 하고 떠오른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서울대인지 카이스트인지. 하여튼 엄청 좋은 대학갔다고 하던데. 하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내가 그 재수없는 녀석의 역할을 하게 된 거다. 프리지아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식으로 해석했죠?"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내 손은 저 글자를 번역한 '올 스탯 슬레이어'를 칠판에 써버렸으니까. '그냥 당연히 그렇게 보이는데요.'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이 녀석들은 대부분이 10대다. 나는 10대를 경험해봤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얘네들도 비슷하게 생각할 거다. 내가 그 때 그 서울대갔던 놈을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얘들도 날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행히 제가 어제 미리 공부했었던 문장이라 운 좋게 맞출 수 있었어요." 프리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긴 글자도 아니고 '올 스탯 슬레이어'라는 짧은 문구였다. 짧은 문구와 더불어, 이게 뭔지 설명하는 요약문 같은 것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해석을 해야했다. 물론 이번에는 적절한 모양새를 취했다. 수학공식을 대입하여 풀듯, 이렇게 저렇게. 풀이를 하는 척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어렵게 해석하는 방법도 이미 공부해놓은 상태다. 아. 진짜. 나 칭찬 받아야 돼. 이건 진짜 생색내도 된다. 나는 그냥 읽을 수 있는데, 이상한 공식과 법칙 같은 걸 외워서 풀이하는 척해야 하니까. 난 한글 해석보다 이게 훨씬 더 어렵다. 맞는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1+1=2' 인데 '1+1'이 어째서 '2'가 되는지를 설명 혹은 증명해야 하는 느낌이랄까. 프리지아는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는군요." 학생들도 날 쳐다봤다. 묘한 눈빛이었다. 계집아이주제에 그래도 제법인걸? 하고 말하는 것같은 눈빛도 있었고 그래봤자 계집이지, 하고 날 내리깔아보는 눈빛들도 있었다. 뭐. 물론 내가 독심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15년간 눈치를 보고 살아온 덕분에 터득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어쨌든 다행이야. 프리지아도 별 의심은 없는 것 같고.'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발표'에 관한 일이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줄 알았다. *** 제국의 마력학원은 각 원생별로 특기를 구분하여 그 특기에 중점된 교육을 진행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 교육만 받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인 소양. 이를테면 인문학, 예절, 예술과 같은 것들을 교양과목으로 배우게 된다. 8관의 학생들. 그러니까 암호 해독과 고어해석 특기를 받은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본적인 제식훈련과 군사훈련등을 한다. 물론 타 관의 학생들. 그 중에서도 3관의 학생들 만큼 엄청난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수업에 비하면 이들의 수업은 말 그대로 '교양'수준이었다. '아...죽겠다.' 그러나 그 교양수준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남자들 입장에서 교양이다. 김상희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뛰었다. 벌써 운동장은 32바퀴나 돌았다. 김상희는 32바퀴를 돌았고 다른 남자들은 벌써 200바퀴를 넘게 돌았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갖고 태어난다. 기본 신체능력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마력이 있는 남자들과 마력이 없는 여자는 그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 남자 입장에서 교양이면, 여자 입장에선 지옥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김상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안 됐다. 이미 얕잡혀 보이고 있는 상태다. 예전 윌리엄 왕자의 일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어서 당장 김상희를 누군가 건드리거나 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김상희는 철저한 약자였다. 교관 중 한 명인 홍상민은 답답했다. '뭐 저딴 계집이 다 있어?' 솔직히 말해 좀 짜증이 났다. 어쨌든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 경고를 주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능력 자체가 너무 떨어지지 않는가. '마력 한 웅큼 없는 주제에. 마력학원이라니.' 황제폐하의 특명을 받아 오기는 왔다는데 도무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계집이다. 단적인 예로 남자들이 수백 바퀴를 도는 동안 저 계집은 이제 30여바퀴를 돌지 않았는가. 김상희는 이를 악물었다. '교관의 잘못이 아냐.' 그녀는 홍상민을 충분히 이해했다. 저 교관은 마력이 없는 상태가 되어본 적이 없을 거다. 여자의 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김상희도 과거 한진수를 답답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 아! 좀! 빨리 좀 하면 안 돼? 김상희가 한진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시절. 한진수가 김상희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하던 그 시절에 김상희는 한진수를 탐탁치 않아했다. 하도 좋아한다고 구애를 하니까 한 번 만나주는 정도였었다. 그 당시 김상희는 한진수의 느린 행동을 매우 싫어했다. 커피숍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는 것도 한 나절이 걸렸다. 물론, 김상희의 눈으로 봤을 때 한 나절이란 소리다. 한진수는 김상희가 쓰고 아무렇게나 놓은 냅킨이나 빨대 같은 것도 꼼꼼하게 쟁반에 담아 정리했다. 김상희는 한진수가 답답했다. 너무 착했었다. 바로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활달하고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매너 있게, 앞장서서 김상희를 이끌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보니 한진수처럼 어리숙하고, 어벙하고, 느린 사람을 보니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었다. - 내가 너랑 있다가는 진짜 속 터져 죽겠다. 그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진짜 몹쓸년이었지. 내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저 교관이 나를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저 교관 입장에서 이건 단순히 워밍업 혹은 스트레칭 수준일 거다. 그런데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준미달 혹은 자격미달이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자. 잘은 못해도 최선은 다하는 거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여자의 몸으로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니까. 정신력으로 어찌어찌 버티긴 했지만 더 이상을 무리였다. 어질어질했다. 그 때, 누군가 김상희를 붙잡아줬다. "괜찮아?" 듬직한 두 팔로 김상희를 반쯤 안다시피하여 부축해줬다. '누구지...?' 윌리엄 왕자의 일이 있다보니 덜컥 겁부터 났다. 김상희는 봤다. 잔잔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를 말이다. *** 김상희를 부축해준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였다. 김상희는 크리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크리스에 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신생국가라 할 수 있는 '백제'라는 작은 국가 출신이며 그 곳 왕의 첫째 아들이라는 것 정도. 김상희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도였다. '백제라면...' 백제에 대한 얘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규모가 작고 힘이 약한 약소국이다. 그리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옅은 곳이라는 글귀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유서 깊은 왕국인, 현재도 매우 강력한 나라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고구려의 왕자가 독립하여 세운 작은 국가라는 게 떠올랐다. 초대 백제의 왕은 특이하게도 부인을 굉장히 아꼈다고 한다. 책에서 읽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여자를 훨씬 인간적으로 대한다고 들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풍토 때문에 다른 국가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내가 책으로 접한 정보는 그랬다. 김상희는 한결 편해진 걸 느꼈다. '이 느낌은... 개차반?' 김훈상은, 가끔 비행기랍시고 -당시 김훈상은 김상희가 실제로 즐거워하는 줄로 착각했었다- 마력으로 감싸 김상희를 이리저리 날려대곤 했는데 그 때 김상희는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포근한 무언가가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 '숨 쉬기가 한결 편해졌어.' 뒤를 돌아보니 크리스가 자신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치 내게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속셈일까?' 병이라면 병이다. 나는 남자들의 호의를 단순 호의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철저하게 약자인 내가 이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는 모두를 적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조금 잘해준다고 덜컥 방심하면 절대 안 된다. '내게 접근하는 이유가 뭘까?' 며칠이 흘렀다. 언제나처럼,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김상희에게 크리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 이름. 김상희 맞지?" "네. 맞아요. 크리스 왕자님." "너 내 이름 알고 있었어?" 크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잘생기기는 했네.' 원래 이 곳 마력학원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미남이긴하다. 워낙에 좋은 유전자와 혈통을 가진 애들이 모인 곳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크리스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특히 김상희는 저 윤기 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음. 황금빛이라고하면 좀 이상하려나?' 갈색이라고하기에는 좀 밝고 그렇다고 노란색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두운 그런 색깔의 머리카락이었는데 푸른색 눈동자, 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냈다.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라,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냥 편하게 오라버니라고 불러." "...네. 오라버니." 김상희는 여전히 크리스를 경계했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날 경계하는 거 알아." 비록 진심은 아니지만 언제나처럼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아니어요. 미천한 계집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기뻐요." "너. 말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해?" "제 말을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크리스가 허리를 숙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김상희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3초 정도가 지났다. 크리스는 밝게 웃었다. "너. 머리로 생각하고 그렇게 예쁘게 대답하는 거지? 일부러 말이야." 김상희는 순간 당황할 뻔 했다. 이 곳 남자들은 보통 단순하다. 여자가 말하면 그게 전부 사실인 줄 안다. 이 곳은 그런 세계다. 그런데 좀 특이한 놈이 나타났다. 크리스가 김상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한테는 안 그래도 돼." "왕자님..."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억지로 비위맞춰줄 필요 없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거든."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김상희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이 놈. 뭔가 이상하다. 그렇다고 마냥 덮어놓고 의심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적인 예로 첫째 오빠인 김형석같은 경우가 있지 않은가. 지금 당장, 크리스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판별할 수 없겠지만 만약 김형석같은 특이종자라면 무조건 친해져야만 한다. 일단은 정석대로의 멘트를 날렸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항상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감히 제가 왕자님을 속이려 했다면 저는 천벌을 받을 것이어요." 크리스는 마치 다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서 김상희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뭐. 지금 당장 나한테 마음을 열라는 소리는 아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알 것 같거든." 크리스가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김상희의 눈에, 크리스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크리스가 김상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조금씩 다가갈게." 김상희는 겉으로 배시시 웃었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너는... 어느 쪽이야?' 윌리엄이야, 아니면 김형석이야. 다시 며칠이 흘렀다. 크리스가 상당히 분노한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는 이번 1차 승급시험 때, 김상희를 못 이겨." 김상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쟤. 도대체 뭐라는 거야. "김상희가 1등을 한다에 내 손목을 걸겠어. 왕실 문장으로 인증한 계약서도 쓸 수 있어. 나는 진짜 손목을 거는 대신 나한테 약속 한 가지 해줘야겠어." 김상희가 놀란 것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술렁거렸다. 도대체 크리스가 왜 저러나 싶다. "김상희가 1등하면 김상희 따돌리는 짓은 그만 해. 잘 대해주라는 소리가 아냐. 괴롭히고 무시하지 말라는 소리지. 어때? 이 정도 조건이면 나랑 내기. 할 만 하지 않겠어?" 김상희가 두 눈을 꿈뻑 거렸다. 이번 시험에 중간 이상의 성적만 받으려고 했었다. 일단 초반이고하니, 눈치를 더 살피려고 했던 거다. 크리스가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 왕가 문장 찍은 계약서 쓸 거야. 너 1등 못하면 내 손목 잘려." 왜 그딴 걸 네 마음대로 정해! 김상희는 소리치고 싶었다. 크리스가 김상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믿음을 얻으려면 믿음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 크리스가 다시 밝게 웃었다. 김상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의 입에서는, 적어도 여자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 튀어나왔다. "내 멋대로 정해서 미안해. 좀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너한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너에 대한 믿음을 보여줄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거든." ...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정말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올 스탯 슬레이어'를 칠판에 써버렸으니까. 응...? 어디서 많이 보던 이름인데. (사실 제 다른 글 중 하나인 올스탯 슬레이어가 어제부로 완결났습니다. ㅎㅎ 자랑. 자랑.) "이거시... ppl? (음흉. 씨익)" 0056 / 0192 ---------------------------------------------- 한진수가 질투하면 뭔가가 터진다. ***56 김상희는 혼란스러웠다. 크리스의 진짜 의중을 잘 모르겠다. 그녀는 눈치가 빠르다. 크리스는 아무래도 선의로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눈치가 곧 만능열쇠일 수는 없었다. 크리스의 행동은 분명 이상한 구석이 있었고 김상희의 입장에서는 크리스를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가지는 확실했다. '나한테도 명분이 생겼어.' 명분이란 거.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나같은 약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힘이 강하면 없던 명분도 만들어 내지만, 약자는 명분이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김상희는 일단 크리스를 말렸다. 무턱대고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녀가 괜히 15년 동안 이쁨 받으며 살아남은 게 아니다. "감히 계집따위가 높으신 남학우님들을 어찌 이길 수 있겠어요? 왕자님께서 저를 그토록 어여삐 여겨주시는 것에는 몸둘 바를 모를 만큼 감사하지만 그 약속 철회해 주시어요." 김상희는 거의 울먹거리면서도 -물론 연기다- 할 말은 꼬박꼬박 잘 했다. 보통의 여자라면 이런 말도 못한다. 한다 하더라도 까딱 잘못하여 일정선을 넘으면 건방질 수 있다. "미천한 저 때문에 왕자님이 피해를 입는다면 저는 죄책감에 평생을 괴로워할 것이어요. 정녕 저를 괴롭게 만드실 생각이신가요?" 김상희는 거의 울먹거렸다.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계집. 뭔가 다르다.'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대답은 못 한다. 그런데 다른 계집들과는 뭔가 다르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자들을 높이면서도 또 할 말은 또박또박 하는데, 그게 건방지지가 않다. 묘했다. 정말 묘했다. '뭐지? 이 기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뻔 했다. 실제로 몇몇은 피식 웃었다. 왜 스스로 웃음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상희는 아무도 모르게 눈치를 살폈다. 울먹거림. 연약한 척. 이거 의외로 잘 먹힌다. 징징거리는 거랑 연약한 척 하는 거랑은 다르다. 징징거리면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징징거림과 연약한 척. 둘 사이 경계를 잘 타야 했다. '옳지. 이런 계집은 처음이지? 신세계지?' 심지어 이들은 여자라곤 거의 시녀밖에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다. 남자들은 원래 단순한 편인데, 제국 마력학원의 남자들은 남자들 중에서도 특히 단순한 편. 살벌한 개차반과 망나니들 사이에서 닳고 닳은(?) 김상희에게는 좋은 먹잇감 -하지만 매우 위험한-이라 할 수 있겠다. 크리스가 다시 밝게 웃었다. 김상희는 크리스의 저 미소가, 첫째 오빠 김형석의 미소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따뜻한 미소였다. "그런 거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저는..." 크리스가 김상희의 말을 끊었다.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공주님. 나는 약속 철회할 생각 없어. 너 하기에 따라 내 손목의 운명은 결정되겠지." *** 김상희에게 명분이 생겼다. 김상희는 '왕자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뼈가 부러지고 살이 녹아내릴 만큼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계집 따위가 '나는 공부 열심히 해서 너희를 이길 거다'라고 말하면 재수 없는 일이지만, '왕자님께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어요'라고 말하면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공부를 열심히하여 1등을 하겠다는 소리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포장이 다른 셈이다. 김환성이 침대에 누운 상태로 물었다. "내기 했다며?" "네. 저를 어여삐 봐주신..." 김상희는 크흠, 헛기침을 했다. 고려에서는 자신을 지칭할 때 무조건 '소녀'라고 해야 한다. 심지어 그게 왕명이었다. 그딴 걸 왕명이라고, 라고 생각하는 김상희의 속마음과는 상관 없이 하여튼 그랬다. 그러나 이 곳은 아니다. 15세 넘은 성년 여자가 자신을 일컬어 '소녀는' 하고 말하면 안 그래도 얕잡아 보이는데, 더욱 얕잡아 보인다. 보통 아주 어린 여자아이나 '소녀는'이라고 붙이니까. 하지만 김환성은 '소녀는'하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 마력학원에서 계속 '저는'하고 말하다가 김환성 앞에서만 '소녀는'하고 말하려니 헷갈렸다. 다행히 김환성은 그걸 트집잡지는 않았다. "소녀를 어여삐 봐준 왕자가 하나 있어요." 압존법도 잘 지켰다. "너를? 왜?" 김상희는 순간 환청을 들은 것 같았다. '어떤 놈이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너무 빨리 말이 지나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김상희는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설명해줬다. 김환성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걔 싸이코야? 아니면 변태? 왜 자학질을 해?" 그 말이 무슨 뜻이냐하면, "똥개 따위가 1등을 어떻게 해? 손목 자르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지. 안 아프게 잘 잘라줄 수 있는데." 김상희는 속으로 욕했다. 너는 네 여동생을 겨우 그 정도로밖에 안 보냐? 내가 기필코 네 명치를 후려치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동안 김환성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진짜 미친놈 아냐?" 김환성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나빴다. 윌리엄이 떠올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끼.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워낙 말이 빨라서 김상희는 제대로 못 들었다. "죄송해요. 소녀가 아둔하여 무슨 말씀인지 잘 못 들었어요."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아냐. 아무것도." 김환성은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제 잘 시간이다. "왕자님. 불 끌까요?" 일부러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단순한 김환성은 또 거기 집착했다. "왕자님 싫다고 했다." 김상희는 울상을 지었다. 미리 준비했던 레파토리를 읊었다. "소녀가 왕자님을 왕자님이라 부르지 않고 오라버니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흉봐요. 저를 흉보는 건 상관없지만 오라버니를 흉보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원래대로라면 '참을 수 없으면 어쩔 건데? 계집 따위가?' 라는 대답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김환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자기를 그만큼 생각해주는 거 아니겠는가. 김환성은 허세를 부렸다. (허세는 허세인데 거짓말이 아니라는 게 제일 무섭다.) "괜찮아. 내가 제일 세거든." 김환성은 우쭐대면서 말했다. "그냥 가서 누워." 불이 저절로 꺼졌다. 마치 '네 오빠는 이런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듯, 아주 우쭐거리는 태도였다. 김환성이 마력을 사용해서 불을 껐다. 김상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게 김상희에게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시녀가 본다면 놀라 까무러칠 일이다. 계집이 있는데 왕자가 직접 마력을 움직여 불을 끄다니! 엄청난 충격을 받을 일이다. 김상희는 아주 천천히, 조금씩 김환성을 조련해가고 있었다. 어두워졌다. 김환성이 말했다. "괴롭히는 놈 없냐?"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김상희가 잠깐 생각에 빠졌을 무렵, 김환성의 말이 이어졌다. "내 똥개는 나만 괴롭혀." ...네? "주인허락 없이 똥개 괴롭히는 놈은 내가 패줄게." 네가 왜 내 주인이냐? 나는 똥개 아니고 인격체라고. 그리고. 네가 허락하면 괴롭혀도 되냐? 앙? 제길. 내 자존심. 엉엉. 아니나 다를까. 김환성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요즘 들어 매일 강조한다. "내가 제일 세." ...아. 예. 그러시겠지. 김상희는 겉으로는 행복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오라버니가..."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일부러 숨을 참아 얼굴을 붉혔다. 아마. 저 괴물같은 망나니라면 이 어둠을 뚫고 얼굴을 볼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사불여튼튼이다. "오, 오빠가... 계셔서 소녀는 정말 든든해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김환성의 광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천했다. 괜히 혼자 뿌듯해했다. "암. 그렇고 말고." *** 프리지아는 서류 하나를 결재받기 위하여 차석교관실을 찾았다. 한진수는 프리지아가 건넨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사인을 해줬다. "나가봐." "벌써 다 읽으셨어요? 역시 대단하시네요." 프리지아는 조금 특별한 여성이다. 한진수도 아주 함부로는 못 대한다. 어찌보면 남자와 동급인데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는 거니까. 사실 일반적인 여자같았으면 '나가봐'라고 했을 때 바로 '네.'하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을 거다. 프리지아니까 안 나가고 버티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질문이 한 가지 있어요." 한진수가 프리지아를 올려다봤다. "김상희는 차석교관님께 어떤 아이에요?" 한진수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프리지아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도,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설마. 사랑이란 단어는 사전에만 존재하는 단어야. 에, 에이. 환청인가? 프리지아가 당황한 사이, 한진수의 말이 이어졌다. "뭐라고?" 프리지아는 당황했다. 한진수가 왜 이러나 싶다. 그런데 한진수가 좀 이상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네 말을 못 들었다. 다시 말해봐." 프리지아는 직감했다. 지금 한진수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진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방금. 뭐라고 말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기분탓인가.' 프리지아가 배시시 웃었다. "아니에요. 주제넘게 감히 제가 질문을 할 수는 없죠. 가볼게요." 한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수는 방금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프리지아는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해.'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틀림없이 그랬다. 한진수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으니까. 사랑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사전속에만 존재하는 단어였으니까. '분명... 잘못 들었어.' 걸음을 옮겼다. *** 1차 승급시험이 시작됐다. 1년 동안 승급시험은 총 3회 치러진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다음 클래스로 넘어갈 수 있다. '잘해야 해.' 나는 열심히 노력하는 척 했다. 사실 노력 안해도 된다. 상위 클래스의 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여기 클래스의 학생들이 배우는 고어는 매우 쉽다. 해봐야 2문장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것도 거의 초등학교 수준. 정말 쉽다. 물론 내 입장에서 쉽다는 거다. '시간은 넉넉해. 최대한 고민하는 척하면서 쓰자.' 모르긴 몰라도 나는 지금 상당한 집중을 받고 있다. 바로 크리스 때문이다. 크리스가 도대체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진짜로 자신의 손목을 걸어도 될 만큼, 내게 믿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고 또 지나치게 순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단순하다고 해도 그건 아닐거야. 나는 시간에 맞춰서 아주 열심히 푸는 척을 했다. '애들은...어려워하는 분위기인가.' 눈치를 살펴봤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래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려워하는 척 했다. 1차 승급시험이 끝났다. 솔직한 말로 나는 100점을 확신했다. 내가 똑똑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진짜로 쉬웠다. 이 정도 문제 틀리면 어디 가서 한국인이라고 말 못한다. 그러기 전에 내가 쪽팔려서라도 콱 죽어버리고 말 거다. 그래도 나는 나름 대학교까지 나온 지성인이라고. 흠흠. 크리스가 내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옅은 미소를 띄고서 말이다. "잘 풀었어?" "왕자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요." 결과 발표는 3일 뒤다. 크리스가 오른손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그거면 됐어. 결과는 중요한 게 아니거든. 이따가 시간 돼? 잠깐 얘기 좀 해." 얘. 도대체 속셈이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진짜 모르겠다. 항상 웃고만 있으니 속내를 알 수가 없다. 표정을 읽기가 너무 힘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얘가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그냥 '따라와. 얘기할 게 있으니.'라고만 말해도 된다. 왜 어째서 굳이 나한테 시간 있냐고 물어보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일단 정석적으로 대답은 했다. "왕자님께서 저를 보자하시니 저는 따르겠어요." 크리스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마. 사람 없는 곳으로 안 가. 교관실에서 훤히 보이는 대운동장에서 얘기할 거야. 거기 아마. 3관이랑도 엄청 가깝지?" ... 얘. 진짜 이상하다.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저 말을 해석해보자면 윌리엄의 일을 겪은 나를 배려하기 위하여 망나니가 있는 3관과 교관실에서 훤히 보이는 -한진수가 바로 볼 수 있는- 대운동장에서 얘기를 하자는 소리다. 이 세계에 여자를 이렇게 배려하는 남자가 있던가? 그나마 여자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알아가려 노력하는 알렉스씨도 이런 배려는 못 할텐데.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는 아직 얘를 믿지 못하겠다. ============================ 작품 후기 ============================ '이 계집. 뭔가 다르다.' '뭐지? 이 기분?' 너희들도 배워볼래? 상희학이라고 ** 김환성 :"까도 내가 까. 괴롭히면 일러라. 내가 젤 세니깐(허세)" ** 이 순간에도 김상희공주의 눈치싸움은 현재진행중. 적이냐. 아군이냐...! 0057 / 0192 ---------------------------------------------- 한진수가 질투하면 뭔가가 터진다. ***55 대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이 곳은 망나니가 있는 3관과 교관실이 있는 2관과 매우 근접해 있으며 특히 수석교관실, 차석교관실, 교장실에서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대운동장 한쪽 켠에는 덩굴나무를 키워 차양막을 만들었다. 이 덩굴나무의 이름은 차프론. 태양빛을 일정수준까지만 통과시켜 딱 기분 좋은 온도의 그늘을 만들어주는 특수한 식물이다. 이 곳에 앉아 있으면 꽤나 기분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나는 앉아 본 적 없다. 나는 계집이고 남자들의 전유물인 이 휴식공간을 감히 침범할 수는 없었으니까.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내가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크리스가 내 옆에 앉았다. 다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크리스의, 눈썹 위까지 내려온 앞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그 말을 다시 하자면 내 머리카락도 흔들리고 있다는 소리다. 앞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왕자와의 독대시간을 갖는데 흐트러진 자세로 있을 수 없어 나는 황급히 앞머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보통은 귀 뒤로 넘겨 핀을 꽂아 고정시키는데 아무래도 핀을 어딘가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뭐야. 얘. 진짜...' 나는 움찔 놀랐다. 크리스의 손이 내 얼굴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를 때린다거나 위해를 가한 건 아니었다. 크리스가 내 앞머리를 내 귀 뒤로 살짝 쓸어 넘겨줬다. "이해해. 네가 보기에 난 정말 이상할 거야. 이상한 거 맞아. 내가 도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했는지. 정말 모르겠지?" "왕자님께서 제게 믿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언제나 사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한다.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실제로 크리스는 그렇게 말했고 내가 그걸 되짚는 건 잘못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넌 그거 안 믿잖아. 아니, 못 믿잖아."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마침 차프론이 햇살을 흡수하여 투영시켜주는데, 한 줄기 밝은 황금빛이 크리스의 얼굴을 집중 조명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잘생기긴 했네.' 특히 저렇게 웃고 있을 때, 잘생겼다는 걸 느낀다. 그냥 딱 거기까지다. 잘생겼다. 그 정도. 왜. 뭐. 그 정도 감상은 말할 수 있잖아. 입 밖으로만 안 꺼내면 되...쳇.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 내 안에 아줌마 있다. "너는 우리 백제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저는..." 크리스가 말을 끊었다. "네가 접할 수 있는 백제는 책 속의 백제 뿐이었겠지." 저 말이 맞았다. 얘. 진짜 이상하다. 마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자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여자의 상황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여자에 대한 개념이 있는 남자. 이 세계에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마력을 가지지 않고 태어난 우리 형석이를 제외하면 이런 경우는 없다고봐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백제는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지 않아. 책 속에서보다 훨씬 더, 훨씬 더 많이 여자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믿을 수 없다. 이 세계는 남자가 우월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는 세계다. "대외적으로 알리지 못할 뿐이지. 아.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의심스럽겠구나. 대외적으로 하지 못하는 얘기를 왜 한낱 계집아이인 내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얘. 너 독심술 익히니? 혹시 마력을 사용하면 상대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해봤지만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백제는 제국을 집어삼키고도 남았을 거다. 마력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니. 그런 건 우리 개차반도 못하는 일이다. "너는 지혜로운 아이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어. 무엇보다도." "......." 크리스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얘는 나보다 키가 크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눈에 크리스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코가 닿을락 말락한 위치. 나는 치마를 움켜쥐고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난 네가 좋아. 어떻게든 너랑 친해지고 싶고 다가가고 싶었는데, 윌리엄이 망쳤어. 네 안의 마음의 벽을 너무 크게 만들어 버렸어. 그래서 일부러 쇼를 좀 한 거야. 나 이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좀 봐줘라. 하고 말야. 어때? 효과는 직빵이었지?" 말도 안 돼.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백제에서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나, 남자가 계집에게 그런 말을 하는 전례는 찾아볼 수 없어요. 저를 시험하시는 거라면 저는 왕자님께 성심성의껏 응하겠어요." 그러나 크리스는 자기 멋대로였다. "백제에서는 이런 걸 첫 눈에 반했다고 해." 크리스가 또 활짝 웃었다. "이런 말. 처음 들어보지? 이건 백제에밖에 없는 말이거든." *** 차석교관실에서 보면 대운동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일반사람이 봐도 그렇다. 한진수의 눈으로 보면 더더욱 잘 보인다. 그의 시력은 일반인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으니까. 한진수는 창문을 열었다. 쨍그랑! 창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모습을 본 시녀 강아영은 부들부들 떨었다. 사실 그녀는 이번 시녀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차석교관 한진수는 그 어떠한 변태적인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아예 무시했다. 있는 사람 취급도 안 했다. 애초에 한진수는 시녀를 필요로하지 않았으니까. 교장에게도 시녀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교장이 굳이 시녀를 집어 넣었다. 차석 교관에게 시녀가 없으면 품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쨌든 강아영 입장에서는 저 무섭디 무서운 차석교관이 자신을 본 체 만 체 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냥 자기 할 일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지?' 머리를 굴렸다. '유리창에 먼지가 너무 많았나? 그러고보니 어제 창틀 청소에 신경을 못 썼던 것 같은데.'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렇게 유리창을 산산조각 낼 정도면,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빠, 빨리 치워야 해.' 그런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청소를 해야 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한진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의 몸이 저렇게 산산조각나지는 않을까하는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가까이 다가갔다. 한진수의 등이 점점 커졌다. 그만큼 더 무서웠다. 죽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그녀를 옥죄었다.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시녀." 강아영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겨우 참았다. "가까이 와봐." 손 발이 덜덜 떨려왔다. 뭔가를 잘못 했다면, 그래서 차석교관이 화났다면... 그 땐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차프론 덩굴나무 아래를 봐라." 한진수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 너무 긴장했기 때문이다. 한진수의 몸이 움찔움찔 떨리는 걸로 봐서 차석교관이 엄청나게 화가난 것 같았다. "저, 저, 저는..." 사실은 이런 반응이 정상이다. 김상희가 굉장히 특이한 거다. "저게 뭘로 보이지?" 시녀의 눈에, 거미 시체가 하나 보였다. 크기가 꽤 컸다. 그녀의 주먹만한 거미였다. 역시 창틀이었다. 창틀에 죽어있는 거미. 이 불량한 위생상태 때문에 차석교관은 분노한 것이리라. "죄, 죄송해요. 당장 치우겠습니다." 강아영은 도구도 없이, 맨 손으로 그걸 집어들었다. 징그럽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징그러운 것보다 차석교관이 화난게 더 무서웠으니까. 한진수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화난 건 틀림 없어 보였다. "뭘로 보이냐고?" "거, 거미로 보여요." 강아영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거미의 시체가 그 악력에 의해 터져버렸다. 축축한 액체가 그녀의 손바닥을 적셨지만 그녀는 그것도 몰랐다. 한진수는 그제서야 시녀를 쳐다봤다. "뭐하냐, 너?" 하긴. 시녀따위한테 뭔가를 기대한 게 잘못이었다. 애초에 시녀에게 질문을 하는 상황조차 이상하지 않은가. 손바닥을 보니, 피가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거미의 피인 것 같았다. 한진수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버렸다. '이상한 취미가 있는 계집이군. 거미 터뜨리는 걸 좋아하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한진수는 강아영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했다. 그녀가 뭘 하든 말든, 별로 신경자체를 안 쓴다는 소리다. 지금은 더욱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잡소리가 너무 심해서 잘 안 들려.'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력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청력을 극대화 시켰다. 크리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난 네가... 어떻게든... 친해지고... 윌리엄이... 버렸어. ...쇼를 좀... 봐줘라...야. 정확하게 들리질 않았다. 대략적으로 들은 내용은 이거였다. 그런데 충격적인 말이 하나 들려왔다. 이상하게 이 말을 또렷하게 들렸다. - 백제에서는 이런 걸 첫 눈에 반했다고 해. 한진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짜증이 난다. '첫 눈에 반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불길했다. 예감이 매우 안 좋았다. '첫 눈에 반하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사전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문구다. '짜증이 나는군.' 그 때, 한진수는 문득 정신을 퍼뜩 차렸다.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또 왜. 또 왜 김상희에게 이렇게 과도한 관심을 쏟고 있는 거냐?'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김상희에게 자꾸만 이상한 관심을 쏟는다. 이성으로 제어가 안 됐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고 나면 괜스레 짜증이 밀려왔다. '몸이 정말 이상해진 것 같아.' 이건 의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문제였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누가 마치 이렇게 몸을 조작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말이다. 정말 이상했다. 김상희를 생각하면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김상희를 미워해라. 김상희를 싫어해라. 짜증나는 계집년. 건방지고 하찮은 계집년. 이렇게 자꾸만 머릿속에 속삭이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스스로도 컨트롤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정밀검진 결과가 나오겠군.' 몸에 이상이 있나 싶어 정밀검진을 받았다. 내일이면 결과가 나온다. 다시 차석교관실로 걸음을 옮겼다. *** 1차 승급시험의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승급시험 결과 발표. 상당히 이슈가 되었었다. 남자인 크리스가 김상희의 실력을 공증하고 나섰고, 왕가의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의 손목을 걸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꽤나 이슈화되지 않았던가. - 1등: 김상희. 92점. 그리고 김상희는 보란듯이 1등을 해냈다. '어, 어라...?' 김상희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느끼든 그녀에게 있어서 시험문제의 난이도는 초등학교 수준도 안 됐다. 그런데 92점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100점을 맞았어도 모자를 판에 말이다. '왜 틀린 거지? 왜 점수가 이렇게 낮아?' 점수가 낮다는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틀렸다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는 말은, 앞으로의 해석에 있어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나는 해석하는 방법을 몰라.' 해석하는 법. 확실히 어렵다. 마력을 써서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남자들도 어렵게 하는데 김상희는 오죽하랴. 해석하는 방법은 모르고 단순히 한글처럼 인식이 되는 건데,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 '앞으로도 계속 틀릴 수도 있다는 소리겠지.' 100프로의 확신과 90프로의 확신은 엄연히 다르다. 100프로 성공은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만 90프로의 성공은, 다른 말로 하면 10프로의 실패를 포함하는 소리니까. 전자와 후자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크리스가 밝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황당한 소리를 해댔다. "남자들을 이겼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풀 죽어 있을 필요 없어. 기 죽어 있지마. 너는 노력했고 노력의 결과를 응당 받았을 뿐이니까." 너. 뭐래니. 김상희는 확신했다.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구나.' 그렇다면 여자에 대한 이해도가 정말로 높다는 소리다. 그런 건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 생활과 경험이 뒷받침 되어서, 지금의 저런 마인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첫 눈에 반했다는 소리는 진심이야...?' 알 수 없었다. 김상희는 무턱대고 아무나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반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계집한테 졌다고?" "계집아이가 어떻게 1등을 할 수가 있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계집아이가 정말로 1등을 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계집따위한테 지는 일. 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란 말인가. 다른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고, 크리스는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네가 좋은 성적을 받게 되서 기뻐." 그리고 김상희를 와락 껴안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김상희는 그의 품에 쏙 안겨버렸다. 김상희는 언제나처럼, 접대용 멘트를 던졌다. 사심이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남자들에게 언제나 그러하듯 남자들이 좋아할만할 말을 해줬을 뿐이다. "왕자님께서 기뻐해주시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황송하고 또 부끄럽고 또 행복해요." 그리고, 밖에서 누군가 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들었다. 황송하고 또 부끄러운데 심지어 행복하단다. 그 누군가의 직책은 차석교관. 이름은 한진수다. 한진수의 눈이 김상희와 크리스를 향했다. 한진수는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크리스의 품에 안겨 있던 김상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눈을 들어 올렸다. 한진수가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 작품 후기 ============================ '이상한 취미가 있는 계집이군. 거미 터뜨리는 걸 좋아하나?' 야... 니가 질투해서 그렇자나... 작작해. 애 잡게따... 0058 / 0192 ---------------------------------------------- 진수...너야? 너 맞아...? *** 이주형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왕이 내린 명령은 '김상희의 의사에 반해 손을 대는 남자놈들의 손목을 모두 잘라 버려라'였다. 그런데 저 상황을 보아하니 김상희 공주도 딱히 거부하는 듯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지?' 애초에 명령이 너무 황당한 명령이라서 그렇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 세계의 남자다. 그렇다보니 그 명령을 어느 정도로 수행해야 합당하고 맞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자에 대한 개념도 없다. 그런 그에게 김훈상의 명령은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었다. '지금 저거. 싫어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바퀴벌레가 인상을 찡그린다고 해서 바퀴벌레의 기분이 나쁜지, 안 나쁜지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아마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물론 이주형의 입장에서, 바퀴벌레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보다 김상희 공주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기는 하겠으나 어쨌든 그는 여자에 대해 잘 모른다. '기분 안 나쁜 거 맞지?' 어려웠다.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면 저 놈의 손목은 안 잘라도 되는 거겠지?' 매 순간. 1초 1초가 갈등과 선택의 기로였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진수였다. 한진수는 이 쪽을 힐끗 쳐다봤다. '설마 눈치 챘나?' 한진수는 현재 1차각성을 마친 상태고, 2차각성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소문은 아직 없었다. '아직 2차각성을 할 나이는 아닌데.' 모두가 2차각성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진수같은 천재의 경우, 2차각성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차각성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은신을 파악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하게 날 쳐다본 건가?' 이주형은 이번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삶이 점점 어려워지는 느낌이었다. *** 김상희는 한진수를 봤다. 한진수도 김상희를 봤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김상희는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한진수는 눈을 돌렸다. 김상희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진수가 가까이 걸어와 말했다. "교실에서 무슨 짓이냐?" 크리스가 대답했다. "기쁨의 포옹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진수는 크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진수는 차석교관이며 교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상희가 남자들을 제치고 1위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쁨의 포옹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계집 주제에 운 좋게 1등을 했다고 기쁨의 포옹이라니."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먼저 껴안았습니다." 한진수는 크리스를 다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계집이 나의 약혼녀라는 사실은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한 번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학업과 관련한 상담이 아니라면 거부하겠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학생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차석교관 한진수. 그는 이미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현 시대의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봐도 됐다. 타국 출신으로 프리온 나이트에 입단한, 대외적인 활동을 맡아하고 있는 프리온나이트들 중 한 명 아니던가. 이 학원의 수석 졸업생이자 무서운 선배였으며 또한 무려 차석교관이니 한진수가 무게를 잡으면 학생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한진수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김상희는 둘의 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고... 한 거야, 지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시대의 약혼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약혼을 깨려면, 남자 측의 입장을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로 상당한 보상을 해주고는 했다. 그 말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약혼을 깨려면 남자에게 돈을 주면 된다는 소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자는 아무런 권리도 없고 '아무래도 그런 얘기가 오간 것 같은데.' 그런데 한진수가 거부했다. 김상희는 묘한 안도감을 느껴야만 했다. 저 한진수. 그 한진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이 가고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그 날. 윌리엄과의 일이 있었던 그 날의 한진수는 예전의 한진수가 맞았다. 그건 확실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 확실하게 느꼈었다. '한진수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날 포기하지 않아. 설령 왕국을 준다고 해도.' 크리스가 말했다. "약혼은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김상희 공주를 사고 싶은데요." 김상희는 순간 긴장했다. '한진수는 날 버리지 않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많은 금은 보화를 준다면, 가치없는 계집인 나 따위는 버려지겠지. 그런 마음도 조금 들었다. 불안해졌다.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꺼져라. 학생과 거래를 할 만큼 나는 궁핍하지 않아. 이 이야기를 한 번 더 꺼냈다간 교관을 모독한 죄로 엄히 다스리겠다." 그리고 김상희에게 말했다. "저녁에 차석교관실에 들러라." *** 차석교관실을 담당하는 시녀 강아영은 당황했다. '저 여자는... 김상희 공주?' 시녀들의 세계에서 김상희 공주는 매우 유명하다. 프리지아처럼 마력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한 여자. 그리고 이번 시험에서 무려 1등을 차지한 여자. 물론, 성적이 나쁜 남자들만 모인다는 암호해독 및 고어해석관련 특기지만, 어쨌거나 1등을 했다는 건 대단한 것이었다. 마력도 없는 몸으로 말이다. 강아영은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설마...' 계집따위가 차석교관실에 따로 올 리는 없다. 자기 의지로 감히 차석교관님을 뵙겠다고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 말은 즉, 차석교관이 직접 불렀다는 소리다. 강아영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예쁘긴 예쁘네.' 김상희 공주를 보아하니 확실히 예쁘기는 했다. 게다가 나이는 15세. '갓 성년이 되었으니 나이도 어린데다가 속살도 탱탱하겠지.' 강아영의 나이는 24세였다. 제국 마력학원의 시녀들 중에는 제법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내게는 눈길 한 번 안주셨는데.' 사실 그걸 좋다고 생각했다. 가끔 변태적인 취미를 가진 교관을 받드는 시녀의 경우는 정말 힘들어하곤 했으니까. 한진수처럼 시녀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시녀들이 꽤 좋아하는 케이스이기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는 그래서 좋았는데 김상희를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건가.' 조금 오기도 생겼다. '내가 더 잘해드릴 수 있는데.' 그녀는 나이가 있는 만큼 성경험도 굉장히 많았다. 남자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도 많이 받아왔고. 그건 시녀의 역할이니까 말이다. 그 때, 한진수가 말했다. "내 허락 없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마라." 차를 준비하던 강아영도, 쇼파에 앉아 말을 기다리던 김상희도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강아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말라니. '지금 설마 김상희 공주에 대한 독점욕을 보이고 계시는 거야?' 시녀들끼리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세상에는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는 남자들이 있다고. 다른 남자의 손을 타면, 그 소유물은 소유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므로 그냥 죽여버리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저, 저건 경고야!' 너는 내 소유물이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죽고 싶지 않으면. 강아영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아까 조금 부러워했었는데. 그건 실수였던 것 같다. 하나도 안 부럽다. '불쌍하기도 하지.' 한편, 김상희는 다르게 생각했다. '너. 나한테 왜 그래...' 과거의 한진수를 떠올렸다. 한진수에 대한 기억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었고 이 삶을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었다. - 네가 다른 남자 쳐다보는 것도 싫고, 다른 남자가 너 쳐다보는 것도 싫어. 이런 내가 진짜 속 좁아 보이는 거 나도 알아. 나도 이런 내가 싫어. 싫은데 어쩔 수 없어. 다른 남자한테 웃어주지도 마. 예전에 한진수는 그렇게 말했었다. 연애 초반에는 그렇게 티를 안내더니, 자기는 질투같은 거 안 한다고 구속하지 않겠다더니 막상 사귀고 난 이후에는 돌변하여 김상희에게 질투를 보여주곤 했었다. '아냐. 이 세계의 한진수가 질투 같은 거 할리 없잖아.' 한진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너는 내 소유다. 조심하란 뜻이야." 김상희는 말해주고 싶었다. 이봐. 나는 여자라고. 너네 잘난 남자들이 마력써서 못 움직이게하고 그냥 나 끌어당기면 난 저항도 못해. 근데 왜 나를 조심시켜? 남자들을 조심시켜야지.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이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진짜 말했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강아영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은 매우 무서운 상황이었다. 역시, 김상희를 부른 것은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김상희에 대한 소유욕을 갖고 계셔. 그런 취급받는 여자들의 90퍼센트 이상은 죽는다고 했는데...' 한진수가 차를 마셨다. "대답. 안 하냐?" "조심할게요.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강아영은 말리고 싶었다. 김상희 공주. 겨우 15살밖에 안 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고해도 저렇게 개념이 없을 줄은 몰랐다. 지금 경고를 받고 있는 도중인데 거기다대고 당돌하게 질문을 하겠다니. '김상희 공주. 오래 살긴 글렀구나.' 여자는 자고로 '네' 혹은 '아니오' 혹은 '감사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 이 네 가지 말만 하는 게 좋다. 적어도 남자 앞에서는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게 그녀의 상식이었다. "저는 마력이 없어서 남자분들께 감히 저항할 수가 없어요. 미천한 몸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저는 너무나 두려워요. 존경하는 오라버니의 명령을 지키지 못할까봐 너무 걱정 돼요." 강아영은 김상희의 명복을 빌어줬다. '차석교관님께 오라버니? 미쳤구나. 단단히 미쳤어. 죽고 싶어 환장한 계집이야. 빨리 자리를 피해야 겠어.' 차석교관은 예의를 굉장히 중시하며, 상당히 무서운 사람으로 통했다. 그 왜. 윌리엄 왕자가 자신을 모욕했다하여 반 쯤 시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같은 남자마저도 그렇게 만드는 사람인데 여자들은 오죽하랴. 그래서 시녀들은 차석교관 한진수를 매우 두려워했다. 불똥이 튈까싶어 강아영은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한진수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럼 오늘은 그 놈이 널 억지로 껴안았던 거냐?" "그, 그런 건 아니어요. 제가 운이 좋아 1등을 하게 된 바람에..." 한진수의 구겨진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한진수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상희가 방금 크리스를 두둔했다. '억지로 껴안은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김상희도 그 포옹에 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내 소유다." 그런데 한진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깐 쓰러졌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반적인 남자들도 이런 경우는 경험하지 못한다. 마력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데 대천재인 한진수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한진수는 머리가 아픈 듯 으으...!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오, 오라버니." 그 때, 한진수가 김상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김상희의 몸이 굳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 느낌. 낯설지가 않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기다린다고 했잖아." "......." 뭐야. 이건. 지금.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목소리. 한진수의 목소리다. 그 한진수의 목소리 말이다. 이 세계의 한진수가 말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김상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느낌은 분명, 그녀가 사랑했던 한진수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정말 큰 일 날수도 있다. 이 곳은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니까. "왜... 나 혼자 기다리게 했어. 나 엄청 기다렸잖아. 알잖아. 나한테 너밖에 없는 거. 네가 내 전부인 거. 알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김상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한진수는 그 한진수였다.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김상희가 입을 열었다. "진수...너야? 너 맞아...?" ============================ 작품 후기 ============================ 막상 껍질 까보면 한진수는 질투쟁인 듯 합니다...(소유물이니 뭐니 하면서 아닌 척 하지만.) 0059 / 0192 ---------------------------------------------- 진수...너야? 너 맞아...? *** 한진수는 눈 앞의 작은 여자를 세차게 껴안았다. 이것 말고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다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꽉 껴안고 사랑하는 여자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알잖아. 나 말도 잘 못하는 거. 너 나 항상 답답하게 생각했잖아." "......." 김상희는 목이 매어 왔다. 이 세계의 한진수라면 저런 말을 할 리 없다. 이 세계의 한진수는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톱 클래스의 천재였으며, 언제나 자신감 넘쳤고 당당했다. 계집 따위 앞에서 약한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정말... 맞아? 너..." 김상희를 입술을 깨물었다. 너 진수 맞아? 라고 물어보려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태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해준 걸 얼마나 후회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해주면 되지, 나중에 해주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이 중요했다. 지금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달콤한 꿈 말이다. 이 꿈이 산산조각 나버리기 전에, 1초라도 더 빨리 말해줘야 했다. 나는 그래야만 했다. "내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진수... 너 맞아?" 한진수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김상희의 몸을 더 꽉 껴안았다. 김상희의 목 뒤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김상희가 진수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너... 왜 울어?" 믿을 수 없었다. 이 한진수가 그 한진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말도 안 돼.' 그러나 이 세계의 한진수가 자신 앞에서 눈물을 흘릴 리 없다. 결국 인정했다. 이 한진수는... 그 한진수다. 김상희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목이 매어와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살아서 돌아간다면, '사랑해'라고 백 번. 천 번 말해주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그런 다짐은 아무 소용 없었다. 아무런 말이 안 나왔다. 진수가 그러했듯 상희 역시 진수를 꽉 껴안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냐. 난 네가 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김상희의 말은 진심이었다. 남자들에게 하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온 말이었다.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났다. 서로 껴안고 있는 상태여서 상희는 진수의 입술에서 피가 나는지 몰랐다. 목덜미에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게 그냥 눈물인줄로만 알았다. 한진수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비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김상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역시 이 한진수는, 자신이 사랑했고 또 사랑하고 있는 그 한진수가 맞았다. 아주 오래 전. 한진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 사람이 가장 비참해질 때가 언제인 줄 알아? 그 때 김상희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엔 한진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진수 말고 다른 남자.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속에서 내가 사라질 때. 그 때가 가장 비참한 거야. 그 당시 김상희는 뭐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다 있어? 라고 생각했었다. 대놓고 면박줄 수 없어서 '아 그래.' 하고 대답했던 게 기억났다. - 약속 할게. 나 절대로 너 비참하게 만들지 않아. 언제나 행복하게 해줄게. 나는 비참해도 괜찮아. 나는 너만 행복하면 되니까. 김상희는 그 때, '그런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오그라드는 대사 따위. 하지 말아 줄래?'하고 말할 뻔 했다. 하지만 참았었다. 분명 내용 자체는 오그라들었으나 한진수의 진심은 느껴졌었으니까. 한진수의 진심. 그 땐 비웃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당시, 한진수가 얼마나 비참했을 지 떠올랐다. '난 정말 복 받은 여자였어.' 너 말고도 나 좋다는 남자 많아. 그 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게 나쁜 년이었는데 나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주는 한진수에게, '나는 너 말고도 나 좋다는 남자 많아.'를 입버릇처럼 말했으니까. 매 순간이 진심이었던 한진수는 얼마나 비참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한진수의 호흡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하도 많이 울어서 그랬다. 그러면서 계속 말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늦게라도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한진수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사랑했던 여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김상희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었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시간이 흘렀다. 김상희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뭐야...?'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뭐지? "진수야... 너 어디있어...?" 주위는 어두웠다. 몰랐었는데 불도 켜져있지 않았었다. 김상희는 더듬더듬 걸음을 옮겼다. 김상희의 부름에도 한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 밖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방 안을 한 차례 휘젓고 나갔다. *** 한진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위를 올려다 봤다. 열려있는 창문이 보였다. 인상을 찡그렸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김상희를 안고 있었고 김상희는 자신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이 안 난다. '건강검진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가슴이 쓰렸다. 심장이 아팠다. 뭔가 이상이 있는 것이 틀림 없는데,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왜 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냐?' 이렇게 아픈 거. 처음이다. 훈련받을 때, 또 스스로를 단련 할 때도 이렇게 아픈 적은 없었다. 고통의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에게 익숙하디 익숙한 근육통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고통의 종류가 달랐다. '괴로워서 미칠 것 같다.' 한진수는 대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잡히지 조차도 않을 속도였다. '뭐냐. 도대체 왜. 왜 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거 같은 거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구 달렸다. 어지간하면 땀을 흘리지 않는 한진수의 온 몸이 금세 땀에 범벅 됐다. 교장실. 교장인 틸레반은 눈을 크게 떴다. "저, 저런 속도라니..." 지금 시간이 늦어 대운동장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누군가 있어서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분명 그 상대는 죽어 버릴 거다. 물론 한진수쯤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다마는 그래도 교장된 입장에서 걱정되기는 했다. '훈련도 좋지만... 너무 과한 건 아닌가 싶군.'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차석교관이 솔선수범 저렇게 나서서 수련을 하는 것을 보면 다른 원생들도 자극을 받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는 한진수도 저렇게 단련을 하는데 일반원생들은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틸레반은 오해를 거듭했다. '노력하는 천재라...' 하기야. 그러니까 저런 대단한 인물이 됐지. 2차 각성도 아직 못했는데도 프리온 나이트에 입단하지 않았던가. 보면 볼수록 대단한 제자였다. '아이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될 거야.' 교장의 생각은 맞았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전교에 체력단련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으니까. "차석교관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나도 해야지." 마력을 완전방출 시키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 그 과정을 계속해서 꾸준히 반복하면 마력을 컨트롤하는 능력도 좋아지고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며 마력의 그릇이 커진다. 또한 순도도 높아지며 회복속도도 빨라진다. 하지만 너무 힘들다. 그래서 다들 기피하는 훈련이기도 했다. 지구식으로 비유를 들어 보자면 운동이 몸에 좋은 거 다 아는데, 힘들고 귀찮아서 안하는 것과 비슷했다. 지구의 운동보다는 훨씬 힘든 과정이긴 했지만. "그래. 우리도 열심히 하자. 노력하면 우리도 차석교관님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방금 일어났던 일이 정말 꿈 같았다. 이 곳의 한진수는 과거의 한진수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다. 이유도 모른다. 나는 어둠속을 더듬어 겨우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 그 때 까지. 한진수는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 3관 기숙사. 1인실 두 개를 하나의 호실로 만들어 버린 둘째 망나니가 내게 달려왔다. 얘. 얘 왜이래. "야. 똥개. 똥개. 똥개. 이거 봐라?" "오라버니. 이 것은 오라버니의 성적표가 아닌가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 1등. 이건 누구나가 예상하고 있었다. 김환성이 1등이 아니면 누가 1등이란 말인가. 얘는 3관 학생으로서 전투특기를 받았다. 그 유명한 고려의 나이트. 그 중에서도 대대장 출신인데 얘가 1등 못하면 말도 안 되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나의 입은 나의 의지를 배신했다. "오라버니! 정말 멋져요! 오라버니 최고!" 나는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역시 그렇지?" 망나니는 크하하핫! 하고 크게 웃었다. 이 곳의 남자들은 단순한 편인데, 김환성은 더더욱 단순하다. 쟤는 분명 이 성적을 받은 게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내가 '오라버니 정말 멋져요!'라고 칭찬해줘서 좋아하고 있는 걸 거다. 그런데 망나니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칭찬에 영혼이 없어." 순간 나는 뜨끔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방금 큰 일을 치르고 왔다.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나는 초인이 아니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완전히 정상이면 더 이상하지. 어휴. 이런 건 어떻게 잘도 느낀다니까. 이 망나니. 조금 진화한 망나니가 된 것 같다. 그런데 망나니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똥개." 표정이 진지해지면 나는 또 긴장을 해야만 한다. 얘는 표정에 기분이 완전히 드러나는 타입이다. 얘 지금. 정말 진지해졌다. 아. 또 뭔데. 갑자기 왜 그러는데. 미치겠네. "네. 소녀가 여기 있어요. 말씀 하시어요." "너 몸에서 이상한 냄새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코를 킁킁 거렸다. 나는 움찔 놀랐다. 차렷자세를 하고서 가만히 서있었다. 제발. 망나니야. 쪽팔리니까 그만 해줘. 망나니는 코를 킁킁대며 내 냄새를(?) 맡았는데 어찌나 창피하던지. 의도한건 아닌데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다. "이상한데. 이건 남자 냄새인데." "아, 아니어요. 소녀가 아까 몸을 많이 움직여서 땀을 흘려서 그런 것 같아요. 오라버니께 불쾌한 내음을 끼치게 되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바로 샤워를 하고 오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나는 후다닥 샤워실로 향했다. 이 자식. 그냥 진화한 망나니가 아니고 진화한 개코 망나니였어. 하기야. 마력이 워낙에 뛰어난 놈이니. 개코보다 더 좋을 수도 있겠지. 샤워실에 들어왔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일 똑바로 안 하냐?" "죄송합니다." 아. 쟤. 또 저런다. 이 곳에는 2명의 시녀가 배정되어 있다. 지금 쟤는 시녀들을 혼내고 있는 거다. "너네가 신경을 똑바로 써야지. 죽어볼래?" 쟤 저건 습관이다. 망나니가 저렇게 망나니처럼 보이기는 해도, 그렇다고 사람을 아무렇게나 막 죽이지는 않는다. 망나니를 15년간 지켜봐온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시녀들 입장에서는 아닐 거다. 시녀들이 느끼기엔 진짜 사형선고다 저건. '아니. 나는 방금 들어왔고. 씻을 시간도 없이 달려들어 성적표를 자랑하던 건 너잖아? 그래서 난 못 씻고 있었던 거고. 쟤네 잘못이 아닌데 왜 쟤네를 터냐?' 시녀들이 정말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신경 좀 써라. 내 똥개에서 남자 냄새 나는 거 짜증나니까.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불쾌해." 시녀들의 사과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급히 움직이는 것 같은 것 같았다. 그런데 망나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아니. 왜 시녀들한테 그렇게 소리를 지르냐. 쟤네 완전 겁 먹었을 텐데. 진짜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있을 텐데. 좀. 살살 좀 다뤄주지. 그런데 샤워실 문이 열렸다. 나는 꺅!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겨우 그 비명을 참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 알몸인 상태다. "오, 오, 오, 오라버니...!" "야. 똥개.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망나니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내가 아까 입고 있던 옷이었다. 아니. 천박한 계집의 옷을 왜 왕자님이 직접 들고 있어. 게다가 왜 샤워를 하는데 난데없이 쳐들어와. 지금은 수증기가 많아서 잘 안보이지만 이제 곧 몸이 보일 거다. 이상한 게 보였다. 내 옷 뒷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너 피났어?" 망나니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쳤냐고!!! 야. 넌 가서 의무교관 데려와." 지금 시각 11시. 의무교관은 자고 있을 시간이다. 물론. 의무교관은 남자다. 시녀가 남자를 감히 깨워서 데려온다?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려왕국의 셋째 왕자가 시킨 일이라면 가능한 일이겠지. 그래도 시녀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기는 할 것이다. 망나니가 불렀으니 오기야 오겠지만, 기분 나쁘다고 시녀에게 해코지를 가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나 안 다쳤다고. 둘째 망나니는 내가 다쳤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주인 허락도 없이 누가 다치래. 똥개 주제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죽을래?" 망나니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내 몸을 강제로 돌렸다. 나의 부끄러움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라...? 안 다쳤는데?" 시간이 흘렀다. 샤워가 끝났다. 망나니가 쇼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도 진짜 놀라운 일이다. 왕자님께서 공주의 샤워를 기다려줬으니까. 시녀들은 매일같이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겠지. 망나니가 히죽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설명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거짓말하면 죽을 줄 알아." 쇼파에 앉은 상태. 손가락으로 쇼파 끝을 톡톡 두드리며 히죽 웃는 저 모습... 왠지 두렵다. 나. 살아남을 수 있겠지? ============================ 작품 후기 ============================ "주인 허락도 없이 누가 다치래. 똥개 주제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죽을래?" 훗날 알렉스는 '상희학'을 편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사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주인→오빠 0060 / 0192 ---------------------------------------------- 수치스러워. 엉엉. *** 자. 정신 차려. 저 아이의 기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어. 여러 번 강조하는 거지만 여기 남자들은 단순한데, 그 중에서도 단순의 끝판왕이 바로 우리 둘째 망나니다. '나를 아끼려면 제대로 아껴주라고.' 쟤는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타고나기를 저렇게 타고난 건지 나를 아껴주긴 아껴주는데 좀, 아니. 아주 많이 독특한 방식으로 나를 아낀다. 나를 아끼긴 아끼는데 인격체로 아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인 똥개로 아낀다. 하여튼 뭐. 이 세계에 태어나 똥개 취급받으며 아낌을 받는 게 어디겠냐마는, 그래도 좀 제대로 아껴달라고. '주인 허락도 없이 어디가서 다치고 오는 미련한 소유물... 정도가 되려나?' 아마도 그 정도 느낌인 것 같다. "똥개. 아까부터 수상해. 몸에선 남자 냄새가 나지. 목엔 피가 묻어있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를,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번을 고민했다. 내 말 하나하나는 곧 위험한 외줄타기니까.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짧은 시간동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만약에라도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면 정말 큰 일이 난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솔직함이었다. 괜히 다르게 말을 꾸며냈다가는 지금 똥개가 아닌 '왕자에게 거짓말을 한 미천한 계집'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랬다가는 정말 죽는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오라버니. 사실은 오늘..." 한진수가 불러서 갔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절 갑자기 안아줬어요. 그, 글쎄요. 소녀는 그 이유를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 피가 묻어 있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갑자기 사라졌어요. 이 이야기를, 나는 정말 진땀을 빼면서 얘기했다. 왜 진땀을 빼냐고? 그럴 수밖에 없다. 상상해보라구. 당신 앞에 사자 한 마리가 떡하니 앉아 입을 쩍쩍 벌리고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봐. 이 사자가 평소에는 제법 친하긴 한데 지금 좀 배가 고픈 상태야. 그럼 당신은 평온할 수 있겠어? 참고로 말하면 얘는 사자따윈 백 마리도 가볍게 찜쪄먹는 아이라고. 망나니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렇죠? 나도 이해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분명 느꼈다. 그 한진수는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그 한진수가 맞았으니까. 한진수의 손길과 체온. 그리고 그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는 분명 그 한진수였었다. "똥개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인상을 더욱 찡그렸다. "소설을 쓸 만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아참. 참고로 말하면 얘는 아직 내가 1등을 한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알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었을 텐데 아직 3관까지는 소문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다. "피는 도대체 뭐였을까?" 김환성은 아주 진지해졌다. "흠...피가 났다라..."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야. 똥개. 일로와." 하고 말한뒤 기다리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그냥 마력을 써서 나를 끌어 왔다. "오, 오, 오, 오, 오라버니!" 야. 이 자식아. 저기. 시녀 오는 거 안 보이냐? 나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보자면 나는 지금 김환성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니 눕혀져 있는 상태다. 그나마 똑바로 누워 있으면 내가 아무런 말도 안 하지. 내 상체가 망나니의 허벅지에 닿아 있다. 무슨 말이냐고? 정말 쉽게 말해, 그 왜. 그런 거 있잖아. 엄마들이 아가들 혼낼 때. 무릎위에 엎드리게 만들고 손바닥으로 엉덩이 때릴 때 하는 그 자세. '죽인다! 죽일 거야. 반드시. 반드시 죽인다!' 아. 수치스러워. 수치스럽다고. 나는 성인이라고. 아니. 안에 아줌마 있다고. 진짜 수치스러워. 엉엉. 제길. 두고보자. 언젠가 복수한다. *** 김환성은 마력을 활성화 시켰다. 그것도 최대한도로. '아씨. 잘 안 되네.' 김환성은 마력의 그릇과 순도가 굉장히 높다. 괜히 천재소리 듣는 거 아니다. 그러나 그 활용 능력은 조금 떨어졌다. 무기로 비유하자면 폭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폭탄은 위력은 강하지만 정밀한 타겟팅은 어렵다. 일단 터지면 주변을 초토화 시킨다. 김환성이 딱 그런 꼴이다. 지닌 바 힘은 강하지만 정밀조정이 어려웠다. '집중하자. 집중하자.' 김상희는 어쩐 일인지 얼굴이 굉장히 빨개진 상태. '오줌 마렵나?' 김환성은 김상희가 수치스러울 거라는 상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아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절차를 미룰 수는 없지.' 그래도 주인이 있는 똥개 아닌가. 똥개에게 문제가 있으면 주인이 나서서 찾아줘야 했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이건 주인의 의무다. '평소에 연습 좀 해놓을걸.'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 좀 해놓을 걸 그랬다. 마력을 통해 온 몸을 구석구석 살피는 이 작업.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형아나 아부지는 엄청 쉽게 하던데.' 김환성이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 진짜 힘들었다. 라고 생각한 김환성은 그제서야 활짝 웃었다. "진짜 다친 데는 없네." "오, 오라버니. 시녀가 흉 봐요." 시녀는 지금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세상에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왕자의 무릎에 누워 있다니. 정작 김상희는 지금 수치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지만, '부러워...' 시녀의 입장에서는 부러웠다. 어떻게 감히 계집이 무려 고려 왕자님의 신체에 저토록 밀착을 할 수 있을까. 시녀의 입장에서 저 모습은 가히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단한 착각을 했다. '김환성 왕자님은 정말 따뜻하신 분이구나.' 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모습을 보아하니 저 공주는 지금 부끄러워서 얼굴이 굉장히 빨개진 상태. 얼마나 행복하면 저렇게 얼굴이 빨개질 수 있을까. 정말 부러웠다. '수치스러워. 수치스럽다고.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어.' 하지만 김상희는 아니었다. 이건 영락없이 어머니들이 엉덩이를 때릴 때 하는 자세. 참고로 말하면 가슴이 얘 허벅지에 닿아 있다. 이거 생각보다 정말 창피하다. 신경도 쓰이고. '누가 망나니 아니랄까봐!' 물론 김상희는 지금 김환성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냥 마력으로 몸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 밖에 모른다. 김환성이 지금 평소 하지도 않던 세심한 마력 컨트롤을 바탕으로 자신의 몸을 스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다친데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김환성이 고개를 들었다. "뭘 쳐다봐?" 시녀는 순간 찔끔 놀랐다. 뭐랄까. 김상희 공주를 볼 때와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의 김환성은 조금 무서웠다. '아냐. 저 분은 정말 따뜻하신 분이야.' 그렇게 생각할 무렵, "빨리 차나 놓고 꺼져." 라는 매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녀는 허리를 숙이고 황급히 물러섰다. 그래도 김환성 왕자에 대한 호감은 여전했다. 방금 그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다웠었으니까. 김환성이 중얼거렸다. "한진수. 점점 마음에 안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 한진수는 땀 범벅이 됐다.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마력을 전부 써버릴 만큼 빠르게 뛰었던 적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은 아무렇게나 막 뛰면 안 된다. 그 충격파로도 유리창이 깨지고 운동장이 파손 된다. 심하면 건물 벽에 금까지 간다. 그래서 외부에 별다른 충격이 가지 않도록 마력을 컨트롤하여 달려야 한다. 한진수는 그게 습관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차석교관실에 들어왔다. 차석교관실은 침실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다. 샤워실도 마찬가지다. 샤워실에 들어갔다. 옷을 벗었다. 강아영 시녀가 한진수의 옷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 공주는...?' 무서워서 자리를 피했었다. 상황은 잘 모르겠다. '저렇게 격렬하게 잠자리를 가지셨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하면 차석교관쯤 되는 남자를 저렇게 지치게 할 수 있는 건지. 김상희 공주를 잘못 보고 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스킬을 가진 여자일 수도 있겠어.'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자신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착각과 오해가 쌓여갔다. 한진수가 말했다. "물 가져와." 김상희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던 강아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기뻤다. 평소, 아예 없는 취급받았다. 괴롭힘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일을 시키셨어.' 그건 곧 존재를 인정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강아영은 냉수를 쟁반에 받쳐들고 얼른 달려왔다. "여기 있어요." 한진수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강아영은 속으로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신이 정말로 있다면 차석교관은 신이 빚은 걸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화려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세기의 명인이 정성스레 조각한 조각상 같은 탄탄한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정말 멋지셔.' 무섭고 두려운 건 맞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땀범벅이 된 상태로,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한진수의 모습을 보며 설레지 않을 계집은 세상에 없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정신 차려!' 실수로 넋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일부러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다행히 차석교관은 그걸 문제삼지 않았다. 한진수가 말했다. "갈아입을 옷 준비해놔." "네." "그리고 눈 깔아." 강아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너무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한진수가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다고는 해도 이건 분명한 결례였다. 솔직한 말로 한진수가 나쁜 마음 먹으면, 강아영 정도 짜르거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서 강아영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한진수는 터벅터벅 샤워실로 걸어 들어갔다.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얼굴과 턱선. 그리고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왜...'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을 뿐더러, 방금 이상한 말을 할 뻔 했다. - 그리고 눈 깔아. 김상희가 싫어하니까. 그걸 겨우 참아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진수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홀로 중얼 거렸다. "김상희. 짜증나는 계집."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짜증나는 계집."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 황제의 밀실. 황제가 말했다. "아무래도. 좀 더 알아봐야할 필요가 있겠어." "분명히 그렇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이것마저도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아이를 구속해야겠지." 황제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프리지아로부터 정기적인 보고는 받고 있다. 김상희가 이번에 무려 92점으로 1등을 차지했단다. 사실 일개 학원생의 시험점수. 황제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쓸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이 것마저도 해석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지금은 일부러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김상희 공주의 1차 각성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는 지켜봐야했다. 그래서 일부러 제국의 마력학원으로 부른 것 아니겠는가. 감시가 편해지니까. 그것도 공식적으로 말이다. "고려와 한진수 측에 약간 잡음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자를 해석할 수 있다면 그 아이를 강제구금하는 것도 고려하도록 해봐." "예. 알겠습니다." 그래봐야. 얼마나 큰 잡음이 나겠냐 싶기는 하다. 어차피 계집아이다. 고려는 이 계집아이의 가치를 전혀 모른다. 황제. 그리고 황실의 최측근만 안다. 만약 황제 혹은 최측근이 아니라면, 이 사실을 아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없어지게 될 거다. "아니. 내 앞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황제폐하께서 직접 심문하실 겁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보고. 직접 판단하겠다." 제국의 황제가 김상희를 다시 불렀다. ============================ 작품 후기 ============================ "소설을 쓸 만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작가해설: 15년동안 속고 있다고 합니다. *** '형아나 아부지는 엄청 쉽게 하던데.' 작가해설: 이 대목으로 미루어보아 '형아' 나 '아부지'는 가끔씩 김상희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 다친데는 없는지 종종 검사했다는 걸 알 수 있져 0061 / 0192 ---------------------------------------------- 목숨을 건지다. *** 황제의 밀실. 언제나 그렇듯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황제가 말했다. "만약 그 아이가 이 글을 해석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포박해라."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포박한 뒤 황제 모욕죄로 감금시켜. 그리고 세간에는 죽였다 발표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황제는 황금의자에 앉았다. '김훈상이 이런 일로 제국을 도발하지는 않겠지.' 황제는 김훈상을 상당히 많이 의식하는 편이다. 웬만하면 김훈상의 편의를 봐주려고도 한다. 고려. 아니 김훈상이 다스리는 고려는 의식을 해야할 만큼 충분히 강했으니까. '어차피 한낱 계집아이다. 일이 그렇게 된다 하면... 한진수에게도 보상을 내리면 되겠지.' 감히 황제를 모욕했다. 즉결처분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한번 더 명령을 내렸다. "비밀이 새어나가는 순간. 너 역시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만약 김상희가 이 고어를 해석할 수 있다면, 죽어야만 할 것이다.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또 황제가 나를 부를까. '왜 일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태양 위의 태양. 제국의 가장 높은 황제가 왜 자꾸 날 보려하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다. 처음에 나를 보겠다고 부른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그 이후 나를 이 학원에 집어넣은 것도 이상하다. 물론 내게 특출난 능력. 그러니까 고어를 해석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학원에 입학시켰다고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보니... 내 고어 해독 능력에 관심이 큰 건가?' 그나마 이게 가장 설득력있는 가정이다. 사람마다 다들 관심사가 있고 좋아하는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황제의 경우. 고어해독에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는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라는 소리다. 어떤 이유를 갖다붙여도 황제가 계집을 직접 부르는 일은 파격에 가까웠다. 침실로 부르는게 아닌 이상 말이다. '나를 침실로 불러들이지는 않을 거야.' 적어도 그 정도 느낌은 있었다. 황제에게서는 나를 향한 음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눈치나 느낌이 만능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은 받았었다. 뭐. 정말 냉정한 말로 황제가 나를 어떻게 하고 싶다면 나는 방어할 도리도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이렇게 혼자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살아남아야 해.' 별 거 없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황제가 날 어떤 이유로 부르고 있는 걸까. 이 것을 열심히 고민하고 다양한 상황과 변수를 고려하여 미리부터 할 말을 생각해놔야 그 앞에서의 실수가 적어진다. 황제 앞에서의 실수는 곧 죽음과도 직결되는 문제. 그러니까 나는 온갖 상황을 가정하여 그에 걸맞는 아주 모범적인 답안들을 미리 생각해놔야 한다는 거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 자리까지 아무 노력도 없이 온 건 아니다. '황제는... 정말 무서운데.' 황제가 내게 욕을 했다거나 협박을 했다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제 특유의 뭔가가 있다. 아우라라고 표현하면 되려나. 역시 제국의 황제쯤 되면 은연중 절대자의 분위기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더더군다나 난 마력도 없는 계집아이고 황제 앞에 서면 정말 긴장이 되어 온 몸이 굳어진다. 사실 뭐. 깡패처럼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앞에 있으면 무섭다. 그런데 내가 만나야할 사람은, 깡패는 커녕 깡패 할아버지보다도 훨씬 무서운 황제.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아니라 남자라고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루가 지났다. 황제가 내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그만 일어나거라. 그런 과도한 예의는 싫어한다고 일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예를 취해도 욕을 먹고, 예를 안 취해도 욕을 먹는다면 예를 취하고 욕을 먹는 게 낫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무릎꿇고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황제는 껄껄 웃었다. "거참. 말 안듣는 계집아이구나." 이봐. 나야 괜찮지만 당신이 그런 말 하면, 일반적인 여자들은 진짜 무서워서 벌벌 떤다고.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여자에 대한 개념과 배려가 너무 없다. 왜 태어나도 이런 세상에 태어난 거야, 도대체. 나 진짜 여기 바꿀 수 있는 거 맞긴 맞아? 그 때, 황제가 다시 말했다. "가져와라." 누군가 황제의 방에 들어왔다. '프리...지아?' 프리지아는 내게 찡긋 눈인사를 해보였다. 프리지아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 폐하." "내 앞에서 그렇게 무릎 꿇지 말라고 누차 말했는데. 이 계집이나 저 계집이나 하여튼 못 말리는 계집들이구나." 프리지아는 황제에게 두루마리? 그런 걸 전해줬다. 저걸 뭐라고 하더라. 하여튼 종이를 둘둘 말은, 그 왜. 사극 드라마 보면 '어명이오!' 하고 외친다음에 펼치는 그 종이. 황제는 그걸 직접 펼쳤다. "계집. 가까이 와라." 그리고 내게 시켰다. "이걸 읽어봐라." 내 예상이 맞았다. 황제는 고어해독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나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긴장을 놓았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날 왜 불렀을지 모를 때와 알 때의 그 느낌은 천지차이다. '그런데. 가만...?' 나는 안심한 나머지 그냥 말을 해버릴 뻔 했다. 저 고어. 별 거 아니다. 어차피 한글로 보이니까. 1차 승급시험에서 92점을 받았고 내 해석능력이 약간 불안정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얼추 맞지 않는가. 내게는 분명 한글로 보인다. 정말 문제는. '황제가 직접 나를 보자고 했어. 그리고 고어 해독을 시켰지.' 나는 그 두루마리를 열심히 살펴보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해석하려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 '왜일까? 단순히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아니다. 단순히 나를 시험하기 위한 건 아닌 것 같다.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다. 이거. 분명 뭔가 있다. 황제쯤 되는 사람이 일개 학원생을 일부러 불러서 확인할 만큼.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은 저 고어가 굉장히 어렵고 해석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가정을 해보겠다. 어차피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는 저걸 맞추는 것이고 하나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눈치를 살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하면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맞춘다면... 어쩌면 황제의 은총을 받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고어해독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니까.' 그러나 단순히 은총을 받기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겠다. 나를 황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결과만 놓고 말하면 나는 노예다. 뭔가를 시키면 당연히 해야만 하는 노예. 고어 해독을 잘한다고 해서 딱히 특혜를 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시키면 당연히 해도 되는 일이고 그래도 되는 입장인데 굳이 뭔가를 해줄까? '모른다고 한다면... 어차피 계집아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수없이 갈등했다. 황제 앞에서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황제가 나를 직접 불러서 직접 물었어. 뭔가 직접 확인해야할 것이 있다는 건데.' 그게 호의일까? 아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 핵무기 쯤 갖고 있으면 모가 나도 괜찮지만, 힘 없는 사람이 모나면 얻어맞는다. 힘 없는 사람이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빼앗긴다. 나는 철저한 약자다. 내 능력을 감추기로 결정했다. "미천한 계집아이는... 아무리 보고 해석해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부족합니다. 공부를 소홀히한 저를 벌하여 주시어요." 나는 정말로 겁을 먹었다. 습관적으로 '벌하여 주세요'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이 작자. 진짜로 벌 주면 나는 큰 일 난다. 단적인 예로 남자들이 자기 아들을 혼낼 때 회초리때리듯 날 때리면 나는 아마 엉덩이가 터져 죽을 거다. 마력이 있는 남자들은 마력 없는 여자들에 대한 배려와 개념따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다행히 황제는 기분 좋은 듯 껄껄 웃었다. "아니다. 네가 고어해독에 탁월하다 들었다. 이 것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네 실책이 아니다. 학자들 조차도 매우 어려워하는 것이니." 황제는 황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순간, 나는 온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위기가 변했다. 몸이 굳어버리는 느낌과 동시에 주변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추워졌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랑한 계집." 쿵! 심장이 아주 잠깐 멎었다. 약 1초 동안. 뭔가가 내 심장을 콱 움켜쥐고 누르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말로는 어떻게 형용하기 어려운 공포가 밀려들었따. "감히 날 속이려 들어?" 마력구속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숨이 막혀 왔다. 죽을 것 같았다. '갑자기 왜...!' 모르겠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다.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여버리겠다." 죽음의 공포가 온 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실낱같은 이성의 끈은 놓치지 않았다. 15년 동안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그동안 배우고 또 갈고닦은 건 눈치 뿐이다. 죽을 것 같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들었지만 참아냈다. '저 사람은 황제야. 정말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런 쇼는 벌이지 않겠지. 쇼를 벌일 필요가 없는 지위의 사람이니까. 이건 나를 시험하는 거야. 분명해. 확실해 이건.' 대학교 교양시간에 프로파일 기법과 비슷한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일부러 범인을 압박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수법이 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내 생각은 지금 확신이었다. 생각해보라. 황제의 입장에서 나를 협박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감히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하여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라면 무서워서라도 사실을 말하겠지.'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온 몸이 폭발할 것 같은 끔찍하고 두려운 느낌. 나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가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죽어야합니다. 감히 저의 하늘이자 태양이신 황제폐하를 기만하려 하였다면 제 목숨이 백 개, 천 개라도. 하늘이 저를 용서치 않을 것이어요.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여도 황제폐하의 존안을 뵈온 것만으로 충분히 영광이고 행복해요." 순간, 나를 구속하던 마력의 힘이 사라졌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많이 놀랐느냐?" 나는 캑캑대느라고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황제가 물으니까 대답은 당연히 해야한다. 어떻게든 하려고 했다. "됐다. 그렇게 대답 억지로 하지 않으려 해도 된다. 내 잠시 장난을 조금 쳐봤을 뿐이다. 너는 확실히 다른 계집들과는 다른, 재미있는 구석이 있구나." *** 고려왕국. 고려왕성. 기록의 관. 강서영이 물었다. "폐하. 무엇을 그렇게 즐겁게 보시어요?" "둘이 있을 때엔 당신이라고 하라고 했을 텐데. 그새 잊었나?" 강서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10년 전만해도 '당신'이란 말이 잘 나왔었는데 이젠 잘 안 나온다. 나이를 먹는 증거인 것 같았다. 김훈상은 종이를 읽었다. 그 종이는 다름 아닌 김상희 공주의 손 편지. 김훈상이 비웃었다. "겨우 이까짓 내용으로 내게 자랑을 하다니." 강서영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강서영은, 김상희만큼은 아니지만. 아니 김상희를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김상희에게 보고 배운 것이 좀 있다. 지금 김훈상의 표정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가소로운 계집 같으니라고." 헤벌쭉 웃는 저 모습 자체는 아주 행복해보이는데, 막상 말투는 그렇지 않았다. 말로는 욕하는데 표정은 칭찬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표정만 보면 마치 아들을 얻으신 것 같은 느낌인데...' 김훈상이 또 히죽 웃었다. "정말 해괴하지 않나? 겨우 이런 걸로 자랑질이라니. 응당 당연한 일인 것을." 그렇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으면 1등 정도는 당연한 거다. 그게 설사 계집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건 아주아주 당연한 일이며 자랑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저는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김훈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문에 강서영은 당황했다. 오늘밤은 다른 침실로 가시려나보다,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편지라 짐작되는 저 종이를 김훈상이 들어서 직접 책상위에 올려놨기 때문이다. 저렇게 간직(?)해놓은 종이가 벌써 세 장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저렇게 직접 운반하시지?' 보통은 그냥 마력으로 휙 던진다. 김훈상쯤 되면 뒤로 던져도 원하는 위치에 정확하게 놓을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그걸 손으로 들어서 직접 옮기다니. 지구식으로 치자면 만능 리모콘이 있는데 일부러 수동조작하는 느낌이다. '설마 내가 모르는 어떠한 은어가 있는 걸까?'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가소로운 계집'이라고 말했다. 아까의 말과 합쳐서 생각해보자면 '한낱 계집 따위가 무언가로 왕에게 자랑을 했다'라는 건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계집이 어떻게 왕에게 자랑을 하겠는가. '중요한 무역문서쯤 되나보다.' 강서영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저런 거. 알아서 좋을 게 없다. 계집이 감히 왕의 행사에 신경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김훈상이 말했다. "가까이 와라." 강서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서서 가까이 가기는 갔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옷은 내가 벗긴다고 했잖아." 강서영의 얼굴이 더욱더 빨갛게 달아 올랐다. "내 즐거움을 빼앗지 마라." *** 김상희는 겨우 살아나왔다. '아.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무슨 장난을 그렇게 살벌하게 쳐?' 황제는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김상희는 그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황제가 왜 굳이 장난을 치겠는가. 분명 뭔가 있기는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범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 거다. '하여튼 난 살았어.' 제 3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나마 이 3관 기숙사는 살만한 곳이다. 우리 둘째 망나니 비위만 어떻게든 잘 맞추면 나한테 이보다 편한 곳은 없다. ...그런 줄 알았다. "너. 죽고 싶냐?" 이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여기에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냐! ============================ 작품 후기 ============================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으면 1등 정도는 당연한 거다. 그게 설사 계집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건 아주아주 당연한 일이며 자랑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작가: "근데 너 왜 자꾸 히죽히죽거리냐?" 0062 / 0192 ----------------------------------------------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품어라 ***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를 아주 빠르게 고민해봤다.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잘못한 게 맞기는 맞는데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럴 땐 내가 독심술이라도 익히고 있으면 좋겠다니까. 일단 정석적인 대답은 해야겠지. "소녀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죽으면 오라버니의 얼굴을 뵙지 못할 것 같아 그게 너무나 두려워요." 아니. 별로 두렵지 않아. 망나니야. 너 그리고 그러지 좀 말라고. 나는 익숙해져서 그렇다쳐도 다른 애들은 네가 대뜸 '죽고 싶냐?'하고 물으면 진짜 벌벌 떤다고. 어휴 진짜. 정말 리얼이다. 다른 공주라면, 나이가 어린 공주라면 정말로 오줌을 쌀 수도 있다. 김환석이 가지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분위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오죽하면 우리 셋째 망나니도 -셋째 망나니가 힘은 더 세다- 둘째 망나니한테 기를 못 펼까. 저 망나니는 나를 또 뚫어져라 쳐다봤다. 김환성도 망나니를 발견했다. "형아. 왔어?" "그래." "똥개가 죽을 죄를 지었어?" "......." 첫째 망나니는 또 한참의 침묵을 유지하다가 둘째 망나니에게 말했다. "가서 씻고와. 냄새가 고약하다." "그래?" 김환성은 코를 킁킁대며. 야. 거기 말고. 거긴 암내잖아! 좀! "냄새 나? 나는 모르겠는데. 씻고 올게." 김환성은 씻으러 갔다. 또 시간이 흘렀다. 얘. 또. 왜. 왜 이렇게 또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는 거냐.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질식사할 것 같으니까. "너." "네. 오라버니." "......." 불렀으면 말을 해라. 왜 말을 못하니. 아니. 안하는 거겠지만서도. "편지." 편지? 음. 그래. 편지. 그게 뭐 어쨌다고? 앞 뒤 다 자르고 그거 하나만 말하면 끝이냐? 나보고 어쩌라고? 명치를 겁나 세게 맞아봐야 좀 똑바로 말할래...는 그냥 내 속마음이고 나는 차분히, 그리고 최대한 예쁘게 웃으면서 기다렸다. 또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10분 이상은 이 긴장상태를 유지한 것 같다. 발바닥에 땀 날 것 같아. "왜 난 한 장이냐?"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됐다. 얘가 왜 이러는지. 얘는 이상하게 내 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건 별로 모르겠는데 손 편지는 좀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왜. 내가 여기 오기 전에도 편지하라고 했었잖아. '개차반한테는 3장 정도 썼었지.' 아마 쟤는 이걸 따지려는 것 같다. 와. 설마 얘. 이거 따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아니, 아니지.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제국을 찾는다는 소식은 들었던 것 같다. 겸사겸사 들른 것 같다. 동생 얼굴 -나 말고. 남자 동생인 김환성- 도 볼 겸해서. '그러니까 개차반한테는 3장. 자기한테는 1장 써줬다고 삐졌나?' 에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저 망나니가 어떤 망나니인데. '에이. 아닐거야.' 그리고 얘가 정말로 편지를 좋아하고 집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는 얘가 원하는 걸 다 해주면 안 된다. 언제나 중요하다. 좋아하는 걸 줄 듯 말듯, 안 줄듯 말듯. 너무 줘도 안 되고 너무 안 줘도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줄타기 중이다. "아버님은 고려의 태양이시니 소녀가 좀 더 길게 쓴 것 같아요." 가라. 회심의 돌직구. "소녀는 오라버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쓸 때마다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워... 수십장을 넘게 쓸 것 같은 불길함에 애써 짧게 자른 것이어요. 소녀의 손과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 것이 오라버니를 언짢게 했다며 소녀를 혼내 주시어요." ...나는 나를 잊기로 했다. 그래. 내 자존심따윈 없어. 없는 거야. 으아. 회심의 돌직구. 말이 좋아 돌직구지 이건 사기다. 내가 말하고도 미치겠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파고들 것 같아. 발가락은 발바닥에 파고들 것 같아. 15년간 이 짓(?)을 해오기는 했지만 정말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구나.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쟤. 지금 좀 풀렸다. 아니. 많이 풀렸다. 다행이다. 김환성도 밖으로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면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는데 물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 몸 좋은 거 알겠으니까 옷은 좀 입어줄래?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는 거 좀 그렇다 얘. "다과를 준비해 올게요." "앉아. 시녀있으니." 원래대로라면 '네'하고 대답하고 앉아야 한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수동적인 동물이니까. 하지만 나는 맞받아쳤다. 원래는 안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괜찮다. 아부성 발언을 다분히 포함한 이런 반항. 이 정도는 애교로 먹힌다... 아마도. 죽이진 않겠지. 아마도. "오라버니들을 위해 소녀가 직접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허락해주시면 안 될까요?" 김환석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을 먹고 있는데 나는 김환성의 아구리(?)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물론 겉으로는 배시시 웃었으나 아마도 내 이마에는 힘줄이 돋아나고 있지 않았을까. "그니까 형아. 있잖아. 한진수가 쟤 막 껴안고. 피 나고. 그랬다?" "......." 김환석 저자식. 사과 집어 먹으면서 저렇게 무게 잡고 먹어야 돼? 네가 무게 잡으면 일반 여자들은 숨 넘어 간다니까? 좀 편하게 먹게 해주면 안 되겠니? "그게 끝이 아냐. 크리스인가 뭔지 하는 개똥땡이같은 놈이 쟤한테 뭐라더라? 야. 똥개.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런 어려운 질문 하지 마. 걔가 나한테 했던 말들. 내가 너희한테 하면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나 있겠냐?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거짓말 하지 마라 네 이년! 하고 말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참. 그러고보니 이건 말해줘도 되겠다. "첫 눈에 반했다고 말하였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인지 소녀는 알지 못한답니다. 현명한 오라버니들께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없겠지. 이런 말. 사전에도 없는 말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런 소리도 했었어? 그게 뭔 개소리야?" 김환석은 여전히 말없이 사과만을 오물거렸다. *** 기본적으로 제국의 마력학원의 기숙사는 마력학원의 학생들만 잘 수 있다. 김환석이라고 해도 그 룰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저녁이 됐고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크리스라.'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첫 눈에 반했다'라는 거. 뭔가 기분 나쁘다. 어감이 별로다. 좀 해괴망측한 느낌이랄까. 이것과 비슷한, 해괴한 단어를 굳이 한 가지 더 꼽아보자면 '딸바보' 같은 말이 있겠다. '뭔가 이상한 말이군. 느낌이 매우 나쁘다.' 제국에서 볼 일은 끝났다. 제국의 공작 서너명을 만나고 돌아왔다. 꽤나 성공적인 만남이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크리스와 한진수 얘기가 나와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차석교관실. "너. 뭐하는 놈이냐?" "둘째 왕자님이시군요." 한진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진수는 김환석을 조금 어려워 한다. 가진바 능력과는 별개로 김환석은 김환석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다. 감히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참고로 한진수는 이런 느낌을, 고려의 왕과 제국의 황제에게서 밖에 느껴보지 못했다. 물론 김환석이 그 정도의 중압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 둘과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는 건 틀림 없었다. 그러나 한진수 역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차근차근 얘기해주시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못 알아듣습니다." "김상희를 껴안았다고?" 한진수는 김환석을 쳐다봤다. 그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 "피를 쏟았다고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술에서 피가 났었더군요. 입술을 깨물었던 모양입니다." "네 마력보호를 뚫고 피를 낼 정도면... 암습이었나?" "......." 한진수는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았다. 김환석 덕분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아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다. '암습...!' 그러고 보면 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많다. 수많은 고어들. 고대 문명. 그리고 제국조차도 답사하지 못한 대륙의 비밀스러운 곳들까지. 마력을 응용하는,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방법이 있다. '그 당시 내 정신을 조작하여 이상행동을 보이게 만들고 나를 암습하려했다고 가정 한다면...' 입술을 스스로 깨문 것이 아니라 공격을 당했던 거라면. '나는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다. 적은 많아.'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방심했다.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것 같다.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의 은신도 알아차렸으니, 다른 놈들은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그게 깨졌다. '그리고 내가 제정신을 차린 것을 깨닫고 도망쳤겠지. 용의주도한 놈이다.' 김환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이면서, 왕국의 귀중한 자산이다. 폐하께서는 네가 태어나자마자 고려왕가의 피를 잇게하려 내정하셨다. 너는 그만큼 왕국에 중요한 사람이란 뜻이다. 왕가의 허락 없이 함부로 다치지 마라." 김환석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왜 화가 나는 거냐?'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다. 한진수의 몸에서 피가 났다? 그런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암습밖에 답이 없다. 왕국의 귀중한 인재인 한진수가 다쳤으니 고려의 왕자 입장에서는 화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김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천한 계집따위를 안는 해괴한 행위를 하니 그런 꼴을 당하는 거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그 말을 달리 해석해보자면 김상희를 안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김환석 스스로도 한진수도 김환석의 말에 동의했다. 한진수가 말했다. "조심하겠습니다." 김환석은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아는 척을 해왔다. 자신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단다. 백제왕국의 첫째 아들 크리스란다. "내 위에는 하나 뿐인 큰 형님과 고려의 태양. 그리고 제국의 태양 황제폐하밖에 없다. 내게서 반말을 듣는 것이 기분 나쁘다면 갈 길 가도록 해라." 크리스는 활짝 웃었다. 적의 없는 웃음이었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이란 말. 괜히 기분 나빴다. 김환석이 물었다. "첫 눈에 반했다라는 게 무슨 뜻이냐?" 크리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요. 무슨 뜻인지 저도 잘... 그냥 백제에는 그런 말이 있어서요." "그렇군." 김환석은 볼 일은 다 봤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가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형님. 김상희 공주는 제가 잘 지키도록 할게요." 김환석이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김환석 특유의 카리스마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복도를 지나다니던 학생들이 일시에 걸음을 멈췄다.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이, 이거 무슨 느낌이야?" "쉿. 조용히 해. 저 사람이 고려의 둘째 왕자 김환석이야." "그게 뭐?" "김환석왕자한테는 무슨 특수한 능력이 있어서 저주를 내릴 수 있다나봐. 그래서 죽는 사람들도 있대. 사실이든 아니든 눈에 안 띄게 조심하는 게 좋아." 물론 헛소문이다. 김환석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그래서 그렇지 김환석이라고해도 멀쩡한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김환석이 입을 열었다. "네가 뭔데?" 크리스도 그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당황했다. 김환석이 다시 말했다. "똥개는 주인이 책임지는 거다. 제 3자는 빠져." 김환석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고려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김환석은 크리스란 녀석을 떠올렸다. '그 놈. 뭔가 느낌이 별로다.' 능글능글 웃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호감적이기는 했지만 이유 모를 적대감이 치솟아 올랐다. '첫 눈에 반했다라.' 잘은 몰라도 그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나쁘다. 한편, 김상희는 의자에 앉아 열심히 손편지를 썼다. 이제는 써줘야 할 때다. 줄 땐 확실히 줘야 한다. 김환성이 심심한 듯 김상희의 뒤로 걸어와 김상희의 머리를 받침 삼아 턱을 대고 편지를 쳐다봤다. "뭐야? 형아한테 편지 쓰는 거야? 방금 보고 갔는데 또 써?" "소녀의 낙이랍니다." 낙은 개뿔. 귀찮아 죽겠다. 김상희는 속마음을 잘 숨겼다. 김환성은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근데 나한테는 왜 안 써?" 이 자식들이 진짜. 전생에 편지 못 받고 죽은 귀신이 씌였나. 너는 나랑 항상 같이 있는데 편지를 뭣하러 쓰냐! 김상희는 외치고 싶었다. 당연히 외치지 못했지만. "나도 내놔." 마력도 없는 내가 편지를 그렇게 마구 쓰면 팔 아프거든? 손가락 뽀개지면 네가 책임질래? 김상희는 여전히 속으로만 외쳤다. 김환성이 활짝 웃었다. 김상희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말했다. 개념없이 말했다. "나는 320장 정도면 만족할게." 김상희는 생각했다. '죽여 버리고 싶다.' 김환성은 그것도 모자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너무 적나?" 무서운 건 진심이라는 거. 김환성이 마음 먹고 쓰면 320장. 순식간에 쓴다. 김상희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최대한 예쁘게 웃었다. "소녀가 진심을 담아 써드릴게요." *** 김훈상은 김상희의 편지를 읽었다. 오늘이 세번째 편지다. 알렉스는 직감했다. '폐하의 표정이 이상하시다!' 표정이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했다. "알렉스." "예. 폐하." "백제라는 곳을 아나?"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알고는 있습니다. 역사가 꽤 오래 되었죠. 아마... 역사로만 따진다면 제국에 거의 맞먹는 수준입니다...마는 그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군요. 굉장히 폐쇄적인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활을 자급자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구요. 변방의 작은 왕국입니다." 대륙에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왕국이 있다. 제국이 관리하는 왕국 외에, 이름도 모르는 중소 도시급 나라들도 있다. 제국에서는 그런 곳들까지 가서 세금을 받기는 받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모든 나라를 제국이 관리하는 건 아니다. 가끔 이름도 모르는 그런 나라들 치고는 역사가 깊은 곳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백제도 그런 곳인 모양이었다. "백제에 대해 조사해봐." 며칠 뒤. 충격적인 이야기가 전해졌다. 나이트의 제 6대대장 파커슨이 보고를 올렸다. "백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 나갔던 나이트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사망한 것 같습니다." 대대장이 '~한 것 같다'라고 보고를 올릴 때엔 90퍼센트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는 뜻이다. 백제로 파견 나갔던 제 6대대의 나이트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 됐다. ============================ 작품 후기 ============================ "미천한 계집따위를 안는 해괴한 행위를 하니 그런 꼴을 당하는 거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비츄: 그냥 내 동생 아까우니까 함부로 안지 마라. 라고 말하면 참 편할텐데... 0063 / 0192 ----------------------------------------------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품어라 *** 김훈상이 물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죽은 것이겠지. 묻겠다. 파견 나이트의 실력은? 상중하로 답해라." 파커슨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하입니다." "상으로 다시 보내." 이건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죽을 수도 있다. 고려 역시, 타국의 간첩을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여기서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은 죽인다는 뜻이다. 고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그랬다. 정상적인 경로가 아닌, 비정상적인 경로로 침입해 오는 모든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국의 간첩이 죽은 걸로 타국에 항의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의 나이트'가 죽었다는 소리다. 파견 나이트의 실력은 하.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하'라고 해도 '고려의 나이트'라는 소리다. 어지간한 국가의 중상급 나이트보다도 강한 게 바로 고려의 나이트다. 그리고 고려의 나이트들은 은신과 침투 및 기습에 특히 발달한 나이트들. 그 나이트가 발각되어 죽었다는 -혹은 실종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름 있는 국가도 아니고, 근근히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는 나라가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나?' 물론, 파견 나이트가 실수했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백제.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다. 조사를 조금 해보니 특별한 건 없고 '역사만 긴' 나라이며 여성을 조금 우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것 외에는 별다른 건 없었다. "알겠습니다." 타국의 감시 및 파견업무를 주로 맡고 있는 6대대. 6대대의 대대장 파커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때, 김훈상이 말했다. "죽은 놈 이름이 뭐냐?" "...정윤한입니다." 김훈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6대대의 나이트들이 훈련하고 기거하는 '웅비관'으로 향했다. 6대대의 나이트들은 다른 나이트들보다 죽음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위험한 나라도 아니고 그저 이름만 있는 작은 나라에 침투했다가 죽었다. 이건 명백히 나이트의 실수라고 볼 수 있을 거다. 파커슨은 묵묵히 김훈상의 뒤를 따랐다. '폐하께서... 질책을 하시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도 아니고 약한 나라에 갔는데 죽었다? 이건 명백히 나이트의 실수니까. 그리고 부하의 잘못은 곧 상관의 잘못인 것이 바로 군대의 세계다. 곧 나이트의 실책은 대대장인 자신의 실책이었다. 웅비관에 도착했다. 김훈상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미리 알려져 있어 대대원들이 모두 전투복을 갖춰입고 차렷자세로 도열한 상태였다. "차렷!" 선임 나이트가 크게 외쳤다. 척! 고려의 엘리트들답게 그들은 신속정확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완벽히 일치된 동작. 절도있는 동작으로 차렷자세를 취했다. 선임 나이트는 '국와폐하께 대하여 경례!' 하고 외치려고 했다. 그런데 김훈상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됐다." 김훈상의 오른손에는 국화꽃 한 송이가 들려져 있었다. 파커슨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다. "폐하..." 국왕폐하의 그릇을 너무 작게 본 것 같았다. "너희들의 동료가 죽었다. 나는 너희들의 왕이며 곧 너희들의 아버지다." 국화꽃을 파커슨에게 내밀었다. "형제가 죽었음을 탓하는 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모두 긴장 풀어." 조용해졌다. 모두가 김훈상을 쳐다봤다. 그들도 사실 긴장하고 있었다. 전시에 죽었다면 영광스런 전사다. 그러나 별 것도 아닌 임무에 죽었다면 직무태만이다. 이번 건은 직무태만이었다. 6대대 대대장 파커슨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차렷자세로 도열해있던 6대대 나이트들도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 지금은 내게 무릎을 꿇을 때가 아니다. 너희 형제들의 죽음을 애도할 때다."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고려의 태양. 국왕 김훈상이 무릎을 꿇었다. 나이트들은 감히 무릎을 꿇은 국왕을 볼 수 없어 머리를 땅에 박았다. 쿵! 쿵! 쿵! 쿵!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땅이 터지는 듯한 소리였다. 마력보호를 일부러 해제하여 나이트들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나는 내가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로 정윤한의 죽음을 애도한다." 나이트들은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국왕이 무릎을 꿇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고인이 되었다지만. 그리고 나는 너희들의 왕으로서." 나이트들은 땅을, 왕은 하늘을 쳐다봤다. 모두가 정윤한의 죽음을 기렸다. "그리고 너희들의 아버지로서 정윤한의 죽음을 절대 잊지 않겠다. 모두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품어라." 나이트들이 울다시피하며 소리쳤다. "충!" 그런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임무 복귀 했는... 헉!" 미쳤다. 이건 미친 일이다. "폐, 폐하!" 국왕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감히 일어서 있을 수 없다.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임무 복귀에 성공한 정윤한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어쨌든 파견 나갔던 나이트가 살아서 돌아 왔다. *** 정윤한은 머리를 땅에 박았다. 두 손은 뒷짐진 상태로 엎드려 뻗쳐를 했다. 이름하여 낙하산이라 불리는 자세다. 옆에는 부러진 각목이 벌써 45개다. 각목으로 엉덩이를 내려쳐서 그렇다. "정윤한. 네가 지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냐?" "아니. 대대장님. 저는 진짜 억울합니다. 연락 끊긴 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새끼가 그래도!" 파커슨도 안다. 정윤한의 잘못은 아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정윤한의 보고를 들어보고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정윤한 때문에 김훈상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왕을 무릎 꿇게 한 죄. 그건 중죄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커슨. 그럴 거면 너부터 나한테 맞아야하지 않겠냐?" 김훈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러진 각목들을 봤다. "무식한 놈들." 파커슨이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사망 보고를 올린 것은 자신이었다. "내가 죽이려면 벌써 죽였어. 혼을 냈어도 벌써 냈다. 내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를 그렇게 모르겠냐? 머리는 장식이냐?" 정말 뜬금없기는 한데, 김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다. 낙하산 자세를 취한 상태로 힐끗 눈만 돌려 김훈상을 쳐다본 정윤한은 질겁했다. '저, 저 포인트에서 왜 웃으시는 거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웃을 구석이 없는데 말이다! 그는 아마 평생 가도 모를 것이다. 딸 얼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아버지의 이야기. 전설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내 마음을 좀 귀신같이 읽는 재주를 익혀보도록 해라." 또 히죽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그 계집아이는 참 요망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아비의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이 놈들도 참 그래주면 좋을 것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흠칫 놀랐다. '내가 지금 계집아이를 무려 나이트들과 비교하고 있는 건가?' 말도 안 된다. 심지어는, '심지어 나이트들보다 계집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아냐. 이건 아냐.' 나이트는 고려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한낱 계집아이와 비교해서도 안 되고 비교할 수도 없는 대상. 이건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시간이 흘렀다. 정윤한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고려의 나이트답게, 1인실을 따로 쓴다. 주위는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정윤한의 눈이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약간 이상하게 움직였다. 로보트처럼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혼잣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고려 국왕. 김훈상. 접선 완료. 파기되지 않았음. 미션. 석세스." *** 내가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려줄까? - 김상희는 봐라.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거냐고?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다. 이거 진짜 정말 어마어마한 거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로 '어마어마하다'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바로 우리 고려의 국왕 폐하. 다시 말해 우리 개차반. 또 다시 말해 지금은 내 아버지인 김훈상이 보낸 편지니까. '물론 자필편지는 아니겠지.' 자필편지일 리는 없다. 누군가에게 시키긴 했을 거다. 그런데 국왕이 아들도 아니고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건 정말 충격적인 거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 물론 내용은 겁나 허접하다. - 죽지는 마라. 그리고 끝이다. 지구식으로 치자면, 이딴 게 무슨 편지겠느냐 하겠지만 이건 정말 센세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네. 하여튼 진짜 대박인 거다.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거 보면 얼마나 대박인지 좀 알겠지. 물론, 나는 이 짧은 글귀에 대하여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킹왕짱'이라는 한 문장을 A4용지 서너장으로 늘려 써야하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하게 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개차반도 정말 많이 변한 거네.' 처음에 내가 태어났을 때엔 또 계집아이라니, 하고 우리 서영씨를 타박하지 않았던가. 나는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조금씩조금씩. 한 걸음씩 나가는 거야.' 원래 변화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예 변화가 없었다면 모를까, 어쨌든 내 주변은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다. 저것 빼고. "날아라 헝거비! 훨훨 난다 헝거비! 가랏 헝거비!" ...죽여버리고 싶다. "네, 오라버니!" ...내 입은 또 날 배신했지만. *** 2일 전. 김환석은 아버지를 뵈러 갔으나 보지 못했다. 제국에 다녀온 건에 대하여 보고를 드려야 했는데 기다려야만 했다. 김훈상이 서재에 들어가서 아무도 출입하지 말라 엄금을 내렸기 때문이다. - 제국의 황제가 날 찾아도 바쁘다 그래. 그래서 관리들이 말렸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찾는데 바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김훈상은 대충 말했다. - 그럼 아프다고 해. 저게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관리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하여튼 김훈상은 그 어느 누구도 서재에 들이지 말라고 했다. 아무래도 대단히 중요한 기밀 문서를 작성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직접 말이다. '아. 그러고보면... 제국과의 은밀한 거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저런 태도가 나오는 것 같다. 왕은 언제나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로 고려를 훌륭하게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 동안, 황제폐하께서 국왕폐하께 연락할 일은 절대 없는 거지. 그 두분의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는 거니까!' 관리들은 뿌듯해했다. 자신들의 비상한 눈치에 감탄했다. 왕의 마음을 읽는 것. 신하에게 그건 굉장히 중요한 덕목 아니겠는가. 한편, 김훈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 마디 썼다. - 죽지는 마라. 그리고 품 안 깊숙하게 숨겼다. 아무도 못 보게 마력보호까지 걸고 마력으로 숨겼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왕인 자신이 딸에게 편지라니. 그런데 이거. 안 쓰고는 못 배기겠다. 뭔가 써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 같은 게 있다고나 할까. '이걸 보내면 답장이 또 오겠지.'라는 무의식의 외침은 무시했다. 가장 믿음직한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김유신을 은밀히 불렀다. 그것도 밤에 말이다. 엄청 중요한 것을 전달하는 듯 매우 조심스레 말했다. "절대 내용을 확인하지 말고 은밀하게 김상희 공주에게 전달해라."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 김환성 왕자도 아니고 김상희 공주에게? '그러고 보니 저번에 황제폐하가 또 김상희 공주를 보자고 했었지.' 그림이 그려졌다. '아. 그렇다면...!' 황제가 김상희를 굳이 마력학원으로 부른 것에 대한 이유가 또 설명이 되지 않는가. '계집을 연락책으로 활용할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거야. 과연...' 그렇지 않은가? 비둘기면 몰라도 바퀴벌레로 편지를 전달하지는 않는 법이다. 남자들이라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방법이다.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거니까. 그런데 국왕과 황제는 역시 달랐다. '이런 깊은 생각이 있으셨다니.' 왕에 대한 충성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아무도 들키지 않게 은밀히 전달해야 하는 거라면, 분명 아주아주 중요한 기밀문서일 거다. 외부로 밝혀져서는 절대 안 되는. 김훈상이 작게 말했다. "절대 기밀을 요하는 일이다. 네가 직접 수고해줘야겠다." 당연히 기밀을 요하는 일이다. 왕이 딸에게 편지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만약 비밀이 새어나간다면 왕의 위신이 땅으로 떨어지게 될 거다. 그냥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곤두박질 칠 거다. "명을 받듭니다." 김유신도 당연히 기밀을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생각하는 '기밀'의 개념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하여튼 김유신은 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국 마력학원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했다. '보고 드려야 하나.' 김상희 공주를 단순한 학생으로 봤다면 모르겠지만 이젠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황제와 왕을 잇는 중요한 비밀다리이지 않은가. 그런 상황이다보니 아무래도 보고를 올려야할 것 같았다. 아니. 올려야만 했다. 지나치게 충직한 김유신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했다. "폐하. 김상희 공주의 신변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징계 위원회가 열릴 모양입니다." ============================ 작품 후기 ============================ - 죽지는 마라. 이거 한 줄 쓰고 보내는데, 서재 완전봉쇄 명령에 더불어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이 직접 움직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걸 시발데레라고 하나요? 0064 / 0192 ---------------------------------------------- 걱정되서 미치겠네 *** 며칠 전. 제 1차승급 시험은 김상희가 1등이라는, 모두가 놀랄만한 결과로 끝이 났다. 사실상 1차 승급시험은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기 힘들었다. 1차보다는 2차가. 2차보다는 3차가 더 중요했다. 다시 말해 1차 시험의 비중은 세 번의 시험 중에서 가장 적다고 할 수 있다. 비중이 적든 어쨌든, 어쨌거나 1차 시험의 1등은 김상희였다. 문제는, 이번 팀 프로젝트에 있어서 김상희와 아무도 같은 팀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그래도 계집 따위와 힘을 합칠 수는 없지.' 김상희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1차 시험 뿐이다. '김상희가 정말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더라도...' 그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그건 분명 운이었을 거야.' 그리고 그 자존심은 김상희의 실력을 운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은 계집의 능력을 인정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한 명은 달랐다. "제가 김상희와 같은 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지아는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 프리지아는 크리스를 약간 알고 있다. 프리지아 역시 이 세계의 여인이다. 아무리 마력을 갖고 태어났다고해도 일단 기본적으로 계집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무시를 많이 받는다. 그런데 크리스는 약간 특이했다. 다른 아이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는 눈빛을 보낼 때, 크리스는 항상 호감 어린 눈빛을 보내곤 했으니까. 다른 건 둘째치고 수업태도는 정말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보니 크리스가 이상한 내기를 걸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기는 하다. '참 이상한 아이야.' 프리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크리스와 김상희. 두 명을 팀으로 인정하겠어요." 물론 다른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듯 크리스를 쳐다봤다. 어떤 학생은 크리스를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계집따위와 같은 팀을 자청하다니.' 저 놈은 남자의 자존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놓고 크리스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크리스는 이 클래스의 '진정한' 1등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김상희를 제외한 1등. 전체 등수로 보자면 2등이었으니까 말이다. 프리지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팀 프로젝트는 3명이 한 조에요." 어디보자. 프리지아는 명단을 슥- 훑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각자가 원하는 사람과 조를 편성해야 했다. 그 인원은 총 3명. "미안. 나는 다른 곳에 붙을게." 크리스는 김상희와 달리 인기가 많았다. 적어도 같은 팀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은 널리고 널렸다. 크리스와 같이 성적이 좋은 학생과 같은 팀을 하게 되면, 성적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가 김상희와 합류하겠다고 말한 순간, 그 인기는 식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계집따위와 뭔가 같이 일을 진행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프리지아가 결정을 내렸다. "이동수 학생 한 명이 남네요." "...네." 이동수에게 눈이 쏠렸다. 이동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굉장히 컸다. 고도. 그것도 초고도의 비만이었으며 살이 너무 찐 바람에 마력의 흐름 역시 불안정하다고 했다. 처음 입학 할 때에는 제법 엘리트 소리를 들었다. 성적 역시 굉장히 뛰어났다. 크리스가 2등. 그리고 이동수가 3등이다. 불과 한 등수 차이지만 학생들의 선호도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 살이 굉장히 많이 찌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 점차 소외되어 왔었다. "어쩔 수 없이 이동수 학생이 크리스 학생, 김상희 학생과 같은 팀이 되어야겠어요." *** 나는 크리스, 이동수와 같은 팀이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교과서에는 없는 고어를 일정분량 이상 해석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아직 해석하지 못한 고어를 해석해오는 것이었다. '해석하지 못한 고어를 해석하란 뜻은 아니겠지.' 현재 학생이 아닌, 교관들. 그리고 날고 기는 학자들도 해석하지 못한 고어를 학생들이 해석할 수 있을 리 없다. 교관들은 학생들에게 '진짜 고어 해독'을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석을 시도해보고 고민하는 그 과정에서 제법 그럴싸한 답을 내놓는 것을 원할 것이다. '좋았어.' 그리고 차라리 잘 됐다. 크리스는 내게 예전부터 호감을 보여왔다. 크리스는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게 적대감이 없다는 것 정도는 확실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다. 어쨌든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한 아이다. 당분간 나를 해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수는 내게 적합한 팀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아이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기를 못 펴는 아이. 그 왜. 동병상련 같은 거 있잖아. 물론 나는 계집이고 쟤는 남자니까, 어마어마한 신분의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능력 같은 건 상대적인 거다. 얘는 남자들에게 항상 무시 받아왔다. 그러니까 일정부분 나랑 비슷하다는 소리다. 실제로 얘는 나를 막 대한적도 없고 내게 명령을 내린 적도 없다. 아참. 그리고 한 가지 방침이 내려왔다. 이제 같은 클래스의 학생에게 호칭은 무조건 '학우님'으로 통일하게 됐다. 왕자든 뭐든. 그런 건 상관없이 '학우님'이다. 학생의 계급 간 차별을 막기 위한 방침이었다. "김상희어요. 잘 부탁드려요. 이동수 학우님." "그래." 얘는 보통 다른 남자들과 말할 때에는 말을 더듬는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아니었다. 굉장히 당당해 보였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크리스가 그 손을 툭툭 쳤다. "동수야. 이 손. 나만 잡을 거거든?" 크리스는 내 허락도 없이 -애초에 내 허락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동수의 손을 치우고 내 손을 꽉 잡았다. 이봐. 악수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크리스...학우님?" ...넌 악수를 도대체 몇 초를 하는 거냐? 내가 정확히 세봤는데 벌써 15초가 넘게 흘렀다. 이만 놔주시지? 이제 17초가 지나간다. 그리고 이 세계 상식으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내뱉었다. "손 잡고 있으니까 좋다. 그렇지 않아?" 그래. 너는 좋을 수 있겠지. 사실 넌 잘생겼어. 100프로 믿지는 못해도 일단 착해. 이 세계에는 없는 착함이야. 그래서 네 손을 잡고 있는 게 그리 불쾌하지는 않아. 그래. 손 잡고 있는 건 그냥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이 분위기 어쩔건데? '아무리 봐도 크리스 저 놈은 제정신이 아니야.' 대놓고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느껴졌다. 눈칫밥 먹고 살아온지 15년. 얼굴이 화끈화끈 거린다. 애들은 크리스를 정신병자처럼 쳐다봤고 나는 감히 남자의 손을 잡고 안 놔주는 버릇없는 년이 되어 버렸다.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는 하여튼 그랬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들의 눈이야 상관없다는 듯 크리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해보자고." 다른 애들 생각에 따르면 정신병자이거나 미친놈임에는 틀림없지만 잘생긴 건 확실했다. 잘생긴 놈이 웃으니까 뭐. 보기에는 나쁘지 않다. 아이돌 보는 느낌이랄까. 아냐. 이건 아줌마의 주책 절대 아니다. 나 말고 다른 여자들 데리고 와도 아마 비슷할...걸. 아마도. 어쨌든 팀이 성립 됐다. *** 사실 이동수는 팀 프로젝트 인원배정에 큰 불만은 없었다. 김상희라는 계집이야 별로 신경 안 쓰면 그만이고, 크리스와 같은 팀이 되었다는 건 나름대로 좋았다. 크리스는 요즘 비록 미친놈 취급받기는 한다. 그래도 고어 및 암호해독 클래스에서 크리스를 싫어하는 학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적도 좋고 성격도 좋다. 다른 학생들은 이동수를 조롱하곤 했었지만 크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뚱뚱하다고 욕하고 놀리지는 않을 테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이런 저런 심부름을 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다행이야.' 클래스에서 이동수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김상희. 아무리 남자들 중에서 열등하다고 해도 계집보다는 훨씬 낫다. 그게 당연하다. 여기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이동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크리스 오라버니. 이건 어떻게 해석한 것이어요?" 정말 이상했다. '저 계집은 분명 92점이었었는데.' 해석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기존의 해석방식을 사용하지 못했다. '해석능력이 대단히 떨어져.' 김상희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암호와 고어를 해독한다. 이들은 이들이 만든 공식과 체계에 맞추어 그것을 토대로 '해석'하는 과정을 취한다. 그러나 김상희는 아니다. 김상희는 모든 고어가 그냥 한글로 보인다. 별다른 해석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보니 이런 차이점이 발생하게 되는 거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 됐어.' 그럼 그렇지. 계집따위가 남자들을 제치고 1등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마력이 있는 여자인 프리지아조차도 1등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하물며 마력도 없는 계집 주제에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 계집아이만 없었다면 내가 2등이었을 텐데.' 크리스는 애초에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1등을 하는 건 상관 없었다. 그런데 저런 계집아이에게 밀리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조금 더 지켜보겠어.'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 나는 감탄하는 척 하면서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립서비스다. 습관 같은 거. "크리스 오라버니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그런데 넌 왜 몰라?" 도대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크리스가 다 좋긴 좋은데 가끔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개차반과 망나니들과는 다른 의미로 '명존쎄'를 부른다. "네?" "내가 널 진짜 좋아하는데, 왜 넌 그걸 그렇게 몰라주냐고?" ...야. 훅 들어오지 마.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음. 솔직히 말하면 크리스가 싫지는 않다. 얘를 좋아한다거나 호감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 뭐랄까, 아이돌 남자애를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하여튼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이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무조건 '사실'만을 말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누가 봐도 트집 잡기 힘든 '팩트' 말이다. "저는 이미 약혼을 한 몸이어요." 이왕이면 우리 거역 불가능한 개차반씨도 끌어 들이고, "고려의 태양. 국왕폐하께서 친히 주도하셨던 일이고..." 거기에 프리온 나이트 한진수도 좀 끌어 들이면, "프리온 나이트 한진수님께서는 약혼을 성사시킬 생각을 갖고 계시다고 알고 있어요." 모든 사실은 완성. 무려 고려 왕국 개차반씨와 프리온 나이트 한진수를 핑계 삼았는데 얘가 어쩌랴. 이 핑계를 무너뜨리려면 아마 황제쯤 되어야 할 걸? "흠. 그게 제일 문제네.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아버님께 인정도 받아야 하고. 할 게 많다." 누구 마음대로 아버님이냐. 너 그 소리 개차반 앞에서 잘못했다가는 큰 일 날걸. 얘는 별로 포기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 녀석은 포기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이동수가 입을 열었다. 내게만 당당한 이 녀석. "야. 김상희." "네. 이동수 학우님. 말씀하시어요." "너. 이거 해석해봐." 어라. 저거 어제 수업시간에 나왔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석했더라? 뭐. 일단 답부터 말해보자면 저건 '태양 제국 잉카 문명'에 관한 내용이다. 긴 내용은 아니고 그저 태양신이 이 땅에 내려와 숨결로 태양을 만들고 달의신이 내려와 눈물을 흘려 달을 만들고, 뭐 그런 얘기. 별 내용은 없는 신화얘기다. 문제는 내가 저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관한 거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머리가 딸린다. 생각해봐. 슈퍼컴퓨터랑 일반 컴퓨터랑 싸움이 되겠어? 쟤네는 어마어마한 CPU를 가진 -마력이 있으니까- 슈퍼 컴퓨터고 나는 고물 컴퓨터인데. 복습을 한다고 하는데, 정공법으로 따라가기 힘든 건 사실이다. '그냥 답을 말해버리면 이상하겠지?' 그렇다고 그냥 모른다고 말하기에도 좀 그렇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얘 뭔가 이상하다. 나를 시험하려는 듯하다. 황제 앞에서는 무조건 모른 척 했지만 얘 앞에서는 어느 정도 아는 척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긴한데, 어떻게 얘를 납득시켜야하는 지 생각해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해석하는 척 연기를 하면 되겠어.' 부끄럽다고 말한 뒤, 공책을 꺼내 해석하는 척을 했다. 어쨌거나 답만 보여주면 되니까. 그래서 나는 일부러 맞춤법 몇 개를 틀리게 하여 글을 적어 보여줬다. 그런데 이동수 이 놈. 반응이 이상하다. "공책 내놔." 크리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동수. 너 김상희한테 왜 그래?" 이동수는 나한테 말할 때와는 달리 크리스에게는 상당히 조심조심 말했다. 말투 자체가 확 달라졌다. "화,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벼, 별 건 아냐..." 별 거 아니지 않다. 솔직히 나도 얘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제대로 해석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대충 끄적여놓기는 했으나 정확한 방법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거부할 명분도, 권리도 없었다. 나는 힘없는 계집아이다. 결국 난 공책을 빼앗겼다. 이동수는 나를 한바탕 노려보고는 공책을 빼앗았다. "이건 내가 잠시 빌리겠어." ...빌리는 거 아니고 빼앗는 거잖아? 그런데 괜찮겠어...? 나는 묻고 싶었다. 그거 우리 개차반씨가 선물해준 건데. 어떻게하면 '아빠. 나 공책 빼앗겼어요. 잉잉.' 의 내용을 정중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그리고 하루 뒤. 나는 교장실로 호출을 받아야만 했다. "김상희." "네. 교장님." "해석해 봐라." 이거. 느낌이 별로 안 좋다. 나는 이 문제들을 기억하고 있다. 1차 승급시험 때 나왔던 문제들이다.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왜...?' 나는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역시 못하는 군." 그래. 나는 너희가 하는 방식으로는 해석 못 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 능력을 모두 까발릴 수는 없잖아. 아마 이걸 밝히게 되면 학자들이 내 몸을 해부할지도 모른다. 개차반이나 망나니가 지켜주기도 전에 말이다. 농담 같지만 진짜다. 여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주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백주대낮에 윌리엄에게 그런 일을 당할 뻔 한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일단 돌아가 있어라. 곧 징계위원회가 열릴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도록." 무슨 소리인가 하니, "아무리 미천한 계집아이라지만 감히 신성한 학원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점수를 취득하다니." 교장은 내가 컨닝을 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자. 일반적인 상황에서 생각을 해보자. 벌레만도 못한 계집이 컨닝을 했다. 그래서 하늘 같은 남자들을 넘어서서 1등을 했다. 이건 뭐.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살펴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내게는 하루의 시간이 있다. 나에대한 처분이 떨어지는 것도 며칠은 걸릴 거다. '방법은 있어.'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계집인 내게 엄격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도 맞다. 매장당하다시피할 거다. 이 곳으로 추천을 해준, 황제폐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사형당할 가능성도 매우 농후하다. 어처구니 없지만 이 곳은 그런 세계다. 이 정도 이유로도 충분히 죽고도 남는다. '상황을 타개해야해.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나는 갈 길이 멀다. 이 개똥같은 세상에서 뭐 한 번 해보지도 매장당할 수는 없다. 복도를 걷는데 이동수가 날 툭 쳤다. 얘 입장에서 툭 친거고, 내 입장에서는 매우 아팠다. 2미터는 날아가 넘어진 것 같다. 아이고. 온 몸이 쑤시네. "건방진 계집년. 감히 신성한 마력학원에서 컨닝을 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년 같으니라고." 모든 상황은 이제 그려졌다. 얘가 날 이상하게 생각했고, 내 해석노트를 가지고서 교관들에게 고자질을 했고 교장이 그걸 확인했다. 그래서 이제 징계위원회. 다른 말로 하자면 마녀재판이 시작되겠지. 지금부터. 나는 나대로 작전 -작전이라 쓰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 읽는다- 시작이다. ... 그리고 이동수 너. 딱 걸렸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이야. ============================ 작품 후기 ============================ 4월 1일 입니다. 새로운 월을 맞이! [띠링. 용량 +30퍼센트 옵션을 사용합니다.] 0065 / 0192 ---------------------------------------------- 걱정되서 미치겠네 *** 나는 내 나름대로의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심하면 사형당할 수도 있다. 다른 건 문제가 안 되는데 황제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현명하게 잘 대처해야 해.' 나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우리 둘째 망나니는 남의 속도 모르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잘도 자고 있었다. '분명 스페셜 나이트가 호위하고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그럴 거다. 나는 뭐 어찌되었든 상관 없겠지만 김환성은 아니다. 김환성은 고려왕가의 '남자'다. 그러니까 분명히 스페셜 나이트가 있을 거다. 좋았어. 작전 시작이다. 힘 없이 걷는 시늉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철푸덕 주저 앉았다. 좋아. 이만하면 자연스러웠어.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엎드렸다. 신에게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쥐어 짜냈다. "소녀는 정말로 억울해요."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더라도, 스페셜 나이트는 그걸 들을 수 있을 거다. 괜히 스페셜 나이트가 아니다. "소녀가 감히 황제폐하를 능멸하였다면 이 목숨. 백 개를 드려도 아깝지 않아요. 하지만 소녀는 결단코 그런 일이 없어요." 열심히 연기했다. "어찌 미천한 계집따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어요? 알렉스 학자님의 지도 아래 암호와 고어를 해독할 수 있는 고려왕가만의 비밀스런 방법을 폭로할 수 없던 것이었는데, 소녀는 황제폐하의 얼굴의 먹칠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소녀는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고려왕국의 비밀스런 해독 방법과 황제 명예 실추. 이 둘 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것. 아마 스페셜 나이트가 듣기에도 납득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이 중얼거림은 실시간으로 왕궁으로 보고되겠지. 그리고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일어섰다. 내가 생각해도 나 요즘 연기에 물 올랐다. 눈물이 많이 나왔다. 물론 완전히 연기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지금 위기 상황에 빠진 거니까. 지구 상식으로 보면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뭐. 쉽게 설명하자면 컨닝 한 번 했다는 것도 아니고, 컨닝 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그래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거니까. 황당하지? 정작 당사자인 나는 얼마나 황당하겠어. 그나마 익숙해져서 다행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위기. 슬프게도 많이 겪어봤다. 때리지 않으면 사형이라고 왕명을 내리던 몰상식한 작자 아래에서 컸는데 뭐. 그리고 여기서 좀 더 흐느껴야겠지. 깊은 잠에 빠진 김환성도 들을 수 있도록. 나는 흐느끼면서 편지를 들었다. "소녀는 죽을 때 죽더라도 사랑해마지 않는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을 위하여 편지를 쓰겠어요. 소녀의 마지막 말이 될..."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말문이 막힌 건데, 타이밍은 좋은 것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편지지를 향해 절을 올렸다. 마치 유서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비장해 보이겠지. 나는 펜을 들었다. - 사랑하는 아빠에게. 나는 '아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죽기 전에 '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싶다는 이 표현을 약 4줄에 걸쳐서 썼다. - 그래도 소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아버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해요. 소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답니다. 저만큼 행복한 계집아이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어요. 그래. 두 번 행복했다가는 여러 번 사형당하겠지만. - 소녀는 아버님이 제 아빠인 것이 너무나 감사해요. 소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을 소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부디 행복하셔요. 살려달라는 말은 하나도 안 했지만 뭐. 뜻은 전달 됐겠지. *** 김상희의 생각과 달리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김환성이 아니라 김상희를 호위하고 있다. 이주형은 요즘 좀 이상함을 느낀다. '김상희 공주는 뭔가 특이하단 말이야.' 뭐랄까. 귀엽기도 하거니와 어떻게 봐도 밉지가 않다. 상식과는 동떨어진 행동들을 많이 보이기는 하는데 그 행동들이 괴팍함과 귀여움 사이를 교묘하게 왕복했다. 가끔은 김상희 공주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이동수가 김상희를 칠 때도 순간 울컥했다. '내 저 쓰레기자식을 그냥.' 왜 자신이 울컥했는지. 그 이유는 그도 몰랐다. 손목을 잘라 버릴까 했지만 조금 애매했다. 김상희의 의사에 반하여 손을 대는 남자의 손목을 잘라버리라는 것이 왕명이었는데, 이건 손이 아니라 어깨를 대지 않았던가.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지나치게 충직했고 왕의 왕명을 정말 곧이곧대로, 글자 그대로 수행했다. 이주형은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김상희가 편지를 쓰기도 전에, 이미 모든 상황은 고려에 전달된 상태. 김훈상이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를 불러." 알렉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묻겠다. 고려학파에, 고어를 해독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고려만의 특별한 방식." 알렉스는 왕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렉스는 현재 상황을 모른다. 그런데 김훈상 옆에 스페셜 나이트 한 명이 보였다. 스페셜 나이트가 옆에 있고, 고어에 관해 묻는다. 고려만의 특별한 방식은 없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해독하는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괜히 괴짜 학자가 아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저 딸등신의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이미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생길 거다. 지혜로운 김상희 공주는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고, 운 나쁘게도 어떤 계기를 통해 교관들에게 들킨 것 같다. '김상희 공주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고어를 해독했으니.' 운 나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건 이미 예측 가능했던 일. 그 시기가 조금 이르기는 했으나 알렉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김상희 공주는 현재 아주 중요하다.' 딸등신의 딸이라는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알렉스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주변의 상황을 통합하여 사실에 근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알렉스의 특기라면 특기였는데, 그 특기 덕분에 황당한 오해를 하고 있는 중 아니었던가. 김상희가 황제와 김훈상의 중요한 비밀 연락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 것은 스페셜 나이트 김유신과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나를 이렇게 따로 부르신 까닭은...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고려만의 특별한 방식이라고 강조하시는 거고.' 물론 아니다. 김훈상은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거다. 김훈상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알렉스. 대답해라." "있습니다. 김상희 공주 역시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저희 학파만의 산물입니다." 김훈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출발해라." 네? 알렉스는 되물을 뻔 했다. 아니. 인간적으로 짐 챙길 시간은 줘야 하잖아요.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왕이 카드를 하나 건넸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현지에서 모두 조달하도록." 알렉스는 함박웃음을 짓고 싶었다. '왕가의 경비카드다!' 저거. 한도가 없는 카드다. 행복해졌다. 요즘 안 그래도 예산이 부족하던 차였다. "현재 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광물 몇 가지가..." 김훈상이 말을 잘랐다. "모든 걸 다 사도 좋다. 학문을 위한 투자이니 아끼지 않겠다." 알렉스는 김훈상의 심리상태를 파악했다. 저 왕. 어지간히도 똥줄 타나보다. 돈이든 뭐든, 뭐가 어찌됐든 일단 제국 마력학원으로 보내고 보자. 뭐 이런 심산인 것 같다. "김상희 공주를 제대로 변호하기 위해서 챙겨야할 자료들이 조금 있습니다." 자료를 챙기러 갔다던 알렉스가 다시 돌아왔다. "폐하. 김상희 공주를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알렉스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김훈상은 왕가의 직인을 찍어줬다. '뭐야? 이거 왜이렇게 쉬워?' 왕의 직인은 받기 힘들다. 직인이 갖는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훈상은 함부로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알렉스의 부탁이라고해도 말이다. 좀 섭섭해졌다. '내가 예전에 그렇게 도장 찍어달라고 조를 때는 안 찍어주시더니.' 김훈상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태연을 가장하며 독촉했다. "뭐해? 빨리 안 가고." 마치 자신은 급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알 수 있었다. '어지간히 똥줄이 타시나보다.' 알렉스는 군말 없이 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것도 왕실이 직접 내준 전용 초음속 제트기다. 왕가의 경비카드를 보니 행복해졌다. 제국행 비행기 안.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등신들. 김상희 공주님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징계위원회를 열어? 하여튼 눈치 없는 것들은 그냥 죽어야 한다니까? 황제폐하와 국왕폐하를 잇는 중요한 연락책인데 아랫것들이 눈치가 그리도 없어서야.' 그 말을 달리하자면 자신은 눈치의 귀재 아니겠는가. 뿌듯해졌다. 왕가의 경비카드를 보니 더 뿌듯해졌다. 착각은 깨지지 않을 때 행복한 법이다. ***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말이 좋아 징계위원회지 사실은 마녀재판이다. 어휴. 그나마 12명 앞인 게 어디야. 모든 교관이 아니라 징계위원회에 소속된 12명의 교관들 앞이다. 나는 12명의 교관들 앞에 죄인처럼 섰다. 12명의 교관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심문하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교장 틸레반이 말했다. "김상희. 컨닝 사실을 인정하나?" 모두가 당연히 '인정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와 이거 장난 아니다. 일반 여자라면 여기서 버티지도 못하고 '네 하고 말았어요. 죄송해요.'하고 말한 뒤 울음을 터뜨렸을 지도 모른다. 나야 망나니의 제왕 개차반 김훈상씨. 그리고 폭풍 망나니형제인 김환석과 김환성 앞에서 단련됐으니 망정이지, 일반적인 여자라면 이 분위기. 절대 못 버틴다. 증인신분으로 참여한 이동수가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심문할 것도 없어요. 제가 다 확인 했습니다. 저 계집년은 감히 남자들을 상대로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해 황제폐하의 위신에도 흠집을 냈습니다. 찢어 죽여야 마땅한 계집입니다." 나는 숨을 골랐다. 당황하지 말자.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고려에도 분명 소식이 전해졌을 거다. 안 전해졌을 리가 없다. 오늘 나올 때에 둘째 망나니에게도 흘리듯 말을 해놓고 나왔으니 망나니도 지금 고민하고 있을 거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저는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교관들은 불쾌한 듯 했다. 이거 참 문제긴 하다. 내가 말을 하면 계집 따위가 감히 말대꾸를 한다하여 욕을 먹을 테고, 말을 안 하면 또 계집 따위가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하여 욕을 먹을 테니까. 딜레마라면 딜레마다. "하지만 미천한 제가 감히 황제폐하를 욕되게 할 수 없어 이 자리를 빌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히 황제폐하를 욕되게 할 수 없다. 이 말은 누가 들어도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니까. 교관들도 내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100퍼센트 맞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고려에는 고어를 해독하는 고려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 방식을 감히 제가 퍼뜨릴 수 없어 교장선생님께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점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폐하를 욕되게 할 수 없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그 비밀을 밝힙니다." 교관들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럴 만도 하다. 계집따위가 감히 고려만의 은밀한 해석기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 아니겠는가. 차라리 닭이 하늘을 난다고 하면 믿을 양반들이다. 이동수가 코웃음을 쳤다. "황당한 계집아이로군." *** 김환성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기도 해보고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컨닝은 나쁜 거야. 황제폐하를 욕되게 했으니 사형은 당연하지." 김환성의 상식상으로도 그랬다. 똥개가 1등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그나마 합당한 가정이 있다면, 그 클래스의 학생들이 전부 꼴통이라는 가정. 그렇지 않고서야 계집이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서 그냥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헀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계집년 주제에 감히 신성한 시험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는데 너무 초조했다. "아씨. 미치겠네." 사형 당해도 싸다. 분명히 그렇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계집 따위. 차라리 죽어버려야 한다. 고려왕가의 체면도 상하지 않는가. "왜 이러지? 나?" 초조하고 불안하고 짜증이 난다.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김환성은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걱정되서 미치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김상희가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이 세계의 질서다. "그딴 거 알 게 뭐야?" 에이 씨팔,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무슨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깽판부터 치자." 깽판부터 치기로 했다. 남이 들으면 기겁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지 뭐." 교관 12명을 상대로 얼마나 깽판을 칠 수 있을 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반대로 제압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그거 밖에 없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 12명의 교관들은 거대한 마력파동을 감지했다. 이런 느낌. 예전에도 받은 적이 있다. 과거 윌리엄 왕자사건 때, 거대한 두 힘이 맞부딪친 적이 있다. 당시 수석교관이었던 한진수와 고려왕국 셋째 왕자 김환성이 마력다툼을 할 때였다. 거의 그때와 흡사할 만큼의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교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또?' 잠시 징계위원회가 중단 됐다. 틸레반이 말했다. "교관들. 어서 나가보세요. 차석교관에게도 연락하고." '거대한 마력을 가진 괴물의 등장인가, 그도 아니면 한진수나 김환성인가?' 정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씨팔! 니네 다 죽었어!" 김환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김상희를 근접호위하고 있던 이주형이 얼른 스페셜 필드를 펼치고 김환성을 막아섰다. "왕자님! 무슨 짓입니까! 교관들을 상대로 폭행이라도 하시려고요?" "아 몰라. 그딴 거." 그딴 거 모르면 안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묻고 싶었다. "빨랑 비켜. 내가 졸라 열심히 생각해봤는데." "왕자님!" "상식이고 뭐고 그딴 건 나중 문제잖아. 내 똥개는 패도 내가 패고 죽여도 내가 죽여." "왕자님!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너 한 번만 더 막으면 너부터 족친다." 그런데 이주형이 뭔가를 발견했다. 밖에서는 스페셜 필드 안이 안 보이지만, 안에서는 스페셜 필드 밖이 보인다. "저 분은 알렉스 학자님 아닙니까?"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려왕가의 직속 학자. 알렉스입니다. 교관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김상희 공주가 억울하게 피랍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찾아왔습니다. 김상희 공주 대신, 제가 변론을 하도록 하죠." 알렉스가 김상희를 봤다. 정체 불명의 학문. 상희학을 공부하던 알렉스가 또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은, 자신의 현재 상태에 기반한 가설이었다. - 김상희가 억울한 상황에 처하면, 주변의 남자들은 화가 난다. 라는 좀 이상한 가설이었다. 어쨌든 알렉스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공주님은 황제와 왕을 잇는 중요한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피식 한 번 웃은 뒤, 화려한 말빨로 주위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알렉스씨라고 합니다 *** "걱정되서 미치겠네." 우리 둘째 망나니가 드디어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0066 / 0192 ---------------------------------------------- 시체가 된 김상희 *** 어라. 저 사람은. "고려왕국의 학자 알렉스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알렉스 학자님이다. 때마침 좋은 시기에 오셨구나. 나는 잘 모르고 있는데 아무래도 나나 김환성의 일거수 일투족이 고려에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다.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셨다. "일단 자료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에. 저 조그만 가방에서 무슨 서류가 저렇게 많이 나와? 신기한 도구네 저거.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귀하가 이 곳에 방문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렉스 학자님이 씨익 웃었다. "그야 당연히 왕국의 보배 김상희 공주님을 변론하기 위해서죠." "와, 와, 왕국의 보배?" "뭐, 뭐라고요! 보, 보배?" 와. 첫방부터 세네. 이 곳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저걸 그냥 핵직구로 날렸다. 뭐. 나도 잊고 있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그래. 왕국의 보배가 맞긴 맞다. 그냥 칭호만 받은 거긴 한데,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교장에게는 엄청난 충격이겠지. 쳇. 보배는 개뿔 매일 똥개취급받기는 하지만. "자. 이 자료들을 보시지요." 알렉스 학자님이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서류뭉치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12명의 교관들에게 한 뭉치씩 떨어져 내렸다. 역시 마력이라는 건 엄청 편리하단 말이야. 그런데 저거 약간 무례한 행위이기는 하다. 대놓고 무례한 건 아니고, 그렇다고 또 예의에 맞는 건 아니고 어중간한 행위. 뭐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또 가만히 있자니 살짝 기분나쁜 행위 말이다. '일부러 자극을 하고 계신 것 같아.' 일부러 자극을 해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심산인 것 같다. 그리고 굳이 내 이름 뒤에 '님'자를 붙였다. 압존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상희 공주님이 컨닝을 하여 제국을 기만하였다는 그 소식. 저는 절대 동의하지 못합니다." 이 곳의 대표는 바로 교장인 틸레반. 틸레반이 바로 되물었다. "하지만 정황이 그렇습니다. 김상희 공주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이지 못했습니다." "김상희 공주님은 고려왕국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계산을 하여 고어를 해독합니다." 좋아. 잘한다. 알렉스 학자님! 슬픈 말이지만 같은 말을 해도, 내가 하는 것과 알렉스 학자님이 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 내가 백 번, 천 번 말하는 것보다 알렉스 학자님이 그냥 한 번 말하는 게 최고다. 말이 가지는 무게 자체가 다르다. "특별한 방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뻥 치지마! 내가 있다고 했잖아. "그럴 리가요. 눈이 있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되 듣지 못하셨겠지요. 김상희 공주님은 여러차례 고려의 특별한 방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텐데요." "......." 계집의 말을 어떻게 믿냐? 라고 되묻는 듯한 저 눈길. 황당하긴 하지만 이 곳에선 저럴 수밖에 없다. 저렇게 태어났고 저렇게 생활해온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이동수.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 눈치다. "부정한 방법으로 1등을 했는데 그걸 숨기려 드는 건 너무 치졸한 행위 아닙니까?" 교관들은 순간 당황한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갑자기 이동수가 말을 할 줄이야. 교관들도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교관들이 제지하기도 전에 알렉스 학자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떤 것이 부정한 방법이라는 소리죠?" "어떻게 마력도 없는 계집이 고어를 그토록 자연스레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까?" 알렉스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은 즉, 고려의 모든 학파를 무시하는 것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런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분명 고려만의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귀하가 말하는 것처럼, 겨우 계집 아이를 위해 고려가 저를 파견했을 것 같습니까? 거짓말을 대신 해주기 위해? 귀하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계집아이가 고어를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 계집아이가 1등을 했다. 말이 안 된다. 고로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래서 처벌해야한다. 이것 아닙니까? 맞습니까?" "바, 바로 그것 입니다." 알렉스씨가 피식 웃었다. "첫 번째. 대전제부터가 틀렸는데 그 이후 논리가 어떻게 성립하겠습니까? 계집아이가 고어를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고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다, 당연한 얘기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김상희는 이 곳에 계신 여러 교관님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보이지 못했습니다." 알렉스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자.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보지요. 평소에 벌레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계집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집아이가 감히 남자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실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미쳤냐. 절대 못하지. 잘난척 한다고 안 까이면 다행이겠다. 내가 정말 여러 번 느끼는 건데, 이 세계 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개념 자체가 너무나 희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스학자님은 진짜 변종이다. 설마 뭐 여성학 이런 거 공부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알렉스씨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실력을 증명해 보였더니 이 꼴이 난 거 아닙니까?"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증명하지 못하다뇨? 증명하지 않은 것과 증명하지 못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이 자리에 없었고, 김상희 공주님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면 역시나 부정한 방법이라 몰아갔겠죠. 아. 여러분을 탓할 생각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어떻게 계집아이가 고어를 그토록 해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알렉스 학자님이 제안했다. 교관들에게 고어를 내오라고 했다. 무작위로 말이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고려만의 방식으로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고려만의 방식. 그런 거 없다. 지금 알렉스씨 12교관들 앞에서 뻥을 치고 있는 거다. 내게 윙크를 살짝 해보이는 저 모습.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저 아저씨. 진짜 괴짜는 괴짜라니까. 어쨌든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고어들을 해석해냈다. 내가 나만의 특별한 방식 스스로 그냥 하면 자만이자 믿을 수 없는 것 - 즉, 사기 치는 것- 이 되는데, 고려학자의 보증 아래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교관들도, 이동수도 눈을 크게 떴다. "이, 이럴 수가!" "마, 말도 안 돼...!" 알렉스씨가 말을 이었다. "거기 있는 자료들은 김상희 공주님과 우리 고려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내용들 입니다. 김상희 공주님의 공이 굉장히 컸지요. 무죄인 사람보고 무죄를 증명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은 누구에게서 나온 겁니까?" "......." "유죄라 주장하는 사람이 유죄임을 밝혀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왜 무죄인 사람이 무죄를 증명해야 하죠?" "......." "뿐만 아니라 김상희 공주님이 황제폐하를 욕되게 했다고 주장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죠. 황제폐하를 모욕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 입니다." 틸레반이 움찔했다. 저 말.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감히 황제폐하를 모욕한다니.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은 삼가 주십시오!" "황제폐하께서 김상희 공주를 직접 이 학원에 넣으셨습니다. 황제폐하께서 김상희 공주님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셨기 때문이죠. 황제폐하의 안목이 여기 계신 귀하들의 안목보다 낮다고 생각 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김상희 공주님의 능력을 그토록 과소평가하시는지? 납득이 되질 않네요. 황제폐하의 안목을 얼마나 낮춰서 보셨는지 궁금하군요. 실제로 황제폐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귀하들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내가 계집아이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하늘을 난다고 말하면 누가 믿을쏘냐. 거의 그런 개념에 가깝다고 보면 됐다. "김상희 공주님이 귀하들 앞에서 감히 능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것은, 첫 째. 고려왕국만의 특별한 해석기법을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 째, 스스로 잘났다 여기는 남자들 앞에서 감히 잘난 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이해를 못하시겠다면 저같으면 교관자리 사표냅니다." *** 교관들은 충격을 받았다. "김상희 공주님이 귀하들 앞에서 감히 능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것은, 첫 째. 고려왕국만의 특별한 해석기법을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 째, 스스로 잘났다 여기는 남자들 앞에서 감히 잘난 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말을 거꾸로 해보자면 저 계집아이가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도 일부러 말이다. 계집아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남자들 앞에서는 숨겨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철두철미했다. "이것은 고려왕가의 직인입니다. 김상희 공주의 능력이 보장되어 있는 보증문서죠. 혹시 몰라 제가 받아왔습니다. 직.인.입니다." 김상희 공주의 능력을 보증하는 보증서. 고려왕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황제의 보증 -황제가 김상희를 이 학원에 넣었으므로- 뿐만 아니라 고려왕의 직인까지 나타났다. "설마 계집아이의 무죄를 증명해주기 위해 고려의 국왕폐하께서 친히 직인을 찍어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사실을 되짚어 보자면 김훈상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대뜸 도장부터 찍어줬다. 알렉스는 그 과정에서 섭섭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김훈상은 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도장부터 찍어줬다. 만약 알렉스가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왕을 상대로 사기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알렉스는 그러지 않았다. 당시 알렉스는 굉장히 놀랐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으실 실수를 이렇게 버젓이 해버리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알렉스는 상희학에 관한 연구를 더욱더 진척시킬 수 있었다. - 김상희 공주(이하 딸이라고 칭한다.)가 위험에 빠졌다는 판단이 들면, 국왕폐하(이하 아버지라 칭한다.)께서는 약간의 심신미약상태에 빠져들며 논리적, 이성적 사고판단이 불가능해진다. 어쨌거나 교관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려왕의 도장의 무게는 매우 가벼웠었다. "이런데도 김상희 공주님의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고려 학파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겠습니다." "크, 크흠...!" 교관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어떻게 감히 고려학파에게 정면 도전을 하고 또 고려왕의 직인이 들어간 보증문서가 있는데 반박을 한단 말인가! 이쯤 되면 만약 김상희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다고해도 눈 감아줘야 할 판이다. 틸레반은 생각했다. '고려왕가에서 한낱 계집따위를 위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하물며 왕의 직인이라니. 백프로 진실이 아닌 경우에는 사용할 리가 없겠지.' 그 진실. 알게 되면 아마 까무러칠거다. 알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딸등신이 그냥 막 찍어준 거였으니까. 알렉스는 자신만만한 눈동자를 주위를 둘러봤다. "이의 없으십니까?" 모두가 알렉스와 눈을 피했다. 괜히 눈 마주쳤다가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았다. 크흠, 헛기침만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김상희를 문책하던 그 살벌한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저 역시 김상희 공주의 능력을 보증하겠습니다." 모두가 출입구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차석교관 한진수의 모습이 보였다. "차석교관님...?" 시찰을 돈다고 징계위원회에 참석 안했었는데, 시찰이 끝난 모양이다. 한진수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 세계가 낳은 대천재가 풍기는 위압감은 12교관들을 전부 누르면 눌렀지, 결코 밀리지는 않았다. "차석교관의 자리를 걸고 보증하죠. 이만하면 됐습니까?" 된 게 아니라 너무 넘친다. 거꾸로 생각해보니, 김상희 공주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황제폐하를 모욕하게 되는 것이 된다. 게다가 고려왕의 직인까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대로 김상희 공주의 유죄를 주장하면 고려 학파와도 싸워야 할 판이다. 그 뿐이랴. 차석교관이 자기의 자리까지 걸고 공개적으로 보증을 하고 나섰는데 여기에 무슨 말을 더하랴. 괜히 말 잘못했다가는 묻힐 판인데. 알렉스는 한진수를 쳐다봤다. '한진수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김환성이 나타나 깽판을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이주형이 없었으면 이미 깽판 쳤겠지만.) *** 차석교관 한진수가 김상희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오, 오라버니." "감사해할 필요 따위는 없다." "그, 그게 아니라..." "나는 고려의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게 짜증이 날 뿐." "그, 그게 아니라 소, 손을..." 한진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김상희를 쳐다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랐다. 그의 입장에서 화들짝 놀란 거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 "쟤는 뭐 급한 일이 있나?" 스페셜필드를 빠져나온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진수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곳은 17층이다. 다시 말해, 한진수가 찔끔 놀라면 17층에서 뛰어내리는 괴현상이 발생한다. "저, 저기 봐. 차석교관님. 또 수련을 하고 계셔!" "마력 풀방전 상태를 만드시려는 건가!" 이전에 차석교관 한진수 때문에 수련열풍이 불었다. 한진수가 또다시 열심히 달리고 있지 않은가. 마력을 가진 남자들이 봐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덕분에 한진수의 얼굴이 붉어진 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한진수는 미친듯이 달리면서 오른손에 남아있는 감촉을 느껴봤다. '손을...잡은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손은 아니고 팔목이었다. '헉...!' 순간, 학생 한 명과 부딪칠 뻔 했다. 겨우 몸을 틀어서 피했다. 땅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이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저렇게 몸을 아끼지 않으시다니." 학생들의 눈으로 보면 한진수는 이 곳의 학생들과 부딪칠 일이 없다. 천재니까. 절대 실수같은 거 안 한다. 실제로 저런 속도로 날리면서도 모래바람 하나 일지 않고 있다. 얼마나 절륜한 마력컨트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사람이 사람과 부딪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렇게 몸을 날린다는 건 마력방전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밖에는 안 보였다. 정작 당사자는 정말 놀라서 피한 거지만 말이다. '손을... 잡았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왜 아직까지도 심장이 이렇게 쿵쾅대는 건지 모르겠다. 팔목을 잡았는데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치겠군.' 뛰어야 겠다. 안 뛰면 미칠 것 같았다. 말로 표현은 못하겠는데 하여튼 심장이 마구 뛰었다. 김상희의 얼굴도 계속 아른거렸다. 김상희의 붉어진 얼굴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그 계집아이의 팔목에 괴상한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한진수의 얼굴도 붉어졌다. 손을 자꾸만 쳐다봤다. '손을...잡았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고장난 것 처럼 뛰었다. *** 우리 둘째 망나니가 말했다. "야. 똥개." "네. 오라버니. 소녀가 여기 있어요. 말씀하시어요." "...물어왓 할래?" 자. 내가 쟤 심리상태를 유추해보겠다. 나는 지금 나름대로 큰 일을 겪었다. 얘가 나한테 물어왓을 할래? 하고 물어보는 건, 즉 '괜찮아?'하고 물어보는 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얘는 내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 지 몰라서 저딴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하는 거다. 아니. 하면 죽여버릴 거야. 라는 내 속마음은 철저히 숨겼다. "소녀가 어찌 감히 오라버니의 행사에 간섭할 수 있겠어요? 다만 물어왓을 하고나면 소녀는 지쳐서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 망나니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럼 하면 안 되겠네. 하여튼 약해 빠져가지곤." 헝거비를 품 안에 갈무리 하는 김환성. 너는 어딜 가나 그 헝거비. 안 떼어놓고 다니는 구나. 용하다 용해. 좋아. 이 쯤에서 연기 한 번 해줘? 나는 휘청거렸다. 일부러 말이다. 좋아. 어색하지 않았어. 자연스레 다리가 풀렸어. 이름하여 연약한 척이다. 이건 우리 둘째 망나니한테 엄청 잘 먹힌다. 쟤는 '내가 제일 세'를 언제나 주장하는 애다. 그래서 얘 앞에서 연약한 척 하면 얘의 허세력을 하늘 끝까지 채워줄 수 있다. ...분명 그랬는데... 문제가 조금 발생했다. ============================ 작품 후기 ============================ 쿨싴한 척 하지만 결국 손목만 잡아도 설리설리 0067 / 0192 ---------------------------------------------- 시체가 된 김상희 *** 시스템 오류로 인해 중복으로 올라갔던 68편 내용 수정되었습니다. 4월4일 0시 15분 전에 68편 보신분은 다시 보시면 됩니다. 12시 15분 기준으로 68편 내용 수정되었습니다. *** '이,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아니,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얼굴을 푹 숙였다. 망나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미쳤어. 이건 너무 과하다고 이 자식아. 아무래도. "에, 에그머니나!" 시녀 중 한 명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분명 놀랐겠지. 놀랄 수밖에 없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을 거야. ...왜냐하면 나 얘한테 지금 업혀있으니까. 기절한 척 해야겠다. 그래야 그나마 명분이 살지. 멀쩡한 정신으로 감히 왕자님 등에 업히는 정신 나간 공주가 되진 말아야할 것 아냐. 엄청 충격이겠지. 아마 나를 시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 이상한 소문도 아니다. 얘가 날 업고 걷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이미 예상했다. 이른바, '김상희 시체설'. 시체가 되지 않는 이상 왕자가 공주를 업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게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나는 또 학생들 사이에서 시체로 각인되고 있겠지. '아. 불행해.' 예전에 왕궁에서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또 시체취급 받고 있다. 제 3관. 기숙사.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망나니의 등에 업혀 있으므로- 이 곳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망나니가 말했다. "아씨. 죽을래?" 야.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네가 그런 말 하면 쟤 진짜 죽는 줄 알고 겁먹는 다니까?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 저 시녀에게는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장난 아닐 거다. 시체라 짐작되는 공주가 등에 업혀 있는 상태고, 그 상황에서 그 살인자가 '너 죽을래?'하고 묻는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이겠냐. 망나니는 나를 쇼파에 눕혔다. "아. 힘들었다." 그리고 엄청 생색냈다. "야. 내가 이렇게 천천히 걷는 거 무지 힘든 일인 거 알지?" 암. 알고 말고. 너는 세상에서 제일 센 오라버니이며 걸음조차도 빛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걷는 킹왕짱 센 오빠니까. 날 무섭게 하지 않으려고 천천히...어라? 진짜 그렇네. 나도 잊고 있었는데 이 망나니. 이상하게 나를 많이 신경써주는 것 같다. 여자에 대한 개념도 조금씩 생기고 있는 모양이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다. 망나니가 말했다. "쉬고 있어. 난 샤워하러 갈테니." 시녀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주 조심스레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나를 콕 찔렀다. "사, 살아 계셔요...?" 그럼. 살아있지. 네 눈에는 내가 귀신으로 보이니? "사, 사, 살아 계시군요!" 시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래. 언니가 네 맘 다 알아. "다행이어요." 시녀가 울먹거렸다. 많이 놀랐지? 우쭈쭈. 그래서 한 가지 팁을 주기로 했다. "가까이 와보렴." 시녀는 여전히 무서운지 쭈뼛쭈뼛 다가왔다. "얼른. 귀 대봐." 어마어마한 팁이라고. 시녀의 귀에 속삭였다. "앞으로 오라버니가 죽을래? 하고 물으면 왕자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하렴." 시녀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망나니. 그렇게 살인 좋아하는 애는 아니거든? 망나니라서 좀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진짜로 죽이지는 않는다니까?' 뭐. 나는 좋은 팁을 줬으니까 이 팁을 활용하고 못하고는 네 몫이겠지. 아 그러고보니 우리 송수진씨는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나는 송수진씨가 업어 키우다시피해서 컸다. 그렇다보니 송수진씨랑 있는 게 편하다. 손발이 잘 맞다고나 할까. 내게도 많이 익숙해져 있는 상태라서 답답한 면도 적고. '송수진씨를 좀 부를까?' 당연히, 내가 내 입으로 '송수진씨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이 세계에서 계집은 계집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는 법이다. '개차반한테 편지를 또 써야겠지.' 나는 자못 비장한 얼굴로 책상에 앉았다. 편지의 내용을 구상해봤다. 별 내용은 아마 안 들어갈 거다. '위대하고 멋지고 상냥하시고 훌륭하신 아빠덕택에 위기에서 탈출하였어요. 아빠 사랑해요. 그런데 제 시녀였던 송수진씨가 그리워요. 같이 있으면 편할 것 같아요.' 이 짧은 문장을 a4용지 서너장으로 늘려서 써야한다. 이런 식이라면 나. 소설써도 되겠어. - 사랑하는 아버님께. ...일단 편소설 -편지와 소설을 합친 말- 부터 쓰고 보자. *** 고려왕국 제 1대대. 스페셜 나이트. 제국 파견임무 수행 중인 이주형 나이트는 울고 싶어졌다. - 너. 임무 태만이냐? 스페셜 나이트는 특별한 나이트다. 제 1대대이며 대대장 김유신 외에 국왕인 김훈상이 직속 상관으로 있다. 그래서 김훈상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라인을 가지고 있다. 실시간으로 보고도 올리고 있는 중이고. 그런데 오늘은 된통 깨지게 생겼다. 뭔지는 몰라도 왕이 임무 태만이라는데, 거기에 대고 반박할 수 있을 리 없다. - 죄송합니다. - 뭐가 죄송한데? - 임무를 태만시 했습니다. - 진짜 죽을래?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이주형은 정말 울고 싶었다. 스페셜 나이트 임무 수행 이래 최대의 위기다. '이 임무. 맡는 게 아니었는데.' 제국 파견 임무. 엄청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봐야 김상희 공주를 호위하는 일 아닌가. 사실상 엄청난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제국 내에서. 그것도 학원 내에서 김상희 공주에게 위험한 일이 얼마나 발생하겠는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임무 너무 이상하다. '김상희의 의지에 반하여 손을 대는 모든 남자의 손목을 잘라라.'가 원래 명령이었다. 나름대로 그 명령.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훈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김상희 잘 지키라고 했지. 아니. 당신이 언제요? 왕님. 왕 폐하. 그런 말 한적 없잖아요. 손목 자르라면서요? 이주형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김상희의 의지에 반하여 손을 대는 모든 남자의 손목을 잘라라.'가 도대체 어떻게 '김상희를 잘 지켜라'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의문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나타났다. '아니. 그리고 도대체 지켜야 한다는 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지키라는 거야?' 이주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억울한 일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다. 얼굴을 향한 주먹만한 돌이 빠른 속도로 날아온다고 가정해보자. 이주형의 입장에서는 피할 필요도 막을 필요도 없다. 그 정도 작은 충격은 마력이 알아서 보호를 해준다. 바람이 분다고해서 그걸 열심히 막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김상희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이주형은 어느 정도의 범위로, 어디까지 김상희를 보호해야하는 건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이해조차 안 되는데 어떻게 적절한 보호를 한단 말인가. - 폐하. 임무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 합니다. 이주형은 울고 싶어 졌지만, 김훈상은 답답해졌다. - 그것도 모르냐?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모른다는 말이 있다. 김훈상이 딱 그 꼴이다. 김상희에게 조련(?)을 당했다. 알렉스의 말을 빌리자면 '딸등신'아빠 다 됐다. 딸바보 아빠 입장에서의 '보호'와 스페셜 나이트의 입장에서의 '보호'는 그 개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김훈상은 그래도 이주형보다는 상황이 훨씬 괜찮았다. 그래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는 있었으니까. - 그럼 임무를 정정하겠다. - 예. 폐하. 이주형은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 김상희의 신체에 그 어떤 위해가 가해지는 것을 불허한다. 또한 정신적인 괴로움이 닥치는 상황 역시 무조건 배제시킨다. 이주형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 교관에 의한 체벌이나 교육 역시 불가합니까? 교관에 의한 체벌. 있을 수 있다. 교육 역시 있을 수 있다. 가끔 벌로 운동장을 돌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혹은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거나. - ....... 김훈상도 거기에는 답을 하지 못했다. 알렉스가 이 상황을 보면 역시 딸등신 맞네, 하고 속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이주형은 따지고 싶었다. 거봐요. 당신도 헷갈리잖아! - 그건 스페셜 나이트의 재량에 맡기겠다. ...아니. 그러니까 구체적인 매뉴얼을 달라고요. *** 김상희는 김훈상을 위한 편지를 썼다. 그 와중에 손님이 찾아왔다. "알렉스 학자님!" "어이구. 공주님. 마음 고생 많으셨죠?" "학자님 덕택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알렉스가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렇게 고마우면 한 번 안아주시죠." 김상희는 활짝 웃었다. 알렉스를 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친 할아버지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알렉스를 힘껏 안아줬다. 알렉스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지 후후- 하고 웃었다. "저한테 감사하실 건 아닙니다." "네?" "폐하께서 바로 출발하라 명령하셨기 때문이죠. 김상희 공주님때문에 급하다고 하니까 서류 보지도 않고 직인 찍어주시던데요?" "그, 그랬어요?" "직항 전용기 타고 바로 날아왔어요." 뿐만이 아닙니다. 저 지금 왕실 경비카드 받았습니다.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그 말은 참았다. 알렉스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말했다. "아마 여기 스페셜 나이트가 있겠죠?"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상희는 모른다. 여기 스페셜 나이트가 있는지 없는지. 김환성이 있는 방이니까 있을 수 있겠다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어디 있는 거 압니다. 폐하와 김상희 공주님 사이에서 지금 고민이 매우 많을 텐데, 팁을 드리기 위해 왔어요. 스페셜 필드 좀 펼쳐주시죠." 김상희는 순간적으로나마 깜짝 놀랐다. 알렉스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페셜 나이트가 진짜 잠복하고 있었나보네. 하긴 망나니가 여기 있으니까.' 그 스페셜 나이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은신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 알렉스는 현재 상희학을 공부 중이다. 물론 '사도'다. 정통학문으로 인정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한다. 하지만 나름대로 믿음은 갖고 있었다. 이주형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김상희 공주를 마력이 없는 왕자님처럼 생각하면 된다고요?" 아니. 이게 말이야 똥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이 학자가.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속는 셈 치고 그렇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게 말끔해져요." "...마력이 없는 왕자님이라..." 김형석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아.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쉬워지겠다, 싶었다. 공주따위를 감히 왕자님들처럼 생각하라는 건 어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실의 대학자 아니던가. 믿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알렉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나이트. 생각보다 순진무구하다. 스페셜 나이트. 보통 은신과 기습, 침투 및 살인에는 특화되었지만 머리를 굴리는 일에는 조금 뒤떨어지는 것 같았다. '좋아. 실험 샘플 확보다!' 상희학. 이거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재미있다. 말도 안 되는 학문인데, 그래서 더 재미있다. 이주형 나이트를 샘플로 쓰기로 했다. 흐흐흐, 하고 웃었다. 이주형은 왠지 찝찝했다. "뭔가 음흉하게 웃으신 것 같은데 말이죠?" "에이. 그럴 리가요. 하여튼 저는 좋은 정보를 귀띔해드렸으니 이제 그만 가봅니다. 제국에서 사야할 것이 많거든요." 이주형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그건 왕실 경비카드 아닙니까?"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잘 내주지 않는, 카드 한도 자체가 없는 무제한 카드. 저걸 내주다니! '이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다!' 왕실 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람에게만 지급하는 카드다. 저 카드를 보는 순간, 알렉스에 대한 믿음이 수십 배는 상승했다. 신뢰도 수백프로 증가다. '밑져야 본전이다. 왕자님이라 생각하자.' 알렉스는 또 흐흐- 웃었다. '아주 좋은 실험 샘플이 되겠어!' *** 제 8관 기숙사. 이동수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 곳은 4인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불도 모두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네.' 불을 켰다. "어이쿠!" 이동수는 깜짝 놀랐다. 방 중간에 남자 하나가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4인실은 2층 침대 2개를 쓴다. "어, 어째서...!" 각 침대 위에 3명의 남자가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굉장히 치욕적인 상황이다. 이,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야. 너. 쥐어터질 준비는 됐냐?"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이동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다, 당신은...!" 저 얼굴. 익히 알고 있다. 괴물 같은 무력을 지닌, 고려왕국의 나이트 제 9대대 대대장이었던 김환성. 김환성이었다. 김상희에게는 샤워를 하러 간다고 말했던 김환성이 8기숙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무서운 일은 동생 모르게.txt + 시스템 오류 (중복편수가 올라감...)로 인해 강제 연참하게 되었다는... 0068 / 0192 ---------------------------------------------- 내가 사랑하는 여자 또 건드리면 그 땐 정말 죽여 버린다. ***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어터질 준비는 됐냐?" 갑자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이동수는 김환성을 쳐다봤다. 이동수는 기본적으로 남자들을 조금 어려워 한다. 워낙에 무시받고 괴롭힘 당하면서 살아와서 그렇다. 그런데 저 남자는, 남자들 중에서도 최정점으로 군림하는 남자 아니던가. 일전에 수석교관(당시에는 수석교관이었다.) 한진수와도 호각으로 싸움을 벌였던 전무후무한 천재. 김환성이다. "그, 그게 무슨...?" "됐고. 일단 좀 맞자." 김환성은 일방적인 구타를 시작했다. "허, 허억! 이, 이러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닥쳐. 돼지 패는 데 이유가 필요해?" 사실 이유 같은 거 없다. 김환성도 안다. 내 동생 괴롭혔으니 그냥 맞아. 이건 이유가 될 수가 없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본다면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지구식으로 비유를 해보자면, 길 가다가 사람 찔러 놓고 네 얼굴 마음에 안 들어서 찔렀어. 이 것과 다를 게 없다. "크, 크아아악!" 이동수는 비명을 질렀다. 아파도 이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팠다. 눈물이 고였다. "사, 살려주세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이대로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안 죽여. 걱정 마." 대신 죽기 직전까지 패줄게. 김환성이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동수는 정말 죽겠구나 싶었다. 온 몸을 난자하는 엄청난 통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의 육중한 몸을 짓눌렀다. 바닥에 엎드렸다. 싹싹 빌었다. "제, 제가 다, 다 잘못했어요. 흐어어엉!" 서럽게 울었다. 아무리 그가 또래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열등하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복날 개맞듯 맞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기숙사 사감이라든가 교관이 지나가기라도하면 좋겠는데 그럴 기미는 안 보였다. 김환성은 이동수를 미친듯이 밟아대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죽기 직전까지 패야 되는데. 젠장. 너 운 좋은 줄 알아." 도대체 뭐가 운이 좋냔 말이다! 이동수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소리치지 못했다. 그저 서럽게 울기밖에 못했다. 두툼한 손이 닳아 없어지도록 싹싹 빌었다. "죄송해요. 제가 정말 잘못 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빌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김환성은 자리에 없었다. 그는 김환성이 이렇게 서둘러서 사라진 이유를 아마 평생 모를 거다. 김환성이 열심히 달렸다. 아니. 그냥 날았다. "저, 저기봐." "상급 비행술? 학원생 중에 저게 가능한 사람이 있었어?" 김환성이야 워낙 어릴 때부터 이러고 다녔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고려왕가의 핏줄. 그 중에서도 천재쯤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학생들은 날아가는 김환성을 보며 감탄했다. "잘은 안 보이는데, 김환성 왕자. 아니 김환성 학우님 아냐?" "맞는 것 같은데. 김환성 학우 말고 저렇게 자유자재로 비행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어?" "국가에 반역이라도 일어났나? 엄청난 속도인데..." "저런 비행을 선보이면서 저런 속도를 낸다는 게... 진짜 차원이 다른 괴물이긴 하구나." 아무래도 고려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김환성 쯤 되는 사람이 왜 저렇게 황급히 날아가고 있겠는가. 김환성은 날아가면서 투덜댔다. "아씨. 한 대만 더 때릴걸." 시간이 촉박했다. 이유 별 거 없었다. 고려에 반역이 일어났다든가 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샤워를 너무 오래하면 의심하겠지?" *** 이동수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김환성이 갑자기 찾아와 마구 팼다. 죽을 만큼 맞았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내장이 엄청 상한 것 같았다. 정말 지독한 놈이었다. 그런데 더 지독한 놈이 나타났다. "뛰어라." 이동수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어째서 차석교관이 자신을 직접 지도편달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속도 느려진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마력파동이 느껴졌다. 마치 뒤에서 커다란 해일이 밀려들고 있는 기분. 모르긴 몰라도 저 해일에 얻어맞으면 최소 전치 2주다. 안 뛸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모가지다 댕겅 잘려나갈 것 같은 공포가 그의 몸을 지배했다. 몸은 힘들어 죽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래도 달렸다. "겨우 2천바퀴밖에 안 뛰었어. 뛰라고 했다." 김환성보다 더 악질같은 새끼! 이동수는 악에 받쳐 소리칠 뻔 했다. 가까스로 참아냈다. 사람이 악에 받치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교관에게 욕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시간이 흘렀다. 차석교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발 굴려!" 처음에는 분노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분노가 아니라 서러움이 밀려 들었다. 내가 왜!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했느냔 말이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달리고 또 달렸지만 저 악마같은 차석교관은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사실 명분은 좋았다. 지금 초고도비만으로 인해 마력흐름까지 불안정해진 이동수를 차석교관인 그가 직접 지도해주고 있는 거니까. 정밀한 마력컨트롤 능력을 바탕으로 이동수의 신체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여 한계치까지 밀어붙이겠다고 하는데, 이동수가 느끼기엔 이건 지도가 아니라 괴롭힘이었다. "헥... 헥... 헥...!" 이러다 진짜 죽게 생겼다. 요즘따라 왜 이렇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지 모르겠다. 차석교관이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다시 말했다. "절대 안 죽으니까 달려라." 그리고 더 잔인한 짓을 했다. 마력 컨트롤을 사용해서 몸을 조종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폐가 터져버릴 것 같다. 조금 쉬고 싶었다. 그런데 몸이 제멋대로 마구 움직였다. '그, 그만... 제발 그만!' 말할 힘도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기절해 버렸다. *** 이동수의 악몽은 여전히 안 끝났다. "허허허허허허." 제 8관 기숙사. 기숙사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남자가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 허허- 거리고 웃고 있었다. "다, 당신은..." 저번에 본 적 있다. 김상희 공주를 변론하던 고려왕궁의 학자 알렉스. "아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겠지? 이유도 모르고 많은 남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거야. 이를테면 우리 셋째 왕자님이라든지. 차석교관이라든지." 이, 이 할아버지. 귀신이다! 범상치 않은 할아버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인상이 꽤 선해보이는 할아버지라 믿을만 했다. 게다가 학자이지 않은가! "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뭘 어떻게 해?" "어떻게 하면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죠?" 알렉스는 다시 허허허- 하고 웃었다.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 "그, 그게 뭡니까!" "김상희 공주님한테 잘못했다가 무릎꿇고 싹싹 빌면 될걸?" 알렉스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입장인 이동수에게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 이 사람도 나를 괴롭히러 왔다...!'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공주따위에게 어떻게 무릎을 꿇고 빌란 말인가? 이게 얼마나 억지냐 하면, 저번에 고려가 펜릴왕국에 선전포고를 할 때에 이 방식을 써먹었었다. 두 나라를 전쟁까지 몰고갈 수도 있을 만큼의 억지. 말하자면 '개억지'다. '내, 내게 어째서...이런 일들이...' 또 서러워졌다. 이동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스는 허허- 하고 또 웃었다. "어쨌든 나는 사실을 전해줬으니 이만 가지.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게." 알렉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동수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한진수나 김환성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놈이 저렇게 절박하게 방법이 뭡니까! 하고 나설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알렉스가 이 곳에 온 것은 이동수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론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이 없던 건 아니다. 그 역시 상희를 굉장히 아꼈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김상희가 억울한 상황에 처하면 주변 남자들이 화가난다'라는 그 가설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그는 천생 학자였다. '나의 가설이 들어 맞았다!' 어째서 이 가설이 맞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기는 했다. 어째서 공주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왕자나 차석교관이 직접 움직이는 거지? 라는 대답에는 논리적인 답을 절대 할 수 없었다. '간만에 연구욕이 불타오르는군!' 알렉스는 신이 났다. *** 이동수의 악몽은 여전히 안 끝났다. "너. 내가 조금 좋게 봐줬었는데 너무 한 거 아니냐?" "크, 크리스?" 이제 이동수는 기숙사에 누가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지켜주고 싶고 조막만한 애를 왜 그렇게 괴롭힌건데?" 괴롭힌 적 없다. 정당한 이의제기를 했을 뿐이다. 교관들도 납득하지 않았던가. "너한테 진짜 실망이다. 애들이 너 괴롭히는 이유를 이제 좀 알겠어."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정당한 이의제기를 했을 뿐이야..." "시끄러워.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이번 프로젝트 이후로 서로 말 같은 거 하지 않아주면 좋겠네. 나도 너 모르는 척 할테니까." "크, 크리스...!" 이동수는 크리스의 '실망했다'라는 말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크리스는 이동수에게 호의적인 사람 아니었던가. 마지막 희망마저도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동수가 크리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 제발 내 말을 좀 들어줘." 크리스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언제나 그렇듯 활짝 웃었다. "내 몸에 손대지마.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이동수는 섬뜩한 공포에 짓눌렸다. 내가 아는 그 크리스가 이 크리스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일순간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크리스가 쪼그리고 앉았다. 언제나처럼 활짝 웃으면서 아주 조용하게 속삭였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또 건드리면 그 땐 정말 죽여 버린다? 알겠니?" 이동수는 직감했다. 저건 진심이었다. *** 이동수의 악몽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마, 말도 안 돼...!' 물론 일반 사회의 '재판'에 비해서는 처벌 강도가 훨씬 낮다. 그러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으면 이후 승급이나 성적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동수가 현재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고는 성적 뿐인데, 그 성적에 악영향을 받게 생겼다. 교관 중 한 명이 물었다. "이동수. 강도죄를 인정하나?" "......."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나 싶다. 고개를 떨궜다.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실 빼앗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잠깐 빌렸다가 요즘 계속되는 악몽에 잊고 있었다. 김상희의 노트 말이다. 그건 빼앗았던 게 아니고 잠깐 빌린 거였는데 어째 일이 이렇게 되나 싶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다름 아닌 국왕 김훈상. 왜 학생들간의 일에 무려 국왕. 그것도 그 유명한 고려의 국왕이 문제를 제기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어째서... 고려왕의 직인이 들어간 노트를 일개 공주따위가 갖고 있는 거냐...!' 이건 예상도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이, 이건 음모다.' 음모였다. 김상희 공주가 자신을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음모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왕의 직인이 들어간 노트를 순순히 줬다. 그 얘기를 미리 했다면 빼앗지도 않았을, 아니 못했을 텐데. "...인정 합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다. 교관들도 골머리를 싸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려 국왕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는데 설렁설렁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6개월간 외출금지와 2차 승급시험에서 20퍼센트의 페널티를 부과하겠다. 또한 본 교관들에게 제출할 반성문 3장과 김상희 공주에게..." 교관도 솔직히 좀 미안했다. 이 정도로 중죄인가 싶었다. 김상희 공주에게 사과문을 쓰라는 거. 이건 정말 죽기보다 더한 처사 아닌가. 그래도 김훈상이 주장하는 것이다보니 흘려버리기도 힘들었다. 제국 마력학원 입장에서 고려의 왕은 대단한 투자주다. 새로운 기숙사가 거의 완공되고 있고 엄청난 시설투자를 받고 있다. 김훈상의 말이라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줘야 한다. 한 학생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뭉개는 거긴 했지만 말이다. "크흠. 김상희 공주에게 사과문을 작성하도록 해라." "교, 교관님!" "이의는 받지 않는다." 이동수는 방으로 돌아와 엉엉 울었다. 어떻게 이런 치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서러웠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다, 당신들은...?" 2명의 남자가 보였다. 한 명은 잘 아는 사람이고 한 명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펜릴왕국의 왕자 윌리엄과, 또 한사람은 선배처럼 보였다.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왕국의 아사히로다.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저, 저랑 말입니까?" 이동수는 요즘 누가 찾아오는 것 자체가 무섭다. 또 자신을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고려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다." 뭐, 뭐라고? 고려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이동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국 분쟁기구에 도움을 요청할 거야. 누구보다도 네 억울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너도 함께하지?" 참고로 말하자면 이동수의 악몽. 아직 안 끝났다. ============================ 작품 후기 ============================ 시스템 오류로 중복편이 올라가서 어쩔 수 없이 비축분을 풉니다. ㅠ_ㅠ 강제연참 당했습니다....ㅂㄷㅂㄷ...Aㅏ...내 비축분... 0069 / 0192 ---------------------------------------------- 차석교관 한진수의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 일왕국의 셋째 왕자 아사히로는 개인적으로 고려를 굉장히 싫어한다. 몇년 전 사건 때문이다. 그 때. 아사히로는 제국의 귀빈들이 묵는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됐다. 고려의 왕자가 자신의 식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뭐. 정말 급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빼앗은 그 식사를 계집아이따위에게 줬다는 거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 때 느꼈던 수치스러운 감정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워서 밤마다 잠을 설쳤을 정도다. 얼마나 일왕국과 자신을 우습게 봤으면 그따위 행동을 한단 말인가. 비록 김상희 공주에게는 '오다 주운 음식'이 되기는 했지만 아사히로 입장에서는 보물을 빼앗긴 것보다도 더 배아픈 일이었다. 윌리엄은 말할 것도 없이 김상희에게 악감정이 충만한 상태다. '나는 정치의 불쌍한 희생양이었을 뿐이야.' 윌리엄은 자신이 이토록 불행한 상황에 처했던 것이 -한 국가의 왕자가 계집에게 무릎을 꿇었으니까- 정치싸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스페셜 나이트의 힘을 증명한 고려의 입지는 한층 더 높아졌으며 힘이 약화되었다는 소문은 쏙 들어갔다. 지구로 예를 들자면 '핵'을 들 수 있다. 핵을 가진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는 국제 관계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의 크기 부터가 다르다. 고려는 '스페셜 나이트'라는 핵을 보유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세상에 공표했고 덕분에 고려의 위상은 예전보다 높으면 높았지 떨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그 계집아이를 그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물론 아니다. 윌리엄은 대단히 착각하고 있다. 김훈상이 그런 정치적인 계산까지 깔고서 움직였는지, 속마음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계기는 '어화둥둥 내새끼가 위협 당했어? 그럼 전쟁이다!' 였다. 알렉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르고 있지만. 심지어 김상희도 모른다. 설마 딸 하나 때문에 그런 미친 짓을 벌이겠어? 라고 생각하던 도중 국제관계에 대한 설명이 떠돌자 그제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당사자인 김상희마저도 그런데, 윌리엄은 오죽하랴. 일왕국의 아사히로가 분한 듯 말했다. "문제는 고려가 지닌 바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변국들을 깔아뭉갠다는 것이지." 윌리엄이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너도 여기 서명해." 이동수는 남자들에게 굉장히 약하다. 심한 경우에는 얻어맞기도 했다. 지구에서 말하는 왕따. 그게 바로 이동수였으니까. 이동수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부하지는 못했다. "조, 좋아." 윌리엄과 아사히로는 확신했다. 정의는 자신들의 편이다. 고려는 너무 갑질을 많이 했다. 응당한 처분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최소한 보상 혹은 사과는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10대 후반의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정의였다. 아사히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옳은 일을 행하고 있을 뿐이야." *** 제국 내 분쟁해결기구인 '아리랑'의 연합장 이광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쓸데없는 건 보고로 올리지 말라고 했잖아? 안 그래도 바쁘구만." "그래도 왕자 둘이 포함되어 있어서..." "인마. 우리 아리랑이야 아리랑. 왕자 이름 뭐 하루 이틀 봐? 이딴 건 그냥 쓰레기통에나 버려. 김훈상쯤 되는 인간 서명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무슨." "그 김훈상과 관계된 안건이라 보고 올렸습니다." "...그래?" 어디나, 어느기관이나 그렇겠지만 분쟁해결기구 아리랑은 언제나 일손이 모자라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안건만 연합장에게까지 올라온다. 김훈상과 관련된 안건. 이건 중요한 안건이다. 그래서 살펴봤다. "어떤 미친놈들이 이딴 걸 주장해?" 내용을 보니 아주 황당하기 그지없다. 요약해보자면, "밥 빼앗겼어요 징징, 전쟁날 뻔 했어요 징징. 혼내주세요 징징. 이거냐?" "...정확하십니다." "이런 씨펄!" 이광호는 요즘 예민한 상태다. 서류를 집어던졌다. "이 어린새끼들이 우릴 뭘로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억울하고 커다란 일이지만 이광호가 보기에는 소꿉장난도 이런 소꿉장난이 없다. "이걸 심지어 김훈상한테 따진다고? 미친놈들 아냐?" 자금성에서도 다루기 매우 힘들어하는 안건들이 몇 개 있다. 특히 고려에 관한 건 그랬다. 고려와 분쟁이 붙으면, 최대한 고려의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한다. 말이 좋아 분쟁해결기구고 정의를 추구하는 기관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려는 이미 강대국이다. 제국도 함부로 못 대한다. 그런 나라의 비위. 이딴 걸로 거스를수는 없지 않은가! 고려가 만약 황태자를 암살했다면 모를까. 그 정도 되는 거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다. "버려버렷!" *** 일왕국의 아사히로는 인상을 찡그렸다. 답신조차 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 됐다. '어째서...?' 왕자가 두 명이나 서명했고 그리고 못미덥긴 하지만 어느 나라 공작가의 아들인 이동수의 서명까지 들어갔다. 그런데도 이렇게 답신이 없다니. "아무래도 기각된 모양인데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답신은 줄텐데요. 우리는 왕자들인데." 그들은 스스로를 높게 평가했지만 자금성의 연합장 광호는 그들을 생각조차 안했다. 며칠을 더 기다려봤다. 하지만 역시 답신은 오지 않았다. 아사히로가 확인해보니 기각되었단다.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기각답신조차 없다니. 고려 때문에 기분 나빴었는데 제국 때문에 더 나빠졌다. 아사히로가 분한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마지막 방법을 쓰는 수밖에."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겁니까?" 이동수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려갔다. 얘네들. 뭔가 좀 이상하다. 말을 들어보니 확실해졌다. "설마... 김상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그렇지. 그깟 계집년 때문에 우리가 수모를 당했으니 제대로 돌려줘야겠지." "아, 안 됩니다.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릅니다." 이동수는 이미 보복을 당했다. 그 때에는 이해할 수 없고 힘들고 무섭기만 했지만 그래도 이젠 깨달았다. 그가 악몽을 꿨던 이유는 바로 김상희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김상희 주변의 남자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었다. 윌리엄이 말했다. "이봐. 이동수. 걱정마. 설마 김상희를 건드리면 안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위, 윌리엄. 너도 그 때문에 차석교관님과 김환성에게..." "멍청한 놈아. 네가 그러니까 돼지새끼 소리를 듣는 거야. 그게 설마 진짜겠냐? 이게 다 고려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지네들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정치적 책략이었다니까?" 아, 아니. 그런 거 아닌 거 같은데. 나도 안 믿기지만 고려는 김상희를 진짜로 아끼는 것 같은데...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윌리엄이 무서워서 말 못했다. 대신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김상희 공주는 고려의 보배라고..." 이건 그가 직접 들은 얘기다. 징계위원회가 열렸을 당시 알렉스라는 학자에게 직접 들었다. "뭐?" 푸하하하핫! 윌리엄과 아사히로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보배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보배? 윌리엄이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미친 소리하고 있네. 너 진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아사히로 역시 비웃었다. "보배? 보배라고?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은 거냐, 도대체?" 도대체 믿을 수 있는 소리를 해야지 좀 믿지. 계집따위가 보배라니. 어불성설이다. '지, 진짠데...' 말하고 싶었지만 말 못했다. 그는 남자들이 무서웠으니까. 윌리엄이 다시 말했다. "이제 김상희의 용도는 끝났어. 고려 역시 자신들의 입지를 증명했고 힘을 여과없이 드러냈지. 하지만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해.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여론은 무시할 수 없어. 이미 갑질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판국인데 더이상 김상희 같은 억지논리로 타국을 강제하지는 못할 거야." 이동수는 그 말을 계속 듣다보니 또 그럴싸하게 들렸다. "내, 내가 좋은 곳을 알아..." 이동수는 이미 괴롭힘을 많이 받아왔다. 가끔 맞기도 했다. 맞기에도 좋은 장소를 알고 있다. 교관들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 CCTV로도 감시가 불가능한 곳. 이동수는 그 곳에서 가끔 또래 친구들에게 맞았었다. 윌리엄이 입맛을 다셨다. "그 년 눈에서 눈물나는 걸 꼭 보고 말겠어." 그러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울고불고 할 때, 따먹는 게 제일 좋더라, 나는." ***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요즘 좀 고민에 빠졌다. '어휴. 내가 왜 이러지?'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자기도 모르게 또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분명 임무는 힘들다. 힘들다기보다는 애매하고 난해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어디까지 김상희를 보호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임무는 어려운데, 요즘 기분이 좋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냐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김상희 공주가 자신이 있는 곳과는 완전히 반대편을 쳐다보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오라버니를 지켜주고 계신 것을 알고 있답니다. 여기 소녀가 딸기랑 바나나를 준비해놨으니 조금 드시어요." 어이. 거기 아니고. 여기야 여기. 이주형은 조금 다급해졌다. 왜 다급해진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랬다. 그래서 벽에 걸린 액자를 툭툭 건드렸다. 이쪽 좀 봐라. 오구. 오구. 그래. 이 쪽이야 이 쪽.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이상하네. 바람도 없는데 액자가 왜 흔들리지...?" 이봐. 그거야 당연히 내가 건드렸기 때문이지! 여길 봐! 나를 보라고! 요즘 이주형이 고민하는 게 이거다. 김상희 공주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발칙하고 맹랑한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그가 알고 있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야!' 그리고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빠가 여기 있어!' 라고 말할 뻔 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해서 은신인 풀릴 뻔 했다. 김환성이 하도 '오빠는', '오빠는'하고 오빠를 강조하길래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이 단어. 뭔가 묘한 마력이 있었다. 김상희의 입을 통해 오빠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 기분. 진짜 이상하다. 이런 기분. 첫 경험이다. 한편, 김상희는 이미 눈치 챘다. 액자가 흔들리는 거. 이미 봤다. 아. 저쪽에 스페셜 나이트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절대 내색은 안 했다. 모르는 척 연기 했다. "이상하네. 바람도 없는데 액자가 왜 흔들리지...?" 그 때, 김환성이 방에 들어왔다. "오옷! 이게 뭐야! 딸기? 바나나?" 안 돼! 그건 내 거라고! 이주형은 소리치고 싶었다. 김상희 공주가 날 위해 정성쓰레 씻고 예쁘게 정리한 -바나나는 까서 일정한 크기로 잘라놨다.- 과일이란 말이다! 왕자님! 그건 내 겁니다!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이 옆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이주형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마음이 이상해졌기로서니 어떻게 은신을 들킬 수 있단 말인가. 마력 컨트롤을 시작했다. "히히. 딸기 맛있다. 고마워 똥개." 김상희는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다. 그렇게 맛있으면 나도 좀 주지? 라는 말 대신, "오라버니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소녀는 기쁘답니다." 라고 말했다. 이주형은 집중이 안 됐다. 저거 내 건데. 공주님이 날 위해 준비해준 건데. 젠장. 어쨌든 은신은 잘 했다. "사실 스페셜 나이트님께 드리려고 준비했었던 건데, 오라버니가 맛있게 드시니 저도 행복해요." 이주형은 또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그리고 또 괜히 손가락으로 입가를 꾹꾹 눌렀다. 저러지 않아도 되는데. 안 그래도 되는데...하면서도 딸기를 씻는 김상희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굳이 표현을 해보자면 '오빠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이것도 내 거!" 야이 망나니야! 내 거다 그거! 이주형은 소리치고 싶었다. 김상희가 말했다. "오라버니. 이건 스페셜 나이트님을 위해 소녀가..."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괜찮아. 내가 더 세." 얄밉게 한 마디 더했다. "억울하면 네가 대대장하든가." 거기까지만 했으면 이주형도 덜 억울했을 거다. 거기에다가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 똥개가 준 딸기는 나만 먹는다!" 김상희는 겉으로는 웃었다. 속으로는 열을 다스렸다. '그딴 것에서 소유욕 부리지 말라고. 망나니야!' *** 김상희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몸이 완전히 굳었다. 이 얼굴. 절대로 잊지 못한다. 이 얼굴을 보기만 하면 온 몸이 경직되고 무섭다. 윌리엄이었다. "잠깐 나 좀 보지?" 김상희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얘는 또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크리스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는데 크리스는 여기 없었다. '어떡하지?' 하지만 김상희가 윌리엄에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얘 앞에만 서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적어도 윌리엄 앞에서는 말이다. 윌리엄이 앞서서 걸었다. 계속 불안해졌다. 좋은 일로 부르는 건 아닐 것 같았다.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해야 해.' 이 당시까지는 몰랐다.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별 생각없이 뒤따라 걸었다. 그 역시 여자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남자에게 저렇게 반 쯤 끌려가는(?) 게 여자에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 그것도 상대가 자신을 강제로 어떻게 하려고 했던 상대면 얼마나 기분이 처참하고 끔찍한 건지. 그것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부족했다. 정말 가볍게 걸었다. 요즘은 기분이 좋았으니까. '이상하게 김상희 공주님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단 말이야.' 절대 아침에 얻어먹은 딸기 때문은 아니다. "오라버니께서 딸기를 다 드시어서 제가 새로 준비했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지 계시지 않은지, 소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듣고 계신다면 오라버니께서 오시기 전에 어서 드셔요. 소녀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언제나 감사해요." 그 말을 떠올린 이주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뒤따랐다. 그의 발걸음은 굉장히 경쾌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 작품 후기 ============================ 고려왕국 최강전력? 꼬시는 거 쉽네여 ㅎㅎ 0070 / 0192 ---------------------------------------------- 차석교관 한진수의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 CCTV 사각지대. 이동수가 자주 괴롭힘을 당하던 곳. 이동수는 그 곳으로 김상희를 데려갔다. 사실 김상희를 여기까지 데려올 때에는 조금 두렵기는 했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갔어.' 어차피 괴롭힘 당하는 거야 일상다반사. 크리스마저도 이미 실망했다고 돌아섰다. 그렇다면 뭐가 더 무섭겠는가. 이왕에 이렇게 된 거. 분풀이라도 확실히 해야했다. 일 왕국의 아사히로가 씨익 웃었다. "왜? 발버둥이라도 쳐보지?" 김상희는 아사히로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그걸 파악해야하는데 불가능했다. '방법이... 보이지 않아.' 약자에게는 약자만의 방식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약자만의 방식도 떠오르지 않았다. 윌리엄도 흐흐흐- 웃었다. "뭐 구질구질하게 말로 합니까? 그냥 옷부터 찢고 보죠. 저번에 맛도 못 봤는데." 윌리엄의 눈이 음욕으로 물들었다. 아예 안 건드렸으면 모를까, 이렇게 겁에 질린 여자를 겁탈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쾌락 아니겠는가. 적어도 윌리엄에게는 그랬다. 윌리엄이 침을 꼴깍 삼키며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 맛을 보지 못한 처녀의 그 곳이야말로 제일 맛있는 반찬이죠." 그 말을 듣고,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이성을 놓아 버렸다. *** 이주형은 언제나 그렇듯 은신한 상태로 김상희를 따라갔다. 얘네들이 도대체 뭘하는가 싶었는데 말을 들어보니 가관이다. 이주형은 처음에 자신의 감정상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뭔가 불쾌한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불쾌한 건지, 그냥 가슴이 근질근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슴을 벅벅 긁어봤는데 이 근질근질한 기분은 도저히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이 기분은...?' 그 때, 알렉스 학자의 충고가 떠올랐다. 왕실 경비카드까지 받을 정도로 국왕폐하께 엄청난 신뢰를 받고 있는 학자의 충고 아니던가. 말도 안 되는 충고였지만 그걸 적용해봤다. - 왕자님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자 시야가 맑아졌다. 만약 왕자님이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스페셜 나이트는 진작에 튀어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과도 약간 기분이 달랐다. 왕자님을 구하는 것이 사명감이나 의무감 혹은 충성심때문이라면, 지금 이 기분은...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는 기분이야.' 이 이상한 기분 때문에 조금 주저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맛을 보지 못한 처녀의 그 곳이야말로 제일 맛있는 반찬이죠." 그래서 이주형은 이성을 잃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사람을 팬 적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페셜 필드를 펼쳐놨기 때문에 구타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다행인 점을 뽑으라면 이 세 놈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 죽이면 일이 좀 커진다. 이주형은 성인이 된 이후로 입에 담지도 않았던 욕설들을 한 순간에 뽑아냈다. "이 좆 같은 십새끼들이, 뭐가 어쩌고 저째? 처녀? 반찬? 이 씨발 새끼들아, 진짜 뒤지고 싶냐?" 이주형의 욕설은 굉장히 상스러워서 듣는 김상희마저도 인상을 찡그릴 정도였다. 그 정도였는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떠랴. 세 남자는 공포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일왕국의 아사히로가 말했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마저도 입술이 퉁퉁 부어서 발음이 제대로 안 나왔다. 이동수는 아예 기절했다. 너무 많이 맞았다.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다. 이주형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는 왜 이렇게 분노를 하고 있는 거지?' 모르겠다.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 김상희 공주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또 윌리엄이란 놈이 김상희 공주를 향해 이상한 말을 지껄일 때,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나는 어째서...?' 참고로 설명하자면 김환성도 자기가 김상희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조련(?)을 받아온 김환성도 그랬다. 이주형은 나날이 충격의 연속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국왕폐하의 명령과는 관계 없는 것 같은데.' 물론 국왕폐하의 명령. 그러니까 김상희를 지키라는 명령이 있기는 했으나, 그 명령과는 별개로 과하게 손을 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모르겠다.' 과하게 손을 쓴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는 했는데, 그 기분. 착각이었다. 김훈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 안 죽이고 뭐했냐? - 하, 하지만 그랬다가는 외교분쟁으로 번집니다. 이미 그 놈들이 자금성에 민원을 넣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유야무야 묻혀 지나가고 있지만 일이 정말 커질 수도 있습니다. 김훈상이 말했다. - 이주형. - 예.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 이주형은 순간 긴장했다. 김훈상은 가끔 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왕이다. 한진수가 느꼈을 때, '제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단 두 명중 한 명이다.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 말이다. 비록 얼굴을 보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핸드폰을 통해 보고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형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폐하께서... 화가 나신 것 같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 네 직책이 뭐냐? - 스페셜 나이트입니다. - 그렇다면 네 임무에만 집중해라. 외교니 분쟁이니. 그건 나의 영역이다. - ... 죄송합니다. 김훈상은 통화를 종료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을 씩씩대며 주위를 걸어다녔다. 마침 제국에서 돌아온 알렉스가 왕실 경비카드를 반납하기 위해 들렀다. 알렉스는 김훈상의 집무실로 돌아옴과 동시에 나가고 싶어졌다. '허, 헉. 타이밍 잘못 잡았다.' 지금 저 국왕폐하. 엄청나게 분노한 상태다. 모르긴 몰라도 대규모 무역거래에서 상당한 출혈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국왕이 저렇게 분노할 정도면 적어도 수조 원단위가 될 터. 겨우 억 단위에서는 저렇게 흥분한 모습을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도대체 얼마의 손해가 난 거야?' 나가고 싶었다. 괜히 불똥 튀는 거 싫다. 하지만 이미 들어왔다. "다, 다녀왔습니다. 옥체 강녕하셨습니까?" "아니." 알렉스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경비카드 너무 많이 썼나...?' 천하의 알렉스도 김훈상이 지금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서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김훈상의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었으면 학자가 아니라 점쟁이를 했을 거다. "알렉스." "예. 폐하." "질문을 하겠다." "예. 폐하." "가슴이 시키는 것과 머리가 시키는 것이 다를 때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알렉스는 제법 눈치가 빨랐다. 평소의 김훈상이라면 무조건 '머리가 시키는 것'을 한다. 가슴이 시키는 것을 하다가는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일반 개인이라면 그래도 되는데,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평소라면 당연히 머리가 시키는 것을 하시겠지.' 하지만 이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묻고 계신다는 건, 반대로 김훈상이 지금 가슴이 시키는 것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약 폐하가 국왕폐하시라면... 머리가 시키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좀 감이 왔다. "하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라면 가슴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 짧은 사이, 김상희 공주에게 뭔가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최근에 딱히 손해볼 것도 없었어. 힘을 과시한 입장에서 주변국이 심기를 거슬렸을 것도 없고. 그렇다면 답은 김상희 공주 하나 뿐이다!' 밤이 됐다. 김훈상은 강서영을 찾았다. 강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훈상을 맞았다. "오셨어요?" "서영." "네. 폐하. 제가 여기 있어요." 강서영은 문득 김훈상이 외로워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랬다. '내가 도대체 무슨 발칙한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럴 리 없다. 김훈상은 완벽한 왕 아니었던가. 흔들릴 리도 없고 외로울 리도 없다. 그게 강서영의, 아니 이 곳 여자들의 상식상 맞는 일이다. 남자가 여자에 대한 개념이 없듯, 여자 역시 남자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겠다. 강서영의 눈으로 본 김훈상은 절대 외로워할 리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서영." "네. 폐하." 이상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자신이 먼저 김훈상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김훈상이 더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내가 왕이길 원하냐, 남편이길 원하냐, 아버지이길 원하냐?" 강서영은 김상희에게 많이 배웠다. 김상희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적절한 답을 내놨다. "당신은 만민의 왕이셔요. 그렇지만 저만의 지아비가 되어주셨으면 하는 발칙한 바람도 갖고 있어요. 아마... 왕자님들도 그럴 거에요. 왕자님들에게는 하나 뿐인 아버지시니까요." "가까이 와라." 강서영이 김훈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강서영은 저도 모르게 김훈상을 꼭 안아줬다. 뭐랄까. 기묘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정말 놀라운 건 김훈상은 그 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강서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다. "저의 왕. 제 하늘. 제가 사랑하는 당신. 당신의 세상에 제가 조금이라도 발을 딛고 있다면... 당신의 무거움을 나누고 싶어요. 당신...지금 너무 외로워 보이셔요. 제가 외로움이란 구렁텅이가 생긴 당신의 마음을 메워줄 수는 없는 건가요?"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발칙한 계집이구나." 그제서야 강서영은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한 나라의 왕에게 저따위 말을 하다니. "저, 저는..."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으냐?" 김훈상의 손이 강서영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말의 내용 자체는 무서웠지만 김훈상의 표정은 온화했다. 눈빛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그리고 턱을 쓸어올리는 그 손길은 더 부드러웠다. 그리고, "사랑스럽구나." 귓가에 속삭이는 김훈상의 목소리는 더 달콤했다. 달콤하면서도 뜨거웠다. "아...!" 귓가를 간지럽히는 뜨거운 목소리 때문에, 강서영은 저도 모르게 야릇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무래도 김상희의 특별 강습(?)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온 몸에 힘이 축 빠져버렸다. 어떻게 자신의 입에서 이런 야릇한 소리가 나왔는지. 너무나 민망하고 창피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사랑스럽구나'라는 그 글자가 거대한 불길이 되어 온 몸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 보름달이 떴다. 한진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입을 열었다. "됐다...!"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 얼굴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저번에는 팔목도 잡았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김상희를 보러 달려가야했다. 시간이 얼마나 허락되었을지 모르겠다. 잠깐이나마 이 정신을 되찾았을 때, 김상희를 보고 김상희를 안고 사랑한다고 백번이고 말해줘야 했다. 한진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창문으로 뛰어 내렸다. "저, 저기봐! 사, 상급 비행술이야!" 교관들 쯤 되면 상급 비행술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 정도 속도의 상급 비행술은 불가능하다. 그냥 상급비행술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은밀하고 조용하게.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고 -김환성이 상급비행술을 펼쳤을 때엔 건물의 유리창이 마구 떨렸었다.- 빠르게 날아갈 수 있는 건 엄청난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1초. 1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김상희가 보이지는 않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고백했다. "보고싶어." 빠르게 날았다.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말로 표현을 해봐도 이 터질 것 같은 가슴은 주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 참아보려고 해도, 보고싶다는 단어가 목을 뚫고 올라와 계속해서 입 밖으로 비집고 새어나왔다. "사..."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한진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공중에 둥둥 떴다. "나는 또 왜... 여기 이러고 있는 거냐?" 혼란스러워졌다.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쿵쿵대고 있었다. 가슴에 손을 대봤다. 이 증상.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마력흐름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이 이상한 기분.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늘에 둥둥 뜬 상태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학생들 몇이 보였다.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돌아가야겠어." 몸을 돌리려는 순간, 김상희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남자가 옆에 있었다. 한진수는 몸을 돌리지 못했다. 몸을 돌리는 대신, 어지간해서는 뽑지 않는 검을 뽑아 들었다. ============================ 작품 후기 ============================ 가끔 김훈상을 주인공으로 로맨스소설을 써보고 싶은 충동이... 0071 / 0192 ---------------------------------------------- 진격의 딸등신 *** 이주형이 물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그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가 가득했다. 사실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김상희는 언어폭력에 이미 익숙하다. 태어나자마자 처음 들은 말이 '또 계집아이라니'와 같은, 지구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말이었는데. 이 정도 언어폭력이야 감수 할만 했다. 김상희는 이번에도 연약한 척을 했다. 완전히 '척'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실제로 무서웠던 건 맞다. 김상희의 몸이 휘청거렸다. 물론, 일부러 그런 거다. "스페셜 나이트님...아." 이주형이 얼른 김상희를 부축해줬다. "가, 감사해요. 소녀가 너무나 미욱하여 이렇게 폐를 끼치고야 마네요. 소녀는 정말 못된 소녀에요." 그러자 이주형의 얼굴에 근심걱정이 또 서렸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아오. 아까 그 놈들 완전히 죽여버릴걸 그랬다. 그랬다가 문득 놀랐다. '그랬다가는 일이 정말 너무 커져.'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죽이지 않는 게 맞다. 그런데 감성적으로는 그 놈들. 죽여도 열 번은 더 죽였다. '폐하께서 어련히 처리하시겠지.' 돌이켜보니 국왕폐하께서는 그 놈들을 정말로 죽여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역시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데, 그가 받은 느낌은 그랬다. 이주형은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하늘을 쳐다봤다. '차석교관 한진수!' 황급히 검을 빼들었다. 번쩍! 갑자기 눈부신 섬광이 대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주형이 외쳤다. "차석교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번 임무. 진짜 쉬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어렵고 난해한 건 둘째치고, 이렇게 진짜 칼을 빼드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마력학원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진수 역시 평소 꺼내지도 않는 검을 꺼내들었다. "너는 누구냐?" 한진수의 눈이 김상희를 향했다. 김상희. 방금 쓰러질 뻔 했다. 분명 힘이 풀렸었다. "너...무슨 짓을 한 거냐?" "김상희 공주님이 쓰러질 것 같아 부축을 해줬을 뿐입니다." 김상희는 마력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지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만약 마력이 눈에 보인다면, 빨간색과 파란색이 이빨을 드러내고 마구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학생들은 경악했다. "차, 차석교관님이 검을 빼들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차석교관쯤 되는 대천재가 검을 빼들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엄청나다는 뜻이다. 어지간한 상대는 손가락만 까딱해도 제압이 가능하니까. "차석교관님이 대등하게 기싸움을 하다니...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야?" 그들은 저 남자가 스페셜 나이트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 곳에 김환성이 있다면 모를까. "저 계집애는 김상희공주 같은데?" "무슨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김상희는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오라버니. 고, 고정하시어요." 학생들이 눈을 크게 떴다. 저 계집애. 아무래도 미친년 같다. 감히 차석교관의 앞을 막아서다니. 그것도 검을 빼든 차석교관의 앞을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력을 가진 남자들도 저런 짓은 못 한다. 하물며 미천한 계집아이가 감히 차석교관의 말을 자르고 앞을 막아서다니. "미, 미친 계집이야..." "죽으려면 뭔들 못하겠어." 성난 차석교관의 검에, 김상희의 목이 잘려나갈 것 같은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차, 차석교관님이 검을 내렸어...?" 차석교관 한진수가 검을 스르르 내렸다.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 역시 검을 갈무리했다. "그렇군. 너는 스페셜 나이트인가?" "그렇습니다." "스페셜 나이트가 어째서 김상희를 부축하고 있는 거지?" 이주형은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한진수. 대천재임과 동시에 김상희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왠지 불쾌해졌다.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저는 공주님을 모시고 돌아가야 하니 길 좀 터주시죠." "차석교관으로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다."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길래 이야기가 저렇게 진지하단 말인가. 얼마나 진지하냐하면, 제 3자가 보기엔 살벌할 정도였다. 거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오라버니. 별 일 아니어요. 높으신 오라버니께서 신경쓰실 일 아니어요." 그 말에, 한진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신경쓰실 일 아니어요.'라고 말했다. 신경 안 쓰는건 당연한 건데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역시 이유는 잘 몰랐다. "그렇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미 왕에게도 보고가 올라간 상태다. 굳이 차석교관에게까지 알릴 필요 없지 않은가. 한진수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페셜 나이트. 너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라." 본연의 임무는 누가봐도, 왕자인 김환성을 보호하는 거다. 이주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 본연의 임무가 이겁니다만." "나는 지금 너와 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다."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학생들은 이 둘의 대화를 못 듣고 있다. 다만, 김상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주형씨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본연의 임무가 나를 지키는 거라고?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스페셜 나이트가 공주따위를 지킬 리 없잖아. 아무리 개차반이 나를 좀 아껴주고 좋아한다고 해도, 왕국 최강의 전력을 이런 일로 허비할 리는 없잖아. 에이. 말도 안 돼. 김상희도 못 믿는데, 한진수는 오죽 하랴. "못 믿으시겠지만 진짜입니다. 제게 내려온 명령서입니다." 별 거 없었다. 잘 지키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국왕의 명령서까지 나온 판국에, 한진수도 뭐라고 더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데려가겠다. 국왕폐하의 명령을 받드는 것에는 감히 간섭하지 않겠다. 대신 은신해라. 스페셜 나이트가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단 말이냐?" "......." 이주형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는,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에 비해서 얼굴이나 인적사항이 좀 더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대외에 공개하고 다니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다. 한 명, 한 명이 전력인데 타국에 노출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괜히 매일 은신해서 다니는 거 아니다. 그게 당연한 건데, '왜 싫지?' 이유는 역시 모르겠는데 싫었다. 대놓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진수의 말이 맞기는 했기에 반박하지 못하고 은신하고 말았다. 명분에서 밀렸다. 젠장. 이주형은 조금 억울했다. 한진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 여자는 내가 지켜." *** 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 여자는 내가 지켜?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진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보며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한진수는 저렇게 표정이 다양하지 않을 텐데, 하고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진수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이마에 열점 하나가 피어오르고, 그 열점은 이내 활화산이 되어 온 몸을 구석구석 불태웠다. 입술 자체는 조금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부드러웠다. 내 몸은 뜨겁게 불타올라 달콤하게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주위에서도 난리가 났을 거다. 그럴 거다. 그러나 주위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순간 만큼은 나랑 한진수. 딱 둘만 남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오라...버니?" 진수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 따뜻한 목소리였다. 정말 헷갈린다. "알아. 네 입장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제 내가 나오면 암호를 말할게. 된장찌개라고. 그러면 안심해도 돼. 시간이 많지는 않겠지만... 나는 한진수가 맞아.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한진수." 어느새 나는 이상한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아마도 이게. 스페셜 필드라고 불리는 거겠지. "진수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눈물이 차올랐다. 모르겠다. 기쁜데, 자꾸만 눈물이 튀어나왔다. 진짜 주책이다. 진짜 바보 같다. "미안해. 너 더 신경써주지 못해서, 더 챙겨주지 못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진수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 눈가를 닦아줬다. "울지 마. 넌 뭘 해도 이쁘고 심지어 울 때도 이쁘지만, 네가 울면 내가 좀 슬퍼." 나는 내 나름대로 씩씩하게 웃었다. 이 상황이 뭔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한진수가 맞았다. "조금만 슬퍼?" 한진수가 피식 웃었다. "아니. 엄청 슬퍼. 여기 손 대봐." 한진수가 내 손을 잡았다. 보드랍게 감싸 안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손을 잡았을 뿐인데, 한진수의 감촉은 내 몸 전체를 감싸안고 심장을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내 손이 한진수의 왼 쪽 가슴에 닿았을 때, "아..." 한진수의 상태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기가 막 쓰라리다고 소리치고 있지 않아?" 진수는 이런 말을 자주하곤 했다. 가끔은 내가 오그라든다며 타박을 주기도 했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들을 자주 읊어대곤 했었으니까. 그 땐, 민망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니까 울지 마. 네가 울면 내가 더 아파." ...아니. 정정. 조금은 오그라든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진수의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한진수가 말했다. "좀만 더 가까이 와." 내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또 말했다. "아니. 내가 갈게." 그리고 한진수는 날 꽉 껴안았다. 숨도 못 쉴 만큼. 정말 꽉 안았다. "너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 내가 갈게. 힘들면 도망가도 돼. 도망가면 내가 쫓아갈게. 약속할게. 알잖아. 나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 대신... 시간은 좀 더 걸릴 거야. 아니. 좀 많이 걸릴 수도 있어." "......." 무슨 말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예상하기로는 이중인격 같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인격이 나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거나. 시간이 짧다거나. 뭐 그런 거랄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적어도 지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사랑하는 한진수가 맞으니까.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한진수가 맞으니까. 나는 전생에 한 번도 해주지 못했던 말을 해줬다. 진수의 품에 안겨서 말이다. "사랑해." 진수가 날 더 꽉 끌어안았다. "내가 더." "아냐. 내가 더." "내가 훨씬 더." 한진수의 오른손이 내 뒷통수에 닿았다. 한진수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카락 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을 만큼 사랑해." "......." 나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진수의 따뜻한 체온보다 훨씬 뜨거운, 진수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은 눈물의 형태가 되어, 입이 아닌 눈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이주형 나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정신을 차려보니 한진수는 옆에 없었다. *** 알렉스는 긴장했다. 저 딸바보. 아니, 딸등신. 뭔가 일을 내도 단단히 낼 것 같은 기분이다. "폐하...?" "도저히 말로는 안 되는군." 김훈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알렉스. 이건 나를 무시하는 행위로 봐도 무방하겠지?" 아뇨. 사실 그렇게까지 가는 건 논리 비약인 것 같습니다만. 김훈상의 논리도 아예 성립자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논리는 있었다. 김상희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건드렸다. 김상희가 중요한 게 아니고, '김상희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한 국왕'을 무시했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어떻게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기는 있다. '사실 그 말을 누가 믿어?' 알렉스도 좀 긴가민가한 상태다. 왕이 진짜로 딸 사랑 때문에 예전에 미친 짓 -왕이 직접 펜릴왕국에 쳐들어갔던-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왕자가 큰 일을 당했어도 전쟁은 잘 안 난다. 그런데 딸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모두가 '김상희'는 그저 '명분 만들기' 위한 제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한다. "폐하.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김훈상도 그걸 안다. 그걸 알기는 아는데, 열 받아 죽겠다. "알렉스." "예. 폐하." "나는 결정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김훈상이 말했다. "나는 왕이기 전에 사람이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언제나 사람이기 전에 왕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묻기에는 김훈상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나는 사람으로서, 이번 일을 절대 참을 수가 없다." 그제서야 알렉스는 한 줄기 광명을 찾았다. 사실, 한 단어만 바꾸면 쉬웠다. '나는 아버지로서, 이번 일을 절대 참을 수가 없다.'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이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각색해보면, '나는 아빠로서, 이번 일을 절대 참을 수가 없다.' 쯤 되겠다. 스페셜 나이트의 통수권자. 고려왕국의 정점에 선 국왕 김훈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한진수. 대천재임과 동시에 김상희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왠지 불쾌해졌다. 작가해설: 너한테 주기 아까운 심리라고 합니다. 0072 / 0192 ---------------------------------------------- 진격의 딸등신 ***72 김유신은 어지간해서는 왕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사람들이 말하는 김유신의 충정심은 다소 미련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을 열었다. "폐하.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김유신. 내가 이런 걸로 농을 던질 것 같나?" "... 그런 건 아닙니다만..." 하지만 진심이라고 하기엔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김유신. 네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안다." 김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왕이 생각하지 못한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김훈상은 김훈상이기에 김훈상이며, 자신이 충정을 바치는 왕이 아니었던가. "...명 받들겠습니다." 이번에는 선전포고도 없었다. 고려왕국은 커다란 일을 터뜨려 버렸다. 제국 정보부 국장 김국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걸 도대체 어떻게 황제에게 보고를 올린단 말인가! 올렸다가는 묵사발 나도 된통 나게 생겼다. 김국현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여태까지 동향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뭘 했나!" 하지만 김국현도 안다. 이건 정보부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정보부 요원들이 실수해도 되는 몇 가지 예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스페셜 나이트다. 스페셜 나이트가 마음 먹고 움직인 일이다. 알아내면 잘한 거고, 못 알아냈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그걸 알기는 아는데, 이번 건은 스케일이 지나치게 컸다. '꼼짝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겠군.' 하지만 보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제국의 정보부장이며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보고를 올리기 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을 통해 황제에게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모가지가 날아갈 지도 모를 일이다. 황제를 찾았다. "폐하." "말해 봐라." 김국현은 뜸을 조금 들였다. 제국 정보부의 정보부장은 어딜가나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다닐 만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권력이란 건 언제나 상대저인 거다. 그는 지금 상당히 긴장했다. 솔직히 말해 쫄았다. "그, 그것이..." 말을 이었다. "고려가 펜릴과 일왕국을 쳤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황금 궁정이 바르르 떨렸다.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황제 역시 분노해서 마력을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저 분노가 나한테 날아오지 않기만을 바라자.' 김국현은 빌고 또 빌었다. 괜히 옆에 있다가 불똥 맞으면 진짜 피곤해진다. 이 정도로 사형을 시킬 황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정보를 제때 파악하지 못하는 정보부는, 쓸모 없는 기관이니까. 다행히 황제는 이성을 되찾았다. "후..." 이 때가 기회다. 분노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김훈상의 행동은 분명 도가 지나쳤습니다. 이 것은 저희 제국을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황제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저 말이 맞다. 그래서 분노하고 있는 거다. 저번에 펜릴왕궁을 칠 때에도, '허락'이 아닌 '통보'를 해왔었다. 당시 펜릴의 왕자가 김상희에게 사과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래서 유야무야 잘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달랐다. 황제는 분노를 다스렸다. 저번에 통보를 해왔을 때에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자존심 강한 김훈상이 통보라도 해줬으니 그러려니하고 넘어갔다. '김훈상의 속셈이 도대체 뭐지?'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다. '제국을 도발할 리는 없어.' 제국이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역시 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사실상 따지고 보면 제국은 고려보다 훨씬 강하다. 전체적인 화력은 그랬다. '분명. 뭔가 감추고 있는 꿍꿍이가 있다.' 김훈상쯤 되는 걸출한 인물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따위로 움직였을 리는 없었다.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김국현. 진상을 철저하게 파악하도록 해. 김훈상에게 뭔가 속셈이 있다. 그걸 파악해라." 김국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 폐하. 그런데 고려에 대한 처분은...?" 고려는 감히 제국에 통보조차 하지 않고 두 나라를 쳤다. 두 나라 역시 제국에 매년 조공을 바치는 나라이다. 특히나 일 왕국 같은 경우는 펜릴왕국보다 덩치도 더 컸고, 제국에서 소비되는 해산물의 30퍼센트가 넘는 양을 충당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제국과 긴밀한 나라이기도 했고. 황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잠시 보류하도록 한다." 김훈상.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 와. 진짜 놀랄 노자다. 편지가 또 왔다. 두번 째 편지다. 왕으로부터 친필 편지를 받는 공주가 있다? 이건 누가 들어도 안 믿을, 말도 안 되는, 아예 거론될 가치 자체가 없는 개소리다. 하지만 내 눈 앞에 이렇게 편지가 떡하니 있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 개차반씨가 나한테 보낸 편지다. - 혼 내줬다. 저번에는 죽지마라. 였는데 이번에는 '혼내줬다.'였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래?'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죽지마라라는 건 어쨌든 나름대로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뭐. 그래. 죽지 말라는 건 나름대로는 걱정해주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혼내줬다니? 뭘 혼내줘?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써주면 네 손가락은 부러지기라도 하는 거니? ...라고 생각 했는데. 이 개차반. 스케일이 엄청났다. "고려가 일왕국과 펜릴을 하루 간격을 두고 동시에 쳤대." "그 와중에 나이트가 7명 넘게 죽었다는데. 고려쪽 피해는 전무하고." "대박. 그게 진짜야?" "대박이지. 또 어떻게 보면 왕국 두 개를 접수하는데 나이트 7명밖에 안 죽인 건 대단한 거아냐?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의미잖아." 일왕국의 국왕과 펜릴 왕국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고 했다. 왕궁이 점거당하는 바람에 변방의 병력이나 다른 병력들은 어떻게 손 쓰지도 못했단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이라고 했다. "펜릴은 저번에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한거네." "그만큼 스페셜 나이트의 저력이 엄청나다는 거겠지." 개차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설마 '혼 내줬다'가 저 두 나라를 혼내줬다는 건 절대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어. 아무리 걔가 날 조금 아낀다고는 해도, 이건 스케일이 너무 크다. 내 생각에 그건 아닐 것 같다. 정말 잘 쳐주고, 잘 쳐줘서, '지구의 딸바보라고 생각해봐도...' 지구의 딸바보쯤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쉽게 예를 들면, 학교에 갔는데 딸내미가 큰 일을 당할 뻔 했다고 해서, 그 동급생의 나라 전체를 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쨌든 이 엄청난 스케일의 대 사건은 우리 학원을 완전히 강타해 버렸다. 우리 반 뿐만 아니라, 전술과 외교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더욱더 큰 이슈가 되었다. 골자는 두 개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틀만에 두 왕궁을 접수하여 속국화 시킬 수 있었는지. 또 국왕 김훈상의 생각은 무엇인지. "제국에 통보조차 하지 않았대. 그래서 황제폐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다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아무리 우리 개차반씨가, 자기가 말하는 것처럼 제일 세다고는 해도 감히 제국을 이런 식으로 도발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사건. "고려가 두 나라를 제국에 헌납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국제정세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원래 두 나라를 제국에 속해있기는 했다. 그러나 완전히 제국 소속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속국이라기보다는, 제국에게 조공 혹은 세금을 바치는 독립적인 세력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 그게 바뀌게 된 거다. 아예 제국 소속의 나라로. 고려가 제국에 그걸 바쳤단다. 학원에 열풍이 불어닥쳤다. - 고려 국왕 김훈상이 진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 드디어 고려가 입을 열었다. 이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워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그 소식을 믿지 못했다. - 김상희는 고려의 보배임을 선포하는 바이며. 미친 소리다. 어떻게 계집 따위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무려 고려의 보배란 말인가. 계집따위가 보배라면, 그럼 남자들은 뭐가 되는가? 남자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고려에는 보배라는 뭐, 다른 의미의 단어가 있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진짜 '보배'를 뜻했다. - 김상희를 능욕하는 것은 곧 고려를 능욕하는 것이라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 경고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 '김상희'는 어디까지나 고려가 억지를 부리기 위해 펼쳤던 억지 명분 아니었던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알렉스와 김상희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 우리의 경고를 무시한 펜릴과 일왕국을 공격했으며. 이쯤되자 제국의 정보부는 진짜 헷갈려 했다.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김국현은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초조해졌다. 저 발표가 진짜일리는 없다. 진짜 일리도 없고 진짜여서도 안 된다. 차라리 볼펜이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걸 믿고 말지. '숨겨놓은 꿍꿍이가 도대체 뭐지?' 일단 중간보고를 위해 황제를 찾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황제의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는 거다. 그건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 그렇군. 그런 것이었어." "......." 김국현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김훈상도 우리 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거지." "...가르침을 청합니다." "우리에게 허락을 구했다면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보했다고 해도 우리가 막았겠지." 국제평화를 지키는 건 제국의 몫이니까. "김훈상은 그걸 알고 우리 몰래 쳤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죄입니다." "하지만 김상희를 걸고 넘어졌지. 김상희는 내가 학원에 직접 넣은 계집이다. 놈들은 감히 내가 직접 선별한 계집아이를 자신들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어. 그래서 나는 분노하게 된 것이다." 아뇨. 딱히 분노해 보이는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고 있지 않으셨잖아요. 김국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꾹꾹 눌러담았다. "김훈상이 나의 분노를 알아차리고 두 나라를 쳤다. 고려는 그렇게 함으로써 세 가지 이득을 얻었다. 하나는 스페셜 나이트의 힘을 다시 한 번 광고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우리 제국에게 밉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제국에게도 명분을 줬다는 것이다." 두 왕국을 제국에 고스란히 바쳤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우리는 전쟁을 막지 않았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어서 좋고, 고려는 고려 나름대로 좋고. 물론 세간의 욕은 감수해야겠지만 김훈상이 그 정도 욕을 감수하지 못할 위인도 아니고." 김국현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좀 아닌 것 같다. 지금 황제는 뜻하지도 않게 두 나라를 공짜로 얻게 되어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이번 일로 고려에게 피해가 있었으면 있었지 이득은 그렇게 크지 않다.' 스페셜 나이트가 강한 것은 모두가 안다. '정말 황제폐하를 회유하기 위해서, 저번에 무턱대고 통보한 것을 사과하는 의미에서, 명분있는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움직일 인물인가? 김훈상이?' 대답은 '아니오'였다. 뭔가가 더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일단은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폐하의 혜안은 언제나 놀라우십니다." 상희학을 배우기 전까지, 절대 파악할 수 없는 김훈상의 심리상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제국 정보부는 숨가쁘게 움직였다. 정말 바빠졌다. *** 사실 나는 우리 개차반씨가 엄청난 스케일의 대사건을 일으킨 것에 관해서 그렇게 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뭘 생각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개차반씨가 무슨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려 애쓰고 있지만 나는 아니다. 그보다 나는 신경써야할 문제가 있었다. '곧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어.' 결혼식. 지금의 한진수는 내가 아는 그 한진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한진수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한진수가 내재되어 있다. 분명 알고 있다.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수가 너무 보고 싶다. 진수의 품에 안겨 있고 싶다. 그리고 나도 진수를 안아주고 싶다. 비록 지금의 한진수는 내게 공포의 대상일지 몰라도 말이다. 지금의 한진수에게 나는 손가락 까딱 하면, 죽어버릴 수도 있는 하찮은 존재지만 나는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진수를 사랑한다. 이제 겨우 한 달 남았다. '한진수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를까...?' 알 수 없었다. 약혼은 남자 측에서 얼마든지 파토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미룰 수 있는 거고. 알렉스 학자님에게 편지가 왔다. 거기에는 놀라운 소식이 한 가지 적혀 있었다. - 고려의 학자들이 지금 김상희 공주님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 작품 후기 ============================ 제국 정보부 : 아무리 뒤져봐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제국 정보부 국장 : 아냐. 뭔가 있다...! 제국 정보부 : 국장님, 진짜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ㅠㅠ 제국 정보부 국장 : 아니. 진짜 뭔가 있다니까?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뭔가가! 제국 정보부 : 아니, 저희도 아는데 진짜 모르겠습니다 엉엉 ㅠㅠ 도대체 김훈상은 어디까지 천재인 겁니까 ㅠㅠ 뭘 노리는 겁니까 ㅠㅠ 제국 정보부 국장 : 자긍심을 가져라! 우리는 제국의 정보부다! 우리가 못 알아낼 것은 하늘 아래 아무것도 없다!!! 제국 정보부 : (멘붕) 진짜 암것도 업어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미치겠네 진짜 작가해설: 진정해. 그게 정상이야. 0073 / 0192 ---------------------------------------------- 특히 넌 이 곳이 민감하지 *** 고려의 학자들은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당연히 우리가 모르는 정치적 책략이 있으실 겁니다." 토론의 주제는 '김상희'였다. 김훈상이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면서 김상희가 왕국의 보배라고 못을 박아 버렸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김상희 공주를 보배로 인정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황이 이미 이렇게 커진 이상, 왕국의 입장에서는 김상희 공주가 무조건 보배여야만 하는 거죠." 토론의 결과는 대충 이랬다. 왕이 공주를 진짜로 보배라고 여기고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왕국의 입장 상 김상희 공주는 무조건 왕국의 보배여야만 했다. 그래야 타국을 쳤던 것에 대한 설명이 되고 이유가 되니까. 한편, 알렉스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가졌다. '물론 저 말이 근거 없는 말은 아냐. 당위성을 부여하려면 뭐가 됐든 김상희 공주는 왕국의 보배여야만 해. 하지만... 폐하께서는 김상희를 정말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확률이 높아.' 학자들이 또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계획하시고 계셨던 것 아닐까요?" 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주에게 보배칭호를 주는 것.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됐다. 아무리 김상희 공주가 고어 해독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수학적, 과학적 지식의 기반을 마련했다고는 해도 한낱 계집아이 아닌가. 10 만원 짜리 일을 한 노동자에게 1억을 주는 사장은 없다. 계집아이따위에게 보배의 칭호는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그 땐 이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는군요." "역시 폐하이십니다. 수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알렉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면... 오히려 엄청나게 황당한 답이 나오지.' 물론 대놓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학계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고 심하면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상희학은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학문 같지도 않은 학문이었으니까. '폐하께서 김상희를 정말로 사랑하시고 또 정말로 보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면... 모든 상황은 복잡한 계산 없이 간단명료하게 정리 되지.' 그렇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상황이 간단하게 정리 된다. 알렉스는 혼자 피식 웃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상희학은 아직 발표될 수 없는 학문이다. 이 것이 정설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연구는 계속 하되 입은 열지 않기로 했다. *** 약혼이라는 건 얼마든지 파토날 수 있다. 여자 쪽에서는 할 수 없지만, 남자 쪽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김상희와 한진수의 경우가 그랬다. 김훈상이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 일반적인 상황과는 달라도 아주많이 달랐다. 김훈상의 팔을 베고 누운 강서영이 김훈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되물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엄청난 발전이다. 원래대로라면 겁에 질려 아무말도 못했을 거다. 김상희를 보고 배운 최대 수혜자를 뽑으라면 당연히 강서영이다. "곧 결혼식이군." 강서영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김상희와 한진수의 결혼식이 있을 거다. "한진수는 왕국의 자랑 아닌가요?"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제국에서도 스카웃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녀석이다. 하지마 마음에 안 든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한진수를 사위로 삼으려고 노력해야 했건만, 그러고 싶지가 않다. "김상희는 왕국의 보배다." 강서영은 이럴 때마다 헷갈렸다. 왕이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 건지. 그래서 강서영은 용기를 냈다. 평소라면 용기를 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몸을 가리던 모든 천 조각들을 벗어 던지고 뜨거운 사랑을 나눈 뒤, 김훈상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이 때라면 어떤 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강서영은 이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김훈상이 자신을 아껴줄 것 같은 기분은 들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김상희 공주를 사랑하시나요?" 김훈상은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강서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건방지구나. 감히 왕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지다니." 내 느낌은 틀렸던 걸까. 폐하께서는 화가 나셨을까? 강서영은 조금 무서워졌다. 김훈상의 목소리가 조금 매서워졌다. "네 질문.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겨우 공주따위를 내가?" 강서영은 이제 정말로 무서워졌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멍청한 계집 같으니라고! 너 진짜 왜 그랬어.' 우리 상희라면 이런 바보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거야, 하고 자책했다. 김훈상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 순간 순간. 1초 1초가 너무 무겁고 무섭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렀다.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는 나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신...?" "서영. 나는 너를 보면 언제나 내 품에 안고 싶다. 네 입가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 좋고, 네 붉어진 얼굴을 보는 것도 좋다. 특히 넌." 김훈상이 강서영의 귀를 살짝 물었다. 혀로 귀를 핥으면서 부드럽게 애무했다. "아...!" 강서영은 저도 모르게 옅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 곳이 민감하지. 나는 너를 안을 때마다 항상 느낀다. 사랑스럽다고." "......." 강서영은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이 몇 년 사이. 많이 느꼈다. 김훈상은 이제 예전의 김훈상이 아니었다. 정말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김상희를 생각할 때엔 느낌이 조금 다르다." "......." 김훈상은 딱히 대답을 필요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강서영은 조용히 그 말을, 밖에서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충격적인 말들을 잠자코 들었다. "나는 그 아이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저번처럼 또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밥은 잘 먹었을까, 길 가다가 넘어지지는 않았을까." 여자는 기본적으로 마력이 없다. 그래서 남자보다 훨씬 연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길 가다가 잘 넘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사실. 김훈상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김훈상의 눈에 김상희는 그저 길 가다가도 자빠지는 그런 애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아이에게 편지가 오면 나는 그 편지를 수십 번씩 반복해서 읽는다. 그 작고 어린 것이 타국에서 홀로 떨어져 온갖 멸시를 받으며 공부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만 하면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당신은... 