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Prol..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시윤아." 짙게 낀 구름이 달을 가려버렸기에 주위는 어두웠다. 평소 에는 활발하기만 한 아파트 앞의 놀이터였지만 지금의 분위 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시윤이라고 불린 남자는 검은 색 우산을 살짝 비껴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할말 있다면서?" 시윤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목이 메말라 있던 것이다. 여자는 시윤의 말에 조용히 고개 를 끄덕였다. 노란색의 우산으로 비를 피하고 있는 그녀는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막 나왔는지 비에 젖은 부분은 없었 다. 그리 예쁘지는 않았지만 귀엽다고 할 수 있는 느낌의 여자.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나, 많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 이제 그만 사귀는 게 좋겠어." 시윤은 가슴이 탁 막혀왔다. 하지만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 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왜?" '역시 너도.' "우리도 이제 2학년이잖아. 내년이면 벌써 수험생이구, 공 부도 해야하고, 또……" '얼마 전에 새로 사귄 남자 때문이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시윤 은 이것저것 변명을 늘어놓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 짓을 말하는 눈을 가슴깊이 새겨놓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 다. 너무나도 가식적인 그녀의 변명에 시윤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너 많이 좋아하지만 말이야." 여자는 매우 미안한 듯이 말했다. 시윤의 눈은 차갑게 가 라앉았다. '거짓말.' "여러 가지 여건이…" '거짓말.' "또 나중에 대학 들어가서 다시 만날 수…있잖아?" '너도 역시 똑같구나.' "그러니까 우리 웃으면서 헤어지자. 가끔씩 연락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자. 응?" 그녀는 몰랐겠지만 시윤은 웃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놀이터에서 그의 표정이 보일 리 없었고, 덕분에 그녀는 시 윤의 자조적인 웃음을 보지 못했다. "아니. 난 괜찮아. 그럼 잘 지내." 심하게 갈라져 있었던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았다. 그 녀는 시윤의 태연한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인사하고는 아파트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후두둑. 시윤은 들고 있던 우산을 옆으로 늘어뜨렸다. 차가운 빗방울이 시 윤의 온몸을 두드린다. 하지만 이미 얼음장 같이 차갑게 얼 어버린 그의 마음만은 못할 터, 그 비조차 시윤에게는 따스 하게 느껴졌다. "다 똑같은 건가? " 누구에게도 묻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이게, 뭐냐고" 눈이 뜨거워진다. 시윤의 눈물을 비가 씻어냈다. 덕분에 우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비는 이미 옷을 모두 적시 고 그에게 우울함마저 채워주고 있었다. 시윤은 표독스럽게 하늘을 노려보았다. 처음 버려졌을 때에는 울고 불며 매달 렸었다. 남자답지 못하다고들 했었지만, 정말 괴로웠다. "…누가 누굴 사랑해?" 누구도 듣고 있지 않는 말. 시윤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빗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을 들어 쓸어 올렸다. 볼까지 내려 오는 긴 머리가 비에 젖어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 머리카락도 방금 전까지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긴 머리를 좋아한다기에 기른 것이다. "하하… 하. 하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도, 괴성도 아니었다. 시윤은 갑자기 입을 열어 뜻 모를 외침을 토해내었다. 슬픔과 울분이 섞인, 곡성이었 다. 그의 몸과 마음은 울고 있었다. 깊은 상처를 끌어안 고……. * * * 푸른색으로 점멸하는 통신 에뮬레이터의 화면. 시윤은 무 표정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159] 비공개 (1/2) 인간이기에... Kriese(크리스) *** Always(명시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Kriese(크리스) 여어, 간만이다. Always(명시윤) 난, 바보가 아닐까? Kriese(크리스) ? Always(명시윤) 버림 받는것도 이제 슬슬 지겨울 때가 되 었는데 말이야. Kriese(크리스) 헤어졌어? Always(명시윤) 지겹다. 더 이상 여자는 믿지 않을래. Kriese(크리스) .... Always(명시윤) 당분간, 여자는 멀리하련다. 그 당분간이 하루가 될지 영원할지는 모르겠지만. Kriese(크리스) 열 두 번. Always(명시윤) …? Kriese(크리스) 아니. 아니다. 한가지만 묻자. Always(명시윤) 얼마든지, 아 잠깐만 나 맥주 한 캔만 가져 올게. 시윤은 컴퓨터를 켜둔 채 부엌으로 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크리스와의 대화는 침체되어 있는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 다. 비록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마음을 열고 얘기하는 것은 '크리스' 한 명일지도 모른다. 시윤은 캔 맥주 하나를 들고는 컴퓨터로 돌아왔다. 그의 평소 지론은 '약간의 알콜 은 뇌를 활성화 시켜준다.' 였다. "…울지도 모르지만, 쳇." Kriese(크리스) 2년 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 네가 모든 걸 나에게 말했다면. 그동안 네가 겪은 것은 열 두 번. 겨 우 그것으로. 네가 모든 여자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겨우 그 정도로 모든 여자들은 널 떠나갈 것이라고 믿는 거냐? 그래서 사랑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크리스는 시윤이 오기 전에 이미 할 말을 타이핑 해놓고 있 었다. 모니터를 바라본 시윤은 씁쓸히 웃었다. Always(명시윤) 적어도,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믿을 만큼 믿었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라고 말했던 게 몇 명 인지도 모른다. ..지금.. .. 속이 너무나 쓰리다.. 톡. 키보드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시윤은 급히 눈을 훔치고 맥주를 집어들었다. 숨도 쉬지 않고 맥주를 비워버 린 시윤은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Always(명시윤) 난 장난이 아니었어. 모두가 진심이었다고. …그냥 지쳤으니까 그만둘래. 뭐 공부나 하지. 뭐. ..... 그래. 그래... 힘들면 죽는 거고.. Kriese(크리스) 울었지? Always(명시윤) 쳇, 눈이 조금 부었다. Kriese(크리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조언 하나 하지. Kriese(크리스) 흔해빠진 말이지만, '시간이 약이다'. 너에 게 베풀어 줄 것은 시간밖에 없구나. Always(명시윤)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Always(명시윤) 너에 대해서는 왜 얘기 안 해? Kriese(크리스) 한가지는 알려주지. Always(명시윤) ? Kriese(크리스) 카운셀러라는 건 말이야. Always(명시윤) 응. Kriese(크리스) 본디 신비로운 법이야. Always(명시윤) ..... 시윤이 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때마다 크리스는 어물쩍 넘어 갔었다. 2년 동안, 일주일에 한번 정도 대화방에서 만 났지만 시윤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동갑이라 는 것 외에는. Kriese(크리스) 시리도록 차가운 밤이다. 외로움을 벗삼아 서 밤을 보내도록. 다음 만남까지 안녕. *** Kriese(크리스)님이 나가셨습니다. Kriese. 어떤 문장의 약자였다. 영어였는데 크리스가 설 명을 해줄 때 듣다가 중간에 포기해 버렸다. '떠오르는 푸 른 별의...'라는 영어 단어의 나열이었는데 정말 신기했다. 크리스는 모든 방면에서 박식하고 어른스러웠는데 그게 시 윤에게는 굉장히 신비롭게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벌써 한달 동안 본적이 없으니. * * * "그래, 오랜만이지." '크리스'는 컴퓨터 전원을 끄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몇 년 째 겪고 있는 감정의 유입. "넌 과연 어떤 사람일까." 크리스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모니터를 부드럽게 쓰다 듬으며 읊조렸다. 아직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알고싶다. "어린아이 같은 녀석……." 언제나 사심 없는 마음으로, 언제나 꾸밈없는 진심으로. 아무 것도 따지지 않은 채, 그저 나눠주기만 하는 아이 "바보 같은 녀석." 1. Game over? 끄응 끄응. "하아. 죽겠다." 한차례 한숨을 내뱉은 시윤은 침대에서 버둥거렸다. 심한 열 때문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시윤은 덮고있던 이불 을 걷어 차며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젠장할, 죽고 말지." 어젯밤에 맞은 비 때문일까. 새벽부터 심한 고열에 시달리 던 시윤은 결국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 있었 다. 가까스로 침대에서 기어 나온 시윤은 약상자가 있는 곳 으로 기어갔다. "어디 보자. 아스피린이." 물도 없이 해열제를 삼켜버린 시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약간은 시끄러운 컴퓨터의 시동음가 함께 윈 도우가 화면에 띄어졌다. -새로온 편지 2개 있습니다. "어라, 누가 보낸 거지?" [야! 나 호영이다. 오늘 학교 왜 안 나왔냐? 담탱이가 졸 라 열 받았더라. 어쨌든, 그런 건 제껴 두고, 오늘 소개팅 땜빵 좀 해라. 시간 널널한 거 잘 아니까 바쁘다고 헛소리 하지 말고, 6시까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로 와라. 안나 오면 각오하는 게 좋을거야. 물론 넌 폭탄 제거용이다.] 빠직. 안 그래도 열이 심하게 나던 차에 아주 불을 붙여 주는구나. 시계를 보니 마침 4시. 정신이 몽롱하고, 약간의 두통이 있기는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나갈 줄 알아?" 이를 북북 갈아대던 시윤은 자신이 갈아입을 옷을 주섬주 섬 챙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끄응, 돈도 없는데… 에이, 씨. 대충 가지 뭐." 대충 나갈 준비를 끝내고는 시윤은 두 번 째 메일을 열어 보았다. 머리를 빗지 않았더니, 자꾸만 눈앞을 가리는 게 영 거슬렸다. 하지만 역시 자르기도 귀찮다고 생각하는 시 윤이었다. 보낸이: Kriese 제목: 알고 싶어? [나다. 오늘 시간 있는지 모르겠구나. 오랫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사람 만나 기를 꺼려하지만-대인 기피증은 아니야-, 왠지 한 번 너라 는 녀석을 한 번 만나보고 싶구나. 시간 있으면 너희 학교 에서 주욱 내려가면 나오는 파파이스로 와.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 시간은 8시 정도로 하고, 가능하다면 답장 줘. 아, 그리고 내가 널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찾을지 는 걱정 마. 너도, 나도, 핸드폰 없는 희귀종 아니냐.] 씨익. 시윤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머금어졌다. 크리스의 의외의 제안에 시윤은 잠시동안 소개팅에 대한 고민을 했지 만 결심은 빨랐다. 일찍 나오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뻔뻔 스럽게도 폭탄 제거용이라니 절대로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 다. "어디 보자. 답장을……." [Okay-. 그럼 있다가 8시에 파파이스 앞으로 갈게. 아, 돈 없다. 밥 사줄 거지?]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급히 일으키던 시윤의 다리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몸이 무거운 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굳이 움직이자면 못 움직일 것도 없었기에 시윤은 해열제 몇 알을 삼키고는 집을 나섰다. * * * -딸랑. 이미 남자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호 영의 친구들이 타원형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었다. 시윤은 머리를 긁적이며 테이블에 다가갔다. "여어, 시윤이 왔냐?" "그래, 어쩌다보니 오게 됐다." 시윤이 귀찮은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을 흔들었다. 평소 호영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기에 이런식으로 불려 나오 는 것 역시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선 보냐?" 시윤이 호영의 쭉 빼 입은 외모를 지적하자 그는 시원스럽 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경 좀 썼지. 오늘은 퀸이 뜬다는 소식이다." 머리를 스파이크처럼 빳빳하게 세운 호영, 붉은 색을 넣은 안경과 역시 붉은 빛이 도는 귀찌, 그리고 깔끔하게 차려입 은 캐쥬얼한 옷이 돋보였다. 이른바 귀공자 타입이었고 시 윤이 매우 싫어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쳇. 싫다고. 절대로 나보다 나아서가 아니야.'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 저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빠지 지 않을 듯 하다. 그리고 더불어서 바람기가 가득하다. 오 죽하면 MC(Master Casanova)라고 불리겠는가. 거기에 같이 나온 친구들도 못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윤보다 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시윤은 기가 죽었다. '젠장, 폭탄 제거는 무슨, 내가 제거 당하겠네.' 어쨌든 시윤은 다른 반인 호영의 친구 둘에 대해서는 신경 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면 자괴감에 빠져들 테니까 ……. "그런데 퀸이라니?" "청빈여고의 퀸이 온 댄다. 아는 친구가 주선해 준 소개팅 인데… 솔직히 놀랐다 ." 시윤은 감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여자 애 들이 모여 있기로 소문난 청빈 여고, 그 중에서도 제일이라 는 여자. 과연 MC 가 움직일 만도 했다. 시윤은 길게 한숨 을 뱉었다. 어차피 그런 일이야 여기 MC-호영이나 관심 있 는 얘기일 뿐이고 자신은 평범하디 평범한 모범적인 평범남 아니던가. "그래? 퀸이 온단 말이지. 오늘 내가 제거 당할 것 같은 데?" 호영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 할 때에 카페의 출 입구가 열렸다. -딸랑. 여자들이 도착한 것이다. 여자들은 한 명씩 차례대로 들어 왔고, 호영은 일일이 그녀들이 올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 다. (B+급, 흐음, 쟤는 아냐.) 마침 호영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시윤은 호영이 작게 중얼 거리는 것을 듣고는 여자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뭐 길게 말 해서 뭐하겠는가. 예뻤다. 하지만 호영의 냉정한 평가에 의 하면 시윤이 사귀었던 여자 중 제일 예쁜 애가 B-급이었다 고 한다. (호오, B++급인데? 하지만 쟤도 아냐.) 으득. 이빨이 갈리는 것을 느끼며 시윤은 급격한 살인욕구 에 시달렸다. 저 정도면 퀸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호 영은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게 아닌가. 이윽고 세 번째 여자애가 들어왔다. '예쁘다…….' 순수하게 나온 감탄성, 예뻤다. 시윤은 저 여자가 바로 그 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이없게도 호영은 역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간신히 A-급이다. 하지만……. 그 소문의 퀸은 아니야.) 이미 그 세 명만으로도 카페에 모든 남자의 시선이 쏠렸 다. 확실히 MC의 소개팅이어서 그런지 특등상품들이었다. 제일 얼굴이 안 되는 여자조차, 시윤이 얼마 전 헤어진 여 자보다 훨씬 예뻤을 정도이니……. (…찾았다! A+급. 특등품이다!) 마지막 한 명이 들어왔을 때, 시윤은 눈을 비볐다. 연예 인? 탤런트?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인의 표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녀와 시윤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윤은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진짜 예쁘다.' 웃고있는 그녀의 얼굴. 시윤은 다시는 여자에게 관심을 두 지 않겠다는 맹세는 이미 잊어버린 듯 넋 놓고 그녀를 바라 보았다.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청빈 여고의 퀸'. 어찌 보면 매우 유치한 별명이다. 게다가 콧대가 높기로 유명해 서 수백 명의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고, 모든 남자를 차버렸 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과장에 과장이 더해진 소문 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마음을 산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런 귀찮은 자리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 었는데…….' 시윤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어째서 그녀가 나왔는 지에 대한 궁금함을 표했다. "야아, 여기야 여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녀들을 보고는, 호영은 손을 흔들며 일어났다. "뭐하냐, 이 녀석들아 손님 맞아야지." 호영은 연신 싱글거렸다. 시윤의 옆에 앉아있는 두 친구는 매우 과묵했다. 굳이 친구를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는 시윤 은 오히려 그쪽이 편했다. 안 그래도 감기 때문에 몸이 안 좋았으니 굳이 활발하게 행동하기도 싫었다. "어머, 어떻게 알아봤어? 얼굴도 모를텐데……."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이미지. 거기에 안경을 써서 그런 지 지적으로 생긴, -호영의 말에 따르면 B+인- 여자가 자 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서로 찾지 못하면 전화 연락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런 미인들을 못 알아볼리가 없잖아?" 호영의 빤히 보이는 아부성 발언에 그녀들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역시 예쁘다는 소리 듣는 건 싫지 않은 모양 이다. 아까 호영이 그녀들의 사진을 갖고 있던 것을 본 시 윤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가벼운 서로의 소개가 끝났고, 시윤은 호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오늘 목표가 '이미라' 맞지?) 그 안경을 쓴 여자애 '미라'. 분명 어디 내놔도 빠질 얼굴 은 아니었지만 비정상적으로 전체적인 수준이 높았기에 폭 탄으로 치부 될 수밖에 없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나머지 여자 애들 이름은 각각 조현 희, 박미애, 휘수연. 그리고 호영의 오늘 목표는 휘수연. 난공 불락의 요새. "흠, 그럼……." 가볍게 분위기를 띄우려고 호영이 헛기침으로 주의를 모으 고 말을 할 때였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수연이 입을 열 었다. "다 생략하고 짝부터 정하자." 갑자기 자신의 말이 끊기자 호영은 당황했지만, 곧 빙그레 웃으며 동의했다. 굳이 이것 저것 따질 필요 없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어떤 식으로 할까?" "짝은 남자가 정해. 대신 짝으로 지명된 여자가 거부하면 그 여자가 택하는 남자는 무조건 짝이 될 것." 매우 불리한 조건이다. 이것은 여자가 무조건 정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조건을 거는지 알 도리가 없는 호영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자신 없어?" 입매를 살짝 올린 그녀는 도발적인 웃음을 지었다. 애석하 게도 호영은 그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아니, 좋아 그대로 하자. 다들 괜찮지?" 호영은 나머지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물론 다들 동의 했고 -달리 거부 할 도리가 없었다.- 시윤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저 녀석,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 들고 있어.' 적어도 시윤이 알기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자가 주도 권을 잡고 호영을 휘두르는 것은. 수연은 자신의 뜻대로 되 자 배시시 웃으며 손을 들어 맨 왼쪽에 앉아있는 호영의 친 구를 가리켰다. "너부터 정할래?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호영의 친구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호영 과 시윤이 앉아 있었다. 한마디로 시윤은 맨 마지막 차례라 는 것이었다. 호영의 친구 두 명은 각각 미라와 수연을 뺀 두 명을 골랐고, 그 여자 둘 모두 선선히 동의했다.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시윤은 볼을 긁적이다가 슬그머니 호 영을 불렀다. 툭툭. (야. 야.) (응? 왜 그래?) 시윤이 호영을 가볍게 두드리자 호영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 다. (혹시 네 친구들도 다 폭탄 제거였냐?) 호영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처음부터 호영은 수연을 꼬실 작정으로 나머지 세 명을 데 리고 온 것이다. 시윤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렸다. 안 그래 도 감기 때문에 열이 심했는데 지금은 아까보다 더 한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둘은 이미 짝을 정했고, 둘은 아직 남아 있었다. 짜고 치 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에 시윤은 속으로 조그맣게 투덜거렸 다. 이제 여자 사귈 생각도 없으니까 폭탄 제거든 뭐든 다 소용 없지만. '여자는 독이다. 여자는 독이다. 여자는 독이다.' "…뭐, 뭐라고?" 속으로 여자는 독이라며 절규하고 있던 시윤은 덕분에 수 연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 다. 그녀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난 그쪽에 앉아있는 시윤이라는 애가 더 마음에 든다고 했어. 한 번 더 말해줄까?" '그래, 어차피 난 차일 운명이었어. 여자는 독이다. 여자 는 독이다. 여자는……?' 속으로 계속해서 절규하던 시윤은 그제야 수연의 말을 이 해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윤이 첫 번째로 사귄 여자 는 그저 그런 첫사랑이었다. 제대로 사귀는 법도 몰랐고,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줄도 몰랐다. 얼마 가지 않아 차였 다. 두 번째는 직접 용기를 내서 고백을 했었다. 역시 사귀 기는 했지만 얼마 못 가서 차였다. 그 때 시윤은 자살소동 을 벌였었다. 그게 막 고1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세 번 째는 여자가 양다리를 걸쳤다. 이때는 칼을 들고 상대방 남 자에게 찾아갔었지만, 공교롭게도 상대방이 싸움을 매우 잘 하는 덩치여서 엄청 맞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윤 은 삼일동안 누워 있었다. 열 두 번째까지 깨지고 또 깨졌 다. 그리고 시윤이 결심 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여자는 독이다. 절대로 믿지 말자.' "파트너 다 정했으니까 그만 찢어지자." 호영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시윤의 얼굴은 완전 히 굳어버렸다. 돌이 되어 버리려는 시윤의 손을 서슴없이 잡은 수연 키득거리며 그를 잡아끌었다. "빨리 안 따라오고 뭐해?" "여자는독이다여자는독이다여자는독이다" 시윤은 수연에게 끌려가면서 계속해서 웅얼거렸고, 수연은 피식 웃었다. "내가 잘 아는 칵테일 바 있어. 거기 가자." 벌써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크리스랑 약속시간이 여덟시인데…….' 시윤은 거세게 수연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시윤의 이상한 물음에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에, 방금 한 얘기 못 들었어? 나가자니깐." 시윤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열이 끓어오르며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감기가 심해진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왠지 놀림 받는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피해 의식인가.' "놀리는 거라면 그만둬." 수연은 웃었다.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 녀는 말없이 시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따스하고 작은……. 그리고 부드러웠다. 1. Game over? 끼익. 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들 이 온 곳은 커피숍이었다. "화아, 대단한데?" 문을 열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갖가지 허브향기와 알싸한 술의 향기가 시윤을 감싸왔다. 실내의 대부분은 나무로 특 색 있게 꾸며져 있었다. 시윤이 살짝 발을 내딛자 나무로 된 바닥이 살며시 울렸다. 실내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오른쪽은 카페, 왼쪽은 칵테일 바(Bar)로 나뉜 상태였다. 수연은 멀거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시윤을 잡아끌었다. "시현 언니! 저 왔어요." 평소에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수연은 바텐더에게 아는 체 를 했다. 시현이라 불린 바텐더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까무잡잡한 하지만 보기 좋은 피부, 매우 큰 키와 늘 씬한 몸매,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시윤은 잠시 시현의 등 급을 매겨볼까 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관두기로 했다. 저 런 여자는 개성이 넘치는 타입이라 등급을 매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쪽은 남자친구?" 흐음, 의외의 인물이야. 바텐더의 미모가 저 정도라니. 등 의 생각을 하던 시윤은 그녀의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굳어 버렸다. '그럼 여자친구인가' 따위의 농담을 떠올리며 긴장 하지 않으려 했지만 몸은 반사적으로 경직 되 버린 상태. "아닌……." 시윤이 쓰게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할 때 수연이 고 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는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남자친구 후보." 적어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시현과 십대 후반의 수연 이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많이 왔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던 시윤은 두 손을 깍지를 낀 채 꼼지락거렸다. '남자친구 후보라니, 누구 마음대로?' 시윤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이 별 로 없어서 그런지 가게 안은 매우 조용했다. 시윤이 이리저 리 시선을 돌리자 시현은 주의를 촉구하려는 듯 쉐이커를 살짝 흔들었다. (쉐이커 :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서 술을 섞 는 도구) "뭐 마실래?" 주문하라는 말에 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 한번도 이런 바에는 온 적이 없었다. 친구들끼리 소주 방이나 그런 곳에는 몇 번 갔었지만 이런 곳은 아예 생각도 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윤은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난 이런 곳에는 처음이라서……." 시윤이 주저하며 대답하자 수연은 배시시 웃으며 메뉴 판 을 소리내어 닫아버렸다. "그럴 줄 알았어. 언니, 주문 받아요!" 시현은 어느새 바 한쪽 끝에 가서 손님에게 칵테일을 만들 어 주고 있었다. 바의 특성상 좌우가 매우 넓은 그녀의 작 업공간 덕분에 몸을 이쪽 저쪽으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뭐 마실 건데? 저번처럼 헛소리하면 아무렇게나 섞어버릴 테니까 똑바로 말해." 약간은 과격한 말투에 시윤은 갸웃거렸다.'도대체 뭘 시키 면 헛소리일까' 수연은 사악하게 웃으며 그의 궁금증을 채 워주었다. "비트윈 더 쉬츠(Between The Sheets)" 시윤은 칵테일의 이름이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시현의 표정을 보고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침대에서…….' 그 런 칵테일 이름도 있단 말인가. "……진짜?" '정말로 그런 이름의 술이 있단 말이야?' 시현은 '나 황당하다'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어왔다. 시윤은 왜 그녀가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알았다 면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보통 비트윈 더 쉬츠는 '침전 주' (잠자리에 '같이'들기 전에 마시는 술)로 마시기 마련 이니까……. 그리고 수연의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더 더욱 시현은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헤에. 농담이야 농담. 언니가 우리한테 어울릴만한 거 만 들어 줘." 우리한테 라니. 시윤은 아직까지 수연의 성격을 도저히 파 악할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장난꾸러기 같은데……. 여자를 기피하려는 마음은 여전히 시윤을 짓누르고 있었다. "흐음, 그래. 알았어." 그녀의 동작이 갑자기 빨라진다. 쉐이커에 보드카와 파인 애플 주스, 그리고 몇 가지 재료를 더 넣고는 재빨리 흔들 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조금씩 가미된 묘기에 시윤은 탄성을 내질렀다. 멋져 보인다고나 할까. 이윽고 공 중으로 던져 올린 쉐이커를 잡은 그녀는 글래스에 얼음가루 를 가득 채워서 만들어진 칵테일을 따라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빨대를 꽂고는 시윤에게 내밀었다. "치치(Chichi), 멋진 남자에게만 주는 거야." 물론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수연의 것을 만들 어 줄 차례다. 수연의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드라이진, 레 몬 주스, 스위트 크림 등을 얼음과 함께 쉐이커에 넣고 가 볍게 흔들기만 하면 되니까……. 금새 두 번째 칵테일은 완성이 되었고 그녀는 유리잔에 칵테일을 따라서 수연에게 내밀었다. "화이트 레이디(White Lady), 하얀 미인에게 어울리는 칵 테일이지." 조명 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칵테일과 수연이 입고 있 는 하얀 옷들은 묘한 매치를 이루고 있었다. 차갑게도 보이 는 그녀의 모습, 그 흰색은 얼음과도 같았다. 수연은 새액 웃으며 칵테일을 받아들고는 살짝 입을 댔다. "으음. 맛있다. 고마워 언니." 시윤도 그때서야 스트로를 빨아들였다. 진한 보드카 향과 파인애플의 상큼한 향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응. 마시고들 있어. 나는 일하러 가야겠다." 이미 한쪽 귀퉁이에 손님들이 와 있었고 시현은 주문을 받 으러 자리를 떴다. "시윤아." 수연은 칵테일 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는 시윤을 쳐다보 지도 않은 채 시윤을 불렀다. 갑자기 어색해짐을 느끼며 시 윤은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응?" '하하 바보 같은 대답이야. 응? 이라니.' "넌 내가 싫어?" "아니." 대답은 무척이나 빨랐다. 시윤 자신도 놀랄 정도로 수연 의 말에 연이어서 대답이 나간 것이었다. 수연은 술의 힘을 빌려는 듯 화이트 레이디를 한 모금 넘기고는 이번에는 시 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사귈래?" '여자에게는 관심 없어'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아쉬워서, 무엇이 좋아서 나 같은 남자를. 그것도 처음 보는 나 같은 녀석에게 그런 말을……. "왜 나랑 사귀고 싶은데?" 놀랍도록 차분한 말투. 시윤의 몸에는 어느새 술기운이 오 르고 있었는지 온몸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머릿속은 더욱 더 차가워졌고 덕분에 그는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놀리는 거라면 가만 안 두겠어.' -Drrrr. 둘의 정적사이로 핸드폰의 벨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살짝 고 개를 숙였다. "미안, 잠깐 전화 받고 올게." 시윤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달려나갔 고, 덕분에 시윤이 상황을 조금 정리해볼 시간이 생겼다. '왜 내가 좋은 걸까? 내가 잘생겨서? 물론 그건 아니야. 그 럼 내가 착해서? 웃기고 있네. 그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여자가 좋아할 만한. 아니 사람이 특별히 호감을 끌 아무런 장점이 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나를 원하 는 거지?' 정리가 되질 않는다. "시윤이라고 했지?" 어느새 시현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덕분에 그의 혼란스 러운 상념은 중단되었다. "예? 아, 예. 명시윤이라고 합니다." "그래? 나는 한시현이라고 해. 너보다 여섯 살 많지만 편 하게 대해." "아, 예." 시현은 시윤의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보석이네." "예. 예?" "아직 세공 되지 않은 원석이야. 탐낼 만 하겠어. 그런데 둘이 며칠이나 만났어?" 시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가게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한시간이요." 이번에는 시현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한시간이라는 말 이 그녀에게 충격을 줬다고 생각한 시윤은 볼을 긁적였다. '한 시간이 이상한가?' "바보 같은 일이네. 그 자존심 센 수연이가 왜……." 시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자리를 떴다. 의아한 마음에 시윤이 뒤를 돌아보니 수연이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아, 미안해. 급한 전화여서……." 이제는 혼란스러웠다. 시현의 말은 시윤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뿐이었다. 갈수록 열이 심해지는 듯한 기분에 시윤은 눈을 감았다. 술기운과 감기기운이 섞여 들어가면서 그는 눈앞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혀가 잘 움직이질 않았다. 매끄럽게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이제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시윤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미 했던 말조차 번복해야하는 것일까. "조금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생각보다 센 것이었는지 다 리에 힘이 빠졌다. 아니 긴장감 때문에 힘이 빠진 것인지도 몰랐다. 시윤은 비틀거리면서 바에서 걸어나왔고 수연은 급 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언니! 계산 나중에 할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 * * -우욱. 뜨겁다. 흡사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뛰어들기라도 한 듯, 너무나도 뜨거웠다. 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 리를 놀렸다. 시윤의 휘청거리는 걸음걸이가 불안하게만 보 였다. '무엇 때문에?'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머릿속의 상념을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두통 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이다. 감기 때문인 것도 같았고, 멋 모르고 마셨던 칵테일이 원인인 것도 같았다. 그 무엇이 원 인이던 간에 두통은 계속해서 시윤의 사고를 방해했다. '이제여자따위는잊기로했잖아무엇때문에고민하는거야어차피 또장난일게뻔하잖아괜히바보처럼상처만받으면서살아가기는 싫잖아그냥피해피하고또피해' 푸드득.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마음속 깊 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꿈틀대는 듯한 그런 느낌이 시윤의 전신을 휘감았다. 무언가 어색한 느낌, 이질적인 기 운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가슴을 뚫고 뛰쳐 나올 것 같은 그런 기운. 그는 모든 것을 바람에 씻어내고 싶기라도 한 듯,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원해? -남자친구야?- 정말로 나를 원해? -남자친구 후보.- 정말로 나를 갖고 싶은 거야? 시윤의 마음속 깊은 곳부터 날아다니던 상념의 한 조각이.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몸밖으로 나올 듯 했던 그 기운이. 급 격하게 잠들었다. 시윤이 마음을 다잡는 그 순간에……. 시 원하게 부딪혀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던 시윤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몸을 멈추고 시원한 대기를 느꼈다. 열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술기운이 날아간 건가.' 마음을 정리하고자 길을 걷던 시윤의 시선이 길가에 있는 상점의 시계에 꽂혔다.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윤 은 뭔가를 잊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려 보다가 누군 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기억속에 묻었다. "시윤아! 기다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윤에게 다가왔다. 수연은 시 윤의 전력질주를 따라잡지 못하고 간신히 쫓아온 것이다. 얼마나 왔는지 바(bar)에서는 꽤나 먼 '파파이스' 앞이었 다. * * * 파파이스의 2층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단 한 명만이 쓸 쓸한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조명 바로 가까이에 앉은 탓인 지 창가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단촐하 게 커피 한 잔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던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보……." 외모는 알아볼 수 없는 여자였지만 목소리만은 좋았다. 아 니 신비롭다고 해야하나? 알 수 없는 맑은 울림이 그녀의 목소리에 섞여 있었다. 그 음성에는 작은 분노가 어렸지만 특유의 아름다움은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바보 같은 녀석."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투시를 위한 수인. 원래 그 녀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막대한 양의 기억이 물밀듯이 쏟 아져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강한 능력을 더 욱 증폭시키기 위해서 어지럽게 손을 교차시켰다. "도대체 뭘까……." 그녀의 손은 창 밖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시윤을 향해 있었 다. 투시대상은 바로 시윤! 그녀는 본연의 강한 투시력에도 불구하고 시윤의 대해서 아직도 많은 양의 정보를 얻지 못 했다. 상념에 잠겨있던 여자는 갑자기 표정을 싸늘히 굳히 며 시윤을 부축하는 수연을 노려보았다. "후회하게 될 거야." 살짝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내가 나서는 건 무리였나." * * * 술 취한 사람인 냥, 아니 정말로 술에 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시윤을 수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부축했 다.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행동이었지만, 제정신 이 아닌 시윤이었기에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휘수연이 남자를 부축했다. 만약 소문이 퍼진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입버릇처럼 한가지를 강조하고 다녔다. -나에게 부족한 남자는 필요 없어. 그리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던 타 학교 남학생들은 -개 중에는 킹카라고 불리는 녀석들도 여럿 있었다.- 그녀의 마 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했고, 자격 미달이라는 이유로 실연 당했다. 자세히 알고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윤도 대충 소 문은 들었던 터라 지금 상황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을 것이 다. 앗차! "…지금 몇 시지?" 심하게 갈라져서 새어나오는 목소리. 시윤은 파파이스 앞 에서 망연히 서 있다가 자신을 부축하는 수연을 뿌리쳤다. 수연은 쓰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천하의 수연이 거부당 하다니……. "9시 20분이야. 왜, 일찍 들어가야 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 수연의 질문에 시윤은 아 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당했다는 생각은 들 지 않았다. 시윤은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지나 가 듯이 말했다. "약속 해줄래? 목소리의 어조도 음정도 너무나 무미건조했기에 수연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며시 밤바람이 불 어왔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의 눈 도…… 흔들렸다. "거짓이 아니라고, 약속 해줄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지만 그 내용은 격렬했다. 시 윤은 나름대로 스스로에 대한 도박을 하고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이채가 어렸다. 기쁨의 빛인지, 아 니면……. 수연은 웃고 말았다.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피어 올랐고, 크고 예쁜 눈에는 빛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했다. "약속할게." 사랑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한번만. 단 한번만. 믿기로 했다. 그리고, 또다시 거절당하면. 그때는 포기하리라. 사랑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더불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신뢰를. 그리고 삶에 대한 가치를. 보낸이: Kriese 제목: 오늘. 《오늘 널 봤다. 꽤나 예쁜 여자랑 같이 있더구나. (어떻게 알았냐고? 후훗, 2층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다정스럽던걸?) 녀석, 그렇게 징징 짤 때는 언제고 벌써 새로운 여자를 꼬 신 거냐. 어쨌거나 축하한다. 덕분에 우리의 식사는 무산됐 지만, 또 기회가 있을 테니까 그건 넘어가 주마. 바람이 심 하게 분다.》 그녀는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빠르게 메일을 타이핑했다. 처음으로 직접 보게된 그의 얼굴. 평범하지만 내면에 숨겨 진 보석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꼭 부화되지 않은 천사의 알과도 같은……. <…스키엘.> 2. 또다시 도약. 그리고……. /나를 믿지마. 그 어떤 어둠이 오더라도 널 버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나를 믿지는 마. 그건 그 어떤 불행보다도 커다란 실수니까……./ 끼익. 교실의 문이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개교 이래로 한번도 보수를 하지 않은, 교실 문치고는 드물 게 철로 된 문은 이곳저곳이 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다. '아마, 소문이 잔뜩 났겠지.' 시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실에 들어갔지만, 의외로 어제의 일을 물어오는 친구는 없었다.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는지 휘수연과의 일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시 윤은 살았다는 듯 한숨을 포옥 내쉬며 창가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명시윤." 뜨끔. 목소리의 주인공은 호영. 시윤은 딱딱하게 굳은 표 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호영이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어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솔직히 나도 알고 싶다. 시윤은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을 찾다가는 이 내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봐야 믿을 리 가 없었고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키 려는 것은 바보짓이다.- 적당히 둘러댈 말도 없었다. 그래 서 시윤은 간단히 말하기로 했다. "사귀기로 했어."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시윤은 언제나 친구에게는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 주의였다. 비록 몇대 맞더라도……. 융 통성이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시윤의 성격이 너무 정직한 것이었다. "훗, 네가?" 호영의 수려한 얼굴이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여자 관계 에 한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착실한 호영이었기에 시윤은 일 종의 불안감을 느꼈다. "응. 어제부터." 그리고, 덧붙이자면 호영은 싸움도 수준 급이었다. 어디서 전문적으로 체술을 배운 건 아니지만 선천적으로 싸움과 외 모는 언제나 최상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주 먹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지금 나 갖고 장난 하냐? 겨우 너 따위가 무슨 수로? 내 가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서." 젠장. 시윤은 혀를 차며 소리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호영 의 자존심은 심하게 상처 입은 모양이었고 이미 친구에게 말하기에는 심한 내용을 내뱉고 있었다. 시윤은 씁쓸히 웃 었다. 더 이상 말을 해서 뭣하겠는가. 게다가 호영과는 달 리 시윤은 평화주의자였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하 는 심정으로 지은 미소였다. '확실히, 나는 폭탄 제거반이었지만…….' 이런 모욕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퍼어억!" 그리고 호영의 주먹은 꽤나 아프다. 시윤은 그 사실을 몸 으로 체감하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책상들 사이로 처박히고 말았다. 여전히 시윤은 웃고 있었다. 『이제는친구마저버렸어』 "…웃어?" 씨익. 시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왠지 오 늘은 호영을 놀리고 싶은 날이라고 생각한 시윤은 조금 더 그를 도발하기로 했다. "그럼 울어? 하하핫." 『이제는망가질대로망가져버렸구나도대체여자하나 때문에 이렇게많은것을희생하는이유가무엇일까』 원래 친하지도 않은 호영이었다. 시윤은 반 친구들을 적당 히 거리를 유지하며 친분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반면에 호 영은 그 호탕한 성격 -비록 여자 꼬시는 일에는 목숨 걸지 만- 덕분에 친구들이 많았다. "미친……. 오늘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호영이 한쪽 손을 책상 위에 짚으면서 뛰어올라 간신히 일 어나려던 시윤의 배를 걷어찼다. 곁에서는 반 친구들이 차 마 말리지는 못하고 주위에서 수군대고 있을 뿐이었다. 시 윤은 다시 한번 책상들과 함께 넘어졌다. 코에서는 어느새 터진 코피가 쉴새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또다시버림받는다면나는과연무엇때문에살아있는것 일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시윤은 코에서 흥건히 배어 나오는 피를 교복 소매로 닦아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구 경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아무도 시윤을 위해서 나서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 '이래서일까?' 『이래서나는이성이좋았던것일까믿고의지하며나의모든것을 맡길수있어서?』 "하. 아하핫!" 소매로 닦아낸 덕분에 얼굴 곳곳에는 피가 번져 있었다. 섬뜩하게만 보이는 얼굴로 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댔 다. 시윤은 조금씩 지친 몸을 일으켰다. 호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시윤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질투가 나냐? 부러워?" 조그마한 웅성웅성. 갑자기 내뱉는 시윤의 말에 모두들 당 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얌전하기만 했던, 아니 조 용하기만 했던 시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여자 하나가 그렇게 부러워? 이렇게 시기하며 덤벼들 정 도로?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휘수연한테 목매달았는데." 휘수연. 웬만한 연예인과도 비교가 될 정도로 인근 학교들 에서 인기가 있는 '청빈'의 퀸. 교실의 분위기는 갑자기 싸 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평범한 여학생을 갖고 싸우는 일 이었더라면 충분히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지금까지 시윤에게 조금이나마 우호적이었던 분위기는 이제 경멸로 바뀌었다. "넌 어울리지 않아." 호영은 짓씹듯이 내뱉었다. 시윤도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연은 자신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 려 진짜 미남이라고 할 수 있는 호영이 훨씬 어울렸다. 하 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윤은 뒤틀리는 심사를 간 신히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약자의 행동이다. "응, 나도 알아." 시윤은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피로 물든 그의 얼 굴 가득히 미소가 어렸고 그것은 곧 광기 어린 모습과도 같 았다. 시윤의 대답에 호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려 했다. 어서 헤어지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넘기라고……. "그럼 헤어…"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건 아니야." 그 아이가 나를 원했어. 뒷말은 생략됐지만 교실에 있는 모두는 시윤의 말을 알아들었고, 다들 황당한 얼굴이 되었 다. "그렇다고 버릴 생각도 없어." 『나는언제나그랬다나에게마음을주지않는사람에게는아무것 도주지않았으나나에게한조각이라도호감을베풀어주는사람에 게는모든것을주었었다』 시윤은 다짐하듯 말했다. "난 절대로 버리지 않아." 버림받는 한이 있더라도……. * * 주루륵. 거울에 비친 시윤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입안이 찢어졌 는지 계속해서 피 비린내가 목을 넘어갔다. 대충 물로 얼굴 을 닦아내고 거울을 본 시윤은 실소를 머금었다. 머릿속이 계속 울린다. 물을 강하게 틀은 후에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는 한껏 들이켰다. 입안에 머금고는 몇 번 돌린 후에 다시 내뱉으니 세면대에 분홍빛 핏물이 섞여 나왔다. "…빌어먹을." 두들겨 맞은 온몸이 쓰리고 아팠다. 누구도 말려주지 않았 고 그 후에도 시윤을 위로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치잇, 너무 하잖아. 따갑게 느껴지는 질시 어린 눈초리. 그리고 꼴좋다고 말 하는 듯한 표정들. 아무도, 아무도 그를 위하지 않았다. 호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죽어. 아주 처절하게 뭉개줄 테니까…….' 그리고 몸을 휙 돌려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단지 그 렇게 말한 후에……. 언제나 그랬듯이. 아팠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도 짧은 시간동안 지쳐가고 있 었다. 원래 깊이 친구를 사귀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설마 모 두가 돌아설 줄은 몰랐다. 오른손을 들어서 물에 젖어서 자 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흩어버렸다. 기분이 지독하게 나빴고, 지독하게 슬펐다. 시윤의 눈동자는 자폐증 환자와 같이 흐릿하게 변했다. 시윤은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교실 로 돌아왔다. 교실 안에서는 이미 적의에 가득 찬 클래스메 이트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예 전에 시윤을 바라보던 그런 눈빛들이 아니었다. "세상 진짜 개 같다. 이제는 별 웃기는 놈이 다 여자 꿰어 차고 다니니……." 이제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한때 친구라고 자처 했던 녀석이 낄낄거리며 대놓고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이 미 반의 분위기는 시윤을 밟아버리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 다. 눈이 옆으로 가늘게 째진 녀석은 계속해서 재잘대고 있 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윤을 씹어대고 있었 다. 왕따라는 개념보다도 일본의 이지메라는 말이 더 어울 릴 것 같았다. 지친다……. 주위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앉는다. 그리 고 엎드린다. 귀를 막지는 않지만, 모든 말을 흘려버릴 정 도로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저 새끼 완전히 삐쳤나 본데?" "뭐 어때?" "주제 모르고 설치더니……." '내가? 도대체 내가 언제?' 디리리링. 가벼운 멜로디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책상 에 엎드려 있던 그는 책을 꺼내려고 책상 속에 손을 집어넣 었다. 그리고 곧바로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 이 느껴졌다. 급히 손가락을 빼내었지만 검지 끝에는 붉은 색 핏방울이 맺혔다. '이상하다. 책상 속에 찔릴만한 물건은 안 넣어놨는데?' 갸웃거리면서 책상을 조심스럽게 뒤진 시윤의 얼굴은 핏기 를 잃었다. 속에 들어있던 것은 수십 개의 압정들과 단 한 장의 쪽지. 죽어버리라는 휘갈겨 쓴 메모. 이제는 누가 뭐 래도 부정할 수 없는 왕따였다. 그것도 악질적으로 괴롭힘 받고 있는……. "전부 기상! 어떻게 된 녀석들이 1교시부터 퍼 질러 자고 있냐? 자아, 총 안 메고 온 녀석 있으면 자진신고 한다. 실시!" 교실에서의 총은 교과서를 뜻한다. 지금 교실에 들어온 수 학 선생은 성격 안 좋기로 유명했고, 재수 없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다들 책을 갖고 다니 지만……. "오호, 통재라. 지금 네가 내 수업에 책을 안 갖고 왔다 이거냐?" 애석하게도 책상 속이 싹 비워진 시윤으로서는 어쩔 도리 가 없었다. 오늘 한번 깨지는 일만 남아있는 것이다. 뱀 같 은 외모의 수학선생은 입매를 실룩거리며 다가왔다. 비쩍 마른 몸매에 작은 키, 쥐 같은 얼굴은 치사하다는 인상이 다. 과장된 몸짓을 하며 다가온 쥐 선생의 얼굴에는 비열한 웃음기가 흘렀다. "반항이냐?" "예?, 아, 아닌데요." "책을 왜 안 갖고 왔냐고 새끼야! 반항해?" '이놈의 선생 성격이 지랄 같다더니…….' "실수로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 짜악, 시윤의 얼굴은 왼쪽으로 휙 돌려졌다. 세차게 뺨을 맞아서 그런지 오른쪽 볼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갑작스 런 선생의 행동에 너무 황당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한 시윤 은 그저 뺨을 감싸쥐고 있었다. 쥐 선생을 응시한 채……. "어? 시윤이 책 또 안 가지고 왔어?"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하지만 다 들리라는 듯 꽤나 큰 목 소리- 쥐 선생의 입이 씰룩거렸다. 상습범이란 말이지. "저번에 수학시간 짜증난다고 책 찢었잖아." 다시 자그마한 중얼거림. 하지만 교실은 조용했고 덕분에 그 목소리는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아침에 해장술을 마신다는 게 아예 취해버린 선생은 이미 눈에 보이는 게 없 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아이들이 계속해서 부추기자 선생은 시윤의 뺨을 사정없이 날렸다. 처음에는 손으로만 때리던 것이 결국에는 구둣발과 주먹까지 섞어가며 구타했다. 그러 나… 아.무.도.말.리.지.않.았.다. 아픔보다도 눈물이 앞섰다. 재수 없다면 재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만취한 상태의 수학선생에게 걸렸으니 까……. 그것뿐이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겠지 만…….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수업시간은 끝났다. 복도에서는 다 른 반 녀석들이 시윤의 반 앞에 와서 그를 보면서 수군대고 있었다. 이미 수연에 대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것이다. 모든 수업시간이 끝날 때쯤 시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체육시간에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교복 상의는 완 전히 걸레가 되어있었다. 바지는 그나마 무사했고, 책가방 속에 들어있던 내용물은 싹 비워져 있었다. 가방 속에는 쓰레기 더미가 들어있었다. 지친다. 쓰레기를 비우고는 가방에 걸레가 되 버린 교복 상의를 넣 고 시윤은 교문으로 향했다. 이제는, 너무도 피곤하고 힘들 어서 아무것도 신경 쓰기 싫었다. 교문 앞에는 웬 여자아이 가 서 있었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쓰기는 했지만 몸의 굴곡으로 보아 여자였다. 청바지와 민 소매 셔츠, 그리고 그 위에 남방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꽤나 매력 적이었다. '여자가 학교 앞에는 웬 일이지?' 궁금한 것도 잠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시윤은 살 짝 여자를 피해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여자는 시윤에게 다가왔다. "보고싶었어."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버렸다. 길고 가느다란 검정 색 머리칼들이 주르륵 흘러 내려왔다. 태양 빛을 반사시키며 새까맣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부드럽게 웃 음 짓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어제 만났지만…말야." 그녀의 웃는 얼굴은 너무나도 새하얗게 시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걸로 된 걸까.' 시윤은 씁쓸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어둠이 새카맣게 밀려 오고 균형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쓰러졌다. 『후회할거야너도나도결국에는후회하면서헤어지게될거야』 * * 푸드득. 새의 날갯짓 소리? 아니야, 달라. 그럼 무엇일까. 조심스 레 눈을 떠보았다. 너무나도 푸른 하늘과, 너무나도 공활한 공간. 오로지 하늘만 존재하며 그 어느 곳에도 대지는 보이 지 않았다. 푸른 하늘 속에서 나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존재도 날고 있었다. '울지마.' 깨끗한 하얀색 날개. 그리고 백금 색의 머리카락, 아름다 운 얼굴.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보기 극히 어려운 분위기를 지닌 그녀가 내게 의지를 전했다. '울지마. 넌…….'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그 존재는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아 니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흐릿해져 간다. '넌……' * * '널 다시…….' 따뜻하다. 시윤은 부드러운 베개의 감촉에 얼굴을 비비며 몸을 뒤틀었다. 그런 시윤의 몸을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자 좋았던 기분이 살짝 망쳐졌다. 젠장, 누가 창문을 열어 놓 은 거야? "일어났어?" '……!' 조용하고 부드러운, 듣기 좋은 목소리다. 시윤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생글거리는 얼굴. 잡티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 어찌 보면 선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붉은 입술이 매혹적 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벤치 위에서 수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꿈이구나." 몸이 안 좋아서 현재의 상황은 개꿈이라고 단정지은 시윤 은 눈을 감으며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갑자기 수연은 고양이 웃음을 지으 며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들려는 시윤의 얼굴 쪽으로 입술 을 가져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달콤한 샴푸 향이 느껴졌 다. '가만, 꿈에서 냄새도 나나?' -쪽. 입술에 느껴지는 짧지만 부드러운 감촉. 시윤은 다시 눈을 떴다. 아무래도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수연의 얼굴 은 시윤의 얼굴에서 불과 10cm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숨결 이 시윤을 간지럽게 했다. "저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이거 꿈이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꽤 큰 웃음소리였지만 경박하다 는 생각은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시윤의 기분까지 즐거워 졌다. 그 때 시윤은 수연의 무릎에서 굴러 떨어졌다. 수연 이 몸을 확 일으켜 버린 것이다. "정말 너무 한다고 생각 안 해? 남자친구라고 학교 앞에서 기다려 줬고, 갑자기 쓰러져서 놀이터로 데려와서 무릎베개 까지 해서 재워줬어. 그리고 예쁘게 뽀뽀도 해줬는데 고맙 다는 말 한마디 없고, 쳇. 재미없어." 막힘 없이 나오는 그녀의 말. 시윤은 당황한 나머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흥, 흥. 너무해, 너무해. 내 입술을 내준 것도 처음이라 서 무지무지 떨렸는데 재미없어. 무드 빵점. 흥!" '첫 키스?' 시윤이 수연의 소문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그중 그녀와 사귀었다는 남자에 대한 소문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첫 키스라니 놀랄 수밖에……. 비록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전혀 떨리는 것 같지는 않던데…….'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시윤은 뭔가 뜨뜻한 것이 입가를 흘 러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자다가 침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그는 소매로 입을 훔치려고 했지만 수연이 먼저 보고 말았다. '젠장 이미지 구기네.' "입이 왜 그래? 입술이 찢어졌잖아!" 그녀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서 시윤의 입에 가져다 댔다. 아플까봐 닦아내지는 않았고 피가 멎도록 입가에 계속 대고 있었다. '젠장, 잘도 때렸군. 얼굴엔 상처 하나 없는데 입안이 터 지다니…….' 역시 '꾼'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시윤이었 다. 실제로 외견상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교복 안에 감춰진 시퍼런 멍들과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었 다. "왜 그래? 어디서 다쳤어, 안 아파?" 안 아플 리가 없다. 하도 맞아서, 아파서, 지쳐서 기절상 태까지 가버린 시윤이 아니던가. "괜찮아. 그보다 어쩐 일이야?" 이틀만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하는 수연을 보고는 시윤 은 씁쓸히 웃었다. 학교에서 당했던 일들이 떠오르자, 그녀 에게도 왠지 불쾌감이 치밀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데 에도 약간의 퉁명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보고싶어서.' 짧아서 좋군. 그리고 그녀는 귀엽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재잘재잘 말하는 게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왠지 기분 나 쁘다. "내 남자 친구인 거 알면, 내가 아는 애들이 잘 대해줄 것 같아서. 라고 생각하고 오기는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나 한테 다들 차인 애들인데 오히려 앙심품고 덤빌지도 모르겠 어. 그래서, 조금 위장을 하고 왔지." 불쾌감. 다시 떠오르는 불쾌감. 이미 퍼진 소문 덕분에 시 윤은 엄청나게 깨졌다. 내일도 모레도 같을 것이다. 호영이 반 아이들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은 변함 없이 당할 것이 다. 이 녀석이 왠지 좋아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낭군 님. 배 고프실 텐데 저녁 먹으러 가자. 벌써 6 시 반이야. 너 한시간이나 자더라. 공부하느라 힘들었나 봐?" 수연은 활발한 모습으로 시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좋아지지를 않는 거지? 이질감, 불쾌감, 위화감? 모 르겠다. 하지만, 왠지 다르다.' 결론은 '에라 모르겠다!'였다. * * 둘이 간 곳은 중국집이었다. 다만 황당하게도 가게 앞에는 붉은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가 손님을 받았고, 호화찬 란한 입구에 걸맞게 실내 또한 정말 고급스러웠다. "여기 비쌀 것 같은데……." 수연이 이 집에서 잘하는 음식이라며 이미 몇 가지를 시켰 을 때에 시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학생 신분 으로 올만한 곳이 아니었다. 신분이 아니라 경제력이 우선 시 되기는 하지만, 역시 시윤은 그럴 돈도 없었다. "괜찮아, 그렇게 안 비싸. 우리 서방님이랑 맛있는 저녁 한끼 먹으려는데 뭐."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대사도 저 정도 미모에서 나온다면 예술이다. 감동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시윤은 초조한 듯 눈만 깜빡였다. '돈 없는데…….' 언제나 여자와의 만남에서 계산은 남자가 하는 게 몸에 굳 어버린 시윤은-덕분에 용돈이 남아날 날이 없다- 지갑 안에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에라 모르겠다.' * * "일은 어떻게 됐어?"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크리스(Kriese) 였다. "예, 아가씨. 보고서 작성 끝났습니다." "책상 위에 놔두고 나가요." 말끔한 세일즈맨으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보다 열 살은 어 려 보일법한 여자에게 절도있게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그 녀는 보고서를 펼쳐 보았고 곧 인상을 찌푸렸다. "모델?" 자잘한 신상명세를 뺀 보고서를 요약하면 이렇다. 휘수연 - MR엔터테인먼트 전속 모델. 가명을 사용하고 활 동 중. 남자와의 친분은 거의 없는 듯 하며, 집안 상태 양 호. 학교 성적 상위권. 인근 학교들에 상당한 유명세를 타 고 있음. 현재 '명시윤'이라는 동갑의 학생과 연인인 듯 보 임. 특이점으로는 부모가 해외에 살고 있기에 혼자 살고 있 음. "치잇." * * 우물우물. 꿀꺽. 냠냠 쩝쩝. 요란하게 들리는 먹는 소리, 몸이 축나서 그런지 엄청나게 먹어댔다. 시윤은 생전 처음 보는 -집안 사정이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고급요리는 처음이다- 요리들에 혀를 내두르며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 었다. "히히, 맛있어?" 생글생글 웃던 그녀는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자, 아- 해봐." 뚝! 열심히 음식을 우겨 넣던 시윤의 움직임이 일순간에 멈춰 버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굉장히 그럴 듯 해 보였다. '쳇, 예전에도 이런 일은 많았는데…….' "아, 아-" 결국은 수연이 집어준 음식을 받아먹은 시윤은 떨떠름하게 웃을 뿐이었다. 서민들이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고, 그렇다 고 중산층이 쉽게 접할 그런 곳도 아니다. 시윤은 그저 얼 떨떨한 기분으로 열심히 식사를 했다. "흐음, 기분 좋은걸." "으, 응?" '젠장, 체할 것 같다고." 입에 가득히 음식을 채워 넣던 시윤은 점점 거북함을 느꼈 다. 물론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 오면서 없었던 일도 아니 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에 불쾌해졌다. 뭔가, 뭔가 어긋났 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아니면 오늘 맞았던 것에 대한 반발심일지도……. "시윤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 보니까 기분 좋아." 예쁘게, 아름답게 미소짓는 그녀. 남자라면 누구나 녹아버 릴 듯한 그런 미소. 살짝 빛나는 그녀의 입술이 매혹적으로 올라갔다. 바보같이 보이는 백치미와 너무나도 요염해 보이 는 성숙함이 공존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예뻤다. '하지만 이상해…….' 시윤은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고 있었다. * * "조작인가?" 시원하게 대기를 가로지르는 음성. 블랙 진과 그에 대비되 는 깨끗한 흰색 셔츠를 입은 남자의 목소리가 은은히 울렸 다. 듣기 좋은 미성의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저희는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대답했다. 골드 블론드 의 머리가 잘 어울렸고, 얼굴은 하얗기 그지없었다. 아름답 다기보다는 성스럽다고 해야 어울릴 듯한 분위기였다. 남자 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연?" 왠지 모를 비웃음이 섞인 말투, 여자는 고개를 들면서 그 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필연, 아니 운명입니다." 그녀의 청색 눈동자는 환희에 차 있었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 물었 다. "저주의 예언에 따르면 절대로 없애야만 한다." 답답한 듯, 한 모금 담배를 빨아들인 그는 탄식하듯 그렇 게 말했다. 하지만 여자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기다렸으니까요. 누가 뭐래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천계에서도 그를 죽이려 들텐데……. 그리고 나도 그래야만 한다. 왕께서는 틀림없 이 멸절의 명을 내리실 것이다." 여자는 웃었다. "영원히 사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225000원 입니다." 시윤은 거의 기절할 뻔했다. 둘이서 먹은 양이 얼마나 된 다고 그런 거액을 부르는지 시윤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설거지 해야하 나.'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수연의 행동을 보고는 더욱 놀 랐다. "여기, 일시불로 해주세요." 담담한 태도로 그녀가 꺼내든 것은 신용카드. 계산을 하던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고등학생이 신용카드를 들 고 다니며 수십 만원의 결재를 한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대, 대단하다." 시윤이 감탄했다는 듯 말했지만 그녀는 혀를 살짝 내밀면 서 웃었다. 짓궂은 표정으로. "다음에는 시윤이가 내야지." "에, 에?" "하하, 나 햄버거도 잘 먹어." 햄버거는 보통 용돈으로도 지불 가능.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수연은 그걸 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왠지 어린 애 같은 성격이었다.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요즘 들어서 한숨이 늘었다. 시윤은 씁쓸히 웃으면서 수연 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남녀. 자신과 수연. 한 명은 평범하고 한 명은 너무나 도 유명하다.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모른다. "자아, 남자라면 집에까지 에스코트 해줘야지." "네, 알아모시죠. 공주 님." 수연은 시윤의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기분 좋다. 남자친구 팔짱 낀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해는 저물었고, 단지 그 자취만이 하늘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이런 경치를 보면 보통 감상적 이 되어 버리는 게 청소년이다. 시윤은 피식 웃으며 수연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녀의 옆 가슴이 닿 는다는 것이 조금 긴장될 뿐……. 시윤은 문득 드는 의혹에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마음에 들었던 남자는 없었어?" "없었어. 한 명도." 너무 확실히 대답이 나와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 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그저 그랬어. 그리고, 시윤이는 그냥 좋았어. 처음 봤 을 때부터 '내 남자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어." "정말이야?" "응, 시윤이는 그냥 마음에 들어." 너무나 행복하다는 그녀의 태도에 시윤은 조용히 웃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조금은 좋아지는 것도 같았다. 거북하던 느낌도 아주 약간 사라졌다. "아, 다 왔다." 이윽고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발걸음 을 멈췄다. 평수도 그리 넓지 않고 가격도 비싸지 않은 아 파트였다. 아까 그녀의 태도로 보아서는 굉장한 집 딸이라 고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물론 그녀가 혼자 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시윤의 판단 착오였다. "여기 앉자." 그녀는 시윤을 아파트 옆 벤치로 이끌었다. 이미 해는 완 전히 저물어서 가로등만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곱 게 포장되어있는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실은 그거 주려고 학교 앞에 간 거야. 그런데 쓰러져 버 리다니 놀랬잖아." 그녀는 시윤의 손에 상자를 쥐어주었다. 시윤은 약간 붕 뜬 마음으로 포장을 조심스레 뜯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쌍의 붉은 루비반지였다. 크지 않은 보석이었지만 아주 섬세하게 세공 되어 있었고, 금으로 된 테에도 정교한 무늬 가 들어가 있었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커플링이잖아. 직접 손가락에 끼워 주는 게 좋을 거야. 음, 내 기분에는 말야." 남자든 여자든 사소한 것에 감동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나 보다. 시윤은 굳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 고, 기뻤다. 물건의 가치를 떠나서,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 주는 것이 기뻤다. "쳇, 가만히 있네. 알았어 내가 먼저 끼워줄게." 그녀는 곱게 놓여있는 반지 중에서 큰 쪽을 집어들고 시윤 의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널…….> 갑자기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기억 속의 흐느 낌. 반지가 완전히 시윤의 손가락에 들어갔을 때, 그 목소 리는 말했다. <널 오랫동안 기다렸어.> "크으. 이게 뭐…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강제적으로 들려오는 목소 리. 혼란스럽다. 그러나 영겁으로 이어질 것만 같던 고통은 금세 잦아들었다. * * "다녀왔습니다." 시윤은 가방을 던지면서 침대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피곤 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다 만 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색 루비반지만이 오늘 있었던 일 이 꿈이 아님을 증명할 뿐……. '바보야, 이 반지 마음에 들어?' '…….' '마음에 안 들어?' '…고마워.' '다행이다. 큰맘 먹고 산 거야.' "시윤아, 밥 먹어라." 시윤의 어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미 저 녁은 먹었지만, 일단은 식탁 앞에 앉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시윤은 어물어물 부엌으로 갔다. "오늘 꽤 늦었구나, 친구들이랑 놀다 왔니?" 시윤의 어머니가 밥을 퍼주며 약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시윤은 안심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걱정 마세요, 앞으론 일찍 들어올게요." "어라? 그거 웬 거냐?" 시윤의 아버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걸어나왔다. 그 가 가리킨 것은 시윤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그, 그냥 샀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묘하게 웃으며 묻는다. "여자 친구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윤, 잘못 걸렸다는 생 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나 그의 아버지는 집요하게 캐 물었다. "그래? 어디 사는데? 동갑이야? 집에 한번 데리고 오지 그 러냐,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텐데 말이야." 시윤의 부모는 개방적인 만큼 장난스럽다. 그래서 언제나 이성교제에 관해서는 환영하면서도 짓궂게 장난을 치는 것 이다. 시윤은 대충 밥을 두어 숟갈 뜨고는 부엌에서 도망치 듯 뛰어 나왔다. "잘 먹었습니다!" "야, 그거 비싸 보이던데, 우리 며느리 부자냐?" 역시 아버지. '이거 비쌀 것 같은데…….' '에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놓은 돈 있어.' '그래? 용돈이 많은 건가?' '그냥 아르바이트하면서 번 거야.' '야아, 대단한데?' '별거 아냐. 아! 맞다. 시윤아 눈 감아봐.' '…왜?' '빨리 감아보라니깐!' '응, 알았어.' 그리고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 촉촉하게 스며드는 그녀. 달콤한 키스였다. 물론 첫 키스는 아니었지만, 그것 이상으 로 기분이 좋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정말 새하얗게 변했 다. <널 오랫동안 기다렸어. …스키엘.> * * <……!> 절규! 애절한 슬픔, 끝없이 퍼져나가는 울부짖음. 그 무한 한 외침을 토해내는 것은 바로 나. 주위의 모든 것이 뭉개 지고 있었다. 망가지고 있었다. <류메리아---!> 그녀는 웃고 있다. 나의 품속에서, 이미 차가워진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웃었다. 왜. 왜 날 원망하지 않는 거야. <…사…랑해.> 수백, 수천의 비겁한 배신자들이 밀려들어오고 있다. 그 들의 눈은 짙은 살기와 광기가 어우러져 빛나고 있다. 그리 고 그들의 중심에 '휴즈', 그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흠? 이유가 알고싶었던 거야?>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되물었다. <형 덕분이야. 덕분에 우리는 되돌아올 기회를 얻었어. 바 보 같은 천사들이 차지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이곳에 말야. 정말 고맙게 생각해.> <비열한 자식.> <우린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저주받은 자들이야, 비열하 다니 너무 당연하지 않아? 아, 형은 그 하얀 날개를 달고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건가?> 그는, 암흑의 군주 '휴즈'는 새빨갛게 웃으며 되물어 왔 다. <스…키엘.> 내가 분개하여 뛰쳐나가려 할 때 류아가 입가에 피를 흘리 며 힘겹게 말했다. 이미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했지만,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멸되었다. 그녀의 진신은 눈부신 입자로 분해되었고, 다시 바람에 휘 날리며 한차례 은빛 바람으로 화해서 사라졌다. <크큭. 형님, 겨우 그런 계집애 때문에 그리도 화가 나신 겁니까?> <크아아아아!> 이미 아무것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운명을 내던지 고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나,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 이 망가지고 말았다. 한차례 날개를 펄럭이며 그에게 날아 갔다. 한 쌍밖에 남지 않은 날개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형은, 당신은 이미…….> <휴-즈! 너만은, 너만은 내가 데려가겠다!> 휴즈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시계 방향으로 돌리며 원 을 그렸다. 검은 빛을 띄는 하나의 구가 생성되었다. <나의 왕이 아닙니다. 조용히 사라지십시오. 당신에게 모 욕을 주지 않으려는 저의 마지막 경의입니다.> <웃기지 마!> 그리고 그 암흑의 구는 그대로 나에게 날아왔다. <비록 천사에게 마음을 뺏긴 한심한 바보이긴 하지만 말입 니다.> <<사랑해, 스키엘>> "어떻게 할까요?" 유 회장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책상 위에 얹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연신 볼에 붙어있는 살들이 흔들렸다. "일단 애들을 몇 명 붙여. 그리고 며칠 감시해 봐."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에게 질문을 했던 젊은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 고는 방을 나섰다. 남자가 방을 나가자 유 회장은 소리내어 웃었다. 유쾌하고 탐욕스러운 웃음이었다. 한참을 킬킬거리 며 웃고있는 그의 뒤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무것도 없던 그의 뒤쪽에서……. "없애버려. 빠른 시일 안에." 유 회장은 감히 뒤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 리며 대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나 차가운 기운 에 치를 떨었지만 그는 애써 참아내며 비굴한 웃음을 지었 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흠?" "일은 언제 진행되는 겁니까?" 그는 꽤나 긴장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그에게 질 문을 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일지도 모르기 때 문에……. "궁금한가?" 사라락, 목소리의 주인이 가까이 왔는지 유 회장은 오한을 느꼈다. "곧 시작된다." * * "불안해." 이곳은 한쪽 벽의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넓은 방이었 다. 크리스는 창 밖의 도심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녀의 방은 사무실이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 았기에 굉장히 넓은 편이었다. 대략 50평정도. "바보 같은 녀석은 도대체 왜 연락 한 번 없는 거야." 언제나 컴퓨터를 켜놓고 통신에 접속시켜 놨지만 시윤은 들어오지 않았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시윤은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있는 전화의 버 튼을 눌렀다. -예, 유민수입니다. "몇 명이나 붙였죠?" -다섯 명입니다. "열 명으로 늘려요." -…예.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서 불안한 마음이 커져가기만 했다. 파랗게 빛나는 모니터 화 면만을 바라보며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연락 좀 하란 말야. 바보녀석아." * * 시윤이 눈을 떴다. 역시 이곳은 그의 방이었다. 하지만 이 질감이 들었다. 밖은 아직 싸늘한 새벽이었다. "류…아?" 눈가에 흐르는 한줄기 눈물,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져서 괴 롭기만 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의 말, 그 뜻조 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슨 꿈을 꾼 것 같았지만 역시 기 억나지 않았다. 풀썩, 침대에 다시 누운 시윤은 왼손을 들 어보았다. 반지가 새벽빛을 받아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 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난" <스키엘…….> * * 오늘은 토요일, 지긋지긋한 학교가 4교시를 하는 날이다. 다른 학교 중에는 3교시를 하는 학교도 있다지만 시윤의 학 교는 토요일에 한시간 일찍 수업을 시작하니 다를 것도 없 다. 학생들에게는 수업시간은 그리 관계가 없었다. 끝나는 시간만이 중요할 뿐. "으윽."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시윤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교 실 뒤편에서 시윤은 두들겨 맞고 있었다. 마치 축구공 다루 듯 호영이 연신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제는 몸에 피멍 드 는 일은 아주 관례가 되 버렸다. 시윤의 눈동자는 이제 완 전히 풀려 있었다. 탁한 기운으로 뒤덮인 듯, 아무런 의지 도 갖지 않은 눈은 죽어 있었다. "스트레스 풀릴까봐 두들겼더니 아주 쌓인다 쌓여." 호영은 잔인하게 웃으며 손목을 풀더니 바닥에 엎어져 있 는 시윤의 배를 그대로 찍어 버렸다. "카학." "너 말이야. 정말 건방지다는 생각 안 들어?" 한쪽 발을 시윤의 배에 턱하니 올려놓은 호영은 계속 싱글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 그저 경멸하고 있을 뿐…….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나.' 오히려 익숙했다. 왠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다. 모두가 경멸로 바라보고, 모두가 저주를 퍼부었던 적 이…….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기억 깊숙한 곳으로 각인되는 목소리, 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던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엇인가가 꿈틀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이윽고 하교시간. 힘없는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서는 시윤 에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윤아, 여기야 여기!" 시윤이 시선을 돌리자 수연이 있었다. 시윤은 한숨을 쉬 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학교 앞에 오래 있어봤자 좋 은 소리들을 일이 하나도 없다. 이제는 아주 학교 앞으로 오는 일이 습관이 되었는지 그녀는 아주 태연히 학교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나게 빠르게 소문이 퍼져서 이제는 시윤이 길거리에 걸어다닐 때에도 타 학교 학생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보고싶어했던 건 나만인가? 시윤이는 안 반가워하네." 그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시윤의 손을 꼭 잡더니 다시 방긋 웃으며 시윤을 그대로 껴안아 버 렸다. "착해요. 반지 잘 끼고 다니네?" '이봐, 이봐, 난 교복이야.' 눈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 던 시윤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도 수연의 품은 매우 따 뜻했다. 수연은 시윤의 볼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부드럽다.' 학교에서는 지옥을, 수연과 함께 있을 때에는 천국을 맛보 는 듯한 극단적인 생활. '왠지 너무 익숙해, 낯설지 않아…….' 원인 모를 불안감에 시윤은 수연을 더욱 꼭 껴안았다. 마 치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 * "서서히 눈을 뜨고 있다. 어떻게 할거지?" 시원한 목소리의 남자가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그 에게 어울리는 블랙 진과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가 말하자 치렁치렁하게 긴 머리를 기른 남자가 대답했다. "왕께서 명을 내리셨다. 꼭 각성 시키라고……. 뭐야, 카 엘. 무서운 거야?" 그는 각성이라는 단어에 힘주어서 말했다. 매우 잔혹한 미 소를 지으며. 유 회장에게 나타났던 바로 그였다. 그 말에 카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각성이라니, 화근이 되기 전에 어서 멸해야 할 것이 아닌 가! 정말로 왕께서 그런 명을 내리셨나. 아진." 아진은 그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행동을 멈추고는 싸 늘한 미소를 지었다. "왕께서는 믿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나도 그렇고. 이미 이 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그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재미있지 않겠나." 블랙진을 입은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면에 긴 머리의 남자의 잔인한 미소는 더욱 더 짙어졌다. "이미 수하로 부리고 있는 인간에게 손을 썼지. 곧 각성하 게 될 거야. 아, 카엘은 그냥 놀고 있으라고. 나 아진이 알 아서 할 테니까." * * "그런데 학교 앞에는 무슨 일이야?" 수연은 시윤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낭군 님이랑 집에 같이 가려고." 얼굴을 약간 붉히던 그녀는 시윤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 넣었다. 그리곤 시윤의 팔을 안았다. "팔짱끼고 가자." 더워! "잠깐만, 집에 같이 간다니?" 수연의 말에 시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집과 수연의 집은 분명 학교에서 반대 방향이었다. 수연은 드물게도 진 지한 얼굴이 되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해버렸다. "장래의 시부모님들게 인사드리러 가는거야." "……." 시윤은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꾸욱 참으며 최대한 이 상황을 안전하게 넘길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 봤다. 그리 고 결론은……. '젠장, 죽었다.' * * "안녕하세요, '휘수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버님, 어머님." 생글생글, 수연은 웃으면서 감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 라보는 시윤의 부모에게 큰절을 올렸다. 의외로 시윤은 태 연하게 앉아 있었다. 아니 사실은 굳어 있었다. '신이시여…….' 평소에는 찾아본 적도 없는 신을 찾아가며 기도를 해대는 시윤의 마음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부 모도 마찬가지였다. '여보. 어때요?' 시윤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 였다. 장난으로 데리고 오라고는 했지만 설마 진짜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비록 시윤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시윤 의 아버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역시 속삭이듯 대답 했다. '허락해야지 뭐.' '그렇죠? 애가 참하게 생겼네 그려, 몸가짐도 단정하고 생 김새도 내가 젊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꽤나 곱죠?' '…으, 응.' 시윤은 그의 부모들이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수연은 여전히 살짝 얼굴을 숙이고 수 줍은 듯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동 하나 하나가 시윤 의 눈에 흡사 여우 한 마리를 보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왔다. 이윽고, 시윤의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이왕 이렇게 찾아왔으니까, 허락은 하겠다만……." 시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교제를 허락한다는 말인가? 하지 만 그것은 새삼스러웠다. 이미 몇 번이나 여자에게 차여서 계속해서 본의 아니게 여자를 바꾼 시윤인데, 이제와서 교 제허락이란 것은 조금 이상했다. "예, 아버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는 수 연, 가히 천하일색이요 경국지색이며, 연기 일품이다. 시윤 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표정관리를 위하여 주스잔을 입에 갖다 대는데……. "그래도 졸업은 하고 날 잡아야지?" 시윤은 그대로 유리컵을 깨물어버렸고 주스가 목에 걸려서 심하게 기침을 했다. 더욱 시윤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은 어 머니가 아버지의 결정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표정이었다. "허허, 그렇게도 좋으냐?" '이…게 아닌데.' 수연은 여전히 수줍게 웃고 있다.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 녀를 보며 시윤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여우로다. 정녕 여우야.' "어이쿠, 너희들 때문에 늦겠다. 여보 어서 나갑시다." 짓궂게 웃던 그의 아버지는 시계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시윤이 주위를 둘러보니 큼지막한 여행가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뭐라고 물어보려는 시윤을 뒤로한채 그의 아버지는 가방을 집어들고는 집을 나섰다. "여보, 빨리 나와요." 시윤의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황을 정리해 주며 떠났다. "엄마 아빠, 온천여행가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올 거니까 밥 챙겨 먹어. 결혼기념일이잖니. 수연이도 잘 놀다가렴. 그동안 생활비는 식탁 위에 놔뒀고, 절대로 사고 일으키면 안 된다." "어머니 안녕히 다녀오세요." 수연은 시윤의 어머니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엄마면 우리 엄마지, 왜 니네 어머니냐.' 시윤의 어머니도 금새 나가버렸고, 집에는 수연과 시윤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씨익 웃더니 현관문을 잠갔다. 찰칵, 문에서 나는 잠금음이 굉장히 불길하게 들렸다. 적어 도 시윤에게는……. "나 자고 갈래." '젠장. 젠장. 젠장!' * * 달콤한 헤이즐넛의 향기가 방안에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크리스는 쌉쌀하고 달콤한 커피를 조금씩 입안에 머금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언제나 그녀는 바빴고 이런 휴식시간 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일이 많다기보다는 그녀가 작은 일 에도 성실했기 때문이지만……. -삐익. 책상위에 놓인 전화기에 불이 들어왔다. 크리스는 왼손 검 지손가락으로 버튼을 콕 눌렀다. "무슨 일?" -현재 시윤군을 감시하고 있던 도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한층 높은 목소리로 물 었다. "무슨 일인데요?" -현재 그의 주위에는 저희 쪽 요원만 배치되어 있는 게 아 닙니다. '태성'쪽에서도 손을 뻗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쪽에서 왜?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요?" 태성그룹, 일 처리방식이 비열하고 더럽다고 소문이 난 기 업이다. 그리고 그만큼 거대한 기업이기도 했다. 아마도 크리스의 '아명'을 제외하고는 국내 제일의 힘을 가진 회사 일런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러운 세계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태성의 출현에 그녀는 놀랐다. -모르겠습니다. 계속 시윤군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조사해 봐요. 그리고 그쪽 인원 몇이나 돼죠?" -열 명입니다. "좋아요, 그 정도면 충분 할 것 같아요. 표면적인 마찰은 피하고 그쪽의 의도를 알아 보도록 해요. 언제나 시윤의 안 전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하는 것 잊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서면으로 올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해요." 크리스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끊어졌다. 그녀의 주 위를 맴돌고 있는 시윤을 향한 불안감. 그녀는 입술을 깨물 었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거지?' 그가 좋아서. '말도 안 돼. 난 지금까지 시윤을 한번 밖에 본적이 없 어.' 하지만 투시의 능력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확실한 법. '하지만, 그를 좋아할 이유는 아무데에도 없는데, 왜 이렇 게 가슴이 아픈거지. 이렇게나 날 괴롭히는 건 대체 뭐지?' 그녀는 고민했다. 겨우 재미 삼아 해봤던 통신에서 만난 남자.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에게 왜 이리도 관심을 쏟아 붇는지 솔직히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분노했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다. 그리고 슬프다. "치잇." <…스키엘. 언제 어디서라…도 잊지 마.> * * 수연이 특유의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시윤에게 서서히 다 가갔다. 요염한 그녀의 자태에 시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땀 한줄기에 그는 몸서리쳤다. "나 여기서 자도 되지?" 약간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며 그녀는 눈을 빛냈다. 시 윤의 평소 가치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 었다. 도둑고양이가 쥐를 궁지에 몰아넣고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듯한 눈빛이 수연의 눈에서 반짝였다. '분명히, 내가 남자야, 내가.' 시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절대로 거절해야 한다고 다짐했 다. 빈집에서 남녀가 단둘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버둥대고 있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입술을 살짝 핥으며 요염하게 웃는 여자는 절대로, 절 대로 안 된다. "안 돼, 위험해." "뭐가, 뭐가 위험한데? 내가, 라고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말을 간신히 삼킨 시윤 은 그저 얼버무릴 뿐이었다. 차마 '내가 위험한 놈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그게 다 큰 남녀가 같이 잔다는 건." "나, 덮칠 거야? 어머, 음흉해라.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제는 아예 적나라하게 밀어붙였다. 그 대담함에 시윤은 혀를 내두르며 시선을 애써 창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와서 이제는 시윤의 바로 턱 앞에까지 닿아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난 시윤이 믿는데, 사랑하는데……." <누구…세요?> 사랑한다니,겨우만난지일주일도채되지않았는데도대체왜이렇 게나를좋아하는거야첫눈에반한다는웃기지도않는공식이성립 된다고는절대로믿지않아도대체무엇때문에나에게다가오는거 야! <히히, 저 푼수 같죠? 제 이름은……> 혼란스러운 마음과, 알 수 없는 공명음이 시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직도 시윤은 그녀를 믿지 못했고, 기묘하게 머 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 다. 자꾸만 들려오는 목소리,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힌다. 애 절함. 그것은 애절함. '하지만 익숙해.' 그리고 어느새 시윤은 그녀를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 리지는 않을 거라고. 다시는 믿지 않겠다며 다짐했었지만 또다시 믿게 되었다. "…하지만" 마치 3류 순정 만화책 같이, 아무런 근거도 원인도 없이 그저 믿게 된 것이다. 안 된다고 말하려는 시윤의 입을, 따 뜻한 그녀의 입술이 살짝 가로막았다. 부드럽고, 달콤하다. 촉촉하고 따뜻하다. "읍." 갑자기 입이 가로막혀서 시윤은 작은 신음성을 토했다. 그녀는 조금씩, 하지만 아주 강렬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그 리고 곧 시윤의 입술을 비집고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리 고, 아주 똑똑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누군가의 목소리……. <히히, 제 이름은 류메리아예요. 그쪽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 도 느낄 수 없다. 단 하나, 그녀의 따스함만이 시윤을 감싸 고 있었다. 자꾸만 들려오는 공명음,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낯익은 목소리. 그리고,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 <난 스키엘. 스키엘 다루카.> 그리고, 역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 시윤은 숨이 막혀오 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비단 그녀와의 진한 키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 한 방울이 시윤의 얼굴을 따라 흘러 내렸다. 그녀는 점점 더 집요하게 시윤을 탐했다. <…왜 그래요? 화났어요?> 점점 목소리는 생생하게 들려왔다. 눈물은 쉴새 없이 흘러 내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있었다. 잊었다. 잊고 있었다. 아니 기억해내야 한다. <화내지 말아요. 그래도, 당신 되게 귀엽게 생겼다니까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 애절한 그리움, 애틋한 감정. "류…메리아." * * -회상. 아니, 전생의 기억. 사아아아. 정면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 으며 날아 올랐다. 대기를 가르는 기분은 정말 좋다. 날개 를 한 차례 퍼덕일 때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인 다. 피처럼 빛나는 붉은 만월이 나를 기쁘게 했다. 끓어오 르는 피는 묘한 쾌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마계(魔界)의 경 계지점인 이곳은 폐허, 묘지, 그리고 망자들의 무덤. 바로 우리 저주받은 이들의 집. -쯔즈즈즈즈. 속도를 조금 올리니 약간은 거슬리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바로 찢어지는 공기의 울부짖음. 새까맣게 빛나는 날개들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모든 날개를 접고 단 두 장만을 펼치 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여섯 쌍의 날 개를 모두 펼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모 든 것들이 파괴되니까……. -우오오오오! 붉은 달을 축복하며 울부짖었다.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마계의 주인, 암흑의 군주. 저주받은 천사들의 수장, 그것이 바로 나 스키엘이니까. 나의 외침에, 나의 노 래에 살아있는 피를 흡혈하는 나무들이 그 거대한 몸을 떨 었고, 시체를 뜯어먹는 마계의 새들이 날아올랐다. "어머, 꺄악!" 숲 위를 날아가던 도중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있었다. 그 어떤 녀석이 감히 나의 산책길을 방해한단 말인가. 서둘러 서 속도를 줄이며 숲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는……. "…천사?" 천사(天使-Angel)가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순백의 날개 를 보듬은 천사가. 나와 같으면서도 정 반대의 존재인 천사 가 그곳에 있었다. 흑과 백, 빛과 어둠. "누구…세요?" 겁을 먹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말했다. 은은한 은 빛과 금빛이 조화를 이룬 머리카락과 아름답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우리 저주받은 일족 중에서도 이 정도로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 그렇게나 저주했고, 그렇게나 갈구했던 빛. 그녀는 바로 빛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지?" 마계와 천계 사이에는 결계가 형성되어 있다. 갈 수도 없 고 올 수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온 것이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천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결계 관리를 하다가… 에헤헤. 실수를 한 것 같은데요?" 결계 관리는 분명히 중요직책이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 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급히 그녀의 등을 살폈고 생각 대로 아홉 장의 날개가 곱게 접혀 있었다. 고급 중에서도 고급 천사라는 뜻이었다. '저런 푼수가…….' "카마세이 십천(十天)의 하나인가?" 설마, 설마 하면서 물어봤다. 천계 최고위의 천사 열 명을 일컬어서 카마세이 십천이라고 부른다. 저런 푼수가 그 중 하나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날개는 곧 지위를 뜻한다. 아홉 장의 날개라면 서열 10위안에 충분히 들 것이 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여섯 번째인데요." 젠장, 머리가 아파 온다.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 소개를 하 는 저 얼빠진 천사는 도대체 목숨이 수십 개라도 된단 말인 가. 나는 코흘리개 마족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아주 중요한 정보라도 되는 듯 말했다. "여기는 마계야." 이렇게 설명을 직접 해주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나를 보고도 겁먹지 않는 천사라니, 약간 지능이 낮은 바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확연한 힘의 차이 조차 느끼지 못할리는 없었다. "아, 그래요? 그런데 당신 되게 귀엽게 생겼네요." ……. 존재되어진 이후 처음으로 신을 찾고 싶어졌다. 우 리 타천사(Fallen Angel)는 천사를 매우 증오한다. 그리고 눈에 띄는 즉시 죽여버리는 것 또한 불문율이다. 그런데, 그런데……. "헤헤, 나 푼수 같죠?" 도대체 네가 푼수 같은 거랑 갑자기 내 얼굴을 쓰다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죽일까 생각도 해봤지만 살기가 치밀 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호기심이 일었다고나 할까. 아 름다운 존재, 천사(天使). 흠, 애완동물이나 삼을까. 아랫 것들이 조금 시끄럽겠지? "내 이름은 류메리아예요. 그쪽은?" 이 어처구니없는 천사의 행동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정신지체박약천사 인 듯 하다. "스키엘, 스키엘 다루카." 퉁명스럽게 내 이름을 내뱉고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 시했다. 천사라면 나의 이름을 모를 리 없다. 나는 모든 암 흑의 제왕이니까. 더불어서 천사의 반하는 존재, 타천사의 수장이니까. 역시 그녀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왜 갑자기 노려봐요? 화났어요?" 으득, 이가 갈린다. 도대체 나를 모르는 천사라니……. "화내지 말아요. 그래도, 당신 되게 귀엽게 생겼다니까 요." 갑자기 살기 싫어진다. 날 잊었나요 천년의 윤회, 아픔의 나날들 속에서 당신만을 그렸어요 날 잊었나요 나의 모든 것이었던 당신, 날 잊은 건가요 다시 한번 그대를 찾고 싶어요 그대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어요 날 기억해 줘요 신이 버린다 하여도 그 모든 것이 나를 버린다 하여도 당신만 있다면……. 나를 찾아요 이제는, 이제는 당신을 놓치기 싫어요 3. 추락 (A fall) 『날위해울지마슬퍼하지도마난조금도힘들지않아 그냥곁에있어주면돼』 그 길었던 기다림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영겁의 윤회를 거치고 돌아올지니 등에는 여섯의 빛나는 백색날개를 등에는 여섯의 칠흑 같은 흑색날개를 축복 받은 자와 저주받은 이의 증거를 동시에 받아서 돌아오리라 천년의 기다림으로 그가 돌아오리라 빛은 빛이되 따스하지는 않을 것이고 어둠은 어둠이되 저주받은 어둠이 아닐 터 그것은 모든 것을 무로써 돌리는 절대의 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절대의 증거 모든 것을 멸하리라. 아아, 통곡의 강을 건너서 노를 젓나니 모든 피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울부짖으니 모든 것은 지워지리 그리고 사라지리라 아무도 막지 못하리라 <미쳤어? 너는 천사야. 그것도 모든 빛의 정점인 카마세이 십 천의 일원!> 깜짝 놀란 얼굴을 한 붉은 머리의 천사, 나의 귀여운 친구 윈드미얀이 벌컥 화를 냈다. 많이 흥분했는지 얼굴도 머리 색과 같이 붉게 물들었다. 덕분에 난 웃고 말았다.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그녀는 귀엽게만 보이니까. <그리고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있는 천사(Angel)이기도 하 지.> 나의 대답에 붉은 머리의 천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한 듯한 얼굴로 날 노려보았지만, 역시 귀엽기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끝끝내 참고있던 말을 해버렸다. <그는 저주받은 일족이야.>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사실 많이 상했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히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왜 다들 이해를 못하는 걸까. <디미얀. 신은 그들 또한 사랑하셔. 우리를 사랑하시 듯…….> 그녀는 여덟 장의 날개를 일제히 펼쳤다. 츠-악, 하는 공 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 하얗게 빛나는 날개는 아 름다웠다. 이곳 카마세이의 고위 천사만이 갖을 수 있는 여 덟 장의 날개. 여섯 장 이상의 날개를 갖고 있는 천사는 단 열 명이었다. 날개는 지위의 표시임과 동시에 강함의 표식 이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용서하지는 않으셨어. 명심해, 그들은 어 둠의 일족이야. 그리고, 일천(First Angel)이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윈드미얀이 여덟 장의 날개를 서서히 진동시키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부드럽게 날아오르는 모습이 잔잔한 바람과도 같았다. <페어(Pair)를 맺을 거야.> <뭐… 뭐얏!> 상당히 높은 곳까지 날아 오르던 그녀는 갑자기 균형을 잃 고 떨어져 버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난 웃지 않 을 수 없었다. <미쳤어!> * * -삐이 크리스는 약간 시끄러운 벨소리에 잠이 깼다. 깜빡 잠이 든 사이에 울었는지 눈이 부어 있었다. 그녀는 손거울로 얼 굴을 확인하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들을 닦아냈다. '무슨 꿈이었을까.' 요즘 들어서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기억나는 꿈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고의적으로 지워버린 백지처 럼……. 그리고 그런 날이면 항상 가슴에 뭐가 얹힌 듯 답 답했다. 그녀는 시끄럽게 울리고 있던 전화의 버튼을 눌렀 다. -삐이. "무슨 일이지?" -회의시작 5분전입니다. 크리스는 놀래서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히 회의가 시 작하려면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을 텐데……. '4시 50분. 두시간이나 잤단 말이야?' 그녀는 자꾸만 깨어지는 생활 리듬에 투덜거리며 인터폰을 끊었다. 서류 정리를 미리 해놨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낭패 를 볼 뻔했다. "정신차리자. 크리스. 바보같이 굴지 말자." 크리스는 심호흡을 하며 자기최면을 걸 듯 작게 중얼거렸 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범하고 조금은 못생긴 듯한 그런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그 어떤 남자 보다도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버렸다. 조금은 편안한 그의 얼굴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후우, 그나저나 눈이 부은 건 어떻게 하지. 시윤이 나쁜 놈." 피식 웃으며 그녀는 서류를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나 쁜 놈, 나쁜 놈 하면서도 왠지 즐거워지고 있었다. * * "울지마……." 수연이 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윤은 떨리는 두 손을 들어서 수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가 서로를 꼭 껴안 고 있는 형태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시윤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하지만 오히려 불안한 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 고 있던 힘에는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어디 갔었어, …류아." 남자가 우는 것은 꽤나 보기가 흉하다.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려서 그녀의 어깨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시윤은 조 금씩 떨면서 중얼거렸다. "류아, 사랑하는 나의 류아. 왜, 왜 지금 나타난…거야." 울었다. 천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결국 울었다. 수연 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피식 웃으며 그의 얼굴을 닦 아주었다. 도대체 류아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 다.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시윤은 그렇게 수연 의 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칠 때쯤 수 연이 입을 열었다. "시…윤아?" 새액, 새액 하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계속 흐느끼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 수연은 시윤의 머리를 한대 쥐어 박아줄까 생각하다가 이 내 웃어버렸다. '이 녀석 의외로 바람둥이인가 보네. 하아, 난 뭐가 좋다 고 이런 녀석 따라다니는 거지.' 그녀는 시윤의 얼굴에 눈물자국을 다 닦아내고 소파에 앉 은 채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눈에 슬픔, 의혹감, 그리고 음모가 교차되었다. 이내 결심 을 한 수연은 시윤의 머리를 살짝 들어서 옮겼다. "맛 좀 봐라." 그녀는 입고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옷이 하나씩 떨어지며 눈부신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 역시 모델 중에서도 꽤나 잘 나가는 그녀였기에 가능했다. 수연은 속옷만 걸친 채로 시윤의 옷을 벗겼다. 역시 속옷만 남겨 놓은 채……. 그리고 시윤의 몸에 있던 상처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무, 무슨 상처가 이렇게나 많이……." 몸 곳곳이 너무 맞아서 부은 곳도 있었고 너무 맞아서 살 이 터져 버린 곳도 있었다. 이런 만신창이의 몸으로 아무렇 지도 않게 행동했다는 사실에 수연은 화가 났다. 이렇게나 심하게 맞았는데도 말해주지 않은 시윤에게 화가 났고, 바 보같이 그런 것도 모르고 시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자신 에게 화가 났다. 시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을까 하던 수연은 말해주지 않은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며 조용히 있기 로 마음먹었다. "많이 아팠지?" 당연히 이 상처들은 모두 학교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바로 그녀 때문에……. 수연은 시윤의 상처를 조심스레 매만졌 다. "어째서 이런 상처가 있는지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하던 일은 마저 해야겠지?" 그녀는 정색을 하며 부엌 구석에 있는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술병을 꺼냈다. 거침없는 태도로 병을 딴 수연은 술을 입에 머금었다. 약간의 술을 입안에서 몇 번 돌리고 그대로 삼켰다. 손에도 어느 정도의 술을 뿌려서 자신의 몸 과 시윤의 몸에 묻혔다. "감히 다른 여자랑 나를 착각해? 흥, 두고보라지." 숨이 막혔다. 목을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에 괴로웠다. 결국 시윤은 견디지 못하고 콜록거리면서 눈을 떴다. "에? 얼레? 우이이오?" 시윤의 목을 누르고 있던 것은 팔, 여자의 팔, 가녀린 팔. 즉 수연의 팔. 시윤은 눈을 깜빡거리며 상황파악에 나섰다. '…어버버?' 그리고 굳어버렸다. 수연은 시윤의 품속에서 잠들어 있었 고, 그 둘은 같은 침대 위에 있었다. 그녀의 팔이 부드러웠 던 이유는 맨살이었기 때문이고……. "흐음, 별난 꿈을 다 꾸는군." 시윤의 합리적이고 탄력적인 이성은 현재 상황을 꿈이라고 판단했다. 설마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은 속옷만 걸친 채 같은 침대 위에서 누워 있었고 같이 잠들어 있었다. 게다가 잠들기 전의 기억은 없었다. "…가만, 꿈이 아닌가?" 부드러운 감촉은 여전했다. 적어도 꿈이라면 감촉이 있을 리 없었다. 시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이불을 살짝 들춰보았 고, 역시 둘은 알몸에 가까웠다. "어?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진한 술 냄새까지 느껴졌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시윤 의 눈에 수연의 하얀 살결이 들어왔다. 그리고 당황하여 눈 을 돌리려고 침을 꿀꺽 삼키는 찰라……. "어? 시윤아, 여긴 어디야?" 그녀가 눈을 떴다. "어, 어머?"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비명을 질렀다. "변-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았다. "정말이지, 너무 하는 거 아냐?" 투덜투덜, 수연은 연신 투덜거리며 티셔츠를 입었다. 시윤 은 살짝 그녀를 쳐다보았고 또다시 '변태!'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피했다. "정말이지. 말이야 바른말이지, 도대체가 술을 먹이고, 우 으윽 말만 꺼내도 얼굴 빨개진다. 흥, 순진한 여자 꼬셔서 잘하는 짓이다." '내가 언제 꼬셨냐. 그런 기억 없어!' 지은 죄가 워낙 크기에 시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입으며 연신 빽빽거렸다. 아까 맞은 뺨을 쓰다듬으며 시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 다. '기억 안나. 절대로 기억 안나.' "참나, 맥주도 아니고 양주를 먹이더니……. 늑대, 흥. 맞 아. 늑대야. 남자는 다 늑대라고 들었어. 설마, 설마 했는 데 내 남자친구까지 그럴 줄이야. 믿는 도끼에 발등 콱 찍 힌 기분이야." '그래, 너 잘났다.' 평소에는 애교만 부리던 게 기회를 잡으니까 청산유수라고 생각하며 시윤은 애꿎은 소파만 쥐어뜯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술을 언제 먹었지?' 필름이 처음부터 끊겨 있었다. 기억이 지워지기라도 한 듯 텅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이 나간 이후의 기억이 희뿌옇다. 게다가 상황 증거가 완벽하다 보니 아무소리도 못하고 겁먹 고 있는 시윤이었다. 평소에 양주라고는 입도 대보지 않은 시윤으로서는 황당하고 또 황당할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거야?" 옷을 다 입은 수연은 매서운 어조로 물어왔다. 평소의 실 실 웃으면 시윤에게 매달리던 것과는 달리 표정이 매우 날 카로웠다. 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뭘?" "순결한, 음, 그러니까 그렇게 됐으니까 책임져야 할 것 아냐." 물이라도 마시고 진정 하려던 시윤은 컵에 물이 넘치는 것 도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물은 계속해서 흘러 내려 그의 바지를 적셨다. "어버버?" "부모님한테 이른다? 어머, 그러면 더 빠르겠다. 날부터 잡을 거 아냐." 물통에 있는 물을 전부 바지에 먹여준 뒤에야 시윤은 입을 열 수 있었다. "…살려 주라." 시윤은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싹싹 빌었다. 부모님 귀 에 들어가면? 정말로 당장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 십대의 부부라니 절대로 싫었다. 덤으로 아빠한테 엄청 맞을지도 모른다. '장한 녀석! 하지만 아직 이르다!' "그럼 책일 질 거지?"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했다. 시윤은 그 날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자신의 앞날을 정하고 말았다. "…네." 아주 완벽하게 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수연의 회심의 미소를 미처 보지 못한 시윤은 아주 완벽하게 당하고 말았 다. 전후사정을 알게 된다면 땅을 칠 노릇이었지만 그럴 리 는 없으니까……. 얼마간 시윤은 수연이 '손' 하면 그녀의 손바닥에 손을 올 려놨고, '예쁜 짓'하면 바닥에 구르면서 개 흉내를 내야했 다. …굉장히 비참했다. 시윤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수 연은 곧 그런 장난이 재미없어졌는지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에 가버렸다. "그런데 말이야." 시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려 고 칼질을 하던 수연은 칼질을 하며 대답했다. "왜 그래?" "집에 안 가봐도 돼?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은데……." 그의 우물쭈물하는 태도에 수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칼을 좌우로 흔들면서 시윤에게 다가왔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식칼과 수연의 웃는 모습은 묘한 조화를 이루며 공 포를 자아냈다. "왜, 빨리 쫓아내고 싶어서?" '응.' 백열등 빛을 반사시키며 식칼을 파랗게 빛났다. 그에 따라 시윤의 얼굴도 같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음, 맞아.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 "부모님 안 계시는데?" "……." 약간은 시무룩한 듯한 말투에 당황했다.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는 생각에 시윤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수연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도마 위에 칼을 던져두고 는 시윤에게 다가왔다. "미, 미안해." 하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무표정하게 다가온 그녀는 시윤 을 감싸안았다. 여자로서는 큰 키인 수연은 시윤의 한 손을 들어올려 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외국에 계셔.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보고 못 봤으니까 반 년 조금 더 됐겠다." 후우, 외국에 계셨구나. 시윤은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숨소리를 들었는지 수연은 시윤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쥐고는 눈 높이를 맞췄다. "피힛, 걱정한 거야?" 떨떠름한 끄덕끄덕. 그녀의 목소리는 항상 변한다. 어느 때에는 너무나 따뜻한 햇살처럼, 또는 차가운 얼음같이 그 리고 이렇게 사랑스러울 때……. 그녀는 따뜻했다. <이상한 녀석이군. 왜 이렇게 따뜻한 거지? 역시 우리랑 다른 건가.> 약간의 두통. 또다시 찾아온 목소리. 과거의 아련한 추억 이 떠오르듯 조금씩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그 내용은 항 상 달랐다. 슬슬 시윤은 자신이 미쳤는지 의심해보기 시작 했다.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시윤이 대답을 안하고 주저하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혼자 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난잡한 생 활은 하지 않았어." <히히, 그래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껴안고 있을 거예요?> "남자 집은커녕 친구들이랑 외박해 본적도 없어. 집에서 혼 자 자는 건 이제 싫단 말이야." <넌 이상한 녀석이야.> 왠지 슬프게만 들렸다. 시윤은 그녀의 허리를 더욱 꼭 껴 안았다. 그녀의 향기가, 그녀의 느낌이 좋았다. 행복하다는 기분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그 느낌일까. "…나 안 버릴 거지?" 시윤의 목소리는 떨렸다. 무서웠다. 버림받는 것은 너무나 무서웠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 바로 헤어짐 이었다. 수연은 조용히 웃으며 시윤의 볼을 쓰다듬었다. '…예쁘다.' 순수한 감상.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수연의 얼굴이 눈앞에 서 웃고 있었다. 시윤은 눈을 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녀의 호흡이 느껴졌고, 그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촉 촉한 느낌. '걱정 마, 시윤아.' 들린다. 수연의 마음이. '난 널 버리지 않아.' * * "…이상이 하반기 목표액과… 들이었습니다." 숨막히는 간부회의가 이윽고 끝났고 크리스는 깊게 심호 흡했다. 언제나 빽빽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일을 잘 해냈다. 어린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커피 드세요." 그녀는 비서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자신보다 그녀가 갖다준 커피를 마셨다. 달콤한 헤이즐넛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자꾸 왜 그 녀석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바보같이……." 불안한 마음.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압박감들 덕분에 그녀 는 회의 도중에 몇 번이나 실수를 할 뻔했다. 바보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쉴 수 있 을 때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눈을 감으려 하는데 낯 익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삐익. "무슨 일이죠?" -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시윤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보고하라고 지시해 뒀기 에 연락이 온 것이다. 크리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해봐요." -그 시윤군의 집에서 저번에 조사했던 수연이라는 모델이 같이 있습니다. "시윤이 부모님은요?" -여행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알았어요." 쨍그랑. 그녀는 커피 잔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구멍까지 울분이 솟아오르기에 그녀는 더더욱 화가 났고, 자꾸만 떠오르는 시윤의 얼굴에 너무나 슬펐다. "미워. 정말, 정말 미워."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책상 위에 그대로 엎드려 버린 크리스는 어깨를 떨었다. "정말… 싫어." <나만을 사랑해줘요. 스키엘.> * * "잘먹겠습니다." 시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젓가락을 놀렸다. 부모님이 여행 중이기에 시켜먹거나 대충 차려먹을 생각을 했던 시윤에게 수연의 요리실력은 축복이었다. 낮잠(?)에서 깨어난 시윤은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홉시, 저녁 먹을 시간이다. "오오, 맛있다. 보기보다 요리 훨씬 잘하네?" 그녀는 '보기보다'라는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식탁은 진수성찬이었다. 수연의 요리 실력은 수준 급. 그 도 그럴 것이 혼자 살면서 대충 차려 먹던 것을 어느 때부 터 인가 정성 들여 만들었었다. 스스로 '신부수업'이라고 생각했었다. "음, 예쁜 여자는, 꿀꺽, 보통 요리 못하는 거라고 생각 했거든. 아아, 내가 직접 해먹은 건 돼지 밥인가." 시윤이 워낙 맛있게 먹자 시윤은 히죽 웃었다. 약간은 푼 수 같은 웃음이었지만 나름대로 귀여웠다. "시윤이 밥이나 평생 해주고 살까?" 냠냠.쩝쩝.냠냠.쩝쩝, 에? "컥, 모, 목에 걸렸어." 창백해진 얼굴로 신음소리를 내뱉는 모습을 보던 수연은 피식 웃으며 물을 따라 주었다. 가슴을 두드리며 물을 마시 는 시윤에게 마지막 결정타가 날아갔다. "아이잉. 순진하긴." 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시윤은 마시던 물마저 목에 걸리고 말았다. 수연은 계속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래저래 무 서운 여자라고 생각하며 시윤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피곤하다며 '멋대로' 샤워를 한 수연은 '멋대로' 시윤의 침대에 기어 들어갔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면서 '끼 웅, 끼웅' 소리를 내고 있으니 시윤은 손 쓸 도리가 없었 다. "이리와, 이리와." 침대 옆을 손으로 탕탕 치면서 손짓을 하는 수연은 무척 위험해 보였다. 방금 샤워를 해서 그런지 머리카락에는 반 짝거리는 물기가 묻어 있었고, 볼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혈 기 왕성한 청소년에게는 무서울 정도의 유혹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제스처는 같이 한 침대에서 자자는 뜻이었고, 시윤 은 건전하고 착한 청소년답게 그 방에서 나와버렸다. "치이이잇. 너무해!" 시윤은 뒤에서 들려오는 투정소리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어리다는 생각에 웃음이 계속 나왔다. 엉겁결에 자기 방에서 쫓겨난 시윤은 거실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통신도 오랜만이구나." -끼웅! 끼웅! 수연은 침대에서 개 흉내를 내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 * -회장님, 서류 결제가 삼 일째 늦어지고 있습니다만……. 인터폰에서는 익숙한 부하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던 크리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최 이사한테 넘겨! 다들 바보야? 알아서들 못해?" 그녀는 평소에 한번도 보이지 않던 모습을 몇 시간 째 해 내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얼음 같은 냉정함과, 무 서울 정도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던 그녀는 지금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회장 님 인가가 없으면 통과 불가능한 서류입니다만……. "…무슨 서류였지?" 그녀는 서서히 기분을 가라앉혔다.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감정에 치우쳐서는 회사운영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된다라 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MR 지원 건이었습니다. "MR?" -연예 기획사입니다. 저번에 조사했던 모델의 소속사입니 다. 뿌드득, 이가 갈렸다. 간신히 진정했던 속이 다시 들끓었 다. 그녀는 작고 창백한 주먹을 꼭 쥐고 책상을 내리쳤다. 손의 통증으로 인해서 조금이나마 차분함을 되찾았다. "가능해?" -현재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다만 스폰서가 되 주겠다는 것이니 그쪽에서도 목숨걸고 반대할 정도는 아니겠지요. "알았어. 아침까지 보내줄게." 인터폰은 끊어졌다. 크리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책 상 위에 걸터앉았다. 기다란 생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그녀 는 한숨을 내쉬었다. "치잇. 난 뭐 하는 거지?" -다리링.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가 흘렀다. 그것은 평소에 나던 인터 폰의 벨소리가 아닌, 컴퓨터의 수신음이었다. 크리스는 몸 을 잠시 멈칫하더니 곧 책상 위에서 뛰어내리며 컴퓨터 앞 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기쁨이 어려있었다. 그녀 의 붉고 작은 입술이 살며시 열린다. "오랜…만이야." 시윤이 접속하면 언제라도 신호가 오도록 설정을 해두었던 그녀는 기뻐했다. 보고싶었고, 얘기하고 싶었다. 비록 그녀 가 누구인지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시윤이었지만 그래도 좋 았다. 파란 통신 에뮬레이터가 모니터에서 빛났다. [132] 비공개 (1/2) 연 락 한 번 안 하 는 치사한 놈! Kriese(크리스) *** Always(명시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Kriese(크리스) 왔어? Always(명시윤) 방.. 제목이 저게 뭐야? Kriese(크리스) 사실이잖아. 치사한 녀석. 여자친구 생겼다 고 아예 들어오지도 않아? 너 그러다가 천벌 받아. Always(명시윤) …에휴, 큰일났다. 큰일났어. Kriese(크리스) 응? 무슨 일인데? Always(명시윤) 아, 저번에 수연이 봤지? 걔가 오늘 우리 집에서 자겠다고 빽빽거리다가 지금 내방에서 자고 있어. 숨이 탁 막혔다.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던 얼굴도 굳어졌 다. 듣기 싫었던 소리를 듣고 말았다. Kriese(크리스) 부모님은? Always(명시윤) 온천여행이시란다. 에휴, 간도 커. 덮치면 어쩌려고. Kriese(크리스) 하핫, 많이 밝아졌구나. 꽤나 여자친구가 도움이 되는 모양이네? Always(명시윤) 으응, 그런가. 하기야 얼굴도 저만하면 어 디 내놔도 손색이 없고, 돈도 많..고; 아 이건 농담이야. Kriese(크리스) 멍청한 녀석. 그런 걸로 좋아하는 정도를 따지냐? 너 그런 녀석이야? 갑자기 크리스의 과민반응, 시윤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손에는 예의 맥주 캔을 들고 있었다. 크리스와 대화 할 때 에는 약간의 음료라고 할 수 있는 맥주가 꼭 마음에 들었 다. "이 녀석 안 좋은 일 있었나……." Always(명시윤) 너 무슨 일 있었어? Kriese(크리스) ...... Always(명시윤) ? Kriese(크리스) 좋아하냐? Always(명시윤) 뭐? Kriese(크리스) 좋아하냐고, 그 수연이라는 여자 애를 좋아 하냐고. 단순히 너를 좋아해 줘서, 단지 예쁘기 때문에, 혹 은 돈이 많아서 때문이 아닌. 정말로 좋아하냐고 묻고 있는 거야. Always(명시윤) .... 침묵이 있었다. 시윤과 크리스, 둘은 타이핑을 멈추고는 모니터만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 너머에 있는 서로를 알아 보려는 듯이……. 시윤은 천천히 맥주를 입에 머금으며 생 각했다. 그녀의 목이 바짝 바짝 말라갔다. '정말 좋아하나?' 단순히 날 좋아해 줘서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걸 까. 시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5분 정도 지났을 까. 그는 웃음을 띄고 감았던 눈을 떴다. Always(명시윤) 응. 정말로 좋아해.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 람들도 다 좋아했지만, 이번은 이상하게도 특별해. 연애감 정 그 이상이 느껴져. Kriese(크리스) 그..래? 만약 네 앞에 그녀 이상으로 아름 답고 그녀 이상으로 너에게 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다면? 비겁하지만 솔직했다. 크리스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수연의 외모쯤이야 자신도 커버할 수 있었 다. 재력 또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게다가 좋아하 는 마음이라면 또한 자신 있었다. 다만 시윤의 선택만이 남 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윤은 침묵했다. Kriese(크리스) 만약, 만약 너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 랑하며, 너에게만 헌신하겠다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여자라면? Always(명시윤) 내가 지금까지 어땠는지 안다면 그런걸 물 을 필요가 없을 텐데? 단 한번도 누군가를 버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버림받는 그 순간까지 헌신했다. 그녀의 얼굴에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펐다. 너무 늦게 움직여서 그를 놓친 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분했다. 단지, 지켜주려고, 뒤에서 돌봐주려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 인데 이미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렸다. "아… 아흐흑." 눈물은 우윳빛 피부를 타고 내려와 책상에 떨어졌다. 그녀 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그대로 흐느꼈다. "…흐흑. 정말, 정말… 싫어." 『분해너무나분해저런무심한남자에게마음을빼앗겨버린내가 미워그리고너무나사랑해서또가슴아파하지만사랑할수밖에없 었는걸모든감정을철저히배제하며살아가는방법을배웠지만사 랑할수밖에없었는걸필요없는감정이라고배웠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 * 톡, 또르르르. 가벼운 퍼팅과 함께 공은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 회장은 터질 듯이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면서 웃었다. 살 속에 눈이 파 묻혀서 돼지와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우스운 그의 모습에도 남자는 웃을 수 없었다.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유 회장의 앞에 우물쭈물 서 있는 남자는 굉장히 늙어 보 였다. 적어도 예순은 넘었을 법한 외모였지만, 그는 마치 굉장한 어른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유 회장은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클럽을 들 어서 다시 퍼팅을 했다. 톡, 또르르르……. "그래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그의 말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유 회장은 클럽 을 내려놓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얼굴 가득한 미소에는 탐 욕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유 회장은 겨우 사십대 후반,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아버 지뻘인 노인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이 부들 부들 떨렸다. 그는 애써 화를 삭이며 더욱더 몸을 조아리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나가봐, 귀찮아. 그리고 그쪽 지분은 예정대로 모두 매각 할 테니 그리 알아." 노인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노옴! 못 준다. 절대로 못 줘! 내가 평생에 걸쳐서 만 든 회사를 네 녀석이 그냥 버리려고 해?" 유 회장은 기름진 얼굴에 비웃음을 띄우고 다시 골프 클럽 을 들고 퍼팅을 시작했다. "끌어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 밖에서 어깨가 떡 벌어진 남 자들이 들어왔다. 시뻘건 얼굴로 소리를 지르던 노인은 우 악스러운 장정들의 손에 밖으로 끌려나갔다. "시끄럽군." 영혼이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목소리, 갑자기 스산한 기운 과 함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회장의 여유 있 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버렸다. 언제나 그는 뒤에서 나타 난다. 흡사 그림자 속에서 솟아나듯이. "아, 아, 저 노인네 말이시지요? 저희 회사에 투자를 요구 하고서는 수익금이 없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비굴한 태도,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아 진은 차갑게 웃었다. "없애버려, 그의 눈앞에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여행을 떠났다고 하니 돌아오는 대로." "시작…입니까?" 유 회장의 목소리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계속된 긴장으로 굳어있던 얼굴에도 희열이 떠올랐다. 남자는 유 회장이 아 까 노인을 보던 바로 그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벌레 같은 녀석.' * * -아아아아아 쿵. 쿵. 세차게 맥박치는 심장의 고동소리. 뜨겁다. 쓰라 리고 아프다. 언젠가 손을 데었던 그 느낌이, 살을 갉아먹 는 듯한 그 아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아아아아 비명소리, 그리고 통곡소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모든 빛을 살라먹은 그 어둠 속에서 하나의 불꽃 이 타오른다. 티끌만큼 작은 불꽃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 다. 몸은 미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어둠은 무서웠다. -아아아아아 귀곡성에 살짝 몸서리를 치며 손을 내밀었다. 그 불꽃의 열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어둠은 두려웠다. 그리고, 한순간 불꽃이 호흡을 하듯 잠시 흔들리고는 폭발하듯이 확장되었 다. -아아아아아 지독한 고통, 눈이 타버릴 것만 같다. 너무나도 뜨거운 홍 염의 불꽃이 파도치듯 몰려온다. -아아아아아 비명소리와 울음소리……. 그것은 시작이었다. * * "으으음."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시윤은 간신히 눈을 떴다. 가을에 덥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시윤은 혀를 깨물어 버렸다. 어젯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상황. 다만 수연이 시윤의 박스 티를 입고 자고 있었기에 조금 더 건전 해 보였을 뿐……. 여전히 그녀가 자신의 옆구리에 파고들 어서 자고 있는 것을 보며 시윤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요 즘 들어서 한숨이 참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시윤이었다. "…우우웅." 터억, 그녀가 몸을 뒤척이자 티셔츠가 살짝 말려 올라가서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비록 복부에 불과했지만 그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혈기왕성한 청소년에게는 분명 위험한 장면 이었다. 시윤이 당황하며 눈을 감으려 할 때에 수연은 잠꼬 대를 하면서 몸을 침대 바깥쪽으로 굴렸다. 그리고는 드럼 통 굴러가듯 데굴데굴데굴데굴. "어, 어?" 쿠웅. 아주 부드럽게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얼빠진 얼굴 의 시윤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버버?" 그리고 이어지는 신음소리. 침대 밑에서 수연이 끄응 끄 응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파. 아파파파." 시윤은 겁먹은 얼굴로 침대 옆에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 다니며 아파하고 신음을 흘리는 그녀에게 조심조심 살금살 금 다가갔다. 그런 시윤의 얼굴을 보자마자 수연은 입을 딱 닫았다. 그리고 이상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열렸다. "…내방에는 어떻게 들어왔어?" 이, 이봐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야. "어머, 게다가 옷은 언제 갈아 입혔어? 이거 내 옷 아닌 데? 간밤에 너 무슨 짓 한 거야? 설마 여자 혼자 사는 집이 라고 만만하게 보고 몰래 문 따고 들어온 거야, 아니면 나 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너무 커져서 견디지 못해 빗나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턱이라도 빠진 듯 열린 입을 닫지 못하고 있던 시윤에게 다시 속사포 같은 그녀의 공격들이 이어졌다. "흑흑, 책임져." 어제도 책임지라고 했잖아! "여기… 우리 집인데?" 수연의 긴긴 방해 끝에 시윤은 드디어 하고싶은 말을 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것이고, 어제의 기억도 해낼 것이며, 따라서 매우 무안해 할 것이다라고 시 윤은 생각했다. "어머머? 그럼 보쌈이었어?" 기어코 시윤은 혀를 깨물고 말았다. 황급히 숨을 삼키다가 혀를 씹어버린 것이다. "으으으음." 혀의 고통으로 인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시윤에게 수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었어, 나가 있어봐. 옷 갈아입게." 시윤은 장난감의 기분을 알았다. 지금 자신의 기분이 바로 장난감의 그것이었으니까……. 아니, 애완동물인가. <꿈, 그것은 경고였다.> 화창하고도 화창한 날씨, 이른바 놀러가기 딱 좋은 때였 다. 펼쳐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기만 했다. 시윤 은 창가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귓가 를 간지럽게 했다. 평화롭고 나른한 일요일 오후, 마음껏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시윤은 눈을 감 고 내리쬐는 햇살을 음미했다. '광합성… 역시 안될까.' "시윤아, 나가자." 그의 그런 시도를 단번에 깨버리는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웬 궁상이냐'는 표정으로 온 그녀에게 눈을 돌린 시 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힙합바지와 곤 색 박스 티 를 걸치고 있는 그녀,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수연을 보며 시윤은 잠시 넋을 잃었다. 무엇을 입어도 잘 안 어울 리는 시윤과는 매우 달랐다. "어? …야, 임마!" "임마라니! 숙녀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건 그렇고, 히히 이 옷 잘 어울려?" "으, 응. …예뻐." 분위기에 밀렸다. 저 옷들은 시윤의 아끼고 아끼는 옷들이 다. 물론 평소에 옷이 없다는 것이 한몫 하겠지만……. 그 녀는 잔인하게도 아주 귀엽게 웃어주었다. 이제는 옷 벗으 라는 얘기는 절대 할 수 없다. "아아아, 빨리 밥 먹고 놀러가자. 아니, 아니다. 그냥 내 가 맛있는 거 사줄게." "우리 집에서 숙식 다 해결하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시윤이 한숨 쉬 듯 말하자 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에 사과를 하려했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그녀의 말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래도 돼? 히야, 다행이다. 혼자 사느라고 이것저 것 돈 많이 들었는데……. 덕분에 한시름 놨어. 앞으로 눌 러 살게." "……." 뻔뻔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엇이 그녀에게 있었다. 덕분 에 시윤은 계속해서 충격을 받았고, 아무런 저항도 못한채 그녀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끌려 다녔지. 으음, 뭔 가 불공평 해. 나는 남자라고!' 남성 우월주의적 절규를 소리 없이 내뱉고 있던 시윤은 이 어 들어오는 결정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히잉. 애 생겼으면 어떻게 하지? 흑, 남자는 다 늑대라더 니……." 완전히 돌이 되어버린 시윤은 굳은 자세 그대로 수연에게 '질~질' 끌려갔다. 공처가의 길이 훤히 보이는 시윤이었다. * * "이상준입니다." 이곳은 MR기획의 본사에 자리잡고 있는 이사장의 방이었 다. 무겁게 감도는 방안의 공기가 그 분위기를 실감케 해주 었다. 크리스는 상준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이상준은 바로 MR의 이사장, 이 방의 주 인이었다. "크리스(Kriese) 류(流), 크리스라고 부르세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 에 상준은 얼굴을 붉히며 커피 잔을 들었다. 이미 삼십을 넘긴 나이에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아명의……?" "대주주입니다." 충격은 컸다. 비록 소문으로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존재를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상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국내 최대, 아니 국외에서도 일류로 인정을 받 고 있는 '아명'의 실권자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 라니……. 웬만한 기업은 '아명'의 꿈틀거림에도 크게 반응 을 할 정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상 준은 담배를 꺼내들었다. 한 대 피워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 했다. 아무 생각없이 담배를 꺼내문 상준은 물끄러미 자신 을 쳐다보는 크리스의 시선에 당황했다. "아, 담배 괜찮습니까?" 그녀는 살포시 웃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천사 같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태우세요, 전 괜찮습니다." 상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붙였고, 담배연기를 흘려 보 내며 잠깐 고민을 했다.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오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방문 예고에 놀랐고 충격에 충격을 거듭한 상 준은 조카뻘 정도인 그녀에게 경어를 썼다. 크리스는 지금 까지의 당당했던 태도와는 달리 우물쭈물 용건을 말했다. "…귀사 소속 모델 중에 휘수연이라는 아이가 있습니까?" * * 어둡다, 붉다. 도망가야 한다. 이곳에 계속해서 잡혀 있을 수는 없어. 주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나는 왜 도망가야 하는 것일까? 모른다.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야한다. 푸드덕, 날개를 조금 움직여 봤다. 고통스럽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문이 열려있다. 다행이다. 도망갈 수 있다. 내가 갇혀있던 깨어진 저 유리병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머리만 아프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우오오오오오!" 나의 목소리,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녹아 내리는 피부, 이미 원래의 그것이 아니다. 치밀어 오르는 피를 삼키며 날개를 펼쳤다. 오랜만에 보는 밤하늘, 그 가운데에 떠있는 은은한 빛의 달은 더욱 나를 슬프게 한다. 나를 괴롭게 한다. -촤아악! 원래의 빛을 잃은 채 탁하게 물들어 있는 날개를 펼쳤다. 나를 부르고 있다. 아니, 내가 부르고 있다. 가야 한다. "우오오오오오!" * * 고층의 빌딩, 건물 앞 바위에는 'MR 엔터테인먼트'라고 양 각되어 있었다. "어이어이. 여긴 또 왜 들어가는 거야." 당황한 시윤의 태도에 수연은 씨익- 웃어줄 뿐이었다. 시 윤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 웃음을 볼 때마다 순간순간 여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무슨 꿍꿍이길래…….' 수연은 시윤의 팔을 끌어안더니 매우 다정스러운 포즈로 건물에 들어섰다. MR이라면 꽤나 알아주는 기획사,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 는 사람이라도 이곳에 있는 건가. "쫓겨날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둘이 건물에 들어서자 정면에서 험악하게 생긴 경비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이히히." 수연이 인사를 하자 경비는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또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시윤, 도대체 수 연은 뭐 하는 녀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어, 이제는 남자친구까지 일터로 모셔오는 건가? 그럼 못써." 비록 험악하기는 했지만 전혀 질책하는 얼굴이 아니었기에 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쫓겨나지는 않을 것 같다. "헤헤, 그럼 어때요. 내가 인기 관리할 것도 아닌데." 인기관리, 일터, MR엔터테인먼트. 세 가지 단어로 유추되 는 답은 하나 뿐이었다. 시윤은 놀란 얼굴로 옆에 꼬옥 붙 어있는 수연을 보았다.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으 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나 여기서 일해, 내가 말 안 했던가?" "…일?" "음, 이것저것 모델. 용돈 내지는 생활비 마련으로, 3년 정도 됐을 거야. 음, 맞아." 언제나 놀라는 것은 시윤의 몫인 듯 싶다. 수연은 엘리베 이터에 타더니 7층으로 가는 버튼을 꾹 눌렀다. 시윤이 뒤 편에 작은 지도를 확인해 보니 '이사장실, 촬영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 * "저희 측을 너무 가볍게 보시는군요, 거부한다면 어쩌시겠 습니까?" MR의 이사장, 상준은 약간 불쾌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크리스의 요구는 조금 황당한 것이었고 일방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준의 거친 반응에도 불구하고 끝까 지 웃고 있었다. "거절하신다면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승낙하신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국내 제 1인자의 위치에 있는 아명그룹의 지원, 그것은 너 무나 큰 조건이었다. 단숨에 주위 경쟁사를 물리치고 클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그 조건이라는 것도, 전혀 손해가 없는 것이었다. 상준은 결심했다. 받아들이자.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 쪽에만 이득이 되는 그런 거래는 왠지 의심스럽기도 하군요."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가볍게 웃 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상준은 문 앞까지 그녀를 따라나 섰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살펴 가시기를." 처음에는 새파랗게 어린 여자에게 경어를 써야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그 자체로 위엄 있었다. 아명의 실권자라고 불리기에 조금 도 부족함이 없는 여자였다. 상준은 크리스가 나간 문을 바 라보며 실소했다. "젠장, 어린애한테 애정을 느끼다니 변태가 다 됐군." 그러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띄우고 담배를 한 개피 무는 상준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은 크리스에게 모두 읽혔기에 문을 나선 그녀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크리스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내미는 선글 래스를 받아서 꼈다. 얼굴이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 다고 드러내고 다닐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의 앞뒤를 네 명의 경호원이 둘러쌌다. "흐음, 재미있겠다. 연예인이라……." 흥미롭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크리스는 자신의 꽉 막 힌 생활보다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렇 게 '경호대상의 말은 들어서도 안되고 들어도 못 들은 것이 다.' 따위의 재미없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 다. 쿵. 쿵. 쿵.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맥박친다.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 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조여드는 듯한 이 느낌. -땡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두 명의 남녀가 걸어나왔다. 수연과 시윤이었다. -두근 수연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심장은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비단 그것은 그녀에게 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윤 또한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마 주 보았다. 비록 선글라스로 막히기는 하였지만 그 눈빛은 시윤에게까지 전해진 것 같았다. 반면 수연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감싸쥐었다. 고통. 고통. 아픔. 아픔. 슬픔 -아아아아아아 진한 슬픔과 고통이 물밀 듯이 크리스에게 밀려왔다. '이, 이건 뭐야. 이건 도대체 뭐야!' 밀려들어오는 수연의 감정, 그리고 크리스의 감정과의 교 류, 그것은 영혼의 움직임. 바로 공명! -아아아아아아 『나는너너는나도대체무엇을위하여윤회한것인가그어둠의그 림자와빛의현신으로서의차이는무엇이던가제발내게알려줘너 에게그리고나에게돌아오는그존재의의를알려줘통곡의강을건 너서슬픔의천년을견디고돌아온나는너너는나그것은하나된증 거』 캬아아앗. 잔혹한 혼돈이 그녀들의 머릿속에 폭발하듯 유 입됐다. -아아아아아아 그리고 펼쳐졌다. 접혀있던 기억들이 그 공명을 통해서 펼 쳐지고 말았다. 시공을 꿰뚫고 기억은 빛을 가르고 시간을 갈랐다. * * "날 사랑해?" 열두 장의 칠흑 빛 날개를 쿠션 삼아 누워있던 스키엘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류메리아는 그 날개 중 한 장을 부여잡 고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빙긋 웃었다. "물론이죠. 당연한걸 왜 물어요?"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자신의 날개를 두어 번 펄럭거렸지 만 사실 기분은 좋기만 했다. 스키엘은 코웃음을 치고는 벌 떡 일어나서 류메리아의 가는 허리를 잡아챘다. 따뜻한 느 낌, 어둠의 일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 만 그녀와 같은 존재는 빛의 일족에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더럽고 칙칙한 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 류메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스키엘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그를 자극했다. "그럼요, 어디든지 따라갈 거예요." 스키엘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더욱 주었 다. 날개 밑의 허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늘었다. 스키엘은 이제껏 접고 있던 날개들을 모두 펼쳤다. 순식간에 어둠의 장막이 만들어 졌고, 그것으로 품안에 있는 류메리아를 완 전히 감쌌다. 빛과 어둠은 서로 너무나 상반되는 존재였지 만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넌 신기해. 어째서 이상이 없는 걸까." "…숨막혀요."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매혹적이었다. 류메리아는 가 볍게 스키엘의 가슴을 두드리고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우리 어둠의 일족은 서로를 믿지 않아." 뭔가 더 약속을 받고 싶은 것일까. 스키엘의 투정에 류메 리아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이내 뭔가 결심한 듯 두 손을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모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손에 주먹만한 금빛 구체가 생성되었다. "나 영광스러운 신의 딸, 카마세이 제 6천 류메리아의 이 름으로 맹세하나니." -즈으으으으 금빛 구체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 했다. "천사 류메리아는 어둠의 군주이자, 타천사의 수장인 스키 엘에게 영원히 귀속될 것을." -즈으으으으 "맹세한다." 금빛 구체는 바로 그녀의 영혼이었다. 고도로 집중된 영 혼, 사념, 정신의 구체는 천사로서 무한한 삶 동안 단 한번 밖에 만들 수 없는 천사의 인(Angelic Stamp). 그 이상의 맹세의 증거는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에 조 금씩 빛을 발하던 금빛 구체는 천천히 그 크기를 줄여갔다. 이윽고 손톱 만한 크기가 된 천사의 인은 빠른 속도로 스키 엘에게 날아갔다. "뭐… 뭐야!" 스키엘의 미간 사이로 금빛 화살이 밀려들어갔지만 고통은 없었다. 류메리아는 힘이 쭉 빠진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천사의 인'. 그냥 선물." 영원한 삶 속에서 단 한 번밖에 만들 수 없는 것일 뿐 ……. 그것은 천사들 사이에서는 목숨을 맡길 정도로 사랑 하는 연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단 한 번 밖에 생성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 가치는 뛰어났다. "일종의 페어링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둬요." 그녀는 웃었다. 참 웃는 모습이 어울리는 천사였다. 바람 이 한차례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휘날리는 그의 검은 머리 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마에 은은한 금빛의 문양이 자리잡고 있었다. * * 영겁과도 같은 시간, 비록 한 순간이었지만 둘에게는 무섭 도록 긴 시간이었다. 겨우 공명이 끝났다. 크리스는 비틀거 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갔다. 시윤의 시선은 잠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스르륵. 문은 닫혔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녀가 그토록 질투했던 수연은 바 로 자신의……. "괜…찮아." * * "괜찮아. 걱정하지 마." 수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기에 시윤은 간이 의자에 그녀를 앉혀놓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시윤은 크리스의 모 습을, 정확하게는 그 느낌을 떠올렸다. 뭐였을까. "이거 마시고 좀 진정해." 시윤은 진심으로 수연을 걱정했다. 창백해진 얼굴에 붉은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수연은 차가운 캔 음료를 한모금 들이키고는 조금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숙녀에게 그런 것 묻는건 실례야." 수연은 그렇게 톡 쏘아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을 찾 았다. 비릿한 피냄새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여러번 피를 뱉 을 뻔 했지만 시윤이 걱정할까봐 참은 것이다. "하아악, 헉." 검은색 외제 승용차, 차 유리는 선팅 되어 있어서 안이 전 혀 비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크리스는 고통에 몸부림치 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운전기사의 걱정스런 물음에 크리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며 손을 내저었다. 간신히 창밖을 둘러보니 앞뒤로 경호차량 이 따라 붙어 있었다. 그녀는 이 거창한 행렬에 스스로를 비웃었다. '예전에는 이 모든 것이 나에게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 는데…….' 흡사 대통령 행차라도 하듯 대규모의 이동. 웃음이 나왔 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대한의 재력을 지니고 있기에 아 무 것도 부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집으로… 카학, 허억. 집으로 가요." 주르륵, 목을 거슬러 올라온 피가 터져 나왔다. 흰 손수 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내 손수건마저 붉게 물들어 버렸 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흔들 리고 있었다. "치잇, 그런 녀석 싫어. 끄윽. 흑……." 눈물, 분함, 괴로움, 혼돈. 겨우 한 남자 옆에 있는 게 부 럽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도 싶었다. 수연이라는 여자는, 크리스에게 너무나 많은 충격 을 주었다. 지독한 공명. 읽으려 하지도 않았는데 밀려들어오는 사념 들. 정체성의 흔들림, 하마터면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뻔 했다. 영혼이 흔들리는 듯한 그 느낌에 미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아…흑흑." <날… 잊지 말아 줘.> * * 같은 시각, 수연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폭발하듯 섞여버리는 감정의 회오리 속에 서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너와 함께 할거야. 언제 어디서라도…….> 여자의 목소리, 마치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듯 귓가에 스치 는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연 은 귀를 막아보았지만 여전히 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연아, 수연아. 괜찮아?" 멍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는 수연을 울상이 된 시윤이 조 심스레 흔들었다. <슬퍼하지 마, 스키엘.> 목소리는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잦아들었다. 환청처럼 들려오던 음성과, 끝없이 그녀를 괴롭히던 감정의 소용돌이 는 조금씩 진정 되었다. 그녀는 지친 눈을 들어 시윤을 바 라보았다. 한결 몸이 편해진 것 같다. "시윤아." 수연은 문득 입을 연다. 목소리는 살짝 갈라졌다. 귀엽게 만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애처롭게 변해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그리고언제나네곁에있을거야.』 그녀는 애써 웃음지었다. 시윤을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이 었지만 조금 기분이 좋기도 했다. 아플 때 자신을 위한 누 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시윤은 너무나도 그녀에게 완벽한 존재였다. 분위기 가 너무 가라앉았으니 조금은 농담도 필요하겠지. "히힛, '미인박명'이래. 시윤이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이 쁜 마누라 때문에." 시윤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곧 씨익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속 빈 강정이라는 말은 아냐?" 그리고는 앉아 있던 수연의 손을 당겨서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럽게 힘을 주자 수연은 시윤의 품에 그대로 안기는 꼴이 되었고, 시윤은 두 손을 그녀의 등에 감싸 안았다. "…따뜻해." 칫, 눈물날 것 같잖아. 수연은 눈을 깜빡이며 눈물이 맺히 려는 것을 안간힘을 써서 막았다. "어이 거기, 여기는 연애 장소가 아니야!"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시윤이 눈을 돌리자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지 저분해 보이는 옷, 거기에 더불어 입을 쩍 벌리며 하품까지 하던 그 남자는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휘익, 멋진데. 잠시만 그 자세로 있어봐." 시윤이 뭐라고 대답할 여유도 없이 그 남자는 둘의 옆으로 가서 카메라를 잡았다. 시윤의 옆모습과 수연의 얼굴이 확 실히 드러나는 구도였다. 게다가 둘은 포옹을 하고 있는 상 태였으니……. "아앗, 안 돼…" -찰칵 "…요." 남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다시 목에 걸 었다. 시윤과 수연은 급히 떨어졌지만 사진은 벌써 찍힌 후 였다. "호오, 최고 인기인 수연이가 남자친구를 회사로 끌어들였 단 말인가. 꽤나 술렁거리겠는걸?" 껄껄거리며 웃는 그 남자의 말에 수연은 얼굴을 붉게 물들 였다. "아저씨는 왜 함부로 사진을 찍어요!" 시윤은 괜히 무안해져서 화를 냈지만 그 남자는 요지부동 이었다. "자고로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고, 폼을 보아하니 둘은 예비 부부로 간주해도 될 것 같았지. 그리고 난 수연의 사 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지. 그럼 결국 찍어도 된다는 거 잖아." 그렇다. 그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아, 글쎄 필름 내놓으라니까요." 어느새 시윤은 사진사에게 달려들었고 수연은 무안한 얼굴 로 눈을 깜빡이며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이래서 미인은 안 된다니까……." 마침 자신의 방에서 나오던 상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남자아이와 괴짜로 불리는 사진작가가 다투고 있는 것 이었다. 게다가 옆에는 수연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서 있 었다. "필름 빨리 내놔요! 초상권 침해예요." "글쎄 괜찮다니까." 상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유명현 씨." 둘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괜히 무안해서 덤비기는 했 지만 시윤으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기에 굉장히 어색했다. 명현이란 이름의 사진작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었다. "하핫, 거 있잖수. 그거, 그거 때문에." 앞뒤 상황에 맞지 않는 엉터리 화법. 상준은 얼렁뚱땅 넘 어가려는 명현의 태도에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괴짜이긴 해도 능력은 있으니 그냥 눈감아 주기로 했다. "아차차, 오늘 수연 양 촬영이 있었지? 어서 가자구. 오늘 은 용케 펑크 안 났네." 이틈에 빠져나가려는 생각인 듯 그는 수연의 팔을 붙잡았 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른 도망가려는 그의 태도에 시 윤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 때 수연의 눈이 갑자기 커졌 고, 그녀는 멋쩍은 듯이 중얼거렸다. "맞다. 오늘이었지. 까먹었었네. 시윤이랑 그냥 놀러 온 건데……." 다시 사색이 되는 명현의 얼굴, 털털한 외모가 삼십대의 산적 같은 용모였지만 하는 짓은 꼭 어린애 같았다. 그런 명현을 보며 수연은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란. "나중에 찍으면 안돼요?" "…한달 미룬 거 알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하는 명현의 모습 덕분에 아무 대꾸 도 못한 수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안 올걸 그랬다.' 이쯤에서 상준은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어차피 미리 못박 아 둬야 할 얘기도 있었으니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 다. "그럼 수연이는 사진 찍고 있어. 남자…친구? 아, 맞나보 군. 남자친구는 내가 구경시켜주도록 하지." "차 한잔 어때?" 상준이 시윤을 데리고 간 곳은 이사장실 이었다. 시윤은 약간 머뭇거리는 태도로 그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깔끔 하고 지적인 인상의 상준이었지만 왠지 호감이 가질 않았 다. "커피 주세요." 곧 그들 앞 테이블에는 비서인 듯한 여자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시윤은 태연한 태도로 각설탕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용건이 뭐죠?" 멍청하게 생긴 녀석이 의외로 눈치는 빠르군. 상준은 살짝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달콤한 원두의 향이 그를 즐겁게 했다. 설탕도 크림도 없이 커피 본연의 향을 즐기는 것이 그의 취향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겠지?" 시윤은 그의 차가운 어투에 피식 웃었다. 이런 건 만화책 에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 묻지 마세요. 수연이한테 직접 말하시죠?" 원래의 성격은 이렇게 도발적이지 않았다. 시윤은 그동안 참 많이도 변했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티 타임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싸늘한 분위기였다. "앞으로 그 아이는 우리 쪽에서 최고의 스타로 키워낼 생 각이다. 헤어지는 게 수연이한테 좋다는 것은 너도 알리라 믿는다." 게다가 어울리지도 않고 말야. 상준은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사실이었다. 시윤과 수연은 대조적이었다. 어떻게 저런 남자를 수연 같은 여자가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 았다. 아무리 십대의 감수성이라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수연이가 스타가 되고 싶다고 한번이라도 하던가요?" 이제는 공격할 차례다. 멍청하게 여자 빼앗기고 울고 자빠 지는 짓은 더 이상 싫다. 특히 이런 상황이라면 말야. 그는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손 가락에는 그녀가 끼워준 반지가 시윤의 다짐을 더더욱 굳게 해주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에췻! 오늘 옷은 왜 이렇게 추운 거야." 흰 나시 티와 검은색의 착 달라붙는 짧은 치마, 거기에 얼 굴에는 평소 안 하던 화장까지 진하게 했다. 평소 그녀의 얼굴이 백치미가 주를 이루었다면 오늘은 한층 더 성숙하고 요염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대로 소파로 달려가더니 시윤에 게 매달렸다. "에췻, 저기 난방시설 고장났어. 사진 찍는데 추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 이사장 아저씨 할 말 있다면서요?" 난감해 하는 시윤을 뒤로한 채 수연은 말을 좌르륵 늘어놓 았 상준은 아저씨라는 말에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아저씨라…….' 그리고 이어지는 상준의 설명, 그는 수연을 MR에서 전폭적 으로 밀어주기로 결정했으며 그에 따라서 TV CF, 가수 등에 차근차근 밀고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남자친구와도 헤어 져야 한다는 말 또한 돌려서 했다. 수연은 곰곰이 생각하더 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할래요." 시윤의 몸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시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헉'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 앉아있던 수연은 시윤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움직이지 마.' "단, 시윤이랑 계속 만날 거예요." "물론, 내가 수연이 사생활까지 어떻게 간섭하겠니? 다만 남자친구 만나는 것을 조금만 숨겨달라는 거지." 결국은 만나지 말라는 말이다. 수연은 손가락을 까딱거렸 다. 꽤나 건방져 보이는 포즈였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인 법 인 듯 오히려 귀여웠다. "예전에도 이런 얘기했었지요? 제가 하고 싶은 데로 하겠 다고, 조금이라도 방해되면 절대 안 한다고." 확실히 있었다. 그녀를 키워줄 테니까 회사에 맡기라고 했 었다. 그리고 단호히 거절당했었다. 상준은 정말 당황했었 다. 제발 TV출연 한번만 시켜달라고 애원하는 애들이 줄 서 있는데 오히려 퇴짜를 맞았으니……. "…저, 저기." 지금 제일 황당한 것은 시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십대 들에게 연예인이라는 것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주니까. 그리고 시윤은 이상할 데 없는 십대였다. 상준은 어쩔 줄 몰라하는 시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별 같잖은 게…….' 상준은 곧 표정을 풀며 특유의 깔끔한 인상의 미소를 머금 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직업인 이상 거짓 미소는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그 또한 과거에는 TV 출연을 하며 연 기를 했었다. "정 그렇다면 좋을 대로하도록 해. 정식 계약은 내일 하도 록 하자. 내가 양식을 준비할 테니까." 