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독자들이 자기 일처럼 응원하는 주인공 프리나의 인생 역전기! 오!나의 주인님은 간단하게 <오.나.주>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판타지 소설이다. 인터넷에서는 주인공이 당한 처지를 자기가 겪는 것처럼 응원하는 리플이 매회 통상 100개를 헤아린다. 흡사 <마왕>과 <레벨>의 인기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적지 않아, 베스트셀러가 유력해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최악의 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거의 노예 신세로 팔려가서 새롭게 사는 제2의 인생 스토리다.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누구나 저절로 '파이팅, 프리나!'를 외치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자들에게는 큰 감동까지 선사하고 있다. 최악의 운명 앞에 선 프리나, 그녀에게 닥친 새로운 인생 제2막! 한때는 잘 나가던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과 그로 인해 닥친 집안의 몰락. 그리고 평생을 걸쳐도 갚을 수 없는 빚이 프리나의 인생을 가둔다. 이제는 빚을 갚기 위해 노예 신세가 되고 만 주인공은 물에 빠져 죽거나 도망가는 대신 남장을 하고 당당하게 팔려가기로 한다. 그녀가 시종으로 끌려가는 곳은 대륙 최고의 명가라고 알려진 카르멘이다. 그리고 그곳 말고도 아일린이라는 또 하나의 대가문을 짊어진 얼음같이 싸늘한 철혈 남자, 반을 만나게 되는데..... 터프한 남장소녀의 등장과 가문의 암투 속에 지친 가주의 만남으로 두 사람을 둘러싸고 새로운 인생 제2막이 시작된다! 제 목: 3 :: 오! 나의 주인님 <- 프롤로그 -> 가네트(uznian) 03-11-24 :: :: 4571 오! 나의 주인님 - 프롤로그 -― 소녀의 머리카락은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밀어닥친 바람을 따라 어지러이 흩 날리고 있었다. 소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오렌지에 가까운 금빛으로, 바람이 불 때면 부드럽게 사방으로 번지면서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특히 노을을 등지고 섰을 때 소녀가 바람을 맞고 섰노라면, 흩어지는 금빛의 머리카락과 지는 노을이 묘하게도 대비되어 섬뜩하도록 신비하고 매혹적인 분 위기를 내보였다. 소녀는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평소에는 한 가닥으 로 묶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머리를 풀고 있을 때가 훨씬 더 매력적인 것 이 사실이었다. "……아버지." 침묵만이 감돌던 소녀의 방안에서 무기력한 한마디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소녀 의 밝은 오렌지색 눈동자에서 흰 구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눈동자에서 부풀 어 오른 은빛의 구슬은 이윽고 또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눈가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갑자기 떨어진 그 물줄기에 약간 당황한 듯 눈가로 손 을 가져가 양 볼을 촉촉이 적신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 녀는 잠시 후 손을 스르르 내리고 말았다. 손가락으로 가리기엔 눈물이 너무나 도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는 도저히 그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의자에 몸을 기댄 소녀의 기다 란 금빛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석양을 받아 부드러운 윤기를 내는 머리카락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자살한겁니까…… 네? 난 어쩌라고!!" 소녀의 눈물은 매혹적이었다. 가느다란 턱선을 타고 내리는 그것은 너무도 맑 고 깨끗한 성수. 의자를 적실 것 같이 흐르는 그 눈물은 정말로 맑고 깨끗했다. 의자에 온 몸을 의지한 채로 앉은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한참동안 흐느꼈다. 소녀는 입을 막은 채로 끅끅대며 울고 있었는데, 눈물의 이유가 무엇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소녀의 태도에선 너무나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프리나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소녀가 한참 울고 있을 때, 소녀만의 시간을 조용히 깨뜨리면서 문 밖으로부 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 가라앉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 린 순간, 소녀는 흠칫하면서 울고 있던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녀의 몸이 살 짝 떨렸다. "프리나 아가씨, 1층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다시 한 번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녀는 천천히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잠시 스읍, 하고 심호흡을 하더니 난데없이 문밖 을 향해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젠장할! 마르케리티 가에서 보낸 거라면 당장 쫓아, 빌어먹을!" 그 엄청난 고함소리. 듣고 있던 사람이 어이없어 질 정도의 커다란 목소리로 소녀는 발악하듯 고함 을 쳤다. 어찌나 그녀가 고함을 세게 쳤는지, 그녀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그 녀가 기대 앉아있던 의자가 다 삐걱거릴 정도였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쌕쌕거렸다. "체…… 쳇, 빌어…… 먹을…… 내가 그렇게나…… 헉헉…… 오지 말라 고…… 했는데……. 당장 쫓아버려!" 방금 전, 너무나도 청초한 분위기로 주르륵 주르륵 눈물을 짜내고 있던 모습과 는 완벽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눈물에 젖은 볼을 훔치던 아리따운 모습은 이 제 소녀에게 없었다. 소녀는 무서운 걸음걸이로 저벅저벅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오렌지 빛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눈동자가 번 뜩, 얼음을 머금은 듯 차갑게 빛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프리나 아가씨." 문 밖에서 노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쫓아낼 때 욕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아니지, 내가 직접 해야겠어! 그 빌어먹을 자식의 면상을 보면서 욕을 해줘야 속이 풀리겠다고!" 소녀는 그 말과 함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저 북쪽 로이네트 숲에서만 자란다는 최고급 나무로 만든 적갈색의 그 문이 소 리도 없이 매끄럽게 활짝 열렸다. 소녀의 모습이 문 밖에 드러나자, 문 밖에서 소녀에게 이것저것 말을 건네고 있던 노인이 소녀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 다. 검은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소녀에게 부드러운 어조 로 말했다 "프리나 아가씨, 마르케리티가의 찰린 도련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고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내쫓을……." 하지만 노인이 건넨 따뜻한 배려가 담긴 말을 소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 돼!! 찰린 이든 아니든 어쨌든 마르케리티가(家)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성 하게 돌려보낼 수는 없지!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청혼? 웃기는 소리하고 있 어, 진짜! 돈으로 협박하는 거지 그게 어떻게 청혼이야? 젠장할! 내가 오늘 저 를 가만 놔두면 프리나 프리텐이 아니다!" 소녀는 큰 소리로 외치더니 마루를 쿵쿵 울리며 요란스럽게 걸어 나가기 시작 했다. 눈물이 떨어졌던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은 요란스러운 움직임에 의해 뒤 쪽으로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휘날리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흰머리의 노인은 한숨 같은 한마디를 내 뱉었다. "……이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 :: 오! 나의 주인님 - PART 1 : 빚대신 끌려가는 금발 소년(1) 가네트(uznian) 03-11-24 :: :: 11878 PART 1: 빚 대신 끌려가는 금발 소년. "후후후후후훗!! 프리나 프리텐님, 괜히 고집 피우지 마시고 순순히 찰린 도련 님과 결혼하시는 것이 어떨 런지? 이미 망해버린 집안의 산더미 같은 그 빚을 결혼만 한다면 도련님은 갚아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만큼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오렌지 도는 금빛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얼굴선을 가진 프리나 프리텐이란 이 름의 소녀는 능글맞은 웃음을 띤 채로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고 있는 눈앞의 남 자를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프리나의 눈에는 엄청난 전기 스파크가 파 지직,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일고 있었다. 갈빛 머리를 짧게 자른 눈앞의 이 남자는, 프리나가 기억하는 가장 꼴 보기 싫 은 녀석 중 1∼2 위를 다툴 만큼 싫은 남자였다. 프리나는 당장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욕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천천히, 천천히 그를 향해 한마디씩 뱉어냈 다. "웃기지 말고…… 그만 꺼져. 내 성미를 자극해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거 알지? 네 주인한테 똑똑히 전해, 난 절대로 너 같은 놈이랑 결혼 안한 다고! 내가 미쳤 냐? 그따위 느끼한 자식이랑 결혼을 하게!" 하지만 프리나가 고함을 지르든 말든,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온 몸에 서 열을 뿜어내면서 '나 화났다' 고 외치고 있는 프리나를 향해, 온몸에 닭살이 오를 만큼 징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후훗! 프레틴 가문의 그 엄청난 빚을 대체 어떻게 갚으실 생각이십니까, 프리나 아가씨? 찰린 도련님과 결혼만 하시면 그 빚을 갚아주신다고 하지 않습 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금 찰린 도련님이 프리나님께 얼마나 열 을 내고 있는지는 잘 아시겠지요? 빚 밖에 안 남은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이제 결혼이라는 수단밖에 없습니다. 순순히 결혼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프 리텐 아가씨! 제가 좋은 마음에 하는 충고이니, 고맙게 받아들이심이 어떠하실 런지?" 프리나는 능글능글한 남자의 그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잠시였 다. 그녀는 찌푸려졌던 표정을 순순히 풀더니 남자를 향해 씩하고 웃었다. 그녀와 맞상대를 하고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왜 눈앞에 있는 이 만만찮 은 성격의 소녀가 화를 버럭 내기는커녕 자신을 마주보고 웃어주는 것인지 이 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약간 멍청하면서 멀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갚을 테니 걱정 마." 하지만 다음 순간 프리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남자의 예상에 훨씬 못 미치 는 말이었기에 그는 속으로 적잖이 실망했고,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녀의 말에 반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호오, 그 엄청난 돈을 고작 18살에 불과하신 당신이 어떻게 갚겠다는 말입니 까? 놀랍군요. 어떻게 갚으실 건지 한 번 얘기나 해주시면 살아가는데 큰 참고 가 될 것 같은데요?" "너한테 참고가 될만한 얘기를 내가 할 것 같아?" 프리나는 남자가 말을 꺼냄과 동시에 냉정하게 그 말을 그대로 받아쳤다.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뭐라고 그녀의 말 에 반박하려는 순간, 프리나의 고운 입술이 스륵 벌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프리나 아가씨! 제 말을 들어봤자 밑지지는 않지 않습니 까? 그저 눈 딱 감고 찰린 도련님과 결혼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남자가 그렇게 외친 순간이었다. 여태껏 화를 누르고, 누르고 또 누르고 있던 프리나가 드디어 폭발한 것은. "아가리 찢어 버리기 전에 닥쳐" 프리나와 사이좋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신사와 숙녀의 대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말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프리나가 목소리를 쫙 깔면서 조금 듣기 껄끄러운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누가 네 녀석의 멍청한 주인인 찰린 마르케리티와 결혼을 한다는 거냐! 내 머 리에 구멍이 하나 나지 않고서는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아직도 모르는 거냐? 피 철철 흘리면서 죽은 시체라도 좋다면 가져가 보시지. 하지만, 살아 있 는 몸으로는 그 따위 버터 놈에겐 절대로 가지 않을 거다! 알겠으면 당장 꺼 져!"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는 쫙 깔린 목소리로 귀족가의 영양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막말을 내뱉고 있는 프리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버터 놈이라니? 찰린 님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기회는 줄 때 잡아야 하는 법 이지요, 프리나 프리텐님. 지금은 찰린 님이 당신에게 목메고 계시지만 그게 언 제까지 갈 줄 아시는 겁니까? 이쯤해서 못 이기는 청 청혼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텐데요." 남자가 빙글 웃으면서 한 그 말에, 프리나의 입술이 가느다란 포물선을 그렸 다. 그녀의 입술선이 삐뚜름하게 위로 치솟았다. 프리나가 말했다. "네가 오늘 아작나고 싶구나?" 프리나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 그녀의 옆구리에는 아름다운 곡선에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이 한 자루 척하고 걸려 있었다. 보석을 박아 넣었다거나 하는 요란한 장식 같은 것 은 없는 검 집이었지만 충분히 그 자태만으로도 날카로움과 고풍스러움을 발하 는 검 집이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크게 외쳤다. "귀족가의 영양으로서 너무 말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아작이라니!" "웃기는 군." 하지만 프리나는 너무나도 간단히 그의 말을 일축시켜 버리고는 오른손을 움 직였다. 남자의 시선이 꿈틀했다. 햇빛이 번뜩한다고 느낀 순간, 프리나가 말 을 하다말고 손을 밑쪽으로 가져가더니 검 집에 걸려 있던 검을 놀라운 속도로 휙 하고 빼들었다. 신속한 발도!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향한 순간, 흰빛으로 번뜩이는 날카로운 광택의 검 한 자루가 완연한 햇살을 반사하면서 턱하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나의 손에 들린 그 검은 살인을 위한 흉기라고 보기엔 아름다운 선을 가지고 있었는 데, 그 검이 뿜어내는 예리하고도 섬뜩한 광택에 남자는 얼어버리는 수밖에 없 었다. "……지금 그걸 뽑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요?" 남자는 속으로 욕지기를 뱉어내면서 프리나를 향해 물었다. 프리나는 당연하 지 않냐는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네 녀석을 베어버려야지." 순간,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프리나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의 얼굴 위로 차가운 공포감이 흘러갔다. 그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프리나는 검을 더더욱 낮추었다. 프리나의 입 꼬리가 쓱 올려져 있었다. "내 검 실력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내 집 안에 피가 튀는 것이 싫어서 여태까지 참고 있었지만…… 오늘은 못 넘어간다." 그렇게 뱉어낸 프리나가 검을 들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자, 남자의 안 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는 살기를 반사해내는 프리나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 오늘도 안 되겠군요. 도, 돌아가겠습니다." 남자의 비굴하다고해도 좋을 만큼 휙하고 바뀐 그 태도에, 검을 빼들고 있던 프리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검은 회수하지 않은 채로 몸을 굳히 고 말을 하는 남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남자는 프리나의 얼굴을 힐끔 보며 말했 다. "하지만 내일 또 찾아오겠습니다.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십시 오." 남자의 말에 프리나는 검을 높게 들어 보임으로써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 혔다. 남자는 프리나의 얼굴이 번뜩이는 것을 보면서 돌아섰다. ▷◀▷◀▷◀▷◀▷◀▷◀▷◀▷◀▷◀▷◀ "제길!!" 프리텐 가의 저택을 나서는 남자의 발걸음은 상당히 무거웠다. 그는 프레틴 가 문의 저택의 정원으로 파랗게 돋아난 잔디를 밟으면서 거친 욕을 뱉어냈다. "빌어먹을 계집애! 얼굴 하나 반반한 것 말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주제에…… 집이 왕창 망해서 오늘내일 하고 있는데 저렇게까지 도도하게 나온다 이거지? 두고 보지, 네년이 찰린 도련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결혼해 달라고 비는 날 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남자는 프리나의 험담이란 험담은 모조리 늘어놓으면서 프레틴 저택을 빠져나 갔다. ▷◀▷◀▷◀▷◀▷◀▷◀▷◀▷◀▷◀▷◀ "아가씨,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방금 전, 그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싸우느라 잔뜩 신경질이 나버린 프리나 는 자신의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경직 시켰다. 하지만 곧 그가 자신의 곁에 가장 오래 머문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프리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겠다." "죄송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프리나 가문의 집사장이자 프리나에게는 언제나 가장 큰 의지가 되는 노인은 프리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고 프리나는 그런 그를 약간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동안 노인의 얼 굴을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쳇, 집사는 또 왜 이래? 그 바보 같은 아버지가 자살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다정하게 놀아줬으면서 왜 갑자기 존대냔 말이야." "그 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프리나 아가씨. 지금 아가씨는 프리텐 가문 의 정통 승계자로서……" "에잇! 그만둬! 어차피 빚밖에 안 남은 집인데 뭘! 빌어먹을, 빚밖에 안 남은 집안에 전통 승계자고 뭐고 어디 있어?" 프리나가 소리를 높이며 외치자, 여태껏 그녀의 말에 인자하게 대꾸를 해주고 있던 집사의 얼굴이 얼핏 굳더니 곧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 다. 프리나는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영감. 죽으려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고 죽든가…… 왜 하필 내가 기 사서임 받기 하루 전에 죽느냔 말이야!" 그러게 말한 프리나는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거 칠게 뒤로 넘겨졌다. 집사는 그렇게 말하는 프리나를 보면서 푹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여자로선 아가씨가 최연소로 기사서임을 받게 된 거였죠?" 집사의 말에 프리나의 얼굴 위로 살짝 자신감이 스쳐지나갔다. "응. 뭐, 내가 한 검(劍)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말이야."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하기까지 한 말이었으나, 집사는 그녀의 그런 오만을 눈 치 채지 못하는 것인지 빙긋 웃을 뿐이었다. 프리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단, 서임 하루 전에 취소 돼버렸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프리나가 몸을 뒤로 길게 뻗었다. 그녀의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이 소파 위로 흩어지면서 가느다란 올의 금빛 물결을 만들어냈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타고 그녀의 한숨소리가 번져 올랐다. 프리나의 오렌지색 눈동자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런 프리나를 바라보던 집사의 얼굴 위로 도 안타까움이 짙게 흘러내렸다. "기사 서임 같은 거 받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대 프리텐 가문의 승계자가 아니십니까? 500년 전통의 건축 업으로 세이피안뿐만 아니라 카세타에까지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프리텐 가 문의 승계자 말입니다. 기사가 되는 것보다, 이 집안을 책임지고 운영해 나가 는 쪽이 훨씬 대단한 것 아닙니까!" 집사는 프리나를 바라보면서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애써 이렇게 말했지 만 프리나의 얼굴은 굳은 채로 풀릴 줄을 몰랐다. "책임? 운영? 집사, 지금 꿈 꿔? 우리 집 망했잖아! 망한 집안에 운영이고 책임 이 어딨어? 망한 집안에 떡고물이라도 남아 있는 거냐?" "……." 프리나가 피식 코웃음을 치면서 한 말에 집사는 할 말이 없어진 듯, 붉어진 얼 굴로 침묵을 지키면서 발로 바닥을 거칠게 비벼댔다. 어린애 같이 계속 그런 행 동을 반복하는 집사를 보고 있던 프리나는 살짝 웃었다. 웃었다고는 하지만, 그 녀의 표정은 심히 어두워 보였다. "핫핫, 집사?" "예." "우리 집안이 진 빚이 얼마였다고 했지?" "7000만 케트입니다." 집사가 나직하게 대꾸하자 프리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 쉰 그녀는 두통으로 어질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미쳤어, 미쳤어! 우리 아버지는 미쳤던 게 분명하다고! 어떻게 그런 돈을 빌 릴 수가 있지? 그것도, 그것도…… 아일린 가에서 말이야!!" 문득 프리나가 버럭 고함을 쳤고, 집사의 인상이 살풋 망가졌다. 아일린 가(家). 그 자산을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다는 대륙 최고의 상업가문이자 '라니아 대륙 은 아일린의 가문이 먹여 살린다' 라는 말을 떠돌게 만든 전설적인 가문. 1200년 전통의 상업가로, 아일린 가의 상술이나 오랜 상업 경력은 두려울 정도 로 엄청나다. 사채를 애용하고, 빌려간 돈을 제때 갚지 않을 때면 '비켈린' 이라 는 이름의 단체를 보내 깽판을 치기로 유명한 집안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아일린 가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 유구한 역사가 만들어 놓은 엄청난 자산과 상술. 둘째, 채무자에게 향하는 가차 없는 냉혹함. "…제길." 프리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뱉어놓고는 답답함에 주먹을 꼭 쥐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넣고 휘두르는 아일린 가의 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그녀의 아버지는 저 엄청난 집안에 돈을 빌린 후 갚지도 못한 채 혼자 비관하 다 덜렁 자살을 해버렸다. 빚은 고스란히 딸의 손에 물려준 채로. "……하지만……" 어느 순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프리나가 갑자기 입을 열더니 자신의 눈 을 바라보고 선 집사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집사는 그 미소의 의미를 몰라 약 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리나는 입가에서 웃음을 싹 지 우며 천천히 입을 뗐다.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 : 빚대신 끌려가는 금발 소년(2) 가네트(uznian) 03-11-24 :: :: 22414 "모두 합쳐서 겨우 672만 2457케트? ……쳇, 이걸로는 어림도 없어." 프리나는 오늘 처분한 물건값으로 손에 들어온 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프레틴 저택이라는, 세이피안에서도 알아주는 대저택을 팔아치우고 집안에 쌓 여 있던 갖가지 보석과 보물, 값나가는 것이라면 숟가락 하나도 빠지지 않고 거 의 다 팔았건만 프리나에게 돌아온 것은 빚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액수뿐 이었다. 프리나는 잠시 고뇌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 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빚에 대한 처리를 마음속으로 결정해버렸기 때문일까? "자아, 내일인가? 그 엄청난 해결사 집단이 찾아올 날이. 좋아, 마지막이 될지 도 모르니까 좀 놀아봐야지." 프리나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기다란 금빛 머리카락을 단숨에 한 가닥으로 묶 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차분한 색깔의 드레스를 훨훨 벗어 던진 다음 옷장을 열어 감청색의 조금 타이트한 바지를 꺼내서 입었다. "집사! 어딨어!" 프리나가 크게 소리쳐 부르자 바로 옆에서 또 기척도 없이 집사가 나타났다. 무슨 암살자같이 소리소문 없는 잽싼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며 프리나는 피식 웃 었다. "사람들은 다 보내줬어?" "네, 다 보냈습니다." 프리나는 집사의 대답에 약간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집사도……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나는 거야. 알지?" 프리나의 말에 집사의 흰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애써 평정을 유 지하며 프리나에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가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제가 같이…" "아니야. 이건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니까. 헤헤헷, 집사! 나이를 생각해야 지! 내게 짐이 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프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방금 전, 몇 년 동안 프리텐 가문에서 일해 왔던 모든 하인들을 집 밖으로 내보 낸 그들이었다. 프리나는 집사 역시 이 집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몰라도, 집사마저 험한 꼴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사는 금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 슴 시리도록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의지해주지 않고 다 떠 맡으려는 어린 소녀가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집안의 집사일 뿐이었고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프리나가 막대한 빚을 진 이 프레틴 가문을 넘겨받는 그 순 간부터 이러한 슬픈 이별은 당연하게 준비되어 온 것이다. 집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프리나의 슬픈 눈을 보았다. 프리나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서 떨어질 것만 같다. "…아가씨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집사는 그런 프리나를 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지! 그,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프리나 약간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대로 저택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가닥으로 길게 묶은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따라 또 한번 길게 휘 날렸다. 프리나의 눈가에 뭔가 투명한 것이 맺힌 것 같은 기색이 들기는 했으나 그것 은 잠시였고 프리나는 아름답고 투명한 오렌지색 눈동자에 가득 생기를 머금더 니 씨익 웃었다. 그녀는 손목을 덮고 있는 깔끔한 감청색 상의를 팔꿈치까지 끌 어 올린 다음 크고 당당하게 외쳤다. "핫핫핫핫! 오랜만에 놀아볼까!" ▷◀▷◀▷◀▷◀▷◀▷◀▷◀▷◀▷◀▷◀ 집사는 정말이지 곤욕스러웠다. 떠난다고 어제 대답을 하긴 했으나 막상 상황 이 닥치자 도저히 이 40년 동안 일해 왔던 이 저택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십 년 이 넘도록 함께 해 온,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젠 손녀같이 생각되는 소녀를 놔두고 가기도 힘겨웠다. 그러나 소녀, 프리나는 웃었고 집사 또한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말씀을 바꿔주신다면……." "무슨 소릴! 정말 내게 짐이 되고 싶은 거야?" 프리나는 넉살 좋게 배시시 웃었다. "적어도, 그 녀석들…… 비켈린이 올 때까지라도…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집사가 외쳤다. 아일린 가문, 프레틴 가가 7000만 케트라는 엄청난 빚을 진 그 가문의 잔혹무도한 해결사들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이 여린 소녀와 함께 있어 주고 싶은 것이 집사의 심정이었다. "웃기지마! 집사가 왜? 험한 꼴 보기 전에 어서 나가라니까! 이건 프레틴가의 주인으로서 명령이야! 어서 나가!" 프리나의 목소리는 컸고 그 속에는 적지 않은 위엄이 담겨있었으나 어린 소녀 가 감당하기에는 큰 슬픔이 있었기에 그 목소리는 떨렸고 목은 콱 메여 있었 다. 집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오렌지색 눈동자의 어린 소녀를 바라보며 메어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앞으로, 프리나가 행복해 질 때까지 함께…… 어릴 때부터 너무나도 많은 고생을 해왔던 이 소녀와 함께, 끝까지 함께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행복… 하십시오, 프레틴… 아가씨." 집사는 띄엄띄엄 말을 하고는 챙겨두었던 몇 안 되는 짐을 챙겨 들었다. 그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저택을 나섰다. 프리나는 그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보다 더 슬픈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런데 집사! 마지막이라서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프리나의 말에 집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리나는 자신을 바라 보는 집사의 쭈글쭈글한 얼굴을 바라보며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항상 집사, 집사, 그렇게 불렀는데… 집사는 이름이 뭐야? 십 년이나 함께 있 었으면서 이것도 몰랐다니, 나 정말 한심하지?" 프리나의 말에 집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한참 만에 작은 목 소리로 프리나에게 답해주었다. "락케이드… 락케이드 란입니다, 아가씨." "락케이드…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그렇지?" 프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웃었고 집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 어 보였다. "그럼, 어서 가!" 프리나는 재촉했고 집사는 슬픈 얼굴로 다시 되돌아서서 저택을 나가기 시작 했다. 프리나는 집사가 저택에서 나가자말자 바로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창문 을 통해 누군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집사가 사라지는 모습을. 프리나 는 그의 백발이 아예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오랫동안… 눈물을 끊 임없이 흘리며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해 준 그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작게 말했 다. "락케이드… 행복해야 돼. 꼭. 꼭 행복해야 돼. 약속이다?" ▷◀▷◀▷◀▷◀▷◀▷◀▷◀▷◀▷◀▷◀ "레신 프리텐씨! 빚을 받으러 왔소!"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채로 저택 안을 크고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 다. 프리나는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를 걸더니 어제 입었던 그 군청색의 옷을 그 대로 걸쳐 입은 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드디어 온 것이다. 아일린 가문의… 그 무자비한 해결사들이. 빚을 갚게 만들 기 위해서는 그 어떤 무자비한 짓도 서슴지 않는 그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 "그래? 들어와요!" 프리나는 그 말과 함께 뛰어나가 벌컥 문을 열어 젖혔고 곧 저택밖에 선 다섯 에 남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나 무식하게 힘세다' 라는 얼굴에 '나 무식하게 난폭하다' 라고 써놓 은 듯한 울퉁불퉁한 몸. 수십 개의 상처를 비롯하여 '건드리면 죽는다' 라고 말 하는 듯한 표정, 웬만한 사람의 두 배는 더 되어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주 먹……. 그러나 프리나는 그러한 사나운 사람들의 모습에도 전혀 겁먹지 않은 채 오히 려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프리나는 제일 앞에선 두목격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우와? 많이도 왔군요? 그런데 어쩌지? 우리 집엔 이만한 사람들 다 먹일만한 음식은 없는데?" "넌 누구냐? 주인을 만나러 왔으니 비켜라." 갈색 머리카락의 그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는 자신들을 반기는 프리나를 저 택의 하녀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도 프 리나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방긋 웃으며 응대했다. "주인? 눈앞에 있잖아." 프리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이 어린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황당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프리나 를 바라보다가 한참만에야 되물었다. "뭐라고?"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프리나의 말에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함께 온 그 동료들을 바라 보았다. 그의 동료들 역시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당황해하며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얼굴로 프리나를 향해 물었다. "우린 레신 프리텐을 만나러 왔다. 넌 누구지?" "그 레신 프리텐의 '아들' 이다. 이름은 프란이라고 하지.." 프리나는 당당히 외쳤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프리나를 찬찬히 훑었다. 상당 히 가녀린 모습의 소년이 그들의 앞에 당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선이 무척이나 가늘고 섬세한 하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잡티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하얀 얼굴 위로는 귓가에 닿을 정도로 짤막한 금빛의 머리카락이 흘러 내 려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군청색의 남성용 옷을 걸친 소년은 웃고 있었 다. 조금은 특이한 빛인 오렌지색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찬다. '남장이라도 해야 밑 보이지 않지. 요즘 세상은 여자가 해쳐나가기에 힘들단 말이야. 험한 꼴 당하기 딱 좋지.' 프리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집사가 떠난 후 프리나는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고 자신의 머리 카락을 서슴없이 싹둑 잘라 버렸다. 십 몇 년간 기르면서 가끔씩 귀찮게 느껴 져 잘라 버릴까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기른 세월이 아까워 차마 못 자르고 있 던 오렌지색 도는 금빛의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싹둑, 단 번에 잘라 버린 그 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소리쳤다. "이까짓 머리카락쯤이야. 푸하, 홀가분하네. 이제 검 연습할 때 걸리적거리는 일은 없어서 좋겠다!" 머리카락을 그렇게 처리한 그녀는 푸,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가져온 기다란 천을 좌악하고 펼쳤다. 그녀는 천천히 상의를 벗고 거울을 보며 천으로 자신의 가슴 부분을 꽁꽁 묶어 나가기 시작했 다. 18살, 이미 풍만해진 몸매를 가리기엔 무리가 있었지만(사실을 말하자면…… 프리나는 좀 빈약한 편이었다.)그녀는 애써서 가슴을 가렸고, 밋밋해진 가슴으 로 그럭저럭 남자처럼 보이는데 성공했다. 가지고 있던 옷이 원래가 남성복이 주류라 따로 살 필요도 없었다. 이름도 프리나에서 프란으로, 아주 가볍게 고쳤 다. 〈남장〉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끝난 후, 그녀는 거울 앞에서 조금은 어설픈 미 소년이 된 모습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여튼 들어오겠어?" 프리나, 아니 프란은 당당히 외치고는 살짝 물러섬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저 택에 들어오도록 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구!'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 다섯 명의 남자들은 일단은 들어가서 상황을 보자는 판단 하에 저택으로 들어 섰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세이피안에서는 꽤나 유명한 집안으로, 장사가 잘 되고 있다 들었는데 들어와서 보니 이건 영 아니올시다였던 것이다. 집안에는 그 흔한 소파나 의자하나조차 없었고 장식품은커녕 탁자도 없었다. 텅 비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한 홀을 멀거니 바라보던 남자들은 담담하게 서 있 는 프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쏘는 듯한 그 시선에, 프란은 로이네트에서 보 냈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싸늘한 겨울바람을 떠올렸다. 몸서리치는 한기가 느껴졌지만, 프란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어찌됐든 절대로 얕 보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굳건한 의지가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프란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들을 바라보자 한참만에야 두목인 듯한 남자가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보면 몰라? 우리 집, 망했어. 그것도 쫄딱." 프란은 태평스럽게 말했다. 어조는 매우 심드렁했고, 얼굴 표정은 조금도 변함 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 한마디에 프란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은 급격히 굳었 다. 그러나 프란은 그들의 그러한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뭐, 그래서 되는 대로 물건을 팔아 해치웠지. 그리고 여기 저택도 팔았어. 그 런데 빚값에선 영 못 미치더라. 어쩔까나?" 프란의 평이한 어조의 말에 한 남자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 아버지는 어디 있나!" "놀랍게도 일주일전에 아무도 모르게 자살했지 뭐야? 그것도 할복으로 말이 야. 핫핫, 정말 도움도 안 되는 아버지를 뒀다니까." 프란은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곤 싱긋 웃어 보였고, 남자 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또 한번 당황한 채 서 있다가 한참 만에야 무서운 눈빛으로 프란을 노려보았다. 프란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밝은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프란을 힐끔거리면서 뭐라고 수군거렸다. 뭔가 모의가 끝났는지, 그들은 저택 안으로 재빨리 들어왔다. 그들 다섯 명 중 셋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집안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들이 예상했던 이 저택의 주인인 프란의 아버지, 레신 프리텐을 찾는 것이 분명 했다. "아무리 찾아봐라. 쥐도 한 마리 없을 테니." 프란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뱉어놓곤 함께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 프리텐이라고 했던가?" 집안을 뒤지기 시작한 세 명과는 달리 두목인 듯 보이는 갈색머리 남자와 그 의 옆에선 또 다른 남자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프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 다.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 중 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순순히 말해라. 너희 아버지는?" "죽었어." 프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너희 집안의 모든 재산은?" "여자한테 사기 당했다더군." 그 말에 두 남자의 표정에서 또 한 번 황당함의 빛이 떠올랐다. 사기? 사기라니… 그 엄청난 빚을 사기 당할 만한 멍청이도 있단 말인가? "아일린 가에 빚을 진 것은 어쩔 셈이지?" 갈색머리카락의 남자 옆에 서 있던 수수한 금발의 남자가 물어왔고 프란은 그 의 눈을 마주하며 태연히 대답했다. "글세." "뭐야!" 프란의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조에 순간적으로 발끈한 갈색 머리 남자의 손 이 냅다 올려졌다. 그 다음 상황을 예상한 프란은 눈을 감았다. 짝, 하는 요란 한 마찰음과 함께 프란의 오른쪽 뺨에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프란의 뺨을 때 린 남자도, 그의 옆에 선 또 다른 남자도 어린 소년을 때렸다는 죄책감이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프란은 빨갛게 부어오른 자신의 뺨을 살 짝 매만졌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때려봐야 없는 건 없는 거야. 날 때리면 금화라도 나오는 줄 알아? 후후, 금화 가 쏟아만 진다면 나를 난도질해도 상관없겠지만, 난 금고가 아니라 사람이거 든?" "……." 또 한 번 말없이 손이 올라왔기에 프란은 몇 대 더 주먹을 얻어맞아야 했다. 그 러나 그녀는 이 정도는 각오했기에 말없이 입을 꾹 깨물며 맞았다. 한참 가녀 린 몸매의 그녀를 구타하던 주먹질이 가쁜 숨소리와 함께 잠시 멎었을 때, 프란 은 그를 향해 시선을 치켜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빚을 안 갚겠단 말은 아니야. 갚을 거야." 그 말에 이 여린 소녀(현재 겉보기엔 소년이지만)에게 무자비하게 주먹을 날 리고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주먹을 천천히 내렸다. "네가 소유하고 있는 현재의 자산은?" 남자의 질문에 프란은 어쨌든 자신이 유도한 바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 녀는 몇 대 얻어맞아 욱씬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일어나선 1층에 남아있 는 유일한 물건인 장롱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왔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 앞에 내 밀었다. "……." 프리나가 내민 그 상자를 열어본 남자들의 표정은 굳었다. 둘은 상자 안에 들 어있는 돈을 열심히 세기 시작했으나 그 액수는 그들이 통보 받은 것에 의하면 너무나도 적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그런 액수였다. "이게 누굴 놀리나!" 남자의 말과 함께 다시 손이 올라왔다. 프란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때리려고? 뭐, 상관없어. 죽일 테면 죽여 봐. 뭣하면 내 검 빌려줘? 이래봬도 나는 세이피안에선 꽤 잘 나가는 검사였다고. 견습 기사단에서도 한 실력 했 고, 저번에는 '황태자 암살 사건' 의 마수에서 황태자를 구해준 적도 있어서 기 사 서임도 받을 뻔 했지. 후훗, 검사의 기본 요건은 검! 나도 내 검 하나는 잘 갈 아뒀는데, 어때? 내걸 빌려줄까?" 남자는 움찔했다. 이건 완전히 배 째라, 라는 식의 배짱이었다. 세상에 그것도 18살짜리가 겁도 없이! 자길 놀리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소년의 눈동자가 너무나 강렬했다. "하? 뭐라고?" 남자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고 프란은 당당히 대답했 다. "난 크게 상관없어. 어차피 한 번 죽으나 두 번 죽으나 죽는 건 죽는 거고 지 금 당장 죽어도 그리 슬퍼해 줄 사람도 없으니 별로 상관없다고. 그러니까 죽이 려면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내가 죽으면 당신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어찌됐 든 난 프리텐 가문의 유일한 후손이니까 날 죽이면 그 엄청난 빚은 영원히 안 녕, 이란 말이지. 하하하하핫! 재밌지 않아?" 프란의 말에 남자는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옆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옆의 남 자 역시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고 프란은 그런 그들을 조금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프란 역 시 속으로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한 긴장감으로 온 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 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프란의 현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 프란은 훅, 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내가, 몸으로 때우면 안 될까?" "……?" 프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 둘의 얼굴에 황당함과 기막힘이 스치고 지나 갔다. 7000만 케트에서 700만 케트에 가까운 돈을 갚았으니 이제 남은 빚이 무려 6300만 케트인데 그걸 몸으로 갚겠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단 말 인가. 6000만 케트라면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하인으로 둘 수 있는 돈인데 그런 돈 을 한 소년이 몸으로 때우겠다니,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정도가 아니라 웃 고 넘길만한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 는 프란을 보며 남자 둘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듯, 동시에 입을 조금 벌렸다 "…헛소리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금발의 남자는 갈색 머리의 남자보다 말소리가 현저히 낮고 조용조용할 뿐만 아니라 차분한 인상이 강했다. 그는 또박또박, 마치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말 을 걸 듯 낮게 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프란에게는 공포감을 주었다. 그러나…… "헛소리라니!" 이미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자, 라고 다짐한 프란은 소녀답지 않은 단순 무식한 배짱으로 그를 향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견습기사 시절 죽도록 연습해 맺 힌 검상이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난 진담이란 말이다!" 쥐어짜듯 외친 프란의 그 큰 목소리에 그녀와 마주하고 있던 금발의 남자의 미 간이 좁혀졌다. 프란은 그러나 그의 미간이 좁혀지든 말든 일단 튀어나온 말은 나온 김에 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돈이 없다는데 그럼 어쩌자는 거야! 지금 날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다 고 해 봤자 당신들한테 돌아오는 게 뭐야? 그리고 빚은 내가 진 것도 아니잖 아! 여자한테 사기나 당해서 빚을 다 날려버리는 아버지가 진 빚이라고, 그건! 크게 상관도 없는 내가 몸으로 때우겠다는데 아일린 가문의 해결사 정도인 당 신이 대체 무슨 상관이야! 그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라는 사람한테는 내가 몸으 로 때우겠다고 직접 말하면 되잖아!" 프란의 목소리는 매우 당당했기에 위축된 것은 오히려 여태껏 대화의 주도권 을 잡아왔던 두 남자였다. 그들은 조금 멍청한 시선으로 프란을 바라보았고 한 참 후에 금발의 남자는 품속에서 가느다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더니 말했 다. "그분께 직접 그 말을 했다간 넌 바로 저승 행이다." 프란은 잠시 멈칫했으나 어차피 도리는 없는 것 같아서 당당하게 말을 받았 다. "흥? 그래서? 죽일 테면 죽이라고 그래! 여기서 이렇게 끝날 일 같지도 않으니 까 좋은 말로 할 때 당신들 고용인한테 날 데려가 줘! 알았어?" '좋은 말로 할 때' 라는 말은 상황에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흥분상 태인 프란이나 그 흥분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두 남자는 그 것을 꼬투리 잡을 만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프란은 두 남자가 아무런 대꾸도 없자 더더욱 목청을 높여서 소리 질렀다. "알았으면 대답을 햇!" 이건 정말 누가 누구에게 빚을 졌는지 모를 상황이다. ▷◀▷◀▷◀▷◀▷◀▷◀▷◀▷◀▷◀▷◀ 아일린 가문의 해결사들, 비켈린이라는 그 악명 높은 이름을 가진 남자들의 발 걸음은 침울하다 못해 무거웠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받아야했던 7000만 케 트라는 돈 대신 온 금빛 머리의 소년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곤 했으나 그 때마 다 소년이 빙긋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대는 바람에 그런 짓거리도 포기하 고 말았다. 6300만 케트를 대신하여 아일린 집안으로 가고 있는 프란의 마음 역시 무겁기 는 했으나 그렇다고 크게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죽나 두 번 죽나 죽는 건 죽는 거라는 18살짜리답지 않은 신조를 가지고 있는 덕이기도 했지만 그나마 자신에게 빚을 받으러 온 저 남자들이 그 자리에 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아일린가로 끌고 가고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말이야." 침울하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비켈린들 사이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들이 막 여정을 시작한 직후였다. "이거 이렇게 꼭 묶어야 되는 거야?" 혹시라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인 채로 말에 태워졌던 프란은 짜증스 럽다는 듯이 물었다. "묶지 않으면 도망을 갈 게 아닌가." 그녀의 뺨을 여러 차례 때린 적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역시 프란의 말투 에 짜증스럽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프란은 속으로 갈색 머리카락 놈들은 다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웃기네. 도망갈 거라면 당신들 오기 전에 벌써 도망갔어. 그리고 도망가 봤 자 아일린 가문에서 수배만 하면 그 날로 바로 잡혀 들어오는데 왜 도망을 가?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단 말이야! 당신 바보야?" "……그래도 잔말 말고 묶여 있어."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프란의 말에 대꾸할만한 찬란한 말솜씨를 가지지 못했 고 그래서 그다지 설득력 없는 말을 하는 수밖에 말았다. 프란은 인상을 있는 대로 없는 대로 다 구기면서 뱉어냈다. "쳇." 몸이 꽁꽁 묶인 프란은 당연히 혼자서 말을 탈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 과 단판을 지은 전적이 있는 금발남자의 말에 묶인 채로 같이 타게 됐다. 그것 은 당연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봐, 당신도 불편하지?" 프란은 자신을 앞에 태운 채로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 는 금발의 청년을 묶인 손으로 푹 찌르며 물었다. 프란에게 옆구리가 찔린 청년 은 미간을 좁히더니 천천히 말했다. "시끄럽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었기에 프란의 눈썹이 꿈틀했다. "시끄럽다고? 댁이 한 번 묶여보시지. 난 지금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 금발의 남자는 아예 프란의 말을 무시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이번에는 대꾸조 차 해주지 않았다. 프란은 자신의 뒤에 앉아 묵묵히 말을 몰고 있는 그의 얼굴 을 마주보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이봐! 대답을 해줘야 하잖아!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야?" "……." 그러나 금발의 남자는 또 프란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오히려 말의 속도를 갑 자기 높임으로서 프란의 입을 저절로 닫히게 만들었다. 갑자기 말이 달리는 바 람에 프란은 깜짝 놀라 크게 소리를 쳤다. "크아아아악!" 프란이 막 고함을 치는 그 순간, 말의 속도가 딱하고 멈추었다. 명백히 자신을 놀리는 이 행위에 프란의 머리 위로 천천히 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프란은 머 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나 자신의 입장 상 뭐라고 떠들어 봤자 죽도 밥도 안 될 것이 뻔하기에 억지로 입을 다물며 씩 씩 거렸다. 프란이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자 금발의 청년이 천천히 말에 속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원래 이렇게 무뚝뚝해?" 프란은 금발 청년의 뒤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남자들을 향해서 내던지듯 물 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원망에 찬 그들의 시선뿐이었기에 프란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어야했다. ▷◀▷◀▷◀▷◀▷◀▷◀▷◀▷◀▷◀▷◀ 아일린 가문의 장(匠) 그 이름만으로도 뭇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프란은 잠시 한 숨을 내쉬며 자신의 계획안을 다시금 검토했다. 프란의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비켈린을 잘 구슬려서 자신을 아일린 가문으로 데려가게 한다. 여기까지 는 성공. 둘째, 아일린 가문의 주인을 만나서 최대한 잘 보인다…… 어떻게 잘 보일지 는 미지수. 셋째, 아일린 가문의 주인에게 몸으로 때울 테니 뭐든 시키라고 한다. 죽을 때 까지 종으로 부려도 좋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넷째, 결과. 결과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가 있었다. 작전이 먹히면? 좋다. 그걸로 그 집안사람들의 하녀(아니, 하인이군.)가 되는 거다. 작전이 안 먹히면? 프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어야지 뭘 어쩌겠어." ……프란은 무(無)계획자나 마찬가지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 :: 오! 나의 주인님- PART 2 :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1) 가네트(uznian) 03-11-24 :: :: 15249 PART 2-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 "이봐! 여기서 아일린가의 저택이 있는 데까지는 하루 정도면 충분하겠지?" 프란의 반복된 질문에도 금발의 청년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은 자신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약간 심통이 났지만 또 한번 속으로 누르 며 방긋 웃는 수밖에 없었다. 한 두 번 무시당한 게 아니라 쌓이고 쌓인 불만으 로 속으로는 칼날을 갈고 있는 채로 말이다. "흐음, 그렇게 남의 말을 무시했다간 인기 없을걸? 젠장, 그렇게 굴다간 평생 총각으로 늙을지도 모른다구. 나 같이 사교성이 많아야 여자들이 좋아하지. 그 렇다고 나처럼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리저리해서 자신과 함께 말을 달리고 있는 남자인 케인의 이름 하나 알아내 는데 간신히 성공한 프란이었다. 이 케인이라는 남자는 지독히도 말이 없었는데, 그래서 사교적이다 못해 수다 스러운 성격을 가진 프란으로서는 그의 말 앞쪽에 태워진 채로 내도록 달려야 하는 것이 죽을 맛이었다. 이 쪽에서 아무리 많은 말을 건네도 저 쪽은 쫀쫀스럽게 몇 마디 대꾸해지는 것 으로 끝나니, 프란으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무리 강한 내공을 쌓은 수 다꾼이라고 해도 상대가 반응이 없다면 시들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프란은 아 무리 말을 시켜도 간신히 한마디 대꾸를 해주는 케인의 무뚝뚝함에 질려가고 있었다. "결혼 따위 못해도 상관없다." "엥? 결혼 못해도 상관없다고?" 프란은 케인의 '상관없다' 는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하지만 케인으로부터의 대꾸는 여전히, 정말로 여전히 없었다. 한참만에야 자 신의 말이 맛있게 씹혔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의 얼굴 위로는 불쾌감이 스쳤지 만, 역시 그는 꾹 하고 참았다. 아니, 참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다. "흐, 흠. 어, 어쨌든! 집에서 출발한지도 이틀이 지났으니 이제 아일린 가까지 는 하루 정도면 되겠지?" 프란의 반복되는 질문에 지겨워졌는지 이 금발의 케인이란 남자가 살짝 얼굴 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3일." "어? 어째서?" 프란의 질문에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은 저 입에는 자물쇠라도 채웠나, 라고 투덜거렸지만 그런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케인은 그 말에 관해서도 일 절 언급이 없었다. "3일이 걸린다구?" 프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프란이 듣기로는 아일린 가문의 저택은 세이피안 남부지방 샤롯 마을에 있는 프리텐가의 저택에서 삼일 거리에 있는 세이피안 동부 헬리언 영지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맞다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떠난 지도 이틀이 지났으니 내일이면 도착해야하는데 앞으로도 3일이 더 걸린다는 말은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케인의 입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꼭 다물어져 있어서 뭔가를 물어보기가 곤란했다. 그러나 프란은 이 남자의 말에 이틀이나 타고 있었던 경력으로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케인, 이 무뚝뚝한 금발의 남자는 반복해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 귀찮아져 서라도 언젠가는 대답을 해준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런데?" "……시끄럽군." "에이, 왜 그러냐니까." "……." "왜? 아일린 가문이 이사라도 했어?" "……." "이상하네. 말을 해보라니까." 이런 식으로 한참이나 끈덕지게, 약 1시간이나 귀찮게 그를 들들들 볶아대던 프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력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 이상 참 지 못하고 지쳐 떨어지려 하는데, 그 때서야 케인이 입술이 열릴 기미를 보였 다. ' 무섭군, 무서워. 이제야 얘기를 하냐!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너무나도 말을 많이 한 나머지 숨을 헐떡이고 있던 프란은 이제야 입을 여는 케 인을 보며 치를 떨었다. 정말로 무서운 인간이라고 중얼거리는 프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인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아일린 가문의 저택으로 가는 게 아니니까." 프란은 순간 당황했다. 케인의 대답은 그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달리고 있는 케인의 등에 자신의 머리를 쾅, 박으면서 외쳤다. "어? 아일린 가문의 장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 "윽!!" 허리에 엄청난 속도로 프란의 머리가 부딪히자 케인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 한 비명소리를 냈다. 여태까지 차분한 분위기로 시종일관 프란의 말을 무시해 오던 그답지 않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의 머리는 여간 단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통증 이 허리 쪽으로부터 찌르르, 머리까지 밀려왔다. 케인의 미간은 고통에서인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대답 안 하면 한 번 더 부딪힐 거다. 대답해." "그분을 만나러 가기는 하지만 지금 그분은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케인은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여태까지 그가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프란을 대함으로서 프란이 얼마나 답답해 했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바꿔 말한다면, 프란의 머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입증해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 사람, 여행이라도 해?" 프란은 케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느새 프란의 머리에 부딪힌 허리의 충격을 극복하고 말에 채찍질을 가하고 있던 케인이 무감정한 목소리 로 말했다. "아일린 가문의 장이 여행 따위나 하고 다닐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긴."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한 대륙을 책임지고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가문의 장이 여행 을 할 시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속으로 고민했다. "그럼 도대체…?" "프리텐가의 도련님이라고 해서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판단은 완 전히 오류였군." 프란이 한참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어떤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들려왔 다. 프란은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하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 었다. 케인과 프란이 탄 말에 바짝 따라붙은 남자가 하나 보였다. 저번에 프란을 몇 번 때린 전적이 있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목소리를 낸 그 장본인이었다. 프란은 그 쪽으로 완전히 시선을 옮겼다. 이 갈색머리카락의 남자 이름은 케신이라고 했는데, 프란은 케신에게 몇 대 얻 어맞은 적이 있어 그다지 감정은 좋지 않았지만 케인이 워낙 말이 없어 답답했 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 남자와 종종 말을 주고받곤 했었다. 프란은 자신을 향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말을 내뱉은 케신을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란 뜻이다." 케신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말해오자 프란은 하마터면 그래, 라 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려 했는지 를 깨달은 프란은 버럭 고함을 쳤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왜 바보야!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구!" "이틀 간의 네 태도로 미루어보면 알고도 남지." 그 말에 프란은 더 이상의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확정적이고 단정적 인 그의 말에 대꾸를 했다가는 자신이 더 바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 동안의 프란의 태도는 '귀족집의 도련님' 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 다. 의젓함이라거나 묵직함, 용맹함, 사람을 깔아보는 도도함 같은 것은 프란에게 있지도 않았다. 그저 누구하고나 수다를 떨고 싶어 못 견디는 촐싹스러운 입에 다 빙글빙글 웃음을 띠우는 바보 같은 얼굴, 뭐라고 말을 해줘도 제대로 이해 를 못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아무리 고려에 고려를 반복하며 살펴봐도 귀 족집의 고귀한 자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쳇, 그래. 나 무식하다. 그러니까 대답 해봐. 나 지금 어디로 가는데?" 프란의 질문에 케신은 말을 움직여 더욱더 프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 며 말했다. "그건……." 프란은 바짝 긴장하며 케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케신은 프란의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더니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웃음 에 황당해진 프란이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갑자기 표정을 무덤하게 바꾸더니 말고삐를 고쳐 쥐곤 말했다. "가보면 알게 되겠지." "뭐야, 그게! 당신 정말 맞아 볼래!" 프란은 실망감에 버럭 고함을 쳤고, 여태까지 조용하던 케인이 천천히 입을 열 었다. "3일이면 도착한다. 호기심은 때가 되면 해결이 되는 법이지." "젠장맞을." 프란의 불평음에, 아직까지도 그들의 옆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케신이 피식 웃 으며 프란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말투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묵직함이 아닌, 어느 정도 웃음기가 섞인 다정함이 깃들어져 있었다. 프란의 촐싹맞은 태도에 마음이 풀어졌다고나 할까. "훗,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네가 프리텐가의 아들이 맞긴 한거냐? 처음 만난 순 간부터 끊임없이 의심이 되는군." "뭐? 왜?" 갑작스러운 말에 프란이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아들이 맞기나 한거냐니. 설마 내가 여자인 걸 눈치 챈 건가?' 프란이 불안해하면서 하는 질문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를 매단 채로 퉁명스럽게 대답을 해주었다. "아무리 봐도 귀족 집안의 도련님다운 구석은 조금도 없어 보이니까. 혹시 프 리텐 가문의 하인이 그들을 대신해서 대신 잡혀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 는군." "제길! 뭐라구!" 그 말에 잔뜩 자존심이 상한 프란은 자기 손만 멀쩡했다면 당장에 검이라도 뽑 아서 저 녀석의 몸 어딘가에 깊숙한 검상을 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소리를 쳤 다. 하지만 그런 프란의 태도는 케인이나 케신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프란이 날뛰고 케신이 무시하는 공방이 한참 벌어지는데, 여태껏 말을 모는 데 만 열중하고 있던 케인이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그으며 조용히 말했다. "시끄럽군." ▷◀▷◀▷◀▷◀▷◀▷◀▷◀▷◀▷◀▷◀ 말들이 차낸 먼지가 자욱하게 앞을 뒤덮는다. 부지런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안개처럼 깔리는 희뿌연 먼지가 사정없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말들이 튕겨 내는 고운 모래가 인위적인 안개와 뒤섞여 호흡을 압박해 들어온다. 프란은 자욱한 인위의 안개에 눈살을 찌푸리곤 사방을 돌려보았다. "다 왔군." 케인의 묵묵한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그 말에 모래가 들어간 눈을 살며시 비비고 다시 한 번 사방을 훑어보 기 시작했다. 막 사방을 확인한 순간, 여태껏 담담하던 프란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눈이 확장된 것도 모자라서, 곧 그녀 의 입이 허 하고 벌어졌다. "……이, 이봐?" 프란이 황당하다는 듯 케인을 쿡 찌르며 그를 불렀다. 온 몸이 묶여 있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용케 케인을 찌르는 프란이었다. "뭐냐." 오늘도 옆구리가 찔린 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 사이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케신이 다가와 프란의 손발을 묶어 놓았던 줄 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프란을 속박 하고 있었던 줄이 투둑하고 끊어져 내린다. 하지만 프란은 이제야 겨우 몸을 속 박하던 끈이 풀려나갔다는 기쁨 같은 것은 맛볼 사이도 없었다. 프란은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 말이야." 프란은 말을 하다 말고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케인은 더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그런 프란을 보 고 있었다. 그런 케인의 눈을 마주하면서, 프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카르멘 가 아냐?" 그 말에 프란의 손발을 묶었던 줄을 완전히 풀어낸 케신이 핫핫, 하고 짧게 웃 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주제에 귀족이라고 카르멘 저택은 아는군." "뭐야, 그 말은! 내가 카르멘 가문 저택도 하나 못 알아볼 줄 아는 거야!" 프란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카르멘 가. 아일린 가문이 제계를 쥐고 흔드는 황제의 가문이라면, 카르멘 가는 대륙의 무 예를 휘어잡고 있는 최고의 가문이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 대륙에 흩어진 기사들의 절반가량을 끌어 모을 수가 있는 검의 명가! 언제나 대륙 최고의 검사라는 칭호를 놓치지 않는 카르멘 가문의 가주와 그의 핏줄들. 검을 제대로 배우려면 카세타의 카르멘가로 가라는 말조차 있을 만큼, 카르멘 가는 유명한 집안이었다. 카르멘 가의 저택에는 굉장히 커다란 조각품이 하나 서 있다고 했는데, 그것 은 신검(神劍)에세리타를 정교하게 새겨놓은 것이라고 했다. 가로세로 약 12휴나에 달하는 이 엄청난 크기의 조각상은 대륙 어디를 찾아봐 도 오로지 카르멘 가문의 저택에서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프란의 앞에, 가로세로 12휴나의 그 조각상이 턱하고 놓여 있는 것이 아 닌가! 이 예상치도 못한 물건에 프란은 턱이 빠지지나 않을까하는 것을 걱정할 만큼 경악했다. "대체 왜 여기로 온 건데? 내가 만나는 사람은 카르멘 가문의 주인이 아니라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란 말이야!" 프란의 그 큰 소리에도 그녀를 데려왔던 비켈린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케인은 말없이 먼저 말에서 내리더니 프란의 허리를 잡아 거의 강제로 말에서 끌어내렸다. 줄을 풀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얼얼한 손을 케인이 붙들자 프란 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비틀었다. 케인은 아랑곳 않고 프란을 땅으로 내려놓았다. 며칠동안 말 위에서 달렸던지라 프란에게 발이 맞닿는 땅 의 감촉은 매우 낯설었다. "대답을 해줘! 내가 왜 이 곳으로 온 거야? 난 아일린 가문의 장을 만나기로 돼 있었잖아!" 프란의 큰 목소리에, 저 편에서 프란이 발악하고 있는 모습을 모조리 보고 있 던 케신이 피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라. 이 곳에, 그 분은 계신다."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 왜 여기 있는데? 아일린 가문의 장이 카르멘 가주 하고 친구라도 되는 거야?" "……그게 네 상상력이 한계냐?" 케신은 피식 웃으면서 프란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험상궂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다가오자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신을 몇 대 때렸던 남자에 대한 은연중의 공포도 프란에게 어느 정 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프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케신의 말에 프란은 굳었 던 몸을 스르르 풀고 말았다. "프란 프리텐이라고 했던가? 난, 네 녀석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득 케신이 말했고, 그 뜻밖의 말에 프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그런 프란의 표정을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프란의 금빛 머리카락 을 몇 번 슬슬 문질렀다. 거친 손바닥의 감촉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벼대고 있었다. 프란이 살짝 인상 을 찌푸리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케신이 피식 웃으면서 낮게 말했다. "너 같은 놈은 나중에 대성(大成)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 넉살로 어디를 가도 굶어죽지는 않을 거고, 그 배짱으로 큰 일 하나 저지를 것 같은 놈이다, 너는. 그리고 그 빙글거리는 얼굴 덕에 미움 받을 리도 없을 테고 말이야. 상인으로 든 뭐로든, 일만 시작하면 넌 몇 년 안에 성공할거야." 프란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더더욱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껏 자신에게 바보니 뭐니 떠들어대던 남자가 갑작스럽게 덕담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이 그저 황당하고도 놀라울 뿐이었다. 프란은 피식 웃으면서 케신을 향해 말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케신을 향해 프란이 그렇게 말하자 케신이 문득 말했다. "그 분의 손에서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지." 그 말에 프란의 몸이 움찔하고 굳었다. '살아남길' 이라는 단어가 프란의 가슴에 와서 그대로 박혔다. 프란은 오른손 의 주먹을 꽉하고 쥐었다. 피가 새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꼭 쥔 프란의 몸이 살 짝 떨렸다. 그녀는 낮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케신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케신은 피식 웃더니 프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프란은 그런 케신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바로 그 때, 프란의 어깨에 누군가 가 손을 올려놓았다. 프란은 고개를 돌렸다.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자 는 케인이었다. 케인은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케신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케신. 너는 이제 아일린 가로 돌아가라." "알았어, 케인 대장. 대장도 저 꼬마가 죽지 않도록 애 좀 써봐. 아무리 '그 분' 이 무서운 분이라곤 해도 네 말이라면 어느 정도는 들어주시잖아?" 프란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주고받은 그들은 서로를 보며 짧은 시간 말없이 서 있었다. 프란이 눈을 멀뚱하게 뜨는데, 케인을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갑자기 말에 훌 쩍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프란은 더더욱 눈을 크게 떴다. 왜 저 자들이 다시 말을 타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어딜 가는 거지? 당신들은 같이 가는 게 아닌가?" 프란의 질문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는 돌아간다. 너는 케인 대장을 따라가면 돼." 프란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케인을 보았다. 케인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프란을 보고 서 있었다. 프란이 케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나머지 남자들은 말을 타고 달리 기 시작했다. 그들이 뿌옇게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케 인이 말했다. "그만 들어가지." 프란은 더 이상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케인의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남길.' 자신을 향해 마지막으로 좋은 말을 건네준 케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프란은 입 술을 꾹 깨물었다. '물론이야.' 프란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은 처음에 비켈린을 맞을 때의 그 당당함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프란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자, 이제 운명의 막이 열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 :: 오! 나의 주인님- PART 2: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2) 가네트(uznian) 03-11-24 :: :: 13204 "우, 우왓!" 지금은 분명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배를 수십 번 찌르는 미친 듯한 행위, 할복을 통해 고통스럽게 죽는 바람에 7000만 케리트나 되는 거금을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빚으로 떠맡게 되었었다. 그리고 아일린 가문의 해결사라는 작자들의 손에 이끌려 아일린 가문의 장을 만나러 몇 일동안 말 위에서만 힘들게 생활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도 또 황당한 사실에 직면했었다. 자신이 아일린 가문이 아닌 카르멘 가문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프란은 지금 그 모든 혼란들을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지금 튀어나오고 있는 감정들은 당황이나 혼란을 담은 목소리가 아니라, 순수한 감탄을 품고 있는 것들뿐이었다. "시끄러워." 듣다 못한 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옆에서 눈치를 줬지만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프란의 입을 다물게 하지는 못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럴 수가! 정말 말도 안 돼!! 카르멘 가문은 분명히 검술 가문이잖아? 왜 이렇게 화려한 거냐? 분명 이건 분명히 비리가 있었을 거다!! ……오오옷!! 궁성 케세트리아도 이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단 말이다!!" 프란의 비명에 가까운 그 소리에 케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절레절레 저었다. 도저히 프란의 수다에는 상대가 안 되는 케인이었다. 케인은 연신 감탄을 흘리고 있는 프란을 보았다. 비켈린 중 하나인 케신의 마음에 너무나 간단하게 들어버린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놀라움과 감탄으로 점칠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재목이 될 것 같긴 하군.' 케신이 했던 말을 회상하면서 케인은 프란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프란의 뻔뻔스러움 정도라면 전 대륙의 그 어떤 상인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케인이었다. 단, 그것은 어디까지나 뻔뻔스러움에 한해서만 해당하는 사항이지만. 물론 비켈린들 사이에서 [다섯 마디의 냉혈 대장]으로 통하는 자신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쟁탈해버린 베짱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줘야 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옷!!!!" "시끄럽군." "시끄럽다니, 시끄럽다니!! 감탄소리가 나오는 걸 어쩌란 말이야!!" "시끄럽군." "당신은 시끄럽군, 이란 말밖에 몰라??" "……." 그렇게 프란이 계속 감탄성 어린 비명을 지르고 케인이 핀잔을 주는 가운데에 그들의 발걸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프란은 고개를 있는 대로 들어 자신의 앞에 펼쳐진 것들을 보고 있었다. 저택 앞에 커다랗게 세워진 [신검] 에세리타만 없었다면 이 곳을 검을 연구하는 가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 저택은 훌륭하고도 화려했다. 검을 연구한다는 가문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거냐고 따지고 싶을 만큼 저택은 화려했다. 찬란하게 깎인 상아빛의, 티 하나 없이 깔끔한 성은 웬만한 마을 하나를 연상하리만큼 말도 안되게 컸다. 그리고 그 성 전체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프란은 연신 감탄을 해가면서 케인의 뒤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몸을 딱 멈추고 굳어 버렸다. 드디어 성의 정문이 보일 정도의 거리에 도착했는데, 성문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숨이 멎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프란은 약 20초간 호흡의 곤란을 느끼며 가슴을 쳐야만 했다. 팡, 팡, 팡. "……왜 그러는 거지?" 숨이 막혀서 계속 자신의 가슴을 쳐대고 있는 프란을 보며 케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프란은 대답했다. "너무 엄청나서…… 수, 숨 막혀!!" "……." 프란의 키에 다섯 배는 됨직한 크기의 문이 보였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듯한 그 문은 프란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은 그 문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프란이 그 황금색의 문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뻐끔거리자 이번에도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케인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입을 뻐끔거리는 거지?" 그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멈춰서서는 문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을 뻐끔거리는 프란의 태도를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어 던진 질문이었다. 프란은 침을 꿀떡 삼키더니 케인의 질문과는 상관없는 말을 했다. "저, 저거…… 서, 설마 황금이야?" 케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고 그의 말없는 긍정에 프란은 잠시 다리가 휘청임을 느꼈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버틴 채로 그 문을 한참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프란이 헤어나올 수 없는 패닉에서 흐느적거리든 말든 케인의 다리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프란은 케인의 발걸음에 뒤치지 않도록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이면서도 눈으로 연신 사방을 훑고 있었다. 성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커다랗게 자리를 잡은 탑들과 성 주위를 빙 돌아 싼 성곽들은 아름답다 못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노, 노, 놀랍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성이 있어도 되는 거야? 궁성보다 큰 성이 있다면 그것도 처형감이라구!! ……정말 너무하잖앗!!!" 뭐가 너무하다는걸까. 하여튼 프란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계속해서 케인을 귀찮게 했다. '내가 이제 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 이거지? 젠장, 더럽게 크구만.' 프란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케인님!" 그들이 황금문 쪽으로 막 근접한 바로 그 때, 황금문 밖에 서 있던 문지기 10명이 케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중무장을 한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수고하는군." 케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를 향해 사무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3일 동안 같이 다녀서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케인이 무뚝뚝하다고 생각하는 프란이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케인님. 그런데 이 아이는…?" 문지기가 손으로 프란을 가리켰다. 프란은 순간 몸을 흠칫 굳혔다. 그녀는 살짝 다가가 케인의 옷깃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그저 긴장감에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이상하게 오해한 문지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케인님의 신부감인건가요? 하긴, 가주님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죠. [케인, 신부감이 생기면 나한텐 반드시 보여줘], 라고요. 인사 가는 길이신가 보죠?" "……." "……."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란과 케인의 움직임이 완전히 정지했다. 그들은 뭔가 못들을 것을 들은 표정으로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프란은 케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을 세게 떼어 내더니 자신의 상의에 슥슥 문질러 닦기 시작했고, 케인 역시 불쾌한 듯 프란의 손이 스친 곳을 간단히 털어 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말 한 마리에 몸을 같이 의지해서 온 주제에 새삼스럽게 그들은 그렇게 내숭을 떨어댔다. "젠장할! 눈 있으면 똑바로 뜨고 봐라!! 난 남자란 말이다!!" 한참 몸을 털어내고 있던 프란은 어느 순간 그렇게 윽박지르듯 외치고는 부다닷 달려가 문지기의 멱살을 확하고 끌어올렸다. 문지기는 살벌하게 빛나는 프란의 눈을 당황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경국지색의 미모라고 말하긴 뭣했지만, 귓가에서 단정하게 빛나는 백금발이라던가 당당함이 가득 베어나는 오렌지빛의 커다란 눈망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꼭 다문 입매나 치켜올려진 눈썹이 약간 중성적인 느낌을 풍겼지만, 전체적으로 [그]보다는 [그녀]에 가까운 외모다. 하지만 프란을 살펴보던 문지기의 시선이 가슴에 맞닿은 순간, 문지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문지기의 당혹스러운듯한 사과에 프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는 줄 알았잖아…….' 이래뵈도 꽤나 걱정을 하고 있었던 프란은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자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문 열어." "네? …아, 예." 문지기는 케인의 말에 잠시 버벅거리더니 자신의 뒤에 있는 남자들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의 손이 가볍게 움직임과 동시에 화려한 황금문이 부드럽게 미동을 하기 시작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엄청난 크기의 문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프란은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저 문짝 하나만 떼어 가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시작되는 말을 한참동안 중얼거리고 있는 프란을 향해 케인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넋 놓고 보지말고 따라와." '쳇, 분위기 깨는데 뭐 있다니까.' 하지만 프란은 성큼 다가가지 못하고 황금 문을 침을 질질 흘리면서 한 번 만져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문지기가 프란이 황금 문을 만지면서 침을 흘리는 것을 보며 경계의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은 한참 그런 문지기를 살벌하게 마주 노려봐 주면서 뒷걸음질치는 한 편 끊임없이 문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프란의 행동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던 케인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오란 말이다!" "아, 알았어! 지금 간다!" 프란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 황금문 앞에서 한참동안이나 눈을 뗄 줄 몰랐다. ▷◀▷◀▷◀▷◀▷◀▷◀▷◀▷◀▷◀▷◀ "오, 오오오오오옷!" "……." 그 엄청난 황금 문을 열고 들어가, 끝도 없이 피어있는 꽃들의 향기를 맡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쳐 온 성의 실내는 바깥의 그것보다 더욱 엄청났다. 프란은 그 엄청난 화려함에 이제 경악을 넘어 경직해버렸다. 파리라도 앉으면 그대로 미끌어져 버릴 것 같이 반짝이는 대리석 복도와 한발자국 떼어놓기가 무섭게 보이는 고가의 골동품. 명품임이 틀림없는 그림들이 무서울 정도로 화려하게 복도를 꾸며놓고 있었다. 제법 집안이 잘 되는 편이었던, 어디서나 당당한 프란도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로. "정말로 대단하군! 젠장맞을, 누구는 돈 없어서 이렇게 끌려왔는데 누구는 편하게 발뻗고 앉아서 이런거나 구경하고 있단 말야? 제길제길제길!!!" 케인은 지칠 줄 모르고 감탄과 욕을 번갈아가며 내뱉는 프란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곧 그분과 만날 테니 좀 조용히 하도록." "……." 여태껏 제 맘대로 떠들어대던 프란의 부산스러운 입은 케인의 그 한마디와 함께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알았어." 케인은 조용해지는 프란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프란은 몇 번 심호흡을 한 후에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으음, 그런데 케인. 내가 아일린 가문의 장을 만나면 말이야…… 그 사람, 날 죽일까?" 프란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아일린' 이라는 가문의 주인, 즉 아일린 가문의 장. 부와 상권을 한손에 들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재계(財界)를 움켜쥐고 있는 제왕 가문. 라니아 대륙 뿐만 아니라 하인트 대륙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 바로 이 아일린 가문이 아닌가. 워낙 많은 재산을, 한나라의 국가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 자산이 엄청나서 감히 짐작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 엄청난 집안, 감히 생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그런 집안의 주인을 만나게 된 프란이다. 아무리 베짱이 두둑하다고는 하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긴장하지 마라. 그분이 화를 내시면 너와 나, 둘 다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지." 케인은 잔뜩 얼어있는 프란을 향해 비교적 부드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만 프란은 오히려 그 말에 더 뻣뻣해지고 말았다. "이봐, 케인!!!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둘 다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긴장을 하지 말라고? 정말 기가 막히는군! 당신!! 정말이지 나한테 검이 남아있었다면 당장에 당신한테 검투신청이야!!!!" 하지만 케인은 또다시 프란의 말을 무시함으로서 그녀를 혼자서 발악한 황당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고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부들 떨었다. 막 다시 발을 옮기려다 말고, 프란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잠깐…. 이상한걸?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그렇다고 치고, 당신이 왜 죽어?" "너희 가문에 돈을 빌려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은 나였으니까." "어? 당신이 우리집안과 아일린 집안의 채무관계를 성립시켰단 말이야?" 케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왜 죽인다는 건데?" "기한 내에 빚을 받아오지도 못할 상대와 돈을 빌려주는 계약을 성립시켰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지." 프란은 너무나도 태연스레 내뱉는 케인의 말에 다시 한 번 기가 막힘을 느꼈다. 기한 내로 빚을 갚지 못한 사람과 계약을 성립시킨 것이 죽을 만큼 잘못한 일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너한테는 말이 안될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당연한 일이다." 케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저벅저벅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허어……" 프란은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었다. 3일 동안 그래도 많다면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저 무뚝뚝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그녀는 문득 걱정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온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름을 느꼈다. '…에구, 남 걱정할 때가 아니구나. 내 목숨이 더 문제지.'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걷고 있는 케인쪽으로 타다닥 뛰어가 그의 옆에 서며 물었다. "근데, 이거 확실히 아일린 가문의 주인을 만나러 가는 게 맞는 거냐?" 케인은 프란의 질문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케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있던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잘 가던 케인이 갑자기 멈춰서 자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 성 안에서는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뭐? 왜?" 프란은 케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어보았다. 케인은 그런 프란을 바라보더니 어울리지 않게도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지금 만나러 가는 그 분은 지금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 아니니까. 너를 만나는 그 순간에는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 되실 테지만." "뭐? 무슨 말이야? 이봐, 좀 쉽게 설명해봐. 네 앞에 있는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케인은 머리를 긁으며 말하는 프란을 향해 조금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지만, 케인은 그 누구에게도 웃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딱딱한 사내였다. 거의 몇 년만에 얼굴에서 무표정함을 털어내며, 케인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카르멘 가문에 대한 기본 지식 정도는 있겠지?" "당연한 거 아냐? 당신! 날 정말 바보취급할 셈이야?" 프란은 당연하다는 듯 뱉어냈다.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아일린 가문이 라니아 대륙 역사상 최고의 상업집안이라면 카르멘 가문은 라니아 대륙 최고의 검술집안. 아버지가 죽는 것도 모자라 집에 엄청난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 바람에 기사 서임식도 하루 전날 포기해야했던 프란이다. 세이피아 여성중 '검에 관한 가능성' 만은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고 칭해지던 프란 역시 카르멘이라는 이름을 동경하는 무리 중 하나였다. 누구든 검을 쓰는 자인 이상, 카르멘 가의 검을 탐하지 않는 자는 없다. "카르멘 가문의 가주, 아일린 가문의 주인." 프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인의 뒷말을 기다렸다. "둘은 동일인물이다." 싸한 케인의 옆얼굴은 여전히 태연스러웠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8 :: 오! 나의 주인님- PART 2 :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3) 가네트(uznian) 03-11-24 :: :: 14718 케인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가 데려왔다. '그 분'을 만나볼 아이다." 케인은 방안에 들어서며 말하고 있었다. 프란에게 검을 들이댄 남자는 잠시 케인을 바라보더니 검을 뽑았던 것처럼 재빠른 속도로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가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프란은 그 자를 쏘아보면서 서둘지 않고 천천히 케인에게로 달려갔다. 그자의 눈매는 매서웠다. 그의 눈과 끝까지 경쟁하며 방에 들어섰을 때, 문이 닫혔다. "……." 프란은 고개를 돌려 케인을 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정말 죽여버릴 것 같았던 그 남자의 검을 받았던 프란의 원망이 섞인 눈을 마주한 케인은 차가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프란은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고, 케인은 그 바람에 상당히 머쓱해졌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해, 프란은 케인이 얼굴 위로 살짝 떠오른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씩씩거리던 프란은 잠시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그래,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지. 조금 있으면 만나게 될 카르멘 가의 가주이자 아일린 가의 주인에게나 신경을 쓰자고.' 프란은 그렇게 생각 한 후에 눈을 똑바로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들어선 방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이게 방일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아마도 이 정도 방이라면 보통 서민들의 총집면적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방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와라." 케인은 그 말과 함께 다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봐, 다 왔다며? 이게 뭐야?" 프란이 뭐라고 외치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걸어나간 케인은 방 끝에 위치한 작은 문 앞에 섰다. "어, 방안에 또 방문이 있네?" 프란이 다시 방정을 떨었지만 케인은 무시했다. 이 방은 참 이상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방문이 2개였다. 일단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한참 걸으면, 저 편에 문이 하나 더 있는 구조. 케인은 저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가볍게 밀려나간 방문이 열린 순간, 프란은 경악했다. "뭐, 뭐야!" 또 한번 내질러지는 비명. 프란은 자신이 오늘 정말로 심장발작으로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다음 순간 드러난 것은 자신이 검술 훈련을 하던 검술장이라고 해도 믿어줄 만한 크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을 들여놓은 그 방안은 무척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닥을 그대로 덮어주고 있는 고풍스러운 카펫과 그 위에 놓여진 무수한 의자들, 탁자를 비롯해서 싱싱한 화초 몇 개가 그 방을 꾸미고 있는 전부였다. 사실 말이 깔끔하게지, 방이 너무 넓어 허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건, 이번 방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프란은 케인을 묵묵히 노려보았으나 케인은 또 프란을 무시하고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아까 전 방과 똑같이 정 반대 쪽에 나있는 문을 거리낌없이 열었다. "이, 이봐, 케인!! 서, 설마… 방문을 열면 또 방이 있고 그 방에는 문이 있고 또 그 문을 열었더니 또 방이 있고… 이런 구조는 아니겠지? 그런 구조면 당신은 죽었엇!!" "네가 무슨 수로 날 죽일거란 거지? 걱정마라. 세군데만 지나면 된다." 프란의 발악하는 듯한 외침에 케인은 너무나도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세군데? 가주 만나기 전에 심장 발작해서 죽겠다!!" 프란이 외쳤지만 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열려진 방문 틈 사이로 흐릿한 잔광이 보였다. 이번에 드러난 방은 조금전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안에 사람이 있었다. 맨 처음 이 방들의 출구로 들어올 때 봤던 것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마치 인형 같은 포즈를 하고 그대로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케인은 그들에게 다가가 짧게 말했다. "케인 칼슈비도다. 가주님을 뵈러 왔다." "비켈린인가?" "그렇다." "좋다. 출입을 허락한다." 처음 들어올 때 봤던 것보다 통과는 쉬웠다. 그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방문을 열어주었고, 이번에는 검을 뽑아 프란의 목에 겨누는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 케인과 함께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이번에도 뒤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케인?" 방문이 닫히는 그 순간이었다. 아주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바로 프란의 눈앞에서 들려왔다. 프란은 그 목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하고 놀라고 말았다. 이 방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방안에 선 사람은 험악하게 생긴 남자 셋과 소년 하나였다. 케인이라고 이름을 부른 것은 소년인 듯 싶었은데 프란이 놀란 것은 바로 그 소년 때문이었다. '이, 이녀석… 나처럼 남장을 한 절세미녀 아냐?' 정말로 남장을 한 절세미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소년이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절대가인, 경국지색이란 말이 괜히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한 미모. 프란은 홀린 듯 눈앞에 있는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소년은 아름다웠다. 소년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그러면서도 어둡고 조금은 위험한 느낌의 끝이 없을 것 같이 깊은 보랏빛이었다. 머리카락 색은 투명한 보라색이 비치는 은은한 은색이었는데, 신비하다 못해 두렵다는 느낌마저 드는 그런 색이었다. 그리고 피부는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얼음빛을 연상케 하는 매끄럽고도 뽀얀 색. 조각 같은 얼굴 생김생김, 섬세한 얼굴선. 프란은 탄성이 튀어나오려는 것은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세상에나, 사람은 오래 살아봐야 안다고… 내 18년 평생 이렇게 예쁜 남자애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케인, 프레틴가에게서 빚은 잘 받아왔나?" 프란이 연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소년의 주위에 서 있던 험상궂게 생긴 남자 중 하나가 케인을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물어왔다. 프란은 자기 집안의 이야기가 나오자 소년을 정신 없이 훔쳐보던 시선을 거두곤 몸을 움찔했다. 케인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죄송합니다." 케인은 짧게 사과의 말을 던지더니 자신에게 질문을 한 남자에게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프란의 아버지가 여자에게 돈을 사기 당해서 왕창 날렸으며, 그 때문에 아일린 가문이 한 푼도 빚을 돌려 받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그는 무척 직설적으로 했다. 프란의 아버지가 할복을 통해 죽었으며, 그래서 프란이 따라왔다는 얘기까지도. 프란 조차 놀랄 만큼 상세하게, 그는 마치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듯이 들려주었다. 그의 말투가 너무 재미없어서 지루했다는 것만 빼면, 정말이지 완벽한 보고였다. "정말이냐?" 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척 엄숙하면서도 차가운, 그리고 도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란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그 말을 한 것은 소년의 주위에 서 있던 험상궂은 남자들 중 그 누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엄숙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낸 것은 프란이 18년 평생 처음 본, 그 미소년이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방안을 살짝 휘감고 있었다. 프란은 문득 이상하다고 느꼈다. 왠지 모르지만 케인이 살짝 몸을 떨고 있었다. 가늘지만 분명한 떨림이 프란에게까지 분명하게 느껴져 왔다. 혹시 저 소년이 꽤 높은 신분의 사람인가, 라는 생각에 프란은 문득 보라빛 눈동자의 미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만나야하는 가주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소년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하게 보이는 걸로 봐서 가능성이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프란의 그 어떤 생각도 뛰어 넘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가주님." 케인은 고개를 숙이며 보랏빛 머리카락이 소년에게 말했다. "한심한 녀석."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 그들 사이로 뭐라고 설명하기도 힘든, 짙은 검은색의 정적이 맴돌았다. 프란의 머릿속에도 너무나도 어두운 정적이 맴돈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가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넌 평생 해봤자 날 이길 수 없을 걸, 프리나 프리텐?] 어린 날, 아마도 막 검을 배웠을 그 때라고 기억한다. 그 당시, 검을 배우는 같은 또래 중 유난히도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같은 스승 밑에서 프란과 함께 검을 배웠던 꼬마였는데, 프란은 그의 이름을 [헤냔]이라고 기억한다. [흥! 나도 열심히 하면 너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어린 그 때. 아마도 프란과 헤냔이 처음 검을 맞댄 날이었을 것이다. 검을 섞은지 얼마 안되어 금방 체력의 한계를 보이며 헉헉대곤 쓰러졌던 프란이 툴툴대듯 한마디했을 때, 헤냔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넌 여자애라고. 여자애가 언제까지 검을 쓸 수 있을 거란 거지?] [뭐……?] 프란은 그 뜻밖의 말에 살짝 입술을 벌리고 반문했다. [그리고 신체적 요건도 다른걸. 힘부터가 다르다고! 넌 아무리 해봤자 나한테 이길 수가 없어. 여자애니까.] 지금이라면 분명 '그런 성차별 적인 발언을 하다니!!!' 라면서 헤냔의 머리카락을 반쯤 뽑아주고 '검이란 힘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잘 갈아두었던 날카로운 검을 꺼내들었고 매서운 눈을 했겠지만 불행히도 그 당시의 프란은 지금처럼 굳세고 단단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 때의 프란은 잠시 멍하게, 그 상태에서 그대로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땐 정말로 억울했다고, 프란은 생각한다. 그 때 처음으로 느꼈었다. 절대 수긍할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그 때 처음으로 현실을 직면했었다. '여자라서 못 이긴다고? 그럴 리가 없어! 열심히 한다면 성(性)따위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여자라서 못 이긴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오늘. 프란은 예전 그 때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이 주위를 휩쓸었다고 생각한 순간,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케인은 갑자기 소리를 치는 프란의 그런 태도에 너무나도 당황해 벌떡 일어섰다. 그는 급히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열려버린 프란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케인은 소리를 친 프란을 보며 이십 몇 년간의 일생의 세월 중 가장 당황하고 있었지만 프란은 그런 케인의 심리 따위는 헤아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프란의 열려진 입은 도저히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한 번 연 입으로 끝을 보겠다는 듯, 프란은 입술을 놀렸다. 프란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을 턱하고 가르켰다. 그리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그 두 가문의 두목이란 말야?" "……." "……." 순간, 다시 한 번 찾아온 무겁디무거운 침묵. 프란은 숨을 헐떡대면서 소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프란은 무겁디 무거운 침묵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듯, 씩씩대며 케인을 보았다. 답변을 해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케인의 얼굴과 마주한 프란은 케인의 근심 어린 얼굴을 보면서 문득 정신이 파박하고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프란의 손이 떨어졌다. "헉!" 프란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껏 그렇게나 차갑던 케인의 얼굴에 근심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신음성의 원인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소년의 옆에 도열해있던 험상궂은 남자들의 전신에서 무서운 기운이… 즉, 온 몸이 미칠 듯이 떨리는 '살기' 라는 것이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신을 에는 듯한 그 차가운 기운에 프란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방정맞게 굴었던 방금 전의 스스로를 때려버리고 싶은 충동에 온 몸을 덜덜 떨면서 프란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죽여도 상관없다고 했던가?" 순간, 그 무거운 정적을 두 토막내면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년의 말에 대한 대꾸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이번에도 방정맞게 프란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우왓! 잘못했다! 죽이지 마!" 그 말에, 프란을 향해 다시 한 번 온 시선이 쏠렸다. 가주의 옆에서 가주를 보좌하고 있던 두 사내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이 소년이 가주라는 것을 알았으면 당연히 존대가 튀어나오고, 살려달라고 빌어야 마땅한데 갑작스러운 반말로 저렇게 지껄여대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황한 것은 프란을 내려다보고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자 카르멘 가주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프란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들어올려졌다. 소년의 눈과 마주한 프란은 온 몸을 차가운 무엇인가가 훑고 지나간다는 느낌에 치를 떨었 다. 소년의 눈에서 너무도 큰 두려움을 느낀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어쩌면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의 일환일지도 모를 말들을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 없이 외치기 시작했다. "나, 나 밥값은 한단 말이다! 아버지가 빚을 갚을 때까지 시키는 대로 다할 테니까 죽이지 마, 제발 부탁이야! 난 이제 겨우 열 여덟! 꽃같이 피어나는 열 여덟 살이란 말이다!! 12살 때까지는 뒷골목에서 굴러서 더러운 바닥 생활도 다 꿰고 있고, 15살 때 아버지 도와서 사업도 해본 적 있어!! 그리고, 그리고…… 나, 난 기사 서임도 받을 뻔! 했다고!! 이것 저것 못하는 거 없는 나를 죽이면 당신, 후회할 거야!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거니까 제발 죽이지만 말아줘!!" 프란은 숨도 쉬지 않고 따따따 뱉어놓고 어느 순간 숨이 차서 하,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막상 말을 뱉어놓고 숨까지 들어마신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프란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나…… 뭘 한 거지. 게, 게다가…… 바, 반말을!!' 다시 한 번 방안을 감돌아 나가는 침묵. 그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프란은 자신이 방금 전에 외쳤던 그 말을 꼼꼼히 되새겨 볼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말을 몇 번이나 생각해보던 프란의 안색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나 미쳤나봐. 대체 정말 무슨 말을 한 거야?'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을 올려다보는 프란의 눈에 공포가 가득찼다. 아직까지 한 줄기 희망은 버리지 않은 듯,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눈의 대두분은 어둠이 잠식해 들어간 채였다. 프란은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 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년의 눈은 무감각하고 무감정했다. 싸늘한 무기질로 만든 것 같은 그 차가운 눈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몸이 공포로 물들여 나간다. 점점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회색 빛 공포. 문득 프란의 머릿속으로 집사, 락케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란은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를 낳자 마자 버렸다는 어머니도, 싸늘한 눈으로 사생아인 자신을 대했던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해준 유일한 인간인 락케이드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프란이었다. "훗." 갑자기 정적을 깨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려다본 그 곳에는 그 싸늘한 눈동자를 가진 가주가 매서운 눈으로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프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뭐·든·지·라, 재미있군." 프란은 그 순간 느껴진 오싹한 공포에 치를 떨었다다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가주의 눈을 보았다. 가주의 싸늘한 눈초리와 마주하는 그 순간, 온 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경직하고 뼈가 으스스, 하는 소리를 내며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면 프란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살아온 프란이었고, 굽힘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었던 프란이었다. 검술교단의 검술교사들과 검을 섞었을 때. 그 실력의 열등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그 때조차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당당히 쳐든 고개로 누구에게나 굽힘이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프란은 저 눈빛을 피할 어떤 곳이 있다면, 숨는 것이 가능하다면 숨고 싶었다. "좋아, 어디 밥값을 하는지 두고보지." 가주는 싸늘히 입매를 들어올리며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명의 남자가 그런 가주의 양옆에 섰다. 가주는 케인을 향해 훗,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녀석을 마린에게 보내도록." "……네." 케인이 낮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그 때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가주는 별 감정 없는 눈으로 프란을 향해 차갑게 말하더니 저 편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안 쪽에 위치한 방문을 스스럼없이 열고는 쾅, 하고 닫았다. 가주의 양옆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은 케인과 프란을 향해 약간의 조소를 부어준 다음 역시 문을 닫고 나갔다. 프란은 완전히 굳어버린 채로 아직도 바닥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9 :: 오! 나의 주인님- PART 3 : 고생문이 열리다!(1) 가네트(uznian) 03-11-24 :: :: 13424 PART 3: 고생문이 열리다!!! "운이 좋았어." 멍청하게 넋이 빠져 있는 프란에게 케인은 작게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이어진 케인의 말을 프란은 다 듣지 못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지는 프란이었다. 그래도 배짱 꽤나 있고 담력 세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그녀였건만 방금 전 그 가주라는 소년에게서 받았던 매서운 눈초리를 떠올리자마자 몸서리가 처졌다. 프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면서, 인간이면서 어떻게 그렇게 차가운 눈동자를 가질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깊고, 한없이 빛나는 보랏빛의 신비한 눈동자를 가진 가주의 눈동자에서 그렇게 살벌한 빛이 뿜어져 나올 수가 있다는 게 프란으로서는 너무나 너무 놀라웠다. 온 몸을 얼려버리는 그 완벽한 압도감에 숨조차 막힐 지경이었다. "……알았나?" "으, 응?" 한참을 골똘히 방금 전의 일을 멍하게 회상하는 프란의 귀에, 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인은 특유의 차분한 표정으로 프란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프란의 눈동자를 또렷이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봤으니, 가주님이 어떤 분인 줄 알 수 있겠지? 다행히도 너와 나, 둘 다 목숨을 부지했다." "……몇 살이야?" 프란은 케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정말 너무나도 궁금했던 그것을 물었다. 케인은 피식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프란은 끌려오는 3일 동안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던 케인의 웃음이 생각보다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난달 1일, 19살이 되셨다." "열 아홉?!" 프란은 경악하듯 외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케인을 삿대질했다. "말도 안 돼!! 고작 나보다 한 살 많잖아!! 지금 나하고 장난하는 거지!!!" "……그럼 그 얼굴이 40대로 보이는가?" 케인의 말에 더 이상 할 대꾸가 없어지는 프란이었다. ▷◀▷◀▷◀▷◀▷◀▷◀▷◀▷◀▷◀▷◀ "흐응∼" 프란은 지금 완전히 당황하고 있었다. 프란을 한 번 훑어보는 여자의 눈에서는 왠지 모를 날카로움이 느껴지고 있다. 사냥감을 앞에 둔 사냥꾼의 날카로운 눈, 물건을 입품하기 전에 꼼꼼히 살펴보는 듯한 눈으로 여자는 프란을 훑어보고 있었다. 물건을 감정하는 그 눈에 일종의 두려움을 느낀 프란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프란을 살펴보고 있던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는 프란에게 요염한 자태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뒤집어도 보고, 옷깃을 스윽하고 매만져 만져보기도 보고, 프란의 볼도 한 번 콕 찔러 보는 둥 별의별 희귀한 행동을 다 해대고 있었다. 프란은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그으면서 그런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프란의 구겨진 얼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프란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여자의 손에도 참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노력했다. 몸에 푸드드드득 돋아나는 닭살을 참느라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으으응∼∼" 프란의 여기저기를 찔러보고 있던 여인은 프란이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프란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닭살이 와르르, 더 이상 참지 못할 만큼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느낌에, 프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쳤다. "대체 뭐하는 짓이예욧!!" "어머?" 여인은 프란이 냅다 고함을 치자 입을 막으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프란이 숨을 쌕쌕 내쉬면서 노려보자 여인은 생긋 웃었다. 프란이 이를 부득부득 갈아도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프란의 뒤에서 이 모든 황당한 일을 초연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케인 쪽을 보았다. "어머, 케인? 이거 상당히 여리여리한 도련님이네? 후훗, 살결이 너무 부들부들한 게 잡아먹기 좋겠어. 볼이 발그스름한게 귀엽고……" "그만두지 못햇!!" 듣다 못한 프란이 다시 고함을 쳤다. 프란을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던 여인은 프란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입을 막고 호호, 하고 짧게 다시 한 번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내 방을 가르켜 줄테니 오늘……" "케인, 살려줘!" 프란은 케인을 향해 냅다 소리를 쳤다. 가주와의 목숨을 건 대면이 끝난 후, 케인은 그 때까지도 조금 떨고 있던 프란을 데리고 이 곳으로 왔었다. 커다란 갈색 문으로 굳게 닫혀있는 방이었는데, 이 방에는 금색 머리카락에 차분한 인상을 가진 20대 후반의 여인이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마린, 케인의 설명으로는 이 여자가 이 집안의 하인들을 총괄하고 있다고 했다. "훗, 귀엽게 굴긴∼. 빼지 말라구! 원래 남자란 말이야, 연상의 여인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하는거야. 그게 진짜 남자지." 금발의 여인, 카르멘 가문의 모든 하인을 관장하고 있는 마린은 프란의 반응을 즐기면서 다시 한 번 베시시 웃었다. 그녀는 볼을 한 번 콕 찌르며 웃었고, 프란은 다시 한 번 몸에 닭살이 스멀스멀 돋아나는 것을 느끼곤 팔을 벅벅벅벅!!! 긁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20대 후반의 여인이 섹시한 자세를 취하며 여기 저기를 건드리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겠지만, 프란은 남자가 아닌 엄연한 여자다. 지금은 비록 남장을 하고 있다지만,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자가 같은 여자에게 그런 짓을 당하면 기분만 불쾌해질 뿐이다. "장난은 그만 쳐라, 마린." 프란이 마린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케인이 프란을 위해 한마디를 배어냈다. 그러자 프란의 양 볼을 잡아늘이며 즐거워 하고 있던 마린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케인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힘껏 잡아 늘였었던 프란의 볼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프란이 뭐라고 뭐라고 날뛰었지만 마린은 생긋 웃으며 깨끗이 무시했다. "어디 보자…… 새로운 하인이라……. 어디로 배정해줄까?" 한참 프란을 슥하고 훑어보던 마린이 뭔가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에 프란이 살짝 기분이 나빠져 몸을 틀려는데, 갑자기 마린이 살짝 웃더니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프란 프리텐." 프란이 짧게 대답을 하자 마린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마린은 손가락을 들어 프란에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해 보였다. 프란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몸을 흠칫했다. 저 마녀 같은 여자가 다시 자기 볼을 잡아당기지나 않을까 경계를 한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마린의 손짓이 프란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케인은 묵묵히 팔짱을 낀 채로 저 멀리 서 있었다. 프란이 마린의 바로 앞에 서자 마린이 밝게 웃었다. 그녀는 프란에게로 더욱 가까이 오더니 그녀의 바로 옆에 밀착해 섰다. 가라앉았던 닭살이 다시 올라오려는 기미를 보여 프란이 한발자국 물러서려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린이 프란의 귓를 탁하고 잡았다. "아야야!!" 프란이 엄살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 때, 마린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였다. 이번에는 닭살이 아니라 소름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팔을 처내려는데, 갑자기 마린이 프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여 왔다. "남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뭐예요, 프란 프리텐 아·가·씨?" "……!!!" 그 예상치 못한 말에 프란의 안색이 더번에 퍼렇게 질렸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신의 귀를 쥔 마린의 손을 탁하고 쳐냈다. 프란이 외쳤다. "무슨!! 내가 예쁘장하긴 하지만 분명 남자란 말이다!!" "어머, 그래?" 프란이 냅다 외친 그 말에 마린은 흥미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더니 다시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굵은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감을 느꼈다. 그녀의 눈치를 살짝 보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마린은 자신의 금발을 뒤로 쓸어올리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꿔 생글 웃으며 말했다. "에잉∼ 근데 진짜 피부곱다, 프란군∼." 마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프란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프란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마린을 보았다. '제, 제길. ……내가 여자라는거 어, 어떻게 알았지?' 마린은 하지만 프란의 고뇌 같은 것은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다시 방금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래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디선가 이상한 서류철을 하나 들고 오더니 갈색의 의자에 턱하고 걸터앉았다. 몇 번 서류철을 뒤적 뒤적거리던 마린이 말했다. "주방 쪽에 있던 베시가 얼마 전에 나갔고, 가주님 밑에 있던 루나하고 런스가 나갔군. 흐음, 우리 프란군은 어디가 좋을까?" 프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사정도 잊고 갑작스레 고함을 쳐버리고 말았다. "주방이 좋아!!" 프란의 커다란 외침에 서류철을 훑어보고 있던 마린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프란을 보았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마린을 훑어보던 그녀가 쿡쿡, 거리면서 낮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프란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 쿡쿡거리던 마린은 서류철을 내려놓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후후후후훗!! 핫핫핫!! ……왜? 왜 주방에 들어가고 싶은건데?" 웃음 뒤에 튀어나온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프란이 말했다. "……난 가주 시중을 드는 건 싫거든." "어머?" 마린은 조금 놀란 얼굴로 프란을 보았다. 사실, 프란으로선 가주의 시중을 드는게 싫은 것이 당연한 말이었다. 오늘 처음 봤지만 차가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가주의 그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거절하고 싶은 일이었다. 반면, 그런 마린은 그런 프란이 이해되지 않아 조금 고민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눈썰미로 프란이 남장을 했다는 것을 간파한 마린이었다. 왜 그녀가 남장을 했는지 따위의 이유에는 관심이 없는 마린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대충 그녀가 왜 남장을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한 그녀는 흘깃 프란을 돌아보았다. 대충 케인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던 터라, 마린은 부드러운 눈길으로 프란을 몇 번 훑어본 후에 피식 웃었다. 자세히만 살펴보면 누구든 여자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프란의 얼굴이었지만, 꽁꽁 싸맨 가슴과 당당함으로 번뜩이는 눈매가 간신히 소년이라고 봐줄 수 있을만한 여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몇 년 만 지나면 굉장한 미녀가 되겠는데…….' 프란을 훑어보던 마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프란이 소리쳤다. "난 주방으로 보내줘!!" 마린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곤 빙긋 웃었다. "그건 안 돼." "왜?" 프란이 놀란 듯이 묻자 마린은 대꾸 없이 어디선가 이상한 가방을 하나 가져와서 프란에게 건넸다. 프란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가방 안을 뒤적거리자 깨끗하게 다려진 상하의 옷이 나왔다. 검은색의 옷이었다. 그 옷은 프란에게도 꽤나 낯익은 옷이었다. 프레틴 가문의 하인들이 입던 그 옷과 다를바 없는 깨끗한 정장. 프레틴 가문의 하인들이 입던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하다는 것만 빼면 나머지는 다를 것이 없는 옷이었다. 마린은 그 하인복을 프란에게 주면서 말했다. "넌 빚을 져서 왔다고 했으니, 남들보다 몇 배는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마린이 건넨 그 말에 프란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고는 생각하면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린이 피식 웃었다. 마린은 굳은 얼굴을 하는 프란에게 다가가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가주님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하고 주방에서 일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잘만하면 프란 혼자서 그걸 다 할 수 있을 거야." 프란은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마린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주방 일도 하면서…… 가주 시중도 들어라, 이건가?" 마린이 환하게 웃었다. "호홋, 얼굴만 귀여운 줄 알았더니 머리도 좋네." 싸하게 얼굴이 굳는 프란이었다. ▷◀▷◀▷◀▷◀▷◀▷◀▷◀▷◀▷◀▷◀ "……젠장." 프란은 낮게 투덜거리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춰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이 비춰졌다. 아직 썰렁한 머리카락이 어색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검은 경장은 그녀에게 그런대로 어울렸다. 무심결에 가슴을 한 번 눌러 보았다. 꽁꽁 묶은 탓에 단단했다. 프란은 입술을 악 물었다. '들키면 안 돼, 절대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여자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그녀는 이제 노예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아닌가. 그녀의 주인이 옷 벗어, 라고 말하면 벗을 수밖에 없는. 그녀는 여자라는 사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를 모독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자가 나약하다는 말도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빨리 지치는 자신이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미친 듯이 검에 매달렸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자라서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모종의 일이 싫을 뿐이었다. 증오스러울 정도로. 검은 경장을 입고 대충 보니 약간의 귀티가 흐른다는 것만 제외하고 나면 보통 하인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거울에 비춰졌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지그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던 케인이 프란을 맞이했다. 프란은 문득, 이 케인이란 남자에 대해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케인." "……." 케인은 대답 없이 자신을 부르는 프란을 보았다. "당신은…… 계속 여기에 있는 거야?" 케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디로 가?" 이 빌어먹게도 넓은 저택에 아는 사람이라곤 그래도 저 금발의 무뚝뚝남 하나가 전부인 프란이다. 너무 말이 없고 쌀쌀한 남자라 가끔 속이 터질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아는 자라는 것은 큰 의지가 되는 법이다. 프란은 가슴이 욱씬, 하고 아파옴을 느꼈다. 저 편에서 마린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이 묻자 케인은 언제나처럼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비켈린이다." 짧은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눈치 못 챌 프란이 아니다. [나는 비켈린이고, 그러므로 앞으로도 비켈린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다.] 즉, 앞으로도 돌아다니면서 빚을 받아오는데 힘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냐?" 프란이 묻자 케인이 피식 웃었다. "가끔은 오겠지." 케인의 대답에 프란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녀는 생글 웃으면서 케인에게 한 쪽 팔을 내밀어보였다. "헤어지기 전에, 우리 악수라도 할까?" "……." 케인은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금빛 머리칼의 소년을 뚫어지게 보았다. 단단하게 빛나는 오렌지빛 눈동자의 소년은 튼튼한 기백으로 몸을 무장하고 있었다. '후우.' 케인은 잠시 낮게 한숨을 내쉰 후 프란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렇게 어린 녀석이…… 카르멘 가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케인은 프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알고 있을까, 프란은. 이 집안이 어떤 곳인지. 어떤 곳인지……. "……난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바로 떠나겠다. 다음에 보지." 케인이 말하자 프란은 짧고 씁쓸하게 웃었다. 케인은 마린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문 밖으로 나섰다. "……다음에 볼 때도 저 또렷한 인상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인은 문을 닫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두고 볼 일이었다. "이 곳에서 변하지 않는 놈은 없으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0 :: 오! 나의 주인님- PART 3 : 고생문이 열리다(2) 가네트(uznian) 03-11-24 :: :: 5918 "가주님? 한 마디로 말하면 [냉혈남]이야." 케인이 그렇게 가버리고 나자 마린은 천천히 프란의 손을 이끌어 어떤 장소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린,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여자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불길했던 프란은 팔을 뿌리쳐 벗어나려했지만 바로 그 때 그녀가 방을 안내해주는 길이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바람에 결국 질질 끌려가게 되버렸다. "냉혈남?" 방까지 이동하는 가운데 그녀를 따라 걸으며 그 싸늘한 소년 가주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던 프란이 마린의 말 중 한 군데를 잡아 되물었다. "어떤 면이?" 마린이 정의하는 냉혈함의 기준을 몰라 프란이 묻자, 마린은 그 목소리도 가볍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음, 밑에 있는 자들이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베어버려." 프란은 머리가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 참 머리를 흔들었다. "……몇 명이냐 벴는데?" 프란이 묻자 마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세어본 적 없어. 좀 많아야지." 그 말에 침착했던 프란의 어깨도 부르르 떨렸다. "또?" 프란의 질문에 마린은 유쾌해진 듯, 말했다. "음, 그리고 굉장히 당당한 분이지. 예를 들자면…. 일국의 사신에게조차 너무나 당당한 분이야. 그 당당함이 지나칠 정도지." '당당함이 지나치면 그건 건방아냐?'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마린이 워낙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또…… 아, 그렇지! 음식이 굉장히 까다로우시지." '어린애냐?' 역시 마린의 표정이 걸려 입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자자, 다왔네." 한참 그 이상한 가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살짝 웃으면서 마린이 말했다. 마린이 발길을 멈추자 그녀의 가슴에 파묻힌 채로 거의 끌려가고 있던 프란(아무리 바둥거려도 마린의 힘이 워낙 엄청나 벗어날 수 없었다.)의 발 역시 멈췄다. 마린이 가르킨 방향을 보니 옅은 나무빛의 문이 보였다. 마린은 무덤덤해뵈는 프란을 향해 살짝 웃은 후 가볍게 문을 열었다. 밤의 여신이 그 옷깃을 내려 하늘을 덮은지라 어두침침한 방 한 가운데에는 7월의 비나룬의 내는 붉은 빛이 교묘하게 반사되어 보였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방을 보며 프란이 말했다. "여기가 내 방인가?" "응." 프란은 의아해졌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보통의 하인들은 남자하인이 큰 방을 하나, 여자 하인이 큰 방을 하나 차지하고 쓰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개인방 따위는 없다. "나 혼자 써?" '그럼 남장 여자 주제에 다른 놈들이랑 같이 쓸래?' 마린은 입에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응. 자자, 내일부턴 힘들테니 오늘 하루 푹 쉬어." 마린이 그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프란은 누군가의 손길이 잘 묻어 있는 그 방을 잠시 훌어보다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포근한 잠의 여신이 그녀를 살짝 감싸안았다. 내일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잡을 틈도 없이, 프란은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 "젠장할!!! 늦잠을 자면 어쩌자는 거야!!!" 쾅쾅쾅쾅쾅! 소녀는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 방 안에 잠든 인간을 깨워야할 임무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으로부터는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문을 두들겨 체력을 잔뜩 소진한 소녀는 결국 입술을 꾹 깨물며 방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런데 단지 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찼던 방문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열려 소녀를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뭐야…… 문도 안 잠구고 자냐?"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리고 난 뒤 발걸음을 가볍게 해서 안 쪽으로 들어섰다. 침대 쪽으로 총총이 다가가자 오늘 그녀가 깨워야 할 상대가 보였다. 그를 한참동안 빤히 내려보던 소녀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스쳤다. "으응……. 안 돼……. 제발…… 죽지마요…… 죽지는 마……. 젠장... 죽으면 용서 안해..." 소녀가 오늘 깨워야 할 상대인 그는 온 몸에 비땀을 쏟으며 침대에서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소녀는 순간 너무나 어이가 없어져 픽, 하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얼씨구?" 핑크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말아 틀어 올린 소녀는 침대에서 굴러다니는(?)금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린님의 말을 들어보니 새파란 신입이라던데…… 첫날부터 이렇게 존단 말야? 이거 정말 싸가지가 없는 놈일세!!" 핑크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버럭 고함을 치고 손을 들어 프란의 머리를 내려쳐 잠에 빠진 그를 깨우려다가 움찔했다. 문득 프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머나? 잘 생겼네……." 그리고 얼굴을 발견함과 동시에, 핑크빛 머리칼 소녀의 얼굴이 확하고 붉어졌다. 아직 열일곱, 채 익지 않은 감수성을 가진 이 소녀는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이 여자라는 것을 모르기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프란 쪽으로 다가와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조금더 그 얼굴을 살펴보려고 고개를 깊히 숙였던 소녀는 그러나 어느 순간 몸을 굳히고 말았다. 갑자기 소년이 눈을 번쩍 뜨더니 손날을 과격하게 들어 그녀의 목 언저리에 갖다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누구냐." 핑크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움찔했다. 침대에 누워 손을 들이대고 있는 금빛 머리칼을 가진 소년의 눈이 너무나 매서웠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문득 금발 소년이 멈칫하더니 손을 내렸다. "아……. 으으……. 평소의 습관이 나와버렸네. 아, 미안."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 말할 것도 없이 프란 프리텐, 그녀다. 프란은 굳어 있는 눈앞의 소녀를 보았다. 핑크빛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보아하니 자신을 깨우러 들어온 모양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자 벌떡 일어섰던 프란은 슬쩍 입매로 웃어보이며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는 미소를 보냈다. 수련 기사시절, 수련 기사단에 유일한 여자였던 프란을 노리던 놈들은 꽤나 많았다. 그렇다고 침실을 덮치는 변태같은 놈은 없었지만(기사단이니만큼)그래도 한 밤 중에 몰래 얼굴을 훔쳐 보고 가는 놈들은 꽤 있었기에 그런 놈들을 대비한 프란의 감각은 날카로웠다. 오늘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버렸을 뿐이다 . 아직도 겁에 질려 있는 소녀를 보며 괜히 미안해진 프란은 뒷통수를 슬슬 긁었다. "아, 난 프란 프리텐이라고 해. 넌?"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서 프란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핑크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그런 프란을 향해 멍하게 입을 벌린 채 대답했다. "아…… 난…… 뮤…… 뮤라고 해." '나, 나…… 이 녀석한테 반했다!' 뮤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프란의 금발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1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 나는 가주가 싫다!(1) 가네트(uznian) 03-11-24 :: :: 14706 PART 4: 나는 가주가 싫다 이른 새벽의 카르멘 가는 조용한 가운데 분주하다. 쏟아지는 햇살을 견디다 못한 나무들은 스삭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고, 신록의 우거짐속에서 작은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청량한 새벽의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발걸음들. 번뜩이는 황금의 건물들 사이로 찾아오는 아침의 걸음은 너무나 바빠서 때로 발을 세우고 그 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정도다. "네가 프란 프리텐인가?" 카르멘 가는 주방도 역시 컸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붙어서 요리를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사람들은 많았고, 그들은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프란은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잠시 허기가 짐을 느꼈지만 눈 앞에 있는 남자가 다시 한 번 물어오자 그 허기는 싹 가셔 버렸다. "네가 빚을 대신해서 온 그 애가 맞지?" "……." 프란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조금은 사나운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주방의 총 책임자였는데, 그가 갑자기 튀김을 튀기다말고 프란을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보조 주방장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주, 주, 주방장님!! 가주님의 새우튀김이 탑니다!!" "엑엑!! 뭐, 뭐야!!" 진지한 분위기를 잡으면서 프란을 위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 있었던 그는 보조 주방장이 옆구리를 푹 찌르며 해준 그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한참을 버벅거렸다. 기름이 파박 튀었고, 욕설이 몇 마디 오가는 것을 보면서 프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매 사나운 주방장은 자기가 한눈을 판 주제에 그런 자신을 말리지 않았다고 오히려 보조 주방장들에게 고함을 쳐대고 있었다. "……." 프란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그들을 보고 있다가 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뮤는 살짝 웃어 보였다. "이 집의 주방은 이런 분위기야?" 프란의 질문에 뮤는 활짝 웃었다. "응, 주방은 언제나 생기가 넘치지." 그렇게말한 뮤는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프란을 보고 있다가 자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주방만 말이야." 한참의 푸닥거림이 끝나고, 그 튀김이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눈매가 올라간 주방장이 다시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음식을 튀기고, 굽고, 찌는 가운데 주방장은 다시 프란을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프란의 가느다란 팔다리며 목선을 지켜보던 주방장은 어느 순간 고함을 버럭쳤다. "사내녀석이 되가지고 그렇게 근육이 없어서야 쓰겠나!!" 냅다 외쳐낸 그 한마디와 함께 주방장은 사람들 사이에 다시 파묻혀 버렸다. 프란은 자신에게 뭔가 일은 시키지 않고 도로 가버리는 주방장을 보고 있다가 어이없다는 눈을 하면서 뮤에게 말했다. "나…… 일 안 시키는 건가?" 조금은 바보스럽게 변한 그 얼굴은 나름대로 귀여웠기에 뮤는 붉어진 얼굴로 프란의 옆구리에 찰싹 붙은 채로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일거리 가지러 가신 것 같아. 아침에 주방이 얼마나 분주한데 일을 안 시키겠니?" 프란은 지나치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뮤의 태도가 불편했지만 워낙 하하호호 거리며 그녀에게 잘 해주는 뮤에게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마린이라는 여자는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기에 닭살이 돋는다느니 소름이 돋는다느니 하면서 떼어낼 수 있지만, 이 뮤라는 여자애는 진심 어린 눈으로 프란을 보고 있어 그런 짓도 할 수 없었다. '젠장.' 프란은 또롱또롱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뮤를 보며 속으로 작게 내뱉었다. 프란은 이상하게도 동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물론 이성으로부터도 인기가 있긴 했지만, 동성들로부터 받는 절대적인 지지에 비하면 그것은 미약할 정도였다. 프란이 남자 못지 않게 강한 검을 쓰는 모습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거침없이 남자에게 검투를 신청하는 당당함이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자들은 프란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랐다. 지금 뮤의 눈빛 역시 같은 종류의 것. '미치겠군.' 자신을 향해 똘망똘망 빛나는 눈동자를 들이대는 뮤를 바라보며 프란이 속아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데, 바로 그 순간 저 멀리로 나갔던 그 주방장이 들어섰다. "자." 주방장은 갑자기 프란 쪽으로 터벅터벅 들어오더니 프란의 손위로 뭔가를 턱하고 올려놓았다. 프란은 입을 떡 벌리곤 자신의 품 안으로 안겨들어온 것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근육이지. 프레인 열매 한 자루를 오늘 다 깎고, 내일도 또 깎고, 그 다음날도 깎으면 근육이 생길거다." 프란에게 건네진 것은 프레인 열매 한 자루(10KG 포대에 담긴)와 커다란 부엌칼이었다. 프란이 그것을 들고 멀뚱하게 서 있었다. 프레인 열매는 겉은 북실북실한 털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고, 안은 노란 진물이 나오는 달달한 과일이라는 것을 프란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프레인 열매는 그녀의 모국인 세이피아에서는 재배되지 않는 것이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 감탄 어린 시선으로 프레인 열매를 보던 프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부엌칼을 의식한 직후였다. "이걸…… 나 혼자 다 깎아요?" 프란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주방장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주방장은 냉담한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어서 깎아!! 지금 시간 없어!" "이걸…… 나 혼자서?" 프란이 멍청하게 중얼거렸고 뮤는 혀를 끌끌찼다. "프란……. 처음엔 다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 질 거야. 한 달만 그거 벗겨보면 도사가 된다구. 그럼 그 때부턴 채소들이 알아서 옷을 벗어주지." '그런 도사 따윈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채소가 옷을 벗긴 뭘 벗어!!' 프란의 마음 속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소리를 무시하면서 뮤는 저 쪽으로 총총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젠장할. ……그래. 빚, 빚, 빚이 있잖아. 죽으라면 죽어야지." 프란은 혼자서 넋두리 같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은 후 구석에 가서 처량하게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부엌칼을 번쩍 들어 열심히 프레인 열매를 깎기 시작했다. 신참인 그녀에게 프레인 자루를 맡겼던 주방장은 프란이 열매를 깎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프란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황당함이 빼곡이 새겨져 있었다. 그럴만했다. 프란은 프레인 열매 하나를 손에 든 채로 엄청난 속도로 그것의 껍질을 벗겨가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신기하기 짝이 없는 속도였다. 그녀가 이날 이때까지 죽도록 휘둘렀던, 살(殺)을 위한 검과는 조금 달랐지만, 일단 칼은 칼이라 그런지 그녀의 손에서 그것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녀는 열심히 프레인 열매를 깎아갔다. 프레인 열매의 겉껍질은 너무 부드러워서 검을 대자마자 싹싹 밀려났는데, 그래서 프란은 이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프란은 조금 자랑스러운 얼굴로 껍질을 다 벗기고 밑에 내려놓았다. "후우, 다 했습니다." 그런데 막 프레인 열매를 다 깎고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프란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태까지 볶고, 지지고, 찌는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던 요리사들 몇몇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프란이 멀뚱한 눈으로 그들을 마주 봐주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주방장이 척척 걸어오더니 냅다 고함을 쳤다. "신참, 지금 뭐하는거냐!!" "예? ……보시다시피…… 프레인 열매를 깎는데요." 프란이 이해를 하지 못해 눈을 둥그렇게 뜨자, 그는 프란이 열심히 벗겨놓은 껍질을 들어올리더니 하나하나 주워담기 시작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고함을 쳤다. "프레인 열매는 껍질을 먹는단 말이다!! 그런데 이걸 다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게 얼만줄이나 알아?" "……에?" 프란이 황당함으로 얼굴을 물들이고 있을 때, 뮤가 총총총 다가오더니 프레인 열매를 번쩍 들었다. 프란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자 뮤가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정리는 내가 할게." 순간 가슴속으로 밀려든 감사의 파도에 그녀는 빠져 버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들린 뮤의 말 한 마디에 그 감사의 파도는 절망의 파도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넌 내 몫인 감자나 깎고 있어. 아주 쉬워." 뮤가 건넨 갑자는 무려 30kg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 날, 프란은 새벽 내내 초인적인 검술로 감자를 깎고 주방인들로부터 열렬한 감탄사와 함께 칭찬을 받았다. 프란이 그 칭찬에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있는데, 갑자기 주방장이 빙긋 웃으며 다가와서 말했다. "잘 했다!" "뭘요, 평소 실력이죠!" "그래? 그럼 넌 이제부터 감자 깎이 담당을 하면 되겠지?" "……." 프란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 "가주님, 식사시간입니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프란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서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했다. 저 문 안에는 그 무서운 소년, 가주가 있을 것이다. 싸늘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그 무서운 소년이 말이다. "……들어와." 허락의 소리가 문 안에서 들려왔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려다 말고 멈칫했다. 어제 이 집안에 발을 들여놨을 때 보았던 남자 둘은 오늘도 여전히 그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로 프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프란이 허튼 짓이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베어버리겠다는 살인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프란은 그런 그들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배 안 고파?" 프란의 말에 그들의 인상이 살짝 좁혀졌다. 프란은 슬쩍 웃은 후 의도적으로 크레인을 돌려 음식 냄새를 주변에 퍼뜨렸다. 그 바람에 늦은 저녁부터 이른 새벽까지 잠 한 숨 자지 않고 가주의 방 앞을 지키고 있었던 두 남자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프란은 킬킬거리는 사악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가주의 방이라는 곳이 프란의 생각보다는 훨씬 작고 아담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보통 귀족 가의 소년가의 방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탁자 하나와 침대 하나, 넓직한 카펫 위에 놓여진 쇼파 몇 개. 길게 잎을 늘어뜨린 관상용 식물 몇개. 정말 수수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 하지만, 그 수수하고 평범한 방 안에는 결코 수수하고 평범하지 않은 소년이 하나 앉아 있었다. 프란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벽 하나를 완전히 창문으로 낸터라 아침의 햇살은 방 전체를 비추고 있었고, 가주는 그 햇살을 등지고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가주의 눈은 기묘한 연보랏빛을 내고 있었는데, 프란이 음식을 갖고 들어오자 미세하게 그 눈동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프란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크레인을 이끌고 가주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문득 뮤가 했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너, 가주님의 시중을 든다며? 부럽다∼.' 나이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게 돈 그들이었다. '뭐가 부러워? 난…… 난 그 가주란 사람이 무섭단 말이다!! 사람을 노려보는 그 눈하며!! 그게 인간이야?' 뮤는 프란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프란의 귓가에다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이 집안에서 가주의 험담을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목과 몸통이 분리가 될 수 있다고. 프란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목언저리를 주물렀다. '음, 가주님의 하인은 말이야……. 일단 가주님의 식사 시중을 들지.' '식사시중?' '응. 식사시중.' 그 식사시중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프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가져간 후 그가 음식을 먹기 편하게 해주면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프란이었다. '그리고 가주님을 항상 따라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야하지.' '…….' 그것만은 정말이지 싫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치를 떨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시고 나면 가주님은 가볍게 산책을 시작하시는데, 그 때도 따라 가야 해. 아무 말씀이 없으시면 무조건 따라가는 거야. 하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식사 전 시간이나 가주님의 회의실에는 따라가지 않아도 돼.'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별의별 충고를 다 듣고 들어온 프란이었다. 절대로 큰 목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발 소리를 요란하게 내서는 안된다……. 기타등등. 복잡하고도 복잡했던 뮤의 이야기를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길맞을…….' 다시 한 번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소년에 대한 연모의 감정으로 두근거리는 것은 물론 절대 아니었다. 절대적인 두려움. 그것이 소년에게 느끼는 프란의 유일한 감정이었다. "……시, 시, 시, 시, 식사 하십시오." 크레인에 한가득 음식을 가지고 온 프란이 말했다. 가주는 덤덤한 눈으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었다. '가주님은 아침식사는 항상 혼자 하셔.' 프란은 가주가 자신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자 잠시 기분이 묘해졌다. "……말병신인가?" 어느 순간, 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란은 그 말에 울컥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엔 가주의 눈이 너무 싸늘했기에 잠자코 있었다. 프란은 천천히 나이프와 포크를 도열해놓고, 커다란 탁자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런 좁은 방 안에서 혼자 외롭게 식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프란은 음식을 차려놓기 시작했고 의자에 앉은 채로 프란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가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몇 살인가." 프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쳇, 자기가 무슨 50대 할아버진 줄 아나. 말투가 왜 저래?' 프란은 낮게 대답했다. "열여덟……입니다." 존대말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반말을 할 뻔 했던 프란은 황급히 대답했다. 가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아침의 햇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투명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와서 자리에 앉았다. 프란은 살짝 뒤로 물러서 그의 시중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주가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프란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음식을 안 먹는 거지? 꾸, 꿀꺽. 맛있어 보이는군.' 프란이 의아한 생각을 할 때쯤,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먹어라." 그 강압적인 말에 프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 "못 들었나? 먹으라고 하지 않나." 프란은 가주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인 열매로 만든 달콤한 파이, 소스를 잔뜩 끼얹어 쪄낸 거위 구이,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뮤레인 잎새 등 웬만한 귀족가에서도 맛보기 힘든 진미가 앞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도도한 눈빛으로 가주는 말하고 있었다. 저것을 '먹어. '라고. 프란은 한 순간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주를 보았다. 가주는 그런 프란을 향해 매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디서 눈을 치켜 뜨는 거냐." '잘났다, 젠장.' 프란은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고개를 얼른 떨궜다. 잠시후, 가주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먹어." "……." 프란이 이 말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가주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했다. "……죽을 거냐, 먹을 거냐." 그 섬뜩한 말에 프란이 움찔했다. "머, 먹을 겁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모조리 다 먹어드리죠!!!" 크게 외친 프란은 파이에 손을 댔다. 그런데 순간, 가주의 손이 프란의 손을 저지했다. 그는 싸늘한 눈을 빛내더니 거위 구이에 손을 갖다댔다. "저걸 먹어라." "……?"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는 가주의 태도에 너무나 황당해진 프란이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순순히 프란은 거위 구이를 한 점 먹었다. 가주의 얼굴 위로 가느다랗게 드리워져 있던 줄이 살짝 걷히는 것을, 프란은 보았다. "이것도." 다시 가주가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뮤레인 잎새였다. 원래 달짝지근한 것을 좋아하는 프란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먹었다. "이것도." "이것도." 그런식으로 가주가 가리키는 음식을 한가지씩 집어먹자 배가 불러왔다. 몇 가지만을 남기고 거의 다 맛을 봤다고 생각했을 무렵, 가주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주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있던 프란은 어느 순간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가주는 프란이 한 번씩 맛을 봤던 음식만을 먹고 있었다. '……왜 저러지……?' 가주는 가만히 음식을 먹으면서 프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보랏빛 눈에서 일순 광채가 스쳤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하루 이틀 독 타는 것도 아니니…… 이 짓도 짜증나는군.' 어찌됐든 그리 유쾌하지 못한 식사를 마친 가주가 천천히 일어섰다. 가주가 일어서자 프란은 뮤의 충고를 생각해내곤 얼른 따라 일어섰고, 가주가 방을 나서자 급하게 크레인을 치우고선 가주의 뒤를 따라 갔다. 그렇게, 첫날이 시작되었다. 악몽으로 기억될 첫날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2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 나는 가주가 싫다(2) 가네트(uznian) 03-11-24 :: :: 14186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바닥을 혀로 핥으라고 해도 핥을 수 있었다. 그 무슨 짓을 시켜도 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주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날리고 있는 자는 분명 이 가문의 주인인 그였다.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의 소유자인 그는 차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 녀석을 상대하라고 말했다." "……." 프란은 멍한 눈으로 가주를 보았다. 뮤가 알려준 가주의 스케줄은 이랬다. 6시 30분에 기상. 7시에 아침 식사. 8시 30분부터 12시까지 가볍게 산책, 그리고 검술훈련. 12시부터 1시까지 티타임. 2시부터 3시까지 점심식사. 3시부터 6시까지 가문의 일에 관한 서류전담. 6시부터 9시까지 손님과 면담 및 일가와의 면담. 9시부터 10시까지 저녁식사. 10시부터 12시까지 검술훈련. 수행을 하기엔 그렇게 힘들지 않은 스케줄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 무슨 말을……." 프란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덩치 큰 사내를 보며 가주를 향해 소리쳤다. "듣지 못한 건가? 검을 들어서 이 놈과 겨루라고 했다." 덩치 큰 사내의 나이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온 몸에서 강함이 뿜어져 나오는 그 자의 모습에서 프란은 어딘지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프란은 정말이지 당황하고 있었다. 처음, 그가 식사를 마치고 넓다 못해 소름끼치는 정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마음을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던 프란이었다. 그런데 정원을 반쯤 걸었을 때, 그들은 이 집 안으로 들어서던 한 남자와 마주했다. 남자는 가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난 후 쑥스럽다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름 아침에 경우가 아닌 줄은 압니다만……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이 아니라면 가주님을 뵐 시간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공손한 말에, 가주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남자도 가주가 그렇게나 쉽게 검을 뽑아 들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었다. 그래, 여기까진 아주 좋았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남자가 진지하게 자세를 잡을 무렵, 갑자기 가주는 검을 옆으로 틀더니 자신의 옆에서 얌전히 구경할 준비를 시작하는 프란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비무해라.' "대, 대체 왜 제가……" 엉겁결에 검을 받아든 프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가주가 소유한 검이라서 그런지 검은 기괴한 빛을 내뿜고 있는 명검이었다. 찬란하게 반사되는 푸른빛의 검신이 프란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무기를 뽑아놓았었던 남자도 조금 당황한 얼굴로 가주를 보고 있었다. "죽을 건가, 겨룰 건가." 갑자기 프란을 바라보며 가주가 말했고 프란의 인상이 왕창 망가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는 가볍게 프란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로 한 번 시선을 준 가주가 말했다. "나는 하수와 검을 섞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나, 나보다 너무 실력이 딸리는 자를 상대하는 것은 싫다. 짜증이 나거든." 가주의 오만한 그 말에, 남자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으나 곧 그의 표정은 풀렸다. 그는 가주 대신 검을 들고 선 프란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 런스 카르멘이라고 한다." 문득 그 자가 입을 열었다. 프란의 몸이 곧게 섰다. '런스 카르멘? 이 사람도 카르멘 가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가족인데…… 조카 뻘 되는 가주에겐 저렇게 항상 존대말을 쓰는건가?' "난 프란 프리텐." 프란은 조금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검을 들었다. 남자는 그런 프란을 보며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이른 아침, 카르멘 가의 장미 정원의 틈에서는 검을 쥔 자들의 고른 숨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가주는 한 켠에 서서 싸늘하게 그들을 훑고 있었다. 문득 남자가 말했다. "너는 어디 소속이지?" "……?" 그 말과 함께 가볍게 허리 쪽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에 프란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성급하게 뺐다. 남자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이 검을 돌려서 이번에는 옆구리를 내리 찍으려고 했다. 프란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그의 검을 피한 후 빠르게 몸을 뒤쪽으로 움직였다. 프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발이 꽤 빠르군. 몸이 가벼워서 그런가? 난 케이온 기사단에 속해있다. 그대는?" "케이온 기사단?" 챙!!!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검 끝에 불이 일었다. 프란은 자신의 검을 맞댄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얼굴위로는 여유로움이 번지고 있었다. "팔 힘을 좀 기르는 편이 좋겠군." 퍼벅!! 그 말과 동시에 프란의 몸이 뒤로 가볍게 튕겨져 나갔다. 몸에 힘이 조금 더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프란은 팔 힘을 길러두지 못했고 그래서 무지막지한 남자의 완력에 그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프란은 쓰러진 채로 몇 바퀴를 굴렀지만 곧 발딱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진다는 것응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 소속 같은 거 없다." 프란은 그 말과 함께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자신도 기사가 될 뻔 했었다. 황태자 암살 사건에 대한 공로자로서. 끼기기기긱.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검과 검이 마찰하면서 뿜어낸 소리였다. 남자는 가볍게 경계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힐끔 눈앞에 있는 소년을 보았다. 자신과 지금 검을 겨누고 있는 금빛 머리칼의 소년은 대단히 빠른 몸과 유연성, 탄력성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단련한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늘가늘한 팔다리가 영 거슬렸지만 힘을 기술으로 커버하고, 유연과 탄력으로 공격을 받아치는 것은 상당한 실력임을 입증해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오렌지빛 눈동자를 불태우고 있는 저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가주의 눈은 탐색하듯이 소년을 뜯어보고 있었다. 지금 이 소년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인인 듯 보이는 이 소년을 왜 저 오만한 가주가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저 가주가 이 이 소년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챙캉!! '질 수 없지!' 남자는 살짝 전투욕을 불태우며 앞으로 나섰다. 그를 상대하고 있는 눈앞의 소년은 상당한 실력을 갖추긴 했지만 남자에 비해선 미숙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 의욕이나 전투욕만큼은 굉장해서 남자는 기운에서만은 압도당했다. "젠장할!! 몰라, 일단 싸움 붙으면 못 말리니까 당신 알아서 하쇼!!" 그 말과 함께 프란이 날아들었다. 치카카카카칵!! 챙캉, 하는 경쾌한 마찰음이 아닌, 쇠가 쇠에 긁히는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프란이 검을 뻗었는데, 남자가 검을 길게 흘리며 몸을 뒤로 빼냈기 때문이다. '젠장!' 프란은 몸을 뒤로 길게 보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남자의 검은 무지막지하게 빨랐고, 그 검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던 프란은 다시 한 번 정원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잘 정리해놓은 장미의 가시가 프란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그리 굵지 않은 가시였기에 살갗을 깊이 파고 들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아팠다. 프란은 풀밭을 뒹굴면서 검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프란이 쓰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와 검을 뻗은 후, 누워 있는 프란을 향해 검을 찍어 누르는 자세를 취했다. 프란은 움찔하면서 누운 자세에 그대록 검을 뻗어냈다.. 챙캉! 챙 챙 챙 챙!! 몸이 눕혀진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찍어 내리는 검을 피하고 있던 프란은 어느 순간 몸에 반탄력을 주고 상대의 검을 밀어낸 후, 똑바로 섰다. 그녀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도전적인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정말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침을 꼴딱 삼켰다. '이것이 검의 본가라 불리는 카르멘 가의 검술인가?'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날렸다. 남자의 검은 이번에도 재빨랐다. 어느 순간, 틈을 파고 든 프란의 검이 남자의 목을 노린다 싶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프란은 옆을 밀고 들어오는 거센 공격에 부딪혀야만 했다. 그녀의 몸이 길게 튕겨져 나갔다. "쿨럭."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대로 복부가 걷어차인 그녀가 거친 한숨소리와 함께 피를 토했다.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발의 힘이 그녀의 내장중 한 부분을 상처 입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검을 쥐고 비틀비틀 일어섰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가 자가 말했다. "여기서 그만 해도 되겠습니까, 가주님?" "안 된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가주가 잘랐다. 남자는 뭐라 항변하려 했으나 이미 가주의 눈이 굳어져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검을 세우려 했다. 그런데 막 그가 검을 가슴까지 들어올렸을 때, 가주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검을 버려라." "네?" "검의 기본도 안 된 녀석에게 내 검을 맡기는게 수치스럽군. 저 검은 내가 거둬야겠으니 너도 맨 몸으로 싸우란 말이다." 가주의 쌀쌀한 말투에 움찔한 남자는 순순히 검을 버렸다. 프란이 흠칫하는데 가주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검을 놔라." "……." 할 말을 잇지 못하고 프란이 검을 주섬주섬 가주에게 건네주었다. 가주는 프란이 건네는 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더니 다시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집안으로 집어넣었다. 프란은 깔끔한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는 가주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남자의 공격이 그녀를 치고 들어왔다. "헉!" ▷◀▷◀▷◀▷◀▷◀▷◀▷◀▷◀▷◀▷◀ "헉, 헉헉헉……" 프란은 심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남자, 런스는 조금씩 곤욕스러워지고 있었다. 가주가 상대를 하라고해서 하고는 있지만 이 소년은 이제 서 있는 게 용할 정도로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거친 주먹 상대가 되기에 소년은 너무 어렸고 체력도 약했으며 몸도 가늘었다. 하지만, 공격을 멈춘다거나 대충 넘기려고 할 때마다 가주가 서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나를 기만하는가?" 가주의 그 싸늘한 말에 런스는 다시 프란에게 달려드는 수밖에 없었고, 그녀를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의 체력은 이미 한계였다. 프란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차각에 잠시 다리를 떨었다. 몇 번 꿈틀꿈틀 거리며 런스 쪽으로 다가오던 프란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런스는 순간 당황해 프란을 받쳐 주려고 했지만, 등뒤에서 쏘는 듯한 시선을 느껴져 몸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읏……." 런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프란은 어느순간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가주님." 런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갑자기 쓰러진 프란을 가리켰다. 가주는 장미 정원에 피를 흩트리며 쓰러진 프란을 보고 있다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입에 매달린 것은 미소. "……한심하군." 가주는 쓰러져 있는 프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가자, 런스." "예? 예? 무슨……? 이, 이 소년은……." "내버려둬." 가주는 싸늘하게 말해놓고 등을 돌려 버렸고, 남자는 당황한 눈으로 한참 프란과 가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주가 싸늘하게 말해왔다. "……회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가,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 "아, 아닙니다……." 그는 몇 번이나 프란을 돌아보다가 뒤를 돌아서 그를 따라섰다. 금빛의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장미 정원에 누워 있었다. ▷◀▷◀▷◀▷◀▷◀▷◀▷◀▷◀▷◀▷◀ 차련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가주의 얼굴에는 한가득 씁쓸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화려한 은백색의 커튼을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 보였다. 「괜찮은 아이입니다, 가주님.」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노을과 너무나도 닮은 한 사람이 가주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노을을 그대로 빼다박은 머리색과 그것보다 좀 더 짙은 오렌지의 눈동자.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명령에 따라 검을 들고 싸웠고, 그 검이 상대에 비해 너무나도 형편 없어 결국엔 맨 몸으로 상대에게 두들겨 맞아야만 했던 그 녀석. 가주의 머릿속에 있는 프란 프리텐이라는 녀석은 뭐라고 딱 한마로 정의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하인 하나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대해서 여태까지는 매우 무심하게 생각했던 가주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프란에게만은 유독 이상하게 구는 그였다.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이가 아무리 바뀌어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그였는데, 이번만은 좀 유별나게 굴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종이 바뀐다해도 일주일을 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의 까탈스럽고 깐깐하며 조금은 더럽기까지 한, 그리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견뎌내는 시종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가주는 검을 모르는 자를 시종으로 받는 것은 싫어했고, 만약 검을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자라면 강제로 검을 배우게 만들기도 했다. 그 바람에 시종들은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일수였다. 그의 시종자리에서 일주일을 넘긴 사람은 여태껏 단 두 사람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두 사람도 채 한달을 넘기지 못했었다. 그 중 한 명은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로 어느 날 밤 짐을 싸고 도망가 버렸고, 다른 한 명은 가주의 분노를 사서 시종들이 모여 있던 홀에서 단 숨에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프란 프리텐이라는 녀석은 가주가 뭐라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녀석이 아닌가. 게다가 꾹 다문 입술하며 치켜올려진 눈은 그녀석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꼭 계집애처럼 생겨먹어선……." 문득 가주가 중얼거렸다. 그는 프란의 그 계집애 같이 곱상한 얼굴선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차였다. 정말, 거울은 보지도 않은 것일까. 방 한 켠에 걸려 있는 잘 닦인 금제 거울 앞에 서면 프란보다 훨씬 더 계집애처럼 생긴 자신을 볼 수 있는데도, 가주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프란이야 원래 여성이기에 여자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가주는 엄연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성혼란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쪽이 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가주는 희미하게 방을 드리운 커튼에 선 채로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의 입술이 비죽하게 올려졌다. "……오늘 회의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 나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진 못한 거다. ……하긴……「그들」이 있는데 어린 내가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이 불만스럽겠지…… 후후훗." 어딘지 모르게 냉소가 끼인 말을 내뱉는 가주의 얼굴에는 가느다란 씁쓸함이 머물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뚫어지도록 노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커튼을 쥔 하얀 손이 부르르 떨리는 걸로 봐서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가주는 어느 순간 커튼을 확 하고 도로 처 버렸다. 「프란 프리텐. 괜찮은 아이입니다, 가주님.」 문득,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며 자신의 앞에 묵묵히 무릎을 꿇었던 금발의 사내가 머릿속에 잔상이 되어 떠오름과 동시에, 가주는 입에 더더욱 짙은 씁쓸함을 머금으며 웃었다. 바로 어제, 이 곳에서 자신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던 그 남자의 이름은 케인. 케인 칼슈비도. 「살려두셨으면 합니다. ……주제넘은 말씀인지 모릅니다만…… 투자를 할 만한 가치는 있는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어쩌면 인간이 저럴 수가 있을까,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싸늘한 남자인 케인이었다. 쌀쌀하기 그지없으며 냉철하고 말조차 없는, 얼음 같은 남자. 케인. 하지만 사실 가주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인지를. 자신의 수하. 깊은 속내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하 중 하나인 것이 비켈린 중의 한명인 케인이었다. 카르멘 가에 머물 때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래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불만일 정도로, 가주는 케인을 아끼는 편이었다. 「프란 프리텐…… 살려두십시오, 가주님.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실 지도 모릅니다.」 "후회한다라……." 왜 그가 그런 말까지 했던 것인지 가주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적어도 쓰레기는 아닌 것 같더군, 케인." 검을 쥐었을 때 빛을 발하던 그 눈빛. 오렌지색 눈동자에 머물던 것은 강렬한 투지. "……쳇." 가주는 어느 순간 퉁명스럽게 외치고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미 다 식어버린 차맛은 가주의 입맛을 깔끄럽게 만들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3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 나는 가주가 싫다!(3) 가네트(uznian) 03-11-24 :: :: 10774 하얀 침대에 눕혀진 채로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고 있는 프란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했다. 그녀의 손은 힘없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침대는 간혈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뱉어놓는 큰 숨소리 때문에 침대는 움직임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는 거예요, 가주님은!!" "진정해라." 깔끔하게 정리된 프란의 방에는 두 사람이 선 채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프란은 그녀의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은 뜬 채였지만 여전히 온 몸에 힘이 풀려 있었고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지는 프란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신에 대한 조소가 그녀를 강타한다. 나름대로 검에는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에 비하면 자신은 어린아이였다. 그래도 기사 작위를 받을 만큼 열심히 검을 닦았던 자신인데! "진정하라니요!!! 프란이 저 꼴이 되었잖아요!! 가주님은 정말 너무하신다구요!!" "……그만 좀 떠들어. 나 괜찮다니까." 프란은 자신의 옆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짜면서 떠들어대는 뮤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뮤는 혼절 직전까지 갔던 프란을 두고 눈물 콧물 다 짜대며 징징대고 있었는데, 프란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너…… 너…… 이 정도 상처면…… 이 주일은 꼬박 누워 있어야 할 정도란 말이야!!" 빽 내지른 뮤의 소리에 프란은 피식 웃어버렸다. "괜찮아. 나도 검을 배우던 몸이니까 남들보다 상처는 빨리 아물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뮤가 다시 버럭 고함을 쳤다. 프란은 오늘 아침 처음 만났던 저 핑크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지나치게 흥분을 한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자신의 머리를 버벅거렸던 프란은 다음 순간 온 몸을 엄습해온 지독한 고통에 상반신을 구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크윽!" "프란!" "프란!!" 프란이 상반신을 구부리기가 무섭게 뮤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프란을 부축했고, 여태껏 뮤와 투닥거리고 있던 마린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대 쪽으로 달려왔다. 마린은 얼굴 가득 걱정을 머금은 채 프란을 보고 있었다. 아까 한 번 보니 옆구리 쪽에 깊지는 않지만 길게 검상이 하나 있었고, 온 몸은 지독한 타박상이 있었다. '후우……. 이걸 어쩐다……. 아무래도 의사한테 보여야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남장여자잖아, 저 녀석은!!' 마린은 프란이 상당히 마음에 든 차였다. 왠지 모르게 저 프란이라는 아이에게는 특이한 것이 있다고 할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대범함! 이런 저택에 들어와서 성별을 감추려고 했던 그녀의 대범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마린이었다. 언제까지 이 저택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평생 남자 행세를 각오하고 들어왔단 말이 잖은가. 마린은 프란의 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숨을 뱉어냈다. 확실히, 무리였던 것일까……. 마린은 프란의 상처입은 두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싸늘한 가주를, 누구보다도 차가운 가주를, 인정사정 없이 누구에게나 가차없이 검을 쥐고 베어버리는 어리지만 냉철한 그 소년을 상대하는 것은 저 금색 소녀도 무리인 것일까. "프란." 마린은 끅, 하고 격한 숨을 몰아쉬는 프란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프란은 그녀의 부름이 있은 후 한참 후에야 눈을 들어 마린을 마주보았다. "……많이 힘들면…… 바꿔줄까." 마린의 말에 프란은 한동안 눈을 꿈뻑였다. 잠시 마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달이 잘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계속 눈을 깜빡거리던 프란은 마침내 마린의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은…… 가주 시중 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프란은 가쁜 숨소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녀로서도 오늘의 일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나름대로 검에는 자신이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가주란 놈은 자신을 [검의 기본도 모르는 바보] 취급한 것도 모자라 검을 도로 뺏어가버리기까지 했다. 여리디여린 여자의 몸으로서 그런 거구의 사내를 검도 없이 맨몸으로 상대하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빌어먹을!! 성격 드럽게 나쁜 놈!! 너란 놈은 진짜 지옥에 떨어져서 죽을거다!! 젠∼ 장!!' 몸서리치게 끔찍한 가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프란이 입술을 악 물었다. 그런 프란의 태도를 오해했는지, 뮤가 다정스럽게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프란. 정 힘들면 마린님 말씀대로 해. ……나는 네가 가주님을 모신다고 했을 때 무척 부럽게 느꼈었는데……." 뮤의 말에 묻어난 안타까움을 느끼며 프란은 마린을 보았다. 마린은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 집안의 하인을 통솔하는 사람으로서, 마린에게는 수도 없는 일거리가 밀려들어 있었지만 마린은 만사 젖히고 그저 평범한 일개 [하인]일 뿐인 프란에게 달려온 차였다. 뮤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프란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보이는 마린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이 늙은 여우가 혹시 프란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오늘 처음 봤긴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 그 외모에 놀라고 그 다음 순간 그녀의 날카로운 표정에 또 한 번 감탄했던 뮤였다. 나름대로 현실감각이 있다고 자부하는 뮤였지만(주위 사람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프란을 보고는 그대로 반해버리고 말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코웃음쳤었지만, 프란을 보고 한 눈에 뻑하고 맛이 가버린 뮤였다. 그런 뮤에게, 분명 이 마린이란 존재는 거슬리는 것이었다. '……흥! 그래봤자 당신은 29살이잖아!! 프란이랑은 11살이나 차이가 난다구!! 넘볼 걸 넘봐!' 뮤는 마린을 샐쭉한 눈으로 보았다. 마린은 이 어린 하녀가 뭐라고 오해하는지는 까맣게 모르고, 침대에 비스듬하게 기대 누워 있는 프란에게 조용조용한 말투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야……. 여태까지 가주님의 시중을 봐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 주일은 못 견디고 나가버렸어. 왜 그런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 분은 조금 까다로우시잖아." '조금? 지금 조금 까다롭다고 그랬냐? 허허, 허허허허허허!!' 프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해야만 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가주는 [조금]까다롭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까다로운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많이 까다로운 사람은 멸족된 것이 틀림없다. "……만약에 많이 힘들다면 말이지……." "아니." 그런데 마린이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프란이 그 말의 허리를 잘랐다. 마린이 의외의 말이 튀어나온 것에 대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프란은 나즉한 어투로 말했다. "계속할거다. 죽으라면 죽지!!!" '그 놈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한 번 해 볼 거라구!!!' 프란은 이빨을 부득 갈며 다짐했다. 이렇게 전투욕을 불살라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 "뮤 레니아스라고 합니다, 가주님." 뮤는 살짝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이른 아침,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이른 아침이었다. 차갑지만 산뜻한 바람이 열어둔 창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책을 읽던 가주는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들어 말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가주의 고운 미간이 그대로 찌푸려졌다. 뮤는 가주의 급격한 표정변화에 순간적으로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너무 예쁘게 생기셔서 그런가……. 왜…… 왜 인지 사람 같지 않은 존재감이야.' 한참 뮤를 노려보고 있던 가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석은." 문득 가주가 입을 열어 말했다. 뮤는 순간 깜짝 놀라서 음식이 가득 담겨 있는 크레인을 끌던 손을 멈칫했다. 은빛의 크레인을 잡은 뮤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뮤는 잠시 입술을 살짝 물었다. 가주의 시중을 들게 된 프란을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주의 앞에서자마자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뮤였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뮤는 다시 크레인을 끌어 식탁 앞에 놓으며 물었다. 지극히 공손한 어조였다. 그런 그녀에게, 가주는 무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 프리텐 말이다." 가주의 말에 뮤의 눈에 일순간 원망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주님이 너무 혹독하게 다루셔서 오늘 아침엔 열이 39도 가까이 오르더군요. 도저히 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오늘은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그이(이미 프란에 대한 뮤의 마음은 이 정도까지 진척되어 있었다.)는 끙끙대면서 끝까지 오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침대 채로 묶어버릴까라는 생각도 할 정도였다구요!!' 뮤는 속으로는 열심히 설명과 책망을 번갈아가며 가주에게 퍼붓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가주의 차가운 눈은 그녀의 심장을 후벼파버리겠다는 기색마저 띄고 있었다. 잔인하고 잔인하고 잔인한 빛. "……데려와." "네? 네?" 뮤는 가주의 그 [데려와]라는 말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고 가주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못 들었나. 데려오라고 했다." "가, 가주님!" 뮤는 얼른 무릎을 숙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저, 저……프, 프란은 지금……." "말은 필요 없는 것으로 아는데. 내 말에 지금 대꾸를 하는 건가." 오싹…….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짙은 무엇인가에 뮤의 핑크빛 눈동자에 공포의 기색이 물들기 시작했다.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리기 시작하는 뮤의 가느다란 몸. "……가주……님, 프란은……." 간신히 입술을 떼서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뮤는 가주의 눈을 마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한 뮤의 입술은 시퍼래졌다. 잔인한 그 두 눈은 도저히 뮤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한 가문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던 어린 소년의 눈에 묻어난 그 기색을 읽은 뮤는 온 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그의 눈을 피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른 침이 목 뒤로 꿀꺽꿀꺽 넘어가고 있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마, 말씀…… 이, 이행하겠습니다." 뮤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가주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 온 몸이 휘청휘청 앞으로 꺾이는 것 같았다. 머리는 더 이상 아플 수 없을 정도로 지끈거리고 있었고 세상은 빙글빙글 제멋대로 춤을 춰대고 있었다. 목 안이 바짝바짝 메말라간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가빠오고,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머릿속은 텅 빈 백지장 같다. 프란은 그러나 몸을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자신을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나갔던 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프란은 간신히 뮤를 달래놓고 가주의 방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차였다. "프란 프리텐……입니다." 프란은 작은 목소리로 문 앞에 기대선 채 말했다. 오늘도 여전히 가주의 방 앞에서 호위를 하고 섰던 남자들이 뚫어질듯한 시선으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었다. 프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쉴 새 없는 비지땀이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창백한 입술과 벌건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대조되고 있었다. 억지로 힘을 내기 위해 꼭 쥔 주먹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피가 흘러나올 것처럼 보인다. "……들어와라." 가주가 차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띄엄띄엄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힘겹게 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호위병들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봐, 넌 눈치챘나?" 반백의 머리카락을 한 사람이 옅은 푸른빛 머리카락을 가진 한 사람에게 질문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반백의 남자가 문을 손가락을 살짝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푸른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팔팔 꼬마?" "음." 둘은 잠시 프란이 들어간 문을 바라보았다. "뭐든 좋으니 나는 가주님이 성질만 안 내셨으면 좋겠군." 푸른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시체 치우는 것도 신물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4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나는 가주가 싫다!(4) 가네트(uznian) 03-11-24 :: :: 6886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가." 들어가자마자 튀어나온 메마른 음성. "……." 프란은 가주가 앉아 있는 식탁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아직 손끝도 안 댄 것 같이 단정하게 차려진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프란은 애써서 눈을 부릅뜨며 한 발자국씩 발을 움직였다. 한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몸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쓰고 있는 프란이었다. 문득 화가 치밀었다. 뭐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프란의 머릿속에서 끓고 있던 말이 입밖으로 분출되었다. "가주님이 어제 시키신 그 대련 때문에 몸이 말을 좀 안들어서 말이지요." 프란은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성은 말하고 잇었다. 절대로 이런 어투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뭐랄까. 너무나도 짜증스럽고 화가나서 평소의 성격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자신이 말을 뱉어낸 그 순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주는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 하지만, 곧 그는 무덤한 얼굴로 돌아왔고 프란에게 말했다. "형편 없는 검이었다." '호오? 그러셔? 그래도 난 나름대로 검을 쓰는 몸이다, 이거다!! 그런 식으로 검사의 자존심을 짓밟아도 되는거야!!!' 물론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녀도 생각이 있는데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는 바보같은 짓을 저리를 리는 없는 것이다. "사내 녀석이 팔 힘은 기르지 않고 뭐한거지?" '미안하다, 사내 놈 아니라서. 나는 달고 있는 물건이 없어서 그렇다, 왜!' 역시 밖으로는 한마디도 내지 않았다. "먹어라." 이윽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지시가 내려졌다. 프란은 울컹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면서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아파……. 젠장, 내 체력이 이렇게나 약했나…….' 프란은 음식을 먹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 프란은 멍청한 걸음걸이로 가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주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얼굴로 정원을 한바퀴 돈 어디론가 향했다. 가주가 간 곳은 커다란 공터 같은 곳이었는데, 그는 그 곳에 가자마자 프란을 향해 검을 한 자루 던졌다. 챙그랑. 가주가 던진 검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쇠 마찰음을 냈다. 프란은 떫은 표정으로 그 검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가주를 보았다. 검이 던져진 이유를 묻는 듯 했다. "닦아라." 가주의 말에 프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들었다. 한참동안 뚫어져라 그 검을 바라보고 있던 프란의 인상이 살풋 일그러졌다. 온통 피로 칠갑된 검인데다가, 그 피가 딱딱하게 굳기까지 해서 도저히 쉽게 닦아질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주님, 천이 없습……." "네 옷으로 닦아." '저걸 진짜 확!!' "……네." 어찌하겠는가. 죽어라면 죽어야지. 프란은 자신의 반들반들한 옷에다 검을 비비기 시작했다. 굵은 피가 묻은 그 것은 굳어진 채로 프란의 옷에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투둑거리며 떨어지는 핏덩어리들은 분명 소름끼치는 것이었지만, 검을 배워왔던 프란에게 혈향은 익숙한 것이라 별 저항감 없이 그것을 닦을 수가 있었다. 프란이 검을 닦는 동안 가주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보고만 있었다. 쓱삭거리면서 그것을 닦던 프란이 문득 말했다. "가주님." "……뭐냐." "여기 이 부분, 유독 피가 많이 묻은 곳은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만." 프란은 저도 모르게 약간 빈정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검을 연구하는 가문의 주인이라는 작자가 검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기막혀 저도 모르게 비꼬는 투가 나온 것이었다. 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검을 쓸 자격이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프란이었다. 검을 함부로 대하는 자는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하는 자라는 말도. 검에는 피가 말라붙은 채로 있었는데, 검신 전체가 피로 덮여있는데다가 그것이 너무나도 딱 늘어붙어 있어서 피가 묻은 후로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될 때까지 검을 그대로 방치했다는 것은 검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래서?" 가주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은 그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조에 당황해서 말했다. "그냥 그렇다구요." "……죽고 싶은 거냐." 가주가 인상을 확 그으며 묻자 프란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네? 아, 아닙니다만?" "……왠지 죽고 싶어서 날뛰는 듯 하군." 프란은 잠시 말 없이 서 있다가 갑자기 열심히 피를 닦기 시작했다. 정말 잘 닦이지 않는 피였지만 닦고 닦고 닦으며 또 닦고 또 닦자 천천히 핏덩어리들이 사라지면서 검이 그 빛을 띄기 시작했다. 검신에서 빛이 난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 남은 것은……. 깊은 은빛을 띄고 있는 검 한자루였다. "우와∼∼." 프란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잘 닦인 그 검은 한 눈에 보아도 명검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다 닦았습니다, 가주님." 그 말과 함께 가주에게 고개를 팍 숙이며 검을 건네는 프란이었다. 가주는 그러나 슥하고 한 번 처다 봤을 뿐 그것을 건네받지는 않았다. 갑자기 가주는 앞으로 나서는 날카롭게 선 검을 뽑아 들었다. 차랑. 맑은 금속음과 함께 소리 소문 없이 가주의 검이 뽑혀져 나왔고, 프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엄청나게 빠른 발도!' 검을 뽑은 가주가 잠시 눈을 감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명상에 잠긴 듯한 그의 뽀얀 얼굴은 프란의 정신을 온통 빼놓기 충분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가주의 검무가 시작되었다. 보랏빛을 띈 소년의 머리카락은 검을 든채로 가볍게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뽑혀져 나온 검은 자유자재로 허공을 비행했다. 무수한 은빛의 선을 그어 내리는 검 끝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고, 푸른빛을 은은히 띄는 검에서는 검풍이 잉잉소리를 내며 일었다. 검을 만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지금 소년이 휘두르고 있는 검은 지나치게 빨랐다, 프란은 놀라움에 눈을 가늘게 떴다. 가주는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것은 물이 흐르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작들의 연속. 아름다운 여인네들이 스텝을 밟고 춤을 추듯, 그의 검끝은 자유스럽게 움직였다.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몸만 푸는 듯, 그의 몸에서는 단 한 방울의 땀조차 흐르지 않았고 숨은 검을 뽑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차분했다. 검이 흔들리는 손에서 이는 것은 검의 속도가 뿜어져 나오는 바람. 그 바람에 가주의 앞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검무. 한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바람이 일고, 감정이 일고, 모든 것이 일렁거린다. 그 검무가 모두 끝나고 가주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땅에 내려섰을 때 프란은 피 끓는 가슴을 안은 채 멍하게 서 있었다. '저게…… 인간이 휘두르는 검인가? 말도 안 돼!! 세이피아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유네온님도 저렇게까지 검을 빨리 휘두르진 않는다고!! 게다가…… 숨소리조차 흔들리지 않았어! 말도 안 돼! 나보다 겨우 한 살 많다면서……. 이게 뭐야!! 단순한 검무라지만…… 실전이 아닌 검무라지만 이건 너무 완벽해!! 동작에 건덕지가 전혀 없단 말이야!!' 가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범벅되어 멍하니 얼어있는 프란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멍하게 있을건가." 가주는 발을 옮기며 말했다. "그 검은 네가 갖도록." 그 한마디에 프란은 문득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손을 보았다. 피터지게 닦았던 은빛의 검 한자루가 있었다. 핏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는 검 한자루. 프란 프리텐. 카르멘 가문의 저택에 온지 하루만에, 가주로부터 검을 하사받는 영광을 얻다. ……본인은 그다지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프란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에게 건넨 이 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검이 왜 피로 물들어 있는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5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1) 가네트(uznian) 03-11-24 :: :: 15522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 하루 종일 가주의 스케줄이 이리 저리 질질 끌려다녔던 프란은 정말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돌아다니고 나니 신기하게 열이 가라앉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하루 푹 쉬고 난 것처럼,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후아∼." 프란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직행했다. 몸을 씻는 것은 물낭비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그녀다운 태도였다. 그녀는 땀냄새와 노린내를 머금은 발냄새를 동시에 폴폴 풍기면서 자리에 들어누웠다. "……음." 잠시 누워서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던 프란은 저 멀리 던져놓았던 검을 들고와 올려다보았다. 저 쪽 탁자 위에는 오늘 아침 뮤가 끓여주었던 차갑게 식은 스튜가 있었다.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뮤가 고마워서 프란은 오늘 아침 뮤를 향해 밝게 미소를 지어줬었다. 그 바람에 뮤가 얼굴이 붉어져서 '어머, 나 몰라∼ 프란도 나 좋아 하나봐∼'같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식어버린 스튜를 한 번 슥하고 훑어본 후 다시 한 번 웃었다. 왠지 가슴이 훈훈해진 탓이었다. 그곳에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은빛의 검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걸 왜 나한테 준 거지?"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 검이 내뿜는 매력에 그대로 감전되어 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한 눈에 척봐도 명검임이 틀림없는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준 그 가주라는 사람의 심리상태가 말이다. 한참 고민하며 끙끙대던 프란은 어느 순간 헤죽 웃었다. "한 번 휘둘러 봐도 될까?" 그 말과 함께 프란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가로 갔다. 창가에서 내려다보니 카르멘 가의 저택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넓게, 끝도 없이 펼쳐진 카르멘 가의 정원에는 경비견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직 몇몇의 보초병도 서 있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 프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정도 달빛만 있다면 나가서 검을 휘둘러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한 번 결심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행하는 것이 프란 프리텐의 무서운 점이다. 프란은 검을 든 채로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검을 흔들어 보는거야∼ 캬아∼" 생각만해도 짜릿한지 프란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 하지만, 검을 들고 방에서 나오자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젠장할……. 더럽게 넓네. 대체 어디가 어디야?"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였다. 그렇다. 프란은 방향치였다. 그것도 지독한. "……빌어먹을." 물론 이 곳은 방향치가 아니라도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곳이긴 했다. 너무나 넓고 너무나 커서 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번 돌아다닐 때마다 마치 던전 탐험을 하는 것 같아 모험심마저 자극할 정도였다. 깊은 밤, 이제 새벽을 맞이 하려하는 카르멘 가의 저택은 어두웠다. 복도는 한적했고 간간히 불이 타오르는 횃불만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프란은 검을 든 채로 계속 앞으로 나갔지만 도저히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미치겠군." 프란은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한참을 헤메이던 프란의 이마에는 점차 가느다란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프란은 벽을 걷어차며 한동안 말없는 난동을 피우다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발광을 동반해 약 2시간 정도를 헤매었을까. 프란은 허옇게 질린 낫빛으로 비틀비틀 거리며 아직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밤이 되니 아무것도 안 보여…… 가주만 따라다니니 뭘 알아야지……." 오늘 밤이 가기 전에 검을 휘둘러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프란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근데 내 방은 어디야, 대체!" 그 방이 그 방 같고, 또 그 방이 그 방 같았다. "제길!! 대체 이 저택 지은 놈이 누구야!! 뭐가 이렇게 넓어?"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프란은 다시 신경질을 부렸다. 손 끝에 닿는 검의 짜릿한 감촉에 미칠 것 같은데, 이걸 마음껏 휘둘러 볼 수도 없다니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실, 프란이 자신의 방을 한밤중에 나올 때마다 이러한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란이 이 저택에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딱 네 군데 밖에 없었다. 가주의 방, 주방, 마린의 방, 그리고 자신의 방. 그런 그녀가 어떻게 저택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 것이며, 2시간 동안 헤맨 후에 자신의 방을 찾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절대로 무리였다. 그것도 방향치인 그녀에게. 프란은 자신이 한심스러워져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돌이나 떨어뜨리면서 올 걸." 정말이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프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왠지 모르게 오싹한 한기가 도는 복도를 계속 걸었다. 복도가 워낙 넓고 커서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기묘한 음영이 맴도는 그 복도는 음산했다. 프란은 검을 한 번 쉭, 하고 흔들며 씩하고 웃었다. "귀신 같은 거라도 나오려나?" 프란은 그렇게 뱉어놓고는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일단 끝도 없이 헤매다보면 어떻게든 길이 나올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건 아니었다. 그냥 걸을 뿐이었다. 복도 한 끝에 얌전히 처박혀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테니. "휘유∼." 걷고 있던 프란은 은빛의 검을 가볍게 세로로 그어보았다. 슁, 하고 들어올려지는 파공음에 프란은 입술을 올렸다. "정말 멋진 검인데. 목을 베면 그대로 베이겠어." 이런 검을 준 가주의 마음이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설마 이런 걸로 누굴 죽이고 와라, 이런 걸 시키는 건 아니겠지?" 프란은 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팔을 벅벅 긁었다. 그리고, 그 놈이라면 그 정도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프란은 이번에는 닭살이 아니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설마 그런 일이야 시키겠어." 억지로, 그래도 가주란 놈의 인간성을 한가닥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면서 프란은 코너를 돌았다. 달그락. 그런데 막 그녀가 동그랗게 말려진 코너를 돈 그 순간. 놀랍게도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미한 움직임조차 없던 이 복도 한 가운데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프란은 갑작스럽게 적막을 깨뜨린 그 소리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을 바짝 움켜쥔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란은 더욱더 가슴이 세게 뜀을 느꼈다. 그녀는 검 끝을 꽉 부여잡았다. '도둑인가? 아, 아님 호, 혹시 정말 귀신?' 그 어떤 존재의 자취도 찾을 수 없는 썰렁한 복도 한 가운데에서 들리는 스산한 소리에 프란은 침울 꿀떡 삼켰다. 조금씩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검을 쥔 두 손에 땀이 베어 나왔다. '도, 도둑이라면 내가 알기 전에 누군가가 잡았을텐데……. 여긴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놈들 투성이인데가 그 가주놈은 괴물같은 검을 쓰고……. 무엇보다 도둑도 생각이 있는데 이런 곳으로 기어들어오진 않겠지.' 어찌됐든 프란은 잔뜩 긴장한 채로 발걸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프란은 다시 침을 삼켰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몸을 움직이고 있던 프란은 어느 순간 움찔하고 다리를 멈췄다. 달그락. 달그락. 더욱 심하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프란은 소리가 커진 곳에서 발을 멈췄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프란의 귓가를 자극하고 있다. "……우걱우걱…… 쩝쩝……."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사위를 가득히 매운다. 프란은 소리가 들린 곳 앞에 멈춰선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방을 한 번 쉬익 살펴보니 그래도 꽤 낯익은 장소였다. "여기 주방 아냐?" 확실히, 주방이다. 프란은 왠지 허탈함과 어이없음을 느끼면서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딛었다. 부들거리는 손 끝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 그 순간, 프란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 한 밤의 주방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비록 달이 자신의 빛을 뿜어 주고는 있다지만, 주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그 어두운 분위기 한 가운데에서, 오늘 먹다 남은 음식이 잔뜩 쌓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의 양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음이 분명한 동작이었다. "하." 프란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한밤중에 부엌을 찾은 누군가가 음식을 먹는 소리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프란의 그 나즉한 웃음소리에 한참 게걸스럽게 뭔가를 먹어 치우고 있던 그림자가 프란의 기척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흠칫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그 그림자. "……." 그 자의 얼굴이 프란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가벼운 실소를 머금고 있던 프란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어두운 주방 한 가운데에서, 케잌을 입가에 가득 묻힌 채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프란은 입을 떡 벌렸다. "가, 가, 가주…… 님?" 정신 없이 무엇인가를 먹고 있던 그 자는 프란이 자신을 '가주' 라고 부르자 조금 놀란 듯한 눈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를 보고 있던 프란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숨까지 멈추는 듯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 싸늘하고 냉정하고 차갑고, 하여튼 뭐라고 설명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도도했던 가주가 한 밤중에 부엌으로 튀어나와 저렇게 뭔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는 것이. 프란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가주…… 님?" 프란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케잌을 먹고 있던 자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했다. 그는 잠시 프란이 선 곳을 빤히 보았다. 프란은 그 자의 얼굴을 보려 애쓰며 말했다. "혹시 가주님이십니까?" "네 눈엔 내가 가주로 보이냐? 이거 영광인데?" 프란의 거듭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제서야 튀어나왔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던 그 자가 살짝 웃으며 프란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오며 한 말이었다. 프란은 조금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환하게 웃는 그 웃음은 매우 눈부셨지만, 불행히도 그의 얼굴 옆에 붙어있던 빵 조각이 그의 핸섬한 웃음을 망쳐놓았다. 프란은 눈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열심히 앞을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를 들여다보던 프란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가주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봐도 한참 잘못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넌 누구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프란이 기억하는 가주의 머리카락은 보랏빛이었고, 눈은 은은한 은색이 맴도는 신비한 은빛이었다. 조각품같이 섬세한 얼굴 선과 성깔 있게 생긴 눈매가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한 것이 가주의 인상이라면. 눈앞에서 지금도 케잌을 집어 삼키고 있는 이 사람은 그게 아니었다. 왜 처음에 가주다, 라고 생각한 것이 의심이 갈 정도로 이 사람은 가주와 달랐다. 일단, 머리색깔부터. 그의 귓가에서 가볍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보랏빛이 아니라 밝은 은빛이었다. 가주의 피부도 고왔지만 이 소년 역시 피부 하나만큼은 백옥에 견주어도 좋을 만큼 고왔다. 다만, 가주의 피부가 투명한 얼음빛이었다면 이 소년의 피부는 조금 탄 갈색이었다. 그리고 눈동자. 초록색이었다. 이른 새벽 이슬이 영롱하게 맺힌 풀잎 빛깔의 눈동자, 신비로운 느낌에 초점이 흐릿해 보이는 눈동자를 소년은 가지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흰빛의 옷을 걸친 그 소년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워 보였다. 마치…… 요정 같다는 느낌? 지금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케잌만 빼고 본다면, 전반적으로 신비로워보이는 이미지였다. 프란은 그 소년을 바라보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렇게 모든 것이 가주와 틀린데도, 어째서 가주와 닮았다고 느꼈을까. 하지만 한참동안 그를 다시 바라보던 프란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날카로운 눈매와 전체적인 얼굴선. 피부나 눈색깔 같은 것만 제외한다면, 가주와 이 소년은 쌍둥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충 형제라고 생각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지?" 프란은 입가에 묻은 크림을 어린애처럼 핥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그의 정체는 모르니, 자신이 먼저 굽힐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주와 닮은 것을 보니 카르멘 가의 핏줄을 이은 자라고 프란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 소년은 손가락을 자신의 가슴 부분에 갖다대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야 놀랍군. 너, 나를 모른단 말이냐? 이 저택에 살면서도?" 뭔가 상당히 기가막히면서 억울하다는 어조였다. 프란은 그런 그의 태도에 약간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당신을 알고 있어야 하지? 당신이 이마에 나는 누구다, 라고 써 갖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소년은 프란의 말에 약간 당혹스러운 눈을 했다. 그는 여전히 케잌을 핥으면서 천천히 프란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넓은 주방 쪽에서 약간의 빛이 들어왔다. 시리도록 하얀 달빛이 소년의 얼굴 위로 부어졌다. 소년은 달빛을 받고 선 채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야? 너, 하인이야?" 그제서야 달빛 한 가운데에서 돋보이며 들어난 프란의 유니포믈 본 소년은 조금 놀랍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그 반응에 기분이 나빠진 프란이 말했다. "그런데?" 자신이 하인이라고 무시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종류의 뜻으로 물어본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라니? 하인이면서 너 정말 날 모르는거냐?" "몰라!" 프란의 단호한 대답에 소년의 얼굴에 가느다란 잔주름이 생겼다. "……이거, 마린한테 다시 교육 좀 시키라고 해야겠군. 요즘 신참은 내 얼굴도 모른다 이거지?" 소년은 다시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을 들어 프란의 볼을 몇 번 두들겼다. 프란은 어이가 없어서 그런 소년을 빤히 보다가 손목을 휙하고 낚아챘다. 프란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어디에다 손을 대는 거냐." 소년은 피식 웃었다. 프란의 눈을 빤히 보고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내리더니 프란을 향해 방긋 웃었다. "통성명이라도 할까, 귀여운 하인씨? 내 이름은 시온이라고 하는데." "내 이름을 가르켜 줘야할 정당한 이유 3가지만 댄다면 얘기하도록 하지." 프란은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기 싫어 이렇게 말했지만, 소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첫째, 나도 말해줬다. 둘째, 내가 궁금해하고 있다. 셋째, 이름을 얘기하지 않으면 내 이름만 들은 것이 되니 넌 비겁자가 된다. 어때?" "……." '이놈은 이럴 때를 대비한 대답이라도 외우고 다니는 건가?' 프란은 어이가 없었다. 검 연습을 하려고 방에서 빠져 나왔다고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 들린 주방에서 이런 황당한 놈을 만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프란 프리텐." 프란이 떫은 어조로 자신을 소개하자 소년이 씨익 웃었다. 한참 프란을 훑어보던 소년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놀란 눈을 하더니 프란의 손을 휙하고 낚아챘다. 그 바람에 검을 들고 있던 오른손이 소년의 손에 들어갔다. 막 검을 빼앗기기 직전일 때, 프란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소년의 목 언저리에 검을 들이대며 말했다. "검사에게 검은 생명이다. 내 검을 뺏으려 한다면, 베겠다." 프란의 태도에 소년은 잠시 입을 헤, 하고 벌렸다. 프란의 눈을 한참 보고 있던 소년은 프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알았어. 좀 아는 검이라서 그랬을 뿐이야, 뺏으려던 의도는 없었어." 그렇게 말한 소년은 휫파람을 휙∼ 하고 불었다. "이거, 카르멘 가주님의 검이잖아. 근데, 이걸 어째서 네가 들고 있는 거지?" "……?" '이 놈이 어째서 그런걸 알고 있는거지?' 프란이 눈을 치켜 뜨는데, 소년은 흥미가 동한 듯 살짝 웃어보였다. "……흐응, 이걸 줬다는 건…… 흐응, 그렇단 말이지?" '뭐가.' 혼자서만 말하고 혼자서만 이해하는 눈앞의 소녀늘 보며 프란은 뭐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소년은 검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다시 프란을 향해 미소지었다. 한참 프란을 바라보던 소년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 갑작스러운 부름에 검을 다시 꽉 쥐며 프란이 그를 보았다. "가슴은 좀 더 졸라매는게 좋아." "……." 프란은 순간 너무나 당황해서 당황의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소년은 그런 프란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게다가 엉덩이가 너무 표시가 많이 난다구. 위에 조금 더 긴 것을 입어서 가리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다니면 '나 여자야.'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알겠어?" "……." 프란은 벙찐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프란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 집안 사람들은 무슨 투신술이라도 연구한단 말인가. 저번에는 그 마린이란 여자가 단번에 프란이 여자라는 것을 간파했었다. 그런데, 이 소년도 또! "아아, 그런 표정 짓지마." 소년은 샥하고 웃었다. 순수하고 밝은 표정이라, 지금처럼 황당한 순간만 아니었다면 프란도 따라 웃었을지 모른다. "여자한테는 여자특유의 냄새가 나거든. 넌 좀 미약하지만, 나긴 나지." 소년은 프란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보냈다. "프란 프리텐양."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6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2) 가네트(uznian) 03-11-24 :: :: 11924 "프란 프리텐양." 그렇게 말하면서 시온이 입술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프란은 아무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이 귓가에서 살짝 흘러내렸다. 프란의 침묵을 은근히 지키고 있던 소년, 시온의 손이 살그머니 올라왔다. 시온의 손이 막 프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려 한 바로 그 순간, 프란의 오른손이 빛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시온은 자신의 손목이 빛같이 움직인 프란의 손아귀 힘에 의해 의해 단 번에 비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욱!" 단숨에 손목을 낚아채인 시온은 인상을 확 쓰며 프란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려 애썼다. "이런 젠장! 아프잖아! 이거 놔!"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서 그 손을 빼내려 바둥바둥거려도 프란의 손에 잡힌 그의 손목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프란의 손은 꽉 잡은 그의 손목을 놓치 않고 있었다. 프란의 눈은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들키지 않아! 미쳤어? 들키지 않아! 난 죽지 않아!' 이 소년에게 진실을 들키면 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프란은 생각했다. 가주에게 이야기가 흘러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틀림없이 문책을 받을 것이다. 그 싸늘한 눈으로 말하겠지. '네가 감히 나를 기만해?' ……보지 않아도 빤하게 환상이 되어 가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시온의 손목을 낚아챈 그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온의 안색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시온은 검을 단련한 사람은 아닌 듯, 꽤나 여린 손목을 갖고 있었다. 너무나 쉽게 꺾여진 그의 손은 프란의 팔 힘에 의해 오른쪽으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프란이 나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손이 잡힌 시온의 입에서는 악, 하는 비명소리가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자신의 손목을 꽉 눌러 쥐고 있는 프란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서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사실 프란은 검을 다루는 다른 이들에 비해 힘이 약한 것이지만, 일단 검이라는 것을 다루는만큼 일반인보다는 완력이 센 편이었다. 상대가 검을 잡지 않은 자라면 프란의 손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 불가능 했다. 게다가 프란은 지금 온 힘을 다해 소년의 손목을 비틀고 있었다. 시온의 인상이 엉망으로 찌푸려지는 가운데 프란의 입술이 가만히 열렸다. "똑바로 봐라, 난 남자다." 프란이 자신있는 목소리로 확정적으로 말했다. "거짓말." 그리고 자신있게 확정적으로 들려오는 대답. 딱 잘라서 나오는 그 말에, 프란은 어이가 없어졌다. 본인이 남자라는데 자신의 알몸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남자라고 하잖아, 이 자식아! 속고만 살았냐? 내가 아무리 잘 생겼어도 난 남자란 말이다, 이 자식아! 네녀석 눈깔은 해태 눈깔이냐? 눈 있으면 똑바로 치켜 뜨고 보란 말이다!" 결국 화가 난 프란은 평소의 습관대로 말을 막 해버리고 말았다. 프란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막말에 소년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여전히 손목이 비틀린 채라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머문다. "거짓말. 여자잖아?" "……남자다." 프란은 거칠게 말했다. 시온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거짓말하지마."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프란이 버럭 고함을 치자, 시온이 그 틈을 노려 손목을 휙하고 빼냈다.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보던 시온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헉…… 손가락 자국이 시퍼렇게 났군. 이봐, 여자라면 좀 조신하게 행동을 하란 말야!" "……." 프란은 하도 어이가 없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온을 노려보았다. 그런 프란의 눈을 보고 있던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화내지마, 장난 한 번 쳐봤어. 그렇게 발끈 할 줄은 몰랐는걸?" "……." 프란은 이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프란이 입술을 크게 벌리는데, 시온이 살짝 웃었다. "장난 좀 친 걸 갖고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다니, 놀랐는걸? 평소에 외모에 콤플렉스라도 있었던거야?" 프란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뭐야!!! 그럼 지금 날 갖고 장난쳤단 말이냐!!" "하하하하핫……." 시온은 멋쩍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러나, 프란은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은 거다. 그저 장난이었더거다. 들키지 않은 거다. 장난이었던거다……. 프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런 프란을 바라보고 있던 시온이 슬쩍 웃었다. "하핫. 난 이만 가봐야겠어, 프란. 지금 가지 않으면 누군가가 화를 낼 것 같거든? 가까운 시일내에 볼 날이 있겠지." 시온은 살짝 웃음을 지어준 후 프란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멍한 눈으로 그런 시온을 바라보는데, 시온은 그 이상의 행동 없이 주방 바깥 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 시온의 옷자락은 밤의 여신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섰던 프란은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 멍청하게 서 있던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시온이 사라진 주방 바깥 쪽을 보고 있던 프란은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 이거야 원…… 나, 나…… 혹시 귀신 본 거 아냐?" 프란은 자신의 몸이 많이 허해졌나, 라는 생각마저 해버렸다. 그 정도로 시온과의 만남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 "지금 아일린 가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가주님. 가주님이 아일린 본가를 떠난 지 벌써 1년이나 되었습니다. 후우. 최근엔 고모님 되시는 이진느님이 숫제 대놓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들고 있습니다. 한 번 두 번이면 그것도 보고 넘겨줄 수 있습니다만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가주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가주 앞에는 갈빛 머리카락을 짧게 컷트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진지한 얼굴로 가주에게 묵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주는 무표정한 입가에 차분한 분노를 담고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진느가 아일린 가의 주인 행세를 한다라……. 후후, 내가 없는 사이 아일린 가를 먹어 보겠다 이건가?" 가주의 냉소적인 말에 그의 앞에 있던 남자는 고개를 바짝 숙이며 대답했다.' "……가주님. 가주님이 계시지 않은 아일린 가는 너무 위험합니다. 이런 말씀은 죄송합니다만, 지금이라도 카르멘 가를 잠시 버려 두고 아일린 가로 가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일린 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다시 카르멘 가로 돌아오셔도 늦지는 않을……." "안 돼." 가주는 말을 딱 자른 후 남자를 보았다. "난 지금 카르멘가를 버리고 갈 입장이 되지 못해. 너도 알고 있지 않는가? 여긴 헤이튼이 있단 말이다. 헤이튼은 결코 만만한 작자가 아니다. 지금이야 내 얼굴을 보며 웃기나 하는 것이 전부지만……. 언제까지 그런 얼굴을 할 것 같은가? 나는 그 놈의 독사 같은 면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내 신경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지만, 그 놈의 행동은 뻔하다." 가주가 인상을 그으며 한 말에 가주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다. 그는 눈앞의 소년의 차분하다 못해 냉정한 얼굴을 보며 심장이 뛰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언제나 이 소년 앞에만 오면 심장이 방망이질 친다. 분명 자신은 남색에 취미가 없으니 이상한 마음이 동해 심장이 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뛴다. 이것은 공포감인가, 동경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충성심이 너무 과도해서 심장이 견디질 못하는 것일까. "가주님, 그럼 아일린가는……." 남자의 자욱한 말투에 가주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조만 간에 무슨 수를 내야겠군. 좋다. 한 달 후에는 아일린 가를 찾겠다." 그는 미간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부르르 떨리는 손끝이 머리에 닿은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가주님! 역시! 아일린 가에 머물고 있는 수하들 모두 기뻐할 겁니다! 모두들 가주님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특히 비켈린과 제 수하의 룬 기사단은 말입니다!" 남자의 말에 가주는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카르멘 가도 위험하니 지금 당장은 갈 수 없겠지만 조만간 빨리 돌아가도록 하겠다. 걱정말고 돌아가 내가 없는 동안 아일린 가를 지키고 있어라. 배신 따위는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룬." 가주의 말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룬은 침을 꿀떡 삼켰다. 배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을 배신한다니. 배에 칼을 꽂고 자결을 하면 했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소년을 버리는 일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은 절대로 이 소년의 편이어야 했다. 12년 전, 이 소년이 아무런 표정 없이 아일린 가의 감옥에서 도망치던 한 남자를 베어 넘기는 모습을 보았던 그 날부터. 일곱 살의 소년이 잔인하게 죄인을 죽이는 모습을 본 그 순간부터, 남자는 가주에게 매여버렸다. "배, 배신이라니…… 저를 믿으십시오, 가주님!! 저는 죽어도 가주님을 따릅니다! 가주님 외의 주인은 제게 필요 없습니다." 그가 바짝 땅에 엎드리며 한 말에 가주는 입술에 씁쓸한 웃음을 매달았다. 가주는 남자가 보지 못하도록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조금 힘들어진다. 19살, 이렇게나 어린 나이로 대륙 최고의 가문을 두 개나 어깨에 매달고 있는 자신의 직책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말할 수도 없이 무거운 족쇄가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이 자리. 너무나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를 누르고 또 눌러,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의 온 몸에서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 같은 것들. 권위에는 힘이 필요하고, 힘을 만들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했다. 잔인해져야만하고 차가워져야만 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그것이, 성인(成人)이 되어서도 떳떳하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가주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나는 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지금은 카르멘 가에서도, 아일린 가에서도 내 말을 무시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자가 있는 모양이지만……." 가주의 입술이 스산하게 들어올려졌다.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면 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가주의 말에 남자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고 얼른 고개를 떨궜다. 언제나 할 말이 없게 만드는 19세의 가주. 아일린 가문이라는 상업의 대부를, 카르멘 가문이라는 검의 가문을. 그 두 가문 모두를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이 어린 소년에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소년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이 분의 나이가 어리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20세만 되셔서 완벽한 성인으로서 [시험]만 치루실 수 있으셨어도……. 그랬기만 한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자들은 나타나지도 않았을 텐데…….' 가주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 두 가문을 모두 책임지는 것은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가주의 두 집안, 즉 아일린 가문과 카르멘 가문에서는 끝도 없이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가문의 주인을 뒤엎으려 하는 움직임이. 완벽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고도 남는 가주이지만, 그래도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두 가문을 빈틈없이 통제한다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어린 나이는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그는 일 년 중 절반은 카르멘 가에서, 나머지 반은 아일린 가에 보내면서 자신에게 반(反)하는 세력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카르멘 가에서 1년이란 시간을 소요하면서 아일린 가문에서 심각한 문제가 빚어졌던 것이다. '이 분만큼 아일린 가문에 잘 어울리는 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누구라도, 설사 피를 나눈 자라해도 거침없이 베어버릴 수 있는 이 분의 이 냉철함은 그야말로 상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벨 수 있는 이 분의 냉혈함이야말로!' 남자는 가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를 마시고 있는 그의 얼굴은 차분했다. '아아, 하지만 이 분 만큼 카르멘 가문에 잘 어울리는 분은 또 없으시다! 16살에 이미 전대 가주님이 서른이 넘어서 이룬 경지까지 도달했다고 하는 분이 아니신가.' 한참 차를 마시고 있던 가주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가주를 보았다. 여태껏 무슨 말을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던 가주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가주의 옆얼굴로는 미세한 선이 가 있었다.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 얼굴이기도 했고, 뭔가 상당한 불만이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가주는 그런 얼굴을 한 채로 가만히 오른 손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주의 말에 남자는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가주가 지칭한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질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가주가 마시던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의 눈을 마주보자 그는 가주가 뭇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시온……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자의 말에 가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주의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남자는 후, 하는 한숨과 함께 말을 했다. "예, 어제 오신 것으로 압니다." 남자의 말에 가주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특별한 볼 일 있어서 온 것 같던가?" 가주의 질문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가주는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가주님. 식사입니다." 조금 텁텁한 목소리가 문 바깥에서 들려온 것은. 프란의 목소리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7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3) 가네트(uznian) 03-11-24 :: :: 15953 "가주님, 식사입니다." 언제나 씩씩한, 뭐라고 뭐라고 협박을 하면 처음에는 기가 죽지만 결국 팔팔해지는 한 소년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온다. 가주는 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가주님……?" 갑자기 가주가 웃음을 짓자 놀란 남자가 가주를 불렀다. 저 어린 소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맹세한 지 12년째가 되는 거였지만 저런 식으로나마 웃는 얼굴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입술을 냉소적으로 들어올리면서 웃어 보이거나 차갑기 그지없는 미소만을 띄는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기에 남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들어와라." 가주는 그런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밖을 향해 차갑게 말해놓고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만 나가보도록." 남자는 가주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선 후 가주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온님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주님. 지금은 그 누구도 믿으셔서는 안될 때입니다." 가주는 남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더더욱 미간을 좁혔다. "……알고 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인사를 하곤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그가 막 문을 열려 하는 그 순간. 쾅!!! "……." 문을 열려 했던 그의 얼굴이 커다란 문에 찍혔다. 그가 문을 열려 한 바로 그 순간에 문밖에 서 있던 자가 문을 열어 젖혔기 때문이다. 남자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미간을 만졌다. 단단한 파리페인(강도와 경도가 오르하르콘 다음으로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금속. 불에 타지 않고, 쉽게 부서지지도 않는다.)과 부딪힌 그의 이마에는 처절하리만치 붉은 액체가 줄줄줄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멍한 눈으로 터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익!" 어제 만났던 그 이상한 은발의 소년 때문에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이리뒤척 저리뒤척을 반복하며 새벽을 까맣게 새어버리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무려 3개나 되는 푸대의 감자를 살인적인 솜씨로 깎아야만 했던 프란은 크레인을 열고 가주의 방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기겁을 하고 있었다. 가주의 그 들어오라는 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었는데, 어떤 남자가 자시니 연 문에 정통으로 코를 부딪히고 넘어졌으니 기겁을 할 만 했다. 게다가……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프란은 넋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문과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 아하하……." 남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이 황당한 범인(자신의 이마에 상처를 낸 범인)을 보면서 잡아 찢어 죽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이고, 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크레인을 끌고 들어온 소년을 노려 보았다. 소년은 오렌지색 눈동자에 금색 머리카락을 하고, 조금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남자는 잠시 소년, 프란을 노려보았다. "……아하하핫, 많이 아픈가요? 저기……. 미안하지만 난 돈이 없어서 보상비는 못 주겠는데……." 프란은 땀을 삐질 흘리며 남자를 향해 변명하듯 말했다. 문을 벌컥 열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들이와 부딪힌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프란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프란의 사과 아닌 사과에 잔뜩 화가난 남자는 프란에게 뭐라고 화를 내려했다. 그러나. 소리를 치려던 남자는 그 순간, 자신의 뒤에 가주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속에 있던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절대로, 가주가 있는 곳에서 소리를 높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프란을 향해 욕지거리를 한 후 가주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가주는 남자가 문에 머리를 박은 순간부터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보고 있었는데, 남자는 그런 가주의 얼굴을 보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그가 날 듯이 문 밖으로 뛰어 나가자, 프란은 머쓱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크레인을 끌고 가주 쪽으로 다가왔다. 가주는 자신 쪽으로 크레인을 옮기는 프란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 시선에 프란은 움찔했다. '이 자식이 오늘은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남의 얼굴을 보는 거지?' 이제 가주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걱정이 되는 프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주는 프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 농밀해서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몸을 뒤로 가져갔다. "왜……. 그러시는지요?" 가주가 눈만 들이대도 무서워지는 프란이었다. 프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주를 바라보며 버벅댔다. 가주의 눈매가 매서워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또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검은 어찌했나." 그리고 다음 순간, 가주의 입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노호성이 떨어졌다. 프란은 그런 가주를 보며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한참만에 그의 뜻을 이해하고는 슬그머니 물었다. "저…… 검이라 하시면…… 어제 가주님이 제게 주신 그 은색 검을 말하는 겁니까?" '검이라고 하면 네가 나한테 준 그 피 덕지덕지 묻어 있던 검을 말하는 거냐?'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프란이 물었다. 가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프란을 노려보았다. 가주의 눈을 보면 프란은 숨이 턱 멈추려는 것을 간신히 이겨내며 말했다. "……저…… 가주님. 저는 주방일을 하기 때문에 검을 들고 다니기 곤란합니다. 그리고 가주님이 제게 검을 들고 다니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 "지금 내 앞에서 말대답을 하는 건가?" 가주는 프란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날카롭게 말했다. "……." '그래, 네 놈 잘났다! 잘났다고, 잘났어! 그렇게 잘난 네가 어디 검 차고 부엌에 들어가서 감자 한 번 깎아보지 그러냐? 엉?! 너는 피가 덕지덕지 묻었던 그 검으로 감자라도 깎으라고 말할 셈이냐? 앙!' 프란은 정말이지 자신의 참을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싶었던 말 같은 것은 참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참을 일 같은 것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녀다. 자신을 놀려먹는 어리석은 녀석들 따위는 검 한 번만 뽑았다 놓으면 잠잠해졌고, 멋도 모르고 자신을 따라다녔던 동기들에게는 독설만 한 번 퍼부어 주면 되었다. 수련 기사단의 유일한 여자랍시고 찝적대는 놈들은 '나하고 검 대결 해서 내가 이기면 포기하는거야.' 라는 말과 함께 깨끗이 떼어 낼 수가 있었다. 언제나 자신 있는 태도로, 남자 못지 않게 당당하게 살아왔다. 입에는 늘 욕을 매달고 살았던 그녀였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내일부턴 검을 들고 다니겠습니다." "……." 가주는 그 이상 말이 없었고, 프란은 천천히 음식을 차려 놓기 시작했다. 프란이 죽도록 깎았던 감자로 만든 스튜와 감자로 장식한 화려한 퓨아가 나왔다. 가주는 아무 말 없이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곧 그 의미를 눈치채고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왜 나한테 음식을 먹이는 거지?' 언제 시간이 나면 마린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음식을 먹었고, 가주는 그런 프란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에? 에? 가, 가주님? 식사는요?" 프란이 외쳤으나 가주는 말을 듣지 않고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미쳐……. 기껏 차려온 사람도 생각해야 할 것 아냐." 프란은 투덜거리면서도 가주의 뒤를 쫓았다. ▷◀▷◀▷◀▷◀▷◀▷◀▷◀▷◀▷◀▷◀ 프란은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당황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커져 있었고, 입술은 떡 벌어져 있었다. 기괴하게 벌어진 오렌지색 눈동자에는 광기라도 넘쳐흐르는 듯 했다. 그녀의 입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곳에 침이라도 한 방울 흐른다면 정말 완벽한 [바보]의 형상이 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그 표정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로 앞을 보았다. "이야아아아아∼ 형님! 이거 반갑수?" "……오랜만이군." 프란은 경악으로 커진 눈동자로, 갑자기 달려와 가주의 어깨를 감싸안는 소년을 보고 있었다. 은색으로 날리는 길다란 머리카락, 진초록의 공허한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다. 가주의 어깨를 안은 채로 밝게 미소짓는 그 얼굴은……. 프란도 아는 얼굴. "별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정확히 석 달 만이라구요, 형님." 소년은 피식 웃으면서 가주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만발하게 피어있는 장미의 유혹적인 향기가 가득 피어오르는 저택에서, 소년은 방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은 어제 만나러 오려고 했는데……. 뭐, 형님이 바쁘다고 해서 만날 수가 없었다구요. 형님은 언제나 이 시간이면 여길 산책하시니……, 시간이 남아도는 내가 기다리고 있었죠." 프란은 멍청한 눈오르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소년을 보았다. 정말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주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년의 은빛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후에 소년이 가주의 어깨를 풀어주자 가주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가주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아일린 가에서 여기까지 왔다면 고생을 좀 했겠군, 시온." 그러자 소년이 환하게 웃었다. "별 말씀을, 형님." 프란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런 소년을 보고 있었다. '저, 저 자식은?' ▷◀▷◀▷◀▷◀▷◀▷◀▷◀▷◀▷◀▷◀ "어라?" 가주의 몸을 반갑다는 듯이 끌어안고 있던 시온은 어느 순간 팔을 스르르 풀곤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곧,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생겨났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웃음. 반드르,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입술 선이 옆으로 살짝 벌어진다, 촉촉한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진다. 시온은 저 멀리 서 있는 프란을 향해 가주가 보지 못하도록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 그 초인적인 느끼함에 프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벅벅 긁었다. 어두침침한 부엌이 아니라 반짝이는 햇살 가운데에 선 시온은 역시 가주와 조금 닮아 있었다. 지금 보니 키도 가주와 비슷했다. 가주가 조금 더 여성스러운 얼굴 선을 가졌다는 것,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 몸을 구성하고 있는 색이 다르다는 것만 빼면 비슷한 점이 꽤나 되었다. "아아, 형님. 시종이 또 바뀌었군요." 시온은 피식 웃으면서 가주를 향해 말했다. 가주는 그런 시온을 향해 말했다. "별로 기억해둘 필요는 없는 얼굴이다.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시종을 드는 녀석일 뿐이고 일주일 이내에 목이 잘릴지 어떨지도 모르는 시종이니까." 프란은 그 말에 울컥했지만, 그의 말 중에 틀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죽으라고 말한다면 죽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래도 가주의 말은 너무 신랄한 데가 있었다. 도무지 배려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프란은 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가주의 옆에 섰다. 시온은 그런 프란을 한 번 바라보다가 다시 가주를 향해 웃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이 동생한테 차도 한 잔 대접 안하십니까, 형님?" "……." 가주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가 갑자기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가 가주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프란이 살짝 뒤를 밟자, 갑자기 가주가 프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장미 정원 티 테이블에 있을 테니 뮤니아 차를 두 잔 내와라." "예? 지금요?" 프란은 잠시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가주의 눈꼬리가 매섭게 위로 올려졌다. "……." "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가주를 향해, [전 부엌에서 여기까지 나오는 길을 모를뿐더러, 장미 정원 티 테이블이 어딘지 모르는데요]라고 말할 정도로 프란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목이라도 덜컹 떨어지면 어쩐단 말인가. 더럽다 더럽다 하여도 그렇게 더러울 수 없는 성질을 가진 저 가주라는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프란은 결국 고개를 숙이면서 그러마하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이 어깨에 힘을 축 늘어뜨린 채로 저벅저벅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시온은 쿡, 하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훗, 꽤 재미있는 시종이군요. 형님 앞에서 가볍게나마 의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시종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보통은 형님 앞에서 벌벌 떨기만 하는데." 어제, 프란이 그 은빛의 검을 갖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시온을 알 수 있었다. 프란이 가주의 시종이라는 것을. 시온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프란의 뒷모습을 보았다. 프란은 모르는 듯 했지만, 그 은빛의 검은 엄청난 의미가 담긴 검이었다. 언제나 피가 마를 날이 없다고 해서, 종국엔 가주가 피를 닦는 것도 포기할 정도로 엄청난 혈향을 맡은 검. 은빛으로 빛나는 그 검은, 언제나 가주의 옆에 선 단 한 명의 사람에게 허락되는 상징. [실버 블레이드]는 가주가 언제나 들고 다니는 카르멘 가의 상징인 [루니아 블레이드]에 조금 못 미치는 검으로, 역대 가주들을 평생동안 모셔왔던 자에게만 내려졌던 검이었다. "형님." 장미 정원에 놓여진 흰색 티 테이블에 앉은 시온이 피식 웃으면서 가주를 불렀다. 가주는 의자에 앉은 채로 붉은 장미 정원 주위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려 시온을 보았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다 좀 미숙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저 녀석에게 실버 블레이드를 줘도 되는 겁니까?" 시온의 말에 가주는 미간을 좁혔다. "일을 잘 못한다면 바로 저 실버 블레이드로 목을 따 버리면 끝인거다." "……그러시겠죠." 시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보니 눈앞에 있는 이 가주는 역대 가주와는 좀 달랐다. 여태까지 가주들은 자신의 곁에 10년, 20년을 머문 시종에게 저 실버 블레이드를 [충성심의 대가]로 하사하곤 했었다. 하지만 현가주는 저 실버 블레이드를 무슨 시종 장난감 주듯이 툭툭 던져주고는 자신의 맘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때에는 자신이 내렸던 그 실버 블레이드로 목을 그어버렸다. 시온은 다시 한 번 쓰게 웃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소년. 시온 자신보다 겨우 3개월 일찍 태어난 이 소년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라는 이름을 너무 어린 나이에 맡았다. 하지만 얕보여선 안된다. 강박관념이 작용한다. 공포감을 심어줘야만 했다, 밑의 사람들에게. 그래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님, 내가 왜 왔는지 생각해봤수?" 시온이 피식 웃으면서 한 말에 가주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그는 샤악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 이제 그만 결혼하는 게 어때요? 내가 좋은 여자 소개시켜 줄까해서 여기까지 왔다, 이 말입니다. 아일린 가문과 교류하는 세일린 가문 알죠? 그 왜, 귀금속 공예를 하는 그 집안 말입니다. 그 집안의 여잔데, 꽤나 귀여워요. 형님만 아니라면 제가 먼저 꿀꺽할까 생각했지만, 역시 집안 좋은 여자를 건드리는건 꽤나 복잡하잖수?" "……." 가주는 말없이 시온을 보았다. "형님이 지금 나랑 같은 19살이라곤 해도, 형님은 나랑은 좀 다르잖아요? 나야, 여자 후리고 다니는 게 취미이고, 여자 만나는 게 유일한 낙이라곤 해도……." 시온은 씩 웃었다. "형님은 집안을 책임져야 하잖아요? 결혼 조금 빨리 해도 나쁠 것 없지. 아일린 가문에서도 형님 결혼하라고 난리라니까. 카르멘 가에서는 그런 말 없수?" "……." 가주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런 류의 질문은 참 싫어하는 가주였다. 그냥 아무 여자, 자신의 후계자를 낳아줄 여자 하나 구해서 애 둘을 낳아 하나는 아일린에, 하나는 카르멘의 가주로 확정짓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일을 실행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려만큼은 자신의 의지대로 맡고 싶었다. "……가주님. 차요." 그런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뜻밖에도 조금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와 함께 불쑥하고 내밀어진 찻잔이었다. 차를 가지로 간 것치고는 상당히 늦게 왔다고 생각하면서 가주는 차를 받아들였다. 가주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 곳을 찾아오느라고 프란이 얼마나 많은 장미 가시에 찔렸는지를. 프란은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갈았다. 시온은 생글 웃으면서 찻잔을 하나 건네받고 프란을 보며 다시 웃었다. 프란은 자신을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보내는 시온을 확 밟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이 곳에는 가주가 있었고 결국 그런 짓을 했다가는 무사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잘 마실게." 시온이 눈을 찡긋 해보였다. 그러자 가주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시온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남자다." 그 말과 동시에, 시온은 풋, 하고 마시던 차를 뿜어냈다. "에?" 프란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말에 의아해지는데, 가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녀석이 여자를 유혹할 때 쓰는 전형적인 웃음이 나오 길래 한 말일뿐이다." 가주는 그 말과 함께 가볍게 차를 들이켰다. 시온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가주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프란을 보았다. 곧, 시온은 풋, 하고 다시 한 번 웃어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뭐야……. 난 형님이 시켜서 남장한 줄 알았는데……. 형님 성격에 「여자는 불편하니 남장해. 그리고 들키면 넌 죽어」라고 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한게 아니었나? 하하, 이거 놀라운걸? 설마 형님은 모르는 건가? 어허? 그럴 수가? ……이렇게 분명하게 여자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시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프란과 가주가 알 리가 없었다. 프란은 얌전히 선 채로 가주와 시온의 앞에 있었지만 곧 다리에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30분이 지나자 프란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시온과 가주는 티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프란은 선 채로 가주의 옆에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다리가 아파!!! 다리가 아프단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검을 훈련하기에 몇 시간 정도 서 있는 다고 해서 부러질 연약한 다리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지루함에서 비롯된 고통은 생각 외로 심각했다. 프란이 온 몸을 베베 꼬고 있자 가주가 말했다. "바로 서." '이제 자세 갖고 트집 잡냐? 아예 말려 죽일 셈이냐?' 하지만 프란은 반감을 가지면서도 자세를 바로 잡고 있었다. 자신이 가주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힘겹게 자리를 잡고 선 채로 가주가 자리에 일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헤헤." 그런 프란을 향해 시온은 싱긋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18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4) 가네트(uznian) 03-11-24 :: :: 14863 ▷◀▷◀▷◀▷◀▷◀▷◀▷◀▷◀▷◀▷◀ 똑똑. 똑똑똑똑……. 나무와 사람의 손이 가볍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반갑지 않은 소리에 엄청난 서류 더미를 껴안은 채 끙끙대고 있던 마린은 이마 위로 신경줄을 하나 돋우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누군지 모르지만 당장에 꺼져! 이 초미녀님은 오늘 바쁘시니까! 혹시라도 내 상대를 하러 온 무지막지하게 잘생긴 남자라면 모르지만 아니라면 그냥 꺼져 줬으면 좋겠어." 발작적으로 외치면서도 손으로는 사인을 멈추지 않고 있던 마린은 그러나 다음 순간 아차, 싶은 기분이 들어서 몇가지 말을 덧붙였다. "……아아, 만약 방금 전에 노크하신게 가주님이시라면 앞의 말은 다 잊어주시고 그냥 들어오셔도 좋아요. 단, 제 목을 자르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말이예요." 혼자서 발악하듯 말하는 마린의 말을 문밖에서 고스란히 듣고 있던 프란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마린의 방 밖에서 말했다. "난 당신 상대를 하러 온 잘생긴 남자도 아니고 가주도 아니지만 지금은 꼭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들어갈 수 없을까?" 열심히 서류를 끌어안으면서 끙끙대던 마린은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튀기듯 일어섰다. 그녀는 반가운 미소를 입에 가득 머문 채로 문을 확 하고 열어 젖혔다. "어머어어어? 프라아아안∼∼? 오호호호호홋! 드디어 내 품에 안길 준비를 하고 온 거야?" 프란이 여자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작은 소녀를 놀리는 것에 취미를 들린 악덕 하인 담당 마린은 손가락으로 프란의 턱 끝을 훔치며 말했다. 프란은 그런 마린의 손을 턱하고 잡으며 말했다. "말해두는데, 난 당신 같은 늙은 여자하고 사귀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어." "뭐, 뭣이!! 내가 얼마나 팽팽한데! 이래 뵈도 남자가 줄을 섰다고!" "당신, 돈 많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말에 마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물론 돈이 많긴 많았다. 카르멘 가는 현 가주가 주인이 되면서부터 엄청난 재력을 소유할게 되었다 아일린 가문과 카르멘 가문은 하나나 마찬가지게 됐으니 아일린 가문의 그 엄청난 재산의 일부분이 카르멘 가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카르멘 가의 거의 모든 하인들과 납입품들을 점검하는 마린은 꽤나 짭짤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물론 많지." 마린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런 마린의 당당함에 쐐기를 박으며, 프란은 웃었다. "훗! 당신하고 사귀려고 줄 선 남자들은 물론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있다면 그 남자들은 전부 당신의 그 돈을 보고 오는 남자들이야." "……." 마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마린의 팔을 가볍게 밀고, 프란은 마린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맨 처음 케인과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방 안은 단촐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더기로 놓여져 있는 엄청난 서류더미만 아니라면 여성의 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방이었다. 마린은 방 안으로 들어선 프란을 퍽 감동 받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솔직히, 프란이 이런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마린이었다. 마린은 흐뭇한 표정으로 프란을 보았다. '이 녀석이 나한테 의지해준다면 좋을 텐데.' 대체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저 소녀가 좋은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 그것은 엄청난 재능이다. "후후, 아일린 가문으로 가면 인재로 등용될지도 모르겠군." 마린은 잘게 실소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마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마린의 방에 아무렇게나 앉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마린." "왜?" 마린은 다시 서류더미 앞에 앉았다. "……그 시온이란 놈은 어떤 놈인지 좀 가르켜 줘." 그 순간, 서류에 막 사인을 하려 했던 마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 시온? 시온 도련님이 여길 오셨단 말야?" 프란은 발작스러운 마린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으, 으응. 맞긴 맞는데…… 지금 들고 있는 그 펜으로 날 찌를 생각은 아니겠지?" 그제서야 마린은 자신의 팔을 보았다. 잉크가 가득 묻은 펜을 자신이 하늘 높이 쳐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린은 호호, 하는 어설픈 웃음과 함께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확실해? 은발에 녹색 눈을 가지신 그 분! 맞아?" "맞아." 마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프란을 보고 있다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온 도련님이라…… 하하, 이거…… 또 시녀들을 갖다 바쳐야겠군. ……아아, 그럴 필요는 없나. 뭐, 붙여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시는 분이니……." 프란은 마린의 그 말에 눈을 멀뚱히 뜨고 그녀를 보았다. 마린은 그런 프란을 향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무슨 말이지?"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다. 하지만 프란은 마린의 곤란한 표정을 보면서도 애써 그것을 캐물을 만큼 시간이 많지도 않았고 오늘 역시 가주를 따라다니면서 시달릴대로 시달린지라 조금 졸리기도 해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으니. "대체 그 놈 대체 누구야!! 가주한테 「형님」이라고 부르긴 부르던데, 친형제는 아니지?" "음? 왜 친형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 마린은 프란을 보며 재밌다는 눈을 했다. "만약 친형제라면 둘 중 하나가 카르멘, 나머지 하나가 아일린을 맡았을테니까. 괜히 가주 혼자서 두 집안 다 맡을 필요는 없겠지." 마린은 피식 웃었다. "제법 맞는 추리인걸? 맞아, 그 분은 가주님의 친동생은 아니야. 음……. 차분히 설명을 해볼까?" 마린은 훑어보고 있던 서류더미를 저 멀리로 밀어 버렸다. 내일까지 저 서류를 다 처리하지 못한다면 가주에게 뭐라고 한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밤을 새우면 어떻게든 다 할 수 있을거라고 자신을 위로해사면서 마린은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나 문제 낼까, 프란?" "뭔데?" 프란은 마린의 그 문제라는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린은 개구쟁이 어린애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주님의 부모님 중 어떤 분이 카르멘가의 주인일까?" "아버지." 당연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이 대답했다. 카르멘 가의 주인이라면 당연히 남자일거라고 생각한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땡! 정확히 틀렸어. 전대 카르멘 가의 가주는 현 가주님의 어머님이셨어." 마린의 대답은 프란의 생각이 완벽한 선입견에서 나왔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에?" 프란이 눈을 크게 뜨자 마린이 피식 웃었다. "전대 아일린 가문의 주인은 현 가주님의 아버지였고 말이야." 프란은 잠시 혼란해지는 정신을 느꼈지만, 여자도 검술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프란은 설명을 촉구하는 눈을 마린에게 보냈다. "전대 카르멘 가의 가주이자 가주님의 어머님되시는 분의 성함은 루이사 카르멘이야.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지. 카르멘 가에 대대로 물려지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분이셨어. 아, 가주님이 여자가 된다고 생각해보면 루이사님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지금 가주의 상태에서……. 그 가주가 여자인 모습만 상상해보면 된다. 뽀얀 피부와 긴 보라색 머리카락, 그리고 화려한 드레스로 몸을 치장한 여자……. 그 여자가 가주와 똑같이 생겼다……. "무진장 예뻤겠군." 성격이 더럽기 그지 없긴 해도, 얼굴 예쁜 거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프란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프란이 뱉어낸 말에 마린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그 루이사님께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성함은 헤이튼이야. 지금 이 저택에 머물고 계시는 분으로 가주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는 분이지." "헤이튼??" 헤이튼이라는 이름을 들은 프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헤이튼이라고 하면, 저번에 이 성에 들어왔을 때 케인에게 자신의 약혼자 아니냐고 물어봤던 그 얼빠진 중년의 사내가 아닌가. "응. 전대에 가주를 결정할 때, 루이사님과 헤이튼님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검으로 승부를 가리는데, 루이사님이 이기셨어. 정말 멋진 승부였지!" "헤에." 프란은 저도 모르게 낮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미모의 여가주라? 절로 가슴이 설레어 오는 프란이었다. "그리고, 아일린 가 쪽으로 가면……. 아일린 가의 전대 주인이자 현가주님의 아버님 되시는 분은 로웬 아일린이라는 분이 계시지, 물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음, 아일린 가에 대대로 물려지는 은은한 은빛의 눈동자가 무척 인상적이신 분이야. 가주님의 보라색 눈에 은은하게 은빛이 도는 것도 다 유전이지." "흐음." 가주의 아버지라면 그 로웬이라는 사람도 아주 핸섬했을거라고 멋대로 생각하면서 프란은 마린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이 로웬이라는 분에게는 누나가 한 분 계시는데, 이 분의 이름은 이진느야." 이진느……. 어딘지 모르게 발음이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 프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린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이진느님의 아드님이 바로 시온님이구." 그제서야 대충 이해가 되는 프란이다. 성질 더럽기 그지없는 가주의 어머니는 카르멘 가의 전대 가주였고, 그의 아버지는 아일린 가의 전대 가주였다. 가주의 아버지에게는 누나가 한 명 있고, 그 누나의 아들이 시온이다. 즉. "둘이 그럼 고종사촌간인거야?" "딩동! 아아아∼ 우리 프란은 참 똑똑하기도 하지!" 뮤가 본다면 '당장 떨어져, 아줌마!'라고 외칠 자세를 취하면서 마린이 프란에게 엉겨붙었다. 프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파묻은 채로 부비적거리자 프란이 그녀를 확 밀쳐냈다. 귓등까지 새빨개진 프란은 버럭 고함을 쳤다. "젠장할!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다신 당신하고 말 안 해!" "어머? 나하고 말 안하면 어떻게 살아갈 건데? 궁금한 게 있으면 누구한테 물을 거야?" "뮤한테 물으면 돼!!!" 프란은 발악하듯 외쳤다. "어머나∼. 뮤도 카르멘 가에 온 지는 2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에에∼ 과연 프란이 궁금한 걸 전부 가르켜 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 프란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아……. 그런데 시온님이 오셨다라……." 마린은 등을 뒤로 누이며 중얼거렸다. '그 분이 오셨다는 건…… 아일린 가에서 슬슬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가. 이거 또, 가주님이 조금 피곤해지시겠군. 하여튼 가주님 괴롭히는데는 뭐 있는 자식들이라니까." 마린은 프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마린은 프란을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시중 들다보니 가주님 성격은 어때?" "최악이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마린은 내심 웃음을 지었다. 여태까지 가주를 모시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물론, 초기에 가주를 모시게 됐던 몇몇 철모르는 어린 시녀들은 행복한 표정들을 하긴 했었다. '저렇게 아름답고 젊으신 분이 가주님이시라구요? 제가 저분을 모신다구요?' 라고 외치면서 상기된 볼을 마린에게 보여줬던 어린 시녀들. 혹시라도 저런 가주와 자신 사이에서 불꽃같은 로맨스가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헛된 기대를 가졌던 그 어리석은 시녀들. 어리석지만 아직 여리고, 그 여림 때문에 사랑스러웠던 그 어린 시녀들은 그러나 처음에 가졌던 행복감을 오래 간직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완전히 망가지고 부서졌고 언제나 눈물로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며 가주를 모시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마린에게 간청하곤 했었다. 그들은 도저히 가주특유의 그 존재감을 견뎌내지 못했고, 가주가 강요하는 검을 들 힘도 가지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가주의 그 싸늘한 눈초리를 너무나 공포스러워했다. '너무 무서워요, 마린님! 어제도…… 어제도 같이 시종 들던 레이가 죽었어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섭다구요! 그 분은…… 그 분은…… 피를 즐기시는 게 아닐까요? 마린님! 대답 좀 해주세요, 마린님!! 전 죽기 싫어요!!! 레키슈엔에는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13살짜리 남동생이 있다구요!! 마린님!!!!!' 마린은 과거가 생각나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가주의 손끝에서 죽은 이가 몇몇이었지? 라고 생각하면서 마린은 하나하나 손을 접어가기 시작했다. 칸, 수닌, 레사, 크샨, 리아, 미르, 로느안, 비비안, 솔린……. 한 손가락을 폈다가 접었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해도 끝나지가 않았다. 마린은 손을 내렸다. '줄잡아도 2년 안에 죽은 사람이 서른 명은 넘는군, 후우.' "하지만…… 그 분은 그 분 다름대로 좋으신 분이야, 프란." "어디가?" 정말 어디가 좋은 분이라는지 궁금해진 프란이 눈을 치켜뜨고 묻자 마린은 조금 민망해졌다. 마린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어디가 좋은지 말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프란을 보며 숨을 훅, 들어마시면서 대답했다. "얼굴이 잘 생기셨잖아!" "……." 프란은 말없이 마린의 팔을 때렸다. ▷◀▷◀▷◀▷◀▷◀▷◀▷◀▷◀▷◀▷◀ 카르멘 가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빠르게 흘러갔다. 가주의 시중을 들어주고, 미친 듯이 일을 하는 것으로만으로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간다. 처음에 벅차던 감자 세 포대는 이제 기본이 되었고, 지금은 다섯 푸대 까지 혼자서 다 깎을 만큼 예리한 부엌칼 휘두르는 솜씨를 자랑하게 되었다. 프란이 이 저택에 온 지 이 주일이 조금 넘었다. 물론, 그 짧은 기간동안 프란을 대하는 가주의 태도는 요만큼도 바뀌지 않았다. 변함 없이 자신의 아침식사를 프란에게 맛보게 한 후에야 식사를 했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자신의 옆에 서 있게 했으며 자세가 형편없다느니 똑바로 서라느니 검은 어디에 메라느니, 머리는 똑바로 자르고 다니라느니 하는 온갖 종류의 트집을 다 당했다. 프란은 모든 것을 다 참아줄 수 있었다. 가주는 원래 그런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가 줄 의향이 프란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쥔 인간이 뭘 하듯 자신은 아무런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가주가 아니었다. "프란. 오늘도 바쁜거냐? 아아∼ 너는 항상 형님 옆에 붙어다녀야 하지. 하지만 지금은 이른 새벽이니까 시간이 좀 있겠지?"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반갑지 않은 얼굴. 시온 아일린의 얼굴이다. "꺼져." 프란은 감자를 깎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는 자신이 앞을 가로막는 시온을 향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프란은 정말이지 이 소년이 달갑지가 않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왠지 자신의 앞에서 추근덕거리는 것이 영 수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추근덕거리는 것은 분명 자신을 꼬시는 행동이라는 것을 프란은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이 소년이 자신을 꼬시려고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을 유혹하려고 했던 머리 빈 남자들은 많았으니 말이다. 정작 문제는 자신은 지금 남장중이었다. 그리고, 저 녀석은 남자였다. "뭐야? 왜 그렇게 쌀쌀 맞은 건데?" "너 남색가냐?" 결국 참지 못한 프란이 차게 물었다. 그 질문에 시온의 얼굴 위로 당황함이 지나갔다. "오우∼. 그럴 리가∼. 이렇게 잘 생긴 얼굴로 내가 뭐하러 할 일 없이 같은 몸뚱아리 가진 남자 녀석을 좋아한단 말이야? 난 예쁘고 미끈한 여자가 좋단 말이야. 남자 따윈 정말 싫어. 뭐, 형님 정도로 예쁜 남자라면 조금은 생각해보겠지만." 맨 뒷말만 뺀다면 정상적인 남자의 말이었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치미는 짜증에, 왼쪽에 걸려있던 검 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싸한 은빛의 검이 시온의 목덜미에 겨누어졌다. 시온은 순간 조금 당황한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만약에 앞으로도 내 방 앞에 서 있는다거나 하면, 나는 네 놈이 남색가(男色佳)라고 이 집안 전체에 퍼뜨려 버릴 거다." "엑??" 시온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내자 프란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이 자식!! 그러니까 내 방 앞에 서 있지 말란 말이다!! 대체 왜 내 앞에서 얼쩡대는 거야!" 그렇게 외친 프란의 싸한 눈에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살짝 삼켰다. 번뜩이는 오렌지 눈동자는 매서웠다. 시온이 한 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프란은 시온에게 한 번 눈을 흘긴 후 검을 들고 총총총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한 편에 기대선 채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던 시온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뱉었다. "이거야 원……. 쿡쿡쿡쿡."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시온은 따뜻한 눈매로 프란의 뒷모습을 보았다. "뭐, 꽤나 곤란한 상대한테 반한 것 같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재밌군. 형님은 언제 알아차리실까? 쿡쿡쿡. 의외로 이런 쪽으로는 둔하시지, 형님은. 뭐, 들킨다 해도 죽이진 않겠지?" 시온은 피식 웃었다.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나름대로 임무를 띄고 이 집안에 온 주제에 여자 뒤만 쫓아다니다니 한심해, 한심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어머니지만, 그 집안 하나 꿰어 차 보겠다고 그렇게나 난린데 말이야……. 쿡쿡." 시온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후 어디론가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0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1) 가네트(uznian) 03-11-24 :: :: 10460 PART 6: 가주, 분노하다. "프란." 프란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앞에 뮤가 서 있었다. 뮤는 프란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프란. 잘 들어." 프란은 뮤의 앞 뒤 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보았다. 뮤는 진지한 얼굴로 그런 프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프란은 조금 덜컥해서 뮤를 뚫어지게 보았다. 혹시 자신이 남장여자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프란은 뮤의 입술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순간 튀어나온 뮤의 말은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시온님이 널 쫓아다닌다며?" "……." 프란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뮤의 눈이 너무나도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조심해, 프란." 프란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마자 뮤가 크게 외쳤다. 그런 뮤의 반응에 놀란 프란이 토끼눈을 했다. 뮤는 놀라는 프란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 "그 분은 여자 꼬시기에 명수야!!!" "에?" 갑작스러운 그 말에 프란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절대적으로 조심해야해! 저 분이 올 때마다, 카르멘 가의 시녀란 시녀는 모조리 뒤로 넘어갔었다구!! 저 분은 유들유들한 말솜씨로 여자를 꼬시는데…… 안 넘어간 여자가 없었어. 까딱하면 나도 넘어갈 뻔했지만, 난 프란을 생각하곤 간신히 참았다구."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분이 무슨 일로 널 쫓아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프란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도 몰라. 프란이 워낙 여자 같이 생겼으니까, 혹시 착각이라도 하고……." "그만." 프란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더 이상 듣는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녀가 듣는 것을 거절하자 뮤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난 기껏 걱정해준 건데……." 프란은 그 말에 어설프게 웃었다. 뮤는 실망한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 뮤가 귀여워보이는 자신이 이상한걸까. 프란은 살짝 웃으며 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뮤의 얼굴은 대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역시 프란은 뮤가 좋았다.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사실에 왠지 안도감을 느낀다. 가슴이 훈훈해진다. 외로웠던가?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웃어주는 뮤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을 남자로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 해야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나 여자야, 라고 말한다면 뮤는 자신을 경멸할까……. 프란은 잠시 고민 섞인 눈으로 뮤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억지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프란은 오늘도 크레인 위에 가득 올려진 음식을 갖고 가주가 있는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그 때, 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게 아니야. 프란." 프란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뮤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으니까 지금 아침을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어. 이 차나 갖다드리면 될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뮤가 차를 내밀었다. 향긋한 그 차의 냄새를 맡고 있던 프란에게 뮤는 웃음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식사를 안하신다는 거지?" "카세타 왕국에서 급하게 사신이 왔다더라구." "와, 왕국에서 사신?" 프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일개 가문에 왕국의 사신이 오다니? 왕국의 사신이라는 것은 국가에서나 오가는 것이 아니던가? "뭘 그렇게 놀라? 원래 카르멘 가는 왕국 사신 정도는 발에 땀나게 드나드는 곳이라구." 뮤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를 담은 쟁반을 프란의 손에 쥐어주었다. "……사신이 드나드는 집안이라……. 역시 적응이 안된다니까." 프란은 머리를 긁적였다. ▷◀▷◀▷◀▷◀▷◀▷◀▷◀▷◀▷◀▷◀ "왕실에서 무엇을 요청해왔던, 우리 가문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작고 나즉하며 맑은 미성의, 하지만 그 누구의 어떤 목소리보다 위엄 서려 도저히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넓은 방안을 살짝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넓은 그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프란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흐음, 그러면 그렇지. 저 인간이 가볍게 네네, 하면서 따를 이유가 없지. 상대가 왕실이든 국가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 제잘난 맛에서 사는 인간인데, 암 그렇고 말고.' 프란은 단 한마디로 실내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저 앞의 존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찻잔이 나갈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냉소적인 어투의 가주의 태도도 그렇고, 가주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인간 역시 차를 마시고 싶어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카르멘 가주님께서는 왕실에 반(反)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가주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 앞에 서 있던 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카세타 왕실에서 보낸 사신(使臣)인 듯 보이는 남자였다. 프란은 그 남자를 꼼꼼하게 관찰해보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한가득 [황당]이라고 적혀 있었다. 프란은 씩 웃어버렸다. 사신으로 이 자리에 앉은 루넨은 지금 정말이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는 카세타 국왕의 이름으로 온 차였고,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이 빳빳한 가주란 자는 자신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 가주라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입에 냉소만을 품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저 눈은 무엇이란 말인가. 남자는 가주의 살인적인 눈빛을 마주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에 반하겠냐'라는 질문까지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질문을 받은 가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반역?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반역인가? 왜 내가 카세타 왕국에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카르멘 가문의 사람들을 보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군." 소년…… 아니, 소년이 맡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직책인 한 가문의 가주라는 명예를 가진 가주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그러나 아까보다 약간 힘주어 말했다. 프란은 찻잔을 들고 선 채로 감탄했다. 자신 역시 한 뻔뻔 하는데다가 그 어떤 사람 앞에서나 건방지게 굴었다고는 하지만, 왕이 보낸 사신 앞에서도 저렇게 뻣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프란은 속으로 또 한 번 저 가주라는 인간에게 감탄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사신은 가주를 향해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 협박이다. "그래서?" 그러나 전혀 거리낌없는 반문. 가주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에 비해 왕의 말을 전하러왔다는 눈앞의 남자는 심적 동요가 무척이나 큰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너무나도 예쁘장해 웬만한 여자보다 훨씬 곱상하게 생겨먹은 소년이 카세타 왕국, 아니 라니아 대륙 최고를 자랑하는 검술가문인 카르멘의 가주라는 것도 놀라운 사실인데 그 소년이 왕의 부탁을 가지고 온 자신의 말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볍게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기에. 프란은 바르르 떨고 있는 사신을 동정하는 마음에 혀끝을 끌끌하고 차냈다. 그녀로서는 참 불쌍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저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에게 그런 부탁을 하러 온 저 사신이. "그래서라니요!! 당신도 카세타 왕국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폐하의 말에 따르시는 것이 당연한 이치……" 사신은 당황함에 감싸인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가주는 냉담했다. "아무리 당연한 이치라고 해도 나는 보낼 수 없으니 알아서 폐하께 전하도록 해." 가주는 그 말과 함께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사신은 당황한 눈으로 가주를 바라보았으나 가주는 그런 그의 눈빛을 완전히 무시하고 언제나 자신의 양옆으로 호위하듯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저택 밖까지 모셔 드리도록." "넷, 가주님!" 항상 가주의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두 명의 남자는 가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신의 양옆에 서더니 그대로 그의 팔을 한쪽씩 붙들었다. 워낙 덩치가 큰 그들이라, 사신은 그들 사이에서 꽉하고 껴버렸다. 그들은 사신이 뭐라고 입을 염과 동시에,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가주님!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셔야 합니다아아앗!" 사신은 두 명의 남자에게 얌전히 모셔지는 것인지 끌려가는 것인지 애매한 상황에서도(하지만 아무리 봐도 끌려가는 듯 했다)끝까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가주는 특유의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였을 뿐이다. "왕? 웃기고 있네. 내가 마음만 먹고 조금만 힘을 쓰면 언제든지 바뀌어버릴 그 따위 왕이 내게 '명령' 이란 단어를 쓴다 이건가? 하하하하하하핫!! ……내가 그 동안 황실측엔 너무 물렁해 보였나보군." 프란은 가주의 냉소적인 말에 헉하고 소리를 칠 뻔 했다. 두 잔의 찻잔이 살며시 떨리는 것을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찻잔을 그대로 들고가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그런데 뜻밖에도 말없이 서 있던 가주가 문 밖에서 차를 들고 올 타이밍을 놓친 채 약간 망설이고 있는 프란 쪽으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프란은 움찔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고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윽, 쳐다보지마! 네가 쳐다보면 무섭단 말이다!' 가주와 눈이 마주친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프란 프리텐." 가주는 조용히 프란의 이름을 불렀다. "응?" 프란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말과 함께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가주 앞에서 반말을 쓴 자신이 내일 아침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고민을 하며 프란은 혀를 꾹 깨물었다. 가주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프란은 벽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버벅거렸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젠장!!!' 하지만 뜻밖에도, 가주는 프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차분한 표정으로 말할 뿐. "방을 좀 치워라." 그 말과 함께 가주는 그대로 프란이 서 있는 문 쪽으로 걸어나오더니 프란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3분 이내로 먼지 하나 안 나오도록 청소해라." '윽!' 프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가주를 향해 있는 힘껏 눈을 부라렸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눈을 치켜 뜨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런데 바로그 때, 문이 다시 한 번 벌컥 열리더니 가주가 들어섰다. 그 바람에 문을 바라보며 가주에게 욕을 퍼붓고 있던 프란은 헙, 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프란이 살짝 돌아보자 가주가 피식 웃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 위로 은은하게 비치는 미소는 정말 환상이었다. 그 차갑도 못해 냉정하고 냉정하다못해 냉철하며 냉철하다못해 떡같은 성격을 몰랐다면 저 웃음에 한방에 뻑 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프란은 성격은 그렇게나 더러우면서 얼굴은 왜 저렇게 곱상한 거야?, 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귀족집안의 자제들은 대부분 곱상하게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사내자식은 본적이 없는 프란이었다. "차는 줘야지?" 가주는 그 말과 함께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프란이 들고 왔던 차 중 하나를 들고서 문 바깥으로 멀리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차가 한 잔 남았다.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들어올렸다. "뭐, 설마 마신다고 죽진 않겠지……." 그 말과 함께 프란은 차를 들이마셨다. "음?" 하지만 약간 식은 그 차를 마신 순간, 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렸고, 가슴이 쥐어 뜯기는 듯 했다. 구토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무엇인가가 몸을 세차게 찌르는 것 같았다. 프란은 심장 부위를 부여잡은 채로 상반신을 구부렸다. "……으…… 으윽?" '이거…… 독…….' 프란은 천천히 카펫 위로 허물어져 내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1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2) 가네트(uznian) 03-11-24 :: :: 14343 자신의 방에서 나온 가주는 벽에 기대섰다. 마린이 몇 날 몇 일을 계획해 고친 덕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게 개조된 복도에 선 가주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방에 그 더러운 황실의 사신이 앉아 있었다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가주였다. 가주는 들고 있던 찻잔을 꽉 쥐었다. 그는 황실에 대해 이유 모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뭐라고 꼬집어서 말하라고 하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지독한 반감이다. 황실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도 들어주기가 싫어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을 만들어서 좋을 것이 조금도 없는 자신인데, 이상하게도 황실의 말에 굴복하는 것이 싫었다. 뭐라고 설명하기조차 힘든 이상한 반감, 이상한 감정―. "……." 가주는 차를 들었다. 언제나 자신의 방 앞에서 자신을 호위한답시고 서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기실 가주에게 호위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호위 무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 검술 가문의 모든 기술을 이어받고, 태어날 때 어머니의 따뜻한 손보다 검을 먼저 매만졌던 가주 본인보다 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칠 듯이 검을 휘두르며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던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라면 저기 있는 호위 무사들도 절대 상대할 수 없다. 호위를 보는 보초병들은 가주가 차 한 잔을 갖고 밖으로 나와 밖에 서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긴장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자 가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천천히 찻잔을 입술에 갖다댔다. 이제 온기가 많이 가신 찻잔은 가주를 향해 미지근한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저어진 차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가주는 아무 생각 없이 찻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솜씨 있는 장인이 있는 힘을 다해 색을 낸 듯한 투명한 자기, 장미 세 송이가 말없이 아로 새겨진 그 찻잔이 가주의 단아한 입술에 닿이는 순간이었다. "……!" 막 한 모금의 차가 목으로 넘어가려 한 그 때, 가주의 미간이 천천히 안 쪽으로 찌푸려졌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가주는 미간만을 천천히 좁혔다. 그리고 잠시 그는 호흡을 멈췄다. "가주님?" 그가 차를 마시다 말고 인상을 찌푸린 채 찻잔을 천천히 밑으로 내리는 것을 본 호위 무사 둘이 당황한 듯 그를 불렀다. 그 순간, 가주는 찻잔을 복도 한 구석에 놓여진 둔턱 위에 올린 후 상반신을 천천히 구부렸다. 두 명의 호위무사가 갑작스런 가주의 행위에 당황한 듯 달려오려 하자 가주는 손을 들어 그런 그들을 저지했다. 호위 무사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하여튼 가주가 멈추라고 하자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이 멈추는 것을 확인한 가주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오른손의 손가락 두개를 목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주님!!" 가주가 난데없이 손을 목 안으로 집어넣는 모습에 놀란 그들이 뭐라고 하려는데, 가주가 입술을 벌린 채 무엇인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우욱! 퉤!" 곧, 그의 목구멍을 타고 극소량의 액체가 침과 섞여 튀어나왔다. 보초병들은 가주가 무엇인가를 토해 냈다는데에 깜짝 놀라 우두커니 멈춰 섰다. 가주는 천천히 목 안에 집어넣었던 오른손을 들어 무감각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오른손을 들어올려 바로 눈앞까지 끌어올린 그의 눈에 일순 짙은 광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손에 묻어 있는 그 액체는 미끌미끌했고 연한 핑크빛을 띄고 있었다. 가주는 천천히 눈꼬리를 들어올렸다. 입술 선이 삐뚜름하게 올라간다. "……크루레티나……?" 가주가 조그맣게 뱉어냈다. 틀림없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미끈미끈한 액체의 감촉. 분홍색이 가볍게 섞인 채로인 그 액체. "가주님! 대체 무슨……." 호위병 둘은 깜짝 놀란 듯 한 명은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가주에게 건넸고, 한명은 당황한 얼굴로 얼른 주변을 살폈다. 가주는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그에게서 손수건을 받아든 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가 독약을 넣었다." 그의 차가운 입매는 싸늘했다. 가주의 한마디에 호위병 둘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한 그 얼굴에 가주는 쐐기를 박듯 한마디했다. "내가 마실 차에 말이야." ▷◀▷◀▷◀▷◀▷◀▷◀▷◀▷◀▷◀▷◀ "그, 그럴 리가……!" 호위 무사 둘은 깜짝 놀란 얼굴로 더듬거리며 뱉어냈다. 가주는 차가운 얼굴로 그런 호위 무사 둘을 보더니 말했다. "지금 당장 마린과 스웬, 시온을 불러와라." "마, 마린님과 스웬님…… 그리고 시온님을요?" 마린은 이 집안의 하인을 총괄하는 여자이니 이런 상황에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치고, 스웬이란 남자는 카르멘 가의 전용의사이니 저 독약이 성분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필요하다지만 시온은 어째서 불러오라는 것일까. "……." 호위 무사들은 잠시 시온이 이 상황에서 왜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가 말없이 자신들을 보는 가주의 눈에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말, 말씀…… 이행하겠습니다." 그들이 인사 후 어디론가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가주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는 단아한 얼굴을 찌푸렸다. 여태까지 무표정을 연기하기 위해 표정을 굳히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망가진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곤 해도…… 훗…… 역시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군." 점점 찌푸려지는 표정을 원래대로 돌려놓느라고 가주의 얼굴은 잠시 굳었다. 동요해서는 안 된다. 놀라는 모습이라던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 따위를 보여서도 절대 안 된다. 지나치게 흥분해서 화를 내서도 안된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순간 진다. 보여서는 안된다. 가주는 입술을 꾹 깨물며 화를 삭혔다. 크루레티나는 극 소량만으로도 치명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맹독이다. 그것을 잘못 먹었다가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고, 머리가 바보가 될 수도 있다.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크루레티나…… 큭큭큭. 루세인도 모자라서 크루레티나라 이거지……." 레키슈안에만 재배된다는 루세인이 매일 같이 빵 한조각에 섞여 그의 식사에 내보내 가주의 숨통을 천천히 조인 적도 있었다. 다행히 치사량에 이르기 직전 발견해서 큰 일이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독약이 자신의 음식에 섞여 나온 이후, 가주는 자신의 시종에게 언제나 먼저 음식을 먹여서 음식의 독약 첨부 여부를 검토했다. 프란에게 먼저 음식을 먹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온갖 독을 자신의 식사에 집어넣는 작자들. 그것이 누구인지 모르지 않기에 가주의 얼굴은 더욱 망가졌다. "……." 가주는 굳은 얼굴로 독약이 타였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찻잔이 자신의 얼굴을 비춘 순간, 가주는 뭔가 자신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녀석은 왜 나오지 않는건가……."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3분 이내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게 청소하라는 어이없는 주문을 받고 들어갔으니 지금쯤은 맥빠진 얼굴로 '청소다했는데요.' 라며 바보같은 얼굴을 한 프란이 튀어나와야 정상이거늘, 이 녀석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가주는 괜히 화가 더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재빨리 자신의 방 앞으로 가 문 손잡이를 비틀었다. "……." 열려진 문 사이로 언제나와 다름없는 자신의 방 풍경이 보인다. 저 멀리, 굉장히 커다란 백색의 커튼이 가리고 있는 창문과 몇 개의 관엽 식물들, 테이블 하나. 가주라는 신분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심플한 공간에 그는 발을 디뎠다. 언제나와 다름 없는 풍경들. 언제나와 다름 없는 것들. "……!" 그 언제나와 다름없는 것들을 둘러보고 있던 가주의 고운 얼굴이 일순 흔들린 것은 그 어떤 변화도 나타나 있지 않았던 자신의 방에서 유독 변한 무엇인가를 찾아낸 직후였다. 이 방에 나오기 직전엔 분명, 금발 소년은 카펫 위에 멀쩡히 서 있었다. 그의 어이없는 명령에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 억울하다는 얼굴을 한 채로 두 발을 카펫에 디디고 서 있었다. "……." 가주는 천천히, 금빛 소년이 있던 그 곳으로 다가갔다. 가주의 새하얀 얼굴은 꽉하고 굳어 있었다.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다. 오로지 냉막함, 냉막함, 냉막함, 냉막함. 오로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그 외에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그의 얼굴은 마치 조각과 같다.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은 가운데 마치 거짓말처럼 오로지 하나만 변해버렸다. 가주는 변해버린 그 무엇인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붉은 카펫 위로 창백해진 얼굴을 숙인 소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금빛의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힘이 빠진 양 팔은 축 늘어져 있다. 그런 금빛 소년의 옆에 놓여있는 찻잔. 산산조각이 난 채로 흩어진 그 찻잔은 소년의 팔 언저리에도 떨어져 있다. 손끝에서 조금 묻어 나온 피는 가주의 굳어진 신경줄을 자극했다. "……." 그는 천천히,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던 이 방에 유일한 잡티처럼 변해버린 소년을 향해 몸을 굽혔다. 소년은 자신이 몸을 굽혀서 가까이로 가져가도 어떤 반응도 없다. 소년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 강제로 들어올려 자신 쪽을 보게 했다. 붉은 화색이 돌았던, 자신을 향해 당황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던 소년의 얼굴은 파리했다. 차가웠고 창백했다. 입술은 색을 잃어버린 채, 옅은 보랏빛을 띄고 있다. 가주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소년, 프란의 가슴 쪽에 갖다댔다. 그의 손이 프란의 가슴을 눌렀다. 맥박이 뛰고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맥박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들리지 않았다. "……." 가주는 손을 들어 이번에는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았다. 손끝에 이는 공기가 없다. 이번에는 입술 근처에 손을 갖다 대 보았다. 역시 손끝에 이는 공기가 없다. 은빛을 머금은 보랏빛눈이 살짝 흔들렸다. 이번에는 맥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던 가주의 하얀 얼굴 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한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금빛의 소년을 들어올렸다. 들어올려진 소년의 안색은 창백하다. "……." 그는 소년을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바깥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그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고 있다. 가주의 손에 들린 프란의 맥은 뛰지 않고 있었다. ▷◀▷◀▷◀▷◀▷◀▷◀▷◀▷◀▷◀▷◀ 마린은 잔뜩 신경질이 나 있었다. 한참 서류 정리에 바쁠 때 가주의 호위기사 중 하나가 급하다며 사정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자신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투덜투덜거리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 가닥으로 묶은 후 방을 나섰다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저 편에서는 자신의 바로 옆방을 쓰는 카르멘 가 전용의사인 스웬이 허겁지겁 달려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트 정리를 하고 있던 스웬도 마린이 자신과 거의 동시에 방에서 나온 것이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가주의 방 앞으로 갔을 때 마린은 조금 더 놀라고 말았다. 저 아일린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로, 여자 후리기의 명수이자 한 번 이 집안에 들어오면 마린의 골치를 지근지근 아프게 하고 마는('저 시온님이 너무 좋아요! 따라가고 싶어요.'……라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는 시녀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언제나 마린의 몫이었다.)시온이 또 다른 호위 무사의 손에 이끌려 가주의 방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랍쇼? 이거 마린씨 아니야? 당신은 웬일이지?" 마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주제에 시온은 반말 비슷한 말투를 구사하며 껄렁껄렁한 자세로 마린에게 물었다. 마린은 잠시 그런 그의 태도에 발끈했다. 그녀로서는 시온이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왔다 하면 카르멘 가의 하녀란 하녀는 다 홀리고 다니는 저 천하의 바람둥이가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가주님이 불러서 왔지요. 도련님은?" 마린은 그러나 싱긋 웃으면서 시온에게 물었다. 시온은 그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어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가주의 방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 표정을 풀었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형님이 불러서 왔지." 그들이 짧은 대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주의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모습이 문 사이로 드러났다. 가주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가장 먼저 기겁을 한 것은 마린이었다. "세상에!! 프란!?" 가주의 양팔에 들린 채 축 늘어진 프란의 모습을 발견한 마린은 기겁해서 고함을 쳤다. "프란!!" 다음 번으로 소리를 지른 것은 시온이었다. 시온은 발작적인 소리를 내지른 후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가주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가주는 표정 하나 떠오르지 않은 가면 같은 표정으로 뛰어 들어온 시온을 맞이했다. 시온은 떨리는 손을 가누며 가주를 보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형님……. 설마, 설마……. 설마 형님이 이렇게 만드신 겁니까?" 이 곳까지 오는 동안 호위 무사들로부터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기에, 오해를 한 시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주에게 말했다. 그는 프란이 이렇게 쓰러진 것이 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가주를 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가주의 몸에 들린 프란의 몸을 뺏아 들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손대지 마라." 가주는 시온의 팔이 다가오기 직전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뱉어냈다. 그의 쌀쌀한 목소리가 사방에 흘렀다. 시온이 놀라 흠칫했다. 가주는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가 뿜어내고 있는 분위기가 어찌나 위압적이었던지, 가주가 태어날 당시부터 그와 함께 있었던 마린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 분위기에 숨조차 막힐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물론 차가운 분위기이긴 했지만, 이렇게 위압감을 주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모두들 가주가 뿜는 기운에 숨이 막혀 목을 조를 정도가 되었을 때. "……스웬." 가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스웬을 호명했다. 카르멘 가의 전용의사인 스웬은 가주의 차가운 호명에 흠칫하며 움찔움찔 다가왔다. 가주의 은 보랏빛 눈에 살기가 감돌고 있음을 예측한 것은 검을 익히는 무사들뿐만이 아닌지, 검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의사인 스웬의 몸도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벌 떨리고 있었다. 가주는 스웬에게 말했다. "치료해라." 스웬은 떨리는 손을 들어 프란의 코끝에 갖다댔다. 일단 살아만 있으면 자신의 의술로 어떻게든 극복이 될 것이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그는 프란이 살아있는지 어떤지 여부만이라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팍하고 굳었다. 프란은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가, 가주님. 하지만……!" '이 녀석은 이미 숨이 끊겼습니다!' 라고 외치려던 스웬은 그러나 그 말을 하기도 전에 냉철한 한마디를 들어야만 했다. "이 녀석이 죽으면 너도 죽는다." "가, 가주님!!!" 스웬은 일방적인 살인공지에 놀라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마린은 당황한 얼굴로 얼른 가주에게 다가가 프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주는 아무런 저항 없이 마린에게 프란의 몸을 맡겼다. 마린은 프란의 온 몸을 꼼꼼히 살핀 후 가주를 보았다. "……대, 대체, 어, 어떻게 된 일이죠?" "독약을 먹었다." 가주는 여전히 가면과도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에 시온이 움찔했고, 마린은 놀란 얼굴을 했다. 죽은 듯 숨조차 쉬지 않는 프란을 본 스웬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는 천천히 프란의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 어느 순간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의심이 간다는 얼굴로 프란의 코 끝에 다시 한 번 손을 갖다댔고,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환해졌다. 그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일시적인 호흡 장애였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다시 숨을 쉬는 것 같습니다." 스웬은 그 말과 함께 프란을 찬찬히 살폈다. 여태껏 벌벌 떨고 있던 그의 얼굴에 일말의 화색이 돌고 있다. 다시 맥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한참 프란을 살피던 스웬이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맥박이 완전히 정지된 후 다시 뛴다는 건…… 크루레티나나 혼수, 루키엔 세가지 중에 하나에 중독된 것 같은데…… 맞습니까?" "……크루레티나 같다. 여기 독약을 탄 차가 있으니 잘 살펴보도록." 가주는 그 말과 함께 저 멀리 놓았던 찻잔을 들고 와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명심해라." 가주의 얼굴이 차갑다. "살리지 못하면 너도 죽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2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3) 가네트(uznian) 03-11-24 :: :: 11348 "살리지 못하면 너도 죽는다." 그 말을 들은 스웬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그런 스웬을 무감정한 눈으로 보고 있던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시선을 마린 쪽으로 향했다. 마린은 굳은 얼굴로 가주의 눈을 맞이했다. "마린." 가주의 나즉한 부름에 마린은 흠칫해서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뒤로 흘러내린다. "네? 네?" 자신을 갑자기 부르는 가주의 호명에 마린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쥐어진 주먹에 땀이 새어들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모든 하인들을 불러모아라." 가주의 감정 없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마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인들을 불러 모으라는 말은 즉……. "가주님……." 마린은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가주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표정없는 가면같은 표정의 소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압적이고 절대적이며 오만한 눈빛. "지금 당장." 그 눈을 한 채로, 가주는 마린에게 차갑게 말했다. ▷◀▷◀▷◀▷◀▷◀▷◀▷◀▷◀▷◀▷◀ 프란을 침대에 눕힌 스웬은 다시 한 번 천천히 프란을 관찰했다. 아까 전 까지만 해도 뛰지 않고 있던 심장은 이제 거짓말처럼 심할 정도로 거세게 뛰고 있어서 전과는 달리 오히려 심장이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너무 빠르게 팔딱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에 스웬은 걱정마저 들기 시작했다. 크루레티나처럼 독특한 독을 먹은 이상, 뭐가 어떻게 진행되어도 결코 당황해서는 안된다. 프란의 온 몸에서는 열이 펄펄 끓었고 멍하게 벌어진 그녀의 입 사이로 헛소리만이 흘러나온다. "락…… 케이드…… 나…… 안……죽어…… 안, 죽어…… 안……." 온 몸이 불덩이 같다.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더듬더듬 프란은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스웬은 헛소리를 계속해대는 프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락케이드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걸 보면 이 금빛머리칼 소년에게 그 이름을 가진 자가 매우 소중한 것 같았다. 사람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면 가장 소중한 자의 이름을 연달아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스웬은 프란의 온 몸에 흐르는 땀을 보며 자신의 보조를 맡는 하녀 레니에게 해열제와 해독제를 준비해오라고 했다. 레니는 곧 몇 가지 약푸믈 들고 스웬에게 다가왔다. 스웬은 프란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킨 후 프란의 벌어진 입 속으로 해열제와 해독제를 넣었다. 하지만 프란의 입 속으로 해열제를 먼저 집어 넣었던 곧 그는 곤란한 사태에 직면했다. 이 프란이라는 소년이 해열제를 삼키지 못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시 약을 먹이려 시도를 해도 프란은 큰 신음성만을 낼 뿐 약을 목 안으로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스웬은 당황스런 얼굴로 프란을 보았다. 크루레티나의 독으로 오르는 열은 푸뤼(세이피아 남부 루텐 영지에서만 자라는 잎 일곱 개 의 식물로, 곱게 빻아 동그랗게 만든 후 모양 채로 삼킨다. 해열에 타고난 효과가 있다하며 특히 크루레티나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오르는 열을 어느 정도 내려주는 역할을 한다.)로 밖에 풀 수 없는데, 소년은 자신이 입 안으로 넣어주는 푸뤼 덩어리를 조금도 넘기지 못한다니. 스웬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 망설임 없이 프란의 상체를 잡아 자신의 품 쪽으로 당긴 후 똑바로 세웠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마치 인형처럼 끌려 들어온 프란의 몸에서는 쉼 없이 땀만이 샘솟고 있었다. 프란의 땀을 보는 스웬의 심장이 바짝바짝 조여들고 있었다. 그녀가 땀 한 방울 흘릴 때마다 자신의 생명이 5분씩 줄어드는 느낌에 스웬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살리지 못하면 너도 죽는다.' 가주의 그 일방적인 이야기가 떠올라 숨이 턱턱 막혀온다. 크루레티나에 중독된 자에게는 시간이 약이다. 시간과 의지. 그것이 얼마나 중독자에게 많은 여유를 베푸는 가에 따라서 모든 것은 달라진다. 스웬은 결국 프란의 입술을 벌린 후 푸뤼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막 프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려 한 순간이었다. "자, 잠깐!!" 저 멀리서 보고 있던 시온이 놀라 고함을 쳤다. 스웬은 뭐냐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마린과 가주가 주방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보러 간 후, 시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스웬의 방으로 달려와 프란을 보고 있던 차였다. 시온은 잔뜩 굳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스웬이 씹던 푸뤼를 갑작스레 뺏어 들었다. 스웬은 이 황당한 사태에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고, 다음 순간 시온의 턱이 움직이는 것을 본 스웬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 시온 도련님?" 시온은 푸뤼를 씹고 있었다. 곧, 시온이 프란의 가냘픈 턱을 부여잡고 그것을 들어올리는 것이 스웬의 두 눈에 보였다. 그녀의 입 속으로 푸뤼 즙이 떠밀리는 것을 보고 있던 스웬이 하얗게 질려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시온으로부터의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의 입술은 이미 프란의 것과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프뤼를 잘근잘근 씹어 즙 상태로 만든 시온의 입술이 프란의 입술에 닿이고, 프란의 부드러운 혀가 그의 혀와 닿였다. 시온은 프란의 벌어진 입술 속으로 푸뤼 즙을 밀어 넣었다. 그것이 프란의 목 안으로 넘어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온은 프란의 목에 손을 올려놓았다. 한참 후 입술을 떼고 보니 프란의 목이 가느다랗게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곧, 그의 손에 미미한 진동이 일었다. 시온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돈다. "……후우. 스웬, 푸뤼 잎은 삼킨 것 같다." 시온은 가벼운 한숨성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스웬이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고, 스웬의 보조를 맡는 간호사 레니의 눈도 처참하리만치 커져 있었다. "……아." 순간, 시온은 깨달았다. 프란은 남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자신은 지금 프란에게 약을 투여하려한 의사를 밀치고 프란에게 대신 약을 먹인 셈이 되버렸다는 것. 그 말인 즉……. '제길…… 바람둥이도 모자라 이젠 남색가라는 소문이 돌겠군…….' 시온은 머리를 감싸쥐며 고뇌했다. 스웬과 레니의 경악어린 눈은 아직도 그의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시온은 그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프란을 보았다. 파리해진 안색이 가슴 아프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내가 왜 저런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거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 이 녀석 만난지 일주일 밖에 안됐단 말이야.' 시온은 어느 순간 쓴웃음을 머금었다. '몰라, 그런 거. 어찌됐든 좋아하게 된 건 좋아하게 된 거니까. ……뭐, 그냥 첫눈에 반했다고 해둘까?' ▷◀▷◀▷◀▷◀▷◀▷◀▷◀▷◀▷◀▷◀ "마린." 한참동안 프란의 머리맡에 선 채로 프란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던 시온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인을 보며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린은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한 채로 레니가 내미는 의자에 턱하고 걸터앉았다. "그래, 어떻게 됐어?" 시온은 성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긴 뭐가 어떻게 됐겠어요?" 마린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가주님, 정말 화나셨어요." "……." 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렇군. 지금 형님은?" "황실 사신이 다시 찾아와서 만나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 사신이란 작자, 몸 성히 못 돌아가겠죠." 마린의 말에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신이……." 시온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사지는 멀쩡하게 보내셨음 좋겠는데." "차라리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세요. 가주님은 한 번 화가 나면 그걸 풀지 않고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분이라는 거,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게다가 황실사신은 오늘 아침에 퇴짜 맞고 저녁에 또 찾아온 것이니 가주님으로서는 스트레스 풀기에 딱 좋은 상대예요. 곱게 보내실 리 없어요."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웬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범인일 수도 있지 않나요?" 스웬의 생각없는 듯한 그 말에 발끈한 것은 시온이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프란이 그럴 리가 없잖아!" "……당신이 프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시죠, 시온님?" 마린은 갑자기 시온이 프란을 두둔하고 나서는 것이 이상했기에 은근슬쩍 떠서 물었다. 시온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고, 마린은 그런 그를 향해 훗 하고 웃어준 후 말했다. "이봐요, 스웬, 프란은 범인이 아니예요." "증거라도……?" 스웬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일단, 프란은 이 집에 온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짧은 시간동안 '가주님께 독약을 타고 싶다.'라고 생각할만한 원망이 쌓였을까?"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스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일주일은 꽤나 짧은 시간이었으니 그 기간동안의 매수는 불가능해요. 프란은 언제나 가주님과 함께 있었는데 그 외의 시간동안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가주님 독살을 프란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고, 프란이 이 집에 침투되었을 스파이일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 일단, 이 녀석은 원래 프리텐이란 가문의 자제였고 카르멘 가문의 가주가 아일린 가문의 주인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조차 모르던 꼬맹이었어. 케인이 데려왔으니 그런 쪽으론 확실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범인이라면 크루레티나가 든 차를 마실 리 없겠지." "차를 마신 게 의심을 덜기 위해서라면?" 스웬은 프란의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솔직히, 그로서는 프란이 범인이 아니더라도 범인으로 몰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프란이 진짜 범인이라면 죽는다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용서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작작 좀 해! 프란은 범인이 아니라고 하잖아, 젠장!" 화가 난 시온이 버럭 고함을 쳤다. 스웬은 그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자 멈칫했다. 아까 전에 프란에게 키스(스웬의 눈에는 그것이 키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를 했던 저 아일린 가문의 후손이 화를 내는 것도 꽤나 무서웠다. 이 30대의 젊은 의사는 의외로 겁이 많은 남자였다. "형님은 밖으로 나와서 차를 드셨고, 프란은 안에서 남은 차를 마신 거라고 형님이 그러셨잖아!! 형님이 차를 드셨는지 어땠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범인이라면 저 빌어먹을 독차를 마셨을 것 같아??" "가주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고 난 뒤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스웬의 기어 들어가는 듯한 말에 시온은 거의 폭발 직전까지 몰렸다. 그가 갑자기 손을 가슴팍쪽으로 모으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마린이 기겁을 했다. "시온 도련님!! 안 돼요!! 지금 뭐하시려는 거예요!!!" "……." 마린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그 소리에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마법 쓰려고 했다, 왜." 그의 그 어이없는 한마디에 마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를 덮었다. "……대체가…… 저택을 부술 셈 이예요? 가주님한테 죽고 싶은 겁니까!!" "……." 시온은 결국 숨을 쌕쌕대며 자리에 앉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스웬은 파들파들 떨면서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다시 프란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말없이 프란을 치료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웬." 스웬이 프란을 바라보며 열심히 치료하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안 마린이 피식 웃으면서 스웬의 이름을 불렀고 스웬이 돌아보았다. "만약 가주님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면 절대로 크루레티나는 먹지 않아. 크루레티나를 먹고 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뿐더러, 만에 하나 죽지 않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크루레티나를 먹겠어? 안 그래? 죽으려면 확실하게 죽지, 크루레티나로 죽진 않아." "……." 스웬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스웬을 보고 있던 마린이 피식 웃었다. '하긴……. 가주님도……. 프란을 조금 의심하시긴 하지……. 그 분은 모든 일에 철저하니까. 일단 프란이 깨어난다면 심하게 추궁은 받겠지. 어쩌면 지금 프란을 살려 놓으라고 닦달하시는 것도 추궁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라.' 그녀는 살짝 몸을 뒤로 눕혔다. 문득 시온의 목소리가 스웬을 향했다. "프란……. 안 죽겠지?" "글세요. 3일 정도 경과를 두고 봐야하겠는데……. 만약 잘 된다해도……. 일부의 정신 착란은……." "정신착란?" 시온이 놀라서 고함을 쳤다. "……네." 시온은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깨어날 가능성은?" "0.1%정도의 기적에 목숨을 거는 사람한테라면 모를까, 어림없죠." 스웬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솔직히 백치가 되든 정신이상자가 되든 스웬은 상관없었다. 가주는 말했다. '살려 놓으라'고. 살려만 놓으면 된다. 스웬은 그렇게 생각했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바보가 되어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살려놓으란 말 외에는 하지 않으셨으니까.' 스웬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3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4) 가네트(uznian) 03-11-24 :: :: 12553 프란은 공허한 세계 속에 누워 있었다. "젠장할." 프란은 투덜거렸다. 온 몸에서 땀이 나고 있다. 찝찝했다. 검을 휘두르고 난 후의 개운함 따위는 몸에 없었다. 그냥 찝찝하기만 했다. 짜증이 났다. "나 절대로 안 죽어!" 왜 그 얘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그저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 안 죽는단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계속 눈물이 났다. 괜히 억울했다. 그리고, 이럴 때는 언제나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프란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얼굴을 잡으려 했다. 프리텐 가문의 옛집사, 락케이드의 얼굴.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는다. '프리나 아가씨, 힘내십시오.'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한 그 목소리는 따뜻하다. 이것은 환청일까. "집사, 난 이제 프리나가 아니야. 프란이야. 집사도 프란이라고 불러야 돼." 프란이 생긋 웃는다. '프리나 아가씨, 행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그가 했던 말에 심장이 얽매인다. 그러마, 라고 대답했었지. 프란은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며 말했다. "집사……. 나……. 행복해 질 거야. 꼭 행복해 질 거야. 걱정 마." '프리나 아가씨…….'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울림은 너무나 따뜻해서 눈물이 난다. 너무나 따뜻해서 숨을 쉴수가 없을 지경이다. 따뜻한 무엇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다. 포근하고 포근하고 포근한 느낌. 태초의 모든 것이 그녀를 감싸고, 죽음으로 향하는 손짓에서 그녀를 구출한다. 온 몸을 감싸오는 따뜻한 추억들. "……집사…… 아니, 락케이드…… 우리, 다시…… 만나는 거지? 응?" 눈물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프란은 락케이드의 노쇠한 얼굴과 하얀 수염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지금은 자신도 걸치고 있는 하인들의 그 까만 옷. 그 옷을 락케이드는 언제나 입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있어주었던 유일한 존재.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유일한 존재. 정을 주었던 유일한 존재가 아니던가. '물론입니다, 프리나 아가씨.'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는 목소리는 프란의 심장을 움켜쥔다. 뜨겁고, 뜨겁고, 뜨겁게 뛰고 있는 가슴속으로 무엇인가 강렬한 것이 튀어 오른다. 그것은 그녀에게 무엇인가 따뜻한 것을 불어넣고 무엇인가 사랑스러운 것을 준다. 의지. 의지.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죽지 않아……. "난 안 죽어……."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락 케이드와 다시 만나는 날까지 그리고……. "그 가주 놈이 징징대면서 우는 얼굴 보기 전까지……. 나…… 안 죽을 거야……."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가주가 징징대며 우는 얼굴, 상상만해도 쿡 하고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프란은 천천히 의식의 끝에 섰다. 무엇인가 저 끝에서 그녀에게 사신의 칼날을 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날 죽이러 올테면 와봐."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내가 다 죽여 버릴 거니까. 난 여기서 안 죽어!!" ▷◀▷◀▷◀▷◀▷◀▷◀▷◀▷◀▷◀▷◀ "난 안 죽어…… 걱정마……." 주르륵. 프란의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고 있던 시온은 당황스러워졌다. 그 한마디와 함께 프란의 목이 스르르 옆으로 타고 흐르는 것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땀이 너무 많이 나는군." 하지만 놀라는 시온과는 대조적으로 스웬은 덤덤하게 말 할 뿐이었다. 문득, 그는 프란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프란의 옷을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마린과 시온의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아, 자, 잠깐!" "잠깐만!" 그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스웬의 행동을 저지했다. "에?" "응?" 마린은 갑자기 시온이 멈추라고 한 것에 당황한 눈을 했고, 시온 역시 조금 놀란 눈으로 마린을 돌아보았다. '설마…… 이 바람둥이…… 눈치챈 건가?' '이 여우가…… 알고 있는 건가?' 서로가 한참동안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사이, 스웬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난 뒤 다시 프란 쪽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벗기려 했다. 어차피 남자의 몸이라 생각했기에 그저 땀에 젖은 옷을 갈아 입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잠깐, 잠깐!!!" "잠깐만요, 스웬!!" 마린과 시온이 또 필사적으로 스웬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쳇, 역시 알고 있는 건가?' '빌어먹을, 이 여우도 알고 있군.' 둘은 서로를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 사위는 어두워지고, 이젠 밤이 찾아왔다. 밤의 여신이 드리운 장막은 카르멘 가를 어둡게 덮고 있다. 믿을 수 없으리 만치 투명한 별들이 카르멘 가의 어두움을 어느 정도 밝혀주고 있다. 카르멘 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우, 우리 모두는 다 죽는 걸까?" "모, 모르겠어. 하지만……. 오늘 가주님은…… 너무 무서웠어." "흐엥∼ 난 오줌 참느라고 혼났단 말이야. 나 결국 무서워서 울어버렸어!" "넌 그래도 좀 낫다. 한나는 결국 오줌을 싸버렸단 말야." 두런두런한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퍼진다는 것만 빼면 무섭도록 조용하다. 오늘 하루, 가주의 [독약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카르멘 가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모든 하인들이 모인 가운데 보인 가주의 눈빛은 싸늘하고 매서웠다. 「범인의 고기는 잘 저며서 카르멘 가 주위에 뿌리겠다.」 가주가 했던 한마디가 온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가주님이 그렇게 화내시는 거 처음 봤어. 물론…… 평소에도 무서운 분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예쁘신 분이니 차가운 표정도 아, 예쁘다…… 이렇게 생각하고 좀 두려운 마음 뿐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 하녀 하나가 얼굴을 감싸쥐며 말했다. "나도." "나도." 결국 오늘은 범인을 잡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보인 가주의 모습은 분명 범인에게도 엄청난 위협을 안겼을 것이다. 하인들은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만약 몇 일 내로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깨끗하게 물갈이 될 것이란 사실을. 피로든, 뭐로든. ▷◀▷◀▷◀▷◀▷◀▷◀▷◀▷◀▷◀▷◀ 어두운 밤 한가운데에 프란은 거친 숨을 쌕쌕 내쉬며 누워 있었다. 스웬은 저 멀리에서 프란을 간호하다 말고 깜빡 잠이 들어 있었고, 시온과 마린은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간 차였다. 사실 시온은 버둥대며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당신과 나는 할 말이 있지 않을까요, 도련님?'이라고 하자마자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 프란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헉…… 하아……."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는 프란의 안색은 창백했다. "……." 아무 말이 없는 그림자는 천천히 프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희미한 달빛이 그의 얼굴 위로 가느다랗게 드리워진다. 하지만, 정작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희미하다. 희미하기만 하다. 얼핏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춰졌다. 은은한 빛을 낸다. 말없는 그림자는 천천히 프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꽤나 앳되어 보인다. 그림자는 천천히 프란 쪽으로 다가와 프란의 바로 앞에 앉았다. 삐그덕,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프란의 바로 앞에 앉는다. "……남의 차를 왜 마신 건가…… 바보 같은 놈."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갑자기 구름에 감싸여있던 달이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달빛에 반사되어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가느다랗게 드러난다. 하얗게 머리를 빗어 넘긴 달빛에 그의 얼굴이 찬찬히 물들어 나간다. 보랏빛 머리카락에 은보랏빛 눈동자. 아름다운 생김생김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다.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 그의 시선이 프란 쪽으로 움직였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그였다. 화가났다. 미칠 듯이 화가났다. 정말로 화가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나가 주방을 담당하는 모든 하인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는 분노해 있었다. 감히 자신이 마실 잔에 독을 타다니.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프란을 보았다. 숨을 뿜어내는 프란의 얼굴은 창백했다. 케인이 부탁한 놈이다. 케인이 신용을 보장하는 놈이다. 가주는 속으로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이런 한 밤중에 프란이 누워 있는 이 곳으로 온 자신을 납득할 수가 없는 가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케인이 부탁한 놈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라고. 새파란 달이 그의 하얀 얼굴 위로 부어지고 있었다. 메마른 달빛은 메마른 바람을 머금은 채로 천천히, 천천히 흔들린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것은 가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문득,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가운데에 가서 멈추었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프란의 옷은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후줄근할 정도로 땀에 절어 있는 그 옷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가주는 아무 생각 없이 프란의 윗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젖은 검은 경장의 그 옷은 미끌미끌해져 있었다. 그의 손이 막 경장을 다 벗겼을 때였다. "……." 그는 땀에 젖을 대로 젖어 프란의 속살을 다 비추는 셔츠 한 장을 보고 순간적으로 손의 움직임을 멈췄다. "……." 프란의 가슴팍은 천으로 몇 번 꽁꽁 묶어 놓은 흔적이 있었다. ▷◀▷◀▷◀▷◀▷◀▷◀▷◀▷◀▷◀▷◀ 가주가 프란의 방에 들어섰던 그 시간. 카르멘 가의 한 귀퉁이에 위치한 방 안에서는 두 남녀의 은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알고 있지?" 은발의 소년, 시온은 마린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급하게 물어왔다. 그의 날카로운 눈을 맞이한 마린은 그런 시온을 향해 아무 말 없이 교태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뭘 말인가요, 도련님?" 그녀의 눈이 살풋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시온은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젠장, 이 여우같은 여자가 정말!' "다 알면서 왜 이래? 서로 속이지 말자 이거다!!" "후훗, 그러니까 뭘요?" 마린은 시온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스물 아홉 살,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치고는 꽤나 나이가 많은 마린이었지만 그녀의 요염한 웃음은 나이를 커버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요염함이 철철 넘치는 마린의 웃음에 시온은 잠시 인상을 썼다. 그 어떤 여자도 현란한 말솜씨로 단 번에 휘어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였지만 마린의 이 웃음 앞에서는 꼼짝을 하지 못했다. 시온은 속으로 다시 한 번 더 이를 간 후 나직하게 말했다. "프란에 대해서." 시온의 진지한 말투는 그러나 다음 순간 튀어나온 마린의 발랄한 어투에 묻혀 진지하게 어필되지 못했다. "흐음? 프란 프리텐. 나이는 열여덟. 오렌지색 눈동자와 금색의 머리카락등 상당한 미모를 소유했고 내 이 분석적인 눈으로 보자면 스물 두 세 살쯤 되면 그 외모가 활짝 꽃펴 상당한 미인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음.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섹시한 여자인 내 대쉬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버리는 대단한 신경의 소유자이며 현재는 가주님의 시종임. 무척 귀여워서 잡아먹기 좋아 보이고 피부가 보들보들해서 만지면 촉감이 좋음. 나, 마린이 관심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이봐, 마린." 프란의 신상명세에 대해서 쭉 나열하는 마린을 보며 시온이 인상을 썼다. "왜 그러시나요 도련님?" 마린은 빙긋 웃으며 시온을 보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가?" "그럼 궁금한 게 뭐였던가요? 최근에 시온 도련님이 프란에게 지나칠 만큼 관심을 보이고 계셔서 시온님께 목매고 있던 하녀들이 잔뜩 실망하신 건 알고 계세요? 남색가를 좋아할만한 어린 소녀는 없다구요."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생글 웃어 보이는 마린을 보며 시온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역시 아직 열 여덟밖에 먹지 않은 시온은 능수능란에게 카르멘 가의 살림을 도맡고 있는 마린의 말싸움 상대로 부족했던 것이다. "젠장!! 프란이 여자라는 거, 당신도 알고 있잖아!!" 발악 같은 시온의 외침에, 그제서야 마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린은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러는 도련님은 언제부터 알았죠? 프란이 여자라는 건 어떻게 아셨구요." "척 보면 알아." 마린의 대답에 시온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대답했다. 정말이었다. 어째서 프란이 여자라고 생각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느낌과 감이라는 것이 있고, 그 느낌을 100% 확신시키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여자야.' 그냥 그랬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마린에게 몇 대 얻어맞을지도 모르지만, 시온으로서는 정말이지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바람둥이의 권한인가.' 마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시온은 턱을 괸 채로 마린을 향해 물었다. "저도 척보고 알았어요." 마린의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에 시온은 혀를 찼다. '역시 여우.' "만약 프란이 깨어난다고 해도……." 시온이 고개를 들어 마린을 보았다. "……형님께 추궁을 받겠지?" "당연하신 말씀. 가주님은 조그마한 틈새도 놓치지 않는 분이시니." 마린이 말했다. 시온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런 시온을 향해 마린이 말했다. "도련님. 하나만 저와 약속해주시죠." "……?" 시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린을 보았다. 마린은 그런 시온을 향해 나즉한 목소리로 하나한 끊어가며 말했다. "프란이 여자라는 거, 가주님께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시온은 대꾸 없이 계속 마린을 바라보았다. 마린은 그런 시온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에는 늘 헤실거리며 쓸 데 없는 이야기를 즐기는 그녀가 그렇게나 진지한 표정을 짓자 시온 역시 진지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약속해주실 수 있으세요? ……전 프란이 가주님 손에 찢겨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요." 시온은 여전히 대답없이 마린을 보고 있었다. 마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만약 프란이 여자라는게 밝혀지면 가주님은 당장에 프란의 몸을 갈기 갈기 찢어버릴거예요.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니까. 시온님도 아시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4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5) 가네트(uznian) 03-11-24 :: :: 13604 프란의 가슴을 꽁꽁 묶고 있는 그 하얗고 얇은 천을 보고 있던 가주의 미간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곤란한 일이 있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미간을 좁히는 버릇이 십분 발휘되는 순간이다. 가주는 프란을 뚫어지게 보았다. 프란의 가슴 부분을 꽉 잡아 묶어놓은 천은 살이 다 비칠 만큼 젖어든 셔츠 속으로 훤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얀 천은 프란의 가슴 부분을 완전히 여민 채로, 세게 조여있었다. 가주는 그 천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들어 프란의 얼굴을 보았다. 짙은 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있다. 이상했다. 왜 이런 것을 가슴에 감고 있는 것일까. 작게 중얼거리던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프란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침대의 오른쪽에 선 채로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메말라 물기라곤 남지 않은 프란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가느다란 한숨소리를 들으며 가주는 저 한편에 누워 있는 스웬을 쏘아보았다. 자신이 들어오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잠이 들어버린 저 따위 의사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화가 났다. 그리고 머리에 김이 오르자마자 떠오른 또 다른 기분 나쁜 사건. 아침에 찾아온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자신을 찾아왔던 카세타 왕국의 사신의 일이 갑자기 가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래라면 프란이 들고 왔던 크루레티나가 담긴 찻잔 중 하나는 카세타 왕국의 사신에게 건네질 것이었다. 자신이 오늘 크루레티나로부터 목숨을 부지했는지 어쩐지도 모르는 채로 낯두껍게도 다시 줄레줄레 나타났던 그 사신을 보는 순간, 가주는 그대로 이성이 날아가고 머리가 뒤집히는 줄 알았다. 그 사신이란 놈을 반 죽여 자신이 그리 녹녹한 자가 아님을 황실에 확실히 알려둘까 하다가 그래도 황실에 밑 보여 좋을 것이 없다고 당부하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던 침착한 케인의 얼굴이 생각나서 억지로 눌러 참았던 가주였다. "윽……." 갑자기 들려온 신음소리에 가주는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땀을 심하게 흘리고 있는 프란을 보고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문득 시선이 다시 아래로 돌아온다. 가슴을 바짝 조인 천. 이 천은 대체 무엇일까. 가슴을 꽁꽁 묶어 놓은 이 의미불명의 천은. "……." 자신의 눈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프란도 나름대로 검을 닦은 검사라고 한 만큼, 가슴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묶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그 천은 너무 약했다. 어딜 보나 천일 뿐이다. 가슴을 가려 검으로부터 보호할만한 금속이 아니다. 그렇다면 가슴 근육이 보통에 비해 심할 정도로 발달해서 검을 휘두르는데 불편해 이런 것을 묶은 것일까. 참 어이없는 생각까지 해가면서 가주는 프란을 보고 있었다. 대체 미심쩍은 이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하고 마음 속에서 갑자기 자그마한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하나의 가설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웃……" 프란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랗게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뚫어지게 프란의 가슴 부분을 보고 있던 가주는 순간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헉……." 너무 땀을 많이 흘려 거의 탈진 직전에 갔던 프란의 눈이 천천히 뜨이는 것이 보였다. 의식을 찾긴 찾았는데, 심한 고통이 밀려와서인지 인상을 확하고 찌푸린다. 프란은 자신의 몸을 덮은 포근한 이불을 꽉 움켜쥐며 고통에 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로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될 만큼 짙은 고통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헉……. 아악!" 파르스름하게 눈을 뜬 채로 홀로 신음하는 프란의 모습에 가주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프란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가주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이불을 집어 뜯으려는 기세마저 보이고 있었다. 정말로 많이 고통스러웠다. 프란은 피가 묻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상반신을 완전히 구부렸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했다. 가주는 한 발자국 물러선 자리에서 그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 때쯤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괜찮냐, 라던가 많이 아프면 날 잡으라던가, 환자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졸고 있는 저 한심하고도 악독한 의사를 반 패 죽여서 라도 깨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가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프란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렇게 한 명은 비명소리를 내며 신음하고 한 명은 그저 무표정하게 방관한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프란의 온 몸을 타고 비 오듯 흐르던 땀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프란의 가빴던 숨소리가 잦아들고 구부렸던 상체가 펴졌다. 프란이 다시 의식을 잃는 것을 보고 있던 가주는 그녀의 가슴팍을 무겁게 노려보다가 천천히 검을 꺼내들었다. 완연한 푸른빛을 띄는 그 검은 프란의 가슴을 향해 있었다. 가슴을 꽁꽁 묶어 놓은 천을 검으로 갈라 속을 확인하려는 듯 했다. 손으로 일일이 풀어내는 작업 따위는 번거롭다는 듯, 가주는 검을 처들었다. 검 끝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의 뾰족한 끝 부분이 막 그것을 찢어내려 한 순간이었다. "으응……?"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프란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 프란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눈을 떴다. 밝은 오렌지색 눈동자가 가주의 시야에 들어옴과 동시에, 가주의 몸이 경직했다. 그의 몸이 굳었다. 아니, 얼었다. ▷◀▷◀▷◀▷◀▷◀▷◀▷◀▷◀▷◀▷◀ 프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아직 몸이 나른하긴 했다. 