상희공주를 많이 사랑하고 계시는 거에요." 김훈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강서영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군." 강서영은 김훈상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넓기만 해보였던 이 등이, 지금은 가녀리게 느껴졌다. 꼭 안아주고 싶었다. "쓸데없지 않아요. 폐하께서는 김상희 공주를 사랑하고 계신 것이어요. 틀림 없어요." "감히 왕에게 계집따위가 가르침을 내리려는 것이냐?" 강서영도 이번에는 겁먹지 않았다. 꽤나 당돌해졌다. 그저 김훈상의 등을 어루만지듯 쓸어 내렸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이 기분. 나쁘지 않구나." 이 기분. 이상한데 나쁘지가 않다. 묘하게 위로받는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김훈상은 고려왕국의 최정점에 위치한 자다. 제왕으로 교육받아 왔고 제왕으로 살아왔다. 그는 사람 김훈상이기 이전에 국왕 김훈상이었다. 그의 모든 말에는 정치적 책략과 외교적 술수가 숨어 있을 것이며, 모든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는 사람이기 이전에 왕이니까. 지금 계집따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감히 계집이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등을 쓰다듬고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기분... 이상하게도... 나쁘지가... 않다.' 신기하게도, 이 기분이 좋다. 강서영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사랑해요." 김훈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강서영의 양 팔목을 붙잡은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가려주고 있던 비단 이불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강서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김훈상의 입술과 강서영의 입술이 겹쳐졌다. 김훈상과 강서영에게 밤은 너무나 짧았다. *** 내 결혼식이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모르겠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한진수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 없다. 나는 한진수 이외의 다른 남자를 남자로 생각해 본적 없고, 앞으로도 한진수 외에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도 없다. 지금 크리스가 내게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크리스를 보는 느낌은 잘생긴 아이돌 남자를 보는 그런 느낌이다. 보면 눈이 즐거운, 딱 그 정도 느낌. '하지만 지금의 한진수는...' 그런데 묘했다. 지금의 한진수는 내가 아는 그 한진수가 아니다. 지구의 그 한진수가 아니라 셰계의 추앙을 받고 있는 대천재 한진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누구랑 결혼을 하는 것일까? 똑같은 외모.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그 한진수와 결혼하는 것. 그게 내가 사랑하는 한진수와 결혼하는 것과 같을까? '정말 모르겠어.' 어차피 결혼은 내정되어 있다.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도망은 치지 않을게.' 내가 사랑하는 한진수가 내게 말했다. 도망쳐도 된다고. 그럼 자기가 쫓아오겠다고.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되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진수는 내게 말했었다. - 나는 다시 태어나도 무조건 너랑 결혼 할 거야. 그래서 내가 되물었었다. - 내가 만약에 너보다 엄청 연상이고 엄청 못생겼고 뚱뚱하고 엄청 가난해도? 진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 나는 네가 예쁘고 착해서 좋아하는 게 아냐. 사실 나는 이 때, 조금 찔렸었다. 나는 진수에게 결코 '착한 여자'는 아니었었다. 특히 연애 초기에는 난 정말 못된 년이었다. - 나는 네가 그냥 수희라서.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 솔직한 말로 나는 진수의 이런 대사가 좋았다.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진수는 언제나 진지했었다. 재미는 없었지만 진심은 있었다. 그 때 나는 좋으면서도 괜스레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닭살! - 진짜야. 나는 좋으면서도 '피이' 하고 소리내며 괜히 토라진 척 했다. 왜 토라진척을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너무 민망해서. -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네가 그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어. 나보다 나이가 10살쯤 많아도, 아니 100살쯤 많아도 나는 너를 찾아서 사랑한다고 고백 할거야.약속할게. - 어휴. 말이나 못하면! 그리고 내 기억에 의하면, 그 때 우리는 키스를 했었다. 부끄럽지만 흠흠. 내가 먼저 덮쳤다. 이 말을 했을 때엔, 그 땐 나도 정신 많이 차렸을 시기였었고 나도 진수를 나름대로는 많이 좋아했을 시기였다. 흠흠. 하여튼. 뭐. 내가 먼저 덮친 건 넘어가도록 하고. 어쨌든 중요한 건 내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거다. 문제는 그 결혼식이 조금 미뤄졌다. 김환성이 내가 깎은 사과를 오물거리면서 잘도 씹어 먹었다. 야. 나도 좀 권하라고. 나도 사과 좋아한다고. 이 망나니야. "한진수가 다른 곳으로 출장 간다네?" "...네?" "프리온 나이트로서의 일이 생겼나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인다함은, 곧 어떤 나라 하나가 지워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우리 둘째 망나니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야. 프리온 나이트 자체가 워낙에 비밀에 가려진 집단이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게 알려진다면 그건 이미 프리온 나이트가 아닐 거다. 망나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똥개. 너. 결혼 좀 나중에 해도 되겠다." "...네?" "그 출장. 기간이 안 정해져 있거든. 언제 돌아올지 몰라." ...야. 근데 너 왜 이렇게 즐거워 하냐? 뭐 잘못 먹었냐? 뭘 좀 잘 못 먹어줬으면 좋겠다. 얘가 캑캑! 거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좀 즐거울 것 같은...아. 이건 아닌가. 흠. 나 변태 아니다. 그냥 쌓인 게 많아서 그래. 하지만 고려왕가의 핏줄. 고려왕가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이 놈이 그럴 리 없다. 특히나 무식하리만치 강대한 마력을 가진 망나니다. 만약 목구멍을 뭔가가 막아버린다면 마력이 무식하게 뚫어버리겠지. 김환성은 매우 신나했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신난 만큼 흥분했다. "날아라, 헝거비! 훨훨 날아랏!" ...야. 저거 나보고 주워 오라고...? 열려있던 창문을 향해 날아간 헝거비는 정말 하늘 끝까지 날았다.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김환성은 내게 저걸 주워오라 말라 말도 없이 사과를 계속 오물 거렸다. '설마 진짜 주워오라는 거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아니지? 망나니야? 네가 망나니이며 진화한 망나니이기는 해도, 그렇게 경우 없는 망나니는 아니잖아. 제발! 몇 분 뒤. 크리스가 찾아왔다. 크리스의 손에는 헝거비가 들려 있었다. 김환성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크리스는 김환성에게 인사를 한 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주 환하게 웃었다.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결혼식 못하게 되어서 난 정말 기뻐." 김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너도 안 돼. 안 줘." 어라. 방금 김환성이 뭐라고 한 거 같은데? 말이 너무 빨라 제대로 못 들었다. 마력 없는 여자들을 배려 좀 해달라고. 이 자식아. 김환성이 헝거비를 받아들면서 물었다. "여긴 웬 일이냐?" 언제나 그렇듯, 크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김상희 공주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하려구요." ============================ 작품 후기 ============================ 수위조절이 어렵군요... ㅂㄷㅂㄷ 가만히 놔두면 내 손은 19금을 넘어선다...!!! "오예하지 말아요. 저는 순수합니다. 19금이 뭔가영? ㅇㅅㅇ순수함의 대명사 비츄!!!" (비츄가 미쳣다고합니다 속닥속닥) 0074 / 0192 ---------------------------------------------- 뽀뽀 안 하면 사형 ***74 크리스의 제안은, 이 세계의 관점으로 봤을 때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크리스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놀라운 것이기는 했는데, 이 아이의 제안은 더욱 더 놀라웠다. 크리스가 싱긋 웃었다. "데이트를 하자는 거야." "소녀는 약혼을 한 몸이어요." "그 결혼 기약 없이 미뤄졌잖아. 약혼 같은 거. 중요한 것도 아니고." 크리스는 약혼 같은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김환성은 굉장히 불만인 듯 사과를 향해 신경질적인 포크질을 퍼부었다. 크리스의 말이 맞기는 맞다. 결혼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약혼같은 건 중요한 거 아니다. 남자 쪽에서 파토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거다. 우리 망나니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는데,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우리 망나니. 일어섰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이봐. 입안에 든 사과는 어떻게 다 삼키고 말을 해주면 안 되겠니? "야. 너. 왜 내 똥개한테 그딴 거, 뭐라더라... 데... 뭐?" "데이트입니다, 왕자님." "그래. 그거. 그거 상당히 기분 나쁜 단어야. 그게 뭐하는 건데?" "호감이 있는 남녀가 만나서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죠." "즐거운 시간?" 우리 망나니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뭔가 불안하다. "그럼 똥개. 나랑 데이트하자." 야. 넌 데이트가 뭔지도 모르잖아. 넌 데이트의 뜻도 모르는 게 무슨 데이트야. 그리고 너랑 데이트 했다가는 난 하루 종일 헝거비를 물어 와야 할 것 같다고. 이 놈아! 크리스는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했다. "왕자님. 제가 먼저 데이트 신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크리스는 제법 똑똑했다. "설마하니 왕자님께서 모르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마하니 모르시진 않겠죠. 김환성 왕자님은 천재라는 소문이 파다하니까요." 그 말이 맞기는 맞다. 좋게 말해 무력.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싸움 하나는 기똥차게 잘한다. 그런데 머리는 좀 단순한 편이다. 한 가지에 특화되어 있는 녀석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망나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대단한 왕자님께서 설마 모르시진 않겠죠, 데이트는 처음 신청한 사람하고 단 둘이 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기본적인 룰인데 설마 그 룰을 깨뜨리시려는 건가요?" 그런 룰. 있다는 거 처음 듣는다. 하지만 크리스는 우리 망나니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건드렸다. "다, 당연히 그런 것쯤은 다 알고 있지." 망나니야. 너 왜 근데 울상을 짓고 있니. 뭔가 말려들어가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그리고 정작 왜 내 의사는 필요 없이 너희들끼리 그러고 있냐.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냐! "이번에는 제가 먼저 김상희 공주를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다음번에는 왕자님께서 데이트를 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죠." 설마. 저런 말도 안 되는 협잡질(?)에 넘어가지는 않겠지. 아니. 막말로 나는 김환성이 '너 따라와'라고 말하면 어딜 가도 따라가야 한다. 그래도 우리 망나니는 나를 어떻게 하려거나 죽이려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믿을만한 망나니다. 어쨌든 뭐, 김환성이 뭐 하자고 하면 나는 무조건 해야 하는 입장인데, 도와주긴 뭘 도와줘? 저거야말로 그냥 조삼모사지. 우리 망나니. 또 쓸데없는 곳에서 자존심을 부렸다. "흥. 그딴 데이트 따위. 전혀 관심 없어." "저는 데이트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김상희를 빌리도록 하죠." 하지만 크리스도 간과한 게 있었다. 우리 망나니가 단순하다는 것까지는 파악을 했으나 무대뽀라는 건 파악 못한 거 같다. "근데 넌 싫어. 안 줘." "...예?" 이만하면 단순한 김환성을 구슬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는지, 크리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내 똥개야. 주인 없이는 아무데도 못 가." ...야. 누가 똥개냐. 나는 사람이라고. 엉엉. *** 크리스와 김환성은 30분여간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결과적으로는 크리스의 패배였다. 김환성에게는 그 어떤 논리도, 이성적인 이유도 통하지 않았다. 원래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상대하기 제일 어려운 법이다. 애초에 김환성을 그런 걸로 설득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김상희 공주가 같이 있는 거 싫어한대요'라고 모함이라도 했다면 통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크리스는 백기를 들었다. "이번 주말... 함께 가시죠." " 김환성도 데이트를 막을 권리는 없다는 것을 아는지, 그쯤에서 합의를 봤다.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인상을 찡그렸다. '저 잡것은 도대체 뭐냐?' 김상희 공주를 좋아한다며 끈덕지게 들러붙는 저 모습. 예전부터 보기는 봤었다. 그런데 '데이트'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왜 기분이 나쁜 건지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그랬다. 이주형은 크리스가 마음에 안 들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골탕 좀 먹여주려고 했다. 정말 유치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넘어지기나 해라.' 은신을 한 상태로 슬쩍 발을 걸었다. 김상희 공주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모양인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빠지면 참 보기 좋을 것 같다는,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역효과다. "크, 크리스 학우님!" 김상희가 얼른 달려가 크리스를 부축해줬다. '이런 젠장!' 이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뭔가 망했다. 왜 상희 공주가 저런 놈팽이를 걱정한단 말인가! 김상희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셔요?" 김상희는 표정이 굉장히 다양하다. 애초에 그녀의 삶 자체가 '연기 인생'이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보니 '걱정을 하는 척'을 하면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척'은 아니었다. 좀 심하게 넘어졌다. 김환성이 낄낄대고 웃었다. 아이고 배야! 거기서 왜 자빠지냐! 하고 마음껏 비웃었다. 이주형은 봤다. '왕자님. 일부러 마력써서 더 세게 넘어뜨렸어!' 오죽하면 나무로 이루어진 의자 하나가 완전히 박살났을까. 그리고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크리스란 놈. 이상한 놈이다.' 처음에는 그냥 망했다고 생각했다. 김상희 공주가 저렇게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그건 잠깐이었다. '저 놈. 뭐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부러 넘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김환성의 마력공격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더 크게 넘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기분 탓이겠지?' 그럴 거다. 크리스는 그저 고어 및 암호 해독 클래스의 일원일 뿐이다. 참고로 고어 및 암호 해독 클래스는 제국 마력학원 내에서 최하위권의 클래스다. 아무리 반 쯤 장난이라고 해도, 스페셜 나이트가 일부러 발을 걸면 피할 수 없다. '묘하게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야.'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아닐 거다. 애초에 지금 심리상태 자체가 이상했다. 자꾸만 유치해지고, 저 놈을 괴롭혀주고 싶고 그런다. 자기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김상희와 크리스. 김환성의 데이트 약속이 잡혔다. 3일 뒤였다. *** 송수진은 벌벌 떨었다. '도, 도대체 어째서...' 시녀는 남자들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어쩔 수 없다. 동물로 비유한다면 시녀는 작은 개구리요, 남자는 뱀 쯤 되는 존재니까. 충분히 공포스러운 대상이다. 그런데 지금 송수진을 직접 부른 사람은 그냥 뱀도 아니고, 굳이 비유해보자면 '슈퍼 왕 뱀' 쯤 되는 뱀이었다. '폐하께서 나를 어쩐 일로...' 너무 무서웠다.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아니, 그 자리에서 무슨 실수라도 했다가는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김상희와 김훈상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다는 것을. 그리고 김상희의 편지에 송수진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안다고 해도 송수진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을 거다. 일단 편지를 주고 받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심지어 그 편지에 공주가 뭔가를 요청했다고 해서 왕이 그걸 들어준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믿고 말지. 김훈상이 말했다. "가라." "예, 예! 폐하." 송수진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가라라니. 사실 말을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너무 긴장한 상태여서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스페셜 나이트가 나타났다. '서, 설마...!' 그녀도 고려인이다. 스페셜 나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스페셜 나이트는 스페셜 필드라는 걸 펼쳐서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사, 살려주세요! 외치고 싶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자신은 저항할 수조차 없다. 저항하면, 곱게 죽을 것도 괴롭게 죽을 수도 있다. '우리 공주님을 뵙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텐데...' 송수진은 김상희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녀에게는 김상희가 그녀 세계의 전부였으며 거의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었다. 스페셜 나이트라 짐작되는 남자가 말했다. "따라와." "예." 차라리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마도. 어디론가 끌려가서 처분 되겠지. 자신은 쓸모가 없어진 시녀였고 자신을 대체할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우리 공주님... 잘 지내고 계셔요.' 정말 이상했다. 비행기라는 거. 처음 타본다. 어째서 비행기로 왔지?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요즘에는 이런 곳에서 사형을 집행하나, 싶었다. 덜컹!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정말 죽는구나 싶었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나이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얜 왜 기절해?" 여자가 왜 공포에 떨고 있는지 이해하기에 나이트는, 여자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없었다. 좀 짜증이 났다. "미친 계집아이군." 마력으로 들어 올렸다. 마력학원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어디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왕의 엄명이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김상희 공주에게 이 계집을 안전하게 잘 배달하라는 게 명령이었다. 송수진이 느낀 공포. 나이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 김상희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수진!" 이제 김상희는 송수진보다 키가 더 크다. 그런데 송수진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고, 공주님!" 김상희한테 달려와 엉엉 울었다. "설마 공주님께서도... 그런 변을 당하신 건가요?" 시녀는 김상희의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녀들은 그녀들만의 세계에 갇혀 지낸다. 김상희가 왕국의 보배라고 공표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기는 들었는데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닐테니까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지금 송수진의 눈에 보이는 건, 귀신 김상희였다. 아무래도 김상희도 변을 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겠지. 그도 그럴 것이 송수진은 기절을 했고 기절한 송수진을 나이트가 여기까지 데려왔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남자가 여자를 옮긴 거니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공주님! 우리 작은 공주님! 어쩌다가..." 송수진은 흐느꼈다. 눈치의 귀재인 상희도 이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그래? 수진? 무슨 일 있었어?" "저는 죽은 것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공주님은 아니잖아요. 우리 공주님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우신 분인데 어떻게..." 김상희는 그제서야 좀 알 수 있었다. 단서를 찾았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개차반. 또 대충 설명한 것 같다. 사실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놀라운 거니까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왈가왈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수진. 진정해." 김상희는 약 30분에 걸쳐 상황을 설명해줬다. 수진은 자신이 살아있음에 놀라워 했고 나이트가 자신을 데리고 왔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수진은 상황을 알게 되자 굉장히 들떴다. "공주님! 저는 그럼 비행기를 탄 유일한 시녀가 되는 것인가요?" "수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좋네." 김상희는 씁쓸해졌다. 겨우 저런 걸로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착잡했다. 비행기를 타는 거. 지구라면 그냥 돈만 있으면 누구나가 탈 수 있는 거다. "저 왕궁을 벗어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집 밖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을 거다. '시녀로 태어나서 시녀로 죽는다라...' 그나마 공주들은 바깥나들이라도 할 수 있지. 시녀들은 아니었다. 왕궁에서 태어나거나 아니면 갓난아기 때 왕궁으로 팔려와 평생을 왕궁에서 산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40세가 넘은 시녀는 폐기처분 한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김상희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40살이 넘은 시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김상희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여태까지 신경 못 쓰고 있었는데, 어쩌면 진짜로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라고 생각은 해도 가슴 한 켠은 불안했다.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수진. 내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게 있는데..." ============================ 작품 후기 ============================ 제가 남자라서 아는데, 남자들은 나이 먹어도 앱니다. 아주 그냥 유치뽕짝. 0075 / 0192 ---------------------------------------------- 뽀뽀 안 하면 사형 ***75 솔직히 묻고 싶지 않았다. 그 대답이 두려웠다. 나는 여태까지 내 삶을 꾸려나가기에 정신 없었다. 특혜를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렇다면 시녀들은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을까, 평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해왔던 것 같다. 내 삶도 힘든데. 지금은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러니까 지금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자. 이렇게 내 스스로를 위안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었다. "수진.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줘." "네, 공주님." 나는 시녀들이 40세가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송수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요..." "수진.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거야.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폐기처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이 자리에서 확인을 해봐야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을 폐기처분한다니. 아무리 이 세계라고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 어여쁜 공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수진. 솔직하게 말해줘. 나도 대답 듣는 게 두려워. 하지만 듣고 싶어." "......." 수진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보통은 두 가지로 갈려요. 궁을 나가든지..." 궁을 나갈 때에는 돈을 조금 준다고 한다. 큰 돈은 아니지만, 남은 생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정도. "그도 아니면 편안하게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요." 그리고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70퍼센트 이상의 시녀들이 편안하게 죽는 것을 선택해요." "......." 충격 받았다. 스스로 죽는 것을 선택하다니. "40세까지 시녀에게 주어진 일을 잘 했고, 사고 없이 40세가 되어서 죽는 거라면 명예로운 일이니까요." "...거짓말." 나는 믿을 수 없었다. 40세가 되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다니. 거짓말이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일평생을 궁 밖으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시녀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이 세계는...'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송수진은 활짝 웃었다. "시녀의 일에 신경써주는 공주님은 상희공주님 밖에 없을 것이어요. 우리 어여쁜 공주님." *** 크리스의 제안은 내게 굉장히 좋은 제안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바깥세상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 솔직한 말로 나도 바깥세상이 두렵다. 공주로 살아도 힘든데, 그보다 훨씬 하층민인 평민으로 살아간다는 건 아마도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만 이 곳의 여자들은 그러한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겠지만. '내 세계는 너무나 작고 협소해.' 그랬다. 나는 왕궁과 제국 마력학원. 이 두 곳을 제외하면 가본 곳이 거의 없다. 세계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책으로만 얻었다. 크리스는 귀신같이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김상희. 표정이 별로 안 좋네." "아, 아니어요." "역시 나랑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왕자님이 껴서 별로지?" 그리고 크리스는 김환성이 발끈하기 전에 초코바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에 제국 내에서도 물량 부족해서 난리가 난 허니초코바에요. 왕자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 이, 이딴 거 누구 조, 좋을 줄 알고!" 이봐. 망나니야. 그런데 왜 손이 그 쪽을 향하니. 어휴 정말. 저 망나니. 진화한 망나니임과 동시에 단순하게 진화한 망나니다. 어쩜 저렇게 단순할 수가 있냐, 인간이. 어디가서 내 오빠라 하지 마라. 창피하니까. 우리 망나니는 크흠, 헛기침을 했다. "성의를 봐서 받아주도록 하지." 어쨌든 우리의 2박3일 일정이 시작 됐다. 고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어.' 여자가 비행기를 탄다는 것 조차도 이미 대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행기를 조종하는 건 남자다. 남자의 마력으로 움직인다. 남자가 몸소 힘을 써서 운전하는 물체에 여자가 편안히 타고 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옆에서 코를 골고 있는 우리 망나니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고 크리스는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상희공주는 아직도 나를 너무 못 믿는 것 같아." "제가 너무 아둔하여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너 아직도 나 경계하고 있잖아." 크리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활짝 웃었다. "천천히 다가갈게. 경계해도 괜찮아. 그럴 수밖에 없어. 나도 충분히 이해해. 어쨌든 내 마음은 진심이라는 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크리스 학우님께서 왜 저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저는 미천한 계집아이일 뿐인데..." "말했잖아." 크리스가 다시 생긋 웃었다. 저 미소. 지구에서 태어났으면 여자 여럿 홀렸을 거다. 인정한다. 쟤는 진짜 잘생겼다. 그냥 전형적인 꽃미남. "한 눈에 반했...으악!" 잠버릇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김환성의 주먹이 크리스의 안면을 강타했다. 김환성이 눈을 떴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크리스의 한 쪽 콧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저 망나니. 일부러 친 거 같은데.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었다. *** 일순간에 시선이 집중 됐다. "누나!" 음. 글쎄. 저 외침을 문자로 표현해본다면 '!!!!!!!!'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엄청나게 컸다는 소리고 이 곳. 고려의 거대 국제공항인 송도 국제공항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는 소리다. 오구. 우리 환혁이. 불과 4달 정도 안 봤는데, 벌써 쑥쑥 컸다. 나보다도 키가 크니까 말 다했다. 우와. 우리 환혁이. 오구 우리 환혁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엉덩이를 툭툭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다. 주위에서 쑥덕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도 콩가루 집안이라고 욕을 하고 있을 거다. '가정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받았길래?' '누나라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저런 식으로 부를 수가 있지?' 아마도 그런 식으로 욕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 우리 개차반씨와 길을 걸을 때 팔짱을 끼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남자가 시비를 걸지 않았던가. 남자 망신 시키지 말라고. 환혁도 이제 그런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건지 필드를 펼쳤다.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스페셜 필드는 그렇게 펼치는 거 아냐." 그리고 엄청 잘난 척 했다. 어깨를 쭉 피고 턱을 높이 들며 나를 한 번 쳐다본 뒤 웃어주는 거. 절대 잊지 않았다. 쟤는 진짜 허세빼면 시체인 것 같다. "이렇게 하는 거지." 우리 환혁이가 나한테 달려들었다. 어어어. 어어. 너, 넘어진다. 넘어진다. 결국 나는 넘어졌다. 완전히 넘어진 건 아니다. 크리스가 나를 받쳐준 덕분에 살았다. '애구. 요 녀석도 여자에 대한 배려가 진짜 없네.' 환혁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안다. 그래서 이렇게 달려와서 나를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너무 세게 안았다는 게 문제다. 남자라면 상관 없겠지만 나는 여자다. 환혁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질 뻔 했다. 그리고 남자라면 넘어져도 안 아프다. 여자는 넘어지면 아프다. 하지만 환혁이를 나무랄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정보는 전달해줬다. "왕자님. 여자는 넘어지면 아프답니다." "왜 아파? 상아는 괜찮던데?" 상아는 마력이 있잖니! 그러고보니 상아가 안 보인다. 만약 상아도 마중나왔다면 기쁨은 두 배가 되었을 텐데. "마력이 없는 여자는 넘어지면 아주아주 아파요. 저는 아파서 엉엉 울지도 몰라요." "그, 그건 안 돼!" 몸은 많이 컸는데 어리광부리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애기는 애기다. 뭐랄까. 이런 걸 갭모에라고 하던가? 정신연령은 아직 초딩인데 몸은 고딩에 가까우니... 아. 귀엽다. 진짜 귀엽다 내새끼. 그런데 우리 환혁이가 투정을 부렸다. "왜 인사 안 해줘?" 무슨 말인가 생각해봤는데, 이 아이가 정말로 '아기'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인사랍시고 볼 뽀뽀나 이마 뽀뽀를 해줬던 기억이 있다. 진짜 '아기'의 모습을 갖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는지. 진짜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다. 나는 우리 귀여운 환혁이를 보고 배시시 웃은 뒤, 환혁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줬다. 가벼운 쪽 소리가 났다. 우리 둘째 망나니가 투덜거렸다. "다 큰 사내자식이 계집한테 앵겨서 뭐하는 짓이야? 혼나 볼래? 쪽팔리지도 않냐?" "형아는 좋겠다." "뭐가 인마." 아, 안 돼. 환혁아. 너. 뭐, 뭔가 이상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아. "기숙사에 같이 있으면 형아는 맨날맨날 인사 받을 거 아냐! 으. 부럽다!" ... 저질렀다. 불평하던 김환성이 씨익 웃었다. 야. 너는 안 귀엽다고... 너는 인사해줄 의욕이 안 생긴다고... 물어왓이나 하지 말라고... 는 내 속마음이고, 망나니가 씨익 웃었다.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나는 인사 매일매일 받지. 그렇지?" ...망했다. 가정교육의 폐해인 것 같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귓가에만 이상한 울림 같은게 들렸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이제 인사 제대로 안 하면 사형인 줄 알아." *** 왕자가 공주의 배웅을 나간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왕궁 학자들은 이제 수긍하는 분위기다. "적어도 겉으로는 김상희 공주가 정말로 왕국의 보배인 것처럼 행동하셔야하니까요." 그리고 좀 이상한 건, "그런데 김환혁 왕자님은 김상희 공주를 정말로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에이. 설마요. 모두 교육의 일환일 겁니다. 고려의 왕자님이시니, 어린 나이부터 정치 교육을 받고 있으실테고..." 그렇게 생각하자 또 놀라웠다. 김상희 공주가 이런 식으로 -전쟁 명분으로- 사용될 줄 미리 예측 했던 것처럼, 아주 옛날부터 김환혁 왕자가 김상희 공주를 좋아하고 따르지 않았던가. 역시.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 틀림 없었다. 역시 왕은 대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고려로 복귀하신 거죠?" 거기에 알렉스가 대답했다. "크리스라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데이트 신청을 했답니다." "데이트요?" 그건 또 무슨 단어인가 싶었는데 학자들은 이내 그 뜻을 떠올렸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단어. 아주 오래된 고어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단어. "설마 지금은 사라진 단어인 그 데이트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김상희 공주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다 합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첫 눈에 반했다는 건 한 번 보고 사랑에 빠졌다는 의미죠." 그래도 학자들은 공부를 많이 한 편이라, 저런 외계어 같이 어려운 말을 쉽게 이해했다. 적어도 머리로는 말이다. "그런 해괴망측한 말이 있다니." "그러면 크리스라는 사람이 김상희 공주를 사랑한다는 소리입니까?" 사랑 역시 절대 흔하지 않은 단어다. 학자들 쯤 되니까 한 번에 그 뜻을 떠올렸지, 일반인들은 아마 모르는 단어일 거다. "맞습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그렇네요." "도대체 어느 국가의 어떤 지위입니까? 무슨 꿍꿍이죠?" "일전에 6대대 나이트를 파견하여 조사를 보냈던 백제왕국의 첫째 왕자라고 합니다." "백제라..." 학자들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또 무슨 책략을 꾸미고 계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국가 백제에 나이트를 파견하고, 또 그 곳의 왕자가 김상희 공주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할 리 없지 않은가. 알렉스만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는다면... 정말 간단명료한데... 문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지.' 아니다. 희박하지 않다. 오히려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에 가까웠다. 학자들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고 그나마 알렉스는 진실에 근접한 상태지만, 믿지 못할 뿐이었다. 학자들의 밤은 또 깊어갔다. 백제. 크리스. 김상희 공주. 나이트. 이 네 가지 단어를 토대로, 왕의 혜안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 크리스가 말했다. "오빠만 믿고 따라와." ...어이. 너도 오빠타령이냐. 굳이 자기 입으로 그렇게 '오빠'를 붙여야 겠어? 너도 우리 망나니한테 옮았니...라고는 해도, 크리스가 말하는 '오빠'는 그렇게 느끼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정말 자연스럽게 들렸다. '오빠'란 단어를 들은 우리 망나니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진 듯한 태도로 퉁명스레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냐?" 크리스가 생긋 웃었다. 저 미소. 진짜 백만불짜리다. 인정. "김상희 공주는... 바깥 세상을 많이 알고 싶어해요. 자기가 경험한 세계가 너무 작다는 걸 알아요."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애다. 어떻게 여자에 대해 저렇게 잘 알고 있을까. 또 나에 대해 저렇게 잘 알고 있을까. 정말... 백제란 나라가 좀 궁금해졌다. "마음 같아선 우리 백제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괜히 상희가 무서워할 것 같아서 고려로 온 거에요. 그래도 이 곳이라면 안심할테니." 그거야... 내 옆에 환성이도 있고 우리 환혁이도 있고 아마도 스페셜 나이트도 함께 있을 테니까 뭐. 안전이야 하겠지. '크리스의 마음은 진심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진심일 것 같다는 기분이 조금씩 들었다. 나에 대해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런 배려는 절대 불가능할테니까. 이 곳 남자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 곳을 먼저 보여주려고 해요. 뭐... 솔직히 데이트답진 않지만. 자. 이제 도착! 모두 내려주세요!" 나는 차에서 내렸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 작품 후기 ============================ 환혁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안다. 그래서 이렇게 달려와서 나를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너무 세게 안았다는 게 문제다. 반가워서 안았는데 살인미수 될 뻔... 0076 / 0192 ---------------------------------------------- 김상희에게 조련당하는 왕자님들 *** 김상희는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마중을 나왔던 환혁이 왕궁에 일이 있다며 돌아갔기 때문이다. 김상희도 생각했다. '나도 왕궁에 먼저 들러야 할텐데.'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김환성이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들렀다 가자'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랬다. 김상희와 크리스. 그리고 김환성. 마지막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주형까지. 크리스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적어도 김상희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곳이었다. 크리스가 손을 들어 김상희 공주의 눈을 가려줬다. "상희공주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할 거야." 그리고서 얼른 핑계대듯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김상희 공주는 굉장히 충격을 받을 거라 어쩔 수 없어요, 왕자님." 김환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저 자식. 뭔가 마음에 안 든다. 김상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저 모습.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짜증이 나긴 나는데 하지 말라고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 동생이니까 건들지 마! 만지려면 내 허락을 받고 만져! 절대 허락 따윈 안 해주겠지만. 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김상희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대략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한편, 크리스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었다. '마력으로 내 시야를 가려도 충분할 텐데.' 마력으로 해도 충분한 걸, 굳이 손을 사용하고 있다. 걸음을 옮겼다. "이제 손 뗀다. 마음 단단히 먹어. 대충 어떤 곳인지 파악은 하고 있을 테니, 보기 싫으면 관둬도 돼." "아니어요. 마음의 준비는 됐어요." 김상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 한다. 지구에 있을 때에 흔히 들었던 말이 있다. 서민의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국회의원이 어떻게 서민을 위한 정책을 필 수 있겠냐? 라는 말이었다. 마찬가지다. '나는 공주로만 살 수 없어.' 언제가 될 지 모르고, 가능할 지,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이 세계가 싫었다. 여자가 남자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바라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람답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전에. 최소한 평민 여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경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보기는 해야하지 않을까. '나는 저들에 비해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거야.' 크리스가 김상희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김상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홍등가...' 지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양 옆으로 투명한 유리창이 있고 그 안에 여자들이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로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남자들은 거만한 걸음걸이로 거들먹거리고 걸으면서 쾌락을 같이 추구할 여자를 골라내고 있었다. '여자들도 있어.' 김상희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남자 손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많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 이 세계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세계다. 여자도 사람이다. 성적인 욕구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김상희도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욕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구에서는 달랐었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그러니까 진수가 옆에 있을 때엔 김상희가 먼저 덮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성적인 욕구가 있기는 있는데, 그걸 감히 남자에게 풀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같은 여자를 사서 여자를 통해 욕구를 해소한다. 크리스가 내게 물었다.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지?" "......." 김상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책으로 경험하는 세계에는, 이런 세계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상희가 접한 책은 왕궁 '기록의 관'에 있는 책들이며 그 곳에 있는 책은 이런 뒷골목의 얘기까지 다루지는 않으니까. 누군가 메가폰을 들고 크게 말했다. "어제 들어온 7살짜리 여아 있습니다. 완전히 처녀입니다." 김상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7살짜리 여아이며 처녀란다. 남자들의 발걸음이 그 곳으로 향하는 걸 봤다. 경매를 하려는 것 같았다. 김상희는 애써 억지웃음을 짓고 김환성을 쳐다봤다. 단순히 쳐다본 게 아니라 팔짱까지 꼈다. 당연히 김환성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오라버니." "왜?" 김환성은 별 생각 없었다. 이런 홍등가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다. 신경도 안 쓴다. 이런 건 그냥 길거리에 흔하디 흔한 나무같은 광경. 김환성에겐 그랬다. "저 아이가 너무 불쌍해요." "왜?" 김상희는 눈물을 꾹 참고 있는 저 아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이 세계를 바꾸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런 아이가 이 세계에 딱 한 명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밖에 대답해야 했다. 지금 어딘가에서도 저와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절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오지랖이라고 해도 좋고, 착한 척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떻게 7살짜리 여자아이를 욕구 해소의 도구로 쓸 수가 있어?' 미친 놈들. 하고 속으로 욕을 해줬다. "수진이 제 시녀로 왔으니 왕궁에 시녀가 부족하지 않을까요?"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김환성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쓴다. 왕궁에 시녀가 부족하든 말든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김상희는 고민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까?' 여태까지는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뭔가를 원해도 직접적으로 '달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괜찮...을까?' 김상희는 짧은 시간동안 아주 많이 고민했다. 뭔가를 갖고 싶을 때, '저게 아주 예뻐요'라고 말하는 거랑 '저거 사주세요'라고 말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다. 더군다나 상대는 김환성. 진화한 망나니이며 고려왕국의 왕자다. '어차피 언젠가는 넘어가야 할 산이야.' 원래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다. '차라리 상대가 둘째 망나니라 다행이야.' 만약 상대가 김환석이었다면 시도도 안 해봤을 거다. 김환석이라면 닥쳐, 라고 말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우리 둘째 망나니는 그래도 첫째 망나니보다는 좀 착한 구석이 있으니까.' 결국 용기를 내서 말했다. 무서워서 아부도 덧붙였다. "오빠. 오빠가 소녀를 위해 저 아이를 사주시면 안 될까요?" 김환성의 입이 벌어졌다. 김상희의 고민같은 건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이주형!" 스페셜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 왕자님." 김상희의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뜸 말했다. "저거 사가지고 와." "...예?" 김환성이 활짝 웃었다. "나 지갑 없어." 이주형이 울상을 지었다. "갚을 거야. 갚는 다고. 그니까 얼른 사갖고 와." "지, 진짜 갚으실 겁니까?" 김상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환성. 역시 쉬웠다. 사달라고 하니 그냥 사줬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역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공주따위가 감히 왕자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다니. 그리고 왕자가 그걸 사주다니. 더 재미있는 건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주형도 그 것에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만약 이 상황을 고려의 학자들이 봤다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거나 알렉스에게 '당장 상희학을 정식 학문으로 채택합시다!'라고 말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옛다. 서비스다. 오늘은 풀 서비스 갈게. 김상희는 립서비스를 맘껏 퍼부어 줬다. "오빠가 소녀의 오빠라서 정말 다행이어요. 너무너무 듬직하셔요. 오빠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오빠셔요." 그 말에, 김환성의 광대가 높이 승천했다. *** 오빠소리. 내가 한 번에 3번 이상 한 적 처음이다. 웬만해서는 잘 안 해주려고 한다. 너무 자주해주면 임팩트가 떨어지니까. 우리 망나니는 어깨를 활짝 폈다. "엣헴. 그렇지?" "공주님. 돈은 제 지갑에서 나가는데요." 망나니가 퉁명스레 말했다. "갚는다니까?" "언제까지요?" "하여튼 금방 갚아!" 그런데 이주형 나이트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쨌든 제 돈으로 나가는 겁니다. 지금은요." "알아. 안다고. 얼른 가서 사와. 경매 끝나기 전에!" 이주형 나이트가 나를 쳐다봤다. "공주님. 이거 일단 제 돈으로 나가는 거라니까요?" 나는 눈치를 봐야만 했다. 도대체 저 아저씨가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를 생각해봤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설마?' 저 아저씨도 오빠소리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저 아저씨. 내가 알기로 나이가 30살이 넘었을 텐데. 정확하게는 몰라도 30대 초중반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아. 물론 외모는 2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얘네는 마력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사기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성장은 빠르고 노화는 느리니까. "소녀는 이주형 나이트님께도 정말 큰 감사를 느끼고 있어요. 정말 감사해요." "킁..." 이주형 나이트는 자기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는 듯, 코 끝과 인상을 함께 찡그렸지만 내 말이 예법에 어긋난 게 아니라 딱히 딴지를 걸지 못했다. '그래도 스페셜 나이트 체면이 있는데 오빠라고 하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내 패배다. 스페셜 나이트 체면. 그런 거 없나보다. "저도 오라버니소리 좀 들어 봅시다." ...아. 예...오라버니. *** 누군가 말했다. "3억." 경매장이 조용해졌다. 3억이라고? 어떤 미친 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부르는 거야? 하고 모두가 뒤를 쳐다봤다. 나이는 1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경매를 진행하던 사회자 역시 떨떠름한 듯 했다. 방금 전까지 최고액이 8천만원 이었다. 사실 귀족가의 버려진 계집이라면 1억이상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계집은 그렇게까지 특등품은 아니었다. 또 아주 예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녀이며 나이가 7살이라는 것. 그 희귀성을 인정받아 8천만원까지 올라간 거다. 사람들 중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장난놀음은 집어치우라는 듯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이봐. 꼬맹이. 3억이라니? 미친 거 아냐?" "왜요? 돈 있으면 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 참. 어처구니가 없군. 3억이란 돈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내봐. 다들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다. 10대 중반의 꼬맹이에게 그렇게 큰 돈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있다고 해도 저런 어린 계집애에게 3억을 쓰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집 한 채를 사고 말지. 소년이 지갑에서 3억짜리 수표를 하나 꺼냈다. 가장 권위 있는 은행인 제국은행에서 발행된 수표였다. "이거면 되죠?" 노련한 사회자마저 말을 더듬었다. "3,3,3,3어, 3억 입니다! 3, 3억입니다! 더, 더이상은 없으십니까!" 이건...진짜 대박이다. 8천만원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3억이라니. 진짜 잭팟이 터졌다! 이주형 나이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왕자님. 쟤가 사고 쳤는데요." "너 겨우 3억도 없냐?" "저 같은 월급쟁이가 무슨 3억이 있어요?" 스페셜 나이트는 월급이 그렇게 높지 않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훨씬 높다. 연봉으로 치자면 1억이 넘기는 한다. 애초에 그들은 돈 때문에 스페셜 나이트를 하는 건 아니다. 돈 보고 할 거면, 스페셜 나이트 때려치고 그 경험을 경력삼아 용병회사를 차리는 게 훨씬 낫다. 김환성은 불만이었다. 겨우 그까짓 3억. 그거 그냥 대충 저금통에서 꺼내면 나오는 돈인데. 지갑을 안 갖고 온게 실수였다. 3억? 웃긴다. 30억도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김상희 공주가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말한 '물건'이었으니까. 김환성이 말했다. "아씨. 야. 크리스. 그거 나한테 팔아." "안 됩니다." "30억 줄게." "싫습니다." "그럼 300억." 이주형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왕자님. 미쳤습니까? 저런 계집 사는데 300억이요? 뭐 저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차라리 그 중에 1억만 빼서 나 좀 줍쇼. 하고 말하고 싶었다. 크리스는 여전히 싫다고 했다. "안 됩니다. 김상희 공주가 갖고 싶다고 말한 아이니까, 제가 선물해줄 겁니다." 김상희는 남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부터 극명하게 차이가 갈리지 않는가. 크리스는 저 여자아이를 일컬어 '아이'라고 했고 김환성은 '그거'라고 했다. 여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김환성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 멍청이냐? 300억은 나한테도 큰 돈이야." "그렇게 큰 돈을 왜 그렇게 쓰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 그거야..." 김환성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고보니 내가 왜? 어째서? 내가 왜 300억이나 쓰려고 하고 있지? 한 두푼도 아니고. 3억이면 모를까. 아니. 30억만 되어도 좀 큰 돈이다. 아무리 고려왕가의 왕자라고 해도 30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김환성은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정신을 퍼뜩 차리고보니,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상희가 그 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오라버니의 마음만 받을게요." 일부러 오빠 대신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김환성이 울상을 지었다.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의 선물은 다음 번에 받을게요. 비록 마음 뿐이지만 소녀는 너무나 행복해요." 다시 말해, '실제 물건'은 없고 '마음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걸 아주 교묘하게 돌려서 말했다. 게다가 '다음 번에 받을게요'라면서 실리까지 챙겼다. 사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선물이라는 거. 누군가 주면 감사하게 받는 거고, 안 주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일부러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김환성으로 하여금 '안 주면 나쁜 놈'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실제로 김환성은 지금 나쁜 오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 잡혔다. 크리스는 결제를 하고 여자아이를 인도 받으러 잠깐 자리를 옮겼다. 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김환성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뭔가 기분이 찜찜해.' 세상에서 제일 센 오빠라고 큰 소리 땅땅 쳐놨는데 크리스에게 진 것 같은 기분. 동생에게 줄 생애 첫 번째 선물 -자기 입으로 갖고 싶다고 말한-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 김환성이 투덜거렸다. "뭔가 짜증나." 그런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 계집. 팔려고 오신 겁니까?" 참고로 김환성. 지금 기분 안 좋은 상태다. "흐음. 상태를 보아하니 귀족가의 여식 같은데." 흐흐흐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보잘 것 없는 계집이 3억에 팔린 거 보셨죠? 이런 계집이라면 훨씬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지금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도 옆에 있다. 현재 기분이 매우 꿀꿀한 고려왕가의 왕자 김환성과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이 동시에 남자를 쳐다봤다. 거기에 인수인계를 마친 크리스도 왔다. "무슨 일이죠?" 남자는 크리스를 알아봤다. 하찮은 계집애에게 3억을 쓴 엄청난 부자! 다시 말해 호구다. 돈 많은 호구. 이 호구를 다시 한 번 잡으면 또 다시 잭팟을 터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크리스에게 굽신거렸다. "이 아이를 팔러 오신 것 같습니다." 묘한 기대가 담겼다. 이 아이. 당신이 방금 사버린 그 여자애보다 훨씬 예쁘고 뽀얗지 않습니까? 라고 은근히 주장하는 듯 했다. '제발 걸려 들어라!' 아무렇지도 않게 3억을 썼다. 그렇다면 이 계집은 훨씬 비싼 값에 거래할 수 있을 터! 김환성과 이주형. 그리고 크리스까지 남자를 쳐다봤다. 세 남자가 동시에 쳐다봤다. 남자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 세 남자 말고. 다른 남자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너. 뭐하는 놈이냐?" 김상희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오라버니의 선물은 다음 번에 받을게요. 비록 마음 뿐이지만 소녀는 너무나 행복해요." 이 말을 다시 한 번, 직설적으로 해석해보자면 → 결국 넌 선물 안 줬어. 마음만 줬잖아. 그니까 다음에 다시 내놔. 이지만 김환성은 모른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른 체 나쁜 오빠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죄책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아. 망나니는 갔습니다. 수렁에 빠져버렸어여 ㅠㅠ 0077 / 0192 ---------------------------------------------- 김상희에게 조련당하는 왕자님들 *** 내가 아는 망나니는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진화한 망나니요, 한 명은 망나니 중 망나니. 상 망나니다. 그 상망나니는 다른 공주들과 시녀들에게 있어서는 공포의 대상이며 -어쩐 일인지 제국의 귀빈호텔에서는 좀 좋은 이미지로 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 최상위 포식자다. 그리고 하늘 위에 아버지와 황제, 그리고 하나 뿐인 형님밖에 없는 줄 아는, 천상천하 유아독존형의 나 잘났소 망나니다. 그 망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명에 의거하여 너를 현행범으로 긴급체포한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자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황당한 표정이다. 사실 나도 황당하다. 음. 이런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는데 굳이 예를 들어 보자면 물을 마시고 있는데, 그 물 마시는 행위가 불법이라고 잡혀간다는 거? 얼마나 황당할까. 팔려고 온 계집아이처럼 보여 그 계집아이를 흥정하려는 행위. 이건 저 남자에게 굉장히 당연한 일이며 일상적인 일일 것이다. 물을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행위를 했더니 난데없이 왕명에 의거하여 현행범 체포. 이거 굉장히 큰 문제다. 왕명에 의한 긴급체포는 어지간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니까. 우리 둘째 망나니를 호위하는 듯 보이는 나이트 4명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남자를 덮쳤다. "저, 저기 무슨 일이지?" "저거... 나이트 문장인데?" "나이트가 어째서 이 곳에...?" "나이트가 호위하고 있잖아. 답은 정해져 있는 거지." "왕족...!" 헉! 사람들이 놀라는 게 보였다. 저들에게 있어 남자 왕족은 아마도 천외천의 외계인 같은 존재일테니까. 아주 무자비한 절대왕정이나 독재주의는 아닌지라, 판타지 세계나 중세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그러는 건 아니었으나 다들 우리 망나니의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무, 무슨 짓입니까! 저는 억울 합니다!" "닥쳐. 왕명에 반발할 생각이냐?" 나조차도 궁금해졌다. 왕명이 도대체 뭘까. 왕명이 뭐길래 갑자기 난데없이 '남자'를 저렇게 포박해버리는 걸까. 첫째 망나니가 나를 쳐다봤다. "어이." "네. 왕자님. 소녀가 여기 있어요. 말씀하시어요." 망나니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김환성. 김상희를 불러봐라." 김환성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싱글벙글이다. 환성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똥개!" ...죽고 싶냐. 김상희를 부르랬지 똥개라고 부르랬냐! 라고 따지고 싶지만 여전히 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마음 속 칼날을 갈며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 첫째 망나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15년간 눈치를 보며 살아왔지만 첫째 망나니의 표정을 읽는 건 상당히 힘들다.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텐데 참. "어이." "네. 왕자님. 소녀가 여기 있어요. 말씀하시어요." 첫째 망나니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대답이 길군." 나는 필사적으로 저게 무슨 말인가를 생각해야만 했다. 말 하나하나에 조심해야하는 게 내 입장이다. 내가 뭘 잘못했지....라기보다는 뭐가 저 포커페이스 천상천하 유아독존 상망나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봤다.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딱 세 가지 단서만 조합하면 됐다. 네. 왕자님. 소녀가 여기 있어요. 말씀하시어요. 네. 오라버니. 대답이 길군. 답은 나왔는데, 좀 믿기 어렵다. '설마...' 내가 완전히 예의를 차리고 대답을 한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첫째 망나니는 시원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 둘째 망나니처럼 '오빠해봐! 오빠!'라고 말하면 명확하기라도 하지. 저 놈은 저러고 끝이다.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또 한참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그냥 네, 오라버니.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환성이는 그런 격식 별로 신경 안 쓰지만 환석이는 다르다. 저 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의니 격식이니 차릴 망나니다. 뭐. 목에 칼이 들어오기도 전에 나이트들이 막겠지만 하여튼. 흠흠. 남자는 나이트에 의해 제압당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하늘을 우러러 왕명을 거역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입 닥쳐." 와. 설명 따윈 불허한다는 저 모습. 아니.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맙긴 한데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저럴 수 있는 건지. 이 세계의 남자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끌고 가." "예. 왕자님." 졸지에 왕명을 거역하게 된 남자는 나이트에 의해 끌려갔다. *** 김환석이 말했다. "넌. 뭐하는 계집이냐?" 이런 말이 나오면 김상희는 언제나 긴장을 한다. 김환석은 어떤 의미에서 김훈상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의 사람이었으니까. 김상희 뿐만 아니라 김환성도 약간 긴장했다. "형. 화 났어?" "넌 조용히 하고 있어." 그래도 동생이라고 '입 닥쳐'라고는 안 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 환혁 역시 둘째 형 환석의 포스 앞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버렸다. 다만 크리스는 이번에 새로 산 7살짜리 여자아이와 싱글벙글 웃으며 얘기를 나눴다. "넌 이름이 뭐니?" 김상희는 그런 상황에 신경쓰지 못했다. '또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지구의 상식적으로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옳은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것이 왕자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면 옳지 못한 일이다. 어휴. 내 팔자야. 하고 한숨을 내쉬어 보지만 한숨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변할 게 없다. 그래도 김상희는 이 세계에는 없는 여자다. '넌. 뭐하는 계집이냐?'라는 아주 뜬금없는 질문에 아주 지혜로운 답을 내놨다. "이제나 저제나 고국 땅에 계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그리워하며 매일 밤 잠들지 못하는 어리석은 계집아이여요." 당연한 말이지만 고국 땅에 있는 오라버니는 김환석 하나 뿐이다. 저 문장은 상당히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국 땅에 계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 라는 뜻이 될 수 있고 '고국 땅에 계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전자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되고 후자는 '고국 땅에 있는 오라버니 중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된다.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듣기 좋은 말을 듣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한다. 특히나 김환석처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욱더 그렇다. 김환석은 전자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는 바로 나' 라고 해석했고 김환성은 후자로 해석했다. '고려에 있는 오빠 중에서 제일 사랑한다는 말이지!' 굳이 '고려에 있는'이란 단서를 붙였다는 말은 그렇다면 고려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그러니까 제국에 있는 왕자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두 왕자는 동상이몽을 꿨다. 김상희가 노린 게 이거 였다.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줌으로써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다. 두 왕자는 느리지만 착실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련되어 갔다. "계집의 사랑따위. 받을 필요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것 치고는 김상희의 편지를 정성스레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김환석의 어조는 상당히 많이 누그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상희는 느낄 수 있었다. '좋았어. 화는 풀렸어.' 그렇다면 쟤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볼 차례. "그런데 소녀가 오라버니를 언짢게 한 것이 있다면, 소녀를 벌하여 주시어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런 말. 김상희밖에 못 한다. 다른 여자들은 진짜로 벌 줄까봐 무서워서 못 한다. 하지만 김상희는 안다. 이런 말 해도 절대 벌 안 준다. "따라와라." 그리고 김상희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원래 김상희는 고려에 입국함과 동시에 바로 왕궁에 들러 김훈상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김훈상이 무려 편지도 두 장이나 보내줬고 -그래봐야 2장 합쳐서 8글자에 불과하며 김유신과 알렉스는 그 것이 황제에게 보내는 기밀 편지인 줄로만 알지만- 이번에 자신을 위하여 엄청난 일을 벌인 것도 안다. 물론, 김상희 역시도 김훈상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 두 나라를 접수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하여튼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발표가 되지 않았던가. '성의를 먼저 보였어야 했는데.' 김상희는 생각했다. '설마 개차반씨 삐졌으려나...?' 정말 문제는 왕이 삐지면 공주따윈 죽을 수도 있다는 거.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오기 시작했다. *** 나는 다급해졌다. "소녀는 너무나 높으신 아버님을 뵈오니 정말정말정말로 행복해졌어요." 우리 개차반씨는 첫째 망나니에 비해서 표정 읽기가 제법 쉽다. 쟤. 지금. 삐졌다. 이건 단순한 감이 아니고 확신이었다. 아이고. 두야. 그래서 나는 선수를 쳤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써먹으려고 했던 카드인데 미리 꺼내야겠다. "소녀가 아버님을 위하여 틈틈이 요리를 연습했어요. 비록 미천한 실력이지만 제 손으로 직접 만든 음식을 아버님을 위하여 준비하고 싶은데... 아버님께서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개차반은 건성건성 대답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봤다. 쟤 지금 입가 씰룩였다. 정확하게 본 건 아니다. 워낙에 찰나였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개차반은 허락할 거다. "너 따위가 만든 음식이 과연 맛이나 있겠냐?" 말이나 좀 이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냐? 뭐.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만. 네 입으로 왕국의 보배라며? 보배를 좀 보배취급 해달라고! '진짜 보배는 아니겠지만.' 아마 나는 모르는 어떤 정치적 책략이 숨어있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왕국의 보배 아닌가!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고. 넌 엄청 잘난 개차반이지만 들어는 봤나? 밀당이라고. "소녀의 투박한 손길을 거친 음식이 아버님의 귀한 입 속으로 들어간다면... 역시 너무나 큰 결례겠지요...?" 일부러 슬픈 표정 지었다. 어차피 넘어올 거 다 알아. "소녀는 소녀의 손으로 아버님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하여..." 오늘은 좀 오래 버티네?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요. 소녀 따위가 음식이라니..." 그래. 나 따위가 어떻게 요리를 하겠어? 그 명성 높은 주방장들이 -물론 남자다- 요리를 하는데 말이야. 결국 개차반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어디 한 번 해봐라." 한 마디 덧 붙였다. "맛은 없겠지만." *** 주방장인 강성천은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의 주방은 신성한 주방이다. 왕에게 올리는 음식을 만드는 주방. 그는 자신의 요리에 프라이드가 있었고 왕에게 대접하는 음식을 만드는 초일류 쉐프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런데 여자따위에게 자신의 주방을 내주라니. 절대 말도 안 된다. 자존심이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다. 같은 남자라고 해도,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이 되지 않으면 보조로도 안 쓰는 강성천이다. '이건 나를 무시하는 처사다.' 마음 같아선 사표쓰고 나가버리고 싶다. 어차피 왕궁 말고도 갈 곳은 널리고 널렸다. 짜증이 무럭무럭 치밀어 올랐다. 신성한 주방에 계집따위를 들이다니. 하지만 다른 곳을 갈 수는 없었다. 지난 7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그만의 주방이었다. 왕이 특별히 만들어준 공간이다. 이 곳은 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다. '후...참자...' 한 번은 참기로 했다. "감히 계집 따위가 내 주방을...!" 그는 일류 주방장이다. 그것도 마력을 사용해서 만드는 음식의 달인이다. 왕명이라 토를 달지는 못했지만 그는 한심하다는 듯 김상희를 쳐다봤다. '저딴 것도 음식이라고...' 칼질이나 뭐나. 모두가 흠 투성이다. 요리를 한다고 하는데 마력도 없는 계집이 잘해봐야 얼마나 잘하겠는가. 보고 있노라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져 왕궁 공터에서 으아아아! 괴성을 질렀다. '어디. 얼마나 맛있나 두고 보겠어.' 사실상 게임이 안 되는 게임이다. 지구로 생각하더라도, 일류 쉐프의 음식이 평범한 여자의 음식보다 맛있을 거라는 건 거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한편, 주방을 보조하는 시녀 중 한 명인 성숙진은 벌벌 떨었다. "나, 난...죽을 거야..." 그녀는 주방의 필요한 식기나 조미료등을 담당하는 시녀였다. 그녀는 쉐프인 강성천 때문에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3시 정도에 몰래 주방에 들어가 식기나 조미료등을 채워넣는다. 혹여나 들킬까봐서 불도 못 키고 아주 희미한 양초불에 의지해서 일을 한다. 일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강성천은 계집이 주방에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이렇게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어찌어찌 잘해왔는데, 어제 큰 실수를 했다. 소금과 설탕을 바꿔서 넣은 것 아닌가. 왕에게 올라가는 식사다. 그 전에 쉐프가 맛을 볼텐데, 그러면 정말 죽은 목숨이다.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맞든가. 시녀들은 구석에 쪼그려 울고 있는 성숙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위로밖에 없었다. 얼마나 맞을지 모른다. 맞다가 죽을 수도 있다. 시녀들에게 있어 그런 실수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실수니까. 그리고 김상희의 요리가 완성 됐다. 어차피 대단한 걸 요리하려는 건 아니었다. 돼지고기 등심구이에 야채 샐러드. 고등어 생선조림, 브로콜리&버섯무침에 소고기 스튜와 귀리를 섞은 잡곡밥 정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맛이...너무 이상해.' 뭔가 잘못 됐다. 맛을 봤는데 이게 아니다.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말정말 맛이 없었다. '시,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밖으로 나갔던 강성천이 주방에 들어왔다. "시간 다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으니 빨리 가야 합니다." 감히 공주따위가 왕의 식사시간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김훈상이 이미 식당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김상희는 눈 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바, 방법을 생각해야 해.' ============================ 작품 후기 ============================ 스토리 진행이 느리다는 분들이 있어서 조금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제 글의 스토리 진행. 작가 입장에서는 굉장히 빠른 편입니다. 한 편 내에서 최소 하나 이상의 에피소드를 마무리 지으려 노력하는 편이고 일부러 늘려쓰거나 질질 끄는 행위. 최대한 지양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물론 독자님들의 피드백은 중요합니다. 많은 의견들 중 제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의견들은 참작하고 글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늘어진다는 의견에 관해 몇 마디를 덧붙여 보자면...(ㅠㅠ) 비슷한 에피소드 -김상희 공주가 모르는 남자에 의해 위기에 빠지고 주변 남자들이 구해주는- 가 반복된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 에피소드는 각 에피소드마다 나름대로의 주제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데 일부러 넣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진행 상태를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초반부의 에피소드는 왕, 왕자들이 김상희의 위기에 이상함을 느끼고 단순히 화를 내기 위함을 드러내기 위한 에피소드. 중반부의 에피소드는 왕, 왕자들. 그리고 한진수 등이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조금씩 자각하고 스스로 그 심리상태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에피소드. 후반부의 에피소드는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주위의 모든 남자들'이 결국 상희에게 빠졌다는 것을 -소제목을 보시면 파악 가능하실... 빠졌다고 쓰고 조련이라 읽는...- 코믹하게 그려내기 위한 에피소드였습니다. 덧붙여 김상희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에피소드이기도 하구요.(←이건 별표 다섯개!!) 초반, 중반, 후반의 에피소드는, 내용은 비슷할 지 몰라도 나타내는 바가 완전히 다른 에피소드였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세계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암 걸릴것 같아 ㅂㄷㅂㄷ)이러한 에피소드 없이 '그냥 내 동생 짱 예쁨'. '내 딸 최고' 라는 식으로 글을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아니, 가능은 하겠지만 제 알량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할 수가 없어요. ㅠㅠ 제가 뭐 대단한 글을 쓰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최소한의 개연성은 갖추고 싶어서요. 전 잘난 글쟁이는 아니지만 이거 하나 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글 억지로 늘려쓰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코멘트 달아주시는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 감사합니다. +이렇게 징징대는 대신, 한편 더 투척! 그러니까 이런 징징글 용서해주세요 ㅠ_ㅠ 0078 / 0192 ---------------------------------------------- 한진수. 네게 있어서 김상희는 어떤 존재지? *** 김훈상은 언제나 바쁘다. 누구나에게 그렇겠지만 그에게 있어 시간은 곧 금이다. 아니, 일반 사람들에게 시간이 금이라면 김훈상에게 있어 시간은 퓨리어스 몇 병 쯤은 될 거다. 일반 사람들이 갖는 시간보다 훨씬 무거운 시간을 가지니까.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허투루 버리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이 세계 기준으로 허투루 버리는 시간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내들과 보내는 시간이요, 또 하나는 김상희에게 쓰는 시간이다. (단적인 예로 서재에 몰래 숨어서 기밀편지인양 편지를 부치고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에게 몰래 쥐어주며 김상희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 만약 김유신이 이 편지가 황제에게 보내는 기밀문서가 아니라 김상희의 안부를 묻는 편지인 줄 안다면 뒷 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김훈상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모든 시간을 분 단위로 계획하여 사용한다. 식사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저녁식사는 6시 정각에 시작되며 잠시 쉬는 시간을 포함하여 6시 30분까지 이어지게 된다. 6시. 김훈상이 테이블에 앉았다. '머리 아프군. 마력석 알론의 수급량 조절이라.' 고려는 마력석 알론을 상당히 많이 생산하는 국가다. 그런데 요즘 공급량이 많아진 건지, 가격이 너무 떨어졌다. 이대로면 타산이 안 맞게 생겼다. 차라리 당분간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공급을 줄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든다. 하지만 또 마냥 그러기도 힘든 것이 제국이 알론을 원한다. '제국은 우리의 채굴 속도와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거다.'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는데 일부러 공급량을 줄이는 것은 안 된다. 김훈상을 제국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필요이상으로 자극하지는 않는다. 누가 뭐래도 제국은 현 시대의 최강자니까. 머리가 아파왔다. 식사가 운반 됐다. 요즘의 식사는 '맛을 즐기기 위한' 식사는 아니다. 그저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에너지를 얻는 투자시간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후에 바로 대책회의에 들어가야겠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습관적으로 밥을 먹다가, 김훈상은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탕! 내려놨다. 덕분에 옆에 진땀을 뻘뻘 흘리며 서있던 김상희는 깜짝 놀랐다. '크, 큰 일이야.' 지구에서라면 그냥 간 좀 잘못 했고 실수였다고 하면 그만이다. 식당에서 이런 실수가 벌어졌다면, 죄송하다고 환불을 해주거나 음식을 다시 내오거나 서비스를 더 해주면 된다. 적어도 이 행위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는다. 김훈상은 기분이 매우 나빴다. "주방장 데려와."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휴식시간이다. 습관적으로 먹기는 한다만, 그나마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이러라고 비싼 돈 주고 주방장 고용한 거 아닌데, 음식을 어떻게 이따위로 하나 싶다. 겁에 잔뜩 질린 시녀 하나가 얼른 달려갔다. 그런데 김훈상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엉성한데?' 요리 자체가 별로다. 일단 비주얼부터가 원래 먹던 음식들과는 천지차이. 이딴 것도 음식이라고, 라고 생각이 듦과 동시에 오늘은, '설마.'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면에 죄인처럼 서서 거의 울먹거리고 있는 김상희의 모습이. *** 주방장 강성천은 속에서 천불이 터졌다. 그러길래 왜 그런 계집따위를 주방에 들이냔 말이다. 왜 부르지는 알 것 같다. 왜 이따위 음식을 냈냐고 하겠지. 따질 말은 많았다. 하지만 상대는 왕이다. 맛 없다고 뭐라하면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주방을 떠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제기랄.' 그래도 옆에서 도와줬어야지! 음식을 봐줬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말이 들려오면 어떡하나 싶다. 그런데 그가 들은 말은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네게 큰 상을 내리겠다." "...예?" "내가 먹어본 음식 중 최고다. 내가 너를 주방장으로 고용한 보람이 있구나." ...설마. 그럴 리가. 강성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례지만 폐하. 저도 먹어보면 안 됩니까? 하고 묻고 싶었다. "아주 훌륭하다." 설마 왕은 저 음식이 김상희가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 칭찬을 하고 있지. "맛있게 드셨다니 저는 영광입니다." 강성천은 충격을 받았다. 저 입에서 칭찬의 말이 나올 줄이야. 김훈상에게 칭찬을 들을 줄이야! 눈으로 보기엔 허접하기만 한 저 음식들이 그토록 맛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레시피와 특수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는 여자를 싫어했다. 거의 경멸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계집이 만든 음식이 왕을 춤추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가치관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걸 느꼈다. '김상희 공주에게 물어야겠어.' 김상희가 다르게 보였다. *** 나는 정말로 조마조마했다. 개차반씨가 포크를 탕! 내리쳤을 때, 나는 정말로 놀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어야할 것 같은데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내가 만들었다는 거... 알고 저러는 거야, 모르고 저러는 거야?' 처음엔 기분 나쁜 듯 주방장을 불렀다가 조금 있다보니 갑자기 칭찬세례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사가 끝났다. 개차반이 내게 물었다. "넌 그런데 왜 계속 여기 있는 거지?" ...그걸 이제 묻냐? 나 30분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서있기만 했는데. 너 내 아빠 맞아요? *** 나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감히 한 나라의 국왕의 식사를 이 따위로 만들다니. 주방장을 불러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오늘의 식사는 김상희 공주가 만든다고 했다. 다시 먹어봤다. '이딴 걸 음식이라고.' 다시 먹어봤다. '이까짓 실력을 가지고 감히 왕의 식탁에 식사를 올려?' 괘씸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포크가 움직였다. 그래도... 먹다보니 먹을만 하지 않은가. 어차피 식사란 에너지원을 얻으면 그만이다. 어떻게든 에너지원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송수진에게 요리를 가르치라 해야겠군.' 강성천 주방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나는 김상희 모르게 김상희를 힐끗 쳐다봤다. 그래. 무섭겠지. 감히 이따위 음식을 왕의 식탁에 올렸으니까. 나는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벌벌 떨고 있는 김상희를 보게 된 내 입은,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아주 훌륭하다." 아니다. 정말 맛이 없었다. 하지만 왕 체면에 딸의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먹어본 음식 중 최고다. 내가 너를 주방장으로 고용한 보람이 있구나." ...이 정도면... 겁에 질리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 인정하겠다. 나는 이상한 정신병에 걸렸다. 정신과의사들과 상담을 할 수도 없다. 왕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 테니까. 난 김상희를 아주 아끼는 병에 걸려버렸다. 왕자들보다도 더욱 신경이 쓰인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미친 게 맞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 미쳤다. 미쳤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는 있는데 고쳐지지가 않는다. '아비 앞에서 벌벌 떨지 말아라. 내가 네 아버지다.' 생각만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망측한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단 말인가. 왕자들에게도 해주지 않은 말이다. 나는 왕이며 공주위에 군림하는 자다.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넌 그런데 왜 계속 여기 있는 거지?" 원래 김상희 너 따위는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듯.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래야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 김상희와 관련된 일이면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어진다. 나는 모든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이토록 과식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빈 그릇을 쳐다봤다. '내 딸이...나를 위해 만들어준 첫 번째 음식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부지, 아니. 아버님. 뭐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왜 생글생글 웃고 있어요?" *** 한진수는 작전 장교로 투입 됐다. '붉은 산맥'. 독기가 매우 강하고 길을 잃기 쉬워 어지간한 탐험가 아니면 찾지 않는 미개척지역이다. 현재 프리온 나이트 내 한진수의 직위는 '소령'이다. 이번 작전의 총괄 책임자인 '준장' 최익현이 말했다. "한진수. 네가 프리온 나이트를 지휘해라. 이번 작전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어차피 작전장교는 직접 전투지역에 투입되지는 않는다. 한진수는 조작 패널을 받아들었다. 프리온 나이트 조작패널에는 현재 가용 가능한 병력의 숫자와 위치. 그리고, '이 것이 소환 스위치인가.' 소환 스위치가 내재되어 있었다. 정사각형 형태. 작은 노트북과 비슷한 형태의 그 것의 액정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최익현의 말이 이어졌다. "마력을 좀 더 끌어올려." 그러자 느껴졌다. '이 것들이... 프리온 나이트의 기운.' 전투 지역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다. 직선거리로 약 700미터 정도. 저 멀리.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몸체가 적어도 10미터는 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것이 진짜 프리온 나이트.' 프리온 나이트는 베일에 가려진 신비단체다. '어쩌면 저것들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제국의 문명은 도대체 어디까지 발달이 되어있는 것이란 말인가. 소환 버튼을 눌러 소환을 했더니 거대병기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저건 사람이 아닌, 로보트와 비슷한 개념인 것 같았다. 한진수는 눈을 잠깐 감았다. 그가 지금 하려는 짓은 '학살'이었다. '나는 프리온 나이트다.' 프리온 나이트는 제국에 충성해야한다. 적어도 프리온 나이트에 속해 있을 때에는 그렇다. "패널과 접속을 끊지 말고 명령을 내려." 그리고 한진수는 명령을 내렸다.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였다. 거대한 폭발음도 들리지 않았다. 붉은 산맥 속. 별로 크지 않은 화전민 마을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환했던 두 기의 프리온 나이트와 교신했다. - 생체 반응 무. - 미션 클리어. 한진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단순한 로보트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다. 사람이긴 사람인 것 같은데, '계집의 목소리...?'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득 계집의 목소리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집'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하나뿐인 약혼녀가 떠올랐다. '김상희...' 이따금씩 계속 생각난다. '내가 프리온 나이트가 아니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한진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깟 결혼. 그게 도대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에겐 프리온 나이트의 일이 훨씬 중요했다. 적어도 머리는 그렇게 말했는데 너무나 찝찝했다. 결혼하고 싶고, 김상희를 옆에 두고 싶다는 속마음의 외침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한진수가 최대한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미션을...클리어 했습니다." 직접 사람들을 죽인 건 아니지만 분명 느껴졌다. 최소 60명 이상의 사람이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이 산 속 깊은 곳까지 찾아와 화전민 마을을 없애버리다니. 최익현이 말했다.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다." "예." 한진수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최익현이 한진수를 다시 불렀다. "한진수." "예." 한진수가 몸을 돌렸다. 최익현과 눈이 마주쳤다. 최익현이 한진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진수의 눈동자가 조금 흐려졌다. 최익현이 말했다. "너는 지금의 일을 모두 잊는다." 한진수가 그 말을 따라하다시피 대답했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없었다. "저는 방금의 일을 모두 잊었습니다." "내 명령을 따르겠다면 지금 오른손을 들어라." 한진수가 오른손을 들었다. 보통은 이 정도에서 끝낸다. 하지만 최익현은 이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상대는 한진수다. 제국에서도 탐내는 세기의 대천재. 과거 김훈상의 재능을 뛰어넘을 지도 모르는 재목이다. "지금 너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나?" 원래 입력된 키워드대로라면 '제국의 영광'이라고 답해야 한다. 한진수가 괴로운듯 인상을 찡그렸다. 무언가를 말했다. "제국...아니....제....김...제...국... 김...상...희..." 최익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가 잘못 됐나?' 몇 가지 키워드를 더 던져봤다. 전혀 이상함이 없었다. 딱 두 가지 질문에만 이상반응을 보였다. "지금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질문의 대답 역시 원래대로라면 '제국의 영광'이다. 한진수가 또 힘겹게 대답했다. "제국....아니...제국...아니...김...상...희...입니다..." 그리고 최익현은 놀라운 것을 하나 더 발견했다. 한진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봤다. 한진수는 고장난 로보트 마냥 '김...상...희...상...희....상...희...사...랑...김...상...보고...사...랑...너무...' 하고 중얼거리다가 크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김상희가 모르는 곳에서, 한진수의 본심이 김상희를 애타게 찾았다. '뭔가...있다. 보고를 올려야겠어.' 그 때, 한진수가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최익현이 어깨를 으쓱하고선 물었다. 최면은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농담삼아 물어보듯 물어봤다. "한진수. 네게 있어서 김상희는 어떤 존재지?" ============================ 작품 후기 ============================ 어휴 오늘 조금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ㅠㅠ 0079 / 0192 ---------------------------------------------- 한진수. 네게 있어서 김상희는 어떤 존재지? ***79 한진수는 최익현을 쳐다봤다. '왜 저런 쓸데 없는 질문을 던지는 거지?' 김상희의 이름. 듣는 순간, 또 쿵! 하고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서는 이게 병이 아니라고 했다. 병원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으니 좀 더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쿵! 하는 충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김상희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국가가 개인을 원한다? 그런데 그 개인이 힘이 없는 약자다. 그렇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서 원하는 것을 빼앗겠지.' 그게 뭔지는 모른다. 다만 황제쯤 되는 자가 김상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김상희에게 일반인들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김상희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농담조로 던진 말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김상희에 대해서 묻다니.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괜히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또 어째서 이런 간단한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는 거냐...?' 김상희와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머리가 굳어 버린다. 이게 굳어 버리는 건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마력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고 사고체계가 엉키는 것 같다. "...그런 계집.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무가치한 계집일 뿐입니다." 이 말을 하려고 천하의 한진수가 갈등하고 또 갈등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김상희는 가치 없는 계집이다. 그런 쓸데없는 계집 따위. 아들이나 잘 낳으면 그만이지. 머리가 더욱 아파왔다. 김상희를 미워해라. 누군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악마라는 것이 있다면, 악마의 속삭임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제발 닥쳐!' 머릿속이 웅웅 거렸다. 직속상관 앞이라서 불편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이상한 속삭임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몇 초가 흐르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 됐다. 하지만 마력흐름은 이미 흐트러졌다. 최익현도 그걸 눈치 챘다. "아무리 천재라해도, 첫 전투는 긴장되는 법이지. 하지만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예." 한진수는 앞장서서 걸었다. 다음 작전지 역시 '붉은 산맥' 내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초록색 나뭇잎 사이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뭔가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뭔가가 기억날 듯 말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약속 할게. 나 절대로 너 비참하게 만들지 않아. 언제나 행복하게 해줄게. 나는 비참해도 괜찮아. 나는 너만 행복하면 되니까. 김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 김상희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배시시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가짜 웃음, 혹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연기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계집.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무가치한 계집일 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던 건지. 한진수는 한진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혼자서,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중얼 거렸다. "보고... 싶어. 죽을 만큼..." *** 알렉스는 이주형과 만났다. 알렉스에게 있어서 이주형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어이구, 우리 귀한 스페셜 나이트가 오셨구만!" 이라고 말은 했지만, '실험 샘플 1호다!' 알렉스에게 있어 이주형은 귀중한 실험 샘플 1호다. "자. 그래. 어떤 일이 있었지?" 이주형은 알렉스가 조금 무서워졌다. 참고로 이주형은 게이는 아니다. 남자들끼리 사랑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딱히 취미는 없었다. 또 참고로 말하면 알렉스는 이미 유명한 게이다. 또 참고로 말하면 그래서 김훈상이 -당시 김훈상 스스로도 자각은 못하고 있었지만- 안심하고 알렉스를 김상희의 교습선생으로 붙였던 거고. '뭔가 기묘한 열망이 뒤범벅된 눈빛이다!'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뭔가 좀 두려워졌다. 원래 스페셜 나이트는 기습 침투 및 살인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거. 결코 쉬운 일 아니다. 김상희와는 다른 의미로 눈치를 아주 잘 살펴야 했다. 사냥감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언제 방심하고 있는지.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움직이게 된다. 그가 본 알렉스는 지금 굉장한 흥분상태였으며 위험한 상태였다. 이주형은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학자님. 심장 박동이 매우 높습니다만." 알렉스는 흐흐 웃었다. 몸이 근질근질한지 손가락까지 꿈틀거렸다. 이주형이 계속 뒷걸음질 쳤고 알렉스는 어서 말해보라며 이주형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이주형의 벽이 등에 닿았다. "어서. 어서. 말해보게." 지구식으로 표현하자면 벽키스 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이주형은 울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스페셜 나이트쯤 되는 사람이 고령의 학자를 밀치거나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이 학자는 왕실의 경비카드까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실세가 아닌가.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둘이 사귀어?" "와, 왕자님. 그런 거 아닙니다." "에이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나이차이는 좀 나지만 뭐. 나는 별 생각 없어. 둘이 연애를 하든 말든." 김환성이 킥킥대고 웃었다. 알렉스의 눈이 번뜩 거렸다. "왕자님!" 왕자님이라고 읽고, '실험 샘플 2호다!' 실험샘플 2호라고 읽는다. '이주형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귀중하고 소중한 샘플이 되겠어!' 김환성도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당황해서 말도 더듬었다. "가, 가까이 오면 죽빵 날린다." *** 알렉스가 물었다. "왕자님 혹시 김상희 공주가 외간 남자와 스킨십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김환성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김환성에겐 그런 경험이 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 크리스가 김상희의 눈을 가려줬을 때 그랬다. 마력을 써서 해도 되는데 굳이 손을 갖다대는 건 뭐람. 짜증이 치밀어 올랐었다. 알렉스는 한 줄기 광명을 찾았다. 이 실험샘플. 최고다! 단순하기까지 하다. 보통은 이런 질문에 '에이 그럴 리가 있겠냐?'라고 대답하는 게 정상이다. '역시 상희학은 헛된 학문이 아냐.' 아주 오랜 옛날, 이 세계가 둥글다고 주장한 미친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은 -이름도 남아있지 않다. 역사에는 미친놈이라고 기록되었다- 학계에서 퇴출당했었다. 수백 년이 흐르고 나서 그 것이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알렉스는 상희학 역시.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왕자님이 김상희 공주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 걸 질투라고 하죠." "헹. 그건 똥개일 뿐이야." "하지만 그 똥개가 주인의 품을 벗어나는 건 싫으시잖아요." "그, 그, 그건 그렇지. 왜냐하면 똥개는 주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거든." "그 말은 즉, 똥개가 뭔가를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건가요?" "으, 응?" 김환성은 자신 스스로도 듣지 못한 내면의 목소리를 알렉스의 입을 통해 들었다. 알렉스가 씨익 웃었다. "주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주인이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그렇지. 똥개는 멍청하니까." "어쨌거나 결론은 챙겨주고 싶다는 거네요." "......." 김환성은 뭔가 얘기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거 아닌데. 뭔가 좀 말려들어가는 기분인데. 그런데 알렉스가 딱힌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어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새로운 단어를 사전에 등재시킨 건 알고 계시죠?" "몰라." 김환성은 그런 거에 관심 없다. "제가 딸바보라는 걸 등재시켰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알렉스는 쉼호흡을 했다. 아직 학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다. 뜻을 설명했다가는 돌 맞아 죽는다. "시스터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그게 뭔데?"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러기 위해 위대한 왕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제 얄팍한 지식만 가지고는 힘들군요." 김환성은 '위대한'이란 단어에 꽂혔다. "그래. 나만 믿어." 알렉스는 쾌재를 불렀다. 왕실 경비카드를 얻었던 것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기뻤다. '실험샘플 2호다!' *** 나는 강서영씨를 찾았다. 강서영씨는 화장을 하다 말고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상희야." 어이구. 우리 강서영씨.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고는 있구나. 잔주름도 좀 보이고. 생각해보면 좀 불공평하다. 남자들은 안 늙는다. 우리 개차반씨도 20대 중반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 물론 개차반 특유의 포스와 분위기가 있어서 좀 오묘한 느낌이 있기는 있다. 눈으로 보이는 나이는 20대인데 느껴지는 나이는 30대 이상이랄까. 하여튼 개차반씨는 그렇게 팔팔한데 강서영씨는 이제 좀 나이를 먹었다. 뭐.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렇다는 소리다. 이 정도면 김태희나 이영애 옆에 있어도 꿀리지 않을 것 같다. "어머니. 그간 강녕하셨지요?" "응. 나는 네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하단다." 그리고 나는 봤다. 시녀가 침대시트를 갈아 나오는 것을. '어제도 한바탕 하셨나 보네.' 뭔가를 한바탕했냐고 묻는다면, 노코멘트하겠다. 다만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 보배수여식이 있던 날. 강서영씨가 지르던 그 엄청난 비명을. 누가 들으면 사람 잡는 줄 알겠던 그 비명. '요즘에도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상희야. 질문을 하나만 해도 될까?" 어래. 무슨 질문을 하려고 갑자기 이렇게 무게를 잡으실까. 설마 뭐. 신음...흠흠. 아니. 뭐라고 해야해. 하여튼 그런 소리를 잘 내는 법. 이런 거 말하는 거 아니겠지. 설마. 그런 건 나라도 대답 못 해준다고. "네. 말씀하시어요."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해. 그 분이 밤마다 찾아와 날 아껴주시고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여 주시고..." 나는 거기서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 개차반씨가 사랑스럽다고 말을 해준다고? 헐. 말도 안 돼. 우리 개차반씨가 달라졌어요. 애초에 '사랑'이란 단어가 흔한 단어가 아니다. 특히나 남성과 여성사이에 있어서 '사랑'이란 단어는 그냥 없는 단어라고 보면 된다. '도대체 개차반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개차반씨는 많이 변한 걸지도 모르겠다. 단서를 얻었다. 개차반씨. 많이 변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도 좀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약간 이상했다. "어머니...?" 자세히 보니 강서영씨의 온 몸에서 땀이 흥건히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황급히 강서영씨의 이마에 손을 댔다. 세상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잖아. "괘, 괜찮으세요?" 그냥 단순한 열이 아닌 것 같다. 이건 정말 심각했다. 손을 댔는데 뜨거울 정도다. 단순히 감기 같은 게 아닌 것 같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저 정도면 피가 끓어오를 것 같은 그런 기분까지 들었다. 뭔가...일이 잘 못 됐다. 크게 외쳤다. "시녀! 시녀 없어!" 진짜 큰 일이다. 예삿일이 아니다. 어쩌면... 독 같은 걸 먹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녀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털썩. 강서영씨가 쓰러졌다. "어, 어머니!"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일이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다. 호흡을 확인해봤다. 호흡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대로면 5분 내에 죽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강서영씨를 죽일 수는 없었다. 비록 내 영혼의 어머니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 몸의 어머니는 맞았다. 이 세계에서 강서영씨는 나의 엄마가 맞다.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어디론가 도움을 청하러 가기는 늦었다. 나는 혼자서 엘레베이터도 사용 못한다. 나는 미친 짓을 좀 하기로 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니, 나도 모르게 미친 짓을 해버렸다. "아빠!!!" 또 외쳤다. "오빠!!!" ...저질러놓고 나니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 지금... 무슨 짓 한 거야...? 공주따위가 감히 왕과 왕자를 부른 거야...? ============================ 작품 후기 ============================ 아... 오늘은 도무지 후기가 떠오르지 않네여 ㅠㅠ 이럴수가 ㅠㅠ 0080 / 0192 ---------------------------------------------- 내가... 네 아버지다 *** 김상희가 오빠와 아빠를 불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강서영이 죽어가는 걸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그리고, "오빠!!!" 이름하여 '부자 소환 사건'은 고려 왕궁 내에서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전대미문의 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데, 하여튼 김상희의 외침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건 황당하게도 이주형이었다. "공." 공주님 무슨 일이죠? 라고 물으려고 했다. 그도 지금 눈 앞의 상황이 안 보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저게 저렇게 큰 일인지는 잘 알수 없었다. 공주가 오빠와 아빠를 부른다는 거. 그것도 저렇게 큰 소리로 부른다는 거.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일이다. 이주형이 만약 김상희를 만나기전의 마음가짐이나 상태였다면 지금 분노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공주따위가 저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김상희 공주가 부른 '오빠'의 호칭에 은근슬쩍 편승하려 끼어들었다. 마치 김상희가 부른 '오빠'에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주형은 '공'이외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충!" '공주님 무슨 일이죠?' 라는 질문 보다는 '충!' 이라는 인사가 훨씬 다급했으니까. 김훈상이었다. 이주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사용하신 건가?' 정확하게는 몰라도 이 시간이면 지금 학자들과 회의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학자들과 주로 회의를 갖는 '화합의 관'과는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1300미터 이상이 떨어져 있다. 길을 따라 걸어오면 20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김상희 공주의 '오빠!'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했다. 결국 그걸 사용하신 거다. '신체에 무리가 굉장히 많이 가는 불완전한 기술인데.' 뿐만 아니라, 저 기술은 아직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 일반 나이트들도 모르는 기술이다. 오직 김훈상과 스페셜 나이트만이 공유하고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기술인데, 이렇듯 공개를 해버렸다. '타국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자고로 자국의 전력이 타국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 쪽이 사용할 수 있는 패가 하나 사라지는 셈이니까. 그런데 이주형은 또 찔끔 놀랐다. 콰광! 콰과과광! 검을 뽑아 들었다. 왕궁 내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냔 말인가. 지금 이 곳에는 국왕폐하께서 계시다. 그런 곳에서 이런 무자비한 진동이 느껴지다니. 이건 마력에 의한 진동이다. 어떤 강대한 마력이 기록의 관을 통째로 흔들며 부숴대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미친 놈이냐!' 국왕을 위협하는 어떤 세력이 지금 이 순간을 노렸을 수 있다. 지금 저 기술을 사용한 왕의 상태는 정상은 아니다. 아주 장거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큰 타격은 없겠지만 하여튼 평소보다 약화되었다는 건 틀림 없는 사실이다. 검을 뽑아 들었다. 강대한 기운이 가까이 다가왔다. 쾅! 거대한 소리. 거대한 진동과 함께 바닥이 뚫렸다. "왜 불러!" 이주형은 검을 놓칠 뻔 했다. '크, 큰일 날 뻔 했다.' 하마터면 왕자님께 검을 겨눌 뻔 했다. 그건 중죄다. 그 어떤 이유가 있고 상황이 있더라도 절대 범해서는 안 될 실수다. "아부지?" "조용히 해라." 이주형은 슬금슬금 걸어가 바닥에 뚫린 구멍을 쳐다봤다. '다행이야. 내가 칼을 빼든 거. 못 보신 거 같아.' 아래를 쳐다봤는데, '세상에...' 구멍이 우수수 뚫려 있다. 아무래도 저 아래에서부터 차례차례 지붕을 뚫고 날아온 것 같았다. '아니 그냥 하늘로 날아오시든가하지. 왜 구멍을 다 뚫어놓으셨대? 너무 당황하셨나?' 그리고 이주형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왕이 인공호흡을 하고 있다. 그것도 섬세한 마력컨트롤을 바탕으로한 마력 인공호흡이다. 왕이 어찌 저런 허드렛일을 한단 말인가. 스페셜 나이트인 자신이 있는데. 김훈상은 인공호흡을 멈추지 않은 상태로 손만 내저었다. 조용히 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주형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왕이 움직이고 있는데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그만큼 불경한 짓이 어디 있을까.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마침, 김상희와 잠시 얘기를 나누려고 찾아왔던 알렉스 역시 김상희의 외침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래도 알렉스는 지붕을 뚫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상적인 경로로 찾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일이 펼쳐져 있었다. 국왕 김훈상. 둘째 왕자 김환석. 셋째 왕자 김환성.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 4명의 남자가 보였다. 그는 학자다. 머리가 굉장히 좋다. 쓰러져 있는 강서영. 울먹거리고 있는 김상희. 네 명의 남자. 김상희의 외침. 부서져 있는 바닥. 이 단서들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유추해냈다. 이주형을 말렸다. "이주형 나이트. 그만두게. 폐하를 방해하지 말고. 지나친 충정이 때로는 독이 될 때도 있는 법." 이주형은 또 찔끔 놀랐다. 스페셜 나이트 직을 수행하면서 오늘처럼 여러 번 놀란 적이 없었다. '김환석 왕자님은 또 언제 오셨대?' 이건 명백한 실수였다. 만약 김환석 왕자가 아닌 암살자였으면 방어하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다. 스스로를 자책해야만 했다. 이래서야 스페셜 나이트의 자격이 없다. 김훈상이 몸을 일으켰다. 강서영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뭐, 뭐지?" 자신을 자책하며 충격에 빠져있던 이주형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홀로 이동도 아니고 누군가를 데리고 이동이라니. 저 경지. 들어본 적도 없다. 저 기술의 이름은 별 거 없다. 워프라고 부르는 기술이다. 아직 밝혀진 기술이 아니다. 고려 스페셜 나이트가 개발하고 있는 기술이며 아직 불완전한 기술. 그리고 고려의 비장의 패이기도 했다. '어째서 이렇게... 왕자님들은 그렇다 쳐도... 김상희 공주와 알렉스 학자까지 있는데 저런 기술을 그냥 사용하시는 거지? 도대체 어디로 가신 건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원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건 당연하지 못한 일이다. 왕자가 아픈 것도 아니고 계집이 아픈데, 그 계집을 왕이 안고 국가 기밀인 기술을 사용하여 병원으로 간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며 그래서 이주형은 병원으로 갔다는 생각을 못했다. 왕궁 내. 회복의 관. 고려 왕국 내 최고의 의료진이 모여 있는 왕궁 내 최고 의료시설이다. 왕족과 귀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시설. 평민도 사용할 수는 있으나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이용하고 싶어도 이용하지 못하는 의료계 최고 권위기관이다. 그 곳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왕이 직접 계집을 안아들고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달려온 것도 아니고 날아온 것도 아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김훈상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회복의 관 관장인 미첼의 앞이었다. 미첼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첼이 그러든지 말든지 김훈상은 뜬금없이 말했다. "치료해라." 미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편안하게 죽여라도 아니고 치료해라라고? "너를 믿는다. 미첼. 반드시 살려내라." *** 제국 정보부는 언제나 바쁘다. 오늘 또 바빠졌다. 제국 정보부 국장 김국현이 충격적인 소식을 받아들었다. "직선거리로 13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예. 왕궁 내에 심어둔 첩자로부터 온 정보입니다. 확실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건 엄청나게 위협적인데..." 정말 위협적인 거다. 김훈상이 만약 암살을 시도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대상이 거의 없어지지 않는가. 13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찌르고 도망친다면, 경호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언제. 어떻게 그런 기술을..." 하지만 정보부 국장 김국현은 한 가지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쇼일 가능성도 높다."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여자를 안고 이동했다. 공주의 부름에 응답했다. 이 두가지 이슈만 놓고 보더라도 굉장한 센세이션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저런 기술은 분명히 극비일 것이야. 고려의 숨겨진 패라고 할 수 있으니." 모르면 모르되, 알면 그래도 대책을 세울 수는 있을 터. 그런 의미에서 저 기술이 밝혀진 이상 모르던 때보다 위협이 훨씬 줄어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사건을 키웠다고 볼 수 있지." 표면적인 사건만 놓고 해석하면, 제국의 정보부 국장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이슈로 만든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를 생각하면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속임수가 있다." 일부러 상황을 크게 만들고 이런 기술이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지 않은가. 그 말은 즉, "지금 제국 교역부가 고려와 마찰을 겪는 중이라고 했지?" 결국 외교적 압박을 가하기 위함일 확률이 높았다. "예. 마력석 알론 때문에 협의점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제국을 상대로 무력을 과시하려는 속셈인 것 같군." 1300미터를 순간이동하는 기술? 그런 게 있었으면 고려는 벌써 세계를 제패했을 거다. 멀리서 갑자기 나타나 왕이나 황제들을 암살해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나 황제는 약간 생각이 달랐다. "네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기술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한 상태로 움직여라." "...예. 폐하." "김훈상은 언제나 상식을 뛰어넘는 자니." 고려에만 비밀의 패들이 있는 게 아니다. 제국에도 공개하지 않은 패들이 있다. 아니. 오히려 고려보다 훨씬 많을 거다. "붉은 산맥 쪽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지?" "수확이 조금 있었다고 합니다." "좋군." 황제는 눈을 감았다. '김훈상은 멍청한 자가 아니다. 제국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할 리는 없어. 그렇다면 뭐지? 뭔가가 더 있는 것은 분명한데.' 만약 그런 기술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솔직한 말로 고려를 그냥 쓸어버리고 싶다. 실제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프리온 나이트를 전원 대동하면 가능하긴 한데, 문제는 그랬다간 황족들이 모두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런 자가 있어야 나도 사는 재미가 있겠지.' 지금 당장은 쓸어버려야할 적이 아니라, 함께 가야할 동지다. "아직까지는 말이야." *** 김훈상은 강서영을 회복의 관에 맡긴 뒤 김상희를 불렀다. 김상희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다. 작게 부른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빠'와 '아빠'를 불렀다. 한낱 계집 아이의 외침 때문에 남자 4 명. 그것도 왕과 왕자, 스페셜 나이트가 움직였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기는 한데 이건 중죄다. 아무리 김상희라도 벗어날 수 없는 중죄. 아니. 죄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상식을 벗어난 미친 짓이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나가라." 김상희는 눈 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너무 긴장해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라는 말. 아무래도 왕궁을 떠나라는 것 같다. 죽일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빈털털이로 쫓겨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제 봤던 그 여자아이처럼 경매대에 올라 몸값이 매겨지고 팔려지겠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소녀가 너무나 경황이 없어..." "이주형." 이주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환성과 함께 김상희를 밖으로 내보내." 김상희는 거기서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김환성과 함께? 그렇다는 말은 아주 내쫓지는 않는다는 뜻인데. 김훈상이 다시 말했다. "아니. 잠깐." 김상희를 일으켜 끌어내려던 이주형이 멈칫했다. 김상희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깨에 뭔가가 닿았다. 묵직한 느낌. 김훈상의 양 손이 김상희의 양 어깨에 닿았다. "나를 봐라." 김훈상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김상희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 "아버님. 소녀가 정말 잘못했어요. 어머니가 죽을 것 같아 소녀는..." "나를 보라고 말했다." 김상희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김훈상이 보였다. 하지만 김상희는 느낄 수 있었다. 저 눈빛. 결코 화가 난 눈빛은 아니었다. "이주형. 지금부터 입을 닫고 눈을 닫고 귀를 닫아라." 이주형은 김훈상이 시키는대로 마력으로 자신의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적 진지에서 상대에게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을 시체처럼 만들어버리는 기술이다. 왕궁 내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김상희. 두려워 하지마라." 김상희가 김훈상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길을 피하자, 김훈상이 손 끝으로 김상희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억지로 눈을 마주쳤다. "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를 지키는 자다. 너를 해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며 너와 함께함이다. 내가... 네 아버지다." 피식 웃었다. "이왕이면 아빠라고 부르든지."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김상희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몸 조심히 잘 다녀와라. 이 자리에서 언제나 늘 기다리고 있을 테니." 김훈상은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마력이 김상희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이주형의 오감을 다시 깨웠다. 방금 전의 따스했던 모습은 거짓말이기라도 한 듯,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건방진 계집과 함께 왕궁 밖으로 나가라. 지금 당장."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한밤중에, 자신을 쫓아내듯 내보내버리는지 말이다. 깊은 밤. 알렉스는 침대에 누웠다. '김상희 공주님을 오늘 밤에 내보내실까, 아니면 내일까지 데리고 계실까?' 아마도 오늘 내보내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확인해보면 될 터.' 자신의 가설이 맞다면 분명 오늘 내보내셨을 거다. 알렉스는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아침 해가 밝아왔다. 알렉스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왕궁에 한 차례... 바람이 불겠어." ============================ 작품 후기 ============================ 이주형: 헤헷 저도 오빠인 척 좀 해보려고 그랬는데... 티났나요? 0081 / 0192 ---------------------------------------------- 오다 주웠다 ***79 몇시간 전. 김환석은 책상에 앉았다. 김환석은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는 김환성보다 무력이 약하다. 쉽게 말해 싸움을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특기를 갈고 닦았다. 그는 요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명해내는 것에 심취해있는 상태다. 실제로 왕궁 내 몇몇 자동시스템은 김환석이 직접 고안하여 설계했고 이미 쓰이고 있는 것들도 있다. 발명 아이디어라는 것이 아무때나, 언제나 마구 떠오르는 것이 아닌데 요즘 꽂힌 것이 하나 있다. 그래서 저녁만 되면 두문불출하고 책상에 틀어박혀 앉아 그 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연구했다. 이 때만 되면 시녀들은 김환석의 방을 찾기가 너무나 무서워진다. "오, 오늘은 네 차례 아니었니?" "그럴 리가! 난 어제도 다녀왔다고." 저녁 7시. 김환석 왕자가 티타임을 갖는 시간이다. 일단 시녀들 입장에서는 무조건 차를 대령해야만 한다. 그러나 또 김환석은 자신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나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옆에서 자그마한 소리라도 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시녀들에게 있어서 김환석은 공포의 대상이다. 결국 오늘 차를 내가게 된 시녀는 울상을 지었다. 다른 시녀들은 자신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를 내가게 된 시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노크를...해아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원래는 하는 게 맞다. 당연하다. 그런데 김환석은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 그렇다고 차를 안 내갈 수도 없다. 딜레마에 빠졌다. 노크를 하느냐, 안 하느냐. 지구 기준으로는 정말 사소한 건데 시녀 입장에서는 생과사를 오가는 중요한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시녀는 노크를 했다. 똑.똑.똑.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는 건 들어오라는 허락인지, 아니면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건지. 파악할 수 없으니까. 원래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모를 때 제일 무서운 법이다. 김환석은 스탠드를 켜 놓은 상태로 뭔가에 굉장히 집중하고 있었다. 시녀는 아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차를 아주아주 조심스레 올려놨다. 약간의 소리라도 나면 안 됐다. 한편, 김환석은 문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이." 시녀의 몸이 굳었다. "네, 네, 왕자님." "내가 작업 할 때, 방해받는 거 싫다고 했냐 안했냐?" 소통의 부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시녀에게는 시녀의 입장이 있다. 시녀의 본업은 시중을 드는 것이며 차를 타는 것도 시녀의 일이다. 시녀는 당연한 일을 한 거다. 하지만 김환석의 입장은 다르다. '나 작업할 때 방해하지 마라.' 라고 했으면 작업 할 때는 아예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김환석이 시녀들에게 방해하지 마라라고 하지 말고, 아예 근처에도 오지 마라. 라고 말한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김환석은 시녀들에게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메뉴얼을 주지 않았다. 김환석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방금, 뭔가 획기적인 방안이 떠오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났다.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하여튼 계집아이란 것들은 말을 도무지 못 알아듣는다. 그는 작업을 할 때,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싫다. 집중을 깨버린다. 자신을 방해하는 소리가 있으면 그 소리를 없애 버린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방금 시녀도 죽여버렸을 지도 모른다.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시녀의 얼굴을 보면 왠지 김상희가 떠올라서 요즘 그런 가혹한 방법은 쓰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왜 김상희가 떠오르는지. 그 스스로도 몰랐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작업 할 때에 그 어떤 소리도 용납하지 않았던 김환석이 벌떡 일어섰다. '어디냐?' 다급한 것이 느껴졌다. 황급히 마력을 풀어 위치를 찾았다. 아무래도 기록의 관 쪽인 것 같았다. 덩달아 김환석도 마음이 급해졌다. 연구 중일 때에 발소리만 내도 히스테리를 부리던 김환석은 여기 없었다.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달렸다. 한편, 시녀들은 굉장히 놀랐다. "어째서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지?" 김환석이 뭔가에 열중하고 있으면 시녀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쉰다. 혹여라도 발걸음 소리가 그를 방해할까봐 걷지도 않는다. 기침이라도 할 것 같으면 필사의 각오로 기침마저도 참는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긴장의 시간이 짧았다. 김환석이 황급히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야. 잠시 쉴 수 있겠어." "그러게... 갑자기 어딜 가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상희 공주의 외침 때문에 달려 나갔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김환석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 김환성이 걸음을 멈췄다. "형?" "이거. 가져가라." "이게 뭐야?" "네 거 아냐." "그럼?" "저거." 이봐. 나는 저거 아니고, 사람이라고. 김상희는 말해주고 싶었다. 똥개 취급도 서러운데 물건 취급이라니. 김환석은 김상희에게 가까이 걸어가 김상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김상희의 귀가 보였다. 김상희의 귓 속에 뭔가를 넣었다. "형. 그게 뭐야?" "몰라도 돼." 김환석은 김상희를 쳐다봤다. 매우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김상희가 김환석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을 뿐더러, 눈치도 살피기 어렵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표정 읽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제 꺼지든지 말든지." 아니. 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김상희는 따지고 싶었다. 지금 워낙 경황이 없어 제대로 따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묻기는 물었다. "오라버님께서 친히 하사하신 선물이 무엇인지 소녀는 너무나 궁금해요. 혹여 알려주시는 영광을 베풀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오다 주운 거." 고려 학자들이 들으면 게거품을 물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저 물건은 이번에 고려 학자와 엔지니어 6명과 김환석이 공동으로 개발한 위치추적용 마이크로칩이다. 특히나 마력이 없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으며 반 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주목할 점은, 이 프로젝트는 김환석이 주체가 되어 진행된 프로젝트였으며 김환석 개인 투자비용만 60억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물건이 '오다 주운 것'으로 둔갑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초였다. 다만, 아직까지 사람에게 임상실험을 한 적이 없어 부작용이 염려되는 제품이었다. 김환석은 이 마이크로칩을 함께 개발한 치프 엔지니어 강옥규에게 말했다. "부작용은 없을 거다." "예?" "내가 확인해봤거든." "서, 설마...?" 아무래도 김환석 왕자가 자신의 몸으로 실험을 해본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째서 고귀한 왕자님이 그런 일을 직접 실험을 한단 말인가! 돈 몇 백만원만 쥐어주면 임상실험에 참여하겠다고 참여할 참가자들이 수두룩빽빽한데 어째서! 시간이 조금 걸린다 뿐이지, 왕자가 직접 그걸 몸에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왕자님. 어째서..." "어차피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김상희가 오늘 밤, 바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부랴부랴 자신의 몸으로 실험해봤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김환석 스스로도 그거 때문에 자신의 몸에 실험을 했다고 생각 안 했다. 인지 자체를 못했다. 당연히 안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실험했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김환석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달빛이 보였다. "죽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그딴 거. 신경 안 쓰니까." 그러면서도 김상희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계속 확인 했다. 시녀들은 책상위에 놓인 새로운 기계, 붉은 점이 깜빡 거리는 기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뭘까?" "모르겠어. 하여튼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야." 작업중에는 절대 한 눈을 팔지 않는 김환석이 중간중간 그 기계를 유심히 들여다볼 때가 있었다. "작업을 하시다가 쳐다볼 정도면 엄청나게 중요한 뭔가가 있겠지." "혹시 보물이 있는 곳을 탐지해주는 물체 아닐까...? 퓨리어스라든가..." 시녀들도 퓨리어스에 대해 안다. 천고의 보물 퓨리어스. 그걸 알려주는 기계라면 저렇게 애지중지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 거 아니다. 김상희 위치추적 기계일 뿐이다. *** 김훈상은 일부러 김상희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왕이다. 왕이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건 아니다. 김훈상이야 워낙에 칭송이 자자하고 명망이 두터운 왕이지만, 힘이 약했던 왕도 분명히 있었다. 신하들의 입김이 강해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적도 있었을 정도다. 특히나 '정당한 명분'이 있을 때 신하들은 왕에게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김상희 공주를 엄히 처벌해야 합니다." 이 세계 상식으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어찌 한낱 공주따위가 겨우 왕비가 쓰러진 것 때문에 '아빠' 와 '오빠'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계집이 남자를 이리가라, 저리가라 말하는 것 자체가 일단 모욕적인 일인데 그 대상이 하물며 왕과 왕자다. '계집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김훈상도 처음에는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들의 말이 맞다. 김상희의 행위는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다. 지구식으로 표현해보자면,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 어떤 소시민이 수령에게 '야이 돼지 새끼야! 이리 와라!' 라고 외치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정도다. 사형당해도 싸다. 김훈상도 그 사실을 안다. 머리로는 김상희를 엄히 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가슴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이렇게 주장할 것을 알아 일단 밖으로 내보내고 봤다. 일단 시간부터 끌으려고 말이다. 일단 밖에 있는데, 이들이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니. "폐하! 김상희 공주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왕궁의 기강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남자들도 왕자와 왕을 이리 오너라, 부르지 못하는데 어떻게 공주따위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학자들은 정말로 화가 많이 났다. 결국 김훈상은 말했다. "...내가 그런 권한을 줬다." "예?" "김상희는 왕국의 보배다. 그래서 내가 특별히 나와 왕자들을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권한.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신하들은 따지고 싶었지만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고금으로부터 그런 권한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폐하께서 그런 권한을 주셨다는 말은 그 어떤 일지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폐하. 김상희 공주를 엄히 벌하여야만 합니다." 김훈상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신하들의 반응. 당연히 예상했다. 만약 김상희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면 어떤 행동파인 놈이 먼저 쳐들어가 '폐하. 이 계집을 목을 제가 땄습니다. 칭찬해주시옵소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주형이 막기는 했겠지만.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다.' 김훈상은 칠 때와 빠질 때를 본능적으로 안다. 괜히 왕자리에 있는 거 아니다. 지금은 '칠 때'다. 김훈상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히 설명해야 하나? 묻겠다. 너희들의 나의 왕이냐? 내가 너희들의 왕이냐?" 무거운 마력이 왕궁 안을 가득 내리눌렀다. 신하들은 숨 쉬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신하들은 이크. 김상희공주 벌 주려다가, 내가 죽겠구나, 싶었다. 김훈상은 약간의 공포분위기를 일부러 조성한 뒤에 엄명을 내렸다. "이번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악해라." 그럴듯한 명분도 줬다. 강서영이 쓰러졌으니 남자들이 나서서 사건을 규명해라, 라고 말한다면 움직이기 싫어할 거다. 그래서 명분을 줬다. "내가 최근 강서영과 동침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강서영을 통해 나를 독살하려는 배후세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는 독약이 있을 수 있으니까. 신하들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여자의 몸을 통해 남자의 몸으로 독을 전이시키는 수법.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 전, 그렇게 죽은 왕도 있었다. 일이 매우 커졌다. 왕궁에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사건의 배후에는 왕비 중 한 명이 있었다. 역사서에 남겨진, 특별한 방식의 독약 같은 건 없었다. 마력을 가진 '남자'들로 이루어진 전문 조사단에 의해 배후는 쉽게 밝혀졌다. 왕비를 질투한 치정극이었는데, 그 결과는 처참했다. 시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 세상에..." 왕궁의 정문에 세 여자의 목이 걸렸다. 장대 위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실제로 목이 잘려나가 죽었다. 왕비의 딸들마저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알렉스 역시 그 목들을 봤다. '국왕폐하께서 일부러 잔혹한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군.' 알렉스는 김훈상을 아주 오래전부터 봐왔다. 어린 시절은 김환성보다 더한 장난꾸러기였고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지금의 저 모습. 김훈상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여자의 목을 잘라 전시하는 저 행위. 김훈상의 천성과는 맞지 않는 행위일 거다. '일부러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야.' 왕의 자리는 무겁다.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이 해야 하며, 냉혹하고 잔혹한 일도 서슴치 않고 저질러야 한다. 그게 왕이다. '또한...' 또 다른 관점의 접근법도 있었다. 바로 상희학적 관점의 접근이었다. '이런 무서운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빨리 내보내신 건가?' 그렇다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다른 왕비나 공주들에게 경각심도 주고, 김상희 공주에 대한 비난여론이 일기도 전에 밖으로 내쫓듯 내보냈으며, 덕분에 무자비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됐다. '실험샘플 1호에게 연락해봐야겠어.' 연구욕이 또 타올랐다. 상희학적 관점에서의 가설이 맞다면, 국왕폐하는 분명히 이주형에게 입을 다물도록 시켰을 거다. 왕궁 내에서 불어닥친 피바람을 아예 모르게할 확률이 높았다. 만약 이주형에게 입단속을 시켰다면, '그건 내가 연구하고 있는 상희학이 절대 틀린 학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지! 암! 그렇고 말고!' 좀 신이 났다. '기다려랏, 실험샘플 1호!' 며칠만 기다려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그걸 상상하니 마음이 행복해졌다. *** 왕이 강서영을 찾았다. 다행히 강서영은 의식을 되찾았다. 아무도 없는 병실. 김훈상이 그 병실에 들어섰다. 김훈상이 온 것을 발견한 강서영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왕이 계신데 감히 누워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포근했다. 포근하고 따뜻한 커다란 손이 자신을 살짝 덮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김훈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서영을 내려다봤다. 한참동안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 무슨 말을 하시려고...' 강서영은 지금 김훈상이 조금 무섭다. 감히 왕을 수고스럽게 만들었다. 그 왕은 여자들의 목을 직접 쳐서 정문에 매다 건 왕이다. 무섭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김훈상이 말했다. "...살아줘서 고맙다." 강서영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한편, 김상희는 그 날 밤. 김훈상에게 내쫓기듯 밖으로 쫓겨났다. 김환성. 이주형. 크리스와 함께였다. 언제나 그렇듯 김환성은 활짝 웃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데이트 하는 거야?" 김상희는 확신했다. 쟤. 데이트 뜻도 제대로 모른다. 깊은 달 밤. 김상희 일행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세계 8대 경관 중 하나라는 프리미엄 그라디아로 향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말이다. ============================ 작품 후기 ============================ 김상희 공주의 외침 때문에 달려 나갔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본문 중) 그런 주제에 마치 난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듯 시크하게 한 쪽 구석에 조용히 있던 김환석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오다 주운건 개인 투자비만 60억 ㅋ 0082 / 0192 ---------------------------------------------- 제발...도망쳐...상희야... *** 고려에서 오프로드 카를 사용하여 붉은 산맥을 관통한 뒤 무지개 사막을 건너게 되면 세계 8대 자연경관 중 하나인 '프리미엄 그라디아'가 나오게 된다. 거대한 푸른 암석인데 멀리서 보면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바위 같다하여 푸른색 보석 '그라디아'의 이름을 딴 암석이었다. 어째서 암석이 '자연 경관'이라고 치부되느냐 묻는다면 그 암석이 정말로 거대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암석의 길이만 약 17km에 이른다. 안에 계곡이 흐르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미스테리한 것은 그것이 오로지 단 한 개의 암석이라는 것. 또한 그 아름다운 외양과는 달리 '프리미엄 그라디아'내에는 그 어떤 생물체도 서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그 흔한 나무, 잡초도 자라지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푸른 빛으로 빛나는 암석지대밖에 없었다. 다른 구성성분으로 이루어진 돌맹이도 없었다. 그 곳에는 오로지 프리미엄 그라디아가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는 이미 그 곳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저녁 노을과 어우러진 프리미엄 그라디아는 세계 8대 경이로운 광경 중 하나야." 김환성은 조금 불만이다. "그냥 날아가면 3시간이면 가는데 왜 굳이 이걸 타야해?" "운전은 제가 할 겁니다, 왕자님." 운전은 귀찮은 일이다. 마력을 사용해야한다. 참고로 김환성은 운전에 별로 자신이 없다. 운전은 '큰 마력양'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하다. 김환성이 제일 자신없어 하는 거다. 10만큼의 힘만 쓰면 되는데 100만큼의 힘을 쓰면 기계는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다. 물론 부서지지 않도록 마력 커패시터등이 안전장치로 부착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김환성은 운전을 잘 못했다. 괜히 어릴 때 지상을 달리는 탈 것을 타고 하늘을 마구 날고 빙글빙글 돌고, 그랬던 거 아니다. 재미도 있었지만 정상적으로 달리지 못해서 그런 거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 빨리 가면 그만인데 왜 굳이 이 이상한 차를 타냐고?" 수륙양용. 오프로드 SUV. 험한 산길등을 이동할 수 있는 오프로드 자동차이긴 한데, 그래도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크리스는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설마... 모르실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난 다 알아."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뭘 알아? 아직 말 나오지도 않았구만. 으이그. 저 놈의 허세는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크리스는 김환성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건드렸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캠핑이라는 것을 아시기는 하지만, 묘미는 모르시는 것 같군요." "묘미? 나 그거 알아." 김환성은 아직 캠핑을 해본 적이 없다. 야영은 해봤지만 그건 캠핑이 아니니까. 김상희는 캠핑이란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진수는 나랑 캠핑 다니는 거 되게 좋아했었는데.' 김상희는 편한 잠자리를 좋아한다. 불편하게 밥해 먹고 씻는 것도 불편한 캠핑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 진짜 투덜거리기만 했었네.' 그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또 느껴졌다. 김상희의 머리가 진수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했다. '캠핑 준비도, 운전도, 요리도, 설거지도, 텐트를 설치하는 것도... 모두 다 진수가 했었는데...' 나중에야 바뀌기는 했지만, 연애 초기. 김상희는 귀찮다는 이유로 진수와 장도 같이 보지 않았다. 진수가 캠핑을 좋아했던 이유는 딱 두 개였다. 하나는 김상희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김상희가 자연경관을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다. 문제는 자연경관 보는 건 좋아하는데 캠핑하기는 귀찮아했다는 것. 그렇게 따지고 보면 김상희는 정말 이기적인 여자였다. 적어도 세상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나... 진짜...정말 그렇게 이기적인 년이었어?' 지금 돌이켜보니 진수는 자기 때문에 캠핑을 다녔던 것 같다. 자연경관을 보러 다니는 건 좋아하는데, 허드렛일 하기는 싫어했다. 김상희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 나는 그냥 너랑 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해. 그러니까 너는 가만히 쉬고 있어. 여기까지 나랑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너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내겐 최고의 선물이니까. 진수는 궂은 일을 하나도 거부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김상희가 불편할까봐 텐트 바닥을 최대한 평평하게, 땀을 뻘뻘 흘리며 다듬었고 김상희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팔베개를 해주면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성욕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 때, 김상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 나는 혼전순결주의자야. 거의 농담식으로 던졌던 그 말에, 진수는 끙끙 앓으면서도 김상희를 지켜주려 애썼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참다못한 김상희가 먼저 덮치긴 했지만. 김상희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희공주. 상희공주도 캠핑 좋아하지?" 김상희는 오랫동안 진수생각에 빠져있느라 크리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좋아하지?'라는 말만 들었다. '좋아하니?'가 아니라 '좋아하지?'였다. '좋아하지'라는 말은 어느정도 동의를 구하는 말이다. 김상희는 남자의 말에 대부분 동의를 해주는 편이고,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해요." 김환성이 활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님은 캠핑 귀찮으시다면서요?" 아. 캠핑얘기였구나. 김상희는 이제서야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캠핑 좋아하지? 라고 물었던 것 같다. 김환성이 발뺌했다. "내가 언제? 나 캠핑 완전 짱 좋아하는데."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이주형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귀찮다며요? 그냥 비행기타고 가자면서요?' 아... 왕자님... 이주형은 한숨을 두 번 쉬었다. 뭐 저런 왕자님이 다있나 싶었다. *** 오프로드카는 승차감이 매우 안 좋았다. 더더군다나 산길을 타다보니 차체가 매우 덜컹거렸다. 지구와는 상황이 아주 많이 다르다. 지구에서라면, 차를 가지고 5미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거나 하는, 몰상식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건 자살행위다. 하지만 여긴 아니다. 일반적인 자동차도 아니고 마력으로 조정하는 자동차이며, 마력으로 마력보호가 가능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5미터가 아니라 10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려도 되도록 설계된 전천후 SUV다. 어쨌든 그런식으로 붉은 산맥 내를 이동하다보니 승차감은 '매우' 나빴다. 물론 김환성이나 크리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들에게는 마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김상희에게는 약간 다른 문제다. 안전하게 설계된 놀이기구만 타도 심하면 멀미와 구토를 동반할 수 있다. 놀이기구만해도 그런데 이 위험천만한(?) 곡예 운전은, 김상희에겐 더욱더 무시무시했다. 크리스가 말했다. "왕자님. 저 운전하느라 신경쓰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마력보호 좀 걸어주세요." "왜?" "아니. 저 말고. 김상희 공주요." "그니까 왜?" 김상희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안전벨트를 꼭 매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이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엔 연약한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소녀 너무너무 무서워요," 원래대로라면 여기까지만 말했을 거다. 자신의 감정상태를 말하는 것 -이것 역시 일반여자들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까지. 하지만 저번, 선물사건 이후로 조금 더 대담해졌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다. "소, 소녀를 지켜주시어요." 뭔가를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거. 이젠 할 수 있었다. '지켜달라'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단 이 세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거다. 감히 남자의 행동을 강제하는 거니까. 하지만 김환성은 그것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이해 자체를 못했다. "뭔 소리야?" 도대체 뭐로부터 지켜달란 말인가? 뭐 위험한 게 있나 주위를 둘러봤는데 위험한 것 따윈 아무것도 없었다. 위험한 것도 없는데 지켜달라는 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김환성은 언제나 그렇듯 허세를 부렸다. 이럴 때 특히 허세 많이 부린다. 뭐가 무서운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지켜주고 보기로 했다. 허세도 잊지 않았다. "오빠만 믿어." 김환성은 당당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 때, 차가 15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 내렸다. 김상희가 비명을 질렀다. "꺄, 꺄아아악!" 김환성은 안전벨트도 없는데 중심을 아주 잘 잡았다. 오히려 아주 편안한 상태로 김상희의 뒤로 돌아가 김상희를 시트 채로, 뒤에서 안았다. 아주 자신만만해져서 말했다. "오빠 믿지?" 오빠가 있는 한, 절대로 죽지는 않을 거야. 크하핫! 김환성은 자랑스레 웃었다. 오늘. 오빠노릇 제대로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 저녁이 됐다. 2박 3일의 일정이 거의 끝나간다. 붉은 산맥 내에서 자고, 새벽 일찍 출발하여 프리미엄 그라디아에 방문한 뒤 제국 마력학원으로 돌아가면 된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텐트를 치고 불을 지핀 크리스가 일어섰다. "제가 물을 좀 길어올게요." 크리스는 혼자서 물을 뜨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에 도착했다. 아까 미리 봐덨던 계곡이다. 계곡에서 물을 뜨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말했다. "마을 하나가 지워진 것 같아. 아무래도 제국 소행이겠지. 일부러 방향을 틀었어. 조금 돌아가기는 하겠지만... 마을 하나가 통째로 지워진 걸 보면, 김상희가 충격을 받을 것 같거든." 또 말했다. "어떡하지?" 주위엔 아무도 없다. 당연히 대답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혼잣말을 이어갔다. "...나 김상희가 정말로 좋아져 버렸는데." 크리스는 언제나 웃는다. 김환성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도, 욕을 먹어도 웃는다. 언제나 활짝 웃는 그 표정은, 크리스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지금 역시 활짝 웃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야. 나 김상희가 진짜로 좋아졌어. 김상희는 확실히 뭔가 달라. 연기하려고 애쓰는 것마저도 귀여워. 아껴주고 싶고 계속 보고 싶고.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크리스는 맑은 물을 쳐다봤다. 맑은 물에 자신의 얼굴이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게 보였다. 크리스의 얼굴은 웃고 있는데, 물 속에 담긴 크리스의 얼굴은 웃고있지 않았다. ***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뭔가가 조금 신경 쓰였다.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논리적이거나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느낌이 안 좋았다. 불행하게도 스페셜 나이트로서의 이러한 직감은 꽤나 잘 들어맞는 다는 것. '이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스페셜 나이트에게 있어서 지형정보는 귀중한 자산이다. 침투와 기습에 있어서 선결되어야만 하는 조건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해야한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머릿속에 지형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입력해놓는다. 바위의 위치. 나무의 위치. 그런 것 조차도 그들에게는 정보다. 그런 사소한 정보 하나가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분명히 있었는데...' 여기와 거리는 제법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있나.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들은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것에 뛰어난 만큼, 상대의 기척을 읽는 것에도 특화되어 있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왜 느낌이 안 좋지?' 이주형은 김상희 공주를 쳐다봤다. "오라버니. 소녀는 숲 속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처음이어요." "그래? 처음이야?" 마치 나는 숲 속에서 잠을 잔 일이 아주아주 많으며 굉장히 믿음직한 오빠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김환성은 또 허세를 부렸다. 이주형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왕자님도 야영 두 번 밖에 안했잖아요? 게다가 캠핑은 처음이실텐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김상희의 모습. 꼭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다.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할 수만 있다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 왜 김상희에게만 유독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아주아주 무섭지만 믿음직한 오라버니와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님이 함께하시니 두렵지 않기로 했어요." 이주형은 은신을 깨고 말할 뻔 했다. '오구. 그래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별 일... 없겠지.' 김상희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이주형은 다짐했다. 왕명이 아니더라도, 김상희 공주를 괴롭히는 놈은 어떤 식으로든 복수해주겠다고. 아니.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프리온 나이트의 준장 최익현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한진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한진수. 느껴지나?" "예." 최익현은 순간 조금 기분이 나빴다. 이 기운. 방금 느꼈는데. 한진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미리 알고 있었나?" "예." "그렇군." 역시. 먼저 알고 있었다. 세계의 천재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지금 강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동경로가 겹치는 게, 아무래도 이 쪽을 쫓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느껴지는 힘의 강도가 너무 컸다. 저 정도 힘을 가진 무언가가 왜 볼 것도 없는 붉은 산맥 안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비행기가 발달한 지금. 오프로드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희가 방향을 틀자 저 쪽도 방향을 틀었습니다." 크리스가 일부러 방향을 틀었다. 사라진 화전민 마을을 거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프리온 나이트의 진행방향과 겹쳤다. "기척을 숨겨라." "예." 그렇지 않아도 이미 기척을 숨기고 있다. 프리온 나이트는 소환되기 전에는 기척이 없으니, 기척을 숨길 사람은 최익현과 한진수. 두 사람 뿐이었다. 최익현이 다시 말했다. "아니. 이대로 두기에는 찜찜하군. 죽일 수 있겠나?" "몰래 기습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면승부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최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강대한 기운.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이 쪽을 쫓아오는 건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행하는 작전은 기밀을 요하는 작전이다. 그는 아주 약간의 불안 요소도 용납하기 싫었다. 한진수의 눈을 쳐다봤다. "명령한다. 저 놈을 기습하여 죽여라." 한진수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로보트처럼 대답했다.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한진수의 몸이 사라졌다. 최익현은 한진수의 등을 쳐다봤다. '영악한 놈.' 최익현은 안다. 한진수가 자신의 힘을 일정부분 숨기고 있다는 걸. 최면을 걸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한진수는 세상에 자신의 힘을 일정부분 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천재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정면승부로는 힘들다고 말은 했지만... 아마 너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느껴지는 기운이 강대하다는 건, 그만큼 마력 컨트롤 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한진수의 능력으로 기습하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거다. 한진수가 기운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최익현이 내린 명령을 잊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죽...인...다...죽...인...다...!" 기척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 작품 후기 ============================ 저도 참 캠핑 좋아하는데요. 여자친구가 없다는 게 함 ㅋ 정 ㅋ 0083 / 0192 ---------------------------------------------- 제발...도망쳐...상희야... *** 현재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가 붉은 산맥 내에 있다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다. 정작 프리온 나이트의 작전장교인 한진수조차도 자신이 왜 이런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당연히 한진수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 곤란했다. 그래서 지금은 프리온 나이트를 나타내는 문양 같은 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복면을 한 상태. 그는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그는 이지를 상실한 듯 홀로 중얼 거렸다. "한 명이...아니..다... 두 명... 아니...세...명...!" 놀랍게도 한진수는 은신상태인 이주형의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감지해냈다. 하지만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 명령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명령을 받았으면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이 바로 프리온 나이트다. "한...명은... 신경...안 써도...돼..." 기척은 느껴지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조차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남은 타겟은 두 개. 두 개의 타겟을 빠르게 죽여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한 명이라도. "일...단은...너...부터..." 자고로 밖으로 드러난 강함 힘보다는 안으로 갈무리 된 힘이 더 무서운 법이다. 한 마력은, 그 크기는 매우 강대하고 순도가 높았지만 그걸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여 이토록 자신의 위치를 마구 드러내고 있었고 또 한 명은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 컨트롤의 능력이 극에 달했다는 소리다. 한진수는 본능이 이끄는대로 움직였다. 이주형도 순간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챘다. '뭔가. 주위에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왕자에게 보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뭔가 불안하다.' 그래도 스페셜 나이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김환성에게 경고를 하려던 그 찰나. "큭!" 이주형이 가벼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주형의 왼쪽 어깨에서 피분수가 솟아 올랐다. 그나마 빠르게 피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목이 날아갈 뻔 했다. "왕자님. 조심하십시오. 암습입니다!" 다행히 왼팔이 잘려나갔다. 오른팔은 멀쩡하다. 잘려나간 팔은 다시 붙이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 괴로운 거.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스페셜 나이트다.' 왕자와 공주를 지켜야만하는 사명이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되뇌이며 고통을 잊으려 애썼다. 김환성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페셜 나이트를 암습했다? 그런데 그 암습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저건 같은 스페셜 나이트나 혹은 베일에 가려진 프리온 나이트정도 되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다. 김환성은 검을 뽑아 들었다. 강대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김환성을 중심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라 소용돌이 치고 땅이 흔들리며 나무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앗차.' 하지만 이내 그 힘을 다시 끌어 내렸다. 옆에 김상희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농밀한 마력폭풍 때문에 김상희가 숨을 쉬기 곤란해 했다. '전력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데.' 감히 왕자를 노린 기습이다. 어떤 간 큰 놈이 저지르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당한 힘을 가진 세력에서 보낸 놈일 것이다. 스페셜 나이트를 저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으니까. 그래도 스페셜 나이트와 김환성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다. 김환성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력으로 싸울 수 있을 때의 상태. '김상희 따위. 알까 보냐!' 힘을 끌어 올리려고 했는데, '젠장.' 불가능했다. 김상희가 다칠 거라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머리는 힘을 끌어올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몸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김상희도 그걸 알았다. '나는 지금 짐 덩어리일 뿐이야.' 김상희도 사람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불편한 존재가 되는 거.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오라버니. 저는 신경쓰지 마셔요." "시끄러워. 똥개. 내가 알아서 해." 이럴 줄 알았으면 마력 컨트롤 연습 좀 많이 해놓는 건데. 김환성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분함을 느꼈다. 그는 타고난 천재다. 너무나 능력이 특출나서 여지껏 미치도록 연습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딱히 연습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젠장!' 마력 컨트롤 능력을 미리미리 익혀놓고 다듬어왔다면 이주형을 도와 저 놈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김상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말이다. 그 사이,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과 복면을 쓴 의문의 남자의 검이 서로 부딪쳤다. 이주형 역시, 암습을 모르면 몰랐으되 이미 안 이상 철저한 대비를 했다. 왼팔이 없어져서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방어 정도는 가능한 수준이었다. 김상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뭔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말했다. 돕고 싶었다.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말로 꺼내기는 힘들었다. 네 명치를 겁나 세게 때릴테니 한 대 맞아보렴.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 때, 김환성이 말했다. "똥개. 내 명치 때려." *** 이번에는 김환성에 대한 복수심을 담은 건 아니었다. 그냥 상황이 절박해서 열심히 때렸다. 김환성은 기어코 큭! 비명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리고선 창피했는지, "하나도 안 아파. 한대 더 쳐." 라고 허세를 부렸다. 김상희는 확실히 알았다. '마력 없이 급소를 맞으면 진짜 아프긴 아픈가보다.' 마력없이 급소를 맞으면 남자도 아프다. 좋은 사실을 얻었다는 것을 감탄하기도 전에, 김환성이 싸움터에 끼어들었다. 김상희는 김환성의 명치를 때리는 것 외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사실 도움이 됐는지, 되지 않았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김환성은 확실히 느꼈다. '확실히 마력 운용이 훨씬 쉬워졌어.' 김환성은 타고난 마력의 크기와 양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그걸 제대로 끌어내 쓰지 못한다. 사실 평소라면 문제가 없다. 사실 김환성이 '가진 양'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조금밖에 못 쓴다는 얘기지, 일반인들과 비교하면 이미 엄청난 양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거니까. 어쨌든 김환성은 자신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많이 상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 10만큼의 마력을 꺼내 쓸 수 있었다면 지금은 20만큼을 꺼내 쓸 수 있는 것 같았다. 10의 힘은 의문의 남자를 상대하는데, 또 나머지 10은 김상희를 보호하는 것에 썼다. 이주형은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갑자기 튀어나온 거냐!' 분쟁지역도 아니고, 붉은 산맥이다. 비행기의 발달로 인해 비록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기는 했지만 저런 실력자가 있을 곳은 아니다. '우리의 행선지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진 거다.' 저 정도의 실력자가 붉은 산맥에 우연히 있을 리는 없다. 이건 분명 계획된 범죄였다. 이주형은 고려 나이트 끼리의 수신호를 보냈다. - 왕자님.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 때. 기습하세요. 김환성이 자신의 힘을 완전히 끌어쓰지 못하는 것 처럼, 이주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둘은 굉장히 비합리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김상희 때문에 말이다. 만약 모든 마력을 방출하고, 주변이 초토화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싸운다면, 어쩌면 복면인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환성 역시 수신호를 보냈다. - 오케이. 이주형이 일부러 틈을 보였다. 교묘한 틈이었다. 복면인이 그걸 파고 들었다. '큭!' 이주형은 고통을 참아냈다. 남아있던 오른팔 마저 잘려나갔다. 피분수가 튀어올랐다. 그 잠깐. 약 1초 정도의 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이주형은 오른팔을 희생시켰다. 그 틈을 타서 김환성이 복면인의 등에 칼을 꽂아넣었다. 콰과광!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이주형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럴...수가..." 칼이 몸을 찔렀는데 폭발음이 들렸다. 김환성의 검이 산산조각났다. 놀라운 건, 복면인의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는 것. 이주형은 믿을 수 없었다. '김환성 왕자님의 공격을 맨 몸으로 받아냈다고?' 현재 시대의 대천재가 있다면 바로 한진수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아직 2차각성을 이루지 못했다. 그에 반해, 바로 전세대의 대천재가 있다면 김훈상이다. 김훈상은 2차각성까지도 이룬 대천재다. '국왕폐하라 할지라도 김환성 왕자님의 공격을 맨 몸으로 받아내면 다칠 수밖에 없을 텐데.' 저 복면인.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갑옷 같은 것을 안에 받쳐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된다. 김환성은 마력 컨트롤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출력자체는 자타공인 최강의 왕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김환성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김상희에게... 전혀 타격이 없었어.' 이전까지는 몰랐다. 그 역시 여유가 없었다. 복면인을 상대하면서, 김상희에 대한 비접촉 보호까지 해야했다. 안 그래도 비접촉 보호는 어려운 상위기술이다. 이 두가지 일 동시에 진행하는 거. 김상희의 '명존세'가 없었으면 아예 불가능했다. '명존세'를 받고나서 그나마 가능해진 거다. '파편이... 방향을 바꿨어.' 이주형에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던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답은, '저 놈이 파편의 방향을 바꿨다.'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 놈이 저걸 의식적으로 한 것 같은 기분도 안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저 놈의 정체가 뭐지.' 파악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한진수일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죽...인...다..." 김환성이 코웃음쳤다. "너 따위가 감히 누굴 죽여?" 김환성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김상희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확인해야할 필요는 있었다. 이주형이 저렇게 된 이상. 자신이라도 모든 힘을 끌어내야하니까. 모든 힘을 끌어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김상희와 자신. 둘 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럴 바에야, 모험을 하는 수밖에. 김상희는 숨이 가빠옴을 느꼈다. 마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유형화시키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편해졌다. 김환성의 눈이 번뜩였다. '똥개를 저 놈이 보호하고 있어.' 이유는 모른다. 짜증나게도, 저 놈의 마력컨트롤 능력은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자신을 상대하면서 그와 동시에 김상희를 보호하다니. 김환성은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했다. 솔직한 말로 충격도 많이 받았다. 김환성이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뒤져랏!" 김환성의 몸이 폭발적인 속도로 앞을 향해 치달았고, 갑자기 빨라진 김환성의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복면인은 김환성의 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했다. 콰과광! 주먹과 배가 부딪쳤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거대한 폭발음이 다시 일었고, 원형의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흙먼지가 휘날리고 낙엽과 나뭇잎들이 무질서하게 마구 날아다녔다. 그 와중에도 김상희의 주변은 깨끗했다. 폭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헤헷. 어떠...어라?" 콰과광! 또다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김환성이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 복면인이 김환성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었기 때문이다. "와, 왕자님!" 이주형이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이미 왕궁에는 연락을 취해놨다. 왕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고, 지원병력이 분명 올 거다. 하지만 지금 그 병력이 오기도 전에 큰 일이 나게 생겼다. 김환성에게 달려가려고 했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젠장.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질 않아.' 마력으로 지혈은 했다만 임시방책이다. 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신의 몸보다는 왕자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저만치 멀리서 김환성이 일어섰다. 김환성의 입가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충격이 꽤나 컸는지 다리가 후들 거렸다. "저 개자식이..." 그런데, 복면인은 김환성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김환성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환성에게 가지 않고 복면인은 김상희를 향해 걸어갔다. "죽...인...다..." 칼을 들어 올렸다. 김상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눈으로 볼 수조차 없는 싸움이었다. 이 세계에서 여자의 힘은, 너무나 약했다. 그런데 복면인이 조금 이상했다. "도...망...쳐...상...희..." 복면인의 걸음이 느려졌다. 물론 상대적으로 느려졌다는 소리다. 이제 겨우 세 걸음 정도만 움직이면,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김상희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복면인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온 몸으로 번졌다. "제...발...도...망...죽...인..."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 뭐야?" 김상희는 봤다. 웃고 있는 크리스를 말이다. 크리스는 들고 있던 양동이를 땅에 떨어뜨린 상태로 천천히 걸어왔다. 김상희는 처음으로 크리스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웃고 있는 저 모습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 끔찍한 느낌의 정체.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팔뚝부터 소름이 피어올랐다. 크리스의 웃음이 짙어졌다. "넌...뭐니?" 뚜벅뚜벅 걸어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밝게 웃었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여자. 어떻게 하려고? 정말 그런 거야? 네가 내 상희. 저렇게 겁에 질리게 만든 거야? 너 따위가?" ============================ 작품 후기 ============================ 좋아. 공식적인 명존쎄를 향해 달려가는 거닷! 0084 / 0192 ---------------------------------------------- 오래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84 크리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여자. 어떻게 하려고? 정말 그런 거야? 네가 내 상희를 저렇게 겁에 질리게 만든 거야?" 나는 저렇게 무서운 크리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여태까지 본 얼굴들 중 최고로 무서웠다. 웃고 있는데 소름이 마구 돋았다. 그런데, 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듬직한 누군가에게 안겨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는 빠져라." 어라. 저 인간은... 몇 시간 전에 나를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나조차도 놀란 그런 말을 던지며 나를 왕궁 밖으로 쫓아낸 인간이다. 나는 아직도 아까의 일이 꿈 같다. 도무지 믿기가 힘들었다. 개차반이 내게 이마키스를 하다니?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니? 나는 너를 지키는 자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건가? '멀리 떨어져 있더니 좀 애틋해졌나?' 하여간 개차반의 심리가 어떻게 변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지금 당장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저 의문의 복면인...인데, '진수...인 것 같아.' 나는 목소리를 정확하게 알아 들었다. 뭔가 이상한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진수의 목소리가 틀림 없었다. 진수라고 한다면 얘기가 얼추 맞지 않는가. 김환성과 스페셜 나이트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정확하게는 잘 모르지만, 아마 나 때문에 우리 망나니가 힘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한 페널티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망나니는 망나니다. 그런 망나니를 이길 수 있는 저 남자. 한진수라면 설명이 되지 않을까? 우리 둘째 망나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망치는 저 남자를 쫓아가려는 듯 보였다. "거기 안 서냐! 이 새끼!" 그걸 개차반씨가 말렸다. "김환성. 그만 둬." "하지만 아부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개차반이 어떻게 여기있는 거지? 개차반이 말했다. "함정이면 어쩔 테냐?"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은 두 팔을 잃은 상태로도 꾸역꾸역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이주형. 너는 지금 당장 회복의 관으로 복귀하여 치료먼저 받는다." "하지만 폐하. 제게는 아직 임무가 남아 있습니다." "당분간 다른 놈을 붙일 거야." 개차반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크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기세가 제법이다." 크리스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고려의 국왕을 뵙습니다." "하지만 그 기세가 되려 내 딸을 괴롭게 만든 건 알고 있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부주의했습니다." 그 말에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나는 우리 개차반씨의 심리상태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놈. 뭔가 특이한 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보통은 '내 딸을 괴롭게 만든 건 알고 있냐?'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하기 마련이다. 이런 건 질문도 아니다. 그나마 김훈상이 했으니까 질문 같은 거지. 다른 사람이 했으면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욕해도 될 일이다. 딸이 괴롭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여튼 크리스는 진짜 특이한 구석이 있는 아이다. 뭐가 진짜 얼굴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마음에 드는구나." "감사합니다." 개차반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무서워하는 모습.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버님..." 나는 내 실수를 안다.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 놓인 덕분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 개차반씨가 내게 그런 로맨틱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다니.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다. - 끼를 제대로 못 부렸다. 가는 것이 있으면 응당 오는 것이 있어야 하고, 오는 것이 있으면 응당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크리스나 김환석이라면 모를까. 우리 개차반씨라면 내가 좀 파악하기가 수월하다. "아빠!" 나는 벌떡 일어나 김훈상에게 와락 안겼다.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볼을 부비며 굉장히 연약한 척을 해줬다. 솔직히 무섭기도 했었고. "아빠가 와주시다니! 소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우리 개차반씨는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꿈처럼 황홀하냐?" 망나니의 허세가 어디서 왔는지. 딱 보니 알겠다. "그럼요! 소녀는 너무나 황홀하여 숨이 넘어갈 것 같답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거리도 엄청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개차반은 몇 시간 전의 모습은 마치 거짓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시크하게 말했다. "계집따위의 황홀함. 내가 알 바 아니다." "소녀는 아빠를 계속계속 보고 싶어요. 아빠 너무 좋아요." 자. 이정도 서비스 해줬으면 되겠지? 어라. 근데 개차반. 표정이 조금 별로다. 조금 약했나?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인 것 같은데. 꼭 뭐 체한 사람 마냥 표정이 별로다. 옛다. 서비스 하는 김에, 오늘은 팍팍 쏜다. "사랑해요, 아빠." 사실 개차반에게 고맙기도 고맙다. 사랑한다? 솔직히 이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립서비스야. 해준다고 뭐 어디가 닳는 건 아니잖아. "시끄럽다. 귀찮으니 내 눈앞에서 사라져." ... 와. 얘 오늘 왜 이렇게 시크하냐 진짜. 이 정도 했으면 꿈틀꿈틀 웃을 때도 됐는데. 하긴. 내가 왕궁에서 '오빠 아빠'를 불러대고 왔는데, 뭐 기분이 좋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달려온 걸 보면 화가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개차반은 언제나 그렇듯 시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라. 이주형." 다친 이주형을 데리고 왕궁으로 향했다. *** 이주형이 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게 네가 내가 할 소리냐?" 이주형은 현재 양 팔이 절단된 상태다. 마력으로 상태유지를 시키고는 있으나 얼른 봉합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주형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현재 왕의 상태. 정상이 아니다. '워프를 무리하게 사용하신 게 틀림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초음속 제트기를 띄웠어도, 왕에게 보고가 올라간지 겨우 3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왕궁에서 붉은 산맥까지 왔을 리는 없다. 정답은 워프다. 문제라면, 워프는 아직 불완전한 기술이며 몸에 상당한 무리를 준다는 것. 김훈상의 옷이 땀범벅이 됐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지금 매우 위중한 상태라는 건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김훈상은 언제나 마력을 컨트롤하여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킨다. 김훈상쯤 되는 사람은 그 정도 일. 식은 죽 먹기로 해낸다. 숨쉬기만큼 자연스러운 행위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지금 괴로운 상태라는 뜻이다. 회복의 관에 도착했다. 때는 늦은 시각. 비밀리에 회복의 관 관장인 미첼을 찾았다. 미첼은 한 눈에, 김훈상의 상태를 파악했다. "어, 어찌하여 이런..."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해라." "폐하!" 미첼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도대체 어떤 일을 벌였으면, 그 엄청난 김훈상이 이런 꼴이 된단 말인가. 아무래도 암습인 것 같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의 호위와 김훈상의 무력을 뚫고 김훈상에게 이런 타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아무리 세상에 기인이사가 많다고는 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첼. 나는 왕이다. 내가 쓰러지면 나의 백성들이 흔들린다.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나를 일으켜 세워라." 김훈상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자세로 가만히 섰다. '기절...하셨다.' 기절했는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과연 왕은 왕이었다. 이주형에게 보고를 받고, 김환석의 위치추적기로 위치를 확인한 뒤, 불완전한 기술인 워프를 사용해서 김상희가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한 번의 이동으로 불가능하여 여러번 연거푸 사용했다. 그게 몸에 상당히 큰 악영향을 끼쳤다. '소문이 새어나가선 안 돼.' 혼자서, 치료를 시작했다. *** 붉은 산맥. 한진수는 김훈상을 발견하자마자 도망을 쳤다.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김환성)를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 셈이다. 한진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죽여야 했는데 죽이지 못했다.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김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라,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아파왔다. 깨질 것 같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을 것 만큼 괴로운 통증이었다. '내가... 내가 김상희를...' 네가 김상희를 김상희를 죽일 뻔 했어.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왜 이런 통증이 생기는 건지.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니까.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스페셜 필드 내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뒹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진정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한진수는 문득, 자신을 괴롭히던 이 고통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괜찮아. 너는 김상희를 죽일 뻔 했지만, 실제로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까 진정해. 그만 괴로워해도 괜찮아." "너, 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보는 얼굴이었으니까. 거울 속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얼굴 말이다. "괴로운 거 알아. 네가 김상희를 죽일 뻔 했으니까. 너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지만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거든. 어쨌든 상희 안 죽었으니까 그만 괴로워 해." 말을 빠르게 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제발 부탁이니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줘." 한진수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다니." "느꼈겠지만 나는 너야. 너는 나고. 네 정신이 흐트러진 틈을 타 잠시 밖으로 나왔을 뿐. 다시 네 안에 복속되겠지." "......." "그리고 나는 김상희를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더. 상희가 없는 세상은 내게 지옥이니까. 아무리 지옥불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김상희만 내 옆에 있으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니까." 미친 소리를 하고 있군, 한진수는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기엔 눈 앞의 한진수가 너무 절박해 보였다. "내겐 정말 시간이 없어. 나는 앞으로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어. 네 정신이 흔들릴 때. 그리고 보름달이 뜰 때에, 그 때에만 아주 잠깐, 내게 시간이 허락돼. 그것도 이제 거의 한계에 이르렀어. 나는 상희가 너무 보고싶어. 죽고 싶을 만큼 보고 싶어. 하지만 나는 이제 상희를 몇 번 보지 못할 거야. 아니. 어쩌면 한 번도 보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나는 네 안에서 상희를 볼 수 있으니까. 내가 내 손으로 만지지는 못하지만, 네 손으로 상희를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상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나는 그거면 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한진수는 혼란스러웠다. 또다른 나라며 주장을 하는 저 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네게 해줄 말은 하나 밖에 없어.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그리고... 제국을 조심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바람결에 흩날리듯, 한진수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졌다. 한진수의 하반신이 거의 사라졌을 때, 한진수가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꼭 말해줘. 내 부탁이야." "......." "네 마음이 허락을 한다면, 언젠가 꼭 네 입으로 상희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럴 일 절대 없을 거다. 한진수는 앞을 쳐다봤다. 한진수의 상체도 점점 사라져갔다. "사랑한다는 말. 되게 좋아하는 아이거든." "......." 그리고 한진수는 또 말했다.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랑해... 수희야." 바람결에 흩날리는 한진수의 모습처럼, 그의 목소리도 바람결에 흩날리며 사라졌다. '수희는 또 누구냐...' 한진수는 알 수 없었다. 지구에서 김상희의 이름이 바로 김수희였다는 것을 말이다. 고통이 잦아들었다. 최익현준장에게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 김훈상과 함께 왕궁으로 복귀한 이주형 대신, 김상희 공주의 호위를 맡게 된 스페셜 나이트의 이름은 강준석이다. 강준석은 이미 패닉상태에 접어 들었다. '내가 왜 공주따위를 호위해야 하지?' 그건 뭐. 왕명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김상희 공주는 일단 '대외적으로는' 왕국의 보배였으며 형식상 왕국의 보배 대접을 해야 하니까. 이해하려면 할 수는 있다. 기분이 너무 나빠서 그렇지. 얼마나 시킬 짓이 없으면, 김상희 공주를 호위시킨단 말인가. 그는 그 때까지 몰랐다. 김상희 공주를 호위하는 이 직책이, 얼마나 좋은 직책인지. '좌천'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행운' 이었다는 걸 깨닫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 때까지만 해도 강준석은 기분이 매우 나빴다. 기분이 나쁜 것도 나쁜 건데, 황당하기까지 했다. "똥개. 오빠 걱정은 하지 말고 그냥 푹 자." 무슨 상황이고 하니, 야영을 하려면 불침번을 서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 불침번에, 김상희도 함께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오라버니. 하지만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공주 따위가 저따위 말대답이라니? 감히 왕자님께. 그런데 왕자님은 그런 공주를 나무랄 생각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이런 황당한 상황이 다 있단 말인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이주형이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을, 강준석이 그대로 느꼈다. 이건 누가 옆에서 설명해줘도 모른다. 직접 느껴봐야 안다. 황당의 끝을 보는 이 기분 말이다. "소녀도 잘 할 수 있답니다!" 김상희가 팔을 들어 올렸다. 있지도 않은 근육을 자랑하며 배시시 웃었다. "소녀가 오라버니를 지켜드릴 것이어요!" 미친 소리좀 작작해! 강준석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마력따윈 한 웅큼도 없는 하찮은 계집아이가 오라버니를 지켜?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지켜주겠다는 상대는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고려 나이트의 제 9 대대장인데. 무슨 자다가 개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더 황당한 건, 왕자의 반응이었다. "오빠가 더 세."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 말 어디에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며 우쭐댈 구석이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오빠요? 자기 자신을 일컬어 '오빠'라고 표현하는 거. 그런 이상한 표현방식 어디서 배웠단 말입니까! 한편, 김상희는 여우짓의 강도를 조금씩 높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배시시 웃으며 눈웃음을 살살 쳤다. "소녀도 많이 세요!" 그래놓고서는, "하지만 우리 오라버니는 하늘 만큼 강하시겠죠!" 그리고 품에 안겼다. 물론. 속으로는 창피해 죽겠다. 자신의 입으로 저런 말을 내뱉게 될 줄. 지구에 있을 때.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상대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소를 꼬실 때에는 풀로 꼬시고, 호랑이를 꼬실 때에는 고기로 꼬셔야 한다는 게 김상희의 지론이다. 김환성을 꼬실 때엔, 저 무한한 허세욕과 '나 강함'을 무기로 꼬셔야 했다. "당연하지! 난 하늘보다 더 세!" 도대체 하늘보다 더 센 건, 어떻게 센 겁니까. 강준석은 황당함을 넘어서서 이제 자포자기에 이르렀다. 이 상황.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내가 제일 세다! 다 덤벼라!" 그런데 진짜 문제가 발생했다. 땅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뭐, 뭔가 이상한데...?" 크리스가 벌떡 일어섰다. "와, 왕자님. 일단 도망부터 칩시다!" 크리스가 김상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김환성도 아이씨, 모르겠다!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상희는 황당해졌다. 이 상황. 이해할 수 없었다. '도, 도대체 뭐야? 뭐가 나타났길래 이 세 명이 동시에 도망을 쳐?' 0085 / 0192 ---------------------------------------------- 오래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 김상희는 평소 김환성을 '허세의 왕'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김환성을 보면, 허세빼면 시체밖에 안 남을 것 같아 보여서 그랬다. 그런데 무서운 건 그게 다 허세가 아니라 진짜라는 거. 대부분 남자의 경우, '내가 제일 세'라고 말하면 그건 허세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김환성이 말하면 허세가 아니다. 나는 오늘 아침 밥으로 샌드위치를 먹었어. 이 말을 하는 건 허세가 아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다.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김환성의 '내가 제일 세'는 거의 그에 근접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저게 왜 여기 있는 거야!" 크리스 역시 빠르게 달리면서 말했다. "고대 기록을 살펴보자면 아주 오래전, 붉은 산맥에서 발견 되었었다고 합니다."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 역시 이를 악물고 달렸다. 잘 못 걸리면 뼈도 못 추스르게 생겼다. 그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건 사람이 절대로 못 잡는다. 적어도 전투기나 탱크 정도는 동원되어야 한다. "아무래도 왕자님의 고성이 저 놈의 단잠을 깨운 것 같은데요." 이번 만큼은 '내가 제일 세! 덤벼!'라고 말하지 못했다. 김상희의 생각과 달리 김환성은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애초에 김환성은 허세를 부린 적이 없다. 사실만 말해 왔으니까. "아이씨. 이 쪽을 향해 브레스를 쏘진 않겠지?" 기록에는 분명히 남아있다. 저 괴물의 이름은 샤벨 드래곤. 그 크기가 무려 7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드래곤이다. 크오오오오! 샤벨 드래곤이 포효를 내질렀다. 땅이 울리고 나무가 떨렸다. 새로이 합류하게된 강준석이 나름대로 현명한 대책을 내놨다. 스스로는 현명한 줄 알았다. "김상희 공주를 버리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샤벨 드래곤은 여자아이를 즐겨 잡아먹는다고 했다. 같은 음식(?)이 있으면 남자보다는 여자를 선호했다. 그렇다면 김상희 공주를 던져놓고 대피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왕국의 보배긴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샤벨 드래곤은 자연재해다. 자연재해 때문에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김환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부터 죽고잡냐?" "예?" 스페셜 나이트가 된 이후로 저렇게 모욕적인 언사는 처음 듣는다. "그, 그게 무슨..." "닥치고 달려. 너 오늘부터 찍혔어. 두고 볼거야." 영문을 모르는 강준석은 울상을 지었다. '아니 내가 왜....'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알렉스가 이 상황을 봤다면 말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상희학이라네. 라고 말이다. 물론 속으로는 실험샘플 3호다! 를 외치고 있겠지만. *** 김상희 일행을 습격했던 한진수가 복귀했다. "죄송합니다.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최익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실패했다고?" 아니. 그럴 리 없다. 최익현은 한진수의 능력을 안다. 비록 지금은 힘을 숨기고 있지만 한진수의 본신 능력은 아까 느껴졌던 그 기운보다 훨씬 더 강했다. 더군다나 기습의 상황.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던 인원이 세 명 더 있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의 기척과 크리스의 기척을 놓쳤다. 거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훈상까지. 최익현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세 명이라고...?" 보통의 경우, 마력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보다 마력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마력을 숨긴 사람이 더 강하다는 뜻이다. 이 쪽은 저 쪽을 파악하지 못했었으니, "그 놈보다 강한 놈이 세 명이나 있었나?" 그 기운을 가진 자보다 강한 놈이 세 명이나 더 있었다는 거다. 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셜 나이트 이주형. 백제의 왕자 크리스. '게다가... 국왕폐하까지.' 언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훈상까지 있었다. 하지만 한진수는 그걸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그 따위 명령을 내리다니.' 죽여버리고 싶었다. 만약 그 때, 조금이라도 멈칫하지 않았다면 김상희는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김상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포에 질려있던 그 모습. 머리가 아파왔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또 들었다. '또 다른 내가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다. 자신이 김상희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또다른 '나'가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는 거다. '김상희...' 가슴이 또 아파왔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외침을, 또다른 '나'의 마음이라고 단정짓고선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그 때,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 뿐만이 아니었다. 최익현이 먼저 하늘에 떠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 저건...!" 엄청난 몸집.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수백미터는 될 법한 괴물이었다. 한진수도 발견했다. "샤벨 드래곤?"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샤벨 드래곤. 자연재해급의 괴물이다. 한진수가 물었다. "...처치 합니까?" 사람은 처치할 수 없다.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라면 가능하다. 세 기정도 파괴될 것을 각오한다면 샤벨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 터. "잠시 기다려라." 아무래도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준장 최익현이 상부에 보고를 넣기 위해 잠시 시간을 끌었다. 잠에서 깨어난 샤벨 드래곤은 당분간 이동하지 않는다. 그게 습성이다. 사람들은 그걸 일컬어 '기지개'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기록상에서 말이다. 최근 100년 동안 샤벨 드래곤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샤벨 드래곤은...여자 아이를 즐겨 먹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쿵! 또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김상희!' 샤벨 드래곤이 공중에서 빨아 들이기만 해도, 김상희는 속절없이 저 거대한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거다. '안 돼.' 마음이 다급해졌다. 움직이고 싶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어.' 내가 왜 그까짓 계집 때문에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 거냐. '나는 프리온 나이트다!' 프리온 나이트다. 프리온 나이트는 군인이며 제국의 명령을 받드는 자다. '단독 행동... 할 수 없어.' 하지만 김상희의 얼굴이 눈에 아른 거렸다. 김상희. 아까도 공포에 질려 무서워 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그깟 계집애때문에 내가 동요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한진수의 몸이 사라졌다. "하, 한진수! 어딜 가는 거냐! 멈춰! 기다리란 말이다!" *** 결국 최익현은 한진수를 따라갔다. 한진수에게 따라붙은 최익현이 말했다. "한진수. 이번 행동에 관하여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 한진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최익현은 이미 보고를 끝마친 상태. 상부로부터 샤벨 드래곤을 사냥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만, 주변에 생물체는 없어야 했다. 그 말은 즉, 목격자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익현은 바로 옆에서, 빠르게 달리고 있는 한진수를 쳐다봤다. '설마... 저들을 일부러 죽이지... 않은 건가?' 최익현은 아까 느꼈던 강대한 기운의 주인공을 알아봤다. 바로 고려왕국의 셋째왕자 김환성이었다. 한진수는 고려의 사람이다. 임무에 실패했다고 말하고선, 일부러 저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 땐 완벽한 최면상태에 빠졌었어.' 최면을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지껏 단 한번도 없었던 일. 그럴 리 없었다. '하긴. 스페셜 나이트도 따라붙어 있을 테고... 저 이상한 놈은 기척이 잡히지 않으니.' 납득은 된다. 김환성 하나만 해도 쉽지 않은 상대인데 또 까다로운 놈들이 둘이나 붙어 있으면 후퇴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저들이 어째서 붉은 산맥에 있는 거지?' 캠핑하러 왔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프리온 나이트이며 각국의 주요인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파악을 하고 있는 상태다. '김환성 왕자는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좋아해. 굳이 산길을 택할 이유가 전혀 없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샤벨 드래곤을 사냥해야 했다. 상부에서는, 샤벨 드래곤을 잡으면서 입게 될 피해보다, 샤벨 드래곤을 잡고 나서의 이득을 훨씬 크게 봤다. 샤벨 드래곤의 사체는 굉장한 효용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어쨌든 샤벨 드래곤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프리온 나이트를 소환해야 한다. 프리온 나이트는 극비다. 아무도 보면 안 된다. 그 말은 즉, "죽여라." 저들 역시 이 곳에서 죽어야 한다는 소리다. 한진수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금기를 발동한다. 저 들을 무조건 죽여라." 금기까지 발동시켰다.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몸에 무리가 많이 가며, 체내 마력회로가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목격자들을 처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여기서 죽이면 목격자도 없다. 마침 샤벨드래곤이 나타났으니 더 잘 됐다. 샤벨 드래곤에게 죽은 것처럼 위조하기가 훨씬 쉬워지니까. 이 곳에 프리온 나이트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 시체만 완벽하게 처리한다면 고려도 어쩔 수 없을 터. 애초에 완벽하게 처리할 자신이 없었으면 죽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려는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나라니까. 일단 프리온 나이트는 아끼기로 했다. '프리온 나이트는 최대한 아껴야 해.' 그래야 샤벨 드래곤을 잡을 수 있다. 전력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금기까지 발동시켰다. 지금의 한진수라면, 스페셜 나이트 한 명과 김환성 왕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터. 정체 모를 저 소년은 자신이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금기까지 발동시켰다. 확실하게 한진수의 모든 힘을 끌어내도록 말이다. 부작용은 있겠지만 뭐. 그 금기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명령을 거부한다면... 책임지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한진수가 명령을 거부할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됐다. 아니. 애초에 아예 거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금제다. 여태까지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제국 프리온 나이트만의 금제 말이다. "왕자님. 저 놈, 브레스를 쏘려는 것 같은데요." "아씨. 망했다. 이 쪽으로 쏘면 우리 다 죽겠네." 강준석은 주장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김상희 공주를 버려두고 다른 길로 도망치자고요!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정말 얻어터질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최익현과 한진수는 김상희 일행과 일부러 거리를 벌렸다. 지금이야 샤벨드래곤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상태라 경황이 없을 테지만 너무 접근하면 이 쪽이 들킬 수도 있다. 빠르게 접근하여 순식간에 죽여야 했다.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기습하기로 했다. 샤벨 드래곤이 신경쓰이는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잠에서 깨어난 샤벨 드래곤은 상당히 둔하니까. 공격하려는 기미를 발견하면 그 때 처치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런데 한진수의 머리가 아파왔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누군가 머릿속에 크게 외쳤다. 머릿속이 웅웅 거렸다. 어지러웠다. '죽인다...!' 달렸다. 모든 힘을 개방시켜서라도, 저 놈들을 죽여야 했다. 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제왕자 크리스와 고려왕자 김환성.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라 짐작되는 -현재는 은신해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런데, '김...상...죽...인...희...안...다...돼....상...희...내...사...랑...'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몸 안의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구역질이 일었다. "한진수. 김환성 왕자와 스페셜 나이트를 죽여라. 내가 다른 놈을 죽일 테니." 죽인다! 한진수가 검을 빼들었다. 아니. 김상희는 죽일 수 없어. "한진수!" 왜냐하면. "이, 이, 개, 개새끼가...!" 김상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누군가의 목이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진수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마력이 폭주했다. 마력을 전부 개방한 것처럼,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금제를 거역한 대가는 끔찍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바닥을 굴렀다. 그의 몸과 부딪친 나무가 우지끈 부서지고 그의 비명이 산맥 전체를 울렸다. 한진수의 눈, 코, 입. 그리고 귀에서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샤벨 드래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방금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100년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마침 매우 배가 고팠다. 아주 맛좋은 먹이가 보였다. 샤벨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느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력의 순도'를 느낀다. 저 먹잇감은 아주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샤벨 드래곤의 날개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상희도 그 소리를 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 그 목소리. 굉장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진수의... 목소리야!' 마음이 급해졌다. 진수의 비명소리였다. 괴로움에 울부짖고 있는 목소리. 찾으러 가야했다. 반드시, 진수의 목소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진수야...' 눈물이 차올랐다. 저 목소리가 저토록 괴로워하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김상희는 너무나 괴로웠다. '나는...어떻게 해야 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음... 저번편... 저는 제 나름대로 다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미진한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네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너무 없어 수정하기가 힘들 것 같고 내일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달라지진 않고, 부연설명이 조금 들어갈 예정입니다 ^^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랑해여 ♡ 제가 독자님들 격하게 아끼는 거 알져? 0086 / 0192 ---------------------------------------------- 오래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 나는 이상한 알림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한진수에겐 네가 필요해. 모르겠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내 머릿속에 속삭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네가 가야 한진수가 살아. 왜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어떻게든 한진수에게 가.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상희 공주. 너 왜 그래? 너 좀 이상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었다. 적어도 '내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 진수가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가야만 했다. "크리스 학우님. 제발 저를 놓아주셔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거 샤벨드래곤이라고." 크리스는 내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계속 달렸다. "제발 부탁이어요. 제발요. 저는 가야만 해요." "어디를?" 진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야 해. "설마 저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김환성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쳤어? 누군지는 몰라도 저 놈이 시선을 끌어주고 있을 때 얼른 도망쳐야 돼. 나는 무지 세지만 저 괴물은 나보다 아주 조금 더 세다고." "오라버니. 소녀는 가야만 해요." 어차피 이 일행의 리더는 김환성이다. 김환성만 잘 구슬리면 된다. 나도 안다. 바보같은 거.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바보같고 미련하지만, 나는 혼자서라도 가야 했다. "소녀를 보내주셔요. 오라버니께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혼자서라도 가겠어요." "아이씨. 너 왜 그래?" "소녀가 사랑하는 분이... 괴로워하고 계셔요. 소녀는 가야만 해요. 오라버니께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혼자서 가겠어요." "아..." 나도 안다. 아마도 은신상태를 하고서 뒤쫓아오고 있을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은 정말 황당해하고 있을 거다. 나를 미친 계집년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왕자의 행동에 딴지를 걸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공주라니. 나도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이런 짓은 안했을 거다. 후. 이거 2연타네 2연타야. 오빠, 아빠 소환사건에 이어 '말머리 돌려, 오빠.' 아니겠는가. 크아아아악! 진수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우리 둘째 망나니가 말했다. "아씨 진짜. 나 죽으면 네가 나 평생 책임져라." *** 한진수는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금제를 어기고 상관을 죽여 버렸다. 그 부작용으로 인해 마력이 폭주했다. 온 몸에 거미줄 같은 실핏줄이 피어오르고, 그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새어나왔다. 그가 입던 옷은 이미 갈가리 찢어진지 오래. 한진수는 거의 나신이 된 상태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샤벨 드래곤은 비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크오오오오! 한 차례 괴성을 질렀다. 천천히 움직여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맛 좋은 먹잇감이 틀림 없었다. 그런데, 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샤벨 드래곤은 하늘 위에 천천히 떠서 주위를 훑어봤다. 이 것은 맛 좋은 인간 암컷 냄새다. 콧김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뭐니뭐니해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건 인간 암컷이니까. 김상희는 크리스의 품에서 김환성의 품으로 옮겨졌다. 김환성이 내 똥개는 내가 안아, 라고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려서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상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누구에게 안겨 있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또 환청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서 한진수를 구하렴. 가서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환청인지 모를 이 이상한 소리도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환청이 계속 이어졌다. -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한진수를 구할 수 있어. 정작 김상희는 그 이상한 알림에 집중하지 못했다. 한진수가 괴로워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진수야...!' 한진수는 정말 괴로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력이 용암처럼 부글대며 끓어 오르고, 그에따라 몸 속의 피도 같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김...상...희...'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들렸다. 분명 그랬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도 너무나 괴롭지만 보였다. 희뿌연 세계 속에, 오로지 김상희만 또렷하게 보였다.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것 같았는데 누군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김환성도 한진수를 발견했다. "한진수잖아?" 이상했다. "왜 발가벗고 있...어라?" 김환성도 충분히 느꼈다. 지금 저 놈. 정상이 아니다. 마력이 폭주하고 있다. "무, 무슨 일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재 중에서도 대천재라 불리는 한진수가 저런 상황에 처했다는 건 굉장히 심각하다는 뜻이다. 보통 10만큼의 위험이 일반사람에게 위험하다 친다면, 한진수에게 10은 아무런 위협도 안 된다. 지금 한진수의 상태를 보건대, 10이 아니라 100. 아니 1000 이상의 위험이 닥쳐있는 상태라 볼 수 있었다. "김...상...희..." 한진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어떻게든 일어섰다. 지금도 여전히 괴롭고 힘들지만 김상희를 보니 일어설 수 있었다. 온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이 온 몸을 짓이겼다. "오라버니..." 김상희는 한달음에 달려가 한진수를 안았다. 한진수의 몸이 힘 없이 쓰러져 내렸다. 김환성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씨. 뭔가 짜증이 나는데...하고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저 거대한 몸체가 천천히 이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크기가 수백미터에 달하다 보니 굼뜨기는 굉장히 굼떴다. '이 쪽을 발견하기는 한 것 같은데...' 이거. 상황이 쉽지만은 않다. 샤벨 드래곤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사냥이 불가능하다. 전투기나 미사일 정도는 나와줘야 상대가 가능한, 괴물 중의 괴물이다. '빨리 튀어야 되는데.' 하여튼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심지어, '저 놈 알몸이잖아.' 상태가 워낙 말이 아니다 보니 별달리 간섭은 안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상황이다. 왜 저 놈이 지금 저런 꼴로 이 곳에 발가벗고 있는 건지, 왜 또 김상희는 저 녀석을 안아들고 있는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됐다. 사실 이해하기도 싫고. "일단 얘 데리고 도망쳐야해." 김환성이 보기에, 한진수의 상태는 정말 위독했다. 최상급 의료진이 빨리 투입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곳에 그런 의료진이 있을 리 없다. '생명이 위독할 정도야.' 그런데, 김환성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위치를 완전히 들켰어.' 샤벨드래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놈. 이 곳의 위치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이 곳을 향해 천천히 날아왔다. 마치 너희는 절대 도망칠 수 없어. 라고 여유라도 부리듯 말이다. 한진수가 비틀대며 일어섰다. "...비...켜..." 그의 온 몸에선 피가 마치 땀처럼 마구 흘러내렸다. 거미줄처럼 새겨진 실핏줄에서 피가 자꾸만 새어나왔다. 김상희의 옷 역시, 한진수의 피에 흥건히 젖어버렸다. 김상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라버니. 제발..." "...비키라고...했다..." 한진수는 지금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고통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명을 참았다. '내가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 그렇게 되면, 김상희가 정말로 엉엉 울어버릴 것 같다. 김상희가 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았다. 웃는 모습을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울게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꺼...져. 거슬...리니까..." 김상희를 어떻게든 여기서 쫓아내야 했다. 김환성보다 기감이 훨씬 발달한 한진수는, 지금 샤벨 드래곤이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확 밀쳤다. "꺼지라고!" 그리고 말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왕자님. 부탁이니 혼자 내버려 두십시오." 김환성은 그 말을 냅다 받아들였다. 저 자식. 지금 알몸이다. 알몸인 상태로 동생에게 안겨 있고, 때문에 동생의 옷이 피범벅이 됐다. 상태가 영 이상하긴 하지만 뭐. 자기가 혼자있고 싶다는데. 게다가 샤벨 드래곤이 이 쪽을 발견했으니 어떻게든 빨리 도망쳐야만 했다. 저 놈은 강하긴 해도 속도는 느리니까 도망친다면 도망칠 수 있을 거다. 사실 한진수는 그 말을 하는 것에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웠지만, 김상희가 그 것을 알게하고싶지 않았다. 김상희가 걱정할 테니까. 하지만 김상희는 떠날 수 없었다. 한진수가 괴로워하고 있는 걸 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훤히 보인다. 애초에 몸에서 땀처럼 생긴 피가 송골송골 피어오르고 있는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하지만 오라버니... 소녀는..." 한진수가 버럭 소리 질렀다. "꺼지라고!" ...이제 한계야. 버틸 수 없었다.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 김환성왕자가 김상희를 데리고 자리를 먼저 피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대로... 김상희를 노리게하지 않는다.' 일부러 김상희를 멀리 보내버렸다. '표적은 내가 되어야 하니까.' 역시 논리적인 이유따윈 없었다. 그저 김상희를 지켜야겠다는 사명감만 들 뿐. 한진수는 패널을 꺼내들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꾸역꾸역 참아냈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죽을 것 같지만 참아냈다. 혼자라면 절대로 못 참았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사명감으로도 이 고통의 마력폭주를 이겨내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김상희의 모습을 보고 나니 가능해졌다. '나는 김상희를 지켜야 하니까.' "프리온 나이트. 소환." 프리온 나이트들을 소환했다. "큭!"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하지만 또 참았다. 또 크게 비명을 질렀다간 김상희가 듣고 말테니까. 마력이 뒤엉킨 상태라서 소환을 하는 것 역시 힘들었다. '여기서...죽어도 좋다.' 아마도...자신은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죽어서 김상희를 지킬 수 있다면.' 정말 황당한 생각이다. 죽을 때가 되니 스스로 미쳤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김상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괜찮았다. 이 한 몸. 이 목숨 같은 거. 죽으면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걸 위해 여지껏 살아왔는지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그 마음의 소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는 마당인데 뭐가 두렵고 뭐가 이상하겠는가.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부응했다. 프리온 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포!" 괴로웠다. 프리온 나이트들을 조종하는 것은 상당한 정신력과 마력이 소모된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원래대로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김상희를... 지키는 거다.' 소환된 프리온 나이트 7기가 초 광자포를 쏘아냈다. *** 김환성은 도망치면서도 샤벨드래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샤벨 드래곤의 주무기는 브레스다. 브레스는 어지간한 중소도시 정도는 한 방에 날려버리는 강대한 위력을 갖고 있는 샤벨 드래곤의 무기였다. 만약에라도 샤벨 드래곤이 브레스를 발사하려 한다면 정말 목숨을 다해 피해야 했다. 마력을 폭주시켜서라도 일단 벗어나야 하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저...저게...뭐야..." 7개의 거대한 빛다발이 샤벨 드래곤의 몸통을 관통했다. 아니. 빛다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빛기둥에 가까웠다. 붉으스름한 빛을 띈 거대한 빛기둥이 샤벨 드래곤의 몸통에 거대한 구멍들을 뚫어버렸다. 크오오오오! 샤벨드래곤은 괴성을 지르며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저거... 설마 한진수가 저렇게 한 거야?" 한편, 김상희는 지금 충격에 빠져있는 상태다. 그녀는 한진수의 눈을 봤다. 한진수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진수의 눈이다. 진심이 담긴 그 눈빛.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꺼지라고 했다. 그렇다는 말은 분명, 뭔가 자신을 쫓아내야만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걸 눈치 챘다. 김상희는 김환성에게 애원했다. "제발 돌아가요, 오라버니." 진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해.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진수에게서 절박함까지 느껴졌다. 어쩌면 진수를 다시는 못볼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 돼. 저 놈. 브레스 발사한다고." 떨어져 내리고 있는 샤벨 드래곤이 입을 크게 벌렸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위력은 많이 약해졌겠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해." "그러면 진수는요!" 그러면 진수는 어떡하라고? 안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우리 구해주려고 더 무리한 거 잖아요! 그렇게 말했다. 강준석은 발끈할 뻔 했다. '저 미친 계집이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개념이 너무 없지 않은가. 왕자님께 소리를 지르다니. 지금 당장 목을 베어버려도 시원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오라버니를 평생 원망하며 살 것이어요." 오냐. 그 목숨. 그냥 여기서 끊어주마. 감히 왕자님을 협박해? 강준석이 움찔하자 김환성이 강준석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야. 너 왜 마력을 끌어 올려?" "그, 그것이..." 김환성은 김상희를 땅에 내려 놓았다. "그럼 내가 갔다올게. 어쨌든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 하지만..." "너 있으면 오히려 방해라고." 그 말이 맞았다. 김상희는 가봐야 도움이 안 된다. 물론, 한진수가 버틸 수 있었던 거. 한진수가 쓰러지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김상희덕분이라고 봐도 됐다. 하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김상희도 김환성의 말에 수긍했다. "갔다올게." 강준석이 말렸다. "하지만 왕자님. 브레스가 토해질 수 있습니다." 직격으로 맞으면 왕자님도 절대 무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삼켰다. 말이 씨가 될 수 있으니까. 김환성이 윙크했다. "괜찮아. 내가 제일 세거든." 그리고 달렸다. 혼자서 중얼거렸다. "똥개한테 평생 원망 듣느니..." 그러느니 그냥 죽음의 위협 같은 거. 무릅쓰기로 했다. 아마도 곧, 브레스가 쏘아질 거다. 그리고 아마도 한진수는 지금 쓰러져 있는 상태. 평소라면 위치를 찾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진수의 마력이 마구 폭주하고 있는 상태라 찾기 쉬웠다. '간당간당 하겠는데?' 마력을 끌어올렸다. 빠르게 달렸다. 브레스가 쏘아지면, 그 이후로부터는 답 없다. 그 전에 한진수를 데리고 탈출해야 했다. 저만치 앞. 기절한 한진수가 보였다. 온 몸이 피범벅이다.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아씨. 미치겠네." 마지막으로 갈등했다. 땅으로 추락한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아내기 일보직전. 이대로면 죽게 생겼다. 이 순간, 발걸음을 돌리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 짜증나! 내가 기필코 오빠소리 백 번 듣고 만다!!!" 김상희의 간절한 모습이 떠올라 외면할 수 없었다. 달렸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쏘아졌다. 뒤따라온 강준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무리봐도 무모했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한진수는 물론이고 김환성까지 죽게 생겼다. "와, 와, 와, 왕자님!!!" 브레스가 쏘아졌다. ============================ 작품 후기 ============================ 꽁꽁 숨겨놓으려 했지만 힌트를 아주 조금 공개: 이 것은 맛 좋은 인간 암컷 냄새다. (인간 암컷은 마력이 없는데 왜 맛있을까?) ***84편 내용이 조금 추가 되었습니다. 이해가 잘 안된다고 하셔서 부연설명을 추가했습니다.*** *** 음.붉은산맥 스토리가 예상보다 1~2편 길어져 버려서... 연참했어요. 12시에 또 뵈어요! 0087 / 0192 ---------------------------------------------- 오래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87 샤벨 드래곤이 브레스를 발사했다. 김환성이 쓰러져있는 한진수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런 젠장! 젠장! 젠장!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위력이 약화되었다지만, 그래도 브레스는 브레스다. 까딱 잘못하면 비명횡사하는 수가 있다. '아오! 저 놈은 왜 저기 발가벗고 쓰러져있는 거냐고!' 그 때, 한진수가 눈을 번쩍 떴다. "...김상희...!" 온 몸을 괴롭히던 괴로움도 이제 사라졌다.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이유를 꼽아보자면, 아까 김상희가 껴안듯 부축 했을 때. 그때 마력 흐름이 일시적으로 좋아졌었다. 하지만 그것이 갑작스런 2차각성의 이유는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유따윈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강대한 기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김환성 왕자다. 어째서 저렇게 무모하게 달려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땅으로 추락한 샤벨 드래곤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브레스를 발사하려는 게 훤히 보이는 데 말이다. 저 멀리. 김상희도 보였다. 이 쪽을 향해 달려오려는 게 보인다. 크리스가 김상희가 달려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나는... 김상희를 지켜야 해.' 아주 혹여라도, 브레스의 파편이라도 저쪽으로 튄다면 김상희가 다칠 수도 있다. 김상희가 '다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이 기분. 이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태를 완전히 파악했다. '2차 각성이... 이루어졌어.'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김상희가 나타났다. 삶에 대한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김상희는 모르고 있지만, 김상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진수의 목숨을 구했다. '나는... 김상희를 지킨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는 걸. 내 안의 또다른 내가 아니라, 그냥 내가 김상희를 좋아하고 있는 거라는 걸. 이 세상에,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해도 괜찮았다. 딱 한 명. 김상희만 옆에 있으면 됐다. 김환성은 한진수가 일어선 것을 발견했다. '어라. 저 자식?'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유는 몰라도 제정신이다.' 마력흐름도 굉장히 안정화되어 있다. 아니. 이젠 오히려 무서워졌다. 원래 얕은 앞바다에는 파도가 거세게 친다. 그러나 깊은 바다는 다르다. 지금의 한진수를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시꺼먼 바다를 보는 먹먹함이 밀려 들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강대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나는 튀고.' 그렇다면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다. 저기까지 달려가서 저 놈을 구하는 거보다, 저 놈이 혼자서 도망치는 게 나을 테니까. "야 인마! 일단 튀어!" 그와 동시에 한진수가 외쳤다. 저 멀리. 김상희가 똑바로 들을 수 있도록. 사실 조금 망설이기는 했다. 하지만 말해야만 했다. 이 마음. 꼭 알아주면 좋겠다. 하나뿐인 내 약혼자가 말이다. "김상희!" 브레스가 쏘아졌다. "사랑한다!" 그와 동시에 체내의 마력을 증폭시켰다. 저 브레스. 위력이 많이 약해진 브레스다. 한 방정도는 맞아도 될 것 같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2차 각성을 이루었고 그와 동시에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 됐다. 약해진 브레스 정도는 맞아도 된다는 예감. 아니 확신이 들었다. 브레스 역시 일종의 마력 덩어리다. 저 마력 덩어리는 자신의 마력보다 약했다. 김상희는 똑똑히 들었다. 김상희. 사랑한다. 단 7글자가 김상희를 울렸다. 저 목소리. 진수의 목소리다. 한진수의 목소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김상희. 사랑한다.'가 한진수의 유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진수는 혹여라도, 브레스의 파편이 김상희에게 튈까봐. 그 작은 가능성도 싫어서 저 위험천만한 브레스를 온 몸으로 받아내려는 거지만, 김상희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저걸 피하기는 이미 글렀으니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죽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김상희는 지금 한진수가 2차 각성을 마친 상태라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니까. 그래서 오해가 생겨버렸다. 김상희가 풀썩 주저 앉았다. "나도...나도 사랑해...사랑해 진수야..."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브레스가 한진수에게 닿는 그 순간. 김상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니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제 약혼녀입니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직 결혼 안 했잖아. 내 똥개거든?" "왕자님. 제 약혼녀는 개가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똥개 취급. 제가 거절합니다." "네 약혼녀이기 전에 내 똥개였어!" "김상희 공주가 태아일때부터 제 약혼자였습니다만." 김환성은 말문이 막혔다. 젠장. 이거. 지는 느낌이다. 신경질을 냈다. "아 그니까! 사랑이 뭔데?" "사랑은 위대한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이 오가는 거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지금...이거 꿈인가?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지껏 저는 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김상희를 미워하라고 머릿속에서 외쳤죠. 하지만 그것이 거짓된 소리라는 걸 이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니까 그거랑 지금 그거랑 뭔 상관인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누군가 김상희를 미워하라고 외쳤다고? 나도 이상한 환청같은 걸 들은 것 같은데. 한진수에게 가라고. 한진수도 그런 이상한 소리를 계속 들었던 걸까? "제가 사랑하는 여자. 제 허벅지에 눕히고 있는데, 왜 왕자님이 그렇게 불쾌한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나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대화들이 지금 오가고 있다. 차라리 확 눈을 떠볼까. 눈으로 보면 좀 더 알기 쉽지 않을까. 크리스는 어디에 있는 거야?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씨는 어디에 있는 거지? 지금 엄청 황당해하고 있을 텐데. 사랑은 위대한 거라든가. 이 세계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가 지금 왔다리갔다리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진수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왕자님. 혹시 지금 질투합니까?" "질투는 개뿔. 그건 또 뭐야?"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동생을 저한테 완전히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신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내가? 너를?"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헹!" 망나니가 코웃음을 쳤다. 아. 나. 어떻게 해야해? 일어나? 말아? 그리고 쟤 질투나는 게 맞기는 맞는 거 같다. 아니라고는 말 안했으니까. 저럴 때 보면 단순하다고 해야할 지. 순진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 그냥 멍청한 건가? 진수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목소리. 그 따뜻했던 목소리가 내 귀를 어루만졌다. "일어났어?" ***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동생을 저한테 완전히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신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김환성은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김상희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라고 말을 해왔다. 물론 그 오라버니가 가끔 바뀌기는 했다. 때로는 김환석이 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김환성이 될 때도 있었지만 김환성은 항상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했다. 헹! 김상희가 제일 좋아하는 건 바로 이 몸이다. 라는 걸 말해주고 싶지만 말하지 않았다. 김상희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저 놈의 얄미운 한진수가 또 선수를 쳤다. 저 놈 저거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마치 큰형님 김형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어났어?" 그리고 한진수가 양해를 구했다. "잠시 스페셜 필드 좀 펼치겠습니다." 흥. 네깟놈의 스페셜 필드. 나중에 부수고 들어가야지. 내 똥개한테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있기라도 해봐라. 아주 그냥 목을 따버릴 테다. 김환성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스페셜 필드가 펼쳐졌다.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닌 강준석도 고개를 갸웃했다. "기척이...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스페셜 필드는 스페셜 나이트들의 전유물이다. 정확한 의미에서 한진수가 펼치는 이 필드는, 스페셜 필드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한진수는 스페셜 필드를 펼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도대체 이건..." 강준석도 한진수가 대천재라는 건 안다. 하지만 브레스를 맨 몸으로 받아내고, 기척조차 아예 느껴지지 않는 -심지어 눈 앞에서 펼치는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필드를 펼쳐낼 줄은 몰랐다. 스페셜 나이트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필드라니. 김환성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애꿎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아씨! 어디있냐!" 김환성이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흙먼지가 일었다. 오기가 생긴 김환성은 마력을 방출시켰다. 우지끈. 나무가 부서지고 바위가 박살났다. 하지만 스페셜 필드는 어디에 있는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컨트롤이 안 되면, 일단 힘으로 박살내려던 김환성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젠장! 내 똥개 데려와! 데려 오라고 이 도둑놈아!" 한편, 김상희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내 똥개 데려오란다. 나 똥개 아니거든. 하고 말해줄 수도 없고. 스페셜 필드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조금 이상했다. 굳이 표현해보자면 시간이 정지해있는 느낌. 바로 옆에 김환성이 있기는 있으나,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었다. 보이기는 보이되 머릿속으로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진수가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김상희." "오라버니." "여태까지 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어." "......." 한진수가 말을 이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부터 할게." "오라버니가 어찌 미천한 소녀에게 사..." 미천한 소녀에게 어떻게 사과를 하냐고 말하려고 했는데 한진수가 김상희의 입을 막아버렸다. "미천하다는 말. 하지 마. 넌 절대 미천하지 않아. 세상에서 유일한,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 한진수가 살짝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 여기서 너랑 평생 그냥 같이 있고 싶어. 마지막 순간이 되니까 알겠더라." 한진수는 마지막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김상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다른 거 필요 없으니 김상희만 있으면 된다는 걸. "오래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 김상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따뜻한 느낌의 무언가가 입을 콱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수는 김상희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한진수가 말했다. "그리고... 사랑해." 그리고 김상희는 눈을 감았다. 말은 나오지 않지만 두렵지 않았다. 눈은 감았지만 보였다. 진수의 얼굴이, 그리고 진수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게.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발 뒷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다. 김상희가 팔을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는 한진수의 듬직한 허리를 감싸 안고, 또 한손은 그의 등에 댔다. 가슴이 아닌 등에 손바닥을 댔음에도 불구하고, 한진수의 심장이 미칠듯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진수가 입술을 뗐다. 시간이 흘렀다. 김상희는 눈을 슬며시 떴다. 김상희의 눈에 가느다랗던 세상이 조금씩 커졌다. 그 세상에는 한진수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더하면 나 스스로를 못 참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할게." "오라버니..." 김상희는 기뻤다. 이 한진수가 그 한진수라거나, 그 한진수가 이 한진수라거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을 미칠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그 진심만큼은 전해져 왔으니까. "그리고... 또 사과할게." 사과를 한단다. 김상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요. 사과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다. 과거는 다 잊을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순간. 지금의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니까. "내가 안 괜찮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상희." 한진수가 다시 한 번 김상희를 불렀다. 김상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김상희가 한진수를 껴안았다. "잠시만요. 잠깐만요..." 한진수는 김상희를 껴안은 상태로 김상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 김상희의 등을 쓸어 내렸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말이다. 김상희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모르겠다. 무슨 무서운 말이 들려올 지. 정말 무서웠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정말 싫은 건, 이런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진다는 거. 한진수가 김상희의 등을 계속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는, 김상희를 향한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적어도 김상희는 그렇게 느꼈다. "내 욕심인 거 아는데..." 이건... 욕심이 맞다.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잊지 않아줬으면 해." 당연히 욕심이다. 욕심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억을... 지워야 해.' 기억을 지울 거니까. 지금 이 순간. 이 행복했던 순간은 자신만 기억할 테니까.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가슴이 아팠다. 내가 이토록 이 여자를 사랑하는 거. 이 여자가 기억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렇게 아픈 거. 혼자만 아프면 족하다. '나는... 반역자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 준장을 죽였다. 빠르든 늦든, 이 사실은 발각되고 말거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하극상으로 처벌될테지만 이런 경우는 아니었다. 제국의 금제까지 풀어 버리고, 제국 프리온 나이트의 비밀까지도 일부 알아냈다. 프리온 나이트에 관한 것은 극비다. 분명히 자신을 반역자라 몰고 처벌할 것이다. 여기서의 처벌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거고. '나와 함께 있으면 김상희가 너무 위험해.' 마음 같아선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지만 안 된다. 김상희가 행복하려면, 지금의 이 순간을 잊어버려야 했다. '나 혼자만 아프면 돼.' 한진수가 김상희의 이마에 입술을 살포시 맞대었다. 다시 한 번, 가볍게 키스했다. "사랑해." 한진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 시끄러워. 김상희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눈이 부셨다. 산새소리가 들려왔다. 김환성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빨리 안 일어나냐?" 내용자체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말투는 전혀 퉁명스럽지 않았다. 김환성은 거들먹거렸다. "이봐. 크리스." "네. 왕자님." 김환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것이야말로 무릎베개지. 그렇지?" "네. 맞는데요." 강준석은 묻고 싶었다. '그러니까 왕자님. 공주따위를 허벅지에 눕혔는데 그게 도대체 왜? 어디가 그렇게 자랑스러우신 겁니까?'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었다. 도대체 이주형은 어떤 정신머리로 이 해괴한 광경들을 보며 견뎌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일단 이동하겠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제국의 마력학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단 목적지인 프리미엄 그라디아로 향했다.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해...'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왜 나 눈물이 나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있는데 눈물이 났다. 그걸 본 김환성은 허세를 부렸다. 아무래도 김상희가 이 오프로드카를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빠만 믿어. 하나도 안 무섭게 해줄게. 크히히힛!" 자동차가 절벽으로 떨어져 내렸다. 김환성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오빠 믿지!!!" ============================ 작품 후기 ============================ 간만에 연참을 했군요. 후후후. 연참을 한 날은 뭐랄까... 후기를 정성들여 쓰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헤헿. *** "더하면 나 스스로를 못 참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할게." 아니... 사실 안 참아도 되는데... (사실 비츄의 손은 19금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0088 / 0192 ---------------------------------------------- 시작되는 1차 각성 *** 우리는 프리미엄 그라디아에 도착했다. 프리미엄 그라디아는 푸른 빛으로 빛나는 광석이다. 저녁놀과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푸른 빛은 내가 이 세계에서 본 모든 자연경관 중에서도 최고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나는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감상평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자식. 싸이코가 틀림 없다. 나를 위하여 준다고 하고는 있지만, 또 나를 아낀다고 생각은 하고 있겠지만. 진짜 싸이코다. 으. 속이 울렁 거린다. 토할 것 같다. "재미 있었지?" 너 같았으면 재미 있겠냐? 아오. 진짜. 넌 명존세다. 명존세를 부르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 자식아! 무슨 뜻이냐고? "왕자님. 그런 짓 하시면 김상희 공주 하나도 재미 없습니다." "에이 설마. 짱 재미있었는데." 무슨 뜻인지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김환성 이 망나니가 나를 프리미엄 그라디아의 절벽 밑으로 밀어버렸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높이가 40미터 정도는 되는 절벽이었다. 일반적인 여자라면, 떨어지면 그냥 죽는다. 그런데 얘는 그 밑으로 날 밀었다. 당연히 난 죽음의 공포를 맛 봐야 했다. 내가 왜 죽음의 공포를 맛 봐야 했냐고? "오빠하면 구해줄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얘가 내 옆에서 같이, 똑같은 속도로 낙하하면서, 싱글벙글 웃으면서...아. 화나. 말하다보니 열 뻗치네. 하여튼 나랑 같이 떨어지면서 웃는 낯으로 말한 거다. 오빠라고 하면 구해준다고. 그럼. 오빠라고 안 하면 안 구해줄 거냐? 이 자식아! 하지만 난 필사의 각오로 '오빠'소리를 참았다. 이 소리. 너무 자주해주면 절대 안 된다. 이 놈이 원할 때마다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날 정말로 죽이지는 않겠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공포를 이겨냈다. 그러니까 이 놈은 오빠소리 듣고 싶어서 나를 40미터 아래 절벽으로 밀어버린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싸이코 맞지? 이유는 또 있었다. 아. 말하다보니 계속 화나. 나 어떡하죠? "재미있었을 텐데!" 한 가지 이유가 오빠소리를 듣고 싶어서 라면, 또 한가지 이유는 내가 정말로 재미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누가 망나니 아니랄까봐. 여자에 대한 이해도. 크리스나 알렉스 학자님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좀 따라가주면 어디가 덧나냐? 이딴 게 재미있을 리 없잖아. 이건 그냥 살인행위라고! 나는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게 더 짜증난다. 쟤는 분명 즐거워했다. 내가 무서워할 거라는 걸 조금 알기는 아는데, 그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크리스의 설명 덕분에 내가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게 왜 무서워?" 아오. 진짜 명존세. "오빠가 옆에 있는데 그게 왜?"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저 망나니에게 40미터 높이의 절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늘도 훨훨 날아다니는 망나니인데. 저 녀석은 하늘을 나는 망나니니까. 그러니까 얘 입장에서는, 음.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이런 행동은...음. 뭐가 있을까. 아 그래. 애인의 입 속에 밥을 떠먹여주는 행위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그런 행위. 전혀 위험하지 않다. 혹시라도 숟가락이 목젖을 건드려 목젖이 이상반응을 일으키고 기도를 막아 질식사가 일어날...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애인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저 망나니한테도 그렇겠지.' 밥을 떠먹여 주는 행위로 인해 상대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저 망나니의 머릿속에서 40미터 절벽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행위일 거다. 나도 그걸 머릿속으로 알기는 아는데 그래도 무섭다. 심장마비 걸릴 것 같다. 하다못해 놀이기구를 타기만 해도 무서운 게 사람인데, 안전장비도 없이 40미터 아래로 떨어진다고 생각해봐. 진짜 미치고 팔딱 뛰겠는데, 그 옆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망나니가! 그 때 명치를 세게 후려 쳤어야 했는데. 아 화나. 화가 난다. 나는 화를 삭혔다. 어차피 이런 일. 하루이틀 겪는 일도 아니잖아. 아예 말귀를 못 알아 먹는 우리 둘째 망나니님. 이제 좀 더 조련의 강도를 높여도 되겠지요. "오라버니. 소녀는 그런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나는 이제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얘한테 뭔가를 직접 시키기까지 했다. 왕자가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기어코 나는 뜻을 이뤄냈다. 한진수를 데려오라고 명령 아닌 명령까지 내린 셈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으니까. 어. 그러고 보니... 한진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나.' 한진수를 봤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한진수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망나니의 말을 들어보면, 샤벨드래곤이라는 것의 기세를 받아 기절했다고 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뭔가 조금 이상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가슴이 아파왔다. 눈물이 핑 돌정도로 말이다. 기억이 만약 종이처럼 생겼다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그 종이의 일부를 싹둑 잘라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어쨌거나 나는 그 상황을 빌어 망나니의 마음도 상당부분 알아낼 수 있었다. 얘는 단순히 똥개 이상으로 나를 아껴준다. 솔직한 말로 나도 고맙다. 고마운데, 얄밉다. 내가 말했다. "소녀를 죽일 생각이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말겠어요." 진짜냐고? 미쳤냐. 나 죽을 생각 없다. 죽어도 얘 명치는 후려치고 죽을 거다. "어떤 놈이 너 죽인대? 다 데려와. 오빠가 다 패줄게." ...야. 진지한 얼굴로 허세부리지 마. 그리고 지금 네 얘기하는 거거든. 하아. 한숨만 나온다. 얘는 내가 지 얘기 하는 줄도 모른다. 아예 개념이 없다. "소녀는 오라버니가 그런 장난을 치실 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응?" 확실하다. 망나니. 지금 충격 받았다. "고통 스러워?" 한진수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었다. 그래서 눈가를 훔쳤다. 울려고 연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타이밍 좋게 눈물이 나왔다. "...야, 야...너 왜 그래? 아이씨. 진짜." 망나니는 내가 눈물을 훔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 넌 여자를 달래본 적이 없으니까! "아 짜증나. 내가 잘못했어." ***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은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아 짜증나. 내가 잘못했어." 뭐라고. 지금 왕자님이 설마 잘못했다고 말하신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왕자님이 잘못했다고 말한단 말인가! 왕자님이 저런말을 할 상대는 오로지 국왕폐하와 황제폐하밖에 없다. '이런 무엄한 계집 년 같으니라고!' 왕자님은 살인을 해도 잘못한 게 아니다. 살인 당한 놈이 나쁘다. 살인 당할 만한 죄를 저질렀으니까 살인 당하는 거다. 적어도 상대가 왕자일 때는 그렇다. 그런데 왕자님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게 하다니! 이건 즉결처분대상이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저깟 계집이 뭔데. 아무래도 왕자님이 이상하다. 하지만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잠자코 조금 더 지켜봤다. 조금만 더 선을 넘는다면, 그 땐 가차없이 죽여버릴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김상희가 물었다. "오라버니께서 무엇을 그렇게 잘못하셨나요?" "으, 응?" 김환성은 당황했다. 태어나서 자기 입으로 자기가 뭘 잘못했다고 말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 익숙하지도 않고 해본적도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뭔가. 뭐라도 잘못한 것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오묘하고도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라버니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미천한 소녀가 못났을 뿐이어요. 소녀가 아주 못된 계집년이어요." 그러자 김환성은 더욱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김상희는 분명 자신이 나쁜 계집이라고 스스로를 욕하고 있는데, '뭐,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 김환성은 느꼈다. 이거.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가 다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냐. 내가 다 잘못했다니까?"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알 수 없어요. 혹여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알려주신다면 소녀의 마음 속 짐이 조금 덜어질 것 같아요." 지구식으로 표현해보자면,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말해봐!' 다. 그걸 이 세계식으로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했다. 김환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 그, 그게 그러니까..." 그런데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김환성은 머뭇거렸다. "소녀를 위하여 거짓말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소녀가 나빠요." 김환성은 울고 싶어졌다. "아씨. 그냥 내가 다 잘못했다니까?"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을 불렀다. "강준석. 네가 말해봐." 참고로 강준석은 지금 김환성에게 찍힌 상태다. 샤벨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 김상희를 제물로 던져주고 도망치자고 제안해서 그렇다. 그 이후로, 김환성은 강준석을 막 대하고 있다. "제, 제가 감히 그걸 어떻게 말을 합니까?" 왕자의 잘못을 캐내어 말을 하라니. 엄연한 하극상이다. 아무리 시켰다고는 해도 절대 할 수 없다. 그리고 강준석의 눈으로 봤을 때도, 김환성이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뭐, 뭐지...' 김상희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김상희는 스스로를 일컬어 미천한 계집이라고 표현했고 스스로가 나쁘다고 표현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왕자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굳이 저렇게 억지를 부리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없는 잘못까지 찾아내라고 하면서 말이다. 강준석은 또 울고 싶어졌다. *** 김환성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크리스가 말했다. "스페셜 나이트님께서 아마 지금 듣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 "......." 강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환성이 나오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왕자님이 왜 김상희 공주를 그토록 신경 쓰는지." "......." 강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저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혼란스러울 겁니다." "......." "제가 팁을 하나 드리죠. 김상희 공주를 귀한 왕자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게 환해집니다." 왕자님도 이상한데, 저 크리스란 놈도 이상하다. 어떻게 공주따위를 왕자님처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크리스는 힐끗 옆을 쳐다봤다. 김상희가 바람을 맞으며 저녁놀을 구경하고 있었다. 프리미엄 그라디아의 장관에 빠져서 감탄에 감탄을 더하고 있었다. 작게 말했다. "왕자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좋을 거에요." "......." 김상희가 이 쪽을 쳐다봤다. 크리스가 김상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손까지 흔들어 줬다. 김상희도 손을 흔드는 크리스를 발견하고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웃는 얼굴의 크리스가 작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거든." *** 나는 마력학원에 돌아왔다. 겨우 2박 3일의 일정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수가... 프리온 나이트에서 직위 해지가 됐다고...?' 프리온 나이트에서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차석교관의 자리까지 빼앗겼다. '진수가 왜...' 충격적인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진수는 제국의 공적이 되어 버렸다. 프리온 나이트였던 한진수가 상관을 죽이고 도피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진수를 숨겨주거나 비호해주는 세력은 제국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엄명까지 내려왔다. '진수가 도대체 왜...' 진수는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다. 그런 진수가 어째서 상관을 죽이고 달아났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진수만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프리지아는 또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성매매를 하는 뒷골목에 갔다가 왕궁에서 대사건 -오빠, 아빠 소환 사건-을 일으킨 뒤 샤벨 드래곤에게 쫓긴 다음, 프리미엄 그라디아의 40미터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스펙타클한 2박 3일을 경험하고 왔더니 한진수가 제국의 공적이 되어 있었고 프리지아 교관이 실종되어 버렸다. '뭐가 이래...?' 샤벨드래곤이 나타나는 게, 전란의 징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황궁의 밀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상에서 걸어내려갔다. "어디 한 번. 얼굴을 보자꾸나." 대외적으로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제국이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고 알려진 프리지아가 양손이 결박된 상태로 황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폐, 폐하..."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프리지아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결박된 상태로, 존재조차도 몰랐던 밀실에 이렇게 갇혀있는 건지. 황제가 씨익 웃었다. "얼마 전. 1차 각성을 했더구나." 황제는 프리지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프리지아는 뭔가 두려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혐오감이 들었다. 아버지의 손길인데도 그랬다. "폐하... 어째서..." 황제가 기분 좋은 듯 설명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저도 이 말 제일 무서워합니다.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이거 진심 무서워요. 0089 / 0192 ---------------------------------------------- 시작되는 1차 각성 ***89 황제가 프리지아를 쳐다봤다. 얼핏보면 자애로운 눈빛이었으나 프리지아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폐...폐하..." "궁금하지 않느냐? 내 딸인 네가 왜 여기 이렇게 있는지." "저는 폐하와 제국에 대해 티끌만큼의 잘못도 한 적이 없습니다." 프리지아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여자로서는 더이상 오르지 못할 위치까지 올랐다. 제국의 6황녀. 제국의 꽃이었으며 여자의 몸으로 마력학원을 졸업하여 지금은 마력학원의 교관노릇까지 하고 있다. 여성으로서는 성공한 삶이 틀림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너는 1차 각성을 끝냈다." 황제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시기가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맞아. 너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지." "허면 어째서..." 프리지아는 혼란스러웠다. 마치 죄인처럼 잡혀와있다. 왜 이런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자가 1차 각성을 하게 되면, 조금 특이한 점이 발현되거든." 황제는 즐거운 듯 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프리지아. 너 같은 경우는... 잉태 쪽으로 발현이 되었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잉태 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리고 자신은 세계 유이 -고려에 김상아 공주가 있으므로-한 마력을 가진 계집이다. 그런데 황제는 마치, 마력을 가진 계집을 많이 봐왔던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1차 각성을 여러번 봤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제국이 가장 원하는 능력들 중 하나지. 이럴 때, 한진수가 옆에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한진수! 프리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한진수.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이다. 물론 그는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있지만, 그래도 첩으로라도 들어가도 좋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한진수의 씨를 받아야 하는데... 한진수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 시점부터, 프리지아는 자신의 안위보다는 한진수의 안위가 더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한진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태다. "한진수는... 프리온 나이트에 있잖아요." "그 한진수가 제국의 배신하고 도망쳤다. 프리온 나이트 7기를 탈취해서." 프리지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리온 나이트 7명이 아니라, 프리온 나이트 7기란다. 그렇다면 프리온 나이트는 사람이 아닌 건가? 혼란스러웠다. "한진수는 이미 물 건너 갔고. 김훈상은 무력으로 제압할 수가 없고." 황제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마음 같아선 내 씨라도 받게하고 싶지만..." 프리지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이 상황. 뭔가 너무 무섭다. 한진수가 제국을 배신하고 도망치다니? 그렇다면 사형당할 것이 뻔하다. 한진수가 지금 위험에 처해있는 상태다. 뿐만 아니라 한진수의 씨나 김훈상의 씨를 받는다니. '그건 설마...' 불안함이 실체를 가지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폐, 폐하...!" "걱정 마라. 너를 범하지는 않을 테니." 황제가 씨익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프리지아를 임신시키고 싶었지만 잠시 참기로 했다. 아주 오랜만에 얻은 '여왕'이다. 제국은 고대로부터 이 능력자를 '여왕'이라고 불렀다. 여왕이 잉태할 수 있는 생명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나을 터. 황제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말했다. "한진수를 발견하면 절대 죽이지 말고 무조건 살려서 데려와라."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피해가 커질 수 있습니다. 상대는 한진수이며 프리온 나이트 7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프리온 나이트 10기가 파괴되어도 상관 없다. 10기까지는 감당할 수 있는 선이야. 어떻게든 목숨은 붙여서 데려와. 놈의 씨가 필요하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했다. "프리지아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혀를 묶어라. 그리고 죽지 않게 관리 잘하도록. 프리지아를 강간하는 놈은 결코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네게 관리를 일임하도록 하겠다." 프리지아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여왕. 한진수의 씨. 강간. 몇 가지 단서들을 통해 퍼즐을 맞췄다. '내가... 여왕이라고?' 여왕이라는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를 잉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같았다. '내가...도대체 뭘?' 그리고 그 잉태를 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남자의 씨앗'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뜻 같은데, 황제의 말을 들어보면 단순히 '아기'를 잉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런 꼴을 당하고 있을 리는 없겠지. 프리지아는 대외적으로 실종되었다고 발표됐다. 하지만 그녀는 황궁 깊숙한 곳. 황녀인 그녀조차도 모르는 비밀감옥에 갇혔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려왔다.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맛 좋아 보이는 계집인데... 참으란 소리요?" "여왕이다." "아... 그렇다면 더더욱 잡아먹고 싶은데. 아랫도리가 벌써 불끈불끈 솟는구만. 어리고 탱탱하니 이쁘던데. 속살은 더 뽀얄 거 같고." "황제폐하의 엄명이 있었다. 씨받이의 기능이 끝났을 때. 그 때 주도록 하지." 누군가가 킬킬대고 웃었다. "에이. 그 때는 이미 걸레가 되고도 남았을 시기인데. 됐수다. 어쨌든 황제의 명령이라니 말을 듣기는 들어야지. 내가 저 년 건드리는 놈들은 고추를 다 잘라버리지." *** 제국의 마력학원에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간 비어있던 수석교관의 자리에 과거 제국의 나이트 연대장 출신 -프리온 나이트가 아닌 일반 나이트- 빌헬름이 부임하게 되었고, 한진수가 맡고 있던 차석교관의 자리에 일왕국 출신 검투사인 야시로가 오게 됐다. 김상희는 그들을 잘 모른다. 대략적인 정보만 안다. 둘 모두, 지극히 평범한(?) 이 세계의 남자들이었다. 그 말을 달리하자면 여자를 깔보고, 똥개만도 못한 취급을 한다는 것. 마력학원에 여자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 정도만 안다. '다행히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은 없으니까.' 다행히 차석 교관, 수석교관과는 직접으로 부딪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또 한 명, 다른 사람이 교관으로 부임했다. 일반교관이며 암호 해독 및 고어해석을 담당하는 교관이었다. 바로 프리지아를 대신하는 교관. 암호해독 및 고어해석 클래스의 학생들도 누가 부임해오는지는 몰랐다. '누굴까?' 그리고 그 날 아침. 김상희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석아!' *** 나는 행복해졌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마음 주고 정 주었던 첫째 오빠 김형석이다. 볼 때마다 눈이 즐거워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저 바람직한 남자의 표본! 아니. 바람직한 오빠의 표본...이라기보다는 어쨌든 현실에서는 절대로 없고 드라마에만 있을 법한 다정다감, 자성의 오빠의 완성판. 오빠계의 끝판왕 등장이시다. 그래도 직책이 교관인지라 나를 편애할 수는 없는 듯, 나를 보며 살짝 윙크를 해줬을 뿐 별다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우리 형석이가 고어해독도 잘했었나...?'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그래도 자격이 되니까 이 곳에 왔겠지. 아. 내 눈이 즐겁다. 환성이나 크리스도 잘생긴 건 맞지만 그래도 내 스타일은 역시 형석이다. 저 훤칠한 키. 넓은 어깨. 게다가 결정적으로 따뜻한 마음가짐까지. 너란 오빠. 하. 넌 왜 오빠로 태어난 거니. 그런데 우리 형석이가 이상한 말을 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말이다. "아. 그리고 김상희 학생은 오늘 수업이 파하고 시간을 비우도록 해요." ...음? 시선이 나한톄 쏠렸다. 나 요즘 그래도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물론 시간은 걸리고 힘들겠지만, 이 클래스의 학생들. 내 편으로 만들기 물밑작업도 조금씩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좋은 표현으로 '물밑작업'이고 나쁜 표현(?)으로 조련이기는 한데 어쨌든. 흠흠. 어쨌든 최상의 조련은 조련 하는 듯, 하지 않는 듯. 아주 천천히 몰래몰래, 당하는 당사자도 모를 만큼 비밀스럽게 해야하는데 그러려면 선결 조건이 갑자기 너무 눈에 확 띄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아주 자연스럽게 옆에 스며들어야 한다.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힘이 없다. 내가 힘이 없으면, 내 주변 사람들이라도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의미에서 이 학생들은 미래 세대를 이끌어갈 세계의 중추들이다, 이 말이야. '별로 안 그래 보이긴 하는데...' 별로 안 그래 보여도 이게 사실이다. 제국의 마력학원은 전 세계 각국의 초엘리트들만 오는 곳이다. 이 곳. 제 8관 학생들이 비록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뒤처지는 클래스이기는 해도, 그래도 역시 각국의 천재들이며 각국의 머리들이다. 나는 이 학생들을 반드시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그거니까. 우리 형석이가 환하게 웃었다. "왜요? 내가 김상희 학생을 편애하는 거. 너무 눈에 보여요?" 장난스런 그 말투에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편애? 저건 또 어디 암호인가 싶다. 물론 뜻은 안다. 편애. 사전적인 의미로는, - [명사]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치우치게 사랑함.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게 계집과 어울리는 단어이냐? 절대 아니다. 계집과는 공존할 수 없는 고귀한 단어다. 계집을 편애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김상희 공주의 오라비에요. 성적에 있어서는 공명정대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동생 예뻐할 수밖에 없다는 거. 미리 말해둘게요." ...오빠. 오빠사람아. 너 왜 그래. 무, 물론 마음은 고맙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날 편애하고 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그래도 좀. 민망하다. 이쯤되자 클래스의 학생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김상희는 뭐지?' 안 그래도 이상한 계집이었다. 계집 주제에 마력학원에 들어온 건 그렇다 치더라도, 크리스가 항상 좋아한다고 따라다니고 있고 고려의 둘째 왕자 김환성이 마치 경비라도 되는 양 이따금씩 들러서 김상희의 안위를 확인하고 간다. 그래서 요즘은 김상희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물론 친해질 생각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시기다. 징계위원회가 열렸을 때에는 고려에서 왕실학자라는 사람이 초음속 제트기를 타고 날아오질 않나. 심지어 이번에는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가 나타나 나는 김상희를 편애합니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질 않나. 하여튼 이해 안되는 거 투성이다.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사실 제일 큰 멘붕상태에 빠져있는 건 바로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이다. - 김상희를 지켜라. 이 불친절한 명령서. 도대체 뭐란 말인가. 뭐로부터 김상희를 지켜야 하는지, 또 얼마나 지켜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주형이 밟았던 멘붕의 전철을, 강준석도 밟고 있는 상태. 그나마 크리스의 조언이 있었던 데다가, - 아주 고귀한 왕자님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게. 폐하의 의중과 진심을 읽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스페셜 나이트의 가장 큰 덕목 아니겠는가? 자네의 충정을 믿어 보겠네. 라는 왕실학자 알렉스 -심지어 이 사람은 왕실의 경비카드까지 쓸 수 있는 실세 중의 실세다. 나이트들 사이에선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 의 조언까지 있어서 그나마 정신을 추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왕자님처럼 생각을 하라니...' 강준석과 달리, 김상희는 강준석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눈치밥 먹은지 벌써 15년이다. 강준석의 심리상태 읽는 거. 일도 아니다. 비록 지금 은신하고 있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듬직하신 이주형 나이트님께선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건가요?" 일부러 자존심 좀 긁었다. 분명 듣고 있을 테니까. "소녀는 이주형 나이트님의 비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미천한 계집인데..." 그 쯤 되자 강준석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왜? 내가 있는데? 내가 이주형보다 못한 게 도대체 뭔데? 김상희는 속으로나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 번 길들여본 경험이 있는 스페셜 나이트다. 한 번도 했는데 두 번을 못하랴. 채찍을 줬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다. 하루이틀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상희는 옆에 강준석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모른 척 했다. "호, 혹시... 강준석 나이트님께서 옆에 계시는 걸까요...?" 일부러 주위를 더듬었다. 이렇게 더듬는 걸로 걸릴 정도면 스페셜 나이트 못 됐다. 하지만 김상희는 열심히 주위를 더듬는 척 했다. 이렇게 하면 스페셜 나이트의 은신을 잡아낼 수 있다는 것 처럼. 그리고 엄청 안심하는 척 했다. "다행이어요. 소녀의 말을 듣지 못하신 것이 분명하군요." 강준석은 좀 황당해졌다. 계집들이란게 원래 멍청하다는 건 알고 있다. 두뇌회전속도 자체가 남자와는 비교가 안 되니까. 그런데 저런 걸로 안심을 하고 있다니. 보아하니 아마도 저 계집은 자신이 옆에 있다는 것 조차 정말로 잊고 있었던 듯 했다. 멍청하니까. 김상희는 열심히 손 글씨를 썼다. - 소녀는 첫째 오라버님과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이동을 해야만 해요. 스페셜 나이트님께 드릴 것이라곤 제 작은 성의밖에 없네요.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소녀의 애정이 듬뿍 담긴 딸기와 바나나랍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보시면 금방 다 빼앗아 드실 테니 얼른 드셔요. 강준석은 어이없다는 듯 쪽지를 읽었다. '소녀의 애정? 웃기는 군.' 그런데 묘하다. 포크에 저절로 손이 갔다. 그는 원래 딸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다. 오밀조밀한 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이렇게 당돌한 계집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페셜 나이트에게 음식을 강권(?)하는 계집이라니. '뭐지? 이거. 맛있네?' 원래 딸기 안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좀 맛있는 느낌이다. '뭐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이 기분. 뭔가 묘한데.' 한편, 김상희는 첫째 오빠인 김형석과의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김상희는 문득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오라버니..." 정말 이상했다. 몸이 뜨거웠다. 단순히 열이 나거나 아픈 느낌이 아니었다.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몸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형석이 당황했다. "사, 상희야. 너 왜 그래!" 그리고 김형석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징후는...' 지금 김상희에게 나타나고 있는 증상. 어떤 증상인지. 익히 알고 있는 증상이었다. 보통은 남자에게서만 발생하는 증상이었다. ============================ 작품 후기 ============================ 사실 제일 큰 멘붕상태에 빠져있는 건 바로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이다. 작가해설: "그래...다들 그 과정을 거쳤어... 금방 익숙해질거야 ㅋ" 0090 / 0192 ---------------------------------------------- 시작되는 1차 각성 *** 김형석은 뭔가 이상함을 알아 차렸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체온. 붉으스름하게 변하는 피부. 갑자기 배출되는 땀.' 설마. '설마... 1차 각성 징후인가?' 보통 남자의 경우, 대략적으로 언제쯤 1차 각성이 나타날지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놓는 게 일반적이다. 김환성같은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면 진통제를 항시 구비하고 다닌다. 아주 오랜 옛날, 진통제가 제대로 발달하기 전에는 이 1차 각성 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어린 소년들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상희는 마력이 없는데 어째서?' 생각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정확한 건 의사를 만나봐야 알겠지만 일단 파악할 수 있는 건 1차각성의 징후와 비슷했다. "상희야. 너 많이 아프니?" "오, 오라버니. 소녀는 괜찮..." 김상희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너무 아팠다. '너무...아파...' 그런데 또 이상했다. 단순히 아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가슴이 시렸다. '나는 또 왜...' 뭔가가 보일듯 말듯.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를테면 한진수가 아파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환영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수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마력 컨트롤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남자인데 그런 고통을 느낄 리도 없다. '너무...너무 아파...'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형석은 김상희를 업어들고 일단 의무교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저거 또 김상희 학우 아냐?" 예전에 한 차례 이슈가 되었었다. 고려왕국의 셋째왕자 김환성이 김상희를 직접 안아들고 걸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김상희가 시체가 아닌가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체가 아니었다. 아주 충격적이게도 시체가 아니라, 정신도 멀쩡하고 사지도 멀쩡한 계집아이를 안아들었던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대단하다는 고려왕국의 왕자가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셋째 왕자도 아니고 첫째 왕자다. 왕자임과 동시에 교관이다. 이쯤 되자 학생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계집이 뭔데 저러지...?" 대관절 저 조그마한 계집이 뭔데 왕자들이 저렇게 나서서 업고 들고 난리를 치는건지 모르겠다. 대외적으로 왕국의 보배라고 밝혀지기는 했지만 왕이나 왕자들이 공주따위를 '진짜 보배'라고 생각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고어 해독 및 암호해석 클래스의 한 학생이 중얼거렸다. "가끔 김상희 공주를 보면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해." "어? 너도 그래?" "뭔가 좀 묘한데..." 처음에는 계집따위가 감히 한 클래스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불쾌함이 좀 사그라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저 계집. 도대체 뭘까?" 한편, 의무교관 김재식은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이건 1차 각성 징후 아닙니까!" 계집아이가 1차 각성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나 되는 경우란 말인가! 그의 의사생활 30년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교관님.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빨리 손 좀 써주세요." "예? 예. 자, 잠시만요. 알겠습니다. 이, 일단 진통제부터 좀 먹이고... 그, 그런데 문제가 좀..." 김재식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마력이 없는 여자아이가 어떻게 1차 각성을 한다는 건가. 그런데 이건 아무리 봐도 1차 각성이다. 원래 마력이 있어야 1차 각성이 가능하다. 그게 정설이며 정론이다. 그런데 마력이 없는 계집이 1차각성이라니. 현 시대를 이루는 근본 자체가 흔들리는 예외적인 경우 아닌가. 어쨌든 그러한 것들은 논외로 치고서라도 '마력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였다. "1차 각성 시 먹는 진통제들은... 마력이 있어야 반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진통제들은 마력을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며, 마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길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진통제는 통증을 잡아줌과 동시에 1차 각성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촉매제 같은 역할이라는 뜻이다. 그 촉매제를 제대로 발동시키려면 마력이 필요하다는 소리고. "저도 압니다. 제가 할게요." "하지만 교관님은..." 교관님은 마력이 없는 남자 아닙니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력이 없다고는 해도 그는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다. 마력석 알론을 구입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충분한 경제적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적어도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합니다." 품 속에서 마력을 품은 알론석을 꺼내 먹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면 몸에 무리가..." 그 때, 김상희 공주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너무 괴로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다만 옆에 김형석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오라버니..."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이 아이의 건강입니다. 내 몸 같은 거.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빨리요." 결국 김재식은 진통제를 투여했다. 그리고 김형석은 정신을 집중했다. 김상희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상희야. 제발 이겨내라.' 과거에는, 마력을 가진 남자들도 고통때문에 죽어나갔었다. 하물며 마력이 없는 여자의 몸으로 저 고통을 어떻게 견딜지. 상희의 고통을 직접 느끼지는 못하지만 김형석은 그것 이상으로 가슴이 아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런 동생이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몸이...무겁...다...' 본능이 경고했다. 빨리 상희에게서 손을 떼라고. 이대로면 뭔가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 경고를 무시했다. '나보다 우리 상희가 훨씬 괴로워.' 이겨내자. 왜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겨낼 수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다. 온 몸의 기가 다 빨려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안...돼...정신...차...' 김상희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김형석이 풀썩 쓰러졌다. 김재식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왕자님!"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냐! 김재식은 식은땀을 흘렸다. 미치겠다. 그래. 상희공주가 어떻게 되든 말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가 이 곳 의무실에서 쓰러졌다? 이건 큰 일이다. 의사 커리어에 상당한 흠집이 되며 고려왕국과 제국의 눈치가 보인다. 지금 김형석은 상당히 특별한 위치다. 고려 왕국의 첫째 왕자이면서 제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상태다. 볼모는 볼모인데 제국에서도 각별히 신경쓰는 볼모이다.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 노력하고 있다. 상대가 고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김형석이 잘 못 된다면? 제국은 또 다른 볼모를 고려에 요구할 수 있을까? 상당히 민감한 문제다. 고려 입장에서는 첫째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수모를 맛봤다. 하지만 고려는 강하다. 전면전은 힘들어도 게릴라전을 통해 제국을 충분히 괴롭힐 수 있다. 저번의 무력시위에서도 보지 않았는가. 고려가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왕국쯤은 하루 만에 접수할 수 있다는 걸. '김형석은 무조건 살려야 돼.' 그 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누, 누, 누, 누구십니까!"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나타났다.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이었다. 강준석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왜 고귀한 왕자님께서 계집을 직접 업고 달리셨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서도 한 켠으로는, '예전만큼 화가 안나는 것 같은 기분적인 기분인 것 같은 기분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좀 황당했다. 절대 아침에 먹은 딸기랑 바나나 때문은 아니다. 딸기랑 바나나. 그 중에서도 특히 딸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 과일이다. 물론 전부 다 먹기는 했지만. 절대. 절대로 안 좋아한다. 어쨌든 강준석은 김재식을 밀쳤다. "비켜!" 강준석이 김형석의 몸에 손을 댔다. 체 내 마력. 그러니까 마력석 알론으로부터 섭취한 마력이 전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김상희의 몸이 마치 블랙홀처럼, 김형석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대로면 김형석. 말라 죽어버릴 것 같았다. "젠장."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건 도대체...' 엄청나게 거대한 괴물이, 커다랗고 시꺼먼 입을 크게 벌리고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자신은 아주 작은 돛단배였으며 그 괴물은 새까만 바다처럼 느껴졌다. '마력이... 빨려 들어간다.'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저깟 계집년 때문에 내 마력이 마른다고?' 그럴 리는 없다. 괴물이 빨아들인다? 그렇다면 그 괴물의 배를 터뜨려 버리면 그만이다. '어디 한 번 해보자.' 어디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어디 한 번 못 해봤다. 김재식은 당황했다. "이, 이봐요!" 보아하니 고려왕가를 지키는 스페셜 나이트 같은데, 그 쯤 되는 자가 여기서 쓰러졌다. 김재식은 식은땀을 흘렸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왕자 하나가 쓰러진 것만으로도 이미 벅찬데, 거기에 무려 스페셜 나이트가 쓰러지다니. 의사 인생 최대의 고비가 닥쳐왔다. '아. 뭐 이딴 경우가 다 있어!' 미치겠다. 미치겠는데 또 미치겠는 상황이 발생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똥개!" 김재식은 저 소년을 안다. 이름은 김환성. 이 곳 제국 마력학원에 교관으로 와도 손색이 없을, 전직 고려 나이트 제 9대대장이다. "아씨. 비켜." 애꿎은 의무교관 김재식은 저만치 날아갔다. 김환성이 별로 힘 안주고 툭 쳤는데 그렇게 됐다. '아이고 삭신이야.' 마력 컨트롤 능력이 떨어진다더니. 그게 진짜인 것 같다. 뭐 이렇게 무식한 힘이 다 있나 싶다. 김환성이 강준석의 몸에 손을 댔다. 마력이 빨려 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거.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위험한 기분이다. 손을 대면 안댈 것 같다. 젠장. 그래도 내 똥개랑 우리 형님. 쓰러져 있잖아. 짜증난다. 똥개 같은 거. 그냥 죽어버리라고 모른 척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겠다. "나 죽으면 똥개 니가 진짜 책임져야 된다." 그래도 김환성 왕자쯤 되는 엄청난 인물이 왔으니 괜찮겠지. 김재식은 그나마 한숨을 쉬었다. 지금 보아하니 영문은 모르겠지만 김상희 공주가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이건 오히려 기회야.' 이런 거. 학회에서도 의료계에서도 아직 단 한번도 발표된 적이 없다.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이다. '이걸 논문으로 발표한다면...!' 심지어 그냥 1차 각성도 아니고 1차 각성시 마력을 흡수하는 여자. '이게 잘만 되면...' 세간에 알려지기로 김환성 왕자가 가진 마력의 양은 거의 세계에서도 탑급. 아마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눈이 번뜩였다. '좋아...!' ...좋지 않았다. "아씨. 똥개. 이 돼지 똥개가 진짜..." 김환성마저 풀썩 쓰러졌다. 김재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외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가 쓰러지고, 고려왕국의 귀중한 전력인 스페셜 나이트가 쓰러졌으며, 심지어 이번엔 무력에 관한한 대천재라는 김환성 왕자까지 쓰러졌다. '나만 멀쩡해?' 아. 이거 죽은 척이라도 해야 되나 싶다. 생각해보라. 이 들이 다 쓰러지고 다쳤는데 그만 멀쩡하다면. '내가 고려 왕이라도 괘씸하겠다.' 고려왕에게 괘씸죄로 찍히면 아마 살아가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서워졌다.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찾아왔다. "역시나가...역시나네. 1차 각성이야." 역광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김재식이 물었다. "누, 누굽니까?" ============================ 작품 후기 ============================ '예전만큼 화가 안나는 것 같은 기분적인 기분인 것 같은 기분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좀 황당했다. 절대 아침에 먹은 딸기랑 바나나 때문은 아니다. 딸기랑 바나나. 그 중에서도 특히 딸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 과일이다. 물론 전부 다 먹기는 했지만. 절대. 절대로 안 좋아한다.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니까 ^^" 0091 / 0192 ---------------------------------------------- 시작되는 1차 각성 ***91 "역시나가...역시나네. 1차 각성이야." 의무교관 김재식은 눈을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입구쪽을 쳐다봤다. '학생?' 학생 같은 느낌이다. 의무교관은 학생들의 얼굴을 잘 모른다. 걸어들어오는 남자. 학생같기는 한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자네. 소속과 이름은?" "암호해독 및 고어해석 클래스. 이름은 크리스입니다만..." 크리스는 김재식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김재식은 크리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묘하다.' 잘생긴 건 확실했다. 잘난 놈들이 잔뜩 모여 있는 이 학원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의 미남이다. 그런데 또 이상한 건, '저 정도 인물을 가졌으면 내 기억에도 있을 법 한데.' 보통 잘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잘생겼으면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런데 기억에 전혀 없다. 별 거 아니라면 아니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누워주셔야겠네요." "그게 무슨... 컥!" 의무교관 김재식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크리스가 손 날로 김재식의 목 뒤를 내려쳐서 기절시켰다. 하아... 김상희의 옅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진통제 먼저 먹이고." 김상희의 입을 벌리고 알약을 하나 넣었다. 기절한 김재식의 몸을 발로 툭 찼다. "아니. 의무교관이 뭐 이따위야? 제대로 처방을 해야지. 아무 진통제나 먹이면 장땡인 줄 아나." 그리고 크리스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말이다. "아니. 임무 때문은 아닌데. 말했잖아. 나 김상희가 정말로 좋아져 버렸다고. 아. 괜찮아. 어차피 상희는 지금 내 말 못 들어. 못 듣는 상황이니까. 아 거참. 잔소리 많네.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해." 크리스는 김상희의 등에 손을 댔다. 크리스의 표정이 조금씩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이거...설마..." *** 제국 정보부의 국장 김국현은 조금 행복해졌다. 요즘 안 그래도 실적을 제대로 올리지 못해서 실의에 빠져있던 때였다. 고려왕국의 행보를 놓쳤지 한진수의 행방은 묘연하지. 그러던 차에 굉장한 소식을 알아냈다. 한달음에 황제를 찾았다. "폐하. 드디어 김상희가 1차각성을 했다고 합니다." "오호?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게 맞나?" 황제는 일부러 김상희를 건드리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말이다. 계집들 중, 그러한 특별한 경우가 있는데 오랜 시간동안 경험해온 바에 의하면 계집들은 자신이 각성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에 부담감을 느끼면 아예 1차각성을 못하는 경우가 제법 되었다. 그래서 근방에 두고 지켜보기만 했다. 더군다나 김상희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제국에서도 탐내는 특별한 경우. "맞습니다. 일단 1차는 그런데...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좋은 의미의 문제냐, 나쁜 의미의 문제냐?" "상당히 좋은 의미의 문제입니다." 김상희의 능력은 굉장히 특별하다. 그래서 예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1차 각성이 끝나면 처우를 결정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미뤄할 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조금 미뤄야할 것 같았다. 김국현을 내보내고서 황제는 밀실에 혼자 남았다. 황금의자에 앉았다. "김훈상이 문제야." 김훈상이 문제다. 일단 공식적으로 김상희는 고려왕국의 보배다. 김상희를 실제로 보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고려는 김상희를 보배라고 우겨야 할 판이다. 두 나라에서 깽판을 쳤고 그 이유가 보배 때문이었으니까. 고려의 입장에서 김상희는 무조건 보배여야만 하는 거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정말 왕자처럼 아낀다고 가정하고 움직여야 해." 가정이 아니라 실제지만 황제는 전혀 예상 못했다. 모로가도 목적지만 가면 되는 법이다. 결론은 비슷하다. 왕자처럼, 아니 그 이상 아끼고 있으니까. "고려와의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얻어야 하는 계집인가..." 원래대로는 그렇다. 김상희의 능력은 제국에 반드시 필요하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재니까. 무조건 잡아야 한다. 제국이 한 단계 더 위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김훈상이 이끄는 고려가 강성한 상태다. 고려와의 전쟁. 마음만 먹으면 못 일으킬 것도 없다. 고려 쓸어버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가 잠을 편히자지 못하겠지." 고려를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스페셜 나이트와 김훈상의 능력 파악이 정확하게 되지 않았다. 저번에 순간이동같은 이상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알게되지 않았던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고려를 구슬려서 김상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무력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니까. 다음 날. 제국의 정보국장 김국현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 "폐하의 양녀로 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국의 꽃 프리지아가 지금 실종상태다. 조만간 시체로 발견될 거다. 평민 계집아이 아무나 하나를 잡아다가 시체로 발표할 거니까. "황제폐하께선 시름에 잠기신 겁니다." "내가 계집따위 때문에 시름에 잠긴다고?" 