지금은 수연이 승낙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멍 청하게 생긴 녀석은 무슨 수를 써서든 떼어놓으면 그만 이 라고 생각하는 상준이었다. "그럼 저희 가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꾸벅하고는 시윤의 팔을 붙잡고 쌩 달려나가는 수 연은 성숙하게 차려입은 외모와는 달리 역시 하는 짓은 애 였다. '휘수연이라는 아이, MR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성공시켜 주세요. 필요한 모든 재력은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죠. 더불 어서 앞으로도 MR의 모든 일을 밀어드리겠습니다.' 하얀 미소가 아름다운 크리스, 그녀가 했던 말이다. 수연 의 숨겨둔 언니가 아닐까 생각하던 상준은 피식 웃으며 고 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 게 닮아 있었다. 수연과 크리스는……. * * "좀 들어가게 해달라니까 열라 띠껍게 구네." 머리를 네모지게 깎은 일명 '깍두기 머리'의 곰같이 생긴 사내가 연신 씩씩 거리고 있었다. 체크무늬의 촌스런 정장 에 시대에 뒤쳐진 듯한 선글라스를 낀 그는 건물 앞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임마, 거기서 오는 사람 막지 말고 저리 가!" 험상궂게 생긴 경비원이 건물 안에서 쫓아 나왔다. 자기는 스타가 될 몸이라며 당당하게 MR엔터테인먼트에 쳐들어온 재원은 입구에서부터 경비에 잡히고 말았다. 재원의 곰 같 은 몸집도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벌일법한 경비 앞에서는 전 혀 소용이 없었다. '빨리 꺼져 임마.'라는 한 마디로 쫓겨 나고 말았던 것이다. "씨파, 길거리도 전세 냈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가래침을 탁 뱉어낸 재원은 그래도 무서운지 슬금슬금 건 물 앞에서 물러났다. 그런 재원에게 두 명의 남녀가 빌딩에 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아, 정말 할거야?" "왜, 싫어? 난 네가 좋아할 줄 알고 한다고 한 건데. 하지 말까?" 시윤과 수연이었다. 시윤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볼 을 긁적였다. "아니, 여자친구가 연예인이라면 좋겠지만……." 음, 확실히 자랑거리이니까 나쁠 게 없다. "내가 유명해지면 시윤이도 유명해지잖아." 생각해보니까 굉장히 괴로울 것 같았다. 단지 그녀와 사귄 다는 것만으로도 학교에서 별 고생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시윤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알았어, 그럼 할게." 재원은 그 둘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평범하게 생긴 남자와 지금까지 봤던 여자 중에서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긴 생 머리와 검은색 미니스커트 그리고 흰색 나시 티와 그 위에 걸친 남방. 가을에 입기에는 조금 추워 보였지만 굉장히 섹시했다. 재원은 침을 삼켰다. 몸매가 그 대로 드러나는 옷이었기에, 게다가 얼굴 또한 일품이었기에 재원은 그대로 다짐해 버렸다. '저건 내 여자다.' "내일 와서 계약해야하니까. 흐응, 모르겠다. 학교 끝나고 오면 되겠지. 일 끝나고 바로 너희 학교 앞으로 갈게. 안 그래도 내일 학교 일찍 끝나거든. 두 시쯤이면 끝 날거야."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수연, 재원은 멀어져 가는 그 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일을 노리자!' * * "배~고~프~다. 밥 사주라, 자기야." 시윤은 잠시 멈칫 하더니 지갑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돈은 들어있지 않았다. 부모님은 온천여행 간다면서 돈을 쥐꼬리 만큼 남기고 갔던 것이다. 집에 있는 비상금 이래봐야 2만 원, 앞으로 일주일이 걱정되는 시윤이었다. 수연은 찰싹 시 윤에게 달라붙더니 지갑 안을 보고는 인상을 썼다. "흥, 거지! 난 돈 없는 남자 싫어!" 라면서 지갑을 꺼내는 그녀, 수표 두 장을 꺼내서 시윤의 지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에헤헤, 내 돈은 곧 낭군 님 돈." 십만 원 짜리 한 장, 백만 원 짜리 한 장. 시윤은 현기증 에 몸을 비틀거렸다. 눈을 비벼 보아도 백 십만 원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아앙, 그동안 모델하면서 번 돈. 차곡차곡 모아 뒀거든, 이 정도야 가뿐해. 게다가 내일 재계약 맺으면 어차피 다시 들어올텐데 뭘." 시윤은 머리가 울리는 듯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 친구한테 얹혀서 사는 건 싫은데……. "괜찮아. 시윤이가 어차피 책임 질 건데 뭐." 얼씨구? 시윤은 얼떨결에 받은 돈으로 수연과 식사를 했다. 계속해 서 음식이 목에 걸린 시윤의 마음은 착잡했다. 간신히 웃고 는 있었지만 그녀를 집에다 바래다 줄 때까지도 가슴속 응 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후훗, 오늘 고마웠어." 앞장서서 걷던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시윤에게 안겼다. 수 연은 온기를 얻어내려는 듯한 몸짓으로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서 최고의 미인이 안긴 다. 하지만 시윤의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그저 억지로 웃으며 수연을 안아줄 뿐이었다. "나 버리면 안 돼. 알았지?" 약간은 겁먹은 듯한 얼굴로 다짐을 받아내려는 그녀의 말 에 시윤은 담담히 웃었다. 시윤은 품에 더욱더 밀착되려는 수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구두를 신은 그녀는 시윤과 거의 눈높이가 맞았다. "나만, 나만 좋아해 줄 거지?" 시윤은 가만히 손을 들어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그녀의 숨결이 목에 느껴졌다. 하지만 그다지 흥분 되지는 않는다. "그래, 너만 사랑할게." 눈을 감고 그녀의 등을 조용히 토닥였다. 그랬기에 시윤은 수연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지 못했다. "불안해, 네가 떠나 버릴 것만 같아서 너무 두려워." 톡, 시윤의 어깨에 떨어진 눈물.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런데 왜 이리도 행복한 걸까. '정말로 날 사랑해?' "떠나지 않아. 절대로 떠나지 않아." 뭐가 그토록 불안한 거니. "아아, 나 바보같지?" 수연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소매로 급히 훔쳤다. 그 순진한 미소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시 윤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느꼈다. "어서 들어가. 내일 학교 갈 준비도 해야하잖아."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수연. "네-에. 서방님 안녕히 가세요." "후우우." 나오는 것은 한숨뿐. 자조적인 웃음으로 스스로를 비웃던 시윤은 예전에 수연과 처음 갔던 바(bar)로 걸음을 옮겼다. 왠지 오늘은 술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더 욱더 그의 괴로움을 더했다. -A Foe 예전에는 이름도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갔었다. 시윤은 칵 테일 바의 이름을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적 -enemy'를 뜻하는 단어 -Foe. 시윤은 문의 손잡이를 잡았 다. 역시나 오래 된 듯한 나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라? 넌……."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허브 향기, 그리 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바텐더 시현. 너무나 어두워서 빛을 빨아들일 듯한 머리카락은 그녀에게 인디언 인형 같은 인상을 주는데 한 몫 했다. 이국적인 미인이란 말이다. "시윤, 명시윤인데요. 다음부터는 기억 해주시죠?" 시윤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시현은 당돌한 시윤의 태도 를 보더니만 싱긋 웃으며 쉐이커를 흔들었다. 천직이 바텐 더인지 쉐이커를 들고 모습이 정말 어울렸다. "다음은 없을 것 같은데? 여기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업소 라고." "알았어요. 술 줘요." 건성으로 대답한 시윤은 태연한 태도로 술을 요구했다. 시 현은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쉐이커로 시윤의 머리를 내리 쳤다. 타악, 경쾌한 소리. "으윽, 왜 때려요." "너 건방져. 그건 그렇고 뭐 마실래?" '맺고 끊는 게 확실한 타입인가 보군.' 라고 중얼거리며 시윤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번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마 시지 않았던가. "진한 걸로 주세요. 오늘밤에는 조금 필요할 것 같네요."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린 녀석은 위험해. "그러니까 건방지다는 거야. 여기서 제일 진한 게 몇 도인 지 알고는 있어?" "에? 60?" 시윤은 평소 경험을 토대로 대답했지만, 시현은 비웃음으 로 답했을 뿐이다. 그녀는 찬장에서 데킬라 한 병, 차게 냉 각시킨 컵, 그리고 레몬과 소금을 준비했다. "됐다. 관두고 이거 마셔. 마실 줄은 알지?" 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는 익숙한 폼으로 한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진한 향기와 불같은 뜨거움, 그리고 슬픈 마음. 레몬을 소금에 찍어서 입에 물고는 뒷맛을 즐겼다. '소금 먹는 방법이 손등에 묻혀서 먹는 거였나. 모르겠다. 첫잔은 스트레이트로 두 번째 부터는 얼음으로…….' "흐음, 제법 아네?" 시현은 웃었다. 칵테일 바에 와서 술을 병째로 요구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다. 그리고 시윤은 무식하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시윤은 두 번째에는 큰 잔에 얼음을 채 워서 서서히 녹였다. "…누나는." 슬프게 빛나는 눈동자. "누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오히려 짐이 된다고 느낀 적 있어요?" 자조적인 목소리. 슬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너무나 슬픈, 계속 피해만 주는 것 같기에 너무나 미안한. 술을 다 시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조금도 쓰지 않았다. "처음이라구요, 정말 이런 일은 처음이예요." 항상 주기만 했다. 받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슬펐다. 아 무것도 주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받고 있었다. 시윤은 응어 리진 마음을 술로 풀어내려는 듯 연신 술병을 기울였다. "착한 아이, 아니 바보같은 앤가?" 시윤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시윤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귀엽게 생긴 여자가 서 있었다. 시현처럼 길게 머리를 기른 미인이었다. "어라, 효진 씨? 오랜만이네요." "예, 오랜만이에요." 효진은 무표정한 얼굴에 인형 같이 어색한 미소를 띄우더 니 시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목소리와 얼굴이 조화를 이루 지 않았기에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기에 섬뜩하기까지 했다. "…레드 아이(Red Eye)." 효진의 주문에 시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하핫, 술 마셔서 그런 거예요? 난 또 과로했다고." 레드아이. 숙취로 인하여 눈이 충혈 되었을 때 마시면 놀 랍게도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 숙취의 묘약' 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 고 있는 시윤은 그저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이제는 조금 씩 맛을 보며 마시고 있었다. "하아, 눈이 그렇게 빨간가?" 효진은 눈을 두 손으로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시윤은 피식 웃으며 들고있던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취기가 오른다. 짜 릿하게……. 시윤이 눈을 감고 술을 음미하는 사이에 효진 이 다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시윤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바에 은은히 흐르는 음악은 그의 마음을 더욱 가라앉혔다. "아무것도 못해줘서 슬프다고… 그랬지?" 문득 그녀가 입을 열었다. 효진의 눈은 칵테일은 만들고 있는 시현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시윤은 이미 반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병을 기울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술 한 모금조차 자신의 돈으로 지불할 리 없었다. 그럴 돈 은 원래 없었으니까, 다만 수연이 준 돈으로 해결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래 수연이 '해준' 것으로. '…한심해.' 시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시현 씨도 그랬어. 시현 씨, 얘기해도 되지?" 시현은 쉐이커를 핑그르르 돌리다가 놓칠 뻔했다. 그리고 는 입술을 깨물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그동안 외상 값 다 받을 거예요!" 효진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뭐, 괜찮아. 오늘 보너스 받았어. 그건 그렇고, 으음, 뭐 라고 불러야 하지?" 시윤은 과일을 하나 집어먹으면서 대답했다. "시윤이요." 효진의 얼굴에 놀람의 파문이 일었다. "아, 네가……. 음, 그래 시윤아. 너는 왜 짐이 된다고 생 각하는 거지?" 침묵, 시윤은 고개를 떨구었다. '키득키득' 거부감이 드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 리고는 수표 두 장을 꺼내 들었다. 한숨을 길게 내뱉은 시 윤은 효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후우욱, 이것 보세요. 학생이 들고 다닐만한 돈이 아니 죠? 선뜻 넣어 주더군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으득, 이를 악 물었다. 아무생각 없이 건네 준 돈에 자존 심은 한없이 침몰해 버렸다. "재밌지 않아요? 날 봐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에 요. 잘생기기는커녕 흔해빠졌죠. 그 아이는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데……. 너무 차이가 나죠? 어이가 없어요. 모자라 요. 너무나 모자라요." 비참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너무나 쓰라리다. 시 윤은 왼손을 들어올리더니 반지를 가리켰다. 노란색 조명을 받으며 반지는 아름답게 빛났다. "이거 봐요. 제가 오히려 매달리고 돈을 퍼부어도 모자랄 판인데 받기만 해요. 그래요, 받기만… 받기만 해요." 목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시윤은 술병을 집어들었다. 슬프다. 무력하기에 슬프고 행복하기에 비참했다. 다들 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 MR의 사장이 라는 남자도 마찬가지. "하아아, 이래도 내가 그 아이 옆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발목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효진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윽고 시윤의 말이 끝나자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흐릿해지는 시윤의 시야 속에서, 시윤의 귓가에서 그녀의 음성은 천천히 맴돌 았다. "어떤 여자는 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만 입혔 단다. 죽을정도로……." 효진은 잠시 말을 끊고 시현을 바라본다. 시현은 이곳저곳 을 돌아다니며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 피해를 줄 것을 알고 피하려고 했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죽을 뻔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미안해서 더욱 피했어. 하지만 그 남자는 끝까지 여자를 사랑했지. 여자는 행복했고, 자신의 행복 때문에 남자가 불행해지는 게 싫었단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지. 남자는 '너 만 내 곁에 있어주면 돼.'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거 든." "……." "넌 왜 수연이가 널 맹목적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흠칫, 시윤은 효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잠시 놀랬다. 그 렇게 금방 추측이 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알고 있었던 건 지……. 아까 시윤의 이름을 들었을 때 효진이 놀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넌 왜 수연이를 좋아하니, 돈 때문에? 예뻐서?" 시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외모에 잠 시 혹했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유 모를 느낌만으로 끌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반 이상 비워져 있는 술병을 매 만지며 시윤은 고민했다. "그것 봐, 그 아이도 너랑 같아. 이유를 말 할 수 있겠어? 못할 거야.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넌 그동안 누군가에게 뭘 주면서 바라는 게 있었니?" 없었다. 단지… 더욱 사랑해주기만 바랬을 뿐. 시윤은 이 제야 알 것 같았다. "옆에 있어 줘.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수연이에게 넌 첫사랑이야. 그 녀석 보기보다 순진해." 옆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럼 수연이도 마찬가지인 걸까, 정말로 사랑해서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할까. 정말로 그런 건가. "…부럽다. 젊은 녀석들은." 효진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윤은 고맙다 며 인사를 하고는 술병을 비웠다. 취기가 짜릿하게 몰려오 기에 눈을 감고 그 기분을 음미했다. 그녀는 대답했었다. '절대로, 절대로 버리지 않을게.' 그건 반대였다. 수연은 버리지 말아달라는 말을 한 것이 다. 뜨겁게 달구어진 몸, 그리고 더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 렀다.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기분이었다. 연인으로 인한 행복을……. * * 터텅! 끼이이익. "차 세워요!" 크리스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 차 에 무엇인가 충돌한 것인지 큰 소리가 났다. 차는 몇 미터 를 더 가서야 섰다. 크리스는 경호차량을 모두 해산시키고 온 것을 후회하며 차에서 급히 내렸다. 그리고 본 것은 ……. "우으읍." 크리스는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때 운전기사 나 오려고 했고 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내리지 말아요!" 왠지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광경 같았다. 사람같이 생 겼으되 피부는 염산이라도 씌운 듯 심하게 일그러지고 녹아 들어가 있었다.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외모, 문드러져서 뚝뚝 흐르는 살점들. 그리고… 전이되어오는 기억, 느낌, 감정. "하아아아-." 공포, 두려움, 그리고 그리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렬했다.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사람이라고 생각되 었던 존재의 '날개'를……. "처… 천사?" 한 쌍의 날개는 비록 회색 빛으로 더렵혀져 있었지만 천사 라고 생각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죽은 듯이 멈춰있던 '천 사'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카… 카마세…이여, 쿠르륵. 카악" 천사는 피끓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왈칵 피를 쏟아내었 다. 커다란 아픔이 그녀에게 전해져 왔다. "제…게, 안식을……." 그 흉측한 모습의 천사는 썩어 들어가는 손을 힘겹게 내밀 었다. 크리스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렀다. 계속해 서 들어오는 감정의 전이. 크리스는 천사의 썩은 손을 잡아 주었다. 질척거리는 느낌도, 썩은 고기의 냄새도 아무렇지 도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힘들었죠. 쉬어요. 편히……." 천사는 웃었다. 한 차례 빛이 둘을 휘감았고 천사의 몸은 빛의 입자로 산산이 나누어지더니 바람에 휘날리며 금빛 물 결을 이루었다. 최후의 순간, 그녀에게 느껴진 것은 안도하 는 천사의 목소리였다. <고마워요> 크리스의 손에 부드러운 금빛 가루가 묻어났고 그것도 이 내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뭘까." 너무나 당혹스런 경험에 크리스는 놀라는 것조차 잊은 듯 했다. 푸른 달이 빛나는 신비로운 밤이었다. * * 순백의 옥좌에는 카마세이 제 일천(一天-First Angel)이 자리잡고 있었다 . 천계에서의 그의 신분은 전지전능하신 신의 대리자, 열 두 장의 날개를 지닌 최고천사였다. 좌우 에는 여덟의 천사가 도열해 있었다. 모두에게는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천사와는 달리 최소한 여섯 장 이상의 날개 가 있었다. 일천을 제외하고 제일 많은 날개는 열 장이었 다. 카마세이 제 일천 '하모리엘 큐디세이아', 그가 입을 열었다. "저주받은 어둠의 자식들이다." 그의 노기 어린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금의 잡티도 없는 수려하고 깨끗한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하 얗게 빛나는 그는 백색의 빛 그 자체였다.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모습은 성스럽기 그지없 었다. "그들 또한, 신께서 사랑하시는 불쌍한 피조물입니다." 아홉 장의 날개를 곱게 접어서 흡사 드레스와 같이 몸에 감고 있던 그녀는 눈을 똑바로 들었다. 조금도 굽힐 수 없 는 그녀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주위는 다 시 소란스러워 졌다. 이곳은 카마세이 고위천사의 회의, 또 는 모임 장소. "신께서는 아직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셨다. 허락 할 수 없 어. 절대로 허락 할 수 없다. 제 6천 류메리아여." 성스러운 그의 내면에는 질투, 강한 질투가 있었다. 하모 리엘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류메리아는 조금도 흔 들리지 않았다. "페어링은 허락할 수 없다. 타락한 자들,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의 수장과 페어링이라니……. 너는 천계를 대표하는 카 마세이 십 천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은 것인가?" 그의 결심은 굳어졌다. 페어링은 곧 영혼의 교류, 그것은 하계의 관습인 결혼 이상의 의미였다. '넌 나의 페어가 되야 해.' 하모리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 겠지만 결계를 보강하여 마계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놓는다 면, 그녀는 언젠가 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페어를 맺 을 것이라고 하모리엘은 확신했다. "제 6천의 지위를 포기하겠습니다." 하모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째서 그런 더러운 것들과 어울리려는 것이냐! "자의로, 자의로 십 천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 상기하라." 미치기 직전이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그에게 집착하는 것인가! 이렇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너 는 왜 하찮은 타락천사에게 마음을 주는 것인가! "날개를… 모두 소멸시키겠습니다." 아무리 약해빠진 천사라 하더라도 최소한 두 장의 날개를 지니고 있다. 그 날개는 성력의 증거이자 동시에,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증거. 생명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혹여 불 명예로 인해서 날개를 소멸시킨 천사는 심한 멸시를 받았 다. 무익(無翼)천사를 향하는 시선은 타락천사에게 향하는 시선과도 같았다. "순간의 충동에 빠져서… 본분을 잊지 말도록 하거라." 눈앞이 아찔했다. 제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모리엘은 그만큼 애절했다. 제발 농담 이었다고 말해 줘. "진심입니다."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류메리아는 두 손 가득히 금빛의 힘을 모았다. 소멸의 의식을 행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그녀는 날지 못하게 된다. 날개가 꺾여서 죽어 가는 새와 같이……. 하지만 그녀는 웃었다. -드드드드드! 바닥이 흔들렸다. 엄청난 힘에 의해서 그들만의 공간인 십 천의 회합장의 한쪽 공간이 점점 균열을 일으켰다. 엔젤로 드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공간은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 다. 강제적으로 들어오려 한다면 로드(Lord)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져야만 했다. 하지만 푸르게 빛나는 공간 은 간단히 찢어졌다. 추아악! 좌우로 갈라지는 공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자. "여기 모여 있었군." 몸의 이곳 저곳은 그을려 있었다. 상처투성이가 되 버린 몸으로도 그는 웃고 있었다. 천계의 결계를 뚫어버리고 이 곳까지 단신으로 날아 온 것이었다. "스키엘!" 류메리아는 비명 지르듯 외치며 그에게 달려갔다. 너무나 아파 보이는 그를 보며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치유해주 고 싶지만 그의 힘과 자신의 힘은 너무나도 다른 것, 단지 그를 안아주는 일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스키엘은 류메리 아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안으며 조용히 웃었다. "멍청이, 날개를 없애버린 천사를 누가 좋아해?" "당신이요." 스키엘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의 얼굴에서는 미소 대신에 잔인한 살기가 감돌았다. "엔젤로드, 대담을 청한다." 스키엘은 온몸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에게 안겨온 류메리아를 담담히 쓰다듬어 주는 그의 눈에는 확연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여덟의 천사는 아 무 말도 못하고 그저 서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온 것이지? 제 아무리 네놈 힘이 강하다 한들 결계를 뚫지는 못할텐데……." 하모리엘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런 그를 보며 스키 엘은 씩 웃어주었다. "꽤 아프더군." 그렇게 말한 스키엘은 류메리아를 살짝 떼어놓고는 하모리 엘 앞에 다가갔다. 그 어떤 존재도 침입하지 못했던 천계를 단신으로 뚫고 들어온 스키엘의 위압감은 너무나 강했다. 본래 엔젤로드와 암흑의 군주는 대등한 관계, 서로의 힘도 거의 같아야 했다. 하지만 스키엘은 마게의 역사상 최강의 타천사, 그 강함은 차원을 달리했다. "용건이 뭐지? 어설픈 핑계라면 계간의 무단침입으로 소멸 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츠아아아악! 접혀있던 날개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열 두 장의 흑색 날 개는 밤하늘을 연상시키게 하였고, 그의 노기 어린 붉은 눈 은 핏빛 보석과도 같았다. 그 기운으로 인해 공간 안에 있 던 천사들은 모두 몸을 움츠렸다. "키득, 웃기는군. 제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할 정도의 바 보가 누굴 어쩐다는 거냐." "……." 냉정히 따진다면 현재 스키엘은 매우 불리했다. 적어도 여 기의 모두가 덤벼든다면 꼼짝없이 소멸 당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는 태연했다. "용건을 말하지." 스키엘은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일생 일대의 선택을 지금 하게 된다. "타천사의 귀환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하모리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움이 너무나도 컸기 때 문이다. 그것은 신의 명령, 신의 약속. 타천사의 최후의 선 택! "나 암흑의 군주, 타락천사의 제왕, 스키엘 다루카는."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류메리아를 살짝 보았다. 그녀는 초 조해 하고 있었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로드만이 알고 있는 맹약이니까. "하모리엘 큐디세티아, 엔젤로드(Angel Lord)에게 청한 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으로의 귀환을 요청한다." 월요일, 월요일. 오늘은 편안한 주말을 끝내고 아쉽게 새 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었다. 구름이 꼈기에 조금 은 어두운 아침이었다. 시윤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반 에 들어갔다. 일주일간의 고통은 굉장히 컸다. 그리고 오늘 다시 시작 될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시윤은 두껍고 차 갑게만 느껴지는 철제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그의 의도와는 달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웅성거리며 떠들던 학급친구들은 잠시 그를 쳐다봤지만 곧 코웃음치며 시윤을 무시했다. 하지만 예상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시 윤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웃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하지만 그런 시윤의 다짐을 무시하듯, 호영은 시윤의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시윤은 호 영의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려 했 다. 적어도 주인이 오면 자리에서 비켜주겠거니 하는 순진 한 생각이었다. 호영은 그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 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비켜줄래?" 시윤은 호영의 바로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조금의 흔들 림조차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뚝, 호영의 허밍이 멈췄고 교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동안의 무표정하 고 아무런 감정이 없던 시윤의 모습이 아니었다. "뭐라고 지껄였냐?" -우당탕. 호영은 발을 들어올려 시윤의 책상을 걷어차 버렸다. 책상 은 다른 책상들과 함께 주욱 미끄러지면 쓰러졌다. 호영이 굉장히 화가 났음은 그 교실에 있는 그 누구라도 알 수 있 었다. '병신새끼, 차라리 조용히라도 있으면 맞지나 않지.' 등의 수군거림이 오가는 가운데 시윤은… 웃고 있었다. 기 묘한 웃음. '완전히 밟아주겠어.' 이제는 여자를 가로챘다는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태도, 전혀 호영을 무서워하지 않는 저 표정. 시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웃지마. 개자식아!" 호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섬과 동시에 시윤의 얼굴에 주먹 을 날렸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시윤은 두 팔을 교차하 여 얼굴을 방어했다. 평소의 살을 울리는 타격음과는 달리, 밋밋한 소리가 났고 시윤은 뒤로 날아갔지만 그다지 큰 충 격은 없었다. "젠장, 너만 보면 기분이 나빠." 호영은 대자로 쓰러져 버린 시윤의 가슴을 잔인하게 짓밟았 다. 비록 호영의 몸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더라도 각력은 굉 장히 강했기에 시윤은 숨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커헉, 카하학." 기침을 하며 괴로워하는 시윤의 모습을 본 호영은 빙그레 웃었다.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호영이 원하던 모습, 유쾌한 모습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 그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몇 번 이나 말했냐." 그 순간, 고통에 겨워 감겨있던 시윤의 눈이 번쩍 뜨여졌 다. 이렇게 물러나서는 안된다. 그녀의 사랑에 부끄럽지 않 도록 움직여야만 했다.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가만 히 있어서는 안 된다. 시윤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절대로 수연에게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겠어.' 호흡곤란으로 힘이 빠져왔지만 시윤은 이를 악물며 오른손 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간신히 움직이는 입을 놀려 말했다. "호영아……." 호영의 눈이 커졌다. 시윤은 씨익 웃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다. "꺼져 버려!" 시윤은 모든 힘을 짜내어 호영의 발을 후려쳤다. 별다른 아 픔은 없었겠지만 덕분에 호영의 발에 힘이 조금 빠졌기에 시윤은 몸을 굴려 일어났다. 웅성거림, 그리고 급격하게 변 하는 분위기. 시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제는 그 스스 로가 변할 차례였다. 조용히, 묵묵히, 자신의 자리만을 지 킨 채 있으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존재하던 그런 사람이 돼서는 안되었다. "날 건드리지 마." 최소한 수연에게 부끄러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 시윤은 최소한의 것만은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고 더 이상 놀림감이 될 생각도 없었다. 호영의 입술이 묘하게 뒤틀렸다. 한쪽 입매가 올라간 것이 분명 비 웃음이었다. "꼴값하고 있네. 병신." 퍼억, 다시 한번 교실의 뒤편으로 나가떨어지는 시윤, 하지 만 그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어려있었다. '아직, 아직 아니야.' 호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일어나는 시윤을 보며 이를 갈았 다. "어디 한군데 부러져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실제로 호영은 싸웠던 상대의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린 적이 많았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 다지만, 주위에서 쉬쉬하고 있을 뿐 다들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호영과 맞붙게 되는 녀석들은 무 서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멍청이, 질투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아!" 오히려 시윤은 도발하고 있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은 모두 넋 을 잃은 표정으로 시윤을 주시했다. 정신이 나갔거나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시윤이 정신이 나갔다고 믿고 있었다. 시윤은 옷을 탁탁 털 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오늘 한번 죽어봐." 잔인하게, 그리고 불길하게 웃는 호영. 상투적인 말이었지 만 너무나 진실 같은 말, 소름 돋는 그의 말투에 교실에 있 던 모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정말로 호영을 말 릴 수 없었다. 만약 말리려고 덤벼든다면 시윤과 같을 꼴이 될 테니까……. 그리고 시윤은 한 번 더 그들의 예상을 뭉 개버렸다. "죽여봐."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겠어.> * * *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다가오는 호영의 주먹, 눈으로는 보 았지만 몸을 움직이기에는 늦었다. 호영의 주먹은 여지없이 시윤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그 충격 때문에 휘청거리는 시윤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호영은 팔꿈치를 강하게 내질렀 다. "아둔한 녀석, 머리로 이해가 안되면 몸으로라도 느껴봐 라. 주제를 알아야지, 쯧."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던 호영은 시윤의 명치에서 팔을 살짝 치웠다. 길거리 펀치기계 조차도 심심찮게 부쉈던 호영, 그 의 주먹은 하나 하나가 흉기였다. 쿠웅, 쓰러지고 마는 시 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이…정도라니.' 시윤은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잠시 동안 제 기능을 못했기에 숨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온 것 이다. '아파… 아파.' 호영은 키득거리며 상의 셔츠를 벗었다. "살려주세요. 라고 해봐." 정신적으로 완전히 짓뭉개는 방법, 스스로를 인정하게 만 드는 것이었다. 의자를 끌어당겨서 오만한 자세로 앉은 호 영은 그의 앞에 대자로 뻗어버린 시윤을 보며 비웃었다. "존경하는 호영님, 당신의 충실한 노예가 되겠습니다. 라 고 말해보라고." 주위에 구경하던 친구들은 그 분위기에 따라 같이 웃기 시 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고있던 아이들도 시윤을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래에 들 어서 호영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덤빈 사람은. "말해보란 말이야! 이 개자식아." 뻐억, 호영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시윤의 옆구리를 걷어 찼다. 단련된 사람의 발차기는 손의 파괴력보다 훨씬 컸다. 시윤은 그대로 2m정도 날아 벽에 쳐박혔다. "크… 크흑." 아픔, 뼈가 저리는 아픔. 하지만 시윤은 굴복하지 않았다. 예전같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지나갈 생각도 없었다. 표독스 러운 눈빛의 시윤을 보며 호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독한 자식, 정말 죽고 싶어?" 호영은 시윤의 멱살을 잡아 올리더니 그대로 뺨을 갈겨버렸 다.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따귀를 맞는 게 훨씬 기분 나쁜 법이다. 짜악, 짜악. 계속해서 뺨 맞는 소리가 이어졌고, 조금씩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오늘따라 시윤이 '너무 버티 는' 듯 했기 때문이다. "약해빠진 새끼가 어디서 덤벼!" 시윤의 입가에는 핏줄기가 흘렀다. 입안이 전부 터져 버리 고 입술에 상처가 났기에 피가 쉴새없이 흘렀다. 이쯤 되면 항복할 만도 하련만……. "있잖아……." 친근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시윤. 그의 손이 살짝 쥐어졌 다. 주먹을 꽉 쥐기도 힘이 모자랐지만, 모든 신경을 그쪽 으로 돌렸기에 그의 주먹은 새하얗게 변할정도로 꽉 쥐어졌 다. "난…말이야." 호영은 멱살을 쥐어 올린 것을 잡은 채로 멍하니 서 있었 다. 시윤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분노도, 슬픔도, 아픔도 없 었다. 그 기쁨이 교실 전체에 퍼졌다. 시윤은 파르르 떨리 는 오른손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온 몸이 욱신거렸지만 아 직 쓸만했다. "너 같은……." 잠시 말을 멈췄다. 시윤은 피가 흐르는 입매를 살짝 올리 며 웃었다. 너무나 처량해 보이는 그의 웃음. 그리고 뒤로 젖혀지는 그의 오른손, 힘을 응축하기 위해서 회전하는 허 리. "녀석한테 빌기는 싫어, 쓰레기는 싫거든……." 퍼어억! 통쾌한 일격, 시윤은 허리를 크게 회전시키며 주먹을 내질 렀다. 호영은 아무 생각 없이 시윤을 바라보다가 미처 그의 멱살을 틀어 쥔 손을 놓지 못하고 얻어맞고 말았다. 시윤의 평소 빌빌거리던 펀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강렬한 일격. "힘에만 의지하는 멍청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호영의 뺨, 너무 놀래서인지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시윤은 양손으로 그의 옷을 틀어쥐고 는 머리로 호영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으아앗?"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기묘한 탄성, 마냥 싸움 구 경을 하고 있던 교실의 학생들은 역전된 상황에 놀라고 말 았다. 그것도 소리를 지를 정도로 많이. "이, 이 자식이 미쳤나!" 호영은 코를 감싸쥐며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나 미쳤다!" 시윤은 호영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더 이상 다른이들의 눈 총을 받으며 살 생각은 없었다. 시윤은 모든 의지를 표현하 기 위하여 공포를 억누르고 호영에게 덤벼든 것이다. 시윤 은 새가 날아오르듯 의자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누가 뭐래도 너만을 사랑하겠어.> * * * "좋아, 그럼 여기다 도장 찍어." 상준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이사장실에는 두 개의 계약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수연의 것이었고 하나는 회사의 비치용이었다. 수연은 서명란에 도장을 찍고는 두 계약서를 나란히 놓고 또 도장을 찍었다. "그럼, 일은 내일부터 시작이죠?" 수연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체엣, 이 버릇도 시윤이한 테 옮은 건가.' "응, 내일부터 스케쥴 맞춰서 나오도록 해. 돈은 우선 계 좌로 넣어줄게."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윤을 만나 러 갈 생각에 웃음부터 나왔다. '언제나 보고싶단 말야.' "그럼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라, 멀리 안나갈게."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는 제스쳐를 취한 수연은 이사장실에 서 나왔다. 시윤의 학교가 끝나려면 조금 멀었지만 미리 가 서 기다리고 싶었다. 기다리는 것도 만남의 일부이니까 ……. 재원은 건물 밖에서 수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흉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기에 살찐 그의 얼굴은 흉하게만 보였다. 그는 거울을 보며 외모를 살피더니 만족스러운 웃 음을 지었다. "역시 멋지단 말이야. 아, 저기 나온다." * *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 수연의 뒤를 따라 재원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다시 한 번 수연의 미모에 혀를 내두르며 점점 걸음을 빨리 했다. 길가에는 거의 사람 이 없는 오후, 재원은 수연의 어깨를 살짝 손가락으로 두드 렸다. "에? 무슨 일이세요?" 짜릿한 흥분감, 수연의 부드러운 음성은 너무나 듣기 좋았 다. 잠시 호흡을 고른 재원은 '옷이 잘 어울리시네요.' 라 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여자는 터프한 남자를 좋아한다!' 평소 선배에게 들었던 지론이다. 재원은 선배가 남자답다고 생각하며 그 지론을 굉장히 신뢰했다. 다만, 선배가 여자친 구가 없다는 게 이상할 뿐……. "너 마음에 들었어. 내 애인해라." 크나큰 착각이었다. 곰같이 생긴 덩치가 대뜸 하는 소리가 '내 애인해라'라니, 차라리 '난 곰이다. 우하하' 따위의 헛 소리를 하는 게 나았다. 수연은 웃었다. 커다랗던 눈망울이 가늘게 좁혀졌고 입술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꺼져."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 이런 일이 생겼다. 이럴 때에는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지금은 시윤을 만나러 가는 상황이었다. 좋던 기분을 망친 수연은 재원을 비웃으 며 몸을 돌렸다. 심한 말을 안 하는 수연이지만 이런 남자 들은 끔찍이 싫어했다. 몇 년 동안 고생했고 심지어 납치 당할 뻔한 적도 있다. 정신병원에 갈 정도로 히스테리를 일 으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야, 부끄럽냐? 걱정하지 말고 이리 오라니까." 짖는 개는 무시하는 게 좋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재원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이미 수연은 멀어져 가고 있 었다.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 없어. 내가 남자친구 해준다니까!" 수연은 걸음을 멈추더니 재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 가버리 는 그녀를 보며 재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단순한 그의 사고 패턴에는 수연의 행동이 그저 부끄러워서 빨리 사라진 것이 라고 인식 되 버렸다. "마지막에 쳐다 본 건, 역시 관심의 표시겠지?" 바보도 정도가 심하면 골치 아프다. 재원은 머리를 긁적이 며 씨익 웃었다. 내일도 이곳에 진치고 있을 생각을 하면 서……. "아마 운명일 거야. 내가 신인 모집에 떨어진 것도 다 예 정된 일이었어. 푸핫. 부끄러워하다니 귀여운데?" 한편, 수연은 어깨를 손수건으로 털어 내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수연을 흘끗 쳐다보더니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아가씨, 왜 그렇게 어깨를 닦아요?" 수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수건을 창 밖으로 버리며 대답 했다. "으으, 끔찍하게 혐오스러운 게 묻어서요. 아끼던 손수건 인데, 칫. 옷도 나중에 버려야겠다." 바퀴벌레인가. 어쩌고 하며 택시기사는 중얼거렸다. * * * -퍼억. 우당탕, 책상들과 함께 나동그라지는 시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붓고 있었다. 퉷, 피를 뱉어내며 시 윤은 간신히 의자에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상처투성이인 시윤에 비해서 호영은 단지 코가 살짝 부어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윤은 웃고 있었고 그것이 호영을 불쾌하게 했다. "네 주먹은 솜으로 만들어졌냐? 아프게 좀 쳐봐. 재미가 없잖아." 뼈가 저릿저릿 울리는 고통을 참으며 시윤은 애써 태연한 척 호영의 속을 긁었다. 평소에 조용하던 녀석이 폭발했기 에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뿌득', 호영은 이를 갈았다. 이렇게까지 그를 화 나게 한 사람은 없었다. "하하핫. 그래… 그렇게 죽고싶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소 원대로 해줘야지 어쩌겠어. 내 성질 건드린 대가는…" 콰가각, 호영은 키들거리며 의자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그 리고는… 맹렬한 기세로 시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엇!"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 금속으로 된 의자는 그대로 시 윤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시윤의 머리를 부술 듯이 부 딪혀 간 의자, 그리고 아픔. 미처 방어도 하기 전에 이루어 진 일이었다. 벼락같은 충격, 그리고 공허한 느낌. -퍼엉! "…어…." 목소리가 멈췄다. 사고도 멈췄다.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 고, 귀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뜨뜻하게 얼굴을 흐르는 핏 물들. 그리고 뿌옇게 변하는 시야. 호영이 둘, 셋으로 나뉘 는 듯도 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아무것도 느 껴지지 않았다. 시윤의 몸은 의지를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 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하물며 맷집 도 약한 시윤이었기에 그 한 방에 시윤은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야! 너희 뭐 하는 짓들이야!" 학년 주임선생은 기막히게도 시윤이 쓰러진 뒤에야 들어왔 다. 덩어리져서 모여있던 학생들은 선생의 등장에 좌우로 갈라졌다. 호영은 씨익 웃으며 의자를 내려놓고는 주임선생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입 조심 해요.' "아, 이 녀석이 다짜고짜 덤벼들어서요." 주임선생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호 영이 사고를 친 것이다. 그로서는 믿는 척 할 수밖에 없었 다. 어쨌든 급한 것은 시윤의 상태였기에 주임은 곧바로 시 윤을 등에 들쳐업었다. "수업 시작할 준비 해. 야, 구경났어? 단체로 운동장 한 번 구르고 싶냐?" 주임은 한바탕 소리를 지르더니 양호실로 뛰었다. 젠장, 젠장 욕설을 퍼부으며. "젠장, 또 이사장 조카야?" 호영은 그런 시윤과 주임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 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구경하던 아이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기에 처음에는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지 켜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고 말았다. * * * 진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무 거운 통증에 시윤은 신음을 흘렸다. 어두움 속의 적막, 시 윤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들어 머리를 건드려 보았다. "으으윽." 두텁게 붕대가 매어져 있었지만, 가벼운 매만짐만으로도 굉 장한 울림이 왔다. 몸을 덮고 있는 하얀 시트를 걷어내고 일어난 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4시, 곧 수업이 끝날 시간 이었다. '왜 여기에…….' "이보세요, 주임선생님!" 환자용 침대를 둘러쌓고 있던 칸막이 밖으로 나가려던 시윤 은 매우 화난 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몸을 멈췄다. 의아하게 여긴 시윤이 살짝 칸막이 사이로 내다보니 양호선생과 주임 선생이 있었다. 평소에 차분한 분위기와 항상 부드러운 미 소를 머금고 있었기에 학생들의 인기를 휘어잡던 양호선생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학교 사정도 생각을 좀 생각을 하 세요." "하, 미쳤어요? 지금 빨리 병원으로 옮기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내출혈로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아니 식물인 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안 된다니 그게 말이 되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얼굴에는 예의 그 미소는 온데 간데 없었고, 노기 어린 표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시윤은 생소한 충격을 받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으으윽. 머, 머리…….' 불행중 다행인지 의자와 부딪혔던 머리는 큰 이상이 없었 다. 다만, 살이 터졌는지 굉장히 아프고 쓰라렸다. 물론 약 간의 두통도 있었지만 내출혈 운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 리라. "벌써 두시간 째예요. 아직도 의식 불명이란 말예요!" 주임선생은 꿈쩍도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조용하기만 하 던 양호선생의 변모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었다. "아, 글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쟤 넘기면 우리 다 작살나는 걸 몰라서 그래?" 이제는 숫제 반말이다. 주임선생과 양호선생의 나이 차는 열 살 가량, 그녀는 주임의 비아냥거림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뭐라고 소리지르려는 찰라, 시윤은 급히 침대에 눕 고는 그녀를 불렀다. "으으으, 거기 선…생님 계세요?" 시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양호선생은 칸막이를 밀치며 뛰어 들어왔다. "깨어났니, 괜찮아?" 정신 없이 시윤의 눈을 벌려도 보고 얼굴색도 확인한 그녀 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으음, 그럭저…럭 괜찮아요." '간간이 느껴지는 머리의 통증만 제외한다면 괜찮겠지요.' "후우, 다행이다. 그래도 이상 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병원 가보도록 해."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양호선생 덕에 약간은 기분이 좋아진 다. 언제나 미소짓고 또 친절하다. 젊고 예쁘다는 것도-하 지만 연애 대상보다는 누나나 엄마 같은- 물론 인기몰이를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병원은 수업 끝나고 가보도록 해. 지금은 빨리 교장실로 가. 교장선생님께 해명은 해야 될 것 아니냐." 무슨 해명?, 눈을 동그랗게 뜬 시윤은 양호선생의 안색이 한 순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학교 3층 정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교장실. 시윤은 아직까 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도 튀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시윤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가 볍게 두드린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너라." 교장이 굳은 얼굴로 시윤을 맞았다. 육십대인 그의 얼굴은 남들보다 더 빨리 늙었는지 노쇠한 노인의 그것과도 같았 다. 교장실 안은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고, 값나갈 만한 것 이라고는 은은히 향을 흘리고 있는 난 뿐이었다. 그리고 방 한쪽에는 코에 붕대를 붙이고 있는 호영이 의자에 등을 기 대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능글맞게 웃고 있는 호영, 뭔가 불안하다. "그래 저기 호영이 옆에 앉거라." 시윤은 교장의 말대로 호영의 옆에 걸터앉았다. 교장은 두 손을 모으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호영의 미소는 더더욱 깊어져 갔다. 너무나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시윤은 이를 악물었다. '뭔가, 뭔가 잘못됐어!' "오늘 너희 둘이…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 * * 아직 학교도 끝나지 않았건만 가방을 둘러메고 터덜터덜 교문을 벗어나는 학생이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어 서 굉장히 눈에 띄는 모습, 바로 시윤이었다. "하아아… 개 같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수연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는 남 자, 시윤이었다. "어? 어어, 그 그게 뭐야!" 시윤은 쓰게 웃었다. 깜짝 놀라서 날뛰는 수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때리고, 맞았고, 정학 먹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시윤을 걱정하는 그녀에게 시윤은 조금더 풀어서 말해 주었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수연. "으아아앙, 아프지 마." 시윤은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훌쩍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시윤을 끌어안더니 더욱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우, 울지마. 누구 죽었냐." 시윤은 30분 동안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고, 그 후 30분 동안 학교로 쳐들어가겠다는 그녀를 말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 * * -쾅. "언니, 나 왔어요!" 수연은 시윤을 끌고 곧장 칵테일 바 -A Foe-로 갔다. 그리 고는 대뜸 문을 발로 걷어 차버리는 수연을 보며 시윤은 볼 을 긁적거렸다. '무섭네.' "휘수연! 죽고싶어? 손은 장식품이냐!" 손님이 없는 한산한 시간이기에 청소를 하고 있던 시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차하면 들고있던 빗자루도 집어 던 질 폼이었다. 할말이 없어진 수연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 적였다. '누나는 더 무섭네.' 시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재미있는 사 람들이야. 그렇게 여유 있는 생각을 하며 서 있던 시윤에게 도 공격은 돌아갔다. "그리고, 여기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업소야. 알아?" 움찔. 시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헤헤, 언니-.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괜찮 잖아." 시현은 빗자루를 던지고 말았다. 부웅, 회전하며 날아드는 빗자루를 미처 피하지 못한 수연은 머리에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그나마, 짚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별로 아프지 는 않았겠지만……. "캬아, 아프다. 언니, 도대체 왜 그래. 오늘 그 날이야?" 시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들어서 시윤을 가리켰다. "야, 임마! 교복 입혀서 오면 빼도 박도 못하는 거 몰라?" 수연은 놀라서 시윤을 쳐다보았다. 음, 교복이네. 역시 시 윤이는 뭘 입어도……. 등의 허튼 생각을 하던 수연은 자신 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맞다. 하도 열 받아서 정신이 없었는데……." 한심해, 한심해 하는 표정으로 수연을 노려보던 시현은 한 숨을 쉬며 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힘들겠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낸 시윤은 씁쓸하게 웃었 다. '뭐, 눈치 없는 여자친구를 둔 게 죄라면 죄겠지요.'라 는 말을 속으로 씹어 삼키면서. "그런데 그 붕대는 뭐야?" 이제야 칭칭 감겨진 붕대를 알아차린 시현에게 시윤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눈치 없기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맞아, 이거 때문에 언니랑 얘기 좀 하려고 왔어." 수연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시현은 가게를 스윽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도 끝났으니까 그 얘기나 들어보자. 지금 시간이면 사람도 없을 때니까 앉아 있어. 마실 것 좀 만들어 갈게." * * * 시윤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이사장, 천진성. 지금 호영과 함께 있는 중년의 남자의 직책이고 이름이었다. 그것은 곧 돈 많은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얘기. "매번 고마워요. 아저씨." 오십대에 접어든 진성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진성 은 호영을 매우 아꼈다. 드문드문 섞여있는 흰머리와 많은 잔주름이 그의 지나간 세월을 증명하였다. 오랜 시간동안 노력한 끝에 돈을 벌었지만 자식은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면 못써." 이사장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호영은 호 감이 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만 믿고 있었죠. 그런 녀석들이 건드려도 아저씨가 든든하게 있는걸요." 공손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호영의 두 눈만은 교활하게 빛났다. 다만 이사장은 그것을 알아채 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호영의 말이라면 다 믿어준 그였 다. "예끼 인석아. 그래도 조심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이사장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용돈 필요하지? 요즘 학생들은 돈 쓸 곳이 많다던데 ……." 그렇게 말한 이사장은 얼마간의 돈을 꺼내어서 한사코 거 절하는 호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호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물론 다 연출된 행동이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꾸벅 하고 돌아가는 호영의 뒷모습을 보며 이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역시 된 놈이라니까…….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 * * * "너 왕따야?" 시현은 시윤의 간략한 이야기를 듣고는 대뜸 물었다. "에, 에?" 시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말 안한 것 있니? 원한 산 일이 있다거나……. 그렇 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 편을 드는 애가 한 명도 없어?" 묵묵부답. 시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연이 곤란해 할까봐 '왜 호영이 날 건드리는가'에 대한 말은 삭제-물론 수연에게 말할 때에도- 해 버린 것이다.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어서 수연 또한 놀라고 말았다. 수연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시현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를 제 지했다. "말하기 곤란하면 그냥 넘어가고, 그나저나 일이 꽤 심각 한데……. 교장까지 누를 정도라면."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한 시현은 자리 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모르겠으니까 정학 끝날 때까지 천천히 생각해 봐. 모처럼의 휴가라고 생각하고……." '예에, 남의 일이라고 말 잘하십니다.' "치잇, 그 녀석 어떻게든 해버려야 하는데……. 내가 가서 때려줄까?"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내는 수연의 모습을 본 시윤은 '킥킥' 웃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 쓰다듬. "으이그, 귀여운 녀석. 됐네요." "히잉, 그래도 우리 낭군님이……." 이어서 들려오는 벼락같은 목소리. 히스테릭하기도 한 그 목소리는 바(bar)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야, 이 녀석들아! 닭살행각은 나가서 하라고!" 오늘따라 닭이 되 버린 둘이었다. * * * 차가운 유리벽. 그 너머로 보이는 회색으로 빛나는 건물 들. 크리스는 방 한쪽의 유리벽에 기대어 섰다. 날씨가 좋 지 않다. 꼭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살짝 볼을 대어 보았다. "…차가워." 주먹으로 두드려 보았다. '톡톡'하는 유리를 두드리는 소 리가 귀엽게 들려왔다. 그녀는 낮게 깔아놓은 클래식의 음 률에 맞춰서 벽을 두드렸다. '토독, 톡. 토토독.'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실증 난 듯 벽에서 물러나 서류가 가득 쌓여있는 책상 앞 의자에 몸 을 실었다. "카마세…이. 천사. 날개." 알 듯 모를 듯한 아련한 기억. 카마세이-천사-날개. 뭔가 빠졌다. "하아, 숨막혀."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보이지 않는 퍼즐 맞추기. 그녀는 집요하게 자신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너무나 뿌옇게 변해버 려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그런 기억을……. 카마세이,천사,날개. 부서지는 천사의 목소리. -카마세이- 흩날리는 금빛의 가루. -천사, 날개- 천사, 날개, 카마세이.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아직은 모르겠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 그것은 바로 천사와의 만 남. 이유는 모르겠지만 크리스의 눈에 비치는 그 존재는 바 로 '천사'였다. 추하게 녹아 내리고 더럽혀져 있더라도 …….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상한 그리움 -또는 알 수 없는 감정- 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보가 되어 가는 걸까." -톡. 토도독.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 크리스가 그러했듯이 빗방울은 유리벽에 부딪혀서 작은 소리를 냈다. 잠시 비내리는 소리 를 즐기던 크리스는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삐릭. "오늘 처리할 서류 들고 올라와요." -예, 알겠습니다. 언제나 간단하고 사무적인 대화,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남 자의 이름은 '유민수-부장'으로 크리스가 하는 모든 번거로 운 일을 대행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믿고 일을 맡기는 사 람이기에 그녀는 유 부장을 꽤나 아꼈다. 물론 부하라는 의 미에서.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서류와 함께 유 부장이 도착했다. "…이건 뭐야?" 언제나 냉정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유 부장은 조금은 놀란 듯 하였지만 이내 담담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감시·보호 대상자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시간별로 하는 일을 나누어 두었고 특기사항도 따로 표기해 두었습니다." 크리스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빠른 속도로 십 수장으로 이루어진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분노라는 이름 의 감정이 실렸다. "여기, 이 '천호영'이라는 아이의 뒤를 봐주는 게 누구 야?" 유 부장은 역시 거침없이 대답했다. "학교의 이사장 '천진성'입니다. 천호영의 아저씨뻘이 됩 니다. 평소 평판은 좋은 편이나 '천호영'의 뒤를 봐주면서 꽤나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귀 엽다고도 할 수 있으나, 워낙 차가운 분위기의 그녀여서 날 카롭게만 보였다. "그래서… 정학이라고?" 유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대기업의 대표를 맡고 있는 크리스가 한낱 고등학생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이 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그녀의 목 소리는 앙칼지게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당했는지 알아?" 잠시 뜸을 들이던 유 부장이 입을 열었다. "전치 4주 정도의 부상이 두 번. 뇌진탕이 한 번. 심리적 충격감은 지속적이었습니다." 크리스는 소리내어 웃었다.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이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 부장의 포커페이스에도 당혹감이 어리 고 말았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더니 보 고서를 탁 던져놓았다. "천호영. 이 녀석 프로필은?" "난봉꾼입니다. 학생들에게 조사를 한 결과, 여러 여학생 들을 건드리기로 유명하고 바람기가 다분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싸움도 수준급. 게다가 교활하기까지 해서 한 번 목 표로 걸리면 재기불능에 빠뜨리게 한답니다. 혹 일이 잘못 되더라도 '천진성'의 도움으로 빠져나가는 듯 하더군요." 크리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하였고, 실제로 소리가 났지만 그냥 듣기에는 너무 작은 소리였다. 유 부장은 반문했다. "예?" "뭉개버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아니 죽어도 좋아. 완벽 하게 뭉개버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던가. 유 부장은 예의 포커페이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크리스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빠른 속도로 서류를 정리해 나갔다. 언제나 무표정한 크리스와 유 부장,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마네킹 둘을 가져 다 놓은 것도 같으니……. 쌓여있던 서류는 금세 동이 났고 크리스는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며 중얼거렸다. "음, 음. 죽여야 해." 여자는 다 그런 걸까? * * * 하얗게 빛나는 조명이 음산하게만 보이는 방, 그 정 중앙 에 위치하는 곳에 푸른색 유리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길이 5m의 투명한 액체로 채워진 큼지막한 유리 캡슐 안에는 '천 사'가 있었다. " -23 '나이린'의 현재 진척 상황은?" 뒷짐을 진 채, 캡슐을 바라보던 중년의 남자가 나직한 목 소리로 물었다. 흰 가운과 무테의 안경이 그의 인상을 강조 해 주었다. 방안에는 여러 가지 첨단장비들이 즐비하게 늘 어서 있었다. "예, 모든 신체 구성작업은 끝났고 혈액 주입도 완료했습 니다. 내부적응 시간도 초과했으니 이제는 마지막 단계만 남았습니다. 두 날개는 곱게 접혀있었다. 다만 회색일 뿐…… -고로로록. 빛에도 어둠에도 속하지 않았다. 인형 같은 무표정한 얼굴 은 아름다웠지만 그뿐이었다. 약동하는 생명력은 보이지 않 았다. 천사의 입에는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호스가 연결되 어 있었다. 하얀 포말이 조각 같은 얼굴을 훑으며 상승했 다. 숨쉬고 있는 걸까. "적응력은 어떤가. 붕괴의 조짐은?" 조심에 조심을 더하기 위함인지, 그는 매우 신중하게 움직 이고 있었다.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연구원이 대답했 다. 이곳에는 현재 20여명의 연구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일하고 있었다. "신체 응집력 96%, 인공혈액 92% 적응. 상태 양호. 의식 불명인 것을 제외하면 극히 양호합니다. 소장님, 더 이상의 작업은 의미가 없습니다만……." 소장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한 연구원의 재촉조차도 기분 좋게만 들렸다. "…96%라니, -22(F)는 80%도 간신히 넘긴 것으로 기억하 는데." 약간은 건방진 듯한 인상의 연구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의 목소리도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작시일을 두 배로 늘렸던 것이 안정적인 효과 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성공할 것 같죠?" 소장 또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성공하리라. 소장은 기쁜 마음을 속으 로 잘 갈무리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 마지막 작 업을 할 때다. -띠리리리. 익숙한 신호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있 으면 천사가 눈을 뜰 때다. 며칠동안의 밤샘 덕분에 굉장히 피로했지만, 아직은 쉴 수 없다. * * * "으으윽, 아파."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인상을 쓴 시윤은 연신 아프다고 투 덜댔다. 그러나 붕대를 뜯어내던 수연의 손은 거침없이 움 직였다. 피가 말라붙어서인지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세심한 손길로 붕대를 모두 걷어냈다. "누가 싸우래? 흥, 자칫하면 생과부 될 뻔했네." …으윽. "아아아, 아프다." 시윤은 괜히 무안해져서 말을 돌렸다. 무안해졌을 때의 습 관인 머리 긁기, 긁적. 긁적. 가만히 시윤을 지켜보던 수연 의 눈이 커졌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으으으으…음." 상처 부위를 긁어버렸다. 시윤은 그 자세 그대로 죽을 것 만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수연은 한심한 눈초리 로 시윤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바보,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다시 한번 살펴봐 주지 않을래?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은데……." 툭, '끄아아아악' 수연은 시윤의 상처를 살짝 건드렸고 시 윤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아냈다. 고통에 완전히 일그러 진 표정을 보며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히이, 약발라 줄게." …왜 하필이면 소독약부터 들고 오는 걸까. 과산화수소. 상처에 부으면 소독과 동시에 보글보글 하얀 거품이 끓어오 르는 것. 마지막으로 무지무지 아픈 것. 시윤은 이제 수연 이 악마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파도 참아. 착하지?" '자, 잠깐! 과산화수소를 머리에 부으면…….' "기다…" -주르륵. 시윤은 이를 악물었다. 심하게 부어있던 상처가 약에 닿으 면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반병 가량의 소독약이 머리에 부어졌을 때 수연은 약 뿌리기를 그만 두었다. "헤에, 균 들어가면 안되잖아. 자, 머리 감고 와." 수연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우우우우……." 시윤은 화장실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머리를 물 에 빨았다. 그래, 빨았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재 빨리 머리를 헹군 시윤은 물이 뚝뚝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 지 않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회, 회색?" 보통 과산화수소수를 머리에 적시면 탈색이 된다. 갈색 정 도로 색이 바뀌는 데 물론 머릿결에는 최악의 물건이다. 그 런데 놀랍게도 시윤의 머리는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태어나서 염색 한 번 안 해본 시윤으로서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 회색머리… 늙은이 같아. 정말. 진짜라니깐! ] 3. 그리고 추락. 몇 번이고 머리를 감은 후에 결국 시윤은 좌절하고 말았다. 회색, 그것도 전체적인 탈색이 아니라 드문드문 섞인 회색 이었다. 브릿지라도 넣은 것 같은 머리 꼴을 보라. "이건 학생의 머리가 아니야!" 우등생까지는 안되더라도 항상 타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 는 -하지만 실패하는- 시윤으로서는 좌절 또 좌절이었다. 학교에서 정학 받고 집에서는 탈색하고……. 의외로 다행인 것은 그리 흉하게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시윤 은 만족해야 했다. "어? 우에에, 우와아아. 그 머리는 뭐야?" 어느새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온 수연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내가 안 했다.' 수 연은 벌컥 화를 내려는 시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에에? 머릿결도 좋은걸. 예쁘다." 머릿결이 멀쩡하다고? 시윤은 급히 머리를 매만져 보았다. 의외로 푸석푸석해졌어야 할 머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제야 시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네가 과산화수소수를 왕창 들이 부은 건 기억 안 나냐?" 잠시동안의 침묵. 그리고 수연은 웃었다. 뭔가를 꾸미는 듯 한 웃음이었기에 시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행히 약품은 시윤의 머리에 전부 희 생되었기에 남은 것이 없었다. 다만 약을 사러 가겠다는 수 연을 막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 지어졌다. -헬렐렐렐레.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벌써 1년째 쓰고 있는 전화지만 벨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 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윤은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그대로 머리에 얹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애비다. "예?" -아빠. "아아. 놀랬잖아요. 여행지는 어때요?" -날은 화창하고 온천은 따뜻하다. 굉-장히 좋아. 부럽지? 하지만 넌 학생이라서 데려올 수가 없구나. 하하하! 시윤은 잠시 전화를 그냥 끊어버릴까 고민했다. "쳇, 난 젊다고요. '노인네'처럼 온천 갈 생각은 없어요." 이겼다. 시윤은 확신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반격이었 으니까. -그래, 그건 그렇고 학교는 잘 갔다 왔겠지? 아빠, 엄마 없다고 학교를 땡땡이 쳤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재미없을 줄 알아라. '…아버지, 아들은 자랑스럽게도 정학 먹었답니다.' 부모님이 돌아오시기로 한 날은 대략 일주일, 그리고 정학 이 끝나는 날도 거의 일치했다. 잘만 하면 비밀로 하고 넘 어 갈 수도 있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시윤의 옆구리 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수연이 뒤에서 간질이는 것이었 다. -뭐,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고. 돈이 부족할 것 같은데……. "으윽, 돈 아직 안 모자라요. 걱정 마세요." 웃음을 참기 위해서 꽤나 노력하는 시윤이었다. 설마 전화 를 하는데 뒤에서 장난을 칠 줄은 몰랐기에 시윤은 식은땀 까지 흘리며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우리는 일정 당겨서 수요일에 돌아갈 테니 까 몸조심하고 있어라. 딸깍. "그게 누구 돈인데……." 수연은 시윤의 뒤에서 그를 와락 끌어안고는 귓불에 입술 을 스치며 작게 속삭였다. 등에 와 닿는 감촉에 시윤은 얼 굴을 붉혔다. '으음, 생각보다 글래머구나.' "다시 줄까?" 자존심이 상한 시윤은 잇소리를 내며 화를 냈다. 그러나 뒤 에서 수연이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니 그나마도 할 말이 없 어졌다. 역시 시윤은 남자다. "화났나 보네. 이그, 속 좁기는……." 그리고는 시윤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한 숨결이 느 껴지자 시윤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다. "맨 날 유혹해도 넘어오질 않으니, 시윤이는 재미없어. 남 자 맞아?" "여자는 아닐걸." 수연은 작은 소리로 웃더니 시윤의 등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는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서 시윤의 얼굴이 수연을 향하도록 돌렸다. "일주일 동안 뭐 할거야?" "음, 모르겠어. 부모님은 수요일에 오신다는 데 어떻게 말 해야 할지……. 역시 숨겨야겠지?" "바보 같아. 시윤이는……." 시윤은 볼을 긁적였다. 이제는 완전히 버릇으로 굳어져 버 린 행동이었다. 핏, 하고 웃으며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일지도……." 수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바보라니깐.' 그리고는 부엌으로 가버리는 그녀. "배고프지? 다쳤으니까 특별히 휘수연식 특급요리를 해줄 게." 그제야 머리를 다쳤다는 것을 기억한 시윤은 멍청한 얼굴 이 되었다. 머리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통증이 있는데도 불 구하고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바보일지 도.' "있잖아 수연아-." 시윤은 조금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왠지 꼭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왜 불러? 아직 덜 됐어." 수연의 앞치마를 두른 모습도 참 어울렸다. 시윤은 볼을 긁적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 날 믿어? ] 3. 그리고 추락. 시윤은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그 화려함은 1류 음식점 못지 않았다. 분명 집에 있는 재료들로 요리한 것이었지만 평소 먹던 것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돈 많고, 예쁘고, 능력 있고, 요리 잘하고, 상냥하다.' 완벽, 완벽.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빠지질 않는다. 장점이 라고 말할 법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시윤은 볶음밥을 퍼먹으며 -사실 프랑스식 '필래프'였다.- 행복함을 만끽하 는 중이었다. 비록 정학 맞고, 친구에게 얻어터졌지만……. 그리고 수연이 가장 좋은 한가지 이유. '아무런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나만을 바라봐 주는 것.' ……처음 있는 일이지.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었다. 왠지 느낌이 괜찮았던 사람들 은 하나같이 떠나갔다. 납득 할 수도 없었고, 이제는 그것 마저 귀찮아졌다. "치사하다." 눈을 빛내며 시윤의 마주 편에 앉아있던 수연이 침묵을 깨 고 입을 열었다. 한 입 가득 물고 있던 음식을 삼킨 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 응?" "됐어. 밥이나 먹어." 갑자기 쌀쌀 맞게 돌변해 버린 태도에 시윤의 눈이 더욱 더 커졌다. '내가 뭐 잘못했나?' 물론 시윤은 수연이 중얼거리 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너무하네.'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열심히 삐졌다고 광고하던 수연은 이 내 포기하고 말았다. 시윤의 눈치는 느려도 너무 느렸던 것 이다. * * [ 빠라빠라빠라빠라 파파라치-. ] 3. 그리고 추락. 유 부장은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돌아갔다. 조용 하고 안정되어 있는 분위기는 다른 부서들과 비교되는 모습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무실은 부서별로 주어지는 공간 에 몇 명씩 들어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유 부장의 것만은 유독 따로 있었다. "뭉개버리라니……." 그의 표정 없는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손에 들고 있 던 서류를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읽어본 유 부장은 작은 한 숨을 내뱉었다. "…변하셨어." 부장이라는 직책은 이름뿐인 것이었고 사실 그는 어느 부 서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았다. 오로지 회사의 최고 권력자 인 '크리스 류(流)'의 오른팔로서 모든 일을 대행하고 있 었다. 회사 내에서는 공공연히 충견(忠犬)이라고 불리기 도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있 던 유 부장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Drrrrrr. 딸깍. -예, 문종석입니다. "종석씨? 저 유 부장입니다. 맡길 일이 있습니다." -아, 일입니까? 흐음. 내일부터는 마침 시간이 비는군요. 유 부장은 혀를 찼다. 역시……. "평소의 두 배 드리겠습니다. 오늘 안에 부탁 드립……." -물론입니다. 항상 묵직한 일거리만 주시는데 어찌 거절 하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해드리겠습니다. 파파라치는 역시 돈으로 다뤄야 한다. 유 부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방면에서는 꽤나 실력을 인정 받는 사람이기에 얼마간의 돈을 더 주고라도 쓰는 게 좋 았다. "자료는 평소처럼 팩스로 보내겠습니다. 지금 자리에 계 시죠?" -아, 예. 물론이죠. 오늘은 한가해서요. 요즘 일거리도 없고……. 듣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였지만 불행히도 유 부장은 불쾌했다. 그의 음정 없는 목소리가 약간은 높 아져서 나왔다. "조사 대상은 학생입니다. 굉장히 쉬운 일일 것 같군요.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약점을 잡으세요. 오늘 밤 안에 말입니다. 자세한 것은 역시 팩스로 보내겠습니 다." -오호라. 오랜만에 편하게 일하겠군요. 그럼 내일 결과물 들고 돈. 받으러 가겠습니다. 아, 여기 적혀 있군요. 저 번 일은 착수금도 안 주셨습니다. 유 부장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심정이 되 버렸다. 이미 끊었기에 더욱 그랬다. 능글능글한 종석의 얼굴이 수화기 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매치가 됐고, 유 부장은 결국 인 상을 찌푸렸다. 돈 벌레 같은 인간. "전번 것은 입금시켰습니다만. 이번 일도 마찬가지로 온 라인으로 넣어 드릴 예정입니다." -아니, 기본 액수만 들어왔던 걸요? 위험수당이 빠졌습니 다. 위험 수당이. 아시다시피 생명에 위협이 느껴질 때에 는 원금의 40%가 추가됩니다. 사진 찍고 도망가다가 발 헛디뎌서 조금 삔 것도 생명의 위협이라면 위협이다. 유 부장의 부동심도 슬슬 흔들리는 지라 그는 빨리 전화를 끊기로 마음먹었다. "좋습니다. 그럼 합쳐서 세 배의 금액을 드리지요. 대신 일은 확실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옛! 아침에 출근하시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을 겁니다. 충성! 충성이든 말든. 유 부장은 수화기를 던져놓으며 의자 깊 숙이 몸을 파묻었다. 아직 할 일은 많이 있다. 밀린 서류 를 정리해야 하고, 내일 쓸 일꾼들을 모아야 한다. 오늘 도 긴긴 밤이 될 거라고 생각한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로 했다. * * 자취방에서 늘어져 있던 종석은 오랜만에 묵직한 의뢰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식도 하고 옷도 빼 입고 김 마담도 만나고 밀린 방세도 낼 수 있겠다. 룰루랄라." 그는 얼마 전에 잡지사에서 해고당했기에 그동안 굉장히 궁핍하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쓰 레기들과 먹다만 컵 라면 용기들,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술병들. 면도한지 한 달은 되었는지 완전히 노숙자에 산 적 두목 몰골이었다. "기다려요, 김 마담. 내가 갈 테니까……." 벽에 붙어있는 여자의 사진에 쪼옥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종석은-직접 찍어서 현상한 사진이다.- 싱글벙글 웃 으며 사진 장비를 챙겨 들었다. 망원렌즈, 도청기, 손바 닥보다도 작은 디지털 캠코더 등 파파라치의 모범적이고 일상적인 도구들이었다. "얼라리요? 정말 학생이네." 나갈 준비를 마친 종석은 마지막으로 전송되어 온 서류 를 훑어봤다. "흐음, 이 근처라면……. 아, 미스 리 근무하는 곳 앞이 네." 종석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수첩을 꺼냈다. 손바닥만한 수첩의 표지에는 '정보요원 일람'이라고 적혀있었다. 파 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첩이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미스 김, 미스 최, 미스, 미스, 아, 여기 있다. 미스 리." 환해졌던 종석의 얼굴이 이내 찌푸려졌다. "젠장, 술 값 외상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한참동안이나 고심하던 종석은 결국 수화기를 집어 들었 다. '에라,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등의 말을 중얼거 리면서……. -Drrrrr -예, '술맛 나는 세상'입니다. "아, 자기야?" -……. "자기야, 나야 나. 종석이." -야이, 개자식아! 너 거기 어디야. 당장 이리로 안 와? 대포 같은 고함소리에 수화기를 잠시 떼고 있던 종석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화기 저 편에서는 한참동안 이나 육두문자가 가미된 욕설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너 올 필요 없어. 거기 어딘지만 말해. 내가 가 서 죽여줄 테니까……. "저, 저기. 이번 일만 도와주면 그 동안 외상값 다 갚을 수 있거든?" -필요 없어! 그게 벌써 몇 번째야. 오호라, 그런 식으로 등쳐먹고 다니는구나? 저번에 우리 가게에 누가 왔었는지 알아? 미스 김은 누구고 미스 정은 누구야. 너 혼인빙자 사기죄로 고소할거야! 순진한 처녀 몸 망쳐놓고 돈 가져 다 쓰고 그대로 도망갔다고. 증거? 당연히 많지. 증인이 몇인줄은 아셔? "…살려주라."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싹싹 빈 종석은 겨우 필요한 정보 를 얻을 수 있었다. 3. 추락 (A fall) -찰칵 "너무 쉬우니까 재미없군. 쯧, 싹수가 노-란 놈이구먼." 종석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착잡한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찝찌름한 화장실 냄새가 코를 찔렀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팔은 저려왔다. 현재 종석이 있는 곳은 공원 맞 은편 빌딩 3층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창문을 통해서 정면 으로 내려다보이는 공원에 호영과 그 친구들이 술판을 벌이 고 있었다. "얼씨구, 어린놈이 벌써부터 계집질이야?" 망원렌즈 덕분에 호영의 얼굴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뚜 렷하게 보였다. 종석은 그래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허, 허허허." 굳이 약점을 잡겠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처럼 이 리저리 잠복하면서 없는 스캔들도 만들어 내겠다는 듯이 필 사적으로 쫓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보이는 대로 찍으면 되 는 것이다. 그래, 지금처럼. 옆에 있는 여자 치마 속에 손 을 집어넣고 다른 손으로는 소주병을 나발불고 있는 장면 을……. "에라이, 썅놈!" 카메라의 필름은 곧 동이나버렸다. 심하다 싶은 장면만 골 라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필름 두 통을 다 써버린 것이다. 때마침 호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석은 다 써버 린 필름을 통에 넣고 장비를 챙겨 화장실에서 나왔다. "음, 사진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냥 갈까." 평소 같았으면 장시간동안 쫓아다니면서 없는 죄까지 뒤집 어 씌워 사진을 찍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 쉬웠고 그래서 종석은 고민했다. 평소 요금의 두 배를 받기 로 했는데 일은 평소보다 두 배는 쉬웠으니까……. 역시 사 진만 갖고 가기는 너무 미안하다. "에라, 유 부장 보기도 민망한데 더 해가야겠다." 종석이 장비들을 들고 빌딩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호영이 여자를 부축하여 가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완 전히 취한 듯 호영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종석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둘을 뒤쫓았다. 주 머니를 뒤져서 손가락 만한 펜을 꺼내든 종석은 호영의 바 로 뒤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호영에게 부딪친 종석은 넉살좋게 웃으며 사과했다. 호영 은 인상을 쓰고는 종석의 바로 앞에 침을 뱉었다. "씨발, 재수 없어." 종석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했고 호영은 그를 냉랭 히 무시하며 가버렸다. 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석은 이를 갈았다. "니미, 새파란 녀석이……." 하지만 종석은 곧 이어폰을 귀에 끼며 화난 표정을 싹 지 우고는 미소를 지었다. '뚜벅뚜벅' 이어폰을 통해서 호영의 발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호영의 주머니 속에 몰래 집어넣 은 펜 모양의 도청기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룰루랄라, 일은 즐거워." 그는 느긋하게 호영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여관으로 들어가는 호영의 뒷모습을 보며 종석은 머리를 절 레절레 흔들었다. "불량 청소년 탐방기. 라는 제목으로 갖다주면 되려나 ……. 쯧쯧, 어떻게 찾아가도 여길 가냐 그래." 종석은 담배를 하나 빼어 물고는 이어폰의 음량을 조절했 다. 이제는 조용히 도청기를 통해 들리는 소리를 감상하면 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으응. 여긴 어디야?' 술에 취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 약간은 정신이 들었는지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그리고 난폭한 남자의 목소리. '무슨… 짓이야. 하지마.' '닥쳐!' '아아악, 저리가!' 종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어폰을 잡아뜯듯이 귀에서 빼버리고 수신장치를 던져 버렸다. 콘크리트에 강하게 던져 진 수신장치는 완전히 박살나 버렸고, 안에서 녹음되고 있 던 소형 테이프도 망가지고 말았다. "망할 자식들!" 한참을 식식거리던 종석은 다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 다. 너무 기분에 맞춰 움직이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침착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여관 앞 차가운 돌계단에 걸터앉아서 호흡을 고르니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옛날 일들이 떠올랐다. '국장 님, 특종 잡았습니다!' '…관둬. 다른 기사거리나 잡아.' '예? 얘기부터 들어보세요. 이번 건 정말 정치계를 발칵 뒤집을 만한 내용입니다.' '포기하고 다른 거 잡아. 허락할 수 없어.' '얘기나 들어보시라니까요. 장관급 인사들이 연루된…….' '시끄럽다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그 뒤로 종석은 어떻게 해서든 신문에 자신이 알아낸 사건 들을 실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얼마 뒤에는 모종의 협박마저 받았으며 신문사에서는 짤리고 말았다. 그 뒤로 눈을 돌리게 된 일이 바로 '파파라치'였고, 의외로 적성에 맞아서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해고당했을 때에 선배의 말이 걸작이었으니……. '이 바닥 생리상 의원급 이상은 절대 건드리면 안 돼. 누 구는 몰라서 특종 놓치고 있겠냐, 다들 쉬쉬하고 있는 거 지.' 두 시간 정도 밖에서 궁상을 떨고 있으니 호영이 만족스러 운 표정으로 여관에서 나왔고 약간의 시간을 두고 같이 들 어갔던 여자가 나왔다. 많이 울었는지 눈은 부었고 화장은 지워져서 얼룩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떨고있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종석은 이를 악물고 심 호흡을 하더니 거침없는 태도로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삼십 대 초반의 남자가 카운터에 앉아 종석을 맞았다. 종 석은 매서운 태도로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경찰입니다. 이곳에서 각방마다 소형 캠코더를 설치, 촬 영 후 매매한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신분증은 위조된 것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냥 비슷하게 생겼 으면 다들 믿을 수밖에……. 여관주인은 사색이 돼서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말씀을, 그런 일 없습니다." 그 어설픈 연기에 종석은 내심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 이 넘겨짚은 것인데 그대로 들어 맞은 것이다. 이제는 강 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끝이다. "서로 가서 얘기하시죠. 이렇게 잡아떼시는데 범죄 사실이 입증되었을 경우 가중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그, 그래. 영장 있습니까?" 종석은 잠깐 고민했다. 영장 없이는 수색도 동행조사도 불 가능했다.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 종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방금 전에 한 학생이 나가더군요. 이곳은 미성년자 출입 금지 업소이고 따라서 현행범은 영장이 없어도 동행조사가 가능합니다. 아, 구속이던가?" 결국 여관 주인은 종석의 협박에 넘어가고 말았다. "…갑시다." 이제는 구슬릴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종석은 조금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비디오만 넘겨주시면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저희 측에서 꼭 검거해야하는 주요인물 이 그 안에 촬영됐을지도 모릅니다. 인근 여관가를 전부 수 색중이니……." 그제야 여관주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치 죽다 살아난 사 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대답했 다. "하하핫.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진작 갖다 드렸 죠. 어느 날 찍은 게 필요하죠? 원래 경찰과 저희들은 상부 상조하지 않습니까." '미친놈. 놀고있네.' 하지만 끓어오르는 속마음과는 달리 그는 미소를 잃지 않 았다. 이런 인간들 상대하는 게 한 두 번이던가. "최근 3일 내에 찍은 것이 모두 필요합니다. 준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호들갑스럽게 카운터 뒤쪽의 문으로 사라진 여관 주인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 한 무더기의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나 타났다. "하핫, 의외로 많군요. 앞으로도… 잘 좀 봐주십쇼." 여관주인의 비굴한 태도에 비위가 상한 종석은 침이라도 뱉어줄까 고민하며 테이프들을 받아 들었다. "그럼 협조 감사합니다." "예, 안녕히 가십쇼." 종석은 몸으로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 한줄 기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나머지는 다 팔아야겠군." "자고갈래." "안 돼." "자고 갈 거야." "안 돼." "…내가 싫어?" "집에 가서 자. 내일 학교 가야할 것 아냐." "괜찮아. 내일 학교 빠지면 돼." 벌써 식사가 끝난 후에 한시간 째 반복되는 대화였다. 오 늘은 월요일이고 내일은 화요일이다. 그러므로 정학을 먹은 시윤은 모르되 수연은 꼭 학교에 가야했다. 하지만 수연은 생떼를 써가며 재워달라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시윤은 단호 하게 거절했지만, 수연은 끈질기게 졸라댔다. "절대로 안 된다니까 그러네. 학교 빠지면 얼마나 내신이 깎여나가는지 몰라?"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 짓을 한시간 동안 하고있으니… 시윤은 미칠 지경이었 다. "그냥 내일 일찍 와. 아니, 아예 내가 학교 앞으로 갈게." 시윤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타협점이었다. 자고 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고등학생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게다가 저번 의 소름끼치는 기억이 생생이 남아있는 시윤은 더더욱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시 윤은 빨리 수연은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흐음. 그럼 시윤아 이렇게 하자." "어떻게?" "내가 최대한 내.일.일.찍. 올게. 그때는 군말 없이 문 열 어주기." 시윤은 잠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만 일단 집에서 잔다는 말은 아니기에 허락하고 말았다. "좋아. 그럼 내일 보자." 수연은 수상쩍은 미소를 짓고는 시윤의 볼에 살짝 입을 맞 췄다. "그럼 잘 자. 알아서 갈 테니까 안 나와도 돼." 그리곤 쪼르르 달려나가 버리는 수연을 보며 시윤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역시 뭔가 꾸미고 있는 듯한데……. -1시간 후 12시가 되자 회중시계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뎅-뎅-뎅 -뎅…' 시윤은 만화책을 뒤적이다가 시계 소리를 듣고는 침 대에 누웠다. 막상 잠을 자려고 하니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 올랐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것도 걱정이었고, 앞으로 학교 생활도 문제였다. "후우, 정학이라니……. 정학이라니……. 정학이라니 ……." -딩동 심장이 덜컥 떨어져 버렸다. 적어도 시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애써 불길한 생각을 지우며 현관으로 뛰어간 시윤 은 좌절하고 말았으니……. "0시 정각. 어제 말했잖아. 오늘 일.찍. 오겠다고." ……. * * 화요일의 이른 아침. 호영은 평소와 같이 오토바이를 인근 상가에 세워두고 학교로 향했다. 요즘 들어서 몸의 컨디션 이 상당히 좋았다. 어제 시윤을 박살내 버린 것도, 밤에 꽤 재밌게 보낸 것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에 도착한 호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교문 앞에는 차 유리가 모조리 선팅 되어있는 정체불명의 차가 주차 되 있었고 그 주위로 여러 명의 덩치 좋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학생이 천호영?" 선글라스에 검은색 정장, 시대에 뒤쳐져도 한참 쳐졌다고 생각한 호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요?" 물론 말을 건 사람은 유 부장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호영의 배를 가격했다. "커…억." "같이 가줘야겠어." 호영은 그 한 방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싸움도 해봤다면 많이 해봤고, 나름대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유 부장이 부하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호영을 차에 태웠다. "…가자." 같은 시각, 호영이 다니는 고등학교 이사장 실에는 커다란 선물이 배달되어 있었다. 천진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상자의 포장을 뜯었다. "누가 선물이라도 보냈나?" 그 안에는 정성스럽게 요약된 보고서 하나와 비디오 하나 가 들어 있었다. 작은 쪽지 하나와 함께……. -호영군은 저희가 데려갑니다. 첫 사랑.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난 고등학교 1학년으로 단과 학원에 다녔다. 비록 두 시간 밖에 안 되는 수업이었지만 워낙 공부를 안 하는 이 몸으로 서는 수업이 끝날 무렵 완전히 넉 다운 되고 말았다. "아아아, 자고 싶어. 자고 싶어." 난 흡사 유령이라도 된 듯 흐느적, 흐느적 교실을 빠져 나 왔다. 지금 시간은 10시, 집에 도착하면 11시 가까이 될 것 이다. 중학교 내내 놀자 판이었던 내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공자 님도 어릴 때에는 놀아야 된다고 하셨어. 아아, 이 곳은 생지옥이야. 아니 한국은 생지옥이야. 으흑, 공부 싫 어!" 투덜대며 교실을 나가는데 누군가 내 옷을 붙잡았다. 졸려 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뒤를 돌아보니 깜짝 놀랐다. 웬 여자애가 혀를 차고 있었다. 쯧쯧쯧. "子曰 學而時習之면不亦說乎아?" (공자 님 말씀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 한가) 쳇, 그래 미안하다. "어? 너는. 그러니까……." "…사라. 한사라." '당연히 알고 있어.' 눈망울이 굉장히 커서 볼 때마다 귀여운 여자였다. 난 한 숨을 내쉬는 사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름 정도는 기억해 야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건가. 하지만 알고 있었다고. 다만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말을 걸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 는지 몰랐을 뿐이지. "무슨 일이야?" 내게 한 번도 말을 건 적이 없었던 사라였다. 원래 여학생 들과의 친분관계가 미미했던 -아예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일이었다. 가끔씩 눈이 마 주치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곤 했다. 누가 잡아먹나. 사라는 볼을 부풀리더니 손가락으로 교실 안을 가리켰다. 어? 교실 안에 뭐가 있는데. "가방 버리고 갈 거야?" 날 한심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목소리에 가득 담겨있었다. 으으윽. "…가방?" 어깨를 한번 휘저어 보았다. 가볍다. 아무것도 매달려 있 지 않았다. 가방을 모두 챙겨 놓고는 그냥 두고 나온 난 충 분히 바보 취급을 받을 만 했다. 얼빠진 얼굴로 교실에 돌 아가서 가방을 가져왔다. "이야, 고맙다.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사라에게 꾸벅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학원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다시 한번 그녀의 손에 제지당했다. 사라는 눈을 가 늘게 좁히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너무 한 거 아냐? 난 그래도 네 은인인데 한턱내야 하지 않겠어?" 은인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사라에게 무한한 경외감을 느꼈다. 원래 여자들 성격은 이랬던가……. '쳇, 내 또래 여자랑 마지막으로 해본지도 벌써 몇 년 째야.' 사라는 의 기양양하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괜히 무안해져 서 볼을 긁적였다. 이번 달은 적자인걸……. 하지만 이런 제의라면 이쪽에서 환영이다. "나 돈 없어. 라면 정도라면 사줄게." "음, 뭐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사라는 선심 쓴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난 사라 를 데리고 분식점으로 갔다. 그리고 분식집에서 그녀는 그 커다란 눈을 빛내며 날 놀려댔다. 분명히 밝혀두겠지만 나 로서는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분식집은 여자들의 수다를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난 몰랐다. "파하하하, 너 얼마나 바보 같은 줄 알아? 비싼 돈 내고 학원 와서 맨 날 졸기만 하고……." 손이 절로 볼에 올라갔다. 긁적긁적. 쳇, 무안한걸. "음, 저런 녀석 데려가는 여자는 굉-장히 힘들 거야." 사라가 계속해서 내 속을 긁어대는 덕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래. 그래서 나 아직까지도 여자 한 번 못 사귀고 있었 다. 됐냐?" 사라는 계속 웃으며 떠들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말을 멈췄다. "미, 미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난 그리 마음이 넓지 않다. 정확히는 잔인하다고 해야겠 지. "아니야. 다 맞는 말인데 왜 사과 해. 비싼 돈 내고 다니 는 학원에선 졸기만 하고. 그런 주제에 공부는 더럽게 못하 고. 물론 생긴 것도 그저 그렇고 키도 작아." 사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스스로를 계속해서 비 하하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웃음이 나와서 킥킥거 리며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비 참해서 웃었다. 특히 마음을 두고 있던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 더더욱 비참했다. "하아, 미안하지만 먼저 갈게." 난 계산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식점을 나섰다. 쓸데없이 시간만 소비한 것 같아서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 다. 조금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였지만 일방적으로 무시 해 버리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쳇, 쓸데없이 가슴 설 레다니……. "아아 싫다. 싫어." 솔직히 눈물 날 것 같았다. 내성적이라면 내성적인 성격이 기에 항상 조용히 있던 나로서는 굉장히 충격이었다. 하하, 그렇게 바보 같은가. 젠장.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 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벌써 3월인데도 밤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 탁탁탁탁탁. 누군가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 "시, 시윤아." 어라? 따라왔네. 어느새 뛰어온 사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 고 있었다. 쳇, 이렇게 따라와서 사과라도 하면 내가 더 비 참해지잖아. "화… 났어?" 저렇게 질문할 때에 '화났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라가 겁먹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자 조금씩 차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맞는 말인걸. 화내고 안 내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애써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니 까, 그렇게 화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듣기 싫었던 말이기 도 했으니까 조금은 외면해도 되겠지. 보통은. 그래 보통은 이런 경우에 '사내자식이 속 좁다.'라면서 그냥 가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두손을 모으고는 "미안해.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 정말 미안해." 이렇게 진지하게 사과해오면 듣는 쪽이 미안해진다. 사라 는 내게 간절히 빌고 있었다. 단지 기분을 상하게 해서 용 서를 구하기 위해서. 착하다는 소문은 여러 번 들었지만 생 각 이상이다. 스산한 바람이 다시 한번 몸을 훑고 지나갔 다. 사라도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밤도 적당히 어두 워졌고 심적으로 매우 피곤한 상태여서……. 조금은 장난쳐 도 될 것 같다. 지금껏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살짝 미소지 었다. "한사라. 정말 미안한 것 맞아?" 사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끄덕끄덕. 작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이렇 게 순진한 애 놀리면 안 되는데……. "그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무슨 …부탁인데?" 그녀가 잠시 주저하며 말했다.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짝 사랑. 짝사랑. 후우, 중학교 때 고백해서 한 번이라도 성공 했던 적이 있었나? 언제나 키가 작은 것도 잘생기지 못한 것도 돈이 없는 것도 공부를 못하는 것도, 전부 내게는 콤 플렉스였다. "나랑 사귀자." 거절당할 것을 알고 있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래도 고백하는 이유는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친구로 지내면서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느니 처음부터 차이고 친구로 지내는 게 낫다. 적어도 내게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바보 같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아쉽거나 부담스러워서. "싫어." 사라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굉장히 씁쓸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좋아, 이걸로 된 거야. '그럼 친구 로 지내는 건 어때?' 라고 말할 차례다. 언제나 이렇게 했 고 앞으로도 이렇게 할 생각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가 나 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진심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은 더더욱 매섭게 변했다. "그런 식으로 장난치는 건 싫어." …무슨 뜻이지? "나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런데 왜 사귀자고 해?" 숨이 막혔다. 그녀는 분한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서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 아오르더니 이내 눈물 한줄기를 흘렸다. 왜, 왜 우는 거야! "거봐. 아무 대답도 못하잖아. 사람을 왜 이런 식으로 갖 고 놀아. 남자들은 정말 싫어. 왜 그런 식으로 상대방 감정 을 바보로 만들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 리야.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놀리지 말고!"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더니 골목길을 통해 달 려가 버렸다. 다리의 힘이 빠졌고 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밤바람이… 차갑다. "…농담이겠지." 그때까지도 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졸리다. 아주 끔찍하게 졸리지만 들뜬 마음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째깍, 째깍. 시계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애써 눈을 감으며 마음을 비우려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정신이 점점 또렷해져서 괴로울 뿐이었다. "…아니겠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지금 내 상황에는 그 속담이 딱 어울릴 것 같다. 울면서 가버린 사라를 쫓아가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집으로 돌아온 내가 바 보 같다. 제길, 어떻게 되든 확실히 하고 왔어야 했는 데……. 이제는 잠자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할 것만 같 다. 마음을 비우자.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도 모르게 또다시 헛소리 해버리고 말았다. 쓸데없는 기 대감, 정말로 쓸모 없는 기대감 때문에 잘 수가 없다. 눈만 감으면 그 애 얼굴이 아른거리니 미칠 지경이다. 오늘 있었 던 일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스스로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 만 난 아직 순수하다. 초등학교 이후로 한번도 여자와의 친 분을 쌓은 적이 없어서 더욱 그렇다. 한사라, 두 달 전에 처음보고는 그대로 반해버렸는데. "으그그그. 미치겠다." 혹시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등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말았다. 어차피 눈을 뜨고 있나 감고 있나 어둡기는 비슷했고 덕분에 검은색을 배경으 로 밤새도록 사라의 우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 * 결국 학교에서 졸고 말았다. 1교시부터 시작해서 7교시까 지 내리 자버렸고 기합도 엄청나게 받았다. 토끼뜀, 팔굽혀 펴기, 손들고 서있기. 그나마 맞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 겨야 했다고나 할까. 학기초라서 군기 잡으려는 선생들이 왜이리 많은지……. 가방의 무게가 평소의 세배로 느껴졌 다. 벌써 여섯 시, 빨리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아무리 학교에서 잤다지만 너무 졸리다. 다행히 평소보다 버스가 빨리 왔다. 게다가 하교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리는 많아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창가 쪽 자리를 골라서 앉았 다. "…조금 졸아도 되겠지." 의자에 기대고 있으니 이내 잠이 쏟아졌다. ………………. -끼익 퍽,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그그그그. 아프다." 버스가 급정거했는지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물론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편의가 아닌, 내 이마에 생 긴 혹이었다. 앞에 있는 의자에 이마를 박아버린 듯 싶다. 꽤 오래 자버린 것 같아서 운전석 옆에 매달린 시계를 살폈 다. 젠장, 40분이나 지났나. "얼레? 차 많이 막히나 보네." 의외로 교통이 혼잡해서 내가 자고있는 동안 절반 정도의 거리밖에 오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시선을 창 밖 에서 버스 안으로 돌렸다. 졸고있던 사이에 드문드문 비어 있던 자리는 모두 차 있었고, 서 있는 사람들도 꽤 됐다. 시간이 하교시간이라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데, 뒤쪽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 사이에 낯익은 얼 굴이 보였다. "…으음, 누구지?" 하아, 낯익은 얼굴인데 교복이라서 알아볼 수가 없다. 약 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을 분간하기도 쉽지 않았다. 눈 이 크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난 바보다. "한사라?" 맞는 것 같다. 아니, 교복을 봐서는 확실하다. 분명 그녀 의 학교 교복이다. 난 말을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눈이 크니까 알아보기 도 쉽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웃음이 나왔다. 조금씩 사람들 을 헤치며 사라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오히려 나를 못 본 척 하며 뒷걸음질 쳤다. 젠장, 도대체 뭐야. "한사라!" 투덜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버스 맨 뒤까지 빠르게 달려 갔다. 그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게되자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이 있어."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며 눈을 마주 치지 않으려고 할 뿐이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굉장 히 갈증이 났고 숨쉬기도 어려웠다. 제발, 제발 설명해 줘. 어제 네가 했던 말에 대해서. 사라의 주의를 촉구하기 위해 난 대담하게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스스로도 놀랄만한 행 동이었고 그녀 또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황급히 내 손 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했지만 나는 놔주지 않았다. "어제… 그 얘기 말인데. 무슨 뜻이야?" 사라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작았다. 금세 내 손에서는 땀이 났고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목말라. 대답을 듣고 싶어. 숨쉬는 것조차 너무나 어려웠다. 힘들었다. 지 금 이 시간을 견디는 것은 고통과도 같았다. "…아파. 놔줘." 아차, 너무 손에 힘을 줬다. 사라는 그 큰 눈망울에 눈물 을 글썽였다. 사실 손을 잡은 것도 내 정신이라고 할 수 없 는 행동이었다. "미, 미안해." 난 미안한 마음에 급히 손을 놔줬고 사라는 괴로운 표정으 로 자신의 손을 쓰다듬었다. 또 실수해버린 것이다. 사라의 표정이 이내 얼음같이 차가워져 버렸다. "난 할말 없어." -삐익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라는 나를 피해서 도망치려 했고,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 았다. 그녀는 빽 소리를 질렀다. "싫어, 저리가!" 난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그 손을 놔주었고 사라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하하…하. 바보 같아." 작게 웃었다.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역시 바보짓 이었다. 어렵게 용기를 낸 것이지만 역시 어리석었다. 바보 같이…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니. 사라의 보석과도 같이 빛 나는 눈이 자꾸만 떠오른다. 울먹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자 꾸만 들려온다. 손에는 아직도 사라의 체취가 남아있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다. …피곤하다. * * 머리가 아팠다. 원래는 집에서 조금 잘 생각이었지만 너무 늦게 도착했던 터라 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이대로 학원에 간다면 수업시작보다 한시간은 일직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미리 가서 교실에서 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후우-." 입김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추운 날씨, 서서히 봄으로 접 어들고 있다지만 아직은 너무 추웠다. 간간이 불어오는 차 가운 바람에 귀가 시렸다. "화이트데이?" 거리 곳곳의 위치한 상점들에는 '화이트데이' 상품들이 즐 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화이트데이라니……. 학기초다 뭐 다 해서 경황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 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줄 사람도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진 않 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학교에서 내내 졸 았으니 아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한사라." 정확히 말하자면 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줄 용기가 없 는 것이다. 퇴짜 맞는 건 끔찍할 정도로 부끄러우니까. 혹 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쳇, 거지잖아." 용돈 받은 지 열흘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소지한 금 액은 만원밖에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정확히 만 천 이백 원. 한 달 용돈이 오 만원이니까 …쓸데없는 곳에 낭비를 했다는 소리다. 젠장! 정작 필요할 때 돈 있는 꼴을 못 봤 다니까. 되든 안되든 일단 알아보기나 하려는 생각으로 상 점들을 이곳 저곳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한 시간 걸렸다. 겨우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사탕 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저렴하고 그래도 비 싸 보이는 사탕을 찾는 것은 힘든 작업이었다. 주먹 두 개 를 합쳐놓은 듯한 크기의 작은 상자 안에 갖가지 사탕을 절 묘하게 채워 넣었고 간단한 내용의 쪽지를 사탕 위에 얹어 놓았다. 덕분에 수업시간에 약간 늦고 말았다. 내가 도착했 을 때 선생님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야아, 많이들 받았네. 선생님도 사탕 좋아하는데……. 누 가 안 주나." 장난스럽게 웃으며 몇 마디 농담을 한 선생님은 아이들의 야유를 받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여 자 애들의 책상 옆에 사탕 바구니나 꽃다발 등이 자리를 메 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학원 오기 전에 받은 아이들이 대부 분 인 것 같다. 자랑하기 위해서 가져온 건지 아니면 바로 학원으로 와서 들고 온 건지…….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대개의 것들이 사탕 바구니였고 그 중에서는 거의 사람 상체 만한 것도 있었다. 가방 속에 들 어있는 내 사탕은 너무 초라한 것 같다. "선생님! 오늘 아무래도 새로운 학원 커플이 탄생할 것 같 아요." 흠칫, 내 얘기하는 줄 알고 놀랐다. 그럴 리가 없지만 ……. 평소 수업의 분위기를 어떻게든 놀게 만들려고 노력 하던 녀석이 소리쳤다. 학원 커플? "오늘 민재가 사라보고 고백했어요."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말소리들, 난 놀라서 혀를 깨물고 말았다. "내 여자친구가 되 줬으면 좋겠어. 널 좋아해." 누군가가 민재의 목소리를 흉내내었고 곧 이곳 저곳에서 '와- 와-. 축하해' 따위의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황급히 민재를 찾아 시선을 옮겼고 그 녀석이 쑥스러워 하며 그만 놀리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다시 난 사라를 찾았고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 그녀 옆에 화려한 장미꽃과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 그럼 선생님이 밥 한 번 사줘야겠는데?" "…하…하하." 아이들이 하도 떠드는 바람에 다행히 내 웃음소리는 그리 크게 들리지 않았다. 웃음 밖에 나오질 않는다. "예, 선생님 감사해요!" 민재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기쁜 듯 크게 소리 쳤다.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 바보같이 혼자서 착각 했다. 그래도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한 게 너무나 바보 같았다. "다들 조용히 하고 책 펴라. 화이트데이는 화이트데이고 공부는 공부다." 선생님은 시끄러운 교실 분위기를 정리하고 수업을 시작했 다. 그저… 착각이었다니 너무나 바보 같지 않은가. 잠도 못 자고 고민한 결과가 이거라니 실망스럽다. 그리고 창피 하다. 미리 주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인 건가. "꼴… 좋다." 자조적인 독백, 쓸모 없는 자학이지만 지금 견디기 힘들었 다. 솔직히 눈물이 날 것도 같은데 억지로 참고 있다. 모두 날 비웃고 있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다. 무심코 사라에게 눈을 돌렸고 어쩌다보니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사 라는 급히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최악이다. 정신이 없었다. 난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갖고 교실 맨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갔다. 가방에서 사탕 상자를 꺼내 손으로 거세게 쥐었다. 분홍빛의 찌그러져 버린 상자 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조금은… 후련해졌다. "어디 가?" 교실 문을 나서는데 평소 내 옆에 앉던 녀석이 놀란 얼굴 로 물었다. "집에." 뭐라고 더 지껄이는 녀석을 뒤로한 채 학원 밖으로 도망치 듯 달려나왔다. 왠지 미칠 것만 같은 기분에 그 기세를 몰 아 계속해서 달려버렸다. 미친 듯이……. "하아. 하아." 꽤 먼 거리를 달려오니 숨이 찼다. 깊게 심호흡을 하지만 차갑게 식은 공기는 오히려 날 괴롭게 했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끓어올랐다. 달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 라 때문일까. "아하하핫, 멍청한 새끼!" 멍청이. 젠장, 젠장, 젠장! 욕할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자 학에 그쳐버리는 욕설을 계속해서 퍼붓는 나. 너무 한심스 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아니 실제로 죽고 싶었다. 내가 죽 으면… 그때는 사라가 슬퍼해 줄까? 조금 더 잘해줬으면 하 고 후회해 줄까? 그리고… 그리고……. "하…하. 바보… 같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따뜻한 것, 눈을 감아봤지만 눈물 은 멈추지 않았다. 『친구?』 집에 도착한 나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끔찍해, 끔찍해, 끔찍해. 물 온도를 적당히 조절한 후에 물을 틀었다. '쏴아아' 샤워기가 뜨거운 물방울들을 강하게 뿜어냈다. 조금만 더 뜨겁다면 살이 익을 정도의 온 도였지만… 추웠다. 분명 몸은 따뜻하게 달궈지고 있었지 만… 이 끔찍한 추위는 가시질 않았다.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아 보았다. "추…워." 이가 맞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물을 더욱 뜨겁게 했다.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하 얗게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봐서는 뜨거운 물이 맞는 것 같지만,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은 가시질 않는다. "하하…하 될 데로 되라지." 더 이상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물을 잠갔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고 나니 빨갛게 달아오른 내 몸이 보였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화상을 입었을지도 모 른다. "으윽." 살이 쓰리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너무나 생생한 고통이 날 후려쳤다. 거의 익다시피 한 몸을 이끌고 겨우 내 방으로 갔다. 속옷을 걸치고 위에 가벼운 옷을 입 는 동안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민감해져버린 피부에 천이 스칠 때마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는 말이다. …이로써 내가 바보라는 사실이 증명된 건가. 얼어버린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삐익 내 방에 있는 가구라고는 책상, 컴퓨터 데스크, 침대 정도 다. 침대 맞은 편에 있는 컴퓨터의 전원을 넣고 의자에 앉 았다. 오랜만에 채팅이나 하는 게 기분전환에 좋을 것 같 다. 물론, 정말로 기분이 좋아질지는 미지수지만……. 30분 정도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이리저리 이 방, 저 방 헤매 고 있을 때였다. [58] 비공개 (1/2) 오늘은 화이트데이, 비참한 하루. Kriese(크리스) 왠지 마음에 드는 방 제목이었다. '화이트데이, 비참한 하 루'라니 나와 같잖아. 라고 생각하다니 씁쓸하군. 비밀번호 가 걸려있는 방이라니, 한 번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관두기 로 했다. 보통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방의 인원제한이 두 명 이라면, 그것은 이성 친구를 찾는 방이었다. 책상 위의 탁 상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11시였다. 그만 잘까……. Kriese님이 당신을 초대합니다.(58번 방, 비밀번호: enemy) "…초대?" 지금, 아주, 매우, 정말, 많이 놀랐다. 통신에뮬레이터를 꺼버리려고 마우스에 손을 대는 순간 '딩동' 소리와 함께 초대 메시지라니……. 왠지 누군가 날 보고 있는 듯한 섬뜩 한 기분마저 들었기에 잠시 고민하고 말았다. 들어갈까, 말 까. 그 와중에 갑자기 쪽지가 왔다. Kriese님이 보낸 쪽지 : 귀신 아니야. 으윽, 저러니까 더 귀신같잖아. 진부한 스토리이긴 하지 만, 채팅을 하고 있는 남자 뒤에서 그를 노려보는 처녀귀신 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름 끼친다. 하지만 호기심은 공포 를 이기는 법, 결국 난 초대에 응하고 말았다. *** Always(명시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Always(명시윤) 안녕하세요... Kriese(크리스) 어서 와요. Always(명시윤) 무슨 일이시죠? Kriese(크리스) 심심해 보여서... 그냥 불렀어요. …무섭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바로 눈앞 에 있는 상대도 아니건만 도대체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역시 장난일까? Always(명시윤) ...제가 심심한지는 어떻게 아셨죠? Kriese(크리스) 음. 사실은 제가 심심했어요. 그러던 와중 에 다른 대화방들 상황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시윤 님이 유 독 눈에 띄더군요. Always(명시윤) 에? 제가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건지.. Kriese(크리스) 한 방에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 돌 아다니시던데요? 다 재미없어서 그런 것 아닌가요?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 사람의 말에 따르면, 내가 대화방 에 재미를 못 붙이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 었다는 것이다. 후우, 귀신이라니… 너무했나. Always(명시윤) -_-; 정확해요. 심심해서 이곳저곳 돌아다 니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방 들어올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 고요. Kriese(크리스) 아.. 그래요? 우연이라기에는 좀 뭣했지만 생각보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지켜보다가 초대하다니……. Always(명시윤) 하아... '화이트데이, 비참한 하루'라고 써 놓으셨는데... 왠지 지금 제 기분 같군요. Kriese(크리스) 후훗, 별로 마음에 드는 날은 아니죠. Always(명시윤) 저기.. 그쪽 소개 좀 해줄래요? 아, 나부터 하죠. 전 17세의 남자, 그리고 바보랍니다. 조금은 자조적이었다. 하아, 상대방은 몇 살일까. 남자 같 은데 말야. Kriese(크리스) 음, 그냥 말 놓을게. 나도 열 일곱의 남자. 이름은 밝히기가 꺼려지니까 그냥 크리스라고 불러. 동갑이라… 신기하다. 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신기하 다. 난 통신을 할 때면 말투가 바뀐다. 다들 그런 것 같지 만, 왠지 내가 했던 말들을 나중에 되새겨 보면 신기할 뿐 이다. 내가 언제부터 저렇게 고상 떨면서 말을 했는지……. '~입니다. ~요.' 등이 그렇다. Always(명시윤) 동갑이었네. 흐음... 너도 오늘 고백하고 차였어? Kriese(크리스) 이런, 이런. '너도' 라니.. 난 준 적도 없 고, 줄 생각도 없어. 그러는 너는 차인 건가? 꼭 저렇게 적나라하게 말해야 하나. 오늘 있었던 일을 설 명해줄까 하다고 쪽팔린 마음에 참기로 했다. …너무 창피 하다. 나는 그대로 침묵해 버렸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참다못한 크리스가 다시 말했다. Kriese(크리스) 무슨 일이었는데? 아... 이런 일을 묻는 건 실례인가. 미안.. Kriese(크리스) 미안해. 넌 기분 많이 상했을 텐데 괜히 캐 물었구나. 정말 미안.. 저 녀석, 고 단수다. 저렇게 수그리고 들어오니까 굉장히 말해주고 싶어졌다. 물론 자랑은 아니지만……. '어차피 얼 굴 볼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녀석인데 뭐 어때.' 라는 마음에 나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그 녀석 은 조용히 경청하였고,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버 린 나는 굉장히 창피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음은 정 리할 수가 있었다. 쓸데없는 기대를 갖기보다는 빨리 잊어 버리는 것이 좋다. 크리스에게 모든 일을 말해주고 나니 시 간은 11시 30분. 반시간이나 잡아먹었다. Kriese(크리스) 요컨대, 고생해서 산 사탕을... 전해주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내던졌다는 얘기구나. 너 바보 아냐? Always(명시윤) 뭐? Kriese(크리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고백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포기하다니... 좋아하기는 했어? 적어도 얘기는 해 봤어야 할 거 아냐. Always(명시윤) 어차피 차일 게 뻔한데.. 게다가 둘을 이어 주려는 분위기에서 내가 고백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아? Kriese(크리스)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까.. 거 두절미하고 짧게 말하자. 그렇게 체면 차리고 자존심 지키 며 몸 사리려고 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 알아? 이 녀석… 꽤 공격적인 성격이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 움 직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말… 고백해 볼 까? Kriese(크리스) 밑져야 본전, 모 아니면 도야. 난 정말 마음이 약하다. 남의 말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성 격이란 말이다. 그리고 지금 크리스의 말에 심하게 동요하 고 있었다. 에라, 될 데로 되라! Always(명시윤) ...쳇, 그럼... Kriese(크리스) 그래, 파이팅! Always(명시윤) 이, 이봐.. 난 아직 한다고 안 했어. Kriese(크리스) 사내자식이 속 좁게 자꾸 그럴 거야? 결국 난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물론 크리스의 말 때 문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정말이야! 흠흠. Kriese(크리스) 그럼 나중에 쪽지 보내. 보통 밤에 접속하 고 있을 테니까.. Always(명시윤) 응. 그래.. 통신친구라.. 네가 처음인 걸? Kriese(크리스) ..... *** Kriese(크리스)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그 녀석은 내가 인사하기도 전에 나가버렸 다. 현재 기분은 매우 좋다. 흔들리던 마음을 처음 보는 녀 석이 잡아주었고, 조언도 해줬다. 후회하지 않도록 한 번 덤벼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을 테니까.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침대에 뛰어 들었다. 푹신 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오늘도…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 * * 크리스는 컴퓨터를 끄면서 빙긋 미소지었다. "…재밌다." 밀린 업무에 지겨워진 나머지 채팅을 했는데 생각보다 재 밌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남자로 착각해줘서 더욱 재 밌었다. 결국 크리스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해가며 시윤의 마 음을 돌려놨고, 남의 연애 사에까지 간섭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오랜만에 드는 유쾌한 기 분이었다. "…재밌고 바보 같은 녀석이야." 남을 갖고 놓는 일에 묘한 쾌감을 느낀 크리스는 실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고… 신기하기도 해." 조금 틀렸다. 대화방에서 각자의 느낌을 되짚어가던 그녀 는 시윤의 사념을 읽고는 잠시 놀랐었다. 너무 착한 것도, 너무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묘하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 던 것이다. 당분간 남자행세를 하면서 친구로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친구라니……. 후훗, 친구." 얼마 만에 갖는 친구란 말인가. 그녀는 눈을 감고 친구라 는 단어를 음미했다. 친구라니… 지금까지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 묻으며 잠을 청했다. 첫 사랑. 『골 들어갔다.』 정작 내가 학원에 다시 간 날은 3월 16일이었다. 결국 하 루 쉬어버린 것이다. 쪽팔리기도 했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했으니까……. 크리스의 격려에 용기 백배하여 학교가 끝나 기가 무섭게 학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벌써 사귀고 있으면 어쩌지?' 걱정은 이것 단 한가지였다. 이미 민재와 사라가 사귀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정말 크리스 말대로 '골키 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인가. 흔들흔들, 내 마음은 갈 대라네. 자꾸만 갈등된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 느새 학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수업시작 15분 전, 아직은 한산할 시간이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누 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으후후후훗, 시윤아." 평소 내 옆에 앉던 녀석, 이름이 준영이던가. …깜짝 놀랐 잖아! "…왜 실실 쪼개?" 기분 나쁘다. 넉살좋게 생긴 얼굴에 함지박한 웃음을 띄우 고 있는 준영. 솔직히 호감이 가는 얼굴이지만 지금 내 기 분이 기분이니 만큼 어쩔 수 없다. 그만 웃으라고 한마디 해주려는데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 다. "시윤아. 몇 가지 정보를 줄 테니 잘 해봐라." 준영은 엘리베이터에 타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 다. "뭐?" "첫째, 네가 버리고 간 사탕이 반 여자들에게 발견됐다." 준영의 말을 그저 흘려듣던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이것 때문이었나. 이 녀석이 계속 웃고 있었던 이유는. "둘째, 사라는 아직 민재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생 각해보겠다고 했다네." 내려앉았던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다. 이번엔 안 도의 한숨을 쉬었다. 준영은 슬며시 날 곁눈질하더니 킥킥 거리며 웃었다. '반응이 너무 웃겨.'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데… 다 들린다 이 자식아! "셋째, 사라는 네가 버린 사탕을 가져갔어. 음, 이건 의외 로군. 그리고 어제는 학원에 나오질 않았지." 사라가 사탕을 가져갔다는 대목에서… 솔직히 기뻤다. 잘 만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얼굴에 내 감정이 그 대로 드러났는지 준영은 계속 킥킥거리고있었다. '띵', 벌 써 6층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준영이 내 양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시윤아, 힘내! 비록 불가능에 가깝다지만 그래도 널 응원 하는 사람이 여기 한 명쯤은 있잖아." 놀랐다. 그저 놀라움뿐이었다. 날 위해주는 친구라니 말만 으로도 고마웠다. 그저 장난기 가득하고 웃기만 하는 녀석 인줄 알았는데, 그 마음 씀씀이가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나에게 호감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 로 녀석보다 먼저 교실에 갔다. 문 앞에서 한 차례 심호흡 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말이야 바른 말이지. 민재가 훨씬 낫잖아." "응, 그건 그래. 민재랑 사라랑 사귀면 꽤 어울릴 거야." 못들을 걸 들어버렸다. 하필이면 문을 열자마자 일찍 온 여자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니, 그것도 내 얘기를……. 교실 에는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이 둘러앉아 떠들고 있었다. 평 소 수업시간에도 시끄러운 아이들이어서 그다지 호감이 가 지 않는 타입이었다. 살짝 문을 열었던 나는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아버렸다. "…제길." 역시 무린가. 또다시 비관적이고 자조적인 상상에 빠져들 려는 찰라, 싱글벙글 웃는 준영이 나타났다. 녀석은 문가에 기대어 길게 한숨을 쉬는 내 모습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웃으며 문에 귀를 대고는 안에서 떠드 는 소리를 엿들었다. "오호라. 이것들 봐라."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준영은 나를 툭툭 쳐서 문에서 물 러나게 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심히 걱정이 된다. 내 가 문에서 두 걸음쯤 물러나자 그는 문을 벌컥 열고는 기운 차게 외쳤다. 그래, 외쳤다……. "하이! 에브리바디. 아아앗, 이 무슨 괴변이란 말인가." 워낙 준영의 목소리가 우렁찼기에 교실 안에서 떠들고 있 던 여자들은 얼빠진 얼굴이 되 버렸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진다는 것, 난 재빨리 밖에서 문을 닫았 다. 아무래도 이걸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감은 역시 적중했다. "교실 문을 열면 아리따운 선녀들이 나를 맞을 줄 알았건 만, 이 웬 횡재수란 말인가. 오호, 통재라. 만일 꿈이었다 면 복권 당첨은 따 논 당상이었을 터. 아쉽구나." 문을 닫았지만 다 들린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준영의 목 소리를 듣고 있던 난 매우 유쾌해졌다. 어디 얼마나 걸리는 지 볼까. 하나, 둘, 셋, 넷……. "…야, 김준영! 너 그게 무슨 소리야!" 4초만에 반응이 나왔다. 슬슬 들어가야겠다. 내가 문을 열 고 조심스럽게 들어가자, 한바탕 소리를 지르려던 여자들이 잠잠해졌다. 준영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방을 내려놓으 며 자리에 앉았다. '꿈속의 횡재수 = 돼지'라는 사실을 떠 올린 여자들은 모두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채웠고, 곧 수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사라는 오지 않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난 민재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눈에서 적의를 찾아낸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당연한 건가. '오질 않네.' 무슨 의미일까. 초조해진다. 불안해진다. 마음을 비우고 차분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도 안 왔다고 했지. 그럼, 오늘도… 인가. -나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런데 왜 사귀자고 해? 좋아하니까 사귀자고 했지. 웃음, 소리 없이 홀로 웃었다. 너무나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짝사랑의 아픔이라는 것, 굉장히 괴롭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럼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 선생님이 웃으며 수업을 끝냈다. 앞으로 한 시간 남았지 만… 더 학원에 있어봤자 사라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어차 피 너무나 답답해서 공부도 되질 않는다. 그냥 집에 갈까 고민하는 중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호! 사라가 나오라고 문자 보냈다. 얘들아, 나 먼저 간 다." 민재는 환희에 찬 얼굴이 돼서는 가방을 집어들고 바람처 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의 친구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그를 응원했고 난…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 았다 인가. 나도 가방을 챙겨서 학원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일,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다. "……."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한시간 째, 학원 근처 벤치에 누 워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지금은 3월 이고 무지 춥다. 하지만, 너무 허탈한 나머지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만 나중에 감기 걸릴지도 모르지 만……. "하하하, 정말이지. 한심해." 자조적이다. 냉소적이다. 현재의 나는 그야말로 바보. 여 자한테 차였다고 인생 다 끝난 것처럼 행동하는 나는 한심 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슬픈걸." 피곤하다. 한참을 울었더니 -지금은 그쳤지만- 체온이 많 이 떨어졌다. 울고 나면 졸리고 이곳은 춥지만 몸을 움츠리 니 그럭저럭 따스하다. …잠들 것만 같다. "될 데로… 되라." -Zi------ 얼마나 잤을까. 핸드폰이 진동한 덕분에 잠에서 깼다. 그 리 오래된 건 아닌 것 같지만 잠시라도 졸았기에 몸이 매우 차가워져 있었다. 누가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한 거지? "…여보세요." -야, 임마! 나 준영이.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 "그냥… 그렇게 됐어. 무슨 일이야? 내 전화번호는 어떻 게……." -젠장, 네가 학원에 두고 간 거 빨리 와서 찾아 가. 번호 는 당연히 선생님한테 물어봐서 알아낸 거고. 나도 집에 갈 건데, 이거 없어져도 난 모른다. 그럼 빠이! 뚝. 준영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학원에 두고 온 거라니……. 가방은 들고 왔는데 설마 뭘 또 빼놓고 왔 나. 시계를 보니 학원이 끝나고도 20분은 지나 있었다. 아 직 문닫으려면 시간이 조금 있으니까 빨리 가서 찾아봐야겠 다. "하아, 정말 바보 같잖아."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왔는데 두고 온 게 있어서 가지러 간다니……. 한심해. 학원까지는 금방 도착 할 수 있었지만 기분 나쁘게도 엘리베이터를 벌써 꺼놓은 상태였다. 결국 6 층까지 뛸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숨이 찬다. 계속해서 사라의 얼굴이 떠올랐기에 더욱 빠르 게 뛰었다. 무리하게 육체를 혹사시키면 그 고통으로라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테니……. 탁탁탁탁탁, 잠시도 쉬지 않고 한달음에 6층까지 가버렸다. "하악, 하악. 후…우, 힘들다." 너무 심하게 몸을 움직였더니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간 신히 호흡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선생님은 하나 둘씩 퇴 근하고 있었다. 빨리 나도 '두고 간' 물건을 찾아서 나가야 겠다. 아까 수업을 받았던 교실로 걷기 시작했다. 적어도 학원 내에서는 뛰면 안 된다. 교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가방 버리고 갈 거야? 하하, 그때는 가방을 두고 갔었지. 그럼 지금은 뭘까. 차 가운 문의 금속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창문으로 미세하 게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지만 교실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뛴다. 불을 키진 않았다. "…넌"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창가에 서 있는 사람. 천천히 어둠에 눈이 적응을 했고, 그녀의 실루엣은 점점 뚜 렷해졌다. 어두운 교실 속, 내 앞에는……. "…진심이야?" 그녀가 있었다. 이제는 내 눈이 어둠에 완전히 적응을 했 고, 덕분에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진심이었어?" 그녀가 재차 묻는다. 이제는 보인다. 그 예쁜 두 눈이 ……. 난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한마디면 되니 까……. "응, 진심이야." 굳어있던 사라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내게로 다 가왔다. 나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라는 차가운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고는 한참을 서 있었다. 조금씩 손이 따 뜻해 질 때쯤 사라는 지나가듯 말했다. "나도… 네가 좋아." 내가 두고 간 건, 사라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시윤은 크리스에게 쪽지 하나를 남겼 다. '충고 고마워. 덕분에 골 들어갔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된 이사장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제목 은 우습게도 '불량 청소년 탐방기'라고 큼지막하게 인쇄되 어 있었다. 이사장은 천천히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고, 곧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착하기만 했던 호영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 이 첨부되어 있는 사진들은 이사장에게 너무나도 실망스러 운 것들뿐이었다. '쾅' 이사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후우, 후우. 이해하자. 이해해. 호영이도 다 컸으니 까……." 평소의 이사장을 대하는 호영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것도 인정해야 했다. 호영은 어리지 않으니까……. 까짓 술 좀 마시고 여자 좀 마신다고 대수냐. 이사장은 조금 부 드럽게 생각하기로 했다.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 앉힌 그는, 상자 바닥에 놓여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잔주름이 많은 그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졌 다. 이내 결심한 듯, 이사장은 그의 방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VTR로 테이프를 재생시켰다. "……." 현실은 잔혹했다. 이사장은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테이프에는 호영이 어떤 여대생을 강간하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있던 것이다.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흘 렀지만 이사장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조작된 것일까. 과연 저것이 조 작된 것일까. 생생하게 들려오는 호영의 잔인한 목소리가 과연 거짓일까. 비열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과연 만들 어진 것일까. 물론 이사장은 알고 있었다. 저것이 진실이라 는 것을……. 하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를 것 같 아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Drrrr 비명 지를 뻔했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의 벨소리가 조 용했던 실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사장은 떨리는 손 으로 전화를 잡았다. 과연… 누구일까. -안녕하쇼? "누구…십니까?" -보낸 것들은 잘 받으셨수? "당신 누구야!" -여어, 보신 모양이구만. 그거 고생해서 찍은 거요. 본 기 분이 어떤지 말 좀 해주쇼. 물론 전화를 건 상대는 종석이었다. 아침까지 고생해서 사 진을 현상하고 비디오를 편집한 종석은 유 부장의 부탁으로 그것들을 배달까지 해줬다. '확실한 애프터 서비스!'를 외 친 그는 유 부장의 계획에 동참시켜달라고 졸랐고 -호영에 게 그만큼 악감정을 품었다- 전화 연락을 대신 해주는 일을 맡았다. "당신… 조용히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 걱정하기보다 조카 걱정을 해야지. 아직 살아 있으려 나……. 이사장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설마 납치 된 건가! 종석은 유들유들한 말투로 계속해서 이사장의 속 을 긁어댔다. -아직도 그런 조카가 사랑스럽게 보이시나. 허허, 참 신기 하네. 나 같으면 눈 딱 감고 인연을 끊어버릴텐데……. 내 아들이면 호적에서 지우고도 남지. 그래, 확실히 썩었다. 이사장은 비디오와 보고서를 보고 호영에게 굉장히 실망했지만, 그가 자신을 속였기에 배신감 을 느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들같이 생각하던 호영에게 큰 일이 생긴다고 하니 구해줘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 얼마를 원해. 뭘 원하는 거지?" -아하. 맞다. 그 얘기를 안하고 있었구나. 음, 거기 시윤 이라고 다니지? "…시윤?" -그래, 시윤. 댁 조카한테 두들겨 맞고 학교에서 쫓겨날 뻔한 시윤이. 이름이 시윤이가 맞던가. 어쨌든 걔 정학 취 소해. 어느새 종석은 반말을 쓰고 있었다. 이사장은 종석의 말투 보다는 그 내용에 놀랐고, 곧 한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시윤의 뒷 배경이 상당할 것이라는……. 물론 그 일 또한 호영이 시윤에게 억울하게 맞았다고 생각했던 이사장이었지 만 지금은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가벼운 요구라면 어서 들어주고 일을 원만하게 끝내는 게 좋을 것 이다. "좋, 좋소. 그렇게 할 테니 당장 호영이를 풀어…" 종석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며 이사장의 말을 끊어버렸다. -물론 풀어주지. 아니, 풀어주겠지.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서……. "그럼 당장 책임자에게 연결해 주시오!" -음… 귀찮아. 그리고 섣부른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물론 해도 소용없겠지만……. 딸깍. 전화는 어이없게 끊겼다. '상대는 틀림없는 미친놈 이다.'라고 생각한 이사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아, 최 검사? 나 진성일세. 다름이 아니라……." 그는 곧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주겠다.' '걱정 말고 기 다려라.' 등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사장의 인맥은 굉 장히 광범위했고, 그는 그 사람들을 모조리 동원해서라도 호영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차분히 기다렸다. 믿 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겼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 고 믿으며……. -Drrrr ……. 그리고 그는 절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사람들이 한결 같이 '미안하네, 손 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선배님,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막혔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등의 대답을 한 것이다. 도대체… 도대체 시윤이라는 학생 의 배경은 어떤 것이기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을 막아놓은 것인가. 아까 전화를 했었던 남자의 말이 떠올 랐다. '섣부른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물론 해도 소용없겠지 만…….' "…호영아." 이제는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깨워." -퍼억 유 부장의 명령에 덩치 한 명이 묶여있는 호영을 걷어찼 다. 호영이 묶여 있던 의자는 덩치 덕분에 뒤로 쓰러졌다. "크윽, …뭐야." 간신히 눈을 뜬 호영은 복부를 걷어차여서인지 얼굴을 잔 뜩 찡그리고 있었다. 호영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천장 에 매달린 전구 하나뿐이었다. 그는 벽지도 발라져 있지 않 은 천장과 초라한 조명 덕분에 이곳이 지하실 내지는 창고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유 부장은 쓰러져서 어리둥절 한 얼굴이 된 호영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다시 명령 했다. "일으켜." 덩치의 억센 손이 호영이 묶여있는 의자를 거칠게 일으켰 다. "개새끼야, 살살 해. 머리 아파 죽겠구만……." 호영은 그제야 유 부장과 덩치들을 볼 수 있었고, 왜 자신 이 이곳에 있는지 떠올랐다. 학교 앞에서 한 대 맞고… 눈 뜨니까 여기로군. 기분이 더러운 나머지 호영의 표정이 묘 하게 일그러졌다. "좋은 말 할 때 이거 풀어라. 너희들 사람 잘못 건드렸 어." 호영은 어차피 느긋하게 기다리면 삼촌이 사람들을 풀어서 자신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에 어떤 놈들인지는 모 르겠지만, 아무렴 어때. "…나가 있어." 유 부장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덩치들이 방에서 나가자 좁아 보이던 방이 꽤나 넓어졌다. 삼십 대 초반의 얼굴, 매섭고 차가운 분위기, 그리고 아까 맞아서 알 듯이 무서운 주먹의 남자. 호영은 담담한 얼굴로 상대가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유 부장은 잠시 뜸을 들 이더니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호영에게 보였 다. "명시윤?" -퍼억 유 부장은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발로 호영의 얼굴 을 걷어찼다. 발 차기는 칼날 같이 매서웠다. "아…아아." 입술이 터지고 이가 부러졌다. 호영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결박당한 상태였다. 정신이 나갈 정 도로 아찔한 충격이었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유 부장 은 조용히 호영에게로 다가왔다. 호영의 몸은 뒤집혀서 얼 굴이 시멘트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곁눈질로 유 부장을 살 피던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돈이 필요해?" 호영의 바로 앞까지 온 유 부장은 잠시 몸을 멈췄다. "말만 해. 돈이 필요하다면 우리 삼촌한테… 아악!" 유 부장은 호영의 머리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시멘트 바닥 에 얼굴이 비벼지자 호영의 얼굴 피부는 사정없이 벗겨졌 다. 적당히 그의 머리를 짓이긴 유 부장은 그제야 입을 열 었다. "연장자에게는 경어를 쓰는 게 예의다." 호영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유 부 장의 살기 어린 음성에 호영은 찢어져서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간신히 대답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그의 뒤통 수에 올려진 이 발이 언제 다시 호영을 밟아버릴지 몰랐다. "원…하는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강한 자에게는 꼬리를 내려야 한다. 적어도 위험을 피하려 면 그래야 했다. 현재 호영에게는 자존심이고 뭐고, 살고싶 은 마음뿐이었다. "별로 필요한 건 없는데." 유 부장은 호영의 머리 위에 올려놨던 발을 치웠다. "이제야 얘기가 좀 될 것 같군."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서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역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녀석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푹 쉬면서 호영을 굴려야 하니, 천천히 편하게 할 생각이었다. 유 부장은 바닥에 얼굴을 박고있는 호영을 걷어찼다. 살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호영은 신음을 흘리 며 굴렀다. 이제 옆으로 늘어진 자세가 된 그는 유 부장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유 부장은 살짝 웃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후-. 담배 필래?" "아, 아닙니다."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한 대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건 분명 속임수일 것이고, 담배 달라 고 하면 또 그 핑계로 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 생각과는 달리 유 부장은 선선히 호영의 입에 담배를 물 려주었다. "한 대 피워. 오늘 하루는 꽤 힘들 거야." 유 부장은 손수 불까지 붙여줬고 호영은 찢어진 입술로 간 신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하얀 담배에 호영의 피가 묻어났 다. "그거 다 피우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유 부장은 평소와는 달리 매우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것은 호영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지금 입에 물고 있는 담배가 자신의 생명선이라고 생각하자 더욱 초조해졌다. 호영은 혹 시 구하러 올 사람이 없을까 하고 반사적으로 문을 바라봤 다. 유 부장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역시 부드럽게 말했다. "다 처리했다. 네 삼촌이 널 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 지마. 내가 널 내보낼 때까지는 그 누구도 널 못 데려간 다." 허풍이 아니다. 호영은 유 부장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 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걱정 마. 간단한 교육만 하고 끝낼 거니까." 본격적인 교육이 어떤 것일지 심히 궁금해지는 호영이었 다. 베란다를 통해서 쏟아지는 따가운 햇빛에 시윤은 눈을 찌 푸렸다. 한참 달게 자고 있었는데 눈이 부신 나머지 투덜거 리며 깨어났다. "지각이다! 지각이다!." 째깍거리는 벽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급하 게 몸을 일으키려던 시윤은 곧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오른팔 에 묵직한 것이 올려져 있는 것을 느낀 시윤은 곧 수연이 자신의 팔을 베고 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윤은 그제 야 정학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떠올렸고 곧 오른팔 때문에 어설프게 일으키던 상체를 털썩 바닥에 뉘였다. "뭐야. 이 녀석은……." 어젯밤에 자고 가겠다고 떼쓰는 수연에게 져버린 시윤은 그녀를 침대에 재웠다. 그리고 자신은 차가운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건만, 아침에 일어나니 수연이 어느새 거실 로 기어 나와서 팔을 베고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탈한 나머지 시윤은 키득거리며 웃어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 분은 좋았고, 정학이라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쳇, 뻔뻔스러워. 이렇게 웃으면서 자고 있다니……." 중얼중얼, 투덜투덜. 가만 살펴보니 혼자서 덮기 적당한 이불이 전부 수연에게 가 있었다. 공기가 약간은 서늘했기 에 시윤은 몸을 부르르 떨어 추위를 이겨내려 했다. 슬슬 팔도 저려오던 터라 그는 조심스럽게 다른 손으로 수연의 머리를 받치고 팔을 빼내었다. 잠에서 깰까봐 무척 세심한 작업이었다. 잠을 설쳤는지 어쨌는지 갈증이 났다. 시윤은 뼈를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주고는 부엌으로 소리 죽여 걸어 갔다. "하암. 오랜만에 잘 잤다." 이 정도로 늦게 일어난 적은 근래에 들어서 한번도 없었 다. 가만 생각해보던 시윤은 곧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 다. '이 시간이 되도록 수연은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수 연은 혼자 살고 있으니까 따라서 스스로 일어나는 데에 굉 장히 규칙적일 것이다.' "피곤했나?" 시윤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고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병 하나를 꺼내자 손에 와 닿는 시원한 촉감이 잠을 확 달아나 게 했다. "얍!"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하도 큰 소리라서 시윤은 얼빠진 얼굴이 되어 물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수 연이 시윤을 놀리려고 몰래 다가왔었던 것이다. "아, 그그그." '하필 물통이 발등에 떨어질 건 또 뭐냐.' 시윤은 아픈 발 등을 부여잡고 연신 투덜거렸다. 수연은 그런 그를 보며 킥 킥거리고 웃었고 시윤은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아하하핫. 많이 아파?" "…너도 해줄까?" 시윤이 물통을 좌우로 흔들며 이를 갈자 수연은 죽는시늉 을 내며 거실로 도망가 버렸다. -Drrrr 갑자기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수연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시윤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숨소리도 죽이고는 눈 만 깜빡거리며 거실에 깔아놓은 이불에 처박혀 있었다. "여보세요?" 시윤에게 이 시간에 전화 올 곳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 대방이 누군지 궁금했고 곧 표정이 삭막하게 굳어버렸다. 수연은 계속 눈을 깜빡거리며 '누구야'라고 입 모양을 바꾸 고 있었다. "왜 전화 하셨어요?" 누굴까, 누굴까. 그렇게 궁금해하고 있던 수연은 시윤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이요?" 결국 수연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시윤아, 누구야?" 한창 진지하게 통화를 하고 있는 시윤에게 수연은 툭 내뱉 듯이 말을 했고, 그것은 분명 전화 상대에게도 들렸으리라. 만약 시윤이 부모님이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수연은 '오 히려 부모님이면 좋겠다.'라고 결론짓고는 씩 웃었다. 시윤 은 깜짝 놀라서 수연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 사촌 누나예요." 부모님은 아니군. 그렇게 생각한 수연은 이번엔 더욱더 큰 소리로 말하려 했다. '시윤이 예비신부예요.' 그러나 시윤 은 세심하게 주의하고 있었고, 다시 수연의 입이 열리려하 자 옆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걷어차 버렸다. 퍽! 수연의 얼 굴에 강타. 윽, 위협만 줄 생각이었는데.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시윤은 간단히 통화를 마무리하고는 전화를 내려놓았다. "참나……. 그래, 맘대로 해라. 이제는 여자 얼굴에 베개 를 집어던진다 이거지?" 움찔, 시윤이 수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삐졌어?" 정말로 잘 삐지는 사람한테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그 건 바로, 삐졌을 때 '삐졌지?' 라고 묻는 것. 그럴 때에는 '화났지?' 내지는 '기분 상했어?'라고 묻는 것이 삐짐쟁이 에 대한 예의다. 시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평소에는 사근사근하던 아이가 저렇게 새침하게 나 오니 어찌나 귀여운지……. "안 삐졌어!" 삐졌구나. 시윤은 간단하게 결론짓고는 키득거리며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하 려 하는 듯 하더니 곧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누구야?" 그래도 궁금한 건 역시 못 참는 것 같다. 시윤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교장선생님." 시윤의 목소리가 왠지 짜증내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연의 의혹은 더욱 짙어졌다. "아니, 교장이 왜?" "정학 취소하겠다고 내일부터 등교하래. 직접 사과하겠다 고 교장실로 오라는데?" 보통 학교의 일이 잘못 되더라도 교장이 직접 나서는 일은 없다. 그저 아랫사람들에 의해서 해결될 뿐이지, 사과니 뭐 니 하는 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얘기. 그것도 학부모가 아닌 학생에게 사과를 하겠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하지 만 시윤의 정학이 풀렸다는 얘기에 수연은 기분이 좋아졌 다. "뭔가 일이 잘 풀렸나 보네. 쳇, 오늘 괜히 결석했나." "…학교 가. 결석보다는 차라리 지각을 해라." 하지만 수연은 시윤의 말에 볼을 부풀리더니 그대로 그를 껴안아 버렸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싫어. 이왕 늦은 거 시윤이랑 있을 거야." 비비적, 비비적. 수연은 시윤의 얼굴에 볼을 비비며 콧소 리를 내었다. "…그럼 네 옷이나 입어. 남의 옷 뺏어 입지말고." 가만 살펴보니 어느새 시윤의 옷을 입고 있는 수연, 밤에 몰래 꺼내 입은 건가. 시윤은 이렇게 가다가는 교복 외에는 옷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수연을 품에서 떼어놓 았다. '벌써 두벌 째야. 가을 옷은 별로 있지도 않은데.' "하하, 오늘 이 옷 입고 나갈 건데?" 시윤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수연을 쏘아봤지만 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왜, 싫어?'라고 말하자 어깨를 축 늘어뜨렸 다. 풀죽은 그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던 수연은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조금만 기다려. 맛있는 밥 차려줄게." 투덜거리던 시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 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부부 같잖아."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시윤은 무슨 끔찍한 생각이냐 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윽, 이건 본심이 아니야! "달링~ 조금만 참아요." 시윤은 놀란 나머지 혀를 깨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그 가 다행이라고 느낀 것은 동거생활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 내일이면 부모님이 돌아오니까. 조금만 참자며 스스 로를 위로하는 시윤이었다. '사실… 조금 마음에 들긴 해.'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일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시윤 은 피식 웃으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바라보던 그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이리저리 스스로의 모습을 뜯어보았 다. 가만 생각해보니 회색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문제였 다. 정학을 받은 데다가 부모님도 집에 안 계셔서 느긋하게 처리하려고 했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서 검은색으로 바 꿔놓아야 한다. "쳇, 저녁에 약 사다가 염색해야겠다." 시윤은 미용실에 가자니 쑥스럽고 -시윤은 아직까지 염색 경험이 전무하다- 쪽팔리기도 해서 약을 사와 집에서 염색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그리 어렵지 는 않을 것이다. "다 수연이 때문이야!" "나 불렀어?" 시윤이 작게 중얼거리자 멀리서 수연이 소리쳤다. 어떻게 그 거리에서 자기 이름을 알아듣고 대답하는지……. 회색으 로 변해버린 머리칼, 왠지 너무나 슬픈 분위기가 되 버렸 다. 할아버지 같을 줄 알았는데, 이것은 뭔가… 다르다. 흰 색도… 검은색도 아닌… 뭐랄까. 그래, 아무 곳에도 속하 지 못하고 소외 받는 것. -쏴아아 시윤은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세면대에 물을 받아 손으로 움켜쥐었다. 물이 손에 잡힐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해보고 싶었다. -쏴아아 세면대에 차 오르는 물에 시윤의 얼굴이 비춰졌다. 출렁이 는 물결에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그의 얼굴, 그리고… 그리 고… "…꿈을 꿨었지." 잠을 쫓기 위해서 차가운 물을 틀었지만, 손에 와 닿는 감 촉은 반대로 뜨겁게만 느껴졌다. 덕분에 시윤은 간밤에 꿨 었던, 아니 어쩌면 밤마다 꿨을지도 모르는 꿈을 기억해냈 다. 평소와는 다른 아침,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시윤은 그저 학교에 가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 지만 지금은 그게 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촤 앗, 시윤은 얼굴을 씻어내며 중얼거렸다. "…불꽃." * * "자아, 그럼 계속해야지?" 호영은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뱉어냈다. 평소에는 맛나 게 피우던 담배가 이렇게까지 쓸 줄이야. 호영은 이를 바드 득 갈며 무표정하게 서 있는 유 부장을 쏘아봤다. 그는 손 가락을 꺾어 소리를 내며 예의 감정이 서리지 않은 그 목소 리로 말했다. "어른을 향한 눈빛이 불손해." 불꽃이 번쩍였다. 호영은 자신이 묶여있는 의자와 함께 바 닥에서 몇 바퀴를 굴러야 했다. 불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유 부장의 주먹이었고, 호영의 코는 그 한번의 주먹질에 내 려 앉아버렸다. "크, 끄으윽." 호영은 시큰거리는 코를 감싸쥐고 싶었지만 포박 당한 상 태에서는 그저 얻어맞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지? 지금까지 내가 당한 적은 없었 는데.' "독한 녀석이군. 비명 지르고 싶을 텐데." 놀랍다는 말이었지만, 역시 감정은 실리지 않은 음성이었 다. 과연 이 남자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을까 라고 생각한 호영은 킥킥거리더니 유 부장에게 침을 뱉었다. "비겁한 새끼. 큭큭, 사람을 묶어놓지 않고는 겁나서 못 덤비겠……" 퍼억! 유 부장은 호영의 말을 개가 짖는 정도로 생각했는 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로 걷어 차버렸다. 그 발 차 기라는 개념이 굉장히 상식 밖의 것이어서 호영의 늑골이 두개나 나가버리고 말았다. "쿠, 쿠악." 피를 왈칵 토해내는 호영, 하지만 그의 표독스러운 눈빛은 죽지 않았다. 상대는 전문 싸움꾼? 아니 그 이상이었다. 유 부장의 눈에 순간 웃음이 떠올랐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것이 어서 호영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묶어놓아서라……." 유 부장은 허리춤에서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칼을 꺼냈 다. 서늘하게만 보이는 칼날이 능히 뼈라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호영의 얼굴은 납빛이 되 버렸 다. 유 부장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호영은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뒤로 도망치려고 발버둥 쳤다. "자, 잠깐만…" 사악,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칼을 그어 로프를 끊어 버린 유 부장. 단순히 휘두른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호 영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고 밧줄만을 끊어버렸다. 간 신히 의자와 몸이 떨어지자 호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체의 자유가 구속된다는 것은 꽤나 갑갑한 일이었다. "이런 일도 오랜만이군." 유 부장의 변화 없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물 론 그것을 보고 있던 호영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를 뿐이었 지만……. "좋아, 옛 생각에 기분도 좋아졌으니 기회를 주지. 날 쓰 러뜨릴 수 있다면 보내주겠다." "말도 안 돼!" 솔직히 어떤 비겁한 수를 쓰더라도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아까는 묶어놔서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은 사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유 부장의 말 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럼 난 왼손 하나만 쓰도록 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호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선 택의 여지도 없을 뿐 아니라, 한 팔만 쓴다면 그만큼 핸디 캡이 크니 이길 수 있다. '저 건방진 자식의 얼굴에 한방이 라도 먹여줘야 속이 풀리겠다!' 