머리도 조금 어지러웠고, 아까 전의 고통도 배가 되어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시야 역시 흐릿하다. 그런데……. 천천히 앞을 보고 있던 프란의 얼굴 위로 일순 식은땀이 흘렀다. 땀이 흘러내려 눈꺼풀을 덮어서 계속 아파 왔다. 하지만 억지로 눈살을 찌푸리고 초점을 맞추고 보니 누군가가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만 빼꼼하게 뜬 프란은 눈앞의 인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내뿜는 매혹적인 빛이 비춰지는 눈앞의 인간은 그러나 프란의 눈에 그다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프란은 더더욱 눈살을 찌푸려 눈앞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 프란이 눈을 찌푸리며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기 위해 버둥대고 있을 때 가주는 얼어붙은 상태에서 검을 거두지도,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크루레티나를 바로 오늘 먹은 주제에, 갑자기 눈을 부릅떴으니 가주로서는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을 꽉 싸매고 있던 천을 풀어 내리려 했던 자신이 변태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주는 굳어진 표정으로 검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프란은 눈을 찌푸리더니 곧 입술을 달싹였고 그러다말고 슬쩍 웃었다. 눈앞의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문득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가주는 프란이 웃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굳었다. '혹시 백치가 된 것인가.' 크루레티나라는 독을 먹은 이상 머리가 어떻게 되거나 죽는 것은 희박한 일이 아니다. 프란이 멀쩡히 일어나 설 것이라고는 기대 하지 않았던 가주였기에 프란이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자신을 보며 베시시 웃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것도 백치미가 철철 넘치는 그런 웃음을. 하지만 가주는 곧 냉정함을 되찾고 얼른 검을 거둬들였다. 몇 년만에 당해보는 당혹감인지, 맺힌 땀이 턱을 타고 고였다. 그런 가주를 보며 프란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누구……?" 기묘할 정도로 정확한 그 발음에 가주의 눈이 흔들렸다. 프란은 조금 풀린 듯한 표정으로 가주를 보고 있었는데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일종의 광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가주는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날 죽…… 이러……사신…… 아니…… 면…… 천사?" 프란이 더듬더듬 말했다. 말이 너무나 느리게 들려서 그 말을 다 알아드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겨우 몇 마디의 말을 하는데 걸린 시간이 거의 5분에 달했으니, 프란이 얼마나 힘겹게 말했는지는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희미한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아니, 담고 있지 않는 것도 같다. 아무튼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공허해서 평소 시온이 여자를 꼬시는 2단계 수법으로 지어보이는 공허한 눈빛보다 훨씬 그 색채가 짙어 보였다.(1단계는 환한 눈웃음.) "……." '사신' 에 '천사' 라. 가주는 천천이 프란을 마주보았다. 기억 상실이라던가 기억착란이 일어나기 쉬운 것이 크루레티나의 독이기도 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프란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멍하게 풀린 눈으로 존재감만을 읽고 있는 것 같다.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담지 않고 있는 저 눈동자. 그 눈빛에 매료될 것만 같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거는 매혹의 주문. 말하세요. 말해보세요. 말하세요. 말하세요. 갑자기 가주의 미간이 흔들렸다. 그는 색채마저 띄지 않는 프란의 눈을 보았다. 프란의 공허한 눈은 사람을 잡아끌어 몽롱한 상태로 이끄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던 가주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후의 일이었다. "반." 천천히 부드럽게 열려지는 입술 사이로 흐르는 것은 차가울 정도로 냉정한 목소리. 단 한마디뿐이었다. 하지만 달빛의 마혹이 풀린 순간 가주는 입술을 틀어막았다. 가주가 막 입을 막은 그 순간, 프란이 멍한 눈을 하며 물었다. "반……?" "……." 가주는 침묵했다. "반……." 프란이 중얼거리는듯 싶었다. 부드러운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프란은 다음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곧, 그녀가 쌕쌕거리며 다시 잠들었다. 가주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런 프란을 내려다 보았다. 한참동안 얼이 빠져 있던 그가하, 하는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젖히는데, 그런 그의 뒤에서 부스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헉! ……가, 가주님?" 가주는 흠칫한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오늘 여기서 날 봤다는 말을 한다면 네놈의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저택 바깥을 떠돌게 될 거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스웬에게 몇 번이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난 후, 가주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스웬의 방에서 나왔다. 가주의 출현이 의외였는지 눈을 둥그랗게 뜨고 파랗게 질려 버벅거리던 바보 같은 의사만을 남겨두고 바깥으로 나온 가주의 얼굴에는 옅은 수심과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짙은 무엇인가가 드리워져 있었다. 탁, 하고 스웬의 방의 문이 닫혔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방은 을씨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카르멘 가의 깊은 저녁에 이렇게나 흐릿한 것이다. 가주는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쳤군." 문득, 걷고 있던 가주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 찾아보기 힘든 짙은 낭패감이 깔려 있었다. "……." 이 가문을 물려받은 이 년 전 이후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던 이름. 그 이름을 방금 말했다. 그것도 저 웃기지도 않는 시종 나부랭이에게.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카르멘. 그의 이름이다. 반이라는 이름은 어렸을 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철없는 어린 시절, 아름답지만 강했던 어머니와 냉철해 보이지만 다정했던 아버지는 늘 그를 그렇게 불렀다. 「반」이라고. 그 이름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늘 저택에서 갖히다시피해서 생활했던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존재는 극 소수였다. 그래도 행복했던 어린시절. 4년 전, 반의 나이 열다섯 되던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2년 동안이나 비워져 있던 카르멘 가와 아일린 가의 가주라는 자리.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가 들인 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베던 날. 부모님이 주었던 반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아일린, 지독한 고집쟁이 할아범들(아일린 가의 장로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 정통 계승자를 정하는 일 등을 하며 아일린 가의 번성에 한 몫을 한다.)이 들어앉은 그 곳에서 얻은 이름이 시즈. 카르멘 가에서, 역대의 남자 가주에게 전승되는 저스티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두 개의 이름을 나란히 받은 그 날 이후로. 반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불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가르켜 주지 않았다. 반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루이사 가주 때부터 카르멘 가에 있었던 마린이나 로웬 가주 때부터 아일린 가에 있었던 케인 정도. "미쳤군." 정말로 자신이 미쳤다고, 가주…… 아니, 반은 생각했다. 한 순간 정말로 달의 여신이 건 장난에라도 놀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이 튀어나와버렸다.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바빴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분명 오늘 프란이 쓰러졌었고 그가 극도로 혐오해마지 않는 사신이 두 번이나 들낙거렸던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이 어두운 가운데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반이 멈춰선 곳은 복도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던 화려한 그림 앞이었다. 한 벽을 완전히 장식하며 걸려진 복도의 그림은 무척이나 컸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주변을 풍경으로, 아름답게 미소짓고 있는 여신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반은 아무렇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그곳에 손을 갖다댔다. 그리곤 그림을 확하고 왼쪽으로 젖혔다. 순간. 어두운 복도에 일순 빛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고, 그 빛은 거짓말처럼 걷혔다. 이윽고 밀려난 그림의 옆으로 드러난 것은 이상한 모양의 계단이었다. 가주는 무감각하게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림을 도로 왼쪽으로 닫았다. 천천히 그의 발이 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두침침한 통로는 이 곳이 비밀 통로 중 하나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았다. 을씨 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좁고 음습한 그 곳으로 들어선 가주는 어느 순간 멈춰섰다. "……나다." 그 어떤 것도 감돌지 않는 싸늘한 방안의 침묵이 가주를 맞이했다. 안으로부터는 어떤 대답도 없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 침묵을 향해, 가주는 다시 입술을 열어 말했다. "시즈 아일린이다." 순간, 저 멀리 있던 그림자가 휙하는 움직임과 함께 바람처럼 가주의 앞에 들어섰다. "부름을 받습니다." 아리따운 모습의 여인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여인은 착 달라붙은 검을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온통 검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녀가 가주의 앞에 섰고 곧 가주를 향해 부복했다. "부탁이 있다, 켈리." 가주가 무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라니,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비켈린 중 하나로서, 언제나 당신만을 따릅니다. 명령을 내리십시오." 켈리라는 이름의 여인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주는 표정 하나도 얼굴에 띄우지 않은 채로 켈리라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케인을 불러와라. 한 달 이내로는 반드시 돌아오라고 전해라." "……가주님?" 켈리라고 불렸던 여자는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가주는 싸늘한 눈으로 켈리를 보며 마저 말했다. "그리고 알아봐 줘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무, 무엇이든지. 가주님." 켈리가 고개를 떨궜다. "……." 가주는 천천히 입을 열어 몇 가지를 알아 봐 주길 부탁했고, 켈리는 고개를 숙였다. 곧, 흐릿한 잔광을 남기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가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방에서 나왔다. 카르멘 가는 완전한 정적에 빠져들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5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6) 가네트(uznian) 03-11-24 :: :: 13691 「이봐요, 마린. 내가 당신한테 말을 못하고 간 건데 말이야……. 형님은 프란을 죽이진 않을 거야. 뭘 믿고 이렇게 장담하냐고 묻는다면……. 뭐, 나 같은 매력적인 남자가 빠진 여자니 그렇다고 해두지. 그리고 걱정마.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형님한테 일부러 말하겠어? 아……. 하나 더 덧붙이지. 당신은 자는 모습이 깨어있는 모습보다 백 배는 낫군.」 마린은 아침 일찍 일어난 뒤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린애 같은 이 글씨체는 자신에게도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훗, 역시 재미있는 도련님." 조그맣게 중얼거린 마린은 벌떡 일어섰다. 오늘도 역시 할 일이 태산 같이 쌓여 있지만, 그것보다 프란의 건강상태가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마린이었다. 마린은 옆방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 스웬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프란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향해 투박스럽게 뱉어냈다. 그녀의 눈이 번뜩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웬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프란의 손목을 휙하고 낚아챘다. 프란은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어젯밤 내내 고통에 몸부림친 덕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프란은 인상을 팍 써가며 스웬을 보았지만 스웬은 이미 프란의 그런 시선 따위는 의식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 어떻게……! 크루레티나에 중독되었는데……. 어떻게 하루만에 그렇게……!" 스웬은 눈을 부릅뜨며 프란을 향해 경악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금색의 눈동자를 빛내는 눈앞의 소년은 멀뚱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 맹독을 가진 크루레티나를 먹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맑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낚아채진 손목의 맥박은 정상이었고 체온도 안정적이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 하며 정확한 의사 전달은 그녀가 백치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프란은 그런 그의 반응은 생각하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뱉어내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금색의 머리카락이 벅벅 긁혀서 올려나가는 것은 상당히 예쁘게 보이지는 했지만 조금은 바보스럽게 보이는 구실도 하고 있었다. 프란은 막 몸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털석 주저 앉았다. "욱?" 밀려드는 고통은 모두 복부로 집중된 듯, 몸을 일으키려 하자마자 배가 미친 듯이 아파왔다. 프란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자 스웬은 날카롭게 안경을 들어올리며 그런 프란을 살폈다. 그렇게 프란이 끙끙거리고 스웬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을 때, 문이 가볍게 열리면서 근심스러운 얼굴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그러나 프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완전히 굳은 채로 멈춰버렸다. "……프란?"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이를 보았다. 눈이 부실정도로 따가운 햇살 속으로 보이는 저 옆얼굴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역시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일까. 프란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리도 아름답게 보이는가. 왜 이리도 반짝여 보이는 것일까.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봐. 저 인간이 이렇게나 예쁘게 보이다니.' 프란은 속으로 생각한 후, 두 눈에 가득 차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여어, 마린." 프란은 생긋하고 웃어 보였다. 그 순간, 프란의 가슴팍까지 덮여져 있던 이불이 길게 흘러내렸다. 마린은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었다. 프란의 셔츠는 젖었다, 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꾹하고 짠다면 물이 줄줄줄 흘러나올 것도 같다. 마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프란을 보고 있다가 홀린 듯한 걸음걸이로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그리고 냉큼 그녀를 안았다. "놔." 프란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마린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어제 하루 종일 혼자서 수십번은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프란은 마린을 떼낼 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마린은 프란을 꼭 안은 채로 말했다. "괜찮아?" "응." 프란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 "괜찮아." "……머리 아프지 않아?" "응."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아? 생각나지 않는거나……. 그런 건 없어?" "없어." 프란은 한숨을 쉬듯 말하곤 피식 웃어버렸다. 마린은 프란을 다시 한 번 안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기쁜 그녀로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남아 있었다. '어째서? 크루레티나의 독을 하루만에 이겨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건가? ……몰라, 그런 건. 어쨌든 프란이 살아났으니.' 스웬은 마린을 억지로 떼어놓고는 프란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크루레티나의 독이 하루만에 중화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스웬이 의아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득 프란이 고개를 들며 마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마린." "응?" 마린은 프란의 안색을 면밀히 살피며 대답했다. "나……." 꿈을 꾼 것 같다.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희미한 정신 사이로 천사를 보았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환상인지도 모른다. 부서지는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냈던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그것은 정신 없이 앓고 있을 때 보았던 것. 역시 확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사를 만났다. 천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천사인 것 같다. "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뚜렷이 형상화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프란은 매우 궁금했다. 게다가 다시 의식을 잃기 전에 한 마디 들은 것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소년의 이름. 그것마저 환청이라면, 더 이상은 기대할 수 없다. 혹시라도 존재하는 자라면……. 혹시 천사가 아니라 정말로 존재하는 자라면? 프란은 기억을 더듬어 어제 천사가 말했던 그 이름을 떠올려 마린에게 말했다. "혹시 말이야…… . 이 저택에 '빈'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있을까?" 프란이 눈을 살짝 뜨며 물었다. "빈??" 마린은 의아한 듯 뱉어놓고 어깨를 으쓱했다. "음? 모르겠는데? 이 저택에 있는 사람이라면……으음." 그래, 라고 중얼거리며 프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린이 생긋 하고 웃으며 프란을 와락하고 안았다. "……프란!! 살아나서 다행이야." 프란은 마린의 품에 안긴 채로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건 정말 천사였나봐…….' 어젯밤 본 그를 천사라고 확정지은 프란이었다. "아픈 곳은 정말로 없는 건가?" 저 편에 서 있던 스웬이 프란을 보며 물었다. 어제 그렇게나 높은 고열에 시달린 사람치고는 너무 안색이 좋았다. 도저히 크루레티나를 삼킨 사람 같지 않은 그녀의 상태에 스웬은 꽤나 놀랐다. 무엇보다도 스웬이 놀란 것은 프란이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몇 초, 몇 분이었다고는 하지만 뇌에 피가 공급되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바보 내지는 백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프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분하게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없다잖아." 프란은 차갑게 뱉었다. 정말로 아픈 곳은 없었다. 어깨가 조금 결리고 머리가 아프고 구토감이 치밀며 속이 울렁거리고 서 있을 수 없고 일어나면 쓰러질 것 같은 것만 제외한다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이 정도의 고통은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었다. 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고통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이 정도의 고통 정도는. 프란은 비틀거리는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새하얘진 그녀의 안색이 파리하다. "프, 프란? 어디가 아픈 거야?" 마린은 프란의 표정이 갑자기 굳자 놀란 듯 물었다. "……파." "뭐? 아프다구?" 마린이 당황해서 프란을 부축하려 할 때였다. "……배고파." 프란의 말에 경악한 것은 비단 마린뿐만이 아니었다. ▷◀▷◀▷◀▷◀▷◀▷◀▷◀▷◀▷◀▷◀ 프란은 마구잡이로 음식을 퍼담고 있었고 스웬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었다. 크루레티나를 먹은 주제에 대체 왜 저렇게 팔팔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맛있게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 프란을 보던 스웬은 결국 자신의 의술이 너무나도 뛰어나 프란이 쉽게 회복된 것이라고 억지로 결론을 짓고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 스웬은 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프란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고 있던 스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집어들고 있는 기름기 좔좔 흐르는 닭고기를 본 스웬이 냅다 고함을 쳤다. "지금 대체 뭘 먹으려는 거요!" "보면 몰라? 닭고기잖아." 프란은 그 말과 함께 살점을 죽 뜯어 입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날렵한 동작으로 마린이 그런 프란의 손을 저지했다. "프란! 그딴 거 먹으면 안 돼! 빈 속에 기름기가 흐르는 닭고기를 먹어서 뭘 어쩌자는 거야!!" "……조금만 먹을거다." 프란이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스웬이 버럭 고함을 치곤 닭고기를 뺏어 들었고, 마린 역시 불타는 눈으로 말했다. "안 돼." 스웬도 동조했다. 빈속에 저렇게 기름기가 더글거리는 닭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프란의 위장상태가 궁금했다. "쫀쫀하기는……." 프란은 투덜거렸다. ▷◀▷◀▷◀▷◀▷◀▷◀▷◀▷◀▷◀▷◀ 이른 아침. 시온은 부드러운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한참을 뒹굴거리고 있었다. 어제 새벽쯤 마린의 침실에 스리슬쩍 메모 한 장을 끼워 놓고 오는 일을 하느라 밤잠을 조금 설쳤기에 일어나 앉기가 영 불편했다. 시온은 그러나 억지로 몸을 일으키곤 크게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프란은 어떨까……." 시온은 일어나자마자 여자를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해 한참을 웃다말고 옷을 대충 정리한 후 침대에서 일어섰다. 보통 때라면 그의 침대 옆에는 보드라운 피부를 가진 시녀 하나가 잠들어 있어야 했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침대는 그의 혼자만의 것이 되어 있었다. 시온은 스스로를 향해 짙은 미소를 보내주고는 대충 씻기 시작했다. 아무 옷이나 골라 입은 후, 시온은 프란을 보러가려고 문에 손을 댔다. 그런데 문을 열기 바로 직전,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시온의 방문이 열렸다. 시온은 놀라서 앞을 보았다. "……형님?" 시온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뜻밖의 사람이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 이른 아침에 절대로 보여서는 안될 얼굴이 앞에 나타나 있었다. 은은한 은빛을 머금은 보랏빛의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다. 이런 이른 아침에 그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뭘 의미하는 걸까. "형님?" 시온이 다시 한 번 반을 불렀을 때. 그가 말했다. "……시온." 반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특유의 차분함이 깃들어져 있었다. 시온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하듯이 말했다. "따라와라." "……형님?" 이런 이른 아침에 방에 들어와선 '따라와라'라니. 시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뭔가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반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가벼운 향기를 흩뿌리며 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시온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반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시온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따라, 복도에서 부딪히는 시녀들이 너무도 적었다. 그리고 그나마 보이는 시녀들마다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반을 피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복도 끝에 몰려 선 채로 반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온은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형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시온이 반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 "……." 침묵으로 일관하는 반의 태도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반의 걸음은 묵직하고 품위가 있었다. 한참 걷던 반은 저택 밖으로 나섰고, 그 순간 시온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저택에 거주하고 있는 카르멘 가의 사람들이 거의 모두 나온 모양이었다. 드넓기 그지없는 장미 정원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시온은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얼굴을 굳혔다. 저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반이 한발자국 나서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그렇게 외치며 무릎을 꿇었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무릎을 굽히며 외쳤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반은 무릎을 꿇는 사람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본 후 그대로 시선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서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던 시온의 시선이 어느 순간 탁하고 굳어졌다. 사람들이 가득 모인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한 소녀가 보였다.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그 소녀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몸을 떨면서 앉아 있었다.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는 카르멘 가 이른 아침의 장미정원. 카르멘 가 13대 가주 때부터 가꾸어왔다는 화려한 장미의 정원의 가운데에서, 초라한 소녀 하나가 있었다. 잔뜩 찢겨진 옷차림과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확하고 눈에 들어온다. 정원의 한 구석에 앉아 있는 소녀는 입에 무엇인가가 틀어 막혀진 채였다. 한참동안 그것을 보던 시온은 흠칫해서 반을 돌아보았다. "……형님?" 시온이 불안함에 그를 불렀다. 저 너머에서는 헤이튼이 긴장한 표정으로 시온을 보고 있었다. 시온은 고개를 돌려 헤이튼을 마주 보았다. 전대 아일린 가문의 가주였던 로웬의 누이 이진느. 전대 카르멘 가문의 가주였던 루이사의 남동생 헤이튼. 그들이 은밀히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 시온이었지만 헤이튼이 자신을 향해 동지 의식을 불태우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불쾌해졌다. 반은 시온의 곁에서 벗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시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번뜩이는 반의 눈동자가 두렵게 느껴진다. 시온은 숨을 잠시 멈추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위압감이 그를 죄어온다. 시온은 잠시 심장에 손을 댔다. 미칠 듯이 뛰는 근육덩어리의 움직임이 그를 압박했다. 반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은 푸른빛의 광채를 띄는 검. 아름다운 검신을 가진 그 검을 손에 쥔 반은 차갑게 웃음을 흘리더니 장미 정원의 한 가운데에 묶여 있는 소녀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환한 햇살 아래로 그의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풀어라." 누구에게 명령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소녀의 입에 막힌 자결 방지용 마개를 뽑으라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종들은 부랴부랴 소녀의 입에서 그것을 빼어냈다. 소녀는 마개가 뽑히자마자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가주를 향해 외쳤다. "가주님! 억울합니다!" 소녀가 앙칼지게 고함을 내질렀다. 갈색 머리카락에 부릅뜬 갈색 눈동자가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가주를 마주하고 있었는데, 가주의 눈이 일그러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가주의 검이 바람같이 그녀의 목에 겨누어지는 것이 보였다. "누가 시켰나." 반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그 말에, 묶여 있던 그녀는 놀란 듯 눈을 치켜 떴다. "무슨,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시온은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반의 눈은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애가 범인이라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6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7) 가네트(uznian) 03-11-24 :: :: 13449 "누가 시켰나." 반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그 말에, 묶여 있던 그녀는 놀란 듯 눈을 치켜 떴다. 반은 싸늘하게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날카롭게 반사되는 푸른빛의 검신을 보고 있던 소녀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소녀의 눈에 커다랗게 맺힌다고 생각했을 때, 반의 검이 움직였다. 처컥. 풀잎에 손을 딛고 있던 소녀의 눈이 그 순간 굳었다. 손가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들어간 반의 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녀는 떨리는 눈 끝으로 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새하얀 것이 아니라 새파랗게 변한 소녀의 안색은 차마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억울……. 억울합니다……."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얀 얼굴 위로 흐르는 끝도 없는 눈물에도, 반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끄아아악!" "우욱!" "아악!"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경악의 소리가 뒤섞였다. 시온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에 일어난 일을 보았다. 커다랗게 뜨여진 그의 동공 사이에 뭔가 멍한 것이 있었다. 시온은 천천히 손을 들어 눈을 부볐다. "아아악!! 아아악!!" 정원에 앉아 있던 소녀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풀잎에 내딛었던 하얀 손에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짙고 짙고 짙은 피. 새빨간 빛깔을 내는 그것은 소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하얀 앞치마 위로, 새파란 잔디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온은 침울 꿀꺽 삼키며 다시 앞을 보았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반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시녀들은 입을 꾹 틀어막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끅끅거리고 있었다. 틀어막은 입사이로 비명소리와 울음소리, 공포의 비명이 모두 감춰지고 있었다. 채 숨기지 못한 감정들은 점성이 맺힌 끈적끈적한 침이 되어 시녀들의 손금 사이를 타고 내렸다. 반의 검은 새파란 빛을 띈 채로 조금의 피도 묻히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이 베었던 곳에는 피의 보라가 일고 있다. 소녀의 손가락을 잘랐다. 반이. 저 검으로. 시온은 입술을 꾹 깨물곤 반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두 팔을 뻗어 검을 틀어쥐고 있는 반을 뒤에서 안았다. "형님!" 반이 움찔한다 싶었다. 시온은 반을 안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그가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정원에서 파들거리며 비명을 질러 대고 있는 소녀의 오른쪽 약지 손가락은 너덜너덜해진 채로 잔디 위를 구르고 있었다. 잔뜩 피를 머금은 채인 고기 덩어리가 눈앞에 보이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소녀는 고통을 호소하며 잔디 위를 구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경을 따라 움직였던 오른손 약지에서 움직이는 엄청난 고통이 소녀를 압박하는 것 같다. 소녀의 얼굴 위로 가득 떠오른 것. 그것은 오직 고통이라는 감정 뿐이다. 아픔이라는 감정 뿐이다. 시온은 반을 뒤에서 안아 그의 행동을 막은 채로 자그맣게 말했다. "형님답지 않습니다." 시온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반은 고개를 들었다. 시온은 자신의 충고가 듣는다고 생각해서인지 마저 말했다. "……왜 범인인지, 증거가 무엇인지…….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은 형님답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바로 그 순간,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반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움직더니 확하고 시온을 떠밀어냈다. 시온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섰던 반이 갑자기 자신을 밀어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너무나도 간단히 밀려나고 말았다. 손의 힘이 쭉하고 빠져나갔다. 시온은 멍한 눈으로 반의 뒷모습을 보았다. 반은 그런 시온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술에 무덤덤함만을 매단 채로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갔다. 반의 보랏빛 눈동자에 일순 광기가 번뜩였다고 시온은 생각했다. "……누가 시켰지?" 반은 천천히 다가가 다시 검을 들이대며 물었다. 소녀는 검이 다가오자마자 다시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너덜해진 오른손 약지의 고통에 소녀의 인상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소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저, 전 아닙니다!" 핏물이 베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문 소녀가 발악하듯 외쳤다. 반은 그런 소녀를 한참 보고 있다가 말없이 검을 들었다. 순간, 소녀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공포, 공포, 공포. 오로지 그것만이 떠올라 있는 작은 소녀의 눈 사이로, 떨어지는 검이 보인다. "꺄아아아아악!!"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 "마린." 프란은 죽을 먹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린은 먹는 것인지 퍼담는 것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죽을 먹고 있던 프란이 스푼질을 멈추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응?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프란의 오렌지 색 눈동자에 뭔가 이상하다는 기색이 떠올라 있음을 깨달은 마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바로 그 순간, 프란이 먹고 있던 그릇을 밑에 내려놓았다. 기름기가 잔뜩 벤 닭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고 대신 맛이라곤 조금도 없는 죽을 들이밀었던 마린은 그런 프란의 태도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라도 다시 닭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한다면 입을 한 대 처줄것이라고 다짐하며 마린이 프란을 보았다. 하지만 프란의 옅은 핑크빛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 오크라도 잡나……?" 갑자기 무덤한 어투로 프란이 뱉어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응?" 갑자기 나온 그 말에 마린이 의아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죽을 먹다 말고 난데 없이 '어디서 오크라도 잡나'라니. 아닌 밤의 홍두깨라고, 갑작스레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프란은 의아함을 가득 드러내는 눈을 자신의 앞에 바짝 들이대는 마린의 얼굴을 오른쪽으로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아까부터…… 피냄새가……."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 전부터 지나칠 정도로 짙은 피냄새가 정원 쪽으로부터 풍겨져 오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카세타의 여름을 강타하는 서북풍 때문에 정원의 향은 그대로 이 방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원래 대로라면 서북풍을 타고 전해지는 것은 혈향이 아니라 매혹적인 장미의 향기여야 했다. 그런데, 코끝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 냄새. 이것의 정체는 말할 것도 없이 피. 살아있는 자의 몸뚱이에서 바로 뿜어져 나온 자욱한 피의 냄새였다. 똑똑하게 방으로 전해지는 냄새에 프란은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나풀거리는 하얀 커튼 사이로 흐릿하게 번지는 혈향을 맡으며 프란은 들고 있던 스푼마저 내려놓았다. 프란은 비틀거리는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아아, 잠깐만. 프란……." 마린은 프란이 일어서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말리려 했지만, 프란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선 후였다. 마린의 생각보다 훨씬 간단히 침대에서 일어선 프란은 비틀거리는 움직임으로 천천히 창문 가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마린과 프란이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었던 스웬은 그런 프란을 유심하게 관찰했다. 걷는데도 무리가 없어진 것인지,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프란은 몸을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스웬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발했다. 프란은 창가에 섰다. 은은하게 풍겨져 오는 장미향과 더불어 흐릿하게 전달되는 피의 냄새. 정확했다. 그녀의 후각은 말하고 있었다. 정원에서, 분명히 피의 축제가 벌어져 있다고.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릿하게 아파오는 복부에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것은 무시했다. "……." 잘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장미정원은 온통 나무로 둘러 쌓여 있고, 그 나무 안 쪽으로 아름다운 장미가 몇 겹이나 둘러 쌓여져 있기에 창가에 선 채로 그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가능했다. 프란은 결국 뻐근해진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다음 창문가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마린을 향해 말했다. "이봐, 아줌마. 여긴 오크 같은 거 안 키우지?" 마린은 난데없는 질문에 어이가 없어졌다. 카르멘 가에서 오크를 키운다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린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오크를 키우는 사람도 있어?" "혹시 모르지. 오크를 잔뜩 잡아 놓고 그걸 상대로 검을 훈련할지도 모르잖아. 원래 카르멘 가의 검훈련은 괴팍하다고 소문이 나 있거든." "훗, 상상력도 풍부하군." 마린은 웃어버렸다. 프란은 마린의 웃음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린은 프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잠깐." 프란은 뭐냐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내가 왜 아줌마야?" 마린은 새삼스럽게 프란의 말 속에서 찾아낸 기분 나쁜 한마디에 대해 물었고, 프란은 늘 그럿듯이 당당한 어조로 대답해주었다. "그럼, 그 나이 먹어서 뭐라고 불리길 원해?" 마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근사근 하게 '마린'이라고 불러줬던 주제에 왜 갑자기 '아줌마'라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호칭을 쓴단 말인가? "……나 아직 결혼 안 했어." 마린의 무게 있는 한마디에 프란은 곧장 대답했다. "알았어, 노처녀." 마린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튀어나오는 그 노처녀란 단어에 발끈했지만 역시 오랜 연륜으로 꾹하고 누르며 호호, 하고 웃었다. 속으로 칼날을 마음껏 갈면서 마린이 일어섰다. 방 안 쪽으로 걷는 프란에게 다가가 그녀를 막 부축하려고 하는데, 프란이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다. "……프란?" 마린은 프란이 침대 쪽으로 오다가 말고 머리를 대충 매만지는 것을 보며 호기심을 보였다. 프란은 손을 들어 천천히 옷깃을 정리하고 있었다. 초췌해진 안색으로 옷매무시를 가볍게 다듬은 프란은 마린을 한차례 돌아본 후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정원에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 "누가 시켰나." 콰직! "우욱! 아악!" 검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찢어지는 소녀의 고함 소리가 정원을 뒤흔들었다.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시녀들은 물론이고, 카르멘 가의 호위무사들, 심지어는 훈련생들까지도 고개를 돌리려 한 순간이었다. 반이 차갑게 말한 것은. "고개를 돌리지 마라." 고개를 돌린 채 이 끔찍한 상황이 종료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빌고 또 빌고 있었던 사람들은 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움찔했다. 사람들의 몸은 저 끔찍한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여린 감성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려하고 있었지만, 반의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은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자들을 향해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 마라고 했다!!" 커다란 목소리에 사람들은 천천히 다시 반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무덤덤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표정조차 없는 소년이 보인다. 마치 짚단 썰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녀의 몸 여기저기에 검으로 고문을 행하고 있는 반의 얼굴을 보던 그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아무리 참고 보려해도 감각은 거부하고 있었다. 속을 뒤집어 버리는 엄청난 구토감에 미칠 지경이었다. 시온은 인상을 완전히 굳힌 채로 반을 보고 있었다.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모릅……" 소녀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피에 잔뜩 젖어 있다. 앞치마가 반쯤 찢어졌고 얼굴 가득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온 몸에는 깊은 상처부터 가벼운 상처까지 온갖 종류의 상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녀의 눈동자는 멍하게 풀려 있었지만 억울하다는 듯 움직이는 그 입술만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반은 이번엔 검을 들어올려 소녀의 어깨에 갖다댔다. 소녀는 이제 두려움이라는 감정조차 묻어 있지 않은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멍하게 풀린 것 같은 소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만이 의지도 없이 흘러 내렸다. 고통에서일까. 억울함에서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단순한 공포감에서일까. 소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주님…… 저는 모릅니다. 절대로 모르는 일입니다. 모릅니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말에 시온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형님!" 시온은 커다랗게 외쳤다. 그러나 반은 돌아보지 않았다. 시온은 그런 반을 향해 다시금 외쳤다. "너무하십니다, 형님! 증거가 있는 겁니까? 증거가 있다면 그 증거를 말씀하시고 그런 짓을 해도 늦진 않습니다!" 시온이 막 외친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시온의 팔목을 붙잡아 그의 말을 저지했다. 시온은 움찔해서 뒤로 돌았다. 그리고 그 곳에 선 자를 발견한 시온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헤이튼……?" 검을 찬 중년의 사내를 발견한 시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일린 가의 어린 도련님, 가만히 계시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헤이튼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온은 그의 말속에 들어 있는 '어린 도련님'이라는 말에 발끈해서 뭐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바로 그 때 앞에서 전해져오는 시선을 느끼곤 움찔 얼어버렸다. 그는 헤이튼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있는 한쌍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반의 시선을 받은 시온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을 보고 있는 소년은 피 한방울도 묻어 있지 않은 채로, 오늘 아침 자신을 깨우러 들어온 그 모습 그대로였다. 소녀를 그토록 난도질하고 있었지만, 반의 몸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젖은 것처럼 보이는 걸까. 눈에 보이지 않는 새빨간 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것 같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형이라고는 하지만 자신과 겨우 몇 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름다운 사촌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는 반대로 너무나 차가워 심장조차 얼어붙지 않았나 싶은 사람. "……얌전히 있으시오!" 헤이튼의 단호한 어조에 시온은 몸을 움찔 떨었다. 반은 도로 시온에게서 시선을 돌려 소녀에게로 가져갔다. 헤이튼은 시온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째서 모르는건가. 저건 경고요!" "……경고?" 시온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저 소녀는 범인이 아닐 수도 있소." 헤이튼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온의 몸이 그 말을 들은 순간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런 시온의 몸을 붙잡고 있던 헤이튼이 계속 말했다. "가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범인을 찾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과 '지금 자리에 방해가 되는 자'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내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 ……그런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말이오. 왜 가주님이 아침에 굳이 당신을 데리러 갔는지 생각이나 해보셨소?" 시온은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악! 가주님……! 살려주십시오! 가주님! 가주님!!!" 반의 앞에 있는 소녀가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제 소녀에게 손가락은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잔인한 분." 입술을 꾹 깨물며 시온이 말했다. "유니!!" 바로 그 때, 그들의 뒤에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시온이 확 하고 고개를 젖혔다. 뒤를 돌아본 시온의 눈이 확하고 커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린의 훤칠한 키였다. 마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난도질 당한 소녀를 보고 있었다. 평소의 그 차분한 여우의 성격은 어디로 갔는지, 마린은 잔뜩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 "프란……." 시온은 중얼거리듯이 프란의 이름을 불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7 :: 오! 나의 주인님- PART 7: 시온과 반(1) 가네트(uznian) 03-11-24 :: :: 15297 "……." 자욱한 피냄새를 맡고 정원에 들어섰던 프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가 한참만에 가라앉았다. 어제 저녁 내도록 올랐던 열 때문에 흘렀던 것과 다른 종류의 땀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차갑게 식은 땀. 프란은 턱 끝에 고였다가 찬찬히 떨어지는 땀을 손으로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었다. 익숙한 빛깔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윤기를 내고 있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년. 하얀 손 위로 푸른빛을 띄는 검 한자루가 들려 있다. 프란은 주먹을 꾹 쥐었다. 저 검을 보는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저 검을 자신이 잡아본 적도 있었다. 완연한 푸른빛을 띄고 있는 아름다운 검. 가주의 상징이라는 검. 반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뒷시선을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은보랏빛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움직였다. 그는 검을 든 자세에서 오로지 고개만을 돌려 프란을 보았다. 그리고, 프란과 반의 눈이 정확하게 맞부딪혔다. 그 순간, 냉묵 했던 반의 표정이 움찔하고 굳었다. 그는 잠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프란을 빤히 보았다. 멀쩡하게 정원에 디디고 서 있는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반은 그대로 검을 든 채로 잠시 굳어진 듯 프란을 보았다. '일어난 건가? 크루레티나를 먹고 하루 만에? 어제만 해도 죽을 듯이 비명을 질러댄 주제에…… 일어났단 말인가?' 어제 저녁 자신이 '반'이라는 이름을 가르켜 줬다는 사실이 생각나 문득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곧 반은 그 어설픈 감정을 지워버리고 냉묵함을 되찾았다. 워낙에 자신도 정신이 없던 도중이었고, 프란 역시 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벌어진 일이니 그녀가 굳이 기억을 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반은 한참동안 프란을 보았다. "……." 하지만, 반이 프란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란은 반에게 조금의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반의 검앞에서 온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시녀를 향해 눈빛을 주고 있었다. 프란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프란은 한발한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반은 그런 프란을 본 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한 발을 뒤로 물러섰다. 물러 선 순간, 반은 의구심을 가졌다. 내가 왜 물러선 것일까? 반은 이해할 수가 없어 스스로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종 따위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데 긴장해서 물러서다니.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반의 바로 앞까지, 프란은 그 어떤 제제도 받지 않은 채로 걸어 들어왔다. 마린은 놀라서 프란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반의 눈동자와 부딪혀서 움찔 얼고 말았고 시온 역시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한 채 프란의 움직임을 방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을 든채 소녀에게 그것을 들이대고 있는 가주의 바로 앞에서 프란의 발이 멈추었다. 그리고, 프란의 눈동자에서 일순 불이 일었다고 생각했다. "……뭐……." 프란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뭡니까…… 이건." 프란은 검 앞에 놓여 있는 소녀를 보며 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른 소녀는, 프란도 주방에서 몇 번쯤 마주쳤던 소녀였다. 수줍게 웃곤 하던 그 소녀는 너무나도 말이 없어 뮤에게서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마저 들을 정도로 얌전한 소녀였다. 한 번 화가나면 굉장히 무섭다는 뮤의 말을 거짓말로 알아들을만큼 조용한 소녀였다. 그 소녀가, 온 몸이 다 난도질당한 채로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느낌에 프란은 몸을 떨었다. 기사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서,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있지 않은가. 검의 본가이자 기사의 가문이라 불리워지는 가문의 주인인자가 그런것조차 모르는 것인가! 프란은 목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분노에 고개를 휙 돌려 반을 노려보았다. 이글거리는 프란의 눈과 마주친 반은 그러나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표정만이 있을 뿐, 그는 침묵하고 있었다. 프란은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대체 자신이 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몸에 피를 철철철 흘리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내밀어졌다. 소녀는 갑자기 내밀어진 프란의 손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으라는 듯이, 프란의 굳은살 가득박힌 손이 내밀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랑.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프란의 목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그대로 목이 베어져 피가 나올 것 같다. 차갑게 드리워진 검은 프란의 목 언저리에서 정확하게 멈춰 있었다. "멈춰라." 검이 들이대어짐과 동시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프란의 움직임이 움찔하고 굳었다. 목에 겨누어진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프란은 눈을 돌렸다. 문득, 프란의 얼굴 위로 가득한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차 눈물로 와해 되어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 대체 어째서 저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죄가 있다면 차라리 단칼에 죽여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프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 프란을 보고 있던 반의 얼굴이 일순간 흔들렸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가주님!" 프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굳어버린 오렌지색 눈동자를 보고 있는 반의 눈동자가 다시 차분해졌다. 반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독을 탔을지도 모르는 자다." "'독을 탔을지도 모르는 자' 라구요?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독을 탔을지도 모르는 자' 라는 말은 독을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이실 작정입니까!!" 프란이 버럭 고함을 쳤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굳었다. 특히 저 멀리서 그런 프란을 보고 있던 뮤의 얼굴이 가장 굳어져 있었다. "프란……." 프란의 걱정으로 터질 것 같은 뮤의 나즉한 부름이 애잔하게 울렸다.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반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과 그대로 마주하고 있던 프란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확하고 눌렀다. 반이 의아함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갑자기 프란이 털썩하고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저도 여기 앉아야겠지요? '독약을 탔을지도 모르는 사람' 이니까요. 어서 찔러 보시지요!" 프란이 그렇게 말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피로 흥건했던 잔디 위로 프란이 앉자, 그 피가 프란의 하얀 옷 위를 물들여 나가기 시작했다. 반은 그런 프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반은 프란을 보고 있었다. 둘 사이의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될 정도로 오랫동안. 반의 얼굴은 냉철했고 동시에 무감정했다. 프란은 그리고 그런 반을 향해 번뜩이는 눈을 들이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놀라고 있었다. 감자나 깎던 소년의 어디에서 저런 베짱이 나왔는지, 저런 말도 안되는 무모함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어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가득 당혹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번뜩이는 프란의 눈을 보고 있는 반의 눈동자는 매서웠다. 그렇게 한참동안 프란의 눈을 마주하고 있던 반은 훗, 하고 어느 순간 가볍게 웃었다. 그의 눈이 무섭게 들어올려져 잇는 것을 보고 있던 시온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안 돼!! 형님이 진짜로 화가 났다!!' "……." 반의 검이 싸늘하게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프란은 그 검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반의 검끝이 프란의 목젖을 향했다. 사락. 반의 검이 높게 들어올려졌다. 싸늘하게 굳어진 반의 눈은 당장이라도 프란을 베어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다. 막 프란의 목에 반의 검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기다려주십시오, 형…… 아니, 가주님!!" 뒤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목소리. 반은 차가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시온은 그 얼굴에 피조차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곤 잠시 팔을 문질렀다. 반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다는 것조차 버겁다. 시온이 다가서자 반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뭔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반은 그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온을 보았다. 시온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한 달 안에 제가 '진짜' 범인을 잡겠다는 말입니다. 저기 있는 저 소녀는 기껏해야 '수행자'일 뿐일 겁니다. 제가 범인을 잡겠습니다." "……." 반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사촌을 물끄러미 보았다. 살짝 떨리고 있는 초록색 눈은 있는 힘을 다해 당혹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검을 치워주십시오." 시온의 말에 반의 얼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의 검은 프란의 목에서 단 1리텐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굳어진 듯한 그의 팔을 보고 있던 시온이 입술을 뗐다. "……만약 잡지 못한다면." 시온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 무엇인가 굉장히 기백이 들어간 프란은 반의 뒤를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시온이 그런 말을 한 후, 반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정원에서 빠져나갔고 프란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런 반을 따라가고 있었다. 뒤에서는 뮤가 걱정스러운 눈을 보내오고 있었지만 프란은 가볍게 웃어주는 것으로 그녀의 걱정을 해결하려고 했다. 반은 묵묵한 걸음걸이로 자신을 따라오는 프란을 단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걷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프란의 목덜미에 드리워져 있던 검은 이제 반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으로 자리를 옮겨 가죽 광택 속으로 자신의 빛깔을 감추고 있었다. 반과 프란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차마 감당해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오르고 있었다. 말없이 등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반을 바라보고 있던 마린의 눈에서는 안도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뮤는 혼자서 저택으로 들어서는 반을 따라가는 프란의 등을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다리에 기운이 빠져 털썩하고 쓰러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린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명령하듯 말했다. "유니를 데려가, 스웬에게로." "네? 하지만 마린님! 이 애는……." '이 애는 가주님이 독약 암살자로 지목한 애인데요……'라고 말하려던 시종은 그러나, 마린의 쏘는 듯한 눈빛에 유니를 업었다. 온 몸이 엉망진창이 된 유니는 마린을 바라보며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마린님…… 저는…… 독약을 타지…… 않았어요…… 마린님…… 저는……" "됐어." 마린은 끊임없이 눈물을 쏟는, 손가락조차 몇 개 남지 않은 그 소녀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곤 말했다. 한 시종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소녀를 업었다. 마린은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지는 유니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시온을 보았다. "도련님, 술이나 한 잔 마실까요?" ▷◀▷◀▷◀▷◀▷◀▷◀▷◀▷◀▷◀▷◀ 프란은 반의 걸음을 따라 끝까지 걷고 있었다. 반은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저벅저벅 앞서나가다가 어느 복도에서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예고도 없이 멈춰서자 프란도 흠칫해서 멈춰 섰다. 반은 멈춰선지 한참만에야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달린 샹드리에가 돌아서는 반의 화려한 얼굴을 조명했다. 기묘한 음영이 늘어진 소년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그 얼굴을 보며 프란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얼굴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 빌어먹을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외모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불빛이 얼굴살을 희미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내리고 있는 반의 얼굴은 역시 사내 녀석의 그것치고는 너무 곱상했다. '젠장! 저렇게 성격이 더러우면 얼굴도 못 생겨야지!!!' 프란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반이 한참동안 시선의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 투덜거림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반은 프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마치 프란의 얼굴을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프란을 보던 반의 오른손이 갑작스럽게 위로 들어올려졌다. 프란은 거의 반 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때린다!' 프란의 눈이 질끈 감겼다. '저도 찔러 보시지요' 라고 했을 때,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검을 들어올렸던 저 소년이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자신을 때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란이 눈을 감음과 동시에, 반의 손가락이 프란의 얼굴 쪽으로 올라왔고 프란은 눈을 더더욱 세게 감았다. 차가운 오른손이 자신의 뺨을 불게 물들일 것이라 생각하며 프란은 있는 힘껏 이빨을 깨물었다. 입안이 터지지 않을 것을 빌면서. 하지만. 다음 순간, 프란의 귀를 두드린 것은 자신의 뺨을 울리는 반의 얼얼한 손바닥 소리가 아니라, 조용히 메아리치는 반의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나서지 마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올려진 반의 손은 프란의 어디도 때리지 않았다. 천천히 올려진 반의 손은 천천히 내려와 프란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프란은 이 뜻밖의 상황에 멍한 얼굴로 눈을 꿈뻑거렸다. 반은 싸늘한 얼굴로 그 어깨를 한 번 쳤다. "……내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에 프란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주홍빛을 뿜는 기괴한 모양의 샹드리에서 반사되는 반의 얼굴을 보던 프란의 얼굴에 어느 순간, 핏기가 사라졌다. 프란은 문득 머릿속에서 어떤 것이 이미지화되는 것을 느꼈다. 프란은 도로 손을 거두어 들이는 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주의 얼굴과 자신의 머릿속을 번갈아 가며 살피던 프란이 어느 순간 찬찬히, 정말이지 찬찬히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가주님." 경고 아닌 경고, 충고 아닌 충고, 따뜻함이 없는 따뜻함으로 프란에게 말을 건넸던 반은 돌아서려던 찰나 프란이 부르자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뭐냐는 듯한 눈으로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그런 반을 갑자기 쏘아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 "……혹시…… 제가…… 기절했을 때…… 한 번이라도…… 보러 오신적이 있었나요?" 왜 이런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 것일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서 괜히 무안해진다. 민망해진다. 프란은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반을 똑바로 보았다. 달의 음영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던 천사의 모습이 왜, 갑자기 반과 겹쳐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 성질머리 더러운 가주가 자신을 보러 왔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프란은 뚫어져라 반을 보고 있었다. 반은 말없이 그런 프란을 보았다. 침묵. 1초, 2초…… 마음의 초시계가 따각거리며 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열심히 재고 있던 프란은 반의 입술이 열릴 기미를 보이는 것을 보며 눈을 들었다. 반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란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뭐하러 너따위를 보러 간다는 거지?" "……." '쳇, 그럴 줄 알았어.' 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반을 보았다. 단 한순간이나마 자신이 보았던 천사를 이런 싸가지 만땅에 재수 없는 놈과 비교했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했다. 그녀는 자신의 천사에게 천천히 사과를 몇 번이나 한 다음 반을 올려다보았다. 반의 눈은 여전히 싸늘했고 그 눈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차가움이 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인 냉정함이 깃들어져 있었다. 가라앉은 반의 눈을 보고 있던 프란이 말했다. "……." 반은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조금 이상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네가 더 이상하다.'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대체가 이 녀석의 머릿속은 종잡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찔러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온갖 난리를 떨어댔던 주제에, 저택으로 돌아서는 자신을 줄레줄레 따라온 것도 내심 황당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까 전의 일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맹한 얼굴로 뭔가를 질문하는 듯한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반이 당황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동그란 눈으로 반을 바라 보며 말했다. "왜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 가주님을 가주님이라고 부르죠? 가주님한테도 이름은 있을 텐데." 프란의 말에 반의 몸이 설핏 굳는다 싶었지만 그건 일순간이었다. 반은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나, 혹은 그 하수, 또는 그와 친근할 때나 가능한 것이지. 감히 내 이름을 부를 만한 존재가 이 저택에 있을 것 같은가?" '잘났어, 정말.'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반을 보았다. 반의 보랏빛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가봐라." 반은 그 말과 함께 돌아섰다. 프란은 말 없이 돌아서 버렸다. 가주가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돌아서서 나가기 전에 당연히 고개를 숙여 뭐라고 인사의 말을 했어야 했으나 프란에게 그런 예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란 프리텐." 문득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고 프란은 멈춰섰다. 반은 멈춰서지 않은 채 걸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을 늦게 가지고 오면 죽여버리겠다." "……나쁜 놈, 싸가지 없는 놈, 버릇없는 놈, 성격 드러운 놈……." 투덜거리면서도, 왜 입가엔 미소가 있는건지 모른다. 사람을 그렇게나 잔인하게 고문하고 있던 사람인데도. 막상 앞에서면 그리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러니까 왜 얼굴이 잘 생긴거냐고." 프란은 투덜거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8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2) 가네트(uznian) 03-11-24 :: :: 18359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거예요?" 마린은 쇼파에 털썩 몸을 기대앉는 시온에게 물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던 시온은 뒷머리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시온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괜찮잖아? 일이 원만하게 수습되었어." 마린은 그의 그 말에 기가막혀 소리를 질렀다. "뭐가 원만하게 수습되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안 나섰으면 프란이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마린은 그런 그의 말에 잠시 움찔했다. 그렇다면 아까 전의 그 것이, 단지 프란을 위한 행동이었단 말인가. '쳇, 이 바람둥이가 이번엔 진심인가 보지?' 마린은 턱을 괴고 시온을 보았다. 술 한잔을 들이키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여태까지 와는 달리 무척이나 매력있어 보였다. 마린은 슬쩍 웃어버렸다. 그런 마린을 향해, 시온이 말했다. "범인잡는거, 당신도 도와줄거지?" "……매력적이라는 거 취소." "응? 뭐라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영문모를 말에 당황한 시온이 묻자, 마린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 "……혹시 가주한테는 이름도 없는 건가?" 문득 프란이 중얼거렸고, 그녀를 진단하고 있던 스웬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몸은 움직이지마라" "……젠장맞을. 대충대충 하란 말이야!" 프란은 낮게 윽박질렀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진단해보고 있는 스웬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스웬이 피식 웃으며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는 프란의 몸을 한 번 다시 한 번 진단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상해. 루넨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크루레티나가 몸에서 모두 중화가 된 것 같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에?" "옛날부터 독에 면역성이 있었나?" 스웬의 말에 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 게 뭐냐." "알 게 뭐냐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는 한 번 프란을 보고 다시 뭔가를 점검하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프란이 화를 냈다. "나한테 이런 쓸 데 없는 짓 할 시간이 있으면 저 애나 돌봐 주란 말이야, 이 돌팔이 의사 야!!" 그 말에 스웬은 피식 웃었다. 스웬은 자신의 뒤에 놓여 있던 커튼을 슥하고 걷었다. 차리한 안색의 소녀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손가락이 몇 개 잘린 소녀는 미친 듯이 신음을 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프란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스웬은 소녀를 보며 말했다. "저 애에게 필요한 치료는 다 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칫." 프란은 아직도 끙끙거리고 있는 유니 쪽으로 다가갔다. 유니는 프란을 보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기운이 없는 그 웃음을 보고 있던 프란이 말했다. "유니." "……하아하아…… ……응?" "힘내." 프란은 그렇게 말해놓고 벌떡 일어섰다. 스웬이 한 번은 꼭 자신에게 다시 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왔긴 했지만, 이 장소에는 그리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가주의 손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 버린 소녀 따위를 보고 싶은 마음은 프란에게 없었다. 프란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편히 쉬고 싶었다. 프란이 딸깍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스웬은 어느 순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얀색, 청결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병원용 커튼을 걷은 스웬은 그 곳으로 걸었다. 창백한 얼굴로 누운 유니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 하루 미친 듯한 모습의 가주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했던 유니 쪽으로 간 스웬은 유니의 힘없는 얼굴을 보며 씩 하고 웃었다. 땀에 젖어 있던 유니가 눈을 뜬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웬님." 옷조차 찢어지고, 아직 피조차 마르지 않은 모습으로 유니가 스웬을 불렀다. 스웬은 살짝 웃으며 그런 유니를 보았다. "……죄송해요, 스웬님. 실패해버렸으니……." 유니가 문득 죄스럽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너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지 않느냐? ……잘했다." 스웬의 그 말에 여태까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끙끙대고 있던 유니의 인상이 어느 정도 펴졌다. 유니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스웬을 향해 말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 손가락요…… 몇 개나 남았죠?" 스웬은 그렇게 묻는 유니의 머리카락을 몇 번 토닥여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입을 다물고 있어준 것에 대해 '그 분'은 매우 고마워하고 계신다. 손가락이 없어도 평생 먹고 놀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생길테니…… 염려 하지 말고 지금은 그냥 푹 쉬기나 하렴." 스웬의 말에 유니의 얼굴이 조금 평화스러워졌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는 유니의 얼굴에는 가득한 고통이 떠올라 있었지만, 그 내면에 있는 약간의 평화스러움은 그녀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평온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니는 웃었다. 오늘 죽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 유니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 싸늘하고 아름다운 그 가주가 자신의 목에 푸른색의 검을 드리웠을 땐, 그 땐 정말이지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그 자리에서 목이 뎅강 잘려 버리는 줄 알았다. 자신도 모르게 '저 분이 시켰어요'라고 말을 할 뻔 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을 탁하고 가리키며 저 자가 그걸 시킨 범인이에요, 라고 몇 번이나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꾹하고 눌러 참았다. '이제 됐어……' 유니는 웃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이제 가족들은 굶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사람은 그녀에게 50케트를 주기로 했었고 그 정도 돈이면 어디서든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다. 비밀은 지켰다. 손가락이 몇 개 잘리긴 했지만, 스웬의 말대로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평생동안 먹을 수 있다. 이제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을테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몸을 팔지 않아도 되고, 동생들은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시녀로 팔려온 그녀의 몸도 '그 분'의 배려로 풀려날 것이다. "……고마워요, 스웬님…… 약이 잘 듣나봐요…… 고통이 가라앉네요……." 유니는 흐뭇하지만, 전혀 말이되지 않는 상상을 하며 말했다. 천천히 그녀의 눈꺼풀이 덮였다. 스웬은 잠에 빠져든 듯 곧 입을 다무는 유니를 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잠든 유니에게 다가가 이불을 들었다. 그리고 유니의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유니는 곤히 잠에 빠졌는지 이불이 머리 끝까지 올라오든 말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스웬은 다시 한 번 웃은 다음 발걸음을 움직여 창가에 기대섰다. 그는 유니를 한 번 돌아보다가 시선을 돌려 밤의 여신이 마음껏 은빛 구슬을 흩트러뜨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즈-아일린. 저스티스-카르멘……." 그 하늘을 보며 어떤 이름을 한 번 죽 읊은 그는 창가에 기대 선 채로 안경을 벗었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긴 정말 재미있는 저택이군." 스웬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웬은 잠시, 아끼 전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가진 건방진 꼬마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놈들도 꽤나 많은 곳이고 말이야." 스웬은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의 앞에서 잔뜩 위축되어 쩔쩔맸던 한심한 의사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 "……그렇게 속아주는 것이지." 반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냉소적인 웃음. 차갑고 차갑기 그지없는 웃음을 짓던 반은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기울였다. 독하디 독한 파인드 글란드가 잔에 소리를 내며 담기기 시작했다. 투명한 글라스에 가득 붉은 술이 가득 담기자, 반은 그것을 들어 입술에 갖다댔다. 독한 파인드 글란드의 향이 머릿속으로 짜하게 스며들었다. 최고급 독주(毒酒)를 한참 들이키던 반은 차가운 입술에 따뜻한 술 한방울을 일부러 흘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속이고, 속이고, 속이고…… 속고, 속고, 속고…… 큭큭큭." 반은 갑자기 웃으며 술을 기울였다. 약간 광적인 맛이 나는 그의 눈동자가 약간 희뿌옇게 변해 있었다.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반의 눈동자는 조금 몽롱해져 있었다. "……목을 베야 하겠지…… 나를 기만한 놈은……?" 반은 잠시 다시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킨다. "……나답지 않은 행동인 건가." 술을 마시는 반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반은 침대 위에 가볍게 누우며 이번에는 술병 째로 술을 들이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함이 녹아 들어있는 얼굴로 침대에 누운 반의 얼굴은 이상한 감정으로 뒤범벅 되어 있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취한 듯한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새어나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누구냐." 이 방에는 분명 반의 모습말고는 비춰지지 않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을 조명해내는 달이 비춰내는 존재는 오직 보랏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소년 뿐이다. 그러나 반은, 누군가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감은 채로 허공을 향해 뱉어냈다. "오른쪽 두 번째 창가에 서 있는 너. 대답해라" 그 말을 뱉어냄과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속도로 반의 몸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침대에서 잽싸게 뛰어 내려 창가로 뛰어 갔다. 그런 그의 움직임이 마치 빛 같다. 쇄도해 들어가는 빛 같은 움직임으로, 그는 창가에 섰다. 척. 반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동작으로 검집에 손을 갖다댔다. 그가 막 검을 뽑아들려는 찰나였다. 그 그림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반은 흠칫해서 손을 멈추었다. "……가주님." 익숙한 목소리다. 반은 움찔하며 그 그림자를 보았다. "……케인……?" "……속하, 오랜만에 가주님을 뵙습니다."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달, 카세타의 하늘 위로 걸린 비나룬이 구부린 허리로 세상을 굽어보는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그 달의 자태를 흉내라도 내는 듯 똑같이 허리를 구부리며 말하고 있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는 달의 모습과, 검은 옷을 입은 채로 허리를 굽히는 남자의 모습은 기묘할 정도로 비슷한 면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날렵하게 검을 꺼내들었었던 반은 그렇게 부복하는 남자를 잠시 보았다. 금발, 그리고 언제 보아도 감정이라곤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차가운 저 표정. 비켈린의 대장중 하나이자, 프란을 이 곳으로 안내해왔던 그 남자. 반은 말없이 자신에게 예의를 표하는 케인을 보았다. "왜 아무 기척도 없이 그 곳에 있었던 건가?" "……죄송합니다. 너무 심난해 보이시기에." 반이 술을 마실 때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기척조차 숨기고 있었다는 말을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줄여서 케인이 말했다. 반은 지나칠 정도로 고지식한 눈앞의 남자를 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대로 베어버리면 어떡하려고 했지?" "그 검에 죽는다는 것도 영광입니다." 감정이라곤 묻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케인이 대답했다. 반은 차가운 얼굴로 그런 케인을 보았다. 표정을 잘 짓지 않는 두 남자의 얼음 같은 냉묵한 표정은, 그들을 지켜보는 제 3자가 있다면 꽤나 불편한 감정을 가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달조차 그들의 딱딱한 표정에 민망스러워져 구름 뒤로 몸을 숨겼을 정도로, 그들의 표정은 차가웠다. 프란이 봤다면 얼음 인형이 두 개 서 있다며 발작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반은 한참 케인을 보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저 멀리 놓여져 있는 쇼파 쪽으로 걸어갔다. 푹신한 쇼파 위에 앉은 반은 손짓을 해서 케인을 불렀다. 반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케인에게 쇼파에 앉을 것을 권했지만, 케인은 앉지 않았다. "켈리에게 전갈은 제대로 받았는가?" 반의 말에 케인이 깊숙이 고개를 떨궜다. "네. 일이 끝나자마자 오는 길입니다." 케인의 입은 짤막한 보고와 함께 다시 침묵을 했다. 반은 쇼파에 기대앉아 가볍게 숨을 골랐다. 아까 마셨던 술의 취기가 조금 올라 있었지만 이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몇 번 심호흡을 크게 한 그의 목소리가 잠시 후 투명하게 울려졌다. "……내가 부른 이유는 알고 있는가?" 케인은 그 말에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 준비' 가 필요하신 겁니까?" 반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은 잠시 반을 보았다. 보랏빛 머리카락이 사라락, 가느다랗게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케인은 천천히 고개를떨구었다. 이 어린 가주……. 어린 시절부터 커오는 과정을 지켜봐 왔던 이 소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어린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소년. 싸늘해진 눈매는 이제 케인의 가슴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싸늘해져 있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들이지 않은가. 자리를 차지 못하면 죽는다. 살아야만 한다고 소년에게 말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살기 위해 필요했던 잔임함과 싸늘함. 그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왜 갑자기……. 3년 후에 하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도대체가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케인은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었고 반 역시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내 찻잔에 독약 따위를 타는 놈들이 저택에 있는 한…… 다가오는 그 날, 날짜에 맞춰서 '그 것'을 하겠다. ……'진짜 가주'로 인정받으려면…… 역시 '그 것' 을 하는 수밖에 없어." 케인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주먹을 내렸다. "……수행하겠습니다." 반은 그런 케인을 한 번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수고해라." 케인은 반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 수고하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적어도 저 자리에 앉아 '반'이라는 이름을 버린 후로는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케인은 반의 얼굴을 보며 낮게 숨을 삼켰다. "너는 아직 못 들었을 테지? 알려 둘 게 있다." 반이 입술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케인은 낮게 말했고 반은 천천히 그런 케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한 달 후, 아일린 가로 돌아간다. 그 사이에 카르멘 가의 불안 요소들을 제거하겠다." "……." 케인의 얼굴이 환하게 피는 것을 보며 반은 피식 그 고운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환하게 터지는 소년다운 웃음이 아니라, 그저 가볍게 머물다 사라지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웃음이긴 했지만.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반은 딱 잘라 말하곤 케인을 보았다. "마린과 시종 몇몇만 데리고 간다. 내가 가기 직전까지, 아일린 가에는 알리지 말도록. 습격은 의미가 있지." "……네." 케인은 가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반의 몸이 일어섰다. 케인은 반의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가주님." 반은 대답 없이 케인을 돌아보았다. 한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케인은 반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저번의……." 말을 할 때는 되도록 간단히. 그것이 케인의 신조였다. 말을 아끼지 않으면 실수를 할 확률이 높아지고, 자신의 실수는 저 보라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의 흠으로 직결된다. 그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 케인은 철저하게 말을 아끼는 남자다. 그런데 오늘, 그런 그가 한 번에 말을 끊지 못하고 길게 늘이고 있다. 뭔가 꺼내기 곤란한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저번의 그……." "프란 프리텐을 말하는 건가." 반이 케인의 말꼬리를 덥썩 자르며 말했고, 케인은 잠시 몸을 세웠다가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죽이진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 케인의 얼굴에 가느다란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미묘하게 가라앉는 그 밝음. "가주님."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부름이다. "뭔가." "그 아이.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대로 썩히기 아까운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은 잠자코 케인을 보았다.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똑똑히 듣겠다는 듯,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케인에게 눈빛만으로 말을 재촉했다. 케인은 그런 반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번에 차갑고 냉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일린 가로 간다면 제게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반의 눈썹이 꿈틀하고 들어올려졌다. 케인은 반의 고운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보며 잠시 침묵했고 반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로 가져갔다. "……그 아이를 데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반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케인이 말했다. "제대로 된 검을 가르킬 생각입니다." "훗." 순간, 반이 약간 비웃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 냉소적인 반응에도 케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이피아에서 기사 서임을 받을 정도는 된다고 들었습니다." "웃기는군. 세이피아는 검으로 따지면 이그라스의 일곱 나라 중 가장 최하위를 달리는 나라다. 그따위 나라에서 기사 서임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 프란이라는 녀석은 런스와 몇 번 겨뤄보지도 못하고 검을 떨궜다." 케인은 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잠시 어이가 없어졌지만 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진 않았다.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는 카르멘 가에서 손꼽히는 검사였고, 그 이름이 카세타 왕국의 전역에 자자할 만큼 그의 검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남자와 프란 같은 애송이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겠는가. 케인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검을 익히게 만든 다음, 제가 있는 비켈린에 들여보내던가…… 아니면 아일린 가에서 공부를 시킨 후 아일린의 재무관으로 만들어도 좋을 듯 합니다. 가주님도 느끼셨을지 모르나, 그 아이의 베짱 하나만큼은 알아 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케인의 말에 반의 입술이 살짝 들어올려졌다. 확실히, 몇 번이나 프란에게 그런 것을 느낀 반이긴 했다. 처음에 이 곳에 도착한 때도 그랬고 오늘만 해도 그랬다. 감히 누가 자신에게 그런 황당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케인은 반을 또렷이 주시했다. 프란 프리텐을 자신이 거두고 싶다는 말은 사실 전에, 이 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주라는 입장에 선 눈앞의 소년에게 빚을 갚지 못해 따라온 소년을 요구할만큼 케인은 뻔뻔스럽지가 못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반은 그렇게 말하며 쇼파에 더 깊숙히 기댔다. 케인이 말했다. "……제가 갈고 닦겠습니다." "훗, 빚을 진 녀석에게 빚은 돌려 받지 못할망정 돈을 투자하겠다? 웃기는군." 케인은 뭔가 반이 평소와는 다르게 묘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말투를 쓰는 반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저렇게 비꼬는 듯한 어조는 쓰지 않는 반이었다. 케인은 그러나 의문을 누른 채로 묵묵히 대답했다. "프란이 조금 더 성장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아일린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만큼 성장한다면…… 가주님께 빚을 돌려드리는 것 정도는 아마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투자가 아닙니다." 반은 침묵했다. 케인은 반의 침묵을 반 긍정이라고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이 무뚝뚝한 가주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침묵으로 긍정을 나타내곤 했기 때문이다. "안 돼." 반이 긍정의 반응을 나타낼 것이라 믿었기에, 케인은 반의 거절에 속으로 당황했다. 표정으론 조금도 들어나지 않았지만. 반의 얼굴이 차가운 가면 같다면, 케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얼음조각 같다. 둘은 서로의 속마음은 조금도 알지 못한 채로 서로를 주시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케인의 질문에 한참만에 반이 입술을 열었다. "……더 이상 시종을 바꾸는 것도 짜증이 난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너에게 줄테니, 그렇게 알던가." 그 말과 함께 반은 일어섰다. 케인은 반을 빤히 보았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종 따위야 수십 수백 번이 바뀌어도 꿈쩍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시종 하나를 그에게 넘기는 것 정도는, 그리고 7000만 케트라는 돈을 포기하는 것 정도는 반에게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자신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한도를 넘지 않는 선에 한해서 모두 들어줄 것 같아 보이는 소년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빚을 갚기 위해 시종이 된 그 소년을 달라는 것 같은 사소한 부탁을 일축시켜 버리는 것일까. 케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은 술병 하나와 술잔 두 개를 들고 다시 쇼파에 앉았다. 케인에게 술잔 하나를 건네며, 반은 잠시 눈을 가라앉혔다. 씁쓸한 침묵이 한바탕 둘의 주위를 휘감고 지나갔다. 살짝 흔들리는 쇼파에 기댄 반이 술잔을 살짝 든 것은 그 후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속이는 자의 피를 대신해서 한 잔 하지." 밑도 끝도 없는 반의 말에 케인은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역시 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독주를 든 반은 케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케인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았고, 그들은 그렇게 나란히 술을 마셨다. 어두운 밤이 깊이를 더해 마침내 여명의 새벽이 올 때까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29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3) 가네트(uznian) 03-11-24 :: :: 13072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아침.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이었다. 어제의 그 공포스러운 일은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낸 듯, 카르멘 가의 새벽은 평소 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다만, 주방을 왕래하는 사람 중에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평소의 주방과 조금 달라진 모습이랄까. 그 외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프란은 뮤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 더 안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뮤가 말했지만 프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침 식사 늦게 가져오면 죽여버린다' 같은 반의 협박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무엇인가 하고 있었던 몸은 쉬면 쉴수록 오히려 상태가 좋지 않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곤 해서 쉴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깨끗하게 닦인 주방용 그릇 사이로 포근한 새벽의 햇살이 미소를 보내왔다. 주방 식구들은 프란이 다가오자 힐끔 바라보며 몸이 완쾌된 것을 축하해 왔지만, 그래도 어제의 일이 있는지라 그렇게 티를 내면서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프란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수염이 숭숭난 주방장이 다가왔다. 프란은 주방장을 보며 씩 웃었다. "프란 프리텐, 복귀했습니다." "그 동안 감자 깎을 사람이 없어서 곤란했지. 자." 채 인사도 끝나기 전에, 그 말과 함께 인정사정 없이 프란의 앞에 놓여진 엄청난 감자 포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주방장이 내려놓은 그 엄청난 무게의 감자 포대를 보며 프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저 주방장이 힘겹게 들고와서 내려 놓았을 정도니 그 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프란은 그 감자 포대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헤헤, 하고 웃었다. "……저, 어제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거든요?" "지금은 멀쩡하지?" "……그렇죠." "그럼 깎아야지." "……네." 프란은 결국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반이 거의 어거지를 쓰다시피해서 이젠 매일 같이 가지고 다니는 은빛의 검을 허리에 맨 채로, 프란은 덜그덕거리면서 주방에 쪼그리고 앉았다. 주방장은 그런 프란을 향해 한 번 엄한 표정을 지어준 채 하고 있던 거위찜을 하러 돌아갔다. "이거 다하고 가주님 식사 챙기는 것 잊지 말고." 뮤가 살짝 윙크를 했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프란은 뮤를 향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뮤는 그런 프란을 향해 싱긋 웃은 후 자신이 깎아야할 몫의 당근을 가져와서 프란의 곁에 앉았다. 뮤는 오른손에 든 칼을 한 번 빙글 돌리더니, 그것으로 당근을 깎기 시작했다. 프란은 뮤의 부지런한 손놀림을 따라 감자를 깎아갔다. 아무리 최절정의 솜씨를 자랑하는 감자 깎기 기술자라해도 몇 년의 노력을 들여온 숙련 기술자를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직 미숙한 감자깎기 기술자 프란은 숙련 기술자 뮤의 당근 깎는 손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프란, 난 다시는 네가 감자를 못 깎을 줄 알았어." "훗." 프란은 작게 웃었다. 뮤는 다시 부지런히 당근에만 몰입했고 프란 또한 이 살인적인 양의 감자깎기에 몰입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뮤가 당근을 다 깎았다. 그녀는 프란을 도와 주려는 듯 손을 뻗어 감자에 손을 가져갔다. "고마워." 그렁그렁 눈물 방울을 매달면 딱 좋을 것 같은 표정으로 프란이 말했다. "뭘, 넌 바쁘잖아." 프란은 감동했다. 이 곳에 와서 제대로 된 사람이라곤 몇 명 사귀지 못한 프란으로서는 뮤의 배려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프란의 입장에서 보면 마린은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하긴 뭣했고, 시온 역시 나쁘진 않은 녀석이었지만 그 느끼함 때문에 프란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반은…… ……말할 것도 없이 반은 프란의 블랙 리스트 1위였다. 한참 감자를 깎는데, 저 멀리서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어머? 정말이야? 케인님이 오셨다고?" "그래! 내가 어제 그분을 침실로 모셔다 드렸다니까!" 수다스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눈이 동그래진 것은 감자를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깎고 있던 프란이었다. 프란은 감자를 깎다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런 프란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뮤가 의아한 눈을 했지만, 프란은 아랑곳않고 수다를 떨고 있던 여인들에게로 저벅저벅 걸아갔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양배추를 손질하고 있던 여인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프란을 보며 놀란 눈으로 말했다. "뭘?" "아까 누가 왔다고 그랬지? 지금 케인이라고 그랬나?"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고 그 대가로 주위에서 쏠리는 사람들의 말없는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조용히 좀 하자고." 주방장은 프란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프란은 찔리지도 않는지 그런 주방장을 향해 뻔뻔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었다. "이런 살인적인 양의 감자를 깎으면서 수다도 떨지 말라고 하다니 그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살인적인 작업을 하다가 잠시 수다를 떠는 거니 좀 봐주쇼." "흥, 입은 살았다니까." 주방장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프란은 다시 여인들을 보았다. "아까 케인이라고 한 거 맞지?" 여인들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고, 프란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 '케인이 돌아왔다.' 왜 이 사실에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란은 꽤나 유쾌한 얼굴로 반의 방에 앞에 서 있었다. 생글생글 웃음을 짓는 프란이 이상해 보였는지 호위 무사 둘이 찜찜한 얼굴을 했다. 프란은 그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호위 무사 둘은 외면했다. "가주님, 식사입니다." 프란은 문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고풍스러운 갈색 문이 그녀의 손등과 몇 번 마찰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반으로부터의 대답은 없었다. 갈색 문 안 쪽은 침묵하고 있었다. 프란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시 한 번 문을 노크했다. 성격 더러운 가주는 프란이 몇 번 문을 두드리면 '들어와'라는 짧은 한마디로 출입을 허락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대답이 없었다. 프란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손을 내려 문의 손잡이에 가져갔다. 금빛을 띄고 있는 문에 손을 대자, 그것이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 철컥, 하고 문이 닫혔다. 프란은 주위를 쉭하고 훑어보았다. 언제나 쇼파에 앉은 거만한 자세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란은 잠시 이 재수 없는 인간이 밖으로 나갔나, 라고 생각을 했지만 이 이른 아침에 반이 나갈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프란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크레인을 죽 밀어 식탁 앞에 가져갔다. 식탁의 맞은 편에는 부드러운 천을 늘어뜨린 침대가 있었다. 프란은 무심한 얼굴로 그 침대를 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무심한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그녀가 침대를 바라보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로 가능한 일이었다. "으응……" "헉!" 하지만, 우연의 일치로 침대를 바라본 프란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프란은 손을 들어 천천히 눈을 부볐다. 그녀의 손가락이 눈에 닿이자 뻑뻑했던 눈가가 확 조이면서 조금 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벼도, 눈앞의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프란은 입을 헤 벌린 채로 계속 앞을 보았다. "……." ……반이 아직 잠들어 있었다. 어째서 이런 시간까지,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저 성격나쁜 가주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은 정말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프란은 크레인 위에 올려 놓았던 손을 멍하니 늘어뜨린 채 멈칫하고 얼어버렸다. 조금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한참 반을 보고 있던 프란의 입에서는 희미한 경악성마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새하얀 시트 속에 파묻혀진 소년의 얼굴은 옅은 홍조를 머금고 있다. 붉어진 복숭아 같은 발그레한 안색을 보며 프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지럽게 흩어진 보랏빛의 머리카락은 하얀 베게 위에 놓여진 채였고, 그의 몸을 살짝 덮으며 새하얀 이불이 침대 끝까지 비죽이 삐져 나와 있었다. 온통 하얀 침대 속에 보이는 반이 모습은 프란에게 이상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살짝 감겨진 기나긴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은 마치…… 마치..... ……천사 같았다. "……미쳤군." 프란은 '천사 같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마를 세게, 아주 세게 두드림으로서 망상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고른 숨결을 내쉬며 붉어진 볼을 베게에 살짝 맡겨둔 채 잠에 취해있는 반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니 또다시 정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뭐랄까,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 때 프란과 둘이 있을 땐 항상 성난 얼굴에 신경질을 부리고, 사무를 볼 때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사고논리를 보여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때문에 지금 정말로 순수한 모습으로 평온히 잠들어 있는 저 소년이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는 그와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깨어 있을때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탁자 위에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프란은 음식을 탁자에 내놓으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 음식을 먹게 하려면 저 가주를 깨워야 할 것 같았지만, 왠지 다가가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이다, 일!' 이라고 중얼대며 프란은 한발자국씩 조심스럽게 침대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색색 숨을 내쉬는 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반의 하얀 얼굴이 더 선명히 들어와서 당황했지만 곧 숨을 멈추고는 조금 더 접근했다. "가주……." 프란이 막 가주를 부르려는 그 순간이었다. 반이 소리도 없이 휙하고 몸을 뒤로 돌리는 모습이 보였고, 프란은 깜짝 놀라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힉!" 프란은 가주가 갑작스럽게 팔을 크게 휘두르는 바람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반은 깬 것은 아니었고 다만 돌아누웠을 뿐이었다. 보랏빛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팔랑거리며 그의 하얀 얼굴께로 쏟아졌다.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있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가주 녀석을 보고 있자니 괜히 이상해지는 프란이었다. 자신보다 겨우 1살 많은 주제에 별별 트집에 잔소리가 할머니보다 더 많은 자신의 주인의 얼굴이 이렇게나 순수하게 보이자 괜히 민망해지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프란은 천천히 다가가서 다시 반을 불렀다. "가주님, 일어나십시오. 벌써 시간이……." 그런데 바로 그 때,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작스레 일어났다. "……." "우왁!" 프란이 막 반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를 흔들려는 순간, 가주가 또 한 번 팔을 크게 휘둘렀다. 프란은 휘둘러진 반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휙하고 젖혔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평소라면 운동으로 다져진 완벽한 균형감각 때문에 심하게 몸이 흔들린 뒤에도 균형을 잡고 설 수 있었을테지만, 눈앞에 있는 인물의 성질머리 때문에 잔뜩 긴장해 있던 프란은 몸이 흔들리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뺀다는 것이 균형이 어긋나 버렸고…… 휘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느다란 몸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흐악!" 프란은 또 한 번 이상한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음……" 반의 침대 위로 미끄러져 내려버린 프란은 반이 몸을 드는 것을 보고 히익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반이 갑자기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려서려는 프란의 팔을 잡고는 그대로 끌어 당겨 버렸다. "악!" 프란은 얼떨결에 포옹하는 자세가 되어버린 이 이상한 상황에 당황하며 비명을 쳤다. 어쩡쩡하게 반의 두 팔에 목만이 안긴 자세로 프란은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내려고 애를 써도 그 가늘가늘해 보이는 몸과는 달리, 반의 팔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프란은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녀였다. 들어와 보니 저 성질 더러운 주인이 잠들어 있었고, 그래서 깨우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되버렸단 말인가. "히이익∼ 가주님!! 이거 놔요!! 가주님!!!" 막 프란이 고함을 질렀을 때였다. 프란의 소리에 드디어 잠이 깨인 듯, 반은 부스스한 얼굴로 힘겹게 눈을 떴다. 평소의 그 냉철함과는 완벽하게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그는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뜨여진 은보라색 눈동자. 약간의 백치미마저 흐르는 공허한 눈.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걷혀져 나갔다. 천천히 뜨여진 그의 눈동자가 비명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팔에 어쩡쩡한 자세로 감겨 있는 프란의 얼굴을 마주한 반은… "헉!" 믿을 수 없게도 평소의 평정심을 잃으며 큰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 비명성은 극히, 정말로 극히 잠시간의 일일뿐이었다. 반은 서둘러 프란을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이 잠시 당혹으로 물들어 간다 싶었다. 프란은 이 민망하고도 민망하며 또 민망한 사태에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우물 쭈물거렸다. 잽싸게 침대 바깥에 선 프란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설상가상으로 밖에서 소리가 울려왔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갑작스러운 반의 비명소리를 들은 그의 호위 무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문을 두드렸다. 언제나 반의 방 앞에서 보초를 서는 그들은 갑자기 가주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방문을 쳤다. 바로 몇 일전에 독약사건이 일어났었기에 그들의 긴장감은 극도에 달해 있었고, 그래서 반의 비명소리에 날카롭게 반응한 듯 했다. "……." 놀라운 일이었다. 언제나 냉정하던 반이 조금 당황한 듯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란은 그 모습이 조금이나마 귀여워 보였다. 반은 한참동안 그 상태로 있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평정을 되찾았다. 갑자기 찾아든 침착한 얼굴로, 반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꺼라." "무슨 일이십니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호위 무사들은 신경을 끄라는 반의 말에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다시 물어왔고, 반은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다시 되찾으며 차갑게 말했다.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호위 무사들은 한걸음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큰 보폭걸음으로 그들이 다시 제자리에 서는 소리가 들렸고, 프란과 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장막을 드리웠다. 가주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인상깊던지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시, 식사하셔야죠?" 프란이 어설프게 말을 내뱉었고, 반은 조금 침묵한 뒤 묵묵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가 방에 딸린 세면실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있던 프란의 얼굴 위로 주룩, 땀이 흘렀다. "시, 십년 감수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0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4) 가네트(uznian) 03-11-24 :: :: 17593 쏴아아아…… 머리카락에 떨어진 후 다시 두 뺨을 흐르고 깎아지른 듯 날카로우며 또한 섬세한 턱선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반은 고개를 숙였다. 검과 갖은 운동으로 단련된 그의 탄탄한 몸을 타고 내리는 빗물들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고 있다. 하얀 살결을 타고 내리는 물줄기들이 온 몸으로 미끄럼을 탄다. 그의 온 몸에는 옷을 입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갖은 검상이 나 있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부터, 몇 년은 된 듯한 깊은 상처까지. 반은 그러나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자신의 상처를 보며 몸을 씻고 있었을 뿐이다. 옷을 모두 벗고 몸을 씻고 있는 반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후우." 반은 가느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얼굴 위로 다시금 물방울이 떨어졌다. 얼굴이 들어올려진 것은 한참만의 일이었다. "……술기운인가……." 반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직도 머리가 띵하게 아파 오는 것이, 과음을 하긴 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난 케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느라 술병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었다. 아니, 술병이 바닥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마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술을 멈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어제는 기분이 나빴으니. 정말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살인을 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었다. 반은 고개를 바짝 들었다. 문득, 아까 전 당황하던 프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은 무안한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한 번 넘기며 살짝 헛기침을 했다. 잠시 프란을 안았던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몇 년 만에 꾼 꿈이었을까……." 문득 반이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정말 그건 얼마 만에 꾼 꿈이었을까. 기억속에서조차 희미한 사람을, 반은 어제의 꿈에서 보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흐릿하게 스칠 뿐인 그 모습들을 왜 오늘, 다시 보게 된 것일까. "……어머니." 반은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작고, 조금은 어색하게 그렇게 뱉어낸 반은 그리고 잠시 후,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어째서였을까. 꿈 속에서 보았던 그 사람…… 꿈 속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잔해속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어머니가 있었다. 꿈 속에서 그는 작은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를 향해 웃었다. 어머니는 양팔을 벌려 자신을 안았다. 루이사 카르멘이라고 불리던 어머니. 혹은 카르멘 가의 가주라고 불렸던 어머니. 강하고도 강했지만, 자신의 앞에서는 그저 다정했던 어머니. 근엄한 면이 있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을 감싸주었었다. 조금은 엉뚱한 면이 없지 않아 있던 분이지만, 반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따뜻한 모습이었다. 반의 눈동자가 다시 흐릿해졌다. "……나답지 않군." 과거를 회상하는 멍한 눈을 하고 있던 반은 어느 순간 그렇게 뱉어내곤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던 날, 나란히 명부에 이름을 새기고 작은 소년의 손에 조그마한 검 한자루를 남기고 떠나간 그 날, 맹세하지 않았던가. "……나답지 않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던 날, 그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던 날, 속으로 수 백 수 천 수 만 번을 울면서도, 겉으로는 조그마한 칭얼거림조차 내지 않았다. 입술만을 깨문 채로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쥔 채였음에도 끝까지 눈물만은 흘리지 않았다. 마침내 손톱이 손바닥을 잠식해 들어가 피 한 방울이 말없이 땅을 적시도록, 그는 그렇게 눈물을 참았었다. 미친 듯이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고 참고 또 참으며 그렇게 주먹만을 쥐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던 그 날, 그의 유년시절이 끝났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릴 시간 따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만에, 대체 몇 년만에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일까. 이루 말할 수 없는 짙은 무엇인가에 목이 텁텁해져왔다. 과거, 저 장미 정원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이 검 한 자루를 쥔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정한 분이었지만, 검을 가르칠 때만은 항상 엄격한 자의 얼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땀에 젖은 채로 모든 검의 훈련이 끝나면 어머니는 팔을 벌리며 이름을 불렀다. '반, 이리오렴.' 그리운 어감이다. 그 이름을 들어본 것도……. 언제적의 이야기일까. '반, 이리오렴.' '반, 이리……' '반…….'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에 울린다. 어린 그는 어머니의 팔 안으로 안겨 들어갔었다. 어머니의 팔은 언제나 그렇듯이 따뜻했고, 어머니의 목덜미에서는 언제나 그럿듯 약간의 땀 냄새와 함께 옅은 릴리아나꽃의 향기가 풍겨져 나왔다. 오늘 꾸었던 꿈에서 어머니에게 안겼을 때, 짙은 릴리아나 꽃의 향기가 났다. 하지만 반은 어머니를 두 팔로 꽉하고 껴안은 순간, 조금 당황해야만 했다. 자신을 불러 들였던 어머니가, 그 다정했던 어머니가 양 팔로 자신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이리 오렴, 하고 팔을 벌렸던 어머니가 자신을 밀어내다니……. 반은 낮은 신음과 함께 다시 어머니에게 팔을 벌렸다.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었다, 어머니의 그 따뜻한 품안에. 더 이상 이 작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일부러 속아주지 않아도 되는, 일부러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일부러 스스로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따뜻한 품안으로. "……나 답지 않아……." 반은 계속해서 '나 답지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따뜻한 품안에서 벗어나기 싫어 꽉 하고 껴안았었다. 어머니에게서나 났던 향기가 강하게 느껴져셔, 안았던 손을 풀기 싫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으악, 이거 놔…… 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래서 그는 억지로 눈을 뜨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 반은 몸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깨어난 순간 마주한 얼굴은,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라 프란의 얼굴이었다. "……미치겠군." 반은 중얼거렸다. 민망함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 "왜, 왜 안 나오는 거야, 이 놈……." 프란은 버벅이고 있었다. 우왕좌왕해대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프란의 얼굴 위로는 가득한 당혹감만이 떠올라 있다. 뜨끈뜨끈했던 거위찜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반이 세면실에서 나오질 않았다. 프란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반이 들어간 세면실만을 뚫어져라 보았다. 물소리는 이미 아까 전에 멈추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나오지 않는 거란 말인가. "……화장실에 빠져 죽은 것도 아니고……. 왜 안 나오는 거야?" 철컥. 프란이 막 투덜거리듯 말했을 때, 마치 프란의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는 듯이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프란은 움찔해서 힉 하고 굳어버렸고, 반은 그런 프란을 한 번 힐끔 보더니 차분한 걸음걸이로 걸어나왔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반의 얼굴을 보던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식사는." 반이 차갑게 물었다. 프란은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반의 태도를 보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젠장, 남을 끌어당겨서 안아놓고는 사과 한마디도 안 하냐?' 프란은 그러나, 속마음과는 다르게 미소 띈 얼굴로 말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나 정말 성질 많이 죽었다, 라고 스스로 중얼거리는 프란이었다. ▷◀▷◀▷◀▷◀▷◀▷◀▷◀▷◀▷◀▷◀ "저기…… 어디…… 가시는 겁니까?" 프란은 의아함을 느끼곤 반을 향해 질문했다.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반이 차가운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찬바람이 씽씽 부는 반의 얼굴은 언제나와 털끝만치도 틀린 점이 없었다. "……행선지를 너에게 얘기 해줘야하는 건가?" 반의 미간이 좁혀졌고, 프란은 그런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 "그럴 필욘 없으시겠죠?" 반은 다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프란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그런 반의 뒤를 따랐다. 보통 때라면, 식사를 끝났으니 다음 행선지는 당연히 정원이어야 했다. 만개한 장미에 취한 채로 걷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반의 하루 일과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반은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 않았다. 그가 걷고 있는 곳은 프란에게는 낯선 길이었다. 하긴, 프란에게 낯익은 길이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란은 인상을 구길 만큼 구긴 채로 반의 뒤를 줄줄줄 따라갔다. 간간히 반과 마주치는 시녀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왔지만, 반은 찬바람이 씽씽 부는 태도로 불쑥 앞으로 지나갈 뿐이다. 프란은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여대는 가엾은 시녀들에게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는 반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젠장. 그래, 너 잘났다, 잘났다고! 그렇다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무시 하냐?' 프란은 가볍게 머리카락을 흔들며 앞으로 나서는 반을 보며 생각했다. 반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바람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프란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더더욱이나 알 수가 없어졌다. 프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화려하게 조각된 샹드리에와 벽면 전체를 장식하는 커다란 그림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으로서는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형님!"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던 프란의 인상이 구겨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은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저벅저벅, 움직임에 따라 은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린다. "시온." 반의 입술이 나직하게 움직였다. 붉은 산수유 열매 같은 입술이 자그맣게 한 사람의 이름을 내뱉는다. "조금 늦었수다, 형님.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시간 칼 같은 형님이, 무려, 무려 20분씩이나 지각입니다." 시온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반은 입술을 꾹 깨물고 그런 시온을 보았다. 시온은 어제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태도로 싱긋 웃고 있었다. 범인은 자신이 잡겠다는 말도, 그 범인을 잡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도……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반짝이고 있는 시온이었다. 시온의 말은 오롯이 반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반의 뒤에 서 있는 프란을 향해 있었다. 시온은 반에게 보이지 않게 프란에게 찡긋 하고 윙크를 해 보였다. 프란은 순간 닭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온 몸을 뒤틀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루룩 돋아난 닭살을 수습하기 위해 프란은 손톱을 세웠고, 그것으로 자신의 팔뚝을 벅벅벅벅 긁었다. "……그렇군." 반 역시, 전에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 황당한 사건 때문에 표정을 수습하느라 세면실에서 오랜 시간동안 버벅대야 했다는 사실을 알려줄만큼 반은 바보가 아니었다. 반의 태도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차분했다. 시온은 다시 한 번 프란에게 찡긋하고 윙크를 했다. 프란은 검집으로 향하는 자신의 손을 멈추기 위해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반이 주었던 날이 잘 선 은빛의 검을 뽑아 저 싱글거리는 얼굴에 상처 하나 정도 내고 싶다고 프란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굳은 듯 서 있는 반에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가·주·님· 사람들이 기다리겠습니다." 반은 시온의 말을 들으며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들어간다는 거지, 라고 프란이 생각될 무렵, 반의 몸이 움직였다. 사선방향으로 가볍게 움직인 그의 몸이 멈춰진 곳은 양 미닫이 형식으로 된 커다란 문앞이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의 앞에 선 그 곳에는 두 명의 시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온은 생글 웃더니 앞쪽에 있던 시녀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시녀들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을 활짝 열었다. 반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고, 시온은 그런 반을 잠시 본 후 프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시간 괜찮지?" "……?" 프란은 멀뚱한 얼굴로 시온을 보았다. 반이 방금 전에 저 안에 들어갔으니, 시온 역시 당연히 저 안으로 따라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프란이었기에 갑자기 시온이 '시간 있지'라고 물어보는 것에는 멍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이번 회의는 간단한 거니…… 정오쯤이면 끝날 것 같은데…… 회의 끝나고 나면 나한테 시간 조금만 내줘." "난 가주님 곁에 있어야……." "아아, 형님이라면 걱정마. 내가 말하면 되니까." 시온은 생긋하고 웃었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품은 듯한 저 공허한 초록빛의 눈동자를 보며 프란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쩐지 그래, 라고 대답해선 안될 것 같았다. 프란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에이, 수작은 무슨." 시온은 당치 않다는 듯이 팔을 휘젓고 있었으나, 그것은 무척…… 수상쩍어보였다. "프란 프리텐." 바로 그 때, 반이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프란은 이 때다 싶어 얼른 뛰어 들었다. 시온은 프란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허락한 걸로 간주하지." ▷◀▷◀▷◀▷◀▷◀▷◀▷◀▷◀▷◀▷◀ '그냥…… 얌전히 죽여줘. 제발…….' 프란은 발악하듯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자고 싶었다. 정말 자고 싶었다. 미칠만큼 자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바닥에 드러누워 한 숨 잘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무슨 짓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번 일은……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 "뭘 더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지." 반의 차가운 목소리가 가득히 번져 오른다. 프란은 그런 반을 보며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쥐가 나다나다 못해, 이젠 아예 다리에 감각이 없어졌다. 저려오는 발 때문에 프란은 그야말로 흐늘흐늘한 댄스를 춰대고 있었다. 온 몸을 낙지처럼 흐느적대며 프란은 비틀 거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에게 뭐라고 차갑게 말하고 있던 반이 프란이 한 번 몸을 뒤틀때마다 살인적인 눈을 했기 때문이다. 반은 계속 매서운 눈길로 '똑바로 서!' 라는 무언의 협박을 해왔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휘청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세우고 있는 프란으로서는 흠칫흠칫 하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다시 흐느적 댄스를 췄다. 그녀의 고개가 얼핏 옆으로 돌려졌다. 그녀는 어느 순간 한 얼굴과 턱, 하고 마주쳤다. 그 얼굴과 마주친 순간,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 것은 시온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훨씬 전부터 프란을 보고 있었는지, 시온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프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넘치는 시온의 녹색 눈동자가 프란이 민망할 정도로 강한 색채를 띈 채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저 느끼함…… 속이…… 속이 울렁거려…… 담, 담백한 것을 먹고 싶어…….' 프란은 시온 특유의 느끼함을 견디지 못하고 속으로 발악했다. 바로 그 때,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조금 더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황실에 밑보여서, 좋을 일 따위는 없습니다."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프란은 은근슬쩍 시선을 꺾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헤이튼이 앉아 있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반을 보고 있었는데, 그 눈매가 어찌나 매서운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반의 얼굴에 구멍이 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가주님. 카세타 황실에서 정식으로 사신을 통해 청해왔습니다. 이 번 일은 이렇게 거절만 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카세타 황실에 이 집안의 사람을 보내주란 말인가. 그것도 아무런 댓가도 없이? ……웃기는군." 반의 냉소 띈 어조를 듣고 있던 프란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크루레티나를 넣은 차를 마셨던 그 날, 카세타 왕국에서 사신이 왔었다. 황실에 반역을 하는거냐니 어쩌냐니 떠들어대면서 황실에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던 사신의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 지금 프란의 앞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널찍하게 떨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반을 중심으로 해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북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로이세타, 그 로이세타에서만 자란다는 최고급 나무 레스티아나를 깎아 만든 원탁 위에 앉은 이들은 저마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세타 황실에 사람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프란은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반이 식사를 한 직후 시작된 이 회의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진척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반의 등 뒤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받아들이고 있는 창문으로 보아하니, 이젠 정오가 가까워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이 사람들은 단 한 건을 갖고 회의를 질질 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동안, 프란은 앉지도 못한 채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간간히 반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면서. "하지만…… 가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됐든 우리는 카세타의 사람입니다. 게다가, 저희 가문에는 기사도 여럿 있습니다." "나에게도 카세타의 기사가 카세타에 충성하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다. 난 다만, 내 휘하에 있는 친위대와 사병은 보낼 수 없다고 했을 뿐이다." 프란은 계속 하품이 나오는 걸 참고 있다가, 마지막에 결국 참지 못하고 가느다랗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란은 무시무시한 살인광선을 띈 하나의 눈과 마주쳤다. 파츠츠츠츠. 괴상한 음을 내며 자신의 온몸에 내려 꽂히는 그 시선을 본 프란의 온 몸으로 두드러기가 쫙하고 돋아났다. 프란은 자신을 보는 반의 눈을 보고 움찔하며 굳었다. 사실, 이 회의가 지루한 것은 프란에게 당연했다. 가주는 카세타 왕국에 사람을 보낼 수 없다고 바락바락 주장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왕국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다. "가주님, 하나 묻겠습니다. 가주님은 어느 나라의 사람입니까?" 프란이 반의 눈빛 공격을 받고 한 발자국 물러설 때, 누군가가 타이밍도 정확하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한 것은 청발에 단정한 얼굴을 가진 미남으로, 반에게 질문을 하는 의도는 뻔했다. 만약 여기서 '카세타 왕국' 사람이란 말을 한다면 반은 황실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카세타 왕국 사람이 아니라 아일린 가문의 본가가 있고, 아버지인 로웬 아일린의 고국인 세이피아의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문제가 심각해진다. 카르멘 왕국은 카세타 왕국에 위치해있고, 엄연한 카세타의 귀족 가문이다. 여기서 만약 반이 '나는 세이피아인'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가주라는 거마저 부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는가. 프란을 제외한 모두가 반의 입술을 보았다. 이 어린 가주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반의 입꼬리가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나도 하나 묻지." 반은 쏘는 듯한 눈으로 청발의 남자를 보았다. "너는 내 사람인가, 카르멘 가문의 사람인가." 청발의 남자는 멈칫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당연히 카르멘의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주의 사람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 가문의 소속된 사람으로서, 그 가문의 주인인 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그런데 대체 저 말의 뜻은 무엇일까. 남자는 침묵했다. 그 침묵의 끝에 선 것은 반이었다. 반은 차갑게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네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 너는 지금 침묵하고 있고, 내가 네 질문에 답하지 않는 이유는 네 침묵의 이유와 동일하겠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한 자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채 몇이 되지 않았다. 가장 빠르게 반의 말 뜻을 파악하고 웃음을 터뜨린 것은 놀랍게도…… 시온이었다. "쿡쿡." 문득 들려온 웃음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조리 시온에게로 쏠렸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들은 시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프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그런 그들의 눈빛에 조금 민망해진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아, 이 쪽은 보지 마쇼."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살풋 웃었다. 사실 시온은 아일린 가문의 사람이므로, 카르멘 가문의 중대사를 의논하는데 이용되곤 하는 이 회의실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시온은 카르멘 가문에 머물러 있는 것이 거의 일상화 된 데다가, 여태껏 카르멘 가에서의 이미지도 좋았기에 굳이 그의 출입을 막는 자는 없었다. 게다가, 가주의 사촌이 아닌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시온은 낄낄거리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1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5) 가네트(uznian) 03-11-24 :: :: 14079 "……도, 도는 줄 알았다…… 주, 죽는 줄 알았다……." 프란은 비틀비틀 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드디어 회의가 끝난 모양이다. 프란은 흐늘흐늘 댄스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움직임으로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회의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빠져 나간지라, 이젠 마지막까지 자리를 잡고 있던 반만이 이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프란은 자신이 먼저 나간다고해서 설마 잡아 죽이지는 않겠지 싶어 먼저 회의실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에 조금이라도 더 있는다면 정말이지 죽을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그녀가 막 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헤헤." 쥐가 난 다리를 억지로 억지로 움직이며 시선은 밑으로 떨어뜨리고, 눈물을 찔끔대고 있던 프란의 몸이 움찔하고 굳는 듯 싶었다. 프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짝 웃어 보이는 은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이 눈앞에 보였다.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머리 색깔과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저 가늘어진 눈매. "……웃지마." 프란은 회의실 문 앞에서 비죽이 웃고 있는 그 얼굴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입으로 내가 웃지도 못하는 거야?" 생긋 웃어 보이는 시온의 입을 한 대 퍽 치고 싶다고 느낀 프란이었지만, 그 순간 뒤에 앉아있던 반이 천천히 일어섰으므로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반은 조금 지친 듯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수 대 일로 싸운 일의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반은 꽤나 피로한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카세타 황실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라는 의제를 가지고 시작되었던 이 지루하고도 지루하며 또 지루한 회의는 결국 반의 패배로 끝났다. 아무리 가주라 해도, 만장일치로 밀고 들어오는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반은 쓰디쓴 패배감을 맛보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프란은 자신의 옆을 스치는 반의 어깨에 몸이 닿이자 잠시 움찔했다. "형님, 힘내쇼." 시온이 생글 웃으며 반에게 한 말이었다. 반은 대꾸 없이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그가 막 문을 지나치려 할 때, 시온이 말했다. "……형님." 갑작스러운 그 부름에 반이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프란은 저 시온이 무슨 말을 할지 바짝 긴장하며 있는 대로 간을 졸였다. 제발 저 놈이 쓸 데 없는 말만은 하지 말기를 빌면서, 프란은 손가락을 꽉 쥐었다. 시온은 그런 프란 쪽으로 그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갔다. 가벼운 스텝으로 프란의 앞에 다가간 시온은 예고도 없이 프란의 손목을 휙하고 잡았다. "오늘 하루만 형님 시종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반이 눈을 살짝 치켜 올렸다 내렸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일로." 이미 프란은 시온의 손을 뿌리챈 채로 살기등등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 듯한 손은 푸들푸들, 엄청난 기세로 떨리고 있다. 프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오오라는 엄청났지만, 시온은 그것을 억지로 억지로 그것을 외면하며 말했다. "프란은 세이피아 출신이라고 들었거든요." 프란은 이 느끼버터가 무슨 말을 지껄이나 싶어서 빤히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그야말로 수상쩍기 그지 없는 놈을 볼 때의 그것과 동일했다. "그런데." 반이 차갑게 대꾸하자, 시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외출을 할 생각인데, 세이피아 물건을 좀 사고 싶어서요. 전 세이피아를 떠난지 꽤 오래됐으니 세이피아 물건에 대해 잘 모르잖쇼? 그래서 이 녀석을 좀 빌릴까하고." 그렇게 말하며 시온은 프란의 목에 자신이 팔을 둘렀다. 프란은 그 순간 파라락 그 팔을 내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시온의 등을 가격했다. 표정은의 변화는 하나도 없이, 물론 반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시온은 컥, 하고 소리를 낼 뻔 했지만 역시 반의 앞이라 억지로 눌러 참았다. 아릿한 충격에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지만, 역시 참는다. 반은 잠시 멈춰선 채로 한참동안 시온을 보았다. 그러다가 반은 한마디 대꾸도 해주지 않고 휙,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저만치 걸어가기 시작했다. "……." 반이 그렇게 가버리자, 프란은 황당한 얼굴로 반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따라오라던가 하는 말이 마땅히 있어야 했지만, 그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진 프란이 그래도 반을 따라가려고 한 발을 옮기는 찰나, 시온이 갑자기 프란의 손을 덥썩 잡았다. 하지만, 이 순간의 시온은 뭔가를 간과하고 있었다. 아까 전 이 곳에는 프란의 절대적 공포의 대명사, 대마왕인 반이 있었지만, 지금 이 곳에는 반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극히도 간단하고도 간단한 이 사실을 간과한 시온은……. "크아아악!" 무섭도록 빠르게 자신의 멱살을 틀어 올려쥔 프란의 눈빛 앞에서 바짝 오그라 붙고 말았다. "……너, 정말로 죽고 싶은 거냐?" 바짝 숨을 들이대며 프란이 한 말에 시온은 어설프게 웃었다. "헤헤, 뭐, 뭘?" "……시치미 떼지마, 이 자식이!" 프란이 버럭 고함을 치자, 시온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온의 멱살을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리며 점점 숨을 압박해 들어온다. 저 아름다운 오렌지색 눈동자 역시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숨이 막힌다. 저 눈동자와 마주하려하니,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하나 둘……. 박자를 맞추듯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시온은 프란을 보며 잠시 웃었다. "자자, 화 내지마. 어찌됐든 형님은 허락했으니…… 간만에 온 자유 시간을 즐겨봐야지, 응?" 시온의 그 말에 저 가주가 언제 허락을 했다는 거냐, 라고 외치려던 프란이었지만, 다음 순간 튀어나온 시온의 말에 그녀는 입을 탁 닫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형님의 침묵은 곧 긍정! 자아, 오늘 하루 프란은 나랑 열심히 노는 거지! 어때, 좋지?" 전혀 좋지 않은 프란이었다. ▷◀▷◀▷◀▷◀▷◀▷◀▷◀▷◀▷◀▷◀ "오∼." 세이피아는 분명 발달한 나라였다. 상업의 본가인 아일린을 정점으로 해서, 귀금속의 공예로 유명한 저 사치로운 가문 세일린, 무기 제조로 유명한 슈카티엔가, 지금은 망해버린 선박의 프리텐 가문……. 최고의 상업 집안이 줄줄이 도열해 있는 그 곳은 역시 화려함의 정점에 서 있는 곳이지만, 이 곳 역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기에 충분한 곳이다. 시온은 프란의 손을 질질 잡아끌었고,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프란은 그 손에 이끌려 오고야 말았다. 카르멘 가의 사람들이 두 필의 말을 내주었지만, 시온은 그것을 웃으며 거절했다. 프란과 함께 운치있게 걷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프란은 그렇게 말하는 시온을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어때? 좋지?" 오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환한 햇살을 감싸 품에 안은 창공의 여신이 귓가에 달콤하게 숨을 불어 넣는다. 살랑대는 미풍을 동반한 채로, 사람들의 수다스러운 음색이 멀리 멀리, 저 멀리까지 뻗는다. 뻗쳐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일렁거리는 모든 것에 프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흑맥주를 높게 든 채로 경쾌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광소라 부를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카르멘 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발랄하고도 즐거운 광경에 프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거리는 완벽한 축제의 분위기에 감싸여 있다. "어때? 조금쯤은 나한테 감사하라구, 프란∼." 시온은 싱긋 웃으며 은근슬쩍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그 순간 바로 뽑혀 나온 살벌한 은빛의 검에 기가 죽어 손을 내리고 말았다. 프란은 가슴을 크게 펴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가 저 하늘 위로 번지고 있고, 오색 빛깔의 선들이 온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속닥속닥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프란은 약간의 의구심을 가졌다. 커다랗게 차려진 음식물하며, 자신의 기억으로는 분명 서커스단이라고 불렸던 사람들……. 세이피아 최대의 축제인 '피아네의 밤'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 거리의 풍경은 꽤나 큰 축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굉장하군!" 프란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시온은 그런 프란의 어깨에 다시 한 번 은근슬쩍 손을 올렸다가 이번에는 그 고운 손가락이 모조리 잘릴 뻔 하는 귀하디 귀한 경험을 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손을 밑으로 내려뜨렸다. 귓가에서 흔들리는 프란의 금색 머리카락이 매혹적이다. 시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해서 주위를 돌아보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호기심이 반들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살짝 웃은 시온은 프란의 손을 잡은 채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이 자식! 이거 안 놔? 정말로 손이 잘리고 싶은 거냐!" "아아, 잠깐 잠깐!" 시온은 싱긋 웃으며 말하더니 어느 순간 딱하고 멈춰 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한 가운데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일으킨 뽀얀 먼지 사이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노인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은 이 노인에게는 웬일인가 싶어서 멀뚱한 표정으로 그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하니 점을 치는 사람인 듯 했다. 품이 넓직하게 벌어진 흰 옷 위로 조그맣게 박혀 있는 붉은 빛의 보석들. 그것은 점성술사들의 상징이라 불릴만한 것이 아닌가. 특히, 머리에 덧씌워진 자그마한 베일 같은 것은 카세타 점성술사들의 자랑거리였다. 노인은 시온이 다가오자 기괴한 광채를 띄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갑수다. 점을 치려고 하는데, 얼마나 들까?" 시온은 그 말과 함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털썩, 하고 노인의 앞에 앉아 버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로 땅바닥에 주저 앉아 버리는 시온을 보는 프란은 조금 놀랐다. 귀족가의 자제들 중 고귀하게 자랐다는 자들, 특히 무와는 담을 쌓은 채로 어릴 때부터 돈계산만을 배우는 작자들은 절대로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승마를 배울 때조차, 흙먼지가 튄다면 싫어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아일린 가문의 후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사람들이 엉망진창으로 지나다니고 있는 길거리에 턱하고 앉아 버렸다. 입고 있는 저 비싼 옷에 먼지가 튀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로. 프란은 저 놈도 앉는데 나도 앉지뭐, 라고 생각하며 자신 역시 편안하게 주저 앉아 버렸다. 노인은 먼저 앉은 시온을 슥 하고 올려다보더니, 한참만에 메마른 어조로 툭하고 뱉어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를 거머쥘 수도 있는 양반이 이런 추접한 노인네에게 뭘 묻고 싶은 건가 그래." 순간, 시온의 얼굴이 흠칫하고 굳었다. 프란 역시 그의 말에 조금 긴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를 거머쥔 자'. 그것은 아일린 가문의 가주를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기도 했다. "……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소다만?" 시온은 그 특유의 말투를 쓰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 복작거리는 인파의 한 가운데에서, 초연한 태도로 노인이 입술을 열어 웃었다. "글세올시다. 허허……" 점성술사 특유의 희디흰 옷과, 그 옷 위에 조그맣게 박혀진 붉은 구슬들은 햇빛을 받아 마음껏 반짝이고 있었다. "……왜 그리 야심이 없소? 아니면…… 속에 감춰두고 있는 그것을 빼낼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오?" 시온이 순간 조금 놀란 듯한 눈을 하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생글, 하고 웃었다. 가늘어지는 초록색의 눈동자가 뿜는 매력을 당해낼 수 있는 자는 이세상엔 아마 존재하지 않을 듯. "하하하, 이거 참……. 당신, 관상은 좀 볼줄 아나보군?" "추접한 노인네에게 너무 과찬인 것 같군."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품에서 빛바랜 종이조각을 꺼내 들었다. 너절해진 그 종이조각들은 분명 운명을 점치는 카드임이 분명했다. 비록 빛이 바래고 너절해긴 했지만, 보관만은 최대한 정성들여 한 노력의 흔적이 역력했다. 프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보는데, 노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프란을 보았다. "호오?" 프란은 뭐냐는 듯한 눈으로 노인을 보았고, 노인은 호기심에 반짝이는 얼굴로 피식 하고 웃었다. "이 쪽 분도 만만치 않은 특이한 분이었군, 그래. '유네아' 를 가슴에 품고 있다니……" "뭐?" 갑자기 튀어나온 그 낯선 '유네아'라는 말에 프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아무 것도 아니오." 노인은 다시 웃었다. 쭈글쭈글한 갈색 얼굴에 얼핏 미소가 매달린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시온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래, 이 추접한 노인네에게 물어볼 것은 뭐요?" "아아, 여기 있는 이 아리따운 아가씨와 궁합을 보고 싶어서요." 퍼벅! 순간, 프란의 팔뚝이 벼락같은 속도로 들어올려지더니 그대로 시온의 머리를 강타했다. 시온은 꽥, 하는 소리를 내며 저 멀리로 날아갔지만 곧 비틀거리며 다시 다가왔다. 그는 최대한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아, 어서요." 퍼버벅! 다시 한 번 프란의 손이 무섭게 움직였다. 프란은 입을 열어 무서운 어조로 뱉었다. "그따위거 절대로 안 보……." 하지만 이미 노인은 카드를 모두 다 섞은 후였다. 그 빠른 움직임, 프로페셔널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빠른 움직임에 경악한 프란은 입을 뻐끔 거렸다. 자신이 저지할 틈도 없이 카드를 착착 진열한 노인은 프란이 자신의 행동을 가로막자 동정을 구하는 눈으로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결국 한숨을 쉬며 노인이 하는대로 놔둬버렸다. 노인은 카드를 두 장 바닥에 내려 놓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는 카드의 뒷면은 조금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먼저 오른쪽의 카드를 휙 뒤집으며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멋지군. 드리비아 레키슈안! ……상대 여자를 얻으면 남자는 최고가 될 운이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온의 얼굴은 환해졌고, 프란이 얼굴은 시퍼래졌다. 드리비아 레키슈안. 레키슈안의 초대 황제이며, 철혈의 군주로 불렸던 자. 그가 당시 대 제국으로까지 불리던 세이피아와 크렌 공국 사이에서 레키슈안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큰 공로를 한 것은 그의 부인인 레이니아였다. 한 떨기의 릴리아나 꽃과 같았다는 그녀, 레이니아는 철혈의 군주라는 드리비아와는 180도 다른 인물로, 남편의 모자라는 모든 점을 커버해준 대단한 여인이었다. 별점을 쳐서 남편의 군대를 위험으로부터 건져내었다는 설화도 있고, 부드러운 연설로 병사들의 투지를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는 설화도 있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은 그 인물 자체로는 뭔가 군주로서 부족한 인물이었다. 너무나 삭막하고 메마른 인물이어서 밑에 있는 인물들에게는 왠지 모를 공포감을 안기곤 했기 때문이다. 그 실력만큼은 최고로 꼽혔지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일한 연인이자 단 하나의 아내였던 레이니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레키슈안을 건국하는 대 업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역대 대륙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를 뽑을 때면 언제나 열 손가락에 꼽히는 남자가 바로 이 드리비아 레키슈안이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시온과 프란의 궁합은 거의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헤에." 시온은 정말로 감탄한듯, 가볍게 소리쳤다. "놀고 있네. 헛소리 지껄이지마! 누가 드리비아 레키슈안이라고? ……크악, 이 느끼버터랑 내가?" 프란은 당장이라도 카드판을 뒤엎을 듯한 분위기를 마구 자아내고 있었다. 노인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크르렁거리는 프란을 보며 시온에게 한마디 했다. "재미있는 연인을 두셨구려." "뭐, 그런 편이지." 시온이 웃었다. "누가 네 녀석의 연인이라는 거야! 이 미친놈! 난 남자라고 했잖아!" 하지만 프란의 말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왼쪽에 놓여있던 카드를 휙하고 뒤집었다. 그이 눈 위로 미미한 감탄이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으음? 이것도 괜찮구려. 크슈아 레닌! ……고귀한 여성상이라. 여인에게 있어서 상대 남자는 그야말로 왕자님이라고 할 수 있소. 뭐, 신분 상승을 원한다면 이 남자가 무척이나 좋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좋은 애인을 뒀어요." 프란을 향해 노인이 씩 웃어 보였다. 프란은 씩 웃으며 그런 노인에게 경쾌하고 발랄하게, 너무나도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아가리 찢어 버리기 전에 닥치는 게 좋아." 노인은 프란의 그 생글거리는 말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2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6) 가네트(uznian) 03-11-24 :: :: 18176 점치는 노인을 만난 후로 프란의 기분은 계속 저조했다. '웃기는군. 뭐가 신분 상승이고 뭐가 드리비아 레키슈얀이야.' 반면, 시온은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시온이 말을 꺼냈다. "프란, 배고프지? 내가 따끈하고 맛있는 거 사줄까? 카르멘 가로 온 이후로 제대로 된 음식도 먹어본 적이 없을 텐데… 어때? 내가 죽이게 맛있는 걸 사주지." "필요 없……." 꼬르르르륵. 하지만, 프란의 배에서 나는 소리는 프란의 의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말았다. 시온은 그런 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뚫어지게. 그 시선은 농밀하고도 농밀했으며, 종국에는 사람의 온 몸을 칭칭 휘감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시온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던 프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고함을 쳤다. "그, 그래 젠장! 배고프다! 어쩔래?" "킥킥." 시온은 경쾌하게 웃었다. 이런 면이 있어서 좋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시온은 프란을 이끌었다. 이젠 알 것도 같다. 자신이 왜 이런 녀석에게 끌렸는지. 이 솔직함. 이 당당함. "그런 면이 좋아……."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프란은 투덜댔다. ▷◀▷◀▷◀▷◀▷◀▷◀▷◀▷◀▷◀▷◀ 시온은 식당으로 프란을 안내했다. '식당'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정말이지 개성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는 식당의 이름을 보고 있던 프란은 그 안으로 들어서고 조금은 놀랐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이 차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음성이 들려와 프란의 머릿속에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잡담을 주고받는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경쾌했다. 어디를 봐도 평민임이 틀림없는 자들이다. 프란은 이 시온이라는 인물이 예상보다 더 특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귀족 주제에, 게다가 아일린 가문의 일족인 주제에……. 이런 평민들의 식당에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불쑥 들어오다니. "역시 붐비는군. 축제날은 늘 이렇다니까. 이 집의 푸쉬아(국밥의 일종)는 끝내주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손을 끌어당기는 시온을 뿌리치며 프란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붐비는 이 식당을 보고 있는데 얼핏 그 차가운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도대체가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 빌어먹을 놈이라면 이런 곳에 와서도 절대 웃지 않을 거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어쩌면 그 차갑다 못해 냉정한 얼굴을 한 채로 이 사람들을 모조리 얼음으로 만들어 버릴 지도 모르지. 프란은 어느 순간 풋, 하고 웃어버렸다. 아마 저 가주라면 길거리를 가다가 몇 천억 케트를 줍는 행운을 거머쥔다 해도 환하게 웃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무슨 일이 있어 이렇게 축제를 벌이는 거지?" 프란은 은근슬쩍 시온에게 물었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축제는 그저 즐기면 되는 거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그 대답에 실망한 프란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던 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맥주 몇 잔에 거나하게 취한 그는 끄윽, 하고 트럼을 하고 있었다. 프란은 남자에게 물었다. "축제인 것 같은데……. 무슨 이유로 이렇게 축제를 벌이는 거지? 여름에 축제라니, 이건 좀 드문 편 아닌가?"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프란을 아래위로 죽하고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허, 외지인인가 보군. 내일이 카세타의 셋째 공주 키네세스님의 생일이지 않나. 키네세스님의 생일 전야의 라칸트(카세타의 수도)에선 언제나 축제가 열리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카세타의 셋째 공주…… 키네세스?" 프란은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 키네세스, 키네세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 같다고 묘하게 생각한다. 그녀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자 답답해진 듯,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 "카세타의 꽃중의 꽃.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님 말이다." 순간, 시온이 입술만을 달짝여 말했다. "……아아. 그 연약한 공주님을 말하는 건가." 뭔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프란은 고개를 휙 돌리고 시온을 보며 말했다. "흥, 카세타의 공주님에게도 그 시커먼 마수를 뻗치는 거냐?" 순간, 시온이 갑자기 두 손을 꽉하고 모아 쥐더니 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당황한 프란이 한 발 물러서는데, 시온이 샥하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빠악! ▷◀▷◀▷◀▷◀▷◀▷◀▷◀▷◀▷◀▷◀ 프란은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또 먹고 있었다. 반면, 시온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음식은 한 스푼도 먹지 않은 채 프란만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보통 때라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온을 향해 한바탕 날뛰고도 남았을 프란이지만, 오늘만은 조금 달랐다. 음식을 너무 열심히 먹느라고 시온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해버린 까닭이었다. 너무나도 맛있게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는 프란을 보는 시온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프란이 흠칫했다. "……어이." "응?" 시온은 자신이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들킨건가 싶어서 얼른 뒤로 몸을 빼며 물었지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프란은 잠시 눈을 찌푸리더니, 한참만에 천천히 뱉어냈다. "……뭔가, 느껴지지 않나?" "응? 뭐가?" 시온이 놀라서 주위를 살피려는 찰나, 프란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사라졌어." 프란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발견되는 것은 없었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던 음식을 한 스푼 떠서 먹었다. 프란은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방금 전에 느껴졌던 그 이상한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 '……방금 그거, 짙은 살기였어…….' 이상할만큼 짙은 살기가 어느 순간 식당 한구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분명히 느꼈었다. 카세타의 셋째 공주 키네세스의 생일을 맞이해서 벌인다는 축제. 축제로 인해 붐비는 이 식당은 아직도 소란스러움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 소란스러움에서 순간적으로 살기를 느끼다니. 그것도 순간적으로나마 온 몸의 털이 곤두설 것만 같은 살기를. 그 살기에 놀란 몸이 먼저 반응을 해서 하마터면 먹고 있던 음식을 놔두고 검을 뽑을 뻔 했다. 하지만, 살기를 느끼고 몸이 움찔했 때는 이미 그 살기라는 것이 사라져버렸다. 오랜만에 경험한 그 살기라는 것에 온 몸의 피가 순간적으로 끌어올랐다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끓어 넘칠 것 같았던 전투욕을 밑으로 내리 누르면서 프란은 다시 음식에 몰두했다. 자신도 모르게 검집을 꽉 쥔 손이 흥분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프란은 새삼스레 자각했다. 자신이, 검사라는 것을. ▷◀▷◀▷◀▷◀▷◀▷◀▷◀▷◀▷◀▷◀ "프란……." "왜." 프란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러니 저리니 해도 오늘 하루 반의 옆을 줄줄줄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온을 힐끗 보고 있노라니, 시온이 말했다. "너 말이야……. 이건 혹시,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시온은 말을 더듬거리다가 한참만에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은 좋아하지마." "검으로 그일 테냐, 손으로 구타당할 테냐."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프란이 매섭게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친절히 주물러 주겠다는 의지가 온 몸에서 끓고 있었다. 시온은 피식 웃으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술기운에 젖어 거리에서 흥분한 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람들의 틈새를 빠져 나가면서 시온은 입술을 가만히 열었다. "형님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좋아.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는 분이고……. 나같이 가벼워 보이는 놈 이랑은 질적으로 다른 것도 형님이지. 멋있는 남자라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역시 형님은 나완 달리 위험한 사람이거든."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그윽한 눈빛으로 하늘을 보았다. 프란은 그런 시온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시온은 빠른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프란이 어딜 가냐고 묻자 시온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마법 용품 이것저것 살게 있어서. 사실, 외출의 궁극적인 이유는 그거였지." 시온의 말에 프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그래. 마법 용…… 뭐?" 하지만 가만히 들으며 무의식 중에 시온의 말을 따라하고 있던 프란은 순간 깜짝 놀라 고함을 치고 말았다. 즐겁게 걷고 있던 은발의 소년은 그런 프란의 반응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프란의 경악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프란은 그런 시온의 태연한 얼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쳤다. "너, 너…… 너어? 너…… 마, 마법사였던 거냐?" "응. 왜 그렇게 놀라고 난리야?" 시온은 별 것 아니라는 태도로 말하고 있었지만, 프란으로서는 놀라는 게 당연했다. 이 대륙에서 마법사라는 것은 정말이지 귀한 존재들로, 한 국가에 채 열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천부적인 두뇌와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절대적인 감각이 완성시키는 마법의 길을 걷는 그 자들은 보통의 사람들에겐 경의의 대상이다. 그녀의 모국인 세이피아에서는 특히 마법사가 적어, 온 나라에 있는 마법사를 다 합쳐도 7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은거 마법사까지 합치면 겨우 10명이 될까. 그런데, 그렇게나 귀한 마법사 중 하나가…… 이 바람둥이 버터라니. "아일린 가문의 사람이…… 왜, 왜 마법을 배운다는 거냐? 넌 재산 증축하는 방법 같은 걸 배워야 정석 아냐?" 프란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사실을 따져 묻자 시온이 방긋 웃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열렸으나, 불행히도 그의 말은 프란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아아, 기쁘군. 드디어 내게 관심을 보여 주는 건가!" 퍼억! 말할 것도 없이 프란의 강렬한 펀치가 날아들었다. 시온은 부드럽게 고개를 움직여 프란의 주먹을 피했다. 프란은 의외로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는 시온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시온은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그런덴 관심없어. 어차피 내가 가문을 이을 것도 아니고." 생글생글 웃더대던 시온의 얼굴이 그 말을 끝낸 순간 확하고 굳었다. 프란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찌푸려지는 시온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시온이 씹어뱉듯 한마디 한 것은 그 순간이었으리라. "나는 아일린 가가 싫어." 단 한마디. 그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순간 프란은 놀라 걸음조차 멈출 지경이었다. 말을 하는 시온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지면서 마치 평소의 반과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언제나 빙글거리던 시온이 그런 표정을 하자, 이건 또 새로운 공포로 다가온다. 프란은 당황한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번 시온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하지만, 아까 전의 그 표정은 이미 시온의 갈색 얼굴 위에서 사라진 후였다. 잠깐 동안 떠올랐다 사라진 시온의 표정을 되새겨보며 프란은 살짝 침을 삼켰다. "왜?" 프란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시온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 얼굴 위에 떠오른 것은 평소 때의 시온이 짓는 그 능글맞은 웃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프란은 방금 전 자신이 보았던 그 차가웠던 얼굴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뭔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억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방금 전에 본 시온의 표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걷자, 시온이 멈춰 섰다. 그가 멈춘 곳은 매우 커다란 규모의 가게 앞이었는데, 온통 흰빛으로 점칠된 그 가게 안으로 시온은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프란은 그다지 따라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가게의 바깥 문에 지그시 기대섰다. 프란이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시온은 이 것 저 것 주인에게 물건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프란의 입에서 가볍게 하품이 나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시온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시온은 프란을 향해 손을 까딱여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다가가 보니, 여러 가지 모양의 보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은 귀금속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무관심한 얼굴을 했다. 프리텐 가문이 건재할 그 때조차 귀금속이라곤 보지도 않았던 그녀였지 않은가. 검만 있으면 되었던 특이한 여인은 그녀에게, 이런 귀금속은 그저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귀족가의 다른 여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돌맹이 따위를 보고 뭘 그렇게 좋아하고 있는 걸까.' 옛날엔 그런 생각조차 했었던 그녀였다. 이런 보석을 본다해도 역시 돌맹이로군, 이라는 생각 이상은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시온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헤에, 이거 꽤 예쁘지 않아?" 시온은 그 말과 함께 앞에 있던 보석을 턱하고 집어들었다. 어째서 마법 용구를 파는 가게에서 보석 같은게 보이는 거지, 라고 프란이 물으려는 순간 시온이 그것을 들어 주인에게 말했다. "저기 있는 파란 보석하고, 여기 있는 빨간 보석, 그리고 저기 저기, 저어∼기 있는 주홍색의 보석을 줘. 아아, 이것도 괜찮군. 라스레의 눈인가? ....흐음? 이건 정령석이로군? 꽤 비싸겠는걸. 호오‥…? 역시 여긴 물건 매입이 빠르다니까. ....쿡쿡, 이레스의 심장도 있군. 아아, 거기 푸른색의 보석, 그건 20개 넣고……. 음, 그 쪽에 있는 하얀 정령석은 12개만 넣어줘." 상인은 갑작스럽게 많은 주문을 쉴 새 없이 해대는 시온이 태도에 놀랍고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더듬더듬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어, 손님……." 상인이 말을 더듬는 이유를 안다는 듯, 시온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으니까 잔말말고 내놔." 시온은 생글생글 웃으며 상인에게 말했다. 상인은 계속 쭈뼛거리다가 어느 순간 시온의 비싼 옷가지를 보며 주섬주섬 시온이 주문한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시온은 물건을 잠시 확인한 후 품을 뒤적였다. 그의 손 안에 이윽고 딸려 나온 것은 찬란한 은빛을 띄고 있는 작은 동전이었다. 프란은 그 동전의 모양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온은 그 작은 동전 하나를 상인에게 내밀었다. 상인은 쭈뼛거리며 뭐냐는 듯한 태도로 그 동전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태도로 동전을 받아들였던 그는 그것을 만져본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부비더니, 한참동안 동전을 보고 보고 또 보고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시온이 피식 웃었다. "의심하는 건가? 확실히 아일린 가의 '세뇨타' 다." 시온의 말에 상인은 경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타올랐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크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가득한 당황함과 경악과, 이루 말할 수 없는 황당함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그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그 동전을 시온에게 도로 되돌려 주며 고개를 다시 한 번 크게 숙인다. "아, 알아뫼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아, 됐어 됐어. 내가 아일린 가의 사람이다, 라고 머리에 써놓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안 그래?" 시온은 그 말과 함께 생긋 웃으며 돌아섰다. 프란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온은 그런 프란을 이끌고 가게에서 빠져 나왔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가게는 아일린 가 소속의 상단이었고 방금 전에 시온이 보여준 그 작은 물건은 아일린의 모든 혈족에게 하나씩 주어지는 동전이었다. 아일린 가의 혈족은 아일린 가에서 세운 모든 상단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상인이 벌벌 떨었던 까닭역시 간단하지 않은가. 자신의 상단 쯤은 언제든지 가볍게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이 왔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시온은 생긋 웃으며 보석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보석 주머니 외에도 이것저것 샀는지, 주머니가 꽤나 두둑해져 있었다. "그딴 쓸 데 없는 돌맹이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프란이 보석 주머니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할 셈이지." 그 말과 함께 시온은 안에서 커다란 물방울 모양의 보석을 꺼내, 프란의 손에 척하고 쥐어 주었다. 프란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에, 시온은 주머니에서 하나하나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 나온 것은 홍염을 머금은 듯한 오팔 팔찌, 그 다음 것은 투명한 초록빛이 살짝 비치는 마노, 저 세인트 레이크 씨(레키슈안의 앞 바다)의 빛깔을 가득 머금은 사파이어에 이르기까지. 시온의 주머니 안에서는 무려 12종의 악세사리와 보석이 나왔고, 그것은 가득가득 프란의 손에 들리워 졌다. "……뭐 하자는 짓거리냐?"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것을 계속 들고 있던 프란이 말하자, 시온이 기다렸다는 듯 살짝 미소지었다. "선물." "……." 이 보석을 팔면 빚을 얼마나 갚을 수 있을까, 라며 프란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프란이 자신의 보석을 받아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듯이. 시온의 그런 표정을 보면서, 프란은 아직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거 다 팔면 정말 얼마 나올까…….' ▷◀▷◀▷◀▷◀▷◀▷◀▷◀▷◀▷◀▷◀ 보석 선물을 잔뜩 받아버린 프란은 군말 없이 그것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었다.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긁어모아서 언젠가는 반에게 빚진 6000케트를 갚고 말거라고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온의 손에 이끌려 다니다 보니 이제 사위는 어두워져, 카세타의 꽃이라는 셋째 공주 키세레네의 생일 전야를 맞아 잔뜩 술렁거리던 거리는 조용히 잠자리에 들려 하고 있다. 밤을 밝히는 비나룬이 모두의 머리카락 위로 수줍은 빛을 뿜는 가운데, 거리는 침묵 속에 녹고 있다. 어째 시온과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프란은 조금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카르멘가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시온의 은발이 길게 휘날렸다. 짧게 컷트된 프란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시온의 머리카락은 길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시온을 올려다보며 프란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지?" 시온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프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신경꺼." 저 긴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니 몇 달 전에 자신이 싹뚝 잘라버린 금빛의 머리카락이 생가나 버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었다. 아니, 아깝다는 생각이 다 뭔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덥썩 잘라버렸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만, 시온의 날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떠올라 버린 것이다. 프란은 썰렁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시온은 프란의 하얀 목덜미를 보며 손을 올렸다. 하지만, 시온의 손은 프란의 목덜미에 닿이지 않았다. 시온은 부드러운 손길로 프란의 머리카락을 몇 올만 건드렸다. 아주 가볍게. 바람을 가장한 움직임으로. 프란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시온이 손을 내린 그 때였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시온은 흠칫해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프란이 갑자기 검 집에서 검을 휙하고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카르멘 가문의 가주, 반이 선사한 그 은빛의 검은 요사스런 은빛의 광택을 간직한 채로 프란의 손에 들려졌다. 희번들한 색이 번지는 그 검을 들고선 프란을 보며 시온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봐, 프란. 겨우 머리 만진 것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하지만, 프란은 시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거기. ……나와." 시온은 갑작스럽게 굳어진 프란의 목소리에 몸을 멈칫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카르멘 가까지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어둑한 길이다. 집이 빽빽이 들어선 이 거리는 더없이 썰렁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사람 한 둘쯤 죽어도 내일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수습될 것 같이 텅빈 거리에서, 프란은 검을 들고 다시 외쳤다. "당장 검 날리기 전에 앞으로 나와!" 프란이 차분하게 외친 그 때였다. 저 앞에서 휙, 하고 그림자 하나가 드리듯 나타났다. 시온은 놀란 듯 그 은빛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림자는 천천히 장막 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또박거리는 발걸음이 점점 귓가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누군가가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 그림자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환하게 달빛이 부어지는 가운데에, 한 남자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구름 뒤에 숨은 듯 서 있던 비나룬이 구름의 방해를 벗어나 눈부신 빛을 뿜었다.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시온의 인상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오랜만이군, 시온! 이 개망나니 같은 놈!!" 다가온 그림자는 씩 웃으며 말을 뱉어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3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7) 가네트(uznian) 03-11-24 :: :: 7737 "……아는 사람인가?" 프란이 검을 세운 채로 묻자, 시온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아, 조금." "뭐가 조금이라는 건가! 이 빌어먹을 자식!" 남자는 화가난 듯 버럭 고함을 쳤다. 그의 그런 태도에 프란은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더더욱 검을 곧게 쥐었다. 만약 이 곳에서 싸움이 나게 된다면, 일단 시온은 자신이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온은 검을 다룰 수 없는 것 같으니. "……하하. 그래, 비엘은 잘 지내고 있나?" 시온은 자신이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가볍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고, 그 말을 듣고 섰던 남자는 이빨을 부드득 갈며 말했다. "빌어먹을 자식. 네놈의 입에서 지금 그 말이 나올 군번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아, 못 나올 건 또 뭘까나." 시온은 깍지를 껴서 머리 뒤로 넘기며 태평스럽게 물었다. 시온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의 태연스러운 태도에 남자는 발끈한 듯 했다. 저 멀리서, 그림자만을 내비친 채로 어둠의 여신이 내린 로브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상당한 다혈질인 듯, 챙하고 검이 뽑히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사정을 모르는 프란이었지만, 어찌됐든 시온에게 상당한 반감이 있는 듯한 이 자의 재빠른 움직임을 보고 그는 얼른 시온의 앞을 막아섰다. 시온을 당장이라도 두동강 내려는 듯 달려오던 남자는 프란이 앞을 막자 흠칫하고 멈춰서더니 프란을 향해 검의 진로를 바꾸었다. 프란의 입술이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검에서 불이 일었났다. 프란은 두 다리로 자신의 온 몸을 지탱한 채로 검을 휘둘러온 남자에게 맞섰다. "이익!" 자신에게 검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치며 몸을 밀어오자 프란의 몸이 살짝 밀렸다. 하지만 한참을 밀려나던 그녀는 어느 순간 오른발을 앞으로 뻗더니, 그대로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남자가 휘청한 사이, 프란은 두 발을 단단히 다진 채로 곧추섰다. 남자는 프란이 이 정도로 자신의 상대를 해올지 몰랐는지, 조금 놀란 듯 몸을 뒤로 뺐다. 그는 검을 살짝 흘리곤 숨을 골랐다. 숨을 들이쉬며 그가 말했다. "이 놈은 또 뭔가, 이 망나니 같은 놈아!" 시온을 향해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아아, 내 연인이야." 시온이 가볍게 웃으면서 한 말에, 발악한 것은 당연히 프란이었다. "닥쳐, 네 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뭐?…… 이, 이젠 남색…… 남색까지?" 남자는 얼빠진 듯한 음색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다가 프란이 갑작스레 휘둘러운 검에 얼핏 정신을 차렸다. 프란은 남자의 얼굴을 향해 검을 한 번 휘두르며 낮게 뱉어냈다. "……헛소리에 장단 맞춰 주지마." 프란은 그 말과 함께 다시 검을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한데, 무슨 일이지? 식당에서의 살기도 너인가?" 남자는 입 꼬리를 부들 떨며 시온을 보더니 프란 쪽으로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만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년은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투기로 살짝 틀어올려진 그 소년의 눈동자를 보면서, 남자는 한 자 한 자 짧게 뱉어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저 개망나니를 발견한 것은 방금 전의 일이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다시 검을 들곤 휙하고 고개를 옆으로 젖혀 시온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시온. 지금 당장 나를 따라와라! 그리고 비엘 아가씨께 무릎을 꿇고 빌어라!" "내가 왜?" 시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하더니 풋, 하고 웃었다. "웃기고 있군. 넌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냐? 이미 끝나버린 남의 애정사에 관여를 하다니, 웃기는군." 시온은 프란의 팔을 당겼다. "프란, 신경 쓰지 말고 이만 가자." 순간, 앞을 막아섰던 남자의 검이 움직였다. "빌어먹을 자식!!" 남자의 과격한 말과 함께 곧바로 올려진 검은 그대로 시온을 두토막 낼 듯이 가까워졌다. 시온은 가볍게 한발자국 물러섰고, 그 사이로 프란이 끼여들었다. 프란은 퍼렇게 날이 선 검을 똑바로 세운 채로 남자의 검에 맞서곤 눈을 빛냈다.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보이는 프란을 보며 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자신의 앞을 막는 프란을 보고 있다가 뒤로 흠칫 물러섰다.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비웃음이 어렸다. "흥! 이 놈의 호위라도 되는건가?" 프란은 대꾸 없이 휭, 하고 검을 휘둘렀다. 남자의 무지막지한 검 앞에서 프란은 조금의 굽힘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침묵의 여신이 숨어산다는 저 비나룬의 빛이 프란의 검 끝에서 조각조각, 유치조각처럼 미세하게 부서져 희미하디 희미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늘가늘한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조그마한 땀방울들이 프란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프란은 검을 살짝 옆으로 누였다. 남자는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된이상, 저 망나니를 납치를 해서라도 데려가겠다!" "저 놈을 데려가 준다면 고맙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난 죽을 거야." 프란은 반을 떠올리며 잠시 오한에 몸부림쳤다. 그녀가 검을 들고 싸늘하게 눈을 빛내고 있자, 남자는 검을 횡으로 휙하고 베어왔다. 하지만, 프란으로서는 그저 우스운 정도의 공격일 뿐이었다. 이 남자의 검은 전체적으로 어설펐다. 검을 배우긴 했으되, 실전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고귀한 귀족 집안의 자제들. 형식으로만 배운 그 자제들의 검이 아마 이럴 것이다. 프란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젖히고 몸을 그 쪽 방향으로 튼 다음, 검의 오른쪽을 번쩍 들어올려 남자의 뒷통수를 검날로 가격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검날에 맞은 채로 뒤쪽으로 물러섰다. 방금 전의 그 공격으로 자신이 프란보다 훨씬 하수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벌개졌다. 이런 여리여리한 소년 따위에게 자신이 쉽게 공격을 허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지 그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프란은 두 발을 살짝 벌린 채로 검을 더욱 세게 쥐었다. 삐죽한 직선을 그리고 있는 검이 바람같이 움직였다. 남자가 흠칫하며 몸을 뒤로 트는데, 그 순간 프란의 검이 남자의 목줄기에 정확하게 닿였다. 남자의 검도 프란 쪽으로 들어올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프란의 복부 근처에서 멈춰 있었다. 프란의 검은 남자의 목 앞에서 정확하게 멈춰진 반면, 남자의 검은 프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져 있다. 프란의 입술이 움직였다. "……네가 졌어." 그 말과 함께 프란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발을 들어 남자의 검을 차내렸다.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땅을 뒹굴었다. 프란은 검을 순식간에 거두곤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는 휘청, 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한 밤중에 살기를 풀풀 날리며 따라오게 만든 거지?" 프란은 땅을 뒹굴거리는 남자를 보며 시온에게 물었다. "……별 것 아닌 일이야." 시온은 조금 찔리는 것이 있는지 버벅대며 말했다. 그의 그 말에 땅을 뒹굴던 남자가 분개한 어조로 뱉어냈다. "별 거 아니라고? 불쌍한 비엘 아가씨. 이런 개망나니를……." 시온은 자신을 빚대어 하는 그 '개망나니'라는 단어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피식 웃었다. "뭐, 내가 개망나니라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듣기에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군." 프란은 어찌됐든 검을 계속 세운 채였다. 시온은 척척, 다가가더니 남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제 더 이상 나따위에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다고 당신 아가씨에게 전해주지 않겠어?" 시온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나에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난 바람 같은 존재란 말이다." 시온은 그 말과 함께 기습적으로 프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바람이 머무는 장소는 한 군데 뿐이지." 다음 순간 프란의 팔꿈치가 시온의 명치를 강타했다. 바닥에 누워있던 남자는 싸늘한 얼굴로 시온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분노로 온 몸을 떨고 있었지만, 프란이 있기에 시온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는 화가난 목소리로 외쳤다. "비엘 아가씨를 울린 것은 후회하게 될거다!!" "아아, 글세." 시온은 픽하고 웃어버렸다. 남자는 몸을 휙하고 돌리더니 삽시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프란은 갑자기 돌아서서 가버리는 그의 태도에 당황한 듯 소리쳤다. "뭐야, 벌써 가는 건가?" 적당히 달아오른 몸은 더더욱 과격한 검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의 열을 식혀줄 상대 따위는 이 곳에 없었다. 프란은 괜히 짜증이 나서 뒤돌아서는 남자에게 외치다 말고 어느 순간 몸을 굳혔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시온 쪽으로 꺾으면서 씨익 하고 웃었다. "자아, 이제 설명을 해주실까? 응? 시온 아일린님?" 시온의 머리 위로 쉴 새 없는 땀방울이 생겨난 것은 그 직후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4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1) 가네트(uznian) 03-11-24 :: :: 12701 PART 8 : 카세타 왕궁 무도회 "초대장이라……." 반은 자신의 앞으로 배달된 한 장의 편지와, 그 편지와 함께 동봉되어 온 초대장을 살짝 들어 위로 올리며 중얼거렸다. 편지의 흰 봉투는 금빛의 테두리를 갖고 있다. 가벼운 편지 한 장에조차 돈을 들이는 저 황족의 사치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반은 가볍게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반은 잠시 뚫어져라 편지의 겉봉을 바라보았다. 키네온 L. K. 카세타- 편비 겉봉에 또렷이 적힌 그 이름은 분명 이 나라, 카세타 국왕의 것이었다. 반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편지를 개봉했다. 곧, 하얀 종이 한 장이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검은 잉크로 휘갈긴 듯한 편지의 글씨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지독한 악필가가 쓴 것이 틀림없는, 정말이지 못 쓴 글씨가 편지에 새겨져 있다. 반은 눈으로 그것을 읽어내렸다. 「카르멘 경. 오는 3일, 짐의 셋째 딸인 키네세스의 17번째 생일을 맞이해 황실에서 무도회를 개최하오. 카르멘경이 반드시, 반드시 참석해 주었으면 하오. 그대가 무도회를 기피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번만큼은 반드시 참석해 주시길 요청하는 바요. 중요한 의논건이 있소. 그대가 참석할 것이라 믿고…….」 "카세타의 국왕이 지독한 악필이란 소문은 틀린 게 아니었나보군." 너무나 못 쓴 그 글씨를 읽고 있던 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읽고 있던 편지를 도로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중요한 의논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이 빌어먹을 영감은." 카세타, 이 나라의 지존인 그 국왕을 '빌어먹을 영감'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반의 얼굴은 가득한 냉소로 뒤틀려 있었다. 반은 입술을 꽉하고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짙은 것이 떠올라 있다. 과거의 잔해를 읽어 내리는 반의 얼굴 위로 어느 순간 가벼운 경련이 스쳐 나갔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반의 얼굴에 파란이 스쳤다. "……설마……?" 뭔가 끔찍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이 분명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섰다. 한 벽의 전체를 이루는 창문에 다가선 그는 커튼을 휙, 하고 젖혔다. 녹 빛의 비나룬은 오늘 역시 아름다운 빛을 뿜는다. 정말 저 안에는 유폐되었다는 침묵의 여신이 살고 있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든 감상적인 생각에 반은 비나룬을 뚫어져라 보았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쉰 그는 이번에는 시선을 내려 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그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두 명의 사람이 저택 문 앞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밤이라곤 하지만, 비나룬이 뿜어내는 빛 덕에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카락은 이런 밤에서도 눈에 잘 띄는 종류의 것이다. 독특한 금빛의 머리카락 역시. 반은 잠시 그대로 밑을 내려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커튼을 휙하고 도로쳤다. "……갈아엎어 버리고 싶군." 누구를 향해 말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미친놈." 카르멘가로 들어서고 있던 프란은 시온을 향해 투박한 어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가득한 불만이 떠올라 있었다. 시온은 자신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내뱉은 프란을 보며 억울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미친놈이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하지만 프란은 그런 시온이 어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뭐야. 그 비엘인가 뭔가했던 여자는…… 네 녀석의 옛연인이다, 이거잖아." "연인이라……. 글세." 시온이 비죽이 웃으며 하품을 크게 했다. "그녀도 나도, 서로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 시온의 어조에 화가난 듯, 프란이 고함을 쳤다. "뭐야? ……사귀던 사이였다며! 게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건 네 녀석이라면서! 목에 칼 맞아도 할 말 없는 놈이었잖아, 이거!" 프란이 버럭 소리치자 시온이 머리를 긁었다. "흠……. 그렇게 되나?" 멋쩍은지 뒷통수를 슬슬 긁으며 시온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확실히, 그 비엘이라는 아가씨는 시온의 일방적인 이별 선언을 받았던 여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시온에게도 이별의 이유 정도는 존재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프란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그녀는 나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내 가문을 원했던 거였어. 그걸 알게 돼서…… 난 그녀에게 실망했고…… 그래서 떠나버렸지.' 입가로 조용히 중얼거려본다. 시온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프란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어느 순간, 시온의 눈이 살짝 확장되었다. 그의 얼굴 위로 불현듯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눈이 머물고 있는 곳은 3층의 어떤 창문이다. 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갑자기 확, 하고 어두워 지는 것이 보인다. 시온은 커튼이 확 하고 닫히는 그 방을 올려다보다가 킥킥 하고 작게 웃어버렸다. 프란이 이상한 놈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한참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 "……적당히 좀 해라." "그럴 수 없습니다." 프란은 눈을 멀뜽하게 뜬 채로 앞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 위로는 무수한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프란은 지금 꽤 당황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라지 않나!" "프로에게 '적당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이 차갑게 내뱉는 말에 저렇게나 당당하게 말대답을 할 수 있는 남자가 존재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프란이었기에 그녀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저 성질 더러운 가주가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그으며 말하는데도 그 말에 당당히 반박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정말이지 놀랍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지금 이게 몇 시간째인 줄 알긴 아는 건가?" "정확히 다섯시간하고도 30분 23초가 되었습니다." 반의 말에 다시 한 번 정확하게 말대답을 하고 있는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20대 후반의 남자로, 갈색의 말총머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연신 진지한 얼굴로 반의 옷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금 반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윤기가 흐르는 보랏빛의 머리카락이라던가, 타고난 외모는 변함이 없지만……. 언제나 입고 있던 검사복이 아닌 부드러운 실크 소재의 옷을 입고 있는 반의 모습은 평소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푸른빛이 도는 정장을 차려 입고 있는 반의 모습은 그야말로 '귀티' 그 자체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가주님. 조금만 더 입어보시면 됩니다."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반의 신경을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 프란은 조금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런 남자를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반이 버럭 신경질을 내며 죽어버려! 라고 외칠까봐 가슴을 졸이던 프란은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살펴도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은 화가난 것이 분명했다. 무표정하지만 눈썹선이 힐끔 위로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삐뚜름하게 다물린 그의 입술은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저 성격나쁜 가주는 성격을 내리 누르며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저 성격 더러운 놈이 성질을 누르고 있다니…… 정말이지 살다보니 별 꼴을 다 보는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프란은 힐끔 옆을 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느긋하게 웃고 있는 금발의 여인, 마린이 있었다. 마린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반을 향해 가득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린의 손에 의해 이 방으로 질질 끌려온 프란이었다. 처음에는 이 무서운 여자의 손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악을 했던 프란이지만, 자신을 따라오면 오늘 아침은 감자를 깎는 중노동을 면제해주겠다는 말에 그만 깜빡 당하고 말았다. 마린의 손에 이끌려 프란은 이 방으로 들어 왔다. 워낙에 카르멘 가가 넓긴 했지만, 이런 방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큰 붉은 색의 문을 여는 순간, 가득한 릴리아나 꽃의 향기가 코 끝을 자극해왔고, 그 사이에서는 금빛의 옷을 입고 있는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아아, 언젠가는 가주님이 저를 찾아오실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날을 위해서 저는 매일매일 옷을 만들고 있었지요!"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반은 그의 표정을 억지로 외면 했다. 하지만 남자는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 같이 아름다운 분이 무도회에 나가시지 않는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있습니까, 가주님. 오늘 하루 만으로 모든 레이디들의 마음은 가주님의 것이 될 겁니다!" "그딴 거 필요없다." 차갑게 뱉는 반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건지, 남자는 여전히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손에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옷들 줄줄줄 걸린 채로 들려 있었다. "아까부터 대체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은 거야? 옷만 갈아입다 오늘 하루 끝낼 셈인가?" 프란은 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마린이 손뼉을 딱하고 쳤다. "이봐요, 막스! 옷이 다 왜 그 모양이야? 조금 더 예쁜 거 없어? 더 화려하면서도 엘레강트한 거!" 마린이 외치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후훗, 아직도 134벌이나 더 남았답니다." "헤에, 그게 정말이야? 모조리 다 입혀드리라구!" 마린의 말에 프란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반의 얼굴에도 희미한 파란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훗, 하고 웃었다. "가주님, 이 쪽으로 오십시오." 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머리를 마구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어제, 카세타 왕실에서 초대장이 왔을 때…… 마린에게 아무 말도 하지말고 조용히 혼자서 준비를 하고 떠났어야 하는 거였다. 반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구 한탄했다. 마린에게 황실에 가야하니 말을 준비하라고 말을 꺼낸 것부터가 실수의 시작이었다. 왜 말을 준비해야 하냐고 마린은 물었고, 반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황실에서 무도회 초청을 해왔다.' 마린은 반의 말을 듣자마자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어머나, 가주니이이임! 이번엔 참가하시는 거예요? 여태껏 무도회라면 치를 떠시고…… 단 한번도 참가하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확실히 그랬었다. 카르멘 가의 가주로서 저스티스라는 이름을 받은 이후로, 반은 정말이지 단 한번도 무도회에 참가해본 적이 없었다. 유년 시절에는 물론 아버지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도회에 참여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주라는 이름을 가진 이후로는 단 한번도 무도회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무도회 따위는 반에게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사교의 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지만, 정작 반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따위는 없는 곳이기도 했다. 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귀족들은 여럿 있었지만 그 때마다 '정 내 얼굴이 보고 싶다면 직접 찾아오라고 해'라고 말했던 반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왔던 반이, 이번 파티에는 참여 한다고 덜컥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었군.' 아무리 황실을 우습게 아는 반이라지만, 황제가 친히 편지를 보내며 와달라고 애걸하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반은 그다지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마린에게 말했다. 마린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오호호호호홋!! 가주니이이임∼ 황실 파티라 이거지요오? 제가 화∼ 끈하게 준비를 해 드리겠어요옷!' ……그 때 말렸어야 했다. 그렇게 날뛰던 마린을…… 말렸어야 했다. 그 때 말렸다면 아마도 이렇게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몇 십 번씩 갈아입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마린의 따따거리는 잔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끔찍스러운 일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 느끼한 카르멘 가 전속 의상 디자이너에게 시달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에 때는 늦어 있었다. "프란, 프란. 어떤 옷이 잘 어울리시는지 좀 봐봐. 응?" 마린은 이제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우훗, 하고 웃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들어나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사악해 보였다. "……마린." 반이 나지막하게 마린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나지막하고 살벌한 음성에조차 요동하지 않는 이 대단한 강철 심장의 여인, 마린은 반에게 싱긋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오호호호호호홋! 쑥스러워 하시기는∼ 오호호홋!" 전혀 쑥스러워하고 있지 않은 반이었다. "이봐, 마린. 저건 절대로 쑥스러워 하는게 아닌……." "오∼ 호호호호호홋!!" 프란의 말을 막으며 마린이 다시 크게 웃었다. "대 카르멘 가의 집사장 중 하나로서 이런 일을 해야하는 건 당연하다고 봐요, 가주니임. 오오, 그 옷도 잘 어울리시네요!!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가주님, 너무 원망하지 마시라구요." "……뭐가 당연하다는 건가!" 반의 딱딱한 말투에도 마린을 물러나지 않았다. 반은 72번째 갈아입고 있는 자신의 옷을 저주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마린은 훗, 하는 웃음과 함께 다시 반에게 말했다. "오∼ 호호호홋! 대 카르멘 가의 가주이자 아일린 가의 가주이기도 한 당신입니다. 그런 당신이 파티에서 가장 돋보여야 하는 건 당연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가장 화려한 옷을 입어야지요! 그렇고 말구요! 황실측보다 더욱!" "……나는 손님이다. 손님이 주인보다 더 돋보인다는 것은 말……" "오호호호홋!! 자아, 자아. 뭐가 좋을까……. 이봐요, 막스! 좀 더 화려한 걸 내 보라구요!!" 하지만, 마린은 반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프란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수십차례 옷을 갈아입는(아니, 갈아입혀지고 있는) 반을 보고 있자니 눈이 핑핑 도는 듯 했다. 그녀의 눈이 막 감기려고 했을 때, 마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오오오오옷!!" "뭐, 뭐야?"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든 프란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순간, 프란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프란은 검을 슥슥, 안으로 밀어넣곤 헤∼ 하고 입을 벌렸다. 검은빛을 띄고 있는 정장의 가슴팍에서부터 허리춤까지 드려준 금빛의 줄과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에……" 프란이 반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마린이 살짝 웃었다. "어때, 어때? 무진장 잘 어울리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프란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마린의 얼굴이 더더욱 환해졌다. "오∼ 호호호호호호호홋!! 거봐요, 잘 어울린다니까! 역시 수십번 옷을 갈아입은 보람이 있었어요! 어머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정말이라니까요!!" 반의 얼굴은 더더욱 망가졌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5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2) 가네트(uznian) 03-11-24 :: :: 17941 안녕하세요, 카르멘 경? 오늘도 날씨가 참 좋군요. 다음 티타임의 주제로는 역시 세이피아와의 무역건이 어떨까요? -키네세스 L. K. 카세타 ▷◀▷◀▷◀▷◀▷◀▷◀▷◀▷◀▷◀▷◀ 반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무섭게 굳어 있다. 게다가 그의 온 몸으로부터는 검은빛의 오오라가 쉴 새 없이 빛을 뿜어내고 있어 평소보다 훨씬 더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수십번도 넘게 옷을 갈아입느라 온 몸이 파김치가 되 버린 반이었다. 반은 이따위 옷을 갈아입는 것보다 검 연습이 수백배는 쉽다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차였다. 이 무도회가 끝나면 당장 그 막스라는 카르멘 전속 의상가를 해고시켜버리고 말 거라고 다짐하는 반의 얼굴은 가볍게 찌푸려져 있었다. 프란은 그런 반의 뒤를 따라가면서 가볍게 두 팔을 깍지껴 머리 뒤로 돌렸다. 환한 하늘이 그녀의 얼굴 위로 부서지고 있다. 바람결에 살풋 날리는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검은빛의 경장은 무섭도록 잘 어울려서, 새삼스럽게 반의 얼굴이 예쁘다는 것을 깨닫는 프란이었다. 저 더러운 성질머리와 어쩌면 저렇게도 어울리지 않는 얼굴인가. 햇빛의 세례를 받아 기묘한 음영이 지는 저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면 저 사람이 정말로 천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하게 된다. 아름다운 장미의 향기가 독하도록 아름다운 것처럼, 반의 아름다운 외모에서는 지나치리만큼 독한 매력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에 숨은 가시가 있는 것처럼, 저 아름다운 외모에는 무섭도록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다. 몇 십 번씩이나 옷을 갈아입는 중노동을 감행했던 탓인지 반의 어깨는 잔뜩 굳어 있었다. 프란은 오늘 하루만큼은 저 지긋지긋한 가주놈에게서 해방되겠군,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는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반이 갑자기 몸을 멈추더니 조그맣게 입술을 열었다. "너는 마린에게 가라." 벌어진 입술 속에서 들려나온 차가운 목소리에 프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예?" "……마린에게 옷을 달라고 해라." 조금의 동요감도 없이 나온 그 말에 프란이 기겁했다. "엑? 에에에에엑? 서, 설마 저도 가는 겁니까?" 프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꼬리가 가볍게 치켜 올려졌다 내려왔다. 프란은 반의 눈이 싸늘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 핫, 하고 입술을 다물긴 했지만 역시 깜짝 놀랐던 프란의 눈은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최근에 목이 두 개로 늘어났나?" '이젠 나한테 말대꾸도 척척 해대는 걸 보니……. 아예 죽고 싶어 발악을 하는군.' 반의 말이 자연스럽게 번역이 되어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프란은 언제나 그렇듯이 속으로는 열심히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아뇨." "지금 당장 마린에게로 가라. 10분 이내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정원으로 나오지 않으면……" "죽이시겠다구요?" 반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프란이 말꼬리를 덥썩 잘랐다. 그들의 사이에 가벼운 정적과 함께 침묵이 파도를 타고 흘렀다. 점점이 흐르는 정적의 끝에 선 반의 눈이 다시 들어올려졌다. 프란은 히익,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반은 말 없이 프란을 보고 있었다. 그 따가운 시선에 프란은 조금 민망해서인지 머리를 슬슬 긁어버렸다.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프란이 고개를 끝까지 숙였을 때 반은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옷자락을 돌렸다.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땀이 흐르고 있다. 그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란이 멀뚱히 서 있는데, 반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10분이다." 프란은 온갖 욕설을 내뱉으면서 마린의 방으로 전력질주했다. "젠장하아아아알!!" ▷◀▷◀▷◀▷◀▷◀▷◀▷◀▷◀▷◀▷◀ 평생동안 해보지 못했던 소원을 하나 푼 마린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지켜 봐왔던 반. 성장함에 따라 점점 더 카르멘 가의 전 가주 루이사 카르멘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소년. 그 소년에게 화려한 옷을 원껏 입혀보았던 마린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혼자서 잔뜩 신이 나서 룰루룰루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마린의 표정이 변한 것은 벌컥, 하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직후였다. 마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신의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뜻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웬일이야?" 언제 보아도 저 소년은 싱그러워 보인다. 누구에게나 웃음을 줄 것 같은 저 소년은 마치 빛 같은 느낌이다. 손을 뻗으면 절대로 내밀어진 그 손을 뿌리치지 않을 것 같은 아이.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그 기분. 같이 있으면 한없이 따뜻해지고 만다. '가주님도 그런 기분을 느꼈으면 했는데 말이야.' 마린은 투덜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방에 들어온 프란을 보며 생각했다. 프란은 툴툴대면서 마린에게로 오더니 이빨을 악물곤 한마디 했다. "옷!!" "엥?" 마린은 갑자기 튀어나온 그 옷이라는 말에 황당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프란의 눈 꼬리가 확하고 위로 치솟았다. "옷 말이야, 옷!! 나도 같이 가야 한다니까 옷을 줘!!" 마린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프란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픽, 하고 웃었다. 그녀는 눈꼬리를 둥글게 말며 핫핫, 하고 남자처럼 웃었다. "왜 웃는 거야?" "아, 아무것도." 피식 웃은 마린은 갑자기 발걸음을 옮겨 방의 깊숙한 안 쪽으로 들어갔다.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프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불길하게 듣고 있는데 한참 후에 마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웃으며 걸어나오는 마린의 손에는 한 벌의 옷이 들려 있었다. 마린은 프란을 향해 자신이 들고 온 그 옷을 한 벌 내밀었고,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옷을 받아들였다. "크악!!" 그리고, 그 옷을 받아드는 순간 프란은 기겁했다. 자신의 손에 들려진 것은 남자 경장이 아니라 푸른빛을 띄고 있는 화려한 실크 드레스였기 때문이다. 마린은 당황하는 프란의 표정을 즐기듯 한 번 바라본 후 킥킥하고 웃었다. 프란이 옷을 보며 입을 뻐끔거리자 마린이 활짝 웃었다. "아아, 예쁘지?" 프란이 갑자기 등장한 그 드레스를 보며 침을 꼴깍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데, 마린은 휙하고 프란에게서 도로 드레스를 뺏아 간 후 보란듯이 그 드레스를 촥하고 들어 보였다. 치마 아랫단부터 달려진 자잘한 프릴은 조그마한 꼬마가 불어넣은 비누방울처럼 달랑달랑그 올마다 반짝인다 치렁치렁하게 달린 프릴을 어깨부터 허리 끝까지 달아놓은 이 푸른빛의 실크 드레스는 눈이 부시리만치 반짝인다. 섹시하게 파여진 가느다랗게 목선 부분. 깔끔하게 들어간 세 개의 허리라인은 심플함을 강조한다. 파여진 목선을 따라 점점히 박혀 들어간 자그마한 보석들. 화려하게 반짝이는 드레스 자락에는 자그마한 진주들이 숨어서 빛을 발하고 있다. 어깨 부분의 하얀 보석은 현요하다. 마린은 잔뜩 긴장한 프란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며 프란이 움찔하며 한 발 물러섰다. 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프라아안, 혹시 이 옷 입고 싶지 않아?" "……절대로 입고 싶지 않다." 저렇게 치렁치렁한 옷을 입어서 어디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나, 라고 말 할 뻔하다가 간신히 참아낸 프란이 말했다. "이봐!!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남자한테 그런 걸 입으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마린은 황당함에 소리를 빽빽 내지르는 프란을 향해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낸 후 드레스를 꼬옥 움켜쥐었다. "흠, 그치만 이 드레스……. 정말 최고급 드레스인걸……. 너무너무너∼무 예뻐서 우리 프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젠장할!! 그만하라고 했엇!" 프란이 버럭 고함을 쳤다. 마린은 김빠지는 웃음을 픽하고 짓더니 그 푸른 드레스를 가슴팍에 대고 저 멀리 있던 탁자 위로 갔다. 장미 정원에서 갓 꺾어온 물기 머금은 흰장미가 크리스탈 물병위에 수줍은 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살포시 미소짓는 장미 앞에서, 마린은 드레스를 펼쳐 놓았다. 프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보고 있는데, 마린은 다시 방 안 쪽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뭐, 뭐냐 그건." 프란이 묻자 마린은 방긋 하고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순간적으로 프란의 몸에 무수한 소름들이 돋아났다. 마린은 보란듯이 드레스를 가볍게 접더니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붉은 리본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커다란 상자 안에 깔끔하게 접힌 드레스가 들어갔고, 마린의 손이 그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잘 살펴보니, 탁자 밑에는 그와 같은 상자가 몇 개 더 있었다. 푸른 실크의 드레스를 상자 안에 넣은 마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은 이 드레스 말인데, 오늘 생일을 맞은 키네세스 공주님께 드릴 선물이야." "뭐?" "음, 이 정도 드레스라면 공주님도 좋아하실 것 같지 않아? 가주님은 이런 덴 영 무뎌서 기본적으로 선물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도 모르고 계실 거야. 아니면 알고 있어도 절대 가지고 가시지 않을 분이지. 그 분은 그런 분이시거든. 황실에 아부할 줄을 몰라. 그러니 나라도 챙겨야지 뭐." 프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푸른 실크 드레스가 생일을 맞이했다는 카세타의 셋째 공주 키네세스의 선물용으로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너무나도 크게 안심한 프란. 혹시라도 저 엽기적인 성격의 마녀가 저 드레스를 입히기라도 할까봐 순간적으로 가슴을 졸였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프란은 곧 나사가 빠진 표정으로 헤실, 하고 웃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또다시 뭔가를 뒤적거리던 마린은 프란에게 다시 옷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검은색의 정장으로, 꽤나 깔끔한 것이었지만 역시 하인들이 입는 옷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프란은 옷을 받아들고 마린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10분 이내로 갈아입고 오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들었으니 얼른 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마린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저 마린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였다. 프란이 마린의 눈치를 계속 힐끔대는데, 문득 마린이 말했다. "프란." "뭐야?" 프란이 돌아보자 마린이 피식 웃었다. "아니야, 아무 것도." 그녀는 푸른 실크 드레스와 함께 준비된 수많은 선물용 드레스를 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그것은 언제나의 마린이 짓는 사악한 미소였다. ▷◀▷◀▷◀▷◀▷◀▷◀▷◀▷◀▷◀▷◀ 달리는 마차 안에서 반은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유폐된 침묵의 여신이 산다는 녹빛 달이 환하게 반사해내는 반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던 프란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녀는 반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창 밖으로 멀찍이 시선을 돌렸다. 다섯 마리의 백마가 힘차게 이끄는 마차에 탄 인원은 모두 다섯 명. 시온 역시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 마차에는 타고 있지 않았다. 마린이 살짝 해준 귀띔에 따르면, 먼저 준비할 것이 있다고 앞서 나갔다 했다. 시온이 이 왕궁 무도회에서 뭘 준비해야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프란이었지만 워낙 시온을 이상한 놈으로 인식하고 있던 프란인지라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다. 힘차게 발길질을 하는 백마의 움직임은 재빠르게 일행을 목적지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인원 모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바디의 말도 없이 끝도 없는 침묵의 항해를 계속 하고 있었다. 반의 방 앞을 언제나 지키고 섰던 두 명의 남자와 반, 프란, 저 앞에 있는 마린. 이 다섯 명이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양 모두 침묵 중이다. 프란은 자신이 입은 옷을 몇 번 만져 보았다. 그녀 역시 세이피아의 귀족이었기에 파티 따위에는 신물이 나도록 다녀보았다. 물론 그 때마다 치렁거리는 드레스 따위를 걸쳐 입은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화려한 예복을 차려 입었었는데. 이제는 타국의 파티에 참가한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은 검은 빛의 시종복. 조금은 씁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프란은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배가 불렀군. 좀 굶어봐야 정신을 차릴려나? 하긴 요즘엔 좀 편하게 살았어.' 저 성질머리 더러운 가주의 손에서 멀쩡하게 설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프란은 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다. 그것이 중요하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 키네세스 공주의 17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궁성 무도회. 이 무도회를 개최하는 황실에서는 파티의 규모를 폭넓게 한다. 생일 전날에는 수도 전체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고, 당일에는 황실 안에서 귀족들의 파티를, 밖에서는 평민들의 파티를 개최한다. 이 날 만큼은 평민에게도 왕궁 정원을 개방하기에, 평민들은 카세타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키네세스 공주의 생일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여기가 카세타 왕궁인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처음으로 카세타의 왕궁을 본 프란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워낙에 엄청난 카르멘 가의 저택에 익숙해진 그녀로서는 저 왕궁을 봐도 그렇게 심장이 뛰거나 하질 않았다. 삐죽삐죽한 첨탑을 봐도, 높게 치솟은 건물들을 봐도,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는다. 저 무식하리만치 화려한 카르멘 가와 비교해 단순히 규모만 더 클 뿐, 화려하기로는 카르멘 가를 따를 수가 없는 궁성을 바라보는 프란의 얼굴은 적당히 긴장을 머금고 있었다. 궁성 앞에 선 문지기들은 달려온 마차를 향해 뛰어 들어왔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귀부인들을 비롯해서 예복을 차려 입은 귀족 남자들의 시선이 다섯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 쪽으로 쏠렸다. 화려하게 조각된 마차 외부를 보고 있던 귀족들의 눈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구죠? 저렇게 화려한 마차라니." 옅은 상아빛으로 조각된 마차. 반과 프란이 타고 있는 그 마차를 보고 있던 귀족들이 서로를 향해 물었다. 카르멘 가의 마차는 어떤 귀족가의 마차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럴수 밖에 것이, 이 상아빛의 마차는 아일린 가에서 만들어온 마차였기 때문이다. 이 마차 한 대 값이 웬만한 저택 하나의 값과 맞먹는다는 말조차 나돌 만큼, 이 마차는 많은 돈을 투자해 만든 것이었다. 황실에서 개최하는 파티에 처음 참여하는 만큼, 확실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고 남몰래 생각했던 마린이었다. 마린은 감탄하는 귀족들을 마차 안에서 내려다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짙어질 때쯤, 마부석에서 걸어나온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살짝 벌어진 마차 밖으로 일행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원에 서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 곳으로 쏠렸다. 마차의 주인을 마차만으로 알아볼 수 없다면 얼굴을 보면 되는 일이었다. 웬만한 중앙의 귀족들의 얼굴을 모두 꿰뚫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마차 바깥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누구지?" 정작 마차에서 내린 이를 본 그들은 마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옷을 보아하니 하나는 시종, 둘은 호위기사, 그리고 하나는 하급 귀족쯤으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린 이는 10대 후반의 소년. 이 마차의 주인은 아무리 봐도 10대 후반의 소년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 화려한 마차를 힐끔대고 있던 그들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무섭도록 화려한 외모를 가진 소년이니만큼 한 번 보았다면 잊을리가 없을터. "누구인가요?" 부채로 입을 살짝 가리며 퓌브린 백작 부인이 네프렌 후작 영애에게 물었다. 네프렌 후작 영애는 사교계 모임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였기에 그녀가 모르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특히나 저렇게 화려한 마차를 몰고 나타난 이가 시시한 가문의 사람일 리가 없으리라 생각한 퓌브린 백작은 잔뜩 기대가 섞인 얼굴로 네프렌 후작 영애에게 묻고 있었다. "……이런……. 송구스럽게도…….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백작 부인. 저 역시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하지만 네프렌 후작 영애의 입에서 나온 말은 퓌브린 백작 부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네프렌 후작 영애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누... 누구인지... 저도..." 퓌브린 백작 부인은 마차에서 내린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에게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위엄에 가득찬 소년의 하얀 얼굴 위에는 표정이라곤 있지 않았다.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것은 짙은 위압감. 이 자리에 모인 귀족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소년의 보랏빛 머리카락은 길게 뒤로 드리워져 있다. 굳은 듯한 보랏빛 눈동자는 정면을 똑바르게 응시하고 있다. "훗……. 역시 가주님이 등장하니까 사방이 조용해지네, 그렇지?" 마린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프란에게 말했다. 프란은 입맛을 쩍 다시며 말했다. "뭐, 그렇군. 쳇." 언제 어디서든 표정의 변화라곤 없는 반은 오늘 역시 딱딱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되지 않아 궁성 밖에 서 있던 귀족들은 소년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반의 양옆으로 무섭게 눈을 번뜩이는 호위기사들. 반의 뒤를 따르는 프란은 휙휙 주위를 돌아보았다. 반의 얼굴을 훑어보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호기심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반은 거리낌 없는 동작으로 성문으로 들어서려 했다. 순간이었다. 철컹! 큰 소리와 함께 반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 있었다. "……." 반은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찌푸려진 미간이 그의 기분이 조금 불쾌해졌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었다. 두 명의 호위 기사 역시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했다. "신분을 밝히시오!" 문 앞을 가로막은 자가 소리를 쳤다. 문지기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세타의 꽃중의 꽃, 물빛의 레이디라 불리는 키네세스 공주의 17번째 생일이다. 이런 경사스러운 날, 보도 듣도 못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 턱하고 나타나 황성 안으로 들어서려 하니, 문지기로서는 반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가? 그러고도 당신이 황실의 손님을 대접하는 자라 할 수 있는가!!" 반의 양옆에 서 있던 호위 중 하나가 소리를 쳤지만, 반의 출입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던 이들의 눈에는 같은 감정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도 저 얼굴은 모르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신분을 말씀해주십시오." 문지기는 호위 기사의 말에 굴하지 않고 똑바른 발음으로 말했다.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귀족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이 얼굴은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호사다마라고, 오늘처럼 기쁜 날 암살자가 끼여드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 반은 문지기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스티스 카르멘."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소년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바람에 날린다. 반은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카르멘 가문의 32대 가주다." ▷◀▷◀▷◀▷◀▷◀▷◀▷◀▷◀▷◀▷◀ 카르멘 가!! 네프렌 후작 영애, 세리아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자신의 귀가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장내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던 이 곳이 갑자기 소란스러움에 묻히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의 가주라고 했는가? 방금 전의 그 말은 정말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세리아는 한 발작 뒤로 물러서 자신의 옆에 선 퓌브린 백작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차분하게 무도회를 즐겨오던 고고한 백작 부인의 얼굴 역시 당황과 놀라움, 그리고 어딘지 비틀린 기대로 인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세리아는 다시 소년에게로 눈을 돌렸다. 보랏빛의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빛나는 소년. 어딘지 모르게 이 세상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소년이다. 이 나라의 국왕조차 저렇게 차가운 카리스마를 뿜어내지는 못하는데. "……카, 카르멘 가의…… 가주님이라 하셨습니까?" 갑자기 극존칭으로 바뀌는 문지기의 말투에 반은 대답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차갑게 문지기를 보았다. "……증거가 필요한가." 순간, 문지기의 눈이 움직였다. 그의 눈은 반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날카로운 검을 감춘 검집에서 멈추었다. 반은 아무 말 없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아까 전에 자신이 받아뒀던 초대장을 문지기에게 내밀었고 문지기는 그것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문에 들이댔던 창을 모조리 걷으라고 명령한 뒤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스티스- 카르멘 경."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6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3) 가네트(uznian) 03-11-24 :: :: 13934 "카, 카르멘 가의…… 저스티스 경입니다." 아직 이 파티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키네세스 공주가 나타나지 않은 탓에, 사교적인 인사만을 나누며 본격적인 댄스를 피하고 있던 귀족들의 몸이 굳어진 것은 파티장을 울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황금빛의 휘창이 가느다랗게 드리워져 있는 출입구. 한 사람의 귀족이 등장할 때마다 큰 소리로 그 귀족의 입장을 알리던 그 출입구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그림자의 이름이 커다랗게 사방으로 번졌다. 황금빛 휘창의 한 가운데로 걸어오는 한 소년의 발걸음이 주위사람들의 눈 속으로 파고 들고 있다. 여태껏 수많은 귀족들의 이름이 저기 휘창에서 불려졌지만, 이만큼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들어온 이는 여태껏 없었다. 귀족들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놀라움이 피어올랐다. "카르멘 가의 저스티스경입니다!" 다시 한 번 울리는 목소리. 이미 정원에서의 한바탕 난리가 있었기에, 귀족들의 동요는 아까 전처럼 격렬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카르멘 가의 가주가 이 파티에 등장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고 있던 귀족들은 소년의 등장에 입가에서 놀라움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금빛 휘창 사이로 걸어 들어온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보며 놀라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저, 저분이…… 저 분이 카르멘 가의……." 한 귀부인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 부인의 얼굴에 가득했다. 한 가문의 주인이라는 자, 그것도 이 카세타 왕국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저 명문가의 주인이 여태껏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참여하지 않아 사교계에서는그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사실 카르멘 가의 가주는 엄청난 박색이라 사교장을 회피하고 검만 갈고 닦고 있다느니,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거라느니, 조금 비뚤어진 듯한 태도로 카세타 황실을 대하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느니……. 심지어는 그가 병신이라 집안에서 숨겨 놓고는 바깥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이 있을 정도였다. "어머나! 루이사님을 그대로 빼어 박으신 분이로군요." 전대 가주를 알고 있는 듯한 여자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감탄을 피워 올렸고, 그 근처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그 여자에게로 몰려 가는 가운데, 장내는 더더욱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여인들의 드레스 자락과 경쾌한 웃음소리, 끝도 없이 높은 천장에 매달린 채로 화려한 조명을 발하고 있는 불빛의 번쩍거림이 프란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프란은 아직까지도 반의 등장에 감탄을 터뜨리고 있는 귀족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젊다, 젊다 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저토록 젊으실 줄이야……." "궁성 무도회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웬일이실까요?" 사람들의 음성은 끝도 없이 귓가를 메아리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모든 것들의 원인인 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태연스러운 태도로 앞으로 걷고 있다. 프란은 조금 떨렸지만 그것은 곧 그녀의 떨림은 얼마 가지 않아 가라앉았다. 그녀 역시 세이피아의 귀족이었으니만큼, 이 정도의 파티에서는 위축되지 않는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그것은 시종이 가질만한 수준의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반은 그동안 철저하게 무도회를 기피해왔다. 아일린 가의 본가가 있는 세이피아에서는 정말 단 한 번의 궁정 무도회에서도 참여하지 않았고, 카세타의 궁성 무도회는 13살 때 한 번 와본 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그가 무도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에 그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경고하겠다. 여기서 아무 거나 집어먹지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어라." 반이 프란을 향해 한마디했고, 그 말에 줄레줄레 그의 뒤를 따르던 프란이 발끈했다. "아니, 가주님! 제가 여기에 와서 아무거나 집어먹을 놈으로 보이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겠지." 그러나 프란이 버럭 고함을 치든말든 전혀 동요하지 않는 반이다. "뭐라구요!" 프란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외쳤으나 반은 그런 프란에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주렁주렁 아름답게 치장한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반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썰물처럼 옆으로 빠지고 있었다. 반은 사람들의 틈 사이로 섞이지 않고 어느 지점까지 계속 걷다가 조그맣게 마련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귀족들은 한참동안이나 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이 자리를 잡는데, 여태껏 귀족들과 더불어 술렁이던 그 곳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감히 반에게 접근해 인사를 하지 못하던 가운데 한 남자가 다가가자, 귀족들은 다시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반 역시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다가온 남자는 반을 향해 작은 미소를 띄우며 과장된 인사를 해보였다. "저는 이스티네 남작의 막내 아들 보일린이라고 합니다, 카르멘 경. 파티 장에는 단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던 당신을 보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갑자기 말을 걸어온 그는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퉁퉁한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귀족틱하게 생긴 청년으로, 온 몸에 기름이 흐르는 듯한 느끼함을 달고 있는 남자였다. 프란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카르멘 가의 오기 전에 자신에게 찝적 거렸던 찰린 마르티케즈의 얼굴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빚 갚아 줄테니 결혼해줘∼.'를 외치던 찰린 마르티케즈의 얼굴만큼 느끼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던 프란은 간신히 간신히 닭살을 억누르며 앉아 있는 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자신을 보일린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보았다. 남작가의 후예라고 한다면 반보다는 한참 서열이 낮은 귀족가다. 반으로서는 반말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임이 틀림없다. 반은 대답 없이 그를 보았고, 보일린이 짙게 웃었다. "오늘 같은 밤, 즐겁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고맙군." 도저히 20대의 청년과 10대 후반의 소년이 나누는 대화 같지 않은 인사였다. 두 사람의 대사가 서로 바뀌어야 그나마 균형이 이루어질 듯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어색한 말을 반이 하고 있으니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보일린을 반을 보며 생긋 웃었다. "무엇 하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카르멘 경?" 반은 대답 없이 그 자를 뚫어져라 보았고, 보일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내걸렸다. "그 어떤 파티도 거부하던 당신이 키네세스 공주님의 생일 파티에 왔다는 것을, 저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반의 미간이 순간 확하고 좁혀졌다. 그는 말하는 보일린은 뚫어져라 보았다. 프란은 뭔가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반의 옆자리로 살짝 몸을 움직였다. 보일린의 시선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온 프란에게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프란에게로 시선이 향한 순간, 보일린의 눈이 크게 한 번 흔들렸다. 그는 한참 프란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갈색 눈이 초점을 잃고 비틀렸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이나님?" 그의 입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프란은 자신을 향해 멍한 얼굴로 갑자기 말을 내뱉는 그 자를 보며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은 이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시선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옆사람과 떠드는 척 하는 한 편 이 쪽으로 계속해서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이스티네 보일린." 반의 입술이 벌어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의 부름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프란을 향해 멍한 눈을 하고 있던 보일린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반의 얼굴이 어느 순간 극도로 차가워졌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보일린을 향해 말했다.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고 말해주지. 그러나……." 반의 얼굴 위로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이되 미소가 아닌 것. 누구나 알 수 있는 짙은 냉소, 짙은 경고가 담긴 그것은……. "……생각의 자유는 때로 생멸(生滅)을 조절하기도 하지." 반의 말에 보일린의 얼굴이 확하고 굳었다. 프란은 황실 무도회에서조차도 저렇게 태연스럽게 말을 하는 반을 보면서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이럴 때보면 당당하다는 생각보다는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반박할 만한 자는 아마 없을 거라고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추, 충고 감사하군요." 보일린은 그 말과 함께 굳은 얼굴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프란은 뭔가 이상한 남자였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했다. 어떤 시선을 느꼈던 까닭이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 보일린이 있었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 굳어진 듯한 얼굴로 프란을 보고 있었다. 프란은 인상을 구기며 그런 그를 마주했다. 보일린은 조금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로 프란을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는 웬지 모를 음습함과 함께 오싹함이 느껴져 왔다. 프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얼른 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가주님." "……뭔가." 반 역시 기분이 상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 프란은 이 단계에서 조금만 더 성질 자극하면 이 파티장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반에게 마저 말했다. "만약에, 이건 만약에인데……. 흠, 세이피아와 카세타의 법은 조금 다를지도 몰라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 때, 반에게 무엇인가가 건네졌다. 차가운 와인 한 잔이었다. 술을 내민 것은 마린으로, 마린은 살짝 웃으며 술을 내밀고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프란은 반의 시종장이나 마찬가지인 마린이 귀족들 사이에 저렇게 끼여도 되나, 라고 생각했으나 프란의 생각은 조금 잘못된 감이 있었다. 마린 역시 귀족의 피를 이은 사람이라 이런 파티장에는 오히려 반보다는 알려진 편이었다. "뭔가." 붉은 와인 한 잔을 손에 든 반의 모습은 정말이지 완벽해 보였다.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붉은 와인으로 그 투명한 입술을 적신다. 온 몸에 난 검상은 화려한 옷으로 가린 채로, 소년은 당당하게 묻고 있었다.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완벽한 절도와 품위. 그러나 그 완벽함 때문에 귀족 아가씨들은 저 멀리 모여서 손만 삐죽댈 뿐 쉽사리 반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프란은 귀족 자제의 아가씨들이 반에게로 다가오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세상은 얼굴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라구, 철없는 아가씨들 같으니.' 이미 세상 다 산 것 같은 생각을 하는 프란이었다. 프란은 다시 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작게 물었다. "세이피아에선, 여성이 원하지 않는 경우 남자가 추파를 던지는 경우……. 그러니까 뭐랄까, 찝적거리는 경우 있잖아요. 음, 이 찝쩍거림 속에는 기분 나쁜 시선도 포함되요. 하여튼 그런 경우, 손해 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데. 카세타는 어때요?" 세이피아는 여성의 인권이 극대로 보장되는 유일무이한 왕국이었으므로 타국가에서는 낯선 제도까지도 갖고 있었다. 여성이 싫어하는 남자가 지나칠 정도로 찝적대는 경우, 여성은 그 남자를 고발할 수가 있었다. 반은 잠시 프란을 보다가 훗,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볼을 붉혔다. 환하게 번지는 그 웃음은 지나칠 정도로 밝아서, 평소의 반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반은 와인을 혀 안에서 살짝 굴리며 말했다. "카세타에는 그런 법이 없다." '쳇,' 만약 그런 법이 있다면 당장에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저 보일린이란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말겠다고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던 프란이었기에 그녀는 실망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얼굴을 향해 따갑게 쏟아지고 있는 그 느끼한 시선 때문에 정말이지 졸도하고 싶을 정도다. 반은 와인 한 잔을 다 비우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지는 파티장 한 곳에 있는 발코니였다. 조금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었다. 역시 이런 답답한 자리 따위는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반은 몸을 움직였고, 그 예고 없는 움직임에 프란이 동행했다. 한참 움직이던 반이 어느 순간 딱하고 멈춰서더니 시선을 돌려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그 눈빛에 움찔 멈춰 섰다. 반은 시선을 돌려 귀족가 영애들의 드레스를 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그 드레스들을 보고 있던 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프란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반의 시선은 한 번은 드레스, 다음 번에는 프란…….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의 시선에 프란은 조금 민망해졌다. "가주님. 왜 그러시는지……?" "……아무것도." 반은 짧게 일축해버렸다. 프란은 뒷머리를 살짝 긁었다. 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뒤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에게 말을 걸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던 귀족가 영애들의 얼굴 위로는 깊은 실망감이 드러났다. 그녀들은 반의 뒤를 줄레줄레 따르고 있는 프란을 한 번 본 다음 저희들끼리 숙덕댔다. 반과 프란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 시선들 중에는 방금 전 반을 향해 말을 걸었던 느끼한 남자, 보일린도 있었다. ▷◀▷◀▷◀▷◀▷◀▷◀▷◀▷◀▷◀▷◀ "레이나님을 닮은 시종……." 보일린은 넋 나간 얼굴로 프란을 향해 중얼거린 후 거칠게 손을 뻗어 술 한 잔을 비웠다. 그는 쏘는 듯한 시선으로 반과 프란을 보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눈 안으로는 짙은 광포함과 더불어 커다란 흥분이 느껴지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시선은 프란의 등에서 거칠게 내려 꽂히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 잔의 술을 비워대는 동안, 한 남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보일린이 술 몇 잔을 연거푸 비우느 것을 웃는 낯으로 보고 섰던 남자는 피식하고 웃은 후 보일린의 팔을 쳤다. 보일린은 움찔하며 술 잔을 내려 놓고 옆을 보았다. 보일린의 팔을 두드린 남자는 근사한 백의를 입고 콧수염을 옆으로 기르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보일린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하리나스 백작!" 하리나스 백작이라 불린 자는 살짝 웃으며 보일린의 옆에서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의 시선 역시 발코니로 들어서는 반과 프란을 향해 있었다. 하리나스 백작의 얼굴 위로는 가득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보일린 경,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리나스 백작은 발코니로 돌아서는 반의 모습을 끝끝내 눈으로 좇다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천천히 입술을 떼어 말했다. "……파티를 그렇게나 회피하는 저스티스가 키네세스의 생일 파티에는 참가했다, 이 거 아닌가. 큭큭큭, 이거 잘 하면 재미있는 소문이 돌겠군, 그래." 하리나스 백작의 말에 보일린은 피식 웃었다. 그는 술잔을 한 번 더 들이킨 후 말했다. "하리나스 백작님." "음? 왜 그러 는가." 하리나스 백작의 대답에 보일린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카르멘 가의 '헤이튼' 말입니다." "음." 하리나스 백작의 얼굴 위로 순간 기괴한 광채가 떠올랐다. 보일린은 이빨을 뿌득, 하고 갈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역시, 난 그 자를 도와야겠소." 하리나스 백작은 중얼거리듯 말하는 보일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건방진 카르멘 가의 가주를 보니 그동안 중립을 지키던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보일린이 뭔가 정곡을 찔린 듯한 태도로 버벅대자 하리나스 백작이 차갑게 웃었다. "그럼……. '그 날'이 관건이로군. 자네의 활약을 기대하지." 하리나스 백작은 자신의 근사한 콧수염을 몇 번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아 군중 속에 파묻혔다. 그의 백색 옷자락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보일린은 폭음한 탓에 달아오르는 뺨에 손을 갖다댔다. 그는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숨을 격하게 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후우." 그는 차가운 눈으로 반이 서 있는 발코니를 보더니 흘러내린 갈색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대는 아일린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 거요, 저스티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7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4) 가네트(uznian) 03-11-24 :: :: 14270 차가운 밤 공기가 뺨을 때린다. 반은 발코니에 몸을 기댄 채로 삐뚜름한 시선으로 파티장 안을 보았다. 프란은 창가에 기댄 채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반도 그렇지만, 프란 역시 이런 파티는 정말이지 싫어하는 편이었다. 이런 파티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파티에 참가할 경우 얻는 이득은 이익을 위한 인간관계, 그것을 제외하면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다. 파티장에서 느껴지는 한 순간의 유희를 원한다면 차라리 집 안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두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편이 낫다. 사교의 장은 나쁜 말로 한다면 암흑의 장. 또는 음모의 장. 모든 것이 벌어지고, 모든 것이 사라지기도 하는 곳. 파티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유희가 아니라 음모다. "하나 묻지." 저 멀리 시선을 두고 있던 반의 입술이 벌어졌다. "……?" 프란이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반을 보았다. 반은 파티장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넌 저런 여자들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지?" 보석을 온 몸에 휘어 감고, 비단을 온 몸에 끌어안은 채 치렁거린 프릴을 누가 많이 달고 있는 가를 경쟁하는 듯한 여성을 보며 반이 한 말에 프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세요. 저런 것도 나쁘다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전 치렁치렁 꾸미는 여자는 별로더군요." 프란의 말에 반은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그러나 한참동안 드레스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프란은 왜 아까부터 반이 저렇게나 드레스를 열심히 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의 그가 저런 드레스에 관심이 있는 변태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프란은 중얼거리듯 반을 불렀다. "가주님." 반은 아무 말 없이 돌아보았다. "에, 저, 그러니까……." "저어……." 프란이 무엇인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바로 가까이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온 목소리는 고왔고, 가늘었다. 여성적인 그 목소리는 털털한 프란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간드러지지만 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목소리다. 시쳇말로 옥구슬 굴러간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그 표현이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는 생각도 든다. 반은 그 목소리에 거의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족의 영양인 듯 보이는 여자가 그의 눈가에 맺혔다.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은 반을 향해 간드러지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앵두같이 앙증맞은 입술이 말했다. "반갑습니다. 카르멘 경.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세리아 네프렌이라고 합니다. 실례인 줄 압니다만, 한 곡 같이 출 수 있을까요?" 살풋이 웃어 보이는 여성의 얼굴은 자그맣고 하얀빛이었다.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승낙하진 않겠지?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이 저 여자의 춤 신청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 기인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생각이 분명하게 들었다. 세리아라는 여자는 당당한 미소를 짓고 반을 향해 웃어보였다. 원래 여성이 먼저 춤을 신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로, 카세타에서는 조신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마저 받곤 한다.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도 반에게 춤을 신청한 세리아의 뒤에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여러명의 귀족 아가씨들이 질투에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 세리아가 반에게 춤 신청을 거절당하면 세리아는 저 아가씨들의 비웃음을 잔뜩 당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반의 입은 정말 인정사정이 없었다. "……춤을 즐기지 않소." 차갑기 그지없는 반의 말에 용기를 내어 춤을 신청했던 세리아의 얼굴이 한 순간 빨개졌다. 그녀는 한차례 고개를 들어 차갑게 뱉어낸 반을 보았다. 아름답게 내뻗은 콧날과 위엄을 가득 담은 차가운 보랏빛의 눈동자. 끝없는 심연을 품고 있는 보랏빛의 그 눈동자는 마력에 가까운 매력을 분출해 낸다. 너무나 하얗고 깨끗해 여성의 것처럼 느껴지는 피부와 그 피부를 살포시 덮으며 내려오는 보랏빛의 장막은 소년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기 만든다. 세리아는 그런 소년을 잠시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아플 정도로 꼭 깨물어졌다. 그녀는 거칠게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세리아가 여러 귀족 여성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발코니에서 내려서는 것을 보고 있던 프란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반을 보고 있다가 외쳤다. "아니, 가주님! 여자를 저런 식으로 보내도 되는 겁니까?" 반은 그런 프란을 뚫어져라 보며 물었다. "그럼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저 여자와 춤이라도 춰야 한다는 건가?" "못 출 건 또 뭡니까? 어차피 파티에 오는 목적은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 아닙니까? 생전 처음 보는 여자든 남자든!" 프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하자 반이 다시 말했다. "나는 춤추는 것을 싫어한다." 하긴, 프란이 생각해도 반이 여인의 손을 잡고 정답게 웃으며 춤을 추는 광경 따위는 제대로 연출되지를 않았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비적비적 나온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저 차가운 가주가 여성과 춤을 추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절대로 웃진 않을 것이다. 그 차가운 얼굴로 무뚝뚝하게 손을 잡고선 엉성하게 스텝을 밟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프란은 반이 딱딱하게 춤추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프란은 흡, 하고 갑자기 입을 막으며 킥킥대는 것을 보고 있던 반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실핏줄이 돋아났다.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했던 프란이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더니 반을 본 후 생긋 웃었다. 프란은 꼼꼼히 반을 살펴보다가, 어느 순간 말했다. "못 추는 건 아니 구요?" "뭐?" 반의 반문에 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혹시 배운 적 없는 것 아니 예요? 검술 가문에서 생활하면 댄스 같은 건 경험하기 힘들 것 아닙니까. 그래서 파티에도 참가 안하고……." 프란의 궤변을 듣고 있는 반은 기가 막히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검술 집안의 후예라해도, 기본적으로 귀족인 이상 댄스를 배우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상업의 왕인 아일린 가의 주인이다. 그런 자신이 예의 교육을 소홀히 했을 것 같은가? 프란의 말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모순 투성이었지만, 프란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거절을 하려면 좀 더 따뜻한 말로 할 수도 있었잖아요! 솔직히……." 반은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열이 난 프란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귓가에서 갑자기 커다란 팡파레가 울렸다. "국왕 폐하와 키네세스 공주님이십니다!" ▷◀▷◀▷◀▷◀▷◀▷◀▷◀▷◀▷◀▷◀ 프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 말에 반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는 프란의 그 멍한 모습을 잠시 보고 섰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키네세스 공주는 이제 겨우 17살이다." '그러는 댁도 19살이야!' 프란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반은 다시 태연한 얼굴로 돌아아왔다. 반이 난간에 기대서고, 프란이 인상을 굳히며 턱에 손을 갖다댔다. 잠시 후, 그들의 뒤에서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은 그 웅성거림에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곧, 그의 눈에 저 멀리서 한 여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반의 눈이 움찔하고 떨렸다. 프란은 살짝 인상을 구겼다. 다가오고 있는 것은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다. 아름다운 웨이브의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맡긴 키네세스는 반에게로 다가와 생긋 하고 웃어 보였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그대로 부러져 버릴 것 같은 연약함을 담은 키네세스의 가느다란 팔은 프란의 눈에 무척이나 안타깝게 보였다. 어째서 시온이 '연약한 공주님'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프란은 키네세스를 보았다. 키네세스는 반을 향해 살풋 미소지으며 말했다. "카르멘 경, 춤 한곡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반은 내밀어지는 키네세스의 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명한 거절의 기색이 물들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막 벌어지려른 찰나였다. 반은 갑자기 자신의 등을 툭하고 치는 손을 느꼈다. 누구의 손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기에 반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생일을 맞은 여자를 울리지는 말아야죠." 프란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주시하고 키네세스를 보았다. 프란의 말은 어디까지나 키네세스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었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생일에 남자에게 용기를 내어 청한 춤이 무자비하게 거절당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 것인가. 반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키네세스를 보았다. 키네세스는 약간 떨리는 눈에 가득 애절함을 달고 말했다. "카르멘 경……." 반은 후, 하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키네세스 L. K. 카세타. 카세타의 꽃 중의 꽃, 물빛의 레이디라고 불리는 여인으로 이 여인은 상당히 허약한 몸을 갖고 있었다. 탁월한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2년 전부터 정사에도 이 것 저 것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는, 비록 공주이긴 하나 카세타에서는 오히려 왕비보다는 키네세스 공주가 더 큰 신임을 얻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공주는 약 1, 2년 전부터 두 서 달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카르멘 가를 찾아, 반에게 면담을 요청하곤 했다. 그녀는 반에게 꽤나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여인이었기에 반으로서도 그다지 싫어하는 손님은 아니었다. "……." 반은 말없이 내밀어진 키네세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을 구경하던 사람들의 얼굴 위로 희미한 파란이 스치고 지나갔고, 잔뜩 굳어져 있던 키네세스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키네세스가 반의 손을 이끌고 나섰다. 반은 무대의 정 중앙에 섰다.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이 번지는 가운데, 반과 키네세스가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반의 보랏빛 머리카락과 키네세스의 물빛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린다. 여러 쌍의 커플들이 춤을 추는 가운데, 반의 얼굴이 보였다. 키네세스는 계속해서 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붙이고 있었지만 반은 대꾸를 해주지도 않는지 입술의 움직임이 없었다. 혼자 남겨진 프란은 춤을 추는 반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좀 어색한 까닭이었다. 반의 스텝은 훌륭했다. 자신이 아까 전에 춤을 못추니 어쩌느니 했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져서 그만 훗, 하고 웃어버렸다. 춤을 추는 반을 보며 웬지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에 그녀는 테이블로 저벅저벅 다가가 무엇인가를 먹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아무 거나 집어 먹지 말고 자신 옆에 붙어 있으라고 한 반의 말이 생각나 어느 시점에서는 움찔했지만 곧 그 생각은 알게 뭐냐, 저 놈은 지금 저기서 춤추고 있는데. 라는 생각으로 화해버렸다. 프란은 한참이나 음식을 먹어댔다. 귓가에서 녹아드는 화려한 음악들이 프란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런데 프란이 한참 무엇인가를 먹고 있을 때, 그것을 방해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았다가 움찔하고 굳었다. 그녀의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비대해보이는 몸집을 가진 남자. 아까전에 반으로부터 따끔한 말 한마디를 선사받았던 보일린이라는 남자였다. 보일린은 프란에게로 다가와 홀린 듯한 눈으로 한참 프란을 보았다. 프란이 불쾌감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보일린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카르멘 가 가주의 시종…… 이오?" 프란은 그런데, 라는 눈으로 보일린을 보았다. 보일린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왔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프란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불쾌감에 더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저 손을 그대로 베어버리겠다, 라고 프란은 생각했다. 보일린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프란은 자신의 결심대로 그대로 손을 검집에 갖다댔다. 그녀가 막 검을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프란에겐 무슨 볼일이지?"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가 지금이라도 뽑혀질 듯한 검을 지그시 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출현에 보일린은 움찔하며 몸을 비켜냈다. 보일린의 눈이 일순 커졌다 작아졌다.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의 뒤에서 한 소년이 밝게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쿵짝짝 쿵짝짝……. 귓가에서 정확히 3박자로 나뉘어 울리는 왈츠의 경쾌한 음과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어느 순간 생긋하고 웃어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시온이었다. 프란은 자신이 검을 뽑으려고 한 순간 정확하게 알고 나타나 발검(拔劍)을 저지하는 시온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온은 그 시선에 땀을 비철, 하고 흘리며 보일린을 향해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는 손을 슬쩍 프란의 손 위에 겹치더니 보일린을 향해 말했다. "볼 일이 없다면 내가 실례해도 되겠지?" "……댁은 누구요?" 보일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시온이 생긋 웃었다. "그건 알 것 없어. 난 지금 좀 바쁘거든?" "이 개망나니 자식이 어디에다 손을 대는 거냐!" 갑작스레 정신이 든 프란이 손을 비틀어 시온의 어깨를 확하고 꺾었고, 시온은 비명소리를 냈다. ▷◀▷◀▷◀▷◀▷◀▷◀▷◀▷◀▷◀▷◀ 키네세스와 원치 않는 춤을 추던 반은 갑자기 등장한 시온이 프란의 손을 이끌고 나가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전에 보일린이 프란에게 접근한 시점부터 잔뜩 인상을 구겼던 반은 시온이 등장한 시점부터는 표정에 드러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키네세스는 반이 자신의 춤에 어딘지 무성의하고, 계속해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며 눈을 새초롬하게 떴으나 그것은 곧 가라앉았다. 스텝을 밟고 있던 키네세스가 반에게 살짝 말을 걸었다. "최근에 폐하께서 보낸 사신을 함부로 대하셨다고 들었어요." "……당신이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반의 차가운 목소리에 키네세스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둘의 사이에 음악이 흘렀다. 스텝은 계속되고 있었다. 키네세스는 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카르멘 경." "……." "당신은 내가 싫은 가요?" 굳이 대답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네세스는 답답함을 느끼며 반이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반의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 "헉, 헉, 헉……." 시온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헥헥 대면서 프란을 보고 있었다. 파티장 바깥까지 프란을 데리고 나오면서 무려 13번이나 걷어 채였던 시온이었다. 반이 자신의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프란은 파티장에서 절대 나오면 안된다며 발악을 했다.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시온을 쥐어 팼으나 평소와는 달리 시온은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굳건히 버텼고, 결국에는 파티장 바깥까지 프란을 데리고 나올 수가 있었다. "무슨 짓이냐! 넌 진짜 내 목이 저 아래로 댕강거리는 걸 보고 싶은 거냐?" 프란이 길길이 날뛰며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시온이 다시 헉헉대면서 프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프란의 뒤에서 말했다. "이보라구, 프란. 형님은 지금 키네세스 공주님과 춤을 추고 있잖아. 잠깐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좋다구, 응?" "시끄러워!" 프란이 다시 들어서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프란의 목을 졸라댈 듯이 시온의 손이 왔다. 시온은 프란의 목덜미를 와락하고 뒤에서 안으면서 소리쳤다. "헥헥…… 프란, 프란. 자, 자아. 진정하고……." "뭘 진정해!!" 프란이 버럭 고함을 치자 시온은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들어 마시면서 말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덮쳐 버린다!!" "……사후 세계가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군." 프란의 손이 슬며시 검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있던 시온은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프란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프란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가 파티장에 도로 돌아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아좋아. 10분만. 딱 10분만이면 돼. 응?" "……." 시온의 간청에 프란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시온은 그녀의 한숨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곤 생긋 하고 웃으면서 프란의 손을 이끌었다. 그런 시온의 얼굴에도……. 오늘 오후 마린이 드레스를 포장하면서 짓던 웃음이 똑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8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초 간의 신데렐라(1) 가네트(uznian) 03-11-24 :: :: 12354 PART 9: 10초 간의 신데렐라 파티장의 분위기는 이제 무르익을 때로 무르익었다. 여기저기서, 놀기 좋아하는 남녀 귀족들 사이에서는 천천히 농밀한 시선이 오가기 시작했다. 작은 부채질과 살짝 움직이는 눈꼬리의 움직임은 유혹을 상징한다. 한 편에선 최근의 정치판이 어떻다느니, 국왕의 저번 무역건은 어쨌다느니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오가는 반면, 한 쪽에서는 사교적인 모임에서 의례 빠지지 않는 이야기들 역시 오가고 있었다. 둥글게 서서 저마다 질세라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의 주인공 키네세스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느니, 부인의 옷이 화려해 보이는데 어디서 맞췄냐느니, 보석의 세공이 참 잘 되었다느니…….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하기 좋아하는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저녁 만찬의 맛있는 반찬거리가 되어 주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귀부인들의 달아오른 시선은 한 번씩 그를 향해 움직였다가 부채 아래로 숨고, 다시 그를 바라보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고, 남자들의 시선은 여인들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그를 향해 있었다. 여인들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데 반하여, 사내들은 조금 긴장한 눈빛, 내지는 냉냉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조금의 호기심이 동반한 그들은 새로 나타난 '경쟁자'를 관찰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카르멘 경." 벌써 몇 분 동안 줄기차게 스텝을 밟고 있느라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 키네세스는 그러나 피로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잡고 있는 반의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키네세스는 그 가냘픈 팔로 상처 투성이인 반의 손을 꼭 움켜쥔 채 푸른 드레스 자락으로 둥글게 둥글게 바닥을 끄는 원을 긋고 있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는 자신이 손을 내밀기 시작한 시점부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등장한 시점부터 계속해서 일련의 시선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던 한 남자를 지금 자신이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는데 완연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은 무덤한 태도로 자신과의 댄스에 임하고 있다고는 하나, 지금 이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행복한 자신을 느낀다. 키네세스는 달아오른 뺨을 한 채로 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이 카세타 최고의 미인으로 불리는 키네세스의 푸른 눈동자 속 한 가득 메워져 있는 행운의 남자의 얼굴에는 그러나 오늘 자신이 이 파티의 히로인인 아름다운 여인의 파트너로 선정되었다는 것에 대한 그 어떤 기쁨도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작게 속삭이는 키네세스의 목소리가 감미롭다. 이 쯤 되면 웬만한 남자는 얼굴부터 대뜸 붉어지거나, 아니면 인사 치레로 라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지는 '영광이군요' 라는 말이 있어야 옳다. 그러나, 불행히도 키네세스의 상대는 '웬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마왕' 내지는 '얼음' 으로 지칭하는 저 카르멘 가의 소년 가주다. 이 냉묵한 소년의 입에서는 보통 남자들의 입에서 튀어나와야 할 화려한 미사여구는커녕 최소한의 말조차 튀어나오지 않는다. 조금 더 빠르고 격렬한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커플들은 파트너의 몸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기 시작했다. 천천히, 키네세스의 스텝이 빨라졌다. 자신의 다리에 가볍게 드레스 자락을 기대오는 키네세스가 보여 반은 시선을 꺾었다. 수줍게 볼을 붉히는 키네세스의 드레스가 반의 발 안쪽으로 들어섰다. 한 나라의 공주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다. 그런 키네세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음악의 템포가 더 빨라졌다. 반은 살짝 손을 들어 키네세스의 허리를 감았다. 키네세스가 살짝 웃어보인다. 물결치는 드레스 자락, 출렁이는 바다빛의 머리카락, 귓가에 매달린 사파이어 귀걸이가 빠르게 회전한다. "……." 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아까부터 줄곧, 저 황금빛의 휘창을 향해 있었다. ▷◀▷◀▷◀▷◀▷◀▷◀▷◀▷◀▷◀▷◀ 그 이름 하나면 웬만한 이들을 발아래 무릎 꿇일 수 있는 재야의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 가볍게 와인이 한잔씩 돌아간 파티 장의 분위기에 사람들은 모두 취했다. 샹드리에가 춤을 추는 귀족영애들의 드레스 사이로 잔잔한 빛을 드리우고 있다. 호위기사들 몇몇이 눈을 번뜩이고 있는 것만 빼면, 긴장 따윈 완전히 사그라진 것 같은 분위기의 파티장. 이 곳 저 곳에서 좀 더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귀족들의 꼬드김이 이어지고 있다. 보일린은 그러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귀족들의 사탕발림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방금 전 황금의 소년이 나간 휘창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짧막한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 "……정말로 닮았다." 어느 순간, 보일린의 입술에서 나지막하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너무나도 닮았다. 보일린의 입술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이마에 천천히 굴곡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아련한 추억을 더듬는 듯한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릿한 옛날을 더듬어 내리는 보일린의 눈가에는 가득한 애수가 아로새겨져 있다. "레이나님……." 보일린은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너무 닮았지 않은가. 그만의 여신,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죽은 레이나와 너무나 닮았다.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켜 버릴 정도였다. 레이나의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길게 흐른 장발이었던 것에 비해, 저 소년의 머리카락은 짧긴 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대로 닮았다. 이스티네 보일린은 황금빛의 소년과, 그 소년을 데리고 사라진 은빛의 소년이 있었던 자리에 그렇게 한참동안 굳은 듯이 서 있었다. 허공을 향한 보일린의 시선이 흐릿하다. 그렇게 보일린이 서 있는데, 저 멀리서 한 소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소년을 발견한 순간 무엇인가 아련한 것을 좇고 있던 보일린의 눈이 얼핏 굳었다. 다가오고 있는 소년은 이제 겨우 16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보일린 쪽을 향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그 소년은 꽤나 깔끔한 외모의 소유자로, 빛나는 초록색의 머리카락과 차분하고 따뜻해 뵈는 적갈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좀 특이한 것은 소년의 복장이었는데, 파티장에 참가한 다른 귀족들의 화려한 예복과는 달리, 소년은 딱딱한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중무장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 차림은 분명 파티장과는 조금 이질적인 성분의 것이었다. 소년은 보일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와인 한 잔을 손에 걸고 있던 보일린은 소년이 다가오자 천천히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은 자신 쪽으로 시선을 가져온 보일린의 귀에 경고조로 또박또박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곧 단장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만 자중하시지요." "……쿡, 충고라는 건가?" 보일린의 질문에 소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이름 뿐이라고는 하나, 당신은 우리 기사단의 소속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희 기사단의 명예를 더럽히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도 불쾌합니다." 또박또박 그렇게 말한 소년은 다시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돌아 파티장 바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그의 초록색 머리카락과 딱딱한 갑옷이 귀부인들의 실비단 드레스와 마찰할면서 생기는 작은 소란스러움을 들으며 보일린은 이빨을 세게 물었다. 이윽고 소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보일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거칠게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여전히 딱딱하군, 키에르군. 그 귀여운 얼굴에 걸맞지 않게 말이야." ▷◀▷◀▷◀▷◀▷◀▷◀▷◀▷◀▷◀▷◀ "정말로 오셨단 말인가……." 케이온 기사단장, 대 카르멘 가문의 일족인 그는 나즈막하게 중얼거리며 파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리 일국의 공주인 키네세스의 생일이라고는 하나, 저 가주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런스였다. 여태까지 파티장 외부의 경비대들과 파티장 내외부를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 이 것 저 것 명령을 내리느라고 몸이 열 개 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던 런스였기에, 카르멘 가의 가주가 파티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무척 늦었다. 그는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언제나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황실의 소속 기사단 중 하나인 케이온 기사단, 그 기사단의 단장인 자신을 압도해버리는 소년이다. 여태까지 그 소년과 검을 섞었던 적은 단 한 번!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경험으로, 그는 깨달았다.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재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으로 보아도, 무엇으로 보아도 분명 그가 앞서야 마땅했다. 그러나, 소년과 비무가 끝난 후 런스가 돌아서는 소년을 보며 느낀 것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 어린 저 소년에게 형편없이 졌다는 사실도, 자신은 소년의 등만을 평생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굴욕감도 아니었다. '이 분이 진정한 카르멘의 주인이시다! 이 분이! 이 분이 나의 주인이시다!' 강자를 만난다면 비록 패배했다 하더라도 투지가 끓어오르고 온갖 감정이 끌어 올라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 때 런스가 느낀 것은 오로지 그 감정뿐. 그 비무 이후로 소년은 단 한 번도 그와 검을 섞지 않았다. 런스는 문득, 몇 주 전 카르멘의 본가를 찾아 소년 가주에게 검을 신청했던 기억을 떠올리다 피식 쓰게 웃어버렸다. 소년은 자신의 요청을 거절했었다. 그리고 가주를 대신해서 자신의 상대를 했던 금색 머리카락의 그 소년. "이름이…… 이름이?" 런스는 잠시 머릿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자신과 검대결을 한 후 몇 분 만에 장미 정언에 피떡이 되어 뒹굴었던 그 소년. 가주의 검을 받아 자신과 싸우다가, 종국에는 가주로부터 도로 검을 박탈당해버린 그 소년. "이름이? 프란…… 이었던가?" "이건 놓고 가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런스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런스는 갑자기 앞에서 터지듯이 들려온 그 커다란 목소리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의 온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리고 그 커다란 목소리에 뒤이어, 으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런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나갔다. 황실의 시녀들조차 모두 파티 시중을 드느라 여념이 없는 지금 시간, 황실의 복도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그 복도를 뛰어 막 코너를 돌던 런스는 어느 순간 두 발에 제동을 걸어 멈춰섰다. 그의 눈은 경악으로 확대 되어 있었다. "아야야야! 이봐, 프란. 정말로 날 때려죽일 셈이야?" 코너 안 쪽에서 보이는 저 은색 머리카락. 반짝이는 은색 눈동자. 생글생글 웃는 저 특유의 표정. 언제 보아도 싹싹해 보이는 미소하며, 본 카르멘 가의 가주와 척 보아도 닮은 얼굴. "시, 시온님?" 그가 기억하는 그 얼굴은 분명히 아일린 가의 소년, 시온 아일린이었다. 런스는 조그맣게 중얼거린 후 후다닥 벽 쪽에 붙어섰다. 누군가와 단 둘이 있는 듯 했기에, 자신이 불쑥 나서서 방해를 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가 여자를 유혹하느라 나온 길이라면, 분명 자신은 방해가 됨이 분명했다. 시온의 바람끼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던 런스였는지라, 그는 방해가 되기 전에 얼른 자신이 숨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벽 쪽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넣었다. 다행히 굵은 굴곡으로 이루어진 황실의 성벽은 그의 몸을 잘 숨겨주었다. "젠장할! 맞기 싫으면 손을 놓으면 될 것 아냐!" 그리고, 이윽고 들려온 그 목소리에 런스는 청각을 곤두 세웠다. 분명 시온의 목소리 뒤에 들려랴 할 목소리는 간드러진 여성의 목소리라 생각했던 런스였는데, 이건 자신의 짐작이 조금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낯선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것 같기도 한 말투. 약간 날이 선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조금의 부드러움도 느낄 수 있다. 소년치고는 굉장히 높은 미성. 소년의 것이라기보다는 소녀의 것에 가깝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설마?' 런스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방금 전에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 척, 하고 앞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저 아일린 가문의 도련님과 함께? "내가 손 놓으면 당장에 도망갈 거잖아!" 시온이 버럭 고함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온의 옆에 선 채로 그의 손에 손목을 압박당하고 있는 금색 머리카락의 소년은 눈을 치켜 뜬 채로 침묵한다. "……." "거봐, 아무 말도 못하는 거 보니 정곡이 찔리셨군? 후훗!" 방글방글 거리는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런스는 조금 더 고개를 길게 뺐다. 언제나 눈에 확하고 튀는 은색의 머리카락의 뒷 쪽으로 살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역시 눈에 띄는 금빛이 보인다. '헉! 정말로 그 때의 그 소년이 아닌가!' 런스는 경악했다. "……이 자식이…… 정말로 맞아 죽고 싶은 거냐?" 런스는 확하고 굳어버렸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 소년이었다.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너무도 강한 인상이라서 줄곧 기억하고 있었던 그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 투지에 불타오르는 오렌지색 눈동자로 자신을 마주했던 그 소년. 이상하리만치 빛났던 소년이었기에, 이상하리만치 끈질겼던 소년이었기에 더욱더 인상깊었던 그 소년. '그런데 어째서…… 시온 도련님과? ……저 아이는 분명 가주님의 시종이 아니었던가.' 런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깊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봐, 프란. 물론 나는 여성의 손에는 그대로 맞아주자, 라는 주의지만 프란의 손에 맞아 죽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거든? 그냥 날 따라 와보라구. 하룻밤 멋진 꿈을 꿀 수 있을테니까!" "웃기고 있네! 내가 네놈에게 허락한 시간은 10분이었다! 이미 10분 초과야!!!!" "후훗, 그 10분의 약속을 믿다니. 쯧쯧, 아직 세상을 덜 살았군, 프란." 온갖 이상한 소리들과 함께 시온과 프란이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퍽퍽, 하는 타격음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누군가 한 쪽이 얻어맞고 있는 것 같았다. 런스는 숨은 채로 멀어지는 두사람을 보고 있다가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빼 복도에 섰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시온과 프란이 사라진 장소를 보았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시온님…… 드디어 남색에도 취미가 생긴 건가?" 어딜 가나 똑같은 오해를 받는 시온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39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초 간의 신데렐라(2) 가네트(uznian) 03-11-24 :: :: 12360 "프란, 이 쪽이야, 이 쪽." 가볍게 손을 이끄는 시온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프란은 더욱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온은 계속해서 프란을 바깥 쪽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불안감은 증대했다. 반이 옆에 붙어 있어야 마땅하다. 오늘은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은 프란과는 생각이 영 다른 듯 했다. 프란은 힐끔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원래부터 옷 맵시 하나는 끝내주는 시온이긴 했었다. 바람둥이의 기본 조건이 일단 옷맵시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늘은 더욱더 빛나보이는 시온이다. 파티장이라서 더욱 신경을 쓴 까닭일까? 그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빛의 머리카락과 오늘 입은 옅은 은빛의 경장은 너무나 어울렸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은빛의 옷은 시온을 평소보다 훨씬 더 고귀해 보이게 만들어 놓는다. 기다란 정장 스타일의 은빛 옷 위로 살짝 드리워진 금빛 줄이 요염한 빛을 낸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네놈은! 여긴 밖으로 나가는 길이잖아!" 한참만에 시온에게서 눈을 뗀 프란이 발악하듯 내지른 말에 시온이 베시시 웃었다. "저기 말이야, 프란." "뭐냐?" 프란이 쏘는 듯이 물었다. "너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프란의 입이 턱하고 막혔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그녀였다. 제일 하고 싶은 거라니? 제일 하고 싶은 것? 머릿속에서 시온의 질문이 몇 배로 늘어나 회오리 치기 시작했다. 프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시온이 다시 한 번 베시시 웃어 보인다. "하고 싶은 거 없어?" "……이, 있다." "뭔데?" 시온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의 은은한 은색 눈동자 위로 희미하게 금색 그림자가 비춰든다. "그, 그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니? 프란의 머릿속은 다시 어지러워 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나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헤에∼. 뭐야, 역시 없는 거지?" 시온이 피식, 웃으면서 한 말에 프란은 왜인지 모르게 발끈했다. 그 발끈의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프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확하고 말했다. "거, 검 닦고 싶다!" "풋!" 그 황당한 대답에 시온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읏." 프란 역시 자신이 한 말에 당황했다.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했단 말인가. "쿡쿡쿡…… 하하하핫!" "젠장할! 왜 웃는 거냐!" 프란은 발끈해서 말해놓고 시온을 향해 공포의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여차하면 처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그녀의 손바닥을 본 시온이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키려고 했다. 시온이 막 몸을 오른쪽으로 트는 순간, 프란의 몸이 움찔하고 멈췄다. 다음 순간 당연히 날아와야 할 프란의 손바닥 내지는 주먹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시온은 그러나 프란의 주먹이 날아와 자신을 두드리지 않자 조금 의아한 얼굴로 바로 섰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프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한 후 흠, 하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시선은 매섭게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아니면 뭔가를 찾는 듯. 꼼꼼하게 주위를 살피는 프란을 보고 있는 시온의 시선이 점점 의아함으로 가득해졌다. '……누가 보고 있다……. 누구냐?' 프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선지 알 수 없지만,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분명한 시선이었다. 프란은 최근 들어 기분 나쁜 시선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러던 프란의 눈은 한참이 지나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시온은 그런 프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후 다시 손을 이끌기 시작했다. 프란은 웬일인지 말없이 그런 시온을 따랐지만, 그녀의 시선은 붙박힌 듯 성벽 쪽에 붙어 있었다. 프란의 눈살이 점점 더 크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성벽만을 바라보고 있던 프란의 정신이 든 것은 한참후의 일이었다. "자아, 도착이다, 프란!!" 시온의 밝은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뭐?" ▷◀▷◀▷◀▷◀▷◀▷◀▷◀▷◀▷◀▷◀ 「아주 먼 옛날에, 아름다운 귀족의 아가씨가 살고 있었어요. 이 아가씨는 너무나도 마음이 곱고 따뜻한 아가씨로,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느낌의 브론드 금발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매일매일을 불행하게 보내고 있었어요. 그녀의 아름답기 그지 없는 녹색 눈동자에서는 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지요. 왜 그랬냐구요? 이유가 궁금하세요? 아아, 그건 그녀의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 때문이었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계모는 언제나 아가씨를 못살게 굴곤 했거든요. 아가씨는 언제나 눈물로 밤을 새울 정도로 많은 서러움을 당하고 살았어요. 그 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신데렐라……. 아, 이 아름다운 귀족의 아가씨의 이름이 바로 신데렐라랍니다. 네, 이 신데렐라는 그 날도 계모 덕택에 매우 가엾은 몰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수도에 있는 궁성에서 왕자님의 무도회가 벌어지는 날이었어요. 귀족의 아가씨인 신데렐라 역시 당연히 그 파티에 참여할 자격이 있지요.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파티에 참가할 수가 없었답니다. 드레스를 모두 빼앗긴 데다가 신데렐라의 고운 금발을 시샘한 계모가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는 바람에 그녀에게는 화려한 드레스 한 벌도, 그 드레스 위에 잔잔하게 늘어뜨릴 머리카락도 없었던 거예요. 참으로 가엾은 신데렐라지요? 하지만, 그런 신데렐라에게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 그게 뭐냐구요? 참, 성격이 급하기도 하시네. 제 이야기를 끝까지 좀 들어봐요. 사실 신데렐라에게는 요정이 있었던 거예요. 네? 왜 갑자기 요정이냐구요? 그건 저도 모르지요. 상당히 느끼한 요정이긴 했지만……. 신데렐라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한 요정이 있었답니다. 그 요정은 신데렐라를 참 많이 좋아했었는데, 그녀가 파티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있자, 그녀를 돕기로 결심하고 젊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선 울고 있는 신데렐라에게 다가갔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이 뭘 바라고 있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나의 아름다운 신데렐라. 당신은 파티에 참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당신을 달래고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랍니다. 어차피 꿈은 깨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모두는 말하죠. 자아, 하룻밤의 꿈이나마 원한다면 당신 자신을 잠시 제게 맡기지 않겠어요?"」 세이피아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데렐라의 하룻밤 꿈'에서 발췌. ▷◀▷◀▷◀▷◀▷◀▷◀▷◀▷◀▷◀▷◀ "자아, 하룻밤의 꿈이나마 원한다면 당신 자신을 잠시 제게 맡기지 않겠어요?" 시온은 싱긋이 웃으며 프란에게 말을 건넸다. 아일린 가는 본디 세이피아에 그 본가가 있는 가문. 세이피아의 풍속에 대해선 누구보다 익숙한 시온은 세이피아인인 프란이 어린 시절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신데렐라의 하룻밤 꿈' 에 등장하는 그 대사를 그대로 건넸다. 하지만, 있는 힘껏 폼을 잡으며 '신데렐라의 하룻밤 꿈' 을 연출하려고 애쓰는 시온과는 달리, 프란은 시온의 말에 그다지 동참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 하다. "……뭘 너한테 맡기라고?" 프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후 시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보통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말한다. 여인의 매서운 눈빛은 암코양이의 그 눈과 닮았다고. 어딘지 고혹적이고 어딘지 앙큼스러운 그 눈은 귀여운 여인들이 귀엽게 눈을 흘기는 모양과 같다. 하지만 흔히들 상상하는 그 고양이 눈과 지금의 프란의 눈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흔히 여인들이 내보이는 내숭 섞인 책망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고양이라기 보단 오히려 표범에 가까운 눈빛으로 시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몇 년을 달련해 온 살기를 온 몸으로 방출해 내는 프란의 눈빛은 눈빛 만으로 사람 하나를 능히 죽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움을 머금고 있었다. 그 엄청난 눈빛이 시온은 잠시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여기서 물러서기엔 그가 오늘의 작전에 들인 공로가 너무 컸다. "너를." 프란은 시온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방금 전 시온이 자, 도착이다 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굳어져 버렸던 프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그 문을 활짝 열고 선 흰빛이 마차를 보며 잠시 치를 떨었다. 시온이 프란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화려한 파티장의 뒤켠, 음악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왕궁의 뒷정원이었다. 마차 몇 대가 호젓하게 세워진 그 곳에는 특히 눈이 띄는 마차가 한 대 있었다. 아일린의 문장, 흔히 세뇨타라고 불리는 그 문장이 중앙에 새겨진 마차. 어디를 보아도 그것은 시온이 타고온 마차가 분명했다. 마차의 바로 앞까지 그녀를 데려온 시온은 프란의 앞에서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네 놈이 이상한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프란의 말에 시온이 쿡, 하고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난 괴짜라는 말을 상당히 좋아해." 그 말에 프란이 휙소리가 나게 시온을 돌아 보았다. 그녀의 눈이 불타오른다. "……하지만 이건 도가 좀 지나친 것 같군. 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를 내가 3초를 셀 동안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너 오늘 제삿날이다. 하나……." "자자자, 프, 프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프란의 태도에 아연한 시온이 얼른 프란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런 시온의 태도에 프란의 눈꼬리가 다시금 들어올려졌다. 시온은 눈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프란의 태도가 어째 반과 닮아 간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너, 그 이야기 알지? 세이피아의 3대 명작 중에 하나, 음유시인 고 안덴의 신데렐라 이야기 말이야." "……여자를 한낱 남자의 전속물로 취급할뿐더러, 여성이 노력도 없이 남자의 지위로 신분이 향상되는 그 진부한 스토리. 현재 세이피아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씹히는 그 신데렐라 이야기를 말하는 거라면 알고는 있다." 비꼬임이 가득한 프란의 말에 시온이 살짝 웃는다. 그의 은색 눈동자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어 내린다. "내가 오늘 하루 그 요정이 되어 줄게, 프란." 프란은 말 없이 시온을 몇 대 구타한 다음 다시 부들거리는 눈으로 마차 안을 보았다. 아일린 가의 문양이 아로 새겨진 마차 안으로는, 어찌된 영문인지 귀부인 전용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들이 줄줄줄 걸려 있다. 아름다운 빛깔을 띄는 실크의 드레스 자락이 그 화려한 면모를 마음껏 과시하고 있었다. 프란은 실실거리는 시온의 얼굴과 옷을 커다란 마차 안을 가득히 드러 채우고 있는 옷을 번갈아 가며 살피다가 슬며시 팔짱을 꼈다. 가볍게 바람이 불어 문을 열어 놓은 마차 안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여 들어간다. 들어닥친 그 바람에 몸을 맞긴 채로 드레스 자락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풍성한 프릴을 가득 매단 채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 화려한 드레스 자락은 자신들을 어이 없다는 식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프란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프란의 시선이 다시 안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 프란을 보고 있던 시온이 얼른 프란의 등을 떠밀었다. "너 정말 죽을……!" 프란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프란의 몸은 시온의 손에 의해 마차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넓은 마차 안으로 들어선 순간, 프란은 더더욱 굳는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의 소녀가 나란히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소녀들의 손에는 오랫동안 준비 해왔음이 분명한 화장 도구들과 가발들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분명 여인들의 치장을 위해 필요한 그 소도구를 보는 프란의 안색은 지금 당장 의사를 찾아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난색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드레스와 소녀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시온." "왜에? "대체 무슨 꿍꿍이냐?" 시온은 씨익 웃더니 검지를 척하고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밤에 활동하는 야생 고양이의 그 것처럼 반짝, 하고 빛났다. "에이, 다 알면서. 이 거 모조리, 프란에게 줄 선물이야." 프란에겐 누가 뭐라해도 절대로 필요 없는 물건이었고, 받을 마음 따위도 없었다. 프란은 즐거운 듯 입술을 놀리는 시온을 한참동안 빤하게 노려보다가 휙하고 몸을 돌려 마차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프란이 막 마차 밖으로 몸을 빼내는 순간, 시온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턱하고 부여잡았다. "프란." 그리고, 다음 순간 들려온 시온의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해서 마차 밖으로 한 걸음을 빼고 있던 프란은 움찔하고 굳어 버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시온을 돌아보았고, 그 순간 시온의 눈동자와 짧게 마주쳤다. 흔히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은색의 눈동자는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향해 조그마한 웃음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 더욱 크게 빛났다 가라앉았다. 시온은 그렇게 반짝이는 눈을 한 채로 프란을 향해 말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 잖아." "그래서?" "입어줘." 직설적으로 말하는 시온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프란이었다. 그녀의 미간에 가느다란 줄이 생겼다. 프란은 어느 순간 피식, 하고 김빠지는 웃음을 흘리더니 시온이 부여잡고 있는 오른손을 휙하고 뿌리쳤다. "좋다. 죽은 사람 소원은 들어줄 수 있지. 네가 시체가 되서 돌아온다면 생각은 해보겠다,생각만." 가차 없는 프란의 말에 시온은 힘없이 얼굴을 떨구며 프란의 이름을 불렀다. "프란." 조그맣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시온은 이미 완전히 굳은 채로 마차 밖으로 몸을 내미는 프란의 목덜미를 뒤에서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 드레스…… 엄청나게 비싼 거야……. 팔면……. 프란이 빚 갚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 말에 프란의 팔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녀는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그으면서 시온을 보았다. 시온은 높다란 천장을 가진 마차 벽에 줄줄이 걸려 있는 드레스자락을 하나 잡으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프란." 잠시 시온이 숨을 골랐다. "딱 한 번만 입어 주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0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초 간의 신데렐라(3) 가네트(uznian) 03-11-24 :: :: 15981 드디어 지루하고도 지루했던 키네세스와의 춤을 끝낸 반은 키네세스에게 예의상의 인사만을 끝낸 채로 다시 발코니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은 아까 전 굳어진 이후로 절대 풀릴 줄을 몰라서, 그를 전부터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내심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저 오만한 카르멘 가의 가주가 불쾌해진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그들의 얼굴 위로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다. 키네세스는 그런 반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그 전에 수다스러운 귀부인들 사이에 갖혀 버렸다. "……이녀석은 어디로 간거지." 반은 잘끈 입술을 물며 중얼거렸다. 파티장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의 옆에 있으라고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그렇잖아도 이따위 불쾌한 파티에 참여한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던 반은 자신의 시종인 프란이 자신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진 것이, 그것도 자신의 사촌인 시온과 함께 사라진 것이 무척이나 불쾌한지 아까부터 잔뜩 찌푸려졌었던 인상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인들이 내미는 에인스(레키슈안에서 재배하는 나르디스의 열매로 만든 독주. 마시면 릴리아나 꽃의 향기가 아련하게 벤다고 해서 한켠에서는 릴리아나론-릴리아나의 술-로 불리기도 한다.)를 받아 들고 거리낌 없이 한 잔을 마셨다. 그의 목을 타고 에인스가 몇 방울 타고 흘렀을 때, 반은 또각거리는 신발의 소리를 듣고 들어올렸던 술잔을 밑으로 내렸다. 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남자를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중무장의 갑옷을 걸친 채로 거리낌 없이 반에게 다가오는 남자. 자신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그 얼굴을 보면서 반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서 가주님을 뵙다니, 의외입니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평범하게 생긴 남자, 케이온 기사단장인 런스 카르멘. 하나뿐인 주군에게 절도 있게 예를 갖춰서 런스는 인사했다. 몸을 크게 굽히며 무릎마저 약간 꿇는 그의 태도는 아무리 반이 서 있는 이 곳이 발코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쏠리진 않는다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격식적이었다. 반은 자신을 향해 깊히 허리를 숙이는 런스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술을 한모금 들이켰다. "……이런 곳에서 나를 향해 굳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 "당치 않으십니다. 저는 가주님의 사람, 언제든지 가주님께……." 런스가 막 입을 열었을 때다. "황실에 있는 동안은 황실의 사람으로서." 런스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반이 차갑게 한마디 했고 그 말을 들은 런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반은 다시 에인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나를 부끄럽게 하지마라." 그 말에 런스의 몸이 또 한 번 크게 움찔했다. 이 소년의 마음을 자신이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굴었던 것 같아 낯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신이 뭔가 너무나도 커다란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기사, 이 카세타 왕국의 기사다. 카세타 왕국의 국화(國花)인 장미가 아로새겨진 이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이상, 그의 주군은 눈앞의 소년이 아니라 카세타의 늙은 국왕이다. 방금 전 소년을 향해 했던 그 격식 갖춰진 인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 소년에겐 결코 해서는 안될 것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런스가 깊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있는 반의 얼굴에는 역시 냉묵함만이 맴돈다. 반은 잠시 발코니를 넘어다 보았다. 그는 프란이 나갔던 시점부터 계속해서 재어 왔던 시간이 어느덧 30분이 넘었음을 기억해냈다. 시종의 부재에 신경을 쓰면서 반은 발코니 난간에 깊히 몸을 기댔다. 런스는 그런 반을 향해 기사로서의 예의가 담긴 짧은 인사만을 해 보이고 돌아섰다. 주군을 대하는 식의 예는 없는 인사를 보는 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럼, 평온하게 파티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런스가 막 발코니를 돌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단장님."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 목소리에 반은 움직이던 술잔을 다시 떨구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런스를 향해 다가오는 한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런스를 향해 다가온 것은 초록색 머리카락에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으로, 런스와 비슷한 종류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런스의 바로 앞에 다가온 그 소년은 다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잔뜩 긴장한 표증으로 런스를 향해 뭐라고 속삭였다. 소년의 귓말을 듣고 있던 런스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크게 뜨였다. "……확실한가?" 런스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웃고 마시는 파티장에서 오직 런스와 그 소년 사이만 진지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반은 오른손에 들린 술을 마저 마셨다. 뜨거운 술의 도수가 목구멍을 텁텁하게 덥힌다. 약간의 취기는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한다. 반은 발걸음을 움직여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소년과 런스에게로 다가섰다. 런스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소년은 갑작스러운 반의 등장에 움찔 놀란 듯 잠시 한 발을 물러섰다. 반은 그런 소년의 태도에 아랑곳않고 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반의 질문에 런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파티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손님이 끼여 있는 것 같습니다." "유쾌하지 않은 손님……?" 반의 미간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런스가 입술을 움직인다. "방금 전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정원 쪽에 뭔가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군요." "……." 반의 눈썹이 일직선으로 위로 들렸다 천천히 내려 앉았다. 런스는 반의 표정을 잠시 살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주님." 그렇게 말하면서 소년의 등을 살짝 미는 런스를 보며 반은 술잔을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는 자신에게 짧게 목례하곤 파티장 바깥으로 나가려 하는 런스를 향해 짧게 말했다. "나도 함께 가지." "예?" 갑작스러운 그 말에 당황한 런스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반의 옷깃이 길게 한 번 휘날렸다. 런스가 황당한 눈으로 반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는 가운데, 반은 런스에게 보고를 한 초록색 머리의 소년에게 짧게 말했다. "앞장서라." "가주님!" 런스의 소리 낮춘 비명성이 파티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든다. ▷◀▷◀▷◀▷◀▷◀▷◀▷◀▷◀▷◀▷◀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을 따르는 반의 발걸음은 전에 없이 가벼웠다. 반은 시끌시끌한 파티장을 넘어서자마자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등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그 중에서도 특히 키네세스를 비롯한 여인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절절이 느끼면서도 반은 가차없이 몸을 움직여 소년의 뒤를 따랐다. 런스는 평소의 그 단정하지만 소박한 검사복을 벗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반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문득, 소년의 옆얼굴과 마주쳐서 놀란 런스는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저 얼굴은 언제나 저렇게 차갑게 굳어 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의 가슴이나 꿰뚫어 버릴만큼 굉장한 마력을 갖고 있다. 정원으로 움직이는 모두의 발걸음이 빠르다. 말없이 시선을 허공으로 향한 채 걷고만 있던 반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앞서 나가는 초록색 머리칼 소년의 정수리 부분에 내리 꽂혔다. 소년의 정수리를 본 반의 눈에 희미하게나마 이채가 서렸다. 반은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을 향해 작지만 분명한 어조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어디를 들어도 10대 후반 소년의 것이라곤 믿기 힘든 고어체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반의 그런 말투에도 앞서나가던 소년은 당황하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헤냔……. 헤냔 키에르 입니다." 짤막하게 말하는 소년의 말에 반은 잠시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척이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키에르라. 그런 성을 가진 귀족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의 머릿속에서 키에르라는 성을 가진 귀족은 없었다. 집안의 가보를 손에 쥐기 훨씬 전부터, 귀족 자제의 기본적 소양의 하나로서 귀족들의 신변잡기에 대해 필수적으로 암기해야 했던 반이다. 모든 귀족들의 자제들이 그러하듯이, 반 역시 카세타의 거의 모든 귀족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어디에도 키에르라는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흥 귀족인가?' 반의 옅은 호기심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이 움직인다.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 자신을 헤냔 키에르라 소개한 그는 자신에게 이름을 물어 본 소년을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불쾌한 시선을 내비쳤다. 헤냔은 입술을 살짝 물면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소년을 힐끔 보았다. 케이온 기사단에 입단한 이후로, 기사단장인 런스의 옆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검을 닦아왔던 헤냔은 여태까지 '카르멘 가의 수장' 이란 작자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상관으로 모시며 존경해 마지않는 기사단장 런스가 반에 대해서는 오로지 찬탄에 가득한 미사여구로 일관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단장님이 목숨처럼 떠받드는 사람이라 길래 기대를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저 비리비리한 몸으로 검 하나 제대로 들 수 있는 건가. 저 어디가 대륙을 호령하는 검술 가문의 주인이란 말인가. 계집애 같은 상판으로 검을 쥔 적이 있기는 한건가.' 헤냔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반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검의 연인이 되기 보다는 만인의 연인이 되는 편이 어울리리라 판단되는 저 얼굴. 헤냔은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꾹 물었다. 런스에게 '카르멘 가 가주' 에 대해 이 것 저 것을 묻곤 했던 그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반에 대한 런스의 대답은 한 결 같았다. "검에 관한 한 최고이신 분이다. 나 같은 건 발치에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에도 최고이신 분이지. 그 이상 뭐가 필요한가? 나이? 나이는……." 그러고 보면 카르멘 가 가주의 나이에 대해 물을 때만은, 런스가 난색을 표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조금…… 젊으신 편이지." 곤란한 듯한 얼굴로 웃으며 헤냔을 향해 말했던 런스가 생각났고, 헤냔은 휙하고 고개를 돌려 런스에게 외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이건 조금 젊은 게 아니잖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보고가 있었던건가, 헤냔." 헤냔이 울컥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생각을 반토막 내면서 런스의 입이 벌어졌다. 런스의 말에 헤냔은 반을 향해 피어올랐던 감정을 통제 하려 애쓰며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조용히 입술을 뗐다. "……유니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격납고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고 하는군요. 그의 연락을 받고 세 차례 경비원들을 보냈는데, 그들로부터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몇 일 전, 격납고에서 분실사고가 있었기에 격납고 부분은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는 것은 런스님도 잘 아실 겁니다. 오늘은 키네세스 공주님의 생일인 만큼, 높으신 분들이 많이 행차를 하셨고, 그 분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일에 얽혀 계신 분들입니다. 격납고 옆 부근은 파티장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위험과 직결될 수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반동분자들도 난동을 피우니 조그마한 위험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냔의 말이 끝나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런스가 고개를 돌려 반을 보았다. 그는 더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반은 대꾸 없이 런스를 보았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이만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그의 말에 반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곡선을 그려냈다. "네 몸 걱정이나 해라." 짧게 일축해버리는 소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가웠다. ▷◀▷◀▷◀▷◀▷◀▷◀▷◀▷◀▷◀▷◀ 하얀 백지 위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그림. 가느다랗게 말린 붓끝에 물감을 담는다. 새하얀 종이 위로 움직여 나가는 붓자락을 따라 그림 위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다. 화가들은 늘 말하곤 한다. 그들이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자신들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최고의 미를 자랑하는 때라고. 그들은 자신의 피조물이 자신의 의지대로 그려질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그 모습을 갖춰갈 때 이루 말 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새하얀 종이 위로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그 순간, 화가들은 전율을 느낀다. "피부가 참 고우시네요." 갈색 머리카락을 동글게 말아올린 소녀는 자신의 작은 양 손에 얼굴 화장을 맡긴 소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여움이 물씬 흘러내리는 소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찬탄이 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수많은 여성들의 피부를 만지고 관리해왔던 소녀였지만 지금 자신의 화장을 받고 있는 이만큼 결고운 피부를 갖고 있는 이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 "짧긴 하지만 머리카락의 윤기도 좋아요! 어머나, 아까워라! 왜 이걸 이렇게나 짧게 자르신거죠?" 옅은 금발의 소녀가 자신의 앞에 앉은 아름다운 숙녀를 향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 숙녀는 그러나 대답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약간의, 아주 미약한 감정이 떠올라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것은 곧 가라앉아 버린다. 화가들이 자신의 붓끝이 만들어나가는 그림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숙녀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손끝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드레스를 봐요! 아아, 너무나 잘 어울려요! 시온님이 그렇게나 신경을 써서 만든 드레스인만큼! 정말로 너무 잘 어울리세요!" 옅은 주홍색 머리칼의 소녀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다시 한 번 찬탄을 피어 올렸다. 부러움과 질투 같은 감정들이 뒤섞인 것 같은 소녀의 눈에는 가득한 동경이 피어 있었다. 주홍색 머리칼의 소녀는 눈앞에 그린 듯이 앉아있는 숙녀를 향해 환한 웃음을 보였다. 옅은 푸른빛의 드레스. 어깨까지 살포시 파인 그 드레스는 심할 정도로 화려한 디자인을 갖고 있진 않지만, A라인을 잔뜩 강조해서 치마 자락부터 박혀나간 프릴때문에 어디를 보아도 수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파여진 어깨 부근을 이름 모를 동물의 뼈로 덧대어 갖가지 문양을 넣어 놓았다. 네 부분으로 나누어 박아 놓은 프릴은 둥글게 퍼지는 드레스 자락을 따라 화려한 곡선을 그린다. 숙녀의 목 부분에 살짝 드리워진 목걸이와 드레스는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금색 목걸이의 중앙에 박힌 커다란 주홍빛의 보석은 숙녀의 하얀 귀에 걸린 주홍빛의 보석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숙녀의 미모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소녀 셋은 마차 안에서 그다지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앉아서 무표정하나 조금은 뿔퉁한 기색이 숨기지 않고 들어나기 시작하는 숙녀를 감탄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세 소녀의 눈은 감동으로 동그래져 있다. "너무너무 예뻐요! 자자자, 머리에는 이걸 써보는 편이 어떨까요? 진주 핀이예요." 갈색 머리칼이 소녀가 보석이 촘촘히 박힌 핀을 내밀자, 숙녀는 잔뜩 질린 표정을 해보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떠련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갈색 머리 소녀의 옆에 있던 주홍색 머리칼의 소녀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한다. "아아! 화장이 좀 잘 못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분홍색 계열로 조금더 다듬어야 겠어요. 이 쪽으로 와주세요!" 절대로 안가! 라는 염원이 온 몸으로 방출되는 자세로 숙녀는 고개를 저었다. 주홍색 머리의 소녀는 약간 아쉽다는 눈으로 물러났다. 이번에 나서는 것은 옅은 금색 머리의 소녀다. 소녀는 방긋 웃으며 소녀를 향해 말을 건다. "뭐니뭐니 해도 드레스의 허리 라인을 조금 더 조이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작작 좀 해." 그 말에, 드디어 숙녀의 입에서 조그마한 제지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개처럼 벌어졌다 다물리는 그녀의 입술은 옅은 핑크빛을 띄고 있다. 반짝이는 핑크색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게 난 깨끗한 미백의 치아가 돋보인다. 금방이라도 화를 버럭 낼 것 같은 숙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허리깨에서 작게 흔들리는 금색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웨이브가 져서 살짝 밑으로 늘어 뜨렸다. 푸른빛의 드레스 위로 조심스레 흔들리는 금색의 머리칼은 손을 대면 그대로 미끄러지리라 생각될만큼 부드러워 보인다. "어머나! 눈살을 찌푸리시면 안되요! 화장이 망가질 수도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다시 숙녀의 볼끝에 화장을 하려고 했다. "크악!! 그만!!" 숙녀는 드디어 고함을 치고 말았다. 부드럽게 볼 끝을 터치하는 묘한 화장품의 냄새에 질식할 것만 같다. 숙녀.... 아니, 프란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이 빌어먹을 가발이라는 것을 저 멀리 멀리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프란이 아니라 프리나일 때조차 겪어본 적 없는 기묘한 경험을 하고 있는 프란은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 아랫단을 북 찢어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검을 찾으려고 했다.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다. "아이, 숙녀님. 가발이 흔들리잖아요. 말은 조용히, 조심스럽게 해주세요." 남의 마음도 모르고 그런 말을 충고랍시고 던지는 금발 소녀의 말에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대체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버린거지?'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크게 한 번 감싸쥐었다. "내가 미쳤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보고 있노라니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3분, 딱 3분만 입고 있어줘. 응? 나랑 한 곡 출 수 있는 시간만…….」 너무 간절한 눈으로 그렇게 말했던 시온 때문에 드레스를 입을만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건 프란이 아니다. 프란은 자신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하는 시온의 얼굴을 격하게 가격한 뒤에 바로 마차에서 뛰쳐 나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시온은 프란이 손을 잡고 작고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프란……. 이대로 나하고 입씨름하면 시간이 다 가버릴텐데……. 난 네가 드레스를 입을 때까지 절대 물러날 마음이 없어. 차라리 드레스 한 번 입고 마는게 나을걸? 형님이 화 내기 전에 돌아가려면 내 말을 듣는 편이 좋을 거야, 프란.」 "꺄아~ 다 됐다~ 시온님~ 시온니이이이임~~" 프란의 이런저런 회상을 부서 뜨리면서, 주홍빛 머리칼의 소녀가 시온을 불렀다. 프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헤에? 다 된거야?" 급한 마음에 휙하고 마차 문을 열어 젖힌 시온과 프란의 눈이 딱 하고 마주쳤다. 순간, 프란은 굳었고 시온 역시 굳었다. ".....하." 시온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나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1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초 간의 신데렐라(4) 가네트(uznian) 03-11-24 :: :: 15089 "먼 훗날이지만…… 내가 너에게 청혼을 한다면 어떡할 거야?" 소년은 눈 앞에 선 소녀에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초록색 머리카락과 적갈빛의 따뜻해뵈는 눈동자를 가진 그 소년의 목소리는 긴장 때문인지 조금은 굳어져 있었다. 수줍음을 가득 머금은 그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다. 하얗게 얼어붙은 주변의 경관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화끈 열이 오른 모습으로, 소년은 자신의 앞에 선 소녀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온통 내려, 초록빛의 나무 위로 소복소복 그 하얀 옷자락을 드리운 눈들. 소년의 앞에서 그 눈덩이를 맞으며 서 있는 소녀는 그러나, 소년의 진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한 발, 또 한 발. 소년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니, 마치 무시한 것처럼 한 발 한 발 발을 앞으로 내딛어 검을 휘두르는 소녀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이 진지해 보였다. 어쩌면 저렇게까지 열심일까. 소년은 생각한다. 다른 귀족의 여자아이들처럼 너도 드레스를 입고, 편안하게 부채를 펴들고 따뜻한 화롯가에 앉아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그렇게 열심인 거야? 소년은 너무나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그 작은 소녀를 보며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어차피 여자인 몸, 지금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고 서로의 몸이 성장해 가는 그 때가 오면 너는 점점 더 초라해 질 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체격의 조건이 다른걸. 너는 나를 이걸 수가 없어. 게다가 언젠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네가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검조차 쥘 수 없을 지도 몰라. 누구나 너에게 검보다는 화려한 드레스와 근사한 남자를 쥐어주고, 네가 거기에 걸맞는 '여자'가 되길 기다리겠지. 소년은 자신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검만을 휘두르고 있는 작은 소녀를 보며 생각했다. 소녀의 볼 끝에 머문 땀방울을 따라, 소년의 시선이 이동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검만 잡으면 불타오르는 소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 곳으로 빨려 들 것만 같다. 언제나 갑옷, 혹은 남자 같이 짧은 아래윗옷 밖에 입지 않는 그녀이지만, 어째서 소년의 눈에는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지. 고상한 척, 깔끔한 척, 내숭이나 떨어대는 저 귀족의 여식들이 목걸이와 귀걸이에 탐닉할 때, 저 어린 소녀는 그저 검 한 자루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검 한 자루에 자신의 모든 미래를 건 듯 그 것에 열중한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인 거지? 왜 그렇게 열심인 거야? 그렇게 먼 곳을 보는 듯한 얼굴로 그 검만을 뚫어져라 보지말고, 가끔은 시선을 돌려 나를 봐준다면 좋을 텐데. "프리나……. 왜 대답을 해주지 않아?" 소년은 손가락을 꽉 쥐며 물었다. 아직도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녀의 금색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린다. 아무리 검을 쥐고 있다지만, 그래도 자신의 여자를 버릴 수가 없어 기른 소녀의 기다란 머리카락. 저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가슴이 뛰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년이었다. "프리나……." 소년은 대답을 하지 않는 소녀를 다시 한 번 길게 불렀다. 한참의 침묵이 길게 두 사람의 주변을 휘돌았다. 소녀가 검을 휘두르고, 소년이 언 발을 땅에 비비는 동안에 한 바탕의 눈이 두 사람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차가운 눈의 감촉이 볼에 닿자, 소년은 조바심이 난 듯 다시 한 번 소리친다. "프리나!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야!" 다시 한 번 휘몰아치는 눈줄기가 소년의 적갈색 눈동자를 때린다. "프……!" "나는……." 소년이 다시 한 번 소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검을 휘두르던 소녀의 손이 멎더니 천천히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소년은 바짝 긴장해서 소녀의 열리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검을 휘두르던 소녀가 갑자기 눈을 들어 소년을 바라본다. 소녀는 두 볼이 화끈, 하는 느낌에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소녀가 다시 입을 연다. "나는……. 결혼 따위 안 할건데?" 아무런 느낌조차 섞이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이 발끈했다. "어째서? 너도 여자잖아! 언젠가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서……." "나한테는 검(劍)이 있어. 난 결혼 같은 거 안 해." 차갑게 뱉어낸 그 말과 함께 소녀가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소년의 눈이 얼핏 굳었다. 소년은 부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한참동안 소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그 뚫어지듯 강렬한 시선을 느낀 듯, 한참만에야 소녀가 눈을 들어 소년을 보았다.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소년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런 게 어딨어! 넌 여자란 말이야! 나하고 결혼해! 난 너하고 결혼할거야! 명심해! 19살이 되면, 난 널 찾으러 올거다! '널' 찾아 올거라구! 그 때가 되면, 나하고……!" "웃기지 마." 소녀는 마구 외치는 소년을 향해 짧게 한마디했다. 소녀는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 넘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하는 소녀의 어투는 차갑기가 그지 없다. 소녀는 검을 휘두르며 딱딱하게 말했다. "난 세이피안 최고의 기사가 될 거야. 폐하의 옆에서 이 나라를 수호하는 당당한 여전사. 그걸 위해서 난 결혼 같은 건 안 해, 절대로." "아니! 난 할 거야!" "그럼 다른 여자하고 하던가." 소녀는 다시 검을 휘두른다. 소녀의 그 차가운 표정을 보고 있던 소년이……. 드디어는 눈물을 떨군다. "……나, 내일……. 내일 아침에……. 카세타로 떠나……. 너도 알아?" 소년의 눈물 섞인 외침에도, 소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소년은 그 담담한 표정에 울컥해 버럭 고함을 질러 버린다. "하지만 난 다시 돌아 올 거다! 돌아와서……." "돌아와서?" 소녀의 반문에 소년이 다시 소리를 쳤다. "널 신부로 맞을 거야!" "쿡." 소녀는 웃는다. 그저 웃는다. 거짓말 하지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소년은 가슴이 아릿하다. 한참동안 웃는 소녀를 보고 섰던 소년은 갑자기 휙하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년의 발. 소녀의 시선이 등을 좇는 것이 느껴지자, 소년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소녀의 시선은 잠시 소년의 등을 뒤쫓다가 다시 밑으로 떨어져 버렸고, 그 순간 소년의 발이 멈칫했다. 뜨거우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지던 소녀의 시선이 갑자기 사라지자 소년은 갑자기 심장조차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에 멈춰서서 두 눈을 질끈하고 감았다. 소년은 한 발, 한 발을 앞으로 내딛다가 한참만에 발에 힘을 주어 뛰기 시작한다. 저 멀리, 저 멀리로. 달리는 소년이 이빨을 악 문다. 눈이 날리고, 바람이 불고, 그 한 가운데에서 소년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 눈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바람이 불고, 눈이 날린다. 흐르는 것은 눈물이요, 바람이요, 그리고 눈이다. "두고 봐." 소년의 꾹 깨문 이빨, 앙다문 입술선을 타고 눈물이 한 줄기 흐른다. "두고 봐." 질끈 감은 눈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두고 봐, 프리나 프리텐! 너와…… 너와 결혼하고 말 테니까!" ▷◀▷◀▷◀▷◀▷◀▷◀▷◀▷◀▷◀▷◀ "휘익∼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인데, 프란." "뭐가 휘익이고 뭐가 기대 이상이라는 거냐, 네놈은!!" 프란은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휘익하고 마차 모서리에 휘감겨 버린 자신의 드레스자락을 뽑아내려 애쓰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흐엑!" 그러나 휘감겨 버린 드레스자락은 워낙 단단해서, 프란은 자신의 푸른 드레스 자락에 엉켜 번이나 휘청거렸다. 익숙치 못한 옷을 입어 전혀 몸에 맞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프란은 온갖 인상을 쓰며 휘청 휘청 시온을 향해 몸을 움직여 나오고 있었다. 그런 프란의 얼굴을 보고 있는 시온의 얼굴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득한 즐거움이 묻어 나오고 있다. 시온은 푸른 드레스 자락을 이끄는 프란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하핫, 하고 다시 한 번 짧게 웃었다. '역시... 여자는 변화의 동물이니까.' 말려올라간 금발과, 하얀 얼굴과, 분홍빛으로 칠해진 입술선, 새초롬하게 들려진 눈가에는 핑크빛 화장, 지금이라도 날아갈듯 날렵한 드레스의 맵시는 도저히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두르는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시온은 살짝 허리를 굽히며 쿡, 하고 웃었다. "하∼ 프란양. 저에게……. 아름다운 레이디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어요?" 생긋 웃어 보이며 시온이 손을 내밀었지만, 프란은 우엑, 하는 얼굴로 그 손을 발로 턱 차 버린다. 드레스 자락이 너무나 거추장스러워 시온을 발로 치는데도 한 참의 시간이 걸렸지만. "됐어! 이제 벗을 거야! 네 석 말대로 이 치렁치렁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걸 입어줬단 말야! 이젠 벗어……." 하지만 프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온의 입가가 씨익하고 들어올려졌다. "에잉! 나하고 춤도 한 곡 쳐줘야지, 프란." "......" 프란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프란이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 한 순간, 시온의 손은 얄밉게도 오른손을 뻗어 그런 프란의 앞을 당연하다는 듯 저지해 버렸다. 앞이 막히자 프란이 입술을 뿌득, 하고 갈았다. "너…… 너라는 자식은……." 더듬더듬 튀어나온 프란의 말에, 시온은 웃는 낯으로 대꾸한다. "귀여워 죽겠지?" 양손의 검지로 자신의 볼을 콕, 하고 찌르면서 시온이 생긋 웃어보였다. 프란은 그런 시온을 한참동안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다시 말없이 발로 찼다. 쿵짝짝…… 쿵짝짝……. 시온에게는 고맙게도, 때를 같이해서 마침 3박자의 왈츠풍 미뉴에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카세타의 작곡가가 아닌 세이피안의 작곡가, 저 이름도 유명한 리에느가 몇 날밤을 세워 자신의 연인 미야를 위해 지었다는 '사랑하는 연인이여' 라는 이름의 왈츠가. 조용한 그 왈츠가 이 곳 정원까지 뻗어나와 주위를 감돌고 있다. 시온은 이런 우연이, 하고 중얼거리며 가볍게 상체를 숙였다. "아름다운 레이디, 한 곡 추시지요." "……치워." 프란이 거부하자, 다시 한 번 시온이 짙은 미소를 머금는다. "헤헤. 싫어?" "싫다!" "……흐응." 시온은 작게 미소 지은 후 프란의 손을 기습적으로 잡았다. 환하게 빛나는 은발, 저 아름다운 비나룬이 비춰내는 오늘의 시온은 그야말로 완벽한 신사의 모습이다. 프란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채 빼니기도 전에, 시온이 기습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이 자식이 뭐……!" "스텝을 뒤로 빼시구요, 레이디." 그러나 발을 들어 시온을 때리려 했든 프란의 움직임은 허사로 돌아갔다. 어엇,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 자락에 발이 휘감길 줄이야! 무엇이든 다 말썽인 것이다, 이 기다란 옷따위는. 프란은 얼굴 근육을 경직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따위... 이... 이런 옷을 입고…… 갑자기 남자가 엉큼한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어떻게 방어를 할 셈인거야!' 이 상황과는 전혀 관계 없는 생각을 하면서 프란은 한참동안 쏘는 듯한 시온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맞닿은 시온의 표정은 즐거워보인다. "너는……." 문득 프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재밌냐?" 다음 순간 들려온 프란에, 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뭔가 이상한 것을 들었다는 듯, 시온의 입술이 헤, 하고 벌어졌다. 프란이 입술을 열었다. "내가 재미있느냐고." 다시 한 번 움직인 프란의 입술에, 시온의 미간에 엷은 줄이 생겼다. 시온은 한참동안 뚫어지게 프란을 보았다. 뭔가 정리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득 말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네가 갖고 놀던 다른 여자들하고는 다르니까 재밌다고 여기는 거냐고 묻는 거다, 지금." 프란은 그런 시온을 마주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순간, 시온의 눈매가 어그러졌다. 마치 뭔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불쾌한 그의 얼굴 위로 찬찬히 분노 비슷한 기운이 어렸다. 그는 프란의 허리를 휘어 감은 오른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가 프란의 눈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프란을 보는 시온의 눈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 지금……." 시온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퍼버버버버버버벙! 난데없이 고막을 찢을 듯한 큰 소리가 울렸고, 그 순간 프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그녀의 귀에서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려온다. 퍼버버버버버버버벙! 무엇인가가 찢기는 소리,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 모여 있던 무엇인가가 어그러지면서 한참만에 자신을 방출해내는 소리. 찢어질듯한 굉음이 그녀의 귓속을 소용돌이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눈을 꿈뻑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악 물고 미친 듯이 앞으로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봐, 프...!" 시온이 채 말릴 틈도 없이, 과격한 움직임으로 뛰어 나가는 프란의 입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이런 제길……!" 그녀가 뛰어가는 뒤편에서, 시온은 한참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은 듯 버럭 고함을 쳤다. "프, 프란! 드, 드레스!!!!!" ▷◀▷◀▷◀▷◀▷◀▷◀▷◀▷◀▷◀▷◀ 퍼버버버버벙! "뭐……?" 갑자기 들려온 고막을 찢을 듯한 큰 소리에, 헤냔은 놀란 듯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막 몸을 틀어 방금 소리가, 라고 외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볼 끝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튀기듯 뒤에 있던 사람이 움직임을 보였다. 헤냔의 볼 끝에 스치는 것은 보랏빛의 신비로운 머리카락. 대체 언제 뽑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기다란 푸른 빛의 검 한 자루가 소년의 손 안에 들려 있었다. 헤냔은 반이 뽑은 검을 한참동안 보다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반은 눈을 치켜 뜨고 그런 헤냔과 런스를 향해 짧게 소리쳤다. "격납고다. 뛰어라!" ▷◀▷◀▷◀▷◀▷◀▷◀▷◀▷◀▷◀▷◀ "젠장할! 뭐야, 방금 전의 그게……!" 뭐였을까. 방금 전의 그 소리는. 하지만 사실은 그 따위건 아무래도 좋았다. 가주. 그 성격 더러운 가주. 그 가주가 있는 곳은 무사할까. "제엔자아아앙!"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냥 뛰어야 겠다는 생각만이 맴돌 뿐이다. 아무래도 폭발 소리는 파티장에서 가까운 것 같아서, 더더욱 심장이 조여든다. 저 빌어먹게도 성격 더러운 가주라면 다른 사람에게 미움도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폭발음은 어쩌면 저 가주를 노리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뛰고 또 뛰었다. 얼마나 정신 없이 뛰었는지, 뛰던 도중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구두굽이 부러지고, 드레스 자락에 엉키면서도 프란은 뛰었다. 하지만 그렇게 드레스 자락에 감기는 동안에도, 프란은 자신이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멍했다. 그저 멍했다. 그 이상의 말이 뭐가 필요할까. 다른 것은 모두 생각나지 않아. 그저 멍하기만 하다. ▷◀▷◀▷◀▷◀▷◀▷◀▷◀▷◀▷◀▷◀ "격납고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헤냔이 크게 외치자, 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어떻게 된거지?" 반의 중얼거림에 런스가 답한다. "사실은 몇 일전, 격납고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황실에서 도둑이라…… 뭔가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조사를 하도록 했지만, 더더욱 이상한 것이 훔쳐간 물건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격납고를 아무리 조사해도, 그러나 이상한 물건 같은 것은 없었는데……." 부지런히 뛰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휙, 하고 구름떼가 훑고 지나간다. 청명한 밤 속으로 녹아드는 그들의 발걸음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지금쯤은 키네세스가 있는 그 곳도 이 이상한 소리로 시끄러워졌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반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생일을 맞은 그 여자는 지금쯤 깜짝 놀란 표정으로 경악성을 터뜨리고 있을 거다. 어딜 가나 반동분자는 존재하는 법. '……최근 들어 반 카세타 세력이 일고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군.' 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이런 날, 공주의 생일 날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것은 왕궁의 수치이고, 국가의 수치다. "가주님." 갑작스럽게 들려온 런스의 목소리에, 반이 고개를 돌린다. "이제 곧 정원입니다. 거기만 지나치면……." "알았다." 반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젠장!!" 계속해서 넘어지고, 계속해서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그녀의 발은 움직인다. ▷◀▷◀▷◀▷◀▷◀▷◀▷◀▷◀▷◀▷◀ "이 쪽입니다!" 바쁘게 재촉하는 그의 발이 빨라진다. ▷◀▷◀▷◀▷◀▷◀▷◀▷◀▷◀▷◀▷◀ "빌어먹을! 이따위 드레스!!" 부욱, 하고 밑단을 찢으면서 프란이 발악했다. 훤하니 들어난 맨 다리가 그제서야 다리의 속박을 풀자, 그녀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휭휭, 하고 귓가에서 차디찬 파공음을 내뿜는 바람을 등지면서 그녀는 달렸다. ▷◀▷◀▷◀▷◀▷◀▷◀▷◀▷◀▷◀▷◀ "헤냔! 자네도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단장님!" 두 사람의 말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움직이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있다. 이제... 곧 정원이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프란은 결국 구두를 벗어 뒤로 던져버렸다. 갑갑해, 갑갑해, 갑갑해. 달리고 싶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3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 10초 간의 신데렐라(5) 가네트(uznian) 03-11-24 :: :: 5219 "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격납고에서 멈춰선 반이 중얼거렸다. 확, 하고 타오르듯 일어난 그 불꽃은 그러나 격납고만을 그 날름거리는 혀로 핥아낼 뿐, 그 이상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빨갛게 오른 그 무서운 마물을 보고 있던 헤냔은, 마치 지금에서야 생각났다는 듯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 저 안……! 저 안에 있는 화약에 불이 붙으면 끝장입니다!" 헤냔의 외침에 반이 입술을 물었다. 그는 흣,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상의의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버리는 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런스가 기겁했다. "뭐, 뭘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들어가서 화약을 갖고 나오겠다." 반의 덤덤한 한 마디에 런스가 발끈해서 외쳤다.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시끄럽군." 마치 대답해줄 가치도 없다는 양 반이 몸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런스의 입술이 꾹, 하고 깨물어졌다. 그는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소년의 뒤에서 그 손을 턱, 하고 붙잡으며 낮게 입술을 열었다. "가지 마십시오." "놔라."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런스가 그렇게 말하며 반의 손목을 더 세게 부여잡았다. 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막 그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손을 막 휘두르려다 얼핏 시선이 뒤로 향한 그 순간의 일, 시선이 뒤로 틀어지는 가운데, 정원의 한 가운데가 보였다. 마치 거짓말처럼. 마치 신기루처럼. 그 정원에 선 한 여인을 보았다. ▷◀▷◀▷◀▷◀▷◀▷◀▷◀▷◀▷◀▷◀ 반과 한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익히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 "……!" "……!" 째깍. 째깍. 째깍……. 마음 속의 초시계가 1초 1초를 넘기면서 상대에게 자신의 인상을 박기 시작한다. 반은 마치 거짓말처럼 정원의 한 가운데에 나타난 저 신데렐라를, 한참동안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반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멍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상대 역시 그를 발견한 듯, 마치 굳어버린 듯한 움직임으로 반을 보고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기다란 금발의 아름다운 웨이브 머리칼. 째깍……. 그리고, 하얗게 분을 바른 깨끗한 피부, 핑크빛으로 빛나는 단정한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매끈하게 내뻗은 콧날과 무언가에 놀란 듯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 그 눈동자는 신비로운 오렌지빛이다. 