김국현은 자신있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고려가 이미 선례를 보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타국을 쳤다. 고려쯤 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서 다들 아무런 말도 못했다. 하물며 이건 전쟁을 일으키자는 얘기도 아니고 그저 딸 아이 하나를 입양하겠다는 거다.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고려 측에 막대한 보상을 제시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멀리보고 계신 상황 아닙니까?" 그렇다. 최소 3년을 보고 있다. 김상희의 능력은, 그 정도의 투자가치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3년 이내에 또 다른 능력이 발현 될 테니까. 두 가지 능력 중 하나. 지금 당장 계집을 취하는 것보다 3년 정도 기다는 게 이득이 된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진해봐라." *** 한바탕 난리가 났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황제폐하께서 딸을 잃어버려 수심에 잠기셨다고?" 물론, 프리지아는 특별한 여자이기는 했다. 마력을 가진 여자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자다. 바퀴벌레를 예로 들어보자면, 바퀴벌레도 분명 개체마다 생긴게 조금씩 다르긴 하다. 어떤 바퀴벌레는 크기가 좀 더 크고, 어떤 바퀴벌레는 좀 더 넓적하다. 혹시 모른다. 바퀴벌레의 세계에는, 그 들중에서도 미남과 미녀가 있을지도. 그러나 사람이 보기엔 어찌됐든 바퀴벌레다. 프리지아가 바퀴벌레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일단 여자임에는 틀림 없다. 다시 말해, 마력을 갖고 있든 아니든, 어찌됐든 일단 여자라는 뜻이다. "그게 말이나 돼?" "뭔가 상류층 세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거 아닐까?" 저번에는 고려의 왕 김훈상이 딸 때문에 화났다고 전쟁까지 일으키지 않았던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그것도 이 세계의 절대자라 할 수 있는 두 명이 그러니까 사람들은 조금 동요했다. "딸에게...뭔가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아닐까?"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 그렇다. 그건 비약이 너무 심한 거다. 어떻게 계집따위에게 뭔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놀라운 소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폐하께서 딸을 입양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는데...?" "개소리하고 있네." "나도 처음에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야." "선동질 하지 마. 무슨 개소리가 그렇...헉. 진짜네?" 개소리 중에서도 상 개소리로 치부되던 황제의 딸 입양설이 정말이었다. 뉴스와 인터넷이 온통 그 얘기로 시끌벅적했다. 김훈상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이지?' 프리지아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김훈상은 별로 감흥이 없다. 프리지아같은 계집따위. 죽어 자빠지든 말든 알게 뭐란 말인가. 문제는 그로 인해 황제가 실의에 빠졌다는 거다. '개소리가 따로 없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개소리는 아닌가...' 다른 사람은 전부 개소리라 생각해도 김훈상은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는 김상희라는 딸이 있다. 다른 사람들한테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인정했다. 다른 딸은 몰라도 그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다. 만약 그 딸내미가 어디 가서 프리지아와 같은 꼴을 당했다면 그 수백배로 갚아줄 생각이다. 만약 산사태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면, 그 산이라도 통째로 밀어버릴 기세다. "폐하. 제국의 제안은 고려에게 무척 이득이 되는 제안입니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김상희는 계륵과 같은 존재다. 일단 대외적으로 보배라서 함부로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렇다고 뭔가 커다란 효용성이 있는 건 아니다. 두 나라를 치고 고려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외교력을 확보하고 강한 힘을 드러낼 수 있었다. 김상희의 용도는 딱 거기까지다. 계집따위에게 더 많은 용도를 기대하긴 어렵다. "나도 고려 중이다." 제국의 제안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계륵같은 존재인 김상희를 막대한 재화를 받고 제국에 넘겨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싫다.' 김상희를 입양 보낸다고? 이제 내 딸이 아니라고? 절대 허락 못 한다. 그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억지로 겨우 참았다. 그는 딸을 누구보다 아끼지만 일국의 왕이다. 왕이라면 반드시 저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 이미 이 충격적인 얘기는 전 세계에 퍼졌다. 고려가 황제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건 모양새가 굉장히 안 좋다. 제국을 우습게 여기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으니까. 실제야 어찌됐든 제 3자가 보기에 그러면, 제국은 또 제국 나름대로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떠한 제스쳐를 취해야 한다. 국제관계란 그런 거다. '김상희를 보내는 게 무조건 이득인데.' 돈으로 생각해 보면, 이득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돈 보다, 이득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뭔지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웠지만 분명 뭔가 있었다. *** 제국의 마력학원. "저거... 김환성 왕자 아니야?" 김환성 왕자가 운동장을 열심히 뛰었다. "내가 세어봤는데 오늘 하루 동안 39,349 바퀴 뛰었어. 그 것도 저 속도로." "지금 마력 방출시키는 거야?" "어쨌든 저 근처로는 절대 가면 안 돼. 까딱 잘못했다간 죽는다고." 김환성은 한진수 만큼 마력을 컨트롤하지 못한다. 같은 속도로 달려도 한진수가 달리면 먼지 하나 피어오르지 않지만 김환성이 달리면 땅이 진동하고 유리창이 떨린다. 저 속도로 달리고 있는 김환성과 부딪치면 적어도 어디 하나는 부러지고 말 것이다. 김환성은 절치부심했다. '나는...' 김환성은 천재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노력하는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느꼈다. '한진수는 나보다 훨씬 강해.' 저번에 샤벨 드래곤을 만났을 때 느꼈다. 한진수가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김상희를 구하지 못할 뻔 했다. 정확한 건 잘 모르겠다. 크리스가 휴, 겨우 살렸네요. 정말 위험할 뻔 했어요. 라고 말하는 건 봤지만 상황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마력 컨트롤을 조금만 더 잘했어도.' 그는 여지껏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겐 '효율'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강대한 마력과 풍만한 마력양을 바탕으로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대로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그래서 마력을 일단 방전시키기로 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 잡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기로 했다. 하나 뿐인 -사실 여러명이지만-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환성은 달리면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내가 제일 세야만 하니까." 거짓말 할 수는 없었다. 제일 세긴 개뿔. 하나도 안 세다. 그렇다면 세져야 했다. 절대 오빠최고란 말이 듣고 싶어서는 아니다. 일단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하여튼 천재인 김환성이 이제 노력까지 하기 시작했다. 단 한명의 여자 때문에. *** 고려의 왕. 김훈상은 편지를 받아들었다. - 사랑하는 아빠에게. 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렇지. 사랑하는 아빠지." 김훈상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군.' 정말 창피할 뻔 했다. 모두에게 위대한 왕이어야만 하는 자신이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차 각성이라...'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에게 듣기는 들었다. 1차 각성을 한 것 같다고. 그러나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고 했다. 일단 1차적인 보고에서는 그랬다. '계집의 1차 각성이라...' 1차 각성 같은 거. 아무래도 좋다. 김상희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는 거. 그게 중요했다. 1차 각성 같은 거. 하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떻단 말인가. 마력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단 말인가. 있으면 좋은데, 없어도 그만이다. 이를 테면 그런 거다. 엄청난 부자 -일반적인 부자가 아닌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부자- 의 아들, 딸은 놀고 먹어도 된다. 일을 하면 좋은 거지만 안해도 상관 없다. 얼마든지 놀고 먹어도 되니까. 김훈상에게 김상희가 그랬다. 김훈상은 김상희가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다. 허세가 아니라 진짜다. 김훈상은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별 내용 없었다. 소녀는 무탈하니 아빠 힘내세요. 소녀가 있잖아요. 와 같은 시덥잖은 내용밖에는 없었다. 그 내용이 왜 이렇게 눈에 쏙쏙 들어오는 지 알 수 없었다. 김훈상은 김상희를 어떻게할 지 결정을 내렸다. 신하들은 서로 모여서 쑥덕거렸다. "제국의 제안. 당연히 받아들이시겠죠?" "당연하죠. 계륵같은 김상희를 버릴 수 있는데다 제국에서 막대한 보상을 지급하기로 약조하였으니."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죠? 하여튼 고려에는 엄청난 이득이니... 폐하께서는 당연히 받아들이시겠죠." 신하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공주 하나 팔아서 막대한 재화와 외교조건을 얻을 수 있으면 이득 아니겠는가. 이득이 커지면, '우리도 보너스다!' 보너스를 받을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김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고려는..." 보너스를 기대하는 신하들의 눈도 말똥말똥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무조건 100프로다. 100프로의 확률로 왕이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 작품 후기 ============================ 신하들 지못미 0092 / 0192 ---------------------------------------------- 김상희의 진짜 능력 ***92 고려의 왕. 김훈상이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제국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제안을 수용할 줄 알았던 신하들은 놀라 까무러쳤다. "폐, 폐하!"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옳은 선택만을 해왔던 왕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이건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답이 그냥 정해져 있는 아주아주 쉬운 문제 아니던가! "반론은 듣지 않도록 하겠다." 반론 그딴 거 제기하면 네 놈들 목부터 따주리라.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아니나다를까. 신하들은 반발하려했다. "하, 하지만..."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이구. 이 답답이들아.' 상희학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건데, 이 세계의 남자들. 정말 답답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물론,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살펴보자면, 겉으로 보이는게 전부가 아닐 때가 대부분이다. 어떤 나라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이면에 어떠한 의도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알렉스가 보기에 김훈상의 행동은 보이는 그대로다. 바로, 딸등신. '저 딸등신이 딸을 남한테 주겠니?' 원래는 긴가민가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확신이다. 이 확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발표하지 않을 뿐이지, 이미 알렉스의 마음속에서 상희학은 진리였다. 적어도 김훈상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내가 김상희 공주님 아버지라도 딴 사람 주긴 싫겠다.' 김상희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으니까. 신하들은 굉장히 황당해 했다. 이건 보기에도 안 좋다. 제국의 제안을 고려가 무시한 셈이 되니까. '도대체 어쩌시려고...' 고려가 약한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국보다 강하지는 않지 않은가. 고려 역시 제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나라다. 괜히 첫째 왕자가 볼모로 잡혀 있는 게 아니다. 신하들이 황당해하는 것 이상으로 제국의 황제도 황당해 했다. "우리 제안을 거부했다고?" "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습니다." "설마 김훈상이 그 딸을 정말로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냐?" 제국 정보국장 김국현은 답답했다. "현재로써는 그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뭔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을 텐데,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리 파악하려고 애써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딸을 사랑한다? 그것도 일국의 왕이? 그건 그냥 개소리다. 그러니까 숨겨진 이면에 뭔가 다른 것이 분명 있는데. '제기랄. 된통 깨지겠어.' 하지만 깨지지 않았다. 저번에도 말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했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정말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전제로. 아니. 전제가 아니라 이젠 그렇다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라." "......." 김국현은 귀를 의심해야 했다. 저 황제. 불과 며칠 전에 딸인 프리지아 -그냥 여자도 아니고 마력을 가진 여자다-를 비밀 감옥에 잡아넣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의 입에서 '딸을 사랑하는 것을 인정해라'라는 말이 나오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황제는 김국현을 내보내고나서 생각에 빠졌다. '김훈상. 너는 김상희의 가치를 아는 거냐?' 그도 아니면, 정말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정말로 김상희를 사랑하는 거냐?' 알 수 없었다. 다만 제국에는 김상희가 꼭 필요 했다.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빼앗고 싶을 만큼 탐나는 물건이었다. 김상희는. '아직 전쟁은 아니야.'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3년 내로 어떠한 변화가 있을 거다. 그 때는 그냥 탐나는 물건이 아니라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물건이 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땐. 정말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김상희를 얻어야 했다. 황제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은 물 건너 갔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이제 곧 마력학원의 2차 승급시험이 있게 된다. 그 때. 손을 쓰기로 했다. 다음 날. 정보국장 김국현이 황제의 밀실을 찾았다.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김국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괜찮아. 이번 프로젝트는 수석교관 빌헬름에게 맡겨라." 그 말의 뜻은 어렵지 않았다. 이번 일의 책임을 모두 빌헬름에게 떠넘긴다는 뜻이다. 현재 제국 마력학원의 수석교관 빌헬름 말이다. 김국현은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빌헬름...' 빌헬름과 아주 친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교류는 있다. 황제의 명령을 따른다면, 빌헬름은 최소 파면. 어쩌면 징역을 살게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거다. 김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빌헬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제국의 신하다. 황제의 신하. 황제의 명령은 무조건적이며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거다. "알겠습니다." *** 제국 마력학원. 마력학원의 승급시험은 1년에 3번 이루어진다. 암호 해독 및 고어 해석 클래스도 마찬가지다. "2차 승급시험 얘기 들었어?" "응.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치러진다던데." 보통 승급시험은 교실에 앉아서 풀이를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보고서 제출이라니." 원래 마력학원의 정책은 수석교관이나 차석교관의 재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가끔 승급시험을 레포트 제출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이 그랬다. "우리에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어차피 성적만 잘 나오면 어떻게 시험을 봐도 상관 없다. 오히려 외부로 견학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갑갑한 시험보다는 나을 정도였다. "두 군데 중 한 곳을 선택하라던데." 고대유적지를 탐사하고 그에 관한 레포트를 제출해야만 했다. 김형석은 교실에 들어왔다.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김형석은 그 날. 김상희가 1차 각성을 이룬 뒤, 그 날 이후로 무려 이틀동안이나 기절해 있었다.(참고로 김환성은 30분 만에 깨어났다.) 사실상 공주때문에 왕자가 기절했다는 건 엄청나게 큰 일이다. 원래대로라면, 김상희는 엄벌에 처해져야 맞았다. 그러나 기절한 당사자인 김형석도 김환성도 김상희를 처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욱 황당한 건 김훈상이었다. - 괜찮으냐? 김훈상은 김상희가 쓰러졌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바로 자필편지를 써서 보냈으니까. 저 네 글자가 황제와 왕을 잇는 비밀 편지라고 알고 있는 김유신이 저 네 글자의 정체를 안다면 정말 까무러칠 거다. 또 참고로 말하자면 공주따위에게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이 은밀하게 움직인다는 건, 상식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김형석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중간쯤에 앉아있는 김상희가 보였다. 상희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상희를 보고 있으면 뭐랄까. 물가에 애를 하나 내보내놓은 느낌이랄까. 가볍게 살짝 윙크를 해줬다. 김상희는 김형석을 좋아한다. 좋아하긴 하는데 저건 좀 부담스럽다. 까딱 잘못하면 시선이 쏠릴 수가 있다. '애정표현은 좋은데. 자제 좀 시켜야겠어.' 감히 공주따위가? 그런 질문은 이제 필요 없을 때가 됐다. 김상희는 이제 자신감이 많이 붙었다. 물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건 맞지만 예전과 달리 이제 허리에 안전벨트를 하나 정도는 매고 있는 느낌이랄까. '조심 좀 시켜야지.' 김형석이 말을 이었다. "모두들 이번 2차 승급시험에 대해서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굉장히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 음. 그렇단 말이지. 우리 잘생긴 형석이의 말을 듣고 나는 이번 승급시험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레포트 제출. 대학교 다닐 때에 많이 해봤다. 오히려 이런 건 자신이 있는 편이다. 마력학원과 비교적 가까운 고대유적 두 군데 중 한 군데를 골라서 답사를 해야만 했다. "먼저 자율적으로 장소를 한 번 골라볼까요?" 한 곳은 '골렘 피라미드' 이고 또 한 곳은 '태양의 무덤'이다. 비록 방향은 반대편이긴 하지만 마력학원과 비슷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3일 정도면 갔다올 수 있을 정도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크리스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상희 넌 어디로 가고 싶어?" "소녀는..." "잘 모르겠으면 그냥 나 따라와." 내게 선택권이 있을 리가 없다. 자. 3일만에 다녀올 수 있다는 건 남자들 기준이다. 나 혼자 간다면 아마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다. 일주일이 뭐야. 아마 수십일은 걸리겠지. 생각해보라. 자동차를 타고 3일 가야 하는 거리. 그걸 나 혼자 간다면 걸어가야 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도 차타고 4시간이면 간다. 그럼 이제 어느정도 거리인지 감이 오지? 3일이면 72시간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타고 가는 거리의 무려 13배다. 그걸 걸어가라고? 절대 못 간다. 나는 방긋 웃었다. "크리스 학우님께서 저를 신경써주시다니. 저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골렘 피라미드로 가자." 정말 황당한 일은 거기서부터 벌어졌다. 우리 클래스의 반 아이들 중 한 명. 이름만 겨우 아는 정도인 홍경식이란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골렘 피라미드로 가겠습니다." 이상했다. "저도 골렘 피라미드로 결정했습니다." 아니. 얘네가 왜 이러지. "저도 골렘 피라미드로 가겠습니다." 아니. 뭔가 이건 좀. 잘못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 형석이가 가볍게 웃었다. "골렘 피라미드가 압도적으로 높군요. 혹시 여러분이 이 곳을 선택한 것은 김상희 학우가 골렘 피라미드를 선택했기 때문인가요?" "교관님.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는 그런 멍청한 마음가짐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단체로 반발했다.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어린 아이들처럼 모두가 발끈했다. 골렘피라미드로 가겠다는 학생이 무려 80퍼센트를 넘었다. 겨우 20퍼센트의 학생들만이 태양의 무덤을 선택했다. 아니.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얘네가 평소에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데. 얼마나 무시하느냐하면 나랑은 거의 말도 안 하고 인사도 잘 안한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기분 나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다. 그런 애들인데 나 때문에 골렘 피라미드를 선택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역시 우리 형석이. 단속 좀 시켜야겠어.' 날 챙겨주고 예뻐해주는 건 좋은데 아무래도 따끔하게(?) 한 소리 좀 해줘야 겠다. *** 저녁 식사 시간. 김형석이 말했다. "오빠는 교관이야."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건 왜 갑자기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으면 다 보여." 그니까 뭐가요? "몇몇 아이들. 자꾸만 널 힐끗힐끗 훔쳐보더라. 몰랐니?" "......." 김상희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이 세계에서 15년을 살아왔다. 눈치가 느리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눈치는 '생존'에 특화된 눈치다. "오, 오라버니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닐까요?"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날 왜 쳐다보겠어. 재수 없어서 쳐다보겠지...하고 김상희는 생각했지만 또 김형석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희는 이 곳에서 15년 간을 살아오면서 스스로의 생각보다 더 많이 끼를 부렸다. 그런 것에 면역이 없는 학생들은 스스로 알게 모르게 김상희의 매력(?)에 빠져 들어간 거고. 김형석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냐. 내 동생 간수 좀 잘해야겠어. 외간 남자들한테 끼 좀 그만 부리고. 오빠 질투할지도 몰라." 아니. 그건 끼가 아니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방식인데요. 슬프지만... 진짠데요.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아니. 고맙긴 고마운데...나 왜 슬프지. 엉엉. ============================ 작품 후기 ============================ '김훈상. 너는 김상희의 가치를 아는 거냐?' 아니면 '정말로 김상희를 사랑하는 거냐?' → 답훈상.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0093 / 0192 ---------------------------------------------- 김상희의 진짜 능력 ***93 알렉스는 왕을 찾았다. "서영이에게 가야 한다." 그 말은 즉, 나는 불타는 밤을 보내야 겠으니 할 말만 빨리하고 사라져라라는 뜻이다. 상희학을 공부하니 이렇게 응용도 됐다. 알렉스는 그 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상희공주님 클래스가 이번에 답사를 간다고 합니다." "아. 들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 3자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제국은 우리 고려에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시일이 조금 걸리는 것 뿐이겠지." 사실 김훈상도 할 말은 없었다. 아버지로서의 선택을 했지만, 왕으로서의 선택으로 놓고 보자면 그의 선택은 틀렸다. 반박할 가치도 없다. 그도 그걸 안다. 그래서 신하들 앞에서 떳떳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보낸답니다." "원래 마력학원의 시험은 교관의 재량 아니었나?" "그렇기는 하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롭습니다." 물론 알렉스도 아주 이상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주 조금. 아주 무언가 뒷공작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 아주 작은 가능성도 놓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구식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앰뷸런스를 들 수 있겠다.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리면 사람들은 그 앰뷸런스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앰뷸런스 안에 응급환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알 수 없다. 거짓말로 사이렌을 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비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라도 응급환자가 타고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같은 맥락이다. "네 말은 김상희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다는 뜻인가?"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아주 작은 가능성. 그 작은 가능성 때문에 알렉스가 왕을 찾은 거다. 알렉스가 회심의 한 마디를 던졌다. "폐하께선 김상희 공주를 사랑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 김훈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깟 계집년 따위. 알 바 아니다. 라고 왕 답게, 남자답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다. 알렉스가 대놓고 말했다. "그만 슬슬 인정하시죠. 저는 폐하를 정신병으로 몰거나 하지 않습니다.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폐하의 반응과 생각은 지극히 정상적이니까요." "상희학이 무엇이냐?" 알렉스가 미소지었다. 됐다! 물었다! 와라. 실험샘플! 아니지. 실험샘플 폐하. 뿐만 아니라, '폐하가 관심을 보이시면... 든든한 우군이 한 명 생기는 거지.' 적어도 돌 맞고 죽을 거 지켜주실 수는 있지 않겠는가. 한편, 김훈상은 생각했다. '알렉스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인가.' 왕은 언제나 고독한 법이다.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해야만 하니까.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도 없다. 절대자의 자리가 원래 그렇다. 기껏 얘기해봐야 강서영에게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스는 참다운 신하가 아닐 수 없었다. '알렉스. 너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구나.'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닌데, 김훈상은 고마움을 느꼈다. 김훈상도 사람이다. 오히려 왕이라서 더 외로운 사람이다. 알렉스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알렉스는 속으로 기뻐했다. '실험샘플! 실험샘플! 실험샘플!' 상희학을 공부하니 왕의 총애가 뒤따라 왔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알렉스는 그저 기쁘기만 했다. *** 나는 언제나 그렇듯 '고마워'. 이 한 마디를 길게 늘려서 표현했다. "고맙습니다. 홍경식 학우님. 저는 정말 큰 은혜를 지고 말았어요. 학우님의 손이 이토록 따뜻하고 넓은지. 저는 오늘에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아. 이건 내가 아냐. 손이 따뜻하긴 뭘 따뜻해. 깨닫긴 뭘 깨달아. 그런 거 아니다. 뭐. 고맙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어쨌든 내가 넘어질 뻔 했고 그걸 잘 잡아줬으니까. 고마운 건 분명 고마운 거다. 다만 '고마워' 이 한 마디를 저토록 늘려서 표현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이젠 뭐 생각 안해도 그냥 술술 나오네.' 더 마음에 안드는 건 저런 멘트가 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입 밖으로 술술 나오는 느낌이랄까. 힐끗 옆을 보니 어느새 크리스가 다가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상희 너. 다치진 않았어?" 이봐. 크리스야. 내가 아무리 마력이 없는 계집이라지만 넘어진 것도 아니고 겨우 넘어질 뻔 한걸로 어떻게 되거나 하지는 않는단다. 그래도 너는 여자에 대한 개념이 조금 있잖니. 너 왜 이러니 나한테. 그런데 확실히 달라진 게 있기는 있는 것 같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넘어질 뻔 하거나 했으며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을 거다. 이를테면 '쯧쯧, 계집이 저렇지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히... 조금씩이지만 변하고 있어.' 적어도 계집년이라는 욕도 안 들려왔고 심지어는 크리스가 아닌 다른 남자가 날 붙잡아주기까지 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사람은 주관을 가진 생물이다. 나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자. '진짜 충격적인 거네.'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정말 충격적인 거다. 남자가 여자를 잡아주다니! 오히려 감히 내 앞에서 자빠지냐고 궁둥이를 퍽 차버리지 않으면 다행인 남자가, 여자를 잡아주다니. 와. 이거 생각해보니 진짜 충격적인 거네. 아마 시녀들이 보면 놀라 까무러치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골렘 피라미드에 도착했다. 골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기록상에만 존재하는 고대유물이다.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록상에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저 엄청난 크기의 피라미드가 사실은 골렘이라나 뭐라나. 골렘이 뭐냐고? 음. 쉽게 얘기하자면 로보트같은 거라면 보면 된다. 고대 기록에 의하면 마력을 원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며 전쟁 시에 사용된 마도병기란다. 하지만 이따금씩 조종에 실패하여 폭주하는 골렘이 생겨나게 됐고 그 위험성 때문에 폐기되었다고 한다. '뭐. 어쨌거나 저게 만약 정말 살아 움직이는 골렘이라면...' 그렇다면 정말 엄청나지 않을까 싶다. 김상희는 이 엄청난 크기의 피라미드에 놀라야만 했다. 목을 한없이 위로 꺾어 올려다 보아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 한국에서 봤던 63빌딩보다도 더 높아보였으니 말 다했다. 입구에는 표지판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해석이... 이상하게 되어 있는데?' 혹시 모른다. 내 눈이 이상한 걸지도.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한글과, 해석을 해놓은 표지판 내용은 조금 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예전에 시험을 봤을 때도 그랬다. 1차 승급 시험 때. 나는 모든 답을 정확하게 썼다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수준의 한글이었으니까. '혹시 그 때...'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하고 생각은 해도 여전히 이상했다. 설마 교관이 틀렸고 내가 맞은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잖아. '내 능력이 완벽하지 않은 걸 수도 있어.'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나를 잡아준 홍경식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김상희. 이건 어떻게 해석해서 이렇게 나온 거야?" 솔직히 나는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남자가 나한테 질문을 해? 자존심도 없나? 크리스라면 모를까. 도대체 어떻게 다른 남자애가 나한테 질문을 할 수가 있지? 그 때, 크리스가 대신 대답했다. "여기서부턴 우리 모두가 경쟁자야. 그런 건 알아서 해석하라고...라고는 하지만 내가 알려줄게. 잘 봐. 여기선 유포푸루토스의 정리를 사용하는 거야. 저번에 배운 기억 있지?" 나는 잘 알아듣지도 못할 외계어로, 크리스는 고어 해석하는 법을 설명해줬다. '혹시... 내가 저런 방식으로 해석하지 못할 걸 알고 일부러 끼어든 걸까?' 에이. 그건 아닐 거다. 그냥 나를 도와주고 싶은 거겠지. ***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은 오늘도 혼란스럽다. '하마터면 은신이 풀릴 뻔 했다.' 김상희가 넘어질 뻔 했을 때 그랬다. 은신을 풀고 달려가 잡아줄 뻔 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딸기랑 바나나 때문은 절대 아니다. 비록 접시는 깨끗하게 비웠지만 그는 딸기 안 좋아한다. '왜 잡아주고 싶은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김상희 공주가 넘어지는 게 싫지?' 혼란이 혼란을 불러왔다. 스스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점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리고 더욱 혼란스러운 건. '나는 왜 저 자식이 김상희 공주에게 자꾸 집적대는 게 싫지?' 아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우스운 거 아니겠는가. 원래 계집은 남자가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야 한다. 그게 맞는 거다. 그런데 왜, 어째서. 기분이 이렇게 별로란 말인가. '좀 멀리 떨어져라. 이 자식아.' 괜스레 짜증이 났다. 골렘 피라미드에 도착했다. 그도 예전에 한 번 왔던 곳이다. '여전히 엄청난 규모군.' 뭐. 저 홍경식이란 놈이 마음에 안 드는 것 빼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곳 남자놈들이 전부 마음에 안든다는 것 빼고. 그다지 어려움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이 곳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일반 고대 유적지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일반인들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는 특수 고대 유적지들도 있기는 있는데, 어쨌거나 일반 고대 유적지는 딱히 위험하거나 특별한 구석이 없는 곳이다. '별 일은 없겠지.' 피라미드 내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도대체 이건...!' 강준석은 김상희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주위는 어두웠다. 뭔가.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아니. 함정은 아니야.' 함정이라고 보기엔 인위적인 느낌이 너무 없었다. 오히려 이건, '오히려 이건 던전에 가깝다.' 던전이었다. 왜 갑자기 특수 고대 유적지도 아니고 일반 고대 유적지에 던전이 생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던전이라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은 거다. 그도 경험해 본적이 겨우 딱 한 번 있었을 뿐이다. "이, 이거 뭐야?"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학생들은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와서 얼마간 걷다보니 별안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웠다. 피라미드 안이 아니었다. 동굴 속인 것 같았다. 언제. 왜. 이런 곳으로 들어오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크리스가 중얼거렸다. "던전..." 강준석이 그 말을 들었다. 크리스를 쳐다봤다. '저 놈은, 학생답지가 않단 말이야.' 뭔가 기분이 묘한 놈이다. 던전이라는 걸 알고 있다니. 일반인들은 던전에 대해서 잘 모른다. 던전이란 건 무작위로, 아무데나 규칙없이 생기는 특수한 공간을 뜻한다. 던전마다 다르기는 한데 이 던전이 요구하는 어떤 조건을 클리어하게 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게다가 막대한 보상도 따른다. '대부분의 경우는 던전 내의 괴물을 처리하는 거지.' 그 와중에 상당히 커다란 보상이 따르게 된다. '문제는... 너무 위험하다는 건데.' 과거 스페셜 나이트 대대원 12명과 일반 나이트 30명이 힘을 합쳐서 던전을 클리어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도 부상자 9명과 사망자 3명이 나왔다. 던전마다 난이도는 다르겠지만 하여튼 던전이라는 건 굉장히 위험한 거다. '상황이... 안 좋다.' 던전 내에 들어서면 일단 외부와의 연락은 차단 된다. 핸드폰도 소용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던전을 클리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김상희 공주는 지켜야 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에 반해 김상희는 울고 싶었다. 애초에 외딴 산길에 혼자 버려져도 무서운 게 사람이다. 김상희는 이 곳에서 잘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용기 넘치는 소녀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 무서웠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 세계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표지판도 그랬다. - 세상을 가지고 싶다면 골렘을 얻으라. 원래는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맞았다. 그런데, - 골렘을 가지면 세상을 얻을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순서가 바뀌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구절도 있었다. - 성녀의 은총이 내릴 때에 골렘이 깨어나리니. 이 부분은 해석이 불가하다고 되어 있었다. 사실상 학생들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그런 해석.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대의 기록이라는 건 워낙 뜬구름 잡는 소리도 많고 전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들이 많아서, 전래동화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크리스가 말했다. "도와주셔야 겠는데요?" 마치 스페셜 나이트의 은신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다시 말했다. "김상희 공주 주변 어딘가에 은신하고 계신 거 알아요. 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거든요." 그 때, 키긱! 키긱!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준석이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을 유지한 채 싸우는 것과 그냥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당연히 전자가 훨씬 힘들다. 강준석은 김상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공주님은 내 뒤에 있어요." 하마터면 다정하게 말할 뻔 했다. 스페셜 나이트로서 창피할 뻔 했다. 어떻게 공주를 뒤로 숨기면서 다정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나는 긍지 높은 스페셜 나이트다!' 스페셜 나이트가 어떻게 공주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자꾸만 몸이 이상하게 움직여서 혼란스럽다. 키긱! 키긱! 이상한 울음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크리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는데 아이들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제국 마력학원의 학생들이다. 각 국의 수재만 모였다. 마력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작게 말을 이었다. "우리 상희는 지켜도 너희는 지켜줄 자신이 없거든." 크리스와 강준석이 동시에 검을 빼들었다. ============================ 작품 후기 ============================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왜 잡아주고 싶은 거지?' '나는 왜 김상희 공주가 넘어지는 게 싫지?' '나는 왜 저 자식이 김상희 공주에게 자꾸 집적대는 게 싫지?' '좀 멀리 떨어져라. 이 자식아.' 조금씩 오빠가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0094 / 0192 ---------------------------------------------- 김상희의 진짜 능력 ***94 키긱! 키긱! 기분 나쁜 울음소리의 정체는 바로 '고블린'이었다. 약 120cm의 작은 키. 초록색 피부. 길게 찢어진 눈과 긴 귀가 특징인 이 괴물은 근력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으나 상당히 재빠르며 날카로운 무기 -뾰족하게 깎은 나무칼이나 죽창 같은-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여기서 근력이 약하다는 말은 남자에 비해서 약하다는 뜻이다. 김상희는 몸이 떨려왔다. '세상에...저게 몇 마리야...' 만약 크기가 약 30cm쯤 되는 바퀴벌레가 있다면 기겁하는게 정상이다. 그런데 고블린은 30cm도 아니고 무려 1미터가 넘는 괴물. 이빨은 날카로웠으며 고약한 악취가 풍겨왔다. 녹색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굉장히 혐오스러웠다. 크리스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키긱! 고블린의 머리 하나가 허공에 떴다. 크리스가 일검에 고블린의 목을 날려 버렸다. 클래스의 학원생들 중 한 명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커, 컥!" 각국의 수재들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괴물과의 실전은 처음이다. 일반적인 곳. 그러니까 던전이 아닌 세상에선 괴물을 보기가 힘들다. 각 국의 나이트들이 주기적으로 괴물들을 토벌하기 때문이다. 수재들이라고 해서 싸움 경험이 많은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컸다. 수재이기 때문에, 보호받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만큼은 달랐다.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의 눈으로 보면 그랬다. '저 자식. 도대체 정체가 뭐지?' 크리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조금씩 눈에 띄게 시작했다. 김상희에게 이상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김상희에게 잘해줬다. 그게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왜 마음에 안 드는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하여튼 그게 별로였다. 그래서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스스로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우리 상희 공주님에게 다가가리라 예상되는 놈들을 가장 먼저,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있어.' 이게. 우연일까. 실력일까.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은 고민해야만 했다. 사실상 고블린이 그렇게 강한 몬스터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지금 이 학생들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처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조건이 하나 붙는다. '학생들은 실전 경험이 없을 텐데.' 지식을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투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들은 전투 특화 클래스도 아니고 암호 해독 및 고어해석 클래스다. 실전 경험이 있을 리가 없다. 강준석이 검을 휘둘렀다. '우연...인가?' 방금, 한 마리가 아마도 김상희 공주에게 접근할 거라 예상되어 죽여 버렸다. 학생들의 걱정과는 달리 강준석은 여유 있었다. 이런 고블린들 따위. 수백, 수천마리가 몰려와도 두렵지 않다. 그는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니까. 그는 고블린보다도 크리스가 더 신경 쓰였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거친 것 같은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크리스의 동작은 화려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신속하고 정확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다. 저건 어지간한 실전 경험이 없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다. 검을 휘둘렀다. 고블린 한 마리가 강준석의 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아니. 근데 난 왜 짜증나지?' 딴 건 모르겠는데 고블린 저 놈들이 김상희 공주를 향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꼴이 아주 꼴보기 싫어 죽겠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데 이 불쾌함의 근원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감히 눈독을 들여, 이 잡놈들이!' 또 검을 휘둘렀다. '최소한으로 움직이려고 했는데.' 스페셜 나이트는 고려왕국의 자산이다. 그리고 이 학생들은 비록 아직 학생이지만, 그래도 타국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에게 스페셜 나이트의 모습을 보이는 거.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조금만 움직이려고 했는데 고블린들이 김상희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걸 보자 짜증이 치밀었다. 김상희 공주가 짧은 치맛자락을 꽉 붙잡는 게 보였다. 안색이 핼쓱하게 질린 것이 어지간히도 무서운가 보다. 원래대로라면, 계집따위가 그럼 그렇지. 남자에게 도움이나 받을 줄 아는 하등한 생물체 같으니라고.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있는데 왜 저렇게 무서워해?'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뭐. 이주형 나이트만 듬직하고 나는 안 듬직해?' 사실 그런 거랑 상관 없이 김상희는 무섭다. 애초에 사자나 호랑이쯤 되는 동물만 앞에 있어도 무서운게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동물도 아니고 괴물이 앞에 있으니 무서울 수밖에. 마력이 있는 남자들도 무서워하고 있다. 김상희가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거다. 김상희가 핼쓱하게 질려서 말했다. "가, 강준석 나이트님. 조, 조심하셔요. 아주 무서운 괴물인 것 같아요." 그 말에 강준석. 제대로 자극 받았다. 자존심이 팍 상했다. '에이씨. 모르겠다. 일단 쓸어버리고 보자.' *** 나는 고블린을 봤다. 고블린. 솔직히 무섭다. 책으로만 봤던 걸 실제로 봤으니까.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공포스럽진 않았다. 내 옆엔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씨가 있으니까. 책에서 본 적 있다. 괴물의 등급은 A,B,C,D. 4가지로 나누어지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의 등급은 '사람의 힘'으로 척살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샤벨드래곤 같은 괴물은 등급 외 몬스터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고블린의 등급은 D. 내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스페셜 나이트 한 명이 있으면 고블린 1000마리가 있어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어.' 대충 그 정도는 안다. 그래서 사실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15년간 언제나 생명을 위협받으면서 살아왔다. 요즘이야 조금 긴장의 끈이 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15년간 커진 건 담밖에 없는 것 같다. 아. 슬퍼. 좋은 거 같긴 한데 뭔가 슬퍼. '열심히 나서는 것 같지는 않네.' 이해는 된다. 스페셜 나이트의 사정이. 열심히 나서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열심히 나서게 만들어주면 되지. 겁 먹고, 연약한 소녀를 연기하면 되려나. 뭐. 백프로 연기는 아니고 한 칠십프로 연기니까 아주 사기는 아니잖아. "가, 강준석 나이트님. 조, 조심하셔요. 아주 무서운 괴물인 것 같아요." 너한테는 하나도 안 무서운 괴물인 거 알아요. 그 말에 강준석 나이트가 사라졌다. 학생들이 주위를 둘러 봤다. "어, 어, 어? 뭐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강준석 나이트. 지금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우리를 둘러싸고 죄어들던 수 백 마리의 고블린을 전부 스페셜 필드에 넣어버린 것 같다. 와... 이런 게 가능하구나. 딸기와 바나나 정도면 조련할 수 있는 쉬운 남자인 것 같기는 한데, 정말 따지고보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련에 내성이 없어서 그렇지. 능력 자체는 되게 출중한 것 같다. 그런데 문득, 나는 이상함을 느껴야만 했다. '크리스는...어디 있지?' *** 강준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이 녹색 피로 흥건했다. 고블린의 목이 마치 낙엽처럼 바닥에 굴러 다녔다. 스페셜 필드를 펼치고 강준석이 혼자서 고블린들을 도륙했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뭐냐?" 크리스가 강준석을 쳐다봤다. "저는 크리스라고 합니다. 이름 정도는 알고 계셨을 줄 알았는데요." "너는 학생이냐?" "보시다시피요. 저는 제국 마력학원 암호 해독 및 고어 해석 클래스의 학생입니다." 강준석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고블린을 처치할 때 그는 봤다. 크리스의 실력을. 학생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아참.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말씀 드리자면..." 뭔가 말을 할 건가 보다, 하고 강준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놈. 뭔가 수상하다. "저는 김상희 공주에게 열렬히 구애하고 있는 중이죠." 그게 제일 짜증난다! 누가 너 따위 놈한테 허락할 것 같냐! 강준석은 그렇게 말할 뻔 했다. 그리고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냐!' 크리스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지 않을까요? 저희 아무래도 던전에 갇힌 것 같은데요." "앞으로 두고 보겠다. 네 놈이 순수한 의미의 학생이라고 보기에는 힘드니까."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순수한 학생입니다. 좀 험하게 커서 그렇지."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거 딱 하나만 알아줘요. 저 김상희 공주 진짜 좋아하거든요. 딴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 기억해주면 아주아주 감사하겠습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블린 떼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던전 안에 고립된 것이 벌써 7시간 째. 남자 학생들 중에서도 벌써 4명이나 혼절했다. 그나마 김상희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은 거다. 강준석 역시 지쳐갔다. '던전은 역시... 던전인가.' 굳이 던전을 클리어 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었다. 분명 제국이나 고려에서 지원을 오기는 올 거다.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 아이들은 각 국의 엘리트들이며 이들이 골렘 피라미드에 갇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각 국에서 지원군을 보내올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설마 고립던전인가.' 던전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한 번 입구가 열린 뒤, 클리어 할 때까지 입구가 열리지 않는 던전을 일컬어 고립던전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고립던전에 갇히면 지원군이 오지 못한다는 소리다. 한편, 제국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망자가 너무 많이 나오면 피곤해져." "적절히 조치하겠습니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수많은 인재들을 몰살시키는 건 -사실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 방법이지만- 조금 무모한 짓이었다. 극한 상황 속에 몰아넣은 뒤, 나중에 혼란을 틈타 스페셜 나이트만 죽이고 김상희를 몰래 빼낼 생각이었다. 던전 내에는 이미 제국의 나이트들이 몰래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죽은 스페셜 나이트는 학생들을 위해 몸을 내던져 학생들을 구한 거룩한 영웅으로 기억될 테고 김상희는 던전 안에서 죽어 버린 흔하디흔한 계집 아이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제국은 김상희를 얻을 수 있을 거고. 그 때, 정보국장 김국현에게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고려 측에서 긴급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무슨 요청?" "고려의 나이트 제 3개 대대가 입국 및 골렘 피라미드에 입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고려의 나이트 3개 대대. 어지간한 나라는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지간한 나라의 수뇌부들의 목을 따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전력. '어떻게... 안 거지?' 김국현은 이유를 알고 있지만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듯 물었다. "우리와 전쟁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연유로?" "골렘 피라미드 내에 고려의 보배가 갇혀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가 알아본 결과, 제국의 마력학원 학원생들이 7시간이나 실종상태라 합니다." 아니. 그건 우리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라고. 김국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일은 비밀을 요하는 일이다. 모든 요원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혹은 이 일이 끝나면 죽여 버릴 요원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정보 통제를 철저하게 했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김국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일단 대외적인 발표는 해야 했다. "우리 제국에서 먼저 구조대를 파견하도록 한다." 먼저 제국 구조대를 출발시키기도록 했다. '3개 대대? 미친 건가?' 3개 대대의 입국을 허가해 달라니. 미친 소리다. 아무리 고려와 제국이 상생하는 관계라고는 해도,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상황을 알게 된 황제가 말했다. "아니. 허락하도록 해." "황제폐하! 하지만 그들은 지나치게 강합니다." "그 놈들이 마음 먹고 몰래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보 통제. 확실히 한 것이 맞나?" 어떻게 이 일이 고려의 귀에 들어갔단 말인가. 고려의 첩보 능력이 뛰어난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제국의 정보망이 허술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첩자가 있는 건 아닐까?" 이 일은 극비다. 심지어 현장에 투입되어 있는 나이트들도 자기들이 뭘 하는지 잘 모른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지." "폐, 폐하!" 김국현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아무래도 황제는 자신을 첩자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정말로 결백합니다!" "그래. 믿겠다." 실제로 의심을 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의심의 씨앗을 틔웠다는 게 중요했다. 그는 황제를 안다. '나는...죽고 싶지 않다.' 정말 조금만 더 잘못하는 게 눈에 보인다면,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일 사람이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냐!' *** 고려왕궁. 알렉스는 뿌듯해졌다. "폐하께선 김상희 공주를 사랑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이 말에, 김훈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만 슬슬 인정하시죠. 저는 폐하를 정신병으로 몰거나 하지 않습니다.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폐하의 반응과 생각은 지극히 정상적이니까요." 평소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발언인데도 김훈상은 오히려 되물었었다. "상희학이 무엇이냐?" 심지어 왕의 총애까지 얻게 됐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다. 그런데 더더욱 뿌듯해졌다. 실제로 제국에서 공작을 벌인 것 같다. 일반적인 고대 유적지에 들어갔는데 7시간 실종은 좀 황당하지 않은가. 이건 뒷공작이 없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던전같은 게 저절로 생긴 게 아니라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이건 예상이 아니라 딸바보 아버지의 딸 걱정이었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김훈상은 조치를 취했다. 스페셜 나이트 두 명을 더 파견해서 김상희의 상황을 파악하도록 한 거다. 제국의 정보통제가 아무리 심했다 하더라도, 스페셜 나이트 두 명이 몰래 잠입하는 것 까지는 막아낼 수 없었다. 애초에 일반 고대 유적지에 외부의 스페셜 나이트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방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단은 그랬다. '딸등신의 딸 걱정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도 있네.' 만에 하나의 가능성. 그 가능성에 집중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심지어 스페셜 나이트 파견이라는 아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는 사람. 이 세상에 김훈상밖에 없다고, 알렉스는 단언하여 말할 수 있었다. 암호 해독 및 고어 해석 클래스. 고립 8시간 째. 강준석은 굉장히 이상함을 느꼈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거, 등급 외 몬스터 중 하나인 '레이가'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 세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일반 나이트 7명이 목숨을 잃었고 탱크 12기가 파괴되었다. 스페셜 나이트 1명이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었는데 그 스페셜 나이트가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 때와 비슷할 정도의 끔찍한 느낌이다.' 그런 괴물이 또 있지 말라는 법 없다. 정말 보기 힘든 괴물이지만 분명 존재하기는 하는 괴물이니까. '도대체 뭐냐... 구조대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같은 시각. 누군가가 말했다. "...김상희는... 내가 지켜..." 그의 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그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 0.00000000000000001 퍼센트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위대한 자의 이름. 딸. 등. 신. ㅋ 0095 / 0192 ---------------------------------------------- 김상희의 진짜 능력 ***93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 지금 이걸... 혼자서 이렇게 했다고...?" 그는 베테랑이지만 이런 광경. 정말 처음 본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국의 반역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 않았는가. 제국의 반역자가 이 곳으로 귀화를 요청해왔을 때만 하더라도, 제국의 어떤 술수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술수가 있을 거라는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한진수는 꼭 얻어야만 하는 그런 인재였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이젠... 믿을 수밖에 없겠군.' 첩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첩자라면 이런 짓을 벌였을 리 없다. '제국의 나이트 40명을 죽여 버리다니.' 이런 거. 듣도 보도 못했다. 한진수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대장님. 저, 저기 보십시오." 그러나 놀라운 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마 이건...?" 그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등급 외 괴물. 발록. 크기 약 30여미터에 이르는 괴물이다. 온 몸이 미끈한 검은색 털로 덮여 있으며, 검은색 길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괴물이다. '등급 외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했다고?' 등급 외라는 이름이 붙은 건 사람의 힘으로 사냥할 수 없기 때문에 등급 외라는 등급이 붙은 거다. 보통은 탱크나 전투기가 동원되어야만 사냥이 가능하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아예 건드릴 수 조차 없는 등급 외 중에서도 정말 등급 외의 괴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괴물들과 인간이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논외로 치고. '발록을 혼자서...' 한편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래. 제국에 대한 원망과 분노. 있을 수 있겠다. 그래서 제국의 나이트들을 도륙해 버렸다. 거기까진 알겠다. 그런데. '저렇게 피투성이가 될 때 까지 발록과 싸웠다고? 어째서?' 이건 이해가 안 된다. 어째서 왜, 발록과 저렇게 싸웠을까. 단순한 수련은 절대 아닐 거다. "일단 한진수를 이송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한진수는 지금 위독한 상태.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이송하려고 했다. 이상한 빛이 번쩍 하기 전까지. *** 하아... 하아...!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 조차도 힘에 겨운 듯 숨을 내뱉었다. '나도... 돕고 싶어.' 김상희는 돕고 싶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크리스와 강준석이 없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애교를 부리고 남자들을 휘어잡는 거. 그래.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면, 김상희는 자괴감에 빠져 들었다. 언제까지나 보호 받는 철창 속의 새일 수밖에 없으니까. 꿈틀. 김상희의 몸이 움찔했다. '뭐지?' 김상희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때, 강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반데스라니." 김상희는 '반데스'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준석의 말투로 보아, 상당히 위협적인 괴물일 것은 틀림없었다. 반데스는 몸 크기 약 3미터의 인간형 괴물이다. 두 팔의 완력이 엄청나게 강해 어지간한 성인 '남성' -당연한 말이지만 마력을 가진- 쯤은 양 쪽으로 찢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게다가 몸놀림이 굉장히 빨라 아주 위협적인 몬스터라고 볼 수 있었다. 몬스터 등급은 B 중에서도 상급.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이라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정도지만 지금은 그도 많이 지쳤다. 고립 된지 벌써 8시간이 흘렀으니까. 강준석은 옆을 힐끗 봤다. 김상희가 보였다. 김상희를 끌어 당겼다.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공주님. 내 뒤에 있으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강준석 뒤에 섰다. '돕고...싶어.' 하지만 나서지 않는 거. 가만히 있는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했다. "크리스. 네가 왼 쪽을 맡아라. 내가 오른 쪽을 칠테니." "네." 크리스와 강준석이 각각, 반데스의 왼 쪽과 오른 쪽을 공략해 들어갔다. 그 때,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학생들 중 한 명이 외쳤다. "위, 위험합니다!" 학생들이 보기에, 저 둘은 반데스에 집중하느라 천장 쪽에 은신하고 있던 작은 몬스터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상희도 그걸 봤다. 무언가 작고 시꺼먼 것이 크리스의 목 뒷덜미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크리스는 그 때, 슬몃 웃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번쩍! 빛이 일었다. 강준석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도대체?' 그도 분명히 봤다. 방금. 뭔가가 번쩍, 빛났다. 어두운 던전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그랬다. 더욱 이상한 건. '몸이... 아무렇지도 않다.' 몸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완전히 회복 됐어.' 아니. 단순히 회복된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컨디션이다. 학생들도 당황해 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 지금 상처 없어졌는데. 너도 없어졌어?" "어. 나도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준석은 몸이 회복되었음을 느꼈다. 분명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오래 생각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일단은 이 위험한 괴물인 반데스부터 죽이고 봐야 했으니까. 몸이 불편한 상태이면 모를까,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에서 반데스는 강준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반데스를 처리한 강준석이 다시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빛은... 김상희공주님으로부터 나왔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보아하니 김상희 공주는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크리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던전의 특수효과인 것 같네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을 회복시켜준다든지." 강준석은 크리스를 쳐다봤다. 그런 특수효과.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또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아냐. 분명 빛은 김상희 공주님으로부터 나왔어.' 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김상희 공주를 김상희 공주님이라 생각하게 됐다. 김상희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나한테서 뭔가 변화가 일어났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를 한 것 같은데 그러자 학생들의 몸이 전부 나았다. 그것도 완벽하게. '도대체 뭐지?' *** 누군가가 말했다.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아무래도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아니. 기적이 맞았다. 기적이 아니고서야 지금 일어난 일이 설명이 안 된다. 거의 시체에 버금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던 한진수가 멀쩡하게 일어섰으니까. 한진수가 말했다. "중요한 건 제 몸이 회복되었다는 거겠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몸이,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상처는 온데간데 없었다. 오히려 훨씬 몸이 상쾌했다. "한진수. 네가 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발록을 상대로 혼자서 싸우다니. 너무 무모했다." "저는 더 무모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무모한 것이, 나의 상희를 위협한다면 나는 그 위험. 얼마든지 무릅쓰겠습니다. 그 말은 참았다. "도대체 뭐가 널 그렇게 초조하게 만드는 거냐?" "...묻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두 말 할 것도 없다. 김상희 때문이다. 지금 마음 같아선 김상희에게 달려가고 싶다. 가서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말이라도 해야, 이 터질 것만 같은 마음을 주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반역자니까.' 반역자에게는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 법이다. 김상희까지 힘들게 만들 수는 없었다. '힘든 건 나 하나로 족해.' 차라리 혼자만 힘들면 됐다. 지금 당장이라도 보고 싶지만, 품에 안고 싶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어디 다치지는 않았냐고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는 순간. 김상희 역시 반역자의 아내로 낙인찍히게 될 거다. "발록의 사체를 수거하도록 한다. 제국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뜬다." 발록의 사체는 상당히 중요한 전리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나게 큰 돈이 된다. 하지만 한진수는 그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진수는 한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한진수. 돌아가자." "...예." 그 한 쪽. 어둠 저편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는 그 사람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로 혼자서 말했다. "...보고 싶어." 가슴이 아파왔다. 조금만 더 가면, 저 곳에 김상희가 있는데. 갈 수 없었다. 가슴이 향하는 그 곳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은 깜짝 놀랐다. "네 놈이 어떻게...?" 몸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 물론 좋다. 뿐만 아니라 마력 흐름도 활성화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좋아졌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네가 어떻게 스페셜 필드를 펼치고 있는 거냐?" 아니다. 사실은 스페셜 필드가 아니다. 강준석도 그걸 안다. 이건 스페셜 필드보다도 오히려 한 단계 더 진화한 스페셜 필드다. '바깥세상은 멈춰 있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필드를 펼친 크리스가 말했다. "던전의 특수효과라고 해두죠." "무슨 뜻이지? 아니. 너는 정말 학생이 맞나?" "제국 마력학원 암호해독 및 고어해석 클래스의 크리스입니다. 백제의 왕자구요. 확실합니다." "......." 강준석은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고차원의 필드를 펼치려면 엄청난 마력 컨트롤 능력이 필요하다. 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바깥은 멈춰있다. 그 말은 즉, 시간을 따로이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데.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고? 이 쪽으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도 아니면 무서운 실력자인가.' 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가끔 있다. 어느 한 쪽 방면으로만 재능이 특화된 사람들. 김환성도 그렇지 않은가. 김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식하게 힘만 센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상한 필드를 만드는 데 특출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김상희 공주의 능력. 보셨죠?"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모든 학생들을 일시에 회복시키다니. 하지만 강준석은 내색하지 않았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저는 많은 말을 할 수 없어요. 그냥... 던전의 특수효과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고려를 위해서도 당신을 위해서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도 좋아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 가슴 아프지만...이제 힘든 길을 가게 될 거에요." 능력이 이거 하나 뿐일리가 없으니까요. 그 말은 삼켰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거고. 그 말도 하지 않았다. 강준석이 말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지? 나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한 가지만 알아둬요. 나도 지금 도박을 하고 있는 거 에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버릴 각오를 하고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스페셜 나이트께서도 김상희 공주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죠?" "......." 그래도 명색이 스페셜 나이트다. 그 쯤 되는 사람이 '나는 공주가 다치는 게 싫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존심 상한다. 그런데 또 아니라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젠장. 내가 미쳐가고 있군.' 그저 스스로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에요. 처음에는 다들 그러는 법이거든요." 크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필드. 보면 아시겠지만 오래 유지 못해요. 엄청 힘들거든요. 더군다나... 뭔가가 다가오고 있어요. 시간 정지는 이제 끝이네요."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기척. 괴물은 아니었다. 분명 사람의 기척이다. 강준석은 조용히 검을 빼들었다. '구조대인가?' 구조대이면 좋겠다. 구조대가 오고도 지났을 시간이다. 하지만 구조대라고 생각하기엔 기척이 지나치게 은밀했다. 뭔가가 분명 다가오고 있었다. 강준석은 청력과 시력을 극대화 시켰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결에 아주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타깃은 김상희 공주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강준석이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이성을 잃을 뻔 했다. 김상희 공주. 절대 내줄 수 없다. 스페셜 나이트의 자존심이 있어 지켜주고 싶지 않지만, 정말 지켜주고 싶다. 모순된 마음인데 하여튼 그랬다. 뭔가가 계속해서 은밀하게 다가왔다. '어떤 놈이냐!'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내려라. 스페셜 나이트." ============================ 작품 후기 ============================ "공주님. 내 뒤에 있으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박 ㅋ 력 ㅋ 너는 이미 노예가 되어 있다. 아직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 ㅋ 0096 / 0192 ---------------------------------------------- 김상희의 행복한(?) 납치. *** 강준석은 눈을 크게 떴다. 황급히 검을 갈무리했다. "와, 왕자님!" 하마터면 김환석에게 검을 겨눌 뻔 했다. '스페셜 나이트가 왔다...!' 같은 스페셜 나이트라고 한다면, 스페셜 나이트는 스페셜 나이트가 은신하면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스페셜 나이트 수십 명이 은신한 상태로 이동하면, 그건 느낄 수 있다. 정확하게 몇 명이나. 어디에 있는지까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은신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거기에 일반 나이트... 이 정도면 3개 대대쯤 되는 병력인데.' 고려의 나이트 3개 대대. 이 정도면 전쟁도 치를 수 있는 병력이다. 한 명, 한 명이 타국의 나이트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엄청난 전력이라 할 수 있으니까. 강준석은 나름대로 감동했다. '설마... 나를 구하기 위하여?'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나이트 3개 대대가 움직이다니. 저들이 그냥 왔을 리는 없다. 분명 제국에게 허락을 구했을 거다. 이 정도의 병력을 제국에 들이려고 했다면 상당히 큰 마찰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마찰과 번거로움. 시간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원세력을 이렇게 보냈다는 것은, 국가가 자신을 이토록 아끼고 있다는 반증아니겠는가. 강준석은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 번거롭..." 번거롭게하여 죄송합니다. 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김환석이 그냥 지나쳐갔다.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김유신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수고했네." 그리고 김유신도 지나쳐갔다. '어라?' 김환석이 말했다. "왜 안 죽었냐?" *** 나는 나름대로 반가운 얼굴을 봤다. 우리 첫째 망나니. 망나니 중 탑 오브 망나니. 그런데 이 곳. 던전 안에서 보니까 반갑다. 아무래도... 나를 구하러 온 것 같다. "오라버니!" 고려에서 작정하고 구조대를 보낸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마 살아나갈 수 있을 거다. 희망이 보였다. 그 희망의 기쁨을 담아 우리 첫째 망나니를 껴안았다. 학생들은 김상희를 쳐다봤다. "저런 미친 행동을..." 김환석. 이미 포악하기로(?) 유명한 왕자다. 하늘 아래 자기 보다 높은 사람은 형님과 아버지. 그리고 황제폐하밖에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왕자이며 계집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김환석 왕자에게 공주따위가 예도 차리지 않고 달려들다니. 김환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건방진 계집." 자리에서 일어선 강준석 나이트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안 돼. 지켜야 해.' 대신 변명을 하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김상희 공주의 저런 모습. 이해가 되기는 된다. 지금이야 이상한 빛 -이건 나중에 따로 보고를 올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모두의 체력이 회복 됐고 괜찮아진 상태지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실신한 남자들까지 있었다. 남자들이 그 정도인데, 허접한 체력을 가진 여자의 몸으로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무서운 상황에서 나이트들과 고려의 왕자를 봤으니 당연히 반가울 법도 하겠지. 이성을 잃을 법도 하다고, 그렇게 애써 합리화했다. 저대로 놔두면 김상희 죽어버릴 것 같다. 단순히 변명을 하고 싶은데서 그치지 않고 변명을 하려고 했다. "왕..." 김유신이 강준석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김유신 대대장 역시 김상희를 처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강준석은 다급해졌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대장님. 그래도 저 정도로 죽이는 건..." 김상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토록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곳에 한 줄기 햇빛같은 오라버니를 뵙다니. 소녀의 마음을 어떻 게 표현해야 할까요?" 김환석이 말했다. "계집 따위의 마음. 알 바 아냐." 이제 이런 상황에 어느정도 내성이 생긴 김유신 나이트는 조금씩 객관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자님... 지금 웃음을 참고 계시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몰라도, 김유신이 보면 분명히 그랬다. 김환석. 지금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 마력을 끌어올려 아주 자세히 보면 입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김환석이 김상희를 밀쳤다. "저리 비켜. 걸리적 거려." 김유신은 안다. 정말로 걸리적 거렸으면 마력을 써서 밀쳤을 거다. 그럼 아마 김상희는 저항하지 못하고 저만치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겠지. '애초에 계집이 달려드는데... 못피할 분이 아니시지.' 아무리 김환석이 무력쪽으로 특화된 왕자는 아니라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고려의 피를 이었다. 계집이 달려드는 거. 마음만 먹었으면 애초에 하지도 못하게 막았다. 김환석이 말했다. "나는 고려의 왕자. 김환석이다.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나이트 3개 대대와 함께 너희를 구출하러 왔다." 학생들은 이제야 살았다는 듯 와아! 하고 환성을 내질렀다. 죽음의 공포를 실제로 맛봤다. 이 순간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서로 얼싸안았다. 그 중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는데, 그 유명한 고려의 나이트들이 구출을 하러 왔다니. '심지어 왕자까지 왔어!' 정말 클리어가 불가능한, 아주 위험천만한 곳에 왕자가 직접 왔을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이 던전. 클리어할 수 있기 때문에 왕자가 직접 온 거다.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면 왕자가 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살았어!' 고려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구조대도 아직 오지 못했는데, 고려의 구조대가 먼저 도착하다니. 역시 고려였다. 목숨을 구함 받은 학생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생명의 은인에게 말이다. "국왕 폐하 만세!" ***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래. 나이트 3개 대대가 갔다. 거기에 머리 좋은 환석이 녀석까지 따라갔어. 그러니 괜찮을 거다. 김훈상은 도통 자리에 앉지를 못했다. 초조해도 이렇게 초조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가 김훈상을 찾아왔다. 김훈상은 요즘 알렉스를 예전보다 더 총애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고마운 신하 아니던가. "폐하. 김환석 왕자까지 따라갔습니다." "내 명령이었다." "던전은 위험합니다." "...나도 안다." 그래. 그런 곳에 왕자를 보내는 건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해서도 안 되는 일이지. 나도 안다. 알렉스. 너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이런 건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알렉스다. "하지만 사랑스런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죠. 김환석 왕자님은 아마 던전 안에서 뛰어난 길잡이 역할을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알렉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습니다. 실험샘...아니. 폐하. 역시. 역시 폐하가 지시한 거군요. 왕자님의 안위를 걱정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김상희 공주의 안전이 더 중요한 거군요! 제국에 3개 대대를 파견하면서 까지 말이죠. 음. 그래요. 이런 데이터 하나하나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고맙습니다. 실험 샘플...아니. 폐하. 알렉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김상희 공주가 정말 걱정 됩니다." "......." 너는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신하다. 김훈상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3시간 뒤. 다행히 김상희 공주를 잘 구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때, 김훈상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하들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알렉스가 다시 김훈상을 찾았다. "뭔가 이상합니다. 제국이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요?" 알렉스는 이 것이 제국의 소행이라고 확신했다. 세상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증거도 포착 됐다. 스페셜 나이트들이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국의 나이트들 수십 명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죠. 그 말은 즉, 제국의 나이트가 미리 그 던전...아니. 던전으로 둔갑하고 있는 함정 안에 잠복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랬지." 이쯤 되니 이제 슬슬 이상함을 눈치 챘다. 원래 예전부터 이상하긴 했다. 제국의 황제가 김상희를 보고 싶어 했고, 또 마력학원에 입학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이상한 함정까지 만들었다. "제국의 나이트가 시체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마 저희는 몰랐을 겁니다." 고려가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 분명했다. 김훈상은 생각헀다. '김상희에게...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알렉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제국이 어째서 김상희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아봐라." 알렉스는 상희학의 관점에 의거하여 한 가지 의견을 냈다. "혹시 황제 역시 김상희 공주님의 사랑스러운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 아닐까요?" 김훈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리겠거니 하는데, 막상 김훈상은 그러지 않았다. "확실히..." 말을 듣고보니 아주 그럴싸하지 않은가. 황제가 정말로 김훈상을 딸처럼 아낀다거나, 아니면 여자로 아낀다거나. 하여튼 김상희에게 완전히 푹 빠져서 김상희를 납치하려고 했다거나.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 또 묘하게 말이 되지 않는가! 적어도 김훈상 -김훈상이라 쓰고 딸등신이라고 읽는다.- 에게는 그랬다. 김훈상이 말했다. "김상희를 다시 고려로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라." 황제가 친히 권하여 마력학원에 입학했다. 그걸 강제로 다시 빼앗아 올 수는 없다. 황제를 무시하는 셈이 되니까.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알렉스가 재확인 했다. "... 역시 사랑스러운 김상희 공주님이 마력학원에 있는 건 못내 불안하신 거죠?" 알렉스의 눈이 빛났다. '그래. 어서 사랑스러워 미치겠다고 인정하세요, 실험샘... 아, 아니. 폐하! 그건 정신병이 아닙니다!' *** 이번 일은 꽤 큰 이슈가 됐다. 골렘 피라미드 안에서 갑자기 던전이 생성 되었고, 고려가 가장 먼저 이상징후를 파악하여 학생들을 구했단다. "역시 고려인가...?" 고려의 정보력에 다들 놀랐다. 제국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는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빨랐다. "제국 내에서 일어난 일인데, 제국보다 빨리 알았다는 건... 고려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거지." 사실 그렇다기보다는, 딸등신이 딸 걱정을 하도 하는 바람에 우연히 알아낸 것 뿐이다. 그리고 딸등신이라 다른 일 다 제쳐놓고 그냥 구조부터 하고봐서 그랬다. 제국의 정보부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황제가 단단히 화가 났다. "정보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김국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려에 비해 한끗발 뒤처진다는 인식이 생겨버렸다. 사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함정 내에 미리 준비시켜뒀던 나이트들을 구조대로 바꿔서 행동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나이트들이 전부 죽었다. "나이트들은 누구에게 죽은 거지? 그것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나?" 스페셜 나이트들은 아닐 거다. 왜 굳이 그들이 제국의 나이트들을 죽이겠는가? 그러나 또 스페셜 나이트 외에 누가 또 제국 나이트들을 그렇게 무참히 죽일 수 있겠는가? 김국현은 머리가 아파왔다. "죄송...합니다." "김국현. 예전같지가 않구나." 김국현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황제의 싸늘한 눈빛. 오랜만에 본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한 가지 알아낸 것은... 한 명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흔적을 살펴보자면 그랬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김훈상이 직접 오기라도 했다는 뜻이냐?" 김훈상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다른 인물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어떻게 제국 나이트 수십명을 혼자서 도륙한단 말인가. 김국현의 입술이 바짝바짝 매말랐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냈다. "김상희 공주가... 빛을 발현시켰다고 합니다." 황제가 분노를 잠시 누그러뜨렸다. "빛이라?" "예. 회복의 빛...이었습니다." 황제는 자리에 앉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상희 공주를 손에 넣어야 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고려에서도 이상함을 눈치 챘겠지. 납치를 해도 좋다. 당장. 손을 써. 일 왕국이나 펜릴왕국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겠지." 김국현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조금 과격한 수단을 써서 납치를 한 뒤, 그 걸 일왕국이나 펜릴왕국에 뒤집어 씌우라는 거다. 증거만 조작하면 될 일이다. '이번 일에... 내 모가지가 달렸다.' 김상희의 중요성은 이제 완벽하게 입증 됐다. '회복의 빛이라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3년 이내에, 모든 능력이 만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황궁. 지하밀실. 김국현이 말했다. "10년을 줄여주겠다." "무슨 일이길래 귀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행차하셨나? 죽을 수도 있는데." "15년으로 하지." "싫다." "20년." 김국현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얘기인데." 다시 제안했다. "30년이면 하겠다." 김국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30년. 대신 스페셜 나이트를 몰래 죽여야 한다. 티 나지 않도록. 그리고 김상희를 절대 범해서도 안 된다. 옆에 김환성 왕자라는 강한 놈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그런 조무래기 때문에 내게 경고를 하는 건가? 기분 나쁜데. 죽고 싶냐?" "이 일에 내 목이 달렸다. 아무리 너라고 할지라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건지 모르겠군. 그깟 계집. 금방 데려오지." 깊은 밤. 제국 마력학원 제 3관. 기숙사에 불청객이 찾아 들었다. ============================ 작품 후기 ============================ "혹시 황제 역시 김상희 공주님의 사랑스러운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 아닐까요?" "확실히..." 야...너네... 속고 있어... 0097 / 0192 ---------------------------------------------- 김상희의 행복한(?) 납치. ***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안다. 자신과 김상희는 이제 멀어져야만 했다.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자꾸만 말을 듣지 않았다. 저번에 제국의 함정 속에서 김상희를 느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김상희가 저쪽에 있음을 분명히 느꼈었다. 그 이후로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 들었다. 결국 그 마음을 참지 못했다. '저 놈이 스페셜 나이트' 예전의 스페셜 나이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바뀐 모양이다. 실력은 제법 좋았다. 저 정도 은신 능력이면 어지간해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터. 한진수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약혼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진수는 손을 뻗고 싶었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저 아이의 뺨에 손을 댈 수 있는데. 닿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냥 보기만 하면 이 보고 싶은 마음이 충족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눈 앞에 있으니 더 보고 싶었다. '김상희...'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한참동안이나 몰래 김상희를 쳐다봤다. 그런데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 '뭐지?' 순간, 한진수는 긴장했다. 이거 뭔가. 느낌이 안 좋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들어왔는지, 들어오지 않았는지조차 모를 정도.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오고 있는데, 스페셜 나이트보다도 은신능력이 뛰어났다. 그렇게 걸어 들어오다가 그 남자는 한진수가 있는 쪽을 쳐다보고 씨익 웃었다.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네 놈. 스페셜 나이트냐?' 한진수는 그 말을 정확하게 알아 들었다. '기다려라.' 한진수는 순간,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려라'라는 말 속에 어떤 권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어슬렁어슬렁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강준석은 그 때까지도 위험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놈은... 상희를 지키는 놈이다.' 그렇다면 저 놈은 지켜야 했다. 약간 이상하게 되어버린 몸을 움직였다. 은신을 깼다. 강준석이 황급히 검을 빼들었다. "누, 누구냐!" 의문의 남자가 말했다. "운이 좋구나. 애송이. 저 녀석이 아니었다면 네 목은 지금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을 텐데." 강준석이 검을 고쳐 쥐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한진수가 말했다. "나는 네 편이다." 하지만 강준석은 믿을 수 없었다. 강준석의 입장에선 당연한 거다. 늦은 밤. 은신을 하고 숨어 있던 -심지어 강준석은 그걸 몰랐다. 상대는 엄청난 실력자다.-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나는 네 편이다, 라고 말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복면부터 벗고 말하지?" "나는 김상희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킬킬대고 웃었다. "뭐.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 좋아. 너는 너희를 얼른 죽이고 이 계집을 데려가야겠다." *** 한진수가 필드를 펼쳤다. 남자가 말했다. "내 수고로움을 덜어주는군." 어차피 남자도 필드를 펼치려고 했다. 소란을 피우지 않기 위해서. 그가 받은 명령은 스페셜 나이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할 수만 있다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김상희 공주를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드를 펼쳐야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필드를 펼치면서 싸우면, 그냥 싸울 때보다는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진다. 필드 운용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어야하니까. 한진수는 생각했다. '김상희를 다치게 할 수 없어.' 김상희는 약하다. 마력도 없다. 싸움의 파편으로도 크게 다칠 수 있다. 평소의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눈 앞의 이 남자. 아무래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쉽게 제압할 수 없다. 큰 싸움이 벌어지면, 김상희가 다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김상희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준석은 결정을 내렸다. '내 힘으로는 이 두 사람 중 한 명도 감당하지 못한다.' 슬프게도 그게 현실이었다. 그는 스페셜 나이트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스페셜 나이트나 프리온 나이트 외에도, 세상에는 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 강한 사람이었고. '어차피 내가 이기지 못한다면... 가능성에 걸어야 해.' 김상희를 사랑한다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저게 무슨 개소리인가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김상희를 사랑한다는 거. 어느 정도 이해는 될 것 같기도 했다. 크리스를 보고 또 왕자님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렇다. '일단 저 복면인과 힘을 합친다.' 싸움이 시작 됐다. 스페셜 나이트는 역시 스페셜 나이트였다. 한진수와 호흡을 맞춰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제법 호흡이 잘 맞았다. 하지만 남자는 여유 있어 보였다. "제법이구나. 애송이들아. 그 나이에 이 정도 성취라니. 정말 제법이다." 한진수는 조금 암담해졌다. 그는 2차각성을 이룬 상태다. 이 정도면 그 누구보다도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남자는...나보다 강하다.' 스페셜 나이트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지. 없었으면 금방 패배할 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쪽이 불리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 "지금 죽는다면 그냥 편하게 죽여주지." 강준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닥쳐라." 그 때, 필드 바깥에서 김상희가 몸을 뒤척였다. 김상희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그녀는 물론 모른다. 잘 때 가끔 눈물이 난다는 걸. 자주 어떤 꿈을 꾼다는 걸. 그리고 일어나면 그 꿈은 말끔히 잊혀져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눈물이 흘러나오곤 했는데, 그녀 스스로도 왜 그런지는 몰랐다. 김상희는 혼자서 중얼 거렸다. "진수야... 나한테 왜 그랬어..." 그 말이 한진수의 가슴을 후벼팠다. '네가 위험해지는 거. 싫으니까.' 그래서 기억을 지웠다. 김상희를 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그 기억. 김상희가 손을 올려 자신의 허리를 껴안고 울던 그 기억. 그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 기억은 이제 한진수만 갖고 있다. 김상희가 끙끙 앓았다. "나 네가 너무...보고 싶어..."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 한진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어떻게 된 거지?' 김상희가 '나 네가 너무 보고 싶어'라고 말하고 난 뒤, 한진수는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마력이 충만해진 느낌. 뿐만 아니라 마력의 순도가 엄청나게 정순해진 느낌이었다. 갑자기 힘이 솟구쳤다. 원래대로라면 눈 앞의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는데, 지금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 그렇다. 자기보다 하수를 만나면, 이 하수는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다. 지금도 그랬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결과가 되었다. 강준석은 입을 쩍 벌렸다. '여태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나?'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여지껏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복면인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고 의문의 저 남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엄청난 움직임이다.' 솔직한 말로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저 복면인이 정말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자신 쯤은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저런 움직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이라도 저런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하지?' 갑자기 강해졌을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저 정도의 강함을 가진 사람. 그는 모른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복면인이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김상희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렇게 약간 시간이 흘렀다. "이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디 나 대신..." 거기까지 말했는데, 한진수는 욕심이 생겼다. 지켜주고 싶다. 다른 사람 아닌 내가 지켜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같이 있고 싶다.' 그러나 같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같이 있고 싶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안 된다. 김상희까지 위험해진다. '내가 지켜주면 돼.' 어떤 위협이 닥쳐올지 몰라. '나도... 행복하고 싶어.' 그게 김상희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어.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그건 네 자만이야. 너랑 있으면 김상희는 위험해질 뿐이야. 한진수는 수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김상희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니 충동을 이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위험하잖아.' 오늘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김상희는 분명 저 의문의 남자에게 잡혔을 거다. '분명 제국이겠지.' 아마도 제국일 거다. 제국 아니고서는 범인을 생각할 수가 없다. 솔직한 말로 만약 오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시체였을 거다. '기적을 일으킨 건... 너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번에도 그랬다. 거의 죽어가던 그 때. 그 때 몸을 말끔히 회복된 적이 있다. 그 때, 한진수는 보지 못했지만 이 것이 김상희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관계야 어찌 됐든 그녀는 자신의 행운의 여신이니까. '기적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용서해줘.' 결국 한진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 김훈상이 벌떡 일어섰다. 어지간하면 표면적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김훈상이다. 그런데 오늘은 굉장히 화가 났다. - 강준석.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강준석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핸드폰 너머로 느껴지는 김훈상의 분노. 어마어마했다. 만약 저 앞에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 모르겠다. - 죄송합니다. 폐하. - 찾아라. 당장. 찾지 못한다면 너를 죽이겠다. 김훈상은 그 말을 겨우 참았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하더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다. 스페셜 나이트에게 이런 임무를 맡기는 것조차도 이미 아이러니한 일인데, 그 임무를 실패했다고해서 죽인다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한데, 김훈상은 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젠장!" 처음에는 분노. 분노 이후에는 염려와 걱정이 밀려들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사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김상희가 어떻게 되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지금 정말 큰 문제는 제국이 항의를 하고 있다는 거다. 상대가 고려쯤 되는 나라라서 항의하고 있는 거지, 다른 나라였으면 프리온 나이트가 쳐들어왔어도 열 번은 쳐들어왔다. 알렉스도 걱정했다. '제국은 우리 고려가 김상희 공주님을 빼돌렸다고 확신하고 있어.'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상희 공주님이 도대체 뭔데 제국에서 저렇게 신경을 쓰지?' 물론 명분은 있다. 황제가 직접 뽑은 아이를 제국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고려로 데려와 버렸다. 이건 상당히 문제가 있는 거다. 황제를 개무시하는 처사니까. 그런데 문제는, 고려는 그런 적이 없다는 거다. 스페셜 나이트는 멀쩡하고, 싸움의 흔적도 없다. 세상에 그 누가 있어 스페셜 나이트 몰래 잠입하여 김상희 공주만 데리고 가겠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 말은 즉, 고려가 빼돌렸다는 소리다. "솔직히 그렇게 티 나는 행동을 고려가 왜 하겠어?" "그런데 김상희 공주를 누가 데려가? 고려 아니면 없잖아." "아니. 그런데 김상희 공주가 도대체 뭔데 고려랑 제국에서 저렇게 아웅다웅 하는 거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겨우 공주 하나 따위를 두고 저렇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세간의 난리는 전혀 모른 채 김상희가 눈을 떴다. "여기는..." 한진수가 말했다. "너. 납치 당했어. 나한테. 정말 미안한데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그냥..." 조금 고민했다. 너 사랑해.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오니 조금 민망해졌다. 민망하고 당황해서 말이 엉뚱하게 나왔다. "날 사랑해라." 김상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날 사랑하라고? 그거... 강요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르게 물었다. "오라버니. 제가 어떻게 여기에...?" ============================ 작품 후기 ============================ "날 사랑해라." 선택권따윈 업 ㅋ 슴 ㅋ 0098 / 0192 ---------------------------------------------- 저는 이 여자를 사랑합니다 ***95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제가 어떻게 여기에...?" 최근에 큰일을 겪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우면 금방 곯아 떨어지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일어나보니 완전히 다른 곳이다. 꿈인 것 같았다. 어째서 한진수의 얼굴이 보이는지. 그 한진수가, "날 사랑해라" 와 같은 이상한 소리나 하고 앉아 있고. 역시 이건. 꿈이 맞다... 맞을 건데 분명. "미안하다. 나는 널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어." "소녀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이 뜻인데, 한진수는 어련히 잘 알아 들었다.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널 납치했다니까." "소녀를요?" 나는 미천한 계집이다. 왜요? 라고 직접적으로 물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줘도 충분하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단순해서 살살 긁어주기만 해도, 알아서 입을 연다. 한진수 역시 마찬가지고. "네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순간 나는 한진수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저 표정. 저 말투. 그리고 저 분위기. 나를 사랑했던 그 한진수의 분위기와 똑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진수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 넌 어떻게 잠들어 있을 때도 그렇게 이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핀잔을 주고 싶다가도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아져선. - 나는 원래 이뻐. 라고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또 진수는, - 내 눈에만 이뻤으면 좋겠는데. 역시 불가능하겠지? 라고 오히려 나를 더욱더 민망하게 만들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너무나 고마웠었고. 그런데 지금의 저 한진수. 그 때의 한진수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지금의 저 모습은...' 그 때보다 훨씬 더 쭈뼛쭈뼛거리고, 훨씬 더 부자연스러웠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의 진수의 마음과 지금 진수의 마음이 똑같다는 걸. "네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 못생겨서 신기하더군." ... 정정하겠다. 분위기는 똑같은데 내용은 아주 달랐다. 이 자식. 너도 언젠가 명치를 겁나 세게 때리고 말 거다. 진짜다. 겁 먹어야 할 거야. 그 때까지 난 주먹을 갈고 닦을 테니까. 네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소녀는... 너무나 못 났어요. 그래서 오라버니의 옆에 설 자격이 없다는 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요. 정말 소녀를... 버리실 생각이신가요?" 이쯤 하면 아니라고 하겠지. '그러고 보니... 나 왜 이렇게 평안해?' 이상함을 이제서야 눈치 챘다. 나는 왜 이렇게 편안한 걸까. 눈 떠보니 이상한 곳이고 내 침대가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어쨌든 진수는 틀림없이 당황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한진수. 내가 알던 한진수랑 너무나 많이 닮았다. 나는 아주 많이 상처받은 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소녀가... 정말로 그렇게 못 났나요? 그렇게 못 났다면... 그래서 오라버니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차라리..." 뭐. 이 정도만 말하면 되겠지. 한진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차라리 뭐. 끝까지 말해." "차라리..." 너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지 않잖아. 빨리 말을 해봐. 사실 나도 차라리 이후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으니까. 빨리 말을 해보라고. 원래의 진수라면 말을 할 텐데? 분명 그럴 텐데? 그래야만 할텐데? 한진수가 말했다. "차라리 나를 사랑하라고!" 아니. 무슨 밑도 끝도 없이, 비논리적인 말이야. 그렇게 못났다면 차라리 널 사랑해? 앞뒤 문맥이 맞다고 생각하냐? 너 세계의 대천재라며. 아까부터 얘 왜 이러냐. 하지만 나는 봤다. 한진수의 목덜미가 아주아주 조금 빨개진 것이.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을 많이 봤었다. 예전의 진수도 부끄러우면 목덜미가 먼저 빨개지곤 했었다. "소녀는..." *** 한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왜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나를 사랑해라'라고 일단 던져 놓기는 했는데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 이해 못하고 있다. 그리고 김상희가 '소녀는...'하고 말꼬리를 흐리자 괜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예전에는 병인 줄 알았는데 병도 아니었다. 병이라면 병이지만 이건 못 고치는 병이다. '그래. 사랑한다고 말해라.'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도 없다. 남자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한 번은 말했는데 두 번은 못 말하겠다. 이런 말. 해본 적도 없고 스스로 할 거라고 생각조차 못해봤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오라버니를..." 한진수의 심장이 쿵쿵쿵쿵 떨리기 시작했다. 제국의 나이트 수십 명을 죽일 때도 심장이 이렇게 요동치지는 않았었다. 저딴 게 뭐라고 이렇게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지. 그리고 또 뭔가가 왜 이렇게 두려운지. "사..." 한진수가 또다시 침을 꼴깍 삼켰다. 긴장한 나머지 주먹도 꽉 쥐었다. "여기까지만 할래요. 소녀는 너무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하겠어요." "아 왜!" 한진수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 무슨 추태냐.' '아 왜!' 라니. 어린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그렇게 신경질을 냈다. 세계의 대천재인 자신이. 불과 얼마전 까지만해도 각국의 러브콜을 받으며 차세대 김훈상이라 칭송받던 자신이.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건 꿈인 거냐!' 김상희는 얼른 말을 끊었다. 저대로 두면 한진수가 기어코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고 말 터. 사실 김상희도 마음 같아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조금 걸리는 게 있다. '나는 저 한진수를 사랑하는 걸까...?' 과거의 한진수를 사랑하는 건 틀림 없었다. 그런데 이 한진수가 그 한진수가 확실히 맞다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었다. 아주 가끔, 예전 한진수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는 하지만 평소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니까. 그리고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니까. '나는 어떤 한진수를 사랑하는 거지?' 그래서 쉽사리 말을 해주지 못했다. 한진수를 사랑하는 건 틀림 없지만, 이 한진수와 그 한진수가 같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으니까. 말을 돌렸다. 굉장히 또 슬픈 척 했다. "오라버니. 소녀가 정말로 그렇게 못생겼나요? 신기하게 쳐다볼 만큼...?" *** 고려 왕궁. 김환석이 말했다. "아버님. 여행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김훈상은 김환석을 쳐다봤다.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 치고는 표정이 지나치게 비장하구나." 김훈상은 한 눈에 알아봤다. 김환석 지금. 김상희 찾으러 간다. 나이트들이 지금 흩어져서 찾고 있지만 그걸로는 성에 안차는 것 같았다. 아들과 아버지는 마음이 통했다. "그래. 다녀 와라." 참고로 김환석은 지금 유부남이다. 그것도 신혼이다. 하지만 아내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애초에 아내와 잠자리도 하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결혼만 했을 뿐. 알렉스가 김환석을 찾았다. "세상에. 왕자님... 전쟁 나가십니까?" "별 거 아니다. 호신도구일 뿐." 호신 두 번 했다가는 나라 하나 멸망시키겠네요. 그 말을 참았다. '아니. 여행 가는데 미사일 레이저 유도기는 왜 챙겨 가시는 거야?' 저거. 갖고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다. 저건 왕의 재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실험샘플 폐하님과 합작을 하나 보군.' 공식적으로 '왕자가 공주를 찾기 위해 움직인다'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실험샘플 폐하는 마지막 한 가닥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여행'. 실질적으로는 '수색 작전'을 하는 거겠지. '김환석 왕자님이 가신다면... 결국 스페셜 나이트 몇은 따라붙게 되어 있고.' 그러면 결국 수색작전이다. '게다가 김환석 왕자님은 상당히 유용한 발명품들을 많이 갖고 계셔.' 상용화 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김환석이 발명하는 것들의 성능은 굉장히 뛰어나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 더군다나 효용성도 떨어졌다. 어차피 이 시대의 문물은 남자를 위한 문물. 마력이 없는 사람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김환석의 발명품은 정말 쓸데없이 마력이 없는 사람을 배려하는 발명품들이 많았다. 이를 테면, 충전식으로 운용되어 마력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이라든가. (참고로 가격이 일반 핸드폰의 천 배에 이른다. 누가 사용하겠는가.) '결국 김상희 공주님을 찾으러 가는 거겠지.' 저번에 보아하니, 위치추적기까지 부착 시켜놓은 것 같았다. 무려 300억의 예산이 들어간 그 것 말이다. 알렉스가 물었다. "혹시 김상희 공주 찾으러 가는 건 아닙니까?" "난 그딴 계집애에게 관심 없어." 아니. 그럼 그거는 왜 챙겨요? 김상희의 위치를 나타내는 디스플레이 기계. 지금은 위치가 안 잡힌다만, 여태까지의 기록이 남아 있다. '엄청 소중히 챙기시네.' 그래서 한 번 떠봤다. "혹시 그거. 레이저 미사일 유도기 아닙니까?" 그거. 별 거 아니다. 저걸로 어느 표적을 가리키면 고려 본토에서 미사일이 발사된다. 탄두에 따라 다르지만 아마도 반경 수백 미터는 한 방에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미사일일 것이 틀림 없었다. "......." 김환석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보통 여행에 이런 걸 챙겨가지는 않으니까. 이런 건 전쟁하러 갈 때나, 스페셜 나이트들이 챙기는 거다. "이건..." 김환석이 변명했다. "내 장난감이다." *** 김상희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하셨잖아요." 김상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김상희가 소녀식을 치르던 그 때. 다시 말해, 8살 때. 한진수는 김상희를 찾아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했었다. 그 때 김상희. 상처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한진수가 갑자기 나타나, 한진수와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으니까. 한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위험 하다.' 아니.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위험할 것도 없다. 그런데 뭔가 위험하다고, 이거 뭔가 느낌이 안 좋다는 게 느껴졌다. 본능의 외침이었다. "그 사람도 납치를 하셨었나요? 오라버니께서 사랑하시는 분이니 저도 인사를 올리고 싶답니다." 개뿔. 그런 거 아니다. 한진수가 반갑고, 한진수가 고마운데, 그래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하지 않겠는가. 한진수는 점점 더 당황했다. 뭔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김상희는 한진수를 재촉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한진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건가...!' 던전 내에서 발록과 싸울 때. 그리고 제 3기숙사에서 이름 모를 이상한 남자가 접근 했을 때. 이런 기분을 받았었다. 아주 크고 무서운 위협이 다가오고 있을 때. 이런 기분이 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지 알 수 없었다. 김상희를 사랑한다는 건 인정했지만, 계집의 질문 때문에 자신이 두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인정하지도 못하고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어서 그렇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거다! 큰 위협이!' 크게 착각한 한진수가 말했다. "내가 지켜주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있다며. 어서 말을 해봐. 김상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때. 한진수는 또 위험을 직감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아까는 실체가 없는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이었다면 이번에는 실체가 있었다. '큰 일이다.' 위치가 발각 된 것 같다. '김상희는 내가 지켜.' 검을 빼들었다. 제국의 마수로부터 김상희만큼은 지켜야 했다. ============================ 작품 후기 ============================ "이건...내 장난감이다." 장난감 잘못 건드리면 지구 멸망할 기세 0099 / 0192 ---------------------------------------------- 저는 이 여자를 사랑합니다 ***97 한진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제국이 마음 먹고 쳐들어오면 혼자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 혼자라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겠지만, '김상희를 두고는 아무데도 못 간다.' 김상희가 옆에 있다. 절대 버리고 가지 않을 거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거다. 겨우 계집애 따위 때문에 도망치지 않는다니. 돈으로 비유해 보자면 100원 짜리를 줍기 위해 10억원을 거리에 뿌리는 거랑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한진수에게 김상희는 100원이 아니라 100억.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하여튼 그랬다. 한진수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 밖에 조금 둘러보고 올테니." 이 곳은 동굴 내에 마련한 임시 은신처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이 곳을 숨기기 위한 장치를 여러개 마련해놨는데, 다행히 아직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는 않은 것 같다. '저 사람은...!' 한진수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긴장을 조금 풀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것 같으니까.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저 사람의 이름은 김환석. 세간에는 여자에게 굉장히 무시무시한 남자로 통하고 있는데, 한진수는 그게 아님을 안다. 한진수는 느꼈다. 김환석은 김상희를 상상이상으로 아꼈다. 다만 김환석 본인이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김상희를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희망적인 생각이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제국의 반역자다. 제국의 반역자라면 곧 고려의 반역자라는 뜻도 된다. 김상희를 찾는 건 분명히 아닐 거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고려의 왕자가 직접 공주를 찾아올 리는 없다.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다. 그렇게 보는게 타당했다. 거기에 김상희가 같이 있게 된 거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반역자와 함께 있는 여자? 번거롭게 다른 절차를 취할 것도 없이 그냥 죽이면 끝이다. 어쩌면 제국에서 그걸 요구했을 수도 있다.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김환석이라고 해도 들키면 안 됐다. '이 곳이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만약 들킨다면, 아마 저항은 하지 않을 거다. 김환석은 김상희의 오빠다. 다시 말해, 가족이다. 김환석이 김상희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김상희는 김환석을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김상희가 듣는다면 굉장히 억울해할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김상희는 김환석에게 항상 애정표현을 하곤 했으니까. '나는... 왕자님을 해칠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김상희가 좋아하는 사람이며 김상희의 가족이다. 그래서 자신은 질 수밖에 없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김상희를 지켜주려면 데려와서는 안 됐다. 그게 논리적으로 맞다. 하지만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 버렸다. 김상희를 옆에 두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반역자의 아내로... 낙인 찍히게 둘 수는 없어.' 김환석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김환석은 초조해졌다. 온갖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수색중인데 아무래도 정확한 위치가 잡히질 않는다. 대략적으로 이 근처에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느껴질 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대외적으로는 여행을 간다고 하고서 이 곳으로 왔다. 카렐 산맥. 대륙의 5대 산맥 중 하나로 뛰어난 길잡이 없이는 절대 되돌아나올 수 없는 깊은 산으로 통하는 곳이다. 탐사되지 않은 미개척지역도 많다. 아주 깊은 곳에는 인간과 맞닥뜨린 적 없는 괴물들도 있다는 전설 비슷한 소문들도 있는 곳. '왜 이런 곳에 똥개가 있는 거냐!' 짜증이 마구 치밀어 올랐다. 일단 스스로는 짜증이라고 생각했다. 계집때문에 무려 왕자인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까.(누가 김상희 찾으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사서 고생 중이다.) '어딜 가면 간다고 연락이라도 하고 가야할 것 아니냐!' 사실 연락할 수단도 방법도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조차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파악 못했다. 그런데, 김상희가 어떻게 연락을 한단 말인가. 김환석도 그걸 알긴 아는데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찾아내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계집!' 그런 것 치고는 너무나 열성적으로, 지나치게 필사적으로 김상희를 찾고 있다. 지금 그는 하루종일 물 한모금 안 마신 상태다. 지금의 상황은 단순히 '실종' 혹은 '납치'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이 얽혀 있었다. 바로 제국과 고려의 관계 말이다. 하지만 지금 김환석은 국제 정세니 외교관계니. 그런 건 지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대로 따지면 중요해야 맞다. 그는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둘째 왕자니까. 지금 꽤 민감한 상황이다. 제국에서는 고려에게 '김상희를 내놓으라'고 윽박을 지르고 있고 고려는 '우린 그런 적이 없다' 라고 맞받아치고 있는 형국이다.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이 건 제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제국의 자존심 잘 못 건드렸다가는 고려가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런 거 따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왜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겨우 똥개 따위에게 이런 절박한 마음이 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미칠 노릇이었다. '죽어 있으면 정말로 죽여 버리겠다. 똥개.' 뭐가 어찌됐든 좋았다. 막말로 엄청난 악인.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제국의 반역자가 되어버린 한진수랑 같이 있든 뭘 하든. 그냥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한진수 그 개자식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아니. 응당 약혼자라면 약혼녀가 납치를 당했으면 행동을 보여야할 것 아닌가. 물론 반대로 생각해보면 좀 아니긴 하다. 만약 그의 아내 최지수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면 별로 신경도 안 쓸 거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똥개 아닌가! '한진수 개자식.' 굉장히 이기적이고 편파적으로 생각했다. 김환석은 아내가 납치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다. 심지어 한진수는 지금 행방이 묘연한 상태. 한진수가 김상희 구출과 관련된 행동을 어디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김환석은 그걸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진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하여튼 다 짜증났다. *** 제국의 정보부 국장 김국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실패...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 30년 형량을 줄여주면서 까지 그를 보냈다. 그가 간 이상. 절대로 실패할 리는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가 그렇게 강할 리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스페셜 나이트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곧 영상분석결과가 나온다. 지금 궁금해봤자 답은 없다. 하지만 초조해졌다. 이번 일로 황제의 마음을 돌렸어야 했는데 실패다. 계속되는 임무 실패. 이젠 정말로 위험했다. "영상분석결과 나왔습니다." 그를 보낼 때에, 초소형 카메라를 부착해서 보냈다. 영상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제국의 데이터 베이스에 기록되게 되는데, 암호화되어 있어서 재해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의문의 복면인이 나타났다. '저 놈은 도대체 누구냐?' 단서는 있었다. 그 남자가 스페셜 나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네 편이다 - 나는 김상희를 사랑한다. 특히 중요한 단서는 '김상희를 사랑한다'라는 단어. 김상희를 사랑한다라.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한진수. '하지만 한진수에겐 저런 능력이 없다.' 그런데, 뭔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여기. 그래 여기. 다시 돌려봐." 김국현은 제국의 정보부 국장이다. 최근 황제의 신임을 잃기는 했지만 그의 분석 능력이 어디가는 건 아니다. 사실 김상희처럼 얼토당토 않은,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김국현의 자리가 이토록 위태로워지지는 않았을 거다. 하여튼 김국현은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았다. "이 음성 주파수대역만 잡아서 크게 확대시켜. 정확하게 보정시키고." 아주 작은 음성이 분석 됐다. 김상희의 목소리였다. - 진수야... 나한테 왜 그랬어... - 나 네가 너무...보고 싶어... 김국현은 아차! 싶었다. '그렇다. 옆에는 김상희 공주가 있었다!' 이제 설명이 된다. '저 복면인은... 한진수가 틀림없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진수는 그를 이길 수 없다. 그게 맞다. 그러나 옆에 김상희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1차 각성 이후. 능력들이 피어나고 있다. 본인이 컨트롤 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만.' 저번에는 회복의 빛이 발현 됐다. 게다가 이번에는, '각성의 빛인가.' 벌써 두 가지. 그것도 이번엔 각성의 빛이 발현 됐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김국현은 한달음에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의자에 앉아 턱을 매만졌다. "각성의 빛이라. 그리고 한진수라. 그래. 그렇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지. 불가항력인 게 맞다." 김국현이 한 가지를 건의했다. "범인은 한진수가 틀림 없습니다." "계속 말해봐라." "고려는 지금 제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해야만 하죠. 그렇다면 아예 고려에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진수는 위험한 놈이다. 프리온 나이트 7기까지 가지고 있다. 힘으로 제압하려면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고려를 이용하면 어떨까? 오히려 대인전에 있어서는 고려가 제국보다 훨씬 강하다. 제국은 대규모 화력전에 강하니까. "흠..." 어차피 김상희가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다. 아직 자신의 능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비유하자면 아직 어린 아이다. 그렇게까지 급할 건 없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죽일 가능성은?" 김국현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랬을 거면 김상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리도 없습니다." 영상 초반. 한진수는 분명 목숨을 걸었다. 김상희가 없었으면 아마 한진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그는 자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없어도 자신 있는 척 해야 했다. 황제 앞이니까. 이제 더 이상 신임을 잃을 수는 없었다. 황제는 제법 만족한 듯 했다. "귀찮은 짐은 고려에 떠넘기고, 우리는 한진수와 김상희를 얻을 수 있는 건가?" *** 한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김환석을 비롯한 나이트들은 이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김상희에게 돌아왔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어.' 그는 김상희를 사랑한다. 다른 건 몰라도, 김상희 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 못할 것도 안다. 자신과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은 가시밭길이니까. 그래서 선뜻 함께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소녀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몰라요." 한진수는 말하고 싶었다. 그래. 너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도 돼. 그냥 나만 믿고, 내 옆에만 있어줘. 난 너만 있으면 돼.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예전부터 그래왔다. 저런 모습의 한진수. 뭔가를 말하지 못하고 더듬대고 있을 때의 한진수는 언제나 김상희를 답답하게 했다. 그러나 믿음은 갔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한진수는 언제나 김상희의 편이었고, 조금 답답할 지언정 김상희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았었다. 지금의 한진수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한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믿는단다. 모르겠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힘이 마구 솟구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진수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소녀를 여기 두고 가시려구요?" "금방 올 거야." 그렇게 말해놓고 한진수는 움찔 놀랐다. 김상희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크게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이 아이를 계속해서 기다리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말이다. 한진수는 알 수 없었다. 김상희가 최소 15년을 기다려왔다는 걸. 15년은 한진수만을 그리워했다는 걸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또 말했다. "이번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약속 해주셔요." 한진수는 순간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김상희의 턱에 손을 댔다. 김상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김상희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사랑...스럽다.' 정말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네게 약속..."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아이를 주머니 속에라도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파르르 떨리는 속 눈썹. 살포시 감은 두 눈. 홍조를 머금은 볼. 굳게 앙다문 듯, 앙다물지 않은 듯 이상한 모양새의 붉은 입술. 미묘하게 떨리는 몸. 한진수의 심장이 미칠듯이 뛰기 시작했다. 김상희를 보는 것 자체가 좋았다. "한다." 모든 게 다 예뻤다. "더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아." 다 예쁜데, 그 중에서도 유독 붉은 입술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참기에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적어도 한진수에게는 그랬다. 한진수도 눈을 살짝 감았다. 한진수와 김상희의 코가 살짝 스쳤다. 한진수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김상희의 입술과 한진수의 입술이 닿으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였다. "드디어. 찾았다." ============================ 작품 후기 ============================ '죽어 있으면 정말로 죽여 버리겠다. 똥개.' 이건 살라는 거냐, 죽으라는 거냐... 한 번에 하나만 해라 환석아. 니가 그러니까 탑 오브 망나니 소리 듣는 거야. 0100 / 0192 ---------------------------------------------- 딸등신. 칼을 뽑다. *** 한진수는 실수를 깨달았다. '앗차.' 김상희와 입술이 맞닿으려는 그 찰나. 마력 흐름이 흐트러졌다. 이 곳을 은신시키던 흐름이 불안정해졌고, 김환석과 스페셜 나이트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은 김상희와 만나면 절대로 안 됐다. 반역자니. 국제관계니. 그런 건 둘째 치고서라도 이건 무조건적으로 한진수의 손해였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사랑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한진수는 혼자인 것이 무조건 이득이다. 경제적으로도, 그 외 다른 능력적으로도. 한진수는 김상희와 만나면 안 된다. 김상희만 아니었으면 제국의 반역자로 몰릴 일도 없었고 이런 실수를 할 리도 없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황당한 실수를 하고나면 후회를 하거나 자책을 한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조금 달랐다. 바보가 된 건 맞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분 나쁘지 않아.' 이 기분. 나쁘지가 않다. 어떻게 따져봐도 자신이 큰 손해를 보는 건데, 그 손해는 손해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김상희가 옆에 있음으로 얻게 되는 이득이 -그 이득이 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지만- 훨씬 크다고 느껴졌다. 한진수가 말했다. "김상희. 넌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밖으로 나갔다.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깍지를 꼈다. 저항할 의사가 없을 표시한 거다. "왕자님. 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무사합니다." 한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슴팍에 빨간색 레이저가 보인다. 이거. 이거 설마 레이저 미사일 유도기? "너. 자세히 얘기해라." 아무리 한진수가 세기의 대천재라고 해도 미사일의 맨 몸으로 맞고 멀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한진수가 아니라 김훈상이라고해도 불가능하다. "왕자님. 실수로라도 그걸 누르시면 안에 있는 김상희까지 다칩니다." 그 말에 김환석은 찔끔 놀랐다. 물론 겉으로는 티가 안 났다. 한진수 쯤 되니까 움찔 놀라는 걸 겨우 눈치 챘을 정도다. 그걸 본 한진수는 깨달았다. '김상희를 해코지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나를 쫓아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김상희는 안전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진수는 안심을 했다. 다른 건 아무 상관 없다. 김상희만 안전하면 됐다. "제가 모든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김환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주 중요한 거. 따질 것이 있었는데. 뭐더라. 엄청 중요한 게 있었는데. 하지만 잠시. 그걸 따지는 건 미루기로 했다. 김환석이 말했다. "내가 어째서 반역자의 말을 들어야 하지?" "김상희 공주의 안전과도 깊은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따위 계집. 내 알 바 아니다." 혹시나 싶었던 스페셜 나이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 왕자님 아닌가. 괜히 철혈이라 불리는 왕자가 아니다. '한진수도 멍청하군.' 겨우 저딴 걸 이유라고 말하다니. 차라리 다른 어떤, 뭔가 있어보이는 이유를 주구장창 설명하는 게 나을 뻔 했다. "하지만 네 얘기는 듣고 싶군. 넌 어째서 제국에 반역을 했나?" 스페셜 나이트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진수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한진수를 제압하려면 큰 피해가 있을 수도 있다. 한진수가 물었다. "제가... 필드를 펼쳐도 되겠습니까?" 스페셜 나이트들이 반대했다. "안 됩니다, 왕자님. 위험합니다." 일반적으로 스페셜 나이트가 펼치는 스페셜 필드는, 외부에서의 간섭이 불가능하다. 물론 스페셜 나이트 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페셜 필드를 부수거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한진수가 만약 마음 먹고 필드를 펼친다면, 외부에서는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김환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펼쳐라." "왕자님!" 김환석은 한진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진수 역시 필드 내에서 김환석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잘 보여야 했다. '김상희의 오라버니니까!' 이미 제국의 반역자가 된 시점에서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려의 왕자라거나하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오로지 하나. 김상희의 오라버니라는 건 아주아주 중요했다. 잘 보여야만 했다. 계집 때문에 오라비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거. 사실 엄청 이상하고 황당한 건데, 하여튼 그의 마음가짐은 그랬다. 필드가 펼쳐졌다. "왕자님. 저는 김상희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제 목숨보다도 더욱. 훨씬 더 많이 사랑합니다."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왕자님도 아실 겁니다. 제 말이 괜한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실제로 왕자님도 김상희 공주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난 단순히 여행을 왔을 뿐이다." 누가 단순 여행에 레이저 미사일 유도기와 위치 추적기. 거기에 스페셜 나이트들을 대동합니까. 한진수는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저 인간은, 김상희의 오빠다. 잘 보여야만 한다. "어쨌든... 김상희 공주가 위험합니다." "너는 김상희 공주를 납치했다." 납치범 주제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냐. 라는 뜻이다. 한편, 김환석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제국의 반역자 한진수와 반역에 관한 얘기는 하지도 않고 김상희와 관련된 얘기만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 귀찮고 짜증나는 계집. 신경도 안 쓰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한진수의 말을 끊지를 못하겠다. 짜증이 났다. 그런데 하나가 신경 쓰인다. '김상희가 위험하다고...?' 아니다. 반역자가 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위험하다면...?' 한진수가 말했다. "제국에서 누군가를 보냈습니다. 스페셜 나이트와 힘을 합쳐 그 누군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김상희의 안전을 위해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조금은 거짓말이다. 김상희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자신의 욕심이 더 컸다. 김상희를 옆에 두고 보고 싶은 그 마음. 그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근거를 대봐라." "제가... 김상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도, 김환석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서로를 이해하기는 했다. 김환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다른 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저 한진수가 미친놈인 것은 확실히 알았다. 계집따위 때문에 목숨을 걸 생각을 하다니. 확실히 미친 놈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단 말인가. 한편, 한진수도 생각했다. '왕자님 역시 김상희를 굉장히 아껴.' 말로는 그저 하찮은 계집이니 뭐니 하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정말 아낀다는 게 느껴졌다. 그 아끼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못하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그런 인지를 안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김환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안을 수용하지. 알겠다. 하지만 위험할 수 있다. 정말 아주 잠깐만 틈을 벌어주겠다. 그 사이 도망쳐라."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나? 필요하다면 지원을 좀 해줄 수 있다." "아닙니다. 그러면 꼬리가 밟힙니다. 저는 제 힘으로, 제 스스로 힘을 키우겠습니다." 다만... 김상희만 책임져 주십시오. 제가 왕자님께 부탁드릴 것은 딱 그것 하나 뿐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잡니다. 그 말은 겨우 삼켰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김환석은 분명히 그렇게 해줄테니까. 김환석과 한진수. 둘의 얘기는 끝났다. 이제 연극 아닌 연극을 해야만 할 때다. 필드가 해제 되었다. "왕자님!" 김환석이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부터, 제국의 반역자이자 고려의 반역자인 한진수를 체포하도록 한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그리고 김환석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진수를 공격하려던 스페셜 나이트들이 멈칫 했다. '저 계집은 도대체 무슨 배짱이냐!' 스페셜 나이트들이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김상희는 김환석에게 가까이 달려왔다. 그리고 김환석에게 안겼다. 겉으로 보면 그저 반가워서 하는 행동이지만, 속 내용은 전혀 달랐다. '진수를 지켜야 해.' 한진수는 천재다. 이 정도의 틈만 벌어주면 도망갈 수 있을 거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김상희 역시 한진수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얼떨떨했다. '저 계집이 어째서 저렇게 무사하지?' 지금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한진수를 치는 순간. 그런데 그 순간을 방해했다. 계집따위가 말이다. 그렇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저 계집.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김상희 공주가 김환석에게 안길 때 까지, 김환석의 칼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총도 쏘지 않았다. '혹시 왕자님이 한진수에게 부상을 입으신 건가!' 필드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하찮은 계집이 왕자에게 껴안길 수 있단 말인가! 한편, 김환석은 당황해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군.' 김상희가 끼어들 줄이야.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연기를 해야 한다. 한진수를 거의 죽일 수 있었으나, 실패하는 걸로. 중상을 입히는 걸로 끝내야 했다. 그리고 한진수를 놓쳐야 했다. 지금 당장 한진수는 힘이 없다. 제국으로부터 김상희를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당분간 고려의 그늘 아래로 숨길 거다. 그러려면 한진수로부터 김상희를 '빼앗아' 와야 했다. '어쩔 수 없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김상희를 밀쳐 버리는 거.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다른 공주들이 접근하면 가차 없이 수십 미터 뒤로 던져버리지만, 김상희 만큼은 예외였다. '다치지만 마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그 스스로는 온 힘을 다해서 던져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본 스페셜 나이트들은 확신했다. '김환석 왕자님 몸이. 정상이 아니다.' 아니다. 굉장히 정상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던진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을 뿐. 전력으로 김상희를 던지지 못했을 뿐이다. 어쨌든 김상희는 날아갔다. "꺄아악!" 동굴벽에 쾅! 부딪쳤다. 한진수는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김환석이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이해는 되지만, 화도 났다. 좀 더 살살 던져도 되잖아! 따지고 싶었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너무 살살 던진것 같아서' 김환석의 안위를 걱정했고, 한진수는 '너무 세게 던진 것 같아서' 김환석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지금 일일히 분노하고 아파하고 할 겨를이 없었다. "프리온 나이트. 소환." 동굴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한진수가 소환한 프리온 나이트는 가장 작은 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높이가 겨우 3미터 밖에 안 되는 소형 모델이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황당했다. "저, 저게 프리온 나이트라고?" 베일에 가려져 있던 프리온 나이트가 실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김환석이 이끄는 스페셜 나이트와 한진수가 이끄는 프리온 나이트 1기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 가운데, 김환석이 일부러 틈을 한 번 내줬다. "와, 왕자님!" 그리고 그 틈을, 한진수가 놓치지 않았다. 김환석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한진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살짝 빗겨맞기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김환석이 일부러 깊게 찔렸다. '왕자님.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알 것 같기는 했다. 가벼운 상처만 입으면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정도 다쳐줘야 제국에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생색이라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한진수의 눈길이 김상희를 향했다. '내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게.' 더 강해져서, '혼자서도 제국을 이길 수 있을 만큼.' 그래서, '그래서 너만큼은 반드시 지킬 수 있는...' 약속하기로 했다. '그런 남자가 되어 돌아올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말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사랑해...김상희.' 김환석이 부상을 입은 그 찰나. 한진수가 도망쳤다. 몇 시간 뒤. 고려가 놀라운 발표를 했다. 대외적인 발표와는 또 별도로, 제국에도 비밀리에 연락이 갔다. 제국의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 작품 후기 ============================ 김환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주 중요한 거. 따질 것이 있었는데. 뭐더라. 엄청 중요한 게 있었는데. 하지만 잠시. 그걸 따지는 건 미루기로 했다. 작가해설: 야. 니 동생. 방금 쟤랑 키스할 뻔 했어. + 대망의 100화!! 여러분의 성원이 있어 100화까지 왔습니다!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는 기획 초 약 160~200편 사이 완결을 목표로 하여 기획되었습니다. 물론 조금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0101 / 0192 ---------------------------------------------- 딸등신. 칼을 뽑다. ***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프리온 나이트 1기가 파괴되고... 한진수는 도주. 그리고 김상희는 의식 불명이라.' 세간에는 고려가 제국의 반역자 한진수를 발견하여 공격했다고만 알려졌다. 그리하여 스페셜 나이트 몇 명이 부상을 당했고 한진수가 도망을 쳤다는 것만 알려졌다. 위치는 카렐산맥.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고려가... 프리온 나이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되었겠군. 이걸 그냥 돌려 보냈을 리는 없지. 분명 해부를 했든 뭘했든. 공작을 부렸을 거다.' 물론 아무리 고려에서 해부를 했다 하더라도 정확하게는 모를 거다. 티나는 해부는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가 적어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터. '한진수. 이 개자식을 내 편히 죽이지 않으리라.' 고려 역시 제국에 반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파괴된 프리온 나이트를 일부러 수거하여 제국에 몰래 운송할 리는 없으니까. '이로써 고려는 한 가지 패를 더 얻게 된 건가.' 상관없다. 완전한 능력을 각성한 김상희만 얻는다면, 그 때에는 모든 비밀이 세상에 알려져도 상관 없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워했다. "고려가 역시 대단하긴 대단한가봐." "제국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카렐 산맥에서 한진수를 찾아내다니. 인간의 능력으로만 보면 고려가 최고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닌가봐." "저번에 골렘 피라미드에서도 증명 됐잖아. 고려의 정보 수집 능력은 진짜 전 세계 탑일걸?" 사실 그런 거 아니다. 애초에 김환석은 한진수를 찾을 생각이 아니었다. 한진수는 그냥 곁다리로 걸렸을 분, 원래는 김상희를 찾으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걸 생각조차 못했고. "그런데 김상희 공주가 한진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 같은데." "반역자의 약혼녀잖아." "그게 뭔 상관이야?" "하긴 그것도 그렇네." 사실 뭐. 별로 상관 없다. 약혼을 했든, 심지어 결혼을 했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대중들은 '그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 이 원래 김환석의 목표 였다는 걸 까마득히 몰랐다.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위치는 동굴. 놈이 탈취한 프리온 나이트 중 가장 약하고 작은 놈밖에는 사용할 수 없었을 터.' 만약 프리온 나이트 7기를 전부 꺼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만약 고려와 한진수가 짜고 어떠한 밀거래를 했다면?' 그럴 가능성도 없을 수는 없었다. 황제는 김훈상의 야망을 안다. 적어도 작은 그릇은 절대 아니다. 한진수를 얻기 위해서 어떤 도박을 했을지, 어떤 거래를 했을지 모른다. '놈이 프리온 나이트를 한 기를 내주고 밀거래를 했을 확률은...'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다.' 그러기엔 김환석 왕자의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옆구리를 완전히 관통당했으며 고려의 뛰어난 의료진 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라고 했다. '프리온 나이트가 파괴되고 김환석 왕자가 그 정도 부상을 입었을 정도면... 자작극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어.' 그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한편, 고려는 김상희 공주의 상태가 위독하며 또다시 어떤 습격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고려에서 보호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프리온 나이트 1기를 우리에게 비밀리에 보내왔다. 이 것은 우리에게 잘 보이기 위함과 동시에...' 그것과 동시에,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를 하는 셈이지.' 하나의 경고다. 우리는 프리온 나이트 마저도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은연 중 드러내는 거다. 김환석 왕자는 여행 중이라고 했다. 여행 중이라면 중화기를 챙기지는 않았을 터. (참고로 김환석은 미사일 레이저 유도기를 챙겼다.) 여행 중인 상태. 그러니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도 프리온 나이트를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들. 그게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들과 김환석이라고 보면 맞았다. '고려를 이용하여 한진수와 김상희를 얻으려 했는데.' 그게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한진수는 커녕 김상희까지 잃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 김상희의 모든 능력이 개화 된다면, 그 땐 전면전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한다 할지라도 김상희를 얻을 생각이었다. 한편, 김환석은 짜증이 무럭무럭 치밀어 올랐다. "야. 똥개." "네. 오라버니." "너 그 때. 뭐 하고 있었냐?" 그 때는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 말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그 때 말이다. 김상희와 한진수를 발견했을 때. 그 때. 둘은 뭔가. 뭔가 아주. 짜증나고. 아주아주 불쾌한 뭔가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소,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어요." 김상희는 직감했다. 저 자식. 지금. 아주 불쾌한 상태다. 잘못 건드리면 큰 일 난다. 저 놈은 누가 뭐라해도 탑 오브 망나니 아닌가. "한진수 앞에서 눈을 감고 있던데." "소, 소녀가 그랬나요? 무서워서 잘 기억이 안 났어요." 김환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 다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난다. 왜 짜증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아주 짜증이 난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말했다. "죽고 싶냐?" 김상희는 남자들 다루는 데에 이골이 났다. 김환석은 다루기에 좀 어려운 상대기는 하지만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아야..." 현재 김상희는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다. 물론 가짜다. 김상희는 그 어느 한 곳도 다치지 않았다. 한진수와 김환석이 각별히 신경써서 보호했고, 굉장히 조심해서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김환석도 안다. 김상희는 지금 다친 곳이 아무데도 없다. "......." 하지만 김환석은 더 이상 김상희를 윽박지르지 못했다. "소녀... 허리가 너무 아픈 것 같아요." "......." 김상희가 아픈 척을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혹시나. 아주아주 적은 가능성으로 정말로 아프다면? '하찮은 계집이니 그렇게 보호를 해줘도 다쳤을 수도 있다!' 김환석의 정신세계는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래. 아주 하찮으니까 다쳤을지도 몰라.' 하나도 안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김환석이 투덜거렸다. "겨우 그까짓 것에 다치다니. 한심하군." 참고로 김환석도 붕대를 감고 있다. 김상희와는 다르게 정말로 크게 다쳤다. 하지만 김환석은 아픈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멍청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리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김환석이 김상희의 방을 나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의 관 관장인 미첼이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김상희는 얼른 몸을 일으켜 미첼을 맞이했다. "회복의 관 관장님께서 어쩐 일로...?" "김상희 공주님이 편찮으시다하여 진료하러 왔습니다." 김상희는 멍해졌다. 아니. 왜? 난 다친 곳도 없다고. 그리고 일반 의료진도 아니고 회복의 관 관장이 직접?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탑 오브 망나니 짓인가 보다.' 아. 그 망나니. 진짜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다. 회복의 관의 관장쯤 되는 사람이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공주의 진료 때문에 여길 온다? 나라도 엄청 짜증났을 거다. 자존심도 상하고. 김환석을 미워함과 동시에 나까지도 미워할 수 있다. 저 사람 입장에선 엄청나게 화 나는 일일테니까.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낄 것이 분명했다. *** 김환석은 퓨리어스 한 방울을 미첼에게 건넸다. "네게 주겠다." 미첼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퓨리어스! 한 병만 있으면 나라를 살 수도 있다는 천고의 보물 퓨리어스를! 미첼은 힘이 솟았다. 퓨리어스는 왕가가 직접 관리한다. 그리고 이 퓨리어스를 받는다는 건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고 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가서 김상희를 살펴봐라." 응? 김상희를? 도대체 왜? "그딴 계집. 알 바 아니나, 아버님께서 그 계집의 안위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계시니." 김환석은 아주 쿨한 척 말했다. 그 스스로가 김상희가 아플지도 모른다고 합리화 했다는 사실은 아예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렇다. 이건 자신이 아니라, 아버님께서 김상희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스스로를 숙이고 기만했다. "김상희 공주를요?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가보겠습니다." 미첼은 하던 일도 미루고 바로 기록의 관으로 달려갔다. 퓨리어스다! 천고의 보물 퓨리어스 한 방울. 이거 먹으면 평생 병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계집한테 가는 거.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돈 있어도 못 구하는 퓨리어스를 받았는데. 그도 스스로를 합리화 했다. '하긴. 일단 대외적으로 왕국의 보배니까 내가 진료를 보는 게 맞지.' 절대 퓨리어스에 낚여서, 행복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는 아주 행복하게 웃었다. 김상희 공주 한 번 봐주면 퓨리어스가 생기는데! '이상도 없잖아?' 행복해졌다. 이상이 없다는 건, 즉 할 일이 없다는 소리다. 이거 완전히 횡재다. 아무 일도 안 했는데 퓨리어스 1방울이라니! '또 봐주고 싶다!' 김상희의 걱정과 다르게, 미첼은 즐거웠다. 김상희의 생각보다 김환석은 제법 똑똑했다. 덧붙여 돈도 많았고. *** 대외적으로 나는 아주 많이 다친 상태이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나는 왕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대신 올 수밖에. 아주 발칙하고 건방진 계집이구나." 무슨 말이냐고? 아. 억울해. 그냥 억울한 것도 아니고 왕 억울. 아니. 비속어 좀 쓰자. 개 억울해, 진짜. 저 개차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설명을 해주자면, 김훈상이 나를 불렀단다. 뭐. 나는 모를 일이다. 쟤가 날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어쨌거나 쟤 말에 따르자면 쟤는 나를 불렀는데, 내가 몸 상태가 위중하여 자기한테 못 오니까 자기가 여기로 왔다는 거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발칙하고 건방진 계집이 된 거고. 이러니 내가 억울해, 안 억울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왕명을 안 들은 미친 계집이 됐다. 김훈상은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어이." "네. 아버님." 아니. 갑자기 스페셜 필드는 왜? "내 명치를 때려 봐라."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나는 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얘가 명치를 때릴 수 있도록 허락해 줬다는 거. 일단 한 번은 튕겼다. "어찌 소녀가 감히..." 아니나 다를까. 이 개차반은 개차반 답게, 개차반에 의한, 개차반 다운 명령을 내렸다. "안 치면 사형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 됐다. 다른 사람들 이목을 피하게 해주려고 스페셜 필드를 펼친 다음에 때리라고 하잖아. 어쨌든 왕 씩 되는 인간이 공주따위를 신경 써주고 있는 거니까 고마운 거긴 한데, 너 딱 걸렸다. 너. 명.존.쎄! (*명치를 존나 세게 때림이라는 뜻의 비속어) 나는 온 힘을 다해 쳤다. 컥. 어라. 나는 분명 들었다. 쟤 입에서 컥 소리 나왔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표정이 너무 멀쩡하다. 이상하네. 방금 신음소리 낸 거 같은데. 나는 매우 걱정 하는 척을 했다. "괘... 괜찮으셔요?" "이 정도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 그랬더니 얘도 허세 부린다. 우리 둘째 망나니의 허세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언코 이 개차반에게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대 더 때려봐라." "소녀가 어찌 감히..." 이제 형식적이다. 어차피 때릴 거다. 아니. 겁나 세게 때리고 싶다. 너. 딱 걸렸어. 명치 대라. 명. 존. 쎄! 큭! 어? 이번엔 진짜다. 진짜 들었다. 진짜로 컥! 소리 들었다. 김훈상 지금 신음소리를 냈다고! 아.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변태 같은가. 나는 변태 아니다. 그냥 단순히, 15년의 한풀이를 하고 있을 뿐! 개차반은 또 허세를 부렸다. "역시 계집따위의 주먹은 간지럽지도 않군." 그럼 또 때려도 되냐? 맘 같아선 한 10대쯤 치고 싶은데. 그리고 나는 느꼈다. 김훈상 저 개차반. 지금 마력 운용해서 몸 회복한 것 같다. 뭐랄까. 숨길 수 없는 뭔가 고통의 표정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지금은 사라졌다. 개차반이 뚜벅뚜벅 내게 걸어왔다. 솔직히 나는 조금 쫄았다. 스페셜 필드라고. 원래 이거는 사람 죽일 때 펼치는 거라고. 막말로 얘가, '왕 때렸으니 너 사형'이라고 말하면 그냥 죽는 거다. 아주 조금 긴장을 했는데, 개차반이 말했다. "내 손을 잡아라." ...응? 갑자기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김훈상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개차반은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또 말했다. "안아라." 예? 김훈상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듯, 시크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귀찮은 듯 팔을 벌렸다. 와. 저 무심한 표정. 뭐랄까. 안기기 싫은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이 있을 리 없지. 나는 쭈뼛쭈볏, 부끄러움을 타는 척 하면서 걸어가 김훈상을 안았다. "음..." 김훈상은 또 고개를 갸웃했다. "꽉 안아라."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얘가 도대체 왜 이래?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러고보니 예전 황제도 명치를 때리라고 했었고. 내가 명치를 때리는 게, 뭔가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아니, 근데 손 잡는 거랑 또 안는 거랑은 뭔 상관이래? 결국 개차반은 내 의문점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대신 내게 다르게 물었다. "차갑냐?" 아니. 일단 너도 사람인데 차갑지는 않지. 체온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 입은 또 나를 배신했다. "아버님의 품은 너무나 따스해요. 결코 차갑지 않답니다." 이건 내 입이 아니야. 내 의지가 아니라고. 엉엉.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오른 손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설마 이거... 내 머리 쓰다듬는, 뭐 그런 비스끄리무리한 거야?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안겨라." 갑자기 얘 왜 이래, 진짜. "내 품도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으니." 아니. 그니까 지금 당신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나. 뭐. 심각하게 잘못 했나? 개차반이 말했다. "많이... 걱정했다." ...아. 잊고 있었는데 나 납치당했다가 돌아왔구나. *** 김훈상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김훈상은 그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별로 당황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너는...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구나." "......." "스페셜 나이트의 경호를 뚫고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다니. 제법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찾아온 용건은?" 김훈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용건은 궁금하지 않다." "고려의 왕이시여." 김훈상은 검을 뽑아든 상태로, 천천히 그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말을 하려면 일단 살아는 있어야겠지." 그 말을 달리 하자면, "죽지 마라." 고려 왕궁 내. 스페셜 필드가 펼쳐졌다. 김훈상이 말했다. "김유신. 끼어들지 마라." 모두가 잠든 새벽. 과거, 전 세대의 대천재 김훈상의 전투가 시작 됐다. ============================ 작품 후기 ============================ 사실 김환성의 허세는 김훈상으로부터 왔다고 합니다 소제목에도 있었죠 그 아버지에 그 아들 0102 / 0192 ---------------------------------------------- 둘째 망나니의 분노 ***102 김훈상은 검을 뽑아들었다. 눈 앞에 나타난 상대와 몇 번인가 검을 겨루었다. 김훈상이 거리를 벌렸다.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구나."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는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김훈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제국의 반역자다. 곧 우리 고려의 반역자임과 마찬가지다. 어째서 굳이 날 찾아와서 죽음을 자초하려 들지?"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뭐랄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상,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저 말은 어이없다는 말이며 이해도 안 되는 말이기도 하다.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볼 수도 없다. 논리가 성립이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김훈상이라서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놈도 단단히 미친놈이군.'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정상은 아니다. 알렉스를 제외한 다른 신하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세상에는 미친놈이 딱 한 명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것과 나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제가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를 제가 어찌 감히 다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즉, 나를 다치게할 수 있다는 뜻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 합니다. 폐하께서 김상희의 아버지인 이상. 저는 폐하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김훈상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저 놈. 아주 재미있는 놈이다. 꼬박꼬박 폐하라고는 부르고 있다. 하지만 저 녀석에게 있어 '폐하'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폐하라서 못 때리는 게 아니고, 김상희의 아빠라서 못 때린단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조금 더 미쳐도 될 것 같습니다." "네가 이렇게 미쳤다는 거. 김상희도 알고 있나?" "이 정도로 미친 줄은 모를 겁니다." 뭐랄까. 김훈상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하늘 아래 미친 놈이 또 한 명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묘한 동질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나를 찾아온 이유를 말해라." 반역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처형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김훈상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제국이 시키는 대로 다 할 생각은 없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국은 김상희를 필요로 합니다." "계속 해봐." 그건 김훈상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제게는 프리온 나이트 6기가 있습니다. 1기는 김환석 왕자님에 의해 파괴되었죠." "프리온 나이트는 사람이 아니더군."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프리온 나이트보다도, 제국은 김상희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김상희가 고려의 보배가 아니었다면 벌써..." 프리지아처럼 되었겠죠.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이 것도 한진수의 추측에 불과했으니까. 대신 김훈상이 말했다. "혹시 프리지아는 제국에 의해 사라진 건가?" "그것 역시 알 수 없습니다. 다만...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프리지아의 실종은 제국이 벌인 자작극 같다는 겁니다." 김훈상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제국이 어째서? 왜 김상희를 얻으려 할까?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을까? '프리온 나이트. 제국. 여자. 도대체 뭐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한진수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째서 진심을 다하지 않으셨습니까?" 김훈상은 조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진심을 다하면, 이 왕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 허세처럼 보이지만, 저 말은 허세가 아닐 터. '하지만... 폐하시라면 그러지 않도록 조절도 가능하시겠죠.' 한진수는 눈치 챘다. '나를 봐주고 계시다.' 어쩌면, '나를 시험한 걸지도 몰라. 김상희의 남편으로 합당한지.' 그럴 수도 있다. 보편적인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제국의 반역자만 아니라면, 한진수는 그 어떤 여자를 거느려도 될 정도의 훌륭한 남편감이다. 애초에 여자의 아버지가 사위될 사람에 대해 평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저 훌륭한 사위를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모자를 판이다. 계집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보편적인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건 틀림 없지만, 한진수는 김훈상의 속내를 어렴풋이 파악했다. "프리온 나이트 1기를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제국의 근간이 되는 전력이니, 연구하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뭔가 마음에 안 든다.' 뭐랄까. 뭔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주 훌륭한 놈이다. 제국의 반역자? 그런 거 신경 쓰려고 했으면 애초에 전력으로 싸워서 체포하든 죽이든 했을 거다. 그 외에 다른 것들. 모든 점에 있어서 한진수는 완벽했다. '저 나이 때의 나는,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김훈상도 인정할 건 인정했다. 저 놈은, 자신을 능가하는 천재였다. 저 재능에 노력, 그리고 약간의 운만 더해진다면 자신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농후한 놈이었다.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리가 없다. 오히려 절하면서 넙죽 업어와야 할 판국이다. 그런데 기분이 나빴다. '도둑놈 새끼.'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지하지는 못했는데, '주기 싫다.' 뭔가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김훈상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중얼 거렸다. "스페셜 나이트의 감시망이 이렇게 허술했던가?"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너무 뛰어났던 거 아닐까요?" 김훈상은 계단 아래쪽을 쳐다봤다. 저 놈. 낯이 익다. 예전에도 제법이라고 느꼈었던 놈이다. 어째서 저 정도의 힘을 가진 녀석이 제국 마력학원의 하위 클래스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제의 왕자라고 했던가?"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기억해주시는군요."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저 놈은 여길 왜 찾아 온 거지. 알 수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나?" "스페셜 나이트의 이목을 피하여 이 곳으로 왔습니다."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찾는 것보다는 숨는 것이 쉽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찾는 사람보다 숨는 사람한테 유리하다. 그러나 이 곳을 지키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페셜 나이트다. 스페셜 나이트의 이목을 피하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안 된다. 김훈상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어째서 스페셜 나이트가 되고 싶지?" 크리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라. 이 말. 방금 전에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김훈상은 기억을 돌이켜봤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불과 1시간 전. 한진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상이 껄껄대고 웃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웃었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구나." "세상에서는 저를 미친놈이라 할 지 모르지만..."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활짝 웃었다. "사랑은 미쳐야만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김훈상은 크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놈. 꿍꿍이가 뭔지 모르겠다. 난데없이 스페셜 나이트가 되고 싶다니. 원래대로라면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가고 있는 셈이다. 단적인 예로, 지금 김훈상 뒤에서 은신하여 대기하고 있는 김유신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다. '아까부터 무슨 얘기가 오가는 거냐?' 무슨 외계어인 것 같다. 사랑이라느니. 어쩐다느니. 뭐가 어떻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나마 김유신은 김상희를 오래 봐와서, 이런 식의 대화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편이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새로운 언어. 혹은 새로운 암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랑은 미쳐야만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저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어느정도 내성이 있는 김유신이 이 정도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아예 이해 자체가, 아니. 논리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얼토당토 않은 대화가 오갔다. "그렇다면 네가 스페셜 나이트가 되려는 건 김상희를 지키고 싶어서냐?" "정확합니다." 김유신이 눈을 크게 떴다. '공주를 지키는 스페셜 나이트라고!' 이주형도 강준석도. 처음에는 엄청난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스페셜 나이트지, 시녀가 아니다. 지구식으로 비유해보자면, 대기업 회장이 계열사 사장에게 나서서 '저기 쓰레기 좀 버려라.' 라고 명령하는 꼴이다. 쓰레기. 까짓 거 못 비울 건 아니지만, 사장이 직접 나서서 할 일은 아니다. 기분이 굉장히 나쁠 거다. 스페셜 나이트들도 마찬가지다. 스페셜 나이트라는 명예를 가지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공주따위를 지키라고 한다고? 엄청 기분 나쁜 일이다. '신기한 건 이주형도, 강준석도 불만이 쏙 사라졌다는 거지.' 김유신은 자신 역시 그런 불만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떠올리질 못했다. '어쨌든 저 놈도 제정신은 아니군.' 그런데 김훈상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뭐랄까. 좋은 것 같기도하고 나쁜 것 같기도한 오묘한 표정이랄까. 김훈상은 생각했다. '저 놈은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라서 마음에 든다. 다른 거에 미친 것도 아니고 김상희에게 미쳐있지 않은가. 자신 역시 김상희에게 미쳐있는 상태다. '이런 미친놈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이로운 미친 놈들이다.' 이로운 미친 놈들이며, 또 바람직한 미친놈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입단을 허가한다." "감사합니다." "대신." 김훈상이 이번에도 검을 뽑아 들었다. "1분만 버텨봐라, 어디." 검을 뽑기는 뽑았는데 역수로 쥐었다. 즉, 검면으로 크리스를 공격했다. 죽일 생각은 없다는 소리다. 크리스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고. 저 죽습니다!" 김훈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퍽! 퍽! 퍽! 퍽! 요란한 격타음이 울려퍼졌다. 일부러 전력을 다해 때렸다. 마력을 컨트롤하여 검을 몽둥이처럼 만들어 버렸다. 김유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렇게 저 놈을 때리시는 거지? 때리는 것이 즐거우신가?' 김유신이 평소 파악한 김훈상은, 때리는 것에 취미는 없었다. 가끔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변태왕들도 있는데, 김훈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즐거워하고 계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크리스를 때리면서 즐거워하는 거지? 김훈상은 신이 났다. '더 맞아라!' 역시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한진수때랑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도둑놈 같은 새끼.' 아무리 딸등신이어도 '감히 내 딸을 넘봐.' 심리를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크리스를 내보냈다. "김유신. 저 놈을 김상희의 호위로 붙여. 스페셜 나이트의 기본교육만 시켜. 무력교육은 필요 없다." "예?" "저 놈은 이미 스페셜 나이트를 뛰어 넘었다." "......." 김훈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아까의 모습. 솔직히 말하면 찌질했다. 비명을 지르며 얻어맞는 모습이라니. 체통과 품위를 지켜야만 하는 스페셜 나이트의 모습으로는 영 아니었다. 하지만 김훈상은 알았다. '피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고?' 재미있었다. 놈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도 궁금해졌다. '정말 재미있는 놈들이 많이 생겼군.' 미친놈 1 한진수. 미친놈 2 크리스. '미친놈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제일 큰 미친놈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 나는 붕대를 감고 생활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엄청 불편하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불편한데, 더더욱 불편한 것이 생겼다.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얘가 이렇게 화난 모습. 처음 본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얘.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고 진심으로 화가 났다. "오, 오라버니..." "...죽고 싶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난데 없이 갑자기 찾아와 나를 노려보다가 처음 꺼낸 말이 '죽고 싶냐?'였다. '내가 뭘 잘못 한 거지?' 애교라도 부리면 풀어질까 싶지만 또 그게 무조건적인 법칙은 아니다. 저렇게 정말로 화가 났을 때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이유를 찾아야 해.' 이유만 알면, 풀어가기가 훨씬 쉬워질 거다. 그런데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누가 우리 둘째 망나니가 왜 화난 건지 좀 말해주면 안 될까요? 기록의 관 전체가 바르르 떨렸다. 쟤 지금. 정말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쟤가 저 상태로, 실수로라도 나를 건드린다면 아마 나는 즉사할 거다. "죽고 싶냐고!!!"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다. 아... 쟤 왜 저래. 진짜 망했다. 망나니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대답 안 해?" 나도 모르게, 내 등에서는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 "자까님. 등장 인물 설명 좀 해주시져?" "넹. 그럴까여? 누구부터?" "한진수!" "전 세계적 대천재이며 바람직한 미친 놈이에여." "크리스!" "뭔가 비밀이 많은 것 같은 백제 왕자인데, 이로운 미친 놈이에여." "김훈상!" "그냥 대놓고 먼치킨인 킹왕짱인데 제일 미친 놈이에여. 다른 말로 딸등신." "!!!" 0103 / 0192 ---------------------------------------------- 둘째 망나니의 분노 *** 김상희는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저 망나니가 정말 망나니스럽게 화가 났는가. 열심히 생각해봤지만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김상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김환성이 정말로 화가 났다면, 정말로 망나니스럽게 화가 났다면, 정말로 지금 외치는 것처럼 김상희를 죽이고 싶었다면, 김상희는 이미 산 목숨이 아닐 거다. 막말로 손가락 까딱만 해도, 김상희는 죽을 수도 있다. "오, 오라버니..." 김상희는 악! 비명을 질렀다. 허리. 하나도 안 아픈데, 아픈 척 했다. 이럴 때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실 우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최후의 보루다. 아무때나 너무 함부로 울면 안 된다는게 그녀의 지론이다. 김환성이 움찔 놀랐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빠르게 달려왔다. "야. 똥개! 너 왜 그래!" "허리가... 허리가 너무 아파요." "이런 젠장!" 와장창! 유리창이 깨졌다. 김상희가 정신을 차려보니, 김환성은 여기 없었다. 약 10초가 지난 뒤, 밖에서 으아아아아아! 하고 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김상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으아아아아! 비명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약 5초 뒤. 김상희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환성이 말했다. "얼른 봐!" 그의 허리춤에는 웬 남자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보아하니, 하늘을 날아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 같은데, 저 남자 지금 팬티바람이다. "봐! 빨리!" 김상희는 눈을 살짝 감았다. 이제야 상황을 좀 알겠다. '자는 의사 납치해서 데려왔다.' 회복의 관에는 유능한 의사들이 많다. 그리고 그 의사들은 서로간 비번을 정하여 휴식시간을 갖는다. 그게 환자에게도 좋다. 의사의 마력흐름이 망가지면, 환자를 보는 데에 있어서 악영향을 끼치니까. 김환성은 자고 있던 의사 하나를 무대뽀로 납치(?)해서 여기까지 날아왔다. 의사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참고로 김환성 쯤 되는 속도로 하늘을 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력비행술은 어렵다. 의사라고해서 하늘까지 빠르게 날아본 적 있는 거 아니다. 아무리 남자라도 무서운 건 무섭다. 기록의 관. 김상희의 방에 무슨 짐짝 버려지듯 버려진 의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고 하니, "헉...헉..." 붕대로 온 몸을 칭칭 감싼 공주가 보였다. '이 곳은 기록의 관...' 김환성이 말했다. "허리 아프대. 고쳐." 신경질을 냈다. "아 빨리!" *** 아무래도 안 되겠어. 김환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똥개. 확실히 안 아픈 거 맞아?" 이 때다. 김상희는 기회를 포착했다. "정말이어요. 오라버니가 제 곁에 계시니 아픈 것이 싹 달아난 것 같아요. 역시 오라버니는 제게 있어서 최고의 오라버니셔요." 김환성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웃음을 참았다. 오늘은 동생을 혼내러 왔다. "너 진짜 죽을래?" 하지만 말투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절대 '최고의 오라버니'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절대 절대 아니다. "소녀가... 오라버니께 큰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오씨..." 김환성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김상희를 때렸다. 사실 때렸다기 보기엔 좀 미안할 정도다. 들어올린 건 주먹이었는데, 결국 김상희의 이마에 닿은 건 검지손가락 뿐이었으니까. 혹시 몰라서 마력을 일부러 하나도 안 썼다. 까딱 잘못해서 마력 썼다가 진짜로 다치면 안 되지 않는가. 다른 공주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아니 이렇게 독대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만 어쨌든 김환성은 최대한 조심했다. "...걱정 했잖아." 김상희는 어이가 없어 웃을 뻔 했다. 그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니까... 내가 납치 됐었고 그 것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이 난리를 피운 거라고? 제국에서 여기까지 온 거고? 학원 때려치고?' 두 번 걱정했다가는 사람 잡겠네. 김상희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아까. 김환성이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에는 정말 놀랐다. 이를테면 그런 거다. 평소에 얌전한 사자가 있는데, 그 사자가 갑자기 엄청 배가 고픈 듯 주인에게 달려드는 상황. 그것보다 훨씬 무서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긴...' 김환석도 그렇고, 김환성도 그렇고 하여튼 못 말리는 망나니들이다. 김환석은 회복의 관 관장 미첼을 직접 보냈고, 김환성은 아예 의사 하나를 납치해왔다. 김상희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방금 그 난리로 인해 회복의 관 병실 하나의 벽이 사람 크기만큼 뚫렸다. 마음이 너무 급했던 김환성이 문을 사용 안하고 그냥 벽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너 진짜 안 아파? 많이 다친 거 아냐? 괜찮아?" 김환성은 속사포처럼 말한 뒤, 손가락을 까딱했다. 김상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김환성이 또 손가락을 까딱했다.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가까이 오라는 뜻 같은데. 그리고 김상희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망나니가 나를 진짜로 신경써주고 있네.' 원래대로면 그냥 마력으로 끌어당겼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허리 아프다고 말했더니 정말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력으로 당기면 쉬운 일을, 굳이 저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평소 김환성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김상희가 쭈뼛거리자 김환성이 신경질을 냈다. "아. 와서 안기라고. 멍청아." 답답해진 김환성은 성큼성큼 걸어가 김상희를 와락 끌어안는 척을 하면서 살짝 껴안았다. 김상희가 또 어디 다칠까봐 걱정되서 그랬다. 물론 김상희는 그것까지 캐치하지는 못했지만. 김환성은 허세를 부렸다. "특별히 안아주는 거니까." 마치 엄청나게 대단한 오빠님께서 하찮은 똥개 한 번 안아준다고 주장하듯 말이다. 김환성이 말했다. "주인 허락 없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닌 거냐? 어? 진짜 죽어 볼래?" ...저기요. 나 싸돌아다닌 거 아니고, 납치당했거든요. 의문의 복면인한테? 그 복면인이 한진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나 죽었을지도 모르거든요.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곡히 돌려서 표현했다. "그 때... 오라버니께서 옆에 계셨다면 소녀는 오라버니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주인이고 뭐고 하필 그 때, 네가 없어서 납치당한 거잖아.'라는 뜻이다. 김환성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뭔가 잘못한 건 없는데, 굉장히 뭔가를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엄청 화가 나서 찾아왔는데, 그래서 따지러 왔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하마터면 미안하다고 말할 뻔 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툭 내뱉었다. "시, 시끄러워. 똥개." *** 하... 힘들었다. 나는 두 망나니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것 같다. 그래. 나를 걱정해주는 건 알겠다. 그래. 그 정도는 알겠어. 그런데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걱정해줄 수는 없는 거야? 회복의 관 관장 미첼님을 보내질 않나, 자는 의사를 팬티바람으로 납치해오질 않나. 아니. 그건 범죄 아냐? 왕자면 다 용서 되는 거 맞아? 아니. 그리고 개차반은 자기를 줘패라고 그러질 않나. 얘네가 단체로 약을 했어? 왜 이래? 물론 뭐. 내가 납치를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거긴 하지만 그래도 좀... 어휴. 어째 내 주변의 남자들은 정상인이 하나도 없는 것 같냐. 나는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그런데 또 누가 찾아왔다. "누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혁이다. 환혁이 목소리! 그래! 환혁이는 그래도 정상에 훠얼씬 가까운 아이지. 예전에 나한테 '명령이야. 나랑 놀아.'라고 말했던 그 사건 이후로, 환혁이는 나를 부쩍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엉엉 울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누나. 누나를 위해 내가 선물을 가지고 왔어! 아주 어렵게 잡은 녀석이야!' ... 정상적인 아이라는 거. 취소...해도 될까? "와, 왕자님. 무, 무서워요." 나 이거 진짜 연기 아니다. 진짜 무섭다. 과거 환혁이와 상아는 매미니 메뚜기니, 하여튼 그런 작은 종류의 곤충들을 잡는 걸로 서로 경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세, 세상에. 이게 도대체 뭐야. 아. 무서워. 무섭다고. "내가 힘들게 잡은 슈퍼 자이언트 스네이크야!" 선물이라고 가져온 게 다름 아닌 뱀이다.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뱀! 그냥 작은 뱀이면 내가 그러려니 하겠다. 환혁이가 활짝 웃었다. "아직 애기라서 크기는 엄청 작은데, 금방 크는 녀석이야!" ...그 포인트에서 웃지 말아줘. 아직 애기 뱀이라는 건 알겠다. 크기가 겨우 3미터 밖에 안 되니까... 슈퍼 자이언트 스네이크가 괜히 '슈퍼 자이언트'가 아니다. 다 크면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뱀이 된다. 그러니까 저걸 내 선물이라고 가져온 거라고...? 환혁이의 얼굴을 봤다. 얼굴은 물론이고 옷도 굉장히 더러웠다. 겉모양만 보면 왕자가 아니고 거지 같다. 아마 저거 잡는다고 며칠을 돌아다닌 모양이다. 보다 못한 스페셜 나이트 강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자님. 그 뱀은 위험합니다. 김상희 공주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어? 왜?" 고마워요. 강준석씨. 나는 설명을 해줘야만 했다. "저는 마력이 없어요. 아주 미천하고 나약한 존재에요. 그러니까 그런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충분히 해칠 수 있답니다." 환혁이는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 되지. 음. 그럼 나 이거 다시 놓아주고 올게!" 환혁이도 나갔다. 거기서 끝인 줄 알았다. "언니!" 좋아. 이번에야말로 정상적인 나의 희망! 나의 힐링! 우리 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소녀는 언니를 너무너무 걱정 했어요! 언니! 언제 나아요? 상아는 언니가 아픈 거 너무너무 싫어." ...그런데 손에 든 그거 뭐니? "상아야. 혹시 그거 언니 선물이야?" "응! 언니 주려고 상아가 잡아왔어요." ...하. 기쁘긴 기쁜데, 나 왜 눈물이 나려고 해? "엄청 귀엽죠?" ...진심이니? 그게 귀엽다고? "상아야. 언니는 다리가 많이 달린 곤충은 별로 안 좋아해." 안 좋아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그거 독 엄청 센 거미 아니니? 아까 봤던 슈퍼 자이언트 스네이크의 새끼는 독은 없다. 하지만 저 거미는 맹독을 가진 거미로 유명하다. 이름이 뭐더라. 메탈릭 포이즌 스파이더였나? 정확하게는 기억 안나는데, 하여튼 엄청난 맹독을 가지고 있는 거미라는 것만 알고 있다. 크기는 약 30cm 정도. 생각해봐. 거미가 30cm 라고. 5cm 만 되어도 엄청 거대한 건데, 그것의 6배라고. 상상이 돼? 아. 소름. "상아야. 상아의 마음은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요." 나는 거미에 닿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상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줬다. 상아의 몰골을 보아하니, 얘도 고생을 좀 한 것 같다. 아무리 마력이 있다고 해도 너는 여자라고! 요 녀석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 이 세계에서 여자가 살아남는 법. 그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다. 상아는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자가 아닌 건 아니다. 여자라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여자니까. 여자의 방식을 써야 해.' 조기교육을 해야겠다. 상아는 자신의 선물을,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챈 것 같다. 시무룩해졌다. 그래서 나는 상아의 이마에 살짝 키스해줬다. 아주 작게 쪽, 소리가 났다. 상아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내일부터 상아는 언니랑 매일매일 데이트할까?" 상아가 활짝 웃었다. "응!" *** 알렉스는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김상희 공주님이 김상아 공주님을 가르친다고!' 오오. 오오. 엄청나다. 엄청난 것이다! 이 것은 혁신이 아닌가! 알렉스는 흥분했다. "김상희 공주님. 저도 참관하면 안 됩니까?" 학자로서의 학구열이 불타 오른다! 김상희 공주 본인이 직접 전하는 상희학이라니! 알렉스는 행복해졌다. "학자님이요...?" 김상희는 알렉스가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지 모른다. 애초에 그런 학문 같은 게 있다고 생각도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상식적으로 그런 학문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저도 꼭!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건..." 김상희는 김상아를 '여자'로 키우려고 한다. 그녀도 남자에게 애교 부리고 할 말도 가려 하고, 돌려 말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이 그렇다. 세상이 그렇다면, 그 세상에 최대한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알렉스 학자님이 계시면 제대로 말을 못 할텐데...?' 알렉스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한 번 참관하도록 하죠!"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알렉스가 왜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지. 뭐가 저렇게 행복한지 말이다. 김상희는 방으로 돌아왔다. '어라?' 방 안은 어두웠다. 뭔가 조금 이상했다. 이상한 일이 펼쳐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둘째 망나니 분노하긴 분노했는데 3초만에 녹았다고 전해달랍니다 0104 / 0192 ---------------------------------------------- 크리스의 은밀한 협박 *** 방 안은 어두웠다. 내가 들어가자 저절로 불이 켜졌다. 어라. 뭐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붉은 색의 향연이었다. 향기로운 장미향이 코에 스며 들었다. 아. 냄새 좋다. 나 이 냄새 좋아. '이건 도대체...?' 나 이런 광경. 15년을 살면서 처음 본다. 지구에서도 한 번 밖에 못 봤다. 진수가 내게 프로포즈 한답시고 이벤트를 해줄 때. 그 때 한 번 봤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마음에 들어?" 주위는 온통 장미꽃 투성이. 그리고 장미꽃들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마치 나보고 걸어오라고 하는 듯. 나는 뭔가에 홀린듯 중얼 거렸다. "예뻐...요." 사실 말이지, 정말 예뻤다. 마치 반짝이는 장미의 화원에 발을 들인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마음에 들어 보이니까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이 때까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장미들은 그냥 장미가 아니라, '로얄 로즈'라고 불리는 특수한 장미꽃으로 향이 일반 장미보다 강하며, 마력을 조금 흡수하게 되면 스스로 빛을 내는 독특한 장미꽃이었다. 붉은 색 뿐만 아니라, 각 꽃마다 여러 가지 색깔을 낸다. 참고로 가격은 한 송이에 약 1만원 가량. 대충 봐도 수천 송이는 되는 것 같으니, 적어도 수천 만원 정도는 들어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예쁘다...' 어둠 사이로, 각양각색의 빛을 내는 이 장미들을 보면서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일단 나는 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진수가 이따금씩 꽃을 사다주곤 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와." 언제나 그렇듯 크리스는 활짝 웃었다. 침대 바로 앞. 크리스가 서있었다. 나는 물었다. "소녀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 "장난 같아?" "......." "장난 아닌데. 나 진짠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나는...' 나는 진수가 아닌 다른 사람은 남자로 보이질 않는다. 크리스가 잘생긴 것도 알겠고, 이제 내 편인 것도 알겠다. 고마운 것도 맞다. 하지만. '하지만 크리스가 진수는 아니야.'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크리스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나는 어떡하면 좋지?' 나 참. 누가 들으면 정말 황당한 고민이라고 하겠다. 이 세계에서 여자에게 선택권 같은 건 없다. 그저 남자가 뭔가를 요구하면 그 것에 따라야 하는 게 맞다. 원래대로라면, 크리스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나를 취할 수 있다. 크리스가 신경써야할 것은 원래 약혼자인 한진수에 대한 예의인데, 지금 진수는 제국의 반역자로 쫓기고 있는 상태. 그러니까 크리스가 신경써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는... 나를 정말로 배려해주고 있어.' 나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크리스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았다. "쉿." "......." 크리스는 또 활짝 웃었다.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말하지 마." "......." "나는 그냥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게 기뻐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작은 이벤트를 벌였을 뿐이거든. 당장 뭐 너보고 나 좋아하라고 그런 말 안 해. 걱정하지 마."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반짝 반짝 빛을 내는 장미들이라니. 신기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서 감사를 표시했다. "감사해요. 크리스 학우님."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지금 당장은."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학우님 빼고, 크리스라고 불러주면 안 되겠어?" "제, 제가 어찌 감히..." 내가 어떻게 감히 크리스를 크리스라 부른단 말인가. 하다못해 내가 예뻐하는 남동생인 환혁이에게도 꼬박꼬박 '왕자님'이라고 부르면서 존댓말을 쓰고 있는데, 타국의 왕자인 크리스를 이름으로만 부르라는 건 내게 형벌과도 같은 거다.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이 본다면? 나는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지금처럼, 우리 둘만 있을 때. 딱 그 때는 그냥 내 이름 불러줘." "하지만..." "김상희." 크리스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이름 부를 거야, 말 거야?" 아니. 이 인간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내가 널 이름으로 부르냐? 괜히 얘기 잘못 퍼지면 나만 엄청 곤란해진다고. 미친 계집이라고 말야. "이름으로 안 부르면 여기서 키스 해버린다." 크리스는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행동으로 보였다. 크리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크리스는 내 행동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내가 뒷걸음질 치도록 내버려뒀다. "그렇게 키스 받고 싶으면 계속 학우님이라고 불러. 사실 난 학우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 그럼 키스할 수 있으니까." 그게 말이냐 막걸리냐. 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냐? 아오. 너도 명존쎄 리스트에 포함시켜도 되겠니? 싫으나 좋으나, 얘는 지금 나 엄청 봐주고 있다. 그래. 나도 안다. 얘가 그냥 마음 먹고 내게 키스하면 나는 거부할 수도 없다. 남자에겐 마력이라는 게 있으니까. "크, 크리스..." "그래. 그렇게 부르니까 얼마나 좋아?" 크리스는 내 침대에 앉았다. "아쉽네. 키스할 수 있었는데." ...이봐. 너 전혀 아쉬운 표정 아니거든? 오히려 즐거워 보이거든?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활짝 웃었다. "그냥 네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아. 나 되게 멍청해 보이지 않아?" "......." 나는 정말 모르겠다. 크리스는 정말 이상하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다. 백제라는 곳.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어떤 곳이길래 저런 특이한 아이가 나올 수 있을까. "근데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네. 자존심도 상하고." "제가... 무언가를 잘못 했나요? 저는 너무나 아둔하여..."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해야 했다. 이 곳은... 그런 세계다. 크리스는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하지만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크리스가 마력으로 내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야. 나도 말 좀 하자! "네 안에 누가 그렇게 크게 있길래, 나를 그렇게 거부하는지 모르겠어." 크리스는 또 활짝 웃었다. 쟤는 참... 정말 속 없이 잘도 웃는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 알고 있어서 더 짜증나. 아까는... 반 쯤 장난이었는데, 그렇게 기겁해서 뒷걸음질 칠 줄은 몰랐거든. 그거 되게 자존심 상한다?" "......." 이봐. 내가 무슨 말이라도 좀 하게, 이 마력 좀 어떻게 해봐. 아오. 진짜. 내가 명존세를 해야 할 대상은 진짜 다름 아닌 마력이다. 왜 신은 남자에게만 마력을 준 거냐! 그 신. 어디 한 번 나와봐라. 명치 한 번 때려주게. 크리스는 여전히 활짝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괜찮아. 내가 자존심 상하는 거보다..."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겨우 그런 거보다 내가 널 더 많이 좋아하거든." 나는 알게 됐다. 크리스가 내 새로운 스페셜 나이트가 되었다는 걸. 크리스가 말했다. "...내가 지켜 줄게." *** 김상희는 김상아를 교육시키기로 했다. 이 세계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상, 여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익혀야만 했다. 김상아는 언제나 김환혁과 어울려 다닌다. 마력도 갖고 있다. 그렇다보니 사내아이와 똑같아져 버렸다. '이래서 교육환경이 중요하다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클 수는 없는 법이다. "상아야. 오늘부터 뭔가를 잡아오는 건 금지야." "하, 하지만 환혁 오라버니는 항상 나보다 큰 걸 잡는데!" 상아는 그게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상아야. 그것부터가 잘못 됐어. 아. 이 아이를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는 거지? 하고 김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남자는 경쟁 대상이 아냐.' 이미 상아와 환혁이 사이에서, 능력의 차이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상아는 여자이고, 여자로서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는 경쟁 자체가 안 된다. 그래서 경쟁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조련의 대상이지.' 조련의 대상이다. 지구에도 이런 말이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라고. '갑갑하네.' 한편, 알렉스는 신이 났다. '오오! 여성스러움이라는 건가!' 여성스러움. 이 세계에서 여성스러움이라는 거 별거 없다. 그냥 천하고, 할 줄 아는 거 없고, 노예처럼 일만 하고, 남자의 성욕이나 풀어주고. 그냥 그런 거다. 천하의 알렉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알렉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세계의 남자들 대부분이 '여성스러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 '상희학에 접목 시켜야겠어. 상희학에서 말하는 여성스러움이라는 건, 기존의 여성스러움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 그랬어! 좋아! 좋다고!' 김상희는 알렉스의 표정을 훔쳐봤다. 뭔가 좀 불길하다. 상아의 수업에 왜 저렇게 열성적으로 참여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필기까지 하고 있다. 당연히, 일반적인 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김상희의 말을 토시하나 안 틀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아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상아의 질문까지도 완벽히 카피했다. 마력이 있어서 가능하다. 지금 펜이 움직이는 거. 김상희의 눈으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아마 지구의 개념으로 치자면, 분당 타자속도 3천타는 넘을 것이다. 김상희는 또 땡을 외쳤다. "땡!" "왜, 왜! 상아는 분명히 맞췄는데!" 질문은 이랬다. 무거운 돌이 있다. 들 수는 있는데 힘들 것 같다. 옆에는 왕자님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였다. 상아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아주 쉽게 문제를 냈는데, 상아의 대답은 해괴할 정도였다. '이 아이를 어떡하지 진짜...' 상아가 낸 답은, 돌을 부숴버리는 거였다. 돌을 부수면 가벼워진다나 뭐라나. 한편, 알렉스는 곰곰히 생각했다. '정답이 도대체 뭐지?'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만학도 알렉스는 학구열에 불타올랐다. 뭔가, 그럴싸한 답이 떠올랐다. "공주님. 혹시 정답은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겁니까?" 알렉스가 생각하기로, 만약 김상희가 왕자들 중 한 명에게 들어달라 부탁한다면 분명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가 알렉스의 한계였다. "땡." 김상희가 생각하는 정답은, 일단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들어 보고 -들어 보는 척을 하고- 구원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왕자를 쳐다보며, 이걸 들 수 있는 분은 정말로 멋진 분이실 거에요, 등의 멘트를 날리는 거다. 물론, 몇 가지 제약이 따른다. 애초에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관계는 미리 쌓아놔야 한다는 거다. 상희가 보기에 상아는 이미 그 정도는 됐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갈 길이 머네...' 어찌됐든 상아는 좋아했다. "오라버니. 소녀는 상희 언니랑 매일 매일 데이트를 한답니다!" "흐, 흥! 그런 거 하나도 부럽지 않아!" 김상희는 또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애초에 왕자님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아는 환혁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요즘은 딱히 이길 구석이 없으니, '언니와 데이트를 더 많이 한다!'라는 걸로 경쟁을 하는 모양이다. "누나. 나도 누나랑 데이트 할래. 왜 상아랑만 해? 나도 누나랑 데이트 하고 싶어." 그래도 예전과 달리, 명령이니까 데이트 해. 이런 말은 안 했다. 그런데 알렉스가 김상희를 찾아왔다. "왕자님. 공주님. 저는 지금 국왕폐하의 명령으로 김상희 공주와 잠시 독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상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올 것이 왔다. '드디어...' 저번에 알렉스와 따로 얘기했던 게 있다. 상대가 알렉스라서, 그래서 얘기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못냈을 거다. 김상아와 김환혁을 밖으로 내보낸 뒤, 알렉스가 말했다.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김상희가 물었다. 솔직히 조금 긴장 됐다. "어떻게 됐나요?" ============================ 작품 후기 ============================ 오늘은 후기를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네요 ㅠㅠ 추천 코멘트는 정말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 0105 / 0192 ---------------------------------------------- 백제에 가보고 싶어요 *** 나는 알렉스학자님과 밀거래(?)를 했었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하고 있는 내가 참... 알렉스씨 눈에는 얼마나 별종으로 보일까?' 이 세계의 상식. 그 상식이 내게는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이걸 해줄테니, 당신은 내게 이걸 해줘.' 이런 건 지구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상대는 남자 중에서도 원로 학자이자 왕의 총애를 받는 남자이며 나는 그저 허울뿐인 공주다. 일단 뭐. 대외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알렉스씨에게 뭔가를 제안한다는 건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스씨도 진짜 특이한 사람이기는 해.' 요즘은 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뭐라더라, 무슨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있단다. 그 학문에 내가 아주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뭐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나는 정보가 많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궁금한 것들 많다. 특히 왜 남자들이 나보고 명치를 때려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마력흐름이 약간 좋아진다고 얼핏 들은 것 같긴한데 확실하진 않다. '개차반은 심지어 안아보라고 하고, 손도 잡아보라고 했었지.' 나와의 스킨십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 같기는 한데, 누구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어쨌거나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정보가 굉장히 제한되어 있는 상태고, 이 제한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하여 알렉스씨와 거래를 한 거다. "여기 있습니다.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 걸리면 저도 모가지입니다." 알렉스씨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목에다 손을 대고 까딱거리면서 칵, 칵, 칵, 킥!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봐요. 당신 80세가 넘었잖아. 그리고 대학자잖아. 제스쳐가 너무 적나라하고 유치한 거 아니에요? 게다가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눈동자는 기이한 열망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여튼 이상한 학자님이다. 그렇다면 이게 뭐냐고? 별 거 아니다. 그냥 책이다. 일단 겉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일반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기록의관 꼭대기. 21층에 있는 왕궁 특별 서고에 있는 책이다. 왕궁 특별 서고. 이 곳은 절대 금녀의 구역이다. 시녀조차도 출입이 불가능하다.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아예 여자의 출입 자체가 금지된다. 남자들이라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고려 학회의 승인을 얻고, 왕의 재가를 받은 자만이 특별 서고에 출입할 수 있는데, 그 서고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많은 책이 수록되어 있는지. 그건 알려진 바가 없었다. 왕궁의 학자들도 말을 해주지는 않았고. 내가 생각해도 참 감회가 새롭다. '이런 거래를 하게 될 줄이야.' 또 계집아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도록 해라. 태어나자마자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저딴 게 아버지라고. 그 때부터 나는 개차반을 개차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하여튼 그런 곳에서 내가 왕궁의 대학자와 이런 식의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내 주변의 세상은 많이 변했다는 뜻이다.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무슨 내용이 있을까?' 책을 펼쳐봤다. 별 기대 안하고 열어봤던 첫번째 책인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 김상희는 알렉스를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남자에게는 할 수 없는 말도, 알렉스에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알렉스는 무슨 말을 하든지 잘 받아들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세상?' 이 세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과거,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학자들에 의해 학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으며 갈릴레이 갈릴레오 역시 지동설을 주장하다 재판까지 받게 됐다. 당시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동설은 하느님을 위협하는 이단의 학문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거보다 더 심각한 얘기인데, 이건?' 오래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김상희는 한국을 떠올렸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 그 갈등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가. 이건 거의 그 정도 수준이 아닐까 싶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세계. 어떻게 이런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그 정도면 차라리 말할 수 있겠다. 옛날에는 이랬대요. 제 해석이 역시 틀린 거겠죠? 헤헷. 하고 웃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마력이 원래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특별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책들은 대부분 해석이 불가능한 책들이다. 여태까지 해석을 할 수 없었던 책들. 그러나 김상희는 읽을 수 있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야?' 원래 고대의 기록이라는 건 뚱딴지같은 소리가 많다. 뜬구름 잡는 소리도 많고, 그냥 헛소리로 치부되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그것과 거의 비슷한 얘기다. "상희 공주님. 뭐 좀 알아낸 거 있어요?" 악! 깜짝이야! 김상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머리로 알렉스의 턱을 세게 쳤다. 알렉스가 물었다. "괘, 괜찮아요?" 당연히 김상희만 아프다. 이 정도 충격은 마력이 알아서 몸을 보호한다. 다시 말해, 알렉스의 몸은 마력으로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김상희는 머리를 비비면서 울상을 지었다. "놀랐잖아요. 갑자기 그렇게 뒤에 계시면 어떡해요?" 그냥 이렇게만 말하면 아주 건방지고 몰상식한 계집이 된다. 여기에 김상희 특유의 애교가 녹아 들었다. '그래. 이건 내가 아니야. 나를 잊자. 나를 잊는 거야. 15년 동안 잘 해왔어 나는.' 스스로를 속이면서, "히잉... 소녀는 너무 아퍼요." 그것도 일부러 약간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굳이 문자로 표현해보자면 '힝. 아파쪄요.'와 같은 느낌이다. 이럴 때마다 김상희는 스스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놀랐잖아요. 갑자기 그렇게 뒤에 계시면 어떡해요? 하면 아주 싸가지 없는 계집이 되는 거니까. "허허허..." 비록 상희학을 공부하고는 있지만 김상희에 대해 큰 면역력을 가진 건 아닌 알렉스는 그저 허허거리고 웃고 말았다. 말의 내용을 들어 보면 아주 건방진데,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전혀 나쁘지가 않다. "미안합니다. 인기척을 좀 낼 걸 그랬나?" 이상했다. 자꾸만 허허허- 하고 웃음이 나왔다. 알렉스의 학구열이 또 불탔다. '좋아. 다른 사람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예를 들어 다른 공주라고 가정을 해보고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화를 냈겠지?' 아마 그랬을 거다. 뭐. 다른 학자들과는 다르게 그냥 조심 좀 하세요, 정도로 끝났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그 공주가 놀랐으니 조심 좀 해라라, 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좀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어디 감히 공주따위가? '분명히 그런데... 상희 공주님은...' 다른 공주와는 다른 뭔가가 있다! 알렉스는 그 실체를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알렉스는 분명 특이한 학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이 세계의 '남자'다. 이 세계의 남자들에 비해서 김상희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거지, 지구의 남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애초에 지구의 남자들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고, 생활 방식 자체가 다르다. 알렉스의 학구열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뭐가 다른 거냐!'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냐! 불가사의하다!' 한편, 김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얘기는 할 수 없어. 일단 더 많은 정보를 끌어 모으자.' 특별 서고에는 대부분 고대의 기록들. 그 중에서도 해석이 불가능한 내용들이 많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 중이다. "공주님. 해석은 됩니까?" "고려의 뛰어나신 학자님들도 아직 못하고 계신데 미천한 소녀가 어찌 해석을 할 수 있겠어요? 소녀는 그저, 특별서고에 모셔진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랍니다." 어쩜. 어쩜 저렇게 말을 예쁘게 할까? 알렉스는 또 흐뭇해지고 말았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허허. 그거 다 보시고 나면, 또 가져다 드리죠." 김상희는 스스로를 또 잊기로 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내 안에. 30살. 아니 살아온 세월로만 따지면 40살 넘는 아줌마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거다. 이건 내가 아니다! 를 속으로 외치면서 겉으로는 예쁘게 말했다. "와아! 알렉스 학자님 최고!" 김상희는 활짝 웃으며 알렉스를 껴안았다. 나는 당신이 정말 정말 좋아, 라고 주장하듯 말이다. 알렉스는 허허! 웃고 말았다. 이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이거 아주아주 좋은 기분이다! '그래서 폐하가 이리저리 날리다가 못 이기는 척 하고 안아주고 그랬나?' 이제 김훈상의 마음도 이해하는 학자가 됐다. 알렉스가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사이, 김상희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 그 외에도, '뭔가... 이 세계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아. 남자들 조차도 모르는... 그런 뭔가가.'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당분간은 모른 척 하자.' ***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봤다. 그래서 확실해진 게 있었다. 일단 고대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저게 소설이 아니라면 과거에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했었다. 흔히들 말하는 고대. 라고 한다면 보통은 '마도 문명'을 뜻한다. 그 마도 문명 시대에는 남자와 여자가 마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여자의 마력이 더 높았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간의 어떠한 차이가 있다고는 하는 거 같은데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 더 공부가 필요하다. '애초에 몇 권의 책으로 고대 문명을 이해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 그런데 왜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남자만이 마력을 갖고 있을까? 또 왜 여자만 이렇게 많이 태어나는 걸까? 그 의문점들. 지금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남자들에게 발설 하지 않으면서, 그냥 순수한 척. 모르는 척 하면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상희. 요즘 공부 열심히 하네?" "아... 크리스 나이트님." 이젠 학우님이 아니다. 크리스는 어쩐 생각인지는 몰라도 제국의 마력학원을 그만 두고, 스페셜 나이트로 입대했다고 한다. 그것도 나를 지키는 스페셜 나이트를 자원했다고 들었다. 그것부터가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어째서 제국 마력학원의 하위 클래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을까? 예전 던전에 갇혔을 때도, 이 아이는 뭔가 특별했다. '정말... 비밀이 많은 아이야.' 언제나 그렇듯 크리스는 활짝 웃었다. 몸을 살짝 숙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름으로 안 부르면 키스해버린다고 했어, 안 했어? 지금 우리 둘 밖에 없는데 그냥 확 해버려?" "크, 크리스!" 그제서야 크리스는 허리를 세우며 일어섰다. "거봐. 이름으로 부르니까 좋잖아. 내가 꼭 이렇게까지 협박을 하게 만들어야겠어?" 그리고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 좋아. 경고는 두 번 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진짜로 키스할 거야. 경고 두 번이나 했어 나는.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다고." 그게 최선을 다한 거냐...? 협박 같지도 않은 그딴 협박이라니. 나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곳...아. 잘못 했구나. 내가 진수 마음고생 많이 시키긴 했었지. 그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는 처음부터 특별했어.' 성장환경이 다른 곳에서 자랐다고 했다. 백제라는 곳. 궁금해졌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책으로 접할 수 있는 내용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거의 평등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무시받는다고도 했고. 백제라는 곳이 궁금해졌다. '한번 쯤... 내 눈으로 보고 싶어.' ============================ 작품 후기 ============================ 오늘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 '뭔가... 이 세계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아. 남자들 조차도 모르는... 그런 뭔가가.'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당분간은 모른 척 하자.' → 작가해설: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알렉스씨는, 김상희가 알렉스를 속이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상희학 공부해도 별로 소용 없네여... 아직도 갈 길이 멀군요... (힘내 알렉스) 0106 / 0192 ---------------------------------------------- 백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크리스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까 김상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음부턴 진짜로 키스할 거야. 경고 두 번이나 했어 나는.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다고.' 스스로 아주 흡족했다. 이렇게 훌륭한 협박이 또 있을까 싶었다. 마음에 들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와 마주쳤다. "잠깐만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고려의 나이트들 중 한 명일 것 같다. "예?" 크리스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주위를 둘러봤다. 마력을 사용하여 감지까지 했다. 주위엔아무도 없었다. 크리스가 작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남자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척 보기에도 어린 놈이다. 어린 놈들 중 자신에게 하대를 할 만한 사람은 왕자님들 정도다. 그 외에 다른 놈들은 하대를 할 수 없다. 자신은 긍지 높은 고려의 나이트가 아닌가. 그 때, 크리스가 말했다. "Kerannis Frential." "......." 고려의 나이트. 6대대 소속 정윤한. 그러니까 과거 죽은 줄만 알고 장례까지 치러졌었던 그의 눈동자의 초점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백제의 왕자 크리스다." 정윤한이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너는 이 곳에서 뭘 하고 있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크리스가 정윤한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윤한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크리스를 멍하니 계속 쳐다봤다. "Essantia Kerannis Frential." "......." 머뭇거리던 정윤한이 말을 이었다. "저는 고려를 살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고려의 자금력에 관한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누구의 명령이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크리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보다 더 상위 명령어가 입력되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Essantia Kerannis Frential'보다 더 높은 상위 명령어는 많아 봐야 5개가 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나이트는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뜻이다. "임무 수행 기간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고려의 자금력을 조사한다라.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려가 막강한 나라인 것은 이전부터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무역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스페셜 나이트라는 강대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예전부터 경제대국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아마, 상부에서는 '뭔가가 있다'라고 확신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확신을 했다면 임무 수행기간을 저렇게 무작위로 주지는 않을 거다. 언제까지, 어떠한 내용을 알아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명령이다. 저렇게 광범위한 주제를 가지고 기간조차 정해지지 않고 조사를 하는 것은, 아마도 조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럴 거다. '누구지? 누가 상위명령어를 사용하여 고려왕궁에 이 놈을 침투시킨 거냐?' 크리스는 알 수 없었다. 예전 김훈상의 명령으로 인해 정윤한이 백제에 침투했다가 돌아왔다는 것을.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세명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그 놈이 관련되어 있다면 피곤해진다.' 원래대로라면 신경을 안 쓰는 게 맞다. 신경 안 써도 된다. 왕궁 내 화장실. 그는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의 그는 히죽 웃고 있었다. 크리스는 웃지 않았다. 히죽 웃고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봤다. 크리스는 거울 속. 자신과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맞아. 사실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대로는 그런데... 상희가 얽혀있을 수 있잖아."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고려왕궁. 고려왕가와 관련된 일이라면 상희와 관련이 없을 수는 없겠지. 상희에겐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더라도. 만약 고려에 피해가 간다면... 고려의 왕이나 왕자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상희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크리스는 활짝 웃었다. 이번에는, 거울 속 크리스는 웃지 않았다. "나는 김상희가 가슴아파하는 거. 보기 싫거든. 알아. 나도 미친 거. 정상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어. 아. 알았다고. 잔소리 좀 그만 해. 임무를 잊은 건 아니야. 임무는 확실히 해. 걱정 말라고." *** 크리스는 이제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다. 왕이 직접 그렇게 임명했다. 하지만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인 김유신은 크리스에 대한 신뢰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김유신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무기는 모두 내려놔라." 크리스는 얌전하게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탐색에 임했다. 왕의 방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으니까 그냥 들여 보내." "하지만 폐하!" "김유신. 잊고있나 본데."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내가 너보다 세다?" ...잊지는 않았습니다만... 김유신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저는 이 아이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수상쩍은 구석이 지나치게 많은 놈 입니다." "그래서 스페셜 나이트 전체임무에서는 빼주잖아. 그냥 형식상 스페셜 나이트고 실제로는 김상희 호위인데 뭐."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활짝 웃었다. 그도 그 스스로의 입장을 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서 제국 마력학원의 하위 클래스에 입학해 있었다. 여태까지 소문도 나지 않았다. 김유신이 그를 경계하는 이유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면 소문이 났어도 벌써 났어야 했다. 그런데 나지 않았다. 뭔가 있다는 거다. 어쨌든 김유신은 크리스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며 스페셜 나이트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왕이 스페셜 나이트라니까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크리스는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태평스레 말했다. "임무와 전쟁에서 팀웍은 엄청나게 중요한 거죠. 저도 이해합니다." "......." "저를 임무에서 제하셔도 좋습니다. 저를 스페셜 나이트로 인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다만, 제가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주셨으면 좋겠네요." "......." 김유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데, 또 이상한 건 저 말이 이상하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다른 여자라면 모르겠는데 김상희니까. 김상희니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 크리스는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부터 얘기했다. "김상희 공주가 백제를 방문하고 싶어 합니다." 김훈상으 피식 웃었다. "백제? 네 고국 말이냐?" "예. 알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그걸 왜 네가 날 찾아와서 말하지? 겨우 그런 게, 일국의 왕을 찾아와 직접 말할 정도로 크고 중한 일이냐?" 보통의 경우. 그러니까 일반적인 신하들이라면 왕이 이렇게 말하면 기가 죽는다. 주눅들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 그리고 김훈상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겨우 공주따위의 소망 때문에 스페셜 나이트가 왕과의 독대를 요청하여 말을 하다니. 이건 엄연히 왕을 무시하는 행위다. 왕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기도 했고. "크고 중한 일은 아니나, 김상희의 일입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혹시 모른 사태 -혹여라도 크리스가 김훈상을 암습한다거나-에 대비하고자 김훈상 옆에서 대기하던 김유신은 말하고 싶었다. '폐, 폐하. 지금 동공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김유신은 김훈상과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전투들도 꽤 된다. 김훈상이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평탄대로로 이 자리에 오른 건 절대 아니니까. 그 때마다 김훈상은 언제나 침착한 상태를 유지했다. 언제나 이성적이었고 냉철했다. 김훈상은 그런 왕이며, 그런 주군이었다. 분명히 그래야만 하는데, '폐하께서 또 이상하시다.' 오늘은 왜 저렇게 불안해 보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크리스는 말하고 싶은 것을 참지 않았다. "폐하. 지금 엄청 상관 있다는 표정이신데요...?" 그랬다가 피식 웃었다. "그럼요. 김상희 공주따위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죠. 그렇다면 제가 김상희 공주를 데리고 백제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일단 제 임무는 임무니까 김상희를 지켜야 하기는 하는데, 저는 백제를 가야 하니까요. 그럼 어쩔 수 없이 김상희를 제가 데리고 가야겠네요." 김훈상은 소리칠 뻔 했다. 뭐라고! 이 도둑놈 새끼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참아냈다. 도둑놈? 무엇을 도둑질 한단 말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김훈상은 거기까지는 아직 인정하지 못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김훈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김상희와 백제를 갔다 오겠다. 이 뜻이냐?" "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휴가를 신청하는 겁니다. 저는 뭐 일단 스페셜 나이트로 인정되지 않는 상태라서 김유신 대대장에게 신청할 수도 없고. 신청 절차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그냥 저를 직접 임명하신 폐하를 찾아왔습니다." 김훈상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크리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크리스의 상황이 그렇다. 스페셜 나이트이기는 한데, 스페셜 나이트로 딱히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 김훈상도 그걸 알기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김유신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신입교육을 시키려고 했던 스페셜 나이트들이 하필이면 부재 중이라서..." 김유신도 김유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고, 나중에 처리해도 될 일이라 조금 미뤘다. 신입교육을 담당하는 스페셜 나이트가 현재 휴가 중이기도 했고. 하지만 김훈상은 김유신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저 도둑놈 새끼.' 자꾸만 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지금 내 딸 데리고 외박 하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는 거 같다. 하루 이틀 거리도 아니고 적어도 열흘 이상 걸리는 거리다. '그 기간동안 함께 있겠다고?' 짜증이 났다. '외박을 한다고?' 김훈상은 표정을 굳혔다. 그 표정을 본 김유신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 표정의 김훈상. 김유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7년 전. 도르긱의 멸망을 결정 지었던, 평원 대전투 때의 단호했던 김훈상의 표정이다. 그 때 김훈상의 명령으로 인해 도르긱의 백성 수천 명이 몰살당했었다. 그 정도로, 단호할 때에는 확실히 단호해지는 왕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김훈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르긱 평원 대전투때, 수천명을 학살하라 명령을 내렸던 그 단호한 표정으로 말이다. "김상희 공주의 외박은 절대 불가하다." '외박'이란 단어를 꺼냈을 뿐인데 몹시 불쾌해졌다. '외박'이란 단어. 뭔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괴상한 단어였다. "다시 한 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왕을 능멸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처음이니 참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크리스는 찔끔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김훈상이 대단하다, 대단하다 말만 들었지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고려의 왕이다.' 한편, 김유신은 조금 헷갈렸다. '이상하네.' 왕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려면 아까 진작에 냈어야 맞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샌가 화를 마구 내고 있는데, 단순히 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김상희 공주의 외박은 절대 불가하다.'라는 말을 꺼냈을 때 부터였던 거 같다. '그 때부터 화가 나신 거 같은데?' 하여튼 김유신은 나서지 않았다. 지금의 김훈상은 건드리면 안 된다. 과거에는 김환성보다도 더 어디로 튈지 몰랐던, 그런 천방지축이었다. '조용히 있자.' 비록 헷갈리고 궁금하긴 했지만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 나는 크리스가 우리 개차반씨한테 혼이 났다는 걸, 크리스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아. 뭔지 대충 알 것 같다. 외박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을 굳이 붙였으니까. 아니. 무슨. 나 태어났을 때엔 계집을 낳았으니 반성하라느니, 어쩌라느니 그래 놓고선 이제와서 통금(?)인지 외박불가인지 하여튼, 그런 걸 정하느냔 말이다. '백제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일단 왕이 직접 '외박은 절대 불가'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 이건 얄짤도 없다. 이미 그렇게 못을 박아놨는데 거기다대고 '저 가고싶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왕자도 아니고 감히 공주따위가 어떻게 그러겠는가. 이쯤되니 나도 묘한 오기가 생겼다. '과연 이번에도 내 말을 들어 줄까?' 확실하지는 않다. '땡깡이... 통할까?' 나는 내 위치를 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권리와 이쁨은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먼지와도 같은 거다. 자만하는 순간, 그대로 끝날 수도 있다. 뭐가 끝냐나고? 인생이 그냥 끝날 수도 있다. 이렇게 아둥바둥, 나를 잊고, 나를 외면하며 살았는데 겨우 15년 살면 억울하잖아. 억울해서라도 나는 그냥 못 죽는다. 그래. 개차반. 네가 외박 불가를 만들었겠다? 그거 내가 풀어주겠어. 못할 것 같아? 나는 할 수 있...겠지? 아마도...? 날 죽이진 않을 거...않겠지? ============================ 작품 후기 ============================ 오늘 김훈상 진짜 화났다고 합니다. 딴 건 모르겠고, 외박이란 글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하네여... 0107 / 0192 ---------------------------------------------- 백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나는 백제에 가보고 싶었다. 여성과 남성이 거의 평등한 세상?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100원짜리와 100억짜리가 같은 가치를 지녔을 리가 없다. 여자는 남자보다 그 숫자도 훨씬 많을 뿐더러 마력도 없는 존재다. 심하게 말하면 남자의 노예나 다름 없다. 이런 세상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남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째서 여자들을 대우해줄까? 라는 의문을 떠올릴 수 있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여자를 대우해줄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고대의 기록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백제야.' 그래서 가보고 싶은 거다. 나는 개차반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입구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폐하께서는 오늘 매우 바쁘십니다." 사실 말이지, 내가 개차반을 직접 찾아온 건...음.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맞네. 처음이네. 내가 내 발로, 왕의 명령도 없이 제 발로 찾아온 건 말이야. "전갈이라도 넣어 주시면 안 될까요?" "......." 스페셜 나이트라 짐작되는 남자 한 명이 나를 노려봤다. 아. 이해는 한다. 건방진 계집년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틀린 거 아니다. 어찌 감히 계집 따위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을 직접 보고 싶다고 찾아올 수 있을까. '나를 막는다는 건... 어쨌든 이 안에 개차반씨가 있다는 거네.' 그렇다면 됐다. 나는 목소리를 약간 키웠다. "저는 아버님이 너무나 보고 싶어요. 상사병에 걸릴 것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돌아가십시오." 그나마 내가 왕국의 보배 쯤 되니까 -일단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이 정도 봐주는 거지, 다른 공주였으면 아마 바닥에 패대기쳐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흠. 이쯤 되면 저 굳건히 닫힌 문이 열릴 때도 됐는데. 마력이라는 사기같은 능력을 갖고 있어서 들릴 텐데. 아. 혹시 자기가 듣고 싶은 단어만 골라듣나. 나는 아주 작게 중얼 거렸다. "아빠... 보고 싶어요." 내가 아무리 작게 말한다 한들, 이 남자는 스페셜 나이트.(일반 나이트인지 스페셜 나이트인지, 나는 모른다. 일단 스페셜 나이트인 것 같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 거다. "아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짜증나게... 헉!"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어라.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남자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어떤 힘이 작용해서 남자를 억누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보자보자하니까 뭐? 끝까지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 김훈상은 오늘 카시야 왕국의 국왕과 중요한 회의를 가졌다. 국가 간의 거래라는 것은 아주 신중해야만 한다. 겨우 0.1 퍼센트의 차이로 수억, 수십억. 혹은 수백억. 혹은 그 이상의 엄청난 차익 혹은 손해가 발생하곤 한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숫자 하나, 조항하나까지 꼼꼼하게 따져야만 한다. 고려는 카시야 왕국으로부터 '프레아'라는 특수 광물을 수입하고 있는데, 그 거래 금액이 1년에 무려 100조원에 이른다. 카시야 왕국의 대사 홈 르반은 긴장했다. '0.1 퍼센트를 깎지 못하면... 난 죽음이다.' 엄명을 받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0.1퍼센트의 관세를 내리고 오라고. 다른 어려운 계산은 전부 배제하고, 편하게 계산한다면 전체 규모의 0.1퍼센트. 즉, 100조의 0.1퍼센트라고 계산한다면 그 금액은 무려 1000억원이다. 겨우 0.1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어마어마한 금액이 된다. "폐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러니까 프레아의 수급에 문제가 약간 생겼습니다. 타국에서도 요청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고려는 강대국이다. 카시야 왕국의 입장만 강요할 수는 없다. 게다가 김훈상은 철혈의 왕이라고 이미 유명한 상태.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확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두 왕국의 왕궁을 접수해버렸던 그런 남자 아닌가.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좀 이상했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김훈상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는 아버님이 너무나 보고 싶어요. 상사병에 걸릴 것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김훈상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홈 르반은 하마터면 '그게 정말입니까?'하고 되물을 뻔 했다. 이대로라면 지금에 비하여 고려는 최소 1000억 이상의 손해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조심하고 또 긴장했던 것인데 이렇게 수월하게 오케이가 떨어질 줄은 몰랐다. 밤새도록 끙끙대며 고민했고, 김훈상이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생각했다. 이 말을 하면 이렇게 대답하고, 저 말을 하면 저렇게 대답하려고 열심히 대본을 짜맞추어 왔다. '일이 너무 쉽다...!' 이상했다. 속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것만 잘 되면 나는 두둑한 상여금을 받을 수 있겠지!' 일이 너무 쉬우니 불안했지만 그래도 또 한 편으로는 기뻤다. 그런데 또 불안해졌다. '김훈상은 어째서 웃고 있는 거냐!' 김훈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봤다. 김훈상에게 '저는 아버님이 너무나 보고 싶어요. 상사병에 걸릴 것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라는 말이 들렸다라는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 '뭔가 속고 있다!' 뭐지. 도대체 뭐지. 김훈상의 말이 들려왔다. "사인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아. 폐하. 제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있어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훈상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렇다. 뭔가 이상한 조항이 들어있는 계약서가 틀림 없었다. 이대로 계약하면 안될 것 같았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겠다.' 괜히 잘못 사인했다가는 불호령이, 아니 모가지가 떨어진다. 김훈상의 귀에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빠... 보고 싶어요. 사실 아무리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해도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건 아니다. 사람의 귀라는 건 참 특이한 기관이라서, 필요한 소리만 골라 듣는다. 그리고 똑같은 소리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집중하고 싶은 소리에만 집중해서 들을 수도 있다. 김훈상이 그랬다. '아빠 보고 싶어요'라는 말이 아주 똑똑히 잘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을 줘야하지?" 홈 르반은 긴장했다. 이거. 뭔가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낚시 조항이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아무래도 하루 정도 더 시간을 두고 검토해야할 것 같았다. "하루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저희 국왕과 상의를 다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훈상은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었다. 홈 르반이 머리를 굴리고 있든 말든, 그런 건 지금 관심 없다. 김훈상이 벌떡 일어섰다. "좋다. 내일 다시 보도록 하지." 홈 르반은 여전히 미궁을 헤맸다. '왜 이렇게 또 쉽게 시간을 허락하지? 불평등 조항이 섞여 있다면 지금 여기서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을 텐데.' 이상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만 함정에 빠져드는 것 같은 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김훈상에게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짜증나게... 김훈상이 말했다. "먼저 일어나겠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구를 지키던 나이트는 김훈상 때문에 일어나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비접촉 상태에서의 마력간섭은 굉장히 고난이도의 기술이다. 그런 기술로 상대의 몸을 제압. 그것도 일반 사람도 아니고 고려의 나이트의 몸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이 본다면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지만 김상희는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김상희는 김훈상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건방진 계집. 감히 날 찾아온 거냐?" '아빠 보고 싶어요' 때문에 1000억 -그것도 최소 수치로 잡아서- 을 날릴 뻔 했던 김훈상이 시크하게 말했다. 김상희는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랬다가 토라진 척 했다. "소녀는... 아빠를 보러오면 안 되는 걸까요...? 혹여 아빠의 일에 너무나 큰 방해가 됐을까요?"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내 안에 42세 아줌마따윈 없다. 나는 15살이다. 그것도 애교 넘치고 아빠를 사랑해 마지 않는 꿈 많은 소녀다. 라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김훈상이 말했다. "너 따위. 그리 방해도 되지 못한다." 김상희는 여러 번이나, 김훈상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좋게 얘기해서 어루만진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몇 차례나 조련에 조련을 거듭했다. 김훈상은 물론 마력 컨트롤에 관한 세계의 대천재지만, 김상희의 조련에는 내성이 별로 없다. 김훈상은 김상희의 애교와 조련에 결국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앙큼한 계집. 목소리에 꿀이라도 바른 것 같구나." 이 때가 기회다. 김상희가 말했다. "소녀는... 백제에 꼭 가보고 싶어요. 아주 재미있는 곳이라 들었답니다." 그 때, 김훈상의 표정이 굳어졌다. '백제라고?' 얼마 전. 크리스가 말을 했었다. 크리스를 떠올리자, '도둑놈 새끼!' 도둑놈 새끼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뭘 훔쳐가려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하여튼 도둑놈이다. 도둑놈을 떠올리니 또 다른 단어도 떠올랐다. '외박?'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단호하게 말했다. "불가." 김상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왕에게 더 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김상희어도 선을 지킬 줄은 안다. 애초에 공주가 왕을 이렇게 찾아와 뵙겠다고 하는 것 부터가 일반 공주들이나 왕비들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나마 김상희니까 이 정도 하는 거지. 이 이상 선을 넘어가면 안 된다.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녀는 아빠랑 데이트하고 너무너무 하고 싶었는데..." 일부러 더 슬픈 척 했다. 이제 이 정도는 되겠지. 하고 조금 더 강도를 높였다. "소녀는... 왕궁이라는 아름다운 철창속에 갇힌 한 마리의 관상용 새에 불과할 뿐이군요." 김훈상은 뭔가 굉장히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 잡혔다. *** 김훈상은 고민에 휩싸였다. 따지고보면 그렇게 고민할 문제도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고민하고 있다니. 그는 왕이다. 절대 한가하지 않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휴가?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만민을 책임지는 왕이니까. 김훈상은 헤벌쭉 웃었다. '데이트?' 그랬다가도 정색했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는 문제인데 왜 이렇게 갈등이 되는지 모르겠다. '내 딸이 내게 신청한 정식 첫 데이트'라는 명제는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고 '왜 나는 갈등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그 때, 김환석이 찾아왔다. "아버님." "그래. 무슨 일이냐?" "제게 예전에 나라를 주신다고 하셨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랬지. 네가 분가를 거부했었지. 왜? 마음이 바뀌었냐?" 김환석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아버님께서 제게 주시려던 땅이 백제에 근접해있다 들었습니다." 김환석이 얘기를 이었다. "지금 당장 그 땅을 받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곳을 먼저 시찰해보고 답사를 다녀온 뒤, 확실한 결정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흠..." 김훈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얘가 왜 마음이 바뀌었나싶다. 왜 그렇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김환석이 선수 쳤다. "가는 김에 백제도 들렀다 오겠습니다. 여러모로 수상한 구석이 많은 나라입니다." 전에는 그 땅에 관심도 없던 주제에, 갑자기 관심이 생겼단다. 김훈상은 거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인지하는 것을 이성이 거부했다. "김상희라는 계집이 백제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냐?" 김환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계집 주제에 돌아다니는 것을 참 좋아하는 군요. 아주 건방집니다." "그렇지." 참고로 김환석은 이미 김상희가 백제 가고 싶어 하는 거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했다. 마치 나는 '그 땅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찰해보려고 가는 겁니다. 라고 주장하는 듯 말이다. 관심이 있었으면 애초에 먼저 갔다 왔어도 됐는데, 굳이 꼭 이 타이밍에 가겠단다. 어떤 타이밍이냐면 '김상희가 백제에 가고 싶어하는 타이밍'. 그리고 김상희가 김훈상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타이밍에 말이다. 김환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방진 계집. 제가 확실히 교육 시키고 오겠습니다." 김환석이 김상희의 방에 들렀다. 김상희가 마치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 나왔다. 여자가 몸에 닿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김환석은, 김상희가 자신을 안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김상희는 김환석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김환석을 올려다 봤다. "어떻게 됐어요? 오빠?" '오빠'라는 단어에 김환석의 몸이 움찔했다. 다만, 아주 미세할 정도로만 움찔해서 김상희는 김환석의 몸이 움찔한 걸 몰랐다. 김환석이 말했다. "준비해라. 내일 바로 출발할 테니." 김상희를 혼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김환석은 '준비하라'라는 말만 남긴 채 뒤돌아섰다. '오빠라...'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뒤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녀인 송수진이 바빠졌다. 송수진은 울먹거렸다. "갑작스레 외국이라니요..." 김상희 공주가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여자의 몸으로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했다가 또 이번에는 외국여행이라니. 공주들 중 이런 특권을 누리는 공주. 여태까지는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저는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수진도 짐 챙겨. 같이 가야지." 그 말을 들은 송수진은 펑펑 울었다. 시녀를 이토록 챙겨주는 공주라니. 김상희 덕분에 저번에 비행기도 타봤다. 이제는 제국이 아닌, 또다른 외국에도 가게 생겼다. "공주님... 공주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공주님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김상희는 우는 송수진을 달래줘야만 했다. 겨우 이런 걸로도, 감동하고 우는 게 한편으로는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해는 됐다. 이 세계가 여자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백제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침이 됐다.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그럼... 가볼까?" 백제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중간중간 잠들었다 깨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20시간 이상은 비행을 한 것 같았다. 공식 일정도 아닌지라, 백제의 왕자인 크리스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항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김상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 주위에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백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작품 후기 ============================ 이번 에피소드가 약간 늘어지는 기분이 들어 연참합니다 !! 연참하는 날은... 후기를 정성들여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헤헿.. 0108 / 0192 ---------------------------------------------- 두 남자를 거느린 여자? ***106 카시야 왕국의 홈 르반은 울고 싶어졌다. '어제는 분명 이대로 하자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하루의 시간을 벌었을 때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못된 선택인 것 같았다. "나도 다시 생각해보니 고려에 너무 큰 손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하, 하오나 폐하...!" 그냥 어제 싸인할 걸. 어제 할 걸. 어제 하는 거였는데. 울고 싶었다. 숙소에 돌아가 몇 번이고 계약서를 살펴봤었는데 이상한 점이 없었다. 카시야 왕국에 무조건 적인 이득이었다. '도대체 어제는 왜 그냥 싸인 하라고 했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어제 싸인하라고 한 이유. 그 이유를 알아내야, 다시금 김훈상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터. '도대체 뭐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홈 르반이 아니고 다른 그 누군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단 한 명, 알렉스를 제외하고 말이다. 알렉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희 공주님 때문에 수천 억의 손해가 날 뻔 했네.' 아 저 딸등신. 저건 좀 위험한데. 저러다 더 미치면 어쩌지. 알렉스는 조금 걱정까지 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냥 싸인을 하려고 했지?' 상황은 들었다. 나이트들 중 누군가가 김상희 공주를 밀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저 딸등신이 하도 급한 마음이 그냥 빨리 일어선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조금 심했다. 국가간 계약이다. 국가간 계약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철혈의 왕이라 불리는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이다니. '어쨌든 다행이네.' 김상희는 지금 백제로 떠났다. 김상희가 떠나고 나니까, 아무래도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역시. 상희학은 오묘한 학문이었다. 수천억의 손실따위는 우습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부심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나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는거다...!' 그리고 생각했다. '홈 르반. 당신은 때를 놓친 거야. 딸등신이 딸에게 미쳐있는 그 순간을 놓치다니...' 그리고 아마. '아마... 어제 왜 폐하가 그 조건을 수락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겠지?' 피식 웃었다. 뭐랄까. 잘난척을 하고 싶어졌다. '넌 평생 모를 거다! 상희학은 안 가르쳐줄 거니까!' 음하하핫! 하고 혼자 웃었다. 알렉스와 모임을 갖던 다른 학자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는 민망해져서 크흠,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 *** 김환석은 크리스를 못마땅한듯 쳐다봤다. "너는 그냥 가이드다." 선을 딱 그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가이드일 뿐이다. 크리스는 싱글벙글 웃었다. "왕자님. 그거 아세요?" "......." "백제에는 여행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김환석은 좀 불길함을 느꼈다. "여행에는 가이드가 있는 법이고, 가이드와 눈이 맞는 남녀가 꽤 많습니다." 김환석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눈이 맞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백제 쪽에서만 사용하는 특수한 형태의 방언인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기분이 매우 나쁘다. 부정해야만 할 것 같은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김환석은 모른다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왕자님. 눈이 맞다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그딴 거 알 바 아니다."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너를 허락한 기억이 없다." 크리스는 싱글벙글 웃었다. 한편, 김상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뭘 허락해? 뭘 허락하는지는 지금 자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묻고 싶었는데, 그걸 크리스가 대신 물어줬다. "왕자님. 구체적으로 무엇을 허락한다는 거죠?" "......." 김환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크리스가 지금 희대의 도둑놈처럼 보이기는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뭘 도둑질하려는 건지는 인지하기를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명료하고 쉬운 답인데, 그 한발자국 떨어지기를 무의식이 스스로 거부했다. 김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만 툴툴대. 이 망나니야!' 이제 김상희도 안다. 저 자식. 탑 오브 망나니인데, 츤데레 (*겉으로는 틱틱 대면서 실제로는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의 속성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탑 오브 망나니다. '견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마 지구였다면 시스터 콤플렉스라고 엄청 욕 먹었을(?) 거다. '아니. 좋아. 오빠가 동생 아끼는 거. 좋지. 아주 좋고 말고.' 김상희는 아주 억울해졌다. '근데 인간적으로 지가 뭘 아끼는지는 좀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아끼라고. 이 못난이 망나니야!' 속으로는 김환석을 욕했지만 겉으로는 따스하게 웃었다. "그런데 백제에는 사람이 정말 없네요."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백제는 인구밀도가 그렇게 높지 않거든." 김환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상함을 조금 느꼈다. 아무리 인구밀도가 낮다한들, 이건 너무 지나치게 사람이 없지 않은가. 공항을 벗어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가운데, 공학직원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하군.' 마치 유령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백제의 거리는 꽤나 발달해 있었다. 그저 건물만 본다면 고려의 번화가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빌딩은 굉장히 높았고 거리는 깨끗했다. 사람이 너무나 없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크리스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운전대를 잡고 운전했다. 뒷자리에 앉은 김상희는 조금 감탄했다. '크리스가 운전하니까 정말 편하네.' 뭐랄까. 여자를 배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움직임 자체가 굉장히 부드러웠다. 그래서 조금 고마워졌다. 여자를 배려하는 남자. 이 세상에는 없는 종자니까. 만약 그녀에게 한진수가 없었다면, 그녀는 크리스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 왔습니다." 놀이동산에 도착했다. 김상희는 입을 쩍 벌렸다. *** 김환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다른 곳의 사람들이 모두 이 놀이동산에만 모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상희는 감탄을 연발했다. "와아..." 정말 이건... 신세계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팔짱을 끼고 걷고 있어?' 백제. 확실히 이상한 곳이다.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개차반과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어떤 남자가 시비를 걸었었다. 남자망신 시키지 말라고. 그런데 이 곳은 마치 지구의 놀이동산을 떼어다놓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김상희는 슬쩍 김환석을 쳐다봤다. '저런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나쁘겠지?' 김환석의 표정.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상희는 읽을 수 있다. 김환석은 지금 기분 나쁜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김상희의 착각이었다. 김환석은 기분이 나쁜게 아니라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건 알겠는데 뭐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다. 눈 앞의 풍경. 역시 이질적인 것은 알겠다. 여자와 남자들이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손도 잡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게다가 한 쪽에는 여자에게 사과하는 남자도 보인다. 남자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았다. 고려의 남자들이 본다면 '미친 놈이군'하고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개미를 밟았다고 개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 이상함은 곧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변했다. 절대 비명따위는 모를 것 같았던 김환석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나는 지금 기분이 좋다. 아주 좋다. 왜냐하면 우리 첫째 망나니. 이름하여 탑 오브 망나니의 얼굴이 아주 핼쓱하게 질렸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괜찮으셔요?" 우리 망나니는 센 척 했다. 아마도 여동생에게 약해 보이기 싫은 오빠의 허세같은 거랄까. 나도 안다. 얘 지금. 엄청 허세 부리고 있다. "뭐가?" "오라버니의 안색이 안 좋으셔요. 혹여... 놀이 기구가 무서우신 건가요?" "미친 소리를 하는군. 나는 고려의 왕자. 김환석이다." 아니. 너. 평소라면 그냥 무시하고 말았을 거잖아. 굳이 그걸 또 미친 소리니 고려의 왕자니 김환석이니. 그렇게 길게 구구절절 변명하고 있으면 더 웃기잖아. 김상희는 속으로나마 쾌재를 불렀다. 김환석은 놀이기구에 면역이 전혀 없는 듯 했다. 김환성과는 달랐다. 김상희는 거짓말했다. "역시 오라버니는 정말 강인하셔요." "......." 당연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김환석은 김상희를 쳐다봤다. 김상희는 '오라버니의 강함'에 정말 감탄이라도 하고 있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김환석을 쳐다보다가 이내 팔짱을 꼈다.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했다. '누가 김환성 형 아니랄까봐. 허세는 진짜 끝내주네.' 계집은 미천하다. 이게 사람들의 기본 생각이다. 그래서 김환석의 안색을 못 알아차릴 수도 있다. 사실 크리스가 보기에도 지금 김환석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누가 봐도 그런데, 김상희는 '미천한 계집'이므로 김환석의 상태를 못 알아 봤을 수도 있다. 김상희는 거기까지 계산하고서 일부러 김환석을 데리고 이것저것 타러 다녔다. 김환석은 죽을 것 같았다. '미치겠군.' 이런 기분. 처음이다. 속이 메스꺼웠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편하게 살아왔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 던져져본 적이 없다. '이런 걸... 멀미라고 하는 건가?' 멀미라는 걸 처음 느껴봤다. 이런 병이 실제로 있는 거라니. 놀이기구들을 보고 있노라니 눈알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그런데 타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김상희의 말이 메아리쳐 들렸다. 역시 오라버니는 정말 강인하셔요. 역시 오라버니는 정말 강인하셔요. 역시 오라버니는 정말 강인하셔요. 게다가 지금은 팔짱까지 끼고 있는 상태! 뭐랄까. 약간 흐뭇해졌다. '미천한 계집이라 다행이군.' 김상희가 자신의 상태를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김상희가 멍청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이 김상희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김상희는 지금 15년간 망나니로부터 받아왔던 설움을 지금 이 순간, 폭발시키고 있는 거다. 지금이야 조금 괜찮아졌다지만 과거 김환석 때문에 얼마나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졸이며 살아왔던가.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으며 매일매일이 위태함의 연속이었다. 작은 복수라면 복수였다. 이어지는 청룡열차. 김환석은 또다시 '으아어어어어어억!'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건 악마의 기구다!' 무서웠다. 솔직히 말해 엄청 무서웠다. 하지만 참았다. 옆에서 김상희도 비명을 질렀다. 사실 김상희도 무서운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무서운 가운데, 김환석은 오빠노릇을 좀 하려고 했다. 뭐랄까. 본능이 알려줬다. 이럴 때 손이라도 꽉 잡아주면 동생이 조금 더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자신이 여유있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에에엑! 황급히 마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면 진짜 토하게 생겼다. 손 잡아줄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청룡열차에서 내린 김환석은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물론, 스스로는 여유롭게 걷는다고 걸었으나 크리스가 보기엔 영락없이 황급히 뛰어가는 모양새였다. 김환석은 화장실에서 정말로 토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김환석은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김환석이 매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크리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고 했을 텐데." 김환석은 옆을 힐끗 쳐다봤다. 토끼 머리띠를 하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에게 말했다. "계집." 이 곳은 백제다. 여자와 남자가 거의 평등한 세계. 아직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일단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런 상식에 기초하여 생각해보면 여자는 사실 기분이 나빠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활짝 웃었다. "네. 손님." "그거. 내가 접수하겠다." 김상희는 황당해졌다. '야... 너는 진짜...' 거기에 더해 크리스가 한술 더 떴다. "왕자님. 그럼 이렇게 하죠."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들. 뭔가. '...답이 없네.'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거냐? 나는 뭐 그냥 꼭두각시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말하고 말았다. 일단 겉으로는 예쁘게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말이다. "두 분이서 알아서 결정하셔요." ============================ 작품 후기 ============================ 허세를 부리면 안 되는 이유. 허세 잘못 부리면 토할 수도 있어여. 0109 / 0192 ---------------------------------------------- 두 남자를 거느린 여자? ***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그 왜. 놀이공원에서 가끔씩 접할 수 있을 법한 그런 이벤트에 관한 상황이다. 이름하여 '베스트 커플샷을 찾아라'인데... 문제는 지금 이 망나니랑 크리스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거다. '아니 왜? 난 진수랑 찍고 싶은데?' 크리스는 그렇다치고, 한 놈은 망나니다. 망나니 중에서도 탑 오브 망나니이며 심지어 그 망나니는 내 오빠다. '네가 왜 나랑 커플샷을 찍으려고 드는 건데?' 망나니가 말했다. "내가 찍겠다. 널 신용할 수 없으니." "왕자님은 오라비이지 남자친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너 역시 남자친구는 아니지." "저는 김상희를 여자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왕자님은 김상희를 하찮게 여기면서 왜 굳이 커플샷을 찍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래. 너는 나를 하찮다고 여기잖아. 근데 굳이 왜 그러는데? 라고 내가 묻고 싶다. 나를 아끼는 건 좋은데, 아낄 대상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다음에 아끼라고. 무의식적으로 아끼지 말고. 이 망나니야! 둘의 신경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크리스는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지은 채 김환석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고 김환석은 너를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반복하며 자신과 찍기를 종용했다. 보다못한 내가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저는 오라버니와도 찍고 싶고 크리스 나이트님과도 찍고 싶은데... 제 너무 큰 욕심일까요?" 마음 같아선 그냥 둘 다 안 찍고 싶다. 애초에 내 의견따윈 전혀 반영되지 않은 투닥거림 아닌가. 어휴. 진짜. 너희 둘 다 명존세다.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그렇게 하죠." 하지만 망나니는 마음에 안 들어했다. "싫다." 아 진짜 저 망나니. 진짜 탑 오브 망나니. 저 망나니를 어찌하면 좋지? 그 때, 크리스가 도발했다. "혹여 베스트 커플 샷에서 저한테 밀릴까봐 지금 견제하시는 겁니까?" 그게 망나니의 자존심을 제대로 긁었다. "개소리." 그렇게하여 나는 두 남자와 따로따로 사진을 찍게 됐다. 가만히 보면 참 대단한 놈들 -둘 다 일국의 왕자들이다.- 인데, 그래서 더 대단하게 유치한 것 같다. 아니. 무슨 왕자님들이 이래? 겁나 유치하네. ***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커플들. 나는 그 중에서 좀 특이한 여자였다. 양 옆에 김환석과 크리스라는 꽃미남 둘을 대동하고 있으니까. 둘 중에 한 명만 있어도 사실 눈에 띄긴 듼다. 둘이 가지는 매력은 약간 다르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잘생겼다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망나니가 제 아무리 탑 오브 망나니라 할지라도 잘생긴 건 맞다. 우리 개차반의 유전자와 왕비 -고려 내에서도 최고로 예쁜 여자들 중 한 명-의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태어났으니 못 생겼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커플은 아니되, 두 남자를 거느린 여자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인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뭐랄까. 이 분위기. 굉장히 낯설다. 여자들과 남자들이 자유롭게 웃고 떠들고 있는 세상. 정말...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대형 전광판의 어떤 커플의 사진이 떴다. 가볍게 키스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참 좋아보였다. 행복해보이는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괜스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인기상이 발표되고 아차상, 코믹상, 추남추녀상. 기타 등등. 몇 가지 상들이 발표 됐다. 정확한 내역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상품들도 꽤 좋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최우수상을 발표하겠습니다!" 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 드럼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옆을 힐끗 봤다. 김환석은 무표정을 가장한 흥분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봤다. '그러다 사회자 몸 뚫리겠다. 그만 노려봐.'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크리스는 여유를 잃지 않고 웃고 있는 모습이긴 했는데, '넌 왜 그렇게 침을 꼴깍꼴깍 삼켜?' 목울대가 계속 꿀렁거리는 게 보였다. 좀 긴가민가했다. '나 이거 행복한 거야?' 최우수상이 발표 됐다. "최우수상은 바로 이분들 입니다!" 그러자 김환석은 더욱 더 찢어 죽일듯 사회자를 노려봤다. 그에 반해 크리스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서 나를 꽉 껴안았다. "상희야. 우리가 최우수상이야." 어, 어. 그, 그래. 그런데 괜찮겠어? 망나니 표정이 너 지금 죽일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망나니가 말했다. "떨어져라." "왕자님. 지금 질투하는 겁니까, 혹시?" "나와 질투라는 단어가 공생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나?" 어. 엄청. 엄청 잘 공생할 거 같은데. 크리스가 계속 약 올렸다. "왕자님. 아쉽게 됐네요. 다른 사람들 눈에도 역시 오빠보다는 제가 훨씬 더 커플같아 보였겠죠." "......." 그 때, 대상이 발표됐다.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다. *** 김환석은 허세를 부렸다. "너 따위는 내 발뒷꿈치에도 따라오지 못 한다." "분하네요. 제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심사하는 사람들의 눈이 정상이 아닌 모양이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네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군." 김상희는 느꼈다. '겁나 유치하네 진짜.' 아니. 애초에 이게 싸울거리가 되는가? 둘 모두 '나는 싸우고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김상희가 보기엔 영락없이 애들싸움이다. 애기 둘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니. 너네 천재라며? 각국이 내노라하는 수재잖아? 근데 왜 그래?' 누가 이 모습을 보면서 고려의 왕자 김환석과 백제의 왕자 크리스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환혁이라면 모를까.'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것들이 왜 이러나 싶다. 김상희가 이렇게 느꼈다. 이들을 비밀리에 호위하고 있는 스페셜 나이트는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와, 왕자님이 도대체 왜 저러시지?' 그는 김환석을 잘 안다. 어릴 때부터 봐왔다. 그런데 저런 모습. 단언하건대 처음 본다.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왕자님이 정말 이상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저게 뭐라고. 베스트 커플샷? 저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백제에 와서 처음 알았다. '왜 저거에 저렇게 목숨을 거시지?' 그것도 이해가 안 됐는데, 대상을 받고 나니까 좋아하는 모습이, 솔직히 말해 꼴불견이다. '뭐가 저렇게 좋아?' 저게 왜? 저게 뭔데? 저거 받으면 뭐 주나? 뭐 주긴 줬다. 둘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와 사진기를 선물로 줬다. 스페셜 나이트는 생각했다. '티셔츠는 쓰레기고. 사진기도 딱히.' 참고로 지금 김환석이 입고 있는 옷은 수억원에 달하는 마력 아이템이다. 온도와 습도를 알아서 조절해주는 마이크로 자동 컨트롤 시스템이 적용되었으며 오염물이 묻는 것을 방지해준다. 무엇보다도 어지간한 날붙이나 총탄은 막아내는 온갖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소재로 만들어진 옷이다. 그에 반해 저 티셔츠는 그냥 둘의 얼굴이 박혀 있을 뿐, 쓰레기나 다름 없다. 김환석 왕자라면 저런 옷.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티셔츠 때문에 좋아할 리는 없다. 사진기도 말할 것도 없다. 김환석이 사용하는 사진기는 개발비만 약 20억원이 들었다. 세계에 딱 하나밖에 없는, 김환석 전용 사진기다. '도대체 뭐가 왕자님을 저렇게 기쁘게 만든 거냐?'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후에 김환석 왕자는, 사진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티셔츠만 소중히 보관하게 되는데, 그는 그걸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김상희 공주님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는군.' 한편, 크리스는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웃고 있는 크리스와 웃지 않는 크리스가 있을 뿐이었다. 웃는 크리스가 거울을 쳐다봤다. "이 정도 힌트를 줬으면 알아차렸겠지?" 혼잣말을 이어갔다. "이미 여러번 인사했어. 일부러. 아주 여러번. 솜사탕을 파는 남자와도 인사를 했고, 사회자와도 인사를 했지. 지나가는 아이와도 인사를 했고 사진기를 들고 있던 여자와도 인사를 했어. 생판 모르는 남자와도 인사를 했어." 고개를 저었다. "알아. 나도 미친 거. 하지만 룰을 어기고 있지는 않잖아?"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안다니까? 난 백제를 배신하지 않아. 그럴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렇게 되면 난 죽어.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죽으면... 김상희를 못 보잖아." 활짝 웃었다. "원래 사랑은 미쳐야 할 수 있는 거야.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 뭔가를 남기려고 하는 거면, 사랑이 아니거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줄 거야. 제약만 아니라면 모든 걸 말해줄텐데."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아니. 애초에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암시를 주는 수밖에. 상희나 김환석 왕자가 부디 알아차렸기를." 그리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어쩌면 고려에서 함정을 팠을 수도 있지. 굳이 보고를 해야 하나?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보는데. 나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어. 고려에서 작정하고 보냈단 말이야. 불확실한 것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보고하는 게 낫잖아? 문책이 들어온다면... 그 땐 그 때 일이고. 내 생각에는 아마 누군가가 분명 움직일 거야. 누가 됐든간에 말이야. 아마 곤욕을 치르겠지." *** 한진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이미 피범벅.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솔직히 그도 잘 기억이 안 난다. 한진수 역시 지금 정상이 아니다. '폐하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다.' 고려왕궁을 떠나올 때에, 김훈상이 말했었다. - 나는 너 같은 미친 놈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나서 선물을 줬었다. - 내 딸을 사랑한다면 증명해봐라.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 말의 뜻은 명료했다. 제국으로부터 김상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우라는 뜻이었다. 제국은 명실공히 이 세계의 최강자다. 그 강하다는 고려조차도 감히 넘보지 못한다. 고려에서는 첫째 왕자를 제국에 볼모로 보냈다. 김훈상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걸 받아 들였다. 제국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그 때 한진수는 김훈상으로부터 퓨리어스 한 병을 받았다. 한 방울만 먹어도 무병장수한다는 천고의 보물. 그 보물을 무려 한 병이나 받았다. 한 병이면 어지간한 나라는 통째로 살 수 있는 엄청난 보물이다. 죽지만 않았으면 누구든 살릴 수 있는 천고의 영약. 그리고 그 영약 덕택에 지금 그는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당신이 나를 먼저 죽이려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회였다. 상부에서 자신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한진수는 반대로 모두를 죽였다. 혼자서 지도부를 숙청했다. 제국을 피해 도망치고, 잠시 힘을 합쳤던 레지스탕스. 레지스탕스의 대장. 이 곳에서는 붉은 늑대라 불리는 칼리번은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다. "당신이 마지막입니다." "우리가 괴물을 받아들였구나." "당신이 그 괴물을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괴물은 당신에게 협조했을 겁니다." "아니. 너는 언젠가 우리를 집어삼켰을 거다. 네 야망은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길들일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구나." 칼리번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진수를 처음 받아들일 때에, 많은 생각을 했다. 너무 강한 호랑이를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하고. 혹은 제국의 첩자라든가.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호랑이도 첩자도 아니었다. 용이었다. 감당할 수 조차 없는. "뭐가 널 그렇게 만드는 거냐?" 한진수는 칼리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게 뭐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칼리번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진수. 정말 미친놈이 틀림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들먹이다니. 그리고 겨우 그딴 이유로 32명의 늑대들이 죽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질문을 정정하지.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할 수 있지?" 제국에서도 처리하지 못한 32명의 늑대들. 하나하나가 모두 강자들이다. 그 강자들이 전부 덤볐는데도 한진수를 이기지 못했다. 32명이 죽고, 마지막으로 자신만 남았다. 레지스탕스는 이제 한진수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될 거다. "모든 것을 잃어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에게, 절실히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것이 생기면 더욱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설마 김상희라는 거냐?" 한진수가 검을 들어올렸다. 칼리번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될 줄이야. 그 때, 한진수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킬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이외의 그 무엇도. 명예도 돈도 권력도. 모두 필요 없습니다. 그런 건 전부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칼리번. 나와 힘을 합치지 않겠습니까?" "32명의 형제들을 모두 죽여 놓고 하는 말이 너무 뻔뻔하구나. 더이상 나를 모욕하지 말고 그냥 죽여라." *** 제국 정보부가 정보를 입수했다. 김상희 공주가 백제로 향했다는 정보다. "문제는... 김환석 왕자가 함께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자가 움직였으니 스페셜 나이트가 분명 따라 붙었을 겁니다." 황제가 말했다. "우리의 소행인 것만 밝혀지지 않으면 되겠지. 네 능력을 믿겠다." 이번 일은 위험하다. 고려의 왕자까지 껴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김상희의 가치는 컸다. "차라리 김환석도 죽여라. 김환성이 아닌 것이 다행이군. 그리고... 우리의 소행이라는 모든 증거를 지워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김상희를 얻어." 제국에서 작정하고, 나이트들을 백제로 보냈다. 나이트들이 김상희 일행을 발견했다. "은밀히 움직인다." ============================ 작품 후기 ============================ 12시 7분에 다음편 바로 올라갑니다...! 0110 / 0192 ---------------------------------------------- 아빠 왔다. *** 제국은 세계의 최강국이다. 그들이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프리온 나이트라는 압도적인 전력이 있다. 하지만 제국에 프리온 나이트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프리온 나이트는 베일에 철저히 가려져 있는 상태고, 그보다 일반 나이트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프리온 나이트의 위명에 가려져서 그렇지 제국 나이트의 수준 역시 세계 최상위권이다. 그들이 김상희 공주를 노리고 접근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김상희의 생포. 그 외의 다른 인물은 죽여야 했다. "아마 스페셜 나이트 하나 내지 둘 정도가 붙어있을 거다. 기척이 감지 되나?" "약 한 명의 기척은 느껴집니다만 정확한 파악은 어렵습니다." "김환석을 공격하면 나타나겠지." 이번 작전은 신속하고 은밀하게 끝내야 했다. 혹여라도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서, 고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단이 벌어지게 된다. '실패한다면... 제국은 우릴 버릴 것이다.' 이번 작전을 주도하고 있는 대령 이종선은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고려와는 척을 질래야 질 수 없는 사이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우군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적군이 되어서는 안 될 사이. '최대한 빠르게 성공시키고 증거를 모두 없앤다.' 증거를 없애는 거. 별 거 아니다. 주변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면 된다. 그게 생명체든 아니든. 김상희 일행이 가까워졌다. 아직까지 이 쪽의 은신을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종선 대령이 수신호를 보냈다. '산개!' 산개하여 여러방향에서 포획하는 것. 이번 작전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러했다. '필드 개방.' 그리고 은밀함이 생명이다. 그래서 필드를 유지하는 나이트 세 명을 따로 골라 뽑았다. 이들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필드를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바깥에서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작전은... 성공이다.' 그는 작전 성공을 확신했다. 김환석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 않았고 느껴지는 스페셜 나이트의 기척은 단 한명 뿐이었으니까. 김상희 생포는 그가 직접 맡았다. 김상희가 보였다. '잡는다!' 상대가 반항할 틈 없이 일시에 쳐야 했다. 그가 김상희를 잡는 그 순간. 다른 나이트들이 일행들의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 그 때, 누군가가 이종선 대령의 앞을 막아섰다. "거기까지." *** 하루 전. 김훈상이 김유신을 불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유신은 그 대단하다는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이며 그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김훈상이 특별히 총애 할만큼. "네가 가라." 어딜 말입니까. 김유신은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천천히 기다렸다.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김환석이 따라간다." 그제서야 김유신은 이해했다. 김환석 왕자는 고려의 둘째 왕자다. 스페셜 나이트가 존재하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왕가핏줄의 수호에 있다. 고려의 둘째 왕자를 지키는데,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이 움직이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김환석보다는 김훈상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을 김훈상도 안다. 김훈상이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너보다 더 세니까." "...예." 저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전 세대, 최고의 천재가 바로 김훈상이었으며 약 20년 전 전쟁기에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다. 그런데 김훈상이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스페셜 나이트들을 데려간다." "몇 명을 데려갑니까?" "최소 7명 이상." 김유신은 의아해했다. 7명이상의 스페셜 나이트를 데려가라니. 그것도 타국. 백제에 말이다. 스페셜 나이트의 임무 특성상, 그들은 몰래 입국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간첩이나 다름 없다는 소리다. 이런 식으로 몰래 침투하면 그 나라에서 이들을 죽여도 할 말이 없다. 불법으로 몰래 침입한 셈이니까. '7명씩이나?' 20년 전, 전쟁기에도 스페셜 나이트 7명을 호위 목적으로 타국에 보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인 암살이라면 모를까. 김훈상이 설명을 더했다. "제국이 술수를 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국에서 말입니까?"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거다." 김훈상이 말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만약 벌어진다면 반드시 한 놈은 생포해라. 자살도 못하도록 막아라.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나는 꼭 알아야겠으니." 한편, 김훈상은 알렉스를 따로 불렀다. 최근에는 알렉스를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알렉스는 고독한 김훈상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주는 고마운 신하였으니까.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현재 김훈상의 상태. 그러니까 '딸등신 상태'는 정신병이나 다름 없었다. 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리고 가려운 곳까지 긁어주는 사람은 알렉스밖에 없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김훈상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알렉스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실험샘플. 아니. 실험샘플 폐하와의 독대는 언제나 유익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이상하군. 상희학의 정통 이론에 따르면... 이 상황은 불가능한데.' 평소의 김훈상과는 달랐다. 평소의 딸등신이라면 딸을 위험한 상황에 모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터.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김상희 공주님을 미끼로 던지는 느낌이다.' 마치 김상희 공주를 미끼로 던지고 제국을 유혹하는 모양새였다. 미끼란 게 무엇인가. 쉽게 말해, 물고기를 낚기 위한 물고기의 밥이다. 미끼는 죽음의 위협에 언제나 노출되기 마련이다. 알렉스가 물었다. "김상희 공주가 위험해지지는 않을까요?" 김훈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말도 맞다. 제국이 지금 김상희를 노리고 있는 건 확실했다. 고려와 제국. 지금 둘은 겉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김상희를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김훈상에게는 하나의 전쟁이었다. "위험하겠지." "허면...?" 알렉스도 차마 묻지는 못했다. 김상희 공주가 위험해지는데 그래도 됩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질문을 하면 '남자 -여자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인 김훈상의 자존심을 건드릴 우려가 있다. '딸을 가지고 도박을 걸 리가 없는데. 상희학에 따르면 딸등신은 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주 사소한 위협에 내몰리는 것도 원치 않을 텐데 어째서?' 김훈상이 말했다. "알렉스." "예, 폐하." "나는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위협과 부딪쳐왔다." 알렉스도 안다. 김훈상은 지금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성군은 아니었다. 성군이 되기까지, 수많은 피를 흘렸다. 물론 자국민의 피는 아니었다. 타국민의 피를 많이 흘리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평탄한 생활을 해왔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세상이 평안해진지 불과 2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세상에 위협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맞습니다. 폐하." "하지만 위협의 경중에는 차이가 있다." "......." "하나의 작은 위협을 극복하여 후에 있을 큰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게 왕의 선택이다." 김훈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빠랑 데이트하고 싶었는데...'하고 시무룩해하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걱정 된다. 당연한 거다. 제국이 이상한 술수를 부릴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기에 일부러 정보를 흘렸다. 김상희 공주가 백제로 향한다고. 김환성이 아닌 김환석이 따라 붙었으며 스페셜 나이트 2명 정도가 따라 붙는다고. '그것보다 더 강한 전력을 데리고 오겠지.' 하지만 아닐 거다. 스페셜 나이트 7명이 따라 붙었다. 그 강하다는 스페셜 나이트들 중에서도 가리고 가려 뽑은 7명의 최정예다. 거기에 더해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까지 붙었다. 알렉스는 한 쪽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저게 뭐지?' 알렉스는 알 수 없었다. 저게 바로 김환석이 독자 개발한 위치추적기라는 것을. 그리고 김훈상이 힐끔힐끔 계속 저 것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김유신이 누군가에게 검을 겨누었다. "거기까지." 제국의 나이트를 통솔하던 대령 이종선은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눈 앞의 이 남자가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일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이종선이 황급히 수신호를 보냈다. 스페셜 나이트에게 발각된 이상 일단 싸움은 벌어질 거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전력으로 일단 먼저 스페셜 나이트부터 죽이고, 그 이후 빠르게 임무를 수행하면 될 거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엄청난 실력자다.' 하지만 괜찮았다. 상대가 엄청난 실력자인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 쪽은 숫자가 훨씬 많다. 이 정도는 예상범위 안이며 충분히 대처 가능한 정도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수신호를 보냈다. - 공격해.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일곱 명. 무려 7명의 스페셜 나이트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이종선 대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찌하여 스페셜 나이트가 7명이나 이 곳에 와있는 건지 모르겠다. 김상희 역시 몰랐다. 하지만 이제서야 김훈상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제로 출발하기 전, 김훈상이 말했었다. - 만약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도 놀라지 마라. 그게 이 뜻인지는 몰랐다. '아니. 설명을 해주려면 제대로 해주든가.'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었다. - 절대 위험해지지 않도록 하겠다. 그냥 딸바보 아빠의 푸념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나 지금... 미끼가 된 거야?'