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 만……. "좋아, 후회하지 말라고." 그새 반말을 쓰고 있는 호영이었다. "괴…물!" 호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누가 '괴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정의해 줄 수 있 을 것 같았다. '괴물? 검은 양복 입고 포커페이스에 한 팔 로 벽에 구멍 비슷한 것을 낼 수 있는 사람.' "집에 가기 싫은 건가?" 유 부장은 '밥 먹기 싫은 건가'라는 투의, 즉 매우 무심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한 팔로 상대할 테니 덤비라고 했는데 도 호영은 전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공 방이 있긴 했지만, 그 뒤로 사색이 되 버린 호영은 이리저 리 도망만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유 부장의 빗나간 주먹 이 벽을 함몰시키는 것을 본 호영은,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 다. "얼마 받았어? 내가 그 두 배 줄 테니 풀어 줘. 200? 300?" 호영은 주머니를 뒤지며 다급히 외쳤다. 그동안 천진성의 명의로 빼돌린 돈이 천만 원 가까이 되었기에 어느 정도 금 액은 감당할 수 있었다. "네게 그럴 돈이 있나?" "물론이야. 친척 아저씨 이름으로 융통한 돈이 꽤 되니 까."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자 호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되고, 이 공포감 조성하는 삭막한 놈 이랑 같이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호영은 500만원 정도는 기꺼이 넘길 생각이었다. "근성까지 썩은 놈이군." 유 부장은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자 하나를 세워서 앉았다. 잠시나마 이채를 띄던 그의 눈은 차 갑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굴욕에 호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지금은 비굴한 표정을 지으 며 헤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면 될까…요?" 돈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호영을 바라보던 유 부장은 내심 그를 비웃고 있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융통할 수 있 었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었다. 그저 호영이 조 금은 근성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되어 마음에 들었었는데, 지금 꼴을 보아하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40억." "뭐? 야! 이 미친 자식아!" 어이없는 금액에 호영은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고,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유 부장은 작게 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으로 해결하는 걸 쉽게 생각했나보군." 퍼억!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의자는 그의 손에 들려 충분한 무기가 되었다. 호영은 두 손을 들어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충격은 그대로 그의 몸에 전달되었다. 금이 간 늑골이 찌르르 울렸다. "아아아아악!" "돈과, 힘과, 권력을 갖고 노는 게 재밌나 보지?" 재차 휘둘러지는 의자, 금속으로 제작되어서 튼튼했고 원 심력으로 인해서 엄청나게 강한 힘을 싣고 있었다. 빠각! 몸을 일으키려던 호영은 등에 극심한 아픔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으…으윽." "많이 아프겠지.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유 부장은 지금까지 휘두르던 의자를 방 한 구석에 던져버 리고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조직 폭력배들이 흔히 쓰는 '사시미'가 아니라, 어느 것이든 자르기 좋은 '잭나이 프'였다. 신음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호영의 얼굴이 그 칼을 보더니 하얗게 질렸다. "40억에서 많이 모자라지만 적당히 받고 끝내도록 하지." "…예?" "마침 장기매매를 하는 친구가 물량이 모자란다고 도와달 라던데……." 휘리릭, 그의 손에서 칼이 춤을 췄다. 어떻게 손썼는지 팽 그르르 돌며 유 부장의 손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묘기를 부리는 잭나이프. 장난스럽게 나이프를 어루만지던 그는 호 영의 팔을 잡아서 바닥에 손을 펼치게 했다. 너무나도 강한 힘에 호영은 변변한 반항도 못해보고 손의 자유를 구속받았 다. "손은 별로 필요 없으니까." 유 부장은 호영의 팔에서 한 뼘 정도 되는 거리에 나이프 를 내리꽂았다. 카각! 나이프는 바닥을 훑으며 시끄러운 소 리를 냈고, 서서히 호영의 팔에 접근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팔을 자르려고 기어오는, 시퍼렇게 날이 선 나이프 의 모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호영은 안간힘을 쓰며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유 부장의 무쇠 같은 손에 제지될 뿐이었 다. "제발. 제발… 살려줘요." '카가가각' 돌 바닥에 하얀 선을 그리며 조금씩 다가오는 나이프. 어느새 나이프는 호영의 손에 닿아 있었다. 호영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유 부장은 아무것도 못 들은 듯, 조용히 그의 팔을 베어 들어갔다. 나이프가 살짝 그의 살에 맞닿자 피부는 아주 쉽게 베어졌다. 시뻘건 핏물이 나이프의 날을 타고 실처럼 흘러내렸다. 팔을 지지는 듯한 아픔, 그리고 팔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호영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 다. "으아아아악!" 겨우겨우 멈췄다. 나이프가 1cm만 더 파고들었어도 호영의 동맥은 여지없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힘줄이나 주 요혈관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워낙 상처가 깊어서인지 출혈 은 상당했다. 벌어진 손목은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 다. 비릿한 피 냄새가 그를 즐겁게 했다. "…으흐흑." 결국 호영은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맨 정신으로 손이 잘리는 고통은 고등학생이 견딜만한 것이 아니었다. "흐흑, 살려주세요. 뭐든지 다 할게요. 흐윽." "뭐든지?" 유 부장은 손을 들어 나이프를 뽑아냈다. 상처를 막고 있 던 칼날이 빠져나가자 유 부장의 얼굴에 피가 확 튀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은 채,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핏방울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난 남자 울음소리를 제일 싫어한다." "끄윽, 끅." 호영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며 끅끅거렸다. 피를 핥던 유 부장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는 주머니에서 다시 사진 을 꺼냈다. 시윤의 사진이었다. "내가 시킬 일은 단 한가지다.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 간단히 세면을 끝낸 시윤은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싸 버렸다. 원래는 마를 때까지 놔둘 생각이었지만 저 놈의 회 색머리가 보기 싫어서 아예 수건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회 색머리…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기는커녕 처량하기만 하다. '다 휘수연 녀석 때문이야.' 가장 못난 남자는 여자핑계 대는 남자라고 하였다. 시윤이 스스로를 못난 놈으로 만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은은한 요 리냄새가 시윤의 코를 자극했다. 머리를 대충 말린 시윤은 수건을 세탁물 더미에 던져버리고는 부엌으로 갔다. "시윤아~ 라면 끓였어." '라면? …냄새가 다른데.' 시윤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 수연이 '맛있는 밥 해줄게.'라고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아니나 다 를까 수연이 조심조심 들고 온 냄비에 담긴 것은 생긴 것만 라면이었다. "짠! 수연이 오리지널 라면, 이름하여 '잡탕 라면'!" 아직도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라면은 시윤의 식욕을 자극 했다. 여러 가지 음식들이 정갈하게 라면에 첨가되어 있는 것이 잡탕이라고 부를 만 했다. "먹어도 되는 거겠지?" "…다 너희 집 냉장고에 들어 있던 거야." 그래도 너무 조잡하게 섞여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시윤은 이미 수연이 만든 요리를 맛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긴 것부터 이상한 라면은 조금 꺼림칙했다. 하지만 고픈 배는 채워야 하는 법, 시윤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면발을 한 가닥 삼켰다. "맛있네?" 맛있어서는 안될 음식이 맛있다는 듯한 목소리, 수연은 피 식 웃더니 작은 그릇에 라면을 덜었다. 왠지 기분 좋은 얼 굴이었다. "당연하지. 혼자 살면 필수적으로 익히게 되는 게 요리 야." 그리고 그녀는 요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기도 했다. 거기까 지 말한다면 콧대높은 여자로 보일까봐 수연은 적당히 말을 끊었고, 배시시 웃으며 시윤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그가 저 번에는 맛있다는 소리를 안 했었기에 수연은 겉치장은 아예 포기하고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남기지 말고 다 잡수세요. 서방님." 수연은 시윤에게 교태 어린 목소리로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3-4인분은 될법한 양인데, 그것을 시윤 혼자서 해치우라는 것이었다. 시윤은 묵묵히 라면을 퍼먹었 다. '진짜 맛있다. 부모님 여행 가셔서 식사는 최악일줄 알았 는데.' 다 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맛은 확실히 있었다. 음 식 잘하는 여자, 시윤은 앞으로는 예쁜 여자보다도 음식 잘 하는 여자에게 표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30분 후, 다 먹으라는 수연의 말 덕분에 시윤은 라면 한 냄비를 다 해치우고 말았다. "끄으응, 배불러." 수연은 빵빵해진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시윤을 보고 싱긋 웃었다. 시윤의 모습이 마치 배부른 고양이와도 같았 기에. "그럼 나가자. 일단 MR가서 사진 찍고 어디 놀러가자." "배, 배불러. 숨도 못 쉬겠어. 좀 있다가 움직이자." 질질, 수연은 시윤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붙잡아 끌었다. 간간이 '데이트, 데이트' 라고 흥얼거리는 것이 무섭기까지 했다. "빨리 옷 갈아입어. 나가자니깐!" 갑자기 '매맞는 남편'을 특집으로 다뤘던 TV프로그램이 떠 오르는 이유는 뭘까? 시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 다. "…이상해." 집을 나서던 시윤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수연이 궁금한 듯 묻자 시윤은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곁눈질했다. 자신도 모를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시윤은 목 소리를 조금 낮췄다. "지금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차 말이야. 저 안에 있는 아저 씨, 많이 봤던 사람이야. 아, 쳐다보지는 말고." 수연은 궁금한 나머지 차를 바라보려 했지만 시윤이 그녀 의 손을 꼭 잡아서 제지했다. "많이 봤던 게 뭐가 이상해? 같은 아파트에 사나보지." "아니, 매일 본 것 같단 말이야. 그것도 여기서만 본 게 아니라 어딜 가든 따라오는 느낌이야. …과민반응일까?" 시윤이 말한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졸고 있었는데, 차 유 리에 살짝 색이 입혀져 있어서 확실히 알아보기는 힘들었 다. 하지만 자꾸만 느껴지는 이 기분 나쁜 느낌, 누군가가 몰래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스토커?" 수연은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가 스토커라니, 시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역시 기분 탓인 것 같아.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 서 그런가." 시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이내 자기도 모르 게 걸음을 빨리 했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차안의 그 남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 절할 뿐이었다. "시윤아, 같이 가!"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 짜릿하게 전달되는 이 이 상한 기분들. '불꽃의 저주.' 간밤에 꿨던… 아니, 이미 수 차례 꿨었던 그 꿈이 다시 생각나서 시윤을 자극했다. 게다가 찢어진 상처부위에서 간 간이 느껴지는 통증덕분에 그는 아픔을 참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아무래도 아까 머리를 감을 때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약한 바람이라도 불면 찢어진 머리가 굉장히 쓰려 왔다. "…많이 아파?" 시윤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어색하게 걷고 있는 것을 눈치 챈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고개를 가로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 했다. 하지만 사실 시윤의 몸은 그 자신이 느낄 정도로 약 해지고 있었다. 숨이 차고, 머리가 아프다. 아니 너무 뜨겁 다. 열이 나고, 온 몸에 힘이 없다. "수연아, 미…안한데 오늘…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쇠를 긁는 듯한 거친 소리가 나서 시 윤은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그 이상한 목소리마저 도 띄엄띄엄, 제대로 나오질 않고 있었으니. "많이 아파? 힘들면 그냥 병원 가자. 응?" 병원? 아니, 이건 다르다. 가끔씩 몸이 이유 없이 아플 때 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병원에 가봐야 거의 소용이 없 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기 싫었다. "괜찮으니까… 집…으로 가…" 흡사 누군가가 생명을 뺏어가기라도 하는 듯, 급격하게 쇠 약해지는 몸. 시윤은 어금니를 깨물어 정신을 차리려 했지 만 시야는 이미 흐려지고 있었다. 흡사 물안개라도 낀 듯, 뿌옇게 보이는 사물들, 그리고 수연. "집…으로" 쿵. 시윤은 까맣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의식을 잃었다. "꺄앗! 시윤아 정신차려!" 너울거리는 불꽃의 그림자, 화염에 휩싸여 그 모습을 잃고 타들어 가는 것들. 뜨겁다. 그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기에 더욱더 뜨겁게 느껴진다. 꼭 쥔 주먹에는 흥건히 땀이 배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 지? 어느 곳에도 발을 디디지 못하고 있을 때,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려온다. -아아아아아 귀곡성(鬼哭聲)이다. 슬픔을 노래하는, 망자의 한을 노래 하는 귀신들의 울부짖음. -아아아아아 무엇을 말하려 당신들은 그리도 슬피 우는가. -아아아아아 당신들은 무엇이 두려워 비명 지르는가. '도…망쳐?' 노래한다. 그들은 노래한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슬픈 곡조로… 노래한다. -아아아아아 그리고 내게 말한다. 어서 도망치라고. 그리고 보여준다. …나의 미래를. "으아아아악!" 시윤은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격렬하게 움직인 나머지 이마 위에 올려져 있었던 물수건이 침대 옆으로 떨어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시윤은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에 두 손을 괴고 잠들어 있는 수연을 발견했다. 창 밖의 어둠으로 보아 벌써 밤이 깊은지 오래였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또 쓰러진 건가." 벌써 수연의 앞에서만 두 번 째다. 태어나서 기절해본 적 이라고는 한번도 없었는데 수연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몸이 굉장히 약해진 것 같았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침대 시트 까지 젖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유 없는 고열에 시달리는 날이 점점 많아진 것도 같았다. 시윤은 잠들어 있는 수연을 깨울까 하다가 살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 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스쳐갔다. "으…응. 엄마, 가지마." '잠꼬대?' 시윤은 곤히 자고 있는 수연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손을 치 웠다. "아…빠. 난 그 여자 싫어." '아저씨?' "난… 엄마가 좋단 …야." 엎드린 채로 웅얼거리는 잠꼬대여서 그 발음은 부정확했지 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차라리… 나 혼자 …살래." 울먹이며 말하는 수연, 시윤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의 수연의 행동이… 조금은 바보 같고 또 대담했던 행동이 조 금은 이해가 갔다. "싫어, 그럴 바에야 나 혼자… 살 거야."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시윤은 본의 아니게 수연의 사정을 듣게 돼서 당 황하고 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는 침대에서 나와서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 하였다. 그리곤 혹시나 그녀가 깰까 봐 조심스러운 태도로 수연을 뒤에서 껴안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기를 나눠주는 것 뿐.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것일까. 스스로도 이해 못할 말을 내뱉으며 더욱더 그녀를 꼭 껴안았다. 흠칫, 잠시 수연의 몸이 들썩 였다. 그녀는 젖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시윤이?" 수연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시윤의 팔을 풀고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안도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두 팔로 시윤의 목을 감싸안았다. 평소에는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냥… 나 좀 안아줄래?" 항상 어린애 같은 행동에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던 수연, 성숙한 외모에 비해 너무나 장난기 많았던 그녀. 시윤은 무 신경한 같은 스스로를 탓하며 그녀의 허리와 등을 팔로 둘 렀다. 그녀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들었지?" 수연의 주저하는 목소리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의 긍정이었고,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들었구나. 헤헷, 어쩔 수 없지." 웃음이 이토록 슬플 줄은 몰랐다. 웃음소리에 섞인 아픔이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줄뿐이었다. "그거 알아? 혼자 보내는 밤은… 너무 힘들어. 집에 돌아 가도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나한테 밥 한끼 차려줄 사 람. 내가 밥이라도 한번 차려줄 사람. …없거든."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내게 시윤이가 있어줘서… 정말 기뻤어. 내게 가 족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한 명 도 없었거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떨리던 그녀의 몸도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다. "그래서 억지를 부려가며 여기 있었던 거야. 대담하게 부 모님께 얼굴도 보여드리고… 난 그런 게 부러웠거든. 너한 테 내가 음식도 해주고……." 그저 어린애 투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시윤은 수연이 쓸 데없이 억지 부리며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 며칠동안 정말 좋았어. 정말 고마워."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눈을 깜빡여봐도 눈물은 멋대로 흐르고 있었다. 수연은 피식 웃 었다. "우는 거야? 바보같이."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온 수연은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 아냈다. 그리고 부드럽게 입맞췄다. "부탁인데, 나 하루만 더 여기 있을게. 내일 아침에는 집 으로 돌아갈 테니까……." 시윤은 눈을 훔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윤의 대 답에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해." 그의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수연은 고개를 갸웃거리 며 되물었다.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시윤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회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 느새 수연은 평소의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고, 예의 칭얼거림으로 시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뭔데? 뭔데-에?" 결국 시윤은 자기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시윤아, 뭐라고 그랬는지 다시 말해줘어!" 행복하다. 지금 시윤은 행복했다. 수연이 곁에 있기에 ……. 그 기분을 한껏 만끽하던 시윤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 다. "수연아, 사랑해." 지금의 시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시윤은 수연이 차려주는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오붓하게 식사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진 시윤이 '설 거지는 내가 할게!'라고 할 때의 그녀가 짓던 미소……. 산 처럼 쌓여있던 설거지 더미에 그는 피눈물을 삼키고 말았 다. "쳇, 쳇. 어쩐지 호화요리들이 가득하더니." 평소 설거지 양의 세배! 수연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감당 못할 정도의 식기들을 꺼내놨으니 뒤처리 가 막막했던 것이다. 한편 모든 일의 원흉인 -적어도 시윤 은 그렇게 생각했다- 수연은, 거실 소파에 누운 채 '가정일 잘하는 남편 만들기' 계획 추진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다. 요리 잘하고, 설거지 잘하고, 청소 잘하고, 애 잘 보는 ……. "자기야-. 나 과일 먹구 시퍼어-." 그리고 아내에게 친절한 남편. 시윤은 그런 수연의 외침을 못들은 채 하며 묵묵히 접시를 닦았다. 그가 깔끔하게 식탁 정리까지 하고 거실에 나오니, 수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소파에 누워서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는 모습에 시윤은 실소 를 머금었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시윤의 실크잠옷을 걸치고 있는 수연은 꽤나 선정적이었다. 몸에 비해서 너무 큰 옷 덕분에 목 부분이 흘러내려 속옷이 살짝 노출되어 있 었고 뽀얀 앙가슴이 언뜻 보였다. "저기… 수연아?" 시윤은 열여덟 꽃다운 청춘, 혈기 넘치는 나이였다. 얼굴 을 붉힌 그는 가급적이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려했지만, 은밀한 부위를 자꾸만 흘끔거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 다. 그는 시선을 천장에 고정시킨 채 수연을 흔들어 깨우려 고 했다. 거실은 추웠고,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손에 전해지는 감촉. "에에?" '물컹'하고 느껴졌다. 고개를 한껏 쳐들고 수연을 외면하 던 결과…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가슴과 옆구리에 손을 댄 것이다. 잠들어 있던 그녀는 손을 뻗어 시윤의 손을 끌어안 았다. 덕분에 더더욱 곤란한 자세, 즉 손이 가슴에 파묻힌 꼴이 되 버렸다. 뜨겁고… 부드럽다. '제길, 이러면 안 돼!' 위선인가? 손을 빼내려고 조금씩 움직여봤지만 그녀의 젖 가슴을 주무르는 꼴밖에 되질 않았다. 한번에 빼지 않는 것 은, 그녀가 깨지 않게 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함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자극이 시윤을 괴롭혔다. '…괜찮을까?' 서로 좋아해서 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시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손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천천히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이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었고, 시윤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거기에 맞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짜릿함이 그를 감쌌다. 그녀가 잡고 있는 오른손은 내버려두고 왼손 만으로 잠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조금씩 수연의 하얀 속살들이 드러났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갑자기 수연이 눈을 뜰까봐 두려웠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의의 단추를 끌렀다. "…으으응." 덜컹, 말 그대로 간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시윤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놀려 수연의 상의를 벗기려고 했다. 죄책 감보다도 본능이 보내는 신화 더욱 컸다. "…엄…마." 흡사 테이프가 끊기기라도 한 듯, 시윤은 정지했다. 결코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앙 다문 입술은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했다. 순간, 수연이 몸을 뒤척였고 그 틈을 타서 시윤은 잡혀있던 손을 빼내었다. "으윽." …바보 같은 자기 합리화였다. 시윤은 주먹을 휘둘러 벽을 거세게 후려쳤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주먹을 벽에 짓찧 었다.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깐이나마 욕망으로서 그녀를 취하려고 했던 것이 부끄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고마워. 시윤아." 갑자기 들려온 수연의 목소리에 놀란 시윤은 그녀에게 다 가갔다. 수연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따라서 잠꼬대였다. 방금 전에 당할 뻔했는데도 편하게 자고 있는 그녀,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같이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목이 메였다. 피멍이 들고, 까져버린 두 주먹의 아픔도 느 껴지질 않았다. "…사랑해." 그 무엇도 이보다 값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의 마법이니. 시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순수한 마음의 입맞춤, 조금의 사심도 섞 이지 않았다. 쑥스러워진 시윤은 얼굴을 붉혔다.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시 매만져 준 후, 그는 이불을 가지러 자신의 방에 갔다. 추운 거실에서 자려면 솜이불을 꺼내야 겠다고 중얼거리면서. "…푸훗." 시윤이 자리를 비우자 수연은 살그머니 눈을 떴다. "후훗, 역시 귀엽다니까." * * 벌써 열한시를 넘었지만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 진성은 호 영의 소식을 기다리며 여전히 학교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 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대 는 그 어느 곳이라도 손을 써놨고, 덕분에 진성은 고립되고 말았다. "연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무사한지 아닌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상대가 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을 원한다면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한은 얼마든지 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상대가 한 요구는 '명시윤'의 정학처분 취소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호영이 잡혀간 이유… 이제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 다. 그 보고서와 테이프를 본 후로는 도저히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오냐, 오냐 하면서 받아준 것이 호영 의 성격을 삐뚤게 만든 것일까. -Drrrr 딸깍. -배달 왔수! 예의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성은 상대가 연 락을 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호, 호영이는 어떻게 됐소?" -우송료는 따로 청구할 거고, 도장은 필요 없으니 갖고 나 올 필요 없수. 여기 교문에다 두고 갈 테니까 찾아 가시던 지. 상대는 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진성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이사장 실을 박차고 나왔다. 노쇠한 몸으로 교문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만신창이가 된 호영을 볼 수 있었다. 찢기고, 터지고, 붓고……. "호영아!" 호영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간신히 눈을 떴다. 깊은 피로 와 좌절이 담긴 눈빛이었다. "…아저씨." 그리곤 눈을 감아버리는 호영. 깜짝 놀란 진성은 호영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고, 곧 살아있음에 안도했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출혈은 호영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 려주었다. "구급차, 구급차 불러!" 진성은 마침 교문 근처에 돌아다니는 수위에게 벌컥 소리 를 질렀다. "또 꿈인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시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몸 에 누적된 피로는 없건만 또 꿈을 꿨고, 자꾸만 그것이 마 음에 걸렸다. 적어도 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경험으론 꿈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주 꾸는 게 아니었다. 아주 가끔씩 너무 피곤하거나 심적으로 지쳐 있을 때에나 있는 일이었 다. 하지만 요새 들어서는 점점 그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 다. 뿐만 아니라, 그저 이것저것 믹스된 듯했던 꿈들이 차 차 그 뚜렷한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다. "정신병일지도… 모르겠군. 쳇." 기억을 더듬어봤다. 언제부터 꿈이 주는 느낌이 이토록 강 렬했는지, 또 깨어나면 절대로 그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 는 것도……. "이 녀석을 만났을 때부터… 인가."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시윤은, 히죽거리며 잠자고 있는 수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연을 만난 이 후로,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 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도 다 지워버렸다. 그리고 남아 있 는 것이라고는 것은 알 수 없는 경고들과 조각나 있는 장면 들 뿐. "…언제까지 거부할 거지?" 갑자기 시윤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평소 그의 동글동글 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대신에, 허스키하고 분위기 있는 것 이었다. '나'는 나로서 인식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온 몸이 짜릿하게 긴장됐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들이 뜨 겁게 달아올랐다. "…우웅." 수연이 몸을 뒤척였다. 침대가 아니어서 잠을 설치는지 이 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심각하게 이것저것을 고민하던 시윤은 그녀의 몰골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침대에 버리고 왔었는데. 분명히." 아무리 침대에 던져놓고 문을 닫아 놓더라도 새벽이면 어 느새 그녀는 시윤의 곁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곤 한다는 소 리가 '나 같은 공주는 침대가 아니면 못 자.'였으니 그 또 한 걸작이라면 걸작이었다. 그놈의 공주라는 것은 잠버릇이 심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건가. "으슬으슬하네." 역시 반 팔로 버티기에는 추운 늦가을이다. 가을…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를 볼 것이고, 그럼 바로 겨울방학이다. 시 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곧 고3이고… 수험생이다. 과연 이 녀석을 계속 만날 수 있을까? 시윤은 베란다로 나 가서 창문을 열었다. 약하지만 아주 차가운 새벽공기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시윤의 몸을 잔인하게 애무했다. 온몸 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었다. "추워……." 수연이 이불 속에 몸을 깊게 파묻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녀가 자고 있던 거실까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 고, 시윤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거실과 베란다를 연결하 는 큰 창문을 닫았다. "후우, 고민인가." 다들 말하는 대학, 그렇게 가고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 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숨을 내쉬자 입김이 하얗 게 흘러나왔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고민, 한국에 사는 인문 계 고등학생이라면 대부분 대학에 대한 고민을 하기 마련이 다. 그리고 정작 시윤은… 꿈이 없었다. 언제나 현실에서 겉돌았고 적응하지도 못하는 소외된 존재였다. …이런 고민 을 하고 있는 것도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았다. -위험해. 들리지 않아. -어서 도망쳐. 들리지 않아. -어둠이 올 거야. 들리지 않아. 시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경고를, '깨끗하게' 지웠다. 처음부터 듣지 못한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본능적 인 거부였을까. "…이상하네." 하지만 느끼고 있었다. 짜릿하게 느껴지는 적의에 찬 시선 들이 시윤의 온몸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베란다에 나와있을 뿐이었지만, 맞은편 건물 옥상, 아파트 밑 놀이터, 편의점 옆 벤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 등 무수한 곳에서 그 를 향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건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영 역의 것이었고, 그래서 시윤은 그것들을 무시했다. "어라?" '방금…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맞은 편 건물의 옥상에… 누군가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자세히 보려고 하자,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었으니까. 시윤은 머리를 맑게 하려고, 크게 심호 흡을 하여 폐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한 아침 공기를 채워 넣 었다. 어느새 황금빛 태양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 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이쯤에서 깨워야겠지?' 시윤은 거실로 돌아와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휘-수-연! 눈 떠엇!" 어젯밤 감히 자신을 유혹한(...) 벌인지, 시윤은 기운차게 수연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곧 수연은 신음을 흘리며 눈 을 떴다. "…으윽, 기차화통을 삶아먹었어?" "좋은 아침이야." 싱긋 웃는 시윤의 얼굴에, 수연은 생긋 웃으며 베개를 집 어던졌다. 퍼억, 좋은 아침인가? "어서 집으로 가. 지금 달려가면 학교 느긋하게 갈 수 있 을 거야." 조금만 더 자겠다고 생떼를 쓰는 수연을 시윤은 안간힘을 들여서 쫓아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고 갔다. "시부모님들께 이따가 며느리 온다고 말씀드려-." 황당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시윤은 피식 웃음을 터뜨 리며 밤에 머리에 감아뒀던 붕대를 풀었다. 자기 전에, 살 펴보니 피가 배어 나와서 감았던 것이다. 사라락, 천이 스 치는 소리와 함께 붕대가 흘러내렸다. 붕대를 던져두고 세 면기의 물을 틀던 시윤은 거울을 보고 말았다. "…머리카락!" 어제 염색한다는 것을 기절하는 바람에 깜빡했다. 이렇게 하고 학교 가야 하나? "최악이다……." 겨우겨우 정학이 풀려서 학교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염색 머리라니 단번에 찍히게 생겼다. 평범한 갈색도 아니고 회 색이라니……. "…재미있군." 치렁치렁한 긴 머리가 미풍에 조금씩 흔들렸다. 인간 같지 않은 원색적인 유혹의 기운을 흘리는 남자, 아진이었다. 검 은색 정장 차림이었지만, 단추가 몇 개 잠겨있지 않은 와이 셔츠와 그 사이로 비치는 하얀 살결이 아진의 퇴폐적인 분 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흐응, 그렇지 않은가. 카엘?" "악취미인 것 같은데." 아진은 카엘의 말에 잠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용케도 내 기운을 잡아냈어. 대단 해!"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 기운을 감추지도 않았으 니 더더욱 쉽겠지." 흔들흔들, 아진의 몸이 위태롭게 기울어졌다. 그가 앉아있 는 곳은 아파트 옥상의 난간이었으며 조금만 앞으로 몸을 내민다면 그대로 떨어질 터였다. 카엘은 뒤에서 그를 툭 밀 어버릴까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흐흥, 그건 우리들의 얘기지. 인간은 느낄 수 없어." 맞는 얘기였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하더라도 선천적 으로 타고난 그들의 기운을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 다. 타천사는 쓸데없이 마기(魔氣)를 흘리고 다니는 하급 마물 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힘은 잘 갈무리되어 있었고 따 라서 인간이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특수한 훈련을 거친 선천적으로 영의 능력이 있는 자라면 다르겠지만. 아진은 입술을 핥으며 새빨갛게 웃었다. "난 보고 싶어. 역대 최강의 군주였다는 그의 힘이……." "엉뚱한 미련은 갖지 않는 게 좋아. 그는 이미 자랑스런 어둠의 일족이 아니니까." 퉁명스런 카엘의 대답을 듣던 아진은 빙긋이 웃었다. "천년의 예언, 그것이 이룩될지 아니면 그저 개꿈으로 끝 날지는 지켜봐야겠지." 카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절대적인 예언에 더 이상 반 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저 아이. 만약 각성하지 못한다면 내가 갖겠어." "…그건 안 돼. 죽여야만 한다."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아진은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옥상 안쪽으로 들어왔다. "넌 너무 고지식해. 늙은이 같으니라고." 퇴폐적인 유혹을 풍기는 그의 이름은, 어둠의 일족 '아뮤 릿 지나이온'이었다. 시윤은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숨이 막혔다. 덕분에 별 로 비뚤어지지도 않은 모자를 의식적으로 고쳐 쓰고는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향했다. 아무리 빨리 가려고 해도, 웬만한 목소리는 다 들렸기 때문에 그는 귀라도 막고픈 심정이었 다. "쟤 좀 봐, 깡도 좋다." "학교 포기했나보지. 아니면 두발자유화 어쩌고 하는 싸이 코라든지." 눈 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모자 안에 밀어 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시윤 의 회색머리는 무척이나 눈에 띄는데다가 입고 있는 옷도 교복이어서 더더욱 눈에 띄었다. 교복에 컬러풀한 머리라니 대담하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붕대라도 할걸. 괜히 두고 왔네.' 집에 두고 온 붕대를 아쉬워하던 시윤은 학교 교문을 보고 는 아예 쓰러질 뻔했다. 한 달에 서너 번 할까말까한 복장 검사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학생주임이 직접.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닥치자 시윤의 머릿속에는 다시 받을 정학에 대한 고민이 가득 차버렸다. "머리 불량. 이리로 집합!" 머리가 조금이라도 긴 학생들은 학생주임에게 한 움큼씩의 머리카락을 잘려야 했다. 서걱대는 가위질 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복장검사가 있는 날에는 항상 새벽같이 학교에 나와서 걸리질 않았었는데… 오늘은 아주 박살나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주임과 시윤의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야-이, 쌍놈의 자식아! 너 머리 꼬라지가…" 학생주임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시윤이 뭐라고 변명을 하 려고 했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학생주임의 표정 덕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빨리 교장실에 가봐라." 꼬리 내린 강아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질이 개 같아서 같은 교사끼리도 못 말린다는 학생주임이 따귀 한 대 안 때리고 보내다니, 신기하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아서 시윤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부모님께도 죄송하다고 전해드리고…….' 이제는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나왔다. 교장실에 기껏 찾아 간 시윤에게 교장은 연신 사과를 했고, 그래서 시윤은 더욱 놀라버렸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시 윤의 머리색으로 누구 한 명 트집잡을 만도 하건만, 오히려 선생들이 잘 어울린다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상하네." 교실에 돌아오자 호영이 당분간 학교를 못나온다는 소식이 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영이 없는 덕분에, 시윤을 따돌 리던 친구들도 상당수 그에게 보내는 시선을 호의적으로 바 꾸고 있었다. 선생들이 변했고, 학생들이 따라서 변했다. "이상해." 마치 학교 전체가 작정을 하고서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허 무맹랑한 생각까지 들었다. 시윤은 연신 입술을 깨물며, 자 기가 정학으로 없었던 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아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나온 말들이란. '시윤이 건드리면 사망이다.' 반 친구중 한 명의 말에 따르면 호영을 옹호하던 선생들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저렇게 극단적 이고 황당한 말은 아니었지만, 쓸모 없는 단어들을 자르고 압축하니 결론이 그렇게 나온 것이다. "…너무 이상해." 불쾌하다. 전신을 뒤덮는 끈적끈적한 시선들, 욕지기가 치 밀어 올랐다. 완전히 역전된 이 상황이 기쁘기는커녕 기분 이 나빠서 토할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파진 시윤은 수업중 인 데도 불구하고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역시 혼내지 않는군.' 난방이 잘되는 덕분에 교실이 따뜻해서 시윤은 금방 잠들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한가하니까 좋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방에서 보내는지 집의 모습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크리스는 혼자 쓰기에 너무 넓은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곧 이 방의 설계를 직접 하셨다는 할아버지에 대해서 떠올렸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넓은 방을 만들도록 하신 건지… 다 낭비야 낭비. "그래, 잘 처리했어?" "예. 적당히 끝냈습니다." 조용히 시립 하고있던 유 부장의 입이 열렸다. 크리스는 '적당히'라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싱긋 웃으며 대꾸했 다. "묻어버리지 그랬어." 유 부장의 표정 없는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언제 부터 크리스가 저런 과격한 어휘를 사용하게 된 것인지 심 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신 회장님 이 보신다면 아마 통곡을 할지도 몰랐다. "…당분간 거동하기 힘든 몸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그래도 병신 만들지는 않았다. 아직 나이가 어린것을 감안 해서 최소한의 흉터만 남기도록 한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 다. …상대방이 그걸 이해할지는 미지수지만. 크리스는 호 영을 떠올리고 있는 유 부장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의자가 있습니다만……." 고지식하다면 고지식하다. 크리스가 언제나 절도 있고 어 른스런 행동을 하는 것도 다 유 부장 덕이었다. 필요할 때 마다 제재를 가하고 충고를 했으니까. 그 결과 그녀의 몸에 는 지배자 특유의 몸가짐이 배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자꾸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조금 있으면 겨울이야. 첫눈은 언제 올까?" 감상적으로 변했다. 아니, 원래의 감수성이 돌아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훈련되어 조금의 오차도 없었던 크리스가 십대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 지만… 그녀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는 유 부장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은 지켜봐야 할 것만 같았다. -Drrrrr 휴대폰의 벨소리가 잠시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을 끊어버 렸다. 크리스는 웃으면서 어서 전화를 받으라고 눈짓했고, 유 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유민수입니다." -여어, 저 종석입니다. 유 부장의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그의 얼굴에 이토록 다 채로운 표정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 있었다. 지 금 눈앞에 있는 크리스와, 전화를 하고 있는 문종석. "돈이라면 입금 보내드렸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저 잘 계시나 안부전화 한번 해 본 겁니다. 뿌드득, 유 부장은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이런 잡음이 심하군요. 이상한 소리가 들리네요. "별 것 아닙니다. 용건이 없으시다니 그럼 이만." 탁, 화가 난 유 부장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닫아버렸 다. 크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유 부장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뭐야, 맨날 무게만 잡더니 유 부장도 화낼 줄 아네?" 못 보일 꼴을 보였다고 생각한 유 부장은 소리 없이 종석 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그 돈버러지 같은 종석 때문이다! "…서 …게 된 건데……" 시끄럽다. 한참 달게 자고 있던 시윤은 잠에서 깨어나기는 했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어느새 쉬 는 시간이 됐는지 주위가 무척 시끄러웠다. 몽롱한 기분 속 에서 허우적대는 그에게 의외의 얘기가 들려왔다. "명시윤 저 녀석 말야." 방금 전까지 어지러웠던 기분은 싹 날아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할지 내심 궁금했다. '서기인가?' 출석부와 학급일지를 기록하는 녀석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아니, 그녀석이 확실한 것 같았다. 시윤은 귀를 쫑긋 새우 며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잡아내려고 애썼 다. "교무실에 출석부 가지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빽이 대단한가 봐." "…설마." …빽이라니 무슨 소리야. "진짜래. 호영이가 학교 안 나온 것, 사실 맞아서 입원해 있대." 침묵, 시끄러웠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였으니, 다들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만했다. 아이들의 재촉에 의해 서기는 계속해서 말을 이 었다. 다 들으라고 말하는 건지, 시윤의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명시윤 친척 중에 야쿠자가 있다던데?" 웃어야 할 대목이었다. 시윤은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 른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다들 창백한 얼굴로 겁을 먹고 있었다. 서기는 자신의 얘기로 아이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자 약간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된 나머지 선심 쓴다는 듯한 표정으로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더욱 웃기는 건, 우리학교 이사장이 호영이 큰 아빠뻘이 란다." 교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까 같이 소리지르고 뛰어 노 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저마다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위해 서 웅성거렸다. 서기는 흐뭇한 표정이 되어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알다시피 우리 학교 이사장이 좀 빵빵하냐? 그런데도 불 구하고 완전히 밟아놨다는 건, 시윤이 그만큼 대단한 놈이 라는 거야. 앞으로 우리도 조심해야겠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일어난 사건들, 그리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문들, 게다가 자꾸만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 위화감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 고 무엇보다도… 초조했다. 무엇을 경고하기에 심장이 이다 지도 빨리 뛰는지… 또, 왜 이렇게 식은땀이 흐르는지. '…무서워.' 학교에 더 이상 갇혀있기 싫었던 시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담임 선생이 5교시가 끝난 후에 단축 수업이라며 종례 를 해버렸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시윤의 비위를 거스르려고 한 사람은 없었고, 그것은 그가 느끼기에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맥박친다. 학교를 나서자 매서운 바람이 시 윤을 휘감았지만, 오히려 차가웠던 피가 달아오르기만 했 다.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은 부가적이었을 뿐 정말로 두려운 것은, …정말로 두려운 것은. -피해!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정신 없이 달리던 시윤의 귀를 강타했다. 아니, 머릿속을 헤집어 버렸다. 시윤은 입 술을 깨물고 고개를 도리질 쳤다. 집까지는 10분이면 뛰어 갈 수 있다. 집에 가면 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 불안감 은 없어질 것이다. 적어도 시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망쳐! 목소리는 한층 더 거세졌다. 뇌수가 찰박거리는 소리… 아 니, 뭔가 조금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영혼의 파 동……. 인정해서는 안 된다. 저것은 없는 것, 존재하지 않 아야 하는 것! -도망쳐! 귀를 막고 미친 듯이 뛰었다. 무시해야 한다. 저것의 존재 를 인정하는 순간, 난 이미 내가 아니게 된다. -어서 피해! 듣기 괴로운 음성, 고막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도망쳐! 들리지 않아. -도망쳐! 들리지 않아.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시끄러워!" 시윤은 결국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존재를 '인정'했으니 그것은 곧 자신을 '인지'할 것이 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것도, 모른 척 지워버린 것도 이 제는 끝이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끄…러워." * * "…벌써 오셨어요?" 시윤이 집에 도착하자 여행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그를 반 겼다. 오랜만에 맛보는 부모의 푸근함에 그는 미소지었다. "머리 꼬라지가 그게 뭐냐?" 아버지는 시윤이 쓰고 있는 모자를 벗기곤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차차, 회색이었지!' 갑작스런 물음에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시윤에게 천사 같 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천사로 인식된 것일지도 몰랐다. "아버님, 그거 제가 해준 건데 어때요? 예쁘죠?" 수연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아양을 떠는 것이, …역시 여우였다. 시윤은 잠시 수연의 본성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응, 좋기는 하다만……." 그걸로 끝이었다. 하다 못해 혼내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 다른 집처럼- 그저 말 한마디에 넘어간 것이다. 할말을 잃 고 망연히 서있던 시윤은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는 어머니에 게 시선이 갔다. "엄마, 그거 뭐예요?" "응?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샀어." 특산품, 특산품, 특산품. 전국 순회를 하기라도 했는지 산 처럼 쌓여있는 특산품들은 각 지방별로 골고루 모여 있었 다. 시윤은 갈 때 보다 두 배는 늘어난 짐에 혀를 내두르고 는 과연 이곳이 정상적인 가정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 작했다. "하아, 식사 하셨어요? 저 배고픈데……." 시윤의 어머니는 손뼉을 짝 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뭔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장을 안 봤구나. 시윤 아, 네가 좀 갔다와라." '또 시장바구니 들고 돌아다니란 말야?' * * 투덜투덜, 투덜투덜. 시윤은 입술을 삐쭉이 내민 채 혼자 서 불평불만을 다 쏟아내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온 것이 좋기는 하지만 -시윤은 가정적인 남자였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다! "쳇, 수연이도 그래. 도대체 나만 쫓아내는 이유는 뭐야?" ……! "또…냐." 짜릿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또다시 누군가 시윤을 적의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시윤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과대망상증이라고 치부될 지도 모르나 몸은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누군가 노리고 있다!' 쿵. 쿵. 쿵. 또다시 느릿한 듯 하더니 빠르게 뛰는 심장, 모든 혈관을 타고 다니는 피들이 거세게 타올랐다. 역류하기라도 할 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흐르는 피, 경고! -도망쳐! "시끄러워!" 점점… 심해지고 있다. 숨기려고 했지만, 부정하려고 했지 만 이제 '그것'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무엇을 알려주려고, 무엇을 경고하려고 이다지도 날 괴롭히는가. -도망쳐! "시끄럽다니까!" 주위의 사람들이 보던 말던 시윤은 소리를 빽 질렀다. 이 대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달린 시윤은 겨우 문 앞에 도착했다. * * "처리 완료." 피로에 젖어버린 목소리였다. 그는 잘 훈련된 움직임으로 이곳 저곳을 살폈다. 치치지직, 그의 무전기에 잡음 섞인 답신이 돌아왔다. -이쪽도 처리 완료. 넷 사살, 하나가 도주했다. "상관없다. 계획대로 설치해."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로 옆에 쓰러져서 피를 흘리 고 있는 남자를 살폈다. 확실히 숨이 끊어졌다. 총알이 미 간을 관통해 버린 것이 고통 없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할 만 했다. "…후우, 아명이라니. 귀찮게 됐군." 시체는 뒤치다꺼리를 하는 '시체처리 반'이 알아서 할 것 이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옥상에서 아파트 내부로 통 하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쯧쯧, 죽었네." 아무도 없던 그곳에서-정확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던- 갑 자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핥으며 웃고있는 그 남 자는 '아진'이었다. 뒤이어 그의 뒤에 한 인영(人影)이 더 나타났고, 아진은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서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를 불렀다. "카엘, 잘 봐두라고." "…진지하게 할 생각은 있는 거냐?" 퉁명스런 그의 반응에 아진은 키득거리며 웃어줬다. 어떤 일이든 즐겁게! 아진의 신조라면 신조였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스윽, 손가락으로 허공에 오망성을 그리니 흑 빛의 점이 생겼고, 선이 이어졌으며 이윽고 원이 완성되었다. 검은 원 속에 악마의 상징인 역 오망성이 자리잡았다. "이곳이 마계였으면 좋겠어. 이따위 것을 쓰자니 너무 귀 찮아." "…그렇군." 카엘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긍정하는 투였다. 아진은 싱긋 웃으며 오망성의 중심에 검지 손가락을 데고는 조용히 읊조 렸다. [너무 아프게는 하지 말아라. 죽지 않을 만큼만 보살펴 줘.] 기이한 목소리, 그것은 마력을 실은 주문이었다. * * "어라?" 시윤은 문을 열려다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도망쳐! "제기랄! 그만두라고 했잖아." 궁금했던 마음도 잠시 시윤은 결국 다 무시하기로 하고는 문을 열었다. 왠지 긴장이 돼서 손에는 땀까지 배어 나왔 다. 자기 집 문을 여는데 긴장하다니, 시윤은 피식 웃으며 철로 된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섬뜩하리 만치 확 실하게 그에게 전해졌다. 철컥. "하아아."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우습게도 잠겨있는 문을 가지고 여태 고민을 한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된 시윤은 싱긋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곤 '딩동' 초인종을 울렸 다. 째깍째깍. 시계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쳐! "시윤이니?" 곧 집 안에서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엷게 들리는 소리,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 은 소리가 들렸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예, 저예요." "잠깐만 기다려. 문 열어줄게."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도망쳐! 시윤은 피식 웃으며 정신과 검진이라도 받아야겠다고 결심 했다. 그래, 부정하고 믿지 않았다. 째깍. 째깍. 삐이. 삐이. 삐. 시계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 규칙적인 디지털 음이 들 리더니 이내 그것의 간격마저 짧아졌다. 불길하다. * * 옥상 난간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며 맞은편 건물을 주시하 고 있는 아진은 웃었다. 저 바보녀석은 결국 판도라의 상자 를 열고 말았으니, 그 축하를 해줘야지. 한 뼘 밖에 안 되 는 난간 위에 사뿐 사뿐한 몸짓으로 올라탄 아진은 붉디붉 은 입술을 핥으며 한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올렸다. 부채처 럼 활짝 펴진 손가락을 천천히 감아쥐었다. "Bang." 퍼엉! 아진이 말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맞은 편 건물의 한 층이 폭발했다. 사방의 창문이 박살나며 시뻘건 불길이 춤추듯 빠져나왔다. 그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는 폭발이 일어난 바로 그곳을 주시했다. * * "으아아아아악!" 문을 여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푸른 불꽃이 바로 눈앞에서 그의 어머니를 살라먹었다. "안-돼---!" 퍼펑, 펑! 가스 폭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불 꽃은 2차, 3차까지 연속으로 터졌다. 시윤은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의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지만 이미 주위가 온통 불바다였다. 그 어디에도 불길이 없는 곳이 없었고, 피할 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시윤만이 무사할 뿐이었다. 조금 뜨겁기는 하지만 화상조차 입지를 않았다. "제발… 일어나요!" 시윤의 두 눈에서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고통스럽 게 타 들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단말마의 비명과 살이 타는 냄새가 시윤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이 되었다. 항상 부 드러운 모습이었던… 어머니. "…제발, 제발. 신이시여." 시윤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지 이미 반쯤 타버린 어머 니를 들쳐 메고는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밖이나 안이나 불 바다인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차라리 들어가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아빠! 어디 있어요. 아빠!"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던 시윤의 눈에, … 전신이 불꽃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시…윤아." 그도 시윤을 이미 타버린 각막으로 멍하니 응시하다가는 손을 내밀었다. 계속해서 익어버리는 몸에도 불구하고 시윤 의 아버지는 이미 이성을 되찾은 듯 했다. 시윤은 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뜨거웠지만 견딜만 했다. "…미안하…다." 그걸로 끝이었다. 풀썩 쓰러지는 시윤의 아버지는 이미 사 람의 모습이 아닌 타버린 고깃덩어리였다. '머리 꼬라지가 그게 뭐냐.' '우리 며느리 부자냐?' '아빠가 밥 사줄테니까 며느리 데리고 와.' 항상 장난끼 넘쳤던 아버지……. "아버지---!" 제기랄, 제기랄. 그 꿈의 의미가 이거였어? 그 경고가 바 로 이거였어? "안-돼에에-!" 날 위해서 무시했다. "으아아--악!"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날 위해서 무시했 고, 날 위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날 지키기 위해서. "흐아아아아!" 너무 심한 정신적인 충격 덕분에, 시윤은 결국 의식을 놓 치고 있었다. 부모님의 시체를 꼭 끌어안은 채……. "…수…연…이……는?" 죽었을까, 이미… 죽었을까? 제발 수연이 만이라도 살아야 할텐데……. 간신히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결국 놓치고 말 았다. * * "이걸로 된 건가? 왕의 명령은." "…돌아가자." 아진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역시 타락한 일족의 일원으 로서 '타인의 고통이 즐거웠던' 것이다. "각성은 멀었나. 흐응, 재미없는 걸. 역시 내가 데리고 놀 까." 카엘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젓고는 힘을 끌어올렸다. 본디 타천사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그였지만 단지 두 장의 날 개만을 꺼내고 있었다. 흑색의 깃털을 가진, 어둠에 물든 자의 증거. 사아악, 두 날개를 활짝 펼친 카엘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는 역시 무리가 되는군." 그런 카엘을 바라보던 아진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날개 를 생성했다. 흑색의 빛이 모여서 날개를 이루었고, 그것은 네 장이었다. 못내 아쉬웠던지 아진은 계속해서 중얼거렸 다. "왕의 명령은 여기까지…니까 돌아가야겠군. 쳇, 그건 그 렇고 전부 소환인가?" "그래, 전원 소환이야. 인간계에서 활동하던 십 장군은 모 두 소환이지. 아, 루이시블은 자의로 남는다고 하더군." 아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흐흥, 왕의 명령을 거역하다니 큰일날 아줌마야." 자신의 나이도 만만치 않건만 아진은 항상 남을 갖고 할아 버지니 아줌마니 하면서 놀려댔다. 확실히 햇수로 꼽기도 힘들만큼의 세월을 보낸 그들이었지만, 아진 만큼이나 어리 게 행동하는 자는 없었다. 카엘은 포기했다는 듯한 표정이 돼서는 날개를 한껏 당겼다. "그럼… 가자." 스파앗! 둘은 검은색 빛줄기가 되어 하늘을 꿰뚫어버리기라도 할 듯, 맹렬한 속도로 날아올랐다. 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는 그 들은 타락한 천사들, 바로 어둠의 일족이었다. Epil.. 감긴 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불빛. 깜빡. 깜빡. 보이는 걸까, 그런데 왜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지. "깨어난 것 같은데요?" 일어날까. 아냐, 역시 자고싶어. 피곤해서 견디기 힘들어. 이제, 그만 쉬고 싶어. 갑자기 눈이 강제로 벌려졌고, 덕분 에 강렬한 백열등 빛이 그대로 눈에 쏘아져 들어왔다. 느낄 까, 볼까? 말할까? 숨쉴까? …귀찮아, 난 쉴래. 긴 꿈을 꿨 어. 앞으로도 꾸겠지? "아니, 이상한데……." 목소리? 아니, 들리지 않는 거야. 이건 꿈이고 난 영원히 잠들 거야.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그 것마저 귀찮아졌다. 인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숨쉬는 것 도, 심장이 뛰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그래서 보임에도 보지 않고, 들림에도 듣지 않는다. "반응이 없습니다." "전기 충격 준비해." 다시 눈을 감는다. 아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미 통제권 을 놓아버린 지금, 육체는 본능으로써 움직이고 있다. 파직, 강한 충격이 몸을 때렸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 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른다. 점점 '나'는 저 어둠 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간다. '도망가는 건가?' 그 목소리… 맞아 도망가는 거야. 견딜 수 없으니까 피하 는 거야. 그러니까 날 내버려 둬. 이제는 상처받지 않을 테 니까……. 암흑의 수면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 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으로……. * * "선생님, 시윤이는요?" 병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수연은 의사가 굳은 얼굴 로 나오자, 사색이 되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의사는 고개 를 조용히 가로 저었다. "코마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의학상식에 문외한인 수연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정말로 절망적인 상황인지 알기 위해서 그녀는 되묻고 말았다. "…식물인간 말인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회복될 가능성은요?" "현재로선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집이 폭발 할 때, 수연은 자신의 집에 가있었다. 단지 옷을 갈아입으러 갔을 뿐이었고,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나 때문에'라는 생각 이 자꾸만 들었던 것이다. "면회해도 될까요?" "들어가 보세요." 수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굳게 닫힌 문을 살며시 열었다. 방은 한 명만이 쓸 수 있는 작고 간소한 1인실 이었다. 그 다지 크지 않은 환자용 침대 위에 시윤이 누워있었다. 마치 잠자고 있는 듯한 평온한 모습, 하지만 그는 죽었다. 정신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 시윤은 '죽었다'. "시윤아? 시윤아, 일어나." 침대 곁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은 수연은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평안하게 숨 쉬며 눈감고 있는 모습, 그저 잠들은 건 아닐까. 영원히 깨 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으흑… 제발… 일어나." 톡, 톡.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너밖에, 없단 말야. 그녀는 눈물을 훔치더니 시윤에게 입맞췄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따스한 입술이어서, 더욱 더 슬펐다. 당장이라도 깨어날 것 같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코마에 빠진 사람이 다시 되돌아올 확률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불가능이라 고 봐도 무방하다. 시윤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간혹, 아주 간혹 회복되는 사람들에게 수연은 희망을 걸었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외로움이 더더욱 무섭 다. 기다리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의지할 곳이 있으 니까… 참을 수 있다. "내겐 너밖에 없어. 시윤아, 돌아와. 기다릴게." 이미 천년을 기다렸어, 앞으로 다시 천년이 흐른다 한들 널 잊진 못할 거야. 6. 만남 바람에 얼음이 묻어나는 날씨, 겨울이 심술을 부리고 있었 다. 여섯 시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늘에는 뜨겁게 타올라야 할 태양 대신에 차가운 은가루를 흩뿌리는 달이 걸려있었 다. 지현은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며 한껏 우수에 잠겼다. 그리 뛰어난 용모는 아니었지만, 생기 넘치는 분위기와 검붉은 빛이 도는 눈동자는 그녀 나름대로 의 매력을 발산했다. "어이 지현 군. 나 배고파." '딸랑' 빵집의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맑은 음을 내며 울렸 다. "왜 나왔어요?" 방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지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에, 운동을 했음직한 탄 탄하게 짜여있는 몸, 사납게 생긴 눈매는 상대에게 위압감 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배고파. 뭐 시켜 먹자구." 저 남자는 멋대로 반말을 한다. 같이 일한 지 벌써 두 달 이 되어가지만 도무지 호감이 가질 않았다. "난 배 안 고프니까 혼자 많이 드세요, 백호 씨." 멋대로 숙녀인 자신을 '지현 군'이라고 부르질 않나, 애 취 급하질 않나. 지현은 여러모로 불만이 많았다. 백호는 그녀 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심에 찬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꼭 지현 이 들으라는 듯한 얘기였다. "…다이어트 하는구나. 어쩐지 배가 많이 나온 것 같더라." 확 짜증을 내려던 지현은 이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이 느껴졌고, 속으로 울분을 삭힐 수밖에 없 었다. 결국 화풀이 대상은 가게 한 쪽에 쌓여있는 빈 상자 더미였다. * * '딸랑' 지현은 가게로 돌아간 후, 머리를 짚으며 괴로워했 다. 어느 틈에 백호가 빵을 잔뜩 꺼내서 먹고 있었던 것이 다. "백호 씨! 자꾸 그런 식으로 팔 물건을 먹으면 어떻게 해 요!" "월급에서 빼. 아, 그리고 가게 앞에 상자들 말이야. 누가 자꾸 걷어차는지, 엉망일 때가 많더라고." 저 뻔뻔함이란! 지현은 재빨리 백호의 남은 월급을 계산해 보았고, 한숨을 내쉬며 냉랭한 목소리로 그 결과를 백호에 게 말했다. "…오늘 그것 다 먹으면 이번 달 월급 없어요. 한푼도." 백호는 손에 들고 있던 팥 빵을 툭 떨어뜨렸다. 금방이라 도 눈물을 떨어뜨릴 얼굴이 된 그는, 딴에는 진지한 목소리 로 되물었다. 나름대로 심각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내가 많이 먹었어?" 백호가 많이 먹긴 정말 많이 먹었다. 그만큼 하는 일도 많 긴 했지만, 빵 집에서 힘쓰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몇 푼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제하라며 공수표를 남발하던 차에, 이런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크으윽, 이번 달에는 꼭 바이크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포기해요, 바이크는커녕 자전거도 어림없어요." 지현은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 고소함을 금치 못했다. 역 시 싫은 사람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인 것이다. 한 달의 월 급이 싹 날아가 버린 백호는 곧 담담한 얼굴이 되더니, 자 신은 낙천주의자라는 듯한 태도로 계속해서 포장지를 뜯어 놓은 빵을 먹었다. "어쩔 수 없지. 덕분에 빵은 원 없이 먹었으니까." 우유를 홀짝 홀짝 마시며 빵을 야금야금 뜯어먹는 그 모습 이 어찌나 얄미운지, 지현은 빽 소리를 질렀다. "겨울이라고 손님도 없단 말예요! 자꾸 그렇게 먹고만 있 을 거예요? 손님 좀 데려와 봐요." "여기가 나이트인줄 알아? 어딜 가서 손님을 물어오라는 거야. 난 삐끼가 아니라 종업원이라구." "아하, 종업원인 건 아세요? 그런 사람이 가게 빵을 싸그 리 먹어치워요?" 따지고 보면 지현도 피고용인이었다. 정작 가게 주인은 얼 마간 일해온 그녀에게 '지배인'이니 어쩌니 하면서 가게를 덜커덕 맡겨놓고는 집에서 놀고 있다. 나이 스물 하나에 빵 집 운영이라니, 지현은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대학에 등록 해놓고는 돈이 없어서, 휴학을 해버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빵집에서 일한 지 벌써 일년이 넘었지만 아직 생 각한 만큼 돈이 모인 것도 아니었고, 공부는 천천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지배인이라는 우스운 직책까지 맡고 있는 것 이다. "흠흠. 지금 뭐 하려나." 백호는 슬그머니 꼬리를 말더니 그녀를 외면하고는 TV를 켰다. 그런 꼴을 보던 지현은 백호의 해고에 대해서 심각하 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봐. 지현 양, 저 여자 이름이 뭐지?" 어느새 '군'에서 '양'으로 바뀌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 낀 백호는 알아서 몸을 사렸고, 그 능청스러움에 지현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의 말에 따라 TV를 보니 그녀도 몇 번 본 화장품 광고를 하고 있었다. 요새 쏟아진 신인 중에 한 명인 듯 한데, 여자인 지현조차도 감탄할 만한 미모였다. "옆에 뜨잖아요, '휘수연'이라네. 신인인가 본데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백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꺼림칙한 표정이 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말했다. "…요즘에 자주 TV에서 보이는 얼굴이긴 한데, 이상해. 어 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야." 지현은 그가 또 허튼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는 TV를 꺼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녀를 막았다. 정말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이 흔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 야." 백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다가는 우유를 원샷하고 스스로 TV를 껐다. 원래 한번 본 사람 얼굴도 잊 어버리는 성격인데, 낯이 익다고 해서 뭐가 이상하겠는가. 그저, 어디선가 스쳐지나간 얼굴이겠거니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이런, 이런. 또 어떤 아줌마가 상자 헤집어 놨네. 틀림없 이 생리중인 히스테리 노처녀일거야." 백호는 이리저리 몸을 꺾어서 굳어있던 몸을 풀며 문 앞에 어질러져 있는 상자를 치울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다. 지현 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이를 깨물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히스테리 노처녀?' 막상 자기를 욕한다고 벌컥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방귀 뀐 놈이 성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속으로 삭일 뿐이었다. 지현은 정신과에 검진을 받아볼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화병으로 쓰러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하던 지현은 이를 깨물며, 즐거운 표정으로 청소를 하는 백호를 노려보았다. * * "으으으음, 심심해. 심심해. 심심… 어라? 벌써 아홉시라니. 난 이만 퇴근!" 손님이 없어서 테이블에 앉아 빈둥대던 백호는 무심코 벽 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더니, 대뜸 외쳤다.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 금세 기쁨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현은 완전히 포기했는지 머리를 부여잡고는 파리를 쫓듯 손을 휘 휘 저었다. "…거기 정리나 하고 가요." 화낼 기운도 없었다. 아무래도 삶의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게 적당한 표현일 듯 싶다. 어서, 자신이 빵집을 그만두던가 아니면 백호를 쫓아내던가. 그녀는 둘 중 하나라도 꼭 이뤄 야겠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랄라, 그럼 내일 봐. 지현 군(君)." 흥얼거리며 가게를 나서는 백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 던 지현은 그의 인사를 듣고는 발작적으로 카운터에 올려놨 던 칼을 움켜잡았다. 허나, 역시나 여우같은 백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달려서 도망가 버렸다. 백호(白虎), 호랑이 중에도 영물로 대우를 받는 그 이름이 너무나 아까웠다. 저 런 남자라면 충분히 구미호라고 부를 만 하다고 생각하는 지현이었다. 멀리 도망가는 백호의 엉덩이에 살며시 흔들리 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살랑살랑. "죽여버리고 싶어!" 지현은 잔뜩 신경질을 내며 칼을 던져버렸다. 식칼은 요란 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고 재수 없게도 마침 그때 가게의 문 이 열렸다. 간만에 찾아온 손님은 칼이 팽그르르 돌며 자신 에게 달려들자, 겁을 집어먹고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망 갔다. "……." 오늘은 정말로 뭔가 재수가 없는 날이다. 지현은 앞으로 '엽기 살인마'등의 별명이 붙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절규하고 말았다. "캬아악! 전부 그 자식 때문이야!"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백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길을 걷다가는 피식 웃 으며 중얼거렸다. 지현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사 실 스스로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이미 놀리는 데 재미 들린 것이다. 살을 에이 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아니,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보름달인가… 운치 있군." 자취하는 곳까지는 속보로 30분 천천히 가면 한시간 정도 걸렸다. 물론 간편한 버스 노선이 있긴 했지만 백호는 오히 려 걷는 것이 좋았다. 땅에 고인 물들이 전부 얼어버릴 정 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워낙 건강체질인지 그런 것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입이 심심해진 백호는 담배를 꺼내 물 고는 공원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빵집 을 오가면서 보는 공원, 도시 속에 그래도 남아있는 녹색이 었다. 가끔 들러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청승 떠는 것 같았다. 필터를 강하게 빨아들이자 금새 담배가 타 들어갔 다. 백호는 혀에 와 닿는 담배연기의 쌉쌀한 느낌을 즐기다 가 하늘을 향해 내뿜었다. 마치… 안개 같다. "좋은 거야. 평범한 생활은……." 도시의 밤하늘은 흐릿했다. 말 그대로 명확한 것 하나 없 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운무에 휩싸인 별들이 살며시 빛을 발했고, 이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반짝인다…. "노인네들은 잘 있으려나." 백호는 손가락을 모아서 술잔을 쥔 듯한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서 건배. "잘들 있으슈. 나도 잘 있으니까." 왠지 인사하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보름달의 미묘한 기운 은 마법을 건다. 사람들은 달빛 아래서 마법에 걸리고 만다. 더 이상 밤에 취해 있다가는 여기서 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호는 손을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승은 여 기까지, 이제는 집에 갈 시간이다. -꺄악! 어디선가 여자의 째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백호 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긴장한 그는 귀를 기울이며 정신 을 집중했고, 이윽고 다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그 위치를 잡아낼 수 있었다. "공원 안이다!" 백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던져버리고는, 의자를 박차 며 공원 내부를 향해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쏘아져 들어갔 다. * * "소리를 내다니 죽고 싶은 건가." 눈에 띄지도 않고 활동하기에도 좋을 듯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꾸짖었다. "일행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조장." 이곳은 공원 내의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있는 산책로였다. 연인들을 위한 것인지, 미로와도 같은 형태였고, 덕분에 남 의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남자 네 명이 여자 둘을 둘러싸 고 있었다. 여자들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동하자."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조장이라고 불린 남자 는 손짓을 하여, 부하들에게 여자들을 들쳐 메게 했다. 모두 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강도 내지는 도둑 의 모습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았다. 막 그들이 발을 떼려 고 할 때, 유쾌한 외침이 들려왔다. "먹고살기 힘들죠?" 어느새 나무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백호가 씩 웃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그렇지, 인신매매라니 쯧쯧." 백호는 혀를 차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조장의 눈 이 날카롭게 변했다. 인기척이 없었는데? 발걸음을 죽이고 기척을 지울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팔아. 어부 어때? 원양 어업이 그렇게 짭짤하답디다. 한번 나가서 1년쯤 있다가 돌 아오면 돈이 꽤… , 꽥!" 조장은 그저 착각이겠거니 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서 그대로 백호에게 던졌다. 칼은 그대로 은빛 궤적을 남기며 일직선으로 주절거리고 있는 백호에게 날아갔고, 그는 기겁 을 하면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위험하잖아!" '빗나갔어?' 던지기 전용의 단검이었다. 잘 훈련된 사람이 쓴다면 가까 운 거리에서는 총 이상의 속도와 정확성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단검 투척이었다. 그리고 조장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부하들도 백병전을 위해서 단검 투척 정도는 필수로 익히고 있었다. 우연히 초보자가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장은 안주머니에서 소음기가 장착되어 있는 권총 을 꺼내 들었다. "이동해라. 처리하고 가겠다." 부하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들을 데리고 공원 반대쪽으로 달렸다. 총을 본 백호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눈에 이채가 어리더니 이내 과장 섞인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거 라이터지?" 총에 겨누어졌음에도 그는 장난기를 잃지 않았다. 좋게 말 하자면 꿋꿋한 거고, 좀 제대로 말하자면 모자란 놈이다. 그 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격자는 무조건 사살." 지현의 소원을 하늘이 알아준 것일까. 드디어 백호를 죽여 주려는 사람이 생겼다. 백호는 지현이 이 곳에 있었으면 잔 치를 벌였을 거라고 생각하며 킥킥거렸다. "거 참. 생명을 소…" -퓩! 조장은 지체 없이 총을 쏴버렸다. 이걸로 끝을 내고 부하 들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피했어?" 백호의 바로 뒤에 있던 나무에 총알이 박혔고, 그는 한 걸 음 옆으로 비켜 있었다. 굉장히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역시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조장은 난데없이 나타난 이 괴 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다시 방 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런 물건은 불법이란 걸 아시나. 형씨!" 순간 백호는 발을 강하게 내딛으며 도약했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랐기에, 백호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펼쳐졌다. 순 식간에 3미터 가량의 거리가 줄어들었고, 조장은 총을 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백호의 허리가 한껏 비틀어졌다가 펴지면서 팔꿈치가 원을 그리는 듯한 모습으로 조장의 명치 를 쳤다. 아니 찔렀다. 조장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허 공으로 떠올라 몇 미터 뒤로 나가떨어졌다. "컥!" 간신히 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늑골이 부러진 것 같았 다. "우, 우웩" 왈칵,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자신이 비록 주 전투요원이 아니라지만, 일반인에게 당할 실력은 아니었다. 기본 훈련은 똑같이 받았고 덕분에 상당한 살상능력을 갖고 있는 그였 다. 조장은 질린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쳇, 그동안 녹슬었나. 멀쩡하잖아?" "…어떻게… 피했지?" "뭘? 아아, 총알 말인가? 간단하잖아. 그렇게 뻔히 조준을 하고 있는데 누가 못 피해. 그나저나 기절 할 줄 알았는데. 쯧." 백호는 상대가 멀쩡히 눈뜨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쾌한지 연신 투덜거렸고, 땅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서 자신의 주머 니에 쑤셔 넣었다. "일단 아가씨들부터 만나고 얘기하지. 여기서 기다려. 이 건 선물로 줄 거지?" 혼자서 멋대로 지껄인 백호는 남자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흐릿한 잔상으로 보일 정도의 빠르기였다. "…괴물인가." 겨우 달빛 아래서 상대방이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 하나 하 나까지 관찰하고 있었다니… 분명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어 려웠다. * * "제길, 인신매매가 기승이라더니." 백호는 투덜거리면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솔직히 이 정도 로 달려 다니는 것은, 도시 속에서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 쩔 수 없었다. 한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날카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벌써 옮겼군. 빌어먹을."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아무래도 미리 차를 대기시켰다가 바로 떠난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여자를 구했어야 했는데. 제기랄!" 오랜만에 맛보는 싸움이었기에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었 다. 백호는 스스로를 욕하며 아까 그 장소로 다시 갔다. * * "이런 빌어먹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고 생각한 백호의 실수였다. 어느새 그 남자까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묶어놓고 갔더라면 차라 리 나았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 가 그런 몸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지금 남 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까 빼앗은 권총 한 자루뿐이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되먹은 동네야. 총 들고 설치는 놈이 있 질 않나. 칼을 던지질 않나." 철저히 훈련받은 듯한 움직임이었다. 백호는 범죄조직이,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배후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달 빛이 참 밝았다. 백호는 연신 투덜거리면서 풀죽은 얼굴로 집을 향해 발을 놀렸다. 그저 업무를 보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방, 크리스는 평소와 같이 창가에 위치한 데스크에 앉아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 다. 원래의 차분하고 얼음과도 같았던 그녀는 많이 변해 있 었다. "어떻게 된 거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웃음을 잃 지 않고 강자의 여유를 보이던 그녀가, 평정을 잃고 말았다. 유 부장은 굉장히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지만, 달리 대답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기랄, 그 망할 노인네는 무슨 꿍꿍이야!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무 성과가 없다니." 크리스는 들고있던 서류들을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렸다. 유 부장은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바람대 로 해주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아명이 국내의 최고 기 업이라면 태성은 뒷세계의 일인자였다. 게다가 오늘 아침 들어온 보고들은……. 문득 유 부장이 지나가듯 말했다. "태성이 치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 한참 씩씩대고 있던 그녀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저희 측에서 비밀리에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전부다 박살 났습니다." "…뭐?" 크리스는 역시 알아듣지 못했는지 다시 물었다. "독일과 합작했던 시스템 작업, 일본과의 공동 프로젝트, 국내 통신망 장악을 위한 정부 지원의 T.O.G 등이 현재 정 보 유출, 원인 불명의 화재, 합작사의 일방적인 계약파기로 인해 완전 백지화되었습니다." 유 부장의 잔잔한 목소리는 크리스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 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피해는?" "총 자본 중 25%를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25퍼센트라니! 이렇게까지 타격이 컸던 적은 없었다. 분명 성공을 확신하고 투자했던 사업들인데 모조리 망치다니. 크 리스는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니, 이미 힘이 없 었기에 의자에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오늘 아침에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독일 지사와 일본 지사에서, 거의 같은 시각에. 화재 신고도 정보가 유출 된 것도." 맙소사, 이건 조작된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대대적 으로 아명을 몰아세우고 있단 말인가. 태성? 태성!? "태성이 한 일이라고?" "그렇습니다. 국외에서 우리를 적으로 돌릴 필요를 느끼는 곳도 없고, 국내에서도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곳은 없습니 다. 물론 태성도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아명을 몰아세울 만한 정보력과 그에 따른 자본이 없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골랐다. "하지만 합작사 중 한 곳이 태성과 재계약을 맺었고, 또… 저희 측에서 완성하기 직전의 상품들이 …태성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완벽히 같은 것들이. 비단 4대 프로젝트만 이 아닌, 저희 주력 상품들의 대부분이 태성에게 넘어갔습 니다." 충격,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허탈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 키던 그녀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불가능했다. 누가 보더라도 절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국내 최정상의 기업 아명을 뿌리치고, 태성 쪽으로 붙는다 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많은 폭력 조직들의 무력과 탄탄한 재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외국에까지 통할 리 가 없었다. 단지 신뢰도와 명성, 재력으로 따진다면 아명이 국제적인 평가는 한참 위였으니까. "도대체 다들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크리스는 가녀린 주먹을 있는 힘껏 쥐었다. 너무 분했다. "태성으로 넘어간 프로젝트의 각 기업별 책임자 명단을 가 져와. 사진 첨부해서, 당장!" 유 부장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에서 빠져나갔다. 이 미 감정을 조절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한 그녀는 손바닥으 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 녀석을 그 꼴로 만들더니 이제는 아명까지… 나쁜 자 식들!" 정확히 십 분이 지나자 유 부장이 손에 명단을 들고는 나 타났다. 참으로 빠른 일 처리였다. 크리스는 유 부장을 내보 내고 이를 갈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적당한 사람을 찾던 그녀는 이윽고 중년의 남자 사진 하나를 짚더니 명단을 내 려놓고 눈을 감았다. 마침 근래에 크리스 자신과 직접 계약 을 했던 상대였다. 그녀는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엘로힘elohim.] 누가 가르쳐 준 말이 아니었다. 단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주문이란 그런 것, 선택받은 이의 언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 소와는 다른 색을 띄고 있었다. [개방하라.] 손을 교차하며 간단한 수인을 맺는다. 이것 역시 알고 있 던 것이다. 마치 호흡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알 듯이. 투 시의 능력이 깨어나고 나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능력을 불러낸 적이 있었던가. 한 십 분 정도 계속해서 수인을 고 쳐 맺던 그녀는 동작을 멈췄다. "후우." 눈을 뜬 그녀는 숨을 길게 쉬었다. 몸 안에 가득 찬 공기 를 내뱉고, 다시 머금고. "보이질 않아. 전혀…"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능력은 단절되고 말았다. 억 지로라도 발휘하려고 들면 몸의 피로가 가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저 가벼운 연상만으로도 가능했던 투시는 지금 온 신경을 쏟아 부어도 단편 적인 것 외에는 얻을 수 없었 다. "공포…"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감정의 파편 정도는 얻어 낼 수 있었으니까. 4대 프로젝트의 하나를 맡 았던 일본의 책임자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태성이 무언 가로 그들을 협박했음이 틀림없다. "한 번 더 해볼까." 물론 무리라는 것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항상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실내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 녀는 씁쓰름하게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호락호락하게 당 하지는 않아." 누가 뭐래도 그녀는 최고의 힘을 자랑하는 아명의 주인이 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피곤한 얼굴이 된 수연이 메마른 목소리로 인사했다. 방금 전 촬영에서 웃고 있던 게 착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녀 의 얼굴은 죽어 있었다. 명현은 세트를 정리하다가 머리를 북북 긁더니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은데."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작게 미소를 띄었지만 오히 려 더 어두워 보일 뿐이었다. "…피곤해서 그래요." 분명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명현의 눈에 비 치는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생기가 넘쳐서 함께 있는 사 람들에게까지 활기를 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예쁜 인형뿐이었다. 거짓웃음을 짓는……. 하지만 본인이 말 하기를 원치 않는 지금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명현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어? 조금 있으면 음반 작업 들어간다면서." "조금 쉬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 런가 봐요."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갑자기 늘어 난 스케줄 때문에 쉴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명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세트장을 빠져나갔다. "그럼 내일 봐." 수연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 다. 촬영을 위해서 머리를 이리저리 묶어놨더니 무척 거추 장스러웠다. 조명 때문에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가 불쾌하 게 느껴졌고, 겨울 패션이랍시고 겹겹이 껴입은 옷이 답답 했다. "…피곤해." 핑계랍시고 피곤하다고 했지만, 사실 정말 힘들었다. 예전 에 비해서 현저히 떨어진 체력이 몸을 지탱해주질 않았다. 눈을 덮고 있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리 고… 보였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시윤의 얼굴이, 그 미소 가. "시윤아…" 내게 남은 단 한가지. 기다린다고 다짐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게 만들 거라고 되 내였지만…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다. "제발…" 외롭다. 싸늘한 적막감만이 실내를 차지하고 있었다. 닫혀 진 눈꺼풀을 비집고 한줄기 액체가 흘러 내렸다. * * 수연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자정이 넘어 있었다. 아 무도 없는 집, 홀로 외로운 곳에 돌아온 기분. 확실히 혼자 살기에는 20평도 크다. 수연은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거실의 불을 켰다. 어둠이 순식간에 걷혀졌고, 휠체어에 몸 을 기댄 체,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시윤아, 나 다녀왔어." 해맑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당연한 것처럼 대답은 돌아 오지 않았지만, 수연은 옷을 간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으며 혼자서 떠들어댔다. "오늘 아줌마가 잘 해줬어? 어라, 김치찌개 해놨네? 음, 내 가 한 것보다는 못하지만 맛있을 것 같다. 집 청소도 잘 해 놨고. 설마 벌써 자는 건 아니지?" 반 팔에 반바지로 갈아입은 그녀는 시윤의 곁에 와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시윤은 눈을 뜨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 에 공허한 눈빛이 시체를 연상시켰지만, 수연은 전혀 개의 치 않는 듯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보고 싶었어, 자기는 안 그랬어?" 닫힌 입은 열릴 줄 몰랐다. 단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으련 만, 시윤은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니, 초점도 잡히지 않은 눈동자는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았다. 수연은 가만히 그의 회색 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려 주었다. "시윤아, …시윤아." 왜 대답해주질 않니. "슬퍼하지 마." 누구에게 하는 얘기일까. 시윤? 아니면 나? 누구의 슬픔 을… 부드럽게 그의 뺨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갖 고 있는데……. 가만히 그의 가슴에 귀를 대어본다. 이렇게 심장이 뛰고 있는데……. "에헷, 이런, 이런. 눈에 뭐가 들어갔나? 미안. 시윤아." 그녀는 눈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어렵다. 항상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면 곧 따뜻하게 안아줄 것만 같은데… 날 불러줄 것 같 은데……. "그만 들어가자. 시윤이도 자야지." 그녀는 미소지었다.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주면서 계속해서 즐겁게 재잘거렸다. 톡, 톡. 시윤의 어깨에 눈물이 떨어졌다. 누구의 것일까. 누구의 것일까. 누가 슬퍼하는 걸까. 너와 함께 한 날이 반년도 되지 않았어. 그런데 이 감정은 뭘까. 항상 합리적으로 생각했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날 괴롭히는 이건 뭘까. 벌써 두 달 째 넌 잠들어 있어. 모 든 것을 잊은 채, 평온하게 잠들어 있어. 내가 깨우려 하는 것은 휴식을 방해하는 걸까. 그렇게 난 널 괴롭히는 거니. 그렇게 난 널 옭아매려 하는 걸까. "그런 거니? 응? 시윤아……." 깊은 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정진 물산'의 장 회 장은 오늘 낮에 받은 놀라운 소식을 곱씹으며 자택의 서재 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이미 회사 경영에서는 손을 떼고 뒷전으로 물러나서 노후를 편안히 즐기고 있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태성이라… 허헛." 그는 팩스로 들어온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웃고 말았다. 주 름 가득한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은 곧 차가운 냉소로 바뀌 었다. 웬만한 일은 회사 경영진들이 처리했기에 그가 나설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 터진 아명에 관한 일만은 달랐다. "다들, 미쳤군." 그는 서류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명의 전대 회 장 '류광희'는 그가 항상 존경하던 남자, 스스로의 힘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도달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아명과는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시간이 흐르다보니 회사 운영 자체도 아명과 공생하는 것처럼 되 버렸다. 이제는 그 가 죽고 어린 손녀가 아명을 이끌어 간다고 했다. 장 회장 의 노안이 부르르 떨렸다. "승냥이 새끼 같구나. 태성."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태성이 손을 잡자고 요청해 온 것 이다. 아명과의 연을 끊고 자기 쪽에 붙으라고, 더더욱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으니 어서 오라고. 장 회장이 아명의 초대 회장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것을,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 을 이 방면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삐리리릭. 전화벨이 울렸다. "…장원일입니다." -그래 결정 하셨습니까? "유 회장이오?" -그렇습니다. 연락 받으셨을 텐데, 대답은? "난 배신할 수 없소." -하하핫. 수화기 저편에서 한차례 웃음이 울려 퍼졌고 장 회장은 잔 뜩 인상을 썼다. -이 봐요, 장원일 씨. 류광희는 이미 죽었어요. 그의 시대 는 갔단 말입니다. 게다가 저희 태성은 벌써 아명의 계열사 와 협력사들을 30%이상 흡수했습니다. 아명은 이제 끝입니 다. 벌써 30퍼센트라니, 점심나절 때만 해도 20퍼센트에 못 미 쳤거늘. 장 회장은 눈두덩이를 손으로 누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할 말 없소." -현실 파악을 하란 말이다! 이 멍청아. 늙어서 머리도 안 돌아가나? 아명은 끝났단 말이다! 코흘리개 어린애가 경영 을 한답시고 앉아있어! 유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코흘리개 어린애. 필시 크 리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장 회장은 딱 한번 류광희의 생일 파티 때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의 나이 는 열 살이었다. 귀족적인 용모를 타고난 크리스, 어린 나이 에도 불구하고 치밀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보였었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네.' 처음 크리스가 장 회장을 봤을 때 한 말이었다. 그저 귀여 운 손녀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장 회장은 웃으며 무슨 소리 냐고 물었다. '저기 있는 속물들이랑 달라. 모두 할아버지 돈을 노리고 있으니까. 바보들이죠. 할아버지는 그 정도는 금세 간파하는 데 말이야. 특히 촌스럽게 파란 옷을 입은 저 아저씨, 할아 버지가 어서 죽기만을 바라고 있어. 정말 미친 거 아냐?' 크리스의 독기 어린 말투 덕분에 장 회장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파란 옷을 입은 남자를 찾았더 니, 바로 태성의 유 회장이었다. 아마 10년쯤 된 일일텐데 생생하게 기억났다. "꼬맹이라……." 류광희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아무 생각 없이 손녀를 자신 의 대리인으로 내세울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그에 걸 맞는 능력도 갖추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질은 이미 장 회장 자신이 확인했다. "아마 당신이, 태성이 모두의 인정을 받기란 불가능 할 거 요. 당신은 류 회장을 넘지 못해." -마지막으로 묻겠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당신의 수명이 결정될 거야. 내 밑으로 와라. "협박인가?" -물론, 거부한다면 당신은 죽는다. 진심이었다. 적어도 상대방의 진심 정도는 장 회장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내일 뜨는 해를 못 볼지도 모른다. 게다 가 집에는 체질적으로 싫어해서 경호도 몇 명 없었다. "오래 살아서 좋을 것도 없지. 거절하오." 딸깍. 장 회장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입에서 쓴맛이 돌았다. 이른 아침, 갓 구워진 빵들을 정리하느라고 지현이 분주하 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그런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크로와상을 마지막으로 정리를 끝낸 그녀는 손을 털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겨우 끝났네."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 백호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흥,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나 보다. 머쓱해진 백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따라 되게 날카롭네. 아침 일찍 빵을 굽는 것 외에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테이블 위 에 상체를 늘어뜨리고 뒹굴거렸다. 심심해하는 백호를 보다 못한 지현이 신문을 던져 줬다. "이거라도 읽고 있어요. 시끄럽게 굴지말고." 신문을 뒤적거리던 백호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썼다. 어제 납치된 여자들에 대한 기사가 없었다. 물론 하루만에 신고 가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자신이 직접 신고했 어야 했지만, 그 납치범들의 정체가 너무 미심쩍어서 고민 하던 중이었다. '그 녀석은 프로였어.' '일단은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한 백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신문을 한 장씩 넘겼다. 그다지 관심이 가 는 기사는 없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 중 한 명이 죽 었다는 게 잠시 시선을 끄는 정도였으니까. 그는 잠시 골치 아픈 생각을 접어두고 시선을 돌렸다. "지현 씨, 애인 있어?" 백호의 갑작스런 질문에 지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가 이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흥! 남자 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녀는 아주 엷은 붉은 색이 덧씌워진 듯한 눈동자로 백호 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남자 같은' 운운하는 것을 보니 백 호가 놀린 것에 대해서 어지간히 마음이 상했었던 것 같았 다. "그래도 예쁘잖아." 확실히 지현은 예쁜 편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보통 사 람과는 달리 검은 색에 붉은 빛이 도는 눈동자, 갸름한 얼 굴 선. 하지만 워낙 이미지가 강렬하다 보니 백호가 남자라 고 놀리는 것이었다. "글쎄요, 있었으면 좋겠죠. 하지만 나 좋다고 나서는 사람 은 없더라구요. 누구 말처럼 '남 자 같 아 서' 일지도 모르 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면 기분을 풀만도 하려만 글자 하나하나 에 강세를 넣어서 발음을 하는 것을 보니 굉장히 화가 난 모양이다. 백호는 지현의 삐짐이 언제까지 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빵을 몰래 먹는 다는 건 불가능 할 것 같 았다. * * "장 아저씨가… 죽어?" 크리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을 숨기고 얼음 같은 모습 을 보여주는 일은 이제 그만둔 지 오래였다. 유 부장은 담 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택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심장이 깨끗하게 도려내진 상 태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스컴에는 지병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생각보다 상대가 거 물인 것 같군요." 크리스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물 고 눈물을 참아내던 그녀는 표독스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 다. "…'태성'이야." 모든 상황이 그들을 가리킨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아명'의 수족을 잘라내던 그들은 결 국 장 회장까지 죽여버린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유 부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피해를 입으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시장 점유 율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고, 총 자본 또한 절반 수준입니 다. 반면에 태성은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크리스는 침묵했다.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한 방울의 눈 물이 그 무게를 주체 못하고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울고 싶은 일이 많은 거지? 왜 이렇게 힘든 거지? 결국 이렇게 해야하나? 수십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지 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 "유 부장… 아니… 오빠." 메인 목소리가 나왔다. 크리스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가볍 게 닦아내고는 말을 이었다. 유 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눈만큼은 한없이 깊었다. "난 이제 못해. 견딜 수 없어. 제발… 도와줘."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절대로 입밖에 꺼내지 않았던 얘기 를 결국 하고 말았다. "그만, 책임을… 떠넘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빠… 난 알고 있어. 배다른 형제라는 거." 쿵! 유 부장, 아니 류민수는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크리스가 알고 있었 던 것이다. 아명의 2대 회장인 '류성욱'은 본디 여자를 좋 아했다. 류민수는 바로 류성욱이 젊었을 때 연애를 하다가 사고를 쳐서 태어난 일종의 사생아였다. 하지만 그는 상대 방 여자가 숨겼기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몰랐고, 후에 출신이 불분명한 외국인과 결혼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크리스 류(Kriese 流)였다. 류민수를 낳은 여자는 출산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류광희가 민수를 데려다 키운 것이다. 크리스의 절대적인 보호자로. 류성욱과 크리스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숨졌다. "……." 류민수는 침묵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고, 관련 자료나 서류도 남아있지 않다. 회장자리 또한 탐낼 생 각이 없었으며, 오로지 그녀를 보좌하는 것만 생각했다. 그 것이 당연했고, 그것이 삶의 목표였다. 크리스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오빠…라면 할 수 있어. 아명이 없어져서는 안 돼. 하지 만 나는 할 수 없어." "……." 아직 그녀는 어렸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에 치인 그녀의 정신은 이미 상처 입을 대로 상처 입었다. 아무리 어른을 흉내내려고 하더라도, 그녀는 어렸다. 류민수의 눈빛이 흔 들렸다.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그의 입이 열렸다. 단 지 입술을 움직이는 것뿐인데 매우 힘겨운 동작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언제부터?" "처음부터. 마음으로."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느새 눈물이 잦아들고 있었 다. 마음이라, 훌륭한 대답이구나. "무엇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좋다. 널 돕는 게 맞 는 일이겠지.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그 자리 내가 맡아 두마." 반말을 들으니 왠지 어색했다. 크리스는 활짝 웃었다. 그 동안의 원숙한 어른의 미소가 아닌, 정말로 기쁜 미소를 지 었다. 눈물로 얼룩이 지고 가볍게 한 화장이 지워졌지만, 류민수는 그동안 봤던 미소 중 최고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오빠." 그래, 이게 어울린다.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며 자신을 가면 속으로 감추는 일은 네 일이 아니다. 같은 아버지를 둔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신세가 그토록 달라 질투할 만도 한데, 류민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실상 너에게 가르치라고 배웠던 것이지만 결국 내가 써먹 게 되었구나. 후후,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난 초대 회장님 께 여러 가지를 배웠다. 오로지 널 위해서. 처음엔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널 봤을 때… 천사같이 아름다운 동생을 봤 을 때 그런 마음은 싹 사라지더구나. 난 널 아끼고 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동생아, 이젠 내게 맡기고 쉬도록 해."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 공간의 개념은 이곳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긴……. -눈을 떠라, 아이야. 누굴까. 많이 들었던 목소리 같은데. 하지만 기억에는 없 는 남자의 목소리. 움직여보려 했지만 단단하게 묶여있는 듯 꼼짝도 할 수 없다. 인식하려 하니 느껴진다. 날 감싸고 있는 것은 부드러운 천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단하여 나의 모든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작정이야? '당신은 누구지?' 목소리는 침묵했다. 단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은 알 아차리는 것 같았다. 물론 짐작이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 고,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난 아무 간섭 도 받지 않은 채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쉬고싶다. 하지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피하려 하지? '피곤하니까, 이제 지쳤으니까.' -왜 피하려 하지? '쉬고싶으니까.' -왜 피하려 하지? '…두려워.' -무엇이 두렵지? '세상이.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잔인한 세상이.' -네가 잃은 것은?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수연.' 목소리는 집요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않아. 또 다른 무엇인가를 잃을지도 몰라. 그래서 두려워.' -수연이라는 여자, 살아있어. 쿵! 멈췄던 심장이 폭발하듯 움직였다. 그리고 곧 내 앞에 한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 스럽게. 그것은 천사(天使)였다. 두 손이 쇠사슬에 매달려 허공에 펼쳐져 있었으며 온 몸이 온통 피에 절어있었다. 원 래는 눈처럼 하얗게 빛났을 날개도 찢겨지고 쇠사슬에 관통 되어 고정돼 있었다. 상처투성이 천사의 얼굴은 새카만 흑 발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그 목소리의 주인?' -그래, 모습을 보이기는 처음이군. 목소리는 경고했었다. 조심하라고 수없이 경고했었다. 모 든 것은 내 잘못. 모두가 죽은 것은 내 잘못이다. '당신은 누구지?' -과거의 넋. '난 누구지?' -…예정되지 않은 자. '무슨 뜻이지?' 천사는 다시 침묵했다. 말하길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는 가볍게 몸을 뒤틀어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더 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가 사슬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알고 싶으면 스스로 노력해봐. '…수연이는 정말 살아있어?' 절그럭. 또다시 천사가 몸을 뒤틀었다. 쇠사슬이 상처를 긁어서 온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 다. 새까만 흑발 사이로 천사의 눈이 보였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그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한낱 쇠사슬에 묶였지만 오히려 오만하게 모든 것을 내려보고 있었다. 죽어 가는 모 습조차 너무나 강해 보였다. 그는 한숨 섞인 말투로 말했 다. -살아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하, 살아있는 건가. 수연이는 역시 살아있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천사는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왠 지 천사는 울고 있는 듯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상한 느낌. -나가고 싶지 않아? '난 나갈 수 없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걸.' 천사는 고개를 크게 저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얼굴이 드러났다. 뚜렷한 이목구비, 강렬한 눈매에 붉게 빛나는 눈 동자.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위엄, 굳이 따지자면 미남이라 고 하겠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는 섣불리 그를 평 할 수 없게 했다. 그는 새빨간 입술로 미소지었다. -내가 도와주지. 영혼의 끝자락에 파묻혀서 돌아갈 방법도 찾지 못하는 얼간이를. '…….' 무슨 뜻인지 대강은 알 것 같다. 내가 스스로를 묶었다는 말이다. 씁쓰름하게 웃던 나는, 문득 저 천사가 왜 저렇게 묶여있는지 궁금해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은 질문하기 로 했다. '넌 왜 묶여있는 거지?' -후후, 글쎄. 그것보다는 네가 이곳에서 나가는 게 더 중 요하지 않을까. 보다시피 난 이런 꼴이라서 쉽게 널 끌어내 지는 못해. 한차례 그의 눈이 빛났다. 무섭긴 하지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천사는 가볍게 미소짓더니 다시 사라졌다. -나와 계약을 맺겠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천사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계약?' -그래, 계약이지. 아무 대가없이 널 도울 수는 없어. '어떤 계약을 원하는 거지.' -날 인정하겠다고 약속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인정?' -나의 존재를 인정하겠다고, 날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해. '…내게 해는 없는 건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틀리겠지. '…좋아.' 일단 나가는 게 중요하다. 수연이가 살아있다면, 난 그 무 엇과 바꿔서라도 그녀에 달려갈 생각이었다. '정진 물산'의 장 회장이 숨지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아명의 자회사들이 부도가 나거나, 지속적으로 거래를 해오 던 기업들 중 일부가 '태성'에 붙었다. 태성은 아명을 갉아 먹으면서 조금씩 국내 시장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10 을 기준으로 원래의 아명의 힘은 7, 태성의 힘은 3정도였 다. 하지만 연달아 실패한 거대 프로젝트들과 계속해서 태 성에게 뺏긴 거래들 덕분에 아명은 그 위세를 점차 잃어가 고 있었다. 매스컴은 연일 변동하는 시장 판세에 집중했고, 그 와중에 충격적인 소식이 모두를 강타했다. -아명의 총수가 새로이 등장했다! 크리스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즉, 아명의 최고 책임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어느 정도 소문은 퍼졌지만, 크리스가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방송을 탄 적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명의 최고 경영진과 그녀 자신이 직접 대면한 각 기업의 총수들 정도. 물론 MR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같은 경우는 예 외였다. -선 류광희 회장이 비밀리에 키워낸 후계자, 류민수. 그는 붕괴 직전의 아명을 살려냈다! 침체되어있는 경제시장에 그 소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류민수는 태성이 파먹은 수족과도 같은 회사들을 모조리 제 거하고 모든 것을 새로이 바꿨다. 크리스를 위해서 쌓았던 경험을, 간직했던 지식들을 죽어 가는 아명에게 퍼부었다. 모든 것은 그와 그녀의 할아버지, 류광희 회장의 안배였다. -네가 돕거라. 류민수는 '유 부장'이라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그 로 돌아갔다. 그는 크리스가 그러했듯이, 아니 오히려 그녀 보다 더 혹독하게 책임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었다. 그 가 특별히 자질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죽을 각오 로' 모든 것을 익힌 것이다. 물론 그는 명석한 학생이었고 가르치는 이는 맨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의 할아버지 였다. 결국 류민수의 활약에 의해, 아명은 다시금 도약했 다. 고여있었기에 썩어버린 물을 모조리 퍼내고, 깨끗한 물 을 다시 담듯이 모든 것을 개혁했다. 이전 같은 공격을 다 시 받더라도 절대로 타격입지 않도록, 설령 피해가 있더라 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아명은 군살을 다 떨쳐내고 탈바꿈했다. -기적과도 같은 회생. 아명의 총수, 류민수는 과연 청출어 람이었다. 크리스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유치한 문구가 새겨진 신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모든 것은 그녀 자신이 준비 한 일이었다. 그녀가 회장에 취임한지 얼마 안됐을 때, 우 연히 '유 부장'의 마음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눈 뜬 능력이어서 제어 자체가 힘들었고, 따라서 차가운 얼음 으로 가로막힌 그의 마음을 읽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의도 하지 않았음에도 읽혀진 때가 있었다. "과연… 이라고 해야할까." 과거 할아버지의 치밀한 계산에 놀랐었다. 모든 것을 오빠 에게 준비해두고 떠난 할아버지에게 놀랐었다. 너무나 부담 스러웠고, 항상 힘든 일만 하는 오빠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번 일이 터 지고 나서야, 힘들게 뛰어다니는 류민수에게 보상할 방법이 떠올랐다. "태성, 바보 같은 녀석들. 이제는 너희가 당할 차례야." 그녀는 웃었다. 억눌린 웃음이 아닌, 해맑은 미소였다. 배 다른 형제라지만 하나뿐인 혈육을 위해서 노력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오빠가 그랬듯이 그녀 자신도 가면을 벗었다. 싸늘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날카롭던 눈빛이 순해졌다.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던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귀엽게 미소지을 수도 있었다. 이제 남은 소원이 한가지 있다면…. "시윤…." 그가 보고싶다. 약간의 서글픔이 그녀의 눈망울에 어렸다. 순수한 원함. -보고싶어. * * "이런 애미 모를 자식이!" 유 회장은 씩씩거리며 들고 있던 신문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는 발로 밟았다. 류민수의 웃는 사진에 선명한 발자국이 찍 혔다. "제기랄! 다 끝난 일이었는데." 이제 아명이 무릎꿇는 것을 여유롭게 감상하는 일만 남았 다고 생각했을 때, 류민수라는 보도 듣도 못한 자식이 등장 했다. 유 회장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이유 는 그 류광희의 정통 후계자라는 녀석이 너무나 수완이 좋 았기 때문이다. 굵직굵직한 거대 기업들만이 아명에게 붙어 있을 때에는 오히려 편했다. '회유'하면 되니까. 하지만 류 민수는 미련 없이 그 것들을 모조리 잘라냈고, 자잘한 중소 기업들을 하나로 모았다. 한둘이 모이면 가소롭지만, 설령 열 개 스무 개가 모인다고 해도 눈 하나 까딱 않겠지만 이 건 상상 밖이었다. 류민수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제 멋대로 인 수십 수백 개의 중소기업들을 하나로 모았고, 그것을 무 리 없이 뭉쳐버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없애버릴까?"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남자가 말했다. 단지 그 자 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둡게 만드는 존재, 타천사였다. 지 금까지 유 회장의 부탁에 따라 '회유'를 맡았던 그였다. 아 진이 남겨두고 간 직속 부관 레오나트. 그의 말에 유 회장 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하아… 제가 직접 할 생각이었는데." 지긋지긋한 류씨 일가를 직접 밟아줄 생각이었다. 하지 만… 나쁘지 않겠지. 류광희, 그 늙은이도 손자가 악마의 손에 죽는 걸 알면 그걸로 좋을 테니까. 유 회장은 잠시 고 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레오나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새까만 날개를 어루만졌다. "키킥. 아진님 덕분에 호강하는군. 별미야, 별미." 이번에도 '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이면 그뿐이다. 지금까지 반항한 사람이라고는 장 회장이 라는 늙은 노인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오나트는 그 때 솔직히 기뻤다. 죽여도 되는 이유가 생겼으니까. 노쇠한 노인이었지만, 심장은 그런 대로 맛이 좋았다. 피의 향기를 떠올리던 레오나트는 입맛을 다셨다. "…언제 가실 겁니까?" 유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아진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청을 들어주기로 되어있는 타천사라지만, …그들은 인간을 먹는다. 레오니트가 입가에 피를 묻히고 왔을 때, 유 회장은 기겁을 해서 도망갔었다. "내일 밤이 좋겠군. 마침 보름달이기도 하고." 내일은 보름달이 뜬다. 강인한 인간의 가슴을 파내어 심장 을 도려낸다면,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달 아래서 그 피를 마신다면……. 그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는 달콤한 향, 붉 은 색의 생명의 증거. 그는 특히 인간의 피를 좋아했다. 레 오나트는 벌써부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 * "하아, 하아." 백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팔뚝에 길게 베어진 상처에 서는 혈관을 잘못 건드린 듯, 심하게 피를 쏟아내고 있었 다. 옷 여기저기가 잘려있었고, 그 안으로 언뜻 비치는 몸 에는 작은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정확 히 일곱 명의 남자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하아, 망할 놈들. 총이라도 가져왔으면 죽을 뻔했네." 빵가루를 사려고 나왔다가 현재 쓰러져 있는 녀석들에게 유인 당했다. 예리한 군용 나이프를 들고 덤벼드는 그들은 백호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개개인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그들은 원래 집단으로 하는 백 병전이 특기인 듯 매우 능숙하게 백호를 둘러싸고 압박했 다. "흐으으, 한 새끼 잡아서 방패삼지 않았으면 진짜 죽었겠 다." 실제로 백호는 방어가 허술한 사람을 한 명 사로잡아서 방 패 삼아가며 싸웠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 중에서 가장 심하 게 상처 입은 사람이 바로 그 방패였다. 말은 못 했지만 아 마 엄청 황당했으리라. 뜨거운 피를 손으로 막던 백호는 너덜너덜한 셔츠를 길게 찢어내서 상처에 질끈 동여맸다. 워낙 힘이 좋은데다가 체 질이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어서 피는 금방 멎었다. 일단 응급처치를 한 백호의 시선은 다시 괴한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피거품을 물고 있는 괴한 하나에게 다가가서 머리채를 거칠게 잡았다. "어디서 나왔어?" "끄으으." 남자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백호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 다. "한번만 더 묻는다. 너흰 누구야?" 남자의 눈이 잠시 백호를 향하더니 이내 감겼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건가… 백호는 피식 웃으며 괴한의 머리를 그 대로 땅바닥에 찍어버렸다. "우으으으…윽!" "후후, 난 싸움을 하고 나면 매우 성질이 급해진다구." 백호는 살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본래 이 정도의 일로 이 렇게 화를 낼 그가 아니었지만, 인신매매를 눈앞에서 놓쳤 던 기억이 떠올라 흥분한 것이다. 백호는 다친 왼손을 늘어 뜨린 채, 오른손만으로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는 들어 올렸 다. 괴한의 얼굴은 뭉개질 대로 뭉개져서 봐주기 힘든 꼴이 었다. "내기해도 좋아.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어." 백호의 눈이 살의로 빛났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그의 진심 은 여과 없이 상대에게 전해졌다. 괴한은 공포에 질렸다. "너.희.는.누.구.지.?" 한껏 한기가 스며있는 목소리가 잔인하게 뻗어나갔다. 철 저한 훈련으로 비밀을 지키기로 되어있던 그들이었지만, 흡 사 귀신에라도 홀린 듯 괴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술이 뭉개지고 앞니가 빠져서 발음이 샜다. "우, 우리…는 태…" 스으- 퍽!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리더니 단검 한 자루가 날아와 괴한의 뒤통수를 뚫고 들어갔다. "제길!" 괴한의 멱살을 잡고있던 백호는 단검이 괴한의 머리를 관 통하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야말로 음속에 가까운 스피드, 사람의 딱딱한 두개골을 비검으로 관통시킬 정도의 힘이라면 연약 한 목은 아무런 장애 없이 잘린다. 백호는 간발의 차이로 단검을 피해내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긴 머리는 끈으로 질끈 묶어서 하나로 모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병자와도 같았다. 고급 정장을 차려입어 멋을 부렸 지만, 어딘지 모르게 메마른 인상을 주는 남자, 레오나트였 다. 그는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하는군. '사슬에 묶인 자'." 두근! 심장이 옥죄이는 느낌, 이것은 흡사 귀신이 깨어났을 때의 그 느낌과도 같았다. 백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녀석 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의 희열마저 느꼈다. "날 아는가!" 백호는 외쳤다. 날 아는가! 내 안의 귀신을 아는가! 레오 나트는 차갑게 미소지으며 단검을 고쳐 잡았다. "흥, 알다 뿐이겠는가. 하지만 아쉽게 됐군. 넌 여기서 죽 을 테니까 말이야."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잔인하게 웃었다.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위압감에 눌 린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강하다! 온몸이 긴장으로 저릿저릿하게 울릴 만큼 상대는 강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하아아아앗!" 백호는 뒤로 물렸던 발을 강하게 내딛으며 레오나트를 향 해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약간의 공간을 남겨두고 도약!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원심력을 이용하여 강력한 돌려차 기를 날렸다. 레오나트의 눈에 잠시 이채가 어렸지만 그것 은 곧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너무 느려!"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르기였으나 레오나트는 그것을 간단 히 피하고는 백호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주먹이 사람을 때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소리가 났다. 백호는 카운터를 맞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몇 바퀴를 구 르고서야 간신히 멈춘 백호는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지경에 빠진 것이다. "실망이군. 아무리 천형의 사슬에 묶였다지만 겨우 이 정 도인가." 백호는 입안에 남아있는 피를 뱉어내고는 떨리는 다리를 손으로 지탱하며 일어났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력감, 백 호는 자신의 복부를 만져보고는 뼈에 금이 갔다는 것을 알 았다. 각목에 맞아도 멀쩡했었는데……. "너 인간이 아니지?" 백호가 말했다.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살기, 자신의 안 에도 있는 그 귀신의 느낌. 상대는 귀신의 힘을 가진 자였 다. "이제야 알았나. 돌머리군." 상대가 빈정거리자 백호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주제에." 레오나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단검을 가볍게 던져 허공에 띄우고는 손가락으로 그 끝을 가볍게 쳤다. -츠아아아아 단검은 엷은 잔상을 남기며 한줄기 빛과 같은 속도로 백호 에게 날아갔다. 그것은 한번의 호흡도 불가능할 정도로 짧 은 시간이었고, 백호는 피할 수 없었다. 심장을 겨냥하여 날아드는 단검, 백호는 재빨리 손바닥을 펼쳐 왼손을 앞으 로 내밀고 그 뒤에 오른손을 대었다. "크아아아아!" 왼손이 관통되는 순간 오른손으로 뚫고 나온 단검의 날을 잡았다. 역시 계산대로 저 '귀신'의 힘을 받은 단검은 아까 봤던 것처럼 뼈조차도 간단히 뚫어버렸다. 하지만, 그 힘만 은 훨씬 약해졌고 오른손으로 간신히 잡아낼 수 있었다. 백 호는 단검을 왼손에서 뽑아내고 이를 악물었다. "…미련한 놈." 레오나트는 신음 흘리듯 말했다. 백호의 왼손은 완전히 구 멍나 있었고, 오른손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잘려있었다. 피 가 두 팔을 따라 흘러내렸다. 아까 깊게 베어진 왼팔의 상 처까지 다시 터져서 출혈은 심각할 정도였다. "흐으으윽! 아프다!" 아픈 정도가 아니라 다시는 두 손을 못쓰더라도 할말 없는 상처였다. 오른손은 당장 치료를 받아야 했고, 왼손은 뼈가 부서진 이상 치료받는다 해도 정상적으로 쓰기는 어려울 것 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백호의 표정에는 한줄기 미소가 감돌았다. "후우, 너도 귀신(鬼神)인가?" 귀신이라. 자꾸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군. 레오나트는 백 호를 비웃었다. '바뮤즈'의 힘이 겨우 이 정도라니. "말장난 할 생각은 없다. '바뮤즈'의 힘이 이 정도라니 실 망이 크군." 그만 끝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레오나트는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바뮤즈?' 악몽을 꿨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 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고, 희뿌연 장막 같은 것으로 기억이 덮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일부가 걷혔다. '바뮤즈'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기억의 실마리를 되 찾았다. 백호는 눈을 감으며 외쳤다. "널 쓰러뜨리고 내 기억을 찾겠다!" [류 카단 레오나티스. 암흑의 창이여!] 레오나트는 기이한 울림의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의 영창! 뻗어진 두 팔 앞에 검은 색의 빛이 원을 이루었고, 그것은 기묘한 모습의 도형들을 새긴 마법진으로 형성되었다. 이것 은 절대 피할 수 없다. "내 안에 잠든 귀신이여! 나와라! 그리고 싸워라!" 순간 백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잠시 감았던 그의 눈에서는 흑색 안광이 폭사되었다. 사악한 기가 충만 한 몸, 인간이 아닌 기운이 그를 뒤덮었다. 흐르던 피는 멈 췄고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었다. 2미터 길이의 흑색 마법의 창을 생성한 레오나트는 놀란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가, 각성…. 정말로 바뮤즈인가!" 여유 만만하던 레오나트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졌다. 지금 느껴지는 힘은 분명, 바뮤즈의 그것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가라! 창이여!] 창은 단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를 내며 한줄기 검은 빛으로 화해 백호에게 날아갔다. 백호는 가슴 앞에 두 팔을 교차시켰다. -콰쾅! 막았다. 백호의 팔은 흑색으로 물들어 빛을 발했다. 상의 가 완전히 날아갔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 까의 상처마저도 이미 치유된 것이다. 정말 각성한 것이라 면 절대 이길 수 없기에 레오나트는 분한 표정으로 백호를 노려보았다. "오라, 귀신이여." 백호는 오만한 태도로 레오나트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한순간에 전세 역전, 게다가 그 기운은 틀림없는 고위급 타 락천사였다. 핏기 없던 레오나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 렸다. 벌써 그 사슬을 풀어냈단 말인가. 천년의 무게로 감 싸진 윤회의 사슬을! 영원을 살아가는 영혼으로 인간으로서 의 제약을 떨쳐냈다는 건가! "오지 않는다면…." 패닉에 빠진 레오나트를 보던 백호는 두 팔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가겠다." 순간, 그의 주먹을 시작으로 흑색기류가 생성되어 손끝부 터 손목 중간까지를 감싸고 들어갔다. 곧 그것은 금속을 연 상시킬 정도로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흑색장갑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손에 전혀 부담감이 없다.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고 행동에 제약도 없다. 이것을 다루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이 걸렸던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정확히 8년 전에는 기의 폭주로 인해서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그때 이미 백호에게 는 부모가 없었다. 그저 하루 하루를 동냥해서 살아가는 고 아였을 뿐이다. '아마 노인네들이 아니었으면 죽었겠지.' 백호는 슬며시 웃었다. 산 속에서 신선이랍시고 살아가는 노인들, 그들은 백호에게 잠재 되어있는 귀신을 다룰 수 있 도록 해줬다. 죽을 고생이었다. 몇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 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몸을 단련했으며 정신을 수양했다. 물론, 정신 수양은 말짱 헛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리 고 그 지루한 수련이 7년째 되던 날 백호는 한 쌍의 장갑을 얻을 수 있었다. 평소대로 귀신의 힘을 제어하여 몸에 싣는 연습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검은색 기운이 생성되더니 손을 감싸버렸다. [내 이름을 기억하라] 장갑이 말했다. 그리고 백호는 귀신에 홀린 듯 자신의 목 소리가 아닌 거칠고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약속 의 언어, 불러내기 위한 이름. 백호는 짧은 회상을 마치고 씩 웃었다. 그의 손에 착용된 장갑을 본 레오나트의 몸이 덜덜 떨렸다. 차가운 겨울의 공 기가 이제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살짝 입김을 뿜어보니 하 얗게 수증기가 올라왔다. [메르니츠] 백호의 목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즈아아앙 장갑이 그의 부름에 대답하듯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반응을 보였다. 손등 부분에 작은 자색의 원이 그려졌고, 그것은 순식간에 장갑 전체에 퍼져나가며 빼곡한 문양을 이뤘다. 마계(魔界) 제일의 방어구중 하나라는 메르니츠가 천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백호의 몸이 맹렬한 빠르기로 레 오나트에게 다가갔다. "2회전이다!" 백호의 주먹이 바람을 찢고 날아들었다. 레오나트는 뒤로 살짝 뛰어오르면서 그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받아내었다. 하 지만 그 힘이 워낙 강력하여서 힘을 흘려버리는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레오나트의 몸은 골목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레오나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어렸다. 분명 맞았는데도 타격이 거의 없었다. 그저 손이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정도.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이었지만, 이 건 뭔가 모자랐다. 설마 힘을 숨기고 있는 건가. 여유를 부 리는 건가. "으하핫! 어떠냐!" 의기양양해진 백호가 추가타를 먹이려고 그에게 뛰어들었 다. 분명 반응속도도 빨라졌고, 실려있는 힘도 그리고 속력 도 몇 배나 상승됐다. 하지만… 아직 인간이다. 인간의 힘 이다. 적어도 레오나트에겐 그렇게 보였다. 복부를 향해서 묵빛 주먹을 내뻗던 백호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쳐요!'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강해요. 당신보다 더!' 환청인가. 백호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레오나트의 배 에 주먹을 꽂았다. '퍼억!' 묵직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메르니츠를 착용했을 때의 파괴력은 바위도 부순다! 승리를 장담하는 백호의 귓가에 비웃음이 들려왔다. "키킥. 역시 '묶인 자'." 퍼엉! 레오나트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 바람에 백호는 균형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너 바뮤즈여! 그 무력함을 알아라!" 잠시나마 두려움을 가진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인간의 조악 한 몸으로 메르니츠를 두르고 싸워봤자, 그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 저 정도라면 최하위 타천사와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레오나트는 공포를 떨쳐버리고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존재감을 숨기려고 막아놓았던 힘을 개방시켰다. 파앗! 반투명한 한쌍의 검은 날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질계 에서는 그 힘을 반도 발휘하기 힘들었지만, 현재의 바뮤즈 라면 모든 힘을 낼 필요도 없었다. 레오나트는 날개를 한차 례 휘저으며 살짝 공중에 떠올랐다. "…악마였어?" 백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나트 의 등에 솟아오른 몸을 다 감쌀만큼 큰 검은 날개는 악마를 연상시켰다. [하 카단 레오나티스. 마계의 불꽃이여!] 레오나트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검붉은 불 길이 치솟았다. 끝 없이 태우기만 하는 마계의 불꽃, 재생 과 정화가 아닌 탐욕스런 파괴자! 긴장한 백호는 자기도 모 르게 침을 삼켰다. '막을 수 있을까.' 메르니츠의 방어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의 불길 을 막을 수 있을까. 백호는 있는 대로 힘을 끌어올려 손에 모두 집중시켰다. 메르니츠가 흑자색으로 강렬하게 빛을 발 했다. 젠장, 총을 든 인신매매범에 이어서 이제는 악마라 니. [인간을 태워라!] 불길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백호 를 덮쳐갔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후끈한 열기가 느 껴졌고, 백호는 남은 모든 힘을 모아서 메르니츠의 힘을 방 출시켰다. "흐아아아압!" 마계의 불길이 백호의 메르니츠 앞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 압박감과 열기는 백호에게 상상 이상의 타격을 주었다. 천근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고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았음 에도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치이이익, 실제로 메르니츠의 검은 투기에 보호되지 않는 어깨가 타들 어 갔다. 게다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두 팔은 부러질 것 같 았다. "우아아아악!" "포기해라. 네 목숨은 여기서 끝이다." 백호의 힘은 빠르게 소진되었고, 이내 메르니츠의 자색 기 운도 점점 약해졌다. 살이 타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끝인가.' 마계의 불꽃이 혀를 날름대며 그를 덮치려는 찰라, 어디선 가 한줄기 푸른빛이 날아와 백호의 몸을 감쌌다. 그것은 차 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불꽃을 삼켰고, 백호의 상처들을 어 루만졌다. 지옥같은 열기는 가시고 한줄기 청량감이 감돌았 다. "누구냐!" 마법이 깨어지자 레오나트는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미 어두워진 골목에 노란 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그 뒤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조용히 움직이자 탐스 러운 골드블론드의 머리카락이 잔잔히 흔들렸다. 이국적인 용모, 청색 눈동자에는 한껏 우수가 어려 있었고 자그마한 귀에는 그녀의 성숙한 미모에 어울리는 귀걸이가 얌전히 걸 려 있었다. 그녀는 머리위로 들어올렸던 손을 살짝 풍만한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아진님의 부관인가? 난 루이시블, 루이시블 크라제토." 백호는 갑자기 나타난 미녀를 바라보며 크게 놀랐다. 아 니, 그녀의 음성에… 그녀가 말한 것에 반응했다. '루이시 블' 가슴속을 울리는 단어.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느낌. "흥, '래픽스 샤딘Rhapix Shadin'을 어찌 내가 모르겠습니 까! 고귀하신 분이 왜 나를 막는 것이오!" 레오나트는 분노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레픽스, 마계 십 장군을 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천계에 카마세이 십 천, 즉 천계 십 장군이 있듯이 마계에도 레픽스 샤딘이 있 는 것이다. "인간을 내게 넘겨라." 루이시블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넘기지 않겠다면 죽이겠 다는 의지를 강하게 담아서. "왕께서 명령하셨소. 천형의 사슬을 지닌 자를 모두 잡아 죽이라고!" 레오나트도 한치의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군주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인 데다가, 평소 루이시블 자체를 싫어하던 그 였다. 영광스런 레픽스 샤딘에 여자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루이시블은 입술을 깨물고 머뭇거리다가 체념한 태도로 입 을 열었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멍하니 서있는 백호를 향했 다. "가서 전해라. 나 여덟 번째 '래픽스 샤딘' 루이시블 크라 제토, 이들을… 이들을 보호하겠다." 이것으로… 좋겠지. "…뭐?" 레오나트는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치뜨고 말했다. "예언의 검은 날개, 그 첫 번째가 되겠다고 왕께 아뢰어 라." 예언의 검은 날개! 여섯 검은 날개와 여섯 흰 날개. 그것은 왕을 부정한다! 그것은 우리를 부정한다! "미치셨습니까!" 레오나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치다…라, 맞는 말일지 도 모르지. 루이시블은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영원을 살아 가는 것보다, 차라리 당신의 곁에서 죽어가고 싶습니다. "……." 그녀가 침묵하자 레오나트는 백호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날 개를 힘차게 휘저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곧 그의 신형은 까마득히 멀어졌고, 이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이제… 됐어.' 갑자기 나타난 이십대 중반의 농염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 성, 아마도 그녀가 자신에게 붙은 불꽃을 없앴을 것이다. 백호는 그녀를 응시했다. 약간은 암울한 분위기의 회색 원 피스가 그녀와 잘 어울렸다. 조금 옷이 수수하긴 했지만 워 낙 분위기 자체가 화려했기에 묘한 언밸런스를 이루고 있었 다. 그녀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설명을 원하겠죠?"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의 이야기를 어찌 한마디로 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흐흑…."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백호는 아까부터 저 려오는 가슴을, 계속해서 칼로 심장을 긋는 듯한 느낌에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움?'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그 리움. …꿈이 현실로 오고 있다. "후우, 미안해요. 절제가 잘 안되네요."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한숨지었다. 얼마 만에 흘려보는 눈물인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백호는 손수건을 꺼내주었 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 웃음조차 애 처로웠다. 루이시블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름은 아까도 들었을 거예요. 루이시블 크라제토."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누군지 궁금하겠죠. 당신이 말하는 그 귀신이 뭔 지 알고싶겠죠." 여태까지 담담하던 백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루 이시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믿기 어려울 걸요?" 백호는 피식 웃었다. 믿기 어렵다니, 오늘 있었던 일을 생 각하면 더 뭐가 놀라운 것인가. 루이시블의 걱정스런 태도 에 백호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알고 싶습니다. 진실이라면." 진실이 아무리 차갑더라도, 아무리 믿기 힘든 것이라도. 나의 과거라면 믿겠습니다. 백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이 상 희뿌연 기억 속에서 살아가기는 싫었다. 꿈속에서 헤매 는 것도 질색이다. "천년 전… 당신은 천년 전에 인간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백호는 귀 신에 대해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명확한 답 일 뿐. "인간들이 흔히 악마라고 부르는… 타락한 천사Fallen Angel, 그 중에서도 악마의 군대를 이끄는 십 장군이었죠. …믿을 수 있나요?" 백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은… 그 십 장군, 즉 래픽스 샤딘의 첫 번째 서열이었습니다. 위로는 어둠의 군주를 아래로는 모든 어둠 의 종족들을 이끄는 것이 당신의 임무였죠. 당시의 왕이었 던 스키엘 다루카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신이었던 마계(魔 界) 제 1장군 바뮤즈, 그게 당신입니다." 억눌렸던 천년의 시간이 백호를 잠식해 들어갔다. 늦은 아침,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들이 점심 겸 아침을 먹 을 시간쯤이었다. "신기해라." 멍하니 창 밖 하늘을 바라보던 백호에게 지현이 중얼거렸 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백호는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몇 개월 동안 들어왔던 바보 같은 음성이 아 니라 착 가라앉아 진지함이 함뿍 배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웬일로 빵도 안 집어먹고, 어울리지는 않지만 분위기도 잡고 있으니까. 의외의 모습이랄까?" 백호는 의외로 멋진 남자다. 활동적인 이미지와 날카롭기 는 하지만 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눈매, 그리고 적당한 키에 탄탄한 몸. 지현은 백호에게 평균 이상은 쳐 줄 용의가 있 었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짓궂은 태도는 절대로 싫다. 특히 그 놀림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싫었다. "후우…." 조금은 점수를 올려 줄까나…. 오늘 같이 착실하게 일하고 손님들이 없을 때에는 조용히 있는 다면, 조금쯤은 좋은 남 자로 봐줘야지. 그녀는 홀로 다짐하고는 간만에 조용한 백 호를 향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백호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지현을 놀릴 생각 따위는 잠시 접어둔-절대로 지울 생각은 없었다- 상태였다. * * "내가 악마라는 뜻입니까?" 루이시블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정말 믿기 어렵군요." 아니, 믿기 싫었다. 분명히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수긍하 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인간 이 아니라는 것, 그것도 신의 의지를 반하는 사악한 악마라 는 것은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이라면 믿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루이시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슬픈 목소리라는 것 이… 이런 뜻이었나. "더 들어보기로 하죠." 백호는 이성적인 판단을 무시하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목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안도의 한숨이 그녀에게서 터져 나 왔다. "고마워요. 어디부터…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 지 모르겠어 요. 하하, 만나면 얘기할 것들이 산더미 같았는데… 저 바 보 같죠?" 외모로만 따진다면 이십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저 들뜬 소녀의 모습으로 보였다. 아까 악마에게 당당히 명 령하던 그 모습도 다 거짓 같았다. "당신은 역대 래픽스 샤딘 중,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어요. 암흑의 군주,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마왕에 가까울 정도로 강했으니까요. 당신에게 속해있는 블 랙아머 메르니츠도 사실은 왕의 신물이었어요. 그 때 우리 마계의 힘은 절정에 달했었죠. 만약 스키엘이 마음만 먹었 다면 카마세이(천계)를 점령하는 일도 가능했을 거예요." 그녀는 백호가 이해하고 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안 색을 살폈다. 백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말을 이 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마신(魔神)으로 추앙 받을 정도로 강했던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어 버리는 일 을 벌였죠." 루이시블의 목소리에 슬픔이 배어 나왔다. 이것은… 애증? "그는 자랑스런 우리 일족을 버리고 천사로의 귀환을 택했 어요. 마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을 그가 한 것이에 요. 다른 이도 아닌 우리들의 왕이……. 우리 타락천사 Fallen Angel는 몇몇에 한해서 어둠을 버리고 천사Angel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해요. <고귀한 신분에 속한 이, 속죄의 길이 있을 지어다> 라는 말이 왕의 옥좌에 새겨져 있어요. 현재까지 전례는 없지만 아마 가능할 거예요. 어쨌든 그 는… 절대의 힘을 자랑하던 스키엘은 천사와 사랑에 빠졌 고… 모든 힘을 버리고 천사로 변했어요." 질투일지도……. "예, 우습죠. 천계 수복을 꿈꾸던 어둠의 일족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죠. 그리고 이어서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동생 < 휴즈 다루카>예요. 힘은 형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그 야심만 은 알아줘야 했죠. 왕의 힘은 핏줄로만 이어져요. 항상 하 나의 자식만 <만들어지는> 것이 왕족이지만 그들은 특이하 게도 둘이었죠. 이미 안배된 것이었을지도 몰라요. 스키엘 은 이제 없으니까." 천년의 이야기. 천년의 슬픔. "스키엘은 스스로 여섯 쌍의 날개 중, 열 장을 잘랐어요. 그리고 단 한 쌍의 날개를 지닌 하급의 천사로 화했죠. 아, 알고 있어요? 천사든 타락천사든 간에 고위 천사일수록 날 개가 많아요. 만약 그런 식으로 소멸시킨다면 힘의 대부분 을 잃게 되죠. 아이러니 하게도 상대 천사는 천계 십 장군, 카마세이 십 천의 한 명이었어요. …아름다웠죠." 백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계와 천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나? 어떻게 서로 만난 거지?" 루이시블은 슬픈 눈으로 백호를 응시했다. 그녀의 청색 눈 동자가 정말로 깊어 보였다. "후우, 스키엘의 페어링 상대는 -페어링은 인간의 결혼과 비슷한 뜻이에요- 류메리아라는 이름을 갖고 있죠. 그녀는 아홉 장의 날개를 갖고있는 고위급의 천사였고 마계와 천계 의 경계에 위치한 <절대의 결계>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어요.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스키엘이 산책을 나갔을 때에 마계에 흘러 들어왔답니다. 아, 절대의 결계란 천계 전체의 힘이 얽혀있는 일종의 방어막이에요." 풀려 가는 이야기. "지루한가봐요? 일단 요점만 얘기할게요. 앞으로도 이 얘 기를 몇 명한테 해줘야할 지 모르니까요. 카마세이 십 천의 페어링이니 만큼 성대한 파티가 벌어졌답니다. 그런데 그 때 현재의 암흑의 군주인 휴즈 다루카에게 <절대의 결계>를 잠시나마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전해졌습니다. 성스러운 페 어링이 열려서 경계가 풀어질 때, 암흑의 군단은 물밀 듯이 천계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일은 서로간의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데 그쳤고, 카마세이 십 천은 간신히 암흑의 일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을 격리시켰어요. 어떠한 접 촉도 피하고 있죠. 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루이시블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얘기가 끝나 가는 것 을 백호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전쟁에서 당신은 목숨을 잃었어요. 전쟁에 방해가 될 까봐 휴즈는 당신을 가둬놨지만, 당신은 스키엘을 구하기 위해서 탈출했죠." -즈오오오오! 백호의 두 손이 빛났다. 조금의 티끌도 섞이지 않은 순수 한 검은색의 장갑이 백호의 두 손을 감쌌다. 영혼을 울리는 진한 공명이 일어났다. 강제적인 소환, 이것은 메르니츠의 의지! 루이시블은 놀란 눈으로 백호를 응시했지만, 백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공명이 극에 달하자 백호는 정신을 잃었다. * * 붉은 하늘의 끝, 완벽한 경계를 이루고 있던 금빛의 막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절대의 결계>가 수 천 마리의 마수가 동시에 들어가도 좋을 만큼 허물어져 있던 것이다. 바뮤즈는 열 장의 날개를 모두 펼치고 미친 듯이 속도를 높 였다. "제기랄!"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휴즈의 간계에 속아 힘을 잃는 미약을 마셨고, 마계의 불꽃 속에 갇혀있었다. 온통 피가 흐르고 죽을 것 같은 통증이 계속해서 전해졌다. 열흘 밤낮 을 그렇게 갇혀 있었더니, 자체 치유력 만으로는 도저히 치 유할 시간이 없었다. 단 세 시간만이라도 쉰다면 어느 정도 힘을 되찾겠지만… 지금은 일 초도 낭비할 수 없다! 바뮤즈 는 힘을 모아 폭갈을 터뜨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길을 터라!] 마계의 경계를 통해 카마세이의 한 방향을 향해서 날아들 던 수많은 마수들과 마족들 그리고 타락천사들이 일제히 양 옆으로 갈라섰다. 바뮤즈의 무서운 기운이 그들 모두를 압 도한 것이다. 다섯 쌍의 날개에서 검은 기류가 뿜어지며 계 속해서 그를 가속시켰다. 이대로는 몸이 부서져 나갈 것 같 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논외였다. 얼마간을 그렇게 날아갔을까. 흑백이 허공에서 뒤섞여 싸 우는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빛을 내뿜는 천사들과 검은 기 운을 흩날리는 어둠의 일족들이었다. 그리고, 바뮤즈는 그 곳에서 자신이 찾던 자를 그 전투의 중앙에서 발견했다. "왕이시여-!" 어울리지 않게도 한 쌍의 초라한 날개에 몸을 지탱하고 있 는 스키엘의 모습, 너무나 약해 보이는 그 모습. 바뮤즈는 아직 살아있는 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엄청난 속도로 싸움의 한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스파앗! 황금빛의 창 하나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뮤즈?" 스키엘의 옆에 걱정스런 눈으로 서 있던 류메리아가 경계 의 빛을 띄웠다. 피로에 젖은 얼굴로 그녀에게 기대선 스키 엘은 가만히 손을 들어 긴장을 풀었다. 바뮤즈는 그에게 예 를 표했다. "후후, 너도 날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피로에 젖은, 슬픔이 묻어나는 음성. 그토록 강했던 왕이 이렇게 초라해졌다. 바뮤즈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무겁 게 가로 저었다. "믿고 있습니다." 쐐애애애액! 공기를 찢고 날아드는 소리, 기형적으로 길다란 화살에 붉 은 기운이 엉겨진 채 날아 들어왔다. 류메리아는 왼손에 들 고 있던 상아빛 창으로 스키엘을 노리는 화살을 향해 휘둘 렀다. 단번에 폭발하는 화살. 스키엘은 쓰게 미소지었다. "넷째 아이로구나." 그가 아꼈던 래픽스 샤딘의 네 번째 서열, 무온 쎄 루나 르. 무온이 날리는 화살은 창에 가까울 정도로 길었고, 그 활도 엄청나게 컸다. 배신자를 향한… 응징인가.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무온이 화려한 보라색 활을 들고 여덟 장의 날 개를 활짝 펼친 채 떠 있었다. "비열한 배신자! 아직도 뻔뻔스럽게 살아있다니!" 그래, 내가 너희들을 버렸다. "무온! 닥치지 못하겠느냐!" 바뮤즈가 거칠게 소리쳤다. 분노한 그에게서는 잔혹할 정 도로 진한 살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다치게 하는구나. "바뮤즈!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자는 더 이상 우 리의 왕이 아닙니다!" 갈색 눈동자가 귀여웠던 아이, 마계 십 장군 중에서 가장 어린 무온. 그의 두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스키엘은 류 메리아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스스로 일으키며 작은 목소리 로 말했다. "…현재 날 도우려는 아이들은 몇이나 되지?" 바뮤즈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전투에 방 해가 된다며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단순 할 정도로 싸움을 좋아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충성스런 아 이……. 스키엘의 눈에는 모두가 어린 아이로 보였다. "저 뿐입니다. 루그라가 아진에게 죽었고, 루이시블은 한 달 전부터 소식이 없습니다. 그 외에 십 장군은……." 스키엘은 쓰게 웃었다. 항상 반항적이었지만 순수했던 루 그라가 죽었다. 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된 힘을 포기했고, 그래서 모 두가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눈앞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씁쓸한 독백, 이제는 끝을 봐야한다. 류메리아가 그의 마 음을 위로하려는 듯, 살며시 순백의 날개로 스키엘을 감쌌 다. 따뜻함… 쉬고 싶다. "배신자!" 무온은 활을 겨냥한 채 소리쳤다. 또 화살을 날려봐야 그 의 힘을 상회하는 류메리아와 바뮤즈에게 가로막힐 것이다. 그 때 바뮤즈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도망치십시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그제야 스키엘은 바뮤즈의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을 알아보 았다. 중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상처들. 스키엘 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웃기지 마. 너도 함께 간다." 바뮤즈는 말 없이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며 씨익 웃었다. 무온의 옆에 또 다른 타락천사가 합류한 것이다. "…카엘." 바뮤즈가 바득 이를 갈았다. 서열 다섯 번 째를 차지하고 있는 카엘이었다. 카엘은 거대한 전투 마수, 데드론의 등에 걸터앉은 채 얇고 길다란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핏빛 눈동 자를 이리저리 번뜩이는 최상급의 전투 마수, 데드론은 마 계에서도 스무 마리밖에 없는 희귀종이다. 너무나 포악하여 변경으로 내몰아 버리거나 대부분 죽여버렸지만 놀랍게도 카엘이 그 중 한 마리를 길들여 데리고 다녔다. 독수리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길이는 10미터에 달했고 온 몸은 새카 만 비늘로 덮여 있었다. 이대로라면 부상을 입은 바뮤즈에 게 승산이 없었다. "왕의 명령입니다. 배신자 스키엘, 당신의 영혼을 취하려 합니다." 갑자기 바뮤즈가 한차례 날개를 흔들어 앞으로 나섰다. "기회를 봐서… 도망치십시오. 왕을 잘 부탁드립니다." 스키엘과 류메리아에게 향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날개를 사방으로 펼치고 외쳤다! [마지막 싸움이다! 메르니츠!] 열 장의 날개에 검은 기운이 엉겼고, 그의 신체를 모두 덮 어버리며 기묘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투 형태의 메 르니츠, 온 몸을 감싸는 전신갑주의 모습! 그의 두 눈만이 갑옷 사이로 시퍼렇게 빛났다. 자색의 문양들이 메르니츠 위에 그려졌다. 마계 지존만이 다룰 수 있다는 메르니츠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 왕을 해하려 하는 자들이여!" 죽음을 각오한 그의 기운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그가 허 공으로 손을 내뻗자 푸른 색 기운이 모이며 거대한 양손 검 이 생성되었다. 2미터 길이의 츠바이 핸더를 움켜쥔 그는 쓰게 웃었다. * * 공명은 거기서 끝났다. 백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양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백호의 얼굴을 루이시블이 마주보고 있었다. "무엇을… 봤나요?" "…마지막 전투." 루이시블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니츠의 힘이었군요. 공명이라니……. 후후, 당신을 완전히 주인으로 인정했나 보군요." "갑옷의 모습이었는데?" 백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메르니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메르니츠는 엄청난 기운을 갖고 있는 갑옷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장갑. "당신이 약하니까요. 윤회의 사슬에 묶인 당신에겐 힘이 없으니까 그럴 거예요. 사실 그 정도의 힘을 내는 것만으로 도 대단하다고 해야겠지요." 평소의 요령대로 힘을 거둬들여 메르니츠를 해제한 백호는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루이시블의 청색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면서. "제일 궁금한 것입니다만… 왜 날 찾았죠. 전생은 그저 전 생이 아니던가요. 윤회를 거친 이상 전 이미 인간 아닙니 까.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죠?" 기억은 아주 약간 돌아왔다. 그동안 꿈을 꿨던 것들도 조 금씩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 인간인데. 루이시블은 골드블론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말 했다. "스키엘도 다시 태어났어요. 그 또한 윤회의 사슬에 묶인 채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언했고, 결국 이뤘습니다. 여섯 검은 날개와, 여섯 흰 날개를 갖고 천년의 시간이 흐른 후 에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여섯 검은 날개와 여섯 흰 날개는 곧 열 두 명의 조력자를 뜻한다고 루이시블이 설명했다. 그래서 마계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휴즈의 명에 따라서 그 열 두 조력자부 터 해치우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현재 확인 된 것은 단 두 명, 바뮤즈의 환생인 백호와 류메리아의 환생이라고 생각되 는 휘수연. 의외인 것은 스키엘의 환생은 절대로 죽이지 말 라고 한 점이다. 휴즈는 그저 스키엘의 주위 사람들을 죽게 만 할 뿐 그 자신은 오히려 보호하라고 하였다. "휘수연, 명시윤?" 루이시블이 귀엽게 미소지었다. 역시 하는 짓만 보면 십대 소녀 같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죠? 후후, 그 휘수연 맞아요." 백호는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빼도 박도 못하겠군." 루이시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호가 이를 으드득 갈았 다. "휘수연이라니… 나 팬인데……. 쳇, 당신 교활해." 어느새 반말을 하고 있는 백호, 역시 사교성이 뛰어난 걸 까. 순식간에 긴장이 풀어진 루이시블은 매혹적인 입매를 올려서 웃더니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반사신경이 극에 달한 백호로서도 피하지 못할 속도로 그녀는 그의 뺨에 입 맞췄다. 부드러운 느낌이 볼에 한참동안 남아 있었다. 그녀 는 수줍게 웃었다. 밝은 금발에 새하얀 얼굴, 이국적인 용 모였지만 미인은 어딜 가나 미인이었다. "고마워요. 도와줄 거죠?" 어떠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던 백호, 기절하다. "어머나? 이, 이봐요. 백호씨!" 태어나서 처음일지도……. * * "뭘 그렇게 히죽거려요?"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을 얼굴에 띄운 지현이 백호를 쏘아 붙였다. 