째깍……. 시선이 움직인다. 밑으로 움직인다. 째깍……. 아름답게 파인 드레스의 윤곽을 따라 드러나는 섬세한 여인만의 곡선. 하늘거리는 푸른색 프릴을 단 여인의 팔은 너무도 희고희다. 째깍……. 막 시선이 발 아래로 닿았다. 억지로 찢어버린 듯, 엉망진창으로 뜯겨진 드레스의 앞단에 시선이 닿는다. 드레스에 잘 어울렸음직한 구두는 어딘가에 벗어던졌는지, 정원을 맨발로 뛴 듯 발은 온통 흙투성이다. 째깍……. 한참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인을 훑고 있던 반이 흠칫한 것은 어느 순간이었다. 그건 그런데. 아까 그 얼굴. 반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낯익은…… 얼굴...?' 째깍……. 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천천히. 째깍……. 그런데 막 그가 고개를 들려 그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여인이 몸을 돌렸다. 찢겨진 드레스의 뒷단과 하얗게 드러난 종아리살, 그리고 하얀 발이 천천히 크로즈업 되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돌아선 여인의 뒷모습뿐. "……." 한 번만 더 보면 기억이 날 것 같다. 얼핏 스친 것 같은 그 얼굴, 지금 다시 한 번 보면 기억이 날 것 같다. 반은 막 걸음을 옮겨, 여인이 뛰어간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읏……?"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앞쪽에서 올라온 화끈한 열기가 그의 얼굴을 때렸고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웃,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들어 불길을 막았다. 아차, 싶었다. "런스……!" 그가 이름도 모를 그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사이, 런스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반은 큰 소리를 내어 런스를 불렀다. 순간, 우렁차게도 런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가주님!" 허억, 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반은 한숨을 들이켰다. 화염을 살라먹는 저 붉은 불길 속으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반은 이빨을 우둑, 하고 물었다. 자신이 여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그의 부하가 저 불꽃 속으로 뛰어 들었다는 사실에 그는 자기괴감을 느꼈다. 한참만에야 런스는 재빠른 발걸음으로 창고 안에서 뛰어 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주위 때문에 까맣게 그슬린 케이온 기사단장은 가슴 한 가득 커다란 나무통을 가져나온 듬직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반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감정이 피어올랐다. "……." 말없이 자신을 보는 반을 향해, 런스는 덤덤한 얼굴로말을 꺼냈다. "가주님, 이게 화약입니다. 일단 화약은 건졌으니, 나머지는 사람을 불러모으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봐, 헤냔?" 런스는 고개를 돌려 헤냔의 이름을 불렀다. 불을 끌 사람을 모아와라, 라고 말하려던 런스의 말은 그러나, 헤냔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딱 멈춰버렸다. 언제나 충실하게 자신의 말을 따르던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 그 소년은 깜짝 놀란 듯, 아니…… 경악한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원을 보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경악한 소년의 두 눈동자가 가라앉은 것은 한참 후. 시간이 멈춘 듯 했던 소년의 입에서 경악 섞인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리나?" ------------------------------ 기억하십니까? 오! 나의 주인님- part 2: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 편에 나왔던 한 소년을... 힌트를 드리자면, 프리나에겐 '남녀 차별주의자' 였지요. 띄워쓰기 하기가 매우 귀찮아서;; 죄송하지만, 집에 있는 컴퓨터에 있는 것 대신 라니안에 펌되었던 글을 썼습니다. 다시 기회되면 차근차근 수정본으로 옮기겠습니다. 분량이 제법 남았군요. 시간이 늦은 관계로;; 내일 계속할게요-_-;=+=+=+=+=+=+=+=+=+=+=+=+=+=+=+=+=+=+=+=+=+=+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4 :: 오! 나의 주인님- PART 10: 청혼(1) 가네트(uznian) 03-11-24 :: :: 14475 PART 10: 청혼 "프리나……." 낮게 중얼거려 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맴도는 그 이름을, 헤냔은 나지막하게 되풀이했다. 몇 년이나 지난 모습이다. 그도 자랐고, 그녀도 자랐다. 지난 몇 년 동안,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나갔다. 세월을 따라 흐르는 것은 망각. 시간이 지나고나면 아무리 소중했던 기억이라해도 퇴색되는 법. 아무리 사랑했던 연인사이라해도,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식어 옛날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미칠듯이 사랑했지만 헤어짐 뒤에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찾아 가는 것처럼. 모든 것은 언제나 망각의 틈에 숨는다. 시간이 지난 후에 손 끝에 남아 소중하게 간직되는 추억은 양 손에 빈틈없이 쥐어지는 한줌도 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추억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가 빠져 나가 버린다. 겨우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추억의 흔적들뿐. 완벽한 추억이라는 것은 가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추억은 그 여분의 찌꺼기만이 남아 한 존재의 가슴에 붙어 있는 것이다. 헤냔 역시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좋아했던 금색 소녀를 어느 정도는 잊고 있었다. 가끔씩은 그 단정했던 얼굴조차 가물가물하게 기억나지 않아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길 때도 있었을 정도로. 인간은 시간이 지나고나면 모든 것을 잊어 버리는, 어쩔 수 없는 '망각의 존재'가 아니던가. 함께하고 싶었던 소녀, 그러나 너무 어릴 때 했던 '청혼'이었기에 조금은 그것을 가벼히 생각했던 자신. 헤냔은 언제나 생각해왔다. 어린 그 때, 자신이 좋아했던 그 금발의 소녀와 재회한다면 이제는 조금 당당해진 모습으로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예뻐졌다, 라거나…… 웃는 낯으로 농담조로 말하고 싶었다. 옛날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라는 식으로. 그렇게 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헤냔이 '프리나' 라는 소녀를 좋아했던 것은 이미 옛날 옛적의 일이므로. 세이피안의 왕에게 환멸을 느낀 아버지가 세이피안의 대귀족자리마저 박차고 나와 카세타로 옮겨와, '변절자'라는 낙인 속에 살아야했던 과거. 그 과거 속, 힘들고 치욕적인 시절 속에서는 어린 시절 좋아했던 금빛 소녀도 그저 추억일 뿐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 속에 조금은 변했을 소녀를 바라보며 무덤덤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헤냔 자신이 프리나라는 소녀를 좋아했던 것은 '옛날'의 일이니까. "프리나……."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뛰는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한순간에 알아보았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한동안 헤냔은 자신의 목덜미를 꽉하고 쥐어보았다. 숨이 막혀 오는 듯한 느낌에 가슴팍이 막막했다.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자신은. 대체 왜 방금 전의 그 여인이 첫사랑의 소녀라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그녀가 있어야 하는 세이피안이 아닌 이 곳, 카세타에서. 언제나는 만나러 갈 것이라고 했었다. 바보 같았던 어린 시절. 바보 같았던 풋사랑. 바보 같았던 자신. 바보 같았던 눈물. 바보 같았던 다짐. 그러나 바보 같기에 희미하게나마 언제까지고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그 강인한 소녀. 그 소녀를 언젠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프리나……." 헤냔이 막 중얼거렸을 때였다. "방금... 프리나라고 했나?" 옆에 있던, 잠시 잠깐 소녀가 남긴 짙은 발자취 때문에 잊고 있었던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헤냔은 흠칫하며 옆을 보았다. 그 곳에는 은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조금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제, 제길……!" 프란은 달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아무 것도 담지 않는 듯 했던 그의 보랏빛 눈동자. 언제나 냉묵한 그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마치 사신과 대면한 것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을 보자마자 크게 뜨였던 가주의 눈동자. "……어떡하라고…… 나보고…… 나보고 어떡하라고……." 아무렇게나 뛰고 있다. 팔 다리를 모두 바람에 맡기고 뛰고 있는 까닭에 프란의 발은 엉망진창이었다. 발치에 맺히는 자욱한 피의 내음에 코끝이 시큰거린다. 앞 가슴을 여며 놓은 흰 끝을 그대로 풀어헤쳐 버리고 싶을 만큼 프란의 호흡은 격했다. 감당해낼 수 없으리만치 세게 뛰는 주먹크기의 근육덩어리. 온 몸을 향해 피를 보내는 그것이 지금 당장이라도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버릴 것 같아서 양 손 가득 땀이 베어난다. 멍울지듯 내걸린 저 위의 달빛, 저 유폐된 여신이 산다는 녹빛의 비나룬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프란은 생각했다. 저 달빛 속으로, 이대로 달려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달빛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가주의 얼굴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저 녹빛이 공간 안으로 숨어들어 저 보랏빛 눈동자의 소년의 추궁을 피할 수만 있다면. 저 달 속에 갖혀 영원히 구속 당해도 좋으리라. "허억…… 헉……." 프란은 한참만에야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섰다. 온통 벗겨진 무릎의 살갗과 따가운 발바닥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지만, 프란은 입술을 꾹꾹 깨물며 참는다. 한 발 한 발, 프란은 아까 전 그 마차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보였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이 옷차림으로 뛰어가 버렸어…… 쿡쿡쿡……." 프란은 웃었다. 이 드레스, 이 기나긴 드레스차림. 그가 이런 모습의 그녀를 보았었다. 그 차가운 사람이 그녀를 보았다. 그 싸늘한 인간이 보았다. "쿡쿡……." 손으로 머리카락을 받쳐들고 한참동안, 프란은 웃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빛을 띄고 있다. 한참동안 그렇게 웃던 프란은, 갑자기 손을 들어 머리를 휙 하고 잡았다. 손가락 끝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프란은 그것을 그대로 팽개쳐 밑으로 집어 던졌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나온 그 가발이 내동댕이쳐졌다. 프란은 한참동안 그 가발을 빤히 내려보고 있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난 이제 죽은 거다." 문득 프란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참동안 드레스를 보고 있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온통 찢어져버린 드레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다리. 이래서는 어딜봐도 시온의 말처럼은 되지 않았지 않는가. 자신을 '신데렐라'로 만들어주겠다는 시온의 얼굴이 생각나서 프란은 피식, 웃어버렸다. 이 모습은 하룻밤 근사한 꿈을 꾼 댓가로 요정과 결혼한 신데렐라의 해피 엔딩과는 영 다르다. 자신이 봐도 우스운 몰골이라 프란은 고개를 숙이곤 한참을 웃었다. 한참동안 멈춰선 자세에서 한숨을 내쉬던 프란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인 것은 한참만의 일이었다. "일단 시온놈에게 내 옷을 받은 다음……." 돌아가면 시온을 반 죽이고 말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프란은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비나룬의 여신이 프란을 가엾게 여겨 달 속에 그녀의 그림자를 숨겨주지 않는 한, 그녀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옷을 똑바로 차려입고,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움직였다. 그런데 그녀가 막 한 발자국 움직였을 때였다. "……!" 프란은 뭔가를 느낀 듯, 갑자기 움찔하고 멈춰 섰다. 그녀의 오른쪽 눈썹이 아래위로 한 번 들어올려졌다. 그녀는 잠시 긴장된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바람이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프란은 눈을 가늘게 치켜 떴다. 바람의 방향이 이상하게 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잠시 손을 오른쪽으로 뻗어 보았다 휭, 하는 파공음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그 때. 순간적으로. 그녀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큭....!!" 프란은 사휘를 둘러보다 말고 몸을 굳혀버렸다. 아니, 굳힐 수밖에 없었다. 힉, 하는 순간에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채 대비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목 안으로 들어온 검 한 자루. 그 검 한자루 앞에, 프란의 몸이 굳었다. 이상한 바람 소리와 더불어 소름이 돋았고, 그 소름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몸을 돌렸건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드리워진 새하얀 검 한 자루가 고고히 그 빛을 반사하고 있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은 날카롭게 날이 선 한 자루의 검. 손가락이 닿으면 그대로 새빨간 피를 빨아들일 것만 같은 저 차가운 빛깔이 섬뜩하게 번들거린다. 무서우리만치 파랗게 빛을 발하는 그 검의 희번들한 광채에 프란은 침을 꿀떡, 하고 삼켰다. 일순 온 몸으로 돋아난 소름을 보며 프란은 고개를 들었다. 목덜미에 닿여 있던 검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따라 프란의 가녀린 목덜미에 상처를 냈다. 하얀 목덜미 선을 따라 검붉은 선이 그어졌다. 새빨간 빛의 그것이 하얀 목에서 유독 도드라진다. 그러나 목에 검이 닿아 베였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프란은 고래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어느덧 차분해져 있었다. 프란은 눈을 좁히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프란이 이런 곳에서 공격받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세이피안에서라면 언제나 이 곳 저 곳에 사고를 치고다녀 원한관계가 적지 않은 그녀였지만, 카세타 왕국, 그것도 오늘 같은 파티장에서 공격을 받을 이유는 없다. 프란은 지그시 눈을 뜨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고고한 비나룬의 빛깔이 반사해내는 그 자의 얼굴을 두건으로 감싸여 있었다. 푸른 천으로 한 겹 감싼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프란의 목덜미에 겨누어져 있는 검이 정확한 선을 긋고 있는 걸로 미루어, 검을 예사로 쓰는 자는 아닌 듯하다. "검을 내게 들이대는 이유 정도는 설명해주시지." 목젖에 임박한 검을 느끼면서 프란이 말했다. 겁이 없는 것인지 베짱이 센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인지 검 앞에 선 프란의 태도에는 긴장이라곤 묻어 있지 않았다. 프란의 목덜미에 들이댄 검이 조금 더 다가왔다. 프란은 입술을 물었다. "쓸데 없는 짓 하지마. 당신은 날 벨 생각이 없어. 겁 주지 말고 용건을 말해." 프란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그 말에, 프란의 목덜미로 조금씩 더 근접하고 있던 검의 움직임이 슬쩍 멈추었다. 프란은 슬쩍 눈가를 들어올리며 살짝 뒤를 보았다. 희미하게 어린 그림자가 그녀의 바로 뒤에 임박해 있다. "검을 들이댄 용건은?" 프란의 담담한 질문에, 검을 쥔 그 자가 잠시 움찔했다. 프란은 그런 그 자의 움직임을 읽으면서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 괴한이 자신의 태도에 당황하는 동안 얼른 검을 꺼내 몸을 비켜낼 작정이었던 프란은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지금 검이 없었다. ▷◀▷◀▷◀▷◀▷◀▷◀▷◀▷◀▷◀▷◀ 자신에게 검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프란은 그 순간 평정을 잃고 움찔했다. 그녀가 막 몸을 틀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괴한이 입을 열었다. "……네가 '카르멘 가 가주의 시종'인가." 검을 쥔 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소리에, 몸을 돌리던 프란의 인상이 확하고 굳어졌다. 그녀의 귓가에서 살짝 부서지듯 들려온 그 목소리는 굉장히 가녀리고 여려서, 아무리 생각해도 남성의 것은 아닌 듯 했다. 거칠게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여성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프란은 눈을 작게 뜨며 숨소리와 함께 작게 뱉어냈다. 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동안 뚫어지게 프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눈이 뒤에 달린 것은 아닌지라 괴한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어찌나 뜨거웠던지 프란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의 몸은 얼어버렸다. 그녀는 그 시선 만으로 자신을 후벼파 버릴 것 같은 눈빛에 잠시나마 온 몸을 떨었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것은 분명 살기는 아니었다. 몸을 토막낼 것 같이 터져 나오는 이 차가운 기운. 그러나 살기는 아니다. 호기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탐색가의 눈도 아니다.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괴한의 눈동자 가득히 차 올라 있었다. 프란은 살짝 한 걸음을 뒤로 뻗었다. 괴한은 움찔했지만 곧 무서운 기색으로 다시 한 번 프란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댔다. 분명 지금 괴한의 움직임은 프란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죽일 작정이었으면 처음부터 뒤에서 그녀를 덮치지 않고 단칼에 베었을 테고, 무엇보다 그녀의 정체를 되묻듯 확인하지도 않았을 거다. 프란은 갑작스레 등장한 괴한의 정체에 대해 새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괴한의 말 중 한부분이 이상하게 심장을 자극한다. 자신을 '프란'이라고 묻지 않았다. '카르멘 가 가주의 시종' 이냐고 물었을 뿐. 프란은 조금 텁텁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지?" 그녀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져 나온 순간이었다. "프라아아안!" 갑자기 들려온 그 커다란 목소리에, 프란에게로 검을 향하고 있던 그 자의 움직임이 설핏 굳어졌다. 귓가에서 터덕대는 발걸음 소리가 거칠게 들려온다. 왕궁 정원의 풀을 엉망진창으로 밟으면서 뛰는 소리와 함께, 프란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침착하게 몸을 앞으로 빼냈다. 물살처럼 앞으로 휘어진 프란의 움직임에 괴한이 엇, 하는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프란의 몸이 뒤쪽으로 휙하고 꺾어 들어갔다. 괴한의 검이 프란의 옷깃을 찢으려고 앞으로 내달리려는 찰나, 그 짧은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프란은 얼른 그의 뒷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재빠른 그 움직임에 괴한은 채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뒤를 공허하게 노출시켰다. 프란은 짧은 미소와 함께 무방비 상태인 괴한의 뒤에서 휙, 하고 그의 팔을 꺾었다. 욱, 하는 소리와 함께 괴한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굽혀졌다. 괴한의 검이 밑으로 떨어진다. "……크윽." 이상한 소리를 내며 괴한이 몸을 굽힘과 동시에, 뭔가가 휙하고 프란의 앞을 날았다. 프란은 오른손으로는 괴한의 팔을 굽힌 손에 힘을 주고, 동시에 왼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날아온 그 것을 받아들였다. 프란의 눈이 반짝였다. 실버 블레이드. 프란의 손에 들려온 것은 가주가 하사한 바로 그 검이었다. "괜찮은 거냐? 그 놈은 뭐야?" 프란에게로 거칠게나마 검을 던진 것은 은빛머리칼의 소년이다. 프란은 잠시 자신을 향해 서둘러 뛰어오는 시온을 노려보다가, 괴한이 한 번 꿈틀하는 것을 느끼곤 도로 괴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시온을 밟아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왼손만으로 힘겹게 검을 꺼내, 방금 전의 괴한이 그랬듯이 그의 목에 검을 바짝 들이댔다. 프란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매달린다. "……넌 뭐냐?"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의 프란이 투박하게 프란이 묻자 그 자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넌 내게 '프란'이 아니라 '카르멘 가 가주의 시종'이라고 했지?" 프란은 그 말과 함께 그의 목 밑에 검을 더더욱 밀착해 갖다댔다. 괴한이 이빨을 뿌득, 하고 가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온다. "날 왜 노린 거지?" 프란이 그 말과 함께 괴한의 등을 한 대 쳤다. 그 때였다. "프란, 조심……!" 시온의 커다란 목소리에 프란이 눈을 찌푸리는데, 괴한의 손에서 뭔가 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움찔하며 크게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녀의 발이 풀 위를 두텁게 밟음과 동시에, 괴한의 손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쿠욱!" 프란이 몸을 뒤틀었다. 괴한의 손에서 들려나온 이상한 것을 본 시온도 얼른 두발자국을 크게 물러섰다. 괴한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 색의 구체로, 괴한이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자마자 곧 그것에서 커다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매캐한 은회색의 그것이 주위를 한바탕 휘감으며 호흡을 압박한다. "쿨럭!" 괴한이 꺼내든 그 검은 색의 물질에서 튀어나온 기체들이 사방을 휘어 감자, 텁텁해진 공기를 따라 매운 기운이 코끝을 자극했다. 프란과 시온은 자신들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고 코를 막았다. 그들은 그 상태로 한참을 콜록거렸다. 프란은 입술을 잘끈 깨물며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은회색의 연기는 그녀의 눈가로 젖어들어 오렌지색 눈동자에 가득 고이는 눈물만을 만들 뿐이었다. 한참만에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 지독히도 매캐한 연기를 흔적도 없이 흩어 냈을 때는 이미 괴한의 흔적 따위는 사라진 후였다. "……." 프란은 연기 자락을 따라 인상을 쓰며 몸을 들어올렸다. 시온 역시 온갖 인상을 다 쓰며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시온은 따가워진 눈을 부비며 한참 사방을 훑어보다가 문득 잔디 밭 위로 떨어진 검은 구체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시온은 화려한 궁궐 뒤에 어리는 검은 그림자를 뚫어지게 보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을 뱉었다. "……세…… 라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0: 청혼(2) 가네트(uznian) 03-11-24 :: :: 12247 화재의 진압 과정 내내, 반은 굳은 얼굴이었다. 황성의 기사들과 경비병들은 거의 아수라장이 된 파티장을 안정시켜 가까스로 분위기를 되돌린 후, 서둘러 밖으로 튀어나온 터였다. 다행히도 런스가 화약을 들고 나온 덕에, 불길은 그리 거세지지 않았고 다만 격납고만을 태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경비병들이 불길을 제압하는 동안 반은 한참동안 뚫어지게, 사그라드는 불꽃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감정이라곤 반사해내지 않는 그의 보랏빛 눈은 그저 불꽃과 그 앞의 인간들만을 향해 있다.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가 파티장의 분위기를 정돈하느라 현재 자리를 뜬 터라, 반의 옆에는 헤냔만이 서 있는 채였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프리나' 라는 이름을 외쳐대던 헤냔은 아까 와는 다르게 조금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서 있었다. 헤냔은 고개를 돌려 반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방금……. 프리나라고 했나?' 헤냔이 연신 '프리나'를 외칠 때, 눈앞의 소년은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움찔한 헤냔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않았다. 한참동안 뚫어지게 헤냔을 응시하던 반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또한 여태까지의 차가움과는 다르게 그 아름다운 두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어떤 묘한 것을 띄고 있는 듯도 했다. 그 눈빛에 압도당한 헤냔은 입술을 열어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반은 잠시 그런 헤냔을 보고 섰다가, 어느 순간 가차없이 몸을 돌려 서 버렸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저 가주는 그런 상태였다. 불꽃을 보고 서 있는 반의 머리카락을 타고 바람이 휘달린다. 불길과, 인간들과, 머리카락과, 바람과, 풀. 그 모든 것이 휘달리는 가운데, 반은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바람에게 유린당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굳건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듯한 느낌. 반의 몸만이 이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우뚝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 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헤냔의 자그마한 부름에, 반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돌아본 반을 향해 헤냔은 짧은 어투로 말했다. "언젠가, 제가 당신의 집을 찾아간다면 박대하실 겁니까." 낮은 그의 목소리에 반의 눈 꼬리가 살짝 올려졌다. 그는 몸을 틀며 차갑게 말했다. "나와 검을 섞기 위해 온다는 뜻인가?" 헤냔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때로 한마디의 말보다 더욱 직설적인 표현이 되는 법. 반은 헤냔의 침묵을 한참동안 감상하듯이 서 있다가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손목이 절단되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만 되어 있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말한 반은 다시 발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걸어나가는 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헤냔은 길고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냔의 입술에서 킥, 하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손목이 절단될 각오라……." 헤냔은 반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 "에엑? 형님한테 들켰다고?" 시온은 경악해서 소리쳤다. 프란에게 얻어터질 대로 터져 으깨진 두부가 되기 직전인 모습으로, 시온은 소리치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프란을 단장시켰던 세 명의 소녀들이 시퍼렇게 눈 두덩이가 멍든 시온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프란 역시 그를 향해 마주 고함을 쳤다. "그래, 이 자식아! 난 이제 죽었다, 이 말이다! 어서 내 옷 내놔!" 세 명의 소녀들은 프란의 그 엄청난 성량에 움찔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프란의 눈을 보고 잇던 그녀들은 한참만에 순순히 프란이 오늘 걸치고 왔던 옷을 슥하고 내밀었다. 주춤주춤 옷을 내미는 그들의 손을 바라보고 있던 프란은 인상을 긁으며 거의 낚아채듯이 옷을 받아들였다. 찢어진 드레스 위로 자신의 옷을 얹으면서, 프란은 머리를 휙휙 저었다. 세 명의 소녀들은 자신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단장시켰던 아름다움 레이디가 드레스는 찢어 먹고, 구두는 어디엔가 내던져 발바닥에 피를 매달고, 게다가 정성 들여 씌워 주었던 금색의 가발은 어딘가에 내팽겨치고 온 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후욱후욱……." 프란은 자신의 옷을 매만지며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그녀는 곤란한 얼굴을 한 채로 입술을 꾹 무는 시온을 빤히 보았다. 방금 전, 자신을 바라 보던 가주의 눈동자가 문득 떠올랐다. 몸서리가 쳐졌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어느 순간 흔들리는 것도, 프란은 놓치지 않고 보았었다. 그 표정은 정말이지 평생동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에……. 걱정하지마, 프란. 형님은 의외로 둔해서……." 시온은 프란을 달래보려는 듯 한마디 했다. 하지만 말을 하고 있는 시온의 마음도 지금 초조하기는 프란과 매한가지였다. 정말로 들켰으면? 그렇다면 프란이 어떻게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시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설사 들켰다해도 설마 죽이진 않을 거라고 시온은 자위했다. '설마, 여자라고해서 죽이진 않겠지……. 그 사실을 숨긴 이유 정도는 형님도 알고 있을 거고……. 그래, 죽이진 않을…….' 그러나 죽이지 않는 대신, 무지막지한 고문이나 고통이 올 수는 있지 않은가. 시온은 그런 생각이 들자 움찔했다. 아니면, 정말로 최악의 경우에 자신을 '기만' 했다는 이유로 예전 '그 때' 그랬던 것처럼 프란의 목을 덜컹 잘라버릴지도 모른다. 시온의 형인 그는 그런 사람이다. "젠장할……." 프란은 자신의 옷에 얼굴을 묻었다. 시온은 말없이 그런 프란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세 명의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뒤에서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얼굴을 옷 사이에 파묻은 프란을 선채로 한참동안 내려다 보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프란을 보다가 어느 순간 훅, 하고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프란에게 다가왔다. 그 둘을 보고 있는 마차 안 세 소녀의 눈동자가 더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시온님! 밀어 붙여요! 그 상태에서 확, 그냥, 안아버리는 거예요!" 소녀 중 하나가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녀의 옆에 있는 다른 소녀들 역시 동의의 뜻을 내비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소녀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온의 손은 프란의 어깨를 감싸거나 두드리지 않고 그녀의 어깨쯤에서 흠칫하고 멈추어 버렸다. 시온은 한참동안 프란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내가 재미있냐?' 막 춤을 추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손이 움직이지 못하고 멈칫해 버린 것이다. 시온은 그 때 결코 재미 따위가 아니다, 라고 크게 소리칠 뻔했었다. 갑자기 들려온 폭발음 때문에 그 말을 속으로 삼켜야 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프란의 마음이 가라앉고, 모든 것에 여유가 생긴 다면 천천히 자신의 감정에 대해 프란과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시온은 생각했다. "나가 있을 테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 프란의 앞에 가만히 서서 시온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말하는 시온의 눈에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하얗게 드러난 프란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심장이 가늘게 뛰다가 어느 순간 가라앉았다. 시온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마차 밖에 나왔다. 세 명의 소녀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마차밖에 기대어 섰다. 저 아름다운 여신의 유일한 보금자리, 유폐된 여신의 눈물이 녹아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비나룬을, 시온은 한참동안 씁쓸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럴 때 술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시온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둥근 감촉이 그의 손에 전해져오자, 시온의 입가가 어느 순간 부들거리며 낮게 들어올려졌다. 그는 입술을 앙 다물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세라딘……. 이 놈들은 대체 프란에게 무슨 볼 일 인 거지……?" ▷◀▷◀▷◀▷◀▷◀▷◀▷◀▷◀▷◀▷◀ 키네세스는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며 창가로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큰 폭발음이 들렸을 때, 키네세스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 전에 카르멘 가의 주인인 '그'가 밖으로 나갔던 터라, 키네세스의 걱정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만약 케이온 기사단장인 런스가 그녀를 향해 짧게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았더라면, 당장에 밖으로 뛰어 나갔을지도 모르는 그녀였다. "언제나 차가운 분……." 키네세스는 자리에 앉은 채로 낮게 중얼거렸다. 한 소년의 얼굴이 눈앞에 휙하니 왔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쯤이면 도로 파티장에 들어설 때가 됐는데, 그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파티장 따위는 지저분하다는 눈으로 훑어보던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오만해 보였다. 키네세스는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 위의 흰 잔에 손가락에 술잔을 걸었다. 찰랑거리는 푸른색의 술이 담겨 있는 흰 잔에 손을 가져간 그녀는 천천히 그것을 들어올렸다. 도수가 낮은 술로 입술만을 축이며, 키네세스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언젠가 당신은 내 것이 될 거예요." 훗, 하고 입술에 자그마한 미소를 걸면서 말한 키네세스의 손이 잔을 테이블로 내려놓은 것은 한 사람을 발견한 직후였다. 폭발음에 대한 공포로 침전되어 있다가 기사들의 노력으로 한참만에야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 파티장의 한 가운데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금빛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은 키네세스, 그녀도 기억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분의 시종이 아닌가." 키네세스는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반에게 춤을 신청하기 전부터 눈여겨 보고 있던터라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았다. 귀족들의 사이를 뚫고 서성서리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한 금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날리는 것이 보인다. 키네세스는 짧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 시종은 자신의 주인을 찾는 듯했다. "공주님, 어디 가시는……?" 키네세스가 갑자기 일어서자 깜짝 놀란 시종들이 돌아서며 물었다. 키네세스는 빙긋 웃으며 그런 그들의 물음에 답했다.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 프란은 파티장으로 들어온 후에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반을 찾고 있었다. 자신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간이니, 반 역시 파티장으로 돌아옴직한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다니며 찾고 있음에도 반은 보이지 않았다. 저 오만하고도 도도한 가주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훑으며 본다면 어디선가는 발견되야 마땅함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려한 보랏빛의 머리카락이나 희여멀건한 얼굴 때문에라도 확하고 눈에 띄어 마땅한 그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있다. 프란은 한참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거기…. 불이 났던 거기에 있는 건가?'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나 활기에 차서 움직이는 걸로 보면, 화재 따위는 이미 진압된 듯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이렇게나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말이다. "……어디에 간 거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프란은 다시 사람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뛴 탓에 벗겨진 발이 따끔따끔하게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프란은 아랑곳 않았다. 아니, 아랑곳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빨리 반을 만나 반의 반응을 확인하는 편이 마음 편할 성 싶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주위를 살폈다. "누구를 찾는 건가요?" 어느 순간 들려온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프란은 언제까지고 이 파티장 안을 돌아다녔을지 모르는 일이다. 프란은 자신의 앞에서 낭랑하게 번지듯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하고 발을 멈추었다. "아……!" 프란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올리자, 그녀의 앞에 선 한 소녀가 생긋 하고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대의 주인을 찾고 있는 건가요?" 생긋 웃어 보이는 그 소녀의 얼굴은 프란이 아는 얼굴이었다. 병적일 정도로 하얀 얼굴과, 그 얼굴을 훑으며 내려오는 굵은 웨이브의 푸른색 머리카락. 아름다운 물빛의 드레스가 눈앞에서 찰랑거리고 있다. 키네세스 L. K. 카세타. 프란은 눈앞에 선 여인의 정체를 간파함과 동시에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떠버렸다. '왜 이 사람이 내 앞을 막는 거지?' 프란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신분을 상기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키네세스는 프란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짧게 웃었다. 그녀는 프란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주인은 아마도 폐하께 가셨을 겁니다만. 지금 그 분은 국왕 폐하와의 면담 중이십니다……." "에?" 프란은 얼빠진 소리를 냈고, 키네세스는 부채를 꺼내 자신의 입을 가리며 후훗, 하고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시종 중 하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시종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옆에 서자, 키네세스는 손을 뻗어 프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제 1궁의 앞에 이분을 안내해줘." "예." 공주의 명령을 받은 시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프란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키네세스를 보았다. 키네세스는 그런 프란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가버렸다. 프란이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빤히 바라보자, 시녀가 프란의 옷깃을 끌었다. "안 가는가?" "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시녀의 반말에 프란이 얼빠진 소리를 내자, 시녀가 뭐냐는 눈빛으로 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 아무것도." 시녀가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에 일순 움찔했던 프란은 표정을 풀며 씨익하고 웃어버렸다. 아마도 이 시녀는 프란을 자신과 같은 시종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반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럼 가지." 시녀가 앞장서서 파티장을 나가는 가운데, 프란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카세타의 국왕과의 면담……? 갑작스럽게 왜……?" 프란은 낮게 중얼거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0: 청혼(3) 가네트(uznian) 03-11-24 :: :: 5938 고풍스러운 갈색의 카펫이 바닥을 모두 덮고 있는 그 방의 규모는 매우 컸다. 몇 백명의 사람들이 몰려와도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규모의 그 방은, 전체적으로 밝은톤의 벽지가 발라져 있어 꽤나 화사한 느낌을 풍겼다. 엷은 크림색으로 채색된 방의 벽지는 특히나 방 구석구석에 매달려 있는 관엽 식물들과 묘하게 어울려 푸르고 싱싱한 느낌을 주었다. 옅은 흰빛의 창문 열 네 개가 뚫린 한 쪽 벽면의 창문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달이 있기에 아직은 환한 밤 하늘이 비춰내는 이 방은 얼핏 보기에도 화려해 보인다. 탁자에 놓여 있는 금빛의 작은 장신구도, 저 너머에 있는 커다란 책상도. "저스티스 경." 그리고, 이 방 한 가운데에서 말하고 있는 두 남자의 옷차림 역시 화려하다. "생각을 해주게." 고고한 여신이 갖힌 저 달의 축복을 온 몸에 받으며, 반은 그렇게 말하는 눈 앞의 남자, 이 카세타 왕국의 주인인 그을 보았다. 국왕의 면전에서 고개를 들고, 그것도 국왕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무례 중에 무례. 국왕의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보았다면 당장에 반의 목을 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반은 자신의 행동에 조금의 껄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국왕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훗, 하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약간의 비웃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 행위 역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무례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지 못하고 있는지 반은 그저 차갑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제가 거절한다면?" 반이 말을 끊으며 카세타의 국왕을 보았다. 이미 노쇠한 국왕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전성기 때의 모습을 잃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카세타의 뒤에 버티고 있을 뿐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이 나라의 주인인 남자다. 이 나라를 한 손에 움켜 쥐고 있는 남자다. 그러나 이 남자의 신분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의 태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있지 않았다. 반은 국왕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대가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건 어명임에도." 국왕이 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말에, 반은 일말의 망서임도 없이 차갑게 대꾸했다. "실례되는 말씀인 줄은 아오나, 이 카세타에서 제가 만일 반역이라도 일으킨다면 카세타의 이름은 내일이라도 카르멘으로 바뀔 것이라는 걸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역적으로 사형될 수 있는 말을, 반은 태연스럽게 내뱉었다. 그러나 국왕은 그런 반의 말에 당장 노여움을 뿜어내지 않았다. 국왕은 한참동안 반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국왕의 눈빛을 반은 덤덤하게 마주보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반이 반역을 일으키고자 작정한다면 카세타의 왕인 그에게는 승률이 거의 없었다. 단기전으로 보아도, 반과 국왕 사이의 반목이 일어나, 카르멘 가의 가주인 반이 역적 모의를 일으켰다…… 라는 말만 떨어져도, 당장에 이 카세타를 버리고 반 쪽으로 달려갈 기사들이 태반이다. 이 기사들의 대부분이 카르멘 가의 검술을 이어 받고 자라온, 일명 '카르멘 가의 사람들' 이니 만치. 그리고, 장기전으로 본다고 쳐도 결과는 마찬가지. 한 나라와 한 가문의 싸움이라곤 해도 가문의 수장인 반은 카르멘 가라는 절대적인 검(劍)과 아일린 가라는 막대한 뒷 배경을 손에 넣고 있지 않은가. 장기전으로 나갈 경우, 만일 아일린 가문이 카세타 쪽으로 향하는 모든 무역을 끊는 손치면, 조금의 무력만으로도 이 카세타를 함락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역대 카르멘 가나 아일린 가도 능히 한 나라 쯤은 말아먹을 수 있는, 한 국가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대단한 가문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그 대단한 두 나라의 수장으로 앉아 있는 반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반의 앞에 선 남자는 한 나라의 국왕이고, 반은 카세타의 가신 중 하나였다. "저스티스경, 그대는 자신이 너무도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국왕이 뱉어낸 말에, 반의 입술이 차갑게 들어올려졌다. "전대 가주였던 루이사 카르멘처럼, 제가 당신을 받드리라고 생각했습니까." 반의 말에 카세타의 국왕의 눈이 전체적으로 크게 떨렸다. 국왕이 반의 눈을 차갑게 주시했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광기를 머금은 채로 반을 본다. 그러나 반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처음, 반은 화재가 거의 진압된 격납고에서 몸을 틀어 파티장으로 도로 돌아오려고 했었다. 거의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옆을 비웠던 그 괘씸한 시종이 지금쯤은 파티장으로 돌아와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는 최초의 의도대로 파티장 안으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가 황금빛의 휘창을 거쳐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한 사내가 그의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반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아 무례하게도 자신의 팔을 부여잡은 그 자의 목에 차갑게 들이대었을 때의 일이었다. 반의 팔을 부여잡고 그의 파티장 출입을 막아섰던 남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카, 카르멘 경. 저, 저는 국왕 폐하의 엄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거, 검을 치워주십시오." 반은 남자의 말에 잠시 인상을 굳힌 후에 검을 거두어 들였다. 남자는 정중하게 그런 반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지금 카세트의 국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고. 반은 남자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그의 뒤를 따랐고, 제 1궁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저스티스경." 반을 불러들인 노인, 아니, 카세타의 국왕이 지그시 반을 불렀다. 반은 대답 없이 그런 국왕을 보았다. 국왕은 반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대가 가주 자리에 앉기 전, 나도 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소. 그건 잊지 않았겠지?" 국왕의 말에 이번에는 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국왕을 보았다. 그의 눈언저리가 파르스름하게 떨리고 있었다. 반이 손을 꾹 쥐는 모습을 보고 있는 국왕의 입가에 처음으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일주일의 말미를 주겠소." "……." 반의 눈매가 매섭게 위로 들어올려졌다. 국왕은 자신을 보는 그 소년의 얼굴을 향해 미소 띈 얼굴로 끊어지듯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제안한 것은 두 가지요. 첫째, 현재 루니아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괘씸한 반역자의 무리를 처단하는데 그대가 앞장서줬으면 하는 것." 반의 무덤한 표정에, 국왕은 짧게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비나룬의 초록빛이 반의 얼굴 위로 여린 숨소리를 드리우는 가운데, 국왕의 메마른 입술이 움직인다. "나는, 그대를 내 사위로 맞고 싶소." 반의 눈이 전체적으로 크게 한 번 흔들렸다. 국왕은 반의 그런 표정을 즐기듯이 보며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 이건 내가 내 딸을 대신해서 하는 '청혼' 이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1) 가네트(uznian) 03-11-24 :: :: 14427 "그나저나, 카르멘 가주는 어떤 사람인가?" 프란을 안내하던 시녀가 은근히 기대가 어린 어조로 프란에게 말을 건 것은 그들의 발이 제 1궁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을 때의 일이었다. 사박사박, 발 밑에 깔리는 풀소리가 스산하게 귀 언저리에서 맴도는 가운데에 들려온 시녀의 말에, 프란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언뜻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시녀의 얼굴이 보였다. 부드럽게 위로 틀어 올린 청빛 머리칼의 소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띈 채로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글세?"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곤란한 사람. 가주에 대해 설명해 볼 것을 요청하는 시녀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내린 땀을 느끼며 움찔거렸다. 소녀는 양 손을 잡고 프란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내가 듣기로, 키네세스 공주님이 사모해 마지않는 카르멘 가의 가주님은 굉장히 이지적인 분이고, 학식도 넓으시고, 검술은 누구와 비견한다는 것조차 어리석을 만큼 뛰어나며 동시에 차가워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 "……그만." 프란은 말을 이어나가는 시녀의 말을 턱, 하고 잘라버렸다. 시녀는 의아한 눈으로 프란을 보았고, 그 눈을 보는 순간 프란은 뭐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라고?' 물론 시녀가 설명하는 저 내용은, 반을 연모한다는 키네세스 공주나 혹은 반을 최대한 '고귀한 남성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카르멘 가에서 퍼뜨린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미화 100%로의 이야기. "왜? 이야기와는 다른가?" 시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프란에게 물었고, 프란은 움찔했다. '피도 눈물도 없고 사람 베는 걸 예사로 여기는 데다가 눈은 독사지!' 라고 크게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른다. 그녀는 시녀의 눈을 억지로 억지로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난 카르멘 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몰라." '그 인간 성격 하루만 겪어보면 파악이 되는데 모르긴 뭘 몰라!! 크아아악!! 그 놈은 악마야, 악마! 아니, 대마왕!!!'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 프란은 중얼거렸다. 시녀는 아쉬운 듯 고개를 휘젓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그런 시녀를 향해 어느 순간 입술을 열었다. "……키네세스 공주님은……." "음?" "키네세스 공주님은 어때?"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질문을 하면서 시녀를 보았다. 시녀는 조금 당황한 듯, 한참동안 눈을 깜빡이다가 어느 순간 핫, 하고 웃었다. "공주님? 두 말 해서 뭣하겠어. 세간에 떠도는 그대로야. 조금 약한 몸에, 심장도 조금 안 좋으신 분. 그야말로 병약 미소녀지. 하녀들에게도 잘 대해주시는 분이고……. 하지만, 일단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 앞에 서면 태도가 확 바뀌는 것도 키네세스 공주님이야." 시녀는 자랑스러운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눈빛부터 확 바뀐다고 해야하나……. 그 병약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갑자기 단단한 여전사를 뵙는 기분이라고도 할 수 있지. 국왕 폐하 앞에서 자신의 소견을 말씀하실 때를 보면……. 이 분이 내가 아는 그 분인가, 싶기도 해." 시녀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프란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생긋 하고 웃었다. "아름답고, 총명하고……. 좋으신 분이야." 프란은 음, 하고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의 병약 미소녀. 하지만, 자신의 주어진 자신의 역할 앞에서는 태도가 휙 하고 바뀌는 여인. 아름답지만, 강하기도 한 소녀라. "뭐, 완벽한 여성상이라…… 이건가." ▷◀▷◀▷◀▷◀▷◀▷◀▷◀▷◀▷◀▷◀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 마저 가버리고, 이제 프란 혼자 남았다. 그녀는 1궁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언제까지고 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초, 몇 분이 흘러가는 동안 점점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낮아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도 조금씩 얼어붙는 것 같다. 바짝 긴장했던 신경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으면서 프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기울어진 모양을 보아하니, 자신이 이 곳에 와서 반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프란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뒤에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그 무서운 가주가 뒤에 선 것 같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 확인을 해야 했다. 한참동안 이렇게 홀로 앉은 채 차가운 밤바람을 쐬고 있노라니 처음에 가슴속에서 들끓어 오르던 온갖 감정이 조금은 삭혀져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꼭 쥔 두 주먹 사이로 땀이 흐른다. 프란은 애꿎은 정원의 잔디만을 뜯으며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볼 끝을 엔다. 순간이었다. 자박,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기척을 숨기지 않는 거친 발걸음 소리. 의도적으로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는 컸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프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속으로 셋을 센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리고, 뒤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녀의 목에선 굵은 침이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뒤로 넘겨졌다. "……가주님." 잡아뜯고 있던 풀이 우수수,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바람을 따라 한참동안 허망한 춤을 추던 잔디가 가라앉는다. 차가운 밤 바람 속에 선 프란은 멍한 얼굴로 궁성 밖으로 나온 남자를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그의 얼굴은 무서우리 만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느다란 바람을 맞아 나부끼는 은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는 다가오고 있다. 입술 끝에 매달린 가느다란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것은 냉소인가, 아니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함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분노인가. 가느다랗게 들어올려진 입술선만으로는 그의 감정을 파악할 수가 없다. 프란의 눈은 반의 보랏빛 눈동자에 가서 멎었다. 무엇인가에 잔뜩 화가 났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도 남는 그 눈동자에서 프란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보랏빛의 눈동자는 굳어 있는 그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시야를 방해해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그대로 굳어버린 눈동자를 하고, 반은 서 있었다. '나 때문인가? 아니면……?' 프란은 거세게 뛰는 심장으로 한 발자국을 다가섰다. 궁성 밖으로 나왔던 반의 발걸음은 무겁게 움직이다 다가오는 프란을 발견하자마자 급격하게 멈추었다. 아직 정원에는 아무도 없어, 날카롭게 그 잔광을 반사하는 달만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고고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대로 애잔하게 피리 소리라도 번진다면, 그리고 만약 프란과 반이 다정한 연인이었더라면 이런 배경에서는 키스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 받았을런지도 모른다. 모든 연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밤의 분위기. 어둠 속에 녹아든 제 1궁의 아름다운 흰빛을 배경으로, 초록이 부숴지고, 잔디가 휘날리고, 차가운 바람은 연인의 따뜻한 품을 찾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 이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 서 있는 것은 다정한 연인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주인,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종속자. 일단 인연의 실로 묶여 있지만, 한 쪽이 놓는다면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그런 관계. 두 사람은 아름다운 이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한참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반은 뚫어져라 프란을 보고 있다. 차가운 그 눈빛은 그의 허리춤에 언제나 들려 있는 그 푸른 검보다도 더 날카로운 것 같다. 온 몸 구석구석을 탐색하듯 바라보는 반의 시선에 잠시 프란은 몸을 떨었다. '역시…… 눈치…… 챈 걸까?' 아마도 그렇다면 죽을 것이라고 프란은 생각했다. 그러나, 최후까지 매달릴 수 있는 데까지 매달려보리라. 저 싸늘한 인간에게, 최후까지 매달리고 또 매달려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프란은 생각했다. 흔들리는 바람 속에 흔들리는 마음. 흔들리는 반의 머리카락. 흔들리는 프란의 머리카락. 흔들리는 반의 옷자락, 흔들리는 프란의 옷자락. 흔들리는 반의 눈동자. 흔들리는 프란의 눈동자. 반은 몇 분 동안 그 자리에 완전히 굳어버린 듯한 태도로 있었다. 프란의 금색 머리카락, 오렌지색 눈동자, 하얀 피부, 단정한 귓불, 오똑한 콧날, 반듯한 입술선, 섬세한 턱선, 좁은 어깨, 가녀린 실루엣을 반은 한참동안 보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 한 가득 차 오르는 것은 오로지 프란, 그녀 밖에는 없다. 그것을 제외하곤 숨이 막힐 듯이 오로지 정적, 정적, 정적, 정적. 둘 사이로 정적만이 떠도는 가운데에, 한참만에 반의 입이 열렸다. "어딜 갔었나." "……에?" 프란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반이 태연스럽게 한 발자국을 정원으로 내딛으며 말했다. "어딜 갔었나." 다시 한 번 되풀이되는 질문에, 프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한참동안 입을 뻐끔거리며 반의 얼굴을 보았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프란은 입을 벌린 채로 한참동안 반을 바라보았다. 반은 프란을 힐끗 보다가 옷자락을 휙 날리며 돌아섰다. "……가자." ▷◀▷◀▷◀▷◀▷◀▷◀▷◀▷◀▷◀▷◀ 바람조차 머금지 않는 저 푸른빛의 눈동자는 언제나 고고하고, 언제나 고귀한 여인의 상징.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궁중의 복도를 걷고 있는 여인의 귓등으로 찰랑거리는 귀걸이는 짜랑, 하는 소리마저 내지 않는다.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악세서리가 흔들리는 소리마저 나지 않도록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움직이는 푸른빛의 여인. 그녀의 뒤로는 수많은 시종들이 시립한 채로 따르고 있었다. 별빛조차 달빛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 밤, 복도의 창 사이로 들어오는 기묘한 빛을 받으며 그녀의 하얀 얼굴은 반짝이고 있었다. 복도를 가볍게 가로지른 한무리의 사람들은 이윽고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섰다. 여인은 문 앞에 있던 남자에게 가볍게 턱짓을 해보였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여인의 얼굴을 발견한 직후 무겁게 한 번 고개를 숙이더니 얼굴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가볍게 험험, 하는 소리로 목소리를 다듬은 후 외쳤다. "국왕폐하, 따님이신 키네세스님 이십니다." "들라하라." 문 안에서 낮은 기침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푸른 여인, 키네세스에게 방으로 들어설 것을 허락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한발자국 뒤로 가볍게 물러서며 방문 가에 서 있던 두 명의 여인에게 문을 열 것을 지시했다. 키네세스는 문을 여는 시종장을 잠시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낮게 물었다. "카르멘 경은 언제쯤 나가셨는가?" 시종장은 키네세스의 물음에 황공하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아름다운 카세타의 물빛 공주, 고귀하고 고귀하며 아름다움으로는 이 카세타 내 귀부인들 사이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라는 아가씨. 그러나, 가끔은 무서운 집착성향도 보이는 여인을 보며 시종장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키네세스는 정말로 한 분야에 빠지면 그것에 몰입하는 성격의 아가씨. 과히 편집증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집착성향을 갖고 있는 여인이었다. 시종장은 그런 집착성을 가진 이 소녀가 유독 집착하는 그 사내를 떠올리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수 년 전부터 이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집착해왔던 사내. "30분 전 쯤에 나가셨습니다." "그래……." 키네세스는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치마 자락을 사뿐히 움켜쥐었다. 아직도 흥청망청 떠들어대고 있는 바보 같은 이들의 파티장을 뒤로 한 채로 왔던 키네세스는 훅, 하는 숨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 문이 활짝 열려진 국왕의 방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였는가, 저 공주가 그 차가운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다, 라고 꼬집어서 말할 만한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 공주의 애정사에 나름대로 관심을 가져왔던 시종장은 저 공주의 사랑이 그리 만만한 세월을 견뎌온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운 남자가 뭐가 좋다고." 시종장은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뚫어져라 문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낮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긴……. 공주님이 그에게 반한 것이 '그 사건' 때문이었으니.……취향 운운할 필요는 없겠지." ▷◀▷◀▷◀▷◀▷◀▷◀▷◀▷◀▷◀▷◀ "어서 오너라, 나의 아름다운 딸. 카세타의 축복이요, 카세타를 빛내는 최고의 사파이어." 국왕은 그 발걸음도 가벼웁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키네세스를 향해 말했다. 키네세스는 발을 뒤로 길게 빼며 사뿐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푸른 드레스자락이 카펫 위로 찬찬히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국왕은 자리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차분하게 드리워진 딸의 푸른색 머리카락은 이 달밤에 보면 더더욱 눈에 띄어 보여서, 자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국왕에게는 전처였던 크레시아 황비로부터 얻었던 제 1왕자 키네온과 제 1공주 키네리아, 제 2공주 키네세아를 비롯, 현처인 피리나 황비로부터 얻은 제 2 왕자 키네슨과 제 3왕자 키네븐등도 있었고, 수많은 첩실로부터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은 소생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 많은 소생들 중에서도 왕이 특별히 생각하는 이가 바로 키네세스였다. 쭈글쭈글하게 망가진 모습의 자신. 결코 잘생겼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씨를 물려 받았다기엔 너무나도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소녀. 언제나 똑바른 눈으로 정사를 보는 아이. 사람을 보는 눈 또한 탁월한 것이 바로 자신의 딸, 제 3공주 키네세스다. "그 분에게…… 말씀을 하셨나요?" 키네세스는 고개를 가볍게 들며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국왕이 싱긋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키네세스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 곳으로 다가가 앉았다.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피어나는 가운데서 국왕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네가 당부했던 것 말이냐?" "예." 키네세느는 조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올해로 17살 생일을 맞이한 키네세스가 부친에게 부탁한 선물은 하나였다. 「……저스티스 경을 갖고 싶어요.」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으냐, 라고 물어본 아버지에게 키네세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던 그 대답에 놀란 국왕이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키네세스는 말했다. 「제 생일 날, 혼인 얘기를 꺼내 주셨으면 해요. 그 것 말고는 다른 선물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말하는 키네세스의 눈동자는 푸른 물을 담은 듯이 출렁거리고 있어, 차마 거절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일단 네 말대로 해놓았다. 두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너와의 결혼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구나. 그는 이상하리만치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남자가 아니던가." 국왕의 말에 키네세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미칠 듯이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며 훗, 하고 웃었다. "달이 아름답군요." "네가 더 아름답단다, 내 딸아." 국왕의 말에 키네세스는 쑥스러운 듯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검지 손가락의 손톱으로 탁자를 몇 번 가볍게 두드린 후에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하지만 아바마마, 제 결혼은 성사되지 않더라도 일단 아버님이 원하시는 건 얻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 제 감정을 이렇게나마 피력했다는 데에서 만족하고 있어요." 키네세스는 달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채 말하지 못한 말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번지고 있다. '언젠가는 내 것이 될 남자니까.' 몇 년간을 고이 품어온 한 소녀의 사랑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다. ▷◀▷◀▷◀▷◀▷◀▷◀▷◀▷◀▷◀▷◀ 달리는 마차 안에서 그저 침묵하고 있는 반과, 어딘지 모르게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는 프란을 보는 마린이 두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라고 프란을 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마린은 뒤편에 지그시 몸을 기댔다. 오늘은 이상한 사건이 많은 하루였다.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재가 발생하지를 않나, 저 도도한 공주 키네세스가 반에게 춤을 신청하지를 않나.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이상한 건…….' 마린은 힐끔 프란의 얼굴을 보았다. '프란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얀 거야? 뭘 잘못 먹었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8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2) 가네트(uznian) 03-11-24 :: :: 13664 "달의 광기를 느낀 적이 있어?" 간드러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여인을 향해 말하는 그의 눈빛은 잔잔한 파도를 연상시키리 만치 안정되어 보인다. 따사로워 보이는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은 그의 앞에 있는 여인을 향해서다. "달의 광기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가주 광기 느끼는 것만으로도 살 떨려 죽겠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자의 부드럽다 못해 느끼한 발언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이 내지른 고함소리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여인, 프란의 고함 소리에 시온은 그만 움찔하며 몸을 사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저 멀리 있는 꽃병을 집어 던질 기세마저 보이는 프란의 눈치를 한참동안 살폈다. "그리고 너, 느끼한 목소리로 내 앞에서 지껄이지 말랬지이!" 시온의 눈길이 자신에게 와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프란은 다시 한 차례 고함을 질렀다. 시온은 귀를 틀어 막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지만, 그랬다간 무사히 이 방을 걸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어설픈 웃음과 함께 충동을 상쇄시켜 버렸다. 그는 허허, 하는 어설픈 웃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험험, 프란. 진정하고 들어봐. 이건 꽤나 낭만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라구. 내가 왜 달의 광기를 운운하냐 하면……" "달의 광기고 뭐고 집어 치워!!!" 프란이 다시 한 번 지른 고함소리에 시온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처음엔 자신의 큰 소리에 놀라서 말문을 닫은 거라고 지례짐작했던 프란은 그러나 잠시 후 움찔하고 말았다. 시온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앉은 시온의 눈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의 입술은 꾹 잠긴 채로 한 단어도 뱉어내지 않고 있었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시온의 폼은 전형적인 '울기를 준비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마. 설마하니, 대 아일린 가문의 후예가 이딴 일로…….'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며 그 얼굴을 막 외면하려 한 순간, 시온이 욱, 하고 소리를 쳤다. "우아!! 프란이 너무 차가워어어어∼ 나 슬퍼서 눈물이 나려고 해……. 흑!!" 말뿐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눈물을 매달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은색 눈동자는 출렁이고 있었다. 프란은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의 눈을 하고, 두 손은 가슴 팍에 꼬옥 모은 채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온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저만치, 아주 깊게 밀어내며 조용하게 뱉어냈다. "……나가죽어." "쳇, 너무 하는군." 자신의 애교작전도, 눈물작전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시온은 투덜거리듯 말한 후 갑자기 몸을 뒤로 던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침대 위에 대 자로 눕자, 프란이 다시 한 번 고함을 버럭 쳤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침대에서 버럭버럭 드러 눕는 거냐!!" "음? 에잉, 프란 침대. 호오, 폭신폭신한걸∼." 프란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싱글벙글 웃어댔던 시온은 스르릉, 하는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거의 조건반사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시온은 하핫, 하는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한 번 멋쩍게 뒷통수를 슬슬 긁었다. 그런 시온을 바라보는 프란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자.' 라고 한마디했던 반은 정말이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카르멘 가의 마차가 세워졌던 왕성 출입구로 걷기 시작했었고, 프란은 긴장으로 입술을 깨물며 그런 반을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말없이 그들은 마차에 올랐고, 모두를 탑승시킨 대 카르멘 가의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로 돌아가는 내도록, 반은 살짝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한 번쯤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는데, 입술이 꾹 다물려지고 눈의 초점이 한번씩 흔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가 너무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프란은 옴쌀달싹도 못하고 그의 옆에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이 대마왕아!!!' 수백번은 저 목덜미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프란은 그러지를 못했다. 목을 죄어오는 갑갑한 침묵이 미친듯한 맹수처럼 그목 언저리를 콱하고 내리누르는, 그런 느낌.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프란은, 주먹만 꾹 쥐었다. 정말 이 가주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엔 뭔가 찜찜한 기분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어, 프란은 한참동안 손톱을 물어뜯으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가 몇 시간을 달려 카르멘 가,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에 도착했을 때…… 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직행해 버렸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란은,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버렸다. "가주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불렀는지는 모른다. 프란은 크게 가주를 불렀다. 부른 순간 아차 싶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주는 그러나,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입술을 열 뿐이었다. 그가 뱉은 내용은, 아주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일 아침, 늦으면 죽여 버릴 테다." "……." 프란이 기억하는 한, 그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가주였다. ▷◀▷◀▷◀▷◀▷◀▷◀▷◀▷◀▷◀▷◀ "결국, 모른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반과 헤어져 힘없이 방으로 들어온 프란은 경악했다. 허락도 없이 어떤 남정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의 방에 무단으로 쳐들어온 주제에, 시온은 꽤나 편안한 자세로 프란의 방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프란이 들어오자마자 싱글 웃으며 "여어∼." 라는 말과 함께 손도 흔들었다. 물론, 프란은 그런 시온을 몇 번이고 꾹꾹거리며 밟아 주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일단 네 놈은 나가!" 프란은 시온을 매섭게 돌아보며 차게 외쳤다. "쳇, 정말 너무 하는군." 투덜 투덜거리면서도 시온은 결국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참동안 프란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잘 자라구, 레이디." "……꺼져." "쿡쿡." 낮게 웃음을 짓고, 시온은 문을 나섰다. 하지만 웃던 모습과는 달리, 프란의 방문을 닫자마자 시온의 얼굴은 어둡게 변했다. 그의 얼굴 위로 깊은 낭패감이 서린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오른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시온의 왼손은 하의의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검은 원형이 까끌하게 만져진다. 시온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후우. 정말이지 프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다는 건가……'세라딘'이라니……." 시온은 머리를 크게 한 번 휘저었다. "젠장!! 그 놈을 만나서 따지든지 해야겠군." ▷◀▷◀▷◀▷◀▷◀▷◀▷◀▷◀▷◀▷◀ "결혼…… 이라." 오늘 같은 날은, 그 자체가 달의 광기에 취해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광기를 띄는 듯하다. 환한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달빛을 받고 서 있노라면, 그 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다. 달의 매력, 달빛. 아아, 아름다운 그 빛의 앞에 선 인간이 그 것을 찬양하는 것 이상 으로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반은 한참동안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폈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들었다 놓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 이것은 아무 뜻 없는 행동이다. "결혼……." 반은 쇼파에 깊게 기대었다. 이제 그만 잘 시간이 되었건만,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피로의 기척도 나타나지 않았다. "……." 반은 잠시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는 창문가에 나서 커튼을 걷었다. 저 달빛은 언제 어느 때봐도 매혹적이나, 동시에 너무나 깊은 광기를 머금고 있다. 그는 훗, 하고 낮게 웃어 버렸다. "키네세스…… 그녀와 결혼한다면……. 편하겠지." 그래, 확실히 편할 것이다. 아일린 가문도 비울 수가 없어, 앞으로 몇 주 후에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의 처지. 자신이 없는 틈을 타서 언제 어떤 식으로 이상이 발생할지 모르는 카르멘 가가 아니던가. 카르멘 가를 통제하고, 자신에 반하는 세력을 처단하는 데에 앞장서 줄 세력. 황실 만한 데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만약 카세타 왕국의 왕, 그의 사위가 된다면…….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질 않은가. 키네세스 L. K. 카세타. 그녀는 부족함이 없는 신부다. 반과 처음 만나던 날 있었던 그 엄청난 일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였던 그녀였지 않은가. 게다가 그 자색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고, 정치를 논할 때면 사람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지성도 겸비한 아가씨다. 물론, 반으로서는 키네세스를 단 한 번도 '여인' 이로 본 적은 없었다. 결혼 상대라면 괜찮다, 라고 생각해 본적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한 여인을 맞는 남자' 이기 이전에 '카르멘의 가주'이며 동시에 '아일린의 주인'이기에. 자신의 반려를 자신의 손으로 맡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지독한 패러독스인 양 '자로 잰 듯 완벽한 여자'를 찾는 것도 그 자신이다. 키네세스는 '조건' 면에 있어선 완벽한 여자다. 게다가, 국왕이 반에게 키네세스를 보내준다는 이야기는 여러 방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현재, 키네세스는 그 어떤 이보다 왕에게 총애 받는 여식이다. 바로 그 여식을 대 카르멘 가의 가주에게 넘긴다! 대 카르멘 가는 그 어떤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한 국가와 일전을 치를 만한 곳이다. 그런 곳에, 공주마저 넘겨준다면……. '보위'를 넘긴다는 무언의 뜻일 지도 모르지 않는가. 결코 앞서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키네세스에게 힘이 되어 주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카세타 최초 여왕의 탄생이라는 이름에 날개를 달아주라는. 게다가…… 키네세스가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로, 그녀는 반,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록색의 달빛이 어느 순간, 한 얼굴을 그려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키네세스의 얼굴이 아니었다. "……." 아름다운 달이여! 빛나는 그대의 이름의 위해 건배! 유폐의 여신이여! 그대가 깨어나는 그 날을 위해 또 한 번 건배! "…… 결혼은……." 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훅, 하고 낮게 숨을 뱉었다. 이윽고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달빛에 취한 밤이 물어 놓고 뱉어 주질 않았다. ▷◀▷◀▷◀▷◀▷◀▷◀▷◀▷◀▷◀▷◀ 프란은 멍하니 눈을 떠 아침의 햇살을 맞이했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수스 떨어져 내리는 눈곱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비비며 프란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도대체가 여자다운 면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인다. 사락, 하고 몸 위로 미끌어져 내리는 이불을 휙하고 걷으며 프란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우아아아아아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이상한 하품 소리를 내는 프란의 몸에서는 뿌득 뿌득, 하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온갖 걱정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해 온 몸이 다 삐그덕 대는 것 같다. 프란은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눈을 대충 비볐다. 세수 할 힘도 없어, 라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원래 그녀는 청결함이나 고상함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던가. 하루 정도 머리 못 감고, 세수 못 하면 불결하다며 길길이 날뛰는 귀족 영애들과는 전혀 그 뿌리부터가 틀린 녀석이 프란이다. 씻는 것 일주일 안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가. 프란은 방문 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열리자 드러난 깨끗한 복도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프란은 다시 한 번 눈을 부비고 주방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의 아침은 어쩌면 이렇게나 조용한 건지. 파리라도 앉으면 주욱 미끄러져 버릴 것 같이 잘 닦인 복도를 걸으면서 프란은 중얼거렸다. "젠장. 오늘은 하루 종일 감자만 깎아도 좋으니까, 가주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되도록이면 그 놈 얼굴도 안 보면 좋겠고." 그러나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대로 진행될 리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프란의 품으로 달려 들어온 사랑스러운 연인. 프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감자 포대를 받았다. 주방장은 프란에게 감자 포대를 내밀면서 씨익, 하고 웃어 보여 주방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천천히 깎아야 돼, 되도록이면 천천히."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늑장을 부려 가주의 방으로 천천히 들어가리라 결심한 프란의 의지와는 달리 감자들은 프란에게 너무나 쉽게 속살을 내보였다. 이미 감자깎기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손이 닿자마자, 감자들은 쓱싹쓱싹 너무나 가볍게 옷을 벗어주었다. 아무리 천천히 깎으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곧, 프란의 손에는 잘 깎여진 감자만이 수북히 남았다. 프란은 너무나 빠르게 깎여버린 감자의 껍질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프란의 어깨를 누군가가 가만히 두드렸다. "프란, 어째 오늘은 피곤해 보인다?" 옆에서 당근을 깎던 뮤였다. 뮤는 프란의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프란은 허허, 하고 뮤를 향해 크게 웃어보였다. 나름대로는 괜찮다는 뜻에서 지어 보인 웃음이었지만 뮤의 눈에는 그 웃음이 괴기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안색은 푸석하기 그지 없었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 있는 사람이 푸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데 그것이 아름다워 보일 리가 절대로 없다. "아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대두!!" "……눈 밑에 기미. 눈곱이 낀 충혈된 눈, 푸석푸석한 얼굴, 기름끼 낀 머리카락!!! 전형적인 페인의 모습이잖아!!" 뮤는 프란을 조목조목 훑어보며 말했다. 프란은 뮤의 말을 부정하려는 듯 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어보는 뮤의 끈적끈적한 시선보다는 차라리 가주의 얼굴이 낫겠다는 생각에 얼른 크레인을 잡았다. 프란은 재빨리 크레인을 밀기 시작했다. 힐끗 돌아보니, 뮤는 정말로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프란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진심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그 순간, 이 순진스러운 핑크빛 머리칼의 소녀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앞치마에 손가락을 비벼댔다는 것을 나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그것도 모자라 찡긋하고 윙크까지 해보였다. "괜찮아, 뮤. 난 까딱 없다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뮤는 그렇게 말하는 프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달아오른 뺨을 양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토끼 눈을 해가지고선 큰 소리는. 프란, 몸이 최고라구! 조심해, 응?" '사랑스러운 낭군의 수척한 얼굴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줄 알아?' 뮤는 프란이 들었으면 당장에 게거품 물고 쓰러졌음이 분명한 말을 입안으로 삼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분하게 웃어 보였다. 프란은 그런 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아, 역시! 난 프란이 너무 좋아. 혹시 프란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닐까? 아아! 분명해! 안 그러면 나한테 윙크를 했을리가 없지! 암!!" 핑크빛 머리칼의 소녀에게 어떤 망상을 품게 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로, 프란은 크레인을 끌고 있었다. 프란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 이 챕터 말입니다, 월광. 월광(月光)이 아니라 월광(月狂)입니다. 달의 광기;=+=+=+=+=+=+=+=+=+=+=+=+=+=+=+=+=+=+=+=+=+=+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9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3) 가네트(uznian) 03-11-24 :: :: 10288 오늘도 변함없이 가주의 방 문 앞에는 두 명의 호위 무사가 서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조금 달라진 것이 눈에 띈다.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긴 하지만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두 무사의 표정이 오늘 아침에는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얼굴에 약간 파르스름한 기가 돌기도 하고, 조금은 핼쑥하기도 하고, 짙은 피로도 낀 듯 하고. 뭔가 잔뜩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프란은 방에 노크를 하려다 말고 그런 그들을 보며 보며 애써 웃었다. "오늘은 어째 안 좋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라도?" 그들은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금색 머리칼의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프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둘 중 하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 거……아니다." 말은 별 거 아니다, 였지만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길게 늘어지는 한숨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별 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표정을 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것 같았다. 프란은 추궁하는 듯한 눈으로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위무사 둘은 더더욱 곤란한 얼굴로 팔을 휙휙 저었다. "별 거 아니라니까!" "……왜 신경질을 내고 난리야?" 프란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크레인을 밀며 그들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들은 프란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응? 무슨 일일까? 에? 무슨 일일 까나? 설마 어제 파티의 여독이 다 풀리지 않은 건가?" 조금 있으면 가주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덕택에 잔뜩 긴장해 있던 프란은 웃자는 마음에 농담조로 물었다. 긴장에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 번 크게 웃고 싶은 심정이라 더더욱 그들에게 끈질기게 물어보는 프란이었다. 두 무사 중 하나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 소년도 저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자신들의 표정이 왜 이 모양인지는 확연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수 초 후면 알게 될 진실을 왜 굳이 소년에게 숨기는가,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둘은 쭈뼛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크레인을 끌고 온 소년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하지말고 들어가라. 음식이 식겠다." 프란은 그들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끝까지 대답을 외면하자 크레인을 앞으로 쑥 밀며 투덜거렸다. "알았어, 들어가면 될 것 아냐." 프란은 한 발자국 문 앞으로 다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노크를 한다. 똑똑, 하고 그녀의 손이 문과 마찰하며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분명 문을 두드렸는데,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물론 평소에도 이런 종류의 침묵이 이어지긴 했지만, 들어오라던가 누군가 라는 질문 정도는 있었다. "가주님, 식사입니다." 프란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역시 묵묵부답이다. "……가주……." "어이." 프란이 다시 한 번 입술을 열었을 때, 호위 무사 둘 중 하나가 프란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프란은 슬쩍 돌아보았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라." "에?" 프란은 뭐냐, 라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허락이 없어도 괜찮다. 그냥 들어가라, 이 말이다." 프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호위 무사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몸을 부들 떨었다. 그녀의 눈가가 휙하고 치켜 올려졌다. 프란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내뱉듯 말했다. "……뭐야? 당신들, 뭐 숨기는 거 있지?" "……." 호위 무사 둘은 정곡이 찔린 듯 몸을 뒤틀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프란의 눈가가 좁혀졌다. 그녀는 , 하고 크게 심호흡 한 후 안을 향해 외쳤다. "가주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 "하아?" 황당했다. "……가주님?" 정말로 황당했다. 이 이상한 대마왕과 함께 해온 나날동안 황당한 날이 황당하지 않은 날보다 적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그 강도가 달랐다. 황당함 때문에 손이 움찔하고 굳을 정도였으니. "……." 언제나 그렇듯이 차분한 저 얼굴은 프란을 돌아보고 있었다. 보랏빛의 눈동자에서 느껴져 오는 것은 무감각, 무감정. 공허하게 가라앉은 듯한 느낌의 눈동자는 프란을 향해 일순 다가왔다가 무감각하게 밑으로 떨어졌다. 의자에 기대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프란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반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가와 탁자에 앉았다. "……어떻게 된 일……." "……내려놔라." 프란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반은 프란에게 음식을 탁자 위에 내려 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프란은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조금 놀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프란은 반의 눈동자를 보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주님." "……대답을 해줘야 할 의무가 내게 있던가?" 싸늘할 정도로 차갑게 튀어나오는 그 반문에 프란은 움찔했다. 그녀는 주위를 훑어보곤 또다시 표정을 굳혔다. 난장판. 단 세 마디로 압축될 수 있는, 방안의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거대한 벽면 전체를 뚫어 만든 커다란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은 반쯤 찢겨진 상태다.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찬찬히 바람에 몸을 맡겼던 그 커튼은 뜯겨진 상태로 지저분하게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하얀색이었던 이불은 저 멀리로 떨어져 있었고, 탁자 위를 장식했던 장미꽃병은 그 파편만이 밑으로 떨어져 내려있다. 카펫을 축축히 적시는 꽃 병 속의 물. 말라비틀어진 장미꽃이 처연하게 꽃잎을 내려뜨린 채 시들어 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은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있고, 방 안을 장식하고 있던 품목들 역시 단단 한 것들말고는 무사한 것이 없었다. 모조리 부서지고, 모조리 망가져 있을 뿐이다. 마치 누.군.가.가 난동을 피운 듯한 이 어지러운 장소는 프란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 프란은 주위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리고 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조금의 달라짐도 없는 평이한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은 훅, 하는 가벼운 신음을 뱉었다. 그녀는 반의 눈을 보며 천천히 음식을 차려 놓기 시작했다. 탁,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음식들이 예의 그 탁자 위에 놓인다. 프란의 손길은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대체 뭐야? 왜 방안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거지?' 프란은 쓰게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는 멀쩡하게 방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뭐가 화가 나서 방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든 거냔 말이다. '젠장, 정말로 성격 더러운 놈!! 장미꽃병을 다 깨뜨려 놨잖아!! 게다가 책이!! 우욱, 커튼이이이이! 저거 치우려며어어어어어언!' 이렇게 엉망이 된 방 안을 치우는 것은 프란의 몫임이 자명했다. 깨진 파편조각을 눈물로 쓸어담고, 뜯겨진 커튼은 깨끗이 빨아야 하겠지. 프란은 우아아아아악∼ 하고 발악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며 가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프란은 움찔했다. '쿠, 쿨럭.' 얼른 눈을 내리는데,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어라." 언제나와 다름없는 주문. 엉망진창인 이 방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그 태연스러운 말투를 들으면서 프란은 가슴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음식에서 그다지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뭐랄까. 가슴 한구석이 불안으로 가득차서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 느낌이랄까. 프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반의 눈동자에서 정말로 불길한 무엇인가를 예감했다. 그것은 정말로 본능이 감지해낸 기운. 반의 보랏빛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을만큼 차가웠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그러나, 프란의 예상과는 달리 오후 늦도록 불길한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은 평소의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움직이는 반의 태도에 프란은 뒤에서 낼름낼름 혀를 내밀며 '이 나쁜놈아!! 나한테는 일을 그렇게나 떠맡기고 전혀, 조금도 찔리지 않냐?' 라고 투덜댔다. 그러다가 반에게 들킬 뻔 해서 혀를 깨물뻔 한 일만 아니었다면, 그건 조금은 통쾌한 행동이었다. '뭔가 불길한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이게 더 불길해!!' 게다가 오늘은 시온마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얼마나 평온스러운 날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젠장!!!' 프란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래, 너무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계속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불길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뭔가가 불길하다고. 반은 침묵만을 친구 삼아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저 가주가 말이 없는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그리고 가끔씩 신경질을 부리며 '죽을래 살래' 를 남발하고 있지만 저 가주 성격 더러운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래.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 거냐? 왜? 프란은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원망했다. "……." 하루의 스케줄 중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 달이 뜬지도 오래되었다. 벌써 10시다. 반은 언제나 그렇듯이 발걸음을 옮겨 장미 정원 뒷쪽의 연습장으로 갔다. 오늘도 달빛은 미친 듯이 세상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휘엉청 밝은 달이 눈부시다. 프란은 반이 오늘도 검을 뽑아 검무를 추거나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바짝 긴장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 반의 검무를 본 이후로, 프란은 정신을 집중해서 반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저한테 검을 가르켜 주세요!!' 라고 외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외쳤다간 저 성격 더러운 놈한테 당장 어떻게 될지 몰라서 꾹 참고 있을 뿐이지. "후우." 프란은 주위를 휙휙 훑어보다가 연습장의 구석 부분에 앉았다. 반의 검무를 또렷이 지켜볼 요량으로. 그런데, 이상했다. 들어서자마자 검을 뽑아야 마땅했다. 저 미친 듯한 달빛 속에 날카롭게 잔광을 반사할 그 아름다운 푸른 검을 지금이라도 당장 뽑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아니다. 검은 뽑지도 않고, 반의 시선이 움직였다. 프란을 향했다. 프란은 움찔했다. "……왜 그러시……." 그녀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말이 튀어나온 것은. "검을 뽑아라." "뭐, 뭐라구요?" 순간 놀란 프란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자 반이 차갑게 한 번 웃었다. "귀가 먹은 건가? 검을 뽑으라고 했다." 반의 차분한 대꾸에 프란은 정신이 나갈만큼 놀라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예? 예? 그, 그치만…… 이번에는 마땅히 상대할 사람도……." 문득 첫날, 반이 자신에게 런스 카르멘이라는 기사단장과 검을 겨루게 한 일이 생각나서 프란은 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프란은 다음 순간 반의 입에서 들려온 말에 절망감을 느꼈다. "상대라면 여기 있지 않나." 고어체의 말투. 차갑게,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아서 절대로 농담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그 말투. 반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에, 프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녀는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반을 보았다. "노, 농…… 농담…… 하지…… 마, 마십……." 프란은 더듬더듬 말을 더듬었다. 상대라면 여기있지 않나, 라고 말한 반의 손은 정확히 그 자신을 향해 있었다. 달빛과 함께 섞이는 푸른색의 검의 광기가 두려울 정도로 소름끼친다. "너는 내가 농담따위나 지껄이는 놈으로 보이는가?" 반은 그 검을 든 채로, 차갑게. 아주 차갑게. ....웃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0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4) 가네트(uznian) 03-11-24 :: :: 11848 드디어 이 남자가 미친 건가? 아니면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건가? 프란은 심장이 덜컥, 멈춰버리는 듯 해서 잠시 몸을 떨었다. 어쩌면 어제 그게 나라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불현 듯 든 그 생각에 그녀의 몸이 격하게 다시 한 번 떨렸다. 그래. 잠이 들려 했을 때, 갑자기 자신과 마주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시종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태까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너무나도 화가나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건지도.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벌였다. 눈부신 달빛을 그대로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이 싸늘한 공간. 반을 위한 이 장소 위에 두 사람이 서 있다. 반은 검을 뽑고 있고, 프란은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검을 뽑으라고 했다." 프란은 그 싸늘한 말투에 다시 한 번 움찔했다. 검을 뽑아야 하나? 저 사람을 상대로?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다. 누군가 말했다. "단 한 번이라도 검을 섞을 수 있다면 몇 대째의 영광으로 알리다, 카르멘의 가주여!" 검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한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검에 관한 한 귀신이라 불리는 카르멘 가의 가주와 검을 섞고 싶어한다. 검 한 자루에 목숨을 건 자들이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죽기 전에, 저 대단한 가문의 실력자와 검을 섞어 보는 것. 반을 만나기 전에는, 프란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다. 카르멘 가의 가주와 언젠가는 반드시! 하지만. '젠장할! 그 언젠가는 내가 검에 완전히 자신이 생겼을 때를 말하는 거였다고! 지금은 아니야!' 그렇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자신이 반과 싸웠을 때의 결과?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죽을 것이다, 단 칼에. "가주님, 저는……." 프란은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그러나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말이 이어지지를 않는다. 프란은 한참동안을 더듬거렸다. 목안에서 빙빙 돌고 있는 목소리는 어딘가에 갖혀 버린 듯 흔적을 찾기 힘들다. 숨을 막아 버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몇 번이고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써본다. 그러나, 그래도 말이 튀어나오지를 않는다. 미친 달빛을 받고 있는 미친 가주. 그 미친 가주의 손에 들린 미친 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섞여 들어와 호흡을 압박한다. "……뽑으라고 했다." 반은 낮고 짧게 한마디했다. 나즉한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갖고 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는 그 목소리는 섬뜩하다. 사신의 목소리처럼. "제가 왜 검을 뽑아야 하는 겁니……." 그러나 프란의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를 못했다. "너에게 질문을 해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반은 그 말과 함께 프란의 말을 막아 버렸다. '젠장할!! 이 성격 더러운 대마왕!! 나쁜놈!!!' 프란은 차가운 반의 말투를 들으며 속으로 발악했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젠장할!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야! 이 성격 더러운 놈이 이유가 어딨겠어!' 프란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속으로 진정시키려 애썼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내 검을 상대로 맨 몸으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프란이 검을 뽑지 못하 자 반이 싸늘하게 말문을 열었다. 프란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 정말로 명료하게 하나. '지금 검을 뽑지 않으면 죽이겠다.' 프란은 침을 삼켰다. 진지한 반의 눈에는 한점의 망설임도, 한점의 거짓도 없어 보인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심장이 세게 방망이질 친다. 미칠듯한 파동이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아서, 이대로 침식당할까 염려된다. 프란은 깊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작은 마찰음과 함께 이윽고 미끈한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반의 푸른검과 대조를 이루는 은색의 검은 프란의 두근거림을 다 안다는 듯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반은 잠시 그런 프란을 보았다. 그의 눈매가 살짝 가라앉았다. 프란은 긴장하듯 몸을 낮추었다. 그 순간이었다. 프란은 순간, 온 몸을 압박해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살갗이 반응을 한다. 이 느낌, 이 느낌! 온 몸이 울부짖을만큼 차가운 이 느낌! 피가 끓을 정도로 짜릿한 투기(鬪氣)! 그것은 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몸을 감전시킬 것 같은 그 기운. "우웃!!" 프란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뒤로 뺐다. 온 몸을 전율시키는 그 짜릿함과 함께, 반의 몸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앞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프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그의 검을 받았다. 챙캉! "윽!" 푸른검과 은빛검이 마찰했다. 시리도록 날카로운 검날들이 치링,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몸에 상처를 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프란의 발은 단 한번의 공격으로 주룩, 하고 뒤로 밀려났다. 프란은 억지로 몸을 빼 뒤로 가져갔다. 반은 그런 프란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는 무리하게 다시 한 번 들어오지 않고 가볍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프란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무슨 짓입니까! 적어도 이유라도 가르켜 주세요!!"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마라."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토를 달지 말라고? 이 썩을 놈이 정말!! 내가 아무리 빚 지고 와서 네가 죽으라면 죽어야 된다고 해도!! 이 나쁜놈아~~!!!!' 미칠듯한 파동이 몸을 잠식한다.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 두근거림은 단순히 공포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 듯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손이 떨리고 있다. 그리고, 온 몸을 마비시켜 버릴 것 같은 이 느낌은 단순히 공포는 아니다. 눈앞에 강자가 있으면 있을수록 불타오르는 것이 그녀다. 이길 수 없다고 해도, 절대로 꺾을 수 없다고 해도, 눈 앞에 있는 강자를 보면 앞뒤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조건 덤벼들게 된다. 격렬하게 끓어넘치는 혈기! 오늘도 역시, 그 혈기는 거침없이 눈앞의 강자를 향해 뻗어나오고 있었다. 프란은 몸 속에서 끓어 오르는 투기를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흥분하면 안 된다, 라고 그녀는 자신을 향해 타일렀다. 그런 프란을 향해 반이 정확하게 검을 겨누었다. "……나에게 상처 하나라도 낼 수 있다면, 칭찬해 주지." '네 칭찬 같은 거 필요 없어, 젠장!!!' 프란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반의 검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로 접근했다. 프란은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반의 검은 노련하게 옆으로 꺾여 몸을 트는 프란의 옆구리로 가차없이 들어왔다. 프란은 움찔하며 다시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어쩡쩡한 자세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검을 막은 프란은 한발자국을 뒤로 내딛었다. 반은 가볍게 한 걸음 물러서서 재차 공격을 해왔다. 프란은 입술을 악 물었다. 최선을 다해도 방어조차 급급했다.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던가? 프란은 손 끝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압박해 들어오는 반의 검을 막기 위해 애썼다. 반은 그런 프란의 눈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불필요한 건덕지라곤 조금도 없다. 물처럼 움직이는 반의 공격에 프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다보면 어느새 막다른 벽까지 몰리게 된다. 프란은 몇 번이고 주의를 기울여 반의 공격을 피해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는다. "헉, 헉……." 프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검을 쥔 손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다시 한 번 검이 움직인다. "흐읍!" 몇 번이고 막고, 막고, 막고, 막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검을 휘둘러 먼저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그녀를 막다른 곳 까지 모는 반의 날카로운 검 끝. "헉, 헉, 헉……." 프란의 눈자위가 위로 치켜 올려졌다. 분했다. 그녀 자신을 이렇게나 땀을 쏟고, 이렇게나 힘들어 하고 있는데 자신의 앞에 선 저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다는 그 사실이. 땀 한 방울 정도면 흘려주었으면 좋겠건만 호흡조차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미미한 기운조차 일어나 있지 않았다. 처음에 보였던 그 투기는 어디로 갔는지,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그저 평온 뿐이다. "헉, 헉…… 으욱!" 재차 들어오는 검을 막으며 프란이 몸을 구부렸다. 이빨이 악 물어진다. 가주는 지금 그녀를 놀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끝내려고 했으면 검을 뽑은 바로 그 순간에 목젖에 검끝을 들이댈 수도 있는 실력이다. 프란으로서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실력이다. 발끝만을 움직여 공격해 들어오는 그의 검을, 프란은 온 몸을 던져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서도, 반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가면 자신의 공격을 그대로 와해시켜 버렸다. 마치, 놀이처럼. 프란은 허우적거리면서 그런 반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우욱…… 으윽! ……핫!" "……." 오로지 그녀의 기합소리 밖에 차지 않는 연습장안은 후끈 달아올라 있다. 반은 진지한 프란의 눈동자를 보며 잠시 속으로 쓰게 웃었다. 프란의 짐작대로, 그는 지금 거의 어린애를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프란의 검에 맞서고 있었다. 상대는 너무나 엉성하다. 헛점을 꿰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노출된 약점만 해도 대체 몇 개였는가. 검만 그대로 뻗었으면, 프란은 지금쯤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하악! 흐욱!" 프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피가 섞인 가래가 목구멍으로부터 치밀 것 같았다. 몇 시간째인지도 모르겠다. 달빛은 차갑게 얼굴로 부어지고, 밤바람은 싸늘하게 불고 있건만 몸은 검투로 달아오른 땀을 식힐 줄을 모른다. "하아…… 흐으……." 프란은 몸을 가누기 위해 애썼다. 반은 그런 프란을 한 번 지그시 바라보더니 어느 순간 검을 높게 들었다. 프란은 움찔하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러나. 샤락. 검은 막을 틈도 없이, 마치 빛처럼 움직였다. "……!"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움직임이었다.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앞까지 쇄도해 들어온 반의 검이 이미 그녀의 목덜미에 드리워져 있다. 차가운 광택에 소름이 돋는다. "……하아……." 이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있으면서. 자신은 숨소리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프란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눈을 치켜 떴다. 정말로 분하고, 또 분해서. 목덜미에 대어진 검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감정없이 베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란의 눈동자가 한 번 크게 떨렸다. 순간이었다. "……." 반은 말 없이 한걸음 물러서더니, 그대로 검을 검집 안으로 집어 넣었다. 프란은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움찔했다. 그녀는 반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검집 안으로 밀어 넣어진 그의 검을 확인한 프란은 천천히 땀에 젖어 힐트 부분이 미끄러워진 검을 허리춤에 걸린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미끌미끌해진 힐트의 불쾌한 감촉을 느끼며 검을 집어넣은 프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이런 겁니까?' 라고 물어볼 힘조차 없다. 숨이 거칠어져 온다. "정말 형편없군. 세이피아의 기사서임은 검을 든 사람이라면 누구한테나 주는 것인가?" 프란은 감정조차 묻지 않은, 그래서 노골적으로 비꼬는 것보다 훨씬 냉소적으로 들리는 그 목소리에 발끈했다. 그녀는 가득한 분노가 담긴 눈으로 반을 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전혀 동요하지 않는 반이다. "앞으로 삼일간 기회를 주겠다." 갑자기 울린 그 말에 프란이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하얀 얼굴 가득 달빛을 받은 아름다운 소년을 보았다. 바람이 멎었다고 생각했을 때, 반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를 공격해라." "……예?" 당황함에 답변마저 늦어버렸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프란은 입을 크게 벌렸다. 반은 딱 벌어진 프란의 입을 보았다. "내 뒤에서 빈틈을 노려, 찔러라." "……." '이 놈, 정말로 미친거야?' 그녀는 하하, 하고 크게 웃어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프란은 처연하게 눈을 들었다. "……대체……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호흡의 흔들림을 자제하며 물은 그녀의 말에, 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질문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프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만약…… 내 옷 한 올이라도 벨 수 있다면." 반은 잠시 말을 끊었다. "6000케트 중 1000 케트를 빚에서 제 해주겠다." "……." 이번에는 당황이 아니라 당혹이었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멍하니 벌어진 눈동자 사이로 반의 입술이 크로즈업되고 있다. 묘한 색기가 어린 저 붉디 붉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는 말은 모두 거짓말처럼들린다. 프란은 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입니까?"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털었을 때 마려한 돈이 1000케트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말로 옷깃만 벨 수 있다면 1000케트를 제해준단 말인가? "……." 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 무거운 소년은 농담따먹기 따위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1000케트……?" 대체 이유가 뭔가요? 라는 질문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000케트라는 말 앞에, 그녀는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미친듯한 달 빛 속에서 작게 끄덕여지는 반의 턱을 보았다. 월광은, 자신과 닮은 소년의 얼굴 위로 부서지고 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1 :: 오! 나의 주인님-PART 12: 순수의 상실(1) 가네트(uznian) 03-11-24 :: :: 14593 PART 12: 순수의 상실 "정말이지…… 꼭 그런 식으로 다루어야 직성이 풀리시는 겁니까?" '정말로요?'를 되풀이하며 멍하게 중얼거리는 프란을 뒤로 하고 가볍게 발을 돌려 들어오던 반은 갑자기 앞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훈련장 저 멀리에 있는 벽에 기대어 있는 인영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말을 달려 오는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달의 빛깔은 아직 퇴색하지 않았다. 잠시 심술궂은 구름이 달의 초록에 가까운 신비를 살짝 가리우긴 했지만. 반은 회색빛의 벽에 가볍게 몸을 기대고 있는 인영을 잠시 보았다. 희미한 그림자에 가려진 벽에 기댄 그 인영은 한 소년이었다. 달빛이 있다고는 하나 그 빛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컴컴한 탓에 벽에 기댄 소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것이 누구인지를 추정해 내는데에는 아무런 무리도 없다. 반은 망설임없이 그 벽 쪽으로 다가섰다. "……저 녀석은 내 시종이다. 어떻게 다루든 내 맘이지." 반이 다가섬과 동시에, 마치 거짓말처럼 드리워져 있던 구름의 그림자가 비켜났다. 호흡을 압박당했던 달이 자신의 빛으로 그림자를 치워내자, 벽에 기대어 있던 소년의 얼굴이 반의 정면에서 바로 드러났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요? 형님이 대충 대충 공격했다는 건 알지만." 벽에 기대어 있던 소년은 반이 바로 앞에 다가오자 몸을 살짝 일으켰다. 어깨에 드리워져 있던 소년의 은색의 머리카락이 위로 살짝 올려졌다. 소년은 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유, 형님?" 은색머리칼의 소년, 시온의 질문을 받은 반은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온은 대답이 없는 반의 보랏빛 눈동자를 한참동안 응시했다. 투영해 내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저 깊고 깊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무슨 죄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도무지 지워버릴 수가 없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저 사람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깊다. "……." 반은 시온 쪽으로 다가와 역시 벽에 살짝 기대섰다. 숨이 막힐 듯한 달빛을 그대로 받아내는 두 소년의 얼굴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반은 어느 순간 가볍게 눈을 감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는." 벌려진 반의 입술을, 시온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프란과 반이 함께 훈련장에 들어간 뒤로, 계속해서 들려나오는 금속의 마찰음에 못내 신경 쓰여 시온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 벽에 기대어 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반은 훅, 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쉬더니 어느 순간 내뱉듯이 말했다. "너는 언제까지 '그 놀이'를 계속할 셈이냐, 시온."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시온이 얼굴이 완전히 굳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시온은 한참동안 넋나간 얼굴로 반을 보았다. 그의 공허한 진초록색 눈동자에 잔뜩 질린 기가 스쳐나간다 싶었다. 시온의 입술이 어느 순간 부르르 떨렸다. 그들 사이에 살짝 침묵의 어두운 그림자가 머물렀다. 시온은 말을 잇지 못하고 부르르 떨다가 한참후에야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수, 형님?" "그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곧바로 나오는 반의 차가운 대꾸에 시온이 움찔했다. 시온은 떨리는 눈으로 반을 보았다. 반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살짝 부는 바람이 둘의 옷깃을 스쳐나갔다. 둘의 머리칼을 흔들던 바람이 멎었을 때, 시온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더니 쿡, 하고 거짓말처럼 웃었다. 그는 감탄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가득한 미소가 물린 시온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언제부터 알았수, 형님?" "네가 '놀이'를 시작한 3개월 전 부터." 반의 대답에 시온의 입꼬리가 더더욱 위로 치켜 올려졌다. "대단하시군. 그럼, 내가 이 저택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군요? 역시 형님 몰래 할 수 있는 '장난' 은 아무 것도 없는 거요?" 시온의 말에 반의 입가에 낮게 냉소가 빼물렸다. 반은 시온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온 아일린." 풀네임으로 호명된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시온의 눈이 얼핏 흔들린다 싶었다. 그가 입술을 꾹 물었다. "……거기선 손을 떼라." 시온의 시선이 밑을 향했다. 그는 쿡, 하고 낮게 웃더니 벽을 한 번 쳤다. 그는 반의 얼굴을 한 번 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초록 눈동자에 체념의 기색이 스쳤다. 시온은 낮게 한 번 웃은 후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거기엔 그리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지요." 시온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반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또렷이 반의 눈을 향했다. "그건 그렇고……. 프란 말입니다……." 반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으며 시온의 말을 기다렸다. " ……설마, '그런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무슨 뜻이지?" "시치미 떼지 마십쇼. '제 2의 켈리' 같은 것을 키우려는 건 아닌지, 묻고 있는 겁니다, 나는!!" 시온은 크게 외쳤다. 그리고 외친 바로 그 순간, 시온은 보았다. 반이 낮게 고개를 숙이고 웃는 모습을. 시온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형님? 설마? 프란에게…… 그럴 생각입니까?" 반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못할 짓이 뭐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시온의 입술이 싸하게 굳는다 싶었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떨렸다. 반은 그런 시온을 무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시온의 어깨를 한차례 치고 나가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한 번, 반이 호흡을 한다. "독을 탄 범인을 찾는 건은 잘 되고 있나, 시온?" "……." 시온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축소되었다. 반은 그런 시온의 곁을 스쳐 다시 발걸음을 옮겨 나간다. 시온은 자신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보며 피식, 자신도 모르게 길게 웃어버렸다. 반은 자신의 뒤로 거침없이 발을 옮겨 나간다. 시온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님…… 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그는 눈을 꾹 감았다. "당신이란 사람은 ……." ▷◀▷◀▷◀▷◀▷◀▷◀▷◀▷◀▷◀▷◀▷◀ '그건 정말로 프리나였나?' 헤냔은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날, 키네세스 공주의 생일 파티에서 보았던 그 영상이 머릿속에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다. 아닐 것이다, 그녀가 이 곳에 있을 리가 없다……. 수천 수만 번은 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거는 그 암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더욱 그 얼굴은 선명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기다랗게 흔들리던 금색의 머리카락과 오렌지색 눈동자, 그리고 가느다랗게 드러났던 팔 다리, 가늘 가늘한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감싸쥐고 있던 그 모습. 어린 날의 프리나가 성장했다면 이런 모습일 거다, 라고 상상해 오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녀를 본 지 벌써 몇 일이 지났건만 그 희미한 환상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환장할 노릇은, 자신이 잘못본 게 아닌가 싶어 어떻게든 다시 한 번 만나 보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봐도 도저히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이런 여자 못 봤어?' 라고 물으면 저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대니 헤냔으로서는 미칠 노릇일 밖에. "헤냔! 이봐, 헤냔!" 때마침 헤냔의 앞을 지나가고 있던 한 남자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는 헤냔을 발견하곤 소리쳐 그를 불렀다. 그러나 너무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나머지, 헤냔은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입술만을 질근질근 깨물면서 헤냔은 그 때 보았던 환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봐, 헤냔!" 머―엉.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소리쳐 불러봐도 헤냔의 상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사람은 아무리 불러도 상대가 대답이 없자 짜증이 난 듯 더 큰 소리로 헤냔을 불렀다. 그러나, 그래도 상대는 묵묵부답이다. "이이이이익∼ 키에르 군!" 결국 헤냔의 이름을 부르다 못해, 그는 고성과 함께 부다닷 달려와 멍하니 앉아 있던 헤냔의 머리를 한 대 갈기고야 말았다. 입을 약간 벌린 채 멍하니 하늘만을 올려다보고 있던 헤냔의 머리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당장에 밑을 향했다. "윽!" 때아닌 기습에 당해 버린 헤냔은 화가 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가 움찔했다. 자신의 머리를 때린 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냔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재빠르게 손을 올리더니 그것을 자신의 눈썹 언저리에 갖다댔다. 그는 무섭도록 빠르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향해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전 헤냔의 머리통을 한 대 내갈겼던 남자, 런스 카르멘은 입술을 꾹 깨물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소년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예의 바르게 거수 경례를 올리는 그의 손등 위로 선선한 햇빛이 부서지고 있다. 은빛의 갑옷 위로 하얗게 드러난 그의 목덜미가 보인다. 시선을 올려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붉은 색의 눈동자가 섬뜩하리 만치 뚜렷하게 빛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나?" 런스는 헤냔을 향해 약간 책망하는 투로 물었다. 사실은 자신이 머리를 한 대 갈겼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의 작용이 이렇게 원망의 투로 돌려서 표현되었는지도 모른다. "……새, 생각이라니요. 별 것 아닙니다." '별 것 아니라면서 얼굴을 붉히다니.' 런스는 단 번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헤냔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달아오른 헤냔의 얼굴을 즐기듯이 한 번 바라보더니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씨익 웃으며 헤냔의 옆구리릎 푸욱 찔렀다. "뭐야, 애인 생각이라도 했나?" "……애, 애, 애인이요? 애인 같은 건 없습니다만!!!" 헤냔이 놀라서 외친 그 소리에 런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실소를 터뜨려 버렸다. 역시 이 소년에게선 보통의 기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풋풋함을 느낄 수 있다. 소년다운 수줍음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그런 것이. 헤냔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스스로가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 좀 민망해진 까닭이다. 헤냔은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런스를 보았다. 런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헤냔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그는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린다. "별로, 그런 것은 아니네만." 그는 헤냔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헤냔은 갑작스러운 자신 쪽을 향하는 런스의 눈초리에 움찔하고 순간 몸을 떨었다. 이대로 자신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그의 갈색 눈동자가 바로 눈 앞에 보인다. 헤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지금 런스의 태도를 보아하니 뻔했다. 런스는 지금 자신에게 뭔가 이야기하기 곤란한 것을 꺼내려는 것이 분명하다. "……하실 말씀은 빨리 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만." 헤냔은 똑바른 목소리로 말하곤 런스를 바라보았다. 런스는 그런 헤냔을 아래 위로 한 번 죽하고 훑어본 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헤냔." 그 부름에 헤냔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말씀하십시오." "……그 날 일에 대해선 이상하리만치 말이 없군." 헤냔이 순간 움찔한다 싶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얼핏 떨리는 것을 보고 있던 런스는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아닌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년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헤냔은 어느 순간 입을 열어 냉담하리 만치 차갑게 말했다. 그는 당당히 고개를 들어 런스는 또렷이 바라보았다. 런스는 씨익, 하고 길게 한 번 웃더니 헤냔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고개를 낮추어 왔다. "……「나의 주인」 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다, 이 말이네." "……." 헤냔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런스를 바라보았다. 런스는 한 번 짧게 웃고 난 후 헤냔의 머리카락을 살짝 부볐다. 헤냔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자네가 그 분에게 아무런 감흥도 받지 않았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네만, 어떤가?" "무슨 뜻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헤냔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런스는 흐응,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호오? 자네, 이제 보니 뻔뻔한 면도 있군, 그래?" "그 뻔뻔한 면은 대장님께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짧고 간결하게 튀어나오는 헤냔의 말에 런스는 기가 막힌 듯 핫, 하고 짧게 숨을 쉬었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헤냔을 보았다. "키에르으으으구우우운?" "본래 대장님은 저를 '헤냔' 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성을 부르시는 건지? 그리고…… 부르시려면 제대로 불러 주십시오. 저는 키에르지 키에르으으으으가 아닙니다." 헤냔이 또 한 번 딱딱 떨어지는 어조로 말했고, 런스는 미간을 좁히며 격하게 기침을 했다. "험험! 험험험험험!" "왜 갑자기 기침을 하시는 지요? 감기에 걸리셨다면 빨리 안정을 취하는 편이 좋습니다만." 헤냔은 얄미울 정도로 똑바르게 말했다. 런스는 하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헤냔을 한참도안 바라보다가 기다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냔." "말씀하십시오." "이제부터 좀 진지하게 말하겠네." "저는 여태까지도 진지했습니다만." "……." 런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뚫어지게, 정말로 뚫어지게 헤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헤냔은 뭐냐, 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런스는 머리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좋아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런스는 헤냔의 눈을 보았다. "자네, '카르멘의 가주' 를 보고 뭘 느꼈지?" 순간, 헤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꾹 물고 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입술을 열었다.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자네의 정직한 대답." 런스의 말에 헤냔의 눈썹이 가느다랗게 들어올려졌다. 헤냔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거침없이 입술을 열었다. "좋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지요." 헤냔은 런스를 똑바르게 바라보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절대로 적으로 삼고 싶진 않은 사람입니다. 됐습니까?" 런스는 그 말에 하핫, 하고 짧게 웃었다. 그는 헤냔을 잠시 바라본 후 피식 미소를 흘렸다. "글세……. 그게 다 인가?" "……." 헤냔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밑을 향했다. 시선이 꺾이는 방향을 보고 있던 런스는 속으로 실소했다. 이 소년은 언제나 차가운 듯 행동하곤 하지만, 속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누구보다도 알고 있다. 감정을 숨기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소년.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주인 소년이다. 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휘는 것보다는 부러지는 것을 택할 것 같은 이 소년은 대쪽같은 성미를 갖고 있어서 정말이지 '기사' 외의 직업을 가졌으면 어떡할 뻔했나,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 정도이다. "그·게·다·인·가·헤냔?" 헤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런스는 속으로 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렇겠지. 그게 다 일리가 없다. "……제게 어떤 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단장님." 헤냔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런스는 속으로 낮게 웃어 본 후 말했다. "원하는 것 따윈 없다네, 키에르 군. 나는 단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헤냔의 눈초리가 약간 위로 치켜올려졌다. 그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면 뭔가 불만사항이 가득할 때라는 것을 런스는 모르지 않았다. 런스는 헤냔에게 아하, 하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나는 지금 카르멘 가에 가는 길이라네." 순간, 헤냔이 온 몸으로 동요하는 것을 런스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생각이 있다면 같이 가겠는가?" 헤냔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응? 헤냔." 헤냔은 한참동안 망설이는 듯한 눈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당신을 찾아간다면 박대하실 겁니까?」 「그건 나와 검을 섞으러 온다는 뜻인가?」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의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던 매서운 기운을 생각하면서 헤냔은 입술을 질끈질끈 물었다. "……좋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2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2) 가네트(uznian) 03-11-24 :: :: 15553 하루 종일 이빨을 갈면서, 프란은 반의 등만을 빤히 보고 있었다.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드리워진 그의 등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프란의 눈초리는 사뭇 매서웠다. 프란은 자신의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움직여 나가는 반의 발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젠장할! 대체 틈이라는 게 있어야 찌를 거 아냐!' 그렇다. 이 남자는 도대체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도 안되는 조건을 내건 것일까. '혹시 이 대마왕이 나 놀리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절대로 못할 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괜히 약올리는 걸 수도 있다고. 젠장할!! 내가 꼭 해내서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말거다! 두고 보라고!!' 프란은 혼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문제였다. 상대에게 검을 들이대려면, 일단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몇 날 몇 일을 지치지도 않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데도 대체가 조그마한 허점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자는 동안은 그녀의 사정 거리에서 벗어나니 그렇다고쳐도, 밥을 먹는 동안에도 허점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네놈은 밥 먹을때도 온갖 경계를 하고 먹으면서 체하지도 않냐!! 젠장할!!' 물론, 딱 한 번 헛점을 발견한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헛점을 발견함과 동시에, 검을 채 뽑기도 전에 헛점이 사라지는 바람에 차마 검을 내밀지는 못했던 그녀였다. 반은 지금 온 몸을 통해 '네가 날 찌르면 그 순간 넌 죽어' 라는 어마어마한 기운을 표출해내고 있었다. 그런 인간이니, 그걸 찌르기는커녕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보통 때도 반은 온 몸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해 내는 대단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이 정도의 검은 오로라(정말로 대마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를 뿜어내는 정도는 아니었다. 반이 복도를 한 번 스쳐 걸어도, 하녀들은 옴짝달싹 못하면서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니 할 말은 다했다고 보면 될까. "……." '날 찔러 봐라.' 라는 말을 한 지, 오늘로 정확히 삼 일째다. 오늘 찌르지 못한다면 빚을 제해준다거나 하는 말은 저 멀리로 훨훨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에게 '목숨' 다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자유' 다. 만약 이런 식으로 빚을 제거해 나갈 수만 있다면, 자유가 되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닐 터. 언젠가 이 성격나쁘고 눈매 더러운 가주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상상만해도 가슴 속이 핑크빛으로 가득 차는 프란이었다. "……가주님." 프란의 자그마한 부름에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해 나가고 있던 반이 돌아보았다. 프란과 시선을 부딪힌 반은 프란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웃을 뻔했다. 온갖 불만을 품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오만가지의 감정을 가지고 찌푸려져 있다. 오렌지색의 저 눈동자는 언제나도 반항기를 머금고 있지만, 오늘은 더더욱 그 기운이 드셌다. "뭔가." 반은 얼핏 발을 멈추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가 가주님을 공격하는 것 말입니다." 반이 조금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프란은 두 눈을 반짝 들며 말했다. "……그거, 어떤 수를 써도 상관 없는 겁니까?" 프란의 목소리는 굴곡이 심했다. 뭔가 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은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프란의 표정이 변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프란은 반의 대답에 갑자기 입술을 싹 들어올리더니 흐흐, 하고 짧게 웃었다. "흐. 흐흐흐흐흐. 정말로 어떤 수를 써도 상관없는 거죠?" 오싹……. 반은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그는 천천히 프란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움찔했다. 돌아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악하게 웃는 프란의 얼굴이었다. 반은 입꼬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들어올린 후 훗, 하고 너무나 사악하게 웃고 있는 프란의 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거세게 고개를 저은 다음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황실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다. 반은 지금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차였다. 평소라면 황실 사람이라는 단어에 발끈해서 녀석들을 반쯤 페인으로 만들어서 성 밖으로 내보냈을지도 모르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은 황실에서 사람이 올 분명한 이유가 잇는 것이다. '그 때의 답을 들으러 오는 것이겠지.' 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왕이 그에게 권유했던 것들이 머릿속에 잠시 떠올라 가라 앉았다. [반역자를 그대가 처리해 줬으면 하네.] [자네를 사위로 맞고 싶네.] 문득 떠오른 카세타 왕국 국왕의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의 영상이 그의 눈앞을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키네세스의 얼굴이었다. 춤을 출 때, 은근히 반의 어깨에 갖다댄 손에 힘을 주던 소녀. 음악이 끝났을 때도, 가련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조금만, 조금만 더... 라고 중얼거렸던 그 소녀. 반은 그 모든 영상을 지워버리려 애쓰며 프란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섰다. 살기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 시종이 자신의 옷깃을 벨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은 사실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을 [계기]로 만드려고 하는 것일 뿐. 시종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그에게 1000만 케트를 제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반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응접실에 있는 쇼파로 가서 걸터앉았다. 프란은 그런 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발을 움직였다. 여태까지 뒷통수에 대고 검을 들이대려고 했던 것이 다섯 번이었는데, 그 때마다 거짓말같이 간파당하고 말았다. '이 대마왕 놈은 뒷통수에도 눈이 달린거야, 분명하다구! 젠장젠장젠장젠장!! 그게 아니라면 귀신이겠지!!'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댔다. 그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공격이 그렇게 느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알아차릴 리가 없으니. 반은 가만히 앉은 채였다. 그들이 이 방에 앉은지 몇 분쯤 지났을 때, 밖에 있던 하녀가 자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런스님이십니다."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황실에서 사람을 보낸다는 게…… 런스였나?' 반은 훅,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들여보내." ▷◀▷◀▷◀▷◀▷◀▷◀▷◀▷◀▷◀▷◀▷◀ 카르멘 가에 들어선 헤냔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물론 자신이 이 카르멘 가에 왔다 해서, 꼭 카르멘의 가주와 검을 섞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자신이 결투 신청을 하지 않는 한은, 저 도도한 카르멘의 가주는 검을 뽑지 않을 것이고, 또 자신이 결투 신청을 한다해도 그가 거절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손목이 절단 될 각오라면 언제든지' 라는 말을 해서 언제든 결투 신청만 한다면 받아준다는 투로 말했긴 하지만. "런스님." 헤냔은 카르멘 가주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런스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런스가 돌아보자, 헤냔은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여기, 카르멘 가의 저택 말입니다. 솔직히 너무 넓고 화려한 것 아닙니까? 정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화려합니다. 심지어……." "심지어 황성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런스가 헤냔의 뒷말을 눈치채로 선수를 쳤다. 헤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뭔가 잔뜩 불만인 듯한 헤냔의 표정에 런스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냔의 볼은 퉁퉁 부어 있었다. 런스는 만약 자신이 좀 더 일찍 결혼을 했다면 헤냔 또래의 아이 정도는 생기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며 살짝 웃어 버렸다. 만약 헤냔이 자신의 아들이라면 정마롤 마음껏 귀여워했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런스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실소했다. 헤냔은 그런 런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뾰로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헤냔으로서는 발을 옮길 때마다 드러나는 엄청난 고가의 골동품이라던가 그림, 그리고 황금문, 엄청난 크기의 장미정원, 복도를 지나가면 수시로 튀어나오는 그 무수한 수의 하인들, 문 하나 열 때마다 사람 간 떨어뜨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고 불쑥불쑥 검을 내미는 검사들 등등이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특히나 불만인 것은 이 엄청난 규모의 성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카르멘 가는 대륙을 이끄는 두 개의 큰 가문 중 하나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이건 곤란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카르멘 가는 카세타에 귀속된 가문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궁성보다 큰 성을 가질 수는 없습……." 헤냔이 얼굴을 붉혀가며 소리를 치자 런스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카르멘 가는 이미 카세타를 뒤엎을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다. 헤냔, 어린애가 아니라면 그런 볼멘 소리는 거둬라. 그래, 보통의 가문이 황성보다 더 큰 성을 짓고 있으면 뭔가 응징이 내려질지도 모르지. 그러나." 런스는 말을 자르고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멘 가에는 그런 응징이 내려진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카세타가 카르멘 가에게 검을 들이대면서 '너, 마음에 안 든다. 저 성 좀 더 작게 만들어라.' 라고 말할만한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단장님……!" 헤냔은 인상을 쓰며 그의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 "자네는 너무 고지식한 게 문제야. 때로는 '법 외의 인간' 도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카르멘 가는 카세타에서 그 법외의 인간 중 하나야. 아니, '법 외 인간'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불공평합니다. 카르멘 가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가문입니다." 헤냔이 투덜대듯 말했다. 확실히 그도 카르멘 가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가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피부로 느껴볼만한 경험은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투덜대는 것이다. 헤냔의 가벼운 투덜거림에 런스는 또 한 번 씨익, 하고 웃었다. "이봐, 헤냔. 자네, 뭔가 간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 헤냔이 의아한듯 되물었다. 런스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카르멘 가는 존재해서는 안될 가문' 이라? 나도 카르멘 가 사람인데 말이야." "……헉!" 헤냔은 그제서야 생각났는지 헉, 하고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런스 카르멘.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옆에서 웃음 짓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자신은 지금 카르멘 가 사람한테 카르멘 가가 부당하다느니, 그 가문은 사라져야한다느니 어쩌느니 불평을 늘어놓은 꼴이 된다. 헤냔의 얼굴이 또 다시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섞인 듯 하다. 금새 또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을 보면서 런스는 또 한 번 속으로 크게 웃어 버렸다. 고약한 취미라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이 어린 소년 기사를 놀리는 것에 이미 재미를 붙여버린 런스였다. 그들은 그렇게 심각한 토론(?)을 나누면서 한참만에 반의 응접실 앞에 섰다. 런스는 집무실 앞에 선 하인에게 가볍게 눈짓을 해보였다. 하인은 허리를 굽혀서 런스에게 인사한 후,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님, 런스님이십니다." 한참동안, 안에 있을 가주로부터는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조금 길었고 헤냔은 크험, 하고 기침마저 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방문을 보았다. 한참만에야 방 문 안에서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 헤냔은 침을 꼴깍 삼켰다. ▷◀▷◀▷◀▷◀▷◀▷◀▷◀▷◀▷◀▷◀▷◀ "속하, 가주님을 뵙습니다." 반은 자신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런스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약간 꺾여졌다. 방 안에 들어선 것은 런스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런스의 뒤에서 쭈뼛거리고 선 초록색 머리카락이 보였던 까닭이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저 독특한 빛깔의 머리카락. "앉아라." 반은 차갑게 한마디했다. 런스는 반을 향해 다시 한 번 인사한 후 헤냔의 허리를 가볍게 쳤다. 그러나 헤냔은 자신의 허리를 가볍게 치면서 자신에게도 반에게 인사를 할 것을 종용하는 런스의 의도에 따르지 않았다. 런스는 굳은 듯이 자리에 선 헤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헤냔, 가주님께 인사드리게." 순간, 헤냔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헤냔은 훗, 하고 가볍게 웃은 후 눈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반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딱딱한 말들이 튀어 나왔다. "저는 폐하의 기사. 폐하와 그 근친, 혹은 제가 인정한 사람을 제외한 이들 외엔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헤냔의 목소리는 탁탁 끊어지고 있어서 굉장히 메말랐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런스는 헤냔의 그러한 대답에 움찔해서 반을 보았다. 지금의 말은 굉장한 실례였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을 제외한 이들' 외에는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말은 즉, 거꾸로 말하면 헤냔 자신이 반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던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헤냔을 한 대 때리고 싶은 런스였다. 런스는 반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보랏빛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져 있다. '제발……. 가주님! 화를 내지 말아주십시오! 이 아이한테는……!' 런스는 반의 눈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런스가 주먹을 꽉 쥐고 헤냔의 다리를 보이지 않게 살짝 쳤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하고 인사를 드려라, 라는 뜻이었지만 헤냔은 꼿꼿하게 선 채로 런스의 말에 거역했다. 런스는 조금 당황했다. 이 소년 기사는 여태껏 그의 말을 거역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헤냔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반을 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을 감돌기 시작했다. 헤냔의 눈매는 매서웠고, 반의 눈빛은 무덤 했다. 헤냔의 눈초리는 반을 곧장 가로 질러 들어간다. 반과 헤냔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서로를 보고 있던 도중, 침착한 그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헤냔이었다. 반만을 보고 있던 헤냔의 눈썹이 꿈틀한 것이다. 이 방에는 카르멘 가 가주, 단 한 사람만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헤냔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반이 앉아 있는 의자 뒷켠에, 고개를 푹 숙인 자세의 소년이 하나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덮어 버릴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년이었다. 헤냔은 왠지 모를 익숙함에 그 금색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도저히 알아볼수는 없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다 덮고 있으니 알아보는 쪽이 이상하다고 볼 수도 있다. 잠시 프란 쪽으로 향했던 헤냔의 시선은 다시 반에게로 향했다. 둘 중 먼저 입을 연것은 반이었다. "나는 너에게 허리를 굽히라고 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굳이 너의 신조를 내게 줄줄 읊어줄 필요는 없다." "……." 헤냔은 순간 흣, 하는 낮은 소리를 냈다. '그렇군. 그래서?' 라는 반응이 아닌가, 이것은. 적당히 화를 내주길 바랬다. 그런데, 아니다. 화를 내기는 커녕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반은 여전히 무덤덤 하게 가라앉은 그 눈동자로 런스와 헤냔을 한 차례씩 보았다. "……나는 앉으라고 했다." 차가운 그 목소리에, 런스는 움찔했다. 헤냔은 자신을 똑바로 보는 반의 눈초리에 역시 움찔하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자국을 물러섰다. 헤냔은 물러서면서도 반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젠장할, 얼굴과는 정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저 얼굴에 웃음이라도 건다면, 천하의 호걸이 다 넘어올 것 같은데(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반은 남자다.)저런 얼굴로 언제나 저렇게 차갑게 굴고 있다. 「너 같은 것은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저 차가운 눈동자는, 감정이라곤 담고 있지 않아서 마치 그림 같다. 차갑게 그려 넣은 그림 말이다. 런스는 발걸음을 옮겨 반의 앞에 있는 쇼파에 걸터앉았다. 헤냔도 한참만에 발을 옮겨 런스의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던 헤냔의 눈길이 우연히도 언뜻 반의 뒤에 서 있는 시종에 가서 닿았다. 짤막한 금색 머리카락을 잔뜩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그 시종은 뭔가 좀 어쩡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헤냔이 자리에 앉았을 때, 반이 눈을 들어 런스를 보았다. 그 때, 문이 살금히 열리면서 찻잔을 든 소녀가 들어왔다. 평소 때라면 프란이 나가서 찻잔을 내 왔을 터였지만, 요 삼일 동안 프란은 반의 옆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 틈을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반 역시 프란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 앞으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볼 시녀를 하나 더 들였다. 그 시녀는 그저 찻잔을 나르거나 바닥을 닦거나 하는 일을 할 뿐이지만. 하지만 아마도 프란의 이번 일이 끝나면 그 일은 다시 프란의 몫이 될 것이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이 그들의 앞에 놓여졌다. 런스는 웃으면서 잔을 들어올렸다. 헤냔은 여전히 경계의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반은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곤 힐끔 뒤를 보았다. 프란은 완전히 굳어버린 듯한 움직임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틈! 오직 틈을 노리는 프란의 눈동자는 한마디로…… ……살벌했다. 런스는 저 소년이 왜 저러나, 싶어서 뒤로 땀을 한 방울 흘렸다. 워낙에 무시무시한 살기였기 때문에 반에게 저기요, 가주님…… 하고 말을 붙일 생각까지 했던 그였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눈치채고 있는데 저 가주가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런스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곤 품에 손을 넣어 작은 봉투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반에게 곧장 내밀었다. 그의 품안에서 나온 봉투를 보는 헤냔은 호기심을 보였다. 반은 그 봉투를 아무 말 없이 받아 넣었다. "……폐하로부터 온 서찰입니다." "……알고 있다." 반이 차갑게 말했다. 반의 눈이 가볍게 돌려져, 이번에는 헤냔 쪽을 향했다. 헤냔이 흠칫하자, 반이 입술을 작게 움직여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오늘 손목이 잘릴 각오로 여기에 온 것인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3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3) 가네트(uznian) 03-11-24 :: :: 13361 "너는 오늘 손목이 잘릴 각오로 여기에 온 것인가?" 갑자기 들려온 그 말에, 헤냔은 잠시 멍한 얼굴로 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눈에는 일말의 거짓도, 동요도 없다. 흠칫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갛게 개인 반의 보랏빛 눈동자는 헤냔의 마음 속을 그대로 관통하고 들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가주님, 무슨 말이 신지…?" 런스는 갑작스러운 반의 말에 움찔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반은 대꾸 없이 헤냔을 빤히 바라봄으로서 그의 말을 가볍게 묵살할 뿐이다. 그런 반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아니, 일방적으로 주시 당하고 있는 헤냔의 눈이 어느 순간 크게 한 번 떨리는 듯 했다. 붉은 눈동자 한 가득 차 오른 반의 모습이 흔들린다고 느껴진 순간, 헤냔의 입술이 찬찬히 열렸다. "……당신과, 검을 섞을 것이냐고 묻고 계신 겁니까?" '뭐라고?' 런스는 헤냔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얼른 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그 말에 런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가, 가주님!" 놀란 런스가 버럭 고함을 쳤으나 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헤냔이 앉은 바로 그 곳 뿐, 런스를 향해서는 미동도 않는다. 그 시선을 눈치챈 런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옆자리에 앉은 헤냔에게로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안 돼, 헤냔! 자네의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 자네는 상처를 받을 거다. 바로 몇 년 전의 나조차도 이 분의 검 앞에……' 그러나, 런스의 마음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옆에 앉은 헤냔의 입술이 가볍게 올려졌다. 그의 붉은 입술이 그 어떤 제지도 없이 가볍게 벌어진 것은 한 순간의 일. "좋습니다." '헤냔!!' 런스의 소리 없는 비명을 무시하면서, 헤냔이 다시 한 번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멘의 가주와 한 번 검을 섞어 보는 것을 몇 대 째의 광영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다 들었습니다. 그런 기회를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주신 다니 받는 게 당연하겠지요." 반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고 있던 헤냔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손목쯤은, 바칠 수 있습니다!" ◀▷◀▷◀▷◀▷◀▷◀▷◀▷◀▷◀▷◀▷ 언제나 가주가 혼자서 검을 휘두르곤 하던 곳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이 묘하게 어색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초조한 한숨을 삼켰다. 프란은 천천히 검 손잡이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천천히, 검에 감기는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프란은 심호흡을 했다. '기회야.' 반은 천천히 앞쪽으로 나서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올려 헤냔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뒤에서 말 없이 기회를 엿 보고 있을 시종을 생각하며 속으로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래, 다시없을 좋은 기회다. 이런 기회는 두 번 찾아오는 게 아니니, 노력 해봐라. 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의 앞에 선 헤냔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뽑고 있었다. 처음, 카세타의 기사가 되기로 맹세를 한 그 날 뽑은 이후 단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던 자신의 보검. 헤냔은 그 검을 꺼내 똑바로 세운 후 반을 보았다. 반은 검을 뽑지 않은 자세 그대로 그런 헤냔을 보고 있다. "검을, 뽑으십시오." 헤냔의 말에 반이 입술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 검으로 승부한다면, 단 1분도 견디지 못할텐데. 그래도 좋은가?" "……." 대답없이 헤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검을 똑바로 당겨 앞에 둔 채로, 큰소리로 외쳤다. "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어서 뽑으십시오!" 프란은 슬그머니 반의 뒤로 걸어가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살기를 눌러 없애려고 애쓰면서 반 쪽을 보았다. 비록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반이 조금의 빈틈조차 용납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반은 그 말에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들었다. 헤냔은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은 것을 보았다. 반은 조금은 무심한 얼굴로 검을 뽑은 후, 앞쪽으로 가만히 검을 세웠다. 뽑혀진 푸른빛의 검이 천천히 그의 흰 손 위에 들리는 것을 보며 헤냔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일순간이지만, 거짓말처럼 반의 검이 빛나 보였기 때문에 헤냔의 손에는 긴장으로 생겨난 땀이 맺혀 있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일순 광기가 보였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검이 위용을 뽐내는 듯 크게 한 번 휘둘러졌다. 헤냔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몸을 떨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저렇게, 저 남자가 검을 뽑고 있는 모습이 이토록이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거지? 반이 검을 든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검의 연인이라기보다는 만인의 연인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 외모, 라고 진작부터 결론을 내린 전적이 있던 헤냔은 그런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새하얀 얼굴 아래 가닥가닥 늘어뜨려진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방치해둔 채로, 검을 들고 선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완벽해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검을 뽑는 모습이 멋졌든 신비로웠던 아름다웠던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한 번 싸우기로 결심하고 뽑은 검을 땅에 그냥 내려놓을 수는 없다. 배에 꽂고 자결하는 한이 있다해도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되는 법이라고 헤냔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검을 똑바로 앞으로 겨누었다. 그리고, 그 것을 공중에서 가볍게 휘두름으로서 반에게 카세타 식의 예의를 다했다. 그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검만으로 따져 이 사람이 강하다는 보장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언제나 헤냔 내부에 잠재되어 있었다. 나도 여태까지 헛살아 온 것은 아냐.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는 내 알바 아니나,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검 역시 헛 닦아 온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어. 헤냔은 검을 뽑고 후욱, 하고 한숨을 들이마셨다. "대 카르멘 가의 수장이여! 헤냔 드 키에르가 그대와의 결투를 원합니다." "카르멘의 수장인 나, 저스티스는 헤냔 드 키에르의 결투신청을 신성히 받는다." 이따위 허위치레가 무슨 필요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상대가 기사라는 것을 배려해서 반은 말해 주었다. 어찌되었든 다른 것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대. 그 뿐이다. "선제 공격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반이 말한 가운데, 헤냔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반의 앞으로 달려왔다. 순식간에 몇 미리아는 족히 뛰어넘는 속도로 달려온 헤냔이 검을 들어 재빨리 가로로 반의 팔목 부위를 겨냥했다. 챙! 검이 격하게 한 번 흔들렸다. 헤냔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검을 막은 반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밀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은 반을 밀어내기는커녕 부르르 떨리면서 그를 바깥쪽으로 밀어낼 뿐이었다. "……흐읏." 헤냔은 중얼거리듯 신음하고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몸을 띄운 헤냔은 이번에는 반의 옆구리 부분을 공격했다. 챙! 다시 한 번 울리는 금속성이 헤냔의 신경줄을 자극한다. 헤냔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아, 라고 낮게 중얼거린 후 검을 양 사방으로 휘둘러 반의 검 속에 틈을 찾으려 했다. 싸우다보면 어느 틈까지는 나올 거다, 라고 생각하며 검을 휘두르는 헤냔의 검은 그 나이 또래치고는 지나치게 날카로워 과연 소년이라곤 해도 기사라는 칭호를 듣기엔 충분하다, 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헤냔은 입술을 꾹 문 채로 반의 두 눈을 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반의 눈은 그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아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는 헤냔을 화나게 만들었다. 반은 검을 휘두르지 않는 상태로, 단지 공격만을 대여번 튕겨 냄으로서 더더욱 헤냔의 화를 북돋았다. "왜 당신은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헤냔이 크게 외치며 다시 검을 움직일 때, 반은 말없이 눈을 들어 헤냔을 한 차례 보았다. 헤냔은 그 눈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으나 그 것 뿐이다.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반을 공격하는 헤냔의 손이 움직였을 때, 반의 검은 두 어차례 움직이다가, 갑자기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움직임으로 스르륵, 옆으로 빠졌다. '읏!' 당했다, 라는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옆쪽에서 반의 검이 움직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이, 옆 쪽에서 커다랗게 이지러는 검의 빛깔이 보여 헤냔의 눈을 부시게 했다. 헤냔은 미칠 것 같은 광기를 뿜어내는 반의 검 앞에서 입술을 질끈 물 뿐,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읏!" 짧은 비명성이 헤냔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헤냔의 오른쪽 팔 윗부분에 검을 살짝 들이댔던 반이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비릿한 혈향이 번졌다. 언뜻 보기엔 살짝, 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살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희미한 혈향 가운데, 런스가 고함을 쳤다. "그만두십시오! 헤냔, 자네가 졌네! 가주님이 원했다면 자네의 검은 지금이라도 당장 바닥으로 떨어졌을 거야! 이젠 그만 둬!" "싫습니다!" 그 말과 함께 헤냔은 몸을 크게 틀어 반이 범위에서 벗어났고, 그 예기치 못한 말에 당황한 런스가 이번에는 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주님! 제발!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승부는 이미 끝났습니다!" 런스의 말에, 순간 반이 차갑게 입술을 들어올려 웃었다. 그 웃음에 오싹한 기운을 느낄 세도 없이, 입술을 들어 올린 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그 웃음보다도 더욱 잔인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가슴을 죄는 힘이 있었다. "싫다." 런스가 움찔했다. 어째서?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반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저 녀석의 손목을……." 그는 검을 가볍게 들어올려 헤냔 쪽으로 향했다. "……정말로 갖고 싶어졌다." ◀▷◀▷◀▷◀▷◀▷◀▷◀▷◀▷◀▷◀▷ "가주님!!" 런스는 그 대답에 놀라 버럭 고함을 쳤지만, 쉽사리 반과 헤냔이 서 있는 그 공간 안으로선 들어서지 못했다. 물론 헤냔은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다. 자신이 목숨만큼 아끼는 애제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나라의 기사이며 케이온 기사단의 귀여움을 한 몸에 독차지하는 후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열정과 순수로 모든 이의 근본이 되기도 하는 귀여운 소년 기사. 그런 아이의 '손목'을 자른다면.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라고 런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사로서 전부인 검을 뺏겠다는 이야기와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카르멘의 가주' 저스티스 카르멘이기 때문이다. 저 소년에게 반항한다고? 말도 안돼, 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스스로가 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할 수 있으면." 헤냔은 베어진 부위를 왼손으로 살짝 누르며 검을 들어 반 쪽으로 겨누었다. 그의 입에도, 반과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뺏어 보시지요." 말하고 있는 그의 눈가에 맺힌 건 분명, 단언하건대 오기였다. 반은 그런 헤냔을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생각이다." 말한 반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헛, 하고 당황할 틈도 없이 가까워진 반을 보는 헤냔의 몸이 깊게 흔들렸다. 그는 속으로 빌어먹을, 하고 낮게 중얼거린 후 검을 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큰소리를 친다해도 사라지지 않을,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가 아릿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반의 검을 막기 위해 단단히 태세를 갖추었다. 챙! 반이 휘두른 검을 살짝 막은 헤냔의 몸이 뒤로 서서히 밀렸다. 그 얇은 팔 아래 대체 무슨 힘이 숨겨져 있길래 이다지도 강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라고 검을 막은 헤냔은 생각했다. 검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데, 저 여유 만만하다 못해 굳세게 얼어붙어 있는 표정은 또 뭐란 말인가.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어, 헤냔은 온 힘을 다해 반을 밀쳐내곤 몸을 완전히 세웠다. 검을 반쯤 쳐들고, 단단한 눈매로 반을 노려보는 헤냔의 눈 꼬리는 위로 치켜올려져 있었다. 휘익! 검이 한차례 휘둘러지고, 그 가운데 헤냔의 몸이 뒤쪽으로 꺾였다. 검을 휘두른 이는 이번에도 반이었다. "크윽!" 낮은 비명성과 함께, 반의 검이 헤냔의 손목 부위를 공격했다. 사락, 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가운데 그의 검이 헤냔의 손목에서 가볍게 떨어져 나왔다. 뚝. 뚝. 뚝. 순간,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연습장에서 피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스산하게 울렸다. 헤냔은 어처구니없게도, 검을 든 손을 검으로 공격한 반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그 자세에서 자신이 내리치면 어떻게 막을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으나, 검을 떼어 놓는 반의 얼굴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거짓말처럼. 가면을 뒤집어 쓴 듯 차가운 그 얼굴에. ……소름이 돋는다. 반의 몸이 천천히 다시 다가섰다. 헤냔은 다시 검을 곧추 들고, 외쳤다. "당신은 분명 강합니다!" 그렇게 외친 헤냔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하지만 상대를 조롱하는 일은 그만 두시지요! 어째서 한 번에 끝내지 않아 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겁니까?" 헤냔의 질문에 반은 검을 조용히 들여다 보며 말했다. "…네가 내 검을 보며 히히덕 거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내가 전력을 다해 너를 베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잔인한 헤냔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른 다음,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반의 검이 다시 호선을 그렸다. "크윽!" 왼쪽 어깨 깃이 베어나가진 헤냔이 입술을 꾹 깨물며 소리를 참았다. 채 감당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아래 쪽을 향해 날아온 반의 검을 막기 위해 그는 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마치 거짓말처럼 움직인 반의 검 앞에선 그런 행동도 의미가 없다. 이번에는 옆구리살이 길게 베어졌다. 윽, 하고 다시 침을 삼키면서 신음을 막는다. 헤냔은 입술을 물었다. 솔직히 이 지경까지 저 남자가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다. 보통 기사들끼리의 경우에, 상대가 검을 떨어뜨릴 때까지 검투를 하는 한은 있어도, 누군가가 피를 흘릴 때까지 검투를 지속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검투는 기사 대 기사가 아니라 ,검사 대 검사의 검투다. "으윽!" 피가 줄줄줄 흐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피투성이가 된 헤냔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몸을 옆으로 꺾었다. 왼쪽 팔목 사이로 길게 피의 흔적이 그려져 있어 그의 고통을 짐작케 했다. 반은 그런 헤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뚜벅, 뚜벅 하고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은 무겁게 진중 했다. 이번에는 손목을 베는 것인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헤냔의 머리가 새하얘지는 동안에도 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막 검을 들어올렸고, 헤냔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바로 그 순간. 아마도 그 순간이었으리라. 헤냔은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존재감 없이, 정말로 존재가 없이 뒤에서 움직이는 자그마한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치 거짓말처럼 사뿐사뿐, 보지 않는 한은 그 기척조차 느낄 수 없으리 만치 조용히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거짓말같이 가뿐한 태도로, 마치 평소부터 준비했다는 듯, 신발이 내는 자그마한 마찰소리마저 줄이기 위해 신발마저 벗어 던진 금색 머리칼의 시종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눈이 불타오르는 것을, 뒤돌아선 헤냔만이 보았다. 아마도 반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헤냔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보는 자신마저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인데, 뒤돌아선 반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천천히, 카르멘 가 가주의 시종이 든 검이 올라섰다. 헤냔은 완전히 숨을 죽인 채로 그 모습을 보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4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4) 가네트(uznian) 03-11-24 :: :: 11562 휘익! 그 순간, 반의 몸이 거짓말처럼 뒤로 흔들렸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반이 어깨에 걸고 있던 커다란 망토자락이 뒤로 움직였다. "하앗!" 반이 뒤돌아 섰다는 것에 직감적인 두려움을 느꼈는지 검을 들었던 프란은 크게 기합성을 질렀다. 이 번 기회를 놓치면 실패다! 라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기척을 줄였던 프란은 검을 휘두르기가 무섭게 반응해 움직이는 반을 보고 숨을 죽였다. '젠장, 이 놈의 대마왕은 역시 뒤에도 눈이 달렸어, 빌어먹을!' 그러나 옷자락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 움직이는 그녀의 손목은 제어를 듣지 않고 반 쪽으로 날아들었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내둘러진 그녀의 검이 반 쪽을 향해 움직이는 순간, 들어올려진 반의 검이 그녀의 실버 블레이드를 막았다. 챙캉! 검의 비명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반의 무표정함을 본 프란이 뒤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반의 뒤에서 조용히 몸을 움직여 일어서는 헤냔을 보았다. '설마?' 그녀는 반의 뒤에 있던 헤냔이 일어서는 걸 보고 가만히 침을 삼켰다. 반은 힐끗 뒤를 돌아 헤냔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한 후 자그맣게 말했다. "저 녀석은 신경쓸 것 없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를 공격하든 말든 상관 없다, 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기사로서의 도리로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헤냔은 몸을 그대로 굳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프란 쪽을 향했다고 생각했던 반의 몸이 무섭게 움직여 헤냔에게로 다가왔다. 헤냔이 놀라 몸을 뒤로 트는데, 그의 검이 헤냔의 다리로 밀고 들어섰다. 쉬익! 반이 몸을 틀어 헤냔을 공격하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뒤에서 프란의 검이 들어왔다. 뭐든 좋다, 일단 옷깃만 베면 끝이야! 라고 생각하는 무대포 형 프란의 공격은 그러나, 막아선 반의 검에 의해 저지 당했다. 프란은 속으로 치를 갈았다. 한 사람에게 검상을 입히고, 바로 뒤돌아서 뒷 상대를 막아내는 이 검이라니! 화가나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크아아아악! 이 괴물! 죽어버려라아아앗~! 너 같은 놈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돼~~!!!' 프란은 이를 악 물고 다시 반의 뒤에 있는 상대를 보았다. 어쩐지 낯이 익은 그 상대가 이번에는 검을 들고 천천히 반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반은 몸을 휙, 하고 젖혔고 바로 그 순간에 헤냔의 검이 날아들었다. 이잉.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다고 느꼈을 때, 프란의 검이 돌아선 반의 망토를 겨낭하고 향해졌다. 아무리 해도 몸을 벨 수 없다면, 반의 어깨에 걸쳐진 저 휘날리는 망토를 베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검이 움직인 그 순간, 반의 몸이 거짓말처럼 뒤로 꺾이지 않았다면 프란이나 헤냔의 공격은 성공했을 터였다. 쉬익, 하는 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반의 모습이 흐릿해진다고 싶었을 때, 이미 그는 헤냔의 뒤쪽에 서 있었다. 거짓말 같은 움직임, 지금의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멍청한 눈으로 자신의 뒷쪽으로 몸을 움직인 반의 뒷모습을 천천히 뒤돌아 확인한 헤냔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을 때, 반은 가차 없이 손을 휘둘러 그런 헤냔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퍼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천천히 헤냔의 몸이 쓰러졌다. 피를 흘리는 그의 온 몸에서 헉헉, 하는 소리가 났다. 반은 프란은 한차례 본 후 입 꼬리를 천천히 치켜올려졌다. 프란이 온 몸에 돋아난 닭살을 주체하지 못하고 '으아악! 저 대 마왕이 웃었어~~' 라고 고함을 치는 가운데, 반은 훗, 하고 다시 한 번 가볍게 웃은 후 헤냔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런스는 보았다. 헤냔을 일으키는 척 하면서, 반의 검이 쾌속으로 움직이는 것을.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 쪽으로! 크게 한 번 움직인 그의 검은 어깨에 드리워져 있던 자신의 망토자락 중 아주 작은 부분을 베어낸 후 가볍게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 집으로 들어섰다. 런스는 갑작스러운 그 모습에 놀라 눈만 크게 뜰 뿐 뭐라고 말을 붙이지 못했다. 왜 당신의 망토를 당신 자신이 베는 겁니까, 라는 질문은 입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로 입 안에서 빙빙 돌았다. 피투성이가 된 헤냔을 들어올린 반은 고개를 숙인 후 헤냔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손목은 다음에 받지." "……어째서?" 헤냔은 쿨럭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반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데려가라, 런스." "가주님. 왜……?" 런스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하마터면 왜 헤냔의 손목을 자르지 않는 겁니까, 라고 물어볼 뻔 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 소년 가주의 사전엔 '적당히' 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도 간단하고 간단한 그 사실을. 아무리 그에게 소중한 제자이자 후배라고 해도, 그 따위 것에는 상관하지 않을 남자임을. "데려가라고 했다." 런스는 읏, 하고 중얼거린 후 얼른 다가와 헤냔의 몸을 받쳐 안았다. 헤냔은 떨리는 눈으로 한차례 반을 보았다. 완벽한 패배. 온 몸을 잠식하는 절망감에 그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당황치 않고, 기사로서의 도리를 포기한 뒤에서의 공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저 남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열등감이 그의 내부를 차지했다. 왜? 라는 질문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를 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반은 런스가 헤냔을 운반하는 동안 뒤에서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던 프란에게로 다가가, 자그맣게 고개를 숙여 말하고 있었다. "1000만 케트는, 저녀석들이 나가고 나면 주겠다" "엥?" 갑작스러운 그 말에 프란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라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뻔 한 프란의 눈이 크게 뜨여진 건 찰나였다. 반의 손에는 자그마한 청색의 옷조각이 본 그 찰나의 순간, 프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그건?" "네가 벤 거다."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반이 그렇게 말했다. 프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반이 내미는 그 청색의 옷자락을 받았다. 자신의 검이 무엇도 베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베어졌다는 것인가? 프란은 눈을 크게 뜨고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늘거리는 푸른빛의 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반의 옷자락이었다. 프란은 떨리는 손으로 그 한 조각의 천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옷자락을 받아든 바로 그 순간에. 런스가 헤냔을 부축한 채로 프란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수치로 반쯤 감긴 눈을 가만히 뜨고 있던 헤냔의 눈이 갑자기 확장된 것은 아마 그 순간이었으리라. 푸른 천 조각을 두 손에 꼭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는 소녀가 보였다. 살짝 쥔 천 조각이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 반을 앞에 두고서 쥐고 있던 검마저 챙, 하고 떨어뜨려버린 그 소녀. 반의 앞에 선 채로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 매면서, 이 천조각이 생긴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소녀를 향한 헤냔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의 내부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환영이다, 라고 속삭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솟아오르는 어떤 외침을 참지 못해 헤냔은 자신을 부축하는 런스의 재촉에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항상, 그래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떠올린 추억 속의 사랑. 어린 날의 사랑. 어린 날, 유일하게 맘에 두었던 소녀. 어린 날의 그 바보 같았던 고백속에 언제나 서 있는 금색 머리칼의 소녀. 그 모든 것에 투영되는 여인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 헤냔의 입이 천천히, 그리고 가만히 벌어졌다. 알고 있어, 프리나? 작은 질문이 속에서 터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바랬던 것은……. 언젠가 반드시 기사가 되는 것이었어. 그리고……. "……나?" 그리고……. "……리나?" 언젠가 반드시. 언제인가 반드시. ……너를 만나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참 동안 말이 헛 나왔다. 헤냔은 떨리는 입술로 눈앞에 선 사람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리 길지 않게 살아 온 인생에서 유일하게 머리 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남아있는 뚜렷한 잔상의 여인. 조금은, 아주 조금은 모질게 떼어 내보려고 했던 어린 날 추억 속의 그녀. 그리고 언제나 환상처럼 찾아왔었던 꿈 속의 그녀. 어느 날인가 왕궁 정원에서 거짓말처럼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던 그 소녀. 그 소녀. 그 소녀……. 그 소녀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프리나!!" 헤냔의 고함소리가 크게 울렸다. ◀▷◀▷◀▷◀▷◀▷◀▷◀▷◀▷◀▷◀▷ 내가 정말로 성공 한 거야? 프란은 반이 내민 푸른색의 옷자락을 가만히 감싸쥐며 속으로 그렇게 물었다. 믿을 수가 없다, 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심정은 정말로 그러했다. 믿을 수 없어, 라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검이 반이 옷자락을 정말로 베어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 "가주님, 저는……." "……1000만 케트는, 반드시 주겠다." '정말? 우와아아앗!!'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프란의 입이 헤∼ 하고 벌어지는 것을 보는 반의 입가에 가볍게 걸린 미소를 눈치챈 것은 이 공간에 있는 인간들 중 아무도 없었다. 반은 프란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려 런스에게 부축 당해 움직이고 있는 헤냔쪽을 향했다. 그 초록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향해. 꽤나 자질이 있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반은 저 헤냔이라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 때면 검을 섞게 해달라며 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녀석들을 모두 물리칠 정도인 그가 자진해서 그에게 검투를 요구한 것은 어쩌면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 시선을 돌린 반이 본 것은 멍하게 풀린 헤냔이 눈이었다. 헤냔의 붉은 눈은 오로지 한 지점을 향한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커다란 떨림을 보이는 그의 눈은 심할 정도의 감정의 기복을 담고 부르르 떨리고 있어 반이 보기에도 무엇인가 굉장한 것을 본 듯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헤냔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신이 건넨 그 푸른 옷자락을 쥔 채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시종, 프란 프리텐 쪽이었다. "……나?" 자그맣게, 헤냔이 내는 목소리가 들려와 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리나?" 텁텁하게 갈라진 헤냔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종은 푸른색 옷자락을 소중히 옷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다가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움찔한 듯 싶었다. 프란도 그제서야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헤냔의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다. "프리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헤냔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 "……." 프란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헤냔을 보았다. 프리나, 라고 크게 외친 그 소년이 애절할 정도의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음을 프란은 순간적으로 느꼈다.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애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 눈에 프란은 순간적으로 몸을 크게 떨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성도 싶은 깊은 붉은 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다. "프리나! 프리나! 프리나―! 프리나!!" 크게, 크게, 크게. 계속해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이름. 프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었다. "헤냔! 왜 이러나?" 런스는 당황한 듯 헤냔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 순간, 프란의 몸이 크게 경직했다. 여태까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여태까지 반을 겨냥해야 한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저 소년. 저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 저 소년이 지금 내 이름을 불렀어? 「프리나.」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여자애는 남자보다 강해질 수 없어, 라는 말 때문에 단단히 미운 털이 박혔었던 한 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헤냔. 헤냔 드 키에르. 그 이름이 떠오름과 동시에, 프란의 몸이 다시 한 번 경직했다. "프…… 리나……." 미친 듯이 부르다가 어느 순간 기운이 다한 듯 마지막으로 조그맣게 프리나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듯 한 번 부른 헤냔의 눈꺼풀이 슬그머니 내려온다 싶더니, 그만 온 몸이 축 하고 늘어졌다. 런스는 당황한 듯 그런 헤냔을 몇 번 흔들다가 슬그머니 등에 업었다. 그는 반을 향해 실례했습니다, 라고 말한 후 가차 없이 몸을 돌려 헤냔을 끌고 나섰다. 그를 질질질 끌고 나가는 런스의 입가에서는 투덜거림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프란은 멍한 눈으로 런스의 등에 업혀 나가는 헤냔을 보았다. 초록색의 머리카락은 마치 신록을 머금은 듯 선명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 색의 눈동자는 마치 불꽃을 머금은 듯 언제나 넘실대고 있었다. 카세타로 간다, 라고 말하던 날 눈물을 흘렸던 그 아이. 그 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됐든 헤냔은 수련 기사단을 떠나던 날 울었다. 그리고. 지금 저 쪽에. 어린 날의 기억 중 한 부분이 소년이 있다. 프란은 하아, 하고 깊게 심호흡 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고개 들어 그녀가 낮게 숨을 쉰 그 순간이었으리라. 마치 기다려다는 듯 작게 목소리가 울린 것은. "…프리나가 누구냐." 그것은, 반의 목소리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5) 가네트(uznian) 03-11-24 :: :: 10413 "프리나라뇨? 하, 하하하." 프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반을 향해 반문하듯 말했다. 고개를 갸웃해가면서,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프란의 뒤통수로는 그러나 채 숨기지 못한 당혹감으로 인해 셀 수 없는 무수한 땀이 샘솟고 있었다. 프란은 어정어정 뒤로 발걸음을 옮겨가며 반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려고 애썼다. 사실을 말하는 순간 바로 교수형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뒤로 빼내는 프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반이 한 발자국, 두 발자국씩 가까이 가까이 다가 오는 이 악몽 같은 상황에 숨이 턱턱 막혀서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꾸욱 하고 참으면서 물러서는 프란의 두 뺨은 당혹감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 가에는 뒤통수와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반이 한 질문을 모른 척 하려고 했지만,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는 건 감정에 관해선 꽤나 둔한 편인 반조차 눈치챌 정도였다. 반은 피식, 가볍게 한 번 웃음 후에 프란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언제나 그렇듯 읽을 수 가 없기에 더더욱 흠칫한 프란은 하하하, 하고 어설프게 한 번 웃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웃음으로 어떻게든 반의 저 살인적인 눈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오산! 다가오는 반의 눈매는 매섭고도 매서웠으며 매처럼 날카로워 프란같이 연약한 소녀(...)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다. 프란은 심장이 바짝바짝 죄어드는 느낌을 숨기려고 다시 한 번 하하, 하고 웃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는 척 했다. "아아, 아까 전의 그 싸움 때문일까요? 이 주변 열기가 아주 화끈! 달아올랐었어요. 그렇죠? 아하하하하!" 프란은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면서 하하핫,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한 번 반의 눈치를 슬쩍 본 그녀는 흠칫했다. 반의 인상은 조금도 펴지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 하하하." 다시 한 번 어설프게 웃어본다. "……." 그러나 이 썰렁한 상대는 여전히 침묵. 억지로 웃고 있는 프란의 심리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냉묵한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는 반의 얼굴에, 프란은 뒤통수를 슬슬 긁으며 다시 웃었다. "하, 하하하하하……." "……." "하……." "……." "……험, 험험." 프란은 아무리 웃어도 반이 반응이 없자 민망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열심히 중얼거려도 보고, 손짓발짓 다해가며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고해도 반의 눈초리가 풀릴 리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빤히, 정말로 빤히 바라볼 뿐인 반의 눈. '허억,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마! 이 대마와아아아앙!' 깊은 그 눈은 소리없는 절규를 내지르는 프란 쪽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턱 하고 멈추었다.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 선 반이 프란을 향해 가볍게 웃어보였다. 프란의 눈에는 그것이 절대로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게 문제지만. "……프리나가 누구냐." "프, 프리나라뇨? 허어, 저는 모르는 이름입니다!" 프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또 모른척을 했다. 일명 시치미 떼기, 한 마디로 내숭 작전이다. "……그런 것 치고는 너와 이름이 좀 많이 비슷한 것 같군. 너를 아주 지그시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던데 말이야." 반의 말에 프란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긁었다. "그, 그런가요? 벼, 별로요." '제, 젠장할!' 반은 다시 한 발자국 다가온 후 프란이 슬금슬금 물러서는 벽에 지그시 손을 댔다. 프란이 흠칫해서 몸을 돌리는데, 반의 손이 프란의 어깨를 꾹 눌렀다. 반항할 수 없는 힘에 쿨럭, 하는 소리마저 낼 지경이 된 프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 모릅니다." "모른다고?" 프란이 얘기하기가 무섭게 반이 바로 되풀이했고, 프란은 자신의 어깨를 누른 반의 눈을 지그시 올려다보며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모릅니다!!" "……저 헤냔 드 키에르라는 녀석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은 그 말에, 프란은 순간적으로 온 몸에 닭살이 오른 듯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다, 다, 다, 다, 닭살이다아아앗!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느끼해진 거야? 괜히 시온놈하고 사촌간이 아니었어!!' 다른 사람이 봤다면 느끼하다, 라는 느낌보다는 무서워, 라고 느꼈을 반의 태도에도 프란은 하하하하, 하고 웃으며 다시 몸을 빼냈다. "몰라요." 헤냔 드 키에르. 그리운 어감일지도, 라고 낮게 중얼거리면서 프란은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모릅니다." 속으로 많이 찔리면서도 프란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만약 헤냔이 그녀를 부지 않았다면, 아마 프란은 죽을 때까지 그 소년을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프란에게 있어 과거 헤냔이라는 존재는 그저 '여자'를 무시했던 녀석, 여자는 기사가 되지 못한다, 라는 짜증나는 말로 자신을 화나게 했던 그런 녀석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헤냔의 현재 모습을 보고 그를 알아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니다, 라는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내부에 차지하는 한 사람의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그 반대의 경우도 항상 같은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헤냔이 프란을 아주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란이 헤냔을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동경하는 마음이 온전하게 되돌림 받는 것은 아니다. "……." 반은 프란의 답에도 여전히 그 포커 페이스를 바꾸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볼 뿐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빠져버릴 것 같은, 그의 입에 머물린 작은 미소. "……다시 한 번 묻겠다. 헤냔 드 키에르와, 너는 정말로 모르는 사이인가?" "네." 매정하게 프란이 입술을 떼어냈다. 순간, 반이 웃었다. 그는 하하, 하고 짧게 웃은 후 자신을 보는 시종의 눈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군. 네 말을 시험해보아도 되겠지?" "예? 시, 시험이라니? 뭐, 뭘요?" '이 대마왕이 또 뭔 짓을 하려고 이래?' 프란이 경악해서 바라보는 가운데, 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헤냔 드 키에르……." 그런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프란의 입술은 완전히 얼어있었다. '마, 망했다!' ◀▷◀▷◀▷◀▷◀▷◀▷◀▷◀▷◀▷◀▷ "……아아."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헤냔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반짝, 하고 눈을 떴다. 그는 희미하게 눈을 떠 몇 번 깜빡인 후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한 번 둘러보다가, 가만히 천장을 보았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냄새. 익숙한 모든 것들이 보여서, 그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함께 하는 기사들의 공간, 다치거나 치료받을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공간을 찾았다. 런스와 처음 검을 섞은 날, 주체할 수 없어 날뛰다가 무릎을 다친 날에도, 의견의 마찰이 심했던 동료와 검투를 했던 날 어깨에 여린 검상을 입었던 때에도, 그는 늘 이 곳을 찾았었다. 기사들이 찾는 작은 쉼터 같은 곳. "괜찮아, 키에르군?" 그 공기에 안심한 헤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데, 저 멀리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누워있던 헤냔의 몸이 굳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 아나?" 자그마한 헤냔의 목소리에, 헤냔을 불렀던 그 존재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나' 라고? 멀쩡한 이름 두고 그따위로는 부르지 말아주겠어, 키르?" "……너야말로." 헤냔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금 전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환상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 자리에서 본 건 분명히 그녀였다. 프리나, 프리나 프리텐! 아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미칠 듯이 부르고 부르고 부르고……. 이름만을 죽도록 부르다가 그만 푹 쓰러져 버렸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에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그만 이름만 죽도록 부르다가 푹 쓰러져 버렸지. 헤냔은 씨익, 쓴웃음을 머금으며 베게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떠오른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저스티스 카르멘의 얼굴. 그 얼굴을 떠올린 순간,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늘로. 그의 내부에 있던 하나의 순수가 깨졌다. '등 뒤에 있는 상대는 찌르지 않는다.' 그가 지켜왔던 것. 작은 원칙이었지만, 분명 깨졌다. 그것은 기사로서 최소한의 선. 그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누군가가 지켜야한다고 못박은, 순수(循守)였다. "이봐, 키르. 뭔가 일이 있었어? 대장님이 업고 와서 내려놓은 이후로 계속 이상한 이름이나 불러대던데 말이야." 헤냔은 자신의 머리맡에서 멀뚱히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푸른색도, 초록색도 아닌. 그 두 가지가 절반 정도 섞인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언제나 지겹도록 봐오지만, 꽤나 수수하게 차려입고 다녀서인지 잘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이봐, 아나." 헤냔은 그런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그 따위로 부르지 말랬다, 키르." 헤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나이스!! 말했을 텐데? 나는 키르가 아니라 헤냔 드 키에르다. 부르려면 헤냔이라고 불러." "흐응, 먼저 '아나' 라고 부르는 건 너야. 너도 나를 아나이스 폰 그란젤이라고 불러라. 그럼 난도 얼마든지 헤냔 드 키에르라고 불러주지, 기사양반." 헤냔의 앞에 서서 틱틱거리는 사람은, 헤냔보다 5∼6살은 많아 보이는 아가씨였다. 그다지 아름답다, 라는 느낌은 주지 않는 아가씨였지만 수수한 얼굴에 건강한 웃음이 깃들어 있어 항상 싱그럽다는 느낌을 주는 여인이다. 헤냔이 기억하는 한, 이 기사단에 문턱이 빠지도록 드나드는 유일한 아가씨이며, 동시에 기사단에서 여자 취급을 못 받는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다. 케이온 기사대원이 레이디에 목숨을 걸고 레이디! 오오, 레이디! 라면서 가끔은 보기 싫은 추태도 부려대지만 절대로 이 여자, 아나이스 폰 그란젤 앞에서만은 조용하다. 아나이스는 결코 기사단에서 '여자' 라고 불릴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이봐, 헤냔. '프리나' 가 누구냐? 혹시 짝사랑 상대?" 잠꼬대를 해대던 헤냔의 말을 다 들은 듯, 아나이스가 놀리듯이 물은 말에, 헤냔이 발끈했다. "시끄러워! 그런 거 아냐!" "흐응, 꼬맹이한테도 짝사랑 상대가 생겼다 이거냐? 호오, 몇 살? 동갑? 아니면 연하?" 순간, 헤냔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헤냔은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어린애, 하는 말과 함께 쯧, 하고 혀를 찬 후 헤냔을 몇 번 쿡쿡 찔러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나는 마이 달링한테 가보겠어. 검상이 난 곳은 내가 깨끗이 소독해놨으니까 기운 나면 나가라, 꼬맹아." "……." 헤냔은 얼굴을 붉히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훗, 하고 가볍게 웃은 후 발을 옮겨 바깥으로 나갔다. 아나이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헤냔의 입술이 움직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니야, 아나이스." 헤냔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동갑도 아니고, 연하도 아냐." 그는 베개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잔상처럼, 거짓말처럼 떠오르는 사람의 얼굴이 있다.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아마도 그 것은 '시종' 이 서 있었던 자리인 것 같은데. 옷도 분명 평범한 귀족자제의 옷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왜 프리나가 카세타에 있는 것일까. 세이피안도 아닌, 카세타에. 헤냔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든 것은 다시 한 번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헤냔은 다짐했다. 다시 한 번, 카르멘 가를 찾아가기로. 그것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겠지만 상관없다. 헤냔은 눈을 꼭 감았다. 어린 날의 프리나, 긴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남실거리며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생각난다. 헤냔은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보았다. "아나이스, 사실은." 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프리나는, 나보다 1살 연상이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6) 가네트(uznian) 03-11-24 :: :: 8576 "……크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우아아아아∼ 우워워워워워워워∼ 이이이익∼∼." "……프란,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내줘." "크아아아! 우아아아악! 이이이이! 우워워어워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내 달라니까." 시온은 침대에 마구잡이로 머리를 박으며 인간이 낼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는 프란을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프란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고로, 시온의 말에 대답해줄 정신이 있을리가 없었다. 프란은 입술을 꾹꾹 깨물면서 침대에 몇 번이고 머리를 박아서 시온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시온은 미친 듯한 소리를 내지르는 프란의 고함에 귀를 막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 나갔다 왔더니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프란의 상태가 영 아니다. 아니, 오늘의 프란은 거의 발작 상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시온은 침대에 머리를 박으며 몬스터의 소리를 내고 있는 프란의 어깨를 조심히 감싸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 괜찮아. 이 오라버니의 넓은 어깨에 푹 안겨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히 말……." 퍼억! 말할 것도 없이, 시온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프란이 날린 펀치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프란은 묵묵히 시온의 입에 주먹을 날린 후 고개를 푹 떨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헤냔 드 키에르라는 녀석부터가 그랬다. 시온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프란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했다.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형님 때문이야?" "……." 프란은 말 없이 입술만을 씹을 뿐이었다. 시온은 어쩐지 서글퍼지는 것을 느꼈다. '하고 있는 장난은 그만둬' 라는 사촌형의 한마디에 여지까지 재미있게 놀고 있던 일에 찬물을 끼얹게 된 것만 해도 서러워죽겠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는 바로 그 사촌형 때문에 인간이 낼 수 없는 소리를 내가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시온 아일린." 어느 순간, 프란이 작게 입을 열어 시온의 이름을 불렀다. 시온은 깜짝 놀라서 그런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이피안 기사단의 10계명이 뭔 줄 알아?" 그녀는 방의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온은 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란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긁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에게 말해주듯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대듯 하나하나 말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첫째,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둘째, 황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셋째, 상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넷째, 레이디에 대한 예의. 다섯째, 청렴결백. 여섯째, 검을 숭상하는 마음. 일곱째,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의기. 여덟째……." 프란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먹을 꾸욱 하고 쥐며 말을 뱉어냈다. "……상대의 뒤를 치지 않는 정당함." 시온은 힐끔, 말하는 프란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우리 자기 기분이 어때∼' 라는 말을 하면서 프란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안 그래도 기분 더럽던 프란의 기분을 더더욱 더럽게 만들어 놓은 이 은색 머리카락의 소년은, 오렌지색 머리칼의 소녀가 오늘따라 영 기분이 저조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의 눈치를 더더욱 슬금슬금 보았다. 프란은 피식, 김빠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그녀의 입가에 한 가득 번져나간다고 생각했을 때, 프란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아홉째, 적을 만났을 때 죽는 한이 있어도 도망가지 않는 것. 열 번째는 상대에 대한 관용." 시온은 여전히 말 해 나가는 프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아야 자신이 도움을 줄텐데, 이 고집센 소녀는 도무지 자신에게말 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늘 문제다. 프란은 눈을 들어 시온을 보았다. 시온이 움찔하는데, 프란의 말이 가만히 이어졌다. "……수련 기사단에서는 그걸 순수(順守)라고 불렀어. 기사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자,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랄까. 뭐, 그런 거였지.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걸 깨뜨린 적이 없었는데." 시온은 '에엑? 거짓말!'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프란의 눈이 너무 진지했다. 프란은 입술을 살짝 들어올려 짧게 미소지었다. "돈을 위해서 순수를 버린다……."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샤님이 아시면, 날 죽도록 패겠지……." '아샤?'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이름에 시온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그게 누구야? 라고 묻기에는 역시 프란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시온은 자신의 소심함을 속으로 원망하며 프란을 보았다. 그는 조금 떫은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도울 일 같은 거 없어?" 그 말에 프란이 크카카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우웨, 하는 소리를 내며 시온을 보았다. "됐다, 됐어. 내가 너한테 무……." 말하려다 말고 프란이 움찔했다. 그녀는 갑자기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시온을 뚫어지게 보았다. 놀란 시온이 흠칫하자, 프란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아일린 가의 사람은, 카세타 왕궁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냐?" 그 질문에 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으응, 괜찮을 거야. ……뭐, 괜찮지 않아도 황궁에는 '그 여자' 가 있으니까 나를 문전박대하진 않겠지." "그 여자? 흐응, 어련하겠어. 천하의 바람둥이씨." 시온은 비꼬는 듯한 프란의 어조에 놀란 듯, 변명하듯 말했다. "아, 아냐! 난 여자 다 정리했어! 내가 말하는 '그 여자' 는 키네세스 제 3공주 라고!" "에? 물빛의 레이디?" "그래그래!" 시온은 말이 통한다, 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박수를 쳤다. 그러나 프란은 입꼬리를 쓰윽 들어 올렸을 뿐. "그 여자랑 네가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프란의 질문에 시온이 가볍게 웃었다. "간단하지. 그 여자는, 형님을 좋아하거든." 프란은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정도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시온의 입으로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프란은 쳇,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후 시온의 입을 빤히 보며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그 여자는 내가 형님의 사촌동생인걸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가면, 나한테 잘보이려고 아주 환대를 하지." "흐응, 그런 건가?" "그런 거다. 아마도 내가 그 여자랑 만난 횟수가 형님이 그 여자를 만나는 횟수보다 많을 거야. 아마도, 지만. 형님은 그 여자한테 별로 관심 없거든." "……." 프란은 잠시 시온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하아, 하는 소리와 입을 열었다. "너." "응?"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냐?" 프란의 진지한 목소리에 시온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물론! 맡겨만 줘! 제발 맡겨줘!' 속에서 온갖 환호가 들끓어 올랐지만, 시온은 내심 점잖게 말했다. "흐음? 들어주면 뭐 줄 건데?" "……." 프란이 아무 말 없이 빤히 노려보자, 시온이 움찔했다. 그는 얼른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됐어. 부탁이란게 뭔데?" '젠장, 난 정말 이 녀석한테는 너무 약하단 말야! 이래선 남자로서 매력이 없잖아! 바람둥이 시온의 이미지가 이렇게 망가지누나. 이래서 한 여자한테 매이면 꼴 사납게 된다는 건가.' 스스로를 책망하며 시온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진지한 눈으로 시온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헤냔 드 키에르." "엥?" 갑작스러운 이름에, 시온이 놀란 듯 반문했다. "기사단…… 뭐였지? 런스……? 하여튼 그런 사람이 있는 기사단인 것 같은데……." 시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런스 카르멘 말하는 건가? 케이온 기사단?" "아아, 그래, 그거. 케이온 기사단에 있을 거야. 헤냔 드 키에르한테 말 좀 전해줘." 순간, 시온의 인상이 살풋 찌그러졌다. "헤냔 드 키에르? 남자냐?" "그래." 시온의 인상이 더더욱 망가졌다. "그래, 전할 말은 뭔데?" "……모른 척 해." "에?" 다짜고짜 튀어나온 모른 척 해, 라는 말에 시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냈다. 프란은 시온이 무슨 소리를 내든말든 아랑곳않겠다는 의지인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앞으로 날 좀 모른척 해줘.... 그게 전해줘야할 말이다." 프란의 말에, 시온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는 웃는 얼굴로 프란의 어깨를 툭툭 치며 활짝 웃었다. "걱정마, 걱정마! 전해줄게! 내일당장."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게 개어 있었다. 그런 시온을 향해, 프란이 중얼거리듯 한마디 더했다. "……프리나가." "에?" "……프리나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다, 라고 하면 알 거야." 시온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그는 프란의 어깨를 두 어번 치며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전하지." ------------------------------------------------------ 악덕연재의 대명사로 욕 엄청나게 먹고 잠수함이 부서졌느니 사망했느니 수능을 쳐서 그렇다느니 말이 많았던 가넷입니다;; (어제에서야 삼룡과 라냔의 리플사건을 알았습니다;; 라니안의 리플..;; 쿵쿵따... 쿨럭; 정말 하셨더군요;ㅁ;) 아마 오! 나의 주인님 카페에 들어가면 카페 주인님이신 히메이님을 위시한 사시미파 회원님들께 포 뜨이겠지요;; 차마 못들어가겠습니다;;;; (리플 달아놓은 거 봤습니다ㅠ_ㅠ) 어찌되었든 저번 연재 분량까지 올렸습니다. 내일부터는 별로 안되는 비축분(기대하셨나요, 혹시?;; 폭탄 만들어 놨을 거라고?;;;)으로 차곡차곡 올릴게요. 피 많이 봤던 저인지라, 이제부터는 한편씩이라도 매일매일 올리기로 했습니다.; 자, 내일 뵈어요^ㅡ^=+=+=+=+=+=+=+=+=+=+=+=+=+=+=+=+=+=+=+=+=+=+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1) 가네트(uznian) 03-11-26 :: :: 11092 PART 13: 반란군(叛亂軍) "헤냔 드 키에르, 누가 찾아왔다." "누가?" 반과의 검투에서 꽤나 많은 검상을 입었지만 그에도 아랑곳 않고 아주 열심히, 정말로 열심히 검을 갈고 닦고 있던 헤냔은 누군가가 자신을 면회 왔다는 동기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는 쉽게 찾아올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헤냔은 살짝 시선을 돌려 기사단 출입구를 본 후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곤 검을 내려 놓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으려 했으나, 정원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고 도로 수련장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어디에선가 인영이 불쑥 튀어나와 헤냔의 앞을 가로막는다. 갑작스러운 그 등장에 놀란 헤냔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데, 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여어." 가볍게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헤냔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를 막아선 것은, 그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긴 하지만 분명 초면이다. 흐르는 듯한 은색의 머리칼과 깊은 진초록의 눈동자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헤냔은 그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어 흠칫 얼굴을 굳혔다. 어디서 본 듯 했더니 바로 저스티스 카르멘, 그 남자의 얼굴과 닮았다! "누구시죠?" 헤냔이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방문객, 시온 아일린은 훗, 하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자신은 나름대로 멋있어 보이려고 한 행동이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으윽, 느끼해! 라는 반응 이상을 이끌어내기는 불가능했다. 시온은 그런 의미 없는 행동(머리를 쓸어 넘기는)을 하면서 헤냔의 얼굴을 꼼꼼히 보았다. 꽤나 앳된 듯한 그 얼굴은 나름대로 곱상했기 때문에, 시온은 만약 프란이 이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 듯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다만 이 놈을 반쯤 죽여 놨을 거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시온. 네가 헤냔 드 키에르지?" 일부러 풀 네임으로 설명하지 않은 시온이 히죽 웃었다. 헤냔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만.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지?" "한 사람의 부탁을 갖고 와서 말이야." 시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곤 생긋 웃었다. "'날 좀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제발 모른 척 해줘.'" "……?" 밑도 끝도 없이 나온 그 말에 황당해진 듯, 헤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시온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프리나가 너한테 전해 달라고 한 말이다." "뭐, 뭐라고?" 시온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헤냔의 안색이 휙 하고 변했다. 그는 당황한 듯, 말을 끝맺었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라고 말하며 미련 없이 돌아서는 시온의 팔을 붙잡았다. 설마하니 이 남자가 프리나의 말을 갖고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헤냔이었다. 헤냔은 놀란 눈을 크게 뜬 채로 시온의 입술을 응시했다. 시온은 깊게 한 번 웃은 후, 헤냔을 향해 말했다. "분명히 전했다." 헤냔의 입술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부, 분명 본인한테 들은 말이겠지?" "그럼 누구에게 들은 말이겠냐." 시온은 흥, 하고 낮게 투덜거린 후 가차 없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헤냔이 당황함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을 돌린 시온은 저벅저벅 걸었고, 헤냔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런 시온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프리나…… 왜?" 시온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때까지, 헤냔은 몸을 부들 떨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그의 뒤켠에서 들려왔다. 헉헉,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였다. 그러나 멍한 시선을 시온이 돌아가는 쪽으로 쏟아 붓고 있던 시온은 그 숨소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그저 서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가 헤냔의 등을 따갑도록 세게 내리친 것은 바로 그 순간. "키르!" 팡! "윽?" 누군가가 등을 친 그 소리에, 헤냔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아진 곳에 선 것이 아나이스 폰 그란젤, 그녀임을 확인한 헤냔이 인상을 찌푸렸다. 헤냔은 팔짱을 지그시 끼고 말했다. "뭐야?" "……속보다." "뭐가?" 프리나의 그 전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잔뜩 심난해진 헤냔이 삐뚜름한 어조로 묻자, 아나이스가 헤냔의 팔을 질질 잡아끌었다. 놀란 헤냔이 뿌리치리도 전에, 아나이스가 작게 입을 열었다. "반란." "……뭐라고?" 순식간에 헤냔의 눈꼬리가 차갑게 굳었다. 아나이스는 헤냔을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발악인 모양이지. 저번에 격납고 사건도 그렇고 저번부터 심상치 않았잖아. 서남부에서 크게 한 번 무리가 일어났다는군. 지난 새벽에 난리도 아니었대. 오늘, 최종 진압에 들어갈 모양이야. 일주일 내로 결판을 봐야지, 썩을." 아나이스의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헤냔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카세타 내에서 반 카세타 세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아니던가. 제 3공주 키네세스의 생일 날 격납고에 불을 지르는 둥 이만저만 대담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짜증이 날 정도로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움직여서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던 놈들이다. 그런데 그 놈들이 본격적으로 들고일어났다? "귀찮아 지겠구만, 젠장." 아나이스가 투덜거렸다. 헤냔은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마, 아나." "호오?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하지, 키르?" "우리는 어차피 나라에서 주는 밥을 먹고 산다, 아나." "그건 나도 알아, 순진빵 키르." "밥을 먹으면 밥값을 해야지, 아나." "그건 그렇지, 키르." "……." "……." 말을 하다 말고 헤냔은 가만히 시선을 내려 아나이스를 보았다. 아나이스도 가볍게 시선을 올려 헤냔을 보았다. 순간, 헤냔이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지, 이런 유치한 짓." "……동감이다." 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그대가 승인할 거라 믿고 있소. 아무래도 반란군의 움직임이 심상찮소. 내일 중으로 입궁해 주시구려. 그리고 두 번째 제안 역시 그대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믿겠소. 키네온 L. K. 카세타- 」 어제, 런스가 전해준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은 반의 얼굴 위로 짧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오늘 아침 누군가가 전해온 다른 편지 한 장을 들어올려 그것도 한 번 훑었다. 「그대 역시 소식은 들었을 거라 믿소. 그대의 힘이 필요하오. 오늘 아침, 빠른 시간 내에 입궁 해 주길 바라오. 그대가 내 가신인 이상, 나를 배반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키네온 L. K. 카세타-」 반은 흥, 하고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가볍게 일어선 후, 곧 이 방으로 들어설 자신의 시종을 기다렸다. 그는 가볍게 눈을 치켜 뜨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효과가 금세 나타나는군. 자금줄이 끊긴 건 힘든 일이겠지." 중얼거리듯 말한 반은 침대에서 가볍게 일어섰다. 곧, 나지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어벙한 시종이 자신의 아침식사를 준비해 온 것이다. "들어와." 반은 낮게 말했다. 곧, 문이 열리면서 프란이 들어섰다. 프란은 어젯밤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쓱한 얼굴이었다. 프란은 반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고 들어와선 탁자 위에 하나하나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문득 반이 말했다. "……너, 내 옷깃을 베면서 뭘 느꼈나." '너 같으면 뭘 느꼈겠어? 이 빌어먹을 자식아.' 순간적으로 발끈한 프란은 그러나, 나오려는 욕지기를 속으로 억지로 눌렀다.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은 걸 느꼈죠." '느낀 게 뭐 있어? 느낀 게 있을 턱이 없잖아!' 물론 마음은 따로 논다. "구체적으로." '젠장할! 뭐가 그렇게 궁금해?' "하하하하! 때로는 뒤쪽에서 하는 공격도 괜찮다는 것을." '그 따위건 깨닫고 싶지도 않았다고!' "그래?" 반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볍게 미소를 띄우는 것을 보고 있던 프란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저 인간이 미소를 지으면 뭔가 불길해! 싫어어엇, 하고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반이 저벅저벅 프란 가까이로 다가섰다. 놀란 프란이 흠칫하는 사이, 반의 입술이 나지막하게 벌어졌다. "좋다, 너도 데려 가주지." "어딜요?" 꺼벙한 어조로 프란이 물었고, 반은 가벼운 얼굴로 대답했다. "즐거운 곳에." 반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어찌됐든 온 몸을 엄습한 불안함에 순간 프란은 치를 떨었다. '뭐, 뭐, 뭐야? 이 대마왕, 또 뭘 꾸미는 거냐고!' 프란의 소리 없는 비명이 오늘도 번져 나가는 카르멘 가는 평화로운 분위기다. 오늘도 역시 새는 지저귀고, 햇살은 좋다. ◀▷◀▷◀▷◀▷◀▷◀▷◀▷◀▷◀▷◀▷ 반은 차분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챙겼다. 그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증거를 잡는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 확보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이긴 하지만. 반은 소매를 걷었다. 방금 전까지 '즐거운 것이라니요? 서, 설마 어디 음습한 곳으로 끌고 가서 죽이시려구요?'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던 시종은 '죽고 싶은가' 라는 자신의 한마디에 질겁하며 뛰어나가버린 차였다. 아마도 시종은 반 자신이 하사했던 실버 블레이드를 가지고 오리라. 반은 자신의 방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그가 문을 열자 호위를 맡는 두 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은 그런 그들을 쓱 하고 한 번 훑어본 후, 기나긴 복도를 한바퀴 돌아 한 층을 내려갔다. 그가 복도를 지나자 복도의 창문을 닦고 있던 하녀들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몸을 미세하게 떨며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는 그녀들을 무심하게 지나친 반은, 한 층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어느 방 앞에서 문득 멈춰섰다. 미색의 방문. 요란스럽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문 앞에 조각된 여러가지 표식들이 화려하게 얽혀 있다. 이 방 앞에 서 보는 것이 몇 번째인가. 반은 입가에 떠오르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나다." 문은 금세 열렸다. "가주님 아니십니까? 여긴 웬일이십니까?" 문을 열며 반가운 듯 웃어보이는 이는 갈색 머리를 가진 중년의 남자, 헤이튼이다. 그는 갑작스러운 반의 방문에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반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런 그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치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헤이튼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반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조카. 헤이튼에게 반은, 누나가 남긴 유일한 한 점의 혈육인 셈이다. 반에게 있어서도, 헤이튼은 외삼촌. 둘의 관계는 어찌보면 가장 가까울 수도 있는 친족이나, 헤이튼을 보는 반의 눈에는 일말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반을 보는 헤이튼의 시선도 역시 조카를 보는 외삼촌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헤이튼의 방 안에 들어선 반은 진중한 얼굴로 그의 넓은 방안을 한 번 훑었다. 반의 방보다 훨씬 화려하고 큰 헤이튼의 방. 반은 뒤에 선 헤이튼을 돌아보았다. 문득, 헤이튼은 등골이 오싹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무섭게 빛나며, 무언가 질책하는 듯한 빛을 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여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헤이튼의 나직한 물음에,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렸을 뿐." 헤이튼은 움찔했다. 반이 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가 결코 자신에게 재미있지 않을 것임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 소년은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니요?" 헤이튼은 애써 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반은 입술끝을 비틀어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것은 평소의 그가 짓는 냉소보다 훨씬 더 농도가 짙은,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반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듯 얘기했다. "......하리나스 백작 가의 여식은 예쁘던가?" 툭하고 내뱉어진 느닷없는 반의 말에, 헤이튼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헤이튼의 대답에, 반이 한 걸음 가까이 헤이튼에게로 다가왔다. 헤이튼이 그런 반의 눈을 마주보려는 순간, 반의 손이 올려졌다. 반의 손은 곧장, 헤이튼의 어깨로 내려왔다. 헤이튼은 조카의 얼굴을 보았다. 반의 눈매는 매의 그것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반은 헤이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입술 만을 움직여 나직히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헤이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반은 그런 헤이튼을 그대로 지나쳐, 문을 쾅 하고 닫았다. 혼자 남겨진 헤이튼은, 굳은 자세 그대로 멈춰 있다 한참만에야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오른손으로 훔쳤다. 으악, 9분 늦어버렸다;ㅁ;=+=+=+=+=+=+=+=+=+=+=+=+=+=+=+=+=+=+=+=+=+=+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8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2) 가네트(uznian) 03-11-26 :: :: 18149 여덟 개의, 수많은 술이 아래에 달린 커다란 깃발들이 서북풍을 타고 화려하게 휘날렸다. 여덟 개 중 절반은 검은색을 띄고 있고 나머지는 푸른색이다. 카세타의 상징인 위어울프가 찍혀 있는 그 깃발은, 이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평범한 이가 아닌 기사라는 것, 그것도 카세타의 기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상에." 그 깃발을 한참 보고 있던 프란은 크게 심호흡 했다. 갑작스레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어 안달이 난 기분이었다. 사방에 번진 이 자욱한 기운. 이건 전투의 기운이다. 도열해 있는 기사들. 햇빛 아래 번쩍이는 갑옷과 기. 빌어먹게도 아직 검을 잊지 않은 살갗이 저릿저릿하게 반응을 한다. 프란은 이마에 손을 대고 한차례 비볐다. 오늘 아침 '즐거운 곳에.' 라고 반이 어울리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프란은 반의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고, 가벼운 경장을 걸친 반이 자신의 푸른빛 도는 검을 허리에 차고 단신으로 말에 올라타면서 '너도 저기에 있는 말을 타라.' 라고 한 순간엔 이 미친 가주가 어디 으슥한 곳에 가서 자신을 생매장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반이 프란을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어디 으슥한 그늘진 곳이 아니라 그녀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카세타의 왕궁. 바로 며칠 전 크게 실례를 범한 적이 있었던 궁성의 경비병들은 반과 프란이 들어서자 90도가 넘는 각도로 꾸벅 크게 인사를 해왔다. "왕궁엔 왜요?" 프란은 옆에 있는 반을 향해 물었다. "시끄럽다." 뭐, 별로 프란도 친절한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왜요?" 프란의 거듭된 질문에도 역시, 반은 대답이 없었다. "……." 그렇게 프란이 떠들고 반이 침묵하는 사이 둘은 카세타 제 2궁의 정원에 도착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조금의 틈새도 없이 키스를 퍼붓는 햇빛의 사랑에, 카세타의 왕궁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런 왕궁의 정원에 런스 카르멘이 이끄는 국왕 휘하의 첫 번째 기사단인 케이온 기사단이 검은 기를 휘날리며 정렬해 있었고 바로 그 옆으로 국왕 휘하의 두 번째 기사단인 디센 기사단이 푸른 기를 날리며 서있다. 프란은 한참동안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느지도 잊은 채 뛰는 가슴으로 정렬해 있는 두 기사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기사단은 언제나 그녀의 로망.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검을 닦았던 프란이었기에,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기사단을 향해 일단 침부터 질질 흐르는 그녀였다. 뭔가에 홀린 듯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프란은 갑자기 아아, 하고 감탄어린 비명을 질렀다. 저 쪽 어귀에서 긴 머리채를 휘날리는 여기사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휘날리며 선 여성. "멋지다!" 프란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란의 눈길을 빼앗은 대단한 여기사님, 풍성한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던 그녀는 살짝 옆을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헤냔. 설마 저 사람이 카르멘 가주인 건 아니겠지?" 그 대단한 여기사님은 바로 아나이스 폰 그란젤 양이다. "그 설마야." 아나이스의 옆에 서 있던 헤냔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반이 아닌 프란에게로 향해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을 한 채,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끊임없이 시선을 또록또록 굴리고 있는 저 소녀에게. 모른 척 해달라고? 헤냔은 혼란스럽다. 그건 어째서일까. 네가 왜 여기에, 그 남자 옆에서 그런 옷을 입고 서 있는 걸까. 너에게 그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헤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나이스는 다시 헤냔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댄다. "으아, 말도 안돼. 너무 젊잖아? 아니, 저건 젊은 게 아니라 어리지! 너보다 기껏해야 두세살 위겠는데?" 헤냔은 아무 말 않았다. 아나이스는 꽤나 놀란 듯, 여기사의 품위를 마구 망가뜨리며(눈에 콩깍지가 씌인 프란에겐 그 품위없는 행동이 우아한 행동으로 변형되어 보였다는 게 문제다) 다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미끈하게 생겼잖아. 눈이 부실 지경이야." "……." 헤냔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하지 않았다. "얼굴이 주먹만 하잖아? 크아, 게다가 저 마른 듯한 살 위로 알맞게 잡힌 근육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게 여자 꽤나 울렸겠는데? 크으, 거기에 비하면 우리 헤냔은 남자다운 매력이 조금 덜하지. 솔직히 넌 아직 풋내가 난단 말이야. .....아하, 남자다운 매력하면 또 우리 달링이 최고 아니겠어? 그나저나 참 잘도 생겼다. 저런 얼굴로 검을 어떻게 휘두른다는 건지,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인데." 도대체 논지가 뭔지 알 수 없는, 게다가 앞뒤까지 하나도 안 맞는 아나이스의 말이 다다닷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나이스가 손바닥을 짝 치면서 뱉어낸 그 말들에, 헤냔은 한참만에야 음습하게 답했다. "……단장님께 이를 거다. 네가 딴 남자보고 소리 지르고 야단이었……" 나직한 헤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나이스의 손이 바람과 같은 속도로 냅다 올려졌다. 그리고 그 손은 약간의 틈도 없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헤냔의 머리를 무섭게 강타했다. "왜 때려!" 눈물이 날만큼 아픈 한 방이었으나, 진중한 분위기를 깨뜨릴까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헤냔이 소리를 쳤다. 그런 헤냔의 오른쪽 눈꼬리에 눈물이 한 방울 달려 있었다. 아나이스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헤냔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이야기를 했다. "……단장님께 얘기하는 날엔, 너 죽고 나 죽는 줄 알아." 헤냔은 꼴에 여자라고 그런 일에 신경쓰긴,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정말 속으로 중얼거린 거였다. 퍼어어억!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한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힌 헤냔 드 키에르군. "왜 그래!" 억울함에 설움이 북받힌 헤냔이 버럭 고함을 쳤다. "지금 '꼴에 여자라고' 하고 생각했잖아!" "윽." 모든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는 헤냔 드 키에르 군이었다. ◀▷◀▷◀▷◀▷◀▷◀▷◀▷◀▷◀▷◀▷ "기사단이랑 같이 뭘 하는 겁니까?" 프란은 옆에 있는 반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솔직히 이번에도 설명해줄 거라는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반의 대답은 생각 외로 빠르게 돌아왔다. "반란군을 토벌한다." 잠시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프란은, 한참만에 에엑, 하는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렸다. "반란군요?" 프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반은 낮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에서 내려섰다. 아까 전부터 갑자기 나타난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 때문에, 기사단은 조용한 가운데 긴장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모임이나 단체보다도, 반의 얼굴이 알려진 곳이 바로 카세타의 기사단이다. 원체 밖으로 나가는 걸 기피하는 반이라 타 모임과는 일절 접촉이 없었지만, 지금 이 기사단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르멘의 검술을 익히고 자라온 지라 반의 얼굴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카르멘의 검을 이은 이들에게 은근히 말을 전해 듣고 있었기에 그들이 지금 느끼는 긴장감은 꽤나 큰 것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다 해도 그들이 여태까지 익히고 닦은 검의 시발(始發), 가장 큰 줄기로부터 내려온 진수(眞髓)만을 익혀왔을 카르멘의 가주가 아니던가. 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는 고개를 숙인 채 반을 묵묵히 환영하고 있었다. 반은 속으로 살짝 냉소했다. 카세타 국왕의 요청대로 그는 지금 여기에 왔다. 그러나 달랑 그 자신과 시종만 온 것을 보면 국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 해도 유쾌해진다. "국왕 폐하시다." 그 때, 누군가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케이온 기사단과 디센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이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착, 착, 하는 소리를 내는 은빛의 갑옷들. 프란은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네 개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반은 기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는 것을 잠시 지켜본 후 다시 꼿꼿이 섰다. 프란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반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주님!" "……뭔가." 갑작스러운 옆구리 공격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할 뻔한 반은 얼른 정신을 추스르곤 물었다. 프란은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가주님은 무릎을 안 꿇으십니까?" "난 기사가 아니다." '오냐, 그래. 너 잘났다. 그래도 넌 왕의 가신이잖아?' 그러나 어차피 반을 향해 말해봤자 두 말하면 잔소리, 세 말해야 헛소리, 네 말하면 미친 소리라는 것을 아는 프란은, 말해야 뭣하겠냐는 심정으로 무릎을 굽히려 했다. 반의 목소리가 위에서 울려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무릎을 꿇지 마라." "……에?" 너는 그렇다치고 시종인 나까지 왜! 라고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프란이 묻자 반은 낮게 답했다. "너는 세이피안 사람이다. 카세타의 국왕에게 머리 굽힐 필요는 없어." 반의 대답에 프란은 헤에, 하고 낮게 속으로 중얼댔다. 하기야, 하고 속으로 묘하게 납득하며 프란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서고, 백 명이 넘는 두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이 부복한 채 있는 조금은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저 멀리에서 보이던 네 개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온다. 네 개의 그림자는 가까이 올수록 정확하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하나는 카세타의 국왕인 키네온이었고 둘은 국왕의 시종이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국왕이 친애하마지 않는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였다. 국왕은 저 멀리에서부터 반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반이 이번 청을 거절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오지 않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반의 눈에 띄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보이자 반색했던 차였다. 그러나 반의 바로 앞에 도착한 그는 멈칫하고 굳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반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키네온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 태도는 예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격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고개를 숙이는 그 순간에조차 눈은 내리깔지 않고 키네온을 쏘아보는 반에게선 현 국왕에 대한 존경심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옆에 있는 프란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이 싸가지 없는 놈.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국왕이잖아!' 프란의 손끝에서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와주어서 고맙네, 저스티스 카르멘 경. 그러나……." 국왕의 눈이 매섭게 위로 치켜 올려졌다. "……그러나 어째서 그대의 뒤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반란군이 일어났다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해도, 그래서 쉬쉬하는 가운데에서도 웬만한 카세타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카세타에게 숨기고 싶은 치부다. 그러나 얼른 숨겨야 할 그 치부를 없애기 위해 동원할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카세타의 모든 병사들은 현재 북쪽의 로이네트, 동쪽의 세이피안, 서쪽의 레키슈안과 맞대고 있는 경계지점으로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세 개의 국가들 사이에 끼여 있는 국가인 카세타에게는 병사를 움직이는데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한참동안 반란군의 존재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동맹국인 세이피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건국 초기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레키슈안, 야만족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저 추운 북부의 로이네트로부터의 공격을 지키고 있는 병력을 빼 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반란군을 현재 왕국을 지키는 기사단만으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왕이 선택한 카드가 카르멘 가였다. 카르멘 가 아래에 있는 병력만 빼 올 수 있다면 굉장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카르멘의 가주가 데리고 왔어야 할 병력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딱 한 사람 보이긴 한다. 금색 머리카락을 한 시종 복장의 소년. 그것이 전부다.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은 아는가?" 키네온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반란군의 수상쩍은 동태를 알려온 것은 남쪽 지방에서였다. 원래 반란군은 게릴라 전의 형태로, 그리고 격납고 폭발 같은 일들로 조금씩 신경을 건드리며 카세타 왕족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는 데에 치중해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어제, 이 반란군은 여태까지의 모든 움직임을 청산하고 갑자기 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국왕이 당황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 병사가 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란군이 아무리 많다해도 국가가 거느리고 있는 군인 수만큼은 되지 않을 것임이 자명했고 또한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병사들만큼 훌륭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레키슈안과 로이네트에서 병사를 빼올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아니, 빼온다 해도 문제였다. 레키슈안이나 로이네트의 국경과 마주대하고 있는 지점에서 수도까지는 적어도 5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반란군이 진격한다면 적어도 3일 이내에 수도에 입성할 것이 틀림 없다. 이대로라면 앉아서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카르멘 가주라는 작자가 데려온 것이 달랑 시종 하나라니. "알고 있다고? 그럼 도대체 자네의 식솔들은 어디에 있는가?" 키네온의 질문에, 반은 시니컬한 어조로 툭 하고 뱉어냈다. "저와 제 시종 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미안함도 담겨 있지 않다. 당연하지 않냐는 그 어조에 키네온의 얼굴에 당황과 분노가 떠올랐음은 당연한 일. "걱정 마십시오." 키네온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반이 말했다. 그는 싸늘한 은보랏빛 눈으로 차분히 말한다. "수하를 동원하지 않아도, 5일이면 끝납니다." 그 말에 키네온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사단은 침묵하고 있었으나 반의 말에 강한 반감을 가지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카르멘 가의 사람들조차도 반의 오만함에 조금 거북해질 정도다. "……자신이 있으신가요?" 그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앞쪽에서 흘러들어왔다. 프란은 흠칫 앞을 보았다. 키네세스다. 그녀는 누가보아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빛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달콤한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이봐, 공주님. 이건 티가 나도 너무 나잖아!' 프란이 속으로 투덜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키네세스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반은 키네세스의 말에 답하지는 않았으나 다물린 입술만으로도 키네세스는 만족할만한 답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살짝 한 걸음 물러서 아버지인 키네온에게 말했다. "어찌됐든 카르멘 가의 수장이 오셨습니다, 아바마마. 출병하시지요." ◀▷◀▷◀▷◀▷◀▷◀▷◀▷◀▷◀▷◀▷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헤냔은 화가 나 있었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첫째, 두말할 것도 없이 프리나 프리텐 때문이었다. 아니 대체가, 반란군이 일어났다는 샤로테에서 가까운 마을인 가로인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녀는 헤냔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던 것이다. 시온이라는 자가 그에게 전해온 언질에 따르면 프리나 역시 그를 알아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헤냔이 이동하는 내내 저 성격 더러운 카르멘 가의 가주 옆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프란을 보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인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랬다. 토벌대의 기수가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나 디센 기사단 단장 메이스가 아니라 저 저스티스 카르멘이라는 것. "이봐, 헤냔." 런스는 조금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헤냔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헤냔의 옆에는 아나이스 폰 그란젤 양께서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서 있다. "말씀하십시오." "도대체 뭐가 불만인거야?" "뭐가 불만이냐고 말씀하셨습니까? 저에게는 저스티스 카르멘 경, 그 사람 자체가 불만이라구요!" 그 순간이었다. "나도 네 얼굴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헤냔은 물론이고 런스, 아나이스도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들어서면서 툭 하고 말을 내던진 것이 다름 아닌 저스티스 카르멘, 반이었기 때문이다. 프란은 자신들이 들어서자마자 숨을 멈추는 세 사람을 보며 속으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거봐, 이 대마왕아. 네가 얼마나 성격이 더러우면 등장만으로 세 사람 얼굴이 저렇게 얼어붙은 동태마냥 변하냐고. 그러면서 프란은 힐끗 헤냔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순간, 헤냔은 지금의 상황을 잊고 프리나! 하고 부를 뻔 했다. 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내가 불만이라고 했나?" 조용히 나온 반의 말에, 헤냔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순간적으로 굴욕적인 그 때가 생각난 것이다. 정말로 손목을 베어버릴 듯이 다가왔던 그 차가운 은보랏빛의 눈이 지금은 훨씬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를 마주한다. 새하얀 그의 얼굴에 맴돌던 냉소적인 표정이 그 때와 겹쳐지면서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헤냔이었다. 헤냔은 나는 굽힐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당당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으아아악! 저 자식 돌았군! 아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헤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프란은 생각했고 '헤냐아아아아아아안!' 런스는 속으로 커다란 비명을 질렀으며 '미쳤냐, 키르!' 아나이스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헤냔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강인한 충동을 느꼈으나 무엇보다 반이 앞에 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조목조목 말을 해나가는 헤냔이었다. "첫째, 저는 당신이 기수가 되는 것이 불만입니다. 여긴 케이온 기사단장인 런스님이나 디센 기사단장인 메이스님도 계십니다. 그런데 대체 왜 당신이 기수인겁니까?" 헤냔의 목소리에 반은 조금의 동요도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첫째가 있다면 둘째도 있겠군." 헤냔은 그 덤덤한 목소리에 더욱 화가 나는 것을 느낀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언제 냉정을 잃는 걸까? "네. 둘째는 당신이 혈혈단신으로 왔다는 겁니다. 분명 폐하께서는 부탁하셨겠지요.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고 또 국방에 배치한 병력이 제 때에 오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신이 적어도 폐하를 받드는 신하라면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런스는 이제 헤냔의 목을 쥐고 흔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헤냔이 너무 솔직하고 곧은 성격이라 언젠가 크게 사고를 칠거라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성질이 왜 하필이면 카르멘 가주 앞에서 특히 이렇게나 폭발하듯 분출되는 것이란 말인가. 반은 한참, 헤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언제나 그렇듯 잔잔하고 깊다. 처음에는 당당하게 그런 반의 눈빛을 받아내던 헤냔이었으나,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뭐랄까. 반의 눈은 오랫동안 마주 보기엔 곤란하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현실감각이 사라지고 공중에 붕, 떠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점점 그 눈이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몸을 조르는 것 같은 기묘한 착각에 빠뜨린다. 이런 걸 카리스마라고 하는 건가. 그러다 어느 순간 반이 말한다. "내가 온 것 이상의 성의 표현이 있나." 헤냔은 발끈했다. 이다지도 건방진 말투라니.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그래, 너 잘났다니까.' 프란은 한숨을 쉬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프란은 자신의 어린시절 추억 속 인물 중 하나인 헤냔이 이젠 그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저런 식으로 가주의 신경을 벅벅 긁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저 잘난 척 밖에 없으니 그만 좀 닥치고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 헤냔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말을 평소 자신이 마음속으로 틱틱 뱉어내고, 때로는 반의 면전에서 입 밖으로 내기도 한다는 자각이라곤 조금도 없는 프란이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당신 하나가 수십의 병력과 맞먹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조용한 대꾸에 헤냔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반의 눈은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저건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일까. 헤냔이 눈만 빛낼 뿐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헤냔이 불쌍했는지 아나이스가 헤냔의 편이 되어 조금 거들어 준다. "……그 말, 진실이길 빕니다. 카르멘 가의 수장이시여." 아나이스의 말은 조금 삐딱하긴 했으나 격식을 갖추었다. 반은 헤냔에게로 주고 있던 시선을 아나이스에게로 돌렸다. 불행하게도, 그 시선에 헤냔의 편을 들어주던 아나이스는, 마음 속으로 반에게 완전히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얼굴이 확하고 붉어졌다. 아까 반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느니 미끈하다느니 법석을 떨었던 만큼, 역시 그녀도 여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잘 생긴 걸까! 크아! 여자의 로망이구만, 로망!' 아나이스는 헤냔이 살기 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옆에 런스 카르멘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5일이면 끝난다." 그런 아나이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반이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는 런스를 향해 짧게 뱉었다. "따라와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9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3) 가네트(uznian) 03-11-26 :: :: 7511 반란군이 왜 일어났을까. 런스는 반의 뒤를 따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현 국왕인 키네온이 요 몇 년 간 제대로 된 정사를 돌보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란이 일어날 만큼 폭정을 했던 적은 없다. 반란은 최근 석 달 사이에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상한 것은 도저히 그 명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왕가를 갈아엎고 싶은 것일까. 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키네온은 런스와 디센 기사단의 단장 메이스에게 기수로 반을 맡길 테니 불쾌해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놓았던 차였다. 런스는 물론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고 메이스 역시 카르멘 가 사람은 아니었으나 카르멘 검술을 익힌 자였기에 그 말에 대한 불만은 없었던 차였다. 반이 런스를 이끌고 간 곳은 자신의 막사였다. 런스는 들어서다말고 흠칫했다. 이미 막사 안에는 메이스가 앉아 있었다. 뭔가 좀 떨떠름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메이스를 한 번 본 런스는, 다시 반을 보았다. 반은 자리에 깊숙이 앉았다. 그리고는 런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반란 진압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메이스의 안면근육이 꿈틀했다. 런스 역시 매우 당황했다. 반의 말이 너무 지나치게 직접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일을 맡은 이상, 어쩔 수 없겠지. 나는 상황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보고를 해라." 반의 말에 런스는 피식, 속으로 웃었다. 능청떠시긴. 어차피 반의 성격상, 아무 것도 알아보지 않은 채 왔을 리가 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척 저렇게 앉아 있긴 하지만 벌써부터 적의 숫자며 동태며 배후의 인물이 대충 누구인지까지 알아보았을지 모르는 남자다. 적어도 런스가 아는 반은 그랬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아 사람의 있는 간장 없는 간장 바싹 졸여 먹는 고약한 심보만 버리면 정말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면조차 존경하는 그가 아니던가. 정말 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카리스마를 가졌는지, 가끔은 자신이 나이를 헛먹은 것 같아서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어찌되었든 런스는 나직하게 입을 열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움직이기 일어난 것은 석달 전, 남부지방인 야인에서였습니다. 야인에 대장장이들의 소규모 마을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거기서 대장장이 몇 명과 수많은 무기들을 약탈해 돌아갔고, 그 이후부터 도둑의 형태로 여기저기에 출몰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서 반란군이라기보다는 도적의 한 형태라고 쉽게만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처음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성주들이 협박을 당해 '반란' 명목으로 돈을 빼앗겼다는 보고가 차례차례 들어오기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쇼로 산에서 대규모 군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기사단이 쇼로 산에 파견되었을 때는 그러나, 이미 눈치채고 도망가 버린 뒤였지요. 그 많은 인원이 어디로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 이후로도 조그마한 소모전 형태로, 여기저기에서 난이 일어났습니다." 런스의 설명에,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옆에 있던 메이스가 말참견을 했다. "결정적인 것으로 궁에 세 번이나 침입자가 습격했고, 한 번은 잡혔으나 잡힌 자가 곧바로 자결해서 뒷덜미는 잡지 못했습니다." 반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스는 뭔가 오오, 라던가 흠. 그랬나, 라는 식의 반응을 기대했던지라 반의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뜻뜨미지근한 반응에 실망해 버리고 말았다. 런스처럼 반을 가까이에서 겪어볼 기회가 없었던 수염 숭숭난 40대의 기사단장 메이스는, 카르멘 가의 가주와 조금이라도 정감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소년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뵈도 궁에 세번이나 침입자가 습격했었다는 이야기는 궁성을 수비하는 문지기들과 그들 기사단만의 비밀이었는데. 런스는 실망하는 메이스를 보며 땀을 조금 흘린 후 흠흠, 하고 목청을 돋운 뒤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으나, 뒤를 대 주는 자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많은 인원이 쇼로 산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도 그렇고. 자금줄 역시 상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이 반란군들은 게릴라 형식으로 조금씩 화를 돋우던 형식이었는데, 갑자기 돌변해 진격을 해오니 말입니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상황입니다. 폐하 역시 크게 당황하셨지요. 제 생각엔 아마도, 지금 상황을 빨리 종결시켜야할 어떤 이유가, 반란군에게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금줄이 끊겼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군. 여기에서 샤로테는 거리가 얼마나 되지?" 반의 말에 런스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말을 타고 달리면 네시간 쯤 걸릴 것 같습니다." 반의 눈이 살짝, 섬뜩하게 빛났다. ◀▷◀▷◀▷◀▷◀▷◀▷◀▷◀▷◀▷◀▷ 런스와 반이 반의 막사 안으로 들어간 사이, 프란은 밖에 서 있었다. 어쩐 영문인지 늘 그녀를 자신의 곁에 세워두어 온 몸에 쥐가 나게 만들었던 반이 '넌 나가 있어라' 라고 했기에 프란은 모처럼만에 찬바람 속에서 홀로 서 있을 수 있었다. 뭐랄까. 지금 프란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 무언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진득한 예감. 이런 예감을 가졌을 때 그것이 비켜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프란은 문득, 락케이드를 떠올렸다. 행복하십시오, 아가씨. 나직하게 말하며 돌아서던 그 등. 조용하고 차분한 백발의 집사. 언젠가 자유로워지면 꼭 만나러 갈게. 저 빌어먹을 놈의 대마왕이나 느끼 버터 이야기도 해줄게. 프란은 하아, 하고 공기 중으로 숨을 뿜었다. 흰 입김이 공기 중에 동그라미를 남긴다. 그 때였다. 차락, 하고 막사의 천막이 걷혔다. 곧 이어 나온 것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의 런스였다. 그 뒤로 차분한 얼굴의 메이스. 런스는 막사 앞에 서 있는 프란을 발견하곤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프란은 확 하고 기분이 나빠지는 걸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 런스가 프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얼굴 보고 한숨쉬면 기분 나쁜 거 모르쇼?" 그런 런스를 향해 프란이 투덜댔다. 그녀로써는 이 기사가 가주에게 뭔가 싫은 소리를 들었나보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프란 프리텐이라고 했던가?" 문득 런스가 프란을 향해 물었다. "음?" 갑작스레 런스가 정색을 하자 당황한 프란이 머리를 긁적였다. "응, 내가 프란 프리텐은 맞지." "……잘해라." "엉?" 프란은 순간 당황했다. 잘하라니. 뭘? 무얼? 도대체 무엇을? "꼭 살아 돌아와라." "엉? 어? 어?" 그 말을 하고, 런스는 다시 한 번 가느다란 한숨을 뿜은 후 비틀거리며 헤냔과 아나이스가 있는 막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이봐! 대체 무슨 말이냐고, 그게!" 프란은 돌아보지 않는 런스를 향해 뒤에서 발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 막사 안에 남겨진 반은 미간을 검지로 문질렀다. 반란 진입이라. 저 쪽은 이제 곧 자금이 끊긴다. 소모전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레키슈안에 있는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일주일 안으로 깨끗하게 끝내야 한다. 그래야 그가 카세타 왕궁에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고 이 귀찮은 일에 말려든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일단 처음에 자금을 댄 자와 일을 추진한 자를 잡아내는 것이 문제다. 아무리 뛴다 난다 해봤자지. 반은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반이 한참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그 때, 프란이 보폭이 큰 걸음으로 저벅저벅 막사 안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우거 같군. 반은 양팔을 크게 휘두르며 무섭게 돌진하듯 들어서는 프란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프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기, 방금 나간 런스란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던데요." 프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이 입술을 뗐다. "500만 케트, 제해주겠다. 일을 하고 와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란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을 발했다. 프란에겐 물론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 런스가 했던 말들과, 자신이 반에게 물어야할 말들과, 심지어는 방금 전에 왜 자신이 여기에 들어왔는지조차 깡그리 잊어버리고 활발하고 즐거우며 씩씩하고 발랄하게 냅다 소리를 질러버렸던 것이다. "넵!" 프란은 이 날 이렇게 힘차고 씩씩하게 외쳤던 것을, 물론 두고두고 후회한다. 반란군 편은, 뭔가 어설픈 것 같습니다(자백) 비축분은 이제 20페이지 가량밖에 안남았...(탕!) 매일 연재를 선언했는데, 첫날부터.. 아아. 딱 9분만 빨리 집에왔어도. ....=_=크으, 아르바이트 때려치우든가 해야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ㅡ^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0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4) 가네트(uznian) 03-11-27 :: :: 11485 "가주님, 항상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프란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반이 눈만 살짝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봐라, 라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반을 향해 프란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은 제가 엄청나게 미우신거죠?" 반의 주위에서 진지한 얼굴로 프란의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싸하게 굳어졌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저게 무슨 말인가. "제 피, 가주님 검에조차 묻히기 싫으신 겁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죽이려는 겁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프란은 아주 진지했다. 당연한 일이다. 방금 전 반으로부터 들은 말은, 그야말로 '어이, 이봐. 좀 죽으러 가.' 라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은 한참동안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갑자기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프란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런스. 너의 기사단에서 두 명. 메이스. 너의 기사단에서 두 명 차출해라." 곧이어 반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런스와 메이스를 향해 평이한 어조로 명령했다. 한마디로 프란은 곱게, 아주 곱게곱게 반에게 씹혀 버렸던 것이다. '으아아악, 무시하는 거냐!' 뭐라고 말은 못하고 가슴을 팡팡 내치는 금색 머리 소년을 조금 안쓰럽게 생각하면서, 런스는 입을 열었다. "……몸이 빠른 녀석들이 좋겠지요. 케이온 기사단에서는 아나이스와 헤냔을 보내겠습니다." '으아악, 싫어! 싫단 말이다!' 그렇잖아도 방금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 에 대해 질겁하고 있었던 프란은, 런스의 대답에 속으로 다시 한 번 발악을 했다. 안 그래도 오는 내내 프란을 곁눈질하며 '이 쪽을 봐, 프리나. 이 쪽을 보라고. 응? 이 쪽을 보라니까!' 라는 눈빛을 사정없이 쏘아 보냈던 헤냔이 아니던가. "그런가. 디센 기사단에서는?" 프란의 마음 속 외침 따위야 깡그리 무시한 채, 반이 메이스를 보며 물었다. "디센 기사단에서는 샤운과 시엔크를 보내겠습니다." 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나, 나 말이야." 햇빛이 음영을 드리웠다. 아직은 환하지만, 부드러운 햇살은 사라지고 얼굴들마다 각각의 그림자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헤냔은 막사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헤냔의 얼굴이 마치 무엇을 훔쳐먹다 들킨 아이마냥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아나이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헤냔의 볼을 콕, 하고 찔렀다. 물론 그 손가락을 헤냔이 콱 깨물었음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왜, 우리 키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긴 하지만, 헤냔이 꽉 깨문 탓에 이빨자국까지 남아버린 손가락을 분노에 차 주무르며 아나이스가 물었다. 헤냔은 아나이스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아나. 키르가 아니잖아. 헤냔 드 키에르라고, 헤냔." "웃기고 있네. 나도 아나가 아냐. 아나이스 폰 그란젤이라고 불러. 네 녀석은 아름다운 레이디에 대한 예의도 없냐? 그러고도 네가 기사야?" 잠시, 침묵 가운데 말없는 눈빛 교환이 이루어졌다. "의미 없는 짓이니 그만하자고 했었잖아." 헤냔의 말에 아나이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허리에 걸려 있던 검의 힐트를 검지와 중지로 어루만지며 이번엔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첫사랑은 정말 안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아나이스의 진지한 목소리에 힘입어, 헤냔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밑도 끝도 없는 튀어나온 헤냔의 그 말에, 아나이스는 잠시 당황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헤냔의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튀어나와야 할 말이라기엔 너무 어색했던 탓이다. 그러길 한참, 여기사 아나이스 폰 그란젤 양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뜨며 오오, 하는 감탄사 섞인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헤냔의 어깨를 턱 잡다니, 곧 사정없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헤냔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들썩인다. 이봐, 아나이스. 왜 그래? 라고 헤냔이 물을 틈도 없이, 아나이스는 동그란 눈으로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헤냔, 헤냔! 어이, 어이.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첫사랑? 그 이름도 대단한 첫사랑이라고 했지, 지금? 자, 자자자. 어서 이 누나의 넓은 품에 안겨서 소상히 떠들어 보지 않을래? 이래봬도 남자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나란다. 내가 아주아주 친절하게 상담해줄 수 있어. 어허! 설마설마 했더니 진짜일 줄이야. 자, 어서어서!" 도대체가 지금 반란군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없이, 오로지 동료 기사의 연애얘기에만 관심을 보이는 아나이스의 호들갑에, 헤냔은 관자놀이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땀을 스윽 닦을 수밖에 없었다. 헤냔은 자신의 동료이자, 그다지 남자에게 인기가 없음에도 인기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가여운 아나이스를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있지, 아나." "응, 말해. 말해봐." 이번엔 너무 흥분해서 '아나' 라는 애칭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아나이스는 입을 함지막하게 벌렸다. "뒤에 단장님 오셨는데." 헤냔의 말에, 깡충깡충 뛰어가며 호들갑을 떨고 있던 아나이스의 움직임이 딱 하고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정자세를 취하며 정지했다. 아까 전부터 둘의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런스는, 그런 아나이스를 정중히 무시한 후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자, 이야기는 끝났나?" '이제 시작인데요!' 아나이스의 소리 없는 절규를 무시하며, 런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할 거다. 단, 우리 중 다섯 명이 먼저 간다." "우리 중 다섯이 먼저 가다니요?" 아나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런스는 대충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이 실력파 기사의 얼굴에서 자그마한 땀방울이 미끄러졌다. 그는 자신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한 명의 여기사와, 뭔가 이상한 일로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명의 소년 기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를테면, 너희가 좀 희생을 해줘야겠다." 헤냔의 얼굴에는 곧장 결의가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단장님!" 런스는 자신이 작전을 설명해도 이 소년기사가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는지, 지금과 같이 별이 반짝이는 듯한 눈을 할 수 있을지, 심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런스는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나이스와 헤냔은 처음에는 진지한 얼굴로 런스의 주위에 붙어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처음, 런스가 입을 뗄 때는 두 사람 모두 조금 긴장한 채였다. 하지만 런스가 말을 끝냈을 때, 런스는 돌이 되어 있는 두 인형(人形)을 발견하고 허허, 하고 속으로 웃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단장님." 아나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나 굳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헤냔조차도,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뭔가 따져 물을 듯한 얼굴을 한다. "설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저와 아나이스가 할 일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 중요한 일' 을 한단 말입니까? 어디 암살자라도 한 명 구해놓으습니까, 아니면 발자국 소리 하나 안 나고 날아다니는 마법사라도 하나 매수해두셨습니까?" 헤냔이 말에, 런스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런스를 향해, 헤냔이 다시금 묻는다. "대체 누가 합니까?" "……종." "예?" 런스의 말이 워낙에 작았던지라, 아나이스와 헤냔이 되묻는다. 그러자 런스는 머리를 슬슬 긁으며 조금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가주님의 시종이 할 거라는군." ▷◀▷◀▷◀▷◀▷◀▷◀ 기사단과 기사단이 아닌 두 명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따라 아무렇게나 치솟아 있는 프란의 짧은 금색머리카락이 너울대며 춤을 추었다. 노을빛으로 흩어지는 프란의 머리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풀어서 바람결에 걸어놓은 붉은색 실처럼 팔랑거린다. "가주님." "......" 프란의, 검은 오오라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반은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도 맛있기 씹혔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며, 프란은 자신의 동그란 오렌지색 눈동자 한가득 원망을 담아 반을 보았다. "저는 세이피안에서 견습 기사였습니다." "세이피안의 견습기사는 모두 그따위인가." '이, 이이이이이익!'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무시하는 반을 향해 이를 부득 갈면서도, 그러나 프란은 있는 참을성 없는 창의성을 다 발휘하여 다시 말을 꺼냈다. 여태까지 목숨 귀중한 것을 생각해 반에게 그다지 긴 말대답을 한 적이 없던 그녀였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참고로 저는 암살자 훈련도 받은 적 없고, 몰래 숨어드는 것도 배운 적 없고, 뒤를 치는 것도 배운 적 없……." "너는 다 했다." "그래요, 다 했…… 예?" 뭔가 반박하려던 프란은,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반의 은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는 프란의 기억 속으로, 무언가가 헤엄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옷깃을 베면 1000만 케트를 주겠다.> <내 옷깃을 베며 뭘 느꼈나?> 순간적으로 과거에 반의 그 모든 말들이, 귓가에 와서 속사포처럼 박혀댄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그 모든 기억들에, 프란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옷깃을 베면 1000만 케트를 주겠다고 했던 말,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도 어김없이 돌아서서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가주. 도대체 옷깃을 베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설마 이런 것이라니. '이 대마왕! 그걸 다 계산하고 그랬단 말이냐?' 프란은 말고삐를 느슨하게 잡으며 길고 거친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과 반이 앞서나가고, 그 뒤를 케이온 기사단이, 또 그 뒤를 디센 기사단이 따르는 가운데에서, 헤냔은 무서운 눈으로 반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숫제 '살기' 에 가깝다. 앞서나가던 런스가 힐끔 돌아봤다가 인상을 찌푸린 후 다시 고개를 돌린다. 헤냔의 옆에 선 아나이스 역시, 이 녀석이 정말 왜 이러나 하는 마음으로 헤냔의 옆구리를 툭 쳐본다. 그러나 헤냔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헤냔은 정말 무섭기 그지없는 눈으로, 아나이스가 기억하고 있는 그 어떤 모습보다도 가장 살벌한 눈을 한 채 반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 역시 사람이라면 헤냔의 시선을 못 느꼈을 리가 없었으리라. 그것도 이렇게나 가감 없이 반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시선인데. 그러나 반은 돌아보지 않았다. "헤냔, 대체 왜 그래?" 아나이스가 다시 한 번 헤냔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을 때, 헤냔의 이가 부득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나를……." "어?" 중얼거리듯 내뱉은 헤냔의 한마디를 슬쩍 놓치고 만 아나이스가 다시금 물었다. 헤냔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프리나를……." 결국, 헤냔의 입 밖으로 나온 건 '프리나를' 이라는 한 음절뿐이었다. ▷◀▷◀▷◀▷◀▷◀▷◀ 이스티네 보일린. 키네세스의 17번째 생일날에 반에게서 강한 충고를 들은 적이 있던 그 남자는, 지금 이마를 감싸 쥔 채 자리에 앉아 있다. 그의 방에서 직격으로 내리쬐는 빛이 그의 머리색을 붉은색으로 비춰내리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그다지 풍성하지 못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문제는 국방에 배치되어 있는 병사가 돌아오는 5일 안으로, 반란군이 수도에 들어올 수 있느냐 마느냐였다. 일단 수도로 들어온다면 그와 '세라딘' 이, 그리고 백작이 알아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터였다. "...아일린 가의 빌어먹을 자식." 무엇이 생각났는지, 보일린이 이를 우드득 갈았다. 역시, 믿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금줄을 대준다며 웃던 그 얼굴이 믿음직스러웠다 해도. 백작이 아무 염려 말라며, 그에게 '세라딘' 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해도. 웃는 입가와는 다르게 싸늘하게 굳어진 눈이 경멸의 빛을 띠며, 분명한 지배자의 기색을 보여주었다 해도. 그래도 역시 믿는 것이 아니었다, 아일린 가의 녀석 따위를. "……시온 아일린." 자금줄이 끊기는 바람에, 반란군을 1년이 넘는 시간에 거쳐 큰 규모로 만든 후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 했던 백작과 보일린의 계획은 완전히 박살이 난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왕가와 카르멘 가의 결탁 조짐이 조심스럽게 보이는 요즘, 새로운 자금줄을 찾는 건 역시 무리였다. 결국 선택한 것이 진격. 반란군이 5일 안으로 수도에 올 수 있을까. 보일린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케이온 기사단과 디센 기사단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카르멘 가에서도 사람이 차출되었다고 했다. 갑자기 떠오르는 반의 얼굴에, 여태껏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보일린이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걸었다. 그 도도하고 건방진 남자를 무릎 꿇리고, 그리고 잔인하게 비웃어 주리라. 여자보다 더 고운 그 얼굴,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차가운 은 보라색 눈동자를 뽑아 더 없는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보일린의 비틀린 입가에서 비죽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보일린은 미간을 한참 문질렀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문득 음흉하게 빛났다. "레이나님을 닮은 시종……." 그렇게 중얼거린 보일린은, 흠, 하고 낮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손을 두어 번 마주 비볐다. 입가에는 아까보다 더욱 비틀린 웃음이 걸려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1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5) 가네트(uznian) 03-11-27 :: :: 8316 기사단과 기사가 아닌 두 명이 멈춰선 곳은, 반란군이 있는 곳에서 말을 타고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에서였다. 말을 세운 그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작전을 상의했고 긴장된 얼굴로 말에서 내려섰다. 프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못할 것은 없어. 프란은 손을 꾹 쥐었다. 죽을 수 없다, 어디에서든. 죽진 않아, 절대. 빚을 다 갚아서 자유로워지는 날까지. 다시 일어서서, 스스로를 결정지을 수 있을 때까지. 절대 죽지 않는다. 헤냔과 아나이스, 그리고 디센 기사단에서 차출된 샤운과 시엔크라는 자가 프란의 곁으로 다가왔다. 프란은 흐읍, 하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막 그녀가 주먹을 쥐려는 찰나, 스치듯 프란의 옆을 지나며 헤냔이 멈춰 섰다. 그리고, 불렀다. "……프리나." 얼마 만에 들어보는 '프리나' 인가. 프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헤냔의 말소리는 낮고, 조그맣고, 그리고 따뜻했다. 프란은 몸을 멈칫하고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곧바로 반을 찾았다. 반은, 기사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지 이 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프란은 제발 헤냔이 하는 이야기가 반에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헤냔 쪽을 보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세게 박동하기 시작한다. 땀이 맺혀 있던 콧잔등을 타고 바람이 내려앉았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나뭇잎들이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봄직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틈에서, 옛날 저 먼 곳에서 대뜸 빠져나온 것 같은 한 사람이, 프란에게 얘기를 걸고 있다. "프리나……. 괜찮겠어?" 헤냔은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발 모른 척 해줘, 라는 프란의 말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썼던 그였지만, 지금 프란이 해야 하는 일을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옛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정한 말로 옛날을 얘기하기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아마도."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대꾸를 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따뜻한 기분이 드는 걸까? 프란은 갑자기 뭔가 그리운 것들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렸던 시절에, 검을 들고 자신을 무시했던 헤냔 드 키에르가 갑자기 성장한 채로 이렇게 서 있는 모습에서, 프란은 뭐라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진득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넌 여자니까 나를 이길 수 없어!' 그런 말로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녀석. 그러나 지금, 헤냔 드 키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의 소년이 이 앞에서, 그녀를 걱정하며 서 있는 것이다. 헤냔은 복잡한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그 눈에 얽힌 수많은 감정을, 물론 프란은 읽어내지 못했다. "프란 프리텐. 이리 와봐라." 그 때, 저 멀리에서 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은 잔뜩 긴장한 채 헤냔을 버려두고 반을 향해 달려갔다. 반은, 왼손을 오른쪽 팔꿈치에 대고 프란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 반은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붉은색, 헤냔의 눈동자다. 무섭게 반을 쏘아보는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명한 적의(敵意)였다. 반은 가감없이 헤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프란이 반의 앞에 멈춰 섰다. "들어라." 반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프란이 그런 생각을 하며 반을 보는데, 역시, 반은 프란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을 뱉어냈다. "확실히 해라." "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싫어, 라고 하겠는가. 프란은 공손히 답했다. 듣는 쪽에서 그걸 공손히, 라고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지만. "방심하지 마라." '방심할 틈도 없을 텐데, 뭘.' 프란은 그러나 투덜거리면서도 반의 말을 새겨들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의 말이 뚝 끊겼다. 프란은 반이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스삭스삭,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며 바람이 한바탕 불었다. 나뭇잎이 프란의 볼끝에 잠시 머물렀다가 샥, 하는 소리와 함께 발치로 떨어져내렸다. 뭐냐, 갑자기 웬 바람, 하며 프란이 자신의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하려고 하는 순간, 반의 그 다음 말이 들려왔다. "……살아서 와라." "에?" 갑자기 들려온 그 말에, 프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은 등을 돌려서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있어 보라고. 프란은 고함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봐. 방금 그거, 저 대마왕 입에서 나온 말 맞는 거야? 프란은 당황하여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 거렸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반은, 무려 자신에게 '그로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대해준' 것이다. 이런 맙소사, 세상에, 하고 프란은 생각했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프란은 당혹감에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발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어이, 거기. 이제 그만 가지." 디센 기사단의 기사 중 한명인 샤운이 말했을 때야 프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프란은 아아, 하고 중얼거리며 말에 훌쩍 뛰어 올랐다. 그러나 프란의 머릿속은 이미 곤죽이 되어 있었다. 저 대마왕이 무려 '다정하게' 말해준 것이 아니냔 말이다. '내일쯤 세상이 멸망할지도 몰라.'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은 이윽고, 뒤에 두 기사단과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 가주를 남긴 채 자욱한 먼지를 날리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괜찮을까?" 헤냔의 질문에, 아나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헤냔은 움찔했다. 아나이스의 표정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지금 그녀는 뭔가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나이스가 그럴 때면, 헤냔은 한없이 불안해지곤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나이스 폰 그란젤은 카세타의 여기사라는, 얼핏 듣기에 굉장히 매력적이며 멋있어 보이는 한편 조금 딱딱하게 들리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가 지나친 낭만가인 것이다. 그녀의 특기는 검술이지만 취미는 공상이다. 여태껏 아나이스가 만들어낸 공상 소설이며 연애 소설을 읽기를 강요당한 헤냔으로써는(헤냔은 물론 소설 읽기를 강요당할 때마다 너에게는 작가적 재능이 형편없으니 그만두라고 수십 번 말했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구타를 당할 뿐, 헤냔의 진심어린 충고는 아나이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지금 아나이스의 심각한 표정이 두려울 뿐이었다. "뭘 생각하는 거야, 아나?" 헤냔은 조심스레 물었다.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은 상태로 아나이스가 답했다. "너의 첫사랑에 대해서, 키르." "……." 헤냔은 할 말을 잃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나이스가 진지한 얼굴로 헤냔을 보았다. "있지, 헤냔?" "왜?" "난 네 편이야." "뭐가?" 갑자기 진지해진 아나이스의 말에 의아해진 헤냔의 질문에, 아나이스는 묵묵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헤냔은 아나이스가 왜 자신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왜 다음 순간 아나이스가 자신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성공할까?" 헤냔이 물었다. 아나이스는 피식, 웃었다. "글쎄다. 저 자신만만한 카르멘 가주의 시종이라잖아? 뭔가 있으니 그랬겠지." '그럴까?' 헤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프리나의 잔영이 헤냔의 머리에 가득 차올랐다. '……넌 날 이길 수 없어.' 좋아했던 소녀였기에,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았다. 오렌지색 눈동자를 빛내며 프리나가 다가오던 그 순간, 조금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검을 휘둘러 그녀와 맞섰다. 처음 검이 부딪치던 날, 프리나의 눈에서 일어나던 작은 놀라움을 기억한다. 프리텐 가문의 버려졌던 아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버려져서, 저 추운 야만인의 나라인 북부 로이네트에서 길거리를 구르며 생활했다고 했다. 프리텐 가문의 정통 승계자가 생기지 않아, 결국 수소문해 데려왔다는 그 아이. 오렌지색 눈동자에 금색 머리카락, 험하게 생활한 지라 온 몸에 나 있던 자잘한 상처들. 어째서 좋아하게 되었을까. 수련 기사단 모두가, 처음부터 프란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대체 미워할 수가 없다. 어디서 어떻게 자랐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아마 '프리나 프리텐' 이 아니라 그저 '프리나' 이기만 했어도, 아마 그녀는 사랑받았을 것이다.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검을 들었을 때,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그 어린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의지가, 주위사람에게 전해져 그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그저 '프리나' 이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아져 버렸다. ―어린 날이지만, 그 감정만은 변함없는 진실. 헤냔은 앞에서 달리고 있는 프란을 눈으로 좇는다. 프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반란군이 머물고 있는 샤로테에 도착했다. 프란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헤냔과 아나이스, 샤운과 세인크 역시 내렸다. 숲이 작은 노래를 했다. 이 숲만 지나가면, 곧바로 반란군이 있는 마을이다. 프란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침입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반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은 네 사람을 휙 하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확실히 하라고, 기사 여러분들." "너만 잘하면 된다." 디센 기사단원 중 한명인 샤운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프란은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세웠다. 그녀가 밝게 웃었다. "걱정마. 이 프란 프리텐님께 맡겨두라고." 프란은 그 말과 함께 돌아섰다. 그러나 채 어쩌지 못한 불안감에 젖은 채로 프란의 뒷모습을 말갛게 바라보는 것은 비단 헤냔뿐만이 아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2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6) 가네트(uznian) 03-11-28 :: :: 12144 500만 케트를 제할만한 일을 주겠다는 반의 말에, 프란은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그런 프란을 향해, 반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사를 죽여라." 프란은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짓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책사를요? 얼굴도 모르는데요. 그냥 나중에 가주님이 직접……." 반이 처음 말을 뱉었던 그 때까지만 해도, 프란은 반의 말에 들어 있는 의도를 전혀 파악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란의 대꾸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이 보라색 머리칼 미소년은 묵묵히 침묵만을 지킨 채 프란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프란은 왜 쳐다보는데,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그런 반의 눈을 마주보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반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프란은 어느 순간, 불행하게도 읽어내고야 말았다. 똑바로 자신을 향한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바를. 차라리 읽어내지 못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파악한 순간, 프란의 입술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농담이시죠?" "말이 많아졌군." 입을 열기가 무섭게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돌아 나오는 반의 말. 농담일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프란은, 순간적으로 목 안이 컥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다. 지금 반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였다. 반란군의 한 가운데에 잠입해서, 책사라는 녀석을 죽이고 돌아오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명령. "……네가 책사를 죽이고 소동을 피우면 마을의 방책(防柵)에 불을 지를 거다. 샤로테는 마을 뒤켠이 숲이라 들짐승을 막기 위해 방책을 세워 두었지." "가주님." "……." "뭘 말씀하시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저는……." 막 말을 하려는 순간, 불행히도 반의 입이 벌어졌다. "……죽고 싶나?" "아뇨." 냅다 대답이 튀어나오는 프란이었다. 그런 대화 이후, 가주님은 사실 저를 엄청 싫어하는 거죠, 등등으로 모든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프란은 지금, 잔뜩 소리를 낮춘 발걸음으로 숲의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다. 반란군이 주둔해 있는 샤로테의 뒤쪽에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숲이 있었는데, 앞뒤의 길이는 짧으나 좌우의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서걱서걱 발끝에서 소리를 내는 풀잎들의 소리가 죽음의 레퀴엠처럼 들린다. '어떻게 한다?' 책사를 죽이라니. 책사가 여기 내 목 있으니 쳐 가시오,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틀 동안 진격한 반란군이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보초를 서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그 중요한 책사라는 작자를 잡는단 말인가! 프란은 한참을 고민했다. 거의 눈물이 날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프란은, 드디어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무르팍을 퍽, 하고 쳤다. 누가보면 대단한 결론을 내렸다가 판단할 움직임이었다. '아아, 젠장, 될 대로 되겠지! 일단 가고 보자고!' ……그러나 역시, 프란은 무대포다. ▷◀▷◀▷◀▷◀▷◀▷◀ 프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닮은 빛이 하늘로 번져나간 지는 이미 오래, 물에 염료를 탄 듯 검은빛이 아스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숲의 길이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기에, 프란은 처음 숲에 들어선 순간부터 최대한 긴장한 채 걷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 프란은 마을의 붉은 지붕들과 그 지붕들 전체를 빙 돌아 에워싼 방책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추었다. 프란은 방책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넝쿨이 수십 개 엉켜지고 이끼가 끼어 그 사이로 공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고목 뒤로 몸을 숨겼다. 살짝 고개만 낸 채로, 프란은 길게 이어진 방책을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을 또렷한 눈망울로 훑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들짐승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방책은 얼핏봐도 높고 견고했다. 다가서서 보면 프란의 가슴 정도까지 너끈히 닿을 듯한 그 방책은, 방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벽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했다. '아주 죽여라, 죽여. 크아아, 대마왕! 대마왕, 대마왕!' 프란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고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프란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팔다리를 오므려 잡고 동그랗게 웅크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저 쪽 하늘부터 먹처럼 검은빛이 대대 기사단처럼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낮의 여신이 흰 옷깃을 두 손으로 사뿐히 접어들고 떠난 자리엔, 밤의 여신이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드리워 온 세상마다 가득한 고요를 내린다. 그 검은빛의 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짙어지더니, 이윽고 사방을 검은색의 치마폭 안으로 감싸 안았다. 오늘밤은 구름마저 약간 끼인 탓에, 유폐된 여신을 안은 비나룬의 녹빛이 흐릿하다. 비나룬의 주위에서 가닥가닥 드리운 별들만이, 물 묻은 은색과 파란색으로 반짝일 뿐. 프란은 조금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두 시가 넘으면 하자.' 프란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무릎을 세웠다. 그러다 문득 프란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란은 쳇, 하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처음 그 가주놈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라고. 그 때 느꼈던 공포와 비교하면, 지금쯤이야. 그러나 속으로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란의 심장은 불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반란군은 방책 주위에서 주의를 기울이며 서 있었다. 이틀을 새워 행군한 탓인지 그들의 얼굴에 피곤이 서려 있다. 그들이 조를 짜서 숲 근처까지 들어와 얼쩡거리는 통에, 프란은 잔뜩 긴장한 채 몸을 살짝살짝 비틀어 시선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는 건 물론 프란의 일생일대 비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침번을 서고 있는 자들이 눈에 띠게 피곤해하는 기색을 띤다. 심지어는 꾸벅꾸벅 조는 자들도 보인다. 하긴, 설마 벌써부터 진압군이 샤로테에 도착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니 경계가 약한 것이 당연할지도. 사방이 완전히 새카매졌다. 프란은 어둠이 주는 한 장의 검은 망토에 조금은 안도했다. 프란은 후욱, 하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쯤이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 그녀가 검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잠깐만." 저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굵직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다. 어두운 밤인지라, 조그마한 소리도 몇 배로 커져서 울려온다. '설마?' 큰 나무 바로 뒤에 몸을 기대고 있던 프란은, 곧이어 방책 사이로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해놓은 유일한 작은 통로를 통해 숲 쪽으로 다가오는 한 인형을 볼 수가 있었다. 중년의 남자.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프란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프란은 꿀꺽, 침을 크게 삼켰다. '……눈치 챘나?'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은 채 벌써 네 시간 째였다. 프란은 쥐가 나기 시작하는 다리의 고통을 애써 참으며 검을 뽑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여기서 검을 뽑으면 안 되잖아!' 여기에서 검을 뽑았다가 검의 잔광이라도 비치는 날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나 실버 블레이드는 그 검휘가 보통이 아닌데다가, 눈이 부실 정도의 은색으로 빛나질 않는가.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땀방울이 흘렀다. 목울대가 출렁였다. 프란은 천천히 일어섰다. 걸어온 반란군 대원 중 한 명은, 프란이 숨어 있는 나무 바로 앞에서 멈춰서더니 주위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프란은 온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서서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 두근 두근 두근, 하는 심장소리 때문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아마 기척이 드러나지는 않으리라. '어서 가! 가란 말이다!' 프란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프란은 정말 기절하고 싶었다. 그가, 반란군 대원 중 한 명인 그 남자가 한참 주위를 살피다 다시금 그녀 쪽으로 똑바로 뛰어왔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으로 보건대, 프란의 위치를 눈치챘음이 분명했다. 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 없다. 검을 뽑아야 했다. 들키든 어쨌든 지금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막 그녀가 검을 뽑으려 한 순간. 철컥철컥.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나무를 감은 넝쿨의 사이로 눈을 갖다대었던 프란은, 흠칫하고 말았다. 남자는 바지 버클을 풀고 있었다. 곧이어,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촬촬촬촬……. "……." "어~어~" "……." 프란은 할 말을 잃은 채 굳어 버렸다. 프란이 숨어 있는 바로 그 나무에서, 반란군 대원이 세차게 오줌줄기를 뿜어냈다. 한참만에야 오줌을 다 누었는지, 뒤척뒤척 옷을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막 그가 돌아서려는 찰나. 퍼억! 프란은 자신을 놀라게 한데 대한 분노를 꾹꾹 응축해 검집에 담은 뒤, 남자의 머리를 검집째 거세게 내리 갈겼다. ▷◀▷◀▷◀▷◀▷◀▷◀ 시온 아일린은, 분명 그다지 진지한 남자는 아니었다. 여태까지의 인생 과정이 그래왔고 거기에 대한 후회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철저한 유희남이다. 대 아일린 가문의 세 번째 승계자인 그였지만, 어릴 때부터 워낙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터라 시온은 많은 경험을 했다. 단지 재미있겠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몇 천만 케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주었다 크게 낭패 본 일도 있었고 콧대 높은 여자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같이하는데 성공했더니 하필이면 그 여자가 대 가문의 적통 승계자인 터라 하룻밤 불장난으로 코가 꿰일 뻔한 적도 있었다.(이 경험이 시온에겐 가장 끔찍한 경험이다.) 그의 경험담들은 하고 많지만, 그 대부분이 웃어넘기고 말 종류의 가벼운 이야기들이다. 시온 역시도 자신에게는 그런 가벼운 이야기들이 어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여태껏 그것을 잘 즐겨왔던 차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런 시온이 지금,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이다. 그는 천천히, 다시금 물었다. 이 깊고도 깊은 밤, 쉬지도 않고 말을 타고 달려왔는지 시온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그가 타고 온 백마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시온은 거친 숨을 무섭게 몰아쉬면서도, 반을 쏘아보는 눈빛만은 그대로인 채 주먹을 쥐었다. 시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잔뜩 긴장한 채로 '신호' 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기사단에서는 일련의 소동이 일어났던 차였다. "프란을 보냈다." 시온의 질문에, 반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혼자, 보낸 겁니까?" 반과 프란이 떠난 아침, 그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안 시온은 한참 멍하게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설마, 하고 중얼거린 시온은 얼른 마린에게로 달려갔다. 노처녀 집사장 마린은 반이 떠나면서 엄청나게 쌓아놓고 간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훑어보며 '카세타 왕궁으로 가셨어요. 반란 진입을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하고, 시온을 향해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마린의 대답에, 시온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이 반란 토벌에 카르멘가가 움직일 거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반란군의 목적 중 일부는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궁극적인 목적에 그것이 끼여 있었던 것이다. 옳다, 시온도 그것은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반이 프란을 혼자 적장에 보내는 극단적일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차였다. "네가 무슨 상관인가." 반의 질문에, 시온은 하, 하고 웃었다. "제가 프란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형님도 알잖습니까?" 반은 아무 말 않은 채 냉담한 눈으로, 흥분한 시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음과 불. 두 사람을 바라보는 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프란을 정말 혼자 보내신 겁니까?" "너와는 상관없다." 반은 지나치리만큼 냉정하게 잘라 답했다. "상관있습니다." 시온이 다급하게 답했고, 순간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시종이다." "그래도 전 들어야겠습니다!" 시온이 버럭 고함을 쳤다. 기사단 모두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가주를 향해 고함을 질러대는 아일린 가의 도련님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반은 그런 시온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본 후, 낮게 말했다. "……가라. 베고 싶지 않다." 베고 싶지 않다니. 벨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말의 진위여부를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시온은 반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 그것이 자신의 사촌 형이다. 그리고 지금 시온을 향해 뱉어낸 반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시온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찰나, 반이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 반을 향해 시온이 손을 뻗으려는데, 그 둘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런스가 시온을 향해 다가왔다. "시온님." "……런스." 저번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 프란과 시온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남색에까지!' 하고 긴 탄식을 뱉어낸 적이 있던 이 케이온 기사단장은, 시온이 지금 원하고 있는 것은 프란의 행방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대충 이번 작전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프란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일을 수행하고 어떻게 끝맺을 것인지. 간략하지만 핵심은 모두 담은 런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시온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형님." "예?" 갑작스러운 형님, 이라는 말에 런스가 반문하자, 시온은 낮게 중얼거렸다.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비꼬는 것인지 칭찬인지, 런스를 향해 하는 것인지 반을 향해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을 던진 시온이 휙 하고 몸을 돌렸다. 런스는 그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백마에 올라탄 시온이 그대로 말에 채찍질을 가해 달려 나갔기 때문이다. 시온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 게시판, 가넷이란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권한이 있다가 없다가.. 인터넷도 엉망진창.. 끊어졌다 연결됐다.. 카페는 갑자기 튕기고.. 히메이님 메일 주소를 아시는 분 제게 좀 가르쳐주세요. 어찌됐든 아슬아슬하게(정말 얍쌉하게) 매일참 하긴 하는군요. 새벽쯤에 몇 편 더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늦은 새벽일테니, 기다리지는 마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3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7) 가네트(uznian) 03-11-29 :: :: 10937 프란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남자의 옷을 벗겼다. 그러나 곧, 프란은 최초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그 옷을 입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옷을 입기에는, 남자의 덩치가 너무 컸던 것이다. 이리 저리 둘러보고 어깨에 대보고 해봐도, 역시 입지 못할 옷은 입지 못할 옷이었다. 프란은 넝쿨을 이용해 기절한 상태인 반란군 남자를 꽁꽁 묶었다. 방금 전 자신이 시원하게 내갈겼던 오줌자국이 그대로 남은 나무에 묶이게 된 남자의 가련한 처지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오히려 한 술 더 떠 프란은 남자의 입에 무작위로 나뭇잎을 가득가득 채워 넣은 뒤 넝쿨로 남자의 입을 다시 한 번 더 막았다. 그러고 난 후에야 프란은 천천히 일어섰다. 남자의 머리를 검집으로 친 후, 그대로 남자의 목둘레를 팔으로 휘어감아 목을 졸랐던 프란이었다. "책사가 있는 곳이 어디냐?" 낮은 목소리로, 남자의 귓가에 대고 프란이 물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이대로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버티던 남자였으나, 프란이 천천히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자 견딜 수 없었는지 띄엄띄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목울대를 압박해 큰 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든 채로, 프란은 그 대단하신 책사가 있는 곳을 밝히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프란은 목을 한 번 좌우로 꺾어보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줌을 누러 나왔던 이 남자의 동료가 남자가 너무 늦어지면 다시 와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랬다간 만사가 끝장이다. 일단 방책을 넘어야한다. 사람이 옆으로 서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좁은 방책의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들킬 위험이 너무 크다. '뭐, 별 수 없는 건가.' 사방을 살펴보던 프란은, 결국 그 방책을 타넘기로 결심했다. 가슴까지 오는 높이,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이 대마왕' 하고 중얼거리던 프란의 눈이 어느 순간 확, 하고 타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프란은, 가벼운 도움닫기조차 없이 손을 뻗더니, 뻗어진 오른손으로 방책을 집고 휙, 하고 그대로 타넘었다. 손이 마치 지렛대라도 되는 것처럼. '헤에, 아직 내 실력 건재하잖아.' 프란은 자신도 조금 놀랐다는 듯, 몸을 숙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을 숲이 우거진 로이네트에서 보냈던 프란이었다. 사방이 숲인 로이네트는 주위를 온통 짐승들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둘러싸 놓았고, 로이네트의 모든 악동들은 그 방책을 담 타듯 휙 뛰어 넘는 것에서부터 유년기를 시작한다. 로이네트에는 우스운 전통이 있는데, 이 방책을 누가 더 높이 그리고 화려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따라 아이들 사이에서 서열이 매겨지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로이네트에서, 프란은 누구보다도 화려한 유년기를 보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담 넘기의 명수였단 소리다. '좋아.' 프란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사방은 죽은 듯 조용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둡다. 횃불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방을 환히 비추는 것은 무리다. 소리만내지 않는다면,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돌 하나라도 밟으면 끝장이겠군,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살금살금 걸었다. 발걸음이 가볍다. 하기야, 저스티스 카르멘이라는 작자에게서 옷깃을 베어내기 위해 살기와 발걸음 죽이는 연습을 내도록 해야 했던 프란이다. 프란은 다시금 반의 용의주도함에 치를 떨면서 발걸음을 움직여 나갔다. 이어, 그녀는 자신이 잡았던 남자가 말했던 '책사가 머물고 있는 작은 집' 앞에 당도했다. 보초를 서는 것이 세 명.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두 명, 나머지 하나는 창문을 지키고 있다. 그런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프란은 히죽, 웃었다. '안됐군. 통로는 문이랑 창문만 있는 게 아니거든.' ▷◀▷◀▷◀▷◀▷◀▷◀ "……잘 할까?" "잘하겠지, 뭐." 헤냔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듯 던진 말에, 아나이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사실, 죽이는 것까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아나이스가 덧붙이듯 한 말에, 헤냔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아나이스를 돌아보았다. "반란군은 우리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덮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을걸. 쉬지도 않고 수도에서 말로 달려왔으니 말이야. ……반 수 이상이 보병인 녀석들이 낼 수 있는 속도와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지. ……요는, 정작 문제가 죽인 다음이라는 거야." 아나이스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헤냔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헤냔을 부드러운 시선을 바라보며, 아나이스는 자신의 긴 머리를 대충 한 번 쓸었다. "……아아, 나는 내가 잘할까봐 걱정인데. 이런 건 처음 해보잖아." 헤냔이 흥, 하는 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나 너는 어릴 때 불장난 많이 했을 거 아냐?" 헤냔의 비꼼에, 아나이스가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그 불장난이라는 말. 어째, 다른 종류의 불장난으로 들린다?" ▷◀▷◀▷◀▷◀▷◀▷◀ 프란은, 굴뚝을 택했다. 다행히도 벽이 낮고 지붕이 길게 이어진 구조라 지붕으로 올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가벼운 몸과 유연성이 지붕으로 오르는데 적절했기에, 그녀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지붕에 발을 디디면서, 프란은 불안감이 온 몸을 휘어 감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몸이 가벼운가? 내가 정말 그렇게 소리 하나 내지 않는 암살자의 움직임을 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프란은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을 하며 굴뚝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굴뚝 청소 좀 하고 살란 말이다!' 굴뚝 안에서 사지를 대 자로 뻗은 채 더듬더듬 내려가며 프란은 속으로만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내려가기를 한참, 그녀는 부엌의 좁기 그지없는 화덕에서 새카맣게 된 모습으로 빠져 나왔다. 한참동안 옷의 검정을 떼어내면서,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차랑! 이어, 드디어 검이 뽑혔다. 이 안에 있다고 했다, 책사가. 이젠 찾아서. 베야한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벨 수 있을까?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는데. 그녀는 망설이다말고 검을 쥔 손에 힘을 꾸욱, 하고 주었다. 힐트가 단단하게 조이면서 그녀의 심장박동을 부채질한다. 프란은 검을 들고 조심히 걷다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우뚝 서 버렸다. "……." 언제 나타났는지 앞에,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쩌면 방금 일어나 나왔는지도 모른다. 겨우 열여섯 살쯤 되었을까. 어려보이는 그 소녀가, 프란을 바라보며 말간 눈을 한다. 프란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보았다.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는 프란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누구세요?" 소녀의 목소리에 프란의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뼈마디가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며 프란은 굵은 침을 삼킨다. 맙소사. 프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거짓말. 아직, 열여섯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보다 어릴 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구, 세요?" 설마,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프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무슨 책사란 말인가. 철저한 농담이지. "……." 프란은 입술을 물었다. ……공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저번에 가주의 옷깃을 베는 일로 기사단의 순수가 깨졌고, 자신이 더 이상 세이피안의 견습기사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이건 아니잖은가. 프란이 멍하니 멈춰 있는 사이, 비나룬을 감싸고 있던 구름이 일부 벗겨져 나갔다. 곧, 은은한 녹색의 달빛을 어깨에 숄처럼 두르고 머리카락마다 드리운 채, 소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로 프란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공허하게 빈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한 눈에도 눈이 멀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히 프란의 앞에 멈춰 섰다. 굳어 있는 프란 앞에서, 소녀가 입술만을 벌려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당신, 첩자로군요. 진압군이 벌써 왔나요?" 프란은 뭔가 이상하다고, 퍼뜩 생각했다. 이렇게 가늘어지듯 은밀한 목소리는 작은 소녀가 냈다고 하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스륵, 하고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자그마한 단검. 프란은 아차, 싶었다. 순간, 자신의 앞에 있던 소녀가 갑자기 쇄도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프란에게 달려왔다. 프란은 얼른 검을 들었다. 검을 주먹 쥐듯 쥔 소녀의 단검이 막 프란에게 닿으려는 찰나, 프란의 은빛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 단검을 막았다. 챙! 순간, 등골에서 땀이 주룩, 흘렀다. 막사에서의 검 소리. 지금은 새벽. 날카로운 잔광을 반사하는 검의 소리가 이 순간을 어떻게 뒤흔들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녀는 그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버럭 지르는 것이 아닌가. "어쌔신이에요!" 프란은 바로 그 순간, 반을 떠올렸다. '확실히 하고 돌아와라.'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방심하지 마라.' 그랬다. 방심하지 말라니,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걸까. '……살아 돌아 와라.' 프란은 울컥 다시 검을 휘둘렀다. 살아 돌아 와라, 라고 했다. 그 감정 없는 보라색 눈동자가, 알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은 그 눈동자가, 가끔 표변해서 거짓말처럼 감정을 담을 때가 있다는 것을, 적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그를 겪어본 프란은 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 반의 눈은 그런 눈이었다. 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손이, 미친 듯한 기분으로 칼을 휘두른다. 소녀는 차랑, 하고 검이 휘둘러지는 때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순간이다. 프란의 날카로운 검이 순식간에, 정말로 순식간에, 소녀의 가슴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피는 푸악, 하고 요란하게도 튀어 올랐다. 소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인 채로 멈추고, 프란의 눈 역시 경악으로 확장된 채 그대로 정지했다. 피는 마치 만개한 장미꽃잎을 위로 쳐들어 올려 떨어뜨리는 것처럼 천천히 떨어졌다. 적어도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 피를 뒤집어쓴다는 게, 이런 것인가.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얼굴이, 옷깃이, 손이 피에 물든다. 찐득찐득하게 비린 냄새다. 떨리는 손으로 프란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았다. 그러다 우직, 하는 요란한 소리에 프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문이 요란스레 열리며 한 무리가 뛰어들었다. 프란의 눈은 여전히 멍하게 굳은 채였으나, 문이 열린 순간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달려 나간 그녀는 반대쪽의 창문을 깨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나!" 소녀의 이름인가, 하고 프란은 멍하게 생각했다. "저 쪽이다!" 큰 소리가 뒤를 잇는다. 프란의 코끝에 싸한 바람이 닿는다. 프란은 뛰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기사 견습시절, 그토록 뛰고 또 뛰었던 훈련이 이때만큼 도움이 된 적은 없으리라. 프란은 그저 뛰었다. 눈가에 초점이 없다. 소녀의 뚫린 듯한 그 두 눈, 프란은 입술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멍한 정신이 빙글빙글 돌 듯하며 미친 듯한 혼란이 뇌리를 엄습한다. 검이 살갗을 파고들던 그 섬뜩한 느낌.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세이피안에 있을 때, 황태자를 암살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적도 있고 실전 연습이랍시고 정말 검을 휘둘러 상대를 상해한 적도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고, 검투가 있을 때면 피가 끓어올라 주체를 못하는 그녀다. 그러나 그건 이 것과는 다른 문제다. 어떤 면이? 명분이 없다는 것? 상대가 어린 여자아이였다는 것? 아니,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프란은 뒤따라오는 반란군의 분노에 찬 외침에서도, 스산한 바람소리에서도, 온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잎들이 그 바람에 젖어 묘한 소리를 내는 것에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를 못했다. 가슴이 아프다. 껍질이 벗겨진 살갗이 그대로 소금물에 노출되기라도 한 듯 따끔거린다. 프란은 말이 있을 장소로 뛰어들었다. "저기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빌어먹을, 들켰다. 프란은 몸을 틀어 다시 전력질주 한다. 아직 횃불에 노출되지는 않았다. 피싯, 하고 화살이 뒤에서 쏘였다. 파공음을 느끼고 피한 것 역시 프란의 본능이었다. 쌕쌕, 숨소리가 짐승의 것처럼 거세어진다. 허억 허억 내뱉는 그 거친 숨소리에 프란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겹쳐졌다. 오자, 탈자, 장난아닙니다;; 있으면 바로 잡아주세요. 어제도 보고, 좀 충격 많이 받았습니다..; 날잡아서 오타 교정을 보든가 해야...;; (도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4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8) 가네트(uznian) 03-11-29 :: :: 10718 "……우리 차례군." 아나이스가 중얼거리자, 헤냔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명의 침입자에 의해 극도로 소란스러워진 샤로테에서, 두 그림자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내참, 아리따운 레이디에게 이런 짓을 시키다니……." 아나이스가 뭐라고 투덜대는 것을, 물론 헤냔은 깨끗이 씹어 삼켰다. ▷◀▷◀▷◀▷◀▷◀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산소부족인지 머리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프란은 욱씬거리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피가 흥건히 어깨를 적시고 있다. 미끈미끈, 불쾌한 느낌으로 젖은 어깨를 동여맬 생각도 하지 못하고 프란은 뛴다. 추격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참 달리던 프란은 사방을 훑다가 아무래도 지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큰 나무 아래에서 몸을 숙였다. 핏자국을 보고 추격한다면 금방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고, 상처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어 고통은 극한까지 심해지고 있었다. '아파…….' 프란은 화살을 두어 대 맞은 터였다. 그나마 하반신 쪽에 맞지는 않아 다행이었으나, 그 아픔은 역시 인내하기 힘든 것이다. 프란은 상의의 아래쪽에서부터 배꼽 부분까지를 지익, 하고 찢어 어깨에 동여맸다. 질끈, 천으로 상처를 단단히 감아 막 지혈을 끝냈을 때다. 쉭, 하고 화살이 한 대 날카롭게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근처를 노리고 조준한 것으로 미루어, 꽤나 가까운 곳에서 쏜 활이다. 프란은 깜짝 놀라 오른쪽으로 잽싸게 고개를 비틀었다. 화살은 퍽, 하고 바로 옆에 있는 나무에 꽂혔다. "이 쪽이다!" 어딘가에서 남자가 소리를 쳤다. 프란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 때,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한 남자가 프란의 앞을 막아섰다. 다행히도 그 남자가 맨 처음 달려온 모양이다. 아직 그 뒤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프란은 잔뜩 긴장해서 곧추세운 검으로 단박에 달려들어 남자의 겨드랑이 윗부분을 찔렀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검을 마주 휘둘러온다. 챙캉! 검소리가 프란의 땀을 타고 흐른다. 남자가 잽싸게 달려들어 프란의 상처 입은 어깨를 찌르려는 찰나, 프란은 크게 몸을 앞으로 젖히며 남자가 만들어놓은 옆구리 옆쪽의 빈 공간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푸악! 이번엔 타격이 꽤 컸다. 베어진 상처에 못이긴 남자가 휘청, 하고 기우는 사이 프란이 얼른 그 옆쪽으로 몸을 틀어 빠져 나간다. 그러나 얼마 못가 와악,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땀이 미간으로부터 솟아나 얼굴 전체를 타고 흘렀다. 횃불이 뒤를 쫓는다. 어른어른하는 도깨비불.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칠 것만 같은 불이다. '이런 젠장할! 도대체 뭐냐고, 뭐!' 프란은 욕지거리를 했다. 헤냔, 멋진 여기사님, 그리고 기타등등! 세 녀석과 한 분은 도대체 뭘 하고 있냔 말이다! 프란은 상처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확, 하고 그녀의 시야가 밝아졌다. 프란은 고함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 프란의 몸이 확연히 드러났다. 횃.불.에. 들.켰.다. 상대의 얼굴마저 뚜렷이 보인다. 프란은 순간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횃불이 꺾여져 자신에게 점점 다가올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여덟. 일단, 이 정도인가.' 그들은 프란 주위로 천천히 다가오는 동시에 소리를 질러 흩어져 있는 동료들을 불렀다. 프란은 이를 악 물었다. 바람소리가 잉잉잉잉,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프란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프란은 검을 한 번 휘둘러 비스듬하게 들었다. 아니다, 죽을 수 없어. 여기서 죽다니! 아직 빚도 갚지 못했고 저 악덕 가주를 한 번 괴롭혀 보지도 못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락케이드도 만나지 못했다. 죽을 수 없다. 내가 죽을 줄 아냐고! 속으로 자신을 향해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던 프란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안녕?" "……?" 상대를 향해 웃으며 조그맣게 인사한 프란은, 일단 검을 크게 한 번 휘둘러 공간을 확보했다. 아직 둥글게 둘러싸인 것은 아니니 기회는 있다. 프란은 검을 두 손으로 비스듬히 잡고 허리를 낮추었다. 한 명이 다가서는 순간, 프란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그 자의 오른팔을 벴다. "으아아아아악!" 남자가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자욱한 피내음을 느낄 찰나도 없이, 프란은 뚫린 그 공간을 향해 전력질주 했다. 오른팔을 베인 남자의 비명소리가 프란의 뒤에 그림자처럼 매달렸다. 프란은 아찔한 마음으로 달린다. 이미 드러난 자신의 움직임.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지금 도망가지 못하면 죽는다. 추격은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는 것 같다고, 프란은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마치 영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시밭길을 맨발로 달리는 기분이었던 프란은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프란은 으하하, 하고 웃으며 화살 맞은 몸의 고통조차 잊고 달려나갔다. 젠장, 살았잖아! 프란은 입가에 함지막한 웃음을 띠우며 얼른 말 등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 때였다. 막 말을 발로 차서 방향을 돌리고 있던 프란에게로, 어디선가 공기를 꿰뚫고 또다시 화살이 한 대 날아들었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프란의 등에 정확하게 꽂혔다. 커헉, 하고 등이 휘었다.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한 번 휘청거린 프란은, 곧장 낙마했다. 퍼벅! "윽!" 말이 높은 탓에, 그리고 갑자기 날아든 화살로 인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했던 프란은 그만 다리를 삐고 말았다. 프란을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일단 등에 꽂힌 화살부터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뽑기 위해 손을 뒤로 보낸 순간, 날카로운 검 한자루가 그녀의 손을 막아섰다. "일어서라." 이윽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무섭게 흘렀다. 차가운 검이 그녀의 손목 부분에서 정확하게 멈춰 있었다. 맙소사. 프란은 속으로 중얼댔다. 그녀의 눈이 옆으로 비틀어지며 번쩍, 맹수처럼 빛났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눈이다. "일어서라." 상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하자, 프란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일어섰다. 여섯의 남자가 그녀를 빙 둘러쌌다. 프란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내렸다. 프란은 여섯 남자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분노와 경계를 읽었다. 프란이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르자 검을 드리우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감이 묻어났다. 바로 그 순간,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재빠르게 자신의 등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곤 엇, 하는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그대로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남자의 오른쪽 가슴에 찔러 넣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지금 망설이면 죽는다. 프란은 바람 같은 움직임으로 화살을 맞은 남자를 베었다. 프란의 그 과격한 행동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자들은 무의식중에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기회다!' 프란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벤 남자를 담장타 듯 그대로 타고 넘었다. "뭐하는 거야? 눈앞에서 놓칠 셈이야?" 프란이 남자를 타고 넘은 후에야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다시 우르르, 프란의 뒤를 쫓는다. 욱씬거리는 허리라든가 어깨라든가 하는 것이 프란을 점점 압박해 들어온다. 하지만 참는다. 너무 여러 번 거세게 깨물어서 입술에서는 피가 났다. 화살을 맞은 몸은 방금 전의 움직임이 한계였다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말을 들어주질 않는다. 프란의 움직임은 현저하게 느려지고 있었다. 솟아난 땀이 눈가로 흘러내려 앞이 흐릿할 지경이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프란의 발밑에서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본능의 경각심이 일깨웠다. 뒤에서 검이 달려든다. 분명히 등을 노리고 한 공격이다. 화살이 박혔던 자리. 피가 흐르는 등에 한 번 더 검의 입술이 닿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몸을 돌려 검을 막는 행위를 하기엔 이 순간이 너무 짧다. 갑자기 무언가가 눈앞으로 스쳐 흐르기 시작했다. 험하게 지냈던 어린시절이, 견습 기사였던 그 무렵이, 락케이드와의 기억이, 카르멘 가에 처음 오던 날이. 한 장의 파노라마처럼, 그 짧은 순간에 인생을 거쳐 수많은 기억들이 되살아나 프란에게로 달려들었다. 죽기 적진에,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찰나의 순간을 가진다고 했다. 프란의 눈이, 처음으로 완전한 포기를 결심한 채 질끈 감겼다. 쐐액! 바로 그 때, 어디선가 굵은 빛줄기 하나가 솟아올랐다. 프란은 눈을 둥글게 떴다. 눈이 부신 황금색의 빛이 자신의 앞쪽에서 뻗어 나오더니, 그녀의 뒤를 스쳐 어디엔가 꽂혔다. 퍼억!! 무언가에 꽂힌 듯,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멍하게 생각하는 프란을 향해 다가닥 다가닥, 가까운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베어난 땀이 등을 모두 적셨다. 크게 뜨여진 프란의 눈으로, 백마가 들어왔다. '적군인가? 설마 말로 밟아 죽일 셈은 아니겠지? 젠장, 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지.' 프란은 땀으로 흐릿해진 눈가를 닦아내며 다시 검을 곧추세웠다. 그 눈에선 격렬한 투지는 읽을 수 없지만, 분명히 전해지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프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세우고 입술을 물었다. 포기할 마음 따위는 없다. "나야." 막 프란이 검을 휘두르려고 했던 때였다. 말 위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은 잠시 입을 멍하게 벌렸다. 잘못들은 것일까. 그러나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너무 익숙한 이 목소리. 설마, 하며 프란은 입을 열었다. "……시, 온?" 프란은 놀랐다, 그것도 무척이나. 도저히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타, 빨리!" 시온이 다시금 고함을 쳤고, 프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내밀어져 있는 시온의 손을 잡았다. 시온은 프란을 잡아당겨 곧바로 자신의 뒤에 앉혔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시온의 백마는 갑자기 더해진 한 사람 분의 무게에 잠시 휘청인다 싶었지만, 시온이 가볍게 목 언저리를 두드려주자 곧바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가닥 다가닥. 백마의 흰 갈기가 날렸다. 프란의 머리칼이, 시온의 머리칼이 길게 날린다. 프란은 떨리는 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옷깃을 잡았다. "어, 어이, 시온. 너…… 정말 시온 맞는 거냐?" "그럼 내가 뭐겠어?" 프란의 당혹을 지우며, 풀섶을 스치면서 말이 달린다. 솨악솨악, 두 사람의 몸에 마찰하며 풀들이 소리를 냈다. 잠시 주춤했던 횃불이 방금 전 프란과 시온이 있었던 자리로 우르르 몰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시온 아일린이 이런 곳엘 오다니, 누군가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믿지 않았으리라. 프란은 시온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려 애썼다. 그러지 않았다간 그대로 졸도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풀리자 이제 살았다 싶은지 몸이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격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땀이 비처럼 내려 덮이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려 애쓰며, 프란은 몸을 떨었다. '그건 그러고……아까, 그 빛은 뭐였을까……?' 눈을 반쯤 감은 채 프란은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프란은 고개를 들었다. 예전, 키네세스의 생일 전날 시온과 바깥에 나갔던 그 때 알았던 사실. 시온 아일린이 꼴에 마법사라는 것. 프란은 아까 전, 갑작스레 뿜어져 나와 날카로운 소리를 냈던 그 빛의 정체를 그제야 깨달았다. 시온 아일린이,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아까 그거, 설마 마법?"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은 거야?" 시온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린다. 대 아일린 가문의 서열 세 번째 계승자, 시온 아일린. 시온은 속으로 자조한다. 정말이다. 정말 단단히 빠져버린 것이다.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이렇게 앞뒤 생각 못하고 달려올 만큼. 이대로라면 위험한데, 정말. 시온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시온 녀석만 나오면 닭스럽습니다.. 뭐, 의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은근히 좋아하는..;; 덧, 레드 드래곤님께. 오후에 몇 번 튕겨서 포기하던 카페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대화창이 떴습니다. 레드 드래곤님이셨는데, 굉장히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해요^ㅡ^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매일참......... 별로 많이 한 것도 아닌데=_= 슬슬........ ..........힘들어지려고 합니다;;;(도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9) 가네트(uznian) 03-12-01 :: :: 12012 "……아파, 젠장." 사냥꾼의 화살에 상처 입은 짐승마냥 거친 숨소리. 씨익 하고 한 번 터뜨리는 웃음으로 애써 여유를 가장하려고 하지만, 프란의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시온은 흉부가 크게 들썩거릴 만큼 크게 놀랐다. 프란이 자신의 등에 힘없이 뺨을 기댔기 때문이다. 특별히 기대고 싶어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기운이 모두 빠져 버린 몸이 앞으로 쓰러진 것뿐이지만. 시온은 살짝 프란을 돌아본다. 긴 속눈썹이 가지런히 감긴 채로, 온 몸의 떨림을 닮아 바르르 떨리고 있다. 펑! 펑! 저 멀리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프란은 눈을 번쩍 뜨고는 시온에게 기대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늘에 수놓아지는, 신호탄이 분명한 불꽃들. 이제야 프란과 함께 왔던 네 명이 제 할 일을 한 모양이다. "빌어먹게 굼뜨네." 프란의 중얼거림에, 시온은 피식 웃었다. ▷◀▷◀▷◀▷◀▷◀▷◀ "신호탄입니다." 런스가 말했다. 반은 그답게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히 한마디 했다. "출격." ▷◀▷◀▷◀▷◀▷◀▷◀ "프란. 괜찮겠어?" 시온은 달리던 말을 천천히 멈췄다. 이대로 달리다가는 프란이 낙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온의 옷깃을 움켜잡은 프란의 손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위태위태하게, 방금이라도 옷깃을 잡은 그 손을 놓아버릴 듯이. 뒤에 앉은 프란을 슬쩍 돌아본 순간, 시온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의 얼굴이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하얗게 질려 있다. 모든 것을 먹어치울 것만 같은 기세로, 위로 위로만 선을 그어 올라서는 불길이 이미 샤로테를 휘감은 뒤다. 반군(叛軍)과 진압군. 아마 지금쯤은 전투가 붙어도 치열하게 붙었으리라. 시온은 물론 알고 있었다. 한 나라에 겨우 열 명이 될까 말까한 대단한 존재인 마법사 중 하나인 자신이 진압군에 합류한다면, 자신의 사촌형이 이끌고 있는 진압군의 승리가 훨씬 유리할 거라는 것. 그리고 그 것이, 일전에 반에게 '밉보였던' 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그러나 시온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법사인 자신의 능력을 굳이 빌려주지 않아도 자신의 사촌형이 잘 해낼 거라는 믿음과는 조금 동떨어진, 비뚤어진 무언가. 시온은 일단 프란을 말에서 내리게 했다. 프란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무섭게 떨어져 시온의 얼굴로 비처럼 내렸다. 시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프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어이…… 느끼 버터. ……어디에 손대는 거냐." 말에서 내려놓으려는 행동이라고는 해도, 분명 허리를 휘감은 시온의 손이 유쾌할 리는 없는 것. 프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느 때처럼 소리를 쳤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목소리는 힘이 없이 완전히 늘어져 있다. 시온은 그저 피식 웃으며(보통 때는 이런 웃음을 짓기 전에 프란의 주먹이 날아와 그의 얼굴을 강타하곤 했다.)그런 프란을 부축했다. 그러다 프란의 등에 손가락이 스친 시온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뭔가 미끈미끈한,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뜨거운 것이 손의 감각을 타고 정확하게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프란의 피라는 걸 깨달은 순간, 시온의 얼굴 역시 프란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렸다. "프란! 괜찮은 거냐?" 시온이 놀라서 버럭 고함을 쳤다. 설마 이렇게까지 피를 흘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지혈해야 된다고 말해주지 않은 건가! "소리 울려. 작게 얘기해." 입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시온은 일단 프란의 상처에 마법을 써주려고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막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시온은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젠장! 나 치유계통엔 완전 젬병이잖아.' 그랬다. 마법사라고 다 같은 마법사가 아닌 것이다. 공격계, 방어계, 치유계. 물론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이 세 가지 마법을 모두 부릴 수 있고 대부분이 세 가지 마법을 단계별로 골고루 사용하지만, 몇몇 특이한 자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가 유별나게 뛰어나고 나머지 한두 가지가 말도 안될 만큼 취약한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시온 아일린. 공격계 마법은 보통, 방어계 마법에 있어서는 특출난 실력을 자랑하는 시온 아일린이라는 마법사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치유계통의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아니, 소질이 없는 정도가 아니였다. 영 젬병인 것이다. 일전에는 고사 직전인 식물을 살린답시고 힐링을 썼다가 까맣게 태워 죽인 적도 있고, 죽어가는 암소 한 마리를 놓고 농가의 재산이 죽어간다며 울고 있던 아주머니를 달래며(물론 울고 있던 것이 남자였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썼던 힐링의 결과, 그 무거운 암소를 저 하늘로 멀리 멀리 띄워 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도저히 힐링을 쓸만한 용기가 안 나는 시온이었다. 고사한 식물을 위해서는 작은 묵념을, 하늘로 날려 보낸 암소 대신엔 돈이면 되었지만 프란이 잘못되면 어쩐단 말인가. "프란." 시온의 나직한 부름에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감고 있던 프란이 다시 눈을 뜬다. 땀에 젖은 눈꺼풀이 부르르, 한 번 떨렸다. "……느끼 버터." "왜?" 뭐라고 부르든, 다정하게 대답해주는 시온이다. 으이구, 정말 느끼한 놈.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프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게 아파." 아프긴 정말 아픈 모양이다. 시온은 창백한 땀을 흘리는 프란의 얼굴을, 바싹바싹 말라가는 프란의 입술을 빤히 보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옷 벗어. 붕대 감아줄게." "붕대가 어디 있다는 거냐? 됐다. 일단 돌아 가자고." 프란이 휘휘 손을 젓는데, 시온이 씩 웃는다. "여기 있지." 그런 시온의 품속에서, 언제 준비한 건지 붕대가 한 뭉치 나온다. "……네, 네 놈은…… 네 놈은 왜 이렇게 준비가 철저한 거냐!" 기가 막힌 프란이 당황함에 어버버 뱉어내는데, 시온은 씩 웃으면서 붕대를 들어올릴 뿐이다. "어쨌든 있잖아. 자, 감아줄게." 시온의 말에 프란은 손을 휘휘 저었다. 역시 늘어진 움직임이다. "됐다. 내가 감을게." 프란은 땀을 닦으며 손을 내밀었다. 시온은 순간, 조금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하얀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 숫제 푸른빛이 돌 지경이고, 그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은 차갑게 굳어져서 시시각각으로 얼굴을 덮어가고 있는데. 그러나 시온이 뭐라고 하기 전에, 프란은 시온의 손에서 붕대를 뺏어버린다. 그리고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 위에다 그대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피를 닦아내지도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렇게 어설프게 묶으면 출혈과다로 죽는다고, 하고 경악하는 시온의 표정은 물론 쳐다보지도 않았다. ▷◀▷◀▷◀▷◀▷◀▷◀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붉은색 머리칼의 남자 센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소녀의 자그마한 몸을 두 팔로 부둥켜안았다. 뺨에 자신의 거친 손가락을 대보았으나, 이미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육체에서는 조금의 온기도 돌아오지 않는다. 열여섯. 아직 어리기 만한 나이의 소녀였다. 눈이 멀었으나 대단한 지략을 갖춘 소녀. 처음 만났던 날, 공허한 눈에 자신이 들어차는 것이 신기해 괜히 놀려주었던 소녀다. 언뜻 보면 평범한 듯 보였지만 검도 제법 쓸 줄 알았고, 이 것 저 것 물으면 수줍게 붉힌 볼로 대답도 잘하던, 그런 소녀. 마을에 남겨둘 것을, 어리석은 자신의 욕심으로 데려와 버렸다. 센은 소녀의 잠든 볼에 자신의 뺨을 갖다대고 한 번 부볐다. 딸 같은 아이였는데. 정말 아껴주고 싶었는데. 이 일이 잘 끝나면, 양녀로라도 맞을 참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죽었다. 모든 것이 자신 탓이다. 자신 때문에―. "불입니다! 빌어먹을! 센님! 불입니다!" 센이 잠든 소녀를 가만히 안고 있는 그 방 안으로 뛰어오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불이라고? 센은 이를 부득, 갈면서 책사였던 어린 소녀, 유나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알겠다." 심장을 깨끗하게 꿰뚫렸다. 도저히 어떻게 손쓸 수 없을 만큼 정확한 솜씨―. 자로 잰 듯 명확하게. 대체 어떤 검사 이길래. 