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그런 것 같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뭐랄까.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미끼로 삼아 무언가를 유혹하여 덮치는 거. 지금 상황을 보니까 딱 그런 모양새다. 이종선 대령은 깨달았다. '함정이다.' 함정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다. 타국. 그러니까 백제에 무려 7명이나 되는 스페셜 나이트를 침투시키다니. 이건 백제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일 아닌가. 하지만 이대로 작전을 실패할 수는 없었다. 작전은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했다. 그게 나이트니까. 이런 변수.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돌파하려면 할 수 있다. 수신호를 보냈다. - 엘리온을 복용한다. *** 엘리온, 일시적으로 남자의 마력을 증폭시켜주는 마약같은 거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개인차는 있지만 심하면 며칠을 앓아 눕는다. 수명이 깎인다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생명이 위급한 순간에 사용하면, 그 순간을 벗어날 수는 있는, 제국의 특별한 약물이었다. 현재 제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약물이기도 했다. 김상희도 저들이 뭘 하려는 건지는 대충 눈치 챘다. 제국의 비약 엘리온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으며 김상희도 책을 통해서 몇 번 접해봤었으니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지휘는 내가 맡는다." 김유신조차 놀랐다. "폐, 폐하...!" 이종선 대령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란 말인가. 불과 10여시간 전, 김훈상은 왕궁에 있었다. 이종선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김훈상쯤 되는 자가 이 자리에, 그것도 타국 한복판에 무방비로 저렇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김유신은 알고 있다. 김훈상이 이 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워프를 사용했을 거다. 백제와 고려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비행기로도 20시간 이상 걸린다. 그 거리를 격하게 넘어 왔다면, 몸에 무리가 엄청나게 많이 간다. 김유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어째서 오신 겁니까, 폐하!' 우리 스페셜 나이트들을 믿을 수는 없으셨던 겁니까! 따지고 싶었다. 무엇이, 도대체 왜, 왕이 왕의 몸을 저렇게 혹사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김상희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왕으로서의 결정이었다." 김훈상의 몸이 사라졌다. 이종선 대령을 순식간에 제압해서 땅에 눕혔다. 이종선 대령 역시 베테랑이며 제국의 나이트이기는 하지만 감히 김훈상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이런 놈을 색출하기 위해서." 무릎으로 이종선의 등을 찍어 눌렀다. "그리고 내가 이 곳에 온 건." 김상희를 쳐다봤다. 김상희를 쳐다보는 김훈상의 눈은 평소와는 달랐다. 김유신조차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뭐랄까. 뭔가 아련한 것을 회상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아버지로서 내린 결정이다." 스페셜 나이트 7명과 고려국왕 김훈상의 가세로 제국의 나이트 16명이 순식간에 제압됐다. 스페셜 나이트들 중에서도 가려 뽑은 최정예 7명과 김훈상이다. 이쯤 되면 제국 나이트 16명이 아니라 160명이어도 힘들 터. "내 딸을 다치게 한다면, 나는 너희를 죽일 거다.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나는 그 것을 수만배로 갚아주겠다. 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저게 도대체 뭐길래 왕의 이름까지 거론된단 말인가. 스페셜 나이트 중 한 명은 이렇게 생각했다. '사실 김상희 공주는 왕자님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상황이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 의문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성별을 숨기는 거였어.' 그러자 설명이 된다. 왕국의 보배가 된 것도.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했던 것도. 이런 미끼작전을 펼치는 것 -가치가 없다면 미끼가 될 수도 없으므로- 도. 이제 명확해졌다. 김상희 공주는 공주가 아니었다. '특수한 능력을 지닌 왕자님이다!' 제국이 김상희를 노리는 것도. '역시 그랬어!' 정답이 생겼다. 김상희 공주 왕자설이 이때부터 시작 됐다. 김유신이 보고했다. "11명 사살. 3명을 생포했습니다. 그러나 부상이 심각하여 빨리 치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쪽 피해는?" "3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심각하지 않습니다." "좋군."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유신은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큰 문제가 발생했군.' ============================ 작품 후기 ============================ 김상희 공주 왕자설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0111 / 0192 ---------------------------------------------- 상희 네 능력은... *** 김유신은 주위를 둘러봤다. '도대체 언제?' 놀라운 일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이 곳은 필드 내다. 제국 나이트 3명이 필드를 펼쳤었고 거기에 더해, 스페셜 나이트들이 스페셜 필드까지 펼쳤다. 그 말은 즉, 이 곳의 상황은 외부에서 못 본다는 소리다. 그런데 백제의 나이트들이 이 곳을 발견하여 포위를 하고 있었다. '난처하게 됐어.' 이 곳은 백제다. 그리고 자신들은 백제에 밀입국한 범법자들이다. 일반 범법자도 아니고, 무려 스페셜 나이트쯤 되는 범법자다. 그것도, 이 정도 인원이 들어왔다는 것이 밝혀지면 상당히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조금 비약하자면 스페셜 나이트가 백제의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들어왔다고해도,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믿을 수 있을 테니까. 백제 입장에서는 공격을 당한 거고 당연히 반격을 해도 된다. 밖에서 백제의 나이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김훈상이 말했다. "김유신. 무기를 거둬라." "폐하...!" 김훈상이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겠지." 턱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방금 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라고 외친 남자 쪽을 향해서 말이다. 크리스에게 '알아서 해결해라'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김상희는 그 말에 긴가민가했다. 크리스가 말하면 언제나 농담같다. 저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백제의 왕자인데...?' 백제의 왕자니까 어떻게든 잘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서도 또 뭔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크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제 쪽 사람이면 괜찮은데, 아니면 힘들 수도 있어요." 저게 무슨 말일까.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백제 내에 세력이 분할되어 있기라도 한 걸까?' 크리스 역시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해 정확하게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김훈상도 김유신도, 그 것을 눈치채고 더 이상 깊게 묻지는 않았다. 크리스가 스페셜필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김상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 지금 어디에 총구를 겨누는 거야?" 저 목소리. 어딘가 모르게 섬뜩했다. 지금은 크리스의 뒷통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크리스의 얼굴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언제나 그렇듯 웃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크리스의 웃는 얼굴이 잠깐 떠올랐는데, 그 얼굴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내가 아는... 그 크리스가 맞아?' 뭐랄까.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크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내게 총구를 겨누는 건 그럴 수 있어. 몰랐으니까. 근데 내 여자한테 총구를 겨누려면 너희들부터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김환석이 칫,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김환석은 왠지 모르게 발끈하고 싶어졌다. 내 여자? 웃기지 마. 나는 아직 허락해준 적이 없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랬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휘관이 누구야?" *** 크리스와 백제 나이트 지휘관이 얘기를 나누게 됐다. 다행히 지휘관은 크리스의 얼굴을 아는 것 같았다.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예. 중령. 홍경식입니다." "내가 있다는 것 알고 움직였어?" "아닙니다. 모르고 움직였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물려." "하지만 타국의 나이트들입니다." "내 손님들이야." "하지만 왕자님..." "못 들었어?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먼 발치서, 이 쪽의 얘기에 집중하고 있는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들은 황당해졌다. '아니. 지금 저딴 걸 이유라고 대는 거야?' 어이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가 여기에 있는 거랑 타국 나이트의 불법 침입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지금 100억짜리 잘못을 했는데, 100원 줄테니까 용서해줘. 이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스페셜 나이트 중 한 명이 생각했다. '저런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댄다고?'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쪽을 신경써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잡아 넣으려는 생각 아니겠는가.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 7명이다. 이들은 엄청난 전력이다. 사실 스페셜 나이트가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겠지만 이 쪽엔 아마도 왕자님일 것이 분명한 김상희 공주와 김환석 왕자가 있다. 이들을 놔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 '교활한 놈!' 크리스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병력을 확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지금 백제의 병력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폐하께 말씀드려야해.' 그러나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내가 아는 걸 폐하께서 모르실 리 없다.' 김훈상이 누구인가. 세계가 인정한 천재인데, 그 천재가 전투 경험마저도 굉장히 많이 쌓았다. 스페셜 나이트들 중 그 누구도 김훈상과 대적할 수 없다. 심지어 대대장인 김유신마저도. '저런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인 분명한데...!'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알겠...습니다." 스페셜 나이트는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다리까지 풀릴 뻔 했다. '뭐라고?' 아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설마 진짜 우리를 그냥 보내준다고? 아무리 왕자의 손님이라지만 우리는 불법 침입자들인데? '사랑하는 여자의 가족. 이딴 게... 진짜 이유가 된다고?'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김유신 역시 황당한 건 매한가지였다. 혹여 저 말이 진짜 대화가 아닐까하는 가정도 해봤다. 저 말 자체가 어떤 은밀한 암호라든가, 그도 아니면 수신호를 통해 다른 얘기를 주고 받았다거나.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마력을 한껏 끌어올려 상황을 주시했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다만 김훈상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리 와라."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쟤. 뭐하는 건데? 김훈상은 마치 어린 아이를 맞이할 때 처럼, 구부리고 앉아서 두 팔을 벌리고 있다. 마치 '나한테 달려와서 안기렴'하고 말하는 것처럼. 김상희가 머뭇거리자 김훈상이, 개차반답게 말했다. "...죽고 싶냐?" 알렉스가 봤다면 '폐하. 제발 좀. 예쁘게 말 하면 어디 덧납니까? 안아주고 싶으면 그냥 부드러운 말로 와서 안길래? 하고 말하면 안 됩니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상희가 김훈상에게 쭈뼛쭈뼛 걸어가서 안겼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김훈상이 김상희의 귓가에만 속삭였다. "미안하다." 김상희는 순간 큰 충격에 빠졌다. 왕은 어지간해서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 사과를 하는 순간, 왕의 권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과를 하는 순간,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왕은 완벽해야만 한다. 그게 신하들과 백성들이 생각하는 왕이다. 김훈상은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사과를 하지 않는다. 김상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김훈상의 입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아, 아버님...!" 뭘 미안하다고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김상희도 분명 느꼈다. 자신이 미끼가 되었다는 걸. 하지만 이게 왕이 딸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할 문제는 아니다. 막말로 왕이 그냥 '너 죽어'하면 죽어야만 하는 것이 공주다. 이런 일 좀 했다고 미안할 일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김훈상이 김상희를 더욱 꽉 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스페셜 나이트들은 확신했다. '역시... 모종의 이유로 여장을 하신 것이 틀림없다!' 아까까지는 좀 긴가민가했는데 이젠 확신이 됐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서로 몰래 얘기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어?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원래 한 명 정도가 생각하면 의심에서 그친다. 그런데 그게 두 명, 세 명. 그러니까 여러명이 한 상황을 보고 똑같이 생각하면 거의 사실 혹은 진리에 가까운 관찰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역시 왕자님이겠지?' '맞네. 왕자님이시네. 우리가 여태까지 모르고 있던 거야.' 7명의 스페셜 나이트가 똑같이 생각했다. 김상희 공주는 사실 왕자였다. 한편, 김훈상은 생각했다. '확실하다.' 저번부터 느꼈다. 김상희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몸 상태가 정상일 때에도 조금 느꼈었는데, 지금 이런 상황이 되자 확실히 느껴졌다. '내 마력이 빠른 속도로 정상상태를 찾고 있다.' 지금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김훈상은 지금 구역질을 억지로 참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쓰러져도 열 번은 쓰러졌을 거다. 일반적인 스페셜 나이트라면 그랬다. 아니. 왕인 김훈상이라고 해도 쓰러졌을 일이다. 그러나 왕인 김훈상보다 아버지인 김훈상이 더 강했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텼다. 연거푸 워프를 사용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어지러웠다. 꼭 죽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김상희를 안는 순간, 빠른 속도로 괜찮아졌다. 특히, '미안하다'라고 말을 했을 때에, 그 때 몸이 거의 정상이 되어 버렸다. '이건 김상희의 능력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이 모두 회복됐다. 천고의 영약 퓨리어스를 마셔도 이렇게까지 말끔하게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다. '제국에서 이 아이를 탐내는 것이 이런 이유인가?' 예전에는 명치를 때릴 때에만 능력이 활성화되는 것 같았다. 마력 흐름이 자연스러워지고 마력의 양이 미미하지만 올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순히 스킨십을 하고 있는데, 몸이 회복되고 마력 흐름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심지어 마력의 양까지 소폭 상승하고 있다.' 마력의 양은 타고난다. 다른 말로 '마력의 그릇'이라고 그런다. 물론 훈련을 통해 늘릴 수는 있는데, 그 늘릴 수 있는 한도 역시 타고나는 거다. 그걸 늘려준다? 엄청나게 획기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 때문에 제국이 김상희를 탐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김훈상의 눈에, 김상희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다. 강서영을 볼 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뭘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뻐보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퉁명스레 말했다. "역시 내가 낳은 계집이군." 김상희는 '왜 쟨 또 자뻑이야?'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배시시 웃었다. "소녀는 아버님의 딸이라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너무너무 기쁘고 너무너무 좋아요!" 물론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라고 속으로 수십 번 씩 외쳤지만. 제 아무리 김상희라고해도 김훈상의 진짜 속마음까지 읽어낼 수는 없었다. 엄청나게 잘난 내가 낳은 딸이니 만큼, '엄청나게 사랑스럽다'라는 속 내용까지는 이해 못 했다. 김훈상은 김상희에게서 눈을 떼질 못했다. 귀여워 죽겠다. 김훈상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뽀뽀해도 되나?' 하지만 참았다. 그랬다가는 스페셜 나이트들이 기절하고 말 거다. 스페셜 나이트들이 김상희를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 김유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이 어떻게 석방의 이유가 되는 건지. 이 백제라는 곳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심지어 김상희 공주는 사실 여자가 아닌 남자인 것이 틀림 없는데. '그렇다면 크리스 왕자는 게이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게이는 남자를 알아보는 특별한 눈을 가졌나?' 그렇게 생각해보니, 알렉스도 그렇지 않은가! '알렉스 학자 역시 김상희 공주님을 편애 했었지.' 알렉스 역시 유명한 게이다. '게이는 남자를 알아보는 특별한 눈을 가진 것이 틀림 없겠군. 확실해.' 그제서야 모든 상황이 말끔하게 정리 됐다. 그래서 알렉스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던 것 아니겠는가. - 왕자님처럼 생각하고 대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을 이제서야 좀 알겠다. 김상희 공주는 사실 공주가 아닌 왕자였으니까! 알렉스는 김상희 공주가 사실은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왕자라고 말을 해주지. 크리스 덕택에 백제의 나이트에게 별다른 위해를 받지 않은 스페셜 나이트들과 김훈상은 고려로 돌아갔다. 신원불명의 세 나이트들을 고려로 압송했다. 사실 이 3명의 나이트들을 백제에서 취조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는데 크리스가 묵살했다. - 내 사랑하는 여자를 다치게 하려던 놈들이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였는데, 백제 나이트들은 그 말에 수긍했다. 그 말에 수긍한 건지, 아니면 왕자의 말이라서 그냥 들어준 건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하여튼 김유신과 크리스. 김환석과 김상희는 백제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놀이동산. 고대 유적지. 백제 내의 유명한 산과 계곡 등. 그러나 김상희는 딱히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여자랑 남자랑 거의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거지?' 김상희는 느꼈다. 이 곳은 지구와 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평등하다고 보기에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고려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어쨌든... 나쁜 경험은 아니었어.' 그러나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지구와 비슷한 분위기의 백제이다보니, 지구에서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진수와 놀러갔던 곳. 진수와 같이 걸었던 거리. 진수와 함께 있었던 장소. 그러한 행복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진수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주황빛 저녁놀이 펼쳐진 하늘을 향해 비행기가 전진했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에서, 저녁놀을 보면서 진수와 키스했던 기억도 있다. '너 미워.' 문득, 진수가 너무 보고 싶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나 혼자 두지 않는다며. 절대로 외롭게 안 할 거라며. 따지고 싶었다. 따지고 싶은데 보고 싶었다. 옆에 있다면 정말로 꽉 안아주고 싶었다.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남 몰래 눈물 한 방울을 훔쳤다. '보고 싶어. 진수야.' 그 때, 비행기가 덜컹거렸다. 불이 깜빡 거렸다. 김환석도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냐?" 승무원들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기장으로부터의 안내방송도 없었다. 난기류도 아니다. 갑자기 이상현상이 발생한 거다. 그런데 갑자기, 김상희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못 들었어?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저런 얼토당토않은 이유에 백제 나이트들은 물러섰다고 합니다...황당하지만 진짜입니다. 0112 / 0192 ---------------------------------------------- 상희 네 능력은... *** 처음에 김상희는 이 말을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사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난 뒤. 불현듯 깨달았다. 저 말은 진수가 자주 하던 말이다. 진짜로 뭘 잘못했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냐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 "왜 나 혼내?" 김상희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으면, 한진수는 그 슬픈 표정 때문에 정말 힘들다고 했다. 단순히 힘든 것을 넘어서서 괴롭다고 했다. 지금은 비행기 안. 한진수가 이 곳에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눈 앞에 한진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비행기 창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저녁놀 사이로 한진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진수가 김상희를 살포시 안았다. 예전과 똑같은 말투. 똑같은 목소리. 그리고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을 했다. "네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 김상희는 가만히 손을 들어 한진수의 등을 살짝 안았다. 한진수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김상희도 말했다. "나도 보..." 그 때, 한진수의 몸이 움찔했다. 방금 전 까지만해도 울먹거리던 김상희였지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한진수의 이 반응. 정말 익숙한 반응이다. '보고 싶었어' 라든가 '좋아해'라든가. 하여튼 그런 식의 말을 해주기 전, '보' 혹은 '좋' 글자만 나와도 몸이 움찔움찔 떨리곤 했었다. '정말 너는...' 지구의 한진수라든가, 지금 이 곳의 한진수라든가. 사실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제 확실해졌다.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웠고, 그 누군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누군가는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을 살포시 안아주고 있는 이 사람이었다. 이 한진수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타들어가는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해주려다가 참았다. 이렇게 계속 혼자 내버려 뒀으면서. 옆에 있지도 않으면서. 한진수의 잘못은 아닌데, 괜히 한진수가 미웠다. "너 미워." "......." 한진수가 찔끔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솔직히 충격 받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자 따위가 감히 '너 미워'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일이다. 한진수도 머리로는 그걸 안다. 이성은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진수는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그게..." 한진수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다. 여자에게서 '너 미워'라는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고, 하필이면 그 여자가 김상희인 것은 더더욱 처음이다.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한진수에게 있어서 이 말은 아주아주 생소한 말이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지구의 남자들이라 할지라도 여자친구가 갑자기 '너 미워'라고 말하면 당황하는 게 태반인데, 이 세계의 남자인 한진수는 당연히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김상희가 다시 말했다. "너 미워." 모르겠다. 누군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어려지는 법이라고. 사랑에 나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평소 자신을 속이고 연기하던 김상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다. "너 진짜 미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와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것도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다. 김환석 스스로가 자신이 뭘 아끼는지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진수는 한진수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내, 내가 엄청난 잘못을 한 것이 틀림 없다.' 세계의 대천재이면 뭘 하나. '너 미워'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이렇게 무서운 말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급기야 김상희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미워..." 스스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김상희는 늘 외롭다.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남자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24시간 내내 눈치를 살피면서, 저 남자가 무슨 말을 들어야 좋아할까를 궁리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덕분에 예쁨을 받고 귀여움을 받기는 하지만, 그건 김상희 본연의 모습을 좋아한다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김상희는 원래 자기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삶을 선택했다.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구에서의 행동방식대로 그냥 살았따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쨌든 김상희는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아왔는데, 그 설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 들었다. 한진수의 품에 안겨있으니까 그랬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지금이었다. 김상희는 너 미워를 되풀이하다가 결국 고백해버리고 말았다. "근데 너무 좋아." 한진수의 몸이 또 움찔 떨렸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르르 떨렸다. '나 지금. 잘 들은 거 맞지?' 세계의 대천재는 혼란스러웠다. 방금까지는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는데, 그리고 굉장히 슬펐고 무서웠는데 갑자기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너무 좋다고?' 지금 나한테 좋다고 한 거지? 그런 거지? 한진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하고 기기묘묘한 표정이 되었다. 스스로도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찾기 위하여 굉장히 초조해졌던 한진수는 이제 자신감이 생겼다. 단순히 '너 좋아' 한 마디 들었을 뿐이데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그런 행복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과 행복감은 잠시였다. "근데 너 미워." 아니.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한진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드나들었다. 계집의 말 한마디가, 남자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만 그 놀라움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한진수는 당황해 했다. 너무 당황해서 계집따위가 감히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나,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알 수 없었다. 정말 모르겠다. 패닉이다. 잘은 모르겠어서 그냥 김상희를 꽉 안아줬다. 지금 당장은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자 느껴졌다. '김상희도 날 꽉 안고 있어...?' 잘은 모르겠는데 정답을 선택한 것 같다. 이럴 땐 그냥 안아주는 게 좋겠구나, 라는 걸 오늘 처음 배웠다. '날 꽉 안는다는 건, 내가 안 밉다는 거지?' 그런 거지? 좀 불안해졌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급격히 소심해진 한진수가 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정신을 되찾은 김상희도 존댓말로 대답했다. "말씀하셔요. 오라버니." "그게..." 한진수는 이런 걸 물어도 되나 싶었다. 이런 걸로 고민한다는 거, 세상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미친 게 틀림 없었다. 그래도 묻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예쁘게 웃고 있는 김상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뭐랄까. 헤벌쭉. 웃음이 나오는 느낌이랄까. 뽀뽀세례라도 퍼부어주고 싶었다. 그걸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세기의 대천재는 계속 소심하게 고민했다. '나 엄청 소심하게 보면 어쩌지?' 남자라면 모름지기 대범해야 하지 않는가. 상대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며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그게 한진수가 생각하는 '남자다움'이다. 그러나 김상희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적어도 김상희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소심해진다. 그걸 이제 확실히 알았다. 결국 물어봤다. "나... 안 밉지?" *** 김상희가 말했다. "오라버니. 말씀해주셔요." 그래서 한진수는 또 슬퍼져야만 했다. 아까는 '너'라면서 이제는 '오라버니'란다. 차라리 '오빠'면 아무 말도 안 하겠는데, 오라버니라고 하면서 존댓말을 쓰니까 묘하게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서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 저게 당연한 건데. 나는 도대체 왜...' 저게 당연한 거다.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도 맞는 일이고 존댓말을 써야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왜? 왜 기분이 별로지? 그래서 한진수가 말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엔..." 그... 오빠라고 불러. 이 말 하기가 뭐 이렇게 힘든지. 오빠 아니고 그냥 진수라고 불러주면 더 좋을 것 같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아무래도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자기'같은 이상한 단어가 떠올랐다. 김상희가 자신을 자기라고 불러준다면 엄청 행복할 것 같은 그런 미친 생각이 들어 황급히 고개를 휙휙 저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한진수의 생각과는 달리 김상희는 이미 저 말을 여러 번 들어 봤다. 한진수는 '호칭'에 조금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김상희가 생각하기에는 참 이상한 애칭을 많이 만들어내곤 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였다.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자기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다. 한진수가 워낙 듣고 싶어해서 몇 번 해줬을 뿐. 뭐랄까. 너무 오그라드는 기분이랄까. '자기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김상희는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말씀하셔요." 한진수는 백 번 양보했다. 자기나 오빠같은 낯 간지러운 호칭 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엔 편하게 말해주면 안 돼?" 이를테면 아까처럼 말이야. 하고 한진수는 묘한 기대가 담긴 눈으로 김상희를 쳐다봤다. "미천한 소녀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아깐 그랬잖아! 아니! 제발! 그래줘! 부탁이야. 한진수는 외치고 싶었다. 몇 번이나 실랑이를 더 하고 나서야 김상희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건 김상희가 못 이기는 척 할 문제가 아니다. 한진수가 그러라고 하면 그냥 그러는 게 맞는 거다. 하지만 한진수도 김상희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둘 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이 본다면 놀라 까무러치겠지만. 현재 한진수는 특수한 필드를 펼친 상태다. 스페셜 필드와 비슷하긴 한데, 비행기 내의 그 누구도 한진수가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한진수는 바깥을 한 번 둘러 봤다. '김환석 왕자님은 모르고 있는 것 같고. 스페셜 나이트도 마찬가지. 그러나 저 크리스라는 녀석이 걸린다.' 뭐랄까. 정확하지는 않은데 자신이 이 곳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분 탓인가?' 아무래도 기분 탓일 거다. 스페셜 나이트와 김환석 왕자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워프와 필드개방이었는데 크리스가 알아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한진수는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이 상태로, 그냥 김상희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좋으니까 둘만 같이 계속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안다. 김상희가 물었다. "이 곳엔 어떻게 오신 것이어...아니. 어떻게 온 거야?" 아직 반말이 익숙하지가 않다. 한진수는 활짝 웃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반말을 들었는데 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무래도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이야.' 최근 들어 이렇게 웃어본 적은 처음이다. 김상희 앞이라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워프했어." "내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구?" "지금 내가 속한 곳의 정보력이 생각보다 좋거든. 고려에서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 같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곳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정확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워프'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도 기밀이라면 기밀인 일이다. 현재까지는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와 고려의 국왕만이 워프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제국 정보부 정도만 파악하고 있다.) 한진수가 말했다. "넌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내가요?" 김상희는 내가? 라고 물으려다가 또 습관적으로 뒤에 '요'자를 붙였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그렇다. 한진수는 그런 김상희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왜 귀엽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지만, 하여튼 귀여웠다. 그래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정확한 건 더 파악해야해.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냈어." 한진수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특별한 여자들에게는 특별한 호칭이 붙어."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의 시선이 한진수를 향했다. 한진수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우연인 것 같았다. 크리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목이 뻐근해서 고개를 돌리는 중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파악하기로 네 호칭은 성녀야." "성녀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진수가 설명을 이었다. 김상희가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 작품 후기 ============================ 세기의 대천재는 오늘도 소심소심 왕소심 (단, 김상희 한정 왕소심) 0113 / 0192 ---------------------------------------------- 고대의 기록. 성녀. 그리고 여왕. *** 성녀라고. 그런 게 있어? 그런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나는 한 가지가 기억났다. 바로 골렘 피라미드에서 봤었던 내용이다.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되어 있었던 그 문장 말이다. - 성녀의 은총이 내릴 때에 골렘이 깨어나리니. 저번에도 말했지만 고대의 기록이란 건 거의 전설과도 같은 것들이 많아서 그대로 믿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옛날 옛적이 도깨비와 구미호가 있었다는 전설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까. '성녀라고?' 하지만 전혀 의외의 인물. 그러니까 진수 입에서 '성녀'라는 말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엔 일부러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썼다. 너무 한 번에 익숙해지면 좀 이상하잖아. "성녀가 뭐야...요?" 그리고 아마도,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진수는 나를 엄청 귀엽다고 생각할 거다. 사실 좀 창피한 말이기는 한데, 진수가 나를 귀엽다고 생각한다면 나도 기분이 좋다. 왜. 뭐. 그럴 수도 있지. 내 안에 40대 없다고. 원래 연애하면... 사실 연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연애를 하면 어려지는 법이라고. 아 근데... 이거 연애 맞지? 나랑 진수랑 지금 연애 비스끄리무리하는 거 맞지? 그렇다고 말해줘. 아니나 다를까. 진수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 어떤 표정이냐고 묻는다면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느껴진다. 저 표정. 저 분위기. 나는 예전에 많이 느꼈었다. 그 땐 잘 몰랐는데, 이젠 정말 잘 느껴진다. "성녀는 모든 여자들 중에서도 전략적 가치가 가장 높은 종류의 여자야. 일단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그래. 사실 그냥 전설과도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제국이 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건 틀림 없으니까." 그 말을 정리해보자면, 원래대로라면 쓸데 없는 얘기로 치부될 얘기이기는 한데 제국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내게 뭔가가 있다. 그리고 그 뭔가가 성녀다? 그런 얘기인 것 같다. '전략적 가치가 제일 높다는 건...' 아씨.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좀 뭐랄까. 너무 군대용어 같은 느낌이잖아. 예전부터 그랬지만 난 군대얘기 별로 안 좋아한다. 진수도 그걸 느꼈는지 말을 좀 바꿨다. "남자들이 널 원할지도 몰라." 그 말을 하고나서 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너 그 말... 하려고? 설마? 진짜로? 너는 지구의 한진수는 아니잖아....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 했다. 진수가 말했다. "나만 널 원하면 되는데." "...응?" 했다! 했다고! 그 땐 귀찮게 생각했던 집착 나왔다! 진수는 가끔 내게 집착(?)을 하기도 했고 내게 소유욕을 부리기도 했다. '너는 내 거야.'라는 식의 말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왜 네 거야? 내가 물건이야? 나는 내 거야.'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저런 말도 많이 했다. - 불가능한 거 아는데, 내 눈에만 좀 이쁘면 안 돼? - 딴 남자들 말고 나만 널 원하고 싶어. 그니까 그만 좀 예뻐. 그럴 때마다 나는, '안 그래도 네 눈에만 이뻐' 라고 대답했었다. 솔직히 말해 진수는 언제나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 내가 조금 이쁜 편이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금 이쁜편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내가 정말로 예뻤으면 TV에 나와 연예인을 하고 있었겠지. 진수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남자가 홀라당 반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하여튼 진수 눈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예쁜 여자이며, 모든 남자들이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늑대들이라고 주장하곤 했었다. 그 때 생각이 나서 나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나도 너만 날 원해주면 돼. 너 말고 다른 남자는 싫어." "......." 진수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가만히 선 상태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표정은 읽어보면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저 표정. 정말... 좋긴 좋은데 중증이다. 한진수는 민망한 듯 크흠,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예전의 진수라면 그냥 부끄러워했을 텐데, 그래도 이 진수는 좀 다르긴 다르다. 괜히 퉁명스레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넌 가치가 매우 높은 계...아니. 여자고." 너 지금. 계집이라고 하려고 했지? 따지려다가 말았다. 그래. 습관은 어쩔 수 없지. 나는 마음 넓은(?) 여자니까 참아줄게. 복수할 거야. 뽀뽀 두 번 할 거. 한 번만 할 거다. 복수가 복수같지 않다고? 무,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큼큼. "그러니까 제국에서도 너를 노린다는 거야. 백제에 나이트들을 투입시켜가면서까지. 물론 그 나이트들이 제국의 나이트라는 증거는 없어. 다른 곳에서 온 나이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제국의 나이트라고 90퍼센트 이상 확신하고 있어." 진수의 말에 따르면 그 나이트들은 제국의 나이트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도 증거를 모두 없애거나 조작했을 거라고 했다. 제국의 소행이라는 것이 들키지 않도록 말이다. 진수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강해질 수밖에 없어." '그래야 내가 너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때가 또 떠올랐다. 그 왜. 예전에 그. 뭐야. 드라마 보다가 얘기했던 거. -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지켜줄게. - 그러지 말고 그냥 경찰에 신고해. - 경찰 오기 전에 너 다치면 어떡해? 나 그 꼴은 절대 못 봐.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라는 그 말. 그게 이렇게까지 진심인 줄은 몰랐다. 혹시나 싶어서 나는 묻기로 했다. "진수야."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진수는 또 움찔했다. 묘하게 귀여운 맛이 있네 이거. "네가 제국을 배신한 건..." 솔직히 말해서 한진수가 제국을 배신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는 세계의 대천재. 그게 바로 한진수였다. 굳이 제국의 반역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다. 부와 명예. 여자. 그가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는 그런 미래를 걷어차고 말이다. 한진수가 내 입을 막았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손이 아니라 입으로 막았다. 진수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진수의 입술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음...?' 뭐야. 근데. 왜 이리 빨리 떨어져? 아 진짜. 나 지금 발 뒷꿈치까지 들었는데 벌써 끝? 진짜 그런 거야? 아. 짜증나. 하려면 똑바로 하던가! 나는 따지고 싶었다. *** 한진수가 제국을 배신한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제 입으로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게는 조금 낯 간지러워서 말 못했지만 정말 그거였다. 김상희를 제국의 손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모든 명예와 부를 걷어차고 제국을 배신했다. 하지만 한진수는 그걸 김상희가 알게하고 싶지 않았다. 김상희는 그저 밝은 세상에 있었으면 좋겠다. 어두운 일. 나쁜 일은 모두 내가 감당할 테니, 김상희는 그저 예쁜 곳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건 안다. 김상희는 성녀다. 성녀가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일단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히 안다. 그것도 제국에서 탐을 낼 만큼의 능력이다. 그러려면 밝고 따뜻한 곳에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경고는 해줘야만 했다. 조심하라고. '내가 지켜줄게.' 마음 같아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게하고 싶다. 궂은 일, 무서운 일. 다 자신이 감당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가볍게 키스했다. 그런데. '나...뭐 잘 못 했나?' 짧게 키스했는데, 김상희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아니. 내가 왜 계집의 눈치를 보는 거야?' 이성이 눈을 떴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왜 한낱 계집 따위의 눈치를 보아야만 하냔 말이다. 감히 계집따위가 기분 나쁜 것을 티내? 아무래도 혼을 좀 내야할 것 같았다. "화, 화났어?" 하지만 말은 거꾸로 나왔다. 머리는 분명 혼을 내라고 단단히 버릇을 고치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김상희가 아무래도 약간 토라진 것 같은데 왜 토라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요." 심지어 이제는 존댓말이다.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 분명 화가 났다. 화가 난 게 맞다! 늑대들 32명과 싸울 때에도 이런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긴장이 됐다. 여러모로 다른 의미의 긴장이긴 했지만. "내, 내가 잘못 했다." "오라버니가 무엇을 잘못하셨어요?" 아까는 진수라며! 반말 하라고 했잖아! 진수는 괜히 슬퍼졌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사과는 해야할 것 같았다. "그냥 다." 김상희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저 말. 정말 많이 들었다. 조금만 화난 체 하고 있으면 진수는 언제나 미안하다고, 내가 못나서 너 화나게 만들었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김상희는 '네가 뭘 잘못 했는데?'하고 물었고 그 때마다 한진수는 진땀을 뻘뻘 흘렸었다. 속으로만 웃었다. '어쩜 이렇게 똑같아?' 겉으로는 냉기가 폴폴 풍겼지만. 하지만 이내 김상희도 웃고 말았다. '나 걱정 안 시키려는 건 여전하네.' 한진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뒷꿈치를 들었다. 한진수에게 먼저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쪽. 소리가 났다. 한진수는 그 상태로 얼어 버렸다. 세계의 대천재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기는 했다. 한진수는 몸에서 열이 확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성녀의 능력과는 별개로, 신체가 그렇게 반응 했다. 그런데 한진수는 또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크리스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가 이 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내 착각이겠지?' 스페셜 나이트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특수 필드다. 그런데 크리스가 이 곳을 파악했을 리 없다. '착각 일거야.' 한진수는 다시금 김상희에게 키스했다. "금방 올게." "거짓말. 매일 금방 온다고 하면서." 김상희의 목소리가 조금 변했다.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투정 부리듯.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냥 그렇게 변해버렸다. 한진수는 그런 김상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길로 김상희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금방은 못 올 것 같다. 그는 힘을 길러야 했다. 김상희를 지키려면. 제국과도 싸울 수 있는 힘을 말이다. 김상희는 눈을 떴다. 입술을 포개고 있던 그 따뜻한 느낌이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집. 입술은 왜 내밀고 있는 거냐?" 따뜻했던 한진수의 입술은 사라지고 탑 오브 망나니가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지금 꿈 꾼거야?'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네. 비행기가 덜컹거렸고 잠시 이상징후가 생겼었던 것 같은데. 정말... 꿈인가? 꿈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크리스가 말했다. "왕자님. 너무 구박하지 마세요. 상희는 정말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표정이 좋아 보이네요. 아까 봤는데 웃고 있더라구요. 많이 행복해 보였어요." 김환석이 퉁명스레 말했다. "너 따위가 알 바아니다." 직역하자면, 내 동생에 대해서 신경쓰지 마라. 나는 내 동생을 너에게 허락한 적이 없으니까. 라는 뜻이다. 물론 김환석 스스로도 이 뜻은 파악 못 했지만. *** 김상희는 왕궁으로 돌아왔다. 알렉스가 조심스레 책을 하나 가져왔다. 지금 이거. 엄청난 불법행위다. 기록의 관 특별서고는 남자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받은 남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다. 당연히 그 곳의 기록들은 일반 남자들은 접근이 불가하다. 일반 남자들도 그런데, 하물며 그보다 신분이 훨씬 낮은 여자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공주님.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물론 원본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알렉스가 필사 -마력을 써서 하는 거라 그리 오래걸리진 않는다.- 하여 사본을 보여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그 사본을 직접 다시 소각해 없앤다. 지금 이 행위는 불법 행위니까. 알렉스도 알렉스 나름대로 모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괴짜라서 할 수 있는 모험 말이다. "고마워요. 알렉스 학자님. 저는 고대의 기록들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요. 모두 해석하지는 못하지만... 아니. 대부분 해석 못하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물론 거짓말이다. 대부분 해석이 가능하다. 일부러 알렉스에게도 숨기는 중이다. 중간중간, 알렉스의 실수라 여겨지는 오탈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뜻을 해석하는 것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김상희는 고대의 기록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이건...?'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기록. 단순히 전설이라 치부하기에는 조금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자세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성녀'라는 글자도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갑자기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특별서고에 보관된 책들은 대부분이 고대의 기록이며, 또 대부분이 해석이 불가능한 기록들이다. 그러나 김상희는 읽을 수 있다. 100퍼센트 맞게 해석한다고 확신은 못했지만 그래도 해석은 됐다. '성녀라고?' 성녀에 관한 이야기. 마력에 관한 이야기가 좀 더 자세하게 써져 있었다. '여왕?' 게다가 여왕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처음에는 언제나 그렇듯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인 것 같았는데 뭐랄까. 마냥 헛소리는 아닌 것 같은 기분이랄까. 기록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라버니가 무엇을 잘못하셨어요?" 남자들이 무서워하는 말 중에 하나죠. 또 다른 대표적인 질문으로는... "오빠.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0114 / 0192 ---------------------------------------------- 분노한 김훈상. "김상희. 너... 뭐하는 짓이냐...?" *** 그는 자신이 영원히 늑대들의 왕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진수라는 걸출한 천재. 그러니까 우리 안에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그 대천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나타난 이후.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한진수의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진수를 공격하려고 했었던 그 시기 이후. 늑대들의 왕은 바뀌었다. '퓨리어스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처음에는 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퓨리어스 한 병을 통째로 우리 형제들에게 사용했다.' 당시. 한진수가 늑대들을 공격했을 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늑대들이 한진수를 공격했을 때. 그 때 한진수가 늑대들을 전부 죽인 줄 알았다. 분명 그랬었다. 죽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반쯤 시체였었으니까. 그러나 한진수는 퓨리어스를 사용하여 그들을 모두 살려냈다. 이 상황은 단순히 '한진수가 퓨리어스를 사용하여 늑대들을 살려줬다.'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실력차'를 들 수 있겠다. 늑대들을 전부 제압했다. 제압과 사살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살이 제압보다 쉽다. 제압하려면 정확한 힘조절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난전'이었다. 32명과 1명의 싸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제압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실력차가 있다는 거다. '거기에 더해 퓨리어스까지.' 퓨리어스는 오로지 고려에서만 생산이 된다. 그리고 고려왕가가 직접 관리한다. 즉, 고려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이 퓨리어스를 얻을 수 있다. 괜히 한 병 가격이 나라 하나와 맞먹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 것을 무려 한 병이나 가지고 있었다. 한 방울만 있어도 무병장수한다고 알려진 그것이 말이다. '그걸 아낌없이 사용했지.' 그 말은 즉, '정말로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건 퓨리어스가 확실했다. 퓨리어스가 아니고서야 반 쯤 시체에 가까운 형제들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살려낼 수 있었겠는가. '정말 황당한 거래지만.' 황당한 건 맞았다. 한진수가 원하는 것은 김상희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이었다. 애초에 레지스탕스가 결성된 것은 제국에게 항거하기 위해서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사정이 있다. 공통분모는 바로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어한다는 것. '한진수 역시 마찬가지지.' 이유는 정말 황당한 게 맞다. 김상희를 지키고 싶어서라니. 한 여자 때문에, 천고의 보물과 창창한 미래를 모두 내던지고 힘든 가시밭길을 간다니.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낱 계집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거.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목표는 같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득과 모든 명예는 우리 늑대들이 갖는다.' 모든 좋은 것들은 자신들이 누리게 될 것이다. 그에 반해 한진수는 '김상희'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정말 남는 거래이지 않은가. 그는 한진수를 늑대들의 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 자리를 되돌려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사실상 그 약속을 정말로 지킬지, 지키지 않을지는 두고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마도 지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면 그 때 그 자리에서 자신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놈은 김상희에게 정말로 미쳐있다.' 그것 만큼은 확실했다. 몸에 무리가 가는 워프를 사용해서 이동을 했다. 워프는 그 자체로도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 일정한 좌표를 가진 곳으로 이동해도 그렇다. 그런데, 이번에는 움직이는 물체. 그것도 시속 700km 이상으로 움직이는 비행기 안으로 워프했다. 그가 물었다. "괜찮은 거 맞습니까?" 한진수가 대답했다. "...괜찮아." 그가 보기에 한진수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고 마력흐름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한진수는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피가 끓어오르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느낌은 지금 느끼는 행복감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김상희가 '보고 싶었다'고 말해줬다. 그거 하나면 세상을 전부 얻은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김상희만 있으면 돼.' 정말이다.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다른 걸 원했으면 제국을 배신하지 않았을 거다.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보고 싶다.' 방금 보고 돌아왔는데 또 보고 싶었다. 미치겠다. 보고 싶은 마음이 주체가 안 됐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이 닿았었지.' 만약 혀를 김상희의 입 속에 넣었다면?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한진수는 모태솔로다. 연애를 해본 경험이 없다. 누군가에게 '키스하는 법'을 배운 적도 없다. 그런 건 원래 관심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떠올린 것이 '키스'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본능이 알려줬다. 혀를 넣으면, 그래서 혀끼리 맞부딪치면 굉장히 달콤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화내려나?' 더러운 짓 한다고 화 낼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그 때. 그러니까 입술이 맞닿았을 때, 예상 외로 시간이 너무나 짧았어서 김상희가 화를 냈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다. '아. 그래서 기분이 나빴었나?' 아무래도 자기도 모르게 혀를 넣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김상희의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확신했다. '혀, 혀를 넣는 건 자제해야겠어.' 이제서야 잘못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김상희도 말을 안 해줬겠지. 더러운 일이고 민망한 일이니까. 자꾸 이상한 충동이 밀려들었다. '아닌데. 난 넣고 싶은데.' 그런데 그러면 김상희가 화 낼 수도 있잖아. 두 가지 마음이 치고받고 싸웠다. 김상희가 알았다면 뒷목을 잡았으리라. 한편, 김상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꿈이었으면 좀. 진도 좀 쫙쫙 빼지. 꿈도 참. 답답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진수가 찾아왔었다는 것이 실제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자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좀. 이렇고 저런 것들도 좀 했으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아쉬웠다. *** 나는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가장 먼저. 고대에는 여자들의 마력이 더 강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일단 이 기록상으로만 보면 그랬다. 원래 고대에는 여자들이 마력을 갖고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었다고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괴롭히거나 노예로 부리지 않았었다. 아. 다시 말하는 거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다. 실제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계속 강조하는 건데, 고대의 기록이라는 건 전설이나 다름 없으니까. 그러니까 100프로 확실한 건 아니다. 하여튼 고대에 여자들은 마력이 없는 남자들을 가엽게 생각했다고 헀다. 뭘 하든지 불편하고, 힘도 약했으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모계중심 사회를 이루었으며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보호받는 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특별히 '성녀'라고 불리는 어떤 여자가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남자들에게 마력을 전수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 성녀는 자신의 특수한 능력을 바탕으로 남자들에게 마력을 전해줬단다. 남자들은 성녀를 칭송했고 점차 마력을 가진 남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여자들도 기뻐했다고 했다. 남자들이 이제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 시기를... 유토피아라고 한다...' 나는 기록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 유토피아. 그 시기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세상에는 전쟁이 없었고 평화로웠으며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유토피아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배신자 율다라...' 율다라는 남자가 등장하게 됐다. '무슨 진짜 전래동화 같네.' 율다라는 남자는 '성녀'와는 반대되는 능력을 가지게 됐다. 어떻게하여 그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능력인지, 아니면 특수한 어떤 약물을 사용한 건지. 아무것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만 알려졌다. 그 율다라는 남자는 여자들에게서 마력을 빼앗기 시작했다고 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여자들은 마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 여자들은 자신들이 왜 마력을 잃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율다가 비밀리에 일을 진행시켰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100년 전쟁'이라는 전쟁기가 태동했다. '100년씩이나 전쟁을 했다고...?'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상당히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힘을 가지게 된 그들은 점차 남이 가진 것을 탐하게 되었으면 서로를 죽이고 가진 것을 빼앗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그걸 막아보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여자들은 이미 힘을 많이 잃은 상태. 그래서 여자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남자들이 힘을 가진 세계. 그리고 끝없는 전쟁. 그렇다면 답이 뻔하지 않은가? 지구를 예로 들어 생각해봐도, 전쟁에서 피해자는 항상 여자였다. 때로는 성욕 해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노예가 되기도 했다. 100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여자들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됐다. '이 기록이 정말일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율다는 100년 전쟁 이후에 또 다른 이상한 방법을 개발해냈다. '도대체 율다는 몇 살이야?' 내가 이 기록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것 때문이다. 고대기록에 존재하는 율다는 최소 100살 이상을 산 것 같다. 아직 끝까지 안 읽어 봤는데 이대로 읽어보면 200살, 300살 정도는 살았다고 애기가 나올 것 같다. 그게 말이 돼? 하여튼 율다는 또 '여자들이 많이 태어나게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했다. 여자들은 힘을 잃었다. 그런데 숫자까지 많아지게 됐다. 그 이후는?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지금의 상황이 된 거다. 극 남존 여비. 여자는 노예일 뿐이며 남자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는 힘 없는 존재가 된 세상. 바로 지금 말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건, '여왕을 가진 남자들이 세상을 점령했다고?' '여왕'이라는 여자를 가진 남자들이 세상을 점령했다고 했다. 분명 여자는 힘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왕은 또 뭐란 말인가. 아쉽게도 여왕이 뭔지는 알지 못했다. 이 기록. 뭔가 이야기책을 읽는 것 같아서 재미 있었다. '그런데... 성녀를 가진 나라가...' 그런데 아주 작은 약소국이었던 어떤 나라가 있다고 했다. 그 나라에는 '성녀'라는 여자가 -아까 위에서의 기록과는 다른 형태의 성녀인 것 같다.- 있었단다. 그리고 그 성녀를 가진 나라가 결국 100년 전쟁을 마무리하고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게... 태양 제국 잉카라고?' 태양제국 잉카. 나는 그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현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대륙의 절대자. 제국의 이름이 바로 잉카다. 뭐랄까. 소름이 돋았다. '이 기록은 아마도... 수천 년 전에 쓰인 기록일 거야.' 그 기록에 '태양제국 잉카'가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현 시대에도 태양제국 잉카가 현존하고 있다. 이 기록이 단순히 거짓말일까? 단순히 이야기일 뿐일까? 사실 알 수 없었다. '성녀. 여왕. 태양제국 잉카. 100년 전쟁.' 도대체 뭘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자들의 배신자 율다. 율다의 행적이 또 자세하게 나와 있는 부분도 있었다. 율다는 원래 한 나라 왕의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왕은 여자였고, '남편'이란 여자에게 보호받는 존재였다. 하여튼 왕의 남편이었던 율다는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왕을 속여서 실험체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충격적인 기록도 있었다. '아. 여자들의 마력을 흡수해서 수명을 오랫동안 연장시켰다고?' 그런 내용도 있었다. 여자들의 마력을 빼앗은 이후, 시간이 흘러서 율다는 여자의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들을 많이 태어나게 했단다. 많이 태어나면, 개중에는 마력을 가진 여자들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정말 못된 놈이네.' 단순히 이야기일 뿐이지만 절로 욕이 나왔다. 나는 이 내용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신기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비추어 생각해보면 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정말 있을 법한 얘기. 있을 법한 얘기라서 더 몰입이 됐다고나 할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상희.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 나는 깜짝 놀라 책을 떨어 뜨렸다. 절대 금녀의 성스러운 구역에서 절대 빠져나와서는 안 되는 그 기록이 담긴 책이. 여자의 손에 의해 땅에 떨어졌다. 나는 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그 때 봤었던, 싸늘하기 그지없는 김훈상의 표정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설정이 조금 풀렸네요. 머릿속에 있는 걸 최대한 쉽게쉽게 풀어내려고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렵네요 ㅠㅠ 아직 제가 너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ㅠㅠ 이렇게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아껴주시고 함께 즐겨주시는 여러분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0115 / 0192 ---------------------------------------------- 분노한 김훈상. "김상희. 너... 뭐하는 짓이냐...?" ***111 김훈상이 뭔가를 발견했다. 보통 사람들이 봤다면 아마도 몰랐을 거다. 그러나 김훈상은 안다. 현 세대에 대천재 한진수가 있다면, 전 세대의 대천재로는 김훈상이 있다. 당연히 알아봤다. '특별 서고 내에 있는 내용이다.' 저 내용을 해석할 수는 없어도, 저게 특별서고에서 나온 내용이라는 것 정도는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상희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조심해서 본다고 보고 있었는데, 인기척도 없이 들어온 김훈상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 아버님..." "다시 묻겠다. 이게 뭐냐고 물었다." 특별 서고는 절대 금녀의 성스러운 구역이다. 아무리 왕비나 공주라 할지라도 감히 들어가서도, 들어가고 싶어해서도 안 된다. '이 계집이 이 내용을 스스로 얻었을 리는 없다.' 김훈상은 김상희가 이 책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롣 사실에 근접한 추리를 할 수 있었다. '범인은 알렉스겠군.' 분명히 알렉스다. 특별 서고에 있는 귀한 내용을 빼돌려 한낱 계집따위에게 전해준 사람은 말이다. 김훈상이 물었다. "김상희. 제정신이냐?" 그리고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스스로 느꼈다. '이 계집을 혼내기보다... 구제할 변명거리를 찾고 있다.' 범인은 알렉스다. 1차적인 범인을, 김상희가 아닌 알렉스로 지목했다. 김상희에게 화를 내기에 앞서 김상희에게 변명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솟구쳤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왕이다. 왕에게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 왕권은 무너진다. 지금 김상희의 행동은 도를 지나치는 행동이며,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건방지게 계집 따위가 감히 특별 서고의 내용을 넘보다니. 그리고 김훈상은 또 깨달았다. '나는 또 즉결처분을 하지 않고 있다.' 이젠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즉결처분 대상이다. 김훈상이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김상희를 죽여도 된다. '그런데 난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있지.' 김훈상은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김상희. 빨리 대답해라. 네 대답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것이다. 만약 그것이 특별서고에서 빠져나온 내용이라면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굳이 계속해서 사족을 덧붙였다. '멍청한 계집. 내 뜻을 좀 알아라.'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원칙이라는 게 있으니까. "특별서고는 절대 금녀의 구역이다. 그러니 특별서고에서 나온 내용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 나는 대단히 곤란해졌다. "특별서고는 절대 금녀의 구역이다. 그러니 특별서고에서 나온 내용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개차반이 이렇게 말했다. 눈치를 보며 살아온 것이 벌써 15년이다. 김훈상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것 같다. '이 책은 특별서고의 책이 아닙니다.' 라는 답변을 얻고 싶을 거다. 그렇게 말한다면 어쩌면 나를 용서할 수도 있다. 어차피 특별서고의 책은 대부분이 해석 불가능한 책이므로, 특별서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온 책이라고 우긴다면 우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 입장을 고려해달라고.'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만약 김훈상이 나를 떠보는 거라면? 물론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대답 여하에 따라 내 목숨이 왔다리갔다리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냥 흔한 책인데요. 절대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 아닌데요.'라고 말을 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계집따위가 왕에게 거짓말을 한다? 이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형이다. 어디 감히 계집이 무려 왕에게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 때, 설상가상으로 망나니 2종 세트가 내 방에 들이닥쳤다. "아부지?" "아버님?"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가 뭔가 묘하다.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탑 오브 망나니, 김환석 같은 경우는 지금 개차반의 손에 들려있는 게 뭔지 알고 있는 눈치였고 김환성은 분위기 파악 못한 채 키득대고 있는 형국. 개차반이 말했다. "너희들은 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냐?" *** 김훈상이 물었다. "너희들은 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냐?" 제발 몰라라. 모르기를 빈다. 김훈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김환석의 경우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모양새였고, 김환성은 키득대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왕궁 특별서고에 있는 거 같은데. 이상한 문자 마구 써있고. 음? 맞나? 맞아요?" 천진난만한 그 질문에 김훈상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놓칠 뻔 했다. 김환성의 경우는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딱히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김훈상은 생각했다. '왕에게는 원칙이라는 게 있다. 원칙이 무너지면 기강이 무너진다.' 원칙.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단체를 이끄려면, 그것도 국가 쯤 되는 거대한 단체를 이끄려면 원칙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는 김상희를 혼내기 싫었다. 정말 이상하고 해괴망측한 마음인데, '이렇게 어려운 걸 보고 있었구나'라고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피어 올랐다. 이건 정말 미친 거다. 정신병도 상당히 심각한 정신병. 그걸 알기는 아는데, 김상희를 혼낼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왕자가 이 책을 발견했다. 그것도 김상희의 방에서. 목격자가 아예 없으면 또 모를까, 목격자가 두 명이나 생긴 상황에서 무턱대고 관용을 베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 놈들은 갑자기 왜 이 방에 들어온 거냐?' 신하들이 듣는다면 놀라 까무러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한낱 공주 때문에, 왕자들의 입장을 싫어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일단 김훈상은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이건 내가 가져가겠다. 계집. 넌 처우를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 김훈상은 저녁 내내 고민했다. 그 고민은 밤이 되어서도 계속 됐다.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하니, 둘째 왕자 김환석이었다. "아버님." "그래. 무슨 일이냐?" 김환석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새어 나왔다. "그 계집을 용서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환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김환석의 아버지다. 김환석이 평소 공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환석이 역시... 정신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이 정신병은 유전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궁 내에는 원칙이 있다. 특별 서고의 내용은...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성스러운 내용이다." "어차피 해석도 불가능한지 않습니까? 성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을지, 천박한 내용이 담겨있을 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든 중요하지 않다. 김상희는 왕궁의 법도를 어겼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김환석을 응원했다. 그래. 어떻게든 핑계를 더 만들어 봐라.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갔을 때, 신하들과 다른 놈들이 납득할만한 그런 위대한 핑계를 말이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책은 아마도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제 책방에 있던 책을 필사한 것일 겁니다." 김상희와 김환석은 입장이 약간 다르다. 김상희가 왕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럼 사형당해도 할 말 없다. 그러나 김환석이 거짓말을 한다? 물론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거짓말의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는다. 그래서 거침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김훈상은 전 세기 대천재답지 않게 미끼를 덥썩 물어 버렸다. "네 눈에도 그렇게 보였나?" "......." 김환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 아버지. 갑자기 왜 이러시지?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니. 그건 누가 봐도 특별서고에서 나왔던 책이 틀림없는데. 김환석 마저도 고개를 갸웃할 뻔 했다. '불호령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김환석은 김훈상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다. 아들에겐 따뜻한 왕이지만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냉철한 왕이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아비에게 거짓말을 하면 크게 혼을 내겠다고 엄포를 놓으실 줄 알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동의를 했다. 욕 먹을 각오하고, 어떻게든 김상희를 변호하려고 비장한 마음을 품고 왔는데 좀 허탈할 지경이다. 김환석은 또 거짓말했다. "그렇습니다. 절대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이 아닙니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들어와." 이번에는 김환성이다. "아부지..." 김환성은 김상희가 멍청하고 바보라서 그런 실수를 했다고 주장했다. 김환성의 논리는 이러했다. "그 계집이 길을 잃은 거에요.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실수로 특별서고에 들어갔고, 그 덜떨어진 계집은 거기가 특별서고인지도 모르고 책을 꺼내왔겠죠. 복사를 했든지. 아니 마력이 없으니까 복사는 못했나? 하여튼 베꼈든 뭘했든 했을 거에요." 김환성의 말은 옳은 구석이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상희는 '기록의 관'에서 나고 자랐으며 거의 15년을 이 곳에서 살아왔다.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정말로 길을 잃었다고해도 특별서고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김훈상의 찻잔에 차를 따르던 시녀마저도 좀 황당해졌다. '특별서고의 입구는... 나이트님들이 특별히 지키고 있을 텐데...?' 나이트들이 지키고 있다. 그걸 뚫고 공주가 들어갈 수 있다고? 그게 말이나 돼? '폐하를 기만하려 하시는 건가?' 그도 아니면 어린 아들(?)의 재롱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비약하여 비유하자면, 왕에게 빨간색 종이를 가지고 와서 '아부지. 이건 초록색입니다. 알겠죠? 반드시 초록색이어야만 해요.'라고 주장하고 있는 꼴 아닌가. 더욱 황당한 건, "그럴 가능성도 농후하군." 김훈상이 저 개떡같은 논리에 수긍하고 있다는 것. 시녀는 혼란스러워졌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신 거지?' 어쩌면 엄청난 비밀이 담긴 얘기를 듣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천한 여자들은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미천하다고 느끼고 있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고차원적인 대화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 대화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대단한 암호인 것이 틀림 없었다.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내용이라 저런 암호화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리라. 물론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저 어떻게든 딸을 혼내고 싶지 않은 딸등신 김훈상과, 논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지만 어떻게든 김상희를 변론하고 싶은 오라버니가 일궈내고 있는, 한 편의 병맛 같은(?) 드라마일 뿐이었다. *** 아침이 밝았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찾았다. 김상희는 지난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김훈상이 자신을 아끼는 건 안다. 하지만 원리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을 용서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렇게 하루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 것이 고맙다고 생각될 지경이었으니까. '어떤...처분이 있을까?' 설마 사형은 아니겠지. 어쩌면 사형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애써 그 생각을 지웠다. '개차반이 옛날의 개차반은 아니니까.' 김훈상이 김상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김상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애교도 부릴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김훈상의 처분을 기다릴 뿐. 김훈상이 입을 열었다. "어이." 김상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버님." "왜 그러고 있는 거냐?"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요. 김상희는 속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긴장 됐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어제 새로이 법을 개정했는데. 아직 못 들었나보군." 김상희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였다. 소녀가 미천하여 아직 잘 모르고 있답니다, 라고 대답했다. "매일 00시 이후 나를 첫 번째로 보는 계집은 무조건 내게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여야만 한다. 그게 법이다." "......." 김상희는 혼란스러워졌다. 저딴 게 법이라고? 아마도 왕명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법령. 즉 왕령인 것 같은데, 갑자기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저런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나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되는 거야...? 김상희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김훈상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김상희의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이제야 올 것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계집." "네, 아버님. 말씀하셔요. 소녀가 여기 있어요." 김훈상이 김상희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너는 감히 왕명을 어겼다." 김상희는 자리에 주저 앉을 뻔 했다. 아마도... 특별서고를 금녀의 구역으로 만든 것은 왕명이었던 듯 싶다. '그게 왕명이었다고...?' 그것까지는 몰랐었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남자라 할지라도 '왕명'을 어기는 건 중대한 잘못이다. 그런데 남자도 아니고 여자따위가 왕명을 어겼다고? 그럼 그건 거의 사형이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김훈상이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 작품 후기 ============================ "매일 00시 이후 나를 첫 번째로 보는 계집은 무조건 내게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여야만 한다. 그게 법이다." 이딴 걸 법으로 만드는 딸등신 왕의 클라스 어지간히도 아빠소리 듣고싶나 봅니다 0116 / 0192 ---------------------------------------------- 아빠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 언젠가 김훈상은 김상희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를 지키는 자다. 너를 해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며 너와 함께함이다. 내가... 네 아버지다." 김상희가 '아빠'와 '오빠'를 불렀던 그 괴상망측했던 사건. 그리고 신하들이 집단으로 반발할 것이 뻔해보였던 그 사건 때 말이다. 그 당시 김훈상은 김상희를 쫓아내듯 궁에서 내보냈었다. 그런데 저게 왕명인 줄은 몰랐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한 것이 왕명이란다. 김상희는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그딴 게 무슨 왕명이야. 개차반을 조련한 것 까지는 좋은데,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지... 아니. 이상해지고 있지 않은가. 아빠라고 부르는 게 왕명. 명치 안 때리면 사형.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게 왕명. 뭐 이딴 인간이 다 있나 싶다. 아니. 두려움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영역 아닌가. 왕명을 지켜야 하는 건 이성의 영역이다. 애초에 영역 자체가 다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해서 안 두려워할 것 같았으면 그건 왕명이 아니라 신의 언어쯤 될 거다. 적어도 억울한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넌 날 두려워하고 있군." 건방져. 아주 건방진 계집이야. 왕권을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만도 못하게 생각하는군. 차를 내오던 송수진이 다른 말은 못 듣고 그 말만 들었다. - 건방져. 아주 건방진 계집이야. 왕권을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만도 못하게 생각하는군. 끔찍했다. 공주가 왕권을 저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왕에게 들켰다? 이젠 정말 끝이다. 송수진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안 돼.' 김상희 공주님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 진작에 알고 있다. 김상희 공주와 함께 해외여행도 갔다 왔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시녀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다. 단순히 외국여행을 갔다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시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어쨌든 그녀는 김상희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김상희 공주님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것 같았다. '어떡하지? 내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왕권을 모독하다니. 저건 빼도박도 못한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김훈상이 직접 저렇게 말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왔다.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김상희 공주님이 죽으면 남은 자신은 어떻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차를 가지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김훈상의 표정이 보였다. '화가... 전혀 안 나신 거 같은데?' 말만 들으면 분명히 엄청 화가난 것 같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아닌 것 같다. 화가 나기는 커녕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김훈상이 또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하지만 하찮은 계집이니만큼 위대한 내가 넓은 아량을 발휘해야겠지." "......." 한껏 긴장하고 있던 김상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아빠는 정말 위대하셔요.'를 약 세 문장에 걸쳐서 정황하게 표현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김훈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라고 부르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 *** ...진심이냐. 나는 정말로 그렇게 묻고 싶었다. '모든 것을 용서'해준단다. '그렇다면 설마...' 그렇다면 설마 '모든 것' 속에는 어제의 일도 포함되어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개차반의 조금 다른 모습이 보였다. '설마 하찮으니 위대하니 아빠니 어쩌니... 다 그런 건 결국 여기까지 오기 위한 쇼였던 걸까?' 과정이야 둘째 치고 그냥 결과만 놓고 보자면 '아빠라고 부르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 이거다. 아마도 저 '모든 것' 속에는 특별서고의 책을 봤던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조련을 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김훈상이 정말로 나를 딸로서 사랑하고 있을까? 그냥 단순히 애완견 보듯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이 곳에는 없는 종류의 여자아이라서 그저 약간의 호기심을 가진 채 날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솔직히 말해 나는 김훈상이 나를 딸로서 사랑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다. 그래서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개차반이 개차반답게 또 말했다. "싫으면 너 사형." "아, 아, 아빠..." 개차반이 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러지 말라고. 난 너 무섭다고. "잘 안 들린다." 그래서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아, 아빠." 김훈상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마치 전쟁을 앞둔 병사처럼, 얼굴에는 비장함까지 감도는 것 같았다. "더 크게." "아, 아빠!" 김훈상이 눈을 살짝 작게 떴다. 그리고 귀를 후볐다. "안 들린다." 안 들릴리가 없잖아. 너는 내가 직선거리 수백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아빠 오빠를 외쳤을 때에도 순식간에 나타났잖아. 네가 마음만 먹으면 나 심장 뛰는 소리. 아니, 내 피가 흐르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잖아. 마력이란 사기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주제에 안 들리긴 뭐가 안들려! 아... 무섭긴 무서운데 진짜 패고 싶다 얘. "아빠." "크게 말하라니까?" 그래서 결국 나도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정말로 크게 말했다. "아빠!" 그제서야 김훈상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서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 스페셜 필드. 김훈상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김상희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김훈상의 바로 앞까지 몸이 움직였다. 김상희의 머리 위에 김훈상이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듯, 김상희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너는 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다." "......." 김상희는 김훈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았다. "그건 절대로 특별서고에 있던 책이 아닌 거다." 김훈상이 결론을 내렸다. 그 책은 특별서고에 있던 책이 아니었다. "알겠냐?"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자의 심리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아니. 지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그가 김상희를 배려해줬다. "말하기 곤란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해라." 결국 김상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머리위에 얹어진 김훈상의 손길이 느껴졌다. '개차반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고...?' '개차반이긴 개차반인데 배려돋는 개차반이다...'라고 김상희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남자 중에서도 왕인 김훈상이 여자를 배려하고 있었으니까. 김상희는 모른다. 여태까지 김훈상이 얼마나 김상희를 배려해왔었는지. 김상희는 잘 몰랐었지만 김상희를 날릴 때. 그러니까 비행기를 태울 때에는 혹여 다칠까봐 비접촉 마력보호를 극성으로 걸어줬고 어딜 나가거나 할 때도 스페셜 나이트를 따로 불러 김상희를 보호하도록 했다. 바깥나들이 때도, 김상희의 고막이 상할까봐서 일부러 김상희의 귀를 보호하라고 김유신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김유신은 왜 그런지 전혀 이해 못했었지만. 김상희가 몰라서 그렇지 김훈상은 여태까지 김상희를 많이 아껴왔다. 김훈상이 말했다. "내가 네 아버지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그리고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다." 아버지 아니고 아빠. 그걸 강조했다. 별 거 아닌데, 아버지라고 부르면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거리감 느껴지니 싫어. 아버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렴.'이라는 이 다정한 말이 개차반의 입을 통해 나오니 '아빠라고 안 부르면 사형 시키겠다.'라고 표현되었을 뿐, 사실상 두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같았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좀 믿어라. 내게 기대어도 좋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빠..." 솔직히 말해 김상희도 이제 김훈상이 좋다. 좋기는 좋은데 무섭다. 좋은 마음과 무서워하는 마음. 그리고 또 얄밉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김상희 역시 자기가 김훈상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김상희." "네. 아버...아니 아빠. 말씀하셔요. 소녀가 여기 있어요. 소녀가 아빠의 말을 들어요." 연속되는 두 번의 아빠에,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김훈상의 표정은 마치 '목.표.달.성.!'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라. 그 책 내용. 해석이 가능했냐?"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이라고는 말 안했다. 그냥 그 책이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김훈상의 배려다. 김훈상은 그 책이 특별서고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모르는 척 했다. 아니, 모르는 척이 아니라 그 책은 특별서고에 원래부터 없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소녀는..." "나는 너를 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를 믿어라." 김상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과연 얘기해도 될까?' 이 세계의 남자들 입장에서는 하도 말도 안 되는 얘기들 뿐이지 않은가. 성녀이니 여왕이니. 배신자 율다니. 이 세계의 지배자인 남자들이 들으면 하도 기분 나쁜 얘기밖에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해석이 무조건 맞다고 볼 수 있을까?' 김상희의 눈에는 고대어가 한글로 보인다. 정확한 해석법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보일 뿐. 만약 그냥 한글로 보이는 것 뿐이라면? 뜻이 다르다면? 김상희도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김훈상은 김상희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릎을 살짝 숙여 김상희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설령 네가 나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너를 지켜주겠다. 그러니 나를 믿고 말해라. 내가 너를 지키는 요새가 되어 주겠다." *** 스페셜 필드가 해제 됐다. 송수진은 갑자기 나타난 김훈상과 김상희 때문에 찔끔 놀랐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김훈상과 김상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김훈상이 말했다. "나는 그저 그 흔한 이야기 책이 재미있었을 뿐이다. 하루의 시간을 주겠다. 잘 고민해서 얘기하도록 해라. 솔직하게 말이다. 아주 흥미로울 것 같아." 송수진은 김상희를 쳐다봤다. 뭐랄까. 고민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이다. '뭘 고민하고 계시지?' 김상희를 볼 때마다, 송수진은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김상희의 옆에 있으면 기상천외한 일들이 자꾸자꾸 벌어지니까. 그런데 오늘은 뭔가 더 충격적이다. '폐하께서 시간을 따로 주신다고?' 왕이 공주에게 뭔가를 말하라고 했다. 그럼 공주는 그냥 말해야하는 게 정상이다. 그게 상식이다. 애초에 공주에게 거부권이나 생각권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바로 말씀드린다고 하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무참히 깨졌다. "네, 아빠. 소녀를 생각하여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아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상황이야? 다 큰 공주가 폐하를 아빠라고 부르다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연속 두 번이나! 송수진은 충격에 충격에 충격을 계속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이 뭔가를 말하라고 했는데, 그걸 또 뜸을 들이는 거나. 아빠라고 부르는 거나. 김상희 공주 옆에 있으면서 충격적인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이건 충격을 넘어 파격이다. 거기에 또 파격이 이어졌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도 좋다." 시녀들의 입장에선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애초에 왕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왕에게 어떻게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그런데 왕이 직접 저걸 허용하다니. 이럴 수가. '공주님. 어서... 어서 말씀하셔요!' 이럴 때엔 아무리 여자들이라도 말해야 했다.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해서 거짓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 그게 상식이다. 이럴 땐, '저는 아버님께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어요.'라고 맹세를 하면 된다. 남자들의 말에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여자들이지만, 거짓말에 관한 문제 만큼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관례이며 상식이다. 실제로 남자들이 '거짓말 해도 좋다'라고 말을 했을 때, 여자가 정말로 거짓말을 하면 '감히 남자에게 거짓말을 해?'라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절대로 안 된다.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아빠가 소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 너무나 감사해요. 그래서..." 잠깐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소녀는 아빠가 정말 좋아요." *** 신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김훈상의 표정이 정말 좋아 보였다. 뭐랄까. 지금 같아서는 어떤 얘기를 해도 다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 하나가, 김훈상의 표정을 읽고서 얼른 보고했다. 이럴 때야말로 나쁜 보고를 올리기에 아주 좋은 시기다. "폐하. 이번 엘란 왕국과의 거래에 있어서..." 어려운 보고다. 손해가 났다는 보고를 해야만 하니까. 보고를 이어갔다. 몇 가지 상황설명을 이으면서, "2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엘란 왕국에서는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평소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거다. 그런데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신하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비록 성군이기는 하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하는 왕이다. 성공을 했다면 칭찬을, 실패 했다면 질책을 하는 그런 왕이다. 그런데 오늘은 좀 기분이 과도하게 좋아 보인다. 모두가 느꼈다. '오, 오늘이야말로 미루고 미루었던 보고를 할 기회다!' 원래 같은 말이라도 상대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해야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오늘은 무조건 해야할 때였다. 김훈상의 기분이 왜 좋은지 파악해야만 했다. 그래야 또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김훈상의 기분을 저렇게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한 명의 딸아이라는 걸 말이다. 시간이 흘렀다. 김훈상이 말했다. "알렉스. 너는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알렉스는 뜨끔했다. 그는 요즘 죄를 짓고 있는 중이다. 특별서고의 내용을 빼돌리고 있으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은 솔직히 좀 찔렸다. 깊은 밤. 알렉스가 김훈상을 찾았다. "폐하. 저를 찾으셔서..." 김훈상이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했다. "특별서고. 네 짓이냐?" 혹시나 했던 알렉스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해도 이번 일은 분명 선을 넘었다. 어차피 다 알고 물어보는 것일 터. 발뺌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학자다. 정치인이었다면 김상희에게 특별서고의 책을 전해주는 그런 미친짓은 하지도 않았다. 순수한 학구열을 가진 학자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무릎을 꿇었다. 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폐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김훈상이 말했다. "그래. 죽을 죄를 지었다." 알렉스의 몸이 움찔했다. 그렇다. 왕은 비록 성군이지만 할 땐 하는 왕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10년 내에서만 찾아봐도 왕궁에 두 번이나 피바람이 불어닥쳤었다. 이번에는 아마도. '아마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다.' 그럴 것 같다. 왕이 직접 '죽을 죄를 지었다'라고 말을 했으니. '상희학을 집대성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이제서야 빛을 조금 발하는 것 같은 학문인데, 그걸 여기서 접어야 한다니. 그게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정이 있으니 편안한 죽음을 내리시겠지.'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프게 죽는 건 사양이다.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개념이 없던 건 사실 개차반이 아니라 김상희라고 합니다. 왜 아직도 모르니 사실은 배려돋는 개차반이라고 ㅠㅠ 0117 / 0192 ---------------------------------------------- 아빠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 김훈상이 물었다. "알렉스.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나?" 솔직히 말해서 김훈상은 조금 화가 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김상희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 들켰다면 일이 많이 커진다. 왕과 왕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해서 그렇지 그렇지 않았다면 눈물을 머금고 김상희를 벌했을 수도 있다. 원칙이란 건 그런 거니까. "김상희 공주의 능력이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아깝다라." "김상희 공주는 김상희 공주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고어를 해석합니다. 그래서 특별서고에 있는 책들 마저도 해석할 수 있을 거라고 내다봤습니다." 사실 김훈상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딸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는 거다. "정말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김훈상은 알렉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말했다. "내가 알아보니 그 책은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이 아니더군." 그리고 알렉스는 확신했다. 알아보긴 개뿔. 알아보지 않았다. 왕은 지금, 누가 봐도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을 특별서고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둔갑시키고 있는 거다. 어차피 본 사람은 없으니까. 알렉스는 비록 정치인은 아니지만 왕의 생각을 아주 무시해버릴 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 물론 그렇습니다. 조금 어려운 고어가 담겨져 있는 책일 뿐이었죠." "알렉스." "예. 폐하." 그리고 알렉스는 안도했다. 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상희학을 집대성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 아닌가. "입 조심해라.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알렉스는 왕이 다르게 보였다. 아까. 불과 몇 분전만 하더라도 공과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왕으로 보였다면 이제는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딸바보. 아니, 딸등신으로 보였다. 그리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희학은 위대하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해왔던, 다른 나라에서는 철혈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김훈상이 이토록 원칙을 깨고서 잘못을 눈감아 줄 만큼. 상희학의 힘은 대단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모양새라니. '게다가 하지 말라고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다!' 그 말이 뭐겠는가? 눈 감아 줄테니까 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혹시 김상희 공주님이 특별서고에 있는 책을 보길 원해서?'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 사랑하는 딸내미가 그토록 원하는 건데, 딸등신이 그걸 못하게 막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원칙을 준수하는 철혈의 왕 마저도, 그 원칙을 깨뜨리게 만드는 것. 그 것이 바로 상희학의 위대함이었다. 학구열이 더욱 불타올랐다. *** 알렉스와의 만남을 가진 뒤, 김훈상은 김상희를 찾았다. 김상희에게 가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그 아이가 내게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확실하게는 몰라도 그 아이는 고어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계집치고 아주 똑똑한 아이이니 자기가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길 꺼려할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냥 심심해서 그런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하면 된다. 하지만 김훈상은 봤다.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김상희의 모습을.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그 정도로 집중할 수 있을리는 없었다. 마치 책을 읽듯, 자연스럽게 눈동자도 움직였었다.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김훈상에게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믿음을 주지 못하는 아버지인가?' 김상희가 말하기를 꺼려헀다. '나는... 믿음을 받지 못하는 아버지인가?'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김상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섭섭함이 마구 몰려 들었다.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정말 애 많이 썼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황당하고 웃기는 일인가. 공주가 왕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건, 그건 범죄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왕은 그 것에 분노하는 게 맞다. 그게 이 세상의 상식이며, 모두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김훈상은 달랐다. 화는 하나도 안 났다. 그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됐다.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하지?' 사실 김훈상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다. 처음에 인정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인정하고 나니까 삶의 태도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었다. 왕자들보다도 김상희를 더 아꼈으니까. 자신이 미쳤다는 걸 인정하고, 김상희를 아끼고 또 아껴왔는데 김상희는 아직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다 열지 못했다. 그게 슬펐다. 김상희가 김훈상을 맞이했다. "아빠. 오셨어요?"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두 손을 앙증맞게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저 모습. 귀엽다. 사랑스럽다. 귀엽다나 사랑스럽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니 더더욱 행복해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마음이 많이 복잡했는데, 이젠 또 아니었다. 김상희의 한 마디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 버렸다. 김훈상이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 봐라." ***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쩌면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옛날에는요. 여자가 짱이었구요, 남자가 배신했어요. 나쁜 남자 놈들이 세상을 이렇게 바꿔 버렸대요. 참 재미있는 얘기죠? 이렇게 말하면 끝나는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것이 왕궁의 성지인 특별서고에서 나온 내용이라는 점이 조금 특이할 뿐. 그리고 남존여비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의 개차반이 그 말을 듣는다는 것이 특별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이 바른 말이지, 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아무에게도 얘기 못하고 있는 상황. 심지어 알렉스 학자님에게도 숨기고 있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개차반이 내 말을 잘 들어줄까? '들어줄 것 같은데...' 개차반. 습관이 되어서 아직도 내가 '개차반'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이제 개차반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안할 정도다. 쟤는 티를 안내려고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나를 볼 때의 눈빛과 다른 사람을 볼 때의 눈빛이 완전히 다르다. 너무 티가 나서 민망할 정도니까. 음. 개차반의 눈빛을 굳이 문자로 표현해보자면 '하트뿅뿅'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이 곳의 방식대로, 남자를 높이며 질문을 했다. "아빠는 저의 요새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맞나요? 정말인가요? 소녀가 아빠의 요새 속에 숨어 숨을 돌려도 될까요?" 개차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렇듯, 약간은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내용 자체는 오글거리는 데, 분위기는 전혀 오글거리지 않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이며 누구보다도 단단한 산성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안전한 요새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말해라. 내가 네 말을 듣겠다." 나는 뜸을 들였다. 말을 하라고 해서 바로 말하면 안 된다. 애도 좀 태워줘야 한다. 말할 듯 말듯. 믿음을 주는듯 마는듯. 내가 15년동안 해온 게 이런 줄타기다. 무슨 일이든 한 10년하면 전문가가 되잖아. 나는 한 15년을, 그것도 목숨을 걸고 해왔다. 이 정도는 이제 껌이다. "소녀는 아빠를 믿고 신뢰하며 존경해요. 하지만... 아빠가 소녀를 정말로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 서질 않아요." 아마... 충격 좀 받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김훈상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 참. 김훈상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이 세계의 남자들이 전부 그런 거야? 아니면 내가 무슨 독심술이라도 갖고 있는 거야? 왜 저렇게 표정이 술술 읽혀? 오늘따라 정도가 아주 심하시네, 이 아버님. "내가 너를..." 그런 주제에 말은 또 잘 못했다. '사랑'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에는 아마도 어려우리라. 해본 적도 없는 말일테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빠가 소녀를요...?" 설마하니 사랑한다고 말하겠어요? 아빠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라고 주장하는 듯. 나는 그렇게 개차반을 쳐다봤다. 개차반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봐.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해요? 내일 전쟁이라도 터져? "하여튼 확신을 가져도 된다." 그러니까 무슨 확신?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시라고. 어라. 나 지금. 엄청 신기한 거 발견했다. 김훈상 지금. 무표정이긴 한데, '귓볼이 조금 붉어졌잖아?' 나 저런 모습 처음 본다. 귓볼이 붉어진 김훈상이라니. 귓볼이 붉어진 이 시대의 성군이라니! 귓볼이 붉어진 전 세대의 대천재라니! 아 미치겠다. 귓볼이 붉어졌다니. 아. 우리 개차반씨한테 저런 모습이 있었어? 와. 진짜 신세계다. 지금 내 기분을 글자로 표현해보자면 아마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오구오구. 아빠. 귓볼. 붉어져쪄요. "어떤 확신인지... 미천한 소녀는 입으로 말씀하여주시지 않으면 정말로 모른답니다. 소녀의 아둔함과 겁 많음을 용서하여 주시어요." 자. 그러면 이제 말해봐. 구체적으로 말이야. 어떤 확신인지. 김훈상은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아니라, 내 뒤의 무언가를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화, 화난 건 아니지?' 분노한 것처럼 보이는 개차반이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몇 번인가 밀당 아닌 밀당을 한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빠에게만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어요. 다른 사람은 너무나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소녀의 요새가 되어주시는 아빠에게... 소녀는 용기를 내보도록 하겠어요. 아빠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야야. 개차반아. 입 찢어지겠다. 표정관리 좀 어떻게 해봐. 그리고 나는 특별서고 내 책에 있었던 내용들을 김훈상에게 얘기해줬다. 여태까지 읽었던 모든 내용들을 말이다. "...그런 내용이 적혀져 있었어요. 소녀의 해석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 개차반씨는 내 말을 딱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고대의 기록이라는 건 전설이나 다름 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전설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나라의 이름이 태양제국 잉카였어요." "......."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김훈상은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내가 말을 이었다. "또한... 저는 한진수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진수?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 글쎄요.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봤던 것 같은데. "저보고 성녀라고 했어요. 성녀 말고 여왕이라는 여자도 있다고 했어요." "성녀와 여왕이라?" "소녀는 성녀가 무엇이고 여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했다. "그리고... 골렘 피라미드에서 아빠를 뵈었을 때가 기억나요." 아. 그러고보니. 그 때. 스페셜 나이트들이 우리를 구출하러 왔었다.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딱히 떠올리지 못했는데, '이 개차반이 나를 아끼기는 정말 아끼는 구나.' 이제 또 좀 알겠다. 단순히 아끼는 게 아니고 아마도 개차반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스페셜 나이트 수십명을 투입했고 자기가 스스로 찾아오기까지 했었으니까. 어떻게 갑자기 날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 곳에서 저는..."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 세상을 가지고 싶다면 골렘을 얻으라. 이 부분은 해석이 잘못되어 있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옳은 해석은 이랬다. - 골렘을 가지면 세상을 얻을 것이다. 그 것을 얘기해줬다. "그리고... 해석이 불가능한 부분에는 이러한 얘기도 있었어요." - 성녀의 은총이 내릴 때에 골렘이 깨어나리니. 그 말을 들은 개차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그리고선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줬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배시시 웃었다. 예전이라면, 나는 100퍼센트 연기로 이런 행동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도 여자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 있으면... 솔직한 말로 마음이 열린다. 비록 우리의 첫 만남 때(?)의 앙금은 평생 없어지지 않겠지만. 또 계집이니 어쩌니 반성이니 어쩌니했던 그 거 말이다. 하여튼 지금은... 완전히 연기는 아니고 한 반 쯤 연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개차반의 손길.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오히려 좀 좋은 축에 속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왕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음? 갑자기 왜 이러지? "알렉스를 통한 특별서고의 이용을 허가하겠다. 누군가 묻는다면 특별서고에서 나온 책이 아니라고 발뺌해라. 내가 보증하겠다. 내가 지켜주겠다. 혹시 모르니 무조건 거짓말 해라. 내가 보증하고 용서할테니." ... 요즘 이 개차반. 나한테 왜 그래...? 왜... 좀 고마워지려고 그래...? 에이. 모르겠다. 오늘은 서비스다. "아빠." 조금 뜸을 들이고 말했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서비스야. 반 쯤은 연기라고. 일단 나를 반만 잊기로 하자. "뽀뽀해도 돼요?" *** 왕궁 내 회의실. 궁정 내부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관리들이 모였다. 이번 회의 주제는 바로 '김상희'와 관련된 얘기였다. "...그렇습니다.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일정이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김상희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진수와의 약혼이 파기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왕궁에는 관례가 있다. 계집들을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차례대로 시집을 보내야 했다. "곽씨 후작가에서 김상희 공주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에 빠르게 보내버리죠." 사실상 이런 것을 결정하는 것은 왕이 아니다. 안 그래도 바쁜 왕이다. 계집의 시집 문제.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관리들끼리 결정해서 마지막에 사인만 받으면 끝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김상희와 김훈상이 전혀 모르는 사이. 김상희의 결혼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김상희에게 통보가 내려왔다. 한 관리가 김상희 공주를 찾아 왔다. 딱히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어중간한 말로 말했다. 태도 자체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그냥 공주라서 아주 무시만 안하는 거지, 사실은 만만하게 보는 게 완전히 티가 날 정도였다. "김상희 공주는 결혼을 준비하도록 합니다." ============================ 작품 후기 ============================ 아빠 잉잉 저 시집가게 생겼어여 0118 / 0192 ---------------------------------------------- 실종된 김상희 ***118 며칠 전. 곽기현은 이상한 꿈을 꿨다. 아니.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다. 곽기현이 벌떡 일어섰다. "야! 야이 나쁜 새끼야!" 주먹을 들고 그 자리에서 돌진하여 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으악!" 하지만 비명을 지른 건 다름아닌 곽기현. 주먹이 너무 아팠다. "인간적으로 맞아주는 척이라도 좀 하든가. 이 나쁜 새끼야." "......." 한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반역자다. 곽기현이 자신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선뜻 찾아오기가 어렵기도 했다. 어린시절부터 믿어 왔고, 알게 모르게 의지해왔던 친구인데 반역자가 된 지금. 어떤 반응을 보일까싶어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제국의 반역자라며 찬밥 대우를 한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았으니까. 곽기현이 말했다. "마실 거라도 좀 내줘?" "아니. 됐다." 곽기현의 태도는 과거, 한진수가 촉망받는 기대주였을 때와 완전히 똑같았다. 제국의 반역자라는 거. 그런 거 쯤은 하나도 신경 안 쓰는 듯 했다. 이 사실이 제국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아무리 곽씨 후작가라 할지라도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 자명했는데도 말이다. 한진수가 물었다. "내 욕... 안 하냐?" "욕? 이미 다 했다. 다 쏟아내서 할 말이 없네 이제. 넌 아주 개새끼야." "......." 욕 다해서 이제 할 말도 없다면서 곽기현은 또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 "적어도 나한테는 네 사정 말할 수 있었잖아. 적어도 한 번은 찾아와서, 아니 전화라도 사용해서 이러이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었잖아. 내가 너한테 이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우리 친구 맞긴 맞냐? 나만 너 친구라고 생각했냐? 나만 너 걱정했냐? 아 생각해보니 존나 억울하네 진짜." "...미안하다."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곽기현은 한진수를, 제국의 배신자가 아닌 친구 한진수로 보고 있었다. 곽기현이 최후 통첩(?)을 내렸다. "한 번만 더 이딴 짓했다가는 진짜 절교다." 하지만 곽기현도 한진수도 이딴 짓 한 번 더 할수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안다. 제국에 한 번 반역했는데 어떻게 또 반역한단 말인가. 하여튼 못 말리는 놈이다. 라고 생각한 한진수는 피식 웃었다. 곽기현이 발끈 했다. "웃지 마. 지금 짜증난 상태니까." "그래." 시간이 조금 흘렀다.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한진수도 곽기현도 이 상황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딱히 무언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어색한 기류는 없었다.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곽기현이었다.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려고 들지 마.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유와 과정이 어찌됐든 그는 제국에 반역했다. 그런데 곽기현은 그 이유조차 묻지 않고 있다.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했다. "그래서 갑자기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 뭔가 나한테 부탁할 게 있는 거 아냐?" 한진수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 "요즘 독심술 익히냐?" "네가 그러면 그렇지 뭐. 그래서 뭔데?" 한진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곽기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진짜 개새끼다." "나도 개새끼인 거 안다." "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통이 터지네. 간만에 떡하니 찾아와서는...아참. 이 것도 불법 가택침입인 거 알지? 너 지금 내가 신고하면 바로 잡혀가야 돼." 신고하려면 진작에 했겠지만. 그 말은 삼켰다. 그리고 또 열을 냈다. "게다가 이젠 뭐라고? 나보고 결혼을 하라고? 에라이, 더러운 새끼야." "...부탁한다." "그래. 결혼하는 건 뭐 그렇다 쳐. 어차피 내 씨를 남겨야 하는건 중요하니까. 그런데 건드리지는 말라고? 그럴 거면 결혼은 뭣하러 해? 위장결혼이냐?" 곽기현은 한진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들어줄 거냐, 안 들어 줄거냐?" 곽기현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한진수를 욕할 뿐이었다. "개새끼..." *** 한진수는 한진수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하고 내린 결정이다. 어차피 김상희는 시집을 가야 한다. 그게 왕궁의 원칙이다. 아무리 김훈상이 김상희를 아낀다고는 해도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다. 김상희가 가지 않으면 그 아래의 다른 공주들도 시집을 못 간다. 그리고 애초에 공주의 시집 문제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므로, 산하의 관리들이 알아서 관리한다. 왕궁에 커다란 이익을 제시하는 쪽에 공주를 넘긴다. 공주는 공주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다른 가치보다도 '고려왕가의 피'를 이었다는 것에서 일단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봐야 계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려왕가의 피를 가지고 있고 그러면 우수한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게다가 왕가의 계집은 대부분이 미녀다. 잘난 아들이 태어날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곽기현은... 믿을 수 있으니까.' 어쨌든 김상희는 무조건 시집을 가야만 하는 상황.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곽기현에게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차선책이다. 사실 그는 김상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다. '분하다.' 단순히 분한 게 아니었다. "어라. 대장. 지금... 설마..." 한진수에게 결국 항복하게 된 붉은 늑대의 왕 칼리번은 깜짝 놀라야만 했다. 한진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지금 웁니까? 라고 말할 뻔 했는데 겨우 참았다. '저 인간도 인간은 인간인가보네.' 피도 눈물도 없는 독종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한진수가 말했다. "우리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뭐. 대충은요. 아. 전 중요한 일이 있는데 깜빡했네요. 그거 먼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칼리번은 황급히 방을 나갔다. 한진수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가 않다. 뭐랄까. 외로워 보인다고 해야하나. 고독해 보인다고 해야하나. 칼리번은 지금 한진수의 느낌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도 모두를 이끄는 리더. 그러니까 절대자의 자리에 앉아본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고독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한진수가 눈물도 흘릴 줄 안다니. 사람은 사람이구나.' 한진수는 눈물을 훔쳐냈다. 너무 분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김상희와 결혼하고 싶다. '내 옆에만 두고 싶다.' 딴 거 필요 없다. 김상희가 자신을 안 좋아해도 상관 없다. 그냥 옆에만 있어주면 좋겠다. 옆에만 있어주면, 정말 잘해줄 자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미 포기하고 김상희를 선택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김상희가 그에겐 가장 큰 보물이라는 소리다. '나는 아직 너무 약해.'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보물을 가지려면 보물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그의 힘은 아직 제국에 비하면 너무나 약했다. 그 전 까지. 김상희를 지켜야 했다. '그러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어.' 그래서 곽기현에게 부탁했다. 정말 싫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주기 싫지만. 이미 너무나 슬프고 분했지만. 그래도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기현이라면... 괜찮아.' 제국의 반역자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건만, 기현은 그런 걸 신경도 쓰지 않았다. 김상희를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곽기현은 아마 그 부탁을 들어줄 거다. 길지는 않지만 한 평생을 살면서, 곽기현같은 친구 한 명 쯤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다음 날. 곽기현이 말했다. "아부지." "왜?" "나 결혼 할래요." 그의 아버지는 반색했다. "결혼 안 한다더니? 필요 없다더니?" 곽기현은 머뭇거렸다. 거짓말 하는 것에 익숙치가 않다. 그래서 좀 찝찝했다. "예전부터 맘에 드는 계집이 하나 있었는데 말씀을 못 드렸어요." "어떤 계집이냐?" "아실걸요? 김상희라고." "김상희?"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모른다. "왕국의 보배 있잖아요." "아. 그 계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은 제국의 반역자가 되었지만 어쨌든 이 세계 최고의 남자라 할 수 있는 한진수의 전 약혼녀. 그리고 고려왕가의 피를 이었다. "좋은 씨받이가 되겠구나." "그렇죠 뭐. 추진 좀 해주세요." 그리하여 김상희 공주의 결혼이 추진되었다. *** 곽기현은 투덜 거렸다. "시밤. 시밤. 시밤. 시밤. 시밤. 시밤." 그는 원래 결혼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친구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이 결혼하게 생겼다. 곽기현만 투덜대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곽기현은 투덜거리만 했다. 그에 반해 김환성은 분노했다. 그는 한달음에 왕의 방을 찾아갔다. 노크도 안 했다. "아부지! 그게 사실이에요?" 원래대로라면, 이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냐! 하고 혼을 냈겠지만 오늘 만큼은 아니었다. 김훈상도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렇게 됐다." "똥개는 아직 어려서 안 돼요! 게다가 약혼까지 했는데 결혼은 무슨 얼어죽을 결혼!" 김환성은 물론 망나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인 김훈상 앞에서 이렇게 언성을 높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버릇없는 행동이 맞았다. 그러나 김훈상도 그것을 질책하지 않았다. "아부지. 잘 생각해 봐요. 걔는 똥개인데다가 더럽고 냄새나고 그래서 안 돼요. 결혼시키면 왕가의 얼굴에 먹칠을 할 거라고요." 김환성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정당한 명분이 없었다. 내 동생이니까 결혼은 안 돼. 아무나 못 줘. 절대 안 준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가는 정신병자로 몰려 아마 탄핵당할 거다. 그 건 김훈상도 마찬가지다. 내 딸은 안 된다. 내 딸은 아무나 못 준다! 내 딸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훌륭한 놈 아니면 안 돼! 라고 주장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결혼하는 건 왕궁의 관례다. 법칙 까지는 아니어도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다. 그리고 계집의 결혼은 관리들이 정해왔다. 곽씨후작가에서는 상당한 예물까지 준비했다.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김환석도 김훈상을 찾아왔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결론만 말해라." "제가 여러모로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김상희의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김훈상도 안다. 지금 저거 핑계다. 김상희의 몸은 완벽히 정상이다. 하지만 모른 척 했다. 아니. 모르기로 했다. "어떻게 이상하지?" "아무래도 불임인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가 많은 계집을 시집 보내는 건 안 될 말입니다." "역시 그런가?" 그래서 명령을 내렸다. "미첼을 불러 와라." 회복의관 관장 미첼이 김훈상을 찾아왔다. 그리고 김훈상은 강요하듯 말했다. "김상희는 불임이지. 그렇지 않느냐?" 회복의관 관장 미첼은 식은땀을 흘렸다. 반드시 불임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살벌한 느낌이랄까. 하여튼 긴장 됐다. 저런 왕의 모습. 처음 본다. 뭔가 똥줄 타는 느낌이다. "김상희는 반드시 불임일 것이다. 미첼. 대답해라." "폐, 폐하... 그 것이..." 하지만 미첼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소견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했겠지만 이미 제출한 상태다. "김상희 공주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소견서를... 이미 제출했습니다." 왕궁 내부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기관. '집행부' 관리들에게 이미 소견서를 냈다. 이건 당연한 거다. 남자에게 보내는 여자다. 여자 측에서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한다. 공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여태까지 항상 정밀 검사를 진행하여 집행부에 검사결과를 넘겼다. 우리가 넘기는 공주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관례였다. 김훈상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걸 왜 그렇게 빨리 제출했어!" 아니... 폐하. 원래 하는 건데요... 미첼은 억울했다. 원래 하는 일이다. 즉, 업무라는 소리다. 업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행 했더니 돌아오는 건 오히려 욕이었다. 미첼은 울고 싶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따지고보면 집행부 관리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 거다. 김훈상은 모두를 내보내고 혼자서 욕했다. 왕의 자리에 앉은 이후, 비속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김훈상의 입에서 상스러운 언어가 마구 튀어 나왔다. "이 개새끼들을 어떻게 족치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핑계도 없고 명분도 없다. 오히려 흠 -과거 약혼을 했으므로-이 있는 김상희를 받아주어 고맙다고 해야할 판이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절대 보낼 수 없다. 절대 안 보낸다. 절대 내 새끼 못 보낸다.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김상희의 방으로 향했다. 김상희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김훈상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김훈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 왕이 된 이후. 말문이 이렇게까지 막혔던 적은 처음이었다. ============================ 작품 후기 ============================ 딸등신 김훈상 동생병신 김환석 동생등신 김환성 지금 발등에 불 떨어졌다고 합니다 0119 / 0192 ---------------------------------------------- 실종된 김상희 ***119 나는 내가 이 세계에 왜 태어난건지 잘 모르겠다. 혹시 또 모른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 이렇게 되는 거. 솔직히 상상 한 번 정도는 해보지 않았을까. 자고 일어났더니 다른 세상이라더라. 정신을 차려보니 이세계라더라. 사실 허황된 얘기다. 그래. 그것까지는 좋다. 허황된 얘기지만 내게는 정말로 일어난 일이니까.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는데 하필이면 개똥같은, 남존여비로 점철된 세상이라는 것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겠다. 개떡같은 남존여비가 팽배한 대신에 이 곳의 남자들은 상당히 단순했고 다루기가 쉬운 편에 속했으니까. 남존여비가 팽배한 상황인데 여자들보다 더 약삭빨랐다면 나는 진작에 혀 깨물고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하여튼 좋다. 다 좋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나는 15년간 살아남았고 개차반과 왕자들의 이쁨도 받고 있으며 여자의 몸으로는 경험하기 힘든 많은 일들을 경험해왔다. 여자의 몸으로 제국 마력학원에도 입학해봤고 바깥 나들이를 두 번이나 다녀왔으며 계집 주제에 아빠와 오빠를 제 맘대로 불러내기도 했었다. 뿐이랴. 해외 여행까지도 갔다왔다. 아마 나는 왕을 독대한 횟수가 가장 많은, 사상 초유의 그런 공주일 거다. 나는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 것 만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것 만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수 외에 다른 남자를 내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크리스가 내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지만 솔직한 말로 나는 크리스가 남자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따지고 보면 크리스는 정말로 좋은 남편감이다. 여자에게 다정다감하며, 여자의 마음을 잘 읽어준다. 재력도 굉장히 뛰어났다. 이 세계에서 '너만을 아끼고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진수를 제외하면 아마 크리스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리스를 이성으로 사랑할 수는 없었다. 내 마음 속에 한진수가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 마음 속에 한진수가 너무너무 커서. 그래서 크리스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너는 어디 있는 거야...' 지구에서는 늘 진수가 나를 기다렸다. 특히 연애 초반. 내가 진수의 속을 아주 많이 썩일 때에. 그 때 진수는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기다렸었다. 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비를 쫄딱 맞으며 1박 2일을 기다렸던 적이 있을 정도다. 언젠가 오겠지. 오겠지. 오겠지하면서 이틀을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 당시 내가 핸드폰이 고장나서 연락하지 못했었다. 물론 핑계다. 연락을 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냥 귀찮아서 안했었다. 내가 그래도, 진수는 어차피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테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내가 진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었으니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못된 년이었다. '그래서 벌을 받나봐.' 눈물이 차올랐다. '어디 있는 거야. 왜 내 옆에 없는 거야. 내 옆에 있어준다고 했잖아.' 예전이랑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제발 내 옆에만 있어달라고.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옆에만 있어달라고 사정하던 진수였다. 그 진수가 이젠 내 옆에 없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제국을 피해 어떤 것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진수는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부탁이야...' 부탁이니까 내 옆에 있어줘. 말하고 싶었다. 부탁이니까 내 옆에서 나를 좀 안아줘.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랬다. 나는 벌을 받는 것이었다. 진수의 진심을 그토록 호구 취급하며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생활했던 그 때의 그 벌을 이제서야 받게 됐다.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니. 나는 그 결혼에 반대할 수 있는 능력도, 힘도 없었고 명분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남자들이 결혼을 하라고 말하면 결혼을 해야만 하는 그런 무가치한 계집일 뿐이니까. '나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나는 내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열심히 해왔는데. 결국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결혼을 해야만 하는 걸까? 서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나는 이불속에 숨었다. 이불 속에 숨고 나니, 그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나는 히끅대며 중얼 거렸다. "보고 싶어..." 나 결혼하게 될 거라고. 그것도 네 절친했던 친구인 곽기현한테 시집 간다고. 이래도 괜찮아? 나 정말 시집가도 괜찮아? 나는 그럼 이제 네 여자가 아니게 된다고. 나는 내 남자가 네가 아니면 안 되는데...너는 정말 괜찮은 거야? 뭐라도 좋으니까 대답이라도 좀 해줘. 내 앞에 나타나란 말이야! 나는 엉엉 울었다. 정말로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실컷 울고나면 속이라도 좀 후련해지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울었다. *** 김훈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그 옆에선 시녀 송수진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왕이 방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공주는 반드시 일어서서 예를 취하고 인사해야만 맞다. '공주님... 제발 빨리 좀 일어나세요.'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가. 무려 왕이 들어왔는데, 공주가 침대에 엎드려 그냥 울고 있다니. 그것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왕이 인기척을 냈든지 내지 않았든지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공주따위가 왕을 무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송수진은 움직이지 못했다. 김훈상이 마력으로 그녀의 몸과 입을 구속했다. 김상희가 실컷 울게 내버려 뒀다. '나는...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냐?' 김훈상은 속이 쓰려왔다. 김상희가 왜 우는지 알 것 같다. 김훈상은 한진수가 김상희를 사랑하는 건 안다. 그러나 그녀가 한진수를 사랑한다는 건 잘 모른다. 김훈상은 아주 심각하게 착각했다. '나 때문이겠지.' 생각해보면 이런 왕이 어디 있는가? 왕자들만 태워준다는 비행기도 태워주고, 퓨리어스도 줬고, 마력학원에 입학도 시켜줬고 -물론 자기가 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 좋을대로 해석했다.- 버릇없는 행동도 봐주고, 심지어 특별 서고의 책 사건까지도 눈 감아 주지 않았는가. 무려 이 정도인데. 계집이 감동 받지 않겠는가. 그래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떨어지기 싫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의 눈으로 본 김상희는 아직 작고 여린 아이일 뿐이었다. 성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는 아직 애기였다. 품에 안고 지켜줘야만 하는 아기새 말이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약 두어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 때까지 김훈상은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서 김상희가 흐느끼는 걸 가만히 듣기만 했다. 후에 김상희가 일어났을 때에, 김상희는 깜짝 놀랐다. 황급히 김훈상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소, 소녀가 감히 아버님께서 오신 줄 모르고..." 송수진의 표정이 사색이 된 것으로 보아 아마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김상희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안다. 왕이 왔는데 그걸 무시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왕의 결정에 -관리들이 결정했지만 대외적으로 공주의 시집문제는 왕의 결정이다- 불복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 꼴이라니. 아무리 자신이라고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꼴불견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냥 하라면 하는 거다. 그것 때문에 울고 있다? 배가 불러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그걸 순식간에 파악한 김상희는, 슬픈 와중에도 거짓말 했다. "미, 미천한 소녀는 아버님과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김훈상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내가 네 마음을 안다." 사실 하나도 모른다. 김상희가 한진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이 결혼에 그토록 서럽게 우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상은 김상희의 말에 조금 행복해졌다. 자신과 떨어지기 싫다니!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울지 마라. 네가 울면 이 아비의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한진수가 떠올랐다. - 울지마. 네가 울면 내가 너보다 더 슬퍼. 한진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 너를 울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너를 행복하지 못하게 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나를 자책하게 된다고.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었다. - 정말 울고 싶으면... 차라리 내 옆에서 울어. 내가 옆에 있을 때 내 품에 안겨서 울어. 그 당시 김상희는 타박했었다. 네가 무슨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냐고. 어떻게 그런 낯간지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거냐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김상희는 좋았다. 대사 내용이 오글거리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한진수의 진심은 느껴졌었으니까. 김훈상이 김상희를 가만히 껴안았다. "울더라도 이 아비 옆에서 울어라." '차라리 내 옆에서 울어.' 그렇게 말하던 한진수가 떠올라서 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네 아버지라 했다. 네 눈물을 포용할 수 있는 가슴이 내게는 있음이니." 김훈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집... 진짜 보내야 하나?' 진지하게 그런 고민이 생겼다. 딸아이가 이렇게 자신과 헤어지기 싫어하지 않는가. 이 얼마나 멍청하고 가녀린 계집이란 말인가. 멍청하고 미천하니 위대한 자신이 지켜줄 수밖에. '보내기 싫다.' 아니, '절대 보낼 수 없다.' 김상희의 눈물 때문에, 김훈상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집행부의 반발이고 뭐고. 신하들의 상소고 뭐고. 그딴 거 다 필요 없다. 왕궁의 법도? 관례? 다 필요 없다. 내가 왕이다. "이 아빠가 너 안 보낸다." 신하들을 뭐라고 구슬릴지. 그건 모르겠다. 안 되면 힘으로라도 쥐어패지 뭐. 김상희의 눈물 앞에, 그의 이성이 죽어 버렸다. 이성을 잃은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못 보낸다." *** 늦은 밤. 왕궁 전체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물론이고 비상대기중이던 나이트들이 벌떡 일어섰다. "이, 이 엄청난 파동은 뭐지?" 나이트들은 왕궁의 안전을 책임진다. 왕궁의 안전을 위협할 만큼의 거대한 파동이 느껴졌다. 이 정도 마력. 신참들은 느껴본 적도 없다. 경력이 20년쯤 되는 베타랑이라면 이 정도 되는 마력파동을 느껴본 적이 있다. 전쟁기 때에, 전쟁을 앞서 이끌던 김훈상이 그랬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은 침을 꿀꺽 삼켰다. '폐, 폐하께서 진심이시다...!' 위험했다. 지금이야 성정이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과거 김훈상은 김환성보다 더한 망나니였다. 김유신은 김훈상을 말릴 생각도 못했다. 까딱 잘못하여 휩쓸리면 자신도 위험하게 생겼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스페셜 필드를 유지하고 밖에 피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을 터. '이렇게 엄청난 마력 파동이면 스페셜 필드 바깥까지 영향을 끼칠텐데.' 스페셜 필드라고해도 만능은 아니다. 그 필드가 감당하는 힘을 뛰어넘는 힘이 안에서 발생하면 스페셜 필드는 깨진다. '그나마 폐하께서 한 가닥 이성은 잡고 계시는군.' 그나마 다행이다. 스페셜 필드를 펼친 사람이 다름 아닌 김훈상. 김훈상이 펼친 이 스페셜 필드는 김훈상의 마력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 물론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김훈상이 씩씩댔다. "너. 뭐하는 놈이냐?" "폐, 폐하. 진정하시고 검을..." 챙! 철과 철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유신은 눈을 부릅떴다. '폐하의 진심이 담긴 공격을 저렇게 쉽게 막아냈다고?' 한진수의 몸이 세 발자국이나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정도면 굉장히 쉽게 막아낸 축에 속한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정도의 능력은 아니었는데...' 과연 세기의 대천재 다웠다. 그 대천재가 어떠한 계기가 있어 엄청나게 강해진 모양이다. 예전의 김훈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김훈상이 씩씩댔다. "너 때문에 내 딸이 울었다." 그 말에 한진수가 움찔했다. "그 죄. 죽음으로 갚아라!" 한진수는 이대로면 정말 죽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쪽은 저 쪽을 공격할 수가 없다. 만에 하나라도, 김훈상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다가는 김상희를 안 줄것 같다. 딴 건 안 무서운데 그게 너무 무서웠다. 한진수는 요리조리 잘 도망다녔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네가 죽으면 고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훈상은 김상희가 운 것을 모두 한진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그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김상희를 시집 안 보내려고 마음 먹기는 했는데 그러려면 명분이 없다.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만 한다. 왕이라고해도 원칙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물론, 한 두 번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원칙이 무너진 왕은 왕권을 가질 수 없다. 김훈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만큼은 원칙 같은 거 무시하고 싶었는데 신하들의 반발이 좀 거셌다. 계륵이나 다름 없는 김상희 공주를 빨리 후작가에 팔아 넘기겠다는 것이 집행부 관리들의 생각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김상희는 하나도 소중할 것이 없으니까. 김훈상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데, 그 덕분에 김훈상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알렉스의 1/10만. 김훈상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누군가는 분명 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관리는 없었다. 스트레스는 받지. 김상희가 울었다는 것에 충격도 받았지. 계속 화도 나지. 그렇다보니 화를 풀 대상이 필요해졌는데 운 나쁘게도 그게 한진수가 걸렸다. 그리고 김유신은 그걸 알아차렸다. '폐하의 분노를 받아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겠군.' 김훈상은 함부로 마력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주변 일대가 초토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격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만 마력을 폭발시킨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진수의 등장은, 왕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반가운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걸 알고 김훈상도 지금 아낌없이 힘을 방출시키고 있는 거고. 시간이 흘렀다. 왕궁을 지키는 나이트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벌벌 떨어야만 했던, 지진같은 진동이 멈췄다. 김훈상이 말했다.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은 허락이다. "알겠습니다." 저 허락받는데 꼬박 3시간 걸렸다. 3시간 동안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실수로 빗겨맞기라도 했다면 최소한 어디 한군데는 터졌을 거다. 운 나쁘게 그게 심장이었다면 아마 죽었을 거고. 그런데 그 말을 달리하자면, 3시간동안 한 대도 얻어맞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김훈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진수. 어쩌면 나를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안 중요하다. '도둑놈 새끼.' 도둑놈은 도둑놈인데, '그래도 도둑놈치고는 제법 기개도 있고 괜찮지 않은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럴 리 없다. 도둑놈은 도둑놈이다. 하여튼 저 도둑놈 때문에 우리 상희가 울지 않았는가. 저 놈이 쓸데없이 반역만 안 했어도. 그랬어도 지금 상희가 울 일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저 놈이 안 도와줬다면... 상희는 지금 제국에 잡혀 있었겠지.' 그걸 생각하니 좀 진정이 됐다. 따지고 보면 저 놈은 김상희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놈이 아니던가. 그래서 결국 허락해줬다. 김상희의 방에 갔다 오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또 울리면... 그 땐 정말로 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 비록 지금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 크기면 분명히 들었으리라. 한진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로 죽일 기세다. 김훈상을 뒤로하고, 한진수는 김상희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 3시. 한진수는 떨리는 맘을 부여잡고 김상희의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뭐지?' 없었다. 김상희가 사라져 있었다. 제 발로는 어디 한 곳. 제대로 이동하지도 못하는 그녀가 -마력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사라져 버렸다. 소식을 접한 김훈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스페셜 나이트들을 전원 소집했다. 어쩌면 제국에서 몰래 잠입하여 납치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한진수는 스페셜 나이트의 감시를 뚫고 들어온다. 감시를 뚫고 오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김훈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 ============================ 작품 후기 ============================ '나와 떨어지기 싫은 것이 분명하다.' 내_맘대로_해석하기_갑 by 딸등신 0120 / 0192 ---------------------------------------------- 남자들. 움직이다. *** 크리스가 말했다. "이대로면 네가 너무 안 되어 보여서... 네가 너무 슬퍼 보여서... 미안해." 크리스는 스페셜 나이트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원들은 크리스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스페셜 나이트인 것은 맞다. 그리고 그의 역할은 김상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물론 김훈상은 크리스에게만 김상희를 맡겨놓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 곳이 고려의 왕궁 내라고는 해도, 제국이 김상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김상희가 '성녀'라는 괴이한 단어와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김상희의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기본적으로 크리스가 보호하고, 그 외에 기록의 관을 스페셜 나이트 한 명과 일반 나이트 한 명이 경계하고 있으며 크리스 외에 또 다른 스페셜 나이트 한 명을 밀착 경호를 붙여 놨다. 그리고 그 스페셜 나이트는 기절한 상태로 김상희의 방 한 켠에서 발견되었다. 크리스가 그랬다. "너 정말 이대로 결혼할 거야? 난 네가 슬픈 것도 싫고,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 것도 싫어. 나는 절대로 너 이렇게 못 보내." "크리스..." 김상희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지금 납치를 당했다. 뭐 이리 운명이 기구한지. 개떡같은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젠 성녀니 뭐니 해가면서 제국에서 납치를 하려하고, 이젠 크리스에게 납치당했다. 그러고보니 저번에는 한진수에게 납치당했었다. 뭐 이리 납치를 당하는 인생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차라리 이대로 도망가고 싶어.'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 죽기보다 하기 싫었다. 만약 이 세계에 한진수가 없었다면, 그 결혼. 했을 수도 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연기하면서 김상희가 아닌 다른 여자를 연기하며 살아갔을 수도 있다. '나는...나는...' 하지만 진수가 이 곳에 있다. 한진수를 떠올리면 이 결혼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는데, 해야만 했다. 거절한 명분이 없었으니까. 한편, 김상희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김환석은 무릎을 탁 쳤다. 현재 시각은 새벽 3시. 그가 이토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건 김상희 때문이다. 금쪽같은 내 동생. 절대로 시집 못 보낸다. 그 마음은 애써 무시하고, 어떻게든 김상희를 시집 안 보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명문가문을 하나 만드는 거지!' 고려 내에서 만들면 좀 눈에 띈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빨리 분가해서 왕국을 세우고.' 왕국 같은 거. 딱히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좀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일단 왕국을 만들고 그 왕국내에서 귀족을 만든다음, 그 귀족을 내세워 김상희와 결혼시키면 될 것 같다. 위장결혼이다. 그냥 겉으로만 결혼 시키고 금쪽 같은 내 동생. 옆에 두면 된다.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만약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그렇다면 외국의 어느 귀족가와 계약을 맺으면 된다. 그냥 겉으로 결혼 하는 척만 하라고. 사실 이런 결혼은, 상상도 못할 조건의 결혼이긴 하다. 애초에 이런 세계에서 누가 여자를 위해 이런 짓을 벌이겠는가. '많은 재물을 약속하면 좋겠지. 가세가 기울어가는 귀족가를 선택하여 거래를 진행하면 일이 아주 쉬울 거야.' 거기에 더해, 곽씨 후작가에는 막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한다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될 터. '내가 왕국을 세우는 것보다는 타국의 귀족을 섭외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는 할텐데.' 일종의 거래다. 김상희와 결혼만 시키고 실제 결혼생활을 못하게 할 거니까. 스스로의 생각에 감탄에 감탄을 더한 김환석은 한달음에 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스페셜 나이트들이 들이닥쳤다. 지금 시각은 새벽 3시. 이렇게 늦은 시각. 자기도 아버지에게 찾아가려고 했던 주제에, 김환석은 한바탕 화를 냈다. "무슨 일이냐? 지금 시간이 몇신인지 잊은 거냐!" "폐하께서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무슨 말인고하니, 김상희가 실종되었단다. '위치 추적기!' 그 동안 김상희가 왕궁 내에 있어서 딱히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김상희의 실종. 그것도 왕궁 내부에서의 실종. 김환석은 눈치 챘다. 외부에서 스페셜 나이트의 경계망을 뚫고 들어와 마력도 없는 김상희를 납치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고려왕궁은 그 동안 외세의 침입을 단 한번도 허용한 적이 없다. (김환석은 한진수가 왕궁에 몰래 드나들었다는 것을 모른다.) "크리스는 어디에 있지?" *** 김훈상이 말했다. "이번 작전은 내가 직접 지휘한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현 세대의 스페셜 나이트들은 과거 김훈상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세대는 아니다. 물론 김유신과 같은 베테랑들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경력이 이제 겨우 7년정도 밖에 안 된(?) 햇병아리들이다. "아니. 이번에는..." 김훈상은 생각했다. '그 놈들을 불러도 되는 걸까.' 세상은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들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분명히 대단하기는 하다. 그런데 세상이 모르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고려는 스페셜 나이트만 가진 게 아니다. 오히려 스페셜 나이트는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가장 강한 나이트들일 뿐이다. 김훈상이 김유신을 불렀다. "김유신." "예. 폐하." 김유신은 직감했다. 아무래도 이번 수색작전에는 그들이 동원될 것 같다. '폐하...' 지금 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 한낱 딸을 찾는데 그들을 부른단 말인가. 이건 그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삼켰다. 지금 왕의 모습이 너무나 절박해보여서 그랬다. '하긴. 김상희 공주는 공주가 아니니까.' 이미 김상희 공주의 왕자설은 스페셜 나이트 내에 파다한 상황. '그렇게 따지면 그렇게 모독이라고는 볼 수 없겠군.' 아니. 모독이 아닌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움직여야 할 때다.'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고려왕궁의 경계가 뚫렸으며, 고려왕궁 내에서 납치가 일어났다. 현재 납치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스페셜 나이트 크리스. 왕궁의 경계가 뚫린 것은 스페셜 나이트와 나이트의 책임이며, 크리스가 잘못했다함은 곧 스페셜 나이트의 잘못이라는 소리도 됐다. 스페셜 나이트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그 상위기관이 움직여야하는 것이 맞다. 김유신의 몸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트들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스페셜 나이트들은 긴장했다. 그들은 저들을 안다. 약 7년 전. 자신들을 엄격하게 가르쳤던 선배들이다. 세상은 모른다. 고려의 진정한 힘은 스페셜 나이트가 아니라, 전대 스페셜 나이트. 그러니까 고려왕가에서는 더블에스 나이트라 부르는 저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전 세대의 스페셜 나이트. 다시 말해 20년 전, 김훈상과 함께 전쟁기를 거쳤던 저들은 전 세계에서도 초특급 엘리트로 분류되는 베타랑 중의 베테랑들이다. 평균 나이는 약 45세. 남자 나이치고는 굉장히 젊은 축이며, 실질적으로 뒤에서 고려를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힘이라고 보면 됐다. 다음 세대를 위해 일부러 빨리 일선에서 빠졌다. '선배님들이 소환 됐다.' 그 말은 즉, '역시 김상희 공주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왕자님이 틀림없다.' 김상희 공주의 왕자설을 완벽하게 입증하는 꼴이 됐다.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맡은 왕자. 그러니까 왕이 더블에스 나이트. 줄여서 더스 나이트를 소환하지 않았겠는가. 전쟁같이 커다란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더스 나이트는 어지간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말이다. 지금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는 김훈상이 제정신이 아닌 제안을 했다. "김상희 공주를 가장먼저 찾는 자에게 퓨리어스 한 병을 내리겠다." *** 제국 정보부 국장 김국현이 황제를 찾았다. 현재 시각 새벽 3시 17분. "폐하." 취침중이던 황제가 눈을 떴다. 이 시간에 정보부 국장이 찾아왔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분명 큰 일이 벌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장 따위가 새벽에 황제의 잠을 깨울 리 없으니까. "김상희 공주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뭐라고?" 김상희 공주는 현재 고려왕궁 내에 있다. 고려왕궁의 경계를 뚫고 들어갈 수 없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중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고려 왕궁 내에서 실종 되었다고?'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쉬웠으면 제국에서도 벌써 했다. "고려의 자작극일 확률은?" "아마 자작극은 아닐 겁니다." 황제가 김국현을 주시했다. 저토록 빠르게 대답이 나왔다는 말은 곧 '아마'를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었다. 김국현은 지금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말은 김상희 공주가 실제로 실종되었다는 소리겠군. 김상희 공주의 위치. 파악할 수 있나?" "대외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황제가 씨익 웃었다. "비공식적으로는 가능하겠군." "예. 비공식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는다. 지금 당장 병력을 풀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찾아서 데려와라. 김국현. 네 능력을 보겠다." 김국현을 내보낸 황제가 흐흐- 웃었다. 딱히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김상희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때를 기다리던 중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저번 실패사건도 있고 해서 일부러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고려에서도 이미 눈치는 챘을 거다. 백제에 투입된 나이트들이 제국의 나이트라는 걸. 하지만 증거는 찾지 못했을 거다. 그냥 심증만 있을 뿐. 그래서 제국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이젠 움직일 때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김상희는 성녀다. '성녀를 가진 자가 곧 대륙의 패권을 쥔다.' 프리지아가 '여왕'으로 각성했을 때만 해도 충분히 기뻤다. 여왕은 정말 귀하다. 아주 귀한 재화다. 과거, 여왕을 가졌던 고대 국가가 한때나마 세계를 지배했었다. '여왕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를 가진 나라가 세계를 제패했다. 그 나라가 태양제국 잉카다. '거기에 성녀라니.' 그렇다면 여왕과 성녀를 동시에 가진다면? '그렇다면 그 시너지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 김상희가 물었다. "크리스. 여기는 어디에요?" "내 은신처." "은신처요?" 김상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일반 가정집같은 느낌이다. 벽에는 따스한 벽난로가 피어오르고 있다. '나를 납치한 거라면... 불을 피우면 안 될 텐데.' 불을 피우면 안되는 게 맞다. 불을 피우면 어떻게든 표시가 나기 마련이니까. 하다못해 연기라도 나지 않겠는가. 어쨌든 따뜻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낸 것을 크리스가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자쯤 되는 사람이 왜 은신처를 따로 갖고 있는 거지...?' 그것도 고려 근처에? 크리스가 말했다. "상희야. 내가 여러모로 생각해봤는데..." "네. 말씀하셔요." "그냥 나랑 결혼하면 안 되겠어?" "......." 김상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안다. 지금 당장이라도 크리스가 마음 먹으면, 자신은 무서운 일을 당할수도 있다. 남자 앞에서 여자는 보잘것 없는 존재니까. 아마 반항도 하지 못할 거다. 크리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음은 몰라도 적어도 몸은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렇게하지 않았다. "알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네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거." "...죄송해요." "그래서 일단 결혼만 하자고 하는 거야. 곽기현이라는 그 사람. 믿을 수 있어?" 김상희는 곽기현을 믿을 수 없다. 당연하다. 한진수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으니까. 한진수가 자신을 찾아오기 직전에, 크리스에 의하여 납치당했으니까. 사실상 납치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기는 했지만. 크리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의 도피에 가깝지 않을까. 납치를 당한 김상희도 딱히 무섭지는 않았고. "그러니까 차라리 나랑 결혼해. 내가 곽씨후작가에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왕가에 충분한 재화를 제공하면 너랑 결혼할 수 있을 거야." 현실적으로 크리스의 제안은 김상희에게 굉장히 유리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내게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릴게. 그냥 서류상으로 결혼만 하는 거야." "크리스..." 크리스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출신이 다르다지만, 김상희의 눈으로 백제를 직접 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크리스의 행동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째서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김상희.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이해하려고 들지 마. 나도 내 스스로를 이해 못해. 나는 네가 좋아. 다른 거 필요 없어. 너만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저 말. 많이 들어본 말이다. 예전에 한진수가 많이 해줬던 말이다. '진수야...' 크리스가 고백을 해오고 있는 와중에도, 김상희는 진수를 떠올렸다. 그래서 김상희는 크리스에게 미안했다. 저 마음. 진심인 건 이제 알겠는데 받아줄 수가 없어서. "나는 정말 오래 기다릴 자신 있어. 너 안 건드릴게. 일단 비부터 피하고 보자. 결혼만 하는 거야."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진수도 했고 곽기현도 했고 심지어 김환석까지 했다는 사실을,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김상희는 생각에 잠겼다. 크리스의 말이 맞았다. 일단 결혼만 하고 나면... 그러고 나면... 진수를 기다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낯으로 한진수를 본단 말인가. '내가 이러는 거... 진수한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단순히 서류상 결혼이라지만 과연 진수가 그걸 용납해줄까? 지구에서라면 무조건 용납해줬을 거다. 진수는 그렇게 멍청하고 미련하리만치 자신을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이 곳의 한진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 자신을 용납해줄까? 그게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다. 곽씨 후작가와 얘기를 나누고 절차를 진행시켜야하니 시간은 분명 있을 터. 김상희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고려왕에게 찾아가서 얘기를 할 때다. 일부러 납치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똥줄이 탔겠지.' 원래 100의 고난을 맞이하다가 10의 고난을 맞이하면 상대적으로 힘들지 않은 법이다. 아예 김상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저와 결혼 시켜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덜 충격 받을 거다.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게다가...' 크리스는 김상희를 힐끗 쳐다봤다. 만약 고려의 왕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도망가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김상희를 내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다고 협박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미안해. 상희야.' 김상희를 힘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김상희가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평생 기다리겠다는 마음도 변함은 없다. 하지만, 김상희의 생각과 다르게 크리스는 김상희를 진심으로 납치할 생각을 갖고 있다. 만약 김훈상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땐 김상희를 데리고 세계 저편으로 도망가버릴 거다. 크리스가 김상희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올게. 허락만 받아서 올테니까 따뜻한 우유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여긴 아무도 못 찾는 곳이거든." 크리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폐하께서 허락해주셔야 할텐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크리스가 벌써 왔나?' 그런데 크리스가 아니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었다. "이 계집이 맞는 것 같군." "이 정도면 찾기 불가능한 것이 맞군요." 남자가 약 7명 정도 보였다. 저희들끼리 떠들었다. "폐하께서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깨끗한 상태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일단 계집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기절부터 시켜놔라." 김상희는 거기까지 듣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절했다. ============================ 작품 후기 ============================ "여긴 아무도 못 찾는 곳이거든." 야... 여긴 아무도 못 찾는다며... 0121 / 0192 ---------------------------------------------- 남자들. 움직이다. *** 김환석은 김상희의 몸에 위치추적을 할 수 있는 마이크로칩을 용해시켜놨다. 그리고 김상희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추적기를 무려 3대나 만들었다. 하나는 김훈상에게 줬고 하나는 그가 가졌다. 그리고 하나는 한진수에게 넘겼다. 김환석이 말했다. "한진수. 무조건 찾아라. 못 찾으면 너부터 죽여버리겠다." 김환석은 이제 인정했다. 똥개가 없으면 안 된다. 똥개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매우 나빴었다. 그런데 납치당했다고 생각하니까 이젠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제 단순히 똥개가 아니었다. "...내 동생을 부탁한다." 김환석이 직접 '동생'이라고 인정했다. 계집 보기를 벌레보기처럼 한다는 그 김환석 왕자가 말이다. 김환성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무턱대고 왕궁을 뛰쳐나갔다. "어떤 새끼야아아아아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목을 따버리겠다! 아니. 산 채로 살을 저미고 소금에 절여 놈이 보는 앞에서 생살을 씹어 먹겠다! 김환성은 분노했다. 감히 왕궁 내에서 똥개를 납치하다니. 현재시각 새벽 3시 20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그저 수많은 공주들 중 한 명인 김상희 때문에 고귀하디 고귀한 두 명의 왕자가 귀신같이 일어나서 추격을 준비했다. 그 때, 크리스가 김훈상을 찾았다. 크리스가 김훈상을 만났을 때엔, 김훈상이 더스 나이트를 데리고 왕궁을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폐하." 김훈상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네 짓이냐?" 현재로써는 크리스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 용의자가 제 발로 눈 앞에 나타났다. 솔직한 말로 김훈상은 지금 분노를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만약 크리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지금 당장 크리스의 목을 쳐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화가 많이 났다. 크리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김훈상을 알 수 있었다. '저 놈도 워프를 구사할 줄 아는군.' 워프는 대중들에게는 공개조차 되지 않은 기술이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물론이고 김훈상조차도 부담을 감수하면서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런 기술인데, '역시 숨기는 것이 많은 놈이다.' 그런 기술을 사용해서 갑자기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워프를 구사하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신기술이라는 건 언제나 공개가 되기 마련이고 이 세상 어딘가, 누군가는 워프보다 훨씬 뛰어난 이동기술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하다. 지금 중요한 건 딸내미의 행방이었다. "내 딸. 네가 데려갔냐?" 왕국의 보배라든가, 공주라든가. 그런 호칭은 모두 생략했다. 더스 나이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가 저렇게 화가 나신 것이 딸 때문이라고?' 그랬다가 문득 깨달았다. '김상희 공주가 사실은 왕자라는 말이 틀림없군.' 후배 스페셜 나이트들이 그런 말을 할 때에는 그저 헛소리인 줄 알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왕궁이란 곳이 워낙 이상한 소문이 많이 나도는 곳 아니던가. 더스 나이트들쯤 되면 그 정도는 그냥 풍문으로 치부하며 흘려듣는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게 진짜인 것 같다. 크리스를 쳐다봤다. '왕자를 납치하다니. 아주 미친 놈이야.' 워프를 사용하고, 또한 기척까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저 나이 때에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 더스 나이트들이 경험하기로는 김훈상정도밖에는 없다. (그들 중 한진수와 직접적으로 마주친 사람은 없었다.) 더스 나이트의 일원 강동훈은 검자루를 만지작 거렸다. '정말 네 놈이 범인이라면 내가 네 목부터 잘라주마.' 일선에서 은퇴한 더스 나이트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인다는 건, 엄청나게 중요한 사안이라는 뜻이다. 왕자. 그것도 여장을 하면서까지 비밀스런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왕자를 납치한 것은, 더스나이트가 충분히 움직이고도 남을 일이다. "제가 그랬습니다. 폐하." 그와 동시에 강동훈이 검을 내질렀다.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도주하지 못하도록 다치게 만들 필요는 있었다. 무릎을 노리고 정확히 검을 뻗었다. 챙! 그런데 강동훈의 검은 크리스의 무릎을 찌르지 못했다. '이럴 수가!' 크리스가 강동훈의 검을 막아냈다. 그 모습을 보며 더스 나이트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동훈이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지만.' 강동훈은 지금 크리스를 얕잡아 보고 있다. 아무리 세기의 천재라는 한지수라고 해도 더스 나이트가 마음 먹고 공격하면, 그것도 기습으로 공격하면 막아낼 재간이 없다. 적어도 더스 나이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한진수도 아니고 이름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초출내기 스페셜 나이트 크리스에게 검이 막혔다? 이건 놀라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강동훈의 자존심이 와장창 부서지는 일이기도 했다. '이 새끼가!' 강동훈은 순간 분노했다. 왕 앞이라 함부로 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시 한 번 검을 내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김훈상이 말했다. "강동훈. 경거망동하지 마라. 내가 직접 문책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김상희 공주를 사랑합니다." 더스 나이트들은 이해를 좀 할 수 있었다. 여자를 사랑하는 건 미친 짓이지만, 우월한 존재인 남자끼리의 정신적 사랑은 얼마든지 이해를 할만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저 놈은 김상희 공주. 아니 김상희 왕자를 지키고 있다가 김상희 왕자에게 반한 것 같았다.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계속 지껄여봐." "김상희 공주가 눈물을 흘리던 그 순간. 저는 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폐하시라면... 제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죠." 그 말이 맞았다. 다른 사람은 절대 이해 못한다. 딸이 운다?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딸이 울든 말든. 보통의 경우, 아버지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쓴다. 오히려 계집이 질질 짠다고 혼을 내거나 내쫓으면 내쫓았지, 그것 때문에 마음이 어렵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훈상은 이해했다. '내 딸은... 소중한 아이다.' 더스 나이트들도 이해했다. '아주 중요한 왕자님이시니까.' 과정이야 어찌됐든 왕과 더스 나이트. 둘 다 이해했다. "현재 김상희 공주는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반쯤 협박을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김훈상이 찢어 죽일 듯 노려봤지만 크리스는 담담히 할 말을 이었다. 일단 김상희 공주와 결혼을 하겠다. 곽씨 후작가에는 자신이 큰 보상을 하겠다. 그리고 김상희의 마음이 열렸을 때에, 그때서야 진짜로 결혼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격이었다. 강동훈은 혀를 찼다. '결혼을 하고 싶어서 납치를 했다고?' 이건 뭐. 거의 정신병자 수준 아닌가. 남자간의 고귀한 정신적 사랑은 물론 인정할 수 있으나 방법이 잘못 됐다. 일국의 왕자를 납치하다니. 그것도 왕궁 내에서. 그것도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스페셜 나이트가. 김훈상이 검을 뽑았다. 그대로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의 목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크리스의 목이 바닥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잔재주를 부리는 구나." *** 이름 모를 숲 속. 한진수는 애타게 김상희를 찾았다. 그가 아는 모든 추적술의 기법들을 동원하여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대략적인 위치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납치를 한 건지는 몰라도. '반항의 흔적조차 없다.' 사실상 남자가 마음 먹고 김상희를 어떻게 하려고 했으면 김상희는 반항할 수 없다. 김상희에게는 마력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흔적 자체가 너무나 없다. 상대는 상당한 실력자인 것이 틀림 없었다. 마력을 한껏 끌어올리고 기감을 극대화 시켰다. 주변 전체를 자신의 마력으로 뒤덮었다. 이름하여 '마력탐지'라는 거다. 마력을 가진 남자라면 누구나가 가능한 기술이지만, 한진수처럼 광범위한 지역을 샅샅이 탐색하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마력 소모가 굉장히 심하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체력을 아낄 생각이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김상희를 찾아야 해. 김상희를 찾아야 해. 김상희를 찾아야 해. 다른 건 모르겠고 김상희를 찾아야겠다는 사명감만이 온 몸을 지배했다. '제발...' 김상희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러 찾아왔다. 친구와 결혼을 하라고, 그 친구는 믿어도 되니까 일단 결혼하라고. 죽기만큼 싫은, 그런 소식을 전하러 왔다. 안 그래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지금은 미칠 것 같았다. 그 때,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뭔가가 걸렸다!' 약 7명의 기척이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은밀하게 이동 중. 7명 모두가 뭔가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발걸음 소리가 약간 둔탁했으니까. 지금은 단서가 없다. 일단 그 곳으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한진수는 발견할 수 있었다. 7명의 복면인. 복면인들은 어깨에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자루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사람인 것 같았다. 복면인들을 이끄는 리더는 한진수는 알아봤다. 한진수는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였다. 얼굴이 이미 유명하다. '한진수다!' 한진수는 제국의 반역자. 그렇다면 저 놈을 잡는 것이 유리한지, 유리하지 않은지. 잠시 고민했다. '우리의 숫자는 7명.' 하지만 7명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의 임무는 김상희를 황제에게 데리고 가는 거다.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한진수는 위험하다. 일단은 피하는 게 맞아.' 제국의 반역자를 그냥 보내준다는 것이 찜찜하기는 했으나 임무가 우선이다. 수신호를 보냈다. - 모두 흩어진다! 일부러 자루 7개를 준비하여 계집 7명을 자루에 담았다. 7명이 7방향으로 움직였다. 한진수는 저 자루들 중 하나에 김상희가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놓치면, 아마도 끝일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저 복면인들이 제국의 나이트라면, 그는 제국 황궁에 잠입할 거다. '황제의 목을 노려서라도 나는 김상희를 구해내겠다.' 제국과 전면전을 치러도 될 만큼, 강한 힘을 기르려고 했다. 그러나 김상희가 저 쪽에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런 거 필요 없다.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저 옆에 김상희만 있으면 된다. 김상희만 있으면 이 세상 전부를 가진 거다. 제국이 고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게릴라전에 능통한 스페셜 나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황제 네가 사주했다면... 나는 기필코 네 목을 따버리겠다.' 만에 하나, 김상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날로 그는 혼자서라도 제국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한 방향을 찍었다. '저 놈일 확률이 높아.' 이성적인 근거는 없었다. 그저 저 놈이 김상희를 데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률상으로 따지면 약 15프로 정도 된다. 복면인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자루를 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진수의 추격을 따돌리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한진수의 손이 복면인의 등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한진수는 손바닥을 통해 복면인의 몸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쾅!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복면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복면인의 입에서 피가 질질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았다. 한진수도 복면인을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제압만 해놓고 배후를 캐야 했다. 그래서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자결했군.' 아마도 입 안에 독약같은 걸 물고 있었던 것 같다. 아쉽기는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루를 풀러 봤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제발... 제발 여기 있어라.' 자루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수야... 나 여기 있어." 한진수는 황급히 자루를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김상희의 목소리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김상희의 목소리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하여튼 뭔가가 이상했다. 끈을 전부 풀었다. 이제 열기만 하면 된다. 열면, 사랑하는 여자가 안에 있을 거다. 아니.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진수가 누군가를 꺼냈다. 얼굴을 확인했다. 한진수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는...!" ============================ 작품 후기 ============================ "...내 동생을 부탁한다." 120편이 되어서야 슬슬 자각하기 시작하네요. 작가해설: "너는 이미 동생병신이 되어있다!" 0122 / 0192 ---------------------------------------------- 남자들. 움직이다. *** 한진수는 그 자리에서 얼었다. "이건..." 김상희처럼 생기기는 했다. 그러나 김상희는 확실히 아니었다. 정확한 연관고리는 찾지 못했지만 이 사람(?)을 보자 '프리온 나이트'가 떠올랐다. 한진수는 현재 프리온 나이트 5기를 소유하고 있다. 원래 7기가 있었는데 2기가 고려 나이트에 의해 파괴됐다. 일부러 파괴하라고 준 거긴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의 초창기 버전이라면 이럴까?' 김상희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뭐랄까. 사람보다는 인형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기계적인 말투와 기계적인 표정으로, "진수야... 도와줘..." 혹은, "진수야... 나야..." 를 연거푸 중얼거렸다. '이 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람보다는 로보트에 가까운 개념인 것 같기는 한데, 그도 아직 프리온 나이트의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지금은 시체가 되어 버린 저 놈이 아니었다. 저 놈이 아니라는 말은, 나머지 6명의 복면인들 중 누군가가 김상희를 데리고 있다는 뜻. '젠장! 어디냐!' 아직도 마력탐지를 가동 중이다. 다른 목표물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 송수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공주님이 갑자기 실종되셨단다. "공주님...! 우리 공주님!" 송수진에게 있어 김상희는 소중한 사람이다. 송수진은 김상희를 어릴 적부터 맡아 키워왔다. 송수진이 김상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어머니가 딸에게 느끼는 감정과 거의 흡사할 정도. '괜찮을 거야.' 송수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자들이 움직였다고 들었다. 여자 때문에 남자가 움직인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송수진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상희 공주님이니까. 다른 공주들은 몰라도 김상희 공주님이니까. '공주님. 꼭 무사히 돌아오셔요.' 송수진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분명 괜찮을 거야.' 그리고 괜찮을 수밖에 없다. 송수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상희를 구출하기 위해 움직인 남자들의 명함을 대충 읊어보자면, '국왕 폐하. 스페셜 나이트. 한진수님. 김환석 왕자님. 김환성 왕자님...!' 일단 고려 국왕 김훈상이 직접 나섰다. 전 세기의 대천재. 혼자서 황궁에 침투하여 황제의 목을 딸 수도 있다고 알려진 괴물 같은 능력자이자 고려의 국왕.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 그 대단하다는 태양제국 잉카에서도 상당히 신경쓰고 견제하는 고려의 초특급 엘리트 나이트들. 그리고 송수진은 모르고 있지만 그 나이트들 보다도 더욱 강한 더블 스페셜 나이트들이 움직였다. 뿐이랴. 전 세기의 대천재 김훈상의 계보를 잇는, 현 세대의 대천재. 현재는 제국의 반역자인 한진수가 움직였고, 무력만 놓고 보자면 한진수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김환성 왕자가 있다. 새벽 3시. 상희학을 연구하며 밤을 새다가 난리를 알게 된 알렉스는 생각했다. '김환석 왕자님과 김환성 왕자님까지 움직였어.' 이거 참. 엄청난 기적이군.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낮도 아니고 새벽 3시에 왕을 비롯하여 더블 스페셜 나이트. 그리고 왕자들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앞다투어 나서다니. 상희학과 별개로도 느꼈다. '김상희 공주님은 정말로 사랑받는 공주님이구나.' 알렉스는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학문적인 관점이 아닌, 감성적인 관점에서도 말이다. '김환석 왕자님의 각종 발명품들과 김환성 왕자님의 무력이 더해진다면 그 시너지효과는 어마어마하겠지.' 한낱 공주일 뿐인 김상희를 위해, 새벽 3시. 수많은 남자들. 그것도 한 명 한 명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거인들이 움직였다. *** 김훈상이 말했다. "잔재주를 부리는 구나." 더스 나이트들도 속지 않았다. 그저 저 조그만 놈이 괘씸할 뿐이다. 더스 나이트 강동훈은 매우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나서서 저 놈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지금 저 놈은 분신을 내세웠다. 본체가 아니라는 소리다. 저런 기술. 더스 나이트들도 사용하려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사용할 일이 별로 없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일 뿐. 허공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는 점차 색깔과 모양을 갖춰갔다. 크리스였다. "저를 정말로 죽이실 셈입니까?" "이 정도도 피하지 못했으면 내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이 말을 만약 곽기현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곽기현은 김훈상이 딸바보. 아니 딸등신이라는 걸 잘 모른다. 알았다면 절대 한진수의 제안같은 거.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장인어른이 시험해본답시고 칼 휘두르면,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하여튼 곽기현은 그런 속사정은 전혀 모른다. 어떻게 말하면 곽기현은 속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날 죽였을 거다.'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은 전력을 다해 피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피한 거다. 만약 안 피했다면, 저 칼은 틀림없이 자신의 목을 꿰뚫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떡합니까?" 김훈상은 크리스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듯 말했다. "그것도 네 복이지. 그래서 김상희는 어디에 있는 거냐?" *** 더블 스페셜 나이트 강동훈은 처음부터 크리스가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침 자신의 발 앞으로 굴러온 가짜 크리스의 얼굴을 짓밟아 부서 버렸다. '이건 도대체 뭐지?' 못 보던 형태의 물건이다. 로보트 같다고나 할까. 이 세계는 로보트가 없다. 특히나 인간형의 로보트는 발명된 적이 없다. 애초에 발명할 필요도 없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마력이라는 걸 갖고 있고 마력이 있으면 로보트보다도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으니까. 강동훈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아주 작은 형태의 골렘인가?' 어쩌면 골렘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고대에는 골렘이라는 마도병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 골렘의 인간형. 그것도 초기형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진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미흡했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이게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강동훈은 그러지 못했다. 김훈상이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김훈상이 경고했다. "만에 하나라도 내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네 놈의 목을 정말로 잘라주겠다." *** 여기가 어디지.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뭔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누군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꿈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여기는...!" 기억이 날 듯 말듯. 뭔가가 이상했다. 크리스가 자신을 데리고 도망친 건 알고 있다. 거기까진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다음이 기억이 안 난다. 언젠가부터 기절을 했던 것 같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냐?" 일어나라는 말은 꿈 속에서 들리던 소리가 아니었다. 진짜 사람으로부터 들리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목소리다. 개차반. 다시 말해 이 세계. 내 아빠의 목소리. "...괜찮으냐고...물었다." 개차반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 그러고보니 뭔가가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가 잠깐 기다리고 말하고 나갔던 게 기억이 났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다. 뭐랄까. 약에 취한 기분이랄까. 안개를 헤매는 와중 겨우 찾은 기억이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아빠." 처음에는 진짜 개차반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다. 나를 걱정했던 것이 여실히 티가 난다. 음.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 지 모르겠는데, 나는 개차반이랑 있으면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확실히 든다. 조련을 한답시고 애교를 부리고 마음에 없는 말도 지어내고 그랬던 걸 보상받는 그런 느낌이 든다. 아...안 돼. 무너질 수 없어. 저 놈은 개차반이야. 뼛 속부터 개차반이라고. 아직 이렇게 마음을 열 수 없어. 밀당은 계속 해야 한다고. 개차반의 목소리가 계속 떨려왔다. "괜찮으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내 몸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왜냐고? "아, 아빠...!" 개차반이 갑자기 날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이, 이봐. 개차반씨. 뒤에 사람들 있다고. 내가 모르는 아저씨들 같은데. 아니. 뭐 일단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힘들다. 애초에 이 곳 남자들은 외모로 나이를 판별할 수 없으니까. 대충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걸로 알아보곤 하는데 저 남자들은 나이가 좀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을 호위하는 것 같다. 스페셜 나이트가 아닐까 싶긴 한데 스페셜 나이트보다 뭔가 더 중후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지 마라. 네 체온이 느껴진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조금만 내 품에 더 안겨 있어라." ...이 개차반. 계속 개차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 김상희는 애초부터 납치를 당한 적이 없다. 크리스는 김상희를 안가에 내려놓고 나올 때에 김상희를 기절시켜 -김상희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실에 몰래 숨겨 뒀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김상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김상희를 대체시켰다. 김상희와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가는 어두운 편이었고 만약 제국의 나이트들이 이 곳을 찾는다고 해도, 김상희를 알아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는 혼자서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말이다. '거봐. 어차피 내 승리야.'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손을 미리 써놨어. 아. 걱정하지 마. 폭발장치를 넣어뒀으니까. 지금쯤 터졌을 걸. 시체도 안 남기고 완전히 사라질 거야. 증거같은 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위험한 발상이었지. 하지만 제국의 나이트들이 김상희의 얼굴을 제대로 알 리 없잖아? 조명도 일부러 어두컴컴하게 해놨었고. 뿐만 아니라 제국 나이트들은 한 시가 급한 상황이야. 정확하게 파악할 리 없었겠지. 글쎄. 통하지 않았다면... 까짓 거. 죽기밖에 더 했겠어?' 남들이 듣는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을 자꾸만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껴안고 있는 틈을 타서, 강동훈이 크리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아무리 봐도 이 크리스란 놈. 뭔가 뒤가 구리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행히 김상희 공주는 무사하군요." 강동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미로같은 길을 걸어온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결계 비스끄리무리한 무언가가 아닐까 싶었다. 길을 걷는 내내 풍경이 이질적이었다. '만약 이 놈이 길잡이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이 곳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놈이 이런 시설을 알고 있는 거지? 백제의 영향력이 이렇게 컸나? 이런 외진 숲 속에, 더스 나이트들조차 발견할 수 없는 은신처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이런 시설을 만들려면 당연히 대규모 공사가 있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천재라고 하는 남자들이 적어도 몇 명은 필요할 거다. 그러나 이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거.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김훈상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백제. 백제를 다시 한 번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다.' 예전에 보고를 받은 적이 있으나, 크게 이상한 점이 없어 넘어갔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백제가 보고처럼, 그냥 그런 나라였으면 이런 시설을 비밀리에 갖추고 있었을 리 없다. 게다가 김훈상은 이제 안다. 프리온 나이트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까 크리스가 보였던 것. 자신 대신 목이 잘리게 만들었던 그 무언가는, '프리온 나이트의 초창기 버전...이라면 설명이 될 것 같은데.' 프리온 나이트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상한 로보트와 비밀리에 위치한 안가. 백제에 분명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편, 연락이 닿아 한 달음에 이 곳으로 달려온 한진수가 크게 외쳤다. "김상희!" 한진수는 몹시 화가 난 것 같은 모양새로 쿵쾅거리며 걸어왔다. 이번에는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이 화가 났다. '저 놈이 감히 폐하 앞에서...!' 감히 국왕 폐하 앞에서 저토록 격앙된 모습을 보이며 신경질적으로 걸어 오다니. 심지어 김훈상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어린 놈이 실력만 믿고 너무 까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의 주군인 김훈상에게 제대로 예를 차리지 않는 것을 보니 화가 났다. 하지만 김훈상은 한진수를 이해했다. "놔둬라." 한진수가 김상희에게 걸어왔다. 기세만 보면 칼을 뽑아 당장이라도 김상희를 내려칠 것 같았는데, 벌어진 일은 정 반대였다. "상희야...김상희..." 그리고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진수를 막아서려고 검을 뽑았던 김유신은, 하마터면 그 검을 놓칠 뻔 했다.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 작품 후기 ============================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작가: 황당한 일... 아직도 안 익숙해졌냐...? 0123 / 0192 ----------------------------------------------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 뚝. 한 방울. 뚝. 두 방울. 뚝. 세 방울. 뚝. 네 방울. 무언가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현재 한진수는 제국의 반역자이자 현존하는 최악의 범법자들 중 한 명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 엄청난 능력을 바탕으로 제국에 항거하고 있는 -사실상 그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한 적은 없지만 제국에서 그렇게 만들었다.- 철면피다. 더스 나이트들도 한진수를 알고 있다. '놈이... 울고 있다...?' 그 한진수가, 제국 조차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최악의 범법자 중 한 명인 한진수가 김상희를 와락 끌어안고 울었다. 김상희가 어떻게 될 뻔 했다고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사하다는 것을 알자 또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전 세계적 대천재라는 한진수라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상희야... 김상희..." 그저 이름을 불렀다. 김상희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녀는 크리스에게 납치(?) 되었다는 것만 안다. 제국 나이트들에 의해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하지만 한진수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김상희가 내 옆에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 전부를 잃은 것 같은 허망함이 가슴에 밀려들었다. 그 것은 마치 해일과도 같이 강력하게 밀려드는,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저 그렇게 상상만 해도 그랬다. 상상만 해도 그런데, 실제로 김상희가 옆에 없어진다면... 그 땐 정말 살기가 너무나 힘들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왜 김상희에게 이렇게 목 매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논리적이나 이성적인 근거는 절대로 댈 수 없는 이상한 종류의 것이었다.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어봤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김상희를 지금 품에 안고 있다. 품에 안고 있는데도 안고 싶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이 괴상한 마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김상희를 더욱더 꽉 안았다. 김상희의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나는... 김상희가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나는 것 뿐이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지만 한진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도 놀랐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펑펑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울게 되는 날이 오다니. 하지만 창피함은 크지 않았다. 그저 김상희가 무사하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김상희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한진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김상희는 지금이 좋았다. 한진수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순간.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진수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터질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심장 역시 강하게 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수의 품은 따뜻했고, 진수의 품을 통해 느껴지는 진수의 감정은 정말로 세차고 뜨거웠다. 진수의 눈물이 상희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 눈물은 굉장히 뜨거웠다. 한진수의 진심이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김상희는 좋았다. 행복했다.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크리스가 됐든, 곽기현이 됐든. 누군가와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 김상희는 지독히도 외로웠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나는 진수를 영원히 잊어야 하는 걸까? 진수는 나를 봐주기는 할까? 아니... 진수가 나를 용서해줄까...? 그런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진수의 품에 안겨 있을 때에 그런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김상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 나 결혼하기 싫어. 나한테 있어서 남자는... 너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뒷쪽에는 김훈상이 있다.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라 짐작되는 남자들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혼을 하라는 왕의 결정'을 딸이 '마음에 안든다. 싫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되면 김훈상은 눈물을 머금고라도 김상희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할 거다. '그런데... 진수는 왜 이렇게 우는 거야...? 설마 내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참고로 김상희는 한진수가 왜 이렇게 펑펑 우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진수가 울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김상희도 가슴이 아파왔다. 옛날에. 그러니까 지구에 있을 때에 김상희는 한진수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엔 모른 척 했었다. '나는 정말...' ***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정말 못된 년이었다. 진수의 진심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정말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 연애 초기. 내가 진수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진수가 주는 사랑만을 받으며 누리고 내 마음대로 행동할 때에...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얼마만큼 나쁜 년이었냐면, 나는 뻔뻔하게 말했었다. - 그 남자가 내가 너무 좋다는데 어떡해? 내가 그 남자한테 사심만 없으면 되는 거 아냐?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뻔뻔하고 이기적이었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진수는 날 떠나지 않을 걸 알고 있다는 걸 얼마나 잔인하게 이용했었는지. 나는 참 못된 년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술김에 그 남자와 키스를 했었다. 변명을 대보자면, 내가 키스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저 쪽에서 먼저 해왔다. 처음에 나는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남자가 다소 강압적으로 내게 키스를 해왔다. 정말로 술김에... 변명이라고 하기엔 정말 치졸하지만... 나는 술김에 남자와 키스를 했었다. 그런데 정말 잔인하고 못된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 날은 마침, 내가 진수보고 나를 데리러 오라고 했었을 때였다. 비가 많이 왔었으니까. 나는 그 남자와 키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볍게 밥만 먹고 술 한 잔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었다. 이미 그것부터가 잘 못 되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었다. 나를 데리러온 진수는 내가 남자와 키스하는 걸 봤었다. '그 때도 진수는 울지 않았어.' 분명 진수는 키스하는 나를 봤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웃었다.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줬다. 자기는 홀딱 젖었었는데 나는 거의 안 젖었었다. 술에 취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책감을 조금 느꼈었다. 정말 천하의 못된 년이긴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가졌다. 나는 혼자 살던 오피스텔 복도 창문에서 밖을 쳐다봤다. 진수에게 미안하다고... 내일은 말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진수가 돌아가는 걸 보려고 했다. 그 때 나는 봤다. 오피스텔 앞 벤치에 앉아, 비를 맞으며 펑펑 울고 있는 진수의 모습을.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술 많이 마셨네? 다음부턴 조금만 마셔. 그렇게 다정하게 말했던 주제에, 밖에 나가서 저렇게 서럽게 울었다. 사실 말하자면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내가 진수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져서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정말... 호구고 등신이고 멍청이였는데...' 그래서 고마웠다. 나 같은 나쁜 년을 포기하지 않아줘서.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줘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호구여도 좋았고 등신이어도 좋았고 멍청이어도 좋았다. 그 때 진수가 화를 내고 내게 이별통보를 했다고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진수는 그러지 않았다. 진수는 언제나처럼, 나를 사랑해줬다. 언제나 내 옆에 있어줬고, 나를 기다려줬고, 나를 이해해줬다. 내가 작게 말했다. "... 고마워." 구체적으로 뭐가 고맙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지 모르겠다. 그냥 고마웠다. 한진수가 몸을 돌렸다. 우리 개차반씨를 쳐다봤다. 한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보다 먼저 개차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주겠다." *** 한진수가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김상희가 한진수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했다. 하지만 한진수가 김상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퉁명스럽게 말했다. "못생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하도 울어서 목이 많이 잠겼다. 사실 김상희의 얼굴. 보고 싶다.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다. 안고 있는데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대천재로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누구보다도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을 거고, 아마 눈이 부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약한 모습 많이 보였는데, 더 이상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김상희 앞에서는 당당한 남자이고 싶었다. 김상희는 한진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저렇게 틱틱대고 퉁명스레 말해도 그녀는 한진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김상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고마워." 한진수도 말했다. "아니. 내가 더 고마워." "...뭐가?" 그냥 살아 있어줘서.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한다면, 김상희가 정말 죽을 위험에 처했을 뻔 했다고 말하는 꼴이지 않은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위험에 안 빠졌던 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위험'의 '위'자라도 김상희와 관련되는 게 싫었다. 논리적으로는 이상한 말인데, 하여튼 싫었다. 한진수가 다시 말했다. "...내 옆에 있어서." "응?" "지금 나한테 안겨 있어서." "......." "네가 날 뿌리치지 않아서."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수 없다. 한진수가 마음 먹고 안으면, 김상희가 아니라 남자들이라고해도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진수니까. 한진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한테 고맙다고 말해줘서." "......." "그리고 나를 안아줘서." 한진수는 아직도 느끼고 있다. 김상희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는 걸. 한진수는 말하고 싶었다. 그냥 다른 거 모르겠고,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김상희도 말했다. "...미안해." 따지고 보면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미안해해야 했다. 김상희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한진수가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된 것은 김상희 때문이었다. 김상희가 아니었다면 한진수는 지금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로 활약하고 있으며 후에는 고려의 중책을 맡게 될 것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제국의 중책을 맡고 있든지. 그도 아니면 독립하여 하나의 나라를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험만 쌓인다면, 한진수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김상희 한 명 때문에 포기했다. 한진수는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너는 나한테 미안할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나는 후회하지 않아." 후회한 적. 물론 있다. 다른 것 때문에 후회한 게 아니라 자신이 약한 것을 후회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로 강했다면, 제국보다도 강했다면 김상희를 지금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그제서야 한진수는 김상희를 조금 놓아줬다. 아까는 못생긴 얼굴 보기 싫다고 말했던 주제에 이제는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내게 정말 고마울 뿐이야." "...뭐가 그렇게 고마운데?" 솔직히 김상희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고마운 건지. "그냥 다. 지금 내 옆에 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정말 감사해. 비록 나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너를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좋아. 그냥... 내 옆에만 있어. 내가 잘할게. 내가 정말 잘할게."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진수도 옛날에 이렇게 말했었다. - 그냥 내 옆에만 있어. 내가 잘할게. 나랑 사귀면서 다른 사람 만나도 좋아. 진심이야. 그러니까... 내 옆에만 있어줘. 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다. - 나는 자신 있어. 다른 누구보다도 널 많이 좋아할 수 있어. 그것만큼은 확실히 약속할게.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너 더 좋아해 내가 정말 잘할게. 김상희는 그 기억들이 또 떠올랐다. 그런데 김상희는 한진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진수에게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나... 결혼하게 될 것 같아." 김상희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이, 한진수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거 내가 시킨 거야." 김상희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뭐라고...?" *** 나는 내가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거 내가 시킨 거야." 지금 뭐라고 했냐? 너가 시킨 거라고 했냐? 다른 것도 아니고 결혼을? 너 진심? 리얼 진심이냐? 내가 너 말고 다른 남자랑 결혼해도 괜찮다고? 하. 아... 그래. 뭔가 사정이 있겠지. 분명 사정이 있을 거야. 그래. 일단 들어보자. 일단 들어는 보고 얘기하자. 후.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한진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다른 남자와 결혼 시키려고는 하지 않았을 거다. 나도 머리로는 그걸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이 섭섭했다. 화도 났다. 그럴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내 상황에 슬퍼하고 좌절하고 그랬었는데. 그게...다 네가 꾸민 거라고? 이유가 있든 말든, 일단 한 대 패도 되겠니? 나는 한진수의 설명을 들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구나. 이제 좀 알겠다. 말하자면 크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위장결혼을 하라는 뜻이다. 그냥 공식적으로 결혼만 하는 거. 곽기현은 믿을 수 있는 친구니까. 그냥 서류상으로 결혼만 하고 나중을 기약하자는 소리였다. 이해는 된다. 진수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고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패이기는 하다. 머리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데 괜히 섭섭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인데, 나는 굳이 하고야 말았다. "...내가 너 말고 다른 남자랑 결혼해도 괜찮은 거 맞아?" 진수의 표정은 진지했다. "죽기보다 싫어." 그럼 죽어. 라고 말할 뻔 했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이해하자. 이해하자. 이게 맞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이렇게 되는 게 충분히 합리적이야. 아 근데. 나 왜 섭섭해? 미치겠네. 머리랑 가슴이랑 자꾸 따로 노네. "그럼...나 진짜 곽기현 공자님이랑 결혼...해?" 따지고 보면 나는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 곽기현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 아닌가. 게다가 진수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 된다. 이 세계의 어느 남자가 한 번 결혼한 여자를 데려가려고 하겠는가. 안 그런 여자도 널리고 널렸는데. 이미 결혼한 여자는, 여자로서의 상품가치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슬픈 말이지만 현실이 그랬다. 그리고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거 아는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 말라고 말해줘...' 싫다고, 무슨 상황이 있든지 나는 다른 남자랑 네가 결혼하는 거. 죽어도 못 보겠다고. 그렇게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안다. 나도 멍청한 거. 그런데 너무 듣고 싶었다. '차라리 같이 도망가자고 해.' 지금 진수가 왜 이러는지 대충은 안다. 제국에 쫓기고 있는 몸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개차반과 망나니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차라리 진수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생길이 훤할지라도. 나는 그 길을 걸어갈 자신이 있었다. 진수가 내 옆에 있으니까. 나를 정말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으니까. 나는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결국 진수는 말했다. "...결혼 하도록 해." 그리고 황당한 건, 이 타이밍에 얘가 나한테 키스를 시도했다는 거다. 나는 안다. 얘 모태 솔로다. 게다가 여자의 감정 같은 거 하나도 모른다. 얘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이 그러면 그렇지 뭐. 나는 한진수의 입술을 막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막는다고, 막아질 입술은 아니었다. 세계의 대천재 한진수인데, 내가 막을 수나 있겠어? 하지만 진수는 멈췄다. 내 손이 진수의 입술에 닿았다. 진수가 나를 쳐다봤다. 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심이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 작품 후기 ============================ "...진심이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작가해설: 한진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0124 / 0192 ----------------------------------------------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122 한진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뭐지. 왜 이러지. 내 몸에 뭔가 커다란 이상이 생겼나. 뭐냐 이 기분은. 스스로도 황당함에 빠져들었다. 이 이상한 오한의 출처는 바로 김상희의 질문이었다. "...진심이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한진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뭔가.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 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느낌이 그랬다. 이건 본능에 가까웠다. 대답 잘 하라고. 본능이 경고를 보내왔다. 목숨을 건 전투에 나설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이 그의 온 몸을 지배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아니. 이 방법이 최선인데.' 누가 봐도. 그 누가 생각하더라도 이 방법이 최선이다.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 상상책이 되기는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상태. 김상희에게 그런 짐을 떠맡길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은 아직 김상희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없다. 제국으로부터 김상희를 보호하려면 고려왕가의 비호를 받는 것이 훨씬 낫다. 그게 논리적이고 합당하며 또한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뭔가 틀린 것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이 방법이 맞는 건데, 본능이 자꾸만 아니라고 외쳤다. 말해야 돼. 뭔가를 말해야만 한다. 좀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말해야... 산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설마 김상희가 자신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똥줄이 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김상희의 표정이 아주 조금. 한진수는 알아차라지도 못할 만큼 아주 조금 풀어졌다. "...그럼 하면 되잖아." "내 마음 같아선 그냥 너를 데리고 가고 싶어. 네가 없는 1분 1초가 내겐 얼마나 괴로운지. 너는 모를 거다." 진수는 예전에도 그랬었다. - 네가 없는 그 짧은 순간이 나한테는 1년, 2년처럼 느껴져. 진짜 괴롭다고. 그 땐 오그라드는 소리하지 말라고 등짝을 한 대 때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나도..." 나도 그래.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수는 충분히 기뻐했다. 끝까지 듣지 않았지만, 김상희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졌으니까. 그거면 됐다. 한진수가 말했다. "네가 날 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수십 배 만큼. 내가 널 보고싶어 해." 진수는 예전에도 그랬었다. - 네가 날 좋아하는 것의 수십 배 정도는 내가 너 더 좋아할 걸?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의 진수와 지금의 진수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말 같았다. 적어도 자신을 이토록 사랑해주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너무나 감사해서, 그 사실이 너무 고마워서,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발 뒷꿈치를 들고 한진수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쪽, 소리가 났다. 김상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지구에서도, 김상희가 먼저 나서서 이렇게 뽀뽀를 해준 적은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 때마다 한진수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진수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여지껏 잘 유지하고 있었는데. 합리적인 판단이나 이성 같은 거. 지금 이 순간 멀리 던져버렸다. "그냥 나랑 같이 가자."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와 함께 있기만 하면 뭐든지 다 가능할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대고 뛰었다. 단순히 입술을 한 번 맞대었을 뿐인데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너 행복하게 해줄게." 제국 따위. 뭐 죽을 각오 하고서 황제의 목만 따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성이 제기능을 상실했다. 그 때, 한진수는 스페셜 필드가 흔들리는 걸 느꼈다. '아차!' 10분이 지난 것 같다. 김훈상이 허락한 시간은 10분. 지금 아마 밖에서 시위하고 있는 걸 거다. 10분 지났으니 나오라고. '폐하의 능력이라면 이 필드를 깨부수는 것도 가능하겠지.' 김훈상을 떠올리자 갑자기 이성이 되돌아왔다. 이러면 안 된다. 잠시 이성을 잃었는데 이러면 김상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지금 당장의 행복감 때문에,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말하려고 했다. 나중을 기약하자고. 그냥 결혼하라고. 그런데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봤다. 왜 사과해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사과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미안해."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희는 지금 스페셜 필드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애초에 마력이 없는 여자이다보니, 그런 것까지 자세하게는 알 수 없었다. '그 한진수나 이 한진수나 답답한 건 매한가지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충분히 전달 됐다. 김상희는 반 쯤 장난으로 물었다. "오빠가 왜 미안한데?" 김상희는 반 쯤 장난이었는데, 한진수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거. 뭔가 잘 못 됐다. "그냥 다..."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힘이 없는 것도 미안하고, 지금 당장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상희가 원하는 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평소라면 그런 말 좋다. 진수가 말하니까 좋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해도, 어떻게 친구와 결혼을 하란 말을 저렇게 쉽게 한단 말인가! 물론 김상희도 이해는 한다. 이해를 하기는 하는데, 섭섭한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한진수는 오빠가 맞다.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 한진수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이거. 뭔가. 엄청 위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뭐, 뭘 잘못했지. 답은 명확했다. "내가 너무 약해서..." 제국으로부터 널 제대로 지켜줄 수 없다는 거. 그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 곳 남자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이런 질문이라면, 지구의 남자들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으이그. 이 답답아!' 김상희는 한진수를 안았다. 한진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네가 시키는대로 할게. 난 너 아니면 정말 싫어. 네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거.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 김상희는 '내가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이야...'하고 생각했지만 딱히 부끄럽다거나 오글거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과거와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 과거 한진수가 그토록 많이 말했었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너 말고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그 말을, 이번에는 김상희가 했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돼." 한진수의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정말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기다릴게. 너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빨리 와줘." 한진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반드시. 언젠가는 이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 나한테는 이 여자만 있으면 된다. '반드시...' 반드시 제국을 뛰어넘는 힘을 가져서, 이 여자를 지켜주고 싶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울지 않게 해주고 싶다. 매일매일 웃게 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 자꾸만 치솟아 올랐다. 한진수는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 김상희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녀는 눈을 살짝 감았다. 한진수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어서 키스해! 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진수는 그럴 수 없었다. 김훈상이 문제였다. '이대로면 진짜 스페셜 필드 부수겠다.' 이대로 뒀다가는 진짜 부수고 들어올 인간이다. 저 장인 어른. 아주 과격한 장인 어른이니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참아준 거다. 한진수는 키스하지 못했다.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김상희는 조금 삐졌다. '키스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답답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처음 거사(?)를 치를 때도 결국 그녀가 먼저 덮치지 않았던가. 결국 김상희가 먼저 한진수에게 키스를 시도했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했다. "이 개새끼가... 내 딸한테 무슨 짓이냐?" 한진수는 억울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키스를 해오는데 밀쳐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장인어른을 보자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진퇴 양난이다. 세기의 대천재. 세계가 인정한 최악의 범법자 중 1인. 과거 프리온 나이트였으며 고려가 자랑하는 걸출한 인재 한진수는 울고 싶어졌다. *** 제국 정보부 국장 김국현은 이 보고를 어떻게 올려야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엄선한 7명의 나이트를 보냈는데. '7명 모두가 죽었다고?' 심지어 그 중 1명은 폭사당했다. '폭사라면...' 상황이 그려진다. 김상희로 위장시킨 어떤 계집의 몸 속에 폭탄을 이식해놨을 거다. 그리고 그 계집을 김상희로 착각한 나이트가 희생당한 거고. '애초에 고려의 함정이었나?'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저번에도 미끼작전에 당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역시 미끼일 수도 있었다. 김상희를 납치하려는 세력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 물론 아니다. 김훈상 역시 김상희가 납치된 줄 알고 미칠 뻔 했다. 그러나 각자의 입장과 상황이 다르다보니, 김국현은 그렇게 오해했다. '하지만 미끼작전이라는 것을 못 알아차린 내 불찰이 크다. 그렇게 보고할 수는 없어.' 이미 신뢰를 많이 잃었다. 어차피 실패는 실패. 그렇다면 이유라도 잘 만들어야 했다. '스페셜 나이트의 능력이 우리가 파악한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고 보고해야겠다.' 아니. 단순히 그것보다는, '스페셜 나이트보다도 상위의 나이트 집단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겠어.' 고려에는 숨겨진 전략병기가 있다. 여태까지는 스페셜 나이트인 줄 알았는데, 스페셜 나이트보다도 더 강한 집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고려의 새로운 전력을 파악했다는 공로라도 인정되겠지.' 그렇다고해도 실패가 성공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죽은 나이트들과 제국과의 연결고리는 없다. 증거가 남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했다. 그러니까 제국에게 피해가 올 일은 없다는 소리다. 나이트 7명을 잃었고 대신 고려의 새로운 능력을 알아냈다. 그렇게까지 큰 문책은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 보고를 올렸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셜 나이트가 아닌. 또다른 나이트라." "예. 대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빠른 시간에, 그토록 정확하게 7명 모두를 죽였습니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아니. 아주 많이 다르다. 그러나 진실에는 근접했다. 실제로 고려에는 스페셜 나이트보다도 강한 더블 스페셜 나이트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그들을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 지칭하기로 한다." 착각과 오해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진실에는 더더욱 근접하게 됐다. "이번 실패는 용서하겠다. 앞으로는 더블 스페셜 나이트의 존재를 인지하고 고려하여 작전을 짜도록 한다." "예. 폐하." 김국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황제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변수는 없어야겠지." 김국현은 그 말을 이해했다. 지금 더블 스페셜 나이트는 외진 곳에 나와 있다. 아마도 고려의 최강전력이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다시 말해 힘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친다면? 그들의 전력을 상당부분 약화시킬 수 있을 거다. 덧붙여, "서두른다면 김상희도 얻을 수 있겠지." 김국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지금 당장...?'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 말은 즉, 이 쪽에서도 가용가능한 최강 전력을 기동시키라는 소리다.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를 운용한다. 단, 일대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는 개미 한 마리도 없어야 할 것이다." 황제는 지금 그 곳에 김훈상이 있다는 걸 모른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이런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다. 타지에 나와 있는 나이트를 공격하는 것과, 타지에 나와 있는 국왕을 공격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만약 김국현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보고를 했을 텐데, 김국현도 거기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김국현이 대답했다. "예. 폐하." 제국의 최강 전력.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려의 나이트들을 죽이고 김상희를 빼앗아 오기 위해서 말이다. 같은 시각, 김훈상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 개새끼가... 내 딸한테 무슨 짓이냐?" ============================ 작품 후기 ============================ "그렇다면 일단 그들을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 지칭하기로 한다." 역시 황제는 황제인 듯 하네여. 대충 찍었는데도 정답 *** "이 개새끼가... 내 딸한테 무슨 짓이냐?" 아빠 딥빡 0125 / 0192 ---------------------------------------------- "정식으로 청혼할게" *** 김훈상은 보고야 말았다. 한진수가 강제로 김상희의 입술을 범하려는 것을. 저 입술이 어떤 입술인가. 그냥 입술이 아니다. 예전에 저 입술이 볼에 한 번 닿았다고, 그래서 왕국 하나의 값에 맞먹는 퓨리어스 한 병을 통째로 뿌렸다. 그토록 귀중하고 귀중한, 아주 소중하디 소중한 그런 입술이다. 그런 입술을 감히 강제로 범해? '죽인다!' 사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한진수는 키스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훈상이 스페셜 필드에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김상희와 키스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김상희가 답답한 나머지 한진수를 먼저 덮쳤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한진수는 덮침을 당했는데, 김훈상이 보기엔 한진수가 김상희를 덮친 것처럼 보였다. 앞뒤 결과. 전후 사정.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했다. 뭐가 어찌됐든 김훈상이 보기엔 확실히 강제로 하는 거였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고 싶을지도. 한진수는 당황했다. "저, 저기..." 천재고 뭐고. 지금 이 상황에선 머리가 굳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올랐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하지. 그런 위기의식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그랬다. 잘못한 게 없다. 설령 자신이 덮침 당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김상희를 덮쳤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 아니다. 상식선에서는 말이다. 오히려 한진수쯤 되는 남자의 유전자를 받을 수 있으니, 아버지는 넙죽 절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분명히 그건 그런데 한진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뭔가 변명을 해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엄청난 변명을 해야할 것 같았다. '모르겠다.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이쯤 되니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빠는 진짜..." 다른 사람은 못 들었어도 김훈상은 확실히 들었다. 한진수를 향해 검을 내지르려던 김훈상의 몸이 우뚝 멈춰섰다. 김유신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지?' 김유신이 만약 김훈상만큼, 김상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김상희가 홀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을 거다. 하지만 김유신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김훈상이 갑자기 저토록 충격 받은 듯한 얼굴로 서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워프의 후유증인가!' 저번에 김훈상은 김상희를 구하기 위해 백제까지 워프를 사용했다. 아무리 천재인 김훈상이라고 해도 분명히 몸에 무리가 가는 행동이었다. 그 후유증이 지금 다시 도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김유신이 황급히 김훈상을 부축하러 달려갔다. "폐, 폐하!" 고려의 국왕은 이런 곳에서 넘어지면 안 된다. 그의 건강이 곧 고려의 건강이다. 적어도 김유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훈상을 부축했다. '폐, 폐하의 몸에 힘이 없으시다!' 단언하건대, 김훈상이 즉위한 이후 처음 보는 약한 모습이다. 이토록 약해진 왕의 모습. 정말로 처음 본다. 역시 워프의 후유증이 맞았다. 물론 그런 거 아니다. '지금... 한숨을 쉬었다고...?' 김상희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들린 것 같았다. '아빠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진짜...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아니. 내 딸이 내게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지.' 그런 말을 할리 없는데. 자꾸만 왜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을까. 한진수는 떨떠름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 대 치러 달려올 것 같았던 왕이 갑자기 멈춰서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김상희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한진수와 키스를 하려던 찰나. 갑자기 난입한 불청객(?)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설마... 화났나?' 도가 좀 지나쳤을 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건 절대 끝나지 않을 과제다. '이번엔 좀 심했던 거 같기도 한데.' 아무리 김훈상이 딸바보가 되었다지만 김훈상이 저러고 있으면 좀 긴장 된다. '왕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가 날만 해.' 참고로 김훈상. 지금 화 하나도 안 났다. 그냥 충격 받아서 가만히 있을 뿐. 그의 머릿속에 자꾸만 '방해꾼' '방해꾼' '방해꾼' 하고 누군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방해꾼일 뿐인가.' 문득 서러워졌다. 딸아이 성심성의껏 키워 놨더니 -실제로 대놓고 이뻐한 시간은 1년이 채 안 되지만.- 딸아이는 자신이 아닌 남자를 더 좋아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굉장히 애통하고 속상했다. 그 때, 김유신이 말했다. "무장을 갖춥니다." 김유신은 스페셜 나이트의 대대장. 스페셜 나이트들이 김유신의 말에 빠르게 움직였다. 더블 스페셜 나이트. 그러니까 김유신의 선배들 역시 김유신의 명령에 빠르게 반응했다. 그들은 김유신의 선배지만, 그래도 명령권은 김유신이 가진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오묘한 관계에 있다. 더스 나이트 중 한 명이 말했다. "김유신 대대장. 제법인데. 실력이 많이 늘었어." 김상희는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 화가 난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훈상은 제자리에 멈춰서 있고. 스페셜 나이트들이 갑자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상한 건, 스페셜 나이트라 짐작되는 사람이 김유신더러 '제법인데. 실력이 많이 늘었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거다. '김유신 대대장님이 제일 높은 사람 아니었어?' 김상희는 더스 나이트의 존재를 모른다. 그래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갑자기 무기는 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무기를 거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 동료들입니다." 김유신이 대답했다. "우리는 고려왕가를 수호하는 스페셜 나이트다. 무기를 소지한 채 빠른 속도로 이 쪽으로 접근하는 놈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겠지." 그래서 한진수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정지." 김상희는 한진수를 올려다봤다.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 한진수는 뭔가 굉장히 남자다웠다. 뭐가 남자답냐고 묻는다면 구체적으로 대답 못하겠지만, 하여튼 남자다웠다. '멋있어.' 하지만 겉으로 티는 안 냈다. 티 내면 왠지 지는 느낌이다. 다시 한 번 상기해냈다. 한진수는, '나를 딴 남자한테 시집 보내려고 했다고!' 그러니까 티 안낼 거야. 좋아하는 티 안 낼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한 김상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한진수가 명령을 내렸다. "즉각 무기를 회수하고 은신을 풀어라." 제국에서도 골치아파하는 레지스탕스와 고려 최강의 전력이 한 곳에 모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김훈상이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아서 다리가 풀릴 뻔 했다. 김유신은 긴장했다. '지금 폐하는 정상이 아니다.' 한진수의 동료라면, 그럭저럭 믿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 김훈상의 상태는 매우 위중한 상태. 워프의 후유증으로 저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모든 일에 안전을 기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김유신이 긴장하는 가운데, 한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대 제국 레지스탕스. 붉은 늑대를 지휘하고 있는 한진수입니다." 정신을 차린 김훈상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붉은 늑대? 혹시 붉은 고양이들이 아니냐?" "......." 전직. 붉은 늑대의 왕 칼리번은 발끈할 뻔 했다. 지가 뭔데 저렇게 늑대를 무시하는가. 고려의 왕쯤 된다면 모를까. 감히 붉은 늑대를 무시하다니. "그리고 이 분은 고려의 국왕. 김훈상 폐하시다." 칼리번은 충격을 받았다. 고려의 국왕이 왜 여기에 있는가? 어째서? 고려 국왕이 왜 고려를 떠나 이 숲속까지 들어왔지? 여기에 무슨 퓨리어스가 한 상자 묻혀져 있나? '이... 이 숲에 뭔가 있는 것인가!' 뭔가 없다. 이 숲에는 그저 김상희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김훈상에게만(?) 보물인 김상희가. 칼리번은 이 숲에 무언가 굉장히 귀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비범해 보이는 남자들 -스페셜 나이트와 더스 나이트들-과 고려 국왕이 이 곳에 직접 행차할 리는 없으니까. 하여튼 칼리번은 한진수에게 보고했다. "우리가 사살한 숫자는 5명입니다. 1명은 이미 죽은 상태였고, 또 한 명은 우리 눈 앞에서 폭사했습니다. 폭탄이 숨겨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훈상과 한진수의 눈이 동시에 크리스를 향했다. 크리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김훈상도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이해했다. '7명이 김상희로 위장한 무언가를 데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모두가 사살되었으며 그 중 하나는 폭탄에 의해 사살되었다... 인가.' 새삼스레 크리스를 다시 보게 됐다.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움직였단 뜻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 좋은 쪽으로 다시 보게 됐다. '내 딸의 귀중한 입술을 강제로 빼앗으려던 저 놈 보다는 이 똑똑한 놈이 나을 수도 있겠어.' 누가 더 마음에 드는 사윗감인지 김훈상의 내적 갈등이 점점 심화됐다. '하지만 뭔가 있는 놈이야. 뒤가 구린 놈이지. 내 딸을 줘도 될까?' 아니. 안 된다. '한진수도 나름 분발하고 있군.'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 누가 됐든. 마음에 들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린 시절. - 아빠랑 결혼 할래요! 라고 말했던 김상희가 있지 않은가.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시집 안 보내고 옆에 두고 싶다. 이 정도면 진짜 정신병 수준이라고 스스로 생각은 하면서도 주체가 안 됐다. '더더군다나 곽기현은 안 돼.' 뭔가 있어 보이는 백제 왕자도 탈락. 세기의 대천재 한진수도 탈락한 와중에 곽씨 후작가의 아들이 성에 찰 리가 없다. 사실 백제 왕자와 한진수를 더하고 거기에 제국 황제까지 얹어줘도 아빠인 자신의 눈에는 찰 리 없지만, 그 사실은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인지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남자 놈들이 다 별로인 걸로 하기로 했다. '뭐 이리 맘에 드는 놈이 한 명도 없냐?' *** 프리온 나이트. 그들은 제국의 최강전력이며 베일에 가려진 집단이다.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를 이끄는 대장 세카르트는 오랜만에 긴장했다. '고려의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 실제로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고 불리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런 것이 있을 거라는 가정하에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를 움직이시다니.' 정말로 전멸을 시키실 생각인 것 같았다. 프리온 나이트는 상대를 완전히 말살시킬 때에만 움직인다. 특히나 12대대의 경우, 더욱더 비밀을 요하는 일에 움직인다. 12대대의 프리온 나이트들은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고 빠르다. 대신 화력은 조금 떨어진다. 대규모 화력전보다는 대인전. 그러니까 강한 사람과 싸울 때에 동원되는 나이트 부대라고 할 수 있다. 무전 연락이 당도했다. - 지원필드. 준비 완료. 가동합니까? - 지원필드 가동시간은? - 약 50분정도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거다. 아무리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 아니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고 할지라도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와 프리온 나이트 어시스턴트가 동원됐다. 이 근방에 살아있는 생물체는 개미 한 마리 없게 될 것이었다. '김훈상. 한진수가 한꺼번에 힘을 합친다고 해도.' 일어날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봤다. 김훈상과 한진수쯤 되는 대천재 둘이 힘을 합치는 상황. 그런 상황이 있을리 없지만 그런 상황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는 모른다. 한진수와 김훈상 사이에는 '김상희'라는 아주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김상희가 가운데에 있는한 한진수는 김훈상에게 있어서 영원한 을이며, 김훈상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걸. 누가 뭐래도 김훈상은 한진수의 장인어른이니까. 물론 그 장인어른은 한진수를 아직 사위로 인정 안하고 있지만.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더라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제국이 괜히 초강대국이 아니다. 프리온 나이트가 괜히 제국의 최강병기가 아니다. '모두 죽여주겠다.' 프리온 나이트 어시스턴트들에게 연락했다. - 지원필드를 가동시켜라. 제국의 최강전력. 프리온 나이트들을 소환시켰다. 12대대 프리온 나이트 3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들과 김훈상. 그리고 한진수. 거기에 크리스와 늑대들까지. 이상함을 눈치 챘다. 그리고 한진수는 이 느낌에 익숙했다. '이건 설마...!' 그 역시 과거 프리온 나이트였다. 마을 몇 개를 순식간에 녹여버린 적이 있다. 그 때와 비슷했다. 한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프리온 나이트...!" 프리온 나이트가 느껴졌다. 그것도 한 두기가 아니다. 적어도 1개 대대 이상이 한꺼번에 움직인 것 같았다. 이건 제국이 정말 작정하고 보냈다. 이 곳에 생명체는 아무도 남기지 않을 거다. 김훈상의 한쪽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게 프리온 나이트의 기운인가?" 목을 풀었다. "역시 김상희를 노리는 건 제국이 맞았군." 그걸 확인했다. 이제. 제국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제국과는 반드시 공생해야만 하는 관계다. 왕으로서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데 딸이 보였다. '나는 왕이기 전에 아버지다.'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거다. 왕이 아닌 아버지의 삶을 선택하면, 많은 백성들이 고통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외면하기로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걸 외면하기 전에, 이 상황부터 타개해야 했다. "더스 나이트. 스페셜 나이트. 지금부터 전쟁에 돌입한다." 한진수도 명령을 내렸다. "늑대들. 전열을 가다듬어라." "예." 그리고 한진수가 김상희를 한 팔로 꽉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 만큼은 내가 지키겠어. 한진수는 그 말을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김상희는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한진수는 지금 두렵지 않았다. 제국의 최강전력이 마음 먹고 이 곳을 노리고 있는데 떨리지 않았다. "김상희." 한진수가 김상희의 이마에 키스했다. 김상희가 눈을 감았다. 한진수는 그 감은 눈에 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코에 키스했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키스했다. 아까 스페셜 필드 내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누가 뭐라해도 프리온 나이트니까. "나랑 결혼하자." 무슨 상황이 있든. 어떤 합리적인 선택이 있든. 그런 건 생각 못하겠다. 김상희밖에 눈에 안 보이고 김상희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저 김상희만 옆에 있으면 될 것 같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다. "다른 놈한텐... 죽어도 못 보내." 그게 믿을만한 내 친구라 할지라도.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여기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정식으로 청혼할게." 정식으로 청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고백했다. "...사랑해. 김상희."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 대대장. 대장 세카르트도 이제 상대들을 느꼈다. 생각보다 숫자가 제법 많았다. 숫자가 많은 건 문제가 안 된다. 몇 명이 있든. 모두 죽여버리면 된다. 딱 한 명. 김상희만 빼고 말이다. 명령을 내렸다. "발포. 단, 계집은 피한다." ============================ 작품 후기 ============================ 이제야 좀 고백다운 고백을 하네요. 무려 6권이 진행되고 나서야... 으이그 답답아. 0126 / 0192 ---------------------------------------------- 내가 죽으면 김상희가 살 수 있다. ***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는 대인전 특화 대대. 각 프리온 나이트의 크기는 약 2미터~3미터 정도로 성인 남자보다 조금 더 큰 수준. 프리온 나이트 32기가 진을 양 옆으로 조금 벌렸다. 옆으로 길게 늘어선 프리온 나이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발포." 프리온 나이트의 오른손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이-!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가 프리온 나이트이 오른손에서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그 것은 마치 황금색 빛줄기같았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그 빛줄기. 그 빛줄기와 맞부딪친 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바위에 빛줄기 크기만한 구멍이 뚫렸다. 32다발의 황금색 빛줄기가 김상희 일행이 있는 곳을 덮쳤다. 김훈상은 직감했다. '제대로 맞으면 최소 중상이다.' 급소를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피해라. 피하면서 거리를 좁혀." 원래대로라면 절대 내릴 수 없는 명령이다. 피하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닌데, 거기다가 거리를 좁히라니. 스페셜 나이트나 더블 스페셜 나이트쯤 되는 사람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크아악!" 한진수가 이끄는 레지스탕스. 늑대라 불리는 남자 중 한 명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유카토! 젠장!" 늑대들은 지금 황당했다. 뭐가 보이지도 않는데, 갑자기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레이저포같은 것이 날아왔다. 심지어 곡사포다. 보통 레이저포는 무조건 일직선으로만 발사된다. 그런데 이 빛줄기는 분명 일직선이 아니었다. 방향을 조금 바꾸는 걸 분명히 봤다. 곡선으로 꺾어져 들어왔다. 한진수가 물었다. "유카토. 괜찮나?" "안 괜찮은데요." "농담하는 거 보니 괜찮나보군." 그러나 한진수도 안다. 전혀 괜찮지 않다. 배를 관통당했다. 마력을 사용해서 황급히 지혈을 하기는 했는데 임시방편이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거기에 온통 신경을 쓸 수는 없다. 김훈상에게 말했다. "폐하. 곧 2차 발포가 시작될 겁니다." "거리를 좁힌다. 한진수 넌 내 딸을 지켜." 한진수는 귀중한 전력이다. 김훈상은 한진수가 2차각성 마저도 끝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2차 각성은 천재들만 이룰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 한진수는 그것 마저도 끝냈다. 어쩌면 본신의 능력만 보면 자신보다 강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생각하는 중이다. 그 귀한 전력을 겨우 여자아이 하나를 보호하는데 쓰는 건 상당한 손해다. 김유신은 이제 완전히 확신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한다. '확실히 왕자님이군.' 이제 더이상 이견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렇다는 말은, '한진수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게이고.' 김상희 공주를 저토록 사랑한다는 건 한진수가 역사에 이름이 남을 엄청난 게이라는 소리다. 거기에 더해 2차 발포가 시작 됐다. 저 쪽은 이 쪽의 움직임을 파악한 것 같았다. 큭! 짧은 비명성이 토해졌다. 32줄기의 빛다발이 얽히고 설켜 날아왔다. 피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여져 쏘아졌다. 1명의 더스 나이트. 그리고 1명의 스페셜 나이트. 또 1명의 늑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김유신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개 같은." 아마도 프리온 나이트라 짐작되는 이 적은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려의 나이트들은 원거리보다는 근거리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 김상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이 사람들을 돕는 일이야.' 나서서 뭔가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김상희는 드라마나 영화 속 민폐 여자주인공처럼, 함부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진수야..." 정식으로 청혼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말을 들은 덕분에 지금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는 반드시 지킬 테니까. 적어도 네가 나보다 먼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예전에는 진수가 이런 말을 하면 네가 무슨 슈퍼맨이냐며 핀잔을 주곤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진수의 진심도 진심이거니와 실제로 슈퍼맨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무서운 말 하지마." 김상희도 조금 솔직해졌다.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정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중요한 시점이었으니까. 이 시점에서까지 속마음을 숨길 수 있는 담력이, 김상희에게는 없었다. 김상희가 말했다. "나도... 너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어."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옆으로 굴렀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부둥켜 안고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김상희는 어디 한 군데 다치지 않았다. 그 흔한 긁힌 상처마저 없었다. 한진수가 물었다. "괜찮아?" 방금. 위험했다. 김상희의 고백 아닌 고백 때문에 한진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대로 놔두면 심장이 폭발해서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 기뻤다. 김상희가 그렇게 말해줘서. 단순히 그런 말을 해줬을 뿐인데,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행복했다. 그래서 이 행복. 부수고 싶지 않았다. 꼭 지키고 싶었다. 김상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 한진수 혼자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거다. 한진수의 등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등 쪽 옷이 반으로 갈라져 나풀댔다. "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걸리적 거린다면서 반으로 갈라진 옷을 벗어 버렸다. 매끈한 상체가 드러났다. 탄탄하게 균형잡힌 몸이, 김상희의 눈에 들어왔다. 지구의 사람들이 본다면 피트니스 모델같다고 군침을 흘릴 만큼 멋드러진 상체였는데, 김상희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진수의 등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진수가 아프다. 나 때문에. 나 같은 못된 계집애 하나 지켜주려고, 저렇게 많이 다쳤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 울지마. 네가 울면 내가 너보다 더 슬퍼. 너를 울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너를 행복하게하지 못하게 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나를 자책하게 된다고. 진수가 예전에 이렇게 얘기했었다. 그 말의 뜻을 이제 좀 알겠다. 김상희는 예전에 '내가 아픈데, 왜 네가 더 아프냐?' 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내 몸은 내 몸이고. 네 몸은 네 몸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진수의 등에서 피가 흘러내리니, 김상희의 가슴이 더 아팠다. 찢어질 것 같았다. 한진수는 김상희 앞에서 등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진수는 지금 입은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 부상인지 안다. 아마도 살이 전부 패이고 가죽이 드러나서, 뼈가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일 거다. 그게 느껴진다. 이걸 김상희가 본다면, 정말 아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픈 내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등도 보여주지 않았다. 보여주기 싫었다. 김상희의 가슴이 아플 테니까. 한진수가 빙그레 웃었다. 평생동안 이렇게 웃어본 적이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그 다섯 번의 미소 중에서도, 오늘의 이 미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진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정말 가볍게 스치기만 한거야. 걱정 마." 한편, 스페셜 나이트와 더블 스페셜 나이트. 그리고 늑대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입었다. 스페셜 나이트 4명이 완전히 회복불능 상태. 그러니까 거의 반 죽음 상태에 이르렀고 더스 나이트 2명 역시 치명상을 입었다. 늑대들은 피해가 더 심각했다. 무려 8명의 늑대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을 꼽으라면 아직까지는 모두 살아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약 15명 정도가, 이대로 가만히 두면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칼리번은 생각했다. '역시 고려의 왕이다...!' 그는 과거 전쟁기를 몸소 겪은 몸이다. 그 때. 김훈상의 이름은 하늘을 찔렀었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로, 김훈상을 무적의 군주라고 부르곤 했었는데 실제로 그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것 같았다. '왕이 일선에서 나이트들을 독려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려 왕쯤 되는 사람이 가장 선두에 서서 길을 개척하고 있지 않은가. '대단한 남자다.' 게다가 김훈상의 움직임은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빛다발을 피하면서도 다른 나이트들의 움직임을 제약시키지 않도록 최적의 방향을 골라서 최적의 속도로 움직였다. 게다가 스페셜 나이트들 역시 서로간 움직임에 익숙해졌다. 저 쪽의 공격은 점점 더 교묘해지고 정교해지는데, 이 쪽의 움직임이 그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변했다.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저 쪽의 공격을 피했다. '게다가 서로에게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일부러 맞는다.' 아무리 전우라지만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 말만 들었지 저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다. 상대의 움직임에 방해를 줄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그 자리에서 저 이상한 광선을 맞아 버렸다. 즉사할 수 있는 급소를 피해서 말이다. '덕분에 사망자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인 일인가.' 프리온 나이트가 보였다.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를 이끄는 세카르트는 감탄했다. '역시 스페셜 나이트인가.' 스페셜 나이트가 아닌 놈들도 몇몇 보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원거리 포격만 해도 살아남는 인간이 별로 없는 게 정상이다. 프리온 나이트의 원거리 포격의 정확도는 상상이상이니까. '뭐.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 아니. 오히려 거리를 좁힐 거라고 확실히 예상했다. '더 가까이 와라.' 이 쪽이 바라는 바다.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의 프리온 나이트는 원래 원거리 전용 나이트가 아니다. 오히려 근거리에 특화된 나이트들이다. 원거리 포격을 할 수 있는데 굳이 접근할 필요가 없었을 뿐. '이 쪽이 원거리 특화형 타입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씨익. 웃었다.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접근을 끝내고 나면 저 쪽은 아주 조금 방심하게 될 거다. 그 때가 오히려 기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런데... 김훈상 같은데?' 김훈상 같은 게 아니라 김훈상이 확실했다. '고려의 국왕이 여기에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째서 고려의 왕이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황급히 보고를 올렸다. 제국의 정보부는 갑자기 또 바빠졌다. 고려의 왕이 이 자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 황제에게도 보고가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김훈상이 거기에 있다고?" 김국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예. 폐하." 정보국장씩 되어서 그 것 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고려의 국왕을 공격했다. 이건 나이트를 공격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죄송합니다. 폐하." 황제가 말했다. "아니.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아니. 차라리 잘 됐다." 김훈상과 스페셜 나이트가 없는 고려. 그렇다면 상대할만하지 않은가? 아니 상대할만한 것이 아니라 아주 상대하기 쉬워진다. 이렇게 외지에 고립되어 있을 때. 이 때 치는 것이 훨씬 낫다. "김국현. 김훈상이 살아나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라." 만약 살아나간다면 일이 굉장히 피곤해진다. 다른 것도 아니고 프리온 나이트가 발각 됐다. 프리온 나이트는 제국만 가지고 있는 비밀병기다.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가 된다. "이 일은 실패하면... 독박은 네가 쓰게 될 거다." 김국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은 즉, 이번 작전을 주도한 것을 자신으로 하겠다는 소리다. 아마 김훈상이 살아돌아간다면 자신의 목은 붙어있지 않게 될 거다. 황제가 말했다. "우리는 한진수와, 그를 동조하는 세력으로 오인하고 공격한 것이다. 작전 책임자는 김국현 정보국장." "...예. 폐하." 반드시 성공해야했다.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은 정말로 없어질 거다. 목이 잘려서 고려에 보내지겠지. 막대한 보상금과 함께. "프리온 나이트 제 6대대를 함께 파견한다. 가용가능한 병력이 더 있나?" 김국현은 머리를 굴렸다. 프리온 나이트가 많아야한다. 무려 고려의 왕과 스페셜 나이트를 상대하는 일이니까. 뭐가 어찌됐든 자신은 살아야하지 않는가. '7대대 병력도... 뺄 수 있을 거야. 전력에 구멍은 생기겠지만. 일단 살아야지.' 그래서 건의했다. "7대대 병력도 운용 가능합니다." 황제의 승인이 떨어졌다. "6대대와 7대대 파견을 승인한다." 아예 싸그리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소리다. 김국현은 조금 안심이 됐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고려의 왕과 스페셜 나이트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무려 3개 대대가 나섰다. 17년전 강대국이었던 도르긱을 평정할 때. 그 때 3개 대대가 나섰다. 그 당시 도르긱이 아마 지금의 고려와 비슷한 힘을 가졌을 거다. 그 정도의 힘이 투입 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고려왕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살아야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 제국과 고려간의 비공식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같은 시각. 김훈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놈들. 만만치 않다.' 접근하는 것 까지는 좋았다. 원거리 타입의 프리온 나이트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근접 전투에도 능했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그들은 빨랐고 또한 강력했다. '이대로면... 피해가 너무 커진다.' 다른 건 모르겠다. 이 곳에 딸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딸만큼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누가 들어도 정말 황당한 생각이지만 김훈상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반드시 널 지키겠다.' 그래서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죽어도 좋다.' 죽어도 된다. 둘째 왕자 김환석이 있고 셋째 왕자도 있다. 아직 어리지만 넷째 왕자도 있다. 고려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거다. '내가 죽으면 김상희가 살 수 있다.' 그러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누구나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김훈상은 그렇게 느꼈다. 자신이 죽는 게. 딸이 죽는 거보다 낫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게 맞는 거다.' 그래야 죽어서도,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로만 아버지가 아니라. 행동으로 아버지임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걸... 사용한다.' 김유신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폐, 폐하! 서, 설마!" ============================ 작품 후기 ============================ 사실 이 소설의 남주는 김훈상인듯 한 거 같기도 하고.... (작가가 헷갈리기 시작함) 0127 / 0192 ---------------------------------------------- 내가 죽으면 김상희가 살 수 있다. ***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스페셜 나이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기술들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워프'가 있다. 이는 제국 정보부 정도만 파악하고 있는 기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술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다만 그러한 기술들은 몸에 무리를 주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자주 쓰이는 기술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지금 김훈상이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마력을 한 순간에 방출시키는 '마력폭발'이라는 기술이다. 김유신이 외쳤다. "폐하! 안 됩니다!" 단순히 방출시키는 게 아니다. 사용자의 잠력을 극대화시키고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냥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강해진다. 김훈상 같은 천재가 사용하면 그 효용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겠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겨우 10분이다.' 그 10분동안은 거의 무적이라고 보면 될 수 있다. 다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워프가 단순히 몸에 무리를 주는 것이라면 마력폭발은 생명을 갉아먹는다. 10분이 지나고 나면 몸이 마력을 감당하지 못한다. 심한 경우, 몸이 터져 죽을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최후의 순간에나 사용할 법한 그런 기술이다. 김훈상이 말했다. "너희들의 마력폭발 사용을 금한다." 이들은 고려의 최고 전력이다. 이런 곳에서 죽게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것은 혼자로 족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스페셜 나이트. 그리고 더블 스페셜 나이트를 구할 수 있다면. 거기에 더해 사랑해마지않는 딸을 구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 아니겠는가. "그리고 너희는 당장 후퇴하여 김상희를 대피시킨다." 솔직한 말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프리온 나이트. 실제로 겪어보니 정말 대단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상대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김훈상쯤 되니까 프리온 나이트를 무려 7기나 부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리온 나이트는 역시 이상했다. 지치질 않았다.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 사실 그냥 도망쳐도 되기는 한다. 나중을 기약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전제조건이 붙는다. '어차피 누군가 한 명은 이목을 끌어야 한다.' 최소한 한 명 이상은 이 곳에 남아 프리온 나이트의 이목을 끌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프리온 나이트는 분명 김상희를 노릴 거다. 그도 아니면 스페셜 나이트가 각개격파 당하든지. 프리온 나이트를 묶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그것도 혼자서 20기가 넘는 프리온 나이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김상희만 살리면 된다.' 그리고 조금 못 미덥기는 하지만 한진수가 옆에 있다. 한진수라면 어떻게든 김상희를 지킬 수 있을 거다. 김유신이 외쳤다. "저는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김유신. 명령이다." "그 명령. 못 따릅니다." 김유신은 막무가내로 마력폭발을 사용했다. 더스 나이트들이 피식 웃었다. "여. 김유신. 멋있는 척 하지 마라. 그러다 골로 간다." "김유신. 네 녀석과 스페셜 나이트는 후일 고려를 이끌어가야 할 중요한 전력이다." 우리는 이제 지는 해고. 너희는 뜨는 해지. 더스 나이트들이 몸을 풀었다.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그들은 웃었다. "너희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후퇴해라. 저 빌어먹을 프리온 나이트 새끼들은 우리가 족칠 테니까." 김훈상은 황당했다. 원래 왕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아니 실제로 죽는 놈들이 아니던가. 갑자기 왜 이리 말을 안 듣나 싶다. 더스 나이트 중 한 명이 말했다. "국왕을 미끼로 도망친 나이트가 나이트 맞습니까? 우리는 이대로 못 갑니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머뭇거렸다. 더스 나이트가 검을 휘둘렀다. "빨리 안 꺼져! 방해 된다고!" 스페셜 나이트 하나가 황급히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 시퍼런 검의 잔상이 남았다. 피하지 않았으면 실제로 잘릴 뻔 했다. 김유신도 마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마력폭발을 사용한 우리 옆에 있으면 너희들은 방해만 된다. 상황을 직시해라." 김훈상이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을 명령 불복종 죄로 엄히 다스리겠다." 강동훈 더스 나이트가 대답했다. "제발 엄히 다스려주시죠." 엄히 다스리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강동훈은 안다. 마력폭발을 사용하는 건 정말로 최후의 순간이라는 거다. 다시 말해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죽는다. 솔직한 말로 이해는 잘 안 된다. 그냥 도망쳤으면 된다. 왜 굳이 왕이 직접 나서서 프리온 나이트와 격돌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해는 잘 안 됐지만 그래도 왕이다. 왕을 지키는 것이 나이트의 사명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명을 다 해야만 하는 때고.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 대대장. 대장 세카르트는 피식 웃었다. 지금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잠깐. 뭔가 엄청난 것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긴장하며 사태를 주시했는데, 딱히 별다른 건 없어 보였다. 분명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콰광!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마, 말도 안 돼!" 세카르트는 비명을 터뜨렸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프리온 나이트 1기의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내구성 자체가 그렇게 뛰어난 프리온 나이트는 아니다. 제 12대대의 프리온 나이트는 '대인전 전용' 이니만큼 그렇게 단단한 장갑을 착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래도 프리온 나이트다. 적어도 미사일 정도는 날아와야 머리를 터뜨릴 수 있을 거다. 세카르트는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맨 손으로 프리온 나이트를 부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일이 눈 앞에서 벌어졌다. 제국 최강의 전력인 프리온 나이트를 어떻게 저렇게 부숴버릴 수 있단 말인가. 프리온 나이트를 소환하고 조작하는 패널이 알림을 띄웠다. - 프로그램 재가동. - 상대의 능력치를 재파악 합니다. 프리온 나이트의 무서움이 이거다. 상대에 따라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상대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가장 적합한 행동을 취한다. '그래. 처음은 어이없이 당했다 하더라도... 데이터만 수집이 되면 상대가 가능해질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 파악 불가능. -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 데이터 부족. 경고알람이 계속 떴다. 세카르트는 다급해졌다. '미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 와중에 또다시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한 번이 아니었다. 프리온 나이트 3기가 부서졌다. 남은 프리온 나이트는 이제 20여기.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프리온 나이트는 마치 고장난 마리오네뜨처럼 손 발을 마구 잡이로 휘저으며 더스 나이트와 김훈상에게 대적했지만 소용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쾅! 쾅! 폭발음이 들려왔고 몇 번의 폭발음이 들린 이후에는 프리온 나이트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 제 7기. 손상. 행동 불능. - 제 3기. 손상. 행동 불능. - 제 15기. 손상. 행동 불능. 겨우 2분여만에, 프리온 나이트 17기가 파괴 됐다. 세카르트는 아연실색했다. '이럴 수가...' 이대로면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문책을 받을 것이다. 제국의 최강전력을 이렇게 허비해버리다니. 필히 중벌을 받게 될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출력을 최대치로 조정한다." - 출력 MAX. - 예비전력을 0으로 조절합니다. - 행동불능 상태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격돌이 이어졌다. 콰광!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연속해서 터져나왔다. *** 김상희는 눈을 꾹 감았다. 무서웠다. 뭐가 무서운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무서웠다. 그 때, 콰과광! 폭발음이 일었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소리가 나는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김상희는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남자들은 도망을 쳤어도 된다. 몇 명의 희생자는 생기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싸우는 것을 선택했다. 스페셜 나이트와 더블 스페셜 나이트는 김훈상의 명령으로, 늑대들은 한진수의 명령으로 말이다. '나 때문이야.' 자신 때문이었다. 저 프리온 나이트는 분명 자신을 노리고 있을 터. 그렇기 때문에 김훈상은 무리해서 저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했다. 그 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공주님은 우리와 함께 전선을 이탈합니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스페셜 나이트 중 한 명이었다. "아, 아버님은? 아버님은 어떻게 됐죠?" 스페셜 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지키려고 마력폭발을 써서, 10분 뒤면 죽을 겁니다. 그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한진수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김상희와 다르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대략적인 상황은 느껴진다. 지금, 고려의 국왕 김훈상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해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갈가리 찢어버릴 만큼 강대한 해일 말이다. '저렇게 거대한 힘을 사용하면... 육체가 버티지 못한다.' 아마도 폐하는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을 바쳐 사랑하는 딸을 도망치게 하고 싶었던 거겠지. 한진수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려면 진작에 쳤다. 프리온 나이트가 움직일 때엔, 단순히 그들만 움직이지 않는다. 어시스턴트들이 같이 움직인다. 섣부르게 도망치려고 했다가는 포위망에 갇혀 각개격파 당한다. 혼자서 따로따로 도망친다면 모를까. 마력 사용이 불가한, 그래서 은신을 할 수 없는 김상희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부딪쳐서 깨뜨리면 모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의 지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상황이 더욱 참담해졌다. 느껴졌다. 저 앞의 프리온 나이트들보다 훨씬 더 강한 프리온 나이트들이. '더 강한 프리온 나이트들이 오고 있다.' 그리고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씨파아아알 개 좆 같은 새끼들아아아아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누군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누군가는 시뻘개진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이름은 김환성. 김상희가 부르는 둘째 망나니였다. "내 똥개를 어떤 개새끼가 건드렸어! 다 죽여 버린다! 이 씨팔 새끼들!!!" 그리고 그 옆에 누군가가 또 떨어져 내렸다. 김환성과는 다르게, 낙하산을 착용하고 가볍게 착지했다. 하지만 스페셜 나이트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평온해 보이는(?) 김환석 왕자는 대단히 분노하고 있는 상태였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건 레이저 미사일 유도기?' 이런 국지전 규모의, 그것도 비공식적 전쟁에서 쓰일 물건은 절대로 아니다. 대규모 화력전에서나 쓰이는, 상대 국가를 초토화 시키려고 할 때에만 쓰이는 무기. 상대에 대한 대대적 선전포고를 할 때에나 쓰이는 무기이며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그런 무기를 김환석 왕자가 가지고 왔다. 김환석은 눈을 힐끗 돌렸다. 김상희가 보였다. 그의 눈에 비친 김상희는 지금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불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김환성과는 분노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지만 그 분노의 크기가 김환성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는 않았다. '개 같은 새끼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 김환성과 김환석은 아직 상대가 제국. 그리고 프리온 나이트라는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다. 방금 비행기에서 떨어져내린 상태니까. 그들의 눈에 보인 건 겁 먹어 보이는, 슬퍼 보이는 김상희였다. 그게 두 형제를 미치게 만들었다. 김환석의 등에는 가방이 하나 매어져 있었다. 김환석이 뭔가를 꺼냈다. 네모난 형태의 작은 물건이었다. 빨간색 버튼이 있었다. 그 버튼을 눌렀다. 김환석이 말했다. "이제 무전 연락이 가능할 거다. 본국에 지원요청 해." 김훈상과 나이트들이 바보라서 본국에 연락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고려에는 스페셜 나이트. 더블 스페셜 나이트 외에도 수많은 나이트들이 있다. 그 나이트들은, 비록 스페셜 나이트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하나하나가 강맹한 전력이다. 그들과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지원 요청이 불가능했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 어시스턴트들이 전파를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걸 김환석이 해제했다. 김환석의 진가가 발휘된 셈이다. 김환성이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야! 우리 애들 다 불러!"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 똥개는 나만 괴롭힐 수 있다고!" 그걸 주장하기 위해 제국과 전쟁을 선포했다. "죽여 버린다!!!" 물론, 상대가 제국이라는 건 몰랐지만. 하여튼 결과가 그랬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내 똥개. 내 똥개는 나만 괴롭힐 수 있는 건데, 왜 자꾸 못 괴롭혀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요즘 물어왓도 못 시켰는데. 물어왓 시켜야 되는데. 짜증이 무럭무럭 치밀어 올랐다. 뭐가 됐든 다 부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김상희의 얼굴을 다시 보니, 한 번 울었던 것 같다. 내 똥개가 울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또다시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그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나무들이 떨리고 잎사귀들이 폭풍을 맞이한 것처럼 마구 떨어져 내렸다. 김환성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씨발 새끼들아!!!" 처음에는 국지 규모였던, 비공식적 작은 전쟁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야! 우리 애들 다 불러!" 본격 일진 놀이...? 0128 / 0192 ---------------------------------------------- 성녀의 능력 *** 김환석. 김환성 형제는 대단히 분노했다. 분노가 표출되는 방식은 달랐지만 둘 모두 분노했다는 사실은 틀림 없었다. 이 둘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 똥개. 아니. 내 동생을 어떤 새끼가 괴롭히는 거냐! 정도가 되겠다. 이미 본국에는 지원 요청이 들어갔다. 그러나 김환성은 그들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김환성이 닦달했다. "형. 쓸어 버리자." 김환석이 가방에서 또 뭔가를 꺼내들었다. 다시 한 번 김상희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아니, 내 동생. 저렇게 슬프게 만든 놈들에겐 미사일 세례가 답이다. 김환석이 꺼내든 것은 크기 약 20cm. 정사각형 형태의 물체였다. 손바닥을 댈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었다. "마력을 최대한도까지 불어 넣어." 스페셜 나이트들은 의아했다. 저게 도대체 뭔가. 저게 도대체 뭔데 마력을 최대한도까지 불어넣으라고 하는 건가. 애초에 김환성 왕자는 천재다. 그것도 마력 양에 있어서의 천재다. 절대량만 놓고보면 한진수보다도 더 뛰어날 거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 양을 감당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고? 말도 안 된다. 김환석이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스페셜 나이트냐?" "예. 그렇습니다." "너희는 김환성 왕자의 뒤에 일렬로 서서 마력을 보충한다." "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김환석은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시간이 없어. 빨리."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강력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건 느껴졌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일단 김환석의 말을 들었다. 김환성이 손을 댄 그 물체를 중심으로 푸르스름한 막이 생겼다. 김환석이 다시 말했다. "내 주위로 밀집해라." 그와 동시에 레이저 미사일 유도기를 꺼내들고 한 곳을 가리켰다. 이상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 타겟팅 아리아를 설정합니다. - 설정 완료. - 토마호크 미사일. 12기 발사준비 완료. 스페셜 나이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토마호크 미사일이라니. 저건 국가 대 국가의 대규모 화력전에서나 쓰이는 물건이 아닌가. 갑자기 왕자가 왜 저러나 싶다. 미친 거 아닌가. "와, 왕자님!" 문제는 단순히 저 무기를 사용한다는 게 아니다. 저 무기는 미사일이다. 그것도 토마호크는 폭발력이 굉장히 강한 미사일. 그리고 그 폭발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다. 아군이라도 일단 맞으면 죽는다. 이건 자살행위밖에 안 된다. 왕자가 미쳐서 자살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는 소리다. 김환석은 여전히 전방을 주시했다. "안심해라. 우리는 안전하니." 흔들림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리 안전한 그물망이 있다고 해도 눈 앞에 공이 날아오면 무서운 게 사람이다.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걸 알아도, 공포영화를 보면 무서운 게 사람이다. 하물며 지금은 눈 앞에 미사일을 터뜨리겠다고하는데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애초에 안전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미사일을 코앞에 터뜨리다니.' 스페셜 나이트의 생각과는 별개로 카운트는 시작됐다. - 발사 10초 전. - 발사 9초 전. - 발사 8초 전. 김상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김상희도 분명 들었다.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토마 뭐시기 미사일이란다. 그게 도대체 뭐지? 한진수가 김상희를 꽉 껴안았다. 김상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게." 한진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김상희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신은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어서 김상희가 산다면, 정말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김훈상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 발사 3초 전. - 발사 2초 전. 그리고 저만치 멀리, 나무 사이사이로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무언가였다. 크기는 약 7~8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뭐야?" 스페셜 나이트 중 한 명이 대답했다. "프리온 나이트입니다." "프리온 나이트?" 스페셜 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왕자들이 이렇게 무대뽀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상대가 프리온 나이트. 그리고 제국인 것을 몰랐기 때문일 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대인전과 화력전은 당연히 다르다. 고려가 먼저 이런 무기를 사용한다면, 제국도 가능하다. 국지전이 국가 단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건 시간문제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당연히, 김환석과 김환성이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려 버렸다. 김환성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저 새끼들이 내 똥개 괴롭힌 새끼들이라는 거지?" 딴 거 필요 없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저 놈들이 내 똥개 괴롭혔다. 그것만 떠올랐다. 동생바보의 정도가 아주 많이 깊어졌다. - 발사 1초전. - 토마호크 미사일 12기. 발사합니다. *** 프리온 나이트 제 7대대를 이끄는 대대장. 대장 프렌토는 이상징후를 감지했다. 프리온 나이트를 컨트롤하는 패널이 위험신호를 알려왔다. - 남서 방향. 1348km 상공에서 위험 물체가 감지 됩니다. - 남서 방향. 1344km 상공에서 위험 물체가 감지 됩니다. 패널이 그 물체를 탐지했다. 프렌토는 영상을 확인했다. '미사일...인가?' 아무래도 고려 놈들이 미친 것 같았다. 여기서 함께 동반자살하자는 건가 싶었다. '젠장.' 미사일. 까짓 거. 막으면 된다. 저들은 자살할 각오로 썼겠지만 이 쪽은 아니다. '우리는 프리온 나이트 제 7대대다.' 물론 출혈이 없는 건 아니다. 출력을 다 까먹게 생겼군. 하고 짧게 중얼거린 그는 패널을 조작했다. "프리온 나이트 쾌속 전진." 일단 더욱더 빠르게 저들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접근하면, 미사일을 함께 맞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있었다. 저쪽이 자살테러를 감행한다면 김상희 공주가 죽을 수도 있다. 프리온 나이트 어시스턴트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김상희 만큼은 살려내서 내 앞에 데려와라. 알림이 이어졌다. - 남서 방향. 720km 상공에서 위험 물체가 감지 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미사일이 접근했다. 이제 김상희 일행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가 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폭발 범위 내에 들어가 있을 거다. 진격 속도를 조금 늦추기로 했다. "배리어를 최대한으로 활성화 시킨다. 출력을 아끼지 마." 저들에게도 배리어 비스끄리무리한 것이 보이기는 했지만 저딴 걸로 미사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적어도 프리온 나이트 정도 되는 출력이 있어야 할텐데, 인간의 힘으로 그 정도의 힘을 낼 수는 없을 거다. 그가 잘 알았다. 그는 프리온 나이트를 지휘하는 입장이고 그 힘을 몸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얼마 뒤. 패널이 알림을 계속해서 띄웠다. - 토마호크 미사일 추정 물체. 접근 중. - 배리어를 MAX로 설정합니다. - 배리어 MAX 설정으로 인해 움직임이 제한 됩니다. - 방어 모드로 전환합니다. 한진수는 김상희를 끌어 안았다. 김환석, 김환성 형제가 이 곳에서 자살을 하려는 건 절대로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저 둘을 믿기에는 미사일이라는 무기의 존재가 너무 컸다. 김상희를 꽉 껴안았다. 등에는 피가 철철 흘러 내리지만 그 고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피 흐르는 등을 프리온 나이트 쪽으로 향했다. 폭발의 파편이라도, 김상희에게는 닿지 않게 하겠다는 듯. 스페셜 나이트들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도 사람이다. 미사일 맞으면 당연히 죽는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 피하기는 글렀다. 두 왕자를 믿어보는 수밖에. 쿠과과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폭발음과 더불어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깊은 구덩이가 패이고 흙먼지가 피어 올랐으며 화염이 숲을 집어 삼켰다. 땅 전체가 우는 것 같았다. 프리온 나이트 제 7대대를 대장 프렌토는 귀를 막았다. 프리온 나이트 안에서 보호를 받고는 있지만, 소리가 너무 컸다.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 제 3기. 제 17기. 제 27기. 완파. 행동 불능. - 제 10기. 12기. 15기. 반파. 행동 제약. - 제 4기. 18기. 22기. 손상. 행동 일부 제약. - 제 2기. 26기. 29기. 손상. 행동 제약 없음. - 그 외 다수. 출력 수치 매우 낮음. 폭발 한 번에 무려 3기의 프리온 나이트가 파괴 됐다. 