한참 분위기 잡고 있기에 뭔 일인가 했더니, 그새 정신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은 백호는 한쪽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히죽, 꿈이 아니야. "…변태 같다." 자신의 볼을 매만지며 실실 웃고있는 백호를 보던 지현은 결국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혹시나 해서 달콤한 빵 냄새 를 부채질하여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보내봤지만 백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가 당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하아, 앞으로는 바빠질 거예요. 정상적인 삶은 포 기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주위에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제게 연락 주세요. 당신과 스키엘에게 묶인 인연이 환생한 자들을 만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제 그렇게 말하고 루이시블은 떠났다. 황당한 것은 '연 락'하라는 사람이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고 가버렸다는 것 이다. 백호는 솔직히 지금 상황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다지 끼고 싶지도 않았다. "흠흠, 그래도 예쁘긴 했어." 루이시블이라는 여자, 서양 모델 뺨치는 외모. 인간이든 아니든 간에 예쁘면 장땡이라는 사고방식이 머릿속 깊게 박 혀있는 백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백호는… 첫사랑 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우, 우웩." 수줍어하는 그의 모습을 본 지현이 구역질을 했다. 최악이 다. * * 오늘은 촬영에 더불어서 음반 작업을 위한 작곡가와 만나 기로 되어있었다. 스케줄이 평소보다 빡빡했다. 수연은 달 력의 빨간 동그라미를 쳐 놓은 것이 오늘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윤이랑 만난 지 백일~♡」 라고 예쁜 필기 채로 달력에 크게 쓰여있었다. 그녀는 활 동하기 좋도록 짧게 자른 머리를 매만지며 연신 흥얼거렸 다. 짧다고는 하지만 예전에 허리까지 오는 것에 비교한 것 일 뿐, 그래도 어깨에 닿을락 말락하는 머리는 꽤 마음에 들었다. "시윤아-, 오늘 기대해." 그녀는 휠체어에 앉은 시윤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살짝 도드라진 그녀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지만, 시윤은 아무 반 응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심술이 난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 게 말을 걸다가 결국 핏기 없는 양 볼을 손가락으로 우악스 럽게 잡아당겼다.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이 녀석아! 난 여자로도 안보이지!" 그 바람에 회색으로 물이 빠진 시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 다. 벌써 색이 바뀐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검은 색은 보이질 않았다. "히잉, 이상하네. 머리카락이 안 자라는 건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뽑아보았지만 원래의 색깔이라는 듯 회색 가득이었다. 벌써 한 달도 더 된 동거생활, 하지만 이 것은 그저 환자와 병 수발을 드는 사람의 관계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울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 라보고만 있는 그에게 수없이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막 뿐. 이제는 슬픔을 혼자 견디는 방법도 조금씩 알아갔 다. "체엣 너무해. 이게 뭐야!"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그의 앞에서 옷을 입던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조심조심 그가 없는 방에서 옷 을 갈아입고 조신하게 행동을 했지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 는 일인지. 이제는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디 보자. 사진 촬영이 세시부터니까, 시윤이 씻기고 밥 먹이고 나가면 딱이겠다." 세 달 동안 역시 그녀가 씻기고 먹이고 다 한 것이다. 예전 의 그 도도한 이미지는 이미 찾을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그녀는 웃었다. 죽고싶을 정도로 슬프더라도 기쁨 한줄기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견뎌내는 길이다. 찰칵. 뜨거운 조명이 실내를 달구고 있었다. 플래시가 연속적으 로 터졌고, 수연은 사진작가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포즈를 바꾸고 있었다. 몇 벌의 옷을 갈아입었고 땀 때문에 지워지 는 화장도 고쳐가며 열심히 한 덕분에 촬영은 예상보다 일 찍 끝났다. "유명현씨, 한가하면 잠깐 내 방으로 와요." 이사장 상준의 목소리였다. 명현은 지쳐서 간이 의자에 앉 아있는 수연에게 씩 웃어 보였다. "오늘 꽤 괜찮았어. 표정이 살았는데?" 수연이 볼을 붉혔다. 오랜만에 제대로 짓는 표정이었다. "헤헤, 그래요?" 엉성해 보여도 사진밥으로 먹고사는 유명현이었다. 그는 수연이 귀엽게 웃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다시 예전의 이미 지를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그녀와는 조금은 달랐다. "그럼 여기서 쉬고 있어." 끄덕끄덕.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장식을 떼어내며 활짝 웃었다. * * "어때요?" 유명현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상준이 대뜸 물었다. "뭐 말씀입니까?" 며칠은 감지 않은 듯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파에 몸을 기댄 그가 반문했다. 언제나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이지만 일에 관한 한은 확실한 사람, 만약 유명현이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면 상준은 그를 진작에 쫓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저 졸린 듯한 눈 너머로는 찌르는 듯한 눈빛이 감춰져 있었 다. "휘수연 1집 컨셉 말입니다. 역시 귀여움을 강조하는 것은 관두고 신비롭고 슬픈 발라드 풍이 좋겠죠?" 정말로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일, 가끔씩 상준은 유명현에 게 일에 대한 의논을 하곤 했다. 유명현은 목에 걸고 있던 큼직한 전문가용 사진기를 접대용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살 짝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의 휘수연이라면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 녀는 완전히 변했다. 오죽하면 팬레터가 오더라도 '그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절 가슴 아프게 해요.'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게 태반이겠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덕분 에 그녀를 가수로 키우려던 작업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그게… 말입니다. 미리 준비했던 곡들이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라고 했죠? 그 중에 반은 써도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유명현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습관적으로 머리에 손을 가 져가며 말했다. "1집은 믹스타입으로 하는 게 좋겠는데… 그러니까, 슬픈 발라드 풍의 노래와 깜찍한 댄스곡을 섞어서 말입니다." 만약 두 시간 전에만 질문했더라도 무조건 댄스곡은 안 된 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짧은 시간 동안에 변 한 수연을 알아챘다. 슬픔을 딛고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 을,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작게나마 미소짓는 모습을. "확실한 겁니까." 상준이 확인하듯 물었다. "확신합니다." 겨우 사진 작가의 말에 흔들린다는 게 우스운 일이지만, 상준은 그렇게 했다. 자신의 감을 믿었고, 인물을 보는 눈 을 믿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봅시다." * *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 예정된 작곡·작사가와의 만남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저 이사장 상준이 수연에게 몇 곡의 악 보를 내밀면서 연습해 오라고 했을 뿐이다. 수연의 노래 실 력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한달 이상을 MR소속의 가수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았음에도 아직 미숙함이 엿보였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배웠겠냐마는. 차가운 바람이 불자 그 녀는 사진 촬영 협찬으로 받아온 하얀 코트를 여몄다. "후훗, 가수라니… 이상해." 그녀는 실소를 터뜨리며 악보들 중 한 장을 제외하고 다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건 상준의 책상 위에 있던 것인 데, 억지로 뺏어온 것이다. 가사가 유치하고 진부하다고 상 준이 만류했지만, 수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집에 넣겠다고 박박 우겼다. "음음. 주위에 아무도 없지?" 한적한 길가를 걸어가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만족했 다. 아무도 없었고, 수연은 목을 가다듬어 소리를 내어봤 다. 피곤하긴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지진 않았다. "아, 아. 흠흠." '천년의 기다림'이라고 유려한 필체로 적힌 곡명. 그녀는 악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부드러운 울 림이 터져 나왔다. 『기억하나요. 그 때의 약속을』 노래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녀의 경험이 모자란 탓에 음정과 박자가 조금씩 틀렸지만, 감정만은 절실하게 묻어 있었다. 하얗게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수연은 조용조 용한 걸음걸이로 나아가며, 노래했다. 곡은 분명히 조잡하 고 유치했다. 하지만, 수연의 목을 타고 나오는 그것은 달 랐다. 문득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고였다. 『아직도 전 당신을 그려요. 천년 전에 했던 약속, 사랑의 속삭임을 기억해요.』 왜……. 『기다렸죠.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과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서.』 왜……. 『잊지 말아요. 영원의 맹약을』 왜……. 『아직도 난 당신을 찾아요. 세월이 서로의 모습을 어떻게 바꿨다 하더라도.』 왜……. 『난 다시 한 번 사랑하겠어요.』 왜 이렇게 바보 같지. 왜 이렇게 슬프지. "칫, 이게 뭐야. 유치해." 그녀는 비웃었지만 눈가에는 이미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이 억눌린 것처럼 답답했다. 까 닭 없는 슬픔, 하지만 납득이 가는 아픔. 수연은 눈물을 닦 고 며칠 전에 봐뒀던 선물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기쁜 날이지, 울어야 할 날이 아니다. -거짓된 자의 이름이여. * * 비록 그 위세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기업은 여전히 '아명'이었다. 한때 크리스의 뒤를 봐주던 류민수는 직접 아명의 총수 자리에 앉아있었다. 고 인 물은 썩기 마련이었고, 그는 아명의 부패한 살점과도 같 은 동맹 회사들을 완전히 도려냈다. 당연 말많은 노인네들 이 시끄럽게 굴었지만 그는 아주 철저하게 행동했다. "후우. 피곤하군." 원래는 크리스가 쓰던, 아니 그 이전에는 아버지와 할아버 지가 쓰던 집무실에 지금 류민수가 있었다. 혼자 있기엔 너 무 넓은 곳이었지만 그에게는 꼭 마음에 들었다. 아니, 지 금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너무나 쉬웠다. 한때의 혈기로 태 어난 사생아 라지만 전설적인 사업가 '류광희'의 피는 그에 게 천부적인 재능을 물려준 것이다. 회사가 안정되고 나면 그는 태성을 칠 생각이었다. 아주 잔인하고 교묘하게… 크 리스가 당했던 것 이상으로. 벽 한쪽을 메우고 있는 유리창 사이로 달빛이 고고하게 쏟 아져 내렸다. 류민수는 의자의 푹신한 감촉을 즐기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런 그를 언제부터인가 창 밖 허공에서 주시하고 있는 자 가 있었다. "키킥, 맛있겠어." 레오나트였다. 어둠 속에 묻어나는 새까만 날개를 캄캄한 밤하늘에 박아 넣기라도 한 듯, 그의 몸은 강렬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심 속에 자리잡은 아명의 본사 빌딩은 굉장히 높은 편이었고, 회장실은 최고층에 있었다. 레오나 트는 현재 지상에서 까마득한 높이에 떠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작게 읊조렸다. [하 카단 레오나티스. 타오르는 마계(魔界)의 불꽃이여] 그의 손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작은 불꽃이 생성 되었다. 백호에게 썼던 불꽃이 거의 2미터에 육박했었으니 현재 만들어진 것은 레오나트가 굉장히 절제한 것이다. 그 와 류민수 사이의 유리창은 굉장히 두껍고 단단한 것으로 망치로 내려친다고 해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태워라] 번거로운 것을 귀찮아하는 레오나트가 생각한 방법은 바로 녹이는 것, 마계의 불꽃은 그의 의지에 따라서 앞으로 뻗어 나갔다. -스으으으 순간, 불꽃 앞 허공에 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백호의 움직임 따위는 가볍게 여기던 레오나트조차 느끼지 못한 엄 청난 스피드였다. "이, 이런." 한 쌍의 큼지막한 하얀 날개를 퍼덕이는 백발의 천사, 하 지만 레오나트가 경악한 것은 천사의 출현 때문이 아니었 다. 그의 손아귀에 단단히 잡혀있는 마계의 불꽃,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갑자기 나타난 천사가 보여준 것이다. "네 놈이로군. 주위를 시끄럽게 하던 녀석이." 천사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천사답지 않은 미소였다. "넌 누구냐!" 마계의 불꽃을 막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바로 얼마 전에도 냉기와 회복마법을 적절히 섞어서 백호를 구해낸 루 이시블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 정제된 마법과 마법의 충돌이었을 뿐, 아무런 기운도 내뿜지 않은 채 육체에만 의존한다면 불타버리기 십상이다. 잠시 잠잠하 던 바람이 다시 몰아쳤고, 일순간 천사의 얼굴을 가리고 있 던 백발이 걷어졌다. '외눈?' 그랬다. 천사는 한쪽 눈은 감겨 있었고, 그 위에는 길게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보라색 흉터가 있었다. 천사 본연 의 치유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처, 그것은 저주받은 무기 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하핫. 타천사가 인계에 나돌아다니다니, 우습구나." 외눈의 천사는 호탕하게 웃었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틀림없는 살기였다. 레오나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 다. 이미 천사가 인간계에 있다니, 카마세이-천계(天界)의 결계가 풀렸단 말인가. 천사는 웃음을 뚝 그치고, 낮은 어 조로 말했다. "어둠 속에 버려진 하찮은 미물아, 이제 죽을 시간이다." 아무리 천사와 타천사 간의 반목이 심하다지만, 빛의 따스 함에 기초를 두고 있는 천사의 성격이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다. 상대의 오만한 말투에 분노한 레오나트는 버럭 소리 를 질렀다. "난 래픽스 샤딘 아진님의 부관 레오나트다! 감히 천계의 쓰레기가 날 모욕하는가!" 레오나트는 남겨뒀던 모든 힘을 개방했다. 그의 뒤쪽에 흑 빛 입자가 모이더니 한 쌍의 날개가 더해졌다. 비록 인간계 이기에 힘이 부쳐서 그 빛깔이 엷긴 했지만, 그는 사익 천 사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다. 상대가 카마세이 십 천이 아닌 이상은 해볼 만 했다. 게다가, 카마세이 십 천에 외눈박이 는 없다. "아진의 부관이라… 죽을 이유가 하나 추가됐군." 상대는 변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래픽스 샤딘의 부관이 라 함은 그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천계의 카마세이 십 천과 마찬가지로 마계의 래픽스 샤딘도 여섯 날개 이상 의 천사만이 그 자격이 주어진다. "건방지구나! 넌 누구냐!" 천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 리로 대답했다. "너희들 어둠의 일족을 멸절하려는 자, 방랑자라고 하면 좋겠군." 스스로를 방랑자라고 칭한 천사는 빙긋 웃었다. "좋아, 천년만의 인연이니 양보해주지. 난 한 팔만 쓰겠 다." 방랑자는 오른손을 들어서 까딱거리며 레오나트를 도발했 다. 그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레오나트는 손을 비수처 럼 날카롭게 만들어서 그에게 휘둘렀다. "웃기지 마라!" -부아앙!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방랑자는 슬쩍 뒤로 피해서 그 공격을 무산 시켰다. "하하하!" 비웃음. 방랑자는 크게 웃으며 레오나트의 수도를 피해서 왼쪽 복부에 오른손을 찔러 넣었다. "크억."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레오나트의 신형이 퉁겨져 나갔다. 10미터 가량 날아간 레오나트는 균형을 잡아 몸을 바로 했 다. 비록 방심해서 맞긴 했지만, 덕분에 한가지는 알 수 있 었다. 상대의 힘은 자신과 거의 같았다. "어때, 견딜 만 한가?" 방랑자는 조롱하듯 말했다. 이어서 연속 공격을 하지 않았 다. 이건 명백히 그를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흥! 큰소리 친 만큼 실력은 되지 않는가 보군." 이 정도라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다. 아니, 불리하면 도망 가면 그만이니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가 잊고 있던 것 이 있었다. 방랑자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퉁겨서 소리를 냈다. 따악, 그와 동시에 그의 등에서 한 쌍의 백색 날개가 뻗어 나왔다. 레오나트의 엷은 날개와 비교할 수도 없는, 정말로 또렷한 색깔이었다. "이 정도면 될까?" 맙소사! 지금 저자는 두 장의 날개만 꺼내고 있었다! 날개 는 곧 힘의 상징, 본래의 힘이 비례하기는 하지만 날개를 꺼내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방랑자는 한 쌍의 날개로 레오나트와 맞먹는 힘을 냈다. "너, 넌 카마세이 십 천이냐!" "그런 저급한 녀석들이랑 비교당하기는 싫군." 카마세이 십 천의 관한 정보는 천년 전의 것, 그동안 새로 운 강자가 등장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레오나트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방랑자는 웃음을 지우고 손가락을 한번 더 퉁겼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한 쌍의 날개가 더 돋 아났다. 소환된 날개는 모두 여섯 장, 방랑자는 카마세이 십 천이거나 그에 맞먹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이제 끝내야겠구나. 어둠의 아이야." "제기랄!" 승산은 없다. 레오나트는 몸을 빙글 돌려 칠흑 같은 하늘 을 향해 쏘아져 올라갔다. 방랑자는 쓰게 웃었다. 한껏 펼 쳐져 있던 그의 날개가 몸 앞쪽으로 휘어져 끝자락을 모았 다. 등에서부터 둥글게 휘어진 날개들이 몸 앞 허공에 작은 원을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긴 어딜 가느냐, 어둠의 아이야." 금빛 광채가 날개들로부터 눈부시게 쏟아져 나왔고, 날개 끝자락의 원으로 집중되었다. -즈으으 즈으으 엄청난 에너지가 집중되어 주먹만한 구형으로 작게 뭉쳐져 갔다. "엔젤릭 캐논Angelic Cannon" -콰아아아아! 방랑자에게서 금빛 광선이 대기를 찢으며 발사되었다. 마 치 빛의 기둥과도 같은 모양의 엔젤릭 캐논은 미친 듯이 날 아가던 레오나트에게 적중했다. "끄아아아악!" 레오나트의 몸은 빛에 휩싸여 분해되었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방랑자는 그의 죽음을 가 만히 지켜보다가 날개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타락천사에게 처음으로 써본 기술이었는데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 었다. "이제… 기다림은 끝인가." 그는 한쪽 눈만으로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 지 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윤은 휠체어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자 연스럽게 실내의 사물들과 동화되어 '죽어있다'. 베란다를 통해서 은은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초점 없는 시윤의 까만 눈동자에 투영됐다. 의식을 타고, 마음속으로 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때가 되었어.' 시윤의 몸이 미동한다. '꿈틀'하는 작은 움직임, 한달 이 상을 굳어 있던 몸이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다. 피로에 지친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달은 음지 속의 빛. 어두운 자들의 힘.' 꿈틀.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움직임이었다. 잠들어 있던 육 체가 깨어나고 있었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시 윤의 눈에 약하게나마 빛이 돌았다. '내가 도와줄 방법은 이것 밖에 없어. 내가 갖고 있는 힘 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 저급한 천사의 힘이니까.' 한 달 동안 병자 생활을 한 시윤의 얼굴은 놀랄 만큼 창백 했다. 새빨간 입술이 조금씩 달싹거리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했다. '천사로서 어둠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실패한다면… 난 사라지겠지.' 달빛을… 빨아들인다. 시윤의 두 눈이 실내로 흘러 들어오 던 빛을 모조리 집어삼키자 주위는 순식간에 먹물을 칠한 듯한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월광(月光)은 눈으로, 그리고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쿵! 쿵! 쿵! 몸 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부딪치는 소리, 이것은 환 청이 아니었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부숴 버리기' 위해서,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쇠사슬이 맞부딪치는 소리 와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렸다. 시윤의 옅 은 회색 머리카락이 은빛을 내뿜으며 넘실대었다. '크아아아악!' 존재는 비명 질렀다. 빛으로 이루어진 영혼이 어둠을 머금 으니, 그 고통은 육체적인 것과 차원을 달리했다. 월광(月 光)은 반항하듯 자꾸만 시윤의 몸에서 빠져나가려 했고, 그 에 따라서 '존재'의 부담은 커져만 갔다. 순간, 그들이 말 했다. '당신은 빛(光)이야.' '당신은 어둠을 지닐 자격이 없어.' '우리를 가두지 마. 우리를 꺼내 줘.' 어둠이 반발한 것이다. '존재'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일갈 했다. 『닥쳐! 난 어둠의 주인이었던 자! 감히 너희들이 내게 반 발하려 하느냐!』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수십 수백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말했다. 『너희들을 다루는 것이 그 증거』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은?' 주인 된 자의 이름은? 메아리치듯 그들은 말한다. 여럿이 하나된 의지로 말한다. '존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영혼을 실어 답했다. 『천년을 거슬러 온 자, 내 이름은… 스키엘』 끊임없이 떠들던 목소리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스키엘은 그들이 인정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발하던 빛 덩이들이 조 용히 시윤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시윤의 몸이 은빛으로 한 꺼풀 감싸졌고, 그것은 점점 커져서 고치처럼 둥글게 변 해갔다. '당신이… 스키엘?' 스키엘에게 다시금 의지로써 말을 거는 자가 있었다. 오랜 기간 들어왔던 익숙한 목소리, 스키엘은 그가 시윤이라는 것을 알았다. '깨어났나.' 방금 전까지는 월광(月光)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영혼을 실 어 말했었다. 하지만 시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기에 느낌 만을 전했다. 마음의 벽 건너편에서 시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대화였지만 어색하지는 않았 다. '…항상 당신의 꿈을 꿨어.' 스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월광을 시윤의 몸에 덧씌 우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몸을 덮었던 빛은 이제 하나의 광구(光球)가 되었다. 지름 2미터 가량의 구는 완전 히 시윤을 감쌌다. '말을 아껴라. 자칫하면 둘 다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광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베란다의 잠긴 창문이 저절로 열렸고, 광구가 창 밖으로 날아갔다. '하나가 된다. 주체는 너, 난 아마도 과거의 넋으로 자리 잡겠지.' '당신은… 없어지는 건가?' '후후, 이제 정신을 집중해라. 그리고… 우리가 했던 계약 을 기억해라.' 스키엘은 가볍게 웃고는 광구가 하늘을 향해 치솟도록 조 절했다. 원래 자신의 힘이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힘 을 제어하고 있었다. 시윤이 살던 아파트를 빠져 나온 광구 는 점점 높은 곳으로 이동했고, 달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더 욱 커져갔다. 건물들이 점으로 보일 만큼 날아오른 광구는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나 너희들에게 명한…』 '기다려!' 시윤이 쥐어짜듯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밖'을 향하고 있 던 스키엘의 시야가 '안'으로 돌아왔다. 시윤의 의지가 그 를 강제적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다. '안'에서는 반투명한 무형의 막에 갇힌 시윤이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죽어버리는 거잖아.' '하아, 죽음이라.' 스스로 만든 마음의 벽조차 부수지 못하는 시윤이 스키엘 을 걱정하여 힘을 발휘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 었다. 스키엘은 사슬에 속박되어 끊임없이 진득한 피를 흘 리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윤을 향해 걸어갔다. 절그럭, 절그럭, 절그럭. 그가 걸을 때마다 피에 절어 붉 게 물든 날개가 잔인하게 찢겼다. 양손을 고정시켰던 쇠사 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그의 손목을 사정없이 파고들었 다. 피에 젖은 천사, 바로 스키엘이 그러했다. '그, 그만둬. 무슨 짓이야!' 시윤이 비명 질렀다. 너무나도 처참한 천사(天使)의 모습 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였다. 무엇을 위해서, 도대체 무엇 을 위해서 당신은 그 고통을 감수하는 거지? 도대체 왜! '난… 맹세했었다.' 의지의 벽, 바로 앞까지 도달한 스키엘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날개가 완전히 뜯겨나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 큼, 사슬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끼이이이익. 스키엘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사슬을 강제로 잡아당겨 두 손을 의지의 벽에 댔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시윤을 바 라보며……. '모두를 죽이겠다고 난 맹세했다.' 그의 손을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지독한 슬픔과, 원 한, 애절한 그리움이 시윤에게 전해졌다. 스키엘의 치렁치 렁한 흑발 사이로 붉은 그의 두 눈이 보였다. '그녀를 앗아간… 모두에게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죽음? 두렵지 않아. 그녀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을 다시 죽 으래도 환영이다. 기꺼이 내 영혼까지 바칠 자신이 있어.' 그는 진심이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짓씹듯이 말하는 스키 엘의 두 주먹이 엄청난 악력으로 쥐어졌다. '우두둑', 뼈마 디가 엉키는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뭉개졌다. 놀란 시윤과는 달리 스키엘은 조금의 고통도 느 끼지 못하는 듯했다. '천년을 기다렸다. 그들의 살을 씹고 피를 삼키기 위해서, 그 영혼까지 멸하기 위해서!' 쿵! 스키엘의 망가진 주먹이 의지의 벽을 강타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의 시간, 난 복수를 너에게 맡기려 한 다.' '…내가?' 시윤은 조심스레 되물었고, 스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봉인이 풀리고, 네 벽이 허물어질 때. 그 때 네가 날 인정한다면 우린 하나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넌 날 갖게 된다.' '…당신이 없어지는 거잖아.' 그건 싫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건 싫다. '난 원래 죽어 없어진 존재, 네가 생각하는 영혼이라는 것 과는 달라.' 스키엘은 씁쓰름하게 웃더니 몸 가득히 돌렸던 힘을 줄였 다. 사슬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몸을 잡아당겨서 속박했 다. '지금의 난 너에게 전해줄 아무런 힘이 없다. 기억을 찾게 되면 조력자를 찾아라. 날 따라서 천년을 거슬러온 자들이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라.' 시윤은 고개를 떨궜다. 주체는 시윤이 아니라 스키엘이 될 수도 있었다. 그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시윤은 이미 느 끼고 있었다. 스키엘은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현세 에 존재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시윤 의 의식은 사라지겠지만. 『들어라! 달의 정령들아!』 그는 당당했다. 모든 것을 잃은 지금도 그는 왕이었다. 『나 주인 된 자의 이름으로 명하나니』 달의 정령들이 반응했다. 진정한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봉.인.을.풀.어.라!』 시윤의 육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광구는 한순간 부풀어 올랐다. 마지막 힘을 모으는 듯하던 광구는 시윤의 몸 속으 로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널 믿는다. 스키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 * 수연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케이 크도 샀고, 샴페인도 샀다. 시윤이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으 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 면, 그가 깨어나는 것. 아니 잠시라도 정신을 차리고 웃으 며 자신을 맞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후후, 너무 과분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언젠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 그녀는 만족하려고 애썼다. 차가운 철제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런, 집이 왜 이렇게 춥지. 창문이라도 열어놨나."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거실로 갔다. 과연 창문이 열려 있어 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휠체어가, 비어있 는 휠체어가 있었다. "시, 시윤아!" 없다. 휠체어에 항상 앉아있던 그가 없었다. 수연은 들고 있던 생크림 케이크와 잡다한 것들을 소파에 던져버리고 모 든 방을 뒤졌다. "설마……." 열려있는 창문이 불길하게만 보였다. 쏟아져 들어오는 달 빛, 그리고 빈 휠체어가…….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디… 간 거야." 오늘은 시윤과 만난 지 백일 째의 날이었다. <그러니까 운명이란 건… 참 묘한 거야. 안 그래?> 보슬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겨울임에도 눈이 아닌 비가 온 다고 애꿎은 하늘에 욕설을 퍼부었고, 우산을 준비하지 못 한 사람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얼음이 얼어도 이상하지 않 은 영하의 날씨인데다 조금씩 내리는 비는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추워." 비에 푹 젖은 하얀 머리의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발목까 지 오는 몸에 맞지 않는 짧은 청바지에 얇은 라운드 티만을 걸치고 있어서 보는 사람마저 춥게 만드는 그런 모습이었 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는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볼 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서 얼굴에 착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긴 어딜까."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답은 없었다. 미친 사람이라고 수 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미 속옷까지 젖은 지 오래여서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이마 에서는 열이 났다. 눈을 돌려 상가의 시계를 확인하니 시계 바늘이 오후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누구지?" 그는 다시 읊조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자기가 가로수에 기대어 잤다는 것을 알았다. 겨울의 아침 공기는 너무나 차가워서 밤새 이곳에서 잤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씁쓸히 웃다가 한가지를 깨달았다.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백치는 아니었다. 적어도 기본적인 소양은 그대 로 남아있는 듯 했으니까. 하지만 이름도 집도 연고자도 전 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모른 다는 것, 그것은 너 무나 큰 고통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렸고, 남자는 혼란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누구지? 이곳은 어디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을 지르고 울고싶었지만 그마저도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울고싶 어도 슬프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고싶어도 놀랍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쏴아아아아. 빗방울은 계속해서 그의 약해진 몸을 때렸다. 지금도 남자 의 몸은 생각만큼 잘 움직여주질 않았다. 오랫동안 처박아 놓은 기계처럼 뼈가 굳어서 뻑뻑하기만 했다. 허기가 지고, 비 때문에 감기라도 걸린 듯 미열이 올랐지만 쉬고 있을 생 각은 없었다. "윽." 남자는 갑자기 신음을 흘리더니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자신의 발바닥을 살폈다. 찢어진 양말 사이로 붉은 피가 보 였다. 날카로운 돌부리나 유리조각에 찔린 듯 했다. 아팠 다. "찾아야 해."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 무런 기억이 없음에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 다.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습기 찬 공기가 그의 폐부 깊은 곳까지 차 올랐다. 기억이 지워졌다. 아니, 지워진 게 아냐. 그저 혼란스러운 것일 뿐이야. 스스로를 안정시키며 위태롭게 걷던 그는 결 국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은 있었지만 몸이 견디지 못하고 나자빠진 것이다. 빌어먹을, 더럽게 쓸모 없는 몸이네. "…시윤?" 자포자기한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남자에게 웬 여자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의혹이 섞인, 그러나 조심스럽게 불러보 는… 음성. 들어본 적이 있던가. "…시윤이야?" 착각이 아니다. 이건 분명 그에게 묻는 목소리였다. 남자 는 잘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곤 상대를 봤다. 시야를 가려버린 하얀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 진 앳된 얼굴의 여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핑크빛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들을 가슴에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은 겁먹은 표정 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명 시 윤… 아냐?" 명시윤. 그게 내 이름인가.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게 느껴 진다. 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 다. 그녀는 앳된 얼굴로 울상을 짓더니 다시 한번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으로 시윤을 가 려주었다. 이미 다 젖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 지만 마음만은 훈훈해지는 듯 했다. "저기… 명시윤 아냐?" "후우, 날 알아?" 시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상대방은 날 알건만 난 상대를 알지 못하다니, 너무나 불공평했다. 순간 그는 그녀의 커다 란 눈망울에 파문이 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이 보였다. 덕 분에 시윤은 아주 많이 당황했다. '젠장, 내가 실수했나.' "미, 미안해. 내가 사람을 잘못…" 그녀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죄했다. 하지만 눈에 고인 눈물은 그와 동시에 빗방울과 섞여서 땅에 떨어졌다. 시윤 은 직감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상대는 확신했음 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면서 가려고 하는 것임을. "기다려!" 지금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시윤은 황급히 일어나서 돌아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 다. 탈진한 상태에서 힘 조절이 안된 것인지, 그녀의 몸이 시윤에게 안겼다. "에?" 툭. 덕분에 그녀는 책과 우산을 떨어뜨렸다. 흠뻑 젖어있 는 시윤에게 안긴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더욱 안겨오지도, 그렇다고 떨어져 나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 니, 당황해서 굳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시윤이구나."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시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가 시윤의 귀를 찔렀다. 울먹거림은 없었고,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밀착된 둘의 뺨이 서로 맞대어졌 고,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 울림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생각이야?" 그녀는 약간씩 말을 끊기는 했지만 확실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엉겁결에 포옹을 한 시윤 은 무안한 나머지 그녀에게서 급히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책에 생각이 미처, 급히 책을 주웠지만 이미 젖어버린 후였 다. 오른쪽 아래에 작고 귀여운 글씨로 쓰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라 꺼다-★> 사라… 이게 이름인가? 예쁜 이름이다. "사…라?" "설마 내 이름도 잊어버린 거야?"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놀랍다는 듯 말했다. 아까는 울상을 짓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표정이 빨리 변하는 애다. 하기야, 길거리에서 끌어안은 남자가 자기 이름도 잊 어버렸다면 굉장히 불쾌하겠지. 사라는 하나로 모아서 묶은 머리를 매만지다가 그냥 끈을 풀어버렸다. 차라락, 머리카 락들이 흘러내리자 귀여웠던 이미지가 도발적으로 바뀌었 다. 그녀는 연 분홍빛 입술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이러면 기억하려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 (不亦說乎)아." 머리를 풀고 한자 성어를 읊조렸다. 이것은 과거를 향한 키워드. 시윤은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라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그에 호응해 줄 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아, 너무 하는데? 아무리 2년이나 지났다지만, 정말 날 잊었어?" 사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지워졌다. 진짜로 화났다는 표 정이었다. 시윤이 당황하는 사이에 그녀는 다시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다채로운 변화였고 그래서 적응 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설마, 아직 용서… 못하는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더 이상 듣고 있다가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이다. 시윤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뜻 모를 말을 하고 울상을 짓는 사라 에게 -그 큰 눈망울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말했다. 정말, 울상을 지었다가 웃었다가 화냈다가 다시 울상 짓 는… 무서운 여자다. "저기… 질문이 있는데." "으, 응. 말해봐." "내가 사는 집이 어딘지 혹시 알아?" "……." 사라는 얼빠진 얼굴이 되 버렸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라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시윤은 꿋꿋하게 진지한 얼굴로 맞대응 했다. 그 때까지도 사라는 떨어진 우산을 주울 생각 을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 다 감기에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시윤이었다. "…생각이 안 나서 못 찾겠어." 시윤이 한마디 덧붙이자 그녀는 바보를 보는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너 바보야?" "…방금 전까지는 내 이름도 몰랐다고 하면 바보에 천치라 고 할거냐?" 기억을 못한다고 바보소리를 듣다니 기분이 나빴다. 시윤 은 투덜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입술을 삐죽이 내미는 그 의 모습에 사라는 킥킥거렸다. 감정의 변화가 정말 심한 여 자였다. "혹시 기억상실증이라던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말하고 싶 은 거야?"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코웃음치려던 그녀는 시윤의 진지한 태도에 잠시 고민했 다. "내가 싫어서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지?" 확인하는 듯한 태도, 시윤은 씁쓰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물론이야."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바로 근처라며 사라는 시윤에게 우 산을 씌워서 끌고 갔다. 가끔씩 그녀는 흘끔흘끔 시윤을 곁 눈질했다. 시윤은 조금 곤혹스럽기는 했지만, 방금 전까지 의 미아가 되 버린 기분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 때, 또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당황하게 된다. 아니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할 때에는 죽고픈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난 누구인가.' 아주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지만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기 도 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그 누구도 아니었지만, 사라 를 만남으로써 '시윤'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얻었다. 우습 게도 그를 기억해주는 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이었던 것 이다. "내 이름이 명…시윤이라고 했나?" 왠지 거북한 것을 입에 담기라도 하듯 혀가 깔깔했다. 그 래, 내 이름이란 말이지. 사라는 시윤의 질문에 눈을 이리 저리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귀여운 애완동물, 그 러니까… 강아지 같은 이미지였다. 시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몰래 웃었다. "응. 명 시 윤." 그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 음한 사라는 시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나저나 이리 좀 더 가까이 붙어. 어깨가 다 젖잖아." 의식적으로 몸을 피하고 있어서인지 몸이 절반쯤 우산 밖 으로 나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젖어 있던 건데. 게다가 아 까 우산을 떨어뜨린 채로 있어서 사라의 옷도 많이 젖어 있 었다. "괜찮…" 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가 그의 팔을 매달리듯 안았다. 조금 더 몸이 밀착되자 시윤도 우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무슨 관계였던 거지?' 시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2년 만에 재회라고 했으니, 일단 애인 사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 사이라고 하 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사라는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워서 시윤의 시선은 피했다- 말했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팔짱 끼는 것도."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전해지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됐다. 편안하다. '지금까지 느꼈던… 찾아야 한다는 그 기분은 사라를 위한 것이었나?' 모르겠다.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느낌만이 가슴속에서 맴돌았고, 사라를 만난 지금 많이 안정됐다. 조금 바보 같 은 생각이었지만 나름대로 '필연'이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재밌었다. 필요할 때 나타난 작은 행운이었다. "시윤이가 우산 들래? 나 팔 아파." 듣고 보니 사라는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우산을 드는 아주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윤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 며 우산을 받아들었다. "후아, 키 많이 컸네?" 시윤이 우산을 들자 사라는 그제야 그의 키를 보며 놀랐 다. 아무 기억이 없는 시윤은 그저 볼만 긁적거렸다. "내가?" "응. 2년 만에 만나는 거라서 그런지 몰라도 엄청 커졌잖 아. 지금은 180도 넘겠는걸?" 확실히 작은 키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라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시윤의 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2년 전과 차이가 없었다. "쿠쿡. 게다가 흰색으로 염색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변화 야."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하얀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그녀가 웃었다. 그리곤 신기해 보이는지 한 가닥 잡아 뽑기까지 했 다. "희한하다.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얗지?" 벌컥 화를 내려던 시윤은 사라의 중얼거림에 자기도 모르 게 신음을 흘렸다. 탈색이나 염색을 한 게 아니라면, 그 나 이에 벌써 백발일 리 없었다. 하지만 머리는 뿌리 끝까지 하얀색이었고 이건 자연적인 색상임을 뜻한다. "앗, 다 왔다." 뭐라고 더 말하려던 그녀는 집에 다 왔다며 열쇠를 꺼내들 었다. * * "어서 들어와." 사라는 거실을 가로질러서 화장실로 종종걸음으로 사라졌 다. 시윤은 곤란한 얼굴로 현관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이렇게 젖어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란 말인가. "멍! 멍!" 개 짖는 소리. 시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내를 둘러봤 다. 소파 옆에서 뭔가 꼬물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왔다. 그것도 뒷발 앞발을 한 쌍씩 번갈아 가며 뛰는 토끼 특유의 그것이 아니라, 개처럼 네 발로 리듬을 타며 뛰어왔다. "…멍?" "멍멍!" 틀림없다. 저건 개다! 길다란 두 귀를 쫑긋거리고 있지만, 빨간 눈동자를 빛내고 있지만 저건 개다. 시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 었다. 갑자기 자리에 멈춘 그것-차마 개라고도 토끼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은 뒷발로 목을 긁어댔다. "끼잉, 끼잉." "우리 피피 귀엽지?"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사라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생긋 웃었다. "…예뻐." 시윤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라는 고개를 한번 갸 웃하더니 개인지 토끼인지 모를 동물의 배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이 녀석이?" 그녀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방금 씻고 나온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색기까지 돌았다. 시윤은 고개를 가로 저었 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앙 다물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내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욕가 운을 걸치고 남자와 단 둘이 있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그녀 의 얼굴은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시윤은 솔직하게 대답하기 로 했다. "응, 아주 예뻐. 내가 이런 미인을 알았나 싶을 정도로." 예쁘다는 말을 싫어할 여자는 없다. 게다가 그것이 진심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사라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장난치는 건 싫어!> 타앙! 그녀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하나는 귀를 통해 서 들려오는 목소리였고, 하나는 머릿속에서 직접 말하는 듯한 목소리. 옛날… 이런 적이 있었던가? 시윤은 떨리는 손을 사라의 뺨에 가져갔다. 그녀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시윤의 손은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 그만!"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놀리지 말고!> 사라의 눈이 커지더니 갑자기 그녀는 시윤의 손을 쳐냈다. 그 바람에 피피는 바닥에 떨어졌고, 낑낑거리면서 거실 구 석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시윤에게는 또 다시 두 가지 음성 이 겹쳐서 들려왔다. "미, 미안해." 사실 시윤은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그저 강아지를 만지는 기분으로 얼굴을 쓰다듬었을 뿐이지만 그녀는 가쁜 숨을 몰 아쉬며 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라가 사과까지 하니 시 윤은 무안해질 따름이었다. "목욕…물 받아놨으니까 쓰도록 해.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 사라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느새 시윤에게서 거리를 두어 뒤로 물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굉 장히 경계하는 듯 했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깊게 생각해보려 했지만 역시 머리가 아파진 시윤은 사라 가 준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제거하고 욕실로 향했다. 친구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껄끄럽긴 했지만, 달리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집에 이렇게 데려오는 것을 봐서는 아 무래도 집안 식구들이 늦게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럼 고맙게 쓰도록 할게." 시윤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사라는 그런 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피를 불러서 품에 안았 다. 그녀는 애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도 기억하지? 시윤이." 피피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잠시 갸르릉거렸다. 사라는 가 만히 피피의 귀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렇게 많이 변했는데도 시윤이 맞지? 맞는 거지?" 피피가 다시 한번 대답하듯 짖었다. 토끼는 토끼이되 짖는 토끼였다. "얼굴도 변했고, 키도 커졌어. 그런데 난 알아봤다? 신기 하지?" 혼잣말이었다. 과거를 추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쓸쓸함 이 가득 묻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간 사라는 책상 위에 올 려놓은 작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라보다 약간 클 뿐, 비 교적 작은 키의 시윤이 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어. 비록 외모는 완전히 바뀌었 지만 시윤이라는 걸……." 사진 속의 그와는 다른, 새하얀 피부에 섬뜩하리 만치 붉 은 눈동자, 그리고 크고 잘 짜인 몸매. 어딘지 모르게 자신 만만한 분위기는 예전의 시윤과 전혀 달랐다. 그런데도 그 는 시윤이라는 사실이 사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후후, 시윤이를 버린 지 2년이나 지났는데 또 이렇게 만 나게 되다니. 정말 바보 같아." 누가 뭐래도 저 사람은 명시윤이었다. 그리고 사라는 2년 전 그를 버렸었다. 오랜만에 만난 시윤은 거짓말 같이 모든 걸 잊고 있었다.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하아, 운명이란… 정말 묘해." 밥이나 해주고, 옷이나 제대로 입혀서 집에 바래다 줘야겠 다. 우린 다시 만나서는 안 되는 사이였으니까. 이렇게 계 속 같이 있으면 정말로 힘들어지니까. 사라는 그렇게 생각 하며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나 잠깐 슈퍼에 좀 다녀올게.' 난 나쁜 여자니까……. 욕실에 들어간 시윤은 젖은 옷들을 벗어서 한쪽 구석에 가 지런히 쌓아두었다. 시윤은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를 물 끄러미 바라보다가 김이 서린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기억에 없는 자신의 얼굴을……. "명시윤이란 말이지……." 낯선 이름, 익숙하지 않은 발음. 아마도 기억을 잃었기 때 문에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시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희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았다. "붉은… 눈?" 그랬다. 거울에 비친 시윤의 눈에는 평범한 흑갈색이 아니 라 적색의 루비 같은 눈동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남자치고 는 꽤 긴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얼굴에 착 달라붙어 눈 을 살짝 가렸다. 시윤이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 하얗고 창백한 피부와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해. 시윤은 이를 꽉 깨물었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 스러운, 주위와 동화되지 않고 유독 자신의 존재를 발하려 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더듬다가 한숨을 내뱉고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으으음." 발의 상처가 쓰려왔다. 뜨거운 물에 들어갔더니 찢어진 부 위가 벌어진 모양이다. 시윤은 가볍게 신음을 흘리며 그것 을 참아냈다. 너무나 피로한 지금은 상처의 고통보다도 잠 깐의 휴식이 절실했다. 과연 노곤한 몸이 따스한 물에 잠기 자 졸음이 밀려왔고 그는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피곤하다. 수마가 의식을 덮쳐왔다. * * 어둠. 그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여긴 어디지?' 존재감 없는 공간, 그러니까 이곳은……. '사슬?' 절그럭. 사슬이 발에 밟혔다. 붉디붉은 피를 흠뻑 머금고 있는 사슬은 산산이 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 다. '…모르겠어.' 시윤은 사슬조각 하나를 집어서 자세히 살폈다. 섬뜩하게 차가운 금속에 끈적거리는 피가 묻어있어서 매우 묘한 느낌 이었다. 매우 무겁기도 했다. '…사슬인가.' 쇠 조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아니, 기분 탓이다. 실제로 그것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시윤은 이를 악물고 사슬조각을 던져버리 고는 눈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 다. 몽환적인 공간. 아무런 냄새가 없으며 그 어떤 느낌도 없 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피에 젖은 사슬조각들과 유리같 이 투명한 '부서진 벽'이었다. '뭘까…….' 사슬, 벽. 피에 젖어 조각난 사슬, 거의 형체를 잃어버린 벽. 사슬은 가두기 위한 것, 벽은 막기 위한 것. <계약을… 잊지마> 그리고 공간은 깨어졌다. * * "푸핫!" 시윤은 물 위로 고개를 내밀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잠 든 사이에 욕조 안으로 머리가 들어가서 입안에 물이 잔뜩 들어와 있었다. 몸의 상태를 봐서, 또 미지근해진 물을 봐 서는 거의 한시간은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없다. 기억상실증도 억울한데 꿈까지 기억 못하니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시윤이었다. 축 늘어진 몸으로 욕조 에서 빠져나온 시윤은 바디샴푸를 수건에 받아서 몸에 문질 렀다. 시원한 민트향의 하얀 거품이 역시 창백할 정도로 하 얀 시윤의 몸을 덮었다. "하아, 모르겠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시윤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샤워가 끝나자 시윤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욕실 한구석을 뒹굴고 있는 젖어있는 옷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뭘 입어야 한단 말인가. "어이, 사라!" 아무래도 놀리기 좋은 이름이야. 사라를 소리 높여 부른 시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약간이 시간이 흘렀 지만 욕실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윤은 볼을 긁 적이고는 -기억에는 없지만 습관이다- 다시 사라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성을 모르잖아." 사라의 성을 모르는 시윤으로서는 '사라'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킥킥 웃으며 욕실에서 알 몸으로 멀뚱히 대답을 기다리던 시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저걸 다시 입어?" 시윤은 비에 푹 젖어있는 옷을 바라보며 진저리를 쳤다. 결국 커다란 목욕수건을 몸에 두른 그는 문을 살짝 열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문 앞에는 '나 잠깐 슈퍼 갔다 올게.'라 는 메모와 함께 실내에서 입기 좋은 면바지와 면티가 가지 런히 놓여있었다. 시윤은 씨익 웃으며 옷을 입기 위해 수건 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세심하다.' 티셔츠를 입은 시윤은 굳어버렸다. 과연 세심한 성격의 사 라였다. 티셔츠 밑에는 속옷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아버지 것인 듯 했다. 왠지 부끄러워진 시 윤은 후다닥 옷을 입어버리고 거실로 뛰어갔다. 때마침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멍! 멍!" 발톱으로 박박 문을 긁는 소리와 함께, 피피가 짖었다. 아 무래도 방에 갇혀 있다가 시윤의 소리를 듣고는 반응하는 듯 했다. 시윤은 집안에 혼자 있는 것도 심심하다고 생각하 던 차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방문을 열었다. 피피가 쪼 르르 방을 빠져나왔다. "너 혹시 개냐?" 시윤은 고민하다가 토끼에게 말했다. 멍멍 짖는 다는 것, 또 지금처럼 헥헥거리며 털 뭉치에 가까운 꼬리를 흔드는 행동은 개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멍! 멍!" …이건 누가 뭐래도 개다. 시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피피를 집어들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생긴 건 토끼인데, 하는 짓은 개다. 시윤은 한숨을 내쉬며 피피가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작고 귀여운 인형들과 큼지막한 곰 인형이 책상 위에 가지 런히 놓여 있었다. 달콤한 오렌지 향이 코를 찔렀다. "…어라?"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액자, 거기에는 사라와 함께 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시윤이 와 함께-♡'라고 작게 적혀 있었다. 정말로 행복한 표정으 로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였 다. 마지막으로 시윤을 만난 것이 2년 전이라고 했으니 저 사진은 최소한 지금보다 두 살은 어렸을 때의 것이리라. "이건 내가 아닌데…" 시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 속의 인물은 자신과는 전 혀 다르게 생겼다. 키도 작았고 피부색도 창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눈동자가 붉은 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 오히려 사라보다 그 남자가 더욱 친 근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처럼……. 그 또한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를 배어 물었다. "이게 나, 명시윤이란 말이지." 수긍하기로 했다. 이미 사실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머릿속 에 각인되고 있었으니까. "시윤아, 나 왔어!" 사라가 거실에서 그를 불렀다. 시윤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 의 방에서 튀어나갔고,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 라보았다. "아니, 숙녀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도 되는 거야?" "아, 이 녀석이 짖고 있어서, 데리러 들어갔지." 시윤은 품에 안고 있던 토끼를 내밀며 말했다. 사라는 싱 긋 웃으며 피피를 받아 들고는 그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톡톡 쳤다. "조용히 하고 있어야지. 너 때문에 누님 방에 불청객이 들 어왔잖니." 숫제 시윤보고 들으라는 소리였다. 사라는 시윤이 우물쭈 물하자 킥킥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안 에는 청바지와 하얀 면티, 그리고 스웨터가 들어 있었다. 모두 방금 산 새것이었고, 그렇게 저렴한 메이커도 아니었 다. "이…이게 뭐야?" "입어봐. 옷 고르는데 시간 많이 걸렸어. 네 옷 다 젖었잖 아" 다 젖었을 뿐 아니라, 이런 겨울에 입는다면 얼어죽기 딱 좋은 옷이었다. 사라는 연신 웃으며 어서 입어보라고 재촉 했고, 놀란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키가 많이 커서 사이즈는 대충 눈대중으로 맞췄어. 혹시 클지도 모르겠다. 아, 꽤 비싸게 줬으니까 나중에 꼭 갚 아." 나중에 갚으라는 말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한 말이라 는 것을 안 시윤은 고개를 푹 떨궜다. 아마 돈을 갚는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고마워." 이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옷은 몸에 딱 맞았다. 사라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시윤 은 그녀의 안목에 감탄했다. 검은색 스웨터가 그의 하얀 얼 굴과 잘 어울렸고, 청바지는 움직이기 굉장히 편했다. 옷을 입고 방에서 시윤이 나오자 사라는 손뼉을 쳤다. "와아, 대단해. 잘 어울려. 모델해도 되겠는걸?" 실제로 지금의 시윤이라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으니까. 하지만 사라는 외모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시윤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자부심 따위는 없었다. "고마워. 정말……." "후후, 이 기회에 시윤이랑 다시 재결합할까?" 사라는 농담하듯 말했고, 시윤은 멍청한 얼굴이 되 버렸 다. 기억상실에 따른 압박감, 그리고 그녀의 친절함이 동시 에 섞여서 시윤을 혼란스럽게 했다. 좋은 사람, 편히 기대 고 쉴 수 있는 사람……. "분명 기억은 없지만… 네가 좋아질 것 같은데 어쩌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시윤이 말했다. 얼굴이 붉 게 상기되었으리라 생각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라의 커다란 눈망울에 이채가 어렸고, 이내 그녀는 귀엽게 웃으 며 혀를 빼물었다. "내가?" 사라는 이어서 하려던 뒷말을 삼키고 말았다. '널 버리고 도망가버린 내가?' 시윤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 하나 제대로 못해서 쩔쩔 매던 2년 전에 비해서 훨씬 대담해진 성격이었다. "…진심이야?" 과거에도 들었던 목소리, 같은 질문. 시윤은 머릿속을 찌 르는 고통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응, 진심이야." …어쩜 넌 2년 전이랑 똑같구나.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전 혀 변하지 않았어. 이쯤에서 과거의 꿈은 접어야 하지. 자 꾸 이러면 널 놔줄 수 없잖아. 사라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애써 밝게 보 이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한숨을 폭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첫째로 넌 아주아주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 소문으로 내 가 들었으니까, 기억상실을 핑계로 바람 필 생각 마. 둘째 로 우리 관계는 2년 전에 끝났어. 이제 친구로 지내기로 약 속했었지."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북받 치는 슬픔을 꾹 누르며 시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러니까… 우린 친구야, 친구."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물기가 서린 것을 본 시윤은 아무 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보고싶었어. 정말로 보고싶었어. 죽고싶을 만큼 보고싶었 어.' 말할 수 없었다. 정말로 하고싶었던 말을 사라는 하지 못 했다. 2년 전 그를 잔인하게 버렸으니까, 비록 시윤에게 기 억이 없다 해도 그건 사실이니까. 그 이유야 어찌됐든 사라 는 시윤을 버렸었다. "하지만 이정도는 괜찮겠지." 사라는 조심스럽게 시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소식을 들었었지.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녀에게 버림받은 후, 시윤은 미친 듯이 애정을 갈구했었 다. 그리고 점점 더 비참해졌고, 점점 더 약해져갔다. "저기… 시윤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시윤에게 말했다. "응?" "나 좀 잠깐만… 안아줄래?" 시윤은 말 없이 두 팔로 그녀를 마주 안았다. 따뜻한 체온 이 전달되었고, 사라는 시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울 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보고 싶었어." 그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 있는 거야." 수연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어둠이 조금씩 가시고 아침이 된 것 같았지만 비가 오고 있어서 하늘은 회 색 빛이었다. 벌써 몇 시간동안 뛰어다니는지 다리가 경직 돼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려왔다. "왜 없어. 왜……." 오랜 시간을 빗속에서 뛰어다닌 그녀에게 우산은 그다지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무겁기만 하고 비를 제대로 막 아주지도 못한다. 수연은 우산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떨어지 는 빗방울들을 느꼈다. 잃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를 잃었다. 너무 춥고 피곤해서 시야가 흔들렸고 정신은 몽롱했다. 여 자의 몸으로 빗속에서 다섯시간 이상이나 누군가를 찾아 헤 맨다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물을 먹은 코트가 엄청난 무 게로 그녀를 짓눌렀다. "시윤아……." '모든 걸 다 줬는데도 부족할까. 그것만으로 부족해서 떠 난 거니?' 수연은 온 동네를 다 뒤지는 것도 모자라서 시윤이 원래 살았던 곳까지 뛰어왔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탱하는 것이 부서졌다. 체력은 바닥났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언제 어디서 시윤을 찾게 될지 모르니까……. "어디야, 어디 있는 거야." 겨울비는 잔혹하게 수연의 체온을 앗아갔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몸이 이제는 오기 하나로 움직였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속이 쓰렸고, 머리가 아팠다. 결 국 견디지 못하고 몸이 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긴…?"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건가. 수연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한 건물을 응시했다. '처음 만난 곳이 저기였지?' 카페의 테이블에서 그는 어색한 웃음을 띄우고 앉아 있었 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에 띄는지……. '여자는 독이다'라 면서 자신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던 시윤, 왜 그렇게 인상이 깊었는지. '별로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정말.' 수연은 웃었다. 회상하니 약간이나마 웃음이 나왔다. '놀리는 거라면 그만둬. 라고 했던가?' 설령 놀리는 것이라도 자신에게 그렇게 대했던 남자는 시 윤이 처음이었다. 놀리면 놀리는 대로 남자들은 수연의 기 분을 맞춰주려고 했었다. 수연은 기침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저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따 뜻해지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처음 만난 그 날 을 다시 더듬어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칵테일 바에 갔지." 그녀는 소리내어 말했다. 스스로에게 더욱 각인시키고 싶 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천천히 그 때의 칵테일 바로 걸음 을 옮겼다.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고, 감각이 흐려졌다. "내가 시윤이를 놀리려고 성인용 칵테일을 시켰고…" 즐거웠다. 처음으로 '순수하게' 즐거웠다. "사귀자고 했지. 시윤이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 감히 또 누가 그런 소리를 할 것인가. 이건 자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수연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내면 냉큼 고개를 끄 덕일 남자가 몇 트럭은 있었다. 팬클럽이랍시고 따라다니는 녀석들만 합쳐도 꽤 되니까. 수연은 간간이 기침소리를 내 며 걸었다. 그 때, 시윤이 갑자기 바를 뛰쳐나와 달려갔던 길을. "…그리고 약속해달라고 했어." <약속해 줄래? 거짓이 아니라고> 그 때의 그 장소, 파파이스 앞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이 된 이곳. 그 때는 밤이었고 어두웠지만 지금은 새벽이고 비 가 온다. 화장이 지워진 수연의 얼굴에 다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쓰러졌다. 비가 고인 차가운 돌 바닥이었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잠 이 온다. -쏴아아아아 비가 다시 거세졌다. 쓰러진 그녀의 몸을 빗방울들이 세차 게 두드렸다. 몇 대의 차가 지나갔지만 길가에 쓰러져있는 그녀를 보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상관하기 귀찮은 건지 멈 추질 않았다. 한 시간 정도가 더 흘렀을 때,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지나 가다가 다시 후진하여 돌아왔다. 벤츠의 문이 열렸고, 한 여자가 뛰어나와서 쓰러져있는 수연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회색 정장에 흙탕물이 튀어서 더러워졌다. "이봐! 정신차려!" 크리스였다. 그녀는 넘어져있는 수연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신음을 흘렸다. "…휘수연."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이미 느끼고 있었다. 오로지 시윤과 수연에게만 느껴지는 공명은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했다. "아가씨?" 그녀를 좇아 차에서 내린 김기사는 크리스에게 우산을 받 쳐주며 말했다. 크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묵묵히 수연 을 바라보았다. 손을 내뻗어서 수연의 이마에 짚었다. -쩌엉! "아악!" 크리스는 비명을 질렀다. 육체의 접촉, 진정한 의미의 공명! 크리스와 수연이 접촉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이것은 ……의 증거> 절그럭. 절그럭.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이 엄습한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고통은 없으리, 아픔은 없 으리. <난 ……를 줬어> 지워진 기억, 되찾아야 하는 과거가 그 너머에 있다. 크리 스의 앙 다물린 입술 사이로 피가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영혼에 직접 가해지는 고통이 그녀에게 포기하라고 소리쳤 다. <천년이 지나도……> 포기 절대로 못해! 이번만은 알아내고 말겠어. 절그럭. 절그럭. 소리가 점점 더 거친다. 사슬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크리 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수연과 크리스로부터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커헉." 크리스는 검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 가 뒤틀리는 아픔, 내부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괴로움. 쓰러 진 수연의 입가에도 가늘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격이 있는 자, 때가 되었어> -타앙! 한껏 당겨진 사슬 중 하나가 끊겨져 나갔다. 크리스를 구 속하고 있던 것들 중 하나가 사라졌다. <기억을 돌려줄게> 크리스의 머릿속으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층 헐거워진 구속, 그리고 밀려드는 기억……. "이, 이건 말도 안 돼!" 고통이 약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두 번 째 사슬이 끊어졌다. 크리스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력을 돌려줄게> 둘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은 크리스에게 모조리 흡수되었 다. 원래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고통과 구속력이 더 약해졌다. 그리고 크리스는 과거를 되찾았다. <육신을 돌려줄게> 세 번째 사슬이 끊어졌다. 그로써 크리스는 모든 억압된 기운을 떨쳐 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은빛과 금빛이 은은 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아, 안 돼!" 크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강제적으로 진행을 멈췄다. 이것 만은 절대로 안 돼! 그리고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멈춰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공간 속 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아가씨?" 김기사는 재차 그녀를 불렀다. 멈춰있던 시간에 그는 포함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그녀의 느낌은 그에게도 영향을 끼 쳤는지 그는 자신의 눈을 비비고 있었다. "…차에 태워요. 병원에 연락해서 특실 준비하고요." 크리스는 김기사에게 보이지 않도록 피를 닦아내며 말했 다. 김기사가 휘수연을 들쳐 메고 벤츠에 태우자, 크리스는 따라 타며 조용히 읊조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휘수연의 이마에 물을 훔쳐 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원했던 것이 겨우 이거 라니… 너무 잔인해. 크리스는 손에 힘을 집중 시켰다. 아 직 익숙하지도 않고, 모든 힘이 깨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가능하리라. [아.프.지.마] 간단한 명령, 그리고 그것은 노란 금빛과 새하얀 은빛으로 뒤섞여서 크리스의 손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은은히 빛을 발하는 손으로 수연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은… 편해지겠지." 과연 거칠었던 수연의 호흡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이것이 그녀가 새로 얻은 능력의 일부였다. "…운명은 너무 가혹하구나." 멈춰있던 천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진은 천사들의 피를 짜내서 성벽을 칠했다는 얘기가 꽤나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피 냄새가 났 다. 온통 검붉은 색을 띄고 있는 성에서 아진이 어두운 표 정으로 걸어나왔다. 이곳은 왕이 거하는 곳, 마계의 중심. "후우, 하필이면……." 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치렁치렁하게 기른 긴 머리카락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췄다. 아진은 눈을 가리는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기면서 성문을 경비 하던 하급의 타천사 카루를 불렀다. "카엘은?" "예, 옛! 일족의 보호자, 영광스런 래픽스 샤딘의 첫 번째 검 아뮤릿 지나이온께 인사드립니다." 지랄. 아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것을 참으며 다시 말 했다. 한껏 존경의 빛을 담은 눈도, 자신에게 보내는 경의 의 인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엘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제야 아진이 심각할 정도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급 타천사는 예를 취하느라 가슴 앞으로 들었던 검을 거 둬들이며 대답했다. "카엘님이라면 평소와 같이 폭풍의 탑에 계실텐데요." 항상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던 아진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 져 있었다. 그와 꽤 여러 번 마주친 카루는 속으로 놀라움 을 삼켰다. 도대체 왕께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저토록 기분 이 나쁜 것일까. 카루는 고민했다. "…그렇겠군. 제기랄." 아진은 답답한지 와이셔츠의 단추를 몇 개 더 풀었고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인간의 옷을 즐겨 입는 그는 항상 아슬아 슬한 차림으로 퇴폐적인 기운을 뿌리고 다녔다. 인간과는 달리 남색(男色)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악마들에 게 아진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 다. "날개." 부우웅. 아진의 등에 두 쌍의 깨끗한 검은 날개가 나타났 다. 그는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날개를 몸 안에 갈 무리 해두었다. 인간의 옷을 즐겨 입고 검은색의 날개를 감 춘 그의 모습은, 인간에 가까웠다. 취향인 것이다. 진지한 구석이 없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며 인간의 삶을 즐기는 자. 그래서 그는 래픽스 샤딘의 수장이면서도 '마계의 이단아' 라고 불렸다. "아, 혹시 끈 가진 것 있나?" 날개를 가볍게 저어서 허공에 몸을 띄우던 아진은 갑자기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카루는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지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성안에 연락해서 가져오게 할까요?" "아니, 됐다." 아진은 손을 휘휘 젓더니 날개를 강하게 움직여서 순식간 에 하늘로 사라져갔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그 위 에 도사리고 있는 저주받은 생물들이 내려다 보였다. 가속, 또 가속. 파라락,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미 친 듯이 날아갔다.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고, 폭풍의 탑 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심해졌다. "…제기랄!" 오늘따라 머리카락이 너무 거슬렸다. 끈으로 묶어볼까 생 각했지만 결국 관뒀다. 역시 '과거'에 집착하는 나쁜 버릇 이리라. 잘라버릴까 생각도 해본 아진이지만 그것도 불가능 하다. 아니, 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면이 깨졌다. "후우, 저기로군." 아진은 미소지었다. 갈라진 표면을 메우고, 흘러나온 내면 을 다시 밀어 넣는다. 분노와 회한은 사라지고 특유의 퇴폐 적이고 장난기 어린 분위기가 그를 감쌌다. 이것은 능력이 다. 극도의 마인드컨트롤로 스스로를 감추는 것. …이것마 저 없다면 견디지 못할 테니까. 쿠우우우우! 폭풍의 탑은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미친 듯이 회전하는 회오리가 땅과 하늘에 못 박힌 채 서있는 것. 집채만한 바 위라 하더라도 거기에 휩쓸리면 그대로 가루가 될 것 같았 다. 회색의 굵직한 바람들은 서로를 휘감으며 원기둥을 형 성했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하얗고 긴 기둥이 있었다. "키킥. 손님이 왔는데도 모르는군." 뭐가 즐거운지 킥킥거리던 아진은 날개 두 장을 더 꺼냈 다. 평소라면 순수하게 기운만을 퍼뜨려서 카엘에게 신호를 보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쿠우우우우! 회오리는 경고한다. 다가오지 말라고. 인위적인 바람, 카 엘의 힘으로 지탱되는 것이다. 아진은 입술을 살짝 핥고는 날개를 뒤로 당겼다. 여섯 장의 날개가 펄럭이는 것과 동시 에 그는 바람의 기둥을 향해 날아들었다. 쿠콰콰콰콰!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서로 엇갈리며 비틀린 바람이 그 의 몸을 잡아뜯으려고 했기에 아진은 이를 악물며 그것들을 꿰뚫었다. 보통의 바람이 아닌 카엘의 힘을 싣고 있는 결계 (結界)는 아진으로서도 온힘을 다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자학이다. 그랬다. 이것은 자학이었다. 아진은 바람의 기둥을 뚫기 위한 최소한의 힘만을 꺼낸 채, 고통받고 있었다. 입에는 여전히 특유의 비릿한 웃음이 걸려있었지만 몸에는 상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베었다. 하지만 아프진 않았다. "하하하!" 자학이다. 볼품 없는 자학이다. * * "어때요?" 크리스였다. 딱딱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정장이 아니라 간 편한 캐주얼의 옷을 입고 있었다. 변한 모습, 오빠에게 모 든 것을 넘긴 그녀는 확실히 변했다. 수연의 상태를 살피던 의사가 청진기를 귀에서 빼며 말했다. "폐렴입니다. 입원해야겠군요." 딱딱하고 사무적인 어투였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의사의 그런 말투는 버릇인 것 같았다. 크리스는 한숨을 쉬고 고개 를 끄덕였다. 수연의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 입히 고 나자 피곤했다. "알았어요. 나가봐." 귀찮다. 아니, 피곤하다.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크리 스는 피식 웃으며 침대 반대편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았다. 푹신하고 커다란 고급이었다. 이 병원도 역시 아명에 속해 있는 것이었고, 그녀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게 없었다. 류 민수가 이번에 새로 병합한 것 중에 하나였다. "…시윤…아." 수연이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 시에 크리스의 미소가 씻겨지듯 사라졌다. "…어디…갔어." 크리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특실인 병실 안에는 그녀와 수연 단 둘이 있었다. 특별히 연락해서 데려가게 할 사람도 없었다. 보호자라는 사람들은 이혼을 해서 외국으로 가버렸 고 그녀는 혼자다. 시윤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지 금은 혼수상태. "할 수 없지." 그녀는 체념했다. "할 수 없어." 환자복을 입고 있는 수연이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크리스 는 수연의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이곳엔 생활의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있었다. 욕실도 있고 부엌도 있으며 냉장고에 TV까지도. "명시윤을… 이리로 데리고 와줘요." 수화기에 대고 그녀는 신음하듯 말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시윤을 치료한 후에 둘을 만 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빠진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둘은 사랑을 하고, 크리스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운명을 외면하는 짓일까.'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짓눌렀지만 결정적인 선택은 그녀 자신이 했다. 그래서 갈등했다.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고 말았다. "판도라의 상자." 크리스는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되찾은 기억, 과거의 힘,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 을……. 이 힘이라면 분명 시윤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 다. 하지만 더 슬픈 결과가 나온다. 그녀는 기분을 전환해 보려고 부엌에서 헤이즐넛 커피 한 잔을 가져왔다. 따뜻한 커피를 입안에 머금고 향을 즐겼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크리스입니다." 사무적인 어투였다. 아직도 이 버릇은 없어지질 않는다.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순간 수화기 반대편 에서는 생각도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없습니다.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뭐…라고요?" 크리스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든 연락망을 동원해서 시윤을 찾았을 것이다. 수연이 살던 집도, 평소 생활하던 모든 공간도. 하 지만 사라졌다는 것은……. [힘.방.출] 불안정한 힘. 크리스는 양손을 모아서 흰 빛을 만들어냈 다. 목소리가 무미건조해지고 힘이 실렸다. 이것은 마법의 언어. 힘의 언어였다. [시.윤.을.찾.아] 빛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분해되고 분해되어 흰 가루 같 은 모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시윤의 모습 을, 그의 느낌을 찾아내려고 순식간에 퍼져갔다. '불안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힘으로 이 정도의 일도 벅찼 다. 하지만 틀릴 리는 없었다. 시윤의 운명은 크리스와 연 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되 시윤이라면 못 찾을 리가 없다. '없어!' 그의 영혼의 색깔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수한 그 냄새가, 상처받아서 슬퍼하는 그 영혼이… 사라졌다. '숨기고 있는 거야.' 크리스는 눈을 감은 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설마 각성을?' 운명은 멋대로 흘러간다. 크리스는 눈을 떠서 빛 무리들을 없앴다. 능력이 소용없다면 현실적인 힘을 쓰는 수밖에. 그 녀는 수화기를 들고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명시윤을 찾아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며칠이 걸리 든 간에." 그녀는 아명의 전(前) 회장이었던 것이다. "시윤이 불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아." '비록 내가 불행해 지더라도.' 크리스는 말했다. 혼잣말이었다. "그것이 비록 내가 상처받는 일이어도……." '그것이 모두를 아프게 하는 일이어도.' 눈물이 흘렀다. 침대 위에 누운 채 기침을 하고 있는 수연 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크리스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수 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얗 고 곱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고 창백해져 있었다. "…불쌍한 것." 크리스는 수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불쌍한 여자." 어쩌면 자신을 향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차갑고 매끄러운 입술과 크리스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시윤은 가만히 사라의 등을 도 닥거렸다. 방금 갈아입은 그의 스웨터가 눈물로 조금씩 젖 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도 중간 중간 에 '보고 싶었어. 정말 미안해.' 라는 말을 흘렸다. "괜찮아. …여기 있어." 시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여기 있다. 그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닌 네 앞에 있다. 정신이 나갈 것처럼 혼란스 러웠지만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이윽고 사라의 울음이 완 전히 그쳤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시윤의 품안에 안겨 있었 다. "예전의 우리는 무슨 사이였…." 시윤이 문득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 라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손에 은은한 오렌지 향 기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시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말하지 마. 질문하지도 마." 그리고 손을 떼어냈다. 사라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던 것 때문인지 시윤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백지처럼 텅 빈 머 릿속, 지금 과거에 대한 실마리라고는 눈앞에 있는 사라 한 명뿐이었다. "저기, 배 안고파? 아침 안 먹었지?" 사라는 시윤의 가슴을 살짝 밀어서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 오며 말했다. 금방 표정이 바뀌고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 그녀의 장점이었다.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식욕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언제부 터 식사를 안 했는지도 모른다. 기억은 아침부터 이어져 있 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일단 집에 연락부터 하자." "집에?" "그래, 너희 집에 연락해야지. 2년 전이랑 같은 곳에서 살 고 있는 거겠지?" 물론 시윤이 기억하지 못했다. 사라는 생글거리며 무선 전 화기를 들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앉아, 앉아." 피피가 사라의 무릎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사라는 피피의 길다란 두 귀를 쓰다듬어 주고는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년 전이라고 했음에도 시윤의 집 전 화번호를 완전히 외우고 있는 듯 했다. 감추고 있다. 시윤은 알고 싶었다. 지금 집이야 어찌됐든 2년 만에 만났 다는 사라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울면서 안길 정도로 깊었던 사이라면, 그런데도 2년 동안이나 헤어 져 있었다면. 그리고 '친구'로 지내기로 약속했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시윤은 고민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딸깍.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어라?" 그녀는 전화를 내려놓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다시 전화를 집어든다. 그리고 이번엔 정확하고 세심하게 꾹꾹 번호를 눌렀다. 사라는 잠시 신호가 가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듯 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무선전화기를 소파에 던 져버렸다. "너희 집 전화번호 바뀌었어?" 시윤은 인상을 썼다. 모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다 니. "뭐가 잘못됐어?" "없는 전화번호라는데. 이상하네……." "혹시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닐까?" 사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희 집 전화번호가 내 이메일 주소였단 말이야. 틀릴 리가 없어." 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갈수록 과거 이야기가 궁금해졌 다. 이메일 주소까지도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가져다 썼다 는 사라. 그녀는 자신이 한 얘기가 얼마나 큰 의심을 시윤 에게 주었는지 몰랐다. "후우, 내가 데려다 줄게. 너희 집으로 직접 가봐야겠다." 사라가 연두색 더플코트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리고는 잠 시 시윤을 살피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밖에는 추울 텐데……. 아빠 옷이라도 가져다 줄까?" 확실히 시윤은 스웨터 차림이어서 추워 보였다. 하지만 시 윤은 춥지 않다고 대답했다. 폐 끼치기 싫어서이기도 했지 만, 실제로 그렇게 춥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계 이 상의 추위가 아니라면 견딜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둘은 집을 나왔다. 사라는 핑크 색 우산을 시윤에게 들게 하고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밖은 예상대로 비만 아니라면 얼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날씨였지만 시윤은 조금도 떨지 않았다. 오 히려 은은한 열기가 시윤에게서 새어나와서 사라를 따뜻하 게 해줄 정도였다. "정말 안 추워?" "응. 전혀 춥지 않아." <…깨어졌어> <천사의 알이 깨어졌어> <넌 어디에 있니> <넌 어디에 있니> <지금 네가 있는 곳은 어디야> 환청일까. 시윤은 귓가에 들려오는 개성 없는 목소리에 잠 시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환청이다. 몸에서는 온기가 흘러나왔다. 감기 때문에 열이 오르는 것도 아니었 다. 순수하게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이었다. 사라는 큰 눈으로 의아한 빛을 띄우다가, 노출되어서 차가워진 손 으로 시윤의 뺨을 짚었다. "따뜻해. 굉장히……." 시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체념한 듯 가만히 있었 다. 어느 정도 손이 따뜻해지자 사라는 손을 떼고는 생긋 웃었다. "편리하다. 굉장히 따뜻해졌는걸? 꼭 난로 같아." "남자 얼굴을 손으로 잡고 있다니, 무례하다구." 무례하다기 보다는 뭔가 부끄럽다. 시윤이 투덜거리는 소 리를 못들은 척 한 그녀는 지나가는 빈 택시를 세웠다. 그 리고는 되려 큰소리다. "오늘 시윤이 때문에 내가 한달 용돈 다- 써버리겠네. 쳇!" 그녀의 행동은 밝았고,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어색했다. 일 류 연기자가 연기를 하는 듯한 어색함,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 어색한 그런 느낌. 시윤은 사라가 잡은 택시에 우산을 접고 오르면서 생각했다. '무엇이… 진실이지.' <시간이 없어!> 또다시 환청. 강한 인상을 주는 남자의 목소리. 시윤은 사 라의 옆에 앉아서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아 무리 생각해도 들려올 곳은 없었고, 사라나 택시 기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무시했다. 택 시 안은 히터의 뜨거운 바람으로 따뜻했고, 그것과 비례해 서 시윤의 온기가 줄어들었다. 무언가 편리하다. <계약을 잊은 건가? 이건 내 마지막 사념이다!> "계약?" 시윤은 무심결에 그 소리내어 되물었다. 사라가 무슨 소리 냐는 듯 쳐다보았고 시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날 인정하고 날 받아들여! 모든 것을 지워버릴 셈이냐! 거부해서 충돌한다면 끝장이야!> "…인정?" 이번에는 사라가 듣지 못했다. 그 목소리는 이미 천둥소리 처럼 커져 있었다. 시윤은 귀를 막아보았지만 여전히 들렸 다. 차라리 이것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기억의 실마리는 되 지 않을까 하며 시윤은 포기하고 말았다. <기억을 받아들여라. 그것이 아무리 가혹한 것이라고 할지 라도 너의 운명이다. 너의 것이다. 시간이, 시간이 없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가 인정하지 않아서란 말인 가. 시윤은 이를 악물었다. 기억을 잃은 이유, 의도적으로 자신이 버렸다는 말이었다.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시윤은 명확한 결론을 끌어내기를 원했다. <네가 원하던…….> 목소리는 이윽고 사라졌다. 메아리치듯 작아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시윤은 갑자기 몰려오는 졸음에 저항하지 못하고 잠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 들어갔다.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 는 늪처럼 그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난… 누구……." 잠들어버린 시윤의 머리를 사라가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 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굉장히 감촉이 좋았다. 그 녀가 건드리는 바람에 시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잠결에 머리를 사라의 어깨에 기대었다. "…이렇게 곁에 있는데, 또 헤어져야겠지." 지금까지의 활발함은 어쨌는지 사라에게 남아있는 것이라 고는 애절함뿐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윤의 손을 잡았 다. 전체적으로 매끈하고 예쁜 손, 따뜻하기도 하다. 사라 는 가만히 그의 손을 매만지다가 반지를 보게 되었다. "루비?" 진짜 보석이고 크고 아름답다. 비싼 물건이다. 시윤이 살 물건이 아니었다. 적어도 2년 전에는 그랬고 지금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라는 그 루비반지는 지금 시윤의 여자친구가 줬을 거라고 짐작했다. "후후, 그 여자아이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돈도 많은가 봐?" 그녀는 비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뻐해 줘야 한 다. 그게 속죄의 길이고, 그게 당연한 것이다. 시윤의 눈과 색이 비슷한 붉은 색 루비반지가 예쁘게 빛났다. "넌 기억을 찾으면 나한테 뭐라고 할까? 왜 돌아왔냐고? 아니면 왜 위선자 흉내를 내느냐고?" 눈물이 다시 고인다. 적어도 자신은 눈물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던 사라였지만 오늘만 벌써 몇 번을 울게 되는지 ……. 2년이란 시간은 시윤과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들까지도 바꿔놓았다. 심장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잠들어 있던 시윤은 무의식 중에 왼쪽 가슴을 손으 로 누르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무뚝뚝한 택시 기사의 말에 사라는 택시비를 건네주고는 시윤을 흔들어 깨웠다. 시윤의 하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 들렸고, 그 사이로 몽롱한 눈빛의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여긴 어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 조금은 차갑고 냉정한 느 낌마저 들었다. 확실한 것은 눈동자 깊이 가라앉아 있는 슬 픔의 응어리들… 잠들기 전의 시윤과는 뭔가 달랐다. "너희 집이잖아." "우리 집?" "적어도 2년 전에는 그랬어." 사라는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을 애써 지워버리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회색 구름만이 하늘에 남아있었다. 둘은 택시에서 내려서 물웅덩이를 피하며 아파 트 단지 쪽으로 걸어갔다. "모르겠어." 시윤은 중얼거렸다. 꿈속에 갇힌 것처럼 힘이 없었고 가슴 언저리가 계속해서 아파 왔다. 불쾌함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날씨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윤은 그렇게 중얼거렸 다. 비가 온 후의 거리에는 평소와 다른 우울한 분위기가 감돈다. "…우욱." 앞장서서 시윤을 이끌던 사라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배 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더니 떨 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흰색 알약 두 개를 꺼내서 삼켰다. "어? 사라야, 괜찮아?" 시윤은 깜짝 놀라서 물었지만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감기야, 감기." 감추고 있다. 또 다시 시윤의 마음 한구석에서 의심이 솟아올랐다. 갑자 기 댄 핑계치고는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감기라니……. 여 전히 시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자 사라가 생긋 웃 으며 -하지만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하, 걱정해주는 거야? 가벼운 감기니까 걱정하지마." 설득력 없다. 이를 악물고 이 추운 날씨에 통증 때문에 땀 까지 흘리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 해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 었다. 사라는 다시 시윤의 소매를 잡아끌며 앞장서서 걸었 지만,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병원 가봐야 하지 않겠어?" 시윤은 앞서 가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사라가 얼마나 자 조적인 웃음을 띄우고 있었는지…….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병원에서도 약 먹고 있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 했어." 가슴이 아려왔다. 기도가 막히기라도 했는지 숨쉬기도 곤 란했다. 시윤은 거짓임을 직감했고, 몸이 따라서 반응했다. 지금 사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있을 수밖에.' 걱정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마음의 부담은 덜 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윤은 입을 다물었다. "아, 다 왔다. 여기도 오랜만인걸?" 사라가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꾹 누른 채 말했다. 눈 에 띄지 않도록 등뒤로 돌리면서……. 시윤의 적안(赤眼)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 미친 듯한 광풍을 아진은 어두운 은색으로 빛나는 검으로 갈라버렸다. 바람은 다시 서로 뭉쳐졌고 끊임없이 순환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에게 사각은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집요한 바람은 모든 각도에서 달려들었지만 아진은 대부분을 칼 한 자루로 막아냈다. 은(銀)은 은이되 사악한 달의 힘을 지닌 다크실버의 결정으로 벼려진 아진의 애검 '루오나'는 섬뜩하리 만치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하하! 길을 열어라! 난 영광의 래픽스 샤딘, 로드의 첫 번째 검인 아진이다!" 절규였다. 크가가각! 회색의 바람이 또다시 달려들자 아진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검과 바람이 부딪치자 귀를 찌르는 금속음 이 터져 나왔다. 카엘의 힘이 실린 '결계'의 광풍은 생각보 다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아진은 기뻤다. "더 강하게! 내 목을 노려라! 날 죽여 보라!" 카엘의 힘은 아진에게 비길 바가 못되었다. 아무리 따돌림 받는다 하더라도, 이곳저곳에서 손가락질 받는다 하더라도 아진은 마계 무력의 상징인 래픽스 샤딘의 수장이었다. 즉 왕을 제외한다면 최강의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 재 아진은 본래 힘의 반 정도를 억제한 상태인 데다가 이곳 의 결계(結界)는 역대 왕 중 한 명이 직접 펼친 것이다. 카 엘의 힘이 원동력이지만 결계의 증폭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아진도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학이다. 알려진 바로 아진의 날개 숫자는 모두 아홉, 그 중에서 현 재 펼친 날개는 여섯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루오나의 속 도가 느려졌고, 그 틈을 타서 날카롭게 변한 바람 한줄기가 그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피가 터졌다. "하하하하!" 기쁜 듯이 웃는다. 그리고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아진은 표 정을 싹 지우고는 검을 허리의 검집에 넣어버렸다. 바람은 날카롭게 응집하여 탐욕스럽게 그의 온 몸에 파고들었다. 악마의 피도 붉다. 허벅지가 베어지고, 가슴팍에 길게 상처 가 났다. 볼에 긴 자상이 남았으며, 날개에도 손상을 입었 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계 해제] 대기의 흐름이 멈췄다. 바람이 흩어졌다. 미풍조차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은 정적뿐이었다. 방금 그 목소리는 카엘의 것, 그가 결계를 중단시킨 것이다. "…무슨 짓이지?" 폭풍의 중심에는 지름 50미터 정도의 거대한 탑이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탑의 최상부에는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 고, 카엘이 거기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상처가 가득 한, 피에 절어버린 아진을 바라보면서…….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진이 피 때문에 검붉게 변한 날개를 움직이며 탑 쪽으로 이동했다. 허공으로 핏방울이 꽃잎 같이 흩뿌려졌고, 카엘 은 그것을 보고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드디어 미친 건가? 죽고 싶어서 그래?" 어느새 마족 특유의 자체 치유력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있 었다. 이미 빠져 나가버린 피는 어쩔 수 없지만, 가볍게 피 부만 베인 상처는 이미 깨끗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타락천 사가 불사의 몸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체력이 받침 되지 않 는다면 치유력도 약하기 마련이고, 만일 감당할 수 없는 신 성력에 당한다면 타격 부위는 타버리고 만다. 아진은 탑에 들어서며 말했다. "…왕께서 명을 내리셨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래픽스 샤딘의 여덟 번째 검, 루이시블 크라제토를……." 카엘이 이를 악 물었다. 아진의 이해할 수 없는 자학행위, 그리고 왕의 명령. "반역자로 간주, 처단한다." 아진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눈을 감고 카엘을 외면했 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는 카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맹렬한 증오가 담긴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증거는? 증거가 있나?" "…내 부관이 소멸되었다. 루이시블이 그들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게다가 '돌아온 자'가 사라졌다. 은연 중에 흘러나오던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니, 각성했 을지도 몰라." 부관은 그리 아깝지 않았다. 평소에도 탐탁지 않았던 부 하, 하지만 문제는 루이시블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후우, 탑에서 근신하고 있도록 해. 토돌과 내가 간다." "모두 죽이라고 말씀하시던가?" "…스키엘을 제외한 전원을… 멸하라 하셨다." 카엘은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대기는 그의 마음 을 전해 받았는지 울고 있었다. 바람이 울고 있었다. "그녀를…" 카엘의 입가에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각혈. "고통 없이 끝내다오. 부탁이다. 친구로서 네게 하는 부탁 이다." 오빠로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부탁, 카엘의 몸 이 덜덜 떨렸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타락천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임에도 너무나 깊게 느끼고 있었다. "…걱정 마." 어긋났다. 천년 전부터 어긋나버린 수레바퀴가 이제야 그 결과를 보 이는 것이다. 아진은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듣는 것만으로 청량감을 느끼게 하던 카엘의 목소리가 불쾌할 정 도로 갈라져 있었다. "…걱정 마라." 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쓰러지듯 탑의 창문에 기대어 밖 으로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카엘이 남아있던 탑 안에서 는 슬픈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제길." 날개를 가볍게 흔들어 몸의 균형을 되찾은 아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모든 것이 잘못 되었다. "키야아아아악!" 흑요석을 녹여서 발랐다고 해도 믿을만큼 검은 광택을 내 는 비늘이, 공격적으로 표효하는 데드론을 감싸고 있었다. 거대한 독수리 형태의 마수를 향해서 토돌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비밀을 알려주마! 잘 들어라!" 그의 손에는 녹색 보석이 끝에 달려있는 2미터 길이의 지 팡이가 들려있었고, 등에는 여섯 장의 검은 날개가 멋들어 지게 흔들리고 있었다. 데드론은 토돌이 말한다는 비밀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불줄기가 토돌을 태워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그 를 쫓았다. "내가!" 여섯 장의 날개가 일제히 움직였다. 일신 상의 모든 힘을 끌어올려서 최고의 가속을 한 토돌은 불길을 피해서 데드론 의 등 뒤로 이동했다. "너의!" 마수서열 1위, 데드론. 마계의 짐승 중에서 최강의 공격력 과 지능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데드론이었다. 그 흉폭한 성 질 때문에 결국 래픽스 샤딘에게 내몰려서, 현재 마계에서 도 20마리 정도밖에 남아있질 않았다. "크르르르." 데드론이 급히 목을 돌려 뒤를 경계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 다. 토돌이 지팡이를 한바퀴 회전시키면서 데드론의 머리를 강타했다. "끼에에에엑!" "내가 너의 아버지다!" 어찌나 지팡이의 위력이 강했던지 데드론의 단단한 머리 비늘 사이로 녹색 피가 흘러나왔다. 마수가 날개를 퍼덕이 며 반대편으로 도망갈 자세를 취하자 토돌이 진지한 얼굴로 지팡이에 묻은 체액을 닦아내며 말했다. "털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한 대 더 때린다." 데드론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놀랍게도 마수는 말을 알아들을 만한 지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토돌의 협박에 굴종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인데 조금 더 해야 하지 않겠냐?" 토돌이 다정스레 묻자 마계 최강의 종족이라는 데드론은 두 날개로 머리를 감싸쥔 채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싫어 어어어엇!' "흐응, 적당히 하지 그래?" 색기가 듬뿍 배인 콧소리와 함께 아진이 나타났다. 옷은 이리저리 찢어지고 피가 말라붙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했다. "망가지면 카엘이 화낼텐데 말야." 매혹적으로 웃는다. 언제나 그렇듯, 장난기 넘치고 퇴폐적 인 분위기의 아진이었다. "쩝, 가 봐라." 토돌은 입맛을 다시며 지금까지 대련 상대로 삼고 있었던 카엘의 전용 데드론에게 손짓을 했다. 마수는 눈물까지 글 썽이며 아파하다가 허락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도망가버렸 다. 설령 쫓아오더라도 잡지 못하도록 최고의 속력으로. 아 진이 그런 데드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 었다. "…애완견이군." "흠?" "카엘의 데드론." "후후, 애완견이지. 길들여진 마수……." 토돌은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날개 사이로 밀어 넣었다. 지팡이는 충돌 없이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토돌의 키는 1미터 60정도, 아진보다 훨씬 작았다. 아니, 남성형 타천사 중에서 가장 작은 편에 속했다. 인간으로 치자면 15 세 정도의 소년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실제로 싸우면 이길 자신은?" "데드론 말인가? 저건 더 이상 마수가 아냐. 그저 길들여 진 개일 뿐이지. 하지만 야생의 데드론이라면… 두 마리 이 상은 상대할 자신없어." 자유를 만끽하는 자와, 충성이란 이름 하에 묶인 자. 어느 쪽이 더 값지단 말인가. 아진의 웃음이 약간 엷어졌다. 토 돌은 아진을 올려다보기 귀찮아서인지 몸을 약간 더 띄우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지? 수장씨. 내가 보고 싶어서?" 토돌의 소년 같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소문으로는 그도 남색을 즐긴다고 하였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된 바 없었 다. 아진은 역시 색기어린 눈빛을 지어주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왕의 명령이다. 인간계로…" 아진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토돌이 비명을 질렀기 때 문이다. 아니 비명 같은 환호였다. "우오오옷! 이 얼마만의 외출이냐. 400년 동안 가고 싶어 서 죽는 줄 알았다고!" 인간계를 증오하는 타락천사가 있는 반면에 토돌 같은 별 종도 있었다. 인간계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 문에 카엘이나 아진처럼 임무가 아니고는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임무의 중요성을…" "으하하하! 휴가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춤까지 추고 있는 토돌. 소문이 안났을 뿐이지, 아진보다 장난기-라고 할 수 있다면-가 심 한 것이 토돌이었다. "스키엘을 제외한…" "해변으로 가자! 수영을 하고 인간 여자를 품에 안는 거 다! 으하하!" 퍼억! 아진은 검을 검집에 꽂은 채 거꾸로 들고는 칼자루 부분으로 토돌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제야 정적이 감돌았 고, 평화(...)가 찾아왔다. 피스. "…아름다운 미녀…들과 밤을…" 퍽! 피스peace. 추락하려는 토돌을 어깨로 받친 아진은 칼을 다시 허리에 채웠다. 그리고 칼자루에는 시뻘건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 다. "……." 잔뜩 가라앉았던 기분이 약간의 운동으로 인해 조금은 좋 아진 아진이었다. * * "후우." 길게 나오는 한숨.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자 답답 했고, 거기에 더불어 시윤은 영문모를 거부감까지 느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하나씩 바뀌다가 이윽고 한 층에서 머 물렀다. "여기야." 사라가 내렸고 시윤이 따라 내렸다. 공기가 뜨겁다. 아니, 다만 시윤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싸늘한 겨울의 기온이었고, 바람만 불지 않을 뿐이었다. "…더워." 시윤의 중얼거림에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는 고개 를 가로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우리 집이 여기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양쪽으로 각기 문이 하나씩 있었 고, 사라는 오른쪽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연두색으로 페인트 가 칠해진 새 것이었다. 아니 가만히 살펴보니 엘리베이터 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전부 새 것이었다. 왼쪽은 약간씩 때 가 타서 낡아있는데 비해 오른쪽은 굉장히 깔끔했다. "계세요?" 사라는 당연히 있어야 할 초인종이 보이지 않자 문을 두드 렸다. "…계세요?" 재차 문을 두드리는 사라.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 다. 시윤은 초조했다. 드디어 집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위 화감과 열기가 그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들었다. "거기 아무도 안 살아요." 시윤이 눈을 돌리자 맞은 편 문에서 한 중년 여자가 쓰레 기 봉투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학생, 나 좀 도와줄래요? 이거 꽤 무겁네." 시윤은 엉겁결에 여자가 내미는 묵직한 쓰레기 봉투를 받 아들었다. 인상이 좋은 40대 후반 정도의 아줌마였다. * * 시윤은 말 없이 아줌마가 끓여준 율무차를 홀짝였다. 쓰레 기 분리수거를 도와주자 마침 심심하다며 차라도 대접하겠 다고 사라와 시윤을 집으로 부른 것이다. 중년 여자는 찻잔 을 기울이다가 신기한 걸 발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이 붉은 색이네, 렌즈 낀 건가?" 중년 여자가 묻자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 받기 귀 찮았기 때문이다. "저기… 옆집에는 아무도 없네요?" 사라가 코코아 잔을 손에 쥔 채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 다. "…모르는구나." 달그락. 시윤이 찻잔을 떨어뜨리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 다. 시간이 느려졌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중년 여자의 목소 리가 들렸다. "한 달 전에" 진실. 피할 수 없는 진실. "가스관이 폭발해서" 더욱 느려졌다. 피가 역류해서 심장을 찌르는 느낌, 이대 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시윤은 이를 악 물고 견뎌냈 다. "네 또래의 남자아이 빼고는" 받아들여야 한다. "…모두 죽었어." 테이블 밑에서 꽉 쥐어져 있던 시윤의 주먹에서 피가 떨어 졌다. 이래서 잊으려고 했던 것인가. "그 …애 이름이 뭐였죠?" 중년의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비록 옆집에 살고 있었다고는 하나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 았다. "명… 아, 그래. 명시윤. 아마 맞을 거야." "시윤아 기다려!" 사라의 외침에 시윤이 달리던 속도를 늦추자 그녀가 뒤따 라와서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중년 여자가 말하는 도중에 시윤은 벌떡 일어서서 그 집에 서 나왔다. 그리곤 아무런 말없이 도망치듯 뛰었다. "…어떻게 믿지?" 시윤이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명시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그, 그야……." 할 말이 없었다. 사라는 무엇이라도 말해보려고 했지만 아 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는 믿음 뿐……. "그 아줌마가 하는 소리 못 들었어? 부모님이 죽고 미쳐버 린 녀석이 나란 말이야?" 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도 2년 만에 본다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바로 한 달 전에 봤다는 사람의 얘기론 그 명시윤이라는 녀석, 나보 다 훨씬 키도 작고 눈도 까맸다고 했어. 말이 된다고 생각 해? 내가 그 녀석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기랄! 그럼 난 누구냐고! 이 아찔할 정도로 슬픈 느낌 은 도대체 뭐야! 널 봤을 때의 그 반가운 느낌은 뭐야! 이 건 누구의 기억이야!" 시윤의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시윤아." 결국 다시 시윤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주는 느낌, 낯설 지 않다. 시윤은 힘이 빠져서 털썩 땅에 무릎을 꿇어버렸 다. "나 불안해." 혼자 있어서 불안해. 나에 대한 간단한 증명조차 없어서 너무나 불안해. 시윤은 그렇게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윤아."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시윤의 이름을 부른 사라는 그의 백 발 사이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강하고 거친 척 했지만 한없이 약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라는 손등으로 그의 얼 굴에서 눈물을 훔쳤다. "알아보자. 아주머니가 말씀해 주신 네가 입원했다는 그 병원에 가서… 확인해보자." 그녀는 시윤의 얼굴을 살짝 들어서 자신과 시선이 맞도록 했다. 한없이 따뜻한 느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피가 빨리 도는 그 느낌. 사라는 예쁜 눈을 살짝 감으며 한숨을 쉬었 다. 따스한 숨결이 시윤에게 느껴졌다. "난 확신해. 네가 2년 전의 그 시윤이라는 것을……. 그러 니까…" 사라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시윤의 입술이 그녀에게 맞닿 았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웠고, 그래서 눈치챌 수 없을 정 도로 빨랐다. 그리고 그 입술은 눈 깜빡 할 사이에 다시 떨 어졌다. 아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사라의 눈이 놀라움으 로 크게 뜨여졌다. "미안해." 시윤이 말했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 며……. <난… 어떤 사람일까> * * 토돌이 깨어난 곳은 태성빌딩의 정문 앞이었다. 어느새 옷 은 인간계의 간편한 복장으로 입혀져 있었으며, 정확한 위 치는 아진의 어깨 위였다. "…인간계?" "깨어났으면 내려와." 내려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아진은 토돌을 바닥에 던 져버렸다. 잽싸게 공중에서 균형을 잡은 토돌은 다행히 땅 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그는 옷의 여기저기를 털어 내고 는 빌딩을 올려보다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오, 맙소사. 마왕 성보다 더 높잖아! 여기가 어디지?" "네 말대로 인간계다." 이리저리 몸을 비튼 토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반 이상이 억눌리는군. 400년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빌딩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400년 만에 인간의 건축기술은 신의 경 지에 달했군.' 팔짱을 낀 채 중얼거리던 토돌은 어느새 문 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진을 쫓아서 뛰었다. 토돌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구경 좀 하고 가자!" 건물로 들어서자 왼쪽에는 보통 크기의 엘리베이터 문이 네 개가 연달아 서있었고, 오른쪽에는 두 배정도 크기의 문 이 따로 존재했다. 아진은 토돌을 데리고 커다란 엘리베이 터 쪽으로 갔다. 네 개의 엘리베이터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큰 쪽은 달랐다. "손님, 그 엘리베이터는……." 프론트에서 안내를 맡고 있던 한 여자가 아진을 향해 다가 왔다. 푸른색 정복을 걸치고 얼굴에는 영업용의 미소를 띄 우고 있었다. "흠?" 아진이 그녀를 바라보자 여자는 말을 잃고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아름다움, 굳이 유혹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상대를 빨아들이고 마는 그 런 타입이었다. 마계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진이었으 니……. "무슨 일이지?"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그의 목소리에 안내원은 그제야 정 신을 차렸다. "그, 그쪽은 회장님 전용이니… 방문객께서는 일반 엘리베 이터를……." 말을 더듬었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이미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 이다. 아진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 다. 금빛의 신분증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고, 그것을 본 여 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기를……." 그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진이 꺼내 들은 것은 회장이 직접 초대한 사람들만 지니고 있는 일종의 신분증이 었다. 그것은 태성의 고위간부라는 말도 되었고, 카드를 소 지한 사람은 얼마든지 회사의 경비를 '사적으로' 쓸 수 있 었다. "오호, 미인이었는데. 아깝다." 토돌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진은 역시 못들은 채 하 고는 카드를 엘리베이터 오른쪽의 작은 구멍에 찔러 넣었 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라? 마법이야?" "…400년만이라고 했지? 그럼 모르겠군." 아진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며 말했다. 토돌은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십대 소년 의 얼굴이었기에 꽤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응, 400년만이지. 오호라, 인간계에서도 마법을 써먹는다 는 건가. 초신 전쟁 이후로는 완전 소멸인 줄 알았는데 ……." "…과학이다." 토돌의 똘망똘망한 눈이 궁금함을 표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마법인데?" * * 해질 무렵, 백호가 일하는 빵집에 루이시블이 찾아갔다. 손님용 테이블에 엎어져서 졸고 있던 백호는 깜짝 놀란 얼 굴로 그녀를 맞았다. "여어, 오랜만이유." 백호는 반갑게 손을 흔들다가 루이시블의 표정이 좋지 않 은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이 없어요. 이제는 함께 행동해야해요." "…벌써?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 아직 한달 정도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 는 말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는지 루이시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스키엘의 기척이 사라졌 고, 휘수연… 즉 류메리아도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 백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예, 사라졌어요. 그 둘의 기척은 특별해서 어디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깨끗하게 지워진 것처럼 느낄 수가 없어요." "없어질 수도 있나?" "기척을 숨길 수는 있지요. 내가 당신에게 가르쳐 준 방법 이 아니더라도 고위 천사라면 누구나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있어요." 타락천사를 쫓아버린 뒤에 루이시블과 백호는 한번 더 만 났었다. 그리고 그녀는 효율적인 수련방법과 기척을 지우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따라서 그 둘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은 '각성'했 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마계에서 움직이기 전에 빨리 그들 과 합류해야해요. 아니, 우리들을 먼저 제거하려고 할 지도 몰라요." "…골치 아프군." 백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치마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정 성스럽게 개어놓았다. 바로 나갈 모양이었다. "이번 달 월급도 못 받았는데……." 어차피 못 받을 거였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는 백호였다. 그는 포장되어 있는 빵 몇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메모용 지 하나를 뜯어서 볼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쩝, 인사도 못하고 가네. 미안해라." 백호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주머니에서 크림빵 하 나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달콤한 크림이 입안에서 살살 녹 았고, 백호는 맛을 음미하다가 루이시블에게 빵 하나를 내 밀었다. "먹어. 꽤 맛있어." "……." 루이시블은 이런 상황에 빵이 목으로 넘어가는 게 신기하 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백호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입 안의 빵을 삼켰다. "메르니츠는 어느 정도나 쓸 수 있죠?" 그녀는 청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지금 백호 에게 전투력이라고 할만한 것은 메르니츠 뿐이었다.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상은 하급 천사에게도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하니까. 환생한 바뮤즈는 너무나도 현실감각이 없는, 푼 수로밖에 보이질 않았기에 루이시블은 굉장히 불안했다. "…그다지 성과는 없었는데." 백호는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번 보는 게 낫겠지." 그는 운동으로 단련된 군살 없는 오른팔을 들어올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달도 안 되는 단련이었지만, 밤에 한잠도 안자며 -낮에는 가게에서 졸고- 키운 힘을 드러내려 는 것이다. "하압!" 기합성과 함께 검은 기류가 백호의 오른팔을 감쌌다. 예전 에는 손목까지 오던 것이 지금은 팔꿈치까지 감싸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메르니츠] 백호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시동어를 말하자 메르니츠가 부름에 응답하듯 자색 빛을 발했다. -즈아아앙 자색의 원이 손등에 그려졌고, 그것을 중심으로 흑색 장갑 에 기묘한 무늬들이 새겨졌다. 더 두터워졌고, 더 커졌다. 그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예전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 친 힘이 뿜어져 나왔지만 지금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음에 도 불구하고 강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성과가 좋은걸요?" 루이시블이 메르니츠를 쓰다듬어 보고는 말했다. 백호는 칭찬 받는 게 좋았던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으하하. 당연히 이 몸은 천재니까. 그리고 다르게 써먹는 방법도 알아냈지." 그렇게 말한 백호는 메르니츠가 장착된 오른손을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갖다 대고는 읊조렸다. [갑옷] -즈아아앙 다시 메르니츠가 길게 울었다. 자색 기운이 사그라지더니 검은 기류는 그의 왼쪽 가슴으로 옮겨와서 심장을 중심으로 몸 전체에 퍼졌다. 그리고 그것은 액체처럼 변해서 몸을 감 쌌고 다시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자색의 문양이 그 위에 새로이 새겨졌다. 몸의 부분 부분을 보호하는 갑옷 의 모습이었다. 각 관절 부분은 아예 보호가 되질 않았으나 웬만한 부분은 모두 갑옷에 덮여 있었다. "어때? 대단하지 않아?" 힘이 한곳에 집약되지 않고 넓게 퍼졌기 때문에 갑옷은 약 간은 반투명한 흑색을 띄고 있었다. "벌써 블랙 아머의 모습을 취하다니……."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루이시 블은 갑자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시험해봐도 되요?" "시험?" 백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 부분도 메르니츠에 의해서 감싸졌지만 움직임에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다. "작은 부위에 한정적으로 힘을 내던 메르니츠가, 이렇게 많은 곳을 보호하려면 상대적으로 약해질 테니까. 어느 정 도의 방어를 할 수 있는지… 시험해봐도 되요?" 결국 때려보겠다는 소리. 백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녀는 백 호가 허락하자 어깨를 가볍게 풀더니 대뜸 팔꿈치로 가슴 부분을 직격했다. 퍼억! "…너 인간이 아니었지?" 왼손을 뒤로 뺀 채, 양다리로 몸을 지지하고 오른쪽 팔꿈 치로 공격했다. 흡사 권법의 일종인 것 같았는데, 백호는 자기도 모르게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살기가 넘치 고 파괴력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의 공격을 가 로막은 두 팔목이 너무나 저렸다. "음, 이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 있나보네요." 그녀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루이시블의 등에 는 탐스러운 검은 날개 한 쌍이 펼쳐져 있었다. 금발의 미 녀가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 백호는 감탄하고 말았다. 그 리고 그 순간, 두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퍼억! "…맙…소사." 맨손으로도 백호는 쇠파이프의 공격을 막아낸 적이 있었 다. 물론 팔이 아팠지만, 부러지진 않았다. 그리고 루이시 블의 펀치에는 쇠파이프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백호는 느꼈 다. 다행히 메르니츠의 덕인지 손에 감각이 없어지는 정도 로 끝났다. "어라? 조금이지만 원래의 힘을 실었는데……. 후후, 역시 대단하네요." 백호가 피식피식 웃자 -어이가 없어서였다- 루이시블은 그 가 가뿐히 막아냈다고 생각하며 날개 한 쌍을 더 소환했다. 그리고 그녀는 두 팔을 뒤로 빼며 힘을 모았다. 백호의 얼 굴이 사색이 되 버렸다. "이, 이봐." 퍼억! 백호는 10미터쯤 날아가다가 가로수와 열렬한 포옹을 하고 말았다. "…4익 천사의 힘까지는 안 되는구나." 루이시블은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사라는 택시에서 내리고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굶고 살아야겠구나. 흐아아." "…갚을게." 시윤이 어물거리며 말했다. 아까 입맞춤을 했을 때 사라는 대뜸 그의 머리를 때렸다. 시윤은 나름대로 부끄러웠지만 사라는 자주 있었던 일인 것 처럼 아주 태연했다. 그렇게 머리를 두들긴 뒤로는 '…망할 녀석.'이라는 말을 남겨서 시윤을 더더욱 무안하게 만들었 다. '…충동적이었어.'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더욱 예쁘게 보이고 호감이 갔는 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아니, 반사적으 로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을 봐서는 '익숙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의 학생이 몸에 밸 정도로 익숙하다는 것은 뭔가 수상하지만. 사라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두 달 굶으면 된다니까 그러네. 마른하 늘의 날벼락이라고 생각하지 뭐." "……." 옷값만 하더라도 10만원은 넘어가리라, 시윤은 할말이 없 어서 입만 우물거렸다. '청천벽력이야. 청천벽력.' 계속해 서 투덜대는 사라의 -즐기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말에 시윤 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사라는 킬킬거리며 웃더니 시윤의 옷자락을 끌고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자동회전식 문을 지나서 실내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그녀 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시윤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떨려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녀는 작게 숨을 토해내고는 입술을 깨물며 제자리에 우 두커니 서있었다. 그녀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고, 주 위에서 지나가던 환자들과 간병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곁눈 질을 했다. "…나 좀 잡아 줘." 너무 작고 가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시 윤은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으려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 다. 손이 차가웠다. 입술에 핏기가 사라졌고, 발갛게 혈색 이 돌던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변했다. "왜 그래?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냐?" 시윤은 그녀의 손이 떨리지 않도록 꼭 잡았다. 그녀의 커 다란 두 눈동자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깊게 아로새겨져 있었 다. "병원 냄새 때문에… 그래." 약간의 시간이 지나니 떨림이 잦아들었다. 상대가 느끼는 감정은 그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시윤은 흠칫 놀랐다. 현 실을 지킬 수 없는 슬픔과 과거에 대한 아픔, 그리고 절망 적인 현실에 대한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그건 자신이 아 닌 그녀의 감정이었다. "…괜찮아졌어. 내가 원래 병원을 싫어하거든." 사라는 병원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조차 싫은지 그 부 분만은 우물거리며 말했다. 시윤은 그녀의 손의 온기가 돌 아온 것을 확인하고 놓아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실외와 공기부터가 달랐다. 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 고 온통 하얀색으로 발라놓은 부자연스러운 공간이 눈을 아 프게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시윤이 느낀 무엇인가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무 언가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역시 덮어두자.' 물어서 대답해 줄 얘기해줄 것 같았으면 진작에 얘기했을 것이다. 시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 다. 혈색이 조금은 돌아와 있었지만 아직 창백했다. 심각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괜찮겠어?" 그래도 확인 차 물었다. "괜찮다니까. 내가 얼마나 건강한지 몰라서 그래?"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시윤은 억지로 밝은 척 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같이 한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사내 녀석이 웬 한숨이야. 그리고… 넌 당장 중요한 일이 있잖아?" 그녀는 간호사 둘이 상주하며 접수를 받고 있는 곳을 가리 키며 말했다. 자신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 스럽다. 시윤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그녀는 그의 등을 손으 로 확 밀어버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비교적 어려 보이는 얼굴의 안경을 낀 간호사가 생긋 웃으 며 말했다. 시윤은 용건을 말하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접수하실 건가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시윤은 고민에 빠져버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녀는 다시 물었다. 불쾌하거나 짜증난 기색은 없었지만,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노려본다는 -그녀 입장에서는 노려보 고 있었다- 것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빨려들 것만 같은 피 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명…시윤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입원하고 있다던데……." "명시윤이라고 하셨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을 피하며 키 보드를 두드렸다. 비록 하얀 머리카락들로 가려지긴 했으나 시윤의 얼굴선은 미남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이 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명시윤이라는 분 입원중이십니다. 실례지만 무슨 관계이 십니까?" "친구예요. 고등학교 3학년, 12월 29일 생 맞나요?" 갑자기 사라가 카운터에 와서 물었다. "예, 맞습니다. 12월 29일 명시윤님." 간호사는 모니터의 화면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면회하고 싶은데요." 사라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입원중이라는 것, 그렇다면 시윤이라는 남자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여기에 기 록도 있지 않은가. 이제는 그렇게 자포자기해버린 시윤을 뒤로한 채, 사라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면회불가…네요." 간호사는 얇은 무테의 안경을 고쳐 쓰더니 의혹어린 목소 리로 말했다. "가족이라도 안될까요?" "죄송하지만 안 되는 걸요. 정신과 쪽에서 절대 불가라고 적어놓았어요." 사라는 더욱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로써 하나는 알았 다. '명시윤'이란 사람은 정신이상으로 입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간호사는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럼 담당 의사라도 만나고 싶은데요?" "…그것도 공란으로 되어 있네요. 음,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 병실도 어딘지 모르겠고……. 누가 입력한 거지?" 간호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체념하고 있던 시윤도 사라가 계속해서 캐묻는 것을 듣고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설프게 작성된 기록만 남아있 고, 병원 측에서는 모든 것을 아예 '알 수 없도록' 해놓았 다. '조작되어 있다.' 사라는 이를 악물더니 간호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시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병원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다시 한가해진 간호사는 전산화되어 있는 자료를 뒤지며 '명시윤'에 대한 복구를 시작했다. 어딘가에 자료가 남아있을 테니, 그걸 근거로 몇 가지 공란이라도 채 워놓자는 생각이었다. "김 간호사, 뭐해?" 안경을 쓴 김 간호사에게, 마침 자리에 나온 정 간호사가 물었다. 3년 선배인 그녀는 여러모로 일 처리에 대해서 통 달해 있었기 때문에 김 간호사가 자주 배우곤 했었다. "여기, 명시윤이라는 환자요. 자료가 싹 날아갔나 봐요. 누가 찾아왔었는데……." 김 간호사가 모니터의 화면을 볼펜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정 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곤 탄성을 질렀 다. "아! 그 환자 찾아오는 사람 있으면 특실로 이어달라고 했 잖아!" "예? 처음 듣는걸요?" "조회시간에 얘기했으니 한참 늦게 온 사람이 알 리가 있 나. 빨리 특실에 연락해." 특실이라 함은 병원에서 가장 좋은 입원실을 뜻한다. 이곳 은 일류시설을 자랑하는 곳이라 그 가격은 웬만한 서민층은 꿈도 못 꾼다. 그리고 그 특실에는 현재 '귀빈'이 있다. "어서 오시지요." 유 회장이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싹싹하게 아진과 토돌 을 맞았다. 카드에는 신원확인 기능도 있었는지 그는 아진 이 올라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죄송하지만 저번의……." 사라져버린 아진의 부관에 대해서 물으려던 유 회장은 아 진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매번 들를 때마다 차가운 인상만을 남기고 갔던 아진이었지 만 이번에는 정 반대였다. 게다가 옆에 따라온 소년에게서 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느 낄 수 없는 그 기운이었다. "준비가 끝났다고 들었다." 아진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유 회장은 최대한 여유 있게 웃으려고 노력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서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키 두 장을 엘리베이터 안쪽에 홈에 그었다. "보안의 유지를 위해서 어줍잖은 짓을 좀 했습니다." 유 회장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워 삼기며 허리를 깊게 조 아렸다. 엘리베이터는 올라올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내 려갔다. 37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았 고 그렇게 떨어진 후에도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지하로 내 려갔다. 아니 몸에 느껴지는 압력을 봐서는 하강만이 아니 었다. 꽤 여러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흐흥. 웃기는군." 아진은 코웃음치고는 눈을 감았다. 가까운 곳에서 만족스 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토돌은 신기한 듯 엘리베이터를 이 리저리 살펴보다가 역시 기운을 느끼고는 탄성을 질렀다. "이건가? 그동안 너와 카엘이 왕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준 비했다는 게?" 영문을 모르는 유 회장만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 을 뿐이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꽤 깊은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아주 순환이 잘 되고 있었다. "이쪽으로." 유 회장은 둘을 데리고 길다란 복도 한쪽의 합금 문 앞으 로 갔다. 그가 문 앞에 서자 디지털음으로 된 목소리가 들 렸다. -홍채 확인했습니다. 오른쪽의 지문 인식기에 손을 대십시 오. 그는 문 오른쪽에 붙어있는 지문 인식기에 손을 펼쳐서 밀 착시켰다. -지문 확인했습니다. 문 개방합니다. "번거롭군." 토돌은 뭐가 그리도 신기한지 계속 눈을 굴리고 있었다. 몰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뜯어내려고 했지만 아 진의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은 유 회 장의 안내에 따라 30평 남짓한 작업실에 들어섰다. 작업실 중앙에는 거대한 유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오, 맙소사." 토돌은 처음으로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시험관 안에는 투명 한 액체로 채워져 있었고, 한 천사가 부유하고 있었다. 흰 색도 검은색도 아닌 탁한 회색의 날개를 달고……. 아진은 착잡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답답하군.' "오셨습니까." 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 한 명이 와서 유 회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원래 10-20명은 있었을 법한 작업실이었지만 그들의 방문 때문인지 단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꺼낼까요?" 유 회장이 아진의 눈치를 보느라고 잠시 뜸을 들이는 사 이, 토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설마……." "충실한 무기지. 저게 뭔지 정도는 알텐데?" 토돌의 소년 같은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피림! 그 빌어먹을 종자를 만들어 냈단 말이냐!" 신화 속의 네피림, 그것은 신족과 인간의 혼혈을 뜻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동물이었고,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닌 마 수였다. 금단의 존재인 네피림은 파멸을 낳았다. 한바탕 커 다란 격전을 치러서 네피림들을 모조리 소멸시킨 후, 지금 은 천계뿐만이 아닌 마계에서조차 금하고 있는 것이 인간과 의 혼혈이었다. "흥, 이건 그 정도의 물건이 아니야." 아진은 그렇게 말하며 유 회장에게 어서 천사를 꺼내라고 손짓을 했다. 유 회장이 몇 가지 지시를 하자, 남자는 캡슐 앞에 위치한 기기들을 어지러운 손놀림으로 조작했다. 삐삑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리관의 투명한 액체의 수위가 서서 히 낮아졌고, 대신 공기가 공급되었다. 외부와의 기압차가 없어지자, 유리관은 허공의 줄에 매달려서 떨어져나갔다. "눈을 떠라, 나이린." 네피림 프로젝트의 첫 작품, 코드명 나이린. 빛을 거부하 는 새까만 흑발이 물에 젖어서 허리까지 내려왔고, 칙칙한 회색의 날개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매끈한 두 다리로 서서, 그의 명령대로 눈 을 떴다. 눈동자와 눈자위 구분이 없는 그저 회색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당신이. 나의. 주인?" "이럴 수가……. 네피림에게 이성이 있단 말인가." 너무나 놀란 토돌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각인을. 원하십니까?" 나이린은 뚝뚝 끊어지는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련되지 않은 성대였기 때문에 목이 아프고 부자 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 었다. "아니, 난 네 주인 될 분의 종일뿐이다. 허나 네게 명령할 자격도 있지." "자격. 인정."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 어나서 처음 움직이는 것치고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자격 가진 이로서 명한다. 네 힘을 보여다오." "명령. 수행." 아진은 힘을 그러모아서 방 전체에 결계(結界)를 형성했 다. 특별히 힘든 일은 아니었고, 단지 외부로 흘러나갈지도 모르는 힘의 파동을 안으로 돌리는 효과만 있는 것이었다. "시작해라." -쿠아앙! 그녀가 전신의 모든 힘을 밖으로 방출하자 그 여파로 고급 기계 설비들이 먹통이 되었고, 지진이 난 듯 실내가 흔들렸 다. 겨우 두 장의 날개만으로 엄청난 힘을 내고 있는 것이 었다. 토돌은 전율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처, 천사와 악마의 혼혈이란 말이냐!" 빛과 어둠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되 둘은 절대 섞 이지 않는다. 하지만 회색의 천사는 그 법칙을 완전히 무시 하고 있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에서 어둠이 흘러 나왔 고, 빛이 그것을 감쌌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간이다." "말도 안 돼." 토돌은 결국 경악하고 말았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간 의 혼혈. 절대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존재였 다. 나이린은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아진을 향해 입을 열었 다. "더?" "모두 보여라." 아진이 그렇게 말하자, 토돌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 었다. 이미 한 쌍의 날개만으로 어림잡아 4익 천사 이상의 힘을 내고 있었다. "명령. 수행." -쿠아아앙! 한 쌍의 날개가 그녀의 등에 새로이 돋아났다. 실내의 공 기가 나이린의 힘에 말려서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힘의 폭풍이었다. 어둠과 빛이 맞물려서 더욱 더 강해지는 힘이었다. 유 회장과 흰 가운의 남자는 그 기세에 억눌려서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제법이군." 그녀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피부에, 군살이 전혀 붙지 않은 몸매. 평소 같았더라면 색을 밝히는 유 회장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겠 지만, 지금 그는 숨도 쉬기 어려운 상태였다. "제법인 정도가 아니야. 인간계에서 저 정도의 힘을 내는 건……." 토돌은 수치심에 뒷말을 흐렸다.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 상이다.' 겨우 만들어진 존재 따위에게 밀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작업실의 집기들이 파손되고 나이린의 힘 때문에 고가의 장비들이 박살나서 허공을 날아다녔다. "거기가 한계인가?" "한계. 나의. 모든. 힘." 래픽스 샤딘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힘, 이것이 어둠의 일족에게조차 외면 받은 네피림의 위력이었다.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수연은 잠에서 깼다. 머릿속이 콕 콕 쑤시는 걸 느끼며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전화벨 소리는 그쳤고 수연은 허탈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곳, 원룸의 아파트 같았다. "환자복? 링겔?" 수연은 자신이 병원의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고, 손목에 꽂혀있는 링겔의 바늘도 보았다. 하지만 퀸 사 이즈의 침대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이곳은 절대로 병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쓰러졌었지." 밤새도록 시윤을 찾아다니다가 비를 맞고 쓰러졌다. 거기 까지가 눈뜨기 전 그녀의 기억이었다. 수연은 씁쓸한 미소 를 지으며 방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의 비친 그녀의 얼굴은 비참했다. 입술이 창백하게 변 해 있었고, 눈 밑이 까맣게 그늘이 졌다. "후후, 도대체 난 뭐지." 목이 부어 있었다. 침을 삼키는 데도 고통이 따랐다. 그녀 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면서 이곳에서 나갈 생각을 했 다. 누군가 도와준 것 같았지만, 그에 대한 보답보다도 시 윤을 찾는 것이 급했다. 당장 보고 싶었다. 목이 마른 그녀 는 테이블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는 창가로 갔다. "…설…마." 수연의 갈라진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창 밖의 노을에 젖 어 붉게 변한 도심을 주시하던 그녀가 놀라움으로 눈을 부 릅떴다. "며, 명시윤!" 그녀는 쉰 목소리로 크게 외치고 말았다. 자신이 있는 건 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시윤이 웬 여자와 함께 걷 고 있던 것이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그것도 머리색이 더 욱 하얗게 변해있었지만 수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시윤에 관한 한 절대로 틀려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굳게 잠겨있 는 잠금 장치를 풀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칼날처럼 밀려들어와 수연의 체온을 앗아갔다. "명 시 윤! 시윤아!"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부어버린 목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 껴져서 수연은 침을 삼키며 다시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 내 생각을 바꾼 그녀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옷장을 뒤졌다. 입을만한 옷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의외로 수연에게 꼭 맞는 것들이 가득했다. 바로 이 방의 주인 크리스의 것 이었다. "후우, 여자랑 도망을 쳤다, 이거지?" 수연은 시윤과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고, 휘청거리는 몸을 추슬러서 옷을 갈아입었다. 입원에서 안정 을 취해야 하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거추장스러운 링겔의 바늘을 빼버린 지는 이미 오래였다. "어디까지 도망가나 보자구!" 그녀의 생기가 돌아왔다. 누가 뭐래도, 수연 자신이 부정 한다고 해도 시윤은 그녀에게 최고의 활력소였다. 화를 내 려고 해도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윤을 다시 찾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그녀는 행복함을 느끼 고 있었다. 검은 바지와 연한 회색의 티, 그리고 코트를 입 은 수연은 달리듯 방을 뛰쳐나갔다. "병원이네?" 자신이 있던 방은 '특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고개 를 갸웃거리다가 시윤을 쫓기 위해서 생각은 접어두기로 하 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환자라고 생각되지 않는 활기찬 움 직임이었다. * * 사라는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으로 시윤을 데 리고 갔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차분히 얘기할 장소가 필요했다. 시윤이 숨을 고르고 음식을 시키자 사라는 물 잔 에 물을 채우고 입을 열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어." 그렇게 운을 뗀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자 신의 생각을 풀어내듯 말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간호사가 잘 모르는 것 같았어. '명 시윤'이라는 환자는 기록상에만 존재하거나… 아니면 병원 에서 빠져나갔을 지도 몰라. 아마 병원 측의 실수였다거나 그런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현재 거기엔 '명시윤'이 없어." 시윤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차갑게 목을 넘어가 는 물을 음미하다가 시윤은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한테 의지할 만한 친척이 있어?" 마침 음식이 나왔고 사라는 시윤에게 수저를 집어주며 말 했다. "…없어." 달리 위로할 말도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시윤은 3대 독 자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금 그는 혼자 남은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말이 안되잖아. 누가 내 치료비를, '명시 윤'의 입원비를 대고 있는 거지? 정신이상이라는 내가?" 어감이 미묘했다. '명시윤'이라고 부르는 것과 '나'라고 부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고, 시윤은 그래서 입맛이 씁쓸 했다. 사라는 처음부터 얘기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닫고 크 게 놀랐다. 도대체 누가 재산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정신 이상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준단 말인가. 그것도 국가운영이 아니라 개인 소유의 병원인데. "음, 이런 건 아닐까? 그러니까 병원 측에서는 널 무료로 받아들이는 척, 입원시키고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장기밀매 를 하려고 든 거야. 그런데 넌 우연한 기회로 병원을 탈출 하고……." 비약사고의 극치였다. 시윤은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진지 하게 하고 있는 사라를 향해 인상을 한번 써주고는 묵묵히 밥을 퍼먹었다. 한가지 결론은 내렸기에, 꽉 막혔던 숨이 조금이나마 트인 기분이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 입원했다던 '명시윤'은 존재하지 않거나 중간에 사 라지고 기록만 남은 게 분명했다. 아마 그래서 숨기는 것이 리라. '기억을 찾으면 알게 될까.' 물론 그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모두 찾더라도 크리스가 시 윤을 위해서 손을 썼다는 것을 그가 알 가능성은 없다고 봐 야한다. "…그만 먹게?" 사라는 볶음밥을 두 숟갈 정도 먹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자신도 식욕이 없었지만 사라의 경우에는 더 심한 것 같았 다. "요즘 살이 쪄서… 다이어트야. 다이어트."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아침에 둘이 만난 이후로 사라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무리 다이어트라지 만 하루 종일 굶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녀는 시윤 이나 많이 먹으라며 손짓을 하고는 손가방에서 약을 꺼냈 다. "이거 감기 약이야." 시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사라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 고, 그것은 의심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시윤은 사라가 약봉지를 뜯어서 약을 입에 털어 넣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배도 안 고팠는데 그냥 나가자." "음? 난 괜찮다니까. 시윤이는 먹어야지." 하지만 시윤의 단호한 태도로 둘은 결국 음식의 반 이상을 남기고 말았다. 사라는 계산을 하면서 연신 투덜댔지만 시 윤으로서는 더 이상 먹을 기분이 나질 않았다. 의학에 관해 서는 짧은 지식을 갖고 있는 그였지만, 간헐적인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틈틈이 약을 먹여야 하는 병이 단순한 감기일 리가 없다는 것을 시윤도 알고 있었다. "후후, 기억을 찾는 것… 그만 둘래." "응?"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둘은 길을 거닐었다. 그리고 돌연 터져 나온 시윤의 발언에 사라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 하고 되물었다. 시윤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기억을 찾는 것, 그만 두겠다고." "어째서?" 어째서일까. 시윤은 미소지었다. 하늘 언저리에 작게 남아 있는 노을이 그의 마음을 조금 들뜨게 했다. "기억을 찾는다고 해도, 내게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 아." 부모님은 죽었고, 친분 있는 모든 사람은 그를 정신이상자 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모르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과거를 더듬는 것보다 새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모든 게 처음이고, 모든 게 내게는 새롭잖아." "그런…" 조금은 망상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선택 이기도 했다. 상처가 가득한 과거를 되찾는 것보다는 새로 이 시작한다. 제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윤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부끄러웠던 것이 다. "난… 네가…" 하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약간만 드러난 시윤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입이 생각만큼 잘 움직여주질 않았다.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고개를 푹 떨궜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가 하려는 말을 사라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남아있는 시간도 얼마 없었거니와 만일 시윤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자신을 한없이 원망할 게 뻔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처럼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 었다. "…내가?" 원했다. 미치도록 원했다. 지난 2년 동안, 정말 죽고 싶을 만큼 보고싶었다. 또 다시, 그를 아프게 할 게 뻔한데도… 그녀는 원했다. 시윤이 다음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시윤!" 시윤은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 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낯이 익은 여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윤아. 시윤이 맞지?" 그녀의 따뜻한 음성은 환희에 차 있었다. 초췌한 모습임에 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미녀, 수연이 었다. "…맞…지?" 대답을 듣지도 않았다. 수연은 천천히 시윤에게 다가와 그 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라는 씁쓸한 미소 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잘 된 거야. 이걸로 충분해.' 2년 만에 재회했고, 그에게 또 다시 고백의 말을 들을 뻔 했다. 이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그녀는 되 내였다. 휘수 연,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사라는 잘 알고 있었다. TV에서 도 여러 번 보았을 뿐 아니라 시윤과 만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악역은 이제 무대에서 사라질 시간이다. "흐윽." 심장이 또다시 아려왔다. 울기 싫은데 눈에서는 쉴 새 없 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서 심장이 다 시 압박되었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손가방 안의 진통제 를 찾아냈다. 몇 알인지도 모를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삼켰다. "잘 된 거야……." 죽기 전의 소원성취 했다고 생각하지 뭐. 사라는 슬프게 웃으며 길가 보도 블록에 앉았다. 차가운 바람도 보도 블록 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시윤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편, 시윤은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사라가 말했던 '미인 여자친구'라는 건 지금 안겨있는 그녀를 뜻하는 것이 리라. "시윤아, 돌아왔구나." 수연은 정말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만 그건 너무나 기뻐서였다. 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수연을 마주 안았다. 몸에 배어버려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편 안했다. 그녀를 품에 안고서야 시윤은 안정감을 느꼈다. 처 음 빗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무의식중에 찾았던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것. 그는 이제야 알았다. "휘…수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이름이 기억 속에서 뛰쳐나 왔다. <약속해 줄래?> 그랬었지. <거짓이 아니라고 약속해 줄래?> 그랬었어. 그리고 그녀는 그 때 대답했었다. <약속할게.> 그렇게 시작했었다. "그래, 나 수연이야. 휘수연. 시윤아, 돌아온 거 맞지? 이 제 떠나지 않을 거지?" "난 떠나지 않아."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항상 곁에 있어줬으며 절대로 떠나 지 않았다. 떠난 것은 언제나 시윤 자신이었는 지도 모른 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지금도 그녀는 그를 찾아왔다. 아니, 그 이전에도……. "한가지 약속해 줄래?" 약속이라는 속박으로 그녀를 옭아맸음에도 불구하고 시윤 은 또 다시 그녀에게 약속하기를 원했다. 수연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 "날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영원히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줄래?" 기억이 하나씩 펼쳐졌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 의 추억들이 시윤을 웃게 만들었고, 울게 만들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 세상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미안해, 인정할 수 없어. 당신을 부정하고, 나의 인생을 살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거 야. 그녀를 지키며 그녀만을 위해서 살아갈 거야.' 시윤은 떠나간 자를 부정했고 남아있는 자를 사랑했다. 맹 약은 깨어졌고, 스키엘의 사념은 결국 지워졌다. 이것이 그 의 선택이었다. 더 이상 커다란 위험에 개입한다면 수연까 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수연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 고는 밝게 웃었다. "물론이야. 약속할게. 영원히, 영원히 시윤이… 네 곁에 있겠다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시윤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 시윤의 몸 안에서 따스한 빛이 흘러나왔다. 둘은 눈을 감 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하얀빛이 둘을 감쌌다. 스키엘은 시윤이 이런 선택을 할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시윤은 천년의 기억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천년동안 당신을 그렸어요…….> 그들은 37층의 유 회장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던 나이린은 아진의 명령으로 준비한 인간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토돌이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눈 을 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 다. "스키엘? 정말로 돌아왔을 줄이야……." 멀리서 느껴지는 공명의 파동, 그것은 분명 스키엘의 것이 었다. 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의 특이한 기운은 잊을 수 없었다. 아진은 입술을 비틀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치렁 치렁하게 기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에는 온갖 종류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아주 좋아. 때를 맞춰서 잘 나타났어." 파직! 아진이 손을 한번 휘두르자 유리로 되어있던 벽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워낙 고층인 만큼 세찬 바람이 방안 을 한바탕 휘저었고, 유 회장은 기겁을 하고는 방밖으로 빠 져나갔다. "날개." 파르륵! 아진의 등에서 여덟 장의 날개가 일제히 솟구쳤 고, 방안의 빛은 모두 몸을 사리듯 엷어졌다. 그가 인간계 에서 이렇게 많은 힘을 전개한 적은 없었다. '말살'이라는 지령이 떨어진 이상, 그는 온 힘을 다할 생각이었다. '카엘을 위해서라도…….' "따라와." 그렇게 아진은 차갑게 명령하고는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넓게 펼쳐진 네 쌍의 날개가 리듬을 타듯 움직였고 그의 몸 은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았다. 혹여 무심코 하늘을 바라본 인간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날개를 소환하는 순간 그의 모습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한,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게 되 버린다. 토돌과 나이린도 날개를 꺼내고 그의 뒤를 따랐다. * * "바보 같은!" 크리스는 차 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앙칼지게 소리 쳤다.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는 수연을 가둬놓 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 시윤과 수연이 만나서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모든 '적'들이 몰려들 것이다. "차 세워요! 병원으로 다시 가!" 묘한 힘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고 감각에만 의지해서 찾 아온 이 곳은 태성 빌딩의 바로 앞이었다. 그 힘은 건물 안 에서 느껴졌다. 크리스는 모든 것을 알아채고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태성의 유 회장은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이 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갑자기 박살나 버린 프로젝트들, 협력사의 총수들의 죽음… 모든 것이 설 명된다. 악마는 최고의 암살자였다. "제기랄, 벌써 알아차렸어." 태성 빌딩을 주시하던 그녀는 평소 생각도 않던 욕을 내뱉 으며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 다. 암흑의 힘으로 움직이는 그들이……. "빨리 돌아가요!" "예? 예, 예. 알겠습니다." 운전기사는 그녀의 명령에 땀을 뻘뻘 흘렸다. 퇴근시간의 도심은 엄청 막히기 마련이었고, 지금도 거북이 운전 외에 는 불가능했다. 아무리 빨리 간다 하더라도 30분 안에 돌아 가기는 힘들 것이다. "빌어먹을!" 이대로는 모든 것이 망가진다. * * 노을마저 사라진 저녁이었다. 초승달이 은은하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던 루이시블은 허리를 두드리며 아프다고 투 덜대는 백호를 향해 생긋 웃어주었다. 밤이 되니 그녀의 금 발도 신비롭게 보였다. "많이 아파요?" "…난 인간이야." 당신 같은 악마가 아니라고! 백호는 뒷말을 삼키고는 연신 몸을 비틀었다. 아프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칫하면 뼈가 부러질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루이시블의 금발과 청 색 눈동자가 마녀(魔女)의 그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마녀가 맞을지도…….' "그래도 대단하네요. 