센은 유나를 한차례 내려다본 후 소녀의 자그맣고 창백한 손에 입을 맞췄다. "유나, 원수는 확실히 갚아줄게." ▷◀▷◀▷◀▷◀▷◀▷◀ "대장이 누구인가, 대장이!"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불꽃이 일렁인다. 모든 것을 끝내버릴 듯 휘몰아치는 그 것은 사방에 산재한 침묵조차 삼켜버리고,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모든 것을 창조한다. 방책에 놓은 불은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잔인한 파괴자 앞에서, 반란군 대장 센은 당황하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가에린 님이여. 세상에 맙소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온통 검다. 타오른다. 센은 알고 있었다. 진압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방으로 흩어진 카세타의 정식 군대는 돌아오려면 적어도 5일이 걸린다. 그 5일이 끝나기 전에 자신은 수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수도에 준비한 그 수많은 계획이 하나씩 착착 진행되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오직 하나, 진격뿐이었다. 설사 그의 진격을 막기 위해 진압군이 파견되었다 해도, 파견될 진압군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이상 진격은 쉬운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센은 당황하고 있다. 책사- 유나가 죽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복수를 다짐하며 검을 뽑고 나왔던 그였다. 그러나. "대장이 누구냐! 대장이! 기수가 누구냔 말이다!" 센의 고함소리가 아스라이 파묻혔다. 처음, 시작은 그랬다. 불타오르는 샤로테, 뒤는 숲. 앞은 좁은 길. 피로한 군사들. 책사였던 유나에겐 분명 계략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립된 지형에 굳이 하룻밤을 묵겠다는 이유는 뭐야? 센이 묻자, 유나는 그저 씩 웃어보였었다. 이런 지형으로 들어온, 그의 책사에게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사는 죽어버렸고, 센에게는 하나의 선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의 앞길을 확인해봐라!" 센은 반란군 중 한명인 남자에게 명했다. 남자는 헐레벌떡 불길 속을 헤치고 들어가다 놀란 듯 돌아와서 센을 향해 보고했다. "마을의 앞길이…… 모두 말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백은 넘는 것 같아요.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말이라. 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샤로테는 상당히 고립된 지형이다. 앞쪽에 큰 길이 있긴 하나, 그 큰길에서 샤로테로 들어오려면 오솔길 같이 작은 길을 지나쳐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진압군이 그 앞길을 말로 가로막고 있다면, 앞길로 도망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모두 숲으로 도주해라! 근처에 있는 세이네를 집결지 삼아 모인다!" 샤로테의 앞쪽 길은, 빠져나가기에 너무나 위험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샤로테의 입장에서 본다면 좁디좁은 길에서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는 넓은 길로 나가는 구조인 것이다.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게다가 수백의 말까지 있다면. 센은 입안으로 낮게 신음했다. 숲을 택한다. 진압군은 기사다. 모두 기마병. 보병을 가진 자신들이 훨씬 유리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나무가 우거진 숲이라면. 설사 불과 진압군에 쫓겨 도망가는 입장이라고는 해도, 역시 길보다는 숲의 빽빽한 나무들이 있는 곳이 나을 터. 센은 명했다. 흩어져 숲으로 도망하라고. 집결지에서 모인다, 라고. 다른 선택이 있을 리 없다. 앞쪽 길을 말을 탄 기사들이 막고 있다는데 어쩔 것인가. 반란군은 물론, 센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센은 지금, 방금 전 그 명령을 되돌릴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작전대로 되니까 불안한데." 씩 웃으면서 런스가 한 말에, 그의 뒤에 있던 메이스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센의 뒤를 따르는 군대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달려 나왔다. 갑작스러운 불과 책사의 죽음, 길을 가로막은 기마병 등등, 그들을 당황시키는 요소는 많았으나, 적어도 그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나름대로 침착하게 상황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숲에 들어서면서부터, 센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숲 안의 새벽 공기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했다. 이 미친 듯한 불길조차 잠재울 정도로. 유나의 시체를 불길 속에 내버려 두고 달려오는 길. 어째서, 뒤에선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토막 낸 레몬조각 같이, 구름 속에 가려 반쯤만 얼굴을 내린 비나룬의 빛까지. ……어쩐지,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으아아아아아악!" 센의 예감을 옳았다. 모든 상황의 부자연스러움을 찢어 내린 것은 벼락같은 비명소리였다. 그리고 그 비명소리가 숲에 자욱히 울린 순간, 센은 알아버렸다. 자신의 심장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던 그 비정상적인 적막. 그 비정상적인 긴장감.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어째서……! 분명히 마을 앞길에서 이리로 오고 있다고……!" 그들의 눈앞에 선 것은 바로 적군(敵軍)―. 진압군이다. 신이여! 센은 놀라버렸다. 빌어먹게도,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 그 이점을, 기동성을 버렸는가! 진압군은 모두 이 곳에 모여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모두 말은 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마을 앞길에 있던 말은, 속임수를 위해 버렸던 것이다. 속았다!! 센은 돌아가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 가넷입니다. 어제 연재를 못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변명이겠지만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돈까스집 아르바이틉니다. 어제 사장과 싸웠습니다-_- 정말 대판 싸웠지요. 세상에 11시 30분까지 붙잡아두는 게 어딨습니까. 오늘도 싸웠고... 앞으로 3일간 안 나오면 돈도 안주겠답니다. -_-화납니다, 화나죽겠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조금 있다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ㅁ;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10) 가네트(uznian) 03-12-02 :: :: 17290 "대장! 대장은 어디 있나!" 케이온 기사단과 디센 기사단은 차분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기동성을 위해 필요한 말을 잠시 포기한 대신, 많은 것을 얻었다. 실상 숲에서는 기동성도 그다지 필요치가 않다. 오히려, 말이라는 거수(巨獸)가 장애가 될 뿐. 어느 샌가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다. 반군의 저항은 강력했으나, 불에 쫓겨 온데다가 평정심을 잃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사단의 약점은 수적인 열세. 그러다보니 피해는 막상막하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난리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단연 네 사람이었다.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와 디센 기사단장인 메이스는 지금 자신들이 몇 명이나 베어 넘겼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래서 평소 그 둘을 단장으로 모셔왔던 기사들은 당황을 넘어서 경악하고 있었다. '세키에(자비의 여신)님! 제가 옛날에 단장님 의자에 소스 뿌린 거, 그래서 단장님이 하루 온종일 엉덩이에 노란 소스 묻히고 다니신 거 말입니다! 그거 제발, 제발 단장님이 이 세상 하직하는 그 날까지 영원히 들통나지 않게 해주세요!' '세키에님! 옛날에 단장님 뒤에서 욕하다 걸린 거, 그거 어떻게 단장님 기억 속에서 지워주실 수 없습니까?' '세키에님! 어찌하여 그동안 저런 단장님과 맞먹는 저를 그대로 방치하셨나이까!' 기사단원들은 반군들과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절절한 심정으로 저마다 단장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연은 단장이 누구의 짓인지 모르는 채로 넘겨버린 일들이 제발 영원히 비밀로 묻혀버리길 기원하는 것이다. 촤악! 그러나 역시, 지금 이 곳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물론 런스나 메이스보다는 반이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년의 하얀 얼굴만으로도 관심이 집중될만한데, 반이 베어 넘기는 검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깔끔해 보는 사람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반은, 정말로 군더더기가 없는 검술을 구사하고 있다. 움직임이 말도 안될 만큼 간단하다. 슬쩍 검을 비틀어, 급소만을 정확히 노려 찌른다.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 짤막하지만 확실한 검에, 처음에는 반의 여리여리한 외모를 우습게 여겨 달려들었던 반란군은 크게 낭패를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세 명을 제외하고도, 유난히 이 곳에서 돋보이는 남자가 하나 있다. 카르 센, 반란군의 우두머리다. 챙캉! 챙캉!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는 가운데에서, 센은 미친 듯이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기묘해보였다. 붉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30대의 남자가 미친 듯 휘두르는 검. 피로 적셔져도, 변하지 않는 머리카락의 석류빛. 센은 가슴을 죄어드는 자괴감으로 미친 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검과 검이 맞부딪히고, 날카로운 검의 잔광이 비나룬에 반사된다. 생과 사가 엇갈린다. 수많은 목숨들이 검 하나에 자신을 걸고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간다. 그러다가, 누구보다 깊숙이 반란군 쪽으로 침투해 들어가 싸우던 런스가 어느 순간 흠칫하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쉬익! 갑작스럽게 생긴 런스의 빈틈에, 기회다 싶었는지 양 옆에서 검이 뻗어져 나왔다. 깜짝 놀란 런스는 오른발을 옆으로 뻗어 먼저 달려오던 자의 검을 차내고, 왼쪽에서 오던 자는 검을 크게 휘둘러 팔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추슬러 달려오는 오른쪽 사내를 향해, 런스는 검을 횡으로 베었다. 런스는 다시, 방금 전 자신을 경악하게 한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물론 이번에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다. 런스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기사들을 무자비하게 상대하고 있는 센의 모습이 있었다. 웬만한 기사들의 공격을 단번에 간파해내는 예리한 검날. 30대 초반?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지도 모른다. 휘두르는 검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자신이 상대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적의 검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은, 분명. "……카, 르멘 가의 검……?" 분명했다. 아무리 확인하고 확인해 봐도, 그것은 카르멘 가의 검법이다. 경악한 런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반란군을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일단 소리를 높여 고함부터 질렀다. "가주님! 적장수가 카르멘 가의 검을……!" 그렇게 말하며 런스는 반을 향해 달려갔다. 런스의 커다란 목소리가 반을 향해 곧장 들어왔다. 검을 휘두르고 있던 반이 눈썹을 꿈틀하며 런스를 돌아보았다. 어찌나 깨끗하게 베어나갔는지, 어찌나 위협적인 검을 썼는지, 이제 반의 주위에는 동그란 원이 만들어졌을 뿐 누구도 그 원 안으로(반의 공격이 유효한 거리 안으로) 공격해 들어오질 않는다. 반은 그 원을 향해 들어오려고 애쓰다가 적들 사이에 파묻히기 시작한 케이온 기사단장을 향해 물었다. "뭐라고 했나." "적장수가, 카르멘 가의 검을! 카르멘 가의 검을 쓰고 있습니다!" 런스는 다시 소리 높여 뱉어냈다.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반란군 우두머리가 휘두르는 검이 카르멘 가의 검이라니. 그러나 믿지 않으려고 하기엔 너무 같지 않은가. 카르멘 가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검. 휘두르는 듯 베고 베는 듯 휘두르는 검. 저건 분명, 카르멘의 검이다. 반은 검을 비스듬히 올려 쥐곤 런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이윽고, 그가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반은 아무 말도 않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온 몸으로 느껴진 찌릿한 느낌에, 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이 대신 나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문제다. 반은 갑자기,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 힐트를 조금 헐겁게 쥐었다. 곧이어, 그가 앞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는 걸 보며, 런스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반을 향해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그를 에워싸고 있던 반군(反軍)은 반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자 엉겁결에 몸을 흠칫하며 비켜나다가, 그런 스스로에게 흠칫해 다시 검을 세웠다. 그러나 차라리, 검을 세우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촤악! 언제 베었고, 어떻게 베었는지, 반은 크게 한 번 휘두른 검으로 재빠르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두 사람을 순식간에 처리해 버린다. 피에 젖은 보라색 머리카락. 은보라색 눈동자 끝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약간의 감정을 머금는다. 어쩌면 분노라고 불릴만한 감정인지도. "대장! 대장은 어디 있나!" 센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고함을 치고 있었다. 반군의 사기를 고조하기 위해 진압군의 대장과의 1대 1을 전투를 제의할 셈이었다. 센은 그렇게 한참을 부른 끝에,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한 남자를 보고 멈칫 멈춰 섰다. 반은 어지러이 검휘를 날리며 센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반의 검이 휘두르는 잔광이 센에겐 뚜렷이 보였다. 그리고 달려오던 반이 드디어 몇 명인가를 베고 센의 앞에 우뚝 멈춰 섰을 때. 센은 감각적으로 깨닫는다. 자신에게 검을 가르친 '그' 가 언제부터인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자. 이 남자가 바로……. "저스티스 카르멘인가?" 센이 웃으며 물었다. 반은 물론이고 센조차 잔뜩 피에 젖어, 두 사람이 나란히 검을 대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수장의 대결이다! 라고 누군가가 속삭이자마자, 어느새 거짓말처럼 두 무리가 양 옆으로 갈렸다. 이것은 암묵의 룰. 수장의 대결로 좁혀진 숲은 흉흉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두 무리 모두 숨을 돌릴 틈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잠시간의 침묵이, 숲 안에 가득한 공기를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만든다. "……누구냐." 어느 순간, 침묵을 깨고 반이 낮게 입을 열었다. 런스는 움찔한다. 반의 목소리는, 런스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것보다 음산했다. 밑으로 무겁게 깔린 그 목소리에, 센은 거짓말처럼 알아버린다. 반을 처음 보는 것이었음에도. 이 자는, 특히 지금의 이 자는. .....위 험 해. "센이라고 한다." 센은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은 묵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이름 따위 알 바 없다." 센이 쳐다보자, 반이 검을 가로로 눕혔다. 표정의 변화도, 눈매의 변화도, 무엇도 없이. 그러나 반의 검 끝은 누구보다 더 분노해 있었다. "내가 묻는 건 네게 검을 가르쳐준 작자다." 센이 흠칫하는 사이, 갑작스레 반이 검을 휘둘렀다. 센은 물 흐르듯 자신을 향해 오르는 반의 검을 정확하게 받았다. 챙! 하고 명검끼리의 맑은 마찰음이 들린다. 반과 검이 부딪히자마자 센은 얼른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러나 반은 그 틈조차 없이 검이 부딪치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오른발에 힘을 실어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챙! 챙! 챙! 검의 소리가 마치 타악기의 맑은 소리처럼, 너무나 청명하다. 기사단과 반란군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단장님. 잘 안 보이는데요." 케이온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좌절에 빠진 목소리로 머리를 감싸며 한 말에, 런스는 피식 웃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겨라. 저기에 하나도 안 보이는 호슨도 있다." 호슨이라 불린 기사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런스를 보고 있었다. 센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반을 보면서, 이런 제길,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반의 실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라서, 라거나 자신이 반의 검을 상대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인간이랑 싸우는 건가?' 어쩌면 이리도 굳어 있단 말인가.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다. 검을 든 사람이라면 적어도, 검을 든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끓어오르는 투기에 몸을 떤다. 아무리 자기 컨트롤이 강한 사람이라도, 검을 들고 싸우는 동안 얼굴로 번져 오르는 열기를 감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다. 그런데 도대체 뭔가, 이 남자는. 센은 항상 들어왔다. 그에게 검을 가르친 자가 언제나 말해왔기 때문에, 센은 이 저스티스 카르멘에 대해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은보라색의 신비로운 눈동자. 가닥가닥 결이 고운 보라색의 머리카락, 검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곱상한 얼굴, 젊다고 말하기에도 뭣한, '어린' 나이.- 차갑고 냉정한 성격. 지인에게조차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메마름. 그리고……. 천재적 소질의 검사. 챙캉!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몸을 길게 뺀 센이 반을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댔다. 키잉, 하고 검이 가까이 온다. 거의 서로의 이목구비까지 또렷이 확인할 수 있게 된 순간, 반이 입술을 열었다. "다시 묻지." 그리고, 센은 놀랐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분명 방금 전, 반은 자신의 오른편에서 비스듬히 자신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반의 검날을 따라서, 죽 따라 올라가는 팔선을 따라서, 분명히 반이라는 남자는 바로 거기에, 자신의 오른편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째서 목소리가. 왼편에서 들리는 걸까……? 챙!!!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막았다.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입을 열지 않았다면, 꼼짝 없이 당할 뻔 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너에게 검을 가르쳐준 자가 누구냐." 센은 그제야 알아챘다. 이 저스티스 카르멘이라는 남자의 폭발적 움직임이 어째서 가능한지. 방금 전에 그 순식간에 이루어진 이동이 어째서 가능했는지. "가르쳐줄 것 같으냐." 센은 검을 천천히 쥐었다. 그래. 언젠가, '그' 가 자신에게 말해주었던 것이 퍼뜩 생각났다. '저스티스 카르멘을 만나면, 방심하지 마라. 방심하는 순간 죽어. 그리고 하나 더, 그 자는 자신의 실력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강하게 밀고 나가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수밖에 없어. 검이라는 건 정말 사람을 닮는 모양이야. ……후후, 저스티스 카르멘은 그가 휘두르는 검 하나만 봐도 모든 걸 알 수 있는 남자다.' 반의 검이 순간적으로 휭, 하고 세로로 그어졌다. 다행히 베기라고 생각한 센이 훌쩍 한걸음을 뒤로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마치 귀신과 같은 움직임으로, 분명히 한 스텝 느리게 발걸음을 떼어낸 반의 얼굴이, 어느 새 불쑥 그의 면전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압도적인 스피드에 센은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다. "……본가(本家)의 검이더군." 반의 목소리가 싸늘히 식었다고 생각된 순간, 센은 이번에야말로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솨악! '유나…….' 검은 똑바로 직선을 그리며 아래로 그어졌다. 피는 요란스레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반은, 쏟아지는 피의 비를 피할 수 있음에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 날 살아서 도망간 반군의 수는 채 2할이 되지 않았다. ▷◀▷◀▷◀▷◀▷◀▷◀ 프란과 시온이 기사단과 합류하기로 한 가르디아 평야에 도착한 것은 아침 무렵이었다. 원래라면 프란이 가장 먼저 도착해야 했으나, 시온의 말이 도중에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도착이 무척이나 지연되었다. 시온은 그가 자신 소유의 말을 얼마나 혹사시켰는지는 생각도 않고, 불쌍하기가 그지없는 그 백마를 발로 차는 것으로 여태까지의 말의 노고에 답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시온일지라도 양심은 있는 탓에, 그리고 행동은 그래보여도 어머니 이진느가 주었던 이 백마를 꽤나 아꼈던 탓에, 그는 말을 버리고 가는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말이 쓰러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인가에 부탁해, 잠시 백마를 맡기고 그 집의 갈색 말을 빌려 탔다. 시온의 백마는 무척이나 화려해서, 말을 빌려준 입장에서는 시온이 자신의 말을 돌려주지 않길 은근히 바랄 정도였다. "프란."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가르디아 평원에서 기사단을 발견한 시온은, 나직하게 프란을 불렀다. 깜빡 잠이 들었던 걸까. 새벽의 희미한 우윳빛이 스러지고 환한 빛이 공중에 떠올랐다. 벌써 낮이다. 시온은 먼저 말에서 내리고는 프란의 손을 부축해서 내리게 했다. 프란은 내리는 동시에 조금 놀랐다. 잠든 사이에 한 것인지, 자신의 몸에 붕대가 꼼꼼하게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등 부분부터 차분하고 단단하게 감겨져 어깨 부분까지 감싼 붕대가 상처를 감싸고 있다. "이거 네가 한 짓이냐?" 분명 옷을 벗기고 감은 것이다. 이 자식이 감히! 하고 생각하며 프란이 부들 떨면서 한 질문에, 시온은 능청스럽게 답했다. "아니, 귀신이 했어." "아주 죽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군." 프란이 검에 손을 갖다대며 한 말에, 시온은 빙긋 빙긋 웃으며 자신의 볼을 콕, 하고 애교스럽게 찔렀다. "네 손에라면 얼마든지." "……." 프란은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몸이 아프지만 않다면 마음껏 구타라도 했을 텐데. 사실은 검을 뽑을 힘도 없었기에, 프란은 오늘만은 넘어가주기로 한다. 그런 프란을 향해, 시온이 갑자기 정색하고 말해왔다. "일단 지혈을 하긴 했어도 아직 잘 모르는 일이니까, 의사한테 같이 가보자." "됐다. 나 혼자 가도 충분해." 프란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이 바람둥이 버터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숨기려 했을 뿐이다. 시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순간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그녀다. 프란은 '왜 어제 나를 구하러 왔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질문을 해봤자 돌아오는 답이야 뻔한 것이고 정말 오랜만에 시온에게 생긴 이 고마운 감정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마워." 프란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시온은 한참 멍하게 그녀를 보았다.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감사의 말인가? 아니, 처음 듣는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온은 한참만에야 씩, 하고 웃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굳었던 주제에 마지막에 지어보인 웃음은 마치 '이 정도쯤이야.' 라고 말하는 듯해서, 프란은 비웃음의 뜻으로 그의 등을 퍽 하고 한 방 쳐주었다. "걱정 말라고,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 그 말과 함께 프란은 빠르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 프란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온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 오늘의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거지. 시온은 다시 빙긋 웃는다. 그래, 오늘은 이걸로 물러 서 주지. 하지만 물러서는 건 오늘만이다.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아니, 한발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다. 시온은 자신이 마법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아주 오랜만에 했다. "흠, 역시 난 멋진 남자라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시온이었다. 프란은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일단은 저 가주에게 귀환을 알려야 한다. 생각보다 도착이 늦었는데, 혹시나 조금이라도 걱정을 하는 건 아니겠지? 한참 기쁜 마음으로 걷던 프란은, 갑자기 심장 한 부근이 욱씬거리는 걸 느끼곤 멈춰 선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자신이 죽인 그 소녀의 얼굴이 말이다. 아아, 잊고 있었구나. 죽였지. 내가. 이 손으로. 허리에 걸고 있는 이 검으로. ……심장을 찔러서. 머리가 다시 아파온다. 프란은 조금 비틀린 걸음걸이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 때, 프란이 움찔하고 멈춰 섰다. 그녀를 저 쪽으로부터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반이다. 반은, 어찌된 일인지 기사단의 앞에 서 있다. 기사들이 어제 새벽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입은 피해를 정리하고 있는 사이, 반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언가' 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로. 프란이 의구심을 가질 새도 없이, 반은 망설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평소보다 조금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걸어왔다. 프란은 그런 반을 잠시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허, 하고 김빠진 웃음을 웃었다. 반과 프란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한 차례 바라본다. 문득, 반이 입을 열었다. "……늦었군." 순간, 프란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에. '미, 미친 거 아냐?' 왜 눈물이 나려 한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그리고 또 뭐냔 말이다, 이 안도감은. 분명히 시온이 온 순간에 자신은 구출되었던 거였는데, 이제와 온 몸이 저리도록 '살았다.' 라며 안심하게 만드는 이 안도감은. 반은 프란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 역시, 이 냉묵한 얼굴의 남자를 바라본다. 어디 다쳤는가 싶어서 보지만, 역시나 대마왕. 다친 곳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인다. "……." 반은, 시선을 어디로 둬야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자신의 시종의 상처를 관찰한다. 무사하다. 다쳤을 뿐. 가장 먼저 오거나 아니면 조금 늦었어야 할 시종은, 상당히 많이 늦었다. 반은 그런 프란에게 뭔가, 말을 해줘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잘했다? 수고했다? 아니, 그런 건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죽 보필해온 비켈린에게도 잘 하지 않는 칭찬의 말인데.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반은 잠시 망설이다, 무의식중에 툭하고 뱉어낸다. "……살아서 왔군." 그렇게 말한 반은, 순간적으로, 프란의 눈이 멈칫하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그 순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뿍 담은 채로 한 차례 떨렸는데, 그 것은 놀라움 같기도 했고 다른 무언가 같기도 했다. 반은 얼른 그런 프란에게로부터 등을 돌렸다. 왜일까. 방금 전, 추위에 떠는 새처럼 몸의 어느 한 부위가 떨린 듯도 한데. 조금 후에야 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따라와라." =========================================== 가넷입니다. -_-폐인대전의 시작으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는 가넷입니다;ㅁ; 카페에 글 올리기는.. 어째... 점점 거짓말처럼 되어가고 있는... 꼭 올리겠습니다..(엉엉- 그래도 일단 가넷 백문백답은 올렸다는;ㅁ; ...아무도 그런 거 원하지 않아, 퍽!!) 오 나의 주인님을 쓰고 있는 요즘. 제가 모터를 달고 글쓰는 것 같습니다.;; 옛날 연재와 함께 호흡하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한 편 분량이 짧고-_- 연참도 잘 안하는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조건 11KB가 넘어요;ㅁ; (이편은 17이나...ㅠ_ㅠ) ..........-_-요점은. ..................................그냥 폐인대전 개막이라구요!!(퍼억!) 덧. 가넷도 리플 좋아해요+_+(그냥 솔직히 리플 달아달라고 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11) 가네트(uznian) 03-12-04 :: :: 14536 따라오라는 말에, 프란은 미적미적 반의 뒤를 따른다. 반은 저번보다 훨씬 자그마한 막사에 들어섰다. 돌아보니, 이 평야에 쳐 놓은 막사는 이 것 하나뿐인 듯 했다. 반은 그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프란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벗어라." "……?" 갑자기 튀어나온 벗어라, 라는 말을 물론 프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이었고, 그래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멀뚱한 표정으로 반을 쳐다보다가, 반의 입술 모양을 토대로, 그리고 얼핏 들렸던 그 소리를 토대로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말들을 조합해본 프란은, 움찔하고 몸을 틀었다. "예?" "……상처를 봐야겠다." 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프란은 한참동안 반을 바라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머릿속은 수백 개의 실이 어떻게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꼬인 광경과 비슷한 형태로 마구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상처를 봐야겠다니. 혹시 지금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뺐다. "아닙니다, 가주님. 상처는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시, 시온이……." "시온이 치료를 해주었다는 거짓말은 안 해도 된다." 반은 딱 잘라 말했다. 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시온 아일린이 치유계통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걸. 시온이 고사시킨 수많은 식물 중 대부분이 아일린 가의 저택에 있는 정원에 피었던 꽃인 탓이다. '으아아앙, 시온님이 또 제가 제일 아끼는 장미를 말려 죽였어요!' 라며 아일린 가의 집사장을 향해 달려가던 정원사의 얼굴도, 반은 기억하고 있다. "……아, 아니요. 시, 시온이 붕대를……." 반은 말없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다시금 얼어붙는다. 이 빌어먹을 대마왕의 눈은, 정말이지 한 번 보고 있으면 반항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저런 눈으로 사람을 봐서, 이렇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건지. 지금 벗지 않으면, 또 검이라도 뽑을 셈인가? 반의 눈동자를 보고 있던 프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설마 벗기기야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프란은 배에 힘을 주었다. "아닙니다, 가주님. 저는 특이체질이라서, 정말 빨리 낫거든요. 별로 심한 상처도 아니고. 하하하, 괜찮습니다." 꽤나 심한 상처를 입었음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던 차다. 프란은 반의 그 매서운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명을 해댔지만, 반의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프란은 으아아아아,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다 다시 소리를 쳤다. "……아, 저는 몸에 흉터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몸 보이는 걸 싫어합니다." 둘러대듯 얘기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어깨 부근에, 작다고 말하기에 뭣한 흉터가 있긴 하다. 어린 시절, 우정의 표식이랍시고 새겼던 것이다. 흉터라고 말하긴 뭣한, 반달 문양을 한 일종의 문신. 그러나 역시, 이 변명은 반에겐 통하지 않는다. "벗어라." 빌어먹을. 반이 탁하고 내뱉는 말에,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까? 그래, 일단 상의를 벗은 다음 재빨리 앞을 가리자. 가슴팍에 붕대를 단단히 감은 건, 어제 다쳤기 때문이라고 하자. 그런데…… 통할까?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천천히, 반의 편으로부터 돌아섰다. 그녀는 아주 느릿한 움직임으로 상의에 손을 댄 다음, 옷을 벗기 시작했다. 팔을 빼내는 프란의 손끝에서는 땀이 베어 있다.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아아, 정말 단단히 감아졌을까? 그래도 표시가 날거다. 프란은 옷을 벗는 동작과 가슴 부분을 팔꿈치로 가리는 동작을 거의 동시에 하고 있어서, 아주 미적미적 힘들게 옷을 벗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으아아아! 시온 아일린! 너는 도대체 이럴 때 등장 안하고 뭐하는 거냐!' 언제나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어 꼭 한 대 얻어맞곤 하던 시온 아일린이 이렇게까지 아쉬운 적은 없었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 '헉.' 프란은, 갑자기 튀어 들어온 목소리에 얼른 옷을 내렸다. 정면에서, 갑자기 뛰어든 사람은 헤냔이었다. 가슴 부분이 거의 보일 만큼 옷을 벗고 있던 프란과 딱 시선이 마주친 헤냔의 얼굴이 한가을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어떻게 수습이 안 될 정도로 붉어진 얼굴의 헤냔은, 버벅버벅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흠, 흠, 흠흠, 하고 연신 헛기침만 해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지나칠 정도로 당황하며 시선을 둘 때를 모르는 헤냔을 향해, 반이 물었다. 헤냔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얼굴색을 억지로 숨기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시, 시간 됐습니다. 나와서 식사하십시오." "……." 반은, 프란을 힐끗 보았다. 프란은 '고맙다, 헤냔 드 키에르. 네가 인생에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구나. 어렸을 때 나한테 여자는 안 되느니 어쩌느니 했던 거, 내가 다 용서해주마.' …… 하는 표정으로(물론 반과 헤냔, 두 사람 모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헤냔을 보고 있었다. 반은 나와라, 하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려 바깥으로 먼저 나갔다. 막사 안에는 갑자기, 헤냔과 프란만 덩그렇게 남겨진다. "……." "……." 얼마만의 재회던가. 헤냔은 이 뜻하지 않은 행운에 멍하게 프란의 얼굴 이모저모를 훑는다. "……오랜만이지?" 헤냔이 여전히 붉은 얼굴로 입을 연다. 프란은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기사가 되었군?" 프란은 조금 질투가 났다. 자신과 다투던 그 소년이 어엿한 기사가 되어 있는 모습에 질투가 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 기색을 감지해내지 못한 채, 헤냔은 부드럽게 웃어보였을 뿐이다. 여전히 조금 홍조 띤 얼굴로. 언제나의 첫사랑인 소녀를 향해, 헤냔은 웃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바보같이 피식피식 웃던 헤냔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표정을 굳혀 프란을 보았다. "……그나저나 프리나. 너, 도대체 왜 카세타에 있는 거야? 그것도 저, 냉혈인간인 저스티스 카르멘의 시종으로." 드디어 물어보았다. 정말 궁금했던 것이지만, 프리나가 '모르는 척 해' 라는 말을 전해왔기에 여태껏 참고 참아왔던 질문이기도 했다. 프란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궜다. 이 상황에선,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 프란은 뒤통수를 슬그머니 긁었다. 그녀로서는 갑자기 나타나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보는 헤냔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 "……빚을 졌어." "뭐?" 헤냔은 동그래진 눈으로 반문했다. 그가 알기로, 프리텐 가문은 건재한 상업가였다. "아일린 가에, 7000만 케트를 빚졌어." "뭐? 뭐라고?" 더욱더 놀라서, 헤냔이 반문한다. "그래서, 그 대가로. ……시종이 되기로 했어. 지금은 보다시피 남장 중이지. ……여태껏 그랬듯이, 나를 좀 모른 척 해라." 헤냔은, 갑자기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버린다. 남장? 시종? 빚을 져? 게다가 7000만 케트? 무슨 그런 천문학적인 숫자를! "너의 아버지는!" "죽었어." 덤덤하게 나오는 프란의 대꾸에, 헤냔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패닉 상태였던 헤냔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프리나?" "……프란이야." 헤냔은 아, 하고 소리를 낸다. 그래, 맞아. 남장 중이라고 했지……. "그래. ……프…… 란. 방금 전에, 너……. 아일린 가에서 빚을 졌다고……." "응." "그런데 어째서……." 헤냔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 카르멘 가에 있는 거야?" ▷◀▷◀▷◀▷◀▷◀▷◀ "센이 죽어?" 남자는 놀란 얼굴로 소리를 쳤다.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한 그 질문에, 그에게 소식을 전하러 왔던 푸른 옷의 소년은 고개를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센이 죽다니?!" 말도 안 된다. 센은 반란군의 중심. 센이 없는 반란군은, 줄기가 없는 나무와 마찬가지다. 남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센은, 그가 검을 가르친 자였다. 원래 센은 용병으로 떠돌며 격식도 무엇도 없는 검을 구사했다. 수많은 검이 섞여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기에 제대로 된 검을 가르치면 흡수가 빠를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옳았다. 검을 가르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센은 이미 훌륭한 검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카르멘 가의 제대로 된 검을! "대체, 대체 누구에게 당한건가!" 남자는 버럭 고함을 쳤다. 푸른 옷의 소년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저스티스, 카르멘에게." 남자는 흠칫 몸을 굳힌다. 푸른 옷의 소년은, 자신이 보았던 바를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의 검을 알아보고 기사단장이 소리를 쳤던 것이며, 그 순간 몸을 돌려 달려왔던 저스티스 카르멘의 모습이며. 몇 번 검을 부딪치다, 어느 순간 빨라진 움직임으로 센을 베어버렸던 저스티스 카르멘의, 그, 얼음 같은 눈이며. 푸른 옷의 소년은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전투도 무엇도 아닌, 보고였으므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싸우면서, 그는 저스티스 카르멘을 관찰하고 있었다. 센을 베던 순간, 소년은 온 몸으로 돋아 오르는 소름에 잠시 치를 떨었다.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하나. 검을 나누는 동안, 분명 그 자는 영혼이 없는 인형과 같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인형. 마지막 순간에 센을 벨 때. 쏟아지는 피를 피하지 않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쓰며 보였던 무표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빛나던 은보라빛 눈동자. 그리고―. 소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카르멘 가주의 시선은 곧장, 소년에게로 와 박혔다. 마치,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박혔던 그 시선. 소년은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냉철한 사람은 이미 알아버린 것이 아닌지. 이미 알고도,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은 아닌지. ▷◀▷◀▷◀▷◀▷◀▷◀ 프란으로부터 '……아, 아일린 가의 가주와 카르멘 가의 가주가 친구야.' 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들은 헤냔은 조금 당황한 걸음걸이로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 하마터면 '두 가문의 가주가 동일인물이야.' 라고 말할 뻔 했던 프란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처음 이 곳에 오던 날, 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두 인물이 동일하다는 것은 어떤 곳에 알려져서도 안 되는, 비밀이라고 했던 말. 그래서 프란은 말했다. 두 사람이 친구고, 그래서 아일린 가의 가주가 자신을 카르멘 가의 가주에게 넘겼다는. 그러나 그 말만으로도 이 정직하고 곧은 소년 기사를 경악시키기엔 충분했다. "뭐야? 그 두 사람이 친구라고? 그 두 사람이 검은 마음으로 손이라도 잡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헤냔의 중얼거림에, 프란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안됐지만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니, 대마왕이 마음을 먹는 순간 대륙이 뒤집히겠지.' 프란은 그리고, 새삼 반의 위치를 깨달았다. 막사에서 나온 헤냔은, 고심하는 얼굴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친구라니! 검의 가문과 상업의 가문. 무력과 재력. 그 두 가지가 결탁되었을 때 일어나는 피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두 가문 중 한 가주가 저런 냉혈한이라면. 헤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여어! 거기 애송이 기사!" 그 순간, 헤냔은 흠칫하고 멈춰 선다.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불쾌한 소리로 들려온 것이다. 애송이, 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분하지만 자신밖에 없다. 뭔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리던 헤냔은 저 멀리에 있는 은발의 소년을 보고 다시 한 번 미간을 좁혔다. 알고 있다. 이 얼굴은, 프란의 말을 자신에게 전하러 왔던 그 남자의 얼굴이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헤냔은 남자, 시온을 향해 소리를 쳤다. 시온은 피식, 웃는다. "글쎄.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특유의 능글능글함으로 시온은 헤냔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조금은 작은 헤냔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시온은 삐딱하게 말했다. "……어이, 저번에 경고하는 걸 잊었는데. 넘볼 생각 하지 마." "뭘?" 헤냔은, 순진한 어조로 멍하게 되물었다. 시온은 속으로 순진하긴, 하고 비웃으면서도,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프란 말이다, 프란. ……아니, 너에겐 프리나라고 해야 하나? ……넘볼 생각 하지 말라고." "뭐라고?" 헤냔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져, 시온을 향해 인상을 긋는다. 시온은 훗, 하고 웃으며 몸을 돌렸다. "경고 했다, 헤냔 드 키에르." 마지막까지 폼을 우선시하는 시온답게, 그는 머리카락을 느끼하게 쓸어 올리며 그렇게 말하곤 헤냔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시온을 보면서, 헤냔은 어이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릴 수밖에. "……뭐야, 저건." 갑자기 '저건' 이 되어버린 시온이다. ▷◀▷◀▷◀▷◀▷◀▷◀ 깃발이 휘날린다. 날렵하게, 수십 개의 칼날이 된 햇빛이 잘게 쪼개어져 하늘에서 내쏘여진다. 하늘은 밝기 그지없는 햇빛은 내보내고 있으면서도, 너무 덥지 않게 기온을 조절해주어 온 사방의 공기가 상쾌한 느낌이다. 이 정도 날씨면 피크닉가기 딱 좋겠군, 하고 런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뒤쫓고 있던 반군 하나를 베었다. 샤로테에서 놓친 반군은 전체의 2할도 되지 않았지만, 그 도망자들을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반의 생각이었다. 프란이 돌아온 그 시간, 점심을 먹자마자 반은 출격 명령을 내렸다. "벌써요?" 새벽까지 전투를 한데다가, 부상당한 동료를 치료해주느라 잠도 거의 자지 못한 상태였다. 죽은 동료를 위해 슬퍼할 틈도 없이, 반은 곧바로 말에 타 출격을 명했다. "벌써 출발 하시려구요?" "다 도망간 뒤에 쫓을 건가." 반은 그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대마왕,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이 그 뒤를 이었고 가주님! 하고 소리치며 런스가 뒤를 이었다. 그 뒤는 뜻밖에도, 언제나 반에 대해선 발끈발끈 하는 헤냔이. 그래서, 기사단은 점심이 속에서 채 소화되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반군이 도망은 하였으나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그나마 기마병이었던 자들도 지난 샤로테 전투 때 말을 잃은지라 기동성은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 부상까지 입었으니 더 말해야 무엇하랴. 그러나 반은 지체하길 원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반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어이, 키르. 웬일로 이번엔 잔소리가 없어?" 아나이스가 피곤한 얼굴로, 옆에서 말을 모는 헤냔을 향해 물었다. 지난 밤, 프란이 주목을 끄는 동안 방책을 태우는 역을 맡았던 아나이스는 지금 상당히 피로한 상태였다. 정신적으로 극도로 긴장해 있었고, 샤로테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반군을 베어 넘겼기 때문이다. "……." 헤냔은 대답 않았지만, 아나이스는 피식 웃으며 다 안다는 듯, 헤냔의 옆구리를 푹 찌른다. "……솔직히 말해봐, 키르. 반했지?" "무, 무, 무슨 소리야?" 헤냔이 화들짝 놀라서 한 말에, 아나이스는 이번엔 더더욱 진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키르으으으응." "……끝에 응은 제발 빼줘. 올릴 것 같아." 헤냔의 야유에도, 아나이스는 아랑곳 않았다. 그녀는 역시, 이 소년 기사를 놀리는 가장 큰 주범이었던 것이다. "그 날, 샤로테에서." "……." "……너도, 나랑 같이 봤잖아. 저, 저스티스 카르멘이 적장수와 싸우는 것." 헤냔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보았다. 그,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휘둘리는 검 끝도. 냉정한 눈동자도. 그 움직임도. 직접 겪어봐서 그가 대단한 작자라는 것, 몰랐던 건 아니었다. 헤냔은, 기본적으로 반이 너무나 싫었다. 프리나를, 빚이라는 명목 하에 시종으로 데리고 있는 자. 자신이 존경하는 런스 카르멘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자. 자신과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는 주제에 카르멘 가라는 대단한 가문의 가주 자리를, 당연하다는 듯 꿰어 차고 있는 자.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 곱상한 것조차 말이다. 그런데. ……정말, 정말, ……멋있었단 말이다. "키르으으. 얼굴에 다 써 있어." 아나이스가 히죽 웃었지만, 헤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랬다. 그 날, 적장을 베어 넘기던 그 순간. 그의 검 하며, 모든 것에. 순간적이지만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그토록 존경하는 기사단장 런스 카르멘이 검을 휘두르는 걸 보던 때보다 더한 긴장감으로, 더한 설렘으로, 더한 심장의 박동으로, 그렇게 보았다. '자신이 되고 싶었던 가장 완벽한 형상' 으로써. ……빌어먹게도, 카르멘의 가주가 서 있었던 것이다. 헤냔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아나이스는 즐거이 보았다. 그 날 흩어진 반란군을 뒤쫓아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헤냔 드 키에르였다. ================================ 이번에도 안되면 진짜 포기합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8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1) 가네트(uznian) 03-12-04 :: :: 11974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 매일참을 한다고 했고,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했습니다. 저번에 한 번, 어긴 적이 있었지요. 그 때 상당한 질타를 받았고 거짓말쟁이라느니 하는 메일도 받았습니다. 어제, 또 글이 올라가지 않아 말들이 많으셨습니다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저녁 10시쯤에 와서, 그 날 오전에 써두었던 글을 조금 수정본다음 11시 조금 넘은 시간에 업데이트를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드림워커의 서버가 나갔고, 어제의 연재분은 오늘 새벽에 올라갔습니다. PART 13의 마지막 분량에 써 있던 '이번에도 안되면 포기합니다' 는 글이 올라가지 않아서 쓴 겁니다. (안올려졌는 줄 알고 아침에 확인하러 왔었습니다.) 서버가 돌아와도, 계속해서 글이 올려지지 않아서 저도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계속 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변명이지만. 그러나 조금은 생각해주세요. 아, 길어져버렸습니다. 그냥 주저리 주저리라고 생각하세요. 진짜 '오늘 분량' 올라갑니다^ㅡ^ ==================================================== PART 14 : 비밀 "수고했네!" 카세타의 국왕 키네온은, 귀환하는 두 기사단과 카르멘 가의 두 사람을 정중하게 맞았다. 피해가 적지만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훌륭했다. 서울로 진격하는 반란군을 4일 째 되던 날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전방의 군대는 수도로 오던 길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키네온은, 기사단의 앞에 선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을 흐뭇한 눈으로 한 번 보았다. 오만하긴 하지만, 정말 실력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내다. 이러니, 내가 딸을 주고 싶을 만도 하지. 키네온의 뒤에 서 있는 키네세스 역시, 입술을 가볍게 말아 올리며 반을 보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모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일단 저스티스 경은 나와 함께 가세. 런스, 메이스. 그대들 기사단에는 곧 상을 내리겠네." "망극합니다." "망극합니다." 기사단 전체가 무릎을 꿇으며 한 말에, 국왕은 입에 미소를 건다. 그리고서 국왕은, 반을 향해 '자, 들어가세.' 하고 말했다.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프란을 돌아보며 가자, 라고 말했다. "저도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프란은 국왕과 키네세스, 반을 따라갔다. ▷◀▷◀▷◀▷◀▷◀▷◀ 예상했던 대로, 프란은 국왕의 방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너는 여기에 있어라, 라고 반이 말했기 때문이다. 복도 저 끝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성격 더러운 가주를 기다리게 된 프란은, 아직도 다 낫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었다 했다. 상처가 채 아물 틈도 없이 말을 달려 반란군을 쫓았기 때문에, 깊어진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뭇 수련 기사단원들의 부러움을 받곤 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프란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조금 어지러워진다. "수고했네, 저스티스 경. 그대에게 이 정도까지 기대한 건 아니네만." "……." 반은 껄걸 웃으며 자신을 칭찬하는 카세타의 국왕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냉소했다.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어디까지일까. "파티를 열까 생각 하오. 물론, 공식적으로는 다른 것을 내걸어야겠지. 반란이 일어난 것을 공표하는 건 안 될 말이니. 어떤가, 저스티스 경이 좋을 시간대로 하시오." 파티광이라고 불려질 만큼 사교를 즐기는 키네온답게 허허 웃으며 뱉어낸 말이었지만, 그의 호의는 물론 반에 의해 무참히 묵살당했다.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키네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잘라 말하는 반의 목소리는 건방지기 짝이 없다. 순간, 그 기분 나쁠 정도의 오만함에 머리에 핏대가 선 키네온이 무서운 눈으로 반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런 그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입장. 게다가, 자신의 옆에는 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어린놈에게 목을 메는 예쁜 딸이 있다. "뭘 주시겠습니까." 잠시간의 침묵 후, 어느 순간 반이 입을 열었다. 순간, 키네온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화기애애한 얼굴로 반을 보고 있던, 불그스름한 얼굴의 키네세스도 만연하게 짓고 있던 미소를 걷었다. 반은 그러나 그 둘의 표정 따위는 아랑곳 않고, 다시금 똑바른 어조로 말했다. "무얼, 주시겠습니까." 키네온은 당황한다. 반의 눈빛은 낮게 깔려 있었고, 목소리 역시 낮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요구' 하고 있는 것이다. 반란군을 소통하는 대가로. 순간, 키네온은 흠칫하고 놀란다. 원래, 그가 반에게 바랐던 것은 '5일 동안만 반란군을 붙잡아 놓는 것' 이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고 아마 그것은 반란군을 모조리 소탕하는 일보다는 백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산에 철두철미한 남자가 선택한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다. 어째서? 아예, 처음부터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 키네온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덫을 놓았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나라를 구해주었다.' 라는 명목의 덫을. "……카르멘 경." 키네세스가, 조금은 안타깝다는 듯 반을 불렀다. 그런 그녀의 하얀 얼굴을 보며, 반은 문득 생각해냈다. 그랬지. 자신은 키네세스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만. "카르멘 경, 무엇을 바라시는지요." 키네세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녀로써는 아버지인 키네온의 심정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심기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물빛의 레이디. 반은 자신을 바라보는 17세 소녀의 조심스러운 눈빛을 무덤덤하게 한차례 본 후, 말했다. "……아일린 가로 갈 때." 흠칫, 하고 키네온이 놀란다. 키네세스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카르멘 가의 가주와 아일린 가의 가주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카세타 왕족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이 일은 전적으로 비밀로 부쳐져,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입 밖으로 내니 두 사람은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 때, 바라는 걸 말하겠습니다." 반의 낮은 목소리에, 키네온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무엇일까, 이 남자가 요구하는 것은. 반의 눈에서, 국왕은 뭔가를 읽는다. 이미 늙어버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는 해도, 한 때는 대륙의 패권을 놓고 레키슈안과 대전투를 벌인 전적이 있는 그다. 키네온은, 반이 요구하는 것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닐 것을, 그러나 그것을 자신이 들어주게 될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키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 키네세스는, 국왕의 방문을 나서려는 반의 옷깃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국왕의 방으로 들어서는 문은 총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복도에서 멈춰 서서 돌아보면 먼저 큰 문, 그 다음으로 작은 문, 또 다시 작은 문 하나. 지금, 둘은 세 번째 문과 두 번째 문의 사이에 있었다. 완벽하게 고립된 그 공간에서 반은, 자신의 옷깃을 부여잡은 물빛의 레이디를 돌아본다. "카르멘 경." 나직한 목소리로 키네세스가 반을 불렀다. "……." 반의 표정 없는 얼굴을 향해, 키네세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조만간에, 찾아가도 되겠어요? 여전히 카르멘 가의 차향(茶香)은 좋겠지요? 부드럽고 은근한 제의. 반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쁠 것 없는 손님이다. 게다가, 이번 일을 위해서는 필요할 지도 모르는 일이고. 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네세스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이 남자, 저스티스 카르멘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자는, 그래도 자신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반이 등을 돌리는 찰나, 키네세스가 입을 열었다. "카르멘 경." "……." "아바마마가, 저에 대한 청을 한 가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키네세스는 조금 웃었다.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내 것이 될 남자. 이 정도, 풀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하지만, 방심하지는 말아요. 누가 가져가기 전에,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을 가질 테니까.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합니다. 당신은, 내 것이니까. 키네세스가 웃는 얼굴 뒤로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은 키네세스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한 번 까딱해 보이고 문을 열었다. 키네세스는 조그마한 미소가 떠오르는 얼굴로, 그런 반이 나간 문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만 있었다. ▷◀▷◀▷◀▷◀▷◀▷◀ 시종은 복도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잠을 자는 건가, 하는 생각에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다. 담이 큰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대는 프란을 향해, 반은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우웅. 집사~ 조금만 더 잘게." "……." 음냐음냐, 하는 소리를 내가며 프란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더더욱 어이가 없어진 반은, 이번에는 조금 더 소리를 높여서 입을 연다. "일어나라!" "집사아아~ 조금만 더어어." 이번에는 말꼬리를 늘여가며 칭얼거리는 프란의 목소리. 반은 잠시 잠깐 얼어붙어 그런 프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몇 초간 지났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타인의 존재감을 인지했는지, 문득 프란이 조금 눈을 떴다. "집사……?" 조심스레 눈을 떴던 프란은,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집사는 백발인데, 어째서 보라색 머리카락이 보이는 걸까. 그녀는 눈을 조금 비벼보았다. 잘못 보았나 했는데, 역시나 백발이 아니라 보라색 머리카락이다. ……보라색 머리카락. 흐음, 보라색. ……보라색? "으아아아악! 가주님!"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일어난 프란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반을 보았다. 들었을까? 응? 들었냐? 집사, 어쩌고 하는 거, 들은 거냐고 이 대마왕아! 반의 눈꼬리가 조금 움찔하는 것을, 프란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프란이 에, 라는 소리를 내며 그런 반을 조금 더 가까이 보려 한 순간, 반은 몸을 휙 하고 돌려버렸다.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곡선을 만들어낸다. 그 움직임에 아름다워, 하고 프란은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어쩐 일인지, 그렇다. 가끔씩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의 외모. "가자." 반의 말에, 프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서 저택으로 가서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프란이었다. ▷◀▷◀▷◀▷◀▷◀▷◀ "어쩌겠소?" 보일린은 백작을 향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득한 절망에 베어 있었다. 안 되도 이렇게까지 안 되다니. 빌어먹을, 이것이 모두 다 그 저스티스 카르멘 때문이다. 그 시건방진 애송이가 될 일, 안될 일 모조리 다 뒤엎어 버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우리끼리라도 하는 수밖에." "그건 너무 위험이 큽니다." 보일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반란군이 5일 안에 도착하지 못할 줄이야. 아니, 5일 안에 도착하지 못한 게 다 뭔가. 반란군 대장이었던 센도 죽고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흩어져 버렸다. 배후 세력이 아무리 튼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으면 뭐하는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 빠져버린 도구는, 아무리 기술자가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법. 백작은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끝을 낼 수 있을까? 이대로, 처음 계획했던 일을 모두 조용히 접어버릴 수 있을까? 아니, 안될 말이다. 그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이대로라면 모든 게 다 끝장이라는 것, 그대도 알고 있을 터. 우리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나. 오랜 시간동안, 숨겨져 왔던 그를 왕으로 만드는 것. ……복수를 할 때가 되었네." 백작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더 기다렸다간, 우리의 덜미가 잡히겠지." 백작의 말에, 보일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덜미가 잡힌다. 이미 반쯤은 들통났을지도 모르는 일. "……알겠소." 보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 번 해보십시다." ▷◀▷◀▷◀▷◀▷◀▷◀ "프라아아안!" 프란은 방문을 열자말자 갑자기 튀어나온 소녀의 진한 포옹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지 물컹, 하고 소녀의 가슴이 그대로 와 닿았다. 프란은 깜짝 놀라 붉어진 얼굴로 소녀의 몸을 떼어 냈다. "프라아아아안." 거의 울먹이면서, 뮤는 자신을 밀어내는 프란에게 다시금 안겨왔다. 그 눈물 맺힌 얼굴이 너무나 가련해 보여서, 프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뮤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말았다. 이럴 때면 여실히 드러나는 기사도 정신이라니! 레이디가 우는 모습은 못보지, 암. 마린이 만약 뮤처럼 이렇게 안겨왔다면 어디서 노처녀가! 라며 당장 뿌리치겠지만, 이 소녀의 진심을 아는지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뮤는 그런 프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엉엉 소리내어 울어댔다. "저, 저기 말이야. 저기, 뮤. 나 괜찮거든?" 버벅거리며 프란이 한 말에, 뮤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마린님이, 마린님이 프란이 다칠 거라고 그랬어. ……나 매일매일, 프란 방에 와서 자면서 프란 오는 걸 기다렸어…… 매일 기도했어, 프란 다치지 말고 오라고……." 뮤의 울먹거림을 들으면서, 프란은 묘하게 흐뭇해진다. 안다. 이건 정말, 기만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기만.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 마음을, 이 따뜻함을.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이 '애정'의 느낌을. 사랑받는다는 이 말도 안될 만큼 포근한 느낌을, 어떻게 감히 포기하겠는가. 그것이 거짓된 자신에게 향하는 것일지라도. "괜찮아, 뮤." 프란이 씨익 웃으며 한 말에, 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프란은 뮤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안아 토닥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프란은, 모든 일이 끝난 줄 알고 있었다. 이제 모든 반란은 진압되었고, 다시금 평화로운(사실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다지 평화롭지 않지만) 일상이 돌아올 거라고. 물론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불과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9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2) 가네트(uznian) 03-12-06 :: :: 12178 제발, 플리즈!! 올라가라 제발-_ㅠ 띄워쓰기를 몇번했는지 이젠 기억도 안난다는..;; ================================================= 그는, 자신의 앞으로 전해진 편지의 봉투를 개봉했다. 커다란 글씨로 '사랑하는 그대에게 보냅니다.' 라고, 겉봉에 적혀 있는 편지. 그는 피식 웃었다. 뜯어진 겉봉에서 편지를 끄집어낸다. 편지는 깨끗한 느낌의 글씨체로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 이 보낸 게 아니라는 건 조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웃었다. 후훗, 게다가 암호로 보내놓았군. 혹시라도 누군가가 읽어볼까 겁이 났던 건가. 그는 편지를 집어 들고 한 줄 두 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비나룬이 비스듬히 걸린 밤. 모두가 잠들어 편지를 넘기는 소리조차 몇 배로 확대되어 들려온다. 손가락 끝에 걸린 이 어둠, 두 발을 부여잡아 하늘로 띄워 보내줄 것 같은 이 적막. 저스티스 카르멘이 돌아온 저녁인지라, 카르멘 가는 오랜만에 찾아온 안심이 깃들인 고요 속에 휩싸여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편지를 다 읽은 후,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산통이 다 깨졌군."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계획대로 실행하겠습니다.」 편지 마지막 구절이 묘하게 비웃음을 산다. 백작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구실일 뿐. 숨겨져 온, 아니, 왕은 존재도 모를 '왕자' 인 자신을 위해서라는 뻔한 거짓말로 속이려 들지만, 실상 자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백작은 권력의 앞잡이. 오직 권력이 갖고 싶어서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왕 이용하기로 했으니,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용해주지. 남자는 차갑게 웃었다. 처음, 백작과 만났던 날을 그도 뚜렷이 기억한다. 그는 어머니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찾아왔었다. 웃기는 소리다. 어머니의 먼 친척이라고? 개소리. 정말로 자신을 위한다면 어째서 진작 그토록 힘들었던 어머니를 도와주지 않았는가. 그는 턱을 슬그머니 어루만졌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큰 의미 없는 한 평생이다. 그는 어깨를 뚜두둑, 하고 한 번 꺾었다. 그러나 이대로 평범하게 살다 묻히기에는, 어머니의 한이 너무 컸다. 어머니. 몰락한 귀족 집안의 영애로 태어나, 그래도 귀족의 후예라고 왕실에 팔려갔던 어머니. 딱 한 번의 승은으로 자신을 배었으나 그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왕비의 모함으로 갖은 고초 끝에 궁에서 쫓겨났던 어머니. 결국은 저 먼 곳으로 팔리고 팔려 다녔던 어머니. 창녀로, 노예로, 노리개로, 온갖 곳에서 굴려 더럽혀졌던 어머니. 그러나 끝까지 자신이 귀족이라는 긍지 하나만은 잃지 않던 어머니. 그에게 언제나 '너는 국왕의 첫 번째 아들이다.'라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어머니. ……왕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도망 다니던 삶을 비참하게 끝냈지만, 허나 자신만은 살려주기 위해 애썼던, 그런, 자신의 어머니. "어디, 끝까지 해보지." 그는 웃는다. 그래, 어디까지든. 여기에 숨어든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을 위해서지 않던가? 자, 끝까지 가보자. 누가 이기는지. 아, 그 전에. 그는 다시금 웃었다. 우선 가장 방해가 될 저스티스 카르멘부터, 처리해볼까. ……크루레티나는 조금 약했으니. ▷◀▷◀▷◀▷◀▷◀▷◀ "범인 잡는 일은 잘 되고 있어요, 도련님?" 반이나 프란보다 조금 더 일찍 저택에 돌아온 뒤,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졌었던 시온 아일린은 아침 일찍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자신을 불쑥 찾아온 자칭 미녀 집사장의 한마디에 잠을 깨는 수밖에 없었다. "으음. ……뭐라고 했지, 마린?" 시온은 부스스 눈을 떴다. 자신이 한 일이라곤 별로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잠을 자지 않고 말도 달렸고 프란도 구해주고 마법도 쓰고 여러 가지 마음고생을 한 탓에 상당히 지쳐 있던 시온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찾아온 마린을, 조금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범인을 잡는 일은 잘 되냐고 물었어요." 마린은 시온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오오, 몸매 좋은데. 여자가 따를 법도 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시에 말했다. "범인?"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시온이 반문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마린은 하아, 하고 기나긴 한숨을 뿜었다. 미치겠군,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저래 봬도 마법사가 아니던가. 천재라고 불릴 만큼 머리가 좋은 족속들이 마법사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헛소리지? 여자밖에 머리에 든 게 없는 것 같은 이 사람이 마법사라는 건 이 세상의 불행이야, 불행! "뭐가 이럴 줄 알았다는 거야, 마린? 당신 같은 미인이 나한테 안기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면 꽤 기쁘긴 하지만, 알다시피 난 요즘 한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야. 후훗, 그래도 약간의 서비스라면 해줄 의향도 있는데." 시온이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말하자, 마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치고 말았다. "당신 같이 어린 애송이한테 안길만큼 남자가 없진 않아요!(이 대목에서 시온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내가 애송이라면 당신은 카사노바쯤 되냐!' 라고 외쳤다.) 내가 말하는 건 범인이에요, 범인! 시! 온! 아! 일! 린! 도련님! 정말 잊고 계셨던 거예요? 찻잔에 크루레티나를 탄 범인을 못 잡으면 가주님께 목숨을 드리기로 했잖아요!" 마린의 소리에, 시온은 잠시 굳었다. ……맙소사. "앗, 생각났다." "이제 생각나면 어떡해요!?" 버럭, 하고 마린이 소리치자 시온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쳤다. "……그, 그게 언제 얘기지?" 맙소사, 정말로 맙소사다. 시온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젠장할. 언제나 느긋하게 미루는 자신의 생활태도가 문제였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사촌형과 한 약속을, 도대체! "……이제 4일 남았군요." 마린의 낮고도 차분한 목소리에, 시온은 정말로 얼어버렸다. 그리고 쩍 얼어붙은 이 아일린가의 도련님을 향해, 시온의 영원한 숙적이지만 한편으론 은근히 그를 매력 있는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노처녀 집사장은, 노련한 여우답게 카운트펀치를 날렸다. "호호호호! 그리고, 보는 노처녀 가슴이 두근두근하니 가운데쯤은 가리시는 게 어떨지?" "……으아아아악!" 시온은, 취침 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자신의 오랜 습관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시온 아일린의 비명소리가 자욱이 번져나간 새벽의 빛은 점점 퇴색하고 아침이 왔다. 프란은, 귀환 다음 날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감자를 깎았다. "으아아악, 또 감잡니까! 난 부상당했단 말입니다!" 칭칭 감은 붕대며 상처를 보여주며 주방장에게 애원해도, 언제나 그랬듯 주방장은 싱긋싱긋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오호, 부상병? 우리 부상병께서는 뭘 모르고 있는군. 나는 젊은 시절, 오른쪽 팔이 화상을 입어 조리도구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던 때에도 전대 가주님을 위한 요리를 만들었던 사람이야. 한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프라이팬을 돌렸고 왼손에 마비가 왔을 때도 필사적으로 요리를 했지. 과연 우리 부상병의 상처는 그 때 내 상태보다 심한지 무척이나 궁금하군, 응? 어디 한 번 보여주겠나?" "감자 포대가 어디 있죠?" 프란은 자진해서 감자포대를 안고서 무지막지한 속도로 감자를 벗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이 없는 한동안 감자 깎을 사람이 모자라 눈물을 삼켰던 주방장은, 드디어 짐을 덜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주방장을 향해, 보조 요리사가 슬그머니 물어왔다. "……저기, 젊은 시절에 화상 입으셨어요? 다리는 왜 베었지요? 왼손에 마비가 온 적도 있으세요? 어떻게 회복되셨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오늘 주방장님의 요리사 정신에 완전히 감복했어요!" 주방장은 쉴 새 없이 떠드는 요리사를 근엄한 얼굴로 돌아보며, 무척이나 근엄하게 말했다. "……훗, 넌 아직 세상을 덜 살았군." ▷◀▷◀▷◀▷◀▷◀▷◀ "어이들." 프란은 반에게 가져갈 음식을 밀며 방 앞을 지키고 있는 두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 팔팔 꼬마!" 그들은 다가오는 프란을 향해 반가운 기색을 했다. 어젯밤, 반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쭈뼛쭈뼛 반을 불렀다. 저, 저기 가주님, 하고 일단 반을 불러 세운 그들은 그러나, 반이 무슨 일이지, 하는 눈으로 돌아보는 순간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들도 조금 궁금했던 것이다. 팔팔거리며 뛰어다니는 이 금색 머리칼의 소년이 무사한지 아닌지를. 처음, 가주가 반란군 토벌에 데려간 것이 카르멘 가의 그 어떤 검사도 아닌 이 자그마한 시종이라는 걸 알았을 때 두 사람 다 무척이나 당황했던 차였다. 그러나 가주가 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이들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저 카르멘 가의 가주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이라면 어디에서든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걱정되는 것은 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 시종이었다. 그래서 반이 돌아오는 날, 그들은 시종의 행방을 물으려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아있다면 다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반의 싸늘함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묻지 못한 어제 저녁, 그들은 가주의 앞에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들의 소심함을 원망하며 바닥을 긁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었구나!" "당연하지. 이 프란 프리텐을 뭘로 보는 거야?" 프란은 자신을 반기는 두 남자를 향해 당당하게 말하곤 씨익, 웃었다. "가주님! 식삽니다!" 그리고 프란이 큰 소리로 외친다. "들어와라." 반의 목소리에, 프란은 호위무사 둘을 향해 손을 흔든 후 문을 열고 쏙 들어가 버렸다. 호위무사 둘은, 사라지는 금색 머리의 소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저기 말이야." 그러기를 한참 후. 둘 중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하나가 왜, 라고 대꾸한다. "난 저 팔팔 꼬마가, 어째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뭘?" 의아하다는 듯한 대꾸에,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답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잘은 모르겠는데, 남자의 직감이라고 해둬. 그냥, 저 팔팔 꼬마가 가주님에게, 뭔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가져다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 반은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는 시종의 야윈 팔을 보았다. 프란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반을 보며 음식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뒤, 프란은 멀뚱멀뚱 눈을 굴리며 반의 앞에 멀거니 섰다. 이윽고, 반은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시작했고 그런 손짓을 따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프란은 하나 둘 입 안으로 음식이 가져가기 시작했다. 반란군의 토벌이 끝나자마자 이 일상이 시작되다니. 뭐랄까. 불만이라기보다는 안심이 되는 느낌이다. "……헤냔 드 키에르라고 했던가." 문득 라넨 가슴살을 먹고 있던 반이 입을 열었고, 그 순간 프란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잡고 있던 포크가 설핏 흔들리는 것을 느끼곤 손에 힘을 주었다. 이 놈의 대마왕,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 엉? "에? 그런 기사가 있긴 했지요." 프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히죽 웃었다. 그러나 똑바로 쏘아보는 반의 눈에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 "……." 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반의 침묵에 프란은 식은땀을 있는 대로 없는 대로 흘리며 다음에 튀어나올 말을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으아아아, 대마왕, 대마왕, 이 대마왕아. 제발 부탁이니, 나 좀 그만 곤란하게 해라. 프란이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반이 벌떡 일어섰다. "왜, 왜 그러십니까?" 프란의 말에, 반은 낮게 답했다. "밖으로 간다." '어, 어디로 또!' 소리 없는 발악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녀, 프란 프리텐이다. ▷◀▷◀▷◀▷◀▷◀▷◀ 달리는 마차 안에서, 반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종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지 하품을 하려다가, 자신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시선에 뚝하고 입을 닫아버린다. 이놈의 대마왕, 너는 하품 안하냐? 엉? 넌 하품 안하냐고! 프란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 않고, 반은 가만히 정신을 집중한다. 대충은 알고 있다. 반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반란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켈리에게 알아봐달라고 했던 그다. 반란에 명분이 없지는 않을 터. 명분 없는 반란은 오래가지 못한다. 반란을 주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반란이 성공해서도 그렇다. 그리고 켈리는 반에게, 썩 만족할만한 대답을 여럿 물어다 주었다. "……가주님." 시종이 입술을 뗐다. 반짝이는 오렌지색 눈동자. 가끔씩 저 눈을 바라보면, 무언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어디의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자신을, 가끔 당혹시키는 저 눈동자. 그리고 저 시종이 가끔씩 툭툭 뱉어내는 어이없는 말들. 세이피안의 견습 기사였다는 사실, 기사 작위를 받을 뻔 했다는 사실. 그런 것이야 우습게 본다 치더라도.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알 것 없다." '오냐. 그렇겠지.' 흥, 하고 속으로 프란은 속으로 투덜댄다. 반은 마차의 등받이에 깊이 기댔다. 카세타 왕족이 어떻게 되던, 그와는 상관없다. 자신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일에 카르멘 가 일부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카르멘 가의 누군가가 반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자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반은 속에서부터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조용히 갈무리 했다. 또렷한 증거가 잡히는 날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겠다. 그러나 증거가 잡히는 날, 너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를, 카르멘 가의 가주인 나를 기만한 벌을. 그러기 위해서 카세타 왕궁에 협력한다. 카세타가 한바탕 뒤집혀서 자신에게 유리할 것도 없고, 반란군이 성공해 '카르멘 가의 누군가' 가 힘을 얻는 것은 더더욱 곤란한 일이다. 반은 저 멀리를 보았다. 하리나스 백작가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0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3) 가네트(uznian) 03-12-06 :: :: 11335 "뭐라고? 저스티스 카르멘이?" 백작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푸른 옷의 소년은 헐떡이며 백작을 향해 부복했다. "부, 분명 저스티스 카르멘이었습니다." "이런 미친!" 백작은 탁자를 퍽, 하고 쳤다, 탁자가 후들후들 떨릴 만큼 강하게. 반란군은 진압 당했으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일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던 그였다. 이 모든 것이, 이 지경이 되도록 궁지에 몰린 것은 그 저스티스 카르멘 때문! 그런데 그 자가 여기는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신의 저택 밖으로 나가기를 그토록 기피한다는, 저 저스티스 카르멘이, 왜 하필, 왜 이런 시기에, 자신의 저택으로 찾아왔단 말인가! 하리나스 백작은 그러나, 온갖 추측과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일단 가라앉힌다. 한 꺼풀의 가면을 쓰는 건 어렵지 않은 일. 아무리 대단한 작자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애다. 무언가 냄새를 맡고 온 것이라면 세월의 두께만큼 두껍고 견고하게 쌓여온 자신의 교활한 연기로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백작님! 저스티스 가의 가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시종 중 하나가 자신을 불렀다. 하리나스 백작은 얼른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서 뫼시어라!" 푸른 옷의 소년은, 하리나스 백작을 향해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재빠른 움직임으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백작은,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문을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바라보았다. "아, 어서 오십시오!" 문이 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그 곱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백작은 싱긋 웃으며 들어서는 반을 환영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진짜 같았는지, 어색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 가주는 그런 하리나스 백작의 방으로 아무 망설임 없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혼자 오셨습니까?" 눈꼬리를 살짝 휘면서, 눈웃음을 보인다. 젊은 시절엔 대사로 지내며 외교에 관련된 일을 했을 만큼 표정연기며 시치미 떼기의 달인인 그다. 아직 세상 경험 없는 어린애 따위야! 백작은 그러나, 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래, 어린 나이다. 그러나 어렸기에 더더욱 잔인해지고 냉철해져야 했던 그다. "시종은 밖에." 반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하리나스 백작을 본다. 교활한 놈. 어릴 때, 자신을 무릎에 앉히며 어머니가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믿어서는 안 될 사람 중 하나인, 하리나스 백작에 대해서, 권력욕이 너무나 강하여 언젠가 한 번은 큰 사고를 치고 말 거라며 장난삼아 얘기하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문득 리플레이 된다. 아무리 시종이라고 해도, 반란이며 가문의 존폐여부(반역에 가담한 가문은 삼대가 멸족 당한다.)가 달린 일에 데려올 수는 없는 일. 반은 마차에 내리자마자 프란을 정원에 세워두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세워둘 거면 왜 데려왔습니까! 하고 뻔뻔스럽게도 자신을 향해 대드는 시종을 향해 '말이 많군.' 하고 말했던 자신. 언제나 혼나고도, 언제나 자신의 싸늘한 눈동자를 받고도 그 이상한 시종은 멈추지 않고 온갖 소리를 다 해댄다. 아주 맞먹자는 건지, 가끔은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렇습니까. 아아, 그나저나 이런 누추한 곳엘 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카르멘의 가주여! 어디에도 잘 나서지 않는 편이라 들었는데. 이거 두고두고 자랑해야 할 것 같군요." 백작의 너스레에, 반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작은 그 시선이, 자신을 찌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이신지요? 차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는 백작의 등 뒤로는,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 프란은 정원의 잔디를 발로 차대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가 인간이 말이야. 정원에 세워둘 거였으면 차라리 저택에 남아 있으라고 하면 될 거 아냐? 하여튼 웃긴 인간이라니까. 남은 아파 죽겠구만." 욱씬 욱씬 쑤셔대는 어깨를 마사지하듯 어루만지며 프란은 정원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폈다. 카르멘 가의 장미정원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나 훌륭하게 꾸며진 정원이다. 백작가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프란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빌어먹게도 졸리다. 하기야, 언제나 상처가 벌어졌을 때는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습관이 있긴 했다. 그렇게 며칠씩 푹 자야 상처가 빨리 아문다는, 수련 기사단 단장 아샤의 충고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것이 제일 좋다는 스스로의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에라, 잠이나 자자,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카세타 왕궁에서처럼 또 잠이 들고 말았다. ▷◀▷◀▷◀▷◀▷◀▷◀ 오늘 백작 가(家)는 손님이 많다. 대낮부터 카르멘가의 가주가 찾아온데 이어, 귀족의 마차치고는 조금 수수한 갈색의 마차가 백작가의 앞에 섰다. 마차에 그려진 것은 붉은색의 작은 말. 이스티네 가문의 상징이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서고, 이스티네 보일린이 그곳에서 내렸다. 그는 백작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우뚝하고 정원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그를 뒤따라오던 한 남자도 보일린을 따라 멈춰 섰다. 보일린은 눈을 의심했다. 거기에 '있었다.' 보일린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러나 틀림없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 봤던 바로 그 시종이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자신을 끌어당겼던.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자 동경인 레이나의 환생인 듯 닮은, 바로 그 시종이다. 보일린은 얼른 주위를 훑어보았다. 시종이 있다면 주인이 있을 터. 혹시 하리나스 백작을 만나러 온 건가? ……뭔가 낌새를 맡고 왔는지도 모른다. 보일린은 그러나, 그 이상의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보일린에게 속삭였다. "이 자는,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 보일린은 끄덕였다. "맞다. 내가 너에게 납치해오라고 했던 그 사람이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이 시종을 데려가는 건.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어차피 저 저스티스 카르멘은 시종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냉철한 남자. 어디론가 도망갔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보일린은, 이 뜻밖의 행운을 놓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보일린은 명했다. "……데려와라."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차향이 아득하니 번진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백작의 방. 조용한 두 사람. 번져나가는 향. 이 곳 저 곳에 드리운 얇고 하늘하늘한 녹색의, 그물 치듯 벌어진 손. 백작은 취향이 상당히 고상했기에, 그의 방은 품격 있게 꾸며져 있었다. 백작은, 반의 여유 만만한 얼굴에서 언제 칼이 튀어나올지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반은 정말로 그저 산책 차 왔다는 듯, 조용히 차를 마신다. '정말 말이 없는 남자군.' 백작은 반을 보며 생각했다. 고개 짓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고개 짓으로 해결할 정도로, 극도로 말을 아낀다. 마치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무언가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 더욱 사람을 조바심치게 만든다. "아참. 카르멘 가주께서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으십니까?" 백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는 조금은 식은 아이리엔 차(카세타의 서부에서만 자라는 아이리엔으로 만든 차. 멜진과 섞어서 단맛을 낸다.)를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반이 대답이 없자, 백작이 웃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물빛의 레이디가 당신을 사모한다고 들은 적이 있지요." 물빛의 레이디가 저스티스 카르멘을 향한 사랑을 불태우고 있음은 이미 오래 전에 알려진 바, 백작은 그 속사정까지 알고 있는 남자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키네세스가 반을 향한 애정을 불태우도록 만든 '원인' 을 제공한, 장본인이라고나 할까. "어떠십니까, 제 3공주님은? 아름답고 총명한 분이지요." "……그대의 딸은?" 갑자기 나온 그대의 딸은, 이라는 말에 백작은 깜짝 놀랐다. 아하, 내 딸! 리나 하리나스 말인가. 하리나스의 막내딸 리나는 대충 반과 비슷한 연배다. 하리나스는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하하하하, 그렇군! 작전을 눈치 챘다거나 냄새를 맡고 온 것이 아니라, 내 딸에게 관심이 있어 온 것이었나? 하기야 내 딸이 예쁘긴 하지! 하리나스의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하핫, 제 딸에게 관심이 있으신 거였습니까? 올해 열여덟입니다. 저스티스경이 원한다면, 저로써는 영광이겠군요. 허허헛." 있는 김칫국 없는 김칫국 다 합쳐 벌컥벌컥 원샷한 하리나스가 웃으며 말한 순간, 반은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열여덟? 헤이튼과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군." "예? 헤이튼이라니……?" 뜻밖의 말에 하리나스는 선수를 뺏겼다. 틈을 보이는 즉시 주도권을 잃는 것이거늘! 그토록 많은 경험이 이 순간에 허를 찔러 허물어져버린다, 그것도 이렇게 어린 애송이 앞에서. "그대의 편지가 수도 없이 헤이튼에게로 날아들더군. 결혼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 적 없습니다." 하리나스는 딱 잘라 답했다. 당연하다. 헤이튼에게 편지를 보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가명으로 편지를 보냈던 그다. 알 리가 없다. 이건 그저 찔러보는 것뿐이다. "그래? ……하리나스 백작." 백작이 고개를 든 순간, 반이 말했다. "그대는 내가 바보로 보이나." "그럴 리가……." "……한 사람에게 줄기차게 오는 편지. 너무나 자주 오기에 한 장을 가로챘다. 똑같은 글씨체를 몰라볼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지." "무슨 소린지……." 하리나스 백작이 인상을 찌푸린 순간, 반이 나직하게 말했다. "잊었군. 당신이 내 어머니께 보냈던 편지를." 순간, 하리나스 백작은 얼굴이 확 하고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한 때 그가, 철없던 시절에 루이사 카르멘에게 끝도 없는 연서를 썼던 건 사실이다. 루이사 카르멘은 카세타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만한 힘을 가졌던 여자다. 카르멘이라는 이름이 없었더라도, 아마 그랬으리라. 온갖 귀족 남자들의 속삭임, 선물, 편지를 독차지 했던 아름다운 여인. 그러나 철저히 검에 매진할 뿐 그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래서 더더욱 빛이 났던 그녀. 그런 루이사 카르멘에게, 하리나스 역시 연서를 보냈던 적이 있었다. 불타는 연정의 마음은 그러나, 그녀가 이름 모를 남자와 결혼하고(아일린가의 결합과 카르멘 가의 결합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졌다.)난 뒤 야망에 묻혀 점점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설마하니! 저 어린 가주가, 자신이 보냈던 그 낯 뜨거운 프로포즈의 편지라도 읽었단 말인가. "……어머니의 모든 편지들은 잘 보관되어 있었다." 어린 날에, 어머니가 속삭여준 말. 이 남자, 이 남자, 이 남자는 위험해. 언젠가 일을 칠거거든. 어머니가 가르쳐준 야심만만한 남자들. 어렸기에 어렴풋하지만, 어머니가 유독 강조했기에 알고 있다. '특히 반아, 하리나스 백작. ……이 자는 야심이 크지, 흠. ……내참, 내가 이런 걸 왜 가르쳐주고 있는 거지? 검사는 검으로 말할 뿐인데. 자, 반아! 엄마랑 검술 연습하자!' 어머니의 말들. "……세상에 같은 필체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리나스 백작이 당황해서 뱉어냈다. 반은, 차갑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 싸늘한 미소에, 하리나스 백작은 심장이 다 섬뜩해진다. 저건 주도권을 쥔 사람의 얼굴이다. "쉼표를 남용하는 습관이나 세 줄에 한 줄은 반드시 띄우는 습관도 말인가." 반의 반박에, 하리나스는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습관이었다. 그런 습관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수긍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까지 비슷한 사람이 있다니, 저도 놀랍군요." "……그렇군." 반의 나직한 응수에, 하리나스 백작은 오싹해진다. 뭘 긴장하는 건가, 하리나스. 앞에 있는 건 애송이다. 아직 열아홉밖에 안된, 게다가 얼굴은 계집애 같은, 그런 애송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마침표를 두 개 찍는 습관도 '우연히' 같은 것이겠군." 덜컥, 하고 뭔가가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놈. 하리나스는 더 이상 발뺌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정하자. 어차피 헤이튼에게 보낸 편지도 암호화된 것이지 않은가. "……인정합니다. 제가 쓴 편지가 맞습니다. 다만, 제 편지를 읽으셨다는 말에 좀 발끈했던 것 같군요. 여하튼 개인 프라이버시가 아닙니까." 반은 하리나스 백작을 유심히 보았다. 하리나스 백작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여러 단어를 쥐어짜내어 말했다. "헤이튼에게 부탁했던 것은 별 것이 아닙니다. ……어떤 편지를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헤이튼에게 가능하면 제 집안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반은 하리나스를 향해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얼음처럼 차가우나 사악한 느낌은 아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감에 손끝이 저리게 하는 그 웃음. "하리나스." "……말씀하시지요." 반은 하리나스를 향해,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광대놀음은 그만둬라." -------------------------------------------- 됩니다, 되는것입니다. 아주 감동의 눈물이..(운다) 아, 파트 13, 14가 제일 밉습니다. ^ㅡ^; 서버의 장애를 보니, 이젠 조금 일찍 연재해야하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생각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1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4) 가네트(uznian) 03-12-07 :: :: 17389 시온은 머리가 다 뽑힐 지경이었다.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잊고 있었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보군. 도대체가 마린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단 말인가. 형님도 형님이지. 왜 다시 한 번 경고해주지 않은 건가. 정말로 사촌 동생을 죽이고 싶기라도 한걸까? 시온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한편, 고개를 숙인 채 냉철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인 시온은, 일단 이 분야의 전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이봐, 스웬. 들어가도 되겠어?" 카르멘 가의 전용 의사인 스웬은, 아일린가의 도련님이 왜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주제에 또 다시 들어서도 되겠냐고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상관없습니다, 라고 답해주었다. "웬일이십니까?" 약품을 제조하고 있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스웬이 멀뚱하게 눈알을 굴리며 묻자, 시온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털썩 방 한 켠에 놓여 있는 침대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아, 그게 말이야. 크루레티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저번의 그 독약 말입니까? 왜 새삼 지금 와서?" 스웬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럴 일이 좀 있어서. 크루레티나에 대해서 아는 대로 좀 설명해 보겠어?" 시온의 말에, 스웬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답했다. "글쎄요, 크루레티나는 아직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미지의 독이지요. 크루레티나는 카세타의 일부지역, 로이네트 일부 지역에서 나는 독초로 소량만 마셔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굉장한 맹독이라 손쓰기도 쉽지 않고, 여러모로 다루기도 힘든 독약입니다. 일단 재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은근히 재배되어 빼돌려지기도 하지요." 시온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왠지 저 설명, 묘하게 거슬린다. 이상한데. 크루레티나가, 그것이 다였던가? 그리고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가 어색해. 설명의 어딘가가 틀린 듯한 느낌이 든다. 어딘가가 불편하게 간지럽다. 시온은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말이야. 나도 명색이 마법사란 말이지? ……어디선가, 크루레티나에 대한 것을 얼핏 읽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게 다야?" 시온의 말에 스웬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뭔가 더 있습니까?" "……흠, 알겠어. 일단 고마워." 시온은 곧바로 일어서더니 빙글, 돌아섰다. 스웬의 방문을 재빠르게 닫은 시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러모로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4일. 어떻게든 이 과제를 풀어야 한다. 시온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 하리나스 백작은 핏발선 눈으로 돌아서는 반을 노려보았다. 광대놀음은 그만둬라.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다음에 이어질 말이 조그맣게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을 받는다. 하리나스 백작은 문을 열고 나가는 카르멘 가의 가주를 배웅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웃는 낯으로 저 어린 녀석을 보내야 했는데. 개자식, 하고 하리나스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내가 너무 우습게 봤어, 빌어먹을. 하리나스의 조용한 욕설을 뒤로한 채 반은 하리나스 저택을 빠져나온다. 복도를 걸어 나오며 그는,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 하리나스. 이젠 어떻게 나올 거냐. 내가 너와 헤이튼, 둘의 모종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밝힌 뒤에도 헤이튼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할거냐. 막 밖으로 나온 반은 주위를 훑었다. 훌륭하게 손질된 정원 어딘가에 서 있을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혹시 또 어느 구석에서 잠이라도 든 건가, 하는 생각에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으응, 집사. 조금만 더 잘게.' 라며 칭얼거리던 시종의 모습이 떠올라, 반은 실제로도 입가에 낮은 미소를 달았다. 반은 정원에 피어난 꽃과 나무의 틈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살피며 걸었다. 정원치고는 꽤 넓은 면적이다. "어디 있나." 보이지 않아, 큰 목소리로 한 번 외쳐 불렀다. 살랑, 바람이 불어와 정원에 핀 온갖 꽃의 향기를 한데 끌어안아 코끝으로 실어다 주었다. 그 향기를 맡으며, 반은 문득 깨달았다. 반은 정신을 집중하고 크게 정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이 정원 어딘가에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한참동안 정원을 걸어 다니며 시종을 찾던 반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시종은 정원에 없었다. 혹시, 먼저 마차로 갔는가. 반은 하리나스 백작 저택의 담 바깥쪽에 세워 두었던 자신의 마차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아일린 가에서 제작한 것이 아닌, 단아하고 소박한 나무 색깔의 마차. 마부는 반이 다가오자 얼른 자리에서 뛰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시종은?" 마부는 반의 질문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함께 들어간 시종인데, 왜 자기에게서 찾는 것인지? "예? 함께 들어가지 않으셨습니까?" 최대한 가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마부가 말했다. 반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도망간 건가. 순간, 반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꾹 쥐었다. 도망? 도망이라고? 감히 누구에게서 말인가. 빚을 갚는 대신 하인으로 써달라고 했던 것은 그 녀석이었다. 그런데 도망? 도망이라고! 반은 고개를 저으며 냉철하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평소라면 쉬웠을 일이다. 반은 잠시 긴 심호흡을 했다. 시종이 문을 통해 빠져나왔다면 마부도 봤을 터. 그렇다면 혹시 담을 넘어 도망간 것은 아닐까. 반은 얼른 고개를 돌려 백작가의 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은, 곧 그런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백작가의 담 윗부분은 모두 반갑지 않은 밤손님을 막기 위한 뾰족한 날로 뒤덮여 있었다. 저 곳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성치 않은 그 몸을 해가지고는 더더욱. 반은 잠시 생각하다, 그다지 가능성 없는 결론 하나에 다다른다. "……내가 없는 사이 백작 가에 들어온 자가 있나." 반의 질문에 마부는 잠시 숨을 헉헉거리며 들이마셨다. 반은 모르고 있었지만, 프란이 도망간다고 생각한 순간 반이 뿜어냈던 어마어마한 살기에, 마부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던 참이었다. 마부는 온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대한 목소리의 떨림을 죽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마, 마차는 딱 한 대만 왔었습니다. 그,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나오던데요."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나왔다? 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마차였나." "아, 저,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 그게…… 아, 문양으로 붉고 작은 말이 보였던 것 같은데……." 이스티네 가의 문장! ▷◀▷◀▷◀▷◀▷◀▷◀ 공기는 탁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흡을 압박할 정도로 내리 앉은 공기가 폐로 스미는 느낌에, 프란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갑갑했다. 무언가에 묶여 있는 듯이. 프란은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허, 꿈을 꾸는 모양이군.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고개를 젓던 프란은 자신의 시야가 어둠에 점점 익어가는 것을 느끼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프란은 손을 움직여보려 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었다. 몸을 세게 흔들던 프란은, 자신이 의자 같은 것에 묶였음을 알 수가 있었다. 뭐냐, 이게에에!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애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이 온통 깜깜했기에 처음에는 뭐가 뭔지를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주변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귀족가의 정원에서 잠시 잠이 들었을 뿐이다. 여기는 도대체 어딘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둡다는 것 하나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리고 무언가 많은 것이 벽에 걸려 있고 또한 무언가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어두워서 잘 알 수가 없었고,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혼란이 폭풍처럼 머리를 엄습한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나는 분명히 잠이 들었을 뿐이라고. 프란은 잠시, 혹시 반이 너무도 곤히 자는 자신을 가엾게 여겨서 자는 자신을 깨우지 않고 저택으로 데리고 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도 알다시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발로 차서 깨웠으면 깨웠지 자는 자신을 안아들어 마차에 태우거나 하는 일을 할 리가 없다. 어디, 느끼 버터도 아니고 말이지. 프란은 다시 주변을 둘레둘레 살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 방의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방에는 빛이 스미는 공간, 그러니까 창문이 없었다. 문은 어디 있지? 아, 도대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좀 설명해줘! 그녀가 그렇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기 누구야!" 프란이 버럭 고함을 쳤다. 동시에, 확하고 불이 밝혀졌다. 방금 방 안에 들어온 누군가가 등을 가져온 모양이다. "일어났군." 들려온 것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달칵, 달칵, 하고 몇 개의 등불이 더 켜졌다. 그제야 어둡던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들어선 사람은 두 명인 듯 했다. 프란은 그 중 한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경악했다. "……너……!" ▷◀▷◀▷◀▷◀▷◀▷◀ 「……드리비아는 눈을 떴다.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가 아찔하게 눈을 덮어왔다. 드리비아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 그리고 이 속임수에 걸려든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추웠기에, 드리비아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추위가 아니고선 이렇게 강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리비아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꿈틀대는 자신의 손가락이 보인 것이다. 온 몸을 뒤덮는 추위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북쪽의 경계선은 넘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뒤쫓는 자가 없었다. 누구든 살려줘, 하고 드리비아는 속으로 외쳤다. 그 때, 저 너머에서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처음에 그것은 그저 환상처럼 보였다. 북부와의 경계선에 사람이 살 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에 드리비아는 소리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려줘! 의지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 한숨쉬듯 작게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저 멀리에 있던 사람은 날듯이 가까이 왔다. 그러나 사람이 가까이 온 순간 드리비아는, 자신이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가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기 때문이다. 드리비아는 훗날 그렇게 회상했다. '다가온 것은 사람일 수 없는 이였다. 나는 그녀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중략…… 드리비아는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얼기설기 얽은 오두막의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그는 멍하게 생각했다. 깨어 나셨네요, 하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다. 드리비아는 시선을 돌렸고 거기에 앉아있는, 자신의 천사를 보았다. 맙소사, 하고 드리비아는 생각했다. 자신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이었다. 나를 살린 게 당신이오? 드리비아가 물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멀리 나와 본 게 다행이었네요, 하고 여인이 웃었다. 갑옷은 무거워 놔두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드리비아는 그 순간 폭풍과 같이 예감했고, 그의 예감은 옳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지금 처음 만난' 여기 있는 그녀만큼은 절대로 옆에 있어 줄 거라는, 뼈에 새겨지는 그 감각. 숙명 같은 만남이었다. 드리비아는 잠시 몸을 떨었다. 여인은 가냘픈 손으로 드리비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의 따뜻함에 드리비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철혈의 군주라 불리는 자신인데, 어찌 이리도 가슴이 뭉클하단 말인가. 마치, 지금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이 느낌은. '……이름이 뭐요?' 드리비아가 물었다. 여인은 웃었다. '레이나라고 합니다.' 레키슈안의 음유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러나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한 불우한 작가 故 유시안의 역사 소설 '레키슈안의 초대국왕 드리비아 레키슈안과 그 불멸의 연인 레이니아' 제 2 장 만남 中 에서」 사방은 고요하다 못해 침묵하고 있었고, 프란은 멍한 얼굴로 보일린을 보았다. 보일린은 천천히 프란에게 다가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그녀 쪽으로 보일린의 손이 올라왔다. "……팔 잘라버리기 전에 손 치워." 프란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보일린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오른손으로 프란의 얼굴을 가만히 한 번 쓰다듬었다. 프란은 그 손을 깨물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시도는 시도로 끝났을 뿐이다. 보일린은 마치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프란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프란은 속이 다 뒤집힐 지경이다. "레이나님, 레이나님." 보일린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프란은 이스티네 보일린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레이니아는 레키슈안 초대 왕비다. 그 아름다움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이 릴리아나 꽃과 닮았다고 해서 한편에선 애칭처럼 '릴리아나 왕비'로 불리기도 한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을 떠올릴 때 레이니아가 당연히 수반되듯이 레이니아 없이 드리비아 레키슈안을 논할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짝이었으며 불멸의 연인으로 후세에 대대로 평가받는 부부였다.(옛날, 시온과 프란이 점을 쳤을 때 나온 결과에 프란이 그토록 경악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의 경우, 레이니아가 없었다면 레키슈안 건국이라는 대 역사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후세의 평가다. 레이니아는 두고두고 영웅들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릴리아나처럼 아름다운' 이라는 수식어가 처음으로 붙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후손들은 불행히도 확인할 수단이 없었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의 초상화는 많이 남아 있었던 것에 반해 레이니아의 초상화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나님……." 보일린은 프란의 차가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의 온 몸 구석구석에 떨리는 손을 갖다대고 있었다. 무릎에, 어깨에, 얼굴에, 손에. 그 때마다 징그러운 뱀이 온 몸을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것 같아 프란은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손 떼지 못해, 이 자식아!" 프란의 고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스티네 보일린의 어머니는 레키슈안의 귀족으로 베로니카라는 성을 썼다. 어머니의 이름은 에리 베로니카. 에리 베로니카는 베로니카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다. 그녀는 카세타 왕국의 이스티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럼으로써 베로니카 가는 그녀의 대에서 완전히 끝이 났다. 에리 베로니카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 자신의 아들을 불러들여 그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낮게 아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들아, 3층에 있는 내 방 알지? 그 방을 샅샅이 뒤져보려무나. ……열쇠는 보석함 맨 밑에 있단다.' 그리고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은 이스티네 보일린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그 방을 샅샅이 뒤졌다. 누구에게도 그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어머니였다. 그 방에서, 이스티네 보일린은 보았다. ―대륙이 잃어버린, 레키슈안 초대 왕비의 초상화를. 어머니의 일기장에는 소상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 옛날, 레키슈안이 건국될 당시 베로니카 가문의 시조는 화가였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은 부인의 아름다움이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할 화가를 찾았다. 왕비님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라고 말했던 베로니카 가의 화가는 그러나 레이니아 왕비를 마주한 순간 깜짝 놀라고 만다. 젊은 화가는 불행히도 그 순간 왕비를 향한 죽음 같은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이 사랑스러운 왕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수십 폭을 그렸다. 그러나 정작 드리비아 레키슈안이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화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단 한 장도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왕비님의 빛나는 미모는 도저히 제가 화폭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폐하, 왕비님은 폐하의 연인이십니다. 후세 사람들이 왕비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그 어떤 그림도 그리지 마십시오. 왕비님은 폐하만의 연인이십니다.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드리비아 레키슈안은 화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레이니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림은 그래서, 그 어디에도 비밀인 채 베로니카 가에서만 대대로 전승되고 있었다. 왕비를 향한 타오르는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은 화가의 피를 이어서일까. 그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베로니카 가의 그림은 단 한 장도 외부에 유출되지 않은 채 간직되어 왔다. 그리고 그 그림은, 마침내 현재의 보일린에게서 멈췄다. 어린 시절에, 처음 보는 순간 모든 말을 잃을 만큼 매료되어 버렸다. 아아, 아름다운 레이나님.(레이니아는 그녀의 본 이름, 허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사료들은 보통 그녀를 레이나라고 부른다.) "……풀어, 이 자식아. 나는 프란 프리텐이다. 레이난지 뭔지가 아니야. 풀어! 당장 풀라고!" 프란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보일린을 노려보았다. 프란으로써는 전혀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이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레이니아의 초상화와 닮았든 말든. "레이나님." 보일린은 그러나 멍청하게 풀린 눈으로 프란을 향해 중얼거릴 뿐, 그녀의 말을 이성적으로 알아들었다는 그 어떤 표식도 내지 않았다. 프란은 정말 머리라도 집어 뜯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보일린과 함께 들어섰던 남자를 보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카르멘 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너 같은 변태한테 잡혀 있을 시간 따위 없어! "……보일린님."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일린은 움찔하며 돌아섰다. 프란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외양은 남자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나 가늘고 곱다. 마치 여자의 그것처럼. 아니, 억지로 남자인 듯한 목소리를 내는 듯 보이지만 분명 여성의 것과 같은 목소리. 프란은 흠칫, 하고 몸을 굳혔다. 저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아. 그래, 바로 그 때!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 내게 검을 들이댔던 자! ……남자였던가? "슬슬 나가보서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올 때가 됐습니다." 보일린은 그제야 눈에 조금 생기를 되찾았다. 미친 듯한 빛을 띠고 있던 그 눈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내려다보는 건 차라리 공포였다. 보일린은 웃는 낯으로 다시 프란에게 다가왔다. "너, 죽는다." 프란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보일린은 축축하게 젖은 개구리피부 같은 입술을 프란의 볼에 갖다대었다. "레이나님,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나는 레이난지 리이난지가 아니라고, 이 자식아!" 프란의 고함소리는, 그러나 그 방 안에 갇힌 채로 완전히 차단되었다. ==================================================== 드리비아 레키슈안과 레이니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 못하시는건-_ㅠ) 그리고 앞으로도 나올 겁니다-_-; 오늘 오후 여섯시에 기상했습니다=_= 어제 폭주하듯이 책을 읽는 게 아니었어어어어어...<-오후 아홉시에 잠듬. 비밀편은 뭐, 그래도 반란군보다는 낫습니다;;(쓰기가;) 빨리 카세타 반란 이야기를 끝내고 룰루랄라하트하트-_-; 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건만. 과연 제가 그 닭살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자,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즐겨주세요~^ㅡ^ 덧. 드디어 카페에 글 올렸습니다-_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2 :: 오! 나의 주인님-PART 14: 비밀(5) 가네트(uznian) 03-12-09 :: :: 13815 마린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비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내가 며칠을 밤샘했더라? 이틀? 삼일? 머리가 몽롱해질 지경이다. 이맘때쯤이면 카르멘 가로 돈을 내고 수업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꽤 많고, 아일린 가와 재정협상이 이루어지는 때라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마린이다. '어흑, 18세 소녀도 울고 갔던 내 옛적의 탱탱한 미모를 돌려줘.' 마린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눈가에는 기미가 까맣게 끼고 머리는 새가 집을 지어도 될 만큼 헝클어져 있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노려보며 내가 제명에 못살지 못살아, 어흑, 시집이나 보내주고 이렇게 일을 시키란 말이에요, 등등을 외치던 어제여 안녕. 마린은 기쁜 마음으로, 일단 가장 중요한 서류뭉치를 안고 방을 나섰다. 자신의 직인도, 그리고 가주의 직인도 필요한 서류다. 종종걸음으로 반의 방으로 그 서류뭉치를 배달하려고 했던 그녀는, 에, 하면서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머, 아름다운 처녀를 며칠 몇 밤을 새도록 부려먹었던 악독한 가주님이로구나. 그녀는 속으로 조그맣게 웃으며 걸어오는 반을 향해 말을 걸었다. "가주님, 이거 가주님 방으로 들어온 선물이에요. 그런데 조금 무겁군요. 조금만 거들어 주시겠어요?" 눈을 찡긋, 하며 마린은 말을 건넸다. 물론 일종의 조크였다. 마린은 누구보다 반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반 역시 마린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마린이 일방적으로 걸고 반이 무시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이런 종류의 조크는 둘 사이에선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막 말을 뱉어낸 순간, 마린은 퍼뜩 반의 눈동자를 보았고, 그 순간 자신의 조크가 시의적절하게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마린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이죠?" 마린의 앞에서 발을 멈춘 반의 얼굴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표정이라던가 하는 것도 원체가 없기에 누군가가 그의 감정을 깨닫고 잡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마린은 지금 반에게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소년의 표정에서 읽은 것이 아니라 소년의 몸에서 풍긴 느낌으로 안 것이다. 경험으로. 아마도 자신이나 케인 정도나 알만한 종류의. "마린." 아, 정말 무슨 일이 있나봐. 목소리 톤이 기묘하게 낮아. 마린은 속으로 생각하며 답했다. "예, 가주님." 마린은 잔뜩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말은 마린의 상상을 뛰어넘는 종류의 것이었다. "……새로운 시종을 알아봐라." "예?" 갑작스러운 그 말에 마린이 의아하게 반문했다. 반은 그대로 마린의 어깨를 치며 지나갔다. 그런 반의 뒷모습을 보며, 마린은 머리를 스친 '무서운 무언가' 에 흠칫 놀랐다. "가주님!" 마린은 뒤를 돌아보며 반을 향해 냅다 고함을 쳤다. "가주님!" 다시 한 번 마린이 고함을 친다. 반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설마, 설마 죽이신 건 아니죠? 프란, 프란! 프란, 죽이신 건 아니죠? 그렇죠? ……가주님! 가주님!" 마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복도 쪽으로 메아리쳤다. ▷◀▷◀▷◀▷◀▷◀▷◀ 시온은 장미정원 티 테이블에 앉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뭔가 의심이 났던 시온은 자료를 찾아보려다가, 그 방대하기 짝이 없는 독약에 대한 자료 중에서 4일 만에 크루레티나에 대한 정보를 발견해내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늘씬한 다리를 사뿐히 꼬고 앉아서 머릿속으로 수많은 것들을 굴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온은,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았다. 시온은 한참 그 그림자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오, 공주님!?" 시온의 목소리에, 시종 넷을 뒤로 한 채 사뿐한 걸음으로 저택을 향해 다가오던 키네세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시온님. 오랜만이네요." ▷◀▷◀▷◀▷◀▷◀▷◀ 프란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장애물이 있을수록 타오르는 인간이었고 풀지 못할 과제가 있다면 그것이 많을수록 더 즐거워하는 인간이었다. 사방은 벽, 창문조차 없고 저 너머에 있는 문은 단단한 열쇠로 잠겨져 있다. 자신의 몸은 의자에 묶인 채. 하지만, 내가 포기할 줄 아느냐. 이 프란 프리텐님은 포기를 모른다 이거야! 프란은 몸을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손은 뒤로 돌려 묶인 채였고 팔과 몸통이 길게 이어진 밧줄에 묶여 한 곳에 연결되어 있다. 다리 역시 한대 묶인 채로 의자와 칭칭 감긴 상태. 이 상태에서 무얼 어떻게 해본다는 건 절대적인 불가능이었다. 프란은 후욱,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폐 안으로 공기가 녹아든다. 천천히 배어들어온 땀이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타박타박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침을 삼켰다. 자, 어서 들어 와봐. 나는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끼이이이이익. 그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프란은 엄청난 긴장을 하며 앞을 보았지만, 뜻밖에도 들어선 것은 보일린이 아니라 그와 함께 서 있던 남자였다. "……." "……." 프란은 무서운 눈으로 들어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는 흠, 하는 낮은 한숨소리와 함께 프란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와서 그 앞에 걸터앉았다. "당신이지? 카세타 왕궁 무도회." 프란의 말에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너, 저 변태의 하수인이냐?"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들고 온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작은 접시위에 무언가 덮인 것을 보니 음식인 모양이다. "그 놈은 미쳤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라고." 남자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프란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네놈이 케인이라도 되냐! 프란은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속으로 발악했다. 남자는 접시 위에 엎여 있던 천을 걷었다. 갓 구워진 듯한 빵 두 덩이와 달콤한 냄새의 주황색 잼, 바삭바삭한 파이가 간소하게 놓여 있었다. 남자는 먼저 빵을 집어 들었다. "먹어두도록 해. 손이 부자연스러우니 내가 먹여주지." "누가 안 먹을 줄 알아?" 프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빵을 아주 조금 떼어 프란의 입에 넣어 주었다. 프란은 우적우적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씹었다. 눈빛을 강하게 빛내며, 도전적인 시선으로 음식을 씹어대는 프란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세라딘' 중 한명으로 아직 카세타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그이지만, 보일린의 '레이니아' 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옆에서 보아왔던 그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에게 프란의 저 눈빛이며 저 얼굴은,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자애로우면서도 다정하고 유려한 동시에 어딘지 의지가 깃든 초상화 속의 레이니아의 부드러운 얼굴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뭐랄까, 덜 여문 느낌이랄까. 조금만 더 자라면 비슷해질 것도 같다고 할까. 남자는 프란이 자신의 눈을 노려보며 음식을 씹는 것을 말갛게 내려다보았다. 그래, 다른 것이 당연하다. 무엇보다, 소년이니까. 아직 덜 성장한 작은 동물을 보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다. 남자는 파이를 집어들어 프란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보일린님은 남색도 가리지 않는 분이다." 음식을 꼭꼭 씹던 프란의 입이 잠시 멍하니 벌어졌다. 그 바람에 입 안으로 반쯤 들어갔던 파이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보았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어이. 당신, 생각보다 농담을 잘하는데?" 프란의 현실도피를 무시하며,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제부터 이 문 앞에 서 있을 거야. ……화장실이 급해지면 말해라. 보일린님은 언제 오실지 알 수 없다. 요즘은 바쁜 일이 많으시니까." 프란은 뒤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를 탈출하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보일린이 찾아오면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프란은 온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한 얼굴이 생각난다. 프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키네세스는 시온의 안내를 받아 1층에 있는 응접실로 갔다. 꽤나 여러 번 드나들던 곳이라 굳이 안내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시온은 부드러운 꽃 미소를 날리며 '어찌 이리 아름다운 여인을 혼자 걷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해 키네세스를 미소 짓게 했다. "여전하시네요, 시온님은." 키네세스의 말에 시온은 오호, 하고 손가락을 튀겼다. "그 말, 여전히 제가 섹시하고 멋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고맙습니다, 공주님. 공주님도 여전히 아름답고 귀여우세요." 키네세스는 그 넉살에 호호, 하고 웃고 말았다. 시온은 그런 키네세스를 잠시 보다가 키네세스와 자신의 옆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하녀 둘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기, 링. 너는 형님을, 아니, 가주님에게 내 말을 좀 전해주지 않겠어? 제 3공주님이 오셨다고 전해드리면 될 거야. 자, 그리고 유리. 너는 차를 좀 내오겠어? 기왕이면 아이리엔으로 부탁해." 시온이 찡긋, 하고 윙크를 해보이며 말하자 시녀 둘은 얼굴 가득 홍조를 피어 올렸다. 옛날에는 지겹도록 받았던 윙크지만 최근에는 무척 뜸했던 것이다. 시녀 둘은 발그레한 얼굴로 네에, 시온님, 하고 말한 후 발소리를 죽여 문 밖으로 나갔다. 두 시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키네세스는 웃었다. "온 집안 고용인의 이름을 다 외우는 건가요? 그것도 아일린 가가 아닌 카르멘 가의 고용인을요." 시온은 키네세스의 말에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물론 아리따운 레이디들의 이름만 알지요." 생글 웃으며 한 시온의 말에 키네세스는 다시 쿡쿡, 하고 자그맣게 웃었다. 시온은 그렇게 웃는 키네세스를 보며 속으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참, 옛날엔 나도 이렇게 청초 하면서도 얌전한 여자가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어쩌다가 나는 프란에게 코가 꿰어버린 걸까. 그렇게 속으로 쓴웃음을 짓던 시온은 어느 순간 아차, 하는 기분으로 키네세스를 보았다. "저기, 공주님." "예? 말씀하세요." "저는 공주님이 꽤 박학다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온이 눈웃음까지 쳐가며 한 말에 키네세스는 후훗, 하고 웃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그 남자의 사촌 동생은 꽤 유쾌한 사람이다. 굳이 '마음에 드는 척' 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말이다. "마법사인 당신께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아뇨, 잘 아시다시피 저는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말이지요. 이를테면, 뭐, 마법에 대한 재능은 솔직히 조금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머지는 완전 꽝이에요. 책으로 흡수한 지식이라면 공주님 쪽이 훨씬 많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괜찮으면 제 질문에 대해 생각 좀 해보시겠어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라면." 대답하면서도, 키네세스는 문 쪽을 흘끔흘끔 자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반이 올까 내심 초조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온은 그런 소녀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요, 사랑하는 분이 올 걸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하십니까?" 시온의 놀림 가득한 말에도 키네세스는 의연하게 농담도 재밌게 하시네요, 라는 말과 함께 웃었을 뿐 얼굴을 붉힌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키네세스를 보며 시온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조금은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물어볼 건 크루레티나에 대해섭니다." "……독초 크루레티나 말인가요?" "예. 알고 계시는 대로 말씀해주시겠어요?" 키네세스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눈치더니 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굉장한 맹독에 잘못 먹으면 사망 혹은 사람이 백치가 된다는 건 알고 계실 거예요. 액체와 섞으면 분홍색을 띈다는 것, 그리고 미끌미끌하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크루레티나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요. 재배가 금지되어 있는데다가, 실제로 재배하려고 해도 재배 방법이 무척 까다롭거든요. ……흠, 기온도 중요하고. 그래서 크루레티나는 세이피안 남부에서만 자라요. 따뜻한 지방이 아니면 자라지 못하니까요." "어? ……잠깐만요, 공주님." 시온은 깜짝 놀라 키네세스에게 말을 멈추게 했다. 아니, 잠깐만. ……이건, 틀려. "왜 그러시죠?" 키네세스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시온은 잠시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저, 급한 볼일이 생각났거든요." 키네세스는 조금 놀랐다. 언제나 빙글빙글 능글능글 모든 여자들을 농락하듯, 그러나 그런 모습이 밉지 않게, 그리고 유쾌하게 어울리는 이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키네세스는 조금 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이 오면 '방해꾼' 없이 그와 단 둘이 있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보세요. 다음에 봐요, 시온님." "안녕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름다운 제 3공주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의 오른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시온이 문을 열고 사라졌다. 잠시 후, 하녀가 차를 두 잔 들고 왔다. 하녀는 시온이 사라진 자리를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곧 자신의 앞에 앉은 여인의 신분을 상기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차를 놓았다. 향이 좋은 차를 담은 작고 아름다운 찻잔을 곱게 그러쥐며, 키네세스는 카르멘의 가주를,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리엔 차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 키네세스는 문 앞에서 멈춰서는 발소리를 들었다. 키네세스는 그 순간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당신은 모르겠지. 나는 사실, 당신의 발소리만 들어도 당신을 알 수가 있지요. 이건, 당신이군요. 탈칵, 문이 열렸다. 키네세스는 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스티스 경. 여전히 차향이 좋군요." 반은 나직한 걸음걸이로 키네세스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키네세스가 느낄 수 없을 정도지만, 굳어 있었다. 키네세스는 반이 자신의 앞에 앉을 것이라 기대하며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 순간, 반이 입술을 열었다. 키네세스는 네? 하고, 조금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가 주십시오." 반은 다시 한 번 말했다. 키네세스는, 잠시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다가 다음 순간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만나려고 궁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스티스 경. 공주의 외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오직 당신을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이리도 매정하신가요. 분명 와도 좋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요?" 그러나 키네세스는 애써 태연한 척 한다. 반은 아무 말 않았다. 키네세스는 자신의 드레스자락을 꼭 눌러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한 걸음씩 반에게로 다가오며 조그맣게 웃어보였다. "그럼, 저택 밖으로까지만 배웅해주시겠어요? ======================================================= 가넷입니다. 오늘도 아슬아슬 세이프가 되겠군요;ㅁ;(죄송해요, 엉엉) 아, 정말 죄송스러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하루는 연재가 힘들 것 같네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일 귀가가 많이 늦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대로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만약 내일 못올리면, 그 다음날 두 편을 올려서라도 사죄를;; 요즘 굉장히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파삭, 하고 부서질 것 같은 나날 말입니다;; 꽤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요즘이라..-_-후우. 이번편으로 무언가를 알게 되신 분들도 있을 거로 아는데요;(너무 뻔했음;) 그런 분들은, 제발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리플로 달지는 말아주세요;ㅁ; -_ㅠ스포일러 대공개는 정말 비참하잖습니까, 네?; ^^그럼 내일, 혹은 그 다음날 이연참이든, 그 때 뵙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3 :: 오! 나의 주인님-PART 14: 비밀(6) 가네트(uznian) 03-12-10 :: :: 10692 ▷◀▷◀▷◀▷◀▷◀▷◀ "……좋아, 모든 것은 이틀 후에." 이스티네 보일린은 남자에게 말한 후 희미하게 웃었다. 남자는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보일린님." "뭔가." 보일린은 연신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싯대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보일린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즘 새로 첩이라도 들이셨습니까? 얼굴 표정이 너무 좋으시군요." 보일린은 음흉하게 웃었다. "첩?" 흐흐흐, 하고 웃는 보일린을 보며 정말 그런가보군, 하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 "아일린 가에는 언제 돌아가시는지요?" 꽃향기를 온 몸에 휘어감은 바람의 정령이 키네세스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름답게 흩어지는 푸른색의 머리카락. 붉은색의 단아한 입술을 움직여, 키네세스는 반을 향해 묻는다. 반은 키네세스를 저택 밖까지 배웅하는 중이었다. "……곧." 프란이 들었으면 '그것도 대답이냐! 묻는 사람 생각도 좀 하란 말이다!' 따위를 외치게 만들었을 짧은 대답에도, 키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짓는다. 물빛의 레이디는 가주의 이 낮은 미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제 가시면, 또 언제 봬올는지." 낮은 한숨을 쉬며 키네세스가 말했다. 허나 반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키네세스는 그런 반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그래, 여기에서 무언가 말을 해야 해. 지난 해, 이 사람이 세이피안에 있을 때 나는 그에게 어떤 여자라도 접근할까 도대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이번에 카르멘 가에서 거의 1년을 머물렀던 만큼, 아일린 가에서도 오래오래 머물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또 어떤 앙큼한 여자가 달라붙을지 모를 노릇. 게다가 반의 나이 스물이 가까워지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아일린 가 특유의 '성인식' 이며 '계승조건' 의 기묘함을 생각해보면 위험하기가 이를 데 없다. 키네세스는 크게 심호흡 했다. 저번에는 당신을 놓아주었어. 이번에는 당길 때지. "카르멘 경." "……." 카르멘 가 정원사들이 꽃을 손질하다말고 이 쪽을 발견했는지 크게 고개를 숙여온다. 그런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키네세스는 빠르게 떨리는 심장의 박동을 억지로 늦추려 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아. 그러십니까.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행복한 분이십니다, 정도의 대답은 해줄 법도 하건만. 아니, 그 정도가 예의건만. 반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뚜벅뚜벅 걸을 뿐이다. 키네세스는 조금 마음이 상했으나 그래, 그것이 당신답지 하고 자위한다. "……옛날에, 제가 어릴 때 만난 분입니다. 그리고 제겐 생명의 은인이지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연모해 왔습니다." 키네세스는 기억한다. 그래. 그 때, 자객을 베어내던 당신의 그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눈동자. 그 얼음 같은 강함. 아아,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 강철의 심장이 바로 내 앞에서만 붉은빛으로 뛰어 준다면. 키네세스는 반을 곁눈질했다. "……." '뭐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카르멘 경.' 이윽고 카르멘 가의 장미정원이 끝날 즈음이 되자, 키네세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공주의 외출은 그리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아일린 가로 돌아가기 전에, 또 한 번 만나기야 하겠지만. 그렇지만 단 둘이 있을 기회는, 어쩌면 이 것이 마지막-. 막 정원이 끝났을 때였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해마지 않던 반의 눈빛이 휙 하고 달라졌다. 키네세스는 민감한 시선으로 죽 반을 보고 있었기에,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반은 키네세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중하기 그지없게-평소와는 지나치게 다를 정도의 정중함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네? 네?" 무슨,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반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키네세스는 일순 당황했다. 눈 깜짝할 사이 홀로 장미정원에 남겨진 그녀는 어질, 하고 두통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잠시 몸을 떨었다. 어디로?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죠? ……잠깐만요, 카르멘 경? ▷◀▷◀▷◀▷◀▷◀▷◀ 곧장 정원에서 돌아나간 반은, 그보다 더 빠를 수 없는 걸음걸이로 마구간을 향해 걸었다. 카르멘 가의 수많은 말들을 막 목욕시킬 생각이었던 마구간지기 라훌은, 존경하는 소년 가주가 보이자 얼른 고개를 숙여보였다. 요즘 들어 외출이 잦으시군, 하고 그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반이 세워져 있던 말 하나에 훌쩍 올라탔다. 반은 말갈기를 한차례 쓰다듬은 후,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재빨리 말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라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주가 밖으로 나갈 때는 적어도 한 명이 더 보여야 하는데. 홀로 대체 어디를 가시는 걸까. "여자라도 만나러 가시는 건가." 라훌은 뒤에서 중얼거렸다. ▷◀▷◀▷◀▷◀▷◀▷◀ "모든 것을 다줘!" "어, 어머머머머머머, 시온님!" 카르멘 가의 수많은 관리인 중 한명인 서른 네 살의 여자 아린은, 아일린 가의 도련님이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며 한 말에 완전히 당황했다. 그녀는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는 시온을 보며 붉어진 얼굴로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모든 것을 다 달라니. 아린은 붉어진 얼굴을 양 손으로 감춘 채 고개를 좌로 꺾었다. 무수한 시녀들에게 손을 대면서도 자신에게는 한 번 찾아오지도 않던 저 새파란 아일린 가의 도련님의 갑작스러운 프로포즈에, 그녀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근거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온은 빨갛게 달아오른 아린의 얼굴을 보며,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는 자신이 커다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큰 두려움에 떨며 얼른 정정했다. "아, 아린. ……미안. 모든 걸 달라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 젠장. 나 지금 정말 급해, 아린. 3년, 아니, 5년. ……그래, 5년. 5년 전의 자료까지 모두 다 줄 수 있겠어? 카르멘 가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자료."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시온을 바라보던 아린의 시선이 차갑게 굳어졌다. 깐깐하기로는 마린조차 두 손 두 발 다 드는 아린이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장난하세요? 그게 얼마나 방대한 자료인데……." "장난 아냐, 아린. 정말 장난 아니거든? 빨리!" 시온은 애걸하듯 말하고 아린에게 다가갔다. 키네세스에게 실례의 말을 전하고 곧장 그 걸음으로 달려왔던 시온이다. 그의 예상이 옳다면 분명 범인은. 시온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빌어먹을. 세상에! 만약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시온은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아린은 화들짝 놀라며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얼굴도 잘생겨가지곤 성격 더러운 것까지 내취향이네, 등등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료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 프란은 일단 고개를 꺾어 오른쪽 팔부분의 옷깃을 물었다. 혹시나 옷깃을 위로 끌어올리면 거기에 쓸려서 밧줄이 조금이나마 헐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취한 행동이었다. 물론 밧줄이 워낙 단단하게 묶인 탓에 밧줄이 헐거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옷이 찢어졌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프란은 아등바등 몸을 비틀며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간간히 지켜보는 문밖의 남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일단 저기서 풀려난다고 쳐도 도대체 문은 어떻게 뚫을 것이며 자신은 어떻게 상대할 거란 말인가. 게다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탈출시도를 하는 모습을 광고하면서. 한참 숨을 헉헉 몰아쉬던 프란이 소리를 빽 질렀다. "물! 물 내놔!" "……." "야! 난 시원한 물 아니면 안 마셔!" "……." 정말. ............어이가 없다. 남자는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저렇게 몇 번씩 의자를 들썩들썩하며 뒹굴뒹굴 몇 시간을 노력 하다가 지칠 때쯤이 되면, 어이없게도 당당하게 한다는 말이 저거다. 물! 물 내놔! 세 번째로 물을 요구했을 때, 남자는 아예 옆에다 물통을 놓았었다. 그랬더니 한다는 말이, 시원한 말이 아니면 안 마신다는 거다. ……내참, 제정신인지. 자신이 납치되어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보일린이 '우리 레이나님에게 정성을 다해라' 라는, 남자가 들어도 정말 이성적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갔던 터라 남자는 프란에게 나름대로 잘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몸을 때린다거나 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남자는 일단 물을 떠다 주기로 했다. 저렇게 먹고도 화장실이 급하지 않은 걸 보면 그것도 참 용하지. 아니, 물을 마셔도 대부분이 땀으로 배출되니 항상성이 유지되는 건가. 남자가 일어섰다. 그가 막 복도 쪽으로 나가는 순간, 프란의 눈빛이 변했다. 아니, 그야말로 눈빛이, '돌. 았. 다.' 정확히 다섯 번 물을 요구했고, 그 때마다 물을 떠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딱 3분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3분. 1, 2, 3, 정확히 180, 까지 세고 나면 어김없이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들어왔다. 프란은 이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서른다섯, 서른여섯! 서른여섯을 셈과 동시에, 프란은 온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온 몸의 무게를 실었다. 퍼억! '으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옆으로 넘어졌다. 온 몸이 찌릿찌릿하다. 그러나 프란은 그 고통에도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프란은 꾸물꾸물 기어가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채인 자세였지만 상체와 하체의 꾸준한 움직임으로 기어간다. 프란은 자신이 옆으로 누운 지렁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빌어먹을, 빨리 돌아가야 해. 벌써 하루가 지났어. 가주 놈은 분명 내가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란 말이다! 프란은 필사적으로 꾸물대며 기어가서, 드디어 도착지점에 이르렀다. ……벌써 속을 센 숫자는 육십사. 프란은 온 몸의 부위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인 손가락으로, 벽에 다 걸지 못해서 바닥에 눕혀져 있는 레이아나의 그림 중 한 점을 추스렸다. 아름다운 액자에 걸려 밑에 놓여진 그 그림. 프란은 액자의 한끝을 잡고 청동제로 장식된, 극히 일부의 날카로운 부분에 밧줄을 갖다댔다. 제발 손목 부분만이라도 끊어져라! 있는 힘을 다해 청동부분에 대고 밧줄을 누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숫자는 끊임없이 세어지고 있었다. ……백이십이, 백이십삼, 백이십사…… 제발, 어떤 신이라도 좋으니까! 으아, 레이나인지 뭔지 하는 당신! 나랑 닮은 게 진짜라면 좀 도와줘도 되잖아! 너무나 작은 부분이라 생각보다 밧줄이 잘 끊어지지가 않는다. 백사십일 백사십이…… ……툭! '으아아아아아! 프란 프리텐에게 축복을!' 프란은 눈물을 흘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힘을 주자 뚜둑, 하고 끊긴다. 프란은 재빠른 동작으로 발에 묶인 끈을 풀었다. 온 몸이 아프다. 타박상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뭐가 문제겠는가. 백육십일, 백유십이…… 프란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밑에 놓인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이니아. ……나랑 닮았어, 이 여자가? 농담이지? 프란은 놀란다. 여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경건하고 성스러운 느낌이다.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숙미와 여자다움. 헤에, 어디가 똑같다는 거냐? 비슷한 거라곤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정도? 얼굴선? ……으음? 프란은 그러나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어 청동제 장식 안의 그림을 빼냈다. 그리고는 둘둘 말아, 대충 옆구리에 끼웠다. 그래, 한 장 정도 갖고 나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그 때였다.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프란은 깜짝 놀란다. 빌어먹을, 프란 프리텐! 너 방금 전에 무슨 짓을 한거냐! 아니, 잠깐. 아직! 아직이야! 이 쪽은 준비가 덜 되었다고! 아아아아악! 잠깐만! 철커덕. 아니, 잠깐. 아직! 프란의 심장박동소리가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 죄송합니다, 한편입니다;;(돌맞고 기절.)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지금 저처럼 경악하는 분이 계실지. 바아흐로 '그 시즌' 이 돌아왔습니다. 공감하고 계신 여러분, 혹은 앞으로 경험하실 여러분; 혹은 경험하신분들; 예, 그 시즌입니다.; 오늘 모자란 편은 내일, 죄송합니다만 모레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편은 약속 안지킨다는 것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군요. 그나마도 짧은 것 같네요;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7) 가네트(uznian) 03-12-12 :: :: 18131 모든 일의 정리를 끝낸 보일린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 오늘이야말로 레이니아님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옆에서 보좌관으로 일해 왔던 남자에게 자료의 일부를 넘겼다. "가져가게. 자네의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잊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헤헤, 하고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학자 타입으로 생긴 남자는 칙칙한 노란색과 옅은 초록색이 지저분하게 섞인, 천박한 금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보일린은 오늘을 축제의 날로 결정했다. 오늘, 카세타의 여러 곳에서 동시에 축포가 쏘아 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끊임없이 터지는 아름다운 불꽃은 카세타를 뒤흔들고 수도에 사는 모든 시민들의 목을 쥐리라.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불꽃이 마침내 유종의 미를 거둘 때, 준비해놓은 모든 것이 터진다. 이틀 후, 이틀 후다. 지금은 그 전야의 밤. 보일린은 자신만의 레이니아를 떠올리며 그녀의, 아니, 그의 하얀 속살을 생각하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축제다. 축제다! ▷◀▷◀▷◀▷◀▷◀▷◀ 딸깍. '빌어먹을!'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묶여 있던 의자를 저만치로 밀어 넣고, 자신은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물을 가지고 들어오는 남자의 뒤통수를 내갈길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문이 열린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프란은 자신이 묶여 있던 의자를 발등 정도까지만 들어올렸다. 그리고 문손잡이가 돌아가고 막 문이 열리려는 그 찰나의 순간, 프란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뛰기 시작했다. 두다다닷! 프란의 말대로 차가운 물을 담은 물병을 들고 온 남자에게는 그다지 과실이 없었다. 딱 한 가지 실수를 한 것이 있다면 프란이 무방비상태로 묶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예전에 프란을 납치하려고 시도하는 도중에 한 차례 그녀를 겪었음에도 그녀의 대담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남자는 막 문을 연 순간, 갑자기 자신의 안면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나무 색의 물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는 표현이 옳겠다. 그는 뭔가 돌출되고 깎아지르듯 조각되어 있는,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것이 눈앞으로 튀어나온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은 거기까지. 퍼어어어어억! 한 사람의 몸을 묶어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의 의자였기에, 꽤나 굉장한 무게였고 크기도 꽤나 컸다. 프란은 그런 의자를 들고 뛰어와 단번에 남자의 얼굴에 박아버린(!) 자신의 팔 힘에 새삼 감탄하며 의자와 정면으로 키스한 남자의 배를 있는 힘껏 밀쳤다. 퍼버벅! "크윽!" 의자와의 키스도 큰 충격이었을 텐데 복부로 가해진 짜릿한 충격은 그 이상이었으리라. 남자의 배 부분에서 의자가 몇 번 춤을 추는 동안, 프란은 오른발로 그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다음 순간 결코 평범한 인간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프란은 밟고선 오른발에 붙인 가속을 그대로 옮겨, 남자의 머리에 왼발을 디뎠던 것이다. 퍽! 세 번째 공격이다. 남자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가 '세라딘' 이니만큼. 그러나 남자는 프란 프리텐이라는, 카르멘 가주의 시종을 너무나 얕봤다. 그리고 비켈린 못지 않은 악명을 (숨은 곳에서) 자랑하는 세라딘 하나를 그대로 KO시킨 프란은, 그 좁디좁은 '레이니아 매니아'를 위한 방을 벗어나 마음껏 달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닥, 놀랄만한 속도로 프란은 달린다. "……프란 프리텐. 너 진짜 천재인가보다." 자축을 한마디 한 후, 프란은 복도를 뛰어나간다. 제발, 남자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길. 그럼 이대로 빠져나가면 끝이거든! 하고 중얼거린 프란은, 여기서 나가자마자 아주 처절한 복수극을 해주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허나 그 전에 가주에게는 뭐라고 변명을 하지? 저, 가주님. 제가 레키슈안 초대 왕비랑 똑같이 생겨서 저를 납치했대요, 라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그 순간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프란은 반의 모습을 생각해봤다. 내참, 정말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군. 프란은 싸늘한 은보라색 눈으로 자신을 한차례 보곤 '드디어 정신이 나갔군.' 하고 말하는 반의 얼굴을 너무나 선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으오오오, 아니지, 아니야. 대마왕이라면 아무 대꾸 없이 빤히 바라보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주는 방법을 택할지도. 음, 이 쪽이 더 신빙성 있군. "……죄수가 도망간다! 쫓아라!" 벌써 정신을 차렸나. 프란은 뒤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당황했다. 프란은 미치겠군, 하고 생각했다. 의자와 키스한데다가 복부에 엄청나게 둔탁한 충격이 갔을 것이고 만만치 않은 무게로 머리까지 밟혔는데 빨리도 소리를 치는군. 그나저나 죄수는 누가 죄수야, 임마! 남을 마음대로 가둬놓은 주제에, 게다가, 무려, 무려, '남색' 이라는 말까지 사용했단 말이다. 자신이 남자라고 알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보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어찌됐든 세라딘인 남자가 그 방에서 소리친 죄수, 라는 한마디는 엄청났다.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사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프란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일단 벽의 가 쪽으로 숨었다. 움푹 파인 벽과 벽 틈사이의 작은 공간 사이로 숨자, 얇은 편인 그녀의 몸이 감쪽같이 숨겨진다. 프란은 새액새액 숨을 몰아쉬었다. 튀어나온 무리들이 언제 어디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프란은 어디로든 숨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을까. 근데 도대체 여기가 몇 층쯤일까. 프란은 등을 조금씩 움직여 창문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란은 두 말 없이 뛰어내리는 일은 포기하기로 했다. 나무의 정수리가 똑바로 내려다보인다. 그것도 아주 긴 간격을 두고. 여기는 적어도 5층 높이다. 뛰어내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 나는 오래 살 거다, 라고 프란은 중얼거린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 거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자신을 가두었던 남자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공포다. 프란은 힐끗 옆을 보았다. 바로 옆에 방이 하나 보였다. 만약 저 것이 빈방이라면 상관없지만,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는 것이다. 프란은 힐끔 곁을 살피다가 마침내 결심한다. 악운에 강하다면 강한 것이 그녀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의 악운을 믿기로 했고, 그래서,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산발적으로 오가던 사람들의 소리가 발악적으로 커진다. 그녀는 찰칵, 하고 문을 닫았다. 귀족가 저택의 방 중 태반이 사람이 들지 않은 응접실이며 접대실. 여기도 그 중 하나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프란은 주변을 휙휙 살폈다. "누구냐?" 그런데 불행히도 바로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깜짝 놀라 납작하게 엎드렸다. 사람은 의외로 발밑을 살필 줄을 모른다. "착각인가." 방은 조금 특이한 구조다. 침대가 있고, 저 너머에 드리우듯 커튼이 걸려 있다. 녹색과 섞인 듯한 어설픈 금발을 가진 남자는 커튼이 있는 쪽에서 머리를 긁으며 나왔다. 책을 읽고 있었던 건가. 분명히 학자타입의 인간. 피부 등등을 보니 검을 배우기는커녕 만져본 적도 없겠다, 하고 프란은 판단했다. 잠시, 프란은 학자 타입이 틀림없는 그런 인간한테 폭력을 쓰는 것이 정당한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을 시작한지 약 3초 후, 그녀는 다시 커튼 쪽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 남자를 향해 자신이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의 손에는 벌써부터 꽃병이 들려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자는 절대 공격 안했다고! 내 투철했던 기사도 정신을 돌려줘어어어!' 퍼억! 그러나 이미 프란 프리텐의 몸은 정신을 거부하고 있었다. 기사도 정신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 하는 모양이다. '역시 난 악운에 강해.'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에서 피가 나는 남자를 향해 짧게 묵념했다. 남자의 입을 틀어 막고 대충 몸을 묶었다. 머리에서 피가 나긴 해도 이 정도론 안 죽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흐읍, 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문은 단단히 잠가 두었다. 어떡할까. 저 쪽에 있는 커튼이라도 잡아 찢거나 침대 시트를 죽 연결해서 내려가 볼까.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다, 곧 단념하고 말았다. 침대 시트를 둘둘 말아서 5층 높이를 내려간다는 생각자체가 아슬아슬한데다가(그녀는 자신의 몸무게를 자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려가는 동안 그 요란스러운 탈출장치가 들키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인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프란은 손마디를 뚜둑 뚜둑 꺾었다. 혹시 어딘가에 비밀 통로라도 있지 않을까. 허망한 생각을 하면서 남자가 나왔던 커튼 안 쪽의 공간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런 것이 나올 리가 없다. 게다가 실제로 비밀 통로가 있다고 친다 하더라도 '여기가 비밀통로이니 이렇게 저렇게 하시오' 라고 적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녀가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주변에 뭔가 참고가 될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서 대충 뒤적여 봤지만 기껏 발견한 것은 '가에린 상단, 제닌 고물상에서 아름다운 축제를' 이라고 적어놓은 한심한 일기 같은 것 뿐이었다. 아름다운 축제는 무슨, 빌어먹을 것. 한참 고민하던 프란은,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와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하나 택했다. "나는 프란 프리텐이라고. 일단 하고 보자." 프란은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대듯 말했다. 역시 그녀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인간이었다. ▷◀▷◀▷◀▷◀▷◀▷◀ "도망쳤다니?" 이스티네 보일린은 진귀한 보석들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손질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었으며 아주 오랜만에 머리도 단장했다. 역겨운 기름이 흐르는 얼굴이나 비대한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해도, 보일린으로써는 노력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잔뜩 부푼 가슴을 안고 그 방으로 간 이스티네 보일린은, 마사지용 계란 한 판이 모자랄 정도로 무자비하게 터진 세라딘 남자의 얼굴을 보며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도망갔습니다. 말 그대로." 남자는 그 주제에도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잘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나의 레이니아님이…… 도망이라니!" 보일린이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고 있던 남자의 복부며 얼굴근육은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고 있다. 보일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찾아, 지금 당장!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 아직 멀리 못 갔을 거다, 어서! 어서 모든 사람을 다 풀어서 찾아!" 보일린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토마토처럼 터져 붉은 물이 줄줄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보일린이 날뛰고 있는 순간, 보일린의 당황을 몇 배로 가속시키는 말이 들려왔다. "남작님!" "닥쳐! 지금 나는 바빠!" 또 하나의 세라딘이 다가오며 그를 부르자, 보일린은 신경질적으로 응대했다. 세라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되었든 '세라딘' 은 이스티네 가에 매인 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세라딘' 은 협력자일 뿐. 이렇게 함부로 대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참았다. "중요한 손님이 오신 듯 합니다." 보일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저희 세라딘이 잠시 숨어 있어야 할 손님입니다." 방금 도착한 세라딘이 말을 끝맺자, 프란에게 얻어맞았던 남자의 멍든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시즈 아일린님, 아니, 여기에선 저스티스 카르멘이군요. 하여튼 그 분이 오신 모양입니다." 남자의 말에 보일린의 얼굴이 더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야?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용건인가!" 세라딘은 고개를 숙였다. "집사장 말에 따르면 단신으로 왔다고 합니다. ……일단, 저희 세라딘은 숨겠습니다." "이런 미친!" 보일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버럭 고개를 돌렸다. "일단 너희들은 레이니아님을 찾아! 숨어있긴 뭘 숨어 있겠다는 거야! 아일린 가의 가주가 '세라딘' 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리가 없어. 너희들은 흩어져서 레이니아님을 찾아! 그게 최우선이다!" 보일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명의 '세라딘' 은 더 망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을 망가뜨렸다. 이런 빌어먹을 돼지 놈아. 여기에서 '세라딘' 이 시즈 아일린의 눈에 띄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야! 우리 세라딘이, 이 시기에, 그것도 바로 이 곳에 왜 있는지가 밝혀지는 날이면, 그 날로 아일린 가는, 아니, 카르멘 가까지도 발칵 뒤집힌다고! 세라딘의 뒤에 있는 '그분' 께까지 피해를 입힐 셈이냐! 그러나 세라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일린은 철컥철컥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보일린은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저스티스 카르멘을 붙잡아 놓을 동안 너희들은 레이니아님을 찾아! 빨리 찾아!" ▷◀▷◀▷◀▷◀▷◀▷◀ "난 전생에 도둑이었을지도." 프란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저택의 담과 뒷정원을 크게 등진 창문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 저택의 '외벽'을 타고 있다. '한 층 한 층씩 눈치를 봐가며 내려가면 되겠지. 그 다음부턴 빌어먹을, 될 대로 되라고 그래!' 무슨 발악이든 해볼 생각인 프란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창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사방을 무섭게 살폈다. 아직은 경계가 그리 삼엄하지 않다. 그녀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건물 외벽에 매달렸다. 어둡지는 않지만 노을이 낀 지라 모든 것이 뚜렷이 확인되는 낮보다야 훨씬 낫다. 그녀는 아주 신중히, 정말로 신중히 외벽을 타기 시작했다. 벽돌의 그 작은 틈 사이로 발가락을 넣어 한 칸 한 칸을 내려가는 것이 이토록 고되고 피를 말리는 일이라는 것을, 프란은 처음 알았다. 줄도 없이 무엇도 없이, 마치 광대 같은 움직임이다.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한 층을 내려섰다. 4층이다. 창문 한 켠에 발을 딱 붙인 다음 창틀에 몸을 밀착시킨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숨은 프란의 몸이 위태위태하기 짝이 없다. 프란은 다시금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시 한 층을 내려가기 위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모든 신, 있으면 좀 들어봐요. 아니아니, 저주의 신 라이메스를 빼놓고. ……오늘 빼곤 다시 안 찾을 테니, 제발 가호 좀 내려주쇼.' 가호를 달라는 것인지 벌을 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한차례 진지하게 기도한 프란은 다시금 떨리는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 반은 응접실 한켠에 있었다. 반은 응접실 전체를 가리듯 쳐 놓은 붉은색의 커튼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낌과 동시에, 그는 손님인 주제에 주인이라도 되는 듯 그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좍 하고 커튼을 열어젖혔다. 커튼을 통해서 안까지 발걸음을 옮긴 노을이 반의 옆얼굴에 엷은 키스마크들을 찍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옛날부터 카르멘 가에서 칩거한다는 소문이 돌만큼 외출을 자제해왔던 그다. 그런데 반란에 개입하고 난 뒤부터는 가문의 정무를 돌볼 틈이 전혀 없었다. 아마 저택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쌓여있을 일이 눈 더미 같을 것이다. "오셨습니까." 문이 열리며 상기된 얼굴의 보일린이 들어섰다. 방금 전의 그 이성 잃은 얼굴은 간데없고, 그는 처음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 반을 향해 당돌한 질문을 했던 그 때와 비슷한 얼굴표정을 지으며 응접실의 문을 연 후 들어섰던 차다. 보일린은 웃는 얼굴로 반의 옆에 섰다. "대체 무슨 일이신지." "종은 매매가 가능하다." 보일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이 입을 열었다. 보일린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반의, 어떻게 들으면 진솔하고 어떻게 들으면 거만한 화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저번에 한 번 겪은 적도 있었기에 당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레이니아에 관련된 얘기만 아니라면, 보일린은 절대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발톱을 숨긴 채 사태를 냉정히 관찰할 줄 아는 남자였다. "종의 매매가 가능하다니요?" 보일린은 공손하게 되물었다.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 너는 내 시종을 눈여겨보더군." 보일린은 급소를 찔린 느낌이다. 이 남자, 다 보고 있었던 건가. 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일린은 아차, 싶다. 왜 자신이 그 생각을 못했을까. 저스티스 카르멘과 자신은 분명 우호적인 관계라고는 할 수 없는 사이이지만 이것과 별개의 문제로 '종'을 팔라고 거래할 수 있는 문제였다. 종은 어디까지나 매매가 가능한 '물건' 이다. 가주의 옆에 달라붙어 시중을 드는 시종이라면 몸값이 비싸기야 하겠지만 그 몸값이 거기서 거기지 어디까지 뛰겠나, 이 말이다. 그래,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는 건데. 보일린은 그제야 후회한다. '저 종을 내게 팔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어본 뒤에 납치해도 늦지 않았을 문제다. 의심이야 받았겠지만 그것은 후의 문제이고. "아아. 뭐라고 해야 할까. 참 특이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한 가문의 가주님을 보필하는 자가 그토록 나이가 어린 경우는 잘 없어서, 랄까요." 보일린은 자신이 반의 함정을 잘 피해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보일린은, 모르는 척, 한마디 더 했다. "그러나 제가 그 시종에게 조금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파실 생각이 있다면,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종은 얼마에 살 수 있습니까?" 웃으며 한 질문이었다. 어차피 그 시종은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 저스티스 카르멘이 돌아가고 나면, 분명히 다시 무릎 꿇려져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평생 동안 저택에 가두어놓고 자신만의 레이니아로 살게 할 테다. 소년이라고 했는가. 상관없다. 소년이라도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를 기르게 하고, 머리가 길어지기까지는 가발을 씌울 것이다. 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가 '레이니아' 의 형상을 하고 있는 동안이라면. "사겠다고?" 반은 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예. 가격이 적정이라면, 제가 사겠습니다." "4천 5백만 케트." "네?" 보일린은 반의 입에서 일말의 에누리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당황했다. 4천 5백만 케트? 지금 장난하는 건가? "……카르멘 경, 농담이 심하시군요. 저는 당신 저택의 가격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시종의 몸값을 말하는 겁니다." "난 농담을 하지 않는다." 반이 잘라 말함과 동시에 하핫, 하고 그답지 않게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보일린은 등 뒤가 쭈뼛하고 서는 것을 느꼈다. 웃었어? 저스티스 카르멘, 지금 당신이 소리내어 웃은 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시종을 다시 사겠다는 네 놈이 웃기는군. 시종의 몸값은 4천 5백만 케트다. 가져갔으니 돈을 가져와라." 반의 웃음소리에 당황했던 보일린은 무슨? 하는 소리와 함께 반을 향해 마주 허허, 하고 웃었다. "허허, 카르멘 경.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가지고 있는 시종이라니,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4천 5백만이 원래 몸값. 허락도 없이 가져갔으니 1억 케트로 인상한다." 농담을 하는군, 하고 생각했던 보일린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농담이라고? 저 저스티스 카르멘이? 아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잖은가. 이 남자는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아, 아니, 카르멘 경.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혹시 시종이 사라지기라도 했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은 보일린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갑자기 그의 온 몸으로 피어오르는 무엇인가에 보일린은 움찔 한발을 물러선다. 검을 배우지 않았기에 이렇게 온 몸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기운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한 발을 물러서지 않으면 오줌을 지릴 것 같아 물러설 수밖에 없다. 보일린과 반의 눈이 마주쳤다. 보일린은 자신의 입이 제멋대로 벌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자제했다. "카르멘 경. ……이런, 번지수를 잘못 짚으셨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대 카르멘 가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저 역시 일가를 이루는 귀족입니다. 더 이상 실례를 범하지 말아주십시오." 능글능글한 변태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정돈된 말이다. 그러나 보일린은 자신만만한 경고는 그 다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울린 소리에 반의 눈에 휙, 하고 창가로 돌아갔다. 보일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툭, 하고 무언가 육중한 것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보일린은 또 보아야만 했다. 저스티스 카르멘. 또 다른 이름은 시즈 아일린인 그 자가, 바로 그 자가, 절대로 자신의 앞에서만은 하지 말아주길 바랬던 일. "무, 무슨 짓입니까!" 창 밖을 잠시 바라보던 반이. ……검을 뽑고 있었다. =============================================== 두편 분량이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제생각엔 꽤 상당한 분량인듯 합니다. 오늘 왠지 필 받습니다;; 계속 써야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 안 올릴테니까요.. 저..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기다리지 마세요;ㅁ;) 덧. '=_=;;;' 같은 허접 변명글에도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썼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요. 이젠 논술만.......(퍼엉)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8) 가네트(uznian) 03-12-14 :: :: 10969 프란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발각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제발 이런 상황은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프란은 지금 한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3층의 창문 난간에 매달려 있다. 온 몸을 지탱하고 있는 손가락 몇 개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사정없이 떨렸다. 밑을 향해 곧장 떨어지기 직전, 미친 듯이 손을 뻗어 잡은 난간. 허나 '손' 으로 잡았다기보다는 '손가락 네 개' 로 잡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으로 프란은 위를 쳐다보았다. 몸은 대롱대롱 매달려 간간이 저택의 외벽에 부딪치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밑은 쳐다보지 않았다. 방금 전, 그녀를 잡으려던 남자 하나가 4층에서 그대로 곤두박질쳐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확실하고 꼼꼼하게 외벽을 타고 내리던 그녀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그 남자를 피하다 그런 것이었다. 프란처럼 악운을 타고난 자라면 모를까, 저 밑에서 나무 가지에라도 걸리지 않았다면 떨어진 남자가 하고 있을 꼴은 뻔했다. "잡아!" "죽여버려!" "죽이면 안 돼!"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위에서 외쳐대는 소리에, 프란은 부들거리는 손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 밑층으로 내려갈까? 잠시 생각했던 프란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 층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들키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체포다. 그러면서 프란은, 하체를 크게 한 번 휘둘러 제비 넘기를 한 다음 한 칸 앞쪽의 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프란은 자신이 공중곡예사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쪽이다!" '빌어먹을.' 설상가상으로, 프란이 매달린 창문이 있는 방으로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왔다. 이 상태라면 강제로 끌어올려질지도 모른다. 으아, 정말 짜증나 미치겠네. 뭘 어쩌란 거냐, 도대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창문에 쳐진 커튼이 열어젖혀졌다. 눈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이 프란을 내려다본다. "끌어올려!" 투박스러운 손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며 프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싫다! 이번에 거기로 끌려가면 정말 끝장이란 말이다! 프란이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다. 펄럭, 펄럭펄럭. '어……?' 갑자기 요란한 소리, 그러니까 꽤나 두꺼운 질감의 천이 휘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밑층의 창문에서 들린 소리라는 걸 깨달은 순간, 프란은 거의 반사적으로 밑을 보았다. 그리고 그 때. "내려와!"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의 몸은 그대로 정지했다. "……." "내려오란 말 안 들리나!" 다시 한 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고회로가 정지한 기분. ……아니, 잠깐. 잠깐만. 거짓말이지? 정말로 당신일 리가 없잖아. "프란 프리텐!" 한참 멍하게 있던 프란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리에야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맙소사. 정말이냐. 정말, 지금, 이 목소리가. 대마왕 목소리란 말이냐? "…가, 가주님. ……가주님 맞습니까?"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금방 사라졌지만. 푸른빛을 띤 무엇인가. 그것은, 프란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검휘(劍暉). 가주의 검이다! 프란은 결심했다. 환청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머지 한 손을 끌어올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간신히 균형을 잡고 난간을 붙잡은 그 찰나의 순간,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발을 굴렀다. 쉬익!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났다. 프란은 몸 전체에 준 반동으로 상반신을 굴러 바로 밑층인 3층의 창문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에고고." 이윽고, 프란의 자그마한 신음소리가 3층 응접실의 공간으로 자그맣게 울려퍼졌다. ▷◀▷◀▷◀▷◀▷◀ 보일린은 그 이상 험악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에고고." '그의 레이니아' 는 카르멘 가주의 뒤에서 꽤나 흉한 모습으로 착지했다.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으며 일어난 프란은, 보일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엄청난 스피드로 벌떡 일어섰다.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프란을 향해 뒤돌아선 상태인 반은, 그런 프란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프란은 움찔했다. 도대체 이 대마왕이 여기에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프란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은 보았다. 반은 아주 가볍게, 한숨 같은 것을 쉬는 모습을. 하아, 하고 낮게. 그것이 안도의 한숨인지 그녀의 한심함을 탓하는 한숨인지는 알 수 없다. "내 시종이 네 저택 창문에 매달려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보겠나." 반이 낮게 입을 열었다. 보일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면서 반은 다시 한 번 힐끗, 시선을 프란 쪽으로 돌렸다. 프란은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이 여기에 왜 온 건데? 혹시, 설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거야? "두 가지 경우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네 독단이거나, 이 녀석이 동조했거나." 반이 문득 입술을 열었다. '동조라니, 동조라니! 저런 변태 같은 놈에게!' 프란이 막 소리를 치려는 시점에 반이 말을 이었다. "……독단이었군." 보일린은 빌어먹을, 하고 생각했다. '그의 레이니아' 는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보일린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다. 두 가지 결정이 가능했다. 하나는, 여기에서 정중히 사과하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뭐라고 거짓말을 해봐야 장본인인 프란이 여기에 있으니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변상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그래, 그것이 최선이겠지. 그러나 보일린은 하필이면, 그 순간 프란과 눈이 마주쳤다. 오렌지색 눈동자. 그 신비하면서도 매혹적인 빛은, 어린 날 그림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동을 그대로 전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저 눈동자가 그를 노예로 만들어 굴복시킨다. 세상 모든 것을 품은 자애로움과, 부드러움. 그 눈으로 웃어준다면, 시든 꽃도 다시 아름다운 망울을 보일지 모른다. 보일린은 입술을 잘끈 물었다. 그리고 그는, 프란이 반에게 슬금 다가가서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어쩌고를 속삭인 순간 판단을 내렸다. "전원 들어와!" 보일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에, 프란 프리텐이 극적으로 3층 응접실로 탈출한 것에 대해 바짝 마음을 졸이곤 3층으로 뛰어내려온 사람들 중 은밀히 섞여있던 세라딘들은, 자신들이 현재 지상 최고 바보의 명령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쳤군, 보일린. 거기 있는 사람은 시즈 아일린이란 말이다! 세라딘은 그의 앞에 나서서는 안 돼! 그러나 문은 열리고 말았다. 보일린은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여기서 저스티스 카르멘을 처치하는 것. 그리고, '그의 레이니아'를 가지는 것이었다. ▷◀▷◀▷◀▷◀▷◀▷◀ 응접실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프란이 3층으로 뛰어내린 순간 저택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곳으로 우르르 몰려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던 탓이다.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반은, 눈썹을 잠깐 올렸다내렸다. "미쳤군." 이윽고 튀어나온 반의 나지막한 음성에 보일린은 조금 웃었다. 그래, 맞다. 나는 미쳤는지도 모르지, 저스티스 카르멘.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잘된 선택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불꽃은 쏘아 올려질 것이다. 내일이면 그 많은 불꽃들이 카세타 전역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겠지. 남빛의 하늘을 캔버스 삼아 그려진 그 아름다운 그림은 이 나라를 바꾸는 초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이 곳의 모든 것은 전복된다. 아마 그 과정에서 가장 방해될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신, 저스티스 카르멘이겠지. 국왕의 가장 큰 적일 수도 있는 대 가문의 가주. 반면, 국왕을 위협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서도 가장 큰 적인 당신. 모순 덩어리의 자리다. 우르르 몰려온 남자들이 이스티네 보일린의 주위를 감쌌다. 많다. 이렇게 협소한 공간에서 이다지도 많은 인원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 운신의 폭이 좁아 마음껏 검을 휘두를 틈도 없이 포위당하고 압박당할 것이다. "가주님." 프란은 나지막이 말하곤 반의 옆에 섰다. 그녀는 자신에게 검이 없다는 것을 반에게 알리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반은 프란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서, 프란은 반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자신은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렇게 느꼈다. 보일린의 눈짓에, 남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지금 자신들이 포위하려고 접근하고 있는 남자가 카르멘 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경비하는 태세는 삼엄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기류가 형성되어 이 부분을 찌릿찌릿하게 감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에 반은 프란을 향해 작게 말했다. "잡아라." "예?" "……잡아라." 그 말과 동시에 반은 팔을 내밀었다. 프란은 에, 에에,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반의 팔을 잡았다. 단단한 팔이다. 그리고 프란이 반의 손을 잡은 바로 그 순간, 반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전혀 경계를 하지 않았던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창문으로, 말이다. ▷◀▷◀▷◀▷◀▷◀▷◀ 보일린은 당황했다. 창문으로? 무슨! 여기는 3층이다. 돌지 않은 이상 여기에서 떨어진 뒤 무사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스티스 카르멘! 당신은 탁월한 검사일지는 모르나 마법사는 아니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일단 보일린은 명령했다. "잡아!" 남자들은 우르르 몰려왔다. 적어도 '레이니아' 님은 살려야했다. 이스티네 보일린 혹은 그의 수하들이 당황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면, 지금 프란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다. "가주님, 여기는 3층이에요!" 순식간에 창문에 선 프란이 그렇게 외칠 틈도 없이, 반은 뛰어내렸다. 프란은 반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프란이 여자이고 가벼운 몸이라고는 하지만 팔에 매달릴 무게치고는 상당히 무겁다. 그러나 무엇이 어찌되었든, 그들은 뛰어내렸다. 그런데, 뛰어내렸는데, 이상했다. "으아?" 그리고 다음 순간에야, 프란은 깨달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3층에서 뛰어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반은 뛰어내리기 전에 얼른 손을 뻗어 창문 바깥 쪽으로 삐져나온 채 흔들리고 있던 응접실의, 그 커튼을 잡았던 것이다. 귀족가 응접실에 쳐진 그 커튼이 얼마나 두꺼운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알 것이다. 햇빛은 물론이고 염탐꾼의 귀마저도 고려한, 그 두껍기 그지없는 재질의 천. 투두두두두두두둑! 두 사람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커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뜯어졌다. 창 바깥으로 펄럭이고 있던 그 커튼은 물론, 3층의 높이를 커버할 만큼 길지는 않았다. 다만. "……내려가! 어서 2층으로 내려가!" 보일린은 버럭 소리를 쳤다. 다만, 한층 내려간 2층의, 3층 응접실에서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방 하나에 닿을만한 길이는 되었을 뿐이다. ==================================================================== 1분 세이프인가요?;; 앗, 올리는 순간 10KB라는 것을 깨달은 가넷. 무슨 수를 써서라도 11KB를 만들어야한다는 조잡한 마음에 다시 잡담을 남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해하십시오. 폐인대전이란 사람을 이다지도 비굴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여러분. 제발 이해해주세요ㅠㅅㅠ) 오늘 다움에 갔더니, 피플지 선정 섹시한 남자 1위로 제가 그토록 원츄해마지 않는 죠니뎁씨가 뽑혔더군요. 정말 좋습니다. 오늘은 우울하게도, 저녁 일곱시에 기상했습니다. 동생은 밥해! 라는 말로 저를 깨우고는 그대로 유유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비밀편은 아직까지 제목이 왜 비밀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음편이나 다다음편쯤, 밝혀질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게 그대단한 비밀이었냐' 라고 하신다면 그다지 할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BGM으로 여전히 라르크의 음악이 나오고 있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폐인대전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일주일이면 끝입니다ㅠㅅㅠ) 자신이 재연재 시작한지 며칠만에 1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썼다는 엄청난 사실에 압도당했습니다;;; (도대체 이건...;;;) 그리고 주인공들에 대한 프로필을 궁금해하시던데 (리플에서) 다음번에 다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잡담이 갑자기 엄청나게 길어진 느낌입니다.;;; 내일 1KB부족한 것을 반드시.. 갚을게요. 자, 그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9) 가네트(uznian) 03-12-14 :: :: 14449 챙캉! 유리가 부서지면서 두 개의 몸이 한꺼번에 그 깨어진 틈새로 '처박혔다.' 잘 닫혀 있던 남작가의 창문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의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깨어졌다. "꺄아악!" 방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던 여자 하나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에 고함을 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가는 여자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던 프란은, 어차피 엎어진 물이지, 하고 생각하며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그녀는 상반신을 숙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들면서 깨어진 창문에 긁혀 얼굴에 엷은 상처가 그어졌다. 거기에서 점점이 피가 묻어났다. 프란은 그것을 쓱하고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반은 몸을 곧게 폈다. 그 혼자라면 이렇게 흉한 몰골로 넘어지듯 착지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프란이 한 손에 매달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주, 죽는 줄 알았잖아!" 숨을 몰아쉬던 프란이 어느 순간 버럭 고함을 쳤다. 아직도 반의 옷깃을 부여잡은 채 조금 떨리는 손끝이 방금 전 얼마나 놀랐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프란은 그러다가 흠칫 반의 옷깃을 놓고 창문 쪽으로 두두두 달려갔다. 방금 전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쇼를 펼쳤는지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뜯어진 커튼의 길이가 여기까지 닿은 것만도 기적.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찢어질 커튼의 길이를 그 짧은 순간 생각해낸 이 미친 가주에게, 프란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자신들이 타고 내려온 커튼을 살피던 그녀는 반을 돌아보며 냅다 소리쳤다. "어서 가요, 가주님! 여기로도 내려올 겁니다!" 프란의 말에 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깨어진 창문을 열어젖혔다. 2층의 높이는 둘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창틈에 잠시 서 있던 둘은, 하나 둘 셋을 맞춘 듯 동시에 밑을 향해 풀쩍 뛰어내렸다. 프란은 다리가 저린 듯 잠시 떨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 '으이구, 괴물.' 2층에서 뛰어내린 주인과 시종은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위험천만한 라이브 쇼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 "어쩌지?" 세라딘 중 한 명인 남자, 프란에게 심한 구타를 당해 온 몸에 타박상을 입은 쿤은 자신의 동료인 렌에게 물었다. 렌은 쳇, 하는 소리를 내며 2층에서 뛰어내린 반과 프란의 뒷모습을 보았다. 벌써 보일린의 나머지 병사들은 두 사람을 쫓아 우르르 내려간 뒤다. 쿤과 렌을 비롯한 열 두 명의 세라딘들은 그러나 최후까지 쫓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미친놈이야, 저 이스티네 보일린이란 녀석. 일단 우리는 여기에 있지. 나중에 추궁당할 때 당하더라도 이건 아니야." 렌의 대답에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제대로 돼야 할 텐데." "아직 우리 일은 안 끝났어. 지금 시즈 아일린에게 붙잡히면 모든 게 끝이다." 쿤의 말에 도열해 있던 나머지 세라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딘, 그들은 한 사람만을 따른다. 시즈 아일린. 현 아일린 가주에게 비켈린이 있다면 '그 사람' 에게는 세라딘이 있는 것. 한 번 모시기로 한 군주에 한해서 세라딘의 충성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총 40명의 세라딘 중 정예라 불리는 12명의 세라딘들은 멀어지는 두 그림자를 눈으로만 좇았다. 아직 기회는 많다. 시즈 아일린은 아직 '아일린 가의 계승식' 이며 '성인식' 을 치르지 못했으니. 그리고 아직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 ▷◀▷◀▷◀▷◀▷◀▷◀ 별빛이 묽었다. 하늘은 놀랍도록 낮아져 있었다. 물을 먹어 홀로 새파란 별 하나가 반짝, 하고 빛났다가 어슴푸레하게 그 빛을 잃어간다. 어느새 노을이 걷히고 잔잔하게 깔리기 시작하는 군청색 융단 아래에서 프란과 반은 걷고 있다. 어두워진 거리에 내린 별빛이 프란의 머리카락이며 옷깃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스티네 저택 대 탈주. 프란은 입술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번 탈주의 방식이 자신이 알던 가주의 방식과는 조금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프란이 아는 가주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창문으로 탈출을 한다거나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앞에 서 있는 적들을 모두 쓱싹쓱싹 무 썰기 했으면 했지. 오늘은 모든 것이 저 카르멘 가주답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그다운 것이고 무엇이 그답지 않은 것이면 어떠랴. 어차피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 지금 그들은 이스티네 저택을 빠져 나왔고, 함께 카르멘 가로 돌아가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2층에서 뛰어내린 순간 저택의 어디에 있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튀어나왔고 이어 저택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어나왔긴 했다. 그러나 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걸음걸이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프란은, 이 무시무시한 남자의 무시무시하게 정떨어지는 깔끔한 검법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 휘둘러 한 번에 끝내는 딱 떨어지는 검으로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베어 넘기며 뛰어나가던 반의 뒷모습. "가주님." 회상을 끝낸 프란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앞서 걷고 있던 반은 물론 돌아보지 않았다. 프란은 조금 걸음을 빨리해 반의 보폭에 맞췄다. 반의 옆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반쯤 가린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 탓이다. "저기, 저택에 왜 오신 겁니까." 발로 돌멩이를 툭, 하고 차며 프란은 물었다. 조금 쑥스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뭘 묻고 난리냐, 프란 프리텐. 무슨 사무가 겹쳐서 왔다가 우연히 널 발견한 거 아니겠어?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엔 반이 보일린에게 했던 말이 거슬린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프란이 이스티네 저택에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말. 그렇다면 혹시, 혹시 자신 때문에 그 저택에 온 것일까. 뭔가 아니라는 느낌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혹시 그럴 수 있지도 않을까. "네 빚." 프란의 질문에 반은 차갑게 답했다. 프란은 에헤, 하는 기분이 들어 반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프란은 갑작스럽게 반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바람에 조금 놀랐다. 어이, 어이, 이봐요. 잠깐만. 왜 갑자기 은근슬쩍 빨리 걷는 건데? "너야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네 몸에 걸린 돈이 4500만 케트다. 아일린에 빚을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오호라, 4500만 케트? 프란은 속으로 계산해보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빚이 많이 줄었다. 하기야 그 빚을 줄이기 위하여 자신은 목숨을 바짝바짝 줄여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잠시 이것저것을 생각하며 걷던 프란은, 흠칫 놀란다. 반의 그림자를 보며 걷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시 주위를 휙휙 살피던 프란은 반이 벌써 저만치에서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소리쳤다. "같이 가요!" 주인과 시종은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그 날, 아주 오래오래 걸었다. ▷◀▷◀▷◀▷◀▷◀▷◀ "……." 시온 아일린은 수많은 자료들과 참고서적을 뒤졌던 터다. 그는 드디어 찾아냈고, 동시에 경악했다. 아린의 방을 찾기를 두세 번. 시온은 다시 한 번 찬찬히 기록들을 살핀다. 이 일을 하느라 꼬박 하루를 샌 탓에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훑었던 탓에 인상은 사납기가 그지없었다. 조금은 히스테릭하게까지 느껴지는 지금의 시온 아일린의 모습을 본다면 적어도 두 명은 크게 경악하리라. 그 중 한 명은 시온에게 마법을 가르쳤던 스승, 자켄린일 것이다. 무엇을 가르쳐주던 빈둥빈둥 놀아대기 바빴던 시온의 마법사 입문시절, 딱 한 달 시온을 가르친 자켄린은 만약 시온이 아일린 가의 후손만 아니라면 진작 내쳐버렸을 것이라고 이를 아득바득 갈았었다. 실제로 자켄린은 시온을 향해 외치기도 했다. '네 녀석이 가져오는 그 막대한 수업료만 아니면 난 네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다!' 말년의 노마법사는 젊은 시절 너무나 호화롭게 생활한 나머지 꽤나 궁핍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독설에도 겨우 시온은 아함, 하고 크게 하품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두 달 후 있었던 마법 경진 대회에서 당연히 시온이 꼴등을 할 거라고 일짜감치 판단을 내렸던 자켄린은, 자신이 가르쳐준 이상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하는 시온 아일린에게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켄린은 그 다음날부터 열성적으로 시온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법을 물려받아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제자는, 자켄린에게 시온이 처음이었다. 허나 머리가 좋든 마법적 재능이 있든 시온 아일린은 언제나 빈둥빈둥 거렸고 그래서 노년의 대마법사 자켄린은 때로 호통을 치고 때로 애걸을 했다. 만약 지금 이렇게까지 열중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온의 모습을 본다면 자켄린은 눈물을 뿌리며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 이놈, 으흑, 네 녀석이 이렇게만 마법 연구하는 모습을 봤다면 한이 없겠다, 라면서. 그리고 시온은 그 단단한 세필나무 방망이(노년의 대마법사들에겐 필수품이다.)로 사정없이 두드려 맞았을 것이다. 시온의 모습에 경악할 두 번째 사람은 아마도 마린. '크아아악, 이렇게 서류를 빨리 읽을 수 있다면 왜 그 동안 말을 안 한 거예요! 노처녀 밤새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답습디까?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마린에게는 아마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는 편이 나을 듯 하다. 어찌되었든 지금 시온 아일린은 그의 평생에 그 이상 진지할 수 없는 태도로 일을 마친 터다. 수북하게 쌓인 자료들을 모두 정독한 시온은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고뇌에 가득한 얼굴로 비틀비틀 일어섰다. 후욱, 하고 한숨을 내쉰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맙소사. 그랬군. '당신들' 이 범인이었어. 빌어먹을. 시온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머니. 도대체 언제쯤 그 대단한 야심을 버리실 겁니까. 이제는 아예 결탁을 해서 일을 버리셨군요. 시온은 웃는다. 빌어먹을 것. 어쩔 수 없다. ……이건 덮는 수밖에. 시온은 비틀비틀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온은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노력했든 그는 '이진느 아일린' 의 아들이고 그런 자신이 어떤 짓을 하든 아일린이란 이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시온은 역시 알고 있었다. 결국에 그가 택하게 될 길이 무엇인지. "……이런, 스타일 다 구기네." 시온은 피식 웃었다. ▷◀▷◀▷◀▷◀▷◀▷◀ 시온은 소리죽인 발걸음으로 '그의 방' 에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던 터다. "웬일인가, 아일린 가의 도련님." 무언가를 하고 있던 헤이튼은 웃으며 시온을 맞았다. 시온은 비틀린 입가로 그런 헤이튼을 잠시 노려보다 피식, 하고 웃었다. 헤이튼은 그런 시온을 조금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그를 소파로 안내했다. 시온은 소파에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시온의, 조금은 공허해 보이는 진초록의 눈이 슬쩍 빛을 머금었다싶은 순간, 시온이 입술을 벌렸다. "어머니와 정확히 얼마나 나누어 먹기로 한 거지?" "……무슨 말이오?" 잠시의 짬을 두고 헤이튼이 묻는다. 시온은 다시 웃었다. "발뺌할 생각 말아.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까 나 얼마 전에 궁성에선 '세라딘' 까지 봤군. 깜빡 잊고 있었는데 말이야. 어리석게, '그건' 내가 만들어준 거였는데 당당히 그걸 내 앞에서 뿌리고 도망갔다고." "무슨 말이오, 시온 아일린. 알아듣게 설명해보시오." 헤이튼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시온은 피식피식 헛웃음만 터뜨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온은 매서운 눈으로 헤이튼을 한차례 노려보았다. 헤이튼은 시온의 초록색 눈동자가 가득한 분노로 메워지는 것을 보았다. 은발에 초록색 눈동자. 처음 보았을 때 저 이진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닮은. "이틀 후까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당신 외의 한 명을 더 알아.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방법을 찾아. 당신은 훌륭하게 잘 할 수 있잖아? 그게 전문이니까. 아니면 당신과 그 사람, 모두 내가 고발할 테니까." 헤이튼은 시온의 말에 어깨를 움찔했다. 헤이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시온을 보았다. 시온은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그래, 내가 간과했어. ……크루레티나에 대해서는 옛날 스승님과 한 번 실험을 한 적도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 말과 함께 시온은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명심해, 헤이튼. 당신이 내 어머니와 결탁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번 한 번은 당신의 편에 서주는 거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알아서 이틀 후까지 처리해." 말을 마친 시온은 문을 쾅, 하고 닫고 방을 나갔다. 빠른 걸음 탓에 길게 휘날리는 은발이 보였다. 뒤에서 급습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인 헤이튼은, 지금 저 아일린 가의 도련님이 자신에게 남긴 말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결론을 내린다.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르는구나, 아일린 가의 도련님. 그래, 평생을 모르고 살아준다면 그것이 더 좋겠지. 어차피 알아주길 바란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러나 역시, 랄까.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 증거도 잡은 건가. 헤이튼은 훗,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들어 줘야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헤이튼은 가볍게 한숨을 뿜었다. 일단은 '그' 에게도 알려야겠다. 이틀 후까지라면 모든 것이 끝나는 날. 헤이튼은 묵직하게 쳐진 방안의 커튼을 걷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다가 그는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너머에서 걸어오는 두 인영(人影)이 보였다. 시즈 아일린, 혹은 저스티스 카르멘. 혹은, 자신의 조카. 헤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승 혹은 패. 이제 이틀이다. ============================================================ 차를 곁들인 간단한 interview. 첫번째 손님은 프리나 프리텐! 글쓴이 가넷- 이하 가. 프리나 프리텐- 이하 프. 가: 안녕하세요~ 간단한 프로필이라도 써달라는 말에 이렇게 인터뷰 형식의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는 티타임을 열기로 했답니다. 분량을 늘리려는 필사의 노력이 아니냐 는 질문은 하지 말아주세요; 프: 뭐가 질문을 하지 말아달라는 거야? 사실이잖아. 가: 프란, 아직도 깨닫지 못했군. 나는 너를 움직이는 사람이야-_- 무슨 말인지 아 직도 몰라? 네가 그렇게나 고생하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아? 프: ........알고 싶어. 가: 호호호호호호=_= 나에게 잘보여, 그러면 가르쳐주지. 자, 이제부터 인터뷰를 시 작하겠습니다~ 프: ....... 가: 자, 간단한 신체 사이즈를 알려주세요. 외모에 관한 것도. 프: 신체사이즈는 얼어죽을. 168. 45. 남장한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절벽인 것 같 고. 흠, 오렌지색이 도는 금발에 오렌지색 눈동자. 가: ...프란, 너는 여자잖아. 그렇게 쉽게 몸무게를 밝혀도 되는거야? 프: 무슨 헛소리야? 밝히라고 한 건 너잖아. (검을 뽑으려다가 자신이 이스티네 저 택에서 검을 빼앗겼다는 것을 깨닫고) 야! 내 검 언제 돌려 줄거야? 가: ....참을 성 한 번 없군. 자, 다음 질문. 생일은? 프: 별 쓸데없는 것 다 물어보는군. 난 사생아야. 어머니도 버렸고. 가: (땀을 흘리며) 아, 미안해. 출신지는 어디지? 프: 북부 로이네트. 가: 현재 생활에 만족해? 프: ......어이, 질문이라고 해? 네가 대마왕 시중 하루만 들어봐. 무슨 말이 나오 는지 궁금하군. 가: (다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 저기, 그래. 독자님들이 제일 궁금해할 질문인 데. 시온이나 반, 헤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프: 그걸 독자들이 왜 궁금해 하는데? 가: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프: 노코멘트. 그거 가르쳐주면 너도 곤란하지 않아?-_- 가: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했냐. 나는 너를 그런 캐릭터로 설정한 적 없어;; 프: 쓸데없는 소리. 다음 질문. 가: 그, 그래. 앞으로 소원이 있다면? 프: 소원? 뻔하지. 어서 빚 갚는 거. 가: (중얼.. 정말 뻔하군.) 뭐, 더 할 질문이 없는 것 같은데? 뭐 더 할 말 있어? 프: 뭐야, 인터뷰가 뭐가 이래? 가: .....정말 그렇네. 오늘은 너를 희생한 셈 치지-_- 다음 편에는 반을 출현시킬 생각이야. 독자님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 있으면 하라고 해야지. 프: ....뭐야? 그럼 나는 왜 그런 거 안해? 가: 몰라=_= 넌 처음이니까 희생양이야. 자, 잘가. 프: 그런게 어딨어어어어어어!!(끌려간다) 가: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자, 어설픈 첫번째 티타임이었습니다. 내일부턴 좀 제대로 된 형식의 티타임을 갖도록 하지요. 내일 주인공으론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 카르멘군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시다면 리플을 달아주세요. 단, 너무 지나친 질문은 삼가해주시길; 덧. 카페에 먼저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근데... 띄워쓰기 안해도 된다고 좋아했는데... 역시 그건 제가 좀 보기 곤란하네요;;; 그냥 하던대로 올리겠습니다요;ㅁ;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9 :: 오! 나의 주인님-PART 14: 비밀(10) 가네트(uznian) 03-12-16 :: :: 18842 "프란, 나랑 결혼할래? ……컥!"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시온은 레비테이션(고공마법 중 하나)을 쓴 것처럼 천장을 향해 화려하게 날았다. 그러나 비행의 끝은 처참했다. 그는 침대 밑으로 화려하게 메다 꽂혔던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탓에, 프란은 어젯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던 터였다. 그리고 새벽, 그런 프란의 침실로 몰래 찾아들었던 시온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프란을 향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던 차였다. 그는 쌕쌕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있는(물론 미화법이고, 사실은 오우거 저리가라 할 정도로 큰 숨소리였다.) 프란의 머리맡에 살포시 앉았다. 그는 옆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을 살포시 걷어낸 뒤 속삭였다. '프란, 나랑 결혼할래?' 라고.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건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일어나봐, 프란. 프란! 아무리 큰 목소리로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있던 프란은, 그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공처럼 튀어 오르더니 정확하게,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시온을 걷어찼던 것이다. "……으, 으음?" 머리를 긁적이며 멍하게 일어나 앉은 프란은, 눈곱이 낀 얼굴로 사방을 훑었다. 방금 전 무언가 끔찍한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나긴 했는데, 흐음. 뭐였지, 방금 그건? "……윽…… 우욱." 잠시 두리번거리던 프란은, 침대 밑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놀라 후다닥 아래쪽을 살폈다. 거기서 그녀는, 상반신을 구부린 채 컥컥대고 있는 은발의 남자를 발견하곤 흠칫했다. "느끼버터. 도대체 거기서 뭐하는 거냐?" 자신이 시온의 어디를 가격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프란이 침대에서 내려서며 물었다. 시온은 '어느 부위' 를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시온의 어깨를 팡팡, 하고 쳤다. "어이, 느끼버터. 어디 아프냐?" 프란이 묻자, 시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니. 아, 아, 안 아파, 하하." "……차라리 솔직하게 아프다고 해라." 시온의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프란이 픽하고 코웃음을 쳤다. 시온은 한참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그는 프란을 향해 싱긋, 하고 눈꼬리를 휘며 웃어보였다. 시온을 잘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앗, 나왔다! 궁극의 눈웃음!' 하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웬만한 여자들을 그대로 쓰러지게 만드는 눈웃음이었건만 저 대단한 프란 프리텐양은 뭐냐, 라는 눈으로 볼 뿐이다. "대낮부터 남의 방에 쳐들어와서,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프란은 투덜거리며 시온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저번의 일로 시온에게 크게 빚진 것이 생각나 억지로 내쫓지는 못하는 프란이다. 그런 프란을, 시온은 잠시 동안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온의 입장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럽게 바라본 것이었지만, 프란으로써는 그저 느끼할 따름이다. "기름이 떨어질 것 같은 그 눈은 저리 치우고. 용건이 뭐냐?" 흘끗 창밖을 바라보며 프란이 물었다. 천천히 부엌으로 가서 감자 깎는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건은 무슨. 우리 예쁜 프란 보려고 왔지." "……어이. 내가 너한테 빚이 있다고 해서 아예 못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프란이 후후, 하고 낮게 웃으며 한 말에 시온은 씨익, 프란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시온은 한 발 한 발, 프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시온으로써는 며칠 동안 프란을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고 싶은 심정으로 다가선 것이었다. 그동안 범인색출 작업으로 몸도 마음도 피로했던 아일린 가의 도련님은, 정말 정말 정말로 그저 며칠간 만나지 못했던 프란을 한 번 안아보고 싶은 마음 외에는 없었다. "우웅. 보고 싶었어, 프란." 그리고, 갑작스럽게 달려온 시온은 손을 뻗어서 프란을 포옥 품에 안았다. 시온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부터 이 자식,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프란이었건만, 갑작스럽게 뻗은 그 손이 예고 없이 몸을 휘어 감고 꼭 끌어당기는 바람에, 아무리 그녀라 해도 경악감에 바짝 얼어버리는 수밖에.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프란이 이 놈의 자식이 감히 어디에 손을! 하고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등뒤로 요란한 소리가 쏟아졌다. 그 소리에 놀란 시온이 흠칫하고 팔을 풀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온은 거기서, 마치 굉장한 괴물이라도 본 양 몸을 덜덜 떨며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온은 잠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다가, 곧 떠올려내고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기, 뮤? 여긴 웬일……." "꺄아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뮤가 비명을 질렀다. 시온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하며 한걸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뮤가 소리를 질렀다. "프란! 어서 이리로 와! 어서!" 시온이 흠칫하고 프란이 엥? 하는 소리를 내는 사이, 뮤는 주먹을 꼭 쥐더니 온 저택이 쩌렁쩌렁 울릴만한 큰 목소리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이, 이, 나, 남색가! 프, 프란은 내거란 말이야! 감히 어디에서 손을 대는 거예요! 오, 온 저택에, 오, 온 하녀들에게 소문 낼 거야! 시, 시온 아일린 도련님은 사실 남…… 우웁!" 얼른 달려가서 뮤의 입을 손으로 꾸욱 막는 시온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색이 아니래도!' 정말이지 울고 싶어지는 시온이다. ▷◀▷◀▷◀▷◀▷◀▷◀ "……살아있었나?" "살아있는 게 불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 프란의 말에, 호위무사 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동안 또다시 보이지 않는 시종 때문에 이 둘이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을 프란이 알 리가 없다. 반란을 진압한 다음 날, 시종만 대동한 채 훌쩍 어디론가 나갔다 왔던 반이 돌아왔다. 요즘 들어 외출이 잦으시네, 하고 중얼거렸던 그 둘은 방으로 돌아오는 반이 혼자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 안 보이지?' '혹시 죽이신 거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가! 저번 일도 잘 끝났잖아! 그리고 내 짐작이 옳다면, 가주님은 그 녀석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게 틀림없다니까!' '도대체 증거가 어디 있어?' '증거는 무슨 얼어죽을! 요즘 가주님이 사람을 안 죽이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대방은 침묵을 고수했다. 정말 그랬던 것이다. 왜 모르고 있었을까. 요즘 들어 확실히 죽어나가는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독약 사건만 해도 그랬다. 가주에게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고도, 저 프란이라는 시종은 다음날 무사하게 이 방으로 출입을 했지 않은가. 두 사람은 한참 다시 침묵하다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네가 여쭤봐.' '네가 하면 될 거 아냐!' '네가 여쭤보라니까!' '싫다니까!' 둘이서 옥신각신하다가도, 반이 밖으로 나오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아무 것도 안한 척을 해야만 했던 호위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당당한 얼굴의 시종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기분일까. 수많은 시종이 죽어나가는 도중에도 '흠, 오늘 또 죽는군.' '이젠 좀 그만하시지.' 하고 서로 조그맣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그런데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이다, 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호하게 생겨먹은 조그마한 꼬맹이 녀석은. 프란은 왜? 하는 얼굴을 하며 호위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프란이 씩 하고 웃었다. "내참, 내가 죽었을까봐 걱정했나? 걱정을 정말 사서 하는군. 걱정 말라니까. 나는 어딜 가든 멀쩡하게 돌아오니까. 내 이것 참, 나도 인기가 많아서 탈이라니까." "……누가 걱정을 했다는 거야, 이 꼬마가." 호위무사들이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프란은 속으로 키득거리며 안에 있는 가주에게 기척을 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호위무사 중 하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 잠깐." "에?" 프란의 손목을 쥔 호위무사는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도 훨씬 뼈가 가늘다. 사내 녀석이 이렇게까지 가느다란 손목이라니. 호위무사는 놀라움 속에서도 일단 말을 이었다. "안 계신다." "엉?" "가주님, 지금 여기 안 계신다." 프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딜 간 건데, 아침부터? 밥도 안 먹었잖아." ▷◀▷◀▷◀▷◀▷◀▷◀ 아침도 안 먹은 반은 지금 응접실에 앉아 있다. "……." 사신은, 조금 미안쩍은 얼굴로 반을 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카르멘 가 저택을 찾았다가 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사신이다. 전에 '아주 곱게 모셔지는' 경험을 했던 그는 사실, '다음번에 카르멘 가에 간다면!' 하고 잔뜩 벼르고 있었던 차였지만, 오늘 자신이 지나치게 이른 시간에 온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저번의 결례에 대해서 물을 수가 없었다. 어제 저녁에 너무나 큰 일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왕이 사신에게 내린 명령은 '카르멘 가주에게 가서 알려라!' 였다. 도대체 일국의 사신인 내가 왜 일개 가문에 이렇게 발에 땀나게 드나들어야 하냐고!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경청하는가 싶던 반은 어느 순간 입술을 떼어 물었다. 사신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답했다. "그래서, 라기 보다는. ……일단 입궁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싫다." "싫…… 예?" 사신의 얼굴이 망가졌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뱉어낸 카르멘 가주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단아한 얼굴선을 가진 카르멘 가의 가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는지 느끼지 못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라." "알고 계실 겁니다, 카르멘 경. 현재 카세타의 반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카르멘 경, 오해 말고 들어주십시오. 현재 국왕 폐하께서는 카르멘 경에 대해서라면 전폭적으로 믿고 계십니다. 그러나 대 카세타 반역이 일어났다, 라 라 말이 들릴 경우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것은 카세타 초기 때부터 언제나 카르멘 가……." 쾅! 흠칫. "……입을 찢어야 닥칠 건가." 사신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티 테이블을 그대로 내리친 카르멘 가주의 주먹이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새벽의 안개마냥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사신은 단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반 역시 알고 있을 사실을. 카르멘 가문은 황실에서 언제나 경계해 마지않는 대 가문이고, 반역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가문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대대로 카르멘 가문은 반역토벌에 대해 헌신적이었다. 사신은 그 선례를 들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 역대의 가주들에게라면 사신의 말은 통했을 것이다. 허나 역대의 가주들과 이 사람은 다르다. 사신은 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눈이 마주쳤다가는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사신은 작게 입을 열어 사과했다. 반은 아무 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신은 입술을 깨물며 반을 올려다보았다. 반은 그런 사신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입술만을 움직여 말을 뱉었다. "끌려 나갈 건가 제 발로 나갈 건가." "……." 사신은 조용히 일어섰다. 사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국가 전체를 모욕하는 일. 그러나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 일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물어물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카르멘 가주― 이 남자의 힘인가. 하기야, 하고 사신은 생각했다. 키네온은 이 만만치 않은 소년 가주와 적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딸을 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포섭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 "나가보겠습니다. ……그러나 궁에 오시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반역은…… 반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잡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사를 해보인 사신이 문을 닫았다. 반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하. 반은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어디 끝까지 날뛰어보겠다 이거군. 불꽃놀이라……. 반은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안 쪽에 달린 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 나와라." "아, 예에." 안쪽 문에 착 달라붙어서 엿듣고 있던 프란이 흠칫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언제부터 있는 걸 알았을까, 이 놈의 대마왕. 반은 그런 프란 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식사는?" "아, 방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가지." 반은 프란을 스쳐서 걸었다. 그런 반의 뒷모습을 보며 프란은 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프란에게는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서 사신과 반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부터 줄곧 마음에 걸리던 이야기였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튀어나갈뻔 하다가 억지로 참았긴 한데. 지금 얘기해도 되려나. 프란은 망설인다. 괜히 얘기했다가 바보취급 당하면 어쩌지. 저 대마왕이면 금방 비웃을 게 뻔한데. 한참 이리저리 생각하던 프란은, 결국 답답해졌는지 이리저리 재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뭐, 일단 말하고 보자. 프란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녀는 반의 뒤통수에다 대고 크게 소리를 쳤다. "가주님!" 그 큰소리에 반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프란은 말했다. "저기, 좀 거슬리는 게 있는데요. 들어보실래요?" ▷◀▷◀▷◀▷◀▷◀▷◀ 똑똑똑. 헤이튼은 가볍게 방문에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안으로부터 가벼운 응대가 들려왔다. 헤이튼은 문을 닫았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헤이튼은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듯 했다. 헤이튼은 이 방 주인과의 소통수단으로는 주로 다른 것을 이용해왔다. 이를테면 편지라거나 믿을만한 심복이라거나 하는 것들로. 직접 드나들면 소문이 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좋지 않으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헤이튼은 선 채로 얘기했다. 헤이튼이 존대를 할만한 상대는 가주를 제외하고는 이 저택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르멘 가 가주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다시 말해 헤이튼에게는 조카가 되는 반의 직계자손이 생기기 전까지는 헤이튼이 이 가문의 2대 계승자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헤이튼은 앞에 있는 남자에게 존대를 하고 있다. 헤이튼은 말하는 동시에 방문을 잠가고 단단히 경계를 했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방이다. "문제라니? 그 이상 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까." 남자는 의아한 듯 물었다. "시온 아일린이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하핫, 하고 웃었다. 국왕의 숨겨둔 첫 번째 아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그렇기에 오랫동안 뒤편에 숨어 이 날만 기다렸던 남자다. 헤이튼은 처음에 하리나스 백작이 이 남자를 소개했던 때 믿지 않았다. 하리나스 백작은 워낙에 야심에 강한 남자였고 가짜 황자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작자였던 탓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헤이튼은 이 남자가 진짜 국왕의 첫째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온 아일린이 알아버렸다니? 어차피 그가 반란군의 뒷돈을 대주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젭니다." 헤이튼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시온 아일린에게 '반역' 은 '장난' 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불쾌하게 생각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활이 달린 문제였을지 모르나 저 시온 아일린에겐 정말로 장난이었을 뿐. 게다가 그 돈은 '시온 아일린' 의 돈이었다기보다는 그의 어머니 '이진느 아일린' 의 돈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몇 달 전 시온이 여기에 온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집안 사정 문젭니다. 이것까지는 알려드리기 곤란하군요. 여하튼." 헤이튼은 숨을 골랐다. "……시온 아일린은 반란의 표면에만 결부되어 있습니다. 깊숙이까지는 파고들지 않아요.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요. 시온 아일린이 알아버린 것은 반란에 관련된 종류가 아닙니다. 시온 아일린은, '저스티스 카르멘' 독약사건에 대해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눈썹을 꿈틀했다. "……알아 버렸다구요?" "그렇습니다." "당신과 나라는 것을?" 헤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미있군, 시온 아일린. 그렇군. 그 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군. 나흘만 내 말을 믿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남자는 웃었다. "그래, 뭐라던가요?" "……눈감아 주겠답니다." "과연." 남자는 큭큭,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시온 아일린. 너도 결국 나와 같다. 핏줄을 부정하지 못하지. "대신." "대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헤이튼은 시온의 말을 전했다. "당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남기고 이 저택을 떠나줘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저와 당신 모두가 살 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과 저, 모두를 고발하겠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제 하루입니다. 잠시 하리나스 백작 가에 머무시지요." 헤이튼의 말에 남자는 턱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몇 번이고 턱을 쓰다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습니다. 시온 아일린이 잡았다는 증거도 어차피 뻔하니." 남자, 카르멘 가 전용의사라는 거짓 꺼풀을 뒤집어쓴 카세타의 숨겨진 제 1왕자, 스웬은 한 번 웃어 보였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 가넷의 간단한 티타임, 그 두 번째. 가넷, 조그마한 티 테이블 위에다 무엇인가를 잔뜩 내려놓는다. 국화차부터 시작해서 아샴, 얼그레이, 레몬홍차까지. 여러 종류의 차를 차곡차곡 내놓고 '식지 마, 식지 말란 말이야! 오! 나의 주인님을 창조한 내 이름을 걸고 식으면 안 돼!'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친 후 얼른 가서 쿠키를 이것저것 내온다. 잠시 후, 반이 등장한다.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기분이 다운된 듯한 반. ……이라기보다는 영문도 모르고 여기로 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가넷 대마녀가 강제소환(……)한 탓이다. 자, 티타임 시작합니다! 두 번째 손님은 그 이름도 긴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 카르멘 군입니다.(와아, 짝짝짝, 효과음;) 가넷: 이하 가.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 카르멘- 이하 반. 가: 이쪽으로 앉으세요 가주님~ 반: (무표정한 얼굴)……누구냐. 가: ……앗, 저,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죠……(벌써부터 쫄았다.) 반: ……. 그 때, 저 멀리에서 이상한 모습의 남자 등장. 반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한다. 잠시 후, 남자가 돌아가고(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반은 뭔가 납득한 듯, 가넷을 바라본다. 물론 그 눈동자가 차갑기 그지없어 움찔움찔해대는 가넷. 가: 저, 저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엄청 정중) 반: ……해봐라. 가: 아, 예에, 예에. 자, 그러면 첫 번째 질문. 일단 신체 사이즈와 외모부……(그 순간에 반의 눈에 얼어붙은 가넷. 알아서 설명 시작.) 아, 아아. 제가 대신 답해드릴 수 있는 건 대신 답해드리겠습니다. 일단 키는 183센티입니다. 몸무게는……(눈치 보다가 다시 쫄았다;;;)............ 예에, 보라색 머리카락에 은보라색 눈동자입니다. 아주 미남이십니다. 쌍꺼풀이 없는 시원스러운 눈매이고 날카로운 느낌이 있지만 깊은 느낌의 눈동자입죠. (다시 눈치) 반: ……. 가: 에, 다, 다음 질문 들어가겠습니다. 출신지는 어떻게 되십니까? 반: (짧게) 세이피안. 가: (활짝 웃으며)아, 아일린 가에서 태어나셨군요. 반: ……. 가: 자, 잘못했습니다.(울먹) 다음 질문 할게요. 현재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반: ……. 가: ……저, 저기요? 반: ……(빤히 바라본다.) 가: 차, 차 드실래요?(말을 돌리기 시작 한다;;) 반: ……(뭔가 불만 있는 듯) 가: 예, 예에. 다음 질문이요. 취미가 무엇인지요? 반: ……딱히 없다. 검을 닦는 정도인가. 갑작스러운 반의 응답에 무척 기뻐하는 가넷. 가: 아, 그렇군요. 어머니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 음, 이건 다음에 나올 내용이니 넘어 갑시다;; 정확한 자산은 얼마나 되십니까? 반: ……마린에게 물어보도록. 가: (중얼…… 마린은 캐스팅할 생각이 없는데……) 아, 그렇다면 혹시 저번에 화약고에서 만났던 여성분 기억하십니까? 반: ……. 가: 저기, 그 분하고 키네세스님을 비교하면. 저, 어느 분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반: ……. 가: ……저, 기, 가주님? 반: ……(갑자기 차를 마신다) 다음 질문. 가: (화, 화난 겁니까;; 두려워한다.) 프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 (역시 간결)시종이다. 가: 그게 끝인가요? 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가: (오, 오옷. 표정이 흔들린다!)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다음 질문을 보던 가넷, 창백해진다.) 저, 저기, 저기…… 저기……. 반: .....병신인가?(옛날 프란에게 하던 말투 그대로;) 가: 아, 아닙니다ㅠ_ㅠ(가넷의 손에는 '여자경험 있으세요? 첫경험 언제예요?' 라는 질문이 적힌 종이가 들려있다. 이건 질문했다가 맞아죽겠다;;) 아, 아프셨던 적은 있으세요? 반: (냉담)알아서 뭐할건가. 가: ……아니, 그게, 저기. 이건 티타임이고, 저기, 그게. 반: ……. 가: (내가 기어야지 뭐..ㅠㅅㅠ)소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반: ……없다. 가: (드디어는 쓰러진다.) 반: (그런 가넷을 잠시 보다가 일어선다.)가겠다. 가: 가, 가시렵니까아ㅠ_ㅠ 안됩니다 아직 가시면은...!! 반: (말없이 등돌린다.) 가: 가주니이이이이이임!!(어디론가 끌려나간다;;) 많은 분이 예상하셨던대로, 알아낸 것 하나 없는 티타임이었습니다.. 뭘 위한 티타임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내일은 시온 아일린과의 티타임을 갖겠습니다. 시온 녀석은 그나마 만만하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시온에게 하실 질문 있으면 해주세요;ㅁ; (자신의 실패-여러의미로-에 부끄러워함.) 덧. 비밀편은 이 것이 마지막입니다. 어째 비밀보다는 반의 티타임에 더 관심이 많으신듯하지만... 티타임에 실망하실듯하군요;;; 콜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가넷입니다. 어라, 드림워커가 작동되는군요(놀라고 있다) 사실 운영자님이 일주일간 드림워커를 닫고 서버 방화벽 구축에 들어간다고 하셔서..;; 카페에도 방금 막 글을 올렸습니다. 어제는 배가본드를 보는 도중에 잠이 들고 말아서...(여덟시쯤;) ...바, 방금 일어났습니다;;; 여하튼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아.(어디서 한숨이냐!;;) 그 잠깐 사이에 밑에 공지글에 리플이 많이 달렸군요;; 방금 카페에 '당분간은 여기에서만 글을 보실 수 있을 듯 하네요' 라고 적었는데 혹시나 해서 들렸더니 열리는 드림워커라니.(웃음) 그럼 연재 재개하겠습니다. 덧붙여, 드림워커 개최 작가대전(그러나 아무도 작가대전이라 부르지 않는 저 악명높은 폐인대전)은 드디어 끝났습니다.(....) ============================================== PART 15: 불꽃놀이 프란으로써는, 반의 방 어디 한 군데에 앉아본 것이 처음이다. 늘 드나드는 방이기는 했으나 항상 서 있는 입장이었던 탓이다. 반이 아침마다 식사를 하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얼굴을 마주대한 채, 두 사람은 앉아 있었다. “……라는 거죠.” 한참 동안 이어지지 않는 말을 억지로 이으며 애쓰던 프란은 드디어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슬그머니 반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확 하고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프란은 화끈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인다. 반의 얼굴에는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닌 모양이다. 바로 앞에서, 반은 프란을 정면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가감 없는 그 시선에 프란은 뒷덜미까지 빨개질 지경이었다. ‘크윽! 그러니까, 저 얼굴을 누가 미워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이지!’ “……확실한가?” 프란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가만히 생각하는가 싶던 반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확실하지는 않다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반이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기에, 프란은 험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프란은 반을 향해 바짝 몸을 내밀더니, 속삭이듯 반에게 말했다. “가주님.” “뭔가.” “……저 혼자 알아볼까요?” 그 순간 반의 미간이 가느다랗게 좁혀지는 걸 본 프란은, 속으로 ‘인상 쓰지 마, 임마! 주변 공기가 냉각된다고!’ 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애써 차분한 태도를 되찾은 그녀는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니, 그게. 저, 아까 사신의 말을 듣자하니 가주님이 하실 일이 많으실 것 같아서요. 역시 왕궁으로 가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프란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기, 허락하신다면 제가 알아보겠단 말입니다. 허락 안하시면 할 수 없는 거고.” 프란이 하하, 하고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반이 벌떡 일어섰다. 그 갑작스러운 태도에 깜짝 놀란 프란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팔을 마구 휘저었다. “가, 가시려구요?” “불만인가.” 반의 차가운 대꾸에, 프란은 에엑, 하고 소리를 쳤다. “아니, 아니. 저기, 가주님.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건……” 프란은 해명하려고 했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일 뿐이고, 확실치도 않은 일인데요, 라고. 그러나. “시끄럽다.” 저렇게 냉정한 눈으로 한마디 하는 저 사람을 대체 누가 말리겠는가. ‘오냐, 내가 너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겠냐.’ 프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출동이다, 키르!” “뭐가 출동이라는 거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헤냔은 얼른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마치 당연하다는 양 케이온 기사단에서 콤비로 인식되고 있는 헤냔과 아나이스, 이 두 사람은, 오늘도 역시 동시 출동 명령을 받은 차였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그냥 출동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그러면서 벌써 말에 탄 너는 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뭐니 하면서도 착실히 출격 준비를 하고 있는 헤냔을 보며 아나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새벽, 흉포한 불꽃놀이가 있었다. 가에린 상단과 제닌 고물상. 수도의 양 끝에서 일어난 그 불꽃은, 사실 말이 불꽃이지 폭발이라 불리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몇 년 동안이나 카세타 왕실과 기사단에 상납하는 무기를 독점해 왔던 가에린 상단. 카세타 전역에 있는 고철이 모여든다는 제닌 고물상.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된 폭발은, 정확히 열 가구씩을 그대로 폭발시키고 거짓말처럼 멎었다. “도대체 반란군을 토벌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 난리냔 말이다.” 헤냔은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일각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해도 분명 수도에서 일어난 그 화려하다 못해 끔찍스러운 불꽃에 왕궁은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던 차다. “이것도 반역 무리일까. 거짓말처럼 딱 열 가구를 폭발시켰잖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헤냔이 묻자, 아나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 수 없지, 귀여운 키르.” 아나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케이온 기사단과 디센 기사단은 이른 새벽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왕궁 쪽에서는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을 뿐, 이 갑작스러운 폭발에 대한 원인을 규명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새벽녘의 스산한 바람이 그치고 아침 햇살이 왕궁 표면에 부드럽게 닿았을 무렵, 황궁의 보초병 하나가 화살에 꽂힌 종이를 가지고 왔다. 「국왕 폐하. 어제 불꽃은 아름다웠습니까. 오늘 역시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을 예정입니다. 수도는 아름다운 캔버스지요.」 명백한 선전 포고였다. 오늘 역시 수도 어딘가에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래서, 지금 무작정 수도 전체에 기사단이 흩어진 상태로 배치된다는 건가?” 헤냔이 묻자 아나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잖아. 어디에 폭발이 일어난다고 딱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기사단 전체와, 수도 경비단원들 전체가 오늘 하루 종일 수도를 지킬 거야. 그 정도라면 충분히 위협도 될 거고. 안 그래?” 아나이스도 이것이 적절한 대비책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수도 자체가 얼마나 넓은 곳인데 고작 이 정도의 인원으로 경비가 될 거란 말인가. 아나이스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헤냔을 보며 픽 웃었다. “헤냔 드 키에르.” “……뭐야, 아나이스 폰 그란젤.” “뭐가 불만이야?” 아나이스는 볼을 퉁퉁 부풀리고 있는 소년 기사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헤냔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아무리 어른인 척 딱딱한 척 해봐도 헤냔은 아직 기사단 모두에게는 동생 같은 귀여운 존재인 것이다. 저렇게 볼이라도 통통하게 부풀리고 있으면 꼬집어 주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내가 언제 불만 있댔어?” “발뺌 할 생각이라면 얼굴에 또렷하게 써 있는 그 ‘불만’ 이라는 글씨부터 어떻게 하고 말해주겠어, 키르? 아주 얼굴이 칠판이라니까, 칠판.” 헤냔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 헤냔을 보며 아나이스는 피식 웃었다. 순간, 헤냔이 나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 사람.” “엉?” 헤냔이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 누군지 금방 떠올리지 못한 아나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말하는 거야? 라고 아나이스가 한 번 더 묻자, 헤냔은 갑자기 얼굴이 벌개져서는 저 멀리 하늘을 보았다. 한참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 숨을 몰아쉬던 헤냔이 툭하고 뱉어냈다. “그…… 카르멘 가주.” “푸하하하하하핫!” 아나이스는 그만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헤냔이 왜 웃는 거야, 아나이스! 하고 크게 외치자 아나이스는 말갈기에 얼굴을 묻고는 킥킥거렸다. 아나이스의 그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모양인지, 헤냔이 인상을 썼다. 아나이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키르. 그래, 카르멘 가주가 뭐?” 그러나 물으면서도, 아나이스는 억지로 속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런, 이런. 헤냔. 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저스티스 카르멘을 정말이지 싫어했다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였잖아. “아니, 이 것도 반란인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없으니 이상하잖아.” 아나이스는 또 말갈기를 부여잡고는 속으로 끅끅대며 웃었다. 반란 진압에 카르멘 가주가 어째서 끼어들어야 하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게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그녀다. 한참 만에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아나이스는 험험, 하고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아아, 그게 말이야. 사신이 카르멘 가에 들렀긴 한데.” “음?” 헤냔이 눈을 반짝이며 돌아보자 아나이스는 빙긋 웃었다. “........오기 싫대.” 그대로 굳어버리는 헤냔이다. 고개를 푹 숙인 헤냔은, 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오면……. 프리나도 같이 볼 수 있는데.’ 물론 헤냔의 속마음을,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저 아나이스 양이 알 턱이 없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마구 웃어대고 있던 아나이스는 어느 순간 웃음을 딱 하고 멈추고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오른팔을 들어 헤냔의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다. 프리나, 라고 속으로 중얼대고 있던 헤냔은 무방비상태로 찔려진 채 말 위에서 크게 한 번 휘청, 했다. 헤냔이 위험했잖아! 라고 외치려는 찰나, 아나이스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미남 발견!” “무슨 헛소…….” 막 말을 하려던 헤냔은 멈칫했다. 그 역시 저 멀리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보라색 머리카락 하나, 그리고 바로 그 옆에서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 하나. “헤에, 세상에나 이런 우연이. 어쩌면 너랑 저 카르멘 가주, 의외로 인연…….” 아나이스는 그렇게 말하려다 움찔 굳어버리고 말았다. 헤냔이, 위험할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냐, 헤냔. 너 설마 그 정도로까지 카르멘 가주가 좋은 거냐!’ 그 미소에 아나이스가 경악하든 말든, 헤냔은 얼른 말을 재촉해 달리기 시작했다. ‘프리나!’ 헤냔의 얼굴에는 어찌 지우지 못할 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 “……가주님.” 프란은 두리번거리며 반을 불렀다. 반이 돌아보자 프란은 끙,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웬만하면 다음부터 외출할 때는 복면이라도 하시죠.” “무슨 소리지?” 프란은 괜히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 “…….” “외출, 얼마나 자주 하세요?”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저스티스 카르멘으로써의 반은, 거의 집 안에서 사무를 보고 훈련을 할 뿐 밖으로는 절대 돌아다니지 않는다. 이 놈의 빌어먹을 반란만 아니라면! 반에게서 대답이 없자, 프란은 괜히 비실비실 웃으며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가주님.” “시끄럽군.” 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프란은, 반의 냉담한 태도에 발끈하고 말았다. “아니, 시끄럽다니요! 가주님이 너무 조용한 거지 솔직히 저 정도면 시끄러운 것도 아니잖아요! 대체가 사람이 말을 안 하고 어떻게 산다는 겁니까? 그리고 거리에서, 예? 생각을 해보세요, 생각을! 두 사람이 걷는데, 가주님은 당연하다는 듯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저 혼자 나불나불 떠드는 거, 저라고 좋아서 하는 줄 아세요? 저도 쪽팔린다 이 말입니다!” 두다닷 쏟아내듯 외쳤던 프란은 자신을 물끄러미 반의 시선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발끈해서 몇 마디하고, 반이 물끄러미 노려보면 시선을 내리깔며 나 죽었소, 라고 고개를 숙이는 것. 으이구, 이 놈의 빚만 아니면! 사실, 프란은 지금 거슬리기 짝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반과 함께 걷고 있는 내내, 온갖 시선이 바늘처럼 온 몸으로 꽂히는데 누가 움찔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제, 한 바탕 난리가 일어났다고는 해도 수도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느 한 귀퉁이에 상점이 폭발했다, 라는 소식이 벌써 전해지긴 했으나 수도는 그 전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하루를 준비해 나가기 때문이다. 북적북적 요란하게 움직이는 수도 거리의 사람들은, 반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한 번씩 돌아보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보라색 머리카락. 어깨를 훨씬 넘어서 옆구리 정도까지 내려오는 그 장발의 보라색 머리카락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끌기엔 충분하다. 거기에 은은한 은색이 감도는 보랏빛 눈동자. 말했듯이, 조각 같은 생김생김이라 이거지. 프란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온 사방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보는데도 전혀 상관치 않는 반의 태도에 프란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예민한가를 상기해보면, 반 역시 자신을 향해 아예 쏟아지다시피 하는 저 시선들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무덤하다 못해 무시하는 듯한 태도라니. 이러나저러나 반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힐끔 반을 한차례 올려다본 프란은 낮은 한숨을 쉰 뒤 머리를 살짝 긁었다. 문득 반이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검은, 빼앗긴 건가.” “예? ……아, 예.” 실버 블레이드. 이스티네 저택에서 눈을 떴을 때 그 검은 이미 프란의 손에서 없어진 뒤였다. 반은 어제 탈출 후, 어째서 프란에게 그 장소로 잡혀 갔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슬그머니 한 장 넣어온 레이니아의 그림을 적당히 숨겨두었던 프란은, 이 일은 그냥 비밀로 해두기로 한 참이었다. 어차피 사실을 얘기해봤자 우스워지기만 할 뿐이다. 그녀가 보기에, 레이니아와 자신은 하나도 닮지 않은 듯했기 때문이다. ‘그 그림, 팔면 비쌀까나.’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퍼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서, 프란은 고개를 번쩍 들고 반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뭐가 말인가.”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어제, 가주님은 변태 놈, 아니, 그 이스티네 보일린에게 모욕당한 셈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그 저택을 뒤져보면 어떨까요?” 프란의 말에 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프란은, 그런 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스티네 저택 대 탈주를 감행했던 어제. 사실 프란은 보았었다. ‘가에린 상단, 제닌 고물상에서 즐거운 불꽃놀이를…….’ 하고 길게 이어지는, 그 낙서 같은 것을. 물론 그 때는 그것이 단지 일기나 낙서 같은 것인줄만 알았다. 어떤 속편한 놈이, 정말로 불꽃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사신이 반에게 찾아와 아침에 하는 말을 들었던 프란은, 우연인지 아닌지, 자신이 훔치듯 보았던 그 장소가 폭발이 일어난 곳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번 폭발은 이스티네 보일린과 큰 관련이 있다는 말이 된다. 반이 지금이라도 당장, 이스티네 저택에 쳐들어가서 ‘나를 모욕했다!’ 라는 명목 하에 그 집을 들쑤신다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프란의 생각이었다.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럴 생각 없다.” 반의 딱 떨어지는 대답에, 프란은 인상을 썼다. ‘뭐, 다 생각이 있겠지. 어련하시겠어.’ 그런 프란의 옆에서, 반은 잠시 낮은 숨을 내쉬었다. 반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이스티네 저택을 뒤지면 훨씬 일이 깨끗하게 끝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반은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며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을 시종에게 일일이 설명하고픈 마음도 없었고, 다른 누구와 공유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또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법. 잠시의 편안을 찾기 위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다. 반과 프란은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스티스 경!”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그 목소리가 들린 것이. ------------------------------------------------------ 앞쪽분량 리메에 들어갔습니다. 다만, 너무 미숙한 전개에(특히 시온과 프란의 관계에 관련된... 아악, 시온네놈 싫어!!;;) 경악하여 고치다가 멈칫 고치다가 멈칫... 영원히 안 끝날 악순환 반복중입니다. 덧붙여 sell my soul은 혼자서 쓰고 있습니다.;; 존재를 알고 있는 분들이 계셔서 감동-_-;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연재해버릴까, 하고 화륵했다가 그랬다가는 정말 심한 극악연재가 되버릴 것 같아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겨우 반권 분량;ㅁ;) ........앗, 여기까지 써놓고 이제와서 시온녀석의 인터뷰가 생각나버렸습니다. ...그것은 다음호에 계속...(이봐이봐!!;;) “시온 도련님.” 잠시간의 휴식을 즐기고 있던 시온은, 생각지도 않은 방문객에 호오, 하며 손을 흔들었다. “웬일이야?”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마린이었다. 시온은 숨을 헐떡이는 금발의 집사장을 향해 찡긋, 윙크를 했다. 급히 온 모양으로, 마린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스웬이…….” 마린이 한마디를 하기가 무섭게, 시온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려버렸다. 잠시 ‘그래, 내 말대로 떠났다는 건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시온은, 그러나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떤 의심의 건덕지도 내비치지 않을 정도다. “응? 스웬이 왜?” 시온의 반응에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던 마린은,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그녀는 얼른 뒤돌아서며 높은 톤으로 말했다. “일단 함께 가시는 편이 낫겠네요. 지금은 가주님이 안 계시니까……. 이 일은 도련님과도 관련이 있고 말이지요.” 시온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시침 뗀 얼굴을 하며 일어섰다. ‘웃기는군, 시온 아일린. 이 가증스러운 연기자 같으니.’ 스스로를 향해서 차디찬 냉소를 보내면서도, 시온은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얼굴이다. 방문을 열고 나온 시온이 마린과 나란히 복도를 걷는다. 그러다가 문득, 마린을 흘끗 본 시온은 그녀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밝고 활달하기가 그지없는 이 여인의 표정이 어둡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녀의 눈 밑으로 까맣게 돋아 있는 것. “마린. 눈 밑에 기미가 장난이 아니야.” 장난치듯 말을 걸어봤으나, 마린에게서는 대답이 없다. “어이, 어이, 마린. 설마 결혼을 포기한거야? 물론 나 같은 영계를 유혹하기엔 당신 나이가 꽤 많긴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 막 농을 걸려다 말고, 시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우뚝 멈춰선 채로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마린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시온은 무슨 일이 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린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혹시 남자가 말썽부리면 나한테 말해. 내가 손봐줄게. 이래봬도…….” “당신이 마법사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산통을 깨듯 말하는 마린의 말에 김이 새버린 시온이 후, 하고 웃는다. “알고 있다니 됐고. 그래, 뭐가 문제야? 서류 정리 같은 것만 아니면 내가 도와줄게.” 마린은 순간,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서른을 바로 눈앞에 앞둔 여자의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순수해 보여서, 천하의 바람둥이로 불렸던 시온조차 잠시 당황했을 정도다. 마린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가주님이, 새로운 시종을 알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주방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요 며칠…… 프란이 보이지 않았다고…….” 그 말에, 마린에 앞서 조금씩 걷고 있던 시온의 발걸음이 뚝 하고 끊겼다. 마린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쏟아지는 시온의 시선을 피했다. “도련님에게도 말할까 많이 망설였는데…… 설마, 설마 죽이신 건 아니신가, 하고…… 요 며칠 새, 죽어나간 시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너무 방심하고 있었나 봐요. 프란이…….” 마린이 막 울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시온이 툭 하고 한마디 했다. “뭔 소리야, 지금?” 막 고개를 든 순간, 마린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시온을 발견하곤 에,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아침에도 프란한테 찐한 애정공세를 하고 왔구만. 내가 범인 색출하는 동안 프란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마린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잠깐만요. 에,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프란을 보셨, 다구요?” “응.” “……정말요?” “내가 당신한테 왜 거짓말을 해?” “……하.” 마린은 얼굴 한 쪽을 찡그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린은 잠시 그 상태 그대로, 몇 초간을 정지해있다가, 다시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 호, 오호호호호호호호호홋!” 한참 광소를 터뜨리던 마린의 웃음이 갑자기 딱, 하고 멎었다. 시온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마린은 훗, 하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를 겁주셨다 이거죠, 가주님. 이 마린을 적으로 돌리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후, 후훗 ……이 빚은 꼭 갚아 드리지요!” 마린의 입에서 천천히, 무시무시한 독백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그 것을 옆에서 고스란히 듣고 있던 시온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 마녀 부활.’ ▷◀▷◀▷◀▷◀▷◀▷◀ “헤에.” 스웬의 방에 들어선 시온은 휙, 하고 낮게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그는 마린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마린은 웃지 않았다. 시온은 그러자 양 손을 머리 위에 얹더니 토끼 귀처럼 까딱까딱해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린은 무반응. 시온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검지와 엄지를 기역자 모양으로 만들어 마린을 향해 귀엽게 튕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마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만하시죠, 도련님? 제 비위가 강하긴 하지만 그 이상 하셨다가는 저도 제 위장상태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상당히 진지하게 튀어나온 마린의 말에, 시온은 무슨 그런 무례한 소릴! 나의 이런 깜찍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 하고 소리를 쳤다. 물론 마린은 무시했다. 스웬의 부재와 그가 남긴 묘한 것들을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카르멘 가의 수석 정원사였다. 가위와 나무를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레키슈안의 멜을 제외하곤 자신이 최고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정원사였으나, 그는 오늘 아침 불행히도 자신의 가위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그것은 근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는 입술을 악 물며 한참동안 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픈 눈으로 한참 그 먼 하늘을 응시하던 그는, 잠시 후 조용히 옆을 돌아보며 자신의 조수를 향해 슬픈 눈으로 말했다. ‘……그만 은퇴해야겠다.’ 거기까지는 어느 최고 정원사의 ‘갑작스럽고도 슬픈 은퇴이야기’ 중 일부가 되기 충분했었다. 그러나 그의 조수이자 그의 하나뿐인 손자는 그를 쓱 하고 한 번 올려다보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할배. 자리는 나한테 물려주고 은퇴하쇼.’ ‘…….’ 물론 정원사는 베이지 않은 왼손으로 손자를 한차례 구타한 후 재빨리 스웬의 방으로 달려갔다. 저 버릇없는 손자 녀석에게 아직은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던 정원사는 그러나, 다음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방의 상태였다.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를 비롯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그 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피를 흘리면서 서 있던 정원사는, 그러다가 묘한 종이를 한 장 발견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는, 그 길로 등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당장 옆방의 마린을 찾았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와서는 그러더군요. ‘마린님, 당장 좀 옆방으로 가보십시오.’ 라고. 후후, 정원사인 그 사람이 그렇게 당황해본 건 처음일걸요.” 마린은 그 말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시온은 엉망진창인 방을 찬찬히 훑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증거, 증거는 어디에 뒀을까. 분명히 어디다 남겨뒀을 텐데.’ 시온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관심 없는 척, 은근히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린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흠,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입술을 작게 오므려 말했다. “어찌됐든 이 일은 가주님이 돌아오시면 의논해야 할 일인 듯 하군요.” “맞아.” 시온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그 무더기들을 대충 훑기 시작했다. 그런 시온의 뒤통수에다 대고 마린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시온 도련님.” “응, 말해.” “뭘 찾으시죠?” 마린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시온은 하하, 하고 웃었다. “내가 찾긴 뭘 찾아?” “……이것, 찾으시나요?” 갑자기 낮아진 그 목소리에, 시온의 등이 조금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린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시온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마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그게 뭔데?” 생글 웃으며 묻는 시온의 말에, 마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이게 뭘까요?” “뭔데, 뭔데? 우리 사이에 뭘 숨기는 거야?” 마린이 품에서 쏙 꺼낸 조그마한 것에 시온은 일부로 들뜬 아이처럼 경박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조바심을 치며 물었다. 그러자 마린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그 날이죠, 도련님. ……가주님이 말한 한 달, 오늘이 그 날이에요.” “으응, 그랬던 것 같아.” 시온은 긴장하고 있었다. 뭘까, 이 느낌은. 자신을 보는 마린의 눈이 어쩐지 송연하다. “……나 이래봬도 도련님을 꽤 좋아하죠.” 마린이 갑자기 내던진 그 말에, 시온은 늑대에 습격당한 레이디 같은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탁자를 부여잡았다. “흐흑. 역시 그랬던 거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노처녀에게 노려지고 있었던 거야. 아아, 나의 순결, 미안해 프란. 나는 이대로 여기 있는 마린에게 당하는 거야.” “......이봐요, 도련님. 지금 저 진지하거든요?” 마린이 가차 없이 시온의 장난을 잘라버리고 난 뒤,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집사장님!” 문을 벌컥 열고 하녀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시온이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낯익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시온은 움찔 한 발작을 물러섰다. ‘윽.’ 뮤는 자신의 사랑하는 그이를 노리는 저 남색가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봐준 후,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마린에게 말했다. “공주님이, 제 3공주님이 오셨어요.” “뭐? 또?” 시온은 점잖지 못하게도 그렇게 외쳐버리고 말았고, 그 순간 마린의 따가운 눈짓을 받았다. ▷◀▷◀▷◀▷◀▷◀▷◀ 키네세스는 숨 가쁜 얼굴로 카르멘 가 저택에 들어섰다. 단숨에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을 보고 있던 카르멘 가의 정원사는, 자신의 손자를 흘낏 보았다. 그의 손자는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가끔씩 저 공주님이 저택을 찾을 때마다 간이며 쓸개까지 다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물론 멀리에서밖에 볼 수 없는 공주님이긴 하지만. 정원사는 의사가 없어진 바람에 자신이 대충 칭칭 감아놓은 붕대를 처량하게 한 번 바라보았다. ‘평생동안 가위를 동반해 살아온 내 신세가 불쌍하누나. 이놈의 자식아, 공주님 그만 봐라.할아버지 손에 피나는 건 안 보이고 공주님 머리카락만 보이냐.’ 키네세스의 이번 방문은 사실 국왕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새벽에 일어났던 불꽃에 대해, 궁에 있던 누구보다도 빨리 알았다. 궁은 지금 비상사태였다. 카르멘 가에 가서 반을 불러오라고 말했던 국왕의 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키네세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늘 그렇지요.’ 그녀가 아는 그는 그런 남자였다. 궁에 들러봤자 얻어지는 건 별로 없으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할, 그런 남자 말이다. 키네세스는 왕궁 전체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네 명의 호위무사와 더불어 당장에 카르멘 가로 달려왔던 차였다. 반에게 요청할 것이 있어서였다. “공주님.” 키네세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카르멘 가 저택 앞에, 언제 봐도 유쾌한 그의 사촌이 서 있었다. 막 뭐라고 키네세스가 입을 열려는 순간, 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서오세요, 공주님. 쓰읍, 그런데 나로 만족하시려나 몰라? 오늘, 형님은 안 계시는데.” 키네세스는, 이미 자신이 한걸음 늦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키네세스는 긴 한숨을 쉬었다. ▷◀▷◀▷◀▷◀▷◀▷◀ ‘……왜 또 여기서 만나는 거냐, 왜!’ 프란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 저스티스 경, 하고 크게 그들을 불렀던 헤냔은 얼른 그들의 앞에서 말을 멈추고는 거기에서 내렸다. 곧, 뒤따라오던 여기사 아나이스도 그들의 앞에서 말을 내렸다. ‘아앗! 그 여기사다, 여기사!’ 프란은 사랑이 불타오르는 눈으로 아나이스를 정신없이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런 프란을 한차례 바라보며, 아나이스는 찡긋 윙크를 했다. 프란은 그러나 윙크는 받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홀린 듯한 눈으로 아나이스를 볼 뿐이었다. 누가 보면 여기사에게 반한 남자시종, 이라며 웃음을 터뜨릴만한 상황이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카르멘 경?” 헤냔이 말을 꺼냈다. 말은 웬일이십니까, 로 꺼냈지만 사실 헤냔은 카르멘 가의 가주가 여기에 나온 이유가 뭐라고 해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프리나가 저기에 있다는 것이고 비록 말을 걸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실만으로 이 욕심 없는 소년 기사는 만족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여긴 웬일이지?” 반은 표정 없는 얼굴로 헤냔을 슥 내려다보았다. 적대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아나이스의 말대로 저번 반란군 진압 때 반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그는(절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저스티스 경도 알고 있을 겁니다, 오늘 새벽 있었던…….” “……그 잘난 불꽃놀이?” 프란이 대뜸 말꼬리를 잘랐기에 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란은 하하, 하고 가볍게 웃었다. 헤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 때문에 현재 기사단의 전 병력이 수도에 배치된 상탭니다. ……폐하께서 오늘 아침에 저스티스 경을 궁에 들라고 하셨을 텐데요. 폐하의 명령도 듣지 않고 지금 여기서 뭘하고 계셨던 겁니까.” 처음에는 그저 프리나를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쁨에 취해 있던 헤냔은, 방금 전 아나이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내고는 마지막 말을 추궁조로 바꾸었다. 이 정직하고 똑바른 소년기사의 말을, 반은 대답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써 간단히 무시했다. “가자.” 프란을 향해 낮게 말한 반이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헤냔이 당황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 아니, 잠깐만요! 기다리십시오, 저스티스 경!” 헤냔이 빽 소리를 쳤다. 프란은 헤냔을 향해 씩 하고 가볍게 웃어 보인 후 얼른 반을 따라 나섰다. 헤냔은 한참동안 굳은 채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고개를 돌려 아나이스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발 부탁인데 뒤따라가자는 말만은 하지 마라, 키르.” “내가 할 말을 미리 해줘서 참 고마워, 아나이스. 역시 파트너란 좋은 거야.” “…….” 아나이스는 왜 자신이 런스 카르멘이 아닌 헤냔 드 키에르와 파트너가 되어야 하느냐고 새삼 속으로 울부짖었다. ---------------------------------------------- 드디어 열리는 세 번째 티타임, 그 주인공은 바로 시온 아일린!(짠짜잔~ 의미 없는 소음;) 가넷, 반 때와는 달리 별반 특별한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온도인 멜진 차 두 잔과 오렌지 몇 개를 탁자 위에 놓아두었을 뿐. 표정도 저번 티타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다. 곧, 저 멀리에서 그림자가 나타난다. 훤칠한 그림자에, 가넷은 손을 번쩍 들고는 어이! 라고 외친다. 가네트- 이하 가, 시온 아일린- 이하 시 가: 안녕, 시온! 시: 오, 그대는 누구신지?(역시 시온,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너를 갖춘다.) 가: (오랜만의 대우에 기뻐하며) 응, 나는 너를 만든 사람이야! 시: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진지한 얼굴로) 병원에 같이 가줄까? 가: ……. 그리고 잠시 후, 또 이상한 남자가 등장해 시온에게 뭔가를 얘기한다. 시온은 오, 하고 감탄하며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가넷을 본다. 가: 자, 그럼 이제부터 질문을 시작할게. 시: 아, 그래. 좋을대로. 여기 있는 차, 마셔도 되는거야? 가: 이미 마시고 있는 주제에 그런 거 묻지마. 시: (웃음) 그래, 질문해봐. 나한테 질문할 팬이 많다니 나도 기쁘군. 가: (아무도 그런 소리 안했어, 임마!)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봐. 시: 음? 보다시피 절정 미남이지. 내 녹색 눈동자를 보면 여자들은 다 기절한다고. 내가 여자를 유혹할 때 쓰는 기술 중 하나가 환한 눈웃음이랑 공허한 눈빛인데, 여기에 넘어오지 않은 여자는 여태까지 프란이 유일……. 가: (차를 내려놓으며) ……그런 보충설명까지는 안 해도 좋아. 시: (실망한 듯) 그래? 쳇. 그래, 좋아. 아, 그리고 머리는 은발이고. 키는 형님보다 아주 조금 작아. 뭐, 거의 비슷해. 피부는 보기 좋은 갈색. 형님처럼 뽀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나는 별로겠지만, 흐음, 남자는 역시 이렇게 적당히…… 가: (듣기 싫다는 듯 말을 자르며) 여태까지 함께한 여자들의 이름을 다 말해보겠어? 시: (부드럽게 웃으며) 현재의 여자에게 집중하고 있는 내게, 과거는 가치 없지. 안 그래? 가: (느끼함에 압도되어 얼어버림) 시: 응? 왜 그래? 내 말이 그렇게 감동적이야? 가: (무시하며) 반과 프란을 어떻게 생각해? 시: ……흠, 기본적으로 두 사람 다 무척 좋아해. 어떻게 비춰지는지 모르지만, 나한테 형님은 어렸을 때부터 뭐랄까……음, 말하기가 좀 쑥스럽군. 여하튼, 형님은 어떤 면만 제외하면, 내가 동경하는 부분을 많이 갖고 있지. 프란에 대해선 말해서 뭣해? 올인 러브♡♥ 가: (부들부들 떨며 질문들을 훑어보다가) 아, 아버지에 대한 질문이 있군, 시온. 시: (웃으며) 그건 곧 나올 거잖아, 안 그래? 가: 하기야, 이런데서 이 중요한 일을 노출할 순 없지. 그런데 네놈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버럭) ……첫 여자는? 시: (능글능글 웃으며) 열한 살 이후로 내 매력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면 답이 돼? 가: (말을 말자, 말을 말아.)프란이 너를 허락한다면 뭘 하고 싶어? 시: (망설임 없이) 프렌치 키스. 가: …………이봐, 조금이라도 뜸을 두고 말하라고;;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시: 아, 뭐라고 할까. 아일린의 이름을 벗어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도라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워.(웃음) 가: (이 녀석, 대체 세상을 뭘로 보는 거냐;;) 음, 프란과 가문 중에서는 어느 쪽이야? 시: 당연한 걸 묻는군. 나한테 가문은 가치 없어.(그러면서 조금 묘한 얼굴) 가: 음…… 내가 너를 괴롭힌다는 말이 있는데, 나한테 할 말 있어? 시: (진지한 얼굴로) 프란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는 언제야? 가: ……. ……시온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다음 인터뷰는 헤냔 드 키에르 군과 하겠습니다^^ ...........아아, 진도가 안나가고 있습니다; “저기 가주님. 그 기사들 말입니다. 계속 따라오는데요?” “안다.” 프란은 낮게 대답하는 반의 무뚝뚝한 얼굴을 잠시 본 뒤 쳇, 하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따라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두 기사가 말을 재촉하는 소리가 저 너머에서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미, 미행하는 거라면 소리라도 내지마, 이것들아!’ 프란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계속해서 그 쪽을 흘낏흘낏 돌아보았다. 반은 그런 프란은 아랑곳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의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프란은 에, 하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려 무언가가 들려진 반의 손을 보았다. 아직 이른 아침의 햇살이 닿은 그 것은 다름 아닌 단검이었다. 단검이라고는 하지만 칼날이 프란 손바닥의 1.5배 정도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한 눈에 보아도 장인이 만든 것이 분명한 검. “받아라.” 반은 휙, 하고 그 단검을 던졌다. 프란은 얼른 손을 내밀어 그 것을 받아들었다. “설마 주시는 겁니까?” 프란이 눈을 깜빡깜빡하며 물었다. 항상 그 푸른빛의 검만을 쓰고 있기에 몰랐는데, 반의 허리춤에는 그 검 말고도 이 단검이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실버 블레이드를 찾을 때까지만.” 프란은 슬그머니 단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검날이 내뿜는 빛이 차분하다. 프란은 살짝 검의 중앙을 눌러보았다. 머리카락을 한 올 갖다대자 소리도 없이 반으로 갈라져 밑으로 떨어진다. 프란은 얼른 검을 검집 안으로 회수한 후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 단검 비싼가요?” 프란이 더듬거리며 묻자 반은 웃지도 않은 채 답했다. “저택 하나를 팔아도 사지 못한다.” “…….” 프란은 당장에 이 검을 꿀꺽하고 싶은 깊은 충동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윽고 그녀가 검을 자신의 품 안으로 넣는다. 고맙다는 말을 해봤자 어차피 면박을 당할 것이 뻔하다. 프란은 그러나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괜한 쑥스러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수도에 카제노 상단이 하나 둘이 아니잖습니까.” 반이 프란을 내려다보았다. 프란은 ‘됐다, 화제 돌리는데 성공했어!’ 하고 생각하며 얼른 말을 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카제노도 아일린만은 못하지만 꽤나 유명한 상업가잖아요. 게다가 기반이 카세타에 있고. 여기 수도만 해도 카제노 상단의 가게가 꽤 많을 것 아닙니까. 그걸 다 찾아보려면 시간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차라리 카르멘 가의 사람들을 푸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지금, 웬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도 따라오고 있으니 기사단에 알리든가요.” “그렇게 요란 떨며 다닐 일이 아니다.” “흐음.” 프란은 고개를 끄덕여보려고 했지만, 역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는 없었다. 수도에 있는 카제노 소속 가게가 도대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이 사람아. 「카제노, 수도의 붉은 축복을. 아산, 카세타의 상징.」 가에린 상단과 제닌 고물상에 관한 이야기 뒤에 적혀 있던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프란은 그 나머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머지는 없을 수도 있다. 가에린 상단과 제닌 고물상은 첫 구절이라 그대로 머리에 박힌 것이고, 그 다음 구절은 워낙에 들어본 적이 많으니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기억하지 못할 뻔 했다. 어제 폭발은 가에린 상단과 제닌 고물상에서 있었을 뿐, 카제노에 폭발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음 불꽃놀이 장소는 카제노 상단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바로 카제노라는 이름을 가진 가게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카제노, 수도의 붉은 축복을’ 이라는 구절은 그렇다고 치자. 둘의 머릿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아산. 도대체 아산이 무엇일까. 아산은 반이 기억하기로는 분명 죽은 제 4대 카세타의 왕이었다. 셋째 왕자로 태어났지만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오른, 골육상잔으로 왕관을 손에 넣은 왕. 그러나 즉위하자마자 화려한 정책으로 흉흉한 민심을 단번에 사로잡은 카리스마의 왕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대체 전대 왕의 이름이 어쨌다는 건가. 이 것도 그 불꽃놀이와 관계있는 것일까. 둘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며 막 첫 카제노 상점으로 가는 골목을 돌았을 때다. “어이. 이봐, 키르.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 갈 셈이야?” 둘의 뒤를 따르고 있던 아나이스가 황당하다는 듯 헤냔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도 골목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보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어, 말을 타고 속도를 내서 이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나이스는 프란과 반이 골목으로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어디에 두고 가면 모를까 이대로 저 둘을 따라 카세타의 골목골목을 누빈다는 것은 무리였다. “저스티스 카르멘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헤냔이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며 던진 말에 아나이스는 그만 또 웃어버렸다. “도대체 네 말은 어디다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겠어. 사실은 그냥 저스티스 카르멘을 따라가고 싶은 거 아냐? 설마 말을 맡기고라도 가잔 말은 아니겠지?” 아나이스는 자신의 말을 툭툭 치며 말했다. 헤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어, 아나이스. 말을 맡기다니.” “그래? 그럼 지금 네 발이 왜 우리 기사단의 단골 음식점으로 가고 있는지 좀 말해줄래?” 아나이스의 말에 헤냔은 웃으면서 경쾌하게 답했다. “뭘 묻고 그래? 말 맡기러 가는 거잖아.” “헤냔.” “응?” 헤냔이 웃으며 답하자 아나이스는 변한 아들을 바라보는 늙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 인간이 변했어.” 저스티스 카르멘이 우리 순수한 키르를 이렇게 만들었어, 라는 울음은 속으로 삼키는 아나이스였다. ▷◀▷◀▷◀▷◀▷◀▷◀ “잠깐 살펴보겠다.” 카제노 상단 소속의 가게를 가지고 있는 남자는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두 사람이 들어 닥치는가 싶어 얼른 두 손을 비비며 달려갔더니 밑도 끝도 없이 한다는 말이 잠깐 살펴보겠다, 라니. 상단의 남자는 눈을 깜빡이며 뭘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반은 눈을 똑바로 뜨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왕궁에서 나왔다. 상단의 재정을 살펴보라는 명령이다.” “왕궁에서요?” 남자는 그 뜻밖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왕궁에서 나왔다는 것도 상단의 재정을 살펴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프란은 반이 얼굴 근육 하나 꿈틀거리지도 않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주 타고 났구나, 타고 났어! 얼씨구, 그 무표정한 얼굴 하나면 어디서 사기 쳐도 큰 사기 하나 치겠다.’ “저희는 세금을 잘 내고 있는뎁쇼.” 그러면서 주인 남자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보통 왕궁에서 나왔다고 하면 한 번쯤 의심을 하겠지만, 반이 워낙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말을 하니 남자는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하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반의 얼굴이 워낙에 귀족적이라 신분을 의심하는 행동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반과 남자가 잠시 대화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프란은 얼른 몸을 움직여 가게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뭐지요?” 비싼 물건 앞에서 유독 눈살을 찌푸리며 오래 머무는 프란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남자가 묻자, 반이 간단히 답했다. “수행원.” “아……. 예. 그렇습니까.” ‘수행원은 얼어죽을. 시종이다, 시종.’ 프란은 그러면서도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이 가게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 프란은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 번 일은 자신이 제의한 것이기에 성실하게 모든 것을 확인했다. 어두컴컴한 상자들이 쌓여 있는 가게의 안쪽은 물론, 창고, 그리고 물건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 등 폭탄이 숨어 있을만한 공간 사이사이를 꼼꼼히 살펴보던 프란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금발 녹안. 그린 듯한 미소년이, 그러나 아름답기보다는 고압적인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보는 그림이었다. 프란이 그 그림 앞에 멈춘 이유는 간단했다. 어쩐지 그 그림에 있는 사람의 느낌이 반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얼굴 생김생김이 비슷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느낌이 그렇다. 그림 안에 있는데도 어쩐지 단박에 사람을 사로잡는 듯한 저 눈. 그림은 그리 잘 그려지진 않았고 붓 터치도 거칠었으나 모델에 대한 애정을 갖고 그린 것인 듯 했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살며시 그 그림에 손을 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이고오, 그 그림에 손대면 안 됩니다!” 반에게 굽실거리고 있던 주인이 언제 프란 쪽을 봤는지 얼른 뛰어나오더니 프란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프란은 엇, 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주인은 프란이 잠시 만져보려 한 그 그림에 혹시나 손상이 가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 우는 듯한 눈을 하며 프란을 돌아보았다. “수행원 나리, 그림엔 함부로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그러시면 안돼요, 정말 그러시면 아니 되는 거예요!” ‘수, 수행원 나리라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아니 되는 건 또 뭐냐.’ 프란은 그러면서도 흘끗 주인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목을 길게 뺀 후 반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기엔 수상쩍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보겠다.” 반의 말에 주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이고. 살펴 가십쇼!” ▷◀▷◀▷◀▷◀▷◀▷◀ 두 사람은 이후로 수도 전역을 돌며 여섯 군데의 카제노 상단에서 똑같은 일을 했다. 상단이 워낙 넓게 분포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걸었다. 그러는 한참동안, 프란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말을 하지 않으면 반이 언제까지 말을 걸지 않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은 정말 지독한 남자였고 프란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란은 결국 두시간만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제노 상단의 가게, 굉장히 다양하네요. 수도에만 열 다섯 개가 가까이 된다니.” 그 말에 한참동안 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또 무시하는 건가, 하고 프란이 중얼거릴 무렵 반이 툭 하고 뱉어냈다. “아일린의 상단은 수도에 스무 개 넘게 있다.” 그 말에 프란은 풉, 하고 웃음이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어린애 같잖아, 임마!’ 카제노가 아무리 잘나도 자신의 아일린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며 프란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아일린의 가주라 이건가. 프란은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돌렸다. 그녀는 다시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아나이스와 헤냔은 저 멀찍이에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처음과는 달리 반도 프란도 그다지 둘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두 기사는 정말로 순찰을 도는 것처럼 행동했고 자신들을 방해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아나이스는 자신들이 따라가는 걸 뻔히 아는 프란과 반에게서 반응이 없자 분개해하며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졸졸 따라가야 하느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헤냔은 간단히 시끄럽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다. 아침부터 끊임없이 걸어야 했던 프란은 조금 지쳐 있었다. 카제노 상단을 여덟 번째로 살폈을 때, 프란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밥 좀 먹고 하죠.” “바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반의 대답이 날아오자, 프란은 주먹을 꼭 쥐고 반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주님! 가주님은 사람 아닙니까? 배 안 고파요? 아무리 제가 빚 때문에 이렇게 있다지만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이지 옛날에 제가 뒷골목에서 구를 때 본 게 있어서 아는데, 폭력조직의 3류 양아치들도 부하들 세끼 꼬박꼬박 먹이면서 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주님 같은 분이 시종을 굶겨가며 일을 하는 겁니까?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세요? 네? …….” 끝도 없이 이어지는 프란의 잔소리가 빛을 발해 처음 말이 나온 지 약 20분 후, 둘은 가까운 식당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반이 프란의 저 조잘거림을 계속 듣는 바에야 차라리 빨리 밥을 먹고 조용히 걷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을 내린 덕이었다. “뭘로 하시겠어요?” 둘이 자리에 앉자마자, 아직 어려보이는 급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무표정하지만 미간에 엷은 주름이 하나 간 반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답했다. “제일 빨리 되는 걸로 둘.” “크레이프가 제일 빨리 됩니다.” “그걸로.” “……예에.” 급사는 주문을 받음과 동시에, 흘끔흘끔 반을 올려다보았다. ‘거, 겁나게 예쁘장하네. ……세라누나는 비교도 안 되겠어.’ 잠시 훔쳐보려고 했던 것이 시선을 빼앗겨버려, 급사는 한참동안 멍하게 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반이 흘끗,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급사는 화들짝 놀라 얼굴이 붉어진 채 얼른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크, 크레이프 둘!” 메뉴판을 보며 ‘자아, 뭘 먹어야 잘 먹었단 소리를 들을까, 뭐가 제일 비싸지?’ 하고 주문할 폼을 잡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던 프란은 급사가 뛰어간 자리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의 자식. 적어도 뭘 먹을 거냐는 질문 정도는 하란 말이다!’ 프란이 속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동안 반은 식당을 대충 한 번 훑어보고 있었다. 너무 붐비지도 한적하지도 않게, 알맞은 수의 손님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다. 그래도 이미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임을 고려해보면 이 집은 상당히 장사가 잘 되는 집임에 틀림이 없다. 반이 주변 장식이며 탁자 같은 것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을 보며 프란이 빙글 웃었다. “이런 식당엔 처음이시죠?” “웃기는군.” 반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프란은 그 순간 아, 하며 가볍게 무릎을 쳤다. 검술가문 카르멘만의 주인이면 또 모르되, 상대는 아일린의 주인이기도 한 사람이다. 아일린 가문의 사람이 매일 저택에 붙어 앉아 있거나 하지는 않을 터. 물론 그렇다고 여기저기 대륙 곳곳을 돌아다닌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계약을 위해서 타국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은 상업의 집안이니 물가나 시장정세를 알기 위해서라도 가끔 이런 곳에도 들릴지 모른다. 식당 안에서도 반은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들을 받았는데 반은 역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수도는 치한이 안정되어 있는 곳이라 추근대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다. 다들 수군수군, 귀족으로 추정되는 반의 얼굴을 훑어보며 자기네들끼리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프란이 그렇게 무서운 시선을 받는 사람과의 동행자로써의 민망함으로 뒤통수를 슬슬 긁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급사가 크레이프를 두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고개를 꾸벅 숙인뒤 접시를 내려놓고 급히 사라지는 급사의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한 번만 더 볼까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곧장 반과 눈이 마주쳐버린 탓이다. 프란은 곧 신이 난 얼굴로 크레이프를 먹기 시작했다. 반 역시 크레이프에 손을 갖다댔다. 그런데 어느 순간. “…….” “…….” 음식을 먹고 있던 둘의 움직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췄다. 둘 중, 먼저 일어선 것은 뜻밖에도 반이 아닌 프란이었다. 반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 사이를 좁혔다. 방금 전에 갑작스럽게 사라진 그 기운을 저 시종이 날카롭게 캐치해낸 것에 놀란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곧 납득한다. 그래. 꼴에 기사서임을 받을 뻔 했다고 했지. 그리고 그 동안의 일도 있었고. 프란은 맡겨 주십시오, 하는 얼굴로 일어서더니 저벅저벅, 식당의 한 구석으로 걸어갔다. 식당의 맨 끝자리에는 청년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회색 로브를 둘러쓰고 앉아 있었다. 스프를 먹고 있던 청년은 프란이 다가오자 어깨를 움츠렸다. 프란은 그 앞에 선 채 삐딱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어이.” “어이.” 프란이 부르자, 청년이 흠칫했다. 로브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푸른색 머리카락이다. “미인이지?” 프란은 그 청년을 향해 고개를 낮추며 작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흘낏, 눈으로 저 멀리에 있는 반을 가리켰다. 푸른색 머리칼의 청년은 흠칫했다. 그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 아주요. 아주 엄청 미인이십니다.” “……저 사람은 남잔데?” 프란의 말에 청년은 잠시 멍한 얼굴로 네?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당연한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대하는 눈으로 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상대를 지정한 눈이다. “뭐야, 알고 있었군. 근데 왜 그렇게 봤지?” “네, 네?” 프란은 순간 눈을 무섭게 굳혔다. “살기등등한 눈으로 봤잖아, 방금 전. 순간적으로. 아니야?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었는데?” “그, 그런 적 없어요.” 청년은 더듬더듬 말했다. 얼굴이 확 붉어진 것이나 말을 더듬는 모양이 영락없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한 촌뜨기 청년인 것 같다. 프란은 그러나 이런 겉모습 보다는 아까 전,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시선을 훨씬 더 신뢰하고 있었다. “웃기고 있네. 방금 전에 너 확실히 이 쪽을 봤다고. 자, 로브 걷어주실까?” “시, 시비 걸지 말아요! 난 그냥 밥을 먹었던 것뿐이라고요!” 그렇게 말한 청년이 로브의 안 쪽을 휙 당겼다. 그 바람에 푸른색 머리카락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프란은 차갑게 식고 있을 크레이프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참 울먹거린 후 얼른 청년의 로브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럼 잠깐 얼굴만 보…….” 그러나 막 로브를 벗기려던 순간, 프란은 흠칫 한걸음을 물러섰다. 로브를 입고 있던 청년의 손에 들린 무엇인가가 날카로운 궤적을 흘리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단검이 한 자루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러지 마시오.” 청년은 방금 전, 쩔쩔맸던 것과는 달리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그대로 일어서서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프란이 그의 어깨에 거칠게 손을 올렸다. “그냥 얼굴만 보자는 것뿐이잖아!” 둘의 실랑이를 살펴보며 천천히 물을 마시고 있던 반이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여태껏 침착하게 프란을 피하던 청년이 갑자기 무언가 급한 듯 프란 쪽으로 휙 하고 검을 날렸다. 검은 프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정확한 각도를 그리며 프란의 어깨 쪽으로 날아 들어왔다. 깜짝 놀란 프란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프란은 앗, 하고 속으로 소리를 쳤다. 실버 블레이드는 그 때 뺏겼었어! 프란은 얼른 몸을 45도 정도 오른쪽으로 비켰다. 붕, 하고 청년의 검이 한 번 헛돌자 프란은 품 안쪽에 얼른 손을 집어넣었다. 반이 주었던 단검이 만져지자 프란은 그대로 그것을 뽑은 후 청년에게 휘둘렀다. ‘뭔가 있어, 이 자식!’ 아까 전, 그들을 노려보던 시선은 결코 평범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살의. 원래는 잘 갈무리하고 있었겠지만 한 순간 채 컨트롤하지 못하고 뻗어져 나온 그 무시무시한 기운. 갑작스러운 프란의 검에, 한 번 검을 헛휘두른 청년이 검을 회수하는 각도 그대로 그녀의 검을 막았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한 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반은 일어선 자세 그대로 팔짱을 꼈다. ‘끼어들지 마세요!’ 곧게 선 프란의 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청년은 흘끗 반의 얼굴을 살폈다. 반은 그 짧은 시선에서 그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 쪽을 알고 있는 거지? 저스티스 카르멘? 아니면 시즈 아일린 쪽인가. 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프란은 살짝 웃으며 한 발 물러서서 검을 휙, 하고 손아귀에서 한 번 휘둘렀다. 청년은 뭔가 다급한 듯 계속 반을 살피고 있었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버럭 화를 내며 그의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딜 보는 거냐, 이 자식아! 상대는 나잖아!” 청년은 프란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흠칫했다. 프란은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청년은 유려한 움직임으로 검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게 만들었다.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청년은 침착하게 검을 프란의 옆구리 쪽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 검을 흘릴 수 없음을 알고, 프란은 얼른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휘릭, 하는 소리와 함께 프란이 다시 자리를 잡는다. 프란의 얼굴에는 이미 어떻게 갈무리할 수 없는 즐거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이 청년과 왜 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어진 듯 했다. “어이. 왜 숨겨?” 그 말과 함께 다시 프란이 날아들었다. 청년은 깜짝 놀랐다. 자세를 정비한 후에 들어오는 공격은 대부분이 천천히 좁혀 들어오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정석과는 다르게, 프란은 무식할 정도로 남자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오른발을 남자의 두 다리 사이에 잽싸게 넣은 프란은, 남자가 자신의 무릎 쪽으로 검을 찌르듯 내리자 얼른 오른발을 옆으로 치워 남자의 다리를 쳤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남자가 다시 검을 내리려는 찰나, 프란은 얼른 오른발을 빼내곤 몸을 휙, 하고 틀어 반 바퀴 회전했다. 남자가 몸을 돌려 회전 후 균형을 채 잡지 못한 프란에게 검을 들이댄 순간, 프란은 가슴 바로 앞에서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남자가 움찔 몸을 틀려는 순간이었다. 프란이 갑작스럽게 오른팔을 굽히고 몸을 숙이더니 그대로 돌진하듯 남자의 배를 눌렀다. 육탄전이라도 하듯. ‘그렇게 하면 등 뒤가 비는 것도 모르나!’ 반이 소리를 치려는 순간, 남자의 검이 반의 예상 그대로 프란의 등 쪽으로 내려왔다. 프란은 그러나 다음 순간 놀랍게도, 오른발을 옆으로 길게 빼 몸을 깊이 낮춰 검의 각도가 어긋나게 한 후 남자의 손을 그대로 낚아채어 자신의 가슴께로 세게 잡아당겼다. 균형이 어그러진 남자가 검을 채 박을 틈도 없이, 프란은 그대로 자신의 등과 무릎을 굽히며 청년을 메어꽂았다. 힘이 아닌 기술이다. “헉!” 청년은 뜻밖의 공격에 무척이나 당황한 듯, 멍하게 누워서 다가오는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이 씩 웃으며 그의 로브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 때였다. 청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서더니, 그대로 프란에게 검을 날렸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긴장했고 그랬기에 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아니, 막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프란은 자신의 옆구리로 그리 깊지 않은 붉은 선이 하나 생겼다는 것, 그리고 남자가 그대로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고 어떻게 저지할 수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프란은 당혹감에 얼어붙었다. 반이 움직였다. 청년이 창문을 깨는 바로 그 순간, 반은 전속력으로 달려와 남자의 로브를 뒤에서부터 잡아챘다. 지익, 하고 로브 윗부분이 찢겨나갔다. 곧 눈이 부시도록 밝은 파랑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로브를 좀 더 세게 잡아당기자 옆얼굴이 보였다. “너……!” 반이 신음을 내듯 말한 순간, 청년이 있는 힘을 다해 그대로 창문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그 화려한 파란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던 반이 고개를 숙였다. 아는 얼굴이다. 그래, 맞다. ‘세라딘의 셀키. 영감의 열한 번째 개.’ 반은 찢어진 로브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 “……들켰다.”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 셀키는 찢어진 로브자락을 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맙소사. 식당 안에 그가 들어섰을 때 얼른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인 살의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미숙할 수가. 들키다니! ‘카세타에 세라딘이 있다’ 는 사실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셀키는 자신의 동료들을 떠올랐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셀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시즈 아일린이 여기는 웬일일까. 셀키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알려야했다. ▷◀▷◀▷◀▷◀▷◀▷◀ “방심만 하지 않았으면 이길 수 있었다고요!” 반은 아까부터 똑같은 소리만 하는 프란을 슥 하고 한 번 내려다보았다. 프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푸른 머리칼의 청년이 나간 창문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프란은 심지어, 정말로 심지어 크레이프조차 먹지 않았다. 식당 밖으로 나온 순간, 프란이 처음으로 던진 말은 방심하지 않았으면 이겼을 거라는 것이었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그녀답게도. “시끄럽군.” 반이 묵살하자 프란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까 그 푸른 머리칼의 청년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서야 폭발하듯 나온 실력이 진짜 그의 것이다. 자신이 하는 말은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 그래도 변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프란이 중얼거렸다. “아니, 이길 수 없었다. 너 같은 것 열명이 덤빈다 해도.” “하지만!” 프란이 멈춰 서서 소리를 질렀다가 반의 싸늘한 눈동자에 고개를 숙였다. 뭐하는 짓이냐, 프란 프리텐. 저 남자에게 다정한 위로라도 기대했느냐. 바보같이.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지. 프란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후 입술을 잘끈 물었다. 반의 목소리가 프란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녀석은 세라딘이다.” “세라딘…… 이요?” 프란이 조그맣게 되물었다. 반은 그 말뿐, 다른 말은 않았다. 반의 주먹이 꾹 쥐어졌다. 세라딘. 비켈린과 더불어 아일린 가의 수족과도 같은 존재. 그러나 비켈린과는 존재 의미 자체가 다른 단체다. 비켈린과는 상극. 외부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카제노를 마저 살핀다.” 반의 말에 프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반과 프란은 그 후로 두 군데의 카제노에 더 들렀다. 이제 네 군데밖에 안 남았군, 하고 반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막 안 쪽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허리를 굽실거리며 상인이 뛰어나왔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뭐가 필요하십니까?” “왕궁에서 나왔다.” 반이 여태까지와 다름없는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상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예에? 하고 소리를 쳤다. 상인은 그러나 여태까지 반에게 얼어붙었던 여타의 상인과는 달리 고개를 갸웃하며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아,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신분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 ‘가, 갖고 있었냐?’ 프란은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아무도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이 없어서 반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위조증이겠지만, 하고 프란은 힐끗 그 신분증이라는 것을 살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국왕의 옥쇄가 선명히 찍혀 있는 진짜 신분증이 아닌가. 프란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인간, 도대체 저런 건 언제 준비했단 말인가. 아니면 저런 걸 모두 가지고 있기라도 한건가. 상인은 그 신분증을 꼼꼼히 살피면서도 뭔가가 미심쩍은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여기 주인이 아닙니다. 한 3일 맡아보고 있는 처지라서. 그리고 사실 제가 신분증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안될까요?” “기다릴 수 없다면?” 반이 낮게 자르자 상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안된다면 강제로라도 잡아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로?’ 프란은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누가 누구를 강제로 잡아둔단 말인가. 상인의 주위에 있는 세 사람의 호위가 걸어 나왔다. 프란은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이 그런 프란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반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저 너머를 향해 크게 소리를 쳤다. “헤냔 드 키에르! 아나이스 폰 그란젤!” 저 골목 너머에서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던 헤냔 드 키에르와 아나이스 폰 그란젤은 흠칫했다. 둘은 ‘나가야 되는 거야?’ ‘부르잖아!’ ‘부른다고 나가? 우리가 개야?’ 등등 투닥이며 다투다가 반이 한 번 더 부르자 그제야 걸어 나왔다. 반은 무심한 눈으로 상인을 한차례 본 다음 말했다. “저기 두 기사가 내가 왕궁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겠군. 내 호위들이다. 증거가 더 필요한가?” 아나이스와 헤냔은 상황파악이 안되는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인은 두 기사와 냉정한 눈빛의 소년을 번갈아가며 살피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사, 살펴보시지요.” ▷◀▷◀▷◀▷◀▷◀▷◀ “뭔가 알아낸 거죠?” 헤냔과 아나이스는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 프란이 자신들을 보는 눈을 통해, 그러니까 가엾은 것들. 이용이나 당하고, 하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눈을 통해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는 것이, 반이 여태껏 그들이 프란과 반을 졸졸 따라다녔다는 것을 묵인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냔은 다른 걸 묻기로 했다. 프란과 반은 이번 상점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상인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상점이 굉장히 커다랬기 때문이다. 창고만 해도 네 개나 된다고 하니 그 것을 일일이 뒤지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프란과 반이 대답 없이 계속 상점 안을 살피고만 있자 헤냔은 다시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계속 저스티스 경과 그, 그, 프, 프란 프리텐이라는 시종은 카제노 상단만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저스티스 경. 당신은 뭔가 알아낸 것이 분명해요. 지금 폭탄을 찾고 있는 거죠? 그렇지요?”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냔과 아나이스는 멀뚱히 반과 프란이 하는 양을 보며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반이 입을 열었다. “‘가에린 상단, 제닌 고물상에 축제를. 카제노- 수도의 붉은 축복. 아산- 카세타의 상징.’” 아나이스는 뜻밖에도 반이 한 말을 재빠르게 알아들었다. “사실입니까?” 아나이스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지만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무렵 헤냔도 이해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수가! 기사단을 동원해서 찾아야 합니다!” 아나이스가 소리쳤다. “확실한 게 아니야. 그냥 어쩌다가 내가 알아낸 거거든.” 프란이 그 둘을 향해 말했다. 아나이스와 헤냔이 기막히다는 듯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모른 척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아나이스와 헤냔은 한참 멍하게 있다가 자신들도 갑자기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기 시작했다. “것 봐, 내가 뭔가 알고 있다고 그랬잖아.” 헤냔의 말에 아나이스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도대체 카르멘 가의 가주는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단 말인가. 저 시종이 얻었다는 말은 거짓말인 게 틀림없어. 게다가 왜 기사단에 알리지 않은 거지?’ 그러다가 문득, 아나이스는 다시 반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잠깐만요, 저스티스 경. 아산- 카세타의 상징은 무슨 뜻입니까?” “모른다.” “모른…… 예?” 아나이스가 버럭 소리를 쳤지만 반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헤냔은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잠시 흐른 뒤 문득 헤냔이 탁, 하고 손바닥을 튀겼다. “알았어! 아산- 카세타의 상징은 중앙광장을 말하는 거다!” “뭐?” “뭐?” 헤냔의 말에 아나이스와 프란이 놀란 듯 돌아보았다. 반도 소리는 지르지 않았으나 천천히 고개를 돌려 헤냔을 보았다. 헤냔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나이스.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라니?” “중앙광장에 있는 아산 전 국왕의 동상!” 물론 프란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수도를 제대로 돌아다녀봤어야 중앙광장에 뭐가 있는지 알 것이 아닌가. 시온과 함께 나가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때도 아산 전 국왕의 동상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 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헤냔을 보며 맞아, 라고 중얼거렸다. “그래요, 저스티스 경. 중앙광장이겠군요, 그렇지요?” “…….” “그래, 중앙광장. 거기가 폭발하면 수도가 난리가 나겠지. 빌어먹을! 가자, 헤냔!” 아나이스는 그 말과 함께 얼른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헤냔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가기 전 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저스티스 경! 그대는 카제노에 있는 폭탄을 마저 찾아 주십시오! 저희가 중앙광장으로 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헤냔과 아나이스가 뛰어나가자, 반과 프란은 조금 썰렁한 가운데에서 일을 계속해야 했다. 프란은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크게 기침을 했다. 먼지가 갑자기 일어난 탓이다. 그러다가 프란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중앙광장에 아산 왕의 동상이 있나요?” “모른다.” 그다지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반이 왕의 동상 따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거기가 폭발하면 어떻게 되죠?” 반은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알기에, 프란은 잠시 헤냔에게 감사했다. 너도 쓸데가 있구나, 헤냔 드 키에르! 장하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폭탄 찾는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반은 잠시 아산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래, 중앙광장에 아산의 동상이 있다면 그곳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수도의 상징이라는 건 무엇인가. 중앙광장이 수도의 상징이라는 건가?’ 반은 그렇게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러다가 프란이 흠칫 하고 멈춰 섰다. “가주님. 이거…… 말입니다.” “뭔가.” 반은 다가간 순간 입을 다물었다. 창고 구석에 있는 검은 천을 걷어내자, 궤짝으로 가득가득 쌓인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과일 궤짝이었는데 프란이 그것 중 하나를 열어 놓은 상태였다. 반은 하, 하고 잠시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폭탄이다. 창고 구석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사과궤짝에 반의 마른 웃음이 조금 커졌다. 이 폭탄이 모두 터질 경우 도대체 수도가 얼마만큼 날아갈 것인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한 궤짝으로 이 근방에 있는 다섯 가구 정도 정도는 충분히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산처럼 쌓여 있는 궤짝이라니! 프란은 그 폭탄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프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 주님. ……마, 마법사가 만든 시한폭탄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반의 얼굴 역시 조금 굳어졌다. “언제 폭발하지?” “8시. 8시입니다.” 그 전에 사람을 데려와야겠군. 반이 입술을 슬쩍 물었다. 일단 시온이라도 데려와서 폭탄 전체를 어디 먼 곳으로 텔레포트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반이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급히 그 곳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막 창고에서 나와 가게 바깥으로 나서려는 순간, 반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서둘러야죠!” 프란이 소리쳤지만 반은 굳어진 채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반의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영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옛날,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 그 때 격납고에 불이 날 뻔 했지. 격납고에 있던 그 화약들. 격납고를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지? 반은 머리를 치고 가는 둔탁한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프란 프리텐.” “예?” 프란이 몸을 휙 돌려 반을 보았다. 반이 문을 정면으로 보고 있으니 프란은 문을 등지고 있는 셈이다. 반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앙광장으로 가라.” “예?” 프란은 놀라서 반문했다. 반은 말을 이었다. “……헤냔 드 키에르를 찾아서 전해.” “예?”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프란을 향해 반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카세타의 현재 왕궁은…….” 그 말과 동시에, 반이 허리춤에서 자신의 검을 휙하고 뽑아 들었다. “이거야 원. 늦을 뻔 했군.” 낮은 목소리에 프란이 깜짝 뒷걸음질을 치며 품안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란은 서른 명도 넘는 남자들이 앞에 서 있는 광경에 턱을 떡 벌렸다. 모두 검을 보통으로 쓰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반은 프란의 앞을 슥 하고 막아섰다. 그의, 푸른빛을 발하는 검이 날카로운 잔광을 반사하며 놀랍도록 시린 빛을 냈다.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가라. 시간이 없다.” “가주님, 지금…….” “현 왕궁은 아산 전 국왕 때 완성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란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들은 눈으로 반을 보는 프란의 눈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아산- 카세타의 상징> 그 구절이 선명하게 뇌리에 박힌다. 반은 낮게, 프란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답을 말해주었다. “불꽃이 설치된 곳은 중앙광장이 아니라 왕궁이다!” =========================================== 너무 늦었습니다. 저번에 공지띄우고 잠적한 시간과 비슷하게 늦었군요. 그때와 똑같은 이유로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요, 새하얗게 불태웠습니다(.....) 오늘 오후쯤에 두편 정도가 더 올라갈 것 같습니다. -_ㅠ사실 쉬는 동안 글을 써두긴 했는데 옮겨적지를 못했습니다. 또 잠적했을까봐 걱정하는 분이 많으셨겠네요. 두려워서 아직 리플 못 읽어봤습니다;; 160개.. 이제부터 읽겠습니다.;; 기사단은 모두 중앙광장에 집결해 있었다. “정말 여기에 폭약이 설치되어 있는 게 틀림없나?” 런스는 아나이스와 헤냔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다시 한 번 아나이스를 향해 묻고는 기사단 전체에게 중앙광장 곳곳을 뒤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나이스와 헤냔이 맡겼던 말을 찾아 타고 기사들 전체에 알린 탓에 모두는 이 곳에 모여 있었다. 궁에 있던 기사들도 소식을 듣고 나왔다. 수도의 경비원들 역시, 흩어져서 보초를 서는 대신 이 곳으로 모여 있었다. 불꽃놀이라 칭해지는 이 재미도 없는 일 하나 때문에 기사단이 이처럼 농락당하다니. 런스는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비라도 죽죽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 폭약이 젖을 것이니. 아니면 이 수도 전체에 비를 내릴만한 대마도사가 카세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이다. 폭약을 찾아서 제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 수가 지나치게 많군요. 궁은 누가 지키고 있지요?” 일단 아산 전 국왕의 동상 주위를 살피고 있던 아나이스가 물었다. 런스는 답했다. “디센 기사단 절반과 약간의 보초병들이.” 그 말을 듣는 아나이스는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폭약제거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왕궁을 비웠단 말인가? “설마 보초가 그게 다란 말입니까, 단장님?” 아나이스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 프란은 입술을 꾹 물고 있었을 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반은 프란을 뒤로 보낸 채 뽑은 검을 천천히 앞으로 겨누었다. “왕궁에서 나오셨다고?” 서른 명의 남자들이 비죽이 웃으며 물었다. 프란은 검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몸을 앞으로 세운 채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물감’을 이미 봤군.” “악취미 같으니라고, 빌어먹을 자식.” 폭약을 물감에 비유하는 남자에게 짜증을 내듯 프란이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다가 반의 눈이 가볍게 들려올라갔다.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너는 뛰어라.” “가주님은……?” “막는다.”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시에, 반의 검이 공중을 좍 하고 가르며 앞으로 튀어들었다. 그것은 서른 명의 남자가 경계를 하고 있었어도 볼 수 없는 날카로운 검이었고,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움직인 것인지 알 수 없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아주 잠시지만, 그 한 번 휘두른 검으로 그들 사이에 틈이 생겼다. 반이 그 공간으로 뛰어들어 재차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프란은 지체 없이 반이 내어준 그 공간으로 달려 나갔다. 반은 프란의 주위를 검으로 보호하며 그녀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막 상대의 검에 당하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공간을 좁히고 넓히며 물러서는 반의 검은 프란에게 분명한 여유를 주고 있었다. “네 놈 누구냐!” 남자들 중 하나가 반의 검에 질린 듯 소리를 쳤다.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프란에게 말했다. “일단은 헤냔에게 가라. ……그리고, 시온을 데려와.” 반의 말에 프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흘깃, 그녀는 뒤를 돌았다. 막 프란이 골목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을 확인한 남자 셋이 이 쪽으로 달려오려고 하자, 반이 지체 없이 몸을 틀어 그들의 등을 베어버리는 것이 보였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한차례 몸을 숙였다 다시 일으킨 반의 머리카락이 그림처럼 아래위로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곧장, 반은 몸을 일으켜 프란이 달려 나간 골목의 앞을 막아섰다. 프란은 그 뒷모습에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반의 등을, 저 굳세 보이는 소년의 등을 보았다. 무려 서른 명이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저 쪽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이는데. 프란은 그러나, 고개를 돌리고 달려 나갔다. 명령을 한 건 가주. 어차피 따라야 하는 게 시종인 그녀다. “……죽지 마세요!” 프란이 전속력으로 뛰어가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프란은 반이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반은 대답했다. 그것도 목소리를 돋워. “헛소리!” 저 말이 다정하게 들리다니, 완전 미쳤군. 프란은 아무 생각도 않고 달리기로 했다. 그녀는 믿기로 했다. 그래, 반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멀쩡히 있을 것이다. 늘 그랬듯 그 차가운 얼굴로. 반드시. ▷◀▷◀▷◀▷◀▷◀▷◀ “헤냔! 헤냔 드 키에르!” 프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헤냔과 아나이스가 있을 중앙광장으로 뛰어들었다. 중앙광장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서 물어물어 가는 길이다. 초저녁 특유의 왁자지껄함이 온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 프란은 다시 소리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헤냔! 헤냔 드 키에르! 대답하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 빨리. 빨리 해야 된다. 늦다. 이대로라면 늦어. 안돼. 모든 것이 끝나버릴 지도 몰라. 프란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있는대로 돋워 크게 소리쳤다. “헤냔 드 키에르―!” ▷◀▷◀▷◀▷◀▷◀▷◀ 폭약을 찾다가 한숨 돌릴 생각으로 허리를 폈던 헤냔은 뜻밖에도 거리 저 쪽에서 뛰어오는 금색 머리카락에 놀라 등을 곧게 세웠다. 프란은 너무나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나머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꽤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헤냔은 프란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되어 있는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한걸음씩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프란과 헤냔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때 헤냔은 옛날의, 아주 옛날의 프란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프리나를 말이다. 처음, 견습 기사단에 왔던 프리나의 당돌한 눈동자와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충혈된 프란의 눈동자가 겹치면서, 데자뷰 현상이 일어난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프란의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키가 작아지고, 얼굴은 앳되어지면서 어린시절의 프리나가 된다. 그러나 고개를 좌우로 붕붕 휘저으며 눈을 한차례 비빈 헤냔은 다음 순간, 자신의 바로 앞에 우뚝 멈춰선 프란의 눈빛이 멈칫 얼어버렸다. 헉헉, 거친 숨을 내쉬던 프란은 단박에 바로 앞에 있는 헤냔의 어깨를 잡아챘다. 여자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다. 헤냔이 어엇, 하고 놀라며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프란은 헤냔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가뜩이나 거칠어졌던 프란의 호흡이 훅, 하고 헤냔의 귓등으로 뿜어졌다. 헤냔은 상황도 잊고 귓등까지 빨개져버렸다. 프란의 목소리가 천천히, 쉬어버린 숨소리 속에 들린다. “……중앙광장이 아니야, 헤냔 드 키에르. 궁이야.” “에?” 헤냔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기사단장에게 전해. 중앙광장이 아니야. ……현재 궁궐은, 아산 전 국왕 때 완성된 거래. ‘아산- 카세타의 상징.’ 그 구절이 의미하는 건 중앙광장이 아니라 궁궐이었다고!” 헤냔이 굳은 듯 섰다. 맙소사. 지금 뭐라고? 뭐라고 했지, 프리나? 헤냔은 잽싸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수도 전체에서 수상한 무리를 지켜보아야 할 수도 경비원들과 흩어져서 수도를 살피기로 했던 기사단이 모두 이 곳에 모여 있다. 궁궐을 지키고 있던 디센 기사단의 절반까지 이 곳에 나와 있다. 지금 궁은. 비어, 있어. 덜컥, 하고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몇 시쯤이나 된 걸까.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이 폭약을 찾는 기사들의 등을 물들이고 있다. 세상에.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중앙광장이라고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이 많은 기사들이 이 곳에 집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헤냔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세이피안에서 태어난 자신은, 몰랐다. 아산 전 국왕 때 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따위. “……구, 궁궐에…….” 헤냔은 더듬더듬 말하다말고 발을 헛디뎌 휘청였다. 프란은 그런 헤냔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듯,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헤냔은 프란의 강한 눈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얼른 런스에게로 달려갔다. 프란은 양 무릎에 양손을 각각 얹고 등을 구부린 채 헉헉, 하고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기사단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집결했다.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빨리 궁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을 보던 프란은 재빠르게 헤냔에게로 다가갔다. 프란은 산소부족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헤냔에게 말했다. “혹시 말 좀 빌려줄 수 있겠어?” 헤냔이 흠칫 돌아보았다. 아나이스가 함께 타자는 신호를 보내오자 헤냔은 자신의 말고삐를 프란에게로 건네주었다. 프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잽싸게 발로 말의 배를 때렸다. 히이이이잉! 말이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기사단이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프란은 곧장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로. ▷◀▷◀▷◀▷◀▷◀▷◀ 프란은 정신없이 달렸다. 급한 마음에 카르멘 가의 보초병이 가로막자 말을 달려 그들 위로 넘어가기까지 했다. 프란이 지나치자 한참 후에야 그 금색 머리칼 무법자가 가주의 시종이라는 것을 깨달은 보초병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프란의 뒷모습을 좇았다. 프란은 망설임 없이 장미정원도 말을 달려 지나친 뒤, 곧장 시온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시온이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듯, 조금 커진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아, 프란? 왜 그래?”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한참 말조차 잇지 못하는 프란을 보며 시온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온 것인가. 시온이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무슨 일이야, 라고 물으려는 순간 고개를 떨구고 있던 프란이 시온의 팔을 덥썩, 하고 붙잡았다. “시온 아일린.” “왜?” 시온이 당황해서 한 걸음 흠칫 물러서자 프란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저번에 확인했긴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자. 너, 마법사 맞지.” “확실히.” “……도와줘.” “뭐?” “곧 여덟시다. 제발, 빨리! 묻지 말고 어서! 카르멘 가의 검사들도 데려가자. 서둘러야 돼. 시간이 없어!” 시온은 프란의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곧 그는 프란이 잡고 있던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푼 후 옷장에서 지체 없이 망토를 꺼내 어깨에 둘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법 증폭기 하나를 허리에 둘렀다. 시온은 무슨 일에서인지 덜덜 떨리고 있는 프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진정해. ……알았어, 가자.” 프란은 순간 흠칫했다. 시온 아일린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고 부드러웠던가. 고개를 든 프란은, 다정한 눈으로 안심하라는 듯 웃고 있는 시온의 얼굴을 발견했다.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웃음이다. 곧, 카르멘 가에서 몇 마리의 말들이 함께 출발했다. ▷◀▷◀▷◀▷◀▷◀▷◀ 프란이 사라지자, 반은 곧장 비스듬하게 검을 누였다. 방금 전에는 프란을 보내기 위해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신경 쓰며 싸워야 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반은 부드럽게 검을 흘리며 휘둘렀다. 오늘 밤, 이 폭약이 터지는 일이 상당한 관건인 모양이었다. 지금 자신에게로 검을 부딪쳐 오는 남자들은 결코 평범한 검사가 아니었다. 숙련된 용병이거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 서른 명에게 둘러싸인 채로, 반은 어깨를 조금 내린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무서운 눈으로 한 쪽을 노려보았다. 흠칫, 하고 반의 시선을 받은 쪽이 굳어졌다. 반은 비스듬하게, 비웃듯 입술 끝을 올렸다. “그나마 네가 제일 낫군.” 그 말에 푸른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입술을 내리며 흘리듯 웃었다. 그는 아까 전 식당에서 반에게 로브가 잡아 채인 셀키였다. “정체를 감추는 건 포기했나, 11번째 세라딘?” 반의 말에 셀키는 입술을 씹으며 아무 말 없이 검을 내렸다. 반은 후우, 하고 웃으며 다시 검을 세웠다. 세라딘과 검을 섞는 건 처음이로군. 비켈린보다 강할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프란이 제대로만 알렸다면 궁 쪽은 기사단이 어떻게든 지켜줄 것이다. 곧, 무언가를 결정한 듯 갑작스럽게 그의 검이 움직였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빠르게 움직인 반의 검은 곧장, 바로 앞에 있던 한 남자의 몸을 꿰뚫고 빠져나왔다. 스륵, 하고 당연하다는 듯 사람의 몸을 침범한 검은 타 검과는 달리, 자신이 꿰뚫었던 육체에서 쉽게 뽑혀져 나왔다. 유려한 움직임이다. ‘이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다.’ 반은 달렸다. 오늘 정말로 ‘궁궐이 기습’ 당한다면 반대로 역적의 집은 비어 있을 것이다. 국왕. 나는 당신을 지켜주는 것보다는 내 가문이 우선이다. 낮게 중얼거린 반의 검이 곧장, 굵은 선을 내리며 흩어졌다. ▷◀▷◀▷◀▷◀▷◀▷◀ 프란이 헐떡이며 도착했을 때, 반은 팔짱을 낀 채 건물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프란은 멍하게 그런 반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러다가 프란은 하하, 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초조한 마음으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던 반은, 이제야 나타난 프란이 왜 웃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웃지?” “……걱정했던 제가 바보 같아서요.” 프란은 그러면서, 반의 칼에 맞고 누운 서른 명의 남자들을 질린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은 아무 말도 않았다. 셀키. 반은 속으로 조용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녀석은 싸우는 도중에 도망쳐버렸다. 반은 오른팔을 잠시 어루만졌다. “이거, 이거. 분위기가 너무 좋으니까 질투가 나는데요?” 반의 앞으로 불쑥 나서며 시온이 말했다. 프란은 이런 상황에서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는 시온의 어이없음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반은 흘끗 프란이 데려온 인원을 보았다. 카르멘 가의 검사 다섯과 시온. 반은 흘낏 창고를 가리켰다. “여덟시가 다 되어간다. 시온 아일린. 저것을 텔레포트 해라.” “‘저거’ 라뇨?” 시온이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프란은 미친 듯 말을 몰았을 뿐 설명이라곤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란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했는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은 시온을 데리고 폭약이 쌓여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사과궤짝 안에 들어 있는 그 엄청난 수의 폭약을 목격한 시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도 없는 곳. ……적색 산맥의 ‘마지막 눈물이 고이는 계곡’ 근처가 좋겠군. 텔레포트 해라.” 당황하고 있는 시온의 뒤에서 반이 말하자 시온은 하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곧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형님. 이만한 양을 텔레포트 할 능력이 저한테 있다고 보십니까?” “있다.” “이런, 이런.” 아무런 망설임 없이 튀어나오는 반의 긍정에 시온은 씩 웃었다. 한참동안 시온은 폭약이 든 사과궤짝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촉박해지고 있었다. 반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한 순간, 사과궤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시온이 반 쪽으로 빙글 돌아서며 그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곧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싫다면 어떻게 하실거요, 형님?” =========================================================== 분량계산을 실패했습니다..;;;; 한편을 더 만들기에는 양이 좀 부족하더군요;; 다음 번에 많은 양으로-_-; 하하;; 그리고 공지 사항 있습니다, 읽어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변명은 또 뒤에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뭘 하길래 안나오는 거야? 빨리 끝내고 튀면 오죽 좋아?” 프란은 투덜거리는 한편 잽싸게 검을 뽑아 들었다. 벅찬 호흡이 아직 진정되질 않는다. 프란이 검을 뽑자, 그녀와 함께 카르멘 저택에서 왔던 일곱 명의 검사들 역시 천천히 검을 뽑았다. 어찌되었든 검사가 같이 가면 좋겠지 싶어 데려온 사람들이었는데 오자마자 바로 덕을 볼 일이 생길 줄이야. “너희들인가?” “건방진 놈들.” 아까 전보다 많으면 많지 적지는 않아 보인다. 이번 폭약의 양을 보면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일지도. 천천히 이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한 눈에 보아도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반이 깨끗이 처리해놓은 잔당들을 보며 무서운 얼굴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곧 폭탄이 터질 시간인 것을 생각해보면 상대는 폭탄과 함께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프란은 독한 놈들,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주님이 혼자 하신 일을 일곱 명이 못하면 안 되지.” 검사 하나가 나직하게 속삭인 말에 검사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프란은 슬쩍 웃었다. “어이, 왜 나를 빼는 건데? 모두 여덟이라고!” 프란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핫,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놈들이 덤벼들었다. 프란은 그러나 이번엔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까는 반과 둘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까지 여덟 명이다. 게다가 함께 온 이들은 카르멘의 검사들. ‘꿇릴 거 없지!’ 프란은 씩 미소 지으며 제일 먼저 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차분히 자세를 잡고 있던 카르멘 가의 검사들은 그 움직임에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자신들을 이 곳에 데려온 것은 가주의 시종이었다. 그러나 재빠른 움직임으로 다가가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을 하는 프란의 모습은 일개 시종이라고 보기엔 도저히 무리다. ‘여덟이라고.’라는 말을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움직임. 프란은 날다람쥐 같이 달려갔다. 그런 그녀를 단박에 두 동강 낼 생각으로 한 남자가 도끼를 크게 쳐들었다. 프란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가볍게 뛰어가더니, 곧장 남자가 그 큰 도끼를 들어올리느라 생겨버린 빈틈 사이를 파고들어 그의 가슴 부분을 칼날로 스치듯 훑었다. 그리고는 억, 할 세도 없이 돌아선 프란이 곧장 몸을 숙이며 바로 뒤에 선 남자의 무르팍에 검을 꽂아 넣었다 뽑아냈다. “가주님한테 시종보다 못하다고 할 셈이냐?” 프란이 한 녀석의 어깨에 검을 찌른 뒤 훌쩍 뒤로 제비 넘기를 하며 도발적으로 뱉어낸 말에, 카르멘 가 일곱 검사들의 인상이 요란스레 일그러졌다. 그들이 무서운 움직임으로 달려왔다. 곧, 여기저기 할 것 없이 두 팀이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프란은 싸우는 틈틈이 힐끔 그 검사들의 검을 보았다. 찌르는가 싶으면 베고 베는가 싶으면 찌른다. 언젠가 런스의 검에서도 한 번 그렇게 느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카르멘 식 검인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묵직하다. ‘나도, 카르멘 가 검을 배우고 싶다. 이거 끝나면 한 번 말이나 해볼까?’ “시종, 조심해라!” 한 명이 내뱉듯 소리를 질렀다. 프란은 그 소리에 흩어져 있던 정신을 그제야 차렸다. 그녀는 심장 쪽으로 곧장 내뻗어오는 검을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한 다음, 춤을 추는 듯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숙이며 틈을 파고들었다. 워낙 유연성이 좋고 스피드가 있는 몸이라 사정범위를 단번에 좁혀 공격해야하는 단검이 의외로 잘 맞는 프란이었다. 한참 그렇게 싸우고 있는데, 카르멘의 검사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이봐, 거기 시종!” “프란 프리텐이다!” 검을 피하느라 허리를 반달모양으로 휙 젖히며 프란이 답했다. “가주님이 너무 늦으시는 것 같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 가주님한테 가봐라!” 프란은 아차, 싶다. 너무 신나게 싸우느라 그만 아예 일 자체를 잊었던 까닭이다. 이런 단세포 같으니. 프란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일곱 명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 얼른 창고로 달음질쳤다. ‘근데 도대체가 뭐하느라고 이 인간들은 이렇게 늦장인거야?’ ▷◀▷◀▷◀▷◀▷◀▷◀ 자신이 폭탄을 텔레포트 시키기 싫다면 어쩌겠냐는 질문을 던져 순간적으로 반을 긴장시킨 시온은 특유의 능글능글한 태도로 씩 웃어보였다. “형님.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수?” 그 말과 함께 시온은 사과궤짝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며 스르르 주저앉았다. “나는 아일린 가 사람이고 아직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잘난 녀석들’ 이 나란 놈한테 반했다고 했잖습니까?” 시온은 손가락으로 지익, 바닥을 긁었다. “여기서 내가 이 폭약을 옮기지 않고 내 한 몸만 텔레포트 한다면 폭약은 예정대로 터질 테고, 그럼 이 혼란을 틈탄 반역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겠지. 형님도 아시다시피 나도 초기 반역에는 약간 개입을 했다, 이 말이거든.” 시온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다. 밖에서는 또다시 싸움이 벌어졌는지 쇠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거슬리는 소리다. “어떻게 생각하쇼?” 반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바라는 게 뭐냐.” “나 이것 참. 이래서 형님은 재미없다니까.” 시온은 후,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린 뒤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사과궤짝을 손으로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리고는 반에게 등을 보인 채 작게 말했다. “시온 아일린이. 시온이 아닌 시온 아일린이 진짜 바라는 게 뭔지 생각해보쇼, 형님.” “……그건 안 된다고 했다. 이미 예전에.” 그 말에 시온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요, 좋아. 그럼 이걸로 해요.” 시온은 눈을 찡긋했다. “이 일이 끝난 뒤 아무 문책도 하지 않는 것. 그 정도면 딱 좋아요. 그리고 내가 텔레포트 한 후에 이렇게 시간 끈 것에 대해 복수하지 말 것. 이 정도 양을 텔레포트하고 나면 나는 아마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을걸.” 반은 아무 말 않았지만 시온은 그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온은 궤짝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손을 뻗은 그는 천천히, 그리고 공들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텔레포트 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무게라 주문을 영창 하는 과정에서 벌써부터 땀이 맺히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프란이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대체 둘이서 뭐 재밌는 걸 하길래 아직……!” 막 말을 하려다말고 프란은 멈칫했다. 반이 턱짓으로 시온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힐끗 그 쪽을 바라본 프란의 눈에 보인 것은 눈을 지그시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시온의 옆모습이었다. 프란은 놀라움에 입을 조금 벌렸다. 세이피안은 마법사가 극히 적은 국가이고 그 대부분이 은둔마법사라 실제로 마법을 행하는 것을 보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다. 프란 역시 마법을 본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온의 몸은 한참 동안이나 하얗게 빛났고 그 빛은 창고를 뒤덮을 만큼 커져 그대로 쌓여있던 사과궤짝들을 휘어 감았다. 빛은 잠시 후,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헉, 헉, 헉…… 흡.” 이윽고 빛이 꺼진 자리에서 미친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시온의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 놀랍게도 그 수많은 사과궤짝은 모두 사라져있다. 텅 빈 앞쪽을 바라보던 시온이 씩 웃었다. 그리고 휘청, 시온의 몸이 기울어졌다. 놀란 프란이 다가가자 시온은 그대로 쓰러지듯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어, 어이. 왜 이러는 거야? 어이?” 밀쳐낼 수도 있었지만 워낙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 프란은 시온을 그대로 부축했다. 시온은 대답하기도 힘든지 입을 열지 않았다. 온 몸이 들썩들썩 거릴 만큼 시온의 호흡이 벅차다. 반은 옆으로 다가와 시온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어 부축했다. “……무리했군.” “무리라는 거, 헉, 뻔히 알면서, 헉, 시키셨, 헉, 잖수!” 시온이 헐떡이며 한 말이었다. 프란이 슬그머니 손을 놓고 빠졌다. 시온은 반의 부축에 의지한 채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무언가 동그란 것이 시온의 손에 들려나왔다. 시온은 그것을 얼른 씹어 삼켰다. ▷◀▷◀▷◀▷◀▷◀▷◀ 창고 바깥으로 나온 세 사람은, 프란이 데려온 일곱 명의 카르멘 가 검사가 창고 쪽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완전 난리가 났군.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까 반이 혼자 30명, 이 사람들이 30명을 상대한 탓에 상단 앞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프란은 흘끗 반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일단 저택으로 가자.” 시온이 완전히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고 있었기에 일곱 명의 검사 중 하나가 그를 자신의 말에 함께 태웠다. 막 그들이 말을 출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펑! 펑―! “…….” “…….” 열명,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하늘로 향했다. 프란은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디서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위로 솟아올랐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피어나는 노란색의 불꽃이 선명하게 보이는 걸 보면 그리 먼 곳은 아닌 듯 하다. “어디서 진짜 불꽃놀이를 하네요. 속 편해서 좋겠군.” 프란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세타의 밤하늘을 수놓으면서 ‘불꽃놀이를 방자한 반역’ 이 아닌 진짜 불꽃이 오르고 있었다. 밤하늘을 찬찬히 물들여 나가는 그 어이없을 정도로 천진한 불꽃들을 조금은 허탈한 마음으로 올려다보며, 그들은 카르멘 가로 귀환했다. PART 16: 공주님 반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피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는 하루 종일 걸었고 많은 사람들과 검을 섞기도 했지만 지금 느끼는 피로는 그런 것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 피로에 가깝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목 부위를 주물렀다. 그저 습관이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해도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반역자의 가문이고 누가 확실한 자신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더더군다나 지금 기사들이 폭약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렸다면 국왕이 확실한 원조를 요청할 곳은 카르멘 가 한 군데뿐이다. 반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왕실에 사람을 보내는 것을 제일 반대했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 ‘게다가, 세라딘.’ 반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차피 세라딘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가문이 생길 때부터 존재한, 아일린이라는 거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원로원과 가주간의 약속이자 암묵의 룰이다. ‘비켈린’ 과 ‘세라딘’. 그러나 역시,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반은 자신에게 검을 들이 댔던 11번째 세라딘 셀키의 얼굴을 떠올렸다. “……힘들어 죽겠네.” 옆에서 프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제 더 이상 시종이 아니에요.” 반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그는 프란을 돌아보았다. “무슨 헛소리냐.” 반의 말에 프란은 곧장 대답해왔다. “난 이제 시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가주님, 나 월급이 도대체 얼마에요? 빚에서 깎이는 월급을 한 번 계산해 보고 싶어요.” 프란이 눈을 반짝이며 한 말에 반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막 그들이 카르멘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황금문으로 가까이 갔을 때였다. 프란은 얼른 말을 세웠다. “어라, 마린?” 거의 야생동물에 가깝게 눈이 좋은 프란이 훌쩍 말에서 뛰어내리며 마린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이들도 말에서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린이 초조한 얼굴로 황금문 앞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자신들을 기다렸던 듯 했다. “가주님!” 이 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린은 당장 반에게 뛰어왔다. 그리고는 반을 향해 속닥속닥, 잔뜩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프란이 생각했다. 마린의 말이 끝나자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알겠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대로 자신과 함께 돌아온 검사들에게 명령했다. “들어가서 자고 있는 사병들을 무장시켜라. 왕궁으로 간다.” “자, 잠깐만요, 가주님!” 그런데 반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마린이 깜짝 놀란 듯 반의 옷깃을 붙잡았다. 프란은 그런 마린을 향해 툭 하고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마린? 지금 가주님은 왕궁으로 가봐야 해. 하찮은 일은 나중에 해결하라고.” “하찮은 일이라니!” 마린은 버럭 고함을 쳤다. “키네세스 공주님이 납치됐단 말이야!” 순간, 반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해봐, 마린.” 프란이 얼른 그렇게 말을 던졌다. 마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오늘, 반이 아침 일찍 어딘가로 길을 나섰을 때 키네세스 공주가 이 저택을 찾아왔었다. 시온에게서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키네세스는 결국 혼자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애초에 국왕에게서 정식 윤허를 받지 않고 혼란을 틈타 호위무사 너댓만 거느린 채 무단으로 궁성 밖으로 나왔던 키네세스는, 돌아가던 길에 한 무리에 의해 납치를 당해버린 것이다. 키네세스 공주를 모시던 나머지는 괴한에 의해 죽고 유일하게 살아있던 호위무사 하나가 한참동안 기절해 있다가 방금 전에야 다 죽어가는 몰골로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카르멘 가에 와서 전했던 것이다. ‘카르멘 가주님의 연인이자 제 3공주이신 키네세스님이 납치당하셨습니다, 흐흑! 빨리 구해드려야 합니다. 벌써, 그게 몇 시간 전 얘깁니다. 거기 끼어 있던 녀석 중에 하나가 옛날에 같이 검을 배운 선배처럼 보였습니다. 그 쪽은 저를 못 봤겠지만……. 분명, 예전에 이스티네 가문으로 들어가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란이 인상을 팍 썼다. ‘또 보일린 그 변태 자식이냐! 아주 여자 납치하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는 놈 아냐?’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온은 그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보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아, 근데 이건 짚고 넘어갑시다. 언제부터 공주님이 형님 연인이었수? 형님, 안 그런 척 하면서 은근히 사귀고 있었수? 이거 너무한데. 나한테라도 말해줬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웃자고 한 시온의 농담에 웃어 줄 만큼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무거운 공기에 반의 차가운 반응까지 어우러져 사람들은 로이네트 북부에 있는 듯한 추위를 느껴야만 했다. 저런 빌어먹을 자식. 프란은 시온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추워죽겠는데 아주 사람을 얼리려고 작정을 했군! 시온은 물론 프란의 그 살인적인 눈에 당장 꼬리를 내렸다. “가서 사병들을 무장시키라 했지 않나.” 그러다 그 무거운 공기를 깨뜨리며 반이 다시금 명령했다. 