고려 무기의 성능이 상상이상이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저 쪽은?' 물론 직격타는 이 쪽이 맞았지만 이 쪽은 프리온 나이트고 저 쪽은 맨 몸이다. 성할 리 없을 거다. 그런데. '어떻게...!' 멀쩡해 보였다. 푸르스름한 막 덕택에 폭발의 여파가 그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형. 2차 발사 가능해?" "그 전에 거리를 완전히 좁힐 거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저 놈들의 힘도 많이 약화 됐다. 김환석은 가방에서 또 다른 무기들을 꺼내들었다. 중화기들이다. 휴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중에서는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무기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사용자의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물건들이다. 한진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 많은 무기들이 들어가는 가방이라니. 그리고... 미사일의 여파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배리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프리온 나이트가 진격해왔다. 그리고 중화기로 무장한 스페셜 나이트가 그들과 맞서 싸웠다. 한진수의 품에 안긴 김상희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일단은 무사하다는 거다. 한진수는 생각했다.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어.' 더스 나이트와 김훈상이 엄청나게 잘 싸우고 있는 것 같다. 더스 나이트와 김훈상의 강렬한 기세는 느껴지는데 프리온 나이트의 숫자는 계속 줄고 있다. 갑자기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세세한 것 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이들이 이 프리온 나이트들을 상대하면 된다. 그것도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다. 김환석이 발명한 최신 무기들로 말이다. '이길 수... 있다!' 그 때까지만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스페셜 나이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미사일 폭격으로 인해 프리온 나이트의 전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느꼈으니까. 그 때, 7대대 대대장 프렌토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배님. 이제 오셨습니까?" "어. 다른 곳에 있다가 급히 발령 받아 파견 됐다." 7대대에 이어 6대대가 도착했다. 과거 도르긱을 멸망 시켰을 때에 3개 대대가 동원 됐었다. 그 중 한 개 대대가 바로 이 6대대다. 총 18개의 프리온 나이트 대대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함을 자랑하는 부대. 프렌토는 이제 한 숨 돌렸다. 6대대까지 도착했다. 저 놈들은 이제 정말로 끝이다. *** 한진수는 눈 앞이 아득해졌다. 제국에서 정말로 마음 먹고 부대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지원을 온 저 부대는 심상치가 않다. 아무리 폭발의 여파 때문에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졌다고는 하지만 저 부대가 접근하는 것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마력이 잘 컨트롤되고 있다는 소리다.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말이다. '방법은... 있다.' 한진수는 방법을 떠올렸다. 품 안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김상희 특유의 향기가 한진수의 코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나는 죽겠지.' 김훈상만 마력폭발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훈상과는 약간 다른 방식이지만 한진수 역시 그와 비슷한 기술을 개발해 놓았다. '내가 죽으면. 그 때 상희는 누가 지키지?' 자신이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김상희를 지키기 위해 죽는다는 건 행복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거니까. 그건 하나도 안 무섭고, 하나도 안 아깝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제국으로부터 상희를 지켜야 해.' 프리온 나이트 제 6대대와 7대대가 진격해왔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잠시간 멍하니 앞을 쳐다봤다. 빠져나갈 방도가 안 보인다. 본국에서 지원이 당도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김상희에게 작게 말했다. "상희야." "...응?" 김상희는 순간 불안해졌다. 한진수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1분 1초가 귀하다는 것을 김상희도 안다. 그 귀한 시간을 빼앗을 수 없어서, 한진수의 말을 막지 못했다. "잘 들어." 한진수가 김상희를 더 꽉 껴안았다. 어쩌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가슴에 안는 것은.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그 생각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행복했다. 단순히 김상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새어 나오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김상희의 미소를 떠올리면 힘이 솟았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있어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남들은 경험해보지도 못 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 특별한 경험에는 김상희가 녹아 있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김상희 때문에 김상희를 알았기 때문에 김상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김상희를 지금 안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행복했다.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수가 마치 유언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면 안 돼." "...무슨 일이 일어 나는데?" "그건 보면 알아." 내가 죽을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마. 그리고... 딱 하나는 기억해줘." "......." 한진수가 김상희를 더욱 꽉 껴안았다. "나한테는 너 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너 밖에 없을 거고,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해." "......." 김상희는 한진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유언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유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싫었다. 지금은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싫어!" 한진수가 없는 세상.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다. 프리온 나이트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한진수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김상희가 철푸덕 주저 앉았다. ============================ 작품 후기 ============================ 전직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0129 / 0192 ---------------------------------------------- 성녀의 능력 *** 한진수는 죽음을 각오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 말했다. "사랑해." 한 번만 말한다고 했는데, 결국 또 말해 버렸다.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해."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정말 사랑해."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없어도 너는 무조건 행복해야 돼.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한 거니까. 네가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으니까. 나는 너를 이제 못 보게 되겠지만. 그래서 아주 많이 미안하지만, 너는 살았으면 좋겠어. 네 목숨이 내 목숨보다 귀하니까. 네 생명이 내 생명보다 값지니까. 적어도 나한테 있어선 그러니까. 김상희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김상희의 몸을 마력으로 구속했다. "미안해." 그것마저도 미안했다. 김상희에게 힘을 쓴다는 거. 그것 자체만으로도 말이다. 하지만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김상희가 자신에게 매달릴 것 같았으니까. 그건 그것 나름대로 행복한 일이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마력을 폭발시킨다.' 마력을 폭발시켰다. 김훈상이나 스페셜 나이트들처럼 이 기술을 '마력 폭발'이라고 명명한 건 아니다. 이 기술의 이름. 아직 정한 적도 없다. 언젠가 쓸 일이 생길 수도 있다하여 이론만 정립해놨을 뿐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진수의 발을 중심으로하여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페셜나이트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마력폭발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똑같은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슷했다. '아니. 마력폭발이 아니다.' 비슷했는데 아니었다. 아무리 마력을 폭발시킨다고 해도, 저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몸 밖으로 피어 오르지는 않는다. 저건 마력 폭발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신체에 무리가 엄청나게 갈 텐데.' 스페셜 나이트들은 깨달았다. 한진수는 지금 이 곳을 자신의 무덤으로 선택했다. 사랑하는 여자.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이 곳을 자신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다. 한진수는 프리온 나이트들을 쳐다봤다. 마지막을 불태우는 힘. 심장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그가 꺼낼 수 있는 또 다른 패인 프리온 나이트를 꺼냈다. 현재 그가 소유하고 있는 프리온 나이트는 5기. 저 쪽은 무려 40기가 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5기가 있음으로 인하여 이 쪽의 전력이 많이 향상 되었다. 힐끗. 김상희를 한 번 쳐다봤다. 김상희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그게 너무 고마웠다. 김상희가 없었다면 이렇게 행복한 기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사람이 너라서.' 그래서 그게 정말 고마웠다. '나를 사랑해줘서.' 그래서 행복했다. '내가 너 진짜 많이 사랑해.' 마력을 폭발시킨 한진수가 프리온 나이트들과 격돌했다. *** 김훈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위는 공터가 되어버린 지 오래. 왕이 된 이후. 특히 전쟁기가 지난 이후 성군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는 부하들에게 딱히 욕을 했던 적이 없다. 최근에 김상희 때문에 흥분해서 욕을 좀 많이 하긴 했는데, 하여튼 그 전까지는 욕을 잘 안 했다. 왕의 입은 무거워야 했으니까. 김훈상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자리에 그냥 누워 버렸다. "멍청한 새끼들. 너희들은 진정한 또라이들이다." 김훈상 뿐만 아니라 더스 나이트들 17명도 쓰러졌다.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웃었다. "제 생각에는 폐하가 제일 또라이인 것 같은데요." "그런가." 전쟁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부하들이다. 형제처럼 느껴지는 이들. 오늘 만큼은 왕 김훈상이 아니라, 이들을 이끌었던 대장 김훈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때가 더 자유롭고, 그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기는 했다. 왕의 신분이 아닌, 훨씬 덜 고독한 위치로 이들과 함께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왕자 하나 구하겠다고 이렇게 자기 목숨을 버립니까? 덧붙여 부하들까지 다 죽게 생겼네요. 이제 한 5분은 살려나?" 그나마 다행인 건 프리온 나이트를 전멸시켰다는 것. 대인전 특화용 프리온 나이트 제 12대대는 김훈상 휘하 더스 나이트들에 의하여 궤멸됐다. 김훈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 "네. 김상희 왕자요." 김훈상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왕자라니. 딸이다."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 "에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 하지 마십쇼. 어차피 같이 죽을 마당에, 뭘 우리까지 속입니까?" "......." 김훈상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김상희를 왕자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김상희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런 딸이다. 스스로 딸병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상희가 아들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된다! "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딸이다." "......." 더스 나이트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허허- 웃고 말았다. "우리 폐하께서 진짜 미친 게 맞네요." "그렇지. 나는 확실히 미친놈이다." 또 다른 더스 나이트 한 명이 말했다. "미친놈을 주군으로 섬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뭘 구태여 거짓을 말하겠는가. "미친놈들의 세상에서, 미친놈들의 왕이 되어 주신 미친 왕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일어나서 무릎 꿇지 못하는 거 용서 좀 해주시고." 김훈상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새겨졌다. 지금 자신은 죽지만 자신과 함께 할 부하들이 있어 그리 외로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딸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던가. 아마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라도 이런 행복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거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안 좋았다. '놈들이 더 몰려오고 있다.' 김훈상이 억지로 일어섰다. 모두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하고 확신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상은 일어섰다. "폐하. 몸이 움직이긴 합니까?" "딸에게 미친놈은 가능한 것 같군." 몸은 거의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든 일어섰다. 그는 가야할 곳이 있었다. "나는 내 딸을 지켜야만 한다." 더스 나이트들은 생각했다.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 바로 폐하 당신입니다. 김훈상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게 내가 아버지인 이유다." *** 스페셜 나이트들은 기겁했다. "미, 미친!" 한진수의 마력폭발. 그 기술은 엄청났다. '폐, 폐하보다도 강하다!' 사실 한진수나 김훈상 정도 되는 실력자 쯤 되면, 그 실력의 차이는 종이 한장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원래대로라면 그렇다. 그런데 스페셜 나이트들이 느끼기에는 아니었다. 지금의 한진수는 김훈상을 뛰어 넘었다. 세기의 대천재가 아니라, 전 세기를 통틀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보는 게 맞을 정도였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12기의 미사일로도 3기밖에 파괴하지 못했던 프리온 나이트들을, 한진수는 맨손으로 부숴버렸다. 프리온 나이트 제 7대대 대대장 프렌토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수 있는가. 인간이 맨 몸으로 프리온 나이트를 부술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고려 국왕 김훈상이라고 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려 국왕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어린 한진수 때문에 프리온 나이트가 파괴 되다니. 그것도 무려 7기가. 프리온 나이트 제 6대대 대대장 맥민이 말했다. "정신 차려라. 이 쪽이 월등히 유리하다. 그리고 저 놈. 조급해하고 있어. 저 힘을 끌어다 쓰는 것에 시간제한이 있을 확률이 높다. 방어 진형을 유지하면서 피해를 최소화 시켜. 시간을 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김상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모든 힘을 조절하고 있다.' 다시 말해, 김상희가 약점이라는 소리다. - 원거리 포격 모드. 프렌토가 깜짝 놀랐다. "선배님! 설마 김상희를 노리시는 겁니까? 안 됩니다. 반드시 살려서 오라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그렇지?" 그의 말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야만 한다'라는 뜻이었다. - 제 3기. 제 4기. 제 5기. 원거리 포격 준비 완료. 방어진형을 유지하면서, 김상희를 향해 오른손을 겨누었다. 오른손등 위에 자리잡은 대구경 레이저포가 김상희를 노렸다. 한진수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안 돼!" 프리온 나이트를 부수던 한진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프리온 나이트 3기가 발사한 황금빛 빛기둥이 주위를 집어삼킬 듯, 김상희를 향해 뻗어 나갔다. 프리온 나이트와 접전을 벌이던 김환성도 비명을 질렀다. "김상희!!!" 맥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다.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안 되지만, 한진수는 저 여자를 끔찍하게 보호하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상희는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한진수가 제어하던,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마력이 풀려 버렸다. 김상희가 한진수를 껴안았다. 김상희는 봤다. 세 줄기의 빛다발이 한진수의 몸을 관통하는 걸. 그리고 관통당한 자리에는, 아마도 심장이 있었을 거라는 걸. 한진수의 몸에는 지금 큼지막한 구멍이 세 개나 뚫려 있었으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김상희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이러면 안 됐다. 이제서야 서로의 마음을 조금 확인했는데, 이제서야 좀 알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죽어버리면 절대로 안 됐다. 김상희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쳐버린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질렀다. 목 놓아 울었다. 김상희에게 반쯤 안긴 한진수가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아까 한 번만 말한다고 했는데, 결국 또 말했다. "...사랑...해..." 그 말을 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김상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마구 말했다. "나 두고 죽으면 절대로 용서안 할거야. 평생 용서 안 할 거야. 너 나 두고 어디 가면 나 평생 울거야. 매일매일 힘들게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죽지만 마. 이렇게 나 때문에 죽어버리면 내가 어떻게 사냐고! "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그러니까 살아나란 말이야! 한진수의 고개가 꺾였다. 살아나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를 입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진수가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한진수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그들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도 마력폭발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곳에서 모두 전멸하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김상희가 오열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다름 아닌 김상희였다. 김상희의 몸이 은은한 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진수가 소유하고 있던 프리온 나이트의 몸체가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어서와. 성녀는 처음이지? 0130 / 0192 ---------------------------------------------- 김상희 성녀. 만세! *** 김상희의 몸이 백색으로 빛났다. 김상희 근처의 스페셜 나이트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도대체...어떻게 된... 일이냐?' 몸의 흉터가 사라져갔다. 급속도로 아물었다. 피가 새어나오던 상처들에서 피가 멎고 새 살이 돋았다. 천고의 영약 퓨리어스를 먹어도 이 정도 효과는 없을 터. 김환성도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거?" 몸에 힘이 솟았다. 단순히 힘이 솟는 게 아니라 마력이 폭발할 것처럼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력의 순도가 높아지고 정갈해졌다. "나 지금 엄청 세진 느낌인데? 원래도 셌지만." 김환성은 뭔가 몸에 변화가 있음을 감지했다. 본격적으로 싸운지 얼마 되지 않아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체력도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최상의 컨디션이다. 김상희의 몸이 하늘로 약간 떠올랐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하다. 여자는 마력이 없다. 마력이 없는 여자가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뜰 수는 없는 법이다. 김상희의 몸이 더욱 더 밝은 빛에 물들었다. 스페셜 나이트들은 생각했다. '아름...답다.' 여자를 보며 아름답다고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찮은 미물이나 다름없는 계집따위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다니.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이상했다. 김상희에게 뭔가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김상희와 멀리 떨어져 있던, 쓰러진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던 더스 나이트들도 이상함을 눈치 챘다. "형님. 몸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고갈된 마력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다. 몸에 활력이 일기 시작했다. 더스 나이트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도대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력폭발을 사용한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래도 일생에, 목숨을 다해 지킬 주군을 모셨고 제국의 최강병력이라는 프리온 나이트를 맨 몸으로 꺾었다. 남자 인생 이 정도면, 성공했던 거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었는데, "몸이... 움직입니다." 더스 나이트들이 몸을 일으켰다. '이건 기적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기적. 그 것 말고는 다른 말로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딸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체가 되어버린 것과 다름 없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김상희를 향해 힘겹게 걸어가던 김훈상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 '몸이... 편안하다.' 혹시 내가 죽은 것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목숨을 다해, 이제야 편해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오로지 '사랑하는 딸을 지키겠다'라는 일념이 그의 목숨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상황이니까. '나는 비록 죽었더라도.' 내가 비록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나는 내 딸을 지키겠다.'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귀신이 되어버린 건지. 몸이 되살아 난건지. 그런 걸 판단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냥 달렸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김상희가 하늘에 떠올랐다.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백색의 빛을 은은하게 흘리고 있었다. 김훈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딸이 살아 있었다. 그랬다. 그거면 됐다. 자신이 죽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 있었구나.' 그러면 됐다. 그리고 김훈상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저 놈은 한진수인가?' 한진수가 틀림 없었다. 몸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었고 아마도 심장이라 짐작되는 부근도 뻥 뚫려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주위는 이미 핏물이 고여 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재생이... 되고 있다.' 저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분명히 심장이 뚫렸다. 저건 거의 즉사라고 보면 됐다. 다시 말해 저건 시체라고 봐도 됐을 정도였다. 딱 몇 초. 몇 초만 더 있었으면 시체가 됐을 거다. '이럴 수가...' 하늘에 둥둥 뜬 딸을 쳐다봤다. '성녀...라는 건가.' '성녀'라는 게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랬는데, 김상희를 보니 성녀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졌구나.' 사실상 김훈상에게 있어서는, 김상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자신이 딸을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왕이 계집을 사랑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기적이었다. 한진수가 눈을 떴다. 이상했다. '여긴... 어디지?' 자신은 죽었어야 했다. 죽는 게 맞았다. 후회는 없었다. 김상희를 지키다 죽은 거니까. 그런데. '죽은 것 같지가... 않다.'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아주 잘 움직였다. 통증도 없었다. 최상의 컨디션이다.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눈이 부셨다. 하늘을 쳐다봤다. 김상희가 빛나고 있었다. 한진수는 멍하니 김상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주위를 둘러봤다. 고려 국왕 김훈상이 이 자리에 있었다. 김훈상 역시 놀란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진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래. 거기까진 좋다. 김훈상이 딸을 사랑하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니까. 상관 없다. 그런데. '저 것들이 남의 여자를 왜 저렇게 쳐다봐?'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느새 도착한 더스 나이트도, 원래부터 이 곳에 있던 스페셜 나이트들도. 입을 쩍 벌리고 김상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아름답다...라고 중얼 거리면서 말이다. '내 여자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전쟁시국이다. 전쟁시국에 사사로운 질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진수는 또 찔끔 놀랐다. '설마... 내가 질투를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았다. 질투. 질투라니. 내가 질투를 하고 있다니. 한진수는 황당해졌다. 자신이 이토록 소인배인 줄 처음 알았다. 다른 남자들이 아름답다면서 김상희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는 그 사실만으로도 싫었다.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이토록 소심한 남자일 줄이야. 부끄럽고 창피하긴 창피한 건데,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늑대들 마저도 김상희를 넋놓고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한진수는 짜증이 무럭무럭 치밀어 올랐다. "눈 깔아!" 저 여자는 내 거라고. 너희들 눈 전부 깔아! 자신이 유치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인지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으나 그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내 여자라고! 쳐다보지 말라고!" 하지만 한진수의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 되지 않은 듯 했다. 모두가 김상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아이씨..." 왜 너는 그렇게 예뻐서 다른 남자들이 다 쳐다보게 만드냐. 내 눈에만 좀 예쁠 수 없냐? 라고 생각했다가, '어차피 불가능하겠지.' 누구에게나 예쁠 거다. 그게 맞다. 김상희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예뻤으니까. 적어도 한진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니까. 누군가 중얼 거렸다. "기적이... 일어났다." 김상희가 공주가 기적을 일으켰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 죽음을 삶으로 되돌려 놨다. 늑대들 중 누군가가 깨달았다. 한진수와 함께 자료를 조사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저 여자가... 성녀." 그리고 한진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최종 형태로 변화합니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한진수의 프리온 나이트들의 몸이 번쩍 빛났다. 태양이 눈 앞에서 터진 것처럼 밝았다. 모두가 눈을 감았다. '뭐지?' 한진수가 눈을 떴다. - 프리온 나이트. 최종 형태 변환 완료. 그리고 발견했다. 변화된 프리온 나이트 5기를 말이다. 한진수가 가지고 있던 프리온 나이트는 중형급이다. 크기는 약 5미터 가량. 그런데 그 크기가 완전히 작아졌다. 보통 사람 정도로 작아졌다. 큰 것이 2미터 정도. 작은 것은 1미터 60cm정도 되어 보였다. '사람과... 똑같다.' 여자인 것 같기도했고 남자인 것 같기도 했다. 여자처럼 꾸며 놓으면 여자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고, 남자처럼 꾸며 놓으면 남자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사람과 다른 점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상했다. - 자동 타겟팅 시스템이 활성화 됩니다. - 적 타겟팅 설정 완료. 공격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한진수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 더스 나이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미친..." 저 정도면, 마력폭발을 일으킨 김훈상과 맞먹는 수준의 엄청난 강함이 아닌가. 프리온 나이트들이 저렇게 강했다고? 그게 심지어 5기나 된다. 더스 나이트들은, 무력으로만 따지면 인간들의 최정점에 올라선 자들이다. 그들이 보기에도 엄청나게 강했다. 김훈상마저도 감탄했다. '저게... 진짜 프리온 나이트의 능력인가.' 진짜 프리온 나이트의 능력인지, 그도 아니면. '내 딸의 능력인가.' 아무래도 딸의 능력인 것 같기도 했다. 김상희의 몸이 백색으로 빛나고 있고 그와 동시에 프리온 나이트들이 강해졌으니까. 확실해진 것도 아닌데 괜히 흡족해졌다. '역시 내 딸이다!' 씨익 웃었다. "더스 나이트. 스페셜 나이트.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거냐? 내 나이트에 약해빠진 놈은 필요 없다." 나이트들이 와아! 함성을 내질렀다. 죽음을 각오했었는데 살아났다.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검을 고쳐 쥐었다. 김훈상이 딸부심(?)을 부렸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괜히 딸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성녀가 우리와 함께함이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들의 왕인 나도 너희와 함께하고 있다." 나이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와아! 함성을 외쳤다. 김훈상이 가장 먼저 내달렸다. "보여 봐라. 고려의 힘을." 한진수도 명령을 내렸다. "늑대들도 지지 않는다." 늑대들도 사기가 높아졌다. 한진수만 해도 엄청난 전력인데, 그 한진수가 저 무지막지한 프리온 나이트들을 조종하고 있다. 이제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거기에 더해, "고려 나이트 제 4대대. 대대장 신충길. 고려 국왕께 인사 올립니다." 고려 본국에서 나이트들이 지원을 오기 시작했다. 함성소리가 커졌다. "고려 나이트 제 6대대. 대대장 파커슨. 고려 국왕께 인사 올립니다." 고려의 나이트 대대들이 고려의 왕자들과 왕을 구하기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고려 나이트 제 8대대 고경혁. 고려 국왕께 인사 올립니다." 만사를 제쳤다. 수행 중이던 임무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이 곳에 국왕이 있다. 국왕이 있어야 나라도 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나이트들이 숲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히며 달려왔다. 프리온 나이트 어시스턴트들을 찾아내 습격하고 프리온 나이트들과 격돌을 벌였다. 그 날.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 전력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가 완전히 궤멸됐다. 제국으로서도 엄청난 손해이자 손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1개 대대면 어지간한 나라는 찜쪄 먹고도 남는다. 그런데 3개 대대가 날아갔다. 특히 제 6대대마저도 전멸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제 6대대는 프리온 나이트 대대들 중에서도 손 꼽히는 강함을 자랑하는 부대였으니까. 고려는 대승을 거두었다. 사망자는 총 12명. 전투의 규모에 비해서는 정말 적은 수치다. 그것도 김상희가 성녀로 각성한 이후에는 단 한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김상희는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하늘에서 백색의 빛을 뿌렸고, 고려의 나이트와 늑대들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아니. 상처를 입어도 금방 회복이 됐다. 지치지도 않았다. 제국이 자랑하는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를 쓸어 버렸다. "와아아아아!"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도 안다. 그들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누군가 외치기 시작했다. "김상희 성녀. 만세!" 오글거리는 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애초에 계집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외치는 것이었다. 계집이든 뭐든. 상관 없었다. 지금 그들을 살려준 건 김상희였다. 김상희가 없었으면 이번 전투는 패배였다. 몇몇이 따라하기 시작했다. "김상희 성녀. 만세!" 그 몇몇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의 최고 공로자. 김상희를 향한 경외와 존경. 그리고 감사함을 담아 만세를 외쳤다. 김상희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김상희 성녀. 만세!" 한진수는 또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좋기는 좋은데 이상하게 불쾌했다. 외치고 싶었다. '김상희는 내새끼라고! 쳐다 보지 말라고! 내 거라고! 나만 볼 거라고!'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김상희의 몸에서 밝은 빛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진수가 달렸다. "김상희!" 김상희를 받아냈다. 이상했다. 한진수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청력을 극대화 했다. 정말 이상했다. 이건 단순히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김상희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 돼!' 불길했다. ============================ 작품 후기 ============================ '김상희는 내새끼라고! 쳐다 보지 말라고! 내 거라고! 나만 볼 거라고!' 너 원래 이렇게 유치했냐...? 세계의 대천재라매...? 그리고 왜 네새끼냐? 훈상이새끼지... 0131 / 0192 ---------------------------------------------- 한진수가 널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널 더 사랑해. ***130 한진수는 김상희의 심장박동을 느끼려 애썼다. 마음만 먹으면 피가 흐르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마력을 사용하면 분명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쿵쾅대는, 아니. 쿵쾅대어야만하는 심장이 멈춰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나이트들도 '김상희 성녀. 만세!' 외치기를 그만 뒀다. 확실히. 뭐가 잘못 됐다.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아무도, 이 승리를 기뻐할 수 없었다. 한진수는 마력을 컨트롤하여 김상희의 심장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일어나라. 일어나야만 한다. 김상희가 없는 세상.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 생각하기도 싫다. 그에게 있어서는 김상희가 가장 크다. 천금보다도 귀했다.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김상희의 멈춘 심장은 다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살고 네가 죽으면...'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제발. 제발 일어나라.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확실히 느꼈다. 그는 김상희가 있어야만 살 수 있었다. 김상희가 옆에 있어야만 자신일 수 있었다. 김상희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김상희의 얼굴이 창백했다. 차가워 보였다. 몸이 점점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한진수는 이성을 잃었다. 세기의 대천재.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기재라고해도,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 앞에선 초탈해질 수 없었다. 하물며 그 여자가 죽은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러면 너무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목 놓아 부르짖었다. 김상희.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라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김상희를 껴안았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는데,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제발... 제발. 내가 죽어도 좋으니까. 내 목숨을 가져가고, 네가 살아나란 말이다!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마력으로 손을 감쌌다. 자신의 목을 찔렀다. 정확히. 동맥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 위치였다. 과거의 한진수가 알았다면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한진수에게 있어서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김상희 하나였다. 다른 거 필요 없었다. 오로지 김상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김상희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욕심을 조금 더 부려보자면 그 김상희를 안고 싶어서. 내 옆에 김상희가 있었으면 하는 그 바람때문에. 그래서 제국에 항거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김상희가 없다. 그럼 이제 죽어도 된다. 아니. 죽어야 했다. 김상희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데 한진수의 손은 그의 목에 닿지 못했다. "그만 둬라." 김훈상이었다. 김훈상이 한진수의 팔목을 잡았다. 한진수는 오열했다. 김훈상은 한진수를 탓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한진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못했다. '내 딸이...' 내 딸이... 죽었다. 누가 봐도 그랬다. 심장이 멈춘지 벌써 10분이 넘게 흘렀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딸이... 죽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죽어 버렸다. '내가... 아버지인가.' 김상희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김상희가 죽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에게는 수십명의 나이트들이 있다. 그가 무너지면 저 나이트들도 무너진다. '이 순간에도 나는 왕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쉬고...싶다.' 그는 쉬고 싶어졌다. 왕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싶었고, 사람이기 전에 아버지이고 싶었다. 내 딸이 행복하게 해주는 거.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이를 갈았다. "한진수. 일어서라." 언제까지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제국을 용서하지 않겠다." 따지고보면 이 일을 일으킨 건 제국 아니겠는가. 프리온 나이트는 오로지 제국에만 있다. 누가봐도 제국의 소행이다. 김훈상은 복수를 다짐했다. "제국을... 반드시 쓸어버리겠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은 취소하는 게 좋을 겁니다." 김훈상이 고개를 돌렸다. 뒷 쪽에 크리스가 있었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어디에 있었지?" "백제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전파가 막혀있는 바람에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서야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겠군요."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움직였단 말인가.' 솔직한 말로 감탄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만 하는 일이다. 프리온 나이트의 어시스턴트들이 펼치는 전파방해를 뚫고 고려든 백제든 어디론가 연락을 했었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이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나이트 하나를 빼서 고국에 연락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자신도 순간 잊어버린 그 것을,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해냈다는 거다. '그리고 어시스턴트들의 경계망을 뚫고 나갔다 왔다는 건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다.' 김훈상이 물었다. "뭘 취소하라는 거지?" 제국은 반드시 쓸어버릴 거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 수도 있다. 김상희의 목숨을 빌어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를 이겼을 뿐이다. 아직도 제국에는 프리온 나이트 10개 대대가 남았다. 물론, 추정치다. 대략 10개 대대 정도가 남아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슬퍼하긴 이릅니다. 하루를 기다려보죠." 크리스는 뭔가를 아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 아침이 밝아 왔다. 한진수는 밤새도록 김상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김상희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제발 일어나. 일어나서 내게 말을 하란 말이야.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내 옆에만 있어. 난 그거 하나면 되니까. 그 말을 수 천번은 되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진...수?" 한진수는 또다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대천재. 레지스탕스의 대장. 붉은 늑대의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면을 차릴 수 없었다. 기뻤다. 너무나 기뻤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시체였었는데 하루가 지나니 다시 돌아왔다. 하루동안 진을 치고 있던 나이트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들의 아침이 분주해졌다. "김상희 왕자. 아니. 김상희 공주님이 살아났다는데?" "설마? 어제까진 완벽하게 시체였는데." 나이트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그저 그런 계집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은인이며, 성녀였다. "오! 진짜다! 진짜야! 김상희 공주님이 일어나셨다! 부활했다고!"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김훈상도 벌떡 일어섰다. 딸이 살아났다. 단언컨대, 그는 태어나서 이런 기분 처음이다. 행복해졌다. 왕이고 뭐고. 그런 거 없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췄다. 나이트들이 그걸 봤다. '폐하께서 이상한 춤을 추고 있다.' 아무래도. '폐하가 좀 미친 거 같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미친 것 같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뛰고 있었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왜 저러나 싶을 정도다. 백성들이 봤다면 미치광이 왕이라고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트들의 시선을 느낌 김훈상이 얼른 정색했다. 마치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듯. 자신은 제정신이라고 주장하는 듯 말이다. 하지만 싱글벙글 터져나오는 웃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짐짓 엄한 척 했다. "김상희. 이 잔망스런 계집. 감히 이 아비를 놀리는 거냐?" 김상희는 지금 죽었다 살아났다. 상황을 모른다. 당황했다. "아, 아버님...!" 김훈상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진수를 밀쳤다. 마치 7살 어린이들이 싸우는 것처럼, 퍽! 밀쳤다. 비켜. 이 장난감은 내 거야.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김훈상이 다가와 김상희를 꽉 안았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 정말 꽉 껴안았다. 김상희는 외치고 싶었다. 아빠. 나 숨 막혀요. 당신 때매 진짜 죽을 거 같다고. "한 번만 안아보자. 내 새끼." 아니. 이미 안고 있잖아. 두 번 안았다간 내 갈비뼈 부러지겠네. 이봐. 개차반. 좀 놓아달라고! 라고 속으로는 외쳤지만 겉으로는, "아빠가 무사하셔서 다행이어요." 그렇게 말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래도 김상희는 괜히 뭉클해졌다. 지금 좀 숨 막히고 괴롭기는 한데, 어쨌거나 김훈상의 진심은 전해졌다. 김훈상은 지금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한진수에게 사랑받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지만 하여튼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은 틀림 없었다. 고려의 나이트들과 국왕. 그리고 성녀 김상희가 고려로 돌아왔다. 고려 왕궁이 발칵 뒤집어졌다. *** 음. 나에 대한 소문이 막 퍼져나가고 있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내 이름은 김상희. 호칭? 지위? 하여튼 나는 김상희 공주라고 불린다. 그런데 요즘은 김상희 성녀라고 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이트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 김상희 성녀라고. 나도 어렴풋이 기억은 난다. 내 몸에서 빛이 났고 사람들이 회복 됐고 프리온 나이트가 금색으로 빛났다. 거기까진 기억이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프리온 나이트는 모두 전멸했고 개차반과 한진수가 굉장히 기뻐했다. '지금...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나는 지금 굉장히 황당하다. 왜냐고?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녀라뇨! 계집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녀라는 칭호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망측한 단어입니다!" 나를 가운데에 세워 놓고 늬들 지금 뭐하는 짓이냐? 누가 나보고 성녀라고 불러달래? 나는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면서 힘을 키워야 된다고. 개차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황금의자에 앉아 관리들이 싸우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늬들은 김상희 공주를 특별대우 하는 게 싫다?" "예. 그렇습니다. 아무리 보배라 할지라도 한낱 계집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저런 말은 맨날 듣는 건데 참.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한낱 계집이라니. 그 때, 알렉스 학자님이 입을 열었다. "한낱 계집이라니.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수?" 오. 그래. 알렉스 학자님. 화이팅. 저 아저씨. 아니 저 할아버지는 언제나 저렇게 돌직구를 잘 날려준다니까. 비교적 내 마음을 아주 잘 알아주고. "뭐 잘난 것도 없으면서 김상희 공주님을 깎아내리려 들지 좀 마요. 그렇다고 지가 잘나지나. 그거 열폭이야." ...어라. 당신 학자님이잖아. 열폭이라는... 음. 지구식으로 치면 인터넷 용어를 막 사용하시네. 열폭. 별 거 아니다. 열등감 폭발이라는 뜻인데, 학자님이 사용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고 다른 뜻 같기도 했다. ... 어쨌든 알렉스 학자님 화이팅. *** 관리는 당황했다. 열폭? 그게 뭐지? 내가 모르는 단어인가! 그는 무식을 티내고 싶지 않았다. 저런 어려운 단어를 쓰는 건 치사하잖아.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아, 알렉스 학자! 말이 너무 지나칩니다!" "지나치긴 뭘 지나쳐. 이번 국지전에서의 활약상을 듣지 못했어요? 귀가 장식으로 달렸나..." 그러나 관리들은 믿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괴이한 힘을 가진 계집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잘 못 믿는 법이다. 차라리 바퀴벌레가 3초만에 진화하여 사람이 됐다는 말을 믿고 말지. 그 때. 문이 열렸다. "폐하. 김상희 공주를 성녀로 추대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봅니다." 모두가 눈을 돌려 봤다. 보니까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얼굴과 직책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프리온 나이트만큼은 아니지만 스페셜 나이트 역시 비밀스런 집단이었으니까. 나이트들이 궁전 내로 물 밀듯 밀고 들어왔다. 물론, 이미 사전에 김훈상이 허락한 거다. 어차피 관리들이 반대할 줄 알았다. 김훈상의 생각을 빌리자면, 저 놈들은 귓구멍이 막힌 놈들이니까. 김훈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다. 관리들은 황당해졌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화장실? 도대체 왜? "김상희. 따라와라." 화장실 가는데 딸은 왜 데려가? 어이가 없었지만 왕이 그렇다는데 어쩌랴. 왕이 김상희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러자 나이트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대장님. 도대체 어떤 무식한 새끼가 김상희 성녀를 성녀라 부르는데 반대합니까?" 그러자 나이트들이 서로간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그랬어?" "그냥 죽일까?" 누군가 외쳤다. "무엄하다! 궁전 내에서 무슨 소란이냐!" 참고로 나이트는 관직과는 상관 없다. 약간 별개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나이트 하나가 왕궁 내의 기둥 하나를 발로 차서 부숴버렸다. 당연히 김훈상에게 다 허락 받은 거다. 오늘 여기. 깽판치러 왔다. 나이트들은 평소 품위를 지킨다. 점잖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사람이 모두 제각각이듯, 나이트들도 마찬가지다. 개중에는 좀 난폭한 사람도 있다. 하늘 아래 왕밖에 없는 줄 아는 무식한 사람도 있다. 일부러 그런 놈들로 뽑아 왔다. "무엄은 개뿔? 당신 아가리부터 털어줘?" 그들은 봤다. 김상희의 능력을. 김상희가 있어서 제국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안 믿는다고? "우리를 구라쟁이로 아시나들." "그냥 죽이자니까요. 까짓거 죽이고 몇 년 감방갔다 오죠 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거리의 불량배처럼 침을 찍찍 뱉었다. 목을 돌리는데 우드득 소리가 났다. 관리들은 좀 긴장했다. 나이트 하나가 말했다. "아참. 김상희 성녀님께 큰 선물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놈은 이빨부터 뽑아줍니다." 그들은 마치 관리들을 정말로 팰 것처럼 행동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나이트들이 저렇게까지 행동한다는 건...' 김훈상의 동의가 있었던 데다가, '정말로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정말 엄청난 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제국과 고려사이의 작은 전쟁에 관해서 밝혀진 바는 그렇게 많지 않다. 쉽게 말해, 공론화되지가 않은 비공식 전투였다. 다만 미사일 12기가 발사 되었고 고려 본국에 지원이 요청되었으며, 프리온 나이트와 싸워 이겼다는 것 정도.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이트들이 저렇게까지 난리를 치지 않겠지.' 그렇게 납득했다. 절대. 절대로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다. 절대 안 쫄았다. 안 쫄았는데 괜히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저 무식한 나이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괜히 땅을 내려다 봤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안 쫄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서, 선물이나 칭호 같은 거 다 주라고 해.' '저, 저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고.'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김훈상은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아침에 잠시 차를 마시기 위해서다. 김훈상은 김상희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침에는 무조건 아빠랑 차를 마시는 거다." 김상희는 아직 잠도 덜 깼다. "안 마시면 사형시켜 버릴 거다." '아빠는 너랑 잠시라도 좋으니 아침에 잠깐 함께 차를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라는 속마음이 '사형'으로 대변 됐다. 그 때, 방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알렉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알렉스가 소식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제국에서... 특사를 보낸답니다." 차를 들어올리던 김훈상의 손이 멈췄다. 김훈상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제국.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놈들이다. 지금 당장 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씨를 말려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김훈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유는?" ============================ 작품 후기 ============================ 정작 김상희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 성녀님 어화둥둥 선물줘여 헤헿 뭐? 반대한다고? 강냉이 뽑히고 싶냐? 캬악 퉤! 뒤질래? ...라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0132 / 0192 ---------------------------------------------- 한진수가 널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널 더 사랑해. *** 제국에서 이례적으로 특사를 파견했다. 제국은 특사를 잘 보내지 않는다. 보통 특사를 보내라고 요구를 한다. 전 세계가 제국과 고려의 행보에 주목했다. "제국에서 고려에 특사를 보낸다더군." "어째서?" "쉬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제국과 고려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었다나봐."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렇다하더라, 라는 얘기만 돌고 있을 뿐. "프리온 나이트도 파괴되고 고려 스페셜 나이트도 여럿 죽었다나봐." "어떻게 그런 일이...?" "임무 수행 중에 상충되고... 오해가 쌓여서 국지전이 벌어졌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국 쪽에 좀 잘못이 있는 것 같더라고." "아. 그래서 특사를 보내는 건가?" 제국은 고려에 사과했다. 제국이 타국에 사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간 태양제국 잉카가 멸망시킨 나라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다. 어이없게도 실수 혹은 오해 때문에 없앤 나라가 두 나라가 넘는다. 그런데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제국의 이번 행보는 상당히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제국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고려라고 별 수 있겠어?" 작전 책임자였던 제국의 정보국장이 이번 일의 책임을 지고 참수당했다고 한다. "정보국장이면 엄청 높은 거 아냐? 실세 중의 실세일텐데. 그런 사람의 목을 잘라서 고려에 보냈다는 건... 진짜 제국이 실수를 하긴 했나 보네." 제국은 언제나 갑의 위치다. 갑이 허리를 숙일 필요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 제국이 이렇게 허리를 숙인다는 건, 제국이 정말 잘못을 했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훈상의 눈에 사람 머리 크기만한 나무곽이 보였다. 특사에게 물었다. "이게 뭐지?" "이번 작전에 있어서 혼란과 손해를 야기시킨 제국 정보국장 김국현의 목입니다. 황제께서 친히 참수하셔서 고려에 사과의 의미로 보냈습니다." 김훈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특사를 쳐다봤다. 정확한 상황을 잘 모르는 특사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이 이렇게까지 하면 응당 제스쳐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상식적으로라면, 아이고 이러실 필요까진 없었는데. 황송하군. 이 정도의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고려 국왕의 고개는 뻣뻣하기 그지 없었다. 특사는 좀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 불쾌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정중하게 말했다. "황제폐하께서는 이번 일에 대하여 정중히 사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번 일의 책임을 지고자..." 김훈상이 말을 잘랐다. "금은보화를 하사하겠다?" "......." 특사는 점점 더 짜증이 났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어떻게 황제의 말을 대신 전하는 자신의 말을 이렇게 자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들어보니 더욱 가관이다. "돈 줄 테니 먹고 떨어져라...인 거냐?" "폐, 폐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 것들은 황제폐하의 진심어린 사과가 깃들 예물들로써..." 김훈상은 말하고 싶었다. 닥쳐라. 그 주둥아리를 찢어 버리기 전에. 그런 험한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기에는, 그 밑에 딸린 수천만의 백성들이 신경 쓰였다. 제국과의 전쟁. 까짓거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백성들은 엄청나게 많이 죽을 거다. 대규모 화력전에 있어서 고려는 제국을 이길 수 없으니까. '아무리 싫어도 나는... 제국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건가.' 무려 정보국장의 목을 잘라서 보내왔다. 이 정도로 사과를 하는데, 무조건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론도 제국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어지간하면 몸을 굽히지 않는 제국인데, 이례적으로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으니까. '젠장.' 김상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뻔 했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제국을 치러 달려가고 싶지만, 가서 황제의 목을 따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생각에 잠겼다. *** 황제의 밀실. 황제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김국현. 네 능력이 예전같지 않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리고... 감사합니다. 목숨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제국 정보국장의 얼굴은 알려져 있지 않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정보국장은 김국현이 아닌, 얼굴만 대표하는 다른 남자였다. 황제는 그를 죽였다. 그리고 정보국장의 목을 보냈다고 했다. 사실상 대외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김국현은 목숨을 건졌다. "아니야.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수확은 있었다. 아마도 성녀가 각성을 했을 거야."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려의 나이트들이 3개 대대를 전멸시켰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황제는 90퍼센트 이상 확신했다. "성녀가 나타났다. 당연히 성녀는 김상희겠지. 그러나 완전한 각성은 아닌 것 같군. 반 쪽짜리 성녀야." 능력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꺼내 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김국현이 말했다. "실제로 고려에서는 현재 김상희를 성녀로 추대하고 있답니다." "고려에서도 이제 김상희의 가치를 알았겠지."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녀의 존재는 이제 완벽하게 확인했다. 그렇다면 김상희를 어떻게 빼앗아오는가가 남았다. 전면전? 물론 할 수 있다. 할 수는 있는데, 피가 많이 흐른다. 문제는 제국도 지금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 3개 대대. 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큰 병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타격임에는 틀림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와 싸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전쟁은 최후로 남겨둬야 할 선택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나마 프리지아가 여왕으로 각성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힘들 뻔 했어." "...예. 폐하." 김국현은 직감했다. 프리지아가 여왕으로 각성하지 않았었다면, 자신의 목은 지금 땅에 굴러 떨어져 있었을 것이었다. 그나마 여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황제에게 여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량을 베푼 것이 틀림 없었다. "김상희를 데려오는 방법을 연구해보도록." 김국현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김상희 공주가 결혼을 한다고 하는군요." 그들은 아직 모른다. 이번 국지전에서 김훈상이 '내 딸. 절대로 안 보내. 아무도 못 줘.'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을.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고려 내 곽씨 후작가의 아들. 까짓 거 보상 좀 많이 해주고 데려오면 그만이다. 김국현이 말했다. "마침 황자님도 아홉 번 째 부인을 들일 때가 된 것 같은데요. 김상희 정도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훌륭하지 않습니까? 아홉 번 째 부인으로 제격인 것 같습니다." *** 나는 정신을 집중해봤다. 그 왜. 그런 거 있잖아. 마법 같은 걸 쓰려고. 이야압! 이라고 한다든가, 읍! 이라든가. 하여튼 기합 비스끄리무리한 뭐 그런 걸 내뱉으면서 그 이상한 힘을 끌어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했었지?' 나는 분명 느꼈다. 내 안에서 뭔가가 빠져나갔고 그와 동시에 기적이 일어났다. 나이트들이 지금 나보고 성녀, 성녀, 성녀하면서 굽실 거리는데 이젠 내가 불편할 지경이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이렇게 변하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내게 칭호와 보상을 주겠다는 걸 반대하는 남자 관리들의 얼굴에, '죽빵을 꽂아 넣었다지?' 죽빵을 꽂아 넣었다는 소문이 있기는 있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에이. 그래도 설마. 아무리 나한테 미쳐있다고(?) 해도 진짜 왕궁 내에서 주먹질을 했겠어? 한국 국회의원도 아니고 그런 멍청한 짓을...왠지 했을 것 같기도 하고. 김상희가 물었다. "크리스. 혹시 제 옆에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가 은신을 풀고 나타났다.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활짝 웃고 있었다. "상희야. 너 한진수에게는 반말 잘 하더라." "...네?" 그래서? 나한테 지금. 반말 하라고? "왜 나한테 그렇게 거리를 두는 거야?" 아니. 내가 언제. 나는 그냥 예의에 맞게 존댓말을 썼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거리를 두는 걸로 변질 되냐? "나한테도 반말 하면 안 돼?"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땐 아이참, 난 몰라요. 난 그런 거 못해요. 예의에 어긋난단 말이에요. 하면서 당황한 척 해야지. 이게 최고다. "제, 제가 감히 어찌 반말을 하겠어요?" "반말 안 하면 키스해버린다." "......." "그것도 딥키스로." ... 야. 그거 성희롱이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침에 차 같이 안 마시면 사형이라는 개차반이나, 반말 안 하면 딥키스를 하겠다는 크리스나. 이 세계 남자들이 그러면 그렇지 뭐.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크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뭔데?" "크리스는 내 능력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소심하게 끝에 요를 붙였다. 이 정도는 눈 감아 주겠다는 듯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능력을 알고 있다기 보다는... 그냥 느낌이 왔어. 하루 정도 있으면 깨어나겠구나." 이상했다. 개차반의 말에 따르면 나는 완전히 시체였단다. 심장이 멈춘 채 하루가 지났으면 시체맞지 뭘. 그런데 오로지 크리스만이 날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루를 기다려 보라면서. 뭔가 알고 있는 게 맞겠지. 나는 일부러 엄청 슬픈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는 나한테 거짓말 안 할 줄 알았는데..." 아마 세상을 다 잃으면 이런 표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이다. 크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정색하지 마. 적응 안 된다고. 크리스가 내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와. 잘생기긴 정말 겁나 잘생...아. 이게 아니지. 흠흠. 절대 상큼한 아이돌 구경하는 아줌마 마음가짐 아니다. 절대. 절대로 아니다...아마 아닐거야. 엉엉. "상희야." "...응?" "내가 널 걱정해."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너만 나 걱정 안 했다며? "한진수가 널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널 더 사랑해." "......." 뭐야. 이 타이밍에 그 고백은.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리고 언제나 조심해야 해." "......." 뭘 조심하라는 거야? "한진수도, 고려도 너를 지켜주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거야." "... 무서워요." "무서워도 알고 있어." 그리고 얘가 말했다. "Lapuntel Essantia Kerannis Frential." 임마. 뭐라는 거야? 나는 몇 번이나 되묻고 몇 번이나 발음을 교정받았다. 크리스가 말했다. "절대로 잊지마. 언젠가 반드시 쓰일 날이 올 거야." 뭔지 제대로 설명은 좀 해주고 하라고 해라. 뭔지도 안 알려주고 하면 무슨 뭐. 기적이 일어나는 주문이라도 되냐? "그리고 절대로 잊지마. 내가 한진수보다 널 더 많이.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크리스...?" 그리고 크리스가 내게 다가왔다. "미안해. 네가 날 허락하지 않았는데,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 크리스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가볍게, 쪽 소리가 났다. "이 정도는 허락해줘. 더 이상은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얘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지. 마치 꼭...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바람결에 '사랑해'라는 소리가 흩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뭐랄까. 가슴 한 쪽이 휑하니 비어버린 것 같은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슨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몇 번 중얼거렸다. "Lapuntel Essantia Kerannis Frential..." 바람 때문인지, 쾅! 하고 창문이 닫혔다. 그리고 몇시간 뒤, 나는 충격적인...아니.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방에 찾아온 우리 둘째 망나니. 김환성에게 되물었다. "그게...진짜에요?" 아무리 왕자인 김환성이 직접 전해준 소식이라지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마침 황자님도 아홉 번 째 부인을 들일 때가 된 것 같은데요." 그 말... 딸등신 김훈상 앞에서 한 번 해보기를 강추합니다. 0133 / 0192 ---------------------------------------------- 제국의 황자 ***133 왕의 특별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전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김상희 공주에게 '성녀'의 칭호를 내리겠다고 했다. 예전에 보배칭호를 받을 때와는 달랐다. 나이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상희 공주님한테 성녀의 칭호쯤은 줘야 되지 않겠냐고 집단으로 나섰단다. 관리들은 물론이고 시녀들 조차도 그런 상황에 어리둥절해 했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었다. 나이트들이 집단 성명을 발표하며 우리 상희 공주님께는 그에 걸맞는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으니까. '그래. 그것까진 그럴 수 있다 치자.' 김상희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 그것까진 좋다. 다 좋다 이거야. 다 좋은데, '무조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 김상희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니까 지금 이딴 게 특권이라고? 다른 사람이 보면 모르겠는데 김상희가 보기엔 이건 특권이 아니었다. 다만 전투보상이란 미명아래 김훈상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송수진시녀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공주님. 저는 공주님이 너무나 부럽고 또 너무나 존경스럽답니다." "어째서?" "어떻게 감히 국왕 폐하를 아빠라 부르겠어요?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기적을... 현실에서 보다니. 저는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워요." ...아. 그러세요... 이건 그냥 개차반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용도일 뿐입니다만... 김상희는 말해주고 싶었지만 송수진의 환상을 깨뜨리지는 않기로 했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이건 또 왜 들어가?' 좋다. 아빠까진 그렇다 치자.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 그래.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김상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송수진 시녀가 이렇게 부러워하는 걸로 봐서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그런 엄청난 특권인 건 맞다. 그런데 이건 특권이 아니라 '특무'였다. '인간적으로 상을 준다면 상을 줘야지, 왜 의무를 줘?' 정확하게 말하면 '아빠' 혹은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를 줬다. 무조건 그렇게 부르단다. 김상희는 진심으로 따지고 싶었다. 이딴 게 무슨 특권이라고. 관리들은 이 특권(?)에 게거품을 물고 반대했지만 김훈상과 왕자들의 뜻이 너무나 확고했다. 덧붙여 나이트들도 무서웠고. '그나마 보상다운 보상은 이거 하나 뿐이네.' 그래도 보상다운 보상도 있었다. 이 보상은 김환성이 직접 줬다. "야. 똥개." "네. 오라버...아니. 오빠." '오라버' 나왔을 때엔 인상을 찡그렸던 김환성이 '오빠' 소리 듣자 활짝 웃었다. 천진난만한 그 미소에, 김상희는 명치를 때려주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부지가 이거 너 주래." "이게 뭐에요?" 옛다. 그래. 실컷 받아라. "오빠?" 오빠소리에 또 김환성이 활짝 웃었다. 행복해 보였다.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는데 오빠소리가 어지간히도 좋은 것 같았다. "뭐긴 뭐야, 퓨리어스지. 넌 역시 멍청이라 잘 모르네." 참고로 김상희는 이게 뭔지 당연히 안다. 아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김환성의 허세심리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에 걸맞는 리액션도 해줬다. "서, 설마 이게 정말 퓨리어스에요? 아, 아빠께서 저한테 이걸 하사하신 건가요? 미천한 소녀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주셔도 되는 걸까요?" 김상희가 놀라워하자 허세력이 충만해진 김환성이 엣헴, 헛기침을 했다. 생색 잔뜩 냈다. "내가 주자고 그랬어." 김환성이 '나 잘했지? 얼른 칭찬해줘' 라는 눈빛으로 김상희를 쳐다봤다. 김상희는 저 활짝 웃는 얼굴과 명치를 한 대 씩 패주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대로 해줬다. "오빠는 역시 최고에요!" 김환성은 대단히 만족했다. 고려왕국 셋째 왕자의 체통과 품위따윈 저만치 던져버렸다. 굉장히 기분좋게, 음하하핫! 하고 웃었다. 입 안의 목젖이 보일 정도였다. "그치? 역시 오빤 짱이야." *** 김훈상은 고민에 고민을 계속 했다. '하루동안 몸이 식었었다. 부작용은 없는 건가?' 하루 종일 딸 걱정 떄문에 업무가 잡히질 않았다. 제국의 특사 놈을 쥐어패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제국의 특사를 보니 저번의 그 아찔했던 전투가 떠올라 심장이 철렁하고, 심장이 철렁한 다음에는 내 딸이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되고. 하여튼 매일 매일이 초조할 정도였다. '이럴 때는 퓨리어스지.' 때마침 김환석, 김환성 형제가 퓨리어스를 주자고 입을 모았다. "아부지. 걔 엄청 약하잖아요. 죽을 뻔 했으니까 퓨리어스 좀 주는 게 어때요?" "맞습니다. 비록 미천한 계집이지만 이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앞으로도 공을 세울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퓨리어스를 조금이나마 하사하는 것이 고려의 국익에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동생 걱정되니까 퓨리어스 주죠.'라는 말이 저렇게 길어졌다.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그래서 퓨리어스를 하사했다. 공주에게 퓨리어스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하사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송수진은 깜짝 놀랐다. "세, 세상에... 공주님. 이, 이것이 그 퓨리어스에요?" "아...응..." 한 방울만 있으면 죽던 사람도 살려낸다는 천고의 영약 퓨리어스. 보통 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하사할 때는 한 방울을 준다. 보통 그게 상식이다. 송수진은 입을 쩍 벌렸다. "이, 이, 이게 전부... 퓨리어스에요?" 김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수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구식으로 비유해보자면, 지금 눈 앞에 몇 천억. 아니, 몇 십, 몇 백조에 달하는 그런 현금이 쌓여 있는 거라고 볼 수 있겠다. 저거 한 병이면 어지간한 나라를 사고도 남는다. 지구를 예로 들면 한국의 전체 땅을 전부 살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선, 건물 몇 채만 가져도 건물주라고,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건물이 아니라 아예 나라를 통째로 살 수 있는 가치를 가진 보물이다. 김상희도 좀 황당했다. '아니. 이걸 왜 한 병이나 통째로 줘? 개차반이 드디어 미쳤나?' 미치지 않았다. 딸 사랑이 조금 특별할 뿐. 내 딸에게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다, 라는 마인드랄까. "수진도 한 방울 줄까?" 송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손사래를 쳤다. "제, 제가 어, 어찌 감히 그런 마, 말도 안 되는!" 시녀의 신분으로 어떻게 저런 보물을 입에 댈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된다. 김상희가 말했다. "명령이야. 한 방울 지금 당장 마셔." "고, 공주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이다. 그런 보물을 어떻게 감히. '내, 내가 어떻게 저런 보물을 마실 수 있겠어?' 송수진은 절대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공주님.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씀입니다. 저는 그 보물을 절대로 받을 수 없어요. 게다가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물건인데 제가 어찌 감히..." 김상희가 협박했다. 땅에 떨구는 시늉을 했다. "수진이 안 받으면 그냥 버린다?" "공주님. 그건 천고의 보물이에요. 절대로. 절대로 그러시면 안 돼요. 일생에 다시는 볼 수 없는 보물이란 말이에요. 제발 아끼셔요."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개차반한테 달라고 하면 또 줄 거 같은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냈다가는 송수진이 기절할 것 같아서 그냥 안 했다. 시간이 흘렀다. 입씨름에서는 결국 김상희가 이겼다. 송수진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감사하다고 절을 올렸다. 김상희가 말했다. "몸이 아플 거 같으면 또 말해." 개차반한테 좀 더 달라고 할 테니까. 아마... 줄 걸? 그 말은 삼켰다. *** 김훈상은 조금 걱정했다. '퓨리어스 한 병으로는 역시 부족하겠지?' 한 병이 아니라 열 병을 줘도 모자르다. 모르겠다 이 마음. 그냥 다 퍼주고 싶다.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호구왕이어도 좋았다. 주는데 행복한 기분.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한테 달라고 졸랐으면 좋겠다.' 어리광 부리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또 줄 텐데.' 한편, 제국의 특사가 다시 한 번 김훈상을 찾아왔다. 김상희를 생각하며 헤벌쭉 웃던 김훈상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 "김상희 공주가 결혼을 할 시기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김훈상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특사 앞에선 그래도 감정을 조금 숨기는 편이었는데 이번 만큼은 아니었다. 말이 나오기 전에 잘라 버렸다. "누구랑 연결시키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딸은 아무도 안 준다." 그 대단하다는 한진수도 눈에 안차는데, 다른 놈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평생 아무한테도 안 주고 싶은 마음이다. 제국의 특사는 황당해했다. '아니. 황자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일거야.' 그렇게 단정지은 그가 다시 말했다. "황자저하께서 김상희 공주와 결혼하고싶어 하십니다." 아. 그 바람둥이 날라리같은 새끼? 김훈상은 말할 뻔 했다. 겨우 참았다.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딸등신이라도 상대는 제국의 특사다. 후우- 깊게 쉼호흡을 했다. "제국의 황자는 이미 결혼을 하지 않았던가?" 제국 특사는 또 황당해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무런 상관 없지 않은가. 계집을 황자에게 보내는 거면, 무조건 기뻐해야 정상이다. 그게 상식인데 저 왕이 왜 저러나 싶다. '왜 저러지? 정말 머리가 망가졌나?'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황자와 결혼시키면 무조건 이득일텐데. 왜 저러지? 김훈상이 진지하게 말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김상희는 시집 안 보낸다." 평소보다 더욱더 진지해졌다. 아니. 못 보낸다. 결연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더더군다나 그 놈으 이미 8명이나 아내가 있지 않은가? 천하의 몹쓸 바람둥이같은 새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욕했다. 참고로 김훈상은 아내가 30명이 넘는다. 그런 건 하나도 안 떠오르고, '도둑놈 새끼들!' 빼앗기기 싫다는 감정만 마구 피어 올랐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도둑놈들처럼 느껴졌다. *** 김환혁은 무럭무럭 컸다.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성장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여전히 애는 애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금 의젓해졌지만, 김상희 앞에서는 언제나 애였다. "누나. 누나가 곤충은 싫어하는 것 같아서 포유류로 잡아왔어. 네 발 달린 짐승이야." 응. 그래. 포유류 고맙긴 한데, 거대 송곳니를 가진 표범은 좀... 그렇지 않니... 김상희는 울고 싶어졌다. 크기가 3미터는 넘어 보였다. 아마 김환혁이 옆에 없었으면 저 표범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혁 왕자님. 저는 왕자님이 좋아요. 그러니까 선물 같은 건 안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아냐. 내가 누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얼른 받아."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거 해주지 말라고. 안 해주도 된다고. 아니.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엉엉. 그렇다고 왕자한테 '이딴 선물 필요 없어. 위험하기만 하잖아.'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크기가 작은 것이 좋답니다. 이건 너무 크고 위협적이어서 무서울 것 같아요. 이렇게 무서운 것이 옆에 있으면 밤잠을 설치게 되어 제가 아주 힘들 것 같답니다." "흠... 그래?" 김환혁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누나한테 다 해주고 싶은데, 뭘 해줘야하는지 모르겠다. 여자. 참 어려운 존재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김상희냐?" 김상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높은 집안 자제 같은데. 왕궁 내에서 공주보고 '네가 김상희냐?'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소한 타국의 왕자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김상희는 저 남자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다. 마력학원에 입학하기 전, 주요인사들의 인상착의 정도는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저 사람이 도대체 여길 왜...?' 그리고 김환혁이 그 남자를 노려봤다. "야." "......."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김환혁을 쳐다봤다. 김환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도둑놈이냐?" 남자도, 김상희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김훈상: '도둑놈 새끼들!' 김환혁: "너도 도둑놈이냐?"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합니다 0134 / 0192 ---------------------------------------------- 제국의 황자 *** 제국의 황자. 나이는 28세. 이름은 프란토.S. 유르디어 헤렐비아. 보통은 프란토 황자라고 통하는 그는 여지껏 자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든 여자들을 취했던 것으로 유명한 남자다. 이미 정실 부인으로 8명이 있으나, 그녀들과는 거의 잠자리를 하지 않고 황궁 밖을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컨택하는 일명 '헌팅'이라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을 유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황자라는 이름과 더불어 헌터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다. 그런데 김환혁에게 있어서는 그가 황자든 헌터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즘은 뭔 놈의 도둑새끼들이 이렇게 많아?' 이게 문제다. 한진수부터 시작해서 곽기현, 크리스. 이런 도둑놈들이 활개치고 있는 와중에, "너도 내 누나 좋냐?" 저런 이상한 놈팽이까지 꼬였다. 못 보던 놈이다. 어디 귀족가의 자식이겠거니 했다. 그럴만도 했다. 이 곳은 고려의 왕궁이고 고려의 왕궁에서 왕자보다 높은 사람은 왕밖에 없었으니까. 프란토가 어깨를 쭉 폈다. "무엄하다. 나는 제국의 황자 프란토. S. 유르디어 헤렐비아다." 보통은 이 정도면 기가 죽기 마련이다. 제국의 황자. 그가 자신의 풀네임을 말했으니까. "근데?" "그렇다. 나는...응?"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한데. "그러니까 너도 도둑이냐고?" 김환혁은 당당했다. 제국의 황자? 그게 뭐? 그게 뭔 상관인데? 김환혁은 제국에 대해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에 누나가 제국 때문에 위험해질 뻔 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열불이 마구마구 치솟는다. '아, 아니... 이게 아닌데...' 이런 상황. 처음이다. 원래 인간은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기 마련이다. 프란토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28년만에 처음이다. 그러니까 당황할 수밖에. "도, 도대체 무슨 도둑이라는 거냐? 나는 제국의 황자다." 그 말의 뜻을 직역하자면, 나는 제국의 황자이므로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도둑질을 한다는 말이냐? 라는 뜻이다. 김환혁은 피식 웃었다. "너도 내 누나 탐내는 거 아냐?" 하여튼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죄다 도둑놈으로 보인다. "내 허락 없이는 내 누나 아무데도 못 가." 김상희는 황당했다. 개차반 망나니 형제들에 이어 이젠 환혁이마저. 맙소사. 나... 시집은 갈 수 있겠지? 하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희는 걱정가득한 기색으로 김환혁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왕자님..." 공주가 감히 왕자에게 '황제에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에요?'라고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이렇게만 했다. 김환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화가 좀 난 것 같은 표정이다. "그니까 누나가 너무 예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잖아." 프란토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공주보고 꼬박꼬박 '누나'라고 하는 미친 왕자가 있다니. 저런 미친 왕자. 처음이다. 고려 왕자 중에 제정신이 아닌 놈이 있다니, 미친개라서 상대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놈이 있었는데, 그게 이 놈인 것 같았다. 프란토가 진지하게 물었다. "네 놈이 김환성이냐?"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환성은 난데. 넌 누구냐?" 김환혁과 짠 거도 아닌데, 이렇게 말했다. "너도 도둑놈새끼냐?" *** 김훈상이 호통을 쳤다. "이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이냐!" 김환혁과 김환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옆에는 황자인 프란토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섰다. 기세 자체는 당당했으나 얼굴은 성하지 않았다. 눈가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팔에는 깁스를 한 상태.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아부지... 그게..." "너희들이 왕자라는 사실을 잊은 거냐? 너희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수천만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 잊은 거냐!" 프란토는 잘난 체 하며 나섰다. "이 정도로 군대를 움직일 만큼 제국은 속이 좁지 않습니다. 그 점은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김훈상은 얼굴을 조금 폈다. "본의 아니게 누를 끼쳤군. 미안하게 됐다. 황자여." "뭐. 괜찮습니다." "제국에는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도록 하지." 그리고 말을 이었다. 프란토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마치 이 것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누를 끼친 상태에서 신성한 혼례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이번 불미스러운 일에는 김상희라는 하찮은 계집이 끼어 있었던 바. 결혼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는 게 좋겠어." 프란토는 뭔가 일이 잘못 되어 간다고 느꼈다. 어라. 뭔가. 뭔가 이상한데. 정확하게 뭔지는 몰라도 뭔가 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김훈상이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김상희. 네 년 때문에 제국의 황자가 크게 다쳤다. 어떻게 할 셈이냐!" "소, 소녀를 죽여주시어요." "네 년은 죽일 가치도 없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김상희는 울고 싶었다. 사실상 김상희는 잘못한 게 없다. 가만히 있었는데 제국의 황자가 찾아왔고, 또 가만히 있었는데 김환혁과 김환성이 찾아왔으며, 또 가만히 있었는데 그들끼리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이 일어났다. 정말 황당한 일이지만 그 일은 정말로 벌어졌다. 김환혁, 김환성 왕자에게는 이성이란 게 없는 듯 했다. 김상희는 방으로 돌아왔다. '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이 날 때가 있다. 또한 억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참고 넘어가야하는 일이 있다. 이건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억울해서 공주따위가 왕에게 반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깊은 밤. 김훈상이 김상희를 찾아왔다. ***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자기는 글른 것 같았다. "네 년은 죽일 가치도 없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라는 그 말이 귓가에 아른 거렸다. 개차반의 본심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자꾸만 그 말이 떠올랐다. 그 때, 김훈상이 찾아왔다. "...괜찮...으냐?" 나는 황급히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서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력으로 나를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입만 간신히 열었다. "아빠...?" 이제 나는 무조건 저 개차반을 '아빠'라고 불러야 된다. 특권 같지도 않은 괴상한 특권이 생겨버렸으니까. 김훈상은 김훈상답지 않게 말을 버벅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건 이래서 이랬고 저건 저래서 그랬고. 그건 그래서 그랬다. 어쩌고 저쩌고를 구구절절 늘어 놓는데, 제 3자가 본다면 약간 애처로운 구석이 있을 정도였다. 타국에겐 철혈의 왕. 자국에는 성군. 대외적으로는 전 세대를 이끌던 대천재 김훈상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는 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거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어쨌든 결혼 얘기는 취소시켰다. 하자가 있는 계집을 보낼 수 없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아빠 말을 저를 시집 보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러셨다는 거에요?" "그것도 있고." 김훈상이 딸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너는 너무 예뻐서."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약을 쳐? "그래서 놈이 자꾸 너를 힐끗힐끗 쳐다보잖아." 엥. 그런 적 없는 거 같은데요. 그거 아빠 당신의 착각 같은데요. 나를 과보호하고 구속하려는 그 심리에서 오는 착각 말이에요.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김상희는 프란토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낀 적이 없다. "그래서 쫓아냈다." 아. 그러니까 프란토가 날 훔쳐보는 게 싫어서 날 빨리 방으로 되돌려보냈다, 이 말인가요? 김상희는 묻지 않았다. 상황은 이제 이해했다. 김상희는 김훈상의 입장을 이해한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제국의 황자고, 이런 일방적인 폭행사건(?)이 일어났으면 당연히 저런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그게 맞긴 맞는 거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그 생각을 하니 좀 화가 났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거. 말 해도 되려나? 안 되나? 그러다가 해도 될 것 같다는 판단. 아니. 확신이 들었다. 이제 줄타기는 더이상 아슬아슬하지만은 않았다. 예전의 줄타기가 고공 100미터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하는 줄타기 였다면, 지금의 줄타기는 높이 10미터에서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하는 줄타기나 다름 없었으니까. 마력으로 몸이 구속되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김상희는 눈동자만 돌려 김훈상을 올려다봤다. "아빠." 안 그래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김훈상이 얼른 말했다. "그래. 말해봐라." "미워요." 김훈상은 충격을 받았다. 밉다니. 내가 밉다니. 내 딸이... 나보고 밉다고 했다니. 뭐랄까.ㅏ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려 버린 것 같았다. 뭔가. 엄청나게 허전한 기분이 든다. "아빠 미워요." 김훈상은 아무 말도 못했다. 세기의 대 천재? 그런 거 소용 없었다. 딸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가녀린(?) 아버지일 뿐이었다. 김상희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천하의 개차반이 저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참...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일이니까. 하고 생각한 김상희는 당근을 던져줬다. "소녀가 아빠를 얼마나 사모하는데..." "......." "그런 소녀가 꼴 보기 싫다고 하시다니... 소녀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참담하고 끔찍한 기분이 들어 하루종일 너무나 괴로웠답니다." 김훈상은 오늘 하루동안 지옥과 천국을 왕복했다. 지옥에서 탈출한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딸의 말 한마디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래. 그럼 그렇지. 내 딸은 나를 사모한다고! 그래서 다시 결심했다. '아무도 못 준다!' 다음 날. 대회의에서 집행부 관리가 물었다. "폐하. 최종승인이 필요합니다." 집행부 입장에서는 김상희를 빨리 시집 보내야 했다. 그래야 순차적으로 시집을 보낼 수가 있으니까. 이건 집행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다. 빨리빨리 일처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김훈상이 말했다. "김상희의 결혼은 보류한다." 집행부 관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 왕님. 당신 미쳤습니까?' 지금 김상희의 몸 값은 올라있을 만큼 올라 있다. 곽씨 후작가에서도, 백제 왕가에서도, 심지어 제국에서도 탐을 내고 있다. 이렇게 몸 값이 올라 있을 때 후딱 팔아넘겨야(?) 이득 아니겠는가! "폐, 폐하!" "그 다음 공주는 누구냐?"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채송희공주다. "나이 순으로 시집을 가는 건 왕명이나 법이 아니다." 김훈상이 무게를 잡았다. 김훈상이 정말로 진지해지면 아무도 토를 못 단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고려를 이끌어온 성군이며, 전쟁기를 다스렸던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었으니까. "나이 순으로 시집을 보내는 건, 단순한 관례였을 뿐. 김상희는 시집을 보내지 않는다. 이 것에는 그 어떠한 반론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내가 추후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김상희의 시집을 입에 올리는 놈은 왕의 이름을 걸고 용서하지 않겠다." 집행부 관리들은 긴장하면서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다음 공주를 시집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애초에 김상희 공주는 없는 공주라고 생각하면 맘이 편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한낱 계집애에게 저렇게 애정을 쏟고 계신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나이트들도 단체로 미쳐있는 상태고. 오죽하면 김상희 팬 클럽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을 정도니까. 하여튼 김상희의 결혼을 보류 됐다. 김훈상은 김환혁과 김환성을 따로 불렀다. 황자 앞에서는 호통을 쳤던 주제에, 따로 모이니 다른 말을 했다. "어차피 팰 거 아예 확실히 팼어야 할 것 아니냐?" "아부지. 그래도 제국 황자인데 너무 심하게 패면 안 되잖아요." "그거야 대충 치료해놓으면 그만이지. 황자인 줄 몰랐다고 잡아떼면 되지 않느냐?" "아씨. 그럴 줄 알았으면 진짜 좀 패놓을 걸." 김환혁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홉 번째 부인? 미친 거 아니에요? 반 쯤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아홉 번째? 진짜 미친 소리다. 첫 번째로도 주기 싫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깝다. 기회를 빌어 진짜 엄청 팼어야 했다. 아버지와 두 형제는 프란토를 반 쯤 죽여놓지 못한 것에 대해 원통해 했다. 김훈상이 입을 열었다. "도둑놈들이 또 있을지 모른다. 조심해야 한다.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그들은 마치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처럼 진지했다. "네. 아부지." "네. 아부지!" 김환성과 김환혁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내 똥개는 내 거야.' '내 누나는 아무도 안 줘.' 한편, 새벽 3시. 파견을 나갔던 나이트 제 6대대 대대장 파커슨이 비밀리에 김훈상을 찾았다. 김훈상이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백제를 관찰하고 돌아오라는. 현재는 크리스도 행방불명 상태다. 백제. 분명 뭔가 있는 나라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몰래 시찰을 보냈다. 파커슨이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김훈상이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이냐...? 확실... 한 거냐?" ============================ 작품 후기 ============================ 김훈상 겉: "제국에게 미안하니까 못주겠네. 이런 하자 쩌는 계집을 줄 순 없지." 김훈상 속: '아... 저 새끼 더 팼어야 됐는데... 어쨌거나 내 딸 시집 안 보낼 수 있겠다' 어쨌거나 결론은 시집은 안가게 되었답니다....끗...? 0135 / 0192 ---------------------------------------------- 이게... 내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 국외 정세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이 주 업무인 제 6대대의 대대장 파커슨. 그가 보고를 올렸다. "백제가... 사라졌습니다." 김훈상은 황당해했다. "뭐라고?" 그럴 리가. 멀쩡하던 나라가 갑자기 어떻게 사라진단 말인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국가가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 처럼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백제가 있던 자리.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단다.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단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불렀다. 김훈상은 예전처럼 '어이' 하고 부르려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부르면 딸이 날 미워하진 않을까? 하는 소심한 생각이 자꾸만 피어 올랐다. 그래서 '어이'라고 못 불렀다. 그런데 파커슨 앞에서 '딸아' 라고 사랑스럽게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절충했다. 사랑하는 딸과 어이.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공식적인 호칭. "김상희 공주." "네. 아버... 아니. 아빠." 순간, 파커슨은 봤다. '지, 지금 헤벌쭉 웃으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냥 웃은 것도 아니고 바보천치처럼 헤벌쭉 웃었다. 금방 정색하기는 했지만 파커슨은 분명히 봤다. 딸을 사랑하는 것도 알겠고 김상희 공주가 범상치 않은 공주라는 것도 안다. 성녀로 칭함받고 있는 것도 안다. 그러나 왕이 저렇게 멍청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파커슨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왜 웃으신 거지?'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빠라는 그 단어가 가진 엄청난 힘을 말이다. 비록 강제적인 거긴 하지만 아빠소리를 듣게 된 김훈상의 목소리가 아주 많이 부드러워졌다. "상희 공주. 백제에 갔다왔던 일을 자세히 읊어봐라." "소녀는..." 김상희는 말을 이었다. 백제에서 특별한 일은 없었다. 크리스의 안내에 따라 여기저기를 둘러봤었다.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굉장히 자상하게 묻고 말았다. "이상했던 점은 없었니?" 하지만 파커슨의 눈치를 살피느라, "니야?" 라고 끝을 이상하게 얼버무렸다. 정리하자면, '이상했던 점은 없었니야?' 쯤 되겠다. 김훈상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는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피식 웃는 그 미소마저도, 김훈상에게는 딸의 사랑스럽디 그지 없는 행복한 미소였다. 그래서 김훈상의 마음이 완전히 열렸다. 무장해제 됐다. 까짓거. 좀 쪽팔리면 어때? 내가 왕인데?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하기로 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는지...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곰곰이 한 번 떠올려보렴.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요." 김훈상은 김상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파커슨은 또 충격 받았다. '폐, 폐하께서 저, 저렇게 다정하신 분이셨던가?' 그는 김훈상과 함께 전쟁기를 겪었다. 전쟁터에서의 김훈상의 모습. 그는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랬던 김훈상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건 이해하기 이전에, 머리에서 이미 엄청난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다. 만약 그가 제 6대대 대대장쯤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충격을 받아 다리가 휘청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훈상이, 그것도 고려의 왕이 저러다니. '심지어 존댓말이라고?' 왕이 존댓말을 쓰는 경우는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의 황제쯤 되면 모를까. '아니. 실제로 황제를 만난다고 해도...' 어쩌면 반말을 쓸 거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파커슨의 머릿속에서 김훈상의 이미지는 그랬다. 파커슨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 속고 있는 건가?' 김상희는 파커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늘상 있는 일 아니겠는가. 파커슨에게는 충격이겠지만, 김상희는 이런 상황. 많이 맞이했었다. 김상희는 생각에 빠졌다. '이상한 점이라...'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이상한 점.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딱 하나. 하나가 떠올랐다. "이게 이상한 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아주 흐뭇한 눈으로 김상희를 쳐다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파커슨의 눈빛을 알아차린 김훈상은 크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딸 앞에만 있으면 체통을 차릴 수가 없다. 이거 정말 큰 문제다. "그래. 무엇이냐?" "공항에 사람이 없었어요."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너무 없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놀이동산에 들어갔을 때에는 또 달랐다. 사람이 굉장히 많았었다. "그렇군..." 김훈상의 판단으로, 백제는 굉장히 이상한 나라다. 딱히 타국과의 교역기록도 없고, 뭔가 전면에 나선 역사가 없는 이상한 나라다. 그런데 재력은 막강한 듯 보였다. '예전 크리스가 노예를 3억에 샀다고 했었지.' 3억은 큰 돈이 아니다. 적어도 김훈상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불시에' 갑자기 '현금'으로 3억을, 그것도 딱히 필요하지 않은 일에 심심풀이로 쓸 수 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어지간한 강대국의 나라라고 해도 그런 불필요한 과소비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김훈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가 혹시 뭔가를 알려주려한 것은 아닌가?' 누가 생각해도 노예를 3억이나 주고 살 필요는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천원 짜리는 만원주고 살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 불필요한 짓을 했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건데. '자기 돈 많으니까 자기한테 시집 오라고 지금 꼬신 건가?' 김훈상은 고개를 저었다.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난다. 도둑놈 새끼, 라는 건 일단 차치하고서 생각을 해봐야 했다. 김상희는 생각에 빠졌다. 왕이 자기를 불러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있다. 크리스가 실종된 상황. 그리고 국외의 기밀등을 담당하고 있는 파커슨이 옆에 있는 상황. 김상희는 대충 상황을 눈치 챘다. '백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 백제에 관해 이상한 점이라. 김상희는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는데..." "이상한 점?" "네. 그런데 정말 사소한 것이라 아빠께 감히 말씀드려도 될런지 모르겠답니다." 파커슨은 생각했다. '폐하께 올라가는 보고는 진중해야만 한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사소하고 필요없는 것을 말할 수는 없는 법. 그랬다간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파커슨은 김훈상의 눈을 봤다. '폐하의 눈에서 뭔가가 쏟아져나오는 것 같다.' 이를테면 빨간색 하트 모양의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좀 이상했다. 김훈상이 말했다. "뭐가 됐든 좋으니 이야기해봐라." 파커슨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뭐가 됐든 상관없으니까 김상희 성녀랑 얘기 하고 싶은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럴 리 없겠지?'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 김훈상은 싱글벙글 웃었다. 보고가 됐든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그냥 딸이랑 대화하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그러니까 지금은 백제 핑계를 대고 공적인 척 하는,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딸. 여행 갔다 왔던 얘기 좀 해보렴. 재미 있었니? 뭔가 특별한 일은 없었고?' 정도가 되겠다. 김상희가 말했다. "정말 사소한 건데... 진짜 괜찮아요?" "그럼. 괜찮고 말고." 당연히 괜찮다. 그냥 말만 같이 해도 즐겁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상한 건데..." "그래그래." "소녀가 여기저기를 다녔단 말이어요?" "그랬겠지."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그 크리스란 놈이랑 데이트 비스끄리무리한 것을 한 셈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어떻게 이상했지?" "모르겠어요." 파커슨은 황당했다. 이게 무슨 보고란 말인가. 보고의 자리에서, '모르겠다'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저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고의 자리에서는 '모르겠다'가 아니라 '부족하여 알아내지 못했다. 알아내겠습니다.' 혹은 '알아보겠습니다.'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자기도 잘 모르겠는데 상황을, 어떻게 이 공적인(?) 자리에서 올린단 말인가. 김상희 성녀는 보고의 보자도 모르는 계집이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김훈상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다는 것. 파커슨은 허탈해졌다. '저렇게 보고를 열심히 받으신 적이 있었던가?' 단언하건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보고를 저렇게 화기애애하게 받으신 적도 없다. 그는 착각했다. 이 자리가 보고의 자리라고. 당연히 아니다. 김훈상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사랑스런 딸내미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는 시간이지, 보고를 하는 시간이 아니다. 대화가 주고 보고는 겸사겸사다. 파커슨의 입장이랑은 완전히 달랐는데, 파커슨은 그걸 이해 못했다. "뭐랄까... 마치 프로그래밍된 사람들 같은 느낌이었어요." "프로그래밍이라..." "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말하고. 그게 딱딱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기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답니다." 그, 그건 보고가 아니잖아! 그냥 단순한 느낌이잖아! 파커슨은 김상희를 말리고 싶었다. 저런 개인적인 판단과 감상에 따른 보고는 아예 안하는 게 낫다. 했다가는 된통 깨지기 마련이다. 저렇게 느낀 것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을 테니까. 저런 보고는 하는 것보다 안 하는게 훨씬 이득이다. 하지만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파커슨은 좀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폐하. 저도 그렇게 보고해도 돼요? *** 우리 송수진씨가 내게 말했다. "공주님. 1주일 뒤면 최소연 공주의 소녀식이 진행 된답니다." "아. 그래?" 이전에 소녀식이 있다고는 했었다. 그러나 나는 참여하지 못했었다. 나는 제국의 마력학원에 가있었으니까. "어느덧 공주님이 벌써 제 1공주님이 되셨네요." 제 1공주. 별 거 아니다. 시집 안 간 공주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공주가 바로 제 1공주다. 시집을 가고나면 완전히 타인이 되어 버린다. 되게 기분 나쁜 말인데, 그냥 씨받이로 팔려가는 거. 그게 이 세계의 현실이다. 어쨌거나 나는 제 1 공주가 됐다. 근데 나 시집은 갈 수 있는 거 맞겠지? 아무래도 좀... 힘들 거 같은데. 응원 좀 해주고 싶다. 진수야. 힘내. 너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있겠지? 환혁이랑 상아를 넘고 망나니 형제를 부순 뒤, 개차반을 뛰어 넘어야 하는데... 아마... 할 수... 이, 있을 거야. 음. 그래. 시, 시집은 보내겠지. 아마도...? 어쨌든 내가 소녀식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건 이제 두 번째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내 소녀식 때. 그리고 지금. '그러고 보니... 내 소녀식때 진수가 왔었는데.' 문득 든 생각인데, 진수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도대체 난 알 수가 없다. 수진씨가 말했다. "어느덧 공주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셨다니... 저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요." 그, 그렇다고 또 울 것 까진 없잖아. 이 세계 여자들은 뭐이리 감동을 잘해? 왕자가 '안녕?' 한 마디만 해줘도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은 여자들이 태반이다. 그래서야 발전이 없지. 이 세계만큼 조련(?)이 쉬운 남자들이 어디 있어? 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애들이라 단순하기 짝이 없는데... 는 나한테만 해당되는 건가. 흠흠. "그 자리에서도 공주님이 가장 빛나실 거에요." "그러면 안 되지. 수연 공주가 주인공인 자리인데." 그래. 그러고보니 내 소녀식 때는 참 가관이었지. 공주들끼리 서열을 정하고 지들끼리 갈구고. 난리도 아니었었는데. '이젠 내가 제 1공주야.' 이번 소녀식 때. 해야할 일은 정해졌다. 공주들끼리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서로 분열이나 일으키고 서로 괴롭히고해서 되겠어? 그럼 될 일도 안 된다고. 여기가 무슨 군대야? 3일이 지났다. 소녀식이 시작 됐다. 나는 최소연 공주를 처음 본다. 최소연 공주는 굉장히 귀여웠다. 8살인데 뭔들 안 귀엽겠어. 나는 제 1공주 자리에 앉았다. 내 옆으로 주르륵. 공주들이 앉아 있는데, 내 밑의 공주들이 꽤 많았다. 나는 공주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대충 보니 20명쯤 되는 것 같다. 개차반씨. 정말 능력도 좋지. 이 정도면 변강쇠 수준인데. 진짜 장난 아니다. 나야 뭐. 원래 공주들과의 교류가 없었으니 잘 모른다 치더라도, 다른 공주들끼리는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나이 14살. 제 2공주인, 김예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 "언니께서는 교류가 거의 없으셨으니... 제가 진행을 해도 될까요?" 그래. 뭐.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녀식에 참여하는 건 또 처음이고. "그래요. 제 2공주가 진행하세요." 김예원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이 소녀식의 주인공인 최소연 공주는 긴장을 한 건지, 겁에 질린 건지. 얼굴이 좀 창백해보였으니까. '긴장해서 그런가?' 제 2공주인 김예원이 아마 거의 막내급이라 짐작되는, 대충 보니 10살쯤 되어 보이는 공주의 뺨을 쳤다. 짝!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짓이야...?'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너. 막내 교육 제대로 안 시킬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최소연 공주는 바짝 긴장했을 거다. 자기 때문에 언니 공주가 뺨을 맞았으니까. 최소연 공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진짜. 뭐하는 짓이람. "김예원 공주." "네. 언니." 그리고 나는 느꼈다. 이 공주. 나를 별로 탐탁치 않아 한다. 공주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던 나고, 공주들 입장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공주인데 갑자기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거니까 불만이 좀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정중하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깔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여긴 네가 낄 데가 아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꼭 이래야 해요?" "언니께서는 여지껏 공주들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짝! 한번 더 소리가 났다. 아까 뺨을 맞았던 공주의 뺨이 붉게 부어 올랐다.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조금...어지러웠다. 제 2공주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잘 안 들렸다. 웅웅 거리는 느낌이랄까. 시간이 조금 지났다. 2 공주의 말이 거의 끝났다. "언니는 어째서 성녀가 되신 거죠?" 모르겠다. 앞에서 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몸 속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질문의 의도가 뭐야?' 너 따위가 감히 성녀야? 공주로서의 역할도 하지 않는 게? 그런 느낌이다. 뭐. 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공주의 행사에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았었으니까. 나만 공주들 중 특권을 누리는 이상한 공주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내가 성녀인 이유는." 이유는 모르겠다.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저 공주의 아픈 뺨을 고쳐줄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든다 자꾸만. 뺨 맞은 공주. 미안한데, 이름을 잘 모르니까 그냥 손짓으로 할게. "공주는 이 쪽으로 오세요." 공주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나는 김예원 공주의 눈빛을 봤다. 네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어? 그런 눈빛이다. 대놓고 말은 못해도, 분명히 그랬다. 그런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있었고. 내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게... 내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작품 후기 ============================ 본격 먼치킨화를 향하여...! +죄송합니다 오늘 너무 늦었네요 0136 / 0192 ---------------------------------------------- 이게... 내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 김상희는 근거 모를 자신감에 가득찼다. 손이 하얗게 물들었고, '나는 저 뺨을 치료해줄 수 있어.'라는 확신에 가득 찼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주들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상 공주들에게 있어서 김상희 공주는 굉장히 특별하고 신비한 존재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데, 성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명할 길은 없지만 왕이 굉장히 총애하는 딸이라고 했다. 남자 관리들은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하여 어느정도는 눈치를 챘지만 공주들은 아니다. 그녀들은 정보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상태고,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하는 소문은 들을 지언정 김상희에 관한 자세한 것들은 잘 모른다. 그녀들이 아는 거라곤 보배칭호, 성녀칭호를 받았으며 나이트들과 김훈상이 김상희를 아끼고 있다는 것 정도. 그녀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김훈상과 나이트가 계집을 아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퍼다 나르다보니 공주들은 긴가민가할 지경이었다. 김상희가 최소연 공주의 뺨을 어루만졌다. 속으로 김상희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질투에 눈이 멀어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김예원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성녀. '녀'라는 글자와 '성'이란 글자가 어떻게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성녀가 자신이 성녀인 이유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분명 뭔가 있었다. 손이 저절로 하얗게 물들다니. 하지만 속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저런 걸로 성녀의 칭호라니.' 뿐만 아니라, '겨우 저런 걸로 국왕폐하와 나이트님들의 예쁨을 받는다니.'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계집이 사내들로부터 이쁨받는 거. 그런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김상희는 실제로 그걸 해냈다. 소문에 불과한 건지, 정말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김상희가 이쁨받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김상희는 순간 당황했다. '얼라리...?' 하얗게 빛나던 손이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잔뜩 겁 먹은 최소연 공주의 뺨을 만지긴 만지는데, 딱히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김예원은 옳다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손이 하얗게 물들었기 때문에 성녀의 칭호를 받으신 건가요?" 겨우 그 정도로? 겨우 그까짓 걸로 왕국을 대표하는 공주가 되었다고? 제국의 마력학원에 입학까지 했고 해외여행까지 갔다올 수 있었다고? 게다가 국왕폐하를 아빠라, 왕자님들을 오빠라 부를 수 있는 엄청난 특권과 혜택 -정작 김상희는 이걸 특혜라고 전혀 생각 안하지만-을 받았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김상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게 아닌데 싶었다. 자신있게 '내가 성녀인 이유를 알려주겠다.'라고 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지 않은가. 최소연 공주의 뺨에는 여전히 손바닥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김예원은 풉, 하고 비웃었다. 대놓고 비웃은 건 아니었다. 티나지 않게, 그러나 김상희는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비웃었다. "저는... 성녀라는 게 정말 대단한 건줄 알았어요. 물론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소문의 기적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것 같네요. 언니." 김상희는 창피했다. 솔직히 반박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박이라는 건 근거가 있을 때나 하는 거다. 지금 뺨도 어떻게 못하면서 전쟁터에서 나이트들을 구했다고? 아무도 안 믿을 거다. 비웃음이나 사면 더 사겠지. 그 때,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이 들어왔다. *** 이게 무슨 쪽팔린 경우야. 엉엉. 나는 울고 싶었다. 아니. 솔직한 말로 김예원 공주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난 별로 상관 없다. 이 아이는 그래봤자 14살의 어린애고 어린애가 날 질투하든, 뭘하든 나는 딱히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시집가면 그만인 아이고 나랑은 영영 볼 일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건 정말 창피했다. 창피하다고. 엉엉. 그렇다고 변명하기도 애매모호한 상황이고, 때마침 누군가 들어왔다. 그런데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불길한 기분은 거의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물어왓!" 헝거비가 하늘을 날았다. 헝거비는 헝겊인형 주제에 앞섶에는 다이아몬드 단추를 달고 있다. 번쩍이는 다이아몬드를 달고 있는 헝거비가 허공을 갈랐고, 이내 그것은 땅에 툭! 떨어졌다. 성녀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똥개다? '반드시, 반드시 패버린다!' 요즘 망나니 형제나 개차반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있는 와중이다. 하지만 저 둘째 망나니 만큼은 용서를 못하겠다. 공주들이 이렇게 많은데서 나한테 그런 쪽팔림을 줘야 겠어? 아. 물론 저 망나니는 이게 쪽팔린 건지도 모르고 그냥 개념 없이 하는 행동이긴 한데. 그래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다. 진짜 패고 싶다. 명치 대라. 아오. 내가 저걸 안 주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울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떡하지? 둘째 망나니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라? 똥개. 너 왜 그래?"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다. 사라졌는데, 내 눈앞에 나타났다. 어윽. 깜짝이야. 아니 뭐 진짜 이런 사기같은 놈이 다있어?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이 마력이라는 건. 도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초인으로 만드는 거야? 공주들은 침묵했다. 뭐랄까. 왕자들의 포스에 짓눌렸다고하는 게 맞을 거다. 모두들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왕자가 왔는데 감히 의자에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미안한데... 왕자들은 너희 신경도 안 쓸걸. 다시 말해 그렇게까지 과도하게 예를 취하지는 않아도 되는데...는 역시 나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려나. 어쨌거나 결론만 말하자면, 난 이 망나니를 패주고 싶다는 거다. 망나니는 나를 요목조목 뜯어보다가,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듯 했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폈다. "상희야." 문자로 표현하자면 '상희야'인데, 육성으로 표현하자면 '상희얌' 정도가 됐다. 그 왜. 그런 거 있잖아. 혀 짧은 소리. 그걸 망나니가 했다. "혹시..." 내게 물었다. "호, 혹시 내가 물어왓해서... 삐졌어?" 문자로 표현하자면 그런 거고, 육성으로 표현하자면 '혹시 내가 물어왓해서 삐져써?' 정도의 발음이었다. 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삐지긴 뭘 삐져. 내 명치를 패버리고 싶은 마음 뿐인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나니는 굉장히 당황했다. "지, 진짜 삐, 삐졌어?" *** 김예원 공주는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랬다가 눈만 살짝 들어 올렸다. '저 공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왕자가 들어왔다. 그러면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게 맞는 일이다. 그런데 저 공주는 뭐가 그렇게 잘났는지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서있었다. '성녀면 다야?' 성녀라고 뭔가 대단한 건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손이 하얗게 물드는 것 정도. '저긴 김환석 왕자님도 계시다고.' 김환석은 여자를 매몰차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김환석 왕자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예를 안 차린다고? 저건 미친 짓이다. 그와 더불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공주들과의 교류도 없었으니 예의범절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참고로 설명하자면 공주들이 왕자 혹은 왕을 대하는 예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공주들 사이에 내려온 관습같은 거다. 왕이나 왕자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한 적 없다. 애초에 그런 것까지 정해줄 만큼 왕이나 왕자들은 한가하지 않을 뿐더러, 공주들에게 관심도 없다. 눈 앞에 날파리가 왼쪽으로 움직이든 오른쪽으로 움직이든 그것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신경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것과 거의 비슷하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왕자들은 별로 신경 안 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관습이 정형화 되면서, 공주들에게는 거의 절대법칙 처럼 되었다. 이를테면 복도에서 왕자를 만나게 되면 한쪽 옆으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왕자가 지나갈 때 까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든가. 이렇게 밀폐된 방 안에서 만나면 왕자가 지나가거나 일어서라고 말을 하기 전까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왕자들은 공주들이 이러고 있는 것도 잘 모른다. 신경 자체를 안 쓰니까. 어쨌든 김예원 입장에서는 한심할 따름이었다. '멍청한 년. 저것도 공주라고.' 그런데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호, 혹시 내가 물어왓해서... 삐졌어?"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탓에, 목소리만 들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김환성 왕자님께서 당황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진짜 삐, 삐졌어?" 일단 이 상황 자체가 쇼킹이고 미스테리다. 왕자가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그런데 더더욱 충격적인 건, 저 미친 공주가 대답을 안하고 있다는 거다. 공주들의 관습에 따르면 왕자가 말을 하면 아무리 늦어도 3초 내에는 답변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3초가 넘었다. 3초는 커녕 10초도 넘었다. 김예원 입장에서 예의도 모르는 한심한 공주 김상희는 거의 30초가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오빠." "으, 응?" "소녀는 물어왓을 하면 자존심이 많이 상해요. 물론 물어왓이 오빠의 애정이 담긴 행동인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공주들 앞에서 물어왓을 하면... 소녀는 가슴이 너무 아프고 울고 싶어요." 그래서 네 명치를 겁나 세게 때려주고 싶어요. 그 말은 참았다. 김예원 공주는 충격에 충격을 더했다. 김예원 공주 뿐만 아니라, 이 곳에 모인 20여명의 공주들이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죽고 싶은가보다.' 아무래도 자살희망자 같았다. 아까 성녀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창피해하더니. 정말로 죽을 셈인 것 같았다. 다들 비슷하게 생각했다. '제 1공주가 완전히 미쳐 버렸어.' 그런데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 오빠가 잘못했어." 김예원 공주는 너무나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참고로 말하면 그녀가 고개를 들었든 말든, 왕자들은 신경도 안 썼다. '와, 와, 와, 왕자님이 사과를 하셨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이런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지? '내가...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너 마음 아프고 울고 싶게해서 미안해. 오빠가 진짜 잘못했어." 그 와중에도 '오빠'란 단어에 굉장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하여튼 공주들의 입장에서 엄청난 충격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기 때문에 공주들이 얼마나 큰 충격의 함정속에 빠졌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에 관한 개념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김환혁이 말했다. "형아. 형아 차례 끝났으면 이제 나도 인사해도 돼요?" 김환성은 이때다 싶었다. 사과는 했는데 아무래도 동생이 안 받아줄 거 같다. 이럴 땐 뭐랄까. 시간을 조금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쟤는 환혁이 녀석을 아끼니까 기분이 풀어줄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환혁이 김상희에게 달려갔다. "누나!" "환혁 왕자님. 저를 보러 오신 건가요?" "당연하지! 저런 계집애들이야 나랑 상관 없는데! 나한텐 누나만 있으면 돼!" 크히히, 하고 해맑게 웃다가 이내 김상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근데 이런 말 하면 누나가 싫어하려나...?" 김상희는 속으로 한탄했다. ...아...망했다. 환혁이도 속세에 찌들고 말았어. 물론 나를 위한다는 건 좋기는 좋은데, 그래도 좀. 환혁이만큼은 물들지 않기를 바랐는데. 김예원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누나만 있으면 돼. 이런 말 하면 누나가 싫어하려나?' 이런 말. 평생 -그래봤자 14년이지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 앞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녀의 능력? 그런 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손에서 빛나는 능력같은 거. 하나도 놀랍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고 신기하지도 않으며 부럽지도 않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 부럽다.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성녀가 된 거야?' 나도 성녀가 되고 싶다. 성녀만 되면 저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러고 싶다! 물론 김예원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성녀가 되어서 저런 대접을 받게된 것이 아니라 저런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성녀가 된 거다. 전후관계야 완전히 틀렸지만 하여튼 김예원은 부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김상희는 차마 '그런 말 하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뒤에는 공주들이 있다. 환혁이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상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환혁이 말했다. "누나가 싫어할 거 같으니까 이런 말 안할게. 취소. 취소야."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왕자님이 공주의 눈치를 살피다니. 심지어 말을 취소 한다니. 공주들은 지금 소녀식을 치르고 있는 건지 충격의 현장에 와있는 건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더욱 놀랍고 충격적인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 작품 후기 ============================ 성녀의 진정한 능력은 아빠 오빠 동생 남친 소환이라고 합니다...? (퍽) 0137 / 0192 ---------------------------------------------- 이게... 내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 김환석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김환석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공주들은 긴장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김환성도 김환혁도 아닌, 바로 김환석이었으니까. 김환석이 무언가를 아주 성의없는 태도로 바닥에 툭 던졌다. "받아라. 선물이다." "네...?"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지금 타이밍에 웬 뜬금없는 선물? 게다가 선물이라면서 무슨 쓰레기 버리듯 이렇게 주냐?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다이아반지라도 그딴 태도로 주면 하나도 안 기쁠 것 같다. 이 탑 오브 망나니야. 하여튼 선물 같지도 않은 선물을 준 김환석은 볼 일 다 봤다는 듯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김상희 입장에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 타이밍에 왜 선물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고 뭔데 툭 던지고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선물을 받긴 받았는데 하나도 안 고마웠다. 그에 반해 김예원 공주는 부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김환석 왕자님이 저렇게 다정하셨다니.' 공주를 찾아와 직접 선물을 하사하시다니. 어떻게 저렇게 자비로울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궁중 내에 퍼진 소문. 그러니까 김환석 왕자는 계집을 매몰차게 대한다는 그 소문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상희는 바닥에 떨어진 검고 동그란, 얼핏보면 조약돌 같은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설마하니 진짜 조약돌일까 싶었는데 김환혁이 말했다. "누나. 형아가 그러는데 그거 절대로 몸에서 떼지 말래." "이게 뭔데?" "음. 글쎄. 하여튼 명령이라고 했어. 절대 절대로 몸에서 떼면 안 된대." 김상희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이런 선물. 하나도 안 좋다. 몸에서 절대로 떼어놓으면 안 된다고 명령을 하면서 주는 선물이 도대체 어디 있어? 이건 선물이 아니고 강요다. 뭐랄까. 강매당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게 도대체 뭐지?' *** 알렉스가 김환석을 찾았다. 마침 김환석은 방에 돌아와 있었다. "왕자님.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은데요." 알렉스는 요즘 신이 난 상태다. 왕과 왕자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기록들이 아주 많았으며 상당히 흥미로웠다. '방금 선물을 전해주셨겠지!' 그럴싸한 가정을 세웠다. '지금 왕자님은 선물을 성공적으로 하사하셨다.' 지금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김환석은 내심 뿌듯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상희는 이딴 선물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알렉스가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했다. 착각했다. '김상희 공주님이 굉장히 기뻐했겠지?' 당연하다. 무려 왕자님이 직접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똥이라고해도 기쁘게 받아야 할 판인데, '그런 엄청난 물건을 받으셨으니 당연히 기뻐했겠지.' 심지어 이 선물은 가히 보물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물건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래서 뿌듯하기도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상태인 것이 틀림없어!' 자세히 보니 김환석은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귓볼이 조금 붉어진 상태. 알렉스는 정확한 결론을 내렸다. '동생병신이 기뻐하고 있구나.' 생각을 정리한 알렉스가 물었다. "왕자님. 배리어는 잘 작동 합니까?" "그래. 네 도움이 컸다." "에이 뭘요. 예산 지원이 그렇게 빠방했는데 아무것도 못하면 그게 학자입니까? 등신이지." 그리고 알렉스는 상희학의 오묘함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개발비만 300억이 들었지.' 개발비만 300억이 들었다. 순수 초기 투자비용만 그 정도다. 그걸 아낌없이 동생에게 주고 오다니. 아니. 애초에 이걸 개발한 배경 자체가 오로지 김상희 공주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역시 상희학은 진리였다. 세상의 모든 상식을 파괴하는, 비상식적인 진리 말이다. 알렉스는 고려왕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학자들 중 하나다. 김환석 왕자가 사재로 300억 정도는 빼서 지원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산을 아낌없이 투자 받았다.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전입미답의 학문. '마력이 없는 사람을 위한 학문'과 기술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김환석과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서 괴물 같은 성과가 하나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반자동 배리어'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품인데다가...' 가격을 책정한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1000억원을 호가하는 물품이겠지. 아니. 애초에 가격을 잡을 수조차 없는 엄청난 물건인데.' 최소 1000억원은 넘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상희는 뭐 이딴 거지 같은 게 다 있냐, 라고 생각을 했지만 기실 그 것은 가치를 측량할 수 조차 없는 보물인 셈이다. 반자동 배리어는, 소지자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전방위적으로 파악하고 탐지하여 배리어(보호막)를 펼쳐주는 일종의 방어도구라고 할 수 있다. 마력이 없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도록 반영구적인 초소형 마력충전장치가 들어가 있다. 저번 제국과의 국지전에서 배리어 사용 및 미사일 방어 연구 데이터를 토대로 이번에 새로이 개발한 엄청난 물건이었다. 알렉스가 정곡을 찔렀다. "김상희 공주가 기뻐했겠군요. 그래서 왕자님도 기분이 좋으시죠?" 물어라. 미끼를 물어라. 네 입으로 그렇다고 말해라! 알렉스의 눈이 기이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김환석은 역시 쉽지 않았다. "그깟 계집이 좋아하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아. 그러세요. 그깟 계집 때문에 매일같이 밤을 새우면서 이거 개발했어요? 심지어 초기 연구비만 300억 들었잖아요? 이게 처음이 아닐텐데. 저번에는 위치추적기를 달았잖아. 그러고보니 왕자님은 매일같이 수백억 단위로 개발해서 수천억 단위의 물품을 김상희 공주님에게 선물해주잖아요. '나참. 제 입으로 인정만 하면 정말 최고겠는데.' 상희학을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그런 열정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 최소연 공주의 소녀식은 김상희 공주의 소녀식 이후로 가장 떠들썩했다. 일단 왕자가 세 명이나 찾아왔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자에 이어 이번에는 왕이 나타났다. 최소연 공주는 정신이 없었다. '도, 도대체 왜...?' 왕까지 직접 나타나다니.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황이었다. 김상희가 '아빠. 오셨어요?'라고 말하자 공주들은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지만 그걸 실제로 할 수 있을 줄이야. 저런 걸 실제로 들을 줄이야. 공주들은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다. 충격도 충격이거니와 너무나 부러웠다. 어떻게 왕에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공주들의 심리상태와는 별개로 김상희는 찝찝해졌다. '이거... 느낌이 꼭...' 배가 살살 아파왔다. 2~3일 전부터 증상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느낌이 확 왔다. 여태까지는 잊고 있었는데 이게 어떤 느낌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초경이 시작되는 느낌인데...' 약간 늦다면 늦은 나이일 수 있겠지만 김상희는 아직 초경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변비기도 좀 있었고.' 찝찝하게도, 하필이면 이 때 피가 좀 새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팬티가 축축해지는, 굉장히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걸 이제야 떠올린 거지?' 이제야 떠올렸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김상희의 나이로 치자면 초경은 30년쯤 전에 경험했던,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이니까. 더더군다나 요즘 겪었던 일이 보통일이던가. 납치부터 시작하여 전쟁까지. 엄청난 일들 때문에 정신 없다보니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그런데 김훈상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피 냄새가 난다.' 김상희가 안다면, '그렇게 쓸데 없는 곳에 마력을 쓰지 말아요 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김훈상은 마력을 활성화 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피냄새는 굉장히 익숙한 냄새였다. 누가 뭐래도 전쟁기를 겪었던 왕이니까. '분명히 피 냄새다.' 딸등신 김훈상은 괜히 불안해졌다. 굉장히 불안했다. 그의 입장에선 불안할 법도 하다. 김상희는 몇 번이나 납치당할 뻔 했다. 심지어 아주 오래 전, '독으로 김상희를 음해하려고 했던 계집도 있었다.' 그래서 사형을 시켰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가 참, 고생길을 거쳐왔다. 그냥 좀 내버려두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마력을 활성화시켜 냄새의 근원을 찾자. '김상희...!'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훈상이 명령을 내렸다. "미첼을 불러와라!" 김훈상은 너무나 뛰어난 왕이며 굉장한 남자라서 여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김상희에게서 피냄새가 난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스페셜 나이트들도 깨달았다. '어떤 개새끼야!' 감히 성녀에게서 피가 나게 만들었다. 여자에 대한 지식과 개념이 없는 남자들이 호들갑을 피우기 시작했다. 김훈상은 진지해졌다. 이전에도 있었다. 김상희를 음해하려고 했던 공주가. 그래서 일부러 공주들과의 교류를 못하도록 막았었다. 기록의 관에 나이트를 두 명이나 배치시켰었고. 김상희는 모르고 있지만 김훈상이 일부러 그렇게 격리시킨 거다. 그렇게 격리시켰었는데, 기어이 이번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김훈상이 말했다. "이 곳을 폐쇄한다." 아마 음식에 독을 탔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상희를 살펴봤다. 체온. 맥박. 모두 정상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게다가 통증도 조금 있는 것 같았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안아들었다. "괜찮으냐?" "......." 김상희는 김훈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얘. 갑자기 왜 이래? 설마하니 아주 조금 새어나온 피 냄새를 맡고 이러는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서 당황하느라 대답을 못했는데, 그 때문에 김훈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시간부로 자리에서 움직이는 계집은 모두 목을 잘라 버리겠다." 이를 갈았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다. 계집들이 아무래도 질투라는 걸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누가 벌인단 말인가! 김훈상의 특명으로 인하여 건물이 모두 폐쇄되고 스페셜 나이트들이 집결했으며 회복의 관 관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김훈상이 말했다. "김상희를 옮겨라. 지금 당장." "...아빠?" 얘 도대체 왜 이래. 김훈상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만 믿어라. 아빠가 반드시 널 지키고 살려주겠다. 그러니까 괴로워도 조금만 참아라." 그러니까 아빠님. 당신 왜 이러냐고요...라고 생각하던 김상희는 그제서야 좀 깨달았다. 김훈상이 왜 저러는지. 15년 눈칫밥 먹고 살아온 그녀다. 이제 척하면 척이다. "아빠. 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건 그냥 여자들은 당연히 겪는 현상이라고요. 배가 살살 아프고 똥이 조금 안 나오고 찝찝할 뿐이라고요. 30년 전에 경험했던 거라 잘 기억이 안 났지만. 김훈상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괴로울 것이 뻔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며 의젓하게 말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안타까웠다. 오해 제대로 했다. "미첼! 지금 당장 옮기라고 말했다." 김상희가 왕의 말을 잘랐다. "아빠.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괜찮은 척 하지마라. 나는 알 수 있다. 지금 네 몸에 위험한 독이 침투되어 있다." 아. 그러니까 안 위험하다고. 지금 당신은 과보호에 중독되어 있어서 위험해 보이는 거 뿐이라고. 당신은 내가 모기한테 물려서 피가 조금 나면, 모기의 씨를 말려버릴 사람이잖아. 이 과보호 중독자야. "아니에요. 아빠. 저는 독에 당하지 않았어요." 미첼의 눈이 커졌다. '왕의 말에 저렇게 토를 달아...?' 상당히 위험한 독인 듯 했다. 정신에도 관여하는 위험한 약물인 것 같았다. 그의 상식으로, 왕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듯한 저런 태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하다. 그것도 공주가 저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아빠. 소녀는 정말 괜찮답니다. 그보다..." 아씨. 나는 지금 여자가 되어가는 것 뿐이라고! 쉽게 말해 생리 한다고! 이 멍청한 아빠야! 김상희는 외치고 싶었다. 김상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김훈상은 눈에 불을 켜고 있지도 않은 범인을 찾았다. "누구냐? 지금 자수한다면 괴롭지 않게 죽여주겠다." 아니. 그러니까 일단 나 좀 보내달라고. 찝찝해 죽겠다고. 이 느낌. 진짜 싫다고! 김상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초경치고는 양이 좀 많은 것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질질 새어나오는 이 느낌. 으. 정말 별로다. 진짜 싫다. 결국 김상희는 말하고 말았다. "소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소녀는 아빠를 평생 원망하고 미워할 거에요!" 이 멍충이 아빠야! 제발 비켜! 그와 동시에 소녀식이 진행되던 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김예원 공주는 망연자실했다. '저 공주는... 이제 죽는다.' 모든 공주가 그렇게 생각했다. 왕에게 저따위 말을 하다니. 사형 확정이었다. 잠시간의 정적을 깬 사람은 다름아닌 김훈상이었다. "나는..." ============================ 작품 후기 ============================ 오해의 스케일은 이렇게 커지게 되고... 0138 / 0192 ---------------------------------------------- 이게... 내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 홀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소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소녀는 아빠를 평생 원망하고 미워할 거에요!" 다른 사람이 듣기에 완전히 미친 말이고, 김훈상이 듣기에 완전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김훈상은 황당해졌다. '정신적으로도 작용하는 약물이 틀림없다!' 어떤 미친 계집이 사랑하는 딸에게 이런 짓을 벌였나 싶어 분노가 차올랐고 그와 동시에 '미워한다'라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나는..." 나는 그저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 거다. 아빠를 믿어라. 그 독. 내가 반드시 치료해주겠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이 없게도 김상희가 말을 잘랐다. "아빠. 소녀는 이제 여자가 되어가고 있어요." 이 정도 말했으면 제발 알아 들어라. 아니. 애초에 넌... 여자가 생리라는 걸 하는지도 모르지? 김상희는 답답해졌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이건 김상희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훈상은 김훈상대로 황당해졌다. 여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과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지금 김상희의 심장이 굉장히 빨리 뛰고 있다. 정상이 아니었다. 김상희는 울고 싶었다. '쪽팔려 죽겠다고!' 일단 부탁을 하고 봤다. "아빠. 스페셜 필드를 펼쳐주시어요." 원래대로라면, 스페셜 필드를 펼쳐주시는 영광을 제게 하사하신다면 저는 너무나 감동스러워 행복할 것 같답니다. 정도로 말했을 거다. 그런데 마음이 급했다. 더더군다나 지금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혹시라도 비쳤다가는 정말로 창피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예원 공주를 비롯한 20공주와 미첼 관장은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따. 스페셜 필드를 펼쳐주시어요. 말투는 공손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스페셜 필드를 펼쳐라'라는 말이다. 남자 관리들도 왕에게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한다. 왕에게 감히 뭔가를 요구하다니. 아무리 성녀라지만 이건 도를 지나쳤다. 이상한 건, 스페셜 나이트들이 제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 미첼은 생각했다. '분명 뭔가 있다. 스페셜 나이트는 과도한 충정심을 가진 집단인데.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지? 폐하를 저렇게 모욕했는데?' 미첼과 공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런 와중에 김훈상이 스페셜 필드를 일단 펼치고 봤다. 김상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김훈상이 김상희를 안아 들었다. "너는 빨리 치료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내 목숨까지도 떼어내서 너를 구하고 말겠다. 단단히 오해한 김훈상이 결연한 각오를 다지고 있을 무렵,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아빠. 소녀는 여자가 되어가고 있어요. 여자는 주기적으로 이렇게 피를 흘린답니다." 그제서야 김훈상은 뭔가를 떠올렸다. "혹시..." 들어보기는 했다. 아니. 머릿속 깊숙한 곳에는 이미 여자들의 생리에 관한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다만 평소 워낙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문제인데다가 김상희가 독에 당했다는 생각에 빠져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뿐. 김훈상은 그 천재적인 두뇌를 회전시켜 한 단어를 생전 처음 입 밖에 냈다. "그렇다면... 초경을 시작한 것이냐?" 그랬다. 초경이란 단어. 어디선가 한 번 봤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 책에서 봤던 것 같은데, 잊고 있었다. "네, 아빠.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사실 이 곳 여자들의 경우는 성교육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 자신의 몸에서 이렇게 피가 나오면 당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주의 경우는 그나마 낫다. 시녀들이 항시 붙어있으니까말이다. 하지만 김상희는 이미 알 거 다 아는(?) 여자다. '어휴 진짜...'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생소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빠. 아빠가 소녀를 걱정하는 마음은 정말 잘 알겠어요. 그 마음. 너무나 감사해요." 두 번 감사했다가는 또 누군가를 참수시킬 것 같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 말은 참았다. "그러니까 소녀를 어서 방으로 돌려주...응?"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잘 모른다. 김훈상이 워프라는 걸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이 워프라는 기술은 상당히 불안정한 기술이라 몸에 무리를 많이 준다는 걸 말이다. 송수진이 기겁했다. "에그머니나!" 김훈상이 명령했다. "내 딸을 잘 보살펴라." 그렇게 명령한 것 까진 좋았다. 시간이 흘렀다. 김상희는 김훈상을 힐끗 쳐다봤다. 저 개차반. 도대체 말을 안해주면 모른다. 답답해 죽겠다. 그래도 아부성 멘트는 날려줬다. "아빠. 사랑하는 아빠." "무슨 일이냐?" 김훈상은 여전히 걱정하는 기색. 다른 건 다 필요없고, 뭐가 됐든 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온 다는 것만 중요했고, 그게 김훈상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아빠가 옆에 있으면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네 옆에 있다. 내가 네 아빠니까." ...아. 스트레스! 그럼 아빠 당신 앞에서 옷 내릴까? 속옷 벗어? 뭐 어쩌라고! 김상희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 개념 없는 아빠야! 결국 직설적으로 해석해서 말해줘야했다. "아빠. 제발 나가줘요. 아빠가 나가셔야 소녀는 무탈해질 수 있답니다." 아빠. 아니 왕을 쫓아내는 모습에 송수진은 저도 모르게 수건을 땅에 떨어뜨리며 몸을 벌벌 떨었고, 축객령을 받은 김훈상은 충격에 휩싸였다. 김상희가 충격에 빠진 왕을 달래줬다. "소녀가 금방 아빠를 찾아뵐게요. 아빠가 소녀를 걱정하시는 모습에 소녀는 무척 감동받았어요. 뽀뽀 백 번 해드리고 싶어요." 충격에 빠진 왕이 충격의 늪에서 헤어 나왔다. 왕이 확인했다. "백 번이다. 숫자 센다." *** 최소연 공주의 소녀식은 충격의 도가니였다. 왕자들과 왕의 등장. 김상희의 만행까지. 거기에다가 왕은 갑자기 사라지는 기적까지 보였다. 공주들은 더이상 놀라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상희가 돌아왔다. 그 옆에는 왕이 함께 하고 있었다. 돌아온 김상희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아빠. 부탁이 있어요." 감히 공주가 왕에게 부탁이라니. "부탁?" 그런데 김훈상은 행복해졌다. 딸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한다는 거. 자신을 그만큼 믿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김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허세력이 가득해졌다. "뭐든지 말만 해라." 기세만 봐서는, 하늘의 별도 따다줄 것 같았다. 아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실제로 가져오고도 남을 위인이지만. "공주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요." "네가 말이냐?" "아빠의 눈에는 한없이 여리고 작은 어린 아이지만, 이래봬도 소녀는 왕궁의 제 1공주랍니다." 제 1공주든 뭐든 상관없다. 김훈상에게 다른 딸들은 그냥 여자1. 여자2다. 그에게 있어서 딸은 김상희 한 명 뿐이었으니까. "그런 걸 왜 굳이 만드려고 하지?" 공주들은 얼이 빠졌다. 왕에게 어떻게 저런 부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사형당한 줄 알았던 공주가 다시 나타난 것도 신기한데, 어떻게 저런 기적들을 일궈낼 수 있단 말인가. 왕에게 부탁하는 공주. 상상해본 적도 없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공주들의 커뮤니티는 예전부터 음성적으로 진행되어왔답니다." 그건 김훈상도 안다. 신경 안 쓰고 있을 뿐. "그걸 양성화 시키고 싶어요." 그늘에 숨어있다보니 뭐 이상한 것도 많고요. 쓸데없는 허례허식 같은 것도 있고. 이상한 군대 비스끄리무리한 문화도 있고요. 차라리 그냥 밖에 끄집어 내서 양성화 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김상희는 생각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성공리에 마친 것 같다. 물론, 제국의 위협이 남아 있고 왕궁 밖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는 한다. 그래도 일단 왕궁 내에서의 생존권 확보는 성공했다. 언제까지나 살아남는 것에만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자들끼리 뭉쳐도 모자를 판에 서로 서열을 가르고 저희들끼리 '갑질'을 하고 있다. 그 문화. 없애버리기로 했다.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그렇지만, "네 부탁이면 들어주겠다." 딸의 부탁이니 들어주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집행부의 부장 에반스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왕궁 내 부처. '프린세스'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에반스는 집무실로 돌아와 투덜거렸다. "폐하께서 요즘 확실히 이상하시단 말이야." 공주에게 과도한 관심을 쏟는 것도 이상하고. 하여튼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왕의 자리를 유지하시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신 것 같기도 하고. 솔직한 말로 화가 났다. 집행부. 그냥 놀고 먹는 기관 아니다. 집행부 관리들은 항상 바쁘다. 인력도 부족하다. 예산은 더더욱 부족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그것도 전혀 쓸모도 없는 공주들만의 기관을 만들라니. 뭐 이런 어이없는 명령이 다 있나 싶다. 에반스의 비서인 스티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보,보,보,보, 보십시오!" 스티븐은 충격을 받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천만. 억. 십억. 무려 10억이었다. 집행부의 예산통장에 10억이 이체됐다. "폐, 폐하께서 지원금이라면서 10억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왕자님 오셨습니까?" 김환석이 집행부장의 집무실에 들렀다. 검은색 가방을 하나 건넸다. 별 거 아니라는 듯 건네줬다. "지원비다. 프린세스. 얼마나 잘 운영되는지 두고 보겠다." 그리고 김환석은 집무실을 나섰다. "부, 부장님... 1, 10억입니다..." 10억이었다. 뭐 이리 억단위 숫자가 쉽게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뒤. 제국에 있던 김형석 왕자가 왕궁에 돌아왔다. 그리고 집행부를 찾았다. "김형석 왕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오랜만이네요 에반스." 김형석이 뭔가를 건넸다. 제국에서만 생산되는 특수광물 프린스톤이었다. 주먹만한 크기다. "우연한 계기로 얻을 수 있었어요." "이, 이, 이 귀한 걸 어째서 제게...?" "집행부의 예산으로 쓰세요. 요즘 인력도 부족하고..." 그리고 강세를 줬다. "새로운 부서를 만드셨다면서요? 그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선 예산이 필요한 법이죠." 프린스톤. 그것도 주먹만한 크기. 시가로 30억이 넘는 귀중한 보물이다. 에반스의 입이 찢어졌다. 행복해졌다. 예산이 무려 50억이 넘게 들어왔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김상희 공주가 성녀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김상희 공주는 성녀가 아니라, 예산을 받게 해주는 예산의 여신이었다. 적어도 에반스에게는 그랬다. 나이트들과는 다른 의미로 김상희 만세를 외쳤다. *** 왕의 특별명령이 있었고, 김환석을 중심으로하여 한 가지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이미 기본 이론은 확립되어 있었다. 이 학문에 있어서 1인자는 김환석이었다. 마력을 갖지 않은 사람을 위한 문물. 이 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김환석밖에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리고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마력이 없는 사람에게 효과가 탁월한 진통제를 만들었다. 이걸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김상희가 생리를 하면 아프다는 사실을 말해줬기 때문이다. 단순히 좀 아프다고 말했을 뿐인데, 세계를 변화시킬지도 모를 엄청난 발명품이 탄생했다. "원래는 진통제로 개발했는데... 남자의 마력 순도를 높이는 것에 탁월하다고 하더라고." "대박이 났군." 마력의 순도를 높여주는 약물. 여지껏 그런 게 없지는 않았지만 이만큼 효과가 탁월하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김환석은 돈방석에 앉게 됐다. 수량이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되었으니까. 김상희 공주를 안 아프게 해주고 싶다는 그 얼토당토않은 열망은, 김환석을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줬다. 전 세계로부터 돈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며 공장을 증축하고 있다. 공장이 증축되기만 하면, 김환석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순 수익이 약 900억원 정도 될 거라고 추산하고 있다. 김환석이 김상희를 찾았다. "어이." "네. 오빠. 축하드려요. 정말 큰 성공을 거두셨어요!" 김환석은 무표정한 눈으로 김상희를 쳐다봤다. 하지만 김상희는 느낄 수 있었다. 봤지? 네 오빠가 이 정도야. 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기이한 표정이었다. "오빠는 정말 최고셔요." 김환석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기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아, 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김환석이 퉁명스레 말했다. "시끄럽고. 이거나 받아라. 어차피 쓰레기니까." 절대 쓰레기 아니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진통제. 그걸 김상희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시크하게 밖으로 나가면서 한 마디 했다. "아프지 마라." 그리고 얼마 뒤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사실이었다. 그 변화의 시작은 바로 최소연 공주였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 아직 안 끝났습니다.후훟 0139 / 0192 ---------------------------------------------- 이게... 내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 최근 떠들썩한 소녀식을 치르게 된 최소연공주에게서 마력반응이 나타났다. 공식적으로는 마력을 가진 세 번째 여자가 된 셈이다. 마력의 양 자체도 그렇게 적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고려왕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상당한 순도 높은 마력을 가지고 있었고 마력의 절대량 역시 적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고려왕궁 내를 한차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그럴 리 없다. 잘못 된 조사인 것이 틀림 없다." 하지만 김훈상은 알고 있다. 최소연 공주에게서 실제로 마력반응이 나타났다.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헛소문을 날조하고 퍼뜨리는 놈은 즉결처분하겠다." 김훈상은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금 제국이 김상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마음 같아선 제국을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 상황이다. 그러한 가운데 김상희가 마력을 만들어주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제발 평범하란 말이다.' 김상희가 엄청난 능력을 가졌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능력을 가진 계집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의 왕은 기뻐해야하는 게 맞다. 그러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게 좋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그냥 평범하게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김훈상은 최소연을 따로 불러 입단속을 시켰다. "계집. 네 몸에는 마력이 생긴 것이 아니다. 잠깐 이상반응이 나타났을 뿐이다. 알겠냐?" "예. 폐하." 그러나 김훈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궁 내에선 최소연 공주가 마력을 가지게 됐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지게 됐다. 애초에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다보니 입단속을 모조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다행한 일이 벌어졌다. 최소연 공주에게 생겨난 마력이 다시 사라지게 된 거다. '옳거니.' 여자에게 마력이 생겨났으면 좋아하는 게 맞다. 전력의 증강을 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김훈상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마력이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증거가 없어졌으니, 그 소문은 헛소문이라 일축시킬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왕궁 밖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계집의 손에서 빛이 번쩍 했더니 여자도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더라. 와 같은 허황찬란한 이야기를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 2공주. 김예원 공주가 말했다. "언니. 제가 정말 잘못 했어요. 사죄 드릴게요." *** 공주들의 커뮤니티 '프린세스'. 이 프린세스는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물론 대외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다.- 발호와 동시에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했다. 음성적인 커뮤니티가 아닌 양성적인 커뮤니티다. 그 차이는 시설에서부터 두드러지게 차이가 났다. 공주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장미관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새로운 건물이 생겼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존 다른 건물로 쓰려고 잠시 비워뒀던 건물을 '장미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완공시켰다. 장미관의 규모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겨우 5층짜리 건물이다. 건물 자체는 5층밖에(?) 안 되지만 그에 딸린 정원이 300평이 넘었다. 정원 내에는 큼지막한 분수대와 잘 다듬어진 장미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주들은 감격했다. 눈물을 흘리는 공주도 있었다. "공주들의 건물이라니..." 공주들은 이런 것을 꿈에도 꾸지 못했다. 공주들만의 정원. 그리고 공주들만의 건물이 생기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공주들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김상희도 놀랐다. 이 정도 건물과 정원이라니. 척 봐도 엄청 돈 많은 어느 중세 귀족이 할 거 없어서 만들어 놓은 초호화 별장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고려왕가가 정말 돈이 많기는 많구나 싶었다. 좀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돈지랄'같은 느낌이랄까. 김상아가 달려와 김상희의 품에 안겼다. "언니! 이게 다 언니 덕분이어요." 상아는 언제나 그렇듯 상희의 품에 안겨 얼굴을 마구 부볐다. 마치 어린 강아지가 주인에게 그러하듯 말이다. 김상희는 김상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말했다. "상아는 언니를 죽일 셈이니?" "응...?" 김상아는 마력을 가진 여자다. 그녀가 힘 조절 제대로 못하고 김상희를 안으면, 김상희는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른다. "미, 미안해요. 언니. 상아가 잘못 했어요." "아니야. 괜찮아요." 김상아는 활짝 웃으며 어깨를 쭉 폈다. 장미관 정원 한 켠에 마련된 쉼터에 공주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그리고 김상아가 김상희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 언니에요." 그거 모르는 사람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상희는 이 곳 모든 공주들의 언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제 1공주니까. 김상아는 밝게 웃으며 또 말했다. "우리 언니라니까요?" 또 웃었다. 행복하게 웃었다. "내 언니에요!" *** 머리가 시커멓게 탄 알렉스가 푸념했다. "왕자님. 이거 출력이 너무 센 거 아닙니까?" "출력이 좀 약한 것 같군." 알렉스는 묻고 싶었다. 이거 잘못하면 사람 잡는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환석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장미관은... 정말 건물 자체로도 보물이지.' 공주들은 모를 거다. 이 장미관을 완공하는데 도대체 얼마의 돈이 들어갔는지. 마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최첨단 설비가 들어간 엄청난 건물이다. 게다가 광역 배리어가 펼쳐져 있어서 허가를 받지 않은 '남자'가 장미관을 침범하면 사이렌이 울리며 전기충격을 주게 된다. 이 광역배리어를 펼친 것은 김환석의 의지이자 투자였다. 김환석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도둑놈 새끼들.' 한진수. 곽기현. 황자. 기타 등등. 그의 눈엔, 세상의 모든 남자놈들이 도둑놈들 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런 특단의 대책을 강구한 거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병신의 병신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김환석은 돈방석에 앉았다. 하루 수백억의 순이익이 생긴다.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1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달 치 수익을 모조리 이 건물에 투자했다. 더 황당한 건 왕도 그걸 말리지 않았다는 것. 다른 나라에서 들으면 비웃을 거다. 공주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주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거기에 수천억 이상의 돈을 쏟아붓다니. 미친 짓이다. 알렉스는 허허- 웃고 말았다. '더 황당한 건...' 제일 황당한 건 따로있었다. '건물의 명의를 김상희 공주님으로 해줬다는 거지.' 덕분에 김상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제일 부자 공주가 되었다. 알렉스가 추산하기로 장미관과 그 정원은 시가로 치면 최소 수조원에 달하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초특급 건물이다. 일단, 마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문물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김환석 뿐이다. 그런 문물과 지식이 총동원 된 건물이다. '아마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사자관보다도 더 안전할 것 같은데.' 그런 문물과 지식과 기존의 문물이 결합 됐다. 덕분에 장미관은 왕궁 내에서도 가장 안전한 건물로 자리 잡게 됐다. "하여튼 출력은 좀 낮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 더 올린다." "그러다 진짜 사람 죽어요." "죽기 싫으면 접근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실수로 들어오면요?" "......." 김환석이 말했다. "돈으로 보상한다." 알렉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양반아. 그게 되겠어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하지만 김환석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희학의 이론에 따르면, 동생 병신의 안전에 관한한, 동생 병신은 과보호와 과한 대처를 하고도 남는데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돈지랄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동생병신이라지만 어떻게 수조원짜리를 그냥 줘?' 심지어 당사자는 자기가 부자가 된지도 모른다. 같은 시각. 김상희 공주가 공주들을 불러 모았다. *** 공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공주들은 이 모든 게 김상희 덕분에 이루어졌다는 걸 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건물 자체가 김상희 공주를 위해 지어진 선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확실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공주들은 김상희가 '성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봐도, 이 정도로 대단했던 공주는 없었으니까. 김예원 공주가 말했다. "언니. 제가 정말 잘못 했어요. 사죄 드릴게요." "김예원 공주?" "저를 죽여주시어요." 김예원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감히 언니를 질투했었다. 언니를 욕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비웃었었다. 그 모든 걸 사과했다. "못난 제가... 언니를 질투했어요." 그, 그랬었지...하고 김상희를 멋쩍게 웃었다. 사실 김상희는 그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일일히 신경쓰기에, 김상희는 너무 바빴다. 납치도 당해야 하고(?) 전쟁터에도 휘말려야 하며(?) 개차반에 의해 죽을 것 같은 창피함도 무릅써야(?) 하니까. 하여튼, 그녀는 14살짜리 공주가 질투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에 일희일비할 만큼 속이 좁지 않았다. "너무 신경쓰지 마요. 김예원 공주의 사과는 잘 받았어요." 김예원 공주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를 이렇게 용서하여 주시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정말 감사해요."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딸이다." *** 나는 말하고 싶었다. 얘네도 당신 딸이거든요? 이 아빠야. 나만 네 딸이에요? 차별도 저렇게 대놓고 차별하면 나머지 공주들이 상처받잖아. 하지만 공주들은 딱히 상처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공주들은 아빠로부터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도, 경험도, 기대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다른 애들 앞에서 나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대할 수는 없겠니. 아니. 적어도 말투는 비슷하게 해주지 않으련...? 다른 애들한테 말할때와 나한테 말할 때. 분위기와 말투 자체가 너무 달라서 나조차도 적응이 안 될 지경이다. 개차반이 내게 말했다. "김상희 공주. 최소연에게 했던 것을 또 할 수 있겠니?" 얼씨구. 할 수 있겠냐? 도 아니고 할 수 있겠니? 라고? 게다가 저 자상한 눈빛은 뭐야. 아. 고맙긴 무지 고마운데, 엄청 신경쓰이네. "어이. 너 나와 봐라." 그런 주제에 다른 공주에게 말할 때엔 저렇게 정색이다. 당신이 그러니까 공주들이 겁을 먹지. 나한테 하는 것의 반만 해줘도 쟤네는 감사하다면서 울고 감동 할 걸. 이걸 고마워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온다. 개차반은 나와 공주들을 데리고 몇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그래서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절대로 장미관을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사실을 발설하는 계집은 혀를 잘라버리겠다." ...요즘 잊을 뻔 했는데 당신 개차반 맞구나. 나한테는 따로 말했다. "상희 너도 입 조심하도록 해라.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상상하기도 싫으니." ...아...예. 고마워요... 저 공주들 눈빛 어쩔 거야. 나를 흠모하는 눈빛인지, 부러운 눈빛인지 분간이 안 되네. 무슨 사실인고 하니, "언니. 저에게도 그 빛을 사용하여 주시어요. 부탁드려요." 내 능력에 관한 일이었다. 나는 내 의지대로 하얀 빛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 빛은, 마력이 없는 여자들에게 마력을 선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에게도 마력이 생긴다? 물론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 적인 건 아니었다. 마력을 가지게 되는 기간은 약 3일 정도. 그러니까 일시적으로나마 마력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공주들이 앞다투어 김상희에게 몰려 들었다. "언니. 저도 그 빛을 받고 싶어요."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냄새나는 계집년들아." ...누가 그 아빠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좋게 말해도 될 걸, 꼭 저렇게 말해야 되나 싶다. 망나니 등장이다. 우리 둘째 망나니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내뿜으며 공주들의 입을 한 번에 다물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얘네 부자. 이중인격 아냐...? "똥개. 중요한 얘기가 있어." "중요한 얘기요?" "그래." 망나니가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망나니가 말했다. "장미관을 만든 진짜 이유에 대하여 말해줄 거야." 망나니의 말을 들은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왕궁 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사실 김상희도 놀랐다. 이 정도 건물과 정원이라니. 척 봐도 엄청 돈 많은 어느 중세 귀족이 할 거 없어서 만들어 놓은 초호화 별장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고려왕가가 정말 돈이 많기는 많구나 싶었다. 좀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돈지랄'같은 느낌이랄까. ...그거 네 거야. 몰랐지...? 0140 / 0192 ---------------------------------------------- 네 결혼상대는... 한진수다. *** 나는 스페셜 필드 내로 들어오게 됐다. 둘째 망나니가 장미관을 만든 진짜 이유에 관해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단순한 커뮤니티는 아닌...거네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요청한 건 순수한 의미의 커뮤니티였다. 공주들간의 공식적인 연결고리를 만들고 그동안 음성적으로 행해져왔던 것을 양지로 끌어내어 좀 더 공식적이고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이건 내가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는 잘 모른다. 잘 모르긴 한데,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다. 개차반도 그렇고 망나니들도 그렇고 제대로 알려주지는 않는데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은 그런 요상한 느낌이 든다. 뭐. 정확한 건 아니다. 그냥 뭔가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그러한 상황 가운데, 전력을 키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생각해보라. 계집들이 마력따위를 갖고 있을 수 없다. 전 세계에 마력을 가졌다 알려진 여자들은 그래봐야 2명밖에 없으니까. 그마저도 한 명은 실종상태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여자들에 대해 긴장을 할 필요가 없다. 더 쉽게 말하면 방심하기 딱 좋은 상대. 거기에 고려공주들은 어쨌든 고려왕가의 피를 이었다. 이러한 공주들이 마력을 가진 채 상대를 공격한다면? '하지만... 방법이 너무...' 정확한 설명은 못 들었어도 나는 안다. 공주들을 아마 선물로 바치겠지. 그리고 그 선물이 상대 -그 상대는 적의 적장 혹은 왕쯤 될 것 같다.- 를 기습하게 될 거다. 그게 잠자리가 되었든 어디가 되었든.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결론만 말하겠다. 장미관은 단순한 공주 커뮤니티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무기 양성소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이상한 능력을 통해 마력을 주고, 그 마력을 가진 공주는 하나의 비밀병기로서 키워지게 되는 거다. 여기서 군사훈련도 받는단다. '당연히 맞는 선택이야. 상대로부터 방심을 유도할 수 있고...' 잠자리에서만큼 상대가 무방비가 되는 곳은 없지 않은가. 정말 효율적인 무기가 될 거다. 공주들은. 대신 그 공주들은 다음 날, 죽겠지. 적들 한 가운데 들어가서 적장을 죽인다면, 남는 것은 죽음 뿐이다. 거기서 혼자서 탈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 개차반이 떠올랐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거. 나도 이제 많이 느낀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왕이구나 싶었다. 비정한 선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런 냉정한 사람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들은 감동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말이다. 망나니가 말했다. "아. 그리고 이게 솔직히 제일 중요한 이유인데." *** 김훈상이 말했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김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식적으로요?" 왜 아버지가 이렇게 어려운 길 빙빙 돌아가는 지 모르겠다. 그냥 직설적으로 본론만 딱 말하면 쉬운 일인데, 왜 저러시지? "어쨌든 공식적인 명분이 있어야겠지." "그럼 비공식적인 명분은요?" 김훈상은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다. 다행히 나이트도 이 미친 정신상태에 동조해주고 있다. 아들 앞에서는 솔직해져도 될 것 같았다. "내 딸을 도둑놈들로부터 지켜야겠지." "아...!" 역시 아부지는 천재에요! 김환성은 말할 뻔 했다. "그러니까 아부지는 그 계집들을 호위나이트로 쓰겠다는 거네요!" 장미관 내에는 남자들의 출입이 제한된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공주들을 훈련시켜 호위 나이트로 쓰겠다는 얘기다. 최소한의 무력을 가지게 해서 말이다. "계집들 따위가 도움이 되겠어요?" "바로 그거다. 계집들 따위는 힘이 없지. 그저 몇 초만 시간을 벌어주면 된다." 그건 가능했다. 계집은 약한 존재다. 갑자기 마력을 사용하면 도둑놈 새끼(?)는 깜짝 놀랄 거다. 그 아주 잠깐. 당황하게만 만들어주면 된다. 그러면, "내 똥개를 훔쳐가려는 도둑놈들은 제가 흠씬 두들겨 팰 거에요." 그러면 왕자들과 왕이 출동(?)할 거다. 왕과 왕자가 생각하는 공주들의 용도는 딱 그 정도다. 나머지는 김상희의 재량에 맡기기로 했다. 공주들에 관한 교육, 위계질서 확립.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하는 딸이 아무려면 알아서 잘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내부적으로는 전략무기 양성기관이다." 덕분에 집행부의 반발도 억누를 수 있었다. 왕은 딸을 지키기 위해 -사실 과보호를 위해-모두를 속였다. *** 고려에 새로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이 소식을 가져온 사람은 다름아닌 6대대 대대장 파커슨. "새로운 나라가 건립되었습니다." "새로운 나라?" "예. 그런데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배짱이 있는 건지. "제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국에서도 함부로 병력을 파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본보기를 위해 파견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희 고려에 의해, 아니 성녀의 도움을 얻은 고려에 의해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가 괴멸되었습니다. 덕분에 제국은 당분간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울 겁니다."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쯤 없다고 제국이 위험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틀림 없었다. 아주 먼 지방에 새로 생겨난 나라 하나를 없애기 위해서 움직이기엔 가성비가 안맞을 거다. "왕의 이름은?" "그것이..." 파커슨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왕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들라해라." 사실 김훈상은 눈치 챘다. 제국에게 제공을 바치지 않겠다 선포하며 들고 일어난 나라? 게다가 극서에 위치한 포름지방에 위치해 있다? 김훈상이 말했다. "자리를 제법 잘 잡았구나." 포름지방은 척박하다. 사실 나라를 세우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요새를 세우기에는 굉장히 좋은 지형이다. 산세가 험하고 입구가 굉장히 좁은 지형이 많다. 한 명이 능히 열 명을 막아낼 수 있는 지형적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이 정도 배짱과 실력을 가진 사람. 김훈상은 딱 한 명 알고 있다. 한진수가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제국의 편이다. 너를 지금 당장 구금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제국이 김상희를 납치하려고 했었죠. 프리온 나이트 3개대대를 동원해서." 정보국 국장 김국현의 목을 베어오면서 미안하다고 사죄했지만, 김훈상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제국의 사죄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건 요식행위다. 그들은 분명 김상희를 계속해서 노릴 거다. 김상희의 능력을 알고 있으니까. 김훈상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마음 같아선 황제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랑하는 딸을 노리다니. 그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저는 고려의 국왕께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왕대 왕으로서의 제안이냐? 아니면 도둑놈새끼로서의 제안이냐?" 한진수가 좀 고민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둘 다 입니다." *** 김훈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에 반해 한진수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이트 제 6대대 대대장 파커슨은 확신했다. '지금 폐하께서... 흔들리고 계신다.' 파커슨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제안이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워프라니. 그런 게 있을 줄 몰랐다. 워프는 아직 불안정한 기술이다. 그런데 그 불안정한 기술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워프. 그건 엄청난 기술이다. 막말로 스페셜 나이트들이 전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워프를 익힌다면 제국의 수뇌부를 일시에 쓸어버릴 수도 있다. 황제를 비롯한 수뇌부가 없는 제국은 말 그대로 허울뿐인 제국이다. 하룻밤 사이에 나라 하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게 되는 거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문제는, '김상희 공주와의 결혼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공주와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을 알려주겠다고 한다면, 당연히 하는 거다. 그게 맞다. '폐하는 엄청나게 고민하고 계신다.' 김훈상이 힘겹게 말했다. "너는 아직 위험하다. 제국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거냐?" "그래서 공식적인 결혼을 제안하지 못한 겁니다. 비밀리에. 김상희와 제 둘만의 결혼식을 허락해주십시오." 김훈상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저 놈. 저렇게 무서운 놈이 되었을 줄이야. 욕 하고 싶었다. 이 도둑놈 새끼! 감히 내 사랑하는 딸을 내 품에서 빼앗아 가려고? 김훈상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도둑놈새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도둑놈새끼들 중에서, 그나마 나은 도둑놈새끼가 바로 한진수다. 적어도 한진수는 김상희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워프를 안정화시키려면... 넉넉잡아 2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겁니다." 김훈상은 이미 마음속으로는 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저 기술이 있다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 제국을 치고 싶은 마음. 원래는 없었다. 김상희를 건드리기 전까지는. 하지만 이젠 얘기가 달라졌다. '제국이 있으면... 내 딸은 언제까지고 위험할 수밖에 없다.' 딸 하나 때문에 전쟁을 결심했다. 워프가 있다면, 백성들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거다. 한 번에 황궁을 접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여튼 결론만 말하면 왕은 지금, 딸 때문에 전쟁을 결심했다. 그것도 세계 최강국과의 전쟁을 말이다. '2년이라...' 2년 후. 스페셜 나이트와 더스 나이트가 워프를 제대로만 익힌다면, 그 때 제국을 치면 된다. "그럼 그 때까지 결혼은 보류하도록 한다." "그럼 저는 기술만 알려주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2년을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내 딸을 얻는데 그 정도는 기다려야하지 않겠나?" 솔직히 말해 사기다. 이건 누가봐도 한진수가 손해인 거래다. 파커슨도 그걸 안다. 파커슨 역시 성녀를 애지중지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당하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공명정대함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한진수가 강하게 나왔다. "그렇다면 저도 기술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감히 나를 상대로 거래를 하려는 것이냐?" "제 여자라고 도장을 찍고 싶습니다. 불안해서 하루하루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크리스란 놈도 신경 쓰인다. 하마터면 곽기현이랑 결혼 시킬 뻔 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황자마저도 김상희와 결혼하려고 -심지어 9번째 부인으로- 했다. 그렇다보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비공식적이라고는 해도, 김상희와 꼭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강짜를 부렸다. 김훈상이 말했다. "24시간 뒤 다시 찾아와라." 파커슨은 좀 황당해졌다. '아니.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그게 뭐라고 24시간씩이나 걸려...?' 24시간이 지났다. 한진수가 다시 김훈상을 찾아왔다. 참고로 김훈상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24시간동안 생각만 했다. 딸을 결혼시킬 생각을 하니까, 일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허락을 했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한진수가 웃었다.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행복해졌다.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 보통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계집따위가 한진수쯤 되는 걸출한 인재에게 시집간다면, 계집의 영광이다. 하지만 한진수는 기뻐하며 잘하겠다 약속했다. 상식이 파괴 됐다.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 김상희.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김훈상이 말을 잘랐다. "아직이다." "...예?" "비공식 결혼은 시켜주겠다." "......." 뭐지. 뭔가 불안한데. 한진수는 말을 참고 김훈상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합방은 안 된다. 합방은 2년 뒤다." "......." 김훈상이 자포자기한 모양새로, 슬프게 말했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딸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그리고 3일이 흘렀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찾았다. "아, 아빠.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니어요?" 누가 봐도 지금 김훈상은 아파보였다. 아프고 초췌하고. 왕이 아니라 노숙자 같았다. "그런 거 아니다." 김훈상은 아프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까짓 워프 기술 따위로 딸을 팔아먹는 것 같은 죄책감과 더불어, 딸을 보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김훈상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 사이, 딸사랑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이 개차반이 무슨 말을 하려고 초장부터 이렇게 약을 쳐? 김상희는 괜히 불안해졌다. "...네?" "미안하다." ...그니까 뭐가요. "너. 결혼해라." 김상희는 황당했다.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저번에는 곽기현이더니 이번에는 또 누구? 김훈상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 결혼상대는... 한진수다." 김훈상은 너무나 미안했다. 어떻게 사랑하는 딸을 겨우 워프기술 따위에 팔아넘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궁극적인 이유는 '김상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워프 기술을 익혀, 2년 뒤. 제국을 칠 거다. 그러기 위해 한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딸이 그걸 알아줄까? 너무나 슬펐다. 분명. 비탄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왕이 계속 사과했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던 김상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빠..." 이어지는 김상희의 말에 김훈상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하지만 합방은 안 된다. 합방은 2년 뒤다." 이 아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합니다. 0141 / 0192 ---------------------------------------------- 네 결혼상대는... 한진수다. *** 김상희는 이게 도대체 웬 횡재냐고 생각했다. 김상희는 한진수 말고 다른 남자는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진수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뻔 했다. 그러한 상황이다보니 재고 따지고, 밀고 당기고 할 겨를이 없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다. "고마워요. 아빠." 김훈상은 충격 받았다. 아니. 그래도 한 번쯤은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너. 옛날에는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그렇게 조르지 않았더냐! 따지고 싶어졌다. 김상희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빠...?" "아... 그래." 김훈상은 당황했다. 나...지금. 왜 안 기쁘냐. 딸이 저토록 좋아하는 걸 보면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하나도 안 기뻤다.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하여튼 네 결혼 상대는 한진수이고 날짜는 3일 뒤다." "3일 뒤요?" 김훈상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왜? 그것도 너무 기냐?" 아, 아니. 이게 아닌데. 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런 말투가 나오는 거냐. 이런 감정은 처음이고 완전히 생소한 김훈상은 스스로의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런 게 아니라..." 김상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결혼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그런데 3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정상적인 결혼은 아닌 것 같아.' 상식적으로 제국의 반역자와 정상적인 결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비공식적으로 결혼이 이뤄지게 될 것 같았다. 어쨌거나 결혼이다. 괜스레 설렜다. 진수와의 결혼이라니. 정말 멀리도 돌아왔다. 고지가 눈 앞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행복해졌다. 김상희가 행복해하면 행복해할수록 김훈상의 마음이 어려워졌다.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 마음. 뭔지 모르겠다. 정말 처음 느끼는 요상한 감정이었다. '한진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으냐?' 아직 자세한 설명은 안 했다. 합방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최소 2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을 성사시킬 거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결혼'이라 함은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게 된다. 김상희는 지금 이 결혼에 대해서 모른다. 다시 말해, '나랑 떨어져도 좋다는 거냐!' 뭐랄까. 정확히 표현은 어려워도 울고싶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그런 마음이랄까. 김상희는 그제서야 김훈상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앗차!' 한진수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서 김훈상의 기분을 하나도 신경쓰지 못했다. 15년 인생동안 이토록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김상희는 당황했다. '개차반씨 기분이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김상희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김상희가 김훈상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김훈상은 마음의 방벽을 단단히 쌓았다. '딸은 역시 키워봤자 소용이...' 그 때, 김훈상의 볼에서 쪽 소리가 났다. 김상희가 가볍게 키스했다. '...나는 여전히 기분이 나쁘다.'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딸 아이의 뽀뽀 정도로는, 이 토라진(?) 마음이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절대로... 절대로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화가 나 있는 상태다.' 고대문서 해독에 관한 자문을 얻기 위해 김상희의 방 안으로 들어오던 알렉스는 흠칫했다. '폐, 폐하가 미쳤다?' 아무리 봐도 미쳐 보였다. 입가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알렉스는 상황을 판단했다. '김상희 공주님이 안겨있는 상태.' 하지만 그것 만으로 저렇게 표정이 미쳐있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뽀뽀를 받으셨을지도 몰라! 그도 아니면 아빠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받았든지!' 상희학에 근거하여 진실에 제법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역시 학자는 학자였다. *** 김환석은 비속어를 자주 사용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한진수 이 개새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결국 도둑놈이 나타났다. 그리고 김상희와 결혼을 하겠단다. 안정화된 워프기술이고 뭐고.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오로지 김상희를 훔쳐간다는 거다. 김환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떡해, 형? 이대로 그냥 둬? 그냥 죽일까?" 만약 상대가 한진수가 아니었다면 벌써 곤죽이 되도록 맞았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한진수 쯤 되니까, 김환성이 함부러 못 움직인 거다. 막내왕자인 김환혁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형아들! 어떡해! 나 누나 결혼하는 거 너무너무 싫어! 누나는 나랑 결혼해야한단 말이야!" 김훈상을 비롯하여 3왕자는 김상희의 결혼에 결사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한진수가 3왕자를 찾았다. "잠시 따로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한진수가 가장 먼저 따로 만난 왕자는 김환석이다. 김환석은 눈치 챘다. 이 놈이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둑놈은 도둑놈이니까. "약소하지만 이걸 준비했습니다." 한진수가 뭔가를 건넸다. 부피가 굉장히 컸다. 김환석의 눈동자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프리온...나이트?' 김환석은 현재 그만의 재능을 살려 발명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과학자이자 엔지니어라는 소리다. 그런데 프리온 나이트라니. 현 시대에 있어서 최강의 전략병기가 아닌가. 그것도 망가진 것이 아닌, 실제로 구동되고 있는 전략병기.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 사랑스런 동생을 데려가는 것에 대한 소소한 보상입니다." "겨우 이까짓 걸로..." 한진수가 말했다. "저에겐 아직 6기의 프리온 나이트가 남았습니다." *** 김환성은 절대로 한진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똥개는 내 거다. 아무도 못 준다. 그렇게 생각했다. "포름지방 깊은 산맥에서 구한... 민트향이 나는 초콜렛입니다. 아주 작은 산골마을에서 개발된 것인데. 아직까지 공개된 적도 없는 새로운 것이죠." "나한테 이걸 왜 주는 건데?" "사랑하는 동생을 내어주는 그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죠." "......." 김환성은 민트향 초콜렛에 쉽게 넘어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진수를 더이상 거부하고 싫어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더더군다나 김환성은 안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그래서 더이상 땡깡을 부리지 못했다. 민트향 초콜렛을 오물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절대 안 줘. 나만 먹을 거야." "......." 한진수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김환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절대 초콜렛에 넘어가서 허락하는 거 아니야." "네. 절대 그렇지 않으실 겁니다." 김환성이 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래서, 이거 또 구할 수 있어?" *** 한진수는 김환혁을 찾았다. 김환혁은 나이가 어려서인지, 대뜸 주먹부터 내질렀다. 한진수가 그 주먹에 얻어맞았다. 복부에 강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김환혁이었다. "어...어?" 어쩌면 고려국왕 김훈상을 넘어섰을 지도 모르는 한진수다. 자신의 주먹따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거란 걸 안다. 그런데 맞아줬다. 마력으로 방어도 안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력을 억지로 눌러서 몸을 보호 못하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김환혁의 주먹에는 마력이 실렸다. 한진수가 가볍게 피를 토했다. 마력을 돌려 회복시키면 회복시킬 수 있는 양이지만 한진수는 그러지 않았다. "빠, 빨리 회복시켜 이 도둑놈아!" "왕자님. 이건 제 선물입니다." 한진수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김환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한진수가 건넨 것은 주먹만한 크기의 황금박쥐였다.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한 희귀종이며, 동물의 피를 빨았을 때엔 붉은 색으로 변한다하여 붉은 흡혈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희귀 동물이었다. "이, 이, 이 귀한 걸 어떻게...!" "제 작은 성의입니다." "그, 그, 그래도 우리 누나는 절대 못 줘!" 한진수가 또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삼두 독 개구리!" 머리가 세개 달린 붉은 개구리. 엄청난 맹독을 가지고 있어서 코끼리마저도 죽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는 개구리다. 거의 영물 취급받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몇 마리 없는 초 희귀 종이다. 김환혁은 침을 질질 흘렸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저, 절대 이딴 것 들 때문에 우리 누나 허락하는 거 아냐." *** 한진수는 한 숨 돌렸다. 그 동안, 왕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가장 큰 산들을 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산은 남았다. "동생들은 그렇다 치고, 나는 어떻게 넘을 생각이죠?" 첫째 왕자 김형석. 아직도 그가 남았다. 사실 그를 장애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김형석처럼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좋게좋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김형석 왕자마저도 결사 반대하는 입장인가.'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 때, 김형석이 말했다. "내 동생을 많이 아껴주길 부탁합니다. 한진수. 아니. 이제... 왕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 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희를 아끼는 거.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누구보다도 잘 할 자신 있었다. "나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렇고. 결국 당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 "우리는 당신이 내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압니다. 당신은 내 동생을 위하여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힘든 길을 선택했죠. 그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합격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김상희.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단순히 목숨을 바치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각오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국이 존속하는 한, 내 동생은 영원히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생각은 물론 있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 생각 이전에 김상희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다. 김상희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김형석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 결국 김상희의 결혼식은 치러지게 됐다. 김상희의 어머니인 강서영과 왕. 그리고 4명의 왕자들만 참여하는 그런 결혼식이었다. 완전히 비공식, 비공개로 치러진 결혼이었다. 당연히 간단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한진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날 받아줘서... 고마워." 사실상 김상희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남자가 결혼하자고 하면, 결혼해야만 한다. 여긴 그런 세상이다. 하지만 한진수에겐 아니었다. 김상희가 기뻐했다. 그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왕과 왕자들의 인상이 동시에 찡그려졌다는 건 여담이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넷 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줬다. "이건... 내 선물이야. 지금 당장은... 성대한 결혼식도, 행복한 삶도 약속할 수 없어." "......." "하지만... 내가 널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할게. 나한테는 너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너 밖에 없을 테니까." "......." 김상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진수의 진심이 전해져왔다. 어쩜 이렇게도 옛날과 똑같은지. 정말 똑같았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저 마음. 분명히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줘.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때 까지. 조금만 참아줘. 조금만 참으면 내가 너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김상희는 그 말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진수는,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결혼식이 끝났다. 밤이 깊었다. 놀랍게도 왕과 왕자들은 한진수와 김상희의 합방을 허락해줬다. 다시 말해, 초야를 허락해줬다는 소리다. 한진수가 설레는 맘을 부여잡고 김상희의 방에 들어섰다. 김상희를 육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김상희와 함께 밤을 지낼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설레고 기뻤다. 행복했다. 김상희의 방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지...?" 그 때. 한진수의 기대는, 행복에 부풀었던 그 마음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한진수는 멍하니 앞을 쳐다봤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아..." ============================ 작품 후기 ============================ 작가(비츄)는 19금이 쓰고싶다. 쓰고 싶다. 쓰고 싶다... ㅂㄷㅂㄷ 0142 / 0192 ---------------------------------------------- 동생병신의 스케일은 이러하다 합니다 *** 침대에 걸터앉은 김훈상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여." 그 폼이 자못 불량해서, 한진수는 순간 저 사람이 왕이 맞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왕이 아니라 약간 깡패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한 쪽 테이블 의자에는 김환석이 무심한 듯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환석 왕자는 도대체 왜?' 좋다. 김환석 왕자가 여기 있는 것 까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오른손에 든 저건 뭐란 말인가. '레이저 광자포...?' 인간이 휴대할 수 있는 무기 중에서, 그리고 단일 대상으로하는 무기 중에서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기 아닌가. 나라 자체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중화기 중 중화기다. 저걸 왜 만지작 거리고 있지? 그 옆에 앉은 김환성이 어색하게 말했다. "어. 한진수. 오랜만이야. 반가워." 한진수는 묻고 싶었다. 반가운데 왜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있습니까? 아니. 애초에 우리 몇 시간 전에 봤잖아. 참고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건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뜻이다. 김상희의 방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왔다. "어. 왔네?" 3왕자 중 막내, 김환혁이다. 김환혁은 오른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아까 한진수가 선물해준 삼두 독 개구리. 코끼리조차도 죽일 수 있는 맹독을 가진 저 개구리를 도대체 왜 들고 있는 건가 싶다. 심지어 저 개구리에는 약간의 비밀이 있는데, 마력을 주입하게 되면 더더욱 강한 독성을 내뿜게 된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비밀이다. 그리고 지금 저 개구리는 마력이 주입된 상태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자들이 진짜...' 한진수와의 뜨거운 하룻밤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아주아주 조금. 그러니까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조금 기대를 하기는 했었다. 어쨌든 그녀가 기대한 건 이런 하룻밤이 아니었다. 김훈상이 껄렁껄렁한 자세로 말했다. "편하게 해. 편하게."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아니. 아빠 당신같으면 편할 수 있겠냐. 지금 여기 왕과 왕자들이 눈을 시퍼렇게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뭘 어떻게 편하게 하란 말이야? 와. 진짜 어이 없네. "우린 신경쓰지 말도록." 그러면서 손에 든 레이저 광자포를 만지작 거렸다. 한진수는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고 말았다. 그 때,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났다. "모두 나가욧!" *** 김훈상과 세 왕자는 김상희에 의해 쫓겨났다. 왕과 왕자가 공주에 의해 쫓겨난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김상희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김환성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엄벌에 처해야 해요." 만약 다른 공주였으면 사형시키고도 남았다. 감히 왕과 왕자를 쫓아내다니! 하지만 김환성이 이내 말했다. "그, 근데 엄벌까진 좀 그렇고..." 아버지가 진짜로 엄벌을 내리면 어쩌나 싶어서 변호했다. 어차피 김훈상도 김상희를 벌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김훈상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청력을 끌어 올려 김상희의 방에 집중했다. '이상한 짓을 하면 죽여 버리겠다.' 김상희의 아빠는, 김상희가 초야를 치르는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아직도 안 됐으니까. 한편, 한진수는 김상희의 침대에 앉았다. 아무 짓도 안 하려고 했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김상희를 안았다. "상희야..." 한진수의 커다란 손바닥이 김상희의 머리에 닿았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보고 싶었어." "...나도." 김상희의 말도 사실이었다. 그녀도. 한진수가 정말 보고 싶었다. 한진수가 말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보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 싶을 수가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상희도 이 느낌이 무슨 느낌인지 안다.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 김상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그 감정이었으니까. "모르겠어.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고, 만지고 있는데도 만지고 싶어. 그리고... 미안해." 김상희는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미안하다는 게 뭘 뜻하는 건지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결혼식을 진행시킨 건, 명백히 한진수의 욕심이었다. 그는 반역자니까. 김상희가 고개를 저었다. 한진수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말 하지마." "......." "너는 나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했어." 김상희는 잠시 숨을 돌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전 생에서는, 진수에게 사랑한다 한 마디 해주지 않았었다. 마음을 숨길 때도 많았다. 진수 마음고생 정말 많이 시켰다.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도... 솔직해 질거야.' 진수는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줬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김상희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 보여줬다. '나도 말할 거야.' 푸르스름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김상희의 방 침대에, 푸른색 격자무늬 달빛 그림자가 새겨졌다. "그 마음..." 너는 나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했어. "나도 그 마음이야." 그건 진심이었다. "나도... 너 없는 세상은 싫어." 한진수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오르는 것 같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김상희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올 줄은 몰랐다. 김상희를 꽉 껴안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듯이. "내가 너 더 많이 좋아할게." "......." 김상희를 조금 더 세게 껴안았다. "내가 너 더 많이 사랑할게." 김상희도 가만히 한진수의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한진수가 계속 말했다. "네가 나를 얼만큼 좋아할지, 나를 얼만큼 사랑할지.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 한진수가 말했다. "내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널 사랑할 거니까." 김상희가 먼저 한진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한진수의 고백은,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았다. 유려한 문장도 없었고, 화려한 단어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담담한 편이었다. 하지만 한진수의 진심 만큼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찬란했다. 김상희의 입술이 한진수의 입술에 닿았을 때, 한진수의 시간이 잠시 멈췄다. 열심히 달려가던 초침이 멈춰 버렸다. 마치 감전이라도 되어버린 것 처럼. 김상희도 고백했다. 전 생에서는 한 번도 해주지 못했던 말. 그 말을 다시 한 번 해줬다. 이젠 아끼지 않을 거니까. "...사랑해." 한진수의 심장이 쿵! 뛰었다. 김상희가 이토록 사랑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김상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키스했다. 처음엔 가벼운 키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더 김상희를 원하고 탐했다. 한진수의 몸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김상희의 몸 역시 붉어졌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입술을 집어 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김상희의 입술을 거칠게 빨았다. 김상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 마른 자가 물을 발견한 듯,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듯. 김상희도 한진수의 입술을 빨았다. 김상희가 움찔 놀랐다. 미끈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무언가가 자신의 입 속을 파고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리고 한진수를 받아 들였다. 입이 맞닿은 상태로, 한진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해." 물론 발음은 부정확했다. 하지만 제대로 알아 들었다. 김상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진수의 목덜미를 꽉 껴안는 것으로 대신했다. 둘의 시간이 점점 더 뜨겁고, 점점 더 치열하게 달려갔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침대에 눕혔다. 김상희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한진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한진수의 호흡은 굉장히 거칠었다. 한진수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김상희는 조금 황당해졌다. 뭐야. 갑자기 왜? 아, 아니. 그, 그렇다고 절대 아, 아쉽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절대 아니지만. "밖에 폐하와 왕자님들이 벼르고 있거든. 잘못하면 나 죽어." 한진수의 말은 반 쯤은 사실이고 반 쯤은 거짓이었다. 아직 그는, 김상희를 완전히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고려와 힘을 합쳐 제국을 없애야 해.' 고려의 왕은 딸의 행복을 위해 세계 최강국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그리고 한진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세계 최강국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그 때까지는...' 그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한진수는 김상희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김상희를 괴롭게 하기는 싫었다. '늦어도 2년이야.' 2년 후면 어떤식으로든 결판이 날 거다. 제국이 없어지든. 자신이 죽든.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 황제가 말했다. "한진수가 고려왕가를 찾았군." 정보부 국장 김국현은 긴장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황제폐하께서 알고 계신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황궁 내에 가만히 있는 황제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정보부 외에도 따로이 운용하는 정보력이 있으신 건가?' 아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단체는 아니었다. 단체라면 어떤식으로든 티가 날 수밖에 없다. 단체가 아니라면, 개인이 될 수도 있다. '개인첩자를... 고려에 침투시킨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과연 누구지. 내가 파악하지 못한, 우리의 첩자가 누구냐. 김국현은 좀 혼란스러웠다. 황제가 말했다. "우리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늦어도 2년 안에는 전력 회복이 끝날 것 같습니다." "김상희가 완전히 각성할 때와 시기가 얼추 맞물리겠군." 정확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 건방진 고려국왕과..." 또 이번에 포름 지방에서, 제국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신라. 그리고 신라 국왕 한진수. "그 모두를 쓸어버리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 쪽엔 '여왕' 이 있었으니까. 2년 후엔, 그 꼴보기 싫은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성녀를 얻겠다." 성녀와 여왕. 그 둘을 모두 얻는다면, 그 때엔 제국이 하늘로 비상하게 될 거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 3개월이 흘렀다. 김상희는 방에 들어왔다가 기겁해야만 했다. "수진... 도대체 이게 뭐야...?" 송수진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아까 나이트들이 들어오는 것을 봤었다. 감히 시녀 주제에 나이트에게 '여긴 왜 오셨나요?'라고 물을 수 없는 법이다. 그냥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가고 나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 김상희는 황당해했다. '이건 도대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19금을 쓰고 싶었으나... 그냥 꽁냥꽁냥으로... ㅠㅠㅠㅠㅠㅠㅠㅠㅠ 0143 / 0192 ---------------------------------------------- 동생병신의 스케일은 이러하다 합니다 *** 나는 나이트의 얼굴은 안다. 하지만 이름까지는 잘 모른다. 이름 모를 한 나이트가 내게 말했다. "오. 성녀님 오셨습니까?" "나이트님. 안녕하시어요?" 아니. 그나저나 이게 다 뭐야. "저희가 분류작업을 거쳤습니다. 덕분에 시간이 좀 걸렸어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내 눈 앞에 쌓인 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로 이루어진 산. 내가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이 것들이 편지봉투인 것 같은데. 아니. 그냥 빈 봉투로 이렇게 쌓으라고해도 못 쌓겠다. 송수진씨도 당황하긴 매한가지. "세, 세상에... 공주님. 저기 보셔요." 송수진씨가 창문 밖을 가리켰다. 그래서 나는 창문 앞으로 걸어가 밖을 봤다. 오. 마이. 갓. 저게 다 뭐야. 기록의 관 앞 정원에는 지금 여기에 있는 편지들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엄청난 편지 산이 쌓여져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만, 아니 수억, 아니 어쩌면 수십억이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몇 개인지 모르겠다. 저렇게 산처럼 쌓여 있으려면 도대체 몇 개가 쌓여야 해? 내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나이트님.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나이트 중 한 명이 말했다. "성녀님을 향한 사랑의 메세지지요." 그러니까 누가, 나를 향한 사랑의 메세지를 보냈냐고? 설마 나이트, 당신들은 아닐 거 아냐. 아무리 마력이 있다고 해도 이 많은 편지들을 쓸 수는 없을 테고. 나이트 중 한 명이 말했다. "전 세계에서 성녀님께 편지를 보내 왔어요." *** 나이트인 최경식은 흐뭇해졌다. "나이트님.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김상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 볼을 한 번 깨물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감정. 이 마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상당히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뭐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지켜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마음 같아선, '오구. 오구구. 우리 공주님. 놀라쪄여?' 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나이트 체통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냥 대답해줬다. "성녀님을 향한 사랑의 메세지지요." 나이트의 말은 진실이었다. 김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산'은 모두 편지가 맞았다. 덕분에 나이트들이 요즘 과한 업무에 시달렸다. 이 편지 안에 혹여라도 독이라도 있으면, 큰 일 나니까. 고려 왕궁 내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셈이다. '이거 검수하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지.' 무려 나이트 30명이 매달려서 검수했다. 최경식은 생각했다. '정말... 신기한 현상이지.' 공주 하나 때문에, 나이트 30명이 자원해서 편지를 검수했다. 그것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이상한 일인데, 그걸 무려 왕이 승인해줬다. 나이트는 안 그래도 바쁘다. 개인 훈련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나이트들에게는 시간이 곧 금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두둔하다니. 아니. 오히려 칭찬해주다니. 여담이지만, 이 많은 편지. 김훈상이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물론 나이트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김상희는 잘 모르고 있지만, 김상희의 주변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거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 김상희는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말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그냥, 살아남는게 우선이 되어버렸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김상희 주변에서, 아주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 세계의 여자들로부터 온 편지라는 소리인가요...?" 이른바. 러브레터라는 것.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김상희는 김환석의 방으로 향했다. ***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연구하던 김환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전 같았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마력으로 몸을 강제시킨 뒤 밖으로 내던져버리거나 했을 거다. 참고로 김환석의 연구실은 3층. 운 나쁘면 죽는 거고, 운 좋으면 사는 거다. 시녀 따위. 죽든 말든 어차피 상관 없으니까. 하지만 김환석도 변했다. 김상희가 '여자를 괴롭히지 마요.'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괜히 김상희의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요즘은 말로 하는 중이다. 내가 집중하고 있을 때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녀들이 듣기엔 지나치게 자상한 목소리로, 그러나 김상희가 듣기엔 시크한 목소리로 김환석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하지만 김환석은 김상희가 찾아온 이유를 안다. 한 쪽 입가가 씰룩 거렸다. 그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래봤자 눈치 채기의 달인 김상희에게는 그게 너무나 훤히 보이긴 했지만. "소녀에게 편지가 많이 왔어요." 그거 당연히 안다. 솔직히 말해서, 저 편지들. 김환석이 몰래 검수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이트가 1차로 검사하고, 아무도 모르게 김환석이 한 번 더 검사하고, 그 다음 김훈상이 또 몰래 검사했다. "오빠가... 이 발명품이 제 거라고 하셨다면서요?" 김환석은 아주 많은 발명을 했다. 그러나 그 발명의 대부분은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마력이 없는 사람'을 위한 발명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건 돈이 안 된다. 마력이 없다함은 보통 여자를 뜻하는데, 여자들은 그렇게 부유하지 않다. 다시 말해 투자비 대비 성과가 안 나온다는 거다. 누가 1000원 투자해서 100원 벌고 싶을까. 하지만 김환석은 애초에 투자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는 안 그래도 아주 많이 부유하다. 그렇다보니 쓸데없는 발명.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로지 김상희만을 위한 발명을 많이 해왔다. 그 중에서도 대히트를 친 것이 바로 '진통제'다. 동생이 생리통때문에 아파하는 것을 본 김환석이 절치부심하여 만들어낸 이 진통제. 이게 부작용(?)으로 마력의 순도를 높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김환석은 지금 돈방석에 앉았다. 하루 벌어들이는 순수익이 무려 900억에 달했으며 이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최고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김환석은 여기에 꼼수를 하나 부려놨다. 이 발명. 김상희가 했다고 공표했다. 제국의 마력학원에서 공부를 했을 정도의 엘리트. 그녀가 노력하여 이 발명품을 만들었고, 새로이 증축한 공장에서 생산되는 진통제의 경우는 오로지 여자들에게만, 아주 싼 값에 판매가 되었다. 김환석이 그런 거다. 동생한테 잘 보이려고. 아무래도 동생은 계집들에게 잘해주면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새로 증축한 공장에서 생산되는 진통제는... 여자들에게만 판매한다고 들었어요." "그건 마력 순도를 높이는 효과가 없는 싸구려 진통제니까."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효과를 없애기 위해서 더 많은 시설투자를 해야만 했다. 똑같은 진통제를 내보내면, 여자들은 아마 남자들에게 빼앗기고 말거다. 지금 물량이 부족해서 난리다. 그러면 동생이 슬퍼하겠지. 당연히 돈이 더 들어간다. 여자들 전용으로 판매되는 진통제는 오히려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난다. 그 손해 규모가 하루 약 200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겨우 200억원.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200억원 버리고 동생이 기뻐하면 그거면 충분했다. 물론, 김환석 스스로는 그런 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김상희는 솔직히 감탄했다. '탑 오브 망나니가 그런 것 까지 계산했을 줄이야.' 물론 저 진통제가 팔면 팔수록 손해라는 것까지는 모른다. 아무리 김상희가 귀신이어도 그것 까지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여자들이 제게 감사하다고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것도 전 세계에서. 지금 전 세계 여자들에게 김상희는 하나의 희망이 된 셈이다. 여자의 몸으로도 이만큼을 보여줄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 말이다. 희망이 없을 때와, 희망이 있을 때의 사람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김환석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볼 일 끝났으면 꺼져. 걸리적 거리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환석은 뒤돌아 선 상태로 싱글벙글 웃었다. 이거. 기분이. 좀... 좋은 것 같다. 그 때, 김환석의 광대가 승천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말이다. "오빠는 많이 변하셨군요." 김상희가 서비스 차원에서 김환석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아줬다. 이름하여 백허그다. 김환석의 경우, 여자에게 백허그를 받아본 적이 없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여자들은 김환석이 무서워서 접근하는 것 자체를 못하니까. 김환석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애써 웃음을 참으며 최대한 시크하게 말했다. "꺼져. 걸리적 거리니까." 한편, 김상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 알렉스가 찾아왔다. "왕자님. 그게 정말입니까?" "뭐가?" "수페르가의 이익 말입니다." 수페르가. 이번에 발명한 진통제의 이름이다. 알렉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동생 병신, 동생 등신이라지만... 이건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은가. "수페르가 순익의 절반이 김상희 공주님에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 아니 이 양반아. 그런가가 아니잖아. 한 달만 모이면, 큰 왕국의 일 년 예산에 맞먹는 돈이라고. '서, 설마?' 어쩌면... 김환석은 지금 먼 훗날(?) 김상희가 결혼을 할 때를 대비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김상희가 결혼 할 때 지참금으로 번듯한 나라 하나 차려주려는 그런 속셈일 수도. "왜 그렇게 한 겁니까?" "하찮은 계집이니, 그 거라도 있어야 덜 하찮을 수 있겠지." 하루 수백 억의 순이익이 생기는데, 그게 덜 하찮아요? 잠 몇 번자면 나라도 세우겠네요. 이 동생병신아.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절반? 절반이 아니라 1퍼센트만 줘도 평생 떵떵거리면서,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걸 저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다니. 심지어 핑계까지 저렇게 병신이라니. 누가 동생병신 아니랄까봐. 그러면서 알렉스는 자신이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자긍심을 느껴야만 했다. 상희학이 없었다면, 그에 기반한 해석이 없었다면 김환석을 완전히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었을 테니까. "그럼... 김상희 공주는 압니까? 자기가 그렇게 부자가 됐다는 걸?" "......." 김환석은 순간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의미를, 알렉스는 해석할 수 있었다. '생색내는 게 싫어서 지금 말 안한 겁니까? 이 오빠가 이렇게 대단한 오빠다, 그거 제 입으로 말하기 창피해서?' 아무리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다지만 알렉스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참다 못한 알렉스가 한 마디 했다. "그냥 이 오빠가 이렇게 대단한 오빠다, 한 번 하시죠? 누가봐도 대단한 거 맞는데. 1억, 2억으로 살인도 일어나는 세상인데. 하루 수백억이잖아요? 너무 숫자가 커서 감도 안 잡힙니다." 김환석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이게?" 알렉스는 순간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저 동생병신. 진심이다!' 진심이라서 무서웠다. 하루 수백억씩 안겨다 주고, 수조원이 넘는, 아예 가치가 환산이 안 되는 장미관을 김상희의 명의로 해줬는데 그게 '겨우'란다. 도대체 이 동생병신의 스케일은 얼만큼 거대하단 말인가. 알렉스는 탄식했다. '내가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수조원에 하루 수백억은 '겨우'였다. 알렉스가 탄식하고 있을 무렵. 김상희는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다. 불을 켰다. 그런데, 침대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 누군가가 말했다. "김상희." "다, 당신은..." 그가 말했다. "내가 이런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었는데." ============================ 작품 후기 ============================ 오늘은 2편 올렸습니다. 2편 올린 날은... 뭔가... 후기를 정성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김환석. 병신은 병신인데... 좀 엄청난 병신이네여 0144 / 0192 ---------------------------------------------- 세계를 변화시킬 첫 단추 *** 김상희는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은..." 어째서 크리스가 이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현재 크리스는 수배중인 상태다.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하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으니까. 중범죄자 취급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다. 크리스가 말했다. "내가 이런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었는데." 김상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랬는데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이... 이상해.' 옷이 이상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왼 팔이 있어야할 그 부분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크, 크리스?"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별 거 아냐. 재생시키면 돼. 그 정도는 가능 할거야.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어째서..." "너를 보러 오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저는..." 크리스가 김상희의 말을 잘랐다. "저는 아니고 나는." 지금 왼쪽 소매는 분명히 비어 있었다. 크리스가 사라졌던 그 사이, 크리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틀림 없었다. 팔이 없어지다니. "나는..." "그래. 나는. 내게 거리를 두지 말아줘. 내게 그거보다 더한 형벌은 없거든."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갑자기 왜 사라진 건지. 또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건지." 고려왕궁의 경비가 그렇게 허술할 리는 없을 거다. 어떻게 이렇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팔은 왜 없는 건지..." "말했잖아.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팔을 줬어." 도대체 누구한테 팔을 줬다는 말이야. 김상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를 보러 오기 위하여 팔을 줬단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 게 있어. 어차피 나는 말 못 해. 그렇게 되어있거든, 나는."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여기까지만 할게. 내가 예전에 알려줬던 말. 기억하고 있어?" 김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희는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크리스의 생각을 한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유도 궁금했고, 왜 이상한 말을 알려줬는지도 궁금했다. 어쨌든 그녀는 크리스가 알려준 이상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Lapuntel Essantia Kerannis Frential" "잘 기억하고 있네." "크리스. 궁금한 것이 있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백제는 어떻게 된 거야?" "아쉽게도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거네."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김상희는 헷갈리곤 했다. 크리스가 어떤 속마음을 갖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대답할 수 없다는 거야?" "나는 그렇게 태어났거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말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건 또 뭔데. "정말로 그렇게 궁금해?" 이쯤 되자 김상희는 오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응. 나는 알고 싶어." "그걸 말해주려면, 나는 오른팔도 잃어야 해." 김상희는 또 헷갈렸다. 저 말이 진짜인가 아닌가. 아니. 애초에 말을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오른팔을 걸어. 아무래도 농담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또 진심일 수도 있어서, 함부로 그러라고는 못하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게 그렇게 비밀이 많을 줄은 몰랐어. 비밀 많은 남자는..." 비밀 많은 남자는 별로야. 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냥 말을 흐렸다. 판단은 크리스의 몫. 언제나 활짝 웃던 크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좀 가셨다. "말해줄게." 그와 동시에 크리스가 검을 꺼내 들었다. 김상희에게 넘겨줬다. "잘 들고 있기만 해. 내가 알아서 자를 테니까. 팔이 없어서 혼자서 하기는 힘들거든." 그리고 겨드랑이 사이에 검을 꼈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오른팔을 자르려 했다. 크리스의 살갗이, 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김상희는 황급히 검을 땅에 버려버렸다. "무, 무슨 짓이야!" 검이 어찌나 예리한지, 크리스의 겨드랑이에선 피가 조금 새어나오고 있었다. "말했잖아. 나는 너 사랑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친놈 처럼 보일 거 알아.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내게는 이런 방법밖에 없어. 말했잖아.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고.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알아. 그런데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크리스가 오른팔로 김상희를 꽉 끌어 안았다. "내가 너 많이 좋아한다는 거." "......." 김상희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크리스에게 비밀이 많은 건 알겠다.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알겠다. 그리고 아마도. '나를 보러 오기 위해 왼 팔을 잘랐다는 거...' 진심인 것 같았다. 단순히, 자신을 보기 위해서 왼팔을 대가로 바쳤단다. 정말인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토록 좋아해준다는 거, 사랑해준다는 거. 싫은 느낌은 절대로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것이 진심이라 느껴지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말을 해야할 때였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진수와 결혼도 마친 상태다. 황당하기는 해도, 어쨌든 초야도 치렀고. (무려 키스까지 했다.) "하지만 크리스." 크리스가 김상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리고 크리스는 울었다. 마력을 최대한으로 컨트롤해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는 했다. 김상희가 보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항상 웃던 그가, 오늘은 울었다. 크리스가 평정을 가장한 채 말했다. "네 마음... 네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잘 알고 있어." "크리스..." 미안해. 그 마음. 정말 고맙고, 또 고마운데, 받아줄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한데, 나한테는 한진수밖에 없으니까. "오늘도 내 욕심 때문에, 그 욕심 버리지 못하고 너를 보러 온 거야. 명령어도 잘 외우고 있는지 확인도 할 겸. 나 욕심 부리지 않을게. 내 옆에 있어달라고도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쫓아내지만 마. 딱 오늘만이야. 오늘 하루만 너 이렇게 안고 있을게. 더 이상 욕심도 안 부려. 너한테 생색내는 거 아닌데... 나 너 보고 싶어서 왼 팔을 잘랐어. 그러니까 심술 좀 부릴게. 조금만... 조금만 나랑 이러고 있자." 김상희는 문득, 크리스가 지독히도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려 크리스의 등을 쓰다듬을 뻔 했다. 남자로 느낀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비밀이 많기는 많은데, 그 비밀들이 크리스를 옭아매고 괴롭히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김상희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이러면 안 돼.' 김상희는 한진수 외에 다른 남자를 남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처로워 보이고, 외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지를 줄 수 없었다. 그게 크리스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크리스의 등을 쓰다듬으려던 팔을 다시 조심스레 내렸다. 그리고 얼마 뒤, 정신을 차렸을 때. 크리스는 자리에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가 나타났다. "이상하네. 공주님. 여기 누구 왔었습니까?" 김상희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스페셜 나이트가 자신을 밀착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마도 교대로 돌아가면서 24시간 붙어있을 거다. 그런데 스페셜 나이트는 크리스가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스페셜 필드 같은 이상한 필드를 펼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정말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스페셜 나이트가 물었다. "성녀님.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젖었습니까? 물 흘리셨나?" 그는 김상희의 어깨 부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크리스가 턱을 올려놓았던 그 자리였다. *** 3개월이 지났다. 언제나 그렇듯, 김환혁이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누나!" 그간의 교육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제 이상한 동물을 선물이라고 잡아오는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요즘에는 이런 부탁을 해오곤 했다. "내 명치를 아주아주 세게 때려줘!" "왕자님. 그러면 주위에서 손가락질 한답니다." 게다가 내 옆엔 스페셜 나이트가 항상 붙어 있다고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왕자님을 치겠어요? 하는 그 말을 아주 조심스레 돌려서 표현했다. "저는 왕자님께 그런 결례를 범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게 웬 걸. "성녀님. 저희 명치도 좀 쳐주면 안 됩니까?" 아이고 두야. 김상희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요즘들어 이런 요구를 하는 남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제 김상희는 남자들이 왜 이런 부탁을 하는건지 이제는 알고 있다. 마력의 순도가 높아지고 절대량이 증가한단다. '고대 기록이 사실이었어.' 한진수와의 비공식적인 결혼을 한지도 벌써 6개월이 흘렀다. 그 사이, 김상희는 김훈상의 묵인 아래 특별서고에 있는 고대 기록들을 계속해서 탐독해왔다. 특히 그녀가 관심있게 살펴본 것은 바로 '성녀'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중 알게된 사실이 있는데 '특별한 행위'를 하게 되면 마력이 커지거나 순도가 높아지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김상희의 경우는 바로 '명치를 때리는 행위'가 그것 이었다. 마력이란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상희는 이제 단순한 계집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물론 나이트들과 왕자들이 입단속을 하고 있어서 김상희의 능력이 바깥으로 알려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이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니. 이봐. 오늘은 내 차례였다고." "무슨 소리? 나는 한 달 전부터 예약을 잡았어."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해달라는대로, 그냥 뭣 모르고 해줬다. 남자가 시키는데 별 수 있어. 그냥 해줘야지...라는 마음가짐보다는, 이 세계의 남자들을 향한 분노를 가득 담아 아주 힘껏 쳐줬다. 특히나 김환성의 경우 마력보호 없이 명치를 세게 맞고서 한참을 고통 속에 신음했었는데, 김상희는 그 때 굉장히 통쾌했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그렇게 해줬는데 신청자가 워낙에 많다보니, 이젠 송수진을 통해 예약을 받았다. 그런데 예약을 받다보니 또, 꼼수를 부리는 나이트들이 생겨났다. 송수진에게 로비를 벌이는 거다. "피부에 엄청 좋은... 이 것이 바로 오미자라는 특산물인데..." "이 것은 남쪽 지방에서만 제배되고 있는 특수 블루베리인데..." 처음에는 그렇게 가다가, 이제는 아예 대놓고 김상희에게 로비를 벌였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김상희 한 명 뿐인데, 그러한 혜택을 보고 싶은 사람은 많았다. 상대적으로 김상희의 능력은 희소가치가 굉장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 콧대 높다는 나이트들이 김상희 공주에게 굽신 거렸다. "공주님. 제 명치부터 좀 부탁드립니다." "아뇨. 저부터 부탁드립니다. 제가 기똥차게 맛이 좋은 산수유열매를 가져왔는데 일단 한 번 드셔보시고..." 송수진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이런 광경. 너무 많이 봤다. 밖에서 만나면 도도하다못해, 무섭기까지 한 나이트들인데 상희 공주의 방에만 오면 어찌도 이렇게 순둥이들로 변하는 건지. 다른 시녀들은 송수진의 말을 믿지 못했다. 어떻게 나이트들이 그럴 수가 있냐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허세 부리지 말라고, 송수진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했다. 다른 시녀들은 나이트의 이런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상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 것은 실재였다. 나이트이 김상희에게 굽신 거렸다. "성녀님. 이 블루 사파이어는 어때요? 제가 아주 힘들게 구한 것인데, 보자마자 딱 공주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결국 김환혁이 폭발했다. "너희 다 나가!" 하지만 나이트들도 만만치는 않았다. "왕자님. 이런 걸로 권력 남용하면 안 됩니다. 순서가 있고 법칙이 있는데." 김환혁이 씩씩댔다. 마력을 끌어 올렸다. "너네도 도둑놈들이냐!" 나이트들은 황당해졌다. 아니. 선물을 가져다 바쳐도 우리가 가져다 바치지, 도대체 뭘 도둑질한단 말입니까? 김상희의 머리가 또 아파왔다. 이 놈의 가족들은 좀 뭔가 이상하다. 아니. 개차반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정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권력 남용 아니거든?" 김상희보다도 키가 많이 커진 김환혁이 김상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누구에겐가 빼앗길새라, 철통같이 보호하는 모양새였다. "우리 누나거든?" "......." 그리고 말이 교묘하게 바뀌었다. "내 누나는 내 거야." 아니. 왕자님. 나는 물건이 아닙니다만. 김상희는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한테, 그것도 누나한테 소유욕 부리지 말란 말이야. 엉엉. "모두 나갓!" 나이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누나인 거랑, 내 누나인 거랑, 모두 나가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이트 중 한 명이 말했다. "못 나갑니다. 오늘은 제 차례란 말입니다." 명치를 얻어맞기 위한, 고려왕자와 고려 나이트들 간의 눈치싸움이 시작 됐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는 내 시간이 하나도 없겠어.' 이대로면 안되겠다 싶었다.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좋았다. 좋기 좋은데, 부작용이 좀 있다.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김상희가 김훈상을 방을 찾았다. 김훈상의 방을 직접, 그것도 다이렉트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김상희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서도, 김훈상이 제일 반기며 행복해하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김상희다. 집행부 부장 에반스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니. 폐하. 굉장히 중요한 사안입니다만..." "에반스. 그거 지금 당장 안하면 고려가 망하나? 그 정도의 사안인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도대체 뭘 하면 하루아침에 고려를 망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안이 도대체 뭡니까? 그게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 된 에반스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결재 받을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바빠 죽겠는데 폐하가 왜 이러나 싶다. '오늘도 야근하겠네.' 에반스의 속도 모르고 김훈상이 말했다. "돌아가봐." 싱글벙글 웃었다. 딸과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겠으니. 그 말은 삼켰다. 그 말까지 하면, 에반스는 아마 고혈압으로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김상희가 인사했다.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직 미비하기는 하지만, 김상희를 중심으로 세계의 변화가 시작 됐다. 에반스에게는 야근의 첫 단추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세계의 변화도 시작 됐다. ============================ 작품 후기 ============================ 세계변화가 되면 될수록 에반스의 야근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0145 / 0192 ---------------------------------------------- 성녀의 기적. '미라클' *** 김훈상이 물었다. "그래. 어쩐 일이냐?" 김상희의 조련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소녀는 섭섭해요." 김상희의 그 단순한 한 마디에 딸등신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딸 앞에서 논리나 이성 같은 건 실종된 지 오래였다. "뭐, 뭐가 그렇게 섭섭하지?" 기분이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가, "소녀는 무슨 일이 있어야만 아빠를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빠에게 있어서 소녀는 용무가 없으면 볼 수 없는 먼 분이신가요?" 그 말에 하늘까지 솟구쳤다. 자신이 '들었다 놨다'를 당하는 건줄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고 말았다. 김상희의 말은 곧, '소녀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용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답니다.'라는 뜻이 되지 않는가. 김훈상은 행복해졌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김상희는 용무 있어서 찾아왔다. 아무래도 뭔가 공적인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김상희가 말했다. "소녀의 생각을 들어주시겠어요?" "그래." 뭘 못해주겠는가. 돈으로 사랑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조원에 달하는 건물을 김상희의 명의로 해줬다. 김상희한테 첫 뽀뽀 받았다고 퓨리어스를 뿌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미친 왕이다. 들어주는 거.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장미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요." "장미관을?" 장미관은 김훈상의 선물이다. 김훈상의 건물인 사자관보다도 더 안전한 곳이다. 물론 사자관도 곧 보수를 통해 훨씬 더 안전한 곳으로 탈바꿈 시킬거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최신식 설비를 갖춘 곳은 바로 장미관이다. 그런데 선물인 그 장미관을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거지? "집행부의 관리분들은 언제나 바쁘고 격무에 시달린다고 들었어요." 그 격무에 시달리는 자의 끝판왕 에반스가 지금, 김상희때문에 결재 못 받고 쫓겨났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공주들로 하여금 어떠한 직책을 맡겨볼까 해요." "흠. 무슨 직책을 맡기고 싶지?" 공주들은 어차피 별로 효용가치가 없다. 적어도 김훈상의 기준에서는 그렇다. 계집들을 데리고 뭘하든, 어쨌든 손해는 안 난다. "제 능력은 아빠도 잘 아실 것이어요." "그렇지." 그래서 도둑놈 같은 놈들이 눈 시퍼렇게뜨고 너를 찾아다니고 있지. 이리 같은 놈들.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사실 그들은 도둑이나 이리가 아니라 자랑스런 고려왕국의 나이트들 아닌가. 아무리 딸등신이어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법이다. 분명히 그런데. "승냥이 같은 놈들." 분명히 그런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굉장히 작았다. 김상희도 제대로 못 들었다. "네?" "아무것도 아니다." 김상희가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 생각은요..." *** 김상희의 능력 중 한 가지는 바로 '마력부여'다. 지난 소녀식 때, 최소연 공주가 그 혜택을 봤었다. 그런데 세상에 제대로 발표하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제 9대대 소속 나이트가 말했다. "모두 섭취하도록 합니다." 장미관 내에 따로이 마련된 연무장에서, 공주들이 알약을 삼켰다. 공주들은 신이 났다. 제 2공주인 김예원 공주가 감탄한 듯 중얼 거렸다. "이 느낌이... 마력...!" 김상희의 능력은 김상희 본인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 것은 김환석마저도 감탄한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바로 마력석 '알론'을 통한 마력부여. 마력이 없는 남자 중 한 명인 김형석은 마력석 알론을 항시 소지하고 다닌다. 알론에 타인의 마력을 저장해놨다가, 그것을 섭취하여 사용하고 있다. 김환석은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김상희를 데리고 실험을 해봣는데,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김상희의 손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빛을 머금은 그 마력석 알론을 정제하여 알약을 형태로 만들면 여자들에게도 마력을 줄 수 있는 비약이 되었다. 물론 김상희에게 직접 마력부여를 받는 것보다는 효과가 나빴다. 지속기간이 30시간 정도밖에는 안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 것이 의미하는 바는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라클에 관하여서는 절대 함구를 하여야 합니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왕명이며, 이를 어길 시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여자들에게 마력을 부여하는 이 알약의 이름은 '미라클.' 미라클은 아직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김환석의 이론에 따르면 대량생산.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여자들을 마력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미라클을 대량생산한다? 그 말은 즉, 남자에 비해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는 여자들을 모두 '전력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건, 공주들이 절대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김상희는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 공주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미라클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김예원 공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아..." 김예원 공주 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이 느낌을 받아본 최소연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라클은 기적이었다. 여자도 마력을 가질 수 있다. 김상희 공주의 도움만 있으면 말이다. 이 세계에서 여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마력이 없기 때문 아닌가. '이 것만 있으면...' 남자와 동등한 위치는 아니라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다. 여자들의 입지가 높아질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런데 김상희 공주가 찾아왔다. 나이트가 차렷자세를 하고서 경례했다. 20여명의 공주들이 손을 배꼽에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근엄하기 그지없던 표정의 나이트의 얼굴이 확 풀렸다. "성녀님. 여긴 어쩐 일로..." 누가 보면 이중인격자라고 오해할 법 했다. 또한 아무도 김상희 공주만 훈련에서 열외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나이트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우리 성녀님은 훈련같은 거 받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김상희가 말했다. "공주들과 얘기할 시간이 필요해요. 여기 왕명을 담은 문서를 가져왔어요." *** 공주들의 커뮤니티를 제안했던 것은 바로 김상희였다. 덕분에 공주들간의 교류가 양성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김상희 역시 공주들과의 만남을 종종 갖고 있다. 그런데 커뮤니티가 있기는 있으되, 공식적인 행사나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름과 집단이 있기는 있는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그런 유령집단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잘만 하면...' 잘만 하면 공주들의 권리가 많이 높아질 거다. "김예원 공주가 관리를 총괄하도록 하세요." 장미관은 독립적인 세력으로 인정 됐다. 김상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반발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겠어. 왕명인데. 개차반이 이럴 땐 참 쿨하고 좋다. 자기 생각에 맞다 싶으면 그냥 막 밀어붙이고 보니까. 또 워낙에 이미지가 좋은 개차반이라서 신하들도 딱히 반대하지 않기는 하지만.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이트들과의 직접적인 창구 역할은..." 장미관의 주된 업무는 바로 김상희 공주의 스케쥴을 관리하고, 김상희 공주와의 만남 시간을 체계화시키고 공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나이트들 사이에 알려졌다. 나이트 제 6대대와 9대대는 생활관을 함께 쓴다. 바로 웅비관이다. 웅비관 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봐. 다음 차례는 너라고." "아냐. 나는 분명히 처음부터 안 한다고 그랬어." "보너스 많이 준다고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제 9대대는 공주들의 훈련을 맡은 대대다. 그들이 나서서 공주들을 훈련시킨다. 공주들을 훈련시키는 거. 사실 굉장히 쉬운 일이다. 일단 그녀들은 기초체력부터가 약하다. 스펙타클하고 혹독한 훈련은 못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너스는 많이 주는 임무. 처음에는 지원자가 몰렸다. 그래서 김훈상이 직접 심사를 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아씨. 저번에 김예원 공주 얼차려를 줬었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그거 아직 기억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성녀와 왕이 장미관에 권한을 부여했다. 김예원 공주의 최종 승인이 있어야 김상희 공주로부터 명치를 얻어맞을 수 있다. 지금 당장 '나부터 해줘'라고 땡깡을 부릴 수도 없다. 만약 다른 나이트들이 없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공평하게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까. "그거... 효과가 반복으로 중첩도 된다며?" 다시 말해, 얻어맞으면 얻어맞을수록 더욱더 마력의 순도가 높아지고 절대양이 커진다는 소리다. 나이트들이 그 지경이다보니, 결국 어쩔 수 없이 김상희의 능력에 관한 소문은 왕궁 전체에 퍼지게 됐다. 이젠 나이트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알렉스는 섭섭함을 표했다. "김상희 공주님. 그런 능력이 있으시면 제게 먼저 해주시지 않고...!" "하지만 많이 아플 것이어요. 알렉스 학자님은 연세가 있으셔서... 그래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어요. 소녀는 학자님을 많이 걱정하고 있답니다." 그 말에 알렉스의 마음이 봄에 눈 녹듯 풀어졌다. 학자 마음 풀어주기 참 쉬웠다. 알렉스가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말했다. "자. 어서 절 때려줘요." "알렉스 학자님. 그건 장미관을 통하여 접수하셔야 해요." "......." 알렉스는 순간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좀 서운해졌다. 자신은 상희학의 유일한 연구자 아닌가! 게다가 김상희와는 한 배를 탄 사이 아닌가.(특별서고에 관한 일은 알렉스 역시 상당한 위험부담을 떠안았던 문제였다.) 김상희가 방긋 웃었다. "농담이어요." 알렉스는 깨달았다. 이 공주님. 사람을 들었다 놨다가 아주 자유자재다.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는 자신도 이런데, 그 것의 존재조차 모르는 왕과 왕자들은 이 것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지. "알렉스 학자님은 제겐 아주 특별한 분이셔요." 배신감 직후에 찾아온 달콤한 말은 알렉스의 마음을 어루고 달래주며 행복하게 해줬다. 특별한 사람이라니! 안 그래도 사랑스러워 보였던 김상희 공주가 더더욱 사랑스러워져 보였다. 손녀딸 삼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는데 그러자면 또, 폐하를 아들로 삼아야하는 난제가 있으니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절 때려주는 겁니까?" "네. 하지만 비밀로 하셔야해요. 공식적으로는 장미관을 통해서만 하게 되어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어서 절 패주세요." *** 황제의 밀실. 황제가 말했다. "미라클에 대해서 알고 있나?" 정보부 국장 김국현은 긴장했다. 갑자기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잘...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라는 말. 일반 사람도 아니고, 정보부 국장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긴장하지 마라. 어차피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 고려 왕궁 내에서도 극비에 해당하는 거니까." 황제가 설명했다. "어, 어찌 그런 일이...! 고대 기록에도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능력이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지." "그, 그런...!" 듣고보니 그랬다. 만약 김환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김상희의 이 능력은 제대로 발굴되지 못했을 거다. 여자에게 마력을 부여하는 알약이라니. 심지어 그 것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니. '그런데 폐하께선 어떻게 고려왕궁 내의 일을 저렇게 잘 알고 계신 거지? 고려 왕궁 내에서 극비인데...' 실제로 자신도 모르는 일 아닌가. "시기를 조금 더 앞당겨야할지도 모르겠어." "시기라 하시면..." 김국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여왕이 있다지만 아직 전력을 제대로 갖추려면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고려에는 수천만의 남자들이 있다." 그 말은 즉, "수억이 넘는 여자들이 있겠군요." 그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마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엄청난 전력 향상이 이뤄지는 거지. 인해전술도 가능해진다. 그 것이 대량생산 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 전에 고려를 쳐야한다. 준비기간을 단축해라." "그러면 여왕이 상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짧게 말했다. "여왕을 버리고 성녀를 얻는다." 그리고 그 사이, 한진수는 또 세상이 모르는 커다란 비밀 한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한진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반쯤 실성한 것처럼 말이다. "상희야. 너..." ============================ 작품 후기 ============================ 여주의 조련은 이 소설이 완결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듯 합니다. 0146 / 0192 ---------------------------------------------- 성녀의 기적. '미라클' *** 한진수는 고려국왕의 암묵적 동의 아래,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김상희를 보기 위해 고려왕궁을 찾는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마다 한진수는 김상희를 달래주기 위해 30분 정도는 시간을 써야 했다. 한진수가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매일 미안해. 상희야." 김상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진수의 사정.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다. 적어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토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상희는 언제나 24시간 내내 대기를 해야했으니까. 한진수가 대략 1달 주기로 찾아 오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언제 오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규칙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김상희는 한 달 내내, 기약없는 기다림을 해야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여자다. 한진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 그러니까 한 달 내내 예쁘게 있는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토닥여줬다. "매일 기다리게 하는 거 알아." "......." "내 스케쥴에 너를 맞추게 하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 김상희는 팔을 들어올려 한진수를 안았다. 솔직한 말로 이 마음, 도대체 뭔지 잘 모르겠다. 한진수를 이해는 하는데, 내 서운한 마음을 알아달라. 이런 느낌인 것 같긴 한데 이 마음의 실체. 김상희 스스로도 잘 몰랐다. 하지만 김상희는 오랫동안 토라져 있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뿐이다. 한진수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싸우고 토라져 있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란 너무나 아까웠다. 언제나 그렇듯, 한진수가 먼저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리고 한진수가 찾아오는 날이면, 왕가의 경계가 한층 더 심해진다. 왕이 말했다. 합방은 2년 뒤라고. 황당한 건, 6개월 전에도 2년 뒤라고 말했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도 2년 뒤라고 한다. 이대로면 앞으로 2년이 지나도 또 2년 뒤라고 말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한진수는 김상희를 육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진도(?)는 그래봐야 키스다. 황당하다면 황당한 일이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오로지 키스만 하면서 3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한진수의 입술과 김상희의 입술이 포개졌다. 한진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김상희를 품에 안고 있고, 그보다 더 나아가 키스까지 하고 있으니까. 속으로 고백했다. '사랑해.' 그러나 김상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 아. 얘. 또. 이런다. 물론 나도 안다. 밖에는 아마 스페셜 나이트가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다. 우리 개차반씨와 망나니들이 미친듯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개차반과 망나니는 과보호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고, 만약 진수가 내 몸을 어떻게 하려고 한다면 아마 난리. 아니 생난리를 칠거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남자가 무슨 패기가 이렇게 없어?' 세기의 대천재? 제국 황제를 속 썩이는 변방 나라 신라의 국왕? 타국 출신으로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가 되었던 천재?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오늘도 키스만 1시간은 하겠네.' 아니. 솔직히 말해서 키스가 싫다는 건 아니다. 키스. 물론 좋다. 나도 진수랑 키스하는 거 좋아한다. 그래도 저번에는 3시간 내내 키스만 했다. 입술 다 불어터지는 줄 알았다. 내가 알기로 남자들은 손 잡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또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하고 싶다며? 그렇다며? 너...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그렇다고 또 내가 덮치기는 좀 그렇잖아. 예전 지구에서도 분명 그랬었기는 했지만 그 당시 내 나이는 20대 후반이었고, 지금 내 나이는 10대 중후반이다. 내가 덮칠 수는 없지. 아니. 이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엉엉.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진수는 또다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길로 날 쳐다보고 있다. '좋기는 좋은데...' 진수의 저 눈빛. 볼 때마다 설레고 좋다. 분명 그건 맞다. 그런데 좀... 2프로 부족하다.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변태 아니다. 그냥 진수가 너무 좋을 뿐. 그리고 진수랑.. 그랬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그냥. 흠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최근 나는 내 능력에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소연 공주의 소녀식 이후로 확실하게 알게 됐다. 나는 내 의지로 이 빛을 내뿜을 수 있다.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만 가능했는데, 이제는 내가 생각한 모든 곳으로 가능하게 됐다. 내가 아무도 없을 때, 거울을 보면서 한 번 해봤는데 심지어 콧구멍으로도 이 빛을 내보낼 수 있다. 아참. 나이트들이 이 빛의 이름을 정해줬다. 성녀의 빛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내가 내 입으로 '성녀의 빛'이라고 말하기 민망하니까 그냥 '빛'이라고 하겠다. '그럼 이 빛을... 한 번.' 콧구멍으로도 내보내는 게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입으로도 내보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나는 한 번 시도를 해봤다. 그리고 진수가 화들짝 놀랐다. "상희야. 너..." *** 한진수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상희가 걱정할까봐 티는 안 내고 있지만 그는 매우 바쁘다. 하루에 잠을 3시간 정도밖에 못 잔다. 아무리 마력이 있는 신체라고는 해도, 그는 그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중이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루 빨리 제국을 없애버리고 김상희를 안전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김상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는 바쁘고 힘들다. 만약 한진수가 얼마만큼 힘들고 바쁜지 알았다면,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을 거다. 감히 투정하기 힘들만큼, 한진수는 너무나 바빴으니까. 특히나 이렇게 김상희를 찾아오고 나면 그는 더더욱 바빠진다. 평소에 3시간을 잔다면, 김상희를 찾아오는 날 전후로 1주일 정도는 1시간밖에 못 잔다. 김상희를 만나는 것 자체가 한진수에게는 일이며 고행이다. 그러나 한진수는 그러한 것을 모두 감당하고서라도 김상희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당연하다. 그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삶의 이유였으며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으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김상희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한진수는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다. '괜찮아...졌다?' 단순히 괜찮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과거 제국과의 국지전이 벌어졌을 때의 그 때의 그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희야. 너...어떻게 한 거야?" "응? 뭐가?" 그리고 깨달았다. 김상희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져들었다. 고대의 기록이 떠올랐다. '특수한 행위를 통해 마력의 순도를 높이고 절대량을 늘려준다였었지.' 여태까지는 그 특수한 행위가 바로 '명존세'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한진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홀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그 때의 그 기분이다. 온 몸에 활력이 생겼다. 한진수의 몸이 저절로 붕 떴다. "지, 진수야?" 한진수의 몸이 번쩍! 빛났다. 김상희가 깜짝 놀랐을 때, 한진수가 다시 땅에 내려섰다. 한진수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중얼거렸다. "상희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묻고 싶어.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한진수는 방금 경험했다. '이 것은... 어쩌면 3차 각성에 근접한 힘일지도 모른다.' 보통 남자들은 2차 각성까지는 한다. 그러나 3차 각성은 아직까지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경지다. 전 세기의 대천재 김훈상도 아직 3차 각성은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한진수는 느꼈다. 3차 각성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지만, 그에 근접한 어떠한 기분을 느꼈다. '이 느낌은 마치...' 마력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생명을 가진 생명체가 몸 속을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 '이러한 모든 것을 제국은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제국이 그토록 김상희를 얻고 싶어 했겠지. 그러나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라로 돌아온 한진수는 프리온 나이트들을 소환했다. 프리온 나이트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전직. 붉은 늑대. 레지스탕스의 대장 칼리번이 말했다. "폐하. 프리온 나이트가..." 프리온 나이트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전에, 김상희가 흰 빛을 뿌렸을 때. 그 때와 마찬가지로 변해 있었다. 패널이 알려줬었다. 이 것이 프리온 나이트의 최종형태라고. 그리고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1기는 일반 프리온 나이트 10기를 능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고려 다녀오신 거 아닙니까?" "......." 한진수도 놀랐다. 프리온 나이트가 변했다. "김상희 성녀와 무슨 일 있었습니까?" 무슨 일 있었다. 키스했다. 키스하는 와중에 김상희의 입을 통해 하얀 빛이 흘러 들어왔다. 칼리번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 아니. 폐하. 얼굴은 왜 빨개져요?" *** 김환석은 한진수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상희의 입을 통해 성력이 방출되면 그 효과가 훨씬 크다고 했다. "어이." "네. 오빠. 말씀하시어요." "너. 한진수랑..." "네?" 김환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다." 아니지. 이걸 말하러 온 게 아니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 결혼까지 한 마당에. 키스까지는 봐줘야겠지. 그래. 딱 키스까지다. 더이상 한다면 한진수 네 놈의 그 것을 잘라 버리겠다. 그 다짐을 하는 한편, 김환석이 본론을 꺼냈다. "이 것에 성력을 불어넣어 봐라." 김환석이 가져온 것은 마력석 알론. 거기에 하나 조건을 붙였다. "입으로." 김환석이 그것을 가지고 실험했다. 결과는 대성공. 훨씬 효능이 뛰어난 미라클이 개발됐다. 김훈상 마저도 감탄했다. "여자들에게 마력을 선사함과 동시에 남자들에게도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이 '미라클'이 있다면 고려의 전력을 한 순간에 수십배 이상 강하게 만들 수 있을 터. 그 정도면 제국과 한 판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석아. 미라클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겠지?" "예. 가능합니다. 다만... 김상희가 조금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그건 좀 곤란한데. 하고 김훈상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김환석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제국을 먼저 없앤다면, 오히려 김상희가 더 빨리 안전해질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김상희를 혹사시키는 거. 그거 별 거 아니다. 그래봐야 마력석 알론에 뽀뽀 몇 번 하게 시키면 된다.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는데, 그 정도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병신과 딸등신은 그 행위를 결정하는데 무려 용단까지 필요했다. 그 용단을 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 그래도 내 딸 힘든 거 싫은데." 그런데 김훈상이 못된(?)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김상희가 입을 통해서 성력을 내뿜으면 그만큼 효과가 탁월해진다고 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김훈상은 대뜸 김상희를 찾아갔다. 그리고 명령했다. "뽀뽀해라."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 개차반이 왜 이래. 아침부터 뭘 잘못 먹으셨나. 이봐요. 난 이제 6살이 아니라 16살이라고. 김훈상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국가 전력에 엄청난 보탬이 될 수 있는, 중대한 일이며 국익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일이다." ... 뽀뽀가요?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그냥 그런 거 핑계로 뽀뽀 강탈할려는 거 아닙니까?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한진수가 저 박력의 30프로만 닮아도 참 좋겠는데.' 라고 생각했다. 김훈상이 조금 무리한 요구를 했다. "여기다가 뽀뽀다." "소, 소녀는 이미 성년이 되었는데..." 아니. 여기가 미국이야? 왜 입술에 뽀뽀를 하래? 이 개차반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한 김상희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김훈상의 몹쓸버릇 또 나왔다. "뽀뽀 안하면 사형시켜버리겠다." 이 황당한 명령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고 말이다. 김상희의 조련은 끝나지 않았다. "소녀의 목숨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군요. 소녀에게 있어서 아빠는 태양과도 같이 크고 바다같이 넓으신 분이신데... 소녀의 착각이었어요." 딸의 서글픈 모습을 본 딸등신 김훈상의 박력이 많이 줄었다. "뽀뽀... 좀 해줘." "소녀를 사형시킨다고 하셨잖아요. 소녀를 죽여주시어요." 김훈상은 완전 백기를 들었다. "뽀뽀 좀 해주면 안 될까? 응?" "......." 김상희는 삐진 척 했다. 결국 김훈상은 힘을 썼다. 마력을 써서 강제로 뽀뽀(?)를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뽀뽀를 한 건 아니었다. 김상희의 입을, 마력을 써서 살짝 벌린 다음 성력을 불라 시켰다. 입술이 닿지는 않았다. 김훈상이 명령을 내렸다. "빛을 불어넣어 봐라."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김훈상. 많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0147 / 0192 ---------------------------------------------- 충격적인 제안 *** 김훈상은 온 몸에 마력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눈 앞이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 뭔가 이상하다.' 이상했다. 이 기분은 마치 2차각성을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불어 넣어 봐라." 김상희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챘다. 있는 힘껏 불어 넣었다.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 김훈상이 쓰러졌다.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아, 아빠!" 김상희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입장에서 김훈상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 처음 본다. 마력이라는 완전무결한(?) 능력이 있는 개차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개차반이 자기 때문에 워프 많이 써서 며칠 앓아 누웠다는 건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 하여튼 김훈상이 이렇게 쓰러져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소란 피우지 마라." 김훈상은 숨을 헐떡 거리면서 말했다. "걱정도 하지마라." 김상희는 문득 깨달았다. 김훈상이 쓰러져서 놀라긴 놀랐는데, 단순히 놀란 게 아니었다. '내가... 개차반을 걱정하고 있었어?' 이제 많이 달라졌다. 개차반이 자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도 안다. '나쁜 쪽으로도 극단적이었다가 좋은 쪽으로도 극단적이라는 게 문제지만.' 좀 정도가 지나친 딸등신이라는 게 문제긴 문제지만. 재미있는 건, 김상희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장미관이 자기 것인지도 모르고, 수페르가 순수익의 절반이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도 모른다. 하여튼 김훈상 부자가 극단적임의 끝을 달리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도 많이 변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김훈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떠냐? 후광이 좀 나는 거 같지 않냐?"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아빠 당신. 자뻑만큼은 세계 최고인 것 같아요. *** 나는 황당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어. 음. 저기. 그러니까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 옷 좀 입어 주세요." 개차반은 자신의 몸을 쳐다봤다. 그리고 껄껄 웃었다. "옷이 전부 사라졌구나." 옷이 없어져 버렸다. 옷이 없어져 버린 건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김훈상은 크하핫! 크게 웃었다. 김상희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호탕하게 웃지 말라고. 옷은 좀 입으라고. 아무리 당신이 내 아빠님이라지만, 맨 몸을 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래. 너는 부끄러움도 없어요? 개차반이 크게 말했다. "시녀는 옷을 가져와라." 아마도 송수진씨라 짐작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폐하." 듣자하니 우리 개차반씨에게 3차 각성이라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3차 각성이 도대체 뭘까. 내가 책을 찾아보니까 아직까지 3차 각성을 이룬 공식적인 사례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책을 통해서 알아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알렉스씨에게 물었다. "알렉스 학자님. 3차 각성이라는 게 도대체 뭐에요?" *** 알렉스는 신세계를 맛보고 있는 중이다. 상희학. 이 것은 역시 진리의 학문이었다. 이 것을 이제는 세상에 공표해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럴 수가. 3차 각성이라니.' 알렉스가 김상희에게 설명해줬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두 번의 각성을 거칩니다. 각성을 할 때마다 마력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순도가 높아지며 절대량이 커집니다. 그 것을 스텝업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음. 쉽게 말해서 마력 10을 가진 남자가 1차 각성을 하게 되면 그게 100이 됩니다. 그리고 100을 가진 남자가 2차 각성을 하게 되면 3000이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편할 것 같네요." 알렉스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김상희에게 말을 이었다. "스텝업이라는 건 남자에게 엄청나게 중요하죠. 갑자기 능력이 증폭되는 구간이니까. 그런데... 공주님 덕분에 딸등시...아니. 폐하께서 3차각성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김상희는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지금. 딸등...까지 말한 것 같은데. 분명 뒤에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1차 각성때보다, 2차 각성때의 스텝업이 훨씬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추어 보자면 폐하의 3차 각성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죠. 공주님은 지금 기적을 만드신 겁니다." 김훈상의 3차 각성 소식은 왕궁을 강타했다. 덕분에 장미관은 더더욱 바빠졌다. 김상희에게 빛을 받으면 -김훈상이 어떤 방식으로 성녀의 빛을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밝혔다가는 도둑놈들이 너도 나도 뽀뽀해달라고 덤빌까봐 그게 두려웠으니까.- 3차 각성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이트들은 물론이고 고위관리들이 장미관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김예원 공주가 말했다. "죄송해요. 순서가 밀려서... 바로 해드릴 수가 없겠네요."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날 미뤄!" "죄송해요. 스티브 공자님의 위명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걸 아는 년이 감히, 내 순서를 뒤로 미루느냐, 이 말이다! 이 건방진 계집년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당신이 누구건 상관없으니까 순서는 좀 지키지?" 나이트였다. 나이트는 일반적인 관리들과는 독립된 단체다. 신분의 고하가 없다. 또 다른 나이트가 검을 만지작 거렸다. "감히 공주님들한테 그따위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주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순서가 빨라질 수 있다. 그는 김예원 공주를 힐끗 쳐다봤다. '이번에 점수 좀 따놓자.'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다. "공주님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란 말이다, 이 배불뚝이 자식아!" "형님. 말로 할 거 있습니까? 그냥 좀 패죠. 패면 편할 것 같은데." 나이트 중 한 명이 또 말했다. "김예원 공주님. 걱정 마세요. 이딴 배불뚝이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한 번만 더 까불면 저 코에 주먹을 꽂아넣어주면 되니까요." 김예원 공주는 요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굽신거리는 상황이 된 거다. '이건... 꿈일 거야.'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배가 볼록 나온 남자는 씩씩댔다. 마침, 김상희가 장미관 안 쪽. 이 곳 김예원 공주가 실무를 보고 있는 홀에 들어왔다. 남자가 김상희를 발견했다. "김상희 공주!" 그의 목소리가 홀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김상희도 마침 이 쪽으로 걸어오던 중이었다. 김상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미관 제 1수칙. 모르고 계셨나요?" 스티브 공자는 당황했다. 김상희 공주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그는 왕궁에 들어와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어디 감히 계집따위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당황하다 못해 이제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그딴 거 알까보냐..." 그 때, 김환성 왕자가 들이 닥쳤다. 장미관에서 소란이 일면, 그리고 그 소란에 김상희가 있으면 언제나처럼 출동하는 망나니가 하나 있다. 그 망나니의 이름은 김환성이며 최근 김상희의 도움을 받아 2차 각성을 끝마쳤다. "어떤 새끼가 내 똥개한테 소리를 질러?" 씩씩대며 다가와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장미관 제 1 수칙. 계집이라고 무시하지 말 것." 뭐, 뭐 그딴 황당한 수칙이 다 있습니까! 스티브는 따지고 싶었다. 그런 수칙. 들어본 적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지키고 싶지도 않다. 말 그대로 쓰레기같은 수칙이다. "장미관 제 2 수칙. 계집에게 소리 지르지 말 것." 김환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설명하기 귀찮다. 너 그냥 꺼져." 김환성은 귀찮다는 듯 걸어가 스티브 공자를 대충 발로 걷어 찼다. 대충 맞았는데, 그는 정확하게 창문쪽으로 날아가 창문을 뚫고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김환성이 태평스레 말했다. "뭐. 죽지는 않았겠지." "오빠. 그래도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그래?" 김예원 공주는 이제 이 상황이 놀랍지 않았다. 왕자에게 태연스레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왕자의 행동이 잘못 되었다 지적하는 것도. 이제는 놀랍지 않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자신의 세대에 이런 변화가 일어날 줄이야. 놀랍다기보다는 이제 매일매일이 감사하다. 그 날 밤. 김예원 공주가 김상희를 찾았다. "언니는 정말 대단하셔요." 지난 6개월간 제법 친해졌다. 말도 놨다. "예원 공주는 또 그 소리야?" "언니 덕분에 세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직 멀었다. 겨우 왕궁 내에 국한된 변화다. 그것만 해도 김예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언니는... 제 은인이셔요. 제가 이러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언니를 사모하고 있어요." 김상희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사실 내가 한 건... 사람들 명치 때리기랑 진수한테 키스한 거랑 개차반한테 뽀뽀 비스끄리무리한 거 해줬을 뿐인데...' 나머지는 한진수를 비롯한 개차반 및 망나니형제가 알아서 다 했다. 김상희의 능력이 꽃 피울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 한진수고, 그걸 토대로 미라클을 개발한 것이 김환석이며 그걸 또 대량생산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게 김훈상이다. 그리고 김환성과 김환혁이 김상희를 싸고 돌면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켰다. '그러고보니 내가 직접 뭔가를 한 건 진짜 없는 것 같은데.' 하여튼 과정은 둘째 치고, 결론만 놓고보면 김상희는 계속 기적을 일구고 있는 중이었다. 김예원은 감동해서 눈물을 훔쳤다.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언니는 기적을 만드시는 분이셔요." ...아...응. 너 뭔가 속고 있는 것 같긴한데, 하여튼 뭐. 그런 걸로 하자. 라고 김상희는 멋쩍게 웃었다. *** 김상희는 모르고 있다. 자신의 성력을 담은 '미라클'이 대량생산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김환석이 말했다. "이제 3달만 있으면 전쟁에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의 미라클이 생길 겁니다." "생각보다 느리군." "마력석 알론의 수요가 갑자기 급증하면 제국에서 의심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량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김상희. 자신이 낳은 딸이지만 대단하지 않은가. 그 딸 덕택에 3차 각성까지 이루었다. 그런데 김환석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왜 그러냐?" "제가... 어떠한 생각을 떠올렸는데 말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의외구나." 김환석은 한참을 주저했다. 과연 말을 해도 될런지. 솔직히 말하자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 것이 궁극적으로는 김상희를 위하는 일이 될 테니까. 김훈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 "그러나... 멀리 본다면, 그리고 만약 성공한다면 김상희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훈상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3일이 지났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불렀다. 이제 김상희는 많이 여유로워졌다. 왜 나를 불렀을까, 나를 죽이려들면 어쩌지? 그런 생각은 이제 안 한다. 대신 예쁘게 웃었다. "네. 아빠. 소녀를 부르셨어요?" 그 예쁜 미소를 보며 김훈상은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또 고민해야만 했다. "아니다. 가봐라." 김상희의 미소를 본 김훈상은 또 고뇌에 빠졌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아니다. 가봐라." 또 김상희의 미소를 본 김훈상은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져들었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아니다. 가봐라." 김상희는 이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쁘게 웃어줬다. "아니다. 가봐라."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번에는 김상희가 먼저 선수 쳤다. "아빠. 소녀에게 꼭 말씀해주셔요. 아빠가 이렇게 뜸을 들이시니 소녀는 너무나 궁금하여 밤잠을 설치고 있어요. 피부가 상하고 속이 안좋아지는 것 같아요. 소녀의 건강을... 나쁘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 깊은 번뇌와 고민에 빠져들었던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딸의 건강이 나빠진다는데.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 "내가 너를 부른 까닭은..." 그 말에, 김상희는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진심...이셔요?" ============================ 작품 후기 ============================ 아빠 당신. 자뻑만큼은 세계 최고인 것 같아요. 과연 자뻑만 세계 최고일까...?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너 지금 건물주야... 지금 네 통장에 수천억원쯤 들어있을걸.. 0148 / 0192 ---------------------------------------------- 충격적인 제안 *** 지금. 개차반이 뭐라고 한거야? 설마.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나는 고심하고 또 고심해야했다. 아니. 이건 함정인가? 분명 함정일 거야. 내가 좋다고 하는 순간, 저 딸바보는 분노하겠지. 분명히 그럴 거야. 낚이면 안 돼. 정신 차리자! 호랑이 굴. 아니, 딸등신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어... 는 뭔가 이상하지만 하여튼. 흠흠. 내가 말했다. "소녀는 아직 너무나 어려요." 그 때 나는 봤다. 개차반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아까까진 마치 목각인형같은 굳은 표정이었다면, 이제는 좀 좋아졌다. 그래. 역시 날 시험한 게 맞았어. 요즘 너무 채찍만 준 것 같으니 이번에는 당근을 좀 줄 차례지. "소녀는 아직 아빠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소녀에게 있어서 아빠보다 더 크신 분은 없답니다." 까지 말했을 때, 개차반은 날 와락 끌어 안았다. 거봐. 역시 시험한 게 맞았다니까. 그리고 겨우 이 정도로 감동하면 어떡해? 내겐 아직 아빠 당신을 위한 멘트가 12개는 넘게 남았는데. 개차반이 말했다. "...그렇지. 너는 아직 어리다." 아니. 그건 아빠 당신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고. 이 세계에서 성년은 15살이다. 그런데 나는 16살이다. 전혀 어리지 않다. 시집가고도 남을 나이다. 하지만 아마도 개차반 눈에는 내가 아직 갓난아이처럼 보일 거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 말은 곧 사실로 증명 됐다. "아직 내 품을 벗어날 수 없는, 가녀리고 어린 갓난아기란 말이다." ...이봐요. 나 성인이라니까?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네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라? 이거 진심인가? "아빠. 하지만 소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걸요." 아니. 마음의 준비. 이미 예전에 다 했다. 한진수가 너무 답답해서 내가 먼저 덮칠까도 고민했었으니 말 다했다. 나는 이 세계의 순수한 16살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로만 따지면 40살이 넘는... 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긴 한데, 닳고 닳은(?) 여자니까. (이상한 뜻 아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뜻이다. 아마도.) 개차반의 제안은 별 거 아니었다. 이미 결혼한 몸이니 한진수와 합방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거였다. 이거 말하는데 거의 1주일 걸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주일동안 나를 다시 되돌려 보내고, 그리고 나를 앞에 앉혀놓고 얘기하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 양반 뭐가 이렇게 한가해? 나를 앞에 두고 3시간이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을 정도로 한가한 당신이 아닐텐데. 왕들 바쁘다는 거 다 뻥인가? 하여튼 개차반이 말했다. "하루의 시간을 더 주겠다. 잘 생각해 봐라." ...그렇게 괴롭다는 표정으로 말하면 나는 어떡하라고? 아빠 당신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의 준말)야? 일단 나는 대답했다. "알겠어요. 소녀의 방으로 돌아가 아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게요." *** 언제나 그렇듯 집행부 부장 에반스는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중이다. 과한 업무량 때문에 요즘 죽겠다. 특히나 장미관. 그리고 미라클에 관한 작업 때문에 죽겠다. '내 다시는 집행부 부장따위를 맡지 않으리.' 그는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도 이 건만 끝내면 한 숨 잘 수 있겠다.' 벌써 이틀밤을 꼬박 새웠다. 이제 이것만 끝내면 한 3시간 정도는 푹 잘 수 있을 거다. 그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뭐, 뭐야...? 왜 안 나와?' 김상희 공주가 김훈상의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 까지는 확인했다. '이, 이거 싸인만 받으면 끝인데.' 세부 내용은 이미 김훈상도 다 알고 있다. 그냥 싸인만 하면 끝이다. 싸인만 받아놓고 3시간 뒤 3개국에 보내면 그만이다. '뭐야! 왜 안 나오시는 거냐고!' 1시간이 흘렀다. 초조해졌다. 스페셜 나이트도 미안한 듯 말했다. "오늘은 좀 오래 걸리시네요. 나중에 다시 오시든지..." 지난 1주일간 김상희가 이 방에 드나들 때마다, 거의 10분만에 방을 빠져 나왔다. 그래서 나이트도 잠깐 기다리라고 했던 건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아니... 이게 좀 급한 거라... 앞으로 2시간 내로 결제를 받아야하는 거라..." 만약 2시간 후에도 김상희 공주가 나오지 않는다면, 긴급요청을 넣어서라도 들어가야 했다. 결제 받기 어려운 문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결제를 못 받으면 수십 억의 손해가 난다. 게다가 마력석 알론 무역과 관련된 내용이라 반드시 사인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고. '앞으로 1시간...'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얘기를 하고 있으면 2시간동안 꼼짝도 않고 안에 있는단 말인가. 에반스는 이제 안다. 성녀가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졌는지. 그렇다보니 왕과 성녀가 굉장히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같은 시각. 김훈상은 김상희에게 '너. 한진수와 합방해라.'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에반스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1시간이 흘렀다. 이제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이거. 