그렇게까지 힘을 향상시키다니……." "후후, 조금 연습해봤을 뿐이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백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의 '조금'은 매일 밤을 꼬박 새가며 뼈를 깎는 고통이었던 것 이다. 루이시블에게 잘 보이려고 그동안 노력했던 것이 성 과가 있자 백호는 기뻐했다.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순진 한 남자의 특성이었다. "어, 어라?" 입을 가리며 웃던 루이시블이 놀란 얼굴로 어둠이 깔린 서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가?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없는 하늘, 루이시블을 따라 시선을 옮긴 백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스, 스키엘! 스키엘이야!" 비명 지르듯 그렇게 말한 루이시블은 대뜸 백호의 허리를 껴안았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조금만 참아요." 파르륵! 그녀가 짧게 '합'하고 힘을 모으니 여섯 장의 날 개가 화려하게 뻗어 나왔다. 까맣고 탐스러운 날개가 힘차 게 움직이자 백호를 안고 있는 루이시블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으, 으아아아! 안 돼! 난 고소공포증이라구!" 풍만한 가슴의 느낌이 등으로 전해졌지만 그 행복을 맛볼 겨를도 없이, 백호는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질러댔다. "조금만 참아요!" "으아아아아악!" 백호의 비명소리가 조용하기만 한 동네를 가득 메웠다.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사라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무릎을 세워서 상체를 기댔다. "하아, 하아. 아직… 시간이 있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심장이 약해서라 아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균이 몸을 갉아먹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으로 떠났다. 2년 동안의 고독했던 투병 생활, 그것도 연고자라고는 전혀 없는 미국에서 그녀는 죽음과 지겨운 싸움을 했던 것이다. '회생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심장을 기증하신다면 재단 측에서 충분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2년 동안 그녀가 끈질기게 살아남자 미국인 의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눈은 환자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희귀한 질 병을 보유한 연구대상을 향한 그것이었다. 사라는 하루에 두 번씩 시트를 갈아야 할 정도로 피를 토해냈고, 그들의 연구를 위해서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전염성 질병이 아 니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살고 싶어." 몇 번이나 죽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조금만 심하게 기침을 해도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올라왔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그녀는 괴롭혔었다. "하루만… 딱 하루만……." 그렇게 그녀를 혹사시키고 병원 측에서는 2년이 지난 후에 야 치료가 불가능함을 밝혔다. 그 동안 사라의 몸에서 혈액 을 샘플로 가져가고, 증상을 정성스럽게 체크했던 것은 모 두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사라는 비 참한 기분으로 두 말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반 년 이상 가기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심장을 팔라고. 그럼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사라의 희망을 그들은 그렇게 무참히 짓밟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4개월이 넘어 가도록 그녀는 시윤을 찾지 않았다. 아니, 찾지 못했다. '제발 떠나지 마. 날 좋아하지 않아도 돼. 난 너 없이는 살 수 없어.' 이별을 얘기했을 때,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이었다. '싫증났어. 그만 만나. 나 이사 갈 거니까 연락도 하지 마.' 밤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 얘기한 게 잘한 일이었다. 목소리는 어떻게든 감출 수 있었지만 눈물은 감 출 수 없었으니까. '…날 버리지 마.'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약속된 6개월 중 반 이상을 무의미 하게 보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정상인처럼 생활하기 위해서 지독히 쓴 약을 삼키는 것뿐이었다. 너무 나 독한 약이어서 위가 상했고,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이 찾 아왔다. 대신 각혈이 줄어들었고 몸의 감각이 무디어졌다. "…시윤아." 다시 만난 그는 멋지게 변모해 있었다. 내면이 너무나 따 뜻해져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은 그대로 간직한 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잘 어울리는 여자가 함께 있었다. "너와 하루만…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건… 과분한 욕심일 까……." 사라의 중얼거림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어차피 손으로 닦을 양도 아니었기에 눈물은 멋대로 흐르도록 내버려뒀다. "읍."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을 비집고 새빨간 선혈이 흘러나왔 다. 평소보다 배 이상의 약을 복용했지만 이제 몸이 받쳐주 질 않았다. 죽어가고 있다. 밤 공기는 지독히도 차가웠고 그녀는 외로움 때문에 몸을 떨었다. "살…고…싶…어." 툭, 사라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처졌다. 온 몸의 감각이 사라졌고,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암흑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기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 도 들리지 않는다. 사라는 그렇게 죽어갔다. '시윤아, 거짓말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널 싫어한다니 그 건 말도 안되잖아. 난 네가 걱정할까봐, 그리고 힘들어 할 까봐 그렇게 떠나려고 했던 거야. 후후, 병원에서 들었는데 살아날 가능성은 3%밖에 안 된다더라. 그런 말을 너한테 하 면, 넌 틀림없이 날 기다린다고 할거야. 맞지? 그럴 바에 야, 차라리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면 어떨까 했어. 2년 동안 너에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뭐, 그래도 어쩔 수 없 지. 너한테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 보단.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 까. -비행기를 기다리며 씀-' '시윤아, 좋아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넌 내 첫사랑이었다는 거 아니? 후후, 맨날 니가 물어봐도 내가 대답 안 해줬으니 모르겠구나. 지금 여긴 미국이야. 조금 있으면 수술을 받아. 이게 시작이야. 내가 다시 건강해져 서, 널 만나러 가기 위해선 이게 시작이야. 수술을 앞으로 열 번도 넘게 받는대. 그리고 약도 계속 먹어야 하구. 너무 보고 싶다. 네 사진을 갖고 오긴 했지만… 전화라도 걸어서 목소리를 듣고 싶어. 미안해. 난 너무 이기적이지? -수술 받기를 기다리며 씀. 시윤이가 너무 보고싶음-' '시윤아. 시윤아. 정말 보고 싶은 시윤아. 부치지도 못하 는 편지를 쓰고 있지만 이렇게 네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기 분이 좋아져. 전에 받은 수술은 성공적이었대. 몸이 좋아지 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의사들 말로는 걱정 말래. 건강해지 면 꼭 널 제일 먼저 보러 갈 거야. 설마 벌써 다른 여자친 구 만든 건 아니겠지? -수술 후 일주일 째. 역시 시윤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음-' '병실 정리를 하다가 작년에 내가 쓴 편지를 찾았어. 미안 해, 시윤아. 역시 이 편지들은 부칠 수 없겠다. 널 보러 가 는 것도……. 헤헤, 진작에 미련 버렸어야 했는데……. 보 고 싶었는데, 정말 보고 싶었는데……. 이제 난 얼마 살 수 없대. 시윤이는 날 그냥 나쁜 여자로 기억하고 살겠지? 헤 헤, 차라리 그게 좋은 거야. 내 수명은 이제 장담 못한대. 그래도 한가지 추억거리는 갖고 갈 수 있겠구나. 시윤이랑 만났던 기억들…….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기억할 사라가 시윤이에게-' 결국 편지들은 보내지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시윤이 수연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은 감 촉, 다시는 놓치기 싫은 기분. "잘 지냈을 리가 없잖아." 그녀가 시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투덜거리 는 목소리였지만 애정이 듬뿍 배어있었다. "정말 잘 돌아왔어." 그녀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던 시윤은 주위의 무엇인가가 바뀐 것을 느꼈다. 공간이 굴곡 되어있는 느낌, 분명 아까 부터 계속 서 있었던 골목의 한복판이었지만 왠지 달라 보 였다. 짙은 어둠이 하늘을 물들였고, 한 겨울의 차가운 바 람이 둘의 체온을 앗아가려 했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암울한 기운이 시윤을 불쾌하게 했다. "흐응, 스키엘과 류메리아인가?"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시윤의 귀를 파고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하늘! 시윤은 수연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면서 시선을 위로 향했다. 칠흑 같은 색의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허공에 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사악한 기운에 억눌린 시윤의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누, 누구야!" 체구가 작은 소년의 몸을 지닌 악마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쯔쯔. 아무리 오랜만이라지만 날 못 알아보는 거야? 그리 고 이 터무니없이 약한 힘은 뭐야?" 아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각성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 윤의 변화는 외모뿐이었던 것이다. 정작 영혼에서 뿜어져 나와야 할 힘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그리고 옆에 류메리 아라고 생각했던 여자도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의 공명 이 그토록 강하게 느껴졌던 것은 단지 착각이었는지도 모른 다. "나이린. 명령이다." 수연도 그들의 무서운 기운에 견디기 힘들었는지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시윤은 이대로 수연을 데리고 도망갈까 하고 생각했다. 악마의 모습을 한 그들이 누구인지는 궁금 하지도 않았다. 무의식중에 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진이 이 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 시윤을 향해서 미소지었다. 루 비같이 빛나는 적색 눈동자, 그것이 아련한 스키엘의 기억 을 끄집어냈다. "…저 여자를 죽여라." 시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듯 말 했지만 저 남자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탁한 회색의 날개 네 장을 지니고 있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 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명령. 접수." 더 볼 것도 없다. "달려!" 시윤은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수연의 손을 잡아 채서 골목 반대편으로 뛰었다. "소용없을 텐데……." 토돌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수연을 데리고 앞장서 서 뛰던 시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공기가 엄청 나게 압축되어서 벽을 만들기라도 했는지, 그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시윤은 허공을 몇 번 더듬고는 경악했다. "이, 이럴 수가!" "인간. 여자. 제거." 나이린은 바닥에 닿을 듯한 낮은 비행을 하며 수연에게 다 가왔다. 시윤은 수연을 자신의 뒤로 가게하고는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제기랄! 당신들 원하는 게 뭐야!" 시윤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두 팔을 벌려서 수연에게 가려 는 나이린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살피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이린이라는 저 회색의 천사는 아무 런 감정이 없다. 움직임에 생명력이 느껴지기는커녕, 기계 와 같은 정확성만이 부여되어 있었다. "방해자. 죽여?" 나이린은 시윤이 비켜서지 않자 아진을 향해 물었다. 공중 에 부유한 채로 그들을 지켜보던 아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 답했다. "아니, 죽이지 마. 그 여자만 제거해." "접수." 나이린은 양옆으로 펼쳐진 시윤의 팔을 붙잡았다. 시윤은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팔이 부서질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나이린의 힘은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몇 배였다. 그녀는 시윤과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입을 열었다. "비켜." 최소한의 경고였다. 시윤은 그녀를 비웃었다. "꺼져."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거부한 이상, 시윤에게 남아있 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욕 설을 내뱉는 것 외에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나이린은 시 윤의 대답을 듣더니 그의 팔뚝을 잡아 올려서 옆으로 던져 버렸다. "크악!" 쿠당! 시윤의 몸이 시멘트벽에 세차게 부딪혔다. 등이 화 끈거렸고, 척추가 욱신거렸다. 잘못 떨어지는 바람에 팔이 몸에 깔려서 부러진 것 같았다. 나이린의 힘은 절대로 인간 의 것이 아니었다. 수연은 비명을 지르며 시윤에게 가려 했 다. "시윤아!" 하지만 가지 못했다. 나이린이 무심한 태도로 그녀를 막았 다. "도망가! 어서!" 시윤은 왼손으로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제거." 나이린의 오른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시윤은 그것이 사람의 몸 정도는 간단히 관통할 힘을 갖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이린은 수도(手刀)에 빛이 골고루 퍼지자 그대 로 수연에게 휘둘렀다. "도망가!" 시윤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놀려 나이린에게 몸을 부딪혔다. "꺄아아악!" 목이 베일 뻔했다. 시윤의 갑작스런 공격이 아니었다면 나 이린의 손은 틀림없이 수연의 목을 잘라냈을 것이다. 수연 은 너무 놀라서 땅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녀의 목에는 날카 로운 기운에 베여 가느다란 상처가 났다. "어서 도망쳐!" 시윤은 땅에 쓰러진 채 나이린의 발목을 끌어안고는 필사 적으로 소리쳤다. 수연은 울상이 된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 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못 가! 널 두고 어떻게 가!" "제기랄! 네가 가야 나도 갈 것 아냐!" 시윤의 몸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땅에 구른 덕분 인지 옷은 흙투성이였고, 팔은 부러졌으며 온 몸이 욱신거 렸다. 나이린은 걸음을 내딛으려다 시윤이 방해가 되자 그 를 망설임 없이 걷어찼다. 퍼억! 복부를 가격 당한 시윤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졌다. "안…돼." 나이린은 다시 수도로 시윤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철판 도 꿰뚫을 위력이니 사람의 뼈와 살 정도는 종잇장이나 다 름없다. 수연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죽는 건가?' 카아앙!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났고 나이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결계를 가르고 들어온 백호가 양 팔을 교차시킨 채 메르니츠를 방패삼아 수연을 보호한 것이 다. 백호의 근육이 과도한 힘의 집중으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젠장할! 날개 달고 있는 아줌마들은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백호는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나이린의 수도를 흘려내고 는 그녀의 몸을 발로 걷어 차버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나이 린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맙소사, 맷집 좀 봐." 있는 힘껏 걷어찼는데도 몇 걸음 물러났을 뿐이다. 바위도 부숴 버리는 그의 각력이었지만 나이린에게는 아무런 타격 이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공격을 막아낸 자신의 두 팔은 엄청나게 아팠다. 백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그 때 흥미롭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바뮤즈까지?" 아진이 서서히 공중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여덟 장의 날개 가 살며시 움직이는 것을 본 백호의 얼굴이 경악으로 질려 버렸다. "…네가 아뮤릿 지나이온?" "아진." 아진은 자신의 풀네임을 짧게 끊어버렸다. "기억을 되찾은 것 같지는 않고, 루이시블이 얘기해줬겠 지?" 강자의 여유가 가득 배어있는 태도였다. 천년만의 재회, 한 때 마계를 뒤흔들었던 실력의 소유자인 바뮤즈는 초라한 인간으로 그리고 이인자의 자리를 고수했던 아진은 래픽스 샤딘의 수장으로 다시 만났다. "…메르니츠를 아직도 갖고 있다니, 정말 바뮤즈로군." 부드럽게 날개를 접으며 땅에 착지한 토돌이 감탄 섞인 목 소리로 말했다. "얼레? 꼬맹이잖…" 퍽! 명령자인 아진과 백호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자 상황 파악을 위해서 잠시 빠져있던 나이린이 갑자기 주먹을 휘둘 렀다. "방해물. 이것도. 살려?" 죽이면 안되냐는 뜻이었다. 꼬맹이라는 소리를 듣고 한바 탕 화를 내려던 토돌은 멍하니 나이린을 응시했다. 백호는 재빨리 메르니츠를 응용해서 그녀의 주먹을 막아내긴 했지 만 그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을 구르고 말았다. "…네피림이군요." 공간의 결계를 비집고 들어온 또 한 명의 타락천사, 여섯 장의 날개를 꺼내고 씁쓸하게 미소짓는 그녀는 루이시블이 었다. "여자. 죽여?" 네피림은 여성체인 루이시블을 보자 대뜸 아진에게 명령을 요구했다. 아진은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갑자기 나타난 루 이시블을 응시했다. "아니, 넌 가만히 있어." 나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진의 곁으로 가서 묵묵히 서 있었다. 루이시블은 그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수연의 부 축을 받아서 일어서고 있는 시윤에게 다가갔다. 이 묘한 대 치상태에서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수연은 시윤을 부축한 채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루이시블이 한 발 빨랐 다. 그녀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윤에게 예를 갖췄 다. "돌아온 왕께 당신의 부하 루이시블 크라제토가 인사드립 니다." 왕? 왕이라니. 시윤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보다못한 토돌이 버럭 소리 를 질렀다. "제기랄! 무슨 짓이야! 정말 반역을 꾀하는 건가. 8장군 루이시블!" "…난 스키엘님을 따른다." 천년 동안 기다려왔던 일이다.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 다. 무한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그녀가 갖고있는 단 하나 의 목표라고는 스키엘의 부하로서 남는 것이었다. 사랑은 아니었다. 순수한 동경이었고 처절한 믿음이었다. "후회는 없겠지?" 아진이 검집에서 루오나를 뽑아 들었다. 다크실버로 이루 어진 루오나는 어두운 은빛을 섬뜩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래픽스 샤딘이 둘, 그리고 그에 필적하는 네피림이 하나. 이건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루이시블의 패배는 자명한 일이 었다. 자신 또한 래픽스 샤딘이라지만 전투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백호의 지금 실력으로는 죽지 않고 도망가기도 힘들 정도였고, 수연과 시윤은 짐 덩어리일 뿐이었다. "백호씨, 스키엘을 데리고 도망쳐요. 내가 저번에 가르쳐 준 주소 있죠? 거기로 가 있어요. 곧 뒤따라갈게요." 루이시블은 백호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고는 허공에 손을 뻗어 채찍을 소환했다. 진홍색의 채찍을 몇 번 땅에 내리쳐 본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채찍이 닿은 곳은 전 부 검게 그슬려 있었다. "고통 없이 죽여주지." 그것이 최대한의 배려였다. 아진은 루오나를 두 손으로 움 켜잡고 날개를 세차게 흔들어서 루이시블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채찍은 거리가 멀수록 유리했고, 아진은 그런 이점을 단숨에 뺏어버렸다. 루이시블은 어두운 은빛을 흩날 리며 횡으로 그어지는 검을 채찍을 여러 겹으로 팽팽하게 당겨서 막아냈다. 마계의 불꽃에 담가서 만든 채찍, 웬만한 공격으론 절대 잘리지 않았고 탄성도 무척 강했다. "무기를 버리고 용서를 구해라! 목숨만은 보존토록 해주겠 다!" 아진은 검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목을 노리 고 들어갔다. 용서를 구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말, 진 심이었다. 카엘의 동생인 만큼 그녀는 아진에게도 무척 중 요한 존재였다. "난 스키엘님을 섬길 거예요." 아진의 검을 힘겹게 방어하던 루이시블이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며 채찍을 짧게 끊 어 치자 아진의 옆구리에 작은 상처가 났다. 하지만 그것으 로 루이시블은 기뻐할 수 없었다. 아진은 본 실력의 반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나이린! 널 공격한 남자를 죽여라! 토돌, 류메리아를 죽 여라!" 몰살명령이었다. 스키엘을 제외한 전원을 죽이고 그를 왕 께 끌고 가는 것이 임무였다. 한편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루이시블은 이를 갈았다. [힘이여! 섬광의 화살이여! 적을 멸하라!] 루이시블이 비어있는 왼손을 내밀고 그렇게 외치자 손바닥 에서 보랏빛 기운이 일었다. 순식간에 길다란 화살의 모양 을 갖춘 기운은 그녀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흥, 겨우 이따위 것을!" 아진은 코웃음을 치며 검으로 마법의 화살을 쳐냈다. 사악 한 달의 마력이 담겨 있는 루오나는 하위 마법에 속하는 섬 광의 화살을 단번에 소멸시켰다. [지옥의 불꽃이여!] 예전에 그의 부관이 썼던 마법과 같은 것이었다. 지옥의 불꽃을 불러내는 것, 하지만 그 위력은 아진의 것이 훨씬 강했다. -푸화아아악! 검붉은 불꽃이 대기를 짓씹으며 아진의 주위를 감쌌다. 떨 어져 있는 루이시블에게도 엄청난 열기가 전해질만큼 강한 것이었다. "죽을 시간이다." 아진은 매혹적인 미소를 베어 물었다. 꼭 죽여야만 한다 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더 이상의 동정은 없다. "저쪽은 저쪽대로 놀라고 하고, 우리도 간만의 인사를 해 야겠지?" 토돌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살기가 섞여 있는 것이 '꼬맹이'에 대해서 굉장히 유감이 많은 것 같았다. 백 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팔에 집중시켰던 메르니츠를 온몸으로 돌렸다. [갑옷] "후후, 마계 제일의 방어구라는 메르니츠가 그렇게 초라하 게 변하다니……. 가소롭구나." 실제로 초라했다. 천 년 전에 토돌이 봤던 메르니츠의 모 습은 온 몸을 보호하는 형태의 전신갑주였지만 지금은 몸의 중요 부분만을 방어하는 파츠아머의 형태였다. 백호는 몸의 각 관절을 풀어주며 말했다. "꼬맹이 주제에 말이 많아." 퍼억! 토돌의 얼굴이 처절하게 일그러지는 순간, 백호는 엄청난 타격을 받으며 퉁겨나갔다.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면한 그는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확인했다. "망할, 네피림인지 뭔지!" "명령. 받았다. 너. 죽인다." 언어구사능력이 떨어지는 나이린은 그렇게 뚝뚝 끊어서 말 했고, 아진의 명령을 기억한 토돌은 몸을 돌려 수연을 찾았 다. "흥! 여자에게 당하면 남자 체면이 뭐가 되냐!" 나이린은 말 없이 백호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내질렀다. 부 우웅!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백호를 위협했고, 그것을 막 는 것이 바보짓이라는 걸 깨달은 백호는 몸을 비틀어 피해 버렸다. "내 안에 잠든 귀신이여, 나와라! 나와서 적을 쓰러뜨려 라!" 백호의 눈에서 흑색 안광이 폭사되었다. 윤회의 사슬에 묶 여있는 그의 혼이 백호의 부름으로 깨어나서 힘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얇은 검은 색 기류가 백호의 몸을 감쌌다. 불완 전하나마 타락천사의 힘을 꺼냈으니, 어느 정도의 대응은 가능할 거라는 게 백호의 계산이었다. "힘. 개방." 나이린은 물끄러미 백호를 바라보다가 -눈동자가 없어서 시선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무심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제 어되어 있던 힘이 족쇄를 풀고 미친 듯이 자신의 존재를 알 렸다. 그것은 백호가 상상한 이상의 힘이었다. "…씨팔. 더럽게 강하잖아." 백호는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땅을 강하게 차고는 공중으 로 뛰어 올랐다. "흐아아아압!"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원심력을 이용하여 발뒤꿈치로 그녀 의 어깨를 노렸다. 거목이라도 간단히 꺾어버릴 정도의 힘 과 스피드가 실려 있었지만 나이린은 그것을 단지 손날로 막아내고는, 팔꿈치로 백호의 비어있는 등을 찍어눌렀다. "크흑."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천사간에는 단지 한 장의 날개가 많더라도 힘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며, 현재 백호의 힘은 4 익 천사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다. 두 쌍의 날개를 지녔 지만 래픽스 샤딘에 버금가는 힘을 내는 네피림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제기랄, 뭐가 이렇게 쎄!" 백호는 핸드스프링으로 몸을 일으키고 다가오는 나이린에 게 뒤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빛줄기로 보 일 스피드였지만, 나이린은 그것마저 가볍게 피했다. 아니, 마치 학습하기라도 하듯 그것을 피하는 동시에 백호를 뒤 돌려차기로 날려버렸다. "크윽, 정말 강해." "널. 죽인다." 나이린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쓰러진 백호의 가슴팍을 발로 짓밟았다. "…미녀의 발 밑에서 죽고 싶다는 변태적인 꿈은 없었다 구." 콰직! 나이린은 백호가 시끄럽게 떠들자 그의 가슴에 올려 놓았던 발을 약간 들었다가 세차게 내리찍었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느낌과 함께 백호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피를 토했다. "…성격도 …화끈하……."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당했다. 천 년 전의 바뮤즈였 다면 쓰러져 있는 것은 나이린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엄 청나게 강해졌다고 자신했던 백호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무 기력함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니츠가 아니었다면 벌 써 죽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를 짓밟기 위해서 발이 허 공으로 올라가는 순간, 백호는 온 힘을 모아서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을 후려쳤다. 쓰러지진 않았지만 나이린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잠시 휘청거렸다. 백호는 틈을 놓치지 않 고 몸을 굴려서 그녀에게서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거 볼수록 매력 있는 여잘세. 한번 다시 해 보자구!"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백호가 실없는 농담을 했다. 가슴을 짓밟혀서인지 계속해서 피비린내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백 호는 이를 악물고 피를 삼키더니 몸에 힘을 돌리면서 나이 린에게 달려들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무수한 잔영을 남 기며 그의 주먹과 발이 나이린을 공격했다. 무엇 때문인지 는 몰라도, 아까보다 훨씬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나이린은 속도를 높여 그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팟! 팟! 팟! 공기를 가르는 느낌이 한층 더 가뿐해졌다. 백호는 입가에 약간의 미소까지 띄운 채, 그녀를 몰아 붙였다. '귀신'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갈수록. 강해진다." 나이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가오지 마!" 뼈가 부러져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시윤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적대감으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연을 죽이려는 자,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공포는 이미 떨쳐 낸 지 오래였다. "류메리아를 넘겨라, 스키엘." 토돌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십대 소년의 외모를 하고 있는 그였지만, 미소는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여섯 장의 날 개가 위압적으로 펄럭였다. "스키엘이라고 부르지마. 난 시윤이야!" 부정했으니까. 이제 스키엘은 없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으 니까. "…시윤? 웃기는 이름이군." 토돌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오른손을 쫙 펼쳤다. "천년동안 도대체 넌 뭘 한 거냐." 그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색으로 빛나는 다섯 개의 구슬이 떠올랐다. 시윤은 불안감을 느끼고는 떨고 있는 수연을 품 안에 끌어안고 말했다. "영문모를 소리 지껄이지 말고 우릴 놔줘." 토돌은 붉은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 끝만을 움직 여 미소지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시윤은 무슨 얘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이 들은 누구이며 왜 자신을 공격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스키 엘이라는 이름도, 천 년 만에 본다는 말도 그의 관심사 밖 이었다. 그저 빨리 이곳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걸 모두 막아낸다면, 그냥 보내주지." 거짓말이라는 것 시윤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시윤이 막 아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설령 모든 공격을 막아낸 다 하더라도 수연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는 빙긋 웃으며 시윤의 팔을 가리켰다. "오른팔." -쐐애애액! 토돌이 중얼거리자 붉은 구슬 중 하나가 시윤의 오른팔을 향해 날아들어 그대로 살과 뼈를 꿰뚫어 버렸다. "사실, 죽이지 말라고 했지. 상처 입히지 말라고는 안 했 거든." 그는 그렇게 웃으며 말하고는 다시 '왼팔'이라고 구슬에게 명령했다. 네 개의 구슬 중 또 하나가 시윤의 왼 팔을 관통 했다. 양쪽 팔 모두 뼈가 부서진 중상이었다. 설령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에 정상인으로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크아아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시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 통에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고, 수연은 깜짝 놀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출혈이 심하다면 쇼크사로 죽어 버릴 수도 있다. "왼쪽과 오른쪽 다리." -쐐애애애액! 양쪽 허벅지가 모두 관통 당했다. 시윤은 땅에 널브러진 채로 사지에서 피를 꾸역꾸역 쏟아내고 있었다. 토돌은 고 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시윤을 비웃더니 수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머지 하나는 네 심장이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토돌, 15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 의 모습이라지만 본질은 악마였다. 그는 마지막 하나 남은 붉은 구슬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유를 부렸다. 시윤은 벌 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핏덩이를 토해냈다. "하아… 하아… 수연이는… 보내 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서 턱이 덜덜 떨렸다. 피를 너무 많 이 쏟은 탓인지, 시야가 흐려지고 체온이 떨어졌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시윤은 죽을 것이다. 아니,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100% 폐인이 된다. 시윤은 입안에 남아있는 피를 뱉어낼 힘도 없어서 비릿한 냄새를 참고 목으로 다시 넘겼 다. "…수연이만… 제발 살려줘." 아무 말도 못하고 시윤의 상처를 싸매던 수연이 비명을 질 렀다. "제발 그만해! 차라리, 차라리 내가 죽을게!" 이렇게 고통 받는 모습을 어떻게 계속 보라는 거지? 수연 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서 시윤의 팔을 강하게 묶어 지혈했다. "선택해. 누가 죽을래?" 왕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토돌은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제멋대로의 생을 살아가는 타락천 사, 그는 이단아 중에서도 최악의 성격을 지닌 자였다. 시 윤은 흐려져 가는 의식을 다잡으며 힘을 짜내어 외쳤다. "내겐 뭘 하든 상관없으니 수연을 보내 줘!" 그게 마지막이었다. 시윤은 더 이상 쥐어짤 힘도, 버텨낼 정신력도 없었다. 억지로 뜨여있던 시윤의 눈이 감겼다. * * 허무의 공간, 그 안에 스키엘이 있었다. 짙은 피로에 젖은 얼굴로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그가 말했다. "…선택은?" 시윤의 영혼이 대답했다. "난… 인간이야." 결국 그런 건가. 스키엘은 씁쓸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다른 존재가 되라는 건 아니었어.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됐을 텐데……." 그녀를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진 않다. 그래서 시윤은 피한 것이다. "눈을 뜨고 봐. 네가 지키려던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 * * 묵직했다.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시윤은 부러진 갈비 뼈 위에 무언가가 올려져 있는 것을 느꼈다. 뼈가 뒤틀리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시윤은 너무나 졸음이 와서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이 그를 억지로 눈뜨게 했다. "…시윤아, 깨어났구나."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시윤의 위에 포개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그녀는 귀엽게 웃으며 시윤의 입술 에 입을 맞췄다. 오랜만의 입맞춤, 달콤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자 시윤은 통증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몸 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스키엘, 괜찮습니까?" 어느새 루이시블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돼서 그들을 가로 막고 있었다. 채찍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아진의 접근을 막 는 루이시블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허벅지에 긴 칼자국이 그어져 있었고, 볼도 길게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염병! 앞으로 여자가 연약하다고 하는 새끼 있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백호가 루이시블의 옆으로 자리를 잡으며 이를 뿌득 갈았 다. 역시 만신창이였다. 메르니츠가 몸을 감싸고 있긴 했지 만, 내부까지 파고드는 공격까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불완전한 메르니츠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백호는 입가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검은 핏물을 거칠게 닦아내면서 입을 쉴새없이 움직여 투덜거렸다. 놀랍게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루이시블의 얼굴에도 눈물 자국이 있었다. "…다행이야. 널 볼 수 있어서… 시윤아." 시윤이 그들의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는 동안, 수연이 다시 그에게 입맞추며 말했다. 초점이 서서히 풀리 는 그녀의 눈, 그리고… 따뜻하게 시윤의 복부를 적시고 있 는 액체. 불안했다. 팔이 부서지고 다리가 부서졌건만 시윤 은 필사적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내가 살아온 동안… 널 만났을 때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 었어." 수연의 생명이 꺼져간다. "그러니까… 정말 고마워." 그녀의 몸을 타고 내려와 시윤의 복부를 적신 액체는 그대 로 땅바닥을 타고 흘렀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선홍색의 따 뜻한… 피였다. "아… 아…." 말도 안 돼! 시윤의 상처도 곧 죽는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 할 게 없을 정도로 중상이었지만 지혈만 잘 한다면 살수도 있다. 하지만 수연은 복부를 관통 당했다. 끈적거리는 피가 시윤의 몸을 적셨다. 가늘게 숨을 쉬던 그녀는 더 이상 견 디기 힘들었는지 눈을 감았다. "…시…윤아." "수, 수연아! 죽지마! 죽으면 안 돼!"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시윤은 몸을 움직이려고 발악을 하며 그녀를 깨우려고 커다랗게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녀 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랑…한다고… 해줄…래? 마지…막으로 듣고 싶어." 갈수록 그녀의 음성은 작아졌다. 띄엄띄엄하고 거의 듣지 못할 정도로……. 내장에 피가 고인 덕분에 목까지 메인 데 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위의 전투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수연의 한마디 한마디를, 그리고 움직임 하나까지 시윤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널 사랑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도도한 태도로 시윤을 놀라 게 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난 그쪽에 앉아있는 시윤이라는 애가 더 마음에 든다고 했어. 왜 한 번 더 말해줄까?> 그 한마디로 시작되었었다. <놀리는 거라면 그만둬.> 화를 내는 날 보고 웃어주었고 내 손을 잡아주었어. <남자친구 후보.> 퉁명스럽게 행동했지만, 솔직히 기뻤다. <나랑 사귈래?>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어. 날 원했어. <장래의 시부모님들께 인사드리러 가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이라고 화냈지만, 기뻤다. <나 책임져.> 그녀는 귀엽게도 자기 순결을 내가 뺏었다며 책임지라고 했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책임지고 평 생 함께 하고 싶었지. <그거 알아? 혼자 보내는 밤은… 너무 힘들어. 집에 돌아 가도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나한테 밥 한끼 차려줄 사 람. 내가 밥이라도 한번 차려줄 사람. …없거든.> 외로워했고, 날 원했는데… 그랬는데……. 그래서 나도 너 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했는데……. "죽지마, 제발. 응? 수연아 죽지 마. 장난치는 거지? 일어 날 수 있는 거지?" 눈물로 범벅이 된 시윤이 울먹였다. 수연은 미소지으며 간 신히 들고 있던 고개를 시윤의 어깨에 떨구었다. "…고…마…워." 숨이 끊겼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느껴지던 심장의 움직임도… 이제는 없었다. 툭. 툭. 비가 다시 내렸다. 먹구름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떨어 지더니, 그것은 이내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으아아아!" 미친 듯한 절규. 시윤이 수연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하나라 면, 수연 또한 시윤에게 남은 단 하나의 존재였다. "흥, 벌레의 외침인가." 토돌이 경멸스러운 눈으로 시윤을 바라보았다. 루이시블은 아진과의 대립으로 인해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백호는 아까보다 훨씬 향상된 힘과 스피드, 그리고 경험의 차이로 나이린을 옭아매고 있었지만 역시 치명적인 공격은 하지 못 했다. 토돌은 무심한 눈길로 둘의 싸움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고 말했다. "하나는 죽였으니, 약속대로 넌 살려주지. 크큭, 설마하니 몸으로 막을 줄이야." 보지 못했지만 눈에 선했다. 정신을 잃은 자신에게 날아오 는 공격을 수연이 대신 맞은 것이다. 나 때문에 죽었어. 내가 죽었다면 수연은 살 수 있었어.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내 탓이야! "으아아아!" 시윤의 눈을 타고 붉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곧 빗물에 씻 겨서 얼굴에 남지는 않았지만 시윤은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 리고 있었다. "스키엘-!" 빗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는 쉽게 묻혀버린다. 하지만 시윤 의 외침은 그대로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영혼이 쥐어 짜내 는 피의 외침이었다. "너와 하나가 되겠어! 널 인정하겠어!" 우드득. 시윤의 부서진 뼈 파편들이 서로에게 달라붙어서 최소한의 형태를 복구했다. 시윤은 지옥에서 살아온 악귀 같은 모습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우드득. 피 에 절어있는 시윤은 빗물로도 씻겨지지 않았다. 싸우고 있 던 모든 이들이 멈췄다.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나 이린 마저도. "…수연아." 시윤은 망가진 몸을 움직여 쓰러져 있는 수연의 시체를 끌 어안았다. 차갑기만 한 몸, 이제는 살아 움직일 수 없는 그 녀. 너무나 따스했던 존재였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자신 을 진심으로 대해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준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주었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그녀는 미소짓고 있다. 시윤도 미소지었다. "…다시 만나자." 시윤은 수연의 차디찬 입술에 입맞추고는 그녀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스키엘! 대답해!" <…후우, 겨우 선택했나.> "내게 싸울 힘을 줘." <이미 너에게 있어.>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각성했을 때 이미 모든 힘을 깨어나 있었다. "모두 죽일 거야." 그녀를 괴롭게 한 모든 것들을 위한 파멸의 힘! 한참동안 스키엘의 목소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 리가 다시 들렸다. <넌 나와 같구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시 윤은 결국 수연을 잃고 말았다. 이젠 피하지 않으리라. 시 윤은 이를 뿌득 깨물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곳 이 없어서 근육이 모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힘이여." 처절한 힘의 각성, 시윤은 스키엘이 전해준 모든 것을 방 출하여 몸에 돌렸다. 우지직, 우지직. 기괴한 소리를 내며 등이 갈라졌고 새빨간 속살이 드러났다. 이건, 천사의 힘도 악마의 힘도 아니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흩어지지 않고, 허공에 머물러서 일정한 형 태를 취했다. "저, 저게 뭐야!" 몸 속의 피가 모조리 뿜어져 나왔다고 생각될 만큼 커다란 날개였다. 피는 시윤의 등을 중심으로 '날개'가 되어갔다. 각기 2미터 이상의 길이였고, 그것들은 너무나도 붉었다. 비가 끊임없이 날개를 두드렸지만 피와 물은 전혀 섞이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온몸의 혈액이 모두 역류했다. 엄청난 마기(魔氣)가 시윤 을 중심으로 폭풍같이 터져 나왔다. 반경 50미터를 감싸고 있던 아진의 결계가 시윤의 울부짖음만으로 깨져버렸다. "…어째서! 어째서 왕의 힘이 느껴지는 거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토돌은 뒤로 몇 걸음 물러 났다. 시윤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미친 듯이 폭사되었다. 이것은 죽을 당시의 스키엘이 아닌, 그의 전성기 때의 힘에 맞먹었다. "정말로 돌아온 건가." 아진이 루오나를 늘어뜨리면서 힘없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피의 계승을 하여 휴즈에게 모든 것 을 넘겨주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스키엘의 영혼에는 아무런 힘이 없어야 한다. 허나, 지금 시윤이 분노하여 터뜨리고 있는 힘은 틀림없이 단신으로 천계의 결계를 부수고 들어가 던 스키엘의 것이었다. -왜 죽였어. 시윤은 포효를 멈추고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 된 눈을 들 어 토돌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인간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왜 죽였어! 콰앙! 시윤이 소리치자 대기가 흔들리고 땅이 울부짖었다. 모든 존재가 공포에 질려서 떨고 있었다. 천 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은 암흑의 제왕. 천계를 단신으로 상 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패자! -왜 죽였어! 시윤의 한 쌍의 날개가 좌우로 쫙 펴졌다. 피로 이루어진 진득한 날개,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머리카락. 팔과 다리에 입었던 상처들이 급속도로 빨리 아물어 갔다.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으아아아악!" 반복되는 시윤의 고함은 그 자체로 토돌에게 타격을 주고 있었다. 영혼을 울릴 정도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는 시윤,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지?" 잔뜩 주눅이 든 백호는 슬며시 루이시블에게 다가갔다. "…울고 있어요."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고 있다. 빠직, 시윤이 발을 내딛자 잘 포장된 길에 깊은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는 토돌에게 다 가가며 다시 말했다. -널 죽이겠어. 아진은 루오나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고는 있는 대로 힘을 끌어올렸다. 검은 기운이 그의 등가에 날개들 사이로 모였고, 날개는 여덟에서 아홉 장으로 늘어났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끌어낸 것이다. [루오나 다즌 카오드릭!] 아진의 모든 힘이 검으로 몰려들었다. 대지를 적시던 빗방 울이 아진의 몸을 피하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강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변 기류 자체가 뒤바뀌고 있었다. 이곳은 도심의 한 가운데, 만약 여기서 아진이 모 든 힘을 폭발시킨다면 이 일대는 폐허가 되 버릴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제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시윤은 지금 토돌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무방비상태였다. 아진은 날개를 한번 퍼덕여서 하늘로 날아 올랐다. 피해를 줄이고 타격점을 하나로 모으려면 위에서 내리 찍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인간계에서 쓰는 힘은 마계의 반 밖에 안 되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천사로서 각 성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 으니까. "죽어라!" 아진은 모았던 힘을 한꺼번에 격발시켜 시윤에게 터뜨리려 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이없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나 이린이 양손에 푸른빛을 모아서 루오나의 힘이 터져 나오기 직전에 날을 잡아버린 것이다. 치이이익, 칼날을 잡은 두 손이 뜨겁게 가열되었다. "무슨 짓이냐!" 아진은 이를 갈며 네피림에게 외쳤다. 나이린은 네피림이 었고, 천사나 타천사들이 받는 인간계의 힘의 제약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나의. 왕. 각인. 완료." 맙소사! 아진은 망연자실해서는 검을 놓칠 뻔했다. 지금 시윤이 뿜어내는 기운은 분명 마계 제왕의 것이었고, 나이 린은 그것을 느끼고 자기 멋대로 각인을 해버린 것이다. 그 러니 자신의 주인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존재는 모두 막을 수밖에……. 아진은 재빨리 생각을 바꿨다. "토돌, 후퇴한다!" 상황은 한순간에 역전되었다. 엄청난 위력을 지닌 네피림 이 시윤을 주인으로 선택했고, 시윤은 왕으로서의 힘을 각 성했다. 겁에 질려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토돌은 그 말 을 듣고는 반색하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꺼져라. 실패작." 아진은 힘을 거둬들이고 검을 세차게 흔들어서 나이린을 떨쳐냈다. 손해본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스 키엘이 정말 원했던 류메리아만은 그들의 속으로 죽인 것이 다. -어딜 가겠다는 거냐! 이곳이 너희들의 무덤이다! 시윤도 대지를 박차고는 핏빛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 아 올랐다. 아진은 손에 마력을 집중하여 전격을 소환하여 시윤에게 날렸다. 시윤은 빗속에서 더욱 증폭된 전격의 창 을 맨손으로 잡아내었다. 뇌전(雷電)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몸부림 쳤고, 시윤은 그것을 콱 움켜지어 가루로 만들 었다. -어딜 가는 것……. 아진의 마법은 어디까지 도망가기 위한 미끼였다. 그들은 마법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날아가 버 린 것이다. 그리고, 시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지면을 향 해 추락했다. '내가 널 돕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스키엘의 음성이 멀어져갔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스키엘은 영혼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피로 이루어진 시윤의 날개는 몸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 다. 너무나 강했던 기운도 그 위압감도 한 순간에 사라져버 렸다. "스키엘!" 루이시블이 지친 몸으로 시윤을 받기 위해서 뛰었지만 그 보다 나이린이 한발 빨랐다. 그녀는 추락하는 시윤의 몸을 부드럽게 받아서 땅으로 착지했다. "당신들. 주인. 동료?" 주인이라는 단어에 루이시블은 깜짝 놀랐다. 아까 아진의 공격을 막았던 이유가 궁금했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네피림은 시윤을 자신의 주인으로서 영혼에 '각 인'시킨 것이다. "그래요. 우린 그 분과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나이린은 경계를 풀었다. 시윤을 위해서 싸우는 것을 이미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마지막 확인을 거친 것이다. 쏴아아아. "…내가 늦었구나." 갑자기 쏟아져 내린 비 덕분인지 안 그래도 인적이 뜸한 골목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크리스는 차갑게 젖어드는 겨울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 다. 핏기가 전혀 없어서 새파랗게 변한 얼굴, 초점을 잡지 못해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시선,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수연의 시체가 있었다. "운명… 거스를 수 없을까?" 크리스는 수연의 감기지 못한 눈을 손으로 살며시 쓸어 내 렸다. "…난 바보일지도 몰라." 흉하게 뚫린 수연의 복부에 손을 가져간 크리스는 잠시 고 민했다. "이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처에 맞닿은 손이 은은한 노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면. 피할 수 없다면." 빛은 점점 거세지더니 찬란한 금색으로, 그리고 시리도록 깨끗하고 차가운 은색으로 점점 물들어갔다. "…속여보자." 상처받는 건 나 하나로 족해. * * "웃기는군." 회갈색의 독수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억을 읽어내던 휴 즈는 말한 것과는 달리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아진 의 힘으로 만들어진 연락용의 마법 생물체였다. "각성이라니, 꽤나 발버둥치는군." 휴즈는 독수리를 창 밖으로 날려보내고는 옥좌에 걸터앉았 다. 옥좌 앞에는 두 명의 타천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래픽스 샤딘의 정식 복장, 금속임에 도 불구하고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갑옷과 데드론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진한 회색의 망토를 걸 치고 있었다. "너희 둘이 가야겠다." 고개를 깊이 조아리고 있던 무온이 놀란 나머지 얼굴을 들 어 휴즈를 바라보았다. 곧 자신의 행동이 무례하다는 걸 깨 닫고 급히 머리를 숙이긴 했지만, 그는 보았다. 희열에 가 득 찬 웃음을 잔인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네피림이 스키엘에게 붙었다는구나." 이번에는 카엘이 놀랐다. 극비리로 진행되던 네피림 프로 젝트, 프로토 타입이 완성된 지 얼마 안된 것으로 알고 있 었는데 벌써 활동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스키엘의 수하로 들어갔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진이… 사용한 것입니까?" 아진이 받았다는 임무, 스키엘을 사로잡고 주위의 모든 인 물을 죽여 없애라는 것이었다. 토돌을 데려간 것뿐만이 아 니라 그 와중에 네피림까지 시험해 본 것이다. "그래, 아진에게 주었더니 그 모양을 만들었구나." 휴즈는 전체적으로 스키엘과 닮아 있었다. 물론 환생한 모 습이 아니라, 천년 전 마계의 군주로 군림하던 때의 그를 말한다. 약간은 유약하게도 보이는 선이 가는 얼굴, 연보라 색의 눈동자, 새까만 흑발. 하지만 그와 그의 형인 스키엘 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하지만 네피림에게는 '왕의 피'에만 각인할 수 있도록 금 제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는……." 대화에 끼어 들지 못하는 무온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카엘과 아진이 비밀리에 인간계를 갔던 것은 알고 있었지 만, 네피림을 만들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힘을 위해서 는 무엇이라도 불사하는 휴즈에게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 다. 래픽스 샤딘 중 한 명인 자신도 모를 정도로 일을 진행 하는 치밀함, 그는 틀림없이 천계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 는 것이다. "하하하. 그래서 우습다고 하지 않았더냐. 인간의 몸으로, 저급한 천사의 영혼으로 왕의 혈통임을 증명하려 들다니. 그것도 자기 여자가 죽었다는 이유로. 하하핫!" 휴즈는 배를 잡고 웃었다. 스키엘은 이제 끝났다. 천천히 조금씩 힘을 모았더라면 그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모른다. 아니, 시간만 있다면 예전의 힘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환생한 류메리아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의 영혼을 버려가며 힘을 짜낸 것이다. "…그럼 그는 소멸되는 것입니까?" 상황을 눈치 챈 카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아니겠지. 아직 인간으로서의 영혼이 남았으니까." 스키엘과 시윤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였다. 스키엘의 영 혼이 소멸됐다 하더라도 몸의 주인은 시윤이었다. 마계 역 사상 따를 이가 없던 강자인 스키엘은 이제 하급 천사의 몸 을 가진 인간인 것이다. "류메리아, 루이시블, 바뮤즈 … 이제 아홉이 남았다. 스 키엘의 저주가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후후훗."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아보며 휴즈가 말했다. 루이시블의 이름을 말할 때 그는 카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카엘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데드론의 가죽 으로 된 두터운 회색의 망토도 그의 떨림을 감춰주진 못했 다. "걱정되는 건가? 동생이?" 카엘이 흠칫 놀라더니 동요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입을 열었다. "루이시블은 배신자일 뿐입니다. 혈육이라고 생각지 않습 니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목소리였다. 휴즈는 만족스러운 미 소를 짓더니 시선을 카엘의 허리춤으로 두었다. "그럼 그건 뭐지?" 카엘의 허리 양쪽에는 얇고 긴 검 두 자루가 검집에 넣어 져 매달려 있었다. 무온도 휴즈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둘로 늘어난 카엘의 검에 대해서 의아함을 표했다. "하나는 루이시블의 것이 아닌가?" 물음이 아니었다. 확인이다. 휴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 면서도 카엘의 속마음을 들쑤셔 놓았다. "…맞습니다." 슬퍼해선 안 된다. 힘들어해서도 안 된다. 그녀는 이제 적 인 것이다. 휴즈는 빙긋 웃더니 옥좌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카엘에게 다가갔다. "무온과 함께 가라. 너희들 휘하의 녀석들을 인간계에 데 려가도 좋으니, 가서 확실히 끝내. 혹시 있을지 모를 카마 세이의 움직임을 주시해라. 언제 봉인을 풀고 인간계에 굳 혀놓은 우리들의 입지를 뒤집으려 할지 모른다." 카엘의 눈에 잠시 원망스런 기색이 어렸다. 찰나지간이었 지만 휴즈는 그것을 읽었다. "후후, 좋다. 네가 스키엘을 잡아온다면, 루이시블을 연옥 에 1년 동안 가두는 것으로 죄를 사하도록 하지." 반역자에게 이 정도의 선처는 없었다. 억눌렸던 카엘의 감 정이 조금씩 요동쳤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다." 10. 회생 또 다시 암흑. "또 이곳이라니……." 이제는 안다. 지금 눈 뜬 이곳이 어디인지, 왜 여기서 깨 어난 건지……. 시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 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꿈속이다. "…스키엘, 거기 없는 거야?" 운명이란 족쇄의 파편들, 그리고 부서져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마음의 벽. 또 다른 자신인 스키엘은 이제 없다. 시윤은 바닥에 널려있는 작은 사슬조각을 하나 집어들었다. 시리도록 차가웠고, 너무나도 무거웠다. "네가 남긴 것은 운명뿐……."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일그러진 운명. 콰직, 시윤이 가 볍게 손을 움켜쥐자 사슬은 간단하게 구겨졌다. "피할 수 없는 거였어?" 뜨끈한 핏물이 시윤의 움켜쥔 손에서 흘러나왔다. 아니, 정확히는 사슬에 남아있던 피였다. 천년에 걸쳐서 슬픔과 증오가 어우러져 배어버린 스키엘의 것이었다. "…차라리 네가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천년동안이나 기다렸으면서도 그는 미련 없이 떠나갔다. 같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만 하는 그 고통을 알고 있으니까, 길고 긴 시 간동안 슬퍼했으니까… 시윤을 배려해준 것이다. 넌 나처럼 아파하지 말라고. 이런 슬픔 다신 겪지 말라고. "네가 틀렸어. 스키엘. 내겐… 그 기회조차 과분해." 시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줬다. 같은 영혼을 지녔으면 서도 다른 존재인 그는… 마계의 제왕이었으며 천년이란 시 간을 뛰어넘어서 다시 돌아온 스키엘은, 단지 인간에 불과 한 시윤의 소원을 들어줬다. "…늦었어." 둘 모두를 구할 수도 있었다. 스키엘과 몸을 공유할 수 있 었다. 목숨보다도 중요한 수연을 살릴 수도 있었다. 아파하 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이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내게 주어진 운명은 너무나 과분했어." 변명이야. "흐흑. 뭐라고 대답 좀 해보란 말야!" 아무도 없다. "도대체 왜 다들 날 떠나가는 거야! 아빠, 엄마, 친구들, 수연, 그리고 너 스키엘까지!" 혼자 남았다. 시윤을 지탱해주던 것은 수연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외로 워할 때 스키엘은 나름대로 그를 위로했었다.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뭘…어떻게 해야…해?" 지겨울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울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은 지금도 목이 메이고 슬퍼서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슬퍼하지 말라고? 차라리 미쳐버리라고 하지 그래? "왜… 가는 거야. 왜 다들… 가는 거냐구." 지독한 정적, 시윤이 입을 다물면 주위는 조용해진다. 아 무도 없으니까. 혼자 있으니까, 외로워서 더더욱 큰소리로 말하게 된다. 시윤은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서 있을 힘 이 남아있질 않았다.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고, 아끼는 연인 이 죽었다. 그리고 시윤의 일부분마저도 그의 잘못으로 떠 나갔다. '이제 더 잃을 것은 없어.' 시윤의 눈에서 서서히 물기가 말라갔다. 한바탕 울고 나자 한기가 몰려왔고, 시윤은 무릎을 껴안고 몸을 움츠렸다. '추워.' 몸이 떨린다. '왜 난 혼자 남은 걸까.' 이대로 잠든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원하는 바였다. 시윤은 지독한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너무나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 막 잠 이 들려는 찰나, 심연의 늪으로 빠져들려는 그 때, 따스한 기운 한줄기가 시윤의 몸을 어루만졌다. '따뜻하다.' 아직도 남은 게 있었던가. 시윤은 의아함을 느끼며 눈꺼풀 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탄성을 터뜨렸다. "…수연아." 아름답게 세공 된 루비반지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시윤에 게 온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커플링이라면서 그녀가 끼워줬 던 반지, 그리고 했던 그녀와의 첫 키스……. 아직도 그 아 찔했던 순간은 잊혀지질 않는다. 행복했었다. "아직… 죽지 말라는 거니?" 마음이 죽어 없어지면 육체만 멀쩡할 리는 없었다. 시윤이 이곳에서 잠든다면 그것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이 다. 반지는 얼음처럼 차가워진 시윤의 몸에 계속해서 온기 를 주입시켰다. 수연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거야?" 반지의 은은한 붉은 빛이 천천히 깜빡였다. '죽지마' 반지 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 생각했다. "후우, 넌 도대체 못 말리겠구나." 마치 반지가 수연이 되기라도 한 듯 시윤은 싱긋 웃으며 반지를 쓰다듬었다.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아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방금 전까지 외로워서 울었던 게 거짓처럼 느 껴졌다. "모두가 떠난 건 아니었구나." 넌 아직도 내 곁에 있구나. 시윤은 얼굴에 묻어있는 눈물 들을 닦아내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죽어서도 곁에 서 응원해주는 수연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구나." 이제 이 어둠에서 나가야 할 때이다. "너와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또 스키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슬픔을 견디지 못해서 만들어낸 공간. 이제는 나가야 할 때다. "그러고 보니, 스키엘 네가 준 인연도 있구나." 시윤은 쓸쓸하게 웃었다. 자신을 스키엘이라고 부르며 나 타난 금발의 타락천사, 그리고 인간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 스키엘이 남기고 간 인연들이었다. 아마 그가 말했던 조력자는 그들이리라. "투정은 그만 할게. 이제는 내가 모두를 지키겠어." 부르르. '공간'이 진동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투정부리며 울고 있어선 안 된다. 시윤은 결심했다. 어린아이이기를 포기하겠어. "내가… 모두를 지키겠어." 우드득. 시윤을 중심으로 공간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기묘한 소리가 나며 수없이 많은 새하얀 금이 그어졌다. '이게 마지막 선택이야. 더 이상의 후회는 없어.' 어리석었다. 바보 같았다. 그래서 잃었다. 현명치 못했다. 그래서 울었다. 모두를 잃었다. 이제 선택했다. 내가 선택했다. "내가 지키겠어." 시윤의 읊조림과 함께 벌집처럼 갈라진 공간은 산산이 부 서져나갔다. <변해야만 한다면… 꼭 그래야 한다면…> "더 빨리 뛰어요!" 루이시블은 비가 고인 웅덩이를 간단히 뛰어넘으면서 말했 다. 백호는 벌써 숨이 찼지만 루이시블의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아서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시체에 가까운 남자를 업고 있다지만, 그래도 초인적인 체력을 자랑하던 백호였다. 그 러나 루이시블은 그의 상식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여러모 로. "제길!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야." 백호는 이를 갈며 폐의 고통을 무시하고 말했다. "그냥 날아가면 안 돼?" 루이시블이 달리는 방향에는 2미터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씨바." 환자까지 업고 있는 자기는 어쩌란 말인가. 백호가 투덜대 며 담을 어떻게 넘어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 너머로 루이 시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기다려요. 차 가져갈게요." 인간을 둘이나 달고 비행한다는 것, 사실 그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진과 토돌이 착각을 하고 도망 간 지금, 작은 힘이라도 드러내며 이동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들이 혹시라도 시윤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돌아 온다면 곤란했다. "후아, 저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니까. 회색, 넌 어떻게 생 각 하냐?" "……." 백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 소리 없 이 그들을 뒤쫓아 온 나이린은 가만히 백호를 응시했을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약간 시간이 지나서야 나이린은 고 개를 갸웃거렸다. "회색?" "너말고 또 있냐?" 눈동자 없는 눈은 회색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힘을 최대한 감추느라 사라져버린 날개도 회색이었다. 피부도 창백하다 못해, 죽어버린 듯한 회색이다. 유일하게 다른 색이 있다면 새까만 흑발 뿐. 옷은 백호의 주먹질로 군데군데 찢어져있 었다. 나이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외모 때문에 그렇 게 불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이름. 나이린." "알았어, 회색. 내 이름은 백호야." 나이린은 고개를 다시 한 번 갸웃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끄 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섬뜩한 외모의 여자가 어 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백호는 낄낄거 리며 웃었다. "백호. 학습능력. 없다." "……." 백호는 고민했다. 저것이 회색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복수 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학습능력 제로의 남자로 인식 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바보취급 당한 것은 확실하지만. 무안해진 백호는 시윤을 길바닥에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입 에 물었다. 쌉쌀한 담배연기가 폐부 깊숙이 몰려들었다. 금 이 간 갈비뼈가 아려왔다. "넌 왜 따라오는 거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묻지도 않고 있었다. 나이린은 분명 히 자신을 공격해서, 자칫하면 죽일 뻔했다. 실제로 지금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고 있었 다. "내. 주인. 데려가니까." "주인?" 백호가 반문하자 그녀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윤을 가리켰다. 사지의 관절이 모두 박살났고, 주먹보다 조금 작 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게 기적 으로 보일 정도였다. 백호가 시윤의 상처를 살피고 있을 때, 길 반대편에서 하얀 색 외제 승용차가 나타났다. "빨리 타요."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루이시블이었다. 차로 이동하자고 하더니, 실제로 그녀 소유의 승용차가 있었던 것이다. "…운전면허가 있었어?" "후후, 인간계에서 생활하려니까 필요하더라구요." 그녀는 웃으며 말하더니 면허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루 이시블 크레제토' 라는 이름이 당당하게 찍혀 있었고, 그녀 의 증명사진이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써 있 는 주민등록 번호의 앞자리는 백호보다 1년 빨리 태어난 것 으로 되어 있었다. 악마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없었다. 인 간계에서 확실한 신분까지 갖고 있는 그녀였다. "스물 다섯 살?" 물론 가짜. 그 때 침묵을 지키고있던 나이린이 입을 열었 다. "주인. 몸이. 식어간다." "뭐?" 루이시블은 놀라서 시윤에게 달려갔다. 아까 폭주했을 때, 뼈가 저절로 맞춰지고 지혈이 되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뼈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는 하나 산산조각이 난 것은 그대로였고, 피가 멈췄으나 찢 어진 살점은 아물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운전할 줄 알아요?" 백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치잇, 할 수 없지. 네피림, 네가 치유시킬 수 있어?" "난. 공격. 마법. 밖에." 갈수록 태산이었다. 루이시블은 재빨리 손에 힘을 모아 허 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결계(結界), 힘의 흐름을 막아라] 자주색의 진은 그대로 그와 시윤의 몸을 감쌀 정도로 커졌 다가 사라졌다. 힘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소규모 결계가 발동된 것이다. 그녀는 결계를 치자마자 곧바로 시윤의 몸 에 손을 댔다. [오즈 오보에 카다무슘 데즈 도 로드린 루이트! 상처 입은 그대를 치유하노라!] 그녀의 손에서 시윤의 몸으로 초록색 빛이 뿜어졌다. 유독 치유술만은 실력이 없던 그녀인지라, 주문도 평소와는 달리 길었다. 익숙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오래 걸리기 마련이었 다. 초록색의 빛은 그대로 시윤의 상처로 밀려들어갔다. [로데 도디스 엘 무하크 루이시블!] 그녀는 한 번 더 마법을 걸었다. 동시에 두 개의 마법을 쓰면, 그에 따른 힘의 소모는 각각을 따로 쓸 때의 두 배 이상이었다. 그런 루이시블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시 윤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차갑게 식어버렸던 몸도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찢어진 살점이 서로에게 달라붙 었고, 끊어진 혈관이 이어졌다. "하아, 이게 끝인가." 체질적으로 치유술은 정말 안 맞는다. 루이시블은 식은땀 이 맺힌 이마를 훔치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손을 휘저 어서 결계를 거두었다. 한번 걸어두면 지속력을 갖고 있는 결계였기에망정이지, 계속해서 힘을 공급해주는 마법이었다 면 견디지 못했으리라. 세 개를 동시에 운용해야 했으니까. "치료 끝난 거야?" "일단 응급처치는 끝났어요. 뼈가 부서진 것은 천천히 치 료해야겠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다. 백호는 그나마 구멍이 뚫린 모 습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루이시블은 차에 타며 말했다. "어서 스키엘을 차에 실어요." 언제나 짐꾼은 백호였다. 그들이 탄 차는 서울을 빠져나가서 네 시간 가량을 이동했 다. 밤이 깊은 시각이었기에 피곤했던 백호는 조수석에 앉 아서 그대로 자버렸으며, 뒷자리의 나이린은 시윤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창 밖 하늘에서는 만월보다는 약간 날씬한 달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네피림은 몇이나 되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던 루이시 블은 무료했는지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나이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회색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잛막하 게 대답했다. "나와. 같은. 자. 없었다." 시험타입이었던 건가. 루이시블은 가벼운 곡조의 음악을 틀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 분을 주인으로 삼은 이유는 뭐지?" "자격. 있으니까." 나이린은 잠시 시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 자격. 없다." 시윤에게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던 왕의 힘은 조금도 남 아있질 않았다. 나이린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은 이내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상관없다. 영혼. 각인. 했다."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루이시블은 쓸데없는 것을 물었다 고 생각하며 액셀을 밟아댔다. 평일의 밤, 고속도로는 텅텅 비었으니 시속 100km 이상은 우습게 낼 수 있었다. 직접 날 개를 사용해서 날아갈 때와는 또 다른 속도감이 느껴졌다. 창 밖을 바라보던 나이린이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 렸다. "자격 있는 자. 카엘. 아진. 레보라크. 그리고. 왕." 끼이이이익! "레보라크!" 루이시블은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 타이어 자국이 도로 위에 길게 그어졌다. "레보라크였어!" 이제 설명이 된다. 인간계의 과학기술로 네피림을 제조한 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것이 설령 아진과 카엘의 협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 무슨 일이야." 잠들어 있던 백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깨어났다. 안전벨 트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앞 유리를 뚫고 튀어나갔을 만 큼 강한 충격이었다. 금이 간 갈비뼈가 안전벨트에 눌려서 시큰거렸다. "천년 전, 휴즈의 등극과 함께 사라졌던 레보라크 비드랏 샤! 마현자(魔賢者), 마현자 레보라크." 루이시블은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차를 세운 채, 넋이 나간 얼굴로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래픽스 샤딘의 한 명 이라지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잊혀진 인물이 었다. 마계 제일의 지식을 소유했다는 그가 네피림 제작에 합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잖아." 류메리아는 죽었고, 스키엘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백호의 힘은 불완전하며 아직 나머지 동료들은 찾지도 못했다. 불 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래픽스 샤딘에 맞먹는 힘을 가진 네피림인 나이린이 자신들 쪽으로 붙었다는 사 실. "어렵구나." 그녀는 한숨을 토하고는 액셀을 밟았다. 차는 다시 부드럽 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태성 빌딩의 37층에 위치한 회장실은 유리벽이 박살나서 시원스럽게 뚫려 있었다. 아진은 품에 자신의 겉옷으로 상 체를 가린 누군가를 안은 채 미끄러지듯 회장실 안으로 날 아 들어갔다. "이쪽으로 다니는 게 낫겠는걸?" 아진의 뒤를 따라 토돌이 착지하여 날개를 접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들에게 1층을 통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은 불편했다. 살을 에이는 날카로운 겨울 바람이 방안을 휩쓸고 다녔지만 타락천사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 다. 유 회장은 추위를 견디지 못했는지 아니면 다른 볼일이 있는지 자리에 없었다. "서랍에서 카드를 꺼내." 아진의 말에 토돌은 책상 서랍에서 카드 키 두 장을 꺼냈 다. 유 회장이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킬 때 썼던 것이다. 그 들은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토돌은 카드를 벽 한쪽에 있는 홈에 그었다. 문이 닫히고 얼마 후 그들은 지하 비밀연구실 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귀찮아." 아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가 연구실의 문 앞에 서자 예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홍채 확인했습니다. 문 개방합니다. 인간이 아닌 그의 경우에는 홍채 확인만으로 체크가 가능 했다. 인간과는 많은 차이가 나는 구조였기 때문에 굳이 지 문까지 대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육중한 철문이 옆으 로 비켜났고 그들은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또 만드는 거야?" 토돌은 인상을 잔뜩 구겼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연 구실은 굉장히 북적거리고 있었다. 20명 정도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컴퓨터 앞에서 무엇인가를 입력하고 있거 나, 이것저것 약품들을 조합하고 결과를 종이에 적고 있었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셋이나 되는군." 하나였던 유리관이 셋으로 늘어 있었다. 그중 둘은 가죽이 벗겨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생명체가 각각 들어있었고 하나는 비었다. 붉은 근육이 드러나 있었고, 눈꺼풀이 없어 서 초점 없는 눈이 섬뜩하게 보였다. 그들 둘에게는 모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호스가 입에 연결되어 있었다. "흐응, 잘됐어. 하나가 비었군." 아진은 비어있는 유리관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토돌 은 그런 아진을 보며 '설명해 줘.'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 진은 못 본 채 하고는 작업실 한쪽에 있는 계단으로 가버렸 다. 유 회장이 엄명을 내려놨는지 연구원들은 아진과 토돌 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계단의 끝에는 갈색의 나무문 이 하나 있었다. "여어, 왔나?" 문이 열리자 무테 안경을 쓴 이십대 후반의 남자가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흰 가운에는 '연구소장 이정혁'이라고 적 힌 명찰이 가슴팍에 붙어 있었다. 토돌은 어리둥절한 얼굴 로 그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고, 아진은 들고 있던 인간을 책상 위에 길게 눕히고는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이건 또 뭐지? 아니, 그나저나 프로토 타입 네피림은 어 땠어? 쓸만한가?" 아진은 그의 물음에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토돌에게 시 선을 돌렸다. "저 녀석 처음 만나지?" "인간 따위를 내가 알 리가 없잖아." 토돌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혁은 미미 한 미소를 띄우고는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댔다. "애송이를 데려왔군." 경멸 섞인 어조였다. 아진은 벌컥 화를 내려는 토돌의 어 깨를 가볍게 눌러서 그를 제지했다. 토돌은 짐승 같은 숨소 리를 내며 자신의 힘 중 일부를 방출시켰다. 아무리 인간계 에서 영적 존재들의 힘이 반감된다지만, 또 본래 힘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치명적 이었다. "경솔하고 어리기까지 해. 쓸모 없는 녀석이잖아." 정혁의 미소는 비웃음으로 변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살 려달라고 애원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토돌은 놀라고 말았다. "인간이 아니었어?" "토돌, 래픽스 샤딘 서열 9위. 1213년을 살았으며 6익 타 천사." 토돌은 입을 쩍 벌리고 아진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녀 석은 누구야.'라고 말하는 얼굴로. "레보라크 비드랏샤. 천년동안 숨어 지내던 녀석이지." 아진의 말에 토돌은 탄성을 질렀고 레보라크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레보라크는 현재 활동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인간으로 위장 중이었다. 그가 타락천사라는 것은 유 회장도 모른다. "숨어 지낸 적 없어." 레보라크의 나이는 토돌의 두 배 이상. 성격이 괴팍해서인 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레보라크는 그렇게 오랜 기 간동안 다른 타천사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천 년 전에는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했다. 토돌로서는 '마계 제일 의 두뇌'라는 소리만을 귀가 따갑게 들었을 뿐, 실제로 만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흐응.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아진은 묘하게 콧소리를 냈다. 그의 두 눈이 끈적끈적한 색기로 물들었다. "이번 것은 실패작이었어." 퇴폐적인 미소였다.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아진은 피를 바른 것처럼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면서 레보라크에게 다가갔다. "토돌, 나가있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분명 평소의 장난스러운 아진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불길함이 감돌았다. 레보라크는 안경 을 고쳐 쓰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서 시험만 해보라고 가져가라고 했잖아." 토돌이 나가자 아진은 레보라크의 멱살을 쥐고 그를 들어 올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레보라크는 졸지에 아진과 눈높이 를 맞추고 있었다. "…그래, 시험만 해보려고 했지." 길게 자란 아진의 머리카락이 레보라크의 얼굴에 닿을 정 도로 둘의 간격은 좁았다. 아진은 달콤한 숨결을 내쉬며 레 보라크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감촉 에 레보라크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데 스키엘의 '왕의 피'를 그 빌어먹을 쓰레기가 인식 해버리지 뭐야." "스키엘이 과거의 힘을 냈단 말인가?" 할짝. 아진의 혀가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혀는 레보라크 의 목선을 타고 올라가서 귓불을 핥았다. 목구멍까지 신음 소리가 밀려 올라왔다. 지독한 쾌락이었다. "그래, 과거의 힘을 보였어. 각성했단 말이야. 게다가 그 네피림이 배반하는 바람에 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어. 약 속을 지킬 수 없었단 말이지." 순간 불같은 통증이 목에서 느껴졌다. 레보라크는 아진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두 팔은 아진에게 잡혀 있었 다. 아진은 레보라크의 목을 깨물고는 상처에서 솟구쳐 오 르는 피를 핥았다. "카엘과의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네 녀석이 만든 네피림 덕분에." 아진과 레보라크의 계급차는 거의 없었다. 현재의 수장이 아진이라면 바로 아래가 레보라크였다. 게다가 서열에 대한 개념마저 희미한 래픽스 샤딘이었기에 대등한 관계라고 보 는 것이 옳았다. 적어도 서열상으로는 그랬다. "요, 용서해 줘.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레보라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아진은 못들 은 척 그의 피만을 핥고 있었다. "난 너그러운 성격이야. 알지?" 많은 이들이 아진을 업신여기지만 그에게 능력이 없는 것 은 아니었다. 그는 힘을 갖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래픽스 샤딘 모두를 짓밟아서라도 자신을 따르게 할 자신이 있었 다. 그리고 지금 아진은 화가 난 상태였다. "한 번만 기회를 더 준다. 이번에 만들어지는 녀석들까지 주인도 못 알아보는 멍청이들이라면…" 아진은 잠시 말을 끊고는 레보라크를 놔주었다. 그는 다리 에 힘이 풀려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널 죽이겠어." 가면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아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 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진면목인가……. 나도 멀었군.' 아진은 목의 상처를 감싸쥔 채 질린 얼굴이 된 레보라크를 비웃고는 책상 위의 겉옷을 들어올렸다. 그 밑에는 여자가, 정확히는 여자의 시신이 있었다. "네 번째 네피림의 재료, 이걸 써라." 아진이 여태 들고 다녔던 것은 여자의 시체였다. 그녀의 큼지막한 눈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허공을 향해서 크게 뜨여 있었다. 몸에는 상처하나 없이 깨끗했고 아직 경직되 지 않은 걸로 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 같았다. 차가 멈췄다. 여섯 시간동안의 이동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주위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기슭에 홀로 자리잡 은 집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 때문에 적잖이 피곤했던 루 이시블은 차에서 내려 차갑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끄자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이 더욱 잘 보였다. 루이시블은 잠시 별빛을 음미하다가 백호를 깨 웠다. "어서 일어나요. 도착했어요." 조수석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백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차에서 기어 나왔고, 불편한 자세로 있어서 굳어버린 몸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그는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웬 시골이야?" 공기가 아주 맑았다. 밤이라서 식물들이 이산화탄소를 내 뿜는다든지 하는 상식은 접어두고라도, 호흡을 할 때마다 굉장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길은 포장도 되지 않았으며 길가에는 이름도 모를 잡풀들이 허리높이까지 자라고 있었 다. 시골이다. "당분간 지낼 곳이에요. 그보다 몸은 괜찮아요?" 백호는 금이 갔던 갈비뼈 부분을 몇 번 쓰다듬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하게 아프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한 두 번 다쳐보는 것도 아니어서 어떻게 치료해 야 할 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해. 워낙 건강체질이라서 말야." 그렇게 말한 백호는 자신의 가슴을 쳐보는 시늉을 하다가 상처를 세게 건드려서 바닥을 구를 정도로 괴로워했다. 마 침 차에서 내린 나이린이 그런 그를 보다가 한숨을 지었다. "바보." "……."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생명체에게조차 바보취 급을 받는 백호였다. 루이시블은 이를 북북 갈고있는 백호 를 보고 즐겁게 웃었다. 나이린이라는 네피림, 의외로 도움 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으니까. "나이린은 어때요? 피곤하지 않아요?" "몸? 괜찮아. 좋아." 백호로서는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그녀와 맞싸 운 백호는 뼈에 금이 갈 정도의 상처를 입은 반면에, 나이 린은 아진 때문에 다친 손을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루이시 블의 시선이 나이린의 손으로 향했다. "아까 다친…" "손. 나았다." 나이린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루이시블의 말이 끝나기 도 전에 그녀는 대뜸 화상을 입었던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사, 상처가 없어?" 백호는 불신에 찬 얼굴이 되었다. 당장 루이시블만 하더라 도 볼에 그어진 자상과 허벅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 태였다. 볼은 얕게 베여서 희미한 붉은 선만 남기고 있었지 만 허벅지의 상처는 지혈만 됐을 뿐이어서 치료가 필요했 다. 검으로 깨끗하게 베인 상처도 그렇게 회복이 오래 걸리 는데, 그것도 그녀가 타락천사의 자체치유력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네피림인 나이린은 루이시블보다 더 뛰어난 치력 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휴즈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구나.' 천 년 동안 휴즈 다루카는 카마세이 침공을 위해서 엄청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현자를 끌어들여서 만들어 낸, 인간과 타락천사, 그리고 천사의 합성생물인 '네피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키엘'을 향한 묘한 집착, 천계와 인간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에 찬 꿈. 그것들 이 묘하게 맞물리고 있었다. '가능할지도 몰라.' 네피림은 성공했다. 저것이 첫 시험작이 실패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 가치는 충분히 입증되었다. 몇 가지만 보완 하고 살육을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한다면 네피림은 최강의 전투병기가 될 것이다. '시간이 없어.'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했다. 네피림이 최소한 20명만 완성 된다 하여도, 천계 정복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천 년 동안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단 한 개체만 완성된 것을 볼 때 네피림 제작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변수가 너무 많아.' 하루빨리 옛 동료들을 모아야 했다. 천마전쟁 당시에 죽어 버린 카마세이 십 천과 래픽스 샤딘, 그 중에 윤회의 사슬 에 묶여 환생한 자들을 찾아야 했다. 천계와 마계를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워야 한다. "언제까지 세워둘 거야?" 생각에 빠져있는 루이시블에게 백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이린을 응시하다가 혼자서 상념에 빠진 것까지는 좋았는 데, 여긴 너무 추웠다. "잠 좀 더 잤으면 좋겠는데……." 루이시블은 백호의 투덜거림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환생한 바뮤즈는 과거의 힘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재미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좋아요. 들어가도록 하죠. 스키엘 좀 데리고 와주겠어 요?" 백호는 투덜거리며 시윤을 들쳐 업었다. '난 짐꾼이야? 짐 꾼이냐구!'라며 나이린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보며 루 이시블은 미소를 짓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짐꾼. 아냐?" 나이린이 루이시블의 뒤를 따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짐꾼 아냐!" 백호는 절규했다. 등에 업고 있는 시윤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 집은 넓었다. 80평 가량의 넓이에 여섯 개의 방이 거실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기형적인 형의 집이었다. 한번도 쓰지 않았는지, 사람이 머문 흔적이 전혀 없었다. 공기는 탁했고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쿨럭, 청소부터 해야겠는걸?" 백호가 먼지를 들이마시고 기침을 해대자 루이시블은 쑥스 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거실 한 가운데로 갔다. "4년 전에 마지막으로 왔었어요.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하기 가 어려워서 결국 새로 지어버렸는데,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가 힘들었어요. 후후, 이건 아직도 있네?" 그녀는 소파 앞 탁자에 놓여진 책을 반가운 듯 집어들었 다. "겨우 3일 있었나? 그러니까 여긴 새 집이나 다름없어요." "이 집, 네가 샀어?" 백호는 못믿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 다. 시윤은 어느새 바닥에 던져놓은 채로. 바닥에 깔린 양 탄자를 옆으로 밀어내던 루이시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소유주는 가공의 인물이예요. 그러니까 제가 만든 가짜 인물인 셈이죠. 아진도 여기는 몰라요. 당분간 은신처 로 쓸 수 있을 거예요." 루이시블 나름대로 확실하게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돌아 올 그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것들을 갖춰놓고 있던 것이다. 이런 집을 살 돈 정도는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마련하고 있었다. 오로지 스키엘이 돌아온다는 막연 한 예언만을 믿고. 그녀는 먼지가 날리는 가운데 양탄자를 돌돌 말아서 벽에 세웠다. 원목이 깔린 바닥에는 직경 3미터 가량의 거대한 마법원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색의 원이 굵직하고 또렷하게 그려져 있고, 그 안에 육망성과 기괴한 문자들이 어지러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건 뭐지?" 백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이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계(結界). 마법진이다." 루이시블은 미소지었다. 어린아이의 지능지수를 갖고 있다 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요, 제 피로 그린 결계죠. 은연중에 드러날지 모르는 힘을 감추기 위해서 집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안은 전부 결계의 영역에 속하게 했어요. 이걸 그리는 것만 꼬박 1년 이 걸렸죠." 아진과 카엘의 눈을 피해서 대규모의 결계를 펼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 피를 흘려서 그렸고, 들키지 않으려고 아주 천천히 했다. 이제 발동시키는 일만 남았다. "나이린, 내 대신 해줄래요? 스키엘을 치료하느라 힘이 모 자랄 것 같아요." 나이린은 잠시 갸웃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계 의 정 중앙으로 갔다. 결계를 짜는 것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발동시키는 것은 힘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가능 했다. 루이시블은 그녀가 선선히 부탁에 응하자 한시름 놨 다는 얼굴로 결계에서 물러났다. 손에서 잠시 빛을 발한 나 이린은 백호가 결계의 가장자리를 밟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빛을 거두고 말했다. "거기에. 계속. 있으면. 아파." "응?" "발. 익어버려. 힘이. 태워." "……."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어려운 어휘였지만, 백호는 알아들었 다. 결계 마법진의 시동을 할 때, 누군가 타인이 올라서 있 으면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리라. 짧게 끊어지는 단어로 말 했건만 그 내용이 섬뜩하게 느껴져서 백호는 슬그머니 뒷걸 음질 쳤다. 그리곤 입을 가리고 웃고있는 루이시블에게 '왜 안 가르쳐 줬어!'라는 시선을 맹렬히 보냈다. [시동] 마력이 실린 언어를 읊조리며 나이린은 손톱을 세워서 왼 손 손목을 살짝 그었다. 창백한 피부에 길게 베인 상처가 났고, 곧 피가 흘러나와 결계 위로 떨어졌다. '붉어. 인간이나 다름없잖아…….' -부우웅 피가 스며들자 결계는 밝은 빛을 내었다. 피로 만들어진 결계였기에 마력이 듬뿍 배어있는 피에 반응한 것이다. 상 처는 금세 아물었고, 진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원의 붉 은빛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도 된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끝났다." "고마워요, 나이린." 루이시블은 그녀가 결계에서 빠져나오자, 웃으며 인사하고 는 양탄자를 다시 바닥에 깔았다. 바닥에 피로 그려진 원이 있다는 것은 섬뜩하기도 했고, 미관상 안좋았다. 양탄자가 그 위를 덮고 있어도 제 기능은 다하니, 아예 안보이게 치 워버리자는 의도였다. 이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간에 아진이 알아챌 일은 없을 것이다. "후우, 그럼 피곤할 텐데 쉬어야죠? 저기 현관 왼쪽의 방 이 백호 씨, 오른 쪽을 나이린이 쓰도록 해요. 그리고 스키 엘은 백호 씨 옆방을 쓰기로 하고." 방은 많았다. 루이시블은 그렇게 각자 있을 곳을 정해주고 는 스키엘을 안아들었다. 사지를 늘어뜨린 그는 세상 모르 고 자고 있었다. 정말로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꼴이었다. "방에 침대랑 이불은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음, 4년 전에 가져다 놓은 거니까 먼지가 많더라도 좀 참아요. 청소는 내 일 하죠." "루이시블, 당신은?" 백호가 의아한 듯 묻자 그녀는 턱으로 스키엘을 가리켰다. "아프니까 돌봐줘야죠." 같은 방에서 잔다는 소리였다. 백호는 순간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뒤집고 게거품을 물었다. "우우욱, 나도 아파." 루이시블은 그의 엄살에 쓴웃음을 지었다. 빤히 보이는 연 기를 왜 한단 말인가. 어린애 투정 같은 그 행동에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 때, 나이린이 백호에게 다가갔다. "아프면. 돌봐줘야. 해?" "……." "내가. 할게." 벌떡. 그러자 쓰러져서 다 죽어가던 백호는 갑자기 일어서서 자 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누구 죽일 일 있냐.' 나이린은 고 개를 갸웃거리며 회색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상해. 백호." "후후, 남자니까요." 남자니까 이상하다. 나이린은 루이시블이 말해준 억지스러 운 발언을 머리에 새겨넣었다. 경험상으로 백호보다는 나이 린의 말이 훨씬 신빙성 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루이시블 은 생긋 웃고는 스키엘을 데리고 그의 방으로 사라졌다. 거 실에 홀로 남은 나이린은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어려워." 흔들흔들, 그녀가 고개를 흔들자 새까만 머리카락들이 허 공에 흩날렸다. 류민수는 지쳐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 로 피로에 젖어 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졌어도, 짜릿한 성취감이 남아 있었다. 몰랐다. 그토록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능력이라……." 재즈가 흐르는 어두운 바 안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회사 건물 내에 있는 바는 간부들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고, 현재 회장인 류민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흘 동안 다섯 시간 밖에 못 잤는데도 더할나위 없이 상쾌했다. "내가 원하던 게 이런 것일까." 그는 얼음을 띄운 위스키를 한모금 입에 흘려 넣었다. '태 성'에게 당했던 손해를 모두 뒤집어 버리고, 회사를 뿌리부 터 뜯어고치는 힘든 작업을 오늘에야 끝냈다. 지금 그가 취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값지고 달콤한 휴식인 것이다. "고맙다. 크리스." 그는 동생을 위해서 건배했다. 허공에 잔을 띄우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술은 그의 전신을 짜릿하게 흔들었고, 그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게 했다. 내심 감추고 있었지만, 류 민수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명예나 권력은 필요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딜 가 있는 건지……." 크리스는 일종의 타협점을 만든 셈이었다. 그녀는 권력에 묶이지 않은 자유를 원했고, 류민수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 한 쏟아낼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 언뜻 보기에는 대등한 관계 같았지만 류민수는 진실로 그녀에게 고마워했다. 크리 스는 물려받은 모든 것은 류민수에게 넘기고는 소식이 끊어 졌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물론 찾기를 원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것이다. 가끔 씩 크리스의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 도 모른 채 하기로 했다. "동생이라니… 후후." 오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굳어버 렸다고 생각되던 심장이 균열을 일으키며 따뜻한 피를 토해 내는 느낌이었다. 말라버린 눈물이 다시 흐를 것 같았다. "좋구나. 정말 좋구나." 잔을 비우고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따랐다. 오늘 같은 날 은 취해도 될 것 같다. 차갑게 식은 위스키가 혀를 자극하 고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뜨끈한 숨결을 토해내며 그는 웃었다. 아니 울었다. '견딜 수 있겠느냐.' 지금은 죽고 없는 유 회장이, 그의 할아버지가 말했었다. '다른 선택이 없잖아요.' 자조했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인생 의 달콤함은 모른 채 괴로움만을 터득했다. 아픈 만큼 성숙 한다. 그래서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냉소적이었다. '그 아이를 부탁한다.' 유 회장은 말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의 교육을 받고 4 년이 흐른 뒤였다. 이 때, 류민수는 비웃지 않았다. 스스로 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열 세 살의 나이, 너무나 어려 서 사리분별 하기도 힘들 때였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의 크 나큰 갈림길 하나를 택했다. '모든 것을… 크리스에게 주어라.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줘 라.' 유 회장은 강요했다. 그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에 그 말을 했다. 류민수는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당신이 인정 한 혈육의 도구로서, 나 또한 당신의 혈육이지만 그렇게 비 참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내가 받았구나. 내가……." 류민수는 다시 한번 잔을 기울이고는 탄식했다. 류민수, 그가 '원하는 것'을 크리스가 원했다. '마음'으로 느꼈다고 하였고, 이미 포기해버린 류민수의 꿈을 찾아주었다. '부탁해요. 오빠.' 지금 이 순간, 그는 배다른 형제인 크리스에게 미묘한 감 정을 느끼고 있었다. 애정(愛情)!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씁 쓸히 웃으면서도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명시윤이라고 했던가." 크리스를 변하게 만들었던 소년.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도 그녀의 일상을 바꿔버린 남자. 류민수는 작은 질투를 느 끼며 술잔에 남아있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많은 걸 바라는 건 무리겠지." 죽어버렸다고 생각되었던 감정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쳐들 었다. 류민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타협점은 스 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쓸쓸했다. * * 시윤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불완전한 각성으로 인해 서 키가 큰 것 같았지만, 오히려 몸무게는 줄은 듯 했다. 아니면 아까 무한정으로 쏟아버린 피 때문인지도 몰랐다. 루이시블은 시윤의 부서진 뼈가 더욱 뒤틀릴까봐 그를 조심 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는지 그는 작 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많이 아파요?" 시윤은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 루이시블은 몸을 기울여 시 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골드블론드의 머리가 시윤의 볼에 내려앉았다. "많이…아픈가요?" 루이시블은 시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눈처럼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 지금은 감고 있 어서 보이질 않지만 피처럼 붉은 눈동자, 인간 세상의 것이 라고 볼 수 없는 잘 깎인 조각 같은 아름다운 얼굴. "스키엘……." 옛날 그 모습이 아니다. 언뜻 보면 비슷한 얼굴이지만, 마 계 제왕이었을 때와 비교한다면 훨씬 연약하고 쉽게 부서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천 년의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결국 돌아왔군요." 내 마음의 주인.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요." 부모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루이시블은 안타까 운 얼굴로 찬찬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물 자국이 남 아 있었다. 자신의 반려를 찾아서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 도 돌아온 스키엘. 그는 또 다시 잃고 말았다. 이대로 무너 져버릴 지도 모른다. "제…발 다시는 떠나가지 말아요." 나의 신이여, 나의 소망이여. "우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요." 아아, 나의 신이여. 내 영혼마저 취한 나의 주인이여. 루이시블은 두 손으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녀의 손은 은은한 녹색의 빛을 흩뿌렸고,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름다운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시윤의 하얀 머리칼이 녹빛 에 물들어서 푸르게 보였다. [오즈 오보에 카다무슘 데즈 도 로드린 루이트! 상처 입은 그대를 치유하노라] 마법진은 그대로 시윤의 가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뼈가 제자리를 찾고, 서로에게 엉겨붙었다. 시윤의 몸은 불완전 하나마 천사(天使)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치료도 가능한 것이다. 시윤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시윤의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졌던 치유의 빛은 서서히 꺼져갔다. 그녀는 손을 거두고 길게 숨 을 내쉬었다. "하아." 인간계에서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현재 래픽스 샤 딘의 수장인 아진과의 싸움이었다. 그 와중에 피해를 최소 로 줄이기 위해서 그녀는 정말로 노력했다. 힘이 크게 반감 되는 인간계였기에 루이시블은 너무나 피곤했다. 게다가 치 료마법에는 워낙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힘은 배로 소모되었 다.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탈진해버렸 다. "수…연아." 시윤의 몸이 한번 꿈틀했고, 그의 입술이 열리고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짓눌리고 두려움으로 인해 가 늘게 떨리고 있었다. 루이시블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 었다. "가지마." 시윤은 아직도 슬퍼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붉 은 루비 반지가 쓸쓸하게 빛을 발했다. "내가, 내가 지켜줄게." 백호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방에 만족하며 침대에 몸을 던 졌다. 침대는 혼자 쓰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컸고, 또 너무 푹신해서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뛰며 즐거워했을 백호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손을 깍지 끼고 머리를 받친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렵구만." 아무리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백호라지만 이건 좀 심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 그리고 그 안에 당연하다 는 듯이 속해있는 자신. "수연이란 여자… 결국 그렇게 죽어버린 건가." 백호는 잠시나마 루이시블이 악마의 힘으로 살려낼 수 있 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권능은 그 누구에 게도 없는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지기 전이라면 몰라도 그 후에는 손 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 천사와 악마도 불 사의 존재는 아니었다. "죽으면 끝이다." 백호는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죽는다는 것, 살아가는 존재 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기도 했다. 누구나 죽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죽을 것이라고 는 꿈에도 상상치 않는다. '아직' 그 시기가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니까. '참 재미있는 상을 타고났구나.' 노인이 말했었다. 산의 노인들 중 한 명이었다. '네 녀석은 절대로 조용히 못 살게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백호는 이미 혼란의 중심으로 서 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 음부터 루이시블의 접근을 막고, 쓸데없는 일에 끼여들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망갔더라면 편하게 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싫 어." 문득 시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오열 하며, 광기에 휩싸이는 그의 모습이, 눈물을 흘리며 주어진 운명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이……. 시윤은 너무나도 약했다. 스키엘로서 각성한 그의 힘은 분명 두려 울 정도였지만, 또 다른 의미로 시윤은 연약했다. "으흐, 모르겠다. 자자!" 백호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베개를 껴안고는 그대로 뒹굴어 버렸다. 몇 시간만 있으면 해가 뜰 정도로 늦은 시 간, 백호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곧 그는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쾅! 이상준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을 거세게 내리치며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유명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는 들고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무안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 다. 이른 아침부터 호출 당하고는 이렇게 질책을 받으니 황 당하기도 했다. "연락이 안 된다니요!" "…집에도 없고, 촬영장에도 나타나질 않아서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수연이 갑자기 사라졌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한창 음반작 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CF를 찍어서 주가를 올렸어 야 하는데 사라져버린 것이다. 상준은 불쾌한 기분을 여과 없이 얼굴에 드러냈고, 명현은 못 본 척 외면해버렸다. "찾아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합니다! 아니면 회사 가 죽어요!" 과장된 발언이 아니었다. 명현에겐 허풍같이 들렸지만 이 것은 상준의 진심이었다. 현재의 MR엔터테인먼트는 다방면 에 걸쳐서 엄청난 액수의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 실, 수연을 키워준다는 조건으로 국내 최고의 기업인 '아 명'에게서 받는 돈으로 벌이는 일이었다. 돈은 힘이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확실한 자본력 이상의 것은 없었 다. 휘수연이 사라진다면 MR에 공급되던 자본은 전량 회수 될 것이다. "…찾아는 보겠수다." 속으로 이상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유명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실 갑자기 수연이 사라져서 걱정하고 있는 것 은 명현이 더했다. 명현에게 휘수연은 동생 같은 존재로 느 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많이 걱정했었는데 역시 일이 터졌다. '집에도 없고… 도대체 어딜 간 거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수연은 악보 몇 개를 받아들고 돌 아갔다. 한달 이상 침울했던 표정이 간만에 활기를 띄고있 었기에 명현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었다. 그러나 수연 은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유명현은 촬영실 테이블에 고가 의 사진기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옛 친구의 전화번호를 눌렀 다. "나다." -…'나'라는 사람 저는 모르겠군요. 전화 잘못 거셨습니 다. "나 유명현이다. 문종석! 이게 몇 년 만이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명현은 간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친근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그 때, 낮고 굵은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튀어나왔다. -…그 사람 죽었습니다. 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 * * "무슨 일이야?" 종석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차가운 생맥주를 목으로 넘겼 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건 명현이 술을 마시자고 조른 것이다. 2년 만의 전화였고, 정말로 다시는 보기 싫은 녀석 의 연락이었다. 명현은 그동안 변한 게 없었다. 동네 아저 씨 같은 후줄근한 옷차림에, 얼굴 가득 띄우고 있는 넉넉한 웃음(저게 거짓된 미소라는 걸 왜 몰랐던가), 그리고 이리 저리 뻗친 머리카락들. "하하, 오랜만에 만난 동창인데 반갑지도 않냐." 종석은 그대로 맥주 잔을 깨물어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맥주 잔을 명현의 얼굴에 던지고 싶은 욕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강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는 극 도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단어를 내 뱉었다. "육 천 칠 백 이 십 오 만 육 천 팔 백 원." 분노에 찬, 하지만 잔잔하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저 녀석 이 돈을 빌려서 도망갔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덕분에 종석은 월세 방에서 쫓겨나서 한겨울에 노숙 생활을 해야했 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유명현이 이름 있는 사진작가가 되 었다는 소리를 듣고 복수만을 꿈꿔왔었다. "어? 아아. 천천히 갚아도 되지?" 점입가경이다. 종석이 유리로 된 맥주 잔을 사람의 얼굴에 전력투구 했을 때의 생존확률에 대해서 계산하고 있을 때, 명현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역시 넌 좋은 놈이야! 그 때 꼭 사고 싶은 장비들이 있었 는데 돈이 있어야 말이지. 내 실력을 어디서 인정해준 것도 아니어서 취직도 어렵고. 다행히 네가 준 돈으로 장비들을 구입해서 지금은 쏠쏠하게 살고 있다." 부드득. 이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명현은 빙긋 웃으며 비어있는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지금 종석의 눈 앞에 과도 하나만이라도 놓여져 있었다면 명현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종석은 고통스러웠던 과거 를 떠올리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 테니까, 지금 할아버지의 생명이 위독한 데 돈이 없어 서 수술을 못하고 있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했었다. "그래, 할아버지는 안녕하시고?" 종석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명현은 표정하나 안바꾸며 '물론 정정하시지.'라고 대답했다. 기가 찰 노릇 이었다. 명현의 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 난 고인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과거의 그 지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도와달라던 명현을 위해서 종석은 사채를 끌어다 돈을 빌려 줬었다. 종석은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을 잊으려고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종석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명 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도와주라." 종석의 기억으로 명현은 타고난 연기자였다. 아니, 타고난 사기꾼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법을 알고, 자신을 관리하여 상대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단순한 뻔뻔이로 불리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싫어." 무조건 조심해야한다. 종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겉 옷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 다. 잘 지내라."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고 차가웠다. 상대를 혐오한다는 인상 을 확실히 주는 음성이었지만, 명현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 고 있었다. "무슨 얘긴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 "미안하다. 요즘 바빠서……." 종석은 그렇게 말을 흐리며 몸을 돌렸다. "못 믿겠다는 거군." "그게 아니라……" 종석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후두둑. 하는 소리 와 함께 명현이 거꾸로 들은 가방에서 돈다발이 쏟아져 내 린 것이다. 빳빳한 만원짜리로만 이루어진 돈뭉치였다. 어 느새 술을 치워버린 테이블 위에는 만원권 지폐들이 쌓여버 렸다. "선금으로 현찰 삼천만 원이다." 놀라버린 종석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명현과 돈다발을 번갈아 주시했다. 사실 종석은 요즘 일이 없어서 돈이 궁했 다. 그는 전문적으로 뛰는 파파라치이긴 했으나, 주요 고객 들에게만 일거리를 받았고 직접 찾아서 뛰지는 않았다. 한 번 살해당한 뻔한 뒤로는 이것만은 꼭 지키고 있었다. "얘기나 들어볼까?" 과소비가 심한 종석은 결국 돈 앞에 무릎꿇었다. 종석은 입으려던 겉옷을 다시 의자에 걸치며 자리에 앉았다. 명현 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석이 가방에 돈을 모조리 쓸어넣자 명현이 입을 열었다. "너 파파라치 맞지?" 끄덕끄덕. "여자애 하나만 찾아줘." "여자?" 종석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되물었지만 명현은 똑같 은 대답을 했다. "여자." "이봐, 난 탐정이나 경찰이 아니야." 파파라치에게 사람 찾는 일을 맡기다니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종석은 가방을 꼭 끌어안으며 슬며시 일어나 려 했다. 일은 일이고 돈은 돈이다. 설령 자신이 할 수 없 는 일이라 하더라도 빌려준 돈이 있으니 돌려줄 생각은 없 었다. "유명한 애니까 찾기 쉬울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 줘." 진지한 목소리였다. 뭔가 다급한 것 같기도 했다. 연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종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누군데 그래?" 아까보다는 훨씬 다정다감한 음성, 돈의 힘은 대단한 것이 었다. 한꺼번에 목돈이 들어오자 그동안의 묵은 감정이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TV에서 몇 번 봤을 거야. 휘수연이라는 이름인데… 알 아?" 종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CF 모델이지?" 본 적 있었다. 굉장히 신선한 느낌의 여자라서 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라졌다니……. "좀 찾아 줘. 증발해버렸어." 파파라치인 친구를 찾은 이유, 휘수연이 새로이 떠오르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종석이 알고 있는 연줄을 어떻게든 이 용한다면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찾을 것이다. 그 무엇이든 캐내고 알아내는 것이 파파라치 니까. "찾아온다면 오천만 원을 더 내겠어." 종석의 눈이 형광등의 빛이 초라할 정도로 강렬하게 번뜩 였다. 외전(外傳) 주룡곡酒龍谷 - 알콜즈 (上) ======================================================= *100화 기념 외전입니다. 이것은 삼류무사의 저자이신 김석 진 님의 글에서 차용하였거나, 아예 가져다가 붙여 넣기 한 부분도 있습니다. 미리 허락을 받은 상태지만, 원작자이신 김석진 님이 글 삭제를 요구할 시에는 예고 없이 지우겠습 니다. ======================================================= 모두가 잠든 시간, 달이 하늘 높이 떠올라 있을 때였다. 백호는 동네의 외진 곳에 있는 공터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 고 있었다. "끄으윽." 속이 뒤틀리는 이 느낌, 주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몸을 헤 집어버리는 이 고통! 보름달은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고 있 었다. 열 여섯 살의 그는 고아였고, 구걸을 하며 하루하루 를 보내는 거지였다. "사, 살려줘." 그 누구도 없었다. 백호는 쓰러진 채 흙으로 된 땅바닥을 손으로 세게 긁으며 고통을 이겨내려고 했다. 강렬한 욕구 도 있었다.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파괴를 향한 갈망 이 느껴졌다. 허우적거리는 백호의 입가에 가느다란 검은 핏줄기가 흘렀다. "아아아악!" 자아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이미 백호는 알고 있었다. 몸 속에 또 다른 무엇인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건 자 신의 몸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못 줘! 절대로 못 줘!'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들에게 물어뜯기는 고통이었다. 그 는 혼절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온 몸을 미친 듯이 움직였다. 시린 월광月光 아래에서 그는 모든 것을 토해내려 했다. 퍼억! 백호는 정신 없이 몸을 움직이다가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장정 두 셋이 달라 붙어도 안을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나무였지만 그 한 가운데 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버렸다. 백호의 주먹은 나무를 부 러뜨리지 않고 그저 꿰뚫어버린 것이다. 주위에는 그렇게 희생 된 나무들이 널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멀쩡한데 중 간 부분에는 꼭 같은 크기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 점으 로 극도로 집중된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난 인간이야!" 그는 짓씹듯이 외쳤다. 벌써 두 달째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보름달만 뜨면 피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속삭인다. '이제 포기해.'라고 달 콤하게 유혹한다. 파괴를 향한 갈망, 사람을 미치게 하는 고통. 그것은 백호 에게 몸을 내놓기를 강요했다. 지독할 정도로 강한 힘을 내 어주면서 말이다. 16살의 소년이 맨 주먹으로 굵직한 나무 를 뚫어버린다면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그것도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발광을 하며 힘을 쏟아내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제기랄!" 주어지는 힘에 비례해서 고통도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아 무리 인적이 없는 곳에서 밤을 보낸다지만, 만에 하나 사람 과 마주친다면 공격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 나마 견딜 만 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 파괴의 욕구가 강했 다. 백호는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가운데, 눈을 돌려 멀리 달빛 아래에 보이는 지리산을 응시했다. '저기라면…….' 적어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백호는 땅을 박차며 지리산을 향해서 달렸다. 너무나도 강한 힘 때문에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 * 처음에는 등산로를 따라서 달렸다. 하지만 달빛만이 시야 를 밝혀주는 지리산에서 반쯤 미쳐버린 상태의 백호가 제대 로 길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미친 듯이 달리던 백호는 어느 새 나무가 빽빽하고 경사가 가파른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 으로 가고 있었다. 옷이 나무에 걸려서 찢기고 작은 상처들 이 났지만,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고통 때문에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크어어어!" 백호에게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죽이고 싶어! 없애고 싶어! 모두를 부수고 싶어!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인적이 드문 지리산으로 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지쳐버려서 더 견딜 수 없었다. 백호의 팔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거 목巨木의 허리어림에 깊은 상처가 패였고, 비교적 가는 나 무들은 그대로 부러져나갔다. "크르르르." 그의 눈에서 흑색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겨울이어서 영하 의 기온이었음에도 백호의 전신은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얼마간을 달렸는지 모른다. 나무들이 고통에 몸을 떨고, 풀 들이 지독한 공포로 비명을 질렀다. 인간이 아니다. 백호는 완전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검은 기류가 피부를 얇 게 감쌌고 눈은 섬뜩하게도 칠흑 같은 어둠이 번져 있었다. "우오오오!" 보름달을 향해 그는 천둥 같은 포효를 했다. 인간이라기 보다는 한 마리의 늑대의 음성이었다. 포효는 메아리쳐서 산을 울렸고, 길게 퍼져나갔다. "웬 개새끼가 짖어대?" 백호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급히 몸을 돌리자, 그곳에 는 수염까지 새하얗게 센 늙은 노인이 있었다. 신경질적으 로 생긴 노인은 나이에 비해서 체구가 큰 편이었는데, 어깨 에는 쌀포대까지 들고 있었다. "크르르릉." "얼씨구? 멀쩡하게 생긴 놈이 짖어? 쯧쯧, 미친놈이로구 만." 노인은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차더니 몸을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로 백호에게 삿대질을 했다. "미친놈이지?" 대답은 없었다. 머뭇거리던 백호는 눈에 살기를 띄더니 땅 을 박차고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야성적인 감각, 그리고 인 간의 몇 배에 달하는 속도와 파괴력! 인간의 뼈 따위는 쉽 게 부서질 터였다. "오호!" 노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곧 입가에 비웃음을 띄 더니 상체를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 백호의 주먹을 흘려보내 고 그의 발이 지나갈 곳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었다. 쾅! 몇 년 살지도 못했을 애꿎은 어린 나무 한 그루만 부러지 고 말았다. 게다가 노인에게 다리에 걸려서 균형을 잃은 백 호는 그대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아픔보다도 분노가 컸 던지 백호는 몸을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카르릉!" "진짜 개새끼구만." 노인은 쌀포대와 지팡이를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준비운동인 듯 싶었다. "흐흐, 오랜만에 힘 좀 써보자. 선수는 이 몸이 양보했으 니 이제 내 차례지?"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통보였다. "으르르르." 백호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갑자기 노 인에게서 폭포수처럼 터져나오는 투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사린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긴 하지만 키도 컸 고, 근육도 제법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위 압감은 상식 밖이었다. 도망가야 한다! 깨어나 있는 백호의 야성은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크앙!" 백호는 노인에게 몸을 날렸다. 흐릿할 정도의 잔상만이 남 는 속도, 그리고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 백호는 손을 쫙 펼 쳐서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노인을 향해서 내리 그었다. 아까의 충격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던 나뭇잎이 그의 손 톱에 걸려서 깨끗하게 반조각이 났다. 먼저 공격하려 했던 노인은 백호가 다시 달려들자 아무런 방어자세도 취하지 않 은 채, 그런 그를 그저 웃으며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이런 느낌.' 노인의 전신은 '위험하니 피하라.'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백호의 손이 노인의 머리와 한 뼘의 거리만 을 남겨놓게 되었을 때, 노인의 발이 움직였다. <…이것의 단초는 사물이 움직이는 모든 면에 그것을 가능 케 할 최적의 지점이 있다는 데 근거한다. 물건을 들 때의 위치, 타격을 가할 때의 상태와 거리, 마찬가지로 피할 때 의 상대와 거리, 모두 한 지점, 즉 절대요처만 점유한다면 최상의 타격, 최고의 수비가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동물 적 감각이 선행 되야 함은 물론이고 그곳을 느꼈을 때 누구 보다 먼저 차지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한 가지 보법이 파 생되니, 달 밝은 밤 홀로 술을 마실 때 한줄기 우레 무성하 여 말없이 눈으로 쫓는다.> 월야독작관추뢰(月夜獨酌觀追雷)! 백호의 공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노인의 몸이 어느새 미끄 러지듯 움직여서 비어있는 백호의 옆구리에 바싹 붙었기 때 문이다. 실로 절묘한 보법, 추뢰보! "잘 가라." 노인은 빙긋 웃었다. 너무나 큰 동작으로 공격을 시도했던 백호는 다시 몸을 추스르려 했으나 그 순간 노인의 주먹이 움직였다. 공기를 찢는 엄청난 속도와 그 안에 실려 있는 육중한 무게는 백호의 공격에 비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았 다. 퍼억! 옆구리를 가격 당한 백호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3미터 이 상을 나가떨어졌다. 뼈가 상하고 내장에도 조금 이상이 생 겼을 것이다. 노인은 손을 탁탁 털고 쌀포대와 지팡이를 주 워들었다. "에잉, 달밤에 체조시키는구먼. 하여간에 요즘 젊은것들 은……." 노인은 투덜거리며 다시 길을 가려 했다. 속의 울혈을 전 부 토해낸 백호는 그런 노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은밀히 몸을 일으켰다. 노인의 투기가 거두어진 지금, 방심하고 있 는 지금 공격한다면 먹힐지도 모른다. 숨소리마저 죽인 백 호는 다시 한 번 땅을 박차고 양손을 쫙 펼쳐서 손톱을 세 웠다. "하여간에 주제를 모른다니까. 에잉, 쯧쯧." 백호의 몸은 허공을 날아서 노인을 덮쳐갔다. '기절하지 않았군.' 이 정도로 기척을 숨기고 살기까지 지워버린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미쳐버린 야성의 인간이었음에도 그런 일을 해낸 다는 것은 정말 칭찬 해줄만한 것이다. 아무리 방심했다지 만 이렇게 가까이까지 자신을 속이고 접근한 것에 대해서 노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부우욱! 노인은 지금까지 걷던 것보다 한 박자 더 빨리 앞으로 감 으로써 백호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려 했다. "이 개새끼가-!"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젊고 실력 좋은 상대에게 호 의를 베풀 생각이었다. 적어도 시내까지 나가서 사온 쌀포 대가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랬으리라. 포대는 날카로운 백호 의 손톱 때문에 주욱 찢어졌고, 새하얀 쌀이 월광을 받으며 모두 쏟아져버렸다. 손에 쥐어져 있던 묵직한 중량감이 사 라지자 노인은 분노하고 말았다. "죽을 줄 알아라!" 엄청난 투기! 숨막히는 위압감이, 산이라도 움직일 듯한 존재감이 노인에게서 터져나왔다. 노인의 다리가 빠르게 교 차되었고, 그 다음 순간 노인은 백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공격을 위한 최상의 보법, 추뢰보였다. "끄르르륵." 노인의 악력은 엄청났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백호의 숨 이 끊어질 터였다. 백호가 호흡곤란으로 정신을 잃으려는 순간 노인은 백호의 목을 놓았다. 자비를 베푼 것은 절대 아니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노인의 동작이 그것을 증 명했다. <…이것은 특정한 형태의 무공도 아닐뿐더러 어떤 영감 같 은 것을 얻어야 실현 가능한 초식에서 그려지는 무공은 더 더욱 아니다. 먼 옛날부터 인간이라면, 인간의 형태를 갖추 었을 때 싸움이 일어나면 본능적으로 쳐들었던 주먹 쥔 손 의 움직임, 인간의 전투적 성향을 가장 순수하게 반영한 주 먹질이 바탕이 되어 권법 하나를 만들어본다. 명심하거라! 이것은 초식도 영감도 필요 없지만 '땀'이란 노력의 부산물 은 반드시 요구된다는 걸. 반복 또 반복을 통해 이것이 너 의 손에서 완전히 펼쳐진다면 너의 주먹은 그 어떤 기문병 기보다 강력한 위력으로 상대를 위협하리라… 회한의 눈물 은 하늘을 가득 메운 유생의 비처럼 대지를 적시는구나!> 회한루여유성우(悔恨淚如流星雨)! 쾅! 한 순간에 열두 번의 주먹질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백호의 복부를 난타했다! 단 한 순간에!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백 호는 검은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아가 거목에 처박혀버렸 다. 어찌 단 한 순간에 십 수 번의 공격이 가능하단 말인 가! 주먹질을 할 때 흔히 팔꿈치를 뒤로 접었다가 쭉 펴서 힘 을 싣는 게 기본이다. 그래야만 상대방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견제를 할 때는 다르다. 그때는 상대 방과의 최단선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배제하고 손을 뻗는다. 이것은 빠르다는 장점을 얻지만 그 대가로 위력을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노인은 달랐다. 그의 공격은 충분히 빨랐고, 하나하나의 공격이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마저 제압하는 초쾌권, 그것도 매우 무거운 권력! "피 같은 쌀을……." 노인은 땅바닥에 흩어져있는 쌀알들을 매만지며 눈물을 글 썽거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쌀밥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 는데 저 망할 견자(犬子)가 덤벼들어서 다 날린 것이다. 백 호는 입에서 검은 피를 꾸역꾸역 게워내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후우, 네놈에게 내가 이 쌀값을 다 받아내지 못하면 천하 의 김석진이 아니다! 성을 갈겠다!"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정신을 잃은 백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렸다. 소년의 앳된 얼굴 그대로였다. 체구가 조금 큰 데다가 달빛 아래여서 최소한 스무 살은 넘었을 거 라고 생각했었지만 착각이었다. "…어린 녀석이 그렇게 강한 살기를 뿌리고 다녀?" 그는 기가 막혀서 중얼거리고는 백호를 앉혀서 등의 몇 군 데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백호는 다시 한 번 피를 왈칵 토해냈고, 그것은 새까만 색에서 점차 선홍색으로 바뀌어갔 다. "끙차, 더럽게 무겁네. 녀석." 노인은 등에 백호를 업고는 지팡이도 내버려둔 채, 터덜터 덜 걸어갔다. "어차피 내버려두면 내상으로 죽어버릴 녀석이었으니까 치 료비로 쌀값의 두 배를 받아야겠다. 아니, 세 배?" 죽어도 자신이 때려서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는 노인이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백호는 햇빛이 얼굴을 두드 리자 불쾌한 얼굴로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랐다. 그가 누워 있는 곳은 웬 오두막이었기 때문이다. 침대는 나무로 만들 어져 있었고, 지푸라기가 깔려 있었다. "여기는…?"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안에 지푸라기가 깔린 침상, 백호 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극심 한 고통 때문에 이를 사려 물어야 했다. 배가 찢어질 듯 아 파 왔고, 늑골이 나간 것 같았다. 상의는 벗겨져 있었고 그 의 상체는 하얀 천으로 강하게 감겨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백호는 정신을 잃었던 때에 생겼을 일에 대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보름달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마지막 선 택으로 험하기 짝이 없는 지리산으로 향했다. 그것도 등산 로가 아닌 쪽으로… 길을 잃어버리기 위해서. 스스로를 묶 어두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한 백호는 침상 머리맡에 나 있는 창-이라기 보다는 그냥 구멍-을 통해 밖을 살폈다. "이럴 수가!" 지금은 12월 말, 즉 겨울이었다. 그런데 새들이 지저귀고 꽃이 만발했으며 풀들이 초록빛을 자랑하고 있는 이 광경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여어, 정신을 차린 건가?" 백호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발에 하 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노인이 있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백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구…십니까? 여긴 또 어디고요?" 노인은 입맛을 쩝 다시며 침상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끌어 다가 앉았다. "혹시 병이라도 있나?" 백호의 말에 대답도 않고 그는 그렇게 물었다. 당황한 백 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특별히 앓고 있는 병은 없는데요." 어젯밤에 보여줬던 그 무위는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 가 많았다. 물론 자신도 인간의 기준에서 한참 벗어났지만, 이 앳된 소년은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그걸 병이라고 생각 한 노인은 백호의 대답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흠, 이상하군." 그 때 문 밖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계십니까?" "홍가냐?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산적 같이 수염을 기른 부리부리한 눈매의 남 자가 들어왔다. 일견하기에 오십은 되어 보였지만, 근육이 꽉 들어찬 몸은 그의 나이를 잊기 하기에 충분했다. 홍 씨 성을 가진 그 남자는 백호를 보고는 반색을 했다. "이 녀석이 형님이 주워왔다는 그 아이입니까?" 남자의 기도는 대단했다. 단지 가까이 왔을 뿐인데 그 위 압감으로 백호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백호를 지켜보던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애 앞이다. 조심해라."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그의 존재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도 오랜만에 보는 바깥 사람이라 실수를 했습니다. 미 안하다. 얘야."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백호는 두 눈을 껌뻑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노인은 그런 둘을 내버 려둔 채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쌀 한 포대 값이… 그러니까……." "예, 뭐라고요? 형님?" 노인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얘야. 너희 부모님께서 걱정하 시지 않겠냐? 집이 어딘지 말해주면 내가 데려다 주마." 그리고 쌀값을 받을 작정이었다. 산에서 조난 당한 소년을 자신의 피 같은 쌀을 내팽개치고 구해서 치료까지 해줬다. 그런 큰 은혜를 베풀고도 모자라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 이 얼마나 멋진 계획인가. "없어요." "…에?"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폐기처분됐다. "고아예요. 그냥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백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텁석부리 수염 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역시 그랬군. 이렇게 귀기(鬼氣)를 강하게 받은 몸이니 당연한 결과겠지." 남자가 그렇게 운을 띄우자 노인은 계속하라고 눈짓을 했 다. "이 소년의 몸은 귀기로 가득하여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게될 상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상(相)이 있을 거라 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타고난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면 크게 다치거나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겠는데요?" 백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귀기! 즉 귀신의 기운! 바로 백호를 자꾸만 침식하려고 들었던 그것이었다. 바로 어젯밤에도 그것 때문에 발작했었다. "알고 계세요? 이 빌어먹을 자식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아세요?" 진한 분노와 증오가 배어있는 목소리였다. 부모를 잃고, 자신은 미쳐갔다. 힘에 휘둘려서 사람을 죽일 뻔했고 그 때 문에 쫓기기도 했었다. 홍 씨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침묵했다. 백호가 다시 뭐라고 소리치려고 할 때 그는 입을 열었다. "기라는 것은 본디 타고나는 것, 네가 지닌 것이 귀기라 하여도 그건 너 자신의 힘일 뿐이다." 그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귀기에도 쉽게 잡아먹히겠 지. 넌 용케도 지금까지 버텼구나. 네가 그 기운을 다룰 정 도로 힘을 키운다면, 그것은 네게 복종할게다." 험상궂은 외모에 비해서 남자는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백호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 다. 떠돌이 고아라는 것은 이루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날 의 연속이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고, 얻어맞기는 하루 걸러서 당할 정도였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되죠?"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백호에게 들리지 않았 을 뿐이지 남자와 노인은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두시죠?' '저렇게 어린애를? 내가 왜?' '제자 겸 하인으로 쓰시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외부인 을 주룡곡까지 데려오신 건, 그런 이유 아니었습니까?' '흠, 하지만 너무 어려. 게다가 귀신을 삼킨 것도 아닌데 저 정도의 귀기(鬼氣)라니…….' '거두지 않는다면 저 소년은 죽어요.' '다른 노인네들이 과연 찬성할까?' '손주같은 어린 아이 하나쯤은 다들 좋아할 겁니다.' 노인은 결국 백호에게 제안했다. "이곳에서 지내겠니?" "예?" 노인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네가 그 힘을 다룰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마." "정말이세요? 정말요?" 백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그는 '죽 을'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내 이름은 김석진이라고 한다. 사부 내지는 스승이라고 부르면 좋겠구나." "제 이름은 백호예요."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의 이름은 주룡곡(酒龍谷)이 었다. 하나같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탓이었 다. 지리산 험준한 곳,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노인들이 모여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이었다. 곡 내에 사는 사람은 이십 명 정도, 그 중 반수 가량은 항상 수행이 니 뭐니 하면서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평소 곡 내의 거주 인원은 열 명 정도였다. 주룡곡은 일년 내내 봄이었다. 다 섯 명의 노인들이 진법을 짠 덕분이었다. 진의 파해법을 알 고 있는 자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으며 헬기 등을 타 고 허공에서 내려본다 하여도 짙은 안개 때문에 들킬 염려 가 없었다. 주룡곡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엄청난 능 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신선들의 마을인 셈이었다. 백호는 그곳에서 8년 동안 '힘을 다루는 법' 만을 배웠다.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어느새 백호는 성인이 되어 있 었고, 앳되 보이던 옛 얼굴은 사라지고 탄탄한 근육과 매서 운 눈매가 돋보였다. "사부님,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으로 나가야겠습 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백호가 말했다. 사부와 그는 넓은 공터 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네놈이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때려서라도 말려야겠다!" "전 바깥세상이 그립단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와 사부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8년 전의 그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백호는 그 때 그 힘을 그대 로 쓰기는 했지만, 이성이 온전한 상태였고 몸도 성장해서 훨씬 강해졌다. '저 노인네는 늙지도 않네.' 사부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주름살 하나 늘지 않았 다. 백호는 사부의 나이를 굉장히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가 르쳐주지 않았다. "갑니다아-!" 백호는 쓸데없는 궁금증은 제쳐두고 싸움에 집중을 하겠다 는 생각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사부에게 달려들었다. * * "갔습니까?" 홍 씨 남자가 와서 말했다. 그도 8년 간 전혀 변한 게 없 었다. 이곳은 시간이 정지된 사람들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백호만 그 위에서 겉도는 셈이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에잉, 썅노무 새끼. 사부를 두들겨 패?" 지난 8년 동안 지독히도 부려먹었다. 백호는 제자라기 보 다는 하인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그런 백호가 가버 리자 못내 아쉬운지 노인은 연신 입맛을 다셨다. 옷은 너덜 너덜 했고,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하하, 얼굴이 멋집니다." 노인은 멍이든 눈을 어루만지며 이를 부득 갈았다. "에잉, 젊은것들이란… 쯧쯧. 역시 보내는 게 아니었어." 물론 본 실력으로 했다면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든 것은 백 호였으리라. 노인은 그다운 방식으로 백호를 세상 밖으로 풀어준 것이다. "잘 해낼 겁니다." "그렇겠지. 내가 가르쳤으니까." 남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법이나, 권법, 하다못해 보법 하나 전해주지 않으셨잖 습니까." 왜 그런지는 남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그저 해보는 말일뿐이었다. "8년이라는 시간, 그 녀석이 귀기(鬼氣)를 소화해내는 것 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지. 그런 녀석에게 무엇하나를 더 얹어주는 것은 독이 될 뿐이야." "그래도 아깝죠?"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못난 제자라지만 어찌 아 쉽지 않겠는가. 그동안 손자라고 생각하고 대해왔는데 이렇 게 떠나갔으니 허전하기도 했다. "그 녀석, 험한 운명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후후, 전생의 업보겠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인연이 있으면 또 볼 게야." 그리고 며칠 뒤에 마을 밖으로 나가던 노인은 마을 입구에 꽂혀있는 명패가 바뀐 것을 알았다. '에이 썅, 술주정뱅이들! 마을 이름이 이 따위니까 사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이 모양이지! 내 언젠가 마을이름을 바 꿀 테요!' 언젠가 백호가 외쳤던 말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몇 년 같이 지내던 사이에 백호는 노인의 성격을 완전히 빼 다 박고 말았다. 그 때를 떠올리며 노인은 킬킬거렸다. 나 이에 맞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그런 건 체면 따지는 사람에 게나 할 말. <알콜즈 타운> 신세대의 감각에 맞춘답시고 영어로 이름을 바꿔버린 명패 였다. 그나마도 한글로 표기되어 있었고 지독히도 못쓴 글 자였다. 백호가 이곳을 떠날 때 꽂고 간 것이리라. 노인은 명패를 쓰다듬으며 백호가 돌아올 날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11. 은신隱身 [천사와 악마? 내가 보기에는 둘 다 괴물일 뿐이야] 청주 외곽에 위치한 '유현 고등학교', 그곳의 3학년 영어 를 담당하고 있는 오영주 선생은 정규 수업을 모두 끝마치 고 잔업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지만 타 고난 동안으로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소유자였고, 아직 독신이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인기척도 없었건만 그녀의 뒤에서는 듣기 싫을 정도로 갈 라지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영주는 책에 펜으로 줄 을 긋다가 놀란 나머지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찌익, 종이 가 약간 찢어졌다. "어, 영진이 왔구나." 그녀는 짜증을 감추며 웃음을 띄우고는 의자를 끌어다가 영진에게 권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색감인 검은 머리 카락,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병자같은 창백한 얼굴, 보는 이를 우울하게 만드는 깊은 눈동자… 영진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게 더 슬퍼보였지만. "어때? 학교 생활은 할 만 하니?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 고?" 유영진, 고3임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이 후미진 곳에 전 학온 학생의 이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전학을 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내신관리에 힘을 쓰기 위해서라도, 학업에 전념을 하기 위해서라도 전학은 기피대상이다. 유현 고등학교가 이름난 명문이었다면 이해 가 갈 법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예." 무뚝뚝한 녀석. 오영주 선생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대답이 한 글자야. 한 글자.' 책상 한쪽에 밀어뒀던 서류철을 끄집 어냈다. "영진이가 전학와서 적응하느라 힘든 건 알겠지만, 어쨌든 이번 모의고사를 봐서 하는 말인데……."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이상, 선생의 최대 관심 사는 '진학'이었다.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을 얼마나 좋은 대학에 많이 진학시키느냐, 또 얼마나 가능성 있는 녀석을 추려낼 수 있느냐. "이건 좀 심하지 않니?" 오영주 선생은 웃으며 모의고사 성적표를 영진에게 내밀었 다. 영진은 그것을 말없이 받아들고는 훑어보았다. "왜 마킹을 하나도 안 한 거야? 피곤해서 시험보기 싫었 니?" 최대한 상냥하게 그녀는 말했다. 수능 모의고사, 400점 만 점에 0점. 즉 답을 아예 체크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전학 온 지 겨우 이 주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진에 대해 서 선생이 파악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영진의 입술을 비집고 예의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학 문제입니까?" 재미없는 녀석. 그녀에게 영진은 다루기 어려운 학생이었 다. 남녀공학이라지만 오영주의 용모는 빼어난 편이었고, 그래서 여학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고 남학생들에게는 인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다루기 편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무뚝뚝한 목석 같은 타입만 아니라면. "응, 말하자면 그렇지. 이번 모의고사 성적만 제대로 나왔 으면 네가 지원 가능한 학교 리스트라도 뽑아놓는 건데… 그게 안됐잖아? 저번 학교에서는 상위권을 유지했다고 알고 있는데." 문득 영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부심? 그건 아니었 다. 그녀가 보기에 영진의 웃음은 분명 '재미있어' 하는 표 정이었다.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영진은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검은 유 리알처럼 빛났다. "대학 진학이라면 관심 없습니다." 선생은 한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대학 갈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야간 자율학습도 빼주시 면 좋겠는데요." 말 나온 김에 다 얘기해버리자는 심산이었는지, 영진은 자 신이 원하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했다. 이름뿐인 '자율'학 습, 영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을 안 가겠다니 왜?" 성적이나 나쁘면 말을 않겠다. 그러나, 전 학교에서 떼어 온 성적 증명서는 유영진의 성적이 최상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수준급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이름 있는 4년제 대학은 너끈히 갈 수 있었다. "…할 일이 있어서요." 오영주의 교직 생활 6년 째, 그 중에 이런 녀석이 아예 없 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은 그녀에게 설득 당해서 뒤늦게나 마 대학진학에 힘을 쏟았고 몇몇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진학을 포기했다. "뭔데?" 어떤 일이든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부는 늦어 지는 만큼 힘든 법이다. 딴에는 영을 생각하고 있는 선생이 었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오영주는 참을성 있게 그 의 답을 기다렸다. "이해 못하실 겁니다." 그녀는 쓰게 웃었다. 이해 못할 이유라면 지금까지 별별 것을 다 들어봤다. 가수가 되기 위해서,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서, 만화를 그리고 싶어서, 결혼하기 위해서(…이건 정말 기가 막혔다), 기타 등등 기 타 등등. "뭔데? 말해봐. 난 꽤 개방적이니까 말해도 돼. 설마 세대 차이 느끼고 있는 건 아니겠지? 노처녀라고 무시하는 거 야?" 마지막 말은 장난이었다. 억지 같은 말이었지만 어조가 농 담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영진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젓 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죄송하지만 역시 말할 수 없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 합니다." 영진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는 기이한 어른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뭐, 천천히 얘기하면 되겠지.' 오늘은 패배다. 영진은 상담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왔다. 이번 주 청소를 맡은 친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청소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남학교에만 다녔던 그에게 남녀가 같이 청소를 한다는 것은 조금은 생소했다. 한 반의 인원은 서른 다섯 명, 교육부의 정책으로 인해서 이번 해부터 확 바뀐 것이 다. 그 중 영진의 반인 3학년 4반은 남자 열 아홉 명, 여자 열 여섯 명이었다. "후우." 영진이 들어오자마자 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남학생들은 못마땅한 눈초리였고, 여학생들은 비명만 지르지 않았을 뿐 혼절할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자가 시작할 때까지 시 간이 꽤 남아있어서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은 열 명 남짓이 었다. "귀찮아." 정말 귀찮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는 자 그마한 선물이며 편지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렇게 많은 양 은 아니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그것도 매일 쌓이는 선물들 은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몇몇의 여자들이 조마조마한 모 습으로 영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단호히 책상 위에 것들을 모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렸다. "으아앙, 영진이가 내 편지 버렸어." 이윽고 한 여학생이 울음을 터뜨렸고 한무리의 여자들이 그녀를 감싸고 위로했다. 영진은 동정이 가긴커녕 짜증만 치밀어 올랐다. "야! 유영진! 네가 뭔데 애들 마음을 짓밟아!" 갈수록 가관이다. 도대체 무슨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의 외양만 보고 평가하여 '사랑에 빠졌다' 운운하는 것 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영진은 자신에게 따지듯 말 하는 당돌한 여학생의 눈을 응시했다. 짧은 커트머리, 부반 장 이미은이었다. "…귀찮아." 전학 오는 첫날부터 난리가 아니었다. 유영진의 외모는 연 예인들 뺨치는 수준이었고, 유현 고등학교의 제일 미남이라 는 칭호가 붙고 말았다. "귀찮다니 그게 말이나 돼? 얼굴 조금 잘났으면 그따위로 굴어도 되는 거야?" 미은은 표독스럽게 영진을 몰아붙였다. 안그래도 눈매가 날카로워서 사나운 인상이었기에 그런 모습이 꽤 어울렸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거짓말 마!" 황당했다. 도대체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왜 거짓이 란 말인가. 부반장은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상황 모면하려고 둘러대지 마!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좋을 대로 생각해." 그러고 보면 부반장 이미은은 사사건건 유영진과 충돌했 다. 영진에게 조금의 호의도 갖고 있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일이 있으면 덤벼들었다. 영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태도로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야간 자율학습은 말이 '자율'이다. 즉 대부분의 학생이 강 제로 학교에 남아있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영진은 담임선 생에게 이미 선언한 대로 집에 갈 생각이었다. 빽빽거리며 시끄럽게 구는 그녀를 뒤로하고 교실을 나가려는 영진을 누 군가가 가로막았다. 그 누군가는 버럭 소리쳤다. "계집애들 다 나가. 한성훈, 문 잠가!" 어딜 가나 주먹 쓰는 놈은 있다. 넘치는 힘을 주체 못해서 앞가림 못하는 그런 부류가 있다. 미은이 기겁을 하고 그들 을 말리려 했다. "야! 이기찬! 무슨 짓이야!" "부반장은 빠져." 기찬의 명령에 따라서 교실의 여학생들은 모두 밖으로 내 몰려졌고 문이 잠겼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며칠 전부터 영진을 손봐주려고 벼르고 있었던 기찬은 마침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괜찮을까?" 아까 울음을 터뜨렸던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복도로 쫓겨나고 나자, 교실 안의 상황이 걱정됐다. "흥, 자업자득이지 뭐!" 평소 분위기 메이커인 그녀였다. 단숨에 대세는 '건방진 영진'을 욕하는 쪽으로 흘렀다. 덕분에 싸움을 말리기 위해 서 선생을 부르러 가는 이도 없었다. * * "꿇어." "뭐?" 퍽! 기찬의 말에 영진이 반문하자 뒤에 서 있던 녀석 둘이 그의 허벅지를 거세게 걷어찼다. 와당탕!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영진은 바닥을 굴렀고 기찬의 이른바 '시다(일본식 속어, 부하)'들에 의해서 무릎 꿇려졌다. "꿇으라고 했잖아. 귀가 막혔냐? 여보슈, 사오정?" 영진을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의 스트레스 해소거리를 만나서 기쁘다는 눈치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렇고 그런 놈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찬은 젤로 세운 짧은 머리를 거울을 보며 매만지고는 다 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잘생긴 분도 가만히 있는데 너 따위가 그렇게 설 치면 쓰냐? 여긴 서울이 아니라고 전학생." 텃세라는 건가. 이번에도 녀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기찬 은 가볍게 인상을 구기며 영진에게 다가갔다. "서울 물 좀 먹었다고 그렇게 잘난 체 하면 원래 계신 분 들 속이 좀 그렇겠지?" 영진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임 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겁먹거나 경직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심사가 뒤틀린 기찬은 영진의 볼을 손바닥으로 세 게 후려쳤다. 짜악! "웃기냐?" 짜악! "웃겨?" 짜악! "한 번 더 웃어봐." 짜악!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영진의 뺨에 빨갛게 손자 국이 났다. 입술이 터져 버려서 피가 배어 나왔다. '쓰레기.' 영진은 사지가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머리를 흔들어 눈을 가리는 머리칼을 치웠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기찬을 쏘아보고 있었다. "니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앙? 눈빛으로 사람을 죽여보기 라도 하게?" 다시 터져 나오는 폭소. 그들은 영진을 완전히 장난감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기찬은 영진의 손에 끼워져 있 는 반지를 발견했다. "호오, 이거 진짜 금 같은데?" 그는 영진의 손에서 붉은 루비 반지를 빼어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루비잖아? 뒈지게 비싸겠네. 너 돈 많냐?" '학교에서 가급적이면 조용히 생활해요. 당분간은 몸을 숨 겨야 하니까.' 이 주일이 한계인가……. 영진은, 아니 시윤은 눈을 가만 히 감았다가 뜨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평소 보다 훨씬 낮고 위협적이었다. "돌려줘." "까고 있네. 이건 내가 압수다. 요즘 기름값이 올라서 바 이크 굴리기가 힘들었는데 네가 희생 좀 해라." 기찬은 주머니에 반지를 집어넣었다. 다른 걸 건드렸으면 참았을 것이다. 죽도록 팼어도 묵묵히 맞아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반지만은 예외였다. 그녀가 남긴 단 하나의 물건이었으니까……. "실수한 거야. 너희들……." 예전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별 이유없이 맞았던 적이 있 었다. 그 때는 힘이 없어서 반항하더라도 더 맞을 뿐이었 다. 시윤의 전신에서 공기를 짓누르는 살기가 터져나왔다. "뭐, 뭐야!" 현재 교실에 있는 사람은 시윤을 제외하고 여섯이었다. 뒤 에서 시윤의 팔을 꺾어서 결박하고 있던 녀석들이 그가 손 을 한번 떨치는 것만으로 나가떨어졌다. 짧은 시간이지만 백호의 지도를 받아서 싸움 기술들을 익혔다. 나이린과 루 이시블에게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시윤의 몸은 이미 반은 천사였기에 인간으로서는 감당 못할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반지만 건드리지 않았어도…" 뻐억! 배를 해머로 내리 쳤어도 이것보다는 덜하리라! 기찬은 시 윤이 올려치는 주먹 한 방을 복부에 맞고, 허공으로 두 뼘 쯤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시윤은 오른손 을 뒤로 물리며 왼쪽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텅! 가볍게 떠올랐던 기찬은 시윤의 스트레이트를 맞고 벽에 처박혔다. 그는 곧바로 위속에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들을 정신없이 게워냈다. 반쯤은 정신이 나갔던 기찬은 자신의 토사물 위에 그대로 얼굴을 쳐박고 혼절했다. "이렇게까지는 안 했겠지." 기찬의 친구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넷이서 한 명을 상 대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지금 시윤이 보여준 움직임 은 또 그 괴력은 자신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것 이었다. 전율이 흐를 정도의 장면이었다. "너희들도 할 거야?" 얼이 빠져있는 그들에게 시윤이 물었다. 낮고 갈라진 음 색, 그것조차 무서웠다. 시윤은 그들이 싸울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영진에게 다가가 그를 발로 밀어버렸다. 얼굴은 온통 토사물로 범벅되어 있는 지저분한 몰골. 시윤은 미간 을 찌푸리며 그의 주머니를 뒤져 반지를 꺼냈다. '…수연아.' 반지를 다시 낀 시윤은 입술의 피를 닦아내고는 가방을 집 어들었다. 지긋지긋한 학교, 위장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너 무 짜증났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이 정도의 힘이라니…….' 예전에도 이런 힘이 있었다면, 천호영에게도 멋지게 복수 할 수 있었겠지. 그리고… 힘이 있었다면 그녀를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고……. "쓸데없는 생각이야." 시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념을 끊기 위해서 소리내어 중얼거리고는 기찬을 툭툭 발로 찼다. 곧 기찬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끄으윽." 시윤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넌 속이 뒤집혀서 쓰러진 거다. 잊지 마라." 그렇게 내뱉듯 말한, 시윤은 잠겨있는 교실 문을 열면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입이 가볍다면 무겁게 만들어 줄 용의도 있어." 자신에게 당한 것을 발설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모두 알아들은 듯 했다. "씨앙! 다시 덤벼!" 비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구른 백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듬뿍 담겨 있었다. 허공에 날개를 움직이며 떠있던 나이린 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43전. 42승. 1무. 백호. 나보다. 약하다." "크아아악! 다시 하자니까!" 방금 있었던 대련 덕분에 그의 운동복은 걸레가 되어있었 고, 백호는 거리낌없이 상의를 벗어던져버렸다. 2개월 전에 비해서 더욱 잘 짜여진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보디빌더 의 근육과는 다른, 그야말로 전투용의 체형이었다. "백호 씨, 도대체 옷을 몇 벌 째 찢어먹는 건 줄 아세요? 그거 비싸다구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둘의 대련을 -빙 자한 나이린의 일방적인 구타- 지켜보던 루이시블이 한숨을 쉬었다. 경제적인 부담은 모두 루이시블이 책임지고 있었 고, 그래서 그녀는 고급 운동복이 백호의 한차례 대련용으 로 찢어질 때마다 피눈물을 흘렸다. "…사내는 돈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야." "제 돈이예요. 그리고, 굳이 성별을 따지자면 여자인 몸이 고." 백호의 기세 등등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얼 굴을 푹 수그린 능력없는 남자만이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벌써 2개월, 그동안 백호는 나이린과 40회 이상 의 겨루기를 했다. 물론 한 번도 이기지 못했고, 하도 맞아 서 운동복만 걸레가 되었다. "미안, 앞으로는 조심할게." 이건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백호가 나이린의 공격 을 한 대도 맞지 않고 모두 피해낼 실력이 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옷을 멀쩡히 유지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 었다.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루이시블은 앞으로 싸고 튼튼한 것으 로 사다줘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시 하자고! 이 회색아!" "백호. 바보다. 아직도. 내. 이름. 모른다." 루이시블은 찻잔을 기울이다 말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 다. 너무나도 수긍이 가는 소리,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2개월이나 지 난 지금에도 백호는 나이린을 회색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애칭이라고 붙여준 모양이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회색'이라고 부르면 '학습능력 제 로의 바보'라고 맞대응 할 정도니까. "내려와! 다시 시작하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백호를 바라보던 루이시블은 경악 할 만한 사실 한가지를 깨달았다. 찻주전자로 차를 따르던 그녀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상처가 없어!' 백호의 구릿빛 상체에는 단 하나의 상처도 없었다.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발전이었다. 2개월 전, 백호가 뜬금없이 나이린에게 '한판 붙자!'라면서 대련을 신청했을 때에는 어 떠했는가. 불완전하다지만 그래도 마계 제일의 갑옷이라는, 블랙아머 모드의 메르니츠를 걸치고도 1분 만에 혼절했던 백호였다. 그 때, 그의 몸에는 시퍼런 주먹자국이 정확히 세 개 심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본래의 힘을 찾을지도 몰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대련 후에는 꼭 혼절해버리던 백호 였다. 버티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지만 그것은 변함이 없었 다. 마법을 쓰지 않는 육탄전이라지만, 나이린은 전혀 봐주 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싸웠으니까. 