공주가 납치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잠시 얼어있었던 검사들은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사람들이 뛰어가자 마린은 반을 보며 초조한 눈을 했다. “어쩌실 겁니까, 가주님? 구해드려야죠!” “시간 없다.” 반이 잘라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발끈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배려가 넘치는 시온도, 왕족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초조해하고 있던 마린도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요!” 고함을 빽 지른 건 프란이었다. “시간이 없다니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프란은 당황한 듯 반의 옷소매를 잡았다. 반은 뭐냐는 눈빛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그 분, 키네세스 공주님은 적어도 가주님의 친구 아닙니까? 시간이 없다는 한마디로 그분을 그렇게 간단히 포기하는 겁니까?” 반은 아무 말도 않았다. 프란은 답답함에 더욱 반의 옷소매를 세게 잡았다. 물론 그녀도 안다. 반에게 키네세스를 구하러 갈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이 중 그것을 제일 잘 아는 것은 바로 반과 함께 폭탄을 찾아냈던 그녀다. 그는 지금 당장 사병을 끌어 모아 왕궁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것이 가장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 역시 안다. 시온은 그런 프란을 보며 훅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살짝 긁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공주님이 납치된 거, 형님 만나러 왔다 가는 길에 당한 거잖습니까.” “…….” “이거 어쩌면 나중에 상당히 곤란할 수도 있다고요. 아시다시피 국왕 폐하께서 공주님을 오죽 사랑하십니까. 아주 애정의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아끼시잖수? 공주님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또 어쩝니까.” “시간 없다.” 반은 똑같은 말을 반복한 후 가차 없이 말에 올랐다. 그새 준비가 되었는지 사병들과 문하생들이 황금문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프란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프란은, 갑자기 당돌한 눈으로 말 위에 탄 반을 올려다보았다. 곧장 자신의 시선을 무시하려는 반을 올려다보며, 곧 그녀가 다짜고짜 밝은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얼마 주실래요?” “……프란?” “엥?” 갑작스러운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시온과 마린이었다. 프란은 활짝 웃어보였다. “가주님. 이스티네 저택이라면 저도 꽤 뛰어봤잖아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반이 잠시의 짬을 두고 그렇게 말하자, 프란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천만 케트. 어떻습니까? 자신 있습니다!” 프란의 말뜻을 그제야 눈치 챘는지 시온과 마린이 질린 눈을 했다. 반은 프란을 빤히 보았다. 프란은 이쯤이야 뭐 어때요, 하는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크게 한 번 얽혔다. 사병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궁으로 출격할 차례라고 말이라도 하는 듯. 반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가 컨트롤이 안 된다. 강압적으로 눌러도, 목숨을 위협해도, 결국엔 저렇게 어느 순간 탁 하고 튀어버린다. 뭘 생각하는 걸까. 저 눈동자로 또렷이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맡겨주세요, 라니. 반은 한 번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다. 프란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언제나 그렇듯 침묵은 긍정. 그녀는 반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꼭 성공하고 오겠습니다, 가주님! 일 끝나면 곧장 그 쪽으로 갈게요!” 반이 대답했다. “필요없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웃었다. ▷◀▷◀▷◀▷◀▷◀▷◀ “나는?” 반과 그의 사병 등이 떠나간 자리에서, 시온은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놈의 변태 소굴에 다시 한 번 가는 거야 뭐가 어렵겠어. 사실 별로 가고 싶진 않지만, 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프란은 시온의 그 말에 곧장 고개를 돌리며 내뱉었다. “어이. 마법을 써서 체력도 잔뜩 바닥난 주제에 누구 짐이 되겠다고 ‘나는?’ 이라는 거냐? 방금까지 헉헉대고 있던 놈이. 약이라도 처먹었냐?” “어떻게 알았어? 맞아, 나 약 처먹었어.” 방금 전까지 헉헉대고 있던 주제에 ‘나는?’ 하고 묻는 시온을 비꼬기 위해 물었던 프란은 부드럽게 웃으며 약 처먹었다고 답하는 시온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아, 좀 더 덧붙이자면 체력 회복약. 아까부터 약효가 돌고 있었어. 우리 사부님 특제야.” 그 말과 함께 시온이 주머니에서 동그랗고 빨간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자그마한 구슬처럼 보인다. “후후. 꽤 대단한 우리 스승님이 머리 쥐어뜯어가며 3년 걸려 만든 거야. 사실 이런 경우 아니면 별로 쓸모도 없지만.” 프란은 그래도 영 떨떠름한 얼굴로 시온을 보았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넌 방해만 될 것 같은데? 너, 몸이나 제대로 숨길 수는 있냐? 검도 못쓰잖아.” 그 말에 시온은 가볍게 브이 자를 그려보였다. “그래도 난 마법사잖아. 나, 꽤 쓸모 있을 걸? 게다가 목적지가 이스티네 가라면 더더욱.” “엥? 그건 또 무슨 말이냐?” ▷◀▷◀▷◀▷◀▷◀▷◀ ‘이런 뜻이었냐, 이 자식아!’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프란은 시온이 말한 ‘게다가 목적지가 이스티네 가라면 더더욱’ 의 말뜻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보일린의 집에 도착한 직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공주님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시온은 웃으며 제안했다. “일단 내가 저택 반대쪽에다 마법을 쓰지. 주의가 그 쪽으로 쏠렸을 때 재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말은 좋다만 이 담을 어떻게 넘을 건지도 좀 설명해 보시지?” 프란은 높고 견고하기가 그지없는 이스티네 가의 성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전에도 한 번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이 귀족가 성벽의 높이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응? 그거야, 간단하잖아?” “뭐가 간단한데?” 시온은 후후, 하고 웃으며 프란 쪽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사실은 저 쪽 풀덤불 밑에 개구멍이 있어.” “뭐, 뭣이? ……도,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에 놀란 프란이 묻자 시온은 고개를 45도 각도로 꺾으며 우울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후훗. 남자의 과거를 알려고 하지 마, 다쳐.” “알고 싶지도 않아! 눈 깔아, 임마! 느끼해!” 물론 시온이 다음 순간 프란에게 구타당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잠시 후, 시온은 차분한 태도로 눈을 감고 주문을 구사했다. 프란은 이번에도 신기하다는 듯 시온의 손동작과 입술을 숨죽인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시온은 입술로만 중얼중얼 뭔가를 외우고 있었는데, 마법사란 항상 정확한 발음으로 마법주문을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프란은 그 점이 조금 의아했다. 잠시 후 저택 저편에서 커다란 광구가 솟아올랐다. 5써클의 마법 라이트닝 써클이다. 저택의 경비원들이 갑자기 나타난 그 마법구에 놀랐는지 소란스러워진다. “좋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 시온은 그대로, 위로 올렸던 손바닥을 휙 하고 아래로 젖혔다. 동시에, 광구가 저택의 아래쪽을 향해 처박히듯 내려 꽂혔다. 저택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쪽이야!” 그리고 시온은 주저 없이 성벽의 오른편에 있는 숲덤불을 헤집었다. 놀랍게도 정말 거기에 ‘개구멍’ 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개구멍’ 이다. 시온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너무나 능숙한 그 모습에 프란은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 도대체 뭐하고 다닌 거야, 이 놈!’ 시온의 능숙한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선 프란은, 정원의 바깥쪽을 크게 돌아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호흡을 길게 늘였다. “이쪽으로 가자.” 프란이 시온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후훗, 달밤에 프란과 데이트를 하려니 심장이 두근두근 하는데?” 이 상황에서도 능글능글한 말을 늘어놓는 시온의 발을 꾸욱 밟으면서, 프란은 어쩐 일인지 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놈의 거창한 불꽃놀이 중 하나는 막았다. 혹시나 기사단이 궁궐에 있는 폭약이 터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그 경우에 그 곳으로 달려간 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 쓸데없는 생각. 프란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짧은 단검이 닿은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이스티네 저택은 마법 때문에 소란스러웠던 것을 순식간에 가다듬고 다시 보초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프란은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어쩔 생각이야? 이 넓은 저택을 하나하나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 사실 짐작되는 곳이 있는데.” 시온의 속삭임에 프란이 작게 답했다. 시온이 놀란 눈을 했다. “우리 둘 정말이지 환상의 콤비인 게 분명해, 프란. 한 명은 개구멍을 알고 있고 한명은 공주님이 납치된 방이 짐작이 된다니. 후후.” “시끄럽군.” “……너 점점 형님을 닮아 가는 거 알아?” 프란은 시온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얼른 검을 빼들었다. 쉬익, 하는 작은 소리에 시온은 긴장한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후, 하고 잠시 웃었다. 둘은 호흡을 가다듬고 문으로 달려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저택의 문 앞에는 따로 보초가 없으나 서너 명 정도가 비스듬하게 선 채로 있다가 가끔씩 저택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 서로 숫자를 세고 막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우당탕! “……!” 프란은 움찔하고 얼어버렸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정원 밑에 얕게 깔려 있던 있는 자갈을 밟고 넘어진 것이다.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문을 지키고 있던 보초 셋이 순식간에 두 사람이 숨어 있던 수풀 더미 속으로 다가왔다. “누구냐!” 창이 곧장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공간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여기서 세 사람을 모두 처리하면 소동이야 일어나겠지만, 그다지 무리하는 일도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싸운다!’ 그렇게 결심한 프란이 막 검을 치켜 올리고 뛰어나가려는 순간, 시온이 단검의 끝을 조심히 잡고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찡긋, 프란을 향해 윙크를 해보였다. “여기선 내가 희생하지.” “시온?” 프란이 놀라서 그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시온은 낮은 정원수와 수풀 속에서 재빠르게 기어 나왔다. 프란은 막 그의 옷소매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시온은 프란을 한 번 돌아다본 후, 부드럽게 웃더니 그대로 앞으로 뛰어나가버렸다. 프란은 입술을 꼭 물었다. '야, 시온!' 시온은 낮은 정원수와 수풀 속에서 재빠르게 기어 나왔다.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점점 거리를 좁혀오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누구냐!” 시온은 부드럽게 화답했다. “난 이집 아가씨의 아리따움에 반해 담장을 넘어온 남자, 시온 아일린! 오랜 연인을 보러 왔소! 이런, 몰래 오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 휘청. 엄청나게 긴장한 채 언제라도 뛰어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프란은 순간 휘청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라고 했소?” 경비병이 묻자 시온이 웃어보였다. 곧 그는 능글능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시온 아일린! 얼라리, 이거 벌써 내 얼굴을 잊어버린 거야? 가끔씩 보기도 했을 텐데. 비엘이 내 얘기 하면서 눈 감아 주라고 하지 않던가? 아아, 혹시 나에 대한 마음이 식어서 이젠 살짝 담장을 넘어온 남자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하라고 말해?” ‘비엘?’ 순간, 프란은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움찔했다. 비엘이라면, 분명 그녀였다. 축제에서 그들을 덮쳤던 남자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비엘 아가씨를 감히! 이 개망나니 같은 자식!’ 맙소사. 프란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그 비엘이라는 여자가 이스티네 가문의 아가씨였단 말인가. “따라 오시오.” 경비원이 시온에게 말했다. 시온은 망설임 없이 경비병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휙, 하고 옆으로 젖혀 보였다. 자신이 주의를 끄는 사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프란은 씩 웃었다. “이 자식아, 개구멍 아는 것도 이 것 때문이었냐.” 시온은 엣취, 하고 가볍게 기침했다. ▷◀▷◀▷◀▷◀▷◀▷◀ “폭탄이 터지지 않아?” 하리나스 백작은 소리를 쳤다. 벌써 시간폭탄이 터져야할 시간이다. 수도의 한 부분이 완전히 날아가고 불꽃에 휩싸여야 마땅하다. 왕궁에서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아름답고 거대한 혀를 내보이며 하늘로 치솟아야 할 불꽃.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예, 터지지 않았습니다. ……확인했더니 만일을 대비해 가까운 곳에 남겨두었던 녀석들이 모두 당한 듯 합니다. 아무래도 저스티스, 그 자가!” 하리나스 백작은 이를 악 물었다. 저스티스, 저스티스, 그 놈의 저스티스! 대체 뭐란 말인가.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카르멘 가주가 황실에 악감정이 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왕실에 차가웠던 주제에, 실상 도와줄 것은 다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하리나스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폭 탄이 터지는 것을 막았다는 것은 냄새를 맡았다는 증거. 정보가 확실히 새어나갔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당장 오늘 밤에 있을 축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축제를 벌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다. “궁은?” 하리나스 백작이 초조한 듯 물었다. 이미 그의 뒤로는 이 날을 위해 그와 보일린이 몰래 길러온 병사들이, 그리고 그에게 동조한 귀족가 세력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얼마 전 몰락한 귀족의 집을 다른 사람의 명의로 사둔 이래로, 하나하나씩 눈에 띄지 않게 병사들을 이 쪽으로 옮겨왔던 하리나스 백작이다. 궁궐까지는 불과 10분의 거리. “궁은 걱정 없습니다. ……방금 기사단원들이 돌아왔긴 한데…….” “뭐? 기사단원들이 돌아와? 분명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야 할 터인데!” 하리나스가 깜짝 놀란 듯 묻자 남자가 인상을 그었다. “예, 조금 전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녀석들은 절대 궁 안에서는 폭탄 못 찾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오늘이 끝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옳은 말이야.” 옆에 있던 보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나스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큭큭 소리죽여 웃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부딪쳐 보는 수밖에. 그리고 만일에 만일을 위한 카드가 남아있기도 하고. 하리나스 백작은 보일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저 카르멘 가가 어떨지 살짝 염탐하러 갔던 보일린이 얻은 수확은 엄청난 것이었다. 키네세스 제 3공주라니. 늙어빠진 왕. 그 자는 자기 셋째 딸을 너무 아끼거든. 보일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확실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나, 키네세스 제 3공주와 카르멘 가의 가주는 서로 마음을 준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은 더 쉬워진다. 게다가ㅡ 다행히 가장 경계했던 카르멘 가에서의 지원이 아직 없다. “헤이튼이 막아준 것인가.” 하리나스 백작의 말에 보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헤이튼 그 작자가 얼마나 약았는지 그대도 잘 알지 않소. 이번에도 그가 카르멘 가에서 빼돌린 녀석은 겨우 서른 명이오, 서른 명! 꽤 정예이긴 하지만. 우리가 실패할 것을 고려해서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더군. 후, 한 배를 탔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하리나스 백작은 웃었다. “그만 투덜거리게. 이제 시작이지. ……우리에겐 ‘그들’ 이 있잖은가.” ▷◀▷◀▷◀▷◀▷◀▷◀ 프란은 저택 안을 도둑고양이 같이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일단 자신이 갇혀 있던 그 방으로 먼저 가볼 생각이었다. 그 방은 생각만 해도 화딱지가 나는 공간이었지만 역시 가능성이 제일 큰 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창문도 없는 방이고 완전히 고립된 형태로 설계된 방이니까. 저택 안은 한적했다. 최소한의 보초만 남기고 보일린이 모두 데려간 탓이다. 그런데 막 소리죽인 발걸음으로 코너를 도는 순간. ‘저 인간이 왜 여기에?’ 프란은 당황함에 잠시 굳어버렸다. 도저히 여기에 보일리가 없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뭔가 싶어 프란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그의 뒤를 밟았다. 스웬. 카르멘 가의 전용 의사. 이 자가 도대체 여긴 웬일이란 말인가. 프란은 검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밑으로 늘어뜨린 채 스웬의 뒤를 차근차근 밟았다. 그리고 막 그가 코너를 꺾어 도는 순간, 벽에 기대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겨나가던 프란은 움찔 멈춰서고 말았다. ‘으아아아! 이건 꿈이야, 꿈. 크아아악!’ 바로 저 앞에, 언젠가 그녀와 그렇게 큰 일전을 치룬 적이 있었던 바로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프란을 감시하다가 온갖 험한 꼴을 다 당한 바로 그 남자. 그 외에도 또 다른 한 명. 프란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앉아 있는 의자로 배를 친 것도 모자라 얼굴을 밟기까지 했는데. 그런 자신과 재회한 저 자가 얼마나 반갑게 자신을 맞아줄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스웬은 두 남자가 지키고 서 있는 방 앞으로 가서 섰다. 웬일인지 문 앞에 서 있던 남자 둘은 스웬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스웬은 언제나 흘리던 그 비굴한 웃음 대신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스웬의 얼굴은 순간적이면, 반과 비슷한 빛을 띄었다. ‘뭐냐, 저 인간?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지키고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문틈에서 프란은 보고 말았다. 기다란 물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바다빛의 눈동자를. 그건 의심할 여지도 없는 키네세스 공주였다. 그 사이로 막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곧 닫힌 문 사이로 사라졌다. 프란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 양이 좀 적습니다. 사실 앞부분 수정 때문에 조금 바빴습니다, 게다가 도중에 편수가 날아가서... 앞부분은 어떻게 조달을 했습니다만 뒷부분은 조달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여러분께 가지고 계시면 달라는 부탁까지 해야만 했습니다.(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무사히 받았습니다ㅠ_ㅠ 가장 먼저 주신 두 분께는 책 나오면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책 나오면 다시 따로 메일 보내겠습니다.) 이제 글이 올라갈 겁니다;; 약 3일 후부터 정상적인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정상적인 연재란 격일 연재 정도... 를 말합니다;) 카페에 글을 못올렸습니다. 조금 있다 올리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일이 많았습니다. 또 공지 없이 연중했을까봐 걱정하셨을 많은 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공주님 파트와 파트 17이 끝나면 저도 조금 수월하게 쓸 수 있을 듯 합니다. 13편부터는 주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면 곧 다시 뵙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오늘이 마감날이었습니다;; 일신상의 문제로 연재가 무지하게(....무지하게무지하게....)늦었습니다. 항상 뭔가 한다! 이제부터 이리저리하게 하겠습니다! 라고 한 뒤에 잠적을 하는 본의 아닌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채, 책이 곧 나올 것 같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또 천천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오랜만이니 글부터 올리겠습니다. 좀 깁니다. (앞에 무슨 얘기였지? 하고 뒤적여보실듯 하군요;; 그동안 리플 확인은 무서워서 또 못하고 말았습니다.) ======================================================= ‘요즘 내가 하는 일이 어찌된 게 무슨 암살자나 해결사 같군.’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기척을 최대한 숨기려고 애썼다.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스웬이 여기에 왜 있는지는 정말로 궁금한 일이지만 ‘야, 여기 웬일이야? 우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부드럽게 브루스나 한 번 춰보자고.’ 라고 말할 시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일단 스웬이 가고난 뒤에 저 두 남자를 해치우고, 키네세스 공주를 데려가야 한다. ‘시간아. 시간아. 빨리 좀 달려라. 으아. 나 진짜 말라 죽겠거든?’ 프란은 초조하게 바닥을 긁으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안에서는 사람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프란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꺾었다. 혹시 저 방에 들어선 그대로 나오지 않을 생각인가. 심장에 손을 얹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말없이 긴장을 확인시킨다. 흥, 웃기지 말라 이거야. 프란은 입가를 조심스레 비틀었다. 그래,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말이지. 겁먹지 마라, 프란 프리텐. 세상은 배짱인거다! 배짱으로 되지 않은 일이 있었어? 한 번 결심하고 돌진한 뒤에 후회한 적이 있어? 없다. 프란 프리텐 사전엔 적어도. 무슨 일이든 진심으로, 정말로 죽을 듯한 긴장감 속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다. 프란은 검집을 왼손에 잡은 채 조심스레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한걸음씩 물러선 그녀는 부메랑을 던질 때처럼 재빠르게 검집을 든 채로 몸을 휙 젖혔다. 막 그녀가 그 검집을 저 너머로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찰칵. ‘……죽이는 타이밍이로군.’ 그녀가 몸을 완전히 뒤로 젖힘과 동시에, 저 앞의 문이 열렸다. 프란은 씩 웃으며 높게 올렸던 왼손을 다시 밑으로 내려뜨렸다. 좋아, 좋아. 조금 더 기다려주지. 문 사이로 스웬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스웬은 아까와는 달리 이가 드러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얼른 문이 보이는 곳으로 가까이 간 프란의 입꼬리가 재빠르게 밑으로 쳐졌다. 순식간에 온 몸으로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이다. 스웬의 표정은 마치, 어느 무법자가 연약하고 여린, 무엇하나 제대로 할 힘이 없는 작은 꼬마 아이를 유린한 뒤 짓는 표정과도 같았다. 저항할 힘이 하나도 없는 여린 생물을 무자비하게 괴롭힌 후 싸늘하게 내려보는 그런 눈. 비웃는 눈. 상대의 무기력함을 조롱하는 눈. 자신의 잔인함에 만족하는 눈. 프란은 그런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싹, 등줄기부터 시작해서 온 몸으로 소름이 돋는다. 떨림이 손까지 전해지려는 찰나, 프란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떠올리지 마!’ 잘 되지 않는다. 기억이 덮친다. 무언가를 먹어치울 듯이. 엄청난 기세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프란 프리텐!’ 요란하게 지른 소리와 함께 프란은 재빨리 검을 들어 자신의 오른손목 부위를 얕게 찔렀다. 따끔한 기운이 스쳐지나간 뒤, 오소소 작은 핏방울이 맺힌다. 그 핏방울들이 다시금 긴장을 불러 세운다. 스웬은 문을 닫은 뒤 흑, 흑, 하고 우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오싹해서 프란은 무언가 못 볼꼴을 본 기분이다. 스웬이 밖으로 나오자 문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그녀에게 당한 적이 있던 바로 그 남자가 스웬에게 다가갔다. 곧 무언가 쑥덕거리던 그들은, 복도 저 편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프란은 조심히 신발을 벗었다. ‘좋았어!’ 두 사람 중 하나가 자리를 떴다. 아마 지금 자리를 뜬 것은 단지 스웬을 배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곧 돌아올 터. 프란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저 먼 곳까지 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단검을 손 안에서 한바퀴 빙글, 하고 돌렸다. 그리고는 처음의 계획대로 왼손에 든 검집을 그대로 들어 부메랑처럼 저 편을 향해 날렸다. 휘익.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는 검집. 곧이어,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타이밍도 훌륭하게, 챙캉! 검집이 복도로 떨어졌다. “누구냐!” 남자는 당황한 듯 검을 뽑은 채 검집이 떨어진 쪽으로 달려 나갔다. 프란은 얼른 움직였다. 그녀조차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마치 밤에 녹아든 암살자 같은 움직임이다. 곧장 달려가 공중으로 몸을 띄운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보인 남자의 머리를 두 토막 낼 듯 위에서 아래로 커다랗게 검을 휘둘렀다. 챙! 다음 순간, 프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젠장, 내가 쥔 건 단검이었어! 또 까먹었냐, 이 빌어먹게 단세포인 녀석아!’ 단검으로 커다랗게 베기를 들어간 것이 문제다. 원래 쓰던 실버 블레이드였다면 지금 이 타이밍으로 남자의 머리를 두 쪽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이 단검은 프란이 공중에 몸을 띄우는 그 찰나의 순간 몸을 돌린 남자의 머리에 박힐 만큼 그 검날이 길지 않았다. 남자와 프란의 눈이 한차례 얽혔다. “누구냐.” “웃기네. 알아서 뭐해?” 프란은 낮게 말하며 남자가 균형을 잡기 전에 얼른 공격했다. 남자는 비틀, 하면서도 프란의 검을 흘리듯 받아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래봬도 나, 검 좀 쓰걸랑?” 프란은 비죽 웃으며 말한 뒤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며 그대로 힘을 주어 남자의 왼 가슴을 베었다. 그리고는 훌쩍 물러선 프란은, 확인을 하듯 남자의 목에 다시 한 번 칼을 박았다. 남자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프란은 검을 재빨리 회수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미안.”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은 프란은 더듬더듬 남자의 몸 어딘가에 있을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열쇠는 남자에게 있었다. 프란은 열쇠를 들고 일어서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미안해.” 아직은 그다지 이런 일에 익숙하지 못해. 가주놈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고도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프란은 낮게 중얼거리며 발을 옮겼다. ▷◀▷◀▷◀▷◀▷◀▷◀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남자의 시체를 질질 끌어 방 안으로 끌고오며 프란은 입을 열었다. “공주님?” 저 가까운 곳에 있는 키네세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프란은 훅 하고 숨을 뱉었다. 시간이 없다. “이리 오세요, 공주님. 어서!” 프란의 부름에, 키네세스는 멈칫하고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프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프란과 키네세스의 눈이 마주쳤다. 막 서두르고 있던 찰나였으나, 프란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곧 저 계단을 밟고 스웬을 배웅했던 남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 남자를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키네세스까지 데리고 도망가면서? 아니, 그건 무리다. 그런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키네세스가 뿜는 기운에 완전히 감전된 느낌이다. 키네세스는 멍하게 프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주님!”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프란이 한차례 더 불렀을 때다. 한참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키네세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힘없는 걸음걸이로 막 이 쪽으로 오는 키네세스가 보였다. 그 모습에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얼른 그 쪽으로 달려간 프란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인가요?” 문득 키네세스가 말문을 열었다. 공주가, 그 도도하고 화려해보이던 그 키네세스 공주가. 멍하게 이 쪽을 보며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네세스의 눈물에 프란은 깜짝 놀라고 만다. 게다가 어딘가 멍하게 나사가 풀려버린 듯한 이 표정.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 거지? 프란은 얼른 공주의 어깨를 잡아 부축을 했다. 키네세스는 휘청, 하면서 프란의 옷깃을 아슬하게 붙잡았다. “공주님!” 프란은 나머지 한 손으로 그런 키네세스의 허리를 둘렀다. 답답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를 내며 달려올 것 같은 존재들 때문에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다. 공주가 함께 움직여줘야 탈출도 쉬운데! 키네세스는 프란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한차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공주의 눈동자에 뭐가 맺혀있는지 프란은 잠시 알 수가 없었다. 키네세스의 푸른 눈에서 어느 순간 눈물이 똑, 하고 떨어져 내렸다. 키네세스가 다시금 입을 연 건 눈물이 곧장 바닥에 작은 파문을 남긴 그 순간과 일치했다. “……그 사람이, 첫째 오라버니래요…….” 그 말은 처음에, 제대로 된 문장으로써 프란에게 인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은 그저 웅얼거림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존댓말. 도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키네세스는 갑자기 프란의 어깨를 꾹 붙잡았다. 아까 그렇게 힘없이 비틀거렸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프란이 놀라 움찔 한 발자국 물러서려는 순간 키네세스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저스티스 경, 흑…… 저스티스 경…… 그 사람이, 아아! ……으흑.” “공주님, 공주……!” 갑자기 오열하는 키네세스를 막기 위해 프란이 그녀를 끌어당기려는데 프란이 프란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대로 쓰러지듯 무너졌다. “저스티스 경…… 어머님이…… 저스티스 경…… 흑, 그,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버지를, 카, 카세타를, ……나를! 아, 아아. 저스티스 경. 안돼요. 안돼, 그게 정말이라면 모두가 끝이야. ……거짓말이야. 그런 건, 응? 저스티스 경. 도와줘요, 응? 도와줘요! 아, 안돼. 그럴 수 없어. 응? 안돼요, 그건 안돼. 응? 저스티스 경. 흑, 사랑해요, 도와줘요, 사랑해요…….” 키네세스의 태도에 프란은 완전히 당황해버린다. 키네세스의 여윈 손마디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프란의 옷깃을 꼭 잡은 그녀는 프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저스티스 경.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내가…… 응? 내가 어떻게 하죠?” 정신적 공황상태다. 프란은 당황에서 벗어나 자신을 힘껏 움켜쥔 키네세스의 손을 떼어냈다. 키네세스가 울며 그녀를 올려다본 순간, 프란의 손이 높게 들려졌다. 짜악! 짜악! 키네세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이었을 것이다. 양 뺨을 정확히 한 대 씩 때린 프란은 차분한 태도로 키네세스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예전에 견습기사단장 아샤휘에게 배웠던 그대로, 락케이드에게 배웠던 그대로, 키네세스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일어섰다. 시간이 없기에 사죄의 표시도 간결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진지하고 정중한 프란의 두 눈에 키네세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키네세스는 머리가 흔들리는, 뇌까지 흔들리는 듯한 묘한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마치, 영상처럼 방금 전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의식이 돌아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저스티스가 서 있는 듯 했던 공간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닌 금발의 소년이 있다. “아?” 키네세스가 앗, 하는 소리를 내자마자 프란이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는 돌아보며 씩,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걱정 마세요. 곧, 가주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키네세스의 묘하게 변해가는 표정은 보지 못한 채, 프란은 키네세스의 손을 잡고 조심히 복도 쪽으로 움직였다. 막 방문이 열리고 프란이 주위를 훑어보는 사이, 키네세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분인가요?” “……예?” “그 분이 보내셨나요?” 프란은 순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묻는 키네세스의 눈동자가 너무나 깊어서 당황한 것이다. 열일곱 살이라는 공주의 애정은 생각보다도 훨씬 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공주님, 대단하시군요. 프란은 따끔거리는 가슴을 꾹 하고 한 번 누른 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예, 물론입니다. 가주님이 보내셨어요.” 키네세스의 환하게 펴지는 얼굴에, 프란은 피식 쓰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 “하, 하하, 아하핫!”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만.” “응, 정신 나갔어.” 헤냔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웃으면서 상대의 말을 긍정했다. 그러나 정신이 나갔다고 말한 아나이스 역시 싱글싱글 웃는 낯이다. 아니, 좋아죽는 얼굴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다. 아나이스는 헤냔의 뒤통수를 딱, 하고 한 대 갈긴 후 다시 한 번 크게 피식 웃었다. 그러자 헤냔이 아나이스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가서 알려드려.” “내가?” 아나이스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헤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알았어!” 아나이스는 좋아라고 얼른 달려갔다. 그런 아나이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헤냔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했다. 헤냔의 그 곱상한 얼굴 위로 기쁨이 번져 올랐다. 다행이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어서, 하고 중얼거린 헤냔은 쪼그리고 앉아 다시금 살펴보고는 헤헤 하고 웃었다. ‘이걸로 프리나한테 좀 자랑해도 될까? 카르멘 가주한테도 얼굴 좀 들 수 있겠고.’ 사실 헤냔이 이걸 찾은 건 우연이었다. 온갖 사람들이 궁성의 온갖 곳을 뒤지며 찾고 있는 동안 가장 붉어진 얼굴로 가장 열심히 찾은 사람은 물론 두말할 것 없이 이 팔팔한 소년 기사 헤냔이었다. 헤냔은 온갖 곳을 머리카락 날리게 뛰어다니며 찾았고, 그런 그의 상태는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그런 헤냔의 시선이 앞 정원의 분수에 가서 멎은 것은 차라리 우연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는 며칠 전에 그 분수에서 물이 새서 궁성의 외부에서 전문가가 찾아왔다는 것을 기억해냈고, 그와 동시에 조금 묘한 것을 발견해냈다. 헤냔은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뒤, 그대로 분수의 물이 오르는 뾰족한 틈새를 커다란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헤냔이 막 행동을 시작했을 때 모든 기사들은 ‘미쳤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이, 헤냔. 뭘 하는 건가.” 보다 못한 케이온 기사단원 하나가 물어오자, 아까부터 헤냔을 지켜보고 있던 아나이스가 대신 답했다. “보면 몰라? 삽질.” “……확실히 이중적 의미의 그 삽질?” “그렇다고 해둬.” “내가 보기엔 망치질 같은데?” “……농담할 때냐?” 둘은 평소 버릇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며 킬킬거리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단장님이 우리한테 너무 좋은 걸 가르쳤어.” “언제 어느 때나 농담할 수 있는 정신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야.”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곧,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바쁠 때 뭘 하는 거야? 아나이스, 헤냔 좀 말려봐.” 아나이스는 그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돌려 헤냔을 살폈다. 그러나 헤냔의 눈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아나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눈 돈지 오래 됐어. 헤냔 눈 돌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아나이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고 그 기사단원은 상황이 상황이 아님에도 곧장 그 곳에서 신경을 꺼버렸다. 헤냔이 ‘눈 돌아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케이온 기사단원들은 지긋지긋하게,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헤냔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더듬더듬 돌조각 속에서 검은 것이 만져지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견고한 것이 물에 젖지 않은 채로 분수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헤냔은 저도 모르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헤냔? 찾았다고?” 궁 전체로 넓게 퍼져서 폭탄을 찾고 있던 기사 몇 명과 런스가, 아나이스의 뒤를 따라서 헤냔 쪽으로 다가왔다. 헤냔은 분수대 앞을 가리고 있던 몸을 비켰다. 거의 다 부서진 분수대의 조각들과 그 틈 사이로 드러난 검은 것을 본 런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시한폭탄인가?” 그 말에 함께 온 마법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돌조각을 조금 치워낸 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건 아니고 스위치로 조정하는 폭탄인 것 같군.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말이지. 지금 조치하겠소.” 아나이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냔 역시 한 걸음 물러선 후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안도의 한숨이다. “어차피 수도궁의 성벽을 깨고 올만한 대단한 부대가 올 리가 없고, 습격을 한다 해도 우리는 성 안에 있으니 이젠 한시름 덜어도 되겠지?” 아나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그 때였다. 폭탄을 해제하고 있던 마법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이상하군.” “이상하다니?” “폭탄의 양이 너무 적어. 이 정도라면 이 근방은 모를까, 성벽을 날린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한데.” 헤냔은 순간 허리를 곧추세웠다. 불길한 생각이 난 탓이다. 아니, 설마. 헤냔은 조금 웃었다. 그럴리가. 안 그래도 경비가 삼엄한 궁궐이다. 분수대 같은 곳에 숨긴것만해도 충분히 놀라운데 도처에 폭탄을 숨겨놓는다는 물론 불가능한 소리…… 콰콰콰콰콰콰쾅! 바로 그 때였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모두는 저 멀리에서 치고 들어오는 흰 연기에 넋을 잃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축이 흔들리고, 요란한 소리에 귀가 멍멍해진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채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나가고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구토감이 머리까지 치밀어오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제 3궁과 이어진 저 끝의 성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글부글 치밀어오르는 속엣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나이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소에 차분하기 그지없는 런스도 마찬가지였고 몇 년간을 궁성마법사로 살아왔던 몇몇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폭탄, 이라는 것을 각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설마…… ……설마 정말로 터질 것이라고는. 아아, 살피소서, 신이여. 콰콰콰콰콰콰쾅! “이런 젠장!” 요란한 소리가 한 번 더 들린 뒤, 가장 먼저 헤냔이 소리를 치며 뛰어나갔다. 잠시 멍하게 있던 사람들 역시 미친 듯한 속도로 그의 뒤를 따랐다. 성벽이. 무너졌다. ▷◀▷◀▷◀▷◀▷◀▷◀ “공주님, 얘기를 해주세요.” 프란은 그렇게 말했다. 키네세스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잘게 떠는 것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몸을 마비시키는 긴장감에 반쯤 떨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리 얕지 않은 왼쪽 팔 안의 상처가 말의 흰 갈기에 묻어 긴 핏자국을 남기고 있다. 다각, 다각. 말을 달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짧고 맑게 번져나간다. 조용한 수도의 밤거리.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량한 밤공기가 키네세스의 긴 푸른색 머리카락을 한바탕 흩어놓고 지나갔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덕택에 세게 일어난 바람이 양 볼에 부딪쳐와 프란과 키네세스의 뺨은 똑같이 붉어져 있었다. “공주님.” 키네세스는 부름에도 대꾸하지 않은 채 프란의 등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만히 깜빡였다. 둘은 막 저택에서 빠져나와 말을 탄 참이었다. 다행히도 프란의 극약처방이 통했던 것이다. 완전히 얼이 나간 듯했던 처음과는 달리, 키네세스는 재빠른 행동으로 프란의 말에 따라주었다. 뛰는데 방해가 될 것 같다며 프란이 단검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찢는 것에도 키네세스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저택을 빠져나오는 동안 경비를 두세 명 마주쳤지만, 프란은 날렵한 동작으로 정확하게 그 모두를 처리했다. 도중에 날아든 어떤 검이 그녀의 왼팔에 흉측한 키스마크를 남기긴 했지만, 둘은 다행히도 무사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막 성밖으로 나와서 호흡을 고르는데, 키네세스가 반쯤 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궁으로 가요, 한시가 급해요.”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위엄과 고고함이 있었지만 채 숨기지 못한 떨림 역시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예? 지금 궁은 위험합니다. 공주님은 차라리 안전한 곳으로 가 계시는 편이…….” “……그 남자가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어요. 내가 가야해요.” “그 남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프란이 낮게 되물어도 키네세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꾹 쥐어보였을 뿐. 키네세스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바르르 떨렸다. 뭘 생각하는 걸까, 이 공주님은. 그러다가 프란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어깨를 탁탁 쳤다. “예, 예. 좋습니다. 그럼 가지요. 말에 타세요!” 시원스레 승낙하는 프란의 태도에 놀란 듯 키네세스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곧, 말이 출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달렸다. 그러다가 한참, 아까의 일로 평정을 되찾았다 싶었던 키네세스가 다시 떨기 시작하자 프란은 얘기를 해달라고 말했다. 무언가 입술을 움직여 말을 한다면 그나마 좀 나을 것 같았기에. 한참동안 아무 말 없던 키네세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말이에요.” 프란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키네세스의 목소리에 흠칫 등을 세웠다. “나는 내가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키네세스는 웃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프란은 최대한 말을 빨리 달리려 노력하면서도, 뒤편에서 나직나직하게 들려오는 키네세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인의 매혹적인 숨소리. 프란은 웃는다. 젠장, 남자였다면 지금 아주 환장한 기분이겠군. 미모의 공주님을 단신으로 구한데다 말 한 마리에 의지해 같이 가는 상황이라니. 프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네세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였어요. A와 B가 있으면, 나는 직감적으로 B가 옳다는 것을 알아요.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직감적으로 B가 옳죠. 이러저러해서 B가 옳다는 것을 아는 게 아니라, B가 옳다는 것을 입 밖으로 낸 후에야 갑자기 그것이 옳은 정당한 이유들이 떠올라요.” 프란은 순간적인 황당함에 엥?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내가 말을 시키라고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러나 상대는 카세타의 공주님. 프란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나에게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능?” “그래요. 재능.” 키네세스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바람결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손가락에서 뭔가가 바스락바스락 마른 듯이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이거다, 싶으면 반드시 그것이었죠. 그것을 재능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 당신의 주인을 만났을 때 쭉 그렇게만 생각해 오던 내 내부에서 무언가가 변했어. 그 전에는 내 재능을 믿고, 그리고 그것에 의지해 자신만만해 했죠. 믿었어요. 내가 여자고, 나에겐 오라버니들보다 지지자가 없다고는 해도, 그래도 내게는 그 모든 불리함을 극복해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이에요.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결코 내가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나의 모든 형제들 중에서는. 오히려 월등하다고 생각했죠. 맞아요, 나는 왕위에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프란은 하마터면 헤에, 하고 소리 내어 휘파람을 불 뻔 했다. 프란은 키네세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낱 시종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좀 평범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을 텐데.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뜻에서 말을 시켰더니 한다는 소리가 왕위에 관심이 있다고? 물론 그녀도 왕의 직계혈통인데다 아직 황태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으로 미루어 왕위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공주이고 여태껏 카세타에서는 여왕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그녀에겐 제대로 된 명분이 하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 하나가 바로 목을 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도대체 무얼 믿고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카르멘 경과.” 키네세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카르멘 경과 처음 만났던 날 말이에요. 날씨가 굉장히 좋은 날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때는 나, 어렸고 게다가 철없던 때이기도 했지요. 난 그 당시에 카르멘 경을 건방지다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왕실 주최 무도회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는 걸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서 아바마마가 청하는 여러 가지 행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걸까. 일종의 오기였어요. 그런 거 말이에요, 알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네까짓 게 뭔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하는. 아무리 카르멘 가의 가주라고 해봤자 그는 내 아버님의 국민이고, 결국엔 이 나라의 귀족이니 내 발밑의 사람인걸.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그 사람에게 만나자마자 도움을 받았어요. 아바마마가 저에게 딸려 보내신 보좌관 두 명과 기사 세 명, 나까지 그렇게 여섯이서 처음 카르멘 가 정원의 풀을 밟았던 걸로 기억해요. 명목은 함께 차라도 마셔요, 라는 것이었지만 저도 알고 있었지요. 아바마마는 그 때부터 벌써 저스티스 경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거예요, 저의 상대로 말이에요. 그렇게 처음 만난 저스티스 경은, 우습게도 말이에요. 정말 우습게도, 악독하다는 소문이 무색하리만치 어린 사람이었어요. 물론 나이보다는 훨씬 성숙해보였지만, 그래도 어리다는 걸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 지금도 그렇게 젊은데 몇 년 전에는 오죽 했겠어.’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키네세스의 말이 이어졌다. “예쁘장한 모습이 어떤 여인들보다 매력적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까지는 그냥 그랬어요. 굉장히 차갑고 도도한 인상이었지만 어려 보였으니까 아, 어리구나. 어려서 뭘 모르는 거야, 조금 더 자라면 이 사람도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구두에 키스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갑작스레 나타난 자객을 향해 검을 뽑았을 때, 머리가 싸늘해졌어요. 그 때의 감각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주변에는 나를 호위하기 위한 기사나 보좌관 외에도, 카르멘 가의 무사들이 있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건 뭔 줄 알아요? 자객이 나타났는데도 카르멘 가의 무사들이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어. 정말 너무나 아무렇지 않다는 시선으로 무사들 모두가 자객을 보는 거였어요. 기사들은 나를 보호하는데 바빴죠. 왜 카르멘 가의 무사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을까. 묘하게도, 나는 그 무사들이 저스티스 경을 자객 속에 던져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스티스 경이 그 순간, 그 강하고 얼음같은 사람이 너무나 가엾고 외로워 보였죠.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건 저스티스 경을 믿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니,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나는 그가 검을 휘두르고, 그리고 가볍게 맺어 끊듯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그 차갑기 그지없는 태도에서 이미…… ……어이없게도 이미, 반해버렸으니까.” 키네세스는 자그맣게 웃었다. “궁으로 돌아와서 내가 맨 처음에 노트에 쓴 말이 뭔 줄 알아요? 나보다 못한 남자에게 반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는 거였어요. 그 얼마나 우스운가요. 이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니 그 얼마나 한심한가요. 그러나 사실이었어요. 이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내가 사랑한 사람이 저스티스 경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때부터 뭔가 변했어요. 여기쯤에서.” 키네세스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물론 말을 몰고 있는 프란은 보지 못했다. “여기쯤에서 무언가가 변했죠. 그래요. 조금 더, 느긋해지고 차분해지고. ……사랑에 빠진 소녀라면 누구나 그렇다고, 유모가 말해주었어요. 재밌는 일이에요. 그래서 더욱 더. 더욱 더 갖고 싶었어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나란히 서고 싶었어요. 그 사람의 옆에.” 잠시 둘 사이로 긴 바람이 스쳤다. 이제쯤엔 키네세스도 완전히 평상심을 찾은 것 같았다. “……공주님.” “네?” “왜 하필 지금 그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키네세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얘기는 감사하게 잘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듣기엔 좀 과분한 내용도 있는 것 같고, 에에, 뭐라고 해야 하나, 저한테 알려주시면 곤란한 얘기도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키네세스는 프란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본다. 솔직하기도 하지. 기분 좋은 사람이다. 키네세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니까, 라고 해둬요. 내가 너무 흥분해 있었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말을 해달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방금 전에 만났던 한 남자가 던진 말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고 거짓말이 되어 뒤섞여 버렸거든요. 그래서 내겐 얘기 거리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단 하나, 지금 내게 정말 단 하나 진실인 것이 있다면 카르멘 경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인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얘길 했어요. 그 얘기밖에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의 깊이. 그런 건 어떻게 측정하는 걸까.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측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깊다. 이 공주님의 마음. 프란은 쓰게 웃었다. “이제, 빨리 달려줘요.” 키네세스의 말에 프란은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예! 전속력으로 달려보겠습니다.” 키네세스는 엷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은 아까 들은 진실을 상기해내고는 차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보는구나, 공주님.’ 그녀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카르멘 가의 전용의사. ‘아니, 누이동생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길 거에요. 길죠? 두 편으로 나누려다가 그냥 올립니다. 책이 막바지 작업에 있습니다. 애초에는 10일까지는 나와야해! 미루고 미뤄서 그 날이야, 정도였는데 제가 너무나 게을러서(예, 죄송합니다) 조금 늦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이 올라가고 또 5일 정도 글이 올라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거니 저라도 질려버리겠군요(웃음) 오랜만에 어느 작가분이랑 대화하는데, 그 분이 그러시더군요. 그 분: 그 정도로 연재를 안하셨다구요? 가넷: .......예에. 그 분: 이건 좀 잔인한 질문인데... 가넷: (꿀꺽) 그 분: ............비축분은 있으신가요? 가넷: ㅠ_ㅠ 또 오랜만에 친구와 대화했는데, 녀석이 그러더군요. 친구: 어쩔거야? 네가 무서워해서 리플 대신 확인해줬는데, 쿵쿵따하고 있어; 가넷: (쿵쿵따 무서워함) .....어떡해;ㅁ;! 친구: .....이제 너의 독자들은 '이게 가넷의 주기로군. 세 편올리고 한 열흘 쉬고 세편 올리고 열흘 쉬고.' 하는 식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 정도로 심각해. 뭐, 태반이 너에게 질려서 포기했을 거라는 너의 말은... 음. 원래 판타지 쓰는 사람들의 주기가 이런거냐? 가넷: ............ 예에, 예에. 곧 돌아옵니다. 정말로 곧 돌아올게요.(정말? 여행은? OT는? 따위는 미뤄두도록 해요, 우리)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예쁜 책과 함께 오겠습니다. 무책임하지만 무양심하지는 않은 가넷이었습니다. part 17: 격돌 헤냔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빔과 동시에 스파크가 크게 일어난다. 이런 바보 같은! 어째서 폭탄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버린 걸까. 어째서 단언한걸까. 먼지가 부옇게 일고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헤냔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면서도 결코 물러설 생각은 않았다. 눈이 따가워 절로 눈물이 났지만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뛰어나간다. “젠장할!” 헤냔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헤냔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그러나 모두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 제 3궁이 파괴된 자리에서 일어난 엄청난 먼지가 그들의 접근을 용납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가장 먼저 달려나가 그나마 다른 사람들보다 멀찍이 다가선 헤냔은, 한참 만에 가라앉은 먼지 속에서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똑바로 앞을 바라본 순간, 헤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악감이 온 몸을 덮치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전원, 전원 정렬! 단장님! 케이온 기사단 전원……!” 헤냔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헤냔의 눈에 가득 찬 것은 일단, 말이었다. 뿌연 안개 탓에 더 으스스해 보이는 주변의 배경이 헤냔을 압박한다. 말과 그 위에 탄 사람들. 그건 두말할 것도 없는 반군이다. 헤냔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헤냔! 수는 얼마나 되나!” 런스가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당혹스러운 일이 터졌다 해도 그들은 왕실의 기사. 위급할수록 냉정을 잃어서는 안된다. 기사들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저마다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단장님. 각오 단단히 해야겠습니다.” 헤냔은 대답하는 한편 그 역시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전투태세를 잡고 있었다. 헤냔의 뒤편에 서 있는 기사단에게 적의 모습은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모두는 속으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지금 궁을 지키고 있는 것은 케이온과 디센 기사단 그리고 궁의 경비원 몇몇 뿐이다. 그러나 국방을 지키고 있는 군대가 있으니 그때까지 견디면 된다. “기사단 동료들 모두에게 전한다. 모두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워!” 헤냔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 그 순간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은 저 너머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한 무리에, 기사들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으…… 윽.” “……노, 농담이지?” “세상에.” 무너진 성벽의 틈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군사들 앞에서 기사단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만한 숫자의 병력을 가지고도 그토록 얌전히 엎드려 있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3궁이 전복되면서 생긴 틈은, 그나마 제 3궁 주변을 두르듯 세워진 제 4궁과 제 5궁이 무너지지 않은 탓에 그리 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틈 사이로 좁게 들어서는 반군의 숫자는 할말을 잃게 만들 만큼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우, 우리는 그 때 반란군을 소통 했어…….”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건…… 저건 다 뭐야?” 기사단장인 런스와 메이스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 상황이나 적군의 숫자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기사단 내부의 엄청난 술렁임에 당황한 것이다. 단 한 번도 이만한 폭발을 경험한 적이 없는 기사단이다. 설마하니 궁성 내부까지 적이 진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 분명한 기사단이다. 그 사실에 대한 경악이 적에 대한 경악으로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다못한 런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 위로 치켜들었다. 사기를 북돋는 말을 할 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정신 차려, 이 미친 새끼들아!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셈이냐?” 기사들은 흠칫했다. 사나운 얼굴을 한 여기사. 아나이스 폰 그란젤이다. 그녀의 얼굴이 차게 굳어있다. “다들 죽을 각오로 싸우라고 했잖습니까!” 이어 기사단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막내인 헤냔의 목소리. 헤냔은 그렇게 소리침과 동시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키르, 위험해!” 갑작스러운 그 움직임에 놀란 아나이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그녀의 고함소리는 곧장 들려온 말발굽 소리에 묻혀버렸다. 아스라이 멀어진 헤냔의 뒷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수십의 기사들이 헤냔의 뒤를 따라 돌격해갔다. ◀▷◀▷◀▷◀▷◀▷◀ “……잠시 시간을 끌어. 뒤에 방어선을 만들겠다.” 디센 기사단장 메이스가 런스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4궁과 제 5궁 사이에 둥근 대형으로 밀집해 서서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빌어먹을!” 그렇잖아도 먼지가 콧속으로 사정없이 스미는데, 저 앞쪽의 반군은 말을 앞세워 더더욱 크게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헤냔은 눈을 부릅떴다. 먼지 탓에 벌써부터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헤냔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맨 앞에 있는 말의 다리를 그대로 베어 들어갔다. “으아아악!” 카세타 건국 783년, 어느 새벽의 일이다. ◀▷◀▷◀▷◀▷◀▷◀ “막아, 막으라고!” “호슨! 죽지 마!” “……정신 똑바로 차려!” 아비규환이다. 몇 안 되는 궁중 마법사들은 기사단의 뒤에 몸을 숨긴 채로 마법을 쓰려고 시도는 하고 있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공격력이 큰 마법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그렇잖아도 제 3궁의 전복으로 제 4궁과 제 5궁에 어떤 무리가 갔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격범위가 큰 마법을 사용할 경우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싼 채 방어선을 치고 있는 기사단이 전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뭐라도 좀 해보란 말입니다.’ 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기사단의 눈빛에 잔뜩 위축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데로 뒤엉켜서 싸우는 앞쪽의 적군과 아군을 어떻게 분리해서 타격을 입히란 말인가. “억! ……으아아아아아악!” 퍽! 가슴이 일자로 갈라진 한 기사가 땅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적군의 말이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기사들은 동료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었다. 평소엔 실실 쪼개는 걸 좋아한다해도 그들은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검사들을 모아 이루어진 궁성의 기사단이다.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군대를 막아서며 방어선을 지키는데 급급해 있었다. 그러나 공격하는 입장과 지키는 입장이 다른데다가 상황은 기사단에게 너무도 불리했다. 일단 수적인 열세가 너무 컸다. 게다가 적군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몇몇은 쉽게 베어낼 수 있는가하면 다른 몇몇은 기사들의 실력을 웃도는 검술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마저 있었다. ‘씨팔.’ 그러다 적군 하나를 막아선 런스는 속으로 욕지기를 했다. 지금 자신과 검을 맞대고 있는 자가 쓰고 있는 검법이 자신의 것과 동일한 줄기에서 나온 것임을, 검이 몇 번 섞인 끝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카르멘 가의 사람이다. 머리끝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가와 턱으로 흘러 있는 런스 카르멘의 눈은 분노로 번뜩이고 있었다. 런스는 휭, 하고 그대로 상대의 어깨를 베어 들어갔다. 무지막지한 분노가 그대로 담긴 일격이었다. “네놈들이!” 촤악! “네놈들이 감히 가주님이 계신데도……!” 촤악! 한 쪽 방어선이 일그러지듯 옆으로 기울 때면 기사단에서 이름난 실력의 소유자들이 당장 그 쪽으로 옮겨가서 싸우는 사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자니 체력이 딸릴 수밖에 없다. 기사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히 지쳐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제 3궁의 무너진 틈으로 들어온 적군은 이제 슬슬 공격대행을 정비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가라앉았다 싶었던 먼지는 그치지 않는 격돌로 스멀스멀 다시 모두를 압박하고 있다. 런스는 한 명을 베어버림과 동시에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목으로 재빨리 훔쳤다. 그러다 그의 시야에 문득 분주하게 움직이는 초록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헤냔이다. “하압!” 그의 시야에 맺힌 헤냔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런스가 봐온 중 가장 흥분한 모습의 헤냔이다. 헤냔은 한 명을 베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다른 한 명을 베었는데 그런 그의 적색 눈동자는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런스가 알기로, 헤냔의 근육은 그렇게까지 격렬한 움직임을 제대로 견딜 수 있을 만큼 잘 발달되어 있지는 않았다. 벌써 그렇게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검을 쓴 지가 몇 십 분이 흘렀으니 오른쪽 어깨에 마비가 올만 한데도 헤냔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겠군.’ 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런스는 깨닫는다. ‘헤냔, 이 녀석……!’ 케이온 기사단은 물론이고 디센 기사단 역시도 그랬다. 그들은 검을 쓰다, 쓰다 힘에 부칠 때면 꼭 한번씩 헤냔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으로 힘을 얻는다는 듯이. 그리고 헤냔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그 자리에서 멀리 움직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막내인 꼬맹이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지금 뭐하는 거지?’ ‘선배 체면 구기는군.’ 팔이 떨어져나가고 옆구리 살이 드러나고 말에 짓밟히면서도 일어난다. 런스는 다시 검을 꾹 쥐었다. 기사단은 헤냔 키에르가 언제부터인가 기사단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방어선을 사수해라! 곧 지원이 있을 것이다, 사수해라!” 그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느 상황에서도. ◀▷◀▷◀▷◀▷◀▷◀ 헤냔은 멈칫 한걸음을 물러섰다. 아까부터 팔 근육이 뜨겁다. 평소라면 이렇게 무리하는 검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 덥다. 앞에 있던 상대가 그런 헤냔을 향해 무겁게 검을 겨누고 그대로 찔러왔다. 헤냔은 몸을 반 바퀴쯤 회전했다가 검을 들어 그 날로 상대의 목을 내리쳤다. 시간은 기사단 모두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방어선은 휘어진 날렵한 부메랑 모양에서 찌그러진 곡선으로 그 형태가 변했다. “제법이군, 꼬맹이.”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곧 무언가 둔중한 것이 날아왔다. 헤냔은 저도 모르게 왼발을 들었다가 그대로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 모닝스타. 방금 전 왼발을 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의 왼발은 잘려졌을지도 모른다. 그 둔중한 무기를 든 적군은 땅에 박힌 모닝스타를 가볍게 뽑아냈다. 헤냔은 흠칫 한 발을 물러선다. 여태까지 저런 무기를 가진 상대를 대상으로 싸워본 적은 없었다. 날카로운 철퇴에 기사단 누군가의 것이 분명한 피와 살점이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헤냔은 시선을 흘끗 돌리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주륵 흘렀다. 헤냔은 조금 웃었다. 입술이 쩍쩍 벌어지고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덥다. 아아, 덥다. 모닝스타가 휭, 하고 움직였다. 헤냔은 가볍게 그것을 피해냈다. 둔중한 무기는 분명 위협적이었으나, 한 번 휘둘렀다 그 공격이 실패할 경우 무기를 회수하는 것에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헤냔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곧장 상대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헉!’ 그러나 그 순간, 헤냔은 남자가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른 속도로 무기를 회수해 재차 휘두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몸을 틀어냈다. 간발의 차이로 몸이 두 쪽 나는 것을 피한 헤냔의 오른쪽 옆구리가 길게 베어져 있다. “……몸놀림이 제법 가볍군, 그래?” 남자가 입술을 가볍게 비틀며 놀리듯 한 말에 헤냔은 헉헉대며 검을 다시 올렸다. 더워. 헤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프다. 모닝스타는 다시 한 번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모닝스타가 그토록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건 다름아닌 남자의 팔힘 때문이다. 팔힘이 엄청나군. 헤냔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 번 그것을 피했다. 2세리아는 족히 될 것 같은 모닝스타를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남자의 팔힘을 보면서, 헤냔은 감히 검으로 그것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검과 마주한 순간 검과 함께 몸이 두 동강 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휭, 휭, 하고 움직이는 모닝스타를 피해나가는 헤냔의 움직임은 아슬아슬하기가 그지없었다. “이 날다람쥐 같은 애송이가!” 그러다 모닝스타가 확 하고 앞을 덮쳤다. 헤냔은 오른쪽으로 발을 틀어 살며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닝스타는 헤냔의 생각과는 달리 왼쪽으로 가지 않았다. 처음에 왼쪽을 향해 휘둘러지나 했던 그것은, 공중에서 약 0.5세리아 정도에서 멈춰지더니 곧장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그 움직임에 깜짝 놀란 헤냔은, 얼른 검을 들어 모닝스타를 측면에서 막았다. 팍! 헤냔은 곧장 튕겨져 올랐다. 그런 헤냔의 뒤에서 적군 하나가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어딜!" 막 그가 헤냔의 목을 그으려는 찰나, 근처에서 초조하게 헤냔을 살피고 있던 아나이스가 얼른 그를 막아섰다. 아나이스는 아까부터 헤냔이 상대하는 저 모닝스타의 작자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려고 했지만, 둘 사이의 간격에서 어떻게든 헤냔을 도와주는 건 무리였다. 헤냔에게 그 외의 공격이 닿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아나이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헤냔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모닝스타가 훌쩍 다가왔다. 헤냔의 어깨 깃이 휙 하고 날아갔다. 그러다가 다시 모닝스타가 날아왔을 때, 헤냔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그 자리에 선 채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헤냔의 머리통을 쪼갤 듯 모닝스타가 가까워졌을 무렵. “윽!” 헤냔은 몸을 숙여 그대로 검을 찔러넣었다. 검이 적군의 심장 깊숙이에 박혔다. 머리통을 향해 날아든 모닝스타 안의 간격으로, 헤냔은 몸을 있는 대로 숙여 곧장 달려 나갔던 것이다. "나는 애송이가 아냐." 헤냔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닝스타가 툭 하고 떨궈졌다. 헤냔은 다시 한 번 검에 힘을 준 후 쓱 하고 그것을 빼냈다. 그러나 안심할 틈도 없이, 곧장 다음 상대가 밀려든다. 헤냔은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쳐냈다. 눈자위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헤냔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 막 그렇게 중얼거린 헤냔은, 다시 엉망진창으로 적과 얽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헤냔이 프리나와 함께 세이피안 견습 기사로 있던 시절, 견습 기사단장 아샤휘가 말한 적이 있다. 다수 대 다수의 격돌 때, 육체의 고통에 좀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좋다고. 오로지 평소에 단련해온 검의 감각에 의지해 싸우라는 그 말을, 헤냔은 이제야 이해한다. “하악, 하악.” 그렇게 얼마나 또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관념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피가 난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헤냔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무르팍이 후들거린다. 문득 헤냔은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으아악,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소리는 곧고 높게, 곧장 기사단 안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 ……도대체,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헤냔이 그렇게 외치며 또 한 사람을 베어낸 순간이다. ‘미치겠네.’ 기사단은 물론이고 적군의 움직임까지 현저히 느려졌다. 뒤에서 두두두두,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 나타난 한 무리에, 아나이스는 속으로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황하는 앞의 상대를 정확한 솜씨로 칼질했다. ‘영웅이란 녀석들은 타이밍이 어떤지 정확히 들어맞춘다더만. 이거야 원.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좋잖아?’ 헤냔은 헛, 하고 숨을 삼켰다.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난다. 지축이 빠르게 흔들린다. 적군들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냉철한 기사단 몇몇이 앞으로 돌격해가며 사방을 휘저었다. “드디어 왔다!” 런스가 고함을 질렀다. “카르멘 가에서의 지원이다―!” ------------------------------------------------ 가넷입니다. 심하게 많이 늦었습니다.(돌맞고 끌려가다가 또 맞는다) 아이고야, 왜 이렇게 늦었는지ㅠ_ㅠ 기실 컴퓨터는 일주일정도 전에 들어왔는데,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쓰지 못하는 동안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습니다. 저번에 책을 보내드리기로 하신 니꼴라님과 판타지소녀님, 아직도 책을 못 보내드렸습니다. 다가오는 월요일 꼭 책을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연재 들어갑니다. 늦은만큼 되도록 성실하겠습니다. 카르멘 가의 사설 병력이 외부에서 활동한 전적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카르멘 가가 한 번 움직이면 대륙 역사가 바뀐다.’ 라는 말은 농담처럼 전해오지만, 그것이 진짜 농담이라고 믿는 사람은 기실 없었다. 그것은 농담으로 포장하고 덧입힌,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무서운 진실― 대륙의 준동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필시 두 가문 중 하나에서 시작되리라. 그리고 그 두 가문 중 하나인 카르멘 가의 수장 저스티스 카르멘은 지금, 말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반의 뒤를 따르는 카르멘의 검사들은 ‘이게 얼마만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어라. 이거 혹시, 처음인가?’ 설마,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처음이다. 반이 가주가 된 뒤로 워낙 피비린내 나는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또 한 차례 대륙이 뒤집어지겠군.’ 많은 사람들이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륙의 호사가들은 이번 반란 진입 사건을 대륙 곳곳에 알릴 것이 틀림없다. “가주님!”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건 말건, 지원군을 얻은 기사단은 신이 났다. 런스는 환호에 차서 검을 휘둘렀다. “엑, 단장님 흥분했다!” “단장님! 나라고요, 나! 어딜 베는 겁니까!” 반은 궁궐로 진입한 후 일단 한 번 멈춰 섰다. 폭발이 일어난 직후라 궁으로 들어서는 것 은 어렵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반의 등장에 당황한 듯, 반란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 틈을 타 기사단은 경계선을 신나게 위로 몰아붙였다. 마구 쫓겨 카르멘 가의 병력 쪽으로 다가오는 반란군을 일별한 후, 반은 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서 반은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검은 옷에 검은 머리, 검은 복면을 한 여자가 말을 탄 채로 거기 있었다. 그녀는 카르멘 가 사설 문하생들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반은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 “하명하십시오.” 반의 나직한 목소리에 옆에 있던 그 여자가 한낮 그림자 같이 엷은 목소리로 답했다. 복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반은 그녀가 자신을 대할 때면 늘 그래왔듯 지금도 충성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반은 칼리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전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칼리가 공처럼 빠른 동작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섰던 반이 이윽고 진군 명령을 내렸다. “와아!” 카르멘 가, 정확히는 저스티스의 군대가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반란군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 중 한 사내가 왼팔을 높이 쳐들었다. “당황하지 마라! 아직 숫자는 우리가 더 많다! 정신 차리고 대비해!” 그러나 외침과는 달리 그 사내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길헐. 카르멘 가 검사들이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카르멘 가의 검은 가차 없이 그런 반군의 뒤통수를 갈겨대고 있었다. “헤헤, 네놈들 이제 한 번 죽어봐라!” 아나이스는 신바람이 나서 검을 휘둘렀다. “이 아리따운 기사님께서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주마!” 케이온 기사단, 디센 기사단의 활기도 되살아났다. 헤냔은 활짝 웃으며 검을 들고 뛰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저 멀리 반을 보았다. 쳇,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금 저 카르멘 가의 병력이 와준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저 병력! 저 엄청난 숫자! 한 가문이 갖고 있기엔 너무나 큰 저 군대는 정말 뭐란 말인가! ‘정말 구해주러 나타나도 당신은 제 속을 뒤집습니다, 카르멘 경.’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밉다. “이익, 나도 강해지고 말테다, 반드시!” 절로 소리가 되어 튀어 나왔다. 런스는 그렇게 외치고 뛰어간 헤냔을 멍하니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열혈 소년 헤냔의 눈은 또렷하게 한 점, 저 멀리 있는 반을 향해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미쳐 있지만 가장 미친 건 저 멀리 보이는 보라색 머리의 미소년이다. 제일 고고한 태도로 차분하게 있는 듯해도 정말이지 저 사람은 ‘조용히 미쳤다.’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투입되면서 더욱 더 살벌해진 아비규환의 전쟁터. 허나 반의 차분하고 무심한 검만은 헤냔과 검투를 했을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시공을 초월해, 반 혼자만이 자신의 공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헤냔에게 있어 그 광경은 질투 나고, 화가 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헤냔이 홀린 것 같이 그 쪽을 바라보며 검을 휘두를 때였다. 불쑥, 검은 그림자가 그의 앞에 멈춰선 것은. “억!” 갑작스러운 그 등장에 헤냔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당혹감은 더욱 컸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는 헤냔을 향해 검은 여인, 켈리가 당황하지도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키에르 경이십니까?” “에?” 자신조차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키에르 경’ 이란 호칭에 헤냔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카르멘 가주님의 전갈입니다.” “전갈?” 옆에서 한눈파는 헤냔을 보좌해주고 있던 아나이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그녀는 제법 농담을 할 여유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도마뱀이 아니라 전갈? 가재가 아니라 전갈?” “……재미없어, 아나이스.” “어머나, 혼신의 힘을 다한 조크였는데! 안타까워라!” 사악! 그렇게 말하고 환하게 웃은 아나이스는 달려오던 반군과, 옆에 있던 반군과, 뒤에 있는 반군을 회전해가며 한 번에 베었다. 적을 신나게 썰어버린 아나이스가 무섭게도, 히죽, 웃어 보인다. “헤냔. 이래도 재미없어?” 그 파괴적인 검 앞에서 헤냔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저게 단장님 앞이라고 내숭 떨고 있었던 거 아냐?’ 켈리는 혀를 차는 헤냔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난리에도 어디 반의 부하 아니랄까봐, 저 냉랭한 얼굴은 반과 똑같다. “‘적을 제 2궁으로 몰아라.’” “네?” 갑작스러운 그 말에 헤냔이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 이후는 그 분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켈리는 다시 바람처럼 저 편으로 사라졌다. 마치 작은 회오리바람 같다. 그 가녀린 여자가 지나쳐 갈 때마다 운집한 사내들 속에서 거짓말 같이 길이 생겼다. 헤냔은 또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면 저 많은 적들 사이로 망설임도 없이 들어설 수 있는 걸까?’ 켈리는 곧 반의 옆으로 돌아왔다. 헤냔은 켈리와 반을 잠시 보고 섰다가, 런스에게로 달려갔다. “대장님! 전갈입니다!” “응? 도마뱀이 아니라 전갈? 가재가 아니라 전갈?” 반군 두 셋을 한꺼번에 베며 런스가 오뉴월 햇살처럼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들 여유 생겼다, 이거지요. 내가 못살아, 진짜.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이라니까.” 그러면서 웃음은 나오는 헤냔이었다. ◇ ◇ ◇ 기사단과 카르멘 가 병사들, 반란군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흙먼지를 일으키는 와중에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너무 가만히 서 있어 구경꾼이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살만한 그들의 정체는 그 이름도 찬란한 ‘카세타 궁중 마법사’- 적군과 아군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공격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은 지금, 천근만근이었다. ‘밥버러지 신세가 됐군.’ 궁중 마법사의 원로 격으로, 이제나 저제나 애타는 마음으로 기사단의 분전을 지켜보고 있던 80세의 라톤은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등장하면서부터 마음 속 한 구석에선 ‘이겨라! 이겨라!’ 하는 어린애 같은 응원이 나올 지경이 되긴 했으나, 속이 불편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헉!” 그래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라 가만히 관전만 하고 있던 라톤은, 어느 순간 깜짝 놀라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했다. 눈앞으로 갑자기 불쑥, 보라색 머리칼의 남자 하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닥가닥 결이 고운 보라색 머리칼에, 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대답도 없이 점차 라톤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런 남자의 얼굴은 비정상적이라 생각될 만큼 아름다워 이게 지금 현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남자의 온 몸에서 이상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라톤은 갑작스레 엄습해오는 섬뜩함에 잠시 몸을 떨었다. 한데 뭉친 채로,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간간히 한숨을 내쉬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라톤이 아직도 자기네들 주위로 기사들이 진을 치듯 보호를 해주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 눈에 띈 이 남자가 적군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내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만에야 상황을 파악한 라톤이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누, 누구요?” 대답은 보라색 머리의 사내가 아닌 젊은 마법사로부터 들려왔다. “카, 카르멘 경입니다.” 라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젊은 마법사가 말했다. 얼마 전 있었던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 반의 얼굴을 보았던 모양이다. 한 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한 반이 라톤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8써클 이상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가 있나?” 그 말에 라톤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8써클 이상의 마법사가 무슨 굴러먹는 돌멩이인 줄 아나?’ 이 대륙을 통틀어 8써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적다. 은거 마법사까지 합쳐야 간신히 다섯 손가락이 채워지겠지. 카세타에 있는 마법사 중 가장 강한 마법사이며, 그래서 누구보다도 우대를 받고 있는 라톤조차도 7써클의 마법사일 뿐이었다. 그런데 라톤으로서는 어이없게도, 반은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라고 말하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없소. 나는 7써클의 마법사고, 이 중에선 내가 가장 강하오.” 나름대로 자부심이 섞인 말이었지만 반은 가느다란 실망의 한숨을 쉼으로서 라톤의 자부심을 산산 조각나게 만들었다. ‘이, 이 젊은 놈이!’ 라톤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 라톤의 반응 따위 아랑곳 않으며 반이 재차 입을 연다. 그야말로 프란 왈, ‘왕 싸가지 대마왕’ 의 모습이다. “마법사는 여덟 명 정도 되는군. 이 중 6써클 이상의 마법사는?” “나를 포함해 세 명 정도 되오.” 반의 미간은 눈에 띄게 좁아졌다. 라톤은 그에 발끈할 수 없는 자기 처지가 슬플 뿐이었다. 이 새파란 사내가 다름 아닌 저 카르멘 가주라고 하지 않는가! 반은 라톤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궁 하나 날리는 것쯤은 할 수 있겠지.” “뭐, 뭐라고 했소?” 놀란 듯 라톤이 물었다. 반은 그런 라톤에게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라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라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동안 반을 바라보며 움찔거렸다. “어, 어찌 그런 짓을……? 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폐, 폐하의 윤허는 계셨소?” 그러나 라톤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반이 더듬거리는 라톤의 말을 듣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달려 나갔기 때문이다. 라톤은 멍한 눈으로, 다시 전장으로 뛰어드는 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찌?” 라톤은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 ◇ 라톤이 뭐라고 중얼거리건 말건, 반은 사방을 휩쓸며 반란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카르멘 가에 들어온 뒤, 있는 힘껏 검을 닦았던 카르멘 가의 검사들도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검을 휘두른다. ‘가주님이 있는 이상 우리가 질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헤냔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나이스가 불쑥, 그런 헤냔의 옆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아나이스는 장난을 걸고 싶은 모양이다. “있지, 키르.” “헤냔이라니까! 근데 왜, 아나?” “……넘어가주지. 근데 있지. 어째 그 시종이 안 보인지 않아? 그 왜, 금색 머리칼의.” 헤냔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옳은 말이다. 맘에 들진 않지만 카르멘 가의 가주는 언제나 프리나를 옆에 달고 다녔었다. 반란군 토벌 작전에서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임무를 맡긴 적도 있는 만큼, 어찌됐든 프리나를 상당히 과하게 부려먹고 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프리나 생각을 못했던 헤냔이다. 만약 프리나가 여기에 있었다면, 누구보다도 눈이 좋은 헤냔이 단박에 그녀를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엔 프리나가 없다. 어째서? 아나이스는 쳇,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귀여운 미소년이 세트로 싸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카르멘 경, 헤냔, 그리고 그 시종. 보기만 해도 힘이 불끈불끈 날 거야.” “……대장님은 어쩌고?” “헤냔, 아직 어리군. 사랑은 외모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거든.” 할 말이 없는 헤냔이었다. ‘귀여운 미소년’ 프란은 지금 키네세스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궁궐 안을 살피는 중이다. 그런 프란의 이마에 가만히 땀방울이 맺힌다. ‘심하잖아!’ 키네세스에게 데려다주겠다고는 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프란은 눈동자를 요리 조리로 굴렸다. 성벽은 이미 파괴된 상태다. 잘 보이진 않아도 반란군과 기사단은 격돌한 지 옛날인 듯 했다. 지금 막 반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착했지만, 싸움이 쉬이 종결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공주님, 안 가는 편이 좋겠어요. 지금 저기는 싸움이 한창입니다.” 프란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키네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키네세스의 안색은 몹시 파리했다. “내가 가야해요. ……오라버니는, 왕위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야.” 프란은 의아한 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오라버니, 라는 말을 했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란의 주모자들은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예요.” 키네세스는 슬픈 얼굴을 했다. “……아바마마를 죽이는 것, 그 뿐.”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프란이었다. 그래도 이 아름다운 물빛의 레이디가 슬픈 눈을 하니 자기도 덩달아 슬퍼진다. ‘아, 이러다 여자가 좋아지는 거 아냐?’- 시온이 들었으면 수천 번 기절했을 법한 생각을 하며, 프란은 결연한 얼굴로 키네세스 옆으로 다가왔다. 프란의 눈이 별 수십 개는 집어넣은 듯 번쩍번쩍 빛났다. “에잇! 알겠습니다, 공주님! 제가 부족하긴 해도, 저 안으로 어떻게든 뚫고 가보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쇼!” 순간 키네세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엥? 아, 아닙니까?” 키네세스는 상황도 잊고 소리 높여 웃을 뻔 했다. ‘카르멘 경,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시종을 두셨군요.’ 키네세스는 프란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위풍당당 용감한 기사 행세를 했던 프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물들인 채 키네세스의 손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공주님?” 키네세스는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비밀 통로로 가고 있어요. 비상시, 왕은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해요. 비밀 통로는 오직 왕만이 알죠. 일가가 모두 죽는다 해도 왕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왕의 아내도, 자식조차도 그 비밀 통로에 대해선 알지 못해요. 왕비가 딴 마음을 먹으면 왕이 죽으니까. 자식들이 아버지를 폐위하려 하면 왕이 죽으니까. 그래서 왕은 모든 권력을 후계자에게 물려줄 때까지, 오직 혼자만 그 곳을 독점하죠. 지금 아버지는 그 비밀 공간에 있을 거예요.” 아하, 그렇구나. 그런 곳이 다 있었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프란은 순간적인 의문에 엉? 하는 소리를 내며 키네세스를 바라보았다. “……근데, 공주님은 거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키네세스는 수줍게 웃었다. “우연히.” “우연히?” “다섯 살 때, 아버님 방에서 함께 놀았던 적이 있어요. 집무 일로 아버님이 잠깐 방을 비운 사이, 비밀 통로로 가는 문을 ‘우연히’ 열었죠.” 절대 ‘우연히’ 가 아닐 것 같은 어조였다. 그래서 감히 프란은 어떻게 그걸 열었냐고 물을 수 없었다. 물었다간 키네세스가 훗, 하고 비밀에 가득 찬 눈길을 보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딘가 싶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죽 한 번 따라 가봤죠. 그래서 외부에서 들어가는 방법도 알게 됐어요. 아바마마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네가 간 곳이 바로 비밀통로란다.’ 라고 얘기해주셨을 땐 정말 기뻤어요. 아바마마가 혼내지도 않고 부드럽게 말씀해주셨으니까.”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동자를 하는 키네세스를 향해, 프란은 솟구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질문했다. “……저기, 공주님. 근데, 몇 살 때 거길 가셨다고요?” “다섯 살 때요.” 그야말로 경악이다. “그, 그런데 거길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다고요?” 키네세스는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느냐고 물을 듯한, 그야말로 재수 없는 천재의 표본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정도는 모두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프란은 입을 딱 벌렸다. 여러모로 정말 무서운 공주님이다. 프란의 손을 잡아끌고 간 키네세스는 왕궁에서 40세리하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잡목림 앞에서 멈춰 섰다. 거기에는 영원히 카세타의 궁궐을 지키겠다며 자신을 이곳에 묻어 달라 말한 카세타 제 4대 왕, 아산의 무덤이 있었다. 키네세스는 바로 그 무덤 앞에 서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산 전 국왕 폐하. 실례 좀 하겠습니다.” ‘흐어어억!’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서 키네세스가, 무언가를 뽑고 있었던 것이다. “고, 공주님, 뭐, 뭐하시는 거예요?” “좀 도와줘요, 힘들어요.” 그 가녀린 목소리가 프란에게는 ‘저기 절벽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꺾어다 주지 않겠어요? 떨어지면 급사(急死)겠지만. 뭐, 괜찮아요. 그냥 급사라니까요?’ 로 번역되어 들렸다. 키네세스가 가리키는 곳에는, 다름 아닌 묘비석이 있었다. 그 묘비석은 프란의 가슴께까지 올라올 만큼 거대한 것이어서 한 눈에 보아도 여기가 예사 사람의 무덤이 아님을 짐작케 해주었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 묘비석에는 ‘카세타의 영원한 황제, 영원한 파수꾼. 제 5대 황제 아산 여기에 잠들다.’ 라는 글귀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키네세스가 무 뽑듯 뽑으려고 한 건 전 국왕의 묘비석이었던 것이다. ‘카세타 전 국왕 폐하의 무덤 도굴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요, 공주님!’ 하지만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든, 프란은 이미 그 묘비석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중이었다. 연약한 공주님이 끙끙대고 계시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잠시 뒤 묘비석이 뽑혀 나왔다. 한 번 한숨을 내쉰 키네세스는 그 후, 더욱더 놀라운 일을 감행했다. 주저 없이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 공주님.” “왜요?” 양 손에 흙을 묻힌 채 키네세스가 돌아보았다. 프란은 살포시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파란 머리칼의 공주님이 무덤을 파헤치는 광경은 실로 무섭다 못해 엽기적이었다. ‘크윽!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공주님이 저런 흉한 몰골을 하게 할 수는 없어!’ 실로 희생적인 기사도 정신으로, 프란은 자기가 그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흙을 조금만 걷어냈을 뿐인데, 안쪽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어?” 무덤의 흙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은 조그마한 나무문이었다. 평범한 남자의 상체만한 크기의 문.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프란에게, 키네세스가 결연한 눈으로 말했다. “들어가요.” ◇ ◇ ◇ “아산 전 폐하는 누구보다 강대한 왕이셨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겁쟁이셨죠. 자기 자신이 피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 피가 또 피를 낳고 또다시 피를 낳을 걸 두려워하셨던 거죠. 자기 대엔 넘겼지만, 자기 아들은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런 비밀 통로를 만들었겠죠. 외부에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아산 폐하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밖에 없어요. 사실 무덤은 다른 곳에 있겠죠. 어쩜 무덤 같은 건 아예 없는 지도 모르구요. ……누가 그런 걸 상상이나 했겠어요? 정말이지 대단한 왕이셨어요.” 프란은 해롱거리는 정신으로 키네세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공주님.” “왜요?” “나중에 무덤 도굴꾼으로 신고하기 없깁니다.” 키네세스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머, 농담도. 호호.” ‘농담 아니에요.’ 프란이 죽어라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키네세스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안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키네세스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 어디에 폐하가 숨어 계실 거예요. 프란이 지켜줘야 해요.” “엑?” 프란은 놀라서 버럭 고함을 쳤다. “제가 폐하를요?” 돌아본 키네세스는 ‘전 연약해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다 해도 그녀는 아직 어린 공주다. 보통의 공주도 검과는 원수처럼 담을 쌓고 사는게 현실인데, 몸이 약하다는 키네세스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보통의 시종 같았으면 ‘못해요, 못해요, 못해요, 못해요, 못해요.’ 외치며 달아났겠지만, 프란 프리텐은 그렇게 도망가는 대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래, 해보는 거다! 어디 누가 죽는지 한 번 보자!’ 게다가. ‘대마왕도 지금 싸우고 있을 거야.’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다. 흥분해서 잘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그녀의 몸은 온 힘을 다해 피로하다고 호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란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카르멘의 병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겠지. 또 그 미친 것 같이 잘난 검으로 사람을 깍둑썰기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요모조모 뜯어봐도 사람 같지 않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그 대마왕도 사람이다. 낮에는 프란을 보내주기 위해 수십 대 일로 싸우기도 했고. 검상 정도는 입었을 법 하다. 생각하던 프란은 자기 머리를 퍽퍽 때렸다. ‘무슨 잡생각이 그렇게 길어, 프란 프리텐! 그 놈은 대마왕이야, 대마왕! 대마왕이 죽는 거 봤어? 다치는 거 봤어? 걱정 마, 걱정 붙들어 매! ……어허, 걱정? 누가 걱정했다고 이러시나!’ “왜, 왜 그래요?” 자기 머리를 퍽퍽 때리는 프란을 향해 키네세스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프란은 고개를 저었다. “하, 하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밀 통로를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한 사람이 팔을 벌리면 양 손이 벽에 닿는 좁은 통로, 어두운 그 곳은 걸으면 걸을수록 불안감을 더 증폭시키는 묘한 공간이었다. 걷다 지쳤는지 키네세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여긴 넓어요. 아무래도 아바마마를 불러야겠어요.” “안 됩니다! 혹시라도 적이 들어왔다면…….” 그렇게 말한 프란이 응? 하는 얼굴을 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던 것이다. “잠깐만요, 공주님. 여길 아는 건 폐하와 공주님뿐이잖아요. 그럼 안전한 거 아닌가요?” 두 박자쯤 늦은 프란의 깨달음에 키네세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에요. ……몹시 취한 밤, 아바마마가 제게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한 때 정말로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고. 실수로 그 여인을 밖으로 내쳤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 이 비밀통로를 자랑스럽게 가르쳐주셨다고 해요. ……제 어머니께는 가르쳐주지 않은 이 통로를.” 프란은 괜히 멋쩍어진다. 아까부터 왕가의 비밀을 줄줄이 듣고 있으려니, 이래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 프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네세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길 아는 사람은 아바마마와 나, 그리고 그 여인뿐이죠. 하지만 그 여인은 죽었어요.” “그럼 안전하신 거 아닙니까?” 프란이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물었다. 키네세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여인에겐 아이가 있었어요. 여인은 아이에게 이곳을 가르쳐 주었겠죠. ……죽은 줄 알았지만, 그 아이는 살아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바마마와 나. 그리고 스웬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의 이복 오라버니. 이렇게 세 사람이 이 곳을 알지요.” 흠흠, 하며 듣고 있던 프란은 어느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홉떴다. 키네세스의 말 중간에 등장한 사람의 이름이 자신이 알고 있는 자의 이름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에 프란의 입이 벌어진다. “스웬이라고요……?” 키네세스는 울 것 같은 눈을 했다. “프란도 알겠군요.” 프란의 입술이 잠시 떨렸다. “서, 설마?” “맞아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카르멘 가의 전용 의사였던.” 키네세스는 결국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비밀 통로 안은 습기가 가득해 벽을 짚을 때마다 물기가 묻어났다. 프란과 키네세스는 아까 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프란이 더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네세스는 그 침묵이 고마웠다. 지금, 공주의 머릿속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첫째 오라비가 반란의 주모자인 것도 놀랄 판인데 그 정체가 사모하는 사람의 전용 주치의라니. ‘카르멘 경, 너무 힘듭니다.’ 키네세스는 휘청거리는 자기 몸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 때였다, 프란이 갑자기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한 것은. 키네세스는 갑작스러운 그 몸놀림에 놀라면서도 절룩거리며 프란의 뒤를 따랐다. 곧, 프란과 키네세스는 저 앞 쪽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앉아 있는 한 늙은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바마마!” 키네세스는 또다시 눈물이 왈칵 솟아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을 들어도 자신의 아버지는 카세타의 왕이었다. 그러나 폭탄이 터지고 반란군이 궁성으로 침입한 순간, 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 것이다. 아내도, 자식들도 모두 버려둔 채 자기 침실과 연결된 비밀 통로 안으로. 반란군이 왕성으로 들이닥쳐 가장 먼저 베려하는 것이 왕의 목이니 달아나는 것이 상책인지도 모른다. 왕이 목숨을 부지해야 카세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니. 하지만 자기 부하, 자기 가족들을 놔둔 채 홀로 도망이라니! 이 같은 수모를 직접 겪은 왕은 카세타 건국 이후 전무후무했다. 키네온은 반 시각 사이 무섭게 늙어버린 몰골이었다. 키네세스의 외침에 키네온은 고개를 들었다. 근심으로 얼룩져 있던 그의 얼굴에 일말의 기쁨이 번졌다. “……내 딸, 내 보석! 그래, 그래. 너는 무사히 올 줄 알았다. 너는 똑똑한 아이니 여기를 기억할 줄 알았어. 그래, 그래. 카르멘 경이……?” 키네세스는 그런 아버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그의 무릎을 양팔로 껴안았다. “네, 아바마마. 저예요. 네, 카르멘 경이 저를 구해주셨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지금 카르멘 경이 와 계셔요. 저와 아바마마를 여기서 꼭 구해주실 거예요.” 그 말은 마치 주문 같았다. 카르멘 경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라는 주문. 프란은 부녀가 서로를 껴안고 도닥이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대마왕은 공주에게도, 심지어 한 나라의 왕에게도 희망을 주는 남자인 것이다. 왜지, 그는 그냥 대마왕일 뿐인데. 프란은 가슴이 답답해진다. 알고 보면 그도 배고플 때 크레이프를 먹고, 알고 보면 그도 피곤한 얼굴을 하고, 가끔은 진짜 미친 것 같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이유 없이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대마왕을 대마왕으로 만드는 거구나.’ 프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 사이, 키네세스는 키네온을 껴안은 채 읊조리듯 말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구해줄 거예요. ……아바마마, 반란이 끝나면, 카르멘 경과 결혼하겠어요.” 마지막 말에 프란이 흠칫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새된 목소리가 부녀의 대화를 갈라놓았다. “그 작자가 너 같은 여자와 결혼해줄까?” 생각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프란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고 목소리가 들려온 저 편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방금 전, 키네세스와 자신이 걸어온 바로 그 방향에서 들려왔다. 반이 실버 블레이드 대신 주었던 단검을 가슴께로 내려잡은 채, 프란은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어떤 자식인지 오기만 와 봐! 아작을 내줄 테니까!’ 프란이 검을 뽑는 것을 본 키네세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키네온의 발치에서 일어선 뒤, 아버지의 앞을 막아섰다. 비록 그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비록 검술 같은 건 익히지 못한 연약한 공주님이지만, 키네세스의 의지만은 프란에게 강렬하게 와 닿았다. 프란은 그런 키네세스의 앞을 막아섰다. 다행히 통로가 좁은 구조라 팔만 양쪽으로 뻗어도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크루레티나 때도 방해하던 꼬마가 이번에도 내 앞을 막는군.” 저벅, 하고 저 편에 서 있던 사내가 큰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이 그의 옷깃을 갉아먹었지만, 다가오는 얼굴만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비굴함 같은 건 그 몸에 지녀본 적도 없다는 듯 도도하게 치켜든 턱으로 다가오는 남자, 알고 있는 얼굴이건만 또다시 낯설다. 스웬이다. 프란은 가만히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방금 전 스웬이 던진 말에서 묘한 구절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크루레티나 때 ‘도’ 라니? 너, 설마?” 독초 크루레티나를 먹은 건 프란이지만, 원래 그 것은 저 도도한 가주를 노린 것이었다. 먹으면 최소한 백치가 되는 그 무시무시한 독초. “그래, 그건 내가 꾸민 일이었지. 네가 먹지만 않았으면 일은 훨씬 수월했을 거다.” 이제야 스웬 같았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매달린 순간, 그의 얼굴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던 카르멘 가 전용의사의 가면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프란이 화를 내기도 전에, 스웬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중년 남성의 낮은 목소리였다. “폐하, 여기서 뵈니 감회가 새롭군요. 기분은 어떠신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간파해낸 키네온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나타난 얼굴은 키네온에게도 키네세스에게도 익숙한 것. “네, 네 놈이!” 여태껏 무너지듯 자리에 앉아 있던 키네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초췌해진 국왕의 얼굴을 보며 키네세스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키네세스는 매서운 눈으로 남자, 하리나스를 노려보았다. “하리나스 백작! 당신이 반역의 주동자였나요? 어, 어떻게 그럴 수가!” 하리나스는 대답 대신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틈에 프란은 하리나스와 스웬의 뒤쪽을 흘낏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 두 사람은 병사들을 데리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왕 혼자만이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프란은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스웬과 하리나스 백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언제나 백의로 가리고 있어 몰랐는데, 스웬의 몸은 의외로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어쩌면 상당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리나스는 스웬의 뒤에서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신하의 배신으로 억장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왕을 보고 있었다. 곧 하리나스의 입술이 비웃듯 열렸다. “폐하, 처음 보는 아드님인데 기쁜 표정을 지으셔야죠?” 키네세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에, 키네온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곧 그가 멍한 눈동자로 물었다. “무슨 소린가, 하리나스?” “기억 안 나십니까, 폐하? 왕비 전하의 음해로 쫓겨났던 폐하의 첫 여자.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모함을 뒤집어쓰고 쫓겨났던, 그녀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키네온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하리나스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한다. “무, 무슨 말인가? 우리 사이엔 아이 같은 건…….” “똑똑히 보시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빌어먹을 아버지.” 아버지의 부정에 화가 난 듯, 스웬은 이를 부득 갈며 키네온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프란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었다. 스웬이 다가올 때마다 키네온의 얼굴은 시시각각 창백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스웬을 훑어보았다. 한참 동안 스웬을 보던 키네온의 얼굴에서 일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이, 이럴 수가.” 스웬의 얼굴에는 그가 한 때 사랑했던 여인의 흔적과, 젊은 날 자신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얼굴에서 키네온 자신의 유전자를 부정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키네온은 눈을 감았다. 곧, 그의 입에서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 튀어 나왔다. “어, 어떻게…… 아, 세키에 여신님. 감사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그러나, 아들의 말 앞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지랄하네.” 스웬의 입에서 씹어뱉듯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 말이었다. 키네온은 놀란 얼굴로 그런 스웬을 올려다보았다. “아, 아들아. 살아 있었다면 왜 그 동안 나타나지 않았느냐.” “웃기지마!” “왜 이런 짓을 꾸몄느냐? 이, 이런 반란 같은 게 없어도 너는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다.” 그 말에 스웬이 그야말로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지옥에 계신 어머니가 들었다면 좋아 죽었을 테지. 걱정 마, 영감. 곧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키네온은 스웬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만에 친 아들이, 첫째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그 존재조차 몰랐던 자신의 아들은, 그러나 사랑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눈에 가득한 것은 증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증오였다. “아바마마, 정신 차리세요.” 키네세스가 무너지는 키네온을 껴안았다. 그 사이 스웬은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영감.” 그의 차가운 웃음에 키네세스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여지까지 참고 있던 프란 프리텐의 목소리가 이 공간에 낭랑하게 울려 퍼진 것은. “고만 좀 하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프란은 스웬이 휘두른 검을 정확하게 막아냈다. 그녀는 비뚜름한 얼굴로 스웬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은 훈수 두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라면 정중히 대해 드려야지. 기뻐하시잖아?” “뭐라고?” 스웬은 웬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말할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라면 방금 세키에 여신 운운했을 때 다 용서했겠다. 속은 좁아 터져 가지고!” 어린 아이를 나무라는 것 같은 목소리로, 프란은 그렇게 소리쳤다. 프란은 지금, 자신과 아버지가 처음 만날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로이네트에서 구르다 온 자신을, 친 아버지란 작자는 너무도 차갑게 대했었다. 단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없는 아버지. 자신이 처음 왔을 때도 그는 ‘세키에 여신님, 감사합니다.’ 이라고 말하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리며 ‘지저분하군.’ 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거기다가 메가톤급 보너스! 죽을 때까지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 “나 같으면 저런 아버지한테 냅다 절부터 하겠다, 이 철부지야!” 프란의 그 말에, 스웬은 가만히 한 걸음을 물러서 프란의 얼굴을 묵묵히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뒤, 스웬은 프란의 훈수에 답해주는 대신 전혀 다른 말을 꺼내 프란을 경악케 만들었다. “흠, 예전부터 난 널 꼭 해부해보고 싶었지. 의사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프란이 흠칫 몸을 굳혔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구조면 크루레티나를 먹고도 일어날 수 있는지, 아주 궁금했거든. 이젠 네 머릿속도 궁금해지는군.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제 곧 네 몸을 낱낱이 해부해볼 수 있을 것 같군.” 잔인한 스웬의 말을, 뒤에 서 있던 하리나스가 즐겁다는 듯 받았다. “아, 저 시종이라면 나도 알고 있지. 당신이 좀 양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보일린이 저 시종한테 관심이 많아서 말이지요. 레이나 왕비와 닮았다나 뭐라나. 노리개로 한참 사용하고 난 뒤 해부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둘 다 닥쳐!” 프란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해부도 끔찍하지만 보일린의 노리개 쪽이 수백 배 더 끔찍하다. 다시 한 번 더 그 비밀 방에 갇히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프란의 검은 요 며칠 간 더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 자신도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도 다 대마왕 덕분이라면 덕분이지, 생각하며 프란은 스웬의 오른쪽 옆구리 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스웬은 읽고 있었다는 듯 그 검을 부드럽게 흘리고, 동시에 프란의 어깨를 찔러 들어왔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고민하다가, 그 어깨를 내준 상태로 스웬의 복부를 노렸다. 그러나 스웬은 그 공격에 당하지 않았다.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그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하리나스는 둘이 싸우는 모양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딱히 공격 의사가 없다기보다는,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스웬으로선 오늘 처음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기에 몸이 가벼웠지만, 하루 종일 미친 듯이 달리기를 해야 했던 프란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검 끝은 여느 때보다 날카롭지만, 검을 휘두르는 몸은 물먹은 솜 마냥 무거워진다. “이얍!” 프란의 기합이 이 축축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스웬은 검을 꽤 쓰는 편이었지만, 그것은 정식으로 훈련받은 검이라기보다는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조금씩 몸에 익혀둔 검에 가까웠다. 쫓기고 또 쫓기면서 배웠던 검, 그러다가 카르멘 가에 오기 직전 헤이튼에게 기술을 조금 배운 것이 다였다. 어찌 보면 프란과 스웬은 검을 쓰는 타입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프란 역시 뒷골목에서 구르며 눈치껏 배운 검을 어릴 때부터 다시 차곡차곡 쌓아온 셈이니까. 하지만 경험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우세한 것은 프란이었다. 스웬 역시 자신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자기가 프란에게 당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는 그것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뒤에 하리나스 백작이 있기 때문이다. 스웬이 원하는 것은, 왕을 베는 것뿐이다. 스웬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곧 그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하리나스!” “네, 왕자 전하.” 하리나스는 나긋나긋한 태도로 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키네세스가 입술을 악물며 소리쳤다. “누가 왕자 전하라는 거지?” “가만히 있어, 누이동생. 너는 상당한 미인이니 비싸게 팔리겠지.” 스웬은 키네세스를 머리부터 끝까지 훑어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능글맞은 웃음에, 키네세스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프란이 침을 퉤, 뱉었다. 정말로 화가 난 것이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투지를 머금는다. 프란은 척, 하고 뒤로 물러난 스웬 쪽을 향해 검을 거누었다.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사내놈은 살아남을 이유가 없어!” 프란의 말에 스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저 영감은 반드시 죽어야겠군. 내 어머니를 물건처럼 팔아넘겼으니.” 그 말에 키네온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스웬을 바라보았으나, 적대적인 스웬의 눈동자에 얼어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증오로 만들어진 카리스마는 무엇보다 강력하게 이 일대를 감싸고 있었다. “하리나스! 저 놈을 죽여!” 그렇게 말하며 스웬은 정확하게 프란을 가리켰다. 하리나스는 픽, 웃었다. “그럽시다.” 하리나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살기가 하리나스에게서 느껴졌다. 이 사람은 스웬과는 달라!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 프란이 몸을 날리려고 한 그 순간이었다. 콰콰쾅! 프란의 뒤편으로부터, 갑자기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하리나스와 스웬, 프란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프란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벽이 떡하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네세스와 키네온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프란의 귓가에 키네세스의 목소리가 꽂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바마마!” 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비겁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가장 먼저 상황을 눈치 챈 것은 스웬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키네온을 비웃었다. 프란과 하리나스, 스웬이 대척하고 있는 동안, 키네온은 키네세스의 손을 잡고 비밀통로의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섯 발자국쯤 뒤로 물러섰을까. 키네온은 비밀 통로에 장착되어 있는 장치를 눌러, 통로 한 가운데를 막는 문을 내렸다. 그 문에 대해서는 키네세스도, 스웬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 영감이 잔머리를 쓰는군! 그래봤자 너흰 독안에 든 쥐야!” 그렇게 소리친 스웬이 들어왔던 방향대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때, 벽 너머에서 키네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목소리였다. “소용없다! 아산 전 폐하의 무덤으로 통하는 문도 이미 파괴했다!” “뭐?” 하리나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비밀통로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하리나스!” 키네온의 목소리에 이어, 키네세스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 미안해요. 지금 …… 당신은 갇힌 거예요.” 프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지금, 키네세스와 키네온은 프란을 미끼로 이용했다는 말인가? 원래 이 비밀 통로에는 혹시 발각 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몇 가지 장치가 있었다. 그리 다양한 장치들은 아니라서, 몇 개의 벽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 장치들 덕분에 키네세스와 키네온은 목숨을 건졌다. 프란이 하리나스와 스웬의 주목을 끄는 동안, 키네온은 자신과 그들 사이에 위치한 벽을 내리고, 동시에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무덤의 문도 파괴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키네온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은, 이제 하리나스와 스웬을 마주한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것이었다. “미, 미안해요. ……아, 아바마마. 어찌…….” 키네세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려 나왔다. 키네세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시종 하나를 맹수들의 먹이로 내던져 주는 것에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대로였으면 그녀도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선택이니까. 허나 그녀를 구해주고 여기까지 데려와 준 저 금색 머리칼의 시종에게, 키네세스는 일종의 죄의식을 느꼈다. 프란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질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인 듯, 스웬도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톡, 하고 천장에 맺혔던 물이 스웬의 뺨에 가볍게 떨어졌다. 차가운 물이었다. 스웬은 곧 후, 하고 한차례 짧게 웃으며 그 물방울을 닦아냈다. 스웬은 하리나스를 보았다. “하리나스, 별 문제는 없다. 보일린이 여길 알고 있으니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구하러 올 것이다. 왕은 놓치겠지만, 어차피 저 비겁한 작자가 살아날 방법은 없어.” 스웬의 말에 하리나스는 프란을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한테 남은 재미는 저 녀석뿐인가요.” 하리나스의 말에 스웬은 조금 웃어보였다. “하리나스, 악취미가 있었군.” “후후.” 프란은 이를 악 물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기랄!’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반은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자신의 옷깃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색 경장에는 작은 옷핀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반이 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핀이었다. 핀은 검지 첫째 마디만큼 작은 크기였고, 옅은 빨간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성의 왼쪽 부근으로 질주해갈 때마다 반의 옷깃에 달린 그 핀은 더욱 붉게 빛났다. 잠깐 정신을 빼앗겼던 탓일까. 쉬익! 갑작스레 오른 쪽에서 달려든 검에, 반은 그답지 않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검이 휘둘러진 후에야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목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든 그 공격은 너무나도 빨라, 검으로 막을 수조차 없었다. 반은 재빨리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즈 아일린!” 그를 공격한 검의 주인이 반의 또 다른 이름을 씹어뱉듯 불렀다. “…….” 반은 방금 전 공격 때문에 잔뜩 흥분한 자신의 말을 진정시킨 뒤,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런 반의 오른쪽 경장 상의는 방금 전 날아든 그 칼날에 베어 오른쪽 어깨 깃이 날아가 있었다. 누가 보면 허술하게 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반이 아니었다면 방금 날아든 그 칼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공격자는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다. “영감의 열한 번째 개로군.” 반은 베인 옷깃을 흘끗 바라본 뒤 그렇게 말했다. 별다른 감흥이 묻어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반면 ‘개’ 라는 호칭으로 명명된 상대는, 당연한 말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격자는 셀키였다. “누가 개라는 거지?” 셀키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열한 번째 세라딘, 반은 속으로 잠시 그의 정체를 상기한다. 셀키는 반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막 공격을 했지만, 서슬 퍼런 기세와는 달리 셀키는 아직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의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시즈 아일린이기 때문이다. ‘시즈 아일린을 만나면 바로 도망 와야 해. 셀키, 넌 너무 다혈질이라서 문제야.’ ‘내가 바보야? 걱정 마.’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른 세라딘들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아일린이 반란에 개입되어 있다.’ 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셀키는 처음 했던 약속을 어기고 여기에 왔다. 어차피 알려진 얼굴, 이미 엎어진 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저 지긋지긋한 시즈 아일린을 베어버리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다. 그러면 아일린 가도 평화로워지고, 세라딘이 목숨처럼 떠받드는 ‘그 분’ 이 대신 아일린가의 가주 자리를 꿰차게 될 것이다. 세라딘은 시즈 아일린이 처음 아일린 가를 물려받을 때부터 ‘그 분’ 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아일린 가의 주인은 너 따위가 아니야!” 셀키는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나는 개가 아니다, 나는 셀키……!” “그래, 너는 셀키라는 이름의 개다.” 반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여전히 무덤덤했다. 저게 목을 베일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셀키는 반의 목소리에 분노한 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심장을 노린 검이었다. 챙! 회심의 일격이었던 셀키의 검은 그러나, 반의 바로 앞에서 정확하게 막혀버리고 말았다. 셀키의 검을 막은 것은 반이 아니었다. 방금 전 반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빛처럼 달려온 켈리가 어느새 반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너는!” 셀키가 소리를 쳤다. 검은 복면까지 했지만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셀키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반을 노려보았다. “웃기는군, 시즈 아일린. 여기는 카세타다. 카르멘 가의 일에 비켈린을 동원해? 수치스럽지도 않나?” 셀키로서는 유감스럽게도, 반은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반의 싸늘한 눈이 ‘수치를 모르는 건 바로 너다.’ 라고 말하는 듯해서, 셀키는 분하기가 그지없었다. 셀키는 그 분함을 켈리에게 풀려 했다. “넌 켈리지? 서른 번째 비켈린!” 복면을 쓰고 있지만 셀키는 확신에 차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켈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는 카르멘의 검사, 비켈린이 아니다.” “거짓말 마!” 셀키는 치가 떨렸다. 아일린을 유지하기 위해, 제 3대 원로원과 가주는 ‘질서 유지용 개인 병력’ 을 만들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 것이 세라딘과 비켈린. 세라딘과 비켈린의 이름은 오직 아일린 가의 자기장 안에서만 울려 퍼져야 할 이름, 그것이 지금 카세타의 반란 사건 때문에 카르멘 가의 이름 앞에 노출되고 있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런데 셀키로서는 억울하게도, 세라딘인 이쪽은 정체를 드러냈건만 비켈린인 켈리는 아닌 척 시침을 떼고 있는 것이다. 세라딘은 비켈린이, 비켈린은 세라딘이 상대하는 것이 원칙! 켈리는 셀키와 싸울 준비를 했다. 허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공격 자세를 잡는 켈리를 반이 막아선 것이다. “가라.” 반이 켈리에게 던진 것은 짧은 한 마디였다. 켈리는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보통의 상대라면 모르되, 상대는 아일린의 두 축 중 하나인 세라딘이다. 아일린을 단단히 받쳐줘야 할 세라딘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격 의사를 밝힌 이상, 반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옳다. 켈리가 말도 없이 비켜서자, 셀키는 다시 반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뭐냐, 시즈 아일린! 손수 상대해주겠다는 거야? 이거 영광이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셀키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방금 전에 어깨 깃을 벤 그 공격도, 반이 방심하고 있었기에 성공했음을 셀키도 알고 있었다. 셀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이 이렇게 난잡하게 얽혀 있어도, 이상하게 셀키와 반 틈으로 공격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 틈으로 들어가면 그 순간 죽는다, 라는. ‘기 싸움에서 밀리지 마, 셀키! 비켈린이 없어진 게 얼마나 다행이냐!’ 셀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다잡았다. 곧 그가 검을 들어올렸다. “죽어라, 시즈 아일린!” 반의 루니아 블레이드는 셀키의 검이 면전까지 다가오도록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셀키는 우선 반의 복부를 노렸다. 챙! 검이 검을 막는 맑은 소리가 이토록 소름끼치기는 처음이다. 셀키는 마주한 반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순간, 반의 검이 곧장 셀키의 어깨를 노리고 들어왔다. 읽긴 읽었다. 막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검을 재빨리 회수하며, 셀키는 검을 수직으로 세워 반의 공격을 막았다. 허나 검은 막았으되, 곧장 들어온 반의 팔을 막지는 못했다. 퍼벅! 반의 팔꿈치는 셀키의 얼굴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셀키가 주인의 몸 때문에 휘청거리는 말을 진정시킬 세도 없이, 반이 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는 얼굴이다. “이익!” 이번에도 셀키는 간신히 막았다. 눈을 향한 공격이었다. 셀키는 이를 갈았다. 시즈 아일린을 본 적은 여러 번 된다. 언제나 차가웠던 아일린 가의 가주- 그러나 공격을 할 때조차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니, 어디 사람인가 싶다. “영감의 개답군.” 반이 말했다. 셀키는 그것이 칭찬인지 비꼼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셀키가 공격을 했다. 반은 날아오는 그 검을 막듯이 흘린 뒤, 그대로 셀키의 손을 찔렀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팔을 찔린 고통에, 셀키는 할 말도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렸다. 허나 애써 고통을 참은 셀키는 눈을 들어 반을 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셀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얼어버렸다. “시즈 아일……!” 그건 정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감정으로 충만한 눈동자. 저것이 정말 시즈 아일린인가? 언제나 차갑고 냉정했던 가주였기에, 분노조차도 제대로 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을 벨 때조차 담담했던 시즈 아일린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의 얼굴에는 온연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허나 그 감정은 오직 분노, 분노, 분노, 분노, 분노 뿐. 절대 감정을 담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눈이 분노를 머금자, 셀키는 온 몸이 차갑게 얼어버린 듯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 반의 검이 높게 치켜지는 것이 보였다. 검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성 싶다. 사람을 그대로 두토막 낼 듯 그 검이 가까이 다가온다. 셀키는 입술을 물었다. ‘먼저 갑니다, 세라딘의 하나 뿐인 주인…….’ 콰직! 반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셀키의 목을 꿰뚫었다. 셀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온 도련님.’ ◇ ◇ ◇ “저 보라색 머리의 계집애 같이 생긴 놈이 저스티스 카르멘이다! 저 놈을 죽여!” “죽이라고!” 반란군의 목소리가 새되게 높여졌다. 그들은 치열하게 항전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제 2궁 쪽으로 몰리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왼쪽에 위치한 기사단이 그들을 제 2궁 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이젠 오른쪽에 위치한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셀키를 해치운 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말에서 떨어진 셀키의 시체는 지금쯤 이 난잡한 전쟁터 어딘가를 구르고 있을 것이다. 말발굽에 찢겨진 채로. 반은 날쌔게 몸을 놀려 적군의 한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기 때문에, 반란군들은 그들을 독려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섬광처럼 튀어나오는 반의 검을 피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기강이 꽉 잡힌 군대가 아니기에, 본능적인 두려움 앞에 물러서는 것이다. 반은 팔등으로 땀을 닦았다. 어느새 반의 옆으로 칼리는 그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가주님.’ 세라딘이 여기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칼리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반의 마음은 찢겨지고 있을 것이다. 저 표정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무표정이 더욱 가슴 아프다. 싸움을 하는 동안 자신이 훨씬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켈리는 자기 상처 따위는 아랑곳 않고 반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달리 비켈린이 아닌 것이다. 반은 전장을 휙, 한 번 둘러보았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꽤 되었다. 반란군을 좌우로 낀 채, 기사단과 카르멘 가의 병사들은 반란군을 동그랗게 포위한 형태로 진을 바꾸었다. 그 후 이 연합군은 반란군의 머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제 2궁 쪽으로 적군을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까지가 그리 쉽진 않았지만, 반의 작전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쯤 신호를 보내야 한다. 칼리는 반을 바라보며 ‘시작할까요?’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칼리는 반의 윗옷 칼라에 꽂힌 자그마한 핀을 하나 발견했다. 셀키의 공격을 못보는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옷핀이다. 칼리는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켈린의 발명품이군요. 그런데 이걸 가주님이 왜?” 의아한 듯 중얼거리는 칼리에게, 반은 대답 대신 명령을 내렸다. “칼리, 신호 보내.” “……네.” 호기심을 접은 채, 칼리는 품을 뒤적여 기다란 나무 막대 같은 것을 하나 꺼냈다. 폭죽이었다. 곧, 그녀는 폭죽의 상단부에 불을 붙였다. 펑! 그것은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싸우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 그것이 대포 소리인 줄 알고 긴장했다. 하지만 대포 소리가 그토록 작을 리는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폭죽’ 소리였다. 퍼-엉! 칼리가 터뜨린 불꽃은 하늘로 내쏘여져 찬란한 노란색 꽃을 피웠다. 이 전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큰 꽃이었다. “진짜 축포를 쐈잖아?” 여기에서 싸우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게 무슨 미친 짓이야?’ 라는 표정을 지으며 칼리가 쏘아올린 축포를 보고 있었지만, 궁정 마법사들은 달랐다. 방금 쏘아 올려진 축포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것은 반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마법사들에게 보내는 신호탄이었다. ‘축포를 쏘면, 내가 지시한 대로 이행해라.’ 반이 했던 말을 상기해내면서, 라톤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이 고안해낸 작전의 의미를, 라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했을 때 일어날 참사도. 반은 왕도 아니고 기사단장도 아니다. 반이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을 때, ‘그런 일 할 수 없소!’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 왕실을 구하고 기사단을 괴멸 직전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 바로 저 카르멘 가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운명을 그에게 맡겼다면, 마지막까지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 라톤은 소리를 질렀다. “시작해!” “저, 정말 하실 겁니까?” 젊은 마법사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지만 라톤의 얼굴은 단호했다. “내가 책임을 진다!” 그 말에 부담을 던 듯, 마법사들이 각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 마법사들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그들의 얼굴은 더 굳을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법사들 주위를 지키고 있던 런스 카르멘의 얼굴 역시 굳어 있긴 매한가지였다. 방금 전, 라톤에게서 반이 명한 이 작전을 전해 들었던 런스다. 런스는 자책감 가득한 얼굴로, 제 2궁 근처에서 반란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다들, 나를 용서해라.’ 드디어 주문 시전이 끝났다. 라톤은 목소리를 높였다. “전원, 제 2궁 뒤편을 향해 마법탄을 쏴라!”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지축을 흔들며, 여태까지 들었던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왜 그러지? 나 같은 건 한주먹이라며?” 프란은 말 그대로 ‘깐죽거리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튀어 보이는 프란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이 머물러 있었고, 오렌지색 눈동자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나 패배 같은 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 같은 눈동자다. 고난 따위는 모르고 살아온 소년이 가질 법한,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그 눈은 있는 대로 상처를 입은 프란의 몸과 완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하!” 조금씩, 조금씩 프란을 압박해 들어가던 하리나스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너털웃음이다. 자리에 앉은 채 프란과 하리나스를 바라보고 있던 스웬은 그런 하리나스를 미친 놈 바라보듯 보았다. “꼬마, 네 몸의 상태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라.” 하리나스의 빈정거림에 프란은 헤, 하는 소리를 내며 검지로 콧등을 비볐다. “어, 피가 좀 나고 열이 나고 어지럽네. 그런데 왜?” 프란의 상태는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리나스로서는 그녀가 아직도 서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방금 전 프란은 왼쪽 가슴 윗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베였다. 프란이 뒤쪽으로 훌쩍 물러서면서 긴급히 지혈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리 만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어디 그 뿐인가. 프란의 무르팍에서는 지금 그야말로 피가 줄줄 세다시피 하고 있었다. 움직이면서 더욱 더 출혈은 심해져, 프란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하리나스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프란은 ‘나이도 먹은 녀석이 강하지도 않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겠어?’ 하며 계속해서 패대기쳐지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하리나스의 노력을 과소평가하려는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젊은 시절 사모했던 루이사 카르멘에게 차갑게 거절당한 이후, 하리나스는 카르멘 가에 의탁하는 것이 싫어 아빌론의 나크론 가에서 검술을 배웠다. 쥐를 잡는 고양이처럼 조금씩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이 집요한 검술은, 로이네트에 있을 적 프란이 흘끗 본 적이 있었던 피슈아 가의 검술과도, 반과 함께 있으며 지긋지긋하게 많이 보았던 카르멘 가의 검술과도 완전히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지쳐 있다 해도 끝까지 밀어붙여 서서히 숨통을 끊는 이 무자비한 검술이, 프란은 생소했다. 하리나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잠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프란이 다시 잔뜩 경계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아직도 틈을 노리는 눈이다. 그 눈을 보며 하리나스는 결국 아까 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이봐.” “왜!” 프란이 냅다 고함을 쳤다. 그 짜증 섞인 목소리에 하리나스는 빙긋 웃었다. “너, 다 집어치우고 내게 오지 않겠나?” 프란은 그 갑작스러운 제안에 ‘에?’ 하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 무자비한 검술로 자신을 난타하고 있던 녀석이 그렇게 물어올 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하리나스?” 스웬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하리나스는 그런 스웬을 향해 내게 맡기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다시 프란을 보았다. “보일린에게 노리개로 넘기거나 왕자님에게 해부용 마루타로 주지도 않겠다. 내 밑에 와서 일하지 않겠느냐? 곧 우리를 구하러 사람들이 달려올 것이다. 네겐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 왕자님은 곧 왕이 된다. 여기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단 나와 왕자님의 수족이 되는 편이 낫지 않느냐.” “헹, 내가 탐나나 보지? 내가 한 몸값 하긴 해!” 프란은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했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자신만만한 농담을 할 수 있는 그 패기에 하리나스는 다시금 웃을 뻔 했다. 정말 재미있는 꼬맹이다. 왜 카르멘 가주가 이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지도 알만하다. “웃기는 녀석이군. 네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 흥정을 걸어올 때면 공손히 대하는 거다, 애송이.” “아, 그래? 나는 내 목숨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하고는 흥정 안 해. ……아, 대마왕하곤 했군. 해봐서 아는데, 이제 다시는 안 해. 절대!”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프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는 저스티스 카르멘의 시종이지?” 그 말에 프란이 의아한 눈을 하며 하리나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에 있는 것은 고역이었을 거다. 저스티스는 그야말로 미친 개새끼니까. 애송이 주제에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 것을 즐기지. 너도 그 자식의 파멸을 보고 싶지 않나? 온 몸을 산산이 찢어발기고 네 발을 핥게 만들어주지. 구미가 당기지 않느냐?” 하리나스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지난 번, 티타임을 가장해 반이 찾아왔을 때 단단히 당했던 하리나스는 그 날 이후 반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 치욕을 달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시종이었던 어린 소년에게 무릎을 꿇는 반을 생각하며 온 몸을 타고 오르는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어때?” 그런데 말을 마친 하리나스는 프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뭐지? 하고 하리나스는 생각했다. 자신이 달콤한 상상에 취해 있는 동안, 프란이 키네온과 키네세스가 닫아버린 그 벽 가까이에 서 있었던 것이다. 거기로 도망갈 구석 따윈 없는데도. 그리고 프란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를 철철 흘리는 어린 남자애가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기엔 불가능할 정도로 민첩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프란을 달렸다. 긴장한 하리나스가 검을 들어 그녀의 가슴팍을 노렸을 때도, 프란은 그가 당황하는 바람에 생긴 조그마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잇!” 날다람쥐! 하고 뒤에 있던 스웬은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지 못했다. 하리나스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던 프란이 하리나스를 찌르는 대신, 그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하리나스가 눈치 채고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봤어? 방심하는 순간 끝이라고.” 어느덧 프란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단검은 어느새 스웬의 목에 정확하게 가닿아 있다. 하리나스 백작은 순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스웬이 갖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채, 프란은 스웬의 목젖에 정확히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안, 조금씩 떨어지는 물줄기가 이 기묘한 분위기를 더욱더 부채질하고 있다. 똑, 똑, 똑. 프란의 금빛 머리칼에도 물방울은 떨어지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프란은 지금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악으로 깡으로 서 있긴 해도, 팔이 떨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스웬의 목젖에 더욱 강하게 검을 갖다 댔다. “귓구멍 파고 똑똑히 들으시지. 절대 네 놈 밑엔 안 들어가.” 프란은 하리나스를 향해 혀까지 날름 내밀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불타고 있었다. “지금은 시종이지만 난 세이피안에선 견습 기사였다! 그런 내게 왕실 반역자와 한 배를 타라고?” 그러다 프란은 조금 머뭇거렸다. 뭔가 싶어 하리나스가 바라보자 프란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게, 게다가……그, 그 대마왕이 엄청 정말 진짜 재수 없는 놈이긴 해도…… 네 녀석 따위에게 그런 취급을 당한 녀석은 아니야!” “대마왕?” 프란의 칼에 목을 내준 채 듣고만 있던 스웬이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프란은 그런 스웬을 흘끗 바라본 뒤 하리나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찌됐든 하리나스! 검을 내려놔! 안 그러면 국왕의 첫 번째 아들인지 뭔지, 여하튼 이 스웬이란 놈의 멱을 따 주겠다!” 프란이 서슬 시퍼렇게 협박했다. 스웬은 당황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리나스를 마주했다. 곧 스웬의 얼굴에 조소가 나타났다. 그가 픽, 하고 웃었다. 하리나스가 검을 버리지 않고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인가, 하리나스?” 스웬이 물었다. 하리나스가 역시 스웬처럼 피식, 웃는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왕자님. 왕자님은 여기서, 카르멘 가주 시종의 손에 죽은 겁니다.” 놀란 것은 스웬이 아니라 프란이었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다가오는 하리나스와 자기 검에 목을 맡긴 스웬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손 안 대고 코 풀었군, 하리나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굳이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지금 들었습니다. 키네세스 공주는 아름다운 사람이죠. 그녀와 두 번째 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스웬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말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아버지는 네가 죽여주겠군, 권력의 앞잡이.” “그러도록 하죠, 가여운 왕자님.” 하리나스는 웃지도 않고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쐐액! 쇄도하는 검 앞에, 프란은 스웬을 방패막이로 삼는 대신 그를 밀치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스웬은 저 멀리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프란은 그런 스웬을 바라보며 검을 세웠다. 스웬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하리나스와 프란을 보고 있었다. 하리나스는 스웬을 향해 혀를 쯧쯧 찼다. “안 됐습니다, 시종 나부랭이한테까지 동정심을 받는 왕자라니.” “닥쳐, 개만도 못한 자식아.” 씹어뱉듯 말한 것은 이번에도 스웬이 아닌 프란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심호흡을 했다. 방금 전 있는 대로 무리해서 스웬을 잡았던 탓에, 프란의 몸은 ‘이제 그만해! 넌 지금 깨어 있는 것도 힘들어!’ 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정말로 잠시일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힘든 순간이면 늘 그랬듯, 락케이드의 얼굴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안 돼, 꼭 죽는 것 같잖아.’ 입술을 깨물며 프란은 그 다정한 얼굴을 지워냈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공격은 딱 한 번뿐이다. “이얏!” 프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하리나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리나스는 망설임 없이 그 검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바로 그 순간 프란은 희미하게나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예감은 분명한 형태로 다가왔다. 하리나스의 검이 마치 두 개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았을 때, 프란은 체념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상태로 자신의 미래를 ‘인식했다.’ 나는. 오늘. 여기서. 죽을 거다. ----------------------------------- 내일, 아니면 모레 오겠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읽으시며 '셀키가 누구지? 프란이 왜 이렇게 됐더라? 반은 왜저래?' 등등을 생각하실 것 같네요. 좋은 밤 되세요. 바람이 노래를 했다. 이 쓰라린 폐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심장을 위해, 그들의 가족을 위해. 궁궐 안 뜰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고요한 아수라장이다. 바람이 노래하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도 있을 만큼. 헤냔의 머리카락이 노래하는 바람에 한 차례 휘날렸다. 그는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진 두 눈으로,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 난 그 무시무시한 소리가 헛것이라 주장할 듯,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모두의 움직임도 멎었다. 제 2궁이 무너졌다. 또다시 폭탄이 터진 것도, 반란군 일당이 그것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궁정 마법사들이, 있는 대로 힘을 끌어 모아 바로 저기 서 있던 제 2궁을 무너뜨린 것이다. “거짓말…… 이지?” 헤냔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제 2궁은 폭발이 일어났던 다른 궁보다 훨씬 더 처참한 형국으로 무너져 있었다. 그 거대한 궁의 잔해 밑에는 방금 전에 숨을 쉬던 적들과 동료들이 처참하게 압사당한 채 누워 있을 것이다. 마법사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되겠나 생각했던 것이다. ‘신호를 하면, 제 2궁을 향해 일제히 마법을 쏴라. 제 2궁을 앞쪽으로 넘어뜨려!’ 반이 처음 그렇게 명했을 때, 라톤은 놀라 말했었다. 그렇게 하면 반란군뿐만 아니라 아군도 죽게 된다고. 적군을 제 2궁 근처로 밀어붙이는 동안, 자연스레 반란군에 섞여 들어가는 자도 생긴다. 마법은 일종의 무차별 공격이다. 아군까지 보호할 수는 없다. 처음 짐작했던 대로, 카르멘 가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이 작전을 몰랐던 성 싶었다. 반란군과 함께 섞여들어 궁의 잔해 속에 파묻힌 자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라톤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마법을 시전 했었다. 콰쾅! 8써클 운운했던 반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던 터라, 마법사들은 망설이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마법탄을 날렸다. 한 명이면 궁의 일부분에 타격 주는 일도 힘들었겠지만, 모두의 힘을 모았더니 제 2궁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 라톤도 있는 힘을 다했던 터라, 제 2궁은 말 그대로 반란군이 있던 앞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반란군과 마찬가지로 기사단이 피할 틈은 없었다. 카르멘 가의 병사들도 피할 틈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은 가장자리에서 둥글게 감싸듯 반란군을 밀어붙이고 있었기에 피해가 극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휩쓸려 들어간 아군의 숫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물론, 반란군은 거의 초토화되다 시피 했다. 정면에서 부서진 성의 파편을 맞았기 때문이다. 저 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일 것이다. “아아.” 헤냔의 눈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옆에 있는 런스를 보았다. 무언가 답을 바라는 듯한, 제발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해달라고 애걸할 법한 눈이었다. 런스의 반응은 헤냔만큼 심각하진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런스는 담담한 얼굴로 그러나 자괴감이 당긴 눈으로 휩쓸려간 기사단원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런 런스를 보는 헤냔의 눈은 마구 떨렸다. “단장님!” 헤냔은 런스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멱살을 잡힌 런스는 하극상에 해당하는 이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헤냔이 누구보다 분노할 것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이런…… 어떻게 이럴, 수가…… 도, 동료들이……! 흐, 흐흑!” 헤냔의 울먹거림을 런스는 고스란히 들었다. 이성적으로, 헤냔은 알고 있었다. 전투를 계속해 반란군을 완전히 소통하려고 했다면, 아마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인원이 희생되어야 했을 것이다. 반란군의 숫자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반이 궁을 무너뜨려 반란군을 소통하는 작전을 세움으로서 오히려 더욱 많은 아군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헤냔의 이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그 이성적인 종합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카르멘 경이 죽였어! 죽였다고! 내 동료들을!’ 헤냔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저 멀리 있는 반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은 눈 같이 하얀 그의 피부를 보드랍고 차분하게 덮고 있었다. 어떤 자책감도 내려앉지 않은 저 무감정한 얼굴- 헤냔은 차라리 절규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헤냔.” 런스가 말했다. 헤냔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다 알고 있었습니까, 단장님! 알고 있었습니까! 카르멘 경이 내린 ‘제 2궁으로 밀어붙이라.’ 는 명령이 바로 이런 것임을, 단장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런 겁니까! ……주, 죽여 버릴 겁니다. 저, 저 작자를, 죽여 버릴 겁니다!” 헤냔이 마구잡이로 런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아나이스가 뒤에서 헤냔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퍼억!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한 방이었기에, 가뜩이나 완전히 지쳐 있던 헤냔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가벼운 뇌진탕쯤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런스는 쓰러진 헤냔을 가만히 안아들었다. 헤냔의 눈가에 아직도 고여 있는 눈물을, 런스는 어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가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아나이스, 정리하자-.” 헤냔보다는 덜 감정적일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건만, 아나이스도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참 만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흑. ……네, 단장님.” ◇ ◇ ◇ 반은 헤냔과 런스 쪽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던 헤냔이 기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반은 예감한다. 헤냔 키에르, 저 도전적인 눈빛을 가진 소년은 조만간에 카르멘 가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 때처럼 손목을 걸고 싸우자고 말할지도 모르고 이 전투의 강제적인 종결을 문제 삼을 지도 모른다. 반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켈리, 뒤를 부탁한다.” 반과 함께 사방을 둘러보고 있던 켈리는 의아한 얼굴로 반의 얼굴을 보았다. “뒤를 부탁하신다니요?” 그러다 켈리의 시선이 아까 전에 보았던 핀에 가서 멈춘다. 반의 옷깃에 꽂혀 있는 작고 붉은 그 핀에. 켈리는 그 핀을 보며 물었다. “이 핀의 주인은 누굽니까?” “말이 많군.” 반은 켈리를 뒤에 둔 채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으로 전복된 제 2궁의 사이사이를,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휩쓸고 지나간다. 켈리는 그런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가주님.” ◇ ◇ ◇ 이 부근만 열기가 피어올라서 그런지 좁은 비밀 통로 안에선 물방울 응결양이 많아졌다. 프란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천정에서 무언가가 뚝, 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참 이상하다. 바로 뺨 위로 떨어지는 것 같은데, 느껴지지가 않는다. 소리도 마치 저 먼 곳에서 들리는 양, 희미하다. 프란은 손가락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런데 열 손가락을 접었다 펴는 것조차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헤, 웃기는 일일세.’ 프란은 태평스레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공간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프란은 다시,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온 몸이 결박이라도 된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걸까, 내가? 갑자기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이 몇 번 검을 섞다가, 어느 순간 무섭게 눈을 굳히며 배에 칼을 꽂았던 하리나스 백작. 그 섬뜩한 칼의 느낌. ‘죽을 것이다.’ 라는 예감이 드디어 확신으로 바뀌던 순간. 자신의 뱃속에 푹, 하고 꽂혔다가 다시 회수되어 바깥의 공기를 마시는 하리나스 백작의 차가운 검을, 멍하게 보았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런 지독한 고통은 난생 처음이었다. 배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감각, 온 몸의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간은 또 얼마나 흘렀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쓰러졌을 테고, 바닥에 누웠을 테지. 그런데 ‘누워 있다.’ 라는 감각조차 없다. 온 몸이 허공에 붕 뜬 느낌, 아니, 수백 미터나 되는 바다 속에 거꾸로 처박힌 느낌이다. 여기서 쓰러지면 대마왕한테도 창피고, 키네세스 공주님에게도 창피고, 무엇보다도 스스로한테 쪽팔리는 일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어날 수가 없다. 숨을 쉴 수가 없네, 하고 중얼거린다. 어라, 숨을 쉴 수가 없다고? 내가 숨을 쉬고는 있었던가. 프란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물방울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은 멀기만 해, 잡을 수 없이 먼 곳에서 울리는 느낌일 뿐이다. “죽었나?” 크루레티나를 먹고 그 다음 날 멀쩡히 일어나 스웬을 경악하게 했던 금발의 시종은 하리나스 백작 앞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스웬은 하리나스 백작이 프란의 몸을 발로 툭툭 쳐보는 것을 무감각한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리나스는 쓰러진 프란을 다시 한 번 발로 차보며 말했다. “끈질긴 꼬맹이였습니다.” 그 말에 스웬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글쎄. 크루레티나를 먹고 완전히 숨이 멈춘 뒤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어났던 녀석이니, 잘 확인해봐야 할 텐데.” “숨은 붙어 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렇군.” 스웬은 하리나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피식, 스웬이 웃는다. “연기력이 늘었군, 하리나스.” “과찬이십니다, 왕자님.” 잠시 어깨를 들썩이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리나스가 배신할 작자라면, 스웬은 처음부터 하리나스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스웬은 사람 보는 안목 하나만은 확실하게 배웠다. 하리나스 백작은 권력의 더러운 앞잡이이고 오직 권력을 위해서만 목숨을 내놓을 작자이지만, 이번 반란이 성공했을 경우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스웬이 죽을 경우 반란은 중심점을 찾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렇기에 하리나스가 방금 전 프란에게 스웬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시종은 지금 저 꼴이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 어딜 봐도 시체 같다. “그런데, 보일린은 어디 있지?” 문득 스웬이 물었다. “글쎄요. 세라딘에 둘러싸인 채 자기 집에 숨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워낙 겁 많은 친구라.” “엉망진창인 반란이군.” 스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에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그건 분명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파괴하는 소리였어. 반란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웬의 말에 하리나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은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가봅시다, 왕자님. 문을 파괴했다고는 하지만 가보면 다른 수가 생길지도 모르지요.” “그래.” 둘은 들어왔던 출구 쪽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저 멀리서 저벅, 저벅, 하고 보폭이 큰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가 들어왔나?” 하리나스는 반색했다. 자신들을 꺼내주러 사람들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리나스는 안색은 급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인데, 대체 왜 여기서 만나는 거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하리나스의 창백한 낯빛을 본 스웬도 목을 길게 빼고 출입구 쪽을 보았다. 그러나 차라리 천천히 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 얼굴은 여기에서 봐선 안 될 사람의 것이다. 스웬은 믿고 싶지 않아 한두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여길 아는 사람은 나와 어머니, 빌어먹을 아버지, 그리고 키네세스 공주뿐인데!’ 경악 속에서도, 스웬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저, 저스티스 카르멘.” ◇ ◇ ◇ 명검끼리의 맑은 부딪침. 다른 건 못 들어도 그 소리 하나만큼은 아직도 들을 수 있다니, 우스운 일이다. 프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싶어 다시 눈을 떠보려 한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다시 한 번 명검의 마찰음이 들리면 일어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그 소리는 두 번은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검의 주인 중 하나가 단 번에 상황을 종결시킨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소리가 들렸다. “……텐! 프…… 리……!” 누군가 부르고 있구나.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 무언가가 철썩! 하고 뺨을 내리쳤다. 배가 너무 아파서인지 맞았다, 는 감각은 있는데 전혀 아프지가 않다. 철저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무화시켜버린 것이다. 프란은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손가락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한다. 잘 되지 않아서 몇 번이나 다시 시도해본다. 잘 되지 않는다. 눈꺼풀을 움직여 본다. 한참 만에, 닫혔던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반쯤 열렸다. 그러자, 보였다. “……프……! ……리텐!” 누군가 눈에 붓질을 한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지만, 보인다. 고통 때문일까? 프란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저번 이스티네 대 탈주 때 대마왕이 자신을 구해준 것이 많이 인상 깊었나보다. 이번에도 또 가주가 구해주러 왔다고 생각한 걸 보면. 프란은 스스로에게 알밤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은 기분이다. 눈앞에 있는 것은 선명한 환상이다. 반쯤 뜨인 그녀의 눈에 그 환상이 가득 찬다. 보라색 머리카락, 은 보라색 눈동자, 가면처럼 굳어 있는 무서운 얼굴, 그가 계속해서 프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는 것을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다. 언제나 차갑게 한 두 마디씩 툭툭 던질 뿐인, 냉정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주인. 환상이기에, 프란은 그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잘 되지 않았다. 얼굴이 너무 아팠던 탓이다. 프란은 입술을 다시 벌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간신히 연 입으로, 프란은 한 마디를 뱉었다. “……대마왕.” 제대로 목소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반의 얼굴이 설핏 굳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말하지 마라.” 대마왕이 낮게 말했다. 이번 말은 꽤 정확하게 들렸다. 프란은 대마왕이 날 걱정도 다 해주고, 별 일이네. 하고 생각했다. ‘환상인데 참 리얼하네.’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의 가주와 똑같았다. 미간이 슬그머니 좁혀진 것도 정말이지 대마왕답다. 가주가 프란의 몸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의 옷을 찢어 지혈을 한다. “…….” 한참 만에 지혈을 마친 반은 의식과 무의식을 찰나 단위로 오가고 있는 창백한 프란을 안아들었다. 지혈을 했건만, 프란의 배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 그 모습을 보며, 프란은 조금 웃었다. 환상이라도 좋다. 왠지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몸은 이미 감각조차 없지만. 다시 눈을 감으며,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믿을 건 대마왕뿐이라니까.’ ------------------------------------------ 괜히 제가 부끄럽네요. ; PART 19 : 카르멘 가의 하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흉측한 반란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듯, 아침의 여신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채 그 얼굴을 내밀었다. 허나 여신의 자비는 기사단과 카르멘 가 검사들 모두에게, 그저 가혹할 뿐이었다. 어두울 때는 차라리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 둘, 정확한 형체를 갖춘 채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한 햇살이 그들의 눈물까지 증발시켜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불행히도 여신의 힘은 거기까지 미치진 못했다. 반란은 종결되었다. 허나 그에 대한 희생은 너무도 컸다. 반란 진압을 위해 기사단의 4분의 1이 죽었고, 카르멘 가의 병력 5분의 1이 죽었다. 죽은 반란군의 숫자는 정확하게 셈할 수 없었다. 찢겨진 다리, 터진 머리, 산산조각 난 팔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셈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 해도, 낭자한 피바다를 헤치고 그 찢겨진 몸을 일일이 꿰어 맞출 정신 나간 작자는 분명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반이 얻은 것은 찢겨진 수하들의 팔다리와, 의식을 잃은 시종 뿐이었다. 그야말로 명분뿐인, 실리라곤 조금도 없는 전투. 카르멘 가의 남은 병력들을 집결시키고 있던 칼리는,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반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카르멘 가의 검사들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기사단은 자신들과 상의도 없이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저질러버린 반을 찢어죽일 놈이라 원망할 수라도 있었지만, 카르멘 가의 검사들은 그러지도 못했다. 반이 그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의 선택이 합리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칼리가 놀란 듯 물었다. 말에 탄 채, 반은 오른손으로 프란의 몸을 잡고 왼팔로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허나 칼리가 놀란 것은 반이 프란을 데려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의 왼팔에, 선명하게 검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그은 듯, 꽤 깊은 상처였다. 검은 경장이 뜯겨져 나간 것도 선명하게 보인다. 다만 경장의 검은색이 피의 붉은색을 가려, 잘 표시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무슨 일입니까, 가주님.” 카르멘 검사들 중 몇몇도 반을 보며 그렇게 물어왔다. 반은 그 말을 자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돌아간다.” 뒷정리는 기사들에게 맡긴 채, 반은 남은 수하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의 팔에 안긴 프란 프리텐이라는 이름의 시종은 아직도 늘어진 채, 꿈쩍도 않고 있었다. ◇ ◇ ◇ “가주님!” “형님!” 저택의 문을 열고 반이 들어서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의 마린과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의 시온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둘은 처음에, 반이 두 팔로 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것’ 이 붕대로 둘둘 말려 있는 것도 모자라 천 조각에 감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린과 시온은, 그 ‘천 조각에 감싸인 정체불명의 것 ’에서 신경을 끈 채 저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됐죠?” “프란은요?” 전자가 마린, 후자가 시온이었다. 반은 대답 없이 시온에게 자신이 안고 있던 ‘물건’ 을 떠넘겼다. “에고, 형님. 이게 뭐…….” 난감한 듯 반에게서 그 ‘물건’ 을 받아들었지만, 그 물건이 품에 안기자 시온은 그것의 정체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시온의 얼굴이 갑각류의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는 딱 이만한 체형의 사람을 알고 있었다. 궁정 무도회 때는 억지로 드레스를 입혀 함께 춤을 추기도 했고,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느라 죽을 뻔 했을 때는 함께 말을 타고 도망한 적도 있었다. 시온은 천 조각에 둘둘 말린 그 ‘물건’ 의 얼굴을 보기 위해 천을 조금 걷었다. 창백하다 못해 시퍼런 얼굴이 보였다. 얼어붙은 물고기 같아 보이지만, 분명 그 얼굴은 프란의 것이었다. 시온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는 절규를 갈무리하며, 다급하게 손가락을 프란의 코끝에 가져갔다. 숨을 쉬는 건가, 숨을 쉬는 건가? “……세키에 여신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마법사 대부분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그 나직한 탄식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숨을 쉬고 있다.’ 시온은 지체 않고 프란을 안은 채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히고 의사에게 보일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시온은 이 집에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멈칫하는 시온을 향해, 반이 말했다. “의사는 불렀다.” 한 차례, 시온은 반을 보았다.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어, 반은 그 눈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시온은 프란을 안은 채 다시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그러면서 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이 의사를 불렀다니, 그가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법사인 주제에 치유 마법도 못 쓰는 쓸데없는 자식!’ 시온은 처음으로, 치유 마법에 젬병인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전에는 불편하기만 할 뿐 이처럼 절박하게 그 능력을 원한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마법사임에도! 그저 붕대에 칭칭 감겨 있는 프란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는 일 외에는. 마린은 시온과 그의 품에 안긴 프란이 층계를 따라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마린은 반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언제나 강한 이 소년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지만, 노련한 집사 마린은 그 얼굴을 스치는 피로를 놓치지 않았다. 한참 반을 살펴보던 마린이 깜짝 놀란 듯 입을 열었다. “가주님, 다치셨잖아요?” 칼리가 발견했던 팔의 검상을 마린도 눈치 챈 것이다. 마린은 재빨리 다가와 반의 팔을 잡았다. 무자비하게 뜯긴 검은색 경장 사이로, 급하게 지혈을 한 흔적이 보인다. “……열다섯 이후, 다치는 건 처음 봅니다.” “별 것 아니다.” “제 방으로 가요, 치료를 좀 해야겠습니다.” 마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다.” 무뚝뚝하게 잘랐지만, 마린이 누구던가. 시온도 인정한 불여우 100단이 아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필요 없다.’ 는 한 마디에 ‘넵!’ 하고 물러가겠지만, 마린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어서요!” 마린은 오지 않겠다는 반의 팔을 굳이 잡아끌었다. 아침 준비를 하느라 법석이 날 시간이지만, 오늘의 카르멘 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가주가 저택을 비웠었기 때문이다. 온 집안 식구들이 반을 기다리느라 초조한 마음속에서 뜬 밤을 보냈다. 허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애타게 반을 기다렸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마린이었다. 그녀는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물론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녀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긴 했다. 그러나 마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눈앞에 있는 저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 반이다. 이 소년이 오늘 겪었던 일은, 이미 대강은 전해 들었다. 날이 밝으면서 사방팔방에 어제 있었던 일이 다 떠들어졌던 탓이다. 소문은 어떤 사람보다 빨리 움직이니까. 그래봤자 스웬에 대한 일은 묻혀 졌고, 하리나스가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을 뿐이다. “여기 앉으세요. 옷도 좀 벗으시고요.” 방 안으로 반을 끌고 들어간 마린이 침대를 탁탁 치며 말했다. 반이 앉지 않고 서 있자, 마린은 소리를 높여 일부러 주책을 떨었다. “어머머, 가주님도 차암!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직 가주님 덮칠 만큼 남자가 부족하지도, 간이 커지지도 않았답니다! 어서 앉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마린은 반을 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옷깃을 마구 잡아당기는 폼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덮친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마린이 막 반의 옷을 벗기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반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치워 냈다. 마린이 걱정스레 바라보는 동안, 반은 묵묵히 상의를 벗었다. “세상에…….” 드러난 반의 팔을 보면서, 마린은 저도 모르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팔에 위치한 검상이 생각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잘못 놔뒀다간 한 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반이 검술 가문의 가주이고 지금 다친 것이 오른팔임을 감안해볼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마린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같은 상처를 갖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귀가하는 것이 반이다. 오늘도 자신이 잡지 않았다면 홀로 방에 들어가 자기 손으로 붕대를 멨을 것이다. “……‘반’ 이라는 이름, 쓰지 않으신지 꽤 되셨죠.” 문득, 마린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 말에 여태껏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던 반이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은 보라색 눈동자가 마린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한다. 그런 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마린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름은 입에 올리지 마라.” 예상과 정확히 부합하는 반의 말에, 마린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 버리신 때부터, 무리하는 게 습관이 되신 것 같습니다.” 마린은 어린 하녀가 가져온 붕대를 반의 어깨에 감으며 말했다. “시끄럽다.” 그 말에 마린이 호호, 하고 일부러 크게 웃어 보였다. “어머, 혹시 쑥스러워하시는 거예요?” 반은 대꾸 없이 한 차례, 농을 거는 마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린이 졌다는 듯 양팔을 들었다 놓는다. ‘그래, 여기까지 해야지. 이 이상은 내가 건드릴 영역이 아니야.’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반은 마린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린은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이마에 솟아난 땀을 훔치던 마린이 마침내 지나가듯,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반란은…… 종결되었습니까?” 반은 과감 없이 답했다. “그래.” “아일린이 결부되어 있었습니까?” “그래.” 반의 대답에 마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멘도, 결부되어 있었습니까?” “그래.” 긴장으로 굳어서 한참 만에 질문했는데도, 들려오는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저토록 단단한 무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린은 마음이 아프다.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가주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갈 생각이다.” “아일린으로?” 대답은 없지만 긍정이라는 것을 마린은 알 수 있었다. 마린이 붕대를 다 감자 반은 말도 없이 일어섰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마린은 슬픈 눈으로 보았다. 제 2궁의 전복 사태를 그녀도 들었다. 그것을 반이 명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린의 눈에 어느 순간 눈물이 그렁해졌다. 마린의 입이 가만히 열렸다. “……가여운 분. 또, 또 얼마나…….” ◇ ◇ ◇ 시온은 프란의 침대 옆에서 몇 시간째 미동도 않고 있었다. 방금 돌아간 의사는 ‘좀 더 경과를 두고 봅시다.’ 라고 말했다. 그 경과라는 것은 얼마나 더 두고 봐야 하는 것인지, 시온은 알 수가 없었다. 창문을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다. 하루 종일 프란의 침대 옆을 지킨 셈이다. “프란, 일어나봐.” 시온은 눈을 감고 있는 프란의 뺨을 톡톡 쳤다. 물론 프란에게서는 어떤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너, 옛날에 크루레티나 때도 그렇고……. 이렇게 누워 있으면 내가 덮칠지도 모른다? 어흥!” 장난스럽게 호랑이 흉내까지 냈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프란의 손을 꽉 쥐었다. 프란이 깨어 있었다면 ‘이 느끼 버터! 당장 손 안 떼?’ 라고 외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프란은 늘 이런 식이었다. 반이 한 번 데리고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다친다. 그것도 예사로 다쳐 오는 법이 없다. 시온은 프란의 손과 깍지를 낀 자신의 손을 이마를 갖다 댔다. 그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 미안해. 내가 세라딘만 막았어도, 반란은 안 일어났을 거야. 세라딘이 여기 있다는 거 알고 있었는데, 형님한텐 말을 안 했어. ……내가, 자금줄만 안 대줬더라도 반란은 안 일어났을 거야. 내가, 스웬과 헤이튼의 결탁 관계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아 차렸더라면…… 내가, 형님한테 빨리, 말만 했더라도……. 네가 이렇게 다치진 않았을 거야. 미안해, 프란. 내가…….” 시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프란을 몰랐던 바람둥이 느끼 버터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괴로운 것이 감정이라면, 사랑이라면, 다시는 이런 마음 따위 느끼고 싶지 않다. 사람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발기는 것 같은 이 감각이 좋아한다는 거라면, 그런 건 평생 알지 못한 채 살아도 좋았을 것이다. 가볍게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했을 때는 가슴을 치는 기쁨이 없었지만 이처럼 살을 도려내는 고통 또한 몰랐기에. 똑똑똑. 그 때, 조용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온은 흠칫 프란의 손을 놓고 방문 쪽을 보았다. “누구야?” “도련님, 나예요.”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마린이었다. ‘한 잔 한 모양인데?’ 시온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마린이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한 순간 비틀, 한 것이다. 거기에다 마린은 품 안 가득 와인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웃어 보인다. “기분 안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술 상대가 필요하면 그렇다고 말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난 도련님 생각해서 온 건데. 프란 옆에서 같이 마셔요.” 마린의 말에, 시온은 힘이 빠진 채로도 농을 걸었다. “노처녀 히스테리 받아줄 여유 없수다.” “그래요?” 그 때였다. 마린이 와인을 방바닥에 놓아둔 채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낸 것은. 그녀의 손에 들려나온 건 얇은 종이 한 장이었다. 시온은 의아한 눈으로 그 종이를 보았다. 마린은 그 종이를 시온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럼 이건 제 맘대로 할까요? 도련님 명줄이 달린 쪽지인데.” 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얼음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시온은 그 종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시온이 찾아냈던 크루레티나의 범인, 그에 대한 증거가 틀림없다. “내 명줄이라니?” 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그 자신이 직접 헤이튼의 방에 찾아가서 말했었다. 스웬과 결탁한 것을 알고 있으니, 모든 것을 스웬에게 뒤집어씌울 방법을 찾으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고 믿을 만한 증거도 남겨놓으라고 말해뒀다. 스웬이 도망친 날, 시온이 스웬의 방에서 아닌 척 하며 찾아다녔던 그 ‘증거’ 가 바로 지금 마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아직도 선하네요. 프란이 크루레티나에 당했던 날, 도련님이 그랬었죠. 내가 범인을 잡겠으니, 프란을 놓아주라고. 범인을 못 잡으면 도련님의 목숨을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마린의 목소리는 낮아져 있었다. “그 땐 내가 좀 멋있었지? 하긴 난 늘 멋지지.” 여유의 가면을 아무리 뒤집어쓰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원래 바람둥이의 천적은 여우인 법이다. 느끼 버터 시온을 애송이인양 갖고 놀 수 있는 ‘진짜 여우’ 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저 마린밖에 없다. “……도련님, 뭔가 알아낸 거죠?” 마린이 물었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그거나 보여줄래?” 마린은 선선히 그 종이를 건네주었다. 종이에 적힌 것은 단순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백서로, ‘죽은 유니를 사주해 내가 가주의 찻잔에 독을 탔다.’ 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다가 스웬은 계획을 생각해낸 시기와 독약을 제조한 방법, 독을 가주의 잔에 탄 방법까지도 소상히 적어 놓았다. ‘일단은 됐다. 너무 빤히 보이긴 하지만…….’ 메모를 읽은 시온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마린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곧, 그녀답지 않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응?” 마린의 눈동자는 굳어 있었다. “참 갑작스럽지요. 스웬은 왜 이런 쪽지를 남기고 도망갔을까요? 이런 쪽지가 있을 때 이득을 보는 사람을 생각해봤어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군요. 범인을 잡기로 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도련님을 빼놓고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범인이 자백하면 도련님이 새삼 일을 캐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가주님의 문책도 없을 거고.” 시온은 애써 음? 하고 양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어느 덧 부드럽게 웃는 눈으로 돌아온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스웬이 ‘이제 겁이 나서 그만둔다.’ 라고 적어놓은 거, 안 보여? 그리고 내가 그걸 알아냈으면 형님한테 말하지 왜 스웬을 쫓아냈겠어? 형님한테 말하면 점수 딸 기회인데 말이야.” 마린은 한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시온은 깜짝 놀랐다. 취기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마린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마린이었다. “도련님, 부탁이에요. 제발 가주님께 도움이 될 일이라면, 진실을 밝혀주세요. ……안 그래도, 힘드신 분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마린은 고개를 숙였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었던 마린은, 입을 다문 채 방바닥에 내려놓았던 술병들을 묵묵히 갈무리했다. 술을 마시자고 했던 건 핑계였음이 분명하다. 술병을 다 갈무리한 마린이 일어섰다. 방금 전에 보였던 흐트러진 흔적 따윈 없는 모습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여우 집사장의 모습으로, 마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도련님.” 쾅! 마린이 문을 닫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들려왔다. 시온은 방문을 한참 동안 묵묵히 바라보았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술은 좀 두고 가지, 마린.” 문을 향해 그렇게 말한 뒤, 시온은 픽하고 웃어버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말했다. “……밝힐 수 없어, 마린. ……그건, 내 어머니가 꾸민 일이니까.” 왜 나는 아일린 가의 자식인걸까. 그런 건 바란 적도 없는데. 시온은 다시 프란 쪽을 돌아보았다. 처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키네세스와의 대화 때였다. 조사를 시작했을 때, 시온은 스웬과 키네세스에게 크루레티나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달라고 했었다. 대강의 내용은 비슷했다. 허나 결정적으로 한 가지, 두 사람이 말하는 크루레티나의 원산지가 달랐다. 스웬은 크루레티나의 원산지가 ‘카세타 서부와 로이네트’ 라고 했다. 하지만 키네세스는 ‘세이피안 남부’ 라고 말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이라면, 키네세스보다는 스웬 쪽이다. 그 때부터 시온은 미친 듯이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깐깐한 아린까지 구워삶아 카세타에 들어온 모든 물품들을 낱낱이 조사한 그는, 마침내 알아내 버렸다. 겉으로 드러난 범인과, 그의 공모자와, 그 둘 뒤에 숨은 또 하나의 공모자를. “크루레티나의 원산지는 세이피안 남부잖아, 프란.” 시온은 어느새 의식 없는 프란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거긴 아일린 가가 있는 곳이지. 내 어머니가 있는 곳이고.” 시온은 웃을지 울지를 망설이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여기 오기 직전에, 헤이튼의 생일이 있었거든. 어머니가 헤이튼의 생일 명목으로 많은 것을 보냈어. 사돈끼리니 그 정도는 주고받을만하지. 하지만 카르멘 가는 철저해서, 선물 목록까지도 모두 기록 해놨더라고. 어머니가 보낸 선물 중에는 책도 있었어. 생전 처음 보는 작가의, 생전 처음 보는 제목을 가진. ……그걸 누가 쓴 걸까?” 프란이 깨어있다 한들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크루레티나는, 원래는 보통 나무야. 그 나무줄기를 갈아 물에 넣으면 미끌미끌해지면서 맹독이 되는 거지만.” 시온은 프란의 뺨을 다시 한 번 톡톡 두드렸다. “크루레티나 나무로 책을 만든 뒤, 그 책을 녹이면 …… 당연히, 원래 나무가 갖고 있던 독성분이 나오겠지?” 대답 없는 프란이 야속하다. 허나 그녀가 깨어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괴롭지만, 시온은 알고 있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입을 다물게 될 것임을. 아일린의 3번째 계승자 시온 아일린은, 반에게 스웬이 남긴 메시지를 얌전히 내밀며 ‘스웬이 범인이었어요.’ 라고 말할 자신을 알고 있었다. --------------------------------------------------------------- 리플 감사합니다!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갔다. 앞에서 잡아당기는 사람은 있어도 뒤에서 잡아당기는 사람은 없는지, 시간은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반란이 종결된 지 벌써 2주째다. 카르멘 가는 언뜻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 허옇게 뜬 아일린 가의 도련님이 하루 온 종일 시종 옆에만 붙어 간호를 하고 있다거나 뮤 이레아스라는 시녀가 ‘달링, 죽으면 안 돼.’ 라고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매일 같이 퉁퉁 부은 눈으로 감자를 깎는다거나 집사장인 마린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는 수군거림만 제외하면, 카르멘 가는 반란전과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 평화로운 저녁, 반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윗옷을 집어 들자 팔으로 밀려오는 작은 통증에, 반은 미간을 좁힌 채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이 상처는 순전히 서두르느라 생긴 것이었다. ‘하리나스.’ 반은 조용히, 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하리나스와 맞닥뜨렸을 때, 반은 그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둘렀다. 하리나스와 스웬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반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야 했다. 두 어 박자 쉬어 공격했다면 무리 없이 하리나스의 목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반은 ‘지금 당장’ 하리나스를 죽이길 원했다. 지금 공격하면 하리나스에게 검상을 입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을 날린 건 그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막무가내로, 있는 대로 틈을 노출한 채 반은 검을 휘둘렀다. 죽기 직전 안간힘을 써서, 하리나스 백작은 반을 향해 검을 내리 그었다. 마치 그의 뿌리 깊은 증오와 탐욕처럼, 그 검은 반의 팔에 긴 상처를 남겼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감행했던 건 시종이 대자로 뻗어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크루레티나를 먹고 기절했던 때보다 훨씬 더 처참한 몰골로, 프란은 누워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반은 그토록 서둘렀던 것이다. 비록 팔에 검상은 입었지만 그에 대한 후회는 없다. ‘정말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면 출혈과다로 죽었을 겁니다.’ 라고 의사도 말하지 않았는가. “……아직 빚이 많이 남은 녀석이니.” 반은 일부로 소리 내어 그렇게 말했다. 말해놓고 보니 왠지 변명이라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어찌됐든 그 덕에 시종은 살았다.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녀석이다. 남들은 몇 번이나 죽을 법한 상황에서도 옷 한 번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게 그녀석이니,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은 상처 입은 팔을 윗옷 안에 넣었다. 상처 부위가 조금 아프긴 했으나 그리 나쁘진 않다. 그는 커프스단추를 잠갔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카르멘 가의 거의 모든 불이 꺼진 시간, 반은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그것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어둠이 짙게 배인 저택을, 난데없이 활보하는 반이라니. “가주님!” 반의 방문 앞을 눈 부릅뜨고 지키고 섰던 호위무사 두 명도 당황한 듯, 얼른 반을 부르며 다가왔다. “산책 나가십니까?” 반은 말도 없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호위무사들은 긴장된 얼굴을 했다. 허나 그들은 반을 따라 나서지는 않았다. 반이 턱짓으로 따라오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호위무사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복도 어딘가를 향해 발을 옮기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은 한 층 아래로 내려가, 복도 끝에서 다섯 번째 방 앞에 섰다. 헤이튼의 방이다. 반은 노크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헤이튼의 방 안은 촛불 하나만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방안, 허나 헤이튼은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헤이튼은 뒷짐을 지고 선 채 창밖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방문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헤이튼이 돌아본다. “반군을 소탕하셨다고 하더군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적막의 가운데를 깨며 헤이튼이 말을 꺼냈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여유로웠다. 반은 대답 없이 헤이튼 곁으로 다가왔다. 어둠 때문인지 반의 얼굴이 하얗게 빛나 보인다. 헤이튼의 바로 앞에 선 반은 헤이튼이 꺼낸 말에 대한 답변 대신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전대 가주 승계 때, 너는 어머니와 막상막하로 싸웠다지.” 갑작스러운 그 말에 무슨 말인가, 싶으면서도 헤이튼은 답했다. “아닙니다. 누님은 어릴 때부터 늘 저를 앞질렀던 분, 그 때도 상대가 안 되긴 매한가지였습니다. 간신히 검을 들고 버텼을 따름입니다.” 반은 헤이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전대 가주 루이사와 그의 동생 헤이튼의 대결은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다. 반의 어머니 루이사는 열두 살 때 이미 ‘화검’ 이라는 칭호를 얻은 전설적인 검사였다. 어떤 남자들도 감히 함부로 검을 내밀 수 없었던 그녀와 막상막하로 싸웠다는 것은 헤이튼의 실력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게다가 헤이튼은 요즘 집무로 숨 쉴 틈 없는 반을 대신해 카르멘 가의 문하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 어머니가 30대에 이룬 경지를 벌써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반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자만하지는 않았다. 헤이튼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직은 10대, 연륜으로 무장한 헤이튼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에게 졌을 때, 분했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반의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헤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원래 그 자리는 누님께 갔어야 했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검사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으니. 카르멘 가는 강한 자가 승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반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너는 어떤가. 너는 실력으로 카르멘 가주가 된 것이 아니잖은가.’ 반은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헤이튼을 바라보았다. “……치밀하게 계산했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반은 사사롭게는 자신의 외삼촌인 헤이튼을 내려다보았다. 헤이튼은 별다른 긴장 없이 그런 반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반의 말대로, 헤이튼은 일을 벌이는 와중에도 언제나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었다. 크루레티나 때도 그랬고, 이번 반란 건도 그랬다. 반란 건에 협조한다는 뜻으로 카르멘 검사 몇 명을 빼돌렸고 제 1왕자라는 스웬을 이 집에 들이기도 했다. 허나 헤이튼은 그 이상의 일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제발 카르멘 가의 검사들을 반란에 투입해달라는 보일린의 말도 냉정히 거절했다. 반란이 성공했다면 그는 새 왕조를 등에 업고 새로운 카르멘 가주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반란이 무위로 돌아간 지금도, 그는 거칠 것 없이 이 집에 있다. 하리나스 백작은 죽었고 보일린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스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가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 헤이튼이 반란에 협조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리나스의 상념을 깨며, 반이 재차 입을 연다. “어머니와 했던 대로 가주의 자리를 놓고 나와 겨뤄보고 싶었나. 그러고 보니 너와 검을 섞은 적은 없군.” 헤이튼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누님의 적자(嫡子)이신 당신과. 꿈꾼 적도 없습니다.” 반은 잠시의 침묵 후에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을 들어라, 헤이튼.” “네?” 그제야 헤이튼은 반의 허리께를 본다. 거기엔 카르멘 가주의 상징, 루니아 블레이드가 걸려 있었다. 초라한 촛불 하나만 켜져 있어서 몰랐는데, 반의 얼굴에 음영이 내려앉은 것이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 반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검투장으로 가자.” ◇ ◇ ◇ 검투장은 최근 2주간 사용되지 않았다. 반은 물론이거니와, 반란군을 토벌하느라고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던 카르멘 검사들에게도 휴식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땀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그 공간으로, 헤이튼은 반을 따라 들어섰다. 검투장 안은 어둑어둑했다. 헤이튼은 루니아 블레이드를 꺼내는 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동작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다친 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검을 쥔 순간 반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지는 것이 보인다. 반란군을 소탕한 게 2주 전이니 큰 상처가 아니었다면 아물긴 했을 테지만 그래도 검을 휘두르는 것이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상태로 나와 겨루겠다는 건가?’ 헤이튼은 순간적으로 화가 치미는 것을 느낀다. 허나 그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그래, 방금 전 반이 했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카르멘 가주 자리는 카르멘 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계승해야 한다. 누나인 루이사 카르멘에게 졌을 때 미련 없이 그녀를 가주로 받들었던 것은, 루이사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검사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이었음에도 루이사 카르멘의 검은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묵직했다. 검을 든 꽃이라는 뜻에서 ‘화검’ 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자신의 누나는 그 빛나는 외모보다도 검으로 더 빛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라면, 가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허나. “저와 검을 섞겠다니, 진심이십니까.” 누님의 아들은 다르다. 전 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문을 이어받았기에, 자신과는 검을 겨룬 적조차 없었다. 헤이튼은 아예 처음부터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나 반은 아직 애송이다. 저렇게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무모하게도 자신에게 덤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헤이튼은 카르멘 가의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 적은 없으나 그렇게 믿는 사람은 이 가문에 많았다. “어머니는 너를 신뢰했지.” 센티멘털한 어조는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그 말에 헤이튼의 눈살이 찌푸려져진다. 도대체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천지가 개벽할 일인가 싶어 바라보는 헤이튼에게, 반이 이어 말했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가주라는 건 웃기는 소리지. 이제 알겠다. ……네가 사라지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가주가 되지 않는다.” 그 말과 함께 반은 검을 내뻗었다. 인정받고 싶었었다. 피로 피를 해결하며,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대 카르멘 가의 가주’ 로 완전한 인정을 받을 거라고 믿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 가문의 유일무이한 가주로, 그래서 더 이상은 피 칠갑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인정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남동생이었던 저 헤이튼 카르멘이라는 자에게- 허나, 그것이 헛된 기대였음을, 차갑게 굳히고 있던 마음에 아직 한 가닥 남은 헛된 희망의 빛이었음을, 반은 이제야 인정한다.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덤벼라, 헤이튼.” 반은 초반부터 밀렸다. 헤이튼은 그 동안 검을 닦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어머니의 손을 만지기 전에 검부터 잡았다고는 해도, 반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카르멘 가의 승계자 후보 중 한 명으로서 키워졌던 헤이튼은 어릴 때부터 반과 비슷한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 위에 쌓인 연륜을 반도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챙! 두 개의 검이 반의 가슴께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 검 사이로, 헤이튼과 반의 눈길이 한 번 얽힌다. 밀어붙일 기세인 듯, 헤이튼이 팔에 힘을 주었다. 반은 그 검을 똑바로 받아칠 생각이었으나, 오른팔을 엄습하는 통증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잠시 힘을 준다 싶었던 반이 검에서 힘을 빼고 훌쩍 물러선다. 헤이튼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기합 소리 하나 없이, 헤이튼이 다시 달려든다. 챙! 챙! 챙! 챙! 옆구리와 어깨, 배, 다리를 차례로 노리고 들어온 검을 반은 간결한 동작으로 막아냈다. 헤이튼은 자신이 쓰는 검술과 반이 쓰는 검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뭐니 뭐니 해도 같은 핏줄에, 같은 검을 배운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간단한 동작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일 테다. 이번엔 똑바로 목을 치고 들어갔다. 반은 빠른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헤이튼이 검을 아래로 내리려는 순간, 반은 오른쪽으로 회전해 헤이튼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런 반의 검을, 헤이튼은 자신 역시 반 회전하여 막아냈다. 둘 다 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한참을 힘겨루기를 한다. “누님이 기뻐하시겠습니다.” 챙! 반이 휘두른 검을 내치며 헤이튼이 말했다. “헛소리.” 허나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반에게 허점이 생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나, 헤이튼은 똑똑히 볼 수 있는 허점이었다. 바로 반의 오른팔 윗부분, 상처 입은 그 부분이다. 헤이튼은 검으로 반의 발등을 노리는 척 하며, 반이 그 곳을 막으려 몸을 트는 순간 그의 팔을 한 차례 강하게 내리쳤다. 공격은 정확하게 먹혔다. “……!” 반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헤이튼이 뒤로 물러서 잠시 자세를 정비한다. 반의 미간이 고통때문인지 찌푸려져 있다. 헤이튼은 인정사정없이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챙! 챙! 팔이 아파서 그런지, 간신히 막기만 할 뿐 되돌아오는 공격이 없었다. 그래도 상처 입은 채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헤이튼은 놀라웠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조카는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이다. ‘그래도 내겐 아직 이르다!’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헤이튼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조그마한 빈틈이 생겼다. 여태까지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힘을 아껴두고 있던 반이 그 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반의 스피드는 놀라웠다. 헤이튼은 처음 자신의 팔을 노리고 날아온다고 생각했다. 각도가 정확하게 그러했으니까. 허나 헤이튼이 그 검에 대비하기가 무섭게, 반이 재빨리 검을 낮춰 비어 있는 헤이튼의 배를 찔렀다. 깊게 찌른 것은 아니었다. 헤이튼은 그 검을 쳐내기 위해 검을 올렸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반의 발이 그 각도도 정확하게 헤이튼의 손을 쳐냈다. 얼얼한 통증이 왔다. 허나 헤이튼은 망설이지 않고 반의 공격에 응했다. 챙! 달은 고요히, 삼촌과 조카의 검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챙! 챙! 챙! 두 검의 합이 눈부시다. 시간은 끝도 없이 흐르고 있었다. 헤이튼이 틈을 노려 찌르면, 반이 그것을 간신히 막아냈다. 한 동안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만 하고 있던 반이 갑자기 스피드를 내 공격해 들어오면 이번엔 헤이튼이 전전긍긍했다. 공격을 많이 하는 쪽은 단연 헤이튼이었다. 허나 반은 짧은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파고들어 헤이튼의 몸에 확실한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억!” 그러다 한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반이 공격을 했던 차였다. 헤이튼은 죽은 듯 웅크려 있다가 갑자기 공격해오는 반의 검을 이번에는 흘려낼 생각이었다. 검을 다루는 실력은 그렇다 치고, 스피드에선 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면승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 차분히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승부를 걸었군!’ 헤이튼은 반의 은 보라색 눈동자 속에서 번쩍, 하고 스치는 섬광 같은 것을 본다. 그러나 그 것은 순간의 일일 뿐이었다. 언제나 간결한 반의 검이, 조금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반의 검이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무엇이 페인트이고 무엇이 진짜 공격인지 모를 만큼 화려한 검이다. 반답지 않은 그 움직임에 헤이튼이 움찔하며 일단 검을 피했다. 그런데 반이 부자유스럽게 팔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또다시 팔에 통증이 밀려온 것이 분명했다.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며 헤이튼이 반의 어깨 쪽으로 검을 뻗은 그 때. “……!” 헤이튼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했다. 반이 갑자기 헤이튼의 빈 어깨를 누르듯이 짚은 뒤, 훌쩍 헤이튼의 뒤로 제비 넘기를 했던 것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그 행동에도, 헤이튼은 놀라는 대신 몸을 휙 틀었다. 허나 때는 이미 늦었다. 헤이튼은 굳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반의 검이 돌아서는 헤이튼의 목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헉, 헉. 검을 겨눈 채, 반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 몸의 힘을 짜낸 것이 분명하다. 목을 정확히 겨냥한 반의 검을 보며, 헤이튼은 물었다. “……방금 공격은 뭡니까, 가주님.” 반은 조금 망설이다 답했다. “……시종의 수법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그 답에 헤이튼이 ‘예?’ 하는 소리를 냈다. 헤이튼으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날다람쥐 같이 사람을 뛰어넘거나 한 뒤, 뒤에서 당황한 상대의 등을 찌르는 수법은 프란이 자주 쓰는 것이다. 한참만에야 ‘시종의 수법’ 이라는 말을 상기해낸 헤이튼은 급작스럽게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년이 눈앞을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 시종이 이런 식으로 싸운단 말인가.’ 물론 프란이 몸이 가볍기는 하나, 반처럼 압도적인 스피드를 낼 수는 없다. 허나 헤이튼은 이 수법이 프란의 것이라는 말에 ‘그 녀석 괜찮은 검사였군.’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졌습니다.” 헤이튼은 후,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여위어 빛나는 달이 그런 헤이튼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반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내렸다. 이긴 것은 반이나 공격을 더 많이 당하고 더 많이 상처 입은 것 역시 그였다. 헤이튼은 루니아 블레이드를 수거해 검집에 꽂아 넣는 반의 동작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진 것인가?’ 당황하지만 않았다면 이겼을 것이다. 반의 검은 제법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고야 말았다. 반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필사적으로 싸웠음을 알려주는 얼굴이다. 헤이튼은 그 얼굴이 루이사 카르멘을 아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계승을 놓고 벌인 결투에서 패했을 때, 루이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이젠 날 도와줘야 해.’ 라고 했었다. 반은 묵묵히 굳은 얼굴이었으나 헤이튼은 왠지 반의 얼굴에서 그 때의 루이사를 떠올린다. ‘그런데 왜 갑자기 검투를 제안한 거지?’ 헤이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잠시 숨을 몰아쉬던 반이 입을 열었다. “……로이네트로 가라.” 갑작스러운 그 명령에 헤이튼은 당황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반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너는, 이번에 있었던 반란을 도왔다. 반란군을 조기 진압하기 위해 갔을 때 반란군 대장 센을 만났지. 그는 카르멘 본가의 검을 쓰더군. 어머니와 너, 그리고 나밖에 모르는 카르멘 가 정통 기술도 사용했다. 어머니는 죽었고 나는 거기서 그를 처음 봤으니 그런 걸 가르칠 수 있는 자는 너 뿐이지.” 헤이튼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반의 또렷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은 헤이튼의 눈을 쏘듯이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반란군 대장에게 검을 가르쳤다.” “…….” “모든 증거를 인멸했다고 생각했겠지. 지금까지처럼 입 닫고 묵묵히 있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되리라 생각했나.” “그런 적 없습니다.” 또렷한 증거가 없는 일은 발뺌하면 그만이다. 헤이튼은 차분하게 그렇게 응대했다. 반의 차가운 눈동자가 꿈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래, 증거가 없다 이거군. 하지만 확실한 증언이 있다면 말은 달라지겠지. 네겐 안된 일이지만, 난 스웬을 살려뒀다.” 그 말에 헤이튼이 눈을 크게 떴다. ‘스웬이라고? 죽은 게 아니었나?’ 헤이튼이 당황하건 말건, 반은 마침내 선고했다. “너는 반란의 일원이다. 카르멘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나를 배신했다.”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헤이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았는가? 아니, 왜 궁궐에 얘기해 자신을 끌려가게 하지 않았는가? 알리기만 했다면 여태까지 반을 몰아내기 위해 애썼던 자신이 반역자로 참수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어째서 자신의 조카는 이 달 밝은 밤 자신을 불러내 수 년 전에도 하지 않았던 검투를 제안했는가. 사실을 알았다면 왜 진즉에 목을 치지 않았는가? 왜 진즉에 자신의 사지를 잘라내지 않았는가? 당황 속에서, 헤이튼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내린 결론을 말했다. “……살려, 주시겠다는 겁니까?” 반은 대답 대신 시선을 저 너머로 주었다. “로이네트의 피슈아 가문이 최근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거기는 카르멘 가의 검술을 익힌 자가 별로 없는 곳이지. 현재 많은 사람이 거기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네가 간다면 많은 도움이 되겠지.”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어머니를 위해.” 그 말에 헤이튼의 눈이 한 차례 움찔, 하고 떨렸다. “허나 이것이 마지막이다.” 반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어머니는 말했었다. 가장 어려울 때, 외삼촌에게 의지하라고. 그가 언제나 힘이 되어줄 거라고. 그 말을 바보같이 믿었다. 몇 번이나 배신당하면서도 믿었다. 허나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다음은 없다, 헤이튼.” 헤이튼은 작아지는 반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 여러분이 반겨주셔서 열심히 글쓰고 있는 가넷입니다. 뭔가 이 시간즈음이면 드드득 업뎃하고 있는 것 같군요. 오랜만에 잡담이나 할까, 싶어 글 남깁니다. 이것도 오랜만이네요. 먼저 소식 하나! 드림워커 프로 연재란에서 새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인어왕자>입니다. 오나주 끝내기도 전에 뭣이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가만히 그 짱돌을 내려놓으시구요.. (하하;) ...잠수 동안에 썼던 글이라 오나주 연재 속도에 타격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즐겁게 썼으니 생각 있으신 분은 읽어주세요. 시온과 반이 번갈아가며 삽질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편부터는 러브 모드가 전개됩니다 (퍽퍽퍽) 대런 헤이즈의 unlovable을 bgm으로 글쓰고 있는 가넷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러브모드를 기다리는 줄 몰랐습니다 (...) 제가 말한 러브모드라는 건 반프불위 (대체 이 단체는 언제 생긴 겁니까;) 분들을 충족시킬만한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흑흑) 여하간 또 한 편, 업합니다. 이번 편은 좀 길어요 ^-^ 24KB나 되다니... 이건 둘로 쪼개어도 황금빛이 나오는 양이 아닌가.... (머엉) (그런데 어째서 글의 퀄리티는 떨어지는 것 같지..) --------------------------------------------------------------------- PART 20 : 즐거운 나의 집 반란이 종결된 지 16일째 되는 아침,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녀는 가만히 눈을 떴다. 프란은 여기가 어딘가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라?’ 하는 소리를 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보일린 그 자식이 날 또 납치했나, 라는 생각에 주변을 미친 듯이 훑어보던 프란은, 곧 천장의 무늬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나 산 거야?”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살아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 순간 프란은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 질리게 들어왔던 로이네트의 동요 하나를 떠올렸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 피고 새 우는 집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오 내 사랑, 나의 집.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진짜 안 어울린다.” 기껏 다 부르고 나서,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왜 이 노래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가 카르멘 가와 ‘즐거운 나의 집’ 이라니 이게 조합이나 되는 소린가! ‘이 집은 절대 작지 않아! 내 집도 아니야!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대마왕도 있어. 근데 왜! 왜 즐거운 나의 집이 생각나는 거야?’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면서도 프란은 환한 얼굴이었다. 사실, 의식이 돌아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그 때부터는 시온이 자신의 손을 잡고 건네는 걱정스러운 말이라든가, 뮤가 흘린 눈물의 감촉 같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럴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이 있는 동안에도 거의 잠들어 있다가, 몇 시간씩 잠깐 깨어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눈을 뜰 수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빛에 망막이 고통스러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16일 만에 처음 보는 빛인 것이다. 프란은 한참만에야 그 빛에 익숙해졌다. 안심이 되자 이번엔 지독한 갈증이 몰려들었다. 튜브를 통해 수분이 공급되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물마시고 싶어.” 그렇게 조그마한 목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핑크색 머리카락을 돌돌 만 조그마한 소녀가 들어선 것은. 물수건과 헝겊을 든 뮤였다. “여, 뮤!” 프란은 사내아이 같은 말투로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뮤는 처음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프란 역시 장난스럽게 과장하여 눈을 깜빡여 보인다. 꼼짝 않고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뮤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 눈가에 눈물방울을 잔뜩 매단 뮤가 프란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프란!” “아야!” “어머, 미안!” 너무 반가워 포옹을 한다는 것이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다. 뮤는 고통 때문에 몸을 구부리는 프란에게서 한 걸음을 물러났다. 괜찮다는 뜻으로 프란이 조금 웃어 보이자, 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나 지을 법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뮤가 경건하게 손을 모으며 짤막하게 기도했다. “아, 모든 여신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뮤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그 눈물은 마치 이 소녀의 연정 같았다. 말 없이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부드러운 소리. 프란은 또 한 번 자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정말로 뮤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프란은 뮤의 어깨를 두어 번 살며시 두드려주었다. 물론 그 행위는 뮤를 더욱 더 기쁘게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뮤는 자책감 가득한 프란의 눈빛까지도 제멋대로 오해해버렸다. “그래그래, 다른 분들한테 알릴게! 모두 좋아할 거야.” 뮤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태세였다. 그런 뮤의 옷깃을, 프란이 슬그머니 붙잡았다. 뮤가 응? 하며 돌아본다. “뮤.” “응.” “나, 얼마나 잔거야?” 뮤가 아무 말 않고 다시 눈물만 흘린다. “왜, 왜 그래?” 가슴이 뜨끔해진 프란이 의아한 눈으로 묻는다. 뮤는 담담한 얼굴을 만들어 보려 애썼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한참만에야 겨우 눈물을 멈춘 뮤는 프란에게 다가와 그녀의 목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엉겁결에 뮤의 가슴에 파묻힌 프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프란은 몸을 비틀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가만히 속삭인 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프란. 프란은 왜 그렇게 멀리 있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가 않아. 매일 다쳐 오고, 매일 죽을 것 같아. 잔 게 아니야, 프란. 프란은……프란은, 혼절해 있었던 거야. 16일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았어. ……매일 매일 혼잣말만 하면서, 락케이드라는 사람만 찾으면서, 그렇게…….” 프란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혼절을 했었다고, 16일? 내가 락케이드만 찾아?’ 멍한 프란의 눈동자를 보며 뮤는 다시 울먹였다. “……프란, 약속해줘.” 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몸으로 누워있지 않겠다고. 나, 프란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 하지만, 아프지 마. 부탁이야.” 그렇지 않아, 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니. 프란도 목이 멘다. ‘내가 남자라면, 분명 뮤를 좋아했을 거야. 뮤는 정말 귀엽다고!’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신, 프란은 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하지 못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안해.” 그 말에 뮤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툭, 흘렀다. “……그리고 고마워, 뮤.” ◇ ◇ ◇ “어이구, 우리 프란양은 오늘도 아리따우시네! 누워 있을 때는 내가 뽀뽀해도 가만히 있기에 어찌나 좋았던지! 이제 일어났으니 그런 짓 했다간 턱이 날아가겠다, 그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있지만, 시온의 입가는 경련하고 있었다. 프란은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지마, 이 자식아. 네가 뽀뽀했으면 빈사 상태라도 일어나 네 목을 칠 사람이다, 난.” “흐응, 우리 프란은 아직도 모르나보네. 프란은 이미 나를 좋아해. 빈사 상태지만 내가 뽀뽀했더니 어찌나 행복한 미소를 짓던지, 그냥 덮치고 싶었을 정도였다니까!” “으아악! 작작 좀 해, 느끼 버터!” 프란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쳤다. 그러나 시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랑곳이 다 뭔가. 시온은 날듯이 다가와 프란의 어깨를 감싸 안기까지 했다. 이거 못 놔? 하며 버둥대던 프란은 곧 온 몸에 힘을 빼고 말았다. 16일 만에 의식을 찾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밀어낼 힘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시온은 그런 프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쉰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달려와 ‘괜찮아, 네가 자고 있는 동안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어.’ 라고 말해줄 셈이었다. 그럴 속셈으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능글맞게 행동한 시온이다. 마치 어제도 본 사람, 오늘도 보는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천하의 바람둥이라도 표정관리가 안될 때가 있는 것이다. 시온은 그야말로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온은 프란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며 저도 모르게 히죽, 하고 웃었다. 프란은 참지 못하고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다. “야. ……일어나서 기뻐 죽겠다는 표정 좀 짓지 마. 닭살 돋아.” “우리 프란, 눈치 좀 늘었다? 나 기뻐. 이제야말로 내 사랑이 진실 된 것임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 저 너머로 폴인 러브…….” 퍽! 반짝이는 눈동자로 말했던 시온은 그가 말했던 저 너머로 별이 되어 날아갔다. 뮤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헛기침을 했다. ‘과격한데, 프란.’ 시온이 다시 험험, 소리를 내며 프란의 옆으로 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 어느 때처럼, 시온은 ‘어느 부위’ 를 손으로 가린 채 절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프란은 비록 느끼 버터이긴 해도 정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설명해주기에 시온보다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온이 프란의 침대에 살포시 앉는다. 프란은 대뜸 물었다. “야!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대신, 시온은 가만히 손을 뻗어 프란의 얼굴을 만졌을 뿐이다. 프란은 그 손을 파리라도 되는 양 찰싹 내리쳤다. “이 자식이!” 시온은 그러나 다시 손을 내뻗었다. 이번엔 그의 손이 프란의 뺨에 조심스레 닿는다. 시온의 눈이 가만히 가늘어졌다. 그는 세이피안의 봄바람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16일 동안이나 못 들어본 목소리 들으니까, 참 좋다. 참 좋아.” 눈을 또렷이 마주치며 말한 시온의 목소리에 프란은 순간적으로 놀랐고, 그 놀람 뒤에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렇게 말하는 시온의 눈동자에는 농담이 없었다. 그 진지한 눈은 시온 아일린이라는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예전, 카세타 축제 때에서 ‘나는 아일린 가가 싫어.’ 라고 말했을 때 봤던 그 눈과 같은,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다정한 눈. ‘그러지 마라, 시온.’ 프란은 울컥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 깊은 진초록 눈동자는 자신이 아닌 훨씬 아름답고 화려한 여성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프란이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시온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어디부터 들을래?” ◇ ◇ ◇ “……라는 거지.” 시온은 반란 때 있었던 반의 활약을 자세히 설명했다. 반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기사단의 활기며, 궁중 마법사 라톤과 기사단 각각에게 작전을 전달한 이야기, 제 2궁을 파괴시키던 순간에 이르기까지 시온이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온처럼 박진감 넘치게 그 장면을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싶어 흘끗 이쪽을 보았던 뮤조차도 어느 샌가 시온의 이야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바람둥이란 말발로 먹고 사는 존재인 것이다. 한참 동안, 프란은 입을 조금 벌린 채 시온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기만 했다. 이야기가 다 끝나도 프란에게서 반응이 없자, 시온이 프란의 팔을 쿡 하고 찔렀다. 프란이 비명 내지르듯 소리를 지른 건 그 순간이다. “미친 거 아냐? 정말 그랬다고?” “암, 암. 그랬고말고.”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시온이 동조하자 프란이 시온의 가슴을 퍽, 쳤다. “아는 척 좀 하지 마!” “에고, 아파도 행복해라.” 다시금 시온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하지만 아까처럼 농담 없는 눈은 아니다. 프란은 그 눈에 적이 안심한다. 프란이 ‘미친 거 아냐?’ 라고 소리친 이유를 시온은 알지 못했다. 프란은 다시금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는다. 저 가주는, 제 2궁을 통째로 전복시켜 사람들을 압사시킨다는 어마어마한 발상을 한 것도 모자라 그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왔다. 타이밍을 생각해봤을 때 그 것 말고는 도대체 답이 없다. 어떻게 왔는지도 알 수 없다. 자신은 기절해버렸으니까. 하지만, 반은 왔었다. 거짓말처럼. “그래서, 대마왕은?” 프란이 물었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한 대마왕이지. 말짱하셔.” “……어, 다쳤다며?” “피쯤이야 한 바가지 흘린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분이잖아?” 반을 무슨 불사신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 시온의 답이었건만, 프란은 부정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달리 대마왕이 아닌 것이다. 조금 더 시온과 이야기를 나누던 프란은 갑자기 하암, 하고 하품을 했다. 궁금증이 풀리자 급격히 졸음이 밀려온 것이다. 피로의 기색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시온이 앉았던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더 같이 있고 싶지만, 지금 일어난 사람을 무리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얼굴에 가득 아쉬움이 담은 채로도 시온은 여유를 부렸다. “일단은 안정을 취해, 프란. 마린은 지금 집무 중인데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밤이 되면 널 찾아오려고 들겠지만, 내가 내일 오라고 말해둘게.”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문을 나서기 전, 갑자기 몸을 돌리며 프란을 향해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그 모습에 또다시 닭이 돼버린 프란에게 시온이 말했다. “있지, 프란.” “고만 좀 불러라. 왜?” 건성으로 대답하다말고 프란은 다시 굳어진다. 아, 또다시 저 눈이다. 농담이 없는 눈. “……자유로워지고 싶지?” “엉?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프란의 말에 시온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쉬어.” 문을 나서는 시온의 눈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 ◇ ◇ “깨어났습니다, 가주님!” 반의 개인 호위 두 명은 순간적으로 너무 들뜬 나머지 자기네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깜빡 잊어버렸다. 지금 반은 카세타 왕궁에서 나온 사신을 접대 중이었는데, 그 방문을 벌컥 열고는 ‘깨어났습니다!’ 라고 소리를 질러버린 것이다. 몇 번이나 수모를 당하고 드디어 반을 만난 사신은 정말이지 질린 얼굴을 했다. ‘나도 얘기나 좀 해보자, 이 잡것들아!’ 그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신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반을 올려다보았다. 카르멘 가주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은 이제, 솔직히 억울하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익숙해진 그였다. 하지만 일개 가문의 호위무사가 사신이 있는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다니 이건 자존심 문제를 뛰어넘어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신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호위들이 반 가까이로 다가왔다. “가주님, 그 팔팔 꼬맹이가 일어났습니다!” “역시 죽지 않는 꼬맹이예요!” 둘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암, 그렇고 말고!’ 그 주는 것 없이 귀여운 꼬맹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 큰 장정 두 명을 이리도 방정맞게 만든 것이다. 프란이 봤다면 ‘에헤이, 내가 그렇게 좋아?’ 라고 외쳤을 법하다. 허나 호위들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반이 동요 없이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들어왔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언제나 질질 끌고 나가서 이제 사신 따위 무슨 짐 자루 취급하게 된 그들이었지만, 어찌됐든 저 쪽은 일국의 사신인 것이다. ‘죽었다.’ 두 호위 무사가 헉, 하는 얼굴로 돌변하는 것을 보자 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라.” “예, 옛! 죄, 죄송합니다.” “겨, 결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반과 사신을 향해 한 번씩 인사를 한 호위무사들이 잽싸게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신이 후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체면 구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사신은 하던 얘기를 속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카르멘 경. 계속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카르멘 경께서 ‘박살낸’ 제 2궁의 복원 비용은 카세타 왕실에서 전부 부담키로 했습니다. 폐허에 깔려죽은 기사단원은 물론 카르멘 검사들을 위한 위로비까지도 왕실에서 지불할 예정입니다. 더불어, 폐하께서는 카르멘 경의 공로를 치하하는 뜻에서 카르멘 가에 에세리타를 능가하는 크기의 기념탑을 세울 생각이십니다.” 사신은 ‘어때, 고맙지?’ 라는 얼굴로 반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기세 등등이었다. 그러나 반은 한참 반응이 없었다. 사신은 순식간에 그만 긴장하고 말았다. ‘헉, 내가 너무 과했나? 아무리 왕궁의 체면을 세우러 온 길이긴 했지만, 제 2궁을「박살낸」이라고 표현한 건 좀 너무했어. 사실 그게 박살낸 건가? ……뭐, 박살이야 났지만 그렇게 안 했으면 기사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 알게 뭐야. 잘한 일을 비난하듯 말했으니 그게 기분 나빴을 거야. 심기에 많이 거슬렸나? 게다가 「폐허에 깔려죽은」이라는 표현도 맘에 걸렸겠지?’ 사신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카르멘 경?”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시선도 사신 쪽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사신은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니면 궁궐이 아닌 카르멘 가에 기념탑을 세우는 게 못마땅한가? 공적을 치하할 때는 남들이 다 보는 곳에다 기념탑을 세워줘야 하는데 광장 같은 길가도 아니고 궁궐도 아닌 자기 집안에다 주는 게 못마땅할 수도 있지! 자기만 보고 좋으면 끝이니까. 아악, 그것도 아닌가? ……설마, 내 말투가 전체적으로? 안 돼, 이제 더 이상 끌려 나가는 건 사양이야!’ 사신이 혼자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을 때, 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 필요 없으니 4억 5천만케트만 내놓으라고 전해라.” ‘아, 예. 4억 5천만 케트요. 별 것 아니네요.’ ……라고 하마터면 말할 뻔 했다. 사신은 혀를 깨물어 간신히 그 말을 참았다. “뭐라고요, 4, 4억 5천만 케트요? 카, 카르멘 경! 그, 그건…… 국고를 거덜 낼 생각입니까!” 그 말에 반은 뭐가 문제냐고 물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이번 궁궐 탈환에서 반 죽었던 내 시종 몸값이 4천 5백만 케트다. 그 열 배만 받겠다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아, 예. 문제될 것 없지요.’ ……라고 또다시 말할 뻔 했다. “카르멘 경! 그 시종은 다이아로 만들어지기라도 한겁니까!” 반은 고개를 돌렸다. 사신은 또다시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끌려 나가는 건 이제 싫어!’ 사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반은 입을 열었다. “됐다. 나가봐라. 빠른 시일 내에 내가 가지." 사신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으니 사신이 오는 것인데, 이쪽에서 친히 와주겠다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카르멘 경! 공주 전하께서…… 아, 아니 폐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사신은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반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다고?’ 반은 문을 열었다. 웃기는 군, 저스티스 카르멘. 반. 시즈 아일린. ‘지금, 웃고 있는 거냐.’ ◇ ◇ ◇ 프란은 막 잠이 들려던 차였다. 시끄럽던 시온이 나가고, 며칠 간 잠을 못잔 것이 분명한 뮤도 좀 쉬라며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선 아무래도 좀 더 쉬어야 될 것 같아 눈을 붙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런 타이밍만 딱딱 맞추는 얄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프란은 눈을 감은 채 소리를 쳤다. “이봐, 아줌마! 왜 꼭 이럴 때만 들어오는 거야? 시온이 말 안 해? 내일 와, 내일! 나 피곤해!” 순식간에 ‘아줌마’ 가 되어버린 반은 자리에서 잠시 얼어붙었다. “마린, 삐쳤어?” 상대에게서 반응이 없자 슬그머니 눈을 떴던 프란은, 침대 바로 앞에 서 있는 늘씬한 장신의 남자를 발견하곤 헉, 하는 소리를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옷자락을 내렸다. 반을 아줌마로 만들어버린 프란은 필사적으로 입안에서 단어들을 굴렸다. ‘뭐, 뭐라도 말해야 돼! 도, 동태가 될 것 같아!’ 얼어 죽기 싫다는 일념 하에 프란은 떠들었다. 정말 열심히. “와아, 가주님. 순식간에 아줌마가 되었네요! 평생 처음 하는 경험이죠? 으하하! ……하하. ……하, 하하.” “…….” 차라리 말을 말 것을. 프란은 코 박고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살려주세요.” 반은 아무 말 없이 프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란은 ‘일단, 죽어라! 라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용서해주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 앉으세요. 하하, 여기까지 웬일로…… 부르셔도 되는데, 그냥.” “딱히 네가 걱정되어 온 건 아니다.” ‘안 물어봤는데?’ 차라도 내와야 하나,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차를 가져오려면 저 멀리 부엌까지 가야한다. 환자인 몸으로 거기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멀쩡하게 보이려고 꽤 노력했지만, 아무리 강철 체력인 프란이라 해도 16일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뜬 날이다. 아직도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은데 차를 가져올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반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프란의 낯빛은 아직 창백하다. 약간의 공백 후 프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말인데요.” 반이 표정 없는 얼굴로 프란을 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래, 그게 정말 궁금했었다. 도대체 반은 어떻게 알고 거기에 온 것일까? 그 비밀통로는 왕과 키네세스 공주, 스웬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했었는데. “무슨 말인가.” 다 알면서도 시침 떼는 거다, 하고 프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심술탱이 대마왕.’ 속으로 잔뜩 욕한 다음, 프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절 구하러 오셨나, 이 말이죠.” “딱히 널 구하러 간 건 아니다.” ‘으윽.’ 프란은 속으로 혀를 날름 내민다. 부끄러워서다. 확실히 거기엔 왕도 있고, 공주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날 구하러 왔냐.’ 라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자신이 우습다. “아, 예. 여하간 어떻게 거길…….” 반이 답했다. “한 번 도망간 시종에겐 종을 매다는 법이지. 이럴 때 도움이 될지는 몰랐지만.” “엥?” 프란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저 대마왕이 또 의미모를 헛소리를 하는군, 생각하면서. 프란은 아일린을 그저 ‘정말 잘 사는 대단한 갑부 집안’ 쯤으로 알고 있지만 아일린은 그렇게 간단히 정의되는 집단이 아니다. 카르멘 가도 복잡한 사연을 갖고 있긴 마찬가지지만, 그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훨씬 단순함을 알 수 있다. 가주를 정점으로 완벽하게 위계 질서화 된 가문. 허나 아일린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주부터 시작해 원로원, 비켈린, 세라딘, 정초원, 위저드 리그……. 그 중에서도 위저드 리그는 눈여겨볼만한 가치가 있는 집단이다. 위저드 리그에는 천재적인 마법사들, 과학자들이 아일린을 위해 오늘도 봉사하고 있다. 시온만 만나면 패 죽이려고 드는 시온의 스승 자켈린도 바로 그 아일린의 마법사중 하나다. 허나 아일린의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들은 워낙에 괴짜에, 만드는 것도 엉뚱하기가 그지없어 시판되는 것도 거의 없었다. ‘자동으로 야채를 썰어주는 칼’ 을 만들기는 했는데 그걸 작동시키려면 8써클의 마나가 필요하다, ‘귀지를 알아서 파주는 면봉’ 이 있는데 이걸 작동시키려면 6써클의 마나가 필요하다……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발명품인 것이다. 반은 종종, 그딴 발명품을 만드는 마법사들을 향해 ‘밥버러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곤 한다. 그런데 정말 백에 한 번 그들 중 괜찮은 발명품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 요번에 자켈린이 만든 ‘감시핀’ 이 거기에 해당하는 물건이다. 검지 첫째 마디만한 이 감시핀은 두 개가 한 쌍으로, 두 개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붉은 빛을 띤다. 별다른 마나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이제 곧 아일린의 이름으로 시판될 참이었다. 프란이 키네세스 공주를 구하러 간답시고 보수 운운하고 있을 때, 반은 가지고 있던 그 감시핀을 프란의 옷에 꽂았다. 프란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감시핀 덕분이었다. 허나 감시핀에 대한 것을 프란이 알 리 없었다. 그녀는 그래서, ‘대마왕이니까 가능한 일’ 이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니 만사가 편할 지경이다. 프란은 흘끔, 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다친 데 없어요?” ‘대마왕, 넌 다친 덴 없냐?’ 진짜 말투와는 다른 고운 말투를 구사하느라 프란은 꽤 힘이 들었다. 하긴 물으나마나였다. 헤이튼과의 검투로 더욱 악화된 팔이 옷 속에 단단히 감춰진 탓에, 반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던 것이다. “그, 스웬은 어떻게 됐나요?” “키네온이 거둬갔다. ……알아서 하겠지. 평생 왕실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고 갑자기 나타나 왕이 될지도 모른다.” 후자는 생각만 해도 치 떨리는 일이다. “스웬이 왕이 되면 가주님이 좀 불편하겠어요?” “그녀를 왕으로 밀어야겠군.” 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프란은 그 말에 괜히 심통이 났다. “호오, 왜 안 그렇겠어요. 공주님이 여왕 되고 그 뒤에 둘이 결혼만 하면 카세타가 넝쿨째 들어오겠네. 좋겠다, 좋겠어.” 반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이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고. 차라리 그냥 닫혀 있어! 반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그녀와는 결혼하지 않는다.” “엉? 왜요?” 프란은 그 대답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키네세스 공주는 정말로 이 얼음 같은 대마왕을 좋아한다. 카르멘 가와 정략 결혼해 카세타 왕실을 튼튼하게 하고 싶다는 야망 때문도 아니고, 도도한 남자를 발밑에 꿇리고 영원히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만들고 싶다는 너절한 욕망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녀는 ‘저스티스 카르멘’ 이나 ‘시즈 아일린’ 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마왕, 그 자체를 원한다. 그것은 그 짧은 시간 접촉한 프란도 알 수 있을 만큼 깊은 감정이었다. 대체 가문 말고 뭔가 생각하는 게 있을까 싶은 저 가주는 왜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걸까?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인데. “건방지군.” 반의 짤막한 대답에 프란은 헤, 하는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반이 물었다. “락케이드가 누구냐.”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 프란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어떻게 가주님이 락케이드를 알죠?” 알 수밖에 없었다. 기절만하면 줄기차게 불러대는 이름이 락케이드니. 반도 그 이름은 다섯 번 정도 들은 것 같다. 프란은 어느덧 꿈을 꾸는 것 같이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평화가 그녀의 얼굴을 물들인다. “락케이드는, 프리텐 가문의 집사였습니다. ……로이네트에서 구르다 온 저를 따뜻하게 안아준, 아버지 같은 분이셨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집사. 로이네트로 간다고 했지. 내가 있었던 로이네트. 거기는 아주 추운 곳이잖아. 집사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 그렇게 추운 곳에서 괜찮을까? “그렇군.” 반의 대답에 프란은 인상을 썼다. ‘너는 좀, 좀! 인상 쓰며 ‘그렇군.’ 이라고 대답하려고 그걸 물었냐?’ 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정을 취해라.” 프란은 춤이라도 더덩실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반에게서 저런 말을 듣다니, 내일은 천지가 개벽할지도 모른다. 깨어나자마자 ‘일해!’ 라고 소리칠 줄 알았는데. “……단, 나흘간 만이다.” ‘이 대마왕!’ 프란은 속으로 고함을 마구 질렀다. 물론 이제 단련되어 얼굴 근육도 별로 경련하지 않는다. 그런 프란이 누워 있는 침대 위로 반은 무언가를 툭, 하고 던졌다. 프란의 눈이 크게 빛났다. “아.” 프란이 떨어뜨리고 왔던 그 단검이었다. 실버 블레이드는 아직 찾지 못한 듯 했으나 그 단검을 보니 그래도 적이 안심이 된다. 프란은 단검을 소중히 집어 들었다. ‘비싼 거라고 했으니까!’ 프란의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보며 반은 몸을 돌렸다. “다시 잃어버리면 용서 안 한다.” ‘아이고, 정말 여전도 하네. 뭐야, 귀는 왜 빨개져있대? 뭐 잘못 먹었나?’ 프란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왠지 기뻐, 웃고 말았다. ----------------------------------------------------------------- 잡담. '작품 속 자유게시판' 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거기가서 여러분이 남긴 글을 읽고 있는데요. (사실 이 밑에 달린 몇 천개의 리플은 무서워서 못 읽고 있습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라르크 콘서트에 가면 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언뜻 말한 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계셨구나, 싶어서 놀랐습니다. 고백합니다. 저, 거기 갔었답니다. ...광란이었죠. 예, 뭐. 잡담이었고요. 일요일은 오나주 연재가 없습니다. 참고 하시길 바래요 ^-^; 연참을 위해 아껴두려다 그냥 올립니다. 이번 편도 자르기가 좀 그래서 양이 많습니다. ----------------------------------------------------------------- 방으로 돌아온 반은 밀려 있는 잡무 더미 앞에 섰다. 그야말로 산더미 같다. 마린은 인정사정없었다. 반란 기간 동안 밀려 있었던 이 서류를 다 검토하려면 3일 밤낮은 잠도 못잘 것이다. 허나 마린을 원망할 형편도 못된다. 3일 후면 마린역시 온 얼굴을 기미로 칠갑한 채 나타나 ‘시집이나 보내주세요, 가주님.’ 이라며 징징거릴 것이 분명하다. 반은 자리에 앉았다. 시종 녀석도 이제 일어났다. 정말이지 질긴 녀석이다. 죽을 것 같은데, 안 죽는다. 그렇게 죽음의 위협 앞에 던져 놓아도 피를 흘리며 살아 돌아와서 그런가. 조금씩 신뢰가 간다. 어쩌면 그는 7천만 케트라는 돈으로 생각보다 괜찮은 시종을 얻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일린 가로 갈 때, 데려가야겠군.’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반란도 해결되었겠다, 헤이튼도 떠났겠다, 아인켈의 룬과 했던 약속대로 이제 곧 아일린에 돌아가야 한다. 여기 오래 머물렀다. 한 동안은 카세타 왕궁이 반의 입지를 위해 애써줄 것이다. 키네세스 공주가 특히. 아일린으로 돌아가면 세라딘 문제로 한 동안은 골머리를 앓겠지만 그것은 원래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넘겼다. 이번 달엔 레키슈안에서 꽤 많은 이들이 문하로 들어왔다. 그 중 대다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에 허겁지겁 짐을 싸서 도망가겠지만, 그 중 몇 명은 살아남아 좋은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 반란 때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이래서 가고 싶지 않았던 거다.’ 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가주로 있을 당시, 문하생들은 평화로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덕이고 힘이었을 것이다. 반은 잡념을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죽은 놈들은 죽은 놈들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종들의 목을 따곤 하던 자신이 문하생 몇 명 죽었다는 걸 신경 쓴다는 사실이 더 웃기지 않은가. 똑똑똑. 그 때, 누군가가 반의 방문을 두드렸다. 반은 창문을 보았다. 아직 새벽이다. 밝아오는 저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어둠이 걷히려면 멀었다. 반은 서류철을 옆으로 밀고 검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사람을 상대하며 서류를 검토하는 건 힘들겠지만, 사람을 상대하며 검을 닦는 것쯤은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냐.” “형님, 접니다.” “……들어와.” 말해놓고서, 반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때라면 ‘형님, 나유.’ 라며 통통거리며 들어왔을 시온이다. 문이 열리고 시온이 들어섰다. 시온은 시온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찾아온 지라 반이 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어 무작정 찾아온 그였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벌써 깨어있는 걸까, 라고 생각해 잠시 당황했던 시온은, 반이 검을 닦고 있는 것을 보고 문득 정신을 차린다. “무슨 일이지?” 반의 검은 어둠 속에서 검휘를 뿜고 있었다. 살기를 머금지 않아도 무서운 검이다. 시온은 반의 정면, 반이 검을 뻗으면 그대로 심장을 맞을 그 위치에 가서 섰다. 반은 오늘의 시온이 평소의 시온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언제나 방긋 방긋 웃음을 머금고 있던 진초록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흐르고 있다. 저런 눈은, 오히려 시온이 어릴 때 자주 봤다. 반에겐 고모이고, 시온에겐 어머니인 이진느 아일린이 ‘안 돼!’ 라고 소리를 칠 때마다 어린 시온은 저런 눈을 했었다. 하지만 성장한 뒤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일은 거의 없었다. 시온이 입을 열었다. “형님. 저를 보십시오.” “보고 있다.” 정 떨어지게 냉랭한 말투였다. 시온은 입술을 물었다. “잘 들어주십시오. 오늘은 시온이 아니라 ‘시온 아일린’입니다. 현재 ‘저스티스 카르멘’ 이신 형님께 흥정을 걸러 왔습니다.” 속으로 한숨이 터진다. “앉아라.” 저 편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반이 말했다. 시온은 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반은 검을 옆으로 치우고 자신의 사촌을 보았다. 시온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반을 마주한다. 흥분했군. 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크루레티나의 범인을 잡았습니다.” “마린에게 들었다.” 이렇게 이 일은 묻혀 진다. 시온은 마음이 쓰리다. 그래도 그는, 일단 그 건을 잊기로 했다. 오늘의 본론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온은 더 이상 우물 쭈물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저, 형님의 시종인 프란 프리텐이 좋습니다.”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표정을 보니 취향이 어쩌니 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십시오.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프란에게 남은 빚, 제가 모두 갚겠습니다. 다시는,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번 더 그런 꼴로 들어오는 거 보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아일린의 재산, 제게도 상속권이 있다는 것 아시겠지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일린의 재산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전부, 제 몫까지 전부 다 형님이 가져가십시오. 승계권도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면 프란이 진 빚의 수 십 배는 되겠지요.” 시온은 주먹을 꾹 쥐었다. 아일린의 상속권? 직계 자식으로서의 권리? 그딴 것 필요 없다. 마법사인 그로서는 어디서든 한 몸 간수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세뇨타 하나로만으로도 원하는 모두를 소유할 수 있다. 아니, 반이 세뇨타를 반납하라고 명령한다 해도 따를 참이었다. “전 형님을 존경합니다. 여태껏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형님의 방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프란, 보내주세요.” 여자에게 매료되는 것은 한 순간. 갖고 싶음도 한 순간. 메이는 건 질색이다. 그러나 프란은 다르다. 지켜주고 싶고 아끼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 이런 게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라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프란이 자유로워지면 데리고 떠나고 싶다. 곁에 두고 천천히 마음을 열고 싶다. 반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시온은 그 침묵이 의아하다. 반에겐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왜 저리 뜸을 들이나 싶었던 것이다. “싫다.” 대답은 느릿하게 튀어나왔다. “어째서? 형님에겐 거절할 이유가 아무 것도……!” 시온이 목소리를 높인 순간, 반이 차갑게 말했다. “협상은 결렬이다. 돌아가라, 시온.” 반의 눈동자 역시 시온과 마찬가지로 굳어 있었다. 그 눈에서 심상찮음을 느끼면서도, 시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 주십시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프란은 형님에게 있어 그저 빚 대신 끌려온 시종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겐 다릅니다. 제겐 다르다고요! 형님의 시종인 그 애는, 제겐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시온.” 반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시온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시온의 눈에서 농담이 사라지니 이것도 묘한 느낌이다. 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내 시종이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내가, 몇 달 동안이나 죽이지 않은 시종이다.” “……!” 시온은 그 이상 조르지 않았다. 다만 몸을 돌리며,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아일린에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전 프란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작정입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 문을 보며 반은 루니아 블레이드를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저 제안을. 매력적인 제안이다. 상속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아일린의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언제나 아일린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하고 외치고 다니는 시온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온의 생각일 뿐 시온을 믿고 따르는 이는 아일린에 많다. 시온의 눈웃음 사이에 감추어진 무언가를 읽었기 때문이겠지.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래서 시온이 공식적으로 ‘아일린의 세 번째 계승권’ 을 포기한다면 아일린에서의 일은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그런데 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반은 그 답을 자신도 내릴 수 없어, 묵묵히 루니아 블레이드를 닦았을 뿐이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감자 깎는 일을 오랜만에 한 프란은 어깨를 주무르며 그렇게 불평 했다. 그래도 뮤와 함께 오랜 만에 수다 떨어가며 일한 게,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주방장이 웃는 얼굴로 30kg나 되는 감자 포대만 안 내밀었어도 더 즐거웠을 텐데. “오랜만이야!” 프란은 반의 방 앞을 지키고 선 호위무사 둘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복도 저 편에서 건네온 인사에, 호위무사 둘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프란 쪽으로 뛰어왔다. “야아, 이거! 너 진짜 불사신 아니냐?” 호위무사들이 웃어가며 한 그 말에 프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불사신은 대마왕…… 아차, 가주님이나 그렇고 난 평범한 인간이라고.” “배를 뚫리고도 살아난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아, 어서 들어가 봐라!” 프란의 손에 들린 크레인을 봤는지 호위무사들이 방문 앞에서 조금 물러서며 말했다. 프란은 방의 방문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여기 오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생각하며 프란은 씩씩하게 소리쳤다. “가주님, 식사 왔습니다!” “들어와.” 경쾌하게 크레인을 밀고 들어온 프란은, 반이 앉아 있는 책상 위에 가득히 쌓여 있는 서류를 보고 잠시 경악했다. ‘윽, 저 산은 다 뭐다냐!’ 서류를 하나하나 뒤적여가며 사인을 하고 있던 반이 고개를 들어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나흘, 딱 맞췄죠?” 프란이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이 의자에서 일어서 탁자 쪽으로 다가온다. 탁자 위에 오늘 준비된 아침 식사를 늘어놓으면서, 프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왜 처음 눈을 뜬 날 ‘즐거운 나의 집’ 같은 얼토당토않은 노래가 생각났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대마왕이 있는 이 카르멘 가가 어느새 그녀의 집 비슷한 것이 되었음을, 반의 탁자에 아침 식사를 올려놓는 이 만만찮은 하루의 시작이 어느 덧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음을, 프란은 인정하기로 한다. 반은 의자에 앉았다. 그로서도 프란이 가져오는 식사를 먹는 것은 오랜만이다. 프란이 쓰러져 있던 이 며칠간엔 뮤 이레아스라는 시녀가 덜덜 떨며 프란 대신 그의 식사시중을 들어왔다. 참 이상한 일이다. 프란이 저 자리에 서 있는 지금에야 ‘반란은 정말 끝났군.’ 하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그런데 막 음식들을 둘러 본 순간, 반은 뭔가 굉장한 시선이 자신을 노려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을 올렸더니 탁자 옆에 선 프란이 입을 헤, 벌리고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런 프란의 눈이 참, 과도하게 반짝이고 있다. “왜 그러나.” 반의 질문에 프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소스를 발라 구운 토끼 구이가 나왔거든요.” 프란의 답에 반은 시선을 돌려 다시 탁자 위를 보았다. 과연, 먹음직스럽게 생긴 토끼 구이가 메인 메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걸 보며 침을 삼키는 거지? 생각하다 말고 반은 자신이 항상 프란에게 ‘먹어라!’ 라고 명령한 뒤 음식을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토끼 구이 좋아하세요?” 프란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 물었다. ‘너 안 좋아하면 내가 좀 먹으면 안 될까, 대마왕?’ 별로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건만 반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먹어라.” “에?” “난 안 좋아한다.” 반의 말에 프란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와, 맛있겠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어대는 프란을 마주한 채 반은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이 저택에 온 지 장장 넉 달 만에 - 프란 프리텐, 독 실험용 마루타가 아니라 한 ‘사람’ 으로서 가주와 함께 식사를 한 순간이었다. 토끼 고기를 한 점 먹은 순간 프란은 몸까지 부르르 떨어가며 소리쳤다. “카르멘 가의 음식은 정말 최고예요!” 음식까지 튀겨가며 한 프란의 말에, 반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케첩이나 닦아라.” “…….” 허나 즐거운 식사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이 식사를 반쯤 마쳤을 무렵, 문 밖에서 방해하는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가주님,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호위무사의 음성이었다. 반은 순간적으로 헤냔의 얼굴을 떠올렸다. 헤냔이 한 번쯤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식사가 종결될 거란 생각에, 토끼 고기를 거의 우겨넣다시피 하고 있던 프란도 의아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인가.” “세라딘의 사키입니다.” 대답한 것은 호위무사가 아니었다. 방문자가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프란은 반쯤 씹은 고기를 꿀꺽 넘기며 고개를 갸웃한다. 방문자의 목소리가 익숙했던 탓이다. 이 목소리를 내가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러다가 프란은, 갑자기 반에게서 무서운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은 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란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도 그만 먹어야 되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반이 차게 말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다. 아쉬운 마음에 한 점의 토끼 고기만 더 입 안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고 있던 프란은 그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방금 들어선 얼굴은 분명 모르는 사람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저 얼굴이 익숙한 걸까. 어디선가 꼭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다. 프란이 고개를 갸웃하건 말건, 여자는 방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허나 방문자 역시 프란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중이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여자, 사키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키가 프란을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 사키가 프란을 봤던 것은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였다. 사키는 그 때 프란의 목에 검을 대고 협박을 하려 했었다. 허나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갑자기 시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때 사키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법사인 시온이 처음으로 발명했던 안개 탄을 바로 그 발명자 앞에 집어던지고 도망갔었다. 보일린의 저택에서 프란을 감시했던 것도 사키였다. 사키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며 잠시 이를 갈았다. 얼굴이 의자에 찍힌 탓에 한 동안은 계란으로 얼굴을 마사지하는 수모까지 당해야 했다. 그래도 그 때마다 혹시 몰라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프란은 계속해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으나, 사키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거기에 염색까지 했으니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속하, 오랜만에 가주님을 뵈옵니다.” 프란의 시선을 일별한 후, 사키는 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기에 걸린 양 목소리도 걸걸하게 냈다. 그 목소리에 프란은 다시 한 번 습, 하는 소리를 냈다. ‘이상하다. 저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허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프란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무렵, 반은 살기를 숨기지 않은 채 사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란은 아까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던 그 살기에 잠시 몸을 굳혔다. 도대체 저기 있는 저 방문자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 사람 때문에 반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스물두 번째 개로군.” 불안감을 감춘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키를 향해 반이 말했다. 몸은 살기를 피워내고 있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반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했고 얼굴근육은 미동조차 없었다. “스물두 번째 세라딘, 사키입니다.” “웃기는군.” 반은 차갑게 내뱉었다. 사키는 순식간에 밀려오는 압박감에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반이 검을 뽑아 목을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키 자신은 비켈린 못지않은 실력 집단인 세라딘의 일원이긴 하나, 카르멘 가주이기도 한 저 작자와 검을 섞어 이길 수 있다는 오만 따위는 가진 적이 없다. 셀키 역시 당하지 않았던가. 이미 사키의 머릿속에선 반이 검을 쳐들고 있었다. 시즈 아일린을 대할 땐 늘 이런 느낌이었다. 사키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시즈 아일린이 실제로 목격한 세라딘은 셀키뿐이었어. 나나 렌 같이 이 반란에 가담했던 다른 세라딘들은 들킨 적이 없다.’ 사키는 속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표면적으로, 셀키를 제외하면 세라딘은 이 반란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세라딘은 셀키의 일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사키는 그렇게 말했다. 반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왔다. “뭐가 유감이라는 건지 모르겠군. 너희들 중 셀키만이 내 눈에 띤 것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그 녀석이 내 손에 죽은 것을 말하는 건가. 유감스럽긴 하겠군, 그 때 셀키란 녀석에게 내가 죽었다면 너희 세라딘은 더 바랄 게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오오, 저 대마왕이 저렇게 많은 말을 하다니!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프란은 엉뚱한 일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프란은 셀키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생각이 난다. 식당에서 그녀와 검을 섞었던 푸른 머리의 남자를 말하던 거다. 순간적으로 프란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 때는 너무 큰 차이로 당했었다. 반드시, 설욕을 할 것이라 다짐했었던 프란이다. 갑자기 호기심이 맹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나 이 심각한 상황에 끼어들어 ‘그래서, 그 셀키라는 놈은 너랑 무슨 관계인데?’ 라고 물었다간 목이 달아날 판이다. 프란은 일단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 내려참았다. 그러면서 프란은 사키의 얼굴을 더더욱 빤히 바라보고 시작했다. 그야말로 빤히. 사키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더욱 더 고개를 숙였다. 시즈 아일린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지경인데 프란이 저런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키였다. “가주님, 저희는 이 일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 세라딘은 가주님을 지키는 아일린의 집단 중 하나입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셀키가 가주님과, 저희를 ‘배신’ 한 일 말입니다.”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떻게 나올지 짐작했던 바는 아니나, 사키의 이 같은 태도를 보니 치가 떨리는 반이었다. “너희의 그 더러운 수법을 또 잊어버렸군. 이번에도 꼬리를 자를 셈인가.” 차라리 냉소를 섞어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허나 반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감정했고 그래서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 을 통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키는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 당치 않으십니다. 가주님. 셀키는 배신자일 뿐, 저희는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저희의 충성심을 믿어주십시오.” “그래, 이번엔 그 잘난 충성심의 대가로 뭘 내놓을 거지?” 됐으니 닥치고 ‘가져온 카드’ 나 내보이라는 뜻이다. 사키는 입술을 잘끈 물었다. “믿어 주십시오, 가주님! 저희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현장에서 찾아낸 셀키의 시신을 조각조각 찢었습니다. 또한 저희가, 셀키가 도와주고 있던 보일린 이스티네라는 남작을 잡았습니다. 도망 중에 있던 남자라, 저희 세라딘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겁니다. 아! 그리고 여기, 그 보일린이 가지고 있던 가주님이 검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키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프란의 눈이 둥그레졌다. 사키의 손에 들린 것이 자신의 실버 블레이드였기 때문이다. 프란이 ‘오오!’ 하는 눈으로 그 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반의 굳어진 눈동자는 풀어질 줄을 몰랐다. ‘더러운 놈들.’ 다시, 사키는 반이 자신을 베려 한다고 느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선명한 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난다. 저 은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지 말자! 그러면 모든 게 끝이야. 마주 하지 마! 세라딘은 혼자 도망하고 있던 보일린 이스티네를 잡았다. 이제 보일린은 무엇도 증명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세라딘이 그의 혀, 그의 손과 발을 모두 잘랐기 때문이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세라딘과 결탁한 사실을 알릴 수 있을 것이고, 손이나 발이 있다면 글자를 써 세라딘과 결탁한 사실을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하다. 손발을 잘라낸 보일린은 마치 애벌레 같아 보였다. 그 일을 한 것은 이스티네 저택에 머무르고 있던 사키와 그녀의 동료 렌이었다. 허나 그들은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어찌됐든 세라딘은, 시즈 아일린에게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주장해야 했다. “……가주님.” 사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다. “저희는 이 일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셀키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반이 움직였다. 프란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신음소리를 낼 뻔 했다. 콰직! 프란이 그랬을 진데 사키는 더 말해야 무엇 하겠는가. 사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 가주님.” 반은 사키가 가지고 온 바로 그 실버 블레이드로, 사키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간 지점을 찔렀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검이 카펫에 정확히 박힌다. 순식간에 자기 손에 있던 검을 빼앗긴데다 그것이 자신의 어깨 바로 옆을 파고들자 사키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키의 머리카락 몇 올이 실버 블레이드의 날카로운 날에 잘려 나가 툭, 하고 카펫 위로 떨어진다. 사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면에서 반의 눈동자와 다가온다. 사키는 점점 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주저앉은 자신의 어깨 바로 옆에 서듯 꽂혀 있는 실버 블레이드 때문만은 아니다. 반의 눈에서 선명하게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 목을 잘라버릴 것 같은 그 살기를. 반의 눈은 차분하게 불타고 있었다. “아일린에서.” 반은 질려 떨고 있는 사키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 ◇ ◇ 사키가 돌아간 뒤, 프란은 반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었다. 대마왕의 기분이 너무 안 좋은 듯해서 한참 망설이고 있던 프란은 반이 다시 서류를 집어 들자 그 때서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 가주님.” 반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프란을 바라본다. “셀키란 건, 그 녀석 말하는 거죠? 식당에서.” 말 없는 긍정이 이어진다. “아까, 저 사키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그 녀석 시체를 조각조각 찢었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진짜 죽은 거예요?” 이번에도 말 없는 긍정이다. 프란은 이를 물었다. 자기 손으로 다시 한 번 겨뤄 꼼짝 못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그 때 당했던 망신을 어떻게 갚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이 분해하고 있는 걸 느꼈는지 반이 말했다. “세라딘에는 셀키 같은 놈들이 많지.” 어? 하며 프란이 반을 보았다. 그제야 프란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셀키가 없다 해서 풀 죽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세라딘인가 뭔가 하는 집단엔 셀키 같은 강자들이 많이 있고, 반에게 자신이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려면 굳이 셀키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는 말일 게다. 프란은 주먹을 꼭 쥐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세라딘이라는 집단과 꼭 한 번 붙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려면 일단 강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리나스 백작에게도 깨져 나가는 자신이 다시 셀키를 만난다 한들 형편없이 당할 뿐이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하리나스 백작에게 질 일은 없었어!’ 그렇게 생각하자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진다. 프란의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것을 보고 있던 반이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궁성에 간다.” “궁성에요?” 프란이 되물었다. 프란은 그제야 키네세스와 키네온에게 생각이 미친다. 자신을 하리나스와 스웬의 미끼로 썼던 키네온과 안타까운 듯 그런 키네온을 원망하던 키네세스. 분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건 아니나, 프란은 그에 대한 복수심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저 쪽은 한 나라의 왕이고 가신도 아닌 자기를 장기판의 말 다루듯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자신은 살아있지 않은가. 키네세스라면 더더욱 원망할 생각이 없는 프란이다. “예, 그럼 잘 다녀오세요.” “너도 간다.” “네? 저는 또 왜요?” 어차피 가봤자 나는 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너나 기다려야 하잖아! 라고 속으로 외치는 프란을 향해 반이 낮게 말했다. “넌 공주를 구했다. 그 쪽에게 감사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 “에, 말이 그렇게 되나요?” 반은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 “옷을 갈아입어라.” 프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깥으로 나왔다. 호위무사 둘이 긴장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프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까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호위무사 중 한 명이 묻자, 프란은 씩 웃으며 가볍게 답했다. “늘 있는 일.” 그러면서 프란은 콧노래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 피고 새 우는 집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오! 내 사랑, 나의 집.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아무리 엉망진창, 공포뿐인 집인들 어쩌리. 여기가 이젠 ‘즐거운 나의 집’ 인 것을. -------------------------------------------------------- 리플은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무책임한 작가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고,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무책임하다고 리플 다신 분 말씀은 틀린 게 아닙니다. 어찌됐든 일단 돌아왔으니 그 말씀에 사과드리고, 열심히 쓰려합니다.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PART 21 : 궁궐에서 “야아, 지긋지긋한 궁성이네!” 프란이 발랄하게 소리쳤다. 반은 무슨 헛소리인가 해서 돌아보았다. 프란은 깍지를 껴 머리에 댄 채 말하고 있었다. “무도회 때는 격납고가 폭발했지, 가주님 따라 왔을 때는 너무 아파서 정원에서 뻗었지, 공주님 구하고 영웅 되는 줄 알았더니 하리나스 백작한테 난타당하고……. 나하고 이 궁궐은 상극인 것 같아요.” 반은 침묵으로 프란의 입을 막았다. 프란은 쳇,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반의 뒤를 따랐다. “카르멘 경입니다!” 국왕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큰 소리로 반의 방문을 알렸다. 프란은 흘끗, 옆에 선 반을 훔쳐본다. 오랜만에 정장을 한 반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멋지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더러운 성질머리에도 불구하고 키네세스 공주님이 목을 매는 거겠지. “어서 들라하라.” 키네온의 다급한 목소리고 들려왔다. 오랜만에 정장을 한 반과 마찬가지로, 프란 역시 오랜만에 말쑥한 경장차림을 하고 있다. 프란 본인은 잘 눈치 채지 못했으나 잠든 사이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부쩍 부쩍 자라나, 처음 카르멘 가에 왔을 때는 완전한 컷이었던 머리가 어깨에 닿고 있다. 애초에도 성별이 모호해 보이는 얼굴에 머리까지 길고 보니 이젠 ‘……남자 맞나?’ 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릴 지경이다. 곧 문이 열렸다. 방 안에서는 키네온과 키네세스가 의자에서 일어선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서서 기다릴 것까진 없는데. 에고, 공주님 얼굴 수척해지셨네.’ 프란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세이피안의 왕족에게도 황태자 암살 건으로 감사의 인사를 받은 적이 있는 프란이지만, 타국의 왕에게 곧 감사의 인사를 받을 거라 생각하니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르멘 경, 어서 오시오.” 키네온은 그 사이에 또 늙어버린 느낌이다. 허나 그의 눈만은 빛나고 있는 것이, 이번 사건으로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 듯 보인다. 키네세스의 얼굴 역시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안 그래도 연약한데, 이번 사건을 겪으며 크게 몸살까지 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반이 보이자마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카르멘 경…….” 키네세스의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완연한 애정에, 프란은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워진다. 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 왕족을 향해 고개만 까딱해보였을 뿐이다.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역시 재수 없어!’ 프란은 속으로 불을 뿜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반의 얼굴은 태연하다. “고맙소, 카르멘 경. 내 경에게 도대체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키네세스에게 듣자하니 이쪽의 시종에게도 신세를 졌다더군. 감사하게 생각하오.” 키네온의 말투에는 프란을 미끼로 쓴 것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프란은 그것에 조금은 화가 난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그렇지, 저런 식으로 나올 것까지 있나 싶은 것이다. 그래도 프란은 참는다. 허나 프란의 말투는 저도 모르게 조금 비틀려 나왔다.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 걸로 제 빚도 많이 줄었고.” 그냥 빚 때문이니 신경 쓰지 마쇼, 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허나 그 말에 담긴 함의를 눈치 채지 못한 듯, 키네온은 잠잠했다. 오히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은 키네세스였다. 다만, 그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다. “빚이라니요?” 반이 말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오자, 프란이 간략하게 자기 사정을 설명했다. “전 세이피안의 귀족이었는데,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여기에 시종으로 있습니다. 빚을 다 갚는 날까지 가주님 곁에서 시중을 들게 된 거죠.” 키네세스는 깜짝 놀란 눈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키네세스는 당황한 목소리로 반을 불렀다. “카르멘 경!” “하문 하십시오.” “그럼, 원래 프란은 귀족인건가요? 당신의 빚 때문에 시종을 하고 있을 뿐” 반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때였다, 키네세스가 뜻밖의 말을 꺼낸 것은. “그 빚, 제가 갚아도 되나요?” “……예?” 먼저 반응한 것은 프란이었다. 반도 한 순간 멈칫한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얼마 전엔 시온이 와서 그런 헛소리를 하더니, 이번엔 키네세스 공주인가. 사람들이 프란을 ‘자유인’ 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상황이다. 프란은 그 멈칫거림을 흘끗 보고 나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키네세스를 돌아보았다. “그, 그게 무슨?” “전 프란 덕분에 살아났어요.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요. 카르멘 경, 허락하신다면 제가 프란의 빚을 갚아주고 싶네요.” ‘나, 왠지 제비가 된 것 같은데.’ 아름다운 공주님을 유혹한 뒤 돈 받고 사라지는 제비. 이 얼마나 환상적인가,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니! 하지만 이 빚이란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7000만 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은 이제 많이 줄어서, 프란에게 남은 빚은 그 절반인 3천 5백만 케트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액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프리텐 가문을 탈탈 털어 나온 것이 1000만 케트가 안 되었던 걸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액수다. 반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빚은 3천 5백만 케트입니다.” 키네세스가 놀란 것은 당연지사. “네? 네? 3천 5백만 케트라고요?” 놀란 듯 한참을 ‘3천 5백만 케트라고.’ 를 반복했던 키네세스였으나, 잠시 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곧 키네세스가 말했다. “카르멘 경. 당장은 무리이지만 제가 보증을 서겠어요. 프란을 자유롭게 해주신 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갚아드릴게요.” 말끝에 키네세스는 프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병약한 공주님이 짓는 미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반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지금은 시종의 신분이긴 해도, 프란 프리텐은 프리텐 가문의 유일무이한 승계자다. 프리텐 가문은 프란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세이피안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꽤 유명한 상업 집안이 아니었던가. 아일린에게 빚을 지는 바람에 망하긴 했어도, 프란이 다시 프리텐의 승계자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내일이라도 프리텐 가문과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반과 프란을 연결해주는 관계는 오직 하나, ‘빚’ 뿐이다. 주인과 시종이라는 관계도 오직 그 빚 아래에서만 작동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프란은 ‘신분’ 같은 걸로 카르멘 가에 묶이지 않는다. 반으로서는 키네세스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시온이 찾아왔을 때는 프란이 없었기에 ‘싫다.’ 고만 말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잠시의 침묵을 깨며 입을 연 것은 반이 아닌 프란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만, 공주님. 거절하겠습니다.” “네?” 키네세스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반 역시 이 상황이 뜻밖인 건 마찬가지다. 프란이 눈을 빛내며 짧지만 단호하게 말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사실 정말 기쁘고 잠시 혹한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역시 제 스스로의 힘으로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빚을 진 건 제 아버지지만, 갚기로 한 건 저니까요. 이 빚을 못 갚으면 전 앞으로 못 나갈 것 같아요. 제 스스로 갚겠습니다.” 그 말에 반은 저도 모르게 한 순간 미소 지었다. 키네온과 프란은 보지 못했지만, 키네세스는 반이 정면에 있었기에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키네세스의 얼굴이 설핏 굳어진다. 차가운 무표정밖에 못 짓는 남자인 줄 알았다. 언젠가 환하게 웃게 해주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그가 웃는 모습은 상상에서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저런 미소라니. 자기 앞에선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미소를, 그 황홀한 미소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짓다니. 무거워진 마음이었으나 키네세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도 반을 향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일린 가로는, 언제 돌아가나요?” “이달 내로.” 곧장 튀어나온 반의 대답에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는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달 내로라니? 이제야 카르멘 가의 일상에 길들여져 즐거운 나의 집 운운하게 된 프란으로서는 속상한 일이었다. 키네세스는 그 대답에 의기소침해졌다. “그랬군요. 이달 내로라니.” 키네세스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키네온이 그녀를 조용히 가로막았다. 키네세스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녀가 나직한 한숨을 쉰다. 키네온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르멘 경. 나는 경에게 두 번이나 빚을 졌소.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때, 경은 내게 아일린으로 돌아갈 때 소원을 말하겠다고 했지. 두 가지를 말해보시오. 경의 소원을 꼭 들어주리다.” 프란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반을 보았다. 한 나라의 왕이 소원을 들어준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프란은 곧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저 차가운 남자에게는 왕이 들어주는 소원 따위는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도 재력으로도 왕가를 앞서는 두 가문의 주인이니. 반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기사단과 카르멘 가 검사들의 유족에 대한 보상을 원합니다.” 그 말에 키네온은 허허로운 얼굴을 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런 건 당연히 지급할 것이오.” “평소 지급되는 액수의 세 배로.” “…….” 키네온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이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라면 카세타 왕실 전체가 가진 것을 털어도 반이 가진 것보다 적다. 그는 카르멘 가주인 동시에 아일린 가주이기도 하니까. 실제로 반은 죽은 카르멘 가 검사들의 유족에게 이미 위로금을 지급한 뒤였다. 허나 중요한 것은 ‘카르멘의 가주’ 로서 내리는 위로금이 아니라 ‘카세타를 위해 죽어간 용사’ 들을 위해 ‘왕’ 이 위로금을 준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인 액수보다 세 배나 높은 액수는, 유족들의 어두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은 ‘네가 웬일이냐? 그런 마음을 다 쓰고.’ 라는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프란은 깨닫는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반이 왕에게 위로금을 세 배로 지급하라 말했다는 사실을. 반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제 2궁 사태로 인해 그를 원수같이 여길 대상도 늘어났을 거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이 대마왕, 진짜 요령 없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그렇게 하겠소. 두 번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키네온이 그렇게 말했다. “두 번째는…….” ◇ ◇ ◇ 반과 그의 시종이 나가고 난 뒤, 키네세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키네온을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청혼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 하십니까!” 키네온은 피로한 표정으로 그런 키네세스를 보았다. 대답은 없었으나, 키네세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황실의 비밀 방에 홀로 갇혀 있는 스웬을 훗날 국왕으로 만들 셈인 거다. 키네세스가 반과 결혼하면 무서운 배경을 업는 것이니 그를 막기 위해 청혼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아바마마! 왕위와는 상관없습니다. 카르멘 경과 혼약하고 싶어요.” 키네온은 한숨을 쉬었다. “내 딸. ……카르멘 경은 위험한 사람이다. 이제 아일린 가의 성인식도 얼마 남지 않았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남자에게 널 줄 수는 없다.” “아바마마!” 키네세스는 울듯이 키네온을 다시 불렀다. 허나 키네온은 입술을 다문 채 침묵할 뿐이었다. 키네세스는 눈물이 맺힌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약한 공주님의 몸에서 결연한 의지가 배어났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절대. 절대로!’ ◇ ◇ ◇ 반과 프란은 왕실 정원을 막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발밑에서 보드랍게 밟히는 잔디에 기분까지 좋아진다. 프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가주님. 전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요.” “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응, 그래. 내 머리로 이해…… 뭣이라?’ 프란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가 무슨 돌 머리인 줄 아십니까!” “아니었나.” ‘으윽.’ 프란은 이를 부득부들 갈았지만, 곧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왜 그런 소원을 비셨어요? 저라면 훨씬 대단한 걸 말했을 겁니다.” “……그러는 너야말로 키네세스 공주가 대신 빚을 갚겠다고 말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나.” 반의 말에 프란은 속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곧 그녀가 당당한 목소리로 답한다. “전 말입니다, 가주님.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부터 제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힘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제 인생을 제 힘으로 온전히 책임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락케이드에게도 부끄러울 겁니다.” 반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프란은 그런 반의 뒤에다 대고 다시 고함을 쳤다. “아니, 근데 가주님은 도대체 왜 그런 소원을 빌었어요? ‘다시는 카세타 궁정 무도회에 참석하라고 하지 마라.’ 라니! 뭐 그런 소원이 다 있답니까?” 프란이 뭐라고 외치든 간에, 반은 아랑곳 않고 걷기만 했다. 그런 반의 뒷모습을 보며 프란은 ‘제대로 된 소원도 없는 대마왕 같으니.’ 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멈추십시오, 카르멘 경.”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다 말고, 프란은 놀란다. 거기에는 키네온보다, 키네세스보다 며칠 간 훨씬 수척해져버린 사람이 서 있었다. “헤냔 키에르.” 프란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별반 내용이 없는 한편이네요. (웃음) 저, 생뚱맞지만 인기투표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건데... 제안해주신 분이 있어서. 설문조사란에 만들테니,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클릭해주세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 덧. 리플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헤냔은 며칠 새 몹시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그의 눈가엔 까맣게 기미까지 앉아 있다.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요 며칠 간 미친 듯이 마셨기 때문이다. 아나이스며 런스까지 그런 헤냔을 말리고 또 말렸지만 헤냔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동료들이 죽었건만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동료들이 적군 손에 죽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을 죽인 것은 적군이 아니라 반이었다. 처음 반이 왔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했던 헤냔은 그 때 그야말로 절망을 맛보았다. 기사로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신념까지 부정당한 기분이다. 그런 그의 앞에 지금, 반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 한 순간, 헤냔과 프란의 눈이 마주쳤다. 무섭게 타오르고 있던 헤냔의 눈가가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진다. ‘무사했구나, 프리나.’ 자신을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프란은 몸을 꼬았다. 아직도 헤냔이 부담스러운 프란이었다. ‘이렇게 마주치는군.’ 반은 헤냔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다. 무섭게 화를 내고 결국은 기절해버린 그 때 헤냔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헤냔의 눈동자는 적의를 머금어서인지 더욱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헤냔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헤냔은 떨고 있었다. “당신이, 내 동료들을 죽였습니다.” “어린애로군.” 반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차갑다, 프란은 그렇게 느낀다. 헤냔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다면 반은 차갑게 내려앉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째서 반 역시 헤냔만큼이나 슬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새빨간 눈동자의 소년 기사와 은 보라색 눈동자의 소년 가주가 눈빛을 교환한다. 곧, 소년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요. 당신에게 우리 기사단은 그저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테니. 수하들조차 그렇게 냉정하게 버리는 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시죠! 그런 식으로 행동 했다간, 가주 자리도 오래 보전치 못할 겁니다.” 평소의 헤냔이라면 결코 이렇게 빈정대며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헤냔은 지금 짙은 비애감에 젖어 있었다. 강하기만 하다면, 자신에게 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반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허나 손목을 걸고 벌인 저번 승부에서 뼈가 저릴 만큼 알았다. 그가 반군의 대장 센을 가볍게 베어 넘길 때도 호흡이 가쁠만한 충격으로 분명히 알았다. 헤냔 자신의 검은 저 남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헤냔은 그래서, 이 슬픔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반을 대신해서 소리친 것은 프란이었다. 헤냔이 움찔하며 프란을 돌아보았다. 프란은 잔뜩 화가 난 눈이었다. 오렌지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헤냔은 몸을 굳힌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투지를 머금은 프리나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를 긴장시킨다. 그런 헤냔의 앞에서, 프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사키가 내놓고 간 실버 블레이드다. 당황하는 헤냔을 향해, 프란이 그 검을 겨누었다. 햇살 때문에 실버 블레이드의 빛이 한층 눈부시다. 프란은 새되게 고함을 질렀다. “덤벼, 헤냔 키에르!” “뭐……?” 놀란 나머지 목소리까지 갈라져 나왔다. “듣는 내가 열 받아 죽겠으니 나랑 겨루자고! 왜, 설마 무서워?” 프란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헤냔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는 기사야. 이제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넌 여자잖아, 라는 말은 다행히도 안으로 삼켰다. 반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헤냔에겐 다행이었다. 만약 그 말까지 했다면 프란이 폭주했을 테니. 허나 그 말을 제외하고도 헤냔이 뱉은 말은 프란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프란은 으아, 하는 소리를 내며 검도 채 뽑지 않은 헤냔에게 달려들었다. “앗!” 어찌됐든 방어하지 않으면 당하겠다는 생각에 헤냔도 검을 뽑았다. 그리고서 헤냔은 부끄러워진다. 습관처럼 늘 검을 들고 다니긴 하는데, 저번 전투 후 그 검을 한 번도 손질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의 피는 아직도 헤냔의 검에 말라붙어 있었다. 프란은 그런 헤냔의 검을 가차 없이 비웃었다. “손질하지도 않은 검을 들고서는 ‘나는 기사야.’ 라고? 부끄럽지도 않아, 헤냔 키에르?” 할 말 없는 헤냔이 주춤하는 사이, 프란의 검이 헤냔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헤냔은 그 검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끽, 하는 마찰음을 내며 프란의 검이 밑으로 밀려나온다. ‘거봐, 프리나. 힘에서부터 밀리잖아.’ 헤냔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챙! 챙! 챙! 프란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헤냔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 동안 프란을 ‘봐주고’ 있던 헤냔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프란을 너무 얕봤던 모양이었다. 프란은 ‘적당히 봐주며’ 싸울만한 상대가 아니다. ‘강해졌구나.’ 헤냔의 눈빛이 변했다. 이번에는 원망을 가득 담아서가 아니라, 투지를 머금어 그의 눈이 타오른다. ‘그래, 그 눈.’ 프란은 헤냔이 그런 눈을 하자 정말로 안심하고 다시 검을 휘두른다. 처음에는 갈비뼈 부근을 노렸다. 허나 어림도 없다. 헤냔은 한 왕국의 기사다. 그것도 최연소의. 실력자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세이피안과 카세타 두 왕국을 넘나들며 검술을 배웠던 탓에 그가 쓰는 검술은 매우 복잡했다. 챙! 프란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 역시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뛰어 넘으며 더더욱 강해지지 않았던가. 헤냔의 검이 처음으로 프란을 노리고 들어왔다. 프란은 그 검을 부드럽게 흘리며 헤냔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헤냔이 주춤하는 사이, 프란은 아무 망설임 없이 헤냔의 배를 쾅, 들이박았다. “윽.” 헤냔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2주일이 넘게 계속 술을 마셨던 헤냔의 컨디션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프란은 비틀거리는 헤냔을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무릎을 노린다. 헤냔이 발을 살짝 벌린다. 프란은 슬쩍, 그런 헤냔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헉!”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헤냔은 그렇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프란은 꼴사납게 넘어져버린 그의 목에 정확하게 검을 겨냥하고 있었다. 헤냔이 고개를 숙이자 프란이 그 검을 아무렇지 않게 회수한다. 그리고서 프란은 흘끔 반을 보았다. ‘나도 좀 강하죠?’ 프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묵묵히 팔짱을 낀 채 둘의 싸움을 보고 있던 반이 한 걸음 헤냔 근처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채, 헤냔은 다가오는 반의 발을 보고 있었다. 헤냔의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힘이…… 내겐 힘이 없어……. 당신의 시종에게도 지는 내게…… 당신을 무릎 꿇리고, 우리 기사단 모두에게…… 사과하게 할 힘이 있을 리 없지…….” 헤냔의 말에 반이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아일린 가로 갈 것이다. 짧아도 1년은 머무르겠지.” 반은 몸을 돌렸다. “그 때까지 검을 닦아라, 그러면 조금은 나아질 거다.” 헤냔은 분한 듯 잔디를 쥐었다. 손에 꾹 힘을 준 채, 그는 그 상태 얼어붙었다. 그 때 프란이 훌쩍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헤냔은 그런 프리나를 올려다본다. 강해졌어, 프리나. 물론 헤냔의 컨디션이 좋을 때 붙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허나 헤냔은 언제 어느 때에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 것 자체가 패인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프리나, 나는…….” 헤냔이 막 무어라고 말하려 한 그 때였다. 프란이 갑자기 철썩, 하고 헤냔의 얼굴을 후려친 것은. 헤냔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짓이야, 프리나.” “프리나가 아니라 프란이다.” 일단 호칭을 정정하며, 프란은 헤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야. 헤냔 키에르. 넌, 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아?” “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헤냔이 눈을 깜빡인다. “누가 차에 독을 타지는 않았을까 걱정해야 하고, 시종이 먼저 먹지 않으면 밥도 먹지 못하는 자리가 바로 저 대마왕의 자리야. 자기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수하들이 되레 그 목숨을 노리고, 뻔뻔하게 ‘난 안 그랬어요.’ 하는데도 참아야 하는 자리고. 저 대마왕이 성격이 좋기라도 해? 수하의 부하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매일 저딴 식으로 남 기분 상하게 만들면서.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되는 자리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프리나?” 프란은 목소리를 버럭 높였다. “헤냔 키에르! 네가 근성이 있는 녀석이라면, 여기서 이렇게 질질 짜지 말고 덤벼! 언제고 좋으니 덤비란 말이다, 저 대마왕에게! 카르멘 가주라고 처음부터 강했을 것 같아? 너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난 네가 좀 더 근성 있는 녀석이라고 믿었어. 그럼 이렇게 앉아있음 안 돼지. 대체 뭘 원망하고 있는 거야? 기사단은 명예롭게, 카세타를 위해 죽었어. 대마왕의 방식이 남의 오해를 사기 쉽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야! 자기 입으론 그런 말 절대 안 하는 사람이라고, 저 사람은!” 헉, 헉, 내뱉듯 말한 프란이 숨을 몰아쉰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대마왕 따위 나쁜 말을 들어도 내가 알게 뭐냐, 그러는 나는 뭘 안다고.’ 헤냔은 멍하니 그런 프란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난 널 이기고 싶었어.” 프란이 말했다. “널 이기고 싶었다, 헤냔 키에르.” 헤냔은 아무 말도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난 이렇게 남을 원망하며 자기 슬픔을 달래는 녀석을 라이벌로 삼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말하며 프란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헤냔이 프란의 옷소매를 부여잡은 것은. 곧 그가 입을 열었다. “프리나.” “왜!” “……고마워.” 흥, 소리를 내며 프란은 돌아섰다. 씩씩거리며 발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헤냔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나의 말이 옳다. 힘이 없는 것을 원망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이피안의 아일린 가로 간다고 했지.’ 문득 헤냔의 눈이 번쩍 했다. 세이피안 - 거길 떠나온 게 언제던가. 자신의 고향, 한 번 떠난 후로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헤냔은 곧 무엇을 결심했는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곧 그가 큰 소리로 프란의 뒤에다 대고 외친다. “기다려, 프리나! 나도 갈 테니!” 프란은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저 녀석……?” --------------------------------------------------------------- 개인적으로는 헤냔 같은 타입의 남자애가 '소년' 같아서 좋아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론 시온도 꽤 편애하고 있어요. 언제나 반에 뒤지지 않는 남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애쓰고 있습니다. 허나. 인기투표 결과. 반, 너무 강하구나. 너의 인기는... OTL 게다가 반보다 더욱 강한 프란. 사랑받아서 참 좋겠다. (퍽) 다음 챕터가 1부 마지막입니다. 이런저런 수많은 사연 끝에 오나주 4권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출판된다는 말입니다.) 담당님께 원고를 넘기면 책은 빠른 시일 내에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정하느라 박 터지는 하루입니다. (2년 반의 공백을 메우는 수정.... 지금보다 훨씬 글을 못 썼군요 . 지금보다 못하다니, 정말 최악이야...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예, 그럼 다음 챕터에서 뵙겠습니다. 1부 마지막 챕터입니다. ---------------------------------------------------------- 제 8장 : 아일린 가로! 궁궐에서 돌아온 저녁, 반은 의사를 불러들였다. 며칠 지나면 낫겠지, 싶었는데 이 상처가 심상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놀란 눈치였다. “어쩌다 이러셨습니까?” 반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알 것 없다.” 의사는 반의 반응에 잠깐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눈앞의 사람이 카르멘 가주라는 것을 상기, 재빨리 가방에서 부목을 꺼내들었다. 반의 팔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아무래도 크게 베인 후 무리하게 움직였던 모양이다. 이 상태라면 완치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의사는 반의 팔에 부목을 갖다 댔다. “이걸 하면 좀 더 빨리 완치될 수 있습니다. 어쩌자고 검상을 입은 뒤 무리하게 움직이셨습니까? 상처가 너무 많이 벌어졌어요. 원래도 큰 상처였는데, 쯧. 게다가 의사한테 바로 보이지도 않고……. 어쨌든 한 달간 절대 안정입니다.” 허나 반은 부목을 꺼내드는 의사의 팔을 완강히 치워냈다. “필요 없다.” 의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반을 바라본다. “이걸 안 하면 위험합니다.” “시끄럽다. 그만 나가봐라.” 반으로서는 거의 20일 만에 남에게 보여준 검상이었다. 스웬이 있을 때도 반은 그에게 잘 가지 않았다. 스웬을 완전히 신용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거니와, 일단 자신이 다쳤다는 것이 알려질 경우 여러모로 나쁜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아일린 가로 돌아간다. ‘어쩐다.’ 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난히 녹색 비나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그 시각, 프란은 검투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더욱 강해지고 싶어.’ 헤냔과의 검투는 그녀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헤냔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가 발걸음을 떼는 그 순간부터 눈치 챘다. 최상의 컨디션일 때의 헤냔을 이길 만큼, 셀키라는 작자와 동급이라는 세라딘을 이길 만큼 강해지고 싶다. 아니. 프란은 쌩, 하고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실은, 대마왕한테도 이길 만큼 강해지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면 대마왕은 웃지도 않은 채 ‘무리다.’ 라고 할 테지만, 프란은 그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실버 블레이드는 오랜만에 비나룬의 세례를 받으며 마음껏 휘둘러졌다. 한참 만에 프란은 검을 수거하며 훅,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 몸을 흠뻑 적신 땀에 프란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감각만을 평생 느끼며 살고 싶다. 검을 휘두를 때의 짜릿함과, 그 후에 몸을 적시는 기분 좋은 땀, 온 몸의 피를 끓게 하는 검의 감각만을- “프란.” 그 때, 목소리 하나가 검투장의 고요를 깼다. 프란은 목소리가 나온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에, 웃는 얼굴의 시온이 서 있었다. “방에 없어서 와봤더니, 역시 여기 있었네.” “웬일이야?”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시온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예쁜 프란 보러 왔지.” 누가 시온 아일린 아니랄까봐. 프란은 땀을 닦으며 쳇, 하고 투덜거린다. “……당장 꺼져.” “왜 이러실까. 아, 잠깐. 나 프란한테 보여줄 게 있어.” 프란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온은 조용히 눈을 감고는 양 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곧, 그가 무언가를 중얼중얼 외우기 시작했다. 시온의 손에서 거짓말 같이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또 마법이구나.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시온은 보란 듯 손을 벌리며 눈을 떴다. “어, 어?” 프란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을 물러서고 말았다. 빛이 멎은 시온의 손에서, 나비 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노란색과 오렌지색이 적절히 섞인 그 나비 떼들은, 시온의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돈 후 프란 쪽으로 다가왔다. 프란은 눈을 크게 뜬 채 그 수줍은 날개들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한 거야?” 나비들은 프란의 주위에서 맴돌기도 하고, 검투장 안을 날아다니기도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 나비들이 한 줄기 빛 같아 보인다. 감탄하는 프란 앞에서 시온이 눈을 찡긋 했다. “스승님이 맘에 드는 여자한테 보여주려고 만든 마법인데, 내가 슬쩍 했지. 맘에 들어? 노란색이랑 오렌지색이 꼭 프란 같지?” “예뻐.” 프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온은 웃으며 답했다. “응, 프란만큼.” “……그 느끼한 말버릇 좀 고쳐.” 프란이 한숨을 쉬며 한 말에도 시온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프란이 넋을 놓고 다시 나비 떼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시온이 기습적으로 그런 프란을 껴안았다. 프란이 놀라 얼어있는 동안, 시온은 프란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일린에서 기다릴게.” “……뭐?” “형님이 곧 아일린에 올 거야. 너도 데려오겠지. 난 준비할 게 있어서 먼저 떠나. 며칠간 못 보는 게 아쉬워서 이벤트 좀 준비했지.” 프란은 시온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냈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거짓말처럼 그 표정을 녹여 없앴다. “프란.” “왜?” “……아니야, 아무 것도. 그럼 아일린에서 봐.” 말없이 돌아서는 그 등을 향해 나비 떼들이 날아든다. 창조주를 위로하듯 움직이는 그 나비 떼들을, 프란은 오래 동안 지켜보았다. * * * 시온이 떠난 지 삼일 째 되는 아침. “쳇, 그 바람둥이 녀석 없으니 아침이 다 홀가분하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마음 한 구석은 쓰라렸다. 그래도 그 놈의 능글능글한 농담이 알게 모르게 프란의 삶에 위안을 주었던 건지도 모른다. 프란은 애써 그러한 생각을 무시하며 반의 아침 식사를 챙겼다. 그런데, 오늘은 대마왕이 심상찮다. “내일 아일린 가로 떠난다. 너와 나 둘이서 가니 채비해라.” 하마터면 프란은 그 말을 흘려들을 뻔 했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반응은 그래서,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진심이세요?” ‘농담이지, 대마왕?’ 프란은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했다. 물론 반의 대답은 싸늘했다. “죽고 싶나.” “……아뇨. 전 오래 살 건데요.” 아일린 가로 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출발이 내일이라고? 사람이 떠날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저랑 가주님 두 명이서 가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거다. 카르멘에서 아일린으로 가는 데는 꼬박 6일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반을 노리는 자들은 아마 급습을 해올 것이고, 그러려면 호위는 많을수록 좋다. 그런데 반은 자신과 프란, 둘이서만 거기까지 간다고 말한 것이다. “말이 많군.” 반은 반대로 생각이 있었다. 우선, 아일린 가에는 알리지 않고 떠나야 한다. 급습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으니까.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그의 팔이었다. 의사는 한 달 꼬박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떠난다면 그는 반의 부상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차라리 반이 원래의 컨디션이라면 공격하지 않을 사람들도 반이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면 쌍수 들고 공격해올 것이다. 조용히 떠나는 것이 낫다. “내일 떠난다.” 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프란은 죽어라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에 제멋대로 라니까.’ * * * “다녀와.” 마린의 반응은 담백했다. ‘대마왕이 내일 떠난데!’ 라고 말하기 무섭게 마린은 단정하게 이별의 멘트를 했다. 어차피 빚을 갚는 동안은 반의 옆에 있어야 하니 아일린에서 곧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흥, 알고 있었지?” “그럼. 내가 달리 집사장이겠어?” 마린과는 달리 뮤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프란! 나도, 나도 갈 거야!” 프란은 자기 팔에 매달려 소리치는 뮤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아무리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이라고 말했다한들 프란은 아직도 뮤의 왕자님이었다. “이봐, 뮤. 어차피 몇 달만 기다리면 프란은 돌아와.” 마린이 달래봤자 소용없었다. “엉엉, 저도 프란 따라가면 안 돼요?” “아일린 가는 여기보다 더 무서운데?” 카르멘 가보다 무서운 곳이라니, 프란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뮤는 아랑곳 않고 프란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아무리 무서운 곳이라도 좋으니 프란과 함께 가고 싶었던 것이다. 프란은 그런 뮤를 다정하게 한 차례 안아주었지만 뮤의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란은 뮤의 핑크색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넘겨주며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괜찮아, 뮤. 또 볼 수 있을 거야.” “프란, 흑.” 다음 날, 프란과 반은 간단하게 짐을 꾸린 후 카르멘 가를 떠났다. 마린과 뮤만이 그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 * * 새벽이다. 프란은 거울 앞에서, 반이 주었던 단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언제 길었대?” 이맘 때 성장은 빠른 것이어서, 그 짧은 시간에도 프란의 얼굴은 여성스럽게 변해 있었다. 프란은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싹둑, 예전처럼 아무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 거울 안에서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년’ 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다.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프란은 긴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카르멘 가를 ‘즐거운 나의 집’ 으로 명명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떠나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목적지는 다른 곳도 아닌 저 아일린! “각오 단단히 하자, 프란 프리텐.” 프란은 씩, 거울을 향해 웃어 보았다. 자기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프란은 챙겨둔 짐을 들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검 두 개와 옷가지 몇몇 개뿐이다. 그렇기는 해도 정말 대마왕과 단둘이 괜찮을까.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카르멘 가의 장미 정원을 지나며 프란은 그렇게 생각한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도 마지막이군. 프란은 탐스럽게 피어 있는 장미꽃들을 가볍게 일별했다. 여기에선 안 좋은 추억이 정말 많았다. 황금문이 보인다. “가주님!” 반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런, 주인을 기다리게 하는 시종이라니! 프란은 혀를 쏙 내밀어 자기를 질책한 후 반의 근처로 달음질쳤다. 반은 정말로 철저해서, 마린 이외의 사람에게는 오늘 이 집을 떠난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카르멘에는 분명 아일린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아일린에게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이니까. 며칠 동안 반이 붙잡고 씨름했던 서류들은 ‘그렇다면 이것들만은 해결해주고 가셔야죠!’ 하며 마린이 떠넘겼던 것들이다. 반은 다가오는 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좀 늦었죠?” “들어라.” 말하기가 무섭게 반이 자기의 발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도무지 여행용 ‘짐’ 이라고 보기엔 무리인 거대한 ‘짐 뭉치’ 가 있었다. “…….” 무슨 짐이 저렇게 크단 말인가. 저 편에 두 필의 말이 서 있긴 하나 분명 저 짐을 어깨에 지고 갈 일이 있을 것이다. 프란은 쳇, 하고 중얼거리며 일단은 그 짐을 들어올렸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고 무겁다. 프란이 짐을 지고 있는지 짐이 프란을 지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뭐가 든 겁니까, 이 안에!”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반이 조용히 답했다. “침낭.” “뭐라고요!” 프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종이라지만, 침낭 두 개를 통째로 지고 가게 하는 주인이라니, 기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마, 마차는요?” 반은 ‘그런 게 있을 리가?’ 라고 말할 법한 표정을 지었…… 다면 차라리 좋았으련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 버려 프란을 완전히 당혹시켰다. 프란은 거의 짐을 끌다시피 하며 그런 반을 따라갔다. “좀 천천히 가요, 천천히!” 곧, 두 필의 말이 출발했다. * * * “……무, 무겁…….” 무겁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프란은 침낭들을 쌍으로 메고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 물론 반은 본 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란은 속으로 이를 우득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프란은 기분이 꽤 들떴다. 이게 얼마 만에 가는 세이피안인가. 세이피안에선 그래도 좋은 일이 많았다. 견습 기사단장 아샤휘도 거기서 만났고 락케이드도 거기서 만났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헤냔을 만난 것도 거기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세이피안만 생각하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주목받은 것도, ‘검에 관한 가능성만은 세이피안 여검사들 중 최고’ 라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은 것도 바로 그 세이피안에서였다. 프란은 싱긋 웃어보려고 했다가 곧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 짐만 아니면 더 기쁠 텐데.’ 프란은 슬그머니 반을 올려다보았다. 반이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지 두 시간째다. 물론 반 혼자서만 말에서 내렸을 리 없다. 그나마 말이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프란은 울면서 짐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프란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도대체 반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분명 세이피안은 남쪽에 있을 텐데, 어째서 반은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걸까. 게다가 아까부터 경사가 가팔라지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산을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산이라니? 아일린 가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주님,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알 것 없다, 라는 말이라도 나오길 바랐는데 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프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산으로 가는 겁니까? 거기가 지름길이에요?” “안전한 산이겠죠? 뭐가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하면 전 꼼짝 없이 당한 말입니다.” “아, 이거 진짜 무거워요.” “가주님, 우리 밥은 안 먹습니까?” 프란의 계속되는 수다에 반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30여분 동안 반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프란은 혼자서 ‘대화’ 라는 걸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대화란 두 사람 이상의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프란에게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조용히 해라.” “가주님도 심심할 거 아닙니까.” 반이 휙 하고 프란을 돌아본다. 땀으로 범벅이 된 프란이, 그런 주제에 환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짐 때문에 한 발작 한 발작을 떼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말을 붙이고 있었다. 어떻게 짐 하나만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반은 지금 오른팔을 쓸 수 없었다. 되도록 빨리 나아야 하니까. 그런데 저 무거운 짐을 바리바리 들고 있는 저 녀석은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걸까. 석양이 뉘엿뉘엿 졌다. 프란의 금색 머리칼이 그 석양을 받아 찬란한 빛을 낸다. 아름다운 그 머리칼을 잠시 보고 있던 반은 둔덕 위에서 멈춰 섰다. 잠시 뒤, 프란도 끙끙거리며 그 둔덕 위로 올라섰다. 반의 옆으로 온 프란이 엇, 하는 소리를 낸다. “이건?” 프란이 눈동자를 도로록 굴린다. 눈앞에 있는 것은 두 개의 무덤이다. 무덤은 매우 장중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프란이 파헤친 바 있는 아산 전 국왕의 묘소 못지않다. 아니, 그것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으나, 방금 전 프란이 낑낑대며 올라섰던 이 산은 전체가 아일린 가의 소유였다. 아일린의 후손들이 자신의 동반자와 영원히 잠든 곳― 그 중에서도 눈앞에 있는 무덤은 더욱 특별했다. 「로이와 루사, 여기에 잠들다.」 반은 무덤 앞에 앉았다. 가문의 이름은 붙어 있지 않다. 아버지의 아일린도, 어머니의 카르멘도 없다. 무덤에 새겨진 이름도 애칭이다. 로웬이 아닌 로이로, 루이사가 아닌 루사로 그의 부모는 여기에 영원히 묻혔다. 마지막까지도 전 대륙에는 자신들의 결혼을 비밀로 한 채- 보고 섰던 프란도 슬그머니 반의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짐을 뒤지기 시작한다. 뭔가 성묘할만한 물건이 있을까 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안에는 ‘딸랑’ 침낭 두 개와 비상식량들 몇 개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프란은 벌떡 일어서서 앞 쪽으로 뛰어갔다. “어디 가는 건가.” “잠깐만요.” 반의 물음에 프란의 목소리가 저 편에서 들려왔다. 이미 멀리까지 간 것이다. 반은 고개를 돌려 다시 무덤을 바라보았다. 대륙 최고의 실력자 둘이 나란히 묻혔건만, 이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는 성 싶다. 그 흔한 꽃 하나 얹혀있지 않은 걸 보면. 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반. 죽으면 안 된다.’ 어머니. ‘너는 내 하나 뿐인 후계자다. 누구도 너를 건들지 못해. 내가 지킬 거야. 행복해야 한다. 반. 꼭 행복해야 해.’ 엄한 아버지의 기억보다는 다정했던 어머니의 기억이 앞선다. 반이 여기에 오는 것은 2년 만의 일이다. 아일린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괜찮을 겁니다. 반은 무덤 속에 누워 있을 부모를 향해 그렇게 말한다. 카르멘 가에서의 1년은 성공적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다 해결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얻은 것이 있다. “가주님!” 시종은 저 편에서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꺾었는지, 프란의 손에는 풀꽃이 잔뜩 들려 있었다. 뭔가, 싶어 반이 앉은 채로 올려다보는데 프란이 그것을 가지런히 엮어 무덤 앞에 놓는다. “헤. 무덤에 꽃 가져오는 건 상식이죠.” 언제부터 상식인 거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꽃 같은 걸 들고 여기에 온 적은 없었다. 가장 미쳐버릴 것 같을 때 여기에 왔다. 그러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꽃을 놓고 가볍게 합장한 프란이 반의 옆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대마왕이 일부러 시간을 내 들릴 곳이라면, 부모의 무덤 밖에 없을 테니까. 프란은 반의 얼굴을 흘끔흘끔 곁눈질한다. 부모의 무덤 앞에서라면 어떤 감흥 같은 게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반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다. 그래도, 왠지 모르지만 그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몸을 내리누르곤 하던 반 특유의 압박감도 전혀 없다. 그래서였을까. 프란은 그 순간, ‘지금이라면.’ 하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혹시, 내가 여자라는 걸 밝혀도…… 괜찮지 않을까.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프란의 입술에 슬쩍 닿고 떨어져 나간다. 프란은 에잇, 소리를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냐. 정신 차려, 프란 프리텐. 그러면서 프란은 슬그머니 다른 질문을 했다. “가주님. 이제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반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가주님 이름이요, 이젠 저도 주워들어서 안다고요. 저스티스 카르멘이랑 시즈 아일린 중에 어느 쪽이 진짜예요?” 반의 시선이 다시 무덤 쪽으로 옮겨진다. 이번에도 무시하는가 싶어, 속으로 ‘됐다, 됐어.’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프란을 향해 그 목소리가 날아든 것은 한참만의 일이었다. “……반.” 이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또 얼마만인가. 프란에게는 벌써 이 이름을 두 번이나 말했다. 마린에게조차 입에 올리지 말라 한 그 이름을. 어째서일까. 프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예? 저스티스 카르멘이랑 시즈 아일린은요?” 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받은 이름.” 저스티스 카르멘이나 시즈 아일린보다야. “좋은 이름이네요, 반.”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 * * 세이피안의 아일린 가까지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자객을 세 번 만났는데, 두 번은 시답잖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번의 습격은 꽤 위험했다. 프란은 몹시 고전했는데, 검 한 번 휘두르면 이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는 반은 ‘네가 알아서 해라.’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프란은 몸에 온갖 타박상을 입은 채 말에 ‘실려 가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어디가 아일린 가입니까?” 정확히 일주일 뒤. 프란은 넋을 놓고 그렇게 말했다. 같은 나라에 있지만, 한 번도 아일린 가에는 가본 적이 없던 프란이었다. 과연 아일린 본가가 있는 지방답게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도처에 들어서 있었다. 한 국가의 수도를 연상시킬 만큼 화려한 그 건물들을 가리키며 프란은 눈을 빛냈다. “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있는 모두가 다 아일린 가다.” “……그건, 농담?” 그런 프란을 내버려둔 채, 반은 말을 달렸다. 프란은 엇, 소리를 치며 그런 반을 따랐다. 이번엔 아일린이다, 이거지. 프란은 씩 웃었다. “같이 가요, 가주님!” 오! 나의 주인님 1부 완결입니다. 공지사항 업뎃되니 읽어주셔요. 티타임 PART 2. 그 첫 번째, 프란 프리텐. 티타임의 기억을 더듬어보던 가넷, ‘대체 언제 적 얘기야! 이 바보자식!’ 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2003년 일이었던가? 아니면 2004년? 이제 해는 넘고 넘어 2007년이 ‘형 왔다-’ 라며 반갑지도 않은 머리를 비죽이 내밀고 있구나. ……아악! 또 한 살 나이를 먹겠군! 돌이켜보건대, 프란->반->시온->헤냔->키네세스 순으로 하려고 했던 티타임 PART 1은 시온에서 끊기고 말아서 헤냔과 키네세스는 결국 등장도 못해봤었다. 미안해. 헤냔, 키네세스 공주. 대신 이번 티타임에는 자네들을 좀 신경써줄게. 그 때, 난데없이 예정에도 없던 헤냔과 키네세스 난입. 가넷이 흠칫하는 사이 멋대로 떠들기 시작. 헤냔 : ……그런 건 별로 바라지 않습니다. 바보로군요. 언제나 중시해야 하는 건 정의입니다. 공평하지 않은 인터뷰 같은 건 제 쪽에서 거부…… (퍽!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헤냔을 날려버린다.) 키네세스 : (도도한 얼굴로) 무엄하군요. 저번에 나를 잘랐다면 이번엔 내 특집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넷 : (약간 기죽은 얼굴) 저기, 키네세스 공주님. 아무리 당신이 공주이긴 해도 나는 당신을 만든 사람…… 키네세스 : 런스 경! 여기 미친 사람이 있어요! 가넷 : ……둘 다 아직 자기 차례 아니니까 들어가! 사태를 수습한 가넷, 예쁜 쿠키를 가져온다. 굽는 건 절대 무리니 아마도 파***트나 뚜**르 따위에서 훔쳐온 것 같다. 그래도 차 정도는 직접 끓일 수 있어! 라고 중얼거리던 가넷, 결국 좌절한다. 그냥 데자와 같은 거 가져오면 안 돼나? 난 데자와 마니아…… (퍽!) 결국 어찌어찌 공수해온 홍차 두 잔과 모자이크 쿠키를 내놓고, ‘프란 소환!’ 이라고 외친다. 곧 1~ 4권 때에 비해 현저하게 초췌해진 프란이 나타난다. 가넷은 약간 양심에 찔리는 듯한 얼굴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다. 프리나 프리텐 : 이하 ‘프란’ 프란 : (두리번거리다가 가넷과 눈이 마주치자 어이없다는 듯) ……또 너냐? 가넷 : 또 라고 하지 마. 저번 티타임은 벌써 3년쯤 전에 있었잖아…… 프란 : (놀라 눈이 동그래짐) ……뭐라고? 가넷 : 어차피 너희 기준 시간으로는 내가 몇 년을 쉬건 마찬가지겠지. 후후. 프란 : 어디서 같잖은 변명을 하려고 하는 거야! 가넷 : 후후후. (먼 산) 프란 : 이번엔 또 무슨 일 때문에 날 부른 거냐? 나 지금 굉장히 바빠. 방금 전까지 적색산맥에서…… 우읍! (6권 스포일러를 말하려는 프란의 입을 강제로 막아버리는 가넷) 가넷 :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몇 개 물어보려고 불렀어. 어차피 네가 내 공간에 소환된 순간 네 세계의 시간은 멈추니까. 프란 : 넌 여전히 이상한 말만 하는군. 좋아, 물어.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날 보내주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가넷 : ……너 왠지 똑똑해졌다? 프란 : ……나 원래 똑똑해. 가넷 : 아무도 안 믿어. 좋아, 첫 번째 질문 간다! 반과 시온, 둘을 네게 어떤 존재고 어떤 차이가 있어? 솔직하게 말해달라는데. 프란 : (머리를 긁는다) 좀 쑥스럽네. 느끼 버터랑은 만날 투닥거리지만 사실 고마워하고 있어. 그 녀석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겠지. 그리고 대마왕은…… 엄청 못돼 처먹어가지고……(생각하다보니 열 받는 듯) 겉보기만 그럴싸하지 사실 어린애야! (버럭) 가넷 : (한숨) 너 하루 종일 반을 따라다니다 보면 스트레스 같은 게 엄청나지 않았냐? 어떨 때 가장 시종 노릇 때려 치고 싶었어? 프란 : 매일 매일 때려 치고 싶었지. 내가 무슨 인형인 줄 알아! 회의 때도 막 세워두고! 몸이 근질거려 죽겠는데 살기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질 않나……제일 심했던 건 대마왕이 ‘날 공격해라’ 라고 말했던 때! (2권 ‘순수의 상실’ 편을 참조해주세요.) 가넷 : 너, 쌓인 게 많구나. 프란 : …… 당연하지. 가넷 : 빚을 다 갚으면 앞으로 뭘 하고 살 거야? 그리고 빚을 다 갚고 카르멘이랑 아일린이랑 영원히 안녕, 하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프란 : 빚 다 갚으면 다시 기사 시험 칠거다. 헤냔 놈은 벌써 옛날에 기사 됐잖아. ……영원히 안녕하면? 사실 아일린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카르멘이랑 영원히 안녕하면 섭섭할 것도 같아. 거기엔 뮤도 있고 마린도 있고…… 뮤 보고 싶다. 가넷 : (무시) 헤냔 키에르는 어때? 프란 : (약간 인상) 글쎄, 옛날엔 진짜 미웠지. 나한테 ‘넌 여자니까 안 돼’ 라고 말했으니까. 사실 옛날에 하진 녀석도 그렇게 말했었기 때문에, 그건 이중 쇼크였어. ‘이 자식, 어차피 하진도 날 인정했다고! 너도 결국 날 인정하게 될 거야!’ 뭐 이런 마음이 컸어. 지금은 좀 많이 바뀌었어. 눈치 없는 자식이긴 해도 헤냔이 나랑 같이 있어줘서 안심이 되거든. 특히 지금은. 가넷 : ……눈치 없는 걸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웃기는군. (중얼) 프란 : …… 혼잣말은 좀 작게 하시지? (스릉- 하고 조잡한 검을 꺼낸다) 가넷 : 오호호! 어차피 네 세계의 무기는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 그럼 다음 질문 들어가겠어. 너, 레이니아 초상화 기억나지? 프란 : 어. 가넷 : 그거 엄청 비싸다? 프란 : ……뭐? 가넷 : 팔면 빚도 갚을 수 있지 -_- 프란 : 헉! 그게 정말이야? 가넷 : 응. 프란 : ……진작 팔아치울걸. (중얼) 가넷 : 그럴 줄 알았다. 야, 너…… 가슴 드러났을 때 안 쪽팔렸냐? 프란 : 글쎄, 그 때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게다가 렌이란 놈은 내 몸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고 눈빛이 마치 무기질을 보는 것 같이 차가웠어.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그런 느낌이 오래 가진 않았지. 일단 살고 봐야 한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가넷 : 흐응. ……너 반을 덮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냐? 샤워하고 난 뒤라든가. 프란 : (펑! 얼굴이 빨개짐) ……그, 그런 것도 질문지에 있냐? 가넷 : 응. 프란 : ……덮쳤다간 죽을걸.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야! 너 왜 실실 웃고 있어! 가넷 : (실실 웃다 말고) 반과 헤냔이 붙으면 누굴 응원할거야? 프란 : (망설임 없이) 헤냔을 응원하겠지. 가넷 : 어째서? 프란 : 대마왕이 이길 테니까. 하지만 그런 강자하고 맞붙겠다고 나선 녀석은 대단해. 그런 의지라면 언젠가는 이길지도 몰라. 나도 꼭 대마왕과 붙어보고 싶어. 가넷 : 흐응. 왜 기사가 되고 싶었어? 프란 : ……난 어릴 때 사생아였지. 엄마도 날 버렸고. 근데 락케이드가 날 돌봐줬어. 집사는 언제나 따뜻한 눈으로 ‘아가씨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정의롭고, 강한 눈을 가졌어요.’ 라고 말해줬어. 만약 집사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난 계속 엇나갔을 지도 몰라. 그러다가 기사단에 들어가게 됐는데, 검 연습이 너무 재밌는 거야. 온 몸이 울리는 듯한 느낌. 나는 강해! 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강함으로,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었어. 기사단! 하면 정의, 정의! 하면 기사단 아니겠어? 가넷 : ……무슨 아이 같은 소릴. 권력욕 같은 건 아니고? 프란 : 권력욕이랑은 상관없어. 지금은 망했지만 프리텐 가도 그리 녹록치 않은 집안이었고. 기사랑 재물도 별로 상관없지. 다만 나는,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었어. 내 꿈이야. 가넷 : (결국 기사가 멋지게 보였다는 거군) 실버 블레이드 가격은 얼마나 될까? 프란 : 글쎄. 대마왕이 툭 던져줬던 단검이 그 주제에 저택 하나 값보다 더 나간다는 걸로 봐선 실버블레이드는 더 엄청나지 않을까? 하지만 실버 블레이드에 값을 매기고 싶진 않아. 그랬다간 ‘내가 들고 있는 건 검이 아니라 돈 덩이야.’ 라고 생각해서 결국 마음껏 못 싸우게 될 것 같거든. 가넷 : 진짜 너 답군. 너, 반의 과거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프란 : (잠시 생각) 흠. 저번에, 키네세스 공주님이랑 비밀 통로를 내려갔을 때 있잖냐. 그 때 카세타 국왕과 공주님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꼭 저스티스 카르멘 경이 구해줄 거다.’ 라고. 그 사람들은 대마왕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던데,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어. 사람들이 대마왕을 대마왕으로 만드는 거구나, 하고. 어쩌면 대마왕도 처음에는 조그맣고 예쁜 꼬맹이였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상상은 안 돼지만. 하하하! (4권 격돌 편 참조) 가넷 : 너 있지, 만약 반이 여자라면 어떨 것 같아? 네가 남장한 것처럼 그도 남장한 거였다면! 프란 : ……어이. 나는 대마왕이 옷 갈아입는 것도 본 적 있는데. (2권 카세타 왕국 무도회 편 참조) 가넷 : 대답이나 해! 프란 : ……그런 마음 알겠냐? 너무 상상이 잘 되는데 상상이 안 되는 거. 가넷 : ……으응, 대강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진은 어때? 프란 :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잘 모르겠지만, 좋은 녀석이야. 어릴 때도 안 그런 척 하면서 은근히 챙겨주는 스타일이었지. 혼자 튕길 거 다 튕기고 뒤에 와서 ‘같이 놀아줘’ 라고 말하는 타입이었으니. 가넷 : 풋! 프란 : 지금은 제법 성장해서, 꽤 많이 달라졌어. 자식, 대견하다고! 가넷 : ……너 시온한테 좀 싸가지 없게 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프란 : (단박에) 느끼버터한테 그렇게 대하는 게 뭐가 어때서. 가넷 : 흐음. 만약에 너랑 반의 입장이 반대로 되었다면 어떨 것 같아? 그 사람이 빚을 져서 네 가문에 왔다거나. 프란 : 죽을 만큼 부려 먹어주마, 으하하! 가넷 : 난 너를 그런 캐릭터로 만든 적이 없다, 프란;;; 이상형이나 첫사랑 같은 건? 프란 : (갑자기 얼굴이 빨개짐) 가넷 : 뭐, 뭐야! 이, 있는 거냐! 프란 : 이상형은 집사 같은 남자. 가넷 : (휘청) 프란 : 또, 첫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넷 : +_+ 프란 : 집사. 가넷 : ……내가 말을 말지, 진짜. 좋아, 질문은 이상이야! 프란 : 야,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가넷 : 음? 응, 물어봐. 프란 : ……나 언제까지 고생해야 되는 거냐? 너 솔직히 말해봐! 너 S지! 가넷, 웃으며 소리친다. ‘프란, 네 세계로 가버려라!’ 프란 : 으아아악! 이 치사한 자식! 대답도 다 해줬는데 이딴 식으로 날 보내 버리냐! 이 나쁜 노오오오오오오오옴! 가넷 : 그래봤자 소용 없지롱. 잘 가, 프란. 대답 고마웠어. 다음 티타임은 저스티스 카르멘. 반. 시즈 아일린 씨와 하겠습니다. 질문을 리플로 달아주세요. 티타임 PART 2. 그 두 번째,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 카르멘. 티타임 PART 1때의 처절한 실패를 돌이켜보는 가넷. (겁나서 반에겐 변변히 말도 못 시켜봤음) 이번에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프란 때와는 달리 다양한 음식들 준비. 대학로 빵굼*에서 공수해온 고구마 모양의 달콤한 빵을 내온다. 일단 입이 고급이니까…… 뭘 준비해야 될지 모르겠어. (털썩) 일단 되는대로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블루베리 치즈 레어 케이크, 아몬드 초코 쿠키 등을 모아온다. 차는 반이 즐겨 마시는 뮤니아 차! ‘반 소환’ 이라고 외친다!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 카르멘 : 이하 ‘반’ 소환된 상태는 5권 후반부, 계승식을 떠나기 직전. (그 이후의 반을 소환하면 감당이 안 되서;;;) 반 : …… 가넷 :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아, 저기. 오랜만…… 반 : (말없이 검을 들어 가넷의 목에 겨눔) 가넷 : 힉! 반 : 뭔가. 가넷 : 루, 루니아 블레이드 좀 치우고 말하면 안 될까요? 아무리 나한텐 그 세계 무기가 안 통해도 역시 싫은 건 싫단 말입니다 ㅠ_ㅠ 티타임 PART 1때와 마찬가지로, 의문의 남자 등장. 그가 반의 귀에다 대고 속닥속닥 무엇인가 속삭인다. 표정 없는 얼굴로 반이 가넷을 바라본다. 가넷이 흠칫하는 동안, 반이 차갑게 한마디 한다. 반 : 나는 바쁘다. 가넷 : ……아, 예. 짜, 짧게 할게요. 반 : ……. 가넷 : 시, 시작할게요. 반 : ……. 가넷 : (첫 번째 질문지를 받아들고 얼굴이 창백해짐. 프, 프란이랑 결혼해서 애 낳으면 이름을 뭐로 지을 거냐니? 물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ㅠ_ㅠ) 반 : ……바쁘다 했다. 가넷 : (질문지를 후다닥 넘김) 프란이 여자인 것을 아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반 : (인상 찌푸림) 모른다. 가넷 : 모, 모른다니요? 반 : 읽어보면 알 것 아닌가. 가넷 : (맞아, 내가 반을 저렇게 만들었지;;) 무도회 끝나고 비나룬을 보면서 ‘결혼은……’ 하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 때 떠올린 얼굴은 대체 누구였습니까? 반 : 네가 ‘비나룬이 물어놓고 뱉어주지 않았다’ 고 쓰지 않았나. 가넷 : ……. 반 : ……더 할 말 없는가? 가넷 : (창백)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잠깐만요! 저, 프란이 책사를 죽이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반 : 그랬나. 몰랐군. 가넷 : ……. (저기요?;) 반 : …아직 안 끝났나? 가넷 : 불행히도 아직 안 끝났거든요?; 고모와 외삼촌 중 누가 더 좋은가요? 반 : ……헤이튼 쪽이 낫다. 가넷 : (곧 죽어도 좋다는 소리는 안하는군)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떤가요? 반 : 엄했다. 가넷 : ……그건 책에도 나오잖습니까! 반 : 그래서? 가넷 : ……위치추적 핀은 일회용입니까? 아니면 계속 달아놓지 그러셨어요. 반 : 감시핀은 일회용은 아니다. 가넷 : ……. 반 : ……. 가넷 : (심기일전, 심기일전, 호흡, 호흡) 프란이 가장 불쌍하게 보였을 때나 행복해 보였을 때가 있습니까? 반 : 하리나스. 락케이드. 가넷 : ……제가 해석까지 해줘야 하는 겁니까! 하리나스한테 맞고 기절했을 때 제일 불쌍해보였고 기절해서 락케이드 부를 때 제일 행복해 보였답니다. (에효) 가넷 : 제 2의 켈리란 무엇인가요? 반 : 켈리는 첩보원이자 암살자다. 가넷 : 그럼 프란을 첩보원이자 암살자로 키우려 하셨단 말입니까? 반 : ……. 가넷 : ……네에,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무섭단 말입니다! 오렌지색 눈동자에 화려한 금발을 가진 여인을 무도회에서 만났던 기억 나십니까? 반 : 그래. 가넷 : ……저, 저는 감상을 말해달라고 한 건데요. 반 : ……. 가넷 : (포기) 노래 잘하십니까? 반 : 해본 적 없다. 가넷 : 정말입니까?;;; 반 : ……. 가넷 : (됐습니다, 됐어요!) 프란이 침대 옆에서 자고 있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잠든 척 했잖습니까. 왜 그러셨던 겁니까? 반 : ……가겠다. 가넷 : 네에? 네에? 네에?; 반, 벌떡 일어남. 가넷 : 저기요, 내가 저 세계로 보내줘야 갈 수 있는 거거든요! 반 : (살기) 보내라. 가넷 : 네에 ㅠ_ㅠ 늘 그랬듯이. 상대가 반일 때는 별 알아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ㅠ_ㅠ 너무 앞서나가는 질문은……. 다음 인터뷰는 시온 아일린 군과 하겠습니다. (단, ‘6권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거야?’ 유의 질문은 삼가주셔요!) 티타임 PART 2. 그 세 번째, 시온 아일린. 평온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가넷. 심지어 준비한 것도 데자와, 캔 커피 (그것도 500원짜리), 그리고 엄마손 파이, 빅 파이 같은 것들이다. 반 때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성의 없는 준비.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넷, 데자와를 딴다. 가넷 : 크윽! 겨울에 먹는 따뜻한 데자와는 정말 최고야! <- 진짜 먹고 있다;; 잠시 뭐 때문에 나왔는지 망각한 듯한 가넷. 그러다 ‘아, 시온을 불러야지.’ 하고 중얼거린다. 아, 이 녀석 지금 폭풍 한가운데에 있잖아! 시간을 조절해서 불러야지! 반 때와 마찬가지로 계승식 전의 시온을 부르기로 결심. ‘시온아 소환 되어라!’ 하고 외친다. 시온 아일린 : 이하 ‘시온’ 시온 : (잠시 당황한 듯 했으나 곧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어라, 당신은 몇 년 전쯤 느닷없이 나타나 ‘난 널 만든 사람이야’ 라고 외쳤던 사람이지? 가넷 : 기억력 한 번 좋다;; 시온 : (어깨를 으쓱함) 달리 마법사겠어? 게다가 당신, 여자잖아. 가넷 : 여자로 봐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부담스러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시온 : 나 같은 미남이 여자로 봐주는데 고마워해야지? 응? 가넷 : ……됐으니까 와서 앉아. 탕탕, 하고 의자를 치는 가넷.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 시온이 의자에 앉는다. 시온 : (진지한 얼굴) 근데 병원은 가봤어? 창조주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건 심각한 병이야. 가넷 : ……병원 같은 덴 안가도 돼. 시온 : (딴청) 근데 이것들은 뭐야? (눈앞에 있는 과자들과 캔 커피를 가리킴) 가넷 : (거들먹거리며) 비싼 거야. (다 합쳐서 삼천 원도 안하겠지만) 먹어도 좋아. 시온 : ……거짓말. 비쌀 리가 없을 것 같은데. 가넷 : (눈치 빠른 자식) 그냥 먹어. 그걸 먹는 대가로 몇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해줘. 시온 : 그러지 뭐. 나에 대해 궁금한 거라면, 뭐든지. 내 팬이 많은 가봐? 가넷 : (아아, 이 녀석의 느끼함은 정말 감당이 안 돼) 프란이 제일 예뻐 보일 때는 언제야? 시온 : 늘 예뻐 보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예쁘지. 가넷 : ……그래. 내가 잘못했다. ……프란에게 프러포즈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할래? 시온 : 그건 비. 밀. (윙크) 가넷 : 나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거든? 반이 널 좋아한다면 어떨 것 같아? 시온 : 하하하하하하하하! 가넷 : 우, 웃다니? 