결제 못 받으면 안 된다. 에반스가 말했다. "긴급입니다. 이제 시간이 정말 없습니다. 안에 연락 좀 넣어주세요." 그 때, 문이 열렸다. 김상희 공주가 보였다. 에반스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얼굴이 왜 빨개지셨지?' 김상희 공주의 얼굴이 빨개졌는데 이상하게 좋아 보였다. 실실 웃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에 반해 김훈상의 표정은 굉장히 어두웠다. "폐하." 하지만 그런 것에 일일히 신경쓸 수 없었다. 일단은 사인이 먼저다. "이 서류에 사인이 필요합니다." "사인 따위..." 김훈상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대충 펜을 들어 대충 사인했다. 에반스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김상희는 침대에 누웠다. '진수와의 합방이라...' 이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첫째 망나니란다. 탑 오브 망나니였는데, 가끔은 이쁜 일도 하네... 라고 말하면 나 너무 변태 같은가... 아냐.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진수를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이렇고 저렇고,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싶은 것 뿐이다. 하여튼 이러한 얘기가 나오게 된 배경은, 좀 낯부끄러운 얘기가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세계는 극 남존여비의 세계다. 또한 남자들끼리의 사랑 역시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존귀하다고까지 여겨지는 판국이다. 그러한 가운데, 남자들끼리 이렇고 저런, 그런 일들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른다. 남자들이 진짜 그러는지 안 그러는지. 그리고 이렇고 저런 일이라 함은 19금을 의미. 아니. 이 세계 기준으로는 15금을 의미한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하여튼. 음. 음. 그러니까 하여튼 그렇다. 내가 이상하게 하여튼이라거나, 어쨌든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기는한데 어쨌거나 결론만 말하자면 남자들끼리 그런 일을 할 때에 남자의 마력이 다른 남자의 몸에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그에 기반하여 우리 첫째 망나니가 어떤 실험을 진행해봤단다. 어떤 실험인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그 실험을 통해 반쯤 확인된 사실이 있단다. '나와의 합방을 하면...' 그러면 한진수에게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했다. 시도해본 적이 없으니 정확할 수 없었다. 입으로 내 힘. 그러니까 성력을 전달하는 행위는 다른 부위로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그 효과가 크단다. 그런데. 아. 이걸 자세하게 설명 해야해? 자세하게 하기에는 아주 많이 민망하지만. 하여튼 합방을 하게 되면 그 효과가 굉장히 클 것이란 예측을, 우리 기특한(?) 첫째 망나니가 했단다. 개차반의 입장에서 나와 합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명 뿐. 바로 한진수다. 개차반은 이렇게 말했다. '한진수가 3차 각성을 하게 된다면... 제국과 싸울 때에 커다란 힘이 되겠지.' 그 말을 듣고 난 오예를 외칠 뻔 했다. 절대로 합방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저 딸등시...가 아니라 딸바보가 어쨌든 합방을 허락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슬슬 진수가 찾아올 때가 됐다. 이맘때가 되면 난 항상 긴장을 하게 된다. 언제 진수가 찾아올지 모르니까. 난 아침부터 일어나 꽃단장을 하고서, 기약없는 기다림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럴 때면 우리의 둘째 망나니는 언제나 그렇듯, 망나니가 되어 버린다. "똥개. 물어왓!" 쟤 심술 부리는 거다.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멀뚱멀뚱 서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우리 송수진씨는 긴장한다. 아마도 '공주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 심장이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아요. 어찌 감히 왕자님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 거에요?' 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다. 괜찮아요 송수진씨. 이 정도는 괜찮아. "오빠. 물어왓은 이제 안 시킨다고 약속 하셨잖아요." 무엇보다 너, 장가는 안 가니? 갈 때 됐잖아. 망나니는 마력을 써서 헝거비를 회수했다. "몰라. 짜증나." 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오빠... 소녀한테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어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분명 오빠는 소녀에게 짜증을 내셨어요. 소녀는... 오빠를 언제나 즐겁게 해드리고 싶은데..." 물론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저 헝거비를 옛날처럼 물어왔겠지. 굳이 문자로 표현해보자면, '오라버니! 여기 이쪄여! 저 잘했죠!' 정도가 되는 표정을 짓고서 말이다. 망나니는 당황해했다.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진짜 아냐." 그리고 속내를 털어놨다. "이맘때만 되면 네가 그 도둑놈새끼를 열심히 기다리는 게 보여서 짜증이 막 치밀어 오른단 말이야." "......." "제깟 놈이 뭔데, 감히 내 똥개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 그냥 콱 죽여 버릴까?" "오, 오빠. 말씀이 너무 무서우셔요." 아, 아마 저 놈은 진짜로 진수를 죽일 거야. 죽이진 않아도 반 쯤 죽여 놓을 거야. 아무래도 진짜 그럴 거 같다. 그리고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그 부분은...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죄하겠습니다." 망나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이 개자식!" 진수였다. 진수가 찾아왔다. 나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수의 얼굴이 보였다. 아악. 망나니. 안 돼! 기다렷! 멈춰! 우리 진수. 때리는 거 아니야. 때리지 말라고. 주먹 내려! 라고 말하기도 전에 진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형님. 민트 초콜렛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한 수레를 가져왔습니다." 망나니가 멈췄다. 진수를 때리지 않았다.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데, 민트 초콜렛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마음과 넘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게 훤히 보였다. 이럴 때엔 서비스 멘트 날려줘야지. 저 두 가지 마음 중 한 쪽에 무게추를 살짝만 올려놔주면 된다. "오빠. 저는 오빠가 초콜렛을 먹을 때 행복해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래. 네 조련의 시작은 초코바였지. "소녀는 오빠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소녀도 덩달아 행복하답니다." 망나니는 결국 민트 초콜렛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초콜렛때문에 봐주는 거 아니니까 앞으로 잘해. 알겠냐?" 또 강조했다. "절대. 절대. 절대로 초콜렛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했다. "진짜야." *** 한진수는 김상희의 방에 찾아오기 전에, 김훈상을 찾았다. 고려왕궁에 들어오기 전에 김훈상을 먼저 찾는다. 그게 예의다. 김훈상은 지금 김훈상 나름대로 리스크를 짊어지고 한진수를 받아들이고 있는 거니까. 만약 이 사실이 제국에 알려진다면 김훈상은 할 말이 없다. 제국과 당장 척을 져도 할 말이 없다. 반역자를 숨겨주고 있는 셈이 되니까. 그것 뿐만 아니라 장인어른 되실 분이니 먼저 인사를 드리긴 드리는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태도부터가 좀 정상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얼마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합방을...허락한다." 김훈상의 표정은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때문에 한진수는 고민해야 했다. '저거 진짜인가...?' 아니면 시험하는 건가? 여기서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면 주먹이 먼저 날아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물론 내 딸을 너 같은 도둑놈새끼한테 주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지만." 그 마음의 준비하는데 벌써 7개월이 넘게 흘렀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마음의 준비. 영영 안될 듯 했다. "하지만... 결국 내 딸의 행복을 위해서... 허락해야겠지." "...진심이십니까...?" 결혼한 사이에서 합방이 뭐가 그리 대수이겠냐마는, 김훈상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 없었다. 누가 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제국과 전쟁을 치를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한진수의 표정 역시 비장했다. 객관적으로보면 비장할 구석이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두 남자는 지나치게 비장해졌다. "...진심...이다. 하지만... 내 딸을 아프게 하지 마라. 난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껴라. 아껴주고 또 아껴줘라. 사랑으로 보살펴라.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절대 아프게 하지 마라." 한진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참겠습니다." 김훈상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게 아니다!" 아니.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한진수는 묻고 싶었다. 그렇게 비장한 시간이 지나갔다. 결과적으로 한진수는 합방 허락을 받았다. 한진수의 심장이 두근 거렸다. 김상희의 방문 앞. 여기까지만 왔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김상희가 그리웠고 김상희의 냄새가 그리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모습이 아른 거렸다. 이 문만 열면, 여기만 지나가면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 설레고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제깟 놈이 뭔데, 감히 내 똥개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 그냥 콱 죽여 버릴까?" 그 말까지 들려왔다. 한진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 세계에서도 아주 희귀한 민트초콜렛을 대량으로 구매해왔다. 이건 돈 있어도 못구하는 아주 희귀한 초콜렛이다. 오늘 거대한 산을 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민트초콜렛이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환성이라는 산은 아주 쉽게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됐다. "상희야." 김상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부끄러운 척 했다. 사실 부끄럽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한데, 또 진수를 기다리기도 했다. "...응?" 실제로 김상희의 목덜미가 조금 붉어졌다. 한진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얘기... 들었어?" 그럼! 들었고 말고! 다 아니까, 이제. 네 용기가 필요할 때야. 누나는 이미 준비가 되었단다. 김상희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겉으로는 계속 부끄러운 척 했다. 아주 작게 말했다. "들었어..."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한진수가 또 답답한 소리를 했다. "네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면, 무서우면... 하지 않을게. 나는 그냥 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거든." 아니. 배려도 너무 지나치면 안하느니만 못한 거야. 이 답답아. 어휴 진짜. 김상희는 직접적으로는 표현 못하고, 돌려서 얘기했다. "불...꺼줘." "응?" "부끄럽단 말이야. 불 꺼줘." 자. 이 정도 멍석을 깔아줬으면 이제 됐겠지. 라고, 김상희는 스스로 태연한 척 했지만 그녀의 심장 역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단순히 합방 자체가 좋은 게 아니었다. 한진수와 함께 하는 그 뜨거운 시간이 좋았다. 그 열기로 이 방이 녹아버려도 좋았다. 그런데, 그 열기가 방을 녹이기 전에 이 몸부터 먼저 녹여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거렸다. 피가 뜨거워졌다. 불이 꺼졌다. 한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희야." 그리고 한진수가 조심스레 김상희를 침대에 눕혔다. 아주 천천히. 급하지 않게 말이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체온이 느껴질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한진수가 김상희를 쳐다봤다. 한진수가 말했다. "눈 감아." 그리고 감은 그 두 눈에, 한진수가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코 끝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쪽, 소리가 났다. 한진수의 오른 손으로 김상희의 왼쪽 귓볼을 살살 어루만졌다. 김상희는 간지러운 듯, 간지럽지 않은 듯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한진수의 손길이 좋았다.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가벼웠던 그 키스가 점점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아직 내 품을 벗어날 수 없는, 가녀리고 어린 갓난아기란 말이다." 이 정도면 정신병 아닌가요? 0149 / 0192 ---------------------------------------------- 첫 날 밤 *** 김상희도 그렇지만 한진수는 이러한 경험이 처음이다. 단순히 키스를 할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몸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피가 몸의 특정 부위에 마구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 쿵! 뛸 때마다 잔뜩 성이 난 그 것 역시 쿵! 쿵! 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 아래. 눈 아래에는 사랑하는 여자. 김상희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게 보였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상태.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한진수는 김상희의 이마에 다시 한 번 가볍게 키스했다. 사실상 불을 끄든 말든, 그건 한진수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불 꺼도 보일 건 다 보인다. 그의 시력은 김상희보다 월등히 좋으니까. 김상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의 손 끝이 김상희의 귓가를 훑고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게 간지러웠는지 김상희는 몸을 움찔 떨었다. "간지러워." 한진수가 피식 웃었다. 간지럽다는 그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손이 아닌 입술로 김상희의 목을 탐했다. 입술이 목에 닿았고, 그 이후 그의 혀가 목에 닿았다. 한진수의 혀가 살살 움직이며 김상희의 목을 간지럽혔다. 김상희가 몸을 뒤척이는 것처럼 몇 번 움직였다. 한진수는 문득, 김상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마음. 언제나 느끼는 거다. 그가 볼 때에 김상희는 언제나, 항상 사랑스럽다. 항상 예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또 느꼈다. 지금 이 순간, 김상희는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으며, 또 누구보다도 귀여웠다.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던 한진수의 왼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머리카락을 지나고 귓볼을 지나고, 볼을 지나고, 입술을 지나고, 목을 지났다. 그리고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에 닿았다. "상희야." 이 사랑스러운 마음. 표현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김상희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폭탄이 되어 심장 속에서 마구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해." "......."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진수의 이 절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굳이 '사랑 한다'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김상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사랑한다는 저 고백. 예전에는 정말 많이 들었다. 많이 들어본 말인데, 침대 위에서 듣는 이 사랑한다는 말은 조금 더 특별했고 조금 더 설렜다. 한진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괜찮아?"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괜찮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그러니까 나를 그만 배려해도 된다고. 예나 지금이나 답답한 건 매한가지라니까. 김상희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봤다. "안 괜찮다고 하면... 그만 할 거야?" "......." 한진수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의 본능과 감성은 절대로 그만 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김상희를 배려하느라 일부러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다. 혹여라도,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다치게 할까봐서. "나는..." 하지만 김상희가 정말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만둘 수 있었다. 아니. 그만둬야만 했다. 그는 김상희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열릴 때 까지 기다릴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김상희는 생각했다. '괜찮아! 괜찮다고! 엄청 괜찮아!' 이 마음을 좀 알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김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니까. 한진수의 손이 천천히, 계속 움직였다. 한진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단추가 모두 풀렸다. 김상희의 속살. 처음 본다. 그의 눈으로 본 김상희의 속살은 굉장히 하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같았다. 정확한 색깔 표현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눈으로 본 김상희의 속 살은 순결한 백색과도 같았다. 김상희가 말했다. "너무 빤히 보지마." "......." 한진수는 한동안 멍하니 김상희를 쳐다보기만 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의 눈으로 본 김상희는. "미, 미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김상희가 허리를 살짝 들어줬다. 브래지어를 잘 풀라는 의미로. 그렇게 해줬는데 경험이 없는 한진수는 당황했다. '이, 이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이냐!' 브래지어를 풀어야 하긴 하겠는데, 후크가 어떻게 생긴지 전혀 몰랐다. 애초에 아는 게 이상하다. 원래 이런 건 여자의 몫이다. 여자가 알아서 옷을 벗고 알아서 속옷을 벗은 뒤, 남자에게 봉사하는 것이 이 세계의 일반적인 부부관계다. 지구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이 세계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어떻게 하는 거지?' 결국 답답해진 김상희는 스스로 후크를 풀었다. 한진수가 조심스레 그 것을 벗겨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자꾸만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심장이 강하게 뛰고 숨이 거칠어졌다. 뜨거운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봉긋 솟은, 갓 성년이 지난 김상희의 가슴위에 그 큰 손을 올렸다. 뭉클하고 기분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 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시간은 새벽 2시. 제국이 신라를 침공했다. *** 대륙 극서. 포름 지방. "새로운 프리온 나이트들의 성능을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예. 알겠습니다." "대형 프리온 나이트 5기를 소유하고 있다. 지형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해."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 3개 대대가 신라를 침공했다. "프리온 나이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작전을 지휘하게 된 제 2대대 대대장 루셔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라왕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사실인 듯 하다.' 황제로부터 지령이 떨어졌다. 프리온 나이트를 소유하고 있는 한진수가 부재 중일 것이라고. 그러나 부재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작전을 짜고 움직이라는 명령이었다. '폐하께선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시는 거지?' 그러한 감탄과 더불어 프리온 나이트의 진격을 명했다. 지형이 이 쪽에 매우 불리하기는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가 있다면 못 뚫을 것도 없다. 심지어 신라의 경우, 생긴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신생국이지 않은가. 이참에 본보기도 보일 겸. 신라를 완전히 무너뜨려버려야 했다. 그런데 그 때, 황금색으로 빛나는 인간형태의 무언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서, 설마!' *** 칼리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 아니. 폐하. 일찍 오셔서 다행입니다." 한진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쳐들어 왔다는 건, 고려 왕궁 내에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내가 워프를 익히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 같군.' 그렇다면 스페셜 나이트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현재, 안정화된 워프를 전수받은 나이트는 스페셜 나이트가 유일하다. 스페셜 나이트들이 먼저 익히고, 일반 나이트들이 익히는 수순을 밟고있던 중이었다. '아마도 나이트들 중 누군가가 제국에 매수되었을 확률이 높아.' 한진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쪽은 높은 지대. 저 쪽은 낮은 지대다. 대함포를 발사하려는 것 같았다. 패널을 꺼내들었다. [프리온 나이트. 가동합니다.] [프리온 나이트. 최종형 기동 승인 완료.] 한진수의 프리온 나이트는 이제 더이상 '대형' 프리온 나이트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사람보다 조금 더 큰 수준.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 프리온 나이트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줬다. 칼리번은 입을 쩍 벌렸다. "세, 세상에..." 프리온 나이트 최종형. 움직임을 거의 보지도 못했다. [초정밀 함포를 발사합니다.] 이어지는 폭발음. 한진수의 프리온 나이트 5기는 상상도 못할 괴력을 냈다. 칼리번은 멍하니 앞을 쳐다봤다. "숲이... 반으로 갈라졌다." 초정밀 함포가 발사되고 지나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뜨거운 잔열 때문에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 한진수가 말했다. "내가 직접 움직인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프리온 나이트랑 싸웁니까!" 저번의 경우와는 달랐다. 저번에는 세기의 대천재 김훈상과 고려 나이트들의 도움. 거기에 김환석의 도움까지 있었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맨 몸이다. '저 폐하가 진짜 미쳤나!' 하지만 칼리번은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이럴 수가..." 놀란 사람은 칼리번 뿐만이 아니었다. 늑대들은 물론이고 프리온 나이트 제 2대대 대대장 루셔 역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대단하다는 김훈상도 저런 힘을 내지는 못할 것이 틀림 없었다. 방금 그는 봤다. 프리온 나이트가 발사하는 함포와 비슷한, 그러한 강대한 힘이 프리온 나이트를 몰아쳤다. 마치 폭풍처럼 말이다. 인간의 힘으로 저런 능력을 낼 수 있다는 거. 아직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한진수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잘못 되어 있다.' 한진수. 그의 능력은 실로 경이적이었다. '어떻게 저런 힘을 낼 수 있는 거냐!' 한편, 비밀리에 지원을 나온 스페셜 나이트들 역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장. 이 정도면 저희가 지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막겠는데요?" "......." 김유신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대단하다는 김유신마저도 아무런 말을 못했다. '한진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래도 3차 각성이 일어난 것 같았다. 3차 각성이 아니고서는 저 비약적인 능력 향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김상희 공주님... 덕분인가.' 그 것밖에는 이유가 없었다. '김상희 공주님 덕분에 3차 각성을 이룬 것 같다.' 김유신만 놀란 게 아니었다. 김유신조차도 모르고 있지만 이 자리에는 김훈상도 와있었다. 그가 온 이유는 별 거 없었다. '한진수 저 놈이 다치거나 죽으면 내 딸이 슬퍼하겠지.' 사실 한진수가 죽든 말든 그건 상관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김상희가 힘들어지면 곤란했다. 그래서 부득불 여기까지 몰래 왔다. 혹시라도 위험한 순간이 오면 최소한 저 놈이라도 구해주기 위해서. 참고로 더스 나이트들까지 왔다. 한진수는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 놈은 이미 나를 넘어선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3차 각성이라.' 김상희의 능력은 가히 기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저 도둑놈 새끼! 감히 내 딸 덕분에 3차 각성이라니...!' 한진수가 대단하긴 대단한데 하여튼 도둑놈처럼만 느껴졌다. 딸을 가진 아버지. 그것도 딸바보. 아니 딸등신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훈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엄청나긴 하군.' 신라와 제국의 격돌. 얼추 그 결과가 나왔다.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 숫자는 약 40여기 쯤 되는 것 같았다. 한진수의 프리온 나이트 5기가 7기를 파괴했고 한진수 혼자서 3기를 파괴했다. 나머지 프리온 나이트는 후퇴했다. 칼리번을 비롯한 신라의 군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봤다. 그들을 이끄는 한진수의 엄청난 능력을. 인간을 아득히 벗어난 그 초인적인 힘을 말이다. 제국 최강의 병기를 단신으로 물리쳤다. "국왕폐하! 만세!" 한진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칼리번이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하나도 안 기뻐 보이는데요." 그랬다. 하나도 안 기뻤다. 제국에 대한 분노가 더 활활 타올랐다.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이제 정말로 아주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이 놈의 제국 때문에 타이밍을 놓쳤다. 제국을 없애 버려야할 커다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이를 바드득 갈았다. '첫 날밤의 원수!' *** 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제국 진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는 매우 서글프게도 혼자서 옷을 추슬렀다. 이 놈의 브래지어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입기 싫고 귀찮은지. 송수진씨가 내게 다가왔다. "공주님. 옷매무새 가다듬어 드릴게요." "...응."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신라를 쳐들어갈 거면 내일 가도 됐잖아? 아니면 모레 가든지. 아니. 쳐들어가면 안 되는 거긴 한데, 하여튼 짜증이 막 난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다. 진수가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다고 호언장담했다. '다치면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제국이 마음먹고 3개 대대를 보냈다고 했다. 괜찮...겠지. 괜찮아야 하는데. 처음에는 짜증이 막 났는데, 지금은 아니다. 진수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 문득 서글퍼졌다. 나는 진수랑 그저 알콩달콩 잘 살고 싶은 욕심밖에 없는데. 그게 너무 큰 욕심인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괴롭힘의 스케일이 이렇게 큰 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제국이라니. 세계 최강국 제국이 나서서 왜 우리 첫날밤을...아니. 우리 사랑을 방해하는 거냐고. 다행히도 내게 소식이 전해졌다. 내게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첫째 망나니. 탑 오브 망나니 김환석이었다. "멀쩡하다." *** 김환석은 굳이 김상희를 찾았다. 시간은 새벽 4시. 원래대로라면 자고 있어야할 시간이다. 하지만 자지 못했다. 오늘은 한진수가 김상희와 합방하는 날.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어떻게 키운 계집인데 감히 그런 도둑놈새끼가 훔쳐간단 말인가. 줄 수 없었다. 아니. 주기 싫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국이 신라를 쳤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계집은 분명 엄청나게 걱정을 하고 있을 거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소식을 전해줬다. 일국의 왕자가. 일개 계집에게. 그것도 새벽 4시에 말이다. "멀쩡하다." 그 말만 남기고 그냥 나와 버렸다.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망나니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그래서 뒤따라 나왔다. 김환석에게 물었다. "소녀는 오빠의 말이 뭔지 이해 못 했어요." "한진수. 멀쩡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라.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끝까지 시크한 척 했다. 그런데 괜히 열불이 났다. '그 도둑놈이 뭔데 저렇게까지 안도하는 거지?' 짜증났다. 김환석에게 있어서 한진수는 그저 희대의 도둑놈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상희가 살아온 세월. 그러니까 16년 동안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비상 사이렌. 국가 경계령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제국 ㅂㄷㅂㄷ 감히 내 19금을 향한 손을 저지하다니. 내 음란한 손가락이 네 놈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ㅂㄷㅂㄷ 0150 / 0192 ---------------------------------------------- 성녀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이트들 몇이 황급히 기록의 관 내 김상희의 방으로 올라왔다. "공주님. 어서 대피하세요." "무, 무슨 일이죠?" "침공입니다." 어디에서 침공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충은 알고 있다. 아마도 제국이리라. 지금 이 시국엔 1분 1초가 매우 중요하다. 초동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투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 김훈상이 없다는 것. 김훈상이 현재 부재중이며 스페셜 나이트와 더스 나이트들마저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없는 상황. 전쟁에서 장수가 없는 병졸은 의미가 없다. 위에서 명령이 있어야 병졸도 움직이는 법이니까. 프리온 나이트 제 1대대. 대대장 신을용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현재 스페셜 나이트와 고려국왕은 신라로 떠나있다.' 그래서 일부러 신라 쪽으로 병력을 보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황제는 지금 고려 내부 깊숙한 곳에 첩자를 넣어놨다. 그 첩자가 정보를 전해줬다. 현재 신라와 고려가 내통하고 있다고. 언젠가 분명히 제국에 반기를 들 거라고. 그래서 일부러 신라를 친 거다. 정보에 의하면 분명히 고려국왕이 움직일 테니까. '그건 미끼였다!' 국왕이 없는 국가. 그 것만큼 상대하기 쉬운 게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이 쪽이야말로 진정한 프리온 나이트다!' 신라 쪽으로 보냈던 프리온 나이트는 사실 신식 프리온 나이트가 아니었다. 프리온 나이트 제 2대대 대대장인 루셔가 속고 있는 것이다. 상대를 속이려고 아군부터 속였다. 덕분에 루셔는 현재 프리온 나이트 10여기를 잃고 도주중이지만, 이 쪽의 작전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터. 고려의 수도까지 이렇게 쉽게 잠입할 수 있었다. 고려왕궁은 고려의 심장이다. 심장을 접수하면, 그 이후는 훨씬 쉽다. 100의 힘이 들거, 10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이 때가 기회다!' 프리온 나이트가 고려 왕궁을 향해 진격했다. *** 김훈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의 예상이 맞았군." 제국의 황제가 프리온 나이트들을 속였다. 고려의 국왕도 아군을 속였다. 김유신을 비롯한 스페셜 나이트들에게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스페셜 나이트에는 첩자가 없어." 더스 나이트를 이끄는 더스 나이트 대대장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누구 새끼들인데 고려를 배신합니까?" "아마 일반 나이트들 중 한 명일 거다." "한 명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전쟁이 선전포고도 없이 고려의 왕궁을 기습침입했다." "더스 나이트도 움직여야할 때라는 소리죠." 그리고 문제는 분명히 남아 있었다. "만약 내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고려의 곳곳을 칠 거다. 내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대규모 화력전, 대규모 물량전에 있어서는 감히 제국을 이길 수 없다. 제국이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고려가 그런 물량전에 강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 곳에 없다면. 놈들은 분명 고려 왕궁에 전 병력을 집중할 거다. 우리의 본거지를 일시에 점거하려하겠지." "놈들은 저희가 신라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신라에서 이 곳까지는 아무리 빨리 와도 3일 이상 걸린다. 워프가 없다면 말이다. "전파방해는 확실히 했겠지." "예. 신라를 침공한 프리온 나이트의 소식이 제국에 전해지려면 최소한 3시간 이상은 걸릴 겁니다." 김훈상이 고려왕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치지 마라.'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아들들의 모습이 아니라 딸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다니. 물론 아들들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들들보다도 오히려 딸이 더 걱정 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런 딸아이 말이다. '다치면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물론, 제국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우리도 움직인다." *** 고려 왕궁.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공주를 비롯한 관리들이 지하대피소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이 쪽. 이 쪽입니다!" 김상희는 대피를 하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래 아무것도 못하는 여자일 때에는 대피하는 게 맞다. 드라마 속 혹은 영화 속 민폐 여주인공 처럼, 논리보다 감성이 앞서서 함부로 행동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그런 짓 하고 싶지 않다. 아무 능력이 없을 때엔 그냥 가만히 있는 거. 주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대피하지 않겠어요." "성녀님!" "그래요. 저는 성녀에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나이트들도 안다. 그 때. 그 국지전때 보여줬던 성녀의 기적을. "하지만 성녀께서 만에하나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국왕폐하를 볼 낯이 없어집니다. 저희들이 죽어도, 성녀님은 다치면 안 됩니다." "일단, 제국을 물리치는 것부터 생각하도록 해요. 저 안 다쳐요. 여기 이렇게 든든한 나이트분들이 계시는 걸요." 나이트들은 나이트들대로 감동했다. 어찌 여자의 몸으로 이리도 용감할 수 있단 말인가. '성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저번의 그러한 능력이 또 나온다면,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가지고 다니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프리온 나이트 1대대 대대장 신을용이 명령을 내렸다. "함포 발사 준비." 이게 바로 프리온 나이트의 무서운 점이다. 보통 마력과 과학문물의 산물. 그러니까 미사일과 같은 대규모 폭격 용도의 무기들은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준비기간 동안, 타국은 충분히 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는 다르다. 사람이 움직여서 소환하면, 그 즉시 전략무기가 된다. 그 장소에서 즉각적으로 함포를 사용할 수 있다. [대구경 레이저 광자포 발사 준비합니다.] [대구경 레이저 광자포 발사 승인 대기 중.] 신을용이 승인했다. 고려 왕궁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터. 분명 배리어가 있을 거다. 배리어부터 없애버리기로 했다. "배리어를 깰 때까지 최고 출력으로 공격한다." [대구경 레이저 광자포 발사 10초 전.] 카운트가 시작 됐다. [9. 8. 7.] 곧 레이저 광자포가 발사될 거다. [1.] 노란빛으로 번쩍이는 레이저 광자포가 공기 중 절연파괴를 일으키며 공기를 태웠다. 코로나 방전이 일며 주변이 번쩍거렸다. 대기 중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 엄청난 기세로 레이저 광자포가 발사 됐다. 그런데. [초정밀 레이저 광자포 발사합니다.] 저 쪽에서 또다른 레이저 광자포가 발사 됐다. 40여 줄기의 레이저 광자포가 단 5 줄기의 레이저 광자포에 의해 무력화 됐다. 더 큰 힘으로, 더 압도적인 출력으로 레이저 광자포를 먹어 버렸다. 오히려 제국 프리온 나이트들이 그 출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3기나 이상반응을 일으켰다. 신을용은 순간 당황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 김상희마저도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자리에 한진수가 있을 수 있는 걸까. "진수...?" 한진수는 김상희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사랑해'하고 아주 짧게 스쳐갔다. 김상희가 어떻게 반응할 사이도 없이, 한진수는 빠르게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서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김상희는 한진수가 자신의 볼에 키스하는 거. 보지도 못했다. 한진수의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랬다. 다만 느껴졌다. 보드라운 그 감촉이 말이다. '진수가 어떻게...' 분명히 신라로 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그녀는 몰랐다. 안정화된 워프의 진실을. 이 것이야말로 도둑놈새끼(?) 한진수가 김상희를 얻을 수 있던 비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김상희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비책이기는한데, 김상희는 그 비책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반 나이트들도 모른다. 국왕인 김훈상을 비롯하여 더스나이트.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들만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다. 때가 되면, 제국을 일시에 기습할 수 있는 기술이다. 기습이라는 건 상대가 모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거니까. 신을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속았다.' 한진수와 김훈상이 지금 부재중이라 가정했다. 김훈상은 있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움직이기는 했다만, 이런 상황이라면 한진수는 물론이고 김훈상 역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그렇게 큰 대수냐!' 한진수와 김훈상이 연합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 둘이 모인 문제가 아니다. 1+1=2가 아닌 1+1=3. 아니. 1+1=10 이상의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난다. 김훈상의 대인전 특화 능력과 한진수의 능력. 거기에 한진수가 가진 프리온 나이트의 힘까지 합쳐지게 될 테니까. 게다가 저번에 파악하게 된 김훈상의 특수병력. 황제가 이름짓기를 '더블 스페셜 나이트'라는 놈들도 함께하게 될 테니까. '그래도 우리는 프리온 나이트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냥 프리온 나이트가 아니다. 여왕에 의해 생산된, 우월한 능력을 가진 프리온 나이트다. 이 프리온 나이트의 존재는, 프리온 나이트 내에서도 대외비에 해당하는 기밀사항이며, 이 프리온 나이트는 일반 프리온 나이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우리가 질 수 없는 싸움이야.' 그 때.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한진수의 이상한 프리온 나이트. 그러니까 황금색 프리온 나이트가 여왕이 생산한 프리온 나이트 1기의 머리를 통째로 부숴 버렸다. '마, 말도 안된다!' 한진수가 제국으로부터 탈취했던 나이트는 구형 나이트다. 신식 프리온 나이트. 그것도 여왕이 생산한 프리온 나이트를 어떻게 이렇게 쉽게 파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고려의 나이트들도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것이 한진수의 프리온 나이트..." 모두가 안다. 저 프리온 나이트의 정체. 저 프리온 나이트는 김상희의 '기적'에 의해 변화된 프리온 나이트이다. 김상희의 몸이 하얗게 빛났을 때, 프리온 나이트가 저렇게 변했다. 나이트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김상희 공주님은... 역시 성녀시다." 그랬다. 한진수가 저런 프리온 나이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역시 성녀인 김상희 공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진수는 맨 몸으로, 프리온 나이트를 향해 질주했다. 고려 나이트들도 당황했다. 지금 한진수는 맨 몸이다. 그 어떤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맨 몸으로 프리온 나이트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적어도 단도라도 가지고 있어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한진수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이상했다. 저대로 두면 위험했다. 어째서 한진수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1대대 대대장 신을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까불지 마라!" 소형 프리온 나이트. 대인전에 특화된, 빠른 속도 위주의 프리온 나이트들이 한진수의 앞을 가로 막았다. [타겟을 설정합...] 그리고 알림음이 끊어졌다. 콰과광! 폭발음과 함께 프리온 나이트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신을용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그는 봤다. 한진수의 오른손이 노란 빛으로 잠깐 빛나는가 싶더니, 스파크가 일었고 그 손으로 프리온 나이트의 머리를 단 일격에 파괴해 버렸다. '이,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3차 각성이라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분명히 아닐 거다.' 그런데 일은 이미 벌어졌다. 한진수의 능력. 여태까지의 정보가 너무나 잘못 됐다. 그리고 고려 나이트들은 알았다. '성녀님 덕분에 한진수가 3차 각성을 일으킨 것이 틀림 없다.' 기적에 이은 미라클 제조. 거기에 3차 각성. 거기에 경이로운 회복능력까지. 고려 나이트들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고려에는 성녀가 있다. 전투와 전쟁에 있어서 사기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녀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마력은 없다. 전쟁터. 당연히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 위험한 곳에 성녀는 몸을 사리지 않고 왔다. 나이트들. 자신들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기 위해서. 나이트들 중 한 명이 외쳤다. "성녀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한 마디는 지휘관이 없는, 왕이 부재중인 고려 나이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어쩌면 왕보다도 더 대단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성녀가.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다!' 함께 하고 있었다.고려 나이트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엄청난 소식이 고려와 세계를 강타했다. ============================ 작품 후기 ============================ 우와. 어떤 분께서...따로 결제가 필요한 후원쿠폰을 300장이나 주셨네요 ㅠㅠㅠㅠㅠㅠ 못난 글쟁이에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주시다니 ㅠㅠ 정말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ㅠㅠㅠ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0151 / 0192 ---------------------------------------------- 들어는 봤냐? 딸등신이라고. *** 황제는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을 호위하던 나이트들은 이미 시체가 됐다. 이러한 상황.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는 분명 신라에 지원을 갔었을 텐데. 그 정보가 틀리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그것도 황궁에 김훈상과 더블 스페셜 나이트들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황제가 말했다. "김훈상. 고려의 국왕이여. 반갑구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황제 폐.하. 개새끼야." 김훈상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황제는 황금 용상위에 앉아 껄껄대고 웃었다. "역시 고려의 국왕답다. 이래야 김훈상이지." 일부러 신라를 쳤다. 김훈상을 움직이게 만든 뒤, 그 다음 고려를 쳤다. 고려의 왕궁. 충분히 접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왕의 손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부러 일을 서두르지 않았던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만 간략하게 말하겠다." "......." "무조건적인 항복.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 하나다." "제국의 황궁 내에서. 황제에게 말하는 태도가 매우 불경하구나." "아직 내 덕분에 살아있는 시체겠지." 황제는 또 껄껄대고 웃었다. 고려 국왕 김훈상은 정말로 오만했다. 누가 감히 황제를 일컬어 '아직 살아있는 시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오만함이 근거 없는 오만함이 아니었다. "김훈상. 무엇이 너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지? 너는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었다." 황제는 김훈상을 이미 파악했었다. 김훈상의 능력에 관한 정보는 언제나 최신상태를 유지했다. 김훈상의 무력. 세력. 고려의 능력은 언제나 관심대상이었으니까. 그리고 김훈상은 언제나 오만하기는 했으되 제국을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았었다. 오만함과 별개로 김훈상의 현실 파악 능력은 뛰어났었으니까. 김훈상은 제국에게 굽힌 적은 없지만, 제국에게 대든 적도 없었다. 지금 김훈상의 이런 행동은 예측 불가능한 행위였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후에 역사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게 만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들어는 봤냐? 딸등신이라고." "......."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딸등신인 거랑 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된 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라에 있어야 할 김훈상이 어떻게 제국의 황궁까지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불과 수십에 불과한 나이트들을 데리고 제국 나이트 수 천명을 도륙할 수 있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봤지만 믿을 수가 없구나." 아무래도 김훈상은 3차 각성의 벽을 깨뜨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까의 그 능력.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능력을 가지려면 딸등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딸등신. 저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고려의 사전에 '딸바보'라는 말이 등재되었다는 유언비어를 들었던 적이 있다. 고려랑 관련된 보고라서 일단 받기는 받았는데, 하도 황당한 보고라 머릿속에서 지웠었다. 딸바보와 딸등신. 뭔가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때부터 김훈상은 이 것을 계획했단 말인가.' 물론 그런 건 아니다. 황제 혼자 확대해석하고 있을 뿐. "김훈상. 너는 정말 경이로운 능력을 가졌구나." "대답해라. 대답여부에 따라 생사여부가 달라질 것이다." 더블 스페셜 나이트들이 황제의 어깨를 잡았다. 억지로 무릎 꿇리려 했다. 김훈상은 말리려고 했다. 됐다. 그래도 제국의 황제였다. 지나친 수치까지 줄 필요는 없겠지. 라고 말하려다가 잠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저 놈 때문에 사랑하는 딸이 위험할 뻔 했다. 납치 당할 뻔 했다. 납치 당했으면 어떻게 되었을 지. 그걸 생각하면 분노가 마구 끓어 올랐다. 그래서 무릎 꿇리는 걸 가만히 두고만 봤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프리지아는 어떻게 됐지?" 황제는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제국 나이트. 황궁을 수호하는 나이트 3200명이 단 수십 명에 의해 죽었다. 물론 고려의 피해도 있었다. 중상 7명. 경상 3명. 그리고 사망 2명. 어쨌거나 고려는 압도적인 능력으로 제국을 눌렀다. 아마 수도 외의 다른 곳에서 병력이 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3시간은 걸릴 거다. "프리지아라." "여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계집 역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나?" "그 것이 내 항복과 무슨 연관이 있지?"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그랬다. 상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황제의 항복문서였다. 김훈상이 물었다. "항복할 건가?" "설마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겠지?" 김훈상이 어깨를 으쓱 했다. 황제가 항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간편한 일이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압송해." 황제를 인질로 잡기로 했다. "2시간 주겠다. 마음대로 분탕질을 쳐라." 황궁 내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있을 거다. 그 보물들의 소유권. 모조리 나이트들에게 주기로 했다. 또한 이 곳에는 아리따운 여자들도 많다. 잔인한 말이지만, 전쟁에 있어서 계집은 하나의 전리품이다. "2시간 뒤. 고려 왕궁으로 이동한다."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물론 제국 전부가 무너진 건 아니다. 제국의 수도인 '에비덤'의 병력만 제거했다. 분명 지방에서도 들고 일어날 거다. 그러나 중요한 건, 황궁의 보안이 뚫렸으며 고려가 황제를 득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 들었어? 제국의 황궁이 뚫렸대." "에이.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집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말이었으니까. 태양제국 잉카가 어떤 나라인가. 세계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대규모 화력전에 있어서 최강의 전략병기. 프리온 나이트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아니던가. "제국이 먼저 고려를 쳤는데, 그 사이 고려가 제국 황궁을 쳤대." "엥? 프리온 나이트들은?" "수도에 있는 프리온 나이트들을..." 말도 안 되는 소식이 알려졌다. 고려 국왕 김훈상이 이끄는 부대가 황궁을 수호하는 프리온 나이트와 싸워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것이었다. "변방의 프리온 나이트가 황궁에 도달하기 전에... 고려 나이트들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대."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소설을 써라, 소설을. 무슨 순간이동 같은 거라도 하냐?" 고려국왕 순간이동설이라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순간 이동'은 '워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마, 말도 안 돼. 사람이 순간이동을 한다고?" "진짜야. 그래서 고려 국왕이 아예 작정하고 본진을 털어버린 거야.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던 제국은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못 써먹은 거고." 세상의 판도가 변했다. 압도적인 1인자였던 제국이 고려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제국의 저력은 역시 막강했다. 제국에 충성하는 몇몇 귀족과 나이트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그들끼리의 세력을 연합하여 고려에 진격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려의 나이트들은... 프리온 나이트랑 1:1로 붙어도 안 진다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밀어 붙이고 있다나봐." "마, 말도 안 돼. 프리온 나이트보다 고려의 나이트가 더 강하다고? 그랬으면 진작에 고려가 제국을 쳤겠지." 말 된다. 다만 이렇게 된 것이 최근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고려는 세계를 압도할 수 있는 화력은 없어. 제국과는 성격이 다른 힘을 갖고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글쎄. 두고 봐야겠지." 세상 사람들은 예측했다. 강국들 여럿이서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될 거라고. 20여년 전 전쟁기에 버금가는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김유신이 스페셜 나이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스페셜 나이트와 프리온 나이트. 이미 여러 차례 격돌했다. 그 동안 스페셜 나이트는 프리온 나이트 수백 기를 파괴했다. 고무적인 것은 사망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 나이트 하나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얼 거렸다. "정말... 성녀의 기적은 엄청나군요." 스페셜 나이트가 프리온 나이트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김상희 덕분이었다. 김상희의 능력을 빌어 김환석이 개발한 '미라클'이 스페셜 나이트의 마력을 활성화 시켜 줬다. 게다가 아무리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살아날 수 있었다. 덕분에 스페셜 나이트는 과감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사기 진작과 더불어 위험한 작전마저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어. 저기 성녀님 오시네요." 제국의 황제를 붙잡기는 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황제가 없기에 훨씬 쉬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성녀님!" 김유신이 고개를 숙였다. 성녀는 고려에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었다. 옛날, 소녀식을 할 때 보배의 칭호를 수여했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그 행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트들이 발 벗고 나서서 보배님 혹은 성녀님이라 부른다. 고려에 만약 성녀가 없었다면, 제국을 이기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중요한 건, 만약 고려에 김상희가 없었다면 제국과 고려가 전쟁을 벌일 일도 없었다는 거다. 나이트 중 하나가 말했다. "야 인마. 성녀님 지나가시는 길에 큰 돌 있잖아. 얼른 얼른 치워 드려라." 고참 나이트의 명령에 나이트 하나가 황급히 마력을 운용했다. 김상희는 허허- 웃고 말았다. 이 사람들이 단체로 개차반을 닮아가는 것 같다. 개차반은 과보호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 저기. 괜찮은데요. 저거 그냥 큰 돌 아니고 조약돌인데요. 막말로 가다가 실수로 차도 하나도 안 아플 거 같이 작은 돌인데요. 저걸 굳이 마력까지 써서 옮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김상희는 묻고 싶었지만 그저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김유신은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녀님은 언제나 자애롭게 웃으시는군요. 저희 나이트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뭘요. 잘난 것 하나 없는 소녀지만, 언제나 최전방에서 힘 쓰시는 나이트 여러분들께 힘이 된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어요." 나이트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그들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김상희 홀릭. 혹은 성녀 홀릭이란 말이었다. 나이트들 모두가 생각했다. '저러니까 예쁨을 받을 수밖에 없지.' 이 세계의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도 뭔가 확실히 달랐다. 같은 말을 해도 저렇게 사랑스럽고 저렇게 이쁠 수가 없다. 어디 다른 세상에서 온 건 아닐까, 하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며칠이 흘렀다. 김상희는 문득 과거 골렘 피라미드에서 봤었던 글귀가 생각났다. - 골렘을 가지면 세상을 얻을 것이다. - 성녀의 은총이 내릴 때에 골렘이 깨어나리니. 골렘. 고대 병기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 혹시, 골렘이라는 것이 바로 프리온 나이트가 아닐까 싶었다. '내 몸에서 빛이 번쩍 했을 때랑...' 그 이후, 자신의 힘을 빌어 한진수가 3차 각성을 끝마쳤을 때. 그 때 프리온 나이트가 변했었다. 최종형태로 변했다고 했다. '그게 바로 골렘 아닐까...?' 그렇다면 얼추 설명이 되지 않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 세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제국이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프리온 나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훈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대충 설명이 되는 것 같구나." 대충 설명이 된다고 말하면서, 대충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 같았다. "가까이 와라."" 그리고서 기다리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3차 각성을 이룬 이후라, 마력 컨트롤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덕분에 김상희는 최고의 승차감(?)을 느끼며 김훈상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반항도 못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력에 무슨 수로 반항한단 말인가. 김훈상이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덕분이다." "그렇게 말씀하여주시니 소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부끄러우니 소녀를 그만 내려주시어요." 이봐. 개차반 아빠씨. 난 아가가 아니라고. 당신 요즘 증세가 유독 심해지고 있다고. 정신 차려. 김상희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시집 아닌 시집을 간 이후로 김훈상은 점점 더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됐는데, 그 때마다 김상희는 흠칫흠칫 놀라야만 했다. 이대로면 한진수를 괴롭힐 것 같다. 시집살이 아닌 처가살이를 시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나 할까. 김훈상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할 것이 있다." "네. 아빠. 말씀하셔요." "나는 네 능력과는 상관 없이, 너를 내 딸로..." 그리고 숨을 골랐다. 김상희는 봤다. '어라. 지금 개차반 얼굴 조금 빨개진 거 같은데?' 정확하게 말하면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 그런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김훈상이 입을 열었다. "너를 내 딸로서 사랑한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너를 노리는 황제는 지하감옥에 가둬 놓았으니... 이제는..." 김훈상은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제국과 전쟁을 결심하는 건 쉬웠었다. 그거보다 이게 더 어려웠다. "네 결혼식을..." 가슴이 쓰라렸다. 한진수. 그 도둑놈새끼를 떠올리니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고려가 황제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워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정된 워프가 없었다면, 고려는 제국을 상대로 도박을 감행하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진짜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러주마." "아, 아니어요. 성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녀는 그런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있어요."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너는 내 딸이다. 자랑스러운 내 딸이다." 내 자랑스러운 딸. 동네 방네. 아니 세계 규모로 자랑할 거다. 그렇게 주장하는 듯한 결연한 모양새에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네 결혼식은 한 달 뒤다." 그리고 그 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 전 황제가...사라졌습니다." 절대 자력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지하 감옥에서, 탈출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모르겠습니다. 자력으로 탈출할 수는 없는데, 외부 도움의 흔적도 없습니다. 저희도 지금 파악 중입니다." 김훈상 역시 황당해했다. 3차 각성을 이룬 자신이라고 해도, 지하감옥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힘으로 한다면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몰라도 그러면 당연히 소란이 인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연기처럼 말이다. '워프를 쓰려면...진작에 썼었겠지.' 워프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트가 보고를 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 조금 이상한 것이..." 황제가 감금당해있던 그 장소에는 피라 짐작되는 액체로 글씨가 써져 있었다. 나이트가 김상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김상희가 없는 곳에서 김훈상에게 얘기했다. "성녀를 데려가겠다는 글귀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 작품 후기 ============================ 성녀님 킹왕짱 0152 / 0192 ---------------------------------------------- 들어는 봤냐? 딸등신이라고. ***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고려는 제국과 같은 엄청난 화력이 없으니 주변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것이고 그에따라 수많은 강국들이 들고 일어서 전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거라고. 그러나 그 예상은 완전히 틀려 버렸다. "프리온 나이트 1개 대대가 완전히 쓸려 버렸다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고려와 혈맹을 맺은 신라라는 나라. 들어봤어?" "신라?" 별로 들어본 적 없던 이름인 '신라'가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신라의 국왕인 다름 아닌 한진수라네." "한진수? 고려 출신 대천재?" 제국의 반역자. 라고 말을 하려던 남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제국은 없어졌다. 아직 고려와 치열한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오로지 고려의 승전보 뿐. 이러한 상황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괜히 피 보는 수가 있다. "그 신라에 프리온 나이트 5기가 있다나봐" 베일에 가려져 있던 프리온 나이트의 실체도 알려졌다. 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단순히 기계라고 보기만도 어려운 것이,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제 아무리 현대문명이 발달했다고 해도,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로보트는 만들기 어렵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또 인간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라니. 역시 제국다웠다. "그런데 그 5기가... 혼자서 50기를 상대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졌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글쎄. 성녀의 은총을 받으면 프리온 나이트가 그렇게 변화한다고 하는데..." 놀람과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유신이 보고를 올렸다. "프리온 나이트 5기. 탈취했습니다." 김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파괴보다 탈취가 훨씬 어렵다.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들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스페셜 나이트들은 조금씩 프리온 나이트의 전투방식에 익숙해져갔다. "제국에서 프리온 나이트의 존재를 극비에 부친 이유는... 아마 그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정형화 되어 있고 단순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겠지." 프리온 나이트의 행동방식은 단순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몰랐다. 그 엄청난 덩치로도 인간과 똑같이 움직이는 만능 로봇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기계는 기계였다.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은, 인간에 비해서 -여기서의 인간은 적어도 미라클을 섭취한 스페셜 나이트 쯤 되는 인간. 그러니까 인간들 중에서도 0.1퍼센트에 속하는 인간들을 뜻한다. - 확실히 떨어졌다. 그에 반해 스페셜 나이트들은 프리온 나이트의 전투 스타일에 점점 더 익숙해졌고, 급기야는 프리온 나이트를 탈취하는 것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말했다. "하지만 폐하. 정말로 탈취한 프리온 나이트를 한진수에게 넘기실 겁니까?" 지금 당장은 혈맹이 맞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이후에 한진수가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프리온 나이트 군단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올 수도 있다. 국제관계란 그런 거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고,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어차피 한진수 외의 다른 사람은 프리온 나이트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 한진수는 과거 프리온 나이트 소속이었다. 프리온 나이트의 사용권한을 부여 받았다. 몸 속에 칩 같은 것이 이식되어 있다고 하는데, 한진수 본인도 그 것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잘 몰랐다. 하여튼 프리온 나이트를 조종하는 패널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은 한진수 뿐이었고 스페셜 나이트가 포획한 프리온 나이트는 착실히 한진수의 병력이 되어갔다. 아주 잠깐. 휴식 시간을 갖게 된 한진수가 김상희를 찾았다. "상희야." 김상희는 성큼성큼 걸어가 한진수에게 안겼다. 한진수의 듬직한 팔이 김상희를 안아줬다. 요즘은 통 못 본다. 그럴만도 했다. 신라는 지금 여기 저기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신라군과 고려군은 지금 세계에서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하도 신출귀몰해서 그렇다. 동쪽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보면 서쪽에 나타나있고, 서쪽에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보면 남쪽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도깨비'라는 이명을 얻었다. 그리고 신라군과 고려군은 단 한번의 패배조차 하지 않았다. 제국만큼 강력한 화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적과도 같은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지배력을 점차 넓혀갔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게 다 네 덕분이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 김상희 덕택에 만들어진 '미라클'이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라클은 나이트들의 체력회복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여줬다. 말 그대로 '성녀의 능력'은 전천후 폭격기와도 같았다. 1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10의 능력을 꺼내 쓸 수 있도록 해줬다. 한진수는 문득 이 여자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또 제국때문에 첫날 밤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김상희를 안고 싶었다. 지금도 안고 싶지만 더욱 꽉 안고 싶었고, 김상희와 그 이상의 것도 나누고 싶었다. 육체적인 쾌락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본능이 외쳤다. 김상희를 가지고 싶다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하지만 참았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좀 더 안전한 때에, 좀 더 안정이 되었을 때. 그 때 안락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정성을 다해 김상희와 함께하고 싶었다. 한진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고려 내에서 비밀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미 타국에까지 다 알려진 것 같아." 한진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 내 여자가 이렇게 대단하다. 내 여자가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쁘다. 라고 언제나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빛나는 보물이었으니까. 보물을 자랑하고 싶은 거. 이상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마음과 다른 마음이 싸웠다. '다들 성녀님 성녀님하면서 눈독을 들인단 말이야.' 요즘 나이트들도 심상치 않다. 김상희만 지나가면 반 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우리 성녀님'이라고 외쳐대는가하면 '김상희 홀릭' 혹은 '성녀 홀릭'이라는 이상한 신조어까지 만들어 김상희를 추종하고 있다. 기분이 좋기는 좋은데 뭔가 나쁜 요상한 기분이다. "너를 추켜세우고 너를 칭찬하는 거. 물론 좋아. 물론 좋긴 좋은데..." 말을 흐렸다. "솔직히 나는 네게 모든 관심이 쏟아지는 거. 싫어." "응?" "지금은 제국과의 전쟁이다 뭐다, 거창하게 일을 벌이고 있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다. 하지만 한진수가 바라는 건 오로지 단 하나 뿐이었다. "나는 너랑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그거면 충분하거든." 한진수는 진심이었다. 김상희만 있었으면 이 세상 그 무엇도 필요 없었다. "내 옆자리에 너만 있으면 돼." 그러자면 김상희가 너무 주목을 받아서는 불편해진다고 생각했다. 김상희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세계의 남자가, 그 어떤 남자가 이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이쯤 되면 과거의 한진수와 완전히 똑같다고해도 믿을 판이었다. 김상희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수 너도... 중증이다." "미친 거 같지?" "응." "미친 거 맞아. 너한테 완전히 미쳤어." 김상희도 솔직히 고백했다. "평생 미쳐있으면 좋겠다." "평생 미쳐있을 거야." "나중에 좀 덜 미치면 서운할 것 같아." 한진수가 김상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럴 일 없어.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너한테 미쳐있을 거야." 어쨌든 한진수의 결론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김상희가 지나친 관심을 받는 거. 원하지 않았다. 지금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진수지만, 그는 둘이서 알콩달콩 조용하게 살고 싶었다. '전쟁만 완전히 끝내면...' 한진수도 안다. 지금 황제가 탈출했다. 어떻게 탈출한 건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상희가 안전해지면... 그 땐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리고 한진수는 봐왔다. 김훈상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와,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그리고 그 두 가지 역할이 충돌하고 싸울 때 김훈상이 번뇌하고 고민해야만 했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다.'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김상희 뿐이다. 그래서 붉은 늑대 칼리번에게 왕위를 양보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내게 왕위같은 건 필요 없어.' 왕위가 아니라 어쩌면 황제의 자리일수도 있다. 지금 한진수는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젊은 천재니까. '그 때가 될 때까지만...' 김상희의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 때까지만 힘을 내기로 했다. 둘이 꽉 끌어안고 있는데, 김환혁이 방에 들어왔다. "이 도둑놈! 그 손 놓지 못해! 우리 누나한테서 떨어져!" *** 나는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우리 환혁이. 나를 아끼는 건 좋긴 좋은데 요즘 그 정도가 지나치다. 그렇다고 왕자를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지금 진수가 어떤 처지인지 안다. 진수는 지금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개차반씨가 진수한테 프리온 나이트를 계속 주고 있다고 한다. 3차 각성을 끝낸 진수가 프리온 나이트를 운용하면 굉장히 강한 프리온 나이트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차기 황제의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는 사람인데...' 기실 한진수는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속사정까지는 모른다. 다만 김훈상과 한진수. 둘 중에 누가 황제가 되느냐로 얘기를 많이 할 뿐. '그런데 환혁이한테 쩔쩔매는 꼴이라니.' 내가 알기로 3차 각성을 이룬 사람은 한진수랑 개차반 뿐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진수는 유독 우리 가족에게 약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고마워.' 나 때문이다. 내 가족이라서. 내 동생이고 내 아빠고 내 오빠라서. 진수가 저렇게 쩔쩔매는 거다. '그런데 저렇게 버릇없게 굴 때는 좀 강하게 나가도 괜찮은데.' 한편으로는 좀 세게 나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진수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그건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금이야 옥이야 나를 아껴주는 건 좋은데... 환혁이 혼 좀 내주지.' 뭐. 많은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그래. 환혁이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다. 요즘 진짜 문제는 저 김환성. 우리 둘째 망나니다. "자. 오늘도 시간이 왔어." "오빠. 양치 제대로 하고 오신 거 맞아요?" 개차반씨가 나 덕분에 3차 각성을 했다. 그와 비슷한 매커니즘이라면 우리 망나니도 3차 각성을 할 수 있을 거다. 입에서 입으로.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하여튼 사람들이 '성력'이라고 부르는 그걸 전해주면 말이다. 그래. 뭐. 사실 입술끼리 닿는 것도 아니고. 요즘, 내 눈에 김환성마저도 귀엽게 보이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그런데 저번에는 하다가 김환성 때릴 뻔 했다. 양치라도 깨끗하게 하고 오던가. "그럼!" 망나니가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저렇게 크게도 벌어지는...아니. 이게 아니지. 확실히 양치는 깨끗하게 한 것 같았다. '3차 각성을 꼭 시켜야해.' 김환성은 역시, 우리 진수나 개차반 정도의 천재는 아닌 것 같았다. 싸움은 잘할지 몰라도 머리가 좀 딸린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나는 이 아이를 반드시 각성시켜야 했다. 개차반의 엄명이기도 했다. 황제가 탈출했고 그 황제가 나를 노릴 수 있다나 뭐라나.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3차 각성을 이룬 김환성이 필요하단다. 솔직한 말로 나한테도 좋은 제안이기도 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망나니는 3차 각성에 성공하게 됐다. "응? 나 몸이 조금 이상한데?" 그런데 망나니가 조금 이상했다. ============================ 작품 후기 ============================ 후기를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따 ㅠㅠ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선작/추천/코멘트/쿠폰은 큰 힘이 됩니다. 0153 / 0192 ---------------------------------------------- 바, 바지는 좀 입어! *** 저 망나니. 신 났다. "이야! 이거 엄청 신기해! 야! 똥개. 이거 봐. 잘 봐봐." 아니. 지금. 신 날 상황이 아닌데 왜 신이 나는 건데? 이봐. 그러니까 옷은 좀 입지...? 난 바닥 한 켠에 버려진 망나니의 상의를 봤다. 망나니는 몸이 참 좋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망나니는 망나니고 몸짱은 몸짱이니까. 하여튼 지금 몸 좋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봐봐. 봐보라고. 이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해괴망측한 장면이 눈에 포착됐기 때문이다. "이거 봐! 가슴이 생겼어!" 그래. 나도 봤어. 이건 도대체 뭐니. 무슨 부작용이니. "이거 보라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만 주물럭 대라고. 그걸 왜 자꾸 주물럭 거리는 건데. "뭐지, 이 건?" 그리고 바지춤 안에 손을 넣었다. "음. 고추도 조금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인데." 야. 너는 여동생 앞에서 진짜. 망나니 인증하냐? 아니. 그러니까 옷은 벗지 말라고. 왜 벗냐고! 바, 바지는 좀 입어! 내 가슴 속 절규와는 상관없이 망나니는 기어코 바지도 벗어 버렸다. 바지만 벗었으면 내가 아무 말도 안 해. 심지어 팬티까지 벗었다. 완전히 알몸...은 아니었다. 알몸은 아니고 양말만 신은 상태다. 그러니까 더 변태같다. 망나니는 혼자서 이상한 기합성을 냈다. "으읍!" 뭐랄까. 나는 잘 모르지만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목과 이마에 핏줄이 솟아 올랐다. 용 쓴다, 용 써. "야 똥개. 가까이 와봐." 그러고보니 목소리도 조금... 여성스러워졌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김환성이 갑자기 왜 약간... 뭐라고 해야 돼? 여성화? 가 된 것 같은데. "빨리. 빨리 와. 나 이거 느낌 좋단 말이야. 느낌이 와. 입 벌려." 망나니는 기다리는 시간 조차 아깝다는 건지, 아니면 엄청 급한 건지 나를 마력으로 강하게 끌었다. 마치 자석처럼 나는 망나니에게 날아가듯 안겼다. "으, 으악!" 비명을 지른 건 내가 아닌 망나니였다. 이건 확실했다. 얘 지금.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한 거다. 자기의 정확한 힘을 모르고 나를 끌어 당겼고 나와 부딪친 망나니가 나를 안은 상태로 침대 위에 넘어졌다. "아씨. 깜짝이야. 너 왜 이렇게 빠르게 날아와? 날 그렇게 패고 싶었어?" "그, 그런 게 아니어요." 이건 네 잘못이잖아! 책임전가하지 말라고! 너는 지금 '이 대단한 오빠가 이런 실수를 할 리는 없지!'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고. 이 허세킹아. "하여튼 빨리 입 벌려." "오, 오빠!" "빨리 입 벌리라니까?" 망나니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날 또 마력으로 끌어당겼다. 감히 반항할 새도 없이 내 입술이 망나니의 입술에 닿았다. 아씨. 얘 진짜 왜 이래. 아니. 좀 살살할 수 없어? 무슨 진공청소기냐? 앙? 이러다 혀 뽑히겠어! 망나니는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빠이 허혀 조! (빨리 성력 줘!)" 얘 지금 엄청 급해 보인다. 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성력을 불어 넣었다. "헤호 헤호! (계속! 계속!)" 아. 지금도 힘들어 죽겠다고. 지금 귀 밑에가 터질 것 같아. 풍선 엄청 열심히 불었을 때 그런 기분이랄까. 머리도 띵했다. 그리고 망나니가 완전히 변했다. "이야. 이거 완전 신기한데?" *** 한진수는 문을 열려다가 말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희의 방에서, 못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 와. 나 이거 느낌 좋단 말이야. 느낌이 와. 입 벌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지. 문을 열어봤다. 그랬는데, 한진수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저, 저건...' 김상희가 위에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덮친 모양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 누군가는 현재 알몸이 되어 있는 상태. 양말을 신고 있기는 있으나 알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진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제국의 반역자라 낙인찍혔을 때도 이런 상태는 아니었다. 거의 코마상태에 근접했을 정도로, 한진수는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게 무슨...' 그리고 아무래도. '저건 여자 같은데.' 화가 많이 났다. 솔직히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그 화를, 김상희에게는 낼 수 없었다. 김상희는 한진수가 살아가는 이유다. '무슨...이유가 있을 거야.' 일단 한 번 참았다. 숨을 골랐다. 상희라면. 그래. 내 상희라면 이상한 짓을 할 리 없어. 저건 어떻게 하다보니 저렇게 되었을 거야. 넘어진 걸거야. 현실을 부정했다. "하여튼 빨리 입 벌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 오빠!" 라는 말이 들려왔고, "빨리 입 벌리라니까?" 라는 말도 들려왔다. 뒤에서 보기에는 격렬한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한진수는 폭발했다. *** 쾅! 거대한 폭발음이 일었다. 기록의 관 전체가 진동했다. 사자관에 머물고 있던 김훈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마력 파동은...' 김훈상이 일어섰다. "내가 직접 간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이 함께 했다. 고려 왕궁 내에서 저런 힘을 낼 수 있는 사람? 아니. 전 세계에서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잘 쳐줘도 열 손가락안에 꼽을 수 있을 거다. 대표적으로 한진수. 그리고 김환성. 그리고 김훈상은 어이없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아부지. 이 자식이 감히 날 쳤어요." 지금 김환성의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김훈상은 고개를 돌려봤다. 옆을 보니 한진수의 꼴도 영 별로였다.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김훈상은 그런 모양새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아들을 쳐다봤다. 아니. 이제 딸인가 싶다. "얘한테 성력을 엄청 받았거든요. 그러더니 이상한 느낌이 들더니 이렇게 됐어요.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면 계집이 되어버려요. 신기하죠?" 그러더니 김환성은 마력을 내렸다가 올렸다가를 반복했다. 그러자 가슴이 없어졌다가 생겼다가를 반복하며 신체가 계속 변했다. "뭐랄까. 계집의 몸이 되었을 때 마력운용이 더 편해지는 느낌이에요. 고추가 없어지니 느낌도 이상하고." 매일 있던 것이 없어지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저 자식이 날 쳤다는 거죠! 죽여 버릴 테다. 내 똥개를 훔쳐간 것도 모자라 감히 날 쳐?" "혀, 형님. 저, 저는 그 것이 아니라..." 한진수의 입장에서는 억울했다. 아니. 누가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김환성이 자기 힘을 제대로 제어 못해 김상희와 침대에서 뒹굴뒹굴(?)할 줄은. 심지어 모습이 변해 있을 줄은. 자세히 보면 못알아 볼 것도 아니지만 아까 한진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고 또 당황하여 김환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너 뒤졌어. 이참에 좀 맞자." 김훈상이 말했다. "김환성. 경거망동마라.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으니 네 몸의 변화와 네 힘에 더 익숙해지도록 해라." 김훈상은 이 짧은 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확실히 파악했다. '환성이는... 가진 바 컨트롤 능력에 비하여 그릇이 절대적으로 크다.' 마력의 절대량만 놓고 보자면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난 인재였다. 물론 한진수보다도 말이다. 다만 그 힘을 제대로 끌어다 쓰지 못했지만. 만약 한진수 정도의 컨트롤 능력이 있었다면 김환성은 능히 세상을 바꾸고도 남았을 거다. 만약 김환성이 지금 3차 각성을 한 것이라면, '마력 절대량이... 엄청나게 커졌을 거다.' 그리고 그 마력 절대량을 감당하기 위한 신체로 몸이 바뀌는 것일 수도 있다. '계집의 몸이... 마력을 운용하기에 훨씬 편안한 몸이라는 건가.' 예전 김상희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과거. 그러니까 고대에서, 마력은 원래 여자의 전유물이었다고. 마력이 원래 여자로부터 유래된 힘이라면 여자의 몸으로 다루는 것이 더 쉬울 지도 몰랐다. '환성이 정도의 절대량을 가지게 되면 몸이 계집으로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 아이고 두야.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응. 그래. 그게 내 제안이야." 얘 제안이 뭐냐하면, 자기가 이 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하여 한진수와 결투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진수는 울상이다. "왕자님..." 뭐.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순히 마력의 양만 놓고 보자면 우리 망나니는 개차반씨나 진수를 뛰어넘는 엄청난 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걸 잘만 끌어다 쓰면 나를 지키는데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단다. 뭐. 그것 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솔직히 내 생각에는, '너는 그냥 우리 진수를 때리고 싶을 뿐이잖아!' 그런 거 같다. 이거 엄청 불공정한 결투다. 진수는 아마 망나니 때리지 못할 거다. 오죽하면 환혁이한테도 맞아준다. 엄청 완전 무지무지 불공정 결투다. 그래서 나는 진수와 따로 얘기했다. "진수야. 부탁이 있어." "들어줄게." ...아니. 인간적으로 뭔지는 들어보고 얘기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나라 하나 사달라고하면 어쩌려고...는. 아마도 사줄 것 같다. 사주는 게 안되면 강탈이라도 해서 줄 것 같으니 이런 부탁은 하면 안될 것 같다. 남자친구. 아니 남편의 능력과 스케일이 너무 커도 문제는 문제구나. "네가 내 가족이라고 많이 봐주는 거 알고 있어." 내 오빠고. 내 아빠라서 네가 항상 저자세인 거 알아. 하지만. "그러기 전에 너는..." 너는 내 남자란 말이야. "너는 내 남자야. 네가 그렇게 기 죽어 있고 풀 죽어 있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이참에 버르장머리 좀 고쳐줘. 솔직히 탑 망나니 환석이는 그냥 그런데 환성이랑 환혁이는 혼이 좀 나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내 남자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강했으면 좋겠어." 물론 어딜가나 주먹을 휘두르고 다니란 소리는 아니지만. 진수가 그럴 것 같지는 않으니 뭐. "그러니까... 사정 봐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그리고 이 정도면 결정타가 되려나? "만약 네가 이긴다면..." 일부러 뜸을 들였다. "뽀뽀 해줄게." 진수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묻어 나왔다. 아니. 내가 말하려던 건 뽀뽀가 아니었는데. 내 레파토리대로라면, '음? 겨우 뽀뽀?' 정도의 반응을 이끌어 낸 다음. '아니. 그 이상의 것도 할 거야.' 라고 제대로 불을 지피려고 했는데 얘 이미 벌써 불타 오르고 있다. 이걸 내가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 어쨌든 레파토리대로 말은 했다. "아니. 그거보다 더 한 거 해줄게." 진수의 눈이 커졌다. 더한 게 뭔지...상상은 네 자유겠지만. 흠. 뭐 어때. 우린. 부부라고. 부부니까. 뭐. 이렇고 저런 거. 그런 거. 있잖아. 말은 못하겠지만. 진수가 불타 올랐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바로 그 거야. 너 지금. 엄청 비장해졌어. "꼭 이길게." "응." 그래야 내 남자지. 내 남자 어깨 좀 피고 다녀. 처가라고 해서 그렇게 무조건 기지 않아도 괜찮아. 화이팅. 내 남자. 김환성과 한진수가 결투를 하게 됐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환성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끌어 쓰기 위한 수련의 일종이긴 한데, 편의상 그냥 결투라고 하겠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 결투 아닌 결투가, 왕궁에 무슨 바람을 일으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떡밥들이 하나씩 풀리고 있습니다. 헤헿 0154 / 0192 ---------------------------------------------- 납치된 김상희 *** 김환성과 한진수의 비공식적 결투가 시작 됐다. 한진수는 앞을 쳐다봤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묘하게 닮았네.' 상희와 묘하게 닮은 김환성 왕자. 누가 보면 자매라고 해도 믿을 법 했다.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는 소리지.' 원래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면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 오른다. 그런데 김환성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게 아니라, 여성화가 진행 됐다.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고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완전히 여자의 모습이 되어 버린다. '왕자님이라 불러야 되나?' 하여튼 왕자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왕자님. 안 봐드릴 겁니다." 일부러 비공식으로 했다. 누가 됐든 일단 패배자는 나오기 마련이고, 나이트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에게 그게 공개가 될 필요는 없었으니까. 김환성이 평소와는 다른 하이톤으로 말했다. "너 죽어도 난 몰라." "......." "내겐 무적의 쌍갑바가 있으니까!" 그러면서 어깨를 활짝 펴고 대략 D컵은 되어 보이는 가슴에 보란 듯이 힘을 줬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무적의 쌍갑바'. 상당히 마음에 들은 듯 했다. 김상희는 그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 했다. '망나니의 멘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몸이 변해서 여자가 되면 충격이라도. 아니 충격 비스끄리무리한 거라도 받아야 하는게 정상이 아니냐, 라고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애초에 김환성은 충격이란 거 자체를 안 받은 것 같다. 오히려 신기하다고 자신의 가슴을 마구 주물럭대는데, 그 꼴이 너무나 해괴망측하여 김상희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더 황당한 건, '야. 똥개. 계집들은 쉬야할때 어떻게 해? 서서 싸니까 흐르던데?'하고 어처구니 없는 질문까지 해댔다는 것. '진수야. 저 멘탈 갑각류 좀 패줘!' 그렇게 결투가 시작 됐다. *** 김훈상은 감탄했다. '3차 각성을 한 아이들이라.' 김훈상 역시 3차 각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타인이 3차 각성을 이룬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굉장히 신기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초거대 덤프트럭과 최신 장갑차의 싸움인가.' 초거대 덤프트럭은 김환성. 김훈상마저도 기겁할 정도의 방대한 마력양을 바탕으로, 거대한 한 방으로 한진수를 공격했다. 그에 반해 한진수는 절대량은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빠르고 효율적으로 결투를 진행해 나갔다. '승자는 정해져 있겠어.' 만에 하나. 운이 작용해서 김환성이 한진수에게 제대로 한 방만 먹인다면. 그러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한진수는 강하지는 않지만 차근차근, 김환성의 몸에 데미지를 가했다. '승자는 한진수겠군.'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김환성이 입가를 슥 문질렀다. 입술에 피가 터졌다. 솔직히 열 받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하이톤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김환성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김상희를 힐끗 쳐다봤다. 아씨. 안 되는데. 내가 제일 세야만 하는데. 하는 다급한 마음이 밀려 들었다. 이 도둑놈새끼를 때려눕히고 '그치? 오빠가 제일 세지?'하고 당당하게 말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김환성은 깨달았다. '저 놈을 더 걱정하고 있어?' 그걸 알게 됐다. 지금 김상희는 오빠인 자신이 아니라 남편인 한진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열 받았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놨더니 -물론 김상희가 들으면 엄청 억울해하겠지만- 이젠 남편 편을 들고 있지 않은가! "이 도둑놈새끼! 반드시 죽여 버릴테다!" 그렇게 사단이 일어났다. ***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괜찮으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지금. 누군가한테 안겨 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 개차반씨 냄새다. "아빠?" 그리고 앞을 봤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진수가 일단 1차로 막고, 그 뒤에 개차반씨가 나를 안고 2차로 보호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모르겠다. 반경 수백 미터쯤은 되어 보인다. 일단 한 눈에 안 들어오니까 엄청 거대하다는 것만 알겠다. 크레이터랄까. 마치 거대한 운석에 부딪치기라도 한듯, 나이트 전용 거대 연무장이 파여 버렸다. 엄청나게 거대한 폭탄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한진수는 어이 없다는 듯 김환성을 쳐다봤다. "왕자님. 김상희를 죽일 셈입니까?" "아, 아니. 이게..." 김환성은 당황했다. 한진수가 화를 냈다. "아무리 제가 밉다지만 전력으로 마력을 방출하면 어떡합니까! 이 정도의 폭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건 전력으로 방출한 게 틀림 없었다. 한진수가 보니 최소 반경 500미터가 넘는 거대 크레이터가 생겼다. 더 황당한 건, 연무장 근처의 건물 3동이 그대로 날아가버렸다는 거다. 물론 결투의 여파가 퍼질 것을 대비하여 사람은 모두 대피를 시켜놨었다. 인명피해는 없다는 말이다. 한진수가 완전히 흥분했다. "배리어가 완전히 박살나고 거기에 왕궁 내 건물 3 채가 사라졌습니다! 상희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냥 건물도 아니다. 왕궁 내 건물은 특수 배리어를 통해 보호 받는다. 게다가 연무장에도 배리어가 설치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을 깨뜨리고 이런 사단을 만들어 냈다. 김환성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 거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해버렸다. "...살살...한건데..." 김훈상마저도 침을 꿀꺽 삼켰다. '걸어 다니는 전략병기가 되는 건가.' 살살한 게 이 정도다. 진짜 마음 먹고 힘을 내면 어쩌면. '중소 도시 하나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겠군.' 프리온 나이트보다도 훨씬 강한 화력이다. 걸어다니는 인간폭탄이랄까. 한진수마저도 침음성을 흘렸다. '엄청나다.' 그 엄청난 김환성이 김상희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똥개야." "......." "아니. 상희야." 처음으로, 김상희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줬다. 김환성은 많이 미안해했다. "괘, 괜찮지? 어디 안 다쳤지?" 김상희는 장난을 한 번 쳐봤다. "아파요." 그랬더니 회복의 관 관장 미첼 앞에 도착해 있었다. 김훈상과 한진수가 무려 워프를 사용했다. 무려 워프를 사용해서 무려 회복의 관에 왔으며 그것도 무려 관장에게 쳐들어왔다. 김훈상이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치료해라!" 한진수도 급하게 말했다. "부탁 드립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미첼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딜 다치신 겁니까?" 그리고 회복의 관 한 쪽 벽면이 완전히 날아갔다. 폭파 됐다. "아씨. 실수했네." 김환성이었다. 아직 힘 조절을 제대로 못했다. 그는 워프를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뛰어오느라 좀 늦었다. 누구도 회복의 관으로 온다고 말 안해줬는데 당연하게도 여기로 왔다. 왕궁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거대한 공룡같은 것이 왕궁을 휩쓸고 지나갔단다. 물론 그런 거 아니다. 김환성이 하도 급하게 달려오느라 마력 컨트롤을 못해서 발자국을 지나치게 크게 남겼을 뿐. 정확한 사정을 잘 모르는 시녀들은 바닥에 금이 가있는 것을 보고 벌벌 떨었다. "혹시... 지진이 일어났던 것 아닐까?" *** 고려와 신라 연합은 상당히 강했다. 아니. 상당히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했다. 주변의 그 누구도 감히 고려와 신라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동력과 더불어 강한 화력까지도 있었다. 고려와 신라는 굉장히 빠르게 세계를 안정시켜 나갔다. 한진수는 저도 모르게 슬몃 웃고 말았다. 칼리번이 말했다. "폐하. 엄청 기뻐 보입니다만?" "이제 곧 네게 왕위를 물려줄 때가 올 것 같다." "아뇨. 됐습니다. 왕은 그냥 폐하 하시죠." 2인자가 되어보니 알겠다. 2인자가 최고다. 1인자와 같은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롭지만, 1인자 못지 않은 권세와 권력을 누린다. "게다가 폐하 아니면 솔직히 이 시국을 누가 어떻게 다스립니까?" 폐하 당신 정도 되는 능력을 가져야만 이 세계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한진수의 능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프리온 나이트를 무려 32기나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32기가 전부 최종형태로서 제국의 프리온 나이트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 거기에 더해 워프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 누구도 감히 신라 국왕 한진수에게 대들지 못했다. "나는 왕위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은 때가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맡고 있는 것 뿐.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단 하나다." "아. 몰라요. 나 왕 안해요. 대장이 폐하 하세요. 난 과로사하고 싶지 않아요." 한진수 쯤 되니까 일을 저렇게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하지, 자신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한진수는 뭔가 불길해졌다. 이게 아닌데. 나는 상희랑 알콩달콩 둘이서 잘만 살면 되는데. 왕 같은거 다 때려치우고 상희랑 여행다니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뭔가 좀. 불안해졌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제국은 쉽게 무너졌고 그로 인해 상희를 위협하는 세력은 없어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방심하기는 일러.'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제국 황제가 지하감옥에서 탈출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외부의 도움이 있었을 거다. 단순히 도움이 있었던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고려 왕궁에서 황제를 빼내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적어도 상식선에서는 말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아직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3차 각성을 끝마친 김환성이 거의 24시간 내내 김상희와 붙어 있다는 것 정도. 김환성이 말했다. "아. 그러니까 계집들은 쪼그려 앉아서 쉬를 해야 해?" "오빠. 그러니까..." 김상희는 답답해졌다. 어째서 자신이 오줌 싸는 법까지 알려줘야 한단 말인가. 아니. 정 불편하면 마력을 풀고 그냥 남자로 돌아와서 볼 일을 보던가. 얘 왜 이러나 싶다. '설마...' 그리고 이내 김환성이 계속 여자 상태로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를 보호하려고?' 그래서 24시간 내내 여자의 모습으로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거야.' 고맙긴 고마운데, 괜히 안 고마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김환성이 자꾸만 황당한 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누르면 젖이 나와?" 자꾸 네 가슴 주물럭 거리지 말라고! 그것도 내 앞에서! 왜 굳이 내 앞에서 이러는 거야! 앙? 진짜 명치 한 번 맞아 볼래? 사실 김환성은 일부러 이러는 거다. 김상희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이럴 때마다 김상희는 부끄러워하고 황당해 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고 즐거웠다. 동생이 귀엽기도 했고. 그래서 일부러 이러는 거다. 물론, 이 가슴이 진짜 신기하기도 했고. 그리고 그 때. 김상희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를 납치하러 왔어." 김상희는 분명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김환성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순간 김상희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빠...?" 김환성이 계속 말했다. "젖이 왜 안 나와? 소들은 막 누르면 나오던데?" 김상희도 말했다. "오빠...." 조금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빠!" 하지만 김환성은 듣지 못했다. "오빠!!!" 김환성은 여전히 듣지 못하고 자기 가슴을 만지작 거렸다. 황당한 소리를 자꾸만 해댔다. "에이. 안 나오네. 젖이 안 나오는 갑바는 필요 없는데." 김환성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를 데려갈게." ============================ 작품 후기 ============================ 3차 각성 망나니. 얘의 멘탈은 이해 불가한 영역이라고 합니다. 좋게 포장하면 그거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미친놈이라고 합니다 0155 / 0192 ---------------------------------------------- 납치된 김상희 *** 나는 이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 안 나왔다. 아마도. 마력으로 강제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망나니야. 여길 봐. 나 지금. 뭔가 이상하다고. 그제서야 망나니가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음. 똥개야. 너 어디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어디 아프냐?" 하지만 이상했다. 망나니가 손을 뻗었다. 내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열이 나는 것을 알아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아무...느낌이 안 나.' 무서워졌다. 아무런 느낌도 안 났다. 내 눈에는 분명 망나니가 보이고 있고, 망나니의 눈에도 내가 보이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망나니는 분명 내 이마에 손을 댔는데 나는 아무런 느낌조차 나지 않았다. '이거...뭐야?' 망나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도 안 아픈 것 같은데. 너 뭔가 표정이 이상해. 화 났어?" 망나니는 내게 가까이 걸어와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 봤다. 요목조목 뜯어봤는데, "이상하네. 왜 표정이 이렇게 딱딱하지?" 라고 자꾸 혼잣말을 했다. 너. 지금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지금...날 보고 있는 것 맞아? 그리고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미안해.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어." 내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언제나 나를 보며 활짝 웃던 아이다. 크리스. 크리스가 나타났다. "궁금할 것이 많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어." 무서웠다. 평소에 항상 웃던 아이였는데 오늘은 굉장히 슬퍼 보였다. 마치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싫은 일은 아마도 납치가 되겠지. '진수야...!' 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뒤면 진수와의 결혼식이 있다. 이제는 정말로, 제국의 눈치를 안 봐도 될 줄 알았다. 제국이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제발... 진수야...' 제발 진수가 나타나줬으면 좋겠다. 이제야 겨우겨우, 이렇게 멀리 돌아와서 겨우 진수와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싸워서 겨우 이제 자리를 잡았는데. 이제야 겨우 진수랑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음. 너 일단 아파 보이니까 눕혀줄게." 망나니가 나를 안았다. '아무 느낌이 안 나.'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웠다. '이, 이건 도대체 무슨...' 망나니가 안아들고 있는 것은 분명 나였다. 아니. 나와 똑같이 생겼다. 표정이 없다. 좀 무뚝뚝해 보였다. "푹 쉬어." 라는 망나니의 말에, "네. 오빠." 라고 대답했다. 이 묘한 위화감. 어디서 느껴본 적 있다. '백제!' 백제에서 이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크리스와 함께 백제를 돌아다닐 때.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약간 이런 느낌을 받았었다. '크리스. 너는 도대체 뭐야?' 나는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자." 그런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크리스가 나를 안아들었다. "조금 무서울 수도 있어." 크리스의 눈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게 내 볼에 떨어졌다. 조금 뜨거웠다. 손가락으로 그걸 만져봤다. '크리스...' 크리스의 눈물은 완전히 시뻘건 색이었다. *** 나는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어두웠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나 보던 지하 감옥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우중충하고 습하고. 여기가 지하인지. 지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몇 시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안 됐다.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구나." 철창 너머. 약간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화, 황제?" 어스름한 불빛 사이로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지. 황제였었지. 이젠 계집마저도 날 황제라 부르는 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라고 부르지 않는, 지금의 이 현실에 약간은 낙담한 것 같기도 했다. 자조적인 웃음을 띄웠다고나 할까. "그 분이 직접 움직이셨다." 그 분이 도대체 누구야? "너도. 고려도. 신라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을 테지." "당신이 그 분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가요?" 당신은 황제폐하였잖아. 얼마 전까지만해도 세계의 최정상에 군림하던 사람이라고. 황제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 나왔다. "나는 그 분의 꼭두각시였다." *** 으아아아아! 김환성은 소리를 질러댔다. 사자관은 물론이고 장미관, 기록의 관을 비롯하여 왕궁 내의 모든 건물들이 무너질듯 마구 흔들렸다. 김훈상이 말했다. "김환성. 진정해라." 지금 김환성은 이성을 잃었다. 제대로 자제시키지 않으면 왕궁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김훈상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마력양 하나만 놓고보면 엄청나군.' 저 엄청난 마력양. 가히 중소도시를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의 방대한 양이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김환성이 주저앉아 바닥을 쾅쾅 쳤다. 쿵! 쿵! 거대한 소리와 함께, 쩌적-! 땅이 갈라졌다. 그 갈라진 폭이 10cm 가 넘었으며 그 길이가 30m가 넘었다. 단순히 1자로 갈라진 게 아니다. 그가 내려친 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금이 늘어났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내가. 내가 지켰어야 했는데!!!" 침대 위의 김상희. 그건 김상희가 아니었다. 김상희와 거의 똑같이 생긴 인형이었다. 그 인형 비스끄리무리한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김환석이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님. 저는 이 것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김환석이 말을 이었다. "그 때 당시에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습니다. 백제에 갔었을 때 느꼈었습니다. 인간들이 인간답지 않았습니다. 정형화된 모듈을 가지고 행동하는 로봇처럼 보였었습니다." "언젠가 김상희도 그런 말을 하더군." 김훈상도 들은 적이 있다. 김상희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이 것을 보니. 그 때 생각이 납니다." 김환석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때 크리스의 행동이 조금 수상쩍긴 했습니다." 김훈상이 김환석을 쳐다봤다. 김훈상도 지금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굉장히 초조했다. 아주 작은 거라도 좋으니. 단서 하나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지금 그도 미칠 것 같았다. 김환성처럼 소리를 지르며, 뭐가 됐든 좋으니 화풀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 그는 알고 있다. 이성으로 감성을 극도로 억눌렀다. "어떻게 이상했지?" "동선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분명. 그건 굉장히 이상했다. 일국의 왕자를 데리고 간 여행이다. 그것도 자국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소비할 수 있도록, 동선을 잘 맞추어야 한다. 그게 예의이며 성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그 땐 그냥 조금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우리에게 힌트를 줬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김환석이 말을 이었다. "크리스가 일부러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 사람들의 대답은 거의 일정했습니다. 1을 누르면 2가 튀어나오는 프로그램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정형화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눈치 채라고, 일부러 이상한 동선을 만들어 비효율적으로 돌아다녔던 것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김훈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백제에... 뭔가가 있다는 뜻이냐?" 백제. 심상치 않았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나라. 김훈상은 문득, 예전 백제에 파견을 보냈었던 나이트가 떠올랐다.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품으라고 말했었던.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왔던 제 6대대 소속 정윤한 나이트.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 제 6대대 대대장 파커슨이었다. 그가 말했다. "정윤한 나이트가..." 하필이면 이 시기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때 시체로 발견 됐단다. 그것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허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말해봐라." "회복의관 관장의 말에 따르면..." 파커슨이 머뭇거렸다. 이 걸 이대로 보고를 올려도 되는 건가 싶었다. 김훈상은 현재 제정신이 아니다. 겨우겨우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뭐라도 됐든 좋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이럴 때에 백제에 관련된 보고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굉장히 다급한 소식이었다. "파커슨. 말해봐라! 어서!" 파커슨이 보고를 올렸다. 믿을 수 없는 보고를 올렸다. "그의 소견에 따르면 죽은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고 합니다." *** 김훈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정윤한 나이트. 그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얘기도 나눴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미 시체였었다고?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건 도대체. 김훈상마저도 혼란스러웠다. 그의 상식으로, 아니 세상의 상식으로 시체가 멀쩡히 말을 하고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도대체 뭐냐.' 지금 김상희의 몸에 심어둔 초소형 위치추적기마저도 작동이 안 된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갑자기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마치 황제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내 딸은... 어디에 있는 거냐.' 김훈상은 방의 불을 껐다. 아무도 볼 수 없게 하고 싶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모두 앞에서 강한 척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결국 그도 아버지다. 그것도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다. 스페셜 필드까지 펼쳤다. 왕의 눈물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스페셜 필드를 펼치고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무능해서 딸을 이토록 위험에 빠지게 만든 거다.' 내 책임이었다. 황제가 그렇게 탈출한 것을 알았으면, 과도하게 손을 써서라도 김상희를 보호했어야 했다. 3차 각성을 마친 김환성을 믿었는데, 믿으면 안 됐었다. 판단 착오였다. '내가... 내가 무능해서 그런 거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 나왔다. 전쟁기 때 수많은 부하들을 잃고나서.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어디에 있는 거냐.' 제발 살아만 있어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널 구해주겠다. 반드시. 반드시 널 구하겠다. 그렇게 다짐한 김훈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입술에서 피가 질질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김훈상은 스페셜 필드를 해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자에 앉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소식 들었습니다." "정윤한에 관한 소식 말이냐?" 한진수는 신라에 있었다. 때문에 김상희가 납치당한 것도 조금 늦게 알았다. 한진수도 지금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난동을 피우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맞대고,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했다. 반드시. 김상희는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녀가 없는 이 세상은, 한진수에게는 의미 없었으니까. "저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한진수의 등 뒤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는데 약 65편? 정도에 나왔던 떡밥이 160편 다되서야 풀리는군요...! 0156 / 0192 ---------------------------------------------- 들고 일어난 전세계 *** 한진수의 뒤에 뭔가가 나타났다. 그냥 저절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한진수의 의지대로, 한진수가 불러들인 거다. 김훈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 것들을 내 앞에서 꺼내는 이유가 뭐지?" 어떤 식으로 좋게 포장해도 저 것은 전략병기다. 그것도 최종형태의 전략병기. 제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그 기본바탕이 되었던 전략병기 말이다. 그러한 전략병기를 국왕과의 독대자리에서 꺼내든다? 그럴 의도가 있든 없든, 이 것은 명백한 적대행위다. 신라의 국왕이지만 국왕으로서의 자각이 거의 없는, 어서 이 왕위같은 거 때려치우고 김상희와 알콩달콩 살고 싶어하는 한진수가 굳이 극존칭을 사용하며 김훈상을 불렀다. "폐하. 진정하시고 살펴보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한진수도 그렇고 김훈상도 그렇고.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한진수도 그래서 제대로 된 설명을 못했고 김훈상도 판단력이 많이 흐트러졌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천재 둘이. 김상희의 실종 앞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 것. 어디서 많이 본 형태 아닙니까?" 그제서야 김훈상도 정신을 차렸다. 프리온 나이트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전투 중에 저것을 꺼내들면 저것들은 금색으로 빛나곤 한다. "이 프리온 나이트들은..." 그리고 전투 중이 아닌 평시에. 이 것들은 인간의 형태였다. 인간과 굉장히 흡사했다. 32기의 프리온 나이트 중. "앞으로 나와라. 데르코." 데르코라 호명받은 프리온 나이트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김훈상은 충격을 받았다. '인간과 거의 똑같다.' 말을 하는 프리온 나이트. 처음 본다. 인간과 거의 똑같았다. 프리온 나이트라는 것을 알고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인간 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그렇다는 말은. "그렇다는 말은, 정윤한이 프리온 나이트였다는 것이냐?" "애초에 프리온 나이트라는 명칭은... 제국에서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랬다. '프리온 나이트'라는 이름은 제국에서 정했던 거다. "상희와 관련되어 여러 자료들을 조사하고 발굴해본 결과." 한진수가 말을 이었다. "프리온 나이트는... 골렘의 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 됩니다." 한진수와 김훈상이 대화를 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산물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백제는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를 엄청나게 많이 소유하고 있던 국가라는 뜻이냐?"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 리가." 그랬다면 백제가 진작에 세계의 패권을 잡았겠지. "다만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프리온 나이트 정도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윤한 나이트 역시... 큰 무력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프리온 나이트를 골렘의 한 종류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전투용과 비전투용. 그렇게 나누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설명한다면 모든 것의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한 순간에 백제가 사라졌던 것도 설명이 되는군." 프리온 나이트는 소환형식을 통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는 말은, 소환을 취소하면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소리다. 그 기술력. 제국이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백제에서 그 기술을 제국에 전해줬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퍼즐이 점점 더 맞춰지기 시작했다. "제국은... 백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을 수 있다는 거겠지." "거기에 크리스는 일부러 힘을 내보였습니다. 크리스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힌트를 주고 있던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시녀 하나를 3억이 넘는 가격에 매입할 수 있는 경제력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때 보여줬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서도 제국마력학원의 하위 클래스에 입학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성녀와 골렘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얘기를 했던 점들을 비추어 보았을 때. 크리스는 백제가 어떠한 힘을 갖고 있었음을 미리 우리에게 표시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백제가 제국에 프리온 나이트를 공급해줬고, 백제가 제국을 뒤에서 움직였다라." 퍼즐은 맞춰졌다. 말도 안 되지만, 세계 최강국이었던 잉카제국이 사실은 백제의 꼭두각시였다. 아니. 적어도 지금 정황상 그랬다. 몇 개 안 되는 단서였지만 김훈상과 한진수는 그렇게 입을 모았다. "그러면 황제가 탈출 할 수 있었던 것도 설명이 됩니다. 우리는 모르는 미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 그 단체가 백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백제를 찾아야겠군." 결정은 내려졌다. "우리는... 백제를 찾는다." *** 나이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어떤 개새끼들이 감히 우리 성녀님을 납치해!" 그와 더불어 정윤한의 죽음은 나이트들을 분노하게 했다. "백제 그 개새끼들이!" 감히 고려의 나이트를 골렘화시켜서 여태까지 이용해먹었다는 소리 아닌가. 하나같이 분노했다. 동료를 그런 식으로 이용해먹다니. 김훈상도 상황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왕궁 내. 나이트들 정도만 아는 기밀 정도가 자꾸만 제국에 넘어가는가 싶었더니, 정윤한 나이트가 문제였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검사를 했다. 다행히 정윤한 이외의 다른 나이트들은 모두 정상이었다. "정윤한의 복수를 하고." 그리고. "우리의 성녀님을 되찾아와야 한다." 나이트들이 들고 일어섰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여자들도 들고 일어섰다. 여자들은 이 세계의 약자였다. 약자인 건 맞고, 지금 역시도 최약자다. 남자들에게 감히 대들지 못한다. 그러나 김상희 덕분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그 분 덕택에 우리의 삶이 달라졌어." 아직은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계의 여자들은 김상희에게서 희망을 봤다. 고려 왕궁의 공주들도 장미관에 모였다. 제 2공주. 김예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는 없을까?" "우리도 뭔가를 해야만 해요."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안락한 환경을 제공 받으며 공주들만의 커뮤니티가 생길 수 있었던 것도 김상희 덕분이었다. 세상에 수페르가를, 그것도 여자들을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따로이 제조한 수페르가를 공급해준 것도 김상희였다.(물론 이건 김환석이 한 거지만 사람들이 알기로 김상희가 했다고 알고 있다.) "언니를... 반드시 구출해야만 해요." 이 정도 변화만 해도 엄청난 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세계의 여자들은 수동적이기만한 존재였으니까. 이들이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움직였던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김상희는 김상희도 모르는 사이에, 작지만 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셈이다. 세계에서도 최고라 일컬어지는 고려의 나이트들 전원과 최근 신흥 강국이자 제국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알려진 신라의 중추. 늑대들 전원이 백제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아직도 일부 남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깟 계집 하나 찾는데... 무슨 세상이 이렇게 들썩거려?" "너 그거 모르냐?" "뭘?" "수페르가와 미라클을 실제로 만든 사람이 김환혁 왕자가 아니라 김상희 공주라고." "에이. 설마. 계집이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하겠어?" "이거 진짜 세상물정 모르는 놈이네. 김상희 공주 앞으로된 자산이 수 조원이 넘을거란 예측도 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몰라? 김상희 공주가 발명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자산가가 되었겠어?" 물론 아니다. 자산가가 된 김상희는 자기가 자산가가 된지도 모른다. 심지어 수조원에 육박하는, 아니 가치를 환산할 수조차 없는 건물인 장미관이 자기 건지도 모른다. 김상희는 김상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 최고의 부자 -여자들 중-가 됐다. "계집들에게 마력을 불어넣고... 그리고 듣자하니 프리온 나이트를 진화시킬 수 있다더라. 그 왜. 신라 왕국의 프리온 나이트." "아. 그 엄청 강하다는 프리온 나이트?" "그게 김상희 공주가 만들어 낸거래." "마, 말도 안 돼!" 조금 와전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맞기는 맞았다. 어쨌거나 김상희 덕택에 한진수의 프리온 나이트가 최종형으로 바뀌었으니까. "그것 뿐인줄 아냐?" "최근에 조금 유출된 사실인데, 예전에 제국과 고려가 한 판 붙었다나봐." "어... 그런 얘기가 많기는 했었지." 그럴 법 했다. 제국과 고려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서 전쟁을 벌였으니. 그 전에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국지전 혹은 외교전쟁이 있었을 거라고 예측은 했다. 물론, 그 계기가 김상희 공주 단 한명이라는 건 모르고 있지만. 아니. 안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그 때, 고려 나이트들을 전원 살려준 게 김상희 공주래. 거기서 기적을 선보였다나봐." "에이... 무슨 소설 쓰냐?" "그래서 그 대단하다는 고려 나이트들이 성녀님, 성녀님하고 김상희 공주를 떠받들었다잖아. 그 콧대 높다는 고려 나이트들이 괜히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랬겠어?" 그리고 놀라운 소식이 알려졌다. 누가 됐든, 김상희 공주의 행방을 알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1조원을 하사하겠다는 고려왕실을 정식 제안이었다. "1조원... 그건 도대체 얼마야...?" 일반 사람들에게 1조원은 가늠조차 안 되는 비현실적인 액수다. "은행에 넣어놓으면 이자로만 1년에 100억이 넘게 나와." 상황이 이 쯤 되니, 남자들이 전부 움직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초에 일은 대부분 여자들이 한다. 남자들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귀족으로 군림하며, 여자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살아왔다. 그 남자들이 전부 들고 일어섰다. "1년 이자만 100억!" 거기에 김환혁 왕자가 또 다른 발표를 했다. "내가 사비로 1조원을 쓰겠다." 그렇게 되면, "1년 이자만 200억!"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거기에 김환성 왕자까지 1조원을 보탰다. 고려왕가에서 총 3조원을 내걸었다. "1년 이자만 300억이래."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왕궁으로 돌아오게 된 첫째 왕자 김형석이, 퓨리어스 한 병을 통째로 내걸었다. "퓨리어스 한 병이면 도대체 얼마야?" "그건 가치 환산이 안 되지.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천고의 보물인데. 부르기에 따라서는 한 방울에 수 백, 수 천억씩 할 텐데. 애초에 여벌 목숨으로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거고." 1년 이자만 300억. 그것도 이율 1퍼센트 최저금리로 생각했을 때 그런 거고, 저게 만약 2프로 쯤 되면 300억이 아니라 600억이 된다. 거기에 보물 퓨리어스까지. 고려 나이트들과 신라의 중추들이 전부 움직이고, 세상의 남자들과 여자들까지 김상희 찾기에 혈안이 됐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현상까지 나타났다. 남자들이 '길드'라는 것을 만들기시작했다. 혼자서는 찾기가 어려우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끼리 힘을 합치기 시작한 거다. 10명에서 팀을 꾸려서 3조원을 받는다 해도, 개인당 무려 3천억원의 수익이 떨어진다. 어지간한 보물사냥보다도 훨씬 큰 이득이 떨어지지 않는가. 3조원과 퓨리어스 한 병이 세상을 움직였다. 일반 사람들만 움직인 게 아니었다. 세계의 왕국들이 자국의 나이트들을 파견 보내면서 김상희의 행방을 찾았다. "무슨 수가 있어도 김상희 공주를 찾아내서 구출한다!" 제국이 무너지면서, 많은 나라들이 피해를 봤다. 누가 뭐래도 제국은 가장 커다란 시장이었으며 가장 큰 교역국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뻔 했다. 신라와 고려과 숨 가쁘게 움직여서 그나마 안정을 되찾은 거다. 어쨌든 많은 나라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한 와중에 3조원이면 가뭄의 단비가 될 거다. "우리가 찾는다!" 세계의 남자들. 세계의 여자들. 그리고 세계의 나이트들과 군대가 동원됐다.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멍하니 창문 밖을 쳐다봤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김상희가 옆에 없는 세상. 그 세상. 너무나 무서웠다. 살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지...?' 살아있기라도 하면 좋겠다. 너무나 보고 싶었다. 다른 거 필요 없다. 그냥 옆에만 있어주면, 그는 그거면 됐다. '보고 싶어.' 어디에 있는 거야. 저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두 방울이 세 방울이 됐다. 세 방울이 곧 네 방울이 됐고, 한진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제발... 나를 두고 사라지지 마." 이대로면. 이대로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이 밀려 들었다. 너무 불안했다. 죽고 싶을 만큼.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진수. 너. 김상희를 그렇게 사랑하는 거. 맞아?" 한진수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누구냐!" 아무리 방심하고 있기로서니. 아무리 비탄에 빠져있기로서니.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뒤를 잡혔다. 만약 상대가 공격 의사가 있었다면 자신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별로 없어. 묻잖아. 김상희를 그렇게 사랑하는 게. 맞냐고?" ============================ 작품 후기 ============================ 많은 응원에 항상 감사드려요 0157 / 0192 ---------------------------------------------- 프리온 나이트의 비밀 *** 한진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걸 일일이 말해야 하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엔 크리스의 모습이 너무 다급해 보였다. 일단 백제에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러한 가운데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크리스. 여태까지 힌트를 계속해서 전해줬던 것 같다. 그래서 대답하고 말았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줬다. "김상희를 사랑해." 그것 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정말이었다. "내 자신보다도. 내 목숨보다도." 김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상희와 입을 맞췄던 밤의 일이 떠올랐다. 김상희의 체온이 떠올랐다. 김상희의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김상희만 볼 수 있다면. 김상희만 무사하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었다. 크리스가 물었다. "진심이야?" "......." 한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는 느꼈다. 한진수는 지금 정말 진심이라고.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김상희 때문에 제국을 등진 사람이니까. 너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겨우 계집 따위때문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다니. "그럼 마지막으로 물을게." "......." 크리스가 말했다. "네가 정말 김상희를 네 목숨보다 사랑한다면... 네 목숨과 상희를 바꿀래?" "그게 무슨 소리지?" "대답해. 시간이 많지 않아." 그래서 대답하고 말았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크리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럼 죽어. 너를 죽이고 상희를 고려로 되돌려 보내줄 테니까." 한진수는 크리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내 알 수 있었다. "김상희!" 크리스가 크리스만의 고유 영역. 그러니까 스페셜 나이트로 치면 스페셜 필드와 비슷한 필드를 풀자 김상희가 보였다. 기절을 한 건지,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너를 죽이고, 김상희를 풀어 줄거야."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말 그대로야. 네 목숨과 상희를 맞바꾸는 거지." 백제에서 김상희를 납치한 것이 맞았다. 그러니까 크리스가 이렇게 김상희를 데려왔겠지.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쇼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기습하려고 했다면, 분명히 기습할 수 있었어.' 이런 전면전보다, 기습이 훨씬 유리하다. 아까 기습당했다면 어쩌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크리스. 네 꿍꿍이가 도대체 뭐냐?' 크리스가 말했다. "반항하지 마. 너를 죽이고 김상희를 놓아줄 테니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김상희를 되찾는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한진수는 긴장했다. 지금. 크리스는 눈 앞에 있다. 그러나 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능력이 높은 사람은, 능력이 낮은 사람의 능력을 알아 본다. 크리스의 기척.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만의 고유영역을 펼쳤던 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지금 갓 3차 각성을 끝낸 모양이네." 놀랍게도 크리스는 한진수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나는 분명히 말했어. 네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는다면, 김상희를 놓아줄 거야." 한진수는 갈등했다. 지금 크리스와 싸워서 김상희를 되찾아 올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해봤다.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다. 아까 그 이상한 필드를 펼치고 도망치면 김상희를 영영 못찾을 수도 있다. 지금 전 세계가 눈에 불을 켜고 백제의 행방. 그리고 김상희의 행방을 찾고 있는데 못 찾고 있지 않은가. 크리스. 그리고 백제는 분명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대로 기회를 날리면...' 그러면 어쩌면 김상희는...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속고 있는 거라 해도 좋다.' 그래도 김상희를 봤다. 김상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와는 달랐다. 0퍼센트의 확률에서, 단 1퍼센트라도 가능성이 생겼다. '나는...' 나는 김상희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프리온 나이트도 소환하지 않았다. '나는 죽어도 좋다.' 이성적인 판단. 합리적인 선택. 그런 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김상희를 보니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나는 상희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반항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정말 멍청하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겨우 계집 때문에 네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크리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진수는 직감했다. 크리스는 자신보다 한 수 위의 상대였다. '김상희는...' 김상희는 겨우 계집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김상희가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였으며, 김상희가 곧 그의 생명이었다. "김상희가 살아야 내가 사는 거다." 그 때, 크리스가 검을 휘둘렀다. 한진수는 반항하지 않았다. 크리스의 검 끝이 한진수의 목에 닿았다. 한진수의 목에서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크, 크하, 크하하핫! 하고 크리스가 웃었다. "이거 진짜 머저리네! 진짜 진짜 멍청한 놈이야! 진짜 어떻게 이런 머리로 세계의 대천재라고 불렸어? 어떻게, 어떻게 그랬어?" 크리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뭔가가 뚝뚝 흘러 내렸다. 예전 김상희가 봤었던 붉은색 눈물이 크리스의 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크리스의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검이 어찌나 날카롭고 예리한지, 한진수의 목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리고 이내. 푹! 검이 살을 헤집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서있던 바닥에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웃음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크하하핫! 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진짜. 진짜 멍청한 놈이네." *** 누군가가 풀썩 쓰러졌다. 검이 심장을 찔렀다. 이 정도면 치료 불가능하다. 성녀의 기적 정도가 있지 않은 한.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다. "크리스. 무슨... 짓이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거든. 나는 결국 모험을 할 수밖에 없어." "무슨 뜻이지?" "비록 힘들겠지만. 비록 이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너와 고려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거야." 크리스는 심장이 관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가슴에서는 피를 쏟고 있지만 눈에서 더이상 피눈물이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다행이야. 네가 적어도 나만큼은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그리고 한진수에게 당부했다. "그러니까 제발 김상희를 지켜. 이번처럼 어이없이 빼앗기지 말고." "......." "너한테 김상희가 생명이라고 했지?" 크리스가 말했다. "김상희가 곧 내 생명이야. 너만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진수는 혼란스러웠다. 크리스가 김상희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아 약간은 경계를 하던 차였다. 그리고 크리스는 백제의 왕자다. 그 것 외에 다른 건 알지 못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난데없이 김상희를 데리고 나타나 김상희를 사랑하냐고 묻더니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 생명. 잘 지켜줘." "크리스. 무슨 상황인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겐 퓨리어스가 있다. 치료해 주겠다."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아니. 하지 마. 그 때가 되면, 나는 너희 앞에 더없이 무서운 적이 되어 나타날 거니까.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아."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해댔다. 한진수가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내 도박이 성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상희를 지켜줄 수 없어. 내 목숨보다, 내 생명보다 상희를 더 사랑하지만... 그래도 나는 상희를 지킬 수 없어. 나는 그렇게 태어났거든." 그리고 피식 웃었다. "이런. 이런. 네가 너무 강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당하고 말았네. 참 안타까운 일이야. 나는 이제 죽겠네." 안타깝다고 말을 하는데, 기뻐 보였다. "상희한테 전해줘. 사랑했다고. 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지 목숨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고. 그 말 정도는... 전해줄 수 있는 거 아냐? 난 은인이라고." 숨이 점점 가빠왔다. 크리스는 느꼈다. 이제 한계다. 손을 뻗어봤다. 하지만 김상희에게는 닿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상희야..." 힘겹게나마 상희의 이름을 불러봤다. 하지만 김상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해준 말. 꼭 기억해. 언젠가 반드시 쓰이게 될 거야."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 세상에 너를 목숨보다 사랑한 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 그거 하나만 기억 해줘. 네 기억 속에 그저 내 이름 세 글자가..." 숨이 차올랐다. 피를 토했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진수는 잠자코 크리스를 지켜봤다. 크리스의 고개가, 그가 만들어낸 피웅덩이에 처박혔다. 그랬다가 마지막 힘을 짜냈다. "한진수. 잘 들어." 발음이 정확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한진수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내가 죽으면 나를... 반드시..." 마력을 끌어 올렸는데도 듣지 못했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 한진수는 크리스를 흔들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축 처진 오른팔은 김상희를 향해 있었다.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던 거냐, 크리스.' 찜찜해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을 해주고 죽었더라면,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들어보니 백제는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제국을 앞장 세우고, 뒤에서 세계를 조종했던 나라다. 제국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적이었다. 도움을 주려면 제대로 줬어야지. 라는 원망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진수는 크리스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김상희에게... 고백하고 싶었겠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루에도 수 백, 수 천번씩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사랑하고 있다고. 좋아 한다고. 계속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내일부터, 그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아마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에 계속해서 말했을 거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그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을 거다. 크리스도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을 다 하지 못했을 거야.' 김상희에게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그 시간. 그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소중해서, 마지막 고백과 당부를 했겠지. 시간이 없어 마지막 조언은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심정적으로는 이해는 됐다. 김훈상이 말했다. "잘... 묻어줘라." 어쨌거나 김상희가 되돌아 왔다. 크리스 덕분이다.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김상희를, 크리스가 되돌려 보내줬다. 당연히 예우를 취해줘야 했다. 예를 다해 장례를 치러주기로 했다. "국장으로 치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이트 하나가 보고를 올렸다. "폐하." "어쩐 일이냐?" "크리스의 시체가..."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크리스의 시체. 국장을 치러주기 위해 깨끗이 닦아 관에 안치된 상태였다. 김훈상이 말했다. "말 해봐라." ============================ 작품 후기 ============================ 정말... 크리스는 죽었을까요? 0158 / 0192 ---------------------------------------------- 프리온 나이트의 비밀 *** "크리스가..." 김상희는 홀로 중얼거렸다. 크리스를 남자로서 좋아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언제나 크리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수상쩍었었지만 크리스는 늘 한결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크리스는 계속 그렇게 행동했었다. "크리스가 죽었다고...?" 모르겠다. 크리스가 왜 죽었는지. 왜 굳이 한진수를 찾아와 죽었는지. "나를 고려에 데려다 주고...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알 수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뭔데...' 그녀는 전생에서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인기의 절정으로, 싸이코에게 죽지 않았던가. 크리스의 경우는 그와 완전히 반대의 경우인 것 같았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은 거야.' 분명히 그랬다. 그것 말고는 크리스가 죽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왜 자신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는 팔을 잘랐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보기 위해서. 얼굴 한 번 보기 위해서 팔을 바쳤다고 했다. 크리스는 그렇게까지 진심이었다. '내가 도대체 뭔데.' 크리스에게 고마웠었다. 고마운 만큼 또 미안했다. 내가 도대체 뭔데.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렇게 묻고 싶었다. '내가 잘난 게 뭐가 있다고.' 따지고보면 잘난 거.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가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이성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예 설명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재력이면 재력. 외모면 외모. 권력이면 권력. 크리스는,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최근 성녀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고 힘을 가지게 되기는 했지만, 크리스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전이었었다. '너는...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눈물이 차올랐다. 크리스의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 이제는 볼 수 없었다. '왜 나 때문에... 네가 죽는 거냐고.' 내가 뭔데. 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길래. 왜 나 때문에 그 소중한 목숨을 버리고 마는 거냐고. '미안해.' 결국 울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 원래 보물을 지킬 수 없는 자가 보물을 가지면, 위험해진다. 보물을 제대로 가지고 싶다면, 그 보물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빼앗기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계집이야.' 크리스가 죽은 것이, 오로지 자기 때문처럼 느껴졌다. 내가 힘이 없어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매일 보호만 받다가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버리고 마는 것 같아서 슬펐다. '왜 겨우 이런 계집애때문에...' 그 때.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희야." 그리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꽉 안았다. 혹여라도 부서질까, 조심스레 꽉 안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과 동시에 김상희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마음고생하지 마." 따지고 보면 크리스가 죽은 것은, 김상희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김상희가 구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팔을 자르고 나를 보러 와달라고 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크리스는 피눈물을 흘렸어." 표현상의 피눈물이 아니라, 실제로 붉은 눈물이 흘러 나왔었다. "하지만... 너를 내게 넘겨줬을 때. 그 땐 웃었어." 가슴에선 피를 뿜었지만 눈의 피는 멈췄다. 오히려 웃고 있었었다. "크리스가... 많이 기뻐했어. 너를 내게 돌려줘서." "......."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너 때문이 아니야. 그리고... 네가 슬퍼하면 내가 너무 아파." 한진수의 위로는, 김상희에게 큰 힘이 됐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크리스의 시체가 갑자기 사라졌단다. 나이트들이 분명 지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졌다. 황제가 사라졌을 때와 똑같았다. 김상희가 말했다. "그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곳에는 황제가 있었어요." 그 때를 생각하면 무섭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몇 시인지도 모르고. 희미한 빛 밖에 없던 어두운 곳. 감옥. 그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손 발이 덜덜 떨려온다.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냈다. 뭐라도. 뭐 하나라도 단서를 주기 위해서. "황제가 말했어요. 그 분이라고. 황제 자기는 그 분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그랬군." 김훈상은 김상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눈치챘다. 아마.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섭겠지. 김훈상이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억지로 떠올릴 필요 없다." "...하지만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네 존재 자체가 내게 힘이 된다." 김훈상은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김상희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김상희는 자신의 옆에 있어야만 했다. 적어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는 김상희의 하나뿐인 아버지였고, 김상희는 김훈상의 딸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소녀가 했던 말이요?" 네 행동 하나하나. 네 몸짓 하나하나. 네 표정 하나하나. 나는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라고 말을 하려다가 아무래도 때가 좋지 않아 한 번 참았다. 대신 본론을 바로 꺼내들었다. "특별서고에 있던 내용. 네가 언젠가 말을 했었지." "아..." 김상희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고대 시대에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이름은 태양제국 잉카였다. "그 잉카는 가짜였지." 그 잉카라는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고대의 기록이 정말이라면. "진짜 잉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지. 그리고 그 잉카는 성녀의 힘을 얻었다고 했었다. 성녀의 힘을 빌어 세계를 제패했지. 성녀의 힘 중 하나가... 골렘을 각성시키는 것이기도 했고." 비록 전설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책에 의존한 추리이기는 했지만 퍼즐은 모두 맞춰졌다. "그리고 백제에는 최종형태의 골렘들이 많이 있었다." 김상희와 김환석이 만났었던 백제의 모든 인간들. 그 인간들이 사실은 골렘일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크리스가 그걸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말을 계속 걸었다는 것 같더군." "......." 다시 크리스가 떠올랐다. 시체가 사라져버린 크리스. 워낙에 비밀이 많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아이니까.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어. 김상희는 애써 그렇게 생각해봤다.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다시 떠올려봤다. 'Lapuntel Essantia Kerannis Frential' 크리스의 유언이라고 생각하니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백제가 곧 태양제국 잉카였다고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마지막 퍼즐이 하나 남았다. "그리고 태양제국 잉카의 초대황제는 율다였었지." "하지만 아빠. 그 것은 그저 전설일 수도 있어요. 고대기록이라는 건..." 뜬구름 잡는 소리가 많으니까. "골렘 피라미드에 있었던 내용도 사실로 확인이 됐지. 그리고 크리스는 우리가 모르던 사실들 조차도 많이 알고 있었다. 네 심장이 멈췄을 때. 그 때도 크리스 혼자만 당황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 모든 기록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황제위의 또다른 황제? 그런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러나지 않으려면 정말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세상의 정보력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백제가 곧 잉카다. 그리고 잉카의 황제는..." 김상희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율다의 후손일 확률이 굉장히 높겠지." 고려왕가는 특별한 피를 가지고 있다. 마력의 절대량과 순도가 일반인들보다 훨씬 높다. 그렇다는 말은 율다에게도 굉장히 특별한 능력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대기록에 따르면 율다에게는, 계집을 흡수하여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했었다. "다시 말해. 고대부터 존재하던 초유의 국가라는 뜻이다." 여지껏 세상 전부를 속여왔던, 그런 초강대국 말이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김상희." "네. 아빠. 소녀가 여기 있어요." 근데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요. 안는 건 좋은데 좀 살살 안으면 안 되겠니, 이 개차반아? 말하고 싶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숨 막혔다. "너는 내 딸이다." 알아. 아니까 좀 놔줘. 숨 막혀! 당신 딸 죽는다고! 아빠 품에서 질식사한 딸! 너무 황당하지 않냐고! "나는 내 딸을 지키겠다." 비록 딸을 노리는 상대가 여지껏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초강국이라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 없었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난 당신이 제일 무서워. 난 지금 숨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수, 숨 막혀요!" 네 아버지를 믿어라. 내가 반드시 너를 지키겠다, 라고 말을 하려던 김훈상은 황급히 김상희를 놔줬다. 그런 멋있는 말 못했다. 김훈상은 드물게 당황했다. "미, 미안. 수, 숨 막혔냐?" 약 1시간이 흘렀다. 한진수는 굉장히 즐거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진수가 반색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폐하?" "그렇다." 한진수가 재차 확인했다. "정말이십니까?" "아. 그렇다니까?" 김훈상이 짜증을 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감사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감사합니다, 아버님!" 김훈상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저 아버님이란 소리.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또 따지고보면 아버님이 맞기는 맞지 않은가. 맞는 말 하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짜증이 마구 치밀어 올랐다. "제가 지켜보이겠습니다." "못 지키면 네가 죽는 거다." 한진수는 지금 신라의 왕이다. 신라의 왕이지만, 김상희를 24시간 밀착 호위하게 됐다. 사실 이건 왕권 모독이다. 겨우 계집을 지키기 위해 왕이 움직이다니. 하지만 그런 거 따위. 한진수는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그는 애초에 왕좌 같은 건 필요 없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왕 하고 있는 거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24시간 김상희와 함께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김환석이 찾아왔다. "아버님." "아 글쎄. 아버님 아니라니..." 김훈상은 정신을 차렸다. '아버님'이라는 그 단어가 너무 짜증이 났다보니, 잠깐 이성이 흐려졌었다. 크흠,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냐?" "이번에... 제법 성과가 있었습니다." 김훈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환석의 연구가 성과만 있다면, 지금의 판도를 뒤집을 수도 있다. "그게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한진수도 고개를 갸웃했다. 김환석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기 때문이다. 김훈상의 표정도 조금 진지해졌다. "말해봐라." 김환석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 작품 후기 ============================ 선/추/코는 큰 힘이 됩니다ㅣ ^^ 0159 / 0192 ---------------------------------------------- 지상 최고의 결혼식 *** 한진수는 예전에 고려왕궁에 프리온 나이트 2기를 헌납했었다. 그리고 김환석은 그 때를 시작으로 프리온 나이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었다. 과거, 황제가 의심했던대로다. 김환석은 그 때부터 프리온 나이트를 파헤쳤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연구가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다. 특히나 이번에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상당히 많은 숫자의 프리온 나이트를 구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김환석이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프리온 나이트를 복제하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다. 과거 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건 프리온 나이트 덕분이었으니까. 그 것을 복제한다? 지금 세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거다. "사실 오래 전에 복제본을 완성했었습니다. 그런데..." 김훈상은 잠자코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오랫동안 뜸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핵심이 되는 부품이 바로..." 김환석은 머뭇거렸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 머뭇거리는 지 알 수 없었다. 까짓 거. 그냥 말해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김상희...' 아마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김상희가 싫어할 거다. 아마. 자신에게 실망을 할 수도 있다. 그게 싫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무서웠다. 하나뿐인 -실제로 그에게는 많은 여동생이 있지만 그는 여동생이라 생각하지 않으므로- 여동생이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봐. 그게 무서웠다. 하지만 말은 해야했다. 지금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제국을 수족처럼 부리던, 실체조차 모르고 있던 초강국이다. 그렇다면 이 쪽의 전력을 최대한 키워놓아야 했다. 그게 맞는 거다. "계집을 부품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 김훈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김환석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김상희...가 알게되면...' 딸은 분명 까무러치게 될 거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전력이다.' 김훈상이 말했다. "예전에도 제국이 화전민 마을을 쓸어버리곤 했었지." "예. 그랬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 하나를 통째로 없애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가 파악하고 있는 것만 두 군데가 넘었다. 아마도 고려가 파악하지 못한 것 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계집을 얻기 위해서였나?" "계집 중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마력반응이 있는 계집들이 있습니다." 있기는 있다. 거의 있으나마나해서 사실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리고 계집들은 그 미약한 힘마저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김환석이 말을 이었다. 김상희에게만은 알게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러한 계집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김상희의 능력을 빌어 만든 수페르가가 있다면, 가능했다. 계집들에게 마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계집들을 부품으로 사용하면, 프리온 나이트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많은 계집이 필요하다는 뜻이냐?" "프리온 나이트 1기에 들어가는 계집의 숫자는 총 3명입니다." 김훈상이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애초에 사자관 내 김훈상의 방은 철통같은 보안을 받고 있다. 거기에 3차 각성을 마친 김훈상이 스페셜 필드까지 펼쳤다. 이 안에서 얘기하는 것은, 결코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서라면 악마가 될 수 있다." "...아버님." "나는 기꺼이 악마가 되어주겠다." 김상희가 알게 된다면. '그 땐 나를 미워하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자책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집들에게 마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상희니까. 김상희의 능력을 빌어 만든 약품으로 계집을 각성시켜, 그 계집들을 희생시켜야했다. 그래야 프리온 나이트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프리온 나이트는 김상희를 지키는 훌륭한 병력이 되어줄 거다. 사실상 김훈상과 김환석이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이 세계의 남자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안하는 게 맞다. 계집 3명을 바쳐서 프리온 나이트 1기를 만들 수 있다? 이건 당연히 해야하는 거다. 그게 상식이다. 그러나 김상희를 딸로 가진 김훈상과, 김상희를 동생으로 가진 김환석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너는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예." "그리고 네 아버지이자 왕으로서 명령한다." "말씀하십시오." "프리온 나이트를 대량생산하도록 해라. 이건 왕명이다. 너는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드는 거다. 그런 거다." 김환석은 아버지를 쳐다봤다. 저 말 역시 김상희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 틀림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김상희가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화살을 오로지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서 말이다. "너는 왕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이행하는 것 뿐이다." 김환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 2시간이 지났다. 김상희가 김훈상을 찾아왔다. "아빠." 김상희 입장에서는 오래 참았다. "결혼식은 언제에요?" *** 김상희는 김상희 나름대로 절박한 상태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면 내일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24시간 진수와 함께 붙어 있는 건 좋았다. 그건 정말 좋다. "......." 하지만 진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바로 옆에 3차 각성을 끝마친 김환성이 눈을 부릅뜨고 김상희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무시무시하게 노려 보는데, 그 기세가 너무나 살벌하여 한진수도 김상희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라는 보이지 않는 적까지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굉장히 소중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진수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건 한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김상희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이 여자 내 여자다. 내 여자니까 아무도 넘보지 마라. 이렇게 도장이라도 찍고 싶었다. 이마에 내 여자라고 써붙이고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한진수와 김상희는 협의를 봤다. 빨리 제대로 된 결혼식을 치르기로. 김상희가 말했다. "신라와 혈맹을 맺게 되는 거에요." "......." 신라와의 혈맹 따위. 그 까짓 거. 내가 신경이라도 쓸 줄 아는 거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김훈상은 참았다. 그리고 딸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지금 그냥 한진수랑 결혼이 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정말 혈맹을 원하는 거냐? 하지만 묻지 못했다. 그렇게 물었다가 딸이 정말 '진수랑 결혼하고 싶은 건데요.'라고 말하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아빠 생각은 어때요?" 김훈상에게는 이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아빠 생각은 어떻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는데 아빠가 반대하면 기필코 아빠를 원망하고 말겁니다. 그러니까 가타부타 말하지 말고 얼른 허락부터 해줘요. 안 해주기만 해봐라. 이렇게 들렸다. 결국 김훈상은 허락하고 말았다. 딸이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는데 또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한진수 이 자식이. 감히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 아무 짓도 안 했지만 김훈상은 괜히 한진수를 원망했다. 그리고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 바로 내일. 김상희의 결혼식이 예정됐다. "성녀님께서 결혼 하신대요." 나이트들은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래도 신라 국왕쯤 되면 내가 양보해줄만 하지." "에이 형님. 형님 양보 같은 건 애초에 필요도 없는 거 아닙니?" "네가 몰라서 그래. 성녀님이 저번에 날 보며 웃어줬어. 그건 날 좋아한다는 뜻 아니겠냐?" 배 아파 하는 나이트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이 김상희를 이토록 좋아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지만, 마치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금이야 옥이야 업어 키웠다는 듯. 금쪽같은 내 동생 시집 보내기 싫은 오빠같은 마음으로 그들은 김상희의 결혼을 축하해줬다. "성녀님과 신라국왕이라니. 세계 최고의 결혼식이 되겠어." 차기 황제감으로 거론되고 있는 젊은 대천재 한진수. 그리고 온갖 기적을 일궈내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성녀 김상희. 둘의 결혼이다. 전 세계의 여자들이 김상희를 부러워하고 또 동경했다. "성녀님께서 신라 국왕폐하와 결혼하신다고 하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셔요." 부럽긴 부럽다. 그러나 질투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었다. 애초에 질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여자들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거의 여신과도 같은, 이를테면 거의 신앙과도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격이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상대라면 질투나 시샘을 할텐데, 격이 너무나 많이 차이가 나다보니 질투가 아닌 동경을 하게 됐다. 고려왕궁 내의 시녀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그 분이... 같은 여자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 분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으면서 송수진은 내심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칭찬을 듣는 것도 아닌데 괜히 자랑스러워졌다. '암! 우리 공주님이신데!' 시녀들은 송수진을 쳐다봤다. "송수진 시녀님은 정말 좋겠어요. 어릴 적부터 존귀하신 성녀님을 보필해왔으니." "그럼요. 저는 그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이랍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해요. 갓 태어나셨을 때 영롱한 목소리로 울고 계시던 그 때를요." 물론 그다지 영롱하지는 않았었다. 송수진의 머릿속에서 워낙에 미화되어서 그렇다. 영롱한 목소리로 울고 있던 게 아니라 김훈상을 보며 개차반이라고 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까!" 암. 그렇고 말고. 엄청나게 감격스러웠죠. 송수진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김상희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시녀들에게는 동경이었다. 공주들이 차례로 김상희를 찾았다. 제 2공주 김예원이 가장 먼저 김상희를 찾았다. "결혼... 축하드려요. 언니. 저는 언니께서 행복해보이셔서 정말 좋아요." 김상희를 얕잡아보던 김예원은 이제 없었다. 그녀도 김상희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 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경외할 정도다. "언니와 한진수님을 보면... 너무나 행복해 보여요. 언니를 보면 저도 꼭 언니처럼 살고 싶다. 그런 다짐을 하곤 해요." 물론 그녀도 생각은 한다. 이건 오로지 김상희니까 가능한 거였다. 이 세계에서 여자들의 지위나 위치. 그렇게 좋지 않다.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상식선에서 생각해보면 김상희가 세계 최초다. "예원이도 예원이를 좋아해주고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단순한 한 마디에 김예원은 감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가 그렇게 말을 해줬으니까. "언니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소녀는 정말 힘이 나요. 감사해요." 김예원에게 있어서 김상희의 존재가 어찌나 컸는지, 별 거 아닌 한 마디가 감격으로 다가왔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언니는 저의 빛이셔요." 김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본 읽니...?' 김상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아직도 이런 건 잘 적응이 안 된다. 이 곳의 시녀들과 공주들에게는 당연한 말투지만, 지구식으로 생각해보면 보통 실생활에서 저런 말은 잘 안하니까. 비록 오그라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예원의 진심은 느껴졌다. 고마웠다. "고마워." "언니." 그 때, 누군가 달려왔다. 김상아였다. "언니!" 김상아가 달려와 김상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울먹 거렸다. "언니는 나랑 결혼해야 하는데!" 마치 좋아하는 장난감 혹은 간식거리를 빼앗긴 어린 아이처럼, 김상아는 투정을 부렸다. "언니. 결혼 안 하면 안 돼요?" 김상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언니가 결혼하는 게 싫어?" "한진수 아저씨한테 언니를 빼앗기는 것 같단 말이에요. 언니는 아무도 안 줄건데!" 은신한 상태로 지켜보던 한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칭얼거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볼을 주욱 잡아당겨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참 엄청나게 변했군.' 김상희 때문에 많이 변했다. 여자들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남자를 위해 봉사하는, 혹은 이 세계에서 필요도 없는 폐기물을 보는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봤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이제 하나의 인격체였다. 또한 김상희처럼. 사랑받기에 충분한 그런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김상희를 찾았다. 축하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왔다. 덕분에 나이트들이 또 바빠졌다. 편지에 혹여 독이라도 있을까, 테러라도 있을까 나이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편지들을 검수하고 또 검수했다. 전세계에서 편지가 쇄도했다. 새벽 2시. 김상희는 잠을 이루질 못했다. 설렜다. 내일이면 결혼이다. 정말 길게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납치라든가 전쟁이라든가. 그런 걸 많이도 겪었다. 이제는 조금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진수와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럼과 동시에 또 싱숭생숭해졌다. 김상희가 말했다. "이제... 우리 정말 결혼하네." 푸르스름한 달빛 사이로 한진수가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김상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자라고 얘기해줬다. 보드라운 마력으로 감싸안고 김상희를 다독여줬다. 날이 밝았다. 김훈상이 직접 결혼식을 주도했다. "지금부터 사랑하는 내 딸과." 이를 바드득, 한 번 갈았다. 하지만 할 건 해야했다. "신라 국왕 한진수의 결혼식을 시작하겠다." 결혼식이 시작 됐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 하루 연재를 쉬었네요 ㅠㅠ 많이 기다리셨죠? (안기다렸다면 낭패..ㅠㅠㅠㅠㅠ.) 0160 / 0192 ---------------------------------------------- 지상 최고의 결혼식 *** 송수진은 아침부터 굉장히 분주했다. 이미 드레스는 정해졌다. 하지만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송수진은 다른 드레스들이 더 예뻐 보이는 듯 했다. "공주님. 사실 저 것으로 했어야 할지도 몰라요." "수진. 그 말만 벌써 3번 째야. 이미 정해졌어.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그냥 이걸로 할게." "하지만 공주님은 오늘 세상에서 제일로 아름답고 제일로 예쁘셔야만 해요." 그 말에 김상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송수진의 마음을 대충 이해는 하겠다. 그래서 그냥 하던대로 조련 아닌 조련을 했다. 누가봐도 과장된 태도로 슬픈 척 했다. "수진. 드레스를 갈아입지 않으면 나는 예쁘지 않은 거야? 수진의 눈에 나는 치장을 해야만 아름다운 그런 사람이었어?" 누가봐도 장난이었지만 수진은 기겁했다. "아, 아니. 공주님! 제 말은 그게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냥 이걸로 할게." ...로 시작했던 결혼식 첫 날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김훈상의 주례사가 이어졌다. "한진수 네 놈은 사랑스런 내 딸을 데려가는 도둑놈이니만큼..."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아니. 깽판치고 싶었다. 그딴 게 지금 주례사냐고. '하긴. 애초에 주례사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이렇게 딸 위주의 주례사. 아마 전 세계 고금을 통틀어서도 없을 거다. 주례사라함은 보통 남자에게 축하메세지를 전하면서 여자에게는 반드시 남자를 잘 낳으라, 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원래는 그런데 이 주례사는 완전히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주례사가 될 거야.' "절대 내 딸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이 아빠야. 그게 지금 타국의 왕에게 할 소리냐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축하사절단이 와 있는 상태잖아. 그런데 그런 정신 나간 주례사를 읊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김상희는 울고 싶었다. 안 그래도 축하 사절단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 개차반씨가 그런 걸 신경쓸 리 없지.' 애초에 제국황제조차도 별로 신경쓰지 않던 김훈상이다. 다른 사람 배려같은 거. 해줄 리 없다. "성녀라는 이름으로 계집들에게 그렇게 큰 찬사를 받고 있다던데... 그것과는 별개로 고려 왕궁 내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군." "그러게나 말이야. 그 대단하다는 신라왕이 저토록 저자세일 수는 없을 텐데." 대부분의 하객들은 한진수가 김상희를 사랑한다는 걸 잘 모른다. 신라와 고려의 정치적 목적으로 인한 혈맹결성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거창한 결혼식을 치른다는 건... 역시 과시하기 위해서겠지?" "그렇지." 틀림 없었다. 그들은 이 장미관이라는 곳을 처음 와본다. 장미관이라는 곳을 처음 봤을 때 사절단들은 문화충격을 맛보아야만 했다. 별다른 마력주입 없이 저절로 동작되는 최첨단 시스템이 갖춰진 장미관. 도대체 이러한 건물을 지으려면 얼마의 예산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 건물이 공주들을 위한 건물이라는군." "엄청난 외교적 수단이 되겠어." 심지어 이 건물이 여자를 위한 건물이란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고려는 한낱 계집들을 위해서도 이 정도 투자를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알아서 기어라. 이런 뜻이 된다. 물론 김훈상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딸이 너무 예뻐서, 딸한테 좋은 선물 주고 싶어서 이 건물 만들었다. 하지만 사절단에게는 조금 달랐다. 애초에 결혼식을 이렇게 성대하게 여는 이유는 바로 주변국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사절단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시대 최강자인 고려와 신라의 결속이라." "그걸 위해서 이렇게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거지." "차기 황제는 누가 될까?"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래도 한진수가 유력했다. 일단 고려는 대규모 화력전에 있어서 신라보다 뒤떨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사절단들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와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마치... 신라 국왕이 고려왕을 황제처럼 대접하는 것 같은데." 그건 왕대 왕이라서가 아니라, 장인어른 대 사위라서 그렇다. 사랑해마지 않는 딸을 주시는 보배로운 아버님이시니, 저자세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물론 그들에게만 그렇다. 사정 모르는 하객들은 이 결혼식이 하나의 정치적 쇼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라왕이... 고려왕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게다가 주례사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랑하는 딸이니, 앞으로 잘하라느니, 내 딸 눈에서 피눈물 나면 죽여버리겠다느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 노림수가 있다는 소리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건, 고려 왕이 일부러 보여주고 있는 거지. 고려가 신라보다 상위의 국가라고. 그렇게 공표하고 있는 거야." 누가 봐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신라는 더욱 더 강성해질텐데. 무엇보다 한진수는 젊잖아. 10년만 더 흐르면 어떻게 될 지 몰라." "그렇지." 누군가 목소리를 낮췄다. "10년 후에는... 한진수가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어. 아니. 지금 상태로라면... 분명히 그럴 거야." 같은 시각. 한진수는 생각했다. '왕 같은 거. 때려치고 싶다.' 빨리 때려치우고 어여쁜 상희랑 둥가둥가 놀러다니고 싶다. '우리 상희 맛있는 거 많이 먹여줘야 하는데.' 맛있는 거 같이 먹으러 다니고, '포름지방 빙하산맥도 참 멋있는 곳이야.' 경치 좋은 곳도 구경 다니고, '로플리아 지방의 꽃 축제가 언제더라?' 꽃 좋아하는 상희한테 꽃도 보여주고 꽃도 사주고. '하여튼 빨리 때려치우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김상희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면 이렇게 귀찮은 왕위 같은 건 하루빨리 던져버려야 했다. '칼리번은 아주 유능하니까.'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한진수보다 유능할 수는 없다. 다른 건 모두 둘째치고 지금 한진수는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를 32기나 소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라를 맡겨도 아주아주 잘 할 거야.' 애초에 그런 약속 아니었던가. '원래 왕위는 넘겨주기로 약속했었으니까!' 칼리번도 아주 기뻐할 거야. 그렇게 합리화하고 또 합리화했다. '왕은 좋은 거니까.' 시켜주면 좋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작 칼리번은 걱정했다. '저 왕 폐하님이 왕 나 시킬 거 같은데.' 좀 불안해졌다. 이제 그도 왕위에는 관심 없다. 고려국왕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 그는 2인자가 좋다. 1인자일 때보다 훨씬 더 좋다. 그래서 왕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핑계를 대야 저 왕님을 계속 폐하 시키지?' 그리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황제폐하 시켜야 내가 더 떵떵거릴 수 있을 텐데?'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절대 왕위를 물려받지 않겠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로 만들겠어.' 김훈상도 생각했다. '이 놈을 황제 시키면 말년이 편하겠어.' 김훈상은 이미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있다. 이 위에 황제 한 명 더 만들어도 상관 없다. 그 황제가 사위이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좋다. 일단 부려먹기 편하다. 부려먹기 좋은 황제. 얼마나 좋단 말인가. '그리고 사랑스런 내 딸에 어울리려면...' 그래도 황제쯤은 되어야 구색이라도 갖출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누구나가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아버지인 김훈상에게는 그랬다. 황제쯤 되는 놈 아니면, 아무에게도 허락 못한다. '황제쯤은 되어야지. 너는 차기 황제로 찜해 놨다.' 축하 사절단의 하객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우리는 어떻게 줄을 서야하지?" 고려와 신라. 지금 둘이 혈맹을 맺고 있다. 둘에게 모두 잘 보여야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행태로 보아서는 고려에 더 잘 보여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또 아무래도 차기 황제는 한진수가 될 것 같다. 모두가 생각했다. '분명 황제가 되기 위한 암투가 벌어질 거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피바람이 불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지금은 이렇게 화기애애하지만, 국제관계에서. 또 정치판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도,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언젠가는 분명 거대한 암투가 벌어질 거다.' 그 때를 대비해서 줄을 잘 서야 했다. *** 축하사절단으로 온 티오피왕국의 강한빈 왕자는 감탄했다. "이 엄청난 건물의 소유주가... 김상희 공주라고...?" "그렇다고 합니다." 강한빈 왕자는 납득했다. "신라 국왕에게 시집 가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겠지. 지참금 명목으로 이 정도면... 훌륭하군."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인물이니까요." "그래도 이런 건물을 가진 계집이라니.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부자 계집이 탄생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 비록 명목상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니다. 절대 명목상 아니다. 아니. 김상희는 애초에 이 건물이 자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이 건물을 선물 받았다. 물론 세금도 안 냈다. 왕이 그냥 줬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조금 들립니다." "이상한 소문?" "고려가 신라를 후원하기 위하여..." 솔직히 말해서 이상하지만은 않다. 고려가 신라를 후원하기 위해, 자금을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 아닌 첩보가 요즘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물론 그런 거 아니다. 그냥 김상희의 용돈이다. 미라클과 수페르가의 순수익 절반이 지금 김상희의 명의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도 물론 김상희는 모른다. 김상희는 모르고 있지만 지금 김상희는 순수 현금만 2조원 이상을 가진 엄청난 자산가가 됐다. 이 정도 규모를 가진 현금자산이 김상희에게 쏠리게 되면, 당연히 주변국가들도 알 수밖에 없다. 1000억, 2000억도 아니고 조 단위에 해당하는 돈이니까. "과연. 김상희를 통해서 신라를 후원하겠다. 이 소리인가?" "고려는 신라를 제국으로 추대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고려는 대규모 화력전에 있어서는 제국에 불리함이 많다. 프리온 나이트를 지속적으로 보유. 어쩌면 생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신라가 제국이 되는 것이 나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차기 황제를 한진수라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한다." 강한빈 왕자는 국제정세를 읽는 자신의 눈에 칭찬을 해줬다. 한진수가 들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랬다. 한진수가 말했다. "빨리 안정화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왕 같은 거 빨리 때려 치우고 숨어서 살텐데. "황제같은 건 욕심나지 않아." "진수야..." "나한텐 너만 있으면 되니까." 밤이 깊어갔다. 한진수는 정말 행복했다. 같은 침대에. 김상희가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기분이 들 수 있는지. 그도 몰랐다. 김상희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고, 멍청이같은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김상희가 한진수의 품에 안겼다. 한진수도 김상희를 꽉 안아줬다. "상희야." 한진수가 몸을 살짝 일으켰다. 엎드린 상태로 김상희를 내려다봤다. 김상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김상희. 대답해." 김상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응."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진수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한진수도 행복했지만, 김상희도 그에 못지않게 행복했다. 그녀에게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 제국의 황제마저도 한 순간에 사라졌다. 크리스가 없었다면 자신 역시 여기 없었을 수도 있다. 내일이 없어서, 오늘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 했다. 한진수와의 시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내가 너 사랑해." "......." 한진수가 김상희의 볼에 손을 댔다. 그리고 조금 힘을 줬다.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내가 너 사랑한다고." 김상희의 대답은 듣지 않았다. 한진수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김상희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혹여나 다칠까, 아주 조심스레 김상희를 대해왔었다면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조금 거칠었다. 두 사람의 시간이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진수가 말했다. "오늘은..." 김상희는 기다렸다. 그래. 그거야. 기다리고 있다고. 속으로나마 응원해줬다. 한진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널 안을게." ============================ 작품 후기 ============================ 하객들: 무시무시한 권력 암투가 벌어질 거야. 황제가 되기 위해서...! 하지만 실상은 김훈상: 저 놈을 황제시켜야 내 말년이 편하겠어 칼리번: 우리 국왕님 황제 시켜야 내가 편하겠어 부려먹자 한진수: 아씨 황제 같은 거 하면 안 돼. 우리 상희랑 못 논다고. 칼리번 주자. 이렇다고 합니다. 0161 / 0192 ---------------------------------------------- 그 놈의 거시기를...! *** "오늘은 널 안을게." 그래. 진수야. 어서 날 안아. 김상희는 그렇게 말할 뻔 했다. 기다리기도 참 오래 기다렸다. 이번 삶 기준으로 약 16년 동안 오로지 진수 한 명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16년이나 참은 셈이다.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도 욕구불만이다. 몸은 16살이되 정신은 16살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숫자로만 따지자면, 그녀는 40년을 넘게 산 아줌마(?)다. 진수의 손길은 굉장히 어설펐다. 세계에서 칭송하는 대천재라지만 여자 옷을 벗기는 것까지 천재는 아닌 듯 했다. 김상희는 티가 나지 않게, 조금씩 몸을 움직여서 진수가 옷을 벗기기 쉽도록 리드 아닌 리드를 해줬다. 물론 한진수는 그런 걸 전혀 몰랐다. 한진수가 감탄했다. "김상희 너... 너무 예쁘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와 동시에 또 귀엽기까지 했다. 김상희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다면 그 주머니에 넣어서 데리고 다니고 싶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뽀뽀 한 번, 뽀뽀 두 번, 뽀뽀 세번.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김상희의 길다란 머리카락이 침대에 물결처럼 흩어졌다. 한진수가 그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한진수의 손가락이 김상희의 귀에 살짝 닿았다. 김상희는 오랜만에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그 야릇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흐응,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야시시한 신음소리'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한진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 받았다. 조심스러웠던 손길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왼 손이 김상희의 입술을 살짝 훑고 오른손이 김상희의 뒷목을 스쳐 지나갔다. 김상희가 몸을 움찔 떨었다. "간지러워." 그 모양새가 어찌나 귀여웠는지, 한진수는 장난스레 김상희의 목을 간지럽혔다. "간지럽다니까?" 두 눈에 사랑을 가득 담아, 한진수는 김상희를 쳐다보면서 키득 웃고 말았다. "간지러우라고 하는 거야." 김상희가 간지럽다며 몸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교묘하게 브래지어를 풀기 쉽도록 등이 조금씩 들려진다는 그 사실. 한진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도 세기의 대천재답게, 저번에 한 번 해봤다고 쉽게 풀었다. 한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상희가 예쁘면 예쁠수록, 그의 마음이 조금씩 다급해져갔다. '안고 싶다.' 안고 싶었다. 김상희를 가지고 싶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뜨겁고 강렬한 욕망이 가슴속으로부터 피어올랐다. 숨이 거칠어졌다. '가지고 싶다.' 그리고. '사랑스럽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브래지어를 벗겨내려했다. 김상희가 황급히 말했다. "부, 불!" "응?" "부, 불 꺼줘." 김상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한진수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호흡이 가빠진 것 만큼. 김상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상희 역시 떨리고 설렜다. 그렇지만 부끄럽기는 부끄러웠다. 지구에서 진수와 함께 할 때도, 그 때도 불을 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더 부끄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진수는 김상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김상희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충동. 무슨 충동인지 모르겠다. 깨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력을 움직여 불을 꺼버렸다. 마력이 움직임과 동시에 한진수의 입술도 움직였다. 김상희의 목덜미를 지나 쇄골에 혀를 가져다 댔다. 누군가 이렇게 이렇게하라고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한진수는 착실히 시간을 뜨겁게 만들었다. 김상희의 등을 쓰다듬던 한진수의 오른손이 김상희의 왼쪽 가슴을 덮었다. 그리고 아기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레, 아주 천천히 조금씩 만졌다. 굳은살이 잔뜩 배긴 한진수의 손바닥 끝으로부터 전해져오는 그 야릇하고 짜릿한 감각이, 그녀의 가슴 끝. 유독 봉긋 솟아 오른 그 곳을 관통하여 온 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진수를 십년 넘게 애타게 기다려왔던 김상희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위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버렸고, 김상희를 그만큼 사랑한다고 하지만 김상희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한진수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만큼. 뜨거운 감각이 온몸을 집어 삼킬 듯 밀려들었다. 김상희는 야릇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속 나이 40살이 넘는다지만 오늘만큼은 부끄러웠다. 이 몸으로는 처음 갖는 한진수와의 뜨거운 시간이다. 일부러 참으려고 참는 건 아닌데, 그런 인식조차 가지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참았다. 하지만 오래 그러지는 못했다. 한진수의 혀 끝이 닿았을 때.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야릇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팔목을 약간 세게 붙잡았다. 강제로 눕힌 것처럼. 그렇게 눕혀놓고 김상희의 봉긋 솟은 그 곳. 김상희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통로가 되는 그 곳을 혀로 부드럽게 보듬었다. 한진수는 무언가가 가슴속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심장이 쿵쾅대고, 이 것을 분출하지 않으면 심장은 물론이고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피가 끓어올라 붉은색 증기가 되어 뿜어진 그 것은, "사랑해." 라는 그 한마디였다. "사랑해."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해." 또 말했다. "사랑해." 계속 말하고 싶었다. "사랑해." 아무리 말해도 부족했다. "사랑해." 정말로 그랬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몸이 펑! 하고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온 몸이 간질간질했는데, 그 간질간질함이 이내 끝 모를 행복감이 되어 한진수를 덮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줘서." 한진수의 입술이 그녀의 봉긋한 언덕을 넘어 배꼽에 닿았다. 마치 배꼽에 속삭이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고마워."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이 김상희였다. 왜 그런지는 한진수도 몰랐다. 김상희가 지금처럼 성녀로서의 능력을 갖기 전부터 그랬다. 지금이야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옛날엔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한진수가 고마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김상희가 지금 한진수에게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애초에 제국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한진수 덕분이니까. 한진수가 아니었다면 김상희는 지금쯤 제국의 노예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상희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김상희도 안다. 한진수가 자신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라는 거. 세계의 대천재이자 차기 황제로 거론되고 있는 엄청난 사람이라는 거. 그러나 그런 다른 상황들과는 별개로 한진수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충분히 느껴졌다. 한진수가 말했다. "넌 내게 너무 과분한 여자야."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김상희도 말하고 싶었다. 나도 고마워. 네가 내 옆에 있어줘서 힘이 돼. 항상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다리를 오므렸다. "부, 부끄러워." 한진수가 가장 은밀하고, 가장 드러나지 않은 그 곳에 키스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상희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한진수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김상희는 옛날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똑같았다. 이랬었다. 지금에 와서 이 한진수가 그 한진수인지, 그 한진수가 이 한진수인지. 확인하고 알 방법은 없었다.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눈 앞의 이 한진수를. 자신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남자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밤이 점점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김훈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김훈상의 품에 안긴 강서영이 물었다. "당신... 오늘 조금 이상해요." "그러냐?" 강서영은 조금 서운했다. 자신과의 잠자리에서,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서글펐다. 어쩌면 다른 여자. 자기보다 더 어리고 더 예쁜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도대체 무슨 발칙한 생각을 하는 거야!' 강서영은 속으로나마 화들짝 놀랐다. 지금 왕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계집 따위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김상희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강서영은 역시 이 세계의 여자였다. 겨우 이런 일로 왕에게 서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상희 공주 때문에 그러시어요?" "그 도둑놈 새끼를...!" 김훈상은 중얼거리다가 이내 움찔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강서영은 문득, 김훈상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지만, 침대에서는 조금 귀여울 때도 있는 것 같았다. '귀여운 구석이 있으셔.' 김훈상이 말했다. "내 반드시 그 놈의..." 김훈상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놈의 거시기를...!" 강서영은 저도 모르게 풉,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려의 국왕 입에서 '거시기'란 말이 나왔다. 강서영도 처음 들었다. "거시기를 잘라버리고 말겠다." 그래서 강서영이 현실을 짚어줬다. "그러면 당신은 어여쁜 손자를 볼 수 없어요." "손자 따위." 손자따위보다 차라리 손녀가 더 좋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게 된 김훈상은 적잖이 놀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손자가 손녀보다 좋은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백만 살이 되면은요.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요?' 라고 옹알거리던 어린 시절의 김상희를 떠올리면, '손자보단 역시 손녀다!' 손자보단 손녀였다. 김상희를 닮은 어린 아가가 태어난다면. 그리고 그 아가가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쫓아다니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겠는가!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거다. 상식적으로 손녀가 손자보다 좋을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김훈상도 자기가 정상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그리고 어차피 미쳤다고 인정한 거. 그냥 쿨하게 미치기로 했다. "손자는 필요 없고 손녀나 많이 낳아주면 좋겠군." 인생계획은 이미 다 짜놨다. 능력 출중한데 부려먹기 편한(?) 한진수를 냅다 황제에 앉히고, 마력은 없지만 똑똑한 김형석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김상희가 낳은 손녀들 재롱이나 보면서 살아가면 되겠다는, 그의 입장에서는 아주 행복한 계획이었다. 강서영은 빙그레 웃었다. 오늘따라 왕이 왜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건지. 아무도 믿지 못할,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정말... 손자보다 손녀가 좋으셔요?" 김훈상은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쿨하게 미치기로 작정하지 않았던가. 쿨하게 미쳐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물론이다. 너도 앞으로 딸을 낳도록 해라."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심지어, "명령이다." 명령이란다. 그렇지만 또 괜히 명령이라고 그랬다가 강서영이 못지키게 되면 불이익이 갈테니 나름 신경은 써줬다. 과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못 지켜도 벌을 내리지 않겠다." "당신..." 이 세상에 그 어떤 왕이 계집의 심정을 이렇게 알아준단 말인가. 강서영은 감동하고 말았다. 강서영이 먼저 김훈상의 입술에 키스했다. 김상희의 밤보다, 더욱 뜨겁고 농염한 밤이 깊어갔다. 누군가에게는 뜨겁고 누군가에게는 깊은 그런 밤. 누군가가 말했다. "행복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 때 맛보는 절망이야말로 사람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는 거지." 그가 피식 웃었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Essantia Kerannis Frential. 그리고 말했다. "가라. 네 의무를 이행해라." ============================ 작품 후기 ============================ 한진수 졸지에 고자될 뻔 0162 / 0192 ---------------------------------------------- 다시 나타난 그 사람 *** 뜨거운 시간 그 후. 김상희는 그 뜨거운 시간보다도 그 시간 이후의 달콤한 시간이 더 좋았다. 이렇게 서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옆으로 누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은데,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이 기괴한 시간. 기괴하지만 정말로 달콤해서 온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시간. 김상희가 결국 웃고 말았다. "뭐야.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어쩜 너는 그렇게 옛날과 똑같은 거야. 김상희는 자신의 등을 감싸안고 있는 한진수의 억센, 그렇지만 부드러운 팔을 느꼈다. 한진수의 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눈에서 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아." 또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의 눈에서도, 그 비슷하게 달콤한 것이 흘러내리고 있을 거라고. 한진수가 입술을 내밀었다. "뽀뽀." 쪽, 가벼운 소리가 났다. 한진수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뽀뽀." 쪽, 가벼운 소리가 났다. "뽀뽀." 쪽, 소리가 났다. "뽀뽀." 이제 김상희가 오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가 먼저 고개를 움직여 김상희와 입술을 맞췄다. 가벼운 뽀뽀를 몇 번 하고 보니, 그 뽀뽀가 점점 깊어지고 점점 달콤해지고 점점 뜨거워졌다. 한진수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다시금 아래로. 또 아래로. 마치 온 몸 구석구석을 탐험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녀의 몸을 탐했다. 김상희는 기겁했다. '또... 또해?' 예전의 한진수와는 정말로 많이 달라졌다. '무슨 에너자이저야?' 일단 기본 능력자체가 엄청나다. 지구식으로 치자면 한진수는 젊은 삼성회장 이건희. 아니, 젊은 빌게이츠쯤 되니까. 그것도 군대를 거느린. 물론 그것도 마땅한 비유는 되지 않는다. 더 비슷하게 표현하려면, 빌게이츠이 재력과 미국의 무력과 북한 수령의 권력을 동시에 가진, 그런 남자다. 이러한 능력을 갖게 해준 배경에는, 여러요소가 있겠지만 일단 한진수가 대천재라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그 대천재가 되기 위해선 마력이 뛰어나야 하며 신체능력이 월등해야 한다. 여기서의 신체 능력이 월등하다함은, '이러다 나 쓰러지겠어!' 그렇다는 뜻이다. 도통 지치지를 않는다. 김상희는 물론 혼자서 여러 운동을 해왔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모도 열심히 가꿨고 남들에게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케겔운동(*괄약근에 반복적으로 힘을 주는 운동.)도 열심히 했다. 솔직한 말로,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서 운동을 그렇게 했다고 해도 기본적인 신체스펙에서 남자를 따라갈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오선생님도 아까 왔다고..!' 이걸 참 대단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미련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엄청나다고 해야할 지. 김상희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절정을 느꼈다. 아직도 몸에 그 여운이 남아있다. '다리도 후들후들 거리고.' 그런 상태이다보니 아무래도 더이상은 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진수야." 예전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예전에는 답답해서 먼저 덮치지 않았던가. "응?" "오늘은... 그만하면 안 될까?" 말하고 싶었다. '벌써 8번씩이나 했잖아! 무슨 변강쇠냐고!' 순간, 한진수는 세상을 다 잃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상희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표정을 하나도 못 속이는지 모르겠다. 정말 세계가 멸망하기라도 한듯한 표정이다. 한진수가 재빠르게 표정관리를 하기는 했지만 눈치 백단인 김상희다. '이럴 때 보면 진짜 귀엽다니까.' 세계가 말하는 대천재. 차기 황제. 그런 건 별로 상관없는 것 같았다. 지금은 정말 귀여웠다. 시무룩해진 모습. 그리고 그 시무룩함을 티내지 않으려는 게 전부 다 보여서 재미있었다. 물론 한진수 입장에서는 아니다. 김상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한진수는 절망했다. 이건 단순히 시무룩함의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세계를 다 잃어버린 것 같은 그런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겨우 8번밖에 안 했는데...' 하지만 말했다. 한진수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보다 김상희가 훨씬 중요하고 소중했으니까. "미안해. 아팠어?" 한진수가 시무룩해진 것을 안 -절망이지만, 김상희는 시무룩해졌다고 느끼고 있다- 김상희가 한진수 조련에 들어갔다. 예전에는 살아남기 위한 조련이었다면 이제는 사뭇 다른 느낌의 조련이 됐다. 일부러 한 것도 아닌데, 코맹맹이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 골반도 막막 이렇게 아프구." 말투가 좀 어려졌다. 이런 말투를 쓴다는 것 자체가 창피하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자신의 말투가 그렇게 변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다리가 막 후들후들 거리구..." 그리고 결정타 한 방. "오빠가 너무너무 대단해서..." 세계를 잃었던 한진수는 다시 세계, 아니 우주를 얻었다. 우주만큼 무한한 자신감과 자존감이 우주 높은 줄 모르고 힘차게 날갯짓하며 치솟아 올랐다. "그래서 막 엄청 좋기는 좋은데..." 결정타 두 방. "오빠가 너무 좋은데..." 그 결정타 두 방에 한진수는 녹아 내렸다. 김상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리고 김상희를 꽉 안았다. 사랑스러워 죽겠다.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한진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김상희는 겉으로 보기에 16살이지만 속 나이는 자신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적어도 40살 이상의 요물(?)이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겉으로 보기엔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하는 아가인데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말이다. 김상희는 조금 궁금해졌다. '이제 물어볼 때가 됐는데.' 이쯤 되면 한진수가 꼭 물어보는 것이 있다. 오늘은 물어보나 안 물어보나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좋았어?" 당연하다. 오늘 이 몸 처음으로 오선생님을 접견했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보드라운 마력이 자신의 몸을 보호해줬다는 걸. 통증을 최소화 시켰고 고통이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김상희는 역시 김상희였다. 바로 좋다라고는,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음..." 한진수가 정말 귀여웠다. '아니. 내가 그 정도로 반응을 보였으면 정말 좋아서 그랬던 건데, 그걸 왜 또 굳이 확인하는 거야?' 그냥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좀 자신없어 하는 모양새로 확인했다. 그 한진수나 이 한진수나 똑같았다. 예전의 그 한진수와는 달리 오선생님과의 접견을 단 한번에 성사시켜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설마 긴장하고 있는 거야?' 제국을 상대로 홀로 맞서싸웠던 불세출의 대천재가 자신의 입에서 '아니. 안 좋았어.'라는 말이 나올까봐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풉, 하고 웃고 말았다. 한진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뭐랄까. 비웃은 것 같은 그런 모양새가 아닌가! 남자의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딱 한번만 말해줄 거야. 나도 정말 좋았어." 단순히 육체적인 그 느낌만이 좋았다는 게 아니다. 진수와 함께 호흡하고 진수와 같은 시간을 만들어나갔던 그 시간. 정서적인 교감까지도 함께했던 그 시간자체가 너무나 행복하고 좋았다. 김상희의 '좋았다'라는 그 한 마디에, 상처입은 영혼이던 한진수가 부활했다. 마치 김환성이 '오빠 최고지?'라고 주장할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쭉 폈다. 비로소 자신감을 회복했다. 쪼오오오오옥. 굳이 문자로 표현해보자면 '쪼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과 같은 소리가 났다.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한진수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고 김상희도 웃었다. 그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니라는 건 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은 엄청난 적이 있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이 기분. 간직하고 싶었다. 이 끝 모를 행복감. 한진수는 정말 처음 느껴보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시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좋아 보이네." 순간, 김상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가 갑자기 식어버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훤칠한 키. 눈이 부실듯한 금발. 환한 미소. 익숙한 목소리. "...크리스...?" 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저 미소. 익숙했던 그 미소가 아니었다. 김상희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식은땀이 흐르고 목 뒷덜미가 싸하게 식었다. 크리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한진수가 일어섰다. '큰 일이다.' 뭔가 일이 잘못 되었음은 느꼈다. 저 쪽은 칼을 뽑아들고 걸어오고 있다. '이 곳 경계를 어떻게 뚫은 거지.' 싸움의 기척조차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모든 경비를 소리 소문도 없이 죽였든지. 그도 아니면 몰래 침투했든지. 3차 각성을 끝마친 김환성이 아마 밖에서 24시간 철통경계를 하고 있으니 전자의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배제할 수는 없었다. 김환성도 사람이다. 김환성이 화장실이라도 간 사이에 경비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진입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무기가 없다.' 크리스가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 김상희 넌 여전히 예뻐." 김상희가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리고 느꼈다. 지금 크리스의 눈. 뭔가 이상하다. 마치 뱀의 눈 같았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니지만 가늘게 변한 눈동자처럼 보였다. "방의 열기가 후끈후끈하네." 크리스가 검을 혀로 핥았다. "모두 죽여버리고 싶은 그런 밤이야." 한진수의 몸에도 닭살이 돋았다. 3차 각성을 마친 이후.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김훈상을 마주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기와 패널이... 너무 멀다.' 온 몸의 본능이 경고해왔다. 움직이면 죽는다고. 그가 죽는 게 아니었다. 김상희가 죽을 거다. 그래서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저 크리스는 예전의 그 크리스가 아니다. 어쩌면 껍데기만 같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높았다. 김상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스... 크리스 너 맞아?"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가 크리스지. 너와 같은 클래스에 있었고." 한진수에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순간, 김상희의 목은 땅에 굴러 떨어질 테니까." 그리고 말을 이었다. "어떤 등신같은 새끼가 한낱 계집에게 빠져서 사랑타령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지켜보기만 했었거든." 혼자서 낄낄대고 웃었다. "정말 크리스 이 놈은 등신이었지. 이 놈이 한진수 네 놈에게 마지막에 하려던 말이 뭔지 알아?" "......." "바로 시체를 불태우라는 거였어.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어. 뭐... 못했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안한 것에 더 가까웠지. 그 이유가 뭔지 알아?" 크리스를 일컬어 크리스라고 말하는 그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라도, 이렇게라도 단 한번 김상희를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욕심 때문에 그 말을 아끼고 아꼈던 거지." 배를 잡고 웃었다. "얼마나 등신이야?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거. 뻔히 알면서도 그 욕심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말을 못했어. 정말 병신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병신이야. 사랑인지 뭔지에 빠지면 전부 뇌가 멈추기라도 하는 건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는 건가?" 김상희는 저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안의 또 다른 크리스가 지금 널 보며 울고 있을 거야. 너를 한 번 더 봐서 좋지만, 이런 상황이 오게 된 것에 대하여 끔찍한 자책을 하고 있겠지. 아. 나는 이런 상황이 왜 이렇게 즐거운 지 모르겠네." 한진수가 말했다. "네 놈은... 크리스가 아니구나." 시간을 끌어야 했다. 어떻게든 무기를 손에 쥐어야 했다. 그는 느꼈다. 맨 몸으로는 승산이 없다. 저 크리스. 분명 뭔가 있다. 기세가 잡히질 않는다. 최소한 동격이라는 소리다. 무기 없이는 이길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크리스가 말했다. "자. 한진수. 넌 어떻게 할 거지? 너는 김상희를 지켜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상관이 없어. 김상희를 보호하면서 나와 과연 싸울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김상희가 죽거나 크게 다친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야." "......." 크리스는 즐거워했다. "예전에 이 등신이 저 계집을 한 번 보겠다고 왼 팔을 잘랐었다. 너도 네 왼팔을 내놓는다면 오늘은 순순히 돌아가도록 하지. 자. 선택은 네 몫이다." 그리고 말했다. "아참. 지원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크리스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 나왔다. ============================ 작품 후기 ============================ 진수야 네가 보고 있는 그 애기가 애기가 맞을까? 0163 / 0192 ---------------------------------------------- 다시 나타난 그 사람 *** 크리스가 말했다. "내가 모두 죽여버렸거든." 한진수와 김상희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한진수는 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스페셜 나이트. 아니 더블 스페셜 나이트들이 포진해 있다. 그리고 이 곳은 장미관 심층부다. 김환석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최첨단 설비가 적의 침입을 막는다. 그런데 아무런 소란도 없이 모두를 죽였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김훈상도 별 거 아니더군." 김상희가 크리스를 쳐다봤다. 순간, 심장이 쿵!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개차반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아닌가. 여지껏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지 않았던가. 보이스피싱에 당하는 사람들이 바보라서 당하는 게 아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소식 때문에 -이를테면 자녀의 납치라든가- 잠시 이성을 잃어서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 거짓말 하지 마." 개차반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잖아. 개차반은 세계가 인정한 대천재라고. 그럴 리 없잖아...! 김상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럴 리 없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저 말이 사실일까봐 두려웠다.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진수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까 크리스가 요구했었던 바를 받아들였다. "내 왼팔을 주겠다." 그리고 서슴없이 왼 팔을 잘랐다. 한진수의 왼쪽 어깨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시뻘건 피가 마구 뿜어져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김상희에게는 단 한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한진수는 김상희를 보호했다. 김상희에게 피가 튀는 것이 싫었다. 상희가 무서워할 것이 뻔했으니까. 한진수가 피식 웃었다. "있지. 나를 흔들 수 있을 테니." 그와 동시에 한진수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크리스의 뒤를 점했다. 뒤를 점한 뒤, 그대로 망설임 없이 크리스의 목을 꺾어 버렸다. 두두둑! 기괴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의 목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크리스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크리스가 아닌 이 크리스.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었다. 거기다가 이상한 말로 자신을 흔들려고 했다. 상황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크리스가 그러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한진수 자신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 크리스가 김상희 때문에 본연의 힘을 제대로 끌어쓰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희를 해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해할 수 있었을 거다.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저 크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크리스보고 크리스라고 했고, 그 크리스를 일컬어 병신이라고 말했지.' 그렇다는 말은 곧 자아가 두 개정도 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두 개의 인격을 가진 크리스. 그 것이 지금으로써는 가장 합당한 결론이다.' 그리고 이렇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목이 기괴하게 뒤틀린 크리스가 땅바닥에 눕혀진 상태로 말했다. 실실 웃었다. "너도 느끼고 있다시피 오늘은 그냥 경고야." 김상희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목이 반대로 뒤틀어진 채, 바닥에 누워 올려다보는 저 크리스. 끔찍했다. 크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팔로 목을 만지는가 싶더니, 우둑! 소리와 함께 목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진수. 넌 역시 제법 똑똑해. 심지도 굳고. 흔들릴 법한 상황인데 흔들리지 않네. 상황판단도 정확하고." "네 놈이... 여길 찾아온 목적이 뭐냐?" 크리스가 실실 웃었다. "주군께서 말씀하셨거든. 사람이 행복할 때, 그 때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절망을 맛본다고." "......." 한진수는 어렵지 않게 그 '주군'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백제의 왕일 것이다. 크리스가 김상희를 쳐다봤다. "이제 곧 나이트들과 김환성이 닥치겠지. 하지만 기억해. 아까 그 느꼈던 충격과 공포." 김훈상을 비롯한 김씨형제들. 순간적으로나마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 김상희도 굉장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한진수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빠르게 움직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김상희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김상희가 멍청해서가 아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찾아와 자기 가족을 모두 죽였다는데. 충격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기억하도록 해." 한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너희는 앞으로도 공포에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할 거야. 그 분께서 지켜보고 계시거든. 그렇게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두려워하며 살도록 해. 그게 그 분께서 원하시는 거야." 그리고 나이트들과 김환성이 들이닥쳤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럼. 안녕. 조만간 또 찾아올게." 김상희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한진수가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크리스의 숨결이 김상희의 귓가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 숨결이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한진수를 죽일거야." *** 콰과광! 폭발음이 일었다. "똥개!!!" 김환성이다. 배리어로 겹겹이 보호받고 있는 이 곳. 미사일도 방어한다는 장미관의 내벽을 뚫고서 김환성이 들이닥쳤다. 지금 김환성이 부숴버린 벽. 복구하려면 아마 7천만원 정도 들 거다. "똥개. 너 괜찮아?" 그러면서 배를 부여잡았다. "아씨. 자꾸 똥이 나오고 지랄이야!" 일단 김상희의 안전은 확인했다. 그래서 김환성은 다시 급하게 뛰어갔다. 콰과광! 소리와 함께 멀쩡한 벽 하나에 또 구멍이 뚫렸다. 콰과광! 콰과광! 콰과광! 화장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그 길이 새로이 열렸다. 저 멀리서, 우렁찬 탄식이 터져나왔다. "아씨! 바지에 쌌잖아!!!" 김환성은 덜컥 짜증을 냈다. 시녀들은 공포에 떨었다. "네가 휴지를 가져다 드려." "제, 제가요?" "어, 언니께서 가져다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왕자가 짜증내면 시녀로서는 답 없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왕자 앞에서 시녀의 목숨이란 파리 목숨과 비슷하지 않은가. 시녀들이 공포에 질려있든 말든 김환성은 인상을 팍팍 썼다. "아씨. 어떤 놈이 이상한 약을 나한테 먹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냥 평소처럼 지냈는데 설사가 마구 나왔다. 아무래도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제조된 약인 것 같았다. 만약 인체에 아주 유해한 독약이라면 마력이 알아서 걸렀을 거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 설사약이었다. 김환성은 투덜거렸다. "똥꼬 다 헐겠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철통같은 경계를 자랑하는 이 장미관의 보안이 뚫렸다. 김환성도 분명히 느꼈다. 그 신혼방에 한진수와 김상희 외.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있던 김상희도 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 도둑놈은 미덥지 못해." 그냥 다 한진수 잘못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김환성도 머리는 있다. 대놓고 한진수를 구박하지는 못했다. 한진수는 지금 적이 아니라 아군이어야만 했다. 김훈상이 장미관을 찾았다. "크리스...가 찾아왔었다라." 김훈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건 맞다. 시체가 살아나서 돌아왔다니. 이건. '정윤한 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역시 백제다. '한진수를 죽이겠다라...' 베일에 가려져 있는 백제왕.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김상희를 데려가려고만 한 것이라면, 몰래 데려갔어도 될 것이었다. '왜... 한진수와 김상희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거지.'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은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상황을 만들고 재미있게 즐기는 듯한. 어쩌면 절대자에 가까운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 딸을 건드려?' 설사 그게 신이라고해도 상관 없었다.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 할애비라도 이건 절대 용서 못한다. 김훈상이 말했다. "한진수." "예." "네 신혼생활은 당분간 포기하도록 한다." 그 말이 무슨 말이고 하니, 김훈상을 비롯한 김씨형제 전부가 장미관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리다. 김상희 한 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훈상이 한진수를 따로 불렀다. "불만 있냐?" "없습니다." 지금은 좋고 나쁘고를 따질 때가 아니다. 김상희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백제왕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단순히 김상희를 노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울러 백제의 본거지를 찾는 것도 중요하겠지." 그리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아주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위험할 수 있으니 당분간 동침은 금지한다." 한진수는 슬퍼졌다. 안 그래도 겨우(?) 8번 밖에 못하지 않았던가. 이제 활활 타오를 신혼인데 그걸 금지당하다니.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잠자리를 갖는데 무기를 소지하고 잠자리를 가질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무기만 소지하고 있었다면 크리스를 훨씬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거다. "방 배치도다." 한진수는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가운데에 우리 방. 동쪽에 아버님의 방. 서쪽에 김환성 왕자님의 방. 남쪽에 김환석 왕자님의 방. 북쪽에 더블 스페셜 나이트의 숙소인가.' 이게 가장 안 쪽의 배치도고, '그리고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할 수 있는 김환석 왕자님방의 바깥에... 김유신 나이트의 방인가.' 그 바깥에 스페셜 나이트들이 포진해있다. '이 정도면... 나라 몇 개를 쓸어버리고도 남을 전력이겠는데.' 한편, 학자들은 제대로 오해했다. "아무래도 고려를 제국으로 격상시키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첨단 설비를 갖춘 장미관을 '주 관'으로 바꾸고 그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며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곳에 프리온 나이트 32기를 주둔시킴으로써... 신라보다 저희가 훨씬 높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외국까지 널리 퍼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프리온 나이트가 신라왕궁이 아닌, 고려왕궁을 지킨다?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결국 신라는 고려의 속국이라는 뜻이다. "폐하께서는 결국 신라를 흡수통일하여 제국으로 발돋움을 하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살아생전... 제국의 학자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겠군요...!" 감동하고 또 감동했다. 이대로 놔두면 국왕폐하 만세! 아니, 황제폐하 만세! 라고 외칠 기세였다. 다만, 알렉스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아니.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그래서 열심히 연구해봤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실 속에 숨겨진 그 엄청난 진실을 말이다. 그리고 결국 알아냈다. '이 배치는... 결국...!' 진실은 어렵지 않았다. '김상희 공주님 지킬라고 그런 거다!' 아무리 봐도 그랬다. 마치 체스의 킹을 보호하듯, 김상희를 중심으로 고려와 신라 최강병력들이 포진해있다. '이건 아무리봐도 그런 거다!'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이걸 밝힐 수는 없었다. 밝혔다가는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학자들로부터 돌을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미친 주장을 했다가는 단숨에 학계에서 매몰되겠지. '아니. 그래도 상희학은 진리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죽기 전 언젠가는 반드시 상희학을 발표하고 말리라는 다짐을 했다. '세 개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병신인 법이니까!' 진실은 언제나 가혹한 법이니까! 라며 알렉스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며칠 뒤. 김상희가 김훈상을 찾았다. 김상희의 말에 김훈상이 펄쩍 뛰었다.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한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안 돼!" 장미관이 통째로 진동했다. 김상희는 이런 반응. 이미 예상했다. 애초에 예상범위 안이다. 오히려 생각보다 덜 펄쩍 뛰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의 대천재라는 이 두 남자. 김상희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 물론 그 두 남자는 자기가 조련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김상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안 돼요?" 두 남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절대 안 된다." "절대 안 돼." 하면 죽일거야. 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김상희는 여유로웠다. 그래. 절대 안 되겠지. 이 두 남자가 반대하든 말든 할 건 해야했다. 조련의 여왕. 김상희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가 찾아온 날을... 두 분 다 기억하고 계실 것이어요." 그러면서 한진수의 왼 팔을 힐끗 쳐다봤다. 두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 "......."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야...니들 다 속고 있어. 이 배치는 그냥... 딸 방패야 0164 / 0192 ---------------------------------------------- 남자는 마누라를 잘 얻어야 한다. *** 그래. 솔직히 말해서 모두 예상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 말을 진짜로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아참. 한 가지를 미리 말해놓자면 나는 타인 앞에서 진수를 부를 때 진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굉장히 버릇 없고 교양 없어 보이니까. 타인 앞에서는 진수가 아닌 서방님 혹은 당신 혹은 오라버니라고 부르는데, 진수는 그 중에서도 서방님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 뭐. 그거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일단 대충 넘어가고. "서방님 왼팔의 경우를 보면..." 크리스가 찾아왔던 날. 진수는 자기 팔을 스스로 잘랐다. 피 분수가 솟구쳤다. 그러나 그건 겨우 몇 초에 불과했다. 크리스가 사라진 이후, 진수의 몸에서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팔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것처럼 말이다. 나와 진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와 함께 밤을 보내면..." 여기서 나는 일부러 얼굴을 붉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도 싫다. 나도 싫은 방법이다. 절대로 용납할 수도 없는 방법이고. 하지만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바를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한 엄청난 능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진수랑 개차반이 동시에 말했다. "절대 안 된다." "절대 안 돼." 정리하겠다. 나는 타인에게 성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 원리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가능하다.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리고 손바닥을 통해 성력을 전달하는 것보다 입을 통해 성력을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크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더욱 효과가 큰 방법이 며칠 전 입증 됐다. 진수를 통해서 말이다. 진수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엄청 화가 난 표정이기는 한데, 나한테 화는 못 내고 입술만 옴싹달싹하는 표정이 솔직히 말해 좀 귀여웠다. 예전의 진수도 저랬다. 나는 일부러 진수의 질투심을 자극하거나 궂은 말을 할 때가 많았다. 진수의 기분을 일부러 나쁘게 했었다. 진수는 기분이 나쁘면 입술을 저렇게 오므리고 살짝 앞으로 내민다. 저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다. 그러면서 나한테는 화를 못 내는 그 모습.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건데, 하여튼 그랬었다. 지금의 진수도 마찬가지였다. 저 모습. 오랜만에 보니까 새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데, 역시 귀여웠다. '내가 설마 진짜로 다른 사람이랑 잠자리를 갖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엄청나게 단순하니까. 하나밖에 못 보니까. 마력이 있고 두뇌회전이 빠르면 뭐해. 생각이 1차원적인데. 안절부줠 못하는 진수를 보아하니 참 재미는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이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또 말하지만 나는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다. 이건 어디까지나 다음 말을 하기 위한 포석일 뿐이다. '마음 조금 풀어줄까?' 조금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물론 저는 서방님 외의 다른 남자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어요. 제게 남자는 오로지 서방님뿐이니까요." ...야. 그래도 개차반 앞인데 표정관리좀 하자. 삐졌던 모습은 어디가고 그렇게 헤벌쭉 팔불출만 남은 거냐. 진수야. 너 개차반씨 표정 안 보여? 개차반씨 표정 지금 엄청 썩었어. 개차반씨가 말했다. "입 다물어라. 입 찢어 버린다." ...이봐. 아빠씨. 당신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위한테 그게 할 소린가요? 아니.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해. "만약 서방님의 입이 찢어진다면 소녀는 가슴이 미어지고 말 것이어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며 아빠께서 왜 그러셨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어요. 그렇게 된다면..." 말꼬리를 흐렸다. 좋아. 책 잡힐 말은 안 했어. 하지만 아마 개차반한테 의미전달은 똑똑히 됐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아빠를 평생 미워하고 말겠다.' ...쯤 되는 선포가 되지 않을까. 하여튼 말했다. "그래서 더스 나이트와 스페셜 나이트의 3차 각성을 돕고 싶어요." *** 김훈상은 매우 기분이 나빴다. 저 놈의 도둑놈 새끼. 남의 딸을 데려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얘가 벌써부터 자기 앞에서 남편 편을 들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별로 키운 거 없다. 오바이토가 날 때까지 비행기를 태우고 -심지어 이걸 좋아하는 줄 알았다.- 툭 하면 죽여버린다, 사형경고 정도 했을 뿐이다. 김상희가 알아서 잘 컸다. 그런데 지금의 김훈상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키운 딸내미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송수진과 강서영이 키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김훈상은 별로 안 키웠다. '내 새끼인데.' 사위 편을 들다니. 내 편이 아닌 저 놈 편을 들다니. 김훈상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가 문득 깨달았다. '난 왜 이렇게 유치해진 거냐?'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했다. 이건 변명할 것도 없었다. 유치했다. 사위에게 질투를 느끼다니.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 때, 김상희의 말이 들려왔다. "만약 서방님의 입이 찢어진다면 소녀는 가슴이 미어지고 말 것이어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며 아빠께서 왜 그러셨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어요. 그렇게 된다면..." 김훈상은 순간 아득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네 놈을 증오하고 말리라! 그렇게 들렸다. 물론 김상희가 그 정도까지 극단적인 생각을 한 건 아니다. 그러나 딸등신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시간이 흘렀다. 김훈상은 결국 허락을 했다. "...방법을 강구해보도록 하겠다." 김상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부러 이렇게 말했던 게 효과가 있었다.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에 비교해서 '입을 통한 성력전달'은 별 거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만약 입을 통한 성력전달부터 한다고 했으면 절대 허락 안 했을 거야.' 아마 한진수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훈상과 한진수는 뭔가 이상하고 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잠자리보다는 훨씬 낫지.' 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방안은 김환석에 의해서 실행 됐다. "다음은 내 차례라고."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불편한 방식을 쓰는 거야?" 김상희로부터 성력을 전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왕궁을 강타함과 동시에 나이트들은 굉장히 기뻐했다. 3차 각성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거니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이 방이 맞긴 맞는 거지?" 셋째 왕자. 김환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으니까 빨랑 들어와라." 방 안에 김상희는 없었다. "왜 여기 왕자님만 있습니까?" "똥개는 옆 방에 있어." 나이트는 의아해 했다. "저는 성녀님한테 성력을 받기로 되어 있는데요?" "알아. 아니까 닥치고 빨리 와." 싫으면 꺼지시든지, 라고 온 몸으로 주장하는 듯한 김환성의 태도에도 나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기쁜 상태다. 3차 각성의 벽을 깰 수 있는 기회가 코 앞에 있지 않은가! 김상희 공주로부터, 그것도 입을 통한 성력 전달이라니. '그런데 진짜 어디 계시지?' 그리고 얼마 뒤 알 수 있었다. 벽 한 쪽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저건... 유리관?' 아마도 유리 소재라고 짐작되는, 관 하나가 벽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옆방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여기다가 입 대." "예?" "아 여기다가 입 대라고!" 하이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가봐도 지금 김환성 왕자 기분 나빠 보였다. 심지어 지금은 여자의 모습이다. 여자의 모습이라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 지금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상태라는 거다. 지금 왜? 여기 프리온 나이트 대대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나? 왜 마력을 끌어올린 상태로 계집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나이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리관을 통한 성력전달이라니. 아니. 왜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 겁니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김환성의 기세가 너무 살벌했기 때문이다. '왕자님 기분이 왜 저래?' 별 거 아니다. 비록 2미터가 넘는 관을 통해 성력을 전달하는 거긴 하지만 어쨌거나 동생의 입김이 이 시커먼 사내놈들한테 들어간다는 게 짜증이 나는 거다. 하지만 나이트들은 그런 걸 전혀 몰랐다. '국제 문제가 걸려있는 것 같군.' 안 그래도 지금 고려가 제국으로 격상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김훈상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 전부가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나이트들조차도.) '신라와의 계약 문제가 불거졌나?' 이쯤 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신라 국왕도 제법 컸겠다, 고려와의 관계. 언제든지 틀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왕자님 기분이 저렇게 안 좋지. '에이 모르겠다. 나는 성력이나 받으면 되지.' 유리관에 입을 댔다. 김환성 벽을 탕탕 쳤다. "똥개. 불어!" *** 나는 황당했다. 우리의 망나니 중 망나니. 탑 오브 망나니 김환석이 개발한 이 이상한 관의 정체가 뭔지 몰랐다. "이걸로 성력을 전달해라." 듣자하니 실험 데이터를 토대로하여 효과적인 성력 전달을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단다. 언뜻 그냥 유리처럼 보이는 이 유리관의 가격이 대충 듣기로 700억원에 육박한다고 들었다. 알렉스학자님이 그랬다. 대충 700억쯤 하는 물건이라고. 왜 저딴 걸 만드는데 700억이나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심지어 2미터가 넘잖아. 이거 불다가 볼 터지겠다.'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유리관이 나름 최첨단이라서 그렇지도 않았다. 살살 불어도 성력전달은 잘 됐다. 알렉스 학자님이 말해줬다. "이 진공관은 김환석 왕자님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죠. 무엇보다도 일단 길이를 보십쇼. 2미터 씩이나 된다고요." 아. 그니까 뭣하러 이렇게 길게 만들었냐고요. "김상희 공주님이랑 시커먼 사내새끼들이랑 입술이 닿을 수도 있으니,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만든 희대의 역작입니다." ...어라. 알렉스씨 뭔가 지금 엄청 자랑스러운 것 같은 표정인데. 마치 나만 알고 다른 사람들 전부 모르는 그런 아주 엄청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이 뿌듯한 표정인데. 저 학자님 지금 웃는 거 좀 변태같다. 죄송해요 학자님. 근데 어떡해요. 진짜 변태같은 걸. 어쨌든 결론을 내자면, 나는 고려의 전력 강화와 내 신변보호를 위해 나이트들의 3차 각성을 제의했다. 그래서 탑 오브 망나니가 700억짜리 유리관을 만들었다. 내가 다른 나이트랑 뽀뽀할 수도 있으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아이고 두야. 쟤는 진짜 돈이 썩어나나 보다. 차라리 그 돈 나나주지. 나한테 700억 주면 진짜 훨씬 유용하고 아름답고 바람직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이딴 거 말고, 아니. 700억 아니고 70억만 줘도 진짜 행복할 텐데. 아니 7억만. 7억만 주면 안 되겠니? ...라고는 하지만 진짜로 돈 달라고 했다가는 싸대기 맞겠지? 7억이 뭐 한두 푼도 아니고. 그래. 아무리 탑 오브 망나니가 날 아낀다고는 해도 그게 7억 정도는 아닐 거야. 이상한 상상은 그만하자. 알렉스씨가 말했다. "그래도 공주님 덕분에 3차 각성을 하게 된 나이트들이 제법 됩니다. 이건 고려왕궁의 역사적인 일이라 할 수 있죠. 3차 각성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상희 공주님은 역시 성녀님이 맞긴 맞는가 봅니다." ***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도 공주님 덕분에 3차 각성을 하게 된 나이트들이 제법 됩니다. 이건 고려왕궁의 역사적인 일이라 할 수 있죠. 3차 각성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상희 공주님은 역시 성녀님이 맞긴 맞는가 봅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여자들 중 세계 최고 부자지...' 라고 생각했다가 고쳐 먹었다. '아니 남자를 통틀어도 저런 부자 없지.' 알렉스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김상희 지금 엄청난 부자다. 오빠랑 아빠 잘 둬서 갑부 됐다. '하여튼 상희학을 공부하는 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 상희학이라는 절대진리의 학문이 없었다면 김환석이 왜 700억이나 들여서 이 쓸데없는 물품 -심지어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은-을 만들겠는가. 이 2미터가 별 거 아닌것 같아 보여도, 이거 엄청난 거다. 사실 30cm 정도로만 만들면 예산이 1/100 수준으로 줄어든다. 7억밖에 안든다는 소리다. 그걸 2미터까지 늘리려고 그 100배인 700억을 썼다. 30cm에서 2미터까지 늘리려고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2미터는 성력 손실이 없는 한도 내에서 가장 긴 길이다. '그나저나 한진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입을 통한 성력전달은 엄청난 힘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또 눈치를 보아하니, '상희 공주님으로부터...' 또다른 방법도 있는 것 같았다. '분명 그 방법이 효과가 더 클 거야.'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손녀 같은 존재다. 손녀의 잠자리를 상상할 수는 없었다. 하여튼 김상희의 가장 은밀한 곳으로부터 성력을 전달받게 되면 그 효과가 대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왕과 한진수의 눈치를 살펴보면 분명히 그랬다. '물론 이 사실은 절대적인 비밀에 부쳐지겠지.' 자신에게도 비밀로 할 만큼. 생각해보라. 만약 김상희와 잠자리를 가진다면, 3차 각성보다도 더 큰 뭔가가 있다면? 아무리 충직한 나이트라고 할지라도 눈이 돌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왕과 한진수는 비밀에 부치고 있을 거다. '내가 상희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런 통찰력은 얻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기뻤다. 뿌듯했다. 행복해졌다. 이게 바로 학자의 삶 아니겠는가! '실험샘플 귀하들은 모두 분발해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하고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상희 공주에게 푹 빠진 실험샘플이 나날이 늘어간다. 아주 흐뭇해졌다. '그나저나 한진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깊은 밤. 뜨거웠던 시간 후. 한진수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몸을 만져봤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김상희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한진수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얼 거렸다. "...뭔가... 변화가 생겼어."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여지껏 발견된 적조차 없던 변화가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김상희: '7억 달라고 하면 싸대기 맞겠지?' 작가 :너님 통장에 70조 있을걸... 0165 / 0192 ---------------------------------------------- 남자는 마누라를 잘 얻어야 한다. *** 한진수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자각했다. '이건 도대체...' 김상희가 보였다. 글자 그대로 보였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진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중얼거렸다. "네 몸 주위에... 빛이 보여." "내 주위에?" 김상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네 주위에 하얀 빛이 있어." 김상희는 다시 한 번 뒤를 쳐다봤다. 열심히 자신의 몸을 살펴봤지만 빛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한진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진수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한진수의 손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김상희도 깜짝 놀랐다. "이건...?" 김상희도 많이 봤었다. 많이 볼 수밖에 없다. 요즘들어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성력전달이 아니었던가. 저 빛은 분명히 성력이었다. 진수가 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거다. "진수 너... 어떻게 된 거야?" 성력은 성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일단 고대의 기록에 의거하면 그랬다. 여지껏 알고 있는 정보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한진수는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분명히 성력이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김상희가 내 옆에 있을 때. 그 때 나도 성력 발현이 가능해진다...!' 실험을 해봤다. 약 10미터 반경 내에 있을 때에 성력 발현이 가능해졌다. 보고를 받은 김훈상이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냐?" 한진수가 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의미하는 바가 엄청나다. 쉽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스페셜 나이트쯤 되는 사람에게 검을 쥐어주는 것과 갓난아기에게 검을 쥐어주는 것. 어느 쪽이 위험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스페셜 나이트쪽이 위험하다. 마찬가지다. 한진수같은 사람이 성력을 운용할 수 있다? 그 전력이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한꺼번에 뛸 수 있다. 위급한 상황에 예전 김상희가 보였던 기적을 몇 번이고 일으킬 수 있는 거니까. 김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수 칭찬 대신 김상희 칭찬을 했다. "역시 내 딸이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은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이건 한진수가 대단한 거다. 김상희가 성력을 10정도 활용할 수 있다면, 한진수는 그 성력을 1000이상 활용할 수 있을 거다. 당연히 한진수가 대단한 거고 한진수를 칭찬해야 한다. 하지만 김훈상은 그러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딸만 대단한 듯 했다. 그리고 나이트들은 환호했다. "성녀님! 성녀님! 성녀님! 성녀님!" 한진수를 연호할 법도 하건만 나이트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박이네." "그 때 보여줬던 그 기적이잖아, 이거." 김상희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은 한진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트들의 연무장에 계집이 찾아왔다는 것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 연무장은 남자들의 영역이며 여자들이 출입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나이트들은 여자가 연무장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 곳은 그들의 신성한 영역이니까.) 나이트의 제 9대대장으로 복귀한 김환성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저 자식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속으로 칼을 갈았다. 저 놈 저거. 기적을 사용해준다는 명목으로 감히 사랑스런 동생을 저토록 꽉 안고 있지 않은가. 그래. 그것까진 그렇다 칠 수 있겠다. '왜 웃고 있냐고! 이 똥개가!' 괜히 성질이 났다. 한진수 품에 안겨서 한진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방긋방긋 웃고 있지 않은가. 물론 김환성 눈에만 그렇게 보였다. 지금 김상희는 눈에서 흘러내리려는 그 꿀을 최대한 감추고 있다. 일부러 김환성 자극하지 않으려고 티 안 내고있다. 오히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한진수다. 지금 한진수는 핑계 제대로 잡았다. 김상희가 옆에 있어야 성력을 발현할 수 있으며 그래야 나이트들의 극한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걸 핑계로 옷에 붙은 껌딱지마냥 김상희를 꽉 껴안고 놓아줄 생각을 안했다. 스스로 생각했다. '아주 멋진 핑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김환성의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걸려있는 듯 했다. '저렇게 끼를 부리다니.' 김상희는 끼 안 부리고 있는데 김환성의 눈에는 끼 부리는 걸로 보였다. 왜! 어째서! 저런 도둑놈 놈팽이에게 끼를 부리냔 말이다! 왜 웃어주느냔 말이다! 김환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해줄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 언젠가 저 한진수 놈을 반 쯤 죽여 버리겠다!' 9대대 소속 나이트 하나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기적이란 건 정말 엄청나네요. 이 힘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이러면 우리 일개 대대 혼자서 나라 하나를 찜쪄 먹겠는데요?" "한진수 왕께서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되었군요. 저 능력을 어떻게 가지게 된 거지?" "글쎄. 혹시 그렇고 그렇고 그런 걸 해서..." 김환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 엎드려 뻗쳣!" 나이트들은 영문도 모르고 엎드려 뻗쳤다. 지금 김환성.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는 소리다. '이크. 살짝 부딪쳐도 최소 중상이다.' 저 상태의 김환성. 자기 힘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다. 힘 조절 잘못해서 어디 한 군데 맞기라도 했다가는 뼈 하나 작살난다. '심지어 지금은 기적이 함께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죽지만 않으면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소리다. '아마 그걸 믿고 우릴 엄청 패시겠지.' 그래서 확신했다. '말 안 들으면 죽음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모두 엎드렸다. 하지만 궁금했다. 도대체 김환성이 왜 기분이 나쁜 건지. 갑자기 왜 저러나 싶다. 저 왕자님 조울증이라도 걸렸나싶어 심히 걱정 됐다. 자고로 군대란, 상관의 기분에 따라 부대의 분위기가 결정되곤 하니까.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김환성이 크게 말했다. "절대로 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내 사랑스런 똥개가 저 짐승같은 도둑놈새끼와 이렇고 그렇고 저런, 이상한 그런 걸 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라고 외치는 듯 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잤네, 잤어'라고 말하는 꼴이라 김상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야... 망나니...' 기필코 명존쎄를 하고 말리라. 다짐했다. 사실 부부가 잠자리를 갖는 것. 그게 무슨 대수겠냐마는, 그래도 이렇게 많은 남자들 앞에서 '했네, 했어'를 돌려 말한 '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그게 뭐 자랑이라고 동네 방네 소문을 낸단 말인가. "오빠... 진정 하셔요." 김환성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저 도둑놈 새끼를 그냥...!" "서방님이 뭘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지 소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다. 어디 감히 공주가 눈을 똑바로 뜨고 왕자에게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나이트도 이런 상황 조금 익숙해졌다. 이상하게 생각은 하지만 충격까지 받지는 않았다.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니까. '역시 성녀님이시다!' 그리고 망나니를 진정시키는 데 즉효약은 바로 성녀의 한 마디였다. "오빠가 그럴 때마다 소녀는 가슴이 미어져요. 서방님과 오빠가 잘 지내면 좋겠는데... 서방님은 오빠한테 항상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그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서방님은 망나니 너한테 잘 보일라고 노력하는데 넌 왜 안 그러냐? 네가 그러니까 망나니지. 이 망나니야. 라는 뜻이다. 그 말을 직접적으로 이해는 못했어도 직감적으로 이해한 김환성이 다시 남자로 돌아왔다. 이대로 계속 윽박질렀다가는 하나 뿐인 똥개가 자기 미워하게 생겼다. 한진수에게 경고했다. "하여튼 너 조심해."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뭘? 뭘 조심해? 솔직히 싸우면 네가 지잖아. 지금 개차반하고 싸워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던데. "아. 그리고 아부지가 너 좀 보잔다." *** 김훈상이 말했다. 지금은 공적인 자리다. "우리에게 협조하겠다는 나라의 목록이다." 한진수에게 기적이란 능력이 생겼다는 소문이 퍼짐과 동시에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몸을 한껏 낮추었다. 무적의 프리온 나이트 부대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네 역할이 매우 컸다."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그것도 거의 불사신에 가까운 프리온 나이트. 거기에 순간이동까지 가능하여 대륙 전역을 누빌 수 있는 프리온 나이트를 32기나 소유한 한진수다. 마음만 먹으면 세계정복까지 가능하다. (일반 국가들은 백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제 역할이 아니라... 상희공주의 힘이었죠." 딸등신은 대번에 미끼를 물었다. "역시 그건 그렇지."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적인 자리건 사적인 자리건 저 놈의 딸등신 기질은 그 자리를 가리질 않는다. 알렉스는 상희학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면서 저 것을 일컬어 '낄끼빠끼'라고 명명했다. 이 것은 알렉스 혼자만이 알고 있는 학술용어로써, '낄 때 끼고, 빠져야 할 때도 낀다.'라는 뜻의 학술용어였는데 상희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개차반과 망나니들이 그랬다. 딸등신, 동생병신의 기질이 때와 장소를 분간도 못하고 무턱대고 마구 튀어나오지 않는가. '이 번에도 어김없이 낄끼빠끼군.' 김훈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딸이다." 알렉스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역시 내 딸이 킹왕짱이지. 왕이 그렇게 말했을 리 없건만, 이상하게도 알렉스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차라리 자기가 딸등신인걸 인정하지 않을 때가 귀엽기라도 했지.' 지금은 아주 팔불출 다 됐다. 오히려 대놓고 저러니까 좀 걱정 된다. '설마 세상 야욕과 물욕에 다 초탈하고 황제 자리를 한진수에게 넘겨준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요즘 가정 비슷한 걸 하고 있는 중이다. 상희학 이론에 따르면, 어쩌면 한진수나 김훈상이 황제 자리에 욕심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은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 뒀다. '아니. 그래도 황제는 엄청나게 영광된 자리인데.' 엄청나게 영광된 자리인 건 맞는데, '딸등신은 손녀 재롱이나 볼려고 황제 때려 치울 거 같고.' 한진수는, '사랑스런 아내랑 띵가띵가 놀러다니고 싶어할 거 같고.' 그럴 거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 착각이겠지?' 설마. 상희학이 아무리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엄청난 학문이라고는 해도 저런 가정까지 들어맞을까 싶다. 그런데 좀 불안했다. '설마 진짜 그러진 않겠지?' 만약 이 가설이 실제로 들어맞게 된다면 세기의 대발견이라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0프로에 수렴하는 일들이 벌어졌고, 상희학의 관점에서 그걸 미리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현실적인 문제가 닥친다. '그래도 제국을 만드는 건데 서로 발을 빼진 않겠지. 설마. 설마 아닐 거야.' 같은 시각. 한진수는 생각했다. '빨리 중요한 일들 끝내고 상희 데리고 놀러다니고 싶다.' 황제 따위. 때려치울 거다. 그딴 거. 누가 하라고 줘도 안 한다. 그런 거 하면 상희랑 제대로 못 논다. 김훈상도 생각했다. '이 놈은 엄청난 외교력을 행사하는 놈이다.' 아니. 행사해야만 하는 놈이다. 그래야 황제에 앉히기 편하니까. '성력을 발현할 수 있다니. 정말 엄청난 놈이야.' 아니. 엄청난 놈이어야만 하는 놈이다. 그래야 황제에 앉히기 편하니까. '아주 대단한 놈이다.' 아니. 아주 대단한 놈이어야만 하는 놈이다. 그래야 황제에 앉히기 편하니까. '불세출의 천재지.' 아니. 불세출의 천재여야만 하는 놈이다. 그래야 황제에 앉히기 편하니까. '그러니까 네 놈이 황제 해라!' 두 남자 사이의 불꽃 튀는 신경전이 시작 됐다. 김훈상이 먼저 운을 뗐다. "그래서... 황제의 자리 말인데." "아. 예." 서로 황제 안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된 거다. 전쟁이 시작될 뻔 했는데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프리지아가... 발견되었습니다." ============================ 작품 후기 ============================ 김훈상 vs 한진수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황제 안 할것인가) 0166 / 0192 ---------------------------------------------- 남자는 마누라를 잘 얻어야 한다. *** 프리지아가 발견 됐다. 제국. 아니 전(前) 제국 지하 밀실에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 되었다. 그리고 프리지아는 김환석이 맡아 연구하게 됐다. 김훈상이 말했다. "이 것은 백제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열어놔야 했다. 실체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지금 어디선가에 숨어 호시탐탐 김상희를 두렵게 만들고 있는 그 백제가 왜 프리지아를 그냥 놔뒀을까? 제국의 황제가 프리지아를 요긴하게 이용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왜 그냥 뒀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세 개 중 하나일 것이다. "프리지아가 쓸모 없어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깜빡 잊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함정이거나." 백제는 골렘 -확실하게 골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골렘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을 다루는 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 짐작되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 프리지아 역시 골렘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발견되게 하여 고려 왕궁에 침투시키려고. '하지만 백제가 왜 굳이 그런 방법을 쓰는 거지?' 크리스만 해도 보안이 철저한 고려왕궁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지 않았던가. 크리스 같은 놈이 분명 한 명은 아닐 터. 그런 놈들이 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정말로 프리지아의 존재를 잊은 건가?' 알 수 없었다. 그건 프리지아를 조사해보면 될 일이었다. 김환석이 연구에 착수했다. 김환석은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이었다. 시녀들은 김환석에게 감히 접근하지조차 못했다. 괜히 잘못 접근했다가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언니?" "뭘?" "성녀님 때문에 김환석 왕자님께서 저렇게 뭔가에 열중하고 계시다고 하네요." "성녀님 때문에...?" 예전 같았으면 '어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어떻게 왕자님께서 겨우 계집 때문에 저렇게 열심이시겠어?'라고 반문했을 거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든 여자들의 희망이 되어버린 성녀다. "성녀님의 안전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연구라나봐요." 시녀들은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도 말 없는 발이 천리를 간다고. 대략적인 분위기 정도는 눈치 챘다. 김환석이 저렇게 미친듯이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건, 김상희 때문이라는 소문이 시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고. 김환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나게 혹사당했군.' 솔직한 말로 좀 끔찍했다. 이게 과연 여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기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김상희가 나타나기 전까지 여자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프리지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상희의 힘을 빌어 회복시키려면 회복시킬 수도 있겠지만, 백제의 노림수가 숨어 있을 수도 있어서 일부러 회복시키지는 않았다. '이건...' 처음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프리지아가 왜 이런 꼴을 당했는지. 하지만 프리온 나이트와 연관지어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리지아는... 계집을 낳는 도구였다.' 인위적으로 잉태를 시키고 계집을 낳게 만드는 그런 계집. '아. 그래서 고대의 기록에...' 김환석은 김상희가 예전에 해줬던, 전설 비슷한 고대의 기록을 떠올렸다. 잉카제국이 아닌 초기의 제국. 이름조차 희미해진 그 제국이 처음에는 세계를 다스렸다고 했다. 그 제국이 바로 '여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프리지아가... 여왕인 건가.' 그랬다. 이제 퍼즐이 맞춰졌다. '프리온 나이트를 생산하려면 특정 조건을 가진 계집이 필요하다.' 마력을 소량이라도 가진, 인지조차 못하고 있을 정도지만 하여튼 마력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계집들이 필요했다. 김환석의 연구에 따르면 프리온 나이트 1기당 여자가 3명 필요하지 않았던가. '그 계집들을 생산하는 그런 역할이었겠군.' 아마도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을 거다. 이를테면 여러 쌍둥이를 빠른 시간 내에 낳을 수 있는, 그런 능력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프리온 나이트를 빠르게 확보 할 수 있겠지. '김상희를 얻기 위해 이 계집을 혹사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야 알겠다. 제국이 갑자기 쳐들어온 이유를. 여왕을 버리고 성녀를 얻기 위해. '그렇다면 김상희는...' 여자들에게 인위적으로 마력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김상희는, '확실히 탐이 나는 먹잇감이겠지.' 이제야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프리지아를 연구함으로 인해서 모든 상황이 그려졌다. 백제가 원하는 건 김상희였다. 프리온 나이트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계집. 김상희 말이다. '하지만 의문점은 또 남아.' 딱 하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저번에는 그냥 돌아갔을까? 한진수보고 왼 팔을 자르라고 했다. 김상희의 능력 덕택에 팔은 곧바로 복구 되긴 했지만 왜 그랬을까? 왜 굳이 그렇게 존재를 드러냈을까? 거기까진 파악할 수 없었다. 백제의 왕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었다. 김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별 생각 안했다. 그냥 김상희를 보고 있었다. 모든 걸 알고 나니, 김상희를 더욱더 지켜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동생 아닌가.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네 알 바 아니다."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럴거면 왜 굳이 내 방에 와서 그렇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아오 진짜. 너는 역시 탑 오브 망나니가 맞아. 하고 말이다. 그리고 김상희는 확신했다. '그런 주제에 진짜로 말 한 마디 안 걸면 삐질 거야.' 탑 오브 망나니가 괜히 탑 오브 망나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짜로 아무 말도 안 걸고 그냥 모른 체 하면 분명히 삐질 거다. 그런 주제에 저렇게 시크한 척을 유지하다니. 그 때, 김환석이 입을 열었다. "너는..." 김상희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 나왔다. "왜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냐?" 이건 정말로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의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말해놓고 김환석은 황당해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 미친 거냐, 김환석. 그렇게 자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그리고 김상희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일부러 못 들은 척 했다. 김환석이 지금 당황해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인다. 겉으로는 시크한 척. 무뚝뚝한 척 유지하고는 있지만 눈치 백단 김상희다. 척 보면 척이다. '그냥 모르는 척해야 사단이 일어나지 않겠다.' 쟤는 분명 쪽팔리다고 무슨 짓을 해도 하고 말거야. 스케일이 남 다른 탑 오브 망나니니까. 라고 생각한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누가 들어도 제대로 들을 만큼 똑똑히 말하긴 했지만, 김환석은 쓸데 없는 곳에서 단순해졌다. 김상희의 말을 그대로 믿어 버렸다. "닥쳐. 아무 말도 안 했으니." 김환석의 머릿속에서 논리는 이렇다. 김상희는 지금 위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중, 삼중, 사중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위협을 받느냐? 그건 김상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런 거다. 물론 스스로도 그게 아니라는 걸 인지는 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김상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다른 놈들이 호시탐탐 김상희를 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논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지만 하여튼 김환석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김환석이 굳이 김상희 방을 찾아와 이러고 있는 건, 다른 이유 아니었다. 김상희를 눈 앞에 두고 보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서 그렇다. 그래서 연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쉬는 시간에는 오로지 여기 와서 있는 거다. 그래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재빨리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저 한진수 도둑놈새끼를 감시할 수도 있고. 김환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 해드릴게요, 오빠. 오빠가 소녀랑 말도 별로 안 하시고 가신다니 굉장히 서운하고 섭섭해요." "......." 김환석은 자신의 옷자락 끝을 잡고 있는 김상희의 손길을 느꼈다. 뒤돌아선 상태로 씨익 웃었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만약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면 아마 빛의 속도로 정색을 하겠지만. 속으로는 좋아 죽겠는 주제에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걸리적 거리니까 꺼져." 김상희는 이제 이런 것 쯤.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이제 익숙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줬다. "또 오셔야 해요." 김환석이 또 씨익 웃었다. 웃음을 참기는 참았다. 그래서 입가가 씰룩씰룩 거렸다. "시끄럽고 문이나 잘 잠궈." 굳이 문 잠그는 것까지 확인했다. 문 밖으로 나와서 김환석은 쉴드를 유심히 살펴봤다. '이상은 없고.' 김상희는 모른다. 김환석이 지금 김상희 모르게 김상희 방 주위에 특별 배리어를 설치했다는 걸. 그래서 매일마다 찾아와 여길 점검한다는 걸. 그리고 그 특별 배리어의 가격이 무려 7400억이 넘는다는 거. '작동상태는 괜찮군.' 그 때, 문이 열렸다. 김상희였다. "응...? 오빠 아직도 계셨어요?" 배리어를 확인하던 김환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뭔가 하고 있었는데 안하고 있는 척 했다. "내가 일일히 내 행동을 네게 보고해야 되냐?" "그런 건 아니지만... 소녀는 그냥..." 시크한 척 하지마. 이 탑 오브 망나니야. 너는 그래봐야 이 누나 손바닥 안이란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김상희가 말했다. "오빠가 혹여라도 저를 다시 봐주시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 때문에 방금 심장이 쿵하고 설레서... 그래서 여쭤본 것이었는데..." 여기에 더해 일부러 낙담한 척 했다. "오빠가 기분 나쁘셨다니... 죄송해요. 소녀가 잘못했어요." "......." 김환석은 찡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닥치고 들어가 있어라." 내가 지금 배리어를 확인해야 하니까. 네 안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놔야 하니까. 그런데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 민망하니까.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어가 있어라. 라는 긴 말이 '닥치고 들어가 있어라'라는 한 마디로 함축 됐다. 김환석은 한참 동안이나 구석구석, 김상희의 방의 안전과 장미관의 안전장비들을 체크했다. 그 콧대 높은 왕자가 허리까지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까지 마다않고 말이다. 그 모습을 본 시녀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누, 눈 마주치면 죽을 거야...!' 왕자가 무려 무릎을 꿇고 있는데 시녀가 감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도,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거지?' 시녀들은 한참동안이나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장미관을 지나는 시녀들이 많았는데, '아, 앞에서 저러고 있다...!' 그래서 시녀들은 바로 눈치를 차리고 엎드렸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앞에 무슨 일이 있다. 그래서 다들 엎드려 있는 것일 터. 시녀들은 눈치가 빨라야 했다. 그래서 가타부타 상황 알 것도 없이 엎드렸다. "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내, 내가 알기로 저 앞쪽에 김환석 왕자님이 무릎을 꿇으셨다고 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다면 김환석 왕자가 지나가기 전까지 무조건 이러고 있어야 했다. 일이고 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여기서 다들 뭐하는 거야?" 김상희였다. 무슨 시녀들이 일렬로 이렇게 줄을 지어 엎드려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김상희는 황당해졌다. "오빠...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김환석은 뭔가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집중했는지 김상희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지 때문에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하여튼 집중력 하나는 인정해줘야 했다. 김상희가 다시 말했다. "오빠!" 시녀들은 긴장했다. 괜히 불똥 잘못 튀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성녀님이야 괜찮으시겠지만 자신들은 아니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아무 일도 없어라. 아무 일도 없어라.' 빌고 또 빌었다. 시녀들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오빠 때문에 이 많은 시녀들이 이러고 있잖아요." 시녀들은 성녀를 말리고 싶었다. 아니. 아무리 성녀라고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말이 있지 않은가. 왕자 때문에 시녀들이 이러고 있는 거.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무 상관도 없고, 그걸 가지고 문제 삼는 것도 어이없는 거다. 김환석이 그제서야 김상희를 알아차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김상희의 안전을 책임질 장비들을 굳이 손수 점검하느라 이런 일이 벌어져 있는 것도 몰랐다. 시녀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제발...!' 두려웠다. 김환석이 분명 무슨 말을 할 건데, 너무 무서웠다. 시녀들이 이러고 있는 게 뭐? 귀찮으니 그냥 다 죽여 버려. 이렇게 말하면 자신들은 졸지에 죽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김환석이 실제로 그런 전례는 없지만 하여튼 겁에 질린 시녀들은 그렇게 극도의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다. 김환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김환석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나 미워하지 마라." 믿을 수 없었다. 궁색한 변명을 했다. "이거 내가 한 거 아니다." 더욱더 충격적인 말은 그 이후에 나왔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약해진 김환석 0167 / 0192 ---------------------------------------------- 마지막 할 말 *** 김상희는 김환석이 이상함을 눈치 챘다. '저 망나니가 왜 저래?' 김상희는 잘 모른다. 김환석이 자기한테 어떤 신경을 써주고 있는지. 하기야 자기 명의로 하루 수백억씩 돈이 무더기로 쌓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당연히 김환석이 온갖 최첨단 장치로 김상희의 방 외벽을 도배하다시피 해놨다는 것도 모른다. 그리고 워낙에 초정밀 기기들이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분명히 뭔가 해놨네.' 하지만 눈치 백단 김상희다. 김환석이 뭔가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여지껏 안 가고 밍기적 거렸다. '차라리 생색을 내!' 말을 아주 싸가지 없이 하는 주제에 하여튼 하는 행동을 보면 김환성보다 더 귀여울 때가 있다고 생각한 김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로 네 방에 이상한 디바이스를 설치하지 않았다." 김상희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를 보호하기 위해 네 방에 온갖 디바이스들을 쫙 깔아놨다. 김상희는 그걸 눈치 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괜히 아는 척 했다가 김환석 민망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얘는 민망해지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적어도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빠가 그러고 있으니까 시녀들이 전부 이러고 있잖아요." "얼레?" 김환석은 저도 모르게 '얼레?'하고 소리를 냈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네년들은 여기서 뭐하는 거냐?" 일렬로 죽 늘어서서 엎드려 있다. 얘네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오빠가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시녀들이 어찌 감히 지나가겠어요? 이러는 것이 당연하죠." "......." 김환석은 순간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김상희가 워낙에 '당연하다'라고 말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기는 하는데, '그냥 지나가도 상관 없는데?' 애초에 신경도 안 쓴다. 계집들이 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계집은 오로지 김상희 한 명 뿐이다. 김상희가 지나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 "이러라고 시킨 적 없다." 김상희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래서 여기 남자들은 안 된다.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다. 개념을 가질 필요도 없는 거다.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이 망나니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해?' 그냥 이해 안 시키기로 했다. "하여튼 오빠가 그러고 있으면 시녀들이 무서워서 지나가질 못해요." 김환석은 억울했다.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너 방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 이러고 있었던 것 뿐인데? 내가 왜 혼이 나야 하는 거냐! "너희들 앞으로는 내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다녀라." 시녀들은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왕자가 있든 말든 신경 안 쓰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이 앞에 호랑이가 있다. 그 호랑이를 보고 신경 안 쓰고 어떻게 지나다닐 수 있겠는가. "앞으로 신경 쓰는 계집은 그 목을 치겠다." 김상희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냥 다녀라까지는 좋은데 목을 치겠다니. 개차반의 피를 이어서 그런지 너도 역시나 극단적이구나, 하고 김상희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김환석이 다시금 궁색한 변명을 했다. "하여튼 내 잘못 아니다." 시녀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자기 잘못 아니라고 변명하는 냉철 왕자 김환석의 모습. 상상해 본적도 없다.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더더욱 놀라운 건 김상희가 그 것에 별로 반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성녀님이셔...!' 시녀들은 감탄했다. 아니. 감동했다. 성녀가 같은 여자라서. 그래서 행복할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굳이 몰래 숨어서 관찰하던 알렉스가 무릎을 탁! 쳤다. '김환석 왕자님은 지금 동생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게 죽기보다 더더욱 싫은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지!' 실험 데이터들이 하나하나 쌓이고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 김상희 공주님이 싫어할만한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실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여자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여자들의 입장을 더욱 이해하시려 들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환석이다. 애초에 개념이 없어서 그렇지 일단 개념만 생기고 나면, '엄청나게 일취월장하시게 될 거야.' 그 사실 때문에 알렉스가 이렇게 흥분한 게 아니다. '상희학을 전수할 수 있는 제자가 될 수도 있어!' 희망을 갖게 됐다. 상희학. 죽기 전에, 언젠가는 반드시 발표하고 말 거다. 그렇다면 혼자서는 어렵다. 괜히 혼자서 그랬다가 돌 맞아 죽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김환석 왕자쯤 되는 걸출한 인물을 섭외해서 제자로 삼게 된다면, 그 땐 아주 훌륭한 방패막이가 될 거다.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이득이지!' 아주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실험 샘플임과 동시에 이해도와 습득력이 매우 빠른 제자. 아주 훌륭한 인재가 아닌가. 오늘 김환석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기회를 봐서 넌지시 얘기를 꺼내봐야겠어.' 딱 걸렸다. 왕자님. 이제 당신은 좋든 싫든 상희학을 배워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신세계가 열릴 것을 장담하죠. 알렉스가 저도 모르게 후후- 하고 웃었다. 조금 사악해보였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와랏. 제자여!' *** 김훈상이 말했다. "현재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지?" 김환석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여기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향후 5개월 내에 500기의 프리온 나이트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딸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500기의 프리온 나이트라.' 그렇다는 말은 즉, 1500명의 계집이 희생될 거라는 소리다. 예전 같았으면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을 거다. 그저 운이 나쁜 계집들이었을 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조금 괴로웠다.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나마 속마음을 조금 털어놓을 수 있는, 강서영과의 잠자리에서 김훈상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독해질 수 있다." "......." 강서영은 저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반문하지는 않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왕이 고독해 보일 때. 굉장히 외로워 보일 때. 그 때가 있다. 이럴 때면 꼭 안아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저는 당신이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은 저의 태양이셔요. 태양은 언제나 밝아요. 당신은 제게 언제나 밝고 높은 분이셔요." 김훈상은 강서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 어미에 그 딸인가." 그랬다가 정정했다. "아니. 그 딸에 그 어미인가."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거 상상도 못했다. 이런 게 어쩌면, 책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강서영이 해준 말. 별 거 아닌 말이다. 신하들도 이런 말 잘 한다. 폐하는 태양이시다. 폐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이런 말. 많이 들었다. 그러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숨결을 느끼면서 듣는 말. 이건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계집들에게는 묘한 힘이 있다.' 그는 상희학을 모른다. 애초에 상희학이란 게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감정이 말해줬다. 비록 마력도 없고 힘도 약하고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여자들에게는 여자들의 뭔가가 있다. 남자들은 채워주지 못하는, 마음 속 한 구석의 무언가를 채워주는 그런 신기한 능력이 있다.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닌가.' 그가 본 바로는 강서영과 김상희가 그랬다. 그런데 또 김상희가 주는 느낌과 강서영이 주는 느낌은 달랐다. '나는 지금 설마... 계집에게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인가.' 원래대로라면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 위로받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인가.' 여전히 잘은 모르겠다. 강서영을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런 위로받는 기분. 이런 건 조금 생소한 느낌이다. 이런 게 사랑의 한 종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군.' 강서영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 이 사소한 행위가 어째서 힘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고 해도..." 강서영이 얼굴을 붉혔다. "저는 당신의 편이어요. 제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 서있을게요."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강서영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계집 주제에 건방지구나." "......." 강서영과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내 뒤에 서있는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강서영은 입술 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내가 네 앞에 서있는 거다." "......." 강서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온 말이지만, 강서영은 충분히 감동 받았다. 이 세상에 왕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자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녀가 알기로는 김상희와 자신. 딱 둘 밖에는 없었다. "내 등이 네 앞을 지키고, 내 손이 너를 잡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뜨거운 시간이 다가오기 전. 김훈상이 강서영의 손을 잡았다. 깍지낀 손에 힘을 꽉 줬다. "내가 이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 *** 나는 솔직히 무서웠다. 장미관 안에 있는 것도 무서웠고 그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서웠다.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매일 같이 찾아와 눈을 부라리는 김환석 망나니와 하루에 한 번은 꼬박꼬박 들러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나의 힐링 첫째 오빠 김형석. 그리고 미덥지는 않지만 하여튼 싸움 하나 만큼은 기똥차게 잘하는 우리 둘째 망나니 김환성. 귀여움으로 무장한 우리 환혁이와 상아. 그래도 이 중에는 가장 믿음직한 우리의 개차반. 그리고. "...네가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진수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난 참 많은 일을 겪은 것 같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 환생부터가 좀 다이나믹하잖아. 다시 태어나보니 극한의 남존여비 세상이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야만 했다. 게다가 납치에 전쟁에 협박에. 어휴. 내가 딱 생각해봤다. 일단 내가 여기 나이로 16살이니까 16년 동안 내가 겪었던 일 중 단 하나라도 겪은 사람. 아마 없을 거다. 언제나 느끼는 건데 난 진짜 스펙타클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뭐.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개차반이 태워주던 비행기조차도 스펙타클했지. 파일럿의 비행훈련을 능가하는 난이도(?)였으니까. 내가 만약 이전 삶이 없었다면, 그냥 말 그대로 16살이었다면 미쳐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내 눈 앞에서 크리스의 목이 꺾였고 꺾인 목이 말을 했다. 시체가 사라지는 기현상도 일어나고. 진수를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들었다. 제정신인 게 이상할 정도다. 진수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무서워하지 마. 두려워하지도 말고. 내가 네 옆에 있어." 별 거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 말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참 힘이 나는 것 같다. 예전에 조폭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며 했던 대화가 또 떠올랐다. -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지켜줄게. - 그러지 말고 그냥 경찰에 신고해. - 경찰 오기 전에 너 다치면 어떡해? 나 그 꼴은 절대 못 봐.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때도, 난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었다. 진수가 정말로 조폭과 싸워주기를 바라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나도 진수 다치는 거 싫다. 하지만 저런 말이 고마웠다. 나는 그냥 저런 말만 들어도 됐다. 진수가 말했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지켜줄게." "......." ...나 지금. 뭔가 위험한 상황이다. 진수의 입술이 보였다. 갑자기 문득. 키스가 하고 싶어졌다. 내가 말했다. "...키스... 해도 돼?" 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좋긴 좋은데... 그렇게 신나서 고개 끄덕이지 말아줘. 뭔가 분위기 깬단 말이야. 지금 진수를 보면 맛 좋은 소세지를 앞에 둔 강아지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밤이 깊어갔다. 나는 진수의 숨결을 느꼈고 진수의 체온을 느꼈고 진수가 나와 함께 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진수와 하나가 됐다. 이 느낌. 하나가 되는 이 뜨거운 감촉. 이 열정적인 시간. 나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문득, 괜히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나왔다. 정말 뜬금없었다. 나도 알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건지. 진수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진수 옆에 있어서 진수가 아무 것도 못하는 거 알고 있다. 신라왕이면서도 마치 고려 속국의 비굴한 왕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 때문에 말이다. '내가 옆에 없었다면... 진수는 어쩌면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눈물이 났다. 사실 진수정도 되면 나 말고도 다른 여자 얼마든지 많이 만날 수 있다. 우리 개차반씨처럼 첩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살아도 된다. 어쩌면, 남자라면 그런 삶이 더 화려하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무서웠다. 이 행복이 언제 깨질지 몰라서. 마치 행복으로 만들어진 살얼음판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했다. 진수는 듣지 못한 것 같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머릿속에만 웅웅 거리는, 그런 목소리처럼 들렸다. - ... 그렇게 한다면 한진수는 살려줄 수 있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눈가를 훔쳐주던 진수가 내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또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 혹시 잘못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틀렸어. 잘 듣고 있는 것 맞아. 그 이상한 목소리가 계속 말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 잘 생각해봐. 어떤 게 한진수를 위한 건지. 어때. 내 제안이? 0168 / 0192 ---------------------------------------------- 마지막 할 말 *** 진수가 잠들었다. 진수와의 행복한 시간. 꿈만 같은 시간. 다 좋다. 너무 좋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싶을 정도로 나는 행복했다. 진수는 내게 입버릇처럼 말을 하곤 한다. 네가 옆에 있어서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고. 내가 정말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고 말이다. 말은 안 해줬지만 나도 그런 기분이다. 진수랑 함께 있으면 내가 정말 이 세상에 살고 있구나, 살아가고 있구나. 그런 마음이 든다. 분명히 그렇다. 이 행복. 깨고 싶지 않다. 내 머릿속에 또 목소리가 웅웅 거렸다. - 이게 한진수를 위하는 길이야. 하지만 나는 진수를 위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내 눈 앞에 이상한 게 보였다. 이게 환상인지. 정말 실재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크리스가 아닌 크리스. 크리스와 똑같이 생긴 그 크리스가 진수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진수는 전혀 모르고 잠든 상태. '이게... 정말일까?'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내 눈으로 분명 보고 있는데, 이게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손을 뻗어 만져보면 크리스가 만져지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눈으로는 분명히 보였다. 크리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진수의 목에 칼을 대고. 크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엔 이상한 목소리가 웅웅 거렸다. - 우리가 마음먹으면 한진수 정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는 거야. 황제폐하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시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진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었다. 저 칼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진수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자. 이제 정말로 네 선택에 달렸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잘못되고 그렇게 큰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바라는 거. 그렇게 많지 않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적어도 지금 만큼은 진수와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것만 바라고 있다. 그게 내 가장 큰 소원이다. 지구로 돌아가겠다거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 그런 거창한 것보다도 지금 내 옆의 이 사람이 가장 소중했다. - 어서 선택해. 날 따라가겠어, 아니면 한진수가 죽는 걸 보겠어? 첫째 망나니의 수고도, 개차반이나 둘째 망나니, 스페셜 나이트의 호위도 소용 없었다. 이 백제라는 나라. 도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진 건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그 험하다는 경계를 모두 뚫고서 이렇게 안방 드나들듯 들어올 수 있다니. '나는...' 가고 싶지 않아. '나는...' 진수의 얼굴이 보였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어쩌면 아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우니까 아기같아 보였다.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가야했다. '진수가 죽어.' 정말이다. 진수가 죽을 수도 있다. '나는...' 크리스가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재미있어했다. 눈물이 새어나왔다. - 편지를 하나 둬. 크리스가 또 싱긋 웃었다. - 걱정 마. 한진수는 절대로 깨지 않을 테니. 네가 소리를 지르더라도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아. 너는 지금 철저히 혼자야. 시키는대로 해. 나도 한진수를 죽이고 싶지는 않거든.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진수를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써야만 했다. 나는 매일매일 가슴을 졸이며 살아가는 것이 싫다. 왕과 왕자들. 그리고 네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애교를 떨며 살아가는 것도 싫다. 나를 무슨 애완동물처럼 취급하는 것도 싫다. 한진수. 너를 좋아하는 척 하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차라리 나는 백제의 황제에게 가겠다. 사실은 널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좋아하는 척 했을 뿐이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아니다. 나는 좋아하는 척을 한 게 아니다. 나는 진수를 정말 좋아했다. 진수가 정말 좋다. 진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진수도 날 좋아한다. 아니. 날 사랑한다. 확신할 수 있다. '이럴 리... 없잖아...' 이럴 리 없다. 좋아하는 척이라니. 매일매일 가슴 졸이며 사는 게 싫다니. '나는 매일매일이 행복했어.' 가슴 졸인 건 맞다. 하지만 다른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진수가 내 옆에서 없어질까봐. 그게 무서웠던 거다. 진수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사라질까봐. 그게 무서웠던 거다. 이런 내용도 썼다. - 그러니까 부탁이니 나를 찾지 말아줘. 아니. 제발 나를 찾아줘. 내 마음속 외침이 진수에게 닿을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크리스는 여전히 활짝 웃은 채 단도를 진수의 목에 겨누고 있는 상태. 크리스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자. 이제 나와 함께 갈 준비가 됐지?" 아니. 안 됐다. 잠들어 있는 진수의 얼굴. 더 보고 싶다. 계속 보고 싶다. 떠나기 싫다. 그것도 이런 편지를 남기고 가는 거. 정말 싫다. 말하고 싶다. 제발 빨리 일어나라고. 나는 너 없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진수가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크리스가 또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 진수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이게 진수를 보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정말로 진수를 보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돼.'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우리가 평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한다. 분명 싸우기도 싸울 거고 언제가 헤어지긴 헤어질 거다. 사람인이상 죽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진수와 이제 막 행복해졌는데. 