루이시블은 두달 전에 그들의 대련을 한 번 보았고, 일주 일 전에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오늘 보는 것이 세 번째였으 니 백호의 발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호가 저렇게 멀쩡하다는 것은 래픽스 샤딘에 버금가는 나이린에게 비록 이길 수는 없지만 쉽게 지지도 않는 다는 의미였기 때문이 다. [메르니츠] 백호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시동어를 말하자 메르니츠가 부름에 응답하듯 자색 빛을 발했다. -즈아아앙 자색의 원이 양 손등에 그려졌고, 그것을 중심으로 흑색 장갑에 기묘한 무늬들이 새겨졌다. 전투종료와 함께 풀어뒀 던 메르니츠의 두 번째 소환이었다. 방금 전에 소환했던 메 르니츠는 2개월 전에 비해서 훨씬 또렷하고 두터워진 블랙 아머 형태였다. 방어력이 눈에 띄이게 향상되었다. "장갑이 한 쌍?" 루이시블은 또 놀라고 말았다. 메르니츠가 백호의 양 팔을 완전히 감싸고 있던 것이다. 힘이 양분되었기 때문에 하나 의 형태를 취했던 것에 비해 약할 거라고 짐작하던 루이시 블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최소한 두 배이상 강해졌어.' 백호와 메르니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2개월 전의 그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니,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1주일 전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백호의 실력은 거의 변 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강해져버렸다. "다시 덤벼! 회색 아줌마!" 백호의 눈은 검은 안광을 뿜으며 나이린을 주시했다. 나이 린은 여전히 못들은 척 하늘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본래 대 련 중에 그녀는 날지 않았었지만 오늘은 백호를 약올리기 위해서인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당하기 만 한 백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올라와." 나이린은 귀찮은 목소리로 -백호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나이린의 목소리는 항상 같다- 대답했다. 백호의 실력이 향 상되었다지만, 그건 나이린도 마찬가지였다. 갓 태어나서 주어진 힘을 제대로 쓸 줄 몰랐던 그녀는 백호와 대련을 하 면서 '싸우는 법'을 배웠다. 그건 굉장한 성과였다. 진검을 들려준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보다는 그것을 쓸 줄 아는 유단자가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하니까. "오라고 했겠다." 백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교차해서 가슴 앞으로 모았다. 빛을 거부하는 검은 기운이 그를 감싸고 힘 차게 회전했다. "그럼, 가야지." 파앗! 양팔이 양 옆으로 강하게 떨쳐짐과 동시에 그의 발 은 땅을 강하게 내딛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백호는 날 아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도약이 아닌, 비행이었다. "말도 안돼!" 쨍그랑. 루이시블의 외침과 함께 테이블에서 굴러떨어진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백호. 날았네?" 루이시블의 표정 없던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그동안 의 학습을 통해서 '감정표현'을 서서히 익힌 그녀였다. "노력과 재능의 산물이라고 해줘! 흐라압!" 어둠의 기류에 둘러싸인 백호는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빠른 속도로 나이린에게 접근했다. 백호의 움직임은 처음이 아닌 듯 꽤 익숙한 비행이었고, 나이린은 미동도 않은 채 그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콰쾅! 백호의 주먹이 나이린이 내뻗은 겹쳐진 양손바닥 위에 가 로막혔다. 그리고 터져 나온 것은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 리가 아니라 폭음이었다. 음속에 가까운 백호의 속도, 그리 고 메르니츠로 향상된 공격력이 한 점에 집중되어 암석이라 도 간단히 꿰뚫어버릴 위력을 발휘했다. 과거 백호가 전력 을 다한다면 바위를 부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온전하게 뚫 어버릴 수는 없었다. 망치와 송곳의 차이다. 넓게 확산된 것과 한 점에 집중된 힘의 차이였다. 물론, 집중된 힘이 확 산된 힘보다 강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구릿빛으로 그을렸던 백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대로 나이린을 날려버렸으면 모르되, 그녀가 조금도 밀려나지 않 아 힘의 반발력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나 이린은 백호의 주먹을 놓아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백호. 아직은. 안 돼." 많이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 무리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루 이시블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들어가려 했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고, 더 이상 둘의 싸움을 보아도 별다른 결과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패검(佩劍)을 주로 쓰던 바뮤즈가 주먹질이라니…….' 그 때 백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직이야. 보여줄 게 아직 남았어." 나이린이 지상으로 착지하려 하자 백호가 그녀를 제지했 다. 아직, 한 수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나이린은 날개를 한 차례 퍼덕여 고도를 높이고는 백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 무나도 진지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머리 끈을 꺼내서 바 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가지런히 묶고는 회색이 가득한 눈 을 빛내며 말했다. "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진지해져 볼 생각이었다. "간다앗!" 백호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허공에는 그가 남긴 옅 은 잔상만이 있었고, 백호는 어느새 나이린과 공격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둘의 움직임이었 지만 루이시블에게는 또렷이 보였다. '…뭘 노리는 걸까.' 공중에는 이동의 제약이 없었다. 백호와 나이린의 '날다' 라는 개념은 조류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싸우던 평면적인 싸움과는 달리 이것은 어떤 자세로든 어떤 방향으로든 공격을 하고 방어를 해야했다. 스팟! 스팟! 흥이 오른 백호가 한번 공격할 때마다, 찢어진 대기가 비 명을 질렀다. 둘을 중심으로 기류가 바뀌고 있을 정도로 그 들의 공방은 치열하고 또 위력적이었다. 나이린의 돌려차기 가 백호의 팔꿈치 방어에 막혔고, 백호는 뒤로 쭉 밀려나고 말았다. "체엣!" '…도대체 언제 저렇게 비행 연습을 해둔 거지?' 마치 땅에서 움직이듯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백호, 나이린 에게 압도당하고는 있었지만 훌륭한 움직임이었다. 루이시 블은 백호에게 감탄했다. "이게. 끝이야?" 나이린이 여유 있게 중얼거리자 백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뭔가를 보여준다고 해놓고서는 아직도 수세에서 빠져 나가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는 결심했다. '…위험할지도 몰라.' 이건 자신이 아닌 나이린에 대한 염려였다. "나이린, 조심해라! 이거 한 방으로 끝낼 테니까!" 그렇게 외친 백호는 오른쪽 주먹을 뒤로 빼면서 마력을 실 은 언어로 말했다. [메르니츠, 원 핸드 모드] -기이이잉 양팔을 감싸고 있던 메르니츠가 그의 부름에 답하더니, 왼 손에 장착되어 있던 장갑이 희뿌연 안개로 변해 오른손에 감기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부터 왼쪽 어깨까지 에워싸 버 린 흑색의 기형 갑주, 백호가 새로이 생각해낸 메르니츠의 원거리 공격형이었다. "메…르니츠? 저, 저게?" 루이시블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천 년 전의 바뮤즈 가 썼던 메르니츠는 한 번도 저런 형태를 취한 적이 없었 다. 백호의 다섯 손가락이 반쯤 안쪽으로 굽혀지며 손가락 끝으로 원을 형성했고,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어둡게 빛 나는 메르니츠가 날카롭게 감쌌다. [힘 개방] -즈아아앙! 커다란 자색의 마법진이 백호의 오른쪽 손등에 나타났다. 그것을 중심으로 자색의 문양들이 메르니츠를 완전히 덮어 버렸고, 그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백호의 손끝에는 흑자 색의 구체가 주먹 만한 크기로 모여들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팔 아래쪽을 지탱하고 말했다. [전개! 메르기온!] 쿠아아앙! 작렬하는 메르기온! 메르니츠를 완전히 사용할 수 없는 백 호에게 주어진 '무기'였다. 본래 메르니츠는 방어구이면서 또한 무기였다. 다만, 역대 마계(魔界) 군주들은 그들만의 신물을 갖고 있었기에 메르니츠를 방어용으로 쓴 것이고 천 년 전의 바뮤즈 또한 자신의 검만을 애용했었다. 그러니 메 르니츠의 또 다른 모습인 메르기온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가라아앗!" 마신포(魔神砲) 메르기온,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고 시전자 의 힘 또한 모자랐지만 그 위력은 절대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전의 공격처럼 맨손으로 막았다가는 낭패를 볼 듯 싶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참히 찢어발기며 메르기 온의 포는 맹렬한 속도로 나이린에게 날아갔다. [어둠의 하나. 빛의 하나. 인간의 하나. 나이린의 이름으 로 명한다. 나와라.] 그녀의 날개가 부르르 떨리더니 한순간 강하게 떨쳐졌다.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회색의 깃털들이 떨어져 나왔 다. 나이린은 무심한 회색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메르기온을 바라보았다. [네피림의 눈물] 그것이 시동어였다. 허공을 메우던 수많은 깃털들은 그녀 가 한 손을 가볍게 들어올리자 메르기온을 향해서 쏘아져갔 다. 수십, 수백, 수천의 깃털은 어느새 가느다란 회색 빛줄 기로 변해있었다. 하나 하나가 바로 빛의 화살이었던 것이 다. 쐐애애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네피림의 눈 물! 쿠콰콰콰쾅! 네피림의 눈물과 메르기온이 충돌하자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시윤이 아무 이상 없이 나오자 밖에 서 진을 치고 있던 여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만신 창이가 되었으리라 예상한 시윤의 얼굴은 입술이 터져서 핏 자국이 조금 묻어있을 뿐이었다. 이미은이 앞으로 튀어나와 교실 안의 광경과 시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믿을 수 없 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윤이 인상을 구기더니 갈라진 목소 리로 말했다. "배탈이 났다는군." 교실 바닥에는 기찬의 것으로 보이는 토사물이 있었고, 그 의 친구 둘이 양옆에서 당혹한 표정으로 기찬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들도 부정하지 않았고, 맞고 있던 당사자가 그렇 게 말했다.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나 많았지만 대부분의 아 이들은 그런 시윤의 말을 믿어버렸다. 불가사의한 위엄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가 친구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 다. '아아, 그러니까 영진은 기찬에게 얻어맞고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기찬이 배탈이 나서 심한 꼴을 당하지 않았구나.' 라고 모두는 그렇게 이해해버렸다. 한 명만 빼고. "정말이야?" 이미은이었다. 속고만 살았는지 '절대로 못믿겠다'라는 표 정을 지으며 따지듯 시윤에게 묻는 그녀였다. 조금씩 짜증 이 치미는 것을 느낀 시윤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낮게 말했 다. "그럼, 내가 저렇게 만들기라도 했다는 건가? 내가?" 황당하게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기찬보다 약해보이는 시윤이었지만, 그래도 -막연히- 의심스러웠고 미심쩍었다. 게다가 배탈 때 문에 구토를 하고 쓰러진 기찬은 3년 내내 감기한번 안 걸 린 튼튼한 녀석으로 유명하지 않던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하는 미은을 내버려둔 채, 시윤은 학교 밖으로 향했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미은은 한 번도 자신의 성격이 깐깐하거나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넉살이 좋아서 친구도 곧잘 사귀었 으며 특별히 사이가 나쁜 아이도 없었다. 유독 시윤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숙아! 나 아파서 집에 갔다고 해!" 무엇이 단 한번도 야간자율학습을 빠지지 않았던 그녀를 자극했는지 모른다. 평소 선생님들에게 모범생으로 통했던 미은에게 야자를 도망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탈행 동이었다. '뒤를 밟아서라도……'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쫓아가보고 싶었을 뿐 이다. 황급히 책상 위에 있던 책들을 가방에 쓸어담은 그녀 는 시윤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 * "하아, 하아. 이 녀석 어딜 간 거야." 학교 건물부터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교문까지 전력으로 달 려왔지만 시윤의 뒷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이 턱 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철제 교문에 손을 짚고는 주위 를 둘러보았다. 시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쫓아 나왔 으니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미은이 벌써 집에 가니?" 미은은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인자한 얼굴로 웃고있는 아저씨 같은 인상의 국어 선생이었다. "모, 몸이 안 좋아서…요."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해본 적이 없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목이 꽉 막혔다. 아프다는 말에 국어선생은 걱정스런 얼굴 을 하고는 집에가서 푹 쉬라며 어깨를 다독여주고 먼저 교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도망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기분이었나? 지금까지 도 망갔던 아이들은 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미은은 그동안 야간자율학습을 무단으로 도망가버린 친구 들에 대해서 약간의 경외심 비슷한 것을 갖게 되었다. 걸릴 까봐 무섭고, 선생님 눈에 띄일까봐 초조했다. 다른 아이들 은 이런 기분을 잘도 견뎌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대단하 게 생각이 되었다. 물론, 초범보다는 재범이 더 죄책감이 덜하다는 것을 모르는 그녀였다. "거짓말이 서툴러." 갑자기 교문 모퉁이에서 나타난 시윤이 비웃고는 말했다. 예의 낮고 갈라지는 그 목소리였기에 미은은 시윤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목소리는 얼굴이랑 달리 개판이란 말야.' 시윤에게 푹빠진 누군가는 '카리스마 있다' '분위기 있다' 라면서 꺅꺅거리고 좋아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의 목 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였다. "뭐, 뭐가!" "처음인가보지?" 도망치는 것은.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놀림받 았다고 생각한 미은은 이를 뿌득갈고 시윤을 노려보았다. "야, 유영진!" "왜 쫓아오는 거야?"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그녀는 시윤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독하게 눈치 빠른 녀석이다.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다. "쫓아가긴 누가 쫓아간다고 그래! 내가 왜!" 소리를 벌컥 지르던 미은은 필요이상으로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이 녀석 만 보면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가지 확신할 수 있 는 것은 호감 때문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 아니면 됐어. 그럼 어느쪽으로 갈 거야?" 시윤은 학교 앞의 갈림길을 가리켰다. "외, 왼쪽 길로 갈 거야." 미은의 대답을 듣자마자 시윤은 몸을 휙 돌리고 걸음을 옮 겼다. "잘 가." 물론 시윤은 오른쪽 길로 향했다. * * '당했다!' 멀어지는 시윤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미은, 오늘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쫓아…갈까.' 여기까지 와서 바보같이 집에 간다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 은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았다. 지금이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 라고 생각하면서……. "못 말리겠군." "꺄악!" 시윤은 아예 길가 보도블록에 주저앉아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가 자신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미은은 깜짝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은 시윤은 혀를 차면서 미은을 향해 미간을 찌 푸렸다. "그, 그러니까 그게…" 분명 왼쪽으로 간다고 말했는데! 쫓아가지 않는다고 말했 는데! 이렇게 들켜버렸으니 너무나 창피했다. 그녀의 얼굴 은 새빨갛게 상기되어버렸다.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미은의 말을 끊고 시윤이 내뱉듯 말했다. "정 따라오고 싶으면 삼십 분 안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여 기로 다시 와." "누, 누가 따라가고 싶대!" 시윤은 그녀가 빽 고함을 지르자 있는대로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대체 누가 소리치고 누가 화내야 하는지……. 꼴에 여자라고 자존심 챙기는 건가. "좋아, 내가 부탁하지. 제발 옷 갈아입고 와 주겠어? 여기 서 기다릴 테니까 말야."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윤은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교복을 입 고 쫓아오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려도 듣지 않을 테니… 최소한 사복이라도 입게 하는 수밖에. "학교에 무슨 일 있니? 왜 이렇게 일찍왔어?" "서, 선생님들 연수간다고 오늘 일찍 끝났어요. 독서실 다 녀올게요!" 미은이 집에 도착하자 집에 있던 어머니가 의아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아까 선생님과 마주쳤을 때보다는 조금 더 수월하게 거짓말을 해버리고 옷을 갈아입고는 바람 처럼 집을 빠져나왔다. 거짓말도 자꾸 하면 가락이 붙는지 라 약간의 스릴감마저 느껴졌다. "…이거 습관 될지도 모르겠는걸." 미은은 엘리베이터 벽면에 부착되어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 습을 비춰보았다. 빛 바랜 청바지, 쑥색의 니트티 그리고 지저분한 운동화 … 외출해서 남자를 만나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대로 입기로 했다. '쳇, 하필이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니.' 그녀는 거울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날카로운 눈 매, 평균보다 조금 큰 키에 짧은 커트머리,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래서 그녀는 한숨쉬었다. 외모를 가꾸는 건 대학교에 가서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평소 지론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약속했던 그 자리에 도착하자 시윤은 이미 검은색 정 장으로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투명하다싶을 정 도의 새하얀 살결과 옷의 색이 섬뜩할 정도로 대비를 이루 었다. 깊게 가라앉은 우울한 눈동자가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조용히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5분 늦었어." 잠시, 아주 잠시 새삼스레 시윤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던 미은은 기분이 팍 상하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5분 정도 늦 은 걸 갖고 면박을 주다니,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그녀 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미안해. 조금 늦었지?" 기껏 인내해서 사과했건만 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은 채 그녀의 온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숨. "하아아아." '한심하다!'라는 의사표현이 단지 한숨한번 쉬는 것만으로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왜 한숨을 쉬는 거야!" 안그래도 옷차림 때문에 트집잡힐까봐 불안했던 그녀다. 시윤의 작은 반응에도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얼빠 진 표정을 짓던 시윤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몸을 일으켜 걷 기 시작했다. "따라와." 너무나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시윤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하늘로 고개를 쳐들고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경을 바 짝 곤두세우고 있던 덕분에 시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라리 교복이 나을 뻔했군." * * 찰칵! 찰칵! 갖가지 표정과 포즈를 취하는 여자 모델을 연신 카메라로 찍어댔다. 실내는 고열을 방출하는 조명 때문에 뜨겁게 달 구어져 있었고, 명현은 그 가운데서 모델에게 계속해서 다 른 자세를 요구했다. 굵직한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 렸다. "지금 많이 바쁜가?" 어느새 촬영실 안으로 들어온 종석이 명현에게 말을 건냈 다. "아, 오늘 온다고 했었지? 미안하지만 거기 의자에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줘." 종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촬영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걸 터앉았다. 한 20분 쯤 기다리자, 명현은 촬영을 끝내고 나 타나서 커다란 카메라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많이 짜증난 얼굴이었다. "하나같이 다 인형들이야. 살아있는 표정이 하나도 없어." 그는 방금 전 모델에게 불만이 많은 듯 투덜거렸다. 종석 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리를 꼬았다. 명현은 인상을 금세 풀 더니 인상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게 소위 '살아있는 표정' 이라는 것인지 종석은 잠시 고민했다. "2개월이나 지났으니 결과가 나왔겠지? 수연을 찾은 건 가?" 잠시 생각에 잠긴 종석은 이내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찾지는 못했어." 그 때 사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와서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에 내려놓고 갔다. 종석은 고개를 숙여서 고맙다고 하고는 커피를 마셨다. 각각 두 스푼씩 들어간 다방식이었는데 물 조절을 어떻게 했는지 맛이 너무나 진했다. 종석이 인상을 쓰자 그때까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던 명현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잠이 확 달아나지? 요즘 밤샘작업 하느라 타달라고 했던 그대로 갖다 준 모양이군." 입에 남아있던 커피를 도로 뱉어버린 종석은 못 먹을 걸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휘수연이라는 아이 조사를 해봤는데… 고아였 어. 알고 있나?"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야 처음 계약할 때부터 알 고 있었다. "양쪽 부모님이 모두 양육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법적으론 어머니와 같이 살아야 하지만, 부모는 모두 외국에 있더군. 그리고 주변 여러 학교에 팬클럽을 갖고 있었고, 빼어난 용 모 덕분에 유명했어." 물론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명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 다. "그리고 이성교제도 했더군. 진도가 얼마나 나갔는지는 알 바 아니고, 평범하디 평범한 남학생이었나봐. 이름이 '명시 윤'이었나. 아마 맞을 거야. 이것도 알고 있었나?" 명시윤이라면 저번에 왔던 그 남학생 얘기일 것이다. 끄덕 끄덕. "웬만한 건 다 알고있다는 얘기군. 좋아, 간단히 말하지. 그 '명시윤'의 집에 가스가 폭발해서 부모님이 모두 죽었다 는 것, 알고 있나?" 처음듣는 얘기였다. 주위에서 가스폭발로 사람이 죽었다면 언뜻 뉴스로 들었을 법도 하련만,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이 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겠지. 철저하게 은폐됐으니까 말이야. 겨울에 있었던 일이야. 가스폭발에 사상자가 둘이나 나는 사건이라면 최소 한 이틀 동안은 뉴스방영이 됐어야 하는데, 그런 기사는 어 디에도 없더군. 신문에도 말이야.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사건도 아니니 숨기기란 어렵지 않았겠지. 어쨌든 아무래도 냄새가 나서 말야, 난 각 신문사들과 방송국들을 입막음시 킨 게 누군지 조사했지." 그는 무의식중에 찻잔을 기울이려다 자신이 뱉어버린 커피 라는 것을 깨닫고는 신음소리를 냈다. "바로 태성그룹이더군. 요즘 아명과 충돌이 잦다는 국내 경제력의 2인자."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했다. 아명이라면 바로 휘수연을 지 원하려 들었던 그 회사가 아닌가. 명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여기까지 조사한 알아낸 뒤에 미리 조사해둔 휘수연의 정 보와 비교해봤지. 우습게도 휘수연의 뒤를 봐주고 있던 게 '아명'이더군. 태성의 라이벌 그룹 말이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억지스럽게도…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말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명과 태성이 휘수연 에게 관심을 집중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 렇잖아? 왜 조금 뜨는 모델에 불과한 여자에게 초거대 기업 들이 접근하는 걸까." 명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스케일이 훨씬 커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초점을 명시윤에게 맞춰보기로 했지. 조금 조사해 보니 아명의 소속인 병원에 그 '명시윤'이 입원해 있다는 기록이 나오더군. 그것도 가스폭발 사건 바로 다음날부터 쭉 입원했다고 말야. 하지만 그것은 전산화된 가짜 기록이 었을 뿐, 실제로 명시윤은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었어. '아 명'이 손을 썼다고 밖에 볼 수 없지." 도대체 어떤 경로로 무엇을 조사한 것일까. 명현은 새삼 종석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병원을 조사하던 와중에 또 신기한 소식을 접 했지. 휘수연이 실종 전날에 그 병원에 왔었다는 거야. 직 접 봤다는 사람이 몇 있었어. 당시 그녀는 TV출연 중이었으 니, 쉽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더군. 어쨌든 휘수연은 특실에 반나절동안 머물러 있었어. 어때, 재미있지 않나?" 무슨 뜻일까.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도무지 알 수 없 었다. 명현은 종석이 계속 말하기를 재촉했다. "이제 약간의 추측은 가능하게 됐지. 명시윤과 휘수연은 아명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태성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걸 말야. 그 와중에 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 었어. 알다시피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기업단위로 고용될 때도 있어서 말야. 내 고용주중 한 명이 바로 현 아명의 총 수 '류민수'라네. 뭐, 이런 건 비밀이지만 상관없겠지. 어 쨌든 예전 그의 명령으로 난 한 고등학생에 대해서 조사한 적이 있었어. '천호영'이라는 이름이었는데 학교 이사장의 친척이랍시고 몹쓸 짓을 하고 다니던 후레자식이었지. 알고 보니 천호영과 명시윤은 같은 학교였어. 그리고 같은 반." 이것도 우연인가? 아니면 지독하게 정보를 잘 찾아내는 종 석의 능력인가. "둘은 휘수연 때문에 싸웠었고, 명시윤이 곧잘 얻어맞았다 더군. 그러던 와중에,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보면 내가 천호 영에 대해서 자료를 뽑아서 류민수에게 넘겨준 바로 다음 에… 천호영은 누군가에게 죽도록 당했다더군. 아마도 그 누군가는… 류민수겠지." 명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 었다. 벽에 자필로 '금연'이라고 써붙여 놓은 것은 보이지 도 않는 모양이었다. 종석도 담배 한가치를 물고 불을 붙여 서 길게 빨아들였다. 후우, 하얀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 다. "여기까지 알아냈을 때, 난 내 결론을 약간 수정해야 한다 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명이 뒤를 봐주고 있던 것은 휘수연 이 아니라 명시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실종 됐지. 이상이 두 달간 알아낸 것의 전부야." 맛있게 느껴져야할 담배가 너무나도 썼다. 명현의 손이 가 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그 뜻은……." "이건 우리가 손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너무 위험하고 더 이상 파고들려 한다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아무리 한때 내가 아명의 일을 처리했다지만 이게 한계야. 더 이상은 안 돼. 선금으로 받았던 삼천으로 그냥 끝내기로 하자. 이런 거래는 찝찝하니까." 종석은 그렇게 결론지어 버리고 망연자실한 명현을 내버려 두고 촬영실에서 빠져나왔다. 몇 가지 얘기 안 한 것이 있 었지만 마찬가지이리라. 휘수연이 스스로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예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 었다. '아마, 천호영에 대해서 조사할 때의… 총수는 류민수의 여동생이었지? 이름이 크리스던가…….' 종석은 몰랐다. 시윤의 병원기록은 크리스가 휘수연과 시 윤이 같이 있게 해주려고 한 배려임을. 그리고 휘수연의 뒤 를 봐준 것은 자기 대신 명시윤에게 그만큼 잘해주라는 뜻 이었음을. 수연을 병원에서 몸조리하게 한 것은 크리스였음 을……. 아무리 추리해봐도 크리스와 명시윤을 연관지어 생 각할 수는 없었기에 여전히 종석에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Over and over. 『페어』 무섭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두려움이었다. 초조하 고 불안하다는 느낌은 이제껏 가져보지 못했던 신선한 자극 이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답답하다. 이곳 카마세 이에는 언제나 달콤한 향기를 갖고 있는 공기가 있었고, 너 무나 부드러워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지만 그런 포근함 속에서도 내 이마에는 땀이 배어 나오 고 있었다. 고위 천사들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 래도 깨끗한 빛깔을 자랑하는 한 쌍의 날개를 난 힘차게 움 직였다. "어라? 마야 아냐?" 낯익은 음성이 내 귀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루미네스, 나 의 절친한 친구. 비록 나보다 한 계급 위인 '네브카Nev-Ka' 의 위치이기는 했지만 격의 없이 지내는 소탈한 친구였다. 화려하게 펼쳐진 그녀의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나와의 간격 은 빠르게 좁혀졌다. 두 쌍의 날개, 전투 능력이 없는 나로 서는 부럽기만 했다. 헛, …타락에 빠진 건가. 힘을 동경하 다니……. 어쨌든 바쁜 와중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 구라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파카Opa-Ka 마야가 네브카 루미네스께 인사드립니다." 그녀는 한껏 볼을 부풀리고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렸 다. …내가 뭐 잘못했나? 제대로 된 격식으로 확실히 한 것 같은데… 인사법이 틀렸나? "기억 안나? 둘만 있을 때에는 그냥 편하게 대하라고 했잖 아." …널 때리면서 장난치다가 다른 천사에게 -그것도 네브카 에게- 걸려서 무지하게 혼난 것도 기억난다. 그게 바로 일 주일 전의 일이던가. 난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신께서 주신 증거가 있나니, 그것은 능력입니다. 신께 더 욱 다가갈 수 있는 증거가 있나니, 그것은 날개입니다. 보 다 고결하고, 보다 아름다우며, 보다 강력하시며, 신께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는 네브카에게 어찌 저 같은 오파카의 천 사가 고개를 들겠나이까."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버렸다. 확실히 여성형 천사 를 놀리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상위 계급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살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 루미네스는 입 술을 꽉 깨물고는 기어 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라 함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위와 아 래가 확실히 구분되는 관계라면, 그것은 곧 서로에 대한 모 욕이며 약자에게 보내는 비웃음일 뿐입니다." 한번 입이 트이니까 말이 술술 나온다. 게다가 평소에 다 른 고위 천사들에게는 자주 쓰던 말투여서 입에 배인 것이 기도 했다. 난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곧 이상한 소리를 들어 버렸다. '뚜욱' 내 심장 떨어지는 소리다. 루 미네스의 얼굴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 …최악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울려버린 것이다. 루미네스가 살아온 기간에 비해 너무 순진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널…갖고 놀았다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경솔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게 큰 실수였다. 가슴이 시큰거릴 정도로 그녀의 슬픔이 진 하게 전달되었고, 난 그녀의 눈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밑으 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이 긍정의 빛으로 보였을까 ……. "그, 그래. 난 몰랐었어. 미안해." 바보같이 웃으며 눈물을 흘리는 루미네스, 하지만 이제 와 서 장난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걸.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 지만 입이 열리질 않았다. 제기랄, 이 정도 밖에 되질 않았 던가. 내가 우물쭈물 하던 사이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슬 픈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난 그저……. 아니,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이내 정색을 하고는 머리를 도리질 쳤다.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 금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울리다 니… 난 최악이다. 루미네스는 나의 굳은 얼굴을 보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억지 웃음이었다.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야?" "……." 순간 내 얼굴이 확 붉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이 뜨 거운 것을 봐서는 틀림없이 사과처럼 상기됐을 것이다. 루 미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일이야?" "…조금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비웃을 거다. "네브카의 이름으로 묻겠어. 카마세이의 끝자락, 결계의 근처는 오파카가 올 곳이 아니야. 무슨 일로 온 거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명령어였다. 그녀는 지금 내게 사 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과도 관련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부근은 전적으로 네브카나 그 이상의 계급이 파수하고 있거나 경계를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시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였다. 난 입 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말했다. "페어를… 페어를 요청하려고 왔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쯤에서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누구에게?" 역시 비웃을 것 같다. 난 그때 봤었던 여신과도 같은 아름 다움을 소지한 그녀를 떠올렸다. 빛이 비치는 차이에 따라 서 금색으로도 은색으로도 보였던 머리카락, 빛을 간직한 눈동자… 세상의 모든 순결함을 담은 듯한 하얀 피부. 꿈만 같았었지. "카마세이의 여섯 번째 날개, 류메리아." 비록 까마득히 먼 계급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 다. 그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었다. 최하위 계급인 난 최고위 계급인 그녀에게 페어를 청하려 한다. 루 미네스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웃지 않았다. 다만 날 개를 움직여 몸을 휙 돌려버렸을 뿐이다.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페어는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의식, 바로 사랑의 증거였 다. 따라서 아무리 금지구역에 가까운 변방이라 하더라도 마음놓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루미네스는 몸을 부르르 떨 더니 엄청난 속도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과연 네브카인가. "…후우, 덕분에 긴장은 풀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루미네스를 만난 덕분에 어느 정 도 나아졌다. 물론 그녀를 놀렸다는 죄책감은 남았지만 나 중에 사과하면 되겠지. 일단은 류메리아, 나의 여신을 만나 러 가야한다. 과연 날 기억해 줄까? 나와 페어를 맺어줄까? "…일단 가자." 스파앗! 온 힘을 다해서 날개를 움직이며 그녀가 있는 곳 을 향해 날았다. 그녀가 십천(十天)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좌절했었지만, 페어는 계급을 무시하는 성스 러운 행위. 단지 거부당할까봐 두려울 뿐……. 11. 은신隱身 한줄기 바람이 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것은 뜨거웠다. '고귀하신 카마세이 육 천(六天) 류메리아께 네브카 Nev-Ka 마야가 인사드립니다.' '후후, 마침 심심하던 차에 손님이라니 잘됐네요. 무슨 일 로 오셨죠? 이렇게 재미없는 결계까지?' '말씀 낮추시기를. 전 하급의 천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싫어요. 이게 편한걸요. 그보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겠어 요? 궁금하다구요. 저한테 용건이 있는 거죠?' '아직… 아직 페어를 맺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맞는 지요?' '맞아요. 페어라… 그러고 보니 십 천 중에는 페어를 맺은 이가 거의 없군요. 물론 저도 아직 맺지 않았답니다.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왔나요?' 마야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었다. 프로포즈. 긴장으로 인해 힘차게 고동치는 심장의 맥박소리 가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류메리아의 표정 이 굳어졌다. '당신께 바랍니다.' 프로포즈. '나의 영혼. 나의 마음. 나의 사랑. 나의 일생. 모든 것을 당신께 바쳐 당신의 사랑을 얻고자 합니다. 미약하지만, 모 자라지만, 하지만 감히 그대에게 이렇게 무릎 꿇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으로 가득한 저의 영혼 때문이니. 전 당신께 …페어를 청합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상체가 살짝 숙여졌다. 이제는 대답만이 남았을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류메리아의 청량한 목 소리가 부드럽게 마야의 귀를 간질였다. 아까보다 훨씬 진 지하고 차분해진 음성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마야 의 얼굴을 위로 향하게 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호의에 감사를 표해요. 네브카의 마야, 슬프게도 난 당신 의 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군요. 정말 미안해요.' 진심을 담아 그녀는 말했다. 마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네브카여서, 제가 모자라 서라면…' '아니요. 당신은 그 자체로도 충분해요. 난 계급이나 여타 의 것들은 신경을 잘 안 쓰기 때문에. 후훗. 아예 생각을 않 기 때문에 그건 상관없어요. 다만 저는 이미 사랑하는 이가 있답니다. 저의 인을 맡긴이가 벌써 있답니다. 사랑하는 이 가 있지요.' 끝이다……. 천사의 인(Angelic Stamp)를 맡겼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상대에게 건네겠다는 말과 같다. 류메리아는 지금까지 그 어떤 천사와도 일정 선 이상의 관계를 갖지 않 았었다. 천사의 인을 맡길 정도의 상대가 있다면 이미 소문 이 났을 텐데… 마야는 듣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축하할 일이군요. 상대는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아마도 빛의 정점인 하모리엘이거나 카마세이 십 천 중 한 명이리라. 마야는 그 행복한 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다. 류메리아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사랑에 젖은 여자의 것이었다. '모르실 거예요. 스키엘, 스키엘 다루카. 제가 사랑하는 이 의 이름이지요.' 누가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악중의 악, 마중의 마, 지옥의 군주 스키엘을……. * * 날이 밝자 촉촉한 봄기운이 닫혀진 창 틈을 비집고 방안으 로 스며들었다. 녹색을 찾기 힘든 회색 빛 건물만이 가득한 도심의 오피스텔이었지만 봄은 예외 없이 자신이 왔음을 알 렸다. 그리 넓지 않은 오피스텔 내부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남자는 지친 얼굴을 들어 창가 에 쏟아지는 햇살을 응시했다. "아침…인가." 피로에 젖은 초췌한 안색,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고통 때문에 찡그렸다. 복부에 길게 베어진 상처는 피가 멈 췄을 뿐이지, 아직도 불에 지지는 고통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디지털 시계를 보고 날짜를 확 인했다. '그것'에 도전한지 정확히 99일이 지났다. 신선놀음 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얘기는 아마 이런 것을 뜻하 리라. 겨우 하루 남짓한 시간이었을 뿐인데 구십 구 일이나 지났다니. "후후, 또 실패라……." 그는 힘없이 웃었다. 미치도록 힘에 집착했지만 아직 원하 는 것을 얻지 못했다. 축 늘어져있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하하! 내가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했다니, 넌 참으로 어 리석구나!'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목소리, 휴즈… 다루카. 생명 을 걸고 증오하는 자. 얼굴을 떠올리려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왼쪽 눈, 그 어둠 속에는 잔인하게 웃 는 휴즈의 얼굴이 생생히 각인되어 있다. 지난 천 년의 세 월 동안 단 한 시도 꺼지지 않았던 증오의 불꽃… 천년의 저주. 그것은 여전히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크크큭." 자조 어린 웃음이 입술을 비틀리게 했다. 이미 오랜 세월 이 지났건만 휴즈를 생각하자 또다시 눈이 불에 데인 듯 뜨 거워졌다. 귓가에 내려앉은 저주처럼 휴즈의 목소리는 절대 로 지워지질 않았다. '그런 눈 따위는 없는 게 낫겠지. 그러나, 하나는 남겨주마. 네가 한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하하핫!' 꾸우욱. 쥐어진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했다. 그때는 질투에 눈이 멀었었고, 지금은 복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휴즈의 말처럼 그는 똑 똑히 하나 남은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덕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는지……. "…그러니 내가 널 죽이겠어."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오직 복수만이 생을 이어가게 하는 단 한가지 이유! 천사를 천사답게 하는 따뜻한 마음, 생명 을 사랑하는 마음, 영혼을 고귀하게 여기는 마음, 빛에 가까 이 되기 위한 노력, 그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천계를 팔아 넘기고 남은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의 삶이었다. 그는 천계를 팔아 넘긴 배신자, 마야였다. '…궁금하군.' 명현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개인적으로라도 조사해볼 생 각이었다. 류민수든 그 동생이든 간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 그리고 태성은 또 왜 그랬는지……. * * "여, 여긴 미성년자 출입금지 업소잖아!" 시윤이 'Blue Rain'이라는 칵테일 바에 미은을 데려가자,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안 들어가겠다며 뻗대고 있었다. 머리를 콕콕 쑤시는 두통 때문에 시윤은 관자놀이를 손가락 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너 몇 살이냐?" "물론 열아홉 꽃다운 나이지." …그런 꽃이 있다면 밟아버릴지도 몰라. "그런데 술집 한 번 안 가봤어?" "응. 당연한 거 아냐? 학생이 무슨 술집이야? 어쨌든 난 절대로 안 들어가!" 순진빵. 미은은 정말로 공부만 하고 산 모양이다. 그녀의 고지식함에 시윤은 짜증이 났다. 누가 따라와 달라고 고사 라도 지냈나? "그럼 집에 가." 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에 들어갔다. 지금 여기서 미은이 돌아간다고 해서 조금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오히 려 홀가분할 뿐. 그래서 그는 내심 그녀가 돌아가 주기를 바랬다. "같이 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그녀는 시윤을 따라서 바로 쪼르르 들어왔다. 아직 해가 질시간은 아니었지만 검게 코팅된 유 리창과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는 은은한 노란색 조명들은 실 내를 충분히 어둡게 유지하고 있었다. 어두운 분위기, 그 사 이를 가로지르는 조용한 피아노 반주곡. '…신기하다.' "여어, 오늘도 온 거야?" 지루한 표정으로 유리컵을 닦고있던 이십대 후반의 남자가 시윤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도'라는 것은 자주 온 다는 얘기? 미은은 '학생'이라는 개념에 이것을 끼워 맞추어 보려다가 포기했다. 아무래도 '영진'과 자신의 가치관은 너 무나 틀린 것 같았다. "예. 경진이 형은 오늘도 한가하네요?" 살짝 목례를 한 시윤이 비어있는 자리들을 가리켰다. 경진 은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대충 묶어 꽁지머리 를 만들고는 빙긋 웃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그보다 같이 온 사람은? 애인?" '어른들이 오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 던 미은은 바텐더 경진의 말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왜 저런 녀석이랑!" 정작 시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미은은 분했 다. 도대체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런 녀석이랑 애인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경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닌가보군. 확실히 애인사이로 보이진 않았어. 남자가 아 깝잖아?" 객관적으로 볼 때 남자가 아깝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은의 뺨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줄곧 조용히 있던 시윤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은 그냥 뱉 어버렸다. "…바보." "이이익!" 막 화를 내려는 미은을 가볍게 무시한 시윤은, 턱을 매만 지며 그녀가 하는 행동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경진에게 말했다. "애 놀리는 건 그만두고 자리나 마련해줘요. 보다시피 ……." 시윤은 말끝을 흐리며 미은을 향해 눈짓했다. '…저렇잖아 요.'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조금만 꾸미면 성인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게된다. 여자의 경우라면 더욱 쉽다. 머리를 기 르고 화장을 짙게 하면 동안이 아닌 이상 꽤 나이 들어 보 인다. 하지만 미은의 경우는 반대였다. 짧은 숏컷트 머리에 대충 입은 청바지에 면티는 애석하게도 그녀를 중학생으로 보이게 했다. '그렇군. 확실히 손님들이 본다면 조금 곤란하겠어.' '그렇죠?' 둘이 말없이 눈빛만을 교환하자 미은의 눈매가 사납게 변 했다. 이 인간들이 무슨 작당을 하는 거지? 아무리 둔하다 고 해도 여자는 여자, 여자의 육감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 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또 다시 그녀의 말은 경진과 시윤이 외면함으로써 가볍게 무시되었다. 경진은 시윤과 미은을 실내 깊숙한 곳에 있는 스윙도어가 달린 자리로 데리고 갔다. 이곳이라면 누구에게 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윤이 말했던 '사복'이라는 것은 학생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나오라는 얘기였지만 안타깝게 도 미은은 알아듣지 못했으니-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리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구석진 자리를 얻을 수밖 에. "주문은?" 40평 남짓한 바에 직원이라곤 경진 한 명이었다. 혹시 더 있을까 하고 미은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사실 블루레인은 경진 혼자 꾸려나가는 곳이었다. 사장이며 종업원이며 바텐더로서 1인 3역이다. 지금 그는 손을 비비며 종업원 행세를 하고 있었 다. 시윤은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곁눈질하는 미은에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뭐 마실… 아니, 됐어. 술 마신 적 없다고 했지?" "당연하지!" …신기한 인종이군. 시윤은 마음속으로 미은에 대한 평가 를 정정했다. "평소 마시던 것, 데킬라 한 병, 그리고 알콜이 들어가지 않은 칵테일 한 잔 알아서 만들어 줘요." 나사가 빠진 것처럼 보여도 경진의 솜씨는 꽤 좋은 편, 그 는 틀림없이 무난하고 초심자도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올 것이다. 그러나 시윤의 주문을 듣던 경진의 얼굴 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한 병? 혼자서?" "예. 한 병이요." 경진은 그제야 시윤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시윤이 이 가게를 처음 찾은 게 한 달쯤 됐 을까. 그 이후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꼭 들러서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돌아가곤 했다. 무리하지 않고 칵테일 한 잔 과 양주 서너 잔으로 시간을 보내던 시윤이 오늘은 의외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칵테일 바에서 병째로 술 시키는 건 촌놈 내지는 닭대가 리라는 것, 알고 있냐?" "꼬꼬댁." 정말이지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닭울음소리를 낸 시윤은 경진을 재촉했다. 벙찐 얼굴이 된 경진을 향해 '뭐, 그런걸 신경 쓰냐.'라는 눈빛을 추가로 보내기도 했다. "젠장, 마침 반쯤 남은 게 있을 테니 그거 가져다 주지." 사실 반병도 치사량에 가깝다. 온더락으로 마시면 물 배차 서 죽을 것이고, 스트레이트로 마신다면 술이 사람을 마시 는 꼴이 되 버린다. 시윤은 그나마 걱정해주는 경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전등 아래 그의 미소는 하얗 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에 올 때마다 시윤이 시켰던 경진이 가져다 줄 칵테일 의 이름은 '화이트 레이디White Lady'……. 시윤의 입가에 매달려있는 미소는 힘겹게 슬픔을 감추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 * *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경진은 금세 트로피칼 형태의 이름 모 를 칵테일 한 잔과, 화이트 레이디, 그리고 데킬라 반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약간은 과장된 몸짓으로 잔들을 테이 블 위에 내려놓고는 한쪽 손을 등뒤로 돌린 채, 연극배우라 도 되는 냥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영업용 멘트인 걸까? 미은은 가만히 경진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틀림없 이 여자관계가 복잡할 것이다. 약간 느끼하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행동, 뚜렷한 이목구비와 입가에 줄곧 머물러 있 는 미소. 그리고… 눈웃음. 분명 호감이 가는 타입이었다. '우웩. 느끼해.' 이성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미은으로서는 경진 의 눈웃음이 달갑지 않았다. 경진이 자리를 떠나자 미은은 기다렸다는 듯 시윤에게 말했다. "저 아저씨, 바람둥이지?" "저래 봬도 스물 여덟 살이야. 아저씨라는 말은 그다지 어 울리지 않는 나이인데." "어쨌든! 바람둥이 맞지?" 시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자신의 잡을 들어서 하얀 액체를 입안에 흘려 넣었다. 드라이 진의 향이 달콤하 게 혀를 자극했다. 그리 진한 술이 아니었지만 뜨거운 기운 이 몸 안에 확 퍼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몰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 시윤은 대답을 듣지 않기로 했다. 시윤은 묵묵히 따로 준비된 작은 잔에 데킬라를 가득 부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약간은 독한 편 인 데킬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속은 더욱 더 뜨거워졌다. 시윤이 조용히 술을 자작하자, 무안해진 미은은 자신의 앞 에 놓인 분홍색의 칵테일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는 께름칙 한 표정이 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이거 술이지?" "칵테일 주스야." 잔뜩 겁먹고 있던 미은은 '별게 다 있네' 라고 신기한 듯 중얼거리더니 잔을 들어 스트로를 입에 가져다 댔다. 음료 를 한 모금 빨아들이자 달콤한 과일 향이 듬뿍 입안으로 들 어왔다. "우와, 맛있다." 술을 못 마신다는 말에 경진이 최대한 무난하게 만든 것, 과일주스들과 시럽만을 넣은 말 그대로 주스였다. 호들갑을 떠는 그녀를 외면한 시윤은 벌써 술을 넉 잔이나 비우고 다 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온더록을 위해 가져다 놓은 얼음은 저만치 밀어놓은 채,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제 슬슬 말해도 되지 않을까?"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예의 그 쉬어터진 듣 기싫은 목소리, 계속해서 들었지만 익숙해지려면 오래걸릴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시윤은 순식간에 진지함을 되 찾고 있었다. "뭘 말해?" "왜 날 따라왔지?" 음습한 정적이 찾아왔다. 스윙도어 건너편으로부터 피아노 소리만이 작게 들려오고 있었고, 미은은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2. 각성을 위한 키워드, 그것은 …불행. "제법이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사라지다니." 아진이 말했다. 투명하게 비치는 핏빛의 와인 잔을 들고 있던 그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 나 그랬던 것처럼 풀어헤쳐진 옷차림으로 요염한 자태를 보 였고, 카엘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니 이상 하군." "루이시블이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단 뜻이겠지. 초조해 할 것 없어, 카엘. " 듣는 이를 시원하게 하던 카엘의 청량한 목소리에 초조함 이 배어있었다. 왕께서 명령을 내리신 지 꽤 시간이 지났음 에도 불구하고 루이시블과 스키엘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 을 수 없었다. 특별히 죄를 사면해준다는 왕의 마음이 변하 기 전에 빨리 그들을 찾아야했다. 그래서 카엘은 날이 갈수 록 답답해졌다. 카엘은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러 느슨하게 하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반복했다. 와인을 입에 한 모금 흘려 넣은 아진은 잔을 내려놓고는 책상에서 내려왔 다. 치렁치렁하게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왕의 뜻을 전하는 것은 래픽스 샤딘의 수장 인 나 아뮤릿 지나이온이니까. 카마세이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이상,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그 때 방문이 열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의 레보라크가 들어 왔다. 단정했던 머리가 부스스하게 흐트러졌고, 무테 안경 너머의 눈은 피로에 젖어있었지만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 다. "하하하! 카마세이가 움직여도 상관없어! 카마세이 십 천 이 모두 강림한다 해도 말야!" 한 달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다. 아무리 체력이 무한 한 악마라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인계에서 쌓 은 천년동안의 지식을 바탕으로 불완전했던 네피림을 수정 보완하고 그 한계점을 극에 달하도록 상승시켰다. "벌써 완성했나?" 아진이 물었다. "저길 봐!" 레보라크는 한달 동안 잠도 못 자고 일한 사람-표현 상 그렇다-답지 않게 상쾌한 모습으로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이잉, 벽의 일부분이 미끄러지듯 좌우로 갈라졌고 10미터 가량 밑에는 엄청난 넓이의 지하 밀실이 보였다. 그가 손가 락을 퉁겨 소리를 내자 강한 조명이 밀실을 밝혔다. 거기에 는 한 무리의 잿빛 천사들이 있었다. "…열 둘?" 카엘의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열 둘의 네피림을 향해 레보라크가 광소를 터뜨리며 명령했다. "으하하핫! 눈을 떠라. '지-옴-카바린'이여!"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열 둘의 네피림들이 눈을 떴다. 단지 눈을 떴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카엘은 굳어버 렸다. '…맙소사.' 경악에 찬 카엘의 표정을 본 레보라크가 만족스러운 듯 웃 었다. 대 카마세이 전용병기, 지-옴-카바린이 눈을 뜬 것만 으로 이 지하 밀실의 공기는 세배는 무거워졌다. 그들이 뿜 어내는 기운은 각각이 마계 최강이라는 래픽스 샤딘의 중급 에 가까운 힘이었기 때문이다. 단일 전투력으로는 여기서 가장 약한 카엘조차 이기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셋 이상 모 이면 아진이라도 감당하기 힘들 터였다. 그런 반천사가 열 둘이나 있다! 물론 물질계(인간계)에서만 통하는 얘기였다. 마족의 힘이 반감되는 이곳 물질계가 아닌, 카마세이나 마계였다며 이런 녀석들이 한 타스가 모여도 래픽스 샤딘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물론 카마세이 십 천의 상대가 될 수도 없었다. 인 간의 육체를 기본으로 한 생체병기에 불과하니까……. 즉, 이것은 인간계 수복을 위한 병기였다. "호오, 정말 멋진데?" 아진은 갓 눈을 뜬 그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예전의 프로토타입은 눈이 회색이어서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눈동자가 잿빛일 뿐 흰자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열 둘의 네피림은 모두 여성체였다. 백 명에 가까운 남녀를 잡아서 실험해본 결과, -무기징역 사형수부터 창녀까지 다 양하게 납치해 왔었다.- 남성체보다는 여성체가 육체적인 '혼합'에 더 적합했던 것이다.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던 아진 이 레보라크에게 눈을 돌렸다. "저것들, 얼마나 힘을 낼 수 있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각각의 네피림이 토돌을 때려눕힐 수 있을 정도지." 토돌에게는 불쾌한 일이겠지만 꽤 쉬운 비유였다. 확실히 예전의 나이린 때보다 성능이 좋아진 것 같았다. 지금 은연 중에 흘러나오는 뒤섞인 기운도 나이린의 그것보다 훨씬 맑 고 깨끗했다. 양질의 기운이라는 얘기다. 아진의 두 눈이 빛 을 발했다. '시험해볼까.' 그는 붉은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얼굴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막아보거라. 아이들아……." 스윽,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선을 긋자 새카만 선이 도 화지 위에 그려지듯 허공에 어둠의 역 오망성이 생성되었 다. 마법진을 이용한 증폭 공격 마법은 아진의 장기중 하나, 그는 완성된 마법진 위에 검지를 데고 조용히 말했다. [거역하는 자, 그대에게 벼락이 떨어질 지어다.] 지이이이잉. 마력을 실은 목소리, 주문의 발동. 그와 동시에 레보라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짓이야! 그 녀석들은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 불과해! 라고 말하려 했다. 레보라크는 그 말을 끝까지 하 지 못했다. 아진이 날린 푸른 낙뢰를 향해, 당황한 네피림들 중 한 명이 땅을 박차고 날아든 것이다. 시험관에서 합성되 어 급속도로 성장한 덕분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잿빛 머리카 락이 사방에 미친 듯이 휘날렸다. [어둠도 빛도 아닌 자, 그것이 우리들의 이름. 막아라! 보 호하라!] 그녀의 팔이 크게 원을 그리자 그녀의 바로 앞 공간에 굴 곡이 생기며 반투명한 노란색 막이 만들어졌다. 콰콰쾅! 눈부신 섬광이 터져나와 밀실을 완전히 감싸버렸다. 빛 때 문에 잠시 눈을 찡그렸던 아진은 네피림을 확인했다. "…쓸만하군."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은 네피림은 아진을 똑바로 쳐다 본 채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었다. 비록 실드가 부서지긴 했지만 아진의 낙뢰를 완전히 막아냈으니 대단한 것이었다. '사정 봐주지 않아도 됐을까.' 레보라크는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진의 공격을 무리 없이 받아내자 대단히 흐뭇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아마 성 공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이 이러하리라. 침착하게 움직였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적절한 방어를 해냈다. 흥 미롭게 그녀를 바라보던 아진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어렸 다. "용케도 막아냈구나." "시험 하셨으니까. 손속을 두지 않으셨다면 전 소멸됐겠지 요."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예전의 답답했던 프로토타입 과의 대화를 생각하자, 더욱 이 네피림이 마음에 들었다. 레 보라크가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차린 듯 짧게 설명해주었 다. "지성은 육체의 기본이 되는 인간의 것을 쓰게 했어. 감정 이란 것은 아예 지워버리고… 이쪽이 훨씬 낫지?" 역시 한 번 깨물었더니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건가. 아진 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며 열려진 벽 사이로 몸을 내던졌 다. 몸은 중력에 이끌려 빠른 속도로 낙하했고, 허공에 머물 러 있는 네피림과 가까워지자 그는 날개를 꺼내어 몸을 멈 추었다. 한 쌍의 검은 깃털의 날개가 좌우로 펼쳐졌다. "얼굴을 보여라."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던 회색의 머리칼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었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아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카엘과 레보라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곧 납 득한 표정이 된 아진, 그의 입가에 머문 미소는 너무나 잔 인했다. "네 이름은?" "…없습니다. 저희는 이제 막 태어났을 뿐, 주인께서 지어 주시기를……." 이름은… 아직 없습니다. 후후, 좋아. 그렇다면 내가 지어줄게. 음… 그래. 아뮤릿, 아뮤릿 지나이온 어때? 내가 메사트 지나이온이니까, 그러 니 널 내 동생 삼지 뭐. 동생…이요? 그래, 내 동생. 후후, 너도 혼자고 나도 혼자야. 그러니 남 매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줄여서 아진이라고 부를게. 자아, 아진 누나라고 불러봐. …에? 누, 누나요? 그래, 누나라고 불러보라니까. 어서. 누, 누…나. 하하핫! 귀여워! "이름이 없단 말인가." 잔인했던 그 미소가 일시에 사라진 아진의 얼굴은 대신 슬 픔으로 가득했다. 왜 지금 이런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왜 하찮은 네피림에게서 그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일까. 그의 두 팔은 자연스럽게 머뭇거리고 있던 네피림을 끌어안았다. "주…인이시여." 네피림의 몸은 가늘었다. 차가웠다. 세게 옥죄면 금방이라 도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허리, 가녀린 목… 아진은 입을 살 짝 벌려 그녀의 목을 물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 내렸다.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녀는 떨고 있었다. 감정이 지워졌다고는 하나, 이런 반응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진 은 네피림의 하얀 목에 입술을 댄 채 가만히 말했다. "널 메사트라고 부르겠다. 넌 나의 오른팔로서, 네피림의 장으로서 움직일 것이다." '아진!'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워낙 주위가 조용했기에 그를 지켜 보던 카엘과 레보라크에게까지 들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레보라크와는 달리 카엘은 당혹한 모습이 되어서 속으로나 마 아진의 어리석음에 절규하고 있었다. '아직도, 아직도 잊지 못했더냐!' 네피림, 메사트라는 추억의 이름을 가진 그녀는 아진의 품 안에서 조용하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피림, 메사트. 명을 받들겠습니다." * *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둘은 아주 얇은 경계만을 둔 채 무한히 떨어져 있는 평행 관계, 손바닥과 손등같이 서로 절 대로 만날 수 없는… 하늘과 땅이 지평선에 가로막혀 서로 를 절대 침범할 수 없듯… 둘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게 '법칙'인 것이다. 마계의 붉은 하늘에 저물어 가는 선홍색 태양 빛이 더해져 성의 없이 휘갈긴 노을진 야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주받 은 자들의 땅, 마계의 하늘은 붉다. 어둡고 칙칙한 색인 데 다가 태양 또한 인계의 것에 비하면 어둡기만 하다.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흉측한 마물들이 이 땅에 는 가득하다. 아니 어쩌면……. '신의 실패작들이 모여있는 곳일지도 모르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약자는 잡아먹히거나 굴복하고 강자는 군림한다.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시되는 곳이 바로 마계인 것이다. 물론 질서는 있다. 래픽스 샤딘이라는 검을 쥐고 마계 최강자로 군림하는 왕의 핏줄 '다루카', 그들 혈 족이 바로 질서요 법이었다. 강자존만이 받아들여지는 마계 에서 '다루카' 핏줄은 단연 최강이었다. 그들을 창조한 신 (신)도 최소한의 질서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 다. 아니, 카마세이와의 균형을 위해서… 빛과 어둠의 균형 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마계의 지 존 다루카를……. "나는 신을 저주한다." 노을이 휴즈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짓씹듯이 말하 고는 창문을 닫으라고 손짓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시종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창문을 닫았다. 시종은 다시 그 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려 했지만 휴즈가 제지했다. "네 이름은?" 조금은 앳된 얼굴의 시종이었다. 물론 시종은 낮은 계급이 지만 왕의 것은 상당한 혈통이 아니고서는 허락되지 않는 다. 아마 귀족 가의 서자이거나 '쥬엘러'의 산물일 것이다. 시종은 왕의 질문을 받자 반은 두려움, 반은 놀람과 기쁨으 로 섞인 신기한 표정을 짓는 실수를 저지르더니, 곧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바카보오르 맛사라입니다." "맛사라?" 휴즈가 반문하자 바카보오르는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떨 구었다. 필시 누군가의 서자이리라. 휴즈는 투명한 루비 같 은 눈동자로 시종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누구의 자식이지? 누구의 핏줄이냐." "…도스예크 상디옌입니다." 의외라는 듯 휴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래픽스 샤딘의 일곱 번째 검, 피의 매료자 도스예크란 말인가. 휴즈의 미소 를 인정받지 못한 아들을 향한 비웃음으로 여긴 바카보오르 는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마계에서는 능력만 된다면 얼마 든지 첩을 거느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동성애조차 허용이 되었기에 힘이 있는 자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탐할 정도 였다. 힘이 곧 법인 것이다. '도스예크가 여섯 날개였던가…….' 그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겨우 세 쌍의 날개로 그보다 한 장 많은 루이시블을 제치고 서열 7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인전투는 루이시블보 다 그가 더 뛰어났다. 대단한 일이었다. "나이는?" "작년에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타락천사의 성인식은 대개 이 백살 전후에 한다. 즉 시종 은 매우 젊은 -사실은 어린- 편이었다. "몇 장이 보였지?" "…셋이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휴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식을 치를 때 마족은 -비단 타락천사만이 아니다. 시기가 다를지언정 일부 마족 들도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심지어 천사까지도- 기존의 어 린아이의 모습을 탈피하고 성인으로서의 모습을 갖게 된다. 무온이나 토돌은 예외지만 대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몸이 바뀜과 동시에 원래의 미약했던 날개는 소멸되고 자신 에게 합당한 힘, 새로운 날개를 얻게 된다.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단숨에 셋 이상의 날개를 얻게 된다. 그리고 환영을 보게된다. 자신의 날개 사이에 검은 그림자 와도 같은 흐릿한 잔상의 날개가 돋아있는 것이 보인다. 이 건 그자가 얼마나 성장할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바카 보오르라는 시종이 뛰어난 아버지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단 지 셋의 날개를 보았다는 것은 어머니 쪽의 혈통이 형편없 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난 여덟을 얻었지.' 다루카의 혈통에 '잠재능력' 따위는 없다. 그들은 예외인 것이다. 래픽스 샤딘끼리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성인식 때 얻는 날개가 다섯을 넘지 않는 반면, 다루카에게는 최소한 여덟 이상의 날개가 돋아난다. 물론 마왕의 힘을 계승한다 면 그것은 열둘로 늘어난다. 얼마나 형을 증오했던가. 소위 원로원에서는 '형에 비할 바 는 아니지만 정말 최상의 혈통이다.'라는 공치사를 보냈고, 역시 다루카의 혈족은 '겨우 둘째'에게도 강한 힘을 부여했 다. 그러나 함께 성인식을 치렀던 스키엘은 마왕의 힘을 물 려받지 않고도 열두 장의 날개를 펼쳐냈다. 얼마나 비참했 던가… 전례가 없었던 최강의 힘을 갖고있는 형에게 눌린 동생이라는 게……. 마왕의 자식은 단 하나, 그것도 아들로만 태어난다. 아무리 첩이 많아도 그 법칙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키엘과 휴즈는 놀랍게도 쌍둥이였던 것이다. 휴즈는 힘이 부족하여 성조차 잇지 못하도록 버림받은 시 종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나 휴즈는 곧 코웃 음치고 말았다. 결국 자신은 승리했다. 힘을 얻어내고야 만 것이다. 패배자와는 달랐다. "됐다. 그만 물러가라." 휴즈가 손짓하자 시종은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하고 방 을 빠져나갔다. 창밖에 태양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 고, 적막한 밤하늘만이 남아있었다. 별빛이 없는 하늘에는 사악한 달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휴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신이시여……." 그래, 우리를 만들어낸 신이여. "우리 실패작들은 이제 당신이 만들어놓은 성스러운 대지 를 침범하려 합니다. 끼여들 수 없을 겁니다. 후후, 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모습을 감춘 것은 벌써 몇 대 전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신이 사라졌다! 과연 누가 이 사실을 믿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휴즈는 알 고 있었다. 카마세이의 퍼스트 엔젤에게 내려졌던 신탁은 몇 천년 전이 마지막이었음을… 그리고 지금까지 신은 아무 런 의지를 보이지 않음을……. "나 휴즈 다루카는 물질계와 천계 그리고 마계 위에 군림 하는 유일자가 되겠지요." 휴즈 다루카, 마계의 왕은 달빛을 받으며 사악하게 웃었다. "난 신이 될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 * "날 따라온 이유가 뭐지?" 낮고 거친 시윤의 음성이 미은의 귀를 긁어댔다. 그녀는 머뭇머뭇 거리다가 한숨을 토해내며 체념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까… 궁금해서… 그랬어." "뭐가?"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어."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었고 특별 히 해꼬지 당한 것도 없는데 마음속 깊은 곳부터 적개심이 솟구쳤다. 분명 호감이 가는 인상인데도 '증오'스럽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미은은 고 개를 떨군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싫었어. 그런 마음, 이해할 수 …있겠 니?" 별로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앞에다 앉혀놓고 '난 네가 싫어. 이유도 없어.'라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기분이 좋겠는 가. 그래서 미은은 조심스럽게 시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 히 그리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적개심'이 마음 을 물들이려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리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널 보았어." 보통 이런 내용의 말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싫었어.'라는 말 한 마디만 '좋았어.'로 고치면 딱 알맞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시윤은 묵묵히 그녀가 하는 말 을 듣고 있었다.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네가 꿈속에서…" 시윤은 그녀의 말을 듣는 동시에 루이시블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인연은 굳이 찾지 않아도 순리대로 찾아 올 것이라 하였다. 시윤의 영혼과 그들은 천 년을 기약하고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니, 곧 만날 거라고……. "혹시…" 갑갑한 가슴을 억누르며 시윤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 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살짝 매만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검은색이었던 시윤의 눈동자는 선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시윤의 손가락 끝에는 검은색 칼라렌즈가 붙 어 있었다. "이런 모습이었니?" 깜짝 놀란 얼굴로 맞다고 대답하는 미은을 보며 시윤은 속 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 던 것이 뇌리를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천 년이나 지난 전 생의 얘기를 행복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이에게 강요해도 될 까.' "마, 맞아! 바로 그 얼굴이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미풍에 맡겨놓고 슬픈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자, 선홍색의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있던 바로 그 남자… 꿈 속에서 단 한 번 그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미은이 떨리는 손으로 그를 가리키자 시윤의 안색이 굳어 졌다.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카마세이 십 천의 한 명이다. 시윤이 각성시켜야 할 조력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 만, 하지만……. '어찌 지금 누리는 평화를 저버리게 하고 싸움터에 끌어들 일 수 있단 말이냐!' 시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류메리아의 환생이었던 휘 수연은 우연히 만난 연인이었고, 루이시블은 원래 그를 따 랐다. 현재 정상적인 조력자라고는 백호 하나뿐이었지만 그 도 고아인데다가 갈 곳도 원래 없었다 한다. 하지만 카마세 이 십 천의 하나로 생각되는 이미은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평범한 여고생일 뿐이었다. 제기랄!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술 한 잔을 더 입 에 털어넣은 시윤은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넌 도대체 누구야? 왜 내 꿈에 나타나는 거야? 너 알고있 지? 그런거지?" 누군말하고싶지않을줄알아도대체나보고어쩌란말이야왜내게 선택을강요하는거야모두를지키겠다고는했지만이런식으로누 군가를사지에몰아넣는결정까지하겠다고한적은없어강요하지 마이젠나도지쳤어 오랜만의 사고의 혼란, 메아리치는 사념들……. 그만두자. 시윤은 마지막 남은 한 잔을 비워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미은이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시윤은 말없이 스윙도어를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유영진! 대답하란 말이얏! 도대체 네가 나에게 뭐길래 이 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 하이톤의 째지는 목소리가 가게를 뒤흔들었다. 카운터에서 TV를 보고있던 경진이 놀라서 들고있던 컵을 떨어뜨렸고, 시윤은 그런 그녀의 발광을 무시한 채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경진에게 내밀었다. "계산해줘요." "…기습키스라도 한 거야?" "아뇨."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놀리듯 그렇게 말한 경진도 시윤 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보고는 장난걸기를 그만 뒀다. 칵테일 값만 계산하고 데킬라 값은 제외했다. 잔 단위 로 팔기는 하지만 어차피 칵테일 베이스로 쓰고 있던 것이 라 손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서비스라고 여기기로 했다. "먹다남은 양주는 서비스로 해주지. 다 마셨어?" "예." 괴물. 경진은 시윤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십대인 시윤이 큰병들이 양주를 반이나 비우고도 낯빛 조차 바뀌지 않는다는 건 괴물이라고 부를만 했다. 시윤은 걸음걸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또 올게요." "야, 유영진!" 그녀는 정말로 화난 듯 바를 나가는 시윤을 쫓아왔다. 사 나운 눈매가 더더욱 치켜올라가서 귀신같은 분위기를 자아 내고 있었다. 시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르고 몸을 벽 에 기대고는 다시 한 번 소리지르려는 미은에게 말했다. "내 말 잘 들어둬." "……?" "내 이름은 명시윤이야. 학교에서는 몰라도 다른 곳에서 봤을 때는 유영진이라고 부르지 마." "명시윤? 왜 이름이…" "한가지 더. 오늘 했던 얘기도 있었던 일도 싹 잊어버려. 기억해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어. 꿈 속에서 날 보았다는 것도 그저 데자뷰에 불과해. 그렇게 믿어. 우린 만난적도 없 고, 앞으로도 그다지 인연이 없을 거야."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나. 시윤은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 다. 평화라는 행복에 묻혀 있는 사람을 불행의 늪으로 끌어 낼 순 없었다.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모르는 게 더 행복 한 것이다. "널 위해서야. 그러니까 이대로 나에 대한 생각은 덮어둬. 제발… 더는 묻지 말아줘." 내가 겪었던 아픔, 너에게까지 전해주긴 싫구나……. 시윤 의 목소리에 묻어난 진실을 읽은 것인지 그때까지 시끄럽게 굴던 미은이 침묵을 지켰다.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저 덮 어두는 것이다. 그게 시윤이 그녀에게 바라는 단 한가지였 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 * 예전에는 그랬다. 나 한사람만을 봐주고 믿어주며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외모가 어떻든, 성 격이 어떻든 상관없다고… 그저 내 사람이면 된다고… 그렇 게 생각했다. 얼마나 사치스러운 바람이었던가. 분명히 내 바람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내가 원했던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나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얻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 반대급부가 있다는 것을 왜 예상치 못했을까. 누군가 말했 다. 가장 행복하다고 느낄 때, 운명은 등을 돌린다고……. 잠에서 깨어나 눈뜰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내 품안 에 잠들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차라리 잊게 해달라 고 수없이 빌어보지만… 그것도 이제는 허락되지 않는다.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녀의 하얀 얼굴, 연분홍빛 입 술, 깊고 고요한 슬픈 눈동자… 잊을 수 없다. 너무나 많이 도망쳤던 내게 남겨진 것은 속죄뿐이니까……. '난 널 버리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약속해줬다. …얼마나 큰 희생이었나. 날 대신해서 생명을 버린 그녀가…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을까. 만약 그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난 거리낌없이 대신 죽을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괴롭다. 또 하루를 보내는 것이… 그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 리도 괴로울 줄이야. 이렇게나 힘든 일이라니……. 마음을 차갑게 하고 냉정하게 현실만을 바라보려 한다. 그게 더 편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내 상처는 더욱 커져만 간 다.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다. "보고…싶어." 미은을 집으로 보내고 홀로 길가 벤치에 앉아있던 시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제까지의 낮고 억눌린 음색이 아닌, 부드럽고 가는 목소리였다. 하늘에 매달린 달의 뾰족한 끄 트머리를 바라보는 시윤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렌 즈를 다시 끼지 않아서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한 없이 처연하기만 했다. "정말 보고싶어." 언제까지 너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니, 나도 널 따라가면 안되겠니. 이렇게도 가슴이 아파오는데, 차라리 죽고 싶은 데……. "수연아……."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이, 그 안쪽부터 망가지고 있었다. 허 물어진 영혼, 남아있는 건 스키엘로서의 인연, 수연과의 약 속뿐……. 억지로 차가운 모습을 하고 강한 척 하지만 상처 에서 흐르는 피는 끊이질 않았다. 지치고 또 지쳤다. '돌아와 줘. 이제 난 더 견딜 수 없어.' 또르르,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 * 구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길은 포장도 안된 진창이었고, 주위는 쓸모 없는 황무지였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 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집은 그런 황무지 위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것도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인 채로……. "끌끌, 이러니 찾기 어려울 수밖에……." 노인은 혀를 차며 집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고 몇 발자국 을 걸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건물은 그의 시야 밖으 로 사라졌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사막의 신 기루와 같이 환상의 여운을 남긴 채. "결계(結界)로구먼… 그런데 어찌 이리도 어두울꼬."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워냈다. 무형의 기운이 집이 보였던 곳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필 시 인간의 힘은 아니리라. 노인은 눈을 감은 채로 걷기 시 작했다. 포장되지 않은 길에 비죽이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 릴 만도 하련만, 마치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나를 비워내고 모두를 받아들이니, 내가 네 안에 있고 네 가 내 안에 있구나." 힘의 그물은 집을 중심으로 꽤 많은 거리를 감싸고 있었 다. 현세에 와서 인간의 힘으로 이런 결계를 만들기에는 굉 장히 힘이 든다. 조금 도력(道力)을 쌓고 수련을 했다고 해 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을 감고 걷 던 노인은 결계의 경계 바로 앞까지 가서는 슬며시 손을 내 밀었다.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니 그게 바로 내가 갈 길이로다." 한치의 틈도 없이 촘촘히 짜여있던 힘의 그물이 그의 손길 에 조금씩 갈라졌다. 아니, 스스로 길을 터 주었다. 수월하 게 결계에 들어갔음에도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 다. '좋지 않아. 정말 좋지 않아.' 결계의 효용은 외부인의 침입을 막는 것보다도, 내부의 힘 을 감추는 데 있었다. 밖으로 발산될 힘을 모조리 안으로 잡아끄는 것이다. 그 내부로 들어온 노인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평생동안 노력해도 절대로 얻을 수 없을 정 도의 짜릿한 기운, 핏빛의 암울한 기운이 결계의 중심부로 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아이의 기운이로구나. 그런데 나머지 둘은……?" 지독한 귀기(鬼氣)였다. 잡령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니 자신이 부리는 신령들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기운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노인의 신형이 조금씩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막힘 없는 움직 임으로 미끄러지듯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 *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던 백호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납 득할 수 없다는 눈빛, 분해서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 마지막 한방울의 힘까지 모두짜낸 백호는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이길 수 없는 거지?"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의 백호라지만 싸움에서만은 달랐다. 계속되는 패배가 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고, 그 럴수록 그는 사력을 다해서 힘을 키웠다. 별빛도 제대로 비 치지 않는 새벽에 몰래 밖으로 나와서 운동했고, 힘을 최소 한으로 방출해서 날아오르는 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들렸다. 메르니츠의 목소리가……. * * 결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로 최대한 집에서 멀리 나온 백 호는 달빛을 벗삼아 몸을 단련하던 중이었다. 항상 주먹에 모았던 검은 기류를 발차기를 해본답시고 다리로 옮겼던 그 는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흐압!" 콰직! 아름드리 나무가 돌려차기 한 방에 깨끗하게 쪼개져 나갔다. 메르니츠를 소환할 때 집중했던 기운을 응용하여 사용하니 놀라운 파괴력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메르니츠 소환보다 약해." 본래의 공격보다는 강했지만 이미 메르니츠 소환에 익숙해 진 백호에게는 쓸모없는 기술이었다. 더욱 파괴력이 강하고 위협적인 공격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 초월적 인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서. "후우우, 어려워. 어려워." 아직 살이 에이는 바람이 부는 초봄인데도 백호는 짧은 면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자 열이 올 라서 추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슥 훔치며 그는 한쪽 발로 땅을 가볍게 내딛었다. "으, 으아악!" 발에 모아두었던 힘을 분산시키지 않은 백호의 몸은 그대 로 허공으로 튀어올라 버렸고 그는 실 끊어진 연마냥 이상 한 자세를 취하며 발악을 했다. "으아아아아아악!" 고소공포증이 어디 가겠는가. 20미터 가량 날아오른 그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며 눈물을 흘렸고, 당황한 나 머지 메르기온을 유지하는 암흑기(暗黑氣)를 엄청난 속도로 활성화 시켰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 어무이이이이!"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찾으며 그는 상승기류를 타고 멋 진 포즈로 더욱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몸의 긴장을 풀고 암흑기를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이 죽음의 비행은 절대 로 끝나지 않으리라. 멀리 보이는 그의 집이 성냥곽처럼 작 아지고, 아까 부러뜨린 나무가 성냥개비처럼 보이자 백호는 드디어 실신 직전까지 갔다. 얼굴에 맞부딪치는 바람이 이 렇게 차가울 수 없었고,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구름이 이렇 게 섬뜩할 수 없었다. 백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고는 외쳤다. "회새애애애액!" 목청껏 나이린을 불렀건만 응답은 없었다. 하기야 이렇게 먼 거리에서 들릴리야 없겠지. 백호는 구조요청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누가 나 좀 살려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이린은 귀신같은 청력으로 백호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이름이 아닌 별명을 불러서 '무시'했다고 한다. 하여간에 백호는 구조를 받을 일말의 가능성마저 포 기한채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바보> "살려--- 에?" 한 없이 상승하던 백호의 몸이 '뚝' 하고 멈췄다. 그리고 들려온 묘한 음성. 아니,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사념이었다. 백호가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며 괴로워하고 있는 가운데 그 사념은 또 다시 전달되었다.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백호는 이유없이 화가 났다. <…최악의 주인이로군, 역대 최악이다.> 백호의 암흑기는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자의로 한 것이 아 니라 누군가의 유도를 받은 것이다. 게거품을 물고있던 백 호는 눈을 질끈 감고 누군지 모를 사념에게 대답했다. "넌 누구야!" <내 이름은! 메르니츠 롬 바슈메 다가스코브 데어 노크 산 셀비시아큐메세소 비에르브 바이카야 우토로…> 사념과 백호의 생각은 이 순간만큼은 일치했다. '이 자식 최악이군.' 백호는 끝없이 이어지는 사념의 주절거림을 끊어 버렸다. "…그러니까 메르니츠란 말이지?" 주절주절 말이 많은 사념체, 그것의 정체는 메르니츠였다. <멋대로 줄이지 마. 나의 성스러운 이름을!> 지금까지 이런 녀석을 두려워 했던가. 백호는 속으로 비명 을 지르며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몸에는 어느새 멋대로 소환된 파츠 아머 형태의 메르니츠가 자색빛을 발하며 방긋 방긋 웃고 있었고 -적어도 백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특 히 다리 주위의 파츠가 강렬한 빛을 내고 있었다. "네가 날게 하는 거야?" <주인의 힘을 내가 제어하는 거지. 이건 거꾸로 된 거라 구. 원래는 내게 주인이 힘을 주입시키고 직접 제어해야 한 단 말이야!>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메르니츠는 연신 투덜거렸다. '정말로 방정맞은 성격이다.' 백호는 어이가 없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런 녀석을 감 당하지 못해서 소년 시절에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광기에 휩싸인 채 파괴를 일삼았고, 청년이 되어가는 기간 중에는 산 속에 쳐박혀서 8년 동안이나 힘을 갈고 닦았단 말인가. 귀신(鬼神)의 힘이라며 두려워 했던 것이 겨우 이런 엉터리 사념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바뮤즈의 화신이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내가 바보였 지.> 이 녀석, 묘한 쪽으로 인간적이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오른손의 메르니츠를 내리칠 뻔했다. <내가 주인에게 말을 거는 일은 스키엘 이후로 처음이라 고. 영광으로 여겨.> 몇 천년? 백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천 년 전만해도 바뮤즈였었던 자신이 메르니츠를 소유하지 않았던가. <…아아, 궁금한가 보군. 설명해주지.> 방긋, 하고 빛이 반짝였다. 오른손에 장착된 메르니츠의 자 색빛은 아무래도 의지 전달용인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 면 백호의 피해망상증이라거나……. <나 메르니츠 롬 바슈메… 에에, 귀막지 말라구. 좋아, 이 름은 생략하지. 어쨌든 내 인격은 주인된 자의 그림자와 같 아. 주인의 영혼을 그대로 빼닯게 되지. 그러니 날 욕하는 건 누워서 침뱉기나 다름없다는 걸 알아두길 바래. 예전의 바뮤즈 때에는 난 '말'을 하지 않았어. 주인과의 의사소통이 없었다는 얘기지. 그건… 음, 설명하면 알아들으려나.> 빠직. 백호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솟아올랐다. <뭐, 알아서 이해하라구. 나 마계 제왕의 신물 중 하나인 '절대의 갑옷' 메르니츠는 다루카의 핏줄에만 반응을 하지. 즉 제왕의 핏줄 이외에는 날 사용할 수 없다는 얘기야.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왕이 날 완벽하게 쓸 수 있었던 건 아니야. 내 '의지'를 깨우는 자만이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다루카? 스키엘 다루카의 그 다루카?" <그래, 왕족의 성(姓)이다. 말 끊지마.> 메르니츠가 약간 성을 냈다. 역시 떠들기 좋아하는 타입이 다. 머쓱해진 백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왕족의 힘이 약해지고부터 나의 의지를 깨우는 자들이 극히 드물어졌다. 그건 '붉은 벼락의 마왕' 때부터인데… 에 에, 이건 알 거 없고. 어쨌든 약해진 왕족들은 결국 나를 갑 옷으로만 쓰게 됐지. 나도 포기한 상태였어. 더 이상 순수한 혈통의 완벽한 마왕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의지가 완전히 메말라갈 무렵, 이변이 생겼 지.> "저기, 얘기 중에 미안한데… 좀 내려가면 안될까?" 백호는 조심스럽게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턱이 떨리고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실신해 버릴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메르니츠는 이번에는 화 를 내지 않고 얌전히 백호를 지상으로 내려주었다. <이제 됐지? 얌전히 경청해. 아니면 하늘 끝까지 데려가 주겠어.> "…네." 주종관계가 바뀌었어. 메르니츠의 협박에 백호는 꼬리내린 강아지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메르니츠는 흐뭇하게 빛을 발 했다. 백호는 확신했다. 저 오른손 손등에 있는 자색의 마법 진은 '떠들기'를 위한 것이라고. <신에 가까웠던 힘을 지닌 자, '혼돈의 주인 테르카시 사 마엘 다루카'. 바로 초대 마왕이었던 그와 비견될만한 왕족 이 태어난 거야.> 알것같은 얘기였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윤?" <그래, 너희들이 시윤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 스키엘 다루 카……. 그가 날 바뮤즈에게 주었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루이시블에게 듣지 못했던 과거 의 이야기… 묘한 흥분감이 돌았다. 긴장한 백호는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을 떨치 지 못하고 질문했다. "왕족이 아니면 널 쓸 수 없다며?" <제기랄. 나의 프라이드가 깨지는 순간이었지. 제대로 된 마왕이 아니면 나와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거늘… 그는 마 왕의 힘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순수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열 두장의 날개를 펼쳐내고 나를 깨웠지. 그건… 개사기야. 젠 장.> 메르니츠의 어조가 격해졌다. 아니, 그건 화난 게 아니라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수한 힘의 추구, 그것에 대한 희열……. <난 단번에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역대 최강의 주 인을 만났다고 기뻐하며… 그러나 곧 난 너에게 넘겨지고 말았지. 젠장,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바뮤즈지만. 어쨌든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족조차 날 못쓰는 일이 허다하거늘 하물며 일개 마족이 날 사용하려 들다니 말야.> 이 녀석, 재수없다. 백호가 느끼는 메르니츠에 대한 단 한 가지의 이미지였다. <그 대에는 왜 그렇게 이변이 많았던지. 바뮤즈는 정말로 왕족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분명히 타고난 핏줄은 '쥬엘러'에서 태어난 일개 마족인데… 어째서 그렇게 강한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 난 백일 밤낮을 거부했 고, 그 녀석은 힘으로 날 제압하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뭐 네녀석이 그녀석이지만… 에에, 말하다보니 이상해지는군. 그렇게해서 난 바뮤즈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최초의 왕족아 닌 주인을 받아들이고 말았지. 하지만 의사소통은 불가능했 어. 뭐, 부작용이었던 것 같아. '왕족의 신물'을 타인이 소유 하면서 나타난… 더욱 가관인 것은 난 바뮤즈의 영혼에 묶 여버렸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바뮤즈가 천마전쟁에서 죽어 버릴 때 같이 윤회의 사슬을 뒤집어 쓰고말았어. 젠장! 그 리고 지금은 핏줄에 대한 거의 모든 제약이 풀린 것 같다. 이제는 '왕족'이 아닌 '바뮤즈'의 영혼에만 반응하게 되버린 것 같아. 그래서 너 같이 모자란 주인에게도 의사소통이 가 능한 거지.> '쥬엘러? 지역의 이름인가.' 백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계속해서 네 녀석은 깨어있는 건가?" <흥! 그건 아니야. 오늘 깨어난 것은 그동안 모아둔 내 힘 으로 움직이는 거고, 앞으로는 네가 날 일깨워야 하지. 하지 만 지금의 너는 너무 약해. 많이 강해지지 않으면 날 다시 깨우는 건 불가능 할 거야. 그러니까…….> 바아아앗. 자색빛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동했고, 백 호의 몸이 땅에서 조금 떠올랐다. 싸아아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창백한 얼굴로 백호는 떠듬 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오늘이 가기 전에, 내가 잠들기 전에. 주인에게 나는 법 을 확실히 가르쳐야지! 날 사용하는 법도 너무 미숙해! 내 가 실컷 가르쳐주지.> 푸화아아악!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백호의 몸은 흑색과 자색의 빛을 흩뿌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쏘아진 화살과도 같이 맹렬하고 빠른 속도로! 너무나 빠른 움직임에 피가 역 류했고, 아찔할 정도로 주위 광경이 빠르게 변했다. "으아아아아악!" 고소공포증 환자에게 이보다 더한 고문은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을 때쯤… 백호는 나는 법과 메르니츠의 또 다른 사 용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 후에 한달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지만 그건 논외로 하기로 하고……. (원래 타인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인 법이다) * * "이놈아 대답좀 해보라구." 메르니츠의 의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백호는 오른손 을 들어올리려다가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신히 움직이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더듬으니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혀를 깨물것만 같은 고통, 탈골된 어깨가 너무나도 시리고 아파왔다. 힘이 모자라서 불완전한 마신포 (魔神砲)임에도 불구하고 반작용이 생각 이상으로 심했다. 전력을 다해서 쏘아낸 적은 없었기에 뼈가 빠져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제…기랄." 슈우욱. 결국 모든 힘이 소진되자 메르니츠가 자동으로 해 제되었다. 공중에 몸을 띄우고 있던 백호는 사지를 늘어뜨 린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쿵! 다행히 바닥은 잔디가 깔려 있는 흙바닥이었다. 둘의 전투를 넋놓고 바라보던 루이시블 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백호에게 달려갔다. "…또…지다니……." 그녀는 백호의 너덜거리는 상의를 찢어내고는 어깨의 상태 를 살폈다. 연골이 부서지지도 않았고, 뼈에 이상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자리를 좀 이탈한 것 뿐이다. 루이시블은 두 손으로 벌써 무섭게 부어오른 그의 어깨와 팔꿈치 부분을 잡았다. "이 악물어요." 우두둑. 냉정하게 말한 루이시블이 힘을 가하자 백호의 뼈 는 금세 원래자리를 되찾았다. "크으으윽." 억지로 뼈를 끼워맞추는데 오죽이나 아플까. 게다가 특수 하게 단련된 백호의 골격은 굉장히 단단하고 탄력적인 편이 었으나, 한번 망가지면 보통 사람의 배 이상으로 아팠다. 루 이시블은 퉁퉁 불어오른 어깨를 손으로 더듬어보고는 근육 에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조금만 참아요. 편하게 해줄테니……." 보통 여자와는 달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걱정하는 투가 아니었다. 여성의 몸이라고는 하나 천 년 동안이나 마 계 십장군의 일원이었던 루이시블인 것이다. 이 정도의 부 상은 아주 경미한 흠집에 불과하다. [오즈 오보에 카다무슘 데즈 도 로드린 루이트! 상처 입은 그대를 치유하노라!] 시윤을 치유할 때의 그 주문이었다. 상처입은 세포를 활성 화시켜서 회복되게 하고, 열을 식혀주는 효과가 있다. 치유 술의 조예가 깊지않은 그녀였지만 그것만으로 꽤 도움이 됐 는지 정신을 잃은 백호의 혈색이 꽤 좋아졌다. 고통에 찬 신음성이 잦아들었다. "휘유. 나이린도 오늘은 옷을 망쳤네요. 후후, 그래도 이겼 으니 옷 얘기는 넘어갈까요?" 항상 옷을 찢어먹던 백호와는 달리 나이린은 초범이다. 루 이시블은 농담처럼 말하며 쓰러져있는 백호를 부축하려 했 다. 그 때, 역시 여기저기 찢어져서 노출도가 심한 옷을 걸 친 나이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틀려." "에? 옷이요?" "아니… 이기지… 못했어." "나이린!" 쿵! 스르르 뒤로 넘어간 나이린의 몸이 땅에 쳐박혔다. 백 호보다 상대적으로 위쪽이었던 그녀가 떨어지자 꽤 큰 소리 가 났고 루이시블은 백호를 내버려두고 루이시블에게 달려 갔다. 원래 창백했던 얼굴이라 오늘도 그럴것이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나이린도 백호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다. "정신 차려요!" "괜…찮아. 죽지. 않아." 루이시블이 나이린의 상체를 잡아 일으켰다. 잿빛으로 은 은하게 빛나던 날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힘의 소모 가 너무 컸던 것이다. "백호. 많이. 강해졌다." 나이린이 빙긋 웃었다. 필시 같이 지내면서 표정을 따라하 게 된 것이리라. 루이시블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있는, 인간을 죽이기 위한 네피림… 지독한 아이러니. "재밌어. 백호도. 너도." 주르륵, 나이린의 하얗게 변한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내장이 상한 걸까? 루이시블은 황급히 치유의 술을 쓰려했다. 그러나 나이린이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다치지. 않았어." 회색으로 가득찬 눈이 살며시 빛을 발했다. 나이린의 목소 리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 피조물은 갈수록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루이시블은 '무 슨 시간'이냐며 반문하려 했지만 나이린의 말에 또다시 막 히고 말았다. "손님. 왔어." * *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루이시블은 나이린이 가리키 는 곳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하얗게 센 수염을 신선 처럼 기른 노인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 다. 그런데도 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니! 루이시블은 황급 히 나이린을 자리에 뉘이고는 손을 휘저어 결계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상이 없어.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인간인가?" 루이시블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허허롭게 웃고있는 노인 은 자연스럽게 대지에 못박힌 나무처럼 보였다. 자신이 심 혈을 기울여 만든 결계에 가볍게 침입한 인간, 쉽게 볼 상 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필시 당신은 생계의 존재 가 아니겠구려." 괴이한 인간이다. 노쇠한 인간의 눈은 달관이라도 한 듯 무심하게 빛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자연스럽게 대 기에 녹아들어갔다. 삼베옷을 입고 손에는 거무튀튀한 나무 지팡이까지 들고 있다. 평범하다고 보기는 확실히 어려웠다. [플레임 윕(Flame Whip)] 백호와 나이린의 상태가 매우 안좋았기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나이린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불꽃 채찍을 소환했다. 진홍색의 불길을 담고 있는 채찍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 히 웃고있던 노인이 한발짝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허어, 난 적이 아니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인은 루이시블의 채찍에도 전혀 겁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했던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는 채찍을 들고 있던 손을 허공에 퉁겼다. 촤 라락! 채찍이 길게 늘어나며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헙!" 갑작스런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은 노인은 크게 숨을 들이 키며 물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채찍의 공격권에서 벗어났 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공 격이 실패하자 루이시블은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생각대로 노인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 중 하나이리 라……. 루이시블은 쓰러져있는 백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잘 피하네?" 노인의 주름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공격이 생각보다 너무 약했던 것이다. "노부가 누군지 알고 계셨소이까." "누군가 말했던 술주정뱅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맞 나? 그나저나 노부라니 우습구나." 루이시블은 기본적으로 예의가 바른 성격이다. 만약 백호 가 깨어있었다면 수염이 새하얗게 세버린 노인에게 그녀가 툭툭 반말을 던지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시블은 타천사, 천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 기껏해야 백년 의 수명을 사는 인간에게 존칭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내심을 알아챈 노인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세월을 잊은 존재께 실례를 했나 보오." "인간은 성급하게 겉을 보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더군. 너도 그렇다고 생각하겠다. 그런데 여긴 무슨 볼일이지?" "못난 제자놈의 얼굴이나 보려고 왔소. …얼굴이 많이 변 했구려." "맞아서 부은거야. 그런데… 저 분이 이곳의 위치를 알렸 나? 어떻게 알고 온거지?" 이상한 관계다. 백호는 노인의 제자고 노인은 루이시블보 다 한참 어린 인간, 그리고 백호는 전생에 루이시블의 상관 이었다. 물론 아무도 그런것에는 개의치 않고 있었다. 노인 은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천천히 백호에게 걸어갔다. "석달 전이었소. 떠나간 제자의 안부가 궁금하던 차에 점 을 쳐보았소이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자가 많지요." 그는 아직까지도 기절해있는 백호의 어깨를 보았다. 루이 시블의 치유술로 많이 가라앉긴 했지만 역시 눈에 띌 정도 로 부어있었다. 근육이 놀란 탓이다. 그는 여전히 입으로 말 을 하면서 어깨를 매만지다가 손가락을 세워 혈 몇 군데를 꾹꾹 눌러주었다. "결과는 흉(凶)이라 나왔소. 그것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으 차, 이 녀석 죽지 않은 게 신기하군. 끌끌, 숨이 간당간당하 구나." 모든 체력을 쏟아낸 백호의 몸은 빈사상태 그 자체였다. 노인은 백호를 억지로 앉히고는 등의 혈 몇 군데를 빠르게 짚었다. '…많이 노력했구나.' 주룡곡-알콜즈 타운-을 떠날 때보다 백호가 훨씬 성장했 다는 것을 노인은 느낄 수 있었다. 몸에 남아있는 힘의 흔 적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노인은 엉켜있는 백호의 속을 풀 어주고는 마지막으로 등을 손바닥으로 탁 두드렸다. "컥!" 검은 피를 왈칵 토해낸 백호가 다시 자리에 쓰러졌다. 이 것으로 치료는 끝났으니 내일이면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우리는 백호를 찾기로 했소. 그리고 모 든 준비를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찾을 수 없게 되었소. 기운이 감쪽같이 없어져서 처음에는 죽은줄 알았지만 백호 는 아직 갈 때가 아니란 걸 난 알았소. 그래서 신령에게 묻 고 천문을 살피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겨우겨우 방향 을 잡았소." 그런 방법이 있었던가……. 루이시블은 이해할 수는 없지 만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아진의 일당에게 잡히지 않기 위 해 결계를 쳐둔 것이 효과가 없을까봐 내심 걱정이 됐던 것 이다. 일단 백호의 치료를 끝낸 노인은 나이린에게 다가갔 다. "이, 이것은!" "…피를 토했다. 치료가 가능한가?" 원래는 루이시블이 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그녀는 치유술 을 너무나 못한다. "못하오. 인간이 아닌… 호오, 그러나 이것은……."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다가 나이린의 몸에서 이상을 발견했는지 더욱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탄식했 다. "어찌하여 이런 것을 만드셨소. 이것이야말로 역천(逆天)의 행위이거늘……." "네가 관여할 바 아니다." 불쾌해진 루이시블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고 나이린의 몸 을 안아들었다. 검은 머리칼로 반쯤 가려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들어가자." 노인은 옆에 널부러져 있는 백호를 들쳐업고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루이시블을 따랐다. * *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시윤이 집의 문을 두드렸다. 초 인종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집, 외부인의 출입은 일체 거부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나갔나? 저건 뭐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하얗게 칠해진 철제 문은 부드 럽게 열렸다. 실내에 들어서자 거실에는 처음보는 노인이 루이시블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에 삼베 옷을 걸친 모습, 신선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 기였다. 시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루이시블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늘은 좀 일찍왔네요. 이쪽은 백호씨가 얘기하던 그 산 속의……." 루이시블이 말끝을 흐렸다. 역시 존칭을 쓰기는 싫었던 것 이다. 강자존의 법칙이 성행하는 마계의 출신인 그녀에게 고작 인간에게까지 예의를 지키라는 것은 무리였다. "아아, 형의 사부라는 그 분?" "맞아요." 그 말을 들은 시윤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 사했다. "명시윤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호 형님께 얘기 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아, 과분한 예는 거두시게나. 난 이름을 잊어버린지 오 래니 그저 구 노인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산의 냄새. 구 노인의 첫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산이 내 뿜는 청명한 공기의 내음이 구 노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 다. 덕분에 기운이 좋아진 시윤은 그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 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잠시동안 주저하던 구 노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튀어나 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자네, 자네가 흉살(凶殺)의 기운을 타고난 자였군." * * 졸린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하며 TV를 보던 지현은 위기감 을 느꼈다. 계속해서 젊은 여성이 실종되고 그대로 소식이 없다는 뉴스, 벌써 실종신고가 들어온 것만 열 둘이라고 한 다. 백호가 가게를 그만둔 뒤로 빵집을 홀로 꾸려나가던 그 녀는 내심 불안했다. '왜 이러지?'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 아마 그런 느낌이리라. 등골이 오 싹해질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끈적끈적하고 음습한 기 운, 신경과민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손으로 헝클어 진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녀는 잡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그리고 들렸다. <……얀> "응?" 낙엽이 떨어지는 것보다도 작은 소리, 바람의 속삭임… 들 렸다. 눈을 가늘게 뜬 지현이 귀를 기울였지만 한 번 떠나 간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너무 나 작아서 착각이었는지 의심될 정도의 속삭임… 영혼의 울 림. "얀?" 휘이잉. 이번엔 현실의 소리가 들렸다. 가게 창밖으로 바람 이 춤추고 있었다. 지현의 붉은 그림자가 어린 새까만 눈이 반짝였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 그녀는 지체없이 바람이 불 고 있는 밖으로 나왔다. 봄의 잔잔한 내음이 섞여있는 밤바 람… 무수한 줄기를 이루며 실처럼 가득 펼쳐져 있는 그것 들. "예…쁘다." 풀어헤쳐진 지현의 머리카락을 흔들어대던 바람들이 그녀 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 다. 지현은 무심코 허공에 손을 내밀어 바람의 가닥을 잡았 다. "어라?" 형체가 없는 투명한 바람줄기가 잡혔다. 솜처럼 부드러운 바람은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바람이… 잡혔어?"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지현은 눈을 치떴다. 애처롭 게 떨고 있는 바람을 놓아준 그녀는 조금 더 큰 것을 잡아 냈다. 뱀의 목줄기를 틀어쥐는 것처럼 바람을 움켜쥔 지현 은 결국 인정해야 했다. 이건 이상한 무언가가 아닌, 순수한 바람이라는 것을. "가던 길을 계속 가렴." 그 증거로 지현이 놓아준 바람은 허공을 자유롭게 거닐며 가로수를 한 번 뒤흔들고 사라졌다. "이럴수가!"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어제와는 너무나 다르게 보이는 밤 하늘, 그것을 단지 봄이 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맑게 개인 밤하늘은 간만에 별을 드러내었고, 초승달은 은은하게 시린 월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 가득히…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이 보였다. <당신은 바람의…….> 바람이 말했다. <……얀.> * * "…씁." 남자는 자신의 구겨진 인상만큼이나 찌그러뜨린 음료수 캔 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며칠 째 연락이 안되는 여자친 구 때문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썅, A급은 구하기 어려운데… 기분 엿같네." 작업하는데 자그만치 삼 주가 걸렸다. 콧대가 워낙 높아서 약간 시간이 허비되었지만 어디 하루이틀 하는 장사인가. 이제 슬슬 이것저것 뜯어내려는 찰라,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래서 기분나빴다. 사랑에 빠진 순수한 남학생 행세를 하 느라 어찌나 힘들었는데 그게 날아간 것이다. "미치겠구만. 진짜." 짧게 자른 머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엷은 붉은 빛이 도는 안경을 낀 귀공자 타입의 남자, 바로 천호영이었다. 그는 연 신 투덜대며 편의점을 나왔다. 방금 전까지 물 좋기로 소문 난 나이트에 갔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화장으로 떡칠을 했 을뿐, 본판이 괜찮은 여자를 찾기란 어려웠다. 성형미인, 화 장미인은 절대로 피하는 호영이었다. "MC의 이름이 운다, 울어." Master Casanova라는 웃기는 별명, 하지만 나름대로 만족 하는 별명이다. 실종사건이다 뭐다 해서 거리의 여자들이 많이 줄었다. 아마 집 안에만 처박혀 있겠지. "젠장, 어느 자식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벌써 몇 번째 갈아치운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연락 도 안되는 판에 새 여자를 꼬실 생각이었다. 그는 이왕이면 순진하고 헌신적이어서 돈이고 몸이고 다 바치는 여자를 원 했다. 더 이상 자신의 학교 이사장이자 친척인 천진성이 자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번에 천진성에게 우송된 비 디오테입과 여타 사진들은 호영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 에 충분했다. "재수없어. 제길."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두 달 전에 퇴원했을 때, 얼 마나 황당했던지. 자신에게 설설 기던 선생들의 눈초리가 달라졌고, 친구들도 그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 명을 두들겨 팸으로써 그런 분위기 조성은 무마시켰지만 시 윤이 남기고 간 파장은 너무나 컸다. "크으, 또 걸리면 죽여버리겠어." 오른쪽 손목에 지네가 기어간 모양의 흉터가 뜨겁게 욱신 거렸다. 기분 탓이겠지만 시윤을 떠올리자 다시 아파왔다. 차갑게 웃던 남자는 시윤의 사진을 들이밀고 말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조 금이라도… 털끝 하나라도 너 때문에 다친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손목이 잘릴뻔 했다. 사람같지 않은 잔인함에 호영은 치를 떨었다. 덕분에 복수는 꿈도 못꾸었으나 이미 '폭발 사고'로 인해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시윤은 휴학 중이라니 한편으 론 고소하게 생각되었다. "흥!" 그는 코웃음 쳤다. 감히 자신을 건드렸던 시윤은 결국 폐 인이 된 것이다. 같은 반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니 면회조차 금지되었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한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 인가. 그렇게 자신의 생각에 몰두한 채로 길을 걷던 호영은 길가에 서있던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윽. 이런 썅!" 앞을 제대로 보고 가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음에도 호영 은 눈부터 부라리고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부딪친 상대방 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었 다. 앞치마를 두른 이십대 초반의 여자였다. "아야야. 아파라. 그쪽은 괜찮아요? 미안해요, 딴 생각좀 하느라고 사람 오는걸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활짝 웃었다. 내숭을 떨며 작게 웃 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질 정도로 크게. '뭐야, 빵집에서 일하는 여자인가?' 순간 돌변하는 호영의 태도, 그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은 먹이를 포착했을 때의 눈빛을 띄었다. 호 영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아뇨, 주의하지 않은 제 잘못인걸요. 다치셨어요?" 'B+다. 나쁘지 않아.'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또다시 여자의 등급을 매기는 호영. 특이한 색의 눈동자를 가진 생기가 넘치고 활발해보이는 미 인이었다. 조금 소년스러운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을 더했다. 호영은 얼굴 가득히 작업용의 미소를 띄우 고 그녀에게 말했다. 친절하게 보이는 것, 이게 작업의 첫 번째다. "다치진 않았어요. 넘어져서 좀 아프긴 하지만… 어라? 벌 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여자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서 빵집으 로 들어가려 했다. "헤헤, 그럼 전 이만 실례. 가게 정리를 해야해서……." 기회다! "제과점에서 일하세요? 마침 빵을 좀 사려고 했었는데 벌 써 닫는 건 아니겠죠?" "에? 빵 사시게요? 그럼 들어오세요." 그녀는 손님이라는 말에 방긋 웃으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마침 문 닫으려던 차에, 미남 손님이라니 마음에 들 수밖에. 지현은 남은 빵들을 모조리 떨이로 줘버리겠다고 마음 먹 었다. 아마 백호가 보면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자 답게 미소짓는 모습에, 또 항상 자신의 차지였던 남은 빵들 을 남에게 주는 모습에. 키득. 갑자기 백호의 얼굴이 떠오르자 지현은 호영 몰래 조용히 웃었다. * * "고마워요. 덕분에 빨리 끝났어요." 가게에 마지막 손님인 호영은 남은 빵들을 모두 안겨주자 가게 정리를 돕는다고 했고 덕분에 뒷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지현은 내심 기뻐하며 가게 문을 닫았다. 백호보다 도 훨씬 일을 성실하게 잘한다. 농땡이만 치는 종업원을 뒀 던 그녀에게 호영은 확실히 달라보였다. '에?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인간이랑 비교를 하는 거지?' 불현 듯 떠오른 남자, 백호…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지 금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는 건지, 지현은 한숨을 쉬 었다. 갑자기 없어져 버려서 굉장히 힘들었다. 둘이 하던 일 을 혼자서 하니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신기한 건 다른 종업 원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애정? 설마… 차라리 빵을 사랑하리라. "열시가 조금 넘었네요. 괜찮다면 차 한잔 하지 않을래 요?"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게, 하지만 마음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으로… 천천히 압박하는 것이다. 상대는 순진 한 듯 했고, 호영은 노련했다. 과연 지현은 그의 생각대로 고민하는 눈치였고 호영이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 다.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였다.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한 호영은 속마음이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 하고는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고민할 필요 없어요. 단지 대화상대가 필요했던 것뿐이니 까……." 대화상대라… 이건 데이트 신청일까? 지현은 약간 주저하 다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호영의 손은 부드러웠고, 그의 미소는 마음에 들었다. 잘생긴 남자의 데이트 신청, 굳 이 거부할 필요는 없으니까. * * "좋은 밤이군." 마야는 오피스텔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채로 차가운 바람 을 맞으며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인간의 술은 맛이 좋았다. 천계의 것에 비해서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 긴 했지만 그만큼 독했고 취하기에도 좋았다. 물론 몸의 해 독작용을 최소화시키지 않는다면 취한다는 것도 불가능 하 지만……. "크흐흐, 좋은 밤이야." 고독하다. 미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나 남은 외눈 으로 그는 어두운 밤 하늘을 노려보았다. "…좋은 밤이야." 그는 그저 무의미한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저 힘든 것이다. 외로운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은 없다. 지난 천 년 동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 다. 일개 네브카에 불과했던, 최하급 천사에 불과했던 그가 너무나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아직도 휴 즈를 상대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마지막 힘, 라르샤 크리엘브(Lar'cha Crielve)를 얻기에는 부족하단 말인가." 초차원 정령검, 라르샤… 차원의 틈바구니에서 주인을 기 다리고 있는 그것. 비단 마계와 천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차 원에서 최강의 힘을 발휘한다는 전설의 무기… 사백년 전에 그 소문을 듣고 무수히 많은 도전을 했지만 그 실체를 볼 수도 없었다. 소문대로의 무구(武具)라면 휴즈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후후, 얻을 수 있다면 말이지." 그는 비어버린 위스키 병을 움켜쥐고 힘을 가했다. 콰드득, 기묘한 파열음과 함께 병은 깨져버렸고 마야의 손은 순식간 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그는 도시의 야경을 향해 손을 떨쳤 다. 지독히도 붉은 핏방울이 허공에 기묘한 무늬를 이루며 사라져갔다. "휴즈… 휴즈… 난 널 원한다." 오, 네 생명을 원한다. 너의 영혼을 원한다. 너의 피만이 나의 갈증을 채우리라. 너의 비명만이 나의 굶주림을 해소시키리라. 파멸하라. 파멸하라. 파멸하라. 내 혼을 걸고 맹세할지니, 널 죽이리라. 영겁의 고통 속에, 너를 가두리라. "크흐흐흐, 으하하하핫!" 미쳐버린 천사… 그의 외안에 남아있는 저주의 낙인은 지 워지지 않으리라. * * "하하, 그래요?" "예, 그래서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답니다. 바보 같죠?" 그들이 간 커피숍에서 지현은 마음놓고 웃고 있었다. 조금 이나마 남아있던 불안감은 싹 날아간지 오래였다. 천호영이 라는 이름의 남자는 친절했고, 하는 얘기는 재미있었다. 매 너도 좋았고 생긴 것도 핸섬했다. 집에 늦게 들어간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니 그다지 신경쓸 일도 아니다. "아, 깜빡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죠?" 이름은 들었으나 나이는 듣지 못했다. 존대말 하는 것도 슬슬 어색해진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호영은 싱긋 웃었 다. "몇 살로 보여요? 맞추면 상품을 드리지요. 기회는 세 번." 상품! 지현은 꼭 맞추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호영의 얼굴 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가늠하기 어렵다. 얼굴이 앳 되보이기도 하지만 태도는 어른스럽고, 경험이 많아 보인다. 게다가 귀에 건 귀걸이가 시선을 분산시켰다. 에라, 찍자. "스물 셋?" 호영은 손가락 하나를 폈다. "땡, 나머지 두 번." '에에, 더 많은가?' 머리를 굴리던 지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물 다섯." "땡. 그렇게 늙어보여요?" 침울하게 변하는 호영의 표정, 미안한 나머지 지현은 고개 를 세게 도리질 쳤다. 아앗, 기분 상했으면 어쩌지. "아녜요, 단지 성숙해 보여서… 그럼… 스물 한 살?" 호영의 입매가 살며시 올라갔다. 역시 이 사람은 너무 순 진하다. 그냥 데리고 놀기에는 매우 좋을 것 같았다. 적어도 재미는 있을 것 같으니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 지 현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예뻤다. "딩동댕. 맞았어요." "와아! 동갑이다!" 한 순간에 두 살이나 자신의 나이를 올려버린 호영은 지현 이 어린아이같이 기뻐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약속했던 대로 '선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붉은 빛이 도는 까만 눈동 자는 호영을 빤히 응시하며 '선물 줘.'를 외치고 있었다. 열 아홉 살이 순식간에 스물 한 살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좋아요, 지현 씨. 약속은 약속이니까… 눈을 감아봐요." "눈을요?" "어서요." 호영이 재차 재촉하자 지현은 눈을 꼭 감았다. 활발한 모 습, 주위에 자신의 활기찬 기운을 전이하는 묘한 사람. 호영 은 오랜만에 나타난 '먹잇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눈 뜨면 안되요." 혹시나 하고 그는 지현의 얼굴 앞에 손을 가져가보았다. 반응은 없다. 정말로 눈을 감은 것이다. 호영의 얼굴이 천천 히 지현의 얼굴에 가까이 갔다. 주위 시선쯤이야 생각할 필 요 없었다. 어차피 심야의 카페는, 그것도 이렇게 소파가 커 서 주위가 잘 안보이는 곳은 으레 이런 분위기니까. 쪽. "에?" 닿았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호영은 얼굴을 뒤로 물렸 다. 촉촉한 것이 입술을 스쳤고 따스한 숨결이 일순간 느껴 졌다. 지현은 놀라서 눈을 떴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호영의 얼굴을 보고 잠시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에, 에?" '그, 그러니까 입맞춤?'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입만 뻥긋거리던 지현은 손등으로 눈을 부볐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실제상황이었다. 중 학교 때, 같은 반 남자에게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당한-물론 그 남자는 죽지 않을 정도로 지현에게 맞았다- 뒤로는 처 음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첫키스는 물론이거니와 세컨드 키스도 기습이라니… 화가 났다. 적어도 로맨틱한 상황에서 분위기 잡고 하는 것을 기대했단 말이다! …라고 그녀는 생 각했다. "애인 있어요?" …그러니까 애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했단 말이지. "아, 아직, 없는데…요." 말 더듬는 버릇은 초등학교 때 고쳤는데 도대체 왜 다시 나오는 건지, 지현은 쉴새없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원망했다. '생각보다 쉽겠는걸.' 당황하는 지현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의 웃음이 한층 짙어 졌다. 여자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상큼하고 매혹적인 미소,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유쾌해지는 호영이었다. "와아, 이런 미인을 가만히 놔두다니. 아니, 지현 씨 눈이 높은 건가요? 그렇다면 큰일인데." 첫 번째, 친절한 인상을 심어주기. 두 번째, 약간의 공격- 이를테면 기습키스 같은-으로 정신을 흔들어주기. 세 번째, 가볍게 띄워주기. 가장 쉽게 먹히는 방법이었다. 여자의 타 입에 따라서 이것들을 실행하는 기간을 늘이기도 하고 줄이 기도 하며, 적당히 가감한다. 지현 같은 타입은 공략하기가 가장 쉬운 편이었다. "하…하하. 미인이라뇨. 그리고… 애인이 없는 건 역시 제 가 못나서겠죠." 그리곤 부끄러운지 차를 마시는 척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 리는 지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는 달리 용모는 꽤 빼 어난 편이었다. 다만, 한동안은 백호 때문에 항상 찌푸린 얼 굴로 지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었다. '그 빵집 여자가 글쎄 칼을 던지더래요.' '어머어머, 저번에 내가 갔을 때는 남자 종업원에게 막 물건들을 던지던걸요?' 그러니, 당연 남자들 이 슬슬 피할 수밖에…….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호영은 웃음을 거두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뭘요, 지현 씨는 예쁘기만 한데요. 그 빈 자리에 전 어때 요?" 쿵! 심장이 떨어졌다. …아니, 간인가? 경악한-그렇다. 경 악할 일이다.- 지현은 되지도 않는 개그를 속으로 되내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당연히 지현 씨 애인으로 난 어떻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거-짓-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으으, 고백을 받아봤어야 알지! 지현의 영혼은 육체를 이탈하려고 안간힘 을 썼고, 당황한 그녀의 몸은 따라서 도망가고 싶은지 조금 씩 떨렸다. "애, 애인이요?" 틀림없이 저 남자는 날 말더듬이로 생각할 거야. 지현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원망하기로 했다. "사랑 애愛, 사람 인人." "…그, 그게……." 조금 강하게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호영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금까지 짓는 표정 모두가 연출이었다. "내가 싫어요?" "그건 아니고요!" 당황한 지현은 필요 이상으로 부정하고 말았다. 무안해졌 다.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의 호영은 그런 지현을 빤히 바라 보았다. "그럼 괜찮지 않나요?" "하지만… 우린 오늘 처음 만났어요." 이젠 안된다고는 안하는군. 호영은 손목에 감긴 시계를 확 인했다. 짧은 바늘이 11을 조금 지나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내일 가게로 갈게요. 그 때까지 생각해서 대답해줘요.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좋지 않다. 이렇게 살짝 생각할 틈 을 줘야하고, 그 시간도 너무 길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아 직 감상적으로 있을 때에 클리어 해야 편하다. 여자를 유혹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하우에 의한 것이지, 조금 뛰어난 외모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바보다. "알았어요. 생각… 해볼게요." '캬앗, 백호 씨! 당신은 틀렸어! 나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 다구!' 얌전히 대답하는 지현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사실 바로 사귀자는 제안에 바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지 않 은 이유는 순간 백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현군 같은 남 자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라는 빈정거림이 산산히 조 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만 일어나죠.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예, 가야겠네요." "내일 6시 이후에 갈테니, 부디 좋은 대답 주길 바래요." "하하, 글쎄요. 생각좀 해보고요." 그러나 아까부터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놀려대던 남자, 백호였다. '한번쯤 연락하면 덧나나.' 갑자기 입맛이 씁쓸해진 지현은 바래다주겠다는 호영의 제 안을 거절하고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입맞춤, 고백… 딴 세상의 것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받을 줄이야. 세상은 역시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진리를 지현은 깨달았다. * * "스물 한 살이라… 별로 상관 없잖아." 오히려 연상이라 편하다. 호영은 멀어져 가는 지현의 뒷모 습을 바라보며 그 옷 속에 감춰져 있는 나신을 상상했다. 과연 침대까지 데리고 가는데 얼마나 걸릴까. 순진한 여자 이니 만큼 더 재미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맛좀 보겠는걸." 입에 침이 고인 호영은 입맛을 다셨다. * * "흉살…이라뇨?" 뜻모를 노인의 말에 시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언제 부터인지 모르게 바뀐 목소리, 지독하게 낮고 갈라진 거북 한 음성이 구 노인을 향했다. "기가 찰 노릇이군. 자네가 모든 일의 원흉이었나?"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듯도 하다. 시윤은 털썩 소파에 주 저 앉고는 노인에게 눈짓했다.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기운 이 쭉 빠져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전생의 업보를 내세까지 짊어지고 오다니, 그것도 무수한 악연들을 이끌고… 어찌 인간의 것이라 하겠는가." 노인은 주저하며 루이시블을 쳐다보았다. 루이시블이 허락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구 노인은 말을 시작했다. "필시 자네는 전생에 신 같은 존재였겠지. 그러나… 무슨 한을 그렇게나 쌓았는가. 왜 현세까지 모든 것을 짊어지고 온 건가." 신에 준하는 힘을 가졌던 마계 유일의 지존, 스키엘……. "자네에게는 무수한 인연이 운명으로 엮어져 있네. 허나, 저주에 의한 것이야. 그러니 불행해질 수밖에……." "불행해지다뇨?" "전생은 전생으로 남아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법… 하지만 자네 덕분에 그것이 일깨워지는 자들은 현세에 걸쳐진 운명 이 망가지고 말지." 알 것 같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으나 외면한 것인지도 모 른다. "현세에 맺었던,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의 모든 인연들이 끊 어지고 말아. 예를 들어 저기 백호를 봄세,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네와 연결되어 있는 질긴 인연의 끈은 그를 외톨이로 만들고 말았어. 부모가 죽었고, 친구는 없네. 기껏해야 인세에서 벗어난 우리 노인네들이 저 아이와 인연 을 맺을수 있었을 뿐이니……. 그게 다 자네 때문이야." "…저 때문에… 불행이 찾아오는 겁니까? 그런 건가요?" 착 가라앉은 시윤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모르는 게 약인 법이다. 스키엘로서 울부짖었던 저주가 오히려 족쇄처 럼 따라붙어 그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백호 형이 홀로 외롭게 지내야만 했던 이유도… 수연이가 죽은 것도… 다 나 때문이었어.' 목이 콱 메였다. 억울하게 죽어간 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죽인 거야." 그쯤이면 그만둘만도 하련만 노인은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 다. 루이시블도 전혀 막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쓰 러운 눈으로 시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아픔 쯤은 참아내야 해요.' "그래, 자네 때문에 죽은 자도 있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더 욱 늘어날 거야. 아마도 전생에 맺었던 인연을 찾아서 과거 를 일깨우려 하는 것 같지만… 그럴수록 제 이, 제 삼의 백 호는 늘어날걸세. 보아하니 오늘도 하나의 인연을 만난 듯 하군." 표독스럽게 적개심을 보이던 여자, 이미은을 얘기하는 것 이다. 결론은 너무나 간단했다. 시윤을 돕기 위해서 함께 환 생한 자들은 모두 상상 이상의 불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는 것이다. -죽고싶어서 미치도록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원망하며 혼자됨을 슬퍼한다. "역시 그랬었나." 누구를 원망해야하나. 분명 이것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 데… 내가 이기적이어서 생긴 일인데… 누구를 원망해야하 나. "나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진다… 그랬었나." 죄 없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 서 살이 타 들어가던 아버지, 어머니… 그 분들이 무슨 죄 가 있겠는가. 모두 자식의 업보로 인해서 억울하게 돌아가 셨다. 연인인 수연도 단지 전생에 인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됐다. 그래, 불행이 우리를 일깨웠던 거야. "루이시블." 말라붙은 목이 찢어질 것만 같다. 시윤은 억지로 침을 삼 키고 루이시블을 불렀다. "예. 말씀하세요." "알고 있었어? 내가 환생자들을 각성시키면 시킬수록, 그 들이 불행해진다는걸 알고 있었어?" 각성을 위한 코드, 불행. 루이시블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엷은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청색의 눈동 자는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뿌드득. 이가 맞부딪치며 갈리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울 려 퍼졌다. 꽉 쥐어진 주먹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 시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 다. "왜 말하지 않았지? 난 오늘도 또 한 명을 깨울 뻔했어. 망가뜨릴 뻔했어! 한 인간의 인생을 완전히 부숴버릴 뻔했 어!" "…한 명이라도 더 모으지 않으면 승산은 없으니까요." 결국 폭발해버린 시윤은 소파에 앉아있던 루이시블의 목 줄기를 잡아채서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웃기지마! 어째서 그래야 해!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 는 그들을 왜 끌어들여야 해!" 숨을 쉴 수가 없어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는 조금의 반항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목이 꽉 잡혀 있어서 소리가 아 주 작았다. "당신은…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요?" 치잇! 겨우 그 이유란 말인가! 시윤은 들고 있던 루이시블 을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강력해진 힘에 비해서 루이시블 의 몸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물론 그녀가 반항하려 들었다 면 상황은 정반대였겠지만. "누구도… 행복을 잃어서는 안 돼. 그건 너무나 잔인하니 까… 이제는 더 이상 깨우지 않을거야." 그것이 거짓된 꿈이라 하더라도, 잔혹한 현실로 끌어내리 는 짓만은 하지 않으리라. 시윤은 다짐했다. 그런 시윤을 보 다 참다못한 루이시블이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의 스키엘, 아니 시윤은 너무나 약해요. 당신이 래픽 스 샤딘 중 하나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하 급 부관이라도 이길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절대로 불가 능해요. 개죽음 당할 바에야 윤회를 거친 자들을 모으는 게 나아요!" 의견충돌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루이시블로서는 당연히 모아야 하는 동료들이었고, 시윤은 사람들이 불행해 지는 게 싫었기에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너무 약해졌어. 스키엘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 천 년이나 기다렸지만 스키엘은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악 중의 악, 마중의 마, 모든 것을 포용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그 때와는 달리. 너무나 나약하고 소심한 모습으 로, 그저 인간으로……. 어떤 일을 하건 항상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윤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 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으면 웃음도 있는 것을 왜 밝은 면만 찾으려 드는 걸까. "누가 그들의 인생을 책임지지? 우리의 필요로 인해서 불 행해진 그들은 누가 책임지지?" 급기야 흥분한 시윤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죽어간 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젊은 시절을 산에서만 보내야 했 다며 씁쓸히 웃던 백호의 모습이 애처롭게만 보였었다. 루 이시블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할 때,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방의 문이 열렸다.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초췌 한 모습의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호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남의 인생을 누가 책임져 달래? 여자면 몰라도 남자는 싫 은데?" 13. 하나씩, 하나씩 부서져……. "배, 백호 형. 몸은 괜찮아요?" 갑자기 백호가 나오자 당황한 시윤은 말을 더듬었다. 그 동안의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 백호는 다 알고 있다는 눈치 였다. "물론이지. 오랜만이유, 구 할배." 구 노인에게 반갑게 손을 흔든 백호는 웃음을 거두고 시윤 에게 다가갔다. 어깨의 붓기는 놀랍게도 불그스름한 자국만 을 남기고 완전히 빠져있었다. 상의는 찢어져서 벗어버리고 바지만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였냐? 그런 거냐, 시윤아?" "……." 시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자, 백호가 시윤의 턱을 손을 잡아 올렸다. "내 눈을 봐.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래서 두려운 거야?" 그랬다. 백호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까, 모든 일의 원흉인 자신을 증오하지 않을까 겁먹었다. 자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시윤은 피하 고 싶었다. 이토록 강렬하게 쏟아지는 백호의 눈빛도… 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윤을 틀어쥔 백호는 조금도 힘을 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거냐?"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시윤의 입술에서 작은 탄식이 흘렀 다. "밉지 않아요? 형을 그렇게 만든 녀석이… 아니, 당연히 밉겠죠. 나라도 미워했을 거예요.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 도……." 겨우 두 달 동안 같이 살았지만 그동안 적지 않은 정이 쌓 였다. 백호에게 싸우는 법을 배우고 같이 운동하고 실없는 농담이나 하며 지냈다. 외동아들이었던 시윤에게 형이란 존 재는 그렇게 각인되었다. "너야말로 웃기지 마.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약하지 않아. 운명에게 짓눌릴 만큼. "네가 왜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거지? 난 제 앞 가림도 못하는 녀석으로 보이나? 그렇게 우습게 보여? 미 안하지만 틀렸어. 내 인생은 내가 짊어지지, 남에게 책임을 넘기지는 않아. 만약 운명이란 녀석이 나에게 불행을 안겨 줬다면, 그건 이겨내지 못한 내 책임이다. 스키엘의 저주가 날 불행에 빠뜨렸다고? 천만에! 난 충분히 즐겁고 유쾌하게 살고 있어. 부모가 있어야만, 즐겁게 웃을 과거가 있어야만 행복한 삶인가? 그런 건가? 현재의 난 이렇게 행복하게 살 아가고 있는데?" 형은… 강하군요. 어찌 이것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란 말인가. 굉장히 힘들 었을 텐데… 그리고 정말로 주어진 운명을 저주하고 싶었을 텐데……. 백호는 강했다. 시윤이 걱정한 것이 부끄러울 정 도로 강했다. 코끝이 찡해진 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미안해요." "흥,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바보 같은 동생이 하나, 정체 불 명의 외계인으로 보이는 회색 아줌마 하나, 미모의 악마가 하나. 이만하면 나도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비정상적이지만 그래도 하나의 가족이다. 누구에게도 뺏기 고 싶지 않은 가족. 백호는 현재의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 다는 듯 투덜대며 말을 맺었다. 시윤의 턱을 놔주던 그는 갑자기 생각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얘기니까… 정 불안하다면 다 른 사람들을 깨우는 건 그만둬도 좋겠지. 그건 네 자유야." 그들까지 백호처럼 심적으로 강하리라고는 볼 수 없으니 까, 이건 시윤을 위한 백호의 배려였다. 아무리 필요하다 하 더라도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만히 듣고 있 던 루이시블이 반발했다. "백호 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못들은 척, 진지했던 얼굴에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백호는 귀를 막고 시윤에게 윙크를 보냈다. '너도 못들은 척 해!' "정말 고마워요. 형……." 순간! 쾅! 퍽! 백호는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시윤의 몸 안쪽으로 회 전하며 파고들어 팔꿈치를 휘둘렀다. 묵직한 느낌! 그대로 팔꿈치는 시윤의 복부에 꽂혔고, 시윤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거실의 끝까지 날아갔다. "끄으윽. 무, 무슨 짓이에요." 낙법으로 몸을 사리며 간신히 일어난 시윤이 신음을 흘렸 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비릿한 피내음이 백호의 공격이 장난이 아니었음을 알려줬다. 반은 천사의 몸이 되 버린 시 윤은 웬만한 충격은 끄덕 없이 버텨낼 수 있다. 해머로 배 를 가격한다-실제로 해봤다- 하여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 시윤이 피를 토할 정도이니 평범한 사람이 맞았으면 비명횡 사할 공격이었다. 백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슬며 시 내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해보니까 기분 나쁘더라구." "……." 어이가 없어진 시윤은 백호가 내딛은 발 근처의 바닥을 보 았다. 단단한 원목이 깔려 있었지만 단 한번의 진각으로 완 전히 패여 있었다. 시윤은 '정말 죽이려고 때린 건가.'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생각보다 멀쩡한데?" 울컥울컥 속에서 올라오는 피를 삼키던 시윤은 기절할 지 경이었다. 백호는 정말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닐까. 둘 을 지켜보던 루이시블은 바닥이 패인 정도와 백호의 몸놀림 을 견주어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삼십 센티미터 두께의 콘크리트 벽은 가볍게 부술 공격이 었어.' 시윤이 살아있는 게 신기해 보였다. "어깨는 멀쩡한 것 같고… 좋아. 그나저나 구 할배 왜 오 셨수?" 백호는 쓰러져있는 시윤에게 씩 웃어 보이고는 구 노인에 게 말했다. 노인의 기운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조용히 있 으면 주위 환경과 동화되어 버렸다. 잠시나마 노인의 존재 를 잊었던 루이시블은 깜짝 놀라서 소파에 앉아있는 구 노 인에게 의혹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이래서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이상한 표정 지을 것 없어. 구 할배는 도를 닦는 도사니 까. 신기한 재주가 많아." 백호가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도사라는 자들은 다 이 정도의 힘을 갖 고 있나요?" 인간은 항상 약하다고 무시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인정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구 노인의 힘은 적어도 사익(四翼) 천사 이상이었다. 인간이 이렇게 강하다 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설마. 200년이나 사는 인간은 산 속 노인네들을 빼곤 아 마 없을걸?" 산 속 - 알콜즈 타운 - 주룡곡. 부르고 싶은 대로 이름을 바꾸는 백호였다. 한편 200년이라는 소리에 간신히 몸을 추 스른 시윤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텐데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구 노인이 대답했다. "주룡곡은… 삶과 죽음의 경계지. 인간임에도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린 자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속세의 흘러감을 읽고, 그저 살아갈 뿐이다.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으며 그저 깨닫고자 한다. 소위 신선이라 함은 바로 우리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지." 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신선이 있어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바보가 되어야만 했다. 항상 바보 취급을 받던 백호조차 시윤에게 '넌 바보야'라는 눈빛을 보 낸 것이다. 눈앞에 타락천사를 두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정말 바보소리를 들을 만 했다. "시윤 씨가 잊고 있었나 본데… 전 악마예요." 루이시블이 말했다. 무안해진 시윤은 고개를 떨구며 조그 맣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잠시 흐르는 정적을 깨고 구 노인이 백호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백호는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싫수다." 자신의 제안이 간단하게 거절당하자 구 노인은 허리에 찼 던 호리병을 끌러서 손에 꽉 쥐었다. "긴말 할 것 없겠지. 이걸 봐라." 그가 손목을 떨치자 호리병 안에서는 '사라락'하며 작은 알 갱이들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다. 구 노인은 엄지손가락으 로 호리병의 입구를 막고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것을 흔들었다. '뭐 하는 거죠?' '몰라, 아마도 점치는 것 같은데?' 눈을 반개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구 노 인이 눈을 번쩍 뜨며 호리병을 막았던 엄지손가락을 치웠 다. 거꾸로 세워진 호리병에서 테이블 위로 새까만 쌀알들 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제각기 생명을 갖기라도 한 듯 일정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백호는 그것을 끝까지 지 켜보고 나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점괘를 읽는 방법은 예전 에 배운 바 있었다. "사死… 하얀 호랑이白虎의 숨이 끊어지리라." "이렇게 명확한 괘가 나오는데 그래도 안갈테냐?" 구 노인의 점괘는 절대로 틀리는 법이 없었다. 답이 안나 오면 안나왔지, 일단 나온 점괘는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맞 아 떨어졌다. 예외가 있긴 있었다. 점괘를 뽑아낸 것도 구 노인이니, 그것을 풀어내는 것도 구 노인의 몫이었다. "그래도 안 갑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백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허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데도 고집을 부릴 셈이냐." "이들을 지켜야 하는데 어디를 간단 말이요?" 시윤, 나이린, 루이시블… 생전 처음으로 지켜야만 하는 이 들이 생겼다. 어떻게 자리를 비우고 피한단 말인가.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단 일주일만 곡으로 들어가 있으면 사성(死星)의 기운이 널 피해갈 것이야." 구 노인이 백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완고했다. "…단 하루도 떠날 수 없수다." 일주일만 피한다면 죽을 위험을 피할 수 있다지만 백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저들에게 조금이라 도 일이 생긴다면 그걸 어찌 견디란 말인가. "형, 그러지 말고 갔다 와요. 우린 괜찮으니까……."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낀 시윤이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백호의 노기 어린 꾸짖음이었다. "운명 따위에게 짓눌리지 않는다고 했다. 죽을 운명이라고 해서, 모두를 두고 혼자만 피하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불안감, 이들을 두고 떠난다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 은 불안감이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지는데. 백호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절대로 안가요. 절대로!" "그럼… 우리 모두가 그 주룡곡으로 가는 건 어때요?" 백호 혼자 가는 게 안 된다면 모두 가는 것은 어떨까. 백 호 대신 노인이 안타까운 목소릴 대답했다. "곡의 규칙상, 그건 불가능합니다. 백호는 속세와 곡을 잇 는 유일한 존재, 타인은 곡에 들어와서도 안되며 들어올 수 도 없습니다." 규칙이 아니어도 불가능하다. 주룡곡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결계는 처음부터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백호는 특별한 존재였으며, 그 외에 인물이 곡에 강제로 들어오려 한다면 결계가 부서지고 만다. 그리고 그 일대는 억눌렸던 기운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초토화 된다. "그러니 나도 안 갑니다." 구 노인이 답답하게 구는 백호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아둔한 녀석 같으니라고! 네가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누 가 누구를 지켜! 네가 가진 알량한 힘만 믿고? 천만에! 넌 나조차 이길 수 없다!" 자신이 그동안 키워왔던 힘이 무시당하자 백호도 화가 치 밀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나이린과 수없이 싸워서 갈고 닦은 실력이다. 예전에 주룡곡을 빠져나올 때와는 차원이 달라진 그였다. "난 강해졌어요." "나도 눈이 있다. 나도 보았다. 지금의 실력에 만족하느냐? 그래, 그건 대단한 성취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넌 크 게 착각하고 있다. 저기 누워있는 아까 너와 겨뤘던 존재도, 진정으로 싸운다면 널 쉽게 죽일 수 있다. 죽이길 원한다면 넌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얘기다." 백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나이린과 호각을 이루 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실제로 호 각으로 싸웠기에 지금 그녀는 거실 바닥에 치료를 받고 누 워있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슨 헛소리입니까." "여기서 네가 이길 수 있는 건 저 소년뿐이다. 생명을 걸 고 싸운다면 말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물어봐라." 정적. 수치심으로 몸을 부르르 떤 백호가 이를 사려 물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린. 깨어났어?" "응." 나이린은 눈만 감고 있었을 뿐 아까부터 깨어 있었다. 다 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다. "저 말이 사실인가? 네가 날 봐주면서 싸웠다는 게… 사실 이야?" "대련과. 전투는. 다르다. 백호. 난. 전투를. 위해. 태어났다. 백호의. 힘은. 나와. 비슷하지만. 생명을. 취하기. 위한. 전투 는. 내게. 이길. 수. 없다." 확실히 백호의 힘은 최하급 서열의 래픽스 샤딘에 가까울 정도로 강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용량의 계산일 뿐 이다. 같은 힘을 갖고 있다면 승부는 경험의 차이에서 갈린 다. 같은 진검을 들고 있는 꼬마와, 검도 유단자 중 어느 쪽 이 강하겠는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백호에게 구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 다. "네가 강해졌다고 했지?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나와 힘을 겨뤄보자. 옛날 곡에서 넌 내 옷깃도 건드릴 수 없었다. 내 가 인정할 만큼 변화했다면 널 포기하고 나 혼자 곡으로 돌 아가마. 흡족치 못하다면, 강제로라도 데려가겠다." 어쩌겠는가.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봅시다." 구 노인은 지팡이를 집어들고 휘적휘적 집밖으로 빠져나갔 다. "따라와라." * * 쥬엘러(Zu-Eller) 빛의 축복을 받은 카마세이에 황금수가 있다면 마계(魔界) 에는 쥬엘러가 있다. 쥬엘러와 황금수가 본디 같은 뿌리에 서 나왔다고 하지만 둘은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틀리다. 탁 한 햇빛을 쬐고 암흑 달의 정기를 흡수하는 쥬엘러는 가지 부터 잎까지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 "풍작이군." 쥬엘러의 둘레는 1500미터에 달했고 높이는 그 네 배였다. 마계 어디에서도 고개만 돌리면 새카만 나무를 볼 수 있다 는 얘기다. 휴즈는 날개를 접으며 쥬엘러 가까이에 부드럽 게 착지했다. 멀리서부터 그런 그를 주시하던 도스예크가 빠른 걸음으로 휴즈의 앞에 섰다. "영광된 이름, 어둠의 주인, 마계지존 다루카의 계승자를 뵈오니. 주군의 검, 일곱 번째 래픽스 샤딘 도스예크 상디옌 이 인사드립니다." 휴즈의 루비 같이 붉은 눈이 도스예크를 향했다. 남들보다 머리가 두 개 정도는 더 큰 도스예크의 몸은 가죽으로 된 갑옷을 걸쳤음에도 터질 것 같은 근육이 도드라졌다. 허리 에 메어져있는 2미터 길이의 커다란 도(刀)는 그의 흉폭함 을 잘 드러내주고 있었다. 얼굴에는 무수한 싸움을 증거 하 는 자잘한 흉터들이 보였다. 전투의 귀신, 싸움만을 추구하 는 수라의 모습이다. "일어나라. 오랜만이구나." "격조하셨습니다." 휴즈는 조금이나마 변한 도스예크의 모습에 잔잔하게 웃었 다. 지난 백 년 동안 쥬엘러의 보호역을 맡겨놨더니 그의 꺼질 줄 몰랐던 살기가 상당히 속 깊은 곳으로 갈무리 된 것이다. 그 증거로 이렇게 정확하게 예를 차리고 있지 않은 가. 쥬엘러에 메어둔 지도 벌써 100년, 슬슬 풀어줄 때가 되 었다. "아직도 싸우고 싶나?" 도스예크는 강한 만큼 순수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리라. 상대가 필요했다. 도스예크가 쥬엘러의 관리를 맡는 그 날부터 이곳에는 다른 타락천사들의 발걸음이 끊겼다. 그의 이름을 듣고서는 가끔 씩 구경을 오던 자들도 사라졌다. 그의 결투 상대가 되고싶 지 않았으니까. 쥬엘러에서 흘러나오는 흑의 정기를 들이마 신 휴즈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동안 잘 견뎌냈으니 이제 제약을 풀어주마." 꾸욱.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 긴장감.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래픽스 샤딘을 무장을 마치고 내일 해가 뜰 때까지 내 성으로 모두 모이게 해라. 각각의 정예 레카베도 함께." 비단 래픽스 샤딘뿐이 아니라, 두 쌍 이상의 날개를 가진 타락천사라면 누구나 운용이 가능한 것이 레카베였다. 개인 의 친위대나 마찬가지고, 힘이 곧 법인 마계에서는 누구나 강자의 레카베에 들어가서 빨리 강해지기를 희망한다. 래픽 스 샤딘의 레카베라면 구성인원은 모두 두 쌍 이상의 날개 를 소유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두 소환한다는 얘기는… 전쟁을 뜻한다. "다음은… '혼합체'의 확인인가……." 휴즈는 무심코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 랐다. 날개를 펼치지도 않았건만 그의 신형은 한줄기의 빛 이 되어 대기를 찢고 날았고 곧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도스 예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에 더 강해지시다니……. 끝이 없구나." 왕족의 힘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 부질없는 생각 을 하던 칠 장군 도스예크는 한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랜만에 있는 총 소집의 래픽스 샤딘 이라… 바쁘게 움직여야 될 듯 싶다. '설마, 2차 천계 침공은 아니겠지.' * * 백호와 구 노인은 집 뒤쪽 공터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 다. 사제간의 대결, 백호의 괴력을 알고 있는 시윤은 노인의 행동이 무모해 보였다. 조금도 강할 것 같지 않은 인간의 노인, 이백 살이나 먹은 신선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외견상 약해 보였다. 하얗게 늘어뜨린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은 백 호의 모습을 보고 의혹을 표했다. "그 귀기(鬼氣)는 쓰지 않는 게냐?" "그건 너무 강해서……." 백호가 말끝을 흐리자 노인이 고개를 젓더니 들고있던 지 팡이를 땅에 꽂았다. 쿠웅! "네가 날 상대하는데 손속을 두겠다니… 많이 컸구나." 부우우웅.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지만 노인이 주먹을 가 볍게 모아 쥐자 옷자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노인이 뿜어 내는 기(氣)는 패도적인 기세도 아니었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자연의 기운이었다. "이래도?" 자신의 힘과 노인의 기운을 가늠해본 백호는 인상을 찌푸 렸다. 어차피 주룡곡 시절에도 미숙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 도 메르니츠를 착용하고 계속해서 깨졌었다. 이제 와서 메 르니츠 없이 싸운다고 이기리라 생각한 건 크나큰 오산이었 다. 괜한 걱정을 한 것이다. 백호는 아직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노인에게 인상을 쓰고는 눈을 감았다. '어깨는… 괜찮구나.' 루이시블이 치유술을 걸고 구 노인이 손을 봤는데 낫지 않 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 '나와라.' 꿈틀. 검은 기운이 약동했다. '나와라.' -브아아앗 이미 많은 힘을 쓴 백호였지만 잠시 취한 휴식으로 상당한 회복을 이뤘다. 핸디캡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암흑기(暗 黑氣)가 백호의 정신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가 끝 난 것이다. '나와라.' 백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는 양팔을 교차시키며 시동 어를… 천년의 세월을 함께 했던 무구의 이름을 불렀다. [메.르.니.츠] -즈아아아앙! 무형의 암흑기는 가닥가닥 나뉘어져서 백호의 전신을 감쌌 다. 메르니츠-블랙아머, 비록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위압감만은 대단했다. 자주색 문양이 그려진 고풍스러운 갑 주,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또… 착용 부위가 넓어졌지?' 시윤이 루이시블에게 속삭였다. '그런 것 같아요. 백호 씨는 정말 성장이 빠르군요.' 루이시블도 놀랐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메르니츠는 전신갑주의 모습을 취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겨우 장갑에서 시작했던 메르니츠를 이 정도로 빨리 진화시킨다는 것은… 아무리 환생체라지만 백호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때, 나이린. 저래도 이길 수 있겠어?' '…죽일. 수는. 있다.' 둘을 따라서 나이린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말했다. 백 호를 이길 수는 없어도 죽일 수는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 까. 시윤은 궁금했다. '뭐가 다르지?' 백호는 몸에 딱 맞는 기분 좋은 착용감을 잠시 만끽하다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역시 착용 전보다 몸이 가벼 워지고 힘이 솟아나며 움직임이 민첩해진다. "확실히 나아지긴 나아졌구나." 나이린과 백호의 대련을 지켜보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판단 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이제야 알아본 것이다. 노인은 고개 를 가만히 끄덕이고는 오른손을 몸 안쪽으로 왼손을 몸 바 깥쪽으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의 넌 김형이 아니라 나조차도 이기지 못한 다." 백호의 정식 스승이었던 김석진은 주룡곡의 최고 고수였 다. 물론 구 노인도 강하기는 하나 그는 도사(道士)지 무사 (武士)가 아니었다. 무예실력으로 따진대도 주룡곡에서 중간 정도 갈까. "하! 예전처럼 쉽지는 않을 거요!" 암흑의 기운! 전신에 서린 흑색 오라! 형형이 빛나는 눈조 차 새카만 어둠에 물들었다. 같은 부피의 금속갑주였다면 무척이나 무거웠겠지만, 메르니츠는 유형화된 암흑기(暗黑 氣), 운신에 불편한 점이 전혀 없다. "와라. 선수는 양보해주마." 노인의 발이 지면을 쓸 듯 슬며시 앞뒤로 벌어졌고, 손은 다시 한번 크고 작은 원을 그렸다. 단순히 자세를 바꾼 것 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백호는 긴장하고 말았다. '태극(太極)… 빌어먹을.' 정말 진지하게 상대할 생각이군. 백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메르니츠의 문양이 강한 자줏빛을 뿜어냈다. 힘의 발현! "갑니다!" 파앙! 한차례 외침과 함께 백호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 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며 허공을 날았다. 회전의 원심력 을 이용하여 그는 낙하하는 것과 동시에 노인을 오른팔로 긁어내리듯 후려쳤다. '제길!' 틀렸다! 가격되었다면 강철도 뭉개버릴 파괴력이었지만 노 인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여 백호의 공격을 흘려버리곤 그의 등을 향해 좌수(左手)를 비틀어 나선을 그리며 장을 쳐냈다. 타인의 힘을 받아 그대로 배가시켜서 돌려주는 수 법, 완숙의 경지에 달한 태극권이었다. "어딜!" 다급해진 백호는 몸을 억지로 돌리며 노인의 장에 주먹을 날렸다. 파워에서라면 밀리지 않는다! 맞부딪친다면 승산은 있었다. 어디까지나 충돌할 때의 얘기지만. 노인은 빙긋 웃 더니, 어깨를 한차례 흔들어 진동시켰다. -선가태극권(仙家太極拳) 회류장(回流掌)! '제길! 제길! 또 이건가!' 나왔다. 선가태극권의 숨겨진 모습이! 당황한 백호는 속으 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내질렀던 주먹을 돌릴 수는 없었다. 둘의 공격은 서로 충돌하는 듯 하더니, 한순간 흐릿하게 움 직인 노인의 회류장(回流掌)이 백호의 팔을 뱀처럼 휘감았 다. 마치 물을 때리는 듯한 허무한 느낌! 주룡곡에서의 대련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백호는 치를 떨며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알 수 없는 회전력에 백호의 팔은 공중으로 퉁겨 졌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노인의 장이 백호의 명치를 때렸 다. 퍼억! "끄윽." "…역시 귀기(鬼氣)의 집합체로군." 메르니츠의 총알도 막아내는 반탄력도 전혀 소용이 없었는 지 백호는 숨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외부에서의 일차적 충격은 막았지만 내부로 스며드는 이차적 충격이 있 었던 것이다. 노인은 백호가 쓰러지지 않자 놀랍다는 듯 중 얼거렸다. "이래도 계속 하겠느냐?" "오십…시오." 흙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뒤로 밀려나간 백호는 피를 삼키며 말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어. 어떻게 한 거지?' '저 노인이 백호 씨의 힘을 받아서 그대로 받아친 거예요. 그리 어렵지 않은 기술이지만… 지금의 백호 씨에겐…….' '메르니츠를 저 정도로 확장했는데도 힘이 모자란 거야? 하지만 저 할아버지는 인간이잖아.' '…힘은 백호 씨가 훨씬 강해요.' 둘의 귀엣말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노인의 몸이 바닥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유려한 움직임으로 백호에게 다가갔다. 바람을 타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게 노인의 힘의 원천이었다. "합!" 