시온 :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 있다) 아아, 형님과 똑같은 미모의 ‘여성’ 이라면 고려해볼게. 가넷 : (그, 그러냐) 네가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은근히 지지 세력이 있잖아? 본인의 어떤 매력 때문이라고 생각해? 시온 : 네가 ‘자유로운 느낌’ 이라고 썼잖아. 가넷 : 응, 그렇긴 해. 시온 : 하지만 내 생각엔, 내 미모에 반해서…… 알았어, 꼬집지 마. (웃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가넷 : 너도 말을 얼버무릴 때가 다 있구나. 첫사랑 있니? 시온 : (어두운 얼굴) 아아, 있었어. 가넷 : 호오, 언제 어떻게 만났대? 시온 : 열 살 때, 가정교사였지. 그녀의 섬세한 손이 내… 읍! (자체 심의) 가넷 : …… 시온 : (웃으며) 왜? 가넷 : 내가 왜 널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그냥 다음 질문 할게. 프란은 드레스 차림 했을 때가 예뻐, 아님 평소처럼 선머슴 같이 하고 있을 때가 예뻐? 시온 : 둘 다 프란인 걸? 어느 때나 예쁘지. 하지만 드레스 차림 했을 땐 정말 놀랐어. 순간적으로 말이 안 나왔지. 가넷 : 흐음. 넌 어릴 때부터 여자를 밝혔냐는 질문이 있는데…… 아까 가정교사 운운한 순간 누구나 눈치 챘겠지. 넌 어릴 때부터 그랬어! 시온 : 하지만 지금은 프란으로 일편단심인걸. 가넷 : 정말 프란이 레이니아 왕비보다 예쁘다고 생각해? 시온 : 당연. 레이니아 왕비가 아무리 예뻤다 해도 프란만큼 찬란하게 빛나진 않았을 거야. 프란은 뭐랄까, 별 같아.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짝반짝 빛이나. 누구나 프란에게 끌리는 건 바로 그 빛 때문 이겠지. 가넷 : (빛이 아니라 빚이겠지……) 자켄린에게 얼마나 맞았기에 이제 감흥이 없는 거야? 시온 : 스승님한테 마법 배우기 시작한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 때부터 줄기차게 두들겨 맞았지. 내가 여자랑 놀러 나가나 안 나가나 지키고 섰던 적도 몇 번 있는데, 스승님이 조는 사이에 항상 살짝 나갔었거든. 그리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야말로 머리가 산처럼 봉긋해지도록 맞았지. 가넷 : 그래도 밤마실을 멈추지는 않았다는 말이군? 시온 : (웃으며) 우리 대화, 프란은 못 듣는 거지? 가넷 : ……응. 키네세스와 프란 중에 누가 더 예뻐? 시온 : 당연히 프란이 예쁘지. 스승님은 또 미쳤냐고 하겠지만. 가넷 : 키네세스, 어떻게 생각해? 시온 : 대단한 공주님이지. 아름답고, 총명하고. 게다가 무슨 일이 터질 때보면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 야심만만하기도 하고. 매력적이야. 가넷 : 어릴 때 반을 어떻게 생각했어? 시온 : 아주 어릴 땐 형님을 못 만났어. 그땐 형님이 카르멘 가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거든. 여덟 살 때였나, 아홉 살 때였나. 그 때 만났는데, 처음엔 여자인 줄 알았지. 바로 다음 순간 케인이 나타나서 ‘반’ 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정말 여자라고 믿었을지도 몰라. 가넷 : 정말 너답구나. 마법은 왜 배우게 된 거야? 시온 : (약간 인상) 어머니가 끌고 갔어. 속셈이 있었겠지.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스승님이 나보고 천재라고 하더라고. 이럭저럭 여자 만나는 거 말고는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남는 시간에 스승님이랑 같이 보내게 됐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마법을 익히게 된 거야. 여러모로 유용하지, 마법이란 건. 나비도 만들 수 있고. (웃음) 가넷 : ……여자 유혹하는데 도움 돼서 마법 배운 거지? 시온 : 날 너무 잘 아는군. 가넷 : (한숨) 만약 프란이 프러포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시온 : 아일린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레키슈안쯤으로 이주해서 같이 살면 좋겠어. 거기서 난 궁중 마법사, 프란은 기사 돼서 살면 참 행복하겠네. 평생 날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해 줄 거야. 그 반짝거림을 잃지 않도록. 가넷 : 지금까지 사귄 여자는 몇 명이나 돼? 임신 시킨 기억 같은 건 없어? 시온 : 피임은 철저히. 여자를 울린다면 최악의 남자지. 사귄 여자는 잘 모르겠어. 세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지금이야 어찌됐든 그 때 그 때마다 내 감정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어? 그녀들을 ‘나와 사귄 사람들’ 이라고 뭉뚱그리고 싶지 않아. 가끔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이름으로, 얼굴으로, 느낌으로 기억하고 싶지. 가넷 : 흐음. 반이 프란을 자유롭게 해달라는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니? 시온 : 일이 커지네, 라는 생각? (웃음) 가넷 : 좋아. 질문은 이상이야. 너한테 온 질문은 반에게 온 질문보다 현저히 적구나…… 시온 : 그거, 내가 형님보다 인기가 없다는 소리? 가넷 : (시온의 어깨를 토닥토닥) 괜찮아, 넌 내가 좋아해주잖니. 시온 : (상큼하게 웃으며)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데. 가넷 : 하하하! ……이제 돌아가도록 해줄게. ‘가라, 시온!’ 하고 외침. 시온은 끝까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상 시온 아일린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다음은 헤냔 키에르 군과 하겠습니다. 헤냔과는 처음이군요. 약- 간 들뜬 가넷. 헤냔이 온다, 헤냔이 온다, 헤냔이 온다! '처음 만나는 건데 뭐라고 해야 하지?' 꽤 정성들여 준비한 애플파이와 멜진. 가넷 : 헤냔, 소환! (이 녀석은 어느 시기라도 상관없음!) 헤냔 키에르 : 이하 헤냔 헤냔, 갑자기 나타난 가넷 때문에 당황한 얼굴. 헤냔 : 여긴 어디죠? 당신은 누구? 정색한 얼굴로 묻는 헤냔. 자식, 그래봤자 너도 내 자식이지. 생각하며 싱글싱글 웃는 가넷을 향해, 헤냔이 날카롭게 외친다. 헤냔 :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웃지 말고 대답하십시오! 가넷 : 응? 음, 나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너를 만든, 좀 더 정확히는 너희네 세계를 만든……. 헤냔 :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이 신이란 말입니까? 세상을 만들었다는 창조주? 가넷 : (한 발자국 물러남) ……아니, 너희 세계 라티네 여신이랑은 좀 다르거든? 헤냔 : 무슨 소립니까, 그럼! 지금 근거 없는 말로 저를 희롱하는 겁니까? 가넷 : 아니, 그게 아니라…… 헤냔 : 그럼 뭡니까?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까! 가넷 : ……. 또 어디선가 남자 하나가 뛰어옴. 그가 헤냔에게 소곤소곤 설명을 하지만, 헤냔은 계속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라고요?’ 라고 묻거나 ‘정말입니까? 맹세할 수 있습니까?’ ‘세키에 여신과 라이메스의 앞에 대고 맹세하십시오.’ 등등을 반복한다. 약 삼십분 후, 완전히 지쳐버린 가넷에게 다가오는 헤냔. 그 남자가 도대체 뭐라고 말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름. 그러나 헤냔은 홀가분한 얼굴로 의자에 앉는다. 헤냔 : 반갑습니다. 가넷 : 어이구, 예쁜 것. (헤냔의 볼을 잡아당김) 헤냔 : (뿌리치며) 이러지 마십시오! 엄연한 추행입니다! 가넷 : 쳇, 쌀쌀맞기는. 어디보자, 질문지가…… 헉, 시온보다도 더 질문이 적어! 이대로면 키네세스 공주는 거의 왕따 분위기겠는걸! (중얼) 헤냔 : (못 들은 듯)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넷 : 어? 아, 아니야. 좋아, 그럼 몇 가지 질문할게. 프란의 어떤 면이 가장 예쁜가, 라는 질문과 여태까지 사귄 여자를 묻는 질문이 있네? 헤냔 : (당황해 얼굴이 빨개짐) 프, 프, 프리나…… 예, 예쁘죠. 가넷 : ……어이?; 헤냔 : (더듬거리며) 프리나는 견습 기사 시절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항상 당당하게…… 옛날에는 프리나가 드레스를 입고 여느 여자처럼 변하길 기다리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아요. 프리나는 검을 들고 있을 때 가장 예쁘니까. ……그리고, 저는 열 일곱에 기사가 되었습니다. 카세타에서 정식 기사가 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에요. 여자를 사귈 시간적, 정신적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가넷 : (흐응) 하진이 나타났을 때 기분이 어땠어? 프리나의 과거를 아는 유일한 인물인데. 헤냔 : 아…… 솔직히 당황했어요. 프리나 어깨에 문신이 있다는 소문은 세이피안 견습 기사단에도 돌았었습니다. (2권 참조) 처음엔 다들 프리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아주 과거가 나쁘다고들 악 소문을 퍼뜨렸어요. 결국엔 그 사람들 모두가 프리나를 좋아하게 되긴 했지만. (웃음) 그런데 그런 문신이 진짜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3권, 5권 참조) 그리고 그런 걸 그 하질리언도 갖고 있고……. 뭔가, 묘한 박탈감이 들던걸요. 나에겐 없는 것을 저녀석은 갖고 있구나, 하는. 가넷 : 프리나가 남장한 걸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어땠어? 헤냔 : (얼굴 붉힘) 그 때 제가 뭣도 모르고 ‘프리나’ 라고 불러서 프리나는 이 당황했겠죠? (2권 참조) 때는 그냥 프리나다, 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예요. 하인들이 입는 검은 옷을 입었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다는 게 이상했지, 설마 남장 중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가넷 : 프란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헤냔 : (어리둥절한 얼굴) 포기라뇨? 가넷 : 아니, 그러니까 포기는 포기…… 아니다, 됐다. 너 같은 순진소년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무리군. 넌 프리나를 위해서는 기사 작위를 포기해도 좋다고 했는데, 어떤 면이 그렇게 좋은 거야? 헤냔 : 프리나를 살리고 싶었어요. 그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단장님이 기사 작위를 반납하라고 한다면, 감옥에 가라고 한다면,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를 겁니다. 그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가넷 : 아니, 내 질문은 그러니까 어느 면이 좋으냐는 거였는데……. 흐음, 프리나가 정말로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헤냔 : 네에?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정색) 처음 만났을 때부터 프리나는 여자애였는걸요. 가넷 :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지. 헤냔 : 그랬다면 아마, 최대의 라이벌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눈을 빛냄) 가넷 : 그, 그러냐. 너는 표정관리가 잘 안되잖아. 그거 관리할 생각은 없냐? 헤냔 : 저는 표정관리를 잘 합니다! 가넷 : ……지금 굳은 그 얼굴은 도대체 어쩔 건데. 언젠가는 반을 이길 수 있다고 믿니? 헤냔 : 물론입니다. 지금은 무리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가넷 : 아나이스를 어떻게 생각해? 헤냔 : (부끄러운 듯) 아나는 최고의 동료죠. 안 그런 척 하면서 절 챙겨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아, 하지만, 아나한테는 말하면 안돼요. 가넷 : 반과 시온 중 누가 나아? 헤냔 : 실력은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저스티스 카르멘 경은 정말 싫습니다. 프리나를 그 지경으로 만들고. 가넷 : 으, 으음. 헤냔 : 시온 아일린 씨와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늘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했으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리나를 구출해주었고, 저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가넷 : 그렇군. 프리나를 데리고 도망칠 때는 어떤 생각이었니? 헤냔 :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아일린에게서 지켜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무룩한 얼굴) 금세 콘솔에서 그렇게 되버리고 말아서…… 가넷 : 괘, 괜찮아. 그렇게 풀 죽을 거 없어. 네 잘못이 아닌걸.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시니? 헤냔 : (얼굴이 약간 굳어있음) 잘 지내십니다. 가넷 : 그, 그게 다야? 헤냔 : 네. (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얼굴에 커다랗게 써 있다) 가넷 : 그, 그래. 프리나가 데이트하자고 한다면 어떨 것 같아? 헤냔 : 예? ……아. (빨개져서 뭔가 혼자 상상하는 듯, 한참 말이 없음) 가넷 : 말을 해, 말을! 헤냔 : 수, 수락할 겁니다! 가넷 : (당황) 그런 거 말고 계획이라든가…… 하긴 여자 사귀어본 적이 없는데 데이트 코스를 알 리가 있나……. 너는 왜 기사가 되고 싶었지? 헤냔 : 검이 좋았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가넷 : 기사 말고도 검을 쓸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잖아? 헤냔 : 남을 상해하면서 검을 쓰고 싶진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나라를 지키는 검을 쓰고 싶었어요. 가넷 : 프란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싶다는 생각 한 적 있어? 헤냔 : (조금 슬픈 얼굴) 프리나라면, 갚아준다고 해도 거절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한테는 그만한 돈도 없고요. 프리텐 가는 키에르 가보다 훨씬 큰 가문이었습니다. 그 집안이 도산할 만큼 큰 빚이라면 제가 갚는 것은 무리겠지요. 하지만 저한테 돈이 있었다면 갚아주고 싶었을 겁니다. 가넷 : 프리나가 너에게 올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기다릴 거니? 헤냔 : (의아한 듯) 저에게 온다는 말씀은……? 가넷 : (답답함에 가슴을 쥐어 뜯는다) 그러니까 너네둘이 이어질 가능성 말이야. 헤냔 : (또 빨개짐) 아? 가넷 : 그, 그만 됐다. 좋아, 질문은 이상이다. 헤냔 : 아, 그렇습니까? (땀을 닦는다) 꽤 힘들군요. 가넷 : 응, 파이 좀 먹고 차도 마셔. 한 동안 맛있는 거 못 먹었을텐데. 헤냔 : (웃으며) 고맙습니다. (먹는다) 애플파이가 참 맛있네요. 가넷 : 응, 내가 안 구워서 그래. 가넷, 일어나는 헤냔의 옷을 털어준다. 가넷 : 잘 가, 헤냔. 헤냔 : 네, 안녕히. 헤냔, 저 세계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말고 어깨를 으쓱하는 가넷. ‘……어떤 의미에서는 반만큼이나 인터뷰하기 어려운 상대였어.’ 라고 생각함. 다음 인터뷰는 키네세스. L. K. 카세타 공주와 하겠습니다. 카페 한정 티타임 이벤트, 그 마지막- 키네세스 L. K. 카세타 키네세스를 사석에서 만나는 것도 역시 처음인 가넷. 공주한테는 뭘 대접하면 좋을까 골똘히 고민하다가, 반과 있을 때의 그녀는 항상 뮤니아 차를 마셨다는 것을 기억해냄. 뮤니아 차 두 잔과 그것과 어울릴법한 예쁜 쿠키들을 준비함. 가넷 : 키네세스 공주님 소환! 키네세스 L. K. 카세타 : 이하 키네세스 키네세스 : (놀란 기색 없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가넷과 마주침) 누구신가요? 가넷 : (우물쭈물) 저는, 그러니까……. 키네세스 : 몸값을 요구할 셈으로 저를 납치한 마법사라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 희 왕국의 케이온 기사단과 디센 기사단, 그리고 궁중마법사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가넷 : 그게 아니고요!; 저는 당신을 만든 사람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키네세스 :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어머니치고는 많이 젊으신 것 같습니다만. 가넷 : (그게 아니얏!) 또 이상한 남자가 튀어나와 키네세스에게 조근 조근 설명. 가넷은 이제 ‘저 놈은 대체 누구고 무슨 말을 하기에 내 캐릭터들이 저렇게 쉽게 납득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키네세스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옴. 키네세스는 물빛의 레이디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물빛 머리카락과 호수 같은 눈동자, 손목을 쥐면 뚝 꺾어질 만큼 연약한 몸매지만 그에 비해 볼륨 있는 가슴 등등이 가히 사기 캐릭터 수준. 빈약한 프란의 몸매를 생각하며 잠시 한숨. 키네세스 : 반갑습니다. 키네세스 L. K. 카세타, 카세타 왕국의 세 번째 공주입니다. 가넷 : 예, 반가워요. 여기 앉으세요. 의자에 앉는 키네세스,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키네세스 : 물어볼 게 있다고 했나요? 가넷 : 그렇습니다. 몇 가지 물어볼게요. 키네세스 : (고개를 끄덕임) 가넷 : 저스티스 카르멘 경과 결혼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키네세스 : (얼굴을 약간 굳히며) 물론이에요. 그걸 위해 아일린까지 찾아왔고. 가넷 : 프란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키네세스 : (화사하게 웃으며) 정말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나를 구해줬을 때,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내게 안도감을 줬죠. 태양처럼 밝은 느낌. (갑자기 얼굴빛이 어두워짐) 하지만 나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에 대해선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뭔가 생각하는 듯) 가넷 : 그리고? 키네세스 : (웃으며) 아니에요. 가넷 : 반이 첫사랑인가요? 키네세스 : 네. 그 분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2권, 4권 참고) 가넷 : 어떻게 생활하기에 그렇게 똑똑하신가요? 키네세스 : 부끄럽군요. 미천하고 하찮은 지식을 조금 습득했을 뿐입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어릴 때는 특히 몸이 많이 약했어요. 항상 궁성 안에서 놀아야 했던 저에게는 아바마마만이 거의 유일한 놀이 상대였지요. 그나마도 아바마마가 늘 바쁘셨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 시간마다 책을 읽었죠. 의학 서적과 법학 서적을 특히 많이 읽었습니다. 소설도 좋아해요. 가넷 : 아주 아름다우신데, 미모 관리법은 있으신가요? 키네세스 : 과찬의 말씀이시군요. 특별히 관리하는 건 없습니다만, 목욕은 늘 장미수로 해요. 가넷 : 만약 반이 청혼을 거절한다면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키네세스 : (슬픈 얼굴)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나에게는 조그마한 확신이 하나 있어요. 그 분의 마음을 흔들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라는. 그렇다면 항상 옆에 있어왔던 내게, 보다 많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가넷 : 시온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키네세스 : 유쾌한 분이에요. 항상 상대를 웃게 하는 분이죠. 시녀장이 언젠가 지나가나는 말로 그런 적이 있어요. 상대를 선택할 거라면 카르멘 경보다는 시온님이 나았을 거라고. 시온님은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고 그랬죠. 분명 그분이 일단 마음을 정한다면, 상대는 틀림없이 그 누구보다 행복한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분의 상대는 제가 아니고, 제 상대 역시 시온님은 아니지요. 가넷 : 왜 그렇게 반에게 마음을 쏟으시는지요? 당신 같이 아름답고 이지적인 분이라면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키네세스 : 예전에 프란 씨에게 말했었어요. (4권 참조) 어릴 때, 한 눈에 반했어요. 상대의 목숨을 가볍게 끊어 맺던 그 분의 눈을 잊을 수가 없군요. 하지만 내가 반한 건 그 분이 강해서가 아니에요. 그의 곁에 도열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카르멘 경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을 때의 그 참담한 마음. 어쩌면 나는 그 때 이미 알았는지도 몰라요. 저 사람은 혼자라는 걸.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그 눈동자를 내게로 돌리게 하고, 웃게 하고 싶었어요. 가넷 : 반의 태도는 그래도 차갑지 않습니까. 창피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한 적은 없었나요? 키네세스 :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어떤 여자에게나 그렇게 대하니까요, 그 분은. 그나마 제게는 부드럽다고 생각해요. 한 번도 저를 완전히 거절한 적은 없었으니까. 제가 카세타의 공주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씁쓸하게 웃음) 부끄럽냐고요? 아니오,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 분의 마음을 손에 넣을 때까지 그런 건 느끼지 않기로 했어요. 가끔 슬프기는 해도. 가넷 : 카세타 무도회 때 프란을 빤히 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키네세스 : 그 분과 함께 와서, 눈여겨보았어요. 시종치고는 어리기도 하고. 도움을 받을 거라고 그 때는 생각도 못했네요. 가넷 : 본인의 미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키네세스 : 빠지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머, 너무 직설적이었나요? (웃음) 가넷 : 공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나요? 키네세스 : 글쎄요. 제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 공주라서 얻어진 것이죠. 그런 걸 잊어본 적은 없어요. 공부할 기회도 그렇고, 국정 운영에 참여할 기회 역시 제가 공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공주가 아니었다 해도 결국엔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꽤 야심만만한 정치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가넷 : 카르멘 경이 당신이 아닌, 조건 좋은 다른 여자와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어쩌실 건가요? 키네세스 : 저를 슬프게 하는 질문이 많군요. 아직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가넷 : 카르멘 경과 생일 날 춤을 추셨는데, 어떠셨나요? 키네세스 :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 날은. 행복했습니다. 진심으로. 가넷 : 스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키네세스 : (얼굴이 굳음) ……그 날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어요. 아버님만이 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면 몸이 먼저 공포 반응을 보여요. …무서워요. 가넷 : 솔직하시군요. 기사단에 정말 관심이 많으신가요? 아나이스와 런스의 관계를 가르쳐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키네세스 : 호호. (소리 내어 처음으로 웃음) 기사단은 재미있는 단체에요. 거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지라, 신기한 부분도 많죠. 두 기사단 모두 엉뚱한 구석이 있어요. 왕국을 보호할 강한 기사들인 건 분명한데, 평소엔 장난도 잘 치고 다들 귀여워요. 기사단엔 정말 관심이 많답니다. 더 강한 기사단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가르쳐준 건…… (조그마한 목소리로) 사실, 그란젤 경이었답니다. 가넷 : 네에? 그랬습니까? (아나이스, 너는 도대체……;;;) 키네세스 : 네. 신이 나서 기사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걸 우연히 들은 거긴 하지만요. (웃음) 가넷 : 반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키네세스 :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그 분은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 남들보다 많이 부족해요. 하지만 그걸 채워주고 싶은 게 저의 욕심이죠. 가넷 : 예. 좋습니다, 공주님. 질문은 이상이에요. 키네세스 : 그렇습니까? 그럼 돌아가도 되는 건가요? 가넷 : 네! 안녕히 가십시오,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가 돌아간 자리, 가넷이 서 있다. 차와 쿠키를 치운 가넷, 씩 웃으며 정면을 바라본다. 카페 여러분, 재미있으셨나요? 이상 티타임 이벤트였습니다. 많이 긴장하고 있는 가넷. 으, 으음. 게시판 밑에 달린 리플들을 읽어본다. 혼자 준비한 티타임이니만치, 즐거운 마음으로 맥주(!)를 마시는 가넷. (<-집안에는 언제나 캔 맥주 내지는 맥주 페트가 저장되어 있다) 이건 뭐, 티타임이 아니라 맥주 타임인 셈. 옆에서 유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가넷을 올려다본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 아이는 제 고양이 유이랍니다. 길을 걷다보면 한 번씩은 마주하게 되는 평범한 길 고양이, 코숏이죠. 아주 희한한 사연을 거쳐 제 옆에 오게 된 고양이인데, 처음 소개해드리네요. 오나주가 안 풀릴 땐 이 녀석이랑 뒹굽니다. (웃음) 자, 그러면 여러분이 주신 질문에 답해보도록 할까요? 참, 질문이 겹치는 경우 한 번만 대답했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고요 ^-^ ‘살짝도야지’ 님과 ‘반&프’님 : 오나주 완결 후 다른 글을 연재할 의향은 없으신가요? 가넷 : 사실 드림워커에 연재를 시작했다가, 몇 달 전부터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는 「인어왕자」 라는 소설이 있어요. 오나주가 완결되고 나면 대대적으로 리메이크해 다시 연재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녀석 스토리는 한 5년쯤 묵었죠. 숙성될 대로 돼서 김치 냄새가 날 지경입니다. 그 외에「신녀(가제)」라는 소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여러모로 바빠서, 어떻게 될지는 사실 모르겠네요. ‘반&프’ 님 : 오나주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가넷 : 눈물 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짧게 설명하자면, 오나주는 전작에 대한 경악을 극복하기 위해 씌어진 소설입니다. 제 전작을 읽으신 분들은 그것을 'y 판타지’ 라고 정의하시더군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던 저로서는 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나도 꽃발 날리는 러블리 판타지를 쓸 수 있단 말이다!’ 라는 생각으로 오나주를 쓰게 됐습니다. 뭐, 꽃발이 날리기는 커녕 권모술수와 피만 난무하고 있지만요. 게다가 여주인공은 남장을 했었죠. 하하하하 OTL ‘반&프’ 님 : 다음 내용이 안 떠오르는 경우는 어떻게 하시나요? 가넷 :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안 되면 사실 포기하고 딴 일을 합니다. 마감 직전이 아니라면 말이죠. 때로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양이와 놀아요. ‘반&프’ 님 : 오나주를 쓰면서 가장 기뻤던 일 혹은 감동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가넷 :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게시판의 댓글을 봤을 때였습니다. 염치없지만 그랬어요. 더불어 독자님들이 메일을 보내주실 때, 담당자님이 ‘이번 편은 이 부분이 좋았습니다.’ 라고 얘기하실 때 행복을 느낍니다. 방학 때 서울에 올라온 남동생이 읽어보더니 ‘재밌네?’ 라고 말했을 때도 좋았죠. ‘Catherine’ 님 : 프란과 반을 빼고, 가장 사랑하는 주 조연, 또는 조연은 누구인가요? 물론 다 사랑하시겠지만 딱 한명만 뽑자면? 가넷 : 글쎄요. 일단 가장 쓰기 편한 조연은 헤냔과 아나이스입니다. 쓰는 입장에선 그게 제일 사랑스럽죠. (웃음) 1~ 3권까지는 시온을 가장 총애했고, 4권에서는 키네세스, 5권에서는 헤냔이었습니다. 그 권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에게 애정을 쏟게 되는 것 같아요. ‘Catherine’ 님 : 가네트님의 이상형은? 가넷 : 예전엔 꽤 거창했습니다만, 지금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요. 의견 마찰이 심한 사람과는 무엇을 해도 결국 싸우게 되거든요. 음, 지적이고 다정한 연상이 좋아요. 어라? 뭔가 시온이랑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바람둥이는 감당이 안 되겠죠? (웃음) ‘Catherine’ 님 : 가네트님의 평소 성격은 어떠세요? 가넷 : 게으릅니다. 취미가 ‘드러눕기’예요. 누워서 뒹구는 게 좋아요. 개인적으로 꽤 원만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연락을 한다거나 하는 자잘한 데에서 아주 무심합니다. 차분해지려고 노력은 하는데, 가끔 발작적으로 까칠해져요. 그러면서 소심하죠. ‘꽃돌이 킬러’ 님 : 오나주를 쓰시면서 가장 고민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많은 생각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궁금해요. 가넷 : 기본적으로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 건 ‘어떻게 하면 프란을 고난에 빠뜨릴까, 흐흐.’ 하는 것?; 진지하게 답하자면, 캐릭터들의 감정 상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나가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캐릭터는 시온과 반이에요. 프란이나 헤냔, 키네세스는 아주 뚜렷해요. 특히 프란이나 헤냔은 거의 알아서 움직여줍니다. 시온도 알아서 움직여줄 때가 가끔 있지만, 역시 모호한 부분이 많죠. 반도 마찬가지구요. ‘유랑’ 님 : 소설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셨나요? 인물의 성격, 이미지, 이름 같은 거요. 가넷 : 글쎄요. 무의식중에 여러 곳에서 영향을 받았겠지만, 특별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건 없어요. 사실 프란이나 반이나 시온은 전형적인 인물이죠. 아주 전형적인 인물을 만들어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밝고 낙천적이고 빛나는 여자- 강하고 냉정한 남자- 부드럽지만 상처 많은 남자- 고지식하고 고집 세지만 의외로 귀여운 남자, 뭐 이런 식의 구도요. 거기에 조금씩 다른 것들을 집어넣고 싶었죠. (웃음) 프리나라는 이름은 ‘Free- Na’에서 나왔습니다. ‘자유롭다.’ 란 뜻의 영어와 ‘나’ 라는 한글이 섞인 거죠. 그걸 줄이니 프란이 된 거구요. 단독적인 주체, 자유로운 이미지를 주고 싶었어요. 반은 ‘절반이다.’ 라는 느낌이었어요. 일단은 카르멘이 반, 아일린이 반이죠. 아주 냉정하지만 가끔은 다정하기도 하고, 그런 이중적인 느낌으로 설정했어요. 시온은 ‘시즈’와 짝으로 지은 이름이고, 이름만 들어도 왠지 바람둥이 같아서;;; 그렇게 정했네요. ‘유랑’님 : 출판제의를 받았을 때의 기분과 책이 나왔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요? 가넷 : ‘어라? 일이 커지네. 어쩐다?’ 라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 출판이었기 때문에 첫 소설만큼 그렇게 설레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책이 나왔을 땐 솔직히, 부끄러웠어요. 뭔가 고쳐야 될 부분이 많은데 결국 이 상태로 나와 버렸네, 라는 느낌이랄까. ‘유랑’ 님 : 스스로 쓴 거지만 이 부분은 마음에 든다, 안 든다, 같은 부분이 있을 텐데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가넷 : 1~5권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4권이에요. 3권도 그럭저럭. 4권에서 반과 프란의 상황이 교차되어 묘사되는 부분이 잘 되었다고 생각해요. 3권의 반란군 진압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반면 마음에 안 드는 건 1권 중반부와 5권 중후반부예요. 1권 중반부는 묘사가 지나쳐서 늘어지는 반면, 5권 중후반부는 역시 뭔가에 쫓기는 듯 서둘러 씌어진 감이 있어서일 거예요. ‘유랑’ 님 : 3권과 4권의 공백 동안 오나주를 잊으신 적이 있으신지? 있었다면 오나주가 다시 생각났을 때의 기분은? 가넷 : 처음 돌아왔을 때도 썼듯이, 그 2년 반의 연중 중 오나주를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출판사에서의 연락도 뜸해지고, 스스로 ‘나 도망쳤어.’ 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간이 분명 있었죠. 다시 생각났을 땐, 아, 정말 비겁했다-라는 느낌이었죠.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독자님이 있는 걸 봤을 땐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유랑’님 : 악플을 봤을 때의 기분은? 가넷 : 내용에 대한 악플보다는 연중에 대한 악플을 많이 봤습니다. 왜 돌아왔느냐, 양심 없다, 뻔뻔하다, 라는 식이었고요. 두 명의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한 명은 ‘다 네 탓이니까 그 사람들 원망하는 게 무책임하다. 수용해라.’ 고 했고, 다른 한 명은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후자의 방식에서 안도감을 얻되, 전자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CHEUKIKO’ 님 : 소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쓰시는 편인가요? 가넷 :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사실 안 써질 때는 때려 죽여도 안 써집니다. 대신 일단 필을 받으면 미친 듯이 씁니다. 정말 잘 씌어질 때는 40시간 가까이 컵라면 먹고 화장실 가는 것 말고 글만 써본 적도 있어요. 자지 않고요. 그럭저럭 잘 씌어질 때는 하루에 12시간 가까이 씁니다. 이때는 글이 잘 나오기 때문에, 세부적인 묘사를 다 집어치우고 바로바로 뼈대만 세워가며 나갑니다. 이 때 쓴 10페이지 남짓을 보완하면 2~30페이지가 나옵니다.(책으로 60매 정도?) 대신 이렇게 한 번 쓰면 꼬박 며칠 간 글이 안 써져요;; ‘CHEUKIKO’ 님 : 6권은 아마 2월 달 초, 중반에 나올 듯한데, 대략 몇 월 달에 나올 것 같나요? 가넷 : 빠르면 그 시기, 늦으면 3월로 늦춰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치고 있네요. 담당자님 건도 그렇고요. 5권 이후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서, 어떻게 될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CHEUKIKO’ 님 : 많은 분들이 가넷님 티타임 하자고 하셨는데, 그 글을 보셨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는지요? 가넷 : 부끄럽고 민망하고, 그랬습니다. ‘프란 프리텐’ 님 : 오나주에는 차를 마신다든가 파티에 간다던가 하는 상류층의 생활이 많이 나오는데요, 특별히 참고하시는 자료 등은 있나요? 가넷 : 특별히 참고하는 자료는 없습니다. 필요할 때는 주로 인터넷을 통해 얻는 편이고, 의상학과 친구에게 복식에 대해 물어보기도 합니다. ‘프란 프리텐’ 님 : 좋아하는 노래는? 가넷 : 옛날에는 라르크지, 당연히! 라고 말했었던 것 같군요. (웃음) 최근에 많이 듣는 그룹은 matchbox-twenty, HIM, Travis, keane, i pooh, 넬 등입니다. 요즘은 새삼스레 keane(킨. 퀸이 아닙니다;;)이 너무 좋아서, 거의 하루 종일 듣고 있어요. ‘행운의 아이’ 님 :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가넷 : 글쎄요. 초등학교 때부터 쓰긴 했어요. 특별히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소설은 언제나 쓰고 싶어 했고, 써왔던 것 같습니다. 행운의 아이 : 배경 같은 것은 어디서 참고하세요? 가넷 : 세이피안은 프랑스 남부, 로이네트는 남극 지방~ 러시아를 참고하고 있어요. 카세타는 특별히 없었고요. 세이리아 : 무엇보다 6권 진행상황을 알고 싶어요. 지금 어디까지 쓰셨나요? 가넷 : ……총 9장 중 이제 겨우 3장 쓰고 있습니다. (무서워요 ;ㅁ;) Ramya : 윗분들이 질문을 많이 하셔서 저는 하나만 할게요, 오나주 가상 캐스팅을 한다면 누구누구를 뽑으실 거예요? (모델, 연기자, 가수 등등 국적, 인종 가리지 않고요) 혹은 오나주 주인공(들)의 모델(들)이 있습니까? 가넷 : 우와, 굉장히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프란은 좀 더 젊을 때의 위노나 라이더? 욕심을 좀 내자면, '라 붐' 때의 소피 마르소. 반은, 음, '토탈 이클립스' 할 때의 디카프리오. 지금은 잭 니콜슨화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정말 많이 예뻤죠. 시온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요. 헤냔은 러브 액츄얼리의 미남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가 훌~쩍 자란 느낌으로. 아, 헤냔치고는 너무 도도한가요?; 키네세스는 '여왕 마고' 때의 이자벨 아자니. 뭔가 이미지들이 튀는군요. 좀 더 생각해볼게요 아, 특별히 모델은 없답니다. ‘☆HALLOW☆’ 님 : 가넷님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공백 기간은 왜 그렇게 길었던 건가요? 가넷 : 여자입니다. 공백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아, 이대로는 도저히 못 쓰겠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못하겠네요. ‘★━あㅕl ズ’ 님 : 공백 기간을 거치고 카페에 돌아왔을 때 회원 여러분이 올려준 격려글을 읽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더불어 사시미 운운하는 협박글을 읽으셨을 때의 느낌은? 가넷 : 미안하고 고맙고 내가 이럴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키리시안’ 님 : 오나주의 블랙홀 반 캐릭터는 어떻게 창조하시게 되었는지? 후후 가능하시다면 프란도요! 가넷 : 블랙홀?;; 이럭저럭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가요? 사실 최강 캐릭터로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검의 가문, 상업의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아름다운 소년, 이라는 설정은 그 아래서 나온 거고요.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캐릭터를 만들어본 건 처음이라 꽤 재미있었답니다. 프란은 ‘무조건 낙천적으로! 생명력은 바퀴벌레보다 강하게!’ 라는 게 기본 설정이었습니다. ‘네페르’ 님 : 지금 직장인이세요? 주거하시는 지역은 어디에요? 그리고 혹시 이름 바꾸신 적 있나요? 예전엔 한은영이라는 이름으로 봤던 거 같은데요. 가넷 : 4학년 진학을 앞두고 휴학을 결심한 대학생이에요.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답니다. ‘한재경’ 은 제 필명이에요. 제목이 너무 로맨스 틱하니 필명은 좀 중성적으로 나가자는 출판사 측의 제의를 받아들여서 지었죠. ‘란스 란슬렛’ 님 :기나긴 공백 기간 동안 무얼 하셨나요? 혹시 연애? 가넷 : 아, 예 (웃음) 특별히 무얼 했다, 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았어요. ‘란스 란슬렛’ 님 : 오나주 인물 중에 이상형이 있나요? 가넷 : 글쎄요. 겉은 안 그래도 속은 다정한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그런 것치고 반은 좀 무섭죠?; 굳이 고르자면 프란? ‘깜눈마녀’ 님 : 외전을 남길 의향은 있으신지? 가넷 : 앞에서도 잠깐 썼지만, 한 권 정도로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출판은 안 되겠지만, 개인지 형식으로 찍어내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6권을 다 쓰고 나서 이제 됐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미련 없이 보내줄 의향도 있습니다. ‘별이’ 님 : 정확한 신상정보를 알려주세요! 가넷 : 아, 예. 뭐…… 고향은 마산이고, 현재는 서울시 명륜동에 삽니다. 문근영 양이 지망하는 학과의 두 학년 선배고요. 나이는 알아서 추정해주셔요. (부끄럽네요) 얼마 전 ‘이제 결혼하셔야죠.’ 라는 글이 올라온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저 아직 멀었어요, 여러분. 하하. ‘신발끈z’ 님 & ‘깜눈마녀’ 님 : 좋아하는 만화가나 소설작가, 딱히 맘에 드는 스타일의 판타지는? 가넷 : 좋아하는 만화가는 요시나가 후미, 유키 카오리, 시미즈 레이코, 타무라 유미, 우라사와 나오키, 야마다 유기, 김혜린, 유시진 등입니다. 좋아하는 소설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리스 레싱,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엘프리데 옐리네크, 폴 오스터, 마루야마 겐지, 비틀로 곰브로비치, 한 강, 윤성희, 이영도 등입니다. 저를 매료 시킨 판타지는 이영도 님의 「폴라리스 랩소디」와「눈물을 마시는 새」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 꼭 이런 스타일의 판타지를 써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던 건 유키 카오리의 「천사금렵구」를 본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신발끈z’ 님 : 반프불밤위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가넷 : 하하. 처음 봤을 때 많이 웃었어요. 시프불밤위나 헤프불밤위 같은 건 없나요?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발끈z’ 님 : 3부나 외전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으신가요? 예를 들어 오나주 스토리를 생각하실 때 표현하려다가 만 것(뺀 것) 같은? 가넷 : 일단 ‘뒷이야기’를 쓰고 싶죠. 사실 꽤 구체적으로 상상은 해두었습니다만…… 실제로 쓸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여태까지 써놓고 삭제한 부분은 프란의 로이네트 시절 암울했던 과거, 헤냔의 가족 관계, 마린의 이야기 등이에요. 이 중 마린 이야기를 뺀 건 두고두고 아쉬워지네요. ‘신발끈z’ 님 : 처음 오나주 캐릭터들 성격설정은 지금과 동일한지? 가넷 : 거의 비슷해요. 처음부터 제 안에서는 캐릭터 이미지가 아주 뚜렷했고, 역할 역시 그랬죠. 다만 반의 경우는 다 못한 이야기가 많아요. 천천히 풀어나가고 싶기도 하고 그랬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빡빡하게 설정돼버렸네요. ‘혼돈의시간’ 님 : 오나주 2권 47쪽에 언급되는 아이쉔(카세타 동부와 세이피안 서부에 주로 피는 흰색의 청초한 꽃) 꽃은 정말 있나요? 아이쉔이라는 꽃이 없다면 그 꽃에 모티브가 된 꽃이 있나요?; 가넷 : 백합, 이라고 생각해두시면 될 것 같아요. 심지어 인터넷 연재할 때는 ‘릴리아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릴리아나가 뭡니까, 이상해요!’ 라는 의견이 보여서 이름을 바꿨습니다.;; ‘혼돈의시간’ : 담당자님께 고맙습니다, 라고 전해주세요. 가넷 : 예, 고마워요. 꼭 전해드릴게요 ^^ 이상 가넷 답변이었습니다. 휘유, 생각보다 질문이 많았어요. 뭔가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하하. 목차 대회의 위저드 리그의 아이돌 전조 폭로 다짐 아일린의 사정 로이네트 재회 혹한 대회의 '대륙을 먹여 살리는' 대 아일린 가의 본가가 위치한 나라, 세이피안은 최적의 기후를 자랑하는 곳이다. 라니아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 중에서도 가장 남부에 위치한 이 나라는, 오늘도 풍요로운 여신의 숨을 대지 전체로 맞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 로이네트 백성들이 시기해 마지않는 그 축복을 방 안 가득 채우기 위해, 비켈린의 대장 케인은 자기 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일린 가의 다른 집단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과는 달리 비켈린은 대륙 내 그 명성이 자자한 집단이다. 흔히 비켈린 하면 '빚 받아내기의 대명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말고도 비켈린이 수행하는 숨은 업무는 수없이 많다. 특히 아릴린 가주의 신변보호에 있어 비켈린의 책임은 막중하다. 그런 비켈린의 대장, 케인 칼슈비도의 방은 아일린 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창을 열면 아일린 가를 휘감고 있는 라어 강까지 보이는 고지대의, 그것도 꼭대기 방이다. 아일린 가의 장엄한 모습을 창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케인은, 어느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가주님?" 저 멀리, 두 필의 백마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이 보였다. 거리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머리카락만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확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왼쪽에 선 사람의 머리카락은 이른 아침의 햇살을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찬란한 금색이다. 케인에게도 그리 낯설지는 않은 빛깔. 그 오른쪽으론 차분한 보라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다. 케인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읽고 있던 업무 보고서를 내려놓고 창문 바깥으로 급히 몸을 내밀었다. "케인 칼슈비도!"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숨을 헐떡이는 한 사내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가주님이 오신 것 같다!내가 창문으로......엉? 너도 본 거냐?" 문을 연 것은 룬이었다. 비켈린과 마찬가지로 가주만을 믿고 따르는 아일린의 또 다른 집단인 아인켈의 대장. 언제나 자신의 아인켈이 비켈린과 동급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시 비켈린이 최고야' 운운하는 아일린의 일족들 앞에서 좌절감을 맛보곤 하던 이 사내는, 오늘도 일말의 좌절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자기만 발견한 줄 알고 신나서 뛰어왔더니 케인이 이미 반의 모습을 본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룬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 놈이 비켈린의 대장이면 대장이지, 항상 날 내려다보는 눈을 한단 말이지.' 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케인은 룬을 지나쳐 급히 방문을 나섰다. '저놈이 또 날 무시했어!' 발끈하면서도 룬 역시 케인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내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룬이 거친 목소리를 토 했다. "예고 없이 오시겠다고 했지만, 정말 언질도 없이 오셨군!" 룬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케인은, 방금 전 목격한 두 인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 아일린의 유일한 주인, 시즈 아일린이 드디어 가문으로 돌아왔다. 허나 단신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프리텐 가의 못 말리는 빚쟁이 녀석도 함께였다. 케인은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가지고 있던 불안이 그제야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프란을 죽이지 말아 달라 부탁했을 때도 냉정한 태도로 답했던 반이었기에, 케인은 어느정도 프란을 포기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아무런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단 둘이 이곳을 온 걸로 봐선 그의 주인도 저 천방지축 빚쟁이 녀석이 마음에 들었음이 틀림없다. "에잇, 그런데 가주님은 왜 하필 저런 모자란 녀석을 데리고 온거야?" 케인의 상념을 깨뜨리며 룬이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케인은 흠칫, 그런 룬을 돌아보았다. "뭐,뭐냐?" 그 시선에 놀랐는지 룬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는다. "너도 프란 프리텐을 아는가?" 의아한 마음에 케인이 묻자 룬은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알다마다. 가주님 앞에서 내 이마를 문짝으로 들이박은 녀석인데." "야아!" 프란의 해맑은 감탄이 공중으로 번져 올랐다. 멀리서 볼 때도 그랬지만 안으로 들어오니 더 굉장하다. 동부 헬리언 지방 전체가 아일린 가의 이름 아래에 존재하고 있다니. 여기는 상업 가문의 본가라고 간단히 정의할 만한 수준의 동네가 아니었다. 아일린 가의 혈족들 대부분은 이 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그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곳에서는 다른 지방에선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값비싼 물건들이 유통 되고 있었다. 프란은 건물들 하나하나를 보며 넋을 잃었다. 카르멘 가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화려한 저택이었다. 허나 아일린 가는 그 막대한 부에도 불구, 카르멘 가처럼 화려한 건물들을 세우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해, 아일린 가는 수백 년 전 세워졌던 '초대 아일린'의 건물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돈은 넘쳐나건만 그들은 건물 재건을 거부했다.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아일린의 명성엔 화려한 건물보다 장엄한 옛 건물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세워진 높은 건물들은 아일린 가가 지나온 오랜 세월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건물들은 세월의 주름에도 불구하고 그윽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화려함으로는 카르멘의 황금문보다 못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한 석문을 지나며 프란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까마득한 높이의 석문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새겨져있었다. 아일린 가가 막 대륙에 그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제작된 그 석문은, 전설적인 아일린의 이름을 처음 만든 자들이 누구인가를 또렷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웬만한 대장장이는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조각된 문이다. 새겨진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 주름까지도 세심하여 당장이라도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 반만 없었더라도 호들갑을 떨며 그 문에 찰싹 붙었을 것이다. '진짜 이 집안, 미친 거 아냐?' 그리고 그 건물들 전체의 외부를 감싸며, 얕지 않은 물줄기의 강이 휘돌아 나가고 있었다, 라어 강. 그 강 안쪽에 있는 모든 건물들과 모든 시장들, 모든 사람들이 다 아일린 가 소속인 것이다. 프란은 반을 흘끔 올려다본다. '카르멘 가도 모자라 이런 아일린 가까지 대마왕 거란 말이지.' 이젠 부럽지도 않다. 아니, 숫제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집안을 도대체 반은 어떻게 이끌고 있는 걸까? 반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원로원, 정초원, 비켈린, 세라딘, 아인켈, 위저드 리그. 이 여섯 개의 이름은 외워둬라." 갑작스러운 그 목소리에 넋 놓고 있던 프란이 번뜩 정신을 차린다. "어? 그게 다 뭔데요? 아는 건 비켈린 뿐인데." 반은 앞으로 닥칠 일 같은 건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채 마구 눈을 빛내는 프란을 보았다. 카르멘 가에서 견제해야 할 것이 왕가와 헤이튼, 수하의 부하들이었다면 아일린 가에서 견제해야 할 것은 '집단'들이다. 그 집단 들의 무서움도 모르는 채 침만 질질 흘려대는 프란을 보자니 앞날이 다 막막해지는 반이었다. "한 번만 설명하겠다. 잘 들어라." 프란은 '네가 두 번 설명하길 바란 적 없네요'라고 생각하며 반과 시선을 마주쳤다. 반은 잠시 고민했다. 알려줄 것은 많으나 지금 이야기한다고 해서 프란이 제대로 들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조금도,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도대체가 카르멘 가에서 그토록 고생해 놓고도 변하지 않는 저 밝은 얼굴이라니. 어이가 없다. "아일린을 움직이는 건 가주다." '그러시겠지.' 반의 말에 프란은 속으로 혀를 쑥 내밀었다. "허나 그 뒤에는 가주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두개있다. 원로원과 정초원이지." "에?" 프란은 놀라 소리쳤다. 가주만큼이나 큰 영향력이라니? 카르멘 가에서 수하들을 깍둑썰기 하던 반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이만한 권력자가 이 집단에는 더 있다고?어이가 없어서, 구경하느라 벌어졌던 입이 저절로 닫힌다. 반은 그런 프란의 반응에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전대 가주의 신임을 얻었던 사람들, 전설적인 상업 실적을 이룬사람들, 수십 년간 업무를 진행해왔던 각 집단의 원로가 모여 구성된 것이 원로원이다. 총 스무 명으로 구성된 이 늙은이들은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대소사에 사사건건 간섭하지.더불어 아일린 가의 모든 여자들이 속해 있는 정초원의 입김이 만만치 않다. ........ 일단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이 두 집단이다. 원로원의 명령에 따르는 세라딘도, 현재는 주의를 요한다." 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잔뜩 주의할게요!" 그 말에 더 불안해지는 반이었다. "가주님!" "가주님!" 그때, 앞쪽에서 두 사내가 달려 나왔다. 반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케인과 룬. 오랜만에 보는 그의 수하들이다. 아일린에서, 반이 믿는 집단은 단 두 개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두 개 집단의 대장들이 그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좋아 죽겠다는 듯 웃고 있는 룬의 얼굴도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전대 가주때부터 비켈린이었던 케인의 얼굴이 더 반가운 것이 사실이다. 허나 반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지켜볼 뿐잉었다. 반면 아무 생각 없이 앞을 봤던 프란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케인!" 반갑게 소리를 지르며 프란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곧 그녀가 케인쪽으로 달려 나갔다. 반 역시 말에서 내려선다. "와, 여전하네! 잘 지냈어?" 프란의 말에 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씩 웃었다. 말 없기론 반에 버금가는 남자지만, 프란은 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케신은?" 자신을 향해 덕담을 건네주었던 갈색 머리칼 남자를 떠올리며 프란이 묻는다. "일하러 갔다." 또 어느 집안 하나 아작내고 있겠구먼, 하고 프란이 생각하고 있을 때 케인과 룬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비켈린의 대장, 케인 칼슈비도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아인켈의 대장, 룬 로스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은 반의 앞에 부복하며 그렇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룬은 숫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반을 향해 사모에 가까운 충정을 불태우고 있는 이 중년 남자에게 반이 없는 하루하루는 버텨내기 힘든 것이었다. 원로원과 정초원, 세라딘의 등살에 견디다 못해 '내 이놈들을 당장에!'하고 번번이 이를 악물어야 했던 룬이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반이 돌아왔으니 비켈린과 아인켈의 기세는 마구 치솟을 것이다. "돌아왔다." 반의 한마디에 룬은 체통 없이 눈물까지 훔치고 말았다.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반과 수하들의 재회를 보고 섰던 프란은, 어느 순간 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프란이 갸웃한다. "거기 아저씨. 혹시 나 몰라?" 프란은 순진무구하게 자기 얼굴을 검지로 가리키며 룬에게 물었다. 그 때문에 룬은 존경하는 주인 앞에서 지랄 발광하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써야 했다. 자신의 칼날 같은 이미지를, 완벽했던 이미지를 반 앞에서 망가뜨려놓고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얼굴이 망가지는 룬을 보며 프란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순 프란이 손바닥을 딱, 쳤다. "오! 기억났다!기억났어!그때 문에 부딪치고 피 흘렸던 아저씨군! 아, 미안해. 아직도 보상해줄 만한 돈은 없어." 룬은 이를 아득 갈았다. '넌 이제 죽었어. 이 아인켈의 대장을 욕보이다니!' 프란이 깐죽거리고 룬이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사이, 케인과 반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케인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반을 환영했다. 반은 그런 케인의 옆을 지나며 한차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케인은 그 순간 온몸의 신경이 긴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식의 인사라니. 예전의 반 같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이 작은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이 저기서 계속 깐죽거리고 있는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시즈, 오셨습니까." 네 사람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은 그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흰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다섯 명 남짓한 여인들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둘 튀어나오는군, 하고 생각했던 프란은 무심하게 그쪽을 보았다. 허나 그 여인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프란은 몸을 사리고 말았다. '미, 미인이다!' 다가오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뒤편에 거느리고 있는 여인들보다 나이는 훨씬 많아 보이지만, 그들의 젊음을 압도할 만한 아름다움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눈빛이나 몸가짐, 얼굴에 드러나는 연륜으로 보아 마흔을 넘깃 듯 했으나 온몸에 가득한 품위 때문에 시간이 비껴나간 것처럼 보일 정도다. 아니, 정정한다. 시간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빼앗는 대신 더한 품위와 고고함을 준것 같다. 아름다운 여인을 많이 보았던 프란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여성은 여태껏 보았던 여느 여인과는 다른 느낌이다. '예쁘다'는 수식어는 어울 리지 않는다. 저 여인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는 '우아한', '품위 있는' 정도로 한정해야 할 것 같다. 청초한 은발에 깊이 있는 진초록 눈동자. 정신없이 여인의 얼굴을 훔쳐보던 프란은 그러다 어느 순간, 묘한 느낌을 들어 멈칫했다. '음?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인걸. 이상하네. 이런 미인을 내가 잊어먹을 리 없는데.' 프란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이 그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이진느." '이진느?이진느?이진느?' 입 안에서 그 이름을 굴려 보던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시온의 어머니?"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가오던 이진느는 그 말을 들었다. 그녀의 눈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진느는 반의 옆에 서 있는 프란을 한순간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위압감에, 프란은 다시 한 번 침을 삼켜야 했다. '뭐,뭐냐?대마왕 못지않은 압도감이다.' 이진느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반 앞에 다가왔다. 그녀의 뒤세 선 다섯 명의 여인들도 고개를 숙인 채 이진느를 따르고 있었다. 반과 이진느의 눈 길이 부딪쳤다. 보기엔 그저 시선을 교환한 정도인 것 같지만, 프란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 순간 일어난 무시무시한 불길을 보고말았다. 정말이지 각오 단단히 해야겠는걸.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꼭 쥔다. "근 1년만인 것 같습니다, 시즈. 별고 없으셨습니까? 아, 여기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즈가 없는 동안에도 큰일은 없었으니 말이지요." 프란은 어깨를 굳혔다. 방금 전에 이진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없어도 아일린 가는 잘 돌아가지.' 비약일까? 방금 전 이진느의 말에서 그런 느낌을 감지한 것은. 반은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시온이 먼저 왔기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만, 생각보다 더 빨리 오셨군요." 반의 뒤통수에다 대고 이진느가 말했다. 목소리에서 일말의 비웃음이 느껴진다. 아무리 예고 없이 찾아왔다지만 이진느 자신을 돌아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네가 찾아낼 빈틈 같은 건 없다는 말. 반은 그 말을 일부러 무시하며 케인을 향해 명령했다. "대회의를 소집해라, 케인." "알겠습니다." 케인이 묵직하게 답했다. '으아악!' 프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진느 아일린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각 집단의 사람들이 벌 떼같이 모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하나로 도열한 채 주인의 귀한을 반겨야 하지만, 반이 예고도 없이 돌아오는 바람에 이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고만좀 와,이것들아!'하고 소리없이 절규하는 프란만큼이나 아일린 가 사람들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아일린 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반의 귀환을 환영했다. 허나 반은 곱게 인사하는 그 사람들 모두를 냉정하게 무시한 채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처음에 프란은 '아니, 왜 인사도 안 받고?'라는 생각을 했으나 곧이어 그 생각을 깔끔하게 접고 말았다. 사람들이 정말 끝도 없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하려면 몸이 백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진짜 많다. 이 안에 몇 명이나 있는거야?"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프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프란을 향해, 파리 쫓듯 사람들을 떨쳐내고 있던 반이 짤막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무지막지한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도 프란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고생은 반과 프란, 케인과 룬이 건물안으로 들어서면서 일단락되었다. 이제 살았다, 싶어 프란은 허리를 쭉 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갈색의 고풍스러운 건물 안이었다. 줄기차게 따라오던 인파들은 반의 행선지가 다름 아닌 '그곳' 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썰물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프란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오라지게 많다, 진짜."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프란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반이 말했다. 프란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반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대답은 듣고 가란 말이다, 대마왕!' 하고 소리치면서도 프란은 반가운 마음이었다. 카르멘 가에서 가주가 회의를 할 때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던 걸 생각하면 바깥에서 기다리라는 말이 차라리 반가운 프란이다. 함께 왔던 케인과 룬이 반의 뒤를 따랐다. 사이를 두고 따라오던 이진느 역시 흰옷을 가볍게 추스르며 그 방으로 들어갔다. "......어라?" 프란은 순식간에 혼자 남겨졌다. 엄청난 인파 속에 파묻혀 있던 몇 분 전이 거짓 같다.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잠시 뒤, 백말이 성성한 노인 하나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하나가 날듯이 달려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둘은 반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긴장한 나머지, 방문 앞을 멀뚱히 지키고 섰던 프란을 무시해버렸다. '넌 누구냐?'라고 물으면 '난 프란 프리텐, 가주님의 시종이죠! 카르멘 가에서 왔습니다!' 라고 씩씩하게 대답해주려 대기했던 프란은, 아무도 자신을 신경쓰지 않자 반쯤 안도하고 반쯤 기분이 상했다. '뭔가 왕따 당하는 기분인데.' 그래도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프란은 하품을 크게 했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으나 지금 반이 들어간 회의실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설계된 곳이었다. 이 회의실은 모든 집단의 '장'이 모일 때만 사용된다. 바로 저 원로원과 정초원, 비켈린, 세라딘, 아인켈, 위저드 리그의 장들이 가주의 소집하에 모일 때. 그렇기에 이 회의실이 사용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아일린 가의 사람들이라면 이 회의실 앞에서 하품을 한다거나 하는 실수를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 한 명만 있어도 무서운 집단의 장들이 떼로 몰려 있는 이 회의실 앞에서 실수를 했다간 당장에 목이 잘리기 때문이다. 프란이 모르는 것이 또 있었다. 집단의 장은 여섯 명 이고 반까지 합쳐서 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일곱 명인데, 방금 들어각 두명까지 합쳐도 회의실엔 아직 여섯 명밖에 없다는 것. 한 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도 오래하겠지?" 아이고, 지겨워. 낮잠이라도 잘까,프란은 속 좋게 생각했다. 프란이 다시 한 번 길게 하품을 한 그 순간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프란은 '응?'하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그저, '또 사람이 오는 구나'하고 느긋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던 프란에게 뜻밖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네가 프란 프리텐이냐?" "엉?" 프란은 깜짝 놀라 긴장했다. 이 집안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니? 긴장한 채 서 있는 프란에게 저벅저벅 다가온 것은 세필나무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었다. '인상이 묘한데?'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는 나이가 많은 것이 분명하다. 자글자글한 주름살도 그렇거니와 원래는 밤색이지만 흰머리가 하도 많아 백발처럼 보이는 머리칼, 흰 수염등이 그의 나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지팡이를 짚긴 했으나 허리 역시 아직은 꼿꼿했다. 세월과 적극적으로 싸워왔다는 느낌을 주는 노인이다. 프란은 온몸으로 긴장하면서도 일단 상대가 노인이라는 것을 상기, 공손하게 답했다. "넵, 할아버지. 근데 제 이름을 어떻게.......으악!" 다른 건 몰라도 노인 공경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키려고 애쓰는 프란이었다. 그래서 공손하게 답한 것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엄청나게 무거운 세필나무 방망이였다. 프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세필나무 방망이를 휘둘러 프란의 머리를 딱, 하고 때려버린 것이다. "뭐, 뭐야? 왜 때려요?" 프란이 소리쳤으나 노인은 그보다 더욱 큰 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할아버지냐, 누가! 이 팽팽한 피부를 보고도 감히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팽팽한 피부?" 어이가 없어 다시 살펴봐도, 눈앞에 있는 건 탱탱한 피부가 아니라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피부다. 프란은 억울함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이게 또 할아버지라고!" 딱! "으악!" 세필나무 방망이의 강도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프란은 눈물을 흘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돌 머리로 이름난 프란이지만 그렇다고 방망이로 맞았을 때도 멀쩡한 건 아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젊은 오빠라고 불러라, 젊은 오빠라고!" '댁은 하나도 안 젊잖아!' 프란은 속으로 잠시 발악하다가 한참만에야 노인이 무슨 말을 했는가를 더듬어보았다. 방금, 젊은 '형님' 이 아니라 '오빠' 라고 하지 않았나? "저기 말이죠.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전, 여자가 아니라 남자 ....." 딱! 방망이질이 또 한 번 이어졌다. 프란이 고통에 못 이겨 이마를 잡고 고개를 숙이는데, 노인이 그런 프란의 머리 위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에서 거짓말하려 들지 마라,꼬마야. 너보다 세 배는 오래 살았다." "..........웬 잘난 척이요, 스승님?" 프란이 이제 더 이상은 못 참아, 하고 분연히 주먹을 쥐는 순간 노인의 뒤편에서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목소리에 프란은 고개를 길게 뺐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집안에서 그런 목소리의 소유자라면 한 명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차분하게 흔들리는 은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느끼 버터!" 뭐라고 명명되든 말든 프란의 얼굴을 아일린에서 다시 보게 된 시온은 기쁜 낯이었다. 그는 세필 방망이를 휘두르는 노인을 지나쳐 프란 앞으로 날듯이 다가왔다. "보고 싶었어, 우리 예쁜 프란! 고생 많았지?" "이, 이것 놔,이 자식!" 누가 시온 아일린 아니랄까봐 시온은 겨우 일주일 못 봤을 뿐인 프란의 손을 정말 반갑다는 듯 붙잡고 있었다. 프란은 그 손을 떼어 내기 위해 팔을 휙휙 휘둘렀다. 한 사람은 손을 잡기 위해, 한사람은 상대의 손을 피하기 위한 공방을 펼치는 사이, 둘의 뒤편에 서 있던 노인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공방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참다못한 노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기 존재가 아예묻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말한 대로 팔팔하긴 하구나, 빌어먹을 제자야." 프란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제자?' 하고 놀란 눈을 깜빡이는 프란의 어깨에 시온은 망설임 없이 손을 올렸다. 시온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허나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반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스승님이라도 용서 없수다." "선머슴은 취향이 아니니라." 이 수습 안 되는 사태에 프란은 머리까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한참 만에 당혹을 수습한 프란이 천천히 입술을 뗀다. "야, 시온 아일린." "응?" 시온은 '아, 오랜만에 이름으로 불렸어' 하며 황홀한 표정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노인을 가리켰다. "저 할아버지가 왜 내 머리를 방망이로 때렸는지 설명 좀 해줄래?" "젊은 오빠라니까!" 다시 한 번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이쪽이 내 애인 프란, 그리고 이쪽은 내 스승님이야." 자신만만하게 서로를 소개시켰던 시온은 오늘도 어김없이 프란의 거침없는 발차기를 받았다. "누가 애인이야, 애인은!" 도대체가 이놈은 어디에 있든 변하지가 않는군. 깔끔하게 턱에 한 방 먹인 프란이 다리를 내리며 그렇게 투덜거린다. ".......코피난다." 시온의 스승이라는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흥미롭다는 눈이다. 시온이 컥컥거리며 숨을 고르는 동안, 프란은 고개 숙인 시온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스승이라니? 무슨스승?" '바람둥이 기술을 전수해준 스승인 건가' 하고 태연하게 생각하는 프란을 향해, 시온은 씩 웃으며 답했다. "나를 세이피안 최고의 미남에서 세이피안 최고의 미남 마법사로 업그레이드시켜준 스승님이지. 너도 들어봤을걸. '선혈의 마법사' 자켄린 밀러." '최고 미남' 운운한 시온의 양심 없음을 심판할 셈이었던 프란은, 그러나 이어진 말에 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리고 말았다. 단죄보다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자켄린 밀러?" "몰라?" 시온이 의외라는 듯 물었지만 프란은 답하지 않았다. '내가 바보냐? 모를리가 없잖아!' 세이피안이 낳은 최초의 8서클 마법사이자 세이피안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바람같이 나타나는 구국의 영웅, 자켄린 밀러. 웬만해선 전투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단 한 번 전장에 발을 디디면 가차 없는 것이 이 자켄린 밀러였다. 붉은 망토를 걸친 채 적군을 새빨간 피로 물들인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 그 유명한 선혈의 마법사. 한동안 평화로운 시절을 구가했던 세이피안인지라 자켄린의 이름을 살펴보려면 20년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역사서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 자켄린 밀러는 단신으로 2만의 적군을 섬멸했다. 카세타 왕궁 마법사 중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인 라톤이 7서클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8서클 마법사인 자켄린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의 마법사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은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 세이피안이 낳은 최고의 마법사 자켄린 밀러가 이런 사람일 리 없어!" "뭣이!" 딱! 다시 한 번 방망이가 작렬했다. "으악!" 프란의 이마에는 이미 혹이 잔뜩 생겨 있었다. 허나 아픈 이마를 붙잡은 채로도 프란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단호하게 저항했다. 그녀는 세필나무 방망이를 붙잡은 노년의 대마법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온을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시온. 거짓말이지? 그럴리 없어. 선혈의 마법사가 이런 인간일 리 없다고." "...저기,스승님. 악의는 없을 테니 그 방망이 내려놓으쇼." 방망이를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자켄린을 향해 시온이 말했다. "프란, 내 스승님은 선혈의 마법사가 맞아. 세이피안이 낳은 최고의 천재, 자켄린 밀러지. 위저드 리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드는 마법사고 말이야." 자켄린은 '선혈의 마법사'나 '최고의 천재' 같은 말보다 '위저드 리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드는 마법사' 라는 말이 더 뿌듯한지 그 부분에서만 크게 웃어보였다. 돈은 있는 대로 갖다 쓰면서 만드는 족족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도구밖에 못 만드는 다른 위저들 리그 소속 마법사나 과학자들과는 달리 자켄린은 '감시핀'등 실용화할 수 있는 많은 마법을 만든 마법사였고 그 사실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프란은 한참 동안 자켄린과 시온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마침내 인정하고야 말았다. 절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그래. 지,진짜 선혈의 마법사란 말이지?" 자켄린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프란은 정말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어째서 선혈의 마법사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런 바람둥이를 제자로 받으신 겁니까? 진짜 노망......아악!" 자켄린의 방망이가 인정사정없이 작렬했다. "도대체가 시종된 이후 정상적인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어! 아아악! 혹 났어, 혹!" 혼자서도 잘 노는 프란을 남겨둔 채, 자켄린과 시온은 회의실문을 열었다. 이 회의실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카르멘 가에서 프란을 경악시켰던 그 방들과 마찬가지로 문을 열면 세 개의 문을 더 거쳐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섯 집단의 장과 가주만을 위해 만들어진 그 회의실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서며, 위저드 리그의 책임자이자 시온의 마법 스승인 '선혈의 마법사' 자켄린은 웃고 있엇다. 일곱 명의 사람들밖에 못 들어가는 회의실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서고 있는 것은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섯 개 집단을 책임지는 사람 중 하나는 아니나 '정초원 책임자의 아들', '가주의 사놏 동생', '세라딘의 비밀주군', '원로원이 호의를 갖고 대하는 아일린의 직계' ,'위저드 리그 책임자의 제자' 등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신분상 이 회의실에 출입할 수 있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아일린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유일한 예외. "네가 반했다는 게 저런 빈약한 꼬맹이였다니 실망이다. 넌 나처럼 글래머 취향인 줄 알았더니." 자켄린의 말에 시온은 가볍게 응수했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못 찾은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자켄린이 박장대소했다. 허나 그 웃음기는 거짓말처럼 싹 가셨다. 그는 앞서 걷고 있는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노년의 대마법사에게 제자는 현재 단 하나뿐이다. 바로 저 앞에 있는 망나니 자식. 젊은 시절 넘 호화롭게 산 나머지 빚에 쪼들려 아일린의 위저드 리그에 들어오긴 했으나, 자켄린은 위저들 리그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시온을 발견하기 전엔 짐 싸들고 도망갈 생각을 하루에 수십 번씩 했다. 비켈린에게 쫓기는 최후가 달갑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시온이 가져오는 막대한 수입에 눈멀어 가르치면서도, 시온에게 재능이 있을 거라곤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켄린이다. 허나 이 녀석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마법사로서의 자질만 따지면 자켄린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아일린의 직계 혈족만 아니면 반쯤 죽여서라도 강제로 마법을 익히게 할 텐데, 제자의 신분상 그럴 수도 없었던 자켄린은 안타까움에 세필나무 방망이만 퍽퍽 휘두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천방지축 제자 놈이 단 몇 달 만에 변해서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자켄린이었다. "저 녀석을 위해서 네가 변했다, 이거지." 자켄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제자는 며칠 전 돌아왔다. 시온이 돌아왔다는 언질을 받자마자 자켄린은 한달음에 시온에게 달려갔다. 이번에는 제발 오래 머물기를 바라면서. 한 번 집을 떠날 때마다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 다시는 안돌아 올테니 다른 제자 알아보쇼' 라는 건방진 말을 서슴없이 해대 가슴을 덜컥덜컥 내려앉히는 제자였다. 이번에도 몇 달을 기다렸던가. 자신의 마법을 계승해주길 바라는 단 하나의 제자는 그런데 몇 달 만에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제자는 초췌한 몰골로, 스스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있잖소, 스승님. 나 정말 천재인 거요?"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건방진 자식!" 자켄린은 일단 시온을 세필나무 방망이로 한 대 퍽, 하고 때렸다. 그러고서, 자켄린은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천재라는 말은 수십 번 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제대로만 배웠으면 6서클 마스터는 이미 몇 년 전에 했겠지!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길 아느냐? 평생 걸쳐서 연구해도 6서클 마스터가 안되는 놈들은 절대 안 돼! 5서클만 익혀도 궁중에서 데려가려고 난리를 치는데, 노력만 했으면 네놈은 이미 6서클 마스터가 됐을 거란 말이다! 그뿐인줄 아느냐? 너라면 십년 안에 7서클을 마스터하고 마흔이 되기도 전에 내 경지에 올라설 거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9서클도 네놈이라면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놈이 아일린 일족만 아니었다면........!" 자켄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헉헉, 들이마셨다. 제자의 재능은 차고 넘치는데 그 외부 요건이 너무 안 좋았다. 아일린의 일족은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았다. 아일린의 직계 혈족인 시온 아일린은 어릴때부터 가지지 못한 것이 없었다. 동기가 없는 마법사는 성장하지 않는다. 배움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 배움으로써 얻는 것이 없는 자는 혹독한 마법 수련과정에서 의욕을 잃어버린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이 있다 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자켄린이 시온만 보면 복창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스승이 숨을 몰아쉬는 동안 제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 "네놈이 부르기만 해도 난 이제 화가 난다! 이번엔 또 무슨 변명을 대고 집에서 나가려고 그러냐! 어림없다! 6서클 마스터하기 전까진 이 집에서 못 나가!" "나,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요." 이 죽일 놈의 바람둥이 자식! 하고 머리통을 후려 갈겨줄 생각이었던 자켄린은 한순간 움찔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떠나겠어요. 영원히 안녕, 스승님!' 하며 생긋 웃을 줄 알았던 시온의 얼굴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제 것인 줄 알던 이 건방진 놈은 그래도 자신의 제자였다. 이 악연도 벌써12년째다. 그런데 저렇게 진지한 얼굴의 시온을, 자켄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설마해서 물어본다. 천지가 뒤집히기 전엔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 "그거 혹시, 혹시나 진심으로 한 소리냐?" 놀랍게도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래서, 이, 이제 마법 안 배우고, 그,그여자랑 살겠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말을 하며 자켄린은 세필나무 방망이를 쥔 손을 떨었다. 허나 시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스승님. 난 강해지고 싶습니다. 6서클이든 7서클이든 8서클이든 닥치는 대로 마스터해서." 자켄린은 눈을 크게 떴다.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요 며칠동안 시온은 하루에 두 시간씩만 잤다. 시온의 이해력에 자켄린은 숨까지 가빠졌다. 시온은 여태까지도 그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여줬던것은 조족지혈이었다. 이 보석을 내가 발견 못했다면 억울해서 잠도 못잤을 거다! 자켄린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자켄린은 이 놀라운 변화를 가능케해준 프란을 만났던 것이다. "저 애를 지켜주고 싶다는 거지?" 자켄린이 웃으며 한 말에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온이 아, 하면 덧붙었다. "저 애가 여자라는 건 비밀입니다. 믿고 말한 거니까 누구한테 발설하면 절대 안 돼요. 스승님이 발설하면 나, 마법 그만둡니다." 자켄린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박을 하며 시온이 진지한 눈을 했다. "그 말은 수백 번 들었다!" 퍽, 하고 자켄린은 다시 한 번 세필나무 방망이로 시온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하도 맞아서 이제는 혹도 안 나는 머리를 만지며, 시온이 웃는다. "이제 긴장 좀 하자고요, 스승님. 그 대단한 대회의입니다." "대회의를 시작한다." 반은 그 말과 함께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켈린의 대장 케인과 아인켈의 대장 룬이다. 이어 원래는 가주의 반려자가앉아야할 정초원의 책임을 대리하고 있는 이진느. 그 옆으로 성성한 흰 수염을 하고 앉아 있는 원로원의 영감, 스탕달. 그 원로원의 뒤를 봐주는 세라딘의 책임자, 레이. 위저드 리그의 책임자이자 8서클의 대마법사, 자켄린. 마지막으로 그 자켄린과 함께 들어온 시온 아일린. "우선 돌아온 걸 환영하오, 시즈." 스탕달이 입을 열었다. 반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본다. 원로원의 우두머리.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를 향해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내. "보고부터 하겠소." "됐다." 반은 스탕달의 말을 잘랐다. 스탕달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리 가주라 해도 원로원은 가주만큼이나 세력이 큰 집단이다. 역대 가주들은 모두 원로원에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저 새파랗게 나이 어린 녀석은 그러나 선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계승식을 한다고 했다지요, 시즈?" 그 때, 새파랗게 얼어붙은 공기를 꺠며 이진느가 입을 열었다. 반은 무서운 눈으로 그런 이진느를 돌아보았다. 말은 안 했으나 케인도 놀란 눈치였다. 카르멘 가에 있을 떄 반이 그에게 계승식 준비를 하라 일렀다고는 하나, 그것은 케인과 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진느가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어디서 그런?" 케인이 반을 대신해 물었다. "글쎄요.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이진느는 가볍게 웃으며 케인의 질문을 회피했다. 반은 주먹을 쥐었다. 무서운 여자다. 그러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 세라딘의 대장이자 정초원 책임자인 이진느를 제외하고 유일한 여자인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하문하십시오." "네 인사는 잘 받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레이가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은 대답 없이 좌중을 한 번 훑어보았다. 모두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중 절반은 불안에 떨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반은 잘 알고 있었다. "세라딘을 통솔하는 건 원로원이지." 반이 문득 말했고 스탕달은 가감 없이 답했다. "부슨 그런 말씀을. 비켈린과 세라딘은 제5대 가주 떄부터 내려오던 전통이지. 가주의 힘이 너무 커질 경우 이 집안은 흔들릴 수 있소. 때문에 힘의 균형을 위해 제5대 가주와 원로원이......" "그러니 세라딘이 내게 한 인사는 원로원과도 연관되어 있다." 반은 스탕달의 말 같은 건 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케인과 룬, 레이가 몸을 움찔했다.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검을 익힌 사람들이 그처럼 극렬하게 느꼈을 정도니 검을 익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숨이 막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온몸을 향해 극렬하게, 반의 살기가 파고든다. 케인은 고개를 숙였다. 살갗 하나하나가 반응하는 이 느낌, 시즈 아일린만이 가질 수 있는 이 위압감. 그런 살기를 뿜고 있으면서도, 반은 표정 변화라곤 없이 단숨에 내뱉었다. "열한 번쨰 세라딘 셀키가 내 목숨을 노렸다." 순간, 좌중이 얼굴을 굳혔다. 세라딘의 대장 레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 "가, 가주님. 사키를 통해 일의 전말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셀키의 배신일 뿐 결코 저희 세라딘의 뜻도, 원로원의 뜻도 아닙니다." 스탕달 역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진느는 무심한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입술을 깨물고 이진느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은 레이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뭐든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네 목을 베갰다." 아무렇지 않게 통고하는 반의 그 말에, 사람들이 모두 침묵했다. 레이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이 미끄러진다. 승패를 장담할 순 없지만, 레이는 자신이 반보다 많이 약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비켈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라딘의 대장인 것이다. 허나 '죽음의 선고'라는 것은 힘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레이는 세라딘의 책임자이자 반의 수하다. 범한 잘못을 물어오는 경우, 그것이 정당하다면 목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허나 이런 식으로는 말도 안된다. 레이는 간절한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제 독단은 아니었잖습니까!' 레이의 시선은 유독 한 사람에게서 오래 머물렀다. 허나 그 사람은 레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한참 만에, 그 무거운 침묵을 깨며 이진느가 입을 열었다. "지나치십니다, 시즈." "가주 암살 미수입니다. 뭐가 지나치다는 겁니까! 그것도 책임지지 않으려면 대장자리는 엿바꿔 먹으라고 하십시오!" 룬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케인도 담담히 말했다. 차분히 말하고 있었으나 케인의 가슴은 지금 들끓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비켈린의 대장이라고는 하나, 바깥으로 나도는 일이 많은 이상 반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허나 암살이라니! 또다시 그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니! "일단 사건 경위를 들어보지요." 태평스레 말한 자켄린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다. 허나 노년의 대마법사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이 간략하게, 셀키의 일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중 몇몇은 분노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고 그중 몇몇은 당혹감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침묵을 한참 동안 주시하고 있던 반이 잘라내듯 말했다. "규정대로, 거수를 통해 결정한다." 그 말에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멘 가와는 달리, 아일린은 힘의 분배를 중요시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사안은 가주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 특히 한 집단의 장을 처리하는 문제는 대회의를 거치지 않고는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집단의 장 각각이 '대회의를 거치지 않은 인사문제'에 대해서는 불복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일단 대회의에 들어온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끝을 봐야 한다. 방안을 놓고 그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그들은 거수로 일을 결정한다. 기권은 불가능하다. 여섯 개 집단의 단체장들과 가주까기 일곱 명이니 결코 무효가 될 수는 없는 시스템이다. 세라딘의 대장 레이의 목을 걸고, 거수가 진행되었다. "야, 이거 진짜 적응 안되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 프란은 문 앞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케인이나 룬은 그렇다 치고 이진느나 자켄린 같은 인물을 만난 것은 영 적응이 안되는 프란이다. 이진느는 시온의 어머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품위가 넘치는 여인이었다. 곱고 아름답고 위압적인 여인.어떻게 그런 여인이 낳은 아이가 시온 같은 바람둥이인지 짐작도 안 되는 프란이었다. 게다가, 자켄린 밀러! "어떻게 그런 스승을 둔 거야? 어이가 없네, 진짜." 선혈의 마법사라는 호칭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느끼 버터는 대체 무슨 재주로 아일린의 셋째 계승자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저렇게 아름다운 어머니를 둔 것이며 그것도 부족해 선혈의 마법사라는 스승까지 모시게 된걸까. 그 기막힌 운에, 프란은 부러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한참 머리굴리던 프란은 허나, 금세 졸음이 와서 고개를 푹 숙였다. 뭐니 뭐니 해도 6일 동안 강행군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얼마나 졸았을까. 탕! 갑작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프란이 눈을 번쩍 떴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반이었다. 그런데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미간이 잔뜩 좁혀진 것이, 아무래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왜 저래? 심통난 애처럼. 일단은 졸았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 들키면 엄청나게 혼날 거라고 생각한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부릅떴다. 너무 크게 뜬 나머지 가뜩이나 큰 눈이 툭 튀어나올 것 같다. 허나 프란이 모르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굳은 얼굴의 반은 한참 동안 프란의 얼굴을 응시했다. 프란은 '응?왜?'하고 물을 듯한 천진한 얼굴로 반의 시선을 마주한다. 반은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침부터 닦아라." "헉!" 프란은 얼른 소매를 입가에 가져갔다. 어찌나 많이 흘렸던지, 금세 소매가 축축해졌다. 민망해진 프란이 고개를 푹 숙인다. "하하, 끝났어요?" 반은 고개 숙인 프란의 목덜미를 내려다본다. 이 시종 녀석은 날이 갈수록 한계를 모르고 간이 무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허나 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괜히 프란에게 짜증까지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은 그래서 프란을 지나쳐 저벅저벅 걸어갔다. "엇, 같이 가야죠!" 생전 처음 오는 집안에서 주인을 잃어버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프란은 얼른 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복도 저편으로 주인과 시종의 모습이 급하게 흐려진다. 프란은 꼐속해서 반을 향해 말을 걸었으나 역시나 반은 한마디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린애 같은 놈! 프란은 입밖으로 냈다간 당장에 목 잘릴 생각을 하며 계속 반에게 말을 붙였다. 아무래도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이진느 아일린은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팔짱을 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고 있다.뒤따라 나온 스탕달이 이진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 스탕달의 얼굴은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거요, 이진느? 그대는 세라딘 전체를 적으로 돌렸소." 그 말에도 이진느는 망설임 없이 미소 지었다. "내가 누구의 어미라 생각하는 겁니까, 스탕달? 세라딘이 자신의 주군으로 누굴 택했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요?" 케인과 룬이 나오면서 그들의 대화는 끊겼다. 자켄린과 시온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세라딘의 대장 레이는 아노지 않을 것이다. 방금 전, 그녀의 목은 처참하게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으니까. 룬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진느를 노려보고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년.' 이번 거수에서, 룬은 이 사태를 결정지을 사람은 자켄린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나 케인은 반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남는 것은 네 사람. 레이는 당연히 자기 목을 부지하는 쪽을 택할 것이고 세라딘의 원주인 스탕달도 거기에 찬동할 터였다. 이진느 아일린 역시 거기에 찬동할 거라고 여겨졌다. 남는 것은 세라딘과 특별한 관계가 없는 자켄린뿐이니 결정은 그의 몫이라 생각한 것이다. 허나, 틀렸다. 뜻밖에도 이진느는 '찬성'에 패를 던졌다. 자켄린이 선택도 하기 전에 레이의 목이 잘린 것이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시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진느를 향해 물었다. 시온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거수가 끝나기 무섭게 룬이 베어낸 레이의 머리를 떠올리며, 시온의 가슴이 급격히 차가워진다. 이진느는 웃으며 답했다. "가주 암살 건을 자행한 단체의 장을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그렇게 말하며 이진느는 몸을 돌렸다. 시온은 굳은 듯이 서서, 그런 이진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켄린은 시온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세라딘과 시온의 특별한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자켄린이다. 지금 시온의 심정이 어떤지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대회의의 참관만 가능할 뿐 어떠한 발언권도 선택권도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으로 시온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허나 자켄린은 다정한 위로의 말 대신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과연 널 낳은 여자다. 머리 회전이 빠르군." "그냥 꼬리 자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쇼." 그렇게 말하며 시온이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린 그의 눈에서 금세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분명한 한 방울이었다. '꼭 죽여야 했습니까, 형님? 꼭 그래야 했습니까, ,어머니?' 시온은 이를 악 물었다. 위저드 리그의 아이돌 저벅저벅 총총 저벅저벅 총총 '천천히 좀 가라,이 인간아!' 한걸음씩 걸을 떄마다 저만큼씩 멀어지는 반을 따라잡기 위해, 프란은 거의 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마왕의 걸음걸이는 점점 더 빨라질 뿐이다.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복도를 걷다 말고, 프란은 쓰러지듯 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반이 돌아보자, 프란이 겸연쩍게 웃는다. "천천히 좀 가요. 이제 뭐 바쁜 것도 없잖아요."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은 반이 방을 나선 그 순간에 눈치 챘지만, 그래도 애써 웃어 보이는 프란이었다. 안 그랬다간 반이 뿜는 공기에 질식할지도 모르니까. 몇 개월간의 경험으로, 반의 위압감을 피하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라는 것을 터득한 프란이었다. 목숨까지 담보로 잡혀야 하는 무시무시한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효과가 있었다. 프란의 손을 떨쳐내면서도 반의 걸음이 조금은 느려진 것이다. 나란히 보조를 맞춰 걸으면서, 프란은 무심한 어조를 가장해서 던지듯 물었다. "전 앞으로 여기서 뭘 하면 됩니까?" 반의 대답은 한참만에야 떨어졌다.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다." '아악, 싫어!' 이와 아릴린에 왔으니 자기도 케인처럼 폼 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었다. 빚쟁이 주제에 뭘 더 바라는 게 염치없다는 걸 알긴 해도. "제 방은 어딥니까?" 인상을 조금 쓰며 프란이 물었다. 반의 짐은 이미 그의 방으로 옮겨졌지만 프란은 아직도 자신의 짐들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었다. 아직 그녀의 방이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방은......" 갑자기 반이 입을 다물었다.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져 있어, 프란은 불안해진다. '뭘 생각하기에 또 미간이 좁혀진 거야, 엉?' 침묵 속에서 두어 걸음을 더 떼어낸 반이 갑작스레 말한 것은 그 순가이었다. "내 방에 가자." "엥?" 프란이 버럭 고함을 쳤다. 대마왕의 방이라니? 프란은 평정을 가장하며 애써 말했다. "이, 이제 자는 거 아니었어요? 엄청 피곤한 걸요!" "오늘은 내방에서 자라." "네. ......엉? 뭐라고?" 프란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당혹감에 말까지 잘못 나온 프란이었다. 반의 눈 끝이 슬며시 위로 치켜 올려지는 것을 목격했지만,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프란은 다시금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잠깐만요! 뭐라고요?" 프란으로서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냔 말이다! 프란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자, 반의 옆얼굴에 갑작스레 표정이 생겨났다. 프란은 처음에, 도대체 이게 무슨 괴현상인가 생각했다. '내, 내 생각이 옳다면 저건.....호, 혹시 쑥스러워하는 얼굴인건가? 아,아냐! 대마왕이 그런 얼굴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 그것보다! 대체 자기 방에서 자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프란이 마구 발악하고 있을 때, 반이 다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프란은 아아악, 소리를 지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하,하하. 이,이제 그만하고 제 방 가르쳐주세요." 짐을 끌면서 프란이 말했음에도 반은 대꾸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뿐이다. 프란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따라 들어섰다. "이야!"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간 순간, 단세포인 프란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잊어버리고 바보같이 감탄하고 말았다. 카르멘 가에 있었던 '저스티스 카르멘'의 방은 깔끔하고 단정한 형태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일린 가에 있는 '시즈 아일린'의 방은 무섭도록 화려했다. 특히........... "저 침대, 말인데요. 저거, 진짜 보석인가요?" 아일린에서 가짜 보석 붙여가며 침대 만들 리는 없겠지만 그런 말이 절로 나오는 프란이었다. 보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눈부셔서 잠이나 올까 싶다. 그뿐인가. 한눈에도 값비싸 보이는 갖가지 도자기하며 아름답게 세공된 가구들이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침대의 모서리를 슬슬 문질러보았다. '보석, 혹시 떼어내지는 거 아냐?' 반 몰래그 보석에 눈독을 들이며 프란이 침을 꿀꺽 삼킨다. 프란이 무슨 짓을 하든 말든, 반은 말없이 방 안에 있는 샤워실로 향했다. 잠시 뒤 물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샤워하고 싶단 말이다!' 요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그래도 대마왕이 있는 곳에서 샤워라니, 석 달을 안 씻으면 안 씻었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란은 훅훅, 하고 심호흡하며 기다란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대체 왜 여기에 날 데려온 걸까, 생각하며. 그때였다. 꼬르륵! 배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아, 오늘 점심도 안 먹었네." 프란은 뒤통수를 슬슬 긁으며 중얼거렸다. 저택에 오고 대회의가 끝날 때까지 문 앞에서 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프란이었다. 반이야 회의 도중 나온 간단한 음식을 먹었겠지만 자신은 내도록 굶은 것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프란이 눈을 번쩍 빛내며 자신의 짐꾸러미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반이 가져왔던 비상식량 몇 개를 자신의 가방에 나눠담았던 것을 상기해낸 것이다. 과연, 잠시 뒤지자 잘 말린 육포가 나왔다. 내로라하는 아일린 가에서 산해진미는커녕 육포나 질겅질겅 씹는 처지가 된 프란이 인상을 찌푸린다. "에잇, 맛대가리 없어." 그래도 대마왕 오기 전에 다 먹어야지, 싶어 프란은 우걱우걱 육포를 씹어 삼켰다. 입 안에 두세 개를 우겨넣고 막 삼키려는 찰나. "......!" 육포를 씹던 프란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허리춤에 매달렸던 실버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그야말로 암살자나 보일 법한 움직임이다. 프란은 발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문 가까이로 접근했다. '누가 왔다.' 문 앞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카르멘 가에서도 줄기차게 묘한 움직임이 있었던 만큼, 아일린에서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프란은 속으로 아하, 하고 감탄한다. 날 부른 게 이것 때문이었군. 좋아, 내가 암살자쯤은 맡아줄 수 있다고! 괜히 뿌듯해하며 프란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까부터 방 앞에서 들어오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걸 보니 떳떳하지 못한 방문자임에 틀림없다. 만약 반에게 정당한 용건이 있다면 노크를 했을 터. '이거, 생각보다 실력이 별로인 모양인데? 기척이 완전히 다 드러나잖아. 헤헤, 아님 내 실력이 좀 늘었나?' 문 앞에 선 채 프란은 손목을 가볍게 꺾었다. 망설이던 문 밖의 사람이 드디어 뭉직인 것도 그때였다. 귀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기에 문 밖의 발소리도 몇 배로 확대되어 들려왔다. 드디어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프란은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정확하게 검을 들이댔다.방문자의 목 앞으로! "누구냐! 정체를.......엉?"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던 프란은, 그러나 다음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 어?어?" "아?" 들어선 자는 암살자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일단은, 손에 무기가 없다. 긴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어린 아가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이 옷은 대체 뭐람!' 프란은 경악 속에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는 원래 기다란 녹색 비로드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프란의 검에 놀라 그 천을 떨어뜨린 차였다. 그런데 그 녹색 비로드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그야말로 코피가 날 것 같이 아찔한 의상이었다. 속옷이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한 네글리제. 그 위에 저 천 하나만 두르고 여기에 온 것이다. 프란은 검도 회수하지 못한 상태로 눈만 둥그렇게 뜬 채 그냥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여운 얼굴과는 달리 갑작스런 방문자는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빈약한 축인 프란으로서는 절로 주눅이 들 정도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이런 차림을 하고 한밤 중 남자의 방에 들어올 만한 이유라면. "거, 검을 치워주세요. 가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여자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프란은 입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딸깍 상황이 정리되기 무섭게 반이 나왔다. 반쯤 나체인 여자도, 그 여자의 목에 검을 들이댄 프란도 한순간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가벼운 경장을 걸친 채, 머리가 반쯤 젖은 반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아름다운 얼굴인데 저렇게 젖어 있는 걸 보니 새삼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대마왕 예쁜게 하루 이틀 일이냐, 괜히 왜 네가 얼굴이 빨개지고 난리야, 프란 프리텐! 머리를 마구 도리질치고 있던 프란은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네글리제 하나 딸랑 걸치고 들어온 이 대범한 여자 역시 넋 나간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까지 반쯤 벌린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내가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지?'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얼른 검부터 거둬들였다. "누구인가?" 반이 무심한 얼굴로 여자를 향해 질문했다. 정신 없이 반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던 여자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유렌의 두번 째 여식 레오니아입니다." 다소곳한 레오니아의 대답에 프란은 괜히 닭살이 돋았다. 한참동안 프란은 레오니아의 얼굴과 반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엔 정말이지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자, 잠깐. 나 혹시, 엄청 방해인 거 아냐?' 프란은 땀까지 한 방울 흘리며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이 곤란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프란이 막 방에서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가냐, 프란 프리텐." "예? 아, 아하하. 하하, 그,그게 말이죠, 하하." 프란은 당황한 얼굴로 돌아서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 빌어먹을 대마왕 놈. 저렇게 벗은 여자가 찾아올 줄 알았다면 절대로 여기에 안왔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프란의 옆을, 반이 스쳐 지났다. 반은 레오니아가 엉겁결에 떨어뜨렸던 녹색 천을 잡아올려 그녀에게 건넸다. 레오니아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순간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레오니아의 뺨이 확 붉어졌다. "나는 바쁘다." 말끝에 반은 프란을 눈으로 가리켰다. 프란이 '내가 뭘?' 하며 눈을 둥그렇게 뜨는 사이, 레오니아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스탕달 어른께서 저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알았다. 가보아라." 프란이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레오니아가 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녹색 천을 몸에 칭칭 감은 채 문을 열었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문은 몹시 다소곳하게 닫혔다. "........" "........" 레오니아가 나가자, 프란과 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반은 몸을 돌려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결 고운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고 섰던 프란이 험험, 하고 큰소리로 기침을 했다. 딴청 그만 피우고 이리 좀 돌아서서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무언의 표시였지만, 저 대마왕이 인간의 의사행위를 알아먹을 턱이 없다. "여기선 만날 이래요?" 프란이 천장을 향해 시선을 두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반은 무신한 목소리로 답했다. "돌아오는 날엔 늘." "왜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프란이 대번에 묻는다. 반은 대답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면서 그는, 프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있었다. 프란은 뭡니까, 라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왜 괜히 가슴이 뛰고 난리야? 대마왕이랑 단 둘이 있는게 처음도 아니고. 근데 난 이제 대마왕이 저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무서워서 그런지 심장이 막 뛴다 말이야.' 프란은 속으로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반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가주님." "말해라." 프란은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해서 그러는데...... 여자들, 또 들어옵니까?" "각 집단에서 하나씩 보낼 테니 이제 다섯 남았다." ".........그렇습니까요." 프란은 온몸에 힘을 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는 프란이었다. 돌아오는 날엔 아일린 가의 각 집단에서 반에게 어울릴 법한 여자들을 저런 식으로 벗겨 보내는 모양이다. 마음에 들면 반은 언제든 그 여자들을 취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어떻게든 후사를 이어놓으려는 시도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으나 이런 요상한 의식에도 일종의 의미가 있었다, '후사를 만드는데 협조한다.'는 것은 가주 자리를 위협치 않는다는 의미이고 더불어 반과 어울릴 만한 여자를 뽑아 보내는 만큼 우리는 언제나 너의 든든한 후방이 되어주겠다는 의미도 숨어 있는 것이다. '지겹군.' 반은 그렇게 생각한다. 저렇게 반나체로 찾아온다 해도 반이 그녀들을 취한 적은 없었다.가끔씩은 시도 때도 없이 여자들이 들어오기도 한다. 어쩔 때는 두세 여자가 한꺼번에 들어와서 난감한 적도 있었다. 프란은 민망하다는 얼굴로 반을 보았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며칠 간 피로가 누적될 대로 누적되어 있던 터라, 프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지금 그녀는 침대위에 대자로 뻗어 그대로 자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매트릭스가 푹신푹신해 뵈는 것이 며칠 간 침낭만을 상대해왔던 몸이 저기에 눕고싶다고 애원하고 있었다. 반 역시 내식은 하지 않았으나 피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자고 있는 동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덥침을 당하는 것만은 사양이다. 둘은 억지로 눈을 말똥하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프란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차라리 여자라도 들어와라! 아악, 대마왕이랑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되냐고!' 프란이 몸부림치든 말든, 밤은 길기만 했다. 반이 말했던 대로 여자들은 차례차례 들어왔다. "가주님 일하십니다." "가주님 주무십니다." "가주님 저와 업무 차 할 얘기가 있거든요." 처음엔 네글리제더니 그 다음엔 괴상한 가죽옷(대체 무슨 취향인거냐, 하고 프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다음엔 속옷에 가터벨트........ 절규하고 싶은 프란이었다. 여자 몸매 보고 좋아할 수 있는 남자라면 차라리 기쁘겠지만 확실히 그건 무리였다. 하나같이 풍만한 몸매의 여성들은 보란 듯 반쯤 나체인 채로 들어섰고 그 때마다 프란은 눈 둘 곳을 몰라 민망해했다. 이렇게나 노골적이라니! 허나 만고불변의 진리, 아무리 강한 자극이라도 계속 보다보면 익숙해지는 법. "가주님 없거든요. 자, 여기 천. 이거라도 걸치고 가세요." 처음엔 기절초풍했던 프란이었지만 네 번째 여자가 들어왔을 때는 완전히 막나가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양탄자를 걷어서 뒤집어 스라고 건네줬을 정도로. 여자는 저 뒤에 서 있는 남자가 가주가 아니면 누구냐고 묻고 싶은 듯했지만 프란의 웃는 얼굴에 결국 지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프란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자를 차례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차라리 싸움을 시켜라.' 프란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여자 달래 돌려보내기는 검투보다 더한 집중력과 정신적 피로를 요구했다.그리고 마침내, 프란은 가장 강한 적수를 만나고 말았다. 다섯 번째로 들어섰던 여자가 완강하게 저항했던 것이다. "무슨 헛소리야? 가주님 저기 계신데. 얼른비켜!.....가주님!"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프란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있는 반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프란만큼은 아니라도 그 역시 피곤한 상태다. 부상을 입은 채 여기까지 온데다 대회의의 스트레스도 있었던 것이다. 프란이 막아섰음에도 육탄공세로 들어서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반으로서는 짜증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눈치 챈 프란은 한순간 흠칫했다. "와아, 와아, 와아! 우리 가주님은 오늘 그럴 기분이 아니랍니다! 내일오세요, 내일!" 프란은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무작정 밀치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어머, 어디에다 손을 대는 거야! 이 저질!' 하고 소리치면서도 문 밖으로 떠밀려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은 속으로 '정말 대다한 여자인걸'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대마왕의 위압감을 무시하고 몸으로 밀어붙이는 저 대담함이라니, 검 한 번 닦아보라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다. 프란은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반을 돌아보며 물었다. "검 뽑으려고 했죠?" 반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대마왕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오늘 자기를 불러서 여자들을 처리하게 했던 만큼, 여자들을 베거나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반이 여기서 검을 뽑는다면 저 여자들은 밤마다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그 얼마나 가여운 인생인가. 그것만은 막고 싶은 프란이었다. 그러다 프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새벽이네요." 말 그대로다. 창밖이 벌써 환해지고 있다. 프란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이 밝는 것을 확인하자, 그야말로 미친 듯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안 돼! 내방에 가서 자야지! 그리고 아직 한 사람이 더 남았단 말이야!' 허나 생각과는 달리 프란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반은 목 전체로 리드미컬하게 운동하고 있는 프란을 바라보았다. 당장 깨워야 하겠지만, 반은 그러지 않았다. 반은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여 방문을 열었다. "아!" 방문 앞에는 마지막 여자가 서 있었다. 반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저드 리그에서 보냈다는 걸 안다. 돌아가라." "하지만......" 여자는 간절한 눈으로 반을 올려다보았으나,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에 굳어 그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여자를 보내고 나서, 반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프란은 카펫 위로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었다. 가슴 부근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재빨리 움직인다. 정말이지 어지간히도 빨리 잠드는 녀석이다. 언제나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허나 반은, 오늘만은 봐주기로 한다. 요 며칠간 자신의 팔 때문에 프란이 무리해서 싸웠다는 것을 반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잠든 것, 내일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보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반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랜만에, 반은 편안하게 잠들었다. 침대 밑에서 시종이 새근새근 소리까지 내가며 잠들어 있음에도, 신경쓰지 않고 잠든 것이다. '이게 뭐지?' 케인은 잠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서는 이렇게 당황해본 것이 아렌 여신에게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 업무보고를 위해 반의 방에 들렀던 차다. 비켈린의 대장인만큼, 아일린에선 반의 방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케인이었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한 후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따. 이미 일곱 시가 넘었기에 반은 당연히 일어나 있어야 했다. 언제나 시간이 칼 같은 자신의 주인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신의 주인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분명 피곤했을 테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게 아니었다. '왜 저기에 프란이 있는거지?' 마치 부부처럼, 프란과 반은 함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케인은 뇌까지 흔들리는 느낌에 얼어붙었다.누구든 빨리 눈을 떠서 이 상황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케인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잠들어 있던 사람 하나가 눈을 떴다. 프란이다. 눈곱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프란은 일단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했다. 그런 프란의 시선이 케인과 부딪친다. 프란은 그 순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케인이 입술을 열었다. "......왜 거기 있지?"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어?"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녀는 한 번 더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러다 프란의 움직임이 한순간 뚝, 하고 굳었다. 한참 만에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푹신한 이불에 파묻힌 자기 몸이 보였다. 프란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누워 있는 반을 확인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 비명도 감탄도 아닌 듯한 프란의 짧은 한마디가 이 모든 상황을 압축하고 있었다. 잠시간, 깨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아침햇살을 다 잡아먹을 만큼 끔찍하게 어두운 것이었다. 프란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말이야, 케인.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얼굴이 벌게진 프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그러니까......아악, 죽기싫어! 난 여자들 막아주러 온 거라고!" 프란이 말하는 동안에도, 케인은 굳은 채 프란과 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반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케인은 한동안 그런 반을 보다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말았다. '설마, 가주님?' 잠시 생각하던 케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 프리텐." "으응? 케인, 제발 입막음 어쩌느니 하면서 날 죽일 생각은 하지 말아줘." 프란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고 케인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니다. 나가봐라." "응?" 프란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정신이 없기로는 케인보다 프란이 더했다. 도대체 왜 자기가 반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엇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야말로 기절할 노릇이다. "프란 프리텐. 네 방은 이 건물 3층의 왼쪽 여섯 번째 방이다. 거기로 가면 돼." 제일 이상한 건 아직도 대마왕이 꿈쩍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몸을 침대에 깊게 파묻은 채, 반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이런 소동이면 일어났으니 당장에 일어나야 하는 건데도 말이다. 어찌 됐든 프란은, 자기를 이 곤란한 상황에서 내보내주겠다는 케인의 말이 기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프란이 자신의 짐을 챙기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케인이 움찔한건 그 순간이었다. 프란이 풀어놓은 짐 안에서 뭔가 특이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둘둘 말린 종이였다. "그건 뭐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프란은 케인이 가리고 있는 그 종이를 보며 '아!'하는 소리를 냈다. 어젯밤 육포를 먹느라 정신없이 짐을 풀어헤쳤는데 그 바람에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짐들이 모두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케인이 가리킨 것은 카르멘 가에서 떠나던 날 챙겼던 레이니아의 초상화였다. '좀 곤란한걸.'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림을 보여주었다. 케인은 그림을 보자마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 변화가 없기로 반과 막상막하를 다투는 그로서는, 어이없다는 심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수백 배 미화해서 초상화를 그리다니, 양심이 없군.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 여장까지 하고 그림을 그렸나?" 두말할 것 없이 프란은 버럭 화를 냈다. "이봐! 내가 아니라고!" 물론 케인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독한 레이니아 마니아인 보일린도 혼동했을 정도니까. 프란은 잠시 망설였다. 탈출할 때 묘한 느낌이 들어 한 장 훔쳐 돌아왔고 혹시 몰라 여기까지 가져오기도 했다. 대륙이 잃어버린 레키슈안 초대 왕비의 초상화를 든 채로, 프란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래도 꽤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상기해낸 프란은 입을 열었다. "이게, 레키슈안의 초대 왕비래." 그때 케인은 본의 아니게, 돌아누운 반이 어깨를 움찔하는 걸 보고 말았다. "으음.......뭐라 했나? 널 수백 배 미화한 그림이 아니라?" "케인!" 케인은 놀라운 마음에 다시 한 번 그 그림을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 그림 안에 있었다. 프란과 같은 금발에 오렌지색 눈동자, 허나 그보다 훨씬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느낌. 아직까지도 레키슈안의 전설로 남아 있는 여신 같은 존재, 한 나라를 건국한 남자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단 하나'의 여인, 레이니아. 그 여인은 대륙에 단 한 점의 초상화도 남기지 않았다. "어떻게 네가 이걸?" 프란은 간절한 눈으로 케인을 올려다보았다. "설명하자면 길어. 그 사이 대마왕 깨면 난 죽어버릴 거야." 확실히 반이 저렇게 누워 있는 앞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래서 케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신중하게 말했다. "혹 이그림, 내가 가져가 봐도 되겠느냐?" "어? 왜?" 뜻밖의 말에 놀란 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만약 진품이라면, 너는 천년을 뛰어넘어 대륙 최고의 여인의 얼굴을 찾아낸 사람이 되거든." 프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흠, 그러든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다. 만약 뒤에 생길 일을 알았다면, 프란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쨋든 빨리 나가봐라.......씻고, 다시와." 케인의 말에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저기, 있잖아. 케인." "왜." "대마왕한테, 내가 저기서 잤다고 말하면 안돼." 그 말에 케인은 잠시 굳은 얼굴을 했다. '대마왕 이라고?' 그러면서 케인은 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또 본의 아니게, 반의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말았다. 케인은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프란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에서 빠져나갔다. 프란이 나가고 난 방, 케인은 아직도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는 반을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침착하고 배려 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제 그만 일어나셔도 됩니다." 프란이 알았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반은 당장에 침대에서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 반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두 남자는 한참 동안 곤란한 얼굴을 한 채, 시선을 부딪치지도 않았다. 한참 만에 반이 말했다. "아무 말 마라."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한 목소리였지만, 그러면 뭘 하는가. 반의 포커페이스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케인은 웃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당황한 얼굴의 반은 처음 본다. 반은 정말이지 곤란해 미칠 것 같았다. 수하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 케인이 노크했을 때, 반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프란을 보고는 그만 굳어버렸다. 케인이 문을 열자마자 반은 다시 잠든 척했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잠든 척을 한 탓에 '말하면 안 돼'라거나 '대마왕'이라고 한 것 까지 본의 아니게 듣고 말았다. 하지만 화를 낼 수 조차 없었다.그러면 깨어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프란도 그랬지만,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반이 완전히 잠들었을 때 프란이 일어나 침대에 누웠던 모양이다. 허나 어째서 몰랐을까? 날카로운 감각을 갖고 있으니 아무리 잠들어 있었다 한들 눈치 챘을 텐데. 아마 여기로 오는 동안 프란과 계속해서 단 둘이 잠을 잤던 탓일 것이다. 나란히 침낭 깔고 누운 것이 전부지만,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잠을 자다 보니 경계가 흐려졌을 테지. 케인이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말하면서 케인은 프란이 두고 간 그림을 반쪽으로 가져갔다. "알고 계셨습니까?" 반은 그 그림을 받아들었다. 방금 전의 대화를 다 들어서 프란이 레키슈안의 초대 왕비 그림을 내밀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수백 배 미화해서 그린 여장한 프란' 일 뿐이었다. 방금 전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어디서 거짓말을! 죽여버리겠다!'하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이나 닮아 있었다. 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도 이 그림에 대해선 몰랐음이 분명하다. 케인은 조금은 당황한 채 말했다.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곤란해. 무지하게 곤란해! 곤란해 죽겠어!" "뭐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소리를 질렀기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목소리는 프란을 기절초풍시키기에 충분했다. 놀란 프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퀭한 얼굴의 시온이었다. "이 자식, 놀랐잖아!" 시온은 프란의 방에 있는 나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프란이 고함을 질렀고 시온은 힘없이 답했다. "네 얼굴 보려고 들렀는데, 안 보여서....." "남의 방에 그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 줄 아냐!" 프란이 다시금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시온은 씩 웃을 뿐이었따. "잠 한숨 못 자고 기다렸는데, 너무 하잖아." 그럼 어젯밤부터 기다렸단 거야? 뭐라고 타박을 줄 셈이었던 프란은 한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이 녀석, 왜 저렇게 표정이 안 좋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얼굴이 안 좋다. 안색도 새하얀게, 뭐 잘못 먹었나 싶다. 프란은 시온 쪽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눈치 없는 프란이 읽었을 정도로, 오늘의 시온은 생기 없는 모습이었다. 어젯밤 대회의의 여파다. 세라딘의 대장 레이가 죽는 동안, 시온은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무력함을 전해 들으면서도 세라딘은 흔들림 없이 시온을 지지할 것이다. 보답 받지 못할 충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맨 처음, 세라딘이 시온을 향해 충성을 맹세한 순간부터 정해졌던 일. "프란." 괴로웠기에 프란을 보고 싶었고 그랬기에 계속해서 기다렸다. 허나 새벽이 지나도록 프란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시온은 계속 기다렸다. 그래도 이렇게 프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풀린다. 참, 한심한 놈. 시온은 그렇게 생각한다. "괜찮아, 느끼 버터? 얼굴 엄청 안 좋다." "걱정까지 해주고, 나 기분 좋다. 매일 안 괜찮아야지." 시온이 웃었다. 보통 때 같으면 한 대 쥐어박았겠지만 그러기엔 표정이 정말 너무 안 좋아서 프란은 참았다. 프란이 슬며시 손을 뻗어 시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시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프란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딘지 모르게 계면쩍어진 프란이 손을 떼어내려는데, 시온이 재빠르게 말을 뱉었다. "프란, 우리 어머니를 조심해." "어? 뭐라고?" 갑작스러운 그 말에 프란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시온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우리 어머니, 각별히 조심해." "이진느 아일린 말하는 거야?" "응." 답하며 시온이 얼굴을 굳혔다. "명심해,프란. 우리 어머니, 조심해야 해." "가주님." 프란은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리라 다짐했던 프란이다. 주인의 침대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는 걸 들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싸가지 없는 대마왕은 그토록 예쁜 여자들에게 조차 옆 자리를 내주지 않은 사람인데 그 자리에 덜렁 누워 자는 모습을 케인에게까지 들켜버렸으니 이런 창피가 어디 있을까. '괜찮을 거다! 어차피 대마왕은 자고 있었잖아!'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면서, 프란은 반의 정면에 가서 섰다. 카르멘 가와 다름없이 시종 노릇을 하게 되긴 했으나, 분명 카르멘 가와 조금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프란은 반이 무언가 지령을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반은 아무 말도 없이 프란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얼굴에 구멍을 뚫으려는 건가, 하고 의심될 만큼 강렬한 시선이었다. 프란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끔찍한 상상에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케인이 말한 건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한참 만에 반이 입을 열었다. "설명해라" "네?" 그 순간, 프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명하라니? 설마 대마왕이 아, 알아버렸나? 왜 거기서 잤는지 설명 하라는 건가? 너무 놀란 나머지, 프란은 무릎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울 듯한 얼굴로, 프란이 반을 올려다본다. "그.그건 말입니다. 제가........" 프란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는 찰나,반이 말을 이었다. "레이니아의 그림에 대해." "엉?" 그리고, 프란은 웃을 뻔했다. 웃었다면 큰일 났을 테지만. '뭐야, 그게 아니잖아?' "말하지 않았나." 프란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지나가는 것을 본 반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소리를 쳤다면 차라리 나았으련만, 저렇게 굳은 얼굴이라면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가 더 공포를 안긴다. 프란은 곤란한 얼굴로 반을 보았다. 그림에 대해,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았던 건 단순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대체 이렇게 예쁜 사람과 자기를 착각한 보일린이란 놈이 눈이 돌기도 돌았지만, '레이니아랑 제가 닮았대요. 보일린 놈이 사실은 레이니아 마니아인데...' 하고 길고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무지막지 쑥스러운 일이었다. 대륙 최고의 여인이라 불리는 레이니아가 아닌가. 그 여인과 스스로가 닮았다는 소리를 어떻게 자기 입으로 할 수 있겠는가. " 아니, 그건, 뭐, 그게....." 프란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니아의 그림이 틀림없나?" "예? 아,아마도요." "네가 아니란 말이지?" 그 순간, 프란은 멍한 눈을 했다. 설마하니 대마왕까지 착각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다, 당연하죠! 전 남자인 걸요!" 지나치게 강조해서 말한 프란이 어깨를 곧게 폈다. 반은 그런 프란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입수 경로를 말해봐라." '아악, 부끄러워!' 민망함에 뱀장어처럼 몸부림치면서도, 프란은 이스티네 가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과를 모두 끝낸 뒤, 파김치가 된 프란은 자기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대마왕 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들었어!' 생각하면 할수록 미칠 것 같았다. 놀라지도 않고 되묻지도 않은 채, 반은 프란의 두서없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더 쑥스러운 프란이었다. 차라리 '흥, 네가 레이니아와 닮아?' 같은 비웃음 섞인 비난을 들었다면 덜 부끄러웠을 거다. 하지만 반은 그야말로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계속 말하라'라고 했을 뿐이다. 시종의 민망함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인답게. "오늘은 왜 이렇게 부끄러운 일만 일어나는 거야!" 프란은 낯선 저택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프란이 소리를 지르고 있던 그 시각, 반은 자기 방에서 상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카르멘 가보다 아일린 가가 더 조심스러운 반이었다. 그 탓에 하리나스 백작에게서 입은 검상을 이 집 의사에게 보일수 없었다. 요 며칠 간 프란이 잠들어 있는 사이 붕대를 새로 갈고 약을 발랐던 반이다. 하지만 빨리 나을 것 같던 그 팔이 의외로 치유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헤이튼과의 검투 때문이겠지.' 후회는 없다. 아니, 이긴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단추를 절반쯤 풀었을 때다. 갑자기 문을 벌컥 열리더니 한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반은 흠칫 다시 옷을 여몄다. "가주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케인이었다. 반은 가만히 눈썹 사이를 좁혔다. 뛰어왔는지 케인의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케인은 말이 없고 언제나 침착한 남자다. 당혹 따위는 모르는 자신의 수하이기도 하다, 그런데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케인은 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가주님." ".......무슨 일인가?" "진품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케인이 그림을 내밀었다. 다시 봐도 '프란 프리텐이 여장한 것을 수백 배 미화한 그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 그림을 받아들며, 반이 케인을 본다.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들이 차례로 메모라이즈로 읽고 과학자들이 그림의 성분을 분석해봤는데, 틀림없답니다. 가주님, 천년 전에 대륙이 잃어버렸던 초상화입니다." 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프란은 그 그림을 이스티네 가문에서 훔쳐왔으며, 그 저택에는 이런 그림이 수백 점 있었다고 말했다. 허나 프란은 모르고 있었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스티네 저택은 반역의 죄 때문에 불 질러졌다. 비밀 방에 보관되어 있던 그 많은 그림들 역시 깨끗하게 소실되었을 것이다. "혹시 몇 점이 더 있지는 않습니까?" "없다. 그게 유일한 거다." 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케인의 몸이 굳었다. 그렇다면 지금 두 사람이 함께 보고 있는 이 그림이 바로, 레이니아 왕비의 유일한 초상화란 말인가. 대륙이 잃어버렸고 그래서 포기하고 있던 그 그림이 지금은 단 한장, 유일하게 그들의 손에 들려있다. "화폐로 환산할 수도 없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 "게다가......." 케인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가주님도 착각하셨을 만큼, 이 그림과 프란은 닮아 있습니다. 그림이 공개될 경우,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두 남자가 이런 상황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어가며 잠에 빠져 있었다. 드르렁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는 프란이었다. "네가 프란 프리텐인가?" "오오! 정말 그 그림이랑 똑같네 그려!" "에이, 그래도 확실히 얼굴이 덜어지긴 하는데 뭘!" 프란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이, 이 영감들은 다 뭐야?' 줄잡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다. 프란이 영감들이라고 한데 묶어 버리긴 했지만 나이도 이십대부터 팔십대까지 다양해 보인다. 그들은 무섭게 번뜩이는 눈으로 프란을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프란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다. 이 저택 안에서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만큼 잘못한 기억은 없는데! 게다가 이 새벽에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일단은 피하고 보자!' 영문을 모르면서도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을 내린 프란은, 방으로 도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쾅! 프란은 움직임을 멈췄다. 어디서 많이 보던 지팡이가 방문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프란은 부들부들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켄린의 세필나무 방망이와 똑같이 생겨서 무의식중에 겁에 질렸던 프란이지만, 다행히 지팡이를 휘두른 것은 자켄린이 아니었다. 그제야 프란은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나이가 많은 이들은 저마다 그 세필나무 방망이를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야? 뭐야? 이게 대체 뭐야?' 프란이 경악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나이 많은 마법사들의 눈은 전구를 켠 듯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희번들한 광기가 흐르는 그 눈을 보면서, 배짱하나 남부럽지 않다고 자부했던 프란은 그녀답지 않게 굳고 말았다. "오호, 오호, 오호!" "어떻게 찾았지?" "정말 신기한 일일세! 오오, 그토록 아름다운 자태라니! 내 평생 메모라이즈 마법을 익힌 게 이렇게 행복 할지 몰랐네!" 사람들은 저마다 떠들고 있었다. 찬찬히 듣고 있던 프란은 그제야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흰 로브에 지팡이. 게다가 '마법'에 대한 언급. 그들은 모두 마법사였다. "저기, 나 좀 바쁘거든?" 프란이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들 가운데를 빠져나가려 했다. 반에게 가야했기 때문이다. 광기에 가득 찬 것 같은 이 사람들이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단 대마왕 반이 화내는 게 더 무서운 프란이었다. '늦다니, 죽고 싶나!' 라고 외치는 반의 얼굴을 보느니 여기를 뚫고 나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채, 프란이 사람들을 밀쳐내기 시작했다. 허나 마법사들은 강경했다. "안 돼! 뭐가 바쁘다고 이 난리인가! 우리는 밤새도록 자네가 나오기를 기다렸단 말일세!" '스토커냐!' 참다못한 프란이 이를 악 물었다. "에잇, 진짜! 내가 이런 짓까진 안하려고 했지만!" 차랑! 맑은 소리와 함께 프란이 검을 뽑아들었다. 눈부신 은빛이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프란은 위협용으로 뽑은 것인데, 오히려 마법사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마법사들은 모두 경탄에 찬 눈으로 그 검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 이것은 실버 블레이드!" "카르멘 가의 실버 블레이드로군! 레이니아의 초상화도 모자라 실버 블레이드라니, 오늘 정말 횡재하는 구먼! 자네 대체 뭔가?" 마법사들이 다시 온몸으로 프란을 밀어붙였다. "아아악!" 프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삼십분 후. "찾아라!" "얼른 찾아! 위저드 리그에서 실적 올릴 기회다!" 프란은 저택 수풀에 숨어 있었다. 이미 지각이다. 지금 들어가면 반의 무시무시한 눈빛 공격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눈이 뒤집힌 마법사들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프란을 찾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방에도 숨어보고 문 뒤에도 숨어보고 저택벽 사이에도 숨어봤지만 마법사들은 귀신같이 찾아냈다. 프라은 숨을 헉헉, 들이마셨다. 아까 '레이니아의 초상화'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프란은 마법에 대해 무지했기에 물건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메모라이즈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들이 어제 레이니아 초상화가 진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반 미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저드 리그엔 사이코가 많거든." 프란은 그 순가, 구원자를 만난 눈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알고 프란을 찾아낸 시온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위저드 리그?" 프란이 제발 설명해달라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시온이 싱긋 웃었다. 어젯밤 자켄린에게 대강의 사정을 전해들었던 시온이었다. 시온은 한걸음 프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 그림은 어떻게 된거야?" "몰라!" 대마왕에게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 죽을 뻔했는데 느끼 버터에게 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부끄러운 일은 한 번 으로도 족하다. 프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온이 소리쳤다. "어라, 저기 또 온다." 정말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 있다!" "이 쪽이다, 이쪽!" "크아악!" 괴수나 낼 법한 비명을 지르며, 프란이 사방을 훑어보았다. 포위당하지 않을 방향을 찾는 것이다. 거의 맹수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프란을 향해, 시온이 충고해주었다. "무작정 형님 방으로 뛰어. 그러면 마법사들도 못 따라와." "알았어!" 드디어 방향을 결정했는지, 프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프란의 등에다 대고 시온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아이돌이 되어버렸네, 프란." "닥쳐, 시온 아일린!" 발악하듯 소리친 프란의 말에 시온이 방긋 웃었다. "걱정 마, 프란. 난 프란이 레이니아랑 요만큼도 안 닮았다 해도 좋아했을 거야." "닥치래도!" 정말 기절할 것 같은 프란이었다. 제3장) 전조(前兆) "힐링(healing)!" 시온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곧 그의 손에서 찬란한 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유대상은 눈앞에 있는 한 송이 국화꽃. 요 며칠간, 시온은 오직 치유마법에만 몰두했다. 언제나 다쳐오는 프란에게 다음번에는 꼭 도움을 주고 싶엇기 때문이다. 허나 마법사에게는 저마다 타고나는 계통이란 것이 있고, 그건 노력으로 어떻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난, 국화가 그렇게도 시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보다 못한 자켄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빛이 멎은 자리, 국화꽃은 손만 대도 부서질 만큼 바짝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국화를 치유하는 마법인지 말려 죽이는 마법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허나 시온은 기죽지 않았다. "성격도 급하긴. 언젠가 제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오?" "차라리 그거 할 시간에 방어계 마법을 더 연구하는 게 어떠냐?" 시온은 픽, 헛웃음을 흘렸다. "나한테 필요한 건 지금 치유마법인데요?" "불쌍하지도 않냐? 대체 꽃으로 태어난 게 무슨 죄야? 후우." "스승님!" 시온이 억울하다는 듯 고함을 쳤으나 자켄린은 냉정했다. "백날 연습해봐라. 네 치유마법은 살생마법이다. 그것도 고도의. 차라리 그걸 심화해서 몸의 물기를 몽땅 제거하는 공격계 마법으로 전환하면, 전혀 새로운 유형의 마법이 탄생할지도 몰라. 나랑 손잡고 한 번 해보자, 응?" "‥‥‥고만하쇼. 슬퍼질라 그러니까." 시온은 말라죽은 국화를 한쪽으로 치우고 이번엔 장미를 가져왔다. 다시 한 번 '힐링!' 하고 외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허나 이번에도 말라죽어버린 장미. '넌 그쪽 능력은 왜 그렇게 엉망이냐?' 자켄린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제자 놈이 조금만 파면 광천수가 솟아나오는 우물을 두고 백 년을 파도 썩은 물 한 방울 안 나올 땅만 죽자고 파고 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벌써 세 시간째였다. 그 사이 말라죽은 식물이 무려 서른 종. 학살당한 꽃들을 내려다보며 시온이 울상을 짓는다. 자켄린은 이제 포기하겠지, 했으나 시오은 다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이번엔 아이쉔이다. 자켄린은 아이쉔이 잠시 뒤 맞이하게 될 참혹한 죽음을 향해 묵념했다. "으아악!" 자켄린의 예상대로 아이쉔마저 말려 죽인 시온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튤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더 이상 꽃이 고사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자켄린은 험, 하는 소리를 내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금발 꼬마 말이다." 역시 제자의 동작이 뚝 멎었다. 자켄린은 짐짓 거드름까지 피워가며 말했다. "그 녀석, 그대로 둬도 되는 것이냐? 저택이 아주 난리도 아니더군. 레이니아 왕비 그림은 어디서 가져왔으며 그건 왜 그렇게 그 녀석이랑 닮은 거지? 이대로라면 어느 집단에서든 손을 쓸 게 뻔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온이 답했다. "손쓰고 싶은 건 스승님이면서." 자켄린은 멈칫한다. 이 녀석,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자켄린을 향해 시온은 손마디를 두둑 꺾어 보였다. 입매가 가볍게 휘어 있지만 저건 절대 웃는 얼굴이 아니다. 일이 년 봐온 것도 아닌데 가증스럽게도 스승까지 속이려 들다니. 자켄린이 세필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려는 찰나, 시온이 입을 열었다. "우리 프란이 천 년 간이나 실종되었던 레키슈안 왕비의 초상화를 찾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레이니아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 아일린 밖으로 새어나가면 대륙이 들썩일 일이지. 뭐, 나한텐 레이니아 왕비 따위보단 우리 프란이 더 예쁘지만." 그 순간, 자켄린이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미친 게냐?" "뭐가 말이우?" 영문을 몰라 의아한 듯 되묻는 시온의 머리를 향해 자켄린의 세필나무 지팡이가 퍽, 하고 날아들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강한 가격이었다. 시온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유? 억울한 듯 올려다보는 시온을 냉정히 응시하며, 자켄린은 근엄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놈아! 레이니아보다 그 꼬마 놈이 예쁘다니 그게 말이나 되냐! 아무리 콩깍지가 씌었던들 인간의 보편적 미(美)를 무시해도 좋은 건 아니야!" "‥‥‥그, 그렇게 흥분할 것까진 없잖소."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냐!" 씩씩대는 자켄린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에야 시온은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이건 놀랄 만한 일이죠. 분명 입수 경로를 알아본다거나, 프란이 혹시나 레키슈안 왕가와 연관이 되어 있을까 싶어 찾아보려 하는 사람도 많을 테지. 흐응,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눈 뒤집힐 집단은 위저드 리그 아닌가요? 지금만 해도 난리잖아." 자켄린은 입으로만 웃었다. 자켄린은 속지 않았다. 웃음 뒤로 숨긴 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스승님이라 해도, 프란한테 손대면‥‥‥.' 자켄린은 왠지 뿌듯하다. 바람둥이 생활 청산하고 한 여자에게 쩔쩔매는 이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고 말하면, 팔불출 소리 듣기 딱 좋겠지? 속내를 감추며 자켄린이 말했다. "난 그 져석이 아이쉔 왕비와 닮았든 말든 상관 안 해. 관심도 없고." "그럼 단속 좀 하쇼. 어제는 방에까지 난입했다던데. 프란이 아주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모양이더라고요." 시온의 말에 자켄린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런 건 별거 아냐. 곧 잠잠해질 거야." 별 생각 없이 넘겨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건만 시온은 그 말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냈다. "그런 건 별거 아니라니?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이우?" 자켄린은 씩 웃었다. "요즘 헛소리를 해대는 녀석이 있거든." "헛소리?" 시온이 눈을 깜빡였다. 자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꼬마가 유네아를 갖고 잇다고 말하는 녀석이 있다. 레이니아 왕비랑 닮았으니 가능성 있다고 소리치는데, 사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지." 자켄린 딴에는 심각하게 던진 말인데,시온은 그게 뭐요? 하고 물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켄린은 또 한 번 부들부들 떨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제자야! 제발 공부 좀 해라! 한마디로 염병할 헛소문인데, 레이니아 왕비같이 상대 남자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여인이 세기에 한 번 씩은 꼭 출몰하거든. 그런데 그런 여인들이 사실은 특수한 힘을 타고난 자다, 이딴 헛소리지. 그런 식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을 유네아를 가슴에 품었다, 라고 그 엉터리 이론을 신봉하는 녀석들은 말한다" 한참 생각하던 시온이 '어라?' 하는 소리를 냈다. "스승님." "왜?" "그 유네아라는 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요?" 자켄린은 고소(苦笑)했다. "그걸 확인할 수 있으면 미쳤다고 온 세상 남자들이 가만히 있겠냐?" "‥‥‥관상 보는 사람이라면 혹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관상 같은 소리 하네. 너 마법사 맞느냐?" 자켄린은 비웃었지만, 시온의 머릿속에는 옛날의 한 현장이 선명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프란에게 막 관심을 가졌던 때, 쇼핑을 핑계삼아 그녀와 외출했던 적이 있다. 키네세스 공주의 탄신 전야제, 이름 모를 노인에게 점을 봤었지. '이쪽 분은 유네아를 가슴에 품으셨구먼. 오히려 이쪽 여자 분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프란의 얼굴을 보며 노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시온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를 거머쥘 수도 있는 자' 라고 했던 만큼, 예사롭게 점을 보는 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 노인이 프란에겐 '유네아를 가진 사람' 이라고 했다. 그댄 대수롭잖게 넘겼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시온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자켄린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시온 아일린." "왜 부르쇼?"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시온이 답했다 "시즈도 돌아왔는데, 너희 어머니는 별 움직임이 없냐?" 자켄린의 은밀한 속삭임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뭐라도 하고 있겠지. 달리 우리 어머니인가?" * * * * * * * * * * * * * * * * * * "유네아? 정말 그런 게 있단 말이냐?" 정초원 책임자, 이진느 아일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정초원은 아일린 내에서도 몹시 특이한 집단이다. 그곳은 아일린 가의 모든 '여인' 들이 속해 있는 곳으로, 본디 이집단의 장은 가주의 반려자다. 가주가 비켈린을 통해 가문을 통솔한다면, 정초원은 가주의 그림자 아래 숨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일린 가주로 여자가 선출되어 남자 정초원 책임자가 생긴 것은 여태껏 딱 두 번뿐인데, 그때마다 정초원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붉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왜 남자가 여자밖에 없는 집단의 책임자야?' , '나라고 좋아서 된 줄 알아!' 등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가주의 아내가 담당하는 이곳의 현 책임자는, 반의 고모인 이진느 아일린이다. 반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자리가 비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이진느의 앞에는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부복하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쯤. 위저드 리그 소속의 마법사인 그는 자켄린이 자기 말을 오뉴월 엿가락 씹듯 좍좍 씹어버리자 여기로 달려온 차였다. 혹시 이진느라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카리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유네아를 품는 자는 여자라고. 그 아이는 남자다." "아니, 틀립니다! 상대 여자를 성공으로 이끄는 남자들도 있잖습니까." 이진느가 입술을 비틀었다. "헛소리." 프란이 여기에 오기 전에도 이진느는 프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레이니아 초상화 사건으로 저택이 떠나가라 시끄럽지만, 이진느는 그것조차도 한참 전에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무엇보다도 이스티네 저택에서 프란을 감시했던 것이 저 세라딘의 사키인 것이다. 시즈 아일린이 몇 달 동안이나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채로운데 그 시종은 레이니아와 닮기까지 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엇다. 이진느는 잠시, 프란을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프란은 그녀를 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시온의 어머니?' 라고 했었다. '시온 도련님의 어머님' 이나 '시온님의 어머니'도 아니고 '시온'의 어머니라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감히 아일린의 세 번째 계승자를 이름으로 호칭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일 때문에 안 그래도 프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오늘 나타난 카리스의 말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저 프란 프리텐이라는 녀석이 일종의 농담 비슷한 '유네아'를 품은 자라는 것이다. 회색 머리칼의 남자, 카리스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건 저의 짐작입니다만‥‥‥." 이진느가 바라보자, 카리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시온님이 심상찮습니다." "무슨 소리지?" 아무리 망나니 같은 아들이라고 해도, 시온은 이진느 자신의 소생이다. 아들이 심상찮다고 보고하는 사람 앞에서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 어머니는 없다. "매일같이 그자의 방에 들락거리시는데, 그건 시온님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녀석 답지 않다니?" 이진느가 의아한 듯 묻자, 카리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시온님이 남자 방에 그렇게 자주 들락거릴 리가 없잖습니까!" * * * * * * * * * * * * * * * * * * 시온은 오늘도 가벼운 콧노래와 함께 흥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들이 밤마다 난입해서 프란을 납치하려는 만행까지 계획하고 있어, 요 며칠간 프란은 시온이 들어와 있어도 구박하거나 구타하지 않았다. 시온이 아일린의 세 번째 계승자이니만큼 시온 앞에서도 자신을 덜렁 납치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프란과 함께 길고 깊은 밤을 보내 볼까나. 흐흐, 그래도 위저드 녀석들이 가끔은 쓸모가 있단 말이야." 프란이 들었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시체가 되겠지만 즐거운 건 어떻게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온이 막 프란의 방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어라? 세리 아냐?" 프란의 방 앞에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시온도 익히 아는 얼굴이다. 그녀는 막 프란의 방문을 노크하려던 차였는데,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시온 쪽을 돌아보았다. 곧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시온 도련님!" "안녕, 세리. 그동안 잘 지냈어?"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온 시온을 향해 세리는 몸을 꼬았다. "도련님도 참. 왜 요즘은 밤에 놀러오지 않으세요?" "응? 아, 요즘 바빴어. 와, 세리는 여전히 예쁜걸." 세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시온은 곤란한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능글맞은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바람둥이의 죄라면 죄다. 시온은 속으로 프란에게 사과하며 세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내가 알기로 세리는 우편배달 쪽 아니었나?" 우편이 배달될 경우, 보통의 집에서는 집사 등이 알아서 물건을 전해주곤 하지만 아일린에선 그런 상식적인 일조차 통용되지 않는다. 워낙 본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아 우편물을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가에는 우편을 관리하는 부서가 아예 따로 있었고 세리는 그 소속이었다. "네, 우편배달이 있어서." "그거 설마, 프란에게 온 거야?" 시온은 세리가 들고 있는 편지를 가리켰다. 그러자 세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카세타에서 온 건데‥‥‥." "카세타? 내가 잠깐 봐도 될까?" 마린이나 뮤한테서 온 건가, 싶어 시온은 세리에게서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그런데 편지의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시온의 눈이 번쩍 했다. 헤냔 키에르 보냄. 시온의 표정이 돌변한다. 그는 편지를 품속에 쓱, 하고 넣으며 방긋 웃어 보였다. "세리, 이건 내가 전해줄게." 그 뜻밖의 말에 세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안 돼요, 도련님. 아무리 도련님이라고 해도 저희 부서의 원칙이‥‥‥." "세리는 참 귀엽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시온이 세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저택만큼 시온 아일린의 바람기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 곳이 없었지만, 마음 약한 세리는 단박에 넘어가고 말았다. '아, 도련님이라면 아무래도 좋아!' 이미 반쯤 넘어온 세리의 귀에다 대고, 시온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틀림없이 전해줄게, 응?" "아, 앗. 네, 네!" 세리가 저도 모르게 대답하자, 시온은 그런 세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자아, 세리. 얼른 가봐. 아직도 업무가 많이 남았잖아?" 세리가 '네!' 하고 소리치며 멀어졌다. 그녀의 등을 보고 섰던 시온은 망설임 업이 편지를 북, 뜯었다.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것이 일급범죄임을 잊은 채, 시온은 급박하게 편지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동글동글, 귀여운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친애하는 프리나에게. '흥, 친애하긴 얼어 죽을! 내가 손대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이 꼬맹이 자식이!' 첫 줄부터 분노하며, 시온은 편지를 마저 읽어나갔다. 프리나, 안녕! 아일린 가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네가 빚을 진것은 아일린 가주였잖아. 카르멘 가주하 고 있을 때 네가 일을 잘 했으니 이제쯤 빚을 줄여주 지 않았을까? 그 두사람이 친구라는걸 생각하면 지금 도 대륙의 앞날이 걱정 돼. "하하하!" 편지를 읽다 말고 시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것도 모르잖아? 형님이 형님이랑 친구라고?' 비밀을 알고 있는 자 특유의 우월감을 느끼며, 시온은 편지를 마저 읽었다. 프리나,그때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또 한심하게 술이 나 마셨을거야. 하지만 네 덕분에 정신을 차렸어. 내 가, 겠다고 한 거 기억나? 그 길로 당장 단장님께 달 려가서 기사 직위를 반납하고 싶다고 말했어. 하지만 단장님이 이삼 년간 말미를 주겠다고 하셔서, 현재는 휴직상태야. 이삼년간 나는 카세타의 기사가 아닌 헤 냔 키에르로 살게 됐어. 프리나,너를 만나러 갈 거야. 견습단장이셨던 아샤휘 님을 뵙고, 곧 아일린 가로 갈게. 상대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네 말대로 저스티스 카르멘에게 다시 한 번 결투를 신청하겠어. 프리나, 나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았어. 처음 만났던 이래 계속, 나는‥‥‥. "여기서 뭐하냐?" 분노 가운데에서도 흥미진진하게 편지를 읽어나가고 있던 시온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 전체를 곧게 폈다. "이, 이야, 프란! 이제 오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지만 시온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프란이 보기도 전에 편지를 뜯었으니 들키는 날에는 사망이다. 하지만 시온은 이 편지를 프란 몰래 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시온은 웃으며 편지를 뒷주머니에 넣었다. "연서가 왔더라고. 내 인기가 워낙 좋아서." "느끼 버터라 좋겠네." 프란은 별 감흥 없이 답하곤 방문을 열었다. 요즘 마법사들을 피해 다니느라고 몸과 마음이 모두 녹초가 된 프란이었다. 시온은 프란의 등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자식, 내가 편지 전해주는지 봐라.' 시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편지를 더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방에 들어선 프란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온은 프란의 옆에 슬며시 앉았다. "야, 네가 만날 들락거리면 괜한 소문나는 거 아냐?" 프란의 말에 시온이 씩 웃었다. "소문나면 어때서?" "말을 말지." 프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린 것은. "어?" 갑작스레 문이 열리자 프란은 물론, 시온도 당황했다. 마법사들은 음흉한 녀석들이라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문으로 들어오면 대비하기도 편할 텐데 그들은 천장을 뜯고 들어온다거나 창문을 깨고 들어온다거나 하는 변태 같은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프란과 시온은 잔뜩 긴장한 채 들어설 사람을 기다렸다. "누구야?" 시온의 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기에, 프란은 그렇게 물었다. 시온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답했다. "‥‥‥어머니." 이진느 아일린이었다. * * * * * * * * * * * * * * * * * * "시온 아일린. 시종 방에 드나들다니, 무슨 일이지?" "아, 프란과는 카르멘 가에서 꽤 친해져서 말이지요." 시온은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이진느는 이미 프란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시온이 잔뜩 긴장하는 사이, 프란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프란은 허리를 곧게 펴고 이진느의 눈길을 마주했다. 당당하게 행동하긴 했으나 프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고 말았다. 가녀린 몸의 선이나 고운 손을 봤을 때 검술 같은 건 전혀 익히지 않은 듯한데, 이진느의 온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위압감은 처음봤을 때 느꼇던 대로 대단했다. '하지만 이 몸은 대마왕의 살기를 매일같이 마주했다고!' 무슨 일로 이 방에 찾아왓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얕잡혀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쪽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는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서 자신이 눈을 갈고 무릎을 굽히면 대마왕에게도 안 좋을 거라는 느낌이다. 이진느는 프란의 태도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시온과 똑같은 진초록 눈동자가 또렷이 프란을 주시한다. 한참 만에 이진느가 입을 열었다. 시선은 프란에게 주고 있지만, 말은 시온을 겨냥한 것이었다. "한낱 시종 따위가 대 아일린의 세 번째 계승자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이 작태를 어떻게 설명할 거지?" 시온은 물론이고 프란 역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나,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시온에게 반말을 했네'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프란은 시온을 돌아보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시온과 자신은 이제 꽤 가까운 사이였다. 이 정도 친분이면 반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프란의 뒤통수에 대고 이진느가 싸늘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건방진 것, 어디서 눈을 돌리는 것이냐! 하긴 그 시즈가 데려온 아이니 어련하겠느냐!" 그 순간, 프란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뜻입니까?" 시온이 프란의 손을 잡아 뒤로 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 행동이 이진느의 눈에 박혀 심기를 거슬리게 했을 뿐이다. 이진느의 시선은 프란의 손을 간절하게 붙잡은 시온의 손에 정확히 머물러 있었다. '사내 녀석의 손을 잡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자신의 아들은 여자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녀석이다. 게다가 저 안달하는 얼굴이라니. 성장한 뒤론 무슨 말을 하든 웃는 가면을 뒤집어쓰던 녀석이다. 대체 저 표정은 뭐지? '안 돼, 프란. 내가 말했잖아. 어머니의 심기를 거슬려서는 안돼!' 시온이 속으로 외치는 소리를, 프란은 당현히 듣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왜 화가 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이런식이니 정말 열 받아 죽겠다. 하리나스 그 작자도 가주에 대해 온갖 험한 말을 다 입에 담았었지. 허나 아일린의 사람이 자기 가주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본인은 속으로 반을 향해 온갖 욕을 다 하면서도, 남이 그러면 이상하게 화가 나는 프란이었다. "저와 시온은 친구입니다. 대 아일린 가에서는 친구에게도 존칭을 써야 합니까? 그게 정말 건방진 거라면,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건방진 것하고 가주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이진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시온은 손을 잡아끄는 걸 그만두고 이제는 프란의 등을 꾹꾹 찌르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프란이 그런 시온을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할 말 있으면 뒤에서 찌르지 말고 말로 해!" "천한 것이!" 이진느의 목소리가 새되게 높아졌다. 시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따라와라! 내 오늘,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프란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못 갈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동시엔 가주님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잠시 기다려주시죠!" "하!" 이진느가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이것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시종 따위가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녀가 막 프란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치켜 올린 순간이었다. 바람 같이 시온이 일어서더니, 정확히 프란의 앞을 막아섰다. 이진느 아일린은 의도치 않게 자기 아들의 뺨을 치고 말았다. 짝! 날카로운 소리에 프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진느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시온을 보았다. 뺨이 홱 돌아갈 만큼 세게 쳤던 이진느다. 시온의 뺨은 부어 있었다. "어머니." 시온은 웃었다. 이진느가 멈칫했다. "제 얼굴 봐서 참으쇼. 이거, 꽤 아픈데." 이진느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녀는 시온을 노려보았다. 이진느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시온이 한걸음 다가왔다. 곧 그가 어머니의 귀에 대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라고 생각하십쇼. 이번 한 번만." 이진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재미있구나." "난 재미없는뎁쇼?" 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진느는 단정히 옷매무새를 고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프란은 시온의 뒤에 선 채, 입만 벌리고 있을 따름이다. * * * * * * * * * * * * * * * * * * "‥‥‥넌 미친놈이다." 프란이 힘없이 한 말에, 시온은 웃었다. "응, 너도." "난 왜?"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시온이 프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어머니한테 대들었잖아, 앞뒤 안 재고." "나, 난 원래 무대포니까 그렇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이게 웬 궤변인가 싶어 프란은 민망해졌다. 뒤통수를 슬슬 긁는 프란을 보며 시온은 혀를 찼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시온은 말끝에 조그맣게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나, 아무래도 형님한테 밀리고 있는 것 같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프란이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시온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프란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기억 나, 프란? 내가 말했지. 형님은 절대 좋아하지 말라고." 기억난다. 절대 좋아하지 말라고, 그래서 한 대 쥐어박았었다. 프란의 얼굴을 보며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하고 있으면 됐어." 그렇게 말하는 시온의 얼굴은 어딘지 슬퍼 보였다. 프란은 그 표정이 이상하게 안쓰럽다. "야, 느끼 버터답지 않게 왜 그런 얼굴을 하냐?" 프란이 툭툭 치며 물었다. 시온은 애달픈 얼굴로도, 웃어 보인다. "그러게 말이야." * * * * * * * * * * * * * * * * * * 이진느 아일린은 한 팔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역시 수상하다.' 프란을 감싸는 시온의 태도는 분명 동성에게 보일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연인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바로 옆에서 본 프란은 몸의 선이 지나치리만큼 가늘었다. 가슴부근이 납작하긴 했으나 억지로 붕대를 감아 맸다면 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이진느는 입술을 핥앗다. 혹시 정말 여자라면? 이진느는 속으로 웃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 시즈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인데. 하지만 다음 순간 이진느는 고개를 젓는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일단은 잡아가두고 확인해봐야겠군.'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저 시즈 아일린이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같이 그 시종을 달고 다닌다는 것. 그래도 조그마한 빈틈이 없을 리는 없지. 이진느는 슬쩍 미소 지었다. '내 손을 쓸 필요도 없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진느는 출입을 허가했다. 곧 한 명의 남자가 들어온다. 이진느는 들어선 남자를 훑어보았다. 파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이진느는 한순간 피식 헛웃음을 흘린다. "오랜만이로구나. 스물아홉 번째 세라딘, 렌." 렌이라 불린 남자가 담담한 눈으로 이진느를 마주한다. 세라딘의 일원인 그는 이스티네 가문에 한 번 파견된 전적도 있었다. 사키와 더불어 이스티네 가문에 상주하면서, 반란의 자금줄을 대고 인원을 소집하는 등 많은 일을 했던 렌이다. 허나 카세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렌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렇게 공을 들인 카세타의 반란이 실패햇기 때문에? 물론 그런 까닭도 있다. 하지만 렌의 얼굴은 함께 일에 가담햇던 사키등에 비해서도 현저하게 어두웠다. 그리고 이진느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렌이 입술을 뗐다. "이진느님, 세라딘이 충성을 맹세한 상대는 시온 아일린님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저희들을 계속 수족처럼 부리시는 일은‥‥‥." "셀키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그말에 렌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확, 하고 불이 일어난다. 렌은 불타는 그 눈으로 이진느를 노려보았다.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셀키는 저 시즈 아일린의 손에‥‥‥!" 말하다말고 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셀키가 배신자라고 주장하기 위해, 세라딘은 말발굽에 갈가리 찢긴 셀키의 시체를 제대로 매장해주지도 못했다. 사키는 렌에게 셀키의 몸을 한 번 더 찢어 발겨싸고, 죄스러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보고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침묵하기는 했으나 셀키의 그 허무한 죽음에 렌만큼 분노하고 있는 자는 없었다. "역시 너도 그렇게 알고 있군." 렌은 눈살을 찌푸렿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셀키를 죽인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지." 렌은 셀키를 죽인 사람은 시즈 아일린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사실이 그랬다. 하지만 이진느 아일린은 거짓말로 렌을 꾀었다. "아직도 모르고 있었느냐, 렌." 이진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시즈의 시종이 한 짓이야." * * * * * * * * * * * * * * * * * * "표정이 왜 그 모양인가?" 다음날 아침, 반은 볼이 부어 있는 프란을 향해 물었다. "예? 제 표정이 어떤데요?" 반은 답이 없었다. 물어본 내가 죄지, 생각하며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어젯밤엔 제대로 잠도 못 잤다. 내가 미쳤지, 아일린의 두 번째 실력자에게 그렇게 막 대들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 프란이었다. '아악! 이 성질머리 안고치면 진짜 제 명에 못 죽겠다.' 프란이 생각하는 동안, 반이 몸을 일으켰다. "나가자." "어디로요?" 프란이 묻자, 반은 간단히 답했다. "아일린을 돌아본다." "‥‥‥저기요, 가주님." 프란의 부름에 반이 돌아보았다. "설마, 여길 다요?" 반은 대답 없이 걷기 시작했고 프란은 또다시 소리를 지르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미쳐, 저 화상!' * * * * * * * * * * * * * * * * * * "가주님!" "오셨습니까!" 가는 곳마다 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반은 사무적인 태도로 그 모두를 무시하고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집단들 곳곳을 돌아보고, 실무 보고를 받는다. 프란은 지친 채로 계속 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대체 왜 자기가 이런 델 따라다녀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카르멘 가 때와 마찬가지였다. '아아, 기절하겠네.' 프란이 그렇게 속으로만 나불거릴 무렵, 한 남자가 가까이로 다가왔다. 프란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룬이었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룬의 눈은 여신을 숭배하는 신도의 눈처럼 빛나고 있어서, 프란으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윽, 느끼해.' 프란이 몸을 꼬고 있는 동안에도 반은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곧 그가 룬에게 물었다. "충원된 인원이 있다 들었다." "예, 새로 한 명을 뽑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룬이 한 명을 앞으로 내세웠다. 차분한 노란색 머리카락의 남자아이다. 프란과 비슷한 또래인 듯, 외양이 어리다. 프란이 고개를 쭉 빼고 바라보는 동안, 룬은 자랑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는 어립니다만, 실력은 괜찮습니다. 뭐하나, 히스. 인사드리지 않고!" 말끝에 룬은 히스라고 불린 소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히스는 머리가 발끝에 닿도록 크게 허리를 굽혔다. "히스입니다! 아인켈에 들어온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가주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인켈에 들어온 것도 영광이고 만나 뵙게 된 것도 영광이냐? 영광될 것도 많네.' 프란이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동안, 반은 히스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아이다. 몸 전체의 밸런스가 좋고 손이 거친 걸로 봐서 훈련을 제대로 한 것이 틀림없다. 반이 자신의 수하를 눈여겨 보자 룬은 하늘을 날 것같이 기뻤다. "열일곱이지만, 훌륭하게 제 몫을 할 겁니다! 기대해주십시오!" 반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쪽과 한 번 대결해봐라." "네." "‥‥‥엉?" 히스가 아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드는 동안에도, 프란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히스가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에야 '이쪽'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프란이 '엥? 정말 나? 농담아니고 진짜 나?' 라고 생각하며 물러섰을 때, 히스가 정확하게 프란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가르치긴 뭘 가르쳐!' 프란이 속으로 발악하든 말든, 사람들은 흥미롭다는 듯 이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이제 소문은 퍼질 대로 퍼져, 위저드 리그를 제외하고도 레이니아 왕비 초상화 사건이 차차 알려지고 있던 차였다. 거물급 인사들은 그래서 모두 프란을 주목하고 있었다. 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확실히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아인켈에게 이긴다면 함부로 덤비는 녀석은 없겠지.' 반은 프란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얼굴은 어디로 가고 시종은 낯빛이 변해 있다. 저런 얼굴을 자주 봤다. 검을 뽑기 전엔 난처해하다가도, 일단 시작되면 얼굴이 무섭게 굳는다. 다른 건 몰라도 집중력 하나는 높이 살만하다. 그동안 시종도 여러 일을 겪으면서 꽤 성장했을 것이다. 아인켈은 강한 집단이다. 물론 프란이 룬과 검을 섞는다면 금방 나가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새로 충원된 히스 정도라면 이길 가능성이 절반은 된다. 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을 보고 있었다. 히스가 검을 들고 프란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프란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사양하지 말자! 즐거운 일이잖아! 세라딘과 싸워보고 싶었는데 아인켈과 붙다니 이것도 좋지!' 프란은 망설임 없이 점프했다. 히스는 그런 프란의 동작을 잠시 바라보다가, 바람 같은 움직임으로 옆으로 피했다. 프란은 피해내는 히스를 끝까지 검으로 추적했다. 챙! 검이 날카롭게 한 번 부딪쳤다 히스는 힐끔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 맞나?' 생각한 히스가 잔뜩 힘을 줘 프란을 밀어냈다. 프란은 아주 쉽게 밀려났다. 히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허나 프란은 밀려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뒤쪽으로 물러선 것뿐이었다. 히스가 방어를 하기도 전에, 프란은 밀려난 반동 그대로 다시 한 번 공격을 해왔다. 챙! 이번엔 위에서 내려찍듯 공격하며, 프란은 입술 끝을 올리고 있었다. '이 녀석, 제법 하는걸!' 둘의 검이 강렬하게 한 번 부딪쳤다. 룬은 그 모습을 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기껏 히스가 주목받는가 싶어 신이 났는데, 시종 하나 단박에 꺾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났던 것이다. '저 시종이 어떤 시종인데! 존경하는 가주님 앞에서 내 머리를 문짝으로 들이받는 녀석이란 말이다, 히스! 본때를 보여줘!' 룬은 히스를 향해 벼락같이 소리쳤다. "히스! 아인켈씩이나 돼서 시종한테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히스가 깨갱, 하고 어깨를 움츠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결연한 의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며 프란은 흘끔 반을 보았다. 그리고 프란은, 반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져 잇는 것을 목격했다. '으, 으음. 절대 지면 안 되겠군.' 프란의 몸에서도 더 강렬한 투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챙! 챙! 챙! 히스는 프란이 비록 팔심은 없지만, 스피드와 유연성을 이용해 파워를 보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의 약점을 훌륭하게 커버할 만큼 프란의 검은 훌륭한 것이었다. 둘은 거의 틈 없이 몸을 붙인 채 몇 차레 공격을 주고 받았다. 히스의 검은 깔끔해서, 프란은 평소 즐겨하듯이 몸 전체의 순발력을 이용한 검을 쓰거나 팔, 다리를 동원한 육탄전을 시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검투는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검이 맞부딪치는 그 순간은 전율이 일어날 만큼 강렬하게, 두사람은 검을 섞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순간, 프란의 눈이 번쩍했다. '그렇지!' 프란이 갑자기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히스는 무슨 속셈인가 싶어 재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프란은 히스가 가까이 올 때까지 자세를 낮춘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왜 방어하지 않는 거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히스는 길게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히스의 시야에서 프란이 사라졌다. 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밑을 봐, 밑을!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검투에 방해가 될까봐 차마 말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른다. 히스가 코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프란은 놀라운 스피드로 몸을 낮추고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또 다른 검을 꺼내들었다. 검투 중 발도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프란의 발도는 빨랐다. 반조차도 일순간 괜찮다고 느꼇을 정도였으니. 프란이 뽑아낸 것은 일전에 반이 주었던 그 단검이었다. 허리를 완전히 굽힌 채, 프란은 몸 전체로 회전했다. 히스가 당황해서 프란의 어깨 쪽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때 프란은 히스의 뒤편으로 다시 한 번 몸 전체를 숙이며 단검을 휘둘렀다. 샥! 프란의 검은 히스의 허벅지 부근을 가볍게 스쳤다. 공격을 성공 시킨 프란은 곧장 일어섰다. "히스!" 룬은 분노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히스는 놀란 얼굴로 자기의 허벅지를 보고 있었다.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크지 않은 상처였다 "아프냐? 살살 벤다고 벴는데." 프란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물었다. 히스는 그 말에서 프란이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 그리고 마음만 먹었다면 한동안은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낼 수도 있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말해주지 않아도 당하는 그 순간 히스는 깨닫고 있었다. "그만해라." 반의 말에, 히스가 입술을 꾹 깨물며 프란을 노려보았다. 검투 시간이 길어 프란은 꽤 지쳐 있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두 자루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히스는 검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사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외치지는 않았다. 주의력이 깊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반은 룬을 향해 말했다. "더 훈련시켜라." "흐흑! 부끄럽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워 죽을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룬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히스를 돌아보았다. 히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주 애를 잡아라, 잡아.' 프란은 그 모습에서, 오늘 히스라는 소년이 심하게 혼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긴 자신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반이 횅하니 몸을 돌렸다.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프란이 그런 반의 뒤를 줄레줄레 따른다. '아야.' 그러다 몇 걸음 움직인 프란은 옆구리 쪽을 감싸며 속으로 신음했다. 사실, 공격을 성공시키기 직전 히스가 휘두른 검에 옆구리 부분이 스쳤었다. 얕은 상처였지만 그래도 검상은 검상. 프란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앞서 가던 반이 툭 하니 한마디 던졌다. "꽤 늘었더군." '응, 나도 꽤 늘었다고.' 속으로 연신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프란을 향해 뜻밖의 말이 날아든 것은 그 순간이다. "‥‥‥잘했다." 어라? 어라? 어라? 프란은 믿을 수가 없어서 걸음마저 멈췄다. '대마왕이 이상해! 뭘 잘못 먹었나봐!' 하고 절규하는 프란을 내버려둔 채로 반이 계속해서 앞서나간다. '잘했다'는 한마디가 뭐 그렇게 대단하기에 그 난리냐고 누군가가 물어온다면, 프란은 스산하게 웃으며 그자의 배를 한 대 때려줄 용의가 있었다. 저런 말을 대마왕의 입에서 듣다니, 이건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참 만에 당혹을 수습한 프란은 어린애같이 구김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옆구리의 통증조차 완전히 잊은 채 프란이 반의 옆으로 두두두 달려간다. "헤헤헤! 진짜요? 진짜요?" "‥‥‥시끄럽군." 이런 부분은 정말 대마왕답지만, 프란은 가슴이 찡하다. 그럴 만했다. 그건 프란이 반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들어본 칭찬이었다. * * * * * * * * * * * * * * * * * * 프란은 흥겹게 콧노래를 불렀다. 웬일인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엔 위저드 리그의 마법사들이 벌 떼같이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란은 경쾌한 걸음으로 반의 방에 들어섰다. "비켈린과 회의가 있다." "예." 프란은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때면 '또 따라가야 하겠지! 귀찮아 죽겠네!' 라고 생각했을 텐데, 오늘만은 그렇지가 않다. 어제 칭찬 때문이다. 심지어 프란은 대마왕이 정말 그런 말을 한 게 맞나, 내가 헛것을 들은건 아닌가, 싶어 밤잠까지 설쳤던 터다. 어찌 됐든 오늘도 어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웃고 있는 프란을 향해, 반이 뜻밖의 말을 했다. "넌 오늘 쉬어라." "‥‥‥엉?" 프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럴수가! 쉬라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프란이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입을 쩍 벌리는 동안, 반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비켈린의 일에는 외부 인사를 데려갈 수 없다. 너도 예외는 아니지." 뭐야? 그런거구나. 생각하면서도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정말 쉬어도 돼요?" 반은 말없이 루니아 블레이드를 챙겨들었다. 침묵은 긍정. 프란은 가볍게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 * * * * * * * * * * * * * * * * * 반은 비켈린의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걷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케인이 건물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반이 홀로 온 것을 안 케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프란은 왜 안 데리고 오셨습니까?" 반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마디 했을 뿐이다. "시끄럽다." 하루쯤은. 반은 고개를 들었다. 어제 조금 다쳤으니, 하루 휴식을 주는 것뿐이다. 이때는 반도 프란도 몰랐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만약 알았다면, 반은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프란을 끌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프란을 두고 온 반은 그날 하루, 케인을 비롯한 비켈린들과 함께 밀린 업무를 검토했을 뿐이다 제4장) 폭로 날씨가 유독 좋았다. 반의 시종이 된 후 최초의 휴일을 맞았으니 날씨가 흐렸다 할지라도 맑아 보였을 것이다. 프란은 하늘을 보며 만세삼창까지 했다. 남들 같으면 모처럼의 휴일을 맞이해 헬리언 지방을 돌아보며 쇼핑이라도 하겠지만, 프란은 그럴 돈도 없었고 돈이 있다 한들 그럴 마음도 없었다. 대신 프란은 신이 나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자, 검수련!" 달리 프란 프리텐이 아닌 것이다. 프란은 건물을 벗어나 곧장 뛰었다. 물론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넓은 이 저택의 수련장을 찾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정원 어딘가에 들어가서 검을 휘두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프란은, 으슥한 곳을 찾고 있었다. 오늘은 반의 시중을 안 들어도 되고 시온 아일린도 안보이니만큼 그야말로 맘 놓고 수련할 수 있는 날이 아닌가. 적당한 장소를 찾아낸 프란은 실버 블레이드로 무형의 상대를 공격했다. '난 강해졌다! 이젠 아무한테도 안져. 안 진다. 절대!'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프란은 달떠 있었다. "저기, 프란 프리텐 씨?" 그때, 조그만 목소리가 비죽이 말을 걸어왔다. 땀을 닦으며 프란이 돌아본다. 말을 건 것은 흰색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으아악! 싫어! 또 위저드 리그냐! 나도 검 연습 좀 해보자!' 프란이 막 도망가려는 찰나, 남자는 헐레벌떡 프란의 손을 붙잡았다. 프란은 깜짝 놀라 그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자 남자가 당황한 듯 로브를 뒤로 젖했다. 곧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삼십대 초반일까. 회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다. "이 손 안 치우면 벤다!" 이젠 하도 당해 지긋지긋하기까지 하다. 프란이 소리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는데, 남자가 급히 말했다. "저, 저는 위저드 리그 소속 카리스입니다. 자, 자켄린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프란은 그 소리에 도망가려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섰다. "뭐? 그 할아버지가 왜?" 자켄린이 들었다면 '내가 왜 할아버지야!'하고 펄펄 뛰었을 말을 하며 프란이 인상을 그었다. 그러자 카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물을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호출에 응하면 앞으론 위저들 리그 소속 마법사들이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전하라 하시더군요." 그 말에 프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냥 이상한 할아범인 줄 알았지만 그래도 좋은 면이 있었잖아!' 위저드 리그가 하도 귀찮게 굴어서 차라리 누가 대표로 자기를 호출하는 편이 속 편하겠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던 프란이다. 프란은 자켄린이 부르는 것이 싫기는 커녕 고맙기까지 했다. 겉보기엔 이상한 할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자켄린은 시온의 스승인데다가 선혈의 마법사로 이름난 대마도사가 아닌가. '때마침 대마왕도 없는데 잘 됐네.' 프란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카리스는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는 왠지 어두침침한 길만 골라서 걷고 있었는데, 프란은 '마법사들은 원래 음침한 놈들이니까' 하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잠시뒤, 둘은 3층짜리 석조 건물에 들어서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프란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 자켄린이 있는거야?" "예." 아일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건물이 무수히 많아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지 못하는 프란이다. 안내자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그래도 건물 안이 어두침침한 게 어쩐지 오싹한 느낌이다. 건물 1층은 전체가 넓은 홀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거나 3층으로 올라가야 방이 있나 보군, 하고 생각하며 프란은 고개를 든다. 카리스는 등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프란은 잠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혹시 또 레이니아 그림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말하라고 하는 건 아닐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쾅!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갑자기 뒤편에서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프란은 바람인가, 하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 프란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파란 머리칼에 푸른 눈을 한 청년이었다. 생전 처음보는 얼굴임에 분명한데, 프란은 이상하게 그 얼굴이 낯익었다. "어이, 저 사람은 뭐야?" 낯이 익은걸 보니 저자도 위저드 리그 소속인가, 생각하며 프란은 카리스를 돌아보았다. 카리스에게 설명을 요구할 참이었던 프란은, 그러나 돌아서기 무섭게 날아오는 빛 때문에 서둘러 몸을 숙여야 했다. "파이어 애로우!" "헉!" 카리스는 로브를 젖힌 채 프란을 향해 거침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공격 범위가 크지 않은 마법이었지만 위협이 되기엔 충분했다. 영문을 모르면서도 프란은 일단 실버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그러다 한 순간, 프란은 오싹한 느낌에 몸을 뒤틀었다. 만약 순간적이 느낌을 믿고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가슴 부분이 베었을 것이다. 몸을 30도 쯤 뒤로 튼 프란은 자신을 향해 검을 뻗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며 훌쩍 뒤로 물러섰다. 청발 청안의 남자, 렌이다. "이게 뭐지? 자켄린은 어디 있는 거냐!" 프란은 그렇게 외치면서도 뭔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켄린의 이름을 대고 나를 속이 건가? 하지만 어째서? 생각할 틈도 없이, 렌의 검이 날아들었다.프란은 정신없이 그 검을 피했다. "왜들 이러는 거야? 그림 얻은 경로 얘기해주면 될 거 아냐!"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완전히 헛짚은 프란을 향해 렌의 검이 다시 한 번 날카롭게 다가왔다. 프란은 렌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냈다. "앗!" 차가가각 렌이 힘으로 밀어붙였기에, 프란은 뒤로 죽 밀려나야 했다. 그러면서 프란은, 지금 자신을 상대하고 있는 남자가 낯익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검을 쓰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꼭 한 번, 만난 적 이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의 검을 다루는 기술이 낯익다. 허나 프란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렌이 프란의 가슴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프란은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오른쪽 옷깃이 길게 베어나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순간, 프란의 오른팔 윗부분에 감추어져 있던 작은 문신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어린 시절 새겼던 상처 같은 반달 문신. "이익!" 프란은 렌의 뒤편에 가서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검을 꺼내들었다. 왼손으로 검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한 번쯤 틈을 노리는 데는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란은 렌의 뒷목을 노렸다. 그러나 렌은 프란의 검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쳐내고, 왼팔로 프란의 배를 가격했다. "큭!" 프란은 렌 족으로 재빨리 다가가며 간격을 좁혔다. 뒤편에 마법사, 카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검사와 마법사가 함께 공격할 경우 이기려면 간격을 최대한 좁히며 싸우는 수밖에 없다. 한데 엉겨 싸우면 마법사는 마법이 빗나가 동료에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워 감히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프란은 자기도 모르게 카르멘 가의 검을, 정확히 말하자면 반의 검을 흉내 냈다. 찌를 듯 달려들었다가 단박에 스피드를 올려 접근하며, 베기를 시도한 것이다. 페이크가 제대로 먹혀, 여유있게 검을 막으려던 렌이 한순간 뒤로 물러선다. '됐다!' 속으로 환호하며 프란이 렌의 가슴을 베려는 순간, 렌은 차분하게 몸을 숙여 프란의 검을 피하고는 그대로 한 바퀴 굴렀다. "제기랄!" 프란은 등을 바닥에 대고 있는 렌을 찌르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 때, 프란의 뒤에 서 있던 카리스가 마법을 시전했다. 한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누워 있는 상태, 게다가 간격도 제법 멀다. 프란이 깨닫지 못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위저들 리그 소속 6서클 마법사 카리스는 지체 없이 주문을 외웠다. "슬립!" 보통의 사람들은 잠이 들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소비한다. 허나 프란 프리텐은 베개에 머리를 대는 그 순간에 잠에 빠지는 특수체질이었다. 반이 '시도 때도 없이 조는군' 이라고 말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프란에게도, 이렇게 빨리 졸음이 밀려드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온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하고, 억지로 눈을 감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졸면 안 돼!'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슬립 주문은 결국 프란의 눈을 감기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프란이 잠들기 무섭게 2층에서 발걸음소리가 났다. 카리스와 렌은 동시에 시선을 올렸다. 내려오고 있는 것은 정초원 책임자이자 아일린의 제 2계승자인 이진느 아일린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위층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진느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 사이, 렌은 땀을 닦으며 검을 수거했다. "네가 질까봐 걱정이 되더군." 이진느가 입을 열었다. 감정에 상처를 낼 법한 말이었으나, 렌은 화를 내는 대신 선선히 인정했다. "실제로 카리스가 아니었다면 졌을 겁니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이진느가 미소 짓는다. "너는 검술로 세라딘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 프란에게 슬립 마법을 썼던 카리스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프란의 등을 보며 연신 웃고 있었다. 카리스는 마법 서클을 높이는 것보다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세상에 있는 비밀을 파헤치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이 사내가 가진 유일한 즐거움이다. 사실 카리스는 독단적으로 일을 벌일 만큼 간 큰 남자는 되지 못했다. 굳이 이진느에게 찾아와 유네아가 어떻고 얘기했던 것도 이진느의 보호막 아래 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어제, 이진느가 프란을 여기로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네가 원하는대로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이진느는 프라느이 몸을 돌려 눕혔다. 프란은 색색 깊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카리스는 이진느를 향해 물었다. "일단 먼저 확인해 봐도 좋겠습니까?" 이진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프란의 윗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마침내 프란의 웃옷을 다 벗겨낸 카리스는 낮게 탄식했다. 남자라면 판판한 가슴이 있어야 할 자리는 꼼꼼히 묶은 붕대가 대신하고 있었다. "아!" 카리스는 환희에 찬 눈으로 그 붕대마저 풀었다. 곧, 몇 달 간이나 붕대에 꽁꽁 압박되어 있던 프란의 가슴이 세 사람의 눈앞에 드러났다. 카리스는 땀에 젖은 채 소리를 질렀다. "보십시오, 이진느님! 여자입니다!" 이진느는 그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혹시, 혹시 하고 의심하고 있긴 했으나 정말일 줄이야. "......시온 그놈." 이진느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카리스는 신이 난 듯 계속해서 프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막 프란의 팔을 들어 보인 때였다. 이진느는 렌을 향해 모조으이 사인을 보냈다., "제 예감이 맞지 않았습니가? 저, 정말로 유네아 일지도 모릅니다. 레이니아 왕비와 똑같이 생긴 것부터가 심상치......" 콰직! 잔뜩 들떠 있던 카리스는 어떤 대비도 하지 못했다.6서클의 마법사이면서도, 단 한번의 주문 시전도 해보지 못한 채 카리스의 목이 떨어진다. 단칼에 카리스의 목을 벤 렌은 그의 몸을 발로 밀어냈다.이진느가 웃는다.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렌은 잠든 프란을 품 안에 안고는 그렇게 말했다. 이진느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봐라, 렌." 돌로 지어진 이 3층 건물은 원래 정초원에 딸린 작은 창고다. 허나 이 창고에 지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진느는 1층 구석에서 거대한 박스를 가지고 죽은 카리스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 시체가 되어버린 카리스의 몸뚱어리를 그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하! 진짜 여자였단 말이지.' 여기에 프란이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제 자신과 렌, 둘밖에 없다. 혹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 카리스를 의심할 것이다. 허나 카리스는 지금 시체가 되어 있다. 렌이 발설하기 전엔 여기에 프란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진느 아일린은 렌이 내려간 지하 계단 쪽에 시선을 주었다. 자신을 모욕한 거만으로도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아들이 저녀석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더더욱 죽여야 한다. 이진느는 옷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날 밤, 반은 하녀를 시켜 프란을 불러오라 전했다. 비켈린와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날은 꽤 어두워진 뒤였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녀는 몸을 떨며 보고했다. 어딜 간 건가. 잠시 생각하다 라고, 반은 결론을 내린다. 시종녀석이라면 지금쯤 검 연습을 하고 있을것이다. 어제 아인켈의 히스와 겨루었던 만큼, 더 타올라서 강해지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론지은 반은 하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허나 다음날에도 시종은 나타나지 않았다. 위저드 리그의 움직임이 잠잠한 것으로 미루어 그 일에 연루된 것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이 녀석이 뭘하느라고! 업무를 보다 말고 반은 바깥으로 나섰다. 프란의 방에 가는 것이다. 반은 프란의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시종은 거기에 없었다. 웬일인지 시종대신 시온이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 "형님? 웬일이시우?" 놀란 것은 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약간 당혹이 묻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허나 그건 오히려 반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시온의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프란 어디 갔습니까?어젯밤 내도록 기다렸는데 안 옵디다. 형님이 또 어디 보낸 거요?" 그 말에 반의 입매가 굳어졌다. 어젯밤 내도록 기다렸다니? 어젯 밤에, 시종은 방에 없었다. 그래도 잠은 여기서 잤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기다렸나." "응? 자정부터였나?......어라?형님이랑 있었던 거 아니우?" 시온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반은 대답 없이 시온이 앉아 있는 침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휴일이라는 것을 줬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 어젯밤 내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반은 지체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 반의 등을 보며, 시온이 소리친다. "형님? 형님!" 반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단 그는 케인을 불러 어제 프란이 무얼 했는지를 알아보도록 지시했다.비록 아일린 가가 넓다고는 하나 프란의 행동반경에는 한계가 있다. 프란이 어딘가로 이동했다면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라도 있을 것이다. '어딜 간 거지.' 이스티네 저택 때와는 달리, 반은 프란이 도망을 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세타 왕국에서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키네세스의 말도 거절했던 녀석이다. 틈을 노려 도망갈 녀석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저택 정문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보고가 날아들기 전에도, 반은 프란이 여기서 나갔을 리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따면 분명 내게 보고했을 것이다. 그 정도 생각은 있는 놈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반의 미간이 좁혀진다. 지금으로선 가장 의심이 되는 것은 위저들 리그였다. 레이니아 왕비 건으로 들뜰 대로 들뜬 그 미친 마법사 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게다가 상대는 한낱 시종에 불과하니, 눈에 띄는 즉시 납치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반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케인이 들어왔다. "가주님, 프란을 아인켈 건물 앞쪽 정원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흰 로브를 입은 남자를 따라갔다고....." 반의 미간이 좁혀졌다. "흰 로브? 위저드 리그인가?" "확언할 순 없지만, 일단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반은 얼굴을 굳혔다. 그의 시종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스승님!" 큰 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온 시온 때문에, 자켄린은 버럭 고함을 질러야만 했다. "시끄럽다, 연구 중이었다!" 마법 연구란 언제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므로, 이렇게 말했을때 보통은 고개를 숙인다. 같은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양심에 털이난 인간이 아닌 이상은 그 정도 에티켓은 지킨다. 자기가 당해보면 그게 얼마나 열받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허나 시온에겐 그런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킬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위저드 리그에서 손썼습니까?" 그 말에 자켄린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네놈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냐? 연구 중이라니까!" "프란이 없어졌어요!" 자켄린의 말을 모조리 무시하고 비명 지르듯 내지른 시온의 말에, 자켄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묻잖습니까! 위저드 리그입니까? 비켈린이나 아인켈은 아닙니다. 원로원은 이런 일에 손대지 않아요. 위저드 리그냐고요!" "우리는 아냐." "스승님! 진지하게 답해주세요!......위저드 리그는 아닙니까?" 시온이 무너질 듯 둠는다. 그는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보통 때는 반이 데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찾으러 갈 수라도 있었지만, 지금 프란은 말 그대로 실종 상태였다. 시온의 당혹한 얼굴을 본 자켄린은 불쑥 입을 열었다. "언제 없어졌냐?" "네?" "언제 없어졌냐고." "아무래도 사흘 전인 것 같습니다." 자켄린은 근엄한 얼굴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딱 사흘 전부터 얼굴이 안 보이는 녀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마법사라는 녀석들은 연구에 한 번 미치면 며칠씩 짱 박혀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프란이 없어졌던 바로 그 사흘전부터 안 보이던 사람이 그 금발 꼬맹이에게 유독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로는 설명할 수 없다. "혹시 그 녀석이......." 자켄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짚이는게 있는 겁니까?" 시온이 소리쳤을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시온과 자켄린이 놀라 돌아본다. "형님!" 들어선 것은 케인과 반이었다. 자켄린은 차분한 얼굴로 둘을 맞아들였다. 어떠한 떨림도 없는 그의 녹색 눈이 반을 똑바로 마주한다. "가주, 무슨 일이십니까?" 대답한 것은 반이 아니라 케인이었다. "사흘 전 가주님의 시종이 없어졌습니다. 그날 그 시종은 한 남자를 따라갔다고 하는데, 흰 로브를 둘러쓰고 있어 저는 마법사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카리스를 의심하긴 매한가지인 자켄린이었지만, 확신할 순 없는 문제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자기 집단 사람을 최대한 감싸야 한다. 자켄린은 짐짓 시치미를 뗏다. "흰 로브를 둘러쓴다고 다 마법산가, 뭐." 그 말에 반의 미간이 좁혀졌다. 케인은 자켄린을 향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얼굴을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목격자? 뭐라고 했습니까?" 흥분한 것은 시온이었다. 시온은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케인을 노려보았다. 반은 그런 시온의 눈길을 무시한 채, 자켄린을 향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스 루틴.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라고 했다." 이진느는 체스 판을 앞에 두고 있었다. 흰색과 흑색의 말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상대는 없었다. 두 가지 색깔의 체스 말을 번갈아가며 움직이고 있던 이진느가 흰색 비숍을 들고 말한다. "체크." 흑색 왕은 도망칠 방법이 없다. 곧 흰색 로크가 흑색 왕을 덮친다. "......위저드 리그가 뒤집어 쓰겠군."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시온 녀석이 유별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 금발 꼬마를 잡았다. 하지만 이 한 건의 값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컸다. 시종 하나 없어진 일 가지고 시즈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것은 뜻밖이었다. 여태까지도 이진느는 시즈의 시종 몇몇을 매수하려고 애썼고, 통하지 않으면 죽이기도 했다. 시즈는 그 때마다 별다른 반응이 없이 곧장 다른 시종을 맞아들이곤 했다. 이번에 그녀가 일을 다소 복잡하게 계획했던 것은 반 때문이 아니라 시온 때문이다. 시온의 반응이 심상찮았던 만큼, 자신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단단히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허나, 그녀의 예상은 반쯤 맞고 반쯤 빚나갔다. 아들놈이 흥분해 있는 것도 모자라, 저 냉철하기 짝이 없는 시즈까지 그 시조으이 행방을 찾아 나선 것이다. 만일 평소대로 정초원을 시켜 그 시종을 잡아 들였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진느는 쓰러진 흑색 왕을 내동댕이 치며 웃었다. "그물은 더 남아 있다, 시즈. ......어디 한 번 허우적거려 보시지!"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둡다. 그래서 프란이 주변을 살펴보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슬립 마법에서 약간 덜 깬 채, 프란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눈이 한 쌍의 청색눈동자와 마주쳤다. 싸늘하고 차가운 눈. 그 눈을 보자마자, 프란은 한순간 멍하게 중얼거렸다. "야, 너 말이야." "렌이다." 렌은 짤막하게 답했다. 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심없는 투로 말했다. "익숙하다 했더니, 셀키라는 녀석이랑 닮았어." 렌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 동생이니까." "그래, 당신의..... 뭐?" 프란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녀석의 형이라고?' 비켈린과 세라딘, 아인켈 전체를 통틀어 형제가 같은 집단에 들어온 경우는 현재 단 한 케이스뿐이다. 그것이 바로 렌과 셀키였다. 나이는 렌이 많았지만 먼저 세라딘에 들어온 것은 셀키 쪽이었다.검술 능력이 출중했던 셀키가 레이의 눈에 먼저 들었던 것이다. 렌은 한참 뒤에야 세라딘에 합류했다. 검술 실력이 다른 세라딘에 비해 뒤처지는 편이긴 했으나, 그에게는 독특한 특기가 있었고 그 특기가 다른 세라딘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렌은 말 없이 프란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한순간 프란이 몸을 떨었다. "진짜 악취미다, 너." 프란은 씩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붕대가......없어.' 웃옷 단추가 모두 열려진 상태라, 고개만 숙여도 자신의 가슴이 바로 보였다. 문제는 언제나 꽁꽁 싸매고 있던 이 가슴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라는 것. 처음 비켈린은 만났을 때,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평생 동안 남자로 사는 것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다. 언제나 주의해왔다.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이스티네 저택에 붙잡혔을 때라든가, 반이 옷을 벗어보라고 했을 때라든가, 기절했을 때라든가..... 남장 사실이 밝혀질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위기는 그녀의 등 뒤로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게, 카르멘 가에는 끝내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아일린에 온 지 단 며칠 만에 이렇게 쉽게 들키다니. 그것도 포박당한 채로! 프란의 손은 만세 하듯 위로 치켜 올려져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쇠 때문에 손목이 쓰라리다. 프란은 그러나 이를 악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그녀로서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혹시나 대마왕이 알게 되었나, 하는것. 걱정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으면서도 프란은 애써 냉정해지려 했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프란 프리텐! 여태까지 수없이 위기를 넘겨왔잖아! 고개를 들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상대의 눈을 봐! 당당해져!' 프란은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여자 가슴 감상하려면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보지? 보다시피, 나 좀 빈약하거든. 애인 없어?" 렌은 대답 없이 프란을 보았다. 이스티네 가에서 프란을 감시한 것은 렌이 아니었지만, 사키를 통해 프란의 이야기를 들었던 그다. 렌으로서도 프란이 남장한 여자라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좀 심하지 않냐? 마법사랑 검사가 편먹고 2대 1로 덤비는건 형평성에 어긋나잖아." 프란은 여전히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아니, 여유를 부리는 척하는 것이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장한 것이 밝혀졌든 이상한 곳에 감금당했든 그 둘 중 하나만 해당해도 끔직한 데 지금 그녀는 그 둘 모두를 한꺼번에 당하고 있지 않은가. "나 이런 거 지긋지긋해. 예전에도 미친 레이니아 마니아한테 납치당했었거든. 완전 변태였어. 네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않냐?" 억지로 미소 짓고 있던 프란은, 한 순간 렌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프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 진다. 렌은 채찍을 들고 있었다. 동물들을 다룰때나 쓰는 가죽 채찍. 렌은 무감정한 얼굴로 바닥 쪽을 향해 채찍을 한 번 휘둘렀다. 좍! 프란의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채찍에 맞아본 적이 있다. 어린시절, 로이네트에서의 일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훔쳤던 빵이 문제였다. 붙들렸을 때,빵집 주인은 그 어린 소녀를 채찍으로 일곱 대나 때렸다.어린 살결을 파고들던 그 채찍은 너무나 아파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릴 수가 없었다. 일어 났을 때는 등의 살이 터져 있었다.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고열에 시달렸다. 그녀와 어울리곤 하던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제기랄! 날 어쩔 셈이지?" 렌은 담담히 대답했다. "네 몸을 찢어 셀키의 혼령을 위로하겠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셀키의 혼령을 위로? 대체 무슨 말이야?' 프란은 자신의 의문을 솔직하게 표출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촤악! 그때, 처음으로 채찍이 날아들었다. 아무리 강철같은 심장을 가졌다 해도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앞에서 약해진다.프란은 공포감에 얼어붙었다. 채찍은 그녀의 옆구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엄청난 통증이 엄습했다. 프란이 눈을 부릅뜨는 사이, 렌의 채찍이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이른 새벽, 렌은 이진느 아일리느이 방에 들렀다. 이진느는 웃는 낯으로 렌을 맞이했다. "경과는 어떻지? 고문 기술자 렌." 셀키와 렌의 아버지는 고문 기술관이었다. 그러나 기술을 물려받은 것은 렌 한 사람 뿐이다. 어릴 때부터 다혈질에 한 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던 셀키가 고물기술이라면 치를 떨었기 때문이다. 세라딘은 렌을 받아들인 선택에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렌이 고문한 사람치고 세라딘이 원하는 자백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렌이라는 사내는 살아 있는 자의 몸을 칼로 썰면서 자백을 요구할 만큼 독한 남자였다,. "손톱을 하나 뽑았습니다." 렌은 덤덤하게 답했다. 소름이 화 끼칠 답변이다. 그러나 이진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렌,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이진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시즈가 계속 그 녀석을 찾고 있어. 벌써 5일째인데도." "시즈 아일린답지 않군요." 렌은 느낀 그대로 말했다. 이진느는 그런 렌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렌. 네 동생의 원수를 갚으면서 시즈 아일린에게도 타격을 줄 계획이 생각났다." 렌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그 녀석에게 자백을 받아. '시즈 아일린의 암살자로 숨어들었다'는 자백을." "그렇게 해서 얻는게 뭡니까?" "모르겠나, 렌?" 이진느는 입술 끝을 들어올렸다. "시즈는 그 시종을 맘에 들어 하고 있어. 그가 아일린 가의 가주가 된 후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있었나? 없어!...... 카르멘 가의 실버 블레이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 그 시종은 그것도 들고 있었다. 시즈가 저 녀석에게 조금쯤 마음을 준 건 분명해. 이건 정말 의외의 수확이다. 믿었던 존재가 배신으로 돌아서면, 저 시즈라 해도 타격을 받겠지. 내 생각에, 그 녀석이 여자라는 건 시즈도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 이진느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시종 녀석이 남장을 하고 정체를 숨겼던 만큼, 일은 더 쉽지." 렌은 이진느를 바라본다. 일을 꾸밀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살 길을 만들어놓는 여자, 아니 자신이 궁지에 빠질만한 음모는 아예 꾸미지도 않는 여자.렌은 이진느의 치밀함에 잠시 치를 떨었다.만약 시온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진느를 마음껏 경멸했을 것이다. 한참 만에, 렌은 마음속으로 경멸을 내리누르며 말을 뱉었다. "그리고서......'내가 시즈 아일린의 암살자를 잡았다' 고 말씀하실작정입니까?" 이진느는 부정하지 않고 렌을 보았다. "불만인가, 렌?" 렌은 고개를 저었다. "자백, 노력해보겠습니다." 이진느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방문을 나서기 전, 렌은 이진느가 생각도 못했던 말을 던졌다. ".....그 녀석이 정말, 셀키를 죽였습니까?" 이진느는 당황했지만 그 기색은 얼굴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표정관리가 철저한 그녀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은 채 냉철한 얼굴로 답했다. "흥, 자기 입으로 죽였다 말할 리가 있느냐." 렌은 침묵했다. 채찍으로 수백 대는 때렸고, 물도 몇 바가지는 끼얹었다. 그러나 프란은 '내가 셀키를 죽였다고? 절대 아니야!'라고 말했을 뿐이다. 고문 앞에서 그렇게까지 사실을 숨길 수가 있을까? '만약 그 녀석이 진짜 거짓말쟁이라면, 거짓 자백을 시키는 건 힘들지 모르겠군.' 렌은 몸을 돌려 다시 프란이 있는 창고로 향했다. "아파 죽겠네." 프란은 80시간 동안이나 수갑에 매달려 서 있어야 했다. 피곤했지만 제대로 잘 수조차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대마왕 곁에 있으면서 그의 '똑바로 서!' 공격에 익숙해졌던 프란이었지만 이렇게 장시간 서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서 있을 기운도 없다. 자시느이 의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갑이 그녀를 '세워놓고'있는 것이다. '넌 양반이었구나, 대마왕. 저 렌이라는 놈은 진짜 지독해.' 프란은 침을 삼킨다. 하도 고함을 질러 침을 삼키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렌이 하는 양을 보니 아직 대마왕은 모르는 모양이다.그렇다면 희망은 있다. 프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다 터져 있어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옷 역시 엉망진창으로 찢어져 실상 반쯤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채찍 앞에서, 옷만 성할 리 있겠는가. 몸은 많이 아팠지만 프란은 아직도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다.한 번 검을 섞어봐서 안다. 렌은 자기보다 약하다. 몸이 이 지경이긴해도 기회만 온다면 달아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프란은 가만히 눈동자를 빛냈다. 렌은 어제부터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렌도 사람이니만큼 잠은 자야 할 것이다. 24시간 프란 옆에 붙어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끄응.' 프란은 렌이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 동안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다 굴렸다.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여기에서 실패하면,정말로 죽을 것이다. 더 고문을 당하면 기회가 다시 온다 해도 붙잡을 수 없다. 프란은 기회를 대비해 수갑에 팔이 묶인 채로도 애써 스트레칭을 했다. 다리를 속박한 족쇄가 덜그럭거리며 그녀의 움직임을 대변한다. '아파!' 팔에 힘을 준 채 무릎을 굽혀보려고 하자 그야말로 기절할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프란은 그러나 계속해서 다리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몸을 풀고 있었을까.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프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얌전해졌다. 렌은 이상한 기구를 손에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보나마나 고문 도구 겠지. 여태까지의 고문만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데 저 알 수 없는 기구까지 동원해서 고문당한다면 더 이상은 살 길이 없을지도 몰랐다.그렇게 생각한 프란은 더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프란은 입을 열었다. "이봐, 렌. 당신, 그 셀키의 형이라고 했지?" 렌의 눈이 출렁인다. 프란은 그런 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냉정하게 남의 살을 잡아 찢는 통에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렌의 동요를 눈치 챈 프란이 씩 웃는다. 확률은 반반. 도발에 실패하면 남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만히 있다가 죽음을 당할 바에야 찍소리라도 내고 죽어야 할 것 아닌가. 프란은 배를 내밀었다. 옷이 다찢어지고 온몸에 가득한 상처가 남은 채라 그 모양새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 상태로, 프란이 말했다. "고문 받는 것도 지겨워. 슬슬 바른대로 말하지. 맞아! 내가 셀키를 죽였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렌은 여태까지 프란을 향해 계속해서 '네가 셀키를 죽였지?'라고 물었다.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해왔다. 하지만 렌을 건드릴 방법은 이것뿐이다. 렌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있던 프란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 녀석 , 약했다고." 찰싹! 채찍이 그녀의 뺨에 정확하게 꽂혔따. 렌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프란에게 다가왓다. 옆으로 홱 꺽였던 프란의 금색 머리카락이 천천히 앞쪽으로 돌아온다. "......렌, 너란 놈은 정말 웃기는 자식이야. 네 동생을 죽인 나를, 너는 가둬놓고 때리면서 원수 운운하고 있잖아. 달릴 건 제대로 달렸냐? 혈육의 원수는 그렇게 갚아지는 게 아니지." 이게 드디어는 미친 건가, 싶어 렌이 프란을 노려본다. 그런 렌을 향해 프란이 직격탄을 날렸다. "약해빠진 동생 놈에다 남의 뒤에 빌붙어 원수 운운하는 형! 웃기고 앉았네." "무슨 수작이냐!"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는 렌을 향해, 프란이 고개를 갸웃한다. "별로. 그래도 동생이 형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이번에도 약발이 먹혔다. 렌의 눈썹이 꿈틀한 것이다. 프란은 쉬지 않고 말했다. "셀키는 적어도 2대 1로 싸운다거나 하진 않았거든. 동생보다 못한 형이군." 렌은 프란을 베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도발일 뿐이다. 이건 도발일 뿐이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렌의 얼굴을 마주하며 프란은 발을 약간 움직여 보였다. "일대일로 한 번 붙어보지 않을래? 어차피 난 이런 꼴이니 네가 이길 가능성이 '눈곱만큼은' 있을지도 몰라.아, 겁나는 거야? 그래, 겁나겠지. 너보다 센 동생이 나한테 형편없이 당했으니까 겁날수밖에.겁나서 내 몸을 묶어놓지 않고는 가까이 올 수도 없는 거겠지. 와, 정말 대단한 남자네!" "닥쳐!" "왜? 아니야? 싸워보니 딱 알겠더라. 너는 셀키보다 백배는 약해. 게다가 남에게 빌붙어 원수를 갚았다고 자위하는 치사한 자식이기도 하지!" 한순간, 렌은 자제를 잃고 말았다. 죽이지 않고 고문하려 했지만 지금 당장 저 입을 찢지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렌은 검을 뽑고 그 상태 그대로 프란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막 렌이 프란을 향해 검을 휘두른 그 순간이었다. "이익!" 프란은 온몸에 남아 있던 힘을 한꺼번에 짜냈다. 렌이 세차게 달려들던 바로 그때, 프란은 양 손목을 속박하고 있는 수갑에 매달렸다. 그것도 그냥 매달린 것이 아니라 그네를 타듯 크게 한 번 몸 전체에 반동을 주었다. 달려들던 렌의 눈에 프란의 몸이 공중에서 젖혀지는 것이 보인다. 무슨 짓을 할 것인지 눈치 챈 렌이 몸을 들리려 했으나, 떄는 이미 늦어 있었다. 퍽! 달려들던 렌은 프란의 발에 감겨있던 족쇄에 정확히 안면부를 강타 당했다. 강철족쇄였으므로, 그것에 맞는다는 것은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렌의 머리가 휘청하는데, 프란이 놓치지 않고 렌의 목에 줄을 건다.그 상태 그대로, 프란은 다리에 힘을 주어 렌의 목을 잡아당겼다. "악!" 쇠줄을 목에 감은 채 끌어당기니 렌은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젖이 그대로 눌리면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왔다. 렌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컥컥거리며서도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없었다. 철컹! 렌의 검이 떨어져 내린다. 프란은 오른발로 넘어진 렌의 목을 꾹 눌렀따. 누운 상태로 누군가가 뒷목을 발로 짓밟으면 호흡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납작해진 코와 입으로, 공기조차 들어오지 않으니까. 수갑을 차고 족쇄까지 매단 프란의 마지막 도박은 그렇게 성공했다. "......열쇠, 내놔." "컥......." 목을 눌린 렌은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저런 꼴의 수감자에게 당하다니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 "아, 내놓는다고 해도 내가 못 열라나?"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결단을 내렸다. 프란은 렌의 뒷목을 있는 대로 힘차게 누르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없게, 그래서 마침내 렌이 기절할 때까지. "흐음......에고, 아야!" 렌이 기절한 후, 프란은 발가락 만으로 렌의 주머니를 뒤져야 했다. 없다면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겠지만, 다행히 열쇠는 렌의 주머니 안에 있었다. "발가락으로 열쇠 따는 법 좀 배워둘걸." 쓸데없는 후회를 하면서도 프란은 열쇠고리에 엄지발가락을 끼웠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번이고 실패했지만 그녀는 기어코 성공했다. 발과 발 사이가 가깜고 족쇄가 그리 무겁지 않아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손목에 매달린 수갑을 풀어야 한다. "이거 성공해다고 하면 서커스단에서 스카우트 제의 들어올지도 몰라." 자조적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녀가 누군가. 로이네트 지방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방책 넘기의 일인자로 뽑히며 그 일대 소년소녀들 위에 군림했던 프란이다. 몸 가볍고 유연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프란은 최대한 하체에 힘을 주어 몸 전체를 늘어뜨렸다. 발가락에 열쇠를 끼운 채,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공중제비 넘기를 시작했다. 꼭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프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빨리 안 하면 렌이 깬다고! 그럼 난 죽어!' 하지만 양손이 공중으로 묶여 포박당한 채 발가락으로 열쇠 따기라니, 묘기대행진도 아니고 가능할 리 없었다. '아악, 진짜 미치겠네.' 당장이라도 렌이 벌떡 일어날 것 같았기에, 프란은 더더욱 초조했다.그러다 잠시 후 프란은 '앗!'하는 소리를 냈다. '꼭 발가락으로 딸 필요 없잖아?' 일종의 깨달음으로 얻은 그녀는 두 발바닥을 마주대하고 그 사이에 열쇠를 끼웠다. 열쇠가 커서 그나마 다행이다. 프란은 그 상태로, 뒤편으로 몸을 반쯤 접었다. 수갑에 매달린 몸이 휘청, 뒤로 기울어진다. 몸 전체의 중심이 뒤로 쏠린 까닭에 프란은 거의 거꾸러 선 형태가 되었다. 프란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발바닥을 천천히 위로 가져갔다. 터진 상처에서 피가 나오고 있어 집중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결국 그녀는 해냈다. '야호!' 프란은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그 지긋지긋한 지하에서 빠져나온 프란은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비로소 육체가 아파 죽겠다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고통에 몸을 맡긴 채 기절할 수조차 없다. 어찌 됐든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거의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프란은 고통을 참았다. 고통을 참기 위해 얼마나 깨물었던지, 입술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돌아가야지! 그러다 일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프란이 우뚝 멈춰 선다. 돌아간다고?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해낸 프란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샌다. '어디로? 대체, 어디로?' 프란은 렌을 죽인 게 아니다. 다만 기절시켰을 뿐이다. 렌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아일린 전체에 그녀의 정체가 밝혀진다. 가장 두려운 것은 바이 알게 되는 것! 렌이 살아 있는 한, 언제라도 반은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려진 것일지도 몰랐다. 프란은 그 가정이 너무도 무서웠다. 알려져서, 반이 자신을 방치한 거라면? 어쩌면 렌의 고문은 반이 명령한 것인지도 모른다.프란은 그런 생각마저 했다. 물론 반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알았다면 반 자신이 직접 처리했을 것이다. 목을 따도 직접 땄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아마,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아.' 프란은, 울고 싶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울지 않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데 지금, 울고싶다. 남장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빚을 대신해 팔려간다는 것이 불러올 결과가 두려워서, 인생 전체를 담보로 하고 내린 선택. 대마왕이 그걸 이해해줄까? 대마왕이 그런 걸 이해해 줄까?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도 제대로 못 알아먹는 것 같은 그 대마왕이 과연 이해해줄까? 머뭇거리던 프란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타오른다. 결심을 한 눈이다. '말하자.' 그래, 말하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가서 고백하자. 나는 여자라고. 두려워서 이런 선택을 했을 뿐, 결코 어떤 의도가 있어서 한 일은 아니라고, 당신을 속이려고 한게 아니었다고, 당신을 기만하려고 한 게 결코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를 내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하자. 솔직하게, 솔직하게 진심을 담아 말한다면 대마왕도, 조금쯤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프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후회한다. 아일린가로 돌아가기 전에,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부모의 무덤 앞에 앉아 있던 그 평화로운 옆얼굴에 대고 말했다면, 그 충동을 그대로 따랐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작 돌로 만들어진 그 집을 벗어나는 동안 그 많은 생각을 했다. 어둑어둑해진 밤, 심한 고통이 엄습해 프란은 뛰는 것을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악착같이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냈다. 프란의 몸에서는 한두 방울씩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잔뜩 무리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프란은, 한순간 온몸을 얼려버리는 것 같은 살기에 움찔 몸을 굳혔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꿈이라고 말해!' 그건 정말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기절해 있던 렌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은 온몸으로 긴장했으나 마땅히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검조차 수중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반이 주었던 실버 블레이드도, 단검도 없다. 이렇게 죽는다고? 프란이 입을 크게 벌린다. 그럴리 없다고, 이렇게 쉬울 리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렌의 분노한 눈동자와 그 거침없는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프란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렌이 막 눈앞에서 검을 휘둘렀을 때였다. 콰직! "......아." 프란은 한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눈앞에 보라색 머리카락이 지나갔다. 일순 그 긴 머리칼이 프란의 코에 슬쩍 닿았다. 거짓말이야, 프란은 그렇게 생각한다. 허나 하리나스 백작 때와는 달리 이번엔 말짱한 정신이었던 탓에, 프란은 그것을 환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없었다. 달려오던 렌은 그대로 반의검 앞에서 두 토막이 났다. 목과 몸이 곧바로 분리된 채. 프란은 그 압도적인 광경에 얼어붙었다. 제대로 된 비명 한 번 못지르고 렌은 즉사했다. 반은 무덤덤한 얼굴로 검을 수거했다. '대마왕 강한 거야 어디 하루 이틀일인가. 이젠 놀랍지도 않다,뭐.' 충분히 놀란 주제에, 괜히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것 같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콤플렉스 환자로 만들만큼 잘난 인간이다. 얼굴 잘났지, 세계제일의 갑부에다 그보다 강한 검을 쓰는 사람은 본 적도 없다.말 그대로 인간이 아닌 대마왕이다. 내가 별명 하난 참 잘 지었지. 프란은 그 와중에도 흐뭇하게 웃으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주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케인?" 프란은 돌아보았다. 케인을 비롯해 그와 비슷한 옷을 차려입은 두 명의 남자들, 그리고 룬.비켈린 셋과 아인켈 대장이다. 케인은 눈을 부릅뜬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프란을 마주보았다. 위저드 리그를 샅샅이 뒤져도 프란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이틀전부터는 밤마다 저택의 온갖 곳을 뒤지고 다녔던 그들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기의 순간에 반은 프란을 구했다. 케인은 그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후, 케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머지 비켈린들도, 룬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그런 눈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던 프란은 깨닫는다. 프란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를 봐도 여자의 몸, 빈약하긴 해도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봉긋한 가슴. 프란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감을 지독하리만치 분명하게 느꼈지만 돌아볼 수가 없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아니면 조금만 더 늦게 오던지. 보통 땐 타이밍이 귀신 같더니, 오늘은 왜이러냐?......아니,네가 안왔다면 난 렌한테 죽었겠지.' 프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의 시선은 진작부터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온몸이 타는 것 같다. 둘의 시선이 정확하게 맞부딪친다. 죽음 같이 끔찍한 적요가 흘렀다. 프란은 그 순간, 반의 눈동자에서 선명한 무언가를 읽는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프란은 간신히 입술을 뗐다. 하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단어는 없었다.입천장에서 모든 단어가 질척질척 녹아 사라졌다. 동굴 같은 입 안에 갇힌 말들은 단 하나도 바깥으로 온전히 살아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프란이 진정으로 믿게 되었을 무렵에야, 반의 입술이 떨어졌다. "지하감옥에." 반은 프란을 가리켰다. 프란은 자신이 잘못 듣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반의 목소리는 조금,떨리고 있었다. "......가둬라." 제 5장. 다짐 시온 아일린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각서, 쓰겠습니다." 자켄린은 순간 내가 헛것을 들었나, 의심했다. 허나 이 방 안에는 아까부터 계속 두 사람뿐이었다. 자켄린은 떨리는 눈으로 시온을 보았다. 스승이 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의 은색 머리카락 역시 한 올 한 올 경 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자 놈이 그 금발 꼬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자켄린 자신이 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무슨 의미인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이냐?" "도와주십시오." 언제나 껄렁껄렁 급한 일 있을 때도 능글맞게 웃는 얼굴로 '도와주쇼' 라고 말하던 제자다. "후회 없겠냐?" "후회는 얼어 죽을. 스승님은 괜찮겠소?" "네가 각서 써준다는데 내가 뭘 더 바라겠냐." 시온은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스승님. 이딴 제자라서." "됐다. 나도 스승 자격 없는 건 마찬가지다." 두 남자가 침묵한다. 한참 만에, 시온은 입을 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다. 때문에 자켄린은 시온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스승님." "왜?" "우선, 사람 하나 찾아주쇼." 사람이라니? 자켄린이 의아한 듯 바라보는 가운데, 시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름은 헤냔 키에르. 얼마 전까지 카세타의 기사였어요. 지금은 세이피안에 있을 겁니다." "오랜만이다, 정말." 헤냔은 숨을 들이마시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봄의 나라, 세이피안. 나라를 버린 변절자의 후예라는 낙인이 두려워, 도망치듯 떠 나온 날 이후로 이 땅을 다시 밟을 용기를 차마 내지 못했던 헤냔이었다. 허나 모국의 바람은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변함없는 손길로 어루만져주었다. 따사로운 세이피안의 햇빛을 닮은 그 부드러운 바람이 긴장하고 있던 헤냔의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한다. 가 장 주목 받는 견습 기사단원으로서, 프리나를 만났던 이 곳. 헤냔은 시선을 옮겼다. 크지 않은 저택 하나가 그의 시야에 가득 찬다. 저 저택 안에, 어린 시절 헤냔이 그토 록 닮고 싶어 했던 동경의 대상이 있다. 헤냔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저택 문을 두드였다. 허리가 굽은 집사가 나왔다. "누구십니까?" "헤냔 키에르, 아샤휘님의 옛 제자입니다." 집사는 헤냔을 안으로 들였다.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헤냔은 저택의 둥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들어가십시오." 집사가 방문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헤냔은 고개를 끄덕인 뒤 가만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였다. 프리나와 더불어 그의 유년기를 나누어 독점했던 한 남자의 뒷 모습이, 헤냔은 아, 하는 감탄사를 속으로 삼켰다. 세월 이 흘렀건만 그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사라면 최소한 예의는 지켜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이 순수야! 아직도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냐!" 어린 시절의 기억이 헤냔에게 소리를 치고 있다. 헤냔은 가만히, 그 기억을 향해 입을 연다. "아샤휘 단장님." 그러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헤냔은 생각했다. 세이파인의 견습 기사단장으로, 기사가 지켜야 할 '순수'를 귀에 못 박히도록 강조하던 어린 시절의 검술 스승, 헤냔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헤냔 키에르 아닌가?" 헤냔의 얼굴을 본 아샤휘는 한걸음에 헤냔 앞에 서며 놀란 듯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헤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달아오른다. 기쁨 때문이다. "아!……기,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아샤휘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했던 헤냔이다. 하지만 아샤휘의 환한 얼굴은 헤냔의 기우를 말끔하게 날려 보내기에 충분했다. "노망난 것도 아닌데, 몇 년 전에 헤어진 제자를 잊어버리면 쓰나!" 아샤휘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수제자였는걸." 헤냔은 수줍게 웃었다. 어릴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에, 아샤휘 역시 덩달아 미소짓는다. 저렇게 수줍 음이 많으면서도 검만 쥐면 달라지는 것이 헤냔 키에르였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육체적으로는 강건해졌으면 서도 어린 시절의 장점은 고스란히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 기쁜 일이다. "일단 앉지." 빨갛게 뺨을 물들인 채, 헤냔은 아샤휘가 가리킨 의자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두 사제가 얼굴을 마주한다. 아 샤휘는 헤냔의 손을 꼼꼼히 보았다. 검을 게을리 하지 않은 손, 아니 죽도록 검을 연마한 손이다. 손 구석구석에 굳은살이 난데다 물집이 터진 자국이 선명하다. 아샤휘는 안심한다. "오랜만이구나, 헤냔. 카세타에서 기사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샤휘는 웃을 뿐이었다. 운이라고? 그렇지 않다. 헤냔은 그가 키워낸 제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사람중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오랜만의 회포를 풀며 대화를 나누었다. 견습 기사시절의 이야기, 카세타에서 기사가 되기까지 의 이야기, 헤냔이 존경하게 된 케이온 가사단장 런스 카르멘에 대한 이야기……. 대화는 긑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한참만에, 헤냔이 문득 말했다. "단장님. 저, 프리나를 만났어요." 갑작스러운 그 말에 아샤휘가 놀란 얼굴을 했다. "프리나를? 어디서?" 아샤휘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은 두 제자 중 헤냔을 제외한 나머지 한 명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리나 프리텐 이었다. 이 두 제자를 한 번에 맞아들인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아샤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프리나와 헤냔은 닮은꼴이었다. 검을 향한 집념과 열정이 지나치다는 점,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점이 그랬다. 바로 그랬기에 어린 소녀는 '헤냔 타도!' 라고 외쳤고, 어린 소년은 그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으리라. 정작 본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아샤휘는 아련한 옛날을 떠올렸다. 투지 선명한 프리나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떠오른다. 가여운 녀석. 아샤휘는 눈 을 감았다. 빚을 잔뜩 져서 가문이 파산해버렸다는 것을, 아샤휘는 프리나가 실종된 뒤에야 알았다. 알았다면 그 녀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을 것이다. 빚 때문에 끌려갔다는 그녀의 종적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기에, 아샤휘는 큰 슬픔을 느꼈다. 프리나의 기사 서임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 누구보다 분노했던 것도 아샤휘였다. 아샤휘의 상념을 깨며, 헤냔이 말했다. "카세타에서 만났습니다." "카세타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더냐?" 아샤휘가 다급하게 물었다. 헤냔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말해주고 싶지만, 프리나가 '비밀이야' 라고 말했기에 헤냔은 아샤휘에게조차 실상을 털어놓지 않았다. "프리나 답게 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프리텐 가문이 빚을 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일린에서 빚을 졌다는 것을 모르는 아샤휘는 프리나가 카세타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잔뜩 걱정하고 있던 마음을 조금은 풀어놓으며, 아샤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프리나답게 살고 있다고 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강했던 아이니까. "저기, 단장님." 헤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단장님은 무슨? 왜 그러지?" 아샤휘는 헤냔 쪽을 향해 몸을 바짝 당겼다. 수년 만에 헤냔이 찾아왔는데 이 자리에도 없는 프리나를 계속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 미안했던 탓이다. 제대로 들어줘야지, 하며 귀를 기울이는 아샤휘를 향해 헤냔이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 카세타에서, 저보다 훨씬 강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아샤휘는 흥미로운 눈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수련을 쌓아라. 원래 연륜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두 살 차이였습니다." 아샤휘의 인상이 굳었다. "누굴 만났느냐?" "카르멘 가주를 만났습니다." "……검을 섞었더냐?" 아샤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 카르멘 가주와 검을 섞는다는 것은 대륙의 검사로서 꼭 한 번쯤은 품게 되 는 꿈 중 하나다. 그것을 이 어린 제자가 이미 경험했다니. 헤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의 차이로, 패했습니다. 제 존재 자체가 부정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아샤휘는 낮게 탄식하며 저도 모르게 턱을 쓰다듬엇다. 카르멘 가주, 대륙 전체에 파다한 그 명성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쉬쉬하고 있지만 카세타 반란진압 건도 세이피안에까지 알려졌다. 대륙의 호사가들은 카르멘 가주를 가지 고 이러쿵저러쿵 난리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아샤휘는 헤냔의 잠재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소질이 충분한 녀석이다. 이맘 때 검술의 향상이란 일이 년의 가쁜 것이긴 할테지만, 저렇게 상처 받은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압도적은 차이로 당했던 모양이다. 그 절망 을, 아샤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의 소질에 대한 회의로 오랜 기간을 괴로워하겠지. 아샤휘는 주저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검을 포기할 마음이라도 생긴 건가?" 잠시 움찔하는가 싶었으나, 헤냔은 곧장 어깨를 폈다. "아닙니다! 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겁니다." 아샤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바로 이런 점이다. 프리나와 헤냔의 공통점. "그래?" "단장님, 저는……." 헤냔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을 이기고 싶습니다." "어째서?" "네?" 헤냔이 눈을 깜빡였다. "그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는 아직 십대다. 찾아보면 그보다 강한 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인가? 어릴 때 너는 세계 최고의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않느냐." 헤냔은 고개를 숙였다. "프리나." "프리나가 왜?" 아샤휘가 의아한 듯 물었다. "프리나 때문이예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샤휘를 향해, 헤냔이 미소 지었다. 어린 시절처럼 밝은 그 미 소에 아샤휘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몇 년 뒤, 이 녀석은 대륙을 놀라게 할 검사가 될 것이다.' 아직도 상기된 얼굴을 한 채, 헤냔은 저택 밖으로 나왔다. 지체없이 아일린 가로 갈 셈이었다. 프리나에게 편지 에 썼던 그대로, 그는 반에게 결투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다시 한 번 참혹하게 패배한다 해도 좋다. 이길 때 까 지 도전할 것이다. 강한 의지로 온몸을 무장한 채, 헤냔은 걸음을 뗐다. "헤냔 키에르 경이십니까?" 그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헤냔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세이피안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많을 리 없거니와 설사 알아 보는 자가 있다 해도 이름 뒤에 '경' 같은 호칭을 붙일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헤냔이 긴장 한 채 바라보자 그를 호명한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는 시온님의 전령입니다. 키에르 경을 찾아 이것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시온?" 눈을 찡그리며 잠시 그 이름을 되새겨보던 헤냔은, 곧 기억 하나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왕궁에서 프리나의 말을 전달해줬던 남자. 게다가 반군 소탕 때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대 그를 당혹시키기도 했었던 그 남자다. 헤냔 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사람이 왜?" "받으십시오." 남자는 편지를 전해주고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헤냔이 붙잡을 틈도 없이, 남자가 멀어졌다. 별다른 긴장감 없이 첫줄을 읽어 내린 헤냔은 그러나 다음 순간 막히는 느낌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프리나의 목숨이 위험하다. 네 도움이 필요해.> 프란은 감옥 안에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채 부러져 있었다. 쓰라리지 않은 데가 없다. 허나 정신이 들 때마 다, 프란은 그 상처를 내다보며 비죽 웃었다. '뭐, 곧 괜찮아질 거다. 이것도 좀 있으면 낫겠지." 아무리 얻어 터져도 며칠만 지나면 깔끔하게 회복되던 몸이다. 그래서 프란은 온 신경을 자극하는 몸의 고통에서 신경을 끊어버렸다. 프란은 누운 채, 창살 너머 바깥을 바라보았다. 남자 간수 세 명이 부릅뜬 눈으로 프란을 지키고 서있었다. 채직 때문에 터져버린 살들이 저마다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프란은 그것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다. 그녀를 죽 도록 괴롭히고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프란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꿈에 락케이드가 나오게 해달라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 는 다정한 락케이드의 목소리 속에서, 아주 잠시간만이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허나 꿈은 그녀의 소망과는 전혀 다른 것을 불러냈다. 꿈 속에 등장하는 것은 락케이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눈이었다 그 눈, 자신을 바라보던 반의 눈.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순간의 적요함이 프란의 꿈속에서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커다랗게 뜨여있던 반의 눈동자, 온몸을 훑어보던 그 고요한 시선. 참혹하게 짓밟힌 몸 같은 것 아무래도 좋았던, 그 시선ㅇ르 피해 달아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지불하고만 싶었던 그 악몽같은 순간. 가장 잊고 싶었던 그 순간은 마귀같이 프란의 뒷머리를 낚아채고 한없는 시간 속에 그녀를 빠뜨렸다. 개미지옥처 럼,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릴수록 꿈은 강렬해져만 갔다. 그 끔찍한 꿈의 와중에도 프란은 바랐다. 그 시선을 자신이 잘못 읽은 것이었기를. 차라리 반의 눈에, 가득한 분노와 증오만 떠올라 있었다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너무나 분명한 형태 로, 프란은 반의 내면을 읽었다 그 때 반의 눈에 떠올랐던 그 격한 감정. 아아, 그 것은……. 끝없이 상처받은 눈이었다. '대마왕, 대마왕, 대마왕." 프란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몸의 고통이 아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발밑에 있는 줄 아는 그 대마왕이 보이던 그 순간의 감정. 분노보다 더 먼저 떠오른 게 슬픔이라는 것, 어찌할 바 모르는 당혹이라는 것, 프란은 그것을 읽어버렸다. 차라리 마음껏 화를 내고 싶다. 미친 듯이 분노하고 싶었다. 단지 성별을 숨겼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잔혹하게 자신을 찢어낼 수 있는 반을 죽일 놈이라고 욕하고 싶다. '너였더라도 그랬을걸!' 그렇게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허나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프란을 사로잡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말하고 싶었다. 아니야, 대마왕,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말고, 내 얘기를 들어! 왜 네가 그런 눈 을 하는 거야? 너랑은 어울리지 않잖아! "밥이다." "……헉!"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꿈속을 헤매고 있던 프란이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했지만 프란은 애 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한 현실이지만 차라리 이 현실이 낫다. 가능하다면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다면 꿈도 꾸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잠을 자지 않으면 몸이 낫지 않을 테니까. 창살 밑에 뚫려 있응 조그마한 틈으로 간수 하나가 밥을 내밀었다. 남은 음식을 모아 국에 말아놓은 개밥 같은 것 이다. 치욕적인 대접이지만 그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이 있었다. 간수들이 수갑을 풀어주자 않았던 것이다. 보통의 죄수는 적어도 밥을 먹는 동안만은 수갑을 풀게 된다. 죄수가 위험한 상대라면 간수가 음식을 떠먹여 주기 도 한다. 그러나 세 사람의 사내는 비웃는 듯한 눈으로 프란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하하하!" "이게 미쳤나?" 사내들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프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프란의 웃음소리가 갑작스레 뚝, 멎는다. 그녀 는 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음식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비명을 너무 많이 질러서 목 안이 잔뜩 갈라진 탓이다. 웃는 것만으로 목이 찢어질 것 같은데, 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아니, 무슨 그런 약한 소리를! 프란은 마음속 으로 소리쳤다. 먹어야 한다. 프란은 거침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 먹을게." 기죽지 않는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난, 프란 프리텐이다. 프란은 우적우적 먹었다. 엎드린 채, 마치 개처럼. 하지만 그런 치욕속에서도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아직도 빛 나고 있었다. 간수 셋은 그런 프란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보통의 죄수는 수치심을 못 이겨 적어도 하루는 음식을 거부한다.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도 그렇다.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 오면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나 이번 죄수는 달랐다. 맹수처럼 빛나는, 저 퇴색하지 않는 눈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달그락 얼굴을 파붇고 먹고 있던 탓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자 그릇이 뒤집힐 듯 휘청거렸다. 허나 그 그릇은 끝끝내 넘어지지 않았다. 프린이 이로 그릇을 잡았던 탓이다. 프란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턱과 입술과 이와 혀로, 그녀는 그 음식을 모두 먹었다. 먹어야 했다. 먹어야 낫는다. "잘 먹었어!" 괴물같이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프란은 그런 말까지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간수들이 보이지 않는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순간 픽, 하고 실소가 터졌다. '아일린이라고 해도 지하 감억에 돈 쓸 마음은 없는가 보지?' 벽에는 죄수가 고문으로 흘린 듯흔 말라붙은 피딱지가 선연하게 남아있었다. 프란은 그 벽을 향해 눈을 또렷이 떴다. 난 지지 않는다. 이런 데사 울 만큼 나약하지 않아! 웃기지 마! 프란은 이를 악 물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악착같이 먹고 악착같이 버틸 것 이다. 언젠가는 여기에서 탈출하고 말거다. 그리고……. 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한 번만 모른 척 해주기로 하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 이 뜨거운 눈물을. 프란이 지하 감옥에 갇힌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골좋구나." 프란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간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들어온 것은 사키였다. 사키는 냉소로 비틀린 얼굴로 프란을 보고 있었다. 프란은 그러나 화를 내는 대신 웃었다. "아, 깨워줘서 고마워. 악몽 꾸는 도중이었거든." 사키는 검에 손을 갖다 댔다. 재빨리 베어버리고 싶은 사키였다. 프란이 발견된 이후, 시온 아일린은 사키의 얼 굴도 보려 하지 않았다. 시온의 방으로 찾아갔던 적도 있다. 시온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었다. '가지 않으면, 마 법 쓸 거야' 라고. 그것은 오직 시온 아일린만을 위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사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 처였다. "아직도 웃을 수 있군." 사키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채찍을 꺼내들었다. "어이, 좀 봐 줘. 아직 안 아물었어." 프란은 그 채찍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인정사정 봐 줄 사키가 아니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채찍을 들 어올렸다. 촤악! 아직 다 아물지도 않은 몸 위로, 채찍이 휘둘러졌다. 사키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시즈 아일린을 죽이러 온 자객이었다고 말해! 그래서 시온 도련님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죽어버려!" 프란은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묵묵히 채찍을 맞았다. 선명한 초점으로, 프란은 사키를 바라보았다. 사키는 그 모습에 더더욱 화가 난 듯, 프란의 얼굴을 향해 채찍을 날렸다. 촤악! 프란의 얼굴 전체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코에서부터 뺨에 이르기까지 붉은 색의 긴 상처가 남는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프란이 입을 열었다. "이봐." 채찍을 든 사키가 부들부들 떨며 프란을 보았다. "너 시온이랑 친한가보지?" "어디서 감히! 네까짓 년이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사키가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 프란은 정신없이 채찍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이렇게 말했다. "좀 전해줘. 난, 괜찮으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헤냔은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도대체 이 말이 어디서 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말을 타고 지나가던 사람을 밀어내고 빼앗었던가? 돈을 주고 샀던가? 알 수가 없다. 그저 헤냔은 달렸다. 시온은 헤냔에게 준 편지에 숨김없이 모든 것을 썼다. 프란이 아일린 가에서 빚을 졌다는 것, 저스티스 카르멘과 시즈 아일린이 동일인물이라는 것, 프란이 여태껏 남장하고 있음을 반이 몰랐다는 것, 가주의 암살자로 지목되어 지금은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있으리라는 것을. 헤냔은 미칠 것 같았다. "프리나! 제발!" 헤냔은 말을 재촉했다. 빨리, 아일린으로 가야 했다. 이 편지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프리나를 구할 수 있는 날은 오직 오늘 뿐이다. 오늘 자정! 자켄린 밀러는 세필나무 방망이를 단단히 쥐고 문을 나섰다. 시온이 그런 자켄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왠일로 스승님이 멋있어 보이우." 시온의 농담에 자켄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할 수 있는 거, 확실하죠?" "난 선혈의 마법사다" 시온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은 선혈의 마법사. 전 대륙에 세 명뿐인 8서클의 대마도사다. 그가 할 수 없다면 누구도 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정원 앞에 멈춰 섰다. 자켄린은 손을 모은 뒤 두 눈을 감았다. 시온은 잠시, 숨을 멈췄다. 스승의 마법 시현을 보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짐작이 옳다면, 스승은 여태까지 자신이 봐온 것을 훨씬 능가하는 마법을 구사할 것이다. 마법사로서의 본능적인 경각심. 시온은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자켄린이 입을 열었다. "좌표." 시온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왼쪽, 사인(sin) 38도" "틀리면 그 꼬맹이 목숨은 없다. 시체 파편도 안 남을 거다. "겁주지 말고 시작하쇼." 아일린 가의 우두운 밤을 환하게 밝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터질 듯 새어나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콰드득 콰직콰직 콰콰콰콰콰콰쾅! 케인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을 통해 눈이 멀 만큼강한 빛이 들어오더니, 곧이어 엄청난 소리가 들렸 기 때문이다. 가주님을 노린 공격인가!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케인은 몸을 돌렸다. 당장 반에게 가야 했다. 아무리 강한 검사라 해도 저런 엄청난 빛의 광구 앞에 선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온몸이 찢기는 한이 있어도 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케인은 단번에 문을 열었다. "케인 칼슈비도!" 복도 저편에서는 룬도 뛰어오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반의 방을 향해 뛰 엇다. 뛰는 동안 보니 저택 전체가 난리였다.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가 정신적인 패닉 상태인 것 같았다. "자켄림님이야!" 그러다 어느 순간, 케인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앞쪽에서 젊은 마법사 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 다. 룬에게 먼저 가라고 말한 다음, 케인은 그 젊은 마법사의 멱살을 단박에 잡아 올렸다. 갑작스러운 그 힘에 숨 이 막혔는지 마법사가 컥컥거린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 완력에 눌린 마법사가 덜덜 떨며 답했다. "컥, 비, 비켈린 대장. 저, 저건…… 8서클의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컥, 마법…… 컥, 위저드 리그에서, 자 켄린님이 유일……." 마법사의 몸이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케인의 눈이 번뜩였다. 케인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 전처럼 반의 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케은은 몸을 돌려, 프란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이게…… 뭐냐?" 프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해 입을 딱 벌렸다. 심장이 미친 듯 박동하고 있었다. 이 지하감옥은 전체가 마 블렌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들었다. 어떤 공격으로도 이 마블렌을 뚫을 수는 없아고 들언 적도 있다. 그런데, 요란 스렁누 소리와 함께 갑자기 이 감옥의 절반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프란은 오른쪽 감옥 구석에 누워있었다. 만약 그녀가 몸을 조금이라도 옆으로 틀었다면 방금 전, 온몸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그녀가 누워있던 오른쪽은 멀쩡핟. 여기는 감옥이야, 라고 누구든 납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왼편은 무엇이란 말인가. 드래곤이 짓이긴 것같이 끔찍하게, 그 흔적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날아가 버린 이 곳은! 프란은 침을 삼켰다. 간수들은 지금 식사를 위해 밖에 나가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다. "……느끼 버터?" 프란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온 말고는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없는 탓이다. 허나 시온이 이렇게 엄 청난 마법을 구사 했을 리는 없다 분명 자켄린의 도움을 받았겟지. 프란은 이를 물었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 자식이……" 사키가 전해주지 않은 것인가. 프란은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여기에서 도망간다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다. 비켈린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평생동안 대륙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잡힌다면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허나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있다. 여 기서 달아나면 영원히 짊어져야 할 짐. '시즈 아일린을 노린 암살자라고 말해!' 사키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분명 아일린 내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있다는 증거겠지. 도망간다면 그 추정은 확 신으로 굳어질 지도 모른다.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다시 한 번 반의 눈동자가 프란의 몸 전체를 압도한다. 그런 눈ㅇ르 보고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이냐! 프란은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신이 달아난다면, 반은 이번에야 말로 확신할 것이다. 프란은 자신이 그래도 반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 프란이 암살자라고 생각했다면 반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프란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대마왕은 그러지 않았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소녀' 의 손가 락을 무심하게 자르던 그 대마왕이 성별을 숨긴 자신은 베지 않았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믿는다는 게 아닐까, 믿는다는 게 아닐까! "이럴 수가!" 그 때, 간수들이 허겁지겁 돌아왔다. 그들 역시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정신을 수습한 그들은, 이 지하감옥의 유일한 수감자인 프란을 포박하기 위해 다 가왔다. 그런데 그 때……. "파이어 애로우!" 프란은 고개를 휙 돌렸고 그 순간, 벼락같이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미친 자식!" 거기에, 시온 아일린이 있었다. 시온의 마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 사람의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시온은 마법의 결과가 어떤지는 보지도 않고 수갑을 찬 프란을 알아올렸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프란의 몸에, 시온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단 며칠만에 몸이 이렇게 축난 걸까. "놔, 시온 아일린! 난 가지 않아!" 프란은 소리쳤다. 허나 시온은 듣지 않았다. 그는 프란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듣지 않았다. 시온이 말했다. "형님은 널 죽일 거야." "아니야!" "아니라면, 어머니가 널 죽이겠지." 대답 못하는 프란을 안아든 채, 시온은 달리기 시작했다. 곧 백마가 눈에 띄었다. 시온은 거침없이 백마 위에 올 라탔다. 프란을 앞에 태울 채, 시온은 백마를 출발시켰다. "프란, 살아 있으면 결국 모든 게 해결되는 날이 와. 하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니야. 살아있으면 돼. 제발,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시온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프란은 그 말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에 숨이 막혔다. "왜 이러는 거냐! 아일린의 세 번째 계승자씩이나 되는 도련님아! 정말 미친거냐! 이런 짓을 했다간 네가 무사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알아!" "걱정하지마, 프란." 시온은 웃었다. "찾으러 갈게, 꼭. 그 때까지 무사히만 있어." 시온은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드디어 라어 강의 끝자락이 보인다. 그 때였다. "멈추시오, 시온 아일린!"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시온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비켈린의 대장, 케인 칼슈비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탄 채, 케인이 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시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냄새를 맡고 오는 사람이 아예 없을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던 탓이다. 케인 칼슈비도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시온은 자문했고, 곧,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이길 필요는 없었다. 시온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라이트닝 볼트!" 마법이 작렬했다. 케인은 말을돌려 재빨리 피했다.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시온은 정신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자켄린이 만들었던 체력 회복 약을 수십 알이나 먹어둔 것 이 다행이었다. 아무리 케인이라고 해도, 수십 발의 마법화살들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다 한순간, 프란과 케인의 시선이 부딭혔다. 프란은 침을 삼키며 케인을 보고있었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 자와 그녀의 찢긴 몸뚱이를, 케인이 본다. '……프란 프리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이없는 꼬마 놈이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해 그를 당혹시켰던 꼬마. 그 엄창난 배짱에 호감을 느껴 죽이지 않고 끌고 왔더니, 여자였단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못 말릴 녀석이다. 대륙 천지를 뒤져도 저 프란 프리텐만큼 그를 당혹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울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케인은 여기까지 달려온 것과는 달리 프란을 그냥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놓아준다면 쫓아가 는 것도 그의 몫일테다. 전 대륙에 수배를 내리고 휘하의 비켈린을 동원해 프란을 찾아야 할 것이다. 빚쟁이들을 죽을 때 까지 쫓아가는 비켈린의 그 저력으로 있는 힘을 다해 저 시종을 몰아가게 되겠지. 그것만은 막기 위해 마법사의 말을 듣자마자 여기 왔던 케인이다. 그런데도,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의 벗겨진 상체를 보았던 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동요하고 있는 반은 처음 보았다. 케인 칼슈비도는 그제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결국 얼음같이 냉정한 자신의 중니도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닐까. 자 아이의 밝음에, 저 아이의 대책 없음에, 저 아이의 저 강인 한 눈동자네, 어느 순간 그의 주인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열고 말았을 것이다. 프란과 함께 있을 때 당혹하던 반의 얼굴을, '아무 말 마라' 라고 말하던 흐트러진 표정을,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던 반의 손을, '데려오지 않았다' 라고 말하던 그 싸늘한 목소리를 케인은 생각 했다. 그리고 그는 달리던 말을 멈췄다. "미안해, 프란. 나는 함께 갈 수 없어." 케인이 더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며 시온이 말했다. 그 정도는 프란도 알고 있었다. 대 아일린의 세 번째 계 승자가 가긴 어딜 가겠는가. 여기에 자신의 스승을 두고. 시온이 말을 이었다. "이 너머에, 헤냔 키에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프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에 이어 헤냔이냐? 아주 릴레이를 하는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있어야 의지도 있으니까." 둘이 막 라어 강에 걸쳐진 다리를 지나려 했을 때다. 뒤편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케인 칼슈비도가 다시 온 것인가? 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프란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바람마저 정지했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재주도 좋지.' 프란은 속 좋게 그렇게 생각했다. 달려오고 있는 건, 단신의 반이었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에 얼굴도 내밀지 않던 반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 급박한 상황에도 저 얼굴이 반갑다. 정말 웃긴 노릇이다. 프란의 눈 앞에서 반 의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렸다. 얼음같이 굳어있는 싸늘한 눈동자로 반이 오고있다. "시온 아일린, 네 놈이……." 반은 검을 뽑아 들었다. 프란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루니아 블레이드의 빛이 그렇게 끔찍하게 느껴진 건 처음 이었다. 반은 그 검을 든 채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온은 그런 반을 보며, 여유롭게도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 안에 쓴맛이 돈다. '참내, 지금 형님이 어떤 표정 짓고 있는지 알기는 하죠? 이것 참, 그건 시종이 탈출할까봐 분노하는 눈이 아닌 데.' 반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온은 다리 끝에 선 채로 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몸 안에서 마나를 회전 시켰다. 이 정도면 해볼 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시온이 프란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막 반의 루니아 블레이드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플라이!" 시온 아일린은 마지막 힘을 짜내 마법을 시전했다. 헤냔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아일린의 정문에서 기다리라고 했었지.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긴 뒤다. 헤냔은 가슴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한순간, 헤냔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프리나?" 세상에, 프란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프란은 아일린의 그 높은 정문을 '날아서' 넘었다. 그 모습에 헤냔 은 말할 수 없이 놀랐다. 혹시라도 갑자기 추락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헤냔은 프란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되는 지 점을 향해 달렸다. 그리도 다음 순간, 헤냔은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프란이 갑자기 낙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헤냔은 얼른 팔 을 뻗어 떨어지는 프란을 받아냈다. 말이 크게 요동쳤지만, 헤냔은 큰 무리없이 프란을 가슴팍으로 안을 수 있었 다. "헤냔 키에르냐?" 헤냔의 팔에 안긴 채, 프란이 입을 열었다. "응, 나야." 헤냥느 얼른 그런 프란을 자신의 앞에 앉혔다. 문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헤냔은 말을 몰았다. 어찌 됐든 시온이란 작자는 성공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의 몫. 한참을 달려간 뒤에야 헤냔은 프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는 보고 말았다. 온 몸에 터진 상처, 터진 상처, 터진 성처. 헤냔은 소리죽여 울었다. '이런 모습 보려고, 세이피안까지 온 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느끼 버터나 너나, 진짜 못 말린다." 그 때 프란이 입술을 웁기여 그렇게 말했다. 웃어보려 했지만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있어 쉽지 않았 다. 반의 검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시온은 플라이를 시전했다. 자신과 프란에게가 아니라, 프란에게만. 마법에 무지한 프란이었지만 마법사 스스로 떠오르는 것과 타인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 다. 프란을 공중으로 띄운 다음, 시온은 말에서 떨어졌다. 반의 검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온은 그 상태에서도 집 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공중에 뜬 상태로, 프란은 반과 시온을 돌아보았다. 반은 말에서 떨어져 내린 시온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공중 에 떠있는 프란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프란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 표정도 없지만 어느 때보다 많은 감정 이 떠올라 있는 듯 느겨진 그 얼굴을.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한 번 부딪혔다.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프란은 소리를 잘렀다. "대마왕!" 반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프란은 외쳤다. 진심으로. 그 진심이 닿길 바라며. "널 진짜로 싫어한 적은 없어! 널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결코 없어! 나는…… 나는 오히려……!" 그리고, 떨어져 내렸다. 그 목소리가 닿았을까? 프란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닿았기를, 프란은 간절히 바랐다. 프란은 고개를 젖혀 헤냔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온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그녀를 탈출시켰다면, 그래, 적어도 그녀는 그에 화답해야 한다. 살아남으라고 했다면, 살아남아야지. 그리고 어느 날 돌 아올 것이다. 기필코. 프란은 멀어지는 아일린 가를 바라보았다. 그 때가지 잘 있어라, 빌어먹을 대마왕아! 그리고 느끼 버터, ……고맙다. 헤냔은 계속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반복되는 긴장과 이완 때문에 프란은 온 몸에 힘이 풀렸다. 그런 프란의 창 백한 얼굴을 보며, 헤냔이 말했다. "프리나." "왜?" '프란이다!' 같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프리나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서. 헤 냔은 프란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앗다. 그리고는 결연하게 말했다. "지켜줄게." 헤냔의 붉은 눈동자가 떨렸다. "무슨 짓을 해서든 너를 지켜줄 거야, 프리나." 제법 멋있는 말이었으나 정작 프란은 픽, 웃음을 흘릴 뿐이다. "기억 안 나냐? 너, 나한테 졌잖아." 헤냔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린다. 확실히 그랬지. 그래도 그의 다짐은 변함없었다. "아일린의 손아귀에서 벗아날 수 있는 곳은 한군데뿐이야." 헤냔은 이를 악물었다. "로이네트로 가자, 프리나." 제 6장. 아일린의 사정 "아일린이군요." 키네세스 L. K. 카세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카세타 왕실 의 문양이 찍힌 그 마차는 며칠간을 내리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카세타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한 여인을 싣고서. 키네세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부가 헬리언 지방에 들어섰다고 말하기 무섭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름답네요." 도도한 라어 강과 장엄한 옛 건물들이 보였다. 왕가의 여인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고풍스러운 아일린 가 의 정문 앞에서, 드디어 마차가 정지한다. 키네세스는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곧 그를 만날 것이라 생각하니 심장의 고동이 예사스럽지 않다. "내리시지요, 공주님."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 카르멘이 마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 키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드레스 자락을 사뿐하게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대륙 전체에 파다한 아일린의 명성을 모를 사람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아일린 가를 직접 방문해본 사람은 극히 소수다. 키네세스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아일린가의 위용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키네세스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신다. 이 저택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키네세스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한발을 내딛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는 런스가 바짝 따라 붙어 있었다. 공주의 호위는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런스 휘하 케이온 기사단 너덧이 함께 오긴 했으나 이들은 아일린 가 안까지 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스티스 카르멘과 시즈 아일린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닌가. 때 문에 반의 신분을 알고 있는 키네세스와 런스 카르멘만이 아일린 가에 들어가기로 사전에 이야기를 끝낸 차였다. '아일린인가.' 런스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로서도 아일린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이사 카르멘과 로웬 아일린이 결혼을 했다 고는 하나, 두 가문은 사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담한 관계를 유지했다. 대륙 전체의 견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런스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아일린의 면면을 유심하게 살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리 아일린이라 한들 상대는 타국의 공주, 카르멘이라면 오히려 무심하게 대할 테지 만 아일린은 상업의 가문이다. 원수진 일이 없는 이상 왕국과는 철저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아일린의 고위급 인사들이 나와 직접 공주를 접견했다.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는 그러나 조급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얼굴이 아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르멘 경.' 시즈 아일린이라는 이름도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 있어 반은 어디까지나 저스티스 카르멘이었다. 그를 볼 수 있었 던 곳이 카르멘 가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시즈 아일린으로서의 반도 받아들을 준 비가 되어있었다. "룬이라 합니다. 아인켈이라는 집단의 장을 맡고 있지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키네세스의 앞으로 나서며 룬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키네세스의 안내를 맡은 차였다. "가주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떨리네요." 공주의 말에 런스는 설핏 웃었다. 룬은 뭐가 그리 급한지 성큼성큼 앞서 걷고 있어, 키네세스의 수줍은 그 한마디 는 듣지 못했다. 공주는 바깥나들이를 잘 하지 않는다. 그 높은 신분 탓이다. 특히 타국의 가문 같은 곳에 개인적으로 방문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키네세스는 눈을 똑바로 떴다. 그 모든 절차를 거쳐 연약한 물빛의 레이디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키네세스가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있던 런스가 말을 걸었다. "아일린까지, 꼭 오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그 말에 키네세스가 고개를 들어 런스를 본다. 런스는 그녀의 호수 빛 눈동자에 잠시 멈칫한다. 그래도 그는 카세 타 케이온 기사단의 단장, 런스는 공주의 시선에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반년만 기다리면 가주님은 돌아오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공주의 몸으로 외간 남자의 가문에 드나드느냐, 이 말인가요?" 키네세스는 쏘아붙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말했을 뿐이다. 런스는 그래서 더욱 민망해졌다.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공주는 선한 눈이다. 그녀는 웃는 낯 그대로, 런스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것이 아니면 아나이스 폰 그란젤 양 때문인가요? 하긴 지금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을 호위라는 명목으로 떼놓 은 건 내가 생각해도 심한 것 같아요." "……고, 공주님! 허, 험험." 난데없는 키네세스의 폭탄선언에 런스가 귀 끝까지 빨개진 얼굴로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키네세스는 살포시 미 소 지을 뿐이었다. 런스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그, 그런 게 아니라는 건 공주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헤냔 키에르 경이었죠?" 난데없이 튀어나온 '헤냔 키에르' 라는 말에 런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무슨? "키에르 경이 떠나는 날 그란젤 경이 만취 상태가 되어 경에게 찾아갔다죠? ……사귀기 시작한 건 역시 그날부터 인가요?" "공주님!" 런스는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치고 말았다.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개진 런스를 보며 키네세스가 '어머?' 하고 입을 가린다. 앞서 걷고 있던 룬이 무슨 일인가 해서 돌아보았다가, 시뻘게진 런스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러죠, 런스?" "그런 건 다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런스가 스산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키네세스가 사실대로 얘기할 경우 이 사건의 제보자는 런스가 돌아오는 날 최 소한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키네세스는 대답 대신 발걸음만 또각또각 옮겼다. "기사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었어요. 나는 기사단에 관심이 많아요. 혹시 몰래 엿들었다고 나를 꾸짖진 않겠죠?" 정말이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런스였지만 키네세스는 더 이상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공주 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헤냔이 떠나던 날, 아나이스는 우는 얼굴로 런스의 집에 찾아왔다. 어떻게든 타일 러야겠다는 생각에 런스는 아나이스를 다독였다. "그만 울어, 아나이스. 돌아오면 헤냔은 장성한 청년이 되어 있을 거다. 동료의 성장은 축복해줘야 하는 거잖아." 그러자 아나이스는 소리를 질렀다. "저 혼자만 가다니 치사하잖아요! 나도 꽃 피는 청춘인데! 나도 바깥나들이 하고 싶단 말이예요! 뭔가 핀트가 어긋난 분노라고 생각하면서도 런스는 품에 매달려 오는 아나이스를 떨쳐내지 못했다. 단짝을 떠내보 낸 슬픔이 크겠다는 생각에 배려한 것이다. 아나이스는 눈물 맺힌 눈으로 런스를 올려다 보았다. "……단장님만 아니었다면 나도 같이 갔을 텐데." "응? 그건 무슨 말이지?" 정말이지,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기습 키스 따위를 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아나이스가 장장 5년 간 자신을 짝사랑해왔다는 고백도 듣지 않았을 것이며, 요 몇 년간 런스에게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집요한 방해 공작 대문이었다는 아나이스의 폭로도 듣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하는 것을 보고 있던 키네세스가 농담조로 말을 던진다. "그래도 아홉 살 연하의 연인이라니, 대단한걸요." 런스는 대꾸할 말을 못 찾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헤냔이 안다면 미친듯이 놀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헤냔이 한참 후에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사이, 룬은 반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태까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았던 키네세스와 런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무적으로 돌아온다. 룬 은 키네세스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키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섰다. 런스 역시 따라 들어선다. 키네세스는 곧, 창을 등지고 있는 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카르멘 경." 키네세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장 두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이상하다. 묘 하게 수척해진 것 같은 저 얼굴. 어째서? 키네세스는 덜컥 마음이 불안해진다. 아일린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 었던 건 아닌가 하여 걱정스러운 것이다. 반이 한 걸음, 키네세스에게 다가온다. 런스는 그런 반을 향해 당장 무릎을 꿇고 싶었지만, 옆에 카세타의 왕족이 있어 그러질 못했다. 대신 그는, 충심을 담아 인사했다. "런스 카르멘이 대 카르멘의 수장을 뵙습니다." 반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런스 역시 그런 반의 얼굴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고작 두 달 만인데, 수장의 얼굴은 눈에 띄가 야위어 있었다. 게다가 저 표정, 원래도 반의 얼굴을 무표정하긴 했다. 그러나 두 달 전의 얼굴이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무표정 이엇다면, 오늘 보는 반의 얼굴을 그 위에 차가운 껍질을 하나 더 씌운 것 같다. 사늘하게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 하는 얼굴. "앉으십시오." 키네세스는 걱정 어린 얼굴로, 런스는 그보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런 스가 성마르게 묻는다. 반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그답게, 키네세스를 보며 짧게 물었을 뿐. "무슨 일이십니까?" 이 냉정한 남자의 말 때문에 키네세스는 순간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정도 상처 견디지 못한대서야. "폐하의 윤허를 받고 왔습니다. 한 달 정도 아일린 가에서 머물렀으면 합니다." 무슨 일로 키네온이 그토록 끔찍이 아끼는 공주에게 아일린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 것도 모자라 한 달씩이나 머물 라고 허락했을까. 반은 깊은 눈동자를 하고 앉아 있는 키네세스의 속내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어찌됐은 왕의 허락 이 떨어졌으니 반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도 6일이나 걸려 그의 집까지 찾아온 왕가의 손님이 아닌가. 반은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허락했다. 키네세스가 안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런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그…… 프란 프리텐이라는 시종은?" 그저 호기심에 물었던 것뿐이다. 매일같에 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 녀석이 안 보이니 궁금해서, 단지 그 것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반의 눈에서 섬광 같은 것이 지나갔다. 런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루니아 블레이드, 제자리에 걸려 있는 것 맞지?' 런스는 반의 허리께를 확인했다. 다행이 검은 가만히 거기에 잠자고 있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반은 그렇게 말했다. "설마, 죽이신 겁니까?" 런스는 옆에 키네세스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뱉어냈다. 그럴 만도 했다. 반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이 오죽 많았는가. 그러나 그렇게 묻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런스는 너무나 명확한 형태로 반의 분노를 읽을 수가 있었다. '더이상 말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저 은보라색 눈동자. 공기가 싸늘해졌다. 키네세스가 입을 연다. "카르멘 경. ……독대를 원합니다." 런스에게는 그 말이 '좀 나가주세요, 런스 경.' 으로 번역되어 들렸다. 런스가 굳은 얼굴로 반을 보는데, 반이 가 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방해물이 되어버린 런스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네세스는 그 사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아일린을 둘러봐요.' 라고 속삭여 런스를 더더욱 맥빠지게 했다. 런스는 터벅터벅 밖으로 나갔다. 런스가 나간 방, 키네세스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대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또 그렇게 자른다. 키네세스는 그러나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곧 경의 생일이지요." 순간, 반은 키네세스그 무슨 말을 할지 곧장 깨달았다. "계승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일린의 계승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것은 철저히 아일린이 비밀로 하고 있는 영역이다. 다만 계승식이 위험천만한 것이며, 가주로 군림하고 있던 자도 계승식을 무사히 치르지 못할 경우 그 자리를 빼앗긴다 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허나 역대 가주들은 계승식을 치른 뒤에야 정식으로 가주의 이름을 이었기에, 가주의 자리에 있다가 그 지위에서 내려온 자는 아일린의 역사를 통틀어도 거의 없었다. 여러모로, 반은 1,300년 전통 아일린에서도 정말 드문 케이스였다. 계승식을 치르지 못한 채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여태까지 다섯 명이었고, 그 중 세 명은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후계자들 중 몇 명이 계승식을 무사히 치렀 는지는 알 수 없다. 후계자들이 계승의식을 성공적으로 치르지 못하면 두 번째 후계자가 길을 떠났고 그가 실패하 면 세 번째 계승자가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선례를 상기해볼 때 그 계승식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도 당신은 해내겠지.' 키네세스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눈앞에 닥친다해도 반에게는 문제 되지 않을 거라고. 검 한 자루 만 있으면 대륙 전체를 떠돌아다니는 과제가 주어진다 해도 무리 없이 해낼 반이다. 드래곤을 잡아오라는 불가능한 과제 따위 아일린의 가주에게는 나오지 않을 테니반, 만약 그런 과제가 나온다 해도 반에겐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키네세스가 보는 반은 그랬다. 그녀가 염려하는 것은 계승식에 관 한 것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반이 답한다. "그대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기계 같다. 그래도 키네세스는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승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성인식이 기다리고 있지요. 그것이 아일린의 전통이니까." "그것 역시 그대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카르멘 경!" 키네세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키네세스의 눈이 그렁해진다. "따로 마음에 둔 상대가 없다면, 성인식 때 그대의 옆에 서고 싶습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진정으로 염려했던 것. 곧 다가올 그의 스무번째 생일날 계승식이 행해진 뒤, 다시 다가올 성인식. 성인식 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키네세스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반의 성인식 날 그의 옆에 서겠 다고 끝도 없이 다짐했다. 아일린의 성인식, 아직 결혼하지 않은 가주에게만 행해지는 그 전통. 그것은 정초원의 새 주인을 임명하는 일. 즉, 결혼이었다. "정식으로 말합니다, 카르멘 경. 나와 결혼해 줘요." "시온님을 뵙고 싶습니다만." 런스는 문 앞을 지키고 선 룬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룬의 눈이 기이하게 비틀어졌다. "도련님은 무슨 일로? 어떻게 아는 사이지?" "그저…… 궁금한 게 있어서." 반의 반응으로 볼 때 프란의 신상에 뭔가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런스는 반란진압 때도 함께했고 키네세스 를 구출하기까지 한 프란 프리텐이라는 녀석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반이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그가 알아낼 방법은 있다. 시온에게 묻는 것이다. 프란이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런스는, 아직까지도 시온이 남색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라다 일순, 런스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룬의 몸에서 갑작스러운 살기가 느껴진 것이다. 왜 갑자기? 런스의 몸 전체게 찌릿하고 울린다. 이 사내, 예사롭지 않군. 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개가 늦었소만, 나는 카세타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 카르멘이오. 귀하가 내게 무슨 감정인지는 알 바 없으나, 그렇게 살기를 피운다면 나도 내 몸을 보호할 수 밖에." 룬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했다면 미안하오. 요즘 이 저택이 좀 복잡해서……. 케이온 기사단장에 카르멘 가 사람이라면 신분은 확실하 군. 알았소, 따라오시오." 런스는 룬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복잡한 일? 신분이 확실해? ……대체 이 저택에 무슨 일이 었었던 거지?' "이진느님이 계십니다." 시온 아일린의 방 앞으로 안내된 런스는 깜짝 놀랐다. 시온의 방 앞에 두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리 봐도 호위무사 같다. 반의 방 앞에도 없던 호위무사가 시온의 방 앞에 있다니? 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룬이 재빨리 말했다. "도련님의 어머니가 계신다는군. 기다렸다 들어가시지. ……나는 돌아가 보겠소." 룬이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너 같은 놈, 난 아들러 둔 적 없다!" 런스는 귀를 찢을 것 같은 큰 소리에 움찔했다. 시온의 방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이진느 아일린은 미친 듯이 시온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시온은 그런 어머니를 한차례 올려다 본 후,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진느를 더욱 자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얼굴에서 실핏줄이 가닥가닥 돋아난다. 품 위 있고 고상한 평소의 얼굴이 무너지고 이진느의 얼굴에서 광포한 분노가 솟아났다. 몸을 떨면서, 이진느가 소리 를 지른다. "당장 나가! 나가서 죽어버려!" 두 달째였다. 이진느는 매일같이 아들의 방을 찾아와 이렇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시온은 그런 어머니를 올려다보 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응수했다. "그러게, 어릴 때 내쳤으면 이런 일 없잖우. 옛날부터 난 나가고 싶다고 노랠 불렀다고." 이진느의 움직임이 한순간 뚝 멎는다. 그녀는 시온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사람 한둘쯤은 쉬이 죽일 수 있을 듯한 살기 어린 눈으로, 이진느가 말했다. "네 녀석이 무슨 짓을 한 줄은 아느냐?" 시온은 가감 없이 답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탈출시켰지. 남자의 로망 아니우? 죽기 전에 해봤으니 이젠 여한이 없……."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온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이진느가 있는 힘을 다해 뺨을 올려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진느는 사정없이 아들의 온몸을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시온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진느가 입술을 깨물었다. "네 놈을 위해 세라딘이 움직이겠지. 하지만 난 널 위해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여태까지는 날 위해서 그랬단 말잉? 내참, 지나가던 개미가 웃겠네." 이진느는 대답없이 시온을 노려보았다. 어릴 때부터 엄하게 키웠다. 시온의 이름이 흠집이 갈 만한 것들은 모두 뒤로 손을 써 없애거나 숨겼다. 프란을 그리 했던 것처럼. 허나 시온은 반항이라도 하듯 나날이 비뚤어져만 갔다. 성장하면서 그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된 사람이 늘어났고 이진느도 더 이상은 시온에게 함부로 손쓸 수가 없게 된 터다. 허나 아무리 망나니로 컸다 한들, 이것 은 아니지 않은가! "그깟 계집에게 무엇이기에!" "그러게 말이우. 반한 게 죄지."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에조차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이진느는 결국, 몸을 돌리고 말았다. 더 이상 시온의 얼 굴을 마주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온 아일린은 고작 시종 하나를 탈출시킨 죄로 방 안에 유폐되었다. 만약 시온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목숨까 지 잃었을 것이다. 그만큼 반의 분노는 컸다. 허나 시온 아일린은 대회의에 출입할 수 있는 아일린 역사의 유일한 예외답게, 이번에도 그리 큰 벌은 받지 않았 다. 원로원과 정초원, 세라딘, 위저드 리그가 합심하여 시온의 벌을 가볍게 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시즈!' 문손잡이를 비틀며 이진느는 이를 갈았아. 대회의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반은 시온도, 그 시온을 도와 지 하 감옥 절반을 날려버린 자켄린에게도 큰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시즈 아일린이 왠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두를 향해, 반이 끔찍한 전제를 달았다. "시종을 잡을 때 까지 시온과 자켄린을 각자의 방에 유폐한다." "뭐, 뭐라고요?" 너무 놀란 나머지, 이진느는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시종을 잡을 때 까지라니! 만약 시종을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영원히' 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모든 단체의 장들은 경악했으나 그 말은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이진느, 너는 그 시종이 내 암살자라고 말했다. 그러면 시온과 자켄린은 내 암살자와 동조했다는 결론이 나오지." 이진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시종이 돌아와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무죄가 될 지도 모른다. 허나 그때까지 두 사람은 내 암살 의 동조자다. 이의 있는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온 아일린과 자켄린 밀러는 자신의 방에, 각각 갇혔다. 고작 시종 하느를 탈출시켰다는 죄로. 쾅! 문을 닫고 나온 이진느는 방문 앞에 선 건장한 갈색머리의 남자, 런스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런스는 당황한 표정 을 숨기지 못한 채 이진느를 보고 있었다. "누구요?" 이진느는 순식간에 고고한 자태로 돌아와 물었다. 런스는 엉겁결에 자신을 소개했다. "카세타의 케이온 기사단장입니다. 키네세스 공주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잠시 시온 도련님을 뵈러 들렸습니다." '카세타 계집이 왔단 말이지.' 뭔가 생각하는가 싶던 이진느가 고상한 물투로 물었다. "그렇습니까. 아일린에 있는 동안 불편한 일이 있거든 저를 찾아오십시오. 이진느 아일린입니다." "……아, 예." 말은 마친 이진느는 고개를 돌려 저 쪽으로 사라졌다. 런스 카르멘은 침을 삼키며 시온의 방문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지 짐작도 안 가는 런스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시온 아일린의 뒷모습이었다. 비록 카르멘 가 사 람인 런스였지만, 시온이 카르멘 가에 워낙 자주 들락거리는지라 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워들은 게 있었다. 그 가 알기로는 시온은 바람둥이라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책 따윈 가까이 두지도 않는다고 했었는데. "어라? 케이온 기사단장 아냐?" 문 닫히는 소리에 시온이 돌아보았다. 시온의 손에 들린 것은 꽤 두꺼워 보이는 마법서였다. [6서클 막바지에 있는 당신을 위해 씌어진, 세상에 다시 없을 천재가 쓴 위대한 마법서] '진짜 유치하군.' 대체 누가 저런 센스 없는 제목을 붙였나 싶어 런스는 저자의 이름까지 확인했다. ……자켄린 밀러. "마법 공부 중이셨습니까?" "스승님과 약속했거든." 빙긋 웃으며 시온이 답했지만, 런스가 알아들을 리 없다. 프란을 빼내주는 대가로 시온은 자켄린과 약속을 하고, 각서를 썼다. <나, 시온 아일린은 죽는 그날까지 마법을 배운다. 온 힘을 다해. 8서클의 대마도사가 되기 전 까지는 마법에 관 한 한, 자켄린 밀러의 말을 '무조건적' 으로 따른다.> 시온은 읽고 있던 책을 옆으로 치웠다. "헤이, 그런데 당신이 여긴 웬일이지? 오호라, 알겠다! 그녀가 왔나 보군." 시온이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단박에 상황을 파악하는 시온의 통찰력에 런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그 는 이 방에 온 목적을 잊지 않고 물었다. "이 저택에 무슨 일 있습니까? 저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고, 프란은 어떻게 된 겁니까?" 시온은 기지개를 길게 켰다. "내가 이번에도 또 한 건 했거든. 완전히 형님의 눈 밖에 났어. 그냥 그것뿐이야." 런스는 시온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시온 아일린이 순가 뭐라 말 하기 어려울 만치 아릿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런스는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아무래도 정말 큰 일이 일어 난 것 같으고 생각하면서. 일단은 키네세스의 옆으로 돌아가야 했다. "공주, 청혼하러 왔나?" 런스가 나간 방 안, 시온은 툭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나 곧, 그는 관심없다는 듯 마법사를 한 장 한 장 꼼 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고 그렇게 마법서를 읽고 있던 시온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아름다운 비나룬. 지금쯤 프란도 저 달 아래 있겠지. 시온은 그녀를 탈출시킨 것을 꿈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무사한 거지, 프란?' 늦은 밤, 케인은 반의 앞에 섰다. "어떻게 되었나?" 지난 한 달간, 이 시간이면 케인은 매일같이 이곳에 왔다. 반에게 한 가지 보고를 하기 위해. 비켈린에 관한 것도 세라딘의 동향에 관한 것도, 정초원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반이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 른 것이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반은 술을 들이켰다. 언젠가 보았던 것 처럼 그 독한 파인트다. 잔도 없이 반은 그것을 마셨다. "건강에 해롭습니다." 반은 답하지 않았다. 허나 케인은 안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주인은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 업무를 볼 것이다. 프란이 사라진 이래 죽 그래왔으니까. 오직 케인만이 반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었다. "찾아라. 반드시." 주인의 발아래 술병이 두 개 뒹굴고 있다. 저런 독주를 두 병씩이나 마시고도 목소리조차 흔들리지 않다니. 케인 은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알겠습니다." 답한 뒤, 케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새로운 시종은 뽑지 않으십니까?" 와장창 케인은 입을 다물었다. 반이 마시고 있던 술병을 집어던졌던 것이다. 마치 피같이 붉은 그 술이 푹한한 양탄자를 물들인다. 반에게 시종은 꼭 필요한 존재다. 업무 보고를 위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아일린의 가주기 한 사람 의 수행원도 없이 혼자 다닌다는 것은 여러모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케인은 그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한 다. "키네세스 공주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게 청혼했다." "……네?" 케인은 한 박자 늦게 놀라움을 표현했다. 한 나라의 공주가 청혼이라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이피안은 다 른 나라보다 여권이 신장된 곳이긴 해도, 아직까지 여성이 청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진대 타국은 말해야 무엇 할 것인가. 여염집이라 해도 그러한데, 한 나라의 공주가 먼저 청혼이라니. 게다가 그 장본인은 대륙 내 미모로 소문이 자자한 카세타의 셋째 공주님. "받아들이실 겁니까?" 반은 그 말에 문득, 프란을 생각했다. '호오, 왜 안 그렇겠어요. 궁주님이 여왕 되고 그 뒤에 둘이 결혼만 하면 카세타가 넝쿨째 들어오겠네. 좋겠다. 좋 겠어.' 건방지게도 그런 말을 했었지. 자신이 뭘 답했던가. '그녀와는 걸혼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왜 그런 말을 했나. 부 족함이 없는 신부인데, 왜. 반은 술병을 내려놓았다. 한참 생각하는가 싶던 반이 말했다. "……나쁘지 않겠지." 케인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좋은 소식이다.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세타 셋째 공주의 결합. 카르멘 가와 아일린 가의 결합은 대륙 전체의 긴장을 불러오겠지만, 아일린 가와 왕가의 결합은 그 정도의 파장을 몰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케인은 찜찜하다. 그렇게 말하는 반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결혼을 한다 말할 때는 기쁜 얼굴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반이 화제를 돌린다. "계승식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예." 케인은 답하고서, 반을 보았다. "며칠 안 남았습니다. ……선택은 하셨습니까?" 반은 케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택! 좋은 어감이다. "……너다." "감사합니다." 케인은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답했다. 케인이 돌아간 밤, 반은 상의를 벗었다. "……." 이상한 일이다.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비록 의사에게 보이지 못했다 한들, 이건 너무 심히다. 어릴 때부 터 잦은 검상을 업어 와서 안다. 완전히 낫진 않는다해도 이정도 시간이 지났다면 아물어야 한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상처를 보고 있던 반이 입술을 악문다. 이 상처를 왜 입었던가! 이 상처를 내가 왜 입었던가! 프란 프리텐, 그 녀석 때문이었다. 아일린의 계승식, 마지막 순간까지 가주와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가주 후계자는 가장 신뢰하는 사 람과 함께 계승식의 현장으로 간다. 가주 후계자인 반이었지만, 그는 계승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것이 무 엇인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계승식을 집행하는 것은 원로원. 원로원의 영감, 스탕달만이 계승식에 대해 알고 있다. 아무리 반과 원로원이 적 대적인 관계에 있다 해도 원로원에서 계승자를 방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일린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곳이니까. 반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케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원래 그가 결정한 동행은 따로 있었다. '가장 신뢰하는 단 한 명의 동행인.' 반은 고소를 지었다. 와장창 술병이 또다시 깨졌다. 반의 눈동자는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반드시 잡을 것이다. 세상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제 6장. 로이네트 "허, 역시 아일린은 다르구먼." "미쳤군, 미쳤어. 아일린에게 쫓기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로이네트에 접한 세이피안 북부의 소도시, 유다는 비교적 안정된 곳이었다. 두 국가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국경 도시가 흔히 안고 있기 마련인 전쟁에 대한 불안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유다의 저잣거리에는 흥분한 사람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또렷히 한 점, 몇 주 전부터 나붙은 수십 장의 수배 전단지를 향해 있었다. 소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국경 도시이니만치 수배 전단지를 보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수 배는 정말이지 특별했다. 사람들은 수배지 앞을 지나갈 때 마다 발걸음을 멈추곤 한 번씩 그것을 올려다 보곤 했 다.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듯 황홀한 얼굴로, 사람들은 수배 전단 앞에서 몇 분이고 머물렀다. "거참, 그만한 액수가 내걸린 수배자치고는 너무 예쁘네, 그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 아일린에서 잡으러 다니누?" "이름이…… 프란 프리텐?" 그 때, 운집한 군중들 사이를 무심히 지나가던 한 소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년은 무언가에 놀란 듯 수배 전단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곧 그가 홀린 듯한 얼굴로 사람들 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뭐야?" 수배 전단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한 사내는 갑자기 자기 등을 밀고 들어온 강한 힘에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비켜주시오." 그렇게 말한 것은 선명한 붉은 눈동자와 녹색 머리칼을 가진 10대 소년이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한지, 시비가 붙기에 충분한 상황임에도 소년은 사내를 팔로 밀어내며 앞쪽으로, 앞쪽으로 나가려고만 했다. '이 애송이가!' 막 화를 내려 했던 사내는 그러나 움찔 손을 내리고 말았다. 갑자기 소년으로부터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 이다. '뭐, 뭐야? 이 녀석, 몸에서……' 그것이 살기라는 것을 모르면서도, 어쩐지 섬뜩한 느낌을 받은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 사이 소년, 헤냔 키에르는 수배전단지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전단을 눈에 담은 순간 헤냔의 입이 저도 모르 게 쩍, 벌어졌다. <프리나(혹은 프란) 프리텐. 여(남장 가능성 높음). 18세. 오렌지색 눈에 금발. 검을 능숙하게 다룸. 키는 168지 나 정도. 마른 편. 몸에 상처가 많음. 열 번째 달 18일 아일린 본가 헬리언 지방에서 도주.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 농후. 확실한 정보 제공자에게 500만 케트, 붙잡은 자에게 3500만 케트 지급. -아일린 가주, 시즈 아일린> 헤냔은 무엇보다도 그 천문학적인 액수에 경악했다. '3500만 케트라고?' 도주한 왕가의 반역자에게조차 내걸지 않을 어마어마한 액수의 포상금이다. 게다가 그 전단에는 프란의 얼굴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실제의 프란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인상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헤냔은 품에 안고 있던 빵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언제? 도대체 언제 이런 게 나붙었지?' 이곳 유다에는 비상식량을 마련하러 내려왔던 차였다. 아일린에서 탈출한 뒤, 프란과 헤냔은 며칠동안 밤낮없이 달리기만 했다. 그 사이 헤냔은 기사의 양심을 어기고 세 번이나 말을 훔쳤다. 충분히 거리가 벌어졌다고 생각했을 무렵부터는 낮에 자고 밤에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둘은 내도록 야숙만 했다. 혹시 마을에 들를 경우 목격자가 생겨 아일린에 제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산맥을 타고 오면서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던 그들이다. 오늘만 해도 프란은 유다의 뒷산 에 숨어있고 헤냔 혼자 마을에 내려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탈출 후 처음 들른 마을에서, 헤냔은 떡하지 붙어있는 프란의 수배 전단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이 녀석 하나 잡으면 귀족이 부럽지 않겠네." 한 사람이 전단을 떼어내며 입맛을 다셨다. 헤냔 역시 슬그머니 손을 뻗어 한 장을 뜯어냈다. 품에 수배 전단을 넣으며, 헤냔은 식은땀을 닦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의 신상명세는 아직 나붙지 않았다는 것. '아무래도 나와 함께 도망친 건 모르는 모양이지.' 저스티스 카르멘의 얼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작자가 프리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사람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치욕스럽다!' 헤냔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그 자리를 떴다. 프란은 힘을 뺀 채 널찍한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온몸으로 햇빛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진다. 요 며칠간 낮과 밤 이 뒤바뀐 듯 살아왔기에, 프란으로선 햇빛을 받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눈물이 나려고 하네. 진짜 이게 얼마만이냐?' 렌의 고문을 받으며 묶여 있던 좁은 방과 아일린의 지하 감옥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햇빛을 못 본 것은 마찬가지 였응니, 프란으로서는 이 간만의 일광욕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프란은 입을 열어 콧노래까지 불렀다. 아일린 탈주 후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던 노래다. 흥겹게 소리 내어 부르 다말고, 프란은 멈칫한다. 저도 모르게 불렀던 노래가 하필이면 '즐거운 나의 집' 이었던 까닭이다. "……하, 하하." 프란은 머리를 긁으며 조금, 웃는다. '뭘 부르는 거야, 이 바보 녀석.' 카르멘 가에서 눈을 떴을 때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렸던 이 노래, 즐거운 나의 집. 대마왕이 구해줬다는 것을 알고 놀랐던 기억……. 카르멘 가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눈 앞을 스쳐 지난다. 아니, 센티멘털해지면 안 돼! 프란은 감상적으로 변하려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고개를 마구 저었다. 갈 길이 멀다. 일단 도망쳤으니 비켈린의 눈을 피해 끝까지 달아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도망치게 해준 느끼 버 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하지만 아일린에게 쫓기는 이 최악의 사태 앞에서도 프란은 한 가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반에게 돌아가 다시 한 번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프란은 두 팔로 목 뒤를 받친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뭐하는 거야?" 그 때, 프란이 누워 있는 바위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프란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너였냐?" 긴장해서 검까지 뽑았건만, 달려오는 건 품에 무언가를 잔뜩 안고 있는 헤냔이었다. 헤냔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프란은 바위에서 훌쩍 내려서며 반기는 얼굴을 했다. "먹을 것 좀 사왔냐?" 추격자가 따라붙을까봐 서두르느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씻지도 못했던 그들이다. 그 삼중고의 고통 중에서도 프 란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바로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이었다. "우우, 빵이다! 빵! 그래, 조리된 음식이 먹고 싶었어!" 헤냔이 사들고 온 물건들을 헤집은 프란은 단박에 봉투 안에 담긴 빵 세 개를 집어 들었다. 특히 초코 머핀을 게 걸스럽게 먹어치우느며, 프란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헤냔은 태평스럽기 짝이 없는 프란의 태도에 한숨밖에 나 오지 않았다. "좀 숨어, 프리나!" "뭔 소리야? 여길 누가 지나간다고." 프란은 닥치는 대로 빵을 우겨넣을 뿐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너무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음식이라 감동까 지 밀려온다. 프란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미친 듯이 음식만 먹어댔기에, 헤냔은 결국 품에서 수배 전단을 꺼내 드는 수 밖에 없었다. "여유 부를 때가 아니야!" "거참,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먹고 하자." 여전히 빵을 씹고 있는 프란 앞에, 헤냔이 수배 전단을 펼쳤다. 그 순간 깜짝 놀란 프란은 빵이 목에 걸려 컥컥, 기침을 해야만 했다. "뭐야, 이게!" 전단을 빼앗아든 프란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는 말조차 잇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그 전단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사태의 심각성을 알겠어, 프리나? 지금 네 얼굴이 사방에……." "……내가 아냐." 잔뜩 잠겨 튀어나온 프란의 목소리에, 헤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봐도 프리나가 틀림없는데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던 것이다. 프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전단에 그려진 것은 레이니아 왕비였다. 프란이 이스티네 저택에서 훔쳐왔던 초상화 속 레이니아 왕비를, 머리만 짧게 만든 후 똑같이 그려낸 것이다. 아일린 가에서 그리 오래 머문 것이 아니기에 프란의 얼굴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남아 있는 레이니아의 초상화를 변형시켜 전단을 만들었겠지. '아, 빌어먹을. 진짜 쪽팔려 미치겠네!' 얼굴이 달아오른 프란이 꼼꼼하게 수배 전단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박힌 '시즈 아일린' 이라는 글자가 가슴 을 친다. '대마왕.'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은근히 히스테리가 있으니 창문을 깨거나 커튼을 찢거나 수하들을 괴롭히고 있을 지도 모르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 얼굴로 여전히 담담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 다. 생각하다 말고 프란은 입술을 깨문다. 가슴이 아파온 탓이다. 3500만 케트라면, 자신이 갚아야 할 돈과 정확히 일 치한다. 무슨 마음으로 이런 전단을 만들었을까. 그 때, 헤냔이 프란 쪽으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인상을 쓰면서도 프란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또 뭐야?" "염색약이랑 설사약." "……."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살이 좀 더 빠지면 인상도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얼른 먹어, 프리나." 헤냔이 너무나도 진지하게 답했기에, 프란은 순식간에 덮쳐오는 소름에 온몸을 벅벅 긁어야 했다. "어, 어이. 그런 얼굴로 썰렁한 농담 좀 하지 마라. 네가 하니까 진짜인 것 같아서 무서워." "나 농담하는 거 아냐." 헤냔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정말로 진지했다. 원래도 약간 마른 편인 프란이지만, 여기서 좀 더 빠지면 살이 쑥 들어가 인상착의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헤냔이 아이같이 순진한 표정으로 '왜 그래? 뭐가 문제야?'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프란은 설사약을 내동댕 이치며 불을 뿜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너나 먹어, 너나!" 헤냔의 말대로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동굴 속으로 숨은 채, 프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좀 있어봐. 목에 염색약 묻는단 말이야." "그러게 내가 한다니까." 프란이 투덜거리든 말든 헤냔은 프란의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계속 펴 바르고 있는 중이었다. 프란같이 화사한 금 발은 어디서든 눈에 잘 띈다. 그래서 헤냔은 염색약으로 무난한 갈색을 골랐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이상 저 오렌지색 눈동자까지 어떻게 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오렌지색 눈동자가 아주 드문 것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는 헤냔이었다. "저기, 프리나." 헤냔의 부름에, 프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왜?" 헤냔은 주저하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금방 낫는 거야?" 프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일린에서 도주한 지 2주 째, 프란의 몸은 그토록 상처 입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채찍으로 맞았던 얼굴의 상처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프란은 씩 웃었 다. "기억 안 나냐? 견습 시절 내 별명." "……괴물?" "알면서 묻지 마." 잠시 침묵이 흐른다.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며 프란의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고 있는 헤냔을 향해, 이번엔 프란 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날아든다. "내 수배 전단이 나붙었다면, 국경 넘기가 생각보다 어려워졌겠군." 헤냔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한다?' 프란은 곰곰이 궁리를 시작했다. 그 사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던 헤냔의 손이 멈췄다. 염색이 끝난 모양이다. 프란은 몸을 약간 틀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하면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던 프란은 자신을 멍하게 보고 있던 헤냔과 눈이 마주쳤다. 헤냔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프란이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아, 아니야, 프리나." 헤냔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부정했다. 프란은 아님 말고, 하고 중얼거리곤 다시 '어떻게 국경을 넘지?' 하고 궁리 했다. 대마왕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척척 내줄 텐데. 그러고 보면 느끼 버터도 생각지 않 게 똑똑한 구석이 있었고 말이야. 생각하다 말고 프란은 쓰게 웃는다. 두고 온 사람들을 아무리 그리워해봐야 그 들은 여기에 없다. 헤냔은 변화무쌍한 표정 변화를 자랑하는 프란의 얼굴을 흘낏을낏 훔쳐보며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만약 아일린의 수배자와 함께 도망쳤다는 것이 알려지면 기사 작위도 취소될 것이 뻔하다. 아니, 수배자를 도망시켰다는 명목 하 에 죄인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헤냔은 마음 쓰지 않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 그토록 피땀을 흘렸건만 그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프리 나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어!" 그러다 한 순간, 프란의 눈동자가 번쩍했다. 곧 그녀가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 하며 헤냔이 올려다보는데, 프란이 그런 헤냔의 어깨를 엄청난 힘으로 덥썩, 붙잡았다. "헤냔 키에르! 로, 로이네트! 우, 우리 로이네트로 가는 거지?" "응? 응. 떠나는 날 그러기로 했잖아. 갑자기 왜 그래?" 프란은 무릎부터 쿵, 주저앉았다. 잡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서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로이네트, 하면 단번에 생각났어야 옳다. 이제야 떠오르다니! 자각해 낸 프란의 눈가에 갑작스레 한 방울의 이슬이 매달렸다. "프리나?" 갑작스러운 프란의 눈물에 헤냔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야말로 전전긍긍하며, 헤냔이 프란에게 무릎걸음으로 다 가오는 동안, 프란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로이네트에는 집사가 있어." "집사라니? ……그, 너희 집 집사 아저씨를 말하는 거야?" 헤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헤냔 역시 락케이드를 알고 있었다. 프리텐 가의 다정했던 집사 아저씨. 그 런데 로이네트와 그 집사 아저씨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헤냔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프란은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것은 아일린 가에서 죽도록 고문당하고 다시 감옥에 갇힌 다음 겨우겨우 탈출하고, 2주 동안이나 정신 없이 도망자 생활을 했던 사람이 지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은 미소였다. 헤냔은 그 미소에 순간 어찔해졌다. 프란의 아이 같은 웃음이 그의 심장을 두드린다. "응, 집사. 로이네트에 있다고 했으니까." 프란은 무릎을 모았다. 아일린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분으로 집사를 마나봤자 폐만 될 뿐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 만 숨어서라도 잘 사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 있다면, 그저 멀리서라도 한 번 불 수만 있다면……. 헤냔은 프란의 눈동자에 떠오른 간절한 그리움을 읽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전혀 몰라." 헤냔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하지만 헤어지는 날, 아들이 로이네트에 있다고…… 거기로 간다고 했었어." 그 넓은 로이네트에서 딸랑 한 사람을 찾겠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는 안다. 하지만 천분에 일 아니 만분의 일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곧, 그녀가 주먹까지 꼭 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 로이네트로 가는 거다!" 헤냔은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프란을 풀죽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로이네트, 특히 그 북부는 살인적인 기후 때문에 거주 인구가 다른 나라의 인구보다 훨씬 적다. 드리비아 레키슈 안이 레이니아를 만났다는 로이네트 최북단에는 아예 사람이 살지 않을 정도다. 때문에 로이네트 정부에서는 신분 만 확실하다면 외국인이라도 주저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끔 로이네트와 갈등을 빋는 레키슈안의 국민만 아니라면, 로이네트로 들어가는 과정은 그리 까다롭지 않다. 그 런 의미에서, 헤냔이 로이네트 국경을 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도 카세타의 기사인 것이다. "날더러 먼저 넘어가라고?" 헤냔은 방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프란은 그런 헤냔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더욱 초조해진 헤냔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널 두고 가란 말이야? 절대 그럴 수 없어. 같이 가!" "날 더러 너까지 챙기라고?" 그렇게 말하며 프란이 헤냔의 어깨를 탁 쳤다. "지금 여유부릴 때가 아니……!" 말하다 말고 헤냔은 프란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강인한 눈동자. 이 힘겨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그의 첫 사랑이, 한 점 흔들림 없는 눈으로 헤냔을 본다. 그 눈을 향해, 헤냔은 뭐라고 더 말할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프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말 말고 먼저 넘어가라. 대신, 일단 넘은 다음엔 로이네트 국경 앞에서 날 기다려. 혹시 문제가 생길 지도 모 르니까. 너랑 나 둘이 함께 넘어가다가 들키느니, 그래도 한 명이 얼른 넘는 편이 낫지 않겠냐? 도와주기에도 편 할테고." "하지만……." "걱정 마.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일단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 프란은 몇 마디 속삭였다. 곧, 헤냔이 못마땅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걸로 뭘 어떻게……." 프란은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믿어달라는 의미다. "알았어. 하지만 조심해야 해." 프란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후, 다시 한 번 유다에 내려갔던 헤냔이 동굴로 돌아왔다. "여기, 네가 준비해달라고 한 거야. ……그리고 이건 약도." 헤냔은 동굴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란에게 방금 전 사온 물건들을 떠안기며 그렇게 말했다. 물건들을 훑어본 프 란의 얼굴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돈다. "호? 꽤 잘 골라왔네?" "그걸로 뭘 할지느 모르겠지만…… 꼭 무사해야 해. 기다리고 있을게."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헤냔이 프란의 손을 꼭 쥐었다. 곧, 그가 등을 돌리고 떠난다. 헤냔의 뒷모습 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프란은 헤냔이 준비해 준 '물건' 들을 차례로 집어들었다. 특이하게도 검은 로 브와 검은 워커, 그리고 지팡이였다. 프란은 우선 검은 로브를 집어 들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뒤집어 쓸 수 있는 크고 넉넉한 로브다. 프란은 그것 을 입고, 모자를 눈 끝까지 눌러썼다. 그 후 그녀는 워커를 신었다. 12지나에 달하는 엄청난 통굽의 워커였다. 단번에 168지나에서 180지나로 키가 커버린 프란이 휘익, 휘파람을 분다. 공기까지 달리진 느낌인걸, 중얼거리며 프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러브가 워커까지 가려주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원래 키가 180지나 인 줄 알 것이다. "이걸 잡게 될 줄은 몰랐네. 위저드 리그가 생각나는 걸." 마지막으로, 그녀는 세필나무 방망이를 들었다. '자, 이제 가보자고!' 프란의 염색한 갈색 머리칼이 일순 바람에 날렸다. 시선을 올리자, 비나룬이 보인다. 운이 좋아서, 오늘 밤 비나 룬은 반의반만 찬 수척한 얼굴이다. 풍요로운 보름이었다면 들키기도 더 쉬웠을 터. 이건 일이 잘 풀린다는 증거 지!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목을 꺾었다. 우방국인 로이네트와 세이피안은 국경 지대의 관리가 허술한 편이다. 그 때문에 신분이 수상쩍은 자가 군인들 몰 래 국경을 넘는 일도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요 며칠, 국경의 경비는 삼엄해져 있었다. 아일린 가가 내건 그 엄청 난 상금 때문이다. 혹시 탈주자가 로이네트로 도망간다면, 그래서 만약 그들이 잡는다면! 그런 생각에 짜릿해진 군인들은 경비를 강 화했다. 유다 쪽 국경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스무 살의 젊은 군인 나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한테 그런 녀석을 잡을 행운이 올 리가 있나.' 군인들은 애써 그렇게 말하며 신경 스지 않는 듯 행동했지만, 그 어느때보다 보초를 강화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 었다. 그럴 수 밖에. 상금이 무려 3500만 케트인 것이다. 그 정도 돈이면 귀족도 발 아래 꿇릴 수 있다. 그거야 말로 인생 역전! 나크는 '헛된 꿈 꾸지 말자' 하고 자신을 꾸짖었지만 그럴수록 눈앞에서는 돈 뭉치가 날아다니곤 했다. '아이고, 졸려.' 그래도 역시 잠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 나크는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원래 밤의 보초라는 것은 교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일단, 해가 기면 전 군인들이 국경 지대 앞에 선다. 허나 그 모든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것은 아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구역마다 두 명의 군인만 남긴 채 다른 군인들은 철수 한다.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 철수가 이루어지므로 탈주자들은 어디에 남은 군인들이 서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 상태에서 두 시간에 한 번씩, 교대가 이루어진다. 가장 괴루운 사람은 두 시에서 네 시까지 보초를 서는 군인 들이다. 자는 도중에 일어나서 보초를 서야 하고, 돌아가서 잘 시간도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또 두 시에서 네 시 당번이냐고! 진짜 상관만 아니면 그냥 확!' 나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시간 보초는 모두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다. 오늘 열두 시 에서 두 시까지 당번했으면 내일은 두 시에서 네 시, 다음날은 네 시에서 여섯 시……. 그런데 나크는 어제와 오늘 연속 두 시에서 네 시 당번이었다. 상관의 착각으로 보초 당번에 어제 그대로 시행되 었기 때문이다. 상관에게 대들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발길질 뿐이니 눈물을 머금고 보초를 설 수 밖에. '아아, 졸병은 힘들어.' 몰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하품을 크게 하던 나크는, 어느 순간 깜짝 놀라 튕겨져 나가듯 몸을 일으켰다. 자 신의 근처에서,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이 움직 이는 소리가 분명해! 나크는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거기 누구냐!" 나크는 날카롭게 외치며 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갔다. 그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동료 역시 깜짝 놀란 듯 나 크를 따라 검을 뽑아들었다. 두 사람이 긴장 속에 사방을 탐색하고 있던 바로 그 때, 나크의 앞으로 그림자 하나 가 휙, 하고 지나갔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나크는 경악해 검을 휘둘렀지만 그림자는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나크는 있는 대로 목소리를 돋워 고 함을 질렀다. "침입자다!" "뭐라고? 어디냐, 나크?" 나크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다른 동료들이 달려왔다. 나크는 그림자가 달려간 쪽을 쫓으며 큰 소리로 답했다. "이 쪽이다!" 총 네 명의 사람들이 그림자를 추격하는 동안, 그 정체불명의 도망자는 국경의 방벽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다. '역시 국경을 넘는 게 목적인가!' 나크는 죽을 힘을 다해 그 뒤를 쫓았다. 그의 동료들 역시 헐떡거리며 나크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서라!" 도망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사람이 따라오고 있는 데도 멈추지 않는다. 나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저대로 타넘을 셈인가?' 도망자와 나크의 거리가 확 좁혀진다. 도망자는 방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놓칠 순 없다! 막 검을 휘두르려 던 나크는, 어느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왜 저렇게 몸집이 작지?' 나크의 동료 역시 나크와 같은 것을 느낀 듯 했다.그러나 호기심은 뒤로 한 채, 그들은 도망자에게 있는 힘껏 달 려갔다.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도망자가 방벽에 손을 대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 던 것이다. "어딜 도망가려고!" 도망자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지만, 나크가 좀 더 빨랐다. 나크는 팔을 뻗어 도망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그러다 도망자를 돌려세운 순간, 나크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잉,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나크는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크가 붙잡은 것은 그의 가슴팍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자그마한 꼬마였다. 겨우 아홉 살을 넘겼음직한 꼬마. 이 조 그마한 애가 혼자 국경을 넘으려 했다고? 나크가 의아하게 생각한 그 때였다. "침입자다!"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크는 경악 속에 고개를 돌렸다. 침입자가 이 꼬맹이 말고도 또 있단 말인가? 다른 방 향에서도 큰 목소리가 이어졌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그 사이, 나크에게 붙들린 꼬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나 마법에 걸리기 싫어, 저주 안 걸릴 거야." '뭐, 뭐지 이건?' 나크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꽤 잘 해주고 있는데?"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프란은 검지로 코밑을 문지르며 발랄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 프란은 유다로 내려갔었다. 도시는 진득한 고요에 잠겨있었다. 소도시라 그런지 자넝이 넘은 시각,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 다. 프란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색이 보일 때마다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을 확인했다. 실버 블레이드도, 반이 주 었던 단검도 모조리 빼앗겼던 터리 지금 그녀의 수중에는 헤냔이 사준 싸구려 검뿐이었다. 그래도 프란은 그 검을 소중하게 손에 쥐었다. 다행히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키 180지나의 사람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원래 많지 않은 법이다. '자, 대로로 나왔고! 이제부턴 약도를 봐야지.' 프란은 품안에 손을 넣었다. 프란이 헤냔에게 부탁한 것은 세 개의 물건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이 마을 의 어린 부랑자들이 모여 지내는 거리가 어딘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냔이 준 약도를 펴본 흐란은 죽어 라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발로 그려도 이것보단 낫겠다, 이 자식아!' 어릴 때부터 검말고는 옆에 두는 것이 없었던 헤냔에게 예술적 재능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헤냔 본인 은 혼심의 힘을 다해 그런 것이었지만 프란에게 그 약도는 '낙서'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대로를 끼고 17번지로 돌아가라는 것은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잠시 헤맨 끝네, 프란은 그 좁은 길을 찾을 수 있 었다. '어둡군.' 비나룬마저 완전히 숨죽인 그믐이라, 부러지듯 누워 있는 부랑자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 좁 은 골목 안에서 아이들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잠에 빠져 있었다. 프란은 그 모습을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나네.' 어느 마을에 가나 부랑자는 있는 법. 허나 부랑자라고 해서 다 같은 부랑자인 것은 아니다. 나이가 좀 들면 깡패가 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등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서라도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되지만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소매치 기를 해도 좀처럼 입에 풀칠하기 힘들다. 지금 이 더러운 거리에 오밀조밀 붙어 자고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 사 정일 것이다. 프란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꼬맹이들아! 일어나라!" 그리고서 프란은 목소리를 돋워 소리를 질렀다. 최대한 음산한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그렇게 걸걸한 목소리는 나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잠들어 있던 아이들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거적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마을을 더럽힌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무리를 흩어놓으려는 경비대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들이 거리 저편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것을 본 프란은 손에 쥔 지팡이로 쾅 도로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거기 서지 않으면 너희는 죽는다!" 도망가던 아이들 중 몇몇은 계속 달리고 몇몇은 흠칫 발걸음을 세웠다. 프란은 한걸음, 아이들 근처로 다가갔다. 아이들이 움찔하며 프란을 돌아본다. 180지나의 키, 검은 로브, 세필나무 방망이. '제발 눈치 좀 채라, 이 꼬맹이들아!' 프란이 속으로 애원하며 한걸음 더 움직였을 때 아이들 중 하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흐, 흑마도사인가요?" 프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똑똑한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야. 코스튬을 한 보람이 있었군.' 프란은 허리를 있는 대로 곧게 폈다. "그렇다. 이 몸은 흑마도사다!" 마법 따위 몸에 익힌 적도 없는 자칭 흑마도사 프란은 자신만만하게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여기서 도망가는 순간, 나는 너희에게 흑마법을 걸 테니까!" 제발 도망가지 말아줘. 난 흑마법 비슷한 것도 못하거든. 속으로는 애원하면서, 프란이 그렇게 소리친다. 아이들 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나는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다! 너희가 도와만 준다면, 내 보수를 충분히 지급하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말한 프란이 품에서 금화를 꺼내들었다. 헤냔이 주고 간 것이다. 두려움에 질려 있던 아이들의 눈에 순식 간에 기쁨의 빛이 들었다. 부랑자인 아이들이 금화를 손에 넣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반짝이는 눈들을 보며, 프란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내 일을 도와줄 착한 아이에게 금화 한 닢씩을 주겠다!" 아이들은 주저하면서도 프란에게로 다가왔다. "고마워, 꼬맹이들." 프란이 그 아이들에게 명한 건 한가지였다. 각자 국경 방벽을 손으로 짚고 바로 돌아 나올 것! 그러면 흑마법사가 저주를 걸지않을 거라고 말해뒀던 프란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훌륭하게 맡은 일을 해냈다. 아무리 부랑아라 해도 마을 아이들이니만치, 사정을 들으면 군인 들도 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 그럼.' 프란은 길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녀가 직므 서 있는 곳은 나크가 보초를 서고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나크가 아이를 붙잡으로 뛰어간 사이 비어버린 이 공간에, 프란은 마음 놓고 서있었다. 그녀는 방벽 위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을 치켜 올렸으나 방벽 끝까지는 조금 모자랐다. 12지나나 되는 구두 를 신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높이다. 하지만 있는대로 점프를 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손만 닿는다면 넘는 건 문제도 아니지.' 뭐니 뭐니 해도 그녀는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방책 넘기의 명수' 인 것이다. 잠시 반란군 책사 유나를 죽였던 때 의 기억이 나 우울해졌지만, 프란은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먹으려 했다. 잡고 점프, 잡고 점프, 잡고 점프. 프란은 훅훅 심호흡을 했다. 방책 위에 철조망이 있어서, 밑쪽에 손을 넣고 재빠르게 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이다. 프란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움닫기다. "여기다!" 막 방책 앞에 당도했던 프란은 깜짝 놀랐다. 갑작스레 눈앞에 맑아진 것이다. 프란 쪽으로 횃불을 비춘 세이피 안 국경 수비대원, 나크는 숨을 몰아쉬었다. 