이제 정말로 행복해졌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 했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 잘 생각해봐." 그리고 그 때, 나는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할 말. "Lapuntel Essantia Kerannis Frential" 크리스는 예전부터 우리에게 티가 나지 않도록 어떠한 힌트를 줬었다. 그리고 지금. 굳이 필요도 없는 '마지막 말'을 남기라고 했다. 그건 어쩌면, 어쩌면 내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크리스가 조금 이상해졌다. 눈동자가 하얗게 변했다. 그러는가 싶더니 어느새, 목소리가 달라졌다. "상희야..." 크리스의 눈에서 또 붉은색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너 아프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렇게 무서운 선택하게해서 미안해." "...크리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다행이야. 명령어. 잘 기억하고 있었네." 크리스의 말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 강제 명령어. 아주 잠깐이야." 크리스가 손을 뻗었다. 내 볼에 크리스의 손이 닿았다. "미안해. 내가 빨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내 욕심 때문에 말하지 못했어." "크리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크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그러면 김상희는 평생을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완전히 떠날거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 거야.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줘.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럴 시간이 없어."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죽어야 하거든. 그래야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수 있거든. 크리스의 눈에서 붉은색 눈물이 계속 흘러 나왔다. '울고 싶지 않아.' 웃고 싶었다. 마지막 모습이다. 왜 자신이 김상희를 사랑하게 됐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이유 같은 거.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좋았다. 김상희를 계속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진수가 너무 부러웠다. 부러워서 미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너 한 번만 안을게. 딱 거기까지야.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아." 김상희가 거부할 틈도 없이 크리스가 김상희를 꽉 끌어 안았다.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잖아.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한진수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한진수를 쳐다봤다. '내가 너였다면.'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가 더 사랑할 수 있는데.' 하지만 김상희는 결국 한진수를 선택했다. 그는 김상희에게 자신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못했다. "너 무섭게 해서 미안해. 너 힘들게해서 미안해. 그럼 나는 이제 정말 갈게." 이제 정말로 안녕. "행복해야 해. 네가 볼 수 없는 먼 곳에서 네 행복을 응원할게." 마지막 최상위 명령어를 알려준 건, 이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강제 명령어다.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한다. 이제 곧 제정신을 차리겠지. 그러기 전에 떠나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담았다. "이걸 말해줄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해줘야 했다. 그래야 김상희가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 아니. 적어도 행복해질 가능성은 높아지니까.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도록 태어났어. 그래서 말하지 못해."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최후의 상황에, 네가 무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너무나 힘들 때. 죽기보다도 싫은 끔찍한 순간이 오면." 아까까지 들고 있던 단도를 건네줬다. 김상희의 손에 꽉 쥐어줬다. "네 심장을 찔러." 김상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을 찌르면 죽는다. 그렇게 힘든 순간이 오면 자살하라는 뜻일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분위기상 그런 건 절대로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크리스. 좀 더 자세히 말해줘. 너는 지금 내가 아는 그 크리스가 맞는 거야? 내 심장을 찌르라는 건 무슨 뜻이야? 너무 힘들 때. 나보고 죽으라는 뜻이야?" 크리스가 말했다. "그래야 모두가 살아. 나 정말 갈게. 시간이 없어." 너를 볼 수 없는 그 곳으로. 나는 가야만 해. 그리고 크리스가 사라져 버렸다. 현재 고려의 스페셜 나이트, 김훈상, 그리고 한진수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져있는 고급기술인 워프를 사용했다. 워프했다. 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 날을 위해 미리 준비했다. 김상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랑해."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사랑해, 김상희." 하지만 자신은 살아갈 수 없었다. 살면 안 됐다. 또 다른 크리스가 그의 명령을 이행하고 말테니까. "내가 널 많이 사랑했다는 거. 그것만 알아줘." 그리고 피식 웃었다. "너한테도 미안하게 됐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내가 있으면 너는 결국 김상희를 데리고 갈테니까." 혼잣말을 이어갔다. "나는 내 목숨보다 김상희가 더 귀해.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해.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거. 이미 예측하고 있었잖아?"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 분께 최상위 강제 명령어를 가르쳐줬다는 그 사실. 보고 올리지 않은 거잖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상희가... 처음 각성했을 때. 그 때 내가 일부러 다른 곳에 있었던 거. 그래서 상희의 각성을 그분께 알리지 않았던 거. 그것도 눈 감아줬잖아.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크리스가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에서도 김상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행복해야 해." 모르겠다. 그 분은 김상희에게 분명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예전부터. 그 분은 김상희를 계속해서,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 "네가 행복해야..." 작았던 불꽃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행복하니까." 아무도 없는 곳. 아무도 모르는 곳. 어두운 밤. 깊은 산 속. 그 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다음 번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땐,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았다. 김상희가 보고 싶었다. 김상희랑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이제 거기에선 백제 왕자같은 거 말고." 백제 왕자같은 거 싫다. "고려 공주같은 거 말고."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힘. 그런 거 다 필요 없이, "우리 둘만 있는 곳에서 평범하게..." 시뻘건 불길 속에 시커먼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그림자가 풀썩 쓰러졌다. "거기서 행복하게 살자." 그 불은 유난히 뜨겁고 유난히 붉었다. "그러니까 그 땐 날 선택해주면 좋겠어." 내가 더 행복하게 해줄게.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은 놈이 되어서 너한테 다가갈게."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사랑해." 마지막 그 말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대륙 전역을 강타했다. ============================ 작품 후기 ============================ 슬슬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은 건 제 착각이겠죠...? 0169 / 0192 ---------------------------------------------- 마지막 할 말 *** 대륙 전역이 믿을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최근 주가를 톡톡히 올리며 신흥 강자이자 차기 제국으로 거론되고 있을만큼 강력한 왕국인 신라왕국이 단 하룻밤사이에 궤멸됐다. 신라왕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라왕국은 극서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극서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진행 방향을 살펴보면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저희 고려왕국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들은 마치 대륙을 제 집 안방인 것처럼 마구 휩쓸고 다녔는데 그 위세가 엄청나서 아무도 막지 못한다고 했다. "이 진군속도가 계속 이어진다고 하면 1달 이내에 국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소속은?" "알 수 없습니다." "규모는?" "프리온 나이트 최종형태 약 3000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실감조차 나지 않는 그 숫자에 김훈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가 3000기란다. '백제가... 온다.' 갑자기 백제가 왜 이렇게 전면에 나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지껏. 아니 적어도 역사가 기록된 수천년 동안은 숨을 죽이고 있지 않았던가.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지?' 김훈상이 김상희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김상희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가 널 그렇게 두렵게 만들지?" "저는..." 그리고 김훈상은 김상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했다. "무슨 일이든 좋으니. 말해봐라." "크리스가..." 김훈상은 김상희의 말을 들었다. 크리스가 찾아왔다. 최상위 명령어니 뭐니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늘어놨다고 했다. 하지만 김훈상은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크리스. 네 놈은... 죽음을 선택했겠지.' 저번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그 놈은 시체를 완전히 없애야 완전히 죽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딸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했겠지.' 분명히 그랬다. '그렇게 따진다면 크리스는 백제왕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그는 백제의 왕자라고 했다. 백제에 왕자가 몇이나 있는지 알려진 건 없었다. 다만 그가 만약 정말로 백제의 왕자라면. 어쨌거나 그는 백제왕의 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너는... 내 딸을 정말로 사랑했던 거냐.' 크리스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백제왕은 그 죽음에 분노하여 대군을 일으켰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크리스는 분명 특별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철통같은 경계를 자랑하는 고려왕궁에 아무렇게나 침투할 수 있었을 리 없다. 3차 각성을 끝마친 그 자신이나 한진수조차도 크리스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지금으로썬... 이게 가장 합당한 얘기겠군.' 상황판단은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좋았다. 백제는 지금도 이 곳을 향해 계속하여 전진하고 있다.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 쪽의 숨통을, 조금씩 조금씩 끊어놓기 위해서. 김훈상이 말했다. "만약에 말이다." "...네?" "네가 내 딸이 아니었으면 지금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 김상희는 김훈상을 올려다봤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딸의 모습을 또 눈에 담았다.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그도 몰랐다. 자신이 딸을 이렇게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올지는. "만약 내 딸이 아니라 다른 놈의 딸이었다면." 김훈상이 김상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묵직하고 커다란 손이 김상희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무거워요, 아빠." "그랬다면 나는 정말 불행했을 것 같다." 김상희는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이해는 했지만 구태여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내가 아니라 다른 놈이었다면." 김훈상이 스스로에게 말하듯 읊조렸다. "너를 지켜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예전에도 말했다. 나는 너를 지키는 자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너를 놓지 않겠다. 그러니까." 김훈상이 김상희를 살짝 끌어안았다. "두려워마라. 무서워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김상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솔직히 김상희는 하루하루가 너무 무섭다. 자신이 흔들리면 한진수가 또 불안해할까봐 티를 별로 못 냈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한진수는 불안해하지 않을 거다. 두려워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이 말을, 어쩌면 김훈상이 아닌 한진수가 해줬을 수도 있다.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아.' 하지만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그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모르겠다. 말하고 싶기도 했다. 나 무섭다고. 나 무서우니까 나랑 같이 있어 달라고. 나 좀 지켜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랬다가도 또 말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했다. 복잡했다. 이 마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김훈상이 또 말했다. "만약에 말이다." 김훈상의 체온이 느껴졌다. "내가 다시금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땐 왕 따위는 하지 않겠다." 왕 같은 거 필요 없었다. 왕이라서 제약이 너무 많다. 왕이라서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건 왕관이다. 나는 왕이다.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나는 왕으로서. 반드시 놈들을 막아낼 것이다." 김상희와 눈을 마주쳤다. 김상희는 그제서야 발견했다. 언제나 젊어 보이고 강인해 보이기만 했던 김훈상의 얼굴이, 조금 안 되어 보였다. 자신에게 내색은 전혀 안하고 있지만 많이 수척해졌다. 그가 말하는 왕관의 무게. 그게 많이 무겁고 힘겨운 듯 했다. 김훈상도 늙기는 늙는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몰랐지만,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다시 말해. 예전보다 조금 늙었다. 김훈상은 생각했다. '왕관의 무게보다...' 김상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 아이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고 싶었다. 이 아이는 과연 알고 있을까. '아버지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는 걸.' 김훈상이 말했다. "백제가 아니라 백제 할애비가 와도, 네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 칼리번이 말했다. "왕님. 저희 어떡하죠?" 신라왕국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들이 모두 죽었다. 병력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마저도 모두 죽었다. 그들. 그러니까 최근 '사신'이라 불리고 있는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미 한 마리 남지 않고 있었다. "저희가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막아내야만 한다." 아니. 솔직히 도망치고 싶다. 김상희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숨어서 살고 싶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김상희를 두고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다. 까짓 거. 죽는 거 어렵지 않다. 만약에라도 김상희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줘.'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 죽음은 전혀 무섭지 않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김상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거.' 그건 그에게 너무나 큰 형벌이었다. '그게 너무 무섭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신라의 백성들이 도륙 당했다. 늑대들도 무려 10명이 죽었다. 칼리번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새끼들을 어떻게 족치죠? 내가 그 새끼들 전부 안 죽이면 고추 떼고 말 겁니다." "우리는... 아르놀드 만에서... 그들을 친다." "에이. 설마요." 아르놀드 만. 부채꼴 형태로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고려의 서쪽에 위치한 만의 이름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바다였을 거라 짐작이 되기는 하는데, 지금은 굉장히 거대한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인 아르놀드 호수의 가장자리라고 이해하면 편했다. 문제는 그 곳은 허허벌판이며 대규모 화력전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곳이라는 것. "거기 최종형태 프리온 나이트가 3천기나 있다니까요?" "우리에게도... 프리온 나이트가 있다." 한진수도 최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김환석이 프리온 나이트 개발에 성공했다. 핵심이 되는 부품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조만간 곧 완성이 된다고 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진군 속도를 10일 정도 늦추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프리온 나이트가 완성된다고 했다. 원래는 500기 생산 예정이라고 했었는데 무리를 많이 해서 1500기까지 생산을 늘린다고 했다.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추가되면 해볼만한 싸움이 되겠지." 크리스같은 괴물이 또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 말은 삼켰다. 장수로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만 하는 건 맞지만, 지금 당장 말할 필요는 없었다. 게릴라전. 워프를 익히고 있는 이 쪽에는 최고의 전술이지 않은가. 한진수가 김상희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 말리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그냥 내 옆에 있어주면 안 되냐고. 땡깡도 부려보고 싶었다. "응." 하지만 속마음을 숨겼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싫었다. 지금 한진수는 시간을 끌러 출전하는 거다. 10일 정도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아마도 이를 악물고 싸울 거다. 어쩌면 한진수가 죽거나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자신이 따라가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이번 전투는 게릴라전이 될 거다. 김상희를 데리고 다니면 기동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한진수의 약점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컸다. 일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나 두고 어디가면 절대로 용서 안 할거야." 한진수가 말했다. "약속할게." 나 너 두고 절대로 어디 안가. 한진수가 김상희의 입에 입을 맞췄다. 김환성이 투덜거렸다. "작작 좀 하지?" 그리고 한진수를 살짝 밀치고선 볼을 내밀었다. "자. 나도 얼른. 나도 싸우러 갈거란 말이야." 얼른 뽀뽀를 내놓아라, 라고 강렬하게 주장하는 듯.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건드렸다. 한진수가 찔끔 놀랐다. "형님...?" 고려의 왕자. 그것도 3차 각성을 끝마친 왕자가 게릴라 전에 함께 투입된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물론 엄청난 전력이 되기는 하겠지만. "야. 반론은 안 들어. 나는 너가 콱 죽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러면 내 똥개가 슬퍼한단 말이야." 인상을 찡그리고 계속 투덜거렸다. "네가 죽는 건 신경 안 쓰지만 내 똥개가 슬픈 건 짜증나니까." 그러다가 이내 킥킥대고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 그동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세계 최강의 군대라니." 이거 정말 재미있겠어! 싸울 맛 나겠어! 하고 혼자 신나했다. 하지만 김상희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김환성도 사실 지금 딱히 내키지 않아하고 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일에, 그 누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겠는가. 김환성이 밝게 말했다. "그 놈들 얼른 때려부수고 내 똥개한테 물어왓이나 시켜야지." 김상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울어서는 안 돼.'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무엇을 해야. 고려를 위해. 아니. 이제는 가족이 되어버린 이들과 사랑하는 한진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김환성이 말헀다. "자! 그럼 출발! 똥개. 너는 어디 아프지 말고 잘 있어. 재미있게 싸우고 올 테니까." 뒤돌아서서 이를 악물었다. 그의 표정은 더이상 밝지 않았다. '백제 이 개새끼들!' 내 똥개 눈에서 눈물 나면, '네 놈들 눈에선 피눈물이 나게 해주겠다.' 아니. '피똥싸게 만들 거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단체 치질 걸리게 만들어서 똥구녕을 다 헐게 만들어 주겠다고!!! 피똥 줄줄 흐를 각오나 하시지!!!" 이 말을 하기 위해 여태까지 뜸을 들였다. "내 똥개는 내가 지킨다!!!" ============================ 작품 후기 ============================ "내 똥개는 내가 지킨다!!!" 이거 한 마디 할라고 엄청 긴 말 했다 합니다 0170 / 0192 ---------------------------------------------- 성녀. 기적의 빛을 뿌리다. *** 한진수와 김환성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서쪽 방향으로 향했다. 그 사이 김환석은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지금 고려가 준비하고 있는 비장의 카드는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다. 전 세계 각지에서 계집들을, 티나지 않게 납치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김환석은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도 안다. 이 일이 그렇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원래대로라면 옳은 일이 맞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 여동생인 김상희가 있는 지금. 이건 틀린 일이라는 걸. '나는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백제의 대군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군해오고 있다. 그들을 맞이할 수 있는 병력이. 지금 고려에는 없다. 그래도 고려는 역시 최강국이다. 그들의 진로상에 있는 국가들이 연합하여 고려로 힘을 보태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힘을 합쳐서 백제를 막는다고는 해도... 그래도 역시 힘들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다. 그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프리온 나이트를 만드는 것뿐이다.' 그리고 한진수와 김환성이 좀 더 정밀한 데이터를 보내올 거다. 그들이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들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면서, 이 쪽이 보다 면밀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내 동생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알았다.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세뇌를 하는 거. 이거.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버님께선 악마가 되겠다고 하셨지만.' 그건 김훈상만의 각오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악마가 될 각오가 되어있다.' 김상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생을 지키고 싶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의 비명을 외면하기로 했다. 얼마 뒤. 한진수와 김환성이 보고를 하나 올렸다. ***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라." 분명히 그렇긴 하다. 그러나 약간 달랐다. "크리스 정도의 능력을 가진 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라." 그건 다행이었다. 크리스의 능력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크리스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프리온 나이트가 분명... 한 개체 이상은 있을 거다. 그 개체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 어쩌면 3차 각성을 끝마친 상태라고해도 상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예전에 크리스가 넌지시 알렸던 적이 있다. 크리스 말고. 크리스와 다른 세력이 있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히 그랬다. '그 놈은 결국 나나 한진수. 아니면 환성이가 맡아야겠지.' 김훈상은 피식 웃었다. '나는 악마다.' 수많은 계집들을 잡아서 부품으로 사용했다. 김상희가 만약 알게 된다면 자신의 혐오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너무나 무서웠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찾았다. "...울었냐?" 김상희가 대답했다. "아니어요. 소녀는 씩씩해요." "내 앞에서 강한 척하지 마라." 김훈상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신의 왼 쪽 가슴을 매만졌다. 이상했다. 심장이 쿵! 하고 어디론가 떨어져 버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나 많이 슬픈 거냐?' 그래서 한진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거기서 죽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왜 내 딸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냐고. 멱살을 잡고 따질 것이다. "너는 내 앞에서 강할 필요 없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라.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라. 지치면 지친다고 말해라. 힘들고 지칠 때에, 낙망하고 넘어질 때에. 그 때 내가 네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김상희는 이제 개차반을 더이상 개차반이라고 부를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김훈상의 진심이 절절히 와닿았다. 자신이 슬퍼하고 있자, 김훈상이 더욱 슬퍼했다. 그게 느껴졌다. 지구에서의 어머니, 아버지라고 해도.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 계속 해왔던 그런 연기가 아닌, 진짜 속마음을 드러냈다. "...고마워요." "......." "고마워요, 아빠." 김상희는 요즘 아주 많이 운다. 가만히 있다가도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고, 물을 마시다가도 울고, 샤워를 하다가도 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지금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향했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 떠나는 모양새가 마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모양새였었다. '왜 내 주위의 사람들은 이렇게 힘든 걸까.'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 돌이켜보면, 정말 불행하지 않은가. 전생에는 칼에 찔려 죽었다. 여기서는 피가 말려 죽을 것 같다. '내가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신이 만약 정말로 있다면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 거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멱살이라도 붙잡고. 나 좀 행복하게 살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냐고. 제발 나 좀 내버려두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김훈상이 말해줬다. "한진수와 김환성은 무사하다고 한다." 프리온 나이트에 대한 정보들도 실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들은 스스로의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다." 한진수의 경우와는 약간 달랐다. 한진수가 가진 프리온 나이트의 경우. 한진수가 패널을 통해 조작한다. 하지만 이 프리온 나이트들은 마치 사람처럼 움직였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것들이 프리온 나이트인지, 아니면 인간인지. 구분할 수는 없겠군." 인간보다도 훨씬 더 강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편의상 프리온 나이트라고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착실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빠..." 김상희는 김훈상에게 안겼다. 예전처럼 가식이 아니었다. 가식이나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의지를 하고 싶어서 김훈상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그래서 일부러 안겼다. 김훈상의 품은 굉장히 따뜻하고 넓었다. 그래서 불렀다. "아빠..." 아빠라는 그 이름. 이렇게 진심으로 불러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지구의 진짜 엄마, 아빠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엄마. 아빠.'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미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김상희는 이 곳이 좋았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그래도 이 곳이 좋았다. '이렇게 더러운 세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이 곳에는 개차반이 있고 망나니들이 있고. 그리고 한진수가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한진수와 이 한진수의 차이와 경계가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하여튼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이 한진수였다. 속 나이야 어찌됐든. 그녀는 어려졌다. 아무리 속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지금 김훈상의 딸이었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안겨있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아빠. 나 지금처럼 아빠한테 안겨도 돼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요? 나 지금처럼 못난 모습으로 울어도 돼요?" 김훈상이 말했다. "정말 멍청한 계집이구나 너는." "......." "너는 숨을 쉴 때. 공기의 허락을 맡고 숨을 쉬는 거냐?" "......." "지극히 당연한 일에 일일이 허락을 구하지 마라. 네 질문은 오히려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나를 모욕할 셈이냐?" 김상희는 김훈상의 품에 안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났다. 김상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가보겠어요." 소식을 전하러 왔던 알렉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 공주님. 가끔 이렇게 과감해질 때가 있다. 알렉스는 상희학을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가끔 김상희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공주님. 위험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저희와의 동맹을 요청한 이들이지만 저들 중에 공주님을 노리는 세력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한진수 국왕이나 김환성 왕자님도 없는 상황 아닙니까?" 김상희의 능력은 이미 밝혀진 상태다. 지금은 전쟁시국이다. 고려의 힘이 지금 분산되어 있는 상태.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김상희를 노린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 분명히 그렇다. 가능성 자체가 높지는 않다. '하지만 그 아주 작은 가능성조차도... 상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100퍼센트만큼이나 위험한 것이지.' 김상희 공주에게 아주 작은 위협이 되는 것. 그것은 상희학의 관점에서 매우 큰 위협처럼 인식이 된다. "제가 가서 큰 힘이 된다면. 저는 그렇게 해야겠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게 좋았다. 지금 세계 각지의 군대가 고려로 집결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백제와 싸우기 위하여. 하지만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들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선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고 힘을 합치고는 있지만.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데 병력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어쨌든 그들은 성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백제 군사의 힘을 봤다. 프리온 나이트 부대. 그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에겐 성녀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사실상 성녀. 그건 너무나 추상적이고 해괴하지 않은가. 고려에서 날조한 헛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상 그 소문은 거의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페르가나 미라클과 같은 것이 제조되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곧 성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니까. 성녀의 능력이 워낙에 믿기 힘든 것이다보니 직접 보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는 거다. 고려 왕궁 내의 사람들도 처음에 못 믿었다. 외국인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훈상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성녀의 존재가 커다란 힘이 되겠지. 사기 충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어려운 시국. 세계 최초일지도 모를, 여자라는 성을 가진 영웅의 등장. 분명히 좋기는 좋다. 하지만 그 영웅이 하필이면 내 딸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세계 각국의 군대가 모여들고 있는 상황. 김상희의 능력을 노리고 있는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 김상희는 가진바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무력 자체가 강한 건 아니지만. '김상희의 얼굴을 알리면...' 그러면 위험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거다. 평생 쫓아다니면서 보호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싫다.' 하지만 김상희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김훈상 역시 그 말에는 동의했다. 왕으로서는 그 말에 분명히 동의하고 있는데, 아버지로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계집의 몸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미천한 계집이지만... 전쟁에 있어서 사기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답니다." "......." 김훈상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말릴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음속에서 왕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계속해서 싸웠다. "저의 존재가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된다면, 저는 반드시 그래야만 해요." 시간이 흘렀다. 김훈상은 결국 허락을 내렸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군대들 앞에.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많은 군인들이 지쳐있는 상태다.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고려를 향해 전속력으로 후퇴. 아니 도망을 쳐왔으니까. "저 계집이... 성녀라고?" "고려측의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녀라는 게. 진짜 있는 걸까. "그래도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온 걸 보면... 뭔가 있기야 있겠지." 어떤 이들은 기대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기대하지 않았다. 성녀라는 건. 그냥 고려의 외교력과 우상화를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나는 솔직히 믿지 않아.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성녀같은 거.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 "다 좋으니까 그냥 따뜻한 방에서 잠이나 좀 자고 싶다. 피곤해 죽겠어." 그렇게 생각할 무렵. 성녀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저는... 고려의 제 1공주. 김상희 공주입니다." 마이크를 타고서, 김상희의 목소리가 거대 연병장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여러분들께는 성녀라는 이름으로 많이 소개가 되었겠지요." 김상희도 안다. 이들 지금 많이 지쳐있다. 자신을 불신의 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한 번 보는 것이... 백 번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어.'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그걸 해야만 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진수도... 망나니도.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도. 나도 최선을 다해야만 해. 집중했다.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 누가 그런 권리를 줬다고는 말 못한다. 하지만. '아니. 행복해지고 싶어.' 큰 거 바라지 않는다. 그냥 진수랑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그것을 위해. 지금은 그 것을 위해 달려가는 과정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성녀니까!' 김상희의 몸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됐다. ============================ 작품 후기 ============================ 이제 김상희도 자기 마음 많이 인정했다 합니다 0171 / 0192 ---------------------------------------------- "이것이... 제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 "저 쪽으로 집결하시면 됩니다." 고련 나이트의 안내를 받아 브레든 왕국의 군사들이 이동했다. 고려 국경까지 힘든 길을 걸어왔던 브레든 왕국의 군사들은 탈진 직전이었다. 그냥 군사들만 왔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브레든 왕국의 국왕은 국민들을 데리고 후퇴했다. 말이 좋아 후퇴지 사실상 고려로 도망쳐왔다. 혼자서 도망치는 것도 힘든데, 국민들을 데리고 후퇴하는 건 더더욱 힘들다. 그 사이 많은 주장이 있었다. 지금은 애들이나 남자들을 챙길 때가 아니라고. 그냥 버리고 우리끼리라도 도망치자고. 하지만 브레든의 국왕은 그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국민들을 데리고 피난가는 것. 정말 쉽지 않다. 밥 한 끼를 먹어도, 1인분 지을 것을 5인분 이상 지어야 하니까. 기동력 역시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브레든의 일반장교 푸앙은 자리에 주저 앉았다. "너무 힘들다..." 고려 왕궁 내. 대 연병장에 지금 병력이 포진되어 있는 상태. 이들을 위한 임시막사나 거처가 마련 되어 있기는 했지만 시설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불평을 말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자신들은 타국의 군대고,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한 곳에 몰아두고 감시 혹은 통제를 해야만 했다. 도망쳐온 입장의 자신들이다보니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었다.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만치 앞. 어떤 여자가 있는 건 보인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눈에 보이기는 보이되, 말 그대로 눈에만 보였다. 머리로는 제대로 인식 못했다. 몸이 너무 힘드니까.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요상하기는 했다. '성녀...?' 성녀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기는 한데 사실상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배고프다.' 배도 고프고 힘도 없다. '쉬고 싶다.' 침대가 그리웠다. 마이크를 타고 어떤 계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제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김상희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김상희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명만이 가능한 일이다. '나만 가능한 일이야.' 이제 힘은 각성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해서 끌어올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비록 거창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줘야 해.'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줘야 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지금 고국을 등지고 이 곳으로 집결했다. 명분상 지금 대륙을 휩쓸고 있는 사신들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마로서, 고려에 집결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냥 도망아니던가. 브레든 왕국과는 달리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친 왕들도 많았다. 이들에게는 지금 희망이 없었다. 사기가 땅 밑까지 추락한 상태다.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지금. 바로 여기. 그녀 스스로가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야.' 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수는 지금 진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다. 10일의 시간을 끌기 위해서. 고작 10일의 시간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지금 전선에 뛰어든 상태일 거다. 진수가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김상희를 위해서. 김상희를 지키기 위해서. 김상희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만약 김상희를 생각하지 않을 것 같으면 혼자서 편하게 살면 그만이다. 대연병장에 모인 사람들이 윗 쪽을 쳐다봤다. "어라...?" 김상희의 몸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들이 알기로, 계집이 몸을 띄울 수는 없었다. 계집들에게는 마력이란 것이 없으니까. 뭔가 있기는 있구나 싶었다. "저, 저길 보십시오." "성녀의 몸이 빛나고 있습니다." 김상희 쪽으로 이목이 집중 됐다. 김상희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는 건... 기적이 아닙니다." 하얀 빛이 증폭됐다. 그리고 그 하얀 빛이 마치 아침햇살처럼 고르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 빛을 기적의 빛이라고. 하지만 김상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여러분께 기적을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몇몇은 생각했다. 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저렇게 생쇼를 하는구나. 그래서 기적이 아니라고 지금 이렇게 약을 치는구나. 분명 그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분께 희망은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상희는 안다.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단어가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희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서 얼마나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전 세계의 여자들이 그랬다. 자신을 희망으로 삼는 수많은 여자들을 봤다. 그들의 삶은 희망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완전히 달랐었다. 김상희가 흩뿌린 그 기적의 빛이 지치고 고된,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몸을 봄비처럼 적셨다. "아..." 그동안 무성했던 소문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럴 수가..." 브레든 왕국의 일반장교 푸앙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건 도대체..." 푸앙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푸앙을 비롯한 수많은 남자들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몸을 만져보는 남자들도 있었다. "이게... 기적...?"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군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인은 모두 남자다. 남자는 마력을 운용한다. 마력을 통해 자신의 신체 컨디션을 정확하게 파악하곤 한다. 신체야말로 그들의 자산이니까. 그렇다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 두명이 아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수 천. 아니 수 만. 아니 수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지금 같은 현상을 보고,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건 사기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사기일 수가 없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 그들 스스로가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것이... 성녀의 진짜 능력..."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게 됐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그동안의 소문. 모두가 진실이었다. 브레든 왕국의 푸앙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대병력을 일순간에 최상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기적이라니.' 성녀는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푸앙에게는 충분히 기적이었다. 이건 기적이란 말 말고, 다른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저 여자가... 성녀..." 이제는 감히 '계집'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눈앞에서 이런 기적을 봤다. 이런 기적을 일으킨 여자를 어떻게 '계집'이라고 깎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때부터, 고려에서 미리 심어둔 바람잡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헀다. 전쟁에는 수많은 요소가 포함된다.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에는 약간의 연극도 필요한 법이다. "김상희 성녀. 만세...!" 한 명.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또 한 명.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 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람잡이들이 그렇게 했지만, 곧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국을 버리고 도망쳐온 이들이다. 이들이 지금 김상희를 통해 희망을 얻었다. 김상희만 옆에 있으면 불사의 군대가 될 수 있다.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상희 성녀 만세! 수 만명이 넘는 병력이 동시에 김상희의 이름을 외쳤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고려 왕궁 내에, 무려 '남자'들이 '여자'를 부르며 환호하고 만세를 외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김상희 성녀 만세! 기적을 눈 앞에서 목도한 그들은 더이상 김상희를 계집이라 부르지 못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김상희는 성녀였다. 김상희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기분. 이상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를 바꾸겠다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그것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다. 이 세계를 바꾸고는 싶은데 그럴 힘이 자신에게는 없었으니까. 지금이야 성녀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계에서 그녀는 철저한 약자였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려라는 든든한 배경이 뒤에서 버텨주지 않았다면, 고려왕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도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 제국 혹은 어디 다른 곳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고 있었겠지. 아니면 프리지아처럼 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수야.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아...?' 세상을 바꾸는 거. 그건 자신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진수와의 행복이 더 중요해졌어.' 그렇게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나 너무 이기적인 년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거보다 진수랑 행복한 게 더 중요해졌다. 그러나 김상희의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이미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중이다. 수페르가와 미라클에 이어 대규모 기적발현까지. 그녀가 조금씩 익숙해져서 그렇지, 계집을 연호하는 나이트들. 원래대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다. '나도...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큰 거 욕심내지 않으니까. 김훈상은 딸을 쳐다봤다. 저번에 이런 대규모 기적 발현 후에 쓰러졌었다. 오늘도 아마 그럴 거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 된다면,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땐 왕관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부. 명예. 권력. 모두 다 가져봤다. 그거 다 가져보고 나니까, 이제 정말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김상희. 네가 없었다면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었겠지.' 아마도 고려를 좀 더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 불철주야 노력을 하고 있었겠지.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네가 알게 해줬다.' 공중에 떠있던 김상희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김훈상이 직접 딸의 몸을 받았다. 사실 김유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김유신은 순간 엄청난 살기를 느껴야만 했다. 직접 들은 건 아닌데, '내 딸의 몸에 손 대지 마라!' 라는 환청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훈상은 김상희를 안아 들었다. 김상희의 얼굴이 보였다. 저번에는 완전히 시체같더니, 지금은 좀 바뀌었다. 잠에 빠져든 모습이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이 아이가 바라는 건 그저 사랑하는 남자와의 행복한 삶일 뿐인데. 세상이 이 아이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네 행복은... 내가 지키겠다.' 그리고 3일 뒤. 김환성이 왕궁으로 복귀했다. 제 발로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워프가 가능한 스페셜 나이트 하나가 김환성을 데리고 복귀했다. 그는 김환성을 안은 상태로 외쳤다. "성녀님! 성녀님 어디 계십니까!" 회복의 관 관장. 미첼이 그 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김상희 성녀님을 찾아야 합니다!" 미첼도 발견했다. 지금 김환성. 혼수상태다. 3차 각성을 끝마친 김환성이 피떡칠이 되어 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다. 미첼이 다급히 말했다. "어, 얼른 회복의 관으로...!" 나이트가 말했다. "필요 없고, 김상희 공주님 어디 있냐고!!!" 회복의 관 관장 미첼은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회복의 관 최고의 권위자다. 성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최고의 의료기관 최고의 권위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자존심은 자존심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미첼마저도 이렇게 생각했다. '김상희 공주님을 어서 찾아야 해.'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난 못 해.' 거의 시체나 다름 없지 않은가. '난 못 해. 이건 상희 공주님 줘야 돼.' 그 쯤 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부상당한 왕자님 치료를 맡았는데, 왕자님이 죽는다? 그러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김상희 공주님이 계셔서 다행이야.'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트는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기록의 관으로 직행한 것 같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이 쯤 되니 자신의 존재의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나 실직하는 거 아냐?' 좀 무서워졌다. 아무래도. 노후 계획을 열심히 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기록의 관. 김상희의 방. 잠에 빠져들어 있었던 김상희를, 누군가가 거칠게 깨웠다. "김상희 공주님!" 김상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발견했다. 피칠갑이 되어 있는 김환성을. 김상희가 벌떡 일어섰다. "오빠!" 순간, 김상희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런 김환성의 모습 처음 본다.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말도... 안돼!' 반 쯤 시체가 된 김환성을 봄과 동시에 김상희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진정한 의미의 "이것이... 제가 성녀인 이유입니다." 파트였네요. 0172 / 0192 ---------------------------------------------- 드러나는 정체 *** 김상희가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쿵쾅대고 뛰었다. 내 똥개는 내가 지킨다! 라고 큰소리를 땅땅치면서, 이번 싸움 되게 재미있겠다고 설레하던 김환성이다. 그 김환성이 막상 거의 반 쯤 시체가 되어 실려오자 김상희는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망나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김상희의 몸에서 하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이내 김환성의 몸에 흡수 됐다. 김상희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 하얀색 빛무리가 김환성을 보드랍게 덮었다. 그리고 조금씩 몸에 스며들었다.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김환성의 몸도 변했다. 여성화가 진행 됐다. 그런데 김환성이 눈을 뜨지 않았다. "...오빠...!" 도대체 왜 일어나질 않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김상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개차반과 망나니. 그들은 원래 공포의 대상이었고 또한 조련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았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나 조련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그녀에게 가족이었다. "어서 눈을 뜨셔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김환성이 이렇게 무참하게 당한 것도 처음이고, 성녀의 힘을 사용했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처음이다. 어떻게 해야할 지. 뭘 해야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회복의 관 관장 미첼은 안경을 고쳐썼다. '저 왕자님...' 저 왕자님 뭔가 수상하다. '분명 깨어나셨는데...?' 그 증거로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다. '설마 공주님께 안겨있는 게 기분 좋아서 저러나...?' 아니. 그럴 리는 없지. 그럴 리는 없을 거야. 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의 이성은 말해주고 있었다. 저 왕자님. 지금 중상을 입었던 것을 핑계로 김상희 공주님에게 안겨있다. 미첼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회복의 관 관장으로서 자존심을 좀 세울 때가 됐다. "왕자님은 이미 완벽하게 회복되셨습니다. 제 소견에는 분명히 그렇군요." 좋아. 나의 이 마력 스캔을 통한 환자의 상태 파악. 이 능력은 김상희 공주님이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분야지. 이래봬도 나는 회복의 관 관장이라고. 하고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는데, "아씨. 너 진짜. 죽을래?" 라는 김환성 왕자의 말이 들려왔다. 김환성은 지금 매우 기분이 나빠졌다. "예?" 미첼은 황당해졌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짚어주는 것이야말로 의사의 본분 아니겠는가. 그는 본분을 다했을 뿐이다. 하지만 왕자님께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하고 되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 저, 그게 그러니까..." "너 때문에 망했잖아." 그니까 뭐가 망했다는 겁니까? 지금 죽기 직전으로 실려와서 어떻게든 살아났는데, 뭘 어떻게 하면, 뭐가 망했다는 거죠? 미첼은 묻고 싶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따지고 싶었다. 지금 살아나서 기쁘다고 덩실덩실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김상희가 버럭 소리 질렀다. "오빠!" 김상희도 이제 상황은 파악했다. 김환성이 아무래도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어... 똥개. 너 왜 그래?" 김환성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미첼을 향한 그의 표정이 분노의 표정이었다면, 지금 그의 표정은 약간 공포를 느낀 표정이랄까. '이, 이거 뭔가 감이 안 좋다!' 감이 안 좋았다. 김상희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그 주먹을 들어 김환성의 가슴을 퍽! 쳤다. 정말로 퍽! 소리가 났다. 미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 미친...!'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왕자의 허락 없이 어떻게 왕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감정실린 주먹이라니. 미쳤다. 이건 미친 짓이다. 분명 미친 짓인데, 이건 김환성이 허락해준 미친 짓이다. 생각해보라. 싸움에 관한한 세계의 대천재인 김환성이 김상희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 그런 거 절대 아니다. 당연히 일부러 맞아준 거다. 김환성은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고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미첼은 점점 더 황당해졌다. '저게...아프다고...?' 일부러 마력을 회수하지 않는 한, 마력은 남자의 몸을 자동으로 보호한다. 김환성쯤 되는 인간은, '덤프트럭으로 밀어도 멀쩡할 사람인데...?' 덤프트럭은 고사하고 덤프트럭 안에 들어가는 바퀴. 그리고 그 바퀴 안에 들어가는 조그만 나사 정도되는 주먹으로 맞았는데 저렇게 아플 리가 없지 않은가. 김환성이 엄살을 부리며 여전히 바닥을 굴렀다. "아이고. 나 죽네!" 미첼은 깨달았다. '저 왕자님. 뭔가 필사적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필사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환성은 지금, 거짓말을 약간 보태자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김상희가 자신을 노려보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러다가 미움받게 생겼다. 그래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고자 아픈 척을 했는데, "오빠. 안 아픈 거 다 알아요." 씨알도 안 먹혔다. "어...어?" 김환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아픈 거. 들켰다. 젠장. 내 연기는 완벽했는데. "어떻게 그런 걸로 장난을 칠 수가 있어요?" "어...어?" "소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실 작정이어요?" "어...어?" "오빠가 이렇게 쓰러져서 실려오면, 소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죠?" "어...어?" "뭐라고 말 좀 해보셔요!" "어...어?" 김환성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들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나는 오빠인데다가 왕자라고?' 자신이 꿀릴 게 없지 않은가! 어깨를 쭉 폈다. 턱을 높이 들었다. 내가 바로 고려의 왕자다. 이름하여 네 오빠란 말이다. 라고 주장하는 듯 말이다. "너 지금 감히 나한테 큰 소리 치는 거냐?" "오빠가 소녀를 걱정시켰잖아요!" 쭉 펴졌던 어깨가 다시 쪼그라들었다. 턱을 내렸다. 고려왕자 김환성은 급속도로 작아졌다. "어... 그, 그게 그러니까..." 장난 잠깐 친 건데. 김환성은 뒷통수를 긁적거리다가 이내 김상희의 눈가를 닦아줬다. "야. 똥개. 안 그래도 못 생겼는데 자꾸 울면 더 못생겨진다?" "소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김상희도 이제 확실히 알았다. 개차반에 대한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망나니에 대한 마음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이건 연기나 조련이 아니었다. 정말 진심이었다. 김환성이 실려왔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었다. "그니까, 그게... 있잖아. 똥개야." "오빠 말 듣고 싶지 않아요!" 김환성은 황당해졌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라며?' 말이라도 하라고 해서 어떻게든 뭐라도 말하려고 입을 뗐는데, 이젠 말 듣고 싶지 않단다. 나보고 어쩌라고. 그래도 동생이 울고 있는데 또 더 울리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김환성은 나름대로 착했다. 김상희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김상희가 따졌다. "오빠 저한테 할 말 없어요?" "......." 김환성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내 말 듣고 싶지 않다며?'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여자라는 생물체. 아니 여동생이라는 생물체. 뭐가 이리 복잡하고 어려운 프로세스를 가졌단 말인가! '나,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미궁이다. 결국 떠오른 거라곤, "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다.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요?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김환성이 정말로 미궁을 헤맬 것만 같았다. 이쯤 하기로 했다. 빨리 전쟁터로 복귀해야하는 김환성이다. 이런 일로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걱정...많이 했단 말이어요." 작아졌던 김환성이 다시 커졌다. 그랬다. 동생은 자신을 이토록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나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이게 내가 혼자 까불다가 실수를 해가지고... 그래서 조금 다치긴 했는데." "그게 조금이에요?" 김상희는 흥분할 뻔 했다. 반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다. 만약 자신에게 성녀의 능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다시 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환성이 이렇게 당한 걸 보니, 이제 좀 실감도 난다. 정말 어마어마한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걸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해맑게 말할 수가 있는 거야?' 이해하기 힘들었다. 김환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난 세상에서 제일 세." "......." "근데 다구리에는 장사 없더라. 아. 치사하게 여럿이서 공격하잖아. 일대일로 붙어야지." "......." 미첼은 황당해졌다. 지금 저딴 걸 핑계라고 대는 건지. 전쟁에서 일대일이 어디 있냔 말이다. '백제가 엄청나긴 엄청난 것 같군.' 미첼이 듣기로 백제 역시 워프기술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마치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하고 밀려드는 해일처럼 말이다. "하여튼 걱정하지 마.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실수만 안 하면 하나도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말야." 이제 김환성도 개념이 조금 생겼다. 김상희가 제일 궁금해할만한 것을 미리 알려줬다. "한진수도 멀쩡해. 다친 곳도 없고. 그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킥킥대고 웃었다. "한 번 안아보자, 내 똥개." 라고 말했다가 수정했다. "내 동생." 김상희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김환성이 김상희를 끌어 안았다. 시크한 척 했다. "그리고 난 똥개 너 때문에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 아니니까 착각하면 죽는다." "......." "나는 고려의 왕자야. 고려를 향해 침공해오고 있는 쓰레기들, 내가 막는 거. 그거 당연한 거야. 그니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 부담가질 필요도 없어. 알겠냐, 똥개?" "......." 김환성은 그렇게 말해놓고서 민망했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김상희는 멀뚱멀뚱 앞을 쳐다봤다. '지금... 김환성...이었어?' 정말 엄청난 변화다. 김환성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게 될 줄 몰랐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끝도 없는 철부지인줄만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김상희는 깊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잘 잘 수 있을 리 없다. 부상당한 나이트들은 워프를 통해 고려왕궁으로 복귀하고, 김상희가 그들을 치료한다. 전면전도 아니고 기습 게릴라를 펼치는데도, 계속해서 부상자들이 생기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사망자들도 생겼을 거다. 백제 역시 게릴라전에 익숙해진 건지 부상당한 나이트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치료를 받으러 오는 나이트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김상희는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진수야...' 진수도 그렇고 김환성도 그렇고. 많이 걱정이 됐다. 전쟁터에 가족을 보내놓은 그 기분.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제발 무사해야 해.' 새벽 2시가 넘었다. 또 누군가가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김상희는 황급히 일어섰다. 분명히 또 누군가 큰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을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 작품 후기 ============================ 고려왕자 김환성은 급속도로 작아졌다. 얘가 상희 앞이라서 이러는 거지 실제로는 킹왕짱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0173 / 0192 ---------------------------------------------- 드러나는 정체 *** "우리 상희.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네요." 뭐랄까. 나는 이 목소리를 들으면 조금 안심이 된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전에는 나를 따뜻하게 불러주는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었다. 누구냐고? 이름하여 김형석.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이자 유년기 시절을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준 유일무이한 존재. 내 첫째 오빠 형석이다. 오구. 그래. 저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네. "오빠..." 내 마음은 아주 흡족해져서 형석이를 쳐다보고 있지만, 일단 겉으로는 달랐다. 수척해진 얼굴과 시름이 가득한 표정으로 형석이를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참 흡족하단 말이야. 그러고보면 이 희망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만약 내 유년기 시절에 김형석이 없었다면 그렇게 꿋꿋하게 잘 버틸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사실상 형석이의 경우, 나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제국에 볼모로 잡혀 있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남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희망이었다. 이런 사람이 또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예 0인 것과 0.0001은 다른 거다. 어쩌면 나는 형석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첫째 오빠가 말했다. "나는 아직도 상희가 오빠라고 부르면 적응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오라버니는 제가 오빠라고 부르면 싫으신가요?" "아니. 그럴 리가!" 형석이가 내 옆에 앉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라는 호칭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은 건 절대로 아냐." 알아 나도. 김씨 일가들은 오빠와 아빠소리 엄청 좋아하잖아. 솔직히 말해서 망나니, 개차반과 함께 첫째 오빠를 같은 '김씨 일가'라고 표현하면 좀 미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럼 오빠도 오빠라고 부르면 좋은 건가요?" "그러엄!" 형석이가 활짝 웃었다. 저 미소. 볼 때마다 녹는다, 녹아. 형석이는 내 머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이 어깨 높이. 딱이다. 다시 말해 난 지금 반강제적으로 -사실은 매우 자발적으로- 첫째 오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시간과 함께 정적도 흘렀다. 만약 형석이가 아니라 다른 왕자. 그러니까 우리 망나니들이었다면 나는 굉장히 어색했을 거다. 어색하고 불안해서 죽기 일보직전이었겠지. 하지만 형석이는 조금 다르다. 이 정적마저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이 곳을 덮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나는 형석이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댄 채, 이 부드러운 정적을 즐겼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오빠였다. "한진수가 많이 걱정 되니?" "......." 나는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걱정 된다. 그냥 걱정 되는 것도 아니고 아주아주 많이 걱정 된다. 더더군다나 그 강하다는 우리 망나니가 그렇게 반 쯤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었으니 말 다했다. "그래. 많이 걱정 될 거야." 우리 형석이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형석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컸다. "수진. 밖에 있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왕자님. 들어갈까요?" 수진이 들어왔다.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형석이가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받치고 또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 스위치를 눌러줄래?" "네. 왕자님." 우리 형석이는 나 뿐만 아니라 시녀들에게도 평판이 매우 좋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치의 높은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만하지 않고 시녀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지구의 남자와 비슷한, 아니 지구의 남자들보다도 훨씬 젠틀하고 훨씬 매너있는, 그런 왕자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수진의 표정을 보면 딱 보인다. 음. 뭐라고 표현해야 해? 아이돌과의 사랑에 빠진 소녀팬? 아니. 아줌마 팬? 하여튼 대충 그런 느낌이다. 수진이 스위치를 눌렀다. 나는 이 장미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 장미관은 사자관만큼이나 안전한 곳이다. 그리고 최첨단 시설이 모두 갖춰진 그런 곳이다. 내 방이 위치한 곳은 로얄 스위트. 꼭대기 층이다. 다른 말로 펜트하우스라고도 한다지. 하여튼 내 방의 위치는, 일단 온갖 무시무시한 남정네들 -왕자와 나이트-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왜 그렇겠어? 이 꼭대기가 가장 좋으니까 그렇겠지...? 나를 둘러싸고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음... 그렇...겠지? 하여튼 이 방의 위치. 그러니까 꼭대기인 것에는 확실한 메리트가 있다. '이건 봐도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꼭대기가 열렸다. 신소재이면서 엄청나게 특수한 소재인 강화유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하여튼 천장이 그렇다. 미사일이 와도 못뚫는다나 뭐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이 훤히 다 보인다. 장미관의 밤하늘은 밝았다. 내가 말했다. "...예뻐요." 누군가에게 아부하기 위함도 아니고, 김형석에게 감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함도 아니었다. 실제로 하늘은 정말로 예뻤다. 검은색 비단에 반짝이는 별을 총총 박아넣은 것 같았다. 나는 뭔가를 발견했다. "어. 저기. 별똥별이어요." 하얀색 꼬리를 남기며, 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김형석은 이런 내가 귀엽기라도 한 듯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내 머리카락을 따라서,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럼 우리 눈을 감고 소원을 빌어볼까?" "좋아요." 소원을 빌었다. 진수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망나니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빨리 해결 되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형석이가 내 머리를 아주 살짝 톡 쳤다. "3초 훨씬 지났어. 바보야. 소원을 그렇게 많니, 우리 공주님은?" "소녀가 너무 욕심이 많았었나요?" "욕심이 많아도 돼. 아니. 욕심을 맘껏 부리도록 해요." 아. 이 시간. 정말 좋다. 뭐랄까. 힘들고 지친 와중에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진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 한진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정돈한 뒤 말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부상자는?" "중상 3명. 부상 12명입니다." "괜찮군." "중상자들은 장미관으로 이동시킨다." 한진수는 김상희를 떠올렸다. 김상희가 없었다면 이런 작전. 실패해도 진작에 실패했다. 이쪽엔 워프가 있다. 워프가 있어서 중상자들을 장미관으로 후송시킨 뒤 김상희에게 치료받도록 하고 있다. '차라리 나도 다치고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도 많이 다쳤다. 하지만 일부러 가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자기가 다친 걸 보면, 김상희가 슬퍼할까봐서. 내가 아픈 거보다 김상희가 더 아플까봐서. 그래서 다쳐도 자가로 치료했다. 칼리번이 말했다. "대장님도 치료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이제 신라왕 한진수는 없었다. 신라는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백제에 의해 멸망했다. 이제 이 자리엔 신라왕 한진수가 아니라, 게릴라 유격대의 대장 한진수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괜찮다." 이번 작전은 어찌어찌 잘 끝났다. "그건 그렇고 부대장님이 또 난리치고 있는 모양인데요." "또?" 한진수는 이마를 짚었다. 부대장이라함은 곧 김환성 왕자를 뜻하는 말이다. 솔직한 말로 부대장의 위세가 대장보다 더 높다. 대장인 한진수도 김환성에게 쩔쩔 매니까. "이유가 뭔데?" "대장님보다 두 기를 못 잡았다는 게 억울하다네요." 끙... 하고 한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그가 파괴한 프리온 나이트는 총 4기. 김환성이 2기였다. 김환성은 그게 못내 억울한 모양이었다. 김환성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네놈보다 더 많이 부숴버려야 똥개한테 내 체면이 산다고!" 그래서 한진수 자신보다 더 많이 부수겠다고 무리하다가 저번에도 거의 죽을 뻔 하지 않았던가. 김상희가 없었다면 지금 김환성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한진수는 좀 의아했다. '왜 저렇게까지 필사적인 거지?' 그랬다가도 또 이해가 됐다. '내가 만약 상희의 오빠였다면...' 물론 그런 상상 싫다. 그는 상희의 연인이고, 남편이고 싶은 거지. 오빠이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빠라고 상상한다면 김환성의 태도도 이해는 됐다. '그렇다고는해도 저번에는 너무 무모했어.' 물론 덕분에 전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김환성도 조금 몸을 사리기는 했다. '아마 상희에게 엄청 잔소리를 들었겠지.' 한진수의 생각은 사실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고려왕자 김환성이 김상희 앞에서 엄청나게 작아졌었으니까. 김상희가 걱정하던 모습을 본 김환성은 이제 몸을 조금 사리게 됐다. '어쨌든...' 어쨌든 보고 싶었다.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이 곳. 너무나 척박하다. 언제 프리온 나이트와 부딪칠지 몰라서 숨어 다녀야 했다. 당연히 편안한 숙소. 생각할 수도 없다. 위치가 발각될까 싶어 밥도 제대로 지어먹지 못한다. 정말 맛 없는 건량같은 비상식량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다. 배가 고프니 몸에 힘도 없다. 씻지도 못하고 산 속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쪽잠을 자야한다. 하루하루를 긴장속에서 살아가다보니 많이 힘들다. 긴장을 조금이라도 푸는가 싶으면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이 생활. 아무리 한진수라고 해도 괴롭다. 무엇보다도 옆에 김상희가 없다. 몸도 힘들고 정신도 힘들다. 하지만 이런 거.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상희가 별똥별 보는 걸 좋아했었는데.' 심신은 지쳐가지만 그대로 버틸 수 있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지키고 싶다.' 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백제는 결국 고려를 집어삼키려 들 것이고 김상희를 노릴 것이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지키고 싶었다. 지켜야만 했다. '나는 쓰러질 수 없어.'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만 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를 위해서, 그는 지옥에라도 들어갈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내가 지킬게.' 내가 지켜줄게. 그 생각만 했다.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별똥별이 꼬리를 그리며 사라져갔다. '그런데...'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어...?' 뭐지. 이건. 잘 모르겠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풍토가 있던가...?' 없다. 이런 거.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면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이런 거 듣도보도 못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자신은 이러고 있을까. 그리고 이게 왜 이상하지 않을까. '뭐지. 이 이상한 감각은...?' 잘 모르겠다. 뭔가 커다란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이상한 느낌. 오랫동안 간직할 수는 없었다. "대장님. 위치가 발각된 것 같습니다." 한진수가 황급히 명령을 내렸다. "이동한다." *** 김형석이 말했다. "소원은... 다 빌었니?" "네." 김상희는 김형석을 쳐다봤다. 김형석이 빙그레 웃었다.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야? 오빠 얼굴에 뭐 묻었어?" "오빠..." 김상희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야.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런 거야. "말해봐요. 공주님." "질문이 하나 있어요." 김형석은 찬찬히 기다려 주었다. 김상희가 물었다. "이 곳에는... 별똥별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풍습... 없잖아요." 김형석이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곳에는... 그런 게 없었나?" 말이 이상했다. 김상희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곳에는'이라고 했다. 그럼. 그럼 다른 곳이 있다는 소리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김형석이 말했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잘 기억이 안 나네." "......." 김상희의 몸이 굳었다. 이 기분. 익숙하다. 마력이다. 마력 떄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첫째 오빠 김형석은 원래 마력이 없다. 마력석 알론을 섭취했을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그래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걸 거야. 그렇게 애써 생각했다. 김형석이 말했다. "그립네." 김상희는 아무 말도 못했다. 김형석이 김상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지구 말이야." 0174 / 0192 ---------------------------------------------- 드러나는 정체 *** 김형석이 말했다. "지구 말이야." 김상희의 몸이 굳었다. 지구. 지구라는 단어가 나왔다. 지구. 다시 물어보지 않아도 그 뜻은 뻔했다. 이 곳에는 지구라는 단어가 없다. '첫째 오빠가...' 그래. 그럴 수 있다. 애초에 이렇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 자기에게만 일어나리란 법은 없으니까. '지구에서... 왔다고?'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됐다. '말도... 안 돼...!' 김상희가 김형석을 쳐다봤다.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김형석이 빙그레 웃었다. "많이 놀랐니, 우리 공주님?" 안 놀랄 수가 없다. "오빠..." 상상도 못 했다. 김형석이 지구에서 왔으리라곤. 그래도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구에서, 나와 일면식도 없던 사람일 수도 있어. 지구에서 넘어온 사람이라고해서 내가 아는 사람일 리 없잖아. 김형석이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약간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해?" "오빠...지구를... 알아요?" "그럼. 알지. 너랑 같은 곳에서 왔으니까. 하지만 네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나는 네 오빠야." 나는 왜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을까, 김상희는 그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의 그 기억.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단 한번도 말하지 못한 채. 차가운 아스팔트에 몸을 뉘였던 그 기억말이다. 김형석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곳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겪었던 거야?" 김형석이 다시 김상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김상희의, 요동치던 심장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는가. 같은 기억과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건 좋은 거니까. 추억을 회상하며 얘기를 나눌 수도 있으니까. "네.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다시 생각해보면 김형석에게 이상한 구석이 많기는 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세상의 남자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됐다. 지구에서 왔다면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지구에서 넘어왔다고 하더라도 고려의 첫째 왕자로 태어났다면 심성이 변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시녀들마저도 흠모할 정도로, 김형석은 여자들에게 잘해줬으니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환경에 변화되지 않고 자리에 변화되지 않고 꿋꿋이 제자리를 지켰으니까. 새삼스레 김형석이 대단해 보였다. 김형석이 김상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김상희는, 어쩌면 저 눈동자가 한진수의 눈동자와도 많이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오빠. 눈에서 꿀 흐르는 것 같아요." "그래? 겨우 꿀이야? 로얄젤리쯤은 되지 않을까?" 아이참, 오빠도. 하고 김상희는 배시시 웃었다. 같은 곳을 경험했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김형석이 평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오빠는 어떤 삶을 살았어요?" "음." 김형석은 눈을 감았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말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 곳에서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정말요?" 그래. 이런 애기가 재미있는 거지, 하고 김상희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나이를 먹어도, 장소가 달라져도. 남의 연애 얘기는 항상 재미있다. "그 여자는 좋았겠어요." "글쎄." "네?" "그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했었거든." 와씨. 그 유명한, 드라마에서 꼭 사용되는 삼각관계! 그런 거야? 하고 김상희는 이야기에 더더욱 빠져 들어갔다. "그래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어요." 김상희는 원래 그 말 싫어한다. 열 번 찍으면 민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줬다. 그래도 오빠 아닌가. 그것도 착하디 착한 첫째 오빠. 말이라도 이렇게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나는 약간 다른 방법을 사용했어." "어떻게 했는데요?" 김형석이 씨익 웃었다. "죽였어." "...네?" 김상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김형석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칼로 찔렀어." 뭐야. 김상희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느낌. 이 비슷한 느낌. 언젠가 받았던 적이 있다. 바로 크리스의 다른 모습을 볼 때 그랬었다. 다시 보니 이 느낌. 저 미소. 크리스와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던 그 크리스 말이다. 크리스. 여자에게 잘 해주는 남자. 백제. 모든 것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 여자는 죽는 그 순간에도... 그 놈의 이름을 부르더라고." "오빠... 소녀는 지금 오빠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김상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말도 안 돼. 이 얘기. 비슷한 얘기. 어디서 많이 듣지, 아니.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이 것은 어쩌면. 이 것은 어쩌면 자신의 얘기와도 굉장히 비슷하지 않은가. 김형석이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를 리 없잖아. 네 얘기인데." 김상희의 머리에 쿵! 뭔가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상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정하기만 했던 김형석의 목소리가 김상희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한진수에게 사랑한다고... 끝까지 중얼거리더라고. 죽는 그 순간에도 말이야." *** 송수진은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김형석 왕자를 봤다. 그녀는 김형석 왕자를 예전부터 흠모해왔다. 감히 김형석 왕자와 어떻게 잘 될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흠모와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저런 분을 오빠로 모시고 있다니. 정말 행운이야.' 김상희가 또 부러워졌다. '우리 공주님 정도면... 어딜가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흐뭇해졌다. 순간, 꺅! 하고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한데, '잘 못 들었겠지?' 김형석 왕자가 안에 있다. 그런데 무슨 비명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뭐. 장난이라도 치다가 잠깐 비명소리가 났겠지. 송수진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흐뭇해졌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질 법한 남매가 둘이서 꽁냥꽁냥 장난을 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흡족해졌다. 송수진은 공주의 바로 옆 방.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송수진의 생각과는 달리, 김상희는 그렇게 행복하지도. 좋지도 않았다. 김형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일 수 없지?" 당연하다. 마력으로 움직임을 봉쇄당했으니까.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어. 그 여자는 날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그 여자를 죽였어." "......." 김상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럴 때면, 너무나 무력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입은 열리지 않았으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공포감은 물론이고 배신감이 몸을 옥죄었다.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김형석이 김상희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과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부드럽지 않았다. 김상희는 읽을 수 있었다. 김형석의 눈동자 안에 깃든,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욕망을. 이상한 욕망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코와 코가 맞닿았다. 속눈썹이 거의 닿을락말락 했다. 김형석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 여자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얼마 뒤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더라." "......." 김상희의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충격 받았다. "내가 듣기로는 말이야." 김형석이 또 빙그레 웃었다. 눈이 반달모양으로 변했다. 즐거운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모양새로 죽어있었다고 하더라구." "......." "정갈한 밥상을 하나 차려놓은 모양이야." 김상희는 떠올렸다. - 된장찌개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오라고 했었다. 그러나 가지 못했었다. "그 여자의 장례식에 나도 갔었거든. 그 때, 그 남자는 아무것도 못했어. 상주노릇을 하고 있기는 한데 툭 건드리기라도하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거든." 김상희의 귓가에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와? 온다고 했잖아. 나한테 약속했잖아. 금방 올 거라고. 그런데...왜 안와? 왜 약속... 안 지켜?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네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너는. - 너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그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아무래도 거짓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글쎄. 경찰조사에 따르면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해.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놓은 곳에는 된장찌개를 끓였다 짐작되는 재료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다고 해." 김상희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서, 마지막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서 끓이고 또 끓이고, 한번 더 끓였겠지. 솔직히 김상희는 된장찌개의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지만, 한진수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 오늘은 맛이 좀 없네. 다음번에 더 맛있게 끓일게. 응?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너한테 제일 맛있는 것만 해주고 싶단 말이야. 뭐라고? 사먹는 건 더더욱 안 돼. 그건 몸에 안 좋아.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일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수십 번을 새로 끓였을 거다. "그 밥상에 편지를 놓고 연탄을 피웠다나 뭐라나. 참. 재미있는 커플이었지?" 김상희는 울었다. 한진수가 그렇게 죽었단다. 지금 눈 앞의 이 남자가 무섭고 미운 것보다. 그것보다 한진수에 대한 슬픔이 훨씬 컸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너 때문에...' 눈 앞의 이 남자. 이 남자 때문에 내가 죽고 한진수가 죽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피눈물이 흐른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나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에겐 마력이 없었으니까. '움직여. 제발 움직여. 움직이라고!' 소리라도 바락바락 지르고 싶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런 거냐고, 왜 나를 좀 내버려두지 않는 거냐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끝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로,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 김형석이 물었다. "왜 나를 미워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봐?" 그걸 몰라서 묻냐고, 김상희는 진심으로 되묻고 싶었다.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을 뿐이었어. 그건 내 사랑 표현의 방식이었을 뿐이야." 김상희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다. 이 남자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저리 꺼지란 말이야!' 김상희는 비명을 질렀다. 물론 겉으로 소리가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거. 처음 알았다. 김형석이 혀로 김상희의 목을 핥았다. 목부터 시작해서 입에서 흘러나온 그 침을 혀로 핥았다. 끔찍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크리스는 아깝게 됐어. 내 최고의 역작이었는데." 김상희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김형석의 혀가 느껴지자 머릿속이 비어버렸다. 너무나 끔찍해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이 남자가 진짜 첫째 왕자가 맞는지.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나를 대해온 건지. 아니면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중간에 바뀐건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참 오래 참아왔는데. 이제야 좀 판을 벌여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 "한진수와 너는 이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어." "......." "그래서 말이야. 이제 나는 한진수를 죽일 거야." 안 돼! 김상희는 소리치고 싶었다. 눈물만 새어나왔다. 김상희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한진수를 죽일 거고 김훈상을 죽일 거야. 네 주변의, 너를 사랑하는 모든 놈들을 죽일 거야." "......."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돼.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김상희는 계속 울었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된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뭐라도 좋으니까. 내가 다 들어줄테니까.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마. 부탁이야. 제발. 빌 수만 있다면 빌고 싶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 혼자로 족하거든." 김형석이 김상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김상희의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또다시 혀로 핥았다. "그러니까 다 죽일 거야." "........" 김상희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버리고 싶었다. 이 끔찍한 상황.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나 아파왔다.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리고 싶은데 그것 조차도 마음대로 안 됐다. "다 죽이고 난 다음에, 너를 가질 거야." 김상희의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김형석의 손길이 김상희의 겨드랑이까지 닿았다. 김상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 느낌. 소름 돋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갖고 싶지만 일단은 참을게. 네 눈으로, 널 감히 사랑한 놈들이 어떻게 죽는지 봐야 하니까. 그건 꼭 보여주고 싶거든." 그리고 한 마디를 더했다. "특히. 한진수 말이야. 아마 아주 쉽게 죽일 수 있을 거야. 너를 인질로 잡으면, 일은 정말 쉽게 풀리겠지." 김상희의 겨드랑이에 닿은 손을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김상희의 가슴골을 살살 간지럽히듯 만졌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김상희의 오른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김상희는 아팠다. 소리 지르고 싶었다. 김상희의 상태와는 상관 없이, 김형석이 말을 이었다. "나는 널 안을 거야." 또 말했다. "내 아이를 낳도록 할거야. 그렇게 내 씨를 이으면 너와 나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겠지." 씨익 웃었다. "그 때 까지. 잘 봐둬.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훈상부터 시작해볼까?" 0175 / 0192 ---------------------------------------------- 성녀. 진격. *** 새벽 4시. 김상희의 방. 방금까지만해도 말을 할 수 없었던 김상희가 외쳤다.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안 돼!"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안 된다는 거냐?" 심드렁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이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다. 맨 처음 들었던 말이, 또 계집아이라니. 반성하도록 해라. 라고 말했었다. 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이다. 김상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빠. 위험해요!"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아빠. 뒤, 뒤에...!" 지금 당신 뒤에 김형석의 얼굴을 한 무언가가 단도를 들고 서있다고! 왜 그걸 모르고 있냐고! 김상희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단도를 들고, 그 단도를 핥으면서 씨익 웃고 있는 김형석의 얼굴이. 그것도 김훈상 바로 뒤에 서서 웃고 있었다. "위험해요. 아빠. 뒤에. 뒤에 누군가가 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제발. 좀 알아 차리라고. 지금 당신 뒤에 칼을 들고서 서있다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있다고! 김상희는 똑똑히 봤다. 김형석이 지금 입모양으로만 이렇게 말헀다. - 죽여줄게. 제발. 제발 개차반. 알아 차리라고! 뒤에 너를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또 뭐가 널 그렇게 무섭게 만드는 거냐? 내게 말을 해..." 김훈상이 말을 잇지 못했다. 김훈상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방금까지 말을 하던 그 목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목이 김상희의 발에 닿았다. 눈동자는 김상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김상희는 비명을 질렀다. 믿을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그 누구도 감히 상대할 자가 없다는 김훈상이 이렇게 죽을 리는 없었다. 이건. 이건 꿈일 거야. 이건 꿈이라고. 이건 말도 안 돼! 누군가가 김상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냐?" 김상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 일도 벌어져 있지 않았다. 김훈상의 목은 제자리에 있었고, 김상희가 느끼기엔 따뜻한 눈으로 김상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일지도 모르겠지만.) 김상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환상을 본 것 같다. 이 곳에는 김형석도 없었다. 방금까지의 일이 꿈인 것만 같았다. 김훈상은 김상희가 우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김상희를 안아줬다. 추위에 떨고 있는 아기새를 보는 것 같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김상희를 안아주기만 했다. 그 큼지막한 손으로 김상희의 등을 토닥여줬다. 김상희를 품에 꽉 안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의 직감은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었다.' 직감 뿐만 아니라 상황이 말을 해주고 있었다. 흐트러지지 않은 이불. 조용했던 흔적. 하지만 누군가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정황.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김상희. '누구지.' 알 수 없었다. 김상희를 이토록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일부러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김상희의 목과 볼을 살폈다. 그의 시력은 일반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눈물과 더불어 누군가의 타액이 보였다. '지금 당장 추궁한다면...' 그러면 이 작은 아이가 겁에 질리겠지. '잠시만 시간을 두기로 한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분노를 다스릴 시간은 필요했다. 감히 어떤 놈이 사랑하는 딸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상태에서 힘 조절을 조금만 잘못해도 김상희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다.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갖자.' 그리고 그 시간 동안은 함께 해주기로 했다. 물어보기는 물어봐야 했다. 시간이 흘렀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김훈상은 침대에 누워 잠든 딸의 얼굴을 쳐다봤다. 미첼을 불러 일부러 수면제를 복용시켰다. 두려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딸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래서 일부러 재웠다. '김형석이라...' 김훈상도 충격을 받았다. '왜 김상희가 말을 하도록 그냥 둔거지.' 지금 파악하기로는 김형석은 엄청난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아까 기습을 했었어도 된다. 하지만 왜. 왜 환상만을 보여준 걸까. 그리고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걸까. 그것도 왜. 일부러 흔적을 남겼을까. 그 정도 능력을 가졌다면 흔적을 지웠어도 될텐데. 만약 그랬다면, 그냥 딸이 신경쇠약에 걸려 헛것을 봤겠거니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액이 남아 있었다. '내 아들이... 언제부터...' 분명 그의 아들이 맞았다. '지금으로써 가장 타당한 가정은... 제국에 있을 때에 몸이 바꿔치기 되었을 확률이 높겠어.' 몸이 바뀐다? 혹은 골렘화? 원래 이런 거 몰랐다. 하지만 예전 나이트와 크리스의 경우를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백제에는 이러한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왜 지금 모습을 감춘 거냐?'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김훈상은 더스 나이트들과 김유신을 불렀다. "너희들을 믿어도 되는 거냐?" 나이트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내 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원래대로라면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겨우 공주따위가 어떻게 되었을 때, 나이트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니! 하지만 겨우 공주따위가 아니다. 무려 성녀님이다. 나이트들은 전혀 위화감 없이, 잘 받아들였다. "명령을 받듭니다!" 김유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요즘 그는 알렉스와의 만남을 자주 갖는 편인데 덕분에 알게 모르게 상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외부로부터의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이 사내놈들이 사랑스런 딸내미를 보며 무슨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봐. '그게 걱정이 되셨을 수도 있다!' 물론 스페셜 나이트가 이상한 마음을 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저 분은 딸등신이니까!' 재미있는 건, 알렉스가 '딸등신'이라는 말을 알려준 적이 없다는 거다. 알려준 적도 없고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지만 알렉스와 김유신은 똑같이 생각했다. '딸등신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도둑처럼 보일 테니까!' 만약 알렉스가 알았다면 이렇게 외쳤을 지도 모른다. '상희학은 위대하다!' 먼 훗날, 알렉스와 김유신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 때 알렉스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유레카! 라고 말이다. *** 김훈상은 김형석의 방을 찾았다. 김형석은 잠들어 있는 상태. 김훈상이 말했다. "아들아." 깊게 잠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아들아. 일어나라." 몇 번을 그렇게 불렀다. 이내 김형석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님...?" 현재 시각은 새벽 4시 30분.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왔다." 김형석이 정중히 되물었다. "제게 여쭈실 것이 무엇인지요?" 김훈상이 김형석을 똑바로 쳐다봤다. "너는 내 아들이냐?" 김형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훈상을 쳐다봤다.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지금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묻겠다. 너는... 내 아들이 맞는 거냐?" "왜 그렇게 당연한 것을 재차 확인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형석에게서는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골렘화의 흔적도 없었다. 김훈상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 아들이냐? 내 눈을 보고 대답해라." 김형석이 김훈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고려의 첫째 왕자이며, 고려의 태양. 아버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네 동생에게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내 아들이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내 명령을 들어라." "무슨 명령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너를 포박하겠다. 너를 24시간 감시하겠다." "......." 사실상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별다른 죄도 짓지 않은 첫째 왕자를 포박한다니. 그것도 24시간 구금하고 감시한다니.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타국에서 어떻게 보겠는가. 그것도 백제가 시시각각 쳐들어오고 있고 전세계가 힘을 모으고 있는 이런 중대한 시기에 말이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명에 따르겠습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어떠한 뜻이 있겠지요." 김훈상은 김형석을 쳐다봤다. 그 역시 아버지다. 아들을 감옥에 넣는데 그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당연히 슬프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연민의 감정.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내게 있어서 지금 지켜야할 최우선은...'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믿기 힘들겠지만, '내 딸이다.' 그래서 김형석을 지하감옥에 넣었다. 김형석은 순순히 그 것에 응했다. 예전에 황제가 탈출했었던 전력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워프가 불가능한 방해장을 펼쳤다. 이 방해장은 김환석이 특별히 발명한 것이고 실전 배치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외부와의 소통도 완전히 단절됐다.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곧 전쟁이 벌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알릴 필요 없었다. 사기만 떨어뜨린다. 백제가 점점 더 가까워오고 있다. 지금 한진수가 일선에 서서 그들의 전진을 막아내고는 있지만 시간이 조금 부족할 듯 했다. 김환석은 잠도 자지 않고 프리온 나이트 개발에 착수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코피를 몇 번이나 쏟았는지 모른다. 미친듯이 일했다. 프리온 나이트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들은 김환석을 보면서 크게 감명 받았다. '역시... 고려의 왕자님이시다.' 고려를 위해서 저토록 살신성인하는 왕자. 역시 고려의 왕자다웠다. 대단했다. 고려를 위해서 저렇게까지 열심이라니. 저 열정과 끈기와 인내. 반드시 배워야만 할 덕목이었다. '이 모든 것은... 고려를 위하여...!' 힘을 내기로 했다. 한편 김환석은 이를 악물었다. '똥개를... 지켜야만 한다!' 고려 학자들의 생각은 조금 오해에 가까웠다. 하여튼 결과는 바람직했다. 프리온 나이트들의 개발이 거의 완료 됐으니까. "최대한으로 서둘렀을 때, 약 20시간 정도만 있으면 가동이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진수 측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 백제가 급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면. - 이대로면 약 18시간 뒤 고려 국경에 도달합니다. 충격적인 보고도 이어졌다. - 이 정도의 화력으로 전면전을 펼친다면... 고려의 필패입니다. 18시간 뒤 백제의 도착. 20시간 뒤 프리온 나이트의 완성. 2시간의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17시간이 흘렀다. 실시간으로 보고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 약 1시간 뒤. 고려 국경에 도착합니다. 대규모 화력전을 대비해야 합니다! 김훈상이 김상희의 방을 찾았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말을 했다. "나는 고려의 왕이다." "아빠..." "우리 고려에게는 2시간이 필요하다." 그 말의 뜻은 어렵지 않았다. 고려에는 2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2시간을, 왕인 그가 벌겠다는 소리다.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만 말하겠다. 내 눈을 봐라. 혹여 내가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안전하게 탈출시킬 모든 방법을 마련해두었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김환석과 함께 탈출해라.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기억해라.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한 아버지 한 명이. 여기 이 자리에서. 지금 너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었다고." "......." 김상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훈상의 표정이 전에 없이 너무나 진지했다. "똑똑히 기억해라." 김훈상이 김상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딸을 사랑한 아버지가 여기 이 자리에 서있었다는 것. 절대로 잊지마라." 피식 웃었다. "어차피 돌아오기야 하겠지만." 몸을 돌렸다. 뒤돌아서 걸어갔다. "아니. 취소.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거다."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내가 제일 세다." *** 고려왕이 출격했다. 복도에서 김훈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죽음을 강요하지 않겠다. 무서운 놈은 빠져라. 두려운 놈도 빠져라.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놈도 빠져라." 김훈상의 뒤에 스페셜 나이트 한 명, 한 명이 붙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전장을 누빌 놈들이 아니면 필요 없다." 한 명, 한 명이 곧 수십 명이 됐다. 스페셜 나이트 뿐만 아니라 나이트들이 그 뒤에 따라 붙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미 중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겁쟁이도 필요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고려의 나이트들 중. 겁쟁이는 없습니다!" 복도가 나이트들로 가득 찼다. 김훈상이 앞장서서 걸었다. "내가 앞장서겠다." "충!" "내가 길을 만들겠다." "충!" "내가 너희들의 왕이다." "충!" "나는 너희들의 왕이며, 너희들의 길을 밝히는 자다. 그 길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 발걸음이 많아졌다. 척! 척! 척! 척! 일사분란한 발걸음이 고려왕궁을 뒤흔들었다. "그 죽음이 두렵지 않은 놈만, 나를 따라라." 모두가 외쳤다. "충!" 전쟁터를 향해 진격했다. 2시간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 작품 후기 ============================ 오늘은 2연참입니다..! 오전 11시 전에 한 편 더 올라갑니다. 0176 / 0192 ---------------------------------------------- 성녀. 진격. *** 약 1시간 전. 김상희가 말했다. "아빠." "왜 그러지?" "저도 돕겠어요." 김훈상은 그 말을 단칼에 잘랐다. "불허 한다." "아빠. 아빠는 성군이셔요. 세상에서 제일 가는, 세계에서 최고로 대단한 왕이라는 걸 소녀도 알고 있어요." 김상희의, 입에 발린 그 아부에 김훈상은 어깨를 쭉 폈다. 물론 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크한 표정으로 어디 한 번 그냥 끝까지 말해는 봐라. 들어는 줄테니. 라고 주장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는 있으나 김상희는 확실히 알았다. 저 아빠. 지금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엄청 신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안 그렇겠는가. 사랑스러운 딸이 아빠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는데. 안 기쁘면 그건 거짓말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만족감과 흡족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니까 아빠는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실 거라고 소녀는 믿어 의심치 않아요." "......." 김훈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지금 그는 전쟁터로 향하려고 하고 있는 거다. 거기에 딸을 데려간다? 있을 수 없다. 이 아이는 아름다운 것만 보고, 예쁜 것만 느끼며 살아가게 해주고 싶다. 그게 아빠의 마음이다. '하지만...' 김상희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소녀 역시 고려왕국의 당당한 일원이어요. 소녀는 고려의 공주로서, 그에 합당한 책무를 이행해 나가고 싶어요. 저도 함께하게 해주셔요." 김훈상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아버지 김훈상이면 절대로 불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왕인 김훈상이다. 백제와의 전쟁. 사실 일단 이기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김상희도 더 안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허락 한다.'를 다른 말로 돌려했다. "많이...컸구나." 이 아빠. 설득하기 정말 어렵네, 하고 김상희는 남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두렵긴 두렵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수는 없었다. 능력이 없으면 모를까. 성녀의 능력이 있는 지금은 반드시 가고 싶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도... 돕겠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김상희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보호받기만 하는 새장 속의 새는 없었다. 마치 자신을 지키는 주문처럼, 혼자서 되뇌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이번 전투에 성녀가 함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김훈상이 앞장섰다. 고려왕궁의 문이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려왕궁의 문과 벽은 굉장히 높다.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그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요새다. 당연히 앞은 보이지 않는다. 철제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높디높은 그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문 사이로 얇은 실선의 세계가 쳐졌다. '이 문을 나서면... 이제 정말 전쟁터다.' 굳건히 닫혀있던 고려왕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미 백성들은 혼비백산한 상태. 김훈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앞에. 백성들이 단 한명도 없다고 해도 좋다.' 이미 대피령은 내려 놓았다. 김훈상 스스로도 이 전쟁.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2시간의 시간을 벌기 위하여 출정하는 건데, 이 2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2시간을 벌었다고 해서 과연 그들을 이길 수 있을 수 있을지는 역시 미지수였다. '모두가 대피를 했으면 좋겠군.' 그렇지만 지하대피소가 그렇게까지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 전체 국민이 100명이라면, 그 중 30명 정도밖에는 수용하지 못한다. '내 실책이다.' 지하대피소를 더 많이 늘려놓는 건데. 그건 실수였다. 나머지 70명 중 60명 정도는 저 멀리 도망치길 바랐다. 30명은 숨고 60명은 도망치고. 나머지 10명이 남아 있다면. 그 나머지는 자신을 응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한 번 해봤다. 피식 웃었다. '나는 왜 이 순간. 이렇게 감상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냐.'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는 이미 지척까지 와있다. 문이 완전히 열렸다. 얇았던 실선의 세계가 점점 더 넓어지고, 점점 더 넓어지고, 계속 넓어져서,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소리가 되어 고려왕과 고려 나이트들을 덮쳤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외쳤다. "국왕 폐하. 만세!" 국왕 폐하 만세! 라는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김훈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출정의 길을 응원하는 백성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빌딩 숲 사이로. 커다란 대로변 한 가운데를 완전히 비워놓고 가장자리에는 백성들이 고려의 국기를 들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외쳤다. "내 아들 장하다!" 남자였다. 나이는 대략 70세 정도 되어 보였다. 그 남자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의 아들은 고려의 나이트다. "나라를 위한 헌신을, 나라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아. 힘 내라. 이 아비가 응원한다! 그렇게 외쳤다. "이 나라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 또 외쳤다. "나는 네가 내 아들인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또 했다. "살아서 돌아와라!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 마지막으로 말했다. "만약 네가 죽는다면, 우리의 아들들이 모두 죽어버린다면. 그 땐 우리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라! 살아서 돌아오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일반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광장을 압도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특별한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목소리를 내도 되고, 마력 컨트롤이 대단히 뛰어난 그런 사람. 김훈상은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의 오른쪽 가슴팍에는 훈장이 하나 달려 있었다. '은성훈장...인가.' 20년 전. 전쟁기. 그 때를 몸소 겪은 나이트인 것 같았다. 전쟁기를 겪었던 나이트들. 그들은 지금 고려 내에서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이들이다. 고려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최상의 대우와 예의를 갖췄다. 심지어 고려 국왕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전쟁기를 함께 이끌어갔던 동료였고 전우였으니까. 김훈상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자들도 있군.'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다. 원래대로라면 무조건 남자만 있어야 했다. 여자는 국민 축에도 못 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김상희와 김환석 덕분에 여자들도 마력을 많이 갖게 됐고 조금씩 그 입지가 높아지고 있다. 마력이 있다. 그런데 숫자가 많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다. 남자들도 이제 여자들을 예전처럼 함부로는 대하지 못했다. 그렇다고해서 남녀가 평등해졌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여자는 여전히 남자에 비해 훨씬 더 연약하고 약한 존재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여자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놀라운 일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기에 눌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응원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힘내셔요.'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그렇게 응원했다. 김훈상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이게 바로 네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증거다.' 여자들이 이 자리에 있고 남자들을 응원하고 있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저 은성훈장을 가슴에 매단 남자가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러운 것보다도 훨씬 더. 훨씬 많이 자랑스러웠다. '언젠가는 여자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날이 오겠지.' 물론 그 날이 바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날은 분명히 오게 될 거다. '만약 우리가 이 곳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김상희의 손을 살짝 잡았다. '두려워마라.' 딸이 기특하기도 했다. 두렵고 무서울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나섰다. 이번에는 게릴라전이 아니다. 전면전이다. 전면전에 있어서 성녀의 능력은 가히 기적과도 비견된다. 그 전력을 수십, 아니 수백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딸만큼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이 세상의 변화는... 너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나는 그 변화를 응원하겠다.' 환호성과 국기가 펄럭이는 그 사이로, 고려왕과 고려의 나이트들이 전진했다. 고려의 수도를 지키는 전 병력이 이미 국경으로 집결하고 있다. 고려의 심장부. 왕궁을 지키는 나이트들도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 한진수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피해는?" "사망자 다섯. 중상자 둘. 경상 여덟입니다."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들이 변했다. 예전보다도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지치지 않았다. "이제 슬슬 우리도 본진에 합류해야할 것 같습니다." 고려 국경에 고려의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들었다. 백제는 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전면전. 할 테면 한 번 해보라는 식으로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고 있다. 화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것 같았다. 한진수와 김환성 등. 게릴라전을 펼치며 시간을 최대한 끌었던 게릴라 부대도 국경으로 향했다. 한진수는 생각했다. '고려의 프리온 나이트 완성은 아직 멀었나...' 2시간 정도라고 했다. 그러니까 전투 시작 예상 시간을 기점으로 약 2시간. 그 2시간을 끌고나면 이 쪽에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추가될 거다. 그렇다면 전투는 훨씬 더 쉬워지겠지. '2시간. 골든 타임이군.'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김상희!"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김상희가 한진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걱정 마. 나 더 이상 어린아이 아니야. 네 눈에 내가 정말 약해 보이고, 지켜줘야만 하고,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내 능력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나도 도울게.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한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김상희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한진수가 사랑하는 사람이 김상희가 아니었다면, '김상희는 엄청난 전력이다.' 그것도 굉장히 특별한 전력. 전투에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대단한 전력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사랑하는 여자를 전투에 내보내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 이 세상에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몇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는 싫었다. 김상희가 이 위험한 곳에 몸을 담그는 것 조차 싫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안다. 김상희가 한진수의 손을 잡았다. "나 더이상 어리광 피우지 않을게." "김상희..." "나 아무것도 못하고 울고만 있지 않을 거야." "너..." "나는 내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 나는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야." 한진수는 김상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품 안에 있을 때엔 이렇게 아기같고 사랑스러운데, 이럴 때엔 의지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김상희가 말했다. "우리 같이, 같이 힘을 합쳐요. 너만 모든 짐을 짊어지려고 하지마. 나도 도울 수 있어."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한진수가 도둑놈 새끼이긴 도둑놈 새끼인데, 김상희를 보니 흐뭇하다. "한진수. 내 딸을 지켜라." "예. 폐하." "우리의 목표는 2시간을 끄는 것이다." "예. 폐하." 저만치 멀리.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진격해오는 프리온 나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2. 연. 참. ! 0177 / 0192 ---------------------------------------------- 성녀. 진격. *** 프리온 나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지금 전 세계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그 최강병력 프리온 나이트. 한진수와 김환성의 보고에 따르면 원거리 타격 무기로는 손상 입히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고려를 비롯한 세계의 모든 나라가 바보는 아니다. 여지껏 수많은 시도를 해봤다. 가장 만만한 것이 바로 원거리 포격. 하지만 포격에는 일절 상처를 입지 않았다. 무슨 원리로 그게 가능한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직접 타격을 해야만 프리온 나이트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진수나 김환성쯤 되면 맨손이 가장 효과적이고 그보다 조금 급이 낮은 나이트들의 경우는 칼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김훈상이 앞으로 나섰다. 김훈상이 가장 먼저 전투에 참여했다. "내가 중앙진을 맡는다." 그리고 한진수와 김환성이 좌익과 우익을 맡았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김훈상이 워프를 사용하여 프리온 나이트의 지척까지 접근한 뒤 프리온 나이트의 머리를 터뜨려 버렸다. 사람과 거의 똑같았다. 머리를 잃은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살인을 했을 때와 느낌이 거의 비슷했다. 찝찝하고 싫다. 하지만 이 느낌에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전쟁기를 겪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정도는 일상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프리온 나이트를 죽이는 거다.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도 마찬가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가진 계집 세 명과 과학 기술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골렘. 이 곳에는 고려의 나이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분이... 고려의 국왕...!' 어쩌면 최후의 결전이 될 지도 모를 이 곳에, 세계 각지의 여러 나라들이 힘을 합쳤다. 그리고 그들은 김훈상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엄청나다...!' 김훈상의 움직임은 감히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였다. 거기에 한진수와 김환성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물밀듯 짓쳐들어갔다. 김환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렸다. "내 똥개는 내가 지킨다!!!" 치열한 전투가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별다른 전술이나 전략은 없었다. 힘대 힘의 싸움이었다. 백제도 그러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의 경우 힘을 약간 비축하면서 싸우고 있다. 지금은 전면전이 아니다. 프리온 나이트 1500기의 화력이 투입되는 순간, 그 때 전력을 다하기 위해서 체력을 아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후방에는 나이트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보호를 받고 있는 김상희가 있었다. 김상희가 눈을 감았다. 치열한 전투. 날아다니는 신체 부위. 끝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피 분수. 아비규환의 현장. 이 모든 것들은 물론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진수야...!' 다시 눈을 떴다. 한진수의 힘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진수는 이를 악물고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한진수는 지금 거의 한 달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전투에 임해왔다. 도망쳐도 되는데. 굳이 싸웠다. 김상희를 지키기 위해서. 김상희를 지키겠다는 그 말을, 말 뿐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미친듯이 싸우고 또 싸웠다. '아빠.' 이제는 개차반을 개차반이라고 부르기 미안해질 정도다. 김훈상의 마음. 이제 확실히 안다. 김훈상의 마음 뿐만 아니라, 그녀 스스로의 마음도 이제 인정했다. 조련을 하기 위한 애교가 아닌, 실제 마음이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그 무섭다는 김훈상도 많이 편해졌다. 그 말은 즉, 이제는 정말로 가족이 되었다는 소리다. '오빠.' 김환성의 모습도 보였다. 중간 중간 '으랏차! 똥개 파워!'라고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을 외쳐대고는 있지만 하여튼 김환성은 가장 화려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김훈상과 한진수의 전투와는 약간 달랐다. 그 둘은 재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필요한 최소의 동작만을 보여준다면, 김환성은 무식하게 힘으로 때리고 보는 타입이었다. 이 곳에는 제각각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진수가 주먹을 쥐었다. '나는 쓰러질 수 없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칼리번은 한진수를 보조하면서 생각했다. '평소에... 힘을 아끼고 계셨던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한진수는 매사에 최선을 다해왔다. 어쩌면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였다. 황제시키면 아주 딱 좋지 않은가. 뭐든지 열심히 하니까. '오늘은 평소의 대장님이 아니야.' 그리고 느꼈다. '지켜야할 사람이 있는 사람은... 저토록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솔직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계집을 사랑한다? 칼리번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개념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칼리번에게 있어서 계집은 그저 아들을 낳기 위한 씨받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한진수를 보면, '내 생각이 틀렸나...' '계집은 단순히 아들을 낳기 위한 씨받이' 혹은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 라는 그 생각. 어쩌면 틀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장님을 보면...' 대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김상희가 옆에 있을 때와 옆에 있지 않을 때의 한진수는 확연히 달랐다.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느낌 자체가 달랐다. 김상희가 옆에 있을 때의 한진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더 필사적이 됐고 더 열정적이 됐고. 무엇보다도 더 행복해보였다. 김상희의 존재는 한진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뒤바꾸어버렸다. '나도 언젠가 저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올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걸 사랑이라고 했던가.' 사랑이라는 저 감정. 언젠가. 언젠가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사랑이란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일단, '일단 살아남고 보자!' 잡생각은 떨쳐내기로 했다. 미친듯이 싸우고 또 싸웠다.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에, 중앙 후미. 그러니까 직접전인 전투 보다는 전투 지원을 위해 대기중인 병력들 사이에서 일순간 소요가 일어났다. *** 회복의관 관장 미첼은 이 자리에 자원해서 왔다. 그 역시 사람이다. 돈 많이 모아서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모두가 고려를 위해 일어나 싸우고 있다. '딱 이번까지만 참여하는 거야.' 그리고는 무조건 편안하게 살기로 마음 먹었다. 참고로 20년 전 전쟁기 때에도, 그 수많은 전투에 미첼은 자원해서 참여했었다. 물론 당시에는 관장의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그는 전투 때마다 '그래. 딱 이번까지만 하는 거야. 내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거다!' 라고 다짐하며 자원하여 전투에 나섰었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미첼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수많은 전투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다는 소리다. 전쟁경험이 굉장히 많은 의사다. '어떻게 이런...' 전쟁경험이 많기는 많은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이 것은...' 이 것은 기적이었다. 김상희가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김상희의 눈에 계속해서 보였다. 아빠. 오빠.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목숨 걸고 싸우는 수많은 이들. '나는 이들을 돕겠어!' 이 세계에 왜 떨어진 건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김상희의 몸이 하얀색 빛에 물들었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백색의 빛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 그 목숨을 지켜줄 수 있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면, 그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 곳에 있는 이유가 되지 않는가. 조금 더. 조금 더 과장하자면 그것이 지금 내가 이 곳에 있고 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적...이다!" 전투를 보조하는 이들이 외쳤다. "성녀의 기적이 강림했다!" 백색의 빛이 전장을 뒤덮었다. 일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김훈상도. 김환성도. 한진수도. 확실히 느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되돌아 왔다.' 일순간. 나이트들과 병사들의 사기가 한순간에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랬다. '성녀가 우리와 함께 한다.' 전쟁에 있어서 그 희망은 엄청난 힘이 된다. 와아아아!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북받쳐 올랐다. 전투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약 2시간이 흘렀다. *** 김환석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이대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잠을 자고 싶었다. 지금 며칠 밤을 꼬박 새웠는지 모르겠다. 잠을 못 잤다. 졸려서 죽을 것 같다는 걸 이제 좀 알겠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성공했다. 프리온 나이트 1500기. "드디어... 완성이다." "바로 전장에 투입합니까?" "그래." 고려 왕궁의 문이 열렸다.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국경을 향해 전진했다. "워프 가동 준비 완료." 그리고 이들은 워프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최강의 병기라고 할 수 있었다. "워프를 준비합니다." 워프 발동 10초 전. "워프 발동 5초 전!" 김환석도 긴장했다. 지금 국경에서의 전투 엄청나게 치열하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전멸했을 수도 있다. 지금 당장. 1초 1초가 급했다. "워프 발동 1초 전!" 그리고 번쩍! 몸이 빛남과 동시에 워프가 성공리에 끝났다. 미리 워프를 위한 자리를 배정해 놨다. 김환석은 저도 모르게 중얼 거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는 봤다. 김상희가 공중에 둥둥 떠서 기적의 빛을 흩뿌리고 있는 것을. 겨우 시간을 끄는 것만 하려고 했었는데. 만약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고려가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는 여전히 많았고 강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똥개 덕분인가.' 분명히 그랬다. 고려군은 지금 지치지도 않았고 부상자도 없었다. 사망자는 발생했겠지만 적어도 부상을 입고 싸우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치명상이라도 김상희가 치료해주고 있었다. 김환석은 김상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랑스러웠다. 동생이 자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꿈틀 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잘 몰랐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감상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밀리지 않고 있는 상황. 여기에 프리온 나이트가 무려 1500기나 추가 된다면 승리는 이 쪽이 따놓은 당상일 것이 분명했다. "프리온 나이트를 출격 시킨다." 미리 작전을 맞추어 놓은 대로, 400. 700. 400기씩 나누어 좌익과 중앙. 그리고 우익을 서포트 할 거다. 고려군도 그 것을 발견 했다. "프리온 나이트가 투입 됐다!" 한진수와 김환성이 목숨을 내걸고 게릴라전을 펼치고, 또 국왕이 직접 나서서 싸웠던 이유는 바로 이 골든타임 2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성녀의 기적에 힘 입어, 그 2시간을 확실히 챙길 수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프리온 나이트다!' 이제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모두가 신이 났다. 이제 전투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훈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온 나이트가... 드디어 완성된 건가.'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힘들었다. 이제는 승리를 따낼 차례다. 그런데. 예기치도 못했던,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0178 / 0192 ---------------------------------------------- 마지막 한마디. 사랑해 ***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없을 때에도 고려는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 성녀의 기적에 힘입어, 거의 대등에 가까운 전투를 벌였다. 거기에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더해졌다. 프리온 나이트의 화력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작전장교 중 한 명이 말했다. "...성공입니다." 고려 프리온 나이트의 원거리 포격에 의하여, 백제 프리온 나이트 일부가 파괴됐다. "원거리 포격이 효과가 있습니다." 원래는 원거리 포격이 불가능했다. 미사일도, 그 어떤 무기도 백제군의 장갑을 뚫지 못했었다. 하지만 고려가 생산한 프리온 나이트의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백제군의 장갑을 파괴했다. 압도적이다, 라고 까지는 표현하기 어려워도 막강한 화력애 보태졌다. 고려군은 승리를 예감했다. 성녀의 빛이 프리온 나이트를 덮었다. 고려 나이트들은 이미 이 현상을 봤었다. 프리온 나이트의 최종형태.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그러한 형태. 인간과 거의 똑같은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고려 나이트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것이... 고려의... 힘이다!' 그런데.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리온 나이트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백제군은 전원이 프리온 나이트로 이루어져있다. 작전장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크아아악! 비명성이 토해졌다. 고려군의 진영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환석 왕자님! 프리온 나이트가 이상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환석도 봤다. 지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의 프리온 나이트가 한진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고려군을 공격했다. '말도... 안 돼...' 김환석도 지금 당장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최신형 프리온 나이트들 1500기가 고려군을 공격했다. 어마어마한 화포 공격. 김훈상이 이를 악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앞 쪽엔 백제 프리온 나이트 2000기 -그간 1000기 가량이 줄어서 약 2000기가 남았다-가 있으며 뒤에는 고려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있다. 앞 뒤. 전부가 막혔다. 앞과 뒤에서 둘러싸고 함포공격을 퍼붓고 있다.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 대단하다는 김훈상조차도 지금 당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포격이 이어졌다.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수많은 나이트들이 죽어나갔다. 이 쯤 되니, 각 국의 대장들은 고려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고려의 속임수였습니까!"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건. '고려가 실권을 제대로 잡기 위한 숙청작업일지도 모른다.' 각국의 왕과 장수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제와 고려가 힘을 하벼서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을 리 없으니까. '이 얼마나 무서운 자인가!' 그리고 욕했다. "김훈상! 이 좆 같은 새끼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군사들을 전부 쓸어 버리면, 아마 이후 고려가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 훨씬 쉬워질 거다. 김훈상은 지금 각국의 군사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백제라는 핑계로 군사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공격한 거다. 누군가가 외쳤다. "김훈상 이 개새끼! 내 반드시 너를 죽여버리고 말겠다!" 그의 눈에, 포격에 죽어가는 동료들이 보였다. 성녀의 기적도 소용 없었다. 성녀의 기적은, 엄청나긴 하다. 죽지 않았으면 살려낼 수 있다. 하지만. 일격에 죽으면, 그러니까 즉사를 하면 성녀의 힘도 무용지물이다. 지금 백제와 고려의 프리온 나이트가 포격을 퍼붓고 있는 상황. 즉사를 하는 나이트들이 굉장히 많았다. "으아아아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전우가 죽어가는 절망감. 고려에 대한 배신감. 그 모든 것이 절규로 표현됐다. 그리고 분노하는 이들의 일부는 복수를 다짐했다. "이대로 죽지는 않겠다!" 어차피 여기서 살아나가기는 글렀다. 그럴 바에야. 복수라도 화끈하게 하고 가야겠지. 이를 악물었다. 권총을 꺼내들었다. 프리온 나이트에게는 소용 없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저 계집에게는 분명 효과가 있으리라. 그리고 하늘에 둥둥 떠있는 김상희를 노렸다. '김훈상이 저 계집을 그렇게 아낀다지.'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라도 소심한 복수라도 할 수 있어서. 그의 행동은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워낙에 상황이 복잡하고 급박하게 돌아갔다. 수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있다. 그의 행동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조준했다. 성녀의 가슴이 보였다. 그리고 발사했다. ***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라고 되뇌였다. 하지만 힘을 내뿜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외침도 들려왔다. "김훈상 이 좆같은 새끼가!!!" 아니. 아빠의 짓이 아니야. 개차반의 짓이 아니라고. 김상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김상희는 김훈상이 고려를 얼마나 아끼는지 안다. 고려는 곧 김훈상의 분신이다. '아빠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러나 분노한 이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오해의 매듭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고려가 이런 게 아니야.' 김상희는 하늘에 둥둥 뜬 상태로 기적의 빛을 흩뿌렸다. 눈을 감았다. 집중에 집중을 더했다.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콰광! 콰과광! 하고 폭발음도 터져나왔다. 하지만 집중을 잃을 수는 없었다. 집중을 잃으면, 죽지 않을 수 있던 사람조차도 죽어버리고 만다.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려야 해.' 그것이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다. '나는 포기할 수 없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했다. 힘을 계속해서 끌어 올렸다. 그 때, 김상희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한진수도 그제서야 그걸 알았다. 한 명이 아니었다. '안 돼!' 몸을 던졌다. 워낙 황급히 몸을 움직이느라 포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충격파가 한진수를 덮쳤다. 겉으로 큰 외상은 없었지만 내장을 다쳤다. 그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가까이 가기만 하면 돼.' 가까이 가기만 하면, 그도 성녀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무리해서 워프를 사용했다. 가까이 갔다. 그의 예리한 청각을 뚫고, 탕! 탕! 탕! 하는 총성이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었다. 그가 파악한 것만 무려 8발 정도는 되었다. 그 중 7발을 그가 대신 막아냈다. 초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총알을, 일부는 손으로 잡아내고 일부는 몸으로 맞았다. '한 발... 놓쳤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봤다. 그 한 발이 김상희의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는 걸. '안 돼!' 그는 자신의 몸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조차도 잊고 김상희를 살폈다. 그런데. 이상했다. 김상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김상희의 몸에서는 여전히 하얀 빛이 흘러나와 부상을 당한 이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 건...!' 이제야 깨달았다. 김상희는 지금. 반자동 배리어를 가동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언젠가, 김환석이 쓰레기처럼 툭 던지고 갔던 그 것.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오로지 동생만을 위해 투자하고 개발했던 그 것. 가치를 환산하기조차 어려운 과학문물인 반자동 배리어가 그녀의 몸을 지켜주었다. '다행이다.' 상황은 결코 다행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한진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값을 다 합쳐도 김상희의 목숨값에는 비할 수 없었다. 적어도 한진수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한진수는 마력을 일으켰다. 저들을 이해는 한다. 지금 상황에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저들은 충분히 합당한 의심을 했고 그에 대한 표출로 김상희를 공격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는 할 수 없었다. 반자동 배리어가 없었다면 김상희는 지금쯤 피를 토하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마력을 일으켰다. 그가 일으킨 마력의 폭풍이 방금 김상희를 공격한 이들을 급습했다. 물론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눈에 띄는 공격을 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정말 공적이 되는 수가 있다.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군중을 건드릴 수는 없는 법이다. 김상희를 조준하여 공격했던 8명의 나이트들은 한진수에 의해 죽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다. 한진수는 김상희의 손을 잡았다. 김상희는 지금 울고 있었다. 김상희의 마음이 십분 이해됐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를 경험했겠는가. '이런 끔찍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가 않다.' 보여주기 싫었다. 이 곳에서 데리고나가고 싶었다. 워프를 사용하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건. 김상희가 원하지 않을 거다. 이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친다면, 김상희는 평생 그 죄책감을 이고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그러한 마음의 짐을 갖고 살게할 수는 없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진수도 김상희에게 힘을 보탰다. 김상희가 뿜어낸 빛보다도 훨씬 강렬하고 훨씬 강한 빛이 전장을 뒤덮었다. 경이로운 회복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즉사하는 나이트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김상희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돼.' 크리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크리스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을 모두 예측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 그녀의 품 속에는, 아직도 크리스가 전해준 그 단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크리스는 말했다. 이 단도로 심장을 찌르라고. 그래야 모두가 산다고. "진수야." 진수를 불렀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쳐다봤다. 한진수는 김상희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더이상 무섭지 않도록. 하지만 김상희는 지금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한진수의 생각만큼, 김상희는 어리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한진수에게도 말했었다. 크리스가 말해준 것. 한진수는 그 때 펄쩍 뛰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그런 소리 같은 거 하면 진짜 혼난다고 화를 냈었다. "지금이... 그 때가 아닐까 싶어." "말도...안 되는 소리하지 마."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심장을 찌른단 말인가. 김상희가 말했다. "반자동 배리어 때문에... 내가 찔러도 소용 없을 거야." 김상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은 볼을 타고 흐르고 턱을 타고 흘러, 방울져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진수 네가 나를 찔러야 해." 한진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내가 내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단 말인가. 크리스의 말을 100퍼센트 신용할 수도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김상희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거 말고 또 있어?" 그랬다. 지금은 어찌어찌 버티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고려군은 무너졌다. 내부로부터 불신과 분노가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고 외부로부터 프리온 나이트 약 3500기가 고려군을 둘러싸고 공격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고려군은 전멸할 거다. 한진수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김상희." 한진수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나는 너를..." 김상희가 말했다. 그녀의 결심은 단호했다. "네가 찌르지 않겠다면 내가 날 찌르겠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배리어가 뚫릴 때까지 계속 찌르겠어." 지금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아빠와 오빠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거야.' 고려군을 내버려두고, 그들은 도망치지 않을 거다. 그건 확실했다. '나도...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진수의 어깨 위에,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짐을 짊어지게 하기 싫었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사랑하는 것 만큼, 김상희도 한진수를 사랑했다. '네가... 떳떳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방법을 선택했다.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 한진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 내렸다.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크리스가 그것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어서. 진수야. 지금 네가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어." 김상희가 그 단도를 한진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중요한 순간에. 김상희는 한진수보다 더 강했고 더 침착했다. 한진수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찌를 수 없어.'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성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성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 성녀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아니. 어쩌면 성녀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뿜어내고 있는 상태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프리온 나이트들이 보였다. 프리온 나이트들은 금색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변화를 이끌어낸 건 김상희였다. 하지만. 지금 프리온 나이트들이 극한의 힘을 끌어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사람은 한진수. 자신이었다. 그랬다. '성녀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이제 알겠다. 김상희가 성녀인 것은 맞았다. 그런데. '나도 지금은... 성녀다.' 성녀가 옆에 있을 때에 비로소 성녀가 될 수 있는, 조건부에 가까운 성녀이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지금 성녀였다. 깨달았다. 성녀. 그것에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었다. 김환성의 경우도 성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가 되기도 했고 여자가 되기도 했다. 성력 혹은 마력의 구동에 있어서 성별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소리다. 퍼즐은 모두 맞춰졌다. 이제는 알겠다. "지금은. 내가 성녀야." 한진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대의명분과 훌륭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여자의 심장을 찌를 수는 없었다. 절대로. 절대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도망을 쳤으면 쳤다. 그 것만큼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사랑해." 그 한마디와 함께, 김상희가 말릴 새도 없이, 푸욱! 하고 날붙이가 살갗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도가 한 사람의 심장을 찔렀다. 0179 / 0192 ---------------------------------------------- 반전의 반전 *** 아마도 지하라 짐작되는 어두컴컴한 공동 내에서,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는 느꼈다. 진정한 사랑같은 거. 그런 거 따윈 없다는 걸 말이다. 아무리 서로 사느니 죽느니 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건 그저 허울뿐인 가식이었다는 걸 말이다. 아주 오래전. 초대 성녀의 때도 그랬다. 둘 사이에 껴서 이간질을 몇 번 하고 겁을 몇 번 주고. 몇 번인가 방해를 하니, 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여기였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정도로 맑은 샘물 앞. 그는 샘물을 한 입 떠마셔 봤다. "시원해." 사람들은 이 물을 일컬어 퓨리어스라고 부른다. 고려가 유일한 공급원이며, 물량이 절대적으로 적어서 한 병의 가격이 어지간한 왕국을 통째로 살 수 있다고 알려진 천고의 보물. 하지만 아니다. 고려왕궁 깊숙한 곳. 아주 깊은 곳에는 이렇게나 많은 퓨리어스가 있다. 아니. 아예 이런 샘물이 있다. 호수라고 하기엔 작지만 그렇다고 웅덩이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대략 깊이가 30미터쯤 되겠지." 저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만, 아마 이 깊이는 최소한 30미터는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예상했다. "고려 놈들은 이 것을 저희들만이 가진 보물이라고 생각했어." 그는 재미있기라도 한 듯 흐흐- 거리고 웃었다. "이 것을 바탕으로 힘을 모았고, 지금의 고려가 있을 수 있었지. 그리고." 크하하핫! 하고 크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덕분에 내 수중에 최종 형태의 프리온 나이트 1500기가 더 생기겠어." 예전과 똑같은 레파토리다. "성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원통하고 원통할까? 그렇지?" 그는 초대 성녀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듣고 있는 건가?" 그랬다가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들을 수 있을 리 없지. 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그는 주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퓨리어스. 천고의 보물?" 웃기는군. 그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끌어올릴 마력이 없었다. 그래서 마력석 알론을 섭취했다. 이 놈의 몸뚱이는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아. 하고 투덜거렸다. 이 놈의 몸을 탈취한 건 좋다. 그리고 90퍼센트 이상 이 놈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여태까지 내버려 두었다. 중요한 순간에만, 조금씩 자신이 컨트롤했다. '마력도 없는 주제에 저항력 하나는 기똥찼지.' 지금이야 이렇게 의식 밖으로 나왔다가 숨었다가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되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마력석 알론을 섭취하고나자 힘이 끌어 올랐다. 마력이었다. 안력을 돋구었다. 저 깊은 밑바닥을 쳐다봤다. 유난히 봉긋 솟아 오른 바닥이 하나 보였다. 저 곳은. 성녀의 무덤이었다. 초대 성녀의 무덤이 있는 곳. 그 위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샘물. 이 곳에서 퍼다 올린 물이 바로 퓨리어스의 진정한 정체였다. '고려놈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겠지만.' 저 바닥을 파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저 안에, 성녀의 시체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하여튼 그 때 성녀는 자신의 가슴을 찔렀었다. 단도로. 그 당시 누가 시켜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성녀 스스로 그랬다. 자책감 때문에. 자신 덕분에 태양제국 잉카는 패권을 쥐게 됐다.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피가 흘렀다. 그리고 태양제국 잉카의 황제 율다 때문에 여자들의 인권은 점점 더 바닥으로 추락해갔다. 율다는 교묘하게 그 사실을 조작하여 이러한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이 성녀 때문으로 몰아갔다. 성녀가 이상한 힘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여자들에게서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거라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성녀는 결국 칼로 제 가슴을 찔렀다. 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남자도 하나 있었다. '그 놈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여튼 그때 당시에는 성녀와 죽고 못 사는 그런 사이였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랬는데 그 때 당시 돈 10억에 매수 됐다. 율다에게 말이다. 율다에게 매수된 그는 성녀 옆에서 성녀의 자살을 방조했다. 은근슬쩍 성녀 네가 나쁘다.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말을 흘렸다. 겉으로는 온갖 착한 척을 다 하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했다. 율다 입장에서는 성녀가 필요 없었다. 이제 제국에 반기를 드는 모든 놈들을 숙청했고 잉카는 점점 더 커져갔다. 제국 초기에 성녀는 황제보다도 인기가 높았다. 황제보다 인기가 많은 성녀. 율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성녀를 죽였다. 결과적으로 성녀는 죽음을 선택했고 그 때, 율다는 알게 됐다. 성녀가 스스로 제 가슴을 찌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이 변화했다. 육체에서 영체로의 변화. 그는 육신을 탈피하게 됐다. 성녀의 죽음과 이 사실 사이에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지 그도 알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것은 그가 이 세계로 넘어온 것처럼.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영역은 아니었다. 그냥 눈을 떠보니 이 세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이 일어나고 보니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녀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많은 정보가 쏟아 들어져 왔다. 성녀가 제 심장을 칼로 찌르면 자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몸을 잃은 대신, 다른 이에게 기생하여 살아갈 수 있었다.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 수 있게 됐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는 골렘을 인간처럼 만드는 기술을 점점 발전시켜왔다. 무생물로 생물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을 제물로 하여 골렘을 만드는 건 가능했다. 고려가 계집 3명을 사용하여 프리온 나이트를 만들었던 것이 그 예다. 그리고 율다는 인간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최종 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라고 생각했는데 그 최정점에 서있던 것이 바로 크리스였다. 크리스 외에 몇 놈이 더 있기는 했지만 크리스만큼 마음에 들지 않아 이번에 다 폐기했다. '크리스 놈은... 참. 아쉬운 놈이지.'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내가 모든 것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강제 명령어를 알려줬다는 것도, 예전에 성녀 각성 시에 일부러 보고를 누락했던 것도. 그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김형석의 몸 뿐만 아니라 크리스의 몸에도 숨어 들어가 있었으니까. 물론 크리스는 자신의 또다른 인격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크리스마저도 속였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이 세계의 신이라고. "모든 것이 내 생각과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 모든 것이 그랬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육체를 거쳐오며 여자를 흡수하며 살아왔던 세월이, 그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김훈상과 김환성. 한진수를 사용하여 골렘을 만들면 크리스보다도 훨씬 뛰어난 역작이 탄생하겠지.' 그는 언제나 삶을 개척해왔고 만들어 왔다. 옳은 방향으로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성녀 김상희는 자신의 가슴에 칼을 찌르게 될 거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죽어.' 그렇다. '사랑하니까 죽이는 거야.' 그게 맞는 거였다. 일부러 더 자극하려고, 내 아이를 낳도록 하겠다거나. 그런 식의 말을 덧붙였다. 심적으로 흔들어놓기 위해서. '이번에 네가 네 심장을 찌르게 되면. 내 힘은 무한대에 가까워진다.' 지금 그는 여러 사람의 정신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최대한도까지 분열시켜본 적은 없지만, 최대한도는 약 다섯 정도. 하지만 이번에 성녀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면, 그 숫자에 제한이 없어질 거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그 때야말로 내가 진정한 신이 되는 거지." 신이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크하하핫! 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죽일 수도 있고 그 덕분에 신이 될 수도 있고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네 시체는 절대로 썩지 않도록 그렇게 만들겠어." 그래서 옆에 두고두고 볼 거다. 이제 그 눈은 다른 사람을 쳐다볼 수 없을 거다. 아니.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을 거다. 두고두고 나만 바라보겠지. "너는 평생을 내 옆에서 살아가는 거야." 마치 저기 저 밑에 곤히 잠들어 있는 성녀처럼. 내 옆을 지키고 있겠지. 기분이 좋아졌다. 흥분 됐다. "하." 기분이 좋아졌다. 황홀해졌다.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오늘은 혼자서 해결해야겠어." 바지를 벗었다. 손을 사용해서 욕구를 해소하기 시작했다. 상상했다. 시체가 된 김상희를 품에 안는 그 장면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김형석이 웃었다. "너는 영원히 나의 것이 될 거야. 김상희." 한진수도 널 막지 못해. 아니. 그 놈은 겁을 먹어서 오히려 너를 찌를지도 모르지. 욕구를 해소하고 난 뒤, 김형석은 자리에 다시 주저 앉았다. "아니. 반자동 배리어 때문에, 김상희 넌 자살을 할 수 없어." 비릿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결국 선택지는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어야겠지." 기분이 더더욱 좋아졌다. 그 누군가는 곧 한진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것을 계획대로다. 아주 순조롭고 좋다. "한진수. 너는 김상희를 찔러야만 할 거야." 왜냐하면 그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멸을 면할 수 없을 테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제 손으로 찌른다니." 그 걸 상상하니 또 아랫도리가 벌떡벌떡 서는 것 같았다. 황홀해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구경을 가야할 것 같았다. 이제 대망의 피날레가 다가오고 있다. 판은 모두 벌려놨다. 이제 추수만 하면 된다. 흐흐흐 웃었다. "죽어서... 내 여자가 되는 거야. 김상희." *** 전장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김형석이었다. 김형석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비규환의 현장.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김상희가 단도를 꺼내드는 것도 봤다. 이제 곧. 대망의 피날레가 다가온다. '어서 찔러.'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만 둬!"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프리온 나이트의 포격이 멈췄다. 프리온 나이트가 멈췄고, 세계의 나이트들도 멈췄다. 그만 둬! 라는 그 소리가 커다란 충격이 되어 모두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어 버렸다. 김형석에게 모든 시선이 쏠렸다. 한진수가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 그의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피가 철철 흘러 나왔다. 김상희의 비명성이 토해졌다. "진수야!" 허공에서 하얀 빛을 흩뿌리던 한진수의 몸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김형석이 욕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도대체 왜. 왜 자신을 찌른단 말인가. 여태까지 세계를 제 마음대로 주물러왔다. 이 모든 상황. 이미 다 예측하고 그가 이끌어왔던 상황이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됐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단 말인가! 한진수가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예전. 초대 성녀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 이상한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말도... 안 돼.' 성녀가 아니, 지금 당장은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일단 남녀로만 구분한다 했을 때, 성남의 그러한 행동은 그에게.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김형석이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비명을 질러댔다. 한참을 그렇게 뒹굴 거렸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그의 몸에서, 허물이 벗겨지듯 누군가가 튕겨져 나왔다. 김상희는 멍한 와중에도 그 누군가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눈에 익은 사람이다. 누군지 안다. 그녀가 증오하는 사람. 그녀를 죽인 사람. 그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칼로 찌르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 싸이코였다. 발가벗은 그는 상당히 왜소해 보였다. 나이트들 사이에 있으니 더더욱 그래보였다. 그가 외쳤다. "모, 모두 눈을 내리 깔아라!" 그는 직감했다. 뭔가 이상했다. 육신이 생겼다. 예전. 성녀가 자신의 가슴을 찔렀을 때엔 육신이 사라지고 영체가 되었었다. 그는 이게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 한진수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자 반대로 영체가 사라지고 육신이 생겼다. "내가 바로 황제 율다란 말이다!" 수 만 년을 영체인 상태로 살아왔다. 갑자기 육체가 생기니 무서웠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모두 무릎 꿇고 신인 나를 경배하란 말이다!" 두려웠다. 갑자기 생겨난 육체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잘못 맞아도 죽을 수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란 말인가. 고차원적이었던 자신에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그리고 김훈상이 말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벌거숭이가 된 율다가 뒷걸음질 쳤다. 이상했다. 마력도 올라오지 않았다. 당황했다. 김훈상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에 발 맞추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김훈상이 또 말했다. "오래 기다렸다." 율다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게 무, 무슨...!" 나는 신인데. 모든 상황을 조율하고 만들어가는 초월자인데. 이 무슨 상황이냔 말이냐! 율다가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0180 / 0192 ---------------------------------------------- 골룸 같은 새끼 *** 언젠가 딸이 말했었다. 크리스가 전하길,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 온다면 '네 심장을 찔러. 그래야 모두가 살아.'라고 말이다. 그리고 김훈상은 생각했다. 그러한 날이 언젠가 오긴 올 거라고.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충분히 올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항상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온다면.' 그 날이 온다면 그 옆에서 한진수가 있을 것임을 미리 예상했다. '상희의 몸에는 반자동 배리어가 항시 가동되고 있다.' 그렇다. 그래서 어지간한 통상 공격으로는 김상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그래서 아까 몇 놈들이 권총을 꺼내드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하지 않았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기도 했거니와 반자동 배리어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으니까. 어쨌든 김상희와 한진수는 실랑이를 벌이게 될 거고, 김상희는 자신의 힘으로는 반자동 배리어를 깨고 자신의 심장을 찌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희는 진수에게 부탁하겠지. 마지막. 마지막 순간은...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을 테니까.' 김훈상은 마치 이 상황을 미리 보기라도 했던 듯, 모두 예측했다. '한진수라면... 내 딸 대신 자신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김상희가 성녀라면, 어쩌면 한진수는 성남 혹은 성자라고 불리겠지. 하여튼 김훈상의 예측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았다. 고려의 나이트가 갑자기 돌변하여 백제의 편을 들게 된 것은 예측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김상희가 자신의 심장을 찔러야만 하는 상황이 왔고 김상희가 그 것을 부탁했고, 한진수가 자신의 심장을 찌른 것. 이 것은 정확했다. '김상희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과 한진수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랬다. 대단한 차이가 있었다. 한진수는 성자가 맞기는 맞다. 그러나 조건부 성자다. (정확한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김훈상은 일단 성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김상희가 옆에 있을 때에 성력을 내뿜을 수 있다. 그러니까 김상희가 있어야만 성자가 된다는 소리다. 크리스의 말을, 적어도 김상희가 옆에 있을 때에는 이행할 조건을 갖출 수 있다. 그에 반해, 김상희는 어떠한 도움이 없어도 성녀로 존재할 수 있다. 옆에 한진수가 있든 없든, 그 누가 있든 말든. 그녀는 성녀이고 스스로 성력을 끌어내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한진수는 심장을 찔러도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는 소리지.' 이게 가장 큰 차이다. '분명 눈물겨운 신파극을 찍을 테지만.' 아마도 김상희와 한진수는 네가 죽느니, 내가 죽느니 엄청난 눈물극을 펼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결과는 간단했다. 항시 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성녀의 옆에 있다. 일순간 심장이 폭발하여 즉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심장에 구멍이 난다고해도 즉사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 여태까지 '그'. 그러니까 백제의 왕이라 짐작되는 인간 -당시에는 인간인지 어떤지도 잘 몰랐다. 심지어는 프리온 나이트가 자아를 가지고 진화한 새로운 개체가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도 했었다.- 의 행동을 토대로 김훈상은 추리를 해왔다.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 놈.' 전면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았다. 최종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를 수족처럼 부려왔다. '용의주도하고 교활하지만.' 그렇지만 절대적인 힘은 없다는 것의 방증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힘을 가지고도 제국 뒤에 숨어 제국을 조종해왔겠지.' '그'가 알고 행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잘 몰라도 김훈상은 '그'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를 해냈다. '직접적인 무력은 없어.' 그 것은 이른 바 '김형석 사건'때 확실히 밝혀졌다. 뭔가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김훈상 자신이 김상희의 방을 찾았을 때, 그 때 움직였어야 하는 게 맞다. 그 때에 그는 호위병력도 없었고 오로지 혼자였으니까. '김상희에게 환성을 보여줬었지.' 환상을 보여줬다. 자신의 등 뒤에서 칼을 들고 혀를 낼름 거리고 있는 그런 환상. '사람의 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놈이야.' 예전. 나이트 제 6대대 소속 정윤한 나이트의 경우에도 그랬다. 골렘화 되었었고 정신을 지배당했었다. '제국을 통치하고 세상 뒤에, 이렇게 오랜시간 숨어 있으려면...'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그 놈에게 직접적인 무력은 없다. 하지만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어떠한 힘이 있다. '아무나 조종할 수는 없어. 만약 그렇게 하려고 했다면 나를 조종하려 들었겠지.' 그런데 김형석을 타겟으로 했다. 김형석은 마력이 없다. '상대적으로 약한 인간을... 조종했다.' 그리고 '김형석 사건' 때 그는 확신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김훈상은 자신의 아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함을 발견한 곳은 바로 '혀' 와 '손바닥' 이었다. 혀를 조금 다쳤었다. 마치, 일부러 꽉 깨물기라도 했듯. 평소라면 그러려니하고 넘어갔을 수 있겠지만 상황이 달랐다. 누군가 김형석을 조종하려고 했다면? 김형석의 의지가 그 것을 반하여 행동하려 했다면? 입을 벌리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팔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한 가정을 세운 뒤, 마력으로 몸을 탐색했다. 근육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고 짧은 시간 폭발적인 힘을 냈었던 것 같은, 자잘한 근육의 상처가 있었다. 3차 각성까지 이룬 김훈상이다. 그 정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확신했다. 누군가, 인간을 정신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상대적으로 약한 인간을 말이다. 예외가 있다면 크리스 정도. '크리스마저 조종할 수 있었겠지.' 김훈상은 크리스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더군다나 크리스는 아마도 자아를 가진 골렘, 혹은 골렘화가 된 인간. 그런 식으로 추정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그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소리. 그래서 아마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어쩌면 그 이상한 명령어 역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함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림이 그려졌다. 마지막. 정말 최후의 순간에, '그'가 노리는 게 뭘까. '그게 바로 심장을 찌르는 것이었겠지.' 그렇게 되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 한진수라는 변수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이렇게 적나라하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김훈상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율다냐?" 그리고 다시 물었다. "네가... 내 딸 괴롭혔냐?" 이를 꽉 깨물었다. "강냉이 털릴 준비 해라." *** 세계 각국의 나이트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한진수가 자신의 심장을 찔렀고 이상한 벌거숭이 남자가 나타났으며 프리온 나이트들이 공격을 멈췄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김훈상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강냉이 털릴 준비 해라." 사람들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그 명성 높은 고려의 왕이 '강냉이 털릴 준비 해라.'라고 말을 하다니. 저건 시접장배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김환성이 그 말을 들었다. 그는 고려의 왕자다. 고려의 왕자인데 시정잡배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었던 욕이 -김상희가 무서워해서 금욕했었다.- 속샆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개 씨발 좆같은 새끼야! 네가 내 똥개 괴롭혔냐?" 거기에 쾅! 충격파가 일었다. 각국의 나이트들은 일시정지에라도 걸린 것처럼 멈췄다. '세상에...' 믿을 수 없었다. '개 씨발 좆같은'을 외칠 때에, 그 떄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마력이 약한 몇몇은 귀를 붙잡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음성만으로 이러한 충격파가 터져나온 거다. 마력량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김환성도 이 때 이 기술을 처음 습득했다. 이후, 이 기술은 '사자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 다수를 상대할 대에 매우 효과적인 기술로 알려지게 되는데, 하여튼 김환성도 자기가 사자후를 터뜨린 것도 몰랐다. '어떻게 음파로 이런 충격파를...!' 솔직히 말해 다들 쫄았다. '자, 잠깐 상황을 지켜보자.' 벌거숭이 남자가 계속해서 미친 듯 외치고 있었다. 내가 이 세계의 신이다. 이 모든 걸 내가 계획하고 이끌어왔단 말이다! 라고 말이다. 김훈상이 검을 버렸다.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 꽉 깨물어라." "이 무슨 무엄... 크악!" 빠각! 소리와 함께 율다의 목이 돌아갔다. 이빨 몇 개가 튀어 나왔다.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율다는 그 주먹질 한 번에 정신을 잃었다. 수 만년 만에 생긴 육체다. 이 감각.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찬물을 끼얹어 율다를 깨웠다. "이 꽉 깨물어라." 빠각!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이트들은 생각했다. '폐하 지금...' 아무래도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지금 성군 김훈상이 있기 전, 전쟁기보다도 더 전에, '...미친개다!' 그 전에 나이트들 사이에서는 미친개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걸. '미친개가 튀어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무식하게 주먹질을 할 리 없지 않은가. 그것도 상대가 죽지 않을 만큼만 힘을 교묘하게 조절해서 때리고 있지 않은가. '진짜 아프게 패고 계신다.' 정말 그랬다. 그리고 한진수가 김환성을 꽉 껴안고 보내주질 않았다. "이거 놔! 내가 저 씨팔 호로 새끼를 조져버리고 말 거라고!" "형님. 형님은 힘 조절 못해서 안 됩니다." 한진수는 지금 미칠 것 같았다. 이 놈의 형님. 아니 누님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김환성의 힘이 너무 세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김환석이 말했다. "기다려." 그래도 김환성은 형의 말을 잘 들었다. 김환성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김환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쳐다보기만 했다. 율다가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그 상황을 지켜봤다. 한진수는 조금 놀라웠다. 김환석이 저렇게까지 침착하고 냉철할 줄이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김환석이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퓨리어스를 먹이면서 고문하겠어." 어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진수의 귓가에 또 흐흐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김환석의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웃음소리였다. "지옥보다 더한 지옥을 경험하게 해주마." 흐흐흐- 하고 아무도 모르게 웃는데, 한진수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저 왕자.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 놈을 지금 당장 죽이면 정보의 근원이 사라집니다." 한진수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저 놈을 지금 조지면, 내가 못 괴롭힙니다. 죽기 직전까지 괴롭히고 퓨리어스로 살린다음 다시 괴롭히고, 죽기 직전까지 계속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계속 괴롭혀서 미치게 만들 거니까 죽이지는 마시고 저한테 넘기십쇼. 그렇게 들렸다. 한진수는 앞을 쳐다봤다. '폐하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이 율다.' 율다의 이름. 들어 봤다. 고대의 기록에 있었다. 율다. 초대 잉카제국의 황제. 저렇게 초라한 모습일지는 몰랐다. 한진수도 이를 바드득 갈았다. '골룸같은 새끼.' 골룸이 뭔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빠각! 소리와 함께, "내가 잘못했다!" 빠각! 소리와 함께,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빠각! 소리와 함께,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낄낄 웃기도 하고, 흐흐 거리기도 했다가 크악!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정신병원에 지금 당장 감금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모양새였다. 김훈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타국의 나이트들은 순간 아무런 말도 못했다. 김훈상에게 따져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지금 괜히 입 열었다가 저 율다인지 뭔지 이상한 찌질이처럼 얻어 맞을까봐 무서웠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으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지금은... 프리온 나이트들이 이 쪽을 모두 정조준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고려측도 큰 손실을 입었어.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야.' 고려의 나이트도 많이 죽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멀어지니 객관성을 되찾았다. 흥분을 가라앉혔다. 절대. 절대 저 무자비한 폭력이 무서워서는 아니다. '나, 나 말고 누군가가 말하겠지.' 누군가 말할 텐데 괜히 총대를 맬 필요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 불만을 재기하면 조용히 편승하자.'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도 총대를 매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제 프리온 나이트들이 한진수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앞의 김훈상도 무섭고 김환성도 무섭고 프리온 나이트도 무섭다. 타국 나이트들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닥치고 있는 게 최선이다.' 그 와중에 김환석은 주위를 한 번 훑고 김환성은 씩씩 댔다. 동시에 생각했다. '그래서. 내 똥개한테 총 쏜 새끼가 누구더라.' '너희들. 전원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결국 누군가가 총대를 맸다. 0181 / 0192 ---------------------------------------------- 젠장. 황제 따위. *** 김상훈도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자신에게 항의하러 올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없을 수가 없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다지만, 실제로 친구가 죽고 동료가 죽고 가족이 죽었다. 그것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고려의 프리온 나이트에 의해서. 백제의 프리온 나이트에게 죽는 것과 고려의 프리온 나이트에게 죽는 건 달라도 아주 다른 문제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다.' 왕은, 때로는 악랄해져야만 한다. 지금 같은 시기. 그러니까 아직 세계의 패권이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면서 압도적인 무력과 힘을 보유하고 있는, 평화가 다가오기 전의 이러한 상황일 때에는 무조건적인 평화적 협정이 올바른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김훈상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한 번 머리를 숙이면 그 이후는 걷잡을 수가 없다. 고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생명을 어떻게 보상한단 말인가? 알렉스는 생각했다. '배째라 작전으로 나가실 생각이시로군.' 좋게좋게 포장하고, 이런저런 대의명분을 갖다 붙이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결론만 말하자면 '미안하긴 미안한데 배째라. 나보고 어쩌라고?' 정도가 되겠다. 알렉스도 그 것에 반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찬성하는 쪽이었다. '지금은 절대적인 무력과 힘을 바탕으로 찍어 누를 필요가 있어.' 이 것이 항상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모든 부분을 만족시키는 천상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만큼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김훈상은 이마를 짚어아먄 했다. '왜 하필이면 너냐...?' 김훈상은 앞을 쳐다봤다. 이건 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딸내미가 죽은 이들을 애도해야 한다는데 어쩔까. "어...그게...그러니까." 솔직히 김훈상도 생각 못했다. 딸이 이렇게 나올 줄은. 물론 김상희는 김상희다. 김훈상에게 이래라 저래라, 사과해라 마라,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 분들의 죽음에 대하여 깊은 애도와 슬픔을 표현하고 싶어요." "......." "이번 전쟁을 통하여 소녀는 절실하게 느꼈답니다. 소녀에게 있어서 아빠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크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요." 정말 뜬금 없지만, 대화의 주제(?)와도 맞지 않지만 김훈상은 이 때 묻고 싶었다. '그래서 한진수가 소중하냐, 내가 소중하냐?'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아빠가 좋냐, 남편이 좋냐?' 하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어라. 이 상황.'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아빠가 좋아, 약혼자가 좋아? 하고 물어볼 때가. 그 때 이후로. 김상희는 성년식을 마쳤고 이제 어엿한 어른이건만 김훈상의 눈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가인 듯 했다. 김훈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아빠도, 오빠도. 소녀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소중하고, 소녀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 그렇지. 이 아빠는 네게 아주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도 왕인데. 허세는 좀 참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되묻고 말았다. 대단한 왕이지만 팔불출 왕인 아버지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렇지? 소중하지?" 김상희는 순간, '뭘 그렇게까지 우쭐대는 것이어요?'하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할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도, 전사하신 분들은 소중한 사람들일 것이 틀림없어요. 소녀는 그 이들의 죽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소녀는 너무나 슬퍼요." 김훈상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고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보상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또 김상희의 슬픈 모습은 보기 싫고.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다. 사실상 이 건의 경우는 정답이 없다. 김훈상의 방법이 옳을 수도 있고, 김상희의 방법이 옳을 수도 있다. 김훈상의 방법을 선택하면, 지금 당장은 불만을 잠재우고 억압할 수는 있으나 이후 힘이 약화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김상희의 방법을 선택하면 지금 당장 큰 피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오히려 이후에는 득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김훈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김상희는 김훈상에게 이래라 저래라,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자신의 감정 상태만을 말했을 뿐이다. 김훈상은 그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김상희에게 조종 아닌 조종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김훈상은 지금 김상희에게 잡혀 사는(?) 걸 모르는 채로 잡혀 살고 있다. 물론 김훈상은 자기가 딸을 꽉 잡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소녀가 성녀의 직함을 내세우고 그들을 애도하겠어요." 결국 김훈상은 김상희의 뜻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김상희의 선택은 옳았다. 전세계에서 김상희를 지지했다. 나아가 고려왕국에 대한 칭송이 마르지 않았다. "성녀님께서 나서서 직접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성녀께서 눈물을 흘리시니 거의 죽었던 자가 살아났대." 눈물을 흘려서 그런 거 아니다. 성력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소문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부풀려지고 과장되기 마련이다. 성녀가 울자 산이 울고 바다가 울고 땅이 울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니까 말 다했다. 하여튼 김상희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은 전 세계에 방영되었는데 그 것을 본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남자들이 '성녀 앓이' 혹은 '상희 앓이' 상태에 빠져들었다. 알렉스는 이 것을 일컬어 '김상희 신드롬'이라고 명명했을 정도다. "그 분께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자 그 일대가 눈물바다가 됐다던데." 김상희가 연기를 한 건 아니었다. 김상희는 실제로 슬펐다. 고려의 프리온 나이트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죽음을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족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소중한 이를 잃은 그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분의 눈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화감동해서..." 김상희 신드롬 효과는 놀라웠다. 김상희를 거의 신격화 시키는 움직임까지 포착됐다. 사람들은 김상희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상당히 조심스러워할 정도였다. "그 사람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고 하더라고." 김상희 신드롬의 큰 효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세계 남자들은 상당히 단순한 편이다. 특히나 타인의 아픔과 슬픔. 혹은 기쁨에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며 그 것의 놀라움 조차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남자 위주의 세계. 다시 말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세계다. 상대가 약하면 찍어 누르면 되고, 상대가 강하면 엎드리면 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단순한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해도 될 정도다. 김훈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힘이 있는 건가.' 이번, 고려의 행보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녀가 전면에 나서서 유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에 처절하리만큼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전세계인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감동을 이끌어냈다. 유족들은 겨우 그 사소한 행동에 눈물을 흘렸다. 고려의 물질적 보상은 차후 문제였다.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것. 이 것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불만이 아주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생각만큼, 넘지 못할 벽은 아니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김훈상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이 세계의 남자들에게는 굉장히 힘들고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이번 고려의 행보를 파격적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전 세계에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왼쪽 가슴에 노란색 리본을 달고, 백제와의 전쟁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짐을 함께 나누었다. 알렉스는 신이 났다. '이것이야 말로 김상희 신드롬이다...!' 상희학이 점점 진화해가고 발전하는 게 느껴졌다. 이쯤 되니 상희학이 스스로 생명을 갖고 덩치를 불려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어여쁜 공주님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고 그로인해 불만의 목소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학문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모두가 내 샘플이다!' 환호성을 지를 뻔 했다. 이보다 좋은 실험 기회. 어디서 얻겠는가. 그것도 실제상황으로. '김상희 신드롬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공감능력인가!' 그런 것 같다. 남자들의 공감과는 뭔가가 다른, 정확하게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하여튼 뭔가가 다른 그 공감능력. 알렉스는, 그 것이야말로 바로 김상희 신드롬의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꼽았다. '이건 남자들에겐 없는 거야.' 무조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물론 남자들도 공감하기는 한다. '하지만 해결책을 전제로한 공감이지.' 그러나 공감보다는 해결책 찾기에 몰두한다. 타인의 감정에 극도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이 세계의 남자에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보기 힘든 능력이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 알렉스는 파격적인 생각까지 떠올랐다. '김상희 공주님만 그런 건가. 아니면 이 세계의 여자들이 그런 건가...!' 여자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놀랍지 않겠는가. 여자들도 이제 슬슬 마력까지 갖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세상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지배할 수도 있겠어.' 김상희 신드롬의 힘을 이번에 직접 보지 않았는가. 성녀의 -조금 더 비약하자면 여자의- 능력을 말이다. '아니.' 아니.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알렉스는 상희학을 공부하고 작성하고 있는 논문 가장 첫 페이지에 이런 글귀를 새겨 넣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남자다.' 이건 당연한 소리다. 이 세계의 상식선에서는 말이다. 거기에 한 줄 더 넣었다. '그러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다.' 그리고 누가 볼새라 얼른 숨겼다. 이거 누가 보면 큰 일 난다. 악마의 서적을 작성하고 있는 꼴 아닌가. 하지만 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공표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했다. '김상희 공주님을 보면 답 나오잖아?' 분명히 그랬다. 김상희 공주를, 학문적 관점에서 유심히 살펴본 결과 김상희 공주는 스스로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주변의 남자들. 그러니까 딸등신과 동생병신, 그리고 아내호구는 김상희가 원하는 바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척척 해줬다. '여자들이 만약 김상희 공주님같은 능력을 모두 갖고 있기만 한다면.' -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지배한다. 이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학문적인 것과는 별개로, '전 세계가 김상희 홀릭에 빠져 있구만.' 알렉스는 흐뭇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동생병신도 아니고 딸등신도 아니고 아내호구도 아닌데. 어째서?' 자신을 뭐라고 불러야할까를 생각해봤다. '동네오빠?' ...라고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녀등신?'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또, '그러면 내 아들이 폐하가 되는 거잖아?' 그런 문제가 있어서 할 수 없었다. 감히 '왕이 내 아들이다'라고 외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런 걸로 고민하는 게 웃기기는 웃긴 노릇인데.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다. 그냥 김상희의 동네오빠라고 하기로 했다.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오빠소리 듣기 민망하기는 할 정도이긴 한데, 뭐. 그럼 대충 오라버니 정도면 되겠지. 하고 마음 편하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이기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동네오빠등신이 되는 것이다!' 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고려 왕궁. 지하 밀실. "제, 제발 주, 죽여주세요." 율다는 죽고 싶었다. 처음에는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속된 말로 미쳤었다. 그러다가 분노했다. 나는 이 세계의 신인데. 이런 대접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동안 분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죽을 것 같으면 퓨리어스로 살려놓고, 또 죽을 것 같으면 퓨리어스로 살려놓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저 놈이 보였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무서웠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내가 살인마야? 널 죽이게?" 흐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이다. 틀림없이 미친 놈이야!' 율다는 죽고 싶었다. 저 악마의 사생아를 마주하느니 그냥 죽고 싶었다. 제발. 제발 나를 그냥 좀 죽여줘. 울었다. 김환석이 가까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오줌이 질질 흘러 나왔다. 두 눈은 퀭했고 율다의 육체는 거의 미라 같았다. 그 사이 김환석은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사랑해서 죽인다며?" 김상희의 과거도 알게 됐다. 율다의 말을 완벽하게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구라는 다른 곳이 있다는 것도 대충 이해는 했다. 그런데 그게 뭐? "내 똥개. 누가 괴롭히래?" 율다의 귀에 또 '흐흐흐'하는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김환석은 그렇게 웃지 않았다. 웃지 않았는데 율다의 귀에 그렇게 들렸을 뿐이다. 율다는 뒷걸음질 쳤다. '차, 차라리 죽여라 이 악마야!' 이젠 무서워서 이 말도 못했다. 김환석은 율다를 상대로 고문만 한 건 아니었다. 그에게 수많은 정보들을 이끌어냈다. 고대 제국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차피 놈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 언젠가 죽이긴 죽일 거다. 하지만 남은 일이 있었다. '내 똥개 앞에서 싹싹 빌게 만들어야지.' 잘못했다고 빌게 해야만 했다. 동생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저 놈은. 다른 건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 똥개. 저 새끼가 괴롭혔다는 거다. 절대로 계속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다. 절대로. '일단 한 번만 더 고문하고.'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김훈상. 김환성. 한진수. 세계 최강 전력의 보호를 받으며 김상희가 율다를 찾아왔다. 김환석이 불렀다. 여기서도 온갖 안전장치를 다해놨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부러 공간도 격리시켰다. 특제 강화유리로 공간을 나눴다. 김환석이 율다의 등을 발로 힘껏 밀어찼다. "꿇어. 이 새끼야." 율다가 무릎을 꿇었다. 율다의 입에서, 율다의 기준 수만 년. 김상희 기준 16년만에 과거의 잘못을 비는, 사과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미안하다..." 김환석이 다시금 율다의 머리를 발로 찼다. 김상희마저 율다가 불쌍해 보일만큼, 율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김환석은 평소와 다르게 율다의 귀에 속삭였다. "어디서 반말질이야? 공손하게 말해, 이 새끼야." 크게 욕하면 동생이 들으니까. 동생은 욕하는 거 싫어하니까. 율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정말 죄송했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그 말에 김환석은 다시금 율다를 팰 뻔 했지만 참았다. 그냥 말을 하게 놔두었다. 어쨌든 저 놈 입장에서 사랑은 사랑이라니까. "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거 압니다." 율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해성사하듯 용서를 구했다. "저는 살인자입니다." 김상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처럼 보였다. 16년 만에. 김상희는 자신을 죽인 살인자에게 사과를 받아냈다. 갑자기 설움 아닌 설움이 북바뎌 올라서 눈물이 쏟아졌다. 율다가 사과했다. 깊이 반성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끝일 줄 알았다. 이어지는 율다의 말에, 김상희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다리가 풀려 쓰러졌고, 한진수가 김상희를 부축했다. 김상희는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 작품 후기 ============================ 몸이 조금 회복되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컨디션이 완벽히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재는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0182 / 0192 ---------------------------------------------- 젠장. 황제 따위. *** 저는 살인자입니다. 김상희는 그 때 느꼈다. 율다의 눈빛은, 마치 표독스런 독사의 눈 같았다. 절대로, 절대로 반성하고 있거나 사과하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독심술 같은 건 익히고 있지 않지만 하여튼 그녀가 느낀 감정은 그랬다. "그리고 저들도 살인자들입니다. 프리온 나이트 1500기를 만들기 위하여 4000명 이상의 여자들을 몰래 잡아다 죽였지. 너로 인해, 마력을 얻게 된 여자들을." 그 말에 김상희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프리온 나이트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결코 범상치 않은 재료로 만들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여자'가 필요한 줄은 몰랐다. 김훈상은 담담한 눈빛으로 율다를 쳐다봤다. 어쨌든 사과는 들었다. 여기에 김상희를 굳이 데리고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김상희의 귀를 마력으로 부드럽게 덮은 뒤. "참수해라." 김상희가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결코 쉽지 않게 죽여라." 율다를 보는 눈빛은 굉장히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서 김상희는 헷갈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김훈상이 오히려 담담해 보이니까. '율다의 말이...정말 일까...' 정말이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내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려가 프리온 나이트를 만든 것. 그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여자 4500명...'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4500명이다. 단순히 1500기의 프리온 나이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여자의 숫자가 4500이고, 실험과 표본 획득 등에 역시 비슷한 숫자의 여자가 쓰였다. 결과적으로 고려왕가는 프리온 나이트를 만든다는 미명아래 거의 1만에 달하는, 무고한 여자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나는...' 김상희는 혼란스러워졌다. 김훈상이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고 말했다. "목을 잘라 죽이되, 천천히 고통스럽게 잘라라." 김유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는데.' 그만큼, 김훈상이 분노를 했다는 뜻이다. 왕은 여지껏 사형을 명할 때에 '참수하라.'라고 명령을 하지 '녹슬고 무딘 칼을 가지고 천천히 목을 잘라라.'라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면 덕이 안 된다. 괜히 까딱 잘못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라도 하면 왕의 이미지에 악영향만 끼치게 된다. 참수할 거면 깨끗하게 참수해버리는 게 낫다. '그만큼 엄청나게 분노하셨다는 뜻인가.' 그러나 겉으로 보면 그렇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아직 상희학 초보(?)인 김유신의 입장에서는 김훈상이 화를 낼 이유조차도 찾지 못했다. '화가 나신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왜 화가 나신 거야?' 만약 알렉스가 봤다면 김훈상의 속내를 단박에 알아차렸을 거다. 김유신은 긴가민가하고 있지만 김훈상은 지금 제대로 분노했다. 1만이 넘는 여자를 죽인 아버지라는 것을 딸이 알아 버렸다. '나는... 1만의 계집을 죽인 살인자다.' 3명의 계집을 바쳐 1기의 프리온 나이트를 얻는다. 남는 장사다. 그게 상식이며 맞는 얘기다. 하지만 딸 앞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이건.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왕의 입장에서 3명의 계집은 훌륭한 부품이지만, 사랑하는 딸을 가진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귀중한 생명이었으니까. '내 딸을 볼 면목이 없다.' 이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겠다. 어차피 그는 여자만 죽인 게 아니다. 전쟁기를 겪으면서 이미 그는 남자도 1만이상 죽였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말이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임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내 딸은...' 내 여리고 약한 아이는. '분명 죄책감에 괴로하고 말 것이다.' 그랬다. 김상희는 알 거다. 자신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그 것을 지금 깨달았을 거다. '내 딸의 눈에서 눈물이 난다면.' 그 눈물을 닦아줄 거다. 그리고. '내 딸의 눈에서 눈물이 나도록 만든 그 놈은.' 김훈상과 한진수가 동시에 생각했다. '피눈물이 나도록 만들어 주겠다.' 한진수도 김사희의 심리상태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김훈상과 한진수. 둘 다 스스로 자각은 못하고 있지만 상희학의 일등공신이자 열혈생도 아니겠는가.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희학의 이론에 따라 충실히 잘 행동하고 있으며, 그 행동에 대한 이해도도 다른 사람 -이를테면 김유신같은- 보다도 훨씬 높았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어깨에 팔을 감쌌다.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눈빛으로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김상희를 쳐다봤다. '나는 이 세상 수만. 아니 수억명의 여자들보다도.' 그 많고 무거운 목숨값보다도. '그보다도 네가 훨씬 더 귀해. 네가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해.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야.' 김상희의 어깨 끝이 조금 떨려왔다. 한진수와 김훈상의 생각대로, 김상희는 지금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만약 김상희가 미라클과 수페르가를 세계에 뿌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여자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내 목숨값이 그렇게 귀한 걸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한진수의 팔이 자신의 몸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김상희 네가 더 귀해. 그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진수의 눈빛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김훈상이 김상희의 귀를 덮은 마력을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제국으로 발돋움을 위하여 프리온 나이트 1000여기를 더 생산하도록 한다." 김훈상은 김상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율다를 쳐다보기만 했다. 방금 전,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차분한 눈빛이었다. '내 딸을 위해 나는 악마가 되겠다.' 그래서 말했다. "이 일의 총 책임자는 김환석 왕자. 네가 책임 지고 1000기를 추가 생산한다." 김유신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지금 이 타이밍에 굳이 저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지?' 김훈상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다. 해답은 알렉스가 내려줬다. *** 알렉스가 혀를 끌끌 찼다.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김유신은 알렉스의 말을 경청했다. 왕실의 카드마저도 발급받아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학자인 알렉스다. 그리고 요즘은 많이 친해졌다. 김유신의 입장에서 알렉스는 신기한 학자였다. 물어보기만하면 뭐든지 답이 척척 나오는 척척박사 같다고나 할까. "폐하께서는 황제가 되시기로 마음 먹으신 겁니다." 알렉스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우리 왕님. 황제따위 되고 싶지 않으실텐데.' 상희학에 의거하면 분명히 그랬다. 저번에 한진수도 대충 떠봤는데 한진수 역시 제국의 황제 직위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싫어했다. 황제같은 거 하면,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고 할 일만 늘어난다. 상희학의 관점에서 그렇게 되면, '어화둥둥 우리 이쁜 상희랑 놀 시간이 없어지잖아. 안 돼!' 정도가 되겠다. 그래서 점점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의 딸등신은 황제따위 때려 치우실 것이 틀림 없다!' 그렇게 가정했었는데, 이번에 그 가정이 틀리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우리 폐하. 어휴. 진짜 지금 혼자 땅을 치고 울고 계시겠군.' 딸 앞이라서 싫은 내색도 못하고 근엄하게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어쩌고 저쩌고를 중얼거렸을 김훈상을 떠올리니 안구에 습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진짜 딸등신이네.' 김훈상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결국 김상희 공주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죠." "...예?" 김유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담담한 모양새로 프리온 나이트 추가생산과 김상희 공주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김상희 공주님은 이 세계의 여자들을 어여삐 생각하고 계시며 동질감을 느끼고 계십니다." "...왜요?" "여자니까요." "아니. 그니까 그게 왜...?" 다른 여자와 김상희는 다르다. 여자는 계집이고 김상희는 성녀다. 김유신도 김상희라면 껌뻑 죽는다. 그런데 다른 여자한테는 아니다. 최근 그 지위가 올라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계집은 계집이다. 한낱 계집이랑 성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여튼 우리 김상희 공주님은 타인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기이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봤잖아요? 성녀의 눈물에 전 세계가 감동한 거. 제가 파악하기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타인의 상황에 귀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이며 그에 대하여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렇군요." "김유신 나이트에게 누군가가 3미터 구덩이를 손으로 파는게 힘들었다고 투정부리면 뭐라고 할 겁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그걸 힘들다고 합니까?" "그니까 뭐라고 할 거냐니까요?" 김유신은 생각도 않고 대번에 대답했다. "투정 부리지 마라. 나는 30미터 참호를 파고 2박3일을 그 곳에서 지낸 적도 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게 바로 남자들이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에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잘난 것을 드러내죠. 일종의 허세입니다 이게. 하지만 김상희 공주님이었다면 대번에 안쓰러운 기색으로 괜찮냐고, 많이 힘들고 덥냐고, 그렇게 걱정해주실 겁니다." 김유신은 인상을 찡그렸다. 김유신의 뇌 구조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3미터 구덩이 파는 게 뭐가 힘든데? 그건 그냥 식전운동 정도밖에 안 되지 않나? 준비 운동도 그거보단 어렵겠다. 하여튼 알렉스가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했다.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김상희 공주님은 자기 때문에 수많은 여자들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자괴감에 빠지시겠죠." "아니. 그니까 왜요?" 계집 죽는거랑 성녀의 자괴감.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짜증났다. 알렉스는 말하고 싶었다. '아이 열등생 자식아! 너는 상희학을 배울 가치도 없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명색이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이다. 그래서 그냥 얘기했다. 조금 실수도 했다. "상희학은 진리입니다. 그냥 묻지 말고 믿으세요." "...예?" 너무 답답한 나머지 실수를 했다. 상희학은 아직 공표된 학문도 아니고 만약 공표된다 하더라도 사이비취급받기 딱 좋은 학문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하여튼 김상희 공주님이 자괴감에 빠졌다고 가정하고 갑시다." 안 그러면 얘기 진행이 안 될 거 같으니까. "그래서 폐하께서는 하기 싫은 황제자리까지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결정하신 겁니다. 제국이 되기 위하여 프리온 나이트를 추가생산한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요." "...그렇군요." "결국 그 분의 행동은 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프리온 나이트를 만든 게 아니다. 오로지 고려를 제국으로 격상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무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프리온 나이트를 만들었을 뿐이다. 이 것을 어필하신 것이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황제하겠다고 마음 먹나? 김유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약간 비약이 심한 것 같았다. 하긴. 알렉스도 사람인데. 김유신은 약간 찝찝한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한편, 김훈상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스페셜 필드를 펼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김훈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는다. "황제따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그 놈의 율다새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제 해먹게 생겼다. "이제와서 안 한다고 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딸이 힘들어할 거다. "아씨. 그 딴 거 하기 싫다고." 아무도 없으니까 조금 솔직해졌다. 그래도 마력탐지를 통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한 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물론 음파도 다 차단했다. "우리 딸이랑 천년만년 둥가둥가 살려고 했는데! 내 노년 계획이 다 망가졌다!" 역시 율다 그 나쁜 새끼때문이다. 망했다. 황제 해먹게 생겼다. 이거 진짜 망했다. 얼마 뒤, 김환석이 김훈상의 방으로 찾아왔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당연히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고려의 국왕이며 이 나라를 제국으로 격상시킬 것이다. 프리온 나이트의 추가 생산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제국 따위. 되고 싶은 생각 없다. 그런 귀찮은 건 젊은 천재 한진수에게 맡겨버리려고 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긴 했지만. "아버님께서 혼자 악마가 되려고 하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여자를 부품으로 사용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훈상은 그걸 강행할 거다. 혼자서 나쁜 놈이 되겠다는 심보다. 김환석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입장이 되는 거니까. 김환석이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해보이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투덜거렸던 김훈상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근엄한 아버지이자 고려의 국왕이 이 곳에 있을 뿐이었다. 김환석이 나가고 나서 김훈상은 또다시 중얼거렸다. "젠장. 황제따위. 하기 싫은데. 어떡하지? 방법이 없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진짜 싫다. 이거 뭔가 망하는 기분이다. 이대로 망할 수는 없다! 황제처럼 귀찮은 거 하면 안 된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김상희가 찾아왔다. 다시금 근업한 왕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신(?)한 김훈상이 의자에 앉아 김상희를 쳐다봤다. 김상희가 말했다. 김훈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말이, 김상희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김상희 너... 그게 정말이냐...?" ============================ 작품 후기 ============================ 김훈상도 혼자 있으면 투덜댄다고 합니다 0183 / 0192 ---------------------------------------------- 젠장. 황제 따위. ***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그리고 김훈상 위에 김상희가 있었다. "아빠. 소녀는 아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김상희. 너..." 말을 들어 보았다. 김상희의 논리는 이러했다. 아빠의 선택을, 물론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애초에 약이라는 것이 인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화학물질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작용이 0프로인 약은 거의 없다. 하다못해 나른하고 졸리는 것도 약의 흔한 부작용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아름답기만하고 옳기만한 선택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김훈상이 프리온 나이트를 만들고 그로 인해 여자들이 희생되는 것. 김상희는 물론 슬프다. 지금도 가슴 아프다.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미안하고 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는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10대였다면, 세상을 많이 경험해보지 않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른들보다 조금 더 순수한, 그런 여자아이였다면 어쩌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나는... 16살이 아니야.' 슬픔과 비탄. 그리고 죄책감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 그녀는 16살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40년을 넘게 살았다. 칼에 찔려 죽을 때,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된지 한참 지난 이후였으니까. '그러기에는... 내가 짊어진 무게가 너무 커.' 김상희는 안다. 그녀는 이 세상의 성녀이며 세계 여자들의 희망이다. '나는 그렇게 있어야만 해.' 여자들에게 마력을 줬고, 그로인해 그들이 프리온 나이트가 되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다. '그들에게는 정말 미안해. 그 생명값. 내가 감히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무기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성녀였고 또 어쩌면 제국이 될지도 모를 고려왕국의 공주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뛰는 놈 김훈상 위의, 나는 년(?) 김상희였으니까. "저는 아빠의 선택을 지지해요. 아빠도 굉장히 어려운 선택을 하셨다는 거. 소녀도 잘 알고 있어요. 소녀는 죽어간 이들의 목숨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요. 제가 마력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쩌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어요." "......." 김훈상은 김상희를 쳐다봤다. 문득 문득 느끼는 건데, 사랑스럽고 여려보이기만하는 이 딸이, 아주 가끔은 정말 어른 같을 때가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고 귀여운 건 틀림 없는데. 오늘 같은 날은 조금 낯설다. '이 아이가... 정말 16살이 맞단 말인가.' 지금 이 상황. '이 아이가 나를 위로하고 있는 건가?' 분명히 그랬다. 아버지가 먼저 찾아가 딸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딸이 먼저 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었다. "너는..."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평소에 아끼고 아끼던 말인데 오늘은 좀 해주기로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상희는 안다. 김훈상의 표정.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다. 김훈상. 겉으로는 평온해보여도 결코 그런 상태가 아님을 잘 안다. "저는 아빠를 사랑해요." 김상희가 가만히 김훈상의 손을 잡았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진심이라는 것 정도. 이제는 정말로 가족이다. "그리고 아빠를 응원해요. 진심이어요. 아빠가 말씀하셨죠. 아빠는 언제나 제 편이라고.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 한다고 해도, 아빠 만큼은 제 편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소녀도 그래요. 소녀는 언제나 아빠 편이어요. 저는... 아빠의 딸이니까요." 김훈상은 김상희를 쳐다만 봤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이 아이가...정말... 내 아이인가.' 내 몸에서 이런 아이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게 바로 기적인가.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 딸인가.' 한없이 어리기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어엿하게 자라서 자신을 위로해주고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는 큰 아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아이의 진짜 나이를 안다면 놀라 까무러치겠지만. 순진무구한(?) 김상희 속에 숨어 있는 아줌마 김상희가 말했다. "소녀는 왕으로서의, 그 선택을 지지해요. 그리고 소녀는 괴롭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빠는 아빠의 위치에서, 아빠의 일을 해주셔요. 저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해요. 소녀는 아빠를 동경하고 있답니다." "......." 김훈상은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제 정말로 딸에게 속마음을 오픈해도 되지 않을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커버린 딸에게, 이제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김상희." "네. 아빠. 말씀하셔요." "네게 긴히 할 말이 있다." 김상희가 잠자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김훈상이 이럴 때엔,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곤 한다. 어쩌면 오늘은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 뒤에 숨어 있는, 아주 약간의 연약함을 꺼내어 보여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 황제 안 해도 되겠지?" ...아무래도 그 예감이 조금 틀린 것 같긴 하지만. *** 김훈상은 신이 났다. '황제 따위.' 그렇게 귀찮은 거. 그냥 한진수 주면 되지 않은가! 명분도 있다. 최종 형태의 프리온 나이트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엄청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 천재! 게다가 신흥 왕국인 신라를 고려와 동등한 입지까지 끌어 올린 전무후무한 능력을 지닌 왕. (지금은 비록 몰락한 왕국이지만.) "그니까 네가 해라." 한진수는 직감했다. '폐하가 지금 짐을 떠넘기려 하고 있다!' 이 작자가. 아니. 이 장인어른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황제 자리에 앉혀 부려먹고 말겠다는 저 야심찬 건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장인어른의 더러운 마수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나는 우리 상희랑 여행다니면서 띵가띵가 놀 거다!' 그래서 말했다. "감히 제가 어찌 아버님을 제치고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이제 이 시대는 네 시대다. 네가 이끌어가야하는 시대라는 소리다. 나는 슬슬 일선에서 물러날 때도 되었지." 한진수는 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폐하는 세계의 왕들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냥 그거 나한테 떠넘기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싫다. 이 제안. 절대로 못 받아들인다. 그거 받아들이면 상희랑 못 논다. "나는 내 딸을 사랑한다." 한진수는 슬슬 불안해졌다. 뭔가 이거 느낌이 안 좋다. 뭔가 말려가는 기분이다. "저, 저도 상희를 사랑합니다." "나는 내 딸의 남자가 그에 걸맞는 격을 갖추고 있다면 좋겠다." 한진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지금 너는 뭐지? 망한 신라의 국왕? 네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다는 거냐?" "저는..." 저는 김상희를 사랑합니다. 제 목숨보다도 더 많이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김훈상도 이미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 이런 대답할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나는 내 딸의 남자가 적어도 제국의 황제 정도는 되었으면 한다." 한진수는 울고 싶어졌다. '그러면 나는 엄청 바빠지겠지.' 어. 그러고 보니. '날 황제에 앉히고 딸이랑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려는 게 틀림 없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이제 확실해졌다. 이건 음모였다. '이건 음모다!' 날 황제에 앉히고 자기만 상희랑 놀려는 무시무시한 음모. 이 음모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김훈상이 말했다. "내 딸도 그러더군. 자기의 남자가 황제쯤 되면 좋겠다고." 김훈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너 황제 해야겠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한진수는 울고 싶어졌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찾았다. *** 깊은 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진수와 김상희는 뜨거운 밤을 보냈다. 지구에서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한진수의 기운이 너무나 넘친다는 것. 한진수의 기력이 워낙에 넘치다보니 김상희는 이제 조금 힘들 정도였다. "...힘들어." 마주하기가 어렵다는 오선생님과 3번이나 접견했다. 불과 3시간만에 말이다. 이런게 실제로 가능하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 세계는 남자에게 너무나 유리한 세계였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정력을 바탕으로 변강쇠 뺨을 수십 대는 때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성녀가 아니었으면 기절했을지도 몰라.' 당연한 말이지만 김상희는 성녀이며 치료를 할 수 있다. '치료 안했으면 화상 입었을 거야.'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한진수는 김상희가 힘들다면 즉각 멈추었다. 자신의 욕구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상희가 힘들어하는 거. 그게 더 싫었으니까. "미안해. 많이 힘들었어?" 김상희는 고개를 저었다. "으음, 으음. 아니야.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일부러 아주 작게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했다. "그래도 너무 좋았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힘든 건 힘든 건데 3시간만에 오선생님과 무려 3번이나 만났다. 그 때의 황홀한 느낌. 아직도 온 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말에 한진수는 세상을 다 가진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족스러워졌고 행복해졌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달콤한 말과 금은 보화라 할지라도 방금의 이 말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이 말은 남자의 자존심을 하늘 끝까지 세워줌과 동시에 심리적 만족감을 선사해주는 말이었으니까. 한진수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뭐라구?" 김상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 말 안해줄 거야." "아니. 그니까 뭐라고 했냐니까?" "몰라!" "좋았다고 한 것 같은데..." "몰라. 말 안 해. 부끄럽단 말이야." 물론 그렇게까지 부끄럽지 않다. 이제 조련이 그냥 몸에 익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냥 된다. 부끄럽다는 그 말에, 한진수는 김상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져서 입술에 뽀뽀했다.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고 네 번 하고 다섯 번 하고, 열 번 연속으로 뽀뽀했다. 김상희가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입술 닳겠어." "진짜 닳게 해줄까?" 아니. 넌 정말로 그럴 것 같아. 내 남편은 무한 정력왕이니까. 아마 뽀뽀도 정력 넘치게 하겠지.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가 결국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을 했다. "상희야. 질문이 있어." 김훈상의 음모. 이건 음모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확인은 해야했다. "응? 뭔데?" "너... 네 남자가 황제였으면 좋겠어?" 한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상희는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이런 걸 물어올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해?' 설마, '내가 그게 좋다고하면 황제 할 거고.' 그게 아니면,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건가?' 에이. 아무리 아내등신이어도 설마 그걸. '설마. 진짜로...?'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뭔가 심상치가 않다. 한진수 지금 매우 진지한 상태이지 않은가. '이, 이건 뭔가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 틀림 없어.' 김훈상이 농간(?)을 부려놨다는 것은 모르고 있지만 하여튼 한진수가 갑자기 이런 걸 묻는 거 보면. 분명 뭔가 있기는 있었다. '설마 내 말 한마디에 제국 황제가 바뀌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는 했다. 그렇긴 한데 정말로 그렇겠냐는 의구심도 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황제인데. 설마하니 자기의 의견때문에 황제가 바뀌고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설마설마 했다. "나는..." 김상희가 입을 열었다. 0184 / 0192 ---------------------------------------------- 결정 *** 김상희는 '내 말 한 마디에 제국의 황제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김상희라도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제가 실시간으로 막 바뀌고 그러지는 않겠지. 인간적으로 그건 너무한 발상 아니겠는가. 너무 황당한 생각에 김상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무슨 황제를 정해주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아니다. 맞다. 지금 한진수는 매우 긴장하고 있다. 김상희가 '나는 내 남편이 제국의 황제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한진수는 아마 앉기 싫은 황제 자리에 앉게되고 말 것이다. '안 돼. 상희야. 나는 황제가 될 수 없어. 나는 황제가 될 수 없도록 설계되어 태어난 몸이야.'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또 그러자니 야망 없고 욕심조차 없는 한심한 남자처럼 보여질까 두려워서 그러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면서 '내 남편 황제!'라는 임명장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고대하고 또 고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네가 황제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김상희는 여지껏 일반 여자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왔다. 좋은 기억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나쁜 기억들도 많았다. 그리고 고난들도 많았다. 작게는 8살 때 소녀식부터 크게는 백제와의 전쟁까지. '내가 그 고난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그녀 스스로가 잘나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건 맞다. 하지만 스스로의 몸을 스스로 지킬 수는 없었다. 개차반 김훈상을 비롯한 망나니 형제들. 그리고 한진수와 나이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경들을 헤쳐나올 수 있었다. 그들이 비록 스스로 나서서 김상희를 위해 헌신하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김상희는 그들의 도움 덕택엥 여지껏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결국 나를 지키고...' 또 내 가족을 지키려면. '내가 힘을 갖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직접적인 무력이 없다. 하지만 다른 무력단체만 있다면. 그 단체의 능력을 몇 곱절로 뻥튀기 시켜줄 수 있다. 성녀의 능력은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니까. '결국...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거야.' 그랬다. 김상희는 그걸 깨달았다. 평범하게, 소소하게, 진수가 끓여준 된장찌개가 곁들어진 저녁밥을 먹는. 그런 평범한 일상은 이제 물 건너 갔다. 좋으나 싫으나 그녀는 성녀고 한진수는 세계가 주목하는 천재다. 김상희가 뜸을 조금 들였다. "진수야." 대뜸 너 황제해, 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건 김상희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해왔으면 김상희 신드롬이나 김상희 홀릭현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자신이 조종(?)당하는 지도 모르게 조종(?)하는 것이야 말로, 조련의 기초 아니겠는가. "나는 내 자신보다도..." 그리고 조련 뿐만이 아닌, 진심을 담아 고백도 해봤다. "내 자신보다도 네가 더 중요해. 이제 나는 너 없는 세상. 상상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 한진수는 기쁘긴 기쁜데 뭔가 찝찝했다. '이건 음모다.' 그래도 그걸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이런 고백을 해오는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고. 본능이 그걸 경고해왔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자기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 감정과 본능이 느껴질 때. 된장찌개라든가하는 이 세계에는 없는 이상한 단어를 떠올릴 때도 있었고. '이럴 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 평생 고생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날이었다. 물론 완전히 연기는 아니었다. 당연히 진심이 들어간 상태에서,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는 것. 딱 그거였다.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아. 내 능력이 굉장히 큰 가치가 있다는 거. 하지만 내 스스로는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거. 그래서 내게는 나를 지킬 힘이 필요해. 너한테 짐이 되기도 싫고, 내가 있다면 네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한진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일리는 있는 말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살면서, 김상희와 평범한. 그러나 위대한 행복을 누리며 살겠다는 그 포부. 실현하려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길이 될 거다. 한진수의 얼굴과 김상희의 얼굴은 이미 세계에 알려진 상태. 완전히 숨어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성녀의 능력을 탐하는 무리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나 혼자서도 상희를 지킬 수는 있을 텐데.' 나는 다쳐도 되고 죽어도 되는데, 김상희는 그러면 안 된다. 그게 한진수의 생각이었다. 김상희는 어렵지 않게 한진수의 마음을 읽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너는 나한테 너무 소중하다고. 왜 이렇게 나를 배려하지 않아줘?" 그 말에 한진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왜 그렇게 내 생각은 안 해줘요. 네가 날 걱정하는 것 만큼. 나도 널 걱정해. 너만 날 위하고 너만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도 너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한진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용만 들어보면 분명히 행복한 내용인데 정체 모를 불안감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이거 아무래도 나한테 황제 하라고 하는 것 같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황제할 거 같다. 그래서 얼른 말을 잘랐다. "우리를 지킬 힘. 우리가 가져야 한다. 이 말에는 나도 찬성해." "...응." "그래서 나는 아버님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응?" 김상희는 이 방법은 생각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너를 지킬 힘은 반드시 필요해. 너를 위한 힘. 너만을 지키는 힘. 분명히 그래. 그런데 나 말고 아버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커다란 힘이 되지 않겠어?" 좋게 좋게 포장하려니 말이 잘 안 나왔다. 저도 모르게 조금 더듬었다. 그런데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김훈상은 무슨 일이 있든지간에 김상희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한진수는 그걸 확신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 김훈상이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한진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음모에 빠질 수 없습니다!' 역으로 함정에 빠뜨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성녀를 호위하는... 이를테면 홀리 나잍트 같은 최정예 기사단을 만들어 너를 호위하는 거야." 그러면 적어도 황제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놀 시간이 많아지겠지. 생각해보니 아주 뛰어난 방법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홀리나이트라는 기관을 만들어 놓으면, 그 기관은 성녀를 보호하는 기관이 될 테고. 그러면 상희와 둥가둥가하고 놀 시간이 많아질 테니까. 한진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 이거 획기적인 방법이다!' 김상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훈상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소녀는 세계의 태양. 세계의 지존. 누구보다도 높으신 황제 아빠를 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딸이 될 수 있는 걸까요?" 김훈상에게는 '아빠. 황제 하세요.'라고 들렸다. 김훈상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것도 아니면 '소녀는 아빠가 황제하면 참 기쁠 것 같아요'라고 말하거나. 조금 더 과장하면 '아빠가 황제 안하면 아빠한테 실망할 거 같아요.'처럼 들렸다. '한진수...!' 이 똑똑한 놈이 자신을 역으로 함정에 빠뜨렸다. '이럴 수는 없다. 네 놈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 편히 부려먹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그 방안을 생각해봤다. 일단 시간을 좀 끌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김상희가 말했다. "아빠가 황제가 되신다면... 그 땐 감히 소녀가 아빠께 뽀뽀도 할 수 없겠죠?" 김상희. 이번에는 조련에 들어갔다. 조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진수가 고생(?)하는 것보다는 아빠가 고생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아빠에게는 조금 미안한 노릇일지 모르겠지만. '황제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 자. 오랜만이야. 한 번 나를 잊어보자. 나는 김상희가 아니다. 나는 김상희가 절대로 아니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아니야. 나를 잊는다! "이제 소녀는 아빠에게 뽀뽀도 할 수 없는 서글픈 날이 오고 말겠죠...?" 그래.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잠시. 그래. 잠시 뽀뽀에 미친 귀신이 빙의된 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순진무구한 눈망울. 초롱초롱한 눈망울. 아빠를 흠모하는 딸래미의 눈망울. 사슴같은 그 눈망울이다. "...뽀뽀해도 돼요?" 김훈상은 그 말에 이성을 잃었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이 남아서 시크하게 대답했다. "특별히 허락해준다." 자신의 볼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에이. 모르겠다. 까짓 거. 황제 하지 뭐. 좀 귀찮긴 하겠지만 그게 대수냐. 나 지금 뽀뽀 받는다. 대충 설명하면 이런 거다. 황제가 되면 뽀뽀 못 한다. 그러니까 지금 뽀뽀하겠다. 지금 이 말을 받아들이면, 이 행동은 암묵적으로 김훈상 자신이 나중에 황제가 되겠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이 마비됐다. 까짓 거. 황제 하면 그만이다. 대충 하다가 기회를 봐서 한진수에게 떠넘기면 되겠지. 그래서 결정했다. '황제 해야지.' 쪽 소리가 났다. 김훈상의 얼굴이 매우 밝아졌다. 많이 행복해진 것 같았다. *** 김상아가 쪼르르 달려갔다. "형부!" 나이는 어리지만 김상희와 거의 동갑으로 보인다. 김상아는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부. 우리 언니 많이 많이 사랑해요? 그래요? 정말 그런 것이어요?" 한진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김상아는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다른 여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다. 형부, 형부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는데 그게 참 귀여웠다. "우리 언니 같은 아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응?" "상아는 언니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우리 언니는 형부가 빼앗아 갔으니까, 우리 언니는 안 되고. 우리 언니 말고 다른 언니를 찾아야 하는데. 우리 언니 같은 언니는 이 세상에 없는 언니고.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언니를 차지한 형부한테 묻는 것이어요. 어떻게 하면 제일제일 사랑스러운 우리 언니를 얻을 수 있는 거죠?" 한진수는 빙그레 웃었다. "처제는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 될 거야. 그러면 나보다 더 멋진 남자들이 줄을 서겠지." "남자따위 필요 없어요. 냄새나고 별로야. 형부는 좀 낫지만 하여튼 정상인 남자는 별로 없어요. 나보다 싸움도 못하는 게 툭하면 계집, 계집 거리고." 그 말을 하는 걸 상희가 들었다. 아이고. 두야. 정말. 이 세상에서 저런 소리를 저렇게 막 하면 안 된다는 거. 여러 번 교육 시켰는데도 소용이 없다. "언니야!" 김상아가 달려가 김상희에게 와락 안겼다. "형부한테 너무 버르장머리없이 굴면 못 써." "우리 오빠들이 그러는데 형부는 도둑놈새끼래요." 끄응.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오빠들. 어느 오빠들인지 아주 잘 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망나니들 아닌가. 그런데, 첫째 오빠 김형석이 나타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오빠답지 않았던 오빠. 처음에는 마음의 안식처였는데, 최근에는 큰 충격을 선사해줬던 오빠. 그였다. "상희야." "오빠...?" 솔직히 말해 조금 두렵기는 했다. 그 때의 그 모습. 개차반의 등 뒤에서 단도를 핥으며 히죽히죽 웃던 그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그래. 나야." "......." 김형석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김형석은 순간 움찔 했다. 하지만 이내 내색하지 않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희야." 김형석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 나왔다. 0185 / 0192 ---------------------------------------------- 결정 ***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고려는 이미 제국으로 격상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프리온 나이트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프리온 나이트는 한진수가 소유하고 있지만 한진수가 고려를 지지하고 있다.- 막강한 무력과 재력. 그리고 성녀까지도 보유하고 있는 과거 잉카를 훨씬 뛰어넘는 저력을 자랑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지." 예전에, 비록 실수였다고는 하지만 세계의 병력들을 한 데 모아놓고 몰살시킬 뻔 했던 적이 있다. 백제와의 전쟁 때 말이다. 그 때. 고려의 무력은 이미 만천하에 증명 됐다. 그러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데 워프라는 획기적인 이동수단까지 가지고 있다. 거기에 퓨리어스라는 천고의 보물의 유일한 공급원인데다가 성녀와 성자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무력이면 무력. 기동력이면 기동력. 정보력이면 정보력. 금력이면 금력. 그 어느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나라가 바로 고려다. 그리고 그 고려의 국왕 김훈상이 황제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봐도 되었을 정도다. "용케 한진수가 황제자리를 양보했네." "엄청난 암투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렇겠지. 차후 100년. 어쩌면 1000년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건데. 젊은 천재 한진수와 전 세기의 천재 김훈상. 그 둘의 암투라. 듣기만 해도 짜릿했겠는데." 암투가 있기는 있었다.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그 암투의 핵심에 김상희가 있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하여튼 암투가 있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김형석이 말했다. "아버님께서... 차기 황제가 되기로 마음 먹으셨어." "그랬...군요." 정말. 어쩔 수 없는 딸바보구나.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조금 뭉클해지기는 했다. 사랑하는(?) 아빠를 과중한 업무 속으로 밀어 넣은 것 같은 그런 죄책감이 조금 들기도 했다. '어쨌든 황제는 좋은 거니까!'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는가. 황제 자리는, 권력자라면 누구나가 탐낼 만큼 매혹적인 자리였으니까. "그 사이에 네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더구나." 김상희는 모른 척 했다. 자고로 조련은, 상대가 조련 당하는 지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조련 아니겠는가. "...제가요?" "그래. 너 때문에 아버님께서 황제가 되기로 마음 먹으신 것 같아." "소녀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네게는 참 묘한 힘이 있어. 너는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너를 위해 행동한단 말이야." 김상희는 멋쩍게 웃었다. 이상한 거 아니다. 이 것이 바로 조련의 힘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김형석이 피식 웃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내가 여기 온 진짜 목적은..." 김형석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게 본론이며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랬던 일이 있었다는 거...정말 미안해." 고려왕국. 곧 제국으로 발돋움을 하게 될 왕국의 첫째 왕자가 계집인 김상희에게 무릎을 꿇었다. 김상희는 화들짝 놀랐다. "오, 오라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려 왕국의 첫째 왕자가 무릎을 꿇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이러지 마셔요. 다른 사람들이 흉 봐요." "오빠는 네게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말았어." "오, 오빠. 제발..." 김상희는 억지로라도 김형석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김형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너를 놀라게해서 미안해. 네게 상처줘서 미안해." "오빠가 한 것이 아니어요. 율다가 오빠를 조종해서 그런 것이어요." "조종을 당한 것도 미안해. 내가 완벽하게 저항했다면... 그랬다면 괜찮았을 거야. 환석이나 환성이. 아니면 아버님처럼..." 김형석은 분했다. 만약 김환석이나 김환성. 혹은 김훈상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쩌면 율다에게 조종당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율다의 능력은 전지전능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니까. 만약 모든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면 김훈상을 조종했을 거다. '내가 이 아이에게 큰 상처를 줬던 건가.' 김형석이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그에 반해 김상희는 죽을 맛이었다. '제발. 제발 일어나라구!' 이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첫째 왕자가 무릎을 꿇는 거. 이게 의미하는 건 엄청나게 큰 거다. 제국으로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는 고려 입장에서도 결코 이롭지 못하다. 왕가의 명예가 크게 손상되는 일이며, 타국이 고려왕가를 비웃을 수도 있다. '이래도 안 일어나겠다, 이거지.' 김상희는 결국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안 봤다. 누군가 김형석이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보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야했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는 김상희가 아니다. 나를 잊자. 잠시 나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 주문을 걸고 또 걸었다. 으아아앙! 김상희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좀 일부러 울었다. 김형석 좀 일으키려고. 이렇게 안 하면 절대 안 일어날 것 같았다. "사, 사, 사, 상희야?" 김형석은 물론 다른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을 훨씬 더 대우해주고, 여자들에 대하여 훨씬 더 잘 알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눈물을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고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소녀에게 무릎을 꿇으시다니. 소녀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요. 소녀가 나빠요."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동생병신도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겉으로는 서글프게 울고 속으로는 닦달했다. 일어나라고. 다행히 김형석은 일어났다.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 장미관. 스페셜 나이트 숙소. 긴급 보고가 올라갔다. -긴급 상황입니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에게 직통으로 연락되는 핫라인이다. 이 핫라인은 개설된 이후로 여지껏 단 7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김유신이 벌떡 일어섰다. '반역인가!' 그럴 수 있다. 고려가 제국이 되겠다는 포부는 이미 밝혔다. 그렇다면 그에 반하는 세력도 분명히 있을 터. 누군가 고려에 반대하며 군사를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이냐?" 인터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성녀님께서 울고 계십니다. 잔뜩 긴장해있던 스페셜 나이트들이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벌떡 일어섰다. "얘들아. 무기 챙겨라." 그들은 고려의 엘리트. 스페셜 나이트다. 무기 챙기고 집합하는데 30초가 안 걸렸다. 김유신의 표정도 자못 비장해졌다. 겉모습만 보면 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치르러 갈 때보다ㅗ도 더 비장했다. "우리는 성녀님을 울린 요인을 찾아 제거한다." 김유신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감히 어떤 놈이 우리 이쁜 성녀님을 울렸단 말인가.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버리고 말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문을 박차고 스페셜 나이트들이 나섰다. *** 김훈상에게 긴급 보고가 올라갔다. "폐하!" 보고를 올리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 분명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어디가신 거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여기 있었는데 워프를 통해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았다. '이 비상시국에 도대체 어딜...!' 큰 일이다. 지금 성녀님의 방에서 성녀님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성녀의 방은 지금 최신식 정밀 기기로 보호(?)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울음 소리라 짐작되는 음파가 탐지 됐다. 비상라인이 가동됐다. 김상희가 울음을 터뜨린지 약 2초 만에 긴급 보고가 올라갔다. 그래서 보고를 올리려고 했는데 김훈상이 사라졌다. '큰 일이다. 보고를 빨리 올려야 하는데.' 이제 신하들 사이에서 '딸등신'이라는 말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딸등신의 대표주자는 바로 김훈상. 딸을 예뻐하고 사랑하는 이 괴상한 행위. 이게 요즘 조금 유행이 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려 국왕 김훈상이 그런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조금씩 따라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딸바보 수준에 이른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하여튼 세계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딸등신이 알면 불벼락이 떨어질 텐데.' 2초만에 왔다. 그런데 이것도 늦은 것 같다... 라고 생각은 했으나, 그의 생각과 달리 김훈상은 이미 워프를 통해 김상희의 방으로 왔다. 딸등신이 황급히 외쳤다. "무슨 일이냐!" *** 김환석은 낮잠을 즐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위잉- 위잉-!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를 닮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 음파 탐지. 음파 탐지. 김환석이 벌떡 일어섰다. - 코드 네임: 내 똥개. 상태 이상을 호소합니다. 그다지 상태이상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울었을 뿐이다. 그러나 김환석의 중앙 통제 슈퍼 컴퓨터는 그걸 상태이상으로 받아들였다. 김환석이 말했다. "준비." - 대 테러리스트 전시 무장을 준비합니다. 그의 방에서 로봇 팔이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불과 3초만에, 김환석의 온 몸에 전신갑주가 입혀졌다. 최근에 발명한 아이언 슈트다. 김환석은 마력을 활용한 신체능력이 조금 뒤떨어진다. 그걸 보완해주는 슈트다. 이걸 입으면 일반인도 김환성과 거의 동등하게 싸울 수 있다. 물론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슈트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 성능 하나만큼은 기똥차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일반인도 아닌 고려의 왕자 김환석이 이 슈트를 입었다. 김환석이 이를 갈았다. '감히 어떤 놈이냐.' 중앙 통제 컴퓨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준비 완료. 아이언 슈트를 입은 김환석이 움직였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여 버리겠다.' *** 김환성은 요즘 김환혁과 김상아와 친하게 지낸다. 이 셋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김환혁이 말했다. "누나가 나랑 잘 안놀아줘요. 형." 김상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언니는 내 건데..." 김환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물어왓도 안 시켰다. 이게 다 한진수 그 놈 때문이다. 그 도둑놈 새끼가 금쪽 같은 내 똥개를 데려가 하루 종일 둥가둥가 노는 바람에 똥개랑 놀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김환성. 김환혁. 김상아는 같은 고민 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 금세 친해졌다. 그런데 김환성이 벌떡 일어섰다. "어떤 놈이냐!" 그리고 한 쪽 벽을 향해 헝거비를 던졌다. 콰광!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헝거비가 하늘을 가르고 벽을 갈랐다. 콰광! 콰광! 콰광! 콰광! 헝겊인형 헝거비가 벽을 부수며 날았다. 상황을 알아차린 김환혁과 김상아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 누나 괴롭히면 가만 안 둬!" "내 언니는 상아가 지킬 거야!" 아직 워프를 못 쓰는 김환혁과 김상아는 열심히 달렸다. 참고로 김환성도 워프 못 쓴다. 헝거비 내던지고 그도 달렸다. *** 한진수가 뭔가를 잡아냈다. '이 건...!' 헝거비였다. 벽 수십개는 족히 뚫고 날아온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일반인은 이거 얻어맞으면 그냥 죽는다. 이건 정말로 누구 죽이려고 던진 거다. 그런데, 이 거.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한진수도 상희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김상희가 울면 한진수가 더 슬프다. 누가 뭐래도 한진수는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이...이거. 뭔가 또 음모에 빠진 것 같다.' 그런데 상황이 영. 좋지 못했다. "너... 내 딸을 울린 거냐?" 김훈상이 지금 오해하고 있다. 아뇨. 제가 울린 거 아닌데요. 저도 울음소리 듣고 달려온 건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지금의 김훈상에게 그런 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저 딸등신. 지금 제대로 분노했다. 아니. 여태까지 맨날 분노하고 싶었는데 오늘 제대로 명분을 잡은 것 같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다. "한진수...!" 스페셜 나이트가 떼로 몰려왔다. 중간중간 더스 나이트도 보인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니. 그니까 이건..." 무슨 비상시국도 아니고 스페셜 나이트가 이렇게 떼로 움직인단 말인가. 여기서 끝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컥! 한진수가 비명성을 토해냈다. 일직선으로 붉은 빛이 쏘아졌다. 이거. 제대로 방어 못하면 죽는다. 레이저 광자포다. '이, 이건 김환석 왕자님...?' 차라리 김훈상과 나이트들은 말이라도 먼저 건넸지. 김환석은 시작부터 레이저포다. 여기서 끝이면 좋으련만.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워프 못 쓰는 김환성이 도착했다. "아니. 왕자님들. 그러니까...!" 말을 하기도 전에 김환혁과 김상아가 달려 들었다. "우리 누나 괴롭히면 죽여버린다고 했잖아!" "내 언니 괴롭히지마요! 상아가 용서 안 해!" 한진수는 울고 싶어졌다. 이거. 처가 사람들. 너무 무섭다. 김상희는 머리가 아파왔다. 아니. 무슨. 상황만 보면 무슨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다. 이대로면 사랑하는 서방님 죽게 생겼다. 안 되겠다. 이거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지금 고려왕가의 사람들은 한진수의 말을 아예 안 듣고 있다. 안 듣는 건지 못 듣는 건지 구분은 안 됐지만 하여튼 안 들었다. 그래서 김상희가 나섰다. 이 세계 기준으로, 고귀한 남자들의 싸움에 감히 천한(?) 계집이 나섰다. "모두 그만두지 못해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0186 / 0192 ---------------------------------------------- 신혼 여행 *** 김상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모두 그만두지 못해욧!" 세계를 움직이는 거인들. 전직 신라국왕 한진수와 현 고려국왕 김훈상. 막강 무력 스페셜 나이트(더스 나이트도 포함). 김씨 왕자들. 그 모두가 멈췄다. 그리고 거인은 아니지만 정적에 휩싸인 또다른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강서영. 김상희를 낳은 어머니이자 현재 김훈상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여자였다. 그녀는 김상희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상희를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세, 세상에...' 강서영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주저앉을 뻔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저앉았다. '사, 상희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명령조로 '그만두지 못해욧!'이라고 외치다니. 그것도 그냥 외친 것도 아니고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외치다니. '마, 말도 안 돼...'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기는 있다.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막말을 내뱉는 경우. 여자들도 그럴 때가 아주 드물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러한 경우 역사서에 대부분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가 참수당했다. 혹은 사약을 마시거나. '안 돼!' 강서영은 마음이 급해졌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사랑하는 것만큼, 강서영도 김상희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누가 뭐래도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 아니겠는가. 제, 제가 대신 죽겠어요! 그렇게 외치려고 했는데 김훈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그러니까..." 김훈상도 김상희의 이런 모습. 처음 본다. 항상 예쁘게 웃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다니. 이럴 수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서영과는 다른 의미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훈상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국정을 논할 때도, 백제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도 이렇게 머리가 굳은 적은 없었다. 이 상황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딸이 내게 화를 내다니. 이건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귀찮은 황제 하기로 했는데! 김훈상은 소심하게 물었다. "내, 내가 뭐 잘못했니?" 그 말에 강서영은 물론이고 스페셜 나이트들마저도 충격을 받았다. 저 왕이 과거 전쟁기를 이끌며 고려를 이토록 키워낸 전설적인 인물. 김훈상이 맞나 싶었다. '폐, 폐하!' 스페셜 나이트는 그렇다치더라도, 더블 스페셜 나이트는 과거 고려의 영광을 직접 일궈냈던 인물들이다. 김훈상과 함께 말이다. '그 카리스마 넘치던 분이 저 분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건가...' 더스 나이트들 중 한 명은 순간 과거를 회상하고야 말았다. 햄버 협곡에서의 보였던 김훈상의 모습.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햄버 협곡의 전투는 누가봐도 절망적이었었다. 그런데 김훈상이 죽음을 불사하고 결사대 몇을 이끌고 나가 기습 침투 작전에 성공하여 불가능했던 승리를 일궈냈던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김훈상을 보며 감탄했었다. 아니. 감탄이 아니라 경외했었다. 정말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김훈상은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리더였었다. '그랬었는데...' 분명히 그랬었는데 '내가 뭐 잘못했니?'라고 묻고 있다. 그것도 그냥 묻는 것도 아니고, '내, 내가 뭐 잘못했니?'라며 말까지 더듬었다. '이 것은... 꿈인가.' 아무래도 꿈이 아닐까 싶다. 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김훈상이 저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김환석은 아이언 슈트의 헬맷을 뒤로 제꼈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김상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저 놈이 널 울린 거냐?" 목소리는 덤덤했는데 그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 대단하다는 한진수마저도 찔끔 놀랄 정도로 말이다. "오빠! 아빠! 제발 그만들 좀 할 수 없어요?" 김상희는 외치고 싶었다. 왜 자꾸 우리 남편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그 말에 김환석의 표정이 잠깐 벙쪘다.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이런 상황에 제법 단련이 되어 있었던 강서영마저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이 소리를 질렀고 왕과 왕자들이 갸우뚱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갸웃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야 맞다. 감히 계집따위가 어느 안전에 소리를 치는 거냐고. 호통을 치고 그 이후 사형장으로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이 곳의 분위기는 영 이상했다. "또, 똥개야." 김환성은 헝기비의 팔 하나를 들고 그걸로 김상희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그리고 무력에 관한한 세계의 대천재 김환성이 우물쭈물 물었다. "헝거비가 그러는데, 너 화 났냐는데?" 목소리도 이상하게 냈다. 제딴에는 헝거비의 목소리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스페셜 나이트는 까무러칠 뻔 했다. 참고로 김환성은 현재 제 9대대의 대대장을 자리를 맡고 있는 중이다. '지금 공주님 앞에서 아양 떠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저 모양새. 아무리 봐도 고양이가 애교를 떠는,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신세계다. 여태까지의 경험들도 충분히 신세계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늘 위에 또다른 하늘이 있었다. 김상희의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우리 진수 좀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요? 왜들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에요?" 김훈상이 변명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저 놈이 널 울린 것 같아서..." 그 때, 김형석이 나섰다. "아버님. 그런 것이 아니라 저 때문에..." 그러자 김훈상이 과거와 다르게 버럭 화를 냈다. "너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이번에는 스페셜 나이트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놀랐다. 김훈상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을 혼을 낼 줄이야. 김훈상의 이런 모습. 굉장히 낯선 모습이다. 첫째 왕자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보통은 이렇게 혼을 내지 않을 터인데. 알렉스는 후에 이 날을 일컬어 '황제 사기극'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 연유는 이러했다. "너는 네 행동 하나로 인하여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김유신은 묻고 싶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지나친 억지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이건 김형석 왕자님이 아니라 김상희 공주님이 불러모은 건데요. 그리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김형석이 소환한다고해서 이렇게 열성적으로 사람들이 모였을까? 그 부분에 대해선 의구심이 들었다. "너의 영향력은 익히 보았다." 김상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무슨 생뚱맞은 상황이란 말인가. "네 영향력은 이미 확인했고, 이제 더불어 너의 리더십을 확인해보겠다." 한진수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 상황. 뭔가 이상하다. 김훈상이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음모의 냄새가 났다. '이번에도 음모다!' 세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황제를 하지 않기 위한 암투와 음모가 난무하는 세상. 그 곳이 바로 이 고려 왕궁 아니겠는가. 김훈상이 말을 이었다. "너의 행동에 책임지기 위하여, 네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왕의 업무를 1년 간 나와 함께 보도록 한다." 김유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그냥 시켰으면 됐지. 이 무슨 억지스런 상황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이 이해하든 말든 김훈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진수를 황제에 앉히려고 머리를 쓰다보니 다른 걸 생각 못했다. 원래 하나에 푹 빠지면 다른 게 안 보이는 게 정상이다. '나도 싫고 한진수도 싫으면 다른 놈이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 왕의 업무를 함께 보고나서 결국에는, '아주 잘 도와줘서 실력을 입증시킨 다음.' 계획이 그려졌다. '황제를 시키자!' 논리적인 이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하여튼 김훈상의 속마음은 이미 결정됐다. 김훈상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상희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안의 남자들은 정말...' 백제라는 무시무시한 적을 이겨놓고 나니까 뭔가 더 힘든 적을 마주한 것 같다. '진수랑 신혼여행도 가야 하는데.' 신혼여행. 이런 거 원래 없다. 여자따위가 어디 감히 여행 따위를 꿈꾼단 말인가. 하지만 한진수는 달랐다. 지금 한진수는 김상희에게 좋은 곳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났다. 아니. 사실 좋은 곳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난 거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디가 됐든 상관 없었다. 바다여도 좋고 산이여도 좋고 계곡이어도 좋다. 어디가 됐든 김상희랑 같이 있는 게 좋다. 어쨌거나 김상희에게 좋은 곳 보여 주고 싶은 것이 한진수의 속마음이다. 그리고 한진수는 또 엉큼한 생각도 했다. '그 때가 되면 진짜 우리 둘이 있을 수 있겠지!' 처가살이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왕이면 여행 엄청 길게 가기로 했다. 이를테면 364박 365일 정도로 말이다. 그 동안 좋은 곳 보고 맛있는 거 실컷 먹으면서 왕창 돌아다니고 싶었다. 하여튼 김훈상의 호통으로 소동은 마무리 됐다. 김상희가 울었더니 황제가 내정됐다. 김형석으로 말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아볼 수 없지만 하여튼 결과는 그랬다. 상황은 이렇게 마무리 됐는데 중요한 것이 남았다. 한진수가 김훈상을 찾았다. "아버님." 김훈상은 듣지도 않고 말했다. "안 돼." "......." 한진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 꺼내기도 전에 안 돼라고 할 줄은 몰랐다. '역시 대천재다.' 무슨 얘기를 할 지 이미 모두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이제 큰 일 다 끝났는데 신혼여행 정도는 보내줘도 되잖아요. 한진수는 울고 싶었다. 꿋꿋하게 말했다. "저는 신혼여행을 가야겠습니다." "신혼여행. 그런 해괴한 풍토는 누가 만든 것이냐!" 한진수도 발끈했다. "딸등신이란 단어를 유행시킨 것보다는 낫겠지요." "딸등신?" 딸바보는 알아도 딸등신은 모른다. 딸바보는 그가 직접 사전에 등재시켰었다. 그런데 딸등신이라니. "어떤 미친 놈이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한단 말인가?" 당신 빼고 전부 다요. 한진수는 그렇게 말할 뻔 했다. 그런데 김훈상은 조금 이상한 핀트에서 화를 냈다. "나 말고 그런 놈이 또 있었단 말이지." 원래 아랫사람이 수군대는 거. 윗 사람한테는 잘 안들어간다. 김훈상이 딱 그런 경우였다. 이럴수가. 딸등신이라니. 딸바보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나보다 더 딸을 사랑하는 놈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겉으로는 투덜거렸다. "그런 미친 놈이 실제로 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군." 그 황당한 미친 놈이 바로 당신입니다. 폐하. 한진수는 숨을 골랐다. "폐하. 하여튼 신혼여행 좀 보내주십시오." "안 된다고 했다." 너 같은 변태 도둑놈 새끼랑 내 딸을 단 둘이 여행 보낼 수는 없지. "정말 안 됩니까?" "그렇다." 한진수는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김훈상은 찝찝했다. 한진수가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김환석과 김환성을 따로 불렀다. 따로이 주의를 줬다. "뭔가 수상하다." 김환석과 김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똥개를 저 엉큼한 놈과 단 둘이 여행을 보낼 수는 없었다. 두 왕자가 눈에 불을 키고 한진수를 감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 일이 벌어졌다. 0187 / 0192 ---------------------------------------------- 신혼 여행 *** 한진수가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이 집안. 이 더러운 처가살이. 못해먹겠다. 물론, 아주 못해먹겠다는 건 아니다. 이런 거 애초에 예상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울음 한 번에 집안 사람들이 전부 집합했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신혼여행조차도 못 가게 막는 건 너무했다. "...응?" 김상희는 눈치챘다. 지금 한진수 사고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고. '나이스!' 김상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진수야... 도, 도대체 뭘 하려고 그래?" 김상희는 다 안다. 한진수는 지금 신혼여행을 빙자한 납치를 강행하려고 하는 중이다. 물론 김씨 집안 남자들 입장에서 납치고, 김상희와 한진수의 입장에서는 허니문 여행쯤 되겠지만. "오늘 밤. 너를 데리고 갈거야."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이토록 좁은 왕궁 내에 계속 처박아 둘 수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 곳에는 보는 눈과 귀가 너무 많아서 지지고 볶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이제야 사랑하는 사람과 좀 편안해지려고 하는데, 넘어야할 산이 이렇게도 많다니. 이럴 때 필요한 건 도망이다. "하, 하지만 진수야. 잠깐만. 지, 진정해." 진정하라는 이 말은 오히려 한진수를 더욱 진정할 수 없게 했다. 김상희는 연기했다. 이제 연기라면 도가 텄다. "나, 나도 물론 너랑 둘이 있고 싶지만." 그래. 좋았어. 나이스. 바로 이거야. 서방님. 그래. 납치를 할 땐 화끈하게 해주라고. 우리 집안 남자들. 답이 없으니까. 무대뽀에는 무대뽀로 맞서야지.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참았어. 암 그렇고 말고! 김상희는 속으로 연신 외쳤다. "정말 너랑 같이 있고 싶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김상희의 말은 언뜻 보면 한진수를 말리는 것 같지만 절대로 말리는 게 아니었다. 우리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난 너랑 같이 있고 싶다. 이걸 말하는 거다. 이 말은 곧, 한진수로 하여금 '상황이 어려운 비극적인 커플'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서 한진수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원래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이다. "꺄, 꺅!" 김상희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최첨단 보안 시스템으로 이 방이 보호되고 있다는 걸 안다. 소리를 지르면 금방 들통날 거다. '실수다!' 실수하고 말았다. 진수가 하도 갑자기 안아드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한진수가 황급히 말했다. "눈 감아. 워프할 거야. 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어." 김상희는 시키는 대로 했다. 한진수의 목에 팔을 둘렀다. 사랑의 도피(?)가 시작 됐다. *** 김훈상으로부터 특별명령을 받은 김환석과 김환성은 들었다. 꺅! 하는 비명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감히 내 동생을!' 그 둘은 그 비명을 구원의 신호로 해석했다. 김상희는 그저 너무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른 거고, 한진수와의 도피 아닌 여행을 즐기고 싶어했지만 그 둘은 철저히 자기 위주로만 생각했다. '똥개가 납치 당했다!' 이 납치. 예전과는 다른 납치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김환석과 김환성 모두 '납치'라는 말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다. 김상희는 이미 여러 번 납치 당했었으니까. 그냥 일단 납치라는 것 자체에 놀라고 본다. 스페셜 나이트 직통 핫라인이 9번째로 연결 됐다. - 대대장님. 큰 일입니다. 김유신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 - 김상희 성녀님이 납치됐다 합니다. 김유신은 보고를 다 듣기도 전에 범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김유신은 오빠된 마음으로 분노했다. "한진수 네 이놈!!!" 비록 결혼은 했으나 단 둘만의 여행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그건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으로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참고로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인 것과 김상희, 한진수의 신혼여행과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다. 전혀 연관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김유신은 자기 좋을대로 생각했다. 바로 김훈상을 찾았다. "폐하!" 아니나 다를까. 김훈상은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우리도 움직인다." 김환석과 김환성에게 주의를 시켰는데, 한진수가 좀 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김훈상이 결연하게 말했다. "반드시 찾아내라." 고려왕궁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 세계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고려왕국이 비밀리에 군사를 움직였다는군." 완전히 비밀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스페셜 나이트와 나이트 제 9대대가 대대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대놓고 출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무엇이 목적인지. 전혀 밝혀진 것이 없었다. "김환성 왕자가 직접 움직인다고 하더라고." 현재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보통 김훈상, 한진수, 김환성을 꼽는다. 다른 건 모두 제외하고 무력만 놓고 봤을 때 말이다. 김훈상과 한진수가 약간 비슷한 타입이다. 김환성은 완전히 다른 타입이다. 일단 힘으로 때려붓고 보는 타입. 최근에 그가 익힌 사자후는 약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여튼 김환성 왕자가 직접 움직인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어디가... 희생양이 될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고려국왕 김훈상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고 공표했다. 근 시일 내에. 늦어도 몇 년 이내에 고려는 제국이 될 거고 김훈상은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고려는 나라 안팎을 재정비 해야 할 것이다. 고려의 내실이야 워낙에 튼튼하니, 정리해야할 것은 보통 바깥이 될 터인데 그러려면 어딘가 고려에 반기를 들고 있는 나라를 본보기로 숙청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 된다. 매정하지만 그 것이 바로 국제사회다. "우리는 아니겠지." "어쩌면 그냥 위협만 할 수도 있습니다. 까불지 말라고 경고할 수 있겠죠."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무력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김훈상은 언제나 완벽을 추구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서 보기엔 영락없는 딸등신이지만 밖에서 보면 세기에 단 한 번 태어날까 말까한 왕이었으니까. "완벽을 추구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어느 한 곳을 칠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일왕국이나 펜릴왕국이 유력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국력이 강한 다른 나라를 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비상입니다." "스페셜 나이트와 1개대대가 움직였을 뿐인데. 이 정도의 영향력이라니... 엄청나군." "거기에 한진수가 포함되어 있다면... 나라 전체를 쓸어버리고도 남을 전력입니다." 프리온 나이트까지 함께 움직일 테니까. "이 것 보십시오. 고려가 단순히 병력을 조금 움직였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합당한 결론을 내렸다. 그는 티오피 왕국의 지혜 주머니. 탈리반이다. '바로 이거다!' 그가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야유회를 갔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행동만으로도 세계는 충분히 긴장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 행위만으로도 고려의 영향력은 입증이 된 셈입니다. 고려는 그 어느 곳도 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힘이 있다. 이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나서 상황이 진정된 이후 우리는 단순히 야유회를 다녀왔을 뿐이다. 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 것이 고려가 노리는 바일 겁니다." "과연...!" 듣고보니 그럴 듯 했다. "그래서 완전히 비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완전히 공표를 하고 움직인 것도 아니겠지요." "과연 그렇군. 역시 탈리반. 네 추리가 맞는 것 같구나. 확실히 단순 야유회 정도라면 군사를 일으킨다고 거창하게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 정말로 군사를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완전히 비밀로 했을 터이고." 물론 아니다. 한진수가 갑자기 김상희를 납치하는 바람에 너무 급해서 병력 움직이는 게 티났을 뿐이다. 그리고 무력시위를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사위 놈이 감히 사랑스런 딸을 납치하여 신혼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가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긴장했다. 틸레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영리한 토끼는 굴을 3개 파놓습니다. 우리도 대비는 해야 합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쳐야 합니다. 감히 고려에 항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도 아니면... 항복의 준비를 완벽하게 갖춰놓든지." *** 김상희가 한진수의 품에 안긴 상태로 말했다. "괜찮...을까?" 한진수가 피식 웃었다. "아니. 안 괜찮을 걸." 괜찮을 수가 없다. 그리고 김상희의 몸에는 마이크로 위치추적기가 부착되어 있다. 아무리 워프를 통해 도망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위치가 발각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둘이 있으니까 좋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스잇트 중립국." "아..." 스잇트 중립국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저만치 멀리, 아르포스 산이 보였다. 산 중턱 부터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지금 서 있는 이 곳은 푸른 들판이 널리 펼쳐져 있었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제법 선선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언젠가 지구에서 진수와 함께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던, 그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김상희가 핀잔을 줬다. "앞 좀 보고 걸어.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사실 이건 한진수를 엄청나게 무시하는 말이다. 세계의 대천재가, 눈 감고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마력의 대천재가 눈 감고 걷는다고 넘어질 리 없지 않은가. 분명 무시하는 말이긴 했는데 한진수의 눈에는, 김상희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한진수가 말했다. "넘어질까봐 걱정 돼요?" 그 말투는 다분히 '오구구. 넘어질까봐 걱정 해쪄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아기한테 하는 듯한 그 말투. 김상희는 이 기분이 좋기도 좋으면서 또 싫기도 싫었다. 오그라들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김상희는 괜스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애기취급 하지 마. 이 초딩아." 한진수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김상희를 쳐다보기만 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김상희에게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눈빛으로 말이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왜 초딩인데?" "그거야 초딩이니까 초딩이지." 과거 지구에 있을 때,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종종 '초딩'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한진수는 가끔 귀여운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이를테면 렌트카 운전을 하면서, 코너를 돌 때 입으로 푸슈슈슉! 하고 소리를 낸다거나 별 시덥잖은 것을 해놓고선 엄청 자랑스러워 한다거나. 하여튼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김상희는 한진수더러 초딩이라고 했다. '어. 그런데...' 김상희는 한진수를 쳐다봤다. '어떻게...' 뭔가 이상했다. 한진수는 여전히 김상희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초딩이란 단어를... 알고 있는 것 같아.' 초딩. 초등학생을 일컫는 말이다. 표준어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비속어로 분류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곳에는 초등학생 혹은 초딩이라는 말이 없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러워?' 마치 그 단어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너는...'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된장찌개'라는 말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예전의 그 한진수라거나, 지금의 한진수라거나. 별로 신경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는 지금의 한진수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조금 마음이 이상해졌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왜 그래?" 김상희가 말했다. "진수야." "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이번에는 묻기로 했다. "어떻게... 초딩이란 단어를 알아?" 0188 / 0192 ---------------------------------------------- 신혼 여행 *** 한진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응?" 김상희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 말을 아는 거야?" "글쎄..." 한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근데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인지 몰라?" "응." "정말 몰라?" "응." 김상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괜히 이상한 기대 하고 말았다. 괜히 토라졌다. 한진수 앞에만 서면 괜히 더 사소한 일로 토라진다. 한진수는 긴장했다. "왜 그래? 삐졌어?" "아니." 아주 빠르게,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이 말을 굳이 과장하여 해석해보자면 '사실 이건 삐졌다고 말하기에도 좀 민망할 정도인데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또 뭔가 싫어. 그러니까 안 삐졌다고 말을 할 거야. 하지만 너는 내가 기분이 나쁨을 당장 알아차리고 어서 내 기분을 풀어줘.'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 세계의 남자 한진수는 당연히 그걸 몰랐다. "밥 먹으러 갈까?" "어." 평소라면 응! 하고 말했을 거다. 고개도 끄덕였을 거다. 행복에 겨운 눈으로 한진수를 쳐다봤을 거다. 하지만 응도 아니고 어라고 말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둔하기 짝이 없는 한진수는 김상희가 아주 약간 우울해진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김상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내가 삐질 문제도 아니긴 해.' 그걸 머리로는 안다. 저 쪽 세계의 한진수와의 연결고리.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전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진수가 초딩이란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에 아주 잠깐 기대를 품기는 했지만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고 해서, 진수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내가 뭘 바라겠어.' 지구의 한진수라 할지라도 눈치 못 챈다. 이런 건. 한진수가 피식 웃고 말했다. "그 전에 잠깐." 한진수가 김상희를 안아 들었다. "뭐, 뭐야?" 그리고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땅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진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래 봐봐." 김상희는 한진수의 목에 팔을 감은 상태로 실눈을 뜨고서 아래를 살짝 쳐다봤다. 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이 보였다. 푸른 들판 어딘가에는 양떼와 양을 치는 목동. 그리고 양치기 개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저쪽 한 쪽에는 풍차가 커다란 팔을 아주 느릿느릿 돌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로 옆에서 짹짹, 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파란색 깃털을 가진 작은 새가 보였다. 그 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한쪽 팔을 뻗었다. 어딘가를 가리키듯 검지 손가락을 폈다. 그 새가 검지 손가락 위에 앉았다. 짹- 짹- 짹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는데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뭐랄까. 