백호는 다가오는 노인에게 앞으로 튀어 오르며 다리를 차 올렸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노인은 맞을 듯 하면서도 살며시 스쳐지나가며 왼손으로는 백호의 들려진 오른쪽 다 리를 붙잡았고, 오른손은 그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회류지(回流指) 위이잉! 모아진 손가락이 가볍게 진동했고, 그것은 한 점에 집중된 힘을 발하며 메르니츠를 강타했다.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으 로 펼쳐진 회류는 복부를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는 고통을 선사했다. '질 수 없어!' 내부가 진탕되어 다시 피가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이번에 는 잡혀 있어서 뒤로 날아가진 않았다. 백호는 이를 사려 물어 비릿한 피를 삼켜내고는 잡혔던 발에 힘을 주어 뒤로 빼려했다. 그런 그의 뜻을 알아차린 노인은 잡고있던 손을 놓아주고는, 미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른 쪽 발을 쓸 어서 찼다. "큭!" 넘어지진 않았지만 균형을 잃어버린 백호는 무방비 상태. 그 때 노인의 팔이 무수한 붉은 원을 그리며 백호의 몸을 가격했다. -선가태극권(仙家太極拳) 연환양극수(連環陽極手)! 퍼퍼퍼펑! 뜨겁게 달아오른 노인의 수장에 수십 번을 가격 당한 백호 의 몸은 3미터나 날아가 버렸다. 붉게 달아오른 노인의 손 은 종이를 올려놓으면 불이 붙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고, 그것은 회전을 거듭할수록 가열되었다. 음양(陰陽)의 기운에 근본을 둔 선가태극권(仙家太極拳)의 효용인 것이다. "크으으! 어째서!"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 분함이 더 컸던 백호는 바닥에 떨어 지자마자 핸드스프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감싼 메르니 츠에는 흠집하나 없었지만 온몸에는 은은한 고통이 전해졌 다. "아직도 네가 왜 약한지를 모르겠단 말이냐." "모릅니다!" 파앗! 꺾이지 않는 신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백 호는 검은 안광을 흩뿌리며 땅을 강하게 내딛었다. '왜 지는 거지?' '예?' '백호형이 더 강하다면서, 그런데 왜 지는 거지?' * * 힘이 달리는 백호는 필사적이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 고 강하게 공격을 해봐도 구 노인은 번번이 피하거나 흘려 내었고, 아주 약간의 빈틈이라도 찾아내서 백호를 거꾸러뜨 렸다. 구 노인이 구사하는 선가태극권(仙家太極拳)은 말 그 대로 신선의 무술이었다. 무극(無極)에서 갈라져 나오는 음 양(陰痒), 양극(兩極)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숙련된 정도에 따라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짧은 기간을 익혔다면 그저 건 강체조에 지나지 않았지만, 구 노인처럼 수십 년 이상을 쏟 아 그 오의를 깨우쳤다면 차원이 다른 힘을 보이는 것이다. '백호 씨가 힘이 있어도 이길 수 없는 이유는… 경험 때문 이죠.' '경험?' '예, 경험이요. 잊고 있었네요. 백호 씨가 전생의 전투경험 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적어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라 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경험이라니? 어째서?' '간단해요. 아무리 가진 힘이 강하더라도 그걸 발휘할 수가 없는 거죠. 실력과 경험은 비례하기 마련인데 백호 씨는 경 험이 부족해요. 생각해봐요. 아무리 힘이 강한 인간이더라도 오랫동안 무술을 익힌 인간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선천적으 로 가진 힘이 모자란다 하더라도 그런 경우에는 무술을 익 힌 인간이 강해요. 싸우는 법을 아니까요.' '…그런 건가.' '네. 그런 의미에서 백호 씨는 인간의 기준에서 한참 벗어 난 저 노인을 이길 수가 없어요. 게다가 저 노인, 제가 보기 엔 적어도… 트윈 윙Twin-wing의 힘을 갖고 있어요. 물론 마계로 간다면 하급 천사에 가까울 힘이겠지만, 우리의 힘 이 반감되는 인간계에서는 대단하게 보이네요.' '그럼 이길 수 없다는 얘긴가.' '하지만… 단번에 제압할 수도 있는데 저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는 뭘까요.' 퍼엉! 다시 한번 멀찌감치 날아간 백호는 몸을 공중에 못박았다. 메르니츠의 사념에게 바가지 긁히며 배운 비행 기술이었다. 고소공포증은 억지로 떼어버린 지 오래였다. "공중으로 가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쳇,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저하던 백호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메르니츠, 원 핸드 모드! 전환 메르기온!] 전신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검은 기류로 변하여 오른손으 로 몰려들었다. 일직선으로 펼쳐진 오른팔에 기형적으로 장 착되는 마신포(魔神砲) 메르기온! 울퉁불퉁한 굴곡을 그리 는 흑색의 대포는 보기에도 섬뜩했다. 즈앙! 손등 위로 자줏빛 마법진이 새겨졌고 뒤이어 포신을 감싸 는 자색의 문양들이 새겨졌다. 바아앗! 바아앗! 혈관처럼 그려진 자색 줄기들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굉장 한 빛을 발했다. 손끝에는 보랏빛 구체가 모여들었다. '되도록 힘을 줄여서… 어깨가 다치지 않도록… 노인네가 죽지 않도록…….' 아무리 구 노인이 강하다 하더라도 풀파워의 메르기온을 받아낸다면 죽고 만다. 멀쩡한 언덕도 날려버리는 판에 무 엇이 문제랴. 백호는 최대한 메르기온의 힘을 줄여서 구체 를 약화 시켰다. 백호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구 노인을 겨냥했 다. '가라.' [전개, 메르기온!] 푸아아악! 자줏빛의 커다란 빔의 쏘아져 나갔다. 백호는 어깨를 걱정 했지만 힘을 많이 줄인 탓인지 뻐근하기만 할 뿐 다칠 정 도는 아니었다. '메르기온? 저건 또 뭐지?' '아아, 시윤은 모르는군요. 백호 씨가 찾아낸 메르니츠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하지만… 어쩐지 아까 썼던 것과는 다 르네요. 그건 둥그런 구체였는데 이번에는 빛의 기둥이라니. 메르니츠가 변화해서 그런가.' 놀란 것은 메르기온을 쏜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와 같 은 구체가 날아갈 줄 알았는데 빛의 기둥이, 빔 형태로 쏘 아지다니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극도로 집약된 마(魔)의 기운이라니, 재미난 것을 쓰는구나." 구 노인은 가볍게 읊조리더니, 재빨리 땅에 박혀있던 지팡 이를 움켜쥐었다. 오랫동안 쓴 거무튀튀하게 때가 탄 나무 지팡이는 손에 꼭 맞았다. 그는 지팡이의 끝을 검을 쥐듯 잡고는 급격하게 쏟아져오는 광선을 응시했다. -선가태극권(仙家太極拳) 월하음극무영검(月下陰極無影劍)!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의 온도가 급격한 속도로 떨어졌 다. 지팡이는 은은하게 푸르스름한 빛을 띄었고, 지독히도 차가워졌다. 노인은 백호를 향해 지팡이의 끝을 돌리고는 그대로 놓아버렸다. 중력에 제약을 받아 떨어져야 마땅할 지팡이는 아직도 손에 잡혀있기라도 한 듯 허공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가볍구나. 쯧쯧." 뭐가 못마땅한지 노인은 백호를 향해 혀를 찼다. -회류지(回流指)! 콰앙! 노인의 손가락이 지팡이의 한쪽 끝을 회류(回流)의 기운을 담아 찔렀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월 하음극무영검! 어검술의 경지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저렇 듯 손쉽게 검기를 지팡이에 담아 움직이는 것은 전설에나 나올 수법이었다. 푸른 화살이 된 그것은 무서운 기세로 메 르기온 광선을 갈랐다. 쿠콰콰콰콰!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음을 내며 넓게 확산되어 있는 광선 의 정중앙을 꿰뚫은 지팡이는 백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 갔다. 메르기온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던 백호의 눈이 부 릅떠졌다. "뭐얏!"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지팡이의 옆면을 황급히 주먹으 로 때려 날려버린 백호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메르니츠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여서 방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고, 음 극(陰極)의 기운이 담긴 지팡이는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기 때문이다. "크으으, 반격이라니. 이 영감탱이는!" 진지함이고 뭐고 욕부터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메르기 온의 효과를 확인하는 백호였다. 지팡이에 의해 관통되어 파괴력과 속도가 약해진 메르기온을 노인은 아주 여유 있게 피한 후였기에 백호는 울화가 치밀었다. '제기랄! 제기랄! 가, 가만… 아무리 절제했다지만 메르기 온이 노인의 지팡이보다 약했을 리가…….' 여기까지 생각한 백호의 인상이 한없이 구겨졌다. 그리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굉장히 밝아졌다가, 다시 자존심이 상해서 입매가 사정없이 뒤틀려졌다. '저 노친네가 정말!' 구 노인은 백호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인자하게 웃었다. "알아차렸느냐? 생각보다 느리구나. 아니, 네게는 빠른 것 일지도……." "망할! 나한테 선가태극권을 가르칠 생각입니까? 예전에는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써도 무시하더니!" 에에, 공손한 존대는 역시 백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게 어울린다. 구경하던 시윤은 슬그머니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가르침이었군요.' '에? 지금까지 싸우던 게?' '예, 맞아요. 적당히 봐주면서 본을 보이는 공격. 힌트를 주 기 위해서였군요.' '으음, 어려운데.' 노인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튼 소리!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다고 해도 80년 이상을 매진해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네 녀석에게 가르친단 말이 냐! 그저 네놈의 못된 버릇을 고쳐주려는 것뿐이다." "못된 버릇?" 노인은 낄낄거렸다. …신선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한 번 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어울리기도 했다. 아옹다옹하는 제자와 사부의 관계라고나 할까. "무공은 가르쳐주지 못해도, 네 녀석의 그 바보 같은 싸움 방식은 바꿔줘야겠다. 도대체 십 년 가까이 곡에 있으면서 뭘 보고 배운 게냐? 그런 막싸움은 주룡곡 원숭이도 하질 않는다. 쯔쯔, 자질이라고는 개미오줌보 만큼도 없으니 ……." 자존심이 파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돌아와라, 월하!" 백호가 쳐냈던 지팡이는 아직도 그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 었다. 척! 순식간에 날아온 지팡이는 노인의 손에 잡혔다. "그러니… 오늘밤에는 개 패듯이 좀 맞자꾸나." 구 노인은 섬뜩하게 웃었다. 신선? 웃기는 소리, 저건 광기 에 찬 늙은이일 뿐이다. '…우린 그만 들어갈까요?' '응.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지?' '예, 들어가서 밥이나 먹죠.' '나이린도 들어가자.' '응.' 슬금슬금 집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백호의 처절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메르기오오온! 오버 히트! 날려 버려어엇!" 날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 * 메사트의 방, 그녀는 지하 연구실에 따로 마련된 숙소에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아가 말살된 네피림에게 사생활이란 있을 수 없으니 이렇게 독방을 쓴다는 것은 분 명 낭비였지만, 연구실의 공간이 남아돌아 네피림들은 모두 각방을 쓰게 되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메사트는 눈을 뜨고 몸을 반쯤 일으켰 다. 그 바람에 시트가 흘러내려 몸에 착 달라붙는 전투용 슈츠가 드러났다. 그녀는 불청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명하실 일이 있습니까?" "아니… 일은 없다. 다만……." 역광이 쏟아져서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만 보였다. 아진 은 말을 흐리며 방에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빛이 칼로 잘 리듯 사라지고 찾아온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머뭇거리던 아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너와… 같이… 자도 되겠니?" 같이 잔다. 남녀가 같이 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교(性 交)를 뜻한다. "전 생식 기관은 있지만 생식 기능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진은 당황했다. 표정하나도 안 바꾸고 책 읽듯 말하는 그녀였지만 내용은 너무나 낯뜨거웠다. 그래서 말을 정정했 다. "아니, 그저 네 곁에서…자도 되겠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침대에서……." "예." 사실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명령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 게 만들어진 네피림이니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진은 마치 '누군가'를 대하듯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허락하자 아진은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날 정 도로 기뻐하며 메사트의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아이 같은 모습, 아이 같은 행동… 과거로 돌아가는 기억. "자자." 아진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메사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진이 옆에 누워있다고 해서 휴식 취하는 것을 그 만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명령이 있으면 그저 움직이는 것이다. 어둠과 정적은 무(無)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창출해 내었고, 그 정적을 깨며 아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메사트." "예." "날… 안아줘." 아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누가 이런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랴. 타락천사의 최강자들. 래픽스 샤딘의 우두머리… 아무리 장난스럽고 색기어린 행동을 하고 다녔다지만… 누 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이런 모습을 누가 상상하겠는가. 메사트는 치렁치렁한 아진의 머리칼 밑에 손을 집어넣어 그 의 목을 둘렀다. "고마워." 아진은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울고 있었다. 메사트의 감각은 놀랍게도 그것을 느꼈다. 주인의 슬픔, 정보에 따르면 이것은…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슬프신가요." "뭐?" "울고 계신다는 것, 슬프다는 뜻. 울지 마시기를." 원래 이 몸의 주인은 누구일까. 울고 있는 상대에게 서슴 없이 손을 내밀어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진은 정말로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냈다. 누군가 자신에게 위로해준다는 것,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 로. "고맙다." 눈물을 삼키며 아진이 말했다. 얼마나 오래됐을까. 이렇게 편히 누울 수 있던 때가. 따뜻 한 메사트의 숨결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수마의 세계로 빠 져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취하는 수면이었다. '메사트…….' * * 저주받은 마계, 온갖 암흑의 존재들이 모여있는 그곳에는 극히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금기의 땅들이 있다. 엄청나게 강한 마수들이 모여 살아서 절로 발걸음이 끊긴 곳도 있고, 한 번 들어서면 돌아오는 자가 없다는 소문 때문에 자연스 럽게 그렇게 불리는 곳도 있었다. "그르르륵." 이곳도 그런 금기의 땅 중 하나, 들어올 수는 있으되 나갈 수는 없다. 거대한 결계가 적월(赤月)의 정기를 흡수해서 일 부 타천사를 제외하고는 놔주질 않는 것이다. 목이 울리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그것은 천천히 움직였다. 하늘의 달 은 피라도 머금은 듯 지독히도 붉었다. "그르르." 그것의 입가에는 말라버린 피가 묻어 있었다. 흡혈(吸血)… 그것은 동족의 핏물이었다. 우연히 결계 안에 들어선 동족 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미쳐버린 그것의 먹이가 된 것 이다. 자아를 상실한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것도 보지 않았 고, 섭취를 끝낸 그것의 몸은 끝없이 다른 형태로 변하려 하였다. "나…를… 크아아아악!" 절규! 한 점 남아있던 의식마저 혼돈의 기운 속에 파묻혔 고, 그것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뿌득, 뿌드득. 살이 갈라지고 뼈가 자리를 바꾸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 다. 메말라버린 땅바닥처럼 갈라진 흉측한 속살 사이로 시 뻘건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 그 리고 혼돈을 향한 비명. 단순히 하급의 타천사에 지나지 않 았던 그는 이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갈라진 피부에 서 터진 핏물은 금세 말라버렸고, 어느새 딱딱해 보이는 보 랏빛 각질이 피부를 한 꺼풀 덮었다. 마물(魔物)이 되어가고 있어! 살려줘! 살려줘! 제발 날 구해 줘! 이건 내가 아냐! 비명은 묻혀버렸다. 더 이상 몸은 명령을 듣지 않았고, 한 가닥 남아있는 의식은 그저 사념으로만 존재할 뿐, 신체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흡혈(吸血)…아니 흡혼(吸魂)이었다. 피는 생명의 상징이었 고, 그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혈액에 담긴 혼 을 삼켜냈다. 저주받은 일족의 용서받지 못할 행위! 피를 마시는 순간 느꼈던 그 희열과 환희는 닥쳐올 고통에 대한 비웃음일 뿐이었다. 그 때, 혼미해져가던 의식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잘 지냈나?" 그것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렸다. 달을 등지고 떠 있는 타천사의 루비 같이 투명하고 붉은 눈동자가 싸늘 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르륵." 원래대로라면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어야 옳다. 그 어떤 타천사라 하더라도 절대의 힘을 자랑하는 다루카의 일족, 마계의 왕 휴즈에게 적대적인 의사를 보여서는 안 된다. 휴 즈는 차가운 웃음을 머금고, 마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일족 을 보았다. 단단해 보이는 보라색 각질이 갑옷처럼 온몸을 덮어 거대해졌고, 한 쌍의 묵 빛 날개가 초라하게 매달려 있었다. "가르르르… 왕……." "아직 의지가 남아있었나." 아니, 그것은 그저 과거의 버릇일 뿐. 뒤섞인 영혼에게 자 아가 남아있을 리 없다. 한 때 타천사였던 마물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 "시끄럽군." 피식 웃어버리던 휴즈는 또 한번 찾아온 마물의 변화에 입 을 다물었다.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등 쪽의 각질을 뚫고 새로운 날개가 솟아난 것이다. 선명한 검은 색이 아닌 뭔가 탁한 혼돈의 어둠의 빛깔이 깃든 그것은 원래의 날개 보다 두 배는 컸다. 마물은 새로 돋아난 날개를 홰쳤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부아앙! 부피가 커지자 한번 날개를 떨치는 것만으로 엄청 난 풍압이 일었다. 마물은 공격적인 몸짓으로 휴즈를 향해 날아올랐다. 둘 사이의 거리는 단숨에 좁혀졌고, 마물은 칼 날 같은 손톱을 길게 뽑아내어 휴즈에게 휘둘렀다. "흡!" 휴즈는 급히 숨을 들이키며 팔뚝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손 톱을 가로막았다. 하급천사의 공격 따위, 이빨도 안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상황, 명검(名劍)으로 도 흠집하나 낼 수 없는 그의 몸에, 손톱이 훑고 지나간 곳 에 다섯 가닥의 상처가 남은 것이다. "크르르." 하급천사의 움직임? 아니었다. 이것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아득 하게 먼 거리를 단숨에 날아와 스쳐지나가며 공격을 한 마 물. 핏물이 허공으로 튀었다. 감히 하급천사 따위가 자신을 건드렸는데도 휴즈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잔잔한 미소 를 머금었다. "생각 이상이군." 피에 취한 마물은 자신의 왕까지 노리고 있었다. 탁하게 흐려진 눈동자, 계속해서 흘리는 짐승의 소리. 휴즈는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면서, 재차 공격해오려 는 마물을 노려보았다. "트윈 윙……." 파라락! 새카만 입자들이 회오리치듯 모이더니 날개가 되 었다. 자그마하게 중얼거리며 단숨에 한 쌍의 날개를 더 소 환한 휴즈는 빙긋 웃었다. 힘을 내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그릇이 필요하고, 날개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네 힘을 보여라." 묶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머리칼을 흩날리며 휴즈는 식식거 리고 있는 마물에게 날아갔다. 퍼퍼펑! 휴즈와 마물이 부딪 쳐갔다. 마물이 손톱으로 가슴팍을 찌르려고 하자, 그는 마 물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꺾고 발로 등을 걷어찼다. 각질로 뒤덮인 표피는 불쾌할 정도로 끈적거리고 차가웠다. "캬아아앗!" 발악하며 휴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마물은 양손의 손톱 을 검(劍)처럼 길게 빼내어 휴즈에게 휘둘렀다. 예리하게 날 이 선 손톱은 트윈 윙 상태의 휴즈에게도 위협적이었는지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그것을 피했다. 뻐억! 한바퀴 크게 선회하며 손톱을 피해 마물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휴즈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불쾌한 감촉도 감 촉이었지만 전력을 다한 권격에도 마물의 표피가 뚫리지 않 은 것이다. 겨우 하급천사인 주제에 트윈 윙Twin wing의 공격에도 끄떡없다니. '어쨌거나 실험은 성공인가.' 외갑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는지 마 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갸아악!" '화만 돋구었군.' 휴즈의 생각대로 마물은 분노하고 있었다. 슬슬 끝마치리 라 생각한 휴즈는 한 쌍의 날개를 더 소환했다. 검은 입자 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날개가 솟아났다. 어떻게 보면 망토처럼 보이는 묵 빛의 여섯 날개는 휴즈를 감싼 채 잔잔 한 리듬으로 펄럭거렸다. '혼의 뒤섞임이라… 처음보다는 많이 망가졌지만 어쨌든 성공이군.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서 망가진 거라면… 아마 성공할 거야.' 도박이었다. 앞으로 하려는 일은 전례가 단 한번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역천(逆天)의 행위. 네피림을 만드는 일은 이에 비하면 차라리 양반에 속했다.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에 그 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검은 장발, 붉은 눈, 스키엘 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의 웃음은 달빛을 받아 매혹적이었다. "죽어라." 부아아앙! 휴즈의 펼쳐진 다섯 손가락 사이로 검은 색의 원이 그려졌 다. [죽음의 그림자Death Shadow] 순차적으로 역 오망성이 그려지고 악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새겨졌다. 마물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느꼈으나, 움직 이기에는 이미 늦었다. 아니 도망가더라도 상관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라도 쫓아갈 테니까. 휴즈는 완성된 마법진을 가볍 게 두드렸다. 파아아앗! 다섯 가닥의 검은 기운이 마법진에서 폭사되었다. 당황한 마물은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하려 했지만 흑기(黑氣)의 속도 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퍼퍼퍼퍼펑! 다섯 겹의 기운이 마 물을 다섯 방향에서 가격했다. 그 어느 곳으로도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 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끄…르륵." 외갑의 일부가 벗겨져 속살이 드러났다. 마물은 신음소리 를 냈지만, 휴즈는 단번에 죽지 않은 마물의 생명력에 감탄 했다. "재…생?"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터져 나간 외갑이 다시 돋아났고, 뒤틀린 팔뚝이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관통된 복부의 상처 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재생됐다. 흡혼을 거친 마물은 래픽스 샤딘에 준하는 힘에도 살아남는 것이다. 금세 원래 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물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재생에 따르는 고통이 상상이상이었던 듯 싶다. 마물은 휴 즈를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태도로 손톱을 세웠다. 손가락들 이 가지런히 모이자 마물의 팔부터 손톱까지 하나로 합쳐져 보랏빛의 예리한 검신(劍身)이 되었다. 휴즈는 혀를 차더니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귀찮은 녀석. 나와라, <베리노엘>" 촤라라락. 하얀색과 짙푸른색의 입자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휴즈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장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타락천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하얀색 의 얇은 검신, 그리고 검신의 중앙에는 푸른 선이 일직선으 로 그어져 있었다. 검이 부르르 진동하며 말했다. 딱딱하고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적은?> 베리노엘, 천상의 병기였던 그것은 마왕의 신물이기도 했 다. 혼돈의 주인 테르카시 사마엘 다루카가 카마세이에서 신의 저주를 받아 마계로 떨어지면서도 부여잡고 있던 것이 다. 다루기 힘은 고고한 자존심과 악마 이상으로 잔혹한 혼 이 담겨 있는 베리노엘, 천상의 것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모 든 마왕들이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아니, 사실은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다른 신물들과 마찬가 지로 베리노엘은 주인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초대 의 마왕 이외의 주인을 거부했던 그것은 이미 잊혀진 신물 이기도 했다. 그러나 휴즈는 베리노엘을 자신의 것으로 만 들고 말았다. "저 마물을 죽여라." 어느새 마물은 휴즈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검으로 변한 한 쪽 팔이 휘둘러졌다. 부아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고 베리노엘은 유려하게 움직여 마물의 팔을 막아냈다. 충돌음은 없었다. 부딪치는 순간에 이미 경질 화된 마물의 팔은 잘려나간 것이다. <디바인 블레이드> 하얀 검날에 성스러운 황금빛이 덧씌워졌다. 자신에게 해 가 되지는 않았지만 성력(聖力)을 눈앞에 둔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진 휴즈는 인상을 썼다. 타락천사가 천계의 빛 을 이용한다는 것부터가 모순이었지만 이 검은 그것을 가능 케 했다. 베리노엘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몸은 멋대로 움직 이고 있었다. 물론 제어하기를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 만, 전투를 검(劍)이 원하고 있었기에 내버려두었다. "크에엑!" 마물이 잘려진 단면에서 솟구치는 피를 각질로 막아버리고 는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마물을 베리노엘이 눈부신 황금빛을 흩뿌리며 허리를 베어버렸다. 잘려진 단면은 성력 때문에 지글지글 타들어 갔다.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 는지, 베리노엘은 더욱 빠른 움직임으로 청백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파라라락! 한순간에 마물은 한줌의 핏물로 화했다. <끝났다> "흥." 허공에 내던지듯 베리노엘을 소환 해제한 휴즈는 코웃음을 쳤다. 어렵사리 손에 넣은 힘, 베리노엘은 상상이상으로 강 했지만 다루기가 너무 어려웠다. 덕택에 자신의 힘도 엄청 나게 상승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 때의 스키엘을 이길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초대 마왕 이후에 처음 얻는 신물의 힘이었지만 바뮤즈가 가져간 메르니츠가 없는 이상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초대 마왕에 가까운 힘을 타고난 스키엘…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스키 엘은 모든 것을 잃었고, 자신은 가졌으니까. 게다가 앞으 로… 그 일만 성공한다면 더 큰 것을 얻으리라. 휴즈는 주 먹을 꽉 쥐었다. "이제 이 결계도 필요 없겠군." 문득 그는 이 들어올 수는 있으되 나갈 수는 없는 결계를 떠올리고는 낮게 웃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하급천사들 이 피에 취한 마물이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들어왔으리 라. 그러나 나갈 수는 없었을 테니, 모두 먹이가 되었을 것 이다. 휴즈는 손을 몇 차례 떨쳐서 결계의 기운을 지워버렸 다. 거대한 실험장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 정말로 모든 것이 가까워져 있었다. * * 아무리 날이 따스해지는 봄이라지만 새벽은 추웠다. 시윤 이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났고, 서늘한 새벽 공기를 온몸으 로 받으며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다. 완전히 메말라 있던 목에 물이 들어가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밤새 악몽을 꾸 면서 식은땀을 흘려서 그런지 굉장히 추웠고, 목이 말랐었 다. "악몽이라니… 후후." 언제부터 수연이 나오는 꿈이 악몽이 되었단 말인가. 시윤 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이 하루도 빠 지지 않고 아주 느린 모습으로 보였다. 꿈은 그런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하는… 그 래서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기 쁨으로 다가오지 못했고, 그녀는 더 이상 즐거운 추억이 아 니었다. 오로지 슬픔으로 점철된 아픈 기억일 뿐……. 차라 리 죽고 싶다는 말이 이토록 애절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이미 전생에 죽음을 경험한 시윤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죽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처구 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짓이야."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남아있는데 바 보 같이 도망만 가서 뭘 한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 시윤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돌아 와 있었다. 낮고 갈라져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아닌 약간은 잠긴 듯한 미성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이질적으로 바꾸는 것은 일종의 자기 암시였다. 기쁘게 살아갈 생각은 없다고. 복수를 하겠다고. "후후." 얼굴도 바뀌고 인생도 바뀌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보고 예전의 시윤을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차라리 그 때가 그 립다. 조금 힘들었지만 수연과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그 때가. 단 하나 남은 그녀의 물건인 반지를 눈 바로 앞에 대고 보았다. 눈 색깔과 비슷한 루비반지. '보면 몰라? 커플링이잖아. 직접 손가락에 끼워 주는 게 좋 을 거야. 음, 내 기분에는 말야.' 어찌나 기쁘던지. 물건의 가치를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에 게서 받는 물건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 때…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잃어버리고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녀가 더욱 절실해졌다. "크리스는 잘 지낼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통신상의 카운셀러 크리스. 이제는 몇 안 되는 친구조차 잊는 건가. 어차피 이제는 PC로 크리 스와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차라리 연락을 끊는 게 낫겠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시윤은 문득 백호를 떠올렸 다. 어제 저녁식사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노인과 백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백호의 방문을 두드려본 시윤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놀라고 말았 다. '설마 돌아갔나.' 분명히 억지로 때려 눕혀서라도 데려간다고 했다. 백호가 졌다면 그대로 산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돼!'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잃은 지금, 단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싫다. 시윤은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는 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 * 새벽녘의 대기는 아주 고요하다. 잠들어 있는 이들을 깨울 까 두려워 바람조차 살며시 불어간다. 가늘게 스며드는 바 람을 느낀다. 뜨겁게 달구어졌던 몸을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식혀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생각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 렸다. "하아아. 하아." 백호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넝 마로 변한 웃옷에 하얗게 소금기가 남았다. 백호가 비참한 모습인 반면에 구 노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유 만 만한 자세 그대로였다. 주위는 온통 난장판, 땅이 서너 번은 헤집어졌고 조금 크다 싶은 바위는 여지없이 박살났다. "…이제 그만 끝내야겠구나." 모든 암흑기(暗黑氣)를 소진한 백호는 메르니츠마저 해제 했다. 너무나 피곤해서 선 채로 잠들고 싶다. 아니,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양팔을 늘어뜨리고 방어자세 를 풀었다.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 았지만 이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다. -선가태극권(仙家太極拳) 월영(月影)! 노인은 은은한 서기가 서린 손으로 커다란 곡선을 그렸다. 하얗고, 하얀 색이 어두운 음영을 만들며 허공에 긴 궤적을 남겼다.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녘에나 느낄 수 있는 달의 그림자… 그것은 백호의 가슴을 향해 이어졌다.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미해서 잠들 어 버릴 정도로 탈진했다. 공격이 날아오건 말건 백호는 눈 을 감고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자포자기…였지만 그 것은 오히려 득이 되었다. '저건 뭐지?' 눈을 뜨고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는 반면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도 있다. 백호는 감겨진 눈 속, 그 어둠에서 백색 호선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 리를 한 걸음 뒤로 빼내었고, 허리를 틀어 자연스럽게 그 빛을 피해냈다. '재미있는데?' 그 빛은 목표를 잃지 않겠다는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다시 한번 다가왔다. 더 빠른 속도로, 더 피하기 어려운 방 향으로. 빛은 달처럼 은은했고, 스친 부분이 시릴 정도로 차 가웠다. 타탓. 탓. 탓. 백호는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달빛 과 함께 춤을 췄다. 피하지 않고, 그에 어울려 춤을 추었다. 빛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다가왔지만 결국 주위를 맴돌 뿐, 닿지는 못 했다. '춤…인가.' 서있기도 힘든데 춤을 추고 있다니 우스웠다. 백호는 눈을 감은 채로, 환상처럼 보이는 흰 빛과 어울려 춤을 추었다. 인위적인 힘을 버리고 흐름에 몸을 맡기자, 나아갈 곳을 절 로 알게 되었다. '재미있어. 정말.' 즐겁다. 이렇듯 흥겹게 춤을 춘 적이 있었나? 백호는 스스 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흰 빛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는 약올리 듯 빛이 가까이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몸을 틀며 그것을 피해냈다. '이 기운은…….' 몸 속 깊은 곳에서 따스한 기운이 솟아났다. 이제는 춤사 위를 끝내야 할 때. 신명나게 놀았으니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이다. 춤을 추면 출수록 백호의 의식은 점점 자제력을 잃 어갔고,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본능만으로 움직이기 시작 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따스한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 한바퀴 크게 회전한 백호는 양팔을 가슴 앞쪽으로 펼쳐 커 다란 원을 그렸다. 그의 움직임에 휘말렸던 흰 빛은 바로 그 앞에 있었다. 사지의 끝부터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 몸의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것은 다시 양팔을 타고 손바닥으로 밀려갔다. 스아아아아.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빛이 감긴 백호의 눈에도 느껴졌다. "느꼈구나. 자연의 힘을……." 쿠웅.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백호의 몸이 흙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다. 자연의 혼과 잠시나마 합일했던 그는 이제 남은 체력이 없는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여태 버틴 것만 해도 용하다. 구 노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 다. "보았는가?" "예, 봤습니다. …이런 엄청난 힘이 어디서." 엄청나다. 그 이외의 무슨 말로 더 표현할 수 있을까. 구 노인이 황급히 물러난 자리에는, 백호가 단순히 양팔로 기 묘한 자세를 취해 만든 빛 덩어리 때문에 흙이 깊게 패여 구덩이가 생길 지경이었다. "후후, 앞으로 이 녀석이 잊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건 어 렵겠구나. 시윤이라고 했나?" "예? 예, 제 이름 맞습니다." "저 아이를 부탁하네. 잘 돌봐주게." 돌봐달라는 말에 시윤은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십 대 중반인 다 큰 남자를 십대의 소년인 자신이 어떻게 돌보 란 말인가. 노인은 백호의 마지막 공격 때문에 풀어진 옷의 앞섶을 여미며 말했다. "정(情)을 원하는 녀석이니, 산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는 다고 했겠지. 자네들이 좋은 게야." "아, 예… 그럼 그 말씀은?" "그래, 억지로 산에 데려가는 건 그만둬야겠어. 다만 언제 든지 오라고 전해주게나. 그럼 난 가보겠네." 시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와 헤어지기 싫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더욱 기뻤다.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줍고 돌아서던 노인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시윤을 보고 말했다. "그 어둠과 빛이 섞인… 존재 말일세." "…나이린 말씀이시군요." "혹시 알고 있나? 아무리 길어도 앞으로 일년 이상 살지 못할 게야." "……?" "어둠과 빛이란 서로를 거부하지. 그런 것을 인간의 육체 를 매개체로 한 곳에 모아두었으니, 자연 견디지 못하고 망 가질 수밖에……. 지금 이 일년이라는 것도 최대한의 수명 일세. 격렬하게 힘을 쓰거나 한다면 더욱 빨리 육체의 붕괴 가 이어질 것이야. 몰랐나?" 도리도리. 시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일년…인가요? 고칠 방법은 없습니까?" "그래, 아마도 그렇다는 거야. 고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네. 처음부터 만들어지기를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아무도 수 명을 늘리진 못해." 일년이라니.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피를 토해냈던 것도 이제야 설명이 되었다. 시윤은 그녀의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를 떠올리고 목이 메여오는 것을 느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저 참견 많은 늙은이라고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을. 그럼 정말로 가보겠네. 잘 있게나." 노인은 바람을 타고 다음순간 사라져버렸다. "겨우… 일년?" 시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독하다. 모든 것이 …하나씩 부서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부서지고 있 다. * * 정말 오랫동안 별러왔던 프로젝트를 끝낸 이정혁은 오랜만 에 회사 외부에 구해놓은 자신의 숙소에서 푹 쉬었다. 아무 리 어떤 곳에서 잠들어도 상관없는 몸이라지만 어두컴컴하 고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회사의 비밀 연구실에서 몇 달을 보낸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깔끔하 게 이발을 하고 편의점에서 도시락 몇 개를 샀다. 어차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기에 주기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필 요는 없었지만, 인간의 습성이 몸에 밴 그는 꾸준히 식사를 하는 편이었다. "소장 님, 일찍 출근하시네요?" 프로젝트 진행 때문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던 이정혁 연구 소장이 나타나자 회사 사원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대외적으 로나 대내적으로나 태성의 연구소는 회사 외부에 따로 지어 져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지만 정작 소장인 이정혁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로지 회사 지하에 존재하는 연구소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정혁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했다. 지적인 이미지의 이 정혁은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물론 그가 천 년 이상을 살 아온 마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 가능한 얘기지 만.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반대편에 늘어서 있는 것과는 확 연히 구분되는 커다란 문을 가진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특 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써 붙여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버튼도 없고 달랑 카드 투입구 하나만 있는 그것은 일반인 의 접근조차 막겠다는 뜻을 보이는 것 같았다. "회장님은 계십니까?" 이것은 회장실 직통 승강기였고 따라서 문 옆에는 안내원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 다. "예, 회장님은 자리에 계십니다." 회장의 부재 따위야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가야할 곳은 회장실이 아니라 지하 연구실이니까. 필경 저 안내하는 여자는 이 승강기에 들어가 본적도 없을 것이고, 회장실로만 통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정혁은 카드를 꺼내 투입구에 꽂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큼직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가만… 결과 보고를 해야했나.'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서 내부 투입구에 꽂으려던 이정혁 은 두 장의 카드 모두를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가만히 승강 기가 상승하기를 기다렸다. * *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미끄러지듯 열 리자 널찍한 회장실의 내부가 드러났다. 이정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급히 옷을 추스르는 젊은 여사원과 이마에 굵직 한 땀을 흘리는 유 회장의 모습, 그리고 민감한 후각에 느 껴지는 이 역겨운 냄새. "험험. 자, 자네 왔나?" "제가 시간을 잘못 택한 것 같습니다. 오후에 다시 올까 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돼지같이 살찐 몸은 딸 같은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을 것이다. 유 회장은 입맛을 다시며 여자를 바라보더니 어서 사라지라고 손짓했다. "아니, 됐네. 안 그래도 그 동안의 성과가 궁금하던 차였으 니까. 자리에 앉게나." 이정혁은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언뜻 스쳐지나가며 보인 그녀의 얼굴은 갓 입사한 새내기의 것이 었다. 역시 종종 들려오던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그 중 몇을 추려서 부른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타락천사인 주 제에 성적 욕구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는 이정혁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회장실을 찾을 때마다 인간의 정 액 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건… 참기 힘든 일이다.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견디기 힘들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예정대로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그 분'께서는 매우 흡족 해 하셨고, 보상은 확실히 해드리겠다는 전언을 남기셨습니 다." 그런 전언 따위 없었다. 그저 아진이 하지 않은 말을 지어 낸 것뿐이다. "오오, 마음에 들어 하시던가." 살이 접혀서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턱이 늘어진 유 회 장은 헤벌쭉하게 웃었다. 악마는 계약을 무척 잘 지킨다. 실 제로 그들은 몇몇 인간을 죽여줌으로써 태성의 주가를 높여 주지 않았는가. 비록 지금은 아명에게 밀리고 있었지만 이 들이 약속한 대가를 받게 된다면 그 정도 기업 따위야 문제 도 아니었다. '네게 이 나라를 주겠다.' '그 분'이 보여준 힘은 맹목적인 신뢰를 만들어 내기에 충 분했다. 한바탕 정사를 하고 나서 푹 자고 있던 그를 끌어 내어 하늘을 날았고, 유 회장 자신이 소유한 사유지를 손짓 한번으로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숲이 사라지고 언덕이 날 아가는 모습… 그는 표정하나 안 바꾸고 그런 일을 해냈다. 악마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대가는 이 나라로 하지.' 그리고 이제 결과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 것이다. 욕망에 젖어드는 유 회장의 눈을 본 이정혁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내려가 보겠습니다." "흠. 식전이면 아침이나 함께 하겠나?" 유 회장은 아진의 신뢰를 받고 있는 -유 회장의 착각이었 다- 이정혁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리고 이정혁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아뇨. 밑에서 먹겠습니다." 이런 곳에서 한시도 더 있긴 싫었다. 분명 건강식이다 뭐 다 하면서 돈으로 처바른 요리들이 나올 터였지만… 차라리 아진과 냉동 도시락을 까먹는 게 나으리라. 쌀쌀맞게 대답 한 그는 카드를 꺼내서 승강기에 꽂았다. * * "…뭐?" 레보라크는 도시락 꾸러미를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고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있는 카엘, 무온, 토돌에게 반문했 다. "지금 뭐라고 했지?" "수장은 지-옴-카바린의 리더 메사트의 방에서 함께 자고 있어. 라고 말했지." 서열 4위의 무온 쎄 루나르가 대답했다. 토돌과 함께 기형 으로 취급받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온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활의 줄을 퉁기며, 갈색의 눈동 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레보라크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건 그런 용도로 만든 게 아니라구." 방금 전에도 유 회장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그는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생식 기능이 제거되었 다지만 기본적으로 네피림은 인간의 여성을 본 딴 것이다. '그런 용도'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카엘은 이제는 흐릿해 질 정도로 오래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메사트라는 이름은… 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줬던 중급 천 사의 것이었지.' "어쨌든 슬슬 깨울 때가 된 것 같으니 내가 갔다오지." 천 년도 더 전에. 아니,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있었던 일 이다. 같은 지역 태생으로서, 아진과 절친한 친구였던 카엘 은 아직도 그의 절규를, 그의 눈물을 기억했다. 타락천사라 고 해서 감정이 없거나 파괴, 욕망, 살육만을 추구한다고 생 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우리의 성인식은 피의 바다였지.' 쥬엘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백이면 백, 한 쌍의 날개만을 갖는 하급 천사를 뜻한다. 그들 중에도 힘의 급수가 차이가 나서 강한 자들끼리 짝을 지어 자식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부모의 힘은 그대로 자식에게 반영되어 자식은 한층 강한 혈통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수십 대가 반복되어 강한 혈통 만이 짝을 짓는다면 그 자식은 날개가 하나씩 추가되는 것 이다. …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성공하기까지 엄청난 세월이 걸린다. 날개가 두 쌍 이상인 타락천사는 마계에도 이백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래픽스 샤딘의 수장인 아진은 쥬엘러에서 태어났다. 분명 이건 기적이었다. "흥!" 기적 같지도 않은 기적. 쥬엘러에서 태어난 덕분에 성적 노리개가 되어야 했던 아진. 그렇게 멸시받던 그에게, 첩의 자식이라고 무시당하던 카엘은 동질감을 느꼈다. 성인식이 이루어지던 날, 얼마나 통쾌했던가. 단 번에 트윈 윙 Twin-wing으로 탈바꿈한 아진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 를 끼쳤던 이들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분명 개중에는 래픽 스 샤딘의 레베카에 속해있는 자도 있었으나, 아진은 중상 을 입으면서까지 그들의 멱을 따고 피를 받아 마셨다. -이것은 복수다! 나 아뮤릿은 자격을 얻어 지나이온 가 (家)의 이름을 계승할 것이니, 복수를 원하는 자는 오라! 그 날부터 아진은 변했다. 자신을 단순히 노예 취급하던 상급 천사들을 몰살시켰고, 몰락해버린 지나이온의 이름을 이었다. 메사트 지나이온… 그녀의 뜻이었을까. 카엘이 열려 고 한 문을 반대편에서 누군가 먼저 열어버렸다. "난 일어났어. 웬일로 다들 모여 있는 거지?" 아진이 방에 들어서자 메사트가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그 림자처럼. 카엘은 그런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우하핫. 나도 누나가 생겼다구! 그것도 트윈 윙! 정말 멋 지지 않아? 나 같은 천한 태생을 동생으로 삼아주다니! -…나도 서자이긴 하지만 래픽스 샤딘의 아들이야. 어쨌 든. 어떻게 생겼는데? 이름은? -무지무지 이쁘게 생겼어. 눈이 호수같이 깊고 수정처럼 예쁘고, 날개는 어찌나 곱고 탐스럽던지! 밤하늘을 담은 것 처럼 까맣게 빛나는데. -중증이군. 그리고 얼마 후에 카엘은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온몸 의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부서진 시체에 불과했지만……. 그래, 확실히 그녀와 닮았다. 커다란 눈이… 곱고 단정한 용모가 닮았다. 하지만… 그건 위험해. 불안정한 아진을 자 극하는 건 좋지 않다. 이렇게 오랫동안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얘기. '없애버릴까.' 카엘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은 아진이 알아서 할 테니까. "인간계 구경도 슬슬 지겨워지는 판에, 레보라크가 할 일 이 있다고 해서 왔지." 토돌이 기지개를 키며 말했다. 무온과 토돌은 오랜만에 돌 아온 것이다. 기껏 인간계에 와서 심심하다며 둘은 죽이 잘 맞아 관광차 이리저리 돌아다닌 지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 다. 역시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은 크게 빗나가지 않는 진리 다. "일이라니?" 치렁치렁한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올리던 아진이 반문했 다. 지금까지 아무 소리 없다가 갑자기 웬 일이란 말인가. 레보라크는 안경을 고쳐 쓰고 책상 서랍을 열어 얇은 서류 철을 꺼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그들을, 스키엘을 끌어내야 하지 않겠어? 다들 몸도 풀 겸 갔다 오라구." 서류를 받아든 아진은 프린트 된 것들을 넘겨보았다. 몇 번 훑어본 그는 피식 웃으며 서류철을 카엘에게 넘겼다. "네 놈도 역시 악마로군." "그거 칭찬이지?" 뻔뻔하군. 잔인한 미소를 띄우는 레보라크를 본 아진은 섬 세한 손길로 메사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서대로 해야하나?" "물론, 여섯시간마다. 그 순서대로 해야해." 꼼꼼히 서류를 모두 읽어낸 카엘이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 을 지었다. '설마… "이 정도로 크게 일을 벌인다면… 카마세이는 어쩌고?" "어차피 카마세이가 열릴 날은 멀지 않았어. 게다가 하루 라로 빨리 스키엘을 처리해야 한다고 왕께서 말씀하셨다." 왕은 어째서 스키엘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이미 힘 을 잃어버린 패배자에 지나지 않거늘. 카엘은 궁금했다. * * 목이 말랐다. 잠든 백호를 침대에 눕히고 타 들어가는 속 을 달래기 위해 시윤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훑고 내려갔다. "후우, 나 때문일까." 불행한 일은 모두 '나' 때문이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 은 모두 불행해져버렸다. 새벽의 끝자락. 감상적으로 변할수 록 손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이건 아냐. 정말 이건 아니라구. "엄마, 아빠, …수연, 백호 형, 모두가 나 때문일까." 허무하게 죽어갔다. 아니면 행복을 모두 빼앗겼다. 어쩌면 루이시블조차도 불행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나이린의 남아 있는 수명은 1년, 그것조차 자신의 탓이라고 여겨졌다. 이게 과연 피해망상일까. 그럴까? 시윤은 착잡한 심정으로 맥주 를 비워나갔다. "스키엘……." 떠나간 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또한… 자신의 존재의 지를 포기하고 시윤을 위해서 사라졌다. 같은 영혼을 소유 했던 그조차도… 이제는 없다. "복수가 옳은 걸까. 그렇게 해야 맞는 거니?" 시윤은 또 다른 자신을 불렀다. 너무나 순수했던 남자, 한 때는 타락천사의 제왕이었으며 사랑하는 이 때문에 하급의 천사로 변했던 자… 시윤은 그를 도저히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스키엘은 순수한 왕이었다. 힘이 있든 없든, 어떠한 모습이든… 심지어 영혼의 일부분일 때조차도 그는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않고 당당한 왕의 모습이었다. "내게 주어진 짐은 너무나도 크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 로……."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 캔. 시윤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로 손에 힘을 주어 캔을 구겨버렸다. "그들은 모두 착각하고 있어. 우습지 않니? 난 네가 아냐." 아무리 핏빛의 눈동자를 하고 있어도, 천사에 가까운 몸을 지니고 있어도. 스키엘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난 네가 아 냐. 시윤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런 생각들, 이런 상 념들, 너무나도 지겨웠다. 거울을 보지 않았던 게 언제부터 인가.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 다. "난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이젠 힘들구 나." 어쩌면 가장 어려운 꿈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시윤의 혼잣말이 중단되자 거실에는 묘한 정 적이 흘렀다. 그는 앉아있던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루이시블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이린이 '주인'이라고 부 르자 미칠 정도로 괴로웠다. 그 둘은 모두 '시윤'이라고 이 름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스키엘의 모습을 찾는 것이었 다. 한쪽은 왕의 모습을, 다른 한쪽은 왕의 피를. 정작 시윤 을 찾는 이는 없다. "난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왜 모르는 걸까."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 걸 따져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지금 한 걸음이라도 물러선다면 또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걸음을 내딛기는 너 무나 힘들다.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시윤은 구겨진 캔 을 테이블에 던져놓고 눈을 감았다. 심적으로 지쳐있던 그 는 금세 잠이 들었다. * *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 되는 얼굴이 떠오른다. 하얀 얼 굴에 발그레하게 홍조를 띄운 그녀, 귀엽게 웃음 지으며 반 지를 끼워주던 그녀……. '날 잊지마.' Forget-me-not 물망초. 그래, 잊지 않았어. 이렇게 난 널 기억하고 있잖아? 그러니 까 돌아오면 안되겠니.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웃음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사라지는 듯 하더니,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웃음은 없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다행이야. 널 볼 수 있어서… 시윤아.' 가지마! '내가 살아온 동안… 널 만났을 때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 었어.'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내 생에 단 하나의 행운이 있다면 널 꼽겠어. 그러니 제발 곁에 있어 줘. 어디에도 가지마. 난 너만 있으면 돼. 돌연, 그것은 변했다. '거짓말!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넌 사실 살고싶었던 거 지?' 왜 화를 내? 아냐, 난 지금도 널 사랑해. 네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이라도 기꺼이 바치겠어. '믿지 않아. 넌 마지막 순간에도 날 살릴 수 있었잖아. 그 럴 힘이 있었잖아? 너 때문에 난 죽었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그녀의 마음은 어둠을 울릴 정도로 강렬하게 퍼졌다. '널 저주해. 왜 네가 아닌 내가 죽어야 했지? 넌 왜 아직도 뻔뻔스럽게 살아있는 거지? 어째서? 난… 난 더 살고 싶었 는데… 아직 더 살고 싶었…' 시윤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수연의 흐느낌, 이게 꿈 이라는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도저히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 찢 어지는 수연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사랑하는 이의 저주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왔다. 벌써 몇 번째 꾸 는 악몽인지 시윤은 기억조차 할 수가 없었다. 14. 그렇게 꿈은 부서져 가고… 파멸의 날이 올지니……. 네 대의 은색 세단이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한 아파트 단지 사이로 들어섰다. 부유층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아니었 기에 은색 세단은 그 존재만으로 이질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중 한 대의 차가 까맣게 선팅된 유리창을 아주 조금만 열 어 밖을 살폈다. "도착했습니다." 운전석의 남자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전직이 의심될 정도로 덩치가 좋고 인상이 험상궂었다. 선글라스만 벗기면 조직 폭력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는 한 아파트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조수석과 뒷자리의 문을 차례로 공손히 열었다. 상황은 다른 차들도 마찬가지, 은색 세단에서 내린 덩치 좋은 운전사들이 큰형님(…그러니 까 그쪽 종사자)을 모시듯 차에 탄 사람들을 수행하고 있었 다. "수고했다." 청량한 목소리가 공기를 적시듯 시원하게 대기에 퍼졌다. 세단에서 내린 카엘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움직이지 않 는 덩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유 회장이 신경 써서 붙여준 운전기사는 하나같이 질이 안 좋은 녀석들뿐이었다. 게다가 은연중에 자신을 무시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즉, 가소롭다. "흐응, 여기도 오랜만이지? 어때, 메사트. 첫 외출은?" 차안의 공기가 답답했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아진이 말 했다. 오랜만에 즐거운 웃음이 돌아온 그는 콧소리를 내며 들떠있었다. 입술을 핥으며 색정어린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 은 평상시 기분 좋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메사트는 자신 의 뒤로 모여있는 다섯 명의 네피림을 둘러보고는 대답했 다. "잘 모르겠습니다." 담담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메사트를 향해 아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 고는 덩치들을 향해서 손을 휘저었다. "가라." 침묵. 덩치들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자세 그대로 서로 눈 빛을 교환했다. '뭔 소리야?' "차 끌고 돌아가." 아진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개를 쫓듯 손짓했다. "회장님께서 손님들을 돌아오는 길까지 안내하라고 하셨 소." 자존심이 상한 덩치 중 한 명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목소리 로 말했다. 웬만한 손님이 아니고서야 자신들을 호출해서 운전사로 붙여주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건 완전히 개 취급이 아닌가.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가." 고의적인 도발이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어깨에 힘 이 지나치게 들어간 덩치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역시 그들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곰 같은 인상의 덩치 가 공손하지만 위압적인 어투로 대꾸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용건 처리하고 오시 죠." 아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라고 했다." 악마가 기회를 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걸 걷어차는 건 바보짓이고 덩치들은 역시 바보였다. 그것도 두 번이나 바 보짓을 해버렸으니. "회장님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딱. 하품을 하던 아진이 손가락을 퉁기자 그림자처럼 곁에 서있던 메사트가 자신이 데리고 온 네피림에게 명했다. 차 가운 일별, 그것은 죽음의 선고였다. "죽여." 회색이 일렁였다. 순식간에 덩치들에게 접근한 네 명의 네 피림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수도를 세워 그들의 가슴팍 에 박아 넣었다. 생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져, 길게 자란 잿 빛 머리칼 위로 새빨간 선혈이 튀어 올랐다. "커헉."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맥이 끊긴 덩치 들의 심장 부위에는 네피림들이 내지른 손이 팔뚝까지 꽂혀 있었다. 단 한순간에 네 명의 숨이 끊어졌다. 이제 '축제'를 시작할 테니,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 "저 쪽으로." 아진이 눈짓한 곳은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건물이었다. 네 명의 네피림은 덩치들의 심장을 뽑아내어 터뜨렸다. 커 다랗게 뚫린 가슴에는 엄청난 핏물이 샘솟았고, 피를 온몸 에 바르고 있는 여자들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진 은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던져라. 한꺼번에 처리해야 편하잖아?" 카엘은 말없이 그런 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를 향한 열망, 욕구는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라면 당연한 것이 었기에 그를 탓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예전의 아진과 다르다는 사실은… 어쩌지.' 그는 잘 인지하고 있었다. 성년기를 같이 치를 정도로 친 한 사이였으며, 지금까지 오랜 기간을 함께 했으니 아진의 변화 정도는 쉽게 캐치할 수 있었다. 아진을 향했던 시선이 뒤에 있는 메사트를 향했다. '역시,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카엘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낱 네피림 때문에 수 천년 동안, 유지되던 아진의 아슬아슬한 평정심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그녀를 닮은 네피림은, 아진의 명령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전했다. "던져." 휙! 네피림들은 미련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시체를 아파트를 향 해 던졌다. 넷 다 백 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장정이었지만, 마치 조약돌을 던진 듯 가볍게 날아갔다. 그 중 세 구는 엄 청난 속도로 벽에 부딪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으깨져버렸 고, 나머지 한 구는 가정집의 유리창을 깨부수고 들어갔다. "끼아아아아악!" 공교롭게도 그 집에는 사람이 있었는지 고음의 찢어지는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은 그 비명을 음악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즐겼다. 공포에 찬 비명은 감미 로운 음악소리요, 두려움에 떠는 인간은 그 자체로 희극이 었다. "메사트. 저 건물 하나만 차원결계로 완전히 감싸." "차원결계입니까?" 메사트는 재차 확인했다. 아진이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피 에 젖어 있는 네피림들을 불러 모았다. 여섯 명의 지-옴- 카바린, 조금 벅차기는 하지만 차원결계를 생성하는데 부족 함이 없었다. "왜 차원결계지? 그 정도로 강한 결계가 필요할 리가 없잖 아." 네피림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힘을 끌어올려 날개를 뽑아내 는 것을 본 카엘은, 의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힘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멀더 라도 곧 알게 되겠지." "흠?" "그리고 우리들에게 오겠지. 계속해서 희생이 늘어날 테니, 도망가고 싶어도 이제는 갈 수 없어." [둘 모두를 가졌고, 둘 모두에게 거부당한 우리 네피림의 이름으로 명한다. 공간이여, 떨어져라!] 한 쌍의 날개만으론 힘이 부쳤는지 네피림들은 각각 넉 장 의 날개를 꺼내 전신에서 천사의 기운과 악마의 암흑기(暗 黑氣)를 흩뿌리며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들은 정확한 거 리를 유지한 채 공명을 통해서 증폭시킨 힘을 메사트에게 주입시켰다. 힘의 중심에 있던 그녀의 두 손이 아파트를 향 해 부드럽게 펼쳐졌다. [차원결계] 쿠구궁! 아파트를 중심으로 아진이 있는 곳까지 공간에 균 열이 생겼다. 밖과 안의 구분, 그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차원 을 갈라놓는 결계였다. 이제는 그 무엇도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없다. 카엘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군." 차원결계를 한번 펼치고 나면 탈진해버리고 마는 카엘은 놀랐다. 게다가 이런 대규모라니… 아무리 공명을 통한 힘 이지만 이건 상상보다 더 강하다. 카마세이 십 천을 상대하 기 위한 병기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실 감하는 카엘이었다. "이게 시작이지." 짧게 끊어서 말한 아진의 얼굴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죽음을 바라는 사신의 미소가 언제까지고 맺혀있을 것 같았 다. 그의 새하얀 손이 아파트를 향했다. 마력의 언어가 공기 를 진동시켰다. [지옥의 불꽃이여!] 루이시블을 상대할 때처럼 절제할 필요가 없었다. 지옥의 불꽃이 아진의 부름을 받고 소환되었다. -푸화아아아악! 검은색이 섞인 시뻘건 불꽃이 아진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감쌌다. 그 주위의 아스팔트가 초고열의 불꽃을 견디지 못 하고 지글지글 녹고 있었다. [가라, 죽음이여] 전신에 흐르던 불꽃이 펼쳐진 아진의 손끝으로 모여들었 다. 뱀이 꼬리를 똬리를 틀 듯 길다란 화염은 가닥가닥 모 여들어 둥그런 구체로 뭉쳐졌다. "타버려." 아진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울리자, 사람의 키만큼이나 커 진 지옥의 불꽃이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고깃덩이가 되어 버린 시체가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보였다. 빛. 침묵. 잠시 빛이 번쩍였고, 곧 고막을 찢는 굉음이 지축을 뒤흔 들었다. -쿠와와아아앙! * * 은은하게 향이 우러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마야가 말했 다. "좋군요. 가슴속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입니다." "절에서 직접 재배한 것이죠. 작년에 따서 말려뒀는데 향 이 생각보다 썩 좋아 귀한 손님께만 대접하고 있습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스님은 자신이 재배한 차가 칭찬 받 자 기분이 좋아 히죽 웃어버렸다. 마야는 말없이 마주 웃으 며 뜨거운 찻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정말로 향이 좋고 뒷맛 이 깨끗하다. 공치사가 아니었다. "저 같은 불청객이 무슨… 과분합니다." 머리칼은 없으나 수염은 하얗게 세어 있었다. 초로의 나이 에 접어든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시지요." 역시 절은 절이었다. 어렴풋이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의 칠이 벗겨지고, 불상의 색이 바랬다. 절도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많이 낡았지요? 하지만 소승이 어렸을 때에는 그래도 가 장 좋다고 생각하던 곳이죠. 이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로 시간이 지나니, 과연 불상도 색을 잃어버립디다." 이렇게 될 때까지 수리를 안 하다니, 마야는 시종일관 웃 고 있는 노승에게 한숨을 지어 보였다. "조금 증축해보는 건 어떨까요." "허헛, 절에 돈이 없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무너져 내릴 것 도 아닌데 무슨 걱정입니까." 마야는 두말 않고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서 노승의 앞 에 내려놓았다. 속세에 찌들지 않은 노승은 보나마나 돈 모 으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터였고, 절 증축은커녕 수리할 돈 도 없을 것이다. "작년, 아니 재작년이군요. 소승은 믿지 못할 소문을 들었 습니다. 정말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요."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받아들지도 물리치지도 않은 채, 노 승은 뜬금없이 과거의 얘기를 꺼냈다. "무엇입니까?" 마야가 말했다. "한 공양 온 시주가 그럽디다. '요즘 스님들은 다 술도 마 시고, 고기도 드신다면서요? 에이, 뭘 빼시나. 결혼만 안 했 지, 여자도 있다던데.' 팔십 평생에 처음 듣는 소리였소. 그 길로 노승은 돈 몇 푼을 쥐고 산을 내려갔지요." 노승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기에, 직접 확인을 하 려고 산을 내려갔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도대체 어떻게 중이 술과 고기를 접할 수 있는지. 수중에 있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한끼 식사는 할 수 있었다. 그는 제일 먼 저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술과 돼지고기를 주문했고, 주인은 힐끔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피식 웃으며 음식을 내 왔다. 그리곤 수군대는 목소리들. '웬 땡중이야?' '내버려 둬. 요즘은 절에서도 계집질을 하는 판인데, 뭘.' '정말?' '과부들 이 왜 절에 다니는 줄 알아?' 심한 모멸감을 느낀 노승은 묵묵히 고기 한 점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나 평생 채식을 했던 노승에게, 고기는 구역질나는 음식이었을 뿐이었다. 한 번 씹은 고기를 역한 냄새 때문에 뱉어낸 노승은 다시 술 한잔을 따라서 마시고 값을 치르고 식당을 빠져 나왔다. "물론 그 때 마신 술은 전부 토하게 됐소. 속이 견디질 못 합디다. 그리고 소승은 아직도 술과 고기를 즐기는 사람들 을 이해할 수 없소이다." 그리곤 봉투를 다시 마야에게 밀어주었다. "나중에 탁발하러 갈 테니 쌀이나 퍼주시오." 그렇게 말한 노승은 킬킬대며 웃었다. 나이를 생각하고 그 의 지위를 따진다면 매우 경망스러운 웃음소리였지만, 둘 모두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모래를 담아줄지도 모릅니다." "씹히는 맛이 좋겠구려." 다시 한번 웃음. 차분한 절간의 분위기가 마야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십 년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이곳은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오는 휴식처가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인간인 줄 알고 얘기를 나누던 노승은 금세 마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복수는 스스로를 태우는 불꽃이요, 그만 용서할 생각은 없소이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 많이 차분해진 분위기에 노승이 말했다. 마야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내 혼을 태워서라도 갚아줄 생각입니다." "아미타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너져 내릴 테니까요. 마야는 뒷 말을 삼켰다. 그 순간, 어떤 격렬한 힘이 그를 진동시켰고 마야는 힘이 보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굉장히 먼 거 리에서 누군가가 강한 힘을 발산하여 결계를 치고 있었다. 빛이 있지만 어둠도 있다. "…그리고, 제가 용서한다 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 "곧… 그가 오겠지요." 억눌러졌던 살기가 급격하게 팽창하여 공기를 싸늘하게 식 혀버렸다. 부우웅!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마야의 옷자락이 펄 럭거렸다. 그의 백발이 물결을 치며 상처 입은 왼쪽 눈이 드러났다. "천년의 세월… 길었습니다." "아미타불……." 맑은 목탁 소리가 들려온다. * * 악몽은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사랑했던 연인의 꿈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잊어버리기조차 힘들다. 헤어 날 수 없는 늪에 들어선 건 아닐까. 아직도 약하기만 한데, 너무나 가혹한 사건들만 터져 버렸다. 몽현의 경계, 현실인 지 꿈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왜 도망만 다녀? 마음을 잡았다며? 모두를 지키겠다며?> 마음의 목소리. 스키엘? 시윤? 기억의 편린 속에서 고개를 들이미는 수연? 셋 모두이기도 하고, 그 중 하나이기도 하 며, 모두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시윤의 의식은 불분명하게 대답했다. 의식의 교환. <거짓말쟁이잖아. 난… 이렇게 힘든데, 아직 어린데… 이 런걸 견딜 수 있을 리 없잖아.> 합리화라는 것, 스스로도 잘 안다. 목소리도 알고 있나? 알 고 있다. 목소리가 비웃었다. <네 약속은 다 거짓인가? 그 정도밖에 안됐던 거야? 목숨 을 바쳐서 사랑하겠다는 건, 결국 한때의 장난이었어? 흔한 남자들의 사랑, 모든 걸 다 주겠다면서 결국 남겨주는 건 상처뿐인 그 따위 감정이었나?>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변명할 말이 없다.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아. 난 영웅이 아냐. 영화에서 나 오는 것처럼, 내가 주인공이라 모든 게 날 중심으로 돌아가 지도 않아.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고, 언제나 위험 속에서 살아. 내 주위의 모두가 부서져. 내 주위의 모든 이가 불행 해져.> 이게 가장 맞는 대답이겠지. 그러니까 합리적인 대답……. 목소리는 실소했다. <또 현실이군.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건가? 운명은 거부 할 수 없으니, 포기하시겠다? 다칠 위험이 있으니까 시작도 못하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천천히 잊어버리시겠다? 참 합리적인 사고방식이군. 아주 멋져.> <…….> <결국 모든 걸 피하겠다는 얘기 아닌가. 그게 네 사랑이고 네 삶인 거야? 그렇다면 넌 쓰레기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쓰레기야.>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확실히 그럴 거야. 난 쓰레기야… 내 여자도 못 지킨…….> <아니, 지키지 않은 거야.>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었다. 그인지, 혹은 그녀인지 모를 목 소리는 나약한 시윤을 강하게 질타했다. <네겐 힘이 있었어. 다만 현실을 좇기 위해 애써 감춘 거 지. 네가 원하는 삶이 깨어질까 두려워, 평범하게 살 수 없 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말야. 넌 그런 녀석이야.> 목소리는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 다. <뭐가 나쁘지? 난 악마의 왕 스키엘이 아냐. 그처럼 강하 지도 않아. 지금의 나에겐 힘이 없어> <스키엘과 널 비교하려 들지마. 그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천사가 되었을 때조차, 당당하고 오만했다. 주위의 모두가 적이었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였지. 그는 너보다 깨끗하고 맑았다. 죽음을 받아들이 는 그 순간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대화하기 점점 불편해진다. 시윤의 의식은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자신의 치부가 하나하나 드러나는 것, 듣고있기 괴 로울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들. 숨기고 싶어했었고, 자신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이 묻어두었던 것들이 다시 밝혀지 고 있었다. 이곳은 인식되어지는 꿈의 가장자리,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 <몰라. 그따위 것.> 시윤은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알아둬. 그는 천년이라는 세월을 견뎠어. 잠들어 있는 상 태였다고 생각해? 천만에!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침잠한 채,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한가지만을 떠올렸어. 사랑하는 연인을 말야. 우습지 않아? 모두가 비웃을 일이지. 어둠의 일인자였던 그가 천사의 상징인 사랑에 모든 것을 걸다니 말야.>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런데도 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는 천년의 세월 을 포기했다! 그걸 몰라? 다시 태어난 류메리아의 모습을 보았는데도 그녀를 일깨워 그토록 기다렸던 사랑을 얻지 않 았어. 오로지 네 녀석 때문에! 또 다른 자신에게 같은 아픔 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바보같이 포기했어! 네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길 빌면서!> <……> <느끼지 못했나? 운명의 사슬에 몸을 맡겨 핏덩이가 된 그의 절규를? 류메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환희에 찬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리고 네 사랑을 위해서 떠나간 그의 아픔을! 넌 이기적으로 받고만 있었지. 그런데도 모른다고 할건가?> <…몰랐어.> 파앙! 의식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시윤의 의지는 짜릿한 고통 을 느꼈다. -난… 맹세했었다.' 그 때의 그 목소리. 사슬에 관통된 스키엘의 지친 음성, 피 를 쏟아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를 죽이겠다고 난 맹세했다. 쩔그럭. 쩔그럭. 사슬이 갈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그녀를 앗아간… 모두에게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죽음? 두렵지 않아. 그녀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을 다시 죽 으래도 환영이다. 기꺼이 내 영혼까지 바칠 자신이 있어. 그렇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도 포기하고 돌아갔다. 왜 알지 못했을까. 왜 느끼지 못했을까. 그의 슬픔을……. -천년을 기다렸다. 그들의 살을 씹고 피를 삼키기 위해서, 그 영혼까지 멸하기 위해서! 그의 분노를 왜 생각지 못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너의 시간, 난 복수를 너에게 맡기려 한 다. 정당한 요구였다. -내 봉인이 풀리고, 네 벽이 허물어질 때. 그 때 네가 날 인정한다면 우린 하나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넌 날 갖게 된다 그때 인정했더라면, 그렇게 해서 스키엘을 받아들여 하나 가 됐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삶을 불 안정하게 깨뜨리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시윤은 숨고 말았다. 그 결과, 수연은 죽었고 스키엘은 시윤을 구하기 위 해서 스스로 소멸되었다. 이제는 사념조차 남지 않은 것이 다. <뭐가 나쁘냐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네가! 주어진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피하기만 하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나? 그런 쓰레기인가?> <…그렇지 않아.>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시윤의 손을 타고 손끝으로 스며들 었다. 왼손에 끼고 있던 루비 반지가 엷은 노을 빛을 뿜어 냈다. 순간 꿈의 어둠은 약간이나마 걷혔고, 가장자리에서 그림자를 드리운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목소리만을 들을 때보다 훨씬 현실감이 있었다. <아니라면 뭐지?> 집요했다. <…부탁이야. 날 내버려 둬.> 애절했다. <왜, 또 도망가게?> 잔인했다. 시윤은 유심히 상대를 살폈다. 반지의 불빛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물을 분간하는 정도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윤은 놀랐다. <너, 넌! …….>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은 뭉그러져 버려서 말을 하는 시윤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시윤은 그 대로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꿈의 가장자 리에서 이탈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 "시윤 씨, 일어나요." 농밀한 환상을 가르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제로 몸을 흔드는 통에 시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꾼 악몽, 내용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 엇을 봤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전 혀 기억나지 않는다. 시윤은 이마에 축축하게 배어난 식은 땀을 훔쳐내며 흐릿한 초점을 바로잡았다. "루이…시블?" 시윤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추위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깨어있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거실 소파에서 잠 들었는데 또 꿈을 꾸었다. 이대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 만 같았다. "어디 아파요? 땀 때문에 옷이 다 젖었어요." "아니, 꿈을……." 기억나지 않는다. 시윤은 손을 휘휘 저어 자신을 걱정스럽 게 바라보는 푸른 눈의 여인에게 괜찮다고 했다. 땀이 식어 서 입고 있는 옷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흐릿한 장막 속에 갇혀버린 꿈… 또 무엇을 암시하고 있을까. '이건 마치… 부모님이 죽을 때와 같아.' 강렬한 암시가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알아채질 못한다. 시윤 은 위험요소가 없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 다. "무슨 생각해요? 백호 씨라면 아까 방에서 자고 있는걸 확 인했어요. 후후, 그 노인도 결국 포기한 모양이에요." "으, 으응." 시윤은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엇이 이 리도 초조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식사해요.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자다니, 시윤도 많이 힘든 가봐요? 안 그래도 원기 좀 보충하라고 삼계탕 했어요."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식탁으로 옮긴 시윤은 입맛을 다셨 다. 먹음직스럽게 그릇에 담겨있는 한 마리의 닭, 속에 채워 넣은 찹쌀조차 너무나 맛있게 보였다. 닭다리를 부욱 찢어 서 한 입 베어 문 시윤은 루이시블의 요리실력에 새삼 감탄 했다. 부드럽게 씹히는 육질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던 것이 다. "맛있어." 시윤이 칭찬하자 그녀가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많이 먹고 힘내요." 시윤 외에 식사를 하는 것은 백호뿐이었다. 루이시블이 맛 을 즐기기 위해 가끔 식사에 동참할 뿐, 루이시블이나 나이 린은 인간의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백호가 잠들어 있어서 시윤 혼자서 식사를 하게 됐다. 자고로 밥은 여럿이서 먹어야 맛있는 법이지만 사정상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시윤은 혼자 식사하는데 익숙함을 느끼게 돼버렸다. "알고 있어?" 시윤은 닭 뼈를 발라내다 말고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마치 누군가가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뭘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나이린이 앞으로 일년도 살기 힘들 거라는 것, 몸이 붕괴 해버린다는 사실 알고 있었어?"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하지만 진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시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았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짐작은… 했었어요. 아무리 마현자 레보라크의 것이라지 만, 초기 실험작의 수명이란 건 뻔하니까요. 미안해요, 말하 지 않아서……." 미안할 건 또 뭔가. 분명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얘기하지 않았을 텐데. 시윤은 깨작깨작 닭고기를 건드리다가 식욕이 떨어진 듯 수저를 내려놓았다. 언제부터인가 식사를 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기는 시윤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천사에 가까워질수록 동물적인 생리욕구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지.' 시윤은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성욕도 식욕도 사라져간다. 이런 감정이 메말라 가는 무미건조한 상태에서도 천사는 사 랑을 하고 악마는 증오를 한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천년동안 외사랑을 한다는 것조차…….' 기적에 가깝다. 류메리아를 향한 스키엘의 사랑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만 먹게요?" 반도 비우지 않아 채 김도 가시지 않은 삼계탕을 놔두고 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애써 아침을 준비한 루이시블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린 얘기를 하지 않은 것,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 쁜 뜻은 없었어요." 비밀을 숨겼다는 이유 때문에 시윤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 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금발의 머리칼이 루이시블의 움직임에 따라 빛을 내며 찰랑거렸다. 이 여자가 과연 악마라고 할 수 있을까. 시윤은 그렇게 생 각하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 식욕이 없어서 그러니까 TV나 볼래." 그리곤 다시 쪼르르 거실로 달려가 소파에 길게 누워버리 는 시윤이었다. "학교는 어쩌구요?" 벌써 8시가 넘었다. 이미 지각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출발해 야 수업시간에 늦지 않을텐데 시윤은 만사태평이었다. "그만둘 거야. 어차피 가짜 신분이었는데 자퇴해버리지 뭐. 박영진이라는 이름도 더 듣기 싫고." "무, 무슨 소리예요? 환생체를 만났다면서요! 하나라도 모 자라는 판에!" 루이시블은 기가 막힌다는 듯 앙칼지게 소리쳤다. 나이린 과 루이시블 그리고 백호만으로는 마계나 천계 그 어느 쪽 도 상대할 수가 없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전력을 끌어들여 야 하는 판에 시윤은 각성시켜야 하는 인간을 오히려 피하 겠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여태껏 느긋하기만 했던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 다. 화내고 싶지 않았지만, 역시 이런 루이시블의 태도는 그 를 참을 수 없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평범하게 살 아가는 아이를 위험한 전장의 한 가운데로 끌어내라니. 절 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불행'이라는 키워드를 걸고 각성시키라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부모도 죽고 모든 이들에게 배척받으며 스키엘의 저주를 견디게 하라는 말이야? 난 싫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전생의 기억이 눈뜨는 순간, 불 행은 시작된다. 원래 예정되었던 것처럼 차갑고 냉혹한 운 명은 현세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전생에 업을 되풀이한다. 시윤 자신도 그랬고, 백호도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은 이 견뎌내기엔 너무나 큰 아픔일 것이다. "바보 같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내 손 으로, 이 내 손으로 직접 죽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줄 수 는 없어! 그럴 수는 없어!" 시윤의 절규를 가만히 듣던 루이시블은 숨을 가다듬었다. 저 사람은 교묘하게 본론을 피하고 있지만, 결국은 상처받 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제길, 그 노인만 아니었어도.' 백호의 스승이란 노인이 각성에 따른 조건만 말하지 않았 어도 시윤은 벌써 새로운 각성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도 대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물 러선다면 계속해서 시윤이 약하게 굴 것은 뻔한 일이기에 그녀는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마계의 척살령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저 가만히 개죽음 당하자는 건 가요? 당신이야 그렇다 쳐도, 백호 씨는, 나는 또 어떻게 해 요. 그저 죽을까요? 가만히 앉아서?" "……." 할 말이 없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관점으로 죄책감을 느끼 고 미안하게 생각했는데 눈앞의 루이시블은 생존이 달린 문 제였던 것이다. 그녀는 거세게 몰아붙이고 나자, 조금 심했 다는 생각이 들어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들어봐요. 시윤 씨. 무조건 비밀을 덮어두고 아무것도 모 른 채, 거짓된 행복을 영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당신 이 그들을 각성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평범한 인간이 라고 할 수는 없어요. 운 좋게 평생을 그렇게 평범하게 살 아갔고, 행복한 가운데 죽었다고 쳐요. 그 때, 모든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건 어떻게 할래요? 자기가 믿고 따르던 주 군을 위해서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거슬러 왔는데. 기회도 갖지 못하고 끝나서, 그래서 당신을 진정으로 원망하게 될 텐데요." <기회를 봐서… 도망치십시오. 왕을 잘 부탁드립니다.> 최후의 싸움이 벌어지던 그 때, 바뮤즈는 류메리아에게 '나'를 맡겼다. 그건 스키엘의 기억… 이미 사라져버린 그의 사념이지만 조각난 기억이 시윤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시윤 의 텅 빈 시야는 천마대전의 그 때를 투영하고 있었다. <이 목숨을 받쳐… 타천의 영혼을 제물 삼아서라도 당신 을 지키렵니다. 나의 주인, 나의 왕이시여>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장면이 떠오르는지. 시윤은 눈을 감으려 했지만, 멋대로 흐르는 눈물이 느껴져 당황하고 말 았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생의 기억, 과거의 장면 일 뿐인데 왜 이리 슬픈지……. 붉은 눈동자에 촉촉이 젖어 든 눈물은 투명하고 맑기만 했다. "백호 씨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관점에서 아픔의 크기를 재려고 들지 말아요, 정 시윤이 깨우기 힘들 다면 내가 할게요. 어찌됐든 저도 각성을 위한 매개체로서 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윽고 시윤은 눈물을 훔쳐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정말……." "괜찮아요. 힘들었을 거라는 것, 잘 알아요. 그럴수록 혼자 서 결정하려고 들지 말고 동료들에게 기대도록 해요. 우린 아직 받쳐줄 수 있다구요." 자신만만하게 말한 루이시블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 다. 성숙한 금발 미인이 그런 표정을 짓자 왠지 언밸런스한 모습이었지만 나름대로 귀엽고 어울렸다. "고마워." 그 때, 소파 옆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시윤은 루이시블에게 눈짓했다. 처음 보는 핸드폰 번호였다. "저도 모르는 번호인데요?" 이런 아침부터 전화를 할 사람은 없다. 번호를 아는 사람 도 거의 없거니와 전화할 용건이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 다. 시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잘못 걸린 전화이겠거니 하 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침묵했다. -여, 여보세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 …이미은. 머리가 욱신거려오는 것을 느낀 시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눌러 통증을 줄이 려 했다. "여보세요." 짤막하게 말한 시윤은 애써 억눌렀던 음성이 원래의 약간 높은 톤으로 바뀐 것을 깨달았다. 자학은 더 이상 의미 없 다는 뜻인가. 시윤은 몰래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명시윤입니다." 박영진이라는 이름은 이제 버렸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목소리도 이름도 원래대로……. 그리고 어처구 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세요? "……." 짧은 침묵. 전화를 걸어놓고 상대의 신원을 묻는 저 뻔뻔 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시윤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아아아. 그 이름, 그 이름. 저번에 가르쳐준 그거다. 영진 이 맞지? "명시윤이야. 번호 어떻게 알았어?" -나 부반장이잖아. 그 정도야 쉽지. 권력남용이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였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집에서 뭐 하는 거야? 학교 안 와? 가만히 옆에서 통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루이시블이 시윤의 옆구리를 콕콕 찍었다. '그 각성자인가요?' 조용히 속삭이는 그녀에게 시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루이시블은 활짝 웃으며 시윤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밝은 금발이 늘어져 시윤의 목을 간질였다. '학교는 이제 그만둔다고 해요.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요.' 그러고는 귀에 바람을 훅 불어넣는 루이시블이었다. 기분 이 가라앉은 시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장난이었다. 시윤은 그녀를 흘겨보고는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안가." -뭐? "이제 학교 안가. 그만둘 거야."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괴롭혀서? 뭔가 비약 사고가 심한 녀석이다. "…아니." -그럼? 그럼 남자애들이 때려서? 시윤은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옆에서 귀를 바짝 대고 통화내용을 엿듣던 그녀가 놀라서 속삭였다. '맞았어요?' 도리도리. 주먹 불끈. '때렸군요?' 끄덕끄덕. 루이시블은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고, 시윤은 그런 그녀가 더 이상 통화내용을 듣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밀어냈다. "아냐,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런데 네가 왜 신경을 쓰 지? 역시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어?" 성격도 참 많이 바뀌었다. 예전의 그 수줍음 타던 시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뻔히 아닌 걸 알면서도 유들유들하게 곤란한 질문을 하는 꼴이란… 바람둥이의 그것이다. -꺼져! 이쯤 해야겠지. 시윤은 말라버린 입술을 핥았다. "후우, 농담은 그만두고 말하지. 이제 학교 안나가. 개인적 인 사정이 있어서이니까 이상한 생각하지마." -그, 그게 무슨! "그리고…" 결국 끌어들여야 하는 건가. 이 지독한 진실 속으로…….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한 시윤은 눈을 감고 숨을 들 이쉬었다. 농담으로 기분을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딸깍. 목구멍까지 치솟았던 말을 결 국 삼켜버린 시윤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우린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이 말을 했더라면 아마 부반장, 이미은은 각성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담고 있다. 특히, 인연의 중심에서 그들을 부르고 있는 시윤의 경우는 더했다. 그러나 시윤은 키워드를 열지 않았다. "미안……." 역시 할 수 없었다. 낙심한 시윤의 머리칼을 루이시블이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또 얼 마나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건 부끄러워할 필요 가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나에게 맡겨요." "고마워. 정말……." 하얀 시윤의 얼굴에 붉은 눈은 안 그래도 도드라지는 색이 었는데, 울음 때문에 흰자위까지 빨갛게 충혈 돼서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루이시블은 시윤을 도닥거리며 속으로 웃었 다.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잠에서 깨어난 나이린은 어느새 거실로 나와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는 눈이 지만 방향을 봐서 그렇다는 얘기다. "인간. 힘이. 아니다." "뭐?" 나이린이 홀로 중얼거리던 것을 들은 시윤이 반문했다. 그 런 시윤은 루이시블이 자신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악마는 역시 악마인 법, 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 정도는 쉽게 다룰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아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시윤이었다. "울었나? 주인?" 시윤의 토끼눈을 본 나이린이 미소지었다. 아직도 어색하 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게 하는 표정이었 다. 부끄러워진 시윤은 애써 외면하며 부은 눈을 보이지 않 으려 했다. "안 울었어." "응." 시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기분에 빠졌다. 나이린의 짧은 대답은 그를 빈정대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 는 피해의식을 느낄 정도였다. "저것. 인간. 아니지?" 저것? 시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TV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뉴스가 하고 있었고, 웬 폭파 사건에 대한 특종이었 다. "…녹아버렸네?" "응." 원래는 아파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녹아서 엉겨붙은 돌덩 어리들만 남아있던 것이다. 그것도 주위 주민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단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잠시 집을 비웠던 사람들은 갑자기 닥쳐온 비극에 대성통곡 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시신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뜨 거운 고열에 돌과 같이 타버린 것이다. 같이 TV를 보고 있 던 루이시블이 이를 갈며 말했다. "차원결계로군요." "차원결계라니?" "공간과 공간을 분리하는 결계예요. 이공간에서 완전히 박 살을 낸 후에 공간을 다시 합치면 한순간에 녹아 내린 것처 럼 보이게 되죠." 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무 엇 때문에 타락천사들이 일개 아파트를 노린단 말인가. 그 리고 바로 그 순간, 시윤은 그 이유를 알고 말았다. "이럴 수가……. "왜 그래요?" 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도 안 되는 일! "저건 내가 살던 아파트잖아!" 아파트의 한 동이 녹아버렸다. 시윤은 어이가 없어서, 또 너무나 화가 나서 소리를 벌컥 질렀다. 백 명도 넘어가는 인원이 한 순간에 재가 됐다. 그것도 바로 자신 때문에! 아 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죽어버렸다. 펑펑 눈물을 쏟으며 절규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시윤의 동공을 가득 채웠다. "개자식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콱 쥐어진 손에서 핏줄기가 흘러내 렸다. 부릅뜬 눈에 지독한 살기가 어렸다. 예리하게 다듬어 진 살의가 전신을 감쌌고, 피를 잔뜩 머금은 심장이 미친 듯이 맥박쳤다. "그 녀석들이……." 으드득. 이가 부서질 듯 갈렸고,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에 상처가 났건만 손에는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갔다. 핏방울 이 주먹을 타고 거실바닥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넘 치는 분노가 결국 얼어붙은 심장을 가르고 흘러나오는 것처 럼. "죽여버리겠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아프게 했어. 모두 부쉈어! 끓어오르는 피가 혈관이 터져 나가도록 세차게 움직였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몸이 멋대로 들끓었다. 『모든 것을 멸하리라』 "그만! 힘을 가라앉게 해요. 흥분하지 말아요. 쉬이-." 루이시블이 시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천천히 달랬다. 흥분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되질 않는다. 복수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침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시윤이 숨을 간 신히 고르게 되자, 제안했다. "일단 백호를 깨우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죠. 당장 래픽스 샤딘을 상대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언 제까지 소득 없는 도피만 할 수도 없으니까요." 언뜻 보기에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광기가 보였어.' 분노한 시윤에게서 흘러나온 살기는 숨막힐 정도로 진한 것이었다. 투명한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가, 피를 바라는 듯 번들거렸다. 그를 달래는 순간, 그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처 럼 모습을 감췄다. '위험해. 정말… 위험해.' 불안정한 시윤의 상태, 자칫하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상황이나 있을는지 모 르겠지만……. * * "이상한. 주인." 어디선가 붕대를 찾아와서 시윤의 손에 감아주던 나이린이 그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이제는 익숙해진 뿌연 잿빛 눈이 그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TV따위를 보 며 여러 지식을 습득한 그녀는 요즘들어 부쩍 말이 많아진 상태였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뼈가 견디지 못할 정도 로 꽉 쥐었던 손이 치료가 끝나자 은은한 통증을 보냈고, 시윤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이상해?" "어째서. 화내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느 냐. 그런 의도겠지. 시윤은 상처입지 않은 왼손으로 볼을 긁 적였다. "나 때문이니까." "그런가." 나 때문에 죽어갔다. 어차피 이제는 인연을 맺은 사람도 없으니, 가슴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다. 친분이 조금이라도 깊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렸으니까. 시윤은 조금 안 면이 있는 옆집에 살던 아줌마를 생각했다.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였다. 그러니까… 그 아줌마도……. "가, 가만." 잊고 있었다. 멍청하게, 바보같이. 까마득하게 있고 있었다. 아련한 기억의 그림자 사이로 뿌연 안개가 서려있다. 그동 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기억이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한가지 언뜻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달콤한 율무차의 냄 새,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동자. 잃어버린 기억, 그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 -눈이 붉은 색이네, 렌즈 낀 건가? 열리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쥐어짜내자, 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건 바로 옆집에 살던 그 아줌마. '내가… 그 집에 갔던 적이 있나?' 눈을 감고 간신히 잡아낸 기억의 끄트머리를 끌어내기 위 해 안간힘을 썼다. 분명 옆집 사람들과 집까지 놀러갈 정도 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뭐야?' 희뿌옇던 의식이 점차 선명하고 또렷하게 가다듬어졌다. 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나와 아줌마, 그리고 또 한 명……. '누구지? 그게 누구지?' 그리움, 갈망. 목이 메이는 슬픔. 흑백필름이 빠르게 감겨지듯, 기억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 다. 추운 겨울날, 비가 와서 얼어붙을 것만 같던 그 때에 손 을 내밀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아니 불안 정했기 때문에 아예 묻혀져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들이밀었다. 겁먹은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시윤이야? 맙소사……. 이렇게 멍청할 수가! 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빠진 나머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억…났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커다란 눈을 걱정스럽게 빛내며 다가온 그녀의 모습을. 따뜻한 손으로 날 일으켜주던 그녀 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2년 전,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버 린 그녀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그리고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커다란 눈망울을 빛 내며 어느 샌가 다가온 그녀였다. 제발 자길 버리지 말아달 라고 바보같이 매달렸던 시윤은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 을 되새겼다. 그녀는 매몰차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그 렇게 사라졌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집 앞으로 찾아 가도 만날 수 없었다. -또 내 앞에 나타나면, 난 정말 죽어버릴 거야. 그렇게까지 말했던 그녀인데. 왜 다시 만났을 때는 그토록 친절했던 걸까. 결국 다시는 그녀를 찾지 못했는데… 그래 서 포기하고 잊어버렸는데. 왜 하필이면 '그때' 만날 수 있 었던 걸까. 한사라. 첫사랑이었던 그녀를……. "제기랄!" 처음 여기 왔을 때, 입고 있던 옷들. 비록 찢어지긴 했지만 그게 사라가 사준 옷이라는 것을 시윤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옷장을 뒤진 시윤은 그제야 파묻혔던 기억들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청바지에 검은 스웨터.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윤은 한가지 사 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한 명인가?' 평범했을 때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 중 마지막 한 명이다. 그것도 최근에 새로 만났으니 그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다. 지독하게 뒤틀려버린 운명의 손길이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 었다. 악마들에게 죽임 당하기 전에 구해내야만 한다. "늦지 않았겠지? 그렇겠지?" 시윤은 루이시블이 구해준 핸드폰을 꺼냈다. 집이 이사가 진 않았으니, 번호도 그대로일 것이다. 과거 수천 번도 더 눌렀던 그 번호를 어렴풋이 떠올려 꾹꾹 눌러서 번호를 찍 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뭐라고 설명을 하지?' 갑자기 휘수연과 마주치고… 공명이 시작되어서 악마들의 공격을 받았다. 아진의 결계 때문에 공간이 격리되었으니 사라는 아마 무사할 것이다. 시윤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 며 상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 사라의 어머니 목소리.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여서 아직 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에는 매 몰차게 시윤을 대하며 다시는 딸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했 다. "안녕하세요." -시윤…이니? 놀랍게도 사라의 어머니는 2년이나 지난 지금, 자신의 목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딸의 남자친구라며 귀여워 해주었 던 분. 시윤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예. 저 시윤이요." -……. 이번에는 상대방에서 침묵을 지켰다. 예전처럼 '다시는 전 화하지 마!'라고 소리치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리면 어쩔까, 걱정스러웠다. -오랜만이구나. 기분 탓일까. 깊은 회한이 서린 목소리라고 느껴지는 건. "저기… 사라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거부당하면 어쩔까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라의 어머니. 분명 시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한 기억이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녀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윤 에 귀에 애절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사라는 없단다. "언제 들어오죠?" 다행히 적개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시윤은 그나마 다행이 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라의 어머니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시윤에겐 벼락같은 음성으 로 떨어지고 말았다. -죽었을 거야. 아니, …죽었단다. "예?" 장난이라면 재미없다. 시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피 하려는 사라의 부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란스럽다. 비틀어진 운명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도대체 어느 쪽일지 가늠이 가질 않 는다. "거짓…말이죠? 그렇죠? 절 떼어놓으려고 하시는 말씀이시 죠?" 그러나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몸이 먼저 받아들인 걸까. 참았던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 다. "그런 거죠? 그렇죠?" 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야. 제발 이젠 그만 두란 말이 야! 시윤은 간신히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온 몸의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치병을 앓던 사라는… 두 달 전에 사라졌단다. 채 한 달도 더 못산다고 그랬는데…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 란다. 아니, 나도 살아있다고 믿고 싶지만… 그렇지만…. 숨겼던 진실이 모두 드러났고, 마지막 하나까지 잃어버린 시윤은 절망하고 말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잃어야 하는 건 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된 지금에도 또 하나를 잃고 말았는데……. 감정이 격해졌는지 사라의 어머니는 말 을 더듬고 있었다. 미국에 갔던 얘기를 하는가 하면 사라가 자신을 계속해서 찾았다는 얘기도 했다. '이럴 수가…….'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었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 수 술 받기 위해서 미국으로 갔던 것뿐이다. 그동안 그녀를 원 망했던 게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니. 시윤은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연신 닦아냈다. -집에 사라가 미국에서 쓴 편지들이 있단다. 전부 네게 보 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와서 가져갈래? "꼭… 가지러 갈게요." 그렇게 착했던 아이. 자신이 고백하자 장난이라고 여겨 울 면서 가버린 아이. 함께 지내는 동안 내내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던 그녀. 시윤은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마음이 딴 남 자가 생겨서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옹졸하고 멍청했는지! -네가 보고싶다고 울면서 말했어. 하지만… 널 모질게 떼 어낸 것 때문에,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다고 하더구나. 죽 기 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고 했는데… 한번만이라도. 미안 하구나. 시윤아. 그때 너한테 사실을 말해주는 게 나았을 텐 데… 우리 아이가 끝끝내 말려서. 초점을 잃은 시윤의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향하고 있었 다. 이윽고 손에 힘이 빠져서 시윤의 핸드폰은 바닥에 떨어 졌다. "운명이, 내 운명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다." 눈물이 말랐다. 슬픔 때문에 끊이질 않던 눈물이 삽시간에 말라버렸다. 붉은 눈이 메마른 감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시 윤의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버렸다. "스키엘… 난 너를 저주한다. 네가 넘겨준 이 운명, 이 인 생… 모든 것을 저주한다. 너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상 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난 널 저주한 다." 바로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영혼을 지닌 또 다른 나이지만. "이 아픔, 이 분노, 이 공허함, 이 슬픔. 네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오로지 텅 빈 가슴 뿐……. 널 저주해, 스키엘." 사라와 만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오 로지 운명의 화살은 시윤이 사랑한 이들을 죽여 없애고 있 으니까. 시련이라는 이름으로… 시윤의 영혼을 아픔으로 담 금질하고 있다. 조용조용하게 중얼대는 시윤의 모습은 차라 리 섬뜩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나의 시간이니 모든 것은 나에게 맡긴다고 했지? 그렇지? 하지만 그건 틀렸어. 나를 위한 것들은 모두 망가 졌으니… 남은 건, 너를 위한 복수밖에 없잖아. 차라리 네가 날 대신했다면 이렇게 원망스럽지는 않겠구나." 시윤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영혼의 친구… 나의 원수여……." 비뚤어진 분노는 스키엘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 다는 것처럼……. * * "아후, 머리야." 과도한 체력의 소모로 탈진해 있던 백호는 아직도 피곤한 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거실로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루이시블이 과격하게 깨워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투덜거 리려 했지만 거실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가만히 입을 다무는 백호였다. 나이린과 시윤의 시 선은 소파 앞에 있는 TV에 꽂혀있었다. 아주 죽일 듯이 노 려보는 그의 눈빛에 백호는 아연실색했다. "왜 그래?" 시윤은 말없이 TV를 턱으로 가리켰다. 하단에 파란색 바 탕의 자막이 뜨고 있었다. 백호는 그것을 떠듬떠듬 읽었다. "속…보, 강북의 P아파트 소멸? 저게 뭐야? 소멸이라니, 무너졌다는 거야?" 대답도 필요 없었다. 녹아버린 아파트의 잔해가 TV화면을 가득 메웠다. 원래의 형체를 찾기 힘들 정도로 녹아 내린 건물…알려지지 않은 폭발물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는 자막. 예상 사망자 집계 250명. 시윤은 그 숫자를 가만히 되새겼다. "보시다시피 타락천사의 활동이 본격화 되어가고 있어요. 지금껏 잠잠했던 건, 우릴 잡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 어서였다는 얘기죠. 이젠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백호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얼굴로 루이시블을 바라보았다. "타락천사의 짓이야? 저게? 어째서 그들이 아파트 따위를 부수는 거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껏 일을 조용 히 처리하기 위해서, 사소한 상황에도 결계를 쳐서 흔적을 지웠던 그들인데. 이젠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로 도심 한복 판에 나타나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대답은 시윤이 했 다. 작위적인 것이 아닌, 정말로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내가 살던 곳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시윤은 섬뜩하게 웃었다. 메마른 미소가 입가 에 떠올랐고 홍옥빛 눈동자는 지독한 살기를 끊임없이 쏘아 내고 있었다. "네가?" 백호가 반문하는 순간, 시윤이 신경질적인 태도로 리모컨 을 벽으로 집어던졌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리모컨은 내 부 부품을 사방으로 토해냈다. "제기랄!" 부릅떠진 시윤의 눈은 방금 새로 들어온 TV속보를 노려 보았다. 백호는 시윤의 안하무인 적인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루이시블의 놀란 목소 리에 정신을 차렸다. "또, 또 했어?" P아파트에서 30분 거리인 L아파트 역시 소멸. P아파트 사 건 두시간만인 11시에 유사 사건 발생. 예상 집계 사망자 320명.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며, 범국가적인 단체로 보인 다. 네이팜과 유사한 새로운 특수병기의 출현이 아닐까 우 려. 헛다리만 짚고 있는 TV보도에 시윤은 이를 힘껏 깨물 고 비웃음을 흘렸다. "지옥이군. 지독한 녀석들이야." 용암이 흐르기라도 한 듯 완전히 녹아버린 건물의 잔해를 바라보던 백호가 읊조렸다. 잠시 외출을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가족들은 울부짖고 있었고, 정부에서는 비상대책 위원회를 소집했다. "저긴… 수연이 집이야. 내 연인의 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의 집이야." 시윤의 웃음은 더욱 섬뜩해졌다. 즐거운 듯 웃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메말라서 기계의 만들어진 음성이라고 생 각될 정도였다. "이제 확실해졌어, 그들은 나를 불러내려고 하고 있어. 그 렇지? 형, 그렇게 생각 안해요?" 아무리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지만 백호도 이 정도 는 눈치챌 수 있었다. 타락천사들의 의도가 확실히 눈에 보 였다. 어서 나와라. 나오지 않는다면 희생자는 늘어만 갈 것 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갈 건가요?" 루이시블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이 상황들, 내가 나가야 할 것만 같은 데?" 시윤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바람이 새는 것처럼, 탁하 게 쉬어버린 목소리가 그 미소와 섞이자 그로테스크하게 보 이고, 들렸다. "네가 좋을 대로 해. 어차피 지금 나가는 건 무모한 짓으 로 보이지만." "지금 가면 개죽음 당할 뿐이에요. 시윤 씨, 조금만 참을 순 없어요?" 말하는 것은 달랐지만, 결국 백호와 루이시블의 생각은 같 았다. 한 명은 상관 않겠다는 투로, 한 명은 그저 말리는 것 처럼. '누굴 위한 것일까.' 시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스키엘의 환상인지, 아니면 나약한 명시윤이라는 인간에 대한 기대인 지. 어느 쪽이든 환영할 수 없는 노릇이다. 가볍게 웃음을 마무리지은 시윤이 간단히 답했다. "가지 않아." 너무나 대답이 자연스러워서였을까. 오히려 놀란 루이시블 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길길이 날뛰며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정말요?" 흘끗 TV를 곁눈질한 시윤이 여유로운 태도로 소파에 몸 을 기댔다. 양손을 깍지껴서 머리에 받친 그는 눈을 감았다.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잖아. 가면 내 목숨이 날아갈 게 뻔한데. 질 게 뻔한데 뭐 하러 가? 난 안가." 이제는 백호마저 놀라버렸다. 언제부터 시윤이 이렇게 차 갑고 냉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합리적인 선택, 이제 더 지켜야 할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마당에 굳 이 서울로 돌아가서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다. 그게 '합리적 인' 생각이다. 하지만 백호는 시윤이 '당연히' 돌아간다고 말 할 줄 알았다. 그게 '인간적인' 생각이니까. "너 진심이냐?" "응, 진심이라니까요." 전신이 떨려오는 것을 억누르며 백호가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야. 최소한 미안하진 않아?" 너무나 태연자약한 모습이 화가 치밀게 했다. 백호는 그런 것을 그냥 보고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쉬어버린 목소리 가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미안하다뇨. 자기네들 운을 탓하라죠. 나같이 저주받은 녀 석이랑…" 퍼억! 시윤은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백호의 강력한 스트 레이트가 그의 뺨에 꽂혔다. 단번에 입안이 터져나가서 시 윤은 피를 뱉어내야 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 한 펀치였다. "무슨 짓이죠?"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시윤은 갑자 기 일격을 선사한 백호를 노려보았다. "비겁한 자식, 넌 원래 이런 녀석이었냐? 이길 수 없으니 까,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면서 도망을 쳐? 그러고 도 네가 남자냐?" 턱을 매만지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시윤은 백호를 비웃 었다. "후후, 그럼 남자답게 가서 죽을까요? '난 비겁하게 살 바 에야, 당당하게 죽어가겠다.'라고 하면서?" 백호는 할말을 잃었다. 결국 자신은 시윤의 죽음을 종용한 것이다. "좋아요. 인정하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는 없어요. 나도 평범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까지 죽어버린 지금 내가 뭘 더 어쩌란 말이죠? 알아요? 그런 마음? 루이 시블, 알고 있어? 내가 어떤 기분인지. 항상 스키엘을 찾는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솔직한 감정. "난 스키엘이 아냐. 이미 떠나가 버린 그 자식을 내게서 찾지 마. 비교하지 마! 난 스키엘이 아냐!" "주인. 화내지. 마." 이십대의 외모를 하고도 하는 행동은 영락없이 어린아이인 나이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동안의 학습을 통해서 의사 소통이 어느 정도 원활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말을 끊어서 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닥쳐! 나이린 너도 마찬가지야! 난 네 주인이 아냐! 난 시 윤일 뿐, 네 주인으로 인지된 스키엘이 아냐. 왜 다들 내게 서 그의 모습을 찾는 거지? 난 나 자체로서 가치가 없어?" "시…윤. 나의. 주인." 그녀는 인정했다. 스키엘이 아닌 시윤을 자신의 주인으로 서 인정했다는 의사를 밝히기 위해, 나이린은 어색하게나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으로 기분이 풀어질 수 있다면. 주 인의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흥." 나이린에게 코웃음 친 시윤은 겉옷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 안 들어올 거야. 바람쐬다가 올 테니까 전화하지 마. 이제는 나도 지긋지긋해." 그렇게 말한 그는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아 무 말도 못하고 있던 백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때려서라 도 돌려놓고 싶은데, 시윤의 상처는 그렇게 바로잡기에는 너무 컸다. "저 녀석… 아파하는 걸까.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하지만 시윤의 말과는 달리 자신은 스키엘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그저 귀여운 동생 정도로 생각했을 뿐인데. 아마 오 해한 것이리라. 백호는 시윤이 돌아오면 꼭 오해를 풀어줘 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요, 시윤 씨는 백호 씨에게 화내지 않았어요." 루이시블이 그의 생각을 간단히 부정했다. "그는 스키엘을… 미워하고 있어요." 시윤의 가시 돋친 어투에서, 루이시블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윤의 비뚤어진 분노는 스키엘을 향한 것이었 다. * * "퉷, 아프잖아."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시윤이 포장되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다. 외곽 지역에 지어놓은 집은 이래서 불편하다. 백호 의 놀란 표정을 떠올리며 시윤은 미안함을 느꼈다.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 이제는 알리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후후, 난 바보니까." 결자해지(結者解之), 묶은 놈이 풀라는 말. 시윤은 스키엘 이 엮어놓은 인연을 자신이 풀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한히 불만스러웠다. 허나, 어쩌랴. 그게 운명인 것을. 입술을 비죽 이 내밀며 투덜대던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어디론 가 전화를 걸었다. "서울행 기차, 가장 빠른 게 몇 시에 있죠?" 이건 정말로 머저리 같은 행동이다. 내딛는 걸음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너무나 무거웠다. 시윤은 안 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자신을 향한 조소를 보냈다. "1시에 있어요? 그럼 도착은… 2시 반이라… 고맙습니다." 시윤은 평일인데다 한가할 때라 표가 예매할 필요가 없다 는 안내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지체할 필요 없이 바로 떠 나면 되는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행동에 절로 웃음이 나 왔다. 이제는 쉬고 싶다. 더 이상 타인의 그림자에 가려서, 운명에 짓눌려서 꼭두각시 인형의 생을 살기는 싫다. 거기 까지 생각하던 시윤은 핸드폰을 본체와 배터리를 분리해서 멀리 던져버렸다. 둔탁하게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행복하게 살기를……." 잠시 걸음을 멈춘 시윤은 아득히 멀어진 집을 바라보았다. 악마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신뿐. 루이시블도 백호도 잘만하면 인간 세상에서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윤 자신만 없어진다면. "좋은 주인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나이린." 그는 나이린을 떠올리며 인사했다. "미안해, 스키엘이 되어주지 못해서. 루이시블." 그는 루이시블을 떠올리며 인사했다. "백호 형, 미안해요. 끝까지 바보같이 굴어서." 그는 백호를 떠올리며 인사했다. 길었던 아픔. 이제 끝내야 한다. 천년의 세월은 너무나 길 었다. 억지로 잡아둔 운명의 사슬은 족쇄가 되어 행복을 앗 아갔고, 슬픔만을 남겨두었다. 이미 그 주체가 사라진 이상 저주는 의미가 없다. "미안해요. 모두들." 벌써부터 더워지고 있다. 시윤은 빙긋 웃으며 양손을 내뻗 어 뜨거운 햇살을 받아냈다. 살아있다는 느낌, 별 거 아니 다.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시 윤은 아이러니 하게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갈게요. 내가 끝낼게요." 동료들을 남겨둔 채, 시윤은 서울로 향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 * "이제 몇 개 남았지?" "네 개. 즐기는 것 같군." 카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말하자 아진이 연신 키 득거렸다. 두 개의 건물을 불태우면서 영혼의 비명 소리를 들은 그는 기분이 최고였다. 악마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음 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벌써 500이 넘어가는 인간을 한순간에 없애버린 아진은 다음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는 중 이었다. "좋지 않아? 오랜만의 살육이야. 여섯시간이나 기다릴 필 요도 전혀 느끼지 못하겠어." "레보라크의 작전 아니었나? 여섯시간마다 하나씩 없애버 려서, 결국 스키엘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 평소의 카엘은 이렇게 깐깐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여동 생이 관련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는 누구보다도 신경을 곤두 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건 아진도 인정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나타나게 하려면 내 방법대로 하는 게 좋아." 계속되는 살육, 아마 참다못해서 나타나겠지. 이건 조금씩 옥죄는 게 아니라 단번에 목줄기를 틀어쥐는 것이나 마찬가 지였다. "카엘, 너무 걱정하지 마. 시간은 충분해." "…그래." 흰 셔츠에 블랙 진을 입은 카엘은 평소 그대로의 모습 같 았지만, 굉장히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 보던 아진은 차를 운전하는 네피림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후후, 인간이었을 당시의 기억을 써먹을 수 있는 네피림 이라 편하군." 설마 운전이 가능했을 줄이야. 유 회장이 내어준 운전사들 을 전부 피떡으로 만들어서 태워버린 아진은 세단을 버리고 날아가려고 했지만 네피림 중에 셋이 운전할 줄 알았다. 한 대의 차에는 네피림 셋이 타고 있고, 또 한 대에는 나중에 도착한 토돌과 무온이 탔다. 그리고 이 차에는 운전을 위한 네피림과 메사트, 그리고 카엘과 아진이 타고 있었다. "난 알 수 있어. 그는 꼭 온다. 아무 힘이 없는 소년이지 만… 과연 얼마나 성장했을지 정말 궁금해. 예전처럼 스키 엘의 힘을 끌어다 쓸 수도 없을 테니까… 하하핫!"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이었다. 핏방울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치고 자신을 죽이겠다며 날아든 그의 모 습을 아진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스키엘… 그는 정말로 사라진 걸까?" 카엘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도저히 스키엘이 사 라졌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왕께서 말씀하셨다. 스키엘은 완전히 소멸했어." 아진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왕의 말은 곧 진리, 절대 어 겨서도 안되고 불신해서도 안 된다. 그게 주군이다. "그렇다면 왜… 왕께서는 루이시블이나, 환생한 녀석들이 아니라… 스키엘의 환생체를 잡아오라고 한 거지?" 듣고 보니 이상하다. 정작 아무런 힘이 없다는 스키엘의 환생체를 뭐하러 잡아오라는 것일까. 이제는 모든 힘을 잃 어버려서 조금도 위협이 되질 않는데. "모르겠어." 아진은 솔직하게 인정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 오질 않는다. 휴즈 다루카, 그가 일개 인간에 불과한 시윤을 찾을 이유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스키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행동. '역시 뭔가 있어.' 카엘은 팔짱을 끼고 자는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지만 수십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스키엘을 잡아오면 루이 시블을 살려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다시 생각해보니 의 심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왕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까지 숨기는 비밀이라니… 정말로 스키엘은 없는 건가.' 15 달의 정령(精靈) '죽어버려! 어서 죽어버리란 말야!' 또 다시 반복되는 악몽을 향해 시윤은 씁쓰레한 웃음을 날 렸다. 현실과 꿈의 경계, 그곳에서 이미 죽어버린 수연이 표 독스럽게 외치고 있었다. '죽어버려!'라면서 저주를 퍼부었 다. 가만히 그것에 귀기울이고 있던 시윤은 마음속으로나마 말했다. '꿈속에서라도 널 볼 수 있어서… 기뻤어. 하지만 이제는 견디기 힘들어, 네가 없는 세상. 혼자 남은 이곳은… 그러 니, 곧 따라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이제 이곳에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시윤은 잠들 어 있던 의식을 의지만으로 깨웠다. 악몽은 그를 놓치지 않 으력 했지만 이미 결심이 굳은 시윤에게 장애될 것은 없었 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좌석에 고쳐앉으며 이마에 축축하 게 배어있는 식은땀을 훔쳤다. 빗소리가 들렸다. 쏴아아아아. 고요한 정적을 깨고 대지를 두들기는 빗줄기. 기차의 창밖 을 바라본 시윤은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쓸쓸하게 느껴졌 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바깥풍경과 차창에 달라붙는 빗방 울들이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1년도 안됐는데……." 씁쓸하게 과거를 되씹다가, 문득 지난 가을이 떠올랐다. 차 갑게 내렸던 비, 여자친구에게 차여서 다시는 연인을 만들 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그 때. 하지만 그 말은 하루만에 뒤 집어지고 말았다. 천호영이 주선한 소개팅에 대신 나갔고, 엉겁결에 수연과의 만남을 가졌다. "하아, 지독히도 오래된 것 같아." 짙은 피로가 한숨에 배어나왔다. '남자친구 후보'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수연과 만난 이후로 그녀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시윤이었다. 붉은 두 눈동자가 망연히 과거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수연아……." 기차는 빠른 속도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이 제멋대로 흐르게 내버려두고 이를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깨 물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잠에서 깨어날텐데……. 날 깨워 주지 않겠니?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 * "이번엔 내가 살던 자취방이군." 백호는 눈을 부릅뜨고 TV를 노려보았다. 시윤이 집을 나 간지 1시간이 넘었다. 뉴스는 끊임없이 이 '테러'에 대한 보 도를 내보냈고 그 와중에 세 번째 희생양이 된 백호의 자취 방이 속보로 나왔다. 실로 아비규환, 집에 머물러 있던 주인 아줌마는 시체조차 찾을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10시에 시윤의 집, 12시에 수연의 집, 1시에 내가 살던 집. 시간이 반으로 줄었군. 어서 나오라고 시위하는 건가? 다음은 어디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그들을 막고 싶었다. 루이시블이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뻔히 죽을줄 알면서도 갔을 것이다. 이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백호가 이를 갈았 다. 벽에 걸린 시계는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장 피해가 큰 곳, 그리고 아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라면… 학교겠죠." 타락천사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루이시블이 곰곰이 생 각하고는 대답했다. 시윤의 학교와 수연의 학교, 그것만으로 희생자는 3천명에 육박할 것이다. 백호는 계속 고민했다. 이 렇게 피하고 있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달리 막을 방 법은 없는지. "대피시킬 수는 없을까? 가령 그 학교에 전화를 해서 다음 목표는 거기라고 말을 해주던지……." "그건 힘들걸요. 게다가 우리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어 요." 전화는 추적당할 위험이 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타락천사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 들의 정보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고, 그래서 백호의 자 취방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까 지 생각했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놀라 소리쳤다. "…설마!" 그제야 맞물려 들어가는 것들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덮어뒀던 일들. 지현의 빵집에서 일하면서 웬 납치극에 휘 말렸던 게 떠올랐다. 납치범들은 고도로 훈련된 녀석들이었 고, 분명 불법일 게 뻔한 총기류를 소지하고 있었다. "타락천사들의 정보망은 태성그룹이지? 루이시블, 그게 맞 나?" "예? 아, 예. 맞아요." "그렇다면, 그 녀석들은 특수요원이라도 키우나? 그러니까 군 특수부대에 가까울 정도의 장비를 지급해서?" 이번에도 역시 루이시블은 고개를 끄덕였고 백호는 자신의 아둔함에 한탄했다. 그들은 역시 타락천사와 손잡은 태성의 공작요원이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이 정체를 알아내려 했을 때, 아진의 부관이라는 레오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는 얘기는……. 백호가 벌떡 일어났다. "당장 서울로 가야겠어. 루이시블, 도와줘!" "예? 무슨 소리에요?" 루이시블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지만 백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자, 도리없이 끌려갔다. 그걸 지켜보 던 나이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내가 일하던 빵집. 기억하지? 분명 거기도 목표에 포함되 어 있을 거야. 그 자식들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 때 왔 던 건 틀림없이 태성의 녀석들일 테고, 그러니 레오나트가 뒤따라 왔겠지. 기억나?" 백호는 집밖으로 달리면서 정신없이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 았다. "뭐가 빠르지? 버스? 기차?" 루이시블은 바보같이 계속 달려가려던 백호의 뒷덜미를 잡 아채서 자신의 차 뒷자석으로 던져넣었다. 머뭇머뭇 따라오 던 나이린은 믿을 수 없게도 한숨을 내쉬더니, 조수석에 얌 전히 앉았다. "평일이니까 고속도로가 빠르죠. 최대한 빨리 달려줄 테니 까, 진정해요!" 루이시블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백호의 심정을 납득할 수는 있었다. 게다가 순서로 보아하건데, 아마 지현이라는 여자가 공격을 받는 건 마지막일 것이다. 최대한 빨리 달려 가서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다면 승산은 있었다. 한 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대피시키는 것보다는 쉬우리라 생각했기에 루이시블도 찬성한 것이다. "나이린, 안전벨트!" 물론 차가 부딪치는 충격정도로 피해 입을 리는 없지만 나 이린은 얌전히 안전벨트를 맸다. 그걸 확인한 루이시블은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부아아앙! 포장되지 않은 길에서 그 녀가 운전하는 차는 미친 듯이 달렸다. "140킬로. 150킬로. …160킬로." 아직 고속도로도 아닌데 차의 속도는 끊임없이 가속했다. 비가 내리는데 폭주의 운전이라니, 죽기에 딱 알맞았다. 빨 리 가자고 재촉하던 백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차 의 속도를 중얼거리던 나이린은 시속 180킬로를 넘어가자 이윽고 입을 닫아버렸다. 이제는 백호가 루이시블에게 들었 던 말을 되돌려 줄 차례. "이봐, 진정…해." 피가 바짝 뒤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끼며 백호가 길게 신음 했다. 루이시블은 들은체도 안하더니 라디오를 켰다. 아직까 지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는지 어느곳으로 주파수를 돌려 도 영문모를 폭파에 대한 얘기 뿐이었다. -서울시 종로구의 L고등학교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 다. 수업시간 중 생긴 일이라 사상자는 1500명에 육박하 며……. "역시 예상이 맞았군요." 시윤이 다니던 학교의 이름이다. 현재 시각은 2시. 타락천 사들은 뻔히 보이는 움직임으로 야유하고 있었다. '나올 수 있으면 나와 보시지.' 비웃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백호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지현의 얼굴을 떠올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산에서 내려와서 처음 사귄 친구, 이대로 잃어버릴 수는 없다. "얼마나 걸리지?" "이 속도로 간다면… 한시간 안에 도착하겠는데요." 루이시블은 눈을 부릅뜨고 액셀을 최대한 밟은 채였다. 빗 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기에 고속도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 지만, 사태가 급박한 만큼 그녀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대로 차가 폭파한다고 해도 죽을 염려는 없지만 말이다. * * "슬슬 지루해지네." 아진은 하품을 하면서 '청빈 여자 고등학교'라고 쓰여진 학 교의 명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2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서 1시간으로 줄였는데, 그것마저도 짜증난다는 얼굴이었다.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아진은 약간의 반탄력을 이용해서 그것을 모두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 일 행 모두가 빗속에 서있었지만 옷에는 물한방울 묻지 않았 다. "어서 나타나라, 시윤. 모든 것을 부숴버리기 전에 말야. 크크큭."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아직 점심나절임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음습한 기운을 몰고 왔다. "시간 됐습니다. 시작할까요?" 메사트가 공손한 어투로 물었다. 아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네 장의 날개를 펼쳐내고 우울한 회색의 빛을 뿜어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섯 네피림이 때를 같 이하여 학교 주위로 날아 올랐다. 건물의 창문 안쪽으로는 여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게 보였다. [둘 모두를 가졌고, 둘 모두에게 거부당한 우리 네피림의 이름으로 명한다. 공간이여, 떨어져라!] 다섯 명의 네피림 사이에서 한차례 힘이 순환하였다. 그것 은 그대로 증폭되어 메사트에게 흡수되었고, 그녀는 부드럽 게 손짓했다. 끼이이익! 학교를 둘러싼 담장위로 반구의 결 계가 형성되었다. 공간과 공간이 억지로 벌어지자 귀를 거 슬리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원결계] 벌써 다섯 번이나 쓰는 고급 주문이었다. 메사트는 약간 지친 얼굴로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무온이 여 덟 장의 부드러운 검은 날개를 홰치며 날아올랐다. 그는 학 교와 거리를 두고 허공에 몸을 고정시켰다. 무온의 가슴 앞 으로 보라색의 대궁(大弓)이 나타났다. "후우, 오랜만에 써보는 건데 괜찮으려나." 밀빛의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갈색의 눈동자가 귀엽게 빛을 발했다. 아이같은 모습의 무온이었지만 그는 래픽스 샤딘의 서열 4위, 레보라크의 바로 아래였다. 무온이 자신의 키보다 큰 기형활의 줄을 잡아당기자, 기형적으로 길다란 화살이 저절로 재어졌다. [내 이름은 무온 쎄 루나르. 주인의 이름으로 명하나니. 피 의 저주여, 내 무구에 새겨질 지어다] 파라라라락! 혼탁한 붉은 기운이 창처럼 길다란 기형 화살 에 엉겨붙었다. 무온은 눈을 감고 마력을 집중했다. 화살이 완전히 붉은 색으로 뒤덮히자 그는 눈을 뜨고, 조용히 시동 어를 외쳤다. [크림슨 애로우!(Crimson Arrow)]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파공음을 남기며 붉은 빛이 대기를 갈랐다. 쿠아아아앙! * * 술맛이 썼다. 비가오는 날에 평소 단골이던 호프 집에서 술잔을 기울인다는 것,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아야 하는데 오늘은 왠지 아니었다. 종석은 가게 카운터에 있는 TV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뭐야아. 오랜만에 왔으면서, 내 얼굴도 안보고. 자기 왜 그래?" 짙게 화장을 한 김 마담이 콧소리를 내며 종석의 허리를 찔러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와서 외상갚을 모두 갚았고, 팁도 듬뿍 줬기에 최대한 서비 스 해주려 했지만 아까 TV를 본 뒤로는 김 마담 자신에겐 관심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미치겠구만."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종석, 이럴 때에는 아무리 찔러봐야 소용 없다. 김 마담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는 종석의 옆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종석은 그것까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삐져버린 김 마담은 다른 자리로 휙 가버렸다. "명시윤, 휘수연… 과연 이게 억측일까?" 아무리 봐도 그 둘의 집과 학교가 날아간 것은 연관이 있 어보였다. 단순히 우연이라기에는 석연찮았고, 테러당한 곳 중 넷이나 그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역시 뭔가 있다는 소 리다. "어렵구나, 어려워." 수연과 시윤에서 시작된 키워드는 태성과 아명에게까지 뻗 어져 나갔다. 게다가 태성은 예전에 시윤의 부모님이 가스 폭발로 죽었다며 은폐한 경력까지 있었다. 비록 소규모의 폭발 사고였지만 그 원인은 지금처럼 찾을 수 없었다. 수연 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종석은 이 사건이 민감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알아봐야 겠어.'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이었다. 돈이나 명예보다는 은폐되 어있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종석은 남은 맥주를 마셔버리 고는 지갑에서 되는 대로 돈을 꺼내서 삐져있는 김 마담에 게 쥐어주었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에 다시 올게." 그 액수가 상당했기에 김 마담은 단번에 화를 풀고는 종석 의 뺨에 루즈자국을 남겨 주었다. "자기야- 사랑해." 그것마저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지 종석은 덤덤한 얼굴로 가게를 나와 빠르게 걸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연락 가능한 정보원이 몇 명이나 되더라.' 사상자 4000명, 이것은 전국을 떠들석하게 하는 기막힌 사 건이었다. 모든 언론이 테러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서 집중 적으로 보도했고 서울 일대의 초, 중, 고등학교가 모조리 휴 교령을 내걸었다. 때를 같이하여 잠잠했던 사이비 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자신만의 신을 찬양했다. '벌써 종말은 아니겠지?' * * 호영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점심시간에 살짝 학교를 빠져 나와서 땡땡이를 쳐버린 그는 빵집의 여자를 어떻게 꼬실까 궁리하고 있었다. 벌서 붉은 장미 한다발을 샀고 미리 준비 해둔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가게 끝날 때 쯤에 간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도 싫었다. 산뜻한 연노란색의 우 산으로 쏟아지는 비를 막으며 호영은 빵집으로 갔다. 이렇 게 비가 오는 날, 감수성이 풍부해지기 쉬운 이런 때는 바 로 절호의 찬스. 더할나위없는 기회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학교가 박살나고 친구며 선생이며 할 것없이, 다 죽어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삼촌인 학교의 이사장까지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라는 사실 까지. "어서오세… 앗!" 활발한 목소리로 손님을 반기던 지현은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너무 일찍 왔나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보고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지독히도 느끼한 대사였지만 준수한 용모의 호영이 말하 자, 그럭저럭 들을만했다. 순진한 지현의 얼굴에 홍조가 피 어올랐다.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녀는 갑자기 어제의 일이 떠올라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 입맞춤이라니!'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은 홍시마냥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받아요." 적당한 아부에 더불어서 선물공세, 정공법 중에 하나이다. 호영이 내민 커다란 꽃다발을 보고 지현은 감탄했다. '와아, 비싸겠다.' "그럼 어제의 대답 들을 수 있을까요?" 그는 항상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설령 속이 타들어갈 정도 로 초조하다고 해서 상대에게 그걸 내비쳐서는 안된다. 심 리적 우월감을 심어주면, 여자는 '이 정도의 남자 쯤'이라는 생각을 하며 차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 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잘난체가 아니 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게 해야한다- 상대는 기꺼워하며 받아들인다. 대개는. 호영에게 연애란 고도의 심리전이었고, 삶의 재미였다. "대, 대답이요?" 그녀가 말을 더듬자 호영이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제 고백에 대한 대답, 받으려고 왔어요. 내 애인이 되어주 지 않겠어요?"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려던 그녀의 얼굴에 다시 화악 붉은 기가 번졌다. 그걸 지켜보던 호영은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 다. '화아, 저렇게 부끄러운 말을 어떻게 하지?' "그러니까 그게……."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배었다. 이 순간은 아무리 쉬운 공략 이라도 이렇게 긴장이 되었다. 카사노바라는 소리를 듣는 지금에도 호영은 이 스릴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제 한번 만 재촉해주면 대답이 튀어나오리라. "내가 싫어요?" 아마 연기자로 나섰으면 대성했으리라 생각하며 호영은 마 지막 대답을 기다렸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끼이이이익!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가게 바로 앞 에서 차가 급정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탄탄한 근육, 짧게 깎은 머리 카락, 장난기가 도는 짖궂은 얼굴의 남자. 백호가 가게 안으 로 튀어들어왔다. "김지현!" "…백호 씨?" 백호가 갑자기 사라진 지도 벌써 2개월이 넘었다. 말도 없 이 사라져서 화도 났었지만, 그보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 가움에 지현은 백호를 욕할 수가 없었다. 피할 겨를도 없이 백호가 지현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와하하핫.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으윽. 그럼 내가 죽길 바랬어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던 지현은 숨이 막힌 나머지 백호 의 명치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워낙 단련된 몸이라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녀는 눈을 감고 신을 찾으며 무릎을 살짝 차올렸다. "……." 타격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단련이 되는 곳이 있 고 불가능한 부위가 있는 법, 백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루이시블이 그 광경을 보더니 매우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프겠네요." "백호. 애 못 낳는다." 나이린의 한마디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주르륵 흘러내 린 백호는 땅바닥에 널브러졌고 심각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질 않았다. '뭐, 뭐야. 이건.' 호영은 작업이 성공하기 직전에 방해받자 꽤 열도 받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일단 선방을 날리고 나자 지현은 쌓였던 분노를 터뜨리기로 작정했는지 백호를 발로 자근자근 밟아대기 시작했다. "봉급은 빵값으로 싹 미리 받아간 주제에, 중간에 없어지 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자근자근. 콱콱. "으윽, 잘못했어." 백호에게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지현이었다. 어느정도 기분이 풀리고 나서야 그녀는 백호의 등에서 발을 뗐다. "무슨 일로 나타난 거예요? 다짜고짜 살아있었냐고 물어보 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저 뒤의 미녀들은 뭐예요?" 미녀라는 단어에 호영의 눈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금발 의 청색 눈동자를 지닌 육감적인 몸매의 섹시한 여자와 빛 도 반사하지 않을 정도로 검은 머리칼에 창백한 피부를 지 닌 선글래스를 낀 여자가 문가에 서 있었다. 둘 다, 흠잡을 데 없는 몸매의 소유자였기에 호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으, 뭐야 이 분위기는? 고백이라도 받은 거야? 에이, 설 마 그럴 리는 없을 테고." 금세 몸을 일으킨 백호는 꽃다발을 발견하고 놀리듯이 말 했다. 그리고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을 지으며 호영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 뭡니까." "형씨, 눈이 삔 건 아니야?"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호영은 백호를 후려갈기는 대신에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눈이 멀어버리겠 죠." 닭이 되버릴 뻔했다. 미간이 일그러졌고, 입이 뒤틀렸으며 눈은 한껏 찡그렸다. 백호는 못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으로 귀를 탈탈 털어내더니, 지현의 손을 잡아챘다. "연애고 나발이고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여긴 위험해." 백호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3시가 되려면 20 분이 남았다. 예측대로 3시까지 그들이 온다면 그 전에 빠 져나가면 되는 것이다. 루이시블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그 때, 호영이 버럭 소리쳤다. "뭐하는 겁니까!" "에?" 우뚝.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쟤 왜 오버하냐?'라고 백호가 지현의 귀에 속삭였고, 나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 인간'이라고 중얼거렸다. "지현 씨에게 용건이라면 제가 먼저 있었습니다. 기다려주 는 게 예의 아닙니까?" 4시 45분, 15분 남았다. 슬슬 초조해지는 백호는 인상을 찌 푸리고 호영의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 "…웃기는군." "배, 백호 씨." 지현이 백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그를 말리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네 놈 용건이 뭔데? 그런 반반한 얼굴을 하고 옷을 잘 차 려입으면, 그 더럽고 음탕한 눈이 가려질 거라고 생각했나? 여자를 하룻밤 놀이개로 여기는 녀석이 무슨 용건?" 힘이 성장함에 따라 심안(心眼)이 미약하게나마 트인 백호 는 단번에 호영이 어떤 인간인지 간파했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심성이 너무 고약해보이는 데다가 지금 지현까지 건드리려고 했으니 참기 어려웠다. 물론 타 락천사들의 습격 때문에 초조하다는 것도 한몫했다. "뭐야? 이 새끼가!" 결국 폭발하고 만 호영은 백호에게 펀치를 뻗었다. 몸이 탄탄하고 운동으로 다져진 것 같았지만 자신도 학교에서 알 아주는 싸움꾼이었으니 꿇린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호영의 뻗어진 팔을 백호가 왼손 으로 흘려내면서 동시에 오른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퍼억! 호영의 명치에 펀치를 꽂아넣은 백호는 물흐르듯 움직여서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어올렸다. 호영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 려 했지만 백호는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반대쪽 옆구리에 돌려차기를 선사했다. 퍼억! 겨우 세 대를 맞았을 뿐이지만 호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실제로 시야가 흐려졌고 곧 정신을 잃어 버렸다. "무, 무슨 짓이에요. 손님한테!" "손님은 무슨……." 아는 사람이라는 것보다, 자신에게 고백을 한 남자라는 것 보다도 '손님'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된 분노의 원인이었다. 백호는 금세 살기를 누그러뜨리고 지현을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어. 가면서 설명할게."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했다는 생각에 백호는 어서 빨리 움 직여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 이건?' 백호의 안색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가게밖에서 느껴지는 이 강대한 기운. 하나하나가 루이시블의 수준이거나 그 이 상이었다. 어둡고 음습한 타락천사의 힘이 느껴졌고, 나이린 과 비슷한 종류의 기운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위압적인 기 운 하나가 가게에 점점 다가왔다. 나이린도 루이시블도 이 미 그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입을 다물고 문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끼이익, 기묘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하나?" 은은한 색기가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타락천사, 치렁 치렁하게 기른 머리가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그렇다고 못알아볼 루이시블이 아니었다. "아뮤릿… 지나이온." "오랜만이지? 루이시블 크라제토. 배신한 여덟 번째 래픽 스 샤딘. 그리고 환생한 바뮤즈." 지금까지의 아진이 아니었다. 조금도 힘을 감추지 않고 한 껏 드러낸 그는 장난기 넘치던 그 아진이 아니었다. 실내의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가기라도 한 듯 루이시블의 몸이 덜덜 떨렸다. 심지어 백호까지 아무말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저런저런. 다들 겁먹은 거야? 흐응, 그러지 말고 밖으로 나와. 물론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버려, 이 일대에는 이미 차 원결계를 쳐놨으니까." 비록 남성체였지만 외모는 여성체에 가까운 아진이었다. 그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잔인하게 웃었다. "어서, 나와. 다들 기다린다구." 연인에게 말하기라도 하는 듯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 하 지만 그의 힘을 감지한 백호는 전율을 느꼈다. * * 비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아직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었지만 비는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루이시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카엘이 그녀가 나오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루이시블은 아주 잠깐 그에 게 시선을 뒀다가 곧 아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돌아와라, 루시! 넌 지금 바보짓을 하고 있어!" 침착하고 냉철하기로 소문난 카엘이었지만 동생에게만은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안타까움과 짙 은 회한이 깃든 그의 눈빛을 분명 루이시블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건… 내 검이군요." 카엘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똑같은 형태의 쌍검(雙劍), 얇 고 길어서 여성스러운 점이 강조된 그것은 본디 그들 남매 가 나눠가졌던 것이다. "어째서 당신이 내 것을 갖고 있는 거죠? 내가 언제까지 바보처럼 모르는 척 해줄 거라고 생각했나요? 당신에겐 그 런 자격이 없어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녀의 푸른눈동자는 깊은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난… 난, 다만…" 그녀의 맹렬한 비난에 카엘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루이시블이 쐐기를 박듯 잔인하게 그의 마음을 긁어버렸다. "뭐라고 변명하든, 뭐라고 합리화시키든 결과는 변하지 않 아요. 당신은 내 어머니를 죽였어!" 이유는 있었다. 비록 그녀가 저렇게 비난하고 있었지만 약 육강식의 세계인 마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논리였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어간다. 그러므로 남아있는 것은 단련된 강자뿐이었다. 그게 설령 부모와 자식 관계라도 마 찬가지였다. '내 어머니? …남매라며?' 문득 의문이 든 백호는 곧 결론을 내렸다. "네 어머니, 바와사가 날 죽이려 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복남매로군.' "웃기지마! 당신은 완전히 무력화된 어머니를 죽였어. 죽이 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앙칼진 루이시블의 외침. 그 바람에 화가 난 무온이 끼여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기를 들어? 넌 왕께 충성을 다해야 하는 제왕의 검, 래픽스 샤딘이다! 고작 천사에게 빠져서 왕의 위(位)를 내던진 자에게 붙다니. 너야말로 웃기지마!" 외모는 비록 제일 어려보였지만 서열로 따진다면 무온은 카엘의 바로 위였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백호의 눈이 커졌 다. 메르니츠가 보여줬던 전생의 기억에서 거대한 활을 들 고 자신을 자신을 공격하던 소년 모습의 타락천사였다. "무온…인가?" 순간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무온은 놀란 눈으로 백호를 바 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탄성을 터뜨렸다. "바뮤즈, 설마 당신입니까?" 줄곧 루이시블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모조리 백호에 게로 꽂혔다. 거추장스럽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근육질의 몸, 전투에 방해된다며 짧게 잘라버렸던 머리칼, 그리고 패 기넘치는 생김새. 분명 전생의 바뮤즈와 닮았다. "내 이름은 백호야. 백호라고 불러."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백호가 선언했다. 뭐라고 하 든 기억도 제대로 나지않는 전생의 인물에게 자신을 먹히는 것은 싫었다. "전대(前代)의 수장과 현 수장의 만남이라구." 토돌이 재밌다는 듯 흥얼거렸다. 사상 최강의 수장이었다 던 메르니츠의 소유자 바뮤즈, 현 수장이자 휴즈의 충성스 러운 부하 아뮤릿 지나이온. "토돌, 닥쳐라."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자 아진이 인상을 썼다. '도망갈 수 있겠어?' 백호가 입모양만을 움직여 루이시블에게 뜻을 전했다. 루 이시블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차원결계를 뚫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요. 시전자가 스스로 거두게 하거나 없애버리기 전에는.' 역시 그렇다는 말이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깨 달은 백호는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이었다. 이렇게 도망만 다닌다는 것은 적성에 맞질 않았다. 전신의 근육이 서서히 긴장하면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오라! 오랜 나의 벗이여!] 쿠쿵! 몸속에 잠들어 있던 암흑기(暗黑氣)가 반응했다. 눈앞에 적 이 피를 들끓게 했다. 흑색 오라가 백호의 몸에 서린 채, 천 천히 유형화되고 있었다. [마신포(魔神砲) 메르기온!] 즈아아앙! 메르니츠의 또 하나의 형태, 메르기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 서린 검은 오라가 오른팔로 모여들어 포가 되었고, 그 위로 자색 마법진이 빼곡이 그려졌다. 용이 입을 벌린 것과 흡사하게 생긴 메르기온을 오른손에 덧씌운 백호는 땅 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저게 뭐야?" "메르기온? …메르니츠가 아니라?" 순식간에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간 백호는 구름 사이 에 가려진 달을 등지고 아진을 조준했다. 그의 생각을 진작 에 알아챈 루이시블은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어의 영창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시동어 뿐이었다. 그건 나이린 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날아오른 백호 때문에 적들의 시 선이 하늘로 집중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 있다면 받아봐라. 아진!" 유치한 도발. 백호가 전신의 힘을 메르기온에 쏟아붇자 소 규모 증폭 마법진들이 자색의 빛을 강하게 내뿜었다.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조준이 흔들 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오른손 끝, 포구라고 할만한 그곳 에 커다란 흑자색 구체가 생성되었다. "흐응, 신기한 무기로군." 까마득히 먼 거리에서도 초인적인 시력으로 백호의 메르기 온을 주시한 아진이 코웃음을 쳤다. 백호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기껏해야 가장 약한 토돌보다 조금 아래인 정도였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주인이 형편없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좋아. 그걸로 공격해 봐라. 받아주마." 작게 중얼거린 아진은 허리에 찼던 검을 손에 쥐었다. 다 크실버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그의 애검 '루오나'였다. 온 신 경을 백호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에게 전혀 엉뚱한 곳에서 공격이 날아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염화(炎火)의 광시곡(狂詩曲)!(Flame Rhapsody)] [네피림의 눈물] 콰아아아아아! 쐐애애애애액! 수십, 수백, 수천갈래의 불꽃이 모든 방향에서 그를 물어뜯 으려 했다. 아진은 잇소리를 내며 루오나를 휘둘러 무수한 잔영을 남기며 불길을 받아냈지만 그 뒤를 따른 잿빛의 마 법화살은 완벽하게 막아낼 수가 없었다. 퍼퍼퍼퍼펑! 순간적으로 손을 휘둘러서 만든 실드는 약간의 공세를 막 아내고 깨져버렸고, 덕분에 아진은 적어도 스무발이 넘는 네피림의 눈물을 고스란히 맞아버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 까짓 공격이야 얼마든지 막아냈겠지만 상대가 백호여서 너 무 방심한 탓이었다. '자연의… 기운이라고 했나?' 구 노인과 싸울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백호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 때는 탈진한 상태에서 무 의식 중에 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힘을 스스로 끌어내 야 했다. '이런… 느낌인가?' 따스함이 백호의 몸으로 대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한줄 기 청량감이 그의 긴장한 몸을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눈 을 감고 있어서 그는 보지 못했지만, 흑자색을 띄고 있던 메르기온의 구체는 서서히 팽창하며 맑은 주홍빛으로 전환 되었다. 대자연(大自然)의 기(氣)와 암흑기(暗黑氣)는 백호 라는 몸을 매개체로 아무런 충돌없이 하나의 힘으로 전환됐 다. <주인. 또 성장했군> 백호는 가만히 입끝을 말아올리며 웃었다. 메르니츠의 익 살스런 목소리가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됐다. 눈을 뜬 백호는 맑은 주홍빛의 구체를 보고 놀랐으나 곧 침착하게 아진을 조준했다. 나이린의 공격 때문에 그는 아직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전개! 메르기온!] 우우우우웅! 예전에 처음 메르니츠를 풀파워로 전개했을 때, 어깨가 빠 졌다는 사실을 의식한 백호는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주홍 색의 포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느리게 쏘아져 나갔다. 너무 느린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그것은 눈 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급가속을 하며 날았다. 허공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줄기 주홍색 빛의 잔상뿐이었다. "아진! 위다, 피해!" 