달려가 붙잡은 꼬맹이는 울면서, '흑마법사 아저씨가 벽에 손 짚고 오면 용서해 준다고…….' 라고 말했다. 그 순간 온몸이 서늘해졌던 나크는 재빨리 자기 자리로 달려오며 살핀 끝에 프란의 탈주를 목격했다. 나크는 프란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얕보지 말라고!' 나크가 달려오고 있음에도 프란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도움닫기를 통해 얻은 힘으로, 프란은 그 순간 정말 멋 진 묘기를 선보였다. 두 팔로 방책 끝을 잡은 뒤, 온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말아 반대편으로 날린 것이다. 방책 위에 돋은 철조망 밑으로 손을 넣고 공중제미를 하는 프란의 모습을 본 나크로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보초를 서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박수 치며 은화라도 던져주고 싶을 만큼, 아름답기까지 한 움 직임이었다. 그래도 나크는 군인 정신을 발휘,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있는 힘껏 프란을 쫓았다. 감탄조차 안으로 갈무 리 해 둔 채, 나크는 밤공기 속에 우아하게 흔들리고 있는 프란의 로브를 뒤에서부터 잡아챘다. "이 도망자 놈아!" '빌어먹을!' 안 그래도 12지나나 되는 구두를 신고 부렸던 묘기다. 뒤에서 잡아당기기까지 하니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균형 이 무너지려 했다. 몸이 뒤편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무릎에 철조망까지 걸린 프란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젠장…….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고!'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철조망에 걸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친 듯이 아팠지만 그나 마 그 무릎에 철조망이 박힌 탓에 몸이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에잇! 속으로 한 번 기합을 넣은 그녀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날렸다. 찌익! 나크는 찢어진 로브 자락을 순에 쥘 수 있었다. 그 사이 프란은 피가 철철 흐르는 무릎으로, 반대편 방벽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방벽 너머 세이피안 쪽에서 '여기다!'하는 소리가 난데다가 쾅, 하는 소음까지 났으니, 이번엔 로이네트 쪽 군인 들이 시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은 이를 문 채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오기 전에 얼른 도망 가야 한다. 그러나 정신 없이 달리던 프란은 곧 멈춰야 했다. 자신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한 무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도망친다. 아직 어두컴컴해서 지신의 몸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도 다행이다. 그때였다. 어둠 속 에서, 누군가가 프란의 팔을 덥석 움켜쥔 것은. "헉!" 너무 놀라 나머지, 프란은 하마터면 상대를 검으로 벨 뻔했다. 그러나 비나룬의 자비로, 프란은 그 사람의 목에 칼을 박아넣으려는 순간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헤냔이다. "프리나, 이쪽으로!" 방금 전 죽을 뻔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의 헤냔이 그녀의 손을 잡고 뛰었다. 분명 국경을 넘 자마자 되돌아 와 숨어있었겠지. 프란은 헤냔이 이끄는 대로 함께 달렸다. "이쪽이다!" 허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프란과 헤냔은 죽어라고 달렸지만, 얼마 안 가 포위당했다. 아무래도 저편에서 나크가 소리를 지른 게 주효했던 것 같다. 로이네트의 군인들에게 빙 둘러 싸인 채, 프란은 헤냔과 등을 마주 댔다. 실버 블레이드는 없지만 헤냔이 사준 조잡한 검은 있다. 프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여덟 명이다. "누구냐!" 한 명이 소리쳤다. 프란은 자세를 잡고 있었다. 군인들이 둘의 주변을 돌며 탐색한다. 다행히도, 로브가 가려준 탓에 그들은 프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헤냔 키에르."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와중에도, 프란은 헤냔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누가 발리 해치우나 내기할까?" 좍! 한순간, 프란의 검이 재빠르게 튀어나갔다. 헤냔의 몸 역시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오른다. 한 사람은 원래 한 나라 의 기사자격이 있었던 사람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기사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이 긴급한 상황에 맞지 않게 몹시 도 우아했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몇ㅁ쳐이 이 두사람의 검을 막는다는 게 애초에 무리였다. 헤냔은 단 번에 두 사람을 베고, 돌아서며 다른 한 사람을 베었다. 그 사이 프란은 군인들 사이사이를 가볍게 넘나들며 검상을 입히고 있는 중이었다. 한 사내가 재빠르게 화살을 당 겼지만 프란은 가볍게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하고는 그대로 돌진해 화살을 쏜 자의 가슴팍을 밟았다. 그것으로 긑난 것이 아니다. 프란은 사내의 가슴팍을 밟음과 동시에 그대로 몸을 틀어, 뒤에서 그녀를 노리던 사 람의 목을 쳤다. 곧장 고개를 숙인 그녀가 검을 휘둘러 한 사내의 발을 스치듯 벤다. "……윽!" 순식간에 여섯 명의 군인을 해치운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한 번 남은 상대를 향해 튀어나갔다. 정신 없이 검ㅇ르 움직이면서도, 헤냔은 자기 옆에서 싸우고 있는 프란의 움직임에 감탄하고 있었다. 등 뒤가 비었다 싶 게 틈을 주었다가, 갑자기 돌아서며 상대를 노리는 프란의 검은 일전에 자신과 겨루었을 때보다 더 향상된 듯했기 때문이다. "대단해, 프리나!" 헤냔의 적색 눈동자가 번쩍한다. 프란이 자신이 맡은 네 사람을 해치우고 고개를 들었을 때, 헤냔은 이미 웃고 있 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프란이 툴툴거렸다. "쳇, 폼 잡지 말라고!" 저 멀리서 횃불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의 손 을 꼭 붙잡은 채로. 날이 밝고 있었다. 헤냔은 눈부신 얼굴로 태양을 올려다보며 말을 재촉했다. 뒷부분이 약간 찢어진 로브를 걸친 프란도 그런 헤냔을 묵묵히 따르고 있다. 로이네트 국경을 넘은 뒤 처음 들어선 마을에서, 두 사람은 또다시 말을 훔쳤다. '벌써 네 마리째야. 흑흑. ……죄송해요, 두 단장님들.' 헤냔은 속으로 아샤휘와 런스에게 사과했다. 기사의 도를 강조했던 아샤휘와 기사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을 말했던 런스에게 '나 말 도둑질했어요! 잘했죠?' 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매번 하는 짓이지만 헤냔은 이 '말 도둑질'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헤냔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내려다보았다. 반면 프란은 아무 거리낌 없는 얼굴로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어차피 말을 가지고 있을 정도면 이럭저럭 잘 사는 사람일테고, 그러면 말 두마리 없어진다 한들 큰 타격은 없을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로이네트에 들어선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로이네트의 기후 때문에 헤냔과 프란에게 유리한 점이 있 다면 그것은 단 하나, 거의 모든 사람이 갖은 수단을 다해 추위로부터 온몸을 보호하려고 애쓴다는 점이었다. 온몸을 모피로 칭칭 감싸든, 눈도 안 보이게 얼굴에 천을 감고 가든 상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선 그 모든 일 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프란 역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누구도 그것을 보고 수상하다며 걸 음을 멈추라고 명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헤냔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란은 유다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혹시 모른다며 헤냔이 고개를 붕붕 내저었기 때문이다. 헤냔은 혼자서만 마을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샀다. 그런 식으로 최소한의 물품들만을 가지고, 두 사람은 목적지인 로이네트 북부를 향해 전진했다. 비교적 얇은 옷을 입고 있던 두 사람의 복장은 나날이 두꺼워져만 갔다. 하루가 다르게,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이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 때문이었다. 그 추운 날씨에도 두 사람은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노숙만 했다. 불을 피워놓고 잔다고는 해도 그 추위를 이겨내 기는 힘들었다. 어릴 때 로이네트에서 자라난 프란은 이럭저럭 견딜 만 했지만 헤냔은 그렇지 못했다. 로이네트에 들어선지 열흘째 되는날, 헤냔의 상태는 급격니 나빠졌다. "쿨럭! 쿨럭! 쿨럭!" "……춥냐?" 아까부터 기침이 끊이지 않는 헤냔을 돌아보며 프란이 물었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헤냔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끄덕 없…….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괜찮아고 말하는 헤냔이 꼭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며, 프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헤냔은 또다시 기 침을 하며 프란을 돌아보았다. "넌 괜찮은거야? 에취!" 온화한 세이피안의 품에 안겨서 유년기를 보낸 뒤 역시 온화한 기후인 카세타에서 자란 헤냔으로서는 로이네트의 추위가 괴로운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국경을 넘은 이틀 뒤에 코트를 사 입었는데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는 가 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 여긴 내 고향 같은 데니까." 헤냔의 뺨은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이틀 전부터 계속해서 기침을 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 프란은 헤냔의 말을 멈 춰세우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야, 아무래도 안되겠다. 너 많이 아픈 거 아냐?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가서 몸이라도 녹이자." "안 돼. 로이네트에도 네 현상 전단은…… 콜록콜록!" 헤냔은 있는 힘껏 안된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터져 나오는 기침까지는 어쩌지는 못했다. 로이네트에 처음 오는 사 람들은 누구나 헤냔같이 심한 감기에 걸리곤 한다. 거짓말처럼, 로이네트의 국경만 넘으면 날씨는 급격히 추워진 다. 아직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로이네트 중부라 이 정도지, 북부로 올라가면 해를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기후 가 계속된다. 로이네트의 겨울이란 만만찮게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닌 것이다. "기침이 저점 더 심해지잖아! 이대로는 폐렴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프란이 고함을 쳤지만 헤냔은 또 한 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나이스 왈, '똥고집 헤냔'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헤냔은 마음이 급했고,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안 돼. 쉬더라도 더 올라가서…… 콜록! 콜록콜록!" 말끝에 헤냔은 심한 기침을 했다. 마치 발작하듯 기침이 이어진다. 그 상태로 고집을 피우고 있는 헤냔을 보고 있 자니, 프란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침이나 멈추고 거짓말을 해라!" 프란은 기습적으로 헤냔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란은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야, 장난해? 장난하느냐고! 뭐가 괜찮다야?" 이건 불덩이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헤냔의 온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프 란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지는 동안에도, 헤냔은 기침을 참으며 고지식하게 '계속가자'고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프란은 참다못해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시끄러워, 헤냔 키에르! 한마디만 더하면 네 녀석 두고 갈 거다! 열이 이게 뭐야! 이렇게 억지로 버티다간 조만 간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잔말 말고 따라와!" '무, 무서워.' 그렇게 헤냔은 프란의 손에 이끌려 작은 마을에 여관에 들어서고 말았다.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윽박질렀던 프란의 엄포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여관방에 눕자마자 약간 안심한 헤냔이, 고 열로 그만 의식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진짜 미친 거 아냐? 어떻게 이 상태로 버텼지?' 도대체가 저 상태가 될 때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용할 뿐이었다. 프란은 침대에 누워 있는 헤냔의 머리에 물수건을 얹었다. 차가웠던 물수건은 헤냔의 머리에 올려지자마자 뜨거운 수건으로 변모했다. "미련한 곰 같으니라고! 완전 찜통이다, 찜통! 네 머리에 계란 얹으면 계란도 익겠다!" 프란은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계속해서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진짜 죽을 뻔했잖아! 야, 듣고는 있냐?" 그래도 헤냔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서둘렀던 이유를 알고있기에, 프란은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프란은 헤냔의 머리맡을 지키며 병간호를 했다. 드디어 헤냔의 열이 조금 내려갔다. 프란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푹 자라, 푹 자." 열이 내린 것을 재확인한 프란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을에 들어왔던 그대로 온몸을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커다란 천으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그 위에 두거운 코트를 입고 털모자를 뒤 집어쓴다. 12지나의 구두도 잊지 않고 신은 프란은 마치 거대한 '털뭉치' 같았다. 그 상태 그대로, 프란은 헤냔을 돌아보며 말했다. "쉬고 있어." "프리……나?" 아직도 열이 있어 어지러웠던 헤냔은 프란이 방문을 나서는 것을 보면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헉헉대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어딜 가는거야?' 여관을 나선 프란은 곧장 그 지방에 있는 세키에 여신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녀도 알고 있다. 헤냔과 처음 얘기했 던 대로, 로이네트의 최북부로 조속히 가야 한다. 로이네트에서도 가장 추운 그곳은 아일린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한시 바삐 그곳으로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프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리한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꼭, 꼭 한번만 락케이드를 만나고 싶었다. 어찌 살고 있는지만 알아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은 세키에 여신의 신전으로 들어섰다. 프란은 락케이드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를 찾는 것은 도망자 신분으론 영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프란은 한 가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되풀이되던 기억에 따르면, 락케이드는 세키에 여신의 신도였다. 월급의 일정 부분을 항상 세키에 여신 의 신전에 기탁했고 프란이 다쳐 들어올 때면 신전에 찾아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로이네트에서도 아마 세키에 여신의 신전에 자주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신전은 긴밀하게 연결되 어있으니 급한 일이라고 부턱하면 알아봐줄지도 모른다. 물론 프란도 그리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밑지는 장사라도 좋으니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프란이다. 그런데 세키에 여신의 제가 프리스트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프란은 그야말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세키에 여신의 신도 중 한 명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락케이드." 평온한 얼굴로 프란을 맞아들였던 프리스트는 놀란 듯 되물엇다. "라, 락케이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프란은 그 프리스트보다 훨신 더 놀랐다.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도 그걸 알아내는 데까지 얼마가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가, 싶었던 것이다. '……집사, 시주를 많이 했나?'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 맞아요." 어째서 그 이름을 아는 거지, 라고 물어보려는 순간 제가 프리스트가 말했다. "신도님, 장난치시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그 사람의 신변을 알고 싶어 신전을 찾아오신 겁니까?" '너야 말로 나랑 장난치는 거야?' 막 화를 내려 했던 프란을 향해, 제가 프리스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근방에서 그 노인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우리 세키에 여신의 신자였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안 타깝습니다." "뭐라고?" 프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락케이드는 평범한 집사였다. 그런데 로이네트에서 그 이름이 유명하다니?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프란이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제가 프리스트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것은 프란이 예상했 던 어떤 말과도 동떨어진, 그야말로 '상상도 해본 적 없는'말이었다. 제가 프리스트는 약간 굳은 얼굴로 입을 열 었다. "콘솔에서 아들 대신 죽겠다고 나선 노인 아닙니까?" 프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헤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모르겠다. 이마에서 떨어져 내린 손수건이 따뜻하다. 이마에 손을 얹어본다. 아직 미열이 있 긴 하나,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헤냔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프란이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간 거지? 헤냔은 덜컥 겁이 났다. 보통 수배자도 아니고 무려 3500만의 포상금이 걸린 수배자다.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하는데! 벌떡 몸을 일으켰던 헤냔은 그 순간, 저편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프란을 발견했다. 어두운 구석에서 온몸을 둥 글게 말고 있던 탓에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저러고 있는거야? "프리나?" 헤냔은 의아하게 소리치곤 프란 쪽으로 다가갔다. 프란은 양손으로 어깨를 움켜쥐고 가만히 있었다. "왜 그래?" 프란은 얼굴을 바닥을 향한 푹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헤냔은 움찔한다. 프란은, 울 고 있었다. 헤냔은 놀라 프란의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금새 손이 축축해진다. 얼마나 울었던 거지? 프리나 가 울다니, 이렇게 되도록 울다니, 대체? "프리나, 괜찮아? 왜 그러는 거야……." 프란이 울자 헤냔은 자기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헤냔을 향해, 프란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헤냔." "응?" 프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콘솔에, 콘솔에 좀 들렀다 가자. 북부로 가는 길목이니까,그렇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란이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므로 헤냔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 었다. 아일린 탈출 후에도 밝은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던 그녀다. 예삿일이 아님이 분명했다. "알았어. 프리나. ……울지마, 응?"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 프리스트에게서 들었던 말이 계속해서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콘솔의 영주는 여색을 몹시 밝히는 인물이라, 그전에도 여러 명의 여인들을 힘으로 끌고 오곤 했습니다. 워낙 힘이 있는 인물이라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크게 반항한 사람이 있었지요. 영주는 얼마 전 여염집 아낙 에게 손을 뻗쳤습니다. 여자를 강제로 끌고 온 것도 모자라 끝까지 반항한 그 남편을 가두고 죽여버리라고 명령했 다지요. 그런데 그 남편의 아버지가 아들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나섰지 뭡니까?" "설마……?" 프란은 덜리는 심정으로 프리스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프리스트는 매정하게도, 프란이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을 똑똑히 전해주었다. "예, 그 노인이 락케이드입니다." 8장 재회 열이 떨어지자마자 헤냔은 밖으로 나가 마차를 한 대 구입했다. 당장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짐 운반용으로도 안 쓸 것같은 낡은 마차뿐이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마차가 준비되고 나서야 헤냔은 프란을 불렀다. 걱정 때문에 잠 한 숨 자지 못한 프란은 창백한 낯으로 마차에 올랐다. 혹시나 있을 불시의 검문에 대비해, 프란은 마차 안에서도 온몸을 천으로 칭칭 감고 있는 상태였다. 헤냔은 프란이 마차에 앉은 것은 확인한 뒤 마부석에 걸터앉았다. 목적지는 콘솔. 로이네트에 와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도가 있어 찾아가는 데 무리는 없을 듯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헤냔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세게 채찍을 휘둘렀다. 힝,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이 앞발을 흔든다.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차가 출발했다. 프란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년 기사의 가슴은 불타고 있었다. 이미 가정을 이룬 여염집 아낙을 강제로 취한 것도 부족해 그 남편과 시아버지까지 죽이려 들다니. 귀족이란 이름하에 벌어진 그 말도 안 되는 폭력에 헤냔은 가슴 깊이 분노했다. '여기가 카세타였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어!' 헤냔이 흥분하며 말을 모는 동안, 프란은 마차 안에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집사, 행복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린 시절, 로이네트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후에는 길거리에서 구르면서 구걸을 하고, 소매치기도 했다. 방책 넘기에서 최연소로 우승한 후엔 마을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기도 했지. 많은 아이들이 그녀를 따랐고 그녀 역시 자신을 따르는 그 아이들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어린 프리나의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불신이 가득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렸고, 어머니는 날 버렸어! 부모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모두 프리나에게 가혹했다. 혼자 사는 부랑자 꼬맹이에게 어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을을 더럽히고 다닌다며 발길질도 받았다. 손을 내밀어주는 것은 또래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모두 적이야, 나를 속이고 때리고 괴롭히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른은 믿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가씨가 프리나님이군요." 프란은 창밖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 저택에 들어선 날 락케이드가 지어 보였던 그 미소를, 내밀었던 팔의 온기를,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다정하게 몸을 들어 올리던 팔과 부드럽게 주름진 얼굴, 가식 없는 미소, 그가 만들어주었던 따뜻한 고구마 스튜.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도닥여주고, 귀족가의 예절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아무리 버릇없이 굴어도 단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던 집사.기사단에서 상처 입고 돌아오면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갈아주고 세키에 여신께 기도를 드리던 락케이드.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를 생각하며 견뎠다. 아플 때마다 락케이드를 불렀다. 자신을 태어나게 만들어준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았던 락케이드와 다시 만날 날을, 언제나 기다렸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단 한 번,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프란이 입술을 악물고 있는 사이,마차는 한 나절을 달려 콘솔에 도착했다. 헤냔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락케이드라는 사람이 사는 곳을 아느냐고 물었다. 열두번째 행인을 붙잡았을 때, 그는 락케이드가 거주하는 집을 가르쳐주었다. "가엾은 노인네지, 쯧쯧." 콘소르이 영민들은 락케이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시장에서 며느리를 끌고 간데다 아들도 잡혀가고, 거기다가 영주에게 아들 내외를 대신해 죽겠다고 말했으니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헤냔은 지체 없이 행인이 가르쳐준 곳으로 마차를 몰았다. '3번가의 빨간 지붕 2층 집.' 잠시 헤맨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정지했다. 헤냔은 마차의 문을 열며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프리나, 다 왔어." 헤냔은 프란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그 순간 알았다. 뭘 해도 무사태평이던 그녀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던 것이다. 프란은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인 후 마차에서 내려섰다. 프란은 한차례, 락케이드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가 머뭇머뭇 집 앞에 서 망설이고 있자, 보다 못한 헤냔이 나섰다. 그는 프란을 대신해 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당황한 프란이 헤냔을 홱 돌아보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집안에서 이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중저음의 예의바른 목소리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흘러 나왔다. "누구십니까?" 얼굴이 붉어진 채 헤냔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프란의 움직임이 뚝, 거짓말처럼 굳었다. '아아.' 프란은 자리에 주저 앉고 싶었다. 그토록 그리워한 목소리가 저 안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프란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어 있자, 이번에도 헤냔이 대신 답했다. "락케이드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달깍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문이 열렸다, 그 문 사이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주름진 얼굴을 내민다. 그의 얼굴이 프리텐 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늙어 보여서, 프란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프란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려갔다. 이 무슨 해괴한 방문자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는 락케이드의 어깨에, 프란은 거침없이 매달렸다. 갑작스럽게 덮쳐온 프란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노쇠한 락케이드가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만다. 정신 없는 두 사람을 대신해, 헤냔이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집사......" 넘어진 락케이드를 여전히 껴안은 채, 프란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던 락케이드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락케이드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린 프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천이 둘둘 말려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락케이드는 프란의 모자를 벗기고, 천을 풀었다. 그러자, 보였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오렌지색 눈동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성숙해진 이목구비. "......아가씨?" 락케이드의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만지지 않으면 환상이라고 믿게 될 것 같아, 락케이드는 몇 번이고 프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프란은 그런 락케이드의 목에 얼굴을 붇었다. 프란의 어깨가 사정 없이 떨린다. 뒤에 서서 두 사람의 재회를 보고 있던 헤냔은 눈시울이 시큰해져 고개를 돌렸다. 프란과 락케이드는 서로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마치 함께하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보상받으려는 듯 길고, 또 길게 그들은 포옹했다. 프란은 몇 번이고 집사, 집사하고 불렀다. 이 품으로 돌아오기 위해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더욱더 늙어버린 락케이드의 품안으로, 프란은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집사, 나......나......" 처음으로 프란은 마음 놓고 엉엉 울었다. 락케이드는 그런 프란의 어깨를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프란과 락케이드가 서로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탁자에 마주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제 3자인 헤냔이 민망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락케이드는 따뜻한 코코아를 두잔 만들어와 프란과 헤냔에게 건넸다. "고,고맙습니다." 헤냔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코코아를 받아든다. 프란은 코코아를 마시면서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락케이드를 바라보았다. 최악의 상황이건만, 프란은 락케이드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기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스스로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피식 피식 웃음이 샌다. 그런 프란을 보며 락케이드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 입니까, 아가씨? 아일린에서 붙인 방을 봤습니다." "콘솔에도 붙었습......앗, 뜨거!" 당황한 나머지 코코아를 엎지른 헤냔이 벌떡 일어섰다. 프란과 락케이드의 시선이 쏠리자 부끄러워진 헤냔이 수줍은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다시 앉는다. 하지만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직 로이네트 남부에만 현상 전단이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헤냔이다. 락케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프란을 보았다. "3500만의 현상금이 걸렸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프란은 대답 없이 락케이드를 보았다. 곧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나보다 집사가.....콘소르이 영주가......나, 다 들었어." 락케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마른나무처럼 거친 손으로, 그가 프란의 손을 부서져라 움켜쥔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아가씨. 이 늙은 몸이 기껏 몇 년이나 더 살겠습니가. 그저 아가씨가 걱정될 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이야기해보세요." 프란의 눈가가 그렁해진다. 그녀는 다시 팔을 뻗쳐 락케이드에게 안겼다. "알았어, 집사. 다 이야기해줄게.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집사 이야기도, 들려줘야 해." 창밖에는 어느덧 눈이 오고 있었다. 헤냔은 창밖을 내다보는 척하면서, 프란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도 꽤 많았다. "그래서 대마왕이 말이야......응, 그래가지고는 그 느끼 버터가......." 프란은 구김 없이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락케이드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진 뒤였다. 락케이드는 프란의 얼굴을 쓸어주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가씨."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프란은 락케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집사 차례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프리텐 가를 떠난 후, 락케이드는 로이네트 콘솔에 있는 아들의 집에 찾아왔다. 아들은 락케이드가 서른다섯을 넘겨 얻은 늦둥이였다. 락케이드가 프리텐 가의 집사로 들어가면서부터 따로 살았기에, 그들은 편지로만 왕래할 뿐 20년 가까이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락케이드는 아들의 결혼식에도 가보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아들 케이는 갑작스레 찾아온 락케이드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제 아내 베라예요." 케이는 웃으며 베라를 소개했다. 처음 베라를 봤을 때, 락케이드는 깜짝 놀랐다. '내 아들이 대체 무슨 재주로 이런 미인과 결혼했지?' 풍성한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에 깊이 있는 고동색 눈동자를 가진 베라는 빼어난 미모만큼이나 성격도 좋아서, 지내면 지낼수록 '도대체 어떻게? 내 아들한테 무슨 숨겨진 매력이 있기에?'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락케이드였다. 아들에게 미안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아들 부부는 락케이드에게 극진했다. 때문에 락케이드는 이 집에 오기 전, 혈육의 정이 있다 해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들 부부와의 생활이 점차로 익숙해지면서도, 락케이드는 때때로 한숨 속에 밤을 지새우곤 했다. 프리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케이와 함께한 시간보다 프리나와 함께한 시간이 더 길었던 락케이드다. 프리나와 그렇게 이별해야 했던 것은 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로 남아 있었다. "또, 그 아가씨 생각하셨죠?" 케이는 때로 프리나를 질투했다. 아버지가 멍하게 앉아 있다는 것은 곧 그 두고 온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케이는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케이는 아버지의 정을 타인에게 빼앗겨버린 사람 특유의 슬픔을 내비치곤 했다. 그래도 그들은 잘 지냈다. 락케이드가 가진 것 없이 로이네트로 돌아왔건만 케이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아들 부부는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로이네트에서 맛보기 힘든 신선한 야채를 세이피안으로부터 공급받아 소매없자들에게 파는 일이었다. 새벽같이 시장에 나갔던 부부는 저녁 즈음에 돌아오곤 했다. 베라가 힘드실 테니 그만두라고 해도, 락케이드는 가족의 식사를 스스로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사람은 서로에게 점점 더 익숙해졌다. 단란했던 이 가족에게 악몽이 닥친 것은 몇 주 전이었다. 콘솔의 영주 데이메르 공은 그날, 자기 영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시찰해본답시고 시장을 둘러보던 길이었다. 영주가 지나가는 길, 시장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바닥에 엎드려 귀족에 대한 예를 표하고 있을 때, 데이메르의 시선이 베라에게 가서 멎었다. "오호." 데이메르 공은 말을 세웠다. 시장통에서 초라한 옷을 입고 있어도 베라는 눈에 띌 만큼 아름다웠다. 데이메르 공은 원래도 여색을 밝히기로 소문난 자였다.귀족 부인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그의 취미이긴 했으나, 그는 베라의 색다른 매력에 순간적으로 끌렸다. 그는 자신의 호위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여자를 잡아와라!" "......뭐?" 처음에 케이는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몰랐다. 데이메르의 병사 하나가 아내의 팔을 난폭하게 잡아챌 때야, 케이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다. "케이!" 베라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케이는 그런 아내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병사들이 그의 배를 발로 찼다. 지독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케이는 끝까지 저항했다. 몸이 짓밟혀도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끌려가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케이는 귀족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로이네트의 규율조차 잊고 소리를 질렀다. "이 짐승 만도 못한 놈아!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이 귀족의 법도냐!" 참을 수 없어 소리친 그 말이 케이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저놈도 잡아와!" 데이메르는 케이를 가리키며 차가베 말했다. 케이는 단박에 포박당해 끌려가, 데이메르의 감옥에 갇혔다. 남편이 끝까지 저항했듯, 베라 역시 저항했다.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진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짐승 같은 데이메르의 갖은 협박과 구슬림, 겁탈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베라에게 실증이 난 데이메르는 베라 역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한 쌍의 금슬 좋은 부부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거도 모자라, 데이메르는 케이를 처형하겠다고 밝혔다.귀족에게 대들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락케이드가 프란을 바라본다. 헤냔은 이 말도 안되는 사태에 대한 분노로 눈물까지 훔치고 있었다.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락케이드를 마주보았다. 아들 부부의 소문을 남의 입으로 전해 들으며, 집사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자 또 한 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프란은 락케이드의 조용한 눈물을 손으로 훔쳐 주었다. "그래서.....집사가, 아들 대신 죽겠다고 한 거야?" 락케이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프란은 락케이드를 꼭 껴안았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락케이드의 어깨를 적셨다. 그날 새벽,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프란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대로 집사를 두고 갈 수는 없어.' 들켜서 아일린에 끌려가는 한이 있다 해도 프란은 케이와 베라를 도와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문제가 있다. 바로 헤냔이었다. 매일 툴툴대고 있기는 해도 헤냔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함께 있는지 모르는 프란이 아니었다. 기저띾지 할 만큼 심한 고열에 시달리면서까지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헤냔을 두고 혼자서 무슨 일을 벌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기절하겠네.' 프란이 머리를 벅벅 긁었을 때였다. "프리나, 자?" 문이 열리면서 헤냔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 아, 안 잔다. 왜?" 프란은 당황해서 말했다. 헤냔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한순가, 둘의 눈이 마주친다. "프리나, 우린 세이피안의 견습 기사 단원이었지." "엉?"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해서 프란이 인상을 찌푸린다. 확실히,그랬지. 아샤휘 밑에서 둘이서 죽어라고 대련 했던 기억이 더올라 프란은 머쓱해진다. 그때는 그렇게 둘이서 도망 다니는 생활 따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싫은 놈! 절대 이겨 보이고 말겠어!' 라고 생각했던 지난날. 헤냔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프란은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지경이었다. '뜸 들이지 말고 본론을 이야기해, 이자식아!'하고 외치기 직전이 프란을 향해, 헤냔이 겨우 말했다. "......저런 일을 보고도 그냥 간다면 평생 아샤휘님께 부끄러울거야. 무엇보다 아저씨는 네 아버지 같은 분이잖아. 물론 우리 상황이 위험하긴 해도, 순수를 지키는 건......앗!" 헤냔은 갑작스레 자기 손을 움켜쥔 프란 때문에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프리나가 내 손을 잡았어!' 헤냐이 당황하든 말든 프란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헤냔의 손을 아래위로 마구 흔들며 동시에 고개도 끄덕였다. "넌 진짜 좋은 놈이다!" 헤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졌다. 그러나 눈치 없는 프란에게 그런 반응을 캐치해낼 섬세한 신경이 있을 리 없다. "아직 열 안 내렸냐?" 프란은 한 마리 곰처럼 짐짓 헤냔의 머리까지 짚어가며 그렇게 말했고, 헤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강력하게 부정해야만 했다. 그제야 프란은 헤냔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침대를 탁탁 건드렸다. 나란히 앉아서 어떻게 할지 계획이라도 세워보자는 뜻이었지만, 순진한 소년 기사는 이번에도 얼굴이 확 달아올라버렸다. 한참 만에야 헤냔은 쭈뼛대면서 프란의 옆에 앉았다. 프란과 헤냔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뭘 생각했는지 프란이 손바닥을 딱, 치며 헤냔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헤냔이 헉, 하고 엉덩이를 뒤로 빼는데, 프란이 헤냔을 돌아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바람에 헤냔은 이 심각한 상황도 잊고 '아, 프리나는 웃을 때가 제일 좋아'같은 한가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런 헤냔의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며, 프란이 소리쳤다. "헤냔 키에르, 우리 결혼하자!" "음, 엥? 어엉?" 이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헤냔은 쩍, 굳고 말았다. 콘솔의 영주 데이메르는 여색을 밝히기로도 유명했지만, 강한 수하를 들이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로이네트의 혹한은 사람들을 각박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최악의 흉작이 몇 년이고 반복되면, 로이네트에서는 때때로 참상이 일어난다.한 마을이 다른 마을을 약탈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 로이네트의 각 영주들은 다른 국가들에비해 상당히 많은 수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라 해도, 때때로 영지로 들이닥치는 야크를 막기 위해서라도 군인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탐욕스러운 데이메르는 강한 수하에 투자하는 돈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그런 소식을 듣고 로이네트 각지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데이메르의 수하로 들어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사병은 그래서, 로이네트에 있는 영주들의 사병을 통틀어 거의 최상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데이메르 공을 뵙고 싶소." ".......누구요?" 데이메르 저택 앞을 지키고 섰던 경비병은,갑작스레 다가온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 선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얼굴 전체를 천으로 감싸고 있어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여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햇빛 아래 강하게 빛나는 적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말을 건 것은 남자였으므로 남자를 주시해야 당연하건만, 경비병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왠지 천 속에 감춰진 얼굴이 아름다울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여인이다. 그녀가 걸친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디자인의 드레스 때문이었을까. 로이네트의 기후에 알맞게 드레스도 따스한 니트와 앙고라로 짜여있었다. A라인의 심플한 드레스. 경비병이 여자에게 계속 시선을 주고 있자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당장 내 아내에게서 눈을 떼라! 그러지 않는 다면 이 헤냔 키에르, 기사의 명예를 걸고 너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밖에 없다!" 헤냔의 목소리는 당당했지만 어딘지 매우 어색해, 관객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연기 못하는 배우 같아 보였다. 주의 깊에 보았다면 헤냔의 얼굴이 쑥스러움으로 인해 붉어진 것을 볼 수 있었으련만, 경비병은 '기사'라는 말에 놀라 그 기색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는 그저 눈을 크게 떴을 뿐이다. "기, 기사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나는 헤냔 키에르, 카세타의 기사다. 콘솔의 영주 데이메르님꼐 만나 뵙고 싶다고 전하라!" "......그게 뭐냐? 좀 잘해봐. 다 들키겠다." 경비병이 말을 전달하러 간 사이, 프란은 저택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남 속이는 것 못하는 헤냔의 성격상 어설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치다. 일곱 살짜리 꼬마애도 저것보단 낫겠다고 생각하며 프란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지만 프리나......." 헤냔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부인'인 ㅍ란을 돌아보았다. 옅은 흰색의 드레스를 발끝까지 늘어뜨리고 그 위에 흰 숄을 두른 프란은 헤냔이 구해온 기다란 갈색 가발까지 쓰고 있었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옷을 그렇게 입어서인지 프란은 아름다웠다. 고귀한 신분의 아녀자처럼 보일 지경이다. "프리나가 아니라, 레오니아라고 부르랬잖아." 프란을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헛기침을 했다. 하필 그 이름을 사칭하다니. 대마왕의 처소에 네글리제 차림으로 들어왔던 그 여인의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제, 헤냔은 '결혼하자'는 프란의 폭탄선언에 그야말로 어쩔 줄 몰라했다. 무려 20분이나 망설인 끝에 헤냔이 한 말은 이것이었다. "우, 우린 아직 어려. 나,난 아직 성년도 안 되었고......" "......뭐라는 거냐?" 조금만 더 부끄럽게 만들면 펑 소리를 내며 폭발할 것 같은 헤냔의 얼굴을 바라보며 프란은 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괜히 자기까지 부끄러워진 탓이다. 프란은 헤냔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데이메르의 성에 몰래 잠입해서 그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건 무리야. 하지만 좋은 방법이 있지. 우리가 거기로 들어가면 되는 거잖아?" "들어가다니?" 헤냔이 의아하게 되묻고는 눈썹을 깜빡이자, 프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 정도 검술 실력이라면 콘솔 영주라도 탐낼걸." 그리하여 두 사람은 데이메르 저택에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방법을 택한 것이다. 헤냔은 카세타의 기사인데다, 아일린에서도 헤냔과 프란이 같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헤냔만 전면에 드러나면 된다. 부인이 남편을 따라 들어오는것은 자연스러우니, 프란은 헤냔의 부인 노릇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온몸을 죄는 코르셋의 압박도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견딜 만했다.집사를생각하면 드레스가 아니라 네글리제인들 못 입겠는가. '자, 잠깐. 네글리제는 역시 좀 무리일지도.' 괜한 상상에 기분까지 나빠진 프란이 욱하는 소리를 냈을 때, 영주에게 달려갔던 경비병이 돌아왔다. "들어오십시오." '악당 주제에 뭐가 저렇게 멀쩡하게 생겼어?' 데이메르를 처음 본 순간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데이메르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은 채 프란과 헤냔을 불러들였다. 그는 남의 아내를 탐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이려는 잔인한 영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위엄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나이는 오십대쯤 되었을까. 그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헤냔을 보고 있었다. "그래, 카세타의 기사라고 했나?" 헤냔이 우물쭈물 하고 있자 프란이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러자 헤냔이 고개를 숙인다. "예, 헤냔 키에르 입니다." 데이메르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가?" 이번에도 망설이는 헤냔의 옆구리를 프란은 꾹꾹,있는 힘을 다해 눌러줘야 했다. '이건 무슨, 태엽을 감아줘야 움직이는 기계 같잖아!' 헤냔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2년간 저를 용병으로 고용해주실 수 없는가 하여 왔습니다." "기사가 용병이라니?" 데이메르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헤냔이 뭐라고 답하려는 순간, 프란이 입을 열었다. 경비병을 상대할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헤냔의 연극 조 말투'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프란은 한참 목을 가다듬었다. '난 지금 카세타 기사의 조신한 아내인거야!크악, 말도 안돼! 아니야! 조신한 아내라니까!' 자신과의 싸움끝에 프란은 성공했다. 헤냔이 '이게 프리나 목소리 맞아?'하고 놀랄 만큼 고상한 목소리로, 프란은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은 젊은 나이에 카세타의 기사가 되었습니다만,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전 대륙을 떠돌며 실력을 쌓으려 하고 있습니다. 카세타 왕실에서도 이를 배려, 몇년 간의 말미를 주셨답니다." '내가 말해놓고 토할 것 같아. ......답니다, 라니! .......답니다, 라니!' 프란이 울적해하고 있는 동안 데이메르는 헤냔을 쳐다보았다. 헤냔이 어린 나이에 기사가 된 것도 사실이고 카세타 왕실에서 헤냔에게 몇 년간의 말미를 준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데이메르가 카세타에 헤냔이 진짜 기사가 맞는지 물어본다면, 기사단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프란의 말 중에 거짓인 것은 헤냔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뿐이었다. 데이메르는 회가 동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헤냔을 살폈다.젊은 나이에 카세타에 기사씩이나 되었다면 어중이떠중이가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수련을 위해 떠난다는 자에게 왕궁에서 몇년간이나 말미를 줄 정도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왜 하필 내게 왔는가?" 데이메르가 물어왔다. '네가 썩어빠진 탐관오리니까 그렇지! 이 미친 자식!' 속으로 있는 대로 욕을 하면서도, 프란은 자제심을 잃지 않았다. "실전 경험을 쌓는 데는 로이네트만한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훌륭한 영주 밑에 훌륭한 사병이 있는 법이니까요." '양심에 좀 찔릴 거다!'하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으나 데이메르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프란은 그 순간 데이메르를 '양심에 털 난 녀석'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그런가? 특별히 바라는 조건 같은 건?" 데이메르의 질문에, 이번에는 헤냔이 대답했다. 프란이 대답하는 동안 계속해서 속으로 대사를 연습한 헤냔이 '조금은'자연스럽게 말했다. "특별히 바라는 건 없습니다. 다만, 저와 제 처의 거처가 마련되지 않았으니 이 저택에서 살게 해주신다면 감사 하겠습니다.월급도 정찰대원 정도면 충분합니다." 타국의 기사를 용병으로 고용하는 데 이 정도 조건이면 정말 파격적이다. 데이메르는 속으로 주판알을 튕겨본 끝에 그야말로 남는 장사라는 결론을 얻었으나, 짐짓 고민하는 척했다. 그 사이, 그는 슬그머니 프란 쪽에 시선을 주었다. 프란은 흠칫 몸을 굽혔다. 온몸의 털이 거꾸로 곤두서는 것 같은 이 기분 나쁜감각. "그런데 헤냔 키에르라고 했던가? 저 여인은 누구인가?" 기분 나빴던 것은 헤냔도 마찬가지였는지, 헤냔은 처음으로 '어색하지 않게'답했다. "제 아내 입니다! 카세타를 떠나며 여행 중에 만났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지요." 데이메르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프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자네의 아내는 왜 실내에서도 저렇게 천을 얼굴로 가리고 있나?" 두 사람은 흠칫한다. 콘솔에서도 이미 전단이 나붙은 만큼, 얼굴이 보이는 순간 그야말로 끝장이다. 프란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특별한 지병을 앓고 있습니다. 피부병인데, 인공적인 빛조차 들어오면 안 되는 병입니다. 석달간만 얼굴에 어떤 빛도 쪼이지 않으면 낫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온 얼굴에 반점이 나고 진물이 터지고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습니다. 누군가는 꼭 시체가 부패한 모습 같다고 하더군요. 너무도 추한 몰골이라 보여드리면 사흘갈 밥을 못 드실 겁니다. 아주,아주 흉하거든요." "......그,그런가?" 프란의 생생한 거짓 묘사에 데이메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미녀만을 상대하는 데이메르는 그 순간 프란에게 가지고 있던 약간의 흑심을 깨끗이 지워버렸다.이제 완전히 헤냔을 향해 관심을 집중 시키며,데이메르가 눈을 빛냈다. "좋아,그럼 실력을 한 번 테스트해볼까?" 예상치 못한 그 말에 헤냔은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러지요, 하고 답한다, 그는 일국의 기사, 어떤 상대와 만나든 그것이 저 저스티스 카르멘 같은 괴물만 아니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나가세." 데이메르는 널찍한 정원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잠깐 기다리게. 곧 상대가 올 걸세." 헤냔은 그때부터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정원을 살피기 시작했다. 뒤에 큰 나무가 하나 있을 뿐, 로이네트 답게 꽃은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 메마른 풀만이 버석버석하게 그 몸을 뒤틀고 있을 뿐이다. 땅도 건조하기 짝이 없다. 헤냔은 음, 하는 소리를 낸다. 이런 조건이면 미끄러진다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야말로 정정당당하게 요행 없이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이, 프란은 헤냔에게 다가가 숨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꼭 이겨야 돼!" 헤냔이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5분여가 흘렀을 때, 저편 건물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아, 하질리언. 어서오게!잠시 여기 있는 사람과 대련을 해주겠나?" 그렇게 말하며 데이메르가 헤냔을 가리켰다.하질리언이라 불린 남자는 당황한 듯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헤냔은 빛나는 눈으로 하질리언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프란 역시 그자를 재빠르게 탐색한다. 하질리언은 엷은 검은색 눈동자에 짧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었디. 갓 20대가 된 듯,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청년이지만 데이메르가 '테스트 용'으로 내민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하질리언이 군말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평범한 롱소드.헤냔 역시 검을 뽑아든다. 그 순간, 데이메르가 '아!'하는 소리를 내며 하질리언에게 소리쳤다. "하질리언! '그건'사용하지 말고 검으로만 겨뤄주게." '그거라니?' 프란의 눈이 번쩍한다. 프란은 재빠르게 하질리언의 온몸을 다시 한 번 훑었다. 누가 본다면 변태 같다고 생각할 만큼 끈끈한 시선이었으나,천이 가려준 탓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따.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특별한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프란은 슬며시 턱을 긁었다. "걱정 마십시오." 하질리언이 고개를 끄덕인다. 헤냔은 기분이 상했다. 뭔가 숨겨둔 무기가 따로 있는 모양인데 그걸 사용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듯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그래도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싸움은 기사의 자존심이 걸린싸움이 아니다. 오로지 락케이드를 위한 싸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순식간에 공기가 싸해졌다.데이메르와 프란이 멀찍이 물러선다. 헤냔과 하질리언은 한참 동안 서로를 살피며 한 걸음씩을 조용히 옆으로 떼어냈다. 데이메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프란은 달랐다. 프란은 손에 땀을 쥐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마왕같이 말도 안 되게 강한 괴물이 싸우는 것을 볼 때는 '요거 체크해뒀다가 쓸 만 한거 있으면 나도 다으메 써먹어야지!'같은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레벨이 다르기 때문에 흉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냔은 자신과 비슷한 레벨이고, 하질리언도 그와 막상막하일 것 같다. 비슷한 레벨의 사람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살피는 것도 실력향상에 큰 도움이 되는 법이다. '좋아, 가라!' 프란이 주먹을 꾹 쥐었을 때, 처음으로 두 사람이 검을 부딪쳤다. 챙! 헤냔은 단숨에 끝장을 볼 생각인 듯했다. 첫 공격은 하질리언에게 가로막혔으나,바로 다음 순간 몸을 틀며 재차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목을 노린 공격이었다. 그토록 뜸을 들이다 시작한 것치고 과감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질리언은 고개를 돌리며 검을 막았다. 헤냔은 하질리언이 그 사이를 노릴까봐 얼른 뒤로 물러섰다. 허나 하질리언은 그 짧은 사이를 놓치지 않고 바로 압박해 들어왔다. 챙!챙!챙! 두 사람의 검이 정신없이 맞부딪쳤다. 프란은 둘의 검에 완전히 몰입했다. 헤냔이 위로 공격하면 하질리언이 순식간에 몸을 뒤틀며 오히려 역공을 해왔다.헤냔은 당황하지 않고 재빠르게 검을 수직해 공격을 막았다. 그런 식으로 몇 차례씩 두 사람의 공격이 얽혔다. 끽 세로로 들어온 하질리언의 검을, 헤냔은 검을 가로로 들어 간신히 막아냈다. 두 사람의 힘겨루기로 검들이 불협화음을 낸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힘겨루기를 했다. 프란은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승부를 봐, 헤냔!' 프란의 바람과는 다르게, 먼저 움직인 것은 하질리언이었다. 하질리언은 순식간에 팔에서 힘을 뺀 뒤, 잠시 몸이 흔들리는 헤냔의 옆구리를 향해 바람 같이 검을 날렸다. 헤냔!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을 무렵, 헤냔은 놀랍게도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었다. '걸렸다!' 그 모습은 프란에게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분명 헤냔이 그대로 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헤냔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몸을 반쯤 홱 돌린 것이다. 하질리언이 공중을 향해 헛손질을 한 그 순간, 헤냔은 돌아섰던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쐐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헤냔의 검이 곧장 하질리언의 가슴께에 닿았다. 헤냔의 옆구리를 베어낼 생각이었떤 하질리언은 왼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에서, 헤냔의 검에 온전히 자기 심장을 맡긴 꼴이 되고 말았다. "헤.....여보!" '헤냔'이라고 소리쳐 부르려다가 데이메르를 의식, 순식간에 호칭을 바꾼 프란이 단번에 헤냔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헤냔에게만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훌륭하군!" 하질리언이 검을 회수하는 사이, 데이메르가 손바닥을 딱 치며 말했다. 프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손에 땀을 쥐어가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동안 데이메르는 무심한 얼굴로 '빨리 결판 안나나?'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에 대한 조예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저렇게 시치미 뚝 떼고 '네 실력 다 알아봤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니. 프란이 비웃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데이메르는 헤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좋아. 내, 자네를 고용하지." 프란과 헤냔은 동시에 속으로 '아자!' 하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헤냔과 프란은 방을 배정받았다. 부부로 행세하고 있기에 방도 하나였다. 프란은 별 망설임 없이 훌훌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헤냔은 쭈뼛거리며 들어섰다. 아직도 프란과 단 둘이 좁은 공간에 있으면 심장이 속절없이 뛰는 헤냔이었다. 헤냔이 방문을 닫자마자 프란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야, 아깐 진짜 굉장했어! 어떻게 한 거냐?" 쑥스러워진 헤냔은 뺨을 긁적였다. "응? 아니......순식간에 힘을 빼서 빈틈을 노릴까 했는데, 그런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잖아. 그래서 역이용해본 것뿐이야." 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냔의 등을 팡팡 쳤다. 어찌 됐든 헤냔이 이겨서 마냥 기분이 좋기만 한 프란이었다.프란의 환한 얼굴을 보며 헤냔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잘 풀리니까 무섭기까지 해." "뭐가 무섭냐?" 프란이 씩 웃는다. "오래 지체할 필요 없어. 오늘 돌아보고, 내일 당장 그 사람들을 꺼내자." 그렇게 말하며 프란이 드레스 사이에 숨겨두었던 검을 확인했다. 락케이드의 집을 떠날 때, 들키지 않도록 종아리쯤에 붕대로 감아놓았던 검이다. 두 겹으로 된 드레스 첫 겹을 휙 젖히면서 몸을 굽히면, 던번에 검을 꺼내들수 있는 구조다. 프란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던 헤냔이 자신도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데, 프란이 고개를 저었다. "넌 쉬어. 내가 나가볼게." "응? 왜?" 헤냔이 의아한 듯 되묻자 프란이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답했다. "야, 생각해봐라. 처음 들어온 날에 '카세타 기사님'께서 주변을 돌아다니면 혹시 첩자 아닌가, 해서 의심을 살 수도 있잖아. 하지만 나는 그냥 조용한 여자일 뿐이니까 이 밤중에 웬일이냐고 물어도 적당히 둘러댈 수 있다고." "저기 말이야......" 헤냔은 신중히 입슬을 뗐다. "......누가 조용한 여자라고?" 자기가 말해놓고도 쑥스러웠던 프란은 헤냔에게 지적당하자 버럭 화를 냈다. "시끄러워!" ".....프리나, 부끄러워하는구나." "시끄럽다니까!" 프란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프란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왔다. 눈보라를 막기 위해 건물은 폐쇄적인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네개의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맞댄 채 서 있고, 그 미음(ㅁ)자 안의 공간에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구조다. 프란은 감옥이 어디에있을까,생각하며 저택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 귀족가의 감옥이라하면 지하 감옥을 연상하지만, 로이네트의 감옥은 그렇지 않다. 지하 감옥에 가두면 위층이 있는데다 지하라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해 어느 정도 보온이 된다. 그래서 로이네트에서는 감옥을 단층짜리 건물로 따로 만든다. 감옥 전체가 철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수감자가 느낄 추위는,특히 밤에 느낄 추위는 상상을 초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얼어 죽기 전에 구해줘야지. 날도 추운데.' 프란은 발걸음을 옮겨 미음자 구조 바깥으로 향했다. 이 건물 외부에 지하 감옥이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몇걸음이나 옮겼을까. "부인?" '힉!' 갑작스럽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흠칫 몸을 긴장시키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럽게 미소 지으려 애썼다.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모든 고상한 여자들, 만세다!만세!' 그래도 이 일은 락케이드의 행복이 걸린 일이다. 프란은 시온이 보았다면 기절했을 '여성스러운 미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돌아보았더니, 거기엔 검은 눈동자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하질리언! 프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늘 헤냔과 다투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프란은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하필 걸려도 이런 놈이 걸리나,싶어서다. "밤이 늦었는데 웬일이십니까,부인?" 프란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 와보는 집이라 잠이 잘 오지 않아서요." '사실은 졸려 죽을 것 같지만. 너는 어디에 숨어 있따가 튀어나오고 난리야? 빨리 들어가지 못해!' 마음 같아서는 후려 패서라도 쫓아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프란의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질리언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프란이 긴장한다. "부군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 프란은 '부군'이라는 한마디에 순식간에 돋아난 닭살을 수습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남편은 이미 잠들었답니다." 눈 똑바로 뜨고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잠 한숨 안 잘 헤냔이라는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프란의 대답에 하질리언은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면 제가 저택을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안 돼! 싫어! 당장 꺼져! 난 바빠!' "네, 물론이지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은 울고 있다. 속 다른 말 절대 못하는 타입이었는데,이렇게 고분고분한 말투를 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다 대마왕 덕택이다. 언제나 그 앞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속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다보니 이 짓도 그럭저럭 할만한 프란이었다. "부인은 고향이 어디입니까?" 별걸 다 물어본다, 싶으면서도 프란은 대답했다. "세이피안입니다." 사실은 로이네트지만 굳이 사실대로 가르쳐줄 필요 없다고 생각한 프란의 대답에, 하질리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는 로이네트 토박입니다. 세이피안에서 자라셨다니,부럽군요. 한겨울 로이네트의 추위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신 부인께 괴로울 겁니다."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걱정 마셔. 나도 로이네트에서 구를 만큼 구른 몸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프란은 상냥하게 답했다. 하지만 프란의 신경은 점점 더 '으악, 못하겠어!'를 외치고 있었다. 제발 이 하질리언이라는 녀석이 어디 멀리로 갔으면 좋겠다. 안 그런다면 진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프란의 마음을 알리 없는 하질리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프란의 남편'으로 알고 있는 헤냐에게 바로 오늘 졌다는 걸 감안하면 친절한 성격임에 틀림없다. "아, 저택을 설명해드린다는 걸 깜빡 했군요. 저택은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개는 데이메르 공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다른 두 개는 데이메르 공의 식솔들이 거주하는 곳이죠." 이거다, 싶어 프란은 물었다. "식솔? 데이메르 공은 이 저택에 얼마만큼의 부하를 데리고 계신거죠?" "이백 명가량입니다." 거침없이 나온 대답에 프란은 죽어라 한 숨을 내쉬었다. '......많다.' 그런 프란의 한숨을 오해한 하질리언이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사람이 많아 부군의 실력이 파묻힐까 걱정이십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근의 실력은 특출 나니까요." 프란은 그저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알아서 북치고 장구 쳐주니까 편하네, 그려.' "그 외엔 또 어떤 건물이 있죠?" "아, 저 편으로 돌아가면 감옥이 하나 있습니다. 그 너머로 공터가 있고요. 그 옆으론 인위적으로 만든 호수가 있지요.거의 일년내내 얼어붙어 있는 곳이긴 하지만........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안내해드릴까요?" 급해 죽겠는데 얼어붙어 있는 호수 따위 보고 싶을 리 없다. 하지만 설명들은 바에 의하면 감옥을 거쳐 지나야 호수가 보이는 것 같다. 프란은 거침없이 고개를끄덕였다. 하질리언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천 속에서,프란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하질리언은 프란이 아녀자라는 점을 배려해 감옥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둘러가고 있어,프란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프란은 눈을 부지런히 굴리며 감옥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살폈다. 감옥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몇 명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귀조각의 저택인것이다.귀족 저택의 담을 타고 넘어와 감옥에 있는 수감자들을 탈출시킬 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두 일곱명인가.' 프란은 침을 삼켰다. 이정도면 이럭저럭 해볼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덧 호수에 도착해 있었다. 역시, 호수는 꽝꽝 얼어붙어 있다. 저렇게 얼어붙을 거 알면서 호수는 왜 만들었나 싶기는 해도, 비나룬이 얼음 위에 색을 내린 것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프란이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 하질리언이 물어왔다. "아름답지요?" "네." 프란은 처음으로 내숭 없이 답했다.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프란은 숄을 단단히 여미며 에취, 하고 거짓 기침을 했다.이만 돌아가고 싶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하질리언은 '그만 돌아갈까요?'라는 말 대신 뜻밖의 말을 던졌다. "묘한 일이지요. 부인을 처음 봤건만, 이상하게 부인이 익숙합니다." 프란은 순식간에 꽝꽝 언 호수처럼 얼어붙었다. '......이 무슨 느끼 버터 같은 작업 멘트냐.' 그런 프란의 반응을 의식했는지, 하질리언이 당황한 듯 말했다. "아, 뭔가 부인께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부인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 말에 프란이 처음으로 하질리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아는 얼굴일 리가 없지.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하질리언이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부인. 날이 찹니다."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하질리언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순간, 프란 역시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든 탓이다. 프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헤냔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락케이드의 가족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그녀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지하 감옥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할 수가 있어.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챌 테니까. 신속하게 경비병들을 해치우고 나서, 두 사람을 꺼내야 해. 내 작전은 이런데 말이야......." 프란이 속삭이자 헤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다음날, 헤냔은 하질리언의 손에 이끌려 데이메르의 식솔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질리언은 헤냔을 향해 '좋은 전력이 되어주어 고맙다'고 했다. 이 순진한 소년 기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수줍어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프란과 헤냔의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번엔 연기 좀 잘해라." 프란의 말에, 헤냔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늦은 밤, 헤냔과 프란은 감옥을 향해 발을 옮겼다. 당당한 걸음이었다. 헤냔과 프란은 감옥 앞을 지키고 선 경비대원들 앞에서 멈춰섰다. 이 작전의 성공 여부는 헤냔의 연기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냔은 어젯밤 내도록 '너는 발성이 부족해!자, 따라해!'로 시작된 프란의 연기 지도를 받아야 했다. 프란의 연기 역시 아주 훌륭한편은 아니었지만 헤냔에 비해서는 그 실력이 월등했기에 헤냔ㅇ은 울며 겨자 먹기로 프란의 충고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정확히 서른일곱 번 연습했던 대로, 헤냔은 감옥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헤냔 키에르라고 합니다." "아, 오늘 낮에 보았던......." 경비대원들은 반가워하며 헤냔 근처로 모여들었다. "나는 처음 여기에 온거라서.....당신들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내 아내가......" 헤냔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경비대원들의 얼굴을 보자니 찔려서 한 행동이었으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그의 연기에 도움을 주었다. 경비대원들은 아직 나이 어린 이 소년 기사가 수줍어서 이러는구나, 말이 약간 어색한 것도 그 때문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헤냔은 말끝에 프란을 가리켰다. 그러자 경비대원들이 아,하는 소리를 내며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흰 드레스 자락을 이끌며 천천히 걸어왔다. 프란의 손에는 야식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고소한 냄새에 경비대원들의 누이 휘둥그레졌다. "야식을 좀 준비해 왔어요. 일들이 많이 힘드실 텐데 좀 먹고 하시라고요." 프란은 덤으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야아, 이거! 부인이 이렇게 신경도 써주시고 부럽습니다." 병사들은 기뻐하며 프란 주위로 몰려들었다. 프란은 웃는 낯으로 그런 경비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한 대원이 바구니를 건네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을 때,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검으로 정확히 그의 가슴팍에 베어냈다. "......많이 먹고 성불하쇼."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당황할 틈도 없이, 이번엔 헤냔의 검이 움직였다. 헤냔은 프란을 보느라고 자신 쪽에서 등을 돌린 세명의 병사를 그대로 칼로 그었다. 헤냔의 검이 단번에 세명의 병사들을 쓰러뜨린다. 그 사이 프란은 나머지 두 명의 턱에 날아 차기를 먹이고, 그대로 검을 뻗어 한 사람의 복부를 찔렀다. "좋아." 재빠르게 일을 해치운 둘은 감옥 안으로 일곱 명의 경비대원을 질질 끌고 갔다. 곧 감옥 안에 당도한 그들은 야식 바구니 안에서 줄을 꺼냈다.치킨 소스를 잔뜩 묻혀서 고소한 냄새가 나게 만들었지만, 그들이 바구니 안에 담아온 것은 야식이 아니라 기다란 줄이었다. 둘은 그 줄로 일 곱명의 사람을 포박하고 입을 막았다. "읍!읍!" "응?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줄 핥아먹으면 고소한 맛이 날 거야." 프란은 여유롭게 농담까지 흘려가며 일곱 사람의 바지 주머니를 일일이 뒤졌다. 한 남자의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그 사이 헤냔은 감옥 안의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 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케이와 베라, 두명뿐이었다. 베라와 케이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각각 수감되어 있었다. "케이 씨예요?" 헤냔은 얼마나 맞았는지 거의 산송장이 되다시피 한 남자에게로 가서 물었다. 남자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것임이 분명했다. 헤냔은 희미하게나마,그의 얼굴에서 락케이드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헤냔은 프란을 향해 고개를 끋거이며 여기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동시에 그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베라 씨인가요?" 여자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프란은 열쇠를 가지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열 몇개의 열쇠를 연달아 꽂은 끝에 베라의감옥 문이 열렸다. 프란은 케이의감옥 문을 열어주기 위해 저편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 헤냔은 베라가 갇혀 있는 감옥의 문을 힘주어 밀었다. "락케이드 아저씨를 대신해서 구하러 왔어요." 그렇게 말했던 헤냔은, 문이 열린 순간 굳어버렸다. 베라의 몰골이 그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탓이다. 헤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씻기지도 않고 감옥에 넣었던 탓에, 베라의 몸에는 겁탈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옷이 찢겨져 있고, 다리 사이에는 정액이 말라붙어 있다. 헤냔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당장 데이메르르 찾아가 찢어죽이고 싶다. 헤냔의 눈에 동정과,분노와,슬픔이 동시에 인다. "요,용기를 가져요,베라 씨. 이, 이건 그냥 포,폭력이었을 뿐이니까......" 말재간이 없는 헤냔은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뿐이었다. 이건 그냥 일방적인 폭력이라고,당신은 그냥 맞은 것과 똑같다고,절대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헤냔이 몸을 떠는 동안,베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일순, 헤냔은 놀랐다.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베라가 웃어 보였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건 폭력이었어요." "에?" 헤냔은 입을 벌렸다.운신이 힘든지 베라가 손을 내민다. 헤냔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손을 쥐어 그녀가 감옥 밖으로 나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베라는 헤냔의 멍한 얼굴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런 일 따위로 헤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난 괜찮습니다." 헤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정말로 강한 여자다.' 헤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 같은 것보다, 백배 천배는 강해. 그 순간, 딸깍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프란이 케이가 갇혔던 감옥의 문을 연 것이다. 케이는 그대로 달려왔고,베라를 보았다.베라의 눈이 잠시간 흔들렸다. 케이는 그러나 베라의 몸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그는 곧장 팔을 벌렸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베라......" "나도, 케이......." 베라의 확신대로, 케이는 베라를 힘주어 안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태도였다. 헤냔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찡해진다. 이 사건이 두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로 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 둘이라면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토록 마음이 굳은 두 사람이라면, 분명히. 헤냔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두 사람은 포옹한 채 일어섰다. 곧 두 사람이 헤냔과 프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케이는 프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버지와는 무슨......" 그 말에 프란은 콧등을 문질렀다. "당신과 나는 따지고 보면 남매야." "무슨!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 말고 다른 여자를......?" 경악한 듯 케이가 몸을 떨었다. 프란은 그 오해에 푹,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니고, 내가 락케이드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니까.자세한 얘긴 락케이드에게서 듣고.......자, 이젠 빠져나가야지." 프란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이 녀석들이!" 분노한 목소리가 헤냔과 프란의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프란은 깜짝 놀라 앞을 보았고, 그 순간 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하질리언! 프란은 속으로 아뿔싸, 하고 생각한다. '어젯밤 하질리언이 나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어. 저 사람은 매일 그 시간에 감옥 부근을 순찰했던 거다.' 불행히도 하질리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네 사람이 서 있었다. 프란은 검을 들어 자신의 드레스 아랫단을 서걱서걱 잘라냈다. "......뒤로 숨어." 케이와 베라를 뒤로 보낸 뒤, 헤냔과 프란은 자세를 잡았다. 팽팽한 긴자으이 끈을 자르며 먼저 달려온 것은 네 남자였다. 네 남자는 두 팀으로 나뉘어 둘은 헤냔, 둘은 프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리나를 도와줘야 해!' 헤냔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 남자를 재빨리 해치우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헤냔의 실력에 못 미칠지 모르지만 그들은 완벽한 콤비 플레이로 헤냔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원래 한 사람을 집중공격하고 파고들다 보면 다른 한 사람은 틈을 노려 공격하는 것이 상식인데,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듯 양옆에서 헤냔을 공격하고 있었다. 너무 완벽한 콤비 플레이라 헤냔은 왼손을 오른손이 듯 능숙하게 쓰는 한 사람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손발이 기계처럼 잘 맞아!' 헤냔을 상대하는 두 사람은 와벽한 통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헤냔이 검을 휘두르면 한 사람이 막았고,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순식간에 가로 베기를 시도해 들어왔다. 그러면 헤냔은 뒤로 물러서거나 검을 내리며 공격을 피해야 했는데,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처음 공격했떤 사람이 재공격을 해왔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프란 역시 마찬가지의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빌어먹을!' 가장 최악인 것은 아직도 하질리언이 두 사람을 살피고만 있을뿐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하질리언은 헤냔과도 대등하게 실력을 겨루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느 한 팀에 가세해 상황을 종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프란은 하질리언을 계속 신경쓰면서도 두 사람을 상대하고 있어, 힘이 부쳤다. 그때, 하질리언이 움직였다. 그는 프란이 아닌 헤냔 쪽으로 갔다. 프란은 싸우는 와중에도 하질리언이 계산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 두 명이서도 프란을 상대할 수 있지만, 저 두 명이선 헤냔을 상대하기에 무리라는 계산을.그런 생각이 더오르자 프란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지지 않아!' 락케이드에게 저 두사람을 돌려보내기 전에, 그리고 대마왕을 찾아서 모든 이야기를 하기 전엔. 프란은 빠른 움직임으로 두 사람을 막기 시작했다.그것은 프란의 가벼운 몸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장기를 살린 움직임이었다.프란은 두 사람의 사이에 가서 섰다. 헤냔처럼 앞쪽에서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두 사람의 몸 한가운데에 자기 몸을 밀어 넣은것이다. 그 상태로 프란은 다른 한 사람의 어개를 짚고 넘거나 몸을 뒤로 틀거나 하면서, 그 두 사람의 콤비네이션이 깨지도록 유도했다. "제기랄!" 그녀를 상대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소리쳤다. 아까부터 자기와 콤비를 이루고 있던 자와 칼이 부딪쳤던 것이 짜증났던 탓이다. 프란은 옳거니,하며 몸을 날렸다. 일단 이자를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프란이 처음으로 몸을 돌려 그 남자족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던 그 순간이었다. 촤악! 프란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뒤에 있는 사람의 검의 간격까지 계산해서 한 공격이다.앞에 있는 사람을 찌르는 동안, 뒤에 있는 사람은 공격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렇게 계산했는데....... 프란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뒤에 있던 사람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앞에 있던 사람이 뒤로 공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프란은 훌적 왼편으로 몸을 날리며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건?' 작고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표창이다. 프란은 휙 고개를 돌려 하질리언 쪽을 돌아보았다. 하질리언은 헤냔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표창이 보인다. 방금 전 느닷없이 날아온 그 표창은 하질리언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프란의 틈을 노려 표창을 던졌듯이 헤냔을 노리고 있었다. 데이메르가 쓰지 말라고 했던 '그것'이 다름 아닌 저 표창이었던 모양이다. '이익!' 프란은 이를 악물며 등에 박힌 표창을 뽑아냈다. 그러나 앞에 있던 사람이 그 틈에 프란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프란은 그 를 피하기 위해 가볍게 몸을 틀었다. 그런데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악!" 눈앞에 닥친 일을 피하느라, 뒤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뒤에 선 사내는 재빠르게 다가와 프란의 등을 발로 찼다. 방금 전에 표창이 꽂혔던 자리를 정통으로 맞은 프란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사내는 그대로 프란의 등을 다시 한 번 발로 꾹 눌렀다. "프리나!" 헤냔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가까스로 세 사람을 막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헤냔은 이를 악 물었다.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맹세했는데.....왜? '나는 왜!왜 너를 지켜줄 수 없는가! 왜! 나는 너를!' 헤냔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헤냔은 이상한 광경을 보아야했다. 쓰러진 프란에게 다시 한 번 표창을 던지려 하던 하질리언이 깜짝 놀란 듯 손을 위로 치켜 올렸던 것이다. "왜그래, 하질리언!" 프란의 등을 밟고 있던 사내가 히스테릭하게 고함을 질렀다. 하질리언은 대답 없이 빠른 걸음으로 프란 쪽으로 다가왔다.그리고는 프란의 얼굴에 둘러져 있던 베일을 단박에 벗겨냈다. '끝이다!' 헤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3500만케트의 포상금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방금 전 '프리나'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헤냔은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얼굴을 가렸던 천이 벗겨진 프란은 눈을 똑바로 뜨고 하질리언을 노려보았다. 하질리언은 그런 프란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깊고 깊은 시선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없는 적막한 검은 눈동자. 프란이 이를 악 물었을 무렵, 하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진짜, 프리나냐?" 헤냔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아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저 말투는 뭐란 말인가. 프란 역시 눈을 크게 흡뜨고 있었다. 등을 눌린 채로도,프란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너,나를 알아?" 그러자 하질리언이 말없이 상의를 벗엇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건가싶어서 헤냔이 싸우고 있는 도중이었음에도 고개를 쭉뺀다. 외투를 벗은 하질리언은 위옷을 어깨 윗부분까지 단박에 걷어올렸다. 그 순간 프란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하질리언의 팔 윗부분에 새겨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명한 문신이었다. 비나룬을 반 토막 낸 것 같은,상처 같은 반달 문신. 크기는 작았으나 그것은 분명한 형태로 거기에 박혀 있었다. 프란은 다시 한 번 하질리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분명하다,저 문신. 자신의 어깨에도 그것과 똑같은 문신이 있다. 설마?프란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하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이 많이 변하긴 했나 보다. 네가 날 못 알아보는 걸 보니." 하질리언이 훅,숨을 들이마셨다. "나의 숀이 여기에 강림하셨군." "너......?" 하질리언은 웃었다. "나다.하진." "말도 안돼! 너 따위가 1등이라니......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일곱 살 때, 프리나는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누구보다 높은 방책을 넘었다. 길고 지독했던 겨울이 심술을 거두고 봄이 부드럽게 미소짓는 여신의 숨결 날, 로이네트의 아이들은 누구나 심호흡을 하고 마을에 둘러진 단단한 방책을 타고 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날,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가장 높은 방책을 일곱 살 프리나가 아무렇지 않게 휙 넘어버렸다. 숀,방책 넘기의 명수에게만 주어지는 그 칭호. 누구나 그 칭호를 탐냈기에,프리나의 승리를 아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도 안돼! 다시해!" 그중에서 가장 못마땅해 하며 길길이 날뛰었떤 것이 세 살 위의 하진이었다. "그래? 흠.그럼 다시 하지,뭐." 프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러나 수십 번을 해도 하진은 프리나를 이길 수 없었다. 조그마한 프리나는 대체 어디에서 그런 점프가 나오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방책을 넘어버리곤했다. 번번이 방책에 부딪쳐 코가 깨진 하진이 '넘어져라,부딪쳐라,떨어져라!'하고 저주를 퍼붓는 사이,프리나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방책을 넘었다. 아이들은 모두 감탄하며 그런 프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수십 번 해도 이길 수 없었던 하진은 눈물을 머금고 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프리나의 명백한 승리였다. "널 인정할 수 없다!결투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하진은 사사건건 그렇게 외쳐댔다. "......야,방책 넘기에서 졌잖아?" 프란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하진은 뻔뻔하게도 이렇게 응수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뭐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거야? 웃긴 놈일세. ......덤벼!" 하진은 이럭저럭 잘 사는 농민의 아들이었다. 프란은 하진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하진은 끈질기게 '결투다!'를 외쳐댔다. 하지만 백날 해봐야 방책 넘기에서도,목검 대결에서도 하진은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진이 프리나를 인정했던가. 아마도 하진이 잃어버렸던 물건을 프리나가 찾아준 뒤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징징대는 하진을 위해,프리나는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과 함께 사흘 밤낮을 하진의 집 근처를 헤매며 목걸이를 찾아다녔다. "자,이거." 광택으로 번쩍이는 금색 목걸이를 건네며 한 프리나의 말에,하진은 흥,하고 고개를 돌리며 샐쭉하게 말했다. "뭐,조,좋아. ......이,이만하면 대장 자격이 있군." 프리나는 씩 웃었다. "진작 그랬어야지." 그렇게,만났었다. 프란은 멍한 눈으로 하질리언,아니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하진은 그런 프란을 일으켜 세웠다. "......넘길 셈이냐?" 프란이 굳은 얼굴로 묻자,하진은 하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시느이 문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우습게 새긴 것 아니었잖아.응? 프리나." 프란은 아,하고 감탄한다. 그렇다. 어린 날의 자신들은....... 결코 가볍게 이 문신을 새긴 것이아니었다. 헤냔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고 중얼거리는 동안, 하진과 프란이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혹한 "비켈린을 열두 명이나 파견하는 건 시기상 적절하지 않습니다.: 케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나 어투엔 묻어나지 않았으나, 지금 케인은 상당히 난감한 기분이었다. 방금전, 반이 시종을 잡아들이는 데 더 많은 비켈린을 동원하라 명했기 때문이다. 총 서른 여섯명으로 구성된 비켈린을 삼분의 일이나 투입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계승식을 바로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가주가 떠난 저택을 지켜야 할 비켈린을 외부로 돌리라니, 반갑지않다. "전력을 다해 잡으라 하지 않았나." 케인의 염려에도 반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케인은 잠시 망설였으나 뭐라고 대꾸하는 대신 허리를 굽혔다. 반이 명하면, 다른다. 그것이 그의 철칙이다. 프란이 도망간 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그동안, 3500만 케트라는 어마어마한 포상금을 내걸어서인지 몹시도 많은 제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확인해보면 번번히 허위제보라는 것이 드러났다. 확실한 정보만 제공해주면 500만 케트라는 말에 사람들이 조금만 닮았다 싶으면 득달같이 아일린에 연락을 취해온 깨닭이다. 그 탓에 비켈린은 죽어라고 레키슈안으로, 카세타로, 로이네트로, 세이피안 북보로 달려가야 했다. 그나마 최근 콘솔에서 제대로 된 정보가 온 것이 다행이었다. 머리가 갈색이라 얘기하긴 했으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틀림없이 프란 같았다. 염색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콘솔 영주의 감옥에서 한 부부를 탈옥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아이 같습니다." 반은 잠자코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보고가 번번이 거짓으로 드러났기에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 같다. 그런 반의 뒤통수에다 대고, 케인이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함께 다니는 협력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드디어 반이 돌아섰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케인이 말을 이었다. "녹색 머리칼에 적색눈동자를 가진 17새 전후의 소년이라고 합니다. ……곧 전단을 만들 테니 함께 뿌리면……." 반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작아진다. "헤냔 키에르." 반은 씹어뱉듯 그 이름을 불렀다. 녹색머리칼, 적색눈동자, 17세 전후의 소년이 프란과 함께 다니고 있다면 그것은 헤냔 키에르 일 수밖에 없다 반은 처음, 헤냔이 자신에게로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에게 패했던 헤냔은 쓰러지면서 자신의 시종을 향해 미친 듯이 '프리나!'라고 소리쳤었다. 처음보터 헤냔 키에르는 시종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은 주먹을 쥔다. 그때 더 추궁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없었을 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않았던 건 결코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의심했었다. "그 녀석 이름은 헤냔 키에르일 거다. 카세타의 기사지." "가주님의 지인입니까?" 내색은 않았으나 케인은 놀라고있었다. 반은 대답 없이 고개만 한 차례 끄덕였다. 그런 반을 향해, 케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조취 하겠습니다." 케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안정을 취하십시오. 모레면 출발입니다." 케인이 방을 나선다. 나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고 있던 반은 왼손으로 한차례, 자신의 오른팔을 만졌다. '아직도인가!' 반의 미간이 좁혀진다. 팔의 통증은 전혀 멎지 않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 휘두른 하리나스의 집념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반은 불길해진다. 오찌하여 아직도 아물지 않았단 말인가! 당장 모레가 출발일이다. 아일린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승식. 이 일만 끝나면 아일린에서도 더 이상의 소동은 없을것이다. 반(反) 가주적인 성향의 집단들이 힘을 얻는 것도 아직 그가 계승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니. '와, 진찌요? 그것만 끝나면 아일린에선 이제 말썽 없는 거예요?' 여기 있었다면, 시종은 그렇게 방정을 떨어댔을 것이다. 반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을 무렵, 가만히 당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밤인데, 대체 누구인가. 방 안의 침묵을 기다리다 못해 방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르멘 경, 키네세스입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곧 키네세스가 들어섰다. 그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물빛 드레스를 걸친 채, 키네세스는 한 글음씩 바느이 앞으로 다가왔다. "늦은 밤에 송구합니다." 대답 없는 반을 올려다보묘 키네세스가 잠시 입술을 떤다. 아직 그녀는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 허락의 말도, 거절의 말도. 이틀 후면 이 남자는 떠난다. 돌아오면 바로 성인식이다. 긴장 속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으며 키네세스는 단정하게 입술을 떼어냈다. "답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모레, 떠나신다지요." 키네세스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확답을 주세요, 카르멘경." "계승식이군." 이진느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녀는 눈앞에 선 세 사람을 차례차례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진느가 지금 진심으로 웃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들 중 아무도 없었다. 시온이 방 안에 유폐된 후, 이진느는 조용히 칩거하며 자신이 맟은 일만 묵묵히 처리해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이진느의 방 안에 선 두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그런 이진느의 행동이 폭풍전야처럼 두렵게만 느껴졌다. "다들 알고 있겠지? 계승식을 끝낸 가주를 뒤엎는다는 건 불가능 해. 거기다 계승식이 성공하면 시즈는 돌아와 카세타 계집과 결혼 할 거야. 그 계집은 어린 주제에 정사(政事)에 밝다더군. 자, 이제 시즈가 어떤 권력을 업게 될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세 사람이 이진느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진느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시즈가 무서운가?" 도발적인 질분이었으나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즈 아일린은 카르멘의 가주이기도 합니다, 이진느님. 그를 만만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전 대륙을 통틀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진느는 눈 끝을 들어올렸다. 겁쟁이 녀석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대사를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이진느는 그러나 경멸을 속으로 갈무리 한 채,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세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기다리는 가운데, 이진느는 그것을 그들의 앞으로 휙, 하고 던졌다. 세 사람은 당혹하여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한 남자가 물었다. 이진느가 던진 것은 뜻밖에도, 피가 말라붙어있는 지저분한 붕대였다. 이진느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시즈의 방에서 나온 것이지. 내 짐작이 옳다면, 시즈는 부상을 입었어. 그것도 꽤 지독한!"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숨겨진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아일린가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저택 구석구석에 밝은 햇발이 내려서는 가운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평소보다 공들여 저택을 청소한 시녀들이 허리를 편다. 청소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창문부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일린의 혈족들이 저마다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저택의 정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각자긩 저택에 숨어 일만 하던 이들조차 바깥으로 나선 차다. 아일린의 혈족들이 화려하게 차린 탓에 그들이 모인 정원은 거대한 파티장처럼 보였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소음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술을 꾹 다문채 한 사람이 바깥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즈 아일린, 오늘 계승식을 치르기 위해 떠나는 아일린의 하나뿐인 가주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 한 사람이 짧은 감탄사를 냈다.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이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세 사람이 따르고 있다. 아일리느이 혈족들은 모두 그 세 사람을 알고있었다. 한 사람은 케인 칼슈비도, 비켈린의 대장이다. 그리고 흰색 수염을 성성하게 기른 원로워느이 스탕달. 그 뒤를 이어 나온자는 앞선 세 사람 보다는 덜 알려진 자였으나, 여기 모인 자들은 그 사람이 현재 가장 주목받는 아일린의 권력자임을 알고있었다. 리온.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스탕달이 은퇴하면 원로원장을 맡을 남자다. 보통 때는 가주와 그의 선택을 받은 한 사람, 그리고 원로원장만이 함께하는 이 여행에 그가 동행하는 까닭도 리온이 스탕달의 후임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계승식 장소가 원로원장에게만 대대로 알려지기에, 다음 원로우너장을 맡을 그가 그곳을 직접 보아야 했다. "부다 성공하십시오!" 모두가 반을 올려다보며 침묵을 고수하는 가운데, 룬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러자 여태껏 굳어 있던 사람들도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부디 성공을!" "진정한 아일린의 주인이 되어 돌아오십시오!" 반을 지지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아일린의 계승식은 신성한 것이다. 아무리 정적(政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첫째로 지켜져야 할 중요한 규칙이었던 것이다. 돌아오면 여태까지 반을 탐탁찮게 여겼던 사람들도 무릎을 꿇고 진정으로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가 진정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반은 무릎을 꿇은 자신의 혈족들을 냉담한 시선으로 훑었다,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차가운 얼굴이다. 스탕달은 그런 반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얼굴 표정하나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심사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인켈 대장 룬은 여느 때보다도 불타는 눈으로 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케인 쪽으로 옮겨간다. 케인은 반과 마찬가지로 조그므이 표정도 없이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가주에게 선택받는 영광을 얻었으면서도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케인이, 룬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가주님의 계승식에 따라갈 수 있다니. 지지리 운 좋은 놈!' 룬은 질투가 가득한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뽑힐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케인이 얼마만큼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는 룬 자신이 가장 잘 아니까. 섭섭하다는 생각이 아예 없진 않았으나, 룬은 반의 선택을 지지했다. 매일같이 속으로 불을 뿜으면서도 룬은 케인에게 라이벌 의식 이상으로 동지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만큼, 아니 인정하긴 싫지만, 자신 이상으로 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꼭, 꼭 성공하십시오!" 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창공으로 번졌다. 잠시 뒤, 반 일행이 드디어 계승식을 위해 출발했다. "오늘이 계승식이지." 시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한테 잘 하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뭐. 이 지경이니까 할 수 없지없지. ……에고, 언제쯤에야 용서해주려나.' 시온은 피식 웃으면서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6서클 막바지에 있는 당신을 위해 씌어진,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가 쓴 위대한 마법서』라는 유치찬란하고 긴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그였다. 이런 제목을 붙인 스승의 센스에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그 제목을 마냥 비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위대한 천재' 라는 말이 허풍이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잘 짜인 책의 구성 때문이다. 방 안에 유폐된지라 실전 연습을 할 수는 없었지만 책의 설명이 워낙 자세한 탓에 대충 여기에 나오는 마법을 모두 구사할수 있을 것 같았다. 자켄린이 알았다면 시온이 보는 앞에선 '거봐!' 라고 외치곤 위돌아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렇게 몇 페이지나 더 읽었을까. 시온은 심드렁한 얼굴로 책을 내려놓았다. 창문 근처에 어린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3층인데 잘도 들어왔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시온은 그 그림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키냐?" "예, 시온 도련님." 창문 근처에 서 있던 인영이 조그맣게 답했다. 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세라딘은 당분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창문이 열리고 사키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시온은 여전히 사키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 웃으며 세라딘을 대했던 시온이었기에, 사키는 정말로 가슴이 아팠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벌인 일입니다, 시온 도련님! 제발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 말아주세요! 사키는 그렇게 외치고 싶다. 그녀는 피 토하는 심정으로 시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온은 여전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키 역시 시온 못지않게 고집이 셌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장장 두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쥐 안나?" 할 수 없이 시온은 입을 열었다. 사키가 고개를 번쩍 든다. 그 얼굴에 기쁨이 만면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보며 시온이 속으로 쓴 웃음을 머금는다. 레이도 죽었고, 렌도 죽었지. 고립무원의 상태인 세라딘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도 시온은 아직, 세라딘을 용서할 수다 없었다. 그녀의 미소를 무시한 채, 시온은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 사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키가 입을 열었다. "시즈 아일린을 치겠습니다." "……!"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결심했던 시온은,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그 말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 그의 진초록 눈동자가 가늘게 떨린다. 이 무슨……! 오늘은 계승식을 위해 떠난 신성한 날이다. 어떤 경우에도 엄중하게 지켜지던 계승식 아닌가. 그런데 다른 날도 아닌 바로 오늘 그런 말을 꺼내다니!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시온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사키가 차분하게 물었다. "사키!" "정초원과 원로원, 세라딘이 동의했습니다. 위저드리그는 옛날부터 권력 관계에서 논외였지만, 이번엔 자켄린 밀러 건으로 몇몇을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계승식 장소로 세라딘이 이미 떠났습니다. 스탕달 같은 영감과 함께 가는 시즈 아일린 보다야 우리가 먼저 도착할 겁니다." 시온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사키! 계승식 장소는 일급비밀이다! 너희가 그곳을 알고 있을 리가……!" 사키는 미소 지었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이럴수가. 알아낸 것인가! 대체 어떻게! 시온이 얼어 있는 동안, 사키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즈 아일린은 계승식을 치르지 못할 것입니다." 아일린 출발 일주일 째. 반 일행은 달리고 있어싿, 정말로 달리고만 있었다, 단 한마디의 대화조차 없이 오직 달릴 뿐이다. 이 일행은 애초부터 대화라는 게 불가능한 멤버로 구성되어있었다. 일단 반과 케인은 꼭 필요한 겨우우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과묵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이었다, 스탕달은 여든셋의 나이에도 불구 하고 자신이 꽤나 유머감각 풍부한 노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반과도 케인과도 그다지 원활한 관계가 아니라서 굳이 입을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주ㅘ 비켈린 대장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으면서 자기 수하하고만 이야기하는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같아, 스탕달은 리온과도 말을 섞지 않았다, 이래저래 리온은 답답할 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쉬었다 갑시다, 한마디밖에 안 나온 이 멤버들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그가 뭐라고 할 처지는 또 못 되었다. 가주, 원로원장, 비켈린 대장. 모두가 엄청난 직책을 가진 자들이다. 비록 리온이 차기 원로원장이라고는 하나 그들과는 나란히 설 입장은 아닌것이다. 이래저래 리온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케인이 아일린을 떠나 처음으로 입을 연 일주일째의 저녁을, 리온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비켈린 대장이 말했다! 리온의 얼굴에 단번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지긋지긋한 침묵을 깨준 것이 고마웠다. 케인의 질문에 스탕달은 허허롭게 웃었다. "글쎄, 어디로 갈 것 같나?" 원로원장도 말했다! 리온은 눈을 빛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 저 가주뿐이다. '시즈가 말할 리가 없지.' 리온은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사이 안좋은 가주와 원로원장인데 대화를 주고받을리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리온의 예상을 박살내면서, 반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로이네트와의 국경밖에 없다." '헉! 말했어!' 리온이 경악하든 말든 나머지 멤버들은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스탕달이 바로 답했다. "잘 알고 계시는군. 우리는 로이네트로 가는 길이오." 반은 시선을 돌렸다. '로이네트라고?' 이틀전 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로이네트에서 시종으로 짐작되는 사람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고 했었지. 헤냔 키에르로 추정되는 녀석과 함께였다고 하니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을 것이다. 일순, 반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저 먼 바닥에 있던 기억 하나가 치고 올라왔던 탓이다. '나, 나 밥값은 한단 말이야! 아버지가 진 빚을 갚을 때까지 시키는 대로 다할 테니까 죽이지마. 제발 부탁이야! 난 이제 겨우 열여덟! 꽃같이 피어나는 열여덟 살이란 말이다! 열두 살때까지는 뒷골목에서 굴러먹어 더러운 바닥 생활도 다 꿰고 있어. 방책 넘기 알아? 여신의 숨결 날 로이네트에서 하는 방책넘기 말이야. 나, 거기서 우승해서 골목대장도 했었어. 내가 최연소 였다고! 열다섯 땐 아버지를 도와 사업도 해본적 있고…….' 처음 만났을 때, 시종이 했던 말이다. 꽃같이 피어나는 열여덟이 라며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했던, 프란프리텐 그 눈에 어리던 생명력이 재미있어 살려두었다. 허나 시종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상황에 처해 있는지 파악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어려운일을 시켜도 시종은 언제나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맡겨주세요! 같이가요! 그런 말을 하며 줄레 줄레 잘도 따라왔었다. 웃긴 녀석이다. 그러나 언제 미소를 띠었나 싶게, 반은 ㅅㄴ식간에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다. ……성별을 숨게고, 결국은 도망을 친, 하나뿐인 그의 시종. "시즈." 스탕달이 반을 호명했다. 반은 대답 없이 스탕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스탕달이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요 앞이 세이피안의 최북단 도시 유다요. 저기만 지나면 로이네트지." 로이네트가 이렇게 추운 곳이었던가. 리온은 온몸을 벌벌 떨었다, 로이네트에 들어서자마자 방한복을 서서 있는 대로 껴입었건만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앞을 보았다. 시즈 아일린도, 케인 칼슈비도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 스탕달은 그러나 이제 슬슬 체력이 달리는 모양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나이 여든셋의 노인인 것이다. 따듯한 방 안에서 손자 손녀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간간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 로이네트의 강추위 속에 말을 달리고 있으니 체력이 달리지 않을 리 없다. 사키의 예상대로, 스탕달 때문에 반 일행의 전진 속도는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허나 누구도 스탕달을 탓하지는 않았다. 저 노인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에 감사를 보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반의 생일이 첫번째달 19일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로이네트가 가장혹독한 추위를 선사하는 달에 이곳에 와야만 했다. '조금만 일찍태어나거나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다면 좋았을것을.' 밍크목도리 안으로 코를 파뭊으며 스탕달은 중얼거렸다. 차기 원로원장일 때 한번, 원로원장이 되고난 뒤 로웬과 함께 이곳에 왔던 스탕달읻. 운 좋게도 처음 왔을 때는 여신의 숨결이 갓 지나간 때라 꽃이 피는 따스한 날씨에 이동할 수 있었다. '로웬 아일린 때도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지.' 스탕달은 등을 팔로 두드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돌아가면 죽을 만큼 앓아눕거나 죽겠구먼.' 스스로에 대해 악담에 가까운 예언을 들려주면서도 스탕달은 말 모는 것을 게을리 하지않았다. 그래돟 계속 반과 케인에게 따라 잡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힘들면 천천히 가셔도 될 듯합니다." 리온이 반의 눈치를 보며 스탕달에게 말했다. 스탕달은 그러나 고개를 저엇다. 북부로 접어들자 추위는 온몸을 얼릴 듯 네 사람을 감쌌다. 머리를 다충 말린 뒤 밖으로 나가 1초만 있어도 머리끝에 얼음이 얼 정도로 끔찍한 추위였다.. 이런 날씨를 매년 견뎌내야 하는 로이네트의 사람들에게, 리온은 경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추운데도 어떻게 이사 안 가고 여기서 사는거야?' 북부로 갈수록 사람들은 적어졌다. 가뜩이나 인구가 희박한데다가 첫 번째 달이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사라밍 거의 없었다, 그들은 첫번재 달이 오자마자 온집안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되도록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잘못해서 얼어 죽는 일만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북으로만 올라갈 셈입니까?" 케인이 입술을 뗐다. 그러자 스탕달이 미소 지었다. "북으로만 올라갈밖에. 우리가 가는 곳은 북부 끄트머리니까." 순간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적색산맥으로 가는 건가?" 그 말에 스탕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말에 반은 속으로 실소했다,. 시온에게 폭탄을 텔레포트 하라고 말했던 장소가 바로 그 적생산맥의 마지막 눈물이 고이는 골짜기였던 탓이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생각해 그리 명령했었거늘. '어쩌면 계승식 장소까지 파괴되었을지도 모르겠군.' 반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만한 양의 폭탄이면 마지막 눈물이 고이는 골짜기 일부를 날리기에 충분 했을 테니까. 일행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도중에 리온이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려 앓아 누워 일주일 동안 그들의 발목을 잡기는 했으나 그만하면 최선을 다해 움직인 셈이다. 네 사람은 어느덧 지상에 존재하는 어느 곳보다도 추운 곳, 그래서 사람조차 살지 않는 로이네트 적색산맥에 도착해 있었다. 원래 아주 추운 지역에는 눈조차 제대로 내리지 않는 법이다. 로이네트 최북보의 평균 강수량은 심지어 레키슈안의 사막 강수량보다 적을 정도다. 그래도 적색산맥 전체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 년 내내 영하의 기온을 유지하는 이곳에서는 한 번 쌓인 눈이 웬만해선 녹지 않았다. 수천 년간 내린 눈이 쌓이고 쌓여 있는 이곳. "식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군." 스탕달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녹여 마셨다. 세 번째니만치 그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일행은 적색산맥 초입쯤에 자리를 폈다. 모닥불을 피운 채, 별로 사이도 좋지 않은 반과 스탕달 마저 밀착해 않는다. 이것은 사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준비해온 마른 식량들을 불에 구우면서, 스탕달은 고요한 시선으로 하늘을 보았다. 지독하리만치 하얀 이 세계. 여기 온 것도 벌써 세 번째건만 이번에도 심장이 속절없이 뛴다. 반은 건어물을 씹어먹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스탕달은 속으로 생각한다. '시즈, 당신은 강한 사람이지. 역대 어느 가주보다도. 하지만 계승식을 치러낼수 있을까? 후우……. 모를 일이지, 모를 일이야. 너무 강한 것은 때로 그 강함 대문에 쓰러지기도 하니까.' 스탕달은 생각에 잠겼다가, 어느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있다. 시온 아일린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분명 성공할 거야. 이진느 아일린은 아마, 절대 불가능 하겠지.' 밤이 깊었다. 네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라고 해봤자 마지막 도시에서 구입한 침낭과 간이 텐트가 전부였다. 최소한의 추위만을 막은 채, 네 사람은 불 가까이에서 잠들었다. 아무도 살지 않은 곳이기에 딱히 경계할 것도 없었다. 이 추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있다 해도 너무 추워서 공격할 의욕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반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까만 밤이 새벽을 향해 질주해간다. 로이네트 적색산맥, 얼음보다 차가운 산의 찬바람은 네 사람을 있는 대로 후려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케인과 반은 일순 눈을 번쩍뜨고는 동시에 일어섰다. 잠귀가 밝은 스탕달 역시 무슨일인가 하여 일어서고, 리온도 부스스 눈을 뜨고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시즈?" 스탕달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자다 말고 무슨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누가 있다." 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케인이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훑는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몹시 잘 훈련받은…… 제가 읽을 수 있는 건 열셋까지입니다." "열다섯." 반의 말에 케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반이 옳을 것이다. 자신이 읽어내지 못한것까지 읽었을 테니까. 스탕달은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반과 케인의 몸이 활시위라도 당긴듯 팽팽해진다. 두사내는 등을 맞댄 채 사방을 노려 보았다. 자기 자신들을 둥글게 감산 채 다가오는 움직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습을 할 생각인 듯했으나 반과 케인에게 그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 어차피 움직임을 다 느끼고 있는 자에게 기습이란 의미가 없는 법이다.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매복하고 잇던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내밀었다. 반과 케인은 눈을 부릅떳다. 기척 숨기기에 이만한 능력을 발휘 할 정도라면 짐작되는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할 때와 생각한 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른 것이다. 스탕달 역시 경악한 채 눈을 홉떴다, 가장 먼저 뛰어내려온 사키의 얼굴을 본 직후였다. "계승식 장소는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세라딘이!" 벼락처럼 소리를 지른 스탕달은 어느 순간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딱 한명에게, 이 장소를 이야기해준 것이 생각낭 것이다. 스탕달은 떨리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리온, 설마 네놈이!" 푸욱!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반도 케인도 반응할 수 없었다. 스탕달의 뒤에 서 있던 리온의 검은 스탕달이 돌아서자마자 그의 배로 파고 들었다. 리온의 검은 스탕달의 배를 뚫고 그의 피를 마시며 비죽 그 얼굴을 내미렁ㅆ다. 스탕달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리온은 그 앞에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밀이라면, 마지막까지 지켰어야지." 어차피 함께 갈 것, 로이네트 적색산맥이라고 미리 귀띔한 것이 뻘겋게 물든다. 여든셋의 노인을 인정사정없이 찌른 리온은 달음질쳐 세라딘 쪽으로 달려갔다. 반은 당장 리온의 등을 베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사이 세라딘에게 포위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시……마지……눈물……고이는……계승……." 스탕달은 반을 바라보며 띄엄띄엄 말했다.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스탕달은 끝내 눈 속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굳이 다 듣지 않아도 반은 온전한 문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마ㅣ막 눈물이 고이는 골자기가 계승 장소라는 뜻이겠지. 이미 죽었건만, 그래서 더 알아낼 것도 없건만, 반은 눈 위에 엎어진 스탕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영감.' 바로 그 순간, 적이 뛰어내려왔다. 열세 명, 최고로 엄선된 세라딘들이. 시온 아일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어머니를 바라보앗다. 이진느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시온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간입니까?" 일순 시온의 입이 열렸다. 일단 한 번 입이 열리자 그 다음엔 토악질하듯 말이 튀어나온다. 시온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당신도 인간이냐고 물었습니다! 이깟 자리를 차지하기위해 조카의 목숨까지 빼앗는 당신이 인간이냐고!" "인간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이진느의 대답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 차가운 대답에 시온은 주먹이 으스러져라 쥐었다.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어머니마 아니라면, 열 달 동안 배 아파 자신을 낳은 어머니만 아니라면! 아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읽으면서도 이진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마법 따위 할 필요 없다. 넌 계승식을 치르고, 곧 아일린 가주가 될 테니까." "그딴 더러운 자리 필요 없다고 수백 번 말했어!" 시온은 악에 받쳐 소리 소리를 질렀다. 허나 그의 어머니는 강철같이 차가운 피를 가진 인간. 아들의 고함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필요 없든 말든 넌 그 자리를 가지게 된다." "웃기지 마!" 시온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이진느는 그러나 차게 대꾸할 뿐이었다. "어차피 오늘, 시즈는 죽는다. 게다가……." 형님은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시온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시온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보며 이진느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네가 아무리 거부해도 소용없다, 시온아일린. 나는 너를 낳은 어미다. 너는 내 손바닥 위에 있어.' 이진느는 입 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웃을 때면 뭔가 지독한 일을 생각해낼 때라는 것을 시온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지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허나 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넌 그 건방진 금발 시종에게 반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시온의 눈에 일순 빛이 꺼졌다. 갑자기 프란은 왜? 어머니가 도대체 프란에 대한 이야기를 왜? "프란에게 손대면 정말로 당신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무언가 깨달은 듯, 시온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어떤경우에도 이런 말만은 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너저분한 어머니의 음모를 따르는 체스 판의 한 마리 말로 행동한 적도 있다. 어머니의 치부를 손으로 덮으면서, 손바달으로 하늘을 가리면서, 이날 이때까ㅣ 그래도 어머니란 이름을 가진 이 여자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한 번씩 한 번씩 가슴 안의 스스로를, 양심을 ㅜㄱ이면서도 그리했었다. 사촌 형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묵과했었다. 덫을 놓는 일을 도운 적도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반의 몰락을 바랏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속으로는 반이 어머니의 음모를 쳐부수길 바랐다. 그리고 반은 늘 그래왔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번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을 이중으로 만든 채 그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 형과 사랑하는 여자. "내가 그 아이를 죽인다고? 착각하고 있구나, 시온." 시온의 움직임이 뚝 굳었다. 이진느는 그런 시온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오히려 반대다. 네가 아일린의 가주가 된다면, 그 아이를 도로 불러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시온은 몸 전체로 경련했다. 이제야 이진느가 어떤 카드를 내민 것인지 눈치 챈 것이다, 그런 아들의 혼란을 두 눈에 똑바로 담으며 이진느 아일린은 한 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약속하마. 만약 네가 가주 자리를 계승한다면, 내 그 아이를 찾아 정초원이라도 내어주겠다." 반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배신이다. 참혹한 배신. 아니, 정확히 말해 배신은 아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니. 그래도 계승식은 치르게 해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가장 확실한 '증명'이니 그것만은 눈감아 줄 것이라 여겼다. 이것만은 누구도 손대지 않는 신성한 금기라고 믿었다. 허나 이제 알겠다. 그들은 처음부터 시험을 치르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세라딘과 정초원의 입장은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기에 인정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 네가 너이기에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의 검이 날카롭게 세라딘들을 공격한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는 아무것도 담고있지 않았으나 루니아 블레이드는 주인의 분노를 머금은 채 차갑고 뜨겁게 그와 공명하고 있었다. '어디가 부상을 입었다는 거야!' 사키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갓 스무 살이 된 남자의 검이라니! 세라딘은 대륙 최고의 가문 아일린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들여 키운 최고의 검사들로 구성되어있다. 비켈린과도 쌍벽을 이룬다. 한 명 한 명이 어떤 왕국의 기사들보다도 뛰어나다고 자처할 수 있다. 그래도 세라딘들은 매번 망셜였다. 시즈 아일린이 강한 검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비켈린이 자신들 못지 않은 실력자임을 이를 갈면서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번엔 확신이 있었다. 열셋과 둘! 애초부터 승패가 결정되어 있는 게임이다. 비켈린 대장과 가주라고는 하나 세라딘 열셋이 그 둘을 어쩌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시즈는 부상을 입엇다고 했다. 분명, 이즌느가 그렇게 말했다. '미친!' 또 다른 세라딘 들도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잇는 것은 사키와 마찬가지여싿. 다섯과 여덟으로 나뉜 채 그들은 반과 케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케인과 맞먹는 실력자인 레이가 죽지만 않았어도 케인을 처치하는 데 다섯 명이나 동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현 세라딘의 잠정적인 대장인 사키는 케인 쪼겡 다섯을 배정했다. 넉넉잡고 한 배치다. 그런데 케인은 당황하지도 않고 차분히 대응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켈린의 대장이라 해도 세라딘 다섯과 동등하게 겨루다니! 허나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케인이 아니라 이쪽이다. "시즈 아일린!" 사키는 히스테일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사키 자신까지 여덟 몇이 붙어 시작한 싸움이었다. 시즈는 당장 죽어야 했다. 오른팔에 검상을 입었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여덟 명이 밀리는 판국이었다, 이건 정말 정신 나간 미친 검이라고 밖에 설명을 할길이 없다. 반의 표정에는 이 상황에도 미동이 없었다. 반을 상대하는 여덟명의 세라딘들에게 그것은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제발, 절망하는 표정을 지어! 죽을 듯이 슬픈 눈을 해라!'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다르게 반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디만 미간이 조금, 좁혀져 있을 뿐이다. 반은 어느 때보다 집중해 있었다. 이런 실력자들과 한꺼번에 싸우는 것은 반도 처음이다. 하지만 반은 그답게 차분하게 싸움에 임했다, 검의 간격들을 순식간에 계산해 내며 싸우는 반의 검과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사키는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쐐액! 반의 검은 착실하게 한 사람씩 노렸다. 온 사방을 다 둘러싸고 공격하고 있는데도 반에게는 사각지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틈이 없다. 오른편에 서 있었는데, 순식간에 왼편에 선다. 휘두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찌르고 있다. 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치고 올라온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고 검을 휘둘렀는데 이미 거기에 없다. "아악!" 일순, 적막을 깨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반의 검이 세라딘 하나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동시에 케인 쪽에서도 비명이 터져나왔다. 케인 역시 한 명을 해치웠다. 케인과 반은 그러나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이 상황에서 던져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얼른 해치우고 가주님을!' '얼른 끝내고 케인을!' 두 남자는 가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끝내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곱으로 줄어든 검이 동시에 반의 목을 노렸다. 반은 유연하게 몸을 틀어 그 검을 피하고는, 순식간에 점프해 한 세라딘의 몸에 검이 박힌다. 두 쪽으로 적의 목을 가를 시간조차 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격필살! 죽음의 공격조차 신속하고, 틈 없이 해야 한다. 여섯으로 줄어든 세라딘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건 괴물이야! 시즈 아일린은 미쳤어!" 그렇게 생각한 것이 마지믹 이었다. 한 세라딘의 심장에 정확히 반의 검이 박힌다. 다섯의 공격이 동시에 반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반은 다섯개의 검을 한 번에 마주하며 그것들을 한꺼번에 쳐냈다. 그러기 무섭게, 반이 한 세라딘을 향해 검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 적의 몸에 검으 박아 넣은 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오른쪽 팔에 갑자기 엄청난 통증이 엄습했다. 처음 싸울때 부터 통증은 잇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팔의 상처가 터진 것이다. '틈이다!' 그 순간 노출된 틈을 사키는 놓치지 않았다. 때마침 반의 오른편에 서 있던 사키는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반의 오른팔을 공격했다. 반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느 부분인지는 몰랐던 사키다. 하지만 그녀는 운이 좋았다. 여태까지 그녀를 향해 수없이 달려들었던 불운이 그 한 번의 행운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느꼈을 정도로. 사키의 검은 아주 살짝, 반의 팔을 스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터졌었던 상처에서는 곧장 피가 새어나왔다.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내 무표정했던 반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나타난 것은. 아주 잠시 나타낫다가 사라졌을 뿐이지만, 사키는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난감함, 혹은 약간의 불안함이 드러난 얼굴이었다. 시즈 아일린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사키의 얼굴이 곧장 펴졌다. "오른팔을 공격해! 시즈는 상처를 입었다!" 네 명의 세라딘이 늑대 떼처름 달려들어 반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심장도 머리도 아닌, 바로 그곳, 반의 팔을 향한 공격이다. 한편 케인은, 세번째 세라딘을 막 처치한 참이었다. "과연 비켈린의 대장이군." 그를 대적하고 있던 세라딘 여자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다섯에서 둘로 줄어든 세라딘들의 호흡은 급박해져 있었다. 그러나 케인에게 당한 세명이 움직일 수없게 되거나 죽으면서 아무 일도 못했던것은 아니었다. 원래 세라딘과 비켈린은 대등한 단체. 아무리 대장이라고는 해도 5대 1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케인의 온몸에는 자잘한 검생들과 더불러 치명적인 상처가 나있었다. 두 번째로 쓰러진 세라딘이 죽기직전 케인의 복부에 검을 박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아까부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서서히 압박을 해가면 특별한 재공격이 없어도 충분히 죽을만한 상처였다. 케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그대로다. 하지만 그는 아까부터 강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예감이라기 보다는 확신. 그는 아마도 오늘 이곳에서 세라딘과 싸우다 죽을 것이다. '죽어도 좋다!' 케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케인의 눈에서 번쩍 하고 빛이낫다. 약간의 여유를 갖고 공격에 임하고 있던 두 세라딘은 일순 온몸으로 긴장했다. '죽음을 각오했다!'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케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비장한 기운에 세라딘 둘이 침을 삼킨다. 이런 싸움에서는 기 싸움에서 밀리면 그 순간 패배다. 케인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둘로 준 세라딘들 각각은 좌우에서 케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케인은 순식간에 왼편으로 몸을 틀어 들어온 공격을 피하고, 공격을 하느라 자기앞으로 몸을 내민 세라딘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냈다. 남은 하나의 세라딘이 당혹하면서도 검을 휘두른 순간, 케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큭!" 케인을 상대하고 있던 마지막 세라딘은 케인의 어깨에 검을 박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심장을 찌른 케인의 검도 함께 봐야 했다. 있는 힘껏 마지막까지 케인의 어깨에 검을 밀어넣었지만 , 케인은 끄떡도 하징 낳았다. 남은 세라딘 마저 죽은 뒤 케인은 자신의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 냈다. 피가 샌다 . 격한 움직임 때문에 그의 배에서도 쿨럭 피가 흐른다. '나는 죽어도 좋다, 하지만, 가주님만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일순 케인의 머릿속으로 감상적인 생각들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반을 향해 날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도로 다가가고 있는 그 짧은 순간, 케인의 머릿속에선 십년도 더된 기억들이 일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있잖아, 케인. 아버지는 날 싫어하나?" 그때는 반이 어렸다. 루이사 카르멘 밑에서 엄격하게 검을배워 그 어린 나이에도 천재로 이름났던 반이다. 그래도 그때는 아직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루이사 카르멘과 로웬 아일린의 그늘 밑에서 편히 쉴수 있는 어린애. 그때 반이 했던 말이나 그가 저질렀던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지금 누군가에게 얘기한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주인은 그만큼이나 변했다. 변해서, 저토록 강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계실 겁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말이 없던 자신이었디. 조금 더 다정한 말로 달래줄 수도 있었는데, 고작 그렇게 말한 것이 다였다. 그래도 이 과묵한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케인을 잘 따랐다. 어머니를 제외하면 케인을 가장 좋아했을 정도다. 어릴 때 반은 얼마나 귀여웠던가. 아직 케인이 십대 후반일 때, 반은 케인의 손을 잡고 달랑달랑 걸으며 미소 짓곤했었다. "아버지가 날 싫어해도 괜찮아. 케인은 날 좋아하니까." 그러나 반의 평화로운 유년기는 갑자기 날아든 재앙과 함께 끝나버렸다. 반이 열네 살 되던 해, 양친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던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덜덜 떨던 반의 손을 잡고 강해져야 한다고 윽박질렀던 것은 케인이었다. "똑바로 들어라!" 생전 처음으로 그때, 반말을 했었다. 온 얼굴이 퉁퉁 부어 자신의 옷자락에 매달리던 어린아이를 온 힘을 다해 떼어내며 소리쳤었다. 아이는 얼마나 놀랐던지 딸꾹질까지 했다. 왜 그래, 케인, 하며 순식간에 둥그레지던 그 겁먹은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 눈에 가득 담긴 그 놀람, 그 상처. 얼마나 아팠을까. 한순간 양친을 잃은 아이에게 그것은 얼마나 큰 슬픔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을 케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나, 안 울었다.……잘 했지, 케인?" 양친의 장례식, 열네 살의 반은 울지 않았다. 그 어린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보면서도 키인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오직 반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 반은 케인의 등을 치며 하염없이 울었다.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그러나 그가 눈물을 보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 다시, 반은 울지 않았다. 대신 눈물과 함께 웃음도 사라졌다. 카르멘 가에서도 아일린 가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그는 반이라는 이름마저 버렸다. 자기 앞으로 날아오는 검에, 케인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케인은 있는 힘을 다해 그 검을 막았다. 적 너머에 보이는 주인은 피투성이였다, 남은 세라딘은 셋. 자신쪽으로 한 명을 돌렸으니, 이제 반이 맡고 있는 것은 두 명이다. 가슴 아프게도, 반은 밀리고 있었다. 팔의 상처 때문이었다. '무겁다.' 반은 속으로 생각했다.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 오른팔에는 이미 감각마저 없었다. 아까 전엔 배와 어깨와 다리에도 검이 들어왔었다. 팔의 상처만 아니었던들, 이 지경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둘 남은 세라딘을 바라보았다. 케인이 비틀거리며 한 명의 세라딘을 상대하는 것이 그 너머로 보인다. 그러나 반은 애써 시선을 돌린다. 이겨야 한다. 이기고 나서 도와주면 된다. 지금 성급하게 저기로 뛰어들면 지는 거다. 반을 상대하는 남은 두 명 중엔 사키도 있었다. 반의 온몸이 엉망진창인 것과 달리 사키는 비교적 멀쩡했다 다른 세라딘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이다. 사키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시즈 아일린을 베어야 해!' 반의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처음 보여주었던 그 악마 같은 움직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저기 있는 것은 지독시 상처입은 한 명의 검사일 뿐이다. 사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었는지, 반이 사키가 아닌 다른 세라딘을 베어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키는 바로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반이 자신이 아닌 남은 한 명을 베는 그 순간을. 적을 벨때에는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 해도 틈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반은 지쳐있었다. 사키는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사키는 반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인다. 반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자의 몸에 검을 박아 넣은 상태였기에. 사키의 입술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케인 칼슈비도!" 푸욱! 검은 한 자나 들어갔다. 사키의 눈 만큼이나, 반의 눈도 커져 있었다. 반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내의 등을 보았다. 내색은 않았으나 언제나 든든하게 여겼던 등이다. 케인 칼슈비도, 비켈린의 대장,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 허나 무엇보다도,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그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가끔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던 사내. 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정지했다. 더 이상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 했다. 그러나 케인의 단호한 외침이 반을 깨웠다. 검이 한자나 들어간 상태로도, 케인은 소리쳤다. "……가주!" 그 부름에, 바느이 어깨가 떨렸다.정신을 차린 듯 반은 단번에 달려 나가, 케인의 몸에 박힌 검을 아직도 뽑아내지 못하고 있는 사키의 옆으로 가서 섰다. 사키는 미친 듯이 검을 뽑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검이 복부에 박힌 케인이 그 상태로도 그녀의 검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케인은 손가락이 잘릴 것 같은 통증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벌써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반은 신경지러적으로 케인의 다리를 쳐내고 있는 사키의 목을 단번에 베었다. 춤을 추는 것 같이 그의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렸고, 검이 힘차게 호선을 그었다. "헉!" 뒤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리온은 반이 마지막 남은 세라딘을 베는 순간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은 리온을 쫓지 않았다. 그는 급하게 케인의 옆으로 왔다. 케인의 몸은 경련하고 있었다. 반은 알 수 있었다. 케인이 알고 있듯이. 이제 곧 케인은 죽는다. 수분, 아니 수초 후 에, 그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는 죽는다. "반……." 그때, 거짓말처럼 케인이 입을열었다. 반은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양친이 죽은 후 케인은 저 이름으로 반을 부른 적이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 부를만큼, 그만큼이나 부르고 싶었다면 그렇다고 이야기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둘이 잇는 자리에서 나마 허락했을 것이다. 반은 케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마지막을 자신이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인의 목소리는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만 케인의 입술이 조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반은 용케 그것을 알아들었다. '당신이, 다시, 웃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입술의 움직임마저 완전히 멈췄다. 정적. 정적. 정적. 끔찍한 정적이 반의 온몸을 휘감았다. "……케인." 반은 케인의 몸을 흔들었다.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은 다시 한 번 케인을 불렀다. "케인 칼슈비도." 언제나 네, 하고 고개 숙이던 케인은 없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다 반은 케인의 열린 눈을 닫아주었다. 그의 수하는 그렇게 조용히, 너무도 그다운 방식으로 죽었다. "으아아아아아!" 적색산맥 구석구석, 반의 절규가 번졌다. 반은 걷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열네 구의 시체가 잇는 곳을 빠져나와, 반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걸었다. 케인은 무엇을 위해 죽었던 것일까. 어차피 이 상처를 입고 살 수있는 방법은 없다. 민가를 찾으려면 말을 타고 나흘을 내려가야 한다. 그 사이 얼어죽거나 출혈과다로 죽을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반은 생각했다. 시온은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었다. 피로 피를 막는 그 방식이 언젠가는 당신을 그 자리에서 밀어낼 거라 애송이 소년 기사도 말한 바 있다. 허나 그것이 반의 생존방식이었다. 먹지 않으면 먹히니까! 케인이 그렇게 말했고, 그 스스로도 몸으로 깨달았다. 그래, 강해져야 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반은 자리에 앉았다. 추웠다. 우스운 일이다. '왜?' 어째서 지금, 그 얼굴이 생각나는지 묻고 싶었다. 너무도 선명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얼굴, 웃는 얼굴, 화내는 얼굴, 찌푸리는 얼굴 ,울고 있던 얼굴, 간절한 얼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 어머니 루이사가 아니다. 아버지 로웬이 아니다. '프란 프리텐.'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자 거짓말 처름 그 이름이 떠올랐다. '쳐낸 건 너다. 저스티스 카르멘! 시즈 아일린! 쳐낸가지에 미련 두지 마라! 너를 기만했다! 그런 녀석을 그대로 곁에 두어선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아아, 하지만. 그 얼굴은 그날 이후 끈덕지게 그를 괴롭혔다. 피를 흘리던 그 손, 이쪽을 향해 뻗던 팔. 어떻게 하면 잊을수 있을까 싶어 술을 마셨다. 얼굴을 마주하면 참지 못하고 베어버릴까 봐 감옥에도 가지 못했다. 그깟 시종 하나 무어 대수라고! 허나 그 시종 하나가 조금씩 그를 망가뜨렸다. 표정이 풍부한 그 얼굴이 꿈마다 불쑥 솟아나 '같이 가요!' 외쳤다. 호기심은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나. 살아 있을까. 누군가가 거둬간 것은 확실했다. 비켈린을 풀어도 찾지 못했다.죽었다면 시체를 들고왔을 비켈린도 불가능했다면, 분명 살아 있겟지. 아니, 살아 있어야 한다. 로이네트에서 헤냔 키에르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반으로 있었다면 용서했을 거다. 그 몸을 묶고 있던 줄을 풀어주었을 거다.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거다. 허나, 시즈 아일린이기에 용서할 수 없었다. 수하들이 눈앞에 있었기에 용서할 수 없었다. 저스티스 카르멘으로 처음 만났기에 용서할 수 없었다. 반은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구출을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혹한의 추위, 누구도 살지 않는 이곳. 반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은 이 근방에서 레이니아를 만났다고 했다. 그의 천사, 그의 연인, 그의 아내, 그의 모든것. 허나 그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움을 바라지도 않는다. 반은 프란의 얼굴을 옆으로 밀어내고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냈다. 다정하게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 '……지금, 갑니다.' 그때였다. 저벅 저편에서 발소리가 났다. 반은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었다. '리온인가?' 용기를 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그에겐 리온같이 허약한 인간 하나 조차 막을 힘이 없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다. 발걸음소리는 점차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단칼에 죽여라. 미련 없이.고통없이. 허나 인영이 눈에 보였을 무렵, 반의 심장은 덜컥 소리를 내며 멎는 느낌이었다. 환영이다. 이건 환영이다. 허나, 금발이 보인다. 오렌지 빛이 섞인 화사한 금발. 석양을 받으면 저 머리카락이 유독 아름답게 반짝인다는 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언제나 듬북 장난기를 머금곤 하던 오렌지색 눈동자.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여기에 있을리가 없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반은 떨리는 눈으로 눈앞에 선 존재를 보았다. "……대마왕?" 목소리가 들린것은 그 순간이었다 <6권에 계속> 제 1장 전설의 땅 이진느는 눈앞의 사내, 리온을 보았다. 리온은 아무도 모르게 이진느를 찾아온 차였다. 그런데 무 슨 일인지 리온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그 눈.' 리온은 섬뜩한 느낌에 양팔을 감쌌다. 사키를 베어낸 직후 자신과 마주쳤던 시즈 아일린의 눈동자가 지금까지도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 눈 때문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말을 달려 로이네트 국경을 넘었을 때에야 시즈의 육체에도 한계가 왔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온은 이진느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이진느는 리온의 앞에 앉아 그를 똑바로 보았다. 일순, 이진느가 미소 지었다. '아름다워.' 그 웃음에 리온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는다. 여태까지 리온을 압도하고 있던 시즈의 환영이 순 식간에 사라진다. 이진느 아일린. 곧 성년을 맞이할 남자를 아들로 두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 큼 고혹적인 여자다. 리온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강박적으로 되새겼다. 리온이라고 해서 원로원, 나아가 아 일린의 정통을 배반하는 이번일이 쉬웠을 리 없다. 하지만 저 싸늘한 이진느가 자신에게 웃어주질 않는가. 아마도 자신은 전대 원로원장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리온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 그 얼굴은 다시금 굳고 만다. "어땠습니까?" "이진느님이 봤어야 합니다." 리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즈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비장한 말투였으나 듣고 있는 이진느는 긴장하지 않았다. 리온이 살아 돌아온 것 하나로 그녀는 모든 것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갔던 세라딘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파견된 세라딘 은 모조리 죽었을 것이고, 리온이 멀쩡한 걸 보면 시즈 역시 죽었을 것이다. 박빙의 승부였나 보군. 이진느는 별다른 감흥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세라딘 한 둘쯤은 살 아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용할 장기 말이 많이 줄었다. "시즈는 확실히 죽었겠지요?" 리온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시즈의 최후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시즈는 죽었을 것이다.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어. 게다가 시즈의 최후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하면 문책을 당하겠지 ?' 잠깐 생각하다 말고 리온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틀림없이 죽었습니다." 그 말에 이진느는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좋아요. 시체를 찾아와야겠군요. 일단은 청소를 시작합시다." * * * '추워.' 헤냔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한 눈을 팔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나무를 쪼개기 시작했다. 장작 패는 일이 처음이었기에 헤냔은 자꾸 실수를 했다. 그래도 그가 누군가. 맡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성심성의껏 처리하는 헤냔 키에르다 . 실수를 하면서도 어찌나 열심히 장작을 팼는지 헤냔의 관자놀이에선 이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 고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헤냔을 보면서 비죽이 웃는 사람이 있다. 하질리언이다. "이봐, 도련님." 하질리언은 적당히 웃음을 섞어 헤냔을 불렀다. "누가 도련님입니까!" 당연하지만, 헤냔은 화를 냈다.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난 기사고 검사란 말입니다! 도련님 취급 받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헤냔 딴에는 진지하게 한 말이었건만 하질리언은 별 웃긴 소리 다 들어보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너, 귀족이잖아." 하질리언은 '미혼의 귀족 남자 = 당연히 도련님'이라는 등식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얼굴이었다. '뭐지! 저 확신으로 가득한 눈은!' 헤냔의 등 뒤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하질리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대체 왜 화를 내는 건데? 도련님이라, 얼마나 좋아? 응?" "아니, 그러니까, 난 당신처럼 검을 다루는 남자로, 샌님 취급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내가 언제 샌님이라 그랬어? 도련님이라 그랬지, 도련님!" 헤냔은 기가 찼다. 악의가 있는 것 같으면 화라도 내겠는데 하질리언에게선 악의는커녕 장난기조 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이페이스. "하여간 난 도련님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도대체 몇번을 말해요?" 헤냔은 고개를 팩 돌리고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그걸 본 하질리언이 혀를 끌끌 찼다. "진짜 못하네. 무슨 장작 하나 패는데 그렇게 용을 써? 별것 아닌 일 너무 열심히 하면 웃긴 걸 넘어 추하기까지 한 거 알지?" "그럼 제 모습이 지금 추하단 말입니까!" "응." "……웬만하면 망설이는 척이라도 좀 해주시죠." 추하다는 말에 어깨가 축 쳐지는 헤냔을 보며, 하질리언은 손가락을 두둑 꺾었다. "편안하게, 몸 전체의 반동을 이용해서 패봐. 검 휘두를 때는 잘하더니. ……흐응. 역시 어쩔 수 없다니까, 도련님은." 가뜩이나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있던 헤냔은 마지막 한 마디에 도끼를 쾅, 내려 놓고 말았다. "아, 글쎄! 난 도련님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새되게 소리친 헤냔의 말을 귓등으로 슬쩍 흘려 넘기며, 하질리언은 어느새 경쾌하게 장작 을 패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헤냔은 볼이 뿌루퉁해져 고개를 돌렸다. "근데 도련님." "아악!" 도대체가 내 말은 그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는 겁니까, 하질리언 씨! 헤냔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 나, 하질리언이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 "혹시 프리나 좋아해?" 휘청. 헤냔은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뎠다. 이건 또 무슨 기습 공격이란 말인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진 주제에 하질리언은 태연자약한 얼굴이다. 프리나보다 세 살 위라고 했으니, 헤냔 자신보다는 네 살 위다. 스물두 살.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나이차도 아니다. 그런데도 헤냔은 말을 섞을수록 하질리언이 자기보다 훨씬 높은 연배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그의 페이스에 일방적으로 말려들기 때문인지도 모 른다. "무, 무슨, 가, 갑자기……." 빨개진 헤냔의 얼굴을 보며 하질리언은 웃을 뻔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고요!' 헤냔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릴 때부터 프리나 노리는 녀석들이 많긴 했지. 우리 마을에 있던 남자 녀석들 첫사랑은 거의 예외 없이 프리나야. 심지어 여자 애들 중에서도 있어." "하질리언 씨도?" 헤냔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 말에 하질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프리나는 나한테 있어 꼭 어릴 적 잃어버린 남, 동, 생, 같은 존재지. 좋아하긴 하지만 전혀, 정 말 전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아. 내가 선호하는 건 매력적인 누님 스타일이라고. 마음 푹 놔, 도 련님." 또 도련님이라고 불렸지만 헤냔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헤냔이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하질리언이 다시 도끼를 들었다. 머쓱해진 헤냔도 도끼를 집어 든다. 퍽, 퍽, 장작 패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린다. 이미 그들 주위에는 일주일의 보온을 책임질 나무 들이 쌓여 있었건만 두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 안에는 환자가 있어, 실내를 후끈후끈 하게 만들만큼 많은 장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질리언은 이번에도 기습하듯 헤냔에게 물었다. "근데, 누구야?" 헤냔이 멈칫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렇게 죽어라 장작 패는 것도 저 사람 때문이잖아." 하질리언은 턱짓으로 왼편에 있는 작은 집을 가리켰다. * * * 프란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하질리언은 돌아갈 곳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 란이나 헤냔의 소재가 불명확한것에 비해 하질리언은 데이메르 저택에서 몇 달이나 일을 해왔던 것 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모든 죄를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라고 말했던 만큼, 하질리언이 할 수 있는 일은 프란을 따라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락케이드는 그들과 함께 오지 않았다. "저희는 아가씨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다." 케이와 베라를 데려갔을 때, 락케이드는 그렇게 말했다. 하질리언은 심드렁하게, '뭐야, 구해줬으 니 이제 일 다 봤다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프란은 락 케이드의 손을 꾹 잡으며 말했던 것이다. "괜찮아. 나랑 같이 가." 프란은 락케이드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짐이 될까봐 염려해서 그러는 거지. 프란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락케이드는 그런 프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 게 쓸어 넘겨주었다. "아가씨는 아일린의 도망자지요." 그 말에 하질리언의 인상이 또 한 번 굳었다. '저 영감, 아일린의 도망자랑 함께 가면 자기가 더 손해다 이거 아냐?' 사정을 알 리 없는 하질리언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이, 락케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저희를 구해줬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아가씨는 어떻게 됩니까?" 하질리언조차 그 말엔 움찔했다. "늙은 저까지 함께 가면 아가씨가 움직이기도 힘드실 겁니다. ……전 괜찮습니다, 아가씨. 여기엔 케이의 친구도 있고 저희를 숨겨줄 이웃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도망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프란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락케이드의 주름진 얼굴을 있는 힘을 다헤 바라보았을 뿐이 다. 케이와 베라는 조용히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가씨가 저 분이군요.' 케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피를 나눈 자신보다 프리텐 가의 아가씨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었 다.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왜 아버지가 그토록 저 아가씨를 아꼈는지 알 것 같았다. 프란은 락케이드의 말을 조금도 오해하지 않았다. 프란 자신의 감정이 올곧게, 한 점 망설임도 없 이 락케이드를 사랑하고 있기에, 락케이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피는 이어져 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연대감은 말할 수 없이 강했다. "집사." 한참이나 말없이 락케이드를 바라보고 있던 프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헤냔은 초조하게 망을 보 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데이메르의 수하들이 몰려나올지 모르기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은 락케이드를 향해, 놀랍게도, 활짝 웃어 보였다. "나 믿지?" 나 믿지? 라니. 하질리언은 의아한 표정으로 프란을 보았다. 락케이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프리텐 가의 하나 뿐인 자손이고……." 프란은 피식, 웃었다. 그건 이미 약발 다 떨어진 말이잖아, 라고 대꾸라도 할 듯이. "그 성(姓)이 없어도 빛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락케이드는 프란을 안았다. 노쇠한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당신은 내 아이니까, 언제까지든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프란은 안긴 채 락케이드의 등을 사뿐히 두드렸다. 프란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믿고 기다려. 언젠가 아일린의 도망자라는 멍에를 풀고 집사를 찾아올게. 힘을 길 러서, 저 빌어먹을 데이메르의 성 따위 다 갈아엎고, 집사를 데리러 올게. 날 믿어. 날 믿고 기다 려. 나는, 프리나 프리텐이고……." 프란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집사는, 내가 돌아와야 할 종착점이니까." 자식이 돌아올 곳은 언제나 부모의 품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락케이드는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집사는 내 아버지니까 난 언제든 집사에게로 다시 돌아올 거야.' 락케이드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 * * 그렇게 프란과 헤냔, 하질리언은 락케이드네 가족과 헤어져 적색산맥으로 도망쳐왔다. 적색산맥엔 오직 눈 밖에 없었기에, 다른 곳에서 나무를 공수해와 집을 짓는 건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하진, 네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내가 못하는 게 없긴 하지." "칭찬해주면 감사히 받아먹고 입 닥쳐." 귀하게 자란 헤냔이나 집 없는 아이였던 프란과는 달리,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부의 자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하질리언은 그야말로 '생활의 달인'이었다. 나무만 조달해주면 뚝딱뚝딱 집을 만들 어낼 수도 있는 그의 목공 솜씨에 프란과 헤냔은 감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도 딴에 여자니까, 수고스럽긴 해도 방은 두개를 만들지. 휴, 귀찮아." "뭐가 '딴에 여자'라는 거냐! 죽고 싶은 거지, 네 놈!" "그럼 '주제에 여자'로 바꿀게." "……검 들고 따라 나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세 사람은 잘 지냈다. 일단 집이 만들어지고 난 뒤부턴, 세 사람은 거의 하 루 온종일 검 연습만 했다. 두 사람이 겨루면 한 사람이 심판을 보며 그 움직임을 체크해 자기 것 으로 삼고, 가끔은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상대로 싸웠으며, 더 가끔은 두 명의 상대가 모두 적이라 고 간주하고 세 명이서 난타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질리언의 입장에선 프란과 헤냔이 싸우는 걸 지켜보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둘이서 털 비 쭉 세운 동물들처럼 긴장해 있을 때 훈수 두는 것 마냥 참견하는 게 유쾌했던 것이다. "도련님, 뒤가 비었네!" "제기랄, 조언하는 건 반칙이라고!" "누가 도련님입니까! 그리고 말 안 해도 알고 있었다고요! 이건 페이크였어요!" 노인네처럼 참견하는 하질리언과 투덜거리는 프란, 괜히 자존심 세우는 헤냔은 나름대로 죽이 잘 맞는 세트였다. 물론, 죽이 안 맞을 때도 간혹 있었다. 하질리언이 계속해서 식량 조달 임무를 거부했던 탓이다. "하질리언 씨! 왜 매일 매일 나랑 프리나만 마을에 내려갔다 와야 해요? 당신보다 프리나가 훨씬 더 위험한 수배자라고요!" 하질리언은 밉살스럽게도 드러누운 채 모닥불 안에 장작까지 집어넣고 있었다. "추워서 나가기 싫거든." 헤냔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로이네트 토박이 주제에 뭐가 춥다는 겁니까?" 하질리언은 웃지도 않고 답했다. "추운 데서 살았다고 추위를 못 느낀다고 생각하는 건 전형적인 도련님 식 사고방식이지. 역시 도 련님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게 세상의 전부라고 판단하고 말이야. 쯧, 어 리고 어리석기도 하지."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린 헤냔을 향해 프란이 소리쳤다. "그냥 나와. 저 녀석, 은근히 말발이 세서 너나 나나 못 이겨." "……하질리언 씨, 뭔가 처음 볼 때랑 성격이 달라." 헤냔은 프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프란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옛날부터 그랬다. 처음 보면 다들 저 녀석이 어른스러운 줄 알지만 알고 보면 심하게 유치해. 일 할 때나 어른들 앞에선 옛날부터 폼 있는 대로 잡았는데, 보고 있으면 웃기지도 않았지. 저 녀석, 하나도 안 힘든 척 시키지도 않은 방책 보수 공사를 의젓하게 도왔던 적이 있어. 당연히 어른들한 테 있는 대로 칭찬 받았지." 헤냔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프란은 양말을 세 개나 껴 신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 다. "실컷 칭찬 다 받고 무리에 돌아와선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거렸어. 막 눈물범벅이 되가지곤, '엉 엉,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엉엉' 이랬다니까! 진짜 한심해서 때려줬지." "풋!" "더 심한 것도 있어. 멋있는 척 '너희들 같은 건 필요 없어' 라고 말해놓고는, 정말로 안 놀아주 니까 슬그머니 찾아와서 '그렇다고 진짜 안 놀아 주는 거야?'라고 했어. 또 징징 울면서." 프란은 진지하게 과거 회상을 한 것이었지만, 듣고 있는 헤냔으로서는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 었다. "프리나, 다 들린다." "들으라고 한 소리다!" 그래도 셋이서 함께한 시간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하질리언이 여전히 헤냔을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 헤냔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거기에 발끈하고, 둘이서 그러거나 말거나 '평생 여기서 살 수는 없고 무슨 수를 내야 하는데' 하고 프란이 중얼거리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러가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도 염색했던 프란의 갈색 머리칼이 금색으로 되돌아오고, 셋의 검술실력이 늘었으 며, 헤냔의 키가 아주 조금 자랐다. 그런데 시간마저 얼어붙은 것 같은 이 혹한의 산맥, 셋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이 하얀 세계에, 균열이 났다. "야크를 구워먹고 있나. 왜 이렇게 안 와?" 그 균열의 날, 하질리언은 프란과 헤냔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색산맥에 들어온 지도 벌써 두 달째 . 세 명이서 함께 하는 생활에 이럭저럭 익숙해져가던 참이었다. '올 때가 됐는데.' 식량이 떨어질 때가 다 돼서, 헤냔과 프란이 '거대한 털 뭉치'로 무장을 하고 마을로 내려간 참이 었다. 이번에도 하질리언은 춥다면서 나가지 않았던 차였다. 둘이 나간 사이, 하질리언은 조그마한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허술한 곳을 손봤다. 아직 불완전한 그 집을 목공 솜씨가 있는 하질리언이 둘 모르게 조금씩 보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늦네.' 나무로 직접 제작한 못으로 벽을 손보고 난 뒤에도 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질리언은 슬슬 걱정 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둘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리란 걱정은 아니었다. '치사하게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질리언이 배신감에 치를 떨 무렵, 문이 벌컥 열렸다. 하질리언은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팩 돌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하질리언이 불평을 터뜨리려는데, 프란이 먼저 선수를 쳤다. "물 끓여!" 프란의 목소리는 높고 선명하게, 공기를 가로지르며 튀어나왔다. 하질리언은 그 순간 얼이 빠졌다 . 갑자기 물은 왜? 하질리언이 당황해서 바라보는 사이, 문 한짝을 사이에 두고 매서운 바람이 살 을 엘 듯이 들어왔다. "물 끓이라니까!" 프란은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프란의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 있다. 프란의 뒤를 이어 헤냔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헤냔은 자기보다 키가 큰 사내를 등에 업고 있는 상태였다. "도련님! 등에 업은 그거, 도대체 뭐야?" 하질리언이 놀라 소리쳤다. 헤냔의 등에 업힌 사내는 정말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가닥가닥 늘어 뜨려진 보라색 머리카락이 피에 엉킨 채 이미 얼어 있었고 옷은 거의 누더기다. 허나 그것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건 오른팔과 복부에 입은 상처였다. "하진! 물 끓이라니까! 빨리!" 하질리언은 그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락케이 드와 헤어질 때 보인 얼굴이 애정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것이었다면, 지금은 걱정과 당혹과 절망으 로 뒤범벅된 얼굴이다. "하진, 빨리……. 죽을 것 같단 말이다……." 프란은 심지어 몸까지 떨고 있었다. "진정해라, 프리나." 하질리언은 벌떡 일어나 물을 끓였고, 헤냔은 자신이 업어온 사내를 하나밖에 없는 침대 위에 엉 겁결에 눕혔다. 헤냔의 표정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헤냔은 멍하니, 그 보라색 머리칼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사이 프란은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방을 들쑤시고 있는 중이었다. "천, 깨끗한 천…… 그리고 칼…… 칼…… 내 검, 소독해서 쓰면 되겠지…… 약, 약은? 약…….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아…… 또 뭐가 필요하지?"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은 상태인데도 프란은 착실하다 할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자기 검을 불 에 달궈 소독하고, 하질리언이 가장 아끼는 옷을 허락도 없이 북북 찢어 붕대로 만들었으며, (너무 진지하게 찢었던 터라 하질리언은 '안 돼!'라고 소리칠 수가 없었다.) 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양의 장작을 가져와 모두 다 아궁이에 처박았다. (하질리언은 '그거 3일치 장작인데 미친 거야, 프리나! '라고도 할 수 없었다.) 프란이 그 모든 일을 다 마쳤을 때, 하질리언은 반의 상의를 막 벗기려는 참이었다. 프란은 하질 리언이 끓인 물을 가지고 침대 옆에 다가왔다. 헤냔은 홀로 방관자인 양, 그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미남이군.' 그렇게 당혹스런 와중에도 하질리언은 생각했다. 정말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이방인은 하얗 게 질린 안색으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고, 옷도 찢어진 상태다. 그런데도 그 조각 같은 얼굴만은 상처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여자 여럿 울리다 못해 기절시킬 외모로군. 여자로 태어났다면 나라 한두 개는 기본으로 아작 냈 을 미모일세.'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하며 하질리언이 막 그의 윗옷을 벗겨내려는 찰나. 철컥. "……!" 하질리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넋 나간 듯 이쪽을 보고 있던 헤냔 역시 깜짝 놀랐다. 죽은 듯 기절해있던 그 남자가, 놀랍게도 갑자기 몸을 일으켜 하질리언의 목에 검을 들이댄 것이 다. 검이 헐겁게 그의 검집에 매여 있었던 걸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발도였다. 누워서 정신을 잃고 있었던 주제에, 옷을 벗기려 하자마자 갑작스럽게 검을 뽑다니. 헤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 온 몸이 다 해진 것 같이 지독하게 상처 입은 남자, 반의 눈은 죽음의 위기에 몰린 맹수의 그것처 럼 번뜩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를 담은 은보라색 눈동자 가 휘황하게 빛난다. 하질리언의 목젖이 움찔했다. 이같이 엄청난 살기는 처음이었다. 헤냔 역시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바로 그 때였다. "지금, 도와주려고 하는 거다." 당장이라도 하질리언을 죽일 것 같던 반의 눈이 소리가 난 쪽으로 휙 돌아갔다. 프란이다. 프란은 저벅 저벅, 반의 바로 앞에 와서 섰다. 아는 사이인가? 하질리언은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질리언은 확신했 다. 아는 사이 맞나보군, 그렇지 않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리 없다.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프란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질리언의 목 앞에서 멎은 반의 검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있다. 프란은 그 검을 바라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 말 좀 믿으란 말이다, 빌어먹을 대마왕 자식아! 진짜 죽고 싶냐! 엉? 죽고 싶으냐고!" 프란은 반의 검을 거칠게 쳐냈다. 뜻밖에도, 반은 저항하지 않았다. 프란은 반의 손에서 루니아 블레이드를 강탈하듯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반 역시, 흐릿한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한 순간 둘의 시선이 깊게 얽혔다. '야크 길들이는 조련사 같군.' 하질리언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건 적절치 않은 비유인지도 모르지만, 다가오는 상대가 누구든 물어뜯어 죽일 것 같았던 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부드러워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안심해서일까? 아니면 그저 힘이 다한 탓일까? 반은 거짓말처럼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그때는 놀라서 생각을 못했는데……." 하질리언은 헤냔을 향해 씩, 웃었다. "드리비아랑 레이니아 같네. 장소도 딱 적색산맥이고 전설의 땅에서 이루어진 전설 같은 재회라." "우연일 뿐입니다." 헤냔은 딱딱하게 답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헤냔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대체 이 엄청난 우연은 뭐란 말이지?' 저스티스 카르멘을 위해 세키에 여신이 자비라도 베풀어준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운명의 신이 여 러 개의 실을 비틀어 이 무대를 주선한 건가. 운명의 주사위. 주사위를 여섯 번 던져 모두 6이 나 오는 것 같은 기막힌 우연. 수십 개의 상황이 겹치고 겹쳐서, 수백의 가능성을 뚫고서 다시 만나는 것. 이런 걸 운명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엇을 운명이라 부를 것인가! 헤냔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그냥 우연이야, 우연.' 공인 칠판인 헤냔의 얼굴을 통해, 하질리언은 헤냔의 감정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 하질리언이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헤냔이 입술을 잘끈 씹었다. "뭘 보는 겁니까! 장작이나 마저 패세요!" "말 돌리는 거 너무 티 난다, 도련님." 헤냔은 하질리언을 보고 푹, 한숨을 쉬었다. 하질리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헤냔이 조그맣 게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하질리언 씨는 꼭 아나 같아요." "아나?" "저 놀리는 걸 삶의 낙으로 삼는 동료가 하나 있습니다." 그 말에 하질리언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누군지 몰라도 나랑 잘 통할 것 같네? 꼭 만나고 싶어." "……제발 만나지 마세요." 상상만 해도 두려운 헤냔이었다. * * * 프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삼일 동안 한숨도 못 잔 탓이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프란은 계속해서 자기 눈을 의심한다. '왜 여기에 있는 거냐?' 혹시나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 프란은 시도 때도 없이 반의 코밑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다행히 처음 여기에 데려왔을 때보다 호흡은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은근히 아는 것 많은 하질리언이 여러 가지로 애써준 덕이다. "인간 맞네." 프란은 문득 중얼거렸다. 뿔 달린 대마왕이 아니라, 피 흘리고 기절할 줄도 아는 진짜 인간. "너도 다치네. 응? 대마왕." 프란은 농담하듯 말을 건넸다.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칼로 쑤셔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고 육친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처럼 행동하던 너도, 사실은 피도 있고 눈물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핏기 없이 누워 있는 반을 보며 프란은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열 네 구의 시체. 그 중 두 구의 얼굴은 그녀도 잘 아는 것이었다. 사키와 케인. 그 둘의 얼굴을 본 순간, 프란은 막연하게나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알 것 같았다. 대마왕은, 배신을 당한 것일 게다. 케인만이 대마왕을 지켜줬겠지. 케인이 반과 함께 있는 것은 딱 두 번 밖에 못 보았지만, 프란은 케인이 어떤 마음으로 반을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인이 반을 보는 눈은 락케이드가 자신 을 보는 눈과 똑같았으니까. 케인만은 절대 반을 배신할 리가 없다. 반을 대신해서, 죽었겠지. '케인이라면 후회 안 했을 거다.' 프란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고 한참 동안 눈물을 참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 다. 케인이 있어서 그래도 이처럼 살아 있을 수 있었는데. 카르멘으로 처음 갈 때 그녀의 편의를 봐준 것이 그였고 아일린에서 도망 나올 수 있게 해준 것도 사실상 그였다. 말은 없지만 속마음까 지 차갑지는 않았던 사람. 프란은 반의 얼굴을 보았다.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끔찍한 상처를 입고 충직한 수하는 죽은 이 절 망적인 상황에서, 대마왕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아득한 상처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지는 않을까. 프란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젓는다. 그녀는 애써 웃음 지으며 반을 향해 투덜거리 듯 말했다. "일단은 빨리 일어나라, 대마왕. 안 어울리게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냐?" * * * 룬 로스는 세 시간 째 침묵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룬의 앞에 기립하고 있던 스물아홉 명의 아인켈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왜 저렇게 폼은 잡고 난리야? 안 어울리게! 어디 비켈린 대장도 아니고!' 스스로는 칼날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하들에게 있어서는 '가끔, 되도 않는 폼을 잡는대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룬의 침묵은, 아인켈들을 있는 대로 시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다못한 란돌이 슬그머니 히스의 등을 찔렀다. 히스는 눈을 부릅떴다. '왜 또 나예요!' 차마 말로는 못하고 히스는 온 얼굴로 저항했다. 안 그래도 가주의 시종에게 지는 바람에 룬에 게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했던 히스다. '그 시종에게 졌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독방에 끌려가서 대장을 상대로 일곱 시간 버티기라는 엄청난 걸 했단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히스였다. 히스도 룬이 전력을 다하면 자신이 7시간은 커녕 7분도 버 틸까 말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자기를 가지고, 룬은 '흥, 졌단 말이지? 고얄 미운 꼬맹이한테 졌단 말이지? 하필이면 내 믿음직스러운 이미지를 박살낸 그 꼬맹이 자식한테?' 라고 말하며 히스를 슬슬 상대해, 그의 있는 진 없는 진을 다 빼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문도 그 런 고문이 없었다. 미운 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힌 차에 이번에도 또 총대를 메야 하다니. '세키에님,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번엔 절대 총대 안 멜 겁니다!' 그러나 대답은, 아니, 란돌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넌 막내다.' '……헉!' '짬밥 안 되면 잔말 말고 총대 메라.'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데 표정만으로 대화가 되는 아인켈의 단결력이 이런 데 이용 되다니. 히스 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매일 막내랍시고 부려먹기만 하고, 이게 뭐야! 막내면 좀 보호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룬 로스는 '첫째도 서열! 둘째도 서열! 셋째도 서열! 서열만이 법이다! 그 러니까 너! 잔말 말고 대가리 박아! 어디서 개수작이야?' 라고 외치는 남자인 것이다. 그런 룬의 밑에서 수행 때까지 합쳐 삼 년을 있었다. 이젠 서열 얘기만 나와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히스다. 어 떡하겠는가? 하라면 해야지. "대장님." 그런데 이상했다. 히스가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룬이 고개를 번쩍 들어 주위를 돌아본 것이다. 그렇다고 '대장님'이라고 부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다. 아인켈 모두가 바짝 긴장해 룬 을 바라보는데 룬은 그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던지듯 물었다. "이상하지 않냐?" "예?" 스물아홉 명의 목소리가 일제히 갈라졌다. 세 시간 째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기껏 던진 첫마디 가 이상하지 않냐, 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어리둥절해 있는 아인켈들의 얼굴을 향해 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날아들었다. "이상하지 않냐고!" "뭐가 말입니까?" 이번에도 히스가 총대를 멨다. 란돌이 등을 찔렀기 때문이다. '아파 죽겠잖아요!' 여전히 표정으 로 말하는 히스를 향해 란돌이 씩 웃어 보인다. 부하들이 등 뒤로 무슨 수작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채, 룬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세타 공주가 돌아갈지도 몰라." "그렇습니까?……그런데, 그게 왜……?" 그제야 아인켈들은 슬슬 긴장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풀면서 '하하하! 그냥 그렇다고!' 하며 웃어 줘야 할 룬의 얼굴이 여전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인켈들은 룬이 뭔가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 음을 이제야 눈치 챘다. '대장이 생각을, 그것도 심각한 생각을 하다니!' 아인켈들은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다 룬이 막내 히스를 보았다. 강렬한 눈이었다. 그 바람에 히스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폼 잡는 게 안 어울리는 거칠고 단순한 남자라고는 해도, 대장은 박력 있는 사람이다. 지금 룬의 눈은 히스가 프란에게 진 그날 보여줬던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케인 칼슈비도가 떠나기 전날, 나를 찾아왔었다." "비켈린 대장이요?" 란돌이 놀라 되물었다. 아인켈 모두는 비켈린에게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것은 자신의 실력이 비켈린보다 떨어진다는 식의 열등감은 아니다. 처음부터 모두가 '비켈린이 잘해', '아인켈은 그 다음!' 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 2인자라는 이름의 열등감으로 변한 것 뿐. 그들은 자신들이 비켈린에게 결코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생각을 누구보다 강하게 갖고 있는 것은 바로 대 장인 룬이었다. '네놈들이 비켈린한테 지면 나는 네놈들 머리를 시궁창에 처박아 버릴 거다! 당장 연습 못해?' '그래갖고 비켈린한테 이길수 있겠냐? 정신차려, 머저리들아!' '케신한테 졌다고? 미친 새끼! 그따위 헬렐레한 놈에게 지다니. 너, 오늘부터 3일간 금식이다! 그 리고 한 달 동안 밖에 나가지 말고 검술 연습만 해! 아니, 내가 너하고 겨뤄주겠다! 검 들고 와!' 갑자기 오스스한 한기가 아인켈 전체를 덮쳤다. '아아,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아.' 스물아홉 명의 아인켈들이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떤다. 룬은 케인을 견제하다 못해 사사건건 '이걸로 승부를 보자!'며 괜한 고집을 피워댔지만, 정작 케 인이 그에 응수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냉랭하기 짝이 없는 비켈린 대장이, 다른 날도 아니고 계승식 전날 룬을 찾아왔었다니? 언제나 모든 걸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그 남자가 계승식 전날 숙명의 라이벌이 라고 할 수 있는 아인켈의 대장을 찾아왔다니! "뭐라고 하던가요?" 란돌이 재차 물었다. 룬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카세타 공주가 돌아간다고 하면 경계하라고 했다." "왜요?" 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건 내 추정이지만 카세타 공주는 가주님한테 청혼하러 온 것 같다. 성인식 때 옆에 서고 싶다 는 거겠지." 아인켈들은 다시금 굳었다. '거기서 추정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습니까!' '그거 모르는 사람이 이 저택에 누가 있냐고요!' '대장, 정말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사람입니까?' 아인켈들은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룬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룬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다. "성인식 때 가주님의 옆에 서고 싶다고 말한 여자가, 지금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가야 하는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란돌의 대꾸에도 불구, 룬은 신경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런스 경이 나한테 왔었다. 아침에 이진느가 카세타 공주를 찾아왔다는군. 이진느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성인식에는 규칙이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일린의 성인식은 결혼식이다. 남편 될 사람이 아내 될 사람을 친정까지 데리러 가고, 아내가 자신의 집에서 아일린까지 오는 과 정 내내 꽃길을 걷는 것이 아일린의 전통 중 하나다'라고." 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이상한 전통이 있었습니까? 진짜 해괴하네요." 룬은 아인켈에서 가장 나이 많은 로키를 보았다. "로키, 난 그때 일 때문에 참석을 못했지만, 너는 로웬님의 결혼식에 있었다. 정말 그런 전통이 있나?" 로키는 신중하게 답했다. "……로웬님과 루이사님 두 분 다 예사 분들이 아니라서 결혼식도 대대적으로 못했잖습니까. 양가 주요 인사들만이 참석한 비공식적인 혼례였으니, 그런 전통이 있다한들 그분들은 지켰을 것 같지 않군요. 하지만 분명한 건, 전대 가주님 때에는 그런 일이 없엇다는 겁니다."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린은 분명 돈이 많은 집안이다. 하지만 상업가지. 상업의 본질은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한 다는 것이다. 난 긍지 높은 상업가 아일린에서 그딴 돈지랄 같은 행사를 계속 해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지랄까지야. 거, 멋지지 않습니까?" 나름 낭만파인 란돌이 슬그머니 끼어들었지만 룬은 못들은 척 했다. "케인이 떠나기 전에 한 말과,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전통. 이건 혹시 카세타 공주를 보내고 나 서 뭔가 꾸미겠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 때였다. "나도 이름이 있어요. 카세타 공주가 아니라 키네세스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요." 룬은 눈을 크게 떴다. 물빛의 레이디, 카세타 꽃 중의 꽃 키네세스 공주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 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로 런스가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키네세스 공주님." 아인켈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키네세스는 그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런 전통이 없다는 건 확실한가요?" 룬은 눈을 찌푸렸다. "확실하진 않습니다. 분명 성인식을 주관하는 건 정초원의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꺼림칙합니다. 그것도 몹시." 키네세스는 당돌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카세타의 공주예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인켈들은 영문도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린은 능히 한 나라를 집어삼킬 힘을 가진 대 가문이지만, 왕국을 그리 만만히 여길 수는 없 을 거예요." 키네세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저택에 과다하게 퍼졌다 시피 저는 당신들의 가주에게 청혼했습니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계면쩍어져, 모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키네 세스는 상관 않고 계속 말했다. "저스티스 카르멘, 아. 미안해요. 습관이 돼서. ……시즈 아일린 가주가 떠난 지 오늘로 한 달째 예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드세요?" 키네세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쯤이면, 계승식이 아무리 먼 곳에서 행해졌다한들 가주님이 돌아올 시간이 됐다고,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겠어요. 난 계승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죠. 설사 북부 끄트머리에서 계승식이 있었다한들, 단지 '거기에 갔다가 돌아오는' 일만을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착할 타이밍은 지금이예요. 거기에 여태껏 저에게 어 떤 언질도 없던 이진느 아일린님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죠." 듣고 있던 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서, 결론은?" 모두의 시선이 이 연약한 공주님에게로 집중됐다. 키네세스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일린에서는 묘한 움직임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주를 바꾸려는 움직임인지도 모른다. 계승식이 성공적으로 완결되 면 가주를 뒤엎는 것은 불가능해지니까." "……!" "반역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확실해야 한다. 첫째, '시즈 아일린은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와도 가문을 되찾을 수 없는 상태다.'라는 것…… 즉, 계승식에 실패했거나 죽었거나." 키네세스는 주먹을 꼭 쥐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엿다. 반이 죽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 이 타 이밍에 아일린에서 반역이 일어날리가 없다. "두 번째는 가문 내에 외부인이 없어야 한다는 것. 가문이 가주를 갈아 치우는 마당에 외부인, 특 히나 왕가의 손님이 와 있다면 여러모로 불편할 테죠." 쾅! 룬은 참지 못하고 탁자를 쳤다. * * * '도망치고 싶다.' 시온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데리러 가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정말로, 데리러 갈 것이다. 아일린의 이름을 버리고 프란과 둘이서 함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다. 아일린과도 카르멘과도 상관없는 레키슈안으로 가면 좋겠지. 날씨가 걸리긴 하지만 로이네트도 나쁘지 않다. 거기에서 프란은 그토록 원하던 기사가 되고, 자신은 적당히 밥벌이할 수단으로 마법을 이용하는 거다. 내키진 않지만 궁중마법사 노릇도 할 수 있다. 낯간지럽지만 실력을 좀 더 쌓아서 마스터 행 세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생각하다 말고 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몰린 거지?' 시온은 언제나 아일린 내에서 가장 자유로운 지위에 있었다. 어떠한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면 서도 모든 집단과 교류를 가졌다. 그를 경계하는 세력은 있었을지언정 미워하는 세력은 없었다. 권력 다툼으로 하루를 다 써버리는 아일린이 싫어 대륙 전체를 떠돌았다. 사랑 놀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남들은 당신만큼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거라 했다. '자유?' 시온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일린으로 돌아와야 하는, 어머니가 눈감아주고 있는 동안만 성립하는 자유. "별로 원하는 거 없는데." 정말이다.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걸 다 가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외모, 재능, 권력, 재력…… 그가 갖추지 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내부는 공허했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과 어울렸다. 여자를 만났다. 그래도 그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내 안엔 구멍이 나있는 거야. 시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뿐인 사촌 형은 결핍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반의 결핍을 눈치 챘다. 그 강 함속에 숨어 있는 감정의 결핍, 동정하든 지나치든 반에게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 는 사람은 없었다. 허나 시온의 결핌을, 그 공허를 눈치 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밝음을 위 장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 껍데기마저 누군가가 뜯어갈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온은 두 려웠다. 이 껍데기마저 벗겨지면 내 옆에는, 시온 아일린이 아닌 시온의 옆에는, 누구도 머물지 않 으리라 생각해서. 몸은 언제나 빛 한 가운데에 있었건만 마음은 언제나 빛을 찾아 헤맸다. 몸은 언제나 오아시스 한 가운데에 있었건만 마음은 언제나 이 사막을 탈출하기 위해, 별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 아마도 다시는 없을. 처음으로 원하고 처음으로 갈망했다. 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만.' 시온은 주먹을 쥐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 * * 반은 꿈을 꾸었다. 긴 꿈이었다. 반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다. 여기는, 카르멘 가다. 그는 카르멘 가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달 3일, 반이 첫 움음을 울던 날, 아버지 로웬은 춤을 췄다고 한다. 언제나 엄하던 아버지가 자신의 탄생에 그토록 기뻐햇다는 것이 잘 믿기진 않지만 마린이 말해준 것이니 아마 사실일 거다. 반이 태어나자마자 아일린에서는 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쳤다. 어찌나 성화가 심했던 지 반은 태어난 지 겨우 16일 만에 아일린으로 옮겨졌다. 카르멘과 아일린은 반의 부모가 결혼하기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가 '대륙 최고의 가문' 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견제가 심할 만도 했다. 두 가문은 사사건건 자존심을 내세웠고 화합은 불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반의 생일 마저 각자 다른 날짜에 챙겼겠는가. 카르멘은 첫 번째 달 3일이 반의 생일이 라고 말했다. 그 날 태어났으니 진짜 생일은 3일이 맞았다. 하지만 아일린은 납득하지 않았다. '아일린에 온 그 날이 진짜 반의 생일' 이라고 우기며, 첫 번 째달 19일을 반의 생일로 쳤던 것이다. 계승식 날짜가 19일었을 정도니, 아일린의 자존심에 대해선 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다. "왜 난 생일이 두 번이예요?" 어머니 루이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루이사는 반의 뺨을 가만히 감싸며 말했다. "네가 너무 사랑받아서 그래." 너무 사랑받아서. 그 말은 넘쳐흐를 것 같은 기쁨이었다. 사랑.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카르멘 가의 사람들을 이 손으로 보호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일린 가의 사람들을 이손으로 보듬게 되리라. 반은 막연 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가주가 되면, 매일매일 사람들한테 선물을 줄 거예요. 기쁘게 해줄거예요." 눈을 빛내며 말하는 어린 반을 보며 루이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그냥 있어도 선물이야, 반. ……저길 봐. 저렇게 널 반겨주잖니?" 여덟 번째 생일을 맞으러 아일린으로 가던 길. 문 앞에 마중나와 있던 수백 명의 아일린 가 사람 들. 반은 그 광경이 아직도 선명하다. 고작 여덟 살짜리 남자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그 많은 어른들. 거기엔 이진느 아일린도 있었다. 한 살 어린 사촌을 데리고 왔던 고모. "어? 형이라 그랬는데 누나잖아?" "난 남자야!" 생일 파티에서 처음 본 일곱 살의 시온 아일린은 그딴 말을 했었고, 어린 반은 화를 냈었다. 시온 은 신비로운 진초록 눈동자를 빛내며 계속 반의 주위를 맴돌았다. "진짜 남자야? 정말?" "계속 그러면 화낸다!" "헤, 화내니까 더 예쁜 것 같아. 진짜로 누나 아니고 형이야? 거짓말하지 말고, 응?" "화낼 거라고 얘기했지!" 그 어린 나이에도 벌써 검을 익혔던 반이니만치, 반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그렇게 말했다. 시온 은 그러나 조금도 겁먹지 않은 채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예쁜데 왜 누나가 아니야? 이상하다. 예쁜 사람은 원래 다 여잔데." "……대체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던 일곱 살의 시온. 어이가 없긴 했어도 그때는 그런 시온이 마냥 귀엽기 만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 시온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상대가 되리라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못 했다. 시온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시온도 이진느도 그 사실에 주눅 들지 않았다 . 그 당시 이진느는 아직 20대였고 누구나 그 외모를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고귀한 여성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과 은근한 카리스마를 몸에 지니고 있던 아름다운 고모. 그 고모가 자신의 뺨에 키스하며 '생일 축하해, 반'이라고 말해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기억은 한 순간에 비틀어진다. 두 번째 기억.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알았을 때의 조각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정말로 두 가문의 가주가 되었던 날, 열네 살의 어린 가주가 되었던 날. '어머니,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나를 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 모든 애정들이 부모의 권력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았다. 부모가 떠난 세상은 적 막하고 차가웠다. 케인은 말했다. 살아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힘을 다해서! 선물을 주는 가주 같은 건 어릴 때의 철없는 꿈일 뿐 그는 피를 만드는 가주였다. 처음으로 사람 을 베던 날이 떠오른다. 아일린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아일린의 핏줄을 이은 먼 삼촌뻘 되는 사람을 베던 날이. 그 모습을 룬 로스가 봤었지. 그 다음부터 룬은 반에게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렇게 피를 만들어야 내게 충성을 하는구나. 그래, 이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구나! 그것은 소년이 깨달은 단 하나의 진리였다. 빈틈없는 차가움. 가면. 피. ……이런 것들이 필요하구나. 내 가 살기 위해선, 남의 피가 필요하구나. 처음엔 괴로웠다. 잠도 자지 못했다. 그 모든 일들이 열네 살의 어린 반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던 탓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 열네 살이 열다섯 살로, 열다섯 살이 열여섯 살로 옮겨가 는 동안 반은 자랐다. 그 사이 심장은 점점 더 딱딱해져 갔다. 시간이 지나자 심장이 얼어붙어서인지 더 이상의 통증도, 감각도, 죄의식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빛만은 놓치 않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완전한 가주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모든 피들을 씻어낼 수 있겠지. 진저리쳐지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완연한 파도가 되어 그를 덮쳤다. 반은 신음했다. 그 고통의 한 가운데,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 가운데 하나, 선명하게,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꿈속인데도 잡힐 듯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처음부터 묘하게 사람 신경 을 자극했던, 언제나 환하게 웃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그 얼굴. 그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반은 잠에서 깼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을 잃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도, 반은 몸을 벌떡 일으켰 다. 무리를 해서인지 일어난 순간 온몸이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일었다. 특히 오른팔 부근의 통증 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반은 재빨리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다. "……허." 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다시 봐도 진짜 잘생겼네'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하질리언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프란이 며칠동안이나 전혀 자지 못한 채 반의 옆에 붙어 있기에, 제발 자라고 옆방에 밀어 넣고 온 길이다. 그런데 하필 자기가 들어온 이 때 눈을 뜨다니. "또 당하는군." 하질리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온 몸의 통증을 무시하고 검을 집은 반이 하질리언의 목덜미에 또 한 번 정확하게 검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반으로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했다. 반은 여기가 어디인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지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 환영인듯, 그 녀석, 프란 프리텐을 보긴 했다. 하지만 그 그건 꿈일거다. 그 녀석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누구냐?" 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하질리언은 혀를 쯧쯧 찼다. "너, 처음 여기 올 때도 그렇게 내 목에 검을 겨누더니 이번에도 또 그러는거, 알기는 알아?" 원하는 대답이 들리지 않자, 반은 검 끝을 더 가까이 댔다. 하질리언도 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이 누구냐고 물어봐도 헤냔 은 미친 듯이 장작만 패면서 '나 많이 늘었죠?' 따위의 '말 돌리는 티 뻔이 나는 말 돌리는 말' 을 해댈 뿐이었고, 프란 역시 '대마왕이야' 같은 이해 못할 소리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보다 어리니 반말해도 되겠구먼, 하고 생각했던 차였다. "너 잘하면 진짜 나 베겠다?" 하질리언은 웃으면 말했지만, 그 순간 땀 한 방울이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하질리 언은 순식간에 자신과 반의 전력을 분석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상황은 단연 자신에게 유리하다. 상대는 더 상처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 입은, 지금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자일 뿐이다. 그 런데 도대체 뭔가, 이 한기는. "……진짜 벨 생각은 아니지? 몰라서 그러는가본데, 나는……." 하질리언이 나는 프리나의 친구라고, 하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역시 안 되겠다. 하진, 그냥 내가……"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섰다. 반의 검이 순간적으로 움찔 떨린다. "어?" 당황한 건 프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10여일 정도를 시체처럼 누워만 있던 인간이 벌떡 일어난 것도 모자라 친구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틈을 타 하질리언은 슬그머니 반의 검 아 래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프란 옆으로 자리를 옮긴 하질리언이 프란의 귀에 대고 조그맣고 속닥거 렸다. "프리나, 네 애인 진짜 무섭다. 어째 골라도 저런 걸 골랐냐?" 잠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프란이 엉? 하는 소리를 냈다. "오라비가 다 안다, 프리나." 하질리언은 진지한 얼굴로 프란의 어깨를 팡팡, 쳤다. "일어났으니 이제 찐하게 뽀뽀라도 좀 해라. 자리 비켜줄 테니까." 정말 영문을 몰라 응? 이라고 물었던 프란은 한참만에야 하질리언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지 깨 달았다. 곧, 프란의 얼굴이 불고구마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애인? 골라? 뽀뽀? "대체 무슨 헛소리야? 미쳤냐?"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질리언은 음흉하게 웃으며 프란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다 안다니까." "알긴 뭘 알아!" 이 자식 또 마이페이스 모드에 돌입했네, 하는 생각에 골치가 다 지끈거리는 프란이었다. "다 안다니까 그러네. 이래봬도, '사랑의 카운슬러 하질리언'으로 불렸다고." "뭐가 사랑의 카운슬러야!" 진짜 미칠 노릇이다. 하질리언은 어렸을 때도 이랬다. 자기가 한번 생각하고 나면 절대 남의 말을 안 듣는다. 그야 말로 무적의 마이페이스. "하하하, 쑥스러워하는군. 괜찮아, 괜찮아, 젊은 남녀는 그래도 돼." 프란은 문득 하질리언의 지금 표정이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앗, 하는 사이 한 얼굴이 떠올랐 다. 저 얼굴, 이상하게 마린 같다. 마린이 '오호호?' 하고 웃을 때도 이렇게 오싹해지곤 했지. "야! 그렇게 웃지 마!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대마왕이랑 나랑은……!" 말하다 말고 프란의 움직임이 뚝, 굳었다. 갑자기 온갖 생각이 몰려든 탓이다. '자,잠깐. 대마왕이 살아났으니 다행이긴 진짜 다행인데. ……이제 난, ……어쩐다냐?' 반이 죽을 만큼 다쳤다는 데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자신이 도망자라는 사실마저 깜빡 잊었던 프란이었다. 아니 도대체가 이 얼어 죽을 만큼 추운 적색산맥 구석까지 온 이유가 뭔가? 반에게서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바로 반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반이 자기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다. '난 도대체 대마왕이 일어날 경우는 생각 안하고 뭐했지?' 한 번에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세포 경력 18년의 프란 프리텐은 '넌 아메바야! 넌 뇌가 없는 게 분명해!' 따위의 말로 자학하고 있었다. 프란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로 그 사이, 하질리언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것을 눈치 챈 프란이 속으 로 고함을 질렀다. '안 돼, 하진! 무슨 헛소리를 해도 상관없으니 그냥 여기에 있어!' 그런 프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그럼 힘 내, 프리나. 아, 프리나가 연애를 하다니 아주 감개가 무량하구먼." "헛소리 좀 작작해, 이 자식아! 자, 잠깐! 문 닫지 마! 야, 야! ……하진! 하질리언! 용서해 줄테 니까 나가지 말고……!" 탁! 그러나 프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은 닫히고 말았다. 휘잉. 어디선가 바람 부는 소리가 났다. "……아." 프란은 진심으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기절하겠다, 진짜!' * * * "후우." 헤냔은 오늘도 장작을 패고 있었다. 서툴기 그지없던 며친 전과는 달리 이젠 제법 장작 패기에 익 숙해진 헤냔이었다.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하질리언은, 땀 흘려 장작 패는 헤냔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과 반의 사이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하질리언으로서는 '연적' 을 위해 저토록 힘들게 장작이나 패고 있는 헤냔이 가여워 보일 수밖에, '불쌍한 놈,' 하질리언이 보기에 헤냔은 정말 괜찮은 녀석이었다. 일단 인물부터 훤하니 잘생겼다. 카세타의 기사라고 하니 평생 밥 굶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게다 가 귀족씩이나 된다. 여러 번 싸워봐서 아는데 검술 실력도 제법이다. 나이가 어린만큼 가능성도 무진해 보인다. 어디 그 뿐인가? 얼굴로 말을 하는 녀석이라 평생 동안 바람은 커녕 거짓말 한 번 제대로 못할 일 등 신랑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헤냔이 프란을 몹시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오죽하면 카세타 기사 자리도 포기할 각오로 여기까지 왔겠는가. 프란의 오라버니라도 되는 양, 반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호오, 녀석. 100점에 가까운데?' 하 고 생각하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던 하질리언이었다. 방금 전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대던 반이 생각나 하질리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녀석보다야 헤냔 쪽이 백 배 나은데 말이야. 프리나, 사람 볼 줄 모르는 군.' 하질리언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질리언은 그토록 당황해하는 프리나의 얼 굴, 간절하게 반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던 프리나의 얼굴, 10여 일 밤낮을 자지 않고 저 불한당 같은 놈의 옆에 붙어 있던 프리나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별 무리 없이 늘 그랬 듯 마이페이스로 단정지어버렸던 것이다. '음, 아일린 수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애인인가보군. 저 놈도 대단하네. 프리나 찾아서 여기까지 왔을 거 아냐?' 망상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그는 점점 더 헤냔이 가여워졌다. "괜찮아, 도련님." 헤냔의 바로 곁에 온 하질리언이 툭 하고 내뱉었다.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헤냔은 이제 항의를 넘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천성이 착하고 강직한 헤냔은 누군가에게 직설적으 로 화를 냈으면 냈지 짜증은 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화를 내도 들어먹지를 않으니 짜 증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또 뭐야?' 헤냔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하질리언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하지 말라니까요! 계속 그러면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검투를 신청하는 수밖에……!" "세상에 여자는 많아." "……예?" 헤냔은 넘어질 뻔했다. 이건 정말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한 마이페이스다. 검투 신청 운운하는 소 리는 아예 처음부터 안 듣고 있었던 게 뻔하다. '이 사람, 혹시 가는귀가 먹은 거 아냐?' 헤냔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하질리언이 헤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원래 '그건'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거니까. 쌉쌉한 게 먼저 와도 어쩔 수 없지, 뭐." 하질리언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리 없는 헤냔은 물음표가 빼곡 히 새겨진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이해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 헤냔이 한숨을 내쉬 었다. 이 사람 마이페이스, 그냥 무시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저기, 하질리언 씨." "왜?" "……진짜 진심으로 하는 부탁인데요." "응?" "아나이스랑은 절대 만나면 안 돼요." 둘이 만나면 난 정말 말라 죽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헤냔이었다. * * * 완강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반이 루니아 블레이드를 내려놓은 상태라는 거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늘 그렇듯 프란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마음은 이게 아닌데, 말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반은 고개를 들어 프란을 보았다. 그 순간 프란 은 심장이 아팠다. 제기랄, 대마왕의 얼굴이 너무 심하게 상해 있어서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핏기가 없어 더 하얗다. 프란은 순간 마음이 약해진다. "상처는 좀 괜찮은……." "왜 도망갔나." 갑작스러운 반의 말에 프란의 몸이 굳는다. 왜 여기에 있냐고 묻거나, 어떻게 자신을 발견했냐고 묻거나, 여하간 그런 걸 먼저 물을 줄 알았 다. 그런데 반의 질문은 그게 아니었다. 프란은 할 말을 잃었다. 왜 도망갔냐고? 반이 죽이지 않더라도 이진느가 죽일 거라는 시온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그토록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하러 온 시온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모든 걸 설명하기엔 가슴이 맺힌 게 너무도 많았 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죽을까봐 그랬습니다!" 이게 아닌데. '네가 날 죽이지 않을 거라고, 난 계속 믿고 있었어. 하지만 그 땐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만 튀어나오고 있었다. "살기 위해 그랬다고요! 여태까지 겪어놓고도 모릅니까? 난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합니다! 그때 도 살기 위해 도망쳤……!" "내가 널 죽일 거라고 생각했나?" 목소리는 낮았다. 낮고, 깊었다. 몸이 아픈 탓인지 반쯤 갈라진데다 쉬어 있기까지 했다. 프란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다. 차라리 그냥, 평소의 대마왕 처럼 차갑게 화를 냈으면 좋겠다. "그럼 아닙니까? 속였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당연히 죽였겠죠!" 입이 마음대로 떠든다. 프란은 젠장, 하고 생각했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반을 만난게 된다면 차근차근 왜 남장을 했는지 왜 숨겼는지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해해줄 지도 모른 다고, 렌에게서 빠져 나오던 그 순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반이 앞에 있는데, 준비했던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누르고 눌렀던 원망의 감정, 섭섭한 마음만이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고 있을 뿐이다. "아니라면 왜 한 번도 감옥에 오지 않았습니까?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던 것도 가주님이었 잖습니까! 가주님이라면……." 프란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주님이라면 날 수백 번도 더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순간적으로, 반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프란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숨을 씩씩 들이마시고 있었다. '죽일 수 있었다면 네가 발견된 바로 그 순간 죽였을 거다.' 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또다시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가주님은 그런 사람이잖습니까!" 반은 잠깐, 그 말을 되씹었다. 곧 반의 미간이 좁혀졌다. 평소라면 '으악, 화났나 보네!' 라고 생각했을 프란은, 그러나 너무 흥 분한 나머지 그 미세한 변화를 읽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반은 말이 없었다. 프란이 '이런 말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라고 죽어라 후회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반의 입술이 열린 것은. "널 죽이진 않았을 거다." 착각일까. 프란은 그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 평소보다 더 냉정한 기운을 읽어냈 다. 오싹, 몸이 떨린다. 처음 반을 봤던 그 순간에 느꼈던 바로 그 위압감이 온 몸을 덮친다. 몇 달이나 함께 있으면서 반의 기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반 의 위압감이 조금씩,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던 걸 그녀는 익숙해지고 있는 탓이라고 치부해버렸던 건지도, 그 증거로, 지금 반의 위압감은 살이 떨릴 정도로 강했다. '빌어먹을, 무섭잖아!' 프란은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물러섰다. 무의식적으로 한 일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 내면서, 반이 말을 이었다. "나는 3천 5백만 케트를 그런 식으로 '처분'하지 않는다." 이번엔 프란의 얼굴이 굳었다. 프란은 애써 웃어 보이려 했지만 입술이 떨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긴, 간단히 '처분'하기에 3천 5백만 케트는 좀…… 많지요." 프란은 농담조로 뱉었다. 그러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프란이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반이 말했다. "넌, 아일린의 도망자다."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분노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 때문이다. 그 때였다.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프리나도 자유로워지겠죠." 언제부터 엿듣고 있었는지, 헤냔이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하질리언의 마이페이스 위로를 한 참 듣고 있다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헤냔이었다. "그 사람이 일어났다고요? 프리나를 두고 혼자 오신 겁니까?" 냅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던 헤냔은, 그러나 문앞에서 망설이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진지 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도망자 운운하는 반의 말에 참을 수가 없었던 헤냔은 문 을 열고 말았다. 문 안에 들어선 헤냔은 프란의 오른편에 섰다. 그제야 반이 '프란의 연인' 이 아니라 '프란의 원 수' 나 다름없는 아일린의 가주라는 사실을 알아챈 하질리언 역시 굳은 얼굴로 프란의 왼편에 가서 선다.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군." 헤냔과 하질리언은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반은 그런 둘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애송이 소년 기사야 익숙한 얼굴이지만, 하질리언은 방금 전 처음 봤다. 저 놈은 누구이기에 여기 있는 거지. 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루니아 블레이드를 집어들 고 있었다. 그것이 명백한 적의(敵意)의 표시임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을 겁니다, 카르멘 경." 헤냔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피로 피를 막는 당신의 방식이 언젠가 당신을 그 자리에서 밀어 낼 거라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더군요." 헤냔은 싸늘하게 식어 있던 열 네 구의 시체를 생각하며 말했다. "프리나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압니까? 비켈린이라는 작자들을 피해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이 적 색산맥으로 도망 온 겁니다. 당신 때문에 프리나는 이 추운 곳에 온 거라고요! 그런데도 프리나는 당신을 살려줬어요! 며칠 밤낮을 붙어 있으면서 당신을 간호했다고요! 그런 프리나에게 할 말이 고 작 '너는 아일린의 도망자다' 입니까?" 헤냔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식이니까 당신이 배신을 당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 마음을 산산조각 내니까! 자기처럼 다 른 사람 심장도 얼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도련님, 그만해." 하질리언이 헤냔의 팔을 툭, 쳤다.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냔의 붉은 눈 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처음 아일린에서 도망 나올 때 봤던 프란의 여윈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 라, 헤냔은 자제가 되질 않았다. "뭘 그만하라는 겁니까! 카르멘 경, 당신은……!" "그만해라, 헤냔." 씩씩거리던 헤냔은 흠칫 프란을 돌아보았다. 프란은 어느새 평소의 얼굴, 약간 미소 띤 그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도망자인 건 사실이잖아." "하지만 프리나……!" 더 뭐라고 말하려던 헤냔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질리언이 헤냔의 입을 턱, 하고 막아버 렸던 것이다. "픕?"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올려다보는 헤냔을, 하질리언이 밖으로 질질 끌어낸다. "왜 이러는 겁니까. 난 할 말이 있단 말입니다!" "좀 있다 해." 평소엔 마이페이스면서 이상한데서 눈치 빠른 하질리언은 저 두사람에겐 단둘이 대화할 시간이 필 요하다고 판단했다. 바깥에서 헤냔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가운데, 프란과 반이 다시 정면으로 마주한다. "좋겠군." 프란은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히 반을 보았다. "시온도 그러더니 저 애송이 녀석도 마찬가지군." 반은 계속 알아먹지 못할 말만 하고 있었다. 다만 프란은 반의 위압감이 아까보다 더 강해졌다고, 그래서 숨을 쉬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프란은 허리와 어깨를 폈다. 담담해져야 했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평소처럼 강하게 빛난다. "뭘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반은 프란의 말에 대단하는 대신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난 여기에 계승식을 치르러 왔고, 도중에 배신을 당했다." 배신을 당했다는 말을 저토록 담담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당 혹한 나머지, 프란은 '그 계승식이란 게 뭡니까?' 라고 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계승식을 함께 치를 예정이었던 케인이 죽었다." 이번만큼은 반의 눈에도 감정이 서렸다. 케인, 이라는 이름을 말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계승식에는 나를 포함해 두 명이 필요하다." 프란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설마, 하면서 바라보는 프란을 향해 반이 말했다. "도망자 낙인을 풀어주고 남은 3천 5백만 중에 2천만 케트를 제해주겠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너무도 파격적인 제안이라서. 마침내 반이 말했다. "내 계승식에 함께 가자." 제 2장 어두운 하늘 "여긴 웬일이오?" 자켄린은 깜짝 놀라 물었다. 유폐된 지 벌써 몇 달째였지만, 자켄린은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하 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직업이 마법사 아닌가. 위저드 리그를 관리하느라 못했던 연구를, 그 야말로 몇 년 만에 원 없이 해보고 있던 자켄린이었다. 파란색 비커를 이리 저리 뒤척이고 있는 자켄린을 향해 방금 문을 열고 들어선 자, 이진느 아일린 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선혈의 마법사' 자켄린 밀러님과 긴히 나눌 말씀이 있어 들렸지요." 이진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자켄린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다난한 생각들이 스치고 있었다. 유폐된 자신, 가주가 없는 상황, 이진느 아일린의 갑작스러운 방 문, 아일린의 계승식, 시온과 자신의 관계. 순간, 자켄린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섰다. "당신이 내게 머리 숙일 이유가 없는 줄로 아는데?" 그렇게 말을 뱉으면서도 자켄린은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때로는 숙일 줄도 알아야지요. 시즈처럼 뻣뻣하게 굴어서는 될 일도 안되는 법이니까." 이진느는 웃었다. "시온은 내 아들이죠." "……." "당신의 제자고." "거절하오." 이진느는 자켄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 번만 눈 감으면 됩니다, 자켄린님." "난 시온이 가주가 되는 걸 원하지 않소. 난 시온이 훌륭한 마법사가 되면 그걸로 충분하오." "그렇겠지요." 이진느는 순순히 수긍했다. "원래는 시온에게 그 자리를 그대로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정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제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이 마법만 배우기를 원한다면, 좋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시온 역시 아일린을 다스리 는 일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까. 만약 당신이 내 얘기를 받아들인다면, 시온은 이름뿐인 가주가 될 겁니다.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시온이 마법 연구를 못 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얘깁니다." 이진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시온은 날 대신해서 계승식만 치르고 돌아오면 됩니다." "이진느, 탐욕이 지나치면……." "나는 탐욕을 부린 적 없습니다." 이진느는 또렷한 시선으로 자켄린을 보았다. "그 자리는 처음부터 시온과 제 것이었습니다." * * * "카르멘으로 간다." "뭐라고요!" "대장! 드디어 돌았…… 악!" 저도 모르는 사이 '대장, 드디어 돌았습니까?'라고 물을 뻔했던 란돌은 히스 덕분에 목숨을 건졌 다. 히스가 등을 꼬집어 터져 나오는 말을 막아줬기 때문이다. 만약 끝까지 물었다면 지금쯤 란돌 은 정신없이 구타당하고 있을 터였다. "고맙다, 히스." 란돌은 히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히스는 상큼하게 웃으며, 역시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별말씀을요. 후배로서 당연히 할 도리를 한 것뿐인걸요." "근데 있잖아. 좀 많이 아프게 꼬집는다, 너?" "하하, 란돌 선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주, 주먹은 내려놓으시죠. 으악, 설마 때릴 셈입니까?" 잠시 얼굴을 마주했던 란돌과 히스는 퍼뜩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다. 방금 룬은 다른 곳도 아닌 '카르멘 가'라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카르멘 가라고 하셨습니까?" 아인켈 내에서 제일 나이 많은 로키가 연장자답게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진심은 아니시겠죠' 하는 속마음이 배어 있었다. 룬까지 합쳐 서른 명인 아인켈들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키네세스 공주는 그들과 약속했었 다. 최대한 오랫동안 아일린 가에 머물겠다고. 자신이 있는 한 아무리 이진느라 해도 함부로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키네세스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돌아가 달라는 말이 나온 뒤에도 키네세스는 2주 동안이나 이 저택에서 버텼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공주의 아버지인 키네온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 버지가 아프다는 말에 가슴이 메어지는 상황이면서도, 배려 깊은 물빛의 레이디는 룬을 찾아왔다. "제가 떠나면 분명 사단이 있을 것입니다." 룬은 핏발이 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인켈의 적은 정초원일 거예요. 제가 아일린의 질서에 낯설기는 하나, 룬님에게 전해들 은 정보를 종합해보면 이런 결론이 나와요." 룬은 이 연약한 공주님의 눈을 보았다. 키네세스의 눈은 총기로 빛나고 있었다. "요즘 통 보이지 않는 세라딘은 늘 그랬듯 정초원 쪽에 붙었을 거예요. 만약 그들이 가주에게 무 슨 짓을 했다면 원로원 역시 그 쪽에 붙었다고 봐야 해요. 계승식 장소를 알고 있는 건 원로원뿐이 었으니까. 일단 정초원, 세라딘, 원로원이 적에게 붙은 셈이죠."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저드 리그는 막강한 변수인 것 같습니다만, 성급히 접촉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이미 저편에 붙었을지도 모르니까. 당신들이 그 쪽에 접촉하는 순간, 적은 그걸 명목 삼아 당신들을 옭아맬 수 있어요. 시온님이 위저드 리그 장인 자켄린님의 제자인데다가, 시온님과 자켄린님의 동시 투옥 건 으로 위저드 리그와 저쪽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거예요. 위저드 리그가 저쪽에 붙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안전하죠." 룬은 키네세스를 보며 생각했다. 시즈 아일린 가주가 돌아온다면, 그는 은근히 키네세스를 반려로 맞이하라고 권유할 것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총명하며 배려 깊은 아가씨를 안주인으로 모신다면 그 만한 행복이 없을 것 같았다. "여섯 집단 가운데 적으면 셋, 많으면 넷이 당신의 적인 셈이죠. 숫자가 적은 당신들로는 이 모두 를 제압하는 것이 역부족이에요. 게다가 당신이 확실한 아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비켈린은 현재 이 저택에 없어요. 열두 명은 한 도망자를 찾기 위해 각지로 흩어졌고……." 키네세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도망자가 프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키네세스의 경악은 이 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룬은 프란이 여자였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키네세스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빚을 갚아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던 프란이, 제 발로 도망갔다는 사실 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다시 단호한 눈으로 돌아온 키네세스가 말을 잇는다. "나머지 스물 네 명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셨으니. ……제 생각엔, 일단 아일린 가를 떠나 있 는 것이 좋을 성 싶어요. 가주가 돌아왔을 때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살아남아 그를 도와줘야 할 테니까요. 제가 정초원이라면, 3대 1내지 4대 1로 포위당한 아인켈부터 먹어치우려 들 거예요. 아인켈과 비켈린이 합세하기 전에 각개 격파하는 게 더 유리할 테니." "키네세스 공주님." "말씀하세요." 룬은 믿음이 어린 눈동자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인켈은 어찌됐든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공주님이 떠나고 나면 이진느는 당장 저희를 공 격할 겁니다. 틈을 주지 않으려 하겠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 키네세스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공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먼저 떠나는 편이 좋았을 것을, 키네온 국왕 폐하가 몸져누울 것이라고 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공주님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는 건 압니다. 허나 혹 우리가 빠져나갈 좋 은 방법이 없겠는지요?" 답을 달라는 게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안다. 하지만 룬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떤지요." 키네세스의 말이 끝난 후, 룬의 눈은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룬은 환희에 차서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잠시 움찔했다. "그, 그런데 공주님. ……그, 그런 짓을 런스 경이 허락할까요?" 키네세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런스 경의 주인은 그대의 주인과 같으니 허락할 거예요." 다시 한 번 눈이 하트로 변해버린 룬이었다. * * * 키네세스와의 대화가 끝난 후, 룬은 당장 아인켈들을 집합시켰다. 행동파다운 일이었다. 더 생각 해보지도 않고 그는 냅다 말해버렸다. '카르멘 가로 가자!'라고. "왜 하필 카르멘 가입니까? 아일린과 카르멘은 대대로 사이가 안좋았습니다. 오죽하면 두 가문의 가주가 동일인물인 지금 상황에서도 서로 왕래를 삼가며 살지 않습니까?" 로키가 모두의 불만을 대신해 말했다. 룬은 짧게 답했다. "간단하게 설명한다. 아일린 가는 대륙에서 제일 막강한 가문이다." 모두의 얼굴에 자긍심이 피어났다. "가주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저택을 나간다면, 그 순간 이진느는 아 일린 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일린을 장악하는 자는 곧 아일린의 그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겠지. 이진느가 '아일린의 이름으로' 우리를 수배하면 우리는 꼼짝 없이 끌려오게 될 것이다. 설 사 우리가 세이피안 왕가에 몸을 의탁한다 해도, 세이피안 왕가는 우리를 아일린에 내줄 것이다. 아일린은 적으로 두기엔 너무도 강한 가문이니까." 모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우리는 아일린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곳, 가주님이 돌아오셨을 때 제일 처음 맞 이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어쩔 수 없다. 카르멘만이 아일린에게 대항 할 수 있다. 괜히 대륙의 양대 가문인 게 아니지." 그제야 모두는 룬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는 '우리 대장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라 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이라는 것과 담쌓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대장은 대장이었던 것이 다. '대장, 몇 분 새 늙은 것 같았는데 그게 다 이 생각하느라 그랬구나.' 모두는 측은한 마음으로 룬을 보았다. 룬이라고 해서 언제나 견제해왔던 카르멘 가로 '도피'하는 것이 좋을 리 없다. 그러나 저 자존심 대장 룬이 스스로 자존심을 굽히고 카르멘 가로 가겠다는 것 이다. 오직 하나, 시즈 아일린 가주가 돌아왔을 때를 위해서. "그럼, 비켈린은 어찌 합니까. 우리가 떠난 후 임무를 완수한 비켈린들이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찍 소리도 못내 보고 이진느한테 먹힐 텐데요." "카르멘에는 켈리가 있다. 켈리를 통해 비켈린과 연락할 수 있을 거다. 우리가 우리 식으로 연락 을 취하듯, 녀석들은 녀석들 식으로 연락을 취하니까." 모두가 동시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서른 번째 비켈린, 켈리. 암흑의 정보원으로 카르멘에서 비 밀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여자. 이번엔 히스가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죠? 저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정초원과 원로원, 세라딘, 위저드 리그 까지 합세해서 공격해오면 수가 없습니다. 라어 강을 건너기도 전에 죽을 겁니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며 키네세스 공주가 들어선 것은. 아인켈들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키네세스가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여러분. 방법을 생각해뒀습니다." * * * 자켄린은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 시온을 두들겨 깨웠다. "일어나봐, 이 팔자 좋은 자식아!" "……몽둥이 말고 손으로 좀 깨우쇼." 부스스한 머리의 시온이 눈을 떴다. 하도 맞아서 아프지도 않은 정수리를 툭툭 건드리며, 시온이 길게 하품을 한 번 한다. "이 빌어먹을 제자 놈! 옷부터 입어라." 잘 때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는 시온의 습관은 여전해서, 그는 오늘도 알몸이었다. 시온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후후. 눈이 즐겁지 않소? 게다가 공짜잖우." "네놈이면 즐겁겠냐! 지랄 쌈 싸먹는 소리 하지 말고 입으라면 입어!" 시온은 험한 말을 들으면서도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운을 걸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여유는 있 는 건가. 자켄린은 씁쓸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안쓰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켄린은 용건을 꺼냈다. "하나만 묻자, 시온 아일린." "물어보쇼. 단, 아프지 않게." "……정말이지 네 놈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실없는 농담이 나오느냐." 자켄린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물었다. "아일린을 가지고 싶나?" "전혀." 힘들게 질문한 사람 무색하게 시온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뭔가를 깨달았는지 시온이 씩, 웃는다. "아하! 어머니가 스승님도 찔렀나보우?" "그래. 옆구리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찔렀다, 이자식아." "그 옆구리는 어찌나 튼실한지 아무리 찔러도 살은 안 빠지네." "농담 따먹기 할 때냐!" 자켄린은 분노의 세필나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시온은 여전히 헤헤, 하고 웃는 낯이다. 이 자식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살지. 자켄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네 어머니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했다, 시온." "뭐라고 그랬는데?" 시온이 머리칼을 정리하며 물었다. 자켄린은 답했다. "그 자리가 본래 너와 자기 것이었다고." 순간 시온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자켄린은 그 눈에서, 시온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하지만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난 시즈가 가주이든 너나 네 어머니가 가주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네 의중을 물어보러 온 거다." "냉정하시우, 스승님. 그래도 형님이 감투까지 씌워줬잖소?" 시온이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자, 자켄린이 세필나무 방망이로 시온의 이마를 딱, 내리쳤다. 이번 엔 평소보다 훨씬 강도가 셌다. 하도 맞아서 혹도 잘 안나는 시온의 이마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아프잖소, 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시온을 향해 자켄린이 벼락 같이 고함을 쳤다. "난 이 지긋지긋한 권력 암투랑 상관없이 너만 무시하면 된단 말이다! 못 알아먹는 척하지 말고 진지하게 답해!" 시온은 환하게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시온의 입술 끝이 조금 떨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 다. '스승님, 미안합니다. 이딴 제자라서.' 프란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 다시 한 번 마음속에서 울컥거렸다. 그랬군, 시온은 새삼 깨닫는다. 내가 그나마 이렇게라도 자랄 수 있었던 건 세필나무 방망이 퍽퍽 휘두르는 스승님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있잖소, 스승님." "왜." "나 아일린 가주는 싫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다. 네 어머니의 말은 지금 바로 거절……." "근데, 그 애는 포기 못하겠어요." 자켄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자켄린을 향해 시온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각서를 썼고, 8써클 마법을 배울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발했다. 자켄린이 아찔해 하는 사이, 시온이 마침내 말했다. "난, 프란을 데려와야겠어요." 시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내가 원하는 건 프란뿐이니까." * * * "난 반대야!" 헤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프란으로부터 반의 제안을 전해들은 직후에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왜? 이게 잘 끝나면 나나 너나 더 이상 도망 안 다녀도 되는데." 프란이 의아한 듯 답했다. 헤냔은 그러나 도리질 치며 다시 소리쳤다. "그래도 싫어, 프리나! 난 네가 카르멘 경이랑 단 둘이……!"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헤냔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너랑 카르멘 경이 단 둘이 가는 거 싫다 고!라고,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헤냔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이번 일만 잘 완료되면 이 지긋 지긋한 혹한의 산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프리나를 죽도록 고생시킨 저 남자 때문에 또다시 프리나가 생고생을 해야 하다니. 게다가 단 둘이 계승식인지 뭔지 뜻도 모를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맘이 편 할리가 없다. "도련님." "씨!" 헤냔이 씩씩대며 바라보는 가운데, 하질리언은 오랜만에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이건 프리나가 결정한 거야.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 말에 헤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헤냔이 뜻밖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 다. "……예, 결정하는 건 프리나니까." 그 순간 하질리언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아, 정말 아까워 죽겠네! 프리나! 헤냔이랑 좀 잘해봐! 자기 잘못을 이렇게 쉽게 인정할 줄 아 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아냐! 내가 여자라면 납치를 해서라도 잘해볼 텐데, 넌 대체 뭐냐! 엉!' 생각하다 말고 하질리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반을 보기 위해서다. 반은 세 사람과 멀찍이 떨어진 채 홀로 서 있었다. 아직도 상처가 낫기는커녕 운신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반 은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의 옆모습을 보며 하질리언은 속으로 감탄한다. '어찌됐든 대단한 놈이야.' 프란에게서 반이 처한 상황을 대강 전해 들었던 하질리언이다. 가장 아끼던 수하도 죽고 몸도 정 상이 아님에도 저렇게 할 일을 확실히 해나가다니, 저 행동력은 무서울 정도다. "헤냔." 아직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헤냔이 고개를 반짝 든다. 반을 보고 있던 하질리언도 다시 고 개를 돌렸다. 헤냔이 풀죽은 얼굴로 응? 하고 올려다보는 가운데 프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눈 끝이 가늘게 휘어지는, 아름다운 미소다. 헤냔은 놀랬다. 프리나가 이렇게 예쁘게 웃었던가. 그런데, 정말 놀랄 일은 다음 순간 일어났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어? 어? ……어, 응, 어." 헤냔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프란이 저토록 솔직하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다. 언제나 쑥스러워하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감사를 표시했던 프리나였는데. 헤냔의 얼굴 이 다시 붉어지는 가운데, 프란이 가슴을 탁, 쳤다. "맘 푹 놓고 기다리라고! 이번에도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프란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하질리언은 물론 헤냔마저도 웃고 말았다. * * * '으아악!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 꼴이 대체 뭐냐!' 그리고 약 다섯 시간 후, 프란은 속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저주의 신 라이메스! 당신은 날 미워하는 게 분명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엉?' 프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땅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아니, 땅을 파고 들어가 두더지와 친구하며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다. 이곳 적색산맥에선 땅 파고 들어가 려면 눈을 20지나 이상 파야 된다는 게 슬플 뿐이다. 물론 두더지따위도 없을 거고. '쪽팔려서 죽어버릴 것 같아!' 프란은 그 쪽팔림을 갈무리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저편 눈밭을 보고 있던 반이 고개를 돌려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가 몇 달 동안 적색산맥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실수를 왜 하필 지금 했단 말인가. 처음, 길을 나설 때만 해도 프란은 자신만만했었다. '대마왕이야 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겠지만 난 좀 익숙하단 말이지. 대마왕이 추위에 덜덜 떨 때 나는 당당하게 걸어야지! 흐흐흐, 자식. 심하게 추울 거다.' 오죽 자신이 있었으면 그런 생각마저 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프란은 발 을 삐었다. '……헉.' 정말 재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닐 거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처음엔 착실 하게 한 걸음씩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발이 퉁퉁 부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 고 말았다. '몸이 엉망진창인 대마왕도 걷는데 내가 못 걸을 리 없다. 움직여라, 몸뚱이야!' 프란은 주문 거는 심정으로 발랄하게 걸어보려 했다. 마지막 눈물이 고이는 골짜가기 차차 보이기 시작하는 터라, 몇 시간만 더 걸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서, 프란의 발은 더 이상 못 간다며 주인의 의지를 배반해버렸던 것이다. 억지로 걷고 있던 프란이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을 때, 반은 두말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가지고 왔던 침낭을 폈다. '웬일로 네가 아무 말 안 하냐! 더 무섭다고!' 차갑게 바라보며 '정신 차려라', '걸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대마왕답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 지도 않는 건 대마왕다운 일이지만, 말 한 마디 없이 침낭을 달랑 펴버리다니, 사람이 아프면 어디 가 좀 이상해지는 건가,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린다.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침묵을 깨며 촐싹거리는 것은 프란이었지만 이번만은 프란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3천 5백만 케트를 그런 식으로 처분하지 않는다." 그 말이 언제까지고 프란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기에, 불굴의 수다 의지를 가진 프란 프리 텐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반의 바쁜 발목을 붙잡아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프란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반은 말없이 헤냔이 싸준 가방을 풀었다. "당신이 좋아서 챙기는 거 아닙니다!" 애송이 기사 녀석은 가방 하나 가득 먹을거리와 나무 몇 개를 싸놓았다. 얼어 죽지 말라고 나무를 넣어놓은 거겠지. 반은 불을 피웠다. 불을 피우는 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프란이 입을 열었 다. "하, 한 나절만 쉬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반은 그런 프란을 돌아보았다. '뭐, 뭘 보는 거냐.' 프란이 당황하는 사이, 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란은 헤냔이나 하질리언과라도 대화를 했지만 , 반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 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저 놈의 입은 붙어 버렸나, 입이 근질거 리지도 않나, 라고 중얼거렸던 프란은 장장 서른여섯 시간 만에 처음으로 반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까이." 서른여섯 시간 만에 말한 것치고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깨어나던 그 날처럼 반쯤 갈 라져 있지도 않다. 하긴 대마왕이야 언제나 말 안하고 사는 남자였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더라 ? 프란은 눈을 끔뻑이며 되묻는다. "예?" "가까이 오라고 했다." "많이 아픕니까?" 프란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쳤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음의 생채기 따위 저 멀리로 치워버 리고, 프란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이건 진짜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 까이 오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대마왕이 나보고 가까이 오라는 말이 나오다니! 천지가 뒤집어 지다 못해 계란 프라이가 될 일이다. 프란이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렇게 소리치자 반의 미간이 좁혀 졌다. "무슨 뜻이지?" "사람이 많이 바뀌면 곧 죽을 신호라는데, 그걸 생각하니 무서워서 이러는 겁니다!" 앞뒤 재보지도 않고 프란이 냅다 소리쳤다. 진심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반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넌 역시 바보로군, 반의 옆얼굴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 표정은 대체 뭐냐!' 프란이 발끈하는 가운데 반이 말했다. "불 옆으로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 프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런 뜻이었어? 괜히 멋쩍어진 프란이 무릎걸음으로 움직여 불 옆으로 가까이 간다. 가방 안에 넣을 수 있는 장작이 많을 리도 없고 그나마도 올 때 갈 때 나눠서 떼야 할지도 모르니 적게 넣은 탓에, 불은 낮게 타올랐다. 그래도 이 추위에 이 불이라니, 프란은 저도 모르게 불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프란의 얼굴 위로 불길의 그림자가 올랐다. 오렌지색 눈동자는 그 불길을 반사 해, 약간 더 붉어 보였다. 반은 잠시 그 얼굴을 보았다. '웃긴 녀석.' 늘 그랬듯이 오늘도 프란은 그를 당혹시킨다. 평소엔 지치지도 않고 조잘조잘 떠들던 녀석이 쥐죽 은 듯 조용하니 반이라고 해서 어색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랬던 주제에 고작 불 가까이 오라는 한 마디에 프란은 평소대로 반응해버렸다. 정말 통제도 예측도 안 되는 이상한 녀석이 아닐 수 없 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프란은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반을 보았다. 반은 뭘 생각하는지 눈동자가 저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 근데 진짜 춥네. 불 옆에 있어도 추워 죽겠어.'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 연습 할 땐 열이 확확 올라서 어느 정도 추위를 잊을 수 있었는데, 그냥 밖에 나와 있어보니 아곳이 얼마나 추운 곳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멍한 표정이던 프란과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반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한 것은, 같은 생각이 둘의 머리를 엄습한 것이다. '익숙하다 했더니, 그때도 이랬었지.'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렇다. 카르멘에서 아일린으로 오던 며칠 동안이 꼭 이랬다. 물론 날 씨는 전혀 달랐지만, 달랑 둘이서 침낭 들고 길을 떠난 것은 똑같았다. 그때도 밤에는 불을 떼고 침낭을 깐 채 나란히 누워 잠을 잤었지. 그때는 이런 추운 곳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저 빨리 아일린이라는 곳에 도착해 발 뻗고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니. 프란은 고개를 들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세계는 온통 흰 빛이었다. 이편에선 저편까지, 오직 흰 색. 밤인데도 흰 눈 때문에 사방이 밝아 보일 지경이다. 흰색은 반사 각이 높다고 했던가. 입자가 고운 설탕 가루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것 같다. 프란은 하아, 하고 손 에 입김을 불었다. "어떻게 지냈나." "으, 으아아악!" 쪼그리고 앉아서 손에 입김을 불어본 사람은 안다. 그 자세, 의와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 다는 걸. 게다가 눈 위에서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프란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당혹한 나머지 그냥 넘어진 것도 아니고, 눈밭에 머리를 찧었을 정도다. 불에 넘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 행이다. "……뭐하냐?" 보고 잇던 반이 한심하다는 듯 한 마디 한다. 넘어졌던 프란은 오뚝이처럼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 이 붉어진 프란이 소리를 쳤다. "안 하던 짓 하니까 놀라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진짜 많이 아픈거 아닙니까?" 프란은 정말 놀라서 물은 건데, 반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안 하던 짓?" "아니 도대체가, 가주님이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하다니, 웃기잖아요!" "뭐가 웃긴다는 건가?" 이건 뭐야. 프란은 순간 당황해버렸다. 정말 농담이 아니라, 저 사람은 '뭐가 웃긴다는 거냐'라고 묻고 있는 거다. 여태까지 네가 해온 짓을 생각해봐, 대마왕! 사람이 나를 향해 '처분'이니 어쩌니 소리를 한 거, 기억도 안 나냐! 프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걸 보고 있던 반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요!" "……뭔가?" "질문을 했으면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럴 거면 대체 왜 물어봤어요! 질문을 했으면 답이 좀 늦게 돌아와도 기다려야 하는 거잖습니까!" 프란이 버럭 고함을 치자 반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 기묘한 얼굴을 보고 있던 프란 역시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마치 못 볼꼴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혹시, 혹시나 해서 묻는데……." "……." "……지금 혹시, 정말 혹시…… 웃음 참고 있는 거 아닙니까? 꼭 그렇게 보여서요. 착각이겠지 만." "……헛소리." 반은 등을 보였다. '대마왕이 진짜 이상해!' 돌아앉은 반을 보며 프란은 생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반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다. 프란은 잠시 그 등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단단한 등이다. 패배나 배신 따위 경험해본 적조차 없다고 강변할 것 같은 등, 상처 따윈 입어본 적 없다고 말할 것 같은 이 강한 등. 진짜 대단해. 프란은 그렇게 생각한다. 케인이 죽고, 세라딘은 배신을 하고, 이진느가 남아 있는 아일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반은 달라진 게 없다. 한참 그렇 게 '역시 대마왕' 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프란은 혀를 깨문다. 갑자기 내가 저 대마왕이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완전히 같진 않겠지만 지독할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건 프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죽고, 집이 박살나고, 끌려와 하인이 되었고, 죽을 고비를 수심 번 넘기면서…… 그러나 프란은 웃었다. 웃는다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는 게 아니었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 따위, 멍들지 않는 영혼 따위 없다. 다만 그녀는 상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고통을 참고 매 순간 에 집중하며 살았을 뿐이다. 그래. 만약 프란 자신이 반의 상황이었다면, 그녀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을 가장했을 것이다 . 다만 프란이 웃는 것으로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면, 저 쌀쌀맞기 그지없는 대마왕은 냉정한 얼굴 로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한 점 흐트러짐도 없 는 저 강함이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프란은 반의 등을 다시 한 차례 보았다. 프란은 그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도망친 건 미안했습니다." 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프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여자라면 얕보일 것 같았습니다. 혹시 성적인 학대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 떠나기 전에 결심한 거였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지만, 기회가 안 됐습니다. 절대, 일부러 속이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도망친 건…… 사실 가주님이 날 죽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 니다. 하지만 그냥, 상황이 그랬습니다." 반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프란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도망쳐서 로이네트로 왔습니다. 거기서 락케이드를 만났고……." "집사 말인가." "……그렇습니다." 락케이드에 대해 얘기해준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기억력도 좋지, 잘도 기억하는군. 프란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락케이드와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어린 시절 친구였던 하질리언도 만났고……." 프란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세계는 여전히 흰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저 계집은 도대체 왜 나가지를 않는 거지!" 이진느는 소리를 쳤다. 국왕 키네온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키네세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키네세스는 키네온과 둘도 없는 부녀 사이라고 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앓아누웠 다는데 당장 떠나질 않고 뭐하는 건가. 그 소식이 전해진 게 벌써 5일 전이다. 오늘은 가겠지, 내 일은 가겠지, 생각했으나 카세타 계집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진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 시즈의 시체 회수를 위해 두 명의 세라딘을 보냈다. 이젠 아인켈만 치면 된다. 그런데 카 세타 계집 때문에 아인켈 토벌 명령도 내리지 못한 이진느였다. '별 수 없군. 내가 직접 가서 설득하는 수밖에.' 현재 이 가문의 안주인인 자신이 계속해서 돌아가 달라고 말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짓 같아서 자제 하려 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그 사이 비켈린이 소식을 듣고 달려오면 어쩐단 말인가. 아인켈과 비켈린이 합세한다 해도 이쪽을 감당하는 건 무리겠지만 피해가 늘어나리라는 건 자명했 다. 이진느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키네세스는 벌써 5일째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 봐도 런스라는 작자가 '공주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라는 시건방진 말로 돌려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이 가는 수밖에. '이런.' 키네세스가 머물고 있던 방 안을 지키고 있던 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반갑습니다, 런스 경." "예, 이진느 아일린님." 격식을 갖춰 말을 주고받고는 있지만 둘 다 표정이 좋지는 않다. 특히 런스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 는 기분이었다. 그런 런스를 향해 이진느가 미소 지었다. 이진느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는 런스였 지만, 그 미소가 아름답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참 고운 여자 로군. 문득 그렇게 생각했던 런스는 험험, 하고 기침을 했다. "공주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엔 상대가 녹록치 않다. "키네온 폐하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이미 전달하지 않았던가요? 공주께서 이 집에 계속 머무 는 건 딸 된 도리가 아닙니다. 한 말씀 드리러 왔으니 비켜서십시오. 당신이 비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가주가 없는 현재, 난 이 집의 가주 대리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충 분한 자격이 있어요." 런스는 주먹을 쥐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진느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만약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진느는 사람을 불러서라도 런스를 밀어내 고 저 문을 열 것이다. 런스는 할 수 없는 비켜섰다. 이진느는 위풍도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문을 연 순간, 이진느의 눈동자는 크게 확장되고 말았다. "……이 무슨……." 키네세스가 있어야 할 그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 * "하하하하!" 시온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온의 은발이 그의 웃음에 장단을 맞추려는 듯 춤을 춘다. 아들놈 이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 있는 이진느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웃음이 나오느냐!" "하하, 하하하하!" "웃음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시온 아일린!" "웃긴 걸 어쩝니까, 그럼." 눈에 맺힌 눈물까지 닦으면서 시온이 경쾌하게 답했다. "공주를 얕보면 안 되죠, 어머니. 그녀가 카세타 전체로부터 사랑받는 건 단지 예뻐서가 아니란 걸 간과하셨군요. 아주 똑똑하다고요, 키네세스 공주님은." "지금 누굴 칭찬하는 것이냐!" 이진느는 고함을 쳤다. 그러나 시온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인켈도 도망친 후죠?" 시온의 질문에 이진느는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미련한 문지기 녀석들! 아직 대(對)아인켈 명령 이 떨어지기 전이라서, 문지기들로서는 아인켈들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멍청한 문지기들 이 멀뚱한 얼굴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서른 명의 아인켈은 사람만한 짐짝을 하나 지고 5일 전에 이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키네세스 공주를 신경 쓰느라 막상 아인켈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이진느로서는 뼈아픈 한 방이었 다. 녀석들도 머리가 있으니 공주가 저택에 있는 한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만 한 짐짝이라니, 그게 필시 키네세스 공주였을 것이다. 공주 된 신분으로 짐짝처럼 천에 둘둘 말려 저택을 빠져나가고는 자신이 이 저택에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니. 정말이지 영악한 계찝이다. "어쩌나. 공주는 도망쳤고 기사는 남았지만 왕국의 기사를 함부로 처벌할 수도 없고. 분풀이도 못 하게 생겼으니 어머니로서는 미칠 노릇이겠네?" "닥쳐라, 시온 아일린!" * * * "이 모든 게 공주님 덕입니다." 룬은 진심으로 말했다. 키네세스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모든 아인켈들은 키네세스 공주를 선망과 숭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 미모로 혼을 빼놓더니 이번엔 기지로 자 신들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안주인이 되시기만 한다면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이지 공주님 같은 분을 만난 건 행운입니다!' '가주님과 결혼만 해주세요!' 아인켈들 모두가 눈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키네세스로서는 한 번에 두가지 실적을 올린 셈 이다. 오직 반을 위해 한 일이었지만, 그 일로 인해 아인켈의 환심까지 샀으니. "그 짐짝이 공주님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룬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탈출을 위한 공주의 작전은 간단했다. 아인켈들은 거대한 천을 가져와 키네세스의 몸 전체를 감싼 후 그 위를 끈으로 싸매 고정했다. 고귀한 신분의 공주를 그딴 식으로 대한다는 데에 일말의 자책 감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모든 건 당신들의 가주를 위해서이니 망설이지 마세요'라 는 키네세스의 말에, 그들은 결연히 눈을 빛내며 그녀를 꽁꽁 묶을 수가 있었다. 망설였던 주제에 어찌나 꽁꽁 묶었던지 키네세스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그, 그만! 숨을 못 쉬겠어요!" "으악! 죄송합니다!" 가주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온 순간 이성을 상실하고 원수 대하듯 키네세스를 묶고 있던 룬은 그제 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고 당황해했다. 공주를 짐짝처럼 꽉 봉한 후, 아인켈은 문지기들의 환송을 받으며 저택을 떠났다. 저택을 벗어나는 동안, 키네세스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정말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짐짝 노릇을 했던 것이다. 아일린 가 추적자들이 이제야 탈출을 눈치 챘다고 해도 아인켈들만큼 빠 르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곧 로딘입니다." 카세타 출신인 란돌이 발랄하게 말했다. 로딘은 카세타와 세이피안의 국경지대다. 아인켈들은 여 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일이 그야말로 일사처리로 풀렸던 것이다. 거기다 이제부터 들어설 곳은 카세타! 공주와 함께 왔으니 출입을 저지당할 걱정도 없다. 카르멘 가까지 무혈입성 하는 건 시간문제다. 룬과 같은 말을 타고 있던 키네세스는 국경의 병사들이 또렷이 보일 때쯤 입을 열었다. "혹시 마찰이 있을지도 모르니, 제가 먼저 가서 당신들을 통과시켜 달라고 말하겠어요." 배려가 깃든 키네세스의 말에 룬은 또 한 번,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제발 가주님이랑 결혼만 하세요! 진짜 평생! 평생! 공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이 우직한 사내는 정말로 감동받고 있었다. 곧, 키네세스가 말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아인켈을 남 겨둔 채 사뿐한 걸음걸이로 국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아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히스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열었다. "가주님은 진짜 운도 좋지. 저런 여자가 청혼을 하다니." 그 말에 룬이 버럭 고함을 쳤다. "운이 좋다니! 가주님이 너무도 멋진 분이니까 공주님이 청혼을 하신 거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당연한 거란 말이다!" 히스가 끼깅, 하고 꼬리를 말았다. 풀죽은 히스의 얼굴을 보며, 고함을 쳤던 룬이 너털웃음을 터 뜨린 건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가주님한테 운이 따르는 건 사실일 거다. 아무리 남자가 멋져도 여자가 못 알아보면 그만 이니까. ……믿자! 그 운으로 우리에게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고." 들뜬 분위기였던 아인켈들은 룬이 목소리를 낮춰 한 마지막 말에 일제히 숙연해졌다. 그들은 고개 를 크게 끄덕였다. '시즈 아일린 가주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아인켈들의 눈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공주가 꽤 오 랫동안 나오지 않아 아인켈들이 의아한 마음을 가질 무렵이었다. "대장!" 한 순간, 히스가 벼락 같은 소리를 질렀다. 로딘 쪽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아인켈들을 보고 있던 룬이 움찔했다. 룬은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 대의 화살이 룬의 발치쯤에 퍽, 하고 꽂혔다. 피하지 않았다면 분명 맞았을 것이다. 룬의 이마로 서늘한 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 무슨……!" 룬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는, 카세타의 국경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화살을 장전하고 있는 광경을 봐야만 했다. 아인켈들사이에서도 숨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가 경악하는 가 운데, 장전된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대장! 도대체!" 히스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 * * 시온과 이진느는 여전히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온은 잠시, 가만히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다. 밉지만, 또, 가여운 사람. 죽도록 미웠지만 그는 끝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의 말대로 행동했던 것은 어쩌면 동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목을 두둑 꺾었다. 그리고 시온이 다시 이진느를 마주 했을 때, 그의 눈에선 농담이 사라진 뒤였다. "어머니, 사실 별로 화 안 났죠? 오히려 속으로 웃음이 날 걸?" "……무슨 뜻이지?" "시치미 떼지 마슈." 시온의 눈동자는 꿰뚫을 듯 이진느를 향해 있었다. "공주 덕에 어머니 손에 피 안 묻히게 된 셈이지 않수? 이 저택에 누가 아일린의 새 주인인지 과 시할 기회를 잃은 건 사실이지만, 집안사람끼리 피 흘리며 싸우게 만들었다는 원망 들을 일도 없어 진거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시온의 말에 이진느는 한숨을 깊게 한번 쉬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내가 알고 있는 건 카세타 국왕이 그렇게 갑자기 아플 리가 없다는 것 정도지." 시온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어머니가 아프게 만들었을 뿐." * * * "당장 멈춰요! 멈추란 말 못 들었어요?" 키네세스는 고함을 쳤다. 키네세스는 눈앞에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키네세스가 로딘의 병 사들 쪽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은 함께 온 자들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 병사들 중에는 웬일인지 디센 기사단장인 메이스도 끼여 있었다. '기사단장이 왜 이런 변방에?' 키네세스는 의문을 느꼈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나와 함께 아일린에서 온 아인켈들이에요. 예의를 갖춰 대접해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이스는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키네세스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동안 두 명의 병사가 키네세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 때까지만 해 도 키네세스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예측하지 못했다. 메이스는 성큼 성큼 병사들 앞으로 나아갔다. 키네세스는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병사들 중 몇몇 얼굴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변방의 병사들을 공주인 그녀가 알 리 없다. 그들은 디센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었다. "적이 왔다. 공격해라." 메이스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울렸을 때야 키네세스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 챘다. "무슨 짓이야! 멈춰요!" 키네세스는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두 명의 병사가 굳건히 그녀 를 막아섰다. 연약한 공주님이 그들의 경계를 뚫는 건 무리였다. "그만둬!" 한 순간, 키네세스는 비명을 질렀다. 카세타의 병사들이 화살을 장전하고 있었다. 룬이 한 발의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것이 보 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아인켈들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 다. 아인켈 대부분은 별다른 무리 없이 화살을 피해냈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세타 병 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을 때야 룬 일행도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들었 다. "……아아." 키네세스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그녀가 지켜주고 싶었던 아인켈들이, 그녀가 사랑하는 카세타의 병 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아, 이런 광경 따위!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도피하 지 않기 위해, 키네세스는 눈을 감는 대신 자신의 옆에 선 메이스를 바라보았다. "대답해줘요, 메이스 경! 그대는 왜 공주인 내 명령을 거역하고 저들을 공격하는 거죠? 저들은 내 친구예요, 내가 지켜주고 싶었던 소중한 친구들이라고요!" 메이스는 공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공주님. 저희는 공주님의 말씀보다 국왕 폐하의 말씀을 더 존중해 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순간 키네세스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몇 개의 단서들이 순식간에 끼워 맞춰진다. 깨닫고 싶지 않지만 이미 단서들은 하나의 명확한 사실을 그녀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키네세스는 입술을 떨면서 물었다. "……아바마마는, 아프지, 않은, 건가요?" 메이스는 답했다. "키네온 폐하의 신상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은 공주에게 안도감을 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키네세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총명한 이 공주님은 한순간에 상황을 파악해버렸기 때문이다. 키네세스 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왜 아일린에선 건강한 키네온이 아프다 했을까? 한 나라 국왕의 건강 문제로 거짓을 꾸며내는 건 중죄다. 그것도 그 딸인 공주를 대상으로 한다면 더욱 그 죄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약 키네온 이 이 거짓말에 동의했다면 어떨까?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공주를 카세타로 불러들이기 위해, 키네 온이 거짓 정보를 흘리는데 동의했다면. 키네세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아버지는 이진느와 결탁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아인켈들을 데리고 이곳에 올 것이라는 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혹 아인켈들이 이 쪽으로 도망 올까 염려해 기사들을 배치한 것이겠지. 세이피안 국경을 맞대고 있는 3국의 변장 모 두 같은 상태일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모두를 의심해도 자신의 아버지는 의심하지 못했다. 키네세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저스티스 카르멘이기에, 아버지 역시 그를 지지해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스웬의 일로 마음고생이 심한 아버 지였던 만큼, 정말로 아플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찌 단 한 번 의심조차 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 키네세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5대 1로 포위당한 아인켈 하나가 칼에 맞는 광경을 본 직후였 다. '카르멘 경!' 키네세스는 속으로 반의 이름만 부를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저주했다. 이 가여 운 공주의 어깨가 무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반은 움찍한다.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듯해서다. 그러나 멈춰 서려는 반의 움직임을 막으며 프란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지게 춥네." 프란은 몸을 부들 떨며 투덜거렸다. 반은 그런 프란을 흘끗 돌아 보았다. 삐끗한 다리가 한나절 안에 아물다니, 사실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프란은 잘도 따라오고 있었다. 분명 다 나아서 저렇 게 걷는 건 아닐 것이다. 프란의 창백한 안색이 그를 증명하지 않는가. 이진느가 아일린을 먹어 치울까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반은 그 자리에서 이틀 쯤 더 소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촌각이 급하다. 반 자신도 지금 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걷고 있는 중이 아닌가. 얼굴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안 아픕니까?" 문득 프란이 물었다. 어제부터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른다. 그 상처, 며칠 만에 뚝딱 나을만한 상 처가 절대 아니다. 특히, 오른팔.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했지만 반의 대답은 여전했다. "네 걱정이나 해라." 프란은 콧등을 문질렀다. 둘 사이 흐르는 공기는 어젯밤을 기준으로 급선회했다. 마치 남장이 폭로된 그 날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프란이 쉬지 않고 떠들고, 반이 가끔 짧게 웅대하는. 반은 그것이 신기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없는 일일 텐데, 저 프란 프리텐이라는 녀석은 아무 렇지도 않게 그 일을 해낸다. 3천 5백만 케트를 처분하느니 어쩌느니 말했던 것은, 사실 그의 진심 이 아니었다. 프란의 말에 화가 나서 했던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반 자신도 알고있다. 그 말이 프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그런데 그 말을 듣고서도 프란은 며칠 만에 본 모습으로 돌 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것은 프란이 줄레줄레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 그 자 체다. 몇 달 동안이나 제멋대로 도망쳐 돌아다녔던 주제에 시간의 공백 같은 건 존재치도 않는다는 양. "호오, 여기가?" 한 순간 프란은 찬탄을 피워 올렸다. 눈앞에 거대한 골짜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와, 대단한데! 일부러 만든 것 같잖아!" 골짜기는 거대했다. 까마득하게 시선을 올려야 할 정도로. 움푹 파인 그 골짜기 사이에는 만년설 이 쌓여 있었다. 왜 눈물이 고이는 골짜기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발밑의 눈이야 아무리 쌓여도 여 기부터 저기까지 전부 평지인지라 모두 일정한 높이로 보인다. 눈이 딱딱하게 굳어진지라 얼마나 쌓였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저 골짜기는 다르다. 파여진 골짜기 사이로 세월의 흔적을 자랑하듯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땅 위의 눈이 고이지 않는 것처럼, 원래 눈물도 고이지 않는다. 그러나 저 골짜기에서만은 눈이 고인다. 그래서 눈물이 고이 는 골짜기라고 불리는 거겠지. "누가 지었는지 거참, 이름 한 번 잘 지었네." 프란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각오 단단히 해라." 방정 떨기 일보 직전인 프란을 향해 반이 말했다. 도대체가 긴장같은 건 하지도 않는 프란에게 긴 장감을 불러주기 위해서였다. 그 말에 프란이 씩 웃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네요. 잔뜩 각오 하겠습니다!" '전혀 믿음이 안 가는군.' 프란은 고개를 들었다. 계승식이라. 후후,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던 프란이 뭘 깨달았는지 갑자기 벼락처럼 고함쳤다. "잠깐! 그런데 그 계승식이란 게 뭡니까!" '또 까먹고 있었어, 이 단세포 자식!' 프란은 그렇게 한탄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이나마 물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갈 뻔했던 것이다.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반은 망설임도 없이 답 했다. "모른다." 휘청. 하마터면 삔 발목 또 삘 뻔했던 프란이다. * * *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 아인켈들은 싸웠다. "너희들은 우리 상대가 안 돼! 우린 우리 대장과 만날 칼을 부딪치는 사이란 말이다!" 란돌이 가볍게 몸을 놀리며 소리쳤다. 그 말에 아인켈들은 이 당혹스런 상황에도 불구, 일제히 웃 음을 터뜨렸다. "우린 지옥에서 훈련했다!" "너희들도 우리 대장이랑 싸워봐!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게 될 거다!" 히스가 란돌의 말을 받았다.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상대라 해도 아인켈들은 일당백의 실력을 자부하는 집단이다. 병사들 중 몇몇이 특출 난 게, 아마도 왕국의 기사인 듯했지만 아인켈들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처음에 망설 였던 것과는 달리 일단 적이라고 판단하고 난 뒤의 아인켈들은 거칠 것 없이 싸웠다. "싸워라! 이딴 자식들 전부 갈아 먹고 간다! 씨팔, 한 놈도 죽지마라!" 룬이 머리 쓰는데 자신 없는 대장인 건 아인켈들 모두가 안다. 그래서 그가 작전을 고안해 낼 때 면 늘 불안하다. 하지만, 싸움터에서는 다르다. 이곳에서만큼은 룬이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는 다. 그들의 검을 일일이 지도해준 것이 저 룬이기 때문이다. 대장 룬은 누구보다 강하고 과격하며, 늘 맨 앞에서 싸운다. 자신의 오른팔을 적에게 내줄지언정 부하들의 목은 절대 내주지 않을게 룬이라는 걸, 아인켈들은 안다. "카세타 공주가 우리를 배신한 겁니까?" 검을 휘두르며 늘 그랬듯 로키가 모두를 대신해 물었다. 거칠 것 없이 싸우고 있는 아인켈이었지 만 그들의 마음은 키네세스에 대한 의심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아닐 거다. 그 분은 가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적의 목을 통째로 날리며 룬이 답했다. 보기만 해도 무식한 검이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각 국의 기사단장이나 케인, 레이처럼 정통 검가에서 수련한 게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직접 몸으로 부딪쳐 익혀온 실전 위주의 검이라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난다. "예,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이 일은 공주님의 의지가 아니었을거라고." 로키의 대답에, 룬은 큰 소리로 말했다. "공주님은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다! 모두들, 우리가 본 공주님을 믿어라!" "예!" 무지막지한 숫자의 열세였지만, 아인켈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그들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하나씩 하나씩 상대방을 잠재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란돌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합시다, 대장!" 맞서 싸우고 있던 병사의 검을 그대로 부러뜨려버린 룬을 향해, 란돌이 외쳤다. 룬이 무슨 뜻이냐 고 소리치자, 란돌이 답했다. "세라딘이나 위저드 리그 놈들이랑 싸울 바에야 그래도 이놈들이 낫지 않습니까! 놈들이랑 비교하 면 이 녀석들은 우습잖아요? 오랜만에 실력 발휘나 제대로 해보자고요!" 파안대소하며 던진 란돌의 말에 카세타 쪽 병사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건방진!" 검들이 어지러이 얽혔다. 아인켈들은 등에 등을 맞댄 채, 사방에서 몰려오는 카세타 병사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다. 아인켈의 최 연장자 로키는 자신의 옆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히스를 흘끗 보았다. 히스는 상기 된 얼굴이었다. 그럴 만했다. 히스는 수행부터 시작해 3년 간 이 단체에 있었지만, 정식으로 아인 켈이 된지는 몇 달 되지 않는다. 아인켈 수행에서 정식 아인켈이 되려면 2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 야 한다. 그리고 히스는 바로 몇 달 전 그 일을 해냈다. 그런 히스니만치 그는 의욕만만이었다. "히스, 성급하게 굴지 말고 싸워라." 상대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으며 로키가 진중하게 조언해주었다. 그 말에 히스는 걱정 말라는 듯 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지만, 그의 노란색 머리카락은 이미 피로 칠갑되어 있었다. 다른 아인켈들은 이 정도 규모의 싸움에 익숙하다. 그래서 그들은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능란하게 싸우고 있었다. 반면 히스는 흥분해 있다. 로키는 그래서 불안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히스의 검은 지금, 너무 과하다. "히스!" 어느 순간 로키가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없이 싸우고 있어 히스를 봐줄 틈이 없기에, 자기 라도 봐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히스는 지금 너무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인켈들은 둥글게 포위된 상태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는데, 히스가 계속 앞으로 파고들어 진이 파괴되기 직전이었다. "이쪽으로 돌아와라, 히스! 다들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싸우고 있잖아! 네가 가면 무너진다고!" 그 절박한 외침을, 히스는 듣지 못했다. 가주의 시종에게 졌던거, 그래서 망신당했던 거, 이번에 톡톡히 갚아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히스의 검은 훌륭했다. 히스의 재능이야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싸움에서 중요한 건 자리를 지키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히스 가 나가고 나면 서른 명으로 꽉 채워진 이 원형의 경계선이 무너질 것이다. 로키는 참다못해 자신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뭔가 일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 란돌이 얼른 공격 범위를 넓혀 히스와 로키의 경계까지도 책임지기 시작했다. "히스! 돌아와!" 히스는 자기 바로 옆에 온 로키의 외침에 깜짝 놀랐다. "왜요, 선배? 난 괜찮아요." 순진한 그 대꾸에 로키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란돌을 봐라, 이 애송이 자식아!" 애송이 자식이라는 호칭만큼 히스가 싫어하는 말은 없다. 그래서 히스의 눈에는 일순 슬픔과 분노 가 함께 서렸다. 그러나 그는 검을 맞댄 채로도 란돌이 있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란 돌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네 몫을 란돌에게 떠넘기지 마라! 적어도 네가 한 사람 몫을 하는 아인켈이라면!" 그 말과 함께 로키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란돌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로키는 다시 강 하게 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히스는 그 순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언제나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해대며 자기를 괴롭히는 란돌이나, 언제나 자신을 꾸짖는 로키나 '아인켈로서 의 몫'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알았기 때문이다. '나도 저쪽으로 돌아가야겠다.' 히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떼어낸 순간이었다. "히스!" 란돌과 로키의 고함소리가 사방을 찢을 듯이 울렸다. '뭐지?' 반대편에 있던 룬도 그 소리를 들었다. 룬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뭔가 큰 일, 히스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형의 경계를 좀 더 촘촘하게 치라고 말한 뒤, 히스와 란돌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그 짧은 거리를 움직이기 위해 룬은 열개가 넘는 검을 부러뜨려야 했다. "히스!" 마친내 히스와 란돌이 있는 그 지점에 도착했을 때, 룬은 눈이 돌아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란 돌과 로키의 사이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히스의 복부에 검이 들어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검은 힐트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들어가 있었다. 히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다못해 시퍼런 색이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가!' 룬은 이를 물었다. 히스를 여기서 잃을 순 없다. 아인켈은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시즈 아일 린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딴 곳에서 부하를 잃을 순 없다. "작전을 변경한다. 여기를 뚫는다!" 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명령에 원을 이루고 있던 아인켈의 몸은 순식간에 선이 되었 다. 아인켈의 단결력이 한 눈에 보이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대장, 난 괜찮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복부에 긴 칼이 꽂힌 히스가 울듯이 말했지만 이미 아인켈은 선으로 바뀐 채 적들 사이를 뚫으려 하고 있었다. "어차피 뚫어야 했어. 좀 더 빨리하는 것뿐이야." 평소엔 후배를 괴롭히기만 하는 란돌이 히스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히스는 자 신의 몸을 그대로 낚아채는 강한 손아귀를 느꼈다. 룬이었다. 룬은 히스를 왼쪽 옆구리에 끼다시피 한 뒤,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대장!" "널 안고 싸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 어지러워도 참아라." 우직한 말투였다. 원망도 느껴지지 않는다. 히스는 울면서 소리쳤다. "죽어도 아인켈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습니다! 절 버리고 가세요!" 룬은 단호하게 검을 휘두르며 답했다. "자기 새끼들 버리는 인간도 있냐?" "……대장……." 히스를 옆구리에 낀 채로도, 룬의 검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아니, 지금까지는 페이스를 조절 하며 싸운 반면 이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량을 다 발휘하는 것 같다. 오히려 더 격하고, 오히 려 더 빠르다. 나머지 아인켈들도 마찬가지엿다. 키네세스를 두고 막 밖으로 나온 디센 기사단장 메이스는 그 광경에 혀를 찼다. '대단한 실력자들이군.' 한 명 한 명이 자기와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 저만한 검사들을 데리고 있다니, 아일린은 정말 무 서운 가문이다. 특히 소년 하나를 옆구리에 낀 룬의 검은 그 핸디캡에도 불구, 자기보다 뛰어나보 였다. '런스 정도인가? 아니, 그 이상이겠군. 저 자가 대장이다.' 메이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룬 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밀리고 있던 차에 기 사단장이 들어오니 카세타 병사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그러나 메이스는 차분하게 움직였다. 런스가 있는 그대로 치고 들어가 정직하게 싸우는 것을 신조로 삼는 반면, 메이스는 이기는 것이 가장 중 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는 룬의 정면으로 가지 않았다. 선으로 대열을 이룬 채 싸우는 이점은 재빨리 상대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등을 보인다는 점 에서 위험하다. 룬은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채 싸우고 있었지만 메이스 같은 실력자의 기척까지 읽 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쉬익! 메이스는 등을 통해 룬의 심장을 찌를 셈이었다. 이 공격만 성공하면 아인켈들은 대장을 잃는 셈 이니 일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대단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작자인 것 같으니, 더욱 그렇겠지. 그 러나 메이스로서는 불행하게도, 히스가 그 공격을 눈치 챘다. 히스는 룬에게 너무도 미안한 나머지,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뒤는 자기가 살피겠다고 생각하고 있 던 차였다. 비록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처지라고는 해도 정신을 룬의 사각지대에 집중하고 있 었던 것이다. '대장!' 히스는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히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 룬의 팔에서 빠져나왔 다. 룬이 흠칫하는 사이, 히스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룬의 뒤를 막았다. 콰직! 룬의 살갗에 검 끝이 조금 파고들었다. 룬은 움찔했다. 그는 몸을 앞쪽으로 조금 빼내며 사방의 적을 단칼에 베어냈다. 그리고서 뒤를 돌아본 룬은 정말로 놀라야 했다. 히스의 어깨 부분이 완전 히 관통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룬과 히스의 신장차이를 생각하면, 룬의 심장을 노린 공격이 히스 의 어깨에 닿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제길!" 란돌이 달려왔다. 그가 메이스를 맡는 사이, 룬은 히스를 안아들고 있었다. 룬의 갈색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한다. "체력 따위 아끼지 말고 싸워! 지금 당장 여기를 빠져 나간다! 빌어먹을, 상대방 한 명 한 명이 나라고 생각하고, 비켈린이라고 생각하고, 케인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싸워라! 그렇게 싸우 란 말이다!" 소리친 룬은 자신이 말한 그대로 했다. 숨을 헐떡이는 히스를 안은 채로, 상대가 케인 칼슈비도 정도의 실력자라고 생각하며 싸웠다. 아인켈들은 룬의 말 앞에서 언제나 하나됨을 느끼며 싸워온 집단이다. 비켈린이 각지로 흩어져 임 무를 완수하기에 다소 개인적인 반면 이들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늘 아일린에 상주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히스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막내 동생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다가왔 다. 카세타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발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룬을 위시한 아인켈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광기 어린 검이 빛을 발했다. * * * "왜요?" 프란은 갑자기 멈춰서는 반을 보며 물었다. 눈물이 고이는 골짜기의 얼음 입구 앞에서, 반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웬만해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이기에 그 모습은 반의 경악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았다." "예?" 프란은 의아함에 되물었다. 반은 나직하게 답했다. "카세타 반란 때, 가게 안에 폭탄이 쌓였던 걸 기억하나?" "당연하죠. 내가 바보입니까? 그새 까먹게." 프란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날 반과 시온이 뭐 재미있는 걸 하는지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 바 람에, 시온이 폭탄을 텔레포트 하는 광경도 전부 봤던 그녀다. "텔레포트 장소가 이곳이었다." 프란은 흠칫 놀랐다. 그 때 반은, 적색산맥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 이곳으로 텔레포트 하라고 말했다. 마 지막 눈물이 고이는 골짜기가 계승식 장소라는 걸 알았을 땐 그래서, 혹 이곳이 파괴되었을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었다. 폭탄의 양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사실 그만한 양이었다면 이 골짜기 전부 날아 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프란 역시 눈이 둥그레지고 있었다. 마지막 눈물이 고이는 골짜기는 정말 너무도 멀쩡했다. 만년설이 그대로 쌓여 있는 것도 이 골짜 기가 폭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이건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프란이 머리 쥐어 뜯어가며 고민하는 동안, 반은 짤막하게 답을 내놓고 있었다. "마법이겠군." "그만한 양의 폭탄을 무력화시키는 마법이 있다고요?" 프란의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믿을 수가 없다. 시온을 봐서 마법사라는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만한 폭탄을 무력화시키다니. 반 역시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8써클의 자켄린이라면 그만한 폭탄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하가 그런 마법을 구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리해보면, 이 골짜기는 적어도 8써클 이상의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 다는 결론이 나온다. 도대체 계승식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반은 약간의 한기를 느꼈다. "아일린답네." 그 떄, 프란이 툭 던지듯 한 마디 했다. 반이 돌아보는 가운데, 프란이 경쾌하게 말했다. "아일린은 사기 같은 가문이니까, 이것도 그러려니 하죠, 뭐." "……뭐가 사기 같은 가문이라는 건가?" 반은 어이가 없었다. 가문의 장 앞에서, 그 가문을 '사기'라고 말하다니,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녀석인지 없는 녀석인지. 프란은 반의 눈을 보며 씩, 웃어보였다. "그 사기 같은 가문의 주인이니까, 미간 좀 풀라고요." 내가 미간을 좁히고 있었나. 반은 저도 모르게 눈썹 사이로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리고 시선을 올려, 다시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프란 역시 골짜기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뭐가 기다릴지는 모르지만 난 겁먹지 않는다, 이거다!'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프란은 어쩐지 어둡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정오쯤 되었을 텐데, 서너시나 된 듯 주변이 뿌옇다. 프란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역시,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여기 온 이래 제일 어두운 하늘이다.' 프란은 그러나 그 어두운 빛깔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어느 샌 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따라서. * * * 반과 프란이 계승식 장소로 들어서고 있던 그 시각, 아인켈들은 로딘에서 벗어나고 있었따. "……안심해라. 이제 빠져 나왔다." 아인켈들은 적의 칼을 피해 한적한 산에 숨어들었다. 어차피 카세타 왕실은 아인켈의 얼굴 하나하 나를 알지 못하니, 지금부터 움직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곳을 빠져 나오는 동안, 아인켈들은 수없이 다쳤다. 히스는 차치하고라도 란돌이나 로키, 그 외 의 아인켈들, 심지어 룬까지 치명상에서부터 중상, 경상까지 두루두루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국경 의 병사들과 싸우면서 죽은 사람이 나오지 않은 건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단 한 명, 숨 이 넘어가고 있는 히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룬은 자신의 품 안에 누워 있는 히스를 흔들었다. 이제야 그를 돌 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히스의 목울대는 경련하고 있었다. "히스, 눈을 떠라. 히스!" "……대장." 히스의 목소리는 얇고 가늘었다. "그래, 나다." 룬은 히스의 손을 잡았다. "나만…… 잘 했으면……." 나만 잘 했으면 다들 이렇게 많이 안 다쳤을 텐데. 우리는 그만큼 강하니까요. 히스는 눈으로 그 렇게 말하고 있었다. 룬은 고개를 저었다. "넌 잘 했다. 내 목숨도 구했다." 그 말에 처음으로 안심한 듯, 죄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히스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그 얼굴에 룬은 가슴이 저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시종한테 진 거, 이젠,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저런 걸 묻다니.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냐." 란돌은 고개를 돌린 채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나머지 아인켈들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귀여운 막내 동생을, 겨우 몇 달 전에야 이 집단에 들어온 저 녀석을, 이런 식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 니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룬은 심장이 뜯기는 것 같았다. 이 강하고 우직한 사내 는 비록 눈물은 보이지 않았으나 아인켈들은 엄하게 대하면서도 '내 새끼들'이라고 칭하는 그답게, 그 얼굴은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히스가 미소 지었다.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히스가 묻는 다. "난, 아인켈이죠?" "당연한 소리." 못 들었는지 히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나, 아인켈 맞죠?" "그래, 누구보다 훌륭한."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칭찬 받은 아이처럼, 히스는 기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빨리 움직인다." 룬은 눈물을 흘리는 아인켈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죽었습니까?" 로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는 안타까운 한숨이 사방에 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세타 병사들이 추적해 오기 전에 얼른 카르멘의 보호막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카르멘마저 그들을 거부한다면, 더 이상은 수가 없 을 것이다. 오직 카르멘만을 믿고 움직여야 한다. "가자." 아인켈들은 눈물을 닦으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자기 품 안에 안긴 히스의 얼굴을 한 번 어루만졌다. 영원한 열일곱, 영원한 웃는 얼굴로 히스는 잠들어 있었다. '히스, 미안하다. 너를 묻어줄 시간조차 없구나.' 룬은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담긴 하늘은, 말할 수 없이 어두웠다. 제 3장 계승식 "도련님." 하질리언의 부름에, 헤냔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딱딱한 말투였다. "난 이제 화 안 냅니다. 하질리언 씨는 내가 화내면 더 기뻐하는 것 같으니까." "오, 드디어 눈치 챘군. 느리단 말이야, 도련님은." 헤냔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이 그 못마땅한 카르멘 가주를 따라나선지 오늘로 이틀째. 헤냔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 먼 곳도 아니고, 바로 저 앞이니 내일쯤이면 돌아올 거야. 헤냔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질리언은 심난한 헤냔에게 하루 종일 말을 붙였다. 하질리언 본인이야 놀아준답시고 한 행동이 었지만, 헤냔에게 있어서 그것은 괴롭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질리언 씨는 걱정도 안 됩니까?" 영양가 없는 농담만 해대는 하질리언을 향해 헤냔이 소리쳤다. 그 말에 하질리언은 무슨 걱정? 하 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프리나는 그 사람 때문에 늘 생사를 넘나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킬 게 분명 해요!" 그 말에 하질리언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있잖아, 도련님. 도련님은 왜 그렇게 그 사람을 싫어하지?" "그거야……!" 헤냔으로서는 할 말이 많았다. 프리나를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 왕가조차 발밑에 있다는 듯 안하무 인이지, 반란 진압 때는 제멋대로 굴어 동료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했다. 헤냔은 하질리언을 향해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차피 사방엔 눈밖에 없는 적색산맥, 시간 죽이기엔 이야기만한 게 없 으니까. 그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하질리언은 한참 만에야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있지, 도련님." "……도련님은 빼고 말씀하십시오." 하질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 다 듣고 보니 그 녀석, 나쁜 놈이라기 보단 멋진 놈 같은데? 너도 부정은 하지만 그 사실 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 "예?" 이번엔 헤냔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 사이 하질리언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고 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흐응, 괜찮군. 집안만 찾으면 세상 제일 부자가 되는 거고. 이쪽을 밀어줄까나?" "저, 무슨 말씀 하시는 거죠?" 하질리언이 자기 세계로 들어갈 조짐을 보이자, 헤냔은 두려워하며 그를 쿡 찔렀다. 그러나 한 번 마이페이스 모드에 들어간 하질리언은 그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음, 프리나가 그렇게 되면 만사형통이지. 좋아, 좋아. 결정했다." "……저기요?" 오늘도 마이페이스 모드로 돌입한 하질리언을 보며 헤냔은 또 한 번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질리언을 외면한 채,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 프리나.' 당장 한 발이라도 내딛으면 온 몸이 얼 것 같은 이 추위 속을 걷고 있을 프리나를 위해, 헤냔은 세키에 여신(자비의 여신)과 가에린신(검의 신)께 기도했다. * * * 프란은 사방을 끊임없이 살피며 전진하고 있었다. 반이 정면만 보고 걷는 것과 대조적이다. 골짜기는 컸다. 그랬기에 반과 프란은 어디에서 계승식 장소를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장소 전체가 계승식 장소인지, 아니면 따로 마련된 곳이 있는지, 반도 프란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골짜기 안에 들어서니 깊게 파인 눈의 벽이 바람을 막아준다. 그나마 덜 춥네. 프란은 그렇게 생 각하며 어깨를 문질렀다. 반은 어느새 루니아 블레이드를 뽑아들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 어나올지 모르기에 경계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프란도 아차, 싶어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형편없군." 프란이 뽑은 검을 보며 반이 말했다. 특별한 감정이 있어 한 말이 아니라 솔직한 감상을 말한 것 이 분명했다. 반 자신이 쓰는 루니아 블레이드가 천하 명검이니만치 시장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이 딴 조잡한 검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듣고 있는 프란으로서는 그 말이 유쾌할 리 없었다. '이 놈의 대마왕 자식이! 그래도 내 검이라고!' 얼굴이 살짝 부은 프란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래봬도 이 검 덕에 로이네트에서 살아남았다고요." "어디서 났나?" 프란이 탈출할 때 수중에 땡전 한 푼 없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반이다. 검을 살 돈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헤냔 녀석이 사줬죠, 뭐. 난 빈털터리였으니까." 어라. 프란은 당황했다. 갑자기 반의 걸음걸이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아씨, 뭐가 저렇게 급해? 발 삐어 서 안그래도 죽겠구먼.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부지런히 반의 뒤를 따라갔다. 약간 절뚝대는 채로. 그런데 그런 프란의 노력을 비웃듯 반의 걸음걸이는 점점 더 빨라지고만 있었다. 앞쪽에 뭔 가 있어서 이렇게 빨리 걷나, 싶어 프란은 고개를 쭉 내밀어 반의 앞쪽을 보았다. 그러나 앞쪽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대체 무슨 심술이야?' 프란은 참다못해 소리를 쳤다. "좀 천천히 가시죠!" 그러든 말든 반의 속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저 왕 싸가지!' 프란이 속으로 투덜대는데, 갑작스레 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일린으로 돌아가면." "돌아가면 뭐요?" 프란은 툴툴대며 대꾸했다. "실버 블레이드를 돌려주겠다." "엉?"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 양반이.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많이 아픈 거 아닌가? 어제는 '대마왕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아니 그 이상으로' 다정하게 굴더니만 오늘은 앞뒤 없는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저 대마왕이야 아파도 아프다고 티 안 내니까, 지금도 고통 을 참느라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걱정이 되는 프 란이었다. "저기, 가주님." "뭔가?" "계승식 끝나면 제대로 치료받으세요." 프란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그러나 반으로부터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두 사람은 골짜기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갔다. 그러나 가도 가도 눈과 바위 뿐,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다. 프란은 도대체 언제 이 계승식이라는 게 시작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크게 기지개를 한 번 폈다. 그리고서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거 끝나면, 남은 빚은 1천 5백만 케트가 되는 건가요?" "……그래." "헤, 영원히 안 끝날 것 같더니 액수가 줄긴 주는구나." 앞으로도 뭔가 할 일이 더 있을 테니, 생각 외로 빚을 빨리 청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천만 케트라는 말을 들었을 땐 평생을 다 바쳐도 못 갚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끝나면 정식으로 대마왕이랑 안녕, 하는 거겠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프란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공중에 뜬 기분이라고나 할까? 묘했다. 기분 이 좋아서 그런 부유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자유의 몸이 되면 하고 싶은 거야 무한정으로 있다. 락케이드도 데려올 거고 기사 시험도 다시 칠 거고. 그러나 두번 다시, 오늘처럼 반과 함께 걷는 일은 없어질 거다. 프란은 문득 생각했 다. 그러고 보니 나랑 대마왕은 심지어 친구도 아니구나, 라고. 빚이 없어진다면 아무런 연결 고리 도 없는, 남남이 되는 거구나. '에잇, 대마왕이랑 깔끔하게 헤어지면 좋은 거지, 뭘! 저 싸가지가 하는 속 긁는 말 안 들어도 되 고!' 프란은 애써 그렇게 생각해보려 했으나 가슴 휑한 씁쓸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 때였다. 반이 걸음을 멈춘 것은. [아일린의 피로구나.] 그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왔다. 도대체 어디에서 들리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에서 수백 휴 나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바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기괴한 목소리였다 . 목소리는 몹시 장중하고 울림이 컸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합 쳐져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왜요?" 프란은 멈춰서 반을 향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반은 흠칫 프란을 내려다보았다. 프란은 흐음, 하는 얼굴로 계속 사방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반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프란이 묻는다. "뭐 특별한 일 있습니까?" 프란은 그를 놀리는 게 아니었다. 정직한 오렌지색 눈동자가 반을 향한다. "들리지 않나?" "뭐가요?" 프란으로서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들리지 않나'라니, 도대체 뭐가? [가주 후보인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들은 것은 반 자신뿐인 듯했다. "이 목소리 말이다." "엉? 무슨 말입니까?" 목소리라니? 프란은 귀를 쫑긋 세웠다. 허나 아무리 열심히 귀를 기울여 봐도 들리지 않았다. 프 란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뭔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하고 중얼거린 그 때, 반의 침묵이 답답했는 지 '목소리'가 재차 물어왔다. [대답하라, 아일린의 피를 이은 자여. 그대는 아일린의 주인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반은 순식간에 모든 당혹을 지워냈다. 이것 또한 마법인가. 누가 준비한 계승식인지 모르겠지만, 광대놀음 같군. 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갑게 답했다. "그렇다." 프란은 흠칫 반을 보았다. 눈이 있는 대로 커져 있다. '미친 건가!'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 혼자서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너는 뭐냐. 마법사인가?" 이번에는 반이 '목소리'에게 물었다. '목소리'는 낮게 답했다. [나는 아일린 초대 가주가 후대를 위해 마련한 시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은 미간을 좁혔다. 만약 시온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는 이 괴상한 현상이 인간은 시전할 수 없다는 전설적인 9써 클의 마법, '메모리 임팩트'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은 마법사가 아니다. 또한 만약 이것이 '메모리 임팩트'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목소리'가 물었다. [옆에 있는 자가 너의 '선택'인가?] 프란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프란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하며 촐싹대고 있었다. 촐싹대기 대장 프란을 자신의 '선택'이랍시고 데려온 반은 잠시 쓴웃 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렇다. 나의 '선택'이다." 반이 대답한 순간, 프란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좋다. 시험을 시작한다.] "엇?" 프란은 소리를 삼켰다. '뭐야, 이 목소리. 엄청 이상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 프란이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프란과 반은 갑갑증을 느꼈다. 일순 주위의 공기가 희박해진 듯 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사방이 꽉 막힌 환기 안되는 방 안에 온 듯한 느낌. 숨을 못 쉴 정도는 아 니었지만 그 공기는 분명 불쾌한 것이었다. "결계다." "결계라고요?" 반도 마법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아무래도 마법사들이 친다는 결계 같았다. 시험해볼 요량 으로 반은 열 걸음쯤 앞으로 갔다. 그러자, 단단한 벽 같은 것이 만져졌다. 보이는 풍경은 아까 전 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무형의 벽이 만들어진 것이다. 프란 역시 굳은 얼굴로, 벽처럼 느껴지 는 무형의 공간을 향해 검을 휘둘러 보았다. [소용없다. 물리적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목소리'의 말에 프란은 혀를 쏙 내밀었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혹시 알아? 내가 이 결계를 깬 첫번째 사람이 될지?" [재미있는 '선택'이로군.] '목소리'는 잠시 웃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을 뿐, 다시 장중한 목소리가 두 사람 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프란과 반 은 그 '목소리'가 자신들의 뇌에 대고 직접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아일린의 피를 이은 자여. 신중히 대답하라.] 프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괜히 자기가 긴장되었던 것이다. [그대는 진정 가주가 되기를 원하는가?] 프란은 힐끗, 반을 올려다보았다. 반의 미간은 여전히 좁혀져 있었다. 뭘 생각하는 걸까, 이 대마 왕은. 좁혔던 미간은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펴졌다. 반은 담담하게, 그러나 여태껏 짊어져야 했던 모든 피의 무게를 실어 답했다. "원한다." 반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차가운 한 마디였지만 그 한마디에 여태까지 반이 지나와야 했 던 모든 시간이 응축되어 있었다. [좋다. 네가 진정 그 자리를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각오를 보여라.] 각오? 프란이 침을 꿀꺽 삼키는 가운데,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건 반도, 프란도 결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명령이었다. 목소리는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너의 '선택'을 죽여라.] * * * 카르멘 가의 집사장, '백년 묵은 여우' 마린은 자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잠꼬대를 할 만큼 마린의 잠은 깊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 하다 말고 깜빡 잠이 든 차였다. 요 며칠 새 마린은 제대로 잠을 잔 기억이 없다. 사흘 만에 잠든 것이니, 그 잠이 얼마나 달콤했겠는가. 헤이튼이 있을 때는 헤이튼이 가주 대리를 해왔지만 지금은 헤이튼이 없다. 그래서 마린은 집사장 이라는 명목 하에 가주 대리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카르멘의 핏줄이 아니기에 정 식 대리는 아니다. 잡무가 끔찍하게 늘어났을 뿐 권한도 별로 없다. 쾅쾅쾅! "마린님!" 잘생긴 남자와 꿈에서 데이트하고 있던 마린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깼다. '꿈에서라도 연애하게 놔두지, 왜!' 마린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사실 남자들에게 꽤 인기있는 편이다. 그러나 최근엔 너무 바쁜 나머지 데이트 한 번 할 시간이 없었다. 꿈에서라도 좀 연애해보려 했는데, 그마저도 박살내 는 이놈의 집안이라니. 마린은 울고 싶었다. 아함, 하고 하품을 한 마린은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했다. 마린은 서류 더미 속에서 손거울을 찾 아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여자는 자신을 가꾸는 걸 소홀히 해선 안 되지!' 평소의 신조를 되새기며 마린은 거울을 보았다. 기미에 눈곱까지 어우러진 자신의 얼굴은 환상적 이었다. '꺅! 이게 대체 뭐야! 꽃 같은 내 얼굴은 어디에 간 거야!' 마린은 경악 속에 얼굴을 정리했다. 눈곱을 떼고 말라붙은 침도 닦았다. 화장을 진하게 해도 가려 질까말까 한 기미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가주님 돌아오면 한 일주일 피부 관리 받게 휴가나 달라고 해야겠다. 흑.' 마린의 소박한 꿈을 받살내며 다시 한 번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마린님!" 쾅쾅쾅! "뮤? 대체 왜 그래?" 화장할 시간 정도는 달라고. 그렇게 혼잣말하며 마린이 느긋하게 대꾸한다. 그러자 문 밖에 서서 줄기차게 문을 두드리고 있던 소녀, 뮤 이레아스는 조급증을 느낀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와 보세요! 손님들이 왔어요!" "손님?" 손님이야 만날 드나들잖아, 가주님이 없는 사이에 신나서 들어오는 사신 같은 작자들도 있고 말이 야. 마린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뮤가 이렇게 호들갑 피우는 걸 보면 아무 래도 중요한 손님인가보다, 생각하면서. 문득 마린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뮤가 이렇게 활달하게 말한 건 오랜만이네?' 프란의 남장 폭로 건은 카르멘 가에도 전해졌다. 카세타 사방팔방에 프란의 수배지가 붙었으니 모 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린은 결국 들통 났구나, 하고 탄식했지만 그리 많이 걱정하 지는 않았다. 마린에게는 모종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을 처음에 봤을 떄부터 가졌던 어떤 확신. 그래서 마린은 남들보다 많이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뮤의 상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동경하던 왕자님이 여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자라 그나마도 저 악명 높은 비켈린에게 쫓기는 몸이 됐으니, 이 가여운 소녀가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잇 을 적시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흑흑, 프란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요. 그냥 무사히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린의 방에 와서 훌쩍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때마다 쌓인 서류를 한숨과 함께 밀어낸 뒤 뮤를 위로해줘야 했던 마린이다. 마린은 서류 때문에 까칠해지고, 뮤는 프란 때문에 까칠해지고, 반의 호위무사들과 프란이 일하던 주방의 일꾼들까지 묘하게 까칠해진 것이 근래 카르멘 가였다. 특히 뮤는 심했다. 뮤가 밥도 잘 안 먹고, 일도 대충하고, 언제나 훌쩍 훌쩍 울고, 목소리는 모기 만 하게 냈기 때문에 마린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활달한 뮤의 목소리 가, 마린은 실로 반가웠다. "누군데 그래, 뮤? 흥분한 것 같네? 미남 부대라도 왔어? 오호호!" 마린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대충 한 가닥으로 정리하며 농을 던졌다. 그러나 뮤가 대답했을 때, 마린은 여태까지의 여유를 모두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일린의 아인켈이라고 했어요! 모두 스물아홉 명이고요!" * * * "룬 로스, 아일린 소속 아인켈의 대장이오. 구면인 것 같소만." "집사장 마린입니다. 예, 몇 번 뵌 적이 있지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남자를 만날 때면 반드시 화장한다는 원칙도 못 지킨 마린이었다. 카르멘과 아일린은 별다른 교류가 없다. 반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을 때에나 케인이나 룬 정도가 드나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두 명도 아니고 스물아홉 명의 아인켈이라니. 아인켈이 모두 서른 명인 걸 감안해보면 이건 모두가 찾아왔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룬 로스님?" 마린이 물었다. 더러운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아인켈들의 몰골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카르멘 가 집사장인 만큼, 아일린의 사정에 대해서도 훤한 마린이다. 아인켈은 만만찮은 집단이다. 그런 저들이 이 꼴로 여기에 왔다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먼저 하나 물어도 되겠소?" 대답 대신 룬은 다른 말을 꺼냈다.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룬의 갈색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 었다. "카르멘은 아인켈을 받아줄 거요?" 마린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당신과 나의 주인이 그 분인 한." 룬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멘에게마저 거절당하면 그야말로 끝장이기에 그로서는 안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룬은 경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하나만 말해두겠소. 지금 우리를 안으로 들이면, 카르멘은 아일린과 싸워야 할 거요. 그 전에 카 세타 왕실과 싸워야겠지만." 그 말에 마린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자, 잠깐. 무슨 말입니까? 아일린과 싸워야 하다니! 서, 설마?" 가주님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겁니까! 마린의 경악을 지켜보며, 룬이 말했다. "그 분은 계승식에 가셨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요. 그 사이 이진느가 아일린을 차지한 거요. 우리는 가주님이 돌아올 때를 위해 아일린에서 빠져나왔소." 마린은 이를 악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였다. 녹색 눈동자는 마구 떨렸지만 마린은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를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상처부터 치료해야 할 것 같군요."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아인켈들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아인켈들을 황금문 안으로 들이며, 마린은 속으로 몇 번이나 반을 불렀다. * * *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너는 검사인 것 같구나, 어린 후보여. 다시 말하겠다. 네 '선택'을 베어라.] "베지 않겠다." 반의 대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왔다. 너무도 순식간에,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흘러나왔 으므로 '목소리'는 잠시 당혹한 듯했다. 프란 역시 둥그레진 눈으로 반을 보았다. [가주가 되지 않겠다는 뜻인가?]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아니, 나는 가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베어라.] "베지 않는다." 반은 담담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단번에 커졌다. [어리석구나, 아일린의 핏줄이여! 아일린의 가주가 된다는 건 대륙 전체를 좌지우지할 힘을 가진 다는 뜻이다. 네게 딸린 식솔만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지. 어떤 의미에선 네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국에 의지하는 사람보다도 많다! 네가 무너지면 대륙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그 모든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는 증거를 내게 보여라. 네가 아일린의 가주라는 증거를, 가장 믿는 사람조차 죽일 수 있는 너의 각오를!]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잦아들었다. [……너의 아일린은 이렇게 유지되어 왔다.] 목소리는 은밀했다. 이딴 미친 짓을 자행한 뒤에야, 모두가 가주가 되었단 말인가? 반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아버지 로웬 아일린도 이딴 광대놀음에 동참했단 뜻이 된다. 그 순간이었다. "안 한다잖아, 이 미친놈아!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가만히 있던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듣자 듣자하니 도대체가 이 목소리, 제정신이 아 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무슨 제왕 전설 놀이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가 어떤 시댄데 저딴 헛소리를 한단 말인가. "네 녀석, 치사하게 굴지 말고 당장 모습을 드러내! 깔끔하게 한판 붙자고!" 프란은 결계라고 짐작되는 무형의 막을 향해 검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격렬한 움직 임이다. 공격은 튕겨나가기만 할 뿐, 도무지 먹혀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프란은 포기하 지 않았다. 제까짓 게 한 천 번 휘둘러도 멀쩡하겠어?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목소리'는 그런 프란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소용없다, '선택'.] "빌어먹을 자식. '선택'이라고 부르지 마! 난 프리나 프리텐이다!" 프란은 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곧, 골짜기 전체가 쩌렁쩌렁 진동할 만큼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너 꼭 변태 같은 거 아냐?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다고! 너 아까 '가장 믿는 사람' 어쩌 고 했지? '선택'이란 게 가주가 제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본데, 바로 그 사람을 죽이라고? 너 같으면 죽이겠냐? 죽이겠어? 앙?" 프란의 거침없는 말에 '목소리'가 잠시 침묵한다. "왜? 정곡을 찔리니 할 말이 없냐? 제일 친한 사람 죽이면 장사를 잘 한다니, 이게 무슨 개수작이 야? 내 살다 살다 별 헛소리 다 들어 보겠네!" 프란은 고개를 쳐들며 그렇게 소리쳤다. 이건 계승식이고 뭐고 거의 막나가는 처사였다. "제기랄! 왜 난 만날 이딴 변태들한테 걸리는 거야? 재수 없어 죽겠네!" 여태컷 담담하게 말하고 있던 '목소리'조차 잠시 당혹했다. '목소리'가 반을 향해 묻는다. [아일린의 핏줄. 저 자가 정말 너의 '선택'인가?] 말은 '저 자가 정말 너의 선택인가?'였지만 어투로 미루어 그 속뜻은 '저딴 게 정말 네 선택 맞아 ?'에 가까웠다. 계승식을 치르지 못하면 영원히 아일린 가주가 될 수 없다. 아일린의 가주 후보가 제일 빋는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 사람이 계승식 따위 개나 주라는 듯 굴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수 밖에. '가주님을 위해 제가 죽겠습니다!' 라고 말해서 시원찮을 판국에 끝도 없이 건방지게 굴고 있는 프란은, 확실히 정상이 아님에 분명했다. "내 '선택'이다." 반은 다시 한 번 긍정했다. 그리고서, 그는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가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목소리는 불쾌하다는 듯 답했다. [이미 말했지 않았는 가. 너의 '선택'을 죽이라고.] "웃기는군. 나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아일린을 포기해라.] "포기하지 않는다." [아일린을 포기하든지, '선택'을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결계는 깨지지 않는다.] '목소리'가 말을 끝낸 그 순간, 반은 피식 웃었다. '어라, 대마왕이 웃었네?' 얼굴이 붉어진 채 길길이 날뛰고 있던 프란이 반을 돌아본다. 반은 방향을 틀더니, 프란이 선 쪽 을 향해 걸어왔다. 단정한 걸음이였다. 아플 텐데도 정말 티 하나 안 낸다니까. 프란이 그렇게 감 탄하는 사이, 반은 프란의 옆에 선 채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프란은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 다. "저 놈 말 듣느니 여길 깨는 게 더 빠르겠죠?" "그렇겠군." 웬일로 반은 순순히 긍정하고 있었다. 프란은 더더욱 짙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가주님은 사기같이 강하니까 이 결계도 깨질지 모릅니다." "사기 친 적 없다." 프란과 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목소리'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일린의 핏줄! 여기는 깨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장난하지 말고 어서 네 '선택'을 죽여라 ! 그러지 않고는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다!] 그 말에 반과 프란이 동시에 답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 * * [아일린의 핏줄이여. 너는 대륙 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검사로군. ……놀랍구나.]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은 죽어라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이 결계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반과 프란이 이 골짜기에 들어온 지도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나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진지 옛날이 었다. [충고하지.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여긴 물리력으로 깨지지 않는다. 신검 에세리타가 현현해도 깨지지 않아. 왜냐하면, 이 시험은 '아일린의 가주'를 시험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 카르멘 가주'를 결정하는 시험이 아니야.] "하하하!" 너무 오랫동안 검을 휘둘러 지쳐 있던 프란은, 그 순간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카르멘 가주를 시험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 너무 웃겼던 것이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이 자로 카르멘 가주거 든. 프란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프란의 웃음에 목소리가 불쾌한 듯 묻는다. ['선택', 뭐가 우습지?] 프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는 얘기해줄 생각이었지만 '목소리'의 태도가 기분 나빴던 것이다. "진짜 지지리 말 안 듣는 놈일세. 난 '선택'이 아니라 프리나 프리텐이라고!" 이건 하진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마이페이스야! 그렇게 생각한 프란이 소리를 질렀으나, '목소리'는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네 이름 따위 알 바 없다, '선택'. 난 뭐가 웃기냐고 물었다.] 프란은 경쾌하게 답했다. "결계 깨주면 가르쳐줄게. 세상에 공짜는 없걸랑, 변태 아저씨." '목소리'는 한참만에야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일린 가의 핏줄.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정말 저 녀석이 네 '선택'이냐?] 대답한 것은 반이 아니라 프란이었다. 프란은 버럭, 온갖 짜증을 담아 고함을 쳤다. "거참 의심도 많네! 너, 엄청 네 멋대로 굴지? 남의 말 더럽게 안 믿지? 세상에서 네가 제일 똑똑 한 것 같지?" […….] "괜히 네 맘에 안 든다고 날 가짜 취급하지 말라고. 귓구멍 파고 들어! 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얘기할 테니까. 내가! 이 프리나 프리텐이! 여기 있는 이 사람의 '선택'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 아!" [……재미있군.] '목소리'가 스산하게 말했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내는 가운데,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만하지. 밤이 깊었으니 내일 다시 오겠다.] 프란은 헹, 소리를 냈다. "너도 잠은 자나보지?" 프란의 말을 무시한 채, '목소리'가 반을 향해 말했다. [하나 빠뜨린 게 있군. 이 시험은 스물네 시간 안에 끝내는 게 원칙이다. 만약 네가 그 안에 '선 택'을 죽이지 않거나, 아일린 가주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목소리'는 웃었다. [너와 네 '선택'은 결계 안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실패한 전 대의 도전자들이 그랬듯이.] 이윽고 '목소리'는 사라졌다. * * * "뭐 좀, 없습니까?" 프란의 난데없는 질문에 반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니, 가주님 아버지가 전대 가주 아닙니까? 뭐 힌트 같은 거 없었냐고요." '힌트 있으면 숨겨두지 말고 지금 꺼내놓으세요! 지금이 바로 적절한 타이밍이란 말입니다! 자, 얼른!" 프란은 온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나 반의 대답은 그런 프란의 기대를 단숨에 박살내기 에 충분했다. "없었다. 힌트를 주는 건 반칙이니까." 아들이잖습니까! 반칙 좀 하면 어때서!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잇, 소리를 냈다. 놀랍게도 반 은 아버지가 힌트를 주지 않았다는 것에 어떤 원망도 않는 것 같았다. 프란은 그게 신기했다. 프란 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반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어떻게 했을지 짐작은 가지 않습니까? 설마 가주님의 아버지가 자신의 '선택'을 죽이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반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프란은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아버지를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서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진심이다." "냉정한 사람이었습니까?" 프란의 질문에, 반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프란은 묘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동질감이 깃든 눈 같기도 했고, 가여운 아이를 보는 눈 같기도 했으며, 어찌할 수 없는 쓸쓸함을 담고 있는 눈 같기도 했따. 반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아버지 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런데 저 녀석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물어온다. 반은 짧게 답했다. "그래. 난 그 사람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헤, 프란은 속으로 낮게 중얼거린다. 얼마나 냉정한 사람이었으면 아들이 저렇게 얘기를 할까. 프 란은 반의 은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문득 말했다. "쓸쓸했겠네요." "쓸데없는 소리." 반이 말을 잘랐지만 프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봐주지 않으면 때때로 서러운 게 사실이잖습니까? ……난 어머니가 없어서 더 그랬는지 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가 매정하게 쳐내면 가끔 서글펐거든요." 프란의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프란은 벌렁, 대자로 드러누웠다. 반은 가방을 뒤져 불을 피웠다. 돌아갈 땐 고생해야겠지만, 이 추운 곳에서 불도 피우지 않고 자 다간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반이 피운 불이 따뜻하게 오르자 프란은 이번에도 무릎걸음으로 불 옆에 다가와 앉았다. 따뜻하다. 프란은 그 불 속에서 어쩐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계 속에 산소가 한정되어 있으니 만치, 불 때문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져 실제로 어지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약간은 몽롱한 상태에 서, 프란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뭣 좀 물어봐도 됩니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나온 후. 반이 뭐냐는 듯 돌아본다. '에잇, 이왕 말 나온 거 그냥 해버리자. 어차피 이 계승식인지 뭔지 지랄 같은 행사, 잘못 끝나면 난 죽을지도 모르잖아.'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별 다른 뜻은 없고."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 안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프란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러나 곧 프란은 얼굴을 굳힌 채,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어본 적 있습니까?" "……." 역시 괜히 말했나. 이런 시시한 질문에 대답을 해줄 리가 없지. 하지만 프란은 궁금했다. 원래 반 은 케인과 함께 여기에 오기로 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계승식의 '선택' 이 가장 믿는 사람을 지 정 한다는 것을 안 지금, 반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케인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 프란이 었다. 그런데 그 케인이 죽은 지금에도 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고 통스럽지 않을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커다란 슬픔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저 대마왕이 한 번이라도 속 시원히 울어본 적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반은 한참만에야 답했다. 그의 시선은 불꽃을 향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없다." '어라, 왜 대답을 해주지?' 프란은 의아했으나 내친 김에 계속 밀고 나가기로 했다. "왜 안 우는데요? 우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잖습니까." 물론 나도 안 울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단 한 번도 없다는 건 좀 심하잖아요. 듣자하니 그 땐 열네살이었다면서.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반의 대답을 기다렸다. "울면 진다." 이 무슨 아이 같은 말인가. "누구에게요? 헤이튼? 왕국? 이진느?" 프란의 질문에 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반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열네 살의 나에게." 프란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반의 옆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만 누워라. 내일도 계속될 것 같으니." 그 말과 함께 반이 불 옆에 누웠다. 프란은 반의 옆에 나란히 누우며, 조그맣게 말했다. 벌써 졸 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사실 아까, 절 죽일 줄 알았습니다." "……." "3천 5백만 케트로 아일린 가주 자리를 획득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일 테니까. 그래서 베지 않겠 다고 했을 땐 좀 놀랐습니다." 돌아누운 반은 한참만에야 무뚝뚝하게 답했다. "난 그런 식으로 처분하지 않는다." '아, 예. 그러시겠죠.' 프란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몸을 심하게 움직였던 탓에, 프란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 * * "도대체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겁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질리언은 짜증스레 대꾸했다. 벌써 잠들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헤냔은 손톱을 잘끈잘끈 씹으 며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좁은 집 안에서 네가 그렇게 움직이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하질리언은 투덜거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도련님, 제발 좀 자라. 응?" 하질리언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자 헤냔이 불쑥, 정말로 불쑥 하질리언 쪽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 하질리언은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있잖아요, 하질리언 씨."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도련님은 눈이 붉어서 갑자기 쳐다보면 가끔 무섭다고!" "그랬습니까?" 처음 알았다는 듯, 헤냔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는 자주 해야겠군요!" 기쁜 듯 답하는 헤냔을 보며 하질리언은 아차, 싶다. 헤냔은 흠,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앞으로 도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얼굴을 불쑥 내밀겠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좀 마! 넌 하도 진지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안 간다고!' 하질리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헤냔은 하질리언 옆에 걸터앉았다. 헤냔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 었다. "둘이 돌아오면 하질리언 씨는 어쩔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난 로이네트에서 살긴 글렀어. 프리나를 따라 가는 수밖에." "그럼 카르멘 경의 일을 도와줘야 할 텐데요?" "그게 왜?" 하질리언은 거리낌 없이 말했따. "도련님은 안 도와줄 거야? 사정 들어보니 여간 딱한 게 아니던데. ……일 잘 처리돼서 가문 되찾 으면 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주겠지, 뭐." 헤냔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이 당한 배신. 그건 분명 정의롭지 못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정의를 소중히 생각하는 헤냔이기 에, 만약 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는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도왔을 것이다. 보수도 무엇도 원하지 않은 채로. 하지만 상대는 저 저스티스 카르멘이다. 내가 왜 그 작 자를 도와야 한단 말인가! 헤냔의 얼굴을 보고 있던 하질리언이 웃는다. "도련님은 참 재미있단 말이야.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여. 어릴 때부터 놀림 많이 당했겠다." 그 말에 헤냔이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붉은 눈을 보며 놀라라고 한 짓이지만, 하질리언은 짖궂게 웃을 뿐이었다. "오호, 진짜 하네?" "거짓말쟁이. 이렇게 하면 놀란다고 하셨잖습니까?" 당했다고 생각한 헤냔의 볼이 퉁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예상하고 있을 때 당하면 별 효과 없다고." 헤냔은 팽하니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을 보며, 하질리언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재미있는 도련님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하질리언은 진심으로 충고해주었다. "그냥 솔직하게 행동해. 맘 가는 대로. 그 둘이 돌아오면, 그 때 결정하는 거야." 헤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야말로 자는 건가! 하질리언이 그렇게 생각하며 평화롭게 이 불을 덮으려는데, 갑자기 생각난 듯 헤냔이 다시 고함을 쳤다. "그건 그렇고 왜 아직까지 안 돌아오는 거죠! 벌써 돌아왔어야 되잖아요!" "으악! 잠 좀 자자, 도련님! 잠 좀!" 하질리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 * * [결정은 했나?] "……아침 댓바람부터 네 목소리 들으니 기분 나빠."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프란이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프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떴다. 아 함, 하고 길게 하품을 한 프란이 반을 돌아본다. 반은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이미 일어나 앉아 있는 상태였다. 반의 얼굴은 까칠했다. 잠을 못잔 게 분명하다. 눈에 핏발도 서 있다. [결정은 했냐고 물었다.] 목소리가 재차 말했음에도 프란은 느긋하게 가방을 뒤적이고 있을 뿐이다. "일단 좀 먹고 얘기하자고, 변태 아저씨." 태평스레 말한 프란은 헤냔이 싸준 음식들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프란이 인상을 찌 푸린다. 원래는 말랑망랑했을 음식들이 어젯밤 추위로 딱딱해져 있었던 탓이다. 그래도 일단은 먹 어야지. 프란은 양껏 먹었다. 온 사방 천지에 있는 눈도 녹여서 먹고, 기지개도 한 번 켠다. "가주님은 좀 드시죠." "생각없다." 생각 없어도 먹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은 일어섰다. 배를 툭툭 두드리며, 만족한 듯 씩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목소리'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가 이번 '선택'은 긴장도 안 하는 건 가 싶었던 것이다. 바보인건지 배짱이 말할 수 없이 두둑한 건지. 프란과 반이 여기 들어온 게 어제 한 시쯤이었으니, 시험이 종료되는 시간까지는 네 시간이 채 남 지 않았다. 그런데도 느긋하게 먹을 거 다 먹고, 마실 거 다 마시고 배를 두드리고 있는 프란의 태 도가 '목소리'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반의 얼굴 역시 한치의 변화도 없이 무감정했다. 여기에 갇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아일린의 핏줄…….] "네 말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튀어나온 반의 단호한 말에, '목소리'가 멈칫했다. "난 죽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잖은 협박 따위 집어치워." [협박이 아니다.] 반은 프란을 돌아보았다. 프란은 반의 의중을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 다. 반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하하! 가주 자리를 포기하겠단 뜻인가?] '목소리'는 크게 비웃었다. 프란이 제기랄, 하는 소리를 내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목소리'를 향해 검을 빼드는 사이, 반이 씹어뱉듯 답했다. "착각하지 마라. 네 인정 따윈 필요 없다는 뜻이니." 그 뜻밖의 말에 '목소리'가 침묵하는 가운데, 반이 말을 이었다. 이 보라색 머리칼의 미남자는 허 공을 향해, 자신이 내린 결론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인정하지 않아도 난 이미 아일린의 가주다. 내 피와 내 시간, 내 모든 것이 내가 아일린의 가주라는 것을 증명한다. 내가 이 결계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다 해도, 내가 아일린의 가주라는 '사 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오, 오늘은 진짜 말 많이 한다!' 프란이 쓸데없이 감탄하는 동안, '목소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 '목 소리'를 향해 반은 마저 말을 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실을 통고하듯, 단호하게. "누가 뭐래도 나는 대 가문 아일린의 하나밖에 없는 주인이다." 침묵. 침묵. 침묵. 계속해서 말을 붙이던 '목소리'가 조용해지자, 프란은 입술을 꼭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라고, 변태 아저씨!' 프란이 초조한 기색인 것과는 달리, 반은 꼿꼿하게 서서 한 점을 응시할 뿐이었다. '목소리'는 한 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일린의 핏줄이여. 네 이름은?] 그러고 보니 이름을 처음 물어봤네.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전대 가주 로웬의 아들인가?] 반은 흠칫했다.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 대수롭잖게 내뱉는 '목소리'의 말에 놀란 것이다. [……의외로군. 