정말 평화로웠다. "여기 위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사람에게 평안한 마음을 심어준다고 해." 땅에서 보면 모른다. 구름이 손에 닿는 이 기분. 초록색 들판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직접 보는 이 기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다. 그 품에 안긴 채로 이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아버님은... 좀 과격했지?" 무슨 말인고 하니, 김상희가 좋아할 줄 알고 예전에 많이 태워줬었던 '비행기'를 말하는 거다. 김상희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지금 이렇게 높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하고 좋았다. 기분을 굳이 촉감으로 설명해보자면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한진수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달콤했다. "...어때? 기분은 좀 풀렸어?" "응?" 김상희는 한진수를 쳐다봤다. 말도 안 돼. 지금 진수가 나 기분이 조금 안 좋았던 걸 눈치 챈거야? 그래서 일부러 이러는 거야? 에이 설마. "나는 사실 둔해서... 네가 왜 기분이 우울해졌는지는 잘 몰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둔하고 미련하거든." "......." "그 뭐야. 초딩이란 단어와 무슨 연관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거 무슨 기념일 같은 거랑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여튼 나는 이유는 잘 몰라.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한진수가 김상희의 몸을 살짝 놓았다. 김상희의 몸이 하늘에 둥둥 떴다. 김상희의 손가락에 앉아 지저귀던 파랑새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김상희는 비명을 지르려다 말고 조심스레 눈을 떴다. '무섭지...않아...?' 무섭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하늘에 떠있는데. 마치 땅 위에 서있는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무서워하지 마. 네 옆에 내가 있어.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는 언제나. 그 어느 상황에서나 네 옆을 지키고 있을 거야. 지금처럼." 한진수가 김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김상희가 눈을 감았다. 한진수는 김상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파랑새가 한진수와 김상희의 주변을 맴돌며 짹짹거렸다. 그리고 그 때. 한진수는 이상함을 눈치 챘다. 키스를 멈췄다. 손을 뻗었다. 파랑새가 한진수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왔다. 한진수는 그 파랑새를 쳐다봤다. "젠장!" 한진수는 파랑새를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김상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무, 무슨 짓이야?" "저거. 우릴 감시하는 카메라였어. 도망쳐야 해." 이럴 수가. 김환석의 기술력을 좀 얕본 것 같다. 추적하려면 적어도 하루 이상은 걸릴 줄 알았는데 불과 6시간 만에 이렇게 찾아내다니. 한진수는 생각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 전쟁기를 이끌었던 국왕 김훈상이 직접 지휘했다. "놈의 현재 위치는 이 곳이다. 그러나 워프를 이용하여 도망을 치겠지. 놈은 어차피 우리에게 잡힌 다는 것을 가정하고 움직일 것이다." 감히 처가를 피해 평생 도망다닐 생각은 아닐테니까. 지금의 이 상황은 이를테면 일탈 같은 거다. 하지만 그 일탈. 1분 1초도 더 허용할 수 없다. 금쪽 같은 내새끼가 지금 납치당한 상태니까. "그렇다면 놈은 짧은 시간 내에 상희에게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겠지. 현재 그 놈의 워프 이동 반경 내에서 가장 유력한 곳은 바로 햄버 협곡과 엘펠 타워. 게슈툴트 폭포. 이 세 가지로 압축이 된다.그러나 엘펠 타워에는 남자 놈들이 아주 많지." 그를 보좌하는 나이트들도 머리를 맞대고 굴렸다. "한진수의 성정상 엘펠타워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괜한 시비에 휩쓸릴 경우가 많습니다. 인적이 드물면서 풍경이 좋은 곳 위주로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보고가 올라왔다. "놈이 눈치를 챘습니다! 파랑 1호를 멀리 던졌다고 합니다." "부수지는 않았군." 알 것 같다. 파랑 1호는 김환석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형님의 작품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차마 부수지는 못하고 멀리 던져버렸겠지. 이걸로 더더욱 확실해졌다. 한진수는 고려왕궁을 등지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반항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김훈상은 이를 갈았다. '다시는 그 반항도 못하게 해주마.' 김훈상이 말했다. "햄버협곡과 게슈툴트 폭포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햄버협곡은..." 햄버협곡은 과거 김훈상이 전투를 치렀던 곳이다. 그 유명한 햄버협곡 전투가 일어났던 곳. "내가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도륙했었지."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라 함은 장난이 아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적어도 3천 이상의 적을 죽이고 매장했었다. 원래대로라면 업적이다. 평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때는 전쟁기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같은 시기. 더더군다나 딸 앞에서라면 그 것은 감히 업적이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 아무래도 딸은 생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그러니까 한진수는 그 곳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 곳. 게슈툴트 폭포. 한진수의 목적지는 바로 그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진수의 능력은 대단히 뛰어나다. 마음먹고 도망만 다니면 잡는 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가용 가능한 전 병력을 집중해야했다. "게슈툴트 폭포에 진을 치고 함정을 판다. 놈을 기다린다." "예. 폐하." *** 한진수는 머리를 굴렸다. '엘펠 타워와 햄버협곡. 그리고 게슈툴트 폭포.' 그 모두. 유명한 관광지다. '그러나 엘펠 타워에는 남자가 너무 많아.' 이렇게 여자를 하늘에 띄우고 안고 있는 것만 봐도 시비를 걸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햄버협곡은...' 그 곳은 김훈상이 전투를 치렀던 곳이다. 딸에게, 아빠가 사람을 생매장 시켰던 곳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남은 곳은 게슈툴트 폭포.'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야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아버님도 똑같이 하고 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게슈툴트 폭포로 가면... 아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김환석의 기술력. 김환성의 마력. 그리고 김훈상. 그리고 스페셜 나이트들. 작정하고 대비를 하면 도망칠 수 없다. 이대로 처월드(?)에 잡혀가게 되는 거다. 한진수와 김훈상은 다른 몸과 다른 머리를 가졌지만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게슈툴트 폭포로 오게 될 거라과 확신하고 있겠지. '햄버협곡으로 가면... 나중에 아버님의 진노가 내리겠지. 엘펠타워는 더더욱 불편해. 게슈툴트 폭포는... 가면 잡힌다.'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어느 곳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그 때, 김상희가 물었다. "진수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눈 감으라고 했잖아." 워프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한진수는 피식 웃었다. 지금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표정은 평온했다. 잠깐 잊을 뻔 했는데 그래도 신혼여행이다. 신혼여행인데 너무 다급한 모습을 보이면 신부가 불안해하지 않겠는가. "아니. 네가 너무 예뻐서 순간 넋을 잃고 말았어." "뭐래." 김상희는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기분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쁘다고 해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있나. 기분 좋지만 괜히 민망하다. 민망하기도 하고, 좋다고 말하면 한진수가 우쭐해할 것 같다. 지나치게 우쭐댈 것 같아서 일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말이야."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갈 건데?" "음." 이미 머릿속 계산기는 계산을 완료했다. "여기." 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땅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곳의 풍경을 더 만끽할 거야." 아무데도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오래는 못 있을 거다. '사냥개를 풀 거다.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어.' 아마 저 쪽은 이 쪽이 워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역으로 아무 곳도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저 쪽은 이 쪽을 워프 하도록 만들겠지. 누군가, 누가 됐든 적은 병력으로 이 쪽을 압박할 거다. 한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혼여행이 뭐 이리 다이나믹하고 전술적이야?' 어쨌든 시간을 벌면, 조금 더 큰 반경으로 워프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워프 예상지가 적어도 5곳은 늘어난다. 지금은 선택지가 하나. 시간을 벌면 선택지가 총 6개로 늘어나는 셈이다. '그 정도면 도박을 걸만 하지.' 그래서 일부러 느긋하게 행동했다. 신혼여행에 임하는 남편의 자세는 자못 비장했다. '와라...!' *** 한진수의 예상대로였다.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감히 나를 상대로 전략 싸움을 하자는 것인가?' 한진수와 김훈상만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그 둘에게는 이토록 비장하고 진지하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딸 등신과 아내 등신이 딸 혹은 아내를 쟁탈하기 위하여 벌이는 각축전에 불과했다. '사냥개를 풀 거라고 짐작하고 있겠지.' 김환석. 아니면 김환성. 둘 중에 한 명만 보내면 압박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겠군.' 시간을 벌면 더 먼 거리로 워프를 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된 이후 도박을 걸 생각이겠지. '일단은... 아이언 슈트를 착용한 환석이를 보낸다.'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저 쪽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전략이란 언제나 적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토대로 짜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봐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스페셜 나이트 대대장 김유신이 깜짝 놀랐다. "폐, 폐하!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다." "하, 하지만... 그 것은 너무..."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나를 상대로 전략게임을 걸었다. 사위에게 지는 장인. 모양새 빠지지 않나?" 김유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모습. 또 나왔다. '나왔다. 미친개!' 현 세기의 대천재 한진수와, 과거 대천재. 현재 딸 등신 김훈상이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세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 그게 정말이야?" ============================ 작품 후기 ============================ 거 참...내가 썼지만... 신혼여행 한 번 다이나믹하네 0189 / 0192 ---------------------------------------------- 신혼 여행 *** 세상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지금 한진수에게 현상금이 걸렸다. "죽이는 건 안 되고... 포위만 가능하다 이건가." "고려 왕국 군이 도착할 때 까지 시간만 끌면 된다는군." "시간만 끌면 한진수를 붙잡고 있는 시간당 퓨리어스 1병을 준다고? 에이 설마." 갑자기 고려국왕이 왜 한진수에게 현상금을 걸었는지도 모르겠고 왜 이런 이상한 내용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정도면 해볼 만 하지 않아?" "한진수가 우릴 공격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선 괜찮지. 퓨리어스 1병이야. 3대가 떵떵거리면서 펑펑 쓸 수 있는 돈이라고. 게다가 3시간을 잡고 있으면 3병."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단순히 포위하고 1시간만 끌면 퓨리어스 1병을 준다. 이 정도면 해 볼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워프를 할 수도 있잖아. 그건 어떻게 하지?" "지금 고려왕국에서 워프를 방해하는 EMP탄을 동시다발적으로 쏜다고 각국에 알렸어."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EMP탄은 미사일에 탑재된다. 자국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을 그 어느 국가가 두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는단 말인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각 국의 수장들에게 엄청난 로비를 벌였다고는 하는데..." 그런데 그게 가능해졌다. "하긴... 고려가 정말 미친 척하고 미사일을 날려대면..." 제국이 없어진 지금, 고려는 전세계를 상대로해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들은 고려를 강제할 힘이 없었다. 그나마 로비라도 해줄 때, 그 때 받아줘야 하는 게 이득. "그런데 이런 일을 도대체 왜 벌이는 거야?" "아마도 한진수가 고려 왕국 내의 엄청난 기밀문서 혹은 보배에 준하는 무언가를 훔쳐갔을 확률이 크겠지." "아. 그래서 죽이면 안 되고 포위만 하고 있으라고 하는 거구나." "그렇지. 그 보물을 어디에다가 숨겼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모든 것이 설명이 되네." 오해가 커지고 커졌다. 지금 한진수는 고려 왕국 내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를 훔쳐서 도주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 와중에 들어간 돈이 -EMP탄 및 로비에 들어간 돈이- 수 백조에 이른다고 했다. 말이 수백 조지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일반인들에게는 감조차 오지 않는 엄청난 금액. 어지간한 왕국의 1년 예산과도 맞먹는 엄청난 돈이 현물로 풀렸다. 그리고 고려 왕궁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퓨리어스 물량도 많이 풀었다. 한진수를 기필코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췄다. "이거 어제까지 6천원이었는데, 왜 갑자기 두 배나 뛴 거요?" "어제의 6천원이랑 오늘의 6천원이랑 같습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2배는 너무 하잖아." "싫으면 사지 마세요. 사겠다는 사람 널렸으니까." 엄청난 돈이 일순간에 풀리면서 현금의 가치가 폭락했다. "고려가 갑자기 엄청난 현금을 풀면서 현금가치가 폭락한 거. 아직도 모르슈?" 전 세계의 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거듭했다. "갑자기 어째서... 어째서 일을 벌인 걸까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고려에서 분명 꿍꿍이가 있을 터인데."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이 행위. 별로 좋은 행위라고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왜? 무엇을 노리고? 뭔가 거대한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아뇨.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말을 아끼고 있을 뿐." "......." 일반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자들은 이미 대충 예상은 하고 있다.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다. "고려는 지금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죠. 하지만 타국을 공격하는 것에는 무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 여러분은 모두 아실 겁니다. 실제로 지금 경제기반이 약한 많은 국가들이 휘청거리고 있죠." "......." "이렇게 약소국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경제속국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치밀하고도 교활한 계산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허. 너무 갔습니다. 입 조심 하세요." 고려의 정보력은 무섭다. 이 순간. 지금 여기에도 스페셜 나이트가 잠입해있을 수도 있다. 말은 아끼고 조심해야했다. 물론 딸등신은 지금 그럴 여력이 없다. 딸 데리고 가출한 사위놈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어쨌든 학자들은 겉으로는 말을 아끼면서. 속으로는 다들 생각했다. '정말 무서운 왕이다.' 무대뽀처럼 보이는데, 그 무대뽀 뒤에 치밀한 전략과 계산이 깔려 있다. 이런 왕이 무섭다. 이런 사람이 패권을 쥐게 되면... 고려는 나날이 부강해지겠지만 그 외의 다른 나라들은 고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할 수밖에 없다. '일단 고려의 눈 밖에 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야지.'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려의 이 무대뽀 행동에 그런 정치적 계산따위는 없다는 걸 말이다. *** 급격한 인플레이션. 한진수가 김상희를 데리고 일탈을 하자 발생한 현상이었다. 김상희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막막해졌다. 사실은 시간을 끈 다음 마력을 더 보충하여 더 멀리 워프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실상 그게 불가능해졌다. 한진수도 조금 곤란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딸등신의 스케일은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스케일이 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전 세계적 스케일일 줄은 몰랐다. 딸등신의 스케일은 가히 우주규모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지금은 지나다니는 모두가 적이다. '아니 아무리 딸등신이라고 해도.' 어차피 이건 일탈이고 반항이다. 김훈상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이 작은 반항조차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를 내비치고 있다. 단지 그 각오를 내비치기 위하여 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뭐 이딴 작자가 다 있나 싶다. 장인어른이 딸등신인 건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인플레이션을 만들 줄이야. '지금 세계 전부가 속고 있다.' 세계인들은 지금 모두가 속고 있다. 지금 한진수는 고려 왕국의, 아주아주 중요한, 절대로 빠져 나와서는 안 되는 기밀 문서. 대충 그런 걸 훔쳐서 나왔다고 알고 있다. 당연히 그런 거 없다. 김상희와 함께 여행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한진수가 말했다. "원래의 계획은 어그러졌어. 지금은 세계인 모두가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해야 해." "...응."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꿈꿔왔던 달콤한 신혼여행은 여기 없었다. 달콤하기는 커녕 살벌하기까지했다. 그런데 또 나름대로는 추억이 될 것 같다. 김상희가 한진수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우리... 나중에 아주 나중에.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서. 이 때를 회상하면 어떨까?" 한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딸등신의 스케일은 엄청났다고 기억하지 않을까? 처월드에서 가출한 사위 잡으려고 인플레이션을 만들었잖아." "딸등신?" 김상희는 이내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딸등신 딸등신. 속으로만 생각했지 진수의 입에서 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김상희가 한진수를 올려다봤다. "그럼 자기는 뭐야?" 그리고 앗차 싶었다. 이 세계에서 한진수보고 자기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애초에 지구에 있을 때에도 별로 그런 적이 없다. 정말 기분 좋을 때. 어쩌다가 한 번씩 자기, 라고 불러줬었다. 그 때마다 한진수는 엄청 좋아했었다. "응?" 한진수의 입이 벌어졌다.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찢어지기 일보 직전. "다시 말해봐. 못 들었어." 김상희는 모른 척 했다. "응? 뭐가?" "방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뭐?" "아니. 그니까 방금 네가 말한 거 있잖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했잖아. 방금. 내가 똑똑히 들었어." "잘 못들었다며?" "잘 못들었는데 하여튼 똑똑히 들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김상희는 외치고 싶었다. 오그라들게 자기가 뭐냐고 자기가. 자신의 주책맞은 입을 자책했다. '아니. 뭐 그냥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한데.' 마음만 먹으면 그냥 해줄 수 있다. 까짓 거. 자기라고 한 마디 해주는 게 뭐가 어렵단 말인가. 그런데 괜히 해주고 싶지가 않다. 한진수가 이렇게 '자기'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도대체가 이 남정네들은 왜 이렇게 호칭에 집착해?' 딸등신은 아빠에, 망나니들은 오빠에 집착했다. 그러다가 이제 한진수는 자기에 집착하고 있다. '무슨 호칭 성애자들도 아니고.' 한진수가 보챘다. "방금 말한 거 있잖아. 자로 시작하는 그거. 빨리. 빨리 다시 말해봐." "아 몰라. 바보야!" 김상희가 한진수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절대 아플리 없는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으므로- 한진수가 아프다며 울상을 지었다. 으악! 하고 되도 않는 비명까지 질렀다. "마력 때문에 안 아프잖아. 마력은 사기야." 생각해보니 잘못 들을 수도 없지 않은가. 마력이 있는데. 한진수는 결국 기분 좋은 듯 웃고 말았다. "오구구. 마력은 사기에요?" 그러면서 김상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는데, 김상희는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이젠 하다하다 애 취급이냐."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 그냥 내 머리 위에 올려다놓고 평생 데리고 다니고 싶다." 김상희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럼 너 목 딱! 부러져." 애기 취급 받는 거.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러나 둘만 있을 때엔 좋았다. 겉으로는 퉁명스럽다 싫다 하지만서도 한진수가 이러면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코맹맹이 소리를 내곤 했다. 혀도 조금 짧아졌고. 예전에, 살기 위해서 일부러 연기를 하고 애교를 부릴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그런 애교였고 목소리였으니까. 김상희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콧소리가 녹아났다. "나 돼지란 말이야." "해볼까?" 한진수는 마력으로 김상희를 들어 올렸다. 지구에서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 곳에서는 가능했다. 한진수의 머리 위에, 김상희가 앉았다. 일명 아빠다리를 하고서 말이다. 머리 위에 앉아 있는데도 굉장히 편했다. 한진수가 말했다. "이러고 평생 다니면 좋겠다." 아주 잠깐 내려달라고 반항하던 김상희는 기분이 좋아져서 배시시 웃었다. 한진수의 머리카락을, 마치 손잡이처럼 움켜쥐었다. 아주 작고 빠르게 빨리 말했다. "나도." 김상희도 진심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같이 있고 싶었다. 진수의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한진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분위기 좋은데.' 분위기 좋은데 기척들이 감지되고 있다. 이 쪽의 위치가 발각된 모양이다. 지금은 준 전시상태다. '분위기를 깰 수는 없지.' 여기서 자신이 바빠보이는 모양새를 취하면, 김상희가 불안해할 거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김상희는 언제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꼈으면 좋겠다. 불가능한 걸 알지만 하여튼 그랬다. '전방에 병력이 약 700정도. 별동대인 것 같군.' 전방에 병력 700. 그리고 아마 후발대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3천 이상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 '스잇트 중립국. 너희는 중립국이잖아.' 중립국인데 돈에 넘어간 것 같다. 고려왕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모양이다. '용병들도 움직이겠지.' 그리고 EMP탄도 투하될 거다. 워프조차 할 수 없도록.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할 때였다. 한진수는 김상희를 땅에 내려줬다. "상희야." "응?" "나한테 안겨."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김상희는 민망한 듯 쭈뼛쭈뼛 걸어갔다. 고장난 인형처럼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려 한진수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냥 내가 안을게." 한진수가 더 빨랐다. 잠시 잠깐. 달콤한 포옹의 시간이 끝난 뒤 한진수가 말했다. "우린 고려왕궁으로 이동할 거야." "응?"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워프를 사용했다. 목적지는 고려왕궁. 정말 놀라운 일은 거기서 벌어졌다. 0190 / 0192 ---------------------------------------------- 슈퍼 딸등신의 스케일 *** "에, 에그머니나!" 김상희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바로 앞에 김훈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훈상이 마력으로 김상희를 확 끌어 당겼다. 그리고 강탈당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찾아왔듯 김상희를 꽉 안았다. 마치 아무도 주지 않겠다는 듯. "어서와라." 그리고 말을 이었다. "등잔 밑이 밝은 곳은 처음이지." 김상희는 순간 옛날을 떠올렸다. 어서와. 딸바보는 처음이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녹차를 마셨었다. 지금 딱 그 꼴 아닌가. 어서와. 등잔 밑 밝은 곳은 처음이지. 한진수가 대답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상대의 수를 읽는 것. 그게 전략의 기본이다." 한진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 딸등신의 스케일. 너무 거대하다. 이렇게 자신을 이 곳으로 오게하기 위하여 전세계를 움직였다. 고려 입장에서는 그다지 손해볼 것이 없었다. 어차피 한진수는 제 발로 이 곳에 돌아오게 되어 있었고, 현상금 따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김훈상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도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겠군." "언젠가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시기가 조금 이르기는 했습니다만." 적어도 2박 3일 정도는 사랑의 도피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저 어마어마한 스케일 때문에 좀 짧아졌다. 김훈상도 한진수도 이 상황을 모두 예측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어차피 한진수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어떻게 감히 장인어른을 이겨먹겠는가. 적어도 한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이나믹했던 우리의 신혼여행은 여기서 끝이겠네.' 그래도 빨리 돌아와서 혼은 덜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김훈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감히 내 딸을 훔쳐가?" 그 때, 김상희가 말했다. "아빠. 남편 괴롭히지 마요." "......." 김훈상은 잠시 아무런 말도 못했다.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그지만 딸은 무섭다. 딸이 쌍심지를 켜고 있다.(물론 김상희는 지금 그런 표정따위 짓고 있지 않다. 하지만 김훈상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우리 신혼여행 좀 제대로 보내주면 안 돼요?" "......." 김훈상은 억울해졌다. "알렉스. 들어와라." 알렉스가 들어왔다. 알렉스가 두루마리를 하나 펼쳤다. 알렉스의 눈에는 이유 모를 뿌듯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제 1계획. 스잇트 중립국으로 전용기 BBJ를 사용하여 이동." 김상희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용기 BBJ?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에 반해 한진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BBJ라고...?' 이럴 수가. 'BBJ는... 왕실 전용 초호화 기체일텐데.' 왕자들도 거의 이용 못한다. 왕이 상대국을 방문할 때, 그것도 품격을 갖추고 이동할 때에나 쓰는 초호화 전용기다. 속도 자체가 그렇게 빠르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전용기 중 가장 비싸고 가장 럭셔리하며 가장 조용한 기체이기도 했다. '그걸...' 한진수는 이상한 단어를 떠올렸다. '웨딩카?' 아니. '웨딩 에어 플랜?' 도대체 이런 단어가 왜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웨딩카가 뭐란 말인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느낌으로만 살펴보면 결혼을 한 뒤, 신혼여행 -애초에 이 곳에는 신혼여행이라는 관습자체가 없다.-을 위해 타는 자동차 같은 느낌이다. '이 해괴망측한 상상은 뭐란 말인가?' 그런 게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결혼은 그저 우수한 남성의 피를 이어 아이를 낳기 위한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웨딩카 따위의 사치를 부릴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김상희도 이제 슬슬 눈치챘다. '웨딩카도 아니고 웨딩 비행기야?' 그냥 비행기면 말도 안 한다. 전세기다. 그런데 그냥 전세기도 아니고 전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초호화 초특급 전용기란다. "제 2계획. 게슈툴트 폭포." 김상희는 이제 알게 됐다. 저 개차반. 겉으로는 싫은 척 아닌 척 다했으면서 비밀리에 신혼여행 계획을 다 짜놓고 있었다. 왕자들도 잘 못 쓴다는, 자신만의 전용기를 아낌없이 꺼내주면서. 알렉스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과거 공주님께서 폐하께 신혼여행을 가겠다 하셨을 때 부터... 이미 준비되어 왔던 사항들입니다." 알렉스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게 깜짝은 무슨 깜짝이야. 그냥 너를 위해 아주 큰 선물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냥 아빠 믿고 기다리고 있으렴. 이라고 한 마디만 했으면 인플레이션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저 딸등신의 스케일은 상희학의 창시자 알렉스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계획을 위해... 수많은 석학들이 동원되었는데.' *** 알렉스가 회의를 주도했다. "스잇트 중립국은 반드시 넣어야만 합니다." "어째서죠?" "로맨틱한 곳이기 때문이죠." "로맨틱?" 학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행에 로맨틱?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가 최근 연구하고 있는 학문에 따르면..." 물론 상희학이다. "여성은 분위기와 풍경에 잘 취합니다. 남자보다 훨씬 더 감성적이고 오묘한 사고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열등하고 비효율적인 사고군요." 알렉스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 열등하고 비효율적인 사고를 가진 한 명의 여자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걸 너희들은 전혀 모르겠지!' 상희학의 창시자 알렉스는 요즘 매일같이 생각한다. '세계는 남자가 지배하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다!' 어디가서 이런 말 하면 돌 맞겠지만 알렉스는 확신했다. 훗 날, 이 세계를 움직일 열쇠는 바로 여자가 될 것이다. 알렉스는 이 돌대가리들(?)을 가르치기 위해 쉬운 예를 하나 꺼내들었다. "똑같이 생존을 위해 도망쳐야 한다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학자님들은 무엇을 챙기시겠습니까?" 학자들은 갑자기 알렉스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했다. 누가 뭐래도 알렉스는 왕의 총애를 받는 학자였으니까. "비상식량과 식수를 가장 먼저 구비해야겠지요."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도 필수입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지킬 호신도구도 필요하겠지요."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사진을 챙길 겁니다." "......." 학자들은 황당해했다. 아니. 그딴 걸 뭣하러 챙깁니까? 식량 챙기기도 바쁜데 사진 따위.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여자는 그런 존재입니다."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상희학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모든 여자가 천편일률적으로 이렇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에게는 극단적인 예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렇게 단정지어 얘기했다. "남자들과는 사고의 프로세스 자체가 다르죠." "......." 계집들 따위. 역시 하등하구나.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알렉스 학자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여자의 눈 높이와 입장에서, 바로 이 계획을 짜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순간,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안 그래도 지금 뭔가 심상치 않다. 김환성 왕자가 제 9대대를 이끌고 나섰고 스페셜 나이트들도 움직였다. "혹시... 살생부를 작성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성녀의 입장에서." 알렉스는 이마를 짚었다. 이 놈들. 생각하는 바가 왜 다 이따위야. 그냥 아빠가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줄, 그런 여행계획을 짠다는 생각은 왜 하지도 못하는 건가. 어째서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건가. '니네들 다 패고 싶다!' 알렉스는 체통도 잊고 외치고 싶었다. 이 세계의 남자놈들.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하루 빨리, 상희학을 정식학문으로 등록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학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스잇트 중립국...? 이 곳은 우리와 상당한 우호관계를 쌓고 있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알렉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그냥 여행계획이라고!' 그래서 설명해줬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건 그냥 여행계획입니다." 모두가 조용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곳에 모인 남자들은 고려왕궁의 학자들이다. 다시 말해, 엘리트라는 소리다. 그 엘리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여행계획을 왜 우리가 짜요...?" 알렉스가 말했다. 명쾌한 해답을 내려줬다. "딸등신의 명령이니까요." *** 김상희가 김훈상을 찾았다. "아빠." 책상에 앉아 서류를 골똘히 쳐다보면 김훈상이 김상희를 쳐다봤다. "왜 그러지?" "소녀를 위하여 그렇게나 많은 준비를 하셨다는 거. 처음 알았어요." "......." 김훈상은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자기가 먼저 좋은 거 해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서프라이즈로 해주려고 했는데 한진수 때문에 망했다. 마음 같아선 사위 놈을 두들겨 패고 싶은데, 그랬다간 딸한테 미움 받을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너무너무 고마워요. 소녀는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셔요." "......." 그 때, 김상희는 확신했다. '개차반. 당신 지금 설마 삐진 거야?' 어라. 말도 안 돼. 그 대단하다는 김훈상이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김훈상 스스로도 놀랐다. '내 현재의 감정상태는 무엇이지?' 딸을 키우면서(?) 참 많은 것을 경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희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 아빠 지금 삐졌다.' 개차반이 삐지다니. 티는 안 내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지만 김상희가 누군가. 16년 동안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온 생존형 눈치녀 아닌가. 그래서 김상희는 김훈상의 뒤로 걸어가, 의자에 앉아있는 김훈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키가 조금 안 맞아서 발꿈치를 들어야만 했다. "소녀는 아빠가 정말 좋아요. 만약 아빠가 아빠가 아니었다면 소녀는 아빠에게 청혼하였을지도 모르겠어요." "......." 지금 김상희의 눈에, 김훈상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 껴안고 있으니까. 그런데 김상희는 김훈상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저만치 앞에 거울이 있었으니까. '이 개차반아. 입 찢어지겠다.' 그런 주제에 겉으로는 거만하고 시크하게 말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화난 줄 알겠다. "감히 그런 당돌한 말을 하다니." 개차반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 같았으면 너 같이 하찮은 계집이 감히 내게 시집 올 수 있을 것 같으냐? 라고 말을 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훈상은 김상희에게 험한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감히 왕의 뒤를 점하다니." 일부러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혹시라도 누가 보면 구설수 오르기 딱 좋다. 왕의 뒤를 점하는 행동은 하면 안 되는 행동이다. 암살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무도 못 보게 스페셜 필드를 펼친 거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김상희가 진짜로 움직일까봐, 또 마력으로 움직임을 막아놨다. 못 움직이게. "이 행위를 백허그라 칭하겠다." 그리고 왕명 내렸다. "한달에 한 번. 백허그를 하는 의식제도를 만들도록 하겠다." 제발. 이딴 걸로 왕명 쓰지 말라고요. 김상희는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이 아빠. 조금 기특하고 고맙다. 겉으로는 그렇게 틱틱댄 주제에 뒤로는 온갖 준비를 다 하고 있지 않았던가. 김상희가 말했다. "아빠. 그럼 저 이제 정말로 신혼여행... 갔다와도 돼요?" 김훈상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대답했다. 0191 / 0192 ---------------------------------------------- 슈퍼 딸등신의 스케일 *** 나는 정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딸사랑도 병이다. 아니. 좋다. 날 사랑해주는 거. 정말 이제 너무너무 잘 알겠다. 그런데 이건 정도가 없다. 개차반은 정말 정도를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말 그대로 초호화 럭셔리 신혼여행을 보내고 있다. 지구에서 한 번도 못 가본 유럽을 전세기 타고 편안하게 간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그 전세기는 재벌조차도 쓰지 못하는 엄청난 물건. 비행기 안에 스파가 있을 줄이야. 스파가 있고 최고급 와인이 있고 최고급 쇼파가 있고. 뭐 하나 '최고급'이란 말이 빠지면 섭할 정도다. 심지어 여기서 쓰는 냅킨 조차도 최고급이니 말 다했다. '그래. 뭐. 이것 까진 그렇다 쳐.' 이런 건 돈과 권력이 있으면 뭐.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빠라면 해줄 수도 있겠지. 돈이 썩어나면 말이다. 그런데 개차반은 좀 심했다. '무슨 신혼여행 계획 짜는데 전세계 석학들이 움직여...' 전세계 석학들이 시간을 일분, 일초 단위로 계산하여 내 신혼여행 계획을 짰다.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슨 살생부를 만든다느니. 외교적 계산이 들어간 어떠한 대지도를 만든다느니. 그런 소리가 있기는 있었는데 나는 확신한다. 개차반은 지금 그런 생각 같은 거 하나도 안 하고 있다. 그저 딸등신이 딸사랑을 한껏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뭐. 그래. 그럴 수 있다쳐.' 그래. 여기까지도 뭐. 그렇다 치자. 전세계 석학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 명도 없어?' 나를 안내해주는 가이드를 제외하면 정말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전부 유명한 관광지들 뿐인데.'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오기 약 3시간 전 부터는 이 곳을 전부 폐쇄한단다. 나와 진수.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서.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이런 게 가능한 거야?' 이건 정말 권력 남용아닌가. 아니. 솔직히 권력 낭비다. 나를 사랑해주는 건 좋지만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다. 그러나저러나 진수는 행복해 보였다. "너랑 둘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내 손을 꽉 잡는 게 느껴졌다. "......." 나도. 라고 말할 뻔 했다. 아. 여우짓을 마음 먹고 할 때는 잘 됐는데, 막상 진짜 연애를 하고 진짜 결혼을 하니까 잘 안 된다. 이럴 때 너무 쉽게 나도, 라고 말해주면 안 돼. 안 된다고. 이봐. 내 입. 거기.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 "나도." ...는 물론 내 망상이다. 나는 진수가 너무 좋다. 좋아서 미칠 것 같다. 내색은 많이 하지 않지만, 아마 내 마음을 모두 표현하면 지금 진수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저렇게 좋을까...' 나를 보는 진수의 표정은 정말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표정이다. 그것도 정말 깊숙히 빠진. 어쩌면 사춘기소년 같은 그런 표정이기도 했다. 눈에서 사랑이 철철 흘러 넘친다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하긴. 나도 좋으니까.' 한진수가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상희야."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눈을 힐끗 돌렸다. 진수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보였다. 진수는 머뭇하는가 싶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애기는 몇 명 낳을까?" 컥. 나도 모르게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뿜고 말았다. "모, 몰라!" *** 몇 시간 전. 김훈상이 말했다. "그대는 내게 협력해야할 것이다." 또 말했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나는 책임지지 않겠다." 이런 말도 했다. "또한 이번에 잘 협조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다." 고려의 학자들은 회의장에 모였다. 김훈상의 속내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을 벌이시는 걸까요?" 알렉스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우리의 딸등신은 복잡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김훈상이 한 일. 별 거 아니다. 학자들이 여행 경로를 짰다. 그리고 김훈상이 그 여행경로 내에 있는 국왕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구하고 있는 거다. 물론, 말이 협조지 사실 따지고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다. 학자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국익에 큰 영향이 있으니... 폐하께서 저렇게 직접 움직이신 거겠지요. 다이렉트로 말이죠." 알렉스가 생각했다. '그냥 딸등신이라는 이유가 제일 클 걸?' 학자들은 토의를 거듭했다. 그 곳에 사람이 없어야 한다니. 개미새끼 한 마리라도 보이지 않도록 하라니. 아무리 고려 국왕이 강하다 하더라도 타국의 왕에게 그 것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상은 강행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결론은 나왔다. "폐하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죠." 알렉스만이 씨익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희들은 틀렸다. 폐하는 스케일이 지나치게 큰 딸등신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어!' 그리고 김훈상을 따로 찾았다. "역시 폐하이십니다." 이번에는 굳이 김훈상의 뜻을 묻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에 김훈상은 영락없는 상희학의 노예였다. 척 보면 척이다. 이젠 뭐 실험샘플도 아니다. 그냥 살아있는 증인이다. "...뭐가 말이지?" "폐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시고 움직이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 그래도 포장은 좋게좋게 해줬다. "첫 번째로, 타국이 폐하의 제안을 수용했을 경우를 가정해보겠습니다." "......." "그 것만으로도 폐하의 능력이 입증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영향력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폐하의 전화 한 통에, 막대한 수익이 발생하는 관광지를 하루 동안이나 폐쇄해버렸으니까요. 그 쪽 국민들의 반발도 억누르고 말입니다." 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중들은 생각할 겁니다. 폐하야말로, 진정 이 세계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향력을 가졌구나. 그렇게 말이죠. 따지고 보면 별 거 아닌데. 대중들의 인식을 하나하나 바꾸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제가 아주 오래 전. 폐하의 어린 시절 때에. 그 때 가르쳐드렸었죠." "그랬었지."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는 대중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일조할 겁니다. 한 두 나라도 아니고. 무려 14개의 나라가 폐하의 뜻을 군말없이 따랐으니까요." 아마 그럴 거다. 알렉스는 감히 생각했다. 김상희 공주의 신혼여행에 들어간 돈만 대략적으로 따져도 6000억원은 넘을 거다. 'BBJ의 하루 이용료만 쳐도 1억이 넘지. 게다가 푸리나 호텔을 그냥 통째로 빌리셨어. 투숙객들에게는 전원 환불이라는 조건까지 제시하시면서.' 푸리나 호텔은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초호화 호텔이다. 그 곳 스위트룸의 하루 숙박비가 무려 3000만원이 넘는다. 김훈상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그 곳을 예약했고 -예약자가 이미 있었고, 김훈상이 그걸 빼앗았다는 건 여담이다.- 아예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사실상 마음 같아선 호텔을 그냥 인수하시려고 했겠죠." 그랬다. 그런데 하도 안 판다고 사정사정해서 봐줬다. 딸이 안전하고 편하게 여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호텔 하나 쯤. 그냥 사도 되지 않겠는가. 이왕 산 김에 딸 명의로 하나 해주고. "어쨌거나 뭐. 대외적으로 폐하의 영향력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위기의식까지도 던져놓으셨죠." 제국이 되기 위해선 약간의 강제력과 지배력은 필수다. 좋게 좋게, 오냐 오냐 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세계는 분명히 약육강식의 세계다. 모든 것이 이상대로 흘러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강할 땐 강해야 하고, 지배할 땐 지배해야 한다. "사람들은 딸등...아니. 크흠.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을 테니까요." 무슨 말인고 하니, "덕분에 전 세계인은 지금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유명 관광지에 어떠한 불순분자 혹은 고려에 위협이 되는 요인이 있다. 고려국왕은 그걸 처리하기 위해 전세계에 폐쇄 명령을 내렸다. "나이트들이 대거 동원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문이 더욱 확실시 됐다. 그 유명한 여행지들에 뭔가가 있다고. 어쩌면 지도층 숙청이 자행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도 돌고 있을 정도다. 그 정도 거창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뭔가 있으니까 고려의 나이트와 자국의 -그 여행지가 있는 자국- 나이트까지 동원하여 폐쇄를 했겠지. 상식적으로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인은 이 등신이 상식을 파괴하는 딸등신인 걸 모르고 있지!' 그래서 이름을 새로이 붙이기로 했다. '슈퍼 딸등신.' 마음 같아선 슈퍼 딸병신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래도 명색이 왕 아닌가. 그래서 그것까지는 차마 못하고 그냥 슈퍼 딸등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김훈상이 그렇게 상식과는 정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덕분에, "세계인들은 폐하께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시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건 폐하께서 의도하신 거겠지요." "......." 사람들은 김훈상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딸등신이라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이 걸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제... 거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실험샘플 폐하!' 알렉스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일단은 양념부터. "이렇게까지 딸바보가 여기 있다는 걸 대중들은 모를 테니까. 폐하께서는 그걸 이용하신 겁니다. 제국이 되기 위하여 차근차근 전진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십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됐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저번에 그 것이 좀 마음에 걸리셨겠군요." 알렉스가 보기에도 이번에는 좀 스케일이 지나치게 컸다. 김상희의 신혼여행을 위하여 나라 두어개 값이 그냥 날아갔다. 아무리 퓨리어스를 거의 무한에 가깝도록 공급 가능하며, 미라클과 수페르가의 유일한 공급원인 고려왕가라지만 지출이 너무 크기는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돈 뿐만 아니라 가용 가능한 모든 권력에 무력까지 싹 다 움직였으니까. 그 이유는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정체 모를 딸등신에게 질 수 없어서겠죠." 김훈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번에 들었다. 딸등신이라는 놈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솔직히 김훈상은 충격이었다. 나 말고 그런 놈이 또 있단 말인가. 딸등신. 결코 좋은 표현같지는 않은데 오기가 생겼었다. "딸에게, 내가 모든 아버지들 중 너를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다. 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김훈상은 왕위에 즉위한 이후로 처음으로, 신하 앞에서 몸을 흠칫 떨며 말을 더듬었다. "따,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알렉스." 알렉스는 사실 더 말하고 싶었다. '사실 그 딸등신이 바로 폐하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참았다. '좀 무식한 딸등신이죠.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그냥 있는 돈 없는 돈 다 때려박고, 있는 권력 없는 권력 다 쓸어넣고, 있는 무력 없는 무력 다 끌어서 딸의 신혼여행을 계획하셨죠. 딸을 사랑해본 경험도 없고, 딸이 뭔가를 원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니까. 일단 딸등신님께서 해줄 수 있는 거 전부를 해주고 싶은 겁니다. 뭐. 이해는 합니다. 열정은 앞서는데 방법은 제대로 모르니까.' 알렉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걸 당당하게 주장을 하고 싶으셔서 이번에 이렇게 큰 일을 벌이신 겁니다." 온갖 외교적 효과들이 파생될 걸 알면서도 말이다. 김훈상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와서 부인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이 사실. 너만 알고 있는 거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어떻게 안 거냐?" 알렉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일전에도 지나치듯 얘기를 드렸던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진리의 학문입니다." "그런 것이... 있었나?" 알렉스가 아주 작게 말했다. "그 학문의 이름은 바로..." 김훈상은 귀를 기울였다. 방금 알렉스의 추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정확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진리의 학문. 상희학입니다." 상희학이, 알렉스의 입을 통해 양지로 나오게 된 첫 번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김상희는 또 황당해졌다. "호텔에도 사람이 없네." 이 곳은 푸리나 호텔. 김상희도 아는 곳이다.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호화 호텔이다. 당연히 최상류층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고 손님들도 있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한진수가 피식 웃었다. "폐하께서 전세를 내신 모양이야." 아내호구 입장에서 딸등신의 이러한 행동은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도 됐다. 당사자인 김상희만 황당해할 뿐이다. 김상희와 한진수가 스위트 룸. 그 중에서도 프리미엄 스위트 룸에 들어섰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이미 깔려져 있는 상태. 로맨틱한 촛불이 주위를 따스히 밝히고 있었다. 무슨 향인지 알 수는 없으나, 김상희는 묘하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 김상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랄까. 이제야 정말로 신혼 첫날밤인가. 한진수가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김상희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우리는 이제..." 아까 말했다. 아기 많이많이 낳고 싶다고. 이왕이면 너를 닮은 딸이면 좋겠다고. 한진수는 더이상 말하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처월드에서 이제 벗어났다. 자유다. 사랑하는 아내를 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한진수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 김상희는 느꼈다. 지금의 한진수. 낮의 따뜻하고 다정한 한진수가 아니었다. 뭐랄까.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밤만 되면 약간 변하기는 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맹수 같다고나 할까. "널 안을 거야." 그리고. "널 완전히 가질 거야." 한진수와 김상희. 둘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김상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입 안막아도 돼. 소리 크게 내도 괜찮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천국을 보여줄게." 한진수의 손이, 김상희의 옷을 거칠게 벗기기 시작했다. 0192 / 0192 ---------------------------------------------- 에필로그(완결편) *** 김상희는 지금 이 순간. 한진수가 조금 낯설다고 느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 낯섬이 싫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알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도 모르게 야릇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한진수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온 몸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한진수의 손길이 닿는 그 모든 곳이 마치 성감대처럼 느껴졌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김상희는 한진수의 이름을 불렀다. "진수야..." 한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희의 야릇한 신음소리 이후. 한진수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어졌다. "한진수..." 그녀는 이상하고 야릇한 감각에 엉덩이를 조금 들었다. 허리가 활처럼 굽었다. 한진수의 양 손이 김상희의 양 옆구리를 잡았다. 그 큰 손바닥이 옆구리를 전부 감싸안았다. 그리고 김상희를 침대 끝. 가장자리까지 반 강제적으로 끌어 내렸다. 김상희가 떨어질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침대 끝에 걸쳤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옆구리를 잡아 몸을 받치고 김상희의 배꼽에 가볍게 키스했다. 배꼽보다 조금 아래에 다시 키스했다. 그보다 조금 더 아래. 조금 더 아래. 조금 더 아래 키스했다. "거, 거기는...!" 김상희가 한껏 다리를 오므렸다. 한진수가 낮은 목소리로, 약간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힘 풀어." "부, 부끄럽단 말이야." 한진수는 손가락 끝으로 김상희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렸다. 깃털처럼 가볍게. 하지만 불보다 뜨겁게. 그리고 그보다 더 뜨거운 목소리로 한진수가 말했다. "다리 벌려." "벼, 변태 같아. 진짜." 그렇게 느끼고 있다. 정말로 변태 같았다. 오늘따라 한진수가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이 이상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섹시해.' 그렇게 느끼고 말았다. 낮의 한진수와는 완전히 달랐다. 처가살이 할 때의 한진수와도 완전히 달랐다. 맹수로 변해버린 느낌이다.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키스를 했을 그 것이 다른 곳을 탐했다. 시간이 흘렀다. *** 읏차. 어휴. 얘는 운동을 많이해서 그런가 팔도 뭐 이렇게 무겁냐. 영차. 영차. 나는 진수의 팔을 들고 진수의 품 속에 안겨들었다. 와. 오늘 진짜 겁나 남자같았어. 다른 곳은 모르겠는데 침대 위에서 만큼은 정말. 어휴. 부끄러워서 내가 정확하게 말은 못하겠는데, 정말 나는 신세계를 볼 수 있었다. 진수 역시 굉장히 흥분한 것 처럼 보였는데, 그럼에도 나를 세심하게 배려해줬다. 마력으로 내 몸을 계속해서 보호해줬다. 그리고 자세를 바꿀 때마다. 흠. 정확한 자세를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하여튼간 자세를 바꿀 때마다 진수는 내가 편하게 할 수 있도록...음. 역시 뭘 했는지는 말 안하겠지만. 음음. 하여튼. 그 때마다 나를 배려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한 행동들 가운데 나는 사랑을 충분히 느꼈고. '진짜 야수 같았는데.' 야성미까지도 느껴졌다. 평소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진수의 모습. 낯설고 설렜다. '이게 낮져밤이야?' 지구에서 낮져밤이, 낮져밤이. 그럴 때 난 뭔가 했다. 그 왜. 그 이상한(?) 짤 있잖아. 낮에는 빨라 개면서, '여보. 내가 빨래 다 해놨어.'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그림 있고. 밤에는 엄청 무서운 얼굴로 '빨아' 라고 말하는 그 짤. 나는 솔직히 그 짤 별로 공감이 안 됐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 같다. 정말이다. 나는 오늘 신세계를 봤다. 내가 입술을 살짝 내밀고 투정아닌 투정을 부렸다. "팔이 왜 이렇게 무거워?" 진수의 품 안으로 더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진수의 어깻죽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진수의 다른 팔이 나를 꽉 안았다. 아. 모르겠다. 이 감정. 평소에도 진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했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좀. 야릇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하여튼 뭔가 다르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굳이 문자로 표현해보자면 내 눈에서 하트가 뿅뿅 쏟아진다고 하면 되려나. 서로의 숨이 맞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진수가 내 눈을 쳐다봤다. 아 저 눈동자. 진짜 빠져들고 싶다. 저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고! 진수가 말했다. "왜 이렇게 예뻐?" "나는 원래 예뻐." 다른 누구 앞에서도 이런 말.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진수 앞에서는 잘만 나온다. 나는 아니까. 이 남자 눈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걸. 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걸. 이 남자는 내가 그런 여자라는 걸 온 몸으로 느끼게 만들어 주니까. 내가 말했다. "여자는 원래 사랑받을 때, 그 사랑만큼 많이 예뻐지는 거야." 그 남자 눈에 그렇게 많이 예뻐 보이는 거야. 진수는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이마에 쪽쪽, 키스하고 코에 쪽쪽, 키스했다. 입술에 키스를 했는데. 한 5초는 길게 한 것 같다. "읍!" 이 양반아. 내 입술 다 닳겠다! "입술 닳겠어." "안 닳아." 진수가 또다시 키스했다. 쪽. 쪽. 쪽. 쪽. 쪽. 연속으로 한 10번은 소리가 난 것 같다. "입술이 지이잉거려." 진수가 하도 빨아서(?) 입술이 지잉- 하고 울렸다. 아. 진짜. 나 이 시간. 너무 좋아. 그냥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절대로. 절대로 오선생님을 여러번 만났기 때문이 아니야. 그냥 진수가 좋아서 그런 거다. 진수가 비록 고자...였다면 음. 음. 그래도 아마 나는 진수를 좋아했...을걸. "입술이 지이잉거려요?" 진수가 내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와. 이 손가락 끝마저도 나를 찌릿찌릿하게 만드네. 너는 정말. '아니. 이러면 안 돼. 긴장감을 줘야 하는데...' 머리로는 안다. 그렇다! 나는 밀당의 귀재란 말이다. 어씨. 이러면 안 되는데. 눈에서 자꾸 하트가 발사 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남자한테는 긴장감을 줘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나 정말. 이 남자한테 엄청 빠져버린 거 같다. 밀당 자체가 안 된다. "너무 좋아." "응?" "네가 너무 좋다고. 너무너무 너무너무 너무너무 좋다고." 진수가 빙그레 웃었다. 저 표정. 저 눈빛. 정말 느껴진다. 나를 정말로 사랑해주고 있구나. 안면근육 하나하나가, 나보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 등을 쓰다듬는 이 손길조차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진수가 직접 입으로 '사랑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진수의 온 몸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투정을 부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뭐가?" "남자한테는 긴장감을 줘야 한다고." "왜?" "그래야..." 그래야 지금처럼 나를 많이 사랑해주고 많이 예뻐해주고 많이 귀여워해줄 테니까. 아. 이러는 내가 좀 창피하다. 귀여워해준다니. 상희야. 내 나이. 진짜 나이 40살이 넘는다고. 귀여움 받는 건 좀 아니지...라고 생각은 한다만. 이상하게 나는 원했다. 진수 눈에는 사랑스러워 보이고 귀여워 보이고 싶다. 애기처럼 앙탈도 부리고 싶었다. 귀엽게 보이기는 싫은데, 또 귀엽게 보이고도 싶었다. 이 이중적인 마음. 나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떡해. 실제로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원래 감정이란 건 논리로 설명이 안 되는 거라고. 진수가 날 꽉 끌어 안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응?"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약속할 수 있어. 나한테는 너 밖에 없어. 너 없는 세상. 상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하기 싫어.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아무것도 못해." "......." "너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나도. 나도. 나도 너 없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진수가 먼저 말을 이었다. "요즘 나는... 정말 행복해. 이런 게 정말 사랑하는 거구나. 예전에는... 불안했어. 불안하고 매일매일이 위태로웠어. 언제나 너는 웃음을 연기했었거든." ...뭐야. 저 둔탱이가 오늘은 왜 이러지. '따뜻해.' 문득. 진수의 품 안이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도 진수를 꽉 끌어 안았다. "내가 언제나 네게 달려가는 기분이었어. 너한테 구애하고 네게 사랑한다 말하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허무한 벽에 대고 그렇게 계속 외치는 기분이었어. 그 벽은, 나를 웃으면서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 웃음은 거짓처럼 느껴졌었거든." "......." 잘 모르겠다. 내가 그랬었나. 나는 진수를 계속해서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그랬던 것 같은데. 물론 살아남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과 거짓 애교. 거짓 웃음을 흘리긴 했었지만. '진수는... 그렇게 느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벽에 사랑한다고 계속 외쳤다고...?' 그러면 굉장히 비참한 기분일 것 같다. 당장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괜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진수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데. 나 혼자 진수에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끝없이 외쳤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비참하고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너도 날 좋아하는 게 느껴져." "요즘이 아니야. 옛날부터. 정말로 널 많이 좋아했어. 아니. 사랑했어." "그래서 나 정말 행복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이런 게 사랑받는 기분이구나. 김상희가 내 여자구나. 이 사실 하나가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만들어." 내가 말했다. "미안해." "...응?" "그런 기분 느끼게 만들어서 미안해."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비참했을 것 같아.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힘겹게, 힘겹게 달려가는 진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상황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못했었는데 진수. 정말 힘들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천재소리 들으면서 잘 컸는데. 나를 만남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세계 최강이라는 제국에 홀로 반기를 들고, 제국에 쫓기면서 목숨을 걸고 싸우며 여기까지 왔다. 만약 내가 진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진수는 정말... 힘들었을 거야.' 그 누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적과 맞서 싸우겠는가. 그런데 진수는 실제로 그랬다. 그런 상황인데. 나는 거짓웃음을 연기하고 거짓사랑을 얘기한 것처럼 느꼈었다니. 미안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이 진수와. 옛날의 그 진수. 그 둘 사이에 어떠한 연관고리가 있나. 내가 정말 이 진수를 사랑해도 될까? 를 수없이 고민하고 고뇌하며 한진수를 바라봤었으니까. '진수가 제국과 맞서 싸울 때.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전할 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어.' 그 것 뿐만이 아니다. 아주 처음. 맨 처음에는 진수를 내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생각하기까지 했었으니 말 다했다. 그냥 약혼자일 뿐이라고. 개차반이 정해준 약혼자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오늘은 정말로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가 말했다. "약속할게. 나도 너 많이 사랑해. 나도 너 없으면 안 돼. 내가 가끔 투정도 부리고 가끔 화도 내고 어쩌면... 여태까지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 "그 때도 지금처럼 나를 꽉 잡아줘. 지금처럼 나 꽉 안아줘. 나는... 네가 붙잡으면 잡힐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진수가 내게 항상 했던 말. 이번에는 내가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줘. 나를 놓지 말아줘."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내게 소중한 것은 바로 진수였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이 세계를 바꾼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지금 내 눈에 담긴 세상은 한진수가 전부였다. 진수가 나를 다시 한 번, 힘껏 끌어 안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해. 상희야." 나도 말했다. "사랑해. 진수야."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진수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목덜미에, 뭔가 뜨거운 것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건. 이건 눈물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뜨거운 눈물. 진수가 말했다. "된장찌개 끓여줄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갑자기 된장찌개를 끓여준다고 했다. - 된장찌개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이, 내가 진수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진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나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정말... 많이 기다렸단 말이야." 나는 봤다. 진수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커다란 망치로 내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진수가 계속 말했다. "TV보면서 말했었잖아. 저런 건달들이 널 괴롭히면 어쩌겠냐고. 그래서 내가 대답했잖아. 내가 너 지켜준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준다고. 그래서 네가 말했잖아. 그러지 말라고. 그냥 경찰에 신고나 하라고. 그렇게 핀잔을 줬었잖아." "......." 우리의 추억들. 어떻게 그렇게 하나하나 다 꺼내는 거야. 너... 진수야? "나는 그 말을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킬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사랑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내가 너를 화나게 하고 너를 슬프게 하면. 내게 맘껏 화를 내. 맘껏 투정 부려. 내가 네 손을 잡을게. 내가 너를 붙잡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놓지 않을게." 눈물이 차올랐다. 이 말. 지구에서 진수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러면 못 이긴 척. 못 이긴 척 내 손을 잡아줘. 나도 부탁할게. 내 옆에 있어줘. 나는...네가 필요해."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사랑해. 수희야." ㅡㅡㅡ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完) 지금까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오랜 여정(?) 이었습니다. 이북 분량으로 치면 거의 10권쯤 되는 분량이니까요. 중간중간 어색한 부분도 있었을 거고 부족한 부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까지 함께 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동안 '왕딸'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겨주신 여러분들이 계셔서 완결까지 달려올 수 있었네요. '왕딸'은 이렇게 완결이 났습니다. 못다한 얘기. 조금 부족한 얘기들은 후에 외전으로 연재 혹은 출간할 예정입니다.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도 사랑해주세요 ^^♡ 외전에는 아마도... 사랑하는 동생과 딸을 신혼여행 보낸 왕자들과 왕의 ㅂㄷㅂㄷ 하는 모습. 신혼 이후의 생활. 지구에서 진수와 수희 -지구에서의 상희 이름- 의 얘기가 담길 예정입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눈치 채셨겠지만 작중에 나왔던 '올스탯 슬레이어'는 깨알같은 자기 홍보였습니다. 저는 홍보쟁이거든요 (퍽) 어쨌든... 비츄의 8번째 완결작.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를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 독자님들. 제가 정말 애정애정합니다! <完> 00193 외전 1부 =========================================================================                               ***외전*** 김환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기분이 매우 별로다. 요즘 김상희는 한진수와 찰싹 달라붙어 지내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뭐. 그렇다 칠 수 있겠다. 김상희가 이렇게 말했었다. '오빠도 오빠의 가정에 충실해보셔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기 가정을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게 멋있던데.' 거기에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수처럼요.' 그래서 김환석은 그 날부터 아내들과 잠자리도 가져보고 대화도 해보려고 했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었다. "너. 따라와라." 아내들 중 한 명인 최지수가 지목 됐다. 그래서 얼른 일어섰다. "팔짱을 껴라." 최지수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었다. "네." 최지수는 행복해졌다. 이런 날이 오게될 줄은 몰랐다. 고려 왕자와 팔짱을 걷고 궁정을 거닐게 되는 날이 오다니. 어떻게 이런 날이 있단 말인가! 꿈에서나 그려왔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됐다. 김환석은 손목 시계 타입의 위치추적기를 쳐다봤다. '이쯤이면 마주치겠군.' 김환석이 물었다. "밥은 먹었나?" 그 말에 최지수는 감동했다. "네. 저는 먹었어요." 고려의 왕자가 자신에게 밥을 먹었냐고 물어주셨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총이란 말인가. 최지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냉혈한이라는 김환석의 입에서 이렇게 다정한 말이 나오게 될 줄이야. 김환석이 다시 물었다. "밥 잘 챙겨먹고 다녀라." 그리고 코너에서 김상희와 마주쳤다. "어맛, 오빠?" 최지수에게 정중하게 인사도 했다. "형님을 뵈어요." "......." 하지만 최지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감동 받아서 말을 잇지 못했다.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대로 말을 하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한진수에게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김환석은 모르는 척 했다. "왜 하필 이 코너를 도니 네가 나타나는 거냐? 똥개 주제에." 그 말에 한진수는 황당해졌다. '기척을 못 느끼셨을 리 없는데.' 김상희의 기척을 못 느꼈을 리가 없다. 김환석은 100프로 알고 있었다. 어째서 저 형님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김환석이 말했다. "내 아내에게 밥 잘 챙겨먹고 다녀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정말요?" 김상희는 눈을 크게 떴다. 김환석이 턱을 조금 높이 들었다. 어떠냐. 이 오빠가 이 정도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김상희는 옆을 쳐다봤다. 보아하니 최지수 지금 엄청 감동 받았다. 딱 봐도 보였다.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 "오빠. 오빠는 정말 다정한 분이셨군요." 다정한 말을 건넨 것이 맞는 것 같기는 했다. 김상희는 방긋방긋 웃었다. 김환석이 정말로 좋다는 듯 말이다. 김환석의 턱이 더욱 높게 들렸다. 어깨도 쭉 폈다. 김상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야. 너가 평소에 안 해주니까 겨우 그거에 감동받고 울먹거리는 거잖아.' 그런 주제에 지금 자기 잘했다고 우쭐대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저게 고려의 둘째 왕자가 맞는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저게 진짜 실세야? 저딴 게 진짜 내 오빠라고. 그리고 며칠 뒤, 한진수가 물었다. "상희야. 네 명의의 계좌. 조회해봤는데..." ***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게 0이 몇 개야..." 세봤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조. 십조. 백조. 그 흔히들 말하는 백조 있잖아. 내가 이 세계로 오기 전까지만해도 대한민국 청년실업이... 몇 프로더라. 하여튼 그건 잘 기억 안 나는데 하여튼 그 백조. 취직 못한 상태의 그거. 그 백조가 아니고 숫자 백조다. '세상에...' 흔히들 로또가 되면 인생 역전이라고 말한다. 내가 한국에 있을 당시, 로또의 실수령액이 약 15억원쯤 된다고 했던 것 같다. 그 정도만 있어도 인생역전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백조라고...?' 한국과 이 곳의 화폐가치는 거의 동등하다고 보면 됐다. 백조라니.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했다. 감이 안 왔다. 나는 첫째 망나니의 방으로 향했다. 첫째 망나니는 언제나 늘 그렇듯, 시크한 태도로 날 맞이했다. "뭐냐?" "오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어요?" 통장을 보여줬다. "아." 김환석이 대충 말했다. "오다가다 주웠어." 나는 황당해졌다. 100조를? 오다가다 주웠다고? 그런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김환석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뭐랄까. 갑자기 약간 불안해진 표정이라고 해야하나. "똥개." 갑자기 얘 왜 이래. 갑자기 왜 진지해져? 이유가 뭐야? "물론 내가 네 인감을 마음대로 사용한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어라. 이, 이게 아닌 거 같은데. "내 마음대로 네 명의의 통장을 개설했다. 네 개인정보를 내 마음대로 도용한 것이지." 아니요. 오빠. 나는 지금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개인정보 도용했는데, 당사자한테 백조 쥐어줬잖아.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김환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왕에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이실직고하고 용서 받자.' 뭐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 참. 얘 왜 이래. "그리고..." "오빠. 그게 그러니까요..." 첫째 망나니는 나에게 말을 할 시간 자체를 주질 않았다. "100조밖에 없게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다 설명할 수 있다." "...네?" 그러니까 지금 너 추궁하러 온 거 아니라니까. 첫째 망나니는 서랍에서 도면 몇 개와 두꺼운 서류뭉치를 가지고 왔다. 내게 보여줬다. "김상희 리조트 사업을 추진하다보니..." 김환석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돈을 횡령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실제 네 돈을 사용하여 조성한 대규모 초호화 리조트 단지를 네게 선물하고 싶었어서..."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서 돈이 100조밖에 없다고 나한테 사과하고 있는 거다. 이거 뭐야. 얘 뭐야. 나 무서워. 사과하는 포인트가 좀 이상하잖아. "네 생일에 맞춰서 완공식을 진행하려고 했었는데." "......." 그러니까 생일 선물로 대규모 초호화 리조트 파크를 내게 선물해주려고 했다고? 그런데 그건 내 돈이라며? "제 생일 선물이 리조트 파크라구요...?" 김환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조금 나빠진 듯 보였지만 내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설마." 그래. 그럼 그렇지. 리조트 파크를 선물로 주는 미친 왕자가 어디 있어? "T.O.P 왕국을 인수합병 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인수합병 얘기가 왜 나와? "인수합병이오?" "그래." 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인수했다고? 이 작자는 도대체 뭐하는 작자야? "네 깜짝 생일선물이었는데." 아. 그러니까 리조트파크는 그냥 덤이고, 그 리조트파크가 있는 나라를 내게 선물하려고 했었단다. 아. 설명을 덧붙이자면 TOP왕국은 지구로 치자면 대충 한국만한 나라다. 이 세계기준으로 큰 나라는 아닌데, 그렇다고는 해도 아주 작은 나라는 아니었다. 그 나라를 사서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단다.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 마침 그 방에 있던 최지수는 허탈감에 쟁반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라를 선물해주신다고...?' 김상희를 쳐다봤다. 김상희와 자신.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나는 밥 잘 먹고 다녀라. 그 말 한마디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렸었는데.' 그랬는데 김상희는 나라를 선물받고 있다.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는 직감했다. 김환석이 자신을 쳐다볼 때와 김상희를 쳐다볼 때의 눈빛.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김상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16년간 해온 게 있다. 거의 습관적으로, 겉으로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영혼이 별로 없는 말을 했다. "오빠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오빠가 사과하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소녀는 오빠의 하염없는 사랑에 그저 행복할 뿐이어요. 오빠를 오빠로 둔 소녀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지, 오빠는 정말 모르실 것이어요." 최지수는 뭔가를 느꼈다. '아...' 김상희는 일반 여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뭔가 도전의식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한편, 고려왕궁 내 사자관. 김훈상의 집무실이 있는 그 곳에서. 김훈상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진수. 정녕 네 놈은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한진수도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이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정말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그러한 그릇이 못 됩니다." "네가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그릇이냐?" "저는... 폐하께서 황제가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시대를 평화로이 이끌어갈 수 있는 영웅이십니다." 김훈상이 미간을 찡그렸다. 영웅이고 나발이고.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내 딸과 함께 여행을 다닐 거란 말이다! 네 놈은 일에 파묻혀서 죽으란 말이다! '어차피 최선책은 물 건너갔다.' 당사자의 의지가 저렇게 확고해서야. 소용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선책을 제시하겠다." 한진수가 김훈상을 쳐다봤다. 이럴 줄 알았다. 어차피 김훈상도, 한진수도 그 귀찮고 일 많은 황제자리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바 있다. 김훈상이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이 곳에 네가 생각하는 황제감을 생각해서 써내도록 해라. 쓴 다음 우리 둘이 동시에 종이를 확인하도록 하지. 우리 둘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놈은 황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 터." 김훈상과 한진수는 동시에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첫째 왕자가 명분이 서지.' '역시 첫째 형님이시지.' 둘이 그렇다고 입을 맞춘 적도 없고 서로 회의를 한 적도 없지만 동시에 김형석을 떠올렸다. 김훈상이 물었다. "다 썼냐?" "예. 다 썼습니다." 둘의 종이를 확인 했다. 그런데 그 때. 긴급보고가 올라왔다. 김훈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비츄입니다. 이제 외전 들어갑니다 ㅎㅎ 외전은 본편과는 크게 연관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외전' 이며 본편과는 별개의 +@ 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연재주기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 00194 외전 1부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훈상과 한진수의 생각은 완전히 일치했다. 차기 황제는 김형석이다. 김훈상은 그렇게 내정했다. 누가 봐도 한창 왕성한 활동을 보여야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제 곧 할아버지가 될 몸이니까 은퇴해야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던, 언젠가는 제국을 뛰어넘고 말겠다던 야망을 가진 왕은 이제 이 자리에 없었다. 이 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하여튼 김훈상은 과도하게 가정적인 아버지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환석이 이 녀석이...!" 김훈상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알렉스를 불러라." 한진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굳혔다. 차기 황제를 논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그렇다고 하기에는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욕구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자리다. 그런데 그 중요한 사안을 놔두고 다른 얘기를 할 만큼 긴급한 보고라는 뜻인가. 한진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김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수는 그게 뭘까 생각해봤다. 저토록 진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국내 혹은 국외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만. 그런데 알렉스 학자님을 부른다고?' 혹시. 아주 어쩌면. '상희랑 관련된 얘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에이. 그래도 설마. 차기 황제를 논하고 있는데. 아무리 저 작자가 딸등신이라고는 해도 그 걸 중간에 끊고서 알렉스 학자를 부를 리가. '왠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 가능성은 사실로 드러났다. "알렉스. 너는 알고 있었나?" "예?" "김환석이 TOP왕국을 인수 합병한 사실을?" "......." 알렉스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저 왕이 왜 저러는 걸까. "폐하. 일전에 보고서가 올라갔었던 것 같습니다만... 혹시 보고가 누락되었습니까?" 그랬다가 알렉스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조그마한 나라의 사정따위.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제서야 김훈상도 기억났다. 김환석이 TOP왕국을 돈으로 사들였다는 얘기.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들이 나라 하나 사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흘려 들었다. 그 땐 한진수와 김상희가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라서 둘의 경호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러니까 환석이가 TOP왕국을 산 것이..." 그 때는 그냥 거기서 나는 특별한 광물이 있겠거니. 아니면 그냥 심심풀이로 샀다든지. 아니면 그냥 주차장이 필요해서라든지. 하여튼 개인적인 용도로 샀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맞습니다. 김상희 공주님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알렉스. 넌 내 마음을 읽는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째서 말리지 않았지?" 알렉스는 억울해졌다. 김훈상의 마음을 읽기는 읽는다. 상희학이라는 엄청난 학문을 연구중에 있으니까. 추후 몇 년 내로 공개할 계획까지도 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김훈상의 모든 마음을 다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왕 앞에서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고.' 왕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감히 어떻게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둔한 저는 폐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렇게 말했다가 이내 떠올렸다. '혹시...!' 문득,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여 폐하께서도 생일선물을..." 아. 이제 알겠다. 명확해졌다. "그럼 최근 변방국들을 정리하러 가셨던 것은..."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이 나라에는 훌륭한 무장들이 많다. 특히나 프리온 나이트를 대거 부릴 수 있는 한진수의 경우는, 일인 군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프리온 나이트를 소환할 수 있으며 워프까지 가능한, 전천후 전략폭격기였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리하러 가셨지.' 고려가 세계 전체를 완벽하게 꽉 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걸 왕이 직접 치러 갔고 평정했다. '그건 저 딸등신이 자기 손으로 선물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래서 굳이 왕이 직접 움직인 거다. 딸한테 선물도 해줄 겸. 변방정리도 할 겸. 겸사겸사. "상희 공주님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함이셨습니까?" 김훈상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다. 그랬건만, 아들이라는 녀석이 자기와 똑같은 항목을 선물로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것도 돈으로 쉽게 말이다. 이건 정성의 문제다. 한진수는 어이가 없어 김훈상을 쳐다보고 말았다. '생일선물이 겹쳐서 저렇다고?' 방금 전까지 차기 황제에 관해서 얘기하던 그 왕이, 저 왕이 맞나 싶다. '딸에게 줄 선물이 겹쳐서?' 그래서 이 회의 아닌 회의를 끊고 알렉스를 소환한 건가. '내가 아는 폐하가 정말 이 폐하가 맞는 건가?' 그랬다가도 이내 납득했다. 만약 자신이 왕이라 할지라도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진수가 말했다. "폐하." "말해라." "생일 선물이 겹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 싶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했다. "폐하께서는 직접 몸을 움직이셔서, 그 손으로 직접 나라들을 평정하셨습니다." 가려운 곳을 팍팍 긁어줬다.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의 값어치가 아니라." 알렉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진수를 쳐다봤다. 어라. 저 한진수. 뭔가 만만치 않은데. 상희학을 공부한 것도 아닐텐데. 무슨 말이 나올지 흥미진진해 했다. "그 선물을 준비하는 정성과 마음입니다." 알렉스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한진수가 변했다.' 세기의 대천재 한진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상희학을 가르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한진수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 뿐인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은 그 어떤 깊은 바다보다도 깊고 그 어떤 높은 하늘보다도 높습니다." "......." "딸에게 잊지 못할 선물이 될 겁니다." 어쨌거나 나라를 선물해주는 거니까. 알렉스는 황당해졌다. 한진수가 한진수가 아닌 것 같다. 상희학에 정통한 사람 같다. 한진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능력이 없던 시절. 저는 상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알렉스는 계속해서 한진수의 말을 경청했다. 능력이 없었단다. '제국에게 쫓기던 그 시절을 얘기하는 건가?' 하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저는 상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매일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는 것과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김훈상과 알렉스가 동시에 크흠, 헛기침을 했다. 알렉스는 솔직히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한진수가 그랬었나? 매일 사랑한다고 말했었나? 따뜻한 음식은 언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상희는 제가 돈을 들여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제 정성이 들어간 손 편지를 더 좋아했습니다. 수십, 수백만원짜리 반지보다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더욱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결국 상희에게 있어서 값어치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뜸은 들일만큼 들였다. 이제 본론을 말할 차례다. "김환석 왕자님의 선물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겁니다." 비록 그게 왕국 하나라는 게 좀 별다른 점이지만. "하지만 폐하께선 정성을 보이셨죠." 알렉스는 맞장구쳤다. 왠지 저 한진수. 마음이 맞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맞습니다." "상희는 폐하의 선물을 훨씬 더 좋아할 겁니다." 김훈상의 표정이 비로소 밝아졌다. *** 김환성이 문을 나섰다. "나이트 제 9대대. 따라와!" 제 9대대를 인솔하여 밖으로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펜릴왕국. 펜릴왕국은 일전에 계집에게 -김상희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했었다. 엄청난 굴욕이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반 고려 결사대를 조직했다. 고려가 막강하기는 하나,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무조 항복을 선언합니다." 고려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반기를 드는 모든 나라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펜릴왕국도 그럴 뻔 했다. 김환성이 목을 돌렸다. 뿌드득, 뿌드득, 소리가 났다. 그 모습만 보면 마치 일국의 왕자가 아니라 어디 길거리의 양아치 같았다. "야. 일단 너네가 다스려." "예...?" 김환성은 뿌듯해했다. '내가 정리한 영토는 나 주신다고 했었지.' 참고로 김환성은 땅욕심이 별로 없다. 땅 같은 거. 안 가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환성은 땅 갖고 왕놀음 하는 것보다 그 땅에서 놀이기구 타는 게 더 좋다. '나라를 선물로 줄 생각은 아무도 못했을 거야!'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나라를 선물로 준다니. '내가 접수한 나라가 이제 3개라고.' 김환성이 우쭐대며 말했다. "너네는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예전에 똥개를 괴롭혔던 그 놈의 얼굴이 보였다. '윌리엄이랬나?' 솔직히 이름은 잘 기억 안났다. 미친듯이 팼었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하여튼 이쁘게 잘 다스리고 있어라." "......." "음. 여기는..." 이 땅은 뭘하면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역시 놀이동산이 좋겠어." "...네?" 김환성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뿌듯해했다. 펜릴왕국의 영토는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냥. '여기는 그런 펜릴 놀이동산으로 꾸며야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 '상희 파크로 해야겠다.' 이왕에 '상희'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거. 그냥 이 나라 전체를 놀이동산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그럴 거면 상희 월드가 나으려나?' 그래도 오빠가 주는 선물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경쟁심에 불타 올랐다. '아부지랑 형의 선물보다 좋아야 할 텐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제일 멋진 오빠니까.' 아니. 제일 멋진 오빠여야만 하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제일 많이 줘야만 했다. 같은 시각. 장미관에 머물고 있는 김상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송수진이 걱정스런 얼굴로 김상희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공주님. 어디 불편한 곳 있으셔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불길했다. 뭐랄까. 목 뒷덜미가 갑자기 좀 차가워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뭔가 엄청난 것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이유가 없는 감정이었다. 그냥 괜히 불안한 거. '뭐. 아무 것도 아니겠지.'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큰 일은 아니다. 일련의 상황들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김상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땅부자가 되어가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생일날이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외전 진행중입니다~~~ 00195 외전 1부 =========================================================================                               *** 외전 3 : 그 딸의 생일 며칠 전. 김환성은 자신의 부관인 정선화를 불렀다. 계집아이의 이름이라고 놀림을 받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의 이름은 정선화가 맞다. "선화야." "네. 대장님." "네가 생각하는 제일 비싼 생일선물이 뭐냐?"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겠습니까?" 김환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관이라는 놈의 스케일이 저렇게 작아서야. "됐다." 한 차례 손짓으로 정선화를 내보내고나서 왕실의 위대한 학자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 할아범." "네. 왕자님." 알렉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 저 힘만 세고 무식한 돌대가리(?)는 자신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선수쳤다. "저는 왕자님께서 저를 왜 부르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역시 할아범이야." 이젠 놀랍지도 않다. 알렉스는 신통방통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인 김훈상의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과 형의 마음까지도 모두 꿰뚫어 봤다. 김환성은 '상희학'의 존재를 모른다. 알렉스의 모든 판단은 딸등신과 동생병신이라는, 상희학의 기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김환성으 그저 알렉스를 대단한 학자로만 생각했다. "왕자님께서 저를 부르신 것은 김상희 공주님의 생일선물 때문이겠죠."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알렉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알긴.' 왕자님 너 뿐만 아니라 당신 아버지랑 당신 형도 당신이랑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든. '어쩜 부자들이 저렇게 똑같은지 원.' 속으로는 좀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들의 거대한 스케일에는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왕은 자기가 정복해서 나라를, 둘째 왕자는 돈으로 사서 나라를, 셋째 왕자는...' 아무래도 역시 왕의 전철을 밟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열심히 정리를 하러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어. 맞아." "그걸 생일선물로 하실 생각 아닙니까?" 김환성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이 할아범. 범상치 않은 할아범이다. 그 특유의 어린아이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 알렉스 할아범은 대단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당신 아버지랑 형도 똑같다니까 그러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아셔야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폐하와 둘째 왕자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김환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셋째 왕자님은 지금 매우 불리한 형세입니다." "...응?" 알렉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생각해보십시오. 폐하는 왕자님보다도 훨씬 많은 힘을 지니고 계십니다. 고려왕국군 전체를 통솔하시는 전군통수권자이십니다. 게다가 둘째 왕자님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재력가입니다." "끙..." 김환성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부지랑 형. 이건 아무래도 반칙이지 않겠는가. 아부지는 권력으로, 형은 금력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왕자님은 차별화 포인트가 있어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그냥 나라를 선물하는 것만으로는 차별점이 전혀 없습니다. 체크 포인트가 있습니다. 나중에 김상희 공주님이 이 선물을 떠올렸을 때, 김환성 왕자님이 떠오르느냐.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니까?" "왕자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테마파크죠." "아!" "테마파크라면, 나중에 김상희 공주님이 왕자님을 계속해서 떠올릴 수 있겠죠." "좋았어. 바로 그거야. 안 그래도 펜릴왕국 정리하러 가려고 했는데." "거기라면 입지도 좋고. 아주 딱이죠." 알렉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주 잘 아는 건설사가 있습니다." "그래. 그래. 알렉스 할아범. 할아범한테 맡길게. 알아서 진행해봐." 알렉스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참고로 그 회사의 대주주가 바로 알렉스다. '이번 예산은 이걸로 충당이 되겠어!' 정말 만세다. '김상희 공주님 만세!' 참고로 김환석이 진행하고 있는, TOP왕국 내의 대규모 리조트사업도 알렉스가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이걸로 상희학을 더욱더 발전시킬 수 있겠다!' 대규모 표본 채집과 연구진행. 이제는 가능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것이야말로 창조경제 아니겠는가. 상희학을 공부한 보람이 있다. 상희학이 아니었다면 왕자와 왕의 심리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것은 추후 상희학 전파에 매우 커다란 힘이 되겠지!' 실적이 없는 학문은 그다지 각광 받지 못하고 있는 추세다. 그에 반해 상희학은 엄청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몇 마디 말만으로도 대규모 사업을 몇 개씩이나 따내고 있지 않은가. '상희학 만세! 아니 상희공주님 만세!' 만세를 불렀다. *** 김상희의 생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김상희를 16년간 보필해온 송수진마저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공주님 그게 정말이어요?" "응... 그런가봐." 김상희도 삼부자가 이럴 줄은 몰랐다. 나라들을 선물하다니. 이건 선물의 스케일이 아니지 않은가. 송수진이 부러움 가득한 얼굴로 김상희를 쳐다봤다. 질투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정말 호화스러운 파티였다면서요?" 그랬다. 공주의 생일잔치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호화스런 파티였다. 온갖 사절단이 고려를 방문하여 김상희 성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흡사 황제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으셨다고..."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 있었어." 한숨만 나왔다. 몇 시간 전을 떠올려봤다. *** 왕이 물었다. "자. 누구의 선물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냐?" 이 것은 마치 예전에 아빠가 좋아 약혼자가 좋아, 하고 물어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상희는 생각했다. 이 아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한진수가 연회장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밖에 없다- 가진 거라곤- 이 목소리밖에 없다- 마이크를 통해, 한진수의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생일파티에 함께 참여하게 된 알렉스는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한진수는 정말....!' 엄청났다. 상희학을 공부한 것도 아닌데 마치 상희학을 공부한것처럼 여자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의 남자가 아닌 것처럼. 어디 다른 세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는 특별했다. 그런데다가. '음악적 소양까지 갖추고 있다고?' 저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다. 그렇다는 말은 곧, 한진수가 작사 작곡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물론 아니다. 이 노래는 과거 한진수가 지구에 있을 때에, 한 아이돌 그룹이 불렀던 노래다. 김상희는 입을 틀어막았다. '저 노래는...' 아주 오래 전. 둘은 가난했었다. 가진 거라곤 정말로 노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그렇게 잘하지는 않았었다. 둘만의 작은 결혼식을 할 때에, 한진수는 이 노래를 김상희에게 불러줬었다. 잘 부르지는 못해도 정말 열심을 다해 불렀다. 진심을 담아 불렀었다. 삼부자가 준비한 나라 선물들. 그렇게 거대한 스케일의 선물들도, 한진수와의 추억보다 값비싸지는 않았다. '진수야...' 김상희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새어나왔다. 첫 결혼식 때. 작은 결혼식 때 진수가 불러줬던 노래. 그게 다시 진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진수는 그 노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알렉스의 눈이 번뜩였다. '김상희 공주님이 울고 계신다!' 틀림없이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상희학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신비한 학문이었다. 천문학적 금액의 선물보다도, 어떻게 저 구린(?) 노래가 상희공주님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건지. 알렉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의 선물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묻던 김훈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김환석과 김환성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 모두가 봤다. 김상희가 울고 있는 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삼부자는 똑같이 생각했다. '내가 졌다.' 그런데 화장실에 갔다와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김환혁은 분노했다. "우리 누나 누가 울렸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 이쁜 누나 울린 놈 당장 나왓! 내가 죽여 버릴 테다!"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김훈상은 김환혁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응원했다. 그래. 저 마음에 안 드는 사위놈을 죽여 버려라, 아들아. 하고 말이다. 온갖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난 김상희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땅 부자에 돈 부자에 건물주가 되었다는 거야?" 아무래도 상황이 그런 것 같다. "나 참..." 사랑을 받는 건 좋은데 그 스케일이 너무 큰 것 같다. 어쨌든 오늘 하루도 평화로웠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녀는 잊고 있었다. 첫째 오빠. 김형석이 생일파티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아직 선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00196 외전 1부 =========================================================================                               *** 김형석은 조금 특별한 왕자다. 서열상으로는 첫 번째이기는 하나, 가진 바 능력이 특출나지 못하다. 그나마 김환석과 김환성. 그리고 김환혁이 제대로 형님 대우를 하고는 있으나 어쨌거나 고려를 이끌어갈 차기 왕으로는 약간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능력이 없다고 해서 눈치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능력이 없기 때문에 눈치가 더 빨랐다. '아무래도 황제 자리를 내게 주실 것 같다.' 김형석은 황제 자리가 싫지는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 남자치고 권력 좋아하지 않는 이. 별로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최근에는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기 위한 비밀회의- 비밀회의라기에는 조금 거창하고, 한진수와 김훈상의 밀담정도-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황제자리 앉기에는...' 그는 그 스스로의 능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직은 과도기다. 지금 이러한 시국에 능력 없는 황제가 제국을 맡으면, 그 제국은 필시 붕괴하게 된다. '나는 많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그는 고려의 왕위를 이어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고려의 왕위는 둘째인 김환석이 이어받게 하려고 했다.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때가 되면 어디론가로 멀리가서 숨어 살거나, 일부러 죄 하나를 지어서 귀양이라도 가려고 했다. 그게 고려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동생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 될 테니까. 그런데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이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혼란스러운 시대.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이 필요하다. '바로 너다.' 그래서 친필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황제위를 넘겨 받게 된다면 그 즉시, 황제위를 한진수에게 양도하겠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이 정도면 상희에게도 충분한 선물이 되겠지.' 생각해보라. 남편이 무려 황제다. '한진수의 성격상 상희를 홀대하지도 않을 거고.' 황후라는 것이, 원래는 그다지 높은 자리도 아니고 그리 좋은 자리도 아니지만 한진수 옆의 황후는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동생의 생일 선물로 황후자리면 괜찮겠지.' 김형석은 크게 착각했다. 한진수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면, 김상희가 좋아할 줄 알았다. *** 알렉스는 급한 마음에 김형석을 찾았다. "왕자님. 제가 들은 소문이 사실입니까?" 김형석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정말 큰 마음 먹었다. 동생의 생일 선물도 선물이거니와,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을 위해. 그리고 한진수를 위해. 그 문서를 작성한 것이었으니까. "맞아요. 사실상 차기 황제는 나로 내정되어 있었으니까요." "아이고..." 알렉스는 이마를 짚었다. 김형석이 오해했다. "알렉스. 나는 이 세상을 위해 충분히 옳은 결정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왕자님. 그게 아닙니다..." 이 왕자님을 어찌할꼬. "왕자님. 왜 폐하께서 왕자님을 차기황제로 추대하려고 하셨을까요? 왜 한진수는 자신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자님을 차기황제로 밀려고 했을까요?" "그거야 내가 고려의 첫째 왕자이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동생들이 자신을 대우해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른 거 없다. 그냥 형이기 때문이다. 고려왕국의 첫째 왕자이며, 제국에서 고생했던 그 전과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태어난 순서 때문에. 나는 특혜를 받는 것이지요.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왕자님. 묻겠습니다." 사실 이 모든 상황. 알렉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반론을 펼칠 차례다. "왕자님께선 황제위를 한진수에게 넘긴 다음.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그저 소박하게 상희가 낳은 아이들을 돌보며 지낼 생각입니다." 그럼 그렇지. 알렉스의 눈이 번뜩였다. 상희학 이론에서 정말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알렉스가 말했다. "그 것이 바로 폐하와 한진수가 노리는 것입니다." "알렉스. 무슨 말인지 나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 것이야말로 폐하와 한진수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지금 왕자님이 원하는 그거요." 김형석은 생각지도 못했던 알렉스의 말에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마...' 아예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나를 우대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황제자리가 싫어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김형석은 스스로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식선에서, 어떻게 그런 이유로 황제자리를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가 어떤 자리인가. 만인지상의, 최고 높은 자리 아닌가.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정말로...?' 정말로 알렉스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가 힘주어 말했다. "한 번은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 "상희공주님이 낳은 딸을 보고 싶다고요." 김형석은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다. "확실히... 딸이 맞습니까?"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고? 손자가 아니라 손녀?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김상희가 사랑받는 거.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김상희에게 국한된 상황이다. '아무리 성녀인 상희라지만, 상희의 아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희의 딸을 원한다고?' 어쩌면 아버지가 많이 변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렉스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왕자님. 이걸 보십시오." 알렉스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상희학을 반드시 세상에 공표하고 말겠다고. 그래서 여태까지 착실히 준비를 해왔다. 착실한 준비없이, 그냥 세상에 내던지면 자신은 돌 맞아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정을 다해 준비해왔다. "이 것은..." "제가 정확히 1년 전에 작성했던 일지입니다. 아시다시피 마력으로 이 날짜를 작성하게 되어 있어 위조가 불가능하지요.""과연 그렇군요." 공문서를 작성할 때나 쓰는 마력종이가 보였다. "한 번 보시지요."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놀라웠다. 아주 정확하게는 아니어도 지금의 이러한 상황이 얼추 예상된 내용이었다. "저는 무려 8년 전부터 이러한 일지를 작성해왔습니다." 미래를 예측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상희의 행동에 대한 딸등신과 동생병신들의 반응들을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예측하여 미리 작성해놨다. 거의 10년 전부터 말이다. "나중에 원본들을 모두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럴 수가..." 김훈상이 황제하기 싫어한다는 내용. 한진수 역시 그걸 싫어한다는 내용. 그래서 김형석 왕자를 황제로 추대할 거라는 내용. 그러한 내용들이 세세하게 담겨 있는 이 일지는 김형석을 충격에 빠뜨렸다. 알렉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제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마파크, 리조트파크 건설건으로 이미 떼돈을 벌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게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희학의 실질적 용도(?) 중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거다. "저는 이 것을." 알렉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일단 가장 만만한(?) 첫째 왕자부터 포섭에 들어갔다. 그래도 여자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왕자였으니까. "상희학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상희학...?" "예. 이 이론에 따르면..." 알렉스는 미리 준비해온 마력 레포트 용지의 첫 장을 펼쳤다.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김형석이 얼굴을 굳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학문을 연구 중이셨습니까?" "말이 안 되지 않는다는 것. 이미 경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시간이 흘렀다. 김형석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결국 그는 상희학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은 대단한 학문이었다. 진리의 학문이었다. 그는 크게 깨우쳤다. 알렉스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 "알렉스. 내가 지원하겠습니다. 연구에 박차를 가하세요." *** 나 지금 기뻐해야 하는 거지...? 음. 대충 따지자면 나라 6개와 황제남편(?)이 내 생일선물로 주어졌다. 내가 알기로는, 조만간 공식문서가 내려와서 형석오빠의 제안은 없었던 일이 되기는 하겠지만. 하여튼... 나 기쁜 거 맞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되었다. 그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부자 말이다. 대한민국의 건물주 따윈 하나도 안 부러운 그런 부자.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구. 이뻐라." ...아. 녹는다 녹아.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행복에 빠져든다. 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침대에 누워 서로의 채취가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진수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이 순간. 사랑 가득한 눈길로 날 바라보는 진수의 저 음란함이 조금 섞인 눈빛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정말 행복하다. 평소라면. 그러니까 침대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나는 저런 말투를 거부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우리 둘만이 있는 비밀스런 공간이다. 진수를 나를 아기취급하는 것도 좋고, 귀여워 죽겠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좋다. 진수의 따뜻한 체온이 좋다. "너도 잘생겼어." 진수가 고개를 저었다. 워낙 진지하게 고개를 젓길래 뭔가 했더니, "너 말고 여보라고 해야지." "......." 그러더니 여보라고 말을 하라고 계속 강요했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한 열 번은 강요한 것 같다. 결국 나는 성화에 못 이겨, "여보..." 라고 말을 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진수의 광대가 우주까지 폭발할 지경이다. 여보란 말이 그렇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진수가 날 꽉 껴안았다. 으악. 숨 막혀. 이 인간아. 나를 좀 배려해서 안아 달라고. 진수가 실실 웃으면서, 허공에 붕붕 뜬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무 좋아." "......." "네가 나보고 여보라고 하는 게 너무 좋아.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행복해서 미치겠어.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어. 내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어." "내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주머니가 있어?" "만들지 뭐." "......." "형님한테 부탁할까." ...아. 얘는 진짜로 만들 것 같다. 진수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대충 10억 정도면 만들지 않겠어?" 라고 말했다. ...그, 그래. 나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10억이라는 돈. 그저 숫자로만 느껴진다. 내가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도 잘 모르겠고. 나 그렇게 부자 맞기는 한 거지? 진수가 말했다. "우리 새로 지은 신혼집 보러 갈까?" 이 때까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신혼집이라는 것이, 세상을 정말로 바꿀 열쇠가 될 거라는 것을 말이다. 00197 외전 1부 =========================================================================                               *** 나는 진수와의 추억들을 떠올려 봤다. 진수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얘기하곤 했었다. '나중에 차를 사게 되면 이름을 붕붕이라고 지을 거야.' 그 때 나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차를 사서 그 차에 이름을 붙이겠다니. 이 얼마나 소년틱한가. 물론 그 때 나는 이미 진수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 모습조차도 귀여워 보이긴 했었지만. "차에 무슨 이름이야?" 그 때 진수는 진지해졌었다. "요즘은 차에도 다 이름을 붙여. 애칭이지." "어휴. 퍽이나 그렇겠다." "이 것이 바로 여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들의 세계지." 이긍. 그러셨어요? 하고 나는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었다. 우리는 어차피 차를 살 형편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행복한 상상에서 멈추고 말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붕붕이야. 타." 그 행복한 상상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쯤 되니까 이제 놀랍지도 않다. 지구에서, 그것도 강남에 가야 겨우 한 번 씩 볼 수 있는 그런 차 있잖아. 뭐라더라. 람보르기니? 페라리? 하여튼 지나가면 사람들이 우와! 하고 한 번 씩은 꼭 쳐다보는 엄청 비싸 보이는 자동차. 저 안에 탄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하고 한 번쯤은 생각해본다는 그런 차. 진수가 그런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내가 열 수 있어." "너한테는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 묻지 않게 하고 싶어서 그래." "정말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분 나쁜 한숨은 아니었다. 나도 손이 있고 발이 있다. 내가 문 여는 것 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 줄 알았는데, "이거 왜 문이 위로 열려?" 아니었다. 나는 이거 문 어떻게 여는지도 모른다. "내 마력에 반응해서 저절로 열리는 반자동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 상희 너 같은 경우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면 너를 인식해서 문이 열릴 거야." 문이 옆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위로 열렸다. 그 왜. TV에서 나오는, 그 이상한 차들. 문 열고 닫으려면 주차장 자리 두 개는 필요하다는 그런 차다. 왕궁의 문이 열렸다. 부와아앙-! 요란한 배기음을 터뜨리며 자동차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와. 대박이야 이건. 원래 나는 시끄러운 자동차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차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차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 같다. 진수가 말했다. "신기한 거 보여줄게." "뭔데?" 갑자기 천장이 트랜스포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오픈카 타고서 해안도로 달리고 싶다고 했었잖아, 내가." 예전에 그랬었다. 제주도 여행을 갔었을 때. 그 때 오픈카를 타고서 해안도로를 달리던 커플을 봤었는데 얼마나 부러웠었는지. 나는 그렇다치더라도 진수가 정말 부러워했었다. 상희 너한테 저렇게 해주고 싶다고. 나는 언젠가 꼭 그렇게 되고야 말겠다고. 진수는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지구나 여기나. 이런 건 비슷한 것 같다. 거리를 지나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쪽을 쳐다봤다.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는데, 듣지 않아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 때,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이 냄새.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진수의 몸에서 나는 향수냄새다. 옆을 바라보니, 한 팔은 창가에 올려놓고, 한 팔로 여유로이 핸들을 돌리고 있는 진수가 보였다.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부대끼고 있는데 저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진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말았다. 진수가 말했다. "식당에 좀 들르자." 식당에 들렀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도대체 뭐야?" "그, 글쎄." 듣도 보도 못한 슈퍼카다. 기종이 뭔지는 잘 몰라도 일단 보고 있노라면 무지막지하게 비싼 차구나, 하는 것은 느껴졌다. 개중에는 저 기종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저거..." "뭔데?" "그 왜. 로얄 엠프리오에서 수제작한... 프리미엄 베네치아... 인 것 같은데요." "그게 뭔데?" 로얄 엠프리오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슈퍼카 회사다. 성능도 성능이거니와. "돈 있어도 못 사는 물건이에요."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로얄 엠프리오 역시 마찬가지다. "현금자산 100억 이상이 기본 조건이고." "뭐라고...?" "로얄 엠프리오에서 인정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이만 탈 수 있는 거거든요." 최소 한 국가의 공작이상. "한 나라에서 저 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은 10명이 안 된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저건 워낙에 고가의 차량이고 2인승이라 실용성도 떨어지죠. 고려에는 딱 한 대 물량이 풀렸다고 알고 있어요. 주인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 차가 그렇게 대단한 차라고?" "돈도 돈이거니와 명예도 함께 갖고 있어야 탈 수 있는 프리미엄급 슈퍼카거든요." 그런데 뚜껑이 열렸다. "저렇게 달리는 와중에 뚜껑을 열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곳도 로얄 엠프리오밖에는 없어요." 그 뚜껑 안에는 한 쌍의 남녀가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도 못 타는 저 자동차 안에, 계집따위가 타고 있다니.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아뇨... 계집이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차 뒤에. 그러니까 자산 100억 이상에 명예와 권력이 있어야만 겨우 구할 수 있는 프리미엄급 슈퍼카 뒤에. 이상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상히상히 알라뵹뵹 ♡ 사람들은 또 충격을 받았다. "저런 슈퍼카 뒤에..." 어떻게 저런 슈퍼카 뒤에 저런 해괴망측한 스티커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저 스티커는 무슨 다이아몬드로 제작된 것이란 말인가! 저건 슈퍼카에 대한 모독이다. 적어도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한진수와 김상희는 식당에 도착했다. 피슈웅-. SF영화에서나 들어 봤을 법한 소리와 함께 버터플라이 도어가 열렸다. 한진수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 "응?" 한진수는 아예 김상희를 마력으로 눌러 버렸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한진수는 굳이 옆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한진수가 활짝 웃었다. "내 손 잡고 일어서세요. 공주님." 여느 슈퍼카가 그러하듯, 로얄 베네치오는 차체가 매우 낮다. 혼자서 앉고 타기가 불편한 구조다. 김상희는 괜히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마력으로 일으켜줘도 되잖아.' 이 차를 타고 온 것만으로도 이미 관심이 집중된 상태. 거기에 또 굳이 무려 남자가 계집의 손을 잡아줘서 일으켜줬다. 이건 정말로 눈에 띄는 행동 아니겠는가. 그 때,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저... 죄송합니다만 손님." "예?" 직원이 머뭇거렸다. "너무 초고가의 차량이다보니... 발렛파킹이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이런 거 잘못 건드리면 큰 일 난다. 실수로 어디 긁기라도 했다가는 인생 종치는 수가 있다. 자신이 가입되어 있는 보험은 겨우 대물 2억이다. 이건 한 번 잘못 긁으면 2억은 커녕 20억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발렛파킹을 하는 직원은 안다. 저 자동차를. 최소 공작 이상만 탈 수 있는 자동차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호화스러우며, 또 최고의 디자인이라 손 꼽히는 슈퍼카다. "아... 그래요?" 지금 한진수는 마음이 급하다. 우리 이쁜 상희랑 빨리 밥 먹고 싶다. 어화둥둥 내새끼 하면서, 밥도 먹여주고 싶다. 그래서 그냥 급한대로 로얄 베네치오의 기어를 중립으로 바꾸고 -마력을 사용해서- 발로 툭 밀어 버렸다. 직원은 입을 쩍 벌렸다. '세, 세상에...'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저, 저걸 발로 찼어?' 이게 가능한 일인가? 다른 차도 아니고 로얄 베네치오를? 저,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마력 컨트롤이 엄청나게 뛰어나다.' 그냥 발로 차면 당연히 안 밀린다. 마력으로 조절해서 주차 라인에 정확하게 대었다. "됐죠? 이제 들어가면 되나요?" 사장이 안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이 식당은 원래 최고급이고 원래 부자들이 이용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손님은 처음 본다. 최소 공작급 이상이라고. 자동차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진수는 마음이 급하다. 인사고 나발이고, 우리 상희랑 빨리 들어가야 했다. "빨리 안내 해주세요." 사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래도 이 손님. 마음이 안 좋아진 것 같다. 자신이 늦게 나와서 인가. 대접이 미흡했나? 발렛파킹 직원이 뭐 잘못이라도 한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그런 거 아니다. 한진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상희랑 밥 먹고 싶을 뿐이다. 그 때, 김상희는 발견했다. "저게 뭐야?" '상히상히 알라뵹뵹 ♥'이라니. 김상희는 이마를 짚었다. "야... 진짜..." 내가 쪽팔려서 못 산다, 못 살아! 김상희는 소리치고 싶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게 뭐냐고. 그리고 사장은 이 때다 싶었다. 감히 계집따위가 저렇게 높으신 분에게 반말을 하고, 야 진짜라니.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남자로서, 당연히 할 말을 했다. 이 남자손님에게 점수를 따야 했다. 얼른 버럭 성질을 내기로 했다. 감히. 이렇게 존귀하신 분께 그따위 언사를 구사하다니. 발렛파킹 직원은 말리고 싶었다. '사, 사장님.' 직원은 봤다. 저 높으신 분이 직접 문을 열고 또 저 여자를 직접 일으켜줬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지만.' 그렇지만 여자가 아닐 거다. 고려. 공작급 이상만 탈 수 있는 슈퍼카. 그리고 그 공작가 이상의 자제라 짐작되는 저 남자가 극진히 받드는 대상. 거기에 여자. 그랬다. 그제서야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분은 바로. '저 분은 김환성 왕자님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감히 계집이 어찌 높으신 분께 훈계질이란 말이냐!" 00198 외전 1부 =========================================================================                               *** 김상희는 분명 뉴스에도 나왔었고 유명한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나 왕궁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보통의 경우, 그런 유명인을 보더라도 그 유명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도 친숙한 얼굴도 아니고 뉴스에 잠깐 -얼굴이 나오는 화면은 거의 찰나라고 보면 됐다- 얼굴이 나왔을 뿐이니까. 교묘한 편집을 통해 그렇게 만들었다. 직원이 소리치다시피하면서 끼어들었다. "아이고. 김환성 왕자님.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사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러고 보니. '이, 이런 병신이 있나!' 현 시대에 있어서,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가문을 꼽자면 바로 고려왕가를 들 수 있다. 그 고려 왕가 내에서도 무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그 김환성 왕자. 마력을 최대한도까지 끌어올리면 여자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었다. 사장은 김상희를 김환성이라고 착각했다. 그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와, 왕자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 어떻게 계집따위가 베네치아에 탈 수 있단 말인가. 원래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김환성 왕자. 모든 상황이, 너무나 정확하게 저 여자가 김환성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김상희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그래. 뭐.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저 사장님 입장에서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는 그런 세계니까.' 언젠가는, 꼭 이 세계를 바꿔보겠다 마음을 먹고는 있지만 현실의 벽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고려왕가만 벗어나도,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여자를 내리깔아보고 있다. 이 세상을 바꾸는 거.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안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게 서로 편하겠어.' 김상희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진수는 아닌 듯 했다. "김환성 왕자님이 아닙니다만." 김상희가 한진수의 팔을 잡았다. 미세하게나마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기분 좋게 식사하러 왔는데 괜히 일 크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밖으로 식사를 하러 나왔을 때. 이 정도 상황은 얼마든지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일이 무서워서 데이트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감수하고서라도 데이트가 하고 싶어서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한진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여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김환성 왕자가 아닙니다. 사장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 그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렇다면 저 여자는 누구인가. 가만. 그러면 나는 지금 계집따위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가 조금 났다. 그나마 최소 공작급 이상이라 판단되는 남자 앞이라서 화를 내지는 못했다. 화를 내지는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김환성 왕자님을 사칭하다니. 계집. 기억해두겠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진수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진수는 항상 말했다. '너는 내 자랑거리야.' 혹은 '나는 항상 널 자랑하고 싶어.' 혹은 '내 여자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라고 말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식되는 게 싫었을 거야.' 그리고 사장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오빠인 척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둘 모두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나 참.' 그렇다고해서 무섭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한진수가 말했다. "이 곳에 모인 모든 분들께 감히 경고합니다." 한진수는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해보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담겨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하고 여기로 모여든 구경꾼들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박혔다. "앞으로 나와 내 사랑하는 여자가 식사를 하는 데에, 방해를 하는 이가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결처분하겠습니다." "......."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저 놈이 뭔데. 지가 뭔데 즉결처분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심지어 이유도 어이없다. 사랑하는 여자와 식사를 하는데 방해를 하면 즉결처분한단다. 그것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양아치도 저런 양아치가 없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다. '젊은 혈기에 뭘 못해?' 젊어서 객기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저건 누가 봐도 완벽한 허세 아닌가.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합니다. 내 생명보다 이 여자가 귀합니다." "......." 감히 구경하지 못하고 일을 하던 여자들, 길거리에서 곁눈질로 훔쳐보던 여자들은 그 말에 동작을 멈췄다. 이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며 이 여자와의 식사를 방해하는 사람은 즉결처분하겠다. 이게 정말 고려 왕국 내에서 일어난 일인지. 그녀들은 믿을 수 없었다. '아...' 저 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저 여자분은. 어쩌면. 어쩌면 성녀가 아닐까. '혹시...?' 그렇다. 성녀라면 저런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든 여자들이 꿈꾸고 동경하는 그 성녀라면 말이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손을 잡았다. 식당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생명보다 귀한 이 여자의 털 끝이라도 건드린다면. 내 목숨을 위협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만해도 콧방귀를 꼈다. 정말로 지체 높으신 왕자님쯤 되는 분이라면, 저런 허세는 부리지 않을 거다. 그냥 어중간하게 높은 놈이라서 저렇게 기고만장하며 까불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진수가 프리온 나이트 4기를 소환할 때까지 말이다. *** 김상희가 물었다. "진수야. 이게 뭐야?" "프리온 나이트."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와, 김상희에게 말을 할 때. 한진수의 표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중인격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김상희는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쉽게 얘기 하지 말라고.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극비에 쌓여 있던 제국 최강의 전략병기잖아. "그러니까 식사를 하는데 프리온 나이트가 왜 필요한 거야?" "괜히 시비 못 걸게 하려고." 시비 못 걸게 하려고 핵무기로 위협하는 인간이 어디있겠니. 이 세계의 핵무기잖아 이건.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문드문 목소리도 들려왔다. "저게 프리온 나이트라고?" 그래서 정체가 확실해졌다. "저 분이 한진수님이셔?" "그런가봐." "대박이다. 저런 사람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차기 황제로 거론되던 세기의 젊은 대천재. 한진수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할 수도 있는, 혼자서 대군단을 이끌고 있는 영웅. "저런 분은 도대체 식사하면서 무슨 말을 할까?" "모르지. 국제정세를 논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랑 밥 먹는데 국제정세 얘기따위. 한진수도 하기 싫다. "상히상히 알라뵹뵹?" 그 표정이 짓궂기까지 해서 김상희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귀엽긴 귀여운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 시선도 신경 쓰이고. "그거 정말 네가 쓴 거야?" 한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현이가 장난쳤어." "저 차 뒤에 스티커는? 슈퍼카에 대한 모독이라고 누가 그러는 거 같던데." 한진수는 정색했다. "붕붕이의 영광이지. 무려 상히상히 알라뵹뵹 스티커를 붙여줬는데. 고마워해야 해." "아... 그래." 김상희는 좋아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좋기는 좋은데 참. 뭔가. 뭔가 좀. 좀 그렇다. 얘가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대천재 혹은 젊은 영웅이 맞는가 싶기도 하고. 좀. 좀 그렇다. 뭐랄까. 이 남자. 답이 없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노답이다. 그런데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성녀님!" 성녀님!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상희가 그 소리를 들었다. 뭐지? 하고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가 울부짖고 있었다. "성녀님. 저희 아가가 많이 아파요." "이 미친년이! 썩 꺼지지 못해!" 입구에서는 직원 중 하나라 보이는 누군가가 그 여자를 밀쳐내고 있었다. "성녀님. 제발요. 저희 아가가 정말 많이 아파요." 김상희가 이제 그 목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쳐다봤다. 이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여자가 일을 열심히 해봐야 남자가 모두 착취한다. 여자의 인권인 최악인 세상. 아가가 많이 아프단다. 김상희가 물었다. "진수야. 잠깐 갔다 와도 돼?" 두 가지 상황으로 가정할 수 있다. 남자가 임신만 시켜놓고 여자를 버린 경우. 혹은 딸아이라서 치료할 돈을 주지 않는 경우. 거의 대부분. 그런 경우다. 한진수는 솔직히 싫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김상희 뿐이다. 지금은 김상희와 데이트하는 중이고. 그 때, 꺅!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얻어맞은 것 같아 보였다. 김상희가 그 여자를 봤다. 정말 가난한 여자인 것 같았다. 몰골도 그렇고. 정말 많이 말랐다. 이쁘게 마른 것도 아니고. 불쌍하게 말랐다. 눈도 퀭했다. '여기에는 남자들이 진치고 있는데다가...' 거기에 전략병기 프리온 나이트까지 있다.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몰라도. 김상희가 보기에 저 여자는 정말로 필사적이다. 정말 목숨까지 걸었다. 혹자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저 여자는 목숨을 걸고 성녀를 찾아온 한 명의 어머니였다. '나는...' 밖으로 나올 때마다 느낀다. 이 세계는 뭔가. 잘못 되었다. 남자가 또 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여자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김상희가 '그만 둬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진수가 빨랐다. "그 쯤 하죠?" 한진수가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김상희가 듣지 못하도록. "내 여자가 슬퍼하잖아." 김상희는 자세하게 모르고 있지만 한진수는 한 때, 단신으로 제국과도 맞섰던 인물이다. 온갖 전쟁을 다 경험했다. 그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묵직한 카리스마가 갖는 힘은 일반인은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죽여 버린다." 그 말에, 남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인형처럼 굳어버렸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여자가 슬퍼하면, 죽여버린다는 그 말도 안 되는 협박에 화도 못 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한진수는 김상희에게는 따뜻하게 말했다. "가봐.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같이 가면 저 분이 부담스러울 거야." 김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 오지랖인 거 안다. 이 세계 상식으로는, 한진수가 저 남자를 제압해서는 안 됐다. 그걸 안다. 이 세계는 다른 세계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오지랖인 거 맞아.' 오지랖인 거 맞는데. '그런데 그 오지랖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는 없다고 해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야.' 그게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을 이 세계로 보낸 이유 아닐까. 그리고 그 작은 걸음. 작은 시작이 바로 이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김상희가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여자는 감격에 겨워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성녀님. 저희 아가가... 저희 아가가..." 김상희가 물었다. "제가 도와 줄게요. 아가가... 어디에 있어요?" 한편, 한진수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버님. 잘 참으셨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쪽 구석. 구석진 테이블에서 모자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00199 외전 1부 =========================================================================                               *** 왕궁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폐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엇? 오늘은 켈라이 왕국 사신과의 접견이 있는 날 아닙니까?" "맞습니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신하들은 사라진 김훈상을 찾으려고 애썼다. "적어도 왕궁 내에는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전화를 한 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알렉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고 계시는 군요." "예?" "지금 상희 공주님이 출타 중이라는 것을 잊고 계십니까?" "그건 알지만..." 신하들은 알렉스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녀님이 외출한 것과 폐하가 이 자리에 없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렉스가 이상한 말을 했다. "딸이 있는 곳에 딸등신이 있다." "무슨 뜻입니까?" 알렉스는 이제 상희학을 만천하에 공개해도 될 때라고 생각했다. 상희학에 따르면, 지금 딸등신은 딸이 걱정되어 딸을 스토킹하고 있을 것이 뻔했으니까. '아무래도 바깥 세상은 걱정되시겠지.' 왕궁 내부와 바깥은 완전히 다르다. 그냥 다른 세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김상희의 얼굴 자체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김상희가 성녀인지 아니면 길거리의 그냥 이쁜 여자인지. 구별을 할 수 없다는 소리다. "제가 연구한 학문 이론에 따르면..." 그 때, 김형석이 회의실에 나타났다. "이번 켈라이 왕국 건은 제가 대신하여 진행합니다." "왕자님께서 말입니까?" 신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께서 정말로 은퇴를 계획하고 계신 건지. 그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갑자기, 전권을 첫째 왕자에게 일임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시다니. 평소 완벽을 추구하는 김훈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알렉스가 다시 말했다. "나는 이 모든 현상을 하나의 이론을 기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은 진리에 상당히 근접한 학문이라 확신합니다. 내 모든 손가락을 걸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폐하와 왕자님들의 파격적인 행보를 충분히 예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충분히 예상 하는 게 아니라, 예상하기 엄청 쉽습니다.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도 왕의 행동을 다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좀 건방지니까. 그런데 김형석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비교적 여자를 잘 이해하고 있고, 처음부터 여자를 배려해왔던 김형석에게도 '상희학'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이 곳에 모인 남자들에게 있어서 '상희학'은 거의 악마의 학문에 가까울 것이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최소한 한 명은 있구나.' 첫째 왕자는 완전히 한 편이 되었다. 이제 나머지 왕자들과 왕을 포섭하면, '그 때는 상희학이 만천하에 공개되리라!' 일단 지금은 참기로 했다. 알렉스가 씨익 웃었다. "하여튼 폐하는 지금 김상희 공주님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확신 합니다. 제 불알 두 쪽을 걸지요!" 한편, 김훈상은 재채기를 한 번 했다. '이 세계는...' 원래 이 세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배하는 거다. 마력이 있는 자가 마력이 없는 자를 지배하는 거다. 그게 맞는 거다. '하지만...' 그게 분명히 맞는 건데. 그게 맞다고 머리가 소리 치고는 있는데. '상희가 슬퍼하고 있다.' 그랬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굉장히 슬퍼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버지의 가슴은 찢어진다. 그는 그의 딸이 매일매일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딸이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는 그것을 어떻게해서든 구해서 딸에게 줄 거다. 그게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세계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거지만, 하여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딸이 싫어하는 것. 딸을 슬프게 만드는 것. 그런 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김훈상이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굉장히 유력한 제국 황제 후보라 할지라도.(사실상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황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바꾸고 싶다.' 왕인 그는 이 세계를 바꿀 수 없지만 아버지인 그는 이 세계를 바꾸고 싶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미친 놈이라 욕할지도 모르지.' 아니. 미친 놈이 맞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어떻게 하면, 딸의 눈으로 바라본 이 세상이 그렇게 슬프지 않을 지. 고려국왕 김훈상은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근데 일단 저 놈은 어떡하지?' 네깟놈이 감히 내 딸한테 소리를 쳐? 라고 일단 깽판 치고 싶었는데. 그래도 왕 체면에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잘못한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상식으로는 당연한 거니까. 그건 아는데 마음에 안 든다. 이 가게. 그냥 확 사버려? '그래도 왕 체면이 있지.' 사사로운 복수는 할 수 없었다. 정작 딸에게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은 흡사 김환석과 닮아 있었다. '환성이한테 얘기해주면 재미있겠어.' 다른 말로, 망나니 아들한테 이르기로 했다. 김훈상은 세계를 바꾸는 커다란 고민 외에, 또 다른 자잘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하면 환성이한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지?' 티나지 않게. 더 정확히 말해서 이르는 티가 나지 않게. 어떻게하면 자연스럽게 이 얘기를 전달할 수 있을 지. 전 세대의 대천재 김훈상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 김환성이 김환석의 방을 찾았다. "우와. 이게 다 뭐야?" 김환성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형의 방은 언제나 신기하다. 지금은 약간 어두웠다. 어두운데 이상한 푸른 화면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그 때, 김환석이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랬더니 그 푸른색 화면이 김환석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확대." 그러자 그 화면이 커졌다. 어떤 영상이 재생 됐다. "됐다." 김환석은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씨익 웃었다. 김환성은 신기한 듯 그 화면을 들여다 봤다. "이게 뭐야? 똥개네? 이상한 계집을 따라가고 있어." 김환석은 또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찾았다." 김상희의 몸에는 위취추적기가 부착되어 있다. 그 것과 연계하여 군사위성을 동원했다. 실시간으로 김상희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 "와. 이거 저쪽 동네 CCTV영상들이야? 전부 해킹했어? 역시 형아는 대단해." 김환석은 고개를 저었다. 동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다. "해킹한 거 아닌데." "그럼?" "그냥 내가 다 설치한 건데." "아하." 김환성은 헤- 하고 형을 쳐다봤다. 전국에 CCTV를 설치했다. 전국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 걸 실제로 행한 김환석이나, 그걸 보고도 '아하' 한 마디로 끝내는 김환성이나. 역시 둘 다 정상은 아니었다. 한편, 김상희는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여자가 말했다. "거의 다 왔어요." 여자의 집은 정말 허름하고 외단 곳에 있었다. 이런 곳에 집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갈대숲이 무성한 외딴 곳에 집이 있었다. 거의 폐가나 다름 없었다. 김상희가 물었다. "아가는 어디에 있어요?" 여자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제가 나올 때 까지... 분명히 울고 있었는데." 여자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김상희도 덩달아 뛰었다. 뭐랄까. 가슴이 아파왔다. 이런 집에서 살고. 이런 곳에. 아픈 아가를 두고 자신을 찾아 왔다니. 그것도 목숨을 걸고 말이다.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방 안에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김상희의 목소리가 착 내려앉았다. "아가는... 어디에 있어요?" 누군가가 침을 퉤 뱉었다. "아가?" 또다른 누군가가 웃었다. "이거?" 그리고 김상희를 데리고 왔던 여자가 꺅!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울부 짖었다. 아가! 아가! 하고 말이다. 성녀님을 데려오면, 데려오면 아무런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 했잖아! 라고 악을 쓰다가 이내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3살쯤 되었을까. 정말 어린 아이가 죽어 있었다. 시체였다. 그것도 머리가 없는. 김상희는 주위를 둘러봤다. 남자들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여자들이었다. 숫자는 6명. "무슨 짓이죠?" "이야. 성녀님은 제법 담이 세네. 시체 보면 놀라서 엉엉 울 줄 알았는데. 질질 짜는 게 취미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아마도 이 무리의 대장이라 짐작되는 여자가 김상희를 향해 걸어왔다. "네 몸에 금은 보화가 그렇게 많다면서?" 성녀에 관한 소문은 다양하다. 그녀의 침이 성수라느니. 그게 퓨리어스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문도 많았다. "그리고 퓨리어스를 항시 1병 이상 소지하고 다닌다고?" 그렇다면 그건 빼앗아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상희가 말했다. "이런 짓.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싶다. 아기는 또 왜 죽였단 말인가. 그것도 어머니 앞에 시체를 던지는 행위까지. 이런 몰상식한 행위. 김상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후회? 우린 이미 잃을 게 없어. 그나마 네가 우리에게 마력을 준 덕분에 우리도 어느 정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게 됐지. 그건 고맙게 생각해."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왕 우리한테 적선하는 거. 퓨리어스만 주면 조용히 끝낼 거야." 또 다른 여자가 김상희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언니는 여자를 좋아하거든.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큰 일 치를 거야. 성녀의 맛이 얼마나 쫄깃한지. 언니가 많이 궁금해하고 계시거든. 듣자하니 성녀는 마력이 없다며?" "저항하면 죽일 거야." "마력이 없는 계집은... 정말 하등하잖아. 감히 우리에게 대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마력이 없는 건 맞다. 같은 시각. 김환석이 군사위성을 통해 좌표를 찍었다. 같은 시각. 김환성이 나이트 제 9대대를 소환했다. 같은 시각. 보호가 가능한 거리에서 김상희를 지켜보던 한진수가 워프했다. 같은 시각. 고려 최강 최후의 보루. 스페셜 나이트와 더블 스페셜 나이트가 워프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고려 왕이 일어섰다. 00200 외전 1부 =========================================================================                               *** 김환석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독자개발하여 우주로 쏘아올린 최첨단 군사위성 '태극 1호'가 한 좌표를 찍었다. 그가 쏘아올린 군사위성을 두고 전 세계가 말이 많았었다. 이 순간. 그러니까 고려가 제국으로 발돋움 하기 직전에, 비밀리에 쏘아올린 군사 위성이다. 이 군사위성을 통하여 초정밀 레이저 광자포 등을 발사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세계 각국은 긴장했다. 김환석이 쏘아올린 군사위성의 용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투시 활성화." 태극 1호의 용도는 간단했다. "음성 확대." 각 국의 주요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어떤 모략을 꾸미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라고 대내적인 보고서에는 올렸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김훈상도 안다. 태극 1호의 주요 목적은 바로 김상희와 한진수에 대한 지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생병신 김환석이 동생을 스토킹하기 위해 쏘아올린 군사위성이다. 겸사겸사 타국 주요 인물들을 관찰도 할 겸. 김환석이 말했다. "김환성. 뛰어라. 전체 상황 지시는 내가 하겠다." "오케이." 김환성이 뛰쳐 나갔다. "나이트 제 9대대! 비상대기조! 당장 뛰쳐나왓!" 한편, 한진수는 말을 들었다. 여자를 좋아한다느니. 살이 쫄깃할 것 같다느니. 성녀는 마력이 없다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세, 세상에. 저, 저게 뭐야!" "저, 저거. 프, 프리온 나이트 아니야?"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또 전쟁이야?" 갈대밭 위로 무언가가 드러났다. 거대한 형태의 프리온 나이트가 나타났다. 3기의 초 거대 프리온 나이트. 그 크기가 무려 30미터에 이르렀다. 멀리서 봐도 확연히 티가 날 정도. 그리고 그 옆에는 최종 형태. 그러니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프리온 나이트 400기가 초라한 -거의 흉가에 가까운- 집 하나를 포위했다. 세계 각국의 정보 기관이 온갖 첩보를 올리기 시작했다. "고려가 움직였습니다." "프리온 나이트는 물론이고 김환성 왕자가 직접 이끄는 나이트 부대. 거기에 한진수까지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세계 각국의 첩보부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무슨 의도로 집결하고 있는 것인지 당장 파악하도록 해!" 그 주변에 일왕국이 있다. 혹여 일왕국을 치러 가는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일왕국을 치려면 나이트들만 데리고 급습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저렇게 대규모 군단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일왕국을 굳이 쳐서 좋을 것도 없습니다. 일왕국은 고려에 충성을 맹세한 상태 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왕국을 친다면, 고려는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고려가 일왕국을 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냔 말이다!" 특히, 일왕국의 경우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뭐, 뭐냐!" "모, 모르겠습니다. 현재 상황 파악 중에 있습니다." "상황 파악하다가 우리 모두 뒤지게 생겼는데 상황파악은 무슨! 빨리 알아내란 말이닷!" 보통 독사가 옆에 있으면, 평범한 사람은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무서울 수밖에 없다. 독사가 언제 자신을 물지 모르니까. 그리고 독사에게 물리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독사가 실제로 사람을 공격할 의사가 있는 지, 없는 지. 그건 차치하고서 하여튼 옆에 있으면 무서운 게 사람이다. 하물며 독사도 아니고 고려의 대군단이 몰려들고 있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왕국의 왕자 아사히로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혹시 나에 대한 원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건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그는 일국의 왕자다. 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그 누구보다도 크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만약 고려가 정말로 일왕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면, 그 때 자신이 나서서 할복을 할 것이라 속으로 맹세했다. 그걸로 고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첩보부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려의 대군단이 하나의 집을 포위했습니다." 거기에, 엄청난 속보가 또 전해졌다. "고려 국왕. 김훈상이 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뭐라고!" 고려 국왕이 함께 하고 있단다. 백제와의 전쟁 이후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변방을 정리하러 다닐 때도. 이렇게까지 큰 병력 이동은 없었다. "보통 고려 국왕이 직접 움직일 때엔, 반기를 든 나라는 멸망하거나 회유당했습니다. 대부분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일왕국은 이미 항복을 선언했을텐데?" "어쩌면 그 허름한 집이 어떠한 군사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것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세계 각국의 엘리트들이다. 생각하는 것이 보통 비슷했다. "그 곳을 기점으로 하여 어떠한 마력진이나 군사시설이 세워지고 있을 거란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혹은... 아주 희박한 확률로 고대에 사라진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량 살상을 목적으로 한 생화학 무기를 연구하고 있었을 확률도 큽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최첨단 군사위성이 동원 됐고. 프리온 나이트와 김훈상이 직접 움직이지 않았겠는가. 김훈상이 작게 말했다. "내 딸 내놔." 작게 말했으나, 여자들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김훈상이 마력을 실었기 때문이다. 마력을 실어서 여자들의 귓가에 음성을 꽂아 넣었다. 김환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밖으로 튀어 나와, 이 미친..." 이 미친계집 년들아! 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앗차.' 내가 욕을 하면 똥개가 무서워 한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욕을 하긴 해야겠는데. 열은 받는데. 감히 내 똥개를 건드려? 욕은 해야 겠는데, 욕 하면 상희가 무서워 한다. "미친 여자 친구들아!" 이 정도면 욕은 아닐 거야. 무섭지도 않겠지. 김환성은 뿌듯해했다. 한편, 한진수가 김상희를 안아 들었다. 애초에 김상희를 혼자 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여자가 부담스러워 할 것을 배려해서, 약간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얼마든지 보호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말이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마자 한진수는 워프를 통해 김상희를 안아 들었다. '나는 가만히 있어야지.' 김상희를 보호할 수 있으면 됐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친 여자 친구들아!" 라고, 김환성이 외치는 소리였다. 한진수가 씨익 웃었다. '폐하도 오셨고. 음. 나이트들도 왔고.' 그럼 이제 나머지 일들은 저 딸등신과 동생병신들이 알아서 할 거다. '그럼 나는 착한 척 해야지.' 굳이 아내 앞에서 험악한 모습 보일 필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기본적으로 김상희는 이 세계의 여자들에게 연민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다. 이 여자들을 아마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이 세계가. 이 세상이. 이 여자들을 이렇게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고 그렇게 억지로라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진수가 아는 김상희라면 그랬다. '그러니까 난 착한 놈.' 나이트들이 들이닥쳤다. "꿇어, 이 미친년들아." 한진수가 또 씨익 웃었다. '너희는 나쁜 놈.' 김환성도 들이 닥쳤다. 정말 화가 났는지 여자들의 머리통을 한 대씩 후려쳤다. 옆에 김상희가 있어서 좀 살살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커다란 소리가 났다. 잘못했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김환성 입장에서는 정말로 살살 때렸다.) '형님은 더 나쁜 놈.' 김훈상이 걸어 들어왔다. 여자들은 이미 무릎 꿇려진 상태. 언제나 그렇듯. 김훈상이 위엄 넘치는 표정으로 김환성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아 그게요. 아부지." 김환성은 머뭇 거렸다. 아부지가 뭘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 차렸다. 뭐가 됐든 할 때는 정말 확실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하느니만 못하다. 그러니까 아부지의 말은, 이왕 때릴 거면 정말 아프게 때렸어야 했다는 거다. 죽기 직전까지 말이다. 한진수는 직감했다. '폐하가 가장 나쁜 놈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만들려고 했는데 역시 폐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김환성을 움직여 대신 복수를 하고 있지 않은가. '뭐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를 구해냈으며, 또한 착한 역할만 했다. 나쁜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해줬다. 또 씨익 웃음이 나왔다. 나이트들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진수님. 뭔가 좀 사악해 보이지 않아?" *** 김훈상이 말했다. "처우는 김환석 왕자에게 일임하겠다." 여자들은 고려왕궁으로 압송 됐다. 나머지 인원들도 왕궁으로 돌려 보냈다. 이제 이 곳에는, 아기를 잃은 그 여자. 한진수. 김상희. 그리고 김훈상만 남게 됐다. 한진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저러는 거지?' 김훈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은가?" 그의 눈은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한진수는 충격을 받았다. '폐하께서... 상희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위로를 건네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 여자는 김훈상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됐다. "폐, 폐하...!"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감히 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일어나라. 너는 내게 죄를 짓지 않았다. 비록 너 때문에 내 딸이 위험에 처할 뻔 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김상희는 황당해졌다. 내가요? 언제요...? 묻고 싶었다. "너는 네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다. 그 마음. 내가 알고 있다." "폐하...!" 그 별 거 아닌 말에 여자가 꺼이꺼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김훈상은 여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김상희를 쳐다봤다. 저 여자의 마음. 정말 잘 알고 있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들 거다. 김훈상이 말했다. "김유신." 모습을 숨기고 있던 김유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여자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적당한 자리를 주고,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해라. 나의 특명이다. 그리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까지. 그 누구도 이 여인을 강제하지 못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김상희마저도 놀랐다. 이제 개차반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지경이다. 김훈상이 김상희를 쳐다봤다. 김훈상은 거의 3분 동안 김상희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김상희는 안다. 김훈상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할 때. 저렇게 머뭇 거린다. 아.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머뭇거리는 것 같지 않지만. 하여튼 김상희가 보면 머뭇거리고 있는 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오늘은 좀 긴데...?' 그리고 김훈상의 입에서, 여태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이 흘러 나왔다. 00201 외전 1부 =========================================================================                               *** 김훈상이 말했다. "김상희. 너는 여자들을 위한 세상이 올 걸고 생각하는 거냐?" "......." 김상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개차반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리고 생각했다. 음. 개차반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제 좀 미안하기는 한데, 어쨌거나 내가 어릴 적에 이 아빠 별명을 개차반이라고 했으니까 개차반이라고 계속 하겠다. 예전에는 증오의 개차반이었다면 이제는 애증의 개차반이라고나 할까.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애정의 개차반에 가깝긴 하지만. 쳇. 망했어. 내가 개차반을 정말 좋아하게 될 줄이야. 라고 말이다. 그런데 김훈상이 딱히 김상희의 대답을 필요로 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예전부터. 네 길을 응원하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예전 고려왕궁을 벗어나 백제와의 대전투를 향해 나아갈 때. 여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의 시작은 김상희였으며, 자신은 그 변화를 뒤에서 응원하겠다고 말이다. 그 길이 비록 이 세계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고 허황찬란하며 쓸데없는 길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아빠...?" "그래. 내가 네 아버지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는 네 길을 응원하겠다는 것이다." 한진수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뭐랄까. '나쁜 놈을 만드려고 했는데.' 다른 왕자들은 다 넘어갔는데 이 아버님만 안 넘어간다. 착하고 나쁘고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나쁜 놈 옆에 있으면 더 착해 보이는 법이고, 착한 놈 옆에 있으면 더 나빠 보이는 거다. 그래서 다른 사람 다 나쁜 놈 만들고 자기만 착해지려고 했는데, '나쁜 놈은 커녕 멋진 놈이 되려고 하시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진수가 선수쳤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네 길을 함께 만들어 갈 거야."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 놈이 감히? 왕의 말을 끊어서 화가 난 게 아니다. 간만에 폼 좀 잡아보려고 했더니, 사위 놈이 망쳤다. 이런 말을 할 때엔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런데 타이밍을 빼앗겼다. 원래는 '너는 네 길을 가라.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내 딸이 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훈상은 지금 왕의 말을 끊은 한진수가 짜증나는 게 아니라,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서 짜증이 난 거다. 물론 말은 이렇게 했다. "왕의 말을 끊는 것은 어느나라 예의냐?" 겉으로는 위엄을 잃지 않았다. 한진수는 그 속마음을 파악했다. '그게 아니라 타이밍 놓쳐서 그렇잖아요.' 미리 답을 생각해놨다. 김훈상이 천재라면 한진수도 천재다. 수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제 아내. 그리고 폐하의 따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마음을 감히 숨길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 김훈상이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저 놈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옆을 보아하니 김상희는 지금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동자를 하고서 저 도둑놈새끼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물론 김훈상의 착각이다. 김상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 진짜 가지가지하네.' 이 남자들. 너무 중증이다. 이건 과하다. 두 남자의 속마음이 뻔히 다 보인다. 다 보이는데 모르는 척 해야 하는 게 답답했다. 어쨌거나 진심은 알겠다. 두 남자 모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으며 자신을 응원해주겠다고 했다. 그 마음은 정말 고맙다. 그런데. '아빠란 아저씨나 남편이란 아저씨나 정말이지.' 답이 없다.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표현 방법이 저렇게 서툴러서야. 타이밍도 조금 이상하다. 이 쯤 되면 자기가 멋있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정말로 자신을 위하는 건지. 분간하기도 조금 애매하지 않은가. 김훈상이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이 나라의 태양이며. 이 나라의 그 누구보다도 높은 이다. 그런 내가 너를 돕겠다. 너는 내 팔을 의지하며 내 길을 따라 걸어라. 내가 너의 힘이 되겠다." 말하자면, 자 봐라. 사위 놈아. 그래봤자 너는 일개 한진수고 나는 고려의 국왕이다. 이렇게 유세를 떤 거다. 그 뜻을 깨달은 한진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분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뭔가 지고 있는 느낌 때문에 분했다. '치사하게 권력가지고 이렇게 나오시다니.' 하지만 한진수는 이내 여유를 되찾았다. 그런 권력 같은 거.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 한진수는 씨익 웃었다. 김훈상은 불안해졌다. 저 놈이 왜 웃지? "저는 폐하와 같은 대단한 능력은 없습니다." 김훈상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그럴 리가. 저 놈. 마음만 먹으면 황제도 될 수 있는 놈이다. 자기가 귀찮다고 황제자리를 걷어찬 놈인데. 능력이 없을 리가 없다. 왜 저렇게 밑밥을 까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는 상희의 남편입니다." 김훈상은 말하고 싶었다. 그게 제일 짜증나는 거다. 한진수가 말을 이었다. "제게는 경천동지할 능력같은 건 없으나, 상희가 슬플 때 함께 슬퍼할 수 있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를 할 것이며, 눈물이 필요할 때 함께 울어줄 것입니다. 상희는 제게 있어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크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물입니다. 그 보물의 옆자리가... 제가 되어서 저는 너무나 기쁩니다. 폐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딱 한 가지. 자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한진수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자는 사랑 받을 때 가장 빛나는 법입니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저는 상희가... 이 세상의 빛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의 태양이 폐하이듯, 저의 태양이 바로 상희가 될 것입니다." *** 식당주인은 얼떨떨 했다. "지금... 그러니까 그 유명한 성녀와 한진수님이 왔다 가신 거야?" 직원이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저 프리미엄 베네치아? 맞나? 하여튼 전 엄청난 자동차가 바로 한진수님 거고." 역시 한진수였다. 젊은 나이에 저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차기 황제로 거론되던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했지만..." 그런데 직원이 뭔가를 발견했다. 아까부터 좀 수상했던 남자가 있다. 몰골도 좀 별로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 확인조차 안 됐었다. 뭔가 죄를 짓기라도 한 건지 옆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었었다. "엇. 도망쳤습니다." 사라졌다. 무전취식이다. 사장이 되물었다. "누가 말이냐?" "아까 저기 숨어서 뭘 훔쳐먹던 그 놈 말입니다!" "아. 그 놈!" 아까부터 수상해서 봤었다. 방금 한진수와 김상희가 한바탕 소동을 피운 까닭에 잠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그 새 도망친 모양이었다. 사장은 열 받았다. "당장 찾앗!" 사장도 밖으로 뛰쳐 나갔다.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감히 법 무서운 줄 모르고 무전취식이란 말인가. 여긴 자선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다. 엄연히 식당이다. 사장 입장에선, 돈 훔쳐간 놈이랑 똑같이 보인다. 직원이 발견했다. "찾았습니다!" 어라. 근데 남자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직원이 황급히 소리쳤다. "이, 이봐! 그, 그게 뭔지 알고 가까이 가는 거냐!" 마음이 급해졌다. 이 세계의 영웅 중 영웅. 한진수가 직접 끌고 온 슈퍼카. 프리미엄 베네치아의 옆으로 저 거지가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저건 정말 굴러다니는 보물이다. 까딱 잘못해서 기스라도 냈다가는 식당 폐업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 그만! 멈춰! 그 차가 어느 분의 것인줄 알고 감히!" 김훈상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안 그래도 좀 진 것 같은 기분이라 꿀꿀했다. 김상희가 실제로 그렇게 보았건 보지 않았건, 하여튼 김훈상의 눈으로 본 김상희는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화풀이를 좀 하기로 했다. 쾅! 소리와 함께 프리미엄 베네치아의 문짝이 조금 구겨졌다. 김훈상이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 사장과 직원은 얼굴이 핼쓱하게 질려 버렸다. '망했다...' 저 미친 거지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한진수에게는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김훈상은 그제서야 좀 기분이 풀렸다. 이제 이거 타고 드라이브나 해야겠다. "이건 한진수님의 것이란 말이다! 이 멍청한 놈아!" 김훈상이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뭐라는 거야. 저 것들이. 김훈상이 말했다. "이거 내가 버린 건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진수 줬다. 더욱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희랑 드라이브 하라고 적선해줬다. 그리고 방금 차 키 받아왔다. 드라이브나 하려고 말이다. 김훈상은 차 문을 열고 안에 탔다. 그리고 사장에게 말했다. "아참. 내가 깜빡했는데." 주머니를 대충 뒤적거렸다. 뭔가 반짝이는 것이 사장에게 휙! 날아 들었다. "대충 그거면 식사값은 되겠지?" 사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저 차도둑은 무슨 배짱으로 감히 한진수의 차를 훔치는 건지. 그리고 던진 이 것이 무엇인지. '응...?'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금...?" 아무래도 금 같았다. 그는 재테크 수단으로 금을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 이건 진짜 금 같았다. '말도 안 돼.' 얼핏 봐도 시가 3천 만원은 넘는 금덩이였다. 아무래도 저 놈. 사기꾼 같다. 김훈상이 식당 주인의 표정을 오해했다. "역시 너무 적나?" 주머니를 대충 또 뒤적거렸다. 그의 주머니에서 또 뭔가가 하나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식당 주인은 그걸 확인해봤다. 이번에도 역시 금이었다. 아까랑 비슷한 크기. 김훈상이 차를 뒤로 뺐다.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이봐." "......." 식당주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저 놈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이게 진짜 금이라면 대박이다. 그런데 가짜라면? 눈 앞에서 한진수의 차를 훔친 범인을 놔줬다면? 김훈상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너 내 딸한테 소리 쳤더라?" 그건 아무래도 쉽게 넘어갈 수가 없는 문제다. 나도 딸한테 소리지른 적 없는데. 감히 네깟 놈이. 그래서 마력을 방출시켰다. 식당 주인과 직원은 움직이지 못했다. 김훈상의 마력 컨트롤 능력에 감히 항거할 수 없었다. 스삭- 스삭- 이상한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뭔가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식당 주인은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머리를 만져봤다. '내, 내 머리!' 머리가 없었다.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보기 좋네. 깔끔하고." 두 남자의 머리가 반짝거렸다. 쉽게 말해, 대머리가 됐다. "함부로 여자한테 소리치지 마라. 그게 내 딸일 수도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참. 그리고 누가 올 수도 있는데." 아마도 사실을 알게 된 김환성이 찾아 올테지. 김훈상은 그렇게 생각한 뒤 메모지에 뭔가를 슥슥 적어서 식당 주인에게 줬다. "식당이 박살나면 여기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해라." 메모지에는 딱 한 줄 써 있었다. 고려 왕궁. 그리고 오른 쪽 아래에는 왕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어버버..." 식당 주인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프리미엄 베네치아가 부와아앙-! 굉음을 일으키며 멀어져 갔다. *** 한진수가 물었다. "상희. 너 괜찮아?" 김상희는 여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이 세계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런데 같은 여자에게 큰 일을 당할 뻔 했다. 김상희는 밝게 웃었다. 이런 상황. 예상하지 못한 거 아니다. "괜찮아." 한진수와 김훈상이 유치한 것은 차치하고서,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늘 고마웠다. 한진수의 볼에 가볍게 키스해줬다. 쪽, 소리가 나자 한진수는 정말로 세상을 다 얻은 등신처럼 실실 웃었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가보실까?" "응?" 차 키는 반 쯤 강제로 빼앗겼다. 왕께서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냥 줬다. "드라이브도 할 겸 했는데 차도 없으니까." 그럼 그냥 워프하기로 했다. "우리 신혼집 구경해야지. 아마 깜짝 놀랄 거야. 자신할 수 있어." 그리고 한진수가 워프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김상희는 알 수 없었다. 왜 한진수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깜작 놀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는지 말이다. 00202 외전 1부 =========================================================================                               ***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음. 어라? "집으로 간다며?"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집이 아니었다. 흡사 고려왕궁 내에 있는 정원 같은 그런 곳이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높은 침엽수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는데, '이 곳은...' 내가 언젠가 진수와 함께 걸었던 길이 생각났다. 양 옆으로 높이 솟은 나무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진수와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서로 사랑을 속삭였었다. "이건...?" 오른쪽 아래를 봤다. 거기에는 대리석인지 뭔지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매끈한 소재의 비석 같은 것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글자가 서있었다. '느려도 괜찮아요. 사랑을 속삭이는 걸음은.' 나는 진수를 올려다봤다. 진수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진수가 말했다. "그 때...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걸음이 왜 이렇게 느리냐고." 그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경치가 좋고 분위기가 좋은 건 맞았는데 그래도 생리현상이 너무 급했었다. 진수한테 '나 급똥 마려 죽겠어.'라고 얘기하지도 못했던 때다. 화장실 가겠다고 말하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안 나왔었다. 그래서 괜히 진수를 구박했었다. 빨리 좀 걷자고. 진수는 아직도 모르고 있겠지만. "그 때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이 길 위에서, 우리가 좀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알아. 하지만 난 급똥상태였었지. 그 말을 삼킨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저런 머릿돌을 만들어 놓은 거야?" "응." 진수가 앞장서서 걸었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집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얘가 워프 실수를 한 건 아닌 것 같고. "응?" 땅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력으로 구동되는 무빙워크야. 충전식이라서 너도 이용이 가능해." "세상에..." 그 때 진수가 얘기했었다. 이 길을 너랑 나랑 함께. 차를 타고 달리면 좋겠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차가 아니라 땅을 타고 달리고 있네. 속도 자체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주변의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무로 만든 예쁜 간판에는 이런 말도 써있었다. '초록색 나뭇잎들 사이로 황금빛 태양이 스며드는 곳.' 아... 나는 진수를 또 쳐다보고야 말았다. 저 글귀. 내가 중학교 때 썼던 글이다. 뭐였더라. 독후감이었는지 기행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게 벌써 30년쯤 지났다- 그 때 상을 받았었다. "내가 했던 말을 그렇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럼. 너와 있었던 순간 순간이 내게는 모두 보물이었는데. 보물을 잊고 다니는 멍청이는 없잖아." 계속해서 땅이 움직였다. "이, 이건 또 뭐야?"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화산지대의 주상절리 같은 모양새. 안전을 위하는 것인지, 투명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저 곳은 푸른 에메랄드 빛 색깔의 바다였다. 진수가 말했다. "내가 해안 도로에서 오픈카타고 드라이브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 때 너는 오픈카 필요 없고 그냥 산책이나 하자고 핀잔을 줬었지만." "......." 그 때, 김상희도 솔직히 마음이 동하기는 했다. 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며, 바람을 맞으며 -비록 나부끼는 머리카락때문에 짜증은 나겠지만- 드라이브를 하면 기분이 참 좋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괜히 그런 소망을 말했다가, 현실의 진수가 자존심상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그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여기다가 해안도로를 만들었다고...? 그것도 저절로 움직이는 땅...? 그냥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이를 테면 해저터널 같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덮여 있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가만히 서있기만 하면 된다. "물론 드라이브도 가능해. 저기 아래 보여?" 이 곳은 해안절벽. 그런데 저만치 아래. 그러니까 절벽의 중간 쯤에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로가 하나 보였다. "저기는 드라이브 코스야. 바다랑 최대한 가깝게 만들었어." "여기에... 바다가 있었어?" 진수가 피식 웃었다. "인공바다인데...?" ...뭐라고? 진수가 또 한 번 피식 웃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바다는 아니고.." 저게 바다가 아니면 뭔데? 좌로 봐도. 우로 봐도. 어딜 봐도 바다인데. 심지어 저기 수평선이 보인다고. "바다를 모티브로해서 만든 거대한 인공호수야." "이게...?" 그러고보니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엄청나게 넓은 호수는 흡사 바다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너무 넓어서 말이다. "그러니까...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서 인공 바다를 만들었다는 거야?" "응.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건 정말 미친 거 아닌가 싶다. 드라이브 하려고 도로를 새로 깔다니. 그것도 해안도로를. 스케일 한 번 거대한 것 같다. 나는 얼떨떨해진 상태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 신혼집에 간다면서?" "신혼집에 와 있잖아." "응?" "여기." 나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좀 오랫동안 생각해봐야 했다. 그리고 나서 깨달았다. "설마..." "이거 전체가 우리 신혼집인데? 여기 실내야." *** 한진수는 신혼집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과거의 추억들을 곱씹어 보고, 그 추억들을 되살릴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공간을 만들기를 원했다. 과거의 상희가 원했던 것. 지금의 상희가 원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을 다 해주고 싶었다. 혹자는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고 혹자는 호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진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하겠다는데 그게 왜? 돈이 많이 든다? 그런 거 상관 없다. 돈이 아무리 귀중해도 김상희의 머리카락보다도 덜 중요하다. 호구다? 내 여자에게 호구가 되는 거. 그게 뭐 어때서. 하여튼 한진수는 신혼집을 거대하게 준비했다. 일반적인 집의 구조와는 완전히 달랐다. 세계 각지의 첩보부를 긴장하게 만들만큼 특수한 시설을 만들었다. "한진수가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투명한 돔 형태의 이상한 곳인데, 그 안에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들고 정원등을 만들었습니다." "투명한 돔?" "중요한 군사기밀을 다루는 군사요새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혼집이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돔의 강도는... 토마호크 미사일도 막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고려왕궁의 쉴드에 버금가는 특별한 공간이라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고려에서 그것을 허가했나?" "허가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고려가 허가했다. 고려는 제국으로 발돋움을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수다. 그 군사력. 한진수가 갖고 있다. 프리온 나이트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프리온 나이트를 육성하고 키우기 위한 비밀시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미로와 호수를 만들었군." 미로 아니고 산책로다. 산책로치고 지나치게 광활하기는 하지만, 마력으로 구동되어 걸어다니는데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거대한 마력장이 포착되었습니다." 당연하다. 한진수가 아끼는, 이른바 '어화둥둥 내새끼'가 걸어 다니면 힘들 테니까. 그래서 집 안을 전부 무빙워크화 시켰다. 그것도 충전식이다. 충전식으로 이런 거대한 시스템을 운용하려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하다. 이 것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천문학적이다.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마력장입니다. 일개 군사시설이라고 보기에도 힘들 정도입니다. 따라서 프리온 나이트의 육성기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거대한 호수까지 있다. 수평선이 보인다. 눈으로는 끝이 확인조차 안 된다. 그렇다는 말은 수중훈련까지도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거대한 인공호수가 필요할 리 없으니까. "저번부터 고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김환석의 군사위성이 움직이고 고려왕과 나이트들이 움직였다. 일대 파란이 일었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예전부터 먼발치서 주시하기만 했던 한진수의 군사시설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 것을 두고 많은 첩보기관들이 머리를 짜내야만 했다. 고려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 것은 곧 멸망을 의미한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고려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의도를 파악하여 고려의 뜻에 반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뭔가... 엄청난 바람이 불 것 같군." "그 바람이 피바람이 되지 않기를 빌어야할 것 같습니다. 저희 정보부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너희를 믿겠다." 비장한 대화가 오고가는 사이, 한진수가 말했다. "어때?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지?" "...어." 그리고 한진수가 한 곳을 가리켰다. "짜자잔." "응...?" 한진수가 가리킨 곳을 봤다. '저 곳은...' 한진수와 김상희가 살았던 원룸. 그 곳과 외양이 똑같았다. "안에 들어가 보자." 둘의 과거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둘이 썼던 이불. 둘이 썼던 컴퓨터. 김상희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책상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쓰던 펜이잖아...?" "모양이 완전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서... 대충 복원해봤는데... 어때?" 김상희는 멍하니 그걸 쳐다만 봤다. 애초에 자기가 쓰는 펜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펜은 그냥 펜이다. 펜을 굉장히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대부분 그럴 것이다. "너 진짜..." 한진수가 웃었다. "여긴 우리의 과거가 녹아 있는 곳이야. 그래서 박물관이라고 이름 지었어. 여기서 살 건 아니고..." 걸음을 좀 더 옮겼다. 그랬더니 이상한 곳이 나타났다. 김상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마법진같이 생겼는데?" 황금색. 바닥에는 별 모양의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아주 옛날, 몇 번인가 봤었던 로보트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문양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그 위로는 황금색 빛줄기가 이따금씩 솟구쳐 올랐다. "워프 포탈이야. 집이 너무 넓어서 너 혼자서는 못 돌아다니거든. 그래서 만들었어." 참고로 워프는 마력을 가진 남자들도 못한다. 정말 극소수의 사람만 할 수 있는 최상급 기술이다. "환석형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 그런데 이제 과학기술을 빌어 김상희도 워프를 할 수 있게 됐다. "비록 집 안 내에서 포탈로의 이동밖에 안 되기는 하지만." 김상희는 모른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용하는데 한 달 수천 만원 이상의 경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자세한 작동법 알려줄게. 일단 이동하자." 유럽식 정원과 주상절리 해안도로를 지나, 워프를 한 곳은. 김상희를 다시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세상에...이게 뭐야..." 00203 외전 1부 =========================================================================                               *** 실내에 인공호수 -인공호수라고는 하지만 바다에 가까운-가 있는 집. 해안도로를 끼고 드라이브를 하고 싶은데, 해안도로까지 가기가 귀찮아서 집 안에 해안도로를 만들어 버린 그 스케일을 접했다. 그 이후로는 이제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상희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뭘 그렇게 놀라?" "저게 뭐야?" "응. 여기 관리할 사람들이랑 손님들 묶을 곳."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게 거대하지 않아? 라고 묻고 싶었다. "종로에 와있는 것 같아." 그것도 철저한 도시계획 아래 짜여진 종로 말이다. 한국의 종로는 대형 빌딩들이 즐비하다. 굉장히 번화한 곳이다. 번화한 만큼 혼잡하고 길도 복잡하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하지만 이 곳은 아니었다. 종로처럼 대형 빌딩들이 즐비해 있기는 하나, 사람도 없고 차도 없었다. 그저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만 보였다. "아직 아무도 입주 안해서... 좀 썰렁하지?" 김상희는 한진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집 안에 도시를 만든 거야?" "응. 네가 원하는 게 있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거...?" 한진수가 설명을 이었다. "너는 이 세계가 변화하길 원하잖아." 김상희는 묻고 싶었다. 그거랑 신혼집이랑 무슨 상관이야? 묻기도 전에 한진수가 계속 말했다. "이 곳은 이제 상희 특별자치구가 될 거야." "뭐라고?" "음. 이건 대외비이긴 한데..."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조금 곤란한 비밀이다. 아직까지 공표된 사실도 아니고. 이 곳은 김훈상의 승인 아래 지어진 한진수의 자택이다. (자택 안에 인공바다와 산. 그리고 도시까지 있기는 하지만.) "이 자택은 사유지거든. 사유지 내에서는 주인이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한진수가 놀라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일단은 이 집을 상희 특별 자치구라고 이름을 지은 거야. 아직 확정된 이름은 아니니까 일단은 흘려들어." "......." 김상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집 크기가 하나의 자치구만하다니. 뭐 이딴 집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그냥 집은 아닌 듯 했다. 굳이 '특별 자치구'라는 이름을 붙였고 또한 '사유재산의 권리'를 언급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여기 말고도 도시를 여러개 만들 거거든." "응." "최고의 복지와 교육 여건등을 마련해 줄거야." "...응." "신도시를 세운다는 거지." "......." 집 안에 말이지...? 김상희는 잠자코 들었다. "이 신도시에서는 최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내 개인 집이고 내가 내 손님들을 대접하는 거니까." "......." 김상희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했다. 개인 집의 손님들을 대접하는데, 그 손님들이 도시민들이라니.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천재라더니 정말 천재가 맞기는 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이 곳은 우리 집이니까. 우리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어." "...응." "이 곳은 프리온 나이트들이 경비를 책임지게 될 거야." 한진수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자기 좋은 것만 말했다. 사실 여기에는 프리온 나이트만 있는 게 아니다. 신혼집을 만든다는데 가만히 있을 동생병신이 아니다. 그 동생병신의 이름은 김환석.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최고의 중앙 경비시스템을 구축 해놨다. 어지간한 왕국의 왕성보다도 삼엄한 경비를 자랑한다. 타국이 군사요새라고 오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어쨌든 한진수는 그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거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한진수가 피식 웃고선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이 곳은 최고의 복지와 최상의 의료 및 교육환경이 제공될 거야. 거기에 철통같은 치안까지 자랑하게 되는 거지." "신혼집... 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한 거 아니야...?" "걱정 마. 워프포탈이 있으니까 네가 이동하는 것에는 그다지 무리 없을 거야." 어, 어이. 그게 아니잖아. 내가 걱정하는 건 지금 그게 아니라고... 김상희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때 보면 천재 맞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이 곳은 최고의 환경을 갖춘 우리집이고, 우리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 들어와서 생활을 할 수 있어. 여기에 가장 큰 점은 이후 폐하께서 은퇴를 하신 후에 여기에서 생활을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거든." 물론 대외비다. 아직 대외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다. 김상희도 몰랐고. "왕께서 움직이시면 그에 따른 세력이 움직이기 마련이거든." 한진수가 비로소 이 집(?)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이 곳에 모이게 될 사람들은 아마도 고려 내에서도 사회 지도층이 될 거야." 아무나 오지는 못할 거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집단이 이주해오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사회지도층은 내게 대접을 받는 대신, 내 집의 법은 지켜야 하겠지. 그들은 손님이니까." "그 법이 뭔데...?" "우리집에서는 남녀 차별이 없을 거야." "...응?" "남자와 여자. 모두가 동등해. 여자를 우위에 놓는다는 소리가 아니야. 성이라는 것을 배제하고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할 거야." "그게... 가능할까?" "물론 쉽지는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곳은 프리온 나이트들이 지키고 있어." 프리온 나이트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략병기였다. 지금은 비록 집 지키는 문지기밖에 안 되지만 말이다. "내 집의 법을 지키지 않는 손님은 필요 없어." 다시 말해 다소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대부분의 거리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적어도 밖에서는 그 누구도 여자를 무시할 수 없을 거야. 애초에 그렇게 서약을 하고서 이 집에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 김상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계를 바꾸고 싶다, 바꾸고 싶다 생각은 했었지만 그 생각을 구체화시켜본 적은 없었다. 아직 그럴만한 힘도 없었고.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와 오빠. 그리고 약혼자가 움직이니 뭔가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물론 이걸로 전세계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 세계는 이미 안정화를 이룬 세계고 몇몇 개인이 단시간에 변화시킬 수는 없어." "......." "그렇지만 이 것이 시작이 될 거라고 생각해. 내가 아까 말했던 거 기억나? 이 곳에 모이게 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응." 아까 들었었다. 왕부터 시작하여 사회 지도층이 모이게 될 거라고. "빠르든 늦든, 대중들은 사회지도층을 따라가게 되어 있거든."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일단 이 곳을 시작으로 하여, 남녀평등의 바람을 조금씩 불러 일으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김상희가 한진수를 쳐다봤다. "진수 너는..." 한진수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김상희가 원하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사랑하는 김상희가 원하니까. 그러니까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이러는 거다. 김상희가 시킨 적도 없다. 세계를 바꿔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한진수는 순수하게, 김상희가 원하는 것을 대신 해주고 싶을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 세계 여자들이 차별당할 때의 네 표정을 봤거든." "......." "나는 이 세계의 여자들이 어떻게되든 상관 없어. 하지만 그 여자들 때문에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 아니. 볼 수 없어." "......." 한진수가 김상희의 턱에 손을 댔다. 김상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불가능한 거 아는데... 나는 네가 항상 웃었으면 좋겠어.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그게 다야." 한진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늘 느끼는 건데, 오늘 또 느꼈다. 정말 미치도록 예뻤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한진수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아참. 나 바라는 거 하나 있는데." 한진수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김상희도 약간 긴장했다. 원래 이런 거 말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진수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정말로 별로 없었다. 진수는 김상희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다만, '옆에 있기만 해달라고... 바라는 건 그게 다라고. 그렇게 말했었어.' 알고는 있었는데, 그 사실을 떠올리니 괜스레 짠해졌다. 정말 바보 같았다. 사랑이라는 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하다못해 나는... 이거 사달라, 저거 요리 해달라. 여기 가자. 이렇게 투정도 부렸었는데.' 그 때마다 진수는 거절이란 걸 하지 않았다. 물론 김상희가 말도 안 되는, 수 백, 수천만원 짜리 가방을 사달라고 요구한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김상희는 한진수에게 바라는 것들이 제법 많았었다. 김상희는 그 사실을 떠올리고나서 조금 더 긴장했다. 여태까지 자신이 바라는 걸 말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너한테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건 처음인 것 같네." 김상희가 되물었다. "뭔데...?" 한진수가 머뭇거렸다. "뭐냐니깐? 왜 머뭇거려?" "그게..." "나한테 말하기 곤란한 거야?" 한진수가 잠시 눈을 감았다. 정말로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뭔데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김상희는 괜히 더 긴장했다. "뭐냐니까...? 큰 일이야?"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한진수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했다. "나 뽀뽀 한 번만 해주면 안 되냐?" "...응?" 그리고 한진수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왕에 말한 거. 끝까지 다 말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나 요구할 것들이 좀 있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나한테 먼저 뽀뽀도 좀 해주고, 나한테 먼저 좀 앵기고, 나한테 먼저 애교 좀 부리면 안 돼?" "...응?"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김상희는 복잡미묘한 심정에 빠져들었다. '뭐라고 한다?' 한진수는 애가 탔다. 지금 당장이라도 김상희가 안겨들어서 새끼고양이처럼 볼을 비벼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그 어떤 때보다도, 김상희가 자신에게 안겨 있을 때. 그는 제일로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김상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 돼." 해달라는대로 너무 쉽게 해주면 안 된다는 걸. 김상희는 머리가 아닌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이유는 딱히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하여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계의 대천재 한진수가 울상을 지었다. "왜!" "안 돼. 민망하잖아." "아씨..." 한진수는 제법 토라졌다. 실제로 토라진 건 아닌데 괜히 서운했다. 내가 너한테 정말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뽀뽀 한 번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속으로만 반항했다. 겉으로는 반항 못했다. 김상희는 혀를 살짝 내밀고 배시시 웃었다. 일부러 귀여운 척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한진수 앞이라서, 저절로 그런 표정이 나왔다. 한진수가 한 차례, 서러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난 뒤에 김상희가 한진수에게 안겨 들었다. 그리고 발 뒷꿈치를 들어 한진수의 입술에 뽀뽀했다. 쪽, 소리가 났다. 김상희의 돌발행동에 한진수의 광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서운했던 건 아주 잠시. 오히려 그 서운함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 기쁨이 더 증폭 됐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꽉 껴안았다. 김상희는 신혼집을 처음 봤을 때 부터, 아끼고 아꼈던(?) 그 말을 하기로 했다. 사실 여태까지 참느라 힘들었다. "오빠야." 여기서는 오빠가 맞다. 그리고 한진수는 예전 세계에서. 동갑일 때도 오빠소리를 참 듣고 싶어 했었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행복해서 미친다면, 저런 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김상희는 원래 부산출신이다. 주로 표준어를 쓰지만, 아주 어쩌다가 사투리를 쓰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한진수는 좋아 죽는다. 김상희가 사투리로 속삭였다. "사랑한데이." 그러자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00204 외전 1부 =========================================================================                               *** 예전에 김상희는 한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그런데 김상희는 이제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안다. 김상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푸르렀다. 투명한 돔이 씌워져 있다고는 하는데, 육안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문제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는 것. 김상희가 외쳤다. "진수야!" 한진수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날아 올랐는데 너무 높이 날아올라서 김상희의 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아마도 구름 위를 뚫고 올라간 것 같았다. "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렇게 되뇌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으니 걱정될 법도 했다. 만약 알렉스가 듣는다면 이렇게 얘기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공주님도 참. 사서 고생하시네요. 멀쩡한 사람이 배탈 한 번 난다고 죽습니까? 그 말인즉슨, 한진수에게 있어서 대기권을 돌파(?)했다가 떨어져 내리는 건 배탈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소리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입장이 조금 다르다. 한진수는 김상희의 몸에 바람이라도 닿으면 걱정한다. 금이야 옥이야. 조금이라도 다칠까 노심초사한다. 김상희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진수만큼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 마음은 비슷하다. 한진수가 조금이라도 다칠 것 같으면 걱정 된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 머리로는 그다지 안 위험할 것을 아는데 그래도 혹시나라는 게 있으니까. 각 나라의 첩보부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영상 확대하겠습니다. 미확인 비행물체는 한진수로 파악되었습니다." "저게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파악 중입니다." 한진수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왜 그런지. 파악하는 것이 바로 정보국이 할 일이다.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한진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것 조차. 미스테리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저 안쪽은 제대로 투영이 되지 않아야 한다. 어쩌면 고려의 일급 군사시설 일지도 모를 -세계 정보부가 보기에는 그랬다- 곳이다. 당연히 보안이 잘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안 쪽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방해장이 펼쳐져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잘 보인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안 쪽을 최대한 살펴놓겠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은 아주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것은 고려의 정보부에도 보고가 되었다. 고려 학자들조차도 고개룰 갸웃했다. "한진수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까?" "예. 저희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사실 고려의 학자들조차도 긴가민가하고 있는 중이다. 저 광활한 곳이 정말로 신혼집이냐, 아니면 군사시설이냐. 단순히 신혼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철통같은 경계를 자랑한다. 또 지나치게 넓다. 그런데 한진수나 김훈상은 단순한 신혼집이라고 말한다. 고려학자 중 한 명이 손바닥을 탁! 쳤다. "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뭐죠?" "지금 고려의 과학기술수준으로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상희는 잘 모르지만 김상희의 신혼집은 김환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타국에는 발표조차 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도 모르는 모든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 되었다. "평소에 그들은 신혼집 안을 살펴보지 못했을 겁니다. 이번 기회를 빌어 열심히 탐지하려고 하겠죠. 한진수가 얼마 뒤. 다시 돔을 가동시키면 그 때부턴 또 모든 정보가 제한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어린애들은 겁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서운 것을 모르기 때문이죠. 뭐가 무서운지 모르는데 어떻게 무서워하겠습니까?" "......." "같은 관점입니다. 평소에는 완벽한 보안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부러 길을 터줬죠. 기술력을 보라고. 사실상 저렇게 방해장을 완벽하게 펼쳤다고 또 완벽하게 없애는 것은 엄청난 기술력이 필요합니다. 충전식 시스템이라 온 오프시의 마력소모도 어마어마하구요. 이 것은 즉. 시스템에 대한 내구성과 신뢰도를 완벽하게 자신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죠." 그리고 또 다른 학자가 말했다. "어쩌면 저들이 보고 있을 위성영상 조차도 거짓된 영상이라는 판단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한진수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런 행동. 분명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이상합니다." "우리는 그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한진수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이상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학자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퍼포먼스...! 그렇군요! 결국 저 것은 시선 돌리기 용입니다!" 몇 사람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몇 사람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세계를 이끄는 위대한 사람들 중 몇이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와 연관된 주식이 폭삭 망하기도 한다.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다. 고려왕가. 그러니까 김부자들이 김상희 생일 선물 주려고 세계 지도를 바꾸고 있는 판국이다. 하여튼 결론은, 몇몇 사람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는 거다.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는 것. 각 국의 정보부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저 행동에 분명히 어떠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에 무슨 의도가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조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그게 정보부다. "그렇지만 아무도 의미를 찾을 수 없겠죠. 저 행위는 말 그대로 퍼포먼스니까요. 각 국 정보부는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왜 신혼집의 돔을 거뒀는지. 어째서 안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한진수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지!" 그나마 한진수의 행동으로 인하여 해를 입을 일이 없는 고려의 학자들이라 좀 더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국은 아니었다. 한진수의 손짓 한 번에 멸망할 나라도 부지기수다. 한진수의 기침 한 번까지도 신경을 써야한다. "비행속도가 어마어마합니다. 어쩌면 저 것은 무력시위일 수도 있습니다." "적외선 초정밀 센서와 슈퍼 컴퓨터를 동원하여 비행경로를 역추적 해본 결과." 잠시 정적이 흘렀다. "KILL 이라는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이 곳에 모인 남자의 숫자는 총 6명. "그 흔적은 미비하지만 KILL이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코드 네임. 신혼집 아리아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나면..."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어쩌면. 그렇다. 함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진수가 지금 무언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함부로 훔쳐보면 죽는다고. '그런 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서 돔을 해제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고려의 정보부가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신혼집 아리아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저 곳은 일급 군사시설이다. 그렇다면. "꼬투리를 잡히게 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멸망까지도 고려해봐야 할 겁니다." 남자들의 리더가 말했다. 발등에 불 떨어졌다. "왕께는 내가 보고하겠다. 일단 우리가 저 곳을 탐지했다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렷! 우리는 저 곳을 본 적도 없고 한진수를 찾은 적도 없다. 우린 전혀 모르는 사실이다. 알겠나? 흔적을 완벽하게 없애라!" 남자는 확신했다. '이 건 꼬투리를 잡기 위함이다!' 아무리 강한 고려라도 명분 없이 타국을 칠 수는 없다. 여지껏 고려는 그들에게 반기를 드는 국가는 대부분 멸망시켰다. 학살을 자행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고려의 속국으로 만들든지 고려에 병합시켜버렸다. '이런 시국에는 꼬투리를 잡히면 안 돼.' 선조치 후보고 하기로 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면서. 같은 시각. 김상희가 말했다. "도대체... 뭘 한거야?" 김상희는 지금 조금 화났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을 만끽하고 왔어." 하도 황당해져서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옛날처럼 말하고 말았다. "또라이 아이가?" 아주 가끔. 김상희는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정말 또라이라고 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좋지 못한(?) 언어 습관 중 하나였을 뿐. 부산에서 살 때에 굉장히 자주 썼던 말이라서 그냥 입에 익었다.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고쳤었는데, 한진수 앞이라서. 또 하도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한진수는 굉장히 어색한 사투리로 대꾸했다. "또라이 아이다. 내가 진짜로 하늘을 날아당기는 기분이 들어 날아다녔다. 내는 지금 갱장히 행복하다. 니가 내한테 사랑한데이라고 말해준 거. 이번까지 다 해서 겨우 11번인 거. 아나?" 김상희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한 거라고...? 그게 다야?"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뛰어 오른 기다. 왜 갑자기 사투리 안 쓰노? 사투리 좀 써도. 응? 사투리 써도. 니는 사투리 쓸 때가 제일루 귀엽다." 김상희는 이마를 짚었다. 얘가 정말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대천재가 맞나 싶다. 한진수가 싱글벙글 계속 웃었다. "와? 니 내 걱정했노? 그런 것 같은데? 걱정했제?" "아 몰라!" 짝!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간만에 나왔다. 한진수가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나 죽네!" 김상희의 손바닥이 한진수의 등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한진수는 피하거나 막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면 일부러 맞아놓고선 죽겠다 엄살을 부려댔다. "서방님을 이렇게 패면 되나?" "그 이상한 사투리 그만두지 않으면 진짜 백 대 팰 줄 알아." 한진수가 정색했다. "알겠습니다." 김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사랑한데이' 한 마디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게 아니라 실제로 하늘을 나는 남자는 이 남자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진수가 변명하듯 말했다. "진짜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 "진짜로 하늘을 날았으니까 그렇겠지!" "아.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았다니까? 하늘 나는데 걸리적 거려서 이 곳을 보호하는 돔도 해제했어." "...그래." 한진수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일로 온나. 앵겨라. 쫌." 아주 이상한 사투리이기는 하지만 김상희는 한진수가 이렇게라도 사투리를 쓰면 저도 모르게 사투리를 쓰곤 했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앵기긴 뭘 앵기나! 궁디를 확마차뿌까!" "아이고 무섭네. 우리 얼라가 서방님 잡네." 그러면서 엉덩이를 쭉 내미는데 김상희는 정말로 화가 날 뻔 했다. 저 엉덩이를 확 발로 차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진수가 김상희를 거의 강제로 안았다. 김상희가 뿌리치려고 했다. "놔라!" 발버둥을 치려고 했으나 소용 없었다. 김상희는 일반 남자도 제대로 상대 못한다. 하물며 상대가 한진수다.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싫다." "놓으래도." "싫어. 죽을 때까지 너 안고 있을 거야." 김상희는 낑낑댔다. 한진수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말이다. "나한테 힘 쓰지마." 그 말 한마디에 한진수가 힘을 풀었다. 힘을 풀면서 말했다. "내가 더 사랑한데이." 그리고 김상희의 정수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죽을 만큼 사랑한데이." 김상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눈 감아라."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감은 두 눈에 한 번씩. 가볍게 키스했다. "진짜로 사랑해." 김상희의 코 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김상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쳤다. 낑낑대며 투정부리던 김상희는 온데간데 없었다. 한진수의 얼굴이 보였다. 한진수의 체취가 느껴졌다. 한진수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그 상태로 한진수가 속삭였다. 입술이 겹쳐진 상태라 발음이 이상했다. "사야해.(사랑해.)" 한진수가 김상희를 껴안았다. 김상희도 이번에는 발버둥치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듯 지나갔다. 김상희가 한진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행복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김상희는 정말로 행복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다. 이 기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었다. 김상희는 그 행복함을 만끽했다. 누군가. 그 둘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00205 외전 1부 =========================================================================                               *** 고려왕궁. 기록의 관. 학자들이 한진수의 이상행동과 신혼집의 돔을 없앤 것에 관한 열띤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누군가 한 명이 나타났다. "알렉스 학자님. 늦어셨네요." "아. 폐하와 함께 얘기를 조금 하느라고." 학자들은 부러워했다. 역시 알렉스는 달랐다. 이번에 리조트 사업건과 테마파크 건설건도, 왕이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지 않은가. (사실은 알렉스를 밀어줬다기보다는 김상희를 위해 한건데, 알렉스가 운 좋게 얻어 걸린 거지만.) "역시 최고의 총애를 받는 학자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이 늙은이를 폐하께서 어여삐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무슨 얘기 중이었습니까?" 알렉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상희학의 보급이 필요하다니까?' 일전에 김형석 왕자가 말리는 바람에 말을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희학이 필요할 것 같다. 상희학의 기본이론에 따르면 저 애기들. 한 방에 정리가 가능하다. "그 지역은 신혼집이 확실합니다." "...예?" "한진수가 이상행동을 보인 건..." 알렉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왜 그게 하늘을 날았을까. 그것도 굳이 돔을 없애고. "아마도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던 거겠죠." "...뭐라고요?" "돔은 자기가 하늘 나는데 방해되니까 철거한 거고요." "아니. 알렉스 학자님.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학자들은 모두 생각했다. 알렉스가 지금 농담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왕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생각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거라고. "아무리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기로서니... 너무 이상한 말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상희 공주님이 뽀뽀해줬다거나 뭐 그랬을 수도 있죠. 한진수는 그래서 기뻐서 하늘을 날라 다녔고."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너무나 허황된 얘기 아닌가. "......." 알렉스가 자신있게 말했다. "저는 그 곳이 특수 군사시설이 아니라 단순히 신혼집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한진수의 이상행동에도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학자들이 생각했다. '분명히 특수시설이다!' 지금 알렉스가 저렇게 연거푸 강조하고 있는 걸 보니 틀림 없었다. 학자들은 이해했다. 원래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중요하고 은밀한 일일수록 최소한의 인원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최소' 안에 자신이 들어가있지 않다는 건 서운한 일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일의 중요성을 아는 이상. 개인의 감정을 앞세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쯤되자 알렉스가 오히려 황당해졌다. '아니. 어디서 상희학이라도 공부해왔나?' 알렉스는 상희학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다른 학자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다른 학자들은 지나치게 상식적이었기 때문에 알렉스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알렉스가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한진수에게는 그 어떠한 정치적 목적이 없으며 그 곳은 정말 신혼집입니다. 아내호구가 아내를 위해 준비한." 이상하게도 학자들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렇게 누가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을 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게 단정지었다. 누가봐도 완벽한 거짓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알렉스는 조금씩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좋았어. 반응을 보아하니 상희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거겠어.' 입이 근질근질 거렸다. 금단의 학문. 상희학을 발표할 시기가 점점 더 가까워오는 것 같았다. 학자들은 생각했다. '일급 기밀 군사시설이로군. 한진수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그걸 알 필요는 없는 거고.' 상황도 딱딱 떨어졌다. '지금 이 순간. 폐하와 알렉스학자가 밀담을 가졌지. 역시.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같은 시각. 같은 곳에서 학자들은 서로 다른 꿈을 꿨다. *** 학자들의 회의가 있기 1시간 전. 김훈상이 말했다. "알렉스." "네. 폐하." 김훈상은 알렉스와 단 둘이 있을 때엔 편안함을 느낀다. 어렸을 때. 김훈상은 알렉스를 할아버지처럼 따랐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지 않냐?" 알렉스는 한 번에 알아들었다. "김상희 공주님이 너무나 예쁘시죠." "역시 그렇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에 담긴 딸의 모습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귀한 법이죠." 이런 법. 존재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김훈상도 딸보단 아들이었다. 김상희가 처음 태어났을 때만 해도 또 계집아이냐고 강서영을 타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김훈상은 저도 모르게 상희학에 물들어 있었다. 알렉스의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해석해보자면, '딸등신의 눈에 차는 사윗감이 있기는 있겠냐? 그냥 전부 다 도둑놈이지.'정도가 되겠다. "알렉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예. 폐하." 김훈상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뭔가를 보여줬다. 메세지였다. "이, 이것은...!"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서, 선왕폐하가 맞습니까!" "어. 이 번호는 고려왕가의 직계 핏줄들만 알고 있는 번호거든. 특정한 번호에서만 수신과 발신이 가능해. 해킹의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하지." 알렉스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25년 전. 왕 같은 거. 귀찮으니 훈상이 네가 그냥 왕 해라. 왕위를 떠넘기고 홀연듯 사라져버렸던 그 선왕폐하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보아하니 내가 하는 꼴이 아주 우스운 모양이다." 자신을 절대 찾지 말라고 했다. 밀림으로 들어가 생활하고 싶다고. 김훈상도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땐 국내외를 안정시키느라 너무 바빴다. "문제는..."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메세지의 마지막 줄이 제일 거슬렸다. - 그 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계집. 내가 한 번 보러가마. 알렉스도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폐하. 지금 당장 병력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분의 무시무시한 습관이라면..." "역시 그래야겠지?" "예. 이왕이면 직접 움직이시죠." "역시 그래야할 것 같다. 하필이면 좀 전에 돔이 해제되었지." 돔이 해제되었다고는 해도 그 곳은 최첨단 보안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모두 정밀하게 체크가 된다. 워프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김훈상이라고 해도 몰래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힘들 정도다. 그리고 그 곳 보안 통제실과 고려왕궁 보안 통제실은 핫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신혼집. 가명으로 상희 특별자치구에 비상이 걸렸다. "신원미상.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침입자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롭기는 했지만. 고려의 나이트들도 벌떡 일어섰다. "침입자?" 고려의 침입자가 아니다. 상희 특별자치구의 침입지다. 하지만 그들은 일어섰다. 오빠 된 마음으로. 누가 감히 내 동생(?) 신혼집을 침입해? 죽고 싶나! 통제실에 연락을 넣었다. - 그 근처까지 워프하겠다. 방해장을 옅게 하라. 하지만 들려온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 폐하께서 직접 오신다고 합니다. 또한 프리온 나이트 300기가 이동했습니다. 아직 지원은 필요 없을 것 가습니다. - 지원 좀 가게 해줘! 나이트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씨. 왜 지원을 못 가게 해? 이왕가면 좋은 거지. 폐하께서 가시면 폐하도 보호할 겸." 사실 다 핑계다. 김훈상은 보호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강하다. 다들 털썩 주저 앉았다. "우리 상희 공주님 한 번 더 볼 수 있나 했는데." "여기에는 왜 상희 공주님처럼 이쁘게 웃는 계집들이 없을까요?" 다들 낙담했다. *** 고려왕궁. 장미관. "상아 공주님. 보신 분 없으세요?" 김상아를 담당하는 시녀인 엘리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오전부터 김상아 공주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간다고 말도 없었다. 시녀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모시고 있던 공주가 사라졌다. 관리 소홀이다. 시녀들이 분주해진 것을 본 알렉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사정을 듣고 난 알렉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이트들이 묵고 있는 웅비관으로 향했다. 마침 김환성 왕자가 훈련중이었다. "왕자님!" "응?" "아무래도 상아공주님이 상희공주님 보러 가출하신 것 같은데요." "그 계집애가. 안 그래도 언니 보고 싶다고 매일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니." 김환성은 아씨. 귀찮아. 훈련도 해야 하는데.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연병장을 나섰다. "대장님. 어디 가십니까?" "어. 동생 데리러. 아주 귀찮은 계집이야. 만나면 콱 때려버려야지." 그러면서도 굳이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아씨. 걔는 마력도 약해 빠진 게.' 상아는 아직 어리다. '쓸모도 없는 게 진짜.' 물론 지금 하는 건 걱정이 아니다. 걱정 같은 거. 안 한다. 그는 무려 고려의 왕자였으니까. 고귀한 남자니까. '난 걱정 같은 거 안 해. 그깟 계집이 어떻게 되든 말든 무슨 상관?' 그런데 상아는 어린데다가 마력도 약한 편이고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나이트 제 9대대를 그냥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냥 다 튀어 나왓!" 뭐가 됐든 숫자가 많으면 좋은 거니까. 괜히 윽박질렀다. "아씨. 빨리 빨리 안 튀어나오냐!" 물론 걱정되서 마음이 급해진 거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다. 라고 그는 생각하며 뛰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단히 빠른 속도로. *** 김상아는 왕궁을 벗어나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좀 헤맸다. 이상한 수풀이다. "여긴 집이 왜 이렇게 넓은 거람?" 언니를 보러 왔는데 언니 보려다가 날밤 새게 생겼다. 넓어도 너무 넓었다. 아직 그녀는 워프포탈을 잘 모른다. 그래서 무작정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고 껄껄 웃으며 나타났다. "너냐?" 그리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너무 어린데? 계집아이들은 발육이 느린 건가?" 그의 꼴을 보니 가관이었다. 아무렇게나 길어서 거의 허리까지 내려온 장발. 꾀죄죄한 몰골. 덥수룩한 수염. 어디서 한 10년 정도는 노숙을 한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살아 있었다. 김상아가 물었다. "넌 누구야?" 남자가 크하핫! 기분 좋게 웃었다. 허리를 젖히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요즘은 계집아이들도 이렇게 당돌한가? 감히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반말을 할 수 있다니. 내가 밀림에서 살았던 30년? 맞나? 20년인가? 하여튼 그 동안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구나."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묻겠다. 네가 김상희냐?" 남자가 딱히 마력을 끌어올린 것도 아닌데 김상아는 몸이 덜덜 떨려왔다. 뭐랄까. 압도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무서웠다. 언니를 보러 무작정 탈출한 건 좋았는데. 이런 강한 남자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대답해라. 내가 묻고 있지 않느냐? 건방진 꼬맹이!" 그리고 그 때.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마력을 폭발시키며 질주해왔다. "내 못생긴 동생 어떤 십새끼가 괴롭혀!" ============================ 작품 후기 ============================ 이 소설은 패륜소설은 아닙니다 00206 외전 1부 =========================================================================                               *** 김훈상은 생각했다. '아버님이 왜 갑자기.' 속세가 싫다면서 세상을 등지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었다. 그 때 김훈상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으드득. 이를 갈았다. 생각해보면 20년 전 전쟁기에 돌입했던 것. 아버지의 영향이 꽤 컸다. 멀쩡하던 고려를 그냥 놔두고 사라져 버렸었으니까. 고려는 퓨리어스의 유일한 생산국이며 인적 자원이 매우 풍부한 나라다. 그런 나라를 어린 나이의 김훈상이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 이끌어 나가야 했다. 주변국에서 호시탐탐 고려를 노렸었다. '내 딸은 갑자기 또 왜.' 그 양반 성격상 분명히 계집년이 어쩌고 저쩌고하며 상희를 핍박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기척을 숨기고 미행했다. 그것도 그렇고. 그 아버지의 습관. 아직 안 고쳐졌을 것 같다. 불안해졌다. '저. 저 놈이...!' 그런데 한진수와 김상희의 연애 행각. 보고 있노라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키운 아이인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매번 똑같은 기분이 든다. 빼앗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저 시커먼 사내놈에게 빼앗겼다. 한편, 김훈상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느낌은...' 그냥 기척이 아니었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아이고! 이 패륜아 호로새끼가 나를 잡아 패려고 하네!" 마력을 끌어 올리던 김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이 느낌. 뭔가 익숙한 느낌이다. 고려왕가의 직계 혈통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 "이 어마어마한 마력. 천둥벌거숭이같은 성격. 네 녀석이 바로 환성이냐?" "...그런데...?" 김환성은 뭔가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요?"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남자가 껄껄대면서 웃었다. "기개 하나는 아주 장군감이로구나.마음에 든다." "......." 김환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 할아범. 뭔가 있는 할아범이다. 당신 마음에 드는 게 무슨 대수야? 라고 묻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다. 뭔가. 뭔가가 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 너는 3차 각성까지 한데다가 마력량이 엄청나다면서? 마력을 최대치까지 끌어 올리면 계집년이 된다는데. 그 말이 맞느냐?" "......." 김상아가 김환성의 뒤에 숨었다. 저 할아버지. 뭔가 이상했다. 김상아도 김상희를 보고 자랐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건 아니지만 김상희가 김환성에게 하는 것을 따라했다. "오빠야..." 김상아가 오빠를 부르며 뒤에 숨자 김환성은 위풍당당해졌다. "무섭냐?" 김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요." "걱정마. 내가 제일 세." 그 말에 어린 상아는 활짝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오빠 앞에서 두려움따윈 떨쳐낸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김환성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그러자 김환성의 어깨가 더욱 넓게 펴졌다. 김환성은 싱글벙글 웃었다. "오빠 믿지?" 남자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오빠 믿지? 내가 없는 동안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계집아이 따위를..." 마력 혹은 본신이 가진 능력과는 별개로,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 남자의 호통은 매우 매서웠다. 그 호통에 김환성은 움찔했다. 능력은 자신이 훨씬 뛰어난 게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이건 직감이었다. 저 할아범은 함부로 상대하면 안 되는 할아범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 고려왕자 김환성이 반말로 물었다. "근데 넌 뭐냐?" "건방진 녀석!"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사해라. 네 할아버님이다." 김훈상이었다. 김훈상 뒤에는 한진수와 김상희가 서있었다. 김상희가 한진수에게 팔짱을 낀 상태. "오호라? 네가 김상희냐? 그 성녀라는?" 김환성. 김상희. 한진수. 모두가 당황했다. 할아버님이라니? 그렇다는 말은 선왕폐하라는 소리 아닌가. 한진수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선왕폐하를 뵙습니다." "아. 네가 그 대천재라는 한진수? 그래. 네가 대단한 놈이라는 건 들었다.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데 네 놈 꼬라지가 가관이구나?" 한진수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아...' 김상희도 깨달았다. 지금 저 남자. 그러니까 김훈상의 아버지라 짐작되는 저 남자가 하는 말의 의도를 말이다. 얼른 팔을 놓으려고 했다. 이 세계의 상식상. 여자가 감히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심지어 윗 세대도 아니고 윗윗세대다. 고지식할 수밖에 없다.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이. 불과 얼마 전 한국만 하더라도 남아선호사상이 강세였었다. 그게 100년, 200년 전 얘기가 아니다. 불과 수십년 전 얘기다. 하물며 고려의 윗윗세대의 사람. 남자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스가 정말 특이한 경우다.) 김훈상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아버님. 제가 미리 경고합니다." "경고?" "제 딸아이를 모욕하면 아버님이라고해도 제가 절대 참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김훈상을 쳐다봤다가 이내 하하핫! 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계집년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네가 그렇게 감싸고 도는 거냐? 감히 이 아비에게 막말을 할 정도로 말이야." "막말 아닙니다. 아버님은 제게 거짓말을 하셨지요. 군왕이란 자고로 모든 이의 생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생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훌륭한 왕이 되라고 교육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도망치셨습니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남자는 또다시 껄껄대고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네 생각에는 이 아비가 그렇게 초라해 보였더냐?" "아니었습니까?" "뭐. 대충 넘어가고. 김상희라고 했나? 가까이 와봐라." 김상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처음이다. 저 남자. 그러니까 김훈상의 아버지. 맨 처음의 개차반을 대하듯 대해야 했다. '마음 단단히 먹자.' 요즘 마음이 너무 물렁해진 게 맞다.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맨 처음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갔다. 입가에는 미소를 띄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상희라고 해요.할아버님을 뵈니 눈이 부실 지경이어요." " 할아버지?" 남자는 기분좋게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알았는데도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다니. 그것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주 재미있는 계집년이구나." 한진수는 끼어들지 않았다. 아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랴 싶었다. 그 때, 김훈상이 스페셜 필드를 펼쳤다. "그만. 손 떼시죠." "뭐. 내가 이 아이를 잡아 먹기라도 한다는 거냐?" 스페셜 필드 내. 김훈상과 남자만이 남게 됐다. "더이상 진행하면 제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내 딸입니다. 내 딸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소중합니다. 아버님의 그 습관. 전혀 고쳐지지 않았군요." "별로 아프지 않다." "아픕니다. 어렸을 때.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남자는 김훈상을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의 고려왕가는 과거의 고려왕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3차각성까지 끝마친 상태.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당연히 김훈상이 남자보다 훨씬 강했다. "저 아이. 예쁘구나." "예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입니다." "그런 딸을 어찌 시집 보냈냐?" "도둑놈새끼에게 빼앗겼습니다." "죽여버리고 싶겠군." "......." 죽여버리고 싶다. 맞다. 하지만 또 죽이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러면 상희가 슬퍼할테니까. 그리고. "그렇지만... 그 도둑놈과 함께 있을 때에 제 딸이 행복해합니다." "그러냐?" "...저는 그거면 됩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딸이 행복해하는 모습. 그거면 되는 거냐? 그거면 만족하는 거냐?" "그것 말고 제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명예도. 권력도. 돈도." "그 모든 것보다도 제 아이의 행복이 더 중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 "만약 내가 죽어야 딸이 산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만약 딸이 걸어야할 길이 가시밭길이라면, 내가 그 아이를 업고 걷겠습니다." "그 길이 정말 괴로운 길이라도 그럴 것이냐?" "제 발에 피가 나고, 가시가 살갗을 파고 들어도. 그리고 그 것의 고통이 나를 덮쳐 나를 쓰러지게 만들더라도..." "그래도 네 자식만큼은 그 가시에 닿지 않게 하겠지.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그렇게 하겠지. 네가 아무리 아파도 네 자식이 아픈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게 훨씬 덜 아플 테니까." 남자가 김훈상을 쳐다봤다.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한참을 망설였다. "... 그게 바로 아비의 마음이다." *** 나는 왜 우리의 개차반씨가 저 남자. 그러니까 개차반씨의 아빠. 다시 말하면 내 할아버지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는지. 이제는 좀 알 수 있을 것 같다. 놔라! 놔! 놓으라고! 나를 꽉 껴안은 상태로, "귀엽긴 귀엽구나. 어디 보자. 네가 내 손녀딸이라는 말이지?" 라면서 턱으로 내 볼을 마구 비벼댔다. "나는 공주고 왕자고 사실 상관 없다. 그저 네가 궁금했을 뿐이다. 실제로 보니 아주 귀여워 죽겠구나. 환성이 놈한테 소리친 건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 호통을 친 것 뿐이고." 할아버지. 당신 엄청 지저분하고 더러운 몰골이라고요. 나를 껴안고 볼을 부벼대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제발요. '아프지는 않네...'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개차반씨나 진수가 마력으로 보호를 걸어주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이 세계의 남자가 마음 먹고 세차게 문지르면 여자는 화상을 입거나 안면뼈가 골절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힘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아까 아빠가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피웠던 거구나.' 스페셜 필드 내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 한 번만 허락해 준다고. 대신 살살하라고. 안 그러면 다칠 수도 있다고 하도 주의를 줘서 뭔가 했더니. '작작 좀 비벼대!' 이 할아버지의 습관은 턱으로 볼을 비벼대는 것인 것 같았다. '왜 내 주위에는 정상이 없는 거야.' 심각한 딸등신에, 정도를 모르는 동생병신에, 스케일의 끝을 알 수 없는 아내 호구. 거기에 성격을 당최 파악할 수가 없는 할아버지까지 나타났다. 뭔가. 내 인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뭔가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었다. "꿈에서 그리던 할아버지를 실제로 뵈니 정말 기뻐요. 소녀는 오늘 하늘을 얻은 것 같아요!" 물론 거짓말이다. 할아버지. 있는지도 몰랐다.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었...이봐. 너희들.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 되는 거야. 표정 관리좀 하자. 이 아빠야. 이 오빠야. 이 남편아! 웃어! 웃으라고! 활짝! 아니! 왜 더 인상 쓰는 거야. 아니 그래도 오늘 처음 본 할아버지인데. 아부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래. 나중에 너네한테도 다 아부 해줄게. 아니. 아부라 그러면 좀 이상하니까. 음. 애정표현 해줄게. 그러니까 표정 좀 펴. 하지만 저 남정네들의 표정은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선왕폐하 앞이라서 표정관리를 한다고 하는건데. 그래도 다 티가 났다. ...뭔가 망했다. 내 신세. 기쁜 거 맞지...? 그렇다고 해줘. 엉엉. ...제발. 00207 외전 1부 =========================================================================                               ***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상아를 무섭게 했던 의문의 그 남자. 그 남자는 다름아닌 우리 할아버지. 수십년 전 갑자기 왕위를 던져버리고 밀림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이 할아버지는 정말 괴짜였다. 하기야. 수십년을 혼자 밀림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정상이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할아버지가 외쳤다. "이 멍청한 녀석. 네가 그러고도 천재라 할 수 있냐?" 내 표현은 이상하지 않다. 말했다가 아니라 분명 외쳤다. 이거다. 글쎄. 밀림에서 사실 때에 곰인지 호랑이인지. 그런 애들한테는 크게 말해야만 말이 먹힌다나 뭐라나. 하여튼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다. 다시 한 번 설명하지만, 남자가 마음 먹고 크게 소리 지르면 여자 고막 파열되고도 남는다. 애초에 설계자체가 다른 생물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개차반 일가...라고 하기엔 이젠 좀 그렇고. 우리 아빠와 오빠들. 그리고 진수가 나를 평소에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우리 둘째 망나니 환성이도 내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곤 했었는데 나는 한 번도 괴로웠던 적이 없다. 흠흠.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얘기를 하자면 할아버지는 우리 진수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는 거다. 음. 말만 들어보면 엄청 분노한 것 같은데 표정은 싱글벙글이니 도대체가 종 잡을 수가 없는 할아버지다. 진수가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곳의 이름을 정확하게 딱! 정해놔야 할 것 아니냐! 이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 곳이라함은 곧 내 신혼집이다. 이렇다 저렇다 말은 많지만 아직 정확한 이름이 정해지지는 않았다. 상희 특별자치구라는 음. 뭐. 집 이름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큰 이름이 붙어 있기는 했지만 확정은 아니었으니까. 진수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말을 기다렸다. "이런 똥멍청이가 밀림의 왕이라니... 아. 이게 아니지." 이봐요. 할아버지. 여기 밀림 아니거든요. 물론 집 안에 밀림 비스끄리무리한 게 있긴 하지만요. 아참. 바다 비스끄리무리한 것도 있긴 하지만요. 아. 해안도로도 있어요. 숲도 있고요. 도시도 있어요. 집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하여튼 밀림은 아니에요. "어쨌거나 이 곳의 이름은 이 아이의 할애비인 내가 정해주도록 하겠다." "고견을 구합니다." "바로 신라다! 신라!" "...예?" "네 놈이 세웠다가 망한 나라 이름이 신라라며? 이제 안주인이 제대로 들어왔으니까 다시 시작해야지. 사내놈 배포가 이렇게 작아서야 되겠냐?" "나라를 새로이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나라 안에 나라를 만든다? 잘못 말하면 이건 반역이다. 그런데 반역 사주자가 왕의 아버지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우리 진수는 감을 잡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이름을 그냥 신라로 하라니까?" 보다못한 내가 물었다. 이 할아버지는 괴짜라서 내 말을 잘 들어 준다. 밀림에서 하도 오래 있었더니 남자 여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그냥 손녀 손자 개념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소녀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 그러니까. 요녀석들아. 내 말을 잘 들어봐라. 내가 아주 아끼는 루시아가 그렇게 말을 했단 말이야. 아주 신성한 언어지." "루시아...요?" 이 곳에는 무슨 신성왕국이라거나 뭐 그런 건 없다. 지구가 아니니까 그런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하여튼 여기엔 그런 거 없다. 신성한 언어? 신탁? 뭐 이런 것도 없다. 내가 왜 갑자기 신성한 언어라든가, 신탁이라든가. 이런 이상한 말들을 꺼내냐고? 이 말은 즉, 나도 할아버지가 뭔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이래봬도 나 여기서 16년 넘게 살았다. 16년 동안 신성한 언어라든가 루시아라든가. 그런 말 들어본 적도 없다. 그 때, 어디선가 음머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수가 황급히 내 앞에 섰다. 오른팔을 뒤로 둘러 내 허리를 잡아 줬다. 언제나 그랬듯. 진수의 등은 하늘처럼 넓었다. "오오! 루시아! 네가 나를 찾아 왔구나!" 한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루시아? 신성한 언어를 사용하는 루시아? 그 루시아? 또 한켠에서는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변방을 지키는 나이트들인 것 같았다. 상황을 들어보자면 황당하기 그지 없다. 나는 정말 황당했다. "그러니까... 이 암말이 루시아라는 소리죠...?" 그런데 왜 말이 음머어어어! 하고 소처럼 우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말은 일반 말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백마였다. 백마인데 이마에 고려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저건 또 어떻게 만든 거야. 그리고 백마치고는 좀 지나치게... 지나치게 컸다. 대충 코끼리만한 크기다. 이만한 크기의 말이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마구 달려왔단다. 주인을 찾아서. 물론 그 주인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고. 음머어어어어! 얼씨구. 루시아라는 코끼리만한 크기의, 소처럼 우는 거대한 말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 내렸다. 할아버지는 그 말에 올라타서 갈기를 쓰다듬으며, "아이고. 우리 루시아.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 라고 묻는데 문제가 뭐냐하면, 나이트들이 이 루시아를 쫓아왔다는 거다. 왜냐고? 이 거대한 덩치가 마구 달려왔다 쳐봐. 주인님이 보고 싶어 그냥 마구 달려왔다고. 거기에는 마을도 있었을 거고 도시도 있었을 거고. 하여튼 피해가 크단다. 그런데 이마에 고려왕가의 문장이 떡하니 박혀있으니 사살할 수도 없고. 나이트들이 이 루시아를 쫓아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라는 소리다. "야야. 얘들아. 우리 루시아때문에 피해가 좀 있었겠지? 그거 이 놈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다. 이 놈아."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우리 진수를 가리켰다. "예?" "너 부자지? 돈 많지? 그니까 내 손녀 낚아챘지?" 부자는 맞다. 집안에 바다가 있는데 말 다했지 뭐.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할아버지!" ... 내 남편의 재산은 내가 지킨다. *** 결론부터 말하겠다. 음머어어어어-! 이 소리가 신라아아아아-! 처럼 들린다면, 그 것은 이미 당신이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게 신라로 들릴 수가 있어?" 그래도 우리 착한 진수는 할아버지 편을 들어줬다. "잘 들으면 신라로 들릴 수도 있어." "인간적으로 그게 가능해?" "......." 진수는 대답을 피했다. 진수도 알 거다. 어지간해서는 그게 그렇게 들릴 수 없다는 걸.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진수가 말했다. "어쨌든... 신라로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폐하께서 허락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의 계획이 왕부터 시작하여 은퇴한 사회 지도층이 이 곳에서 살기로 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게해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취지였는데, 만약 단순한 신혼집이 아니라 나라로 만든다면? 워낙에 거대한 스케일의 신혼집이다보니 나라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니까. 뭐. 그거야 그렇다 치는데. '음...' 진수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오히려 이것도 좋을 것 같아." "그런데 너 왜 낯빛이 어두워?" "...솔직히 말해도 돼?" 뭐야. 왜 진지해져 갑자기. 괜히 긴장되네. "응." "그러면 내가 왕 해야 되잖아." "...응?" 무슨 얘기가 나오나 했더니. "그러니까 지금 왕 하기 싫어서?" "......." 진수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귀를 긁적거리는데, 저거 진짜 진심이라는 소리다. 내가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왕 하기 싫어서 나라 만들기 싫다고...?" "......." 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변명했다. "그게... 왕을 하면 신경쓸 것도 많고... 해야할 것도 많고... 그게..." "그래서 나랑 알콩달콩 둥가둥가 못해서?" "......." 나 이거... 기뻐해야해, 말아야 해? 정말 요즘은 잘 모르겠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이 남자가 일개 소시민(?)으로 전락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싶기도 하고. 나는 이 문제로 며칠을 고민해야만 했다. 뭐가 우리를 위해서 맞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했다. 물론 나도 그냥 평범한 진수랑 매일매일 알콩달콩 사는 게 좋긴 좋다. 내 행복을 위해선 그게 천번 만번 옳다. 하지만 내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제 할말도 못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심한 말로 폐기처분을 기다리는- 시녀들도 나는 많이 봐왔고 목화농장에서의 노예들도 봤었고 여자들이 상품처럼 팔리는 경매도 봤었다. 감히 계집주제에 남자와 팔짱을 낀다며 욕도 먹어봤다. 이 세상은 강간조차도 일상이 되어버린 정말 이상한 세상이다. '나는...'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진수야. 그거 기억 나...?" "뭐?" 진수가 또 진지해졌다. 내가 말을 하는 걸 보고 좀 긴장한 것 같다. 그래. 긴장은 좀 해야할 거야. 원래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했다. "너가 예전에 나한테 물어봤었잖아. 황제가 되면 좋을 것 같냐고." "...응." 얘기가 시작 됐다. *** 한진수는 긴장했다. '제, 제발... 그것 만은.' 필사의 노력을 해서 황제후보에서 벗어났다. 머리 많이 썼다. 차기 황제를 김형석으로 점찍어 뒀다. 그게 모양새도 좋지 않은가? 형님이시니까! 그런데 황제는 피했는데, "나는 남편이 왕이었으면 좋겠어." 왕 노릇하게 생겨 먹었다. "아빠는 분명히 허락하실 거야." 한진수도 안다. 김훈상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김훈상도 당연히 허락할 거다. 김상희의 말이라면 세계를 접수해서라도 줄 위인. 아니 딸등신이었으니까. "......." 한진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다. '왕 하기 싫다.' 진짜 싫다. 상희랑 둥가둥가 천년만년 놀고 싶다. 그냥 놀고 싶다. 하루 종일 상희 껴안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 그게 제일 행복하다. '싫은데...' 아 진짜 싫은데. 생각했지만 내색은 못했다. 안색만 좀 창백해졌다. 하지만 또 김상희가 왜 이러는지도 안다. 김상희가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의 행복이 너무 좋아. 매일매일이 너무 행복해." "......." "그런데 나는 우리가 이 곳에 오게 된 것이... 단순히 우리 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 곳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힘을 얻었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우리 둘만을 위해 산다면... 그건 비겁한 거라고 생각해. 나는 비겁해지고 싶지 않아." 며칠이 흘렀다. 김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예. 폐하." 김훈상도 한진수의 상태를 눈치 챘다. "너 솔직히 말해봐라. 왕 하기 싫지?" "... 아닙니다. 이 것은 저의 신성한 의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사실 나도 왕 하기 싫거든. 지금 스페셜 필드도 펼쳤다. 아무도 도청 못해." "......." "싫지?" "그게 아니라..." "싫잖아." "......." 한진수는 결국 항복했다. "...네." 김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마음 잘 안다." 처음으로 김훈상이 한진수를 이해해줬다. 도둑놈새끼에서 이제 동병상련의 동지가 됐다. 많은 발전이었다. 김훈상이 말했다. "신라 건국을 허가한다." 김상희가 내조하자 왕이 탄생했다. 한진수를 내보내고 나서 김훈상은 생각했다. '잘 됐다.' 동병상련의 동지인 척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었다. '아무래도 형석이보다는 진수가 낫지?'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도 그게 낫다. '원래 왕부터 시작하는 거지.' 세계평화를 위해서 -사실은 딸이랑 자기가 놀기 위해서- 한진수가 황제하는 게 낫다. 일단은 신라 국왕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원래 시작이 어려운 거지. 시작만 하면 일단 반은 성공한 거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김훈상이 씨익 웃었다. '축하한다. 왕의 세계에 온 것을. 어서와라. 격하게 환영한다.' 미리 축하했다. '황제 네가 해라.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딱이다.' 김훈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00208 외전 진행중 %26 신작 공지 %26 이북 공지 =========================================================================                               *** 한진수가 여러모로 발악 아닌 발악을 해보기는 했지만 결국 한진수는 왕좌에 앉게 됐다. 김상희가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응..." 왕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 치고는 지나치게 힘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하여튼 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결혼 기념일에... 즉위식을 한다구?" "응..." 김상희는 활짝 웃었다. 한진수의 마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김상희도 한진수와 단 둘이 여행도 다니고 싶고 놀고 싶기도 하다. 김상희 역시 한진수가 좋고 한진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이 것은 다른 문제다. "큰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 "...응." "역시 여보밖에 없어." "...응?" 한진수의 눈이 커졌다. "...뭐라구?" 김상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다. 호칭 성애자!' 아까까지만해도 거의 반 시체나 다름 없었던 한진수의 얼굴에 제법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김상희는 안다. 한진수. 지금 못 들은 척 하지만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이 곳은 지구가 아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천리 밖에서 떨어지는 바늘소리도, 마음만 먹으면 듣는 한진수다. '응? 그러고보니 정말로 들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남편의 능력이 지나치게 대단하다는 것을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하나를 잠시 고민한 김상희는 그 고민을 떨쳐버렸다. 한진수가 못 들은 척 하는 것도 귀엽고 해서 다시 한 번 말해줬다. 그래. 그렇게 하기 싫은 왕 하기로 했는데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지. 여보 소리 몇 번 한다고 입이나 귀가 닳는 것도 아니고. "큰 용기를 내준 여보가 나는 정말 자랑스러워." 아까까지 다 죽어가던 한진수의 표정이 펴졌다. 단순히 생기가 돌았다 수준이 아니었다. 한진수는 지금 제법 기뻐하고 있었다. 힘을 잃었던 어깨가 그 힘을 회복했다. 어깨가 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랑스러워?" 그리고 굳이 다시 물었다. "내가 뭐라고?" "그래. 여보." 김상희는 본능적으로 안다. 밀당(*밀고 당기기의 준말)을 하겠다고 머리로 계산하고 하는 게 아니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여보'소리에 이렇게 애타하는 것도 다, 김상희가 그 횟수를 본능적으로 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또 아낌없이 해준다. 김상희는 한진수의 품에 안겨 들었다. "여보. 여보. 여보." 그리고 이건 연기가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다. 한진수에게 고마웠다. 또 한진수가 멋있었다. 한진수의 품에 안겨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역시 난 네 여보지." 풀 죽어있던 한진수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이 곳엔,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여보'소리를 들은 호칭 성애자 한진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힘을 완전히 회복했다. 아니. 회복한 정도를 넘어서서 이제 기뻐했다. 김상희는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단순한 거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연애를 하면 유치해지고 단순해진다고. 한진수는 그 극단적인 예였다. 한진수가 자신에게 폭 안긴 김상희를 꽉 끌어 안았다. "너 내거야." "...응." 예전이라면 다르게 대답했을 거다. '내가 왜 네 거야? 나는 내 거야.' 라든가 '사람을 사물취급하지 말아줘'라든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너 내거야.'라는 말이었다. 사람은 사람이지 사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그 때보다 오히려 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한진수를 좋아하게 됐다. 사랑하게 됐다. 그러니까 저 말에 반박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한진수도 그걸 알아차렸다. "너도 많이 변했네." 김상희는 한진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뭐가?" "예전에는 내가 이런말 하면 아니라고 그랬잖아. 너는 내 거라고." "기억 안 나." 기억 안 날리가. 수십, 수백 번을 말했었는데. "에이. 그랬잖아. 바보야." "기억 안난다니까?" "그랬었어." "기억 안 나." "네가 분명히 그랬어." 김상희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었다. 한진수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 한진수는 김상희의 그 행동 하나에 천하를 다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광대가 승천했다. 입가가 씰룩 거렸다. 눈가에는 행복이 가득 찼다. 김상희가 아주 조금, 토라진 척 말했다. "기억 안 나." "오구오구." 한진수는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말했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보다." 이 순간.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진수도, 김상희도 모두 알고 있다. 김상희는 분명 과거에 지금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었다. 김상희가 다시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눈이 작아졌다. 반달을 그렸다. "그렇지?" "응. 내가 잘 못 기억하고 있었어. 너 그런 적 없어." "거 봐. 바보야." 한진수는 그런 김상희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김상희를 품에 안은 그 상태로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뭐, 뭐해?" 김상희는 알고 있다. 지금 한진수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한진수가 태연스레 되물었다. "뭐가?" 한진수도 물론 알고 있다. 김상희가 당황한 듯 말했다. "바, 발 걸려. 넘어진다구! 바보야." 물론 김상희도 알고 있다. 절대 발 걸릴 일 없다. 넘어질 일도 없다. 겨우 이런 걸로 사랑하는 여자 넘어뜨릴 것 같으면 세계의 대천재 타이틀은 못 얻었다. 세밀한 마력 컨트롤이 가능한 한진수다. 절대 넘어뜨리지 않을 거다. 만약 넘어진다 하더라도, 땅에 부딪치기 전에 일으켜 세울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진수가 계속 걸었다. 김상희를 품에 안은 상태로. 당연히 걸음걸이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안 넘어져. 바보야." 한진수의 말은 틀렸다. 풀썩. 한 쌍의 남녀가, "넘어졌잖아." 넘어졌다. 한진수가 씨익 웃었다. 이 곳은 침대 위다. 자신의 아래. 침대 위에 반 쯤 강제로 눕혀진 김상희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라. 넘어졌네." 침대에 넘어지는 거다. 절대 아플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진수는 무려 마력을 움직여서 그녀를 보호해줬다. 김상희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이 변태가 진짜." "변태라서 싫어?" 한진수가 김상희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의 손길이 김상희의 배를 쓸고 올라갔다. 옷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그의 손이 김상희의 목을 간지럽혔다. "변태라서 싫으냐니깐?" "누, 누가 싫댔나 뭐." 김상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주 오래 전. 아이들은 김상희더러 여우라고 욕하고 구미호라고 욕했을지 몰라도, 김상희는 이런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가 않다. 한진수와의 잠자리. 이미 많이 경험했지만, 그 때마다 새롭고 그 때마다 부끄럽다. 김상희가 작게 말했다. "불 꺼야지." 한진수가 마력으로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키스했다. 조심히. 살살.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이내 격정의 파도가 되어 김상희의 입술을 휩쓸었다. 그 부드럽지만 성난 파도는 김상희의 입술을 휩쓸고, 목덜미를 휩쓸고, 쇄골을 휩쓸고, 그녀의 젖가슴을 휩쓸고, 그녀의 배를 휩쓸고, 그녀의 다리를 휩쓸고, 그녀의 모든 곳을 휩쓸었다. 한진수와 김상희의 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진수와 김상희가 함께 보내는 그 시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진수와 김상희가 함께 있는 이 곳이 야릇한 신음소리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김훈상이 말했다. "곧 네 즉위식이구나." "폐하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가 있어서 이토록 일이 쉽게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훈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불만 많은 것 같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반항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왕 하기 싫은 표정이냐?" "아닙니다. 폐하. 오해하고 계십니다." 김훈상은 즐거웠다. 이제 저 사위놈을 왕좌에 앉히고 나면! 그리고 나면 이제 딸과의 오붓한 데이트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라를 새로이 세우게 되면, 아주 많이 바빠질 것이다. 초창기엔 원래 그런 것이지. 나도 처음엔 죽는 줄 알았다." 그 말은 곧, '너는 아주 많이 바쁠테니 일에 파묻혀 죽어라!' 라는 뜻이다. 숨겨진 속 뜻은, '그 사이 나는 상희랑 놀겠다!'이고. 한진수가 말했다. "혹시... 육아휴직 있습니까?" "...응?" 김훈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절대 잘 못 들을 리 없는 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그리고 김훈상은 알게 됐다. 김상희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김훈상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최근 1년 동안. 한 번도 지은 적이 없을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으하하핫! 크게 웃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그렇단 말이지!" 저 죽일 놈의 사위놈은 사위놈이고. 사랑하는 딸내미가 임신을 했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손자! 아니 손녀가 생길 가능성이 생긴 것 아니겠는가! 내 딸을 닮았으면 얼마나 이쁠꼬! 그 생각에 아주 행복해졌다. 김훈상이 물었다. "딸이냐, 아들이냐!" *** 신작을 연재 중입니다. 제목은 '레벨업 어게인' 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 또한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북이 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네X버북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은 조금 더 있다가 풀릴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 00209 외전 1부 =========================================================================                               *** 한진수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아'까지 나왔을 때. 한진수는 살기를 느꼈다. 모른다고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 라고 말하는 장인어른의 무시무시한 포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모른다고 말하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진수는 느꼈다. '왠지 딸이길 원하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상식대로라면 말도 안 되지만 한진수는 안다. 김상희는 이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여자. 아니 딸이다. 사랑해마지않는 딸에게서 태어난 딸. 그걸 강력하게 원하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그걸 굳이 확인했다. "딸이길 원하십니까?" '딸'이라는 단어에 활짝 웃었던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렇다. 그럴 리 없다. 상식대로라면 말이다. 이 세계는 무조건 남자가 태어나야만 한다. 실제로 김상희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김훈상은 강서영을 나무랐었다. 또 계집이냐고 말이다. "대를 이을 남자가 중요한 것이지."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한진수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래도 아들일 것 같았다. 김훈상이 여태까지 태도와는 다르게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조금 당황했다. "그, 그러냐?" "회복의관 관장 미첼씨의 말을 들어보면, 여자아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확실하지 않다. 아무리 마력이 발달했고 과학이 발달했어도 아직은 모른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뿐. 김훈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뭐가 다행이란 말이냐? 사내아이가 아닌데?" 말만 들어보면 기분 나빠 보인다. 기분 나쁜 척 했다. 그런 주제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딸이다. 딸이란다. "폐하께선 사실 딸을 원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나는 그런 적 없다." 한진수는 분명 '딸 입니다'라고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말을 했을 뿐이다.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김훈상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 같았다. 마치 무조건 딸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딸 안 좋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럴 리 없다는 걸 한진수도 김훈상도 알고 있다. 김훈상은 패기를 부렸다. "당연하지." 어차피 성별은 이미 정해져 있다. 미첼이 그렇게 확정지었다면 100프로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김훈상이 혼자 확신하고 있다.) 전 세기의 대천재고 현 세기의 대천재고. 고금을 통틀어 모든 천재를 다 데려와도 이미 결정된 성을 바꿀 수는 없지 않겠는가. (김훈상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어서 지금 이미 딸이라고 확신 중이다.) 김훈상은 왕이다. 상대국가와 타협점을 찾을 때에도, 패기를 부리고 호기를 부린다. 그래야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때에 그랬다. 그 것이 왕의 숙명이다. 그 숙명을 가지고 지금 허세를 부렸다. "사내아이가 아니라니. 안타깝군." 한진수는 피식 웃었다.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인데요. "당장 가보자." 한진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를테면 신라국왕 즉위식이라든가. 신라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라든가. 뭔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려면 어때.' 어차피 왕도 아내가 원해서 하는 거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아내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도 따다줄 한진수다. 아내가 왕이 좋다니까 왕도 하는 거다. 다시 말해 왕이나 국가따윈 하나도 안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보. 내가 갈게!' 떨어진 지 겨우 30여분 밖에 안 됐는데 한진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참고로 걸어서 20분 거리다. 한진수가 제안했다. "워프하시죠?" 김훈상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똥줄이 타던 중이었다. 이 놈이 왜 워프하자고 안 하지? 난 지금 한시가 급한데. 왜 워프하자고 안 하지? 내 딸 빨리 보러 가야 하는데.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래도 왕 체면에 워프하자! 내 딸 빨리 보고 싶으니까! 라고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참고 있던 중이었다. 굳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정 원한다면." *** 김훈상이 활짝 웃었다. "정말이냐? 네가 임신을 한 것이냐?" 침대에 누워있던 김상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왕이 왔는데, 당연히 일어서서 인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움직이지 마라." 김상희는 움직일 수 없었다. 무형의 기운. 마력이 그녀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못 움직이게 막았다. 부드럽게 말이다. "귀한 몸이지 않느냐?" "하지만 오빠가 오셨는데... 임신 초기라서 몸도 무겁지 않아요." "어허. 가만히 있어라. 왕명이다." "...네." 김상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다. 왕 앞에서 피식 웃다니. 다른 공주였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쳤나봐.'라고 생각하며 벌벌 떨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김훈상의 눈에는 피식 웃는 김상희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생 많았다." 김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상희가 되물었다. "뭐가요?" "저 짐승같은 놈에게 얼마나 시달렸겠느냐?" 김상희는 움찔 몸을 떨었다. 뭐랄까. 김상희는 잘 모르지만, '살기...?' 살기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태어날 아가를 위해 예쁜 생각만 하고 예쁜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어라. 내가 힘껏 도와주겠다." 아니. 아빠. 아빠 왕이잖아요. 안 바빠요? 묻고 싶었다. 그 말을 돌려 말했다. "아빠의 마음은 너무나 감사해요. 아빠의 진심에 소녀는 언제나 행복하답니다. 하지만 아빠는 고려 만민의 왕이시잖아요. 일개 소녀에게 마음을 전부 쏟아주신다면... 소녀는 너무나 행복하지만 아빠를 어버이로 따르는 고려의 백성들은 어버이를 잃고 방황하고 말 것이어요." "......." 김훈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상희의 말 제대로 듣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아기가 옹알옹알 옹알이를 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김훈상은 사랑 가득한 눈동자로 김상희를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다가 말했다. "형석이가 곧 왕위를 물려받게 될 거다." "...네?" "보니까 신혼집이 제법 괜찮더구나." 뒤에 서있던 한진수는 뭔가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뭐지?' 불길하다. 불길하다. 불길하다. "내 자랑스러운 사위가 나라를 새로이 건립하지 않았느냐? 곧 즉위식이고." 덕분에 나는 마음 놓고 차기 황제를 점 찍어 놓을 수 있었지. 후후후. 하는 그 말이 한진수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한진수의 가슴 한 켠이 무거워졌다. 뭔가 무거운 납덩이를 심장에다가 달아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러모로 바쁠 것이다. 이럴 때 장인인 내가 도와야겠지. 이 나라는 이상한 나라니까." 최고의 복지와 환경을 제공하지만, 여자를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된다. 어찌보면 약간의 역차별도 존재한다. 여자를 위한 나라였으니까. 하다못해 여자를 향해 삿대질조차도 하면 안 된다. 일단은 그렇게 했다. 이렇게라도 강제성을 띄고 있어야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이라도 변화할 테니까. 김상희도 이제 깨달았다. "아빠. 그 말은..." "곧 고려의 왕은 형석이가 될 것이다." "그럼 아빠는요?" "너는 임신을 했고 사위는 왕이 될 거다. 내 도움이 필요할 거다." 김상희와 한진수는 동시에 생각했다. 아니요. 필요 없어요. 김상희가 말했다. 단호할 땐 단호해야만 하는 법이다. "아빠. 저 아직 신혼이어요." 좋은 게 좋은 거지만 오늘 만큼은 안 됐다. "신혼에는 남편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법이랍니다." "......." "아빠가 옆에 계시면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겠지만, 남편과 단 둘이 있으면 그보다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가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어요." 한진수는 속으로 응원했다. 옳지. 잘한다 내 색시. 여기는 우리집이다. 우리집인데 처가살이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응원했다. 김훈상은 충격을 받았다. 한진수를 한 번 노려봤다. '저 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내 딸이 이렇게...!' 하지만 딸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줄 김훈상이다. 별채를 하나 더 짓기로 했다. "고마워요. 아빠. 소녀의 마음을 이토록 잘 이해해 주시는 분은 아빠밖에 없어요." "역시 그렇지?" 그리고 뽀뽀 한 번에 김훈상의 마음이 풀어졌다. 며칠이 더 흘렀다. 한진수는 신라국왕의 자리에 앉았다. "국왕폐하 만세!" "국왕폐하 만세!" 시가지를 지났다. 신라로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의 숫자가 제법 많았다. 여자들도 많았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도 많았다. 이 곳은 여자의 천국이다. 여자 전용 시설도 굉장히 많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즉결 처분이 된다. 왕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국방도 튼튼하다. 재정도 복지도. 그 모든 것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나라다. 이러한 나라를 구현하는 것에는 알렉스의 힘이 컸다. 김상희가 말했다. "학자님. 고마워요." "아닙니다. 상희학을 정식학문으로 인정해주신 국왕폐하덕분 입니다." 이 나라를 이루는 근간은 바로 '상희학'이었다. 현대로 치자면 여성학에 가까운 이 학문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과거 고려왕의 행적들과 고려왕자들의 행동들이 이 '상희학'하나로 모두 설명이 되었다. 알렉스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상희학은 분명 세계를 변화시킬 겁니다." 어쨌든 여성을 대우하는 괴상한 나라. 신라의 국왕이 즉위식을 끝냈다.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다. 한진수가 말했다. "오늘을 공휴일로 정하고 내년부터 이 날을 기리도록 한다." 그리고 기뻐했다. 응애! 응애! 응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린 아기를 본 한진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나왔다. 한진수가 김상희의 손을 꼭 잡아줬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정말." 아기가 태어났다. 나라 안에서는 경사였다. 공주가 태어났다. 그리고 놀라운 소식이 나라 밖에서 또 들려왔다. 00210 외전 1부 완결 =========================================================================                               *** 과거. 약 25년 전. 전쟁기 때에 세계는 혼란스러웠다. 몇 개의 나라가 새로 생겨나고, 또 몇 개의 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이후로 지금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신라가 위세를 떨치며 급격하게 성장해갔다 "어째서 고려 국왕은 신라가 저렇게 크는 걸 그냥 방치하고 있지?" "글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고로 권력은 부자사이에도 나눠갖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부자사이에는 나눠갖는 것 아니지만, 딸에게는 얼마든지 퍼줄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몰랐다. 그러던 와중 또다른 소식들이 겹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 고려왕자 김환성과 김환석이 각각 세상으로 진출했다던데?" 고려에서는 총 4명의 왕자가 있다. 그 중 둘째와 셋째가 분가를 했다는 뜻이다 "갑자기?" "안 그래도 예전에 김환석 왕자는 건국을 하려고 생각했었대."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환석은 동생 옆에 있고 싶어서 왕 안 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지금 와서 갑자기 나라를 건립한다는 건... 어쩌면 신라를 견제하기 위함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위치를 보면..." 김환성이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동쪽 끝. 극동에는 김환석이 자리 잡았다. "잘 봐. 지도를 살펴보면..." 지도를 살펴보면 고려와 신라가 꽤나 근접해 있고, 윗 쪽에는 김환성의 국가가 있다. 오른 쪽에 김환석의 국가가 있다. "이렇게 세력도를 펼쳐보면 어때? 그림 나오지?" "과연..." 김환성이 세운 국가의 이름은 고구려. 그리고 김환석이 세운 국가의 이름은 발해였다. "고려와 고구려. 발해가 이렇게 에워싸고있잖아. 유사시에... 신라를 포위할 수 있는 세력배치야." "아... 그럼 이제 고려 측에서도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네?" "그렇지. 고려 입장에서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라를 견제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3개 국가의 수장. 고려 국왕 김훈상. (아직까지는 김훈상이 왕이다.) 발해 국왕 김환석. 고구려 국왕 김환성이 한 자리에 모였다. 김환석은 한진수를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의 의미. 한진수는 금방 알아차렸다. 내 동생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냐. 죽고 싶냐? 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로 안하는 게 더 무서웠다. 씨익 웃으면서 레이저포를 만질 것 같다고나 할까. 한편, 김환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야. 너. 내 똥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애 얼굴이 왜 이렇게 수척해?" "오빠들. 그런 거 아니에요. 아기를 낳고 나서..." 김훈상이 말했다 "그래. 저 도둑놈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내 딸 얼굴이 저 모양이 됐겠냐?" 마침 시중을 드는 송수진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자리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김상희의 방에 아빠와 오빠와 남편이 있는 자리였지. 송수진은 생각했다. '이상하네. 공주님 안색이 그리 나쁘진 않은데...' 안색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산후조리도 잘해서 건강했다. 그런데 아빠와 오빠들이 보기엔 아닌 것 같았다. 시력이 여자보다 월등히 좋을텐데 왜들 저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형님. 발해 운영은 잘 되고 계십니까?" 김환석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차피 나라 운영은 별로 관심 없다. 그가 나라를 세운 이유는 단 하나다. 김환석이 김상희를 쳐다봤다 "저 놈은 못 미더우니 내가 도와주겠다." 그리고 시크하게 고개를 돌렸다. 세상사람들은 고려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와 고구려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세력확장을 견제하고, 유사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김환성이 말했다 "야. 똥개. 오빠 믿지?" "...네." "오빠 짱 세다." 제일 세다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여기 형도 있고 아부지도 있다. 그래서 제일이란 말 대신 짱이란 말을 붙였다. 김상희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빙그레 웃었다. 동쪽에는 발해가, 북쪽에는 고구려가 버티고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고려가 있다. 물론 거리상으로는 매우 멀다. 일부러 거리를 뒀다. 그래야 신라가 더 커질 수 있을 테니까. 김환성이 말했다 "빨리 신라를 키워. 나 왕 귀찮아." 김환성의 생각은 이러했다. 한진수가 신라를 성장시킨다음, 고구려를 신라에 흡수통일을 시키는 거다. "그 땐 내가 항복해줄게." 나라간 합병.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빨리 키우라고. 왕 했으니까 그냥 황제도 해." 김훈상도, 김환석도 고개를 한 번 씩 끄덕였다. 김씨부자들은 이미 권력에는 초탈했다. 한진수를 어떻게 부려먹을까 생각만 하고 있다. 김훈상이 공명정대한 척 말했다 "신라가 제법 기틀이 잡혀가고 있다.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는 적격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여자들의 권위가 많이 높아졌더군. 지금은 강제력을 가졌지만... 세월이 흐른다면 여자들도 대우받는 세상이 오겠지." 한진수는 말하고 싶었다. 그거 다 핑계잖아요! 아버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잘 못 알고 있다. 고려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나라를 만든 게 아니다. 오히려 신라를 지켜주기 위해서다. 바다 건너. 새로운 대륙에서 침략자가 온다면, 그건 발해가 일차적으로 막아줄 것이다. 북쪽 산맥. 아직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북쪽지방에서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고구려가 막아줄 것이다. 남쪽. 아직도 무시무시한 마물들이 득실대는 그 곳에서 이상현상이 발생한다면 고려가 막아줄 것이다. (지금은 밀림으로 돌아간 할아버지도 여차하면 돌아오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딸, 내 동생을 지켜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완전히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김훈상이 물었다 "그래서 우리 수희는 어디에 있는 거냐?" 김상희가 대답했다 "옆 방에서 자고 있어요." 김훈상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 들었다. 사랑스러운 손녀가 잠들어 있으니까 깨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왕이 보고 싶으면 보는 거다. "그런데 이름은 누가 지은 거냐? 내가 그럴 듯한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는데." 김상희는 생각했다. '진수가 지었다고 말하면 진수 엄청 깨지겠지.'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 아니. 확실했다. 사실 수희라는 이름은, 김상희의 옛날 이름이다. 그 당시에도 한진수는 김수희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었다. 그 사랑의 의미를 담아, 김상희의 분신인 이 딸의 이름을 '김수희'로 짓자고 했다. 김상희도 거기에 동의했고. 김상희가 말했다 "제 이름을 닮기도 했고... 제 첫 아이이니... 제가 주고 싶은 이름을 줬어요. 혹시... 잘못일까요?" 김훈상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아빠. 나 지금 잘못했다고 혼낼 거에요? 혹여라도 한진수가 이름을 지었다면 호통을 한 번 치려던 김훈상은 호통을 칠 수 없게 됐다. 오히려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다. 이름을 아주 예쁘게 잘 지었구나." 한진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장인 어른. 분명 나한테 화를 내려고 했는데. 세간에서는 칭송받는 왕이다. 신라는 정말 파죽지세로 그 덩치를 불려가고 있는 중이다. 여성우대정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펼치고는 있으나, 상희학이라는 이론과 한진수의 능력. 그리고 고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라는 유래없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과거와는 약간 달라진 것이 있었다. 성녀의 도움으로 인하여 여자들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비록 그것이 임시사용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 힘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부터 여자들도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게 됐다. 이게 중요하다. '어느 정도'는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의 비율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애초에 남성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라면, 소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지배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약간 얘기가 달라졌다는 소리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힘은 조금 약하지만 그 숫자가 훨씬 많다. 머릿수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고 있고,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풍토가 남아있다. 남아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직도 만연하다. 하지만 이 세계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신라는 절대다수의 여성들의 지지도 등에 업으며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김훈상의 뒤를 이은, 세계의 대천재이자 세계의 위인 중 한 명으로 추대받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울고 싶다.' 여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구별이 안 된다. 시월드보다 더 무섭다는 처월드. 그 처월드가 펼쳐졌다. 심지어 여기는 신라 안이다. 신라 안에서 신라국왕은 구박을 당했다. 김씨부자들이 돌아간 뒤, 이번에는 김상희가 한진수의 손을 잡아줬다 "고생 많았어. 아빠랑 오빠들이 조금 극성이라..." 그만하면 다행이다. 환혁이와 상아는 더 대책없다. 우리 누나를 뺏어간 도둑놈! 이라든가 우리 언니를 납치해간 나쁜 오라버니! 라든가. 얘들은 논리도 없고 대책도 없다. 그럴 때마다 김상희가 혼을 내서 이제 조금 잦아들기는 했지만 결혼 초기에는 정말 심했다. 김상희가 미안한 듯 한진수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으니까." 확실히 그건 그랬다. 오빠들도 아빠들도. 그리고 김환혁과 김상아마저도 한진수를 이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받아들이고는 있는데, 사랑하는 딸 혹은 동생 혹은 누나 혹은 언니를 빼앗아 간 도둑놈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 아직은 살갑게 굴지 못하는 정도였다 "아냐.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내 와이프가 이토록 사랑받는 여자라는 게 기쁘고 좋아." "......." 김상희는 한진수를 올려다봤다. 이 남자.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진수도 사람이다. 아무리 장인이고 형님이고 뭐고. 이렇게 자꾸 무시하고 구박하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한진수에게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진수가 왜 저러는지 안다. 자신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배려하는 거다. 한진수가 웃었다 "정말이야. 나는 기쁘고 행복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네가 내 옆에 있어줘서. 그게 너무 고마워. 너는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김상희도 웃었다. 오늘은 뭐랄까. 정말 뜬금 없는데, 한진수의 저 미소가 정말 섹시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김상희가 먼저 말했다 "불 꺼줘." 불이 꺼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불은 더 크게 활활 타올랐다. 예전보다 더 농염하고 더 뜨겁게 말이다. ***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의 외전이 끝났습니다... 는 거짓말이구요. 일단 외전의 1부가 끝났습니다. 지금은 신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연재하는 '레벨업 어게인'은 퓨전 판타지구요. 로맨스 판타지를 또 준비하고 있어요. 신작의 제목은 아직 비밀! 추후 공지나 또다른 외전 공개를 통해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왕딸의 외전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 신작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신작이 완결된 이후에, 또다시 왕딸 외전을 연재할 생각입니다. 아직 못다푼 망상(?)들이 제법 있어서요. ㅎㅎ 어쨌거나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왕딸 외전 2부를 연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정확한 날짜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어디까지나 참고용으로만 말씀드린다면 대략 8개월 쯤 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어쨌거나... 왕딸을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레벨업 어게인. 그리고 11월 말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신작 완결 후 또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