카엘이 경고했지만 메르기온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진 에게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눈부신 섬광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아아아아앙! * * "뭐야, 저게 도대체 뭐냐구." 가게에서 절대 나오지 말고 숨어 있으라는 백호의 말에 그 녀는 몸을 푹 숙인 채, 창문으로 밖을 훔쳐보고 있었다. 도 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 오랜만에 나타난 백호는 자신 에게 고백을 하던 남자를 기절시키고 -지금도 바닥에 누워 있다- 영문모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영화 촬영인가?" 특수효과? 말도 안되는 소리.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결론은 없었 다. 꿈이 아닐까 볼을 주욱 당겨본 지현은 눈물을 찔끔 짜 내고 나서야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흐아아앙. 이게 뭐야아." 경찰에 신고해보려고 했으나 가게 전화기는 물론이고 핸드 폰까지 먹통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빨리 뛰는 심장을 진정 시키려고 심호흡을 하면서 백호를 응원하는 지현이었다. 이 왕 이렇게 된 것, 영화 보는 셈 치자는 심산이었다. '백호 씨, 화이팅!' * * "흐흥, 위험했어. 아-주 위험했어. 하지만 역시 소용이 없 었는걸?" 아진은 '아주'라는 말을 길게 끌면서 백호를 비웃었다. 사 실 아진 자신도 맞았더라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을지 모 를 정도로 강한 마력포였지만 안맞았으니 그만 아닌가? 다 만, 여섯 네피림은 저마다 창백해진 낯빛으로 속에 고인 울 혈(鬱血)을 토해내고 있었다는 게 피해라면 피해였다. "제기랄!" 어렵사리 생각해낸 공격이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차원 결계를 생성 후 뒤에서 쉬는 중이었다- 여자들이 아진을 대신해서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여섯이서 공명을 일으켜 서로의 마법을 증폭시키는 희한한 방법으로. "저들은 설마… 네피림?" 잿빛의 머리카락, 나이린과는 달리 흰자위가 구분이 되는 회색 눈동자. 그리고 무감각해 보이는 표정. 나이린의 표정 이 살짝 굳어졌다. 상대방의 정체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이 미 인지한 것이다. 나이린은 저도 모르게 루이시블에게 속 삭였다. '나보다. 강해.' '새로 만들었나봐요.' "잘했다. 메사트, 피해는?" 슬쩍 주위의 네피림들을 돌아본 메사트가 고개를 깊게 조 아렸다. "모두 가벼운 충격을 받았을 뿐입니다. 신경쓸 일이 못됩 니다." 적어도 한명은 미리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백호는 이 를 바득 깨물었다. 어설픈 공격이 오히려 경계만 산 셈이었 다. 그는 빠른 속도로 낙하해서 나이린과 루이시블 옆에 섰 다. 그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본 아진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 했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스키엘은 어디에 있지? 같이 오지 않았나?" <도망가라, 주인. 현재의 힘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바뮤즈 때의 주인이라고 해야 이길 수 있을 정도다> 백호는 메르니츠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아진의 말에 빈정거림으로 대답한 것이다. "걔 가출했어." 화를 내야할 아진은 은은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빵집을 향해서 손을 펼쳐서 팔을 내뻗었다. [터져라] 무형의 기운이 그의 손에서 쏘아졌다. 지현이 가게 안에 아직 있다는 사실에 다급해진 백호는 땅을 강하게 내딛어 뛰어올라서 무형의 기운을 메르기온이 장착된 팔로 막아냈 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백호는 속을 뒤집 는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멍청이! 갑옷으로 전환하고 막았어야 할 것 아냐! 패검 (佩劍)은 어쩌고 맨손으로 주먹질이야? 너 정말 바뮤즈 맞 냐?> 주인이라고 부르던 호칭은 어느새 '너'로 바뀌었다. 자신의 무구에게조차 무시를 받는 백호였다. "다시 묻겠다. 스키엘은 어디에 있지?" 아진의 말을 무시하고 백호는 메르기온을 갑주 형태인 메 르니츠로 전환시켰다. 여전히 완벽한 전신갑주의 형태는 아 니었지만 그런대로 천년 전의 바뮤즈를 떠올리게 할만한 모 습이었다. 물론 탐스럽던 열 장의 날개는 온데간데 없지만. "정말 바뮤즈…였어?"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하던 무온이었지만 메르니츠를 장착하 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믿어버리는 눈치였다. 흑색의 갑옷 으로 무장한 백호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진에게 가운데 손가 락을 내밀었다. "엿이나 먹어." <제정신이 아니군. 미치광이 주인이라니, 젠장> 메르니츠는 절망했다. * * 전투는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실험작에 불과한 나이린을 여섯 명의 네피림이 상대했고, 서열 8위였던 루이시블을 4 위인 무온과 9위인 토돌이 맡았으며, 전대의 수장이었던 백 호를 현 수장인 아진이 상대했다. <왼쪽이다!> 사악한 기운을 머금은 은빛 궤적이 백호의 옆구리로 파고 들었다. 메르니츠의 외침에 따라 백호는 손으로 원을 그리 며 그것을 막아냈다. 양팔의 갑주는 메르니츠의 자체변형으 로 굉장히 두텁고 단단해진 상태였기에 그 어떤 갑옷이라도 베어낸다는 루오나를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완전한 상태 의 메르니츠였다면 이런 자체 변형 자체가 필요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등 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백호의 움직임은 구 노인의 그것을 완전히 베껴온 상 태였다. 선가태극권을 쓸 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인 권격과 기운의 이동은 상당부분 응용할 수 있었다. 상대보다 힘이 모자랄 때에 쓰기 좋은 것이었다. '생각보다 강해! 지금까지 상대했던 누구보다도 더!' <당연하잖아, 멍청아! 래픽스 샤딘의 수장이라는 말은 다 루카의 일족을 제외하고는 상대할 자가 없다고!> 아진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무수한 잔영을 남기며 백호의 빈틈을 찔러갔다. 동물적인 감각과 오랜 세 월동안 쌓인 경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백호를 압박해갔 다. <피해! …얼씨구? 그걸 맞냐?> 루오나가 휘둘러지는 속도는 음속에 가까웠다. 가까스로 피한다고 해도 충격파로 인해서 자잘한 상처가 남았다. 만 약 메르니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백호는 단번에 두동강이 나버렸을 것이다. 메르니츠는 그 와중에도 쉬지않고 종알거 렸다. "하압!" 아진이 백호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백호도 단단히 작정을 했는지 팔목으로 막아내는 것은 그만두고 검 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 다. <위험해!> 위험을 감지한 메르니츠가 빽 소리를 지르며 경고했지만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상태에서 상대의 무 기를 놔준다는 건 자살행위였고, 백호는 그 사실을 잘 인식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아진 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의 눈이 백호를 비웃었다. "루오나의 날을 잡다니, 대단하군." 감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백호가 손에 힘을 넣는 것을 내버려 둔 채, 작게 읊조렸다. [루오나] 시동어이자 검의 이름! 루오나에서 짙은 보라색의 빛이 뿜 어져 나오는 듯 싶더니 백호의 손에 엉겨붙었다. 벌레가 파 먹는 고통과 불속에서 태워지는 아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저주받은 달의 축복을 받은 루오나의 능력은 메르니츠에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그 내부에 있는 백호에게만 고통 을 주는 괴이한 것이었다. "크윽!" 결국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학 루오나에서 손을 떼는 동시 에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날개 소환." 파라락! 검은 빛의 입자들이 아진의 등 뒤에서 모이더니 급기야 열 장의 날개가 생성되었다. 날개가 기지개를 하듯 한껏 펼쳐졌다가, 이내 빠르게 펄럭이며 아진의 몸을 허공 으로 띄었다. "아무리 환생했다지만, 너무 약해졌구나. 바뮤즈." 부우웅! 그가 루오나에 암흑기(暗黑氣)를 주입하자, 검이 진동하면 서 점점 길어졌다. 그저 장검이었던 루오나는 어느새 양손 대검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아진은 날개를 움직여 급격 하게 가속하더니, 한줄기 빛이 되어서 백호를 따라잡아 그 의 갑주로 보호된 등에 검을 박아넣었다. 메르니츠의 방어 력도 제약이 되질 않았다. 손에 묵직한 느낌을 즐기며 아진 이 웃었다. "이제 지겨운 인연, 끝내자." 흐릿하게 보이는 아진의 얼굴에 백호는 피식 웃어버렸다. "지독하게 빠르…네." <주인! 정신 차려!> 아진이 검을 확 뽑아내자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튀어올랐 다. 백호는 치명상을 입었고, 오른쪽 가슴에 깊은 검상을 남 긴 채 서서히 추락했다. 벌써부터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 다. * * 퍼퍽! 퍽! 여섯의 네피림은 마치 한 몸과 한 육체를 지니기라도 한 듯 엄청난 속도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차륜전을 펼치고 있 었다. 그동안 백호와의 대련으로 약간이나마 경험을 쌓지 않았더라면 나이린은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 밀리기는 마찬가지, 아니 완전히 놀림받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옴-카바린은 그녀를 쉴새없이 몰아붙였고 효율적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지-옴-카바린 얼어붙은 마음] [지-옴-카바린 얼어붙은 마음] [지-옴-카바린 얼어붙은 마음] [지-옴-카바린 얼어붙은 마음] [지-옴-카바린 얼어붙은 마음] [지-옴-카바린 얼어붙은 마음] 여섯 네피림은 나이린을 둘러싸고 회전하며 마법을 공명시 켰다. 그들의 기운의 파장은 거의 일치했고, 덕분에 별다른 방법 없이도 저절로 마법이 융합, 증폭되었다. 새하얀 차가 운 얼음의 기운이 그물망처럼 나이린을 덮쳤다. [네피림의 불꽃, 나를 감싸라] 화르륵! 불꽃이 나이린을 보호하기 위해서 화려하게 솟아 올라 상극인 얼음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여섯과 하나의 힘 의 차이는 대단한 것. 최대한 강하게 만든 불꽃의 벽이었지 만 '얼어붙은 마음' 둘이 나이린의 몸을 강타했다. "우욱." 또다시 내부가 진탕된 그녀는 피를 왈칵 토해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불안정한 몸이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마법에 직격당한 왼손과 오른쪽 발목이 얼어버려서 움직이 질 않았다. "항복해. 이건 효율적이지 못한 싸움이다. 승패는 뻔하지 않은가." 네피림들의 리더인 메사트가 전투불능에 가까운 나이린의 상태를 보고는 제안했다. 어차피 '제압하라'라는 명령을 받 았으니, 항복만 받아내더라도 상관 없다. 그녀를 없애려고 든다면 스스로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니 그건 피해야한 다고 메사트는 생각했다. "항복?" 이상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나이린이 눈매를 올리고 주위 를 둘러보았다. 백호가 피를 뿌리며 추락했고, 루이시블은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고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나이린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호와 루이시블이 먼저 항복을 한다면 당연히 자신도 그들의 뜻을 따르겠지만, 지금처럼 혼자만 빠져나갈 수는 없다. 비록 도망가는 것조차 불가능 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결국 싸움을 선택한 나이린은 아직 움직이는 오른팔을 쭉 뻗었다. [어둠의 하나. 빛의 하나. 인간의 하나. 나이린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와라.] 파라라락! 날개에서 잿빛 깃털들이 무수히 떨어져나왔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 었다. 힘을 무리해서 운용하자 암흑기(暗黑期)와 천사의 힘 이 균형이 깨졌다. 게다가 무리한 전투 때문에 몸이 내부부 터 망가졌다. 입가에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시커먼 먹피가 그것을 증명했다. [네피림의…] 그저 탁하기만 한 그녀의 눈에 언뜻 슬픔이라는 감정이 스 며들었다. 인간들이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 내가 느낀 것과 같을까? 때론 따스하고, 때론 날 웃음지게 하며, 항상 함께하고 싶 은 그것.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것이 '마음'인 건가? […눈물] 이게 마음이라는 것이라면… 난 죽고싶지 않아. 쐐애애애애액!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발현된 네피림의 눈물이 사방의 지 -옴-카바린에게 날아들었다. 마지막 힘을 쏟아낸 나이린은 눈을 감았다. '안녕, 백호. 루이시블. 그리고 나의 주인, 시윤…….' * * 토돌과 무온을 상대하면서 간간히 백호와 나이린에게 한눈 을 팔던 그녀는 결국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백 호가 추락하는 것에 놀란 나머지 무온이 쏘아낸 화살을 미 쳐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깊게 패인 어깨를 왼손으로 억누 른 그녀는 절망하고 말았다. "나이린까지!" 루이시블은 여기에 괜히 왔다며 후회했다. 백호가 다시 일 어나지 못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었고, 나이린은 모든 힘을 퍼붓고 실드를 펼칠 힘조차 남지 않아서 네피림들의 공격을 고스란히 맞아버렸다. 퍼퍼퍼펑! "안돼에엣!" 아무리 냉혈한인 루이시블이었지만 그동안 나이린에게 정 이 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린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나이린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루이시블은 착각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숨이 끊어진 것이 다. 처음부터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계속 숨어서 힘을 키웠 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백호를 말렸어야 했는데. 그 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한눈을 그렇게 파시나." 부우우웅! 채찍으로 재차 날아든 화살을 쳐낸 그녀에게 녹 보석이 박힌 지팡이가 휘둘러졌다. 루이시블은 여러겹으로 감겨 팽팽하게 당겨진 채찍으로 토돌의 지팡이를 퉁겨냈다. 이런 타격용의 무기에는 방패나 검으로 막는 것보다 반탄력 이 좋은 채찍을 응용하는 게 낫다는 건 예전부터 체득한 사 실이다. [잔! 만! 단! 하디크! 그림자여, 적을 붙잡아라!] 무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토돌의 주특기는 육탄전이 아닌 마법이었다. 그는 한손으론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큰 지팡 이를 휘두르며 다른 한손으로는 허공에 규칙적인 도형을 그 려냈다. 지팡이의 녹보석이 빛을 발산했다. [미브! 디온! 가우! 바람의 영이여, 적을 말살하라!] 두가지의 주문을 한꺼번에 영창한 토돌은 지팡이를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 물지 않았는데도 허공에 나타난 기묘한 형상의 새까만 그림 자들은 지체없이 루이시블에게 달려들었다. "허튼 수작!" 세 쌍의 날개를 모두 펼친 그녀는 일신의 기운을 남김없이 끌어올린 상태였다. 타오르는 염화의 기운을 머금은 붉은 채찍이 그녀를 봉쇄하려던 그림자를 모조리 갈라버렸다. 크아아앙! 바로 그 뒤를 이어 푸른빛의 늑대의 모습을 한 바람의 영 이 반투명한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흥! 겨우 영체 주제에 누구에게 이빨을 들이대는 거냐!" 휘리릭! 화염의 채찍이 허공에서 저절로 풀어졌고, 그녀가 손잡이에 약간의 힘을 가하자 꼿꼿하게 서서 창처럼 변했 다. 날카롭게 변한 채찍의 끝이 그대로 푸른 늑대의 미간을 꿰뚫었다.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를 남기고 영체는 사라졌다. 그러나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쐐애애액! 두 발의 대형화살이 그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바람의 영 체를 처리하느라 감각이 무뎌진 상태에서 당한 공격이었다. 게다가 피하거나 쳐내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몸을 피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푸확! 하나의 화살은 채찍과 충돌하며 힘의 반발력 때문에 폭발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그녀의 날개 한장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며 관통했다. "끼아아악!" 영혼에 가해지는 고통! 천사와 악마의 날개는 영혼의 힘을 끌어내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날개의 장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영혼 본연의 힘이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런 날개 에 상처를 입는다는 건, 영혼에 직접 상처를 내는 것과 다 를 바가 없다. 여간해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날개였지만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느라 탈진한 그녀는 날개를 보호할 힘 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채찍을 놓친 그녀는 거의 추락하는 듯한 비행으로 땅에 간 신히 착지했다. 검은 날개에서 붉은 핏물이 뚝뚝 땅으로 떨 어져 고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는 상처입은 날개 를 거두어 다섯 장의 날개만을 남겨두었다. "후후, 역시 강하군요. 무온 쎄 루나르." 어느새 그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무온, 토돌, 아진, 개량된 네피림… 그리고 카엘. 아직 시작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는데 실패란 말인가. 루이 시블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아버렸다. '스키엘…. 당신만 있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 았을 텐데… 정말로 없는 건가가요. 돌아오겠다던, 모두를 멸하겠다던 약속은 그저 거짓이었나요…….'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상급자인 무온과 아진이 있었지만 우선적인 발언권은 카엘 이 쥐고 있었다. 이것은 암묵적인 약속으로, 그녀의 동생만 큼은 스스로 처리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 카엘의 청량 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일단 전투가 끝나고 나자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마음을 돌리고 래픽스 샤딘의 일원으로 돌아오거나…" 철컥. 카엘이 갖고 있던 얇고 길다란 장검 하나가 루이시블의 앞 에 검집째 떨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선택해라. 자결이 어렵다면 내 가 도와줄 수도 있다." 전신이 떨렸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갈 망했던 것은 자유, 힘의 논리나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상에 서 벗어나 따스한 신천지에서 살고 싶었다. 어머니가 살해 당했음에도 가문의 계승자가 될 정도로 강하다는 이유만으 로 용서받은 카엘이 싫었고, 마계가 싫었다. 자신을 저주하 고 배다른 오빠를 저주하던 그녀에게 스키엘의 존재는 신 (神) 그 자체였다. 타락천사의 왕이며 마계의 지배자인 그는 고작 한 천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힘이 아 닌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전율이었다. 그 어떤 타천사보다도 냉혹해야 할 그의 모습은 루이시블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때, 그녀는 맹세했 다. 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를 따른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했다. "하하, 하하하핫!" 그녀는 광소를 터뜨렸다. 밝은 금발의 머리칼이 찰랑였고 청색의 눈동자에 너무 웃어서 눈물이 어렸다. 그녀는 속으 로 시윤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하고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시윤. 결국 내 생각은 틀렸나봐요. 멋대로 스키엘의 말을 해석해서 기대했는데… 그게 다 틀린 것 같아요. 당신은 인간 시윤이지, 스키엘이 아니었어요. 그 가 떠나간 이유 이제야 조금은 알겠어요.' 루이시블의 웃음은 이제 매우 포근한 미소로 변해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타천사들은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미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선택했어." 조금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루이시블이 원래는 자신의 것이었을 검을 검집에서 뽑아냈다. 새파란 예기를 발하는 명검, 얇고 길다란 검신은 오히려 장식용에 어울릴 것 같았다. 그녀가 검을 잡자 카엘의 안색이 굳어졌 다. "자결하겠어." 그녀는 양손으로 검을 거꾸로 쥐어 목 언저리까지 들어올 렸다. 날카로운 검의 끝이 새하얀 목에 스치자 금세 핏방울 이 떨어졌다. 이제 가볍게 힘을 주는 것만으로 검은 목을 관통할 것이고… 생명이 끊어지겠지.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검을 약간 더 들어올렸다가 강 하게 끌어당기기 위해 힘을 주었다. 목을 드러나게 하기 위 해서 고개를 쳐들었더니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달이 은 은하게 하얀빛을 내뿜어주었다. '이제 다 끝났어.' 그 순간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죽어도 좋다고 했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무언가 움직 이고 있었다. "누구냐!" 단순히 목소리와 발을 내딛는 소리만 들렸을 뿐인데도, 긴 장해버린 토돌이 결계의 가장자리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 위압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루이시블, 검을 내려놔." 팔에 힘이 빠진 그녀는 들고있던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윽고, 결계의 불투명한 안개 사이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숨막히는 살기를 뿜어내는 핏빛의 눈과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여리게만 보이는 얼굴… 시윤이었다. "여자 품에서 겨우 살아난 겁쟁이잖아?" 토돌은 시윤이 스키엘의 환생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죽거렸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대에게 겁먹었던 것이 못내 억울했던지, 수연이 죽어가던 그 때를 떠올리며 비아 냥거린 것이다. 시윤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토돌, 네가 정녕 죽고싶은 게로구나." 깊은 한숨을 내쉰 시윤이 검게 물들인 머리카락이 눈을 가 리자 살며시 쓸어올렸다. 그는 걸음을 옮겨서 쓰러져 있는 나이린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스키엘인가?" 백만분의 하나라도 가능성은 있었다. 위압적인 말투, 조금 도 굽히지 않는 저 당당함은 전생의 스키엘을 떠올리게 하 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나이린의 사체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데다가 몸의 붕괴가 이미 시작된 상태에서 공격을 받 았기에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너희들까지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는 데……." 목소리에는 한점의 슬픔도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나 메말 라서 사막의 모래를 퍼내는 듯한 느낌. 이미 말라버린 눈물 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아직도 뜨여있는 회색의 눈을 시윤의 손이 가만히 쓸어내려서 감겨주었다. "미안하다. 나이린……." 주인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시윤은 그녀에 게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부디 내세에는 행복하길 빌었 다. 바로 몇걸음 떨어진 곳에 메르니츠를 장착한 백호가 쓰러 져 있었다. 시윤은 그의 상세를 살피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르니츠가 벌써 깨어난 건가." 백호의 오른쪽 가슴은 아진의 루오나에 관통되었다. 하지 만 지금 상처에서는 피가 한방울도 흐르지 않았고, 백호도 혈색이 조금 좋지 않을뿐 살아 있었다. 그것은 모두 메르니 츠가 상처 부위를 꼭 틀어막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이시블! 쓸데없는 짓 할 생각은 말고 백호 형을 데리고 결계 밖으로 나가!" "흐응, 인간 소년.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건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들의 시선이 시윤에게 집중되어 있자 루이시블은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시윤의 곁으로 가버렸다. 아진은 그 녀가 움직이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쓰레기 같은 환생체 주제에 건방지구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무온이 활을 당겼다 놨다가를 반복했다. 확 죽여버리고 싶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시윤은 최대한 무관심을 가장한 채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직 접 뚫고 들어온 결계의 일부는 어느새 막혀버렸다. 루이시 블이 입구를 새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렇다고 자신이 앞장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루이시블, 백호 형을 데리고 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있 어." "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반문한 그녀는 이윽고 자신의 귀가 정상임을 알 수 있었다. "들어가서 네가 생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막을 건물 전체에 걸어. 이건 명령이야." "하, 하지만 그럼 시윤은?" "어서!" 명령이라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루이시블은 어리둥절했지 만 시윤의 강한 위압감에 눌려 부상당한 백호를 들쳐메고 빵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건물에는 연노란색의 반구가 씌워졌다. 두께가 1미터는 될법한 지독 히 견고한 것이었다. 시윤은 보호막이 완전히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진에게 시선을 향했다. "오랜만이지?" "그렇군, 인간 소년. 아니 스키엘인가?" 시윤이 소리내어 웃었다. 건조한 먼지가 뒤섞인 듯한 전혀 유쾌하지 않은 웃음소리였다. "시윤이라고 불러. 그게 내 이름이니까." "몇가지 물어도 되겠나?" 대화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시윤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결계 안으로 들어온 거지?" "입구를 만들었으니까." 입구를 만든다. 굉장히 추상적인 대답이었다. 차원결계에 출입구 따위는 없었다. 여타 결계와 격을 달리하는 그것은 공간과 공간을 완전히 분리하기 때문에 결계를 해제하지 않 는한 안과 밖을 왕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또 하나, 어째서 루이시블을 저런 조악한 곳으로 도망가 게 한 거지? 차라리 싸우는 편이 살아날 가능성이 더 높을 텐데?" 그래봐야 개미눈물만큼이겠지만. 하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었다. 부상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루이시블의 전 투력은 인간 시윤을 가볍게 상회했다. 시윤은 예의 그 메마 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틀려. 나도 하나 묻지. 아까 그 네피림들은 어디 갔지? 분 명히 네 곁에 여섯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크크큭, 곧 알게 될 거야." 어차피 그렇게 궁금했던 일은 아니다. 시윤의 시선이 하늘 로 향했다. 먹구름이 짙게 끼었지만 그 사이로 은은한 월광 (月光)이 쏟아져 내렸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밤이었다. "내가 왔으니까… 저들을 놓아줘도 되지 않아? 어차피 목 표는 나였잖아." 정말 하고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백호와 루이시블을 어떻 게든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주고 싶었다. 아진이 그런 시윤 을 빈정댔다. "위험의 씨앗을 내버려 둘 멍청이라고 생각하나? 마지막 한명까지 몰살시키는 게 우리의 원칙이다." 루이시블이 항복한다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백호는 틀림없 이 죽을 것이다. 카엘의 동생인 그녀와, 전대의 수장이었던 백호는 확실히 대우가 틀렸다. 입술만 깨물며 아무말도 하 지 못하던 시윤이 결국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쓸 수밖에 없겠어." 타탁! 날렵하게 움직여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시윤은 허공에 몸을 띄웠다. 우우우웅! 염색약으로 까맣게 물들였던 시윤의 머리카락이 점점 하얗 게 변하기 시작했다. 루비같이 반투명하던 눈동자가 진득한 핏빛의 살기를 내뿜었다. 대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커다란 공기의 파동이 생겼고, 그것은 무서운 속 도로 상승해서 하늘의 먹구름을 흩어놓았다. "저건 또 무슨 짓이야!" 무온이 일이 커지기 전에 끝내기 위해 화살을 활에 재어 시윤을 겨냥했다. 하지만 아진이 가만히 손을 들어 그를 제 지했다. "달빛을 흡수하고 있어. 지금 건드려봤자 헛수고야." 달빛을… 빨아들인다. 시윤의 두 눈이 허공에서 쏟아져 내 리는 빛을 모조리 집어삼키자 주위는 순식간에 먹물을 칠한 듯한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순백의 월광(月光)은 그의 눈을 통해서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크아아아악!" 그의 내부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어났다. 현재 시윤의 몸의 반은 천사(天使), 그러나 달의 힘은 어둠의 상징이었기에 서 로 융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어!' 죽을것만 같은 고통이 온몸을 두드렸다. 스키엘 없이 혼자 서 달의 힘을 끌어내는 일은 너무나도 힘겨웠다. 아득해지 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으며 시윤은 오히려 더욱 흡수의 속 도를 빨리했다. "무모해. 저렇게 강제로 힘을 잡아두다가는 몸이 터지고 말텐데?" 월광(月光)은 이제 태산같은 기세로 시윤을 감쌌다. 너무 많은 힘을 몸속에 가두면 붕괴될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윤은 멈출줄을 몰랐다.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 한올까지 은월(銀月)의 힘이 모두 차올라서 은빛으로 빛날 정도였다. '목숨따위 포기한 지 오래야. 내가 죽을 곳은 바로 여기 다!' 쿠와아아아! 시윤의 몸을 중심으로 빛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짓을 하고 있어." "월령의 힘을 이용하다니… 불가능한 일이야!" 『달의 정령들아!』 마족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빛, 그것은 달이었다. 그래서 월 령은 최상위의 정령으로 분류되었고, 아쉽게도 다룰 수 있 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눈이 높았다. 마계의 군주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명령을 거 부하기 일쑤였다. '스키엘?' '스키엘?' '스키엘?'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스키엘의 이름을 불렀다. 시윤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난 스키엘이 아냐, 시윤이라고 한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거지? 메아리치듯 그들이 말한다. 여럿이 하나된 의지로 말한다. 그 때는 스키엘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윤이 대답했 다. 『내 힘이 되어다오』 스키엘의 이름을 빌려서 쓴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같은 영 혼을 지녔으니 그들도 인정할 터였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 로 이루어 내고 싶었다. 스키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 었다. 달의 정령들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명령은?' 인정받았다. 시윤은 쾌재를 불렀다. 그들은 스키엘이 아닌 시윤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허락했다. 『내게 힘을 줘』 첫 번째 명령이었다. 시윤은 그들과 얘기하면서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고 느꼈지 만 사실 그건 아주 한순간에 불과했다. 일단 월령의 주인으 로 인정받자 통증이 사라졌다. 미친 듯이 회오리치던 빛줄 기들이 천천히 시윤의 몸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느껴져?" 눈이 동그랗게 변한 토돌이 묵묵히 월광폭풍을 바라보는 아진에게 말했다. 저 빛의 회오리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엄 청났다. 그것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으니 경악에 경악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심각하군." 콰앙! 겉을 맴돌던 빛줄기들이 갑자기 한점을 향해서 모여들었 다. 굉음이 터져나왔고 월광(月光)의 폭풍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한명의 천사가 있었다. 갓 돋아난 여섯 장의 순백색의 날개가 멋들어지게 펄럭였다. "파티 타임이다." 완전한 고위 천사로 변한 시윤이 빙긋 웃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이미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16. Nightmare - 降臨 갑자기 들이닥친 루이시블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수인 을 맺고 힘을 발산했다. 데드론의 공격에도 걱정 없는 최상 급의 실드로 가게를 둘러싼 그녀는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 고 있는 지현에게 말을 건넸다. "놀랐죠?" "아니, 저, 그게…" 이런 상황에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현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었고, 루이시블은 정말로 미안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설명해볼까 생각했지만 지현 의 상황을 봐서는 그것도 무리였다. 루이시블의 시선이 창 밖으로 향했다. 반투명한 연 노란빛 막 바깥쪽에 놀라운 일 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부신 흰빛을 내뿜는 여섯 장의 날개 를 지닌 천사가 악마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시윤! 시윤이 어째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 하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어깨에 서 느껴졌다. 무온의 크림슨 애로우(Crimson Arrow)에 스 친 상처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다시 살펴보니 피가 멈추 질 않았다. 물리적인 공격이 아닌 마법에 의한 상처였기에 자체 치유력으로 회복이 불가능했다. [회복되어라] 간단한 마법어였다. 왼손에서 은은한 노란빛이 피어올랐고, 그녀는 그 손으로 살며시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쓰다듬었 다. 금세 통증이 줄어들었다. 하급의 마법이라 통증을 완화 시키고, 출혈을 멈추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지만 지금은 이 걸로 충분하다. 날개의 상처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손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혼의 매개체인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치유되도록 해야한다. '그러고 보니 백호도 치료해야 할텐데.' 루이시블은 정신을 잃은 백호의 상태를 살폈다. 메르니츠 의 검은 기운이 상처부위를 막아놓아서 큰 문제는 없어 보 였다. 문제는 '루오나'의 사악한 힘이 자체 치유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건 그녀의 능력밖에 일이었다. 백 호가 스스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윤? 그게 저 천사의 이름인가요?" 허리까지 내려오는 눈처럼 하얀 머리칼이 그가 움직일 때 마다 허공에 아름답게 수놓아졌다. 여섯 장의 날개가 마치 망토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지현은 유심히 시 윤을 바라보았다. '본적이 있어.' 붉은 기가 살짝 스며들어 있는 지현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 다. 과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바람의 ……> * * "트리플 윙? 겨우 그걸로 우릴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 나?" 아진이 빈정댔지만 시윤은 토돌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갑 자기 자라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깨끗한 백발의 머리칼이 바 람에 흔들렸다. "힘이 없어서 여자 하나 못 지킨다고 했던가? …그래, 맞 는 말이야." 목소리는 차분했다. 시퍼렇게 쏟아지던 살기 어린 눈빛도 자취를 감췄다. 여섯 장의 날개가 은은한 황금색 입자를 허 공에 흩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조차 할 수 없는 비천한 악마들이 무엇을 알 겠나!" 모든 성스러운 것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 '사랑'을 느꼈다고 당당히 말한 타락천사는 오직 스키엘 하나였다. "토돌, 상대해라." 갑작스런 명령에 토돌이 반문하듯 아진을 쳐다보았다. 한 순간에 트리플 윙으로 성장한 시윤이다. 이왕이면 여럿이서 합공하여 완전히 끝내는 게 낫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생각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의혹에도 아진은 일말의 미동도 하지 않았고, 토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 며 앞으로 나섰다. "수장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어이, 스키엘. 덤벼 보라구." 월령(月靈)의 힘을 얻은 트리플 윙의 천사, 그 힘이 궁금했 다. 토돌의 등에는 시윤과 마찬가지로 여섯 장의 새까만 날 개가 돋아 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날개가 한꺼번에 접혀졌다가 활짝 펴졌다. 물리법칙이고, 음속의 벽이고를 완전히 무시하며 시윤의 몸은 한줄기 백색 빛이 되어 토돌에게 쏘아졌다. '호오, 못 막겠는걸.' 자신의 눈에도 흐릿하게 보이는 움직임이라니, 아진은 감 탄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토돌이 황급히 지팡이를 휘둘렀지 만 시윤은 그것을 교묘히 뚫고 들어가 그의 얼굴을 후려쳤 다. 퍼억! 강력한 타격음과 함께 토돌의 몸은 허공을 날았 고, 시윤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아음속(亞音速)의 펀치에 일격을 허용한 토돌은 두 번째 공격까지 받아야 했다. '제길! 얕봤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 시윤은 토돌의 몸을 한바퀴 돌 며 찍어 찼다. "커헉. …비, 빌어먹을!" 어느새 속이 상해버린 토돌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땅에 처박히려는 몸을 간신히 가눈 그는 날개를 퍼 덕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자신의 힘을 시험해본 시윤은 가는 미소를 띄우며 여유롭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내 이름은 시윤이야." 흥, 웃기지 마. 토돌은 피를 뱉어내고 코웃음을 치더니 지 팡이를 흔들며 주문을 영창 했다. 목표는 시윤! [잔! 단! 만! 루! 보! 사! 메리크! 마에스터여, 적을 섬멸하 라!] 크르르르. 토돌의 앞으로 네 마리의 마물이 나타났다. 붉은 털의 마 수 마에스터, 늑대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머리와 꼬리가 두 개라는 것과 크기가 집채만하다는 게 다르다면 달랐다. 거대한 마물들은 목을 울리며 적을 찾았다. "요즘 마에스터가 안 보인다더니…." 카엘이 신음했다. 자신이 데드론을 길들인 것은 애교로 봐 야 할 정도로 토돌이 한 짓은 대단했다. 마계 마물 서열 1 위가 데드론이라면 2위는 마에스터였다. 파괴력만으로 따진 다면 둘은 비슷했지만 지능이 떨어져서 2위로 밀려난 마물 마에스터, 무식하고 힘만 쎈 족속이었다. 그런걸 네 마리나 소환용으로 피의 인장을 찍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캬아악! 토돌이 시윤을 향해 손짓하자 마에스터들은 일제히 몸을 날렸다. 날개는 없었지만 고유의 부유능력으로 떠오른 그것 들은 각기 입에서 차가운 입김을 뿜었다. 데드론이 불이라 면 마에스터는 얼음, 참으로 상반되는 능력이었다. [월령(月靈)! 보호해라!] 피를 얼리는 차가운 입김은 시윤의 주위로 나타난 은빛의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자신들의 공격이 실패하자 마에스터 는 크게 포효하며 각기 다른 방향에서 시윤에게 돌진했다. 무엇이라도 부숴 버릴 것 같은 칼날 같은 이빨이 그를 위협 했다. 크아앙! "흥!" 시윤은 날개를 퍼덕여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자연 그를 공 격하려던 마에스터들은 방향을 틀어 그를 뒤쫓았다. 어느 정도 치솟은 시윤의 신형은 갑자기 몸을 틀더니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에스터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물리법칙을 완 전히 무시한 너무나 빠른 반전이었기에 가장 앞서있던 마물 은 꼼짝없이 목을 잡혀야 했고, 시윤은 잔인하게 웃으며 손 에 힘을 넣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말이야.' 그르륵. 부아악! 양손으로 마에스터의 굵은 목을 찢어버린 시윤은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온몸으로 맞았다. 웬만한 명검은 이빨 도 안 들어가는 마에스터의 가죽이었지만 시윤의 손은 거침 이 없었다. '내게 이런 힘이 있더라면 어땠을까.' 크아아앙! 크아아아앙! 동족이 죽임을 당하자 분노한 마물들은 미친 듯이 포효하 며 시윤을 공격했다. 한번 발을 휘두를 때마다 풍압으로 바 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이를 부딪칠 때마다 작두가 내 리 찍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시윤은 빙그레 웃으며 그것들 을 여유롭게 상대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해내는 한편, 간간이 휘둘러지는 앞발의 관절을 걷어찼다. '조금은 달랐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지 않아도 됐을까?' 우두둑! 손쉽게 박살나는 뼈, 분노와 고통, 공포를 동시에 느끼고 있는 마에스터. 시윤은 웃었다. 복수의 쾌감이 몸을 강타했 다. '이젠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야.' * * 최상급 마수를 네 마리나 소환한 토돌은 지금 피를 토하고 있었다. 혼으로서 엮어진 마에스터 한 마리가 목숨을 잃자 상당한 충격이 왔던 것이다. "무온, 너도 가담해라." 네 마리나 되는 마에스터, 살육만을 아는 최강의 괴물들이 었기에 토돌로서도 두 마리 이상은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 게 트리플 윙의 한계였다. 하지만 시윤은 입가에 웃음까지 띄우며 그것들을 갖고 놀고 있었다. 무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윤을 향해 화살을 날리며 이동 하자, 갑자기 카엘이 입을 열었다. "뭐지?" "왜?" "왜 시간을 끌고 있지?" 카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처음부터 합공을 했 더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태도로. 아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얼마 전에 왕의 전령이 왔었다." 모두에게 비밀로 했지만. "스키엘이 나타나면…" * * 오오오옴! 수천 미터 높이로 날아오른 네피림들은 똑같은 음성으로 똑같은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그 어떤 소리라고도 할 수 없는, 일종의 진동이었다. 차원결계를 만들 때와 같은 배열 로 위치한 그들은 저마다 탁한 회색 빛을 뿜어냈다. 오오오옴! 최고위급의 마법이라는 차원결계를 만들 때와는 비교도 되 지 않을 정도로 강한 공명이 일어났다. 시윤이라는 인간이 결계를 침입할 때 아진은 메사트에게 은밀히 명령했다. '문'을 열라고. 그 뒤로 네피림들은 공기마 저 희박한 하늘에서 지속적으로 힘을 보내며 주문을 진행했 다. 이제 막바지에 달했다고 느낀 메사트는 주문을 마무리 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냈다. [열려라! 차원의 문이여! 저 깊은 곳, 저 어두운 곳. 저주받 은 마족들의 세계를 연결하라!] 네피림들에게서 한없이 증폭된 회색 빛이 어두운 밤하늘을 꿰뚫었다. 하늘에 구멍이 나기라도 한 듯, 커다랗게 뚫린 하 늘에서는 사악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지옥의 그것 이었다. * * 느껴진다. 그가 왔다. "크하하핫!" 마야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 지옥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무온의 공격을 적절히 피해내는 것과 동시에 마에스터를 잡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다. 하지만 시윤은 결국 마에스터 를 모두 죽여버렸고, 몸에 피칠 갑을 한 모습으로 무온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버린 겁니까!" 천년 전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공격만 해댔고, 결국 휴즈의 손에 죽어 가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건 개운치 않았다. "난 스키엘이 아니라 시윤이야." 그렇게 말한 시윤은 얼굴에 튄 핏자국을 손으로 슥 닦아내 다가, 손에 피가 더 많이 묻었다는 걸 깨닫고 인상을 찌푸 렸다. "하지만 스키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군." 스키엘의 전언. "무온, 너도 사랑을 해보면 알게 될 거야." 이건 스키엘의 목소리였다. 증오스런 그를 대변해야 한다 는 게 시윤으로서는 참으로 아이러니 했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린다 하더라도, 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이건 시윤의 마음이기도 했다. "설령 신과 맞서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두 견딜 수 있다는 걸……." 시윤은 웃고 말았다. 결국 자신을 파멸에 빠뜨린 스키엘은 같은 영혼을 가진 형제 이상의 존재, 시윤의 마음은 곧 그 의 마음이었다. "그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순간 무온은 시윤에게서 스키엘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언 제나 당당했다. 나의 왕, 나의 주인.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다. 무온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천사들이나 갖 는 감정이라 배웠고, 또 그렇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묻겠습 니다. 당신은 배신자입니까?" 여전히 자신과 스키엘을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무온을 붉은 눈을 바라보던 시윤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스키엘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 너희들을 포기했다. 대답이 될까?" 포기했다는 말과 버렸다는 말은 엄연히 다르다. 무온은 그 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간이 됐군." 그는 가까이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무온에게는 시선도 주 지 않은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주시했다. 무온도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곧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새까만 인 영(人影)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어둠의 기운을 흩뿌리는 그 들의 등에는 각각 두 쌍 이상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마계 에 남아있던 래픽스 샤딘 모두가 정예 레베카를 이끌고 온 것이다! "래픽스 샤딘의 수장, 아뮤릿 지나이온이 왕을 뵙습니다!" "래픽스 샤딘, 토돌이 왕을 뵙습니다!" "래픽스 샤딘, 카엘 크라제토 왕을 뵙습니다!" "래픽스 샤딘, 무온 쎄 루나르 왕을 뵙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예를 취했다. 마계의 왕, 휴즈 다루카에게. 그는 오만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시윤의 것과 너 무나 닮은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 그리고 더 날카로운 인 상의 얼굴. 열 두 장의 날개는 멋지게 펼쳐져서 펄럭거렸다. 그의 시선이 시윤에게 닿았다. "천사의 날개라니… 스키엘? 형인가?" 천사의 날개를 지니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했지만 둘은 닮아 있었다. "스키엘은 없어, 난 시윤이다." "크큭, 그런가?" 휴즈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하늘에서 뒤 늦게 내려온 네피림들이 아진의 곁에 섰다. 회색의 날개를 가진 그들에게 새로 도착한 래픽스 샤딘과 레베카들의 관심 이 집중되었다. "저건 네피림이 아닙니까!" 래픽스 샤딘 중 하나가 소리쳤다. 금단의 족속, 마계에서조 차 외면 받는 네피림을 봤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날개가 회색이라는 것은……. 타락천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하며 웅성거렸지만 휴즈의 한마디에 삽시간에 조용 해졌다. "이의를 제기하는 녀석은 죽여버리겠다." 시윤의 시선이 한 네피림에게 꽂혔다. 분명 어디서 본적이 있는데, 머리칼이 얼굴을 가려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휴즈가 시윤이 관심을 갖던 네피림에게 이름을 물었다. "메사트입니다. 왕이시여." 휴즈 다루카, 그가 주인이라는 것은 이미 만들어질 때부터 정해졌던 일이었다. 이름을 들은 휴즈는 피식 웃었다. 래픽 스 샤딘 사이에서는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때, 아진이 마계를 피로 물들인 이유가 메사트 지나이온 때 문이 아니던가. 비록 천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아진이 지어줬나?" "그렇습니다."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진을 향해 휴즈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거 원, 뺏어가지도 못하겠구나. 나머지 여섯은 어디에 있지?" "지금 레보라크가 데리고 오고 있을 겁니다." 순간 시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잔잔한 미풍이 그녀의 머리칼을 흔들어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사, 사…라. 한사라앗!" 비록 색깔은 바뀌었지만 커다란 눈동자와 부드러운 눈매는 그대로였다. 회색의 눈을 지닌, 잿빛 머리칼의 네피림은 사 라였다. 분노로 몸이 떨려왔다. 행방불명 됐다는 얘기는 결 국 그들이 납치해서 천사와 악마를 뒤섞은 무기를 만들었다 는 소리였다. 감정이 지워진 전투를 위한 생명체! 휴즈는 시윤과 사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재미있군. 메사트, 가서 저 녀석을 없애라." 분명 메사트는 시윤의 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로서의 기억일 뿐이다. 메사트는 조금도 망설이 지 않고 시윤을 공격했다. [지-옴-카바린 전격의 창!] "한사라! 정신 차려!" 지지직! 눈부신 전격의 창이 날아들었다. 시윤은 그녀의 공격을 피해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명 맞서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사라를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이름은 메사트다." 시윤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 가 정신을 차릴까. 어떻게 해야! * *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휴즈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네피림의 리더인 메사트는 낮은 서열의 래픽스 샤딘을 상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엘. 난 기회를 주었고 넌 그걸 잡지 못했다. 할 말 있 나?" 그는 연 노란색의 방어막을 보고 있었다. 루이시블의 존재 를 느낀 휴즈는 카엘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결국 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주지도 못했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카엘이 지 켜보는 가운데 휴즈의 손가락이 보호막에 쌓여있는 건물을 향했다. 주문의 영창도 없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 진 가느다란 검은색 기운이 루이시블의 방어막을 간단하게 뚫고 건물을 부수고 들어갔다. "크윽." 카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반역자를 말살한 다는 건 아주 당연한 법칙이었지만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 었다. 비록 배다른 동생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루이시블을 아꼈다. '없어졌어.' 사라졌다. 루이시블의 기운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존재 그 자체가 소멸된 것이다. 카엘은 신음을 흘렸고 휴즈는 그 런 그를 모른 척 했다. 다른 래픽스 샤딘들도 숨죽이고 그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역자의 말로를……. * * "제기라아알!" 시윤은 보고 말았다. 루이시블이 펼친 방어막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의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피가 미친 듯 이 들끓어 올랐고 메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어느 샌 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격할 수가 없어서 계 속해서 피하고만 있는 시윤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하나씩 늘었다. "사라! 한사라! 나 시윤이야! 시윤이란 말야!" 시윤은 필사적이었다.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만 있는데… 사라까지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잠시 자세가 흐 트러진 그의 볼에 메사트의 공격이 스쳐지나가며 엷은 상처 자국을 만들었다. '힘이 있었더라면…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 * "휴-즈!"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어느 샌가 차원결계를 뚫고 나타난 천사가 있었다. 순백의 날개가 열 장이나 돋아 있는 외눈박이의 천사였다. 타락천사들의 시선은 그에게 집 중되었고, 그는 분노에 타오르는 눈으로 휴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 기억하는가!"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휴즈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 여자 때문에 천계를 팔아 넘긴 멍청이를." 갑자기 마계로 와서는 왕을 알현하고 싶다는 천사라니, 어 처구니가 없었다. 단 한 쌍의 날개를 지닌 최하급 천사 주 제에 무슨 배짱이었는지. 아마 아진에게 잡히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울면서 말했었다. 카 마세이의 '절대의 결계'를 해제하는 법을 알려줄 테니, 스키 엘과 류메리아의 페어링을 막아달라고. 류메리아라는 천사 를 자신에게 달라고. '그녀는 틀림없이 날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스키엘의 유혹에 빠졌을 뿐…….' 어찌나 우습던지 휴즈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폭소가 터져 나왔다. "널 죽이기 위해 천년동안 힘을 길렀다. 셰볼츠를 청한다!" 셰볼츠는 일종의 1:1 대결을 뜻한다. 명예를 걸고, 목숨을 걸고 치르는 의식. 천년동안 필사적인 수행을 거친 마야는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고위급 천사가 되어있었다. 보이지 않는 외쪽 눈에서 불에 지진 듯한 통증이 왔다. 그건 일종 의 희열이었다. "아진. 네가 상대해라. 난 할 일이 있구나." "휴즈!" 마야를 가볍게 무시한 휴즈는 날개를 움직여 자리에서 피 해버렸다. 아진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손 에 쥐었다. "와라." 아무래도 내키질 않았다. * * 메사트의 주먹과 발차기는 모두 방어했고 마법은 피해버렸 다. 반격을 가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입장이라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어때? 상대할 만 해?" 둘이 싸우는 곳으로 다가온 휴즈가 새빨갛게 웃고 있었다. 시윤은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메사트를 상대하는 것만으 로도 힘들었다. 죽이려고 마음먹는다면 삽시간에 끝날 일이 지만. "루이시블이 죽었어. 너한테 붙었던 녀석들은 모두 내 명 령으로 죽었지."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몸은 메사트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온통 딴 곳으로 향해 있었다. '힘이, 힘이 필요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다니. 뭐 하 러 돌아온 거야? 스키엘." 구할 수 없었어. 지켜주지 못했어. 그러니 복수하겠어. 시윤은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말을 외치는지. [약속된 자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게 시작이었다.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날 돕겠다고 약속한 너희들을 부 른다! 그만 깨어나라! 더 이상의 휴식은 없다!]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시윤을 향해 휴즈는 사악하게 미소지 었다. * * 아진과 마야의 전투는 격렬했다. 순수하게 전투만을 갈고 닦은 마야에게 아진은 감탄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최하급 천사가 나와 비등한 힘을 갖다니.' 결론은 금방 나왔다. 정도를 뛰어넘는 지독한 분노와 집착 이 그 이유였다. 천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휴즈에 대한 분노를 키워온 그는 결국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대단하군." 아진은 그가 날린 화염탄을 루오나로 소멸시키며 말했다. 진심 어린 칭찬이었다. 인간의 주술이란 주술은 모조리 섭 렵했는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기술을 마야는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융 합시킨 덕분에 힘의 질이 떨어졌다. 지금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곧 우위를 점할 것이라고 아진은 생각했다. * * 시윤의 외침이 끝나자 마자, 반응이 왔다. 아주 가까운 곳 에서부터 수백 킬로나 떨어진 곳까지 총 여섯 개의 기운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넷은 빛이었고, 둘은 어둠 이었다. 바로 환생체들의 각성의 조짐! [깨어나라!] 이성을 잃은 시윤이 포효했다. 재차 공격하려던 메사트는 휴즈의 제지를 받아 그만두었다. 휴즈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잔인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형은 정말 바보야." 멀리 떨어진 곳까지 환생체의 기운은 너무나 잘 느껴졌다. 표적으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는 가볍게 시 동어를 읊었다. [죽음의 선고] 들려진 오른손에서 여섯 줄기의 검은빛이 솟아올랐다. 그 중 넷은 허공을 향해 날았고, 둘은 루이시블이 지키고 있었 던 빵집을 향했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백호가 위험 하다는 걸 느끼지 못할 시윤이 아니었다. 시윤은 순간적으 로 몸을 움직여 검은 빛줄기들보다 먼저 가게 앞을 막았다. [월령(月靈)! 막아라!] 즈아아앙! 달의 정령이 만든 보호막은 대단한 위력을 지닌 휴즈의 마 법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역시 마계 제왕의 힘은 다 른 법, 시윤은 죽음의 선고를 막으면서 급속도로 힘이 빠지 는 것을 느꼈다. "월령? 스키엘이 쓰던 것이군." 휴즈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그 때, 부상을 입었던 백호가 멀쩡한 모습으로 시윤에게 다가왔다. 아니, 부상이 어떤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최강의 갑옷이라는 메르니츠가 그의 전 신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 천년 전의 그 완벽한 모습으로! "괜찮아요. 백호 형?"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시윤은 걱정스 런 목소리로 물었다. 백호는 잠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대 답했다. "오랜 세월동안 기다렸습니다. 주군이시여."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경계했던 일 이 터지고 만 것이다. 백호의 각성은 바뮤즈의 기억을 되살 렸고, 그도 자신을 스키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시윤은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경황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지만, 그 의 등에는 열 한 장의 날개가 돋아 있었다. 강하고 순수한 힘을 내는……. "당신마저 내게서 스키엘을 찾는군요." 그럴수록 난 죽고싶은데 말입니다. 시윤은 속으로나마 자 조했다 "오랜만이죠, 스키엘?" 활발한 여자의 목소리에 시윤은 고개를 돌렸다. 지현, 아니 바람의 천사 윈드미얀이었다. 세 쌍의 하얀 날개를 퍼덕이 며 그녀는 시윤에게 다가왔다. -류메리아를, 그 아이를 슬프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 요! 전생의 연인 류메리아의 절친한 친구, 윈드미얀이었다. 타 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날 찾는 사람은 없어. 모두 스키엘의 그림자를 볼뿐…….' 외롭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 줄은 몰랐다. "하하핫, 둘이나 각성하다니 의외군." 휴즈가 웃음을 터뜨리며 허공에 손을 몇 번 휘저었다. 네 개의 투명한 벽이 허공에 만들어지자, 거기에는 어떤 장면 이 투영됐다.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죽은 네 구의 시체였다. 바로… 공명하던 환생체들이었다. "으, 으아아아악!" 그 중 하나는 시윤도 잘 알고 있는 여자, 이미은이었다. 영 문도 모른 체 갑자기 나타난 마법에 당했을 터였다. 내장이 훤히 보이도록 뚫린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 다. 그건 마치… 휘수연이 죽던 모습과 같다. "으아아아아아아!" 시윤은 미쳐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스 키엘만 찾는 이들. 사람이란 자신을 알아주는 상대가 없다 면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시윤은 그런 면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시윤'을 아는 존재 는 모두 죽었다. "우아아아악!" 시윤은 끝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죽고싶다. 살고싶다. 죽이고 싶다. 살리고 싶다. 사랑한다. 증오한다. 극단적인 감정들이 그를 강타했다. 여섯 장의 날개가 파르 르 떨렸다. 피가 역류했고, 달의 힘이 멋대로 요동쳤다. 눈 의 실핏줄이 터져서 시윤은 피눈물을 흘렸다. 수연의 얼굴 이 떠올랐다. 목이 메였다. "스키엘! 스키엘! 괜찮습니까?" 백호가, 아니 바뮤즈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시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 영혼이 뒤흔들리는 이 아픔. 시윤은 이를 악물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난… 스키엘이 아니야!" 이런 운명을 선사한 스키엘을 저주한다! 내게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뺏어간 신을 저주한다! 신을 저주하는 천사에게 내려지는 징벌은 단 한가지! 시윤 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타락할 지어다> "끄아아아악!" 그의 날개가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또 다시 타락천사 로 돌아가고 마는 시윤! 빛의 힘에 억눌렸던 월령(月靈)이 미친 듯이 순환했다. 사악한 기운을 머금은 은빛 입자들이 시윤의 등에 나타났고, 그것은 곧 새로운 여섯 장의 날개로 변했다. 이로써 시윤의 날개는 열 두 장, 그 위압감은 휴즈 와 맞먹었다. "크큭, 생각대로 되는군." 스키엘이 그랬듯이 시윤 또한 마왕의 힘을 계승받지 않았 는데도 여섯 쌍의 날개를 갖추었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휴즈는 스키엘이 완전히 변하도록 기다렸다. * * 부웅! 아진의 검이 마야의 가슴에 박혔다. 루오나는 탐욕스럽게 천사의 피를 먹어치웠다. 그가 검을 뽑자 마야는 눈을 부릅 뜬 채 아진을 노려보며 추락했다. "후우." 그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에 당 했던 엔젤릭 캐논이라는 기술은 정말로 파괴력이 강했다. 이 자리에 오른 후로 한번도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했 던 아진이었기에 마야의 존재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사악 한 달의 기운을 받은 루오나가 아니었다면 이기지 못했으리 라. "힘든 상대였어." 희생이 컸다. 왼팔이 어깨까지 통째로 날아가 버려서 피가 그치질 않았다. 어떻게든 지혈은 될 테지만 앞으로는 외팔 이로 살아가야 한다. 순수한 일대일 대결이었기에 그것을 지켜보던 래픽스 샤딘중 누구도 끼여들지 않았다. 어깨의 상처를 막아버리려는 아진의 귓가에 마력을 실은 휴즈의 목 소리가 들렸다. [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배신자를 섬멸하라!] 아진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섬멸'이라니? 어차피 남은 건 스키엘 하나뿐이 아니던가. '스키엘!' 새하얀 백발을 제외한다면 과거의 모습 그대로인 열 두 장 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스키엘, 완전한 메르니츠를 장착하 고 있는 열 한 장의 날개 바뮤즈, 그리고 카마세이 십 천중 한 명이었을 천사가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어떻게 힘을 되찾았단 말인가!' * * 잔혹한 전투였다. 광기에 찬 시윤의 손길에 걸린 레베카들 은 단 한번의 공격으로 몸이 터져 나갔고, 래픽스 샤딘도 약한 편에 속하는 이들은 진작에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다 행인 것은 시윤이 '마왕'의 힘을 계승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 의 힘만으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휴즈 다루카는 웬일인지 공격을 지시하기만 할 뿐 직접 전투에 뛰어들지는 않았고, 그래서 시윤과 바뮤즈, 윈드미얀의 공격은 그들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뒤늦게 도착한 레보라크와 여 섯의 네피림은 상황을 완전히 뒤집었다. 전대의 마왕, 스키엘. 전대의 수장, 바뮤즈. 이 둘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갖게 했지만 인해전술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래픽스 샤딘과 그에 버금가는 네피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길 리 가 만무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지키겠습니다! 나의 왕이여!' 바뮤즈의 결심은 대단했다. 이공간에서 소환해낸 패검으로 적을 베어가며 절대로 스키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윈드미얀은 바람을 자신의 수족과 같이 부리며 적을 공격했 다. 류메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기에 미친 듯 한 살육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 동안 죽어간 레베카의 숫자는 팔십을 넘었고, 네피림은 여섯이 죽었다. 래픽스 샤딘에서는 두 명의 희생자가 났다. 현 래픽스 샤딘의 수장이라는 아진은 이미 왼팔을 잃었기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자신이 이끌고 온, 마계의 최정 예 부대가 반 이상이나 죽었는데도 휴즈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윤은 아직도 광기에 찬 모습으로 살육을 즐겼다. 땅에는 타락천사들의 시체가 쌓였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래픽스 샤딘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레베카가 모두 죽었 다. 네피림은 메사트를 포함하여 단 네 명이 남았다. 래픽스 샤딘은 두 명이 더 죽었다. 초인 같은 체력을 자랑하던 바 뮤즈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고, 윈드미얀은 탈진해서 되 려 시윤의 보호를 받았다. 바뮤즈의 패검은 피에 절었고, 메 르니츠는 검은색인지 붉은 색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땅에도 온통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메사트가 시윤을 공격하려던 찰라, 바뮤즈의 검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 네피림의 리더라고는 하지만 역대 최강의 래픽스 샤딘인 바뮤즈의 상대는 아니었다. 마침 그 때를 맞 춰서 시윤의 광기가 걷혀졌다. "…아, 안-돼! 죽지마앗!" 시윤은 추락하는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싸늘히 식어 가는 몸,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시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메사트의 눈에 잠시 생기가 돌아왔다. "시윤아……." 사라의 목소리, 그녀는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시윤의 첫사 랑으로, 그를 사랑했던 여자로서.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널 보고 싶었어. 미 안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는 고개를 떨궜다. 손안에 따스한 온기가 점차 사라져갔다. 시윤은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사랑하는 자, 모두 죽어가리라> 다시 하루가 지났다. 시체의 산 위에 주저앉은 시윤은 자신을 노려보는 래픽스 샤딘을 무시한 채, 바뮤즈를 불렀다. "도망가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백호가 아니라 바뮤즈다. 시윤은 절실히 느꼈다. 백호형이 었다면 이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을 것이다. "천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 할 수는 없어. 도망가." "몇 번이라도 전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던질 겁니다." 시윤은 스키엘이 부러워졌다. 이렇게 자신만을 위해서 모 든 것을 바치는 부하가 있다는 건 정말로 부러운 일이었다. 더불어 바뮤즈는 스키엘의 친구였다. "윈드미얀을 데리고 도망가. 저들이 노리는 건 나다. 내가 여기 있으면 도망치기 수월할 거야. 안 그래? 백호 형?" "…알고 있었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 "지금의 난 백호이자, 바뮤즈. 하지만 둘 다 널 버리고 도 망가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시윤이 맑게 웃었다. 다시 타락해버린 천사였지만 그 웃음 만은 너무나도 해맑았다. 혹시나 하고 넘겨짚어 본 건데 백 호는 역시 남아 있었다. "형이 먼저 가야 나도 따라가지. 난 형보다 강해. 알고 있 지? 윈드미얀을 데리고 먼저 도망쳐. 곧 뒤따라 갈 테니까. 그게 나한테도 더 안전하다구." 시윤은 여전히 시윤이었다.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어도, 왕 의 핏줄인 붉은 눈을 하고 있어도 시윤은 자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호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지?" "그래, 나도 살고 싶다구. 후다닥 튀어야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시윤의 머리를 백호가 헤집어 버렸다. 그는 빙긋 웃으며 기절해 있는 윈드미얀을 들쳐 멨다. "빨리 와라. 이건 나의 왕이자, 멍청한 동생에게 하는 말이 다." 백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열 한 장의 날개를 동시에 움직여 서 적들이 없는 쪽으로 날아올랐다. 아무도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물론 따라가려고 해도 그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 는 자는 거의 없었지만. 시윤은 간신히 타락천사들의 시체 에서 몸을 일으켰다. 날개로 가리고 있었지만 옆구리의 베 인 상처는 체력이 떨어진 지금 굉장한 타격이었다. 무엇보 다도 피가 멈추질 않았다. "후후, 아무래도 거짓말 해버린 건가." 사실을 안다면 백호가 노발대발하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그를 피신시킬 수는 있었으니까. 시윤은 뻣뻣하게 굳은 날개를 애써 풀어주고는 하늘로 치 솟았다. 반밖에 남지 않은 타락천사들은 시윤에게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계 최상위의 전투력을 가진 그들을 단 세 명이서 상대했으니 무섭지 않다면 말이 되질 않았다.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고 재차 시윤을 공격하려던 찰라, 휴즈가 그들을 제지하고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전투를 시작한지 5 일 째의 일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이미 도망칠 힘도 남아있지 않은 시윤의 목을 휴즈가 움켜 쥐고 땅에 처박았다. 많은 힘도 필요 없었다. 탈진한 상대는 그저 슬쩍 밀어도 쓰러지는 법이다. 시윤의 목을 움켜잡은 채, 휴즈가 말했다. "혹시 알고 있나? 너의 각성은 내가 유도한 것이라는 걸." 그랬다. 휴즈는 시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해서 결국 그를 타락천사로 바꾸어 놓았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시윤이 강해지는 일인데 왜 그랬을까. 시윤은 생각하기도 귀찮은 듯 피식 웃었다. "왜 그랬지?" "너와 나, 스키엘과 나는 본래 쌍둥이였지. 그런데 불공평 하게도 스키엘의 힘은 마신이 될 가능성이 보일 정도로 강 했어. 반면에 난 평범한 왕족이었고." 마신(魔神),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비록 어둠의 신이라고 는 하나 영(靈)의 상태가 아닌 초월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생각했지. 형의 힘을 내가 가질 수는 없을까. 라고 말야. 후후, 난 한가지 방법을 생각했지. 마력이 담긴 피를 훔친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고, 실험해보니 되긴 되더군. 하지만 그건 실패작이었어." 형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처럼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영혼의 파장이 비슷할수록 실험은 성공적이었어. 우리 같은 쌍둥이는 아예 반발이 없었지. 그걸 알았을 때, 난 무척이나 후회했어. 왜 바보같이 형을 죽였을까. 그냥 힘 을 빼앗고 버리면 되었을 것을. 안 그래?" 시윤은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일을 꾸민 것은 전부 휴즈였다는 사실을.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고 신을 저주하게 만들어서 결국 타락천사로 만든 것도 그였다는 사실을. 그 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후후, 이제는 쉬고 싶어.' "안심해. 고통은 없을 거야. 어떻게 형에게 내가 고통을 줄 수 있겠어? 목을 깨물거나 하진 않아." 오랫동안 감춰온 비밀을 털어놓는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형의 힘을 얻는다면 난 신(神)이 되겠지. 천계와 마계, 그 리고 인간계를 지배하는 자가 될 거야. 자, 막을 내릴 시간 이야. 카마세이의 군단들이 곧 강림할 테니. 그 전에 끝내야 지?" 그는 시윤의 왼쪽 가슴, 심장이 위치한 곳에 자신의 검지 를 깨물어서 피를 흘렸다. 그리곤 시윤의 가슴을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가슴팍에는 작은 상처가 났고 휴즈의 피와 시 윤의 피는 곧 섞이기 시작했다. '이제 쉴 수 있겠지. 이 악몽도 이젠 끝나겠지.' 휴즈는 묘한 주문을 외우며 시윤의 심장 부분에 작은 마법 진을 그렸다. 시윤은 수연을 생각했다. 단 몇 달을 만난 연 인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하긴,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기다린 연인을 어찌 잊겠는가. '수연아…….' 체념한 시윤의 이마에 황금빛 문양이 엷게 새겨졌다. '…다시 만나자.' 준비가 끝난 휴즈는 씩 웃으며 시동어를 읊었다. 환희에 찬 표정. [내게로 오라] 스으으으! 시윤은 몸에 가득 찼던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 끼며 눈을 감았다. 날개가 하나씩 사라졌고,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해져 갔다. 힘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전부 빠져나갔다 고 생각될 무렵 시윤은 정신을 잃었다. 이제 이 악몽도 끝나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만 했던 아픔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슬픔도. 어둠뿐인 삶 속에서 널 얻었던 건, 그야말로 축복이었어. 그래, 그건 과분한 축복이었어. 내 욕심이 지나쳤던 건지도 모르지. 미안해. 나 조금만… 조금만 쉬고 싶어. 이젠 이 악몽도 끝이겠지? 푹 자고 일어나면 아무 일도 아 니었던 그런 꿈이라면… 좋겠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어. 모든 것이 그저 악몽이었다면… 그래서 꿈이라면… 좋겠어. 잠에서 깨어나면 네가 내 곁에 잠들어 있는 그런……. 수연아… 사랑해……. <소년은 행복하게 잠들었다> Epilogue -그리고 남은 것 한낮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초입이이다. 종석은 손에 쥐고있는 메모지와 집들의 문패를 비교하며 다른 손으 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 작된 것도 아닌데 날씨는 숨막힐 정도로 더웠다. 겨드랑이 에 흐르는 땀이 너무나 불쾌하게 느껴졌다. "후우, 도대체 어디야?" 작게 투덜거린 그는 시선을 재빨리 이동하면서 동시에 주 위의 눈치를 살폈다. 이상한 낌새는 없는지, 감시하는 사람 은 없는지.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오랜 파파라치 생활동안 신변의 위협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주위를 경계하 는 건 일상이 되 버렸다. "저긴가?" 한참을 더 두리번대던 그는 한 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작 은 마당이 딸린 평범한 주택 집이었다. 주위의 집들은 모두 2층인데 홀로 단층을 고수하고 있어 왠지 소박한 느낌을 줬 다. 그는 까치발을 한 채로 담을 넘어 보다가, 소형 카메라 를 꺼내서 마당과 집을 찍었다. 굉장히 숨죽이고 조심스럽 게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고 집에서 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두근. 갑자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소름이 돋는 불안감. "무슨 짓이지?" 막 새로운 필름으로 갈아 끼우려던 종석은 그대로 굳어버 렸다. 뒤쪽에서 나타난 자신의 목을 감싸쥔 손길과 귓가에 꽂힌 목소리는 얼음같이 차가웠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도 종석의 몸이 떨렸다. 의심받지 않을 만한, 그럴듯하고 평범 한 핑계를 빨리 찾아야 한다. "지, 집이 너무 예뻐서요. 제 취미가 사진 찍기라… 실례 좀 했습니다." 아주 잠깐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상대의 목소리가 여자의 그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이 당장에라도 잘려나갈 것 같은 섬뜩한 기분 때문에 종석은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흥. 이런 집이야 널리고 널렸어. 이유를 말하기 싫다면 내 가 하는 소리나 새겨들어." 목을 잡고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석은 고통스러운 표 정으로 컥컥거렸지만 상대는 관심도 없는 듯 했다. "이 부근에, 이 집에 또 관심을 갖는다면 그 때는 '죽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죽을'이라는 글자를 발음하면서 악력은 더욱 강해졌다. 파 랗게 질린 얼굴의 종석을 손의 주인이 내팽개쳤다. 비참하 게 굴러간 그의 목에는 선명하게 가느다란 다섯 가닥의 자 국이 남아 있었다. "꺼져. 뒤돌아보지 말고." 육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상대는 정말로 '죽일 각오'를 하 고 있다고. 목숨을 걸고 밥을 벌어먹는 종석의 육감은 미세 한 감정마저도 읽어낼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최소한 진 심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 누군가의 발언은 단순한 협박이 아닌 진실 된 경고였다는 것도 판단할 수 있 었다. 공포가 땀을 싸늘하게 바꾸었다. 종석은 상대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하고 발을 재개 놀려서 골목 사이로 빠져나갔다. "흥!" 여자는 코웃음쳤다. 풀어헤쳐진 진홍색의 머리칼 사이로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엷은 붉은 빛을 머금 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종석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 는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흔히 들을 수 있는 클래식의 단조로운 멜로디가 반복되었 지만 집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네……." 아무도 없는 건 아니다. 적어도 그건 아니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몸에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그녀는 검지 를 세워서 유려한 동작으로 허공을 훑었다. 바람. 잔잔하던 대기에 파문이 일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 했다. 날이 더운데도 귀찮다는 이유로 묶지 않았던 머리칼 이 제멋대로 휘날렸지만 지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가 산발이 되든 말든 더운 건 질색이다. 그녀는 잠시 바람을 느끼다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라?" 혹시나 하고 손잡이를 비틀자 문은 열려 있었다. '들어와.' 왠지 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현은 잠시 망 설이다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만약 예상이 맞다면…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불안…….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옥죄어왔다. 시 원한 바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식혀주었지만 손에는 촉촉하 게 땀이 배었다. 지현은 천천히 차가운 금속의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 * 백호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 초점 이 잡히질 않았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주저앉은 그의 모습 은 너무나도 힘이 없어 보였다. 벌써 석 달째 미동도 않고 있었다.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미 윤회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린 그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또……. 영혼의 울부짖음이라고 해야할까. 그는 진한 슬픔을 내면 으로 끝없이 갈무리하고 있었다. 너무나 큰 아픔이기에 토 해낼 수조차 없는… 그는 울고 있었다. 이미 말라버린 눈물 은 흐르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또… 지키지 못했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볼을 덮을 정도로 제멋대로 자 랐다. 땅에 깊숙이 박혀있는 패검에는 피가 말라붙어서 섬 뜩한 빛을 발했다. "스키엘……." 왕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시윤……."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따뜻한 느낌……. 어느 쪽도 잃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영혼을 걸고 맹세 하였으니, 나의 주인 스키엘. 인간으로서 살았던 동안 처음 으로 느꼈던 가족이란 존재… 시윤. 그는 마지막까지 웃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먼저 도망가라 고……. 심각한 치명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또 잃어버렸어……. "저어, 백호 오빠?" 어느새 나타난 지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석 달의 시간 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백호를 오빠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정작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그 진한 슬픔이 자신에게도 전 이되는 듯해서 지현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주 룡곡의 빈 공터, 외진 곳이라 아무도 쓰지 않기에 지현 외 에는 오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는 여러 노인들이 와서 그 를 위로도 해주고 식사고 가져다 주었지만 묵묵부답인 그에 게는 도리가 없었다. "…지현이?" 숨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간신히 그가 대답하자 지현은 답 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는 어때?" "아직까지 차도가 없어. 깨어나질 않아." 백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 사해야 할 판이니까. 은밀히 타락천사들의 뒤를 쫓던 주룡 곡의 노인들이 휴즈의 눈을 속이고 루이시블을 살려낸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쳐놓은 결계에 스며들어 서 휴즈가 어둠의 화살을 쏘아낼 때 자연의 기운을 집약시 킨 보호막을 쳤다. 이질적인 힘이 아니기에 아무도 느끼지 못했고, 결계는 기운을 감추는 효과도 있어서 사실상 루이 시블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보호막도 완전 치 못해서 일부의 힘이 그녀를 꿰뚫어 치명상을 남겼다. "…그런가." 그 뒤에 백호가 윈드미얀을 데리고 도주할 때, 그들은 루 이시블을 데리고 그를 따라갔다. 몸을 숨긴 곳은 이곳 주룡 곡, '인간'이었다면 결계의 제지를 받았을 터지만 그들은 이 미 초월적인 존재,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루이시블 은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며 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혼수상태이긴 하지만. 백호는 폐를 쥐어 짜내는 것 같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 했다. "내가 간호할게.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석 달만에 백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의 눈은 짙은 슬픔에 젖어 혼탁하게 변해있었다. 과거의 장난 스러웠던, 나잇값도 못한다고 욕을 먹던 그가 차라리 그리 워질 지경이었다. "웃지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백호를 향해 지현이 빽 소리쳤다. 그 의 입가에 슬며시 떠오른 미소마저 너무도 슬펐기에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는 죽었어! 하지만 당신은, 바뮤즈는, 백호는 살아 있잖아! 과연 그가 이런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날 살리기 위해서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 을 버린 그가 좋아할 것 같아?" 왈칵,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 지 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도대체 이게 뭐야! 그 때의 그 백호는 어디 갔어?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은 얼굴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모든 걸 잃어버려? 백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 미소 는 더욱 슬펐다. "넌 이해 못해." 지현과 함께 한 시간은 겨우 일년 남짓 과연 그녀가 자신 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가 루이시블이 요양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라, 지현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뒤를 따 랐다. "우리 결혼하자." 이번만큼은 백호도 당황했는지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지. "결혼하자고 그랬어. 내가 치유해줄게. 내가 상처 쓰다듬어 줄게. 언제까지고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기대." 말은 매끄럽게 흘러나왔지만 심장은 부서질 듯 아려왔다. 잠시 한숨을 쉰 그녀는 덧붙였다. "부탁이야." 잘못들은 건 아니었다. 백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활기찼던 그녀도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날 사랑해?" 이 말을 하면서 백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값싼 동정심에 서 나오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데 이렇게 잔인해지는 이유는 또 뭘까. "몰라." 울면서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붉어진 얼굴, 묘 한 표정. 백호는 피식 웃었다. 결혼… 나쁘지도 않을 것 같 다. 그래, 인간으로서의 행복도 좋겠지. "농담은 아닌 것 같군. 그래, 나도 분명 널 좋아해. 하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다. 조금만 기다려주겠어? 내 가 마음을 정리하도록." 정리하는 거다. 모든 것을……. 백호의 대답에 지현은 상기된 얼굴을 가볍게 끄덕였다. 자 신도 모르게 한 고백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복수가 끝난다면… 그 때는…….' 정리가 끝나면 결혼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복수를 하고 나서… 그 때에도 살아 있게 된다면 지현의 고백을 받아들 일 생각이었다. 백호는 씁쓸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살아 남는다면 말이지.' 카마세이든 마계든 간에 복수를 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결혼이라…….' 루이시블만 깨어난다면 백호는 홀가분하게 남은 빚을 청산 하러 갈 생각이었다. 석 달째 되는 오늘 그 결심을 한 것이 다.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겠군.' <거짓된 환상을 꿈꾸지 마. 주인……> 그래, 그건 꿈일지도 모르지……. * * 결국 그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백호에게 정작 할 말을 하 지 못했다.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확인해야 할 일이 생 겼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친 그녀는 백호가 루이시블을 간호한다고 사라지자, 홀로 곡을 빠져나와서 산 을 내려왔다. 누군가 의식적으로 뿌리는 기운을 추적하였고, 마침내 그 끝에 도달했다. 찰칵.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지현은 보고 말았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문 바로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백금발이 아닌 윤기 나는 짧은 흑발이었고, 금빛의 눈동자가 아닌 연갈색의 눈이었지 만 분명 그녀였다. 신음 같은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류…메리아?" 카마세이 6천, 천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천사, 그리고 윈 드미얀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 류메리아. 그녀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디미얀." 류메리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로 기쁜 듯이 마주보는 이를 너무나 기쁘게 만드는 미소. 천년이 흘렀건만 조금도 변하 지 않은 그녀. "이게 꿈은 아니겠지? 정말… 류메리아 너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후후, 나 류메리아 맞다니까. 어서 들어와." 류메리아는 계속 웃었고, 지현은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다. "으아앙, 보고 싶었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슬펐던가. 일주일동안 밤새서 울었는데… 너무 슬펐는데. "어어? 울지 마라. 응?"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당황한 류메리아는 팔을 뻗어 그녀를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여줬 다. "흑흑. 죽었을 줄, 흑, 알았잖아. 으아앙." 토닥토닥. * * 30분을 내리 울어버리자 완전히 탈진한 지현은 초췌한 얼 굴로 류메리아가 권해준 소파에 앉았다. "눈이 빨개졌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피 잔을 내밀었다. 달콤한 헤이즐 넛 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내 눈은 원래 빨개." 투정부리듯 말하는 지현의 모습이 귀여워서 류메리아는 살 며시 웃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질문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 어버렸다. "인간의 이름 휘수연 맞지? TV에서 여러 번 봤어. 하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말야. 백 호는 역시 바보야. 타락천사에게 죽었다고 했었는데……." 잠시 굳었던 얼굴을 지현이 알아차리기 전에 엷은 미소를 재차 띄운 그녀는 말을 돌렸다. "백호? 그게 누구야?" "아아,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백호는 바뮤즈, 스키엘 의 마지막 수호자였던 타천사. 기억나?" 수연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때부터 지현은 마침 잘됐다는 듯 그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 만났을 때는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멋대로 집어 먹고 자기한테 반말을 했다는 둥, 예의가 없다는 둥. 하지만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이었기에 수연은 고개를 잠시 갸웃했 다. 활기차게 말하다니 이상해. "그 남자 좋아하니?" "그러니까 백호가 또…에?" 잠시 굳어버린 지현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숨을 한번 푸욱 내쉬고는 고개를 밑으로 떨구었다. "…응." 개미울음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그걸 알아들은 수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를 사랑하는 천사라니… 너까지 어쩌려구?" 악마와 천사의 사랑은 이단이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다. 설사 그것이 마계의 제왕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불운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게 가장 걱정됐다. 수연은 안 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랑 스키엘도 사랑했… 미, 미안. 혹시 알고 있 니? 스키엘은 이미……." 수연의 안색이 약간 나빠지긴 했지만 그다지 심하지는 않 았다. 슬픔을 참고 있는 걸까. "나도 갔었어. 그 자리에 있었어. 그가 혼자 휴즈를 상대하 는 그 모습을… 봤어." 지현과 백호가 빠져나간 후에 도착했다는 얘기다. 그렇다 면 틀림없이 스키엘의 최후를 봤으리라. 갑자기 수연이 뭔 가 생각난 듯 말했다. "…보여줄게 있어. 백호에게 '시디바루'를 쓸 수 있니?" 시디바루는 연락용의 마법을 뜻한다. 얼마 전에 멋대로 백 호에게 마법인장을 새겨둔 지현은 언제라도 그에게 모습과 목소리를 전달하는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녀는 두말 않고 허공에 손가락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바람의 주인, 윈드미얀의 이름으로! 내가 원하는 곳, 내가 원하는 이에게. 듣게 하고 보게 하라] 사람의 상체는 가볍게 덮을만한 원이 그려졌다. 공간에 굴 곡이 생겼고, 그 원의 안쪽으로는 머리가 길게 자라서 얼굴 을 알아보기 힘든 백호와 침대에 누워있는 루이시블이 보였 다. 백호가 간호하는 사이에 정신을 차린 루이시블은 지친 얼굴이었지만 의식을 차린 듯 눈을 뜨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생명력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차갑게 식 어버린 눈이 시디바루 건너편의 지현을 응시했다. 수연이 시디바루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에요. 바뮤즈." -류메리아? 당신은 죽었잖아! 백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루이시블도 놀 란 건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둘의 눈앞에서 죽어간 그녀 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죽었을 텐데요." 수연은 그런 둘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다만 허공에 손을 휘저어 어떤 영상을 보여줬다. 커다랗고 둥그런 구체 에 깨끗한 영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 저건?" 지현이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시윤……. -스키엘의……. 그것은 백호가 보지 못한 시윤 최후의 모습……. 휴즈가 시윤의 목을 움켜쥐고 힘을 흡수하는 바로 그 때. 고통 속 에서 몸부림치는 시윤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의 날 개가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입자로 바뀌어 사라졌다. 소 멸……. <우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혼이 찢겨나가는 고통! -안 돼! 백호가 소리쳤다. 주먹은 부서질 듯 쥐어졌고, 눈은 무섭게 그것을 노려보았다. 시윤의, 스키엘의 마지막이라니!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수연이 중얼거렸다. <우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혼이 빨리는 지독한 고통 때문에 혼절했는데도 비명소리는 끊기질 않았다. 휴즈는 집요하게 힘을 흡수하였다. 시윤의 날개는 하나씩 분해되어서 휴즈에게 흘러들어갔다. 엄청난 기운이 미친 듯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고, 휴즈는 그 힘에 휩쓸려버리지 않도록 정신을 가다듬었다. "크아아아악!" 하얗게 눈을 치뜬 시윤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비명을 질 렀다. 차라리 살이 뜯기는 아픔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느 껴질 정도로, 고통은 심각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검은 오라가 안개처럼 흘러나와 둘을 감쌌다. "흠?" 시윤의 힘을 흡수하던 휴즈는 문득 그의 이마를 보았다. 이 마에 새겨진 흐릿했던 황금색 문양이 강한 빛을 발했다. '이런 게 있었나?' 기억나질 않는다. 어차피 머리카락 때문에 이마는 잘 보이 지 않았으니 이런 문장 하나쯤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해서 이 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하필 이럴 때에 반응을 한다는 것 은……. -파아앗! 한순간, 문장은 태양보다도 강하게 빛났다. 그곳에 있던 모 두는 이 강렬한 섬광 때문에 눈을 가렸다. "뭐, 뭐얏!" "메스킬라토! 천사의 빛이다. 어째서?" "죽었다는 얘기로군. 흥!" "어둠의 일족으로서 메스킬라토를 내다니……." 휴즈가 눈을 떴을 때, 시윤은 없었다. 그는 씁쓸히 웃었다. '메스킬라토… 후후, 그런 건가.' 천사라고 해서 무한히 살아가는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 나 이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살기 때문에 불멸이라 불릴 뿐이다. 자신의 수명이 다해서 소멸되는 것보다는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로 그들은 오래 살았다. 어찌됐든, 천사들은 그들의 삶이 끝날 때 <메스킬라토>라 고 불리우는 빛을 내뿜는다. 천사의 삶을 산 악마, 스키엘이 라면 메스킬라토를 낼법도 했다.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 이제 소원을 풀었으니까. 휴즈가 웃 었다. "하하하! 드디어 얻었다. 당신 스키엘의 힘을, 이제 난 신이, 마신(魔神)이 되리라!" 휴즈의 화려한 열 두장의 날개가 펼쳐져 그 위용을 한껏 과 시했다. 그는 하늘로 날아오르며 포효했다. -우오오오오! 야수의, 짐승의 음성! 핏줄을 타고 달리는 이 터질듯한 힘 은 스키엘의 것이리라. 너무나 뜨겁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 로 강렬했다. 전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 다. 단지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모든 타락천사들은 질린 얼 굴을 하고 있었다. 땅이 진동하고, 대기가 울부짖었다. "왕의 힘이… 이 정도라니… 맙소사!" "스키엘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후후, 나도 바 보였구나." 이제는 허전해진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감싼 채, 아진이 슬픔이 가득 배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토록 충성했 는데, 당신을 믿었는데. 이게 당신이 원했던 일입니까. 나의 왕이시여. 그 때,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하얀 빛들이 쏟아져 내렸다. "거기까지다. 암흑의 우두머리여!" 순백의 날개를 지닌 그들은 신의 대리자. 하나하나가 너무 나도 깨끗한 빛이었다. 카마세이 십천이 수백의 천사를 이 끌고 강림한 것이다. 한순간에 하늘은 하얗게 빛나는 천사 들로 가득찼다. "천년의 징벌, 이제 받을 때가 왔다. 나 하모리엘의 손으로 너희들을 벌하리라!" 그 빛 중에서도 유독 강렬한 천사가 있었다. 새하얀 열 두 장의 날개를 펄럭이며 조용히 앞으로 나선 그의 이름은 카 마세이 1천 <하모리엘 큐디세이아>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그 위용은 신의 이름을 대신 하는 자라 할만했다. "내가 너희를 벌하겠노라. 저주받은 어둠들이여." 천계의 지배자는 그렇게 말했다. 수백의 천사 앞에서 래픽 스 샤딘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데리고 온 레베카는 모두 죽었고, 네피림은 셋이 남았으며, 래픽스 샤딘은 넷이 죽었 다. 루이시블을 제외하고 부상당한 아진을 뺀다면 남은 숫 자는 겨우 넷이었다. 게다가 모두 지쳐 있었다. "크하하핫! 누가 누구를 벌하겠단 말인가! 감히 내 앞에서!" 대기를 짓누르는 위압감, 너무나 오만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힘을 지닌 자! 휴즈가 광소를 터뜨리며 천사들 앞으로 다가 섰다. "다시 말해봐라! 나 마신(魔神) 휴즈에게!" 콰앙! 그는 이미 타락천사가 아니었다. 붉게 빛나는 눈은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나 사악한 나머지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기운, 그것은 정말로 신에 가까웠다. 휴즈가 어깨 위로 양손을 올리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날개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부우욱! "왕이시여! 무슨 일입니까!" 생명이나 다름없는 날개를 없애다니 제정신으로 할 짓인가!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휴즈는 씨익 웃으며 남은 날개를 모조리 뜯어내서 암흑의 불꽃으로 소멸시켰다. "신이라면…" -바아아앗! 그의 등 뒤로 새로운 날개가 돋아났다. 그것은 깃털을 갖고 있는 천사의 날개가 아니었다. 검은 오라가 넘실대는 그것 은 너무나도 깨끗한 흑색으로 빛났다. 어떻게 보면 투명하 다고 느낄 정도로 빛깔이 깨끗했다. "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갖춰야지 않겠나." 휴즈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새로 돋아난 한쌍의 날개, 비 록 두 장 뿐이었지만 은은히 흐르는 기운은 열 둘의 날개를 지닌 때보다 두배이상 강해졌다. 아진은 씁쓸한 미소를 베 어 물었다. 어찌됐든 왕은 옳았다. 힘의 정의를 논하는 그는 결국 신에 가까운 힘을 얻은 것이다. 비록 그게 부하들의 희생을 밟고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카마세이 1천 하모리엘이 검을 뽑고 외쳤다. "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 신의 선택을 받은 천사들이여! 공 격하라! 어둠을 멸하라!" 휴즈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지금의 나라면 스키엘과 하 모리엘이 함께 덤벼도 이길 수 있어! 휴즈가 오른손을 허공 에 내밀자 <베리노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신(魔神)의 힘 을 가진 지금, 베리노엘은 더 이상 감당하기 버거운 힘의 결정체가 아니었다.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변해버린 휴즈를 느꼈는지 검(劍)은 한없이 공손하게 변했 다. "저 천사들이다." <디바인 블레이드> 부우웅! 새하얀 검날에 황금빛이 덧씌워졌다. 예전에 불완 전한 혼합체를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너무나 강하게 변한 디바인 블레이드였다. '이건 신의 검이었지.' 얼마나 우스운가. 지금에야 알았다. 완벽하게 베리노엘을 지 배하게 되자, 그것의 유래를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베리노엘은 카마세이 1천의 신물이었다. 신의 힘을 증명하 는 신검(神劍) 베리노엘. 1대의 마왕(魔王)인 혼돈의 주인 테르카시 사마엘 다루카는 신의 대리자, 카마세이 1천이었 던 것이다. 휴즈는 검의 빛을 허공에 흩뿌리며 외쳤다. "오라, 카마세이의 쓰레기들아!" * * 어둡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어둡다고 느낀 것은 빛이 없 기 때문일까. 하지만 어둠도 없다. 그저 '나'만이 존재할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곳. 휴즈에게 힘을 빼앗기다가 이마를 불로 지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깨어나니 이곳이었다. '죽은 건가.' 손을 가슴 앞으로 뻗어보았다. 하지만 미약한 대기의 파문 조차 없다. 역시 이곳은 사후의 세계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 면 죽음은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다. 겨우 무(無)에 침잠하는 것 뿐이라니. 마계의 제왕이었던 자, 순수한 인간이었던 자는 쓰게 웃었 다. '이제는 쉬어도 되는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이곳은 너무나 아늑하고 편안하다. 금방이 라도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나른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눈을 감는다면 편해지리라. 영원한 안식이 될 테니까. '…백호 형도 윈드미얀도 잘 도망쳤겠지?' 많은 희생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불행해졌다. 더 이상은 감 당해낼 힘이 없다. 이렇게 내가 사라져버린다면, 많은 인간 들이 타천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겠지만… 이게 한계다. 시윤 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류메리아,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시윤은 처음으로 휘수연의 이름 대신에 전생의 이름을 불렀 다. 이 기묘한 공간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알 수 없는 기 운이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모든 것을 비약적으로 추측하 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닌 근거 있는 확신으로 변했다. 그동안 그토록 궁금하게 여겼던 일들이 하나씩 풀려나갔다. '살아있구나. 루이시블.'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히 그녀의 생존을 확인한 시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윤은 고개를 돌렸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득히 멀 리 떨어진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귀를 기 울이자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아련한 과거의 추억이 시야에 들어왔다. * * -스키엘, 당신의 이름. 뜻을 알아요? 백금을 녹여서 풀어놓은 듯한 머리칼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 부시게 빛났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맑게 웃었다. -뜻이 있을 리가 있나. 내가 지은 이름인데. 내가 그녀를 덥썩 끌어안고 머리를 헤집어버리자, 눈처럼 하얀 그녀의 날개가 내 몸을 등에서부터 덮어버렸다. 결과 적으로 류메리아의 날개에 난 감싸인 꼴이었다. 숨결이 맞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고, 그녀의 장난스런 표 정에 나도 웃고 말았다. -있어요. 아주아주 오래된 기록에 당신의 이름이 있었어요. 무슨 뜻일까요? 맞춰보겠어요? 난 잠시 고민했다. 기록이라 함은 천계의 것일 텐데, 어째 서?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스키엘이라는 이름의 천사는 없 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물론 장난스 럽기도 했으나, 농담은 아닌 것 같다. -모르겠군. 그런데 정말 나와 같은 이름이 있어? -정말이라니까요. 그의 이름도 스키엘이었어요. 어떤 천사 였는지 계급은 뭐였는지는 기록이 불완전해서 알 수 없었지 만. 아무래도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시킨 것 같아요. 아마 신께서 카마세이를 돌보실 때의 기록 같아요. 신이 신탁을 내릴 때. 그것은 벌써 십만 년도 더 전의 일이 었다. 지금 신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 한번도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신은 종적을 감췄다. 그런 때의 기록이 남아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내가 궁금한 표 정을 짓자 그녀는 기분좋게 말을 이었다. -신이 한 천사의 이름을 명했으니, 그것은 <슬픈 사랑의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신어(神語)였다. 신의 대리자들의 …였으니, 그 이름은 <스키엘>이었다. 라고 적혀 있었는 데… 슬픈 사랑의 수호자. 나쁘지 않다. 바로 앞에서 재잘대는 그 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아마, 널 만나지 못 했더라면 난 이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 정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보호할 사랑은 너밖에 없어. 류메리아, 난 너만 있으 면 된다. 난 잠시 고민했다. 과연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난 널 만나는 동시에 두려움을 배웠다. 그 무엇 도 무서울 게 없던 내가, 널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 게 되었으니. 후후, 재미있지 않은가. 마계의 제왕인 내가 말이다. 류메리아는 배시시 웃더니 내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 주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난 당신에게 나의 인장을 새겼어요. 기억하죠? 끄덕끄덕. 그녀가 이마를 가리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옆으 로 쓸어넘겼다. 그곳엔 아마도 황금빛의 문장이 새겨져 있 으리라. 류메리아가 새겨준 천사의 인(Angelic Stamp). -우리 천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두 개의 인장을 갖고 있어 요. 하나는 이렇게 영혼을 맡길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며 류메리아는 자신의 새하얀 상의를 손으로 잡 아당겨서 어깨를 드러냈다. 우윳빛의 깨끗한 살결에는 내 이마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문장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나한테. 이건 내 영혼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서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어 있어요. 게다가 난 거기에 마법을 하나 더 걸었어요. 후훗.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 지만 아직 무슨 얘긴지 파악이 되질 않는다. -당신은 앞으로 무슨 모습을 하고 있든, 어디에 있든 간에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 당신의 영혼과 나의 영혼은 깊 은 맹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죽음조차 우리를 헤어지게 할 수 없어요. 설령 신이라 하더라도 간섭할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응시했 다. 무엇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내가 말 없이 그 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표정은 더욱 가라앉았다. -저어, 화났어요? 화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난 바보 같 아서 당신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어요. 영원히…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당신만을 사랑할 거니까. 허락받지 않 고 절대의 맹약을 덧씌운 것… 미안해요. 그동안 숨겨왔던 사실이 이거였나. 천사의 인에 절대의 맹 약을 씌웠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생 각한 것처럼 화가 나진 않았다. 난 웃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류 메리아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난 팔 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영원히… 그래,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줘. 난 널 위해 세상을 버리겠다. 달콤한 향기가 폐부 깊숙히 밀려들어왔고, 그녀는 조용히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중 얼거렸다. -사랑해요.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 * '…스키엘이라.' 시윤은 깨달았다. 스키엘의 이름이 초대의 마왕인 테르카시 사마엘 다루카의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가 카마세이 1천이 었으며, 동시에 마족의 여인을 사랑한 <슬픈 사랑의 수호자 >임을 알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지식에 시 윤은 잠시 놀랐지만 그것도 이내 익숙해져버렸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무(無)의 공간에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운명의 사슬이 있었다. '천사의 인… 절대의 맹약… 이 모든걸 보여주는 이유는 뭐 지?' 시윤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곱씹으며 자신의 이마를 매만 졌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온 바로 그곳은 천사의 인 이 새겨진 부위다. 그 때, 한 목소리가 무(無)의 공간을 가르고 들려왔다. -시윤아… '…역시 그런 뜻이었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날 부르는 이가 있다! 탁하게 죽어있던 시윤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무력하게 감각을 잃어가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던 아늑함은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죽음의 유혹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 지만 시윤은 그것을 간단히 뿌리쳤다. -내가 여기 있어… 화르륵! 찬란하게 불타오르는 성화(聖火)가 이마를 스쳐지나가자, 황 금의 문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힘 을 발휘한 천사의 인이 스스로 발현했다! 그와 동시에 힘이 돌아왔다. 아니, 새로운 힘이 천사의 인을 통해서 유입됐다. 폭포수처럼 흘러들어오는 성스러운, 그리고 익숙한 기운! -날 찾아와 '아직…' 시윤은 몸을 휘감는 죽음의 기운을 모두 흩어버리며 주위를 살폈다. '난 끝나지 않았어!' 일그러진 공간의 끝자락, 목소리의 발현지! -시윤아… 꾸욱! 온몸에 힘을 최대한으로 돌렸다. 마지막 기회가 찾아 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간다!' * * 아아, 이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카마세이 십천 모두가 휴즈 한명에게 달려들었건만, 평수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었 다. 열 명의 천사들은 간신히 그의 공격을 막아낼 뿐이었고, 그들을 따라온 전투천사들은 네피림과 래픽스 샤딘에게 몰 살당하고 있었다. "크하하핫! 너희들 모두 죽어라! 신의 명령이다!" 휴즈가 광소를 터뜨렸다. 카마세이 십천이 살아있는 것은 마신의 힘을 완전히 몸에 융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 들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옴-카바린과 래픽스 샤 딘은 전투천사들에게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천사의 성혈(聖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곳곳에서 메스킬라토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백의 깃털이 휘날리는 여섯 쌍의 날개를 퍼덕이며 하모리 엘이 앞으로 나섰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조금도 물러 설 수 없었다. [천계의 지배자, 하모리엘의 이름으로! 섬광의 창이여! 폭풍 의 칼날이여!] 수백개의 섬광의 창과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의 검이 휴즈 에게 쏟아졌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공격이어서 피할 수도 없었지만, 휴즈는 웃기만 했다. 그는 하모리엘의 마법이 지 척까지 다가오자 검으로 허공을 그어내렸다. "사라져라." 콰콰쾅! 성신검(聖神劍) 베리노엘이 마신(魔神)의 손에서 빛났다. 마 를 멸하기 위한 무기였지만 도리어 천사들을 치고있는 지독 한 아이러니. 휴즈는 핏빛의 눈동자에서 숨막히는 살기를 쏘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방향에서 지키고 있는 열 명의 천사, 카마세이의 수호자가 있었다. "크크큭, 겨우 너희들이 날 막겠단 말이냐." 가소롭다. 스키엘의 힘을 흡수하지 않았을 때도 카마세이 1 천 하모리엘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성신검 베리노엘과 마신의 힘을 얻은 지금은 천계 전체가 몰려와도 이겨낼 자 신이 있었다. "하하하하! 모두 죽어라!" 그는 크게 웃으며 베리노엘을 허공에 띄우고는 양팔을 좌우 로 뻗었다. 강하게 쥐어진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어 둠과 빛, 흑과 백, 상반되는 두가지였다. 스키엘의 힘을 얻 어서일까. 아니면 마의 극의 경지에 달했기 때문에 오히려 빛을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조심해라!" 하모리엘이 그 힘의 정체를 알아채고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보호막을 펼 쳤다. 어둠과 빛은 섞일 수 없다. 그 둘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역천을 뜻한다. 일개 네피림만 해도 카마세이 십 천과 맞먹을 힘을 지니게 되었으니, 휴즈가 두 힘을 융합한다면 막을 수 있는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게다가 그의 힘은 네피 림의 것처럼 불완전한 게 아니었다. "파멸하라!" 카라라라라! 공기가 잠시 진동했다. 그리고 무형의 기운이 천사들에게 밀려들어갔다.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긴장했던 천사들 사이에서 작은 한숨소 리가 들렸다. 안심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순간 비명소 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정확히 아흔 아홉 명의 천사가 피를 뿜으며 추락했다. 콰 앙! 콰앙! 콰앙! 콰앙! 하늘을 가득 메우는 하얀 시신들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고, 피의 웅덩이만을 남기 며 빛을 뿜고 사라졌다. "이, 이럴 수가…" 그들 중에는 비록 카마세이 십 천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자도 여럿 있었다. 그런 고위천사들이 단 한순간에 핏물로 화하다니, 정녕 마신이라 부를만 했다. 휴즈는 일부러 카마세이 십 천을 제외한 천사들만 없애버렸 다.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무엇 때문에 살육을 일삼는 거냐!" 하모리엘이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 "원하는 것이라…" 파멸의 기운을 한차례 몸에 돌린 휴즈는 이를 드러내고 잔 혹하게 웃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아직 허공에 떠있는 베리노엘의 손잡이를 쥐었다. 순백색의 기운에 감싸인 성신 검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성스럽기 그지없어서, 정말 신 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물론 등의 반투명한 검은 날개만 제외한다면. "멸절이다." "뭐?" "내가 원하는 것은 파멸. 모든 것을 없애겠다. 인간계도, 카 마세이도, 마계도. 모두 없애겠다." "말도 안 돼!" "그게 내 신으로서의 숙명이다." 휴즈는 느꼈다. 영혼의 외침을 들었다. -모든 것을 지워라. 신의 이름으로! 스키엘의 힘을 흡수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 다. 엄청난 힘을 얻고 한단계 더 초월적인 존재로 탈바꿈하 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휴즈가 원래 원했 던 것은 군림이었다. 천계와 마계 그리고 인간계를 지배하 는 신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파괴신이 되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지워라. 신의 이름으로! "모두… 죽어라." 의식이 또렷해질수록 그 목소리는 더 생생해졌다. 휴즈는 '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해!" 하모리엘이 휴즈의 움직임을 보고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 휴즈는 카마세이 5천 벨리아 스의 심장에 베리노엘을 쑤셔넣고 있었다. 천사와 악마의 한계마저 초월한 그는 정녕 파괴신이었다. "크…윽." 피가 뿜어져나오는 벨리아스의 시신을 무심히 걷어찬 휴즈 는 착가라앉은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어라." 파앗! 그의 신형이 다시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크라시아!" 카마세이 3천 크라시아, 푸른 머리칼이 아름다웠던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 다. 주르륵. 뭐라고 말하려던 그녀의 입술에서 목소리 대신 에 핏물이 흘러나왔다. 휴즈는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어 터 뜨렸다. "크라시아앗!" 크라시아의 페어, 5천 테이딘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 며 다섯 쌍의 날개를 몸 앞쪽으로 모았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까지 힘을 모두 끌어낸 그는 날개의 끝으로 그것을 모았다. 날개와 같은 새하얀 빛이 동그랗게 모인 날개의 끝 에 맺혔다. "죽어라! 엔젤릭 캐논Angelic Cannon!" -콰아아아아! 테이딘에게서 대기를 찢어발기는 백색 광선이 쏘아져 나갔 다. 휴즈는 그것을 힐끗 보더니 손에 묻은 피를 핥고는 베 리노엘을 들고 엔젤릭 캐논의 중심으로 돌진했다. "성천사포도 소용이 없단 말이냐!" 누군가가 소리쳤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휴즈가 털끝 하 나도 다치치 않고 엔젤릭 캐논을 통과해서 테이딘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멸하라! "난 신이다." 기계적인 목소리로 휴즈가 말했다. 자아는 남아있지만 '의 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휴즈는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더 이상 몸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저 그 목소리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 없애라! 파괴하라! * * "하아, 공기 좋다." 시윤은 굳은 몸을 이리저리 꺾어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기는 시원했고 슬슬 날이 저물고 있어서 하늘에는 노을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시윤은 얼마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시윤아." 곱고 가는 목소리, 시윤은 웃었다. 그녀가 바로 자신을 죽음 의 늪에서 건져온 그 목소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노을을 반사하여 붉게 빛나는 백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금색의 눈동자로 생글생글 웃었다.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류메리아… 역시 너였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 다. 얼마만의 재회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시윤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기 분좋게 느껴졌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안 궁금해?"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윤은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 려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 말하지 마.' 무(無)의 공간에서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인연의 사슬들을 거슬러 올라간 그는 결국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차가운 진실이었다. 진실이어서 차가운 것인지, 차갑 기 때문에 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이윽고 흥분이 진정되자 시윤이 입을 열었다. "나 꼭 말하고 싶었어. 지금까지 그래서 기다렸어." 시윤은 류메리아의 입에서 손을 치웠다. 그녀는 신비롭게 빛나는 벽안으로 물끄러미 시윤을 마주보고 있었다. "…무슨 말?" 너무나 떨렸다. 그는 천천히 류메리아를 끌어안았다. '작구나.' 그냥 보기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안고나니까 몸이 외소하다 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자의 몸이라서 그런 걸까. 시윤은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널 사랑해……." 몸이 따스해진다. 온기가 전해지는 것일까. "내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어. 천년… 그래, 천년 만에 다 시 만나는 너한테 꼭 말하고 싶었어. 사랑한다고, 그 누구보 다도 내가 널 사랑한다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스키엘이기도 했고 시윤이기도 했다. 지 금까지의 반목은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둘은 하나가 되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시윤의 기억과 스키엘 의 기억, 둘의 인격이 조심스럽게 하나로 맞물려갔다. 잠시동안 침묵하던 류메리아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널 사랑해. 기억하니? 나의 맹세를…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네가 어떤 곳에 있어도 내가 찾아가겠다 고… 나 이렇게 돌아왔어. 다시 받아줄 거지? 시윤아… 사 랑해." 눈이 뜨거워졌다. 목이 메여서 더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어 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류메리아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 서, 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입맞췄다. 짧은 입맞춤 이었지만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나… 이제는 가야해." 시윤이 슬픈 듯이 말했다. 죽음의 순간, 삶을 위해서 다시 기회를 잡은 것도… 류메리아의 힘을 받아들여 무의 공간을 부수고 나온 것도 다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어차 피 정해진 수명은 끝났다. 억지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버티려고 하면 영혼이 붕괴될지도 모른다. 류메리아가 울기 시작했다. 겨우 살려냈건만 시윤은 또다시 죽으러 간다. 말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슬펐 다. 그녀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서 엉망이었다. "세상을 버리고 날 선택한다고 했잖아. 그랬었잖아……. 흐 흑……." "널 또 잃기 싫어서 그래.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가지 않 으면… 우린 정말로 헤어지게 된다는 걸……." 지독한 역설적 현실에 시윤은 비참함을 느꼈다. 그녀를 두 고 가지 않으면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희생한 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데… 내 마음 을 모르겠니? 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만나자." 그렇게 말한 시윤은 허공으로 발을 내딛었다. 더 이상 지체 한다면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못할 것 같다. 등을 보이고 있는 시윤, 그도 울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턱을 따라 흘 러내렸다. "시, 시윤아!" 멀어져가는 시윤을 보다못한 그녀가 크게 그를 불렀다. 시 윤은 잠시 멈칫했고, 그런 그를 향해서 류메리아가 자신의 창을 소환하여 던졌다. "이걸 가져가!" 상아빛의 가늘고 길다란 창, 천계의 무구 중 세손가락에 꼽 히는 류메리아의 <히카루나>였다. 시윤은 그것을 받아들고 는 손에 꼭 쥐어보였다. 단지 쥐었을 뿐인데, 예리한 살기가 퍼져나갈 정도로 좋은 무기였다. "고마워!" 그 어떤 무기도 없는 시윤에게 이것은 커다란 도움이 되었 다. 앞으로 맞설 적은 맨손으로 상대할 만큼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다시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것을 애써 참으 며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날기 시작했다. 약간 떨 어진 곳에서 빛과 어둠의 충돌이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조심해. 시윤아……." * * "어, 어째서 저를…" 도스예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복 부는 완전히 찢겨져 있었고, 휴즈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휴즈의 손에는 방금 묻어난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모두 죽어라. …그것이 신의 뜻이다." 그는 조용히 말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에 숨죽이고 지켜보던 모두들은 깜짝 놀랐다. 어째서 왕이 자신을 돕겠다고 다가 온 신하를 죽인단 말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이없어 하는 건 카마세이의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건가. 래픽스 샤딘을 죽여서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고!' 하모리엘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계산이 나오질 않 았다. 역시 휴즈는 미친 게 틀림없다는 결론만이 나왔다. 하 지만 그의 힘은 정말로 신에 가까웠다. 이틈에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빛도 어둠도 모두 사라지리라. 무(無)로 돌아가리라. 천계 도 마계도 인간계도 모두 파멸하리라." -그것이 신의 의지! 아주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지만, 초인적인 청각을 갖고있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천계의 수호자 카마세이 십천, 마계의 검 래픽스 샤딘까지도 싸늘하게 피가 식는 걸 느꼈다. 휴즈는 그들 모두를 없앨 생각이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아진이 전투천사들을 몰살시키고 온 래픽스 샤딘을 손짓해서 불렀다. 그의 눈은 삶을 포기하기 라도 한 듯 처연하게 휴즈를 향하고 있었다. "카엘, 유라시, 데드루어… 남은 건 너희 셋뿐인가." 그리고 네피림이 있었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씁쓸 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아진은 검을 뽑아들었다. 어둠의 달, 루오나의 사악한 기운이 검은 오라로 검신에 은은히 피어올 랐다. "우리는 왕의 검 <래픽스 샤딘>." '어둠의 수호자', 우습게도 초대 마왕이었던 테르카시 사마 엘은 자신의 직속 타천사들의 명칭을 신어(神語)로 지었다. 그리고 그는 한가지 금기를 대대로 전승시키도록 했다. 래 픽스 샤딘의 수장이 갖는 고유 권한, 그것은 마왕조차 침범 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마계의 수호자다. 나 래픽스 샤딘의 102번째 수 장, 아뮤릿 지나이온은 마왕 테르카시 사마엘 다루카의 이 름으로 이어진…" 편히 돌아가소서. 나의 왕이여. 입술만을 움직여 작게 중얼 거린 아진은 검을 가슴 앞에서 곧게 세웠다. 화르륵! 루오나를 검붉은 불길이 휘감았다. <리볼라티언을 발동한다!> 아아아아아아아! 지옥의 불꽃이 그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슬프게 만 보였던 그의 두 눈에 새카만 기운이 흘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래픽스 샤딘 모두가 지옥의 불꽃에 몸을 담 은 채, 흑색 안광을 뿜어냈다. "지-옴-카바린에게 명한다! 왕을 척살하라!" 메사트가 빠졌기에 지휘를 받지 못했던 그들은 아진의 한마 디에 모두 휴즈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왕을 위해 만들어졌 지만 도리어 그를 해쳐야하는 역설적인 상황! 검이 주인을 공격하는 것이나 다를바가 없다. "1천! 잠시 휴전하자! 목표는 휴즈 다루카! 우리들의 싸움은 그 다음이다!" 그는 거침없는 태도로 외쳤다. 무력하게 휴즈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살기가 가득차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좋다. 제안 받아들이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던 하모리엘은 아진의 리볼라티 언을 보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리볼라티언, 그것은 신어 로 희생을 뜻한다. 왕이 마계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고 느 꼈을 때, 래픽스 샤딘의 수장은 왕을 제거할 권리를 얻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으윽. 비, 빌어먹을!"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휴즈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 렀다. 방금전까지의 감정이 섞이지 않은 기계적인 음성이 아닌, 당혹스런 목소리였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다시 외쳤다. "리볼…라티언인가." 리볼라티언, 일단 발동되면 왕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절대명령어. 대가는 래픽스 샤딘 수장의 목숨이다. 지금 타 오르고 있는 이 불꽃은 아진의 생명을 원동력으로 래픽스 샤딘 전원의 능력을 한계이상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휴즈는 쓰게 웃었다. "차라리 잘됐구나." 잠시 생기가 돌았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날…" 말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인간적인 감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예의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가 돌아왔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뜬 휴즈는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숨을 천천히 몰아쉰 휴즈는 검을 느린 속도로 들어올렸다. "파멸의 시간이다." -모두 정화되라! 그것이 신의 의지다! 그러나 아진은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날… 죽여다오.' "래픽스 샤딘! 지-옴-카바린! 명령한다! 배신자 휴즈 다루 카를 처단하라!" "영광스런 신의 의지, 카마세이 십천이여! 어둠의 왕을 공격 하라!" 빛과 어둠이 하나의 의지로 모였다.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 던 천계와 마계의 합동 공격! 파괴의 왕, 휴즈에게 그들은 무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수천발의 빛의 화살이 그의 몸을 두들겼고 암흑의 마법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널 돕겠다. 대신, 넌 내 부하가 되는 거야. 좋은 조건이라 고 생각하지 않아?' 아주 오래 전에, 성인식조차 치르지 못한 아진에게 휴즈가 제안했었다. 그리고 그는 충성을 바칠 주군을 선택했다. 스 키엘이 아닌 휴즈로. <디바인 블레이드 암흑, 그리고 빛> 성신검 베리노엘에서 암흑의 기운과 빛의 기운이 뻗어져나 왔다. 그 둘은 서로를 감싸 파멸로서 합쳐졌다. 흑도 백도 아닌 혼돈의 기운이 검에 담겨졌다! "크하하하하!" 휴즈가 광소를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감정이 돌아온 것 같았지만, 그것은 원래 휴즈의 모습이 아니었다. 백지화된 영혼에 새로이 새겨진 듯한 모습. 그것은 …파괴신이었다. "죽어라! 사라져라! 파멸하라!" 파멸의 검이 흩뿌려지는 곳마다 피가 터졌다. 전투천사는 전멸한지 오래였고, 그나마 지금 남아있는 것은 양쪽 모두 정예중에 정예였다. 그러나 그들조차 휴즈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퍼걱! 한줄기 빛으로 변한 휴즈가 스쳐지나가자, 카엘과 카마세이 십천의 천사 하나의 목이 깨끗하게 잘렸다. 붉은 피가 분수 처럼 솟아나왔다. 콰콰쾅! 거대한 빛의 광선이 잠시 멈춰선 휴즈에게 쏘아졌다. 하모 리엘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직접 쏜 직경 10미터의 엔젤릭 캐 논에 격중당한 휴즈! "빌어먹을!" 빛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휴즈는 상처하나 없이 깨끗 했다. "하하." 아진이 입을 벌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채 3분도 지나지 않 았는데 둘이 죽었다. 반면에 휴즈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능 력이 향상된 래픽스 샤딘조차 소용이 없다. 뭔가를 결심한 듯 아진이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내가 그의 움직임을 잠시동안 막겠다. 카마세이는 엔젤릭 캐논을 래픽스 샤딘은 마계의 염화를 소환해라. 네피림은 각자 최강의 공격마법을 써라. 기회는 단 한번, 한순간이 다!' 그들 모두에게 마음을 전달한 아진은 다섯 쌍의 검은 날개 를 세차게 움직이며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휴즈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한계까지 힘 을 끌어내야 했다. 빛의 속도에 가까운 둘의 움직임! 인간 계의 법칙 따위는 조금도 장애가 되질 않았다. "휴즈! 멈춰라!" 자신을 따라오는 아진을 흘끗 본 휴즈는 귀찮다는 듯 뒤로 돌아 검으로 그의 어깨어림을 베었다. 영혼을 불태워 무서 운 힘을 얻은 아진은 검에 힘을 잔뜩 불어넣고, 휴즈의 베 리노엘을 막아냈다. 카가강! 조금이라도 밀리면 당장에 목이 베일 상황! 둘의 검은 맞물 려 있었고, 그것은 힘겨루기로 이어졌다. 아진은 검을 세차 게 퉁겨내어 뒤로 물러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다!" 마법의 발동! 네피림과 천사와 악마의 마법이 한데 어울려 져 휴즈에게 퍼부어졌다. '설령 신이라도 견디지 못하리라.' 직경 3미터의 커다란 방어막이 그를 감쌌지만, 빛과 어둠의 마법은 그것을 가볍게 부서버렸다. 무방비 상태가 된 휴즈 는 황급히 반투명한 흑색 날개로 몸을 감쌌다. "크아아아악!" 휴즈의 비명과 함께 터져나오는 시력을 앗아갈 정도로 강렬 한 빛! * * 스르륵.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를 느끼며 시윤은 땅에 내려섰다. 용 암이라도 흘렀는지 아스팔트가 녹아서 이상하게 엉겨붙어 있었고, 한때는 포장되었을 길이 완전히 헤집어져 있었다. 시윤은 볼을 긁적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크윽."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둘이 아냐.' 꽤 많은 숫자였다. 그것도 곧 죽음의 냄새가 느껴질 정도다. 시윤은 빠르게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갔다. "크크큭, 내가 하찮은 피조물에게 당할 줄 알았더냐." 옆구리를 길게 베인 외팔의 타락천사의 목을 짓밟은 채, 이 제는 색깔조차 사라진 투명한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난 휴즈 가 비웃었다. 흑색이 씻겨진 그의 날개는 천사도 악마도 아 닌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넌 누구냐." 목을 압박당해 숨 쉬기도 곤란한 상황에서 아진은 필사적으 로 물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굳이 죽임 당하지 않더라도 리볼라티언의 부작용으로 곧 소멸되리라. "넌… 크윽. 왕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냐." 주위에는 천사들과 네피림, 그리고 악마들이 깊은 상처를 입고 땅에 떨어져 있었다. 시윤은 그 중에서 익숙한 얼굴 몇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마세이 1천 하모리엘의 전신이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고, 쓰러져있는 그에게서 계속해서 핏물이 흘러 땅을 적셨다. "정말… 신이란 말인가." 그의 목소리는 비참한 기분만 가득했다. 자신을 향하던 빛 과 어둠의 공격을 무위로 돌릴뿐 아니라, 몇배로 증폭해서 튕겨내다니…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신에 가까웠다. 시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걸 느낀 휴즈가 씨익 웃으며 아진의 몸을 멀리 차버렸다. 아진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졌 다. "정말 오랜만이군. 그렇지 않나?" 류메리아의 창을 땅에 늘어뜨리고 시윤이 천천히 그의 앞으 로 걸어갔다. 무한한 윤회를 거치기 전, 그는 '신'을 알았다.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윤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뭐라고 당신을 불러야 할까. 신? 태초의 의 지?" 잔뜩 긴장한 시윤의 태도에 휴즈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니. 나의 아들아……." 태초에 모든 것을 만들어낸 창조자, 태초의 의지 그 자체인 신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무(無)의 공간에 '의지' 가 있었을 뿐이다. 독자적인 완전함을 이룬 의지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못박혀있던 시간은 서서히 움직였고, 그것은 곧 '변화'를 불러왔다. 의지는 이어서 감정을 만들었다. 아니,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의지를 변하게 만들었 고 그 와중에 그는 여러 가지를 깨닫고 만들었다. 영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의지는 '외로움'을 느꼈다. 독자로서의 완전함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나 가능했고, 완전성을 잃어버 린 그는 외로웠다. 시간에 자신을 맡기고 감정을 느끼게 된 의지는 타인을 원했다. 의지를 나누고 싶다. 홀로 있기는 싫다. 의지는 곧 '타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두가지로 나누어 져 있는 자신의 속성 중, 빛의 일부분을 떼어내어 감정을 불어넣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아름다웠고, 의지는 그 를 '천사'라고 불렀다. 의지는 자신의 일부분을 떼어내어 다 시 천사가 살 세계를 만들었다. 의지는 이어서 천사를 무수 히 만들어내었고, 종래에는 저절로 그들이 늘어나도록 번식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자신의 일부분을 떼어 황금수를 천사의 세계에 심어주었다. 이제는 외롭지 않다. 의지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의지는 그가 가 장 아끼던 최초의 천사가 자신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됐다 는 것을 알았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만든 어둠의 세계, 그곳의 '악마'를 '천사'가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의지는 '질 투'를 느꼈고, 서둘러 그 세계를 없애려 했다. 하지만 너무 나 복잡해진 세계에 의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은 이미 불가 능해졌다.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낸 '마계'는 멋대로 성장했 고, 의지를 거부했다. 그래서 의지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직 접 없앨 수 없다면, 대신 시키면 되는 것이다. 의지는 천사 하나를 골라 자신을 불어넣었다. 마계를 부서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주었다. 그러나 최초의 천사가 그것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는 즉시 어둠에 자신을 물들였고, 마계에 '타락천사'라는 존재를 퍼 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지의 대리자와 맞서 싸웠다. 이후에 세상은 더 이상 의지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 었다.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만든 인간계조차도 너무나 타 락하고 더럽혀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의지는 생각했다. 멸망시키자. * * 최초의 천사이자, 타락천사인 시윤이 고개를 저었다. "또 대리자를 쓰는군. 그것도 나의 동생을……." 씁쓸하게 입을 다무는 스키엘에게 의지가 한걸음 다가갔다. "돌아오거라. 나의 아들아. 이 더러워진 세상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스키엘." 시윤이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아니, 난 돌아갈 수 없어. 당신을 막을 거야." "하하! 네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넌 힘조차 남 지 않았어. 무엇을 위해서 이런 세상따위를 구하겠단 말이 냐. 천년 전에도 세상에 배신당해 개죽음 당했던 녀석이!" 시윤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띄 웠을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잃고 싶지 않아." 의지는 이를 부득 깨물고 소리쳤다. "넌 날 막을 수 없어! 지금의 나는 '최초의 천사'라고 하더 라도 상대가 되질 않는다! 하물며 윤회를 거듭한 그런 몸으 로 날 막겠다니, 웃기지 마!" 처음으로 스키엘이 만들어졌을 때, 그는 신에 가장 가까운 힘을 갖고 있었다. 신의 의지를 행하는 카마세이의 주인으 로서, 신의 아들로서, 신의 친구로서. 지금의 대리자는 그보 다 더 강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시윤은 놀라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난 내 신념이 있다. 포기할 순 없어." 기어코 의지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의 투명하던 날개는 혼 돈으로 채워졌고, 한때 스키엘의 검이었던 베리노엘은 혼돈 의 검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널 죽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 난 태초의 의지, 널 다 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포기해라, 스키엘." 협박이 아니었다. 의지가 아무리 스키엘을 아낀다지만 죽이 지 않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새로 살려낼 능력도 그에겐 있었으니, 제어할 수 없는 이런 세상보다는 더욱 마음에 드 는 세상을 만들어 그곳에서 함께 사는 게 낫다. "난 천사이자 악마였지만… 지금의 나는 인간이다. 시윤이 라고 불러." 그렇게 말한 시윤은 늘어뜨렸던 창을 앞으로 뻗으며 강하게 움켜잡았다. "네가 내게서 가져간 힘은 절반 정도, 나머지는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걸 몰랐나?" 류메리아의 구출이 아니었다면 모두 흡수당했으리라. 하지 만 천사의 인을 이용한 빛의 전환 때문에 힘을 남길 수 있 었다. 파라락! 깨끗한 흑색의 날개 여섯 장이 시윤의 등에서 돋아났다. 그 것도 왼쪽에서만. 한쪽으로 치우쳐진 기이한 모습이었다.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걸 로 충분해." 수연아… 고마웠어. 파라락! 원래 검은 날개가 있어야 할 등 오른쪽에 새하얀 날개 여섯 장이 돋아났다. 류메리아가 천사의 인으로 넘겨준 날개였다. "오라. 신이여, 나의 창조자여. 난 다시한번 당신에게 대항 하겠다. 나의 신념으로, 나의 의지로." 해맑은 미소를 짓는 시윤은 조금도 불행해보이지 않았다. "이제 끝을 내야 할 때야." 빛과 어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의지. 시윤은 조금도 두렵 지 않았다. * * 지축이 흔들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고, 해 가 저물어서 어두워진 하늘이 불꽃이 터지며 대낮같이 밝아 지기를 수 차례. "시윤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류메리아는 눈물젖은 눈으로 마지막 격전이 벌어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시윤아……." 몇번이고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 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석 장의 날개를 쏟아부었고, 힘을 주기 위해서 나머지 여섯 장의 날개를 옮겨주었다. 이제는 날 수조차 없는 류메리아. 파멸의 의지가 하늘을 뒤덮었고, 빛과 어둠을 머금은 인간 의 의지가 그것을 갈랐다. 혼돈의 힘과 시윤은 그렇게 무서 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아니 천사나 악마 로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그들은 강했다.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건물이 박살났고, 후폭풍이 일어나서 가로수가 뿌리째 뽑혔다. 콰아아아! 비가 쏟아져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몸을 두드렸지만 류메 리아는 오로지 멀리 보이는 둘의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 다. 머리칼이 물에 젖어서 시야를 가리자 그녀는 거칠게 머 리를 쓸어올렸다. "치잇."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전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지속되었다. * * 비가 그쳤다. 싸움은 아침까지 계속됐고, 해가 떠오를 즈음 승패가 가려졌다. "…어째서지?" 의지가 물었다. 상아색 창이 그의 가슴에 박혀 있었고, 그것 은 파멸의 의지를 누를 정도로 강한 기운을 담은 것이었다. 의지는 창을 힘주어 뽑아내고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을 손으로 막았다. 치료는 불가능하다. "어째서 네가 날 이길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천사와 악마의 힘을 동시에 완벽하게 발휘해도, 내 혼돈의 기운이 더 강했 을 텐데… 어째서지?" 휴즈의 몸은 스키엘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마신체에 달했다. 타락천사의 한계를 초월한데다가 의지 본체의 힘을 조금 끌 어오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시윤은 지지않았다. "무엇이 널 그렇게 강하게 만드는 거지? 도대체 뭐가 널 강 하게 만드는 거야!" 왈칵, 절규하던 의지가 핏물을 가득 토해냈다. 이제 곧 생명 이 끊어지리라. 의식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간절 한 눈으로 시윤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어. 그건 아마도… 후후, 그래. 네가 신으로서 의 자신을 버린다면 깨닫게 될지도 몰라." 비에 젖어서 얼굴에 착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올리자 붉은 보석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깊은 슬픔을 간직했던 눈이 이제는 깨끗하고 맑게 빛났다. 피로에 지치고 많은 상처를 입은 몸이었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 시윤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더럽다고 느끼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난 행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기에." 의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 ……." 시윤의 마지막 말을 의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을 느꼈다. 그런 건가? 영겁의 시간동안 깨닫지 못한 것, 시 윤을 통해서 아주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나머지는 직접 찾아보면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 나도 느껴보고 싶구나. 스키엘, 아니 시 윤… 네게 보답…하겠다." 그렇게 말한 의지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떨궜다. 숨이 끊 어지고 심장이 멈췄다. 죽은 것이다. 마계의 왕을 자신의 대 리자로 삼았던 신의 최후는 그렇게 초라했다. 시윤은 옆구 리에 베인 상처를 지그시 누르며 걷기 시작했다. 고통은 참 을 수 있지만 출혈이 심해서 벌써 눈이 감기려고 했다.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반향되어 귀에 울린다. 꿈속에서 들리는 것 처럼 현실감이 떨어졌다. 다리를 헛디딘 시윤은 빗물이 고 인 웅덩이에 얼굴을 쳐박고 쓰러졌다. 시윤은 정신을 잃으 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류…메리아?" 어느새 다가온 류메리아는 시윤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새빨갛게 변한 그녀였다. "그래, 나야. 이제 끝난 거니?" 쉬어버린 목소리. 밤새도록 울었군. 시윤은 피식 웃으며 한 쪽 팔을 힘겹게 들어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끝났어. 모두 끝났어. 이제 안심해도 돼." "그럼…" 그럼 곧 헤어질 시간이구나. 그녀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조 금 걷자 땅에 쓰러져 있는 네피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서봐." 류메리아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던 시윤은 네피림들 앞에 섰 다. 반탄당한 마법을 맞고 쓰러진 그들은 각기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강인한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금방 죽었으리라. <돌 아 와 라> 부우웅. 시윤이 그들을 가리키자, 네피림들의 몸에서 안개같은 하얗 고 검은 기운이 빠져나왔다. 동시에 상처도 치유되었다. 힘 이 빠진 시윤은 류메리아에게 무너지듯 기댔다. 이렇게 지 탱해주는 그녀가 없었더라면,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 다. "잘 됐…어?" 얼마남지 않은 생명을 더욱 깎아낸 시윤이었다. 류메리아는 그를 안아주며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인간으로 돌아왔어." 시윤이 활짝 웃었다. 고통과 피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나 좀 쓰러지지 않게 해줘." 지금의 시윤, 막을 수 없다. 류메리아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 가 한숨지었다. 잡아주지 않으면 또 쓰러질지 모른다. 머뭇 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뒤에서부터 시윤의 허리를 감싸안았 다. "울지마… 나 힘들지 않아." 등에 촉촉히 젖어오는 눈물이 느껴졌다. 울고있는 그녀는 시윤의 등에 얼굴을 부볐다. "울지… 않을게." 시윤의 눈이 래픽스 샤딘과 카마세이 십천을 찾았다. 양쪽 모두 상당수가 죽어버리고 남은 인원은 몇 되질 않았다. 그 나마 남은 이들도 중상을 입어 의식이 없었다. <옮 겨 라> 파앗! 한차례 빛이 번쩍이고 카마세이 십천이 사라졌다. 시윤이 자신의 수명을 깎아내면서까지 강제로 그들을 카마세이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래픽스 샤딘… 쿨럭!" 중얼거리다말고 시윤은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속이 상했는 지 피가 뿜어져 나왔고, 그는 피를 손으로 슥 닦아냈다. "제발 무리하지마." 류메리아의 걱정을 뒤로한 채, 시윤은 휴즈의 시신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윤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휴즈의 몸에서 검은 구체가 튀어나왔다. 계승의 증거물! 스키엘이 휴즈에게 넘겨준 바로 그것이다. "이리 오거라." 다루카의 핏줄에 반응하여 날아온 검은 구체를 시윤이 움켜 잡았다. <변 해 라> 부우웅! 계승의 증거를 간단하게 변하게 만든 시윤은 쓰러져 있는 아진을 찾았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 다. 리볼라티언을 발동시키고 죽은 자는 잿더미가 되버리니 까. 하지만 아진의 생명도 이제 바닥나 있었다. 곧 숨이 끊 어질 것이다. "새로운 마왕은… 아무래도 네가 좋겠다. 아진." 휘익! 시윤에 의해서 성질이 바뀐 계승의 증거는 더 이상 다루카 의 핏줄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왕에 의지에 의해서 계승되도록 변한 것이다. 흑색의 구체는 쓰러져 있는 아진 의 미간 사이로 빨려들어갔다. "나도 알고 있었지. 네가 성장하기까지 휴즈가 도와줬다는 사실을… 메사트 지나이온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줬 다는 것도. 넌 정이 많은 녀석이다. 아진. 네가 왕이 된다면 적어도 천년 동안은 평화로울 거야." 그리고 아진은 죽지 않을 것이다. 리볼라티언으로 바닥난 생명력을 마왕의 힘이 보충해줄 테니까. 시윤은 아진의 왼 팔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는 더 도와줄 힘이 없다. <옮 겨 라> 네 명의 타락천사도 마계로 이동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시윤 은 완전히 탈진했다. 마력도, 체력도 생명도 모두 바닥났다. "…미안해." 시윤이 뒤로 돌아서 자신을 안고 있던 류메리아의 눈을 보 았다. "뭐가 미안한데?" "…미안해." 날카롭게 묻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치잇, 이런 게 어디있어. 만난지 얼마나 됐다구 벌써 헤어 져야 하는 거야." 투정부리는 류메리아, 입술을 비죽이 내민 그녀는 너무나 귀여웠다. 시윤은 대꾸하는 대신에 그녀의 입술을 맛보기로 했다. "읍!" 갑작스런 키스에 류메리아는 눈을 크게 떴지만 곧 감아버렸 다. 감미로운 느낌, 시윤의 땀냄새조차 싫지 않았다. 그래, 그의 모든 게 좋았다. 깊은 키스가 끝나고 류메리아의 얼굴 에 홍조가 어렸다. "이제 시간이… 됐어." 시윤이 그녀를 놓아주고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운명을 위해서 죽음을 미뤄놨었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다. 그의 몸 이 황금색 기운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시윤을 마중나온 죽음의 그림자. "다시… 만나자." 다시 천년이 지나도, 널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다시 만나 자. "시윤아!" 오열했다. 다시 연인을 잃은 슬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 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싫었다. 참았던 눈물이 다시 흐 르기 시작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때문에 견딜 수가 없 었다. 빛무리가 지나간 자리에 시윤은 없었다. -네가 어디에 있어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내가 찾아 갈게. 기다려줘……. * *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수연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고, 지 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시디바루 너머의 백호도 루이시 블도 슬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군요. 아진이 왕이 됐고, 오빠가… 죽었다니. 그가 죽고 나서야 루이시블은 카엘을 오빠라고 불렀다. 인 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까지 외면했을 뿐이다. -후우, 결국 시윤은 죽었다는 소리군. 중간에 살아난 시윤의 모습을 본 백호는 환호했다. 그러나 결말은 역시 바뀌지 않았다. 다만 복수할 상대가 없어졌을 뿐이다. 휴즈 다루카가 아닌 신을 칠 방법은 없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수연의 연인인 시윤이 죽어 버렸기에 마땅히 해야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 작 휘수연 본인은 태연하기만 했다. "올 시간이 됐는데……." 시계를 본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 시간이 넘었는데 왜 안오는 거지? "누가… 와?" 지현이 눈을 훔치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수연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벌떡 일어 선 수연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앞 에는 시장바구니와 생활용품을 잔뜩 쌓아올려서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수연이 앙칼지게 말했다. 뭐라고 화를 내려던 남자는 물건 을 몽땅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대 꾸했다. "배달 안해준대잖아!" 깨끗하고 윤기나는 새하얀 머리카락, 은은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는 시윤이었다. END... 태초의 의지가 남긴 선물… 그것은 부활이었다. 더 이상 헤 어지지 않도록, 슬퍼하지 않도록 축복을 내린 것이다. 힘은 모두 사라졌다.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은 모두 없 어졌다. 오히려 그게 고마웠다. 거추장스러운 힘을 갖고 있 는 건 불편할 뿐이다. 쓸 곳도 없으니까. 밤 공기가 차다. 지현이라는 여자는 주룡곡으로 돌아갔다. 저녁을 먹고 그녀가 가져다 준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 난 일찍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저어, 시윤아. 할 말이 있는데…" 잠옷 대신인 면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가 조용히 나 를 불렀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빗소리가 들렸다. 베란다 바깥으로 보슬비가 내린다. 그러고 보니 벌써 장마철이다. "오늘 밤에는… 같이 자면 안될까?" 잔뜩 긴장한 표정. 이곳으로 이사 온 것도 벌써 석달이 지 났는데 한번도 같은 방에서 잔 적이 없다. 방은 세 개였고, 하나는 내가 하나는 그녀가 썼고 나머지 하나는 비워뒀다. "……."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의도로 같은 방을 쓰자는 것인지 안다. 간절한 눈빛이 내 마음을 할퀴었지만, 난 대답할 수 없었다.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려 했지만, 얼굴은 어색하게 굳어버렸을 뿐. 슬픔을 감추기도 힘들다. "그렇게 하면… 안될까?" 낮에 떠들며 농담을 주고받던 게 거짓말이라 여겨질 정도 로, 분위기는 숨막히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왜 저렇게 슬픈 얼굴을 간절한 눈을 하고 있는지 난 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린…" 잔뜩 긴장해서 갈라지는 목소리, 난 천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아직 어리고, 결혼도 안…" "그만둬! 그따위 것!" 그녀가 빽 소리를 지르며 내 말을 끊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우리 함께 살잖아. 서로 사랑하잖 아. 결혼? 할 거잖아!" 후후, 틀린말도 아니지. 말문이 막혔다. 친인척 하나 없는 고아가 되버린 난 의지할 상대가 그녀밖에 없다. 가진 것도 없으며 능력도 없다. 반면에 그녀는 많은 재산을 갖고 있고, 능력도 좋다. 결혼하자고 한다면 감지덕지할 사람은 당연히 나다. "왜 날 거부하는 거야? 도대체 왜 그래. 예전에는 안 그랬 잖아." 얼마전에 짧게 잘라서 얼굴을 가리는 머리칼의 일부가 흔들 리면서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 날 사랑하지 않아? 그런 거야?" 또 다시 짧은 침묵. 그녀의 고운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날… 사랑하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 답답하다. 고통스럽고 슬픈데, 도저히 표현 할 수가 없다. 외면하고 있던 진실은 너무나 잔혹하다. 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피했다. 쏴아아. 떨어지는 빗방울들, 문득 비를 맞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슬픔을 피할 수 없다면 오히려 몸을 맡기리라. 결 국 난 결심했고, 천천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피할 수 없다면……. "넌… 누구야?" 새하얗게 질린 얼굴, 그녀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난 그녀 가 대답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분명히 넌 류메리아야. 그래, 그건 알아. 하지만 수연이는 아니야. 목소리도 얼굴도 같지만… 네가 그 아이가 될 순 없어." 아니지? 아닌 거지? 제발 내 말이 틀렸다고 해. 부탁이야.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난 미쳐버릴지도 몰라. 너 수연이 맞 지? 그렇지? "언제… 언제부터 알았어?" 모든걸 체념한 듯 그녀는 눈물을 슥 닦아내며 담담한 목소 리로 말했다.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는 모든 감정이 일시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 도 생각할 수가 없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처음에는 수연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와 지내면서 알 게 됐어. 다른 사람이라고… 수연이가 아니라고. 정말 그랬 던 거야? 쳇, 눈에 뭐가 들어갔네." 뜨뜻한 것이 흐르는 걸 느끼고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제기 랄, 사내자식이 눈물이 뭐람. "반은… 맞는 말이야."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어. 날 수연이라고 생 각하면 안될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라도 살 아가면 안될까? 너한테는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난 식어버린 커피가 담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수연이 는 원두커피를 싫어했다.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난 잠시 생각했다. 이대로 살아도 좋겠노라고. 날 사랑해주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고. 하지만 그건… "알고 싶어." 거짓된 꿈이다. 진실을 외면해서 얻는 행복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아니 오히려 더 불행하다는 사실을 난 절실 하게 경험했다. "휘수연이 어떻게 됐는지, 그리고 넌 누군지… 알고 싶어." 그녀는, 수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는 긴 한숨을 쉬었다. 폐의 공기를 모두 짜내기라도 하려는 듯 너무나 길고 애절 한 한숨이었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후후,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휘수연은 죽었어. 직접 봤으니까 알 거야. 하지만 동시에 살 아있기도 해. 아니, 존재한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녀의 영혼이 내 안에 있거든. 수연이가 죽고 너희들이 도망쳤을 때, 난 그 시신을 가졌어. 영혼을 흡수했지. 그녀 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은 내 안에 살아 있어. 그러니까 난 휘수연이기도 한 거야. 너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 첫키스 를 했을 때의 그 감촉까지 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이래 도 내가 수연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까?" 역시 죽었단 말인가.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저 수연이 살아돌아왔다고 기뻐했던 건 역 시 어리석었다. "난 류메리아이기도 해. 목숨보다도 널 사랑했던 카마세이 6천, 그게 나야. 내가 진정한 류메리아의 환생이야." 류메리아……. "너와의 영혼의 공명 때문에 다들 착각했겠지만, 수연은 사 실 나의 천사의 인(Angelic Stamp)이었어. 내 영혼의 조 각… 그것은 내가 환생할 때의 충격으로 어디론가 날아갔 어. 인간계를 떠돌다가 우연히 몸이 약해서 유산될 아이의 몸에 들어가 생기를 불어넣고 그 아이를 살려냈어. 그게 바 로 휘수연이야. 죽을 운명을 타고난 천사의 조각." 죽었어야 했지만, 천사의 조각을 받아들여 운명을 바꾼 휘 수연. 결국 운명은 그녀를 데려가고 말았다. "난 그녀가 내 일부분이란 걸 진작 깨달았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어. 내가 끼여들면 네 행복이 망가질까봐." 그런가… 날 위해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과거를 들먹이면서 나타나는 건 바보같다고 생각했어. 그냥 놔주자, 사랑하니까 놔주자.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현재니까 말야." 분명 그랬다. 그 때의 나였더라면 단순히 류메리아의 환생 이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스키엘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내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휘수연은 내가 아니니까, 난 그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선택이었지. 결 국 넌 너무나 아파하고 슬퍼했으니까." '모르겠니, 내 마음을? 널 이렇게나 사랑하는데도 얻지 못 해서 지켜봐야 했던 내 마음을 아직도 모르겠어? 이제는 놓 치기 싫어. 남에게 내주기도 싫어. 제발 내 마음을 알아줘.'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단지 빗소리만이 들려올 뿐. 왜 날 위해서 그렇게 희생했을까.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더니, 양손을 펼쳐서 손바닥을 마주대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할게." 그녀가 손바닥을 천천히 떼자, 황금빛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그녀의 전신을 애워쌌다. 강렬한 빛 때문에 난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때에는 전혀 다른 모 습의 여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이름은 크리스Kriese 류(流). 너의 신비로운 카운셀러." 수연이 활발해보이는 깜찍한 외모의 소유자였다면, 크리스 는 지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난 당황하고 말았다. 크리 스? 그 크리스란 말인가. "그리고 너를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자." "크리스가… 너였어?" 남자라고 생각했던 친구, 크리스. 한순간에 엇갈림으로 인해 서 1년 이상 대화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의 카운셀러.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너였구나. 바로 너였구나. "너한테 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어……. 날 받아 주지 않을래? 아직도 휘수연을 사랑한다면 내가 그 모습으 로 있어줄게. 알다시피 난 수연의 기억을 모두 갖…" 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더 듣고 싶지 않아. 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말하지 마. 천천히 손을 떼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시윤아, 나 버리지… 마." 희생. 크리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 전에야 알았다. 처 음 날 만나기로 한 날에도, 수연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을 보 았겠지. 그리고 두 번째 날 보았을 때도 난 수연과 있었다. 엇갈린 운명 속에서 그녀는 슬퍼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 하고 날 기다리며 도왔다. 난 바보다. "내가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난 네게서 수연의 모습을 찾을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니?"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나 추하다. 대답을 당연히 알면서도 묻다니. "…네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너도… 바보야. 왜 나같은 녀석을……." 눈물이 쏟아진다.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안았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바보가 되는 거야." 그녀는 울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니? 널 아프게만 했던 내가? "시윤아, 네게 오기까지는 정말 힘들었어. 하지만, 하지만 말야." 내 품에서 크리스가 살짝 빠져나갔다. 그녀는 양손을 내 뺨 에 가져다 대고는 배시시 웃었다. "지금 네가 날 받아들이겠다는 말, 그걸 들으니 너무나 기 뻐. 이제 아프지 않아. 힘들지 않아." 눈을 감은 크리스의 얼굴이 조금씩 다가왔다. 나도 눈을 감 았다. "정말 사랑해."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고마워.' 그녀의 마음이 들려왔다. 쏴아아아. 빗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제는 슬프지 않다. -나랑 사귈래?- -아, 그래요? 그런데 당신 되게 귀엽게 생겼네요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