로웬은 네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나직하게, 혼잣말하듯 말하는 '목소리'에, 반은 눈을 흡떴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반으로서는 짐작되는 바가 전혀 없었다. 반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소리'가 이번엔 프란을 향해 물었다. ['선택'이여. 네 이름은?] "벌써 백 번은 말해줬겠다! 프리나 프리텐! 이젠 좀 외우라고!" 프란이 소리치자, '목소리'가 엷게 웃었다. [시즈 아일린과 프리나 프리텐이라…….] '목소리'는 약간의 틈을 둔뒤 조용히 말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자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축하한다, 시즈 아일린. 너는 시험을 통과했다.] * * * "우오! 벽이 없어졌어!" 프란은 날뛰고 있었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그 무형의 벽이 사라진 것이다. 공기부터가 달랐다. 프란이 '와아! 통과했대! 통과했어!' 따위의 말을 하며 사방을 휘젓는 사이, 반은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도저히 납득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네가 원한 게 이것이었나?" [그렇다, 어린 가주. 나는 두 가지를 시험한다. …… 그 첫째, 사람을 믿는 너의 마음. 가장 신뢰 하는 사람조차 죽인다면 너는 앞으로 누구도 믿지 않게 될 거다. 물론 네 '선택'의 자질도 내가 평 가한다. 네 '선택'이 널 위해 먼저 죽어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네 '선택'은 틀린 것이다. 그런 맹목적인 충성은 독이 될 뿐이지. 네가 데려온 것은 평생을 함께할 반쪽이다. 나는 서로 믿고 서로를 지키는 마음을 본다.] 뭔가 닭살 돋네. 평생을 함께할 반쪽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은 반을 보았다. [그리고 둘재, 나는 너의 확신을 본다. '선택'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네 생각을 관철시 킬 수 있는 의지를. 너 말고는 아일린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확신을 말이다.] 단세포 프란이 금세 넘어가 '호오, 그렇게 깊은 뜻이!'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반은 난감하 다는 듯 말했다. "정말 엉망진창이군. 운을 시험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일린 가주가 되기 위해선 운도 필수적이지.] 억지다. 반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더 토를 달지는 않았다. "증명은?" 반이 물었다. 계승식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는 징표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목소리'는 웃었다. [너와 네 '선택'인 프리나 프리텐이 살아서 돌아가는 것…… 그 자체가 '증명'이다. '선택'을 죽 이고 홀로 돌아간 녀석들은 모두 쫓겨났지.] "헤!" 프란은 손바닥을 딱 쳤다. 엉망진창이긴 해도, 묘하게 설득력 있다고 느끼면서. 그러다 문득, 무 언가를 깨달은 프란이 벼락같이 소리를 쳤다. "잠깐! 그럼 전대 가주도 '선택'을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네?" 프란의 말에 반이 멈칫했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이다. 아버지인 로웬 아일린은 냉정한 사람이었 다.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였기에, '선택'을 죽이 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죽이지 않았다니. 프란의 말에 '선택'이 웃었다. [당연한 일이다. 로웬읜 '선택'은 시즈, 너의 어머니였으니.] 반은 가만히 있었다. 그랬나. 아버지의 '선택'이 어머니였다고. 반이 생각에 잠긴 사이, 프란이 대뜸 물었다. "그런데 당신, 정체가 뭐야?" '목소리'는 허허롭게 웃었다. [수십 명의 '선택'을 지켜봤지만 너 같은 녀석은 처음이다. 프리나 프리텐. …… 말했듯 나는 초 대 아일린의 가주가 후대를 위해 마련한 마법에 지나기 않는다.……초대 아일린 가중의 친구였던 9써클의 대마도사가, 친우를 위해 만든 것이지.] "9써클이라고! 그게 가능한가?" 반은 물었다. 9써클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 했는데 누군가가 아일린을 위해 9써클 마법 을 썼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목소리'는 조용히 답했다. [이 이상은 대답해 줄 수 없다. 서둘러 돌아가거라. 널 절실히 기다리는 자가 있을 것이니.] '목소리'는 그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제 4장 안녕, 적색산맥 하질리언과 헤냔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젯밤 내도록 헤냔의 '왜 안 돌아오는 겁니까!' 공격 에 시달렸던 하질리언은 날이 밝을 무렵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달콤한 잠에 빠졌던 하질리언은 채 두 시간도 못 되어 몸을 일으켜야 했다. '팔자 좋구나, 도련님.' 밤새도록 자신을 고문 시켰던 주제에, 옆자리의 헤냔은 웃는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좋은 꿈이라 도 꾸는가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하질리언은 검을 챙겼다. 그리고서 헤냔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헤냔은 갑작스러운 입 막기 공격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하질리언은 그런 헤냔의 귓가에 대고 속 삭이듯 말했다. "누가 왔어." "예?" 헤냔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프리나 아니에요?" "발소리가 달라." 하질리언은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헤냔 역시 잔뜩 긴장한 채 하질리언과 똑같이 벽에 몸을 붙인 다. 두 남자가 긴장해서 몸을 숨기고 있는 그 때, 바깥쪽으로부터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하질리언은 눈을 굴렸다. 적색산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사람 따위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대 답이 없자 답답했는지 바깥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러니 들어가게 해주세요."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하질리언은 헤냔을 돌아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지금부터 도련님은 한 마디도 하지 마." 헤냔이 '왜요?' 하고 올려다보는 가운데, 하질리언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면 안 돼. 그리고 어떤 일이 터지더라도 검을 뽑지 마. 알았어? 약속해." 영문을 모르면서도 헤냔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하질리언의 검은색 눈동자는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 * * '무섭습니다, 당신.' 헤냔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두 남녀가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검사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한 건 하질리언의 태도 변화였다. 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면 서 하질리언의 마이페이스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던 헤냔이었다. 이젠 헤냔은 하질리언! 하면 '무적의 마이페이스, 남의 말 절대 안 들음!' 이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명의 이방인이 안으로 들어간 순간, 하질리언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 추운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일단 들어오십시오. 몸이 얼었군요." 다정하면서도 침착한,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친절한 얼굴. 그건 데이메르 저택에서 처음 만났던 모습의 하질리언이었다. 하질리언은 웃는 얼굴로 두 남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둘은 꽤 좋아 보이는 검을 차고, 푸른빛이 도는 경장 위로 검은 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상당한 실력의 검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헤냔은 잔뜩 긴장한 채 검집을 쓰다듬었다. 그런 헤냔과는 달리, 하질리언은 추 위에 얼어 있는 두 사람에게 이불까지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반색하며 그 이불을 받아들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죽을 정도로 춥기 때문에, 폼 잡고 자시 고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살았다는 눈으로 이불을 덮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 질리언은 차까지 두 잔 끓여다주었다. '차를 끓이다니!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안 줬으면서!' 헤냔이 억울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하질리언이 헤냔을 향해 다시 한 번 눈으로 다짐을 주었 다. '도련님은 아무 것도 하지 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하질리언은 웃는 얼굴로 두 명의 남녀를 보고 있었다. 그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적색산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당신들은 왜 여기에 있지?" 헤냔이 어깨를 굳히는 사이, 하질리언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을 납치했거든요." "네?" 차를 마시고 있던 여자가 놀란 듯 물었다. 공주님이 어디 있는데요? 하고 물어볼 것 같은 그 여자 를 향해, 하질리언이 말했다. "여기, 저의 공주님입니다."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하질리언의 말을 지키기 위해 시선을 저 편으로 돌리고 있던 헤냔은 움찔 했다. 두 방문자의 시선이 자신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님으로 보이진 않는데요?" "예?" 멍하니 대꾸했던 헤냔은 그제야 하질리언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았다. '하질리언 씨!' 헤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질리언을 패대기치고 싶었지만, 자 신을 빤히 바라보는 하질리언의 검은 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질리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부연했다. "사랑의 도피를 했습니다. 이쪽은 귀족 가의 도련님이고 그를 사랑한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었거든요. 서로 사랑하는데 평민이고 귀족이고 남자고 여자고 무슨 상관입니까? 도망치고 보 니 갈 곳은 여기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정착한 지 한 달쯤 됐죠."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믿을 것 같습니까!' 헤냔은 게거품을 물고 있었지만 하질리언은 그마저도 탁월한 연기로 커버했다. 그는 쓸쓸한 눈으 로 헤냔의 녹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던 것이다. "상의도 없이 여기로 데려온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렸구나. 정말 미안해." '닥치십시오!' 헤냔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 헤냔의 얼굴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이 이상한 남녀는 이미 하질리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힘내세요. 귀족이라는 신분마저 버리다니, 대단하군요." 여자는 감동받은 듯 헤냔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헤냔은 하마터면 하질리언과 했던 약속마저 잊어버리고 '정말 이걸 믿습니까?' 라고 소리칠 뻔했다. 다행히 하질리언이 그 최악의 사 태를 막아주었다. "나무 좀 더 가져와줄래? 이 두 분, 추울 것 같으니까." 그 말에 헤냔은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무슨 수작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여기서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막 바깥쪽으로 발걸음 을 옮기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혹 몇 주 전쯤 여기서 큰 싸움이 있지 않았나?" 헤냔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래도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간신히 비명을 참았다. 헤냔은 얼 른 하질리언을 돌아보았다. 허나 하질리언은 얼른 나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헤냔은 저기 앉은 두 사람이 누구인지, 하질리언이 얼마나 위험한 연극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일린 가 사람들!' 이 갑작스런 방문자들은 반의 시체를 찾으러 온 두 명의 세라딘이었다. "아아, 그 사람들 말이군요." 하질리언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동시에, 하질리언은 아직도 문 앞에 선 채 어쩔 줄 몰라 하 는 헤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헤냔은 입술을 깨문 채 바깥으로 나갔다. 저 위험한 연극에 자기 같 은 생짜 초보자가 도움이 될 리 없다는 걸, 헤냔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생각입니까, 하질리언 씨!' 헤냔은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거짓말은 물론 잔머리 쓰는 것에도 서툰 헤냔은 하질리언의 언행 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냔이 바깥으로 나간 사이, 하질리언은 다소 안심하며 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언젠가 한밤중에 검소리가 들려왔고, 서둘러 달려가 보니 모두가 죽어 있 었습니다." 그 말에 세라딘 둘은 신음을 삼켰다. 여기에 온 것은 반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혹 시 자신들의 동료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여자가 침울 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시체는 있겠지요?" "태웠습니다." "태우다니?" 네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둥그레졌다. 사실, 태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시체들을 어떻게 다 태운단 말인가. 나무가 남아도는 곳도 아니고. 실제로 하질리언과 프란, 헤냔은 케인은 물론 세라 딘들까지 곱게 묻어준 상태였다. "저와 제 애인이 하루 온종일을 투자해 화장시켰습니다." 둘의 눈동자에 어둠이 서렸다. 하질리언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둘의 전력이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급히 싸워 좋을 게 없었다. 만약 이들을 거짓말로 속여 넘길 수만 있다면 아일린 가에서는 반이 죽었다고 완전히 믿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은 약간 이나마 시간을 벌게 되는 것 아닌가. 자신과 헤냔이 개죽음 당하는 불상사도 없을 거고. "사실인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난 도련님과 일평생 조용히 사는 것 외에 바라는 게 없는 사람입 니다." 아무렇지 않게 꾸며대는 하질리언을, 둘은 꿰뚫을 듯한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하질리언은 모든 것을 흡수해버릴 것 같은 검은 색 눈동자로 그들을 마주할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 여자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낭패감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돌아가자." 그 말에 하질리언은 안심했다. 그러나 여자가 웃으며 한 말에, 하질리언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한 곳이 어디인지 가르쳐주시겠어요?" '망했다!' 바깥에서 검을 쥔 채 안쪽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헤냔은 그 순간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들어오지 마, 도련님!' 하질리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헤냔은 이미 검을 뽑아든 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그리고 헤냔은 검을 든 그 상태 그대로, 돌아앉은 세라딘 남자를 노렸다.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 했던 만큼 헤냔으로서는 자신 있게 가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헤냔은 자신의 검이 튕겨 져 나갔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어, 어느틈에?' 헤냔의 적색 눈동자가 굳었다. 세라딘 둘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둘의 몸에선 방금 전에 느꼈던 그 온화한 기운과는 전혀 다른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진짜 예사 상대가 아니잖아! 그 기운을 느낀 하질리언은 검을 쥔 채 당혹한 표정으로 서 있 는 헤냔을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짓이야! 아직 늦지 않았어, 도련님! 제발 지금부터라도 아무 말 하지 마라!' 세라딘 남자는 헤냔을 돌아보며 비스듬하게 웃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가보군. 이 사내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건 거짓이지?"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한 헤냔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연하지! 그 말을 믿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아이고!' 하질리언은 한숨을 쉴 기력조차 없었다. 헤냔 키에르의 전폭적인 도움 아래 상황은 최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 * * 헤냔과 하질리언은 등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 사람이 몇 번이나 파티를 이뤄 싸워봤다는 사실이었다. 프란을 적으로 설정한 채 둘이 팀을 먹고 싸워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프 란을 상대로 맞춰졌던 그들의 호흡이 세라딘 둘에게도 먹힐지는 의문이지만. "내가 진짜 도련님 때문에 못살아!" "그럼 그 상황에서 어쨌어야 됩니까!" "도련님만 안 끼어들었으면 정리할 수 있었어!" 챙! 헤냔은 세라딘 남자와 검을 맞댔다. 순간적으로 헤냔의 오른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하다!' 헤냔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헤냔의 눈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녀석들을 이겨주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눈이었다. 반면 하질리언은 다소 침착한 태도로 공격 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챙! 여자는 무심한 얼굴로 하질리언을 공격하고 있었다. 단 한 합만으로도 하질리언은 분명한 사실 하 나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여자를 검술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하질리언은 팔꿈치로 헤냔의 옆구리를 한 차례 쳤다. 헤냔은 '아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다음 순간, 둘은 재빨리 멀찍이 떨어져 섰다. 세라딘 남녀는 여태까지 등을 마주한 채 자신들 을 상대하고 있던 헤냔과 하질리언이 왜 갑자기 작전을 바꾸는지 몰라 의아해했지만, 곧 눈을 굳히 고 공격했다. 챙! 헤냔은 상대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상대는 롱소드를 가로로 길게 뉘이며 다짜고짜 헤냔의 심장부터 노렸다. 하지만 헤냔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 공격을 등으로 흘렸다. 동시에 헤냔은, 돌아선 상태 그대로 검을 치켜 올려 적의 목을 공격했다. 그러나 먹히지 않았다. 남자는 그 사이 비어버린 헤냔의 복부를 발로 뻥, 하고 찼을 뿐이다. 헤냔은 그대로 죽 밀려났다. 공격을 성공시키기는커녕 밀려난 주제에, 헤냔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균형을 잡고 있었 다. 세라딘 남자는 빠르게 헤냔을 압박해 들어왔다. 막 헤냔의 얼굴을 향해 검이 날아오던 그 순간 , 헤냔은 피하지 않고 검으로 맞섰다. 끽, 하고 두 검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 하질리언은 헤냔과의 거리를 점점 더 넓히고 있었다. 어차피 좁아터진 집이라서 거리를 넓혀봤자 그리 큰 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세라딘 여자는 그런 하질리언을 침착하게 코너 로 밀어붙였다. 하질리언은 막기에 급급한 지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는 밀리는 자 특유의 초조함이 전 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세라딘 여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 후에 이 작자의 목숨을 바로 끊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쉬익! 검은 하질리언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왔다. 하질리언은 그대로 몸을 숙였다. 세라딘 여자는 코웃음 을 치며 하질리언의 목을 검으로 찍어 누르려 했따. 하질리언은 땅에 누운 상태 그대로 몇 바퀴나 떼굴떼굴 굴렀다. "도련님!" "도련님 아니라니까요!" 헤냔이 빽 소리를 쳤다. 세라딘 여자는 그 이상 빠를 수 없는 속도로 다섯 바퀴쯤 굴러 저 편으로 밀려나간 하질리언을 따 라잡기 위해 검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헤냔을 상대하고 있던 세라딘 남자는 깜짝 놀랐다. 공격을 흘리고 있던 헤냔이 갑자기 자신을 내 버려두고 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헤냔의 등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무슨 노릇인 가 싶으면서도 남자는 검을 뻗었다. 헤냔으로선 어떻게 막아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쉬익! 쉬익! 쉬익! "으윽!" 그러나 남자는 헤냔의 목을 내려치지 못했다. 하질리언이 능숙한 동작으로 표창 세 개를 집어던졌 기 때문이다. 헤냔에게 완전히 집중하고 있던 그는 다리에 하나, 팔에 하나, 그리고 심장 근처에 한 대를 맞았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그 암기들이 조금만 더 정확하게 날아들었다면,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놀람 속에서 표창을 뽑아내는 가운데, 누워 있는 하질리언을 향해 검을 뻗고 있던 여자 역 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공처럼 데굴데굴 구르고 있어 지금 당장 한 대 치면 죽어버릴 예정 이었던 하질리언의 앞을, 헤냔이 막아선 것이다. 그리고 헤냔이 달려오는 동안, 그녀의 동료는 아 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챙! 여자는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헤냔의 검을 막아냈다. 바로 그 때, 여자는 동료를 꼼짝 못하게 한 하질리언의 표창을 맛봐야 했다. 어느 샌가 일어난 하질리언이 다시금 표창을 던졌기 때문이다. 여 자가 깜짝 놀라 그것을 쳐내려는 찰나, 헤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푹! 헤냔의 검이 여자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헤냔과 하질리언은 속으로 동시에 환호성을 울렸다. 프리 나 상대로 한 공격이 효과가 있었구먼! 둘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뻐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 야 했다. 프리나 프리텐은 절대 양반은 못되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하질리언과 헤냔이 그 이름을 생각하자마자, 프란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진! 헤냔! 나 왔다!" "프리나!" "윽, 왜 지금 오는 거야!" 헤냔과 하질리언이 놀라서 소리치는 가운데, 문 가까이에 서 있던 세라딘 남자의 얼굴에 기쁨이 맴돌았다. 인질이다! 하고 생각하며 그는 얼른 프란 쪽으로 달려갔다. '어딜!' 프란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세라딘 남자는 자신이 마주한 얼굴이 그 누구도 아닌 '아일린의 수배자'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다소나마 당황하고 말았다.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프란은 검을 뽑았다. 남자가 프란의 목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을 때, 프란은 이미 틈을 벌리고 휙 , 뒤쪽으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바보!' 헤냔의 공격에 옆구리를 관통당한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적은 벌써 셋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래도 어떻게든 이 녀석들을 모두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자가 다시 검을 치켜 올린 그 때였다 . 문을 열고,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들어선 것은. 세라딘 둘은 동시에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즈 아일린!" 반은 망설이지 않았다.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시퍼렇게 빛을 반사하는 루니아 블 레이드로, 반은 문 가까이에서 얼어 있는 세라딘 남자의 목을 단숨에 날렸다. 바로 그 옆에서 검을 뽑아들고 서 있던 프란은 남자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을 때에야 상황을 깨닫고 전율했다. '대마왕!' 렌의 목을 거리낌 없이 날려버렸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으며 반은 한 걸음씩 세라딘 여자에게로 가까이 왔다. 그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무섭게 굳어 있다. 세라딘 여자는 벌벌 떨었다. "어, 어떻게, 어, 어떻게 살아 있지?" "저승에 가서 네 동료들에게 물어봐라." 반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치켜 올렸다. 여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하질리언과 프란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만해!" 프란은 반의 손을, 하질리언은 여자의 어깨와 손을 각각 붙잡았다. 반은 싸늘한 눈으로 프란을 돌아보았다. 프란은 그 눈에서 무시무시한 분노를 읽었다. 케인을 죽 인 건 사키였다. 케인을 죽인 사람과는 다르지만, 반은 눈앞의 사람이 세라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 로도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눈에 어린 분노를 보면서도, 프란은 반의 검을 붙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 릅뜨고 반을 마주봤을 뿐이다. 하질리언이 입을 연 건 그 순간이었다. "어떻게 됐는지는 들어봐야지. 저 아일린도." 바로 그 때, 여자가 하질리언의 손을 내리치며 다시 검을 들었다. 반은 이번에도 눈 하나 깜짝하 지 않았다. 여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반은 무심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한 순간, 반 의 오른팔에 끔찍한 통증이 왔다. 안 그래도 몇 달쯤은 푹 쉬었어야 하는 상처였다. 그 상태로 건 장한 남자의 목을 통째로 날릴 만큼 힘을 썼으니,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다. 반이 움찔하는 그 순간, 여자가 반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콰직! "아!" 세라딘 여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였다. 프란은 반의 바로 앞을 막아서며 , 그 조잡한 검을 휘둘러 여자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상대가 반만을 의식하고 있어서 가능한 공격이었다. 한 순간, 프란의 금색 머리칼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여자의 심장에선 피가 왈칵, 솟아났지만 프란은 피할 틈이 없었다. 이윽고 프란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세라딘 여자의 피가 그림처럼 묻어 있었다. 헤냔이 입을 반쯤 벌리고 보고 있는 가운데,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자의 눈동자 는 오롯이 반을 향해 있었다. 지금 당장 죽을 것이라는 위기감도, 자신을 찌른 게 프란이라는 사실 도 아랑곳하지 않는 눈이었다. 여자는 반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가, 살아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시즈." 프란은 슬픈 눈으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반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너는 모든 걸, 모든 걸, 다 잃게 될 거야……. 넌…… 심지어는, 카르멘……" 프란이 흠칫했다. 방금 전에, 카르멘이라고 했나? 카르멘 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뮤와 마린 등을 생각하며 프란의 눈에 순식간에 걱정이 자리 잡았다. 반은 한 발작씩, 저주의 말 을 뱉어내고 있는 세라딘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반이 검을 한 번 들어 올렸다 내렸을 때, 더 이상은 어떤 목소리도, 어떤 저주도 들려오지 않는다. 여자는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뒀다. 엄청난 침묵이 살아 있는 네 사람 사이로 감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반은 피로한 목소리로 툭, 하고 내뱉듯이 말했다. "카르멘 가로 가겠다." * * * 네 사람은 망설임 없이 짐을 쌌다. 시체 둘이 뒹굴고 있는 이 집에 더 남아 있을 이류가 없어서였 다. 그 바쁜 와중에도 프란과 헤냔은 눈을 죽어라고 판 뒤 세라딘 둘을 묻어주었다. 프란과 함께 눈을 파며 사람들을 묻는 동안, 헤냔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무슨 생각 하냐?" 헤냔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프란이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프리나." 헤냔은 고개를 저었다. 프란과 헤냔이 집 앞으로 돌아왔을 때, 반과 하질리언은 모든 준비를 끝마 친 채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냔의 적색 눈동자가 어느 순간 번쩍했다. 반의 싸늘한 눈을 본 직 후였을 것이다. 헤냔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저는 당신을 도울 생각이 없습니다!" 반이 등을 돌린 그 순간, 헤냔의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 꽂혔다. "무슨 뜻이지?" 반은 돌아보며 물었다. 표정이 조금은 변할 줄 알았는데, 여전한 무표정이다. 헤냔은 감정을 담지 않는 그 얼굴이 싫다. "당신이 아일린을 찾는 걸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나?" 무심한 반의 대답에 헤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헤냔이 아는 반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어느 정도는 받아 줘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란 말인가. "쓸데없는 소리군." 반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다시 등을 돌렸다. 그 순간 헤냔은 참지 못하고 벼락 같이 소리를 질 렀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 됩니까?" 프란의 어깨가 움찔했다. 별다른 말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질리언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 를 매단 채 반의 등을 보았다. '거기 미남. 좀 받아줘라. 이건 도련님 나름의 프러포즈란 말이야.' 하질리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헤냔은 악을 쓰듯 그 등에다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말하면 안 되냐는 뜻입니다, 저스티스 경! 한번쯤은 그렇게 말해도 되잖습니 까! 당신은 뭐가 그리 잘나서 언제나 혼자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듯 구는 겁니까? 저런 사람들이 떼로 몰려 있는 그 집안을 혼자서 어떻게 찾을 겁니까!" 세라딘 두 사람이 시체를 되찾기 위해 파견된 지금에야, 헤냔은 알 것 같았다. 반이 도대체 어떻 게 살아왔는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 헤냔은 '도와달라고 말하면 도와줄게요!'라고 외치고 있는 중 이었다. 하지만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을 뿐이다. "도움은 필요 없다." "어째서!" "내 일이니까." 헤냔은 허탈한 듯 반을 보았다. 반은 걷기 시작했다. 하질리언은 연장자의 여유를 만면에 머금은 채 반에게 다가갔다. "어이, 미남." 반이 돌아보자 하질리언이 웃었다. "도련님 마음도 좀 이해해줘. 사실은 널 좋아한다고." "안 좋아합니다!" 헤냔이 뒤에서 빽 소리를 질렀다. 어찌됐든 그렇게, 탈 많은 네 사람이 적색산맥에서 출발했다. 목적지는 카르멘 가였다. * * * '후우.' 프란은 앞서 나가는 세 남자의 등을 보면서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정말이지 정신없는 하루였다. 계승식에 다녀왔더니 세라딘 둘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질 않나, 반은 그걸 무 썰기 해버렸고, 그 후 채 몇 시간도 되기 전에 자신은 벌써 적색 산맥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니. 프란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하얀 세계가 그녀를 차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이 없 는 와중에도 프란은 저 안에 잠들어 있는 무수히 많은 전설을 향해, 계승식의 '목소리'를 향해, 두 달 간 그녀에게 숨을 곳을 마련해 주었던 그 장소 자체를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 안녕, 빌어먹게 추웠던 적색산맥. 프란은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어쩐 일인지 여기서 평생 사는 게 나았을 거라고 후회하는 앞날이 보여.' 프란은 담담하게 걷고 있는 반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씩, 웃는다. 어 쩌겠는가, 저 남자에게 아직도 빚이 남은걸. '어떻게든 되겠지, 뭐!' 프란은 고개를 들었다. 적색산맥은 이 금색 머리칼의 소녀를 조용히 배웅했다. 제 5장 카르멘 가의 수난 "어서 오너라. 내 딸." 키네온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팔을 벌렸다. 늘 그랬듯 딸이 달려와 안기길 바라며 한 행동이었 으나, 키네세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을 뿐이다. 고작 한 달 못 본 사이 주름이 늘긴 했지만 확실히 키네온의 건강엔 이상이 없어 보였다. 키네세 스는 키네온의 앞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키네온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공주의 아름다운 눈 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왜 그러셨나요?" 키네세스는 안부의 말조차 하지 않은 채 그것부터 물었다. 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 고 곧장 아버지를 찾아왔던 그녀다. 키네온은 한숨을 쉬었다. "난 그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왜 그러셨나요?" 키네세스의 호수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키네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키네세스의 바로 앞에 섰다. 키네세스는 키네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왜 그 여자와 결탁했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아바마마!" 한 번도 아버지의 뜻에 반대해본 적이 없는 공주였다. 그러나 키네온은 이 예외적인 상황에도 당 황하지 않았다.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몸을 떨면 서, 키네세스는 슬픔과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카르멘 경이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뭐라고 변명하실 셈이세요?"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키네세스는 순간 머리가 어찔해지는 걸 느꼈다. "돌아오지 않는다니요? 그 분은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아일린에 그가 죽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다." 키네온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키네세스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병약한 그녀다. 지금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키네온은 얼른 딸을 부축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 린 키네세스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돌아올 거예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키네세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래서 아일린의 그 여자와 손잡은 거고." "이건 옳지 않아요!" 키네세스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왕국의 안녕을 위해, 아일린의 새 주인과 돈독한 관계 를 맺어야 한다. 이건 왕국을 위한 일이다." 키네세스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키네세스를 안다시피 부축하고 있던 키네온의 어깨가 키네세스의 눈물로 금세 축축해진다. "너와 함께 온 자들이 카르멘 가에 들어갔다고 하더구나. 아일린과 카르멘의 알력 관계를 알고 있 기에, 그곳으로 갈 거라고 예상을 못했다." 키네세스는 흠칫 놀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기쁨의 빛이 돈다. '무사한가요, 룬? 무사한가요, 다들?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 기쁨의 빛을 무시하며 키네온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 아일린에 넘길 것이다." "끌어내다니요? 그들은 카르멘 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카르멘가는 그들을 보호할 거예요!" 키네세스는 놀라서 말했다. 카르멘은 아일린만큼이나 영향력이 큰 집단 아닌가. 카르멘과 아일린 이 아인켈을 놓고 상반된 요구를 한다면 어느 편을 들어줘야 하는지는 자명한 일이다. 카르멘은 몇 번이나 왕국을 도와 카세타를 보호했다. 게다가 아일린은 타국에 위치한 가문이지만 카르멘은 바로 이곳, 카세타에 있다. "카르멘은 영향력이 너무 커졌다." 키네세스는 또 한 번 비틀거렸다. "카르멘은 가문 대대로 우리를 도와왔지만, 지금은 너무 세력이 커져버렸어. 너도 알고 있지 않으 냐? 카르멘의 영향력은 이미 왕가의 그것조차 넘어섰어. 아인켈들을 거기서 끌고 나온다면 아일린 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카르멘을 견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저스티 스 경이 없는 만큼 카르멘도 크게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키네세스는 키네온의 팔을 잡았다. 이성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다면 감정에라도 호소하고 싶은 그녀였다. 키네세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아바마마. 저스티스 경은 돌아올 거예요. 제가 얼마나 그 분을 사랑하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도 열렬히……. 제발, 아바마마, 그 분을 도와 주세요. 그 분이 돌아올 때를 위해 아인켈을 그대로 놔두세요. 제발, 제발……." 딸의 젖은 목소리를 들으며, 키네온은 말했다.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 딸아." 키네세스의 두 눈에서 빛이 꺼졌다. 그 눈을 안타까이 보며, 키네온이 말을 이었다. "저스티스 경은 그만 잊어라." * * * 카르멘 가를 대표하는 상징, 신검(神劍) 에세리타. 마린은 회의실에 앉은 채 가로 3휴나, 세로 12휴나에 달하는 그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조각상이 워낙 거대한지라, 4층 회의실에서 보는 것임에도 검 끝이 보이질 않는다. 마린은 에세리타를 보며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저 에세리타를 카르멘 가에 세운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카세타 왕국이었다. 제 3대 카르멘 가주 때 , 카세타는 레키슈안으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아직 국가 기반이 약했던 카세타였기에, 만약 카르멘 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카세타는 멸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세타는 카르멘 가의 충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에세리타를 하사했고, 그것으로 카르멘 가와의 관 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했다. 에세리타는 카르멘 가에 보이는 카세타 왕국의 신의였던 셈이다. "에세리타가 거기에 있는 한, 그대의 가문은 카세타의 이름 아래 영원히 영광되리라." 제 3대 가주가 그런 말을 들었다지? 그 말은 대 카르멘 가를 왕국의 이름 아래 묶어두려는 술수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었지만 카르멘 가가 카세타에 반하지 않는 한 먼저 카르멘 가를 치지 않겠 다는 왕국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카르멘 가는 그 때보다 더욱 큰 가문이 됐다. 카세타에 있어 카르멘이 내부의 불안요소일 수밖에 없는 건 주지의 사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카세 타를 막아주는 카르멘의 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서 카세타를 벨 수도 있는 것. 룬 일행이 카르멘에 도착한 바로 그 날, 카세타 왕국의 사신이 가문에 들어왔다. 반 앞에서 몇 번 이고 치욕을 당했던 그는, 설욕이라도 하려는 듯 큰 목소리로 왕가의 요구사항을 전했다. "카르멘 가에 있는 '불순분자'들을 당장 카세타에 넘기시오!" 카르멘 가 검사들은 난처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들은 카세타의 신하이니만치 당연히 왕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왕국이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주의 사람들이다. 결정을 내리는 건 가주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엔 가주가 없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는 상태다. 카르멘 가 검사들은 일단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섣불리 룬 일행을 내놓았다가 는 반이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무작정 룬 일행을 감쌀 수도 없는 노릇이다. 룬 일행은 어디까지나 아일린 사람들이니만치 카르멘 가가 무심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카르멘 가 사람들의 곤욕은 룬 일행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룬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 다. 기껏 믿고 온 카르멘의 태도가 너무도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회의는 가주가 없는 가운데 성사되었다. 회의를 주관한 것은 집사장 마린. 카르멘의 피를 이은 다수의 검사들이 모두 참여했다. 룬 역시 자신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 불참할 수 없었다. 한 참이나 에세리타를 보고 있던 마린은 고개를 돌려 회의실에 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곧 그녀가 입 을 열었다. "가주님이 계시지 않기에 제가 많은 분들을 대신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널리 양해바랍니다." '고작 집사장 주제에 우리를 오라 가라 하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행히 없었다. 오히려 카르 멘 가 사람들은 모두 마린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누구도 반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이 일의 책임자 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린은 그 모두를 돌아보며 입술을 뗐다. "왕가에서 마지막 경고문이 왔습니다." 룬의 얼굴이 굳었다. "마지막 경고문이라니?" "'불순분자'를 넘기지 않으면 강제로 황금문을 부수고 들어와 연행하겠다는 경고입니다. 더불어 지금 넘기지 않으면 책임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무서운 침묵이 사방을 감쌌다. 카르멘 가 검사 중 하나가 신음을 흘렸다. "문을 부수는 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허, 카르멘 가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그 말은 정당했다. 그러나 검사들은 괜한 소동을 원치 않았다. 왕가가 내놓으라는 아인켈만 주면 만사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만연해 있었다. 그러한 기색을 느낀 룬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쳤다. "우리를 넘길 거요?" 룬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이대로 아인켈이 카세타에 넘어간다면, 그 때는 반이 돌아와도 아일 린을 탈환하는 건 영영 무리다. 켈리의 소집 아래 비켈린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 욱 그렇다. 룬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던 란돌과 로키는 바짝 긴장해 검을 뽑을 기세였다. "이래서 카르멘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로키의 잇새로 그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들 주위에 서 있던 카르멘 가 핏줄들은 얼굴을 굳혔다. "한 번 해보자는 건가?" "우리는 대 아일린 소속 아인켈들이다! 숫자가 적다 해도 얕보지 않는 게 좋을걸." 란돌이 빈정거리듯 답했다. "뭐라 했나!" "검으로 말하자고 했다." 사태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유혈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마린은 두통을 느꼈다. '이래서 사내들이란!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힘으로 해결하려 든다니까.' 마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당장 검을 뽑아라! 검의 명가 카르멘을 모독한 죄를 치르게 해주지!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 을 것이다!" "너야말로 후회하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질질 짜도 소용없을거다!" 도발적인 말들이 오간 후 마침내 검 뽑히는 소리가 났다. 마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 남자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쾅! "그만들 두지 못하겠습니까!" 장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마린이 책상을 치며 일어선 것이다. 이 회의실에는 오직 마린만이 여자였다. 하이 톤인 그녀의 음성이 넓게 퍼진다. 검을 뽑아 들었던 카르멘 가 검사 하나와 란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린을 보고 있었다. "합심해서 이 난국을 해쳐나가야 할, 우리끼리 싸워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당장 검을 집어넣으세 요!" 서슬 시퍼런 마린의 말에 란돌은 머쓱해져 검을 집어넣었다. 카르멘 가 검사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이 사태를 그냥 묵인하고 있다니, 가주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회의실 안은 더더욱 고요해졌다. 평소에는 오호호! 하고 눈웃음치던 마린의 녹색 눈동자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아인켈 셋은 놀라기만 할 뿐 당황하진 않았지만, 마린의 평소 모습을 알고 있는 카르 멘 가 검사들은 당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린은 사방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서 룬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리는 성이 다르고 소속도 다릅니다. 당신들은 아일린, 우리는 카르멘. 당신들은 세이피안. 우 리는 카세타." 믿고 있던 마린마저 저따위 말을 하니 룬은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따위 가문을 믿고 우리가 아일린에서 빠져나왔단 말인가! 이따위 가문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내가 히스를 잃었단 말인가!' 룬이 뭐라고 욕지기를 내뱉으려는 순간, 마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은 같습니다." 룬이 입술을 깨문다. 마린은 고개를 돌려 카르멘 가의 사람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들은 마린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으나, 저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여자, 대체 뭐지. 단순한 집사장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룬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린은 다시, 그런 룬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의 주인은 단 한 분, 시즈 아일린님뿐이오." 룬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마린은 바로 그 대답을 원했다. 마린은 고개를 돌려 카르멘의 핏줄들 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들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이오. 현재는." 마지막 말이 걸렸지만 마린은 토를 달지 않았다. 마린은 찬찬히 말했다. "그럼 우리의 주인은 같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저스티스 카르멘, 시즈 아일린입니다. 그 분이 계 셨더라면 아마 카르멘 가를 보호하려고 애썼던 만큼 아일린의 아인켈들을 보호하시려 하셨겠죠." "하지만 그건 '시즈 아일린'으로서의 그 분 생각일 뿐 우리는 거기에 찬동할 수 없소!"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마린은 그쪽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아일린과 상관없이 오직 카르멘의 사람으로서만 대답하십시오."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 멈칫했다. "그대는 카세타 반란 건 때 진압군으로 함께 나섰습니까?" "그렇소."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왕가의 표창을 받았겠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그대는!" 마린의 목소리는 높아져 있었다. "반군으로부터 왕가를 구해준 지 채 반 년도 채 되지 않아, 주인이 '자리를 비운' 이 가문을 협박 하는 저 왕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협박이라니, 말이 너무 과하오!" "과하지 않습니다! 황금문을 부수겠다는 게 협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요?" "왕가는 단순히 이들을 내놓으라고……!" "가주가 여기에 있었던들 저 왕가가 우리에게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모두가 시선을 집중한 가운데, 마린이 피를 토하듯 말했다. "우리는 왕가를 도와 싸웠습니다! 카세타가 건국될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나 왕가는 지금, 주인이 부재중인 우리 가문에게 손님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충성심의 대가입니까? 그 런 요구는 적어도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상식이라고요!" "지나치다고 얘기했소, 집사장!" 카르멘 가 사람들 중 몇몇이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마린과 똑같은 생각을 하 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가주만 여기에 있었던들!' 그들에게 반의 부재가 그토록 실감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 * * "기분 더럽군." 헤냔 키에르의 단짝이자 런스 카르멘의 연인인 아나이스 폰 그란젤 양의 끝없이 욕지기를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 있는 동료 기사들 역시 벌레 씹은 표정인 건 마찬가지. 그들은 지금 카르멘 가를 향해 진군하는 중이었다. 아나이스의 옆에 있던 호슨이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히, 그때 카르멘 가가 안 왔으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었는데." 반이 제 2궁을 무너뜨려 기사단을 희생시킨 것이 사실인 것처럼, 카르멘 가가 오지 않았다면 기사 단 전원이 몰살을 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채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기사단은 자기들 손으로 은인의 집 대문을 쳐부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우리 자기만 있었어도……." 아나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런스 카르멘은 아직 기사단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가 아일린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아나이스는 물론 케이온 기사단 전원이 모르고 있었다. 아나이스는 왕가가 런스를 이 임무에서 제외시키기 위 해 일부러 외부로 빼돌렸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카르멘의 피를 이은 기사들이 이 임무에서 빠진 만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만치, 왕가도 카르멘 사람들을 이 일에 동참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카르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나이스조차 카르멘의 저 황금문을 집어 뜯고 안 뜰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기쁠리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왕국의 기사다. 좋든 싫든, 정당하든 정당하지 못하든 간에 기사들은 왕가의 명령 을 따라야 한다. "문을 여시오!" 마침내 카르멘 가의 황금문 앞에 도착한 디센 기사단장 메이스가 소리쳤다. "문은 열지 않습니다! 돌아가 전하에게 전하십시오! 우리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린은 황금문 안쪽에서 목소리를 돋워 답했다. 지금 여기에 가주는 없다.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훈련 중인 수련생들과 그들의 스승인 카르멘의 핏줄들. 검의 숙련도로 따 지면 대륙 어디에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한 가주는 지금 여 기에 없다. 말하자면 카르멘 가에 있는 수많은 병력들은 장수를 잃은 격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장수를 잃은 가문 앞에서, 사병들 앞에서, 카세타의 기사들이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문을 열라'고. 마린은 이를 악 물었다. 수장이 없다면 누구 한 사람이 나서서 대행해야 한다. 하지만 수련생들과 그들의 스승들은 그 역 할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린 자신은 집사장이었다. 그녀가 비록 가문의 병력을 통제할만 한 힘은 없다 해도, 그녀는 이 가문을, 저택을 지켜야 했다. "왕가의 명령을 어기는 이는 반역자요!" 메이스가 소리쳤다. "카르멘은 반역하지 않습니다, 에세리타가 여기 있는 한!" 마린이 답했다. 그러나 왕가의 기사들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놓지 않으면 카르멘은 반역가가 될 거요!" 카세타의 기사들이 소리를 높였다. 마린은 잠시 치를 떨었다. 그런 마린의 옆에 뮤가 걱정스러운 듯 서 있었고, 카르멘 가의 검사들 역시 소리를 죽인 채 서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집사장, 문을 여는 게 좋겠소." "어째서?" "우리는 카세타 기사와 함께 반군과 맞섰소. 말하자면 저들과 우리는 전우란 말이오. 전우에게 칼 을 대고 싶지 않소.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라면 더더욱." 외부 인사인 아인켈 때문에 카세타 군과 싸우고 싶지 않다는 소리였다. 마린은 피식 웃었다. "그 말씀,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무슨?" "가주님이 오시면, 그대로 전해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주님은……!" 말하려다 말고, 그는 입을 닫았다. '벌써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라고 말하려다, 혹시나 반이 살아 있다면 이 말 한 마디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린은 황금문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가주님이 없어 결정할 분이 안 계십니다. 곧 돌아오실 테니 그때 허락을 받으세요!" 예전에, 프란과 함께 샤로테에 숨어든 적이 있던 디센 기사단 소속 샤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저스티스 경이 없어서 벌이는 일인데 무슨." * * * 반과 프란, 헤냔과 하질리언은 카세타와 로이네트의 접경지대인 비엔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헤냔 은 말할 수 없이 즐거워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코트를 벗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역시 카세타가 따뜻하구나.' 프란도 즐거웠다. 저 빌어먹게 추운 적색산맥에 있다가 따스한 카세타의 땅을 밟자, 온 몸이 녹아 내릴 것만 같았다. 프란은 고개를 들어 해를 보았다. 로이네트 토박이인 하질리언 역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 마찬가지. 그는 '이렇게 따뜻한 곳이 있다니, 여긴 천국이야. 여기 눌러 앉아야겠다'라는 결심을 한 지 옛날이었다. "다들 잘 있으려나." 문득, 프란이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카르멘 가에 있는 모두가 생각난 탓이다. '뮤. 내가 여자란 걸 알았겠지.' 뮤를 보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하나, 프란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프란이 어울리지 않게 고뇌라는 걸 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자, 반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프란은 무의식중에 답했다. "가주님이 사방팔방에 내 얼굴을 붙여서…… 아참! 수배지!" 갑자기 생각난 사실 하나 때문에 프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당 장에 쳐들고 반을 바라보았다. "수배지 말입니다, 수배지! 도대체 내 얼굴이 그게 뭡니까!" 프란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얼마나 쪽팔렸는지 아십니까! 그거!" 그거, 레이니아 왕비잖아요! 하고 프란이 소리치려는 찰나, 하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아, 그 수배지? 프리나, 원망할 걸 원망해라. 너무 예쁘게 그렸던 걸. 난 처음에 네가 아닌 줄 알았어. 오히려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라지." "내가 아니니까 문제지!" 하질리언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많이 미화되긴 했지만 너 맞던데?" "아, 글쎄! 나 아니라니까!" 프란이 부끄러움으로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그들이 탄 말은 국경 지대로 접어들고 있 었다. 카세타의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프란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변방의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 나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네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국경지대요. 조용히 좀…… 헉! 너는!" 불쾌한 듯 경고하고 있던 한 병사가 어느 순간 깜짝 놀란 듯 프란을 손가락질 했다. 프란은 뒤통 수를 슬슬 긁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질릴 만큼 저런 반응을 보았던 프란이다. '또 저런다. 나중에 얼마나 실망할꼬.' 프란이 그렇게 혀를 차는 동안, 다른 병사들도 그제야 프란이 누구인지 눈치 챈 것 같았다. "아, 아일린의 수배자!" "……였는데, 이젠 수배 풀렸어." 프란은 씩 웃으며 말했다. 허나 병사들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없다. 그들은 순식간에 프란 일행을 둥근 형태로 감쌌다. 창과 검과 화살을 움켜쥔 그들이 일행 주위에서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3천 5백만 케트! 저 녀석 잡아서 우리끼리 공평하게 나눠도 인생 편다!' '나한테 이런 행운이!' 너무도 노골적인 기쁨이 그들의 눈빛에서 드러나고 있어서, 프란은 미안할 지경이었다. 헤냔과 하 질리언 역시 먼 하늘을 보며 흠흠,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늘 그랬듯, 이번에도 반이 나섰다. "내가 수배를 명한 아일린의 가주, 시즈 아일린이다." 그 말에 병사들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허나 그것은 '아니, 그토록 높으신 분이 여기에!'라는 얼 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얼굴은 '제기랄, 3천 5백만 케트 물 건너갔네.'라는 실망어린 표정에 가 까웠다. 병사들의 희비가 수시로 교차하는 그 얼굴을 보며 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만에야 감정을 수습하고 반의 정체를 상기한 병사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일린의 가주라 면 보통 신분이 아니다. 한 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반은 아무 말 없이 세뇨타를 내밀었다. 아일린 가의 세뇨타는 워낙 유명해, 국경 지대에서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뇨타는 그 소유주가 아일린의 일족이라는 증거와 다름없으니, 신분증 노릇 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주의 세뇨타는 더욱 특별했다. 은빛의 그 동전 같은 것은 평범한 세뇨타보다 1.5배 이상 크고, 테두리가 다이아몬드와 마블렌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더불어 그 안에는 아일린 가의 상징이 나 다름없는 석문(石門)과 라어 강이 놀랄 만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모작을 만들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병사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키네온은 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변방 에 주의를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 데 모두가 비엔 안으로 들어서는 찰나, 병사 한 명의 목소리가 그들의 뒤통수에 꽂혔다. 자기네들 끼리 떠들던 말이 우연히 일행의 귀에 들린 것이다. "들었어? 오늘 카르멘이 얼굴에 먹칠 좀 할 거라는데?" 반은 걸음을 멈췄다. 반뿐만이 아니라 프란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갔다지 뭐야. 황금문이 부서질 지도 모른다더군."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 대 가문이 그런 수 모를 겪다니." "듣자하니 가주가 없어서 그런 거라던데." "왜? 어디 여행이라도 갔대?" "글쎄, 어디로 갔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더군." 반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저희들끼리 떠들고 있던 카세타 병사들은 벌 써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아일린 가주가 자기네들 쪽으로 다가오자 깜짝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반의 온 몸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뭐, 뭐지?'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떠는 사이, 반이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말해봐라." * * * 기사들이 황금문 앞에 선 지 벌써 여덟 시간이 지났다. 해가 뉘엿뉘엿하게 지고 있다. 카르멘 가의 황금문은 그 노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찬란한 빛 을 내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장관이다. 기사들은 잠시, 상황을 잊은 채 그 황 금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저길 부수고 들어가야 한단 말이지?" 아나이스가 냉소했다. 그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아나이스를 돌아보았다. "저렇게 예쁜 걸 부숴야 한다니, 영 내키질 않는군." 그래도 할 수 없는 노릇인가. 아나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황금문 안쪽의 마린은 끈덕지게 저항하 고 있었지만, 기사단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은인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문을 부순 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기사단 내부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창백한 안색의 마린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해도,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저항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켈들의 굳은 얼굴을 볼 때마다 마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만! 제발 부탁이야. 제발 오늘만이라도 돌아가 줘.' 마린은 속으로 그렇게 애원했다. 그러나 대규모의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에 온 메이스는 말머리를 돌릴 수가 없었다. 메이스도 이 일이 내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사들이 동요하고 있 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대장답게 처신해야 했다. 메이스는 마침내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소. 문을 여시오. 10분을 기다리겠소. 그 사이 열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을 부술 것이오. 이건 농담이 아니오." 마린은 아무 말도 않았다. 룬이 마린의 옆으로 다가왔다. 굳은 얼굴의 그가 입을 연다. "저들이 문을 부순다면, 그 틈을 타 우리는 여기서 도망치겠소. ……도피해 있다 가주가 오는 즉 시 여기로 올 거요. 그러니 그렇게 책임감 느끼지 마시오." 바로 그 순간, 메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숴라!" "우아아아아아아아!" 아인켈들은 이를 악물며 탈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 검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황금 문을 열어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인켈들의 비장한 얼굴을 보며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금문이 기사들의 검 앞에 무너진다면, 대륙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카르멘 가에게 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수치가 될 것이다. 게다가 왕가는 책임을 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책임이라는 게 불순분자를 내놓지 않은 것에 대한 문책이라면, 카르멘 가는 은인의 가문에서 반역의 가문으로 돌아설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동안 신세 많았소." 룬의 말을 시작으로, 황금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미리 준비해온 길쭉하고 거대한 쇳덩 어리를 수십 명이 함께 든 채 황금문을 쿵쿵 찍어대기 시작했다. 견고하게 잠겨 있는 황금문이었지 만, 몇 십 분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린은 이를 악물었다. 곧 그녀가 황금문 앞으로 다가갔다. 뭘 하는가 싶어 마린을 지켜보던 카르 멘 가 검사와 아인켈들은 경악스런 광경을 보아야 했다. 마린이 황금문에 등을 댔기 때문이다. 지 켜보고 섰던 하인들이 달려와 동참했다. "나는 끝까지 저항할 거예요!" 보고 있던 카르멘 가 검사들 중 몇몇이 하나 둘씩, 홀린 듯 문 앞에 선 것은 그 말을 들은 직후였 다. "좋소, 집사장. 왕가에 반역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정당방위겠지." 한 검사가 나직이 말했다. 마린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스는 쉽게 열릴 것 같던 황금문에 저항이 오자 곧장 상황을 깨달았다. "더 세게!" 쿵! 쿵! 쿵! 계속해서 거세지는 압박에, 황금문에 등을 대고 있던 마린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곧 이 문은 무너질 것이다. 마린은 룬 일행을 보았다. 저 사람들이 무사히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기사단이 저렇게 빼곡히 앞을 막아서고 있는데, 대체 몇 명이나 도망칠 수 있겠는가. 쿵! 마린과 뮤, 그 밖의 사람들이 동시에 튕겨져 나갔다. 마린은 곧장 자리로 다가와 온 몸으로 문을 밀었다. 뮤 역시 눈물범벅이 된 채 똑같이 했다. 쿵! 다시 한 번 사람들이 튕겨져 나간다. 마린은 필사적으로 다시 뛰어갔다. 핀으로 고정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산발이 되어 있었다. 옷도 흙투성이다. 그래도 마린은 온 힘으로 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린은 이제 더 이상은 막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쿵! '미안해요, 가주님. 당신의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황금문 안쪽 사람들이 넘어지듯 밀려난 가운데, 쇳덩어리가 2지나 정도 황금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 이제 곧 박살난다. 피하지 않으면 몸이 으스러질 것이다. 쇳덩어리가 반동을 주기 위해 다시 뒤 쪽으로 물러난다. 이제 한 방이면 황금문은 박살이 날 것이다. 습, 하고 바람 소리가 났다. 쇳덩어리가 앞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마린은 눈을 질끔 감았다. 그런데 황금문이 두 쪽 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집 앞에서 물러서라."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끄럽게 엉겨 있던 모두가 일순 동작을 멈췄다. "……물러서라 했다." 기사들은 황금문에 쇳덩어리를 갖다 댄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1지나만 더 움직이면 이 황금문은 박살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저 목소리가 들리다니. 맨 뒤에 서서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메이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그 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메이스는 탄식해야 했다. '이럴 수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해 싸늘한 침묵만이 맴도는 가운데, 마린과 룬의 목소리가 천지를 찢으며 날 카롭게 울려 퍼졌다. "가주님!" "가주님!" "우오오오오오오오!" 황금문 안쪽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일었다. * * * 한 시간에 말을 한 마리씩 바꿔 타야 할 정도로 빨리 달려왔던 터라, 반의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갈이라도 잘못 밟아 낙하하면 즉사할 정도로 서둘러서 왔던 그다. 뒤에 서 있는 프 란이나 헤냔, 하질리언도 마찬가지다. '진짜 귀신같은 타이밍이네. 저번에 궁궐에서도 그러더니.' 쇳덩어리를 든 채, 아나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반은 한 걸음을 걸었다. 기사들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서 있었다. 아직도 쇳덩어리를 든 채다. 반은 그런 기사단을 한 번 돌아보았다. 반의 옷은 며칠간의 여정으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모두가 반의 그 눈 에서 분노를 읽었다. 카르멘 가 가주인 반의 실력이야 모두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 몸에서 뿜 어져 나오는 살기는 어떤 때보다 더 강했다. 반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기사들이 모두 반의 손을 주시하는 가운데, 반은 황금문 위쪽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에세리타를 가리켰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모두들 일순간 숨마 저 멈췄다. "에세리타가 거기에 있는 한, 그대의 가문은 카세타의 이름 아래 영원히 영광되리라." 마린이 홀린 듯 말했다. 반은 냉담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선대왕이 했던 약속을 비틀어, 씹 어 뱉듯 말했다. "에세리타가 거기에 있는 한, 카르멘은 영원히 왕가를 수호하리라." 아나이스는 오싹, 하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바꿔 말해 에세리타가 저기에 없다면, 카르멘은 왕가를 배신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건 분명히, 이 황금문을 부수는 순간, 다시 말해 카르멘의 영토 안에 기사들이 발을 디디는 순간, 카르멘의 문제 에 왕가가 개입하는 순간, 카르멘은 참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이 말 한 마디로 반역자로 몰려 참 수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저 남자라면 그것마저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나와 나의 카르멘은 왕가에 반역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르멘을 위협하는 세력이 다른 누구도 아 닌 저 왕가라면." 반은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지체 없이 에세리타를 부술 것이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카르멘의 검사들까지 얼었다. 헤냔의 경악 역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반의 망토를 잡아당기며 '그만하십시오, 저스티스 경!' 하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 나 그럴 수 없었다. 심지어 헤냔은 반의 옆에 한 발자국도 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반의 얼굴이 너무 무시무시했던 탓이다. "돌아가서 왕께 전하라." 반의 목소리는 낮았다. "카르멘은 에세리타를 부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기사들은 하나둘 씩 쇳덩어리를 내려놓았다. 노을이 반의 머리칼을 물들이고 있었다. * * * 기사들이 돌아간 자리, 황금문을 열고 나온 마린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주님!" 룬 역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다가와 반의 손을 부여잡았다. "어흐흑! 살아 계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 룬은 한 치의 의심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반은 말없이 그런 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제 6장 마지막 거래 반은 침소로 들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반은 그 모든 일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아무리 그가 대마 왕이라 해도, 적색산맥에서 미친 듯한 스케줄을 감행한 것도 모자라 로이네트에서 카르멘 가로 바 로 달려와야 했던 이 여정이 몸에 무리를 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의사가 만약 반의 몸을 보았다면 당신 제정신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반이 자신의 방에 들자, 카르멘 가 사람들과 아인켈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방으로 흩어 졌다. 헤냔은 일단 기사단을 따라 귀환했고, 하질리언에게는 손님용 방이 하나 내어졌다. 가주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아인켈들은 그 날 저녁 내도록 술을 퍼마시며 반의 귀환을 축하했다. 그런데 그 환희의 물결 속에 홀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프란이다. "뮤." 뮤는 프란의 방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던 핑크색 머리칼의 소녀는, 프란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움찔, 몸을 떨었다. 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 뮤는 자신도 모르게 프란의 가슴께부터 바라보았다. 더 이상 가슴을 싸맬 필요가 없어 붕대를 풀었던 프란이다. 그 곡선이 뮤에게도 그대로 보였다. "미안해." 시선을 느낀 프란이 할 수 있는 건 사과 밖에 없었다. "미안해, 뮤. 정말 미안해.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 어떤 사람에게도 뮤에게만큼 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은 소녀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프란은 익히 알고 있었다. 프란은 그 자리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혹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죄책감. 그 모든 감정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프란의 얼굴을 향해, 뮤가 입을 열었다. "아픈 덴 없어?" '아아.' 프란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말 한 마디로 이 소녀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아마도 뮤는 매일 밤 울었을 것이다. 뮤는 프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가주님이랑 같이 돌아와서 놀랐어. 나, 매일 매일 프란을 걱정했거든. 다행이야."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하는 프란을 보며, 뮤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곧 차분한 말투의 조근 조근한 목소리가 뮤에게서 흘러나왔다. "있잖아. 프란이 남자든 여자든, 난 프란이 참 좋아. 정말이야. 그래서 난 프란이 행복했으면 좋 겠어. ……저번에도 말했지? 다치지 말라고. 다치지 말고, 프란이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는 거, 그 게 내가 프란한테 바라는 전부야. 응,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정말 충분해. 프란이 돌아와서 난 너 무너무 기뻐. 그러니까 프란,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뮤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프란이 팔을 뻗어 뮤를 안았기 때문이다. "뮤, 미안하다. ……미안해." 프란은 뮤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뮤의 키가 작은 탓에, 고개 숙인 뮤의 얼굴은 프란 의 가슴께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뮤는 프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작은 골에 파묻힌 뮤가 헤헤, 하고 웃는다. "가슴이 있으니까 좋은 점도 있네." "그런 말 하지마. 있는지 없는지도 헷갈릴 만큼 빈약하니까." "하하하." 뮤는 울면서 웃었다. 프란은 이 작은 소녀를 꼭 껴안았다. '나도 그래, 뮤.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평생. 나 같은 거 마음 구석에서 뻥 차버리고, 좋 은 사람 만나 상처 받지 않으며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 프란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이 이 소녀의 마음을 더 흔들 거라는 사실 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은 뮤를 꼭 껴안았다. 이 작은 소녀의 온기가, 프란에게도 큰 위로였다. * * * 뮤를 보내고 돌아온 프란은 방 안에 대자로 누웠다. 시선을 올리자, 익숙한 천장의 무늬가 보였다 . 그 무늬를 멀거니 올려다보면서, 프란은 문득 시온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방 안에서 느끼 버터한테 날아 차기를 먹인 게 수십 번이었다. 피식 웃음이 샌다. 그렇게나 악을 쓰며 내쫓았는데 도 굴하지 않고 이 방 안으로 쳐들어오던 느끼 버터.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날 탈출시켰으니, 분 명 고생을 많이 했겠지. 너는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는 없어진 것 같다, 느끼 버터. 프란은 눈을 감았다. '대신, 내가 만나러 갈게.' 시온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는 프란이다. 프란은 그래서, 이번만큼은 자신이 시온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겠지. 그래도 평소처럼 느끼하게 웃으면서 잘 지내고 있기를, 프란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계속해서 밀어내고 밀어내도 가까이 왔던 시온 아일린.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야, 시 온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가를 깨닫는다. 한참이나 시온 생각으로 뒤척이던 프란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은 자야 한다. 내일 부터 또 바빠질 테니까.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매트릭스에 몸을 푹, 파묻었다. 너무 푹신해서 몸 이 축 늘어지는 것 같다. 프란은 이불을 끌어당겨 목 끝까지 덮었다. 그런데 그 때. 딸깍. 프란은 벌떡,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군가 싶어서다. 그리고 예고 없는 방문자 가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프란은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진짜, 진짜, 의외네요." "뭐가 말인가." 방문자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가주님이 한밤중에 여기 온 거요. 그거 말고 의외일 게 뭐 있습니까?"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반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놀라움도 잠시, 프란은 뭔 가 용건이 있겠지 싶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세요?" '용건?' 프란의 질문에, 반은 움찔했다. '그래. 용건이 있어야 하지.' 그런데, 용건이 없었다. 반은 잠시,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용건도 없는데 내가 여기에 왜 온 건가? 피곤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다. 그래서 회의도 내일로 미룬 채 침소로 들었었고. 그런데 왜 내가 자지 않고 여기에 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 느 새 노크도 안 하고 이 방문을 열고 있었다. 내가 대체 왜 그런 거지? 반의 혼란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프란은 멀뚱히 눈을 뜨고 반을 보았다. "용건 없습니까?" 거참 해괴한 일일세.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며 보는데, 한참 만에 반이 불현듯 말했다. "내일 아침부터 당장 일을 시작해라." "무슨 일이요?" 프란이 눈을 깜빡거린다. "나를 수행하는 일 말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감자 깎고 식사 시중드는 그 일 말하는 겁니까?" 프란이 한숨 쉬듯 물었다. 반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 한 프란은 목을 오른쪽으로 두둑, 꺾었다. 그러고서 하품을 한 번 크게 하려던 프란은,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용건을 들었건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 하려고 오셨습니까?" 그런 말쯤이야 호위무사들에게 전하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반은 또 한 번 당황했다. 이걸론 안 되는 건가? 뭐 말할 만한 게 없는가 싶어 필사적으로 생각하 던 반이 마침내 말했다. "바빠질 거다."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뭐야, 그게 다야?' 프란의 얼굴은 또다시 그렇게 묻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던 반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가겠다." "엥?" 프란은 깜짝 놀라 반의 옷깃을 잡았다. 엉겁결에 한 행동이었다. 반이 흠칫하며 돌아본다. 프란은 얼른 손을 놓았다. 자기가 잡아놓고도 놀라서, 이번엔 프란이 당황한다. 무덤덤한 은보라색 눈동자 와 마주친 프란은, 반의 시선을 피해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마구 말할 거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아참! 그러고 보니 아까 에세리타가 어쩌고 했었잖아요. 그거, 뭔 뜻입니까?" 에세리타가 신검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왕가와 관련된 조각상임을 모르는 프란의 질 문에, 반이 짧게 답했다. "에세리타는 왕가가 준 조각품이다." "……아, 예." '전혀 설명이 안 되잖아! 친절한 설명 따위 물에 말아먹을 대마왕아!" 프란이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고 있을 때, 반은 프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뭘 발견 했는지 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흐릿한 이미지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서 날듯이 지나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응을 눈치 챈 프란이 '왜요?' 하며 시선을 올렸다. 프란의 화사한 금색 머리칼은 몇 달 동안이나 자르지 않아 어깨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머리를 짧 게 자르고 있을 때도 언제나 '남자 맞나?'라는 의심을 받던 프란이다. 시간도 흐른 데다, 머리까지 길어지자 프란은 예상 외로 꽤 여성스러워 보였다. 그런 프란을 보며, 반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 다. "……너였나?" "뭐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리가 없는 프란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 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 니 이건 아닌 밤중에 대마왕이로구먼. 홍두깨보다야 대마왕이 백 배 무섭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반은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프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 "예?" 카세타 왕궁 무도회라고? 프란은 찬찬히 그 때 일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그때가 키네세스 공주님의 생일이었고…….' 기억을 복원해보고 있던 프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것은 한 순간이었다. '으아악! 설마 그때를 얘기하는 건가?' 시온이 억지로 드레스를 입혔고, 그래서 입었고, 그 상태로 반이 있는 격납고로 달려갔었다. 딱 1 0초 간, 얼어붙은 채 반과 마주쳤었지. 뭘 묻는 건지 알아듣자 프란은 당혹감에 죽을 지경이었다. '대마왕 놈, 도대체 그걸 왜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때 몰라봤으면 끝까지 몰라봐야지! 아악, 게 다가 왜 묻는 거야? ……아악!' 프란이 답지 않게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매고 있으려니, 반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맞나보군." "아, 아니 그게…… 하, 하하……" 프란의 얼굴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반의 시선 앞에서 거짓말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프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예. 저 맞습니다. 아니, 뭐, 그게…… 어쩌다 보니까 그게 저 맞긴 한데요. 이상하게 생각하 진 마시고…….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앞뒤 안 맞게 횡설수설하는 프란의 말을 듣고 있던 반의 얼굴 위로 한 차례 파란이 스쳤다. 시선 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탓에, 프란은 보지 못했다. "……그렇군." 반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자, 잠깐! 왜 그냥 나가는 거야? 뭐라도 한 마디 해야지!' 프란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반은 저벅저벅,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방을 나서고 있었다.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프란을 남긴 채, 반은 쾅, 소리를 내어 문을 닫았따. 프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 위를 마구 뒹굴었다. "아아악! 도대체 왜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 * * 원로원 서열 3위인 유렌의 여식이자 정초원의 멤버이기도 한 레오니아는 이진느가 신임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이치고 제법 처세술에도 능하고 눈치도 빨라, 사람 보는 것이 깐깐하기 그지없는 이진느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아이다. 원로원 영감 스탕달을 꼬드겨 레오니아를 방에 밀어넣었던 전적이 있는 이진느는, 레오니아가 급 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서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니아 정도면 시즈도 넘어올 줄 알았건만.' 황급히 허리를 굽히는 레오니아를 보며 이진느는 생각했다. 레오니아의 아름다움에 넘어간 반이 조금쯤 빈틈을 보이길 바랐던 이진느였다. 하지만 철저한 실 패. 레오니아뿐 아니라 시즈의 방안에 들어간 여자들은 모두 시즈의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내 쫓겨야 했다. 저 차가운 조카는 레오니아 정도로도 눈에 차지 않는 것인가? 하긴 키네세스, 고 영 역한 계집조차 시즈에게는 냉대를 받기 일쑤였으니. 상념을 접으며 이진느는 턱을 괸 채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레오니?" 레오니아는 급하게 달려온 듯 머리카락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카르멘 가의 첩자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레오니아가 입을 열었다. 레오니아의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로부터 무언가를 예감하긴 했으나, 이 진느의 진초록 눈동자에는 어떤 떨림도 없었고 입술은 고요히 닫혀 있었다. "그래, 무슨 내용이지?" 레오니아는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야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시즈 아일린 가주가 살아 돌아왔답니다." 이진느는 절제된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던 물컵을 집어 들었다. 이진느 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긴장감이 느껴져 서둘러 입술을 축이려 한다거나 목이 탄다거나, 그래 보 이진 않는다. 그 증거로 컵을 내려놓은 이진느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진느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둘이 돌아오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랬군.' 이진느가 소리부터 지를 거라고 생각했던 레오니아는 그 침착한 모습에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 가 살아 있다는데 어떻게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거지? 시즈가 다시 이 가문을 찾는다면 이진느 는 무슨 벌을 당해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을 터였다. "리온이 내게 거짓말을 했군, 어리석은 놈."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긴 했으나 이진느의 얼굴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는 평소의 이진 느 아일린 그대로다. 우아하고 고상하며 차가운. "어째서 그토록 태연하십니까, 이진느님?" 이진느는 답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아인켈은?" "시즈 덕분에 무사하답니다." "결국 아인켈, 비켈린이 시즈의 명 아래 모이겠군." "그뿐이 아닙니다. 시즈는 카르멘의 가주입니다.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시즈를 도울 거라는 사실 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호호호!" "이진느님?" 이진느의 갑작스런 웃음에 레오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즈에겐 프라이드란 게 있다, 레오니. 쓸데없는 자존심이지만 시즈는 그걸 중요하게 여겨. 그가 아일린의 일에 카르멘을 끌어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게다가 만에 하나 카르멘 가가 아일린과 일전 을 불사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순간 카르멘과 아일린의 관계가 전 내륙에 발각되겠지." "만약 카르멘 가가 아일린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쳐도 시즈가 돌아온 게 이 집안에 얼마나 큰 영향 을 미칠지는 자명합니다. 분명 아일린은 분열될 거예요." 레오니아는 차분하게 말했으나 이진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난 분열을 좌시하지 않을 거야. 누군가가 시즈에게 붙으려 한다면 난 그 순간 팔다리를 잘라버릴 거다." 레오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시즈 아일린이 피를 만드는 가주였다면, 시온 아일린은 허수아비 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에서 이진느 아일린은 음모와 야합을 만드는 숨은 가주가 되겠지. 시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진 않을 잔인한 사람. "하지만 이진느님. 시즈 아일린은 계승식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계승식을 완수했을 가능성이 높 아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시즈를 못미더워하던 사람들도 이젠 그를 지지할 텐데요." "그러면 뭘 하겠느냐." "네?" "계승식의 성패를 알려주는 사람이 누구냐, 레오니." "원로원장, 스탕달 어르신입니다." "그 영감이 죽었다면?" 레오니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도 시즈의 계승식이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없다. 설사 원로원장 외의 누군가가 계승 식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포섭하면 그만이지. 어찌됐든 시즈는 여기에 없고 현재 이 집안의 가주 대리는 나다." 이진느는 나른하게 웃었다. "게다가 내겐 리온이 있지. 리온은 내게 빚이 있고." "빚이라 하시면?" "내게 치명적인 거짓말을 했어. 녀석에게 거짓말을 한 번 더 시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레오니아는 이진느를 가만히 보았다. 이진느 아일린은 레오니아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저기, 이진느님. 그리고……." "또 무엇이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시즈 아일린이 수배를 내렸던 그 시종도 함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전 령에 따르면, 사이좋게 돌아왔다고……." 이진느의 얼굴이 한 순간 창백해졌다. * * * 프란 프리텐의 복귀는 그녀를 알던 카르멘 가의 모든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요,요 꼬맹이 녀석!" "맛 좀 봐라!" "으악! 갑자기 무슨 짓이야!" 반의 방 앞을 지키고 섰던 두 명의 호위무사들은 프란이 '여!' 하고 반갑게 인사하기가 무섭게 다 가왔다. 그리고는 급습하듯 달려들어 프란의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 프란이 컥컥대며 발버둥 쳐봤 자, 두 명의 덩치가 잔뜩 힘을 주고 있어 빠져나오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두 호위무사가 한참 만에 헤드록을 풀어주었을 때, 프란의 얼굴은 뻘겋게 변해 있었다. "날 죽일 셈이야? 당신들이 여린 소녀도 아니고! 그 팔에 한 번 목감기면 부러질지도 모른다고! 좀 자각을 하란 말이다, 이 울퉁불퉁 근육덩어리 아저씨들아!" 프란이 목을 주무르며 소리치자 호위무사 한 명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아, 아직 모르고 있었나보군. 우린 사실 여린 소녀다." "웃기지 마!" 프란이 끌고 왔던 크레인을 쾅,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부엌에서도 온갖 사람들이 헤드록을 걸 어와서 정말로 기절할 뻔했던 프란이다. 그게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서른 명의 건장한 남자들에게 목을 졸리고, 서른 명의 여자들에게 육탄 공격에 가까운 포옹을 당하고 돌아왔 는데 또다시 당하자니 기쁠 리가 없었다. "난 부엌에서 주방장한테 프라이팬으로 두드려 맞기까지 했다고! 헤드록도 백 번은 당했겠다!" "시끄럽다, 꼬맹이! 우릴 속인 죗값은 치러야지!" "그래!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어. 걱정했어?" 순식간에 프란의 표정이 풀린다. 시뻘겋게 변해 있던 프란의 얼굴 전체에 능글능글한 웃음이 퍼졌 다. 호위무사 둘은 동시에 헉, 하는 얼굴을 했다. 프란은 어느새 약점 잡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 었다. 프란은 두 호위무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헤, 난 인기인이군." "요 놈의 꼬맹이가!" "왜 시온 도련님의 흉내를 내는 거냐!" 호위무사 둘은 다시금 프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프란은 웃으며 꿀밤을 맞았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집사,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어. 신기하지?' 프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턱이 없는 호위무사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말소리를 맞추어 속삭 였다. "네가 왜 남장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 너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거야. 이해한다." "뭐,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디냐. 잘 돌아왔다." "헤헤." 진심이 담긴 그 말들에, 프란은 쑥스러워서 그냥 웃고 말았다. 아, 결국 돌아왔구나. 어느 샌가 즐거운 나의 집이 돼버린 이곳, 카르멘 가에. * * * "뭐라고 하셨습니까?" 룬의 목소리는 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갈색 눈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이 우직한 사내의 팔이 떨리는 걸 보며, 반은 나직하게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죽었다고 했다." "케인 칼슈비도가, 주, 죽었다고…… 말씀, 하신 겁니까?" 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언제나 '겨루자, 케인!' 하며 검을 뽑아 든다 해서 룬이 그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만한 착각도 없다. 가장 강한 라이벌이지만 동시에 케인은 룬에게 있어 누 구와도 바꿀 수 없는 동지이기도 했다. 처음엔 그냥, 이겨보고 싶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았다. 언제나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저 차가 운 케인의 손에서 보란 듯이 검을 빼앗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룬은 케인이 있다는 사 실만으로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평생을 뒤따라가도 저 녀석의 손에서 검을 빼앗지 못 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그래도 경쟁자이자 동지가 있다는 사실만은 충분한 기쁨 이었다. 목표점이 거기에 있다는 건 언제나 강해져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으니까. 룬 자신이 아인켈의 대장이고 케인이 비켈린의 대장인 이상, 그들의 복잡 미묘한 관계는 계속 유 지될 터였다. 그러나 언젠가, 시간이 흘러 자신이 아인켈에서 은퇴하고, 케인 역시 자리에서 물러 나면 그 땐 둘이서 체스라도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잘난 케인 칼슈비도는 분명 무표정한 얼굴로 귀신 같이 체스를 둬 속을 북북 긁겠지만, 마누라 가 누구냐고 물으면 룬은 약간의 쑥스러움과 함께 '친구'라고 답해줄 생각이었다. 그래, 친구. 평생 다정한 말 한마디 주고받은 적 없지만 언제든 망설임 없이 등을 내줄 수 있는 믿음직한 친구였다고. 차라도 한 잔 마시고 마누라가 직접 구운 맛없는 쿠키라도 씹으면서 체스나 두고 싶었다. 나이 먹어도 여전히 말 없을 케인과 함께. "어떻게, 죽었습니까?" 한참만에야 룬이 물었다. "……나 대신 세라딘의 검에 맞았다." 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내가 잔인한 질문을 했구나.' 룬은 그 조용한 목소리에 곧장 그렇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 대답 덕분에 룬은 케인의 죽음을 납 득할 수 있었다. 가장 케인다운 최후가 아닌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텐 한 번 이길 기회조차 주지 않는구나. ……난 평생 네 그림자를 따라가 야 할 것 같다.' 히스를 잃은 생채기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가 룬의 가슴을 까맣게 태웠다. "분명히…… 분명히…… 후회 없이……." 룬은 그렇게 말했다. 반을 위해서였다. 반은 아까부터 시선을 내린 채 말하고 있었다. 주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시선을 피해 말한 적이 없었다. 분명,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가주야말로 누구 보다도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울컥, 참았던 눈물이 솟았다. 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어?" 룬은 자신의 눈물에 당황했다. 주인도 울지 않는데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룬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냉정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비켈린 대장 케인이 얼음이었다면 아인켈 대장 룬은 불꽃이다. 심장이 뜨거운 이 사내에게 케인이 가지고 있던 그 침착함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오후에 다시 와라."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반이 말했다. 룬은 지금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려 했 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룬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물러났다. 눈시울이 젖은 아인켈 대장은 가주의 방문을 닫자마자 오렌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프란은 손에 크레인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룬은 프란을 보자마자 곧장 히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금 울컥 눈물이 솟으려 했다. 하지만 그 는 참았다. 남 앞에서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된다. 룬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가주님도 좀 쉬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음식만 놓고 돌아가도 괜찮을 거다." 룬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십 분 후, 란돌은 가주와 앞날을 상의하고 오겠다고 말한 자신의 대장이 왜 방 안에 들어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체스 한 번 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가버린 거냐! 이 무정하기 짝이 없는 자식아……. 이, 이 못 된 자식…… 뭐가 그렇게 급해서……." 룬 로스는 방문을 잠그고 대성통곡했다. * * * 반은 창 쪽을 향해 서 있었다. 프란은 그 등을 보며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어젯밤 일 때문에 대체 어떤 낯으로 반을 봐야 하나 고민했던 프란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부끄 러움 따위는 이미 프란의 가슴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호위무사 둘과 낄낄거리며 말 을 주고받는 사이 안에 있는 룬의 목소리가 들려와,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다. 프란이 들어왔다는 걸 알면서도 반은 돌아보지 않았다. 프란은 일단 크레인을 탁자 앞에 끌고 왔 다. 오늘 아침에 그녀가 직접 깎은 감자로 만든 감자튀김은 이미 눅진해졌을 터였다. 그래도 프란 은 차례차례 음식을 내려놓앗다. 달콤한 냄새가 방안을 채웠지만, 프란도 반도 식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음식을 다 내려놓은 프란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처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 방을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반의 꼿꼿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 다. "……울어도, 되지 않습니까?" 프란을 등지고 선, 반으로부터는 대꾸가 없었다. 프란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참견인가 싶었던 것이다. 대마왕이야 울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 대마왕은 울지 않는 것으로 여태까지 견뎌 왔다. 케인이 죽어 도 그 모든 슬픔을 전부 갈무리한 채 계승식을 치러내고, 카르멘 가 앞에 몰려나온 기사들을 무시 무시한 카리스마로 정리한 게 저 대마왕이었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말해, 대마왕에게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말이 된다. 모든 감정을 안으로 눌러서 삭제해버려야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열네 살의 나약한 자신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을 잃을까봐 반이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또 눌러왔다는 것도 프란은 모른다. 그러나 한 가 지, 분명히 알고 있는 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도 울지 않는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대마왕이 대마 왕인 척 하면 할수록, 그의 안은 곪아 터져갈 거라는 사실. 무엇보다 반 역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프란은 그걸 알고 있었다. "슬퍼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시끄럽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반의 말에 프란은 어깨를 굳혔다. 반은 고개를 돌렸다. 슬픔의 흔적이 조금이 라도 묻어 있을 줄 알았건만, 반의 얼굴엔 눈물자국 따윈 없었다. "난 울지 않는다." "엘네 살의 자신한테 지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프란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반의 눈이 한 차례 떨렸다. "그따위 거 겁내다가 평생 케인을 위해 울어주지도 않을 겁니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프란은 주먹을 쥔 채 고래고래 소리 쳤다. "케인을 좋아했지 않습니까! 가장 믿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당신을 위해 죽었다고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대신 칼을 맞았단 말입니다, 오직 당신을 위해서! 그걸 알면서도, 어째서……!" "……조용히 해라." 반은 고요하게 말했다. 살기가 뻗어 나온 것도, 반 특유의 위압감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프란은 그 순간 움직 임을 멈췄다. 반은 그런 프란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프란은 그 얼굴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싶었 다. '차라리 울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 반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지 않았다. 똑같다. 꾹 다물고 있는 저 입도 그렇고, 저 단정한 표정도 그렇다. 하지만 언제나 차갑던 은보라색 눈동자는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그건 쉽게 눈치 챌 수 있 는 변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프란만은 그 변화를 눈치 챌 수 있다. 저것과 똑같은 눈을 불과 몇 달 전에 보았으니까. 아무런 말도,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지만 수십의 감정을, 수십의 단어를 감춘 저 눈.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는 울고 있었고, 소리치고 있었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눈은 담담했고, 조용했고, 가라앉아 있다. 마치 파도치는 바다에 뜬 배 같다. 파도가 한 번 닥칠 때마다 흔들리지만, 그 때마다 절묘하게 방향을 잡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파도 를 가로질러 가는 배. 보는 사람을 다 어지럽게 만드는, 걱정스럽게 만드는, 그런 눈이다. 반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게 울지 말라고 한 건 케인이었다." 프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눈을 하고서도 반은 울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프 란은 반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란은 반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그런 말은 이제 그만 잊어버려도 된다고, 케인이 진짜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 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바보야, 울어! 소리 내서 울라고!' 엉뚱하게도, 반의 눈을 보는 프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진짜 바보네요." 눈물 한 방울 제대로 흘리지 못하는 이 못난 대마왕이 가여워서였다. * * * "시즈가 살아 있다고요?" 모두의 눈을 의식해 독방에 몸을 숨기고 있던 리온은, 갑작스런 소식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눈을 부릅떴다. 모든 게 정리되면 그는 이 방에서 나가 가문 전체를 휘두를 권력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 날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던 리온이다. 그런데, 시즈가 살아 있다니. 다시 한 번, 마지막 순간 마주쳤던 시즈 아일린의 눈동자가 그를 포 박하려는 듯 다가왔다. 시가를 스무 대 이상 연달아 핀 직후처럼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시즈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나를 죽일 거야!' 엄청난 공포에 리온의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시즈가 복수할 것을 얌전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목을 매달아 주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잔뜩 움츠러드는 리온을 또렷이 바라보며, 이진느는 입을 열었다. "리온,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시즈가 죽는 걸 봤다고 했잖습니까?" 나직한 목소리였다. 리온의 입술이 시퍼래 졌다. "이, 이진느님, 미, 미안합니다. 나, 나는……." 나는 시즈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온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변하는 걸 보고 있던 이진느 가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몰라 리온의 얼굴이 멍해졌다. "시즈가 계승식을 치르고 돌아온 거라면 원로원은 나 따위 밀어내고 시즈를 다시 받아들일 겁니다 .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 날로 죽임을 당하겠지요. 나 역시 화를 면치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일린의 핏줄입니다." 리온의 입술이 떨리는 걸 보고 있던 이진느가 말을 잇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일린의 전통이 우습기 그지없다는 것!" "네?" "원로원장이 계승식의 성패를 알아본다지요? 그러나 스탕달은 죽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영감은 제게 계승식이 무엇인지 얘기해주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가 그걸 알아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던 리온의 얼굴이 갑자기 밝 아졌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한 줄기 동아줄을 바라보는 듯, 리온이 이진느를 올려다보았다. 이 진느는 그 얼굴을 보며 리온이 원하는 바로 그 말을 해주었다. "알려줬던 알려주지 않았든 그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남들이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을." 이진느가 웃었고, 리온 역시 따라 웃었다. 금세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던 것이다. "한바탕 연극이나 벌여보지요." 이진느의 말에, 리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나, 지랄들을 해." 자켄린은 창 바깥을 보며 혀를 찼다. 시온 역시 긴 의자에 드러누워 느긋하게 창밖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정원 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로 몇 분 전, 옷이 걸레가 된 데다 온 몸에 검상이 난 리온이 시체처럼 비틀거리며 정원으로 들 어왔다. 그 모습을 본 이진느가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뛰어왔고, 원로원부터 시작해 위저드 리그, 정초원 사람들, 세라딘 역시 달려왔다. 레오니아의 아버지이자 원로원 서열 3위인 유렌은 색색 숨소리를 내고 있는 리온을 바라보며 눈을 홉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차기 원로원장! 가주님과 원로원장, 비켈린 대장은 어디 가고 혼자 돌 아왔습니까!" 그 말에 리온은 곧장 눈물을 보였다. 헤냔이나 프란의 어설픈 연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뛰어 난 연기였다. "흑흑, 대 아일린 역사상 이런 치욕스러운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뒤로 이어진 리온의 말은 원로원이 이를 갈게 만들었고, 위저드 리그원들을 분노에 떨게 했으 며, 이진느와 정초원, 세라딘을 미소 짓게 했다. "시즈는 계승식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분명 자신이 없었던 게지요!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계승식 을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거짓 증언해 달라 했습니다." "그럴 수가!" 세라딘 하나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물론 스탕달 어르신은 그러지 못하겠다고 하셨지요! 허나 거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 시즈는 원로원장을 단숨에 죽이고, 이건 도리에 어긋난다며 저항하는 비켈린 대장조차 순식간에 죽여 버렸 습니다. 아아, 그토록 잔인하다니! ……스탕달 어르신과 비켈린 대장이 죽어가면서 시간을 벌어주 는 덕에, 저는 겨우 겨우 그 곳에서 도망 나왔지만…… 흑흑흑." 리온은 목 놓아 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약삭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과반수 이상이 이미 자신 과 한 배를 탄 탓에, 분위기는 모두 리온에게 동정적이었다. 리온은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 다시금 소리쳤다. "시즈는 계승식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치르지도 못할 거고요! 스탕달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서 제게 모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시즈는 결코 이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가문 이 너무나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시즈보다 제가 먼저 도착했군요. 이 사실을 미리 알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아, 세키에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팔을 하늘로 뻗으며 감격한 듯 소리치는 리온을 보며, 자켄린은 떨떠름하게 총평을 내렸다. "배우 같구먼." "왕년에 꿈이었을 지도. 얼굴 보니 왜 포기했는지 알겠소." 농담 삼아 맞장구치면서 시온이 말했다. 능청스레 말하고 있었지만, 시온은 몹시 기뻤다. 비록 어머니가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언정, 반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에게 위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형님, 나는 믿고 있었다고.' 시온이 진하게 미소 지었을 때, 이진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런! 오늘 낮에 소식통 하나가 날아들었는데, 아마도 이 일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진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짜놓은 각본대로, 이진느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낮, 시즈가 카르멘 가에 도착했다는 전령을 받았습니다. 계승식을 끝마치고 거길 먼저 갔다 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만 기분이 상하실까 해서 여러분께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차기 원로 원장의 말을 듣고 나니 명확해졌군요." 이진느는 자신을 향해 쏠려 있는 모든 눈동자들을 향해 또박또박 끊어가며 말했다. "시즈는 카르멘 가를 동원해 여기를 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를 치다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계승식도 성공하지 못한 주제에 아일린을 무력으로 범하려는 것입니다." 이진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켄린이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내 평생 여자가 무섭게 느껴진 건 처음이다." 그 말에 시온이 빙글, 돌아앉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리 어머니는 8써클 대마도사도 겁에 질리게 하는 거유?" "누가 겁에 질렸다고 그러냐!" 분노에 찬 자켄린의 방망이가 작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자켄린은 언제 그랬나 싶게 근엄 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제자의 진초록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냐?" 시온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 * * 시온이 짙은 미소를 지었던 그 날 오후, 카르멘 가에선 중차대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눈물을 닦고 억지로 표정을 굳힌 룬과 평소의 여우 집사장으로 돌아온 마린, 어떻게 하다 보니 자리에 끼 게 된 하질리언, 비켈린 대표로서 그림자처럼 존재감 없이 앉은 켈리, 카르멘 가의 다수 검사들이 참여한 회의였다. 대 아일린 작전을 짜야 하는 자리인 만큼, 분위기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 큼 진지했다. '아니, 그러니까…… 난 안 들어가도 되지 않느냐고.' 그 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프란은 죽어라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눈 물 한 방울을 보였던 터라, 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민망한 프란이었다. 반을 향해 무려 '바보'라 는 소리까지 했지 않은가. 하지만 반이 누군가. 프란이 앓는 소리를 내건 말건 그는 프란을 회의실 로 질질 끌고 온 차다. 반과 프란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이미 회의실에 모여 앉아 격론을 펼치고 있었다. 카르멘이 이 일에 개입해야 한다는 파와 도대체 그게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파가 나뉘어져서 설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과 프란이 들어선 순간 말소리는 뚝 그쳤다. 프란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 분위기?' 그건 정말 묘한 분위기였다. 회의실에 몇 번 출입해봐서 안다. 반이 이 회의실에 들어설 때면, 언 제나 두 가지 기운이 느껴지곤 했었다. 그 하나는 어찌됐든 반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반에게 보내는 긍정의 기운. 다른 하나는 반을 못미더워 하는 다른 쪽 사람들의 냉랭하고 부정적인 반응.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차가운 시선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아니, 차가운 시선이 다 뭔가. 반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하질리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섰다. 어딜 가나 마이페이스인 하질리언이 '왜 이 난리야?'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사람들은 동시에 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던 탓이다. '이 인간들이 뭘 잘못 먹었나?' 프란이 놀라든 말든 그들은 반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앉아라." 반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조용히 착석했다. '나도 좀 자리에 앉자, 이 못된 대마왕아!' 프란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데, 반이 힐끗 프란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그 시선에 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프란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봐야 했다. 반이 손짓 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 저도요?" '너도 뭐 잘못 먹었냐?' 하마터면 말로 튀어나올 뻔했다.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말을 간신히 잡아 누르며, 프란이 놀 란 얼굴을 한다. "그래." 설마 했던 프란이 엑, 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 역시 이해 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반을 보았다. 시종 따위가 어떻게 감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하 질리언은 중요한 용병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프란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반의 시종이다. 시종장쯤 되는 것도 아니고 일개 시종 주제에, 가주와 자리를 함께 하는 회의실 의 자에 앉다니 말도 안 된다. '이 인간이 진짜 왜 이래?' 프란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늘 똑바로 서! 공격을 당했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사 람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반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들의 생각을 읽었는지 반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날 구했다." "예?" 그 뜬금없는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쳤다. 반은 부연했다.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앉을 자격이 있다." "엉?"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프란에게 쏟아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네 이놈!' 모두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프란은 그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느니 그냥 서 있는 게 낫겠 다고 생각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특히 룬의 시선은 아주 위험했다. 이 남자의 시선은 지금 당장이 라도 프란의 얼굴을 뚫고 지나갈 것 같이 강렬했던 것이다. 프란은 그 눈을 억지로 피하며 허허, 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게다가 하나 남은 의자는 하필이면 반의 옆자리에 있었다. '아악, 남아도 이런 것만 남아!' 프란이 몸부림치든 말든, 반은 계속해서 눈으로 앉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란은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몸에 구멍 날 것 같잖아, 이 자식들아! 그만 좀 봐!' 프란은 의자를 빼내는 그 순간부터 훨씬 더 날카로워진 시선들을 느끼며 속으로 소리쳤다. 그야말 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이 놈의 대마왕, 대체 이건 무슨 심술이냐! 프란은 반을 곁눈질 했 다. '이 유치한 자식! 내가 바보라고 말했다고 이렇게 심통 부리는 거지!' 그 사이, 반은 담담하게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일순간,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고 있던 반은 갑작스런 두통을 느꼈다. 카르멘 가 사람들의 눈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반 자신이 느꼈기 때문이다. 짐작되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웃기는 일이군. 고작 황금문 사건 때문에 이러는 건가.' 반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을 때, 카르멘 가 검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카르멘 가가 아일린의 일에 개입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들려올 것인지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반의 표정은 그야 말로 얼음장이었다. 심지어 그 순간, 모두는 반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은 망설임도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헛소리 마라." 순간적으로 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카르멘 가 검사들도 말 만 안 했을 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인켈이 이 가문에 피신했을 때부터 상황은 모두에게 알 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반이 아일린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했다. 저쪽 아일린 사람 들이 네, 네, 하며 자리를 내줄 리가 없었다. 그쪽과 상대하려면 당연히 일전을 치러야 한다. 반이 무사히 돌아왔다지만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라서, 지금 반의 수중에 있는 것은 아인켈과 비켈 린뿐이었다. 황금문 사건을 빌미로 카세타 왕국에서 기사들을 빌릴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게 가능 하다 해도 저 아일린을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룬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가주님! 카르멘 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두 가문은 아무 관계도 없다." "예?" 격렬하게 반대를 주장하고 있던 검사들마저도 일순 입을 크게 벌렸다. 당연히 반이 부탁할 줄 알 았던 그들이다. 모두가 놀라서 이 어린 가주를 올려다본다. 마린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내 일이다." '또 저런다, 또!' 프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건 뭐, 헤냔이 '도와달라고 말하면 안 됩니까?'라고 소리쳤을 때의 반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카르멘 가 검사들은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반은 그런 그 들을 바라보며 못을 박듯 말했다. "주제 넘는 개입 마라." 도움을 애걸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도대체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사람들은 눈을 부릅뜬 채 반을 보고 있었다. 이진느가 호언장담했던 반의 프라이드란 게, 바로 이 런 것이었다. 한 가문의 일을 다른 가문과 결부시키는 것은 반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카르멘 가 검사들은 일제히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누구도 한마디를 꺼내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카르멘에는 어떤 피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반의 말을 따른다 면, 백이면 백, 반은 저쪽에 패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또다시 수장을 잃는 끔찍한 상황 에 처하는 것이다. 엄청난 딜레마였다. 헤이튼마저 먼 곳으로 떠난 지금, 반이 사라지고 나면 얼마나 큰 재앙을 감당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황금문 사건으로 왕가가 자신들을 얼마나 견제하고 있는지 깨달은 검사들이 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가주님.' 언제나 무표정한 켈리마저 속으로 애를 타우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반의 말엔 틀린 것이 없었다. 카르멘이 아일린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나서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카르멘 가의 사람들이어야 하지, 반이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전혀 상황에 맞지 않았다. "하, 하지만 가주! 당신은 아일린을 되찾지 않을 겁니까?" 한 검사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반은 즉답했다. "되찾는다." "어떻게 말입니까?" "너희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반을 보았다. 프란 역시 반의 생각을 짐작 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 때였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질리언이 슬그머니 손을 든 것은. '하진!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그러냐!' 하질리언이 가까이 있었다면, 프란은 하질리언의 배를 차서라도 손을 매리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질리언의 검은 눈동자를 본 프란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질리언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공식적 내 숭 모드'로 돌아가 있었다. 평소의 하질리언이 절대적인 마이페이스로 헤냔이나 괴롭히면서 시간을 죽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의 '공식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데이메르 저택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중하고 다감한 이미지로 돌아온 하질리언은 진지한 얼굴 로 반을 보고 있었다. "말해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반은 하질리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하질리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간단한 일 아닙니까?" 뭐가 간단한 일이라는 거지? 룬이 당혹감이 어린 눈으로 하질리언을 올려다보았다. "고용하십시오, 저스티스 경." 그 순간,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하질리언은 '미남, 화내지 마'라는 뜻으로 씩 웃어보였다. 프란은 반의 반응을 보고서야 하질리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 이 모두 올려다보는 가운데, 하질리언은 차분하게 부연했다. "아일린 가주로서 카르멘 사람들을 고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일이 끝났을 땐 충분한 보수를 지급 하면 되는 일이고. 카르멘 가 입장에서도 부끄러운 일은 아닐 텐데요." 반은 무서운 눈으로 하질리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질리언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든 혼자 하려고 하면 결국에 큰 낭패를 당한다고, 미남. 넌 그걸 좀 알아야 돼.' 사람들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갑게 식어 있는 가운데, 마린이 그 침묵을 깨뜨리며 손바닥 을 짝, 쳤다. "나쁘지 않군요." "마린!" 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마린을 불렀다. 하지만 마린은 즐거운 얼굴로 벌써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 프란이 저 주판은 도대체 어디서 난 거야, 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감싸 쥐는 가운데, 마린이 왼 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좀 비싸요. 알고 계시죠, 아일린 가주님?" 반은 정말이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아일린의 일에 카르멘을 개입시키지 않고 카르멘의 일에 아일린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려 했던 원칙이었고 반 역시 그 원칙에 충실하려 고 애써왔다. 그래서 비켈린도 아인켈도, 웬만해선 카르멘 가에서 보지 않으려 했던 반이었다. 켈 리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다가온다 해도 그 원칙만은 깨지 않으려 했 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있다 해도 부하들이 협조할리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예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반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카르멘 가 검사 중 하나였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 13대 가주 때, 카르멘 전체 검사들이 레키슈안을 도와 로이네트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보수 를 받는 조건이었지만, 사실 보수란 건 그저 명목이었죠. ……한 번쯤 더 한다 해서 딱히 책잡힐 일은 없을 겁니다." "전혀 다른 문제다. 대륙이 들썩일 거다." 반이 낮게 답했다. 그 말에 프란이 저도 모르게 툭 하고 뱉어냈다.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런담. 안 어울리게." 순식간에 시선이 모조리 프란 쪽으로 쏠렸다. '닥치고 있어, 요놈의 입!' 프란이 자기 입을 마구 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반은 대답을 못한 채 미간을 좁혔다. 화가 난 것 같지만, 프란은 반의 바로 옆자리에 있었기에 그 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프란은 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잠깐만, 대마왕…… 너 설마, 걱정하고 있는 거냐?' 프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농담이 아니다. 반은 정말로 걱정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그리고 저 뒤의 훈련장에서 땀 흘리며 검을 닦고 있을 카르멘 가 의 사병들을.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카르멘 가의 사람들이 죽기라도 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프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카세타 반란진압 때 이미 눈치 챘었는데, 이렇 게 요령 없는 놈이라는 건. "표면상으론 아일린의 알력 싸움이고 카르멘이 거기에 힘을 빌려준 형태로 진행될 겁니다. 저스티 스 경이 양대 가문의 가주로 알려질 일도 없을 거고." 하질리언이 덤덤하게 말했다. 반은 곤혹스러웠다. 언제나 검사들 전체와 싸우고 그들을 무시하고, 견제하며 살아왔다. 갑작스레 카르멘 가 검사들이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겠다고 말하는 이 상황이, 반으로서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반을 향해,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조금쯤 떨리는 목소리였다. "우리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가주." 반은 움찔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족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반은 익숙한 얼굴 하나를 마주했다. 카세타 왕국에 원조를 해야 한다고 언제나 바락바락 대들던 바로 그 검사다. 뒤이어, 다른 목소리 하나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없기 때문에 당하는 치욕은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모두는 반이 돌아온 순간 느꼈던 그 감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낯간지러 운 것은 반뿐만이 아니었다. 이 어린 가주를 믿지 못해 몇 번이나 그를 골탕먹여왔던 검사들이기에 , 쑥스러운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반이 입술을 씹고 있는 가운데, 마린이 나직하게 물었다. "아일린 가주님. 대답해 주십시오. 카르멘 가의 검사들을 고용할 겁니까?" 반은 마침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분히 그다운, 퉁명스러운 긍정이었다. "……보수는 충분히 지급하겠다." 룬은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 * * 늦은 저녁, 시온은 부지런히 마법서를 넘기고 있었다. 자켄린이 만든 그 유치찬란한 제목의 마법 서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시온은 자신의 몸 안의 마나가 희미하게나마, 여태까지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온은 씩 웃었다. '있잖소, 스승님. 난 어쩌면 스승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천재일지도 몰라요.' 시온의 그 흐뭇한 감상을 깬 것은 이진느 아일린의 방문이었다. "웬일이우?" 시온은 마법서를 덮으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그 금발 시종이 시즈와 함께 돌아왔다더구나." "거짓말 하지 마슈." 시온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하고는 귀를 휘적거렸다. 어머니의 말엔 하도 속아서 이젠 놀랄 기력도 안 남은 시온이다. 이진느는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야." 시온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데리러 간다고 말했었다. 프란을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었고. 그런데, 그 프란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반과 함께 있다고? 시온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비켈린이 그새 프란을 잡아온 건가? 아니면 둘이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 건가? 시온은 두 번째 가정을 곧바로 폐기했다. 그런 거짓말 같은 우연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시온의 얼굴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이진느가 재차 입을 열었다. "곧 죽일 거라는 얘기가 파다했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말투가 달라졌다. 그러나 이진느는 여전히 눈썹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럼 그 시즈가, 그 사이 달라져서 그 아이를 용서라도 했을 것 같으냐?" 시온이 진정으로 가주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란 건 이진느도 안다. 반이 돌아오면 그 즉시 '형 님, 난 좀 가보겠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좀 쉬다 올게요'라고 말하며 자리 툴툴 털고 일어날 아들놈이다. 하지만 시온을 쥐고 흔들 만한 열쇠를, 이진느는 아직 수중에 쥐고 있었다. 프 란 프리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아들놈이 유일하게 마음에 두고 있는 그 녀석. "사람들 앞에서 같지도 않은 연극을 하는 어머니를 내가 믿을 것 같습니까?" 이진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소중한 것이 걸려 있을 때 약해진다. 만약 선택을 잘못해 그 소중한 것에 위 해가 가해진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 시즈와 싸워. 우리가 이긴다면 그 아이는 아무 탈 없이 네 옆에 서게 될 게다." "어머니." 시온은 한숨과 함께 이진느를 불렀다. 그는 눈을 내리갈고 있었다. 이진느는 조용히 시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참의 틈 후에야 시온은 고개를 들었다.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에는 분노와 슬픔이 함께 서려 있었다. "난, 어머니가 처음부터 날 이용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세라딘이 따르는 것은 저고, 위저드 리그가 어머니에게 협력하는 것도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 초원이야 어머니 수중에 있겠지만, 저 원로원조차 어머니 손을 들어주는 것도 반쯤은 저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어머니는 당장 발 아래가 흔들립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시온은 이진느를 보았다. 몇 번이고 속으로 억눌렀던 말이 드디어 튀어나온 건 그 순간이었다. "나를 낳은 것조차 당신의 계획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난 슬프고 치욕스러워 참을 수가 없습 니다!" 억눌러왔던 아들의 애증이 한 순간, 명확한 형태로 어머니의 심장에 가 꽂혔다. 이진느의 눈가가 가만히 좁혀졌다. 시온의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네 개의 진초록 눈동자가 날카롭게 공중에 서 부딪쳤다. 이진느의 옆얼굴에 가느다란 균열이 갔다. 그런 얼굴을 한 채, 이진느는 나직한 목소 리로 자신의 아들을 불렀다. "시온 아일린." "난 형님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형님도, 어머니 못지않게 가여운 사람입니다. …… 그깟 약속, 이젠 잊어버릴 때도 됐잖습니까?" 잦아든 목소리로 내뱉은 마지막 말에, 이진느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시온 을 노려보았다. 이진느의 목울대가 울컥거린다. 시온은 다음 순간 이진느가 무슨 말을 할지를 눈치 챘다. 지긋지긋하게 되풀이하며 들어온 말, 또다시 그 말을 하겠지. 시온이 반쯤 체념하며 올려다 본 가운데, 이진느는 시온이 짐작했던 그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몇 번이나 말했지 않느냐! 그 자리는 처음부터 너와 내 것이었다고!" 이진느는 숨을 골랐다. 시온이 아무 말 않고 바라보는 가운데, 이진느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좋아. 그렇다면 싸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시온 아일린." 이진느는 다정하기까지 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럼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하마." "나는……!" 시온이 소리를 친 그 순간, 이진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르진 않겠지, 시온?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아이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이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지금은." 반에게 '시온 아일린'의 이름으로 선전포고가 날아든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 * * 반은 시온의 이름으로 도착한 두루마리를 풀었다. 찬찬히 읽어 내리고 있던 반의 미간이 무섭도록 좁혀졌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일린의 가주 승계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네가 무력으로 아일린을 범하려 한다면, 아일린은 있 는 힘을 다해 그것을 막겠다는 내용이다. 반은 천천히 그 두루마리를 접었다. 스탕달이 죽은 지금, 계승식의 성공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다 는 것은 반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승식의 내용을 아일린 전체에 알릴 수도 없다. 그가 계승식의 내용을 알리는 순간, 아일린의 의식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편지를 보낸 것은 시온 아일린이었다. 그것이 진짜 시온이든 이진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저쪽이 내세운 게 시온이라는 사실, 그 자체니까.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마린이 창백한 얼굴로 가져다준 그 두루마리의 내용이 궁금했던 프란이 깐죽거리며 물었다. 반은 흘낏 그런 프란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밝게 웃고 있는 이 녀석은, 오늘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 실조차 이미 까먹은 것 같았다. 회의 내용이 잘 풀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읽어보면 안 됩니까?" 프란이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반은 한숨과 함께 두루마리를 건넸다. 이걸 내가 읽어도 되나, 라는 의심조차 없이 프란은 두루마리를 좍 펼쳤다. 그러나 첫 줄을 읽는 그 순간부터, 프란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악이 스치고 있었다. 채 다 읽지도 않은 프란이 두루마리를 팽개쳤다. "이럴 리 없습니다!" 프란은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느끼 버터가 이런 글을 썼을 리 없다!' 프란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반을 보았다. "아, 알고 있잖습니까. 이럴 놈 아닌 거." 반은 말없이 프란을 볼 뿐이었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분명히 또 이진느가 꾸민 일일 겁니다!" "그래서?" 반의 나직한 대꾸에, 길길이 날뛰고 있던 프란의 얼굴이 굳었다. 이 글을 쓴게 시온이 아니라는 것은 이 대마왕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거다. '그래서?'라고. 한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프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거, 아직 아무도 못 봤죠?" "싫다." 프란은 웃을 뻔했다.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무슨 말 할지 알고 있다." 프란은 그러나 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문제다. 프란은 곧은 눈으로 반을 바 라보았다. 한 치의 떨림도 없는 강인한 눈동자였다. 저런 눈으로 말할 때면 억눌러도 튀어나가 버 린다는 것을 반도 알고 있었다. 반은 속으로 신음했다. 그런 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단숨에 말했다. "시온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프란은 반의 위압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나러 가겠습니다. 혼자서." 반의 날카로운 시선을, 프란은 망설임 없이 받아냈다. '그 자식이 선전 포고를 하다니, 말도 안 되잖아.' 프란은 굳게 믿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난 아일린이 싫어'라고 씹어뱉듯 말했던 녀석이다. 그랬 던 시온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반을 배반한다니, 그럴 리 없잖은가. 이것이 시온의 의지가 아 니라면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괴로워하고 있을 터였다. "난 싫다고 말했다." 반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프란의 눈썹이 아래위로 꿈틀한다. "왜요! 난 시온을 데려올 겁니다!" "싫다고 했잖은가!" 반이 목소리를 높였다. 프란은 움찔했다. 이것이 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격한 반응이라는 것 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프란은 물러서지 않았다. 배에 단단히 힘을 준 프란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시온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가주님에게도 이득이잖습니까!" 반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싫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할 뿐이었다. "넌 아직 내 시종이다. 허락하지 않겠다." 그 순간 프란은 씩 웃었다. 반의 미간이 좁혀지는 가운데, 프란이 차분하게 말했다. "뭐, 난 아직 시종이고, 내겐 자유의지가 없는 게 사실이죠." 프란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프란은 절대로 말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두 눈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꼭 가야겠습니다." 시온 녀석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걱정되어서 못견디겠습니다, 프란은 이어지는 말을 삼켰다. 반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삼갔다. 얼마나 그렇게 침묵이 흘렀을까. 반은 아까보다 한참 낮아진 목소리 로 나직하게 대꾸했다. "아일린은 위험하다." 프란으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야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전부 가주님이 시키 셨잖아요." "그것과는 다르다." '다르긴 뭐가 달라, 이놈의 대마왕.' 프란은 자꾸만 억지를 쓰는 반을 바라보았다. "위험해도 상관없습니다. 시온 녀석에겐 빚이 많아요." "빚이라고 했나?" 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프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녀석은 나를 위해 몇 번이나 희생했습니다. 그러니 나도 이번 한 번쯤, 녀석을 위해 목숨을 걸겠 습니다. 가주님이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몰래라도 갈 겁니다." "다시 한 번 내게서 도망치겠다는 말인가!" 반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서렸다. '제기랄, 숨쉬기가 힘들군.' 프란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프란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반의 위압감에 지지 않기 위해, 프란은 주먹을 꾹 쥐었다. "무슨 벌을 받든 좋습니다. 그래도 갈 거니까. 난, 절대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 프 리나 프리텐의 긍지입니다." 오늘의 비나룬은 배가 잔뜩 부른 보름이다. 벽 전체를 창문으로 낸 탓에, 비나룬의 화려한 빛이 반의 상체를 뚜렷하게 물들인다. 특히나 반의 머리칼은, 저 녹색에 반쯤 잡아먹혀 있었다. 예쁘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잊고 그렇게 생각했다. 한눈을 팔았던 탓일까. 반이 갑자기 입 을 열었을 때, 프란은 한 순간 비틀거려야만 했다. "너석을 좋아하나?" 프란은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른 대답하질 못했다. 시온을 좋아하냐고? 당황한 프란을 향해 반이 재차 말했다. "녀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시온은 네가 여자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더군. 내게 찾 아와 널 놓아달라고 부탁도 했었다. ……너도, 그 녀석이, 시온이 좋은가?" 프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도대체가, 지금 상황과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프란은 한참만에야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당연하지, 넌 내 시종이니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평소의 반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반의 대답은 프란에게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없다. 네 감정이니까." 웬일이야, 대마왕. 억지도 안 쓰고. 프란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둘 사이로 다시금 침묵의 옷 자락이 흘러내렸다. 주고받을 말이 모두 끝난 것 같은데도 반이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하지 않 은 채 침묵하자, 프란은 이 침묵이 허락인 건가, 생각했다. 그런 프란을 향해 반이 다시 입을 열었 다. 억지로 짜낸 듯, 다소 쉰 목소리였다. "네가 녀석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면, 남은 빚을 모두 제해주겠다." 남은 빚을 모두 제해주겠다니? 이 갑작스런 제안에 프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전엔 보내 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종잡을 수 없는 대마왕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 말은 프 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7천만 케트나 되는 엄청난 빚 을, 시온과 함께 돌아오기만 하면 면제받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 때야말로 자유가 된다는 이야 기니까. 그러나 프란은 한참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반의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 "이번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대가를 받지 않겠습니다." '시온을 설득하러 가는 건 오로지 내 의지입니다.' 프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지금 가주님의 양해를 얻는 것뿐입니다." "아니, 네 빚을 제해주겠다. 너는 내가 명령해서 시온에게 가는거다." 프란의 말을 자르며 반이 말했다. 명백한 억지였다. 프란은 말을 섞을수록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빚을 제해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다니, 이런 채권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채무자 주제에 채 권자가 빚을 덜어주겠다고 말해도 싫다고 답하는 자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면서, 프란은 반의 태도를 납득할 수가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프란은 반의 눈을 보았다. 그 눈에 감정이라도 들어 있다면 이해 하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그러 나 반의 눈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갑게 굳어 있고, 얼굴은 무뚝뚝하기가 그지없다. 프란은 평상시 와 다를 바 없는 그 얼굴이 묘하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묘하게, 한지점이 비틀어져 있다고 생 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도 그 표정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는 없었다. 프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있는 그대로, 느낀 대로 솔직히 물었다. "제 의지로 시온을 만난다고 생각하는 게 싫은신 겁니까?" 반은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만에 반은 얼굴이 통통하게 부어오른 비나룬 아래에 서, 여태까지 들어본 적조차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몹시 감정적인 목소리였다. "……그래." "어째서?" 프란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프란이 멍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반이 말했다. "2주일만 말미를 주겠다. 그 안으로 돌아와라. ……이건 너와 나의 거래다." 거래. 시온을 설득하러 가는 일을 왜 여태까지의 거래와 똑같이 취급하려 하는 것인지, 프란은 역시 납 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대마왕이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그렇게 해야만 시온에게 갈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게, '마지막 거래'인 겁니까?" 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일만 끝나면 넌 자유다." 자유.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어찌됐든 시온을 설득할 것이다. 시온을 만나서, 굴러가고 있는 이 빌어먹도록 무거운 불행의 수 레바퀴를 멈추고야 말 것이다. 프란이 막 돌아서려는데, 반이 프란을 불러 세웠다. "왜요?" 반은 천천히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검집을 풀었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좋은데 갈 테면 날 이기고 가라! 이따위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반은 검을 뽑았다. 루니아 블레이드의 시리도록 푸른빛이 찬란하게 빛을 냈다. 언제나 그랬듯 보 는 것만으로도 황홍해지는 화려한 검신. 프란이 상황도 잊고 아름다운 레이디를 보는 동네 총각의 눈으로 그 검을 바라보는데, 반이 불쑥 프란 쪽으로 그 검을 내밀었다. "예?" 도대체가 의미를 몰라 프란은 멀뚱하게 서 있는 수박에 없었다. 어쩌라는 건지. 프란의 당혹을 두 눈으로 담으며, 반은 나직하게 말했다. "……가져가라." "엑?" 루니아 블레이드는 카르멘 가주의 상징이라고 했다. 혹시나 프란이 붙잡힌다면, 반은 이 검을 영 원히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검을 내밀다니, 한낱 시종에 불과한 자신에게. 프란의 오 렌지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반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조잡한 검 따위론 아일린에 들어가지도 못할 거다." 프란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오싹, 순간적으로 온 몸에 전기가 인다. 이 검은, 정말이 지, 예사로운 검이 아니었다. 원래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받아드는 순간 온 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 같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주님은?" "어떤 검을 쓰든 나는 이긴다. 네 말대로, 나는 사기같이 강하니까." 프란은 씩 웃었다. '잘난 척하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프란은 사양 않고 검을 받아들었다. 검을 허리춤에 매달면서, 프란은 아, 하 는 소리를 낸다. 이 검을 건넨 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언제였던가. 아마도 반란군 책사를 처치하기 위해 떠날 때였을 것이다. 그 때 반이 그랬었다. '살 아서 돌아와라'라고.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었지만, 프란은 그 순간 눈물이 날만큼 당혹했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반은 말했다. '살아서 돌아왔군' 이라고. 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살아서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그 때 알았다. 매일 '죽어라!'와 다름없는 주문을 툭툭 내던지면서도, 그러나 반은 그녀가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아 돌아와서, 내게 그 검을 다시 돌려다오.' 프란은 고요한 시선으로 반을 보았다. 반 역시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들키기 싫었기에 프란은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다녀와라." 반은 인사를 했다. '철들었네, 대마왕.' 프란은 미소 지었다. 반의 옆모습을, 프란은 한참이나 두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프란은 천천히 돌아섰다. 쾅! 이윽고,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반은 한참이나 그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제 7장 프란, 동방 여왕 되다! 아일린은 엄청난 규모의 병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아일린은 어디까지나 상업가다. 병력은 비켈린, 세라딘, 아인켈이라는 세 집단으로 사실상 충분했 다. 각 집단이 웬만한 국가의 기사단장 급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병사들이 더 필요할 까닭도 없 었다. 위험한 경우를 대비해 최고의 마법사들로 구성된 위저드 리그까지 만든 아일린이 아닌가. 허나 일단 마음만 먹으면 아일린의 어느 가문보다도, 어느 국가보다 많은 병사들을 모집할 수 있 었다. 그 엄청난 부(富)로 병사를 사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느는 일전을 대비해 아일 린의 금고를 열었다. 급료가 어마어마했기에, 청운의 꿈을 안은 수많은 검사들이 아일린으로 모여 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흠." 런스 카르멘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창 하나 없는 방이어서, 바깥사정을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는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일이백 명 모여 가지고는 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런스는 불길한 예감에 주먹을 쥐었다. * * * 소문이 새어나간 건 언제부터였을까? 반의 경고대로, 대륙은 벌써 들끓고 있었다. "아일린과 카르멘이 한바탕 싸움을 벌일 것이다!" 라니아 양대 가문의 전쟁은 대륙의 새 판도를 가름할 터였다. 음유시인들은 아일린 주변으로 속속 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각국의 왕가는 긴장한 채 두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가 이길 것인가? 승산이 큰 쪽에 재빨리 붙어야 했다. 계산이 잘못된다면 후에 닥쳐올 앙갚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진느는 아일린 안뜰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눈으로 한 번 훑었다. 검사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 가문의 위용에 주눅이 든 탓이다. 세라딘이 저 중 쓸 만한 녀석들을 알아서 추려내겠지. 어차피 이 한바탕만 끝나면, 돈을 주고 내쫓으면 그만이다. 이진느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온에게로 가는 것이다. 시온 아일린은 유폐되어 있었다. 반이 가두었던 때보다 더 깊은 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진느 자신이 가두었다. 위저드 리그 소속 6써클 마법사 두 명이 결계를 친 것도 모자라 세라딘 세 명이 시온의 방 앞을 감시하고 있었다. 자켄린은 시온이 보이지 않는만치 움직임이 잠잠했다. "난 형님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시온은 수차례 거부했지만 이진느에겐 시온이 필요했다. 시온의 말 그대로, 지금 이진느를 지지하 는 사람들은 이진느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뒤에 있는 시온을 보고 있었다. 시온이 증발하기라도 한 다면 지지자의 절반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지금쯤 아들놈은 이를 갈고 있겠지. 허나 어쩔 수 없다. 시온이 있어야 한다. 그녀가 왜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벌여 왔겠는가. 모두 시온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였다. 시온은 반드시 이 자리를 가져야 했다. '시온,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일린의 정통 승계자다.' 이진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즈가 정말로 아일린 정통 가주의 계승식을 통과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시즈가 해낸 것을 시온이 못해낼 리 만무하다고.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태어 나는 그 순간부터 그 자리를 약속받은 것은 시즈가 아니라 시온이었다. 이진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십 년도 더 된 기억이 이진느의 머릿속에서 일제히 살아나고 있었다. * * * 모든 것은 그 여자, 루이사 카르멘 때문에 시작되었다. "반가워요, 이진느. 루이사예요." 처음 만나던 날, 그 여자는 꼭 태양 같이 웃고 있었다. "카르멘의 다음 대 가주는 여자가 될 지도 모른다던데. 후보는 남매로 둘인데, 누나 쪽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라는 거야. 검만 들면 무적이래." "흥. 그 무식한 검가에서 어릴 때부터 검만 다뤘으니, 아주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거 같군. 교양도 없을 게 뻔해." "모르는 소리! 카세타에선 그 미모로 온갖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던데! 그녀를 연모하는 남 자들은 화검(花劍)이라고 부른다더군." "카르멘에서 낸 헛소문이겠지! 그게 말이나 되냐!" "하긴, 말이 안 되긴 하지." "어찌됐든 한 번 봤으면 좋겠구먼." 루이사의 명성은 카세타를 넘어 세이피안에까지 자자했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들은 건 이진느가 여섯 살, 루이사가 일곱 살인 때였다. 카르멘의 전대 가주가 루이사를 껴안고 다시없을 천재라고 경탄했다는 얘기가 바람을 타고 아일린 가까지 전해졌다. 아일린 사람들은 견제하던 카르멘의 여식을 가끔 화제에 올렸다. 루이사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 이 모두 그렇듯, 아일린 사람들도 소문을 반신반의했다.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거짓 같았다. 보라색 눈동자에 보라색 머리칼을 가졌는데 그 빛이 신비롭기가 그지없다느니, 한 번 바라 보면 온 몸이 굳어버릴 만큼 아릅답다느니, 미소를 지을 때마다 카세타 전체가 들썩인다느니. 그러면서도 카르멘 가의 가주가 한 수를 가르칠 때마다 경탄할 만큼 뛰어난 검사라느니, 열여덟 나이에도 이미 절정의 고수라느니, 검의 천재라느니.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문이 허풍이 많이 들어 간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고, 카르멘이 소문 조작을 한다고 믿었으며, 이야기가 끝날 때쯤은 으레 카르멘의 허풍을 비웃었다. 허나 루이사 카르멘이 처음 이진느 아일린의 앞에 서던 순간, 이진느는 그녀의 미모 하나만큼은 소문과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루이사는 아름다웠다. 같은 여성인 이진느가 보기에도 감탄할 정도로. 그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거칠기 짝이 없는 손만이 그녀가 검가의 여식이라는 것 을 증명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루이사. 난 아일린의 딸 이진느입니다." 아일린의 검사 충원 문제 때문에 루이사가 찾아왔던 차였다. 세개의 검사 집단을 위해 아일린은 모든 검가와 연락을 취했다. 비켈린도 세라딘도 아인켈도 모두 뛰어난 검사로 채워져야 하는 만치, 아일린은 검가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몇 년 전 카르멘 가에서 추 천한 케인 칼슈비도의 성장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일린은 카르멘 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람을 뽑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카르멘 가와 연 락을 취했다. "이진느. 당신, 참 예쁘네요." 루이사를 날카롭게 살펴보고 있던 이진느는 두서없이 툭 튀어나온 그 말에 움찔했다. 이 무슨 엉 뚱한 소리인가? 이진느를 보는 루이사는 천진한 얼굴이었다. 어떤 계산도 사심도 없어 보이는 천사 같은 얼굴. 언제나 계산부터 해야 하는 상업가에서 살아온 이진느에게, 검을 업으로 삼은 가문에서 찾아온 루이사는 낯선 존재였다. 루이사는 이진느의 은색 머리카락과 진초록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당신이 가장 예뻐요. 특히 그 진초록 눈동자, 진짜 예쁘네요." 당신 같은 미인이 할 소리가 아닌걸. 이진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미모 를 칭찬받을 때 기쁘지 않은 여자는 없는 법이다. 특히나 루이사 같은 절세미녀의 칭찬임에야. 루 이사는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진느, 나는 열여덟이에요. 당신은 열일곱이라고 들었어요. 난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 친 구하지 않을래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끝없이 견제해야 할 가문이라고는 해도 카르멘과 잘 지내 나쁠 것은 없으 니까. 이진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럼 우리 이제부터 친구?" 루이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웃는 모습이 밝았다. 이진느도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 다. 도도한 성격과 높은 신분 탓에 친구 하나 없던 이진느에게 루이사는 시원한 물, 거침없는 불 같았 다. 모든 장벽을 순식간에 적시고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루이사 카르멘은 치명적일 만큼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때는 이 여자를 뼛속 깊이 미워하고 죽을 때까지 증오하게 되리란 사실을 몰랐다. 루이사를 생 각할 때마다 치를 떨며 저주의 말을 퍼붓게 되리란 사실 역시 몰랐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이진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 * * 프란은 홀로 떠났다. 하질리언과 뮤에게만 각각 한 장씩 곧 돌아오겠다는 메모만 남겼을 뿐, 그 외의 누구에게도 이번 일을 알리지 않았다. 아일린 가까지 가는 데는 늘 그랬듯 6일이 걸렸다. 도망자와 채무자 담당인 비켈린들이 수배용지 를 깨끗이 수거한 탓에 '아일린의 도망자다!'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몇 번씩이나 로브를 걷어보라는 요구를 받았다. 거절하면 로브를 찢기기도 했다. 얼굴이 드러날 때마 다 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형씨들, 난 이제 도망자가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믿을 리가 없 었다. 그래서 헬리언 지방에 도착했을 때, 프란은 이미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뭐랄까. ……이젠 고생이 내 옷 같군.' 프란은 장엄한 아일린의 성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떠나올 때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가까이 와서 보니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노을을 받은 라어 강은 황금빛 열매들이 잘게 쪼개져 떠가는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 일린 가는 라어 강이 그 주변으로 길게 둘러쳐져 있고, 강 안쪽은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잠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구조다. 게다가 저 아일린 가만큼 그녀에 대해 잘 아는 곳은 없을 것이니, 한 사 람한테라도 발각된다면 즉시 끝이다. 그러나 프란은 온 몸을 두둑두둑 꺾으며 스트레칭을 한 후, 길게 한번 웃었다. "얕보지 말라고! ……기다려라, 느끼 버터." 프란은 허리춤에 찬 루니아 블레이드를 한 번 쓰다듬었다. 어떻게 저 안으로 들어갈 거냐고? '묻지 마라, 이거야! 한다면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프란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우아한 몸짓으로 다이빙했다. 저 도도하기 짝이 없는, 깊고, 넓고,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라어강으로. * * * '그래서 그녀는 그대로 잠입에 성공했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젠장." 우아한 다이빙의 결과는 아주 참혹했다. 라어 강에 들어간 지 약 10분 후, 프란은 어깨 부근을 비껴 찌른 화살 한 대를 뽑아내며 욕지기를 내뱉어야 했다. 상처 부분을 천으로 꽉 여미면서, 프란은 물을 왈칵 토했다. 아일린의 성곽은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미친 거 아냐, 저것들?' 프란은 라어 강 안 쪽에 위치한 석문을 보며 혀를 찼다. 프란이 라어 강에 들어간 그 순간, 아일린의 성벽에서는 소란도 없이 바로 한 대의 화살이 날아왔 다. 그 날카로운 화살 한 대는 늘 그곳에서 강 전체를 살피는 자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주변을 전부 다 살핀단 말이야? 이 무시무시하게 큰 강 전체를?'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래서 수십 초 동안이나 호흡을 참고 저편으로 건너가서 다시 한 번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런데도 정확하게, 화살은 그 자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프란은 그제야 이곳이 다른 곳도 아닌 아일린이며 저 아일린은 세상 둘도 없을 '사기 같은 집안'이라는 사실을 새 삼 깨달아야 했다. "진짜 무섭네, 이 인간들. 누가 대마왕 집 아니랄까봐." 그래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프란은 온 몸이 쫄딱 젖고 어깨에는 상흔까지 입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카르멘에서 아일린은 왕복 12일, 사실상 반이 프란에게 준 시간은 이틀뿐이다. 그 이틀 안에 어떻 게든 저곳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피가 마를 지경이다. 그러나 프란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프란은 바른 눈으로 아일린의 성곽을 주시했다. 강을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저곳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일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 프란은 주먹을 쥐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뭐, 어쩔 수 없다. 도움을 청하는 수밖엔." 프란의 입술에 쓴 웃음이 걸렸다. "휴우. 수백 번이나 가르침을 어긴 이딴 제자를 도와주실지 모르겠지만." 프란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어찌됐든 한 번은 찾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 * * "프리나!"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눈앞에서 로브를 걷어내자, 아샤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샤휘의 얼굴에 찬찬히 놀람과 기쁨이 어리는 걸 보고 있던 프란이 볼을 슬슬 긁는다. 세이피안의 견습 기사 단장으로 언제나 자신을 엄하게 훈련시켜줬던 검술 스승, 아샤휘. 여기에 올 때는 멋지 게, 모든 굴레를 다 벗고 오리라 다짐했었는데. 그래도 프란은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단장님." "이런 바보 녀석!" 아샤휘는 쑥스럽다는 듯 볼을 긁는 프란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샤휘가 소리치자, 프란이 씩 웃는다. "이 녀석! ……아무튼 잘 왔다." 아샤휘는 당황한 것 같았다.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던 제자가, 아일린의 수배자인 제자가 갑작스 레 찾아왔으니 그럴 법 했다. "헤냔도 그러더니 너도 연락 한 번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똑같구나. 너흰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 는 게 없어." "어! 헤냔이 여길 왔었습니까?" "그래." 잔뜩 당황한 와중에도 아샤휘는 반갑게 프란을 맞이했다. 헤냔으로부터 잘 살고 있다는 대답을 듣 기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이 많던 아샤휘였다. 프란은 아샤휘가 내주는 의자에 앉았다. 아샤휘는 프란이 잔말없이 의자에 앉자 이상하다는 생각 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프리나라면 만나자마자 '다 집어치우고 일단은 검 쓰는 거 한 번 봐주세요, 단장님! 나도 좀 늘었습니다!' 라고 웃으며 말했을 것이다. 얼굴 마주칠 때마다 지겹도록 그런 소리를 하던 제자 아닌가. 그러나 오늘, 프란은 가만히 손을 모아 쥔 채 아샤휘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뭔가 부탁할 게 있나보군.' 아샤휘는 내심 그렇게 짐작했다. 프란은 굳은 얼굴로 아샤휘가 내주는 차를 받아들었다. 가만히 프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아샤 휘가 문득 감탄했다. "이제 제법 여자 티가 나는구나." 그 말에 프란이 툴툴거리듯 답했다. "처음부터 여자였다고요." "그거야 네 생각이고. 사실 선머슴이었지, 뭐." "아니라니까요!"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프란을 향해 아샤휘가 슬픈 눈을 해보였다. "이런 선머슴 같은 녀석 어디가 좋은지, 견습 기사단 녀석들이 밤마다 떼로 달려들어 네 방에 난 입하는 바람에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놈들은 다 잘 있습니까?" 프란은 오호, 하는 소리를 내가며 물었다. 몇 가지 곤란한 일을 제외하면 견습 기사 시절엔 재밌 는 일이 많았다. 그때도 모두와 잘 지냈던 프란이다. "그래. 정식으로 기사가 된 녀석들도 꽤 있지." 얼굴이 어두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프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프란은 여기에 온 목적마저 잊어버리고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제길, 벌써요? 나도 더 늦기 전에 돼야 할 텐데. 자식들, 그래도 제법이군. 평생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견장 한 번 못 달아볼 줄 알았는데." "하하하!" 사실 견습 기사단에서 프란의 기수에 있던 이들 중에선 프란이 가장 먼저 기사의 자격을 얻을 뻔 했었다. 큰 실적을 올리기도 했었던 그녀였기에 서임 기회도 가장 먼저 주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일로 프란은 그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충분히 질투심도, 억울함도 느낄 수 있을 터다. 그 런데도 프란은 환한 얼굴로 웃고 있다. "하긴 단장님이 만날 두들겨 패가며 교육시켰으니까." "두들겨 패다니. 난 그런 적 없다." 아샤휘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프란은 '거짓말 마세요'라는 뜻으로 웃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 아샤휘는 슬그머니 표정을 굳혔다. 늘 곁에 두고 싶었던 제자였다. 그때 기사가 됐더라면 지금쯤 한 자리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만한 실력이 있는 아이니까. 프란의 밝은 표정을 보는 아샤 휘의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졌다. 프란은 살짝 긴장했다. 이제 뭔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프란을 향 해 아샤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프리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일린에서 수배령이 내린 걸 봤다. 세이피안은 위험할 텐데?" 프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단장님. 수배는 이미 풀렸어요. 아일린에서도 절 잡으러 다닐 여력이 없을 거고." 사정을 잘 모르면서도 아샤휘는 대강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하긴 요즘 대륙의 소문이 퍼진 것 도 옛날이다. 일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아일린에서 수배자 찾기를 뒷전으로 미루는 것도 당연하다 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구나." 아샤휘가 안심했다는 듯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사이, 프란은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을 꺾고 있 었다. 왜 이러나, 싶어서 보고 있던 아샤휘는 프란이 계속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러지? 뭐 불안한 일이라도 있나?" 움찔. 프란의 어깨가 굳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언제나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던 프리나였 기에, 아샤휘는 그녀가 힘든 말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샤휘는 재촉하지 않았다. 내버려둬도 결국 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과연, 프란은 어느 순간 결심한 눈 으로 고개를 들었다. "드릴 말씀이 두 가지 있는데, 둘 다 좀 하기가 그렇습니다." "뭐든 좋으니 말해봐라." 아샤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프란은 입술을 뗐다. 그녀는 망설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 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단장님을 만나지 못한 근 1년 동안, 전 '순수'를 백 번 정도 깼습니다." "……." "지금부터 단장님께 드릴 부탁도 '순수'를 깨는 것과 비슷하고요." 아샤휘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아샤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건 사실 두 가지 밖에 없었다. 그 하나, 검술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도 아샤휘가 더 강조했던 것은 '순수를 지킬 것'이라는 원칙이었다. 그것은 기사가 되고자 하는 사 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일종의 소양이었다. 그리고 프리나는 그 순수를 가장 잘 지켰던 제 자 중 하나였다. '평생 동안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어린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찡긋했던 기억까지 또렷하다. 그런데 지금, 가장 아꼈던 그 제 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이 가르쳐줬던 것 중 하나를 백 번 정도 어겨왔다고. 그리고 부탁할 게 있는데, 그것도 스승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프리나, 그게 대체……." 아샤휘가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프란이 망설임 없는 눈동자로 아샤휘를 응시했다. 아샤휘는 그 눈동자에서, 프란이 무슨 짓을 했건 그것은 결코 프란의 긍지도 신념도 꺾지 못했음을 확인한다. 처음 견습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맑고 깊은 눈이다. 하긴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 녀석의 이 맑은 기운을 꺾을 수 있겠는가. 아샤휘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프란이 단숨에 말했다. "아일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단장님. 친구가 잡혀 있어요." * * * 같은 시각, 카르멘 가에선 헤냔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디로 보냈습니까!" 사실 헤냔은 왕가의 전언을 가지고 온 참이었다. 키네온은 아인켈 건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반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일린의 편을 들었는데, 반이 멀쩡하게 살아돌아왔으니 그의 입장에서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사신을 보내서 부를까 했지만, 이 사신 역시 반이 없는 동안 온갖 행패를 부렸던지라 카르멘 가에 가기를 결사적으로 거부했다. "저, 저스티스 경이 돌아왔다고요?" 사신을 히죽, 웃었다. "……아아. 전 다 그만두고 낙향하렵니다. 끌려 나가는 것도 모자라 맞을 거라고요. 그것만은 싫 어……. 후후, 괜찮아. 도망가면 다 해결돼. 후후. 괜찮아, 괜찮다고." 혼잣말로 중얼중얼 거리는 게 영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카르멘 가 전담 사신을 보내는 일은 포 기해야만 했다. 이에 키네온이 꺼낸 카드가 헤냔이었다. 영문은 모르지만 헤냔이 반과 함께 돌아왔 으니, 그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반의 얼굴을 마주한 헤냔은 왕가의 말을 전하는 대신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하질리언 씨를 만났어요! 프리나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프리나가 당신 허락 없이 마 음대로 행동했을 리 없습니다. 대체 이번엔 무슨 짓을 시키신 겁니까?" 헤냔의 적색 눈동자가 분노 때문에 더욱 시뻘겋게 빛났다. 반은 자리에 앉아서 헤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싸늘한 은보라색 눈동자에 헤냔은 또 다시 화가 났다. 그는 울컥하는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금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로 보낸 겁니까!" "왕가의 명을 받고 왔다는 걸 안다. 그만 나가라." 반은 무심하게 답했다. 헤냔은 잠시 움찔했으나 다시 주먹을 쥐고 소리를 쳤다. 왕가의 전언이고 뭐고, 지금 헤냔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얼마나 힘들게 여기로 돌아왔는데, 이 남자가 프리나에게 무슨 짓을 또 시켰는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당신도 인간인 이상 아일린으로 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요?" 반은 답 없이 헤냔을 보았다. 헤냔은 한참이나 대답을 기다렸다. 설마하니, 당신, 당신도 인간인 데, 그렇게나 위험한 아일린으로 보내진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반의 침묵은 깨지지 않고 있었다. 헤냔은 크게 한 번 심호흡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반이 말했다. "……보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헤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일린에선 모두가 프리나의 얼굴을 알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프리나는 당신을 구해줬어요! 저 적색산맥에서! ……그런데, 은인이나 다름없는 프리나를 그곳에 보내다니! 아무리 당신에겐 시종일 뿐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반은 표정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헤냔은 이 무표정한 얼굴을 더 이상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반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반이 자신을 제압할 것이다. 반이 자리 에서 일어섰다. 그는 뚜벅뚜벅, 헤냔의 근처로 걸어왔다. 헤냔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점검했다. 검은 그곳에 메어 있다. 헤냔은 지지 않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반은 짧게 말했다. "가라, 헤냔 키에르." "가지 않을 겁니다. 프리나를 다시 불러 오세요! 지금 당장!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가 있 단 말입니까!" "……때문에 보낸 게 아니다." "뭐라고요?" 목소리가 작았기에, 헤냔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헤냔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런 헤냔을 향해, 반은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말해주었다. "녀석이 원했다." 헤냔과 반의 눈빛이 얽혔다. 헤냔은 순간 심장이 덜컥하는 것 같았다. 반이 뒤돌아섰다. 그런 반 의 등을 보며, 헤냔이 입을 열었다. "카르멘 경, 당신…… 혹시……." 헤냔은 한참 동안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반은 한 걸음을 옮겼다. "궁으로 간다." 헤냔이 굳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때 반은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헤냔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신, 정말은, 프리나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겁니까?" * * * "……그래서?" 아샤휘는 냉정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프란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여태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추 려 이야기해준 프란은 있는 염치, 없는 염치 다 무릅쓰고 겨우 겨우 말을 꺼냈다. "단장님이라면 아일린에 들어가실 수 있잖습니까?" "그래. 무리는 없겠지. 아일린에선 검사들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고, 나는 현재 세이피안의 기사단 장 중 하나니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다." 아샤휘는 무겁게 말했다. "하지만 프리나." 프란이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가운데, 아샤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건 너무 위험하다. 나에게가 아니라 너에게 말이다. 꼭 이래야만 하느냐?" 아샤휘의 말에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해야 합니다.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저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곳에 들어갈 테니까. 무슨 짓을 해서든 시온을 만날 겁니다." 아샤휘는 다 큰 딸을 보는 기분으로 프란을 바라보았다. "왜? 그가 널 도와줘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프란은 한참 망설인 끝에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그냥, 만나야 한다는 것밖엔." 아샤휘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프란은 부탁이라는 걸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마도 혼자서 죽도록 노력한 끝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여기로 온 것일 테지.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면, 저 성격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칼날위로 목을 밀어 넣을 녀석이 다. 아샤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고집을 누가 말리겠나 싶었던 것이다. "좋다, 프리나. 너를 내 딸이라고 소개하고 안으로 데려가겠다." '좋다, 프리나'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환한 얼굴을 했던 프란은 '내 딸'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 간 얼굴을 굳혔다. 프란은 엑? 하는 소리를 내며 소리를 쳤다. "설마 로지아 말하는 겁니까?" "내 딸이 로지아 말고 누가 있나?" "아니, 하지만, 로지아는……." '로지아는 취향이 엄청 특이하잖습니까!' 말을 억누르며 프란이 아샤휘를 보았다. 견습 기사단장의 딸이라면, 기사단에서 충분히 아이돌이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샤휘의 딸 로지아는 아이돌이 아니라 '피해 다녀야할 요주의 인물' 이었 다. 아샤휘는 씩 웃었다. "그럼 내 아내로 가장해서 들어갈래? 내 딸 취향은 아내한테서 물려받은 거, 알고 있지?" 프란의 얼굴이 굳었다. "……그냥 로지아로 해주세요." 반시간 후, 프란은 이름 모를 소녀 하나에게 끌려갔다. 이거 어디서 겪어본 상황인데, 하고 중얼 거리는 프란을 향해 소녀는 갖가지 드레스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모두가 아샤휘의 딸 로지아의 드 레스였다. 프란은 그 드레스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소녀는 한참이나 드레 스를 뒤적거리다가 하나를 척 들어 프란에게 건넸다. 프란은 그 드레스를 바라보며 헉, 하는 소리 를 삼켜야 했다. 그건 가슴골이 보일 만큼 푹 파인 드레스였다. 거기다 가슴부분부터 엉덩이가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착 달라붙는 스타일의 옷이기도 했다. 그걸로 다가 아니었다. 드레스는 번쩍거리는 게 아니라 번들거리는 남색 소재로, 프란이 보기엔 아무래도 생선 비늘을 붙여놓은 것 같았다. 그 야말로 끔찍한 취향의 드레스다. 다행히 엉덩이부분부터는 치마가 퍼져 검을 숨길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걸 입는다는 건 프란으로선 무모한 도전이었다. 드레스를 받아드는 프란의 입술이 잠시 경련했다. "저기, 좀 평범한 건 없어?" 그러자 로지아의 하녀임이 분명한 소녀가 생긋 웃었다. "로지아 아가씨 옷 중에선 제일 평범한 건데요." "그렇겠지." 프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로지아를 보았을 때의 경악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프란이었다. 프란이 열세 살일 때, 로지아는 열 여섯이었다. 그리고 그 때 그녀는 세이피안 전체, 아니, 라니아 대륙 전체에서 누구도 절대 입지 않을 옷을 입고 나타났었다. 그건, 배꼽이 보이는 녹색 털옷이었다. 도대체 로이네트도 아니고 이다지도 따뜻한 세이피안에서 왜 저딴 털옷을 입는가를 이해할 수 없 어 열세 살 프란은 혼란스러웠다. 목에는 몬스터 이빨로 만든 목걸이까지 걸고 있던 로지아. 모두 를 대신해 직설적인 프란이 물었다. 도재체 왜, 무슨 의도로 그런 옷을 입는 거냐고. 로지아는 주 먹을 불끈 쥐며 답했었다. "두고 봐!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5년쯤 지나면 모두가 이 옷을 입을 거야. 난 유행의 선 두주자라고!" 로지아가 호언장담한 5년이 지났지만 프란은 그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런 로지아의 옷장 안에 평범한 것이 들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부터가 애초에 무리였다. 프란이 난감해하며 드레스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자 소녀가 생긋 웃었다. "왜요? 예쁘잖아요." "아. 그, 그래." 프란은 고개를 홱 돌리고 아무 말 없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 입고 돌아봤을 때, 소 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거꾸로 입으셨는데요." '뭐라고! 그럼 이게 앞이란 말이냐!' 프란은 드레스를 바라보며 놀라 뒷걸음질 쳤다. 가슴 쪽이 세로로 푹 파지다 못해 배까지 보일 정 도다. 등이라면 몰라도 가슴이라니. 이제 더 이상 보기에 이상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소녀는 하얗게 질린 프란을 붙들고 드레 스 입는 걸 도와주었다. 마침내 드레스를 다 입은 프란은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다 그렇다 쳐도, 이거…… 나한테 안 맞아." 프란은 헐렁한 가슴께를 죽 잡아당기며 말했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프란은 난감했다. "그러니까 안 괜찮다고. 안에 사과도 들어갈 것 같단 말이다……." 소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됐으니 앉으세요. 화장을 해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못알아보게 화장을 하라고 했는데 저 는 그것만큼은 자신 있답니다! 로지아 아가씨에게 화장을 해드리는 게 저니까요." 그 말에 프란은 멍한 얼굴을 했다. 새삼 로지아와의 추억이 하나 더 떠오르는 프란이었다. 딱 한 번, 프란은 로지아의 맨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서 경악했다. '도대체 왜 화장을 하고 다니는 거야! 맨 얼굴이 백배는 예쁘잖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건 다른 사람이잖아?" ……하고. 프란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로지아 식 화장이라는 건……." 소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폈다. "하인트 대륙의 동방 여왕 식 화장이죠." "……라니아 대륙에선 아무도 안 하는 화장이겠지." 소녀는 굴하지 않았다. "그게 그거죠." '그게 그거일 리가 없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프란을 앉혀놓고 화장을 시작했다. 라니아에선 보통 하얀 분을 바른다. 하지만 소녀는 갈색 분을 바르고 있었다. 곧 프란의 흰 얼굴이 갈색으로 변했다. '아니, 이래선 목이랑 색깔이 전혀 다르다고!' 프란이 경악하는 가운데 소녀가 목은 물론이고 드러난 모든 부분에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 후, 소녀는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들을 가져왔다. 그것들을 솔로 살살 문질러가며, 소녀는 프란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눈이 아파서 더 이상 뜨고 있을 수 없던 프란은 할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소녀는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속눈썹이 상당히 길군요. 포인트를 팍팍 줘야겠어요." 반시간 후, 프란의 속눈썹은 검지 두 마디만한 길이로 뻗어났다. 뽑아서 표창으로 쓸 수도 있을 길이였다. "입술이 예쁘시네요. 입술에도 포인트를 팍팍 줘야겠어요." 반시간 후, 프란의 입술은 석탄을 삼킨 것처럼 새카맣게 칠해져 있었다. "와, 코도 오뚝한 걸! 포인트를 팍팍 줘야지!" 반시간 후, 프란의 콧대 주변엔 먼지 같은 검정이 묻어 있었다. "눈이 예쁘시네요! 눈에도 포인트를 팍팍……" "이봐, 그래선 온 얼굴이 포인트잖아!" 더 이상 '포인트 팍팍'을 참을 수 없었던 프란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상대는 최강의 메이드였 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방 여왕 식 화장은 원래 그래요." "거짓말하지 마!" 반시간 후, 프란의 눈두덩은 매 맞은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자, 마지막으로 가발!" 소녀는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가발 하나를 가져왔다. 로지아가 즐겨 쓰던 검은 색 스트레이트 가 발이다. 허리께까지 내려올 만큼 길고 탐스러운. 가발까지 쓰고 거울을 바라본 프란은 경악에 휩싸 여 소리를 질렀다. "우악! 진짜 로지아 같아!" "에헴! 당연하죠!" 프란은 기세등등한 하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홀로 중얼거렸다. '로지아, 제발 하녀를 바꿔.' * * * "헉!" 프란이 내려오는 순간 아샤휘는 숨을 들이마셨다. 프란은 희한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굽 10지나의 구두를 신고 비틀거리며 2층에서 내려왔다. "로지아랑 똑같은 의상에 똑같은 화장이라고요, 단장님." 프란은 연극배우 못지않게 두껍게 칠해진 갈색 분에, 눈은 멍든 사람처럼 시퍼렇고, 입술은 석탄 먹은 사람처럼 시커멓고, 속눈썹은 표창으로 쓸 만큼 길고, 푸른색으로 볼터치를 있는 대로 하고, 콧대 주변은 검댕 묻은 것처럼 검고, 검은 색의 긴 생머리 가발을 써 예쁘다기보다는 무서워진 자 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는다. "난 로지아가 화장하고 올 떄도 늘 놀란다, 프리나. 걘 언제쯤이야 정신을 차릴까?" 한숨을 내쉬며 아샤휘가 말했다. 프란은 웃으며 말했다. "로지아는 어디 갔는데요? "'유행을 선도하는 멋진 여자들의 모임'에 갔다. 벌써 3년째 정기모임 중이지." "회원이 있단 말입니까?" 프란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애 엄마가 회장이야." 아샤휘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내 밑에 있는 기사들 부인들이 돌아가며 참석하지." "그건 고문이라고요!" 프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다리부분에 억지로 밀어 넣은 검 때문에 한 발자 국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런 굴욕은 처음이지, 너?' 프란은 루니아 블레이드를 툭툭, 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찌됐든 네가 누군지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로지아의 취향이 도움이 될 때가 다 있구나." 프란은 웃었다. "로지아도 화장 지우면 아무도 못 알아보니까요." 곧 아샤휘의 저택에서 마차 한 대가 출발했다. * * * "이진느님. 세이피안 기사단장 아샤휘 경이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뭐라?" 이진느는 갑작스러운 그 말에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입술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 지 금까지 세이피안 왕가를 몇 번이나 찔러보았던 이진느였다. 비켈린과 아인켈이 아나고, 세라딘이 열다섯 명이나 죽은 지금, 아진느 쪽에는 검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세이피안 왕국에서 기사단 장을 보냈다면, 이곳에 협조를 하겠다는 의미임에 분명했다. '좋아.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군.' 이진느는 웃으며 명령했다. "얼른 이곳으로 모셔라!" * * * 아일린의 문지기는 굳은 얼굴로 아샤휘를 보고 있었다. "저, 동행하신 분은?" "내 딸이오. 꽤 유명할 텐데?" "저기, 화장이……." '화장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어떤 얼굴인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신분 확인을 제대로 해야겠는데 요.' 문지기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프란은 재빨리 대꾸했다. "내 화장이 왜요? 동방 여왕 식 화장이라고요!" "동방…… 여왕이요?" 문지기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하긴, 말하는 프란으로서도 납득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우겨야지. 프란은 어깨를 펴고 아샤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이 사람이 내 화장이 마음에 안 드나본데요." 아샤휘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내 딸이 확실하고, 이 화장은 이 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거요. 여기 신분증도 있소." 아샤휘는 얼른 로지아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신분증에도 그렇게 지독한 화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서, 로지와의 신분증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청순한 모습을 여인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문지기는 한참동안이나 신분증과 프란을 돌아가며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 같은데요." '게다가 하나도 안 어울려요. 괴물 같다고요!' 경비병이 속말을 억지로 누르며 그렇게 답했다. 아샤휘는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내 딸이오." 문지기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찰나, 방으로 모시라 했다는 이진느의 말이 전달됐다. 문지기가 '진짜 이상한데'라고 중얼거리며 그 신분증을 뚫어져라 살피고 있는 사이, 프란은 날듯 이 아샤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 * * "이쪽입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봤을 때 프란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그 여자의 얼굴 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엇지만 로지아 식 화장을 한 것도 아니 고 얼굴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프란은 떡만 한 침을 꿀꺽 삼켰다. '레오니아!' 대마왕의 침소에 반나체 차림으로 들어왔던 그 여자가 분명했다. 어쩌지, 내 얼굴을 정면에서 봤 을 텐데. 프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곧 자신이 '동방 여왕 식' 화장을 하 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 프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일단 눈동자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들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레오니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샤휘와 프란을 안내하고 있었다. 아샤휘가 흘끔 프란을 돌아보았 다. 프란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잠깐만요." 하마터면 '잠깐만요, 레오니아'라고 부를 뻔했던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레오니아가 돌아보았다. "화장을 좀 고치고 싶은데요." "지금 그 모습으로도 괜찮을 것 같은 데요." 어투는 다정했지만 프란이 그 속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뭘 고치겠다는 거야? 고쳐서 달라질 것이 없잖아!' 프란은 속으로 백 번 동감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진느 아일린님을 만나는 건 제 평생의 소원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졸라 함께 따라온 것이 고…….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이진느고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예뻐질 리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오니아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레오니아는 함께 서 있던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이진느님과 아샤휘님과 단 둘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테니,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제가 아가씨를 저쪽으로 모셨다가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레오니아의 말에, 아샤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레오니아가 프란을 앞쪽으로 이끌었다. 프란은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았어, 이젠 거의 성공이다! 일단 화장실로 데려가서 가두고…….'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레오니아가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시즈 아일린 가주가 보냈습니까?" 프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네이버 카페중 glehd777님이 스신 텍스트 문서 오! 나의 주인님 입니다. 1장과 2장이 같이 있습니다. 즐감하세요 제 1장_탑에 갇힌 왕자님 카르멘 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는 궁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 탄 사람은 헤냔과 반, 두 사람뿐이다. 둘은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 은 채 서로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말을 꺼내려다 참았던 헤냔이 입을 연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난 당신이 싫습니다." 헤냔 딴에는 진지하게 한 말이건만 반의 대답은 냉랭할 뿐이었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은!' 헤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싫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저스티스 카르멘경!" "어쩌란 건가?" 무심하게 대꾸하는 반 때문에 헤냔이 윽 소리를 냈다. 헤냔은 주먹을 꾹 쥔 채 반을 보았다. 반은 마차의 창을 통해 수도의 거리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있다면 됐습니다. 오해할 일도 없겠군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이번엔 반이 돌아보았다. 헤냔은 볼 이 부어 있었다. "당신을 돕는 일에 자원할 겁니다." "헛소……." "헛소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헤냔은 시선을 다시 반의 반대편으로 홱 꺾으며 소리쳤다. 반을 보았 다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할지 알 수 없엇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냔은 마차 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니까,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가 절대, 절대, 절 대로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난 당신이 진짜 싫으니까요. 그냥 내 신념을 위해서 그러는 것뿐입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헤냔은 한참 후에야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곧 마차가 궁궐 앞에 멈춰 섰다. 헤냔은 잽싸게 먼저 내렸다. * * * "시즈 아일린 가주가 보냈습니까?" 등을 보인 레오니아는 차분하게 물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얼었던 것 도 잠시, 프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행동을 개시했다. 레오니아 가 한 걸음을 다시 옮기려는 순간, 상대가 여자건 뭐건 봐주지 않고 있 는 힘을 다해 레오니아를 벽 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아……읍!" 레오니아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었다. 무섭게 달려온 프란이 잽싸게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아일린의 기둥은 거대해서, 기둥 사이에 두 명은 물론이고 네 명도 너끈히 숨을 수 있다. 프란은 그 기둥 사이로 레오니아를 밀어 넣은 뒤 바로 검을 뽑았다. 레오니아는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루니아 블레 이드의 검휘가 무시무시했던 탓도 있지만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에 소름이 끼쳤던 게 더 주효했다. "무슨 수작이냐?" 프란의 목에서는 이 뜻밖의 상황에 대한 경악으로 그르렁거리는 듯 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프란을 진지하게 마주하려던 레오 니아는, 그러나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다시 봐도 프란의 화장이 너무 웃겨서다. 허나 그 꼴을 하고서도 프란은 더없이 진지했다. "처음부터 알아봤나?" "그런 우스운 화장을 하고 왔는데 의심이 안 될 리가 없죠." 그래도 문지기는 통과했다고.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 알리지 않았지?" 레오니아가 잡으라고 명령만 했다면 프란은 아샤휘와 함께 들어온 그 순간 질질 끌려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도와줄 거냐?" 프란은 레오니아의 코에 거의 얼굴을 들이밀다시피 한 채 물었다. 레 오니아는 프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뜻밖의 말을 했다. "확률은 반반이죠. 시즈가 이길 가능성이 반, 이진느님이 이길 가능 성이 반. 당신을 발견한 건 내게 행운인지도 몰라요. 당신을 도와주겠 어요. 시즈가 이기면 그때 보답을 해줘요." 이번엔 프란이 진저리를 쳤다. '이놈의 집안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 무서워? 완전 권모술수꾼들이 잖아!' 검이 목 언저리를 압박하고 있음에도 레오니아는 전혀 떨지 않았다. 검을 배우지 않은 여자가 검 앞에서 이토록 담대하다니. 대마왕의 침소 에 네글리제 차림으로 들어왔던 그 기백을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프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보험 드는 걸로 이해하면 되냐?" 레오니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좋아. 난 시온을 만나러 왔다." 프란의 말이 끝난 그 즉시 레오니아의 입가엔 비웃음이 매달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지만 프란은 아무 말 않고 레오니아를 응시하 기만 했다. "그분은 갇혀 계십니다. 6써클 마법사 둘이 결계를 쳐놔서 안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죠.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입니다. 거기다 그 앞은 검사 셋이 지키고 있죠." "셋쯤이야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다." 프란은 자신 있게 대꾸했지만 레오니아는 어림도 없다는 듯 덧붙였다. "세라딘 셋입니다." 그 말에는 프란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렌 정도로 세 명이라도 어려운데 셀키 정도로 셋이라면 이건 그야말로 가망 없는 싸움이다. 레 오니아는 프란의 당혹을 눈치 챘다. 그러나 프란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 혔다. 결심을 한 프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입니까?" "'이 보험, 쓸모없을 수도 있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지 마. 난 시온을 만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란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마치 반의 화법 같았다. 가정이 아니 라 진실을 통고하는 듯 명확하고 망설임 없는 어투. 레오니아는 이 자신만만한 태도가 의아했다. 뭘 믿고 이렇게 확언할 수 있는 거지? 레오니아는 프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프란은 믿 어달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망설이던 레오니아는 그 고갯짓에 힘입어 입을 열었다. "서쪽…… 첫 번째 탑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말이 끝난 그 즉시, 프란은 레오니아의 목덜미에 들이댔던 검을 떼어 냈다. "좋아. 후회하지 않게 해주지." "당신, 꼭 남자애 같군요." 레오니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프란은 쑥스러웠는지 계면쩍게 웃 으며 검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드레스가 드레스이니만치 검을 뽑는 건 순간적으로 했어도 도로 집어넣는 건 쉽지 않았다. "에잇,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제기랄 놈의 드레스!" 무라고 한참이나 꿍얼댄 끝에 검을 집어넣는 데 성공한 프란은 그대 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복도 저편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 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섰던 레오니아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시즈. 이건 당신에게 첫눈에 반한 제가, 이 진느님의 눈을 피해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입니다.' * * * 프란은 온몸의 털이 비쭉 설 만큼 긴장한 채 움직였다. 성 안에 진입한 이상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 생각할 만큼 프란은 바 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프란의 옷이 워낙 특이했던 탓에, 숲 덤불을 통해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도움이 되는 건지, 영 안 되는 건지.' 프란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일린이 일전을 대비해 소란스러웠다는 점이다. 몰려든 어중이떠중이가 워낙 많았기에 제대로 된 검사를 추려내는 시 험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프란은 시끄럽게 웅성대는 정원을 지나 서쪽 탑 근처로 움직였다. 허나 막상 서쪽 첫 번째 탑에 도착했 을 때, 프란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레오니아의 말대로 탑 앞에 세 명의 검사들이 서 있었던 탓이다. '후우. 장난 아닌데?'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그들은 탑에 기댄 채 다소 나태하게 서 있었지만, 전해지는 공기만으로도 예사 상대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 다. 저들을 한꺼번에 상대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것도 저 인 간들이 모두 세라딘임을 안 지금에야. 프란은 드레스 자락 아래 감추어진 루니아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닥치는 대로 베고 들어가 버려?' 그게 가능할 턱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프란 자신이 안다. 반의 검을 가졌다 해서 반이 되는 건 아니니까. 잠시 생각하던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신이 있다면, 몇 번이나 그녀를 배반하고 또 도와준 그 빌어먹을 신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이번에도 무슨 수를 내주겠지. 프란은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탑 근처에 있는 회색 건물 뒤편에 숨었 다. 언제 뛰어나가야 될지 모르기에 프란은 옷매무새부터 가다듬었다. 흙이 잔뜩 묻은 옷을 가볍게 털고 가발도 한 번 정리했다. 그런다고 이 끔찍한 차림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프란은 그 지겨운 시간 동안에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꼼짝 않고 기다렸다. 틈을 보였다간 세 라딘들이 눈치 채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지러울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세 시간은 훌쩍 넘겼을 터다. 밤은 새카맣게 제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프란은 침을 삼키며 루 니아 블레이드를 쓰다듬었다. 작게 떨리는 그 검이 그녀에게 침착하라 고 속삭이는 것 같아, 프란은 문득 웃음 지었다. '걱정 마. 잘 될 거다.' 그 순간이었다, 프란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인 것은. 여자 하나가 가 볍게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 니들도 인간이니 화장실은 가야겠지!' 프란은 속으로 아자 하고 소리를 쳤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이젠 두 사람 남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고 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 었다. 게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게 분명한 저 여자도 곧 돌아올 것이다. 어찌됐든 프란은 천천히 탑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품을 하며 느긋 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라딘 둘은 희한한 옷차림에 희한한 화장을 한 프란이 나타나자 기겁하며 검을 뽑았다. "악! 괴물이다!" "으아악!" 그야말로 끔찍한 반응이었다. '괴물이라니? 너무하잖아, 이 자식들아!' 프란은 울적해졌으나 그렇다고 긴장감을 풀지는 않았다. 먹혀라, 먹 혀라!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시온님을 뵈러 왔습니다." 성공이다. 목소리가 제법 곱게 나왔다. "뭐?" 세라딘 둘은 그 뜻밖의 말에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이진느님이 보내셨습니다. 아드님이 적적하실 것 같다고." 시온은 바람둥이니까 여자 한둘 보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그 렇게 싫어하는 대마왕한테도 여자를 밀어 넣는 희한한 집안이니까. 프 란은 그렇게 생각해서 짜낸 말이었으나, 세라딘 둘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럴 리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게다가……."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프란을 위아래로 죽 한 번 훑어보았다. 할 말이 있긴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심성 고운 남자를 대신해, 동 료 여자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시온님은 너 같은 여잔 영 취향이 아니다." 프란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런 여자 취향인 남자가 흔한 건 아니지.' 잠시 고민하던 프란은 자기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말았 다. "잘못 알고 계시네요. 시온님이 특이한 차림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일부러 꾸미고 온걸요?" 세라딘 둘은 그게 말이나 되냐는 듯한 얼굴로 프란을 보았다. 시온이 이 탑에 유폐된 지 벌써 십여 일이 지났다. 그사이 이진느만 간간히 저 탑 위로 올라갔을 뿐, 자켄린 조차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방 이다. 세라딘 입장에서도 시온이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얼마나 적적할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그들이다. 게다가 시온은 여자 라면 깜빡 죽는 사람이니 어머니가 그걸 배려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 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만약 프란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꾸미고 들어왔다면 차라리 통과 가 쉬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라딘들은 이런 이상한 여자가 눈 높은 시온을 상대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진느님이 허락하신 건가?" "그럼요."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세라딘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등 을 돌렸다. "확인해보고 올 테니 그동안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세라딘 여자로선 이까짓 괴상한 여자 하나 동료가 못 막을 리 없다고 생각해 한 행동이었다. 여자는 저편으로 뛰어갔다. 긴장이 되었던 프란은 얼굴이 굳는 걸 막기 위해 억지로 웃어보였다. 생긋. "웃지 마!" 하지만 웃음에 대한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남자가 소리를 쳤던 것 이다. "엉?" "웃으니까 진짜 무섭다." 입술 언저리가 경련하는 걸 보니 진심인 것 같다. '로지아. 난 네가 정말 존경스럽다.' 프란은 어디서나 당당한 로지아를 생각하며 땀을 닦았다. 그래도 프란은 남자를 은근히 훑어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둘이 나란히 선 채 1분이나 흘렀을까. 프란이 오기 전 잠깐 볼일을 보 러 갔던 세라딘 여자가 저 멀리서 돌아오고 있었다. "여, 베키! 빨리 이리 와." 세라딘 남자가 손짓한 그 순간이었다. "아니……!" 남자는 깜짝 놀랐다.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괴상한 미소만 짓고 있던 프란이 인정사정없이 머리를 디밀었던 탓이다. 검을 뽑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프란은 무식하게 돌진해 남자의 배를 머리로 쾅 들이박았다. 단단하기론 차돌 못지않은 프란의 머리다. "윽!" 저 멀리서 돌아오고 있던, 베키라 불린 여자가 경악한 채 속도를 높 였다. 적이 풀을 밟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시간이 없어! 남자가 몸을 숙이는 틈을 타, 프란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쉬익! 루니아 블레이드의 시린 빛에 남자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건 찰나였 을 뿐이다. 남자는 어느 틈엔가 뽑아든 검으로 프란의 어깨 쪽을 노렸 다. 프란은 가볍게 몸을 돌려 공격을 흘렸다. "반드시 이긴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가 했던 공격을 그대로 따라했다. 하 지만 상대가 그리 호릭호락하게 당해줄 리 없다. 챙! 남자는 잔뜩 힘을 준 채 검을 횡으로 휘둘러 프란의 공격을 막았다. 쐐액! 남자가 재차 공격을 했다. 프란은 그 공격을 피해 몸을 훅 낮추고는 검끝으로 상대의 발을 노렸다. 남자는 놀라 한 발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이쪽으로 다가온 세라딘 여자, 베키가 남자의 앞을 막아 서며 프란을 향해 검을 날렸다. "에잇!" 프란은 베키의 공격을 검으로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했다.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은 오른팔을 든 채, 이편을 향해 검 을 위아래로 휘두르려는 베키를 몸으로 밀어붙였다. '이 계집애가!' 베키는 순간 당황했고 그 바람에 뒤에서 자세를 정비하고 있던 남자 까지 비틀거려야 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세라딘이었다. 한 발 물러 섰던 그들이 다음 순간 지체 없이 프란을 양옆으로 포위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프란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두 개의 검이 프란을 사이에 둔 채 뚜렷하게 달빛을 반사한다. 프란 은 조심스레 뒷걸음질 치면서 콧잔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끔찍한 화장이 번져 더더욱 끔찍한 형상이 됐지만 프 란은 알지 못했다. 프란은 그 상태로도 히죽 미소 지었다. '역시 실력자들이랑 싸우는 건 재밌어.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만 빼 면.'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면서도 프란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긴장해 있었다.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충만한 자신감이 그녀의 온몸 을 채운다. 그 기백 때문인지 세라딘 둘은 쉽사리 프란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들은 먹잇감을 사냥할 때 맹수가 흔히 그러듯 틈을 노리며 프란 주위를 천천히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있던 프란은 한 순간 뭘 생각했는지 루니아 블레이드를 반쯤 비틀어 쥐었다. 다음 순간, 세라딘 둘은 정말로 당황해야 했다. '뭐 하는 짓이지?' 프란은 탑 옆에 있던 거대한 나무에 검을 박아 넣더니, 그 검에 의지 한 채 공중제비 넘기를 했다. 루니아 블레이드를 지렛대로 사용하다니! 세라딘 둘이 그 검의 정체를 알았다면 더 기겁했을 것이다. 프란은 여태까지 겪은 거의 모든 경험을 되살려 이 싸움에 임하고 있 었다. 반, 런스, 헤냔, 히스, 하질리언…… 그 모든 사람들을 구경하고 그 모든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얻었던 경험들을 살려, 온몸의 감각을 찌 릿하게 세운 채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 걸린 건 시온이니까. "이얍!" 공중에서 한 바퀴 돈 프란은, 순간적으로 헤냔이 하질리언과 싸웠던 때를 흉내 냈다. 프란은 세라딘 여자, 베키를 노렸다. 둘 중 누구를 공 격할지 몰라 당황했던 베키는 움찔하며 검을 똑바로 세웠다. 하지만 바 로 그게 실수였다. 베키가 검을 들어 막는 순간, 프란이 손에서 힘을 빼 버렸던 것이다. "아악!" "이 녀석이!" 허나 베키를 제압했다고는 해도 프란은 남자에게 등을 보인 차다. 프 란이 베키의 손목을 발로 비틀고 있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남자의 검이 프란의 목을 노렸다. 쐐액! '뭐지?' 하지만 자신 있게 공격했던 남자의 검은 먹잇감을 사냥하지 못했다. 이 괴상한 차림의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였던 탓이다. 프란 은 베키의 손목을 밟은 그 상태 그대로 몸을 뒤로 빼곤, 부드럽게 공중 제비를 넘었다. 제비를 넘으면서 세라딘 남자의 어깨를 짚는 것도 놓치 지 않았다. 너무도 유연해 우아하기까지 한 움직임이다. 남자의 얼굴에 당혹을 넘어 경악이 서렸다. 하지만 세라딘답게 그는 경악을 수습하며 재빨리 돌아섰다. 남자의 어깨를 짚고 넘었던 프란은 막 땅에 착지한 차다. 그런 프란을 향해 남자의 검이 인정사정 없이 다 가왔다. '제길! 너무 빨라!' 프란은 남자쪽을 향해 돌아서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막을 순 없었다. 공격에서 틈을 찾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몇 번의 눈속 임과 돌출 행동으로 타격을 줄 순 있어도 이처럼 정식으로 노리고 들어 오는 공격을 피할 재간이 프란에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검을 쥔 손 에 있는 대로 힘을 주는 한편,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상대가 막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검이 한순간, 이 비정상적 인 행동 때문에 궤도를 이탈했다. 푸욱. "익!" 프란의 배를 노렸던 공격은 예상치 않게 프란의 옆구리를 길게 찢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프란에겐 충분한 타격일 테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어야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옆구리에 검이 박힌 프란이 스산하게 웃고 있었던 탓이다. 그 웃음에서 남자는 프란이 바로 전 순간 해냈던 계산을 눈치 챘다. '피하지 않고 공격을 받은 다음 시간차로 움직일 생각이었나?' 남자는 당혹에 젖은 채 프란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힘껏 뽑아냈으나, 간발의 차이로 공격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프란은 자신의 옆구리에 검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되로 줬으면 말로 받아라, 이자식!' 프란은 속으로 소리쳤다. 남자가 프란의 살에서 뽑아낸 검을 서둘러 쳐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다.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그대로 보인 채, 프란은 남자의 심장을 노렸다. 콰직! 루니아 블레이드가 목표점에 정확히 꽂혔다. 남자는 헉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대로 절명이다. 심장이 고 요히 잦아드는 소리를 고스란히 전해 들으며, 루니아 블레이드는 적의 피를 탐욕스레 먹어치웠다. 프란은 그 검을 공중에서 한 번 휘익 돌렸 다. '빌어먹을, 그 주인에 그 검이군. 이 검도 괴물이야.'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동료를 잃은 베키가 광분해 달려 들었다. "죽어!" 프란은, 그러나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프란 자신은 눈치 채지 못했으나 한 타임을 움직일 때마다 순식간에 적과의 거리를 계산해내는 그녀의 검은 반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카르멘 가 의 검'이 아닌 '반 특유의 검'과 말이다. 그리고 세라딘 여자, 베키의 검이 프란을 두 토막 낼 듯 다가온 바로 그 순간! 프란은 순식간에 왼다리에 감춰뒀던 또 다른 검을 꺼냈다. 헤냔이 사 줬던 그 조잡한 검이다. 검신도 힐트도 모두 짧아 루니아 블레이드보다 훨씬 숨기기 쉬웠던 검. 프란은 망설임 없이 그 검을 내던졌다. 하질리 언이 표창을 던질 때 취하는 완벽에 가까운 포즈로, 그러나 표창보다 검이 무겁다는 걸 알기에 있는 힘껏! 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그 검은 베키의 몸 어디도 맞히지 못했다. 하지만 프란은 그 검이 특별한 성과를 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다. "젠장!" 베키가 신경질적으로 그 검을 쳐냈을 때, 프란은 이미 베키의 가슴 언저리에 육박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사태를 인식한 베키의 눈이 있 는 대로 커졌다. '너, 대체 정체가 뭐지?' 베키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대답 없이 프란의 검만이 화려한 호선을 그렸다. 콰직! "으윽!" 루니아 블레이드는 순간적으로 괴력을 발휘했다. 베키의 배에 꽂힌 그 검이 그녀의 내장을 있는 대로 헤집는다.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프 란은 더더욱 검을 깊게 밀어 넣었다가 한순간 온 힘을 다해 뽑았다. 오 싹, 전율이 일 만큼 요란한 핏방울들이 프란의 얼굴을 향해 튀어 올랐 다. "흐, 헉……." 피를 잔뜩 쏟아낸 베키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그 모습을 보는 프란의 눈가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제길!' 허나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약해지지 마라, 프란 프리텐! 확실히 하 기 위해, 프란은 몸을 숙인 베키의 가슴께를 등을 통해 찔렀다. 퍽! 곧 탑 근처가 완전한 정적에 감싸였다. * * * 프란이 베키의 심장을 찌른 그 시각, 반은 키네온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카펫이 방 전체를 덮고 있는 그 조용한 방 안에서, 키네 온은 했던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지겹군.' 반은 키네온의 말을 반쯤은 듣고 반쯤은 귓가로 흘려버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된 이 응접실은 늘 푸른색 화초가 싱싱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화초들은 평 소 떄완 달리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있다. 이 방의 화초들만은 키네온 이 취미삼아 직접 가꿔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내 말을 듣고 있소, 카르멘 경?" 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키네온은 아직도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두 시간 반 동안 되풀이되었던 그 말들을 정리하면, 사실 간단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카르멘가의 황금문을 부수려 한 것은 내 의지가 아 니다.' 평소의 반이었다면 횡설수설하는 키네온의 말을 단박에 잘라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반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키네온에게 더 강한 압박 을 가하리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벌써 백만 스물세 번은 들은 것 같다. "이해해주리라 믿겠소." '드디어 끝났군.'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은 또렷한 시선으로 키네온을 보았다. 이런 사과를 받으려고 온 그 가 아니었다. 검사들은 문제가 없다. 카르멘 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원치 않았던 반이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뒤다. 검사 쪽은 카르멘 가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문제는 마법사였다. 위저드 리그는 아일린이 노심초사하며 만든 대 단체다. 죽었다 깨어 나도 아일린 외의 장소에서 그만한 마법사들이 다시 모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반이 입을 열었다. 키네온은 흠칫 반을 보았다. "카세타의 궁중 마법사들을 빌려주십시오." 키네온으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무어라?" "대가는,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때 지불할 겁니다." 키네온은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는 이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반은 방금 대가라고 말했다. 반이 마법사를 빌리는 건 카르멘 가주로서가 아니었다. 지금 반은 아일린 가 주로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를 빌려간 반이 아일린을 탈 환한다면, 그 대가 역시 아일린 가주로서 줄 것이다. 그때 깨끗한 호수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아바마마?" 반은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목소리의 주인공은 키 네세스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나 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반은 잠시 난감해진다. 키네세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얼굴이었다. 반은 그 얼굴에서 키네세스의 엄청난 걱정을 단박에 읽을 수 있었다. 감정에 무 딘 그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키네세스의 야윈 얼굴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카르멘 경? 그대가 만약 내 딸과……!" "그만두세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 챈 키네세스가 단숨에 말을 끊었다. 그 뜻밖의 반응에 키네온의 눈이 커졌다. "더 이상 그런 식은 싫습니다, 아바마마. 일단은 결정하세요. 마법사 들을 내줄 것인지, 내주지 않을 것인지." 키네세스는 그 이상 단호할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강해졌군.' 반은 순간 그렇게 느꼈다. 말 그대로다. 키네세스는 반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몇 달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키네세스를 성장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키네온이 결정을 내린 후 그 녀와의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 키네세스와 반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던 키네온은 한숨을 쉬었다. "마법사들을 빌려주겠소. ……아일린의 가주." * * * "후." 프란은 피에 젖은 루니아 블레이드를 수거하며 숨을 뿜었다. "나 진짜 많이 늘었나 보네." 프란은 스스로의 성장을 칭찬해주며 애써 웃으려 했다. 그러나 발밑 에서 뒹굴고 있는 두 구의 시체가 그녀의 입술을 계속 경련케 했다. '얼마나 죽이면 이런 게 익숙해질 수가 있냐?' 프란은 반에게 묻고 싶었다. 멍한 얼굴을 했던 프란은 다음 순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돼. 시온을 만나고 나서.'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몹시도 무거운 그 시체들을 질질 끌어당겼 다. "미안." 프란은 두 구의 시체를 탑 안쪽에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서 그녀는 시선을 올렸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안에서 보니 이 탑, 꽤 높은 것 같다. 프란은 계단에 한 발을 올렸다.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시온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 * * 프란은 탑 안을 날듯이 뛰어올라갔다. 밖에서 볼 때보다 안에서 볼 때가, 안에서 볼 때보다 직접 올라갈 때 가 더 높게 느껴지는 이상한 탑. 프란은 한 층을 올라가고 난 뒤에야 이 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깨달았다. 한 층에 계단이 마흔 여덟 개나 있었던 것이다. "뭔 생각으로 이런 건물을 만든 거야. 돈 거 아냐?" 투덜거리곤 있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 이진느에게 사실을 확인하러 갔던 세라딘 여자가 곧 이진느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단장님이 여길 안전하게 떠났어야 할 텐데." 프란은 중얼거리면서도 계단을 쉴 새 없이 밟았다. 얼마나 숨차게 계 단을 올랐을까. 마침내 프란은 4층 방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다행히 4 층에 있는 방은 하나뿐이었다. '여기 있는 거지, 느끼버터?' 레오니아는 이 방에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프란은 그래서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자기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문이 닫히 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쾅! 하지만 방 안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은 프란은 깜짝 놀라야 했다. 프 란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닫힌 것이 다. '마법은 마법인가 보군. 저걸 어떻게 다시 열지?' 시온 역시 저 문을 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 에 갇힌 뒤 나오지 못했을 거고. 프란은 머리칼을 집어 뜯으며 자학했 다. '다리로라도 고정했어야 하는데, 바보 자식! 으아악!' 프란의 죄 없는 머리칼이 한 움큼 뜯겨나간 그때였다. "누구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프란의 귀를 파고들었다. 프란은 머리에 손을 얹은 그 상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문 여는 소리에 깼는지 저 안쪽에서 유령 같은 그림자가 비척비척 일 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있었 다. 달마저 구름에 숨은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이 흐릿하지만, 프란은 그 자리에 선 남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프란은 주 먹을 쥐었다. 그리곤 여태껏 했던 모든 걱정을 담아 그를 호명했다. "느끼 버터!" "……프란?" 어차피 들어올 건 이진느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온이다. 그래서 그 는 '느끼 버터'라는 호칭에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시온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시선만을 돌려 어둠이 주 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이편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다.' 프란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어둠이 눈에 익자 희미했던 시온의 실루엣이 점차로 뚜렷해졌다. 시 온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해 그 잘난 얼굴이 지저분해져 있었고, 도대체 며칠이나 밤을 샜는지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되고 머리는 산발이다. 밥도 제대로 안 먹은 것 같다. 가뜩이나 날씬했 던 자식이 더 홀쭉해지지 않았는가.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했던 시온이었기에, 그 모습은 프란에게 큰 충 격이었다. 프란은 몇 번이고 속으로 제길,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꼴인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왔어야 하는 거였다. "진짜…… 프란이야?" 프란이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 때, 시온은 한 발 한 발 프란 쪽으로 다 가오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 흔히 그러 듯, 의심과 환희가 혼란스럽게 섞인 얼굴을 한 시온은 이게 꿈은 아닐 까 멍하니 생각했다. 방이 어두웠던지라 저 편에 선 프란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시온은 안타까움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 때, 구름에 숨었던 비 나룬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의 눈이 굳어진 건 그 순 간이었다. "피가……." 시온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프란의 온 몸이 피에 젖은 걸 봤기 때 문이다. "아, 이거? 내 피 아니다." 닦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굴에 묻은 피 를 닦아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씩 한 번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허나 시온은 속지 않았다. 프란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이려 안 그 순간, 그녀가 움찔하며 옆구리에 손을 가져가는 것도 동시에 보았디 때 문이다. "다쳤지? 거기." 정확히 옆구리를 가리킨 시온 때문에 프란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래봬도 영광의 상처다." 프란이 으하하 웃으며 말했음에도 시온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 다. 그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더니 길쭉한 약병 하나를 들고 왔다. 깨끗 한 붕대도 함께다. "괜찮은데……." 프란이 몸을 뒤틀건 말건 시온은 프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곤 그녀의 옆구리에 약을 발랐다. 따끔따끔한 약이 상처를 훑은 후, 시온이 부드 러운 손놀림으로 붕대를 감는다. 이 다정한 손길 때문에 프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난 치유마법, 잘 못하니까." "소를 하늘로 날렸다는 전설은 들었다." 프란이 농담하듯 말하자 그제야 시온이 웃었다. 시온은 몸을 벌떡 일 으키더니 아무 거리낌 없이 팔을 들어 프란의 얼굴은 닦아내기 시작했 다. 기겁하는 프란의 손을 가만히 치워내며, 시온의 최고급 원단으로 만든 자신의 상의로 피투성이인 프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고." 프란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우후 하고 외치면 차라리 편하련만, 굳어 있는 시온의 눈동자는 진지할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애달픈 얼굴을 하고 있던 시온의 얼굴 에 한 순간 금이 쩍 갔다. 시온은 가만히 팔을 내리곤 뚫어져라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거의 다 지워진 탓에, 지금 막 프란의 얼굴이 뚜 렷하게 보이는 시온이었다. "어이." 프란이 불길함에 불렀을 때, 시온의 어깨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프 란은 시온이 왜 그러는지를 바로 눈치 챘다. 프란이 제기랄 하고 중얼 거리는 동안, 시온의 어깨가 약 10초간 조용히 경련했다. 그리고 10초 후, 더 이상 참지 못한 시온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와하하하!"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얼굴을 했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게도, 시온 은 위까지 경련할만한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눈 꼬리에 눈물까지 매달려 있는 걸 보니 보통 웃긴게 아닌가 보다. 프란은 이를 으득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 "하하하, 예술인데! 그 화장 대체 누가 한 거야? 게다가 번졌어. 와하 하!" "웃긴 거 아니까 그만 해라." "하하하하!" 프란이 신경질을 내건 말건 시온은 진심으로 웃었다. 그 큰 눈이 보 이지 않을 만큼 왁자하게 웃으며 시온은 프란을 보았다. '아아, 즐겁다. 프란이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지는 구나.' 잠시 생각했던 시온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화장 못하는 일곱 살 여자아이가 한 것도 그것보다는 낫겠다, 프란. 다음엔 나한테 맡겨." 그 말에 프란이 시온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맡기긴 뭘 맡기라는 거냐." "사랑의 힘으로 아름답게 해줄게." 시온은 오른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프란은 그 느끼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방금 전에 시온이 짓고 있던 애달픈 표정보다는 차라리 이 느끼함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빛은 전형적인 폐인 마법사 같은 시온 아일린은 계속해서 웃었다. 얼마나 그렇게 웃었을까. 시온은 천천히 웃음을 거뒀다. 그리고는 차분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말했다. "무사했네? ……옆구리 상처는 빼고." "까딱없다." 프란이 당차게 대꾸하자 시온은 활짝 팔을 벌렸다. "그래, 무사했던 거야……." "이 느끼 버터 놈, 시간 없다니까!" 프란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시온은 이미 손을 뻗어 프란의 어깨를 감 싸 쥐고 있었다. 그는 프란의 쇄골에 단숨에 얼굴을 묻었다. 프란의 존 재를, 프란이 무사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무사했다. 무사했어. 진짜 프란이다.' 프란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피에 젖어 있다는 사 실 때문에, 잠깐 뒤로 밀려났던 재회의 기쁨이 이제야 비로소 밀려왔 다. 프란을 품에 안은 시온은 한동안 말조차 잇지 못했다. "야, 이거 놔!" 길길이 날뛰고 있던 프란은 한참 만에 결국 몸에서 힘을 빼고 말았 다. 마치 뮤처럼 자신의 품에 꼭 매달린 시온니 안쓰러워서다. 프란은 어설픈 손놀림으로나마 시온의 등을 잠시간 다독여주었다. 그러면서 프란은 입을 열었다. "어쩔 셈이야?" 딱 한마디였지만 시온은 프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그는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무사한 덜 봤으니 오늘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나가고 싶 어." 이럴 줄 알았다, 이 자식. 프란은 활짝 웃었다. 시온이 아일린 가주 자리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처음부터 알고 있던 프란 이다. "너 대마왕한테 선전포고까지 했잖아?" 시온이 보낸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프란은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 다. 그러나 시온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프란을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 정말은 조금도 원하지 않아." "뭐라고? 그럼 그걸 정말 네가 보냈단 말이냐?"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이진느가 시온의 이름을 훔쳐 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뭘 생각했는지 프란의 눈이 움찔 떨렸다. "날, 만나고 싶어서라고?" 시온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넌 그 자리 원하지 않았잖아." 프란은 울컥거리는 심장을 안고 물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 좀 작작해라, 응?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넌 네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이 있잖아. 그걸 잡아! 네가 희생해도 조금도 기쁘지 않단 말이다!" 시온은 얼굴이 붉어진 채 외치고 있는 프란을 보았다. 생각하는 그대로 계산 없이, 사심 없이, 그대로 말하는 솔직한 프란. 시온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아님…… 모른 척하는 거야?" 프란의 어깨가 굳었다. 시온의 눈이 오롯이 프란을 향했다. "널 사랑하니까, 프리나." 농담이 완전히 사라진 시온의 눈이 프란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시온은 나직하게 덧붙였다. "너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으니까." * * * 키네온이 나가고 난 응접실, 반과 키네세스는 단둘이 남겨졌다. 할 말은 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련만 키네세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 다. '그동안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당신은 알기나 할까?' 키네세스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반에게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녀는 여염집의 여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공주.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언어가 되지 못한 마음은 키네세스의 여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리 게 만들었다. "애써주셨다 들었습니다." 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하며 반이 입을 열었다. 키네세스는 한 참 동안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간신히 그 말에 화답할 수 있었다. "도움이 못 되었는 걸요."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진심으로, 키네세스는 반의 도움이고 싶었다. 키네세스는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흘 렸다. 그만 포기하라고, 저스티스 경은 죽었다고 소리치던 아버지의 목 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모든 충격과 절망 속에서도 키네세스는 믿 음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렸다. 그는 돌아올 거라고. 무사히, 언제나의 모습으로. 한참의 침묵을 뚫고 키네세스가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당신의 카르멘도, 아일린도 원 하지 않아요." 이번에도 공주의 말은 진심이다. 반은 그걸 알고 있었다. "당신이 떠날 때 내게 그랬어요. 돌아오면 답을 주겠다고." 계승식을 위해 떠나던 날, 반은 키네세스에게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돌아와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야말로 대답해야 한다. 몇 년간이나 오롯이 자신만을 향했던 공주의 애정에 답해야 한다. 반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반이 막 한마디를 뱉어내려는 그 순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반은 움찔했다. "지금 당신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가문과 왕가, 마법사와 검사, 아일린과 카르멘…… 그러지 말아요. 그 모든 문제들과 나를 연 관시켜 생각하지 마세요." 키네세스는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해주세요. 당신이 안정되면, 당신이 가문을 찾으면…… 그 때, 오직 나만 생각하고 답을 해줘요." 호수빛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더욱 청초해진 공주가 웃는다. 그런 키 네세스가 몹시도 아름답다는 것을, 반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다만 하나는 기억해줘요, 카르멘 경. 공주라는 신분 따위 상관없을 만큼, 당신이 누구였든 상관없을 만큼, 그만큼이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 다는 사실을." 키네세스는 완전한 여인의 얼굴을 한 채 말했다. * * * 고백 같은 건 많이 들어봤다. 득시글한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싸움 잘 하는, 왕 형님 같은 공주' 취급 받아본 적도 있다. 로네이트에 있을 때도 인기는 만점이었다. 그 러나 지금만큼 당황해 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모든 것을 무릅쓰 고 사랑을 고백해온 사람은 여태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프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젠 '헛소리 마!' 하고 날아 차기를 먹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프란이었다. 저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프란은 있는 대 로 오두방정을 떠는 것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이,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곧 너희 어머니가 올 거다. 그 전에 나 가야지."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시온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시온의 시선이 등 에 꽂히는 것을 느끼면서도 프란은 사방을 있는 힘껏 들쑤셨다. 외부에서밖에 열 수 없다고 한 문이 닫혀버렸으니 사실상 갇힌 것이 나 마찬가지였지만 프란은 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설마 어 디엔들 틈이 없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온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그거, 형님 검?" 검집만 봐도 안다. 아무 무늬가 없는 검은색의, 그러나 자신이 감싸고 있는 것이 천하제 일 명검임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검집. 저 검집이 숨기고 있는 것은 분 명 루니아 블레이드! '도대체 왜 저걸 프란이?' 저 검은 그 자체로 가주의 상징이다. 카르멘 가 가주의 둘도 없는 표 식이란 말이다. 시온의 경악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문을 빵빵 차대고 있 던 프란은 이번엔 벽을 향해 다가갔다. "형님 검, 맞지?" 안 되면 벽을 박살내면 되지, 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프란이 엉? 소리 를 내며 돌아보았다. 시온의 눈은 루니아 블레이드의 검집에 고정되어 있었다. 프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검집을 툭 건드렸다. "이거 말이냐? 대마왕이 빌려줬어." 그 대답에 시온은 허탈한 듯 웃었다. "형님이 그걸 빌려주다니……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어 마지막 말을 할 때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 도가 되었다. 그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프란은 벽을 향해 발 길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부로 만든 것도 아니고 벽이 박살날 리 없다. 프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온을 돌아보았다. "너도 빨리 마법 좀 써봐라. 너랑 나랑 같이 하면 어떻게든 될 거 아 냐?" 프란의 말에 시온이 가까이 다가왔다. 드디어 힘을 쓰겠군, 하며 프 란이 기대하며 올려다보는 가운데, 시온은 가만히 손을 뻗어 프란의 머 리칼을 쓰다듬었다. 곧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프란. 나는……." 그때였다. "쥐새끼 같은 년!" 쾅! 문 열리는 소리에 프란과 시온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최악이다!'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 밖에 그 여자, 이진느 아일린이 서 있었 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라딘 여섯, 정초원 인사 다섯과 함께였다. 초조 하게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던 프란은 그 인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레오니아를 발견했다. 레오니아는 무심한 얼굴, 우리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법한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둘러대기 위해 위장을 했었는지 레오니아의 팔엔 쓸린 자국까지 나 있었다. 프란은 그런 레오니아를 보며 피식 웃 음을 흘렸다. '진짜 멋있는 여자네.' 프란은 눈을 빛냈다. 모두가 이 탑 안에 갇히는 황당한 사태를 방지 하기 위해서인지, 프란을 도와주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니 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 바람에 마법에 의해 자동으로 닫혔어 야 할 문은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였다. 프란은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모두 열둘. 시온이 마법을 쓰고 자신이 그사이에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 영 탈출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진느가 고함을 쳤다. "저승길에 제 발로 들어왔구나!" "내게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시온이 빈정거리듯 말을 받았다. 이진느는 그 말을 무시하며 세라딘 을 향해 눈짓을 했다. 눈짓의 의미를 간파한 세라딘 여섯은 엄중한 얼 굴로 시온에게 다가왔다. 일단 시온의 신병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 러나 프란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건들지 마!" 프란은 순식간에 검을 뽑더니 그것을 가로로 누이며 시온의 앞을 막 아섰다. 이진느의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검의 정체를 알아보았기 때문 이다. "루니아 블레이드군. 저년 검부터 빼앗아!" 세라딘이 시온와 프란을 둘러쌌다.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둘 상대하 는 것만으로도 죽을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떻게 든 될 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프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의지가 너 무도 강렬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세라딘조차 일순 망설였다. 프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프란이었지만 그녀의 눈만큼 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프란이랑 같이 가면 참 좋겠다.' 그 눈을 보며 시온은 생각했다. 이대로 프란을 안아들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따위 짓거리 모두 때려치우고. 그러나 시온은 웃었을 뿐이다. 프란 은 순식간에 그 웃음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프란도 하루 이틀 봐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란은 영 엉뚱한 오해를 했다. 시온이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걱정마라, 느끼 버터. 같이 나가자!" 엄청난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란은 포기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마로 여기를 뚫으려 하고 있었다. "주제에 마법사니까 너도 도와라." 나직한 프란의 말에 시온은 파안대소할 뻔했다. '주제에 마법사'라 니. 내가 그렇게 신용 없는 인간인가? 시온은 손을 뻗어 프란의 머리카 락을 다시 한 번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곧장 뱉어냈다. "프란. 난 안 가." 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세라딘은 물론이고 이진느조차 얼굴을 굳혔다. 나간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를 땐 언제고 저게 무슨 말인가 싶 었던 것이다. 프란 역시 경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뭐? 어째서?"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형님이 내 앞에 온다면 모든 게 설명될 거야." 프란의 눈동자가 이 뜻밖의 말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시온, 그런 눈으로 말하지 마라. 세상이 다 끝장난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진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저년을 잡아!" 프란만 확보하면 원하는 대로 시온을 부릴 수 있다. 그걸 알고 있기 에 이진느는 그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진느는 싸늘한 시온의 눈을 마주해야 했다. '이 녀석 도대체……!' 이진느가 서늘함을 느꼈을 때, 시온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말려 올라 갔다. "어머니. 여기를 감싸고 있는 결계는 6써클 후반이더군." 이진느가 움찔했다. 위저드 리그와 이진느가 알기로 시온은 아직 6써클 중반의 마법사였 다. 그래서 시온을 가둔 이 방을 감싸고 있는 결계는, 그의 말대로 6써 클 후반의 마법이었다. 지금은 방문이 열려 있어 출입이 가능하지만 이 상태로도 결계는 작동하는 것이라서, 이 안에선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7써클 이상이 아닌 한. 프란이 막 공격에 막 돌입하려던 그 때, 시온은 입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 리고 있었다. 세라딘 여섯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시온이 공격한 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온의 온몸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빛났다. 프란 이 침을 꿀꺽 삼키는데, 시온이 씩 웃어보였다. 그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내가 아직도 6써클로 보이지? 하긴, 어머니가 그런 걸 알 리가 없 지." "뭣이?" 시온은 손을 척 들었다. 프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온의 몸에서 뻗 어 나온 빛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이게 처음 써보는 거지만 아무래도 나, 7써클에 진입한 것 같거든." 이진느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 순간, 프란은 자신의 온몸을 뒤덮는 찬란한 빛을 보았다, "느끼 버터. 이 자식!" 프란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 다. 예전에 아일린 가에서 탈출할 때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다. 시온이 플라이를 시전 했던 그때! 그때도 이렇게 온몸이 흩 어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시온! 야!" 프란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서 곧장 흩어졌다. 그리고 프란의 온몸을 감쌌던 그 눈부신 빛이 멎었을 때 그 자리엔 프란도, 프란의 커다란 목 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공허. 시온만이 프란이 사라진 그 공간에 비틀거리며 서 있을 따름이었다. "시온, 너?" 이진느는 눈을 부릅떴다. 나머지 사람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경악에 가득한 눈초 리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온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온의 어깨가 파도처럼 들썩인다. 처음으로 7써클 마법을 시 전 한 것이니 그로서도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시온 도련님……." 세라딘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온을 불렀다. 마법을 잘 알지는 못해도 한 써클을 건너뛸 때마다 적어도 십 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써클이 높아질수록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모두가 놀란 것 은 시온이 7써클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진느가 경악을 대신해 소리쳤다. 시온은 웃으며 답했다. "난 진짜 천재일지도 몰라. 며칠 전부터 느낀 건데, 내 안에서 마나가 7개로 원을 그리더라고." 이 사실을 자켄린이 알았더라면 그는 정말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십 년 안에 7써클을 마스터할 거다, 라는 말조차 제자의 재능을 십분 인정 하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단 몇 달 만에 이 괴물 같은 시온 아일린은 6 써클을 마스터하고 7써클로 진입해버린 것이다. 이 속도라면 7써클을 마스터하는 기간 역시 예상보다 훨씬 짧아질 것이다. "그럼 왜?" 이진느가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왜 여기서 나가지 않았던 거지!" 시온은 힘없이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7써클 마법이 그리 호 락호락할 리 없어서, 그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래도 시온은 어머니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글쎄. 곧 형님이 돌아올 텐데, 도망치는 건 성에 안 차잖아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프란은 그 바람의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렸다. "이 미친 자식…… 미친, 미친 자식……."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프란은 라어 강 바깥으로 정확히 워프 되 어 있었다. 예전처럼 누군가가 받아줘야 할 정도로 거친 마법이 아니었 다. 부드럽고 안전하게 모래사장으로 워프된 것이다. 시원한 공기가 주변을 맴도는 지금에야 프란은 알 수 있었다. 시온은 혼자서도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어쩔 셈이냐, 너……." 프란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주먹이 까졌으면 차 라리 마음이 편했으련만, 질퍽한 모래사장은 부드럽게 프란의 주먹을 감쌌을 뿐이다. "제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와주겠다고 들어갔는데 오히려 폐만 끼쳤다. '아직도 모르겠어?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널 사랑하니까, 프리 나. 너 말고는 갖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시 한 번 선명하게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입술을 깨물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로 돌아갈 것이다.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멈추지 못했다 해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 * * 프란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일었던 아일린 가는 거짓말처럼 다시 고 요해졌다. 느지막한 새벽에 있었던 소동들이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 깨끗하게 지워져간다. 그러나 아일린 가의 모두가 다음 날을 준비하는 그 아침에도 이진느 아일린만은 핏발 선 눈으로 어제의 소동을 생각하 고 있었다. "레오니."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이진느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레오니아를 불렀다. 레오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레오니아로서는 다행스럽 게도, 어젯밤 소동에 그녀가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밧줄에 쓸린 자국을 만들어낸 덕이기도 했지만, 이진느 가 레오니아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가 더 컸다. "네가 보기엔 시온이 무슨 생각릉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이진느의 질문에 레오니아는 당혹했다. 어머니가 모르는 아들의 심 리를 제삼자인 자신이 알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다만 레오니아는 자신 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대던 프란을,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시온이 갇 힌 탑 앞으로 달려 나가던 그 자신만만한 뒷모습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 위로 더없이 쓸쓸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시온의 얼굴이 겹쳐졌다. "무슨 속셈인지를 모르겠어."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닌 듯, 이진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프란 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 굴었던 녀석이 프란이 나타난 순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다니.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래도 이진느는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었다. 시온은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던 걸 보면 7써클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비밀로 할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 지만 프란이 위험에 처하자, 시온은 자신이 7써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만방에 공개했다. 그만큼이나 프란이 중요하다는 증거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이진느는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레오니…… 젠을 데려와라." 이진느의 앞에서 다소곳하게 양손을 모으고 있던 레오니아의 눈이 일순 커졌다. 방금 전 이진느가 말한 '젠'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도 익 숙했던 탓이다. "일곱 번째 세라딘 말인가요?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무언가를 말하려던 레오니아는 이진느의 눈을 보며 고개를 숙 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진느는 대꾸를 용납지 않는 위압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레오니아는 직감적으로 이진느가 생각한 바를 눈치 챘다. 상대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약점을 잡으면 된다. 그것이 이진느 아일린이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다. 아들 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터. 이진느는 시온의 확실한 약점인 프란을 잡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젠이라니!' 레오니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제 1장_탑에 갇힌 왕자님' 끝 - 후아아 드디어 4일 동안 이것만 쳐서 끝냈습니다. 조금만 수면을 보충한 뒤에 다시 2장을 치기 시작하겠습니다. -새군- 당신들은 8000원 + 새군의 손가락 땀이 담긴 텍본을 눈팅하고 계십니다. 제 2장_거짓말 프란은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형님이 내 앞에 온다면 모든 게 설명될 거야.'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프란은 죄 없는 말을 자 꾸만 채찍질했다. 어찌나 서둘러 달려왔던지, 6일이 걸렸어야 할 귀환이 4일 만에 끝났 다. 그사이 안 입고 안 씻고 안 잔 프란의 몰골은 거지가 '아이고, 형님. 그동안 고생 많았소.'하고 넙죽 엎드릴 만큼 지저분해져 있었다. 거기 다가 동방 여왕 화장이 어찌나 독했던지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은 탓에, 프란의 얼굴은 공포 수준이었다. 국경 지대에서는 병사들이 귀신이라 며 야단까지 피웠다. '드디어 도착이다.' 그 모든 수난을 넘어 마침내 카르멘 가의 황금문 앞에 도착한 프란은 숨을 헐떡이며 문지기들 앞으로 다가갔다. "헉!" 그러나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 문지기들조차 프란을 알아보지 못했 다. '내 꼴이 그렇게 심한가?' 프란은 민망함을 느끼며 나야, 하고 말했다. 허나 문지기들은 '이 도 깨비가 누구든지 간에 황금문을 지켜 보이겠다!'라는 굳건한 의지로 무장한 채 프란을 향해 장창을 들이대고 있을 뿐이었다. 프란으로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할 수밖에. "이것들 보라고. 나, 프란 프리텐이란 말이다!" "뭣이?" 생각도 못했던 듯, 문지기들은 창을 내려놓은 채 서둘러 프란 앞으로 달려왔다. 문지기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프란의 얼굴을 보고 있던 그때였다. "프리나. 꼴이 그게 뭐야?" 프란은 목소리가 난 뒤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부른 맹수마냥 프 란 쪽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흑발의 남자가 보인다. 하질리언 이다. "어딜 갔다 온 거냐?" 문지기들이 문을 여는 사이, 프란은 옆에 선 하질리언을 향해 물었 다. 카세타에 연고지라곤 없는 하질리언이 저택 밖에 나와 있는 게 의 아했던 탓이다. "심심해서 산책했어. 나한텐 아무 일도 안 시켜서 시간이 남아돌거 든." 하질리언은 그렇게 답함과 동시에 프란의 위아래를 침착하게 훑어보 났다. 하질리언이 대뜸 웃음부터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던 프란은 예상 외로 한참 동안이나 하질리언이 웆지 않자 도리어 당황했다. "어, 어이. 왜 안 웃는 거냐?" "네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웃을 마음도 안 나." 담담한 얼굴로 '심하군'이라는 평을 내리는 폼이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다. 프란은 이 자식, 하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이상한 차림인 게 하 질리언 탓도 아닌데 뭐 어쩔 것인가. 괜히 뒤통수나 슬슬 긁어대는 프 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표정이 안 좋네. 일이 잘 안 풀렸어?"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이젠 어 떻게 해야 한다. 루니아 블레이드도 갖다 주고 앞으로의 일도 의논해봐야 지. 마음을 굳힌 프란은 반의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섰다. 그제야 프란 이 어딜 가는지 눈치 챈 하질리언은 기겁한 얼굴로 프란의 어깨를 붙잡 았다. "혹시 미남한테 가는 거야?" 하질리언이 반을 호명하는 단어는 어느새 '미남'으로 굳어져 있었 다. "어. 왜?" 프란이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자 하질리언의 얼굴이 망가졌다. '네 얼굴 보면 미남이 기절할 거야. 나나 되니까 참고 보는 거지.' 하질리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얼굴레 묻은 그 이상한 것부터 좀 지우고 가지 그래? 게다가 미 남, 지금 방에 없어." 프란은 놀랐다. 아일린 가와의 일전을 앞두고 가문을 비우다니 반답 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떄문이다. "어디 갔는데?" "나야 모르지. 오후쯤 나갔어. 곧 올 거야." 하질리언은 프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내 방에 가자. 너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녀에게 말해 화장 지우는 용액과 솜을 얻어온 하질리언은 일을 시 작하기에 앞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엄청난 작업이겠군. 화장이 아니라 독이다, 독.' 며칠 동안이나 이 상태로 있었다면 자연히 지워져야 하는데, 이건 도 대체 무슨 수를 써서 한 화장인 건지 지워지기는 커녕 아예 프란의 피부 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아악! 아파!" 한순간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아무래 도 평범한 화장 지우기 용액으론 무리라는 생각을 한 하질리언이 손톱 으로 프란의 얼굴을 긁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됐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하질리언의 손을 단호하게 쳐낸 프란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 리곤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화장은 때로 만들어 벗 기려는 것이다. "프리나. 나 궁금한게 있어." 여전히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면서, 프란은 고개를 돌려 하질리언을 보았다. 그런 프란의 얼굴에 손바닥 길이만 한 긴 떄가 붙어 있는 게 보 였다. '이젠 심한 게 아니라 참혹하군.' 하질리언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프란이 물었다. "뭔데?" 프란의 얼굴이 웃기긴 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자기 할 말을 못할 하 질리언이 아니다. "네 빚 말이야, 언제 끝나?"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빚이라. 때로 화한 화장을 잡아당기며 프란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시온을 데려오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대마왕 이 그랬었다. 그러나 프란은 떠나는 그 순간부터 그 약속을 까맣게 잊 어버렸다. 시온을 신경쓰느라 빚을 생각할 여유 따윈 전혀 없었던 것 이다. 빚쟁이 주제에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싶어 프란은 웃었다. "나도 몰라. 일단 남은 건 1천5백만 케트." "뭐라고?" 하질리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났 던 탓이다. 로이네트 시절 현상금이 3천5백만 케트나 됐다는 데서 눈치 챘어야 했다. 1천5백만 케트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액수를 빚질 수 있는 건데?" "나도 궁금하다. 빌어먹을 아버지 같으니." 말은 험하게 뱉었지만 프란의 얼굴에는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다. 의외로 빨리 갚을 수 있을 지도 몰라." 하질리언은 더더욱 놀라응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많이 나아진 거라면 처음엔 대체 빚이 얼마였다는 소린가? 하질리언은 때로 화한 화장 찌 꺼기가 온 얼굴을 뒤덮어 더 이상은 사람의 형상이 아닌 프란이 갑자기 안쓰럽게 느껴졌다. "빚은 왜?" 화장을 다 밀어냈다 싶었던 프란이 자신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제야 프란이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본 하질리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프리나. 그 빚 다 갚으면 나랑 사업하지 않을래?" "엉?" 프란은 뚱딴지같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사업 파트너론 최고거든. 나도 이제 용병 생활 접고 뭔가 건실한 일을 하고 싶고. 로이네트에서 일하면서 모아둔 돈이 좀 있어. 네가 동 의만 한다면 사업 자금은 내가 댈게. 프리텐 가 일으키는 일부터 시작 해도 상관은 없고." 프란은 곧장 대답을 못했다. '사업이라고?' 물론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빚을 다 갚고 나면 제일 먼 저 할 일은 락케이드를 데려오는 거지만, 프리텐 가의 사업을 재건하리 라는 꿈도 한 번쯤은 꿔봤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빚의 액수를 생각해보 면 어디까지나 꿈이었을 뿐이지만 꿈꾸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기사 서임을 받는다면 아버지의 옛 거래처들과 다시 인연을 맺는 일 도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상상이 구체화될수록 프 란은 가슴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왜 또 이 모양이야?' 하질리언은 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프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관찰의 시선이었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프 란은 깨닫지 못했다. "괘, 괜찮은 생각이다. 빚 다 갚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한참 만에 하질리언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상기한 프란이 말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질리언이 히죽, 참으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뭐, 뭐냐. 그 얼굴은!' 순식간에 소름이 돋은 프란이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하질리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라비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프리나. 됐어. 그 건은 다음에 얘기하자고." 프란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의아한 얼굴을 해야 했다. * * * 반은 궁성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피곤하다' 마차 안에서 반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키네온으로부터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을 빌리는 데 성공한 반은 요 즈음 빈번하게 궁성에 출입하고 있었다. 처음에 7써클 마법사 라톤을 위시한 궁중 마법사들은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지?'하는 얼 굴로 반을 맞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은 궁중 마법사들 자신 의 손으로 카세타 제 2궁을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장본인과 손잡고 그의 집을 되찾는 작전에 합류해야 한다니. 반으로서도 인사조차 제댜로 하지 않은 마법사들과 손잡고 일을 해 야 한다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게다가 천생이 검사인 반과 천생이 마 법사인 그들은 작전을 짤 때도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해서, 오늘 역 시 수확이 전혀 없다고 해도 좋았다. "가주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며 정중하게 말했다. 반은 마차에서 내려섰다. 궁중 마법사들과 다투다시피 하고 돌아온 지금도 반의 일정은 다 끝 나지 않았다. 식사를 한 직후 그는 검사들의 검을 봐주러 가야 한다. 그 일이 끝나면 마린이 싸들고 올 어마어마한 서류들의 러브 어택을 감당 해야 하고 그 후엔 룬 등의 아인켈, 켈리 등의 비켈린을 대동한 채 카르 멘 가 검사들과 작전을 상의해야 한다. 프란이 아일린으로 떠난 직후 꼬박 열흘간, 반은 이토록 무리한 일정을 감당하고 있었다. 장미 정원을 지나친 반은 저택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웬일 인지 반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쯤엔 늘 저택 문 밖에서 대기하곤 하던 호위무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히죽히죽, 속을 알 수 없게 웃어대 는 이상한 남자가 호위무사들을 대신해 저택 앞에 죽치고 앉아 있을 뿐 이다. "여! 미남." 이상한 남자, 하질리언은 반이 보이자마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꼴을 보니 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성싶었다. "미남이라고 부르지 마라." 반의 차가운 대꾸에 하질리언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런 걸 신경 썼던가, 미남? 난 내가 미남이라고 부르면 재깍재깍 돌 아보기에 '너도 네가 미남인 줄 알긴 아는구나.'하고 생각했는데." "헛소리." 이 차가운 대꾸에도 하질리언은 굴하지 않았다. "내가 널 '가주님'이라고 부르는 건 웃기잖아? 그렇다고 '저스티스 카르멘 경'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미남이 제일 적당하다 고. 왜, 너 미남 맞잖아?" 능글능글한 말투였다. 헤냔이라면 기가 질려 악 소리를 냈겠지만 반 에겐 통하지 않았다. 반은 하질리언이 떠들건 말건 완전히 무시한 채 저택 안으로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래도 하질리언은 무너지지 않 았다. 그는 반의 뒤통수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을 붙였다. "미남, 요새 통 못 자더라? 요전에 보니까 새벽 네 시에도 불이 켜져 있더라고." 그 소리에 반은 걸음을 멈추었다. 확실히 요즘 못 자긴 했다. 엄청난 업무를 헤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쏟아지는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던 매일 매일이었다. 반이 걸음을 멈추는 걸 확인한 하질리언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 섰다. "너 요새 일정이 여섯 시부터지? 체력도 좋지. 어떻게 하루에 두 시 간도 안 자면서 그렇게 멀쩡하냐? 하지만 오늘로 그것도 끝이다. 이젠 푹 자도 될 거야." 반은 마침내 돌아서고 말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이젠 걱정하느라 잠 설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하질리언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이 오싹함을 느낄 틈도 없이, 하질리언이 말을 이었다. "프리나 왔거든. 네 방 앞에 있을 거야." * * * '바보 같은 소리.'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요 며칠 강행군 속에서도 잠을 못 자긴 했다. 하지만 그건 아일 린 가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어서였지, 프란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하질리언을 향해 '헛소리'라고 일침을 가하고 나서, 반은 자신의 방으 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방금 전까지 온몸을 뒤 덮고 있던 끈적끈적한 피로가 거짓말처럼 싹 가셨다는 점이다. 게다 가 반은 스스로가 의식할 수 있을 만큼 서둘러, 거의 뛰다시피 하며 계 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은가!' 누구에게 변명하는지도 모르는 채 반은 속으로 외쳤다. 그러는 사이 에도 발은 착실하게 움직여서, 정신을 차렸을 때 반은 어느덧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있다.' 그래. 정말로 거기에 프란 프리텐이 있었다. 뒤돌아 앉아 있긴 하지만 저 화려한 금발은 분명 프란의 것이다. 어 디 가서 안 오나 했던 호위무사 둘은 프란을 사이에 두고 잔뜩 신이나 뭐라고 시시덕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 가주님!" 호위무사 하나가 반을 발견했는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 두 사 람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프란이 자신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린 순 간 반은 흠칫하고 말았다. 10여 일 만에 돌아온 프란의 상태가 영 이상 했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꼴이지?' 프란은 돈 주며 입으라고 해도 거절할 법한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 다. 생선 비늘로 만든 것 같은,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슴 밑까지 푹 파여 있는 옷이다. 옷만 해도 충분히 이상한데 씻지도 않았 는지 프란의 온몸은 진흙과 먼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워낙에 무표정이 라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반은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반의 경악을 알 리 없는 프란이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자." 당혹을 수습하며 반이 말했다. 호위무사들이 서둘러 방문을 열어주 었다. 프란은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반의 뒤를 따랐다. 곧 철컼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이 들어간 방문이 잠겼다. 문이 닫힌 후, 호위무사 둘은 얼 굴을 맞댄 채 한참이나 쑥덕거려야 했다. "근데 쟨 무슨 저런 옷을 입고 있대?" "그러게. 살다 살다 저런 옷은 처음 봤다. 여자 옷 입은 거 처음 봤는 데, 저런 거라니." "진짜 괴상하군. 저런 취향이라면 불쌍할 정도다." 프란이 그 말을 들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아니야! 절대 아니란 말이 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 * * 방 안에 들어선 반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프란은 곤란한 낯빛으로 그 런 반을 보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도 반은 프란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 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씩 웃어보이던 녀석이 침울한 표정이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다. "여기요." 프란은 반에게 검을 내밀었다. 검을 받아들며 반은 프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프란은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예상대로다. 반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 만 프란은 그 얼굴이 묘하게 기뻐 보인다고 느꼈다. '착각이겠지. 기쁠 리가 있나.' 반이 루니아 블레이드를 말없이 허리에 차는 것을 보며, 프란은 고민 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나질 않자 프란은 곧 생각하는 걸 포기했 다. '에라. 그냥 말하자!' 프란은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저택에 들어가서 시온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만났다고?" 무심히 루니아 블레이드를 만지고 있던 반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감 정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는 반이기에, 프란은 그가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온과 만났다는 게 저렇게 놀랄 일인가 생각하자 프란 은 기분이 나빠졌다. '아일린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프란은 자존심이 상했다. 사람을 얕봐도 분수가 있지. "만났지만 시온은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의로 남아 있겠다고 그랬습니다." 한참 만에 반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뭐라고 그러던가?" "가주님이 자기 앞에 오면 모든 게 설명될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프란은 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담긴 것이 걱정과 혼란이라는 것을 반조차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다. 프란은 초조한 듯 물 었다. "어쩔 겁니까?" "아일린을 친다."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 때문에 프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시온을 데려올 기회를……." "싫다." 단칼이었다. '그렇게 자를 건 없잖아. 사람 민망하게시리!' 프란은 속으로 소리쳤다. 한 번 실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 지 단호하게 거절하니 꼭 못 믿을 녀석 취급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프란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시온은 스스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프란은 믿고 있었다. 시온은 절대 반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프란이 그런 생각 때문에 멍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데, 반이 기습적 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부터 다시 수행을 시작해라." "뭐요?" 프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너도 인간이냐, 앙? 나도 여독이라는 걸 좀 풀어야 할 거 아냐! 하루 쯤은 쉬게 해달라고!' 얼굴로 말을 하는 프란을 보며 반이 무심하게 물었다. "불만인가?" '으윽.' 그래. 빚진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야.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댔 다. 한참을 구시렁거리면서도 프란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반은 웃을 뻔했다. 우거지상을 한 채 억지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프란의 표정이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겠지.' 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며 얼굴로는 '싫 어, 이놈의 자식아!'하고 말하ㅏ면서도 대답은 늘 공손하게 '알았어요.' 였질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분 나쁠 법한 일인데도 반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게, 졸음이 왔다. '왜?' 몸이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조금씩 감긴다. 10일 동안의 수면 시간 을 다합쳐도 서른 시간을 넘기지 않은 자신인 만큼 잠이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프란이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고 있는 저 모습을 보면서 며칠 동안이나 이루지 못하던 잠이 쏟아지다니. 해괴한 노릇이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한순간 반은 재빨리, 또 한 번 누군가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했 다. 하질리언의 그 음흉한 미소가 생각나서 몹시 불쾌해지는 반이었 다. "왜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반의 미간이 좁혀진 걸 눈치 챈 프란이 물었다. 프란이 오렌지색 눈 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걸 보던 반은 화급히 말했다. "나가봐라." '뭐야, 진짜?' 웃기는 녀석, 하고 중얼거리면서 프란은 등을 돌렸다. 그 등에 대고 반이 잊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내일부터다." '알았다고 그랬잖아, 이놈의 대마왕!' 프란은 벌레 삼킨 듯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문을 열었다. 문 을 쾅 소리 내어 닫으면서 프란은 몇 번이고 나쁜놈,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프란의 마음속에선 두 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 오고 있었다. 진짜 사람 부려먹기 좋아하는 못돼 처먹은 대마왕이지만 그 대마왕 의 얼굴을 본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 아닌가. 당장 내일 부터 일을 시작하라는 것도 뭐, 생각해 보면 늘 있었던 일이다. '으아, 몰라. 피곤해 죽겠다. 일단은 자고 생각하자!' 고개를 휙휙 저은 프란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잘 거다. 잘 거라고!' 그날 밤, 프란은 씻을 틈도 없이 잠들렀다. 카리스라는 마법사에게 당했던 예전처럼 잠의 여신이 눈꺼풀에 수면의 가루를 뿌린 것 같았다. 프란은 물처럼 깊은 잠 속에 저항 없이 몸을 맡겼다. 새벽이 안개 빛 목 소리로 노래할 때까지, 프란은 꿈조차 꾸지 않고 잤다. 프란은 몰랐다. 그날 밤 반 역시 거의 같은 상태로 잠들었다는 걸. * * * 아일린 가와의 일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주듯 카르멘 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요즘 정신없이 바빴다. 평소에도 여덟 시간 이상 검술 훈련을 하는 견습생들은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 검술 연습 에 매진했고, 집사장 마린을 비롯한 집사들은 전투에 필요한 예산 측정 등으로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이토록 바쁜 카르멘 가 사람들 중에 유독 여유로워 보이는 이 들이 있다. 바로 주방 소속 하인들이다. 어차피 매일같이 수천인 분의 음식을 만들어내던 그들이니 입이 조금 더 늘어났다 해서 힘에 부칠 까 달기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방장은 오늘도 힘이 넘쳤다. 이 넘치는 힘으로, 주방장은 어제 막 돌아온 힘없는 주방 보조 프란 프리텐에게 물었다. "너말이다. 정식으로 주방에 취업할 생각은 없냐?" "전혀 없는데요." 프란은 감자 껍질을 서걱서걱 깎아내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 바람에 진지하게 물었던 주방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의 감자 깎기 기술은 이제 최고급이지. 난 오랫동안 신중하게 지 켜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건 네게 요리사로서의 싹수가 보인다는 것!" 프라이팬을 휙 내밀며 말하는 주방장 떄문에 프란은 결국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에잇! 제 검은 생선이나 감자를 다듬기 위해 갈고 닦은 게 아니란 말 입니다!" "너 지금 생선과 감자를 무시하는 거냐?" 주방장이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프 란은 오늘도 주방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푹 자긴 했지만 어깨 뼈가 두둑 소리를 내는 걸로 봐선 그 수면도 충분하진 않았던 모양이 다. 주방장은 몇 번이나 윽박질러도 '아, 글쎄. 내 검은 식칼이 아니라니 까요!'라고 대거리하는 프란과 실랑이하느라 오늘도 반의 새우튀김을 태웠다. "세인트 레이크 씨에서 잡아온 최고급 새우들이! 아, 안 돼!" 통곡하는 주방장을 보며 프란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프란의 옆에서 당근을 깎고 있던 뮤가 그런 프란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프란, 아파 보여.'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뮤만은 알고 있었다. 프란이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감자를 깎다보니 옆구리를 움직여 야 해서 프란이 간간히 인상을 찌푸렸던 탓이다. "많이 아파, 프란?" "응? 어, 어떻게 알았어?" 놀라는 프란을 향해 뮤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프란의 부대에 담긴 감자를 가져와 깎기 시작했다. 프란은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 대신 뮤의 부대에 담겨 있는 당근을 꺼내 들었다. "프란도 참." 가볍게 원망하는 듯했던 뮤는 이윽고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곧 전투가 일어날 테고 사람들이 다쳐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뮤에겐 무엇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프란 역시 뮤 옆에서 나란 히 감자를 깎으며 조금쯤 행복한 기운을 느꼈다. 걱정은 산더미 같지만 그래도 이 착한 소녀에게까지 그 걱정을 넘겨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 다. "근데 프란. 들었어?" "뭘?"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뮤를 바라보았다. 뮤는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프란이 가까이 가자 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주님이 제 3공주님이랑 결혼한대." "엉?" 프란은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결혼이라 니? 멍한 얼굴로 돌아보는 프란의 눈에 몽롱한 얼굴을 한 뮤가 보였다. "프란이 아일린 가로 떠난 사이에 가주님이 궁성에 가셨거든. 그때 두 분 중 한 분이 청혼을 하셨나봐. 그래서인지 가주님, 요새 궁에 자주 드나드셔. 그게 다 키네세스 공주님과의 결혼 준비를 위해서래, …… 믿어져? 그 차가운 가주님이 결혼을 한다니!" 물론 반은 키네세스와의 결혼 준비를 위해 궁성에 가는 게 아니라 마 법사들과 '전쟁'을 하러 궁에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개 하녀인 뮤가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이 핑크빛 염문은 이미 카르멘 가의 나이 어 린 소녀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손에 넣을 수 없는 아름답고 차가운 가주가 공주님과 결혼한다는 사실에서 이상 한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중이었다. "소문을 들어보니까 가주님, 일전에 사선을 넘나드셨다며? 죽는다고 생각했더니 키네세스 공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아닐까? 아아, 진짜 로맨틱해!" 뮤는 꿈꾸는 눈동자로 말했다. 그렇게 허공을 향해 달콤한 눈빛을 던 지고 있던 뮤는 한참만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프, 프란?" 이제 이 주방에선 프란 프리텐하면 감자 깎기의 초절정고수로 통한 다. 그런데 그 절정고수께서 웬일인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뭉텅뭉텅 감자 살을 베어내고 잇었다. "왜 그래?" 뮤는 나사가 빠진 표정으로 감자만 깎고 있는 프란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초점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뮤 가 건드려도 모르는 것 같다. 프란은 감자 깎는 일을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처럼 죽어라고 감자만 깎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보다 못한 주방장이 다가와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갈겨버릴 때까지 말이다. * * * '결혼? 대마왕이?' 프라이팬으로 얻어맞은 머리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건만 프란은 오늘 도 '습관'의 힘으로 반의 방을 향해 크레인을 끌고 가고 있었다. 아직 도 뮤가 했던 말이 현실로 와 닿지 않은 프란이었다. "하하하, 대마왕이 결혼을 한다네? 애가 태어나면 대마왕 2세다, 와 하하!" 큰소리로 웃어봤자 바보가 된 느낌일 뿐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 무, 물론 공주님이 대마왕을 좋아하는 특이한 취미를 갖고 계신 건 알고 있었지.' 공주의 마음은 사랑에 대해 별로 고민해본 적 없는 프란에게도 강한 충격을 남길 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그 마음이 드디어 전해진 거라면 그건 분명 크게 축하해줄 만한 일이다. 공주님은 대마왕을 정말로 좋아 하고, 그런 공주님과 함께라면 대마왕도 언젠가 활짝 웃을 수 있을 테 니. 케인을 위해 울어주는 일도 언젠가 가능하겠지. 자신을 사랑해주 는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큰 위로니까. '뻥쟁이 같으니.' 허나 축하해줄 만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프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전, 아일린 가로 갈 때 대마왕은 그랬었다. '그녀와는 결혼하지 않는 다.'라고. 그런 주제에 사선을 넘어서 돌아오자마자 하는 일이 키네세 스와의 결혼 준비라니. 뮤의 말대로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한 순가, 공주 를 향한 사랑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쌩쌩 꼬마!" 반의 방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는 프란을 발견하자 기쁜 듯 다가왔다. 어젯밤에 프란이 돌아오자마자 방 앞에 앉혀놓고 이것저것 캐물었던 두 사람은, 그러나 프란이 어제와는 다르게 멍청한 표정을 하 고 있다는 걸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뭐 잘못 먹었냐?" "얘 상태가 왜 이래?" 평소의 프란이라면 방정을 떨면서 두 호위무사의 이야기에 맞장구쳐 줬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 한두 개가 핑핑 나가 있는 프란에게 평소의 행동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안에 있지?" 프란은 크레인을 툭툭 치며 물었다. 형식상의 질문이었고 사실은 문 을 열어달라는 뜻이었으나 호위무사 둘은 고개를 저었다. "안 계신다." 프란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분명 어제, 내일 당장 일을 시작하라고 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 주제에 밥 갖고 왔더니 먹지도 않고 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그래도 곧 돌아오겠지 싶어 프란이 그 자리에 서 있는데, 호위무사 한 명이 프란의 어깨를 쳤다. "아침 일찍 '궁성'에 가셨다. 문제가 좀 생겼나봐. 내 생각에 넌 오늘 쉬어도 될 것 같다." 그 순간 프란은 방금 전 뮤가 해줬던 말이 실체가 돼서 눈앞에 나타 남을 느꼈다. '가주님 요새 궁에 자주 드나드셔. 그게 다 키네세스 공주님과의 결 혼 준비를 위해서래.' 가슴이 말도 못할 만큼 아파진 건 그때였다. * * * '세키에 여신님. 저한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케이온 기사단의 마스코트, 헤냔 키에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헤냔이 카세타 왕실이 특별히 허락한 '휴가'에서 돌아와 기사단에 복귀한 지 이제 3주쯤 되었다. 기사단은 헤냔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장소였다. 그래서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를 기쁘 게 만들어줘야 마땅했다. 무시무시한 마이페이스 하질리언의 공격도 더 이상 없지 않은가. 그러나 뜻밖에도 헤냔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죽어버릴 거야." 매일같이 저딴 말을 하는 인간이 옆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헤냔은 당장 달려가 그 사람의 손목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리고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 만한 곳인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을 거다. 그러나 헤냔이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 는 사람이 이 세상에 딱 두 명 있다. 그리고 방금 전 죽어버리겠다는 말 을 한 사람은 그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시끄러워, 아나." 헤냔은 검을 닦으며 말했다. 이 무심한 반응에 더욱 화가 난 듯 아나 이스는 고함을 질렀다. "날 두고 여행 따위나 가버린 주제에 이렇게 냉정할 수사 있어? 게다 가 키르, 너! 성격도 이상해졌다고. 내가 아는 키르는 이렇지 않았어. 얼마나 순진했는데! 나의 순진빵 키르를 돌려줘!" "……누가 너의 순진빵 키르란 거야?" "타락한 주제에!" 밑도 끝도 없는 비난에 헤냔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좀 살자, 아나이스.' 하질리언에게서 드디어 탈출했다 싶었는데 이젠 타자를 바꿔 아나이 스가 헤냔을 괴롭히고 있었다. 평소의 아나이스가 슬슬 약을 올려가며 헤냔을 놀렸다면 최근의 아나이스는 그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예전 의 그녀라면 이렇게 우는 소리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죽 겠다고 말하면 '죽겠다고? 하하하. 어디 죽어보시지! 앙? 죽어보라고!' 하며 등을 뻥뻥 차댈 어이없는 인간이 바로 저 아나이스기 때문이다. 그래도 헤냔은 아나이스가 왜 이렇게 죽는 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 다. 런스 카르멘 때문이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땐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다. 단장님과 아나이 스가 사귀다니? 천지가 세번 개벽하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 줄 알았다. 기사단이 이 일을 가지고 떠들 때도 '아나, 이젠 헛소문까지 내는 구나.'하고 오히려 아나이스를 동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짜 환 장할 노릇은 이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데 있었다. 아나이스의 방에서 런 스의 자필로 씌어진 '러브레터'가 나오는 순간 헤냔은 피를 토하고 싶 은 심정이었다. "단장님, 이건 진짜 아니지 않습니까? 단장님이 뭐가 아쉬어서!" 절규하는 헤냔의 뒤에서 아나이스는 음흉하게 웃으며 '이제 그만 인 정하시지.'하고 소리를 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런스가 뭔가 특 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일만 끝나면 곧장 돌 아올 테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런스 카르멘 은 아직까지도 행방불명이었다. "아무래도 물어봐야겠어. 진짜 못 참겠다고." "뭘?" "달링은 처음에 키네세스 공주님이랑 같이 갔었어. 그 후로 뭔가 다 른 임무를 맡았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어쩌면 아직 거기에……." 아나이스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혹시 아직 아일린에 남아 있는 게 아닐까?'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탓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단장님이 아일린 가로 갔었다고?" 헤냔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나이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아나!" "뭐?" 갑작스러운 헤냔의 말에 아나이스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같이 가자 니, 어디로? "저스티스 카르멘 경이 마법사들을 만나러 오기로 한 날이야. 직접 가서 물어보자고!" 아나이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얼굴에 다소 안심한 헤냔은 여태까 지 백 번 정도 참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기분이 너무도 안 좋아 보여 여태 못했지만 사실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그 말을. "대신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단장님을 '달링'이라고 부르면 너와 절 교해버리겠어!" 헤냔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협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 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짖궂게 웃었을 뿐. "달링을 달링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순진빵 키르?" "순진빵 키르라고도 하지 마!" 헤냔은 버럭 화를 냈다. * * * '생각보다 더 힘들군.' 궁성 뜰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반은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궁성마법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던 그다. 반은 그들과 대화할수록 마법사들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 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실력으로 서열이 분명히 정해지고 그 서열이 곧 법인 검사들의 세계와는 달리, 마법사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해온 듯싶었다. 생각하는 건 또 어찌나 엉뚱한지 반으로서는 어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오늘 아침만 해도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아침도 못 먹고 왔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어제 회의 기록이 없어졌어요.'였다. 마법사는 모 두 천재라고 얘기한 게 어디의 어떤 바보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그래도 이왕 온 것, 작전 토의나 진행하려고 했던 반이다. 하지만 다 섯 시간이 지나도 불평만 가득 늘어놓을 뿐인 '마법사 놈들' 때문에 반 은 휴식을 선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휴식한다." 그런데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반의 심기를 잔뜩 건드리는 얼굴 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멘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스티스 경." 헤냔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헤냔의 뒤에 선 훤칠한 여기사는 딱 세 번 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반은 그 여기사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 나이스 폰 그란젤이라고 했었지. 두 사람은 다급한 얼굴로 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꽤 오 래 기다린 성싶었다. "무슨 일인가." "달링 아직 아일린 가에 있습니까?" 반은 아나이스의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달링이라디? "아나!" 마음속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는 반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헤냔은 얼굴이 빨개진 채 아나이스의 팔을 꾹 붙잡았다. 아나이스가 움 찔하는데, 헤냔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 단장님, 그러니까 런스 카르멘 경이, 아직 아일린 가에 있습니 까?" 반은 잠시 망설였다. 런스가 아일린 가에 있다는 건 룬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반이다. 그러 나 런스를 빼낼 뾰족한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런스가 카세타 전체로부터 사랑받는 케이온 기사단장이니만치 이진느도 쉽게 해하지 못할 거라는 셈은 있었다. "진짜로 거기 있는 겁니까?" 반이 침묵을 지키자 헤냔이 놀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이 남자의 침 묵이 긍정이라는 것 정도는 헤냔도 안다. "그래." 그 순간 아나이스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언제나 쾌활하던 아나이스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 과 마찬가지로, 방 금 전까지만 해도 홍조를 머금고 있던 헤냔의 얼굴도 질려 있었 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나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요구했다. 반은 아인켈 탈주 과 정에서 있었던 런스의 희생을 짧게 설명했다. 아나이스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밝히는 남자들조차 얼굴을 붉힐 정도의 저질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아나이스지만, 그녀는 사실 연애소설을 수백 권 소장하고 직접 쓰 기도 할 만큼 마음만은 여린 여자다. 헤냔은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아무 말 않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아나이스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아나이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서렸다. "아나!" 그 얼굴을 한 채로 아나이스는 등을 돌렸다. 헤냔이 놀라 불렀건만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헤냔은 놀란 얼굴로 그런 아나이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아직 반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의식하곤 고개를 돌렸다. 헤냔의 눈에 들어온 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헤냔은 그 얼 굴에 슬며시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뭡니까, 당신은? 단장님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수하였는데.' 반이 저토록 냉정한 걸 보니 분노가 치민다. '단장님. 이딴 남자한테 충성하지 말란 말입니다!' 멀리 있는 런스에게 속으로 소리치며 헤냔은 인상을 그었다. "단장님은 무사하겠죠?" "아마도." 간결한 대답이다. 헤냔은 가슴을 폈다. "그럼 됐습니다. 단장님은 제가 구할 테니까." 자못 도전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한 헤냔은 인사조차 하지 않고 반에 게서 등을 돌렸다. "아!" 그런데 아나이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가려던 헤냔이 한순간 발걸 음을 멈췄다. 잠시 고민하던 헤냔은 고개를 휙 돌리곤 건물 안으로 돌 아가려는 반을 향해 소리쳤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 반이 헤냔을 돌아봤다. "프, 프리나는 어떻게 됐습니까?" 물어보는 헤냔의 얼굴은 다시 붉어져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두 단장님 중 한 명이 위험한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묻지 않을 수 없었던 헤냔이다. 걱정이 가득 배어 있는 순진한 소 년 기사의 얼굴을 보면서, 뭘 생각했는지 반의 미간이 가만히 좁혀졌 다. 한참 만에 반은 차갑게 답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헤냔은 망연한 얼굴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은 등을 돌려 궁성마법사들에게로 돌아갔다. * * * 반이 궁성으로 간 차라 프란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평소라면 '아자, 검 수련!'하고 외치며 뛰어나갔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프란은 그냥 방 안에 처박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놀부 심보도 아니고 대마왕 결혼 소식에 왜 기분이 나 빠지냔 말이지. 프란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를 방해하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 안에 있어?" "뮤?" 프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자신이 프란에게 심란한 헛소문을 전해줬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채, 이 핑크색 머리칼의 소녀는 문 밖에서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프란.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나가지 않을래? 가주님도 안 계시잖아. 심부름거리가 있는데 프란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짐짓 태연한 척 얘기하고 있지만 목소리완 달리 뮤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심부름은 핑계고, 뮤는 프란과 함께 외출하고 싶었다. '괜찮을까?' 프란은 망설였다. 반이 만약 자신보다 일찍 돌아온다면 또 그 못돼먹 은 성질머리를 부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은 뮤의 반짝반 짝 빛나는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뭐. 어차피 잠깐 나갔다 올 거고 대마왕은 공주님이랑 시간 가는 줄 도 모르겠지.' 생각하다 말고 프란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돌아온 어제, 대마왕이 집을 비웠던 것도 키네세스를 만나러 궁성에 갔기 때문이라 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은 죽어라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넌 연애질이나 한 거냐!' 프란은 홧김에,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버 렸다. "좋아, 뮤. 뭐 사러 가는 건데?" 그 허락에 신이 난 뮤는 공중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헤헤. 윗분들만 드실 싱싱한 생선!" 하필 생선이냐,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프란이다. * * * 카르멘 가의 황금문을 나선 프란은 뮤의 인도에 따라 촐랑촐랑 걸어 갔다. 뮤는 그런 프란 때문에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누가 뭐라 해 도 뮤 입장에선 프란과 처음하는 데이트인 것이다. 프란은 아는지 모 르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자신들 쪽을 바라보는 것도 너무 기분이 좋다. '프란, 멋있어.' 뮤가 보기에 프란은 정말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언뜻 미소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시원시원하게 아름다운 여성처럼도 보인다. 그 래서 거리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간에 한 번씩 프란을 돌아보았 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거니까 누구든 건드리면 가만 안 둘 줄 알 아!' 뿌듯함과 독점욕을 동시에 느끼며 뮤는 프란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무서운 눈으로 쫓아 보내고 있었다. 막 프란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남 자도 '다가오면 물어뜯을 거야.'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뮤의 기세에 눌 려 물러섰다. "무슨 일 있어, 뮤?" 유난히 기세등등한 뮤를 보며 프란이 물었다. 뮤는 그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프란을 중앙시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씽씽, 완전 씽씽! 맛좋은 사과 맛보고 가세요!" "언니! 이 옷 한번 입어봐. 이 옷은 언니를 위한 거야!" 시장에 한 발을 내딛자마자 열기가 후끈 전해졌다. 프란은 저도 모르 게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시장 전체에 넘쳐흐르는 원초적인 삶의 열 기가 프란의 마음속을 깊게 한 번 휘젓고 지나가던 것이다. 값을 깎아 달라고 투정하는 손님, 입으론 절대 안 된다면서도 속으론 얼마나 깎아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가게 주인 사이의 가벼운 실랑이가 사랑스러 울 만큼 생기가 있어서, 프란은 저도 모르게 뮤만큼이나 들뜨고 말았다. "이쪽!" 가득 쌓인 사과를 보며 침을 삼키고 있는 프란을 뮤가 휙 잡아끌었 다. 뮤는 중앙 시장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수산 시장으로 들어섰다. "진짜로 많잖아. 우오!" 수산 시장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프란은 감탄하고 말았다. 중앙 시장 안에 위치한 수산 시장은 로네이트에서도 도매상이 내려 올 만큼 규모가 컸다. 뮤는 익숙한 걸음으로 시장 골목 곳곳을 누비다 가, 유달리 큰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주인 없어요?" 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큰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뮤? 흥정을 할 생각이야?' 생선 가게 주인을 눈앞에 둔 뮤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 나 평소의 뮤를 알고 있는 프란으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뮤가 누군가. 그야말로 '꿈꾸는 소녀'다. 상처입어 약해진 사람을 자 상하게 안아주는 따뜻한 소녀이기도 하다. 그런 소녀가 피도 눈물도 없 는 시장의 흥정과 어울릴 턱이 없다. '여차하면 내가 도와줘야지. 뮤는 마음이 여리니까. 에이, 왜 흥정하 는 일에 마음 약한 뮤를 보내?'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비싸다는 게 말이 돼요? 저번에 왔을 때는 분명 10% 이상 쌌 다고요!" 가격을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는 듯 뮤가 생선 머리를 퍽 내리쳤던 것이다. 아니, 뮤에게 이런 면이! 프란은 놀랐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 다. "아가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거짓말은 안 통해." "방금 거짓말이라고 했어요? 하녀이긴 해도 난 카르멘 가 소속이라 고요. 뭐가 아쉬워서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죠?" 뮤는 시장 상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카르멘 가 가주인 대마왕도 거짓말 엄청 잘 하는걸.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프란은 조심스레 속삭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가게 주인과 흥정하 고 있는 뮤는 한없이 진지했다. "카르멘 가엔 생선 따윈 산지 직송으로 배송된다고요. 배가 좀 늦어 져서 사러 왔는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해요. 한두 마리 사는 것도 아니 고 무려 4백 마리씩이나 살 거라고요!" "아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4백 마리라는 말에 회가 동한 듯 가게 주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면서 뮤는 속으로 후후 웃었다. '걸렸군.' 평소의 여린 소녀는 거기 없었다. 프란은 뮤를 도와주겠다고 생각했 던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4백 마린데 안 깎아주면 그게 사기라고요." 뭐가 사기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뮤는 결국 가격의 10%를 깎는 데 성 공했다. 그러나 이것도 끝은 아니었다. 한참이나 강공으로 밀어붙였던 뮤가 프란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 즈음 '연약한 소녀'모드로 돌변 했던 것이다. "아저씨, 조금만 더 깎아주세요. 전 사실 말단이에요. 예상 금액을 넘 으면 마녀 같이 괴팍한 집사장님한테 혼난단 말이에요. 흑." 순식간에 마린을 마녀 집사장으로 만든 뮤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마린은 예상 금액 따위 상관 않고 '밥에 돈을 아끼는 건 죄야!'를 소리치며 무조건 최상급을 주장한다. 하지만 뮤는 알뜰살뜰하게 흥정 을 한 끝에 처음 가격보다 15%나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주문할 수 있었 다. "헤헤." 흥정에 성공한 뮤는 기쁜 듯 웃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구먼. 하고 많은 주방 식구 놔두고 왜 뮤에게 생성 주문을 시켰는지.' 프란은 그 모습을 보며 땀을 닦았다. * * * 진주홍. 연분홍. 연보라. 감청. 네 가지 빛깔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으며 색의 경계를 허문다. 하늘은 각 색들을 공들여 직조해 노을을 만들어냈다. "뮤, 너 대단하다." 프란은 노을 아래서 웃고 있었다. 수산 시장을 빠져나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고 평범한 여자 친구 들처럼 거리를 산책한 둘은 이제 카르멘 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껴야 잘 살잖아. 아무리 카르멘 가라도 그건 예외 없어." 뮤는 새침하게 답했다. 으아, 귀여워!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프란 은 한순간 뮤를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통의 여자 애들은 이런 걸까? '그러고 보면 나, 여자 친구가 없었네.' 정말이다. 시커먼 남자애들 사이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여자애들과 어울릴 시간도 여유도 전혀 없었다. 로지아 같은 소녀도 만났으나 그녀 는 결코 전혀 절대 평범하지 않았고, 게다가 친구라고 불릴 만큼 자주 어울린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평범한 소녀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들은 예전의 프란을 동경의 대상으로, 친구가 아닌 왕자님으로 여겼다. '뮤가 내 첫 번째 여자 친구인건가?' 프란은 자신의 팔에 팔짱을 낀 채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뮤 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뮤는 즐거워보였다. 그 얼굴을 보며 사심 없 이 헤벌쭉 따라 웃었던 프란은 한 순간 엇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뮤를 정말로 좋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성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 이다. 하지만 뮤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남자'로서 좋아 하지 않았는가. '이, 이래도 되나?' 프란이 죄책감 때문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뮤가 갑자기 프란 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프란은 난감한 얼굴로 뮤의 오목한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걸음을 옮기 면서,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조그맣게. "프란." "응?" "나 엄청 멋진 남자랑 연애할 거야. 프란만큼이나 멋진." 갑작스러운 그 말에 프란은 재빨리 뮤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 나 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어 표정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프란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뮤가 자진해서 고개를 들었다. 프란의 예상과는 달리 활짝 웃는 얼굴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나랑 놀아줘야 해?" 카르멘 가로 돌아왔을 때도 프란은 느꼈다. 이 작은 소녀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해준다는 것을, 그러니 매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준비했 다는 듯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뮤는 지금 말했다. 예전의 그 마음을 예 쁘게 간직하고 앞으로 나갈 테니 죄책감 따윈 가지지 말라고. "당연하지!" 콧잔등이 시큰해진 프란이 씩 미소를 지으며 한 대답에 뮤가 헤헤 소리 를 내며 또 웃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천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네 가지 빛깔의 머리카락이 뒤섞인 듯했던 노을이 흩어지고, 남색 연료가 풀린 듯 안으로 깊어져가는 하늘. 프란은 다소 걸음이 느린 뮤의 보폭 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이제 20분쯤 더 걸으면 황금문이 보일 것이다. 대마왕이 돌아왔을지 아직 안돌아왔을지 모르겠지만, 설사 혼난다 하 더라도 프란은 오늘의 외출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프란의 옆에선 뮤가 작은 새처럼 종알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프란, 그때 스잔이 뭐라고 그랬야 하면……."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다정하게 뮤의 말을 받아주고 있던 프란의 얼 굴이 삽시간에 얼어붙은 것은. '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기가 올라 프란은 몸을 떨었다. 즐겁게 수다를 풀어놓고 있던 뮤는 그런 프란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뮤 가 모르는 사이 프란의 눈동자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프란은 온몸의 감 각을 세운 채로 사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냐, 이 시선은?' 혹시나 착각인가 싶어서 다시 한 걸음을 뗐다. 그러나 이번엔 분명하 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신과 뮤 쪽을 향한 명백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 니, 이젠 더 이상 그것은 시선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진 완전하게 갈무 리되어 있던 기운이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사방을 채우고 있었으 니. 분명하다. 이건 살기다. "어째 좀 으스스하지 않아? 아직 추워지려면 멀었는데." 살기를 단순한 추위 정도로 착각한 뮤가 이상하지 않느냐는 듯 물었 다. 바로 그 순간, 프란은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완강하게 뮤의 팔을 잡 아당겼다. 웃고 있던 뮤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채 걸음을 멈춰야 했 다. "왜 그래? 아파." 뮤는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프란은 대답 대신 다시 뮤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쪽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제야 뮤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뮤가 '무슨 일이야?'하고 겁에 질린 듯 물었을 때, 프란은 허리에 차 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카르멘 가에서 몇 년을 있었지만 검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뮤는 프란이 뽑아든 그 검을 보며 몸을 떨 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을 거면 차라리 앞으로 나와!" 프란은 검을 앞으로 한 번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상했다. 이 거리엔 원래 사람이 없긴 했지만 지금은 행인이 아무도 없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옷깃을 붙잡은 뮤가 떨고 있다 는 걸 잘 알기에 더 긴장이 되는 프란이었다. "나오라니까!" 프란이 다시 한 번 소리쳤을 때였다. "맹물은 아닌가 보군. 하긴, 베키와 준을 죽였다고 했으니." 프란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꺾었다. 그러나 어 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길옆으로 좁게 뻗어난 골목길에서인 가? 아니면 지붕 위? 그것도 아니면 저편 거리 너머? 프란은 도무지 짐 작할 수가 없어서 검을 꾹 쥐었을 뿐이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나 혼자야."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간지럽게 들려왔다. "근데, 이 여자앤 뭐지?" 오싹! 이번엔 분명히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정확히 프란의 등 뒤에서 들렸으니까. '기척이 전혀 없었어!' 프란은 뮤를 왼쪽 팔에 낀 채 얼른 180도 회전했다. "안녕?" 그러자 보였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여자 하나가 방금 전까지 뮤가 있던 그 공간에 서 있는 모습이. 여자는 20대 후반처럼 보였다. 아직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건만 프란 의 관자놀이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로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는 이 여자가 내뿜는 기운이 웃는 얼굴과는 달리 너무도 무시무시했 기 떄문이다. 여자는 옅은 붉은색 머리카락에 자주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키는 프란 정도였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은 프란이 들고 다니던 실버 블레 이드보다도 훨씬 컸다. 가녀린 여자가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다. '기운이 엄청나잖아!' 검을 쥔 프란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베키나 준보다도, 어쩌면 셀키보다도 훨씬 더 강할지 몰라! 적은 자신이 단언했듯 혼자건만 프란 은 천지사방 어디로도 달아날 곳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프란은 얼른 뒤에 있는 뮤를 돌아봤다. 2대 1의 상황이라곤 해도 뮤 는 평범한 소녀다. 실제로는 프란이 뮤를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괜찮아, 뮤. 내가 꼭 지켜줄게.' 프란은 뮤에게 안심하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눈앞의 이 여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프란은 이 여자가 아일린과 관련 된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아까 그녀가 베키라는 이름 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시온을 만나러 가는 길에 프란이 죽였던 여자의 이름이었다. 프란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 "목적이 뭐냐?" 여자는 대수롭잖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답했다. "널 데려가는 것." "이진느가 보냈나?" "정답." 진짜 치 떨리는 여자다, 이진느 아일린. 시온이 남아 있겠다고 말한 상황임에도 더 단단히 시온을 결박할 수단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도대체가 그 녀석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 녀석 눈을 한 번이라 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있어? 얼마나 쓸쓸한 눈을 하는지 본 적이 있냐 고! 그러고도 어머니야?' 프란은 온몸을 잠식하려는 분노를 삭이려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도망 안 가. 하지만 뮤는 상관없다. 보내줘." "네 뒤에 있는 여자애?" 여자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 "싫은데?" 여자가 비웃듯 말한 그 순간이었다. 여자는 여태까지 느긋하게 프란 을 바라보고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달려 들어왔다. 대비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여자의 검이 프란을 노 린다. * * * 쾅! 향이 좋은 홍차와 갓 구운 뜨끈한 스콘을 옆에 둔 채 서류를 넘기고 있던 이진느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폭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온이 방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젠, 어디로 갔습니까?" 시온의 상태는 프란과 만났던 때보다 더 심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해쓱한데다가 눈의 핏발이란 핏발은 모조리 서 있다. 그는 피로에 찌들 다 못해 절어 있는 몰골이었지만 진초록 눈동자만큼은 무서운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어디 갔냐고 물었습니다!" 시온이 재차 소리쳤다. 프란이 다녀가고 난 뒤, 시온은 더 이상 탑에 유폐되거나 하지 않았 다. 대신 위저드 리그의 7써클 마법사 로디가 감시관 역으로 늘 시온을 따라다니게 되었을 뿐. 로디의 말에 따르면 시온은 최근, 매일같이 마 법 연구만 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하지만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그 속 을 짐작할 수 없는 이진느는 불안해질 뿐이었다. "일하러 갔어." 이진느가 대꾸하자마자 시온은 입가에 냉소를 걸었다. "젠은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으로 따져서 세라딘에서 네 번째입니다. 아니, 레이와 사이먼이 죽었으니 이젠 두 번째로군. 그런 젠이 지 금 상황에서 아일린 가를 지키는 것보다 더 먼저 수행해야 할 일이란 건 대체 뭡니까?" 분명 질문이었건만 시온은 이미 자기가 한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온의 입가가 분노로 떨리는 것을 알면서도, 이진느는 서류만 넘겼다. "시온 아일린." "대답부터 하십시오." 시온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진느는 또 한 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내 배 아파 낳은 아 들인데 그 아들이 두렵게 느껴진 것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 만 시온은 사실 아주 이성적인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폭발해서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저 눈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보냈다. 그것뿐이야." "그딴 거짓말……!" 시온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이진느는 조용히 시온의 옆에 있는 감시관 역의 마법사 로디 에게 손짓했다. 시온을 잠재우든지 해서 데려가란 뜻이다. 그런데 그 때, 시온이 마법을 구사하려는 로디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같은 7써클 이라곤 해도 이제 막 7써클에 진입한 시온이 상당한 연륜의 로디를 이 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로디는 멈칫했다. 그 역시 이진느와 마 찬가지로 시온의 눈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다. 로디가 망 설이는 사이 시온은 다시 이진느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입니다. 이게 내 한계니까." 무슨 말인가 해서 인상을 찌푸리는 이진느의 눈에 부들부들 떨리는 시온의 주먹이 보였다. "이번 한 번만, 정말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빤한 거짓말에 속아주겠 습니다." 그 말을 하는 시온의 얼굴엔 명백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다음은 절대 없습니다. 각오하십시오.' 하지 않은 말을 갈무리하며 시온은 등을 돌렸다. 누구든 그때 시온의 눈을 봤다면 살인이라도 낼 기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 * 시온이 이진느를 찾아갔던 그 시각, 뮤 이레아스는 완전한 공포에 빠 져 있었다. "으, 아, 으아, 으……." 실성한 것처럼, 혹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뮤의 말은 단어가 되지 못하고 계속 갈라지기만 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공포 때문에 뮤는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프란. 프란. 프란. 프란.' 뮤가 생각할 수 있는건 오직 하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프란 뿐이다. "별거 아니군." 붉은 머리칼의 여자, 아니 세라딘의 실력자 젠은 입술을 비틀며 웃고 있었다. 그런 젠의 눈에 엉망진창으로 상처 입은 프란이 보였다. 그 상 태로도 프란은 아직까지 뮤의 앞을 가로막은 채 흔들림 없이 서 있었 다. '재밌는 상대야' 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란은 분명 자신에게 한참 못 미친다. 그래 도 뒤에 서 있는 핑크색 머리 계집애만 모른 척했다면 몇 합쯤은 대등 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란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움직임으로 몸을 놀리면서 젠의 공격 범위로부터 뮤를 보호하고 있었 다. 자신의 몸 따위는 걸레조각이 되든 말든 뮤만 무사하면 된다는 식 이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죽이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젠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운이 좋긴…… 빌어먹을, 퉤!" 어이없다는 듯 프란이 침을 탁 뱉었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가 섞여 나왔다. '제길!' 프란 역시 알고 있었다. 젠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는 하 나도 입히지 않았다. 미칠 노릇은 '심한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는 핸 디캡을 가진 저 여자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이상하다. 자신은 살려두겠지만 자신이 무너 지는 순간 뮤를 죽여 버릴 거다. 프란의 몸에 검을 들이댈 때마다 아쉬 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 광기 어린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런 확신이 들 었다. 그렇기에 뮤를 위해서라도 절대 쓰러질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저 여자를 이긴다지? 뮤를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프란이 생각하는 그 사이에도 젠은 가볍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프란 은 순식간에 상념을 걷어치우고 검을 비틀어 쥐었다. '못 본다.' 프란은 달려오는 젠의 모습을 눈으로 좇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못 읽 을 테니까. 차라리 감각에 의지하는 게 낫다. 프란은 몸이 시키는 그대 로 젠을 향해 뛰어올랐다. 쉬익! 프란은 필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공격을 몸으 로 막는 대신 검을 들이댄 것이다. 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두 사람의 검이 잠시 얽힌다 싶더니, 프란이 있는 힘을 다해 젠을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그러나 젠은 어린애 장난이라도 하는 듯 사뿐하게 한 발자국을 물러선 후, 재차 몸을 날려 프란을 공격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동 작 한 동작이 확실한 여자다. "이익!" 프란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젠의 동작을 따라갔다. 챙! 처음으로 한 합, 두 사람의 검이 치열하게 얽혔다. 젠이 그 공격을 흘리려는 순간, 프란은 거침없이 무릎을 들어올렸다. 퍽! 젠은 검을 마주하고 있을 때 무릎을 들어 올려 상대의 복부를 공격한 프란을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복부를 얻어맞은 채 그대로 검을 들어 목이라도 날려버리면 어쩔 텐가? 무릎에 힘을 주느라 막을 틈도 없을 텐데. 젠의 그 호기심을 비웃듯 프란이 소리쳤다. "넌 날 못 죽인다고 했지? 하지만 난 널 죽일 수 있다." 그 말에도 젠은 웃었을 뿐이다. "무리야. 그 전에 저 여자애가 죽어." 젠은 손가락으로 뮤를 가리켰다. 뮤는 그 손가락 끝이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걸 느끼자 몸을 조그맣게 말고는 무섭게 떨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젠은 프란이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는 것 을 보았다. 그렇게 하면 틈이 생기지. 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프란의 공격을 간단히 흘려 넘겼다. "젠장!" 있는 힘을 다한 공격을 이처럼 간단하게 흘릴 줄은 몰랐기에 프란은 당혹했다. 젠은 그것 봐, 하고 비웃는 듯 뮤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 에 경악한 뮤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아악!" "안 돼!" 프란의 간절한 목소리가 뮤의 비명을 덮었다. 두 사람이 뭐라고 외치건 간에 뮤를 향해 가로로 길게 검을 휘두르려 했던 젠은,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강한 손을 느꼈다. 어느 사이엔가 프란이 재빨리 뒤돌아서 젠의 목덜미를 잡아챘 던 것이다. 하지만 프란의 필사적인 노력을 무시하듯 젠은 다시 훌쩍 그 손을 피 해 덜덜 떨고 있는 뮤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젠은 뮤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그리고 검 실력은 한참 아래인 주제에 그 같은 유연성과 스피드는 어디서 기인 하는 것인지, 프란이 또 한 번 젠의 목덜미를 낚아챘던 것이다. 젠은 결국 쳇 소리를 내며 뮤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이제 알겠군. 내가 저 여자애를 공격하면 넌 힘이 난다, 이거지?" 젠은 농담 같은 소리를 전혀 웃지 않고 했다. 어느새 뮤 앞에 다시 자 리를 잡은 프란은 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프란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다. 어쩌면 방금 전 뮤를 보호하기 위해 행했던 그 악착같던 수비가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지쳐 쓰러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 젠은 무리한 탓에 다리가 떨리고 있는 프란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젠의 눈에 프란의 선명한 오렌지색 눈동자가 비쳤다. '재수 없어' 젠은 기분이 살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먹 지 않는 눈동자가, 자신보다 약한 자를 보호하고 있는 필사적인 움직임 이, 입술을 꾹 깨물고 진지하게 자신을 보는 프란의 그 모든것이 젠은 몹시 불쾌했다. 그래서 젠은 천천히 공격하려던 처음의 마음을 버렸다. "귀찮아." 마음을 먹은 그 순간, 젠은 바람처럼 달려왔다. 몸을 뒤로 젖히는 등 의 예비 동작조차 전혀 없었다. 이미 프란의 약점도 강점도 뮤라는 걸 눈치 챈 젠이다. 뮤만 죽인다면 프란은 여태껏 보여줬던 것 같은 한계 이상의 힘을 내진 못할 것이다. 젠이 뛰어오는 걸 보며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뮤의 가슴에 자신의 등을 밀착했다. 죽어도 뮤를 죽게 하진 않을 거다, 라는 단단한 각오가 들어간 동작이다. 그러나 젠의 이번 공격을 대체 어떻게 막지? 도무지 수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도 프란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젠을 똑바로 응시했다. 젠은 공중에 크게 뜬 상태에서 검을 아래로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프란이 그 검의 방향을 읽기 위해 온 신경을 검 끝에 집중하고 있는데, 젠이 프 란을 공격하려는 듯 정면에서 검을 휘둘렀다. '내 쪽이다.' 젠의 공격 궤도가 정해졌다고 생각한 프란은 검을 뻤었다. 허나 바로 그 순간, 프란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제기랄! 속임수야!' 느낀 건 한순간이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젠은 공중에 뜬 상태에 서 몸을 길게 틀었다.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대는 프란을 살며시 피해, 그녀는 오른팔을 유연하게 뻗었다. 넉넉지는 않으나 프란의 뒤에 있는 뮤를 찌르기엔 충분한 거리다. 프란은 미친 듯이 다시 검을 뻗었다. 그 러나 프란은 알았다. 이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뮤를 지킬 수 없 다는 것을. 젠의 검은 이미 완전한 무방비 상태인 뮤의 목덜미를 겨냥하고 있었 다. '안 돼! 제발! 뮤!'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던 그 때. "카르멘 가 사람인가?" ……뜻밖에도 목소리가 들렸다. * * * 프란의 검 따윈 의식도 하지 않은 채 똑바로 뮤의 목을 노리고 있던 젠은 목소리가 들린 순간 멈칫했다. '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프란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젠은 누가 끼어들건 말건 상관 않고 뮤를 해치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젠은 어느새 프란과 뮤로부터 한 걸음 훌쩍 물러서 있었다. 그 리고서 젠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뮤를 짓누르다시피 해서 보호하고 있던 프란도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 선을 돌린 건 마찬가지다. '들어본 목소리인데.'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묵직한 저음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놀라운 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시 하다는 듯 프란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던 젠이 잔뜩 긴장한 채 검을 세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려고 한참이나 애썼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먼저 프란을 알아보았다. "넌 '그' 시종이군. 지금 곤란한 상황인가?" '보고도 모르냐!' 꼴을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하는가 싶어서 프란은 어이가 없었다. 허나 다음 순간, 프란은 불평 따위는 쑥 들어갈 만큼 놀라운 광경을 봐야 했다. 성큼 한 발자국 다가온 그 남자가 검을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싸울 생각인 성싶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젠을 향해 남자가 달려들었 다. 앞서 젠이 그랬듯 도약 동작조차 없이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게다 가 그 움직임이 젠보다도 훨씬 빨랐다. "뭐, 뭐야?" 그 모습을 보면서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나타 난 이 남자의 실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했으나 프란이 그처럼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대마왕같이 싸우잖아?' 그랬다. 남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반과 비슷한 움직임으로 싸우고 있었다. 반만큼이나 압도적으로 빠르고, 반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베는가 싶 으면 찌르고, 찌른다 싶으면 베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가 다음 순 간 틈 없이 가까워진다. 남자의 검과 젠의 검이 섞인 건 몹시 짧은 순간이었다. 강렬한 스파 크가 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때, 두 사람의 검이 재빠르게 떨어지더 니 다시 한 번 정신없이 섞였다. 눈으로 쫓아가기가 힘들 만큼 현란한 움직임이다. 그렇게 몇 번인가 검 섞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젠의 팔에서 핏방울이 솟아올랐다. "당신, 어떻게 여길!" 부상을 입은 순간 젠은 분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말하 는 대신 입술을 꾹 깨물더니 그대로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그냥 가는 거야? 진짜? 정말?' 프란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데, 지붕 위에 올라선 젠이 프란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을 뿐이다. 젠은 남자 를 쏘아본 것을 마지막으로, 지붕들 각각을 놀라운 속도로 밟으며 곧장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뒤쫓을 생각은 없는 듯 사라지는 젠의 모습을 바 라볼 뿐이었다. "괜찮나?" 남자가 프란과 뮤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가 이건 모두 환상이라 고, 다 귀찮아진 젠이 너와 뮤를 죽였다고 말하면 오히려 그 편이 더 믿 기 쉬울 것 같은 프란이었다. 그러나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도대체 뭐야?' 대마왕이라면 저런 괴물 같은 짓도 가능하겠지만 분명 대마왕은 아 니다. 젠을 쫓아 보낸 주제에 남자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프란을 향해 다 가오고 있엇다. 어, 이 얼굴, 아는 얼굴인데. 가까이 다가온 그 얼굴을 보며 프란이 생각했을 때였다. 프란의 뒤에 있던 뮤가 울며불며 소리를 지른 것은. "헤이튼님!" 그제야 프란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남자의 이름은 헤이튼 카르멘. 대마왕의 외삼촌이다. * * * 오늘 반에겐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 각각은 반을 당혹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첫째로 오늘 그는 헤냔에게 '시종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일 당장 이라도 들킬 법한 거짓말을 했다. 스스로도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거짓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랬다. 둘째로 그 거짓말의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프란이 자신의 허락도 없 이 뮤라는 하녀와 함께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날 일인데 시도 때고 없이 온갖 부상을 혼자서 다 입는 프란은 오늘도 또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셋째로 그 상처투성이 프란을 로네이트에 있어야 할 헤이튼이 데려 왔다. "왜 돌아왔나?" 반은 낮은 목소리로 앞에 서 있는 헤이튼에게 물었다. 아직도 안정되 지 않은 뮤는 마린이 데려가고,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몸에 상처 가 많이 생겻다는 진단을 받은 프란은 하질리언과 함께 있었다. 그 사이 헤이튼은 묵묵한 발검음으로 반의 방에 따라온 차였다. 반은 방 안엔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룬과 켈리도 있었다. 룬과 켈리 는 세라딘과 결탁한 적이 있던 헤이튼을 엄중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반은 룬과 켈리를 뒤에, 헤이튼을 앞에 둔 채 입을 열었다. "시종의 설명을 종합해보니 일곱 번째 세라딘, 젠 같더군. 세라딘에 협조했던 너라면 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의 목소리는 얼음같이 싸늘했다. "다시 묻지. 왜 돌아왔나?" 헤이튼은 고개를 들었다. 그 추운 로네이트가 이 남자에겐 나쁘지 않은 곳이었는지, 헤이튼은 떠날 때보다 오히려 혈색이 좋아보였다. 팔뚝에 여러 개의 새 검상이 생긴 것 역시 제자들을 돌보는 일도, 스스로 실력을 쌓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렷이 증명하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헤이튼은 입을 열었다. 조용하게 꺼낸 말이었으나 그 말의 내용은 그를 제외한 이 방 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며칠 전 정초원 인사라는 자가 찾아왔소. 다시 한 번 손잡자고 말하 더군." 성질 급한 룬은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반의 앞이라는 걸 상기하며 간 신히 참았다. 언제나 침착해 종종 여자 케인으로 불리곤 했던 켈리 역 시 순간적으로 검집에 손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예상 밖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반은 미간만 좁혔을 뿐이다. "그래서?" "거절했소." 헤이튼의 목소리는 반만큼이나 담담했다. '웃기지 마라. 한 번 세라딘과 결탁했던 너 따위를 믿을 것 같으냐?' 룬은 뛰어나가 헤이튼의 멱살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조용한 켈리 의 눈이 그를 가로막았다. 반은 감정이 서리지 않은 얼굴로 헤이튼을 보고 있었다. "왜 거절했나?" "일전에 내가 패했기 때문이오." 헤이튼은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냐는 듯 대답했다. 뼛속까지 검사. 반과 겨뤄서 졌으니 이제 카르멘 가의 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한 말투였다. 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룬은 이를 부득 갈면서 헤이튼 을 노려봤을 뿐이다. 헤이튼은 그런 룬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재 차 말을 이었다. "또한 빚을 졌으니." 반은 그 빚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헤이튼의 반역 사실을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고 검술 스승이라는 명목 하에 그를 로이 네트로 보내준 것을 말하는 거다. 반은 무심하게 물었다. "날 돕겠다는 뜻인가?" "가주님!" 어림없다는 듯 룬이 소리쳤지만 이번에도 켈리에 의해 저지당했다. 룬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헤이튼은 고개를 끄덕였 다. "혼자 왔습니다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없는 것보단 나은 정도가 아니었다. 헤이튼은 카르멘 검술의 정수 중의 정수를 익힌, 라니아 대륙에 단 두 명만 존재하는 카르멘의 정통 승계자 중 한 명이다. 반과 검을 겨뤘 을 때도 한순간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승부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노 릇이었다. 그런 헤이튼이 전투에 참여해주기만 한다면 반이 둘 있는 것 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한 번 배신한 놈은 두 번 배신하기도 쉽습니 다!' 룬은 반의 뒤에서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반의 대답은 간결했다. "알았다. 출발은 2주 후다." '으아악! 가주님!' 분개하는 룬과 침착하게 서 있는 켈리를 뒤에 둔, 근 몇 달 만에 이루 어진 외삼촌과 조카의 재회는 이처럼 간단하게 끝났다. * * * 헤이튼은 예전에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섰다. 꽤 오랫동안 로이네트에 머물렀건만 매일같이 청소를 한 듯 방은 여 전히 깨끗했다. 심지어 방을 나서며 정리했던 전등갓의 각도까지도 그 때와 똑같아 보일 정도로. '미안하다. 저스티스.' 그 전등갓을 보며 헤이튼은 속으로 반을 향해 사과했다. 패했기 때문에, 또 빚을 졌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말하다니 웃음이 나 올 정도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형국이 되었군.' 헤이튼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돌아온 진짜 이유는 아까 반에게 얘기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 '제 2장_거짓말' 끝 - 한재경 판타지 소설 오! 나의 주인님(Oh, My Lord!) 제 타수가 130타라는 점을 감안하고 정성이거니와 하십사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타가 있을 시에는 이 부분에선 부모님의 감시를 피하느라 정신 없이 치셨구나라고 이해해 주세요. 그럼 사담은 이만 접고 소장본을 펼쳐 손가락이 분질러질 그 날까지 여러분 즐독. -새군(어이, 너 고3이잖아? 수능 준비 안 해?)- 오·나·주 대망의 완결! 7권 - 운명 목차 1장 탑에 갇힌 왕자님 2장 거짓말 3장 질투 4장 작전 5장 선택 6장 빚과 빛 7장 상처투성이 진실 8장 장례식과 환영회 9장 행복의 조건 에필로그 당신들은 8000원 + 새군의 손가락 땀이 담긴 텍본을 눈팅하고 계십니다. 제 1장 탑에 갇힌 왕자님 카르멘 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는 궁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 탄 사람은 헤냔과 반, 두 사람뿐이다. 둘은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은 채 서로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말을 꺼내려다 참았던 헤냔이 입을 연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난 당신이 싫습니다." 헤냔 딴에는 진지하게 한 말이건만 반의 대답은 냉랭할 뿐이었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은!' 헤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싫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저스티스 카르멘경!" "어쩌란 건가?" 무심하게 대꾸하는 반 때문에 헤냔이 윽 소리를 냈다. 헤냔은 주먹을 꾹 쥔 채 반을 보았다. 반은 마차의 창을 통해 수도의 거리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있다면 됐습니다. 오해할 일도 없겠군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이번엔 반이 돌아보았다. 헤냔은 볼이 부어 있었다. "당신을 돕는 일에 자원할 겁니다." "헛소……." "헛소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헤냔은 시선을 다시 반의 반대편으로 홱 꺾으며 소리쳤다. 반을 보았다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할지 알 수 없엇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냔은 마차 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니까,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가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난 당신이 진짜 싫으니까요. 그냥 내 신념을 위해서 그러는 것뿐입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헤냔은 한참 후에야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곧 마차가 궁궐 앞에 멈춰 섰다. 헤냔은 잽싸게 먼저 내렸다. * * * "시즈 아일린 가주가 보냈습니까?" 등을 보인 레오니아는 차분하게 물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얼었던 것도 잠시, 프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행동을 개시했다. 레오니아가 한 걸음을 다시 옮기려는 순간, 상대가 여자건 뭐건 봐주지 않고 있 는 힘을 다해 레오니아를 벽 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아……읍!" 레오니아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었다. 무섭게 달려온 프란이 잽싸게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아일린의 기둥은 거대해서, 기둥 사이에 두 명은 물론이고 네 명도 너끈히 숨을 수 있다. 프란은 그 기둥 사이로 레오니아를 밀어 넣은 뒤 바로 검을 뽑았다. 레오니아는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루니아 블레 이드의 검휘가 무시무시했던 탓도 있지만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에 소름이 끼쳤던 게 더 주효했다. "무슨 수작이냐?" 프란의 목에서는 이 뜻밖의 상황에 대한 경악으로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프란을 진지하게 마주하려던 레오니아는, 그러나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다시 봐도 프란의 화장이 너무 웃겨서다. 허나 그 꼴을 하고서도 프란은 더없이 진지했다. "처음부터 알아봤나?" "그런 우스운 화장을 하고 왔는데 의심이 안 될 리가 없죠." 그래도 문지기는 통과했다고.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 알리지 않았지?" 레오니아가 잡으라고 명령만 했다면 프란은 아샤휘와 함께 들어온 그 순간 질질 끌려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도와줄 거냐?" 프란은 레오니아의 코에 거의 얼굴을 들이밀다시피 한 채 물었다. 레오니아는 프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뜻밖의 말을 했다. "확률은 반반이죠. 시즈가 이길 가능성이 반, 이진느님이 이길 가능성이 반. 당신을 발견한 건 내게 행운인지도 몰라요. 당신을 도와주겠어요. 시즈가 이기면 그때 보답을 해줘요." 이번엔 프란이 진저리를 쳤다. '이놈의 집안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 무서워? 완전 권모술수꾼들이잖아!' 검이 목 언저리를 압박하고 있음에도 레오니아는 전혀 떨지 않았다. 검을 배우지 않은 여자가 검 앞에서 이토록 담대하다니. 대마왕의 침소에 네글리제 차림으로 들어왔던 그 기백을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프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보험 드는 걸로 이해하면 되냐?" 레오니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로했다. "좋아. 난 시온을 만나러 왔다." 프란의 말이 끝난 그 즉시 레오니아의 입가엔 비웃음이 매달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지만 프란은 아무 말 않고 레오니아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분은 갇혀 계십니다. 6써클 마법사 둘이 결계를 쳐놔서 안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죠.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입니다. 거기다 그 앞은 검사 셋이 지키고 있죠." "셋쯤이야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다." 프란은 자신 있게 대꾸했지만 레오니아는 어림도 없다는 듯 덧붙였다. "세라딘 셋입니다." 그 말에는 프란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렌 정도로 세 명이라도 어려운데 셀키 정도로 셋이라면 이건 그야말로 가망 없는 싸움이다. 레오니아는 프란의 당혹을 눈치 챘다. 그러나 프란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 혔다. 결심을 한 프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입니까?" "'이 보험, 쓸모없을 수도 있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지마. 난 시온을 만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란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마치 반의 화법 같았다. 가정이 아니라 진실을 통고하는 듯 명확하고 망설임 없는 어투. 레오니아는 이 자신만만한 태도가 의아했다. 뭘 믿고 이렇게 확언할수 있는 거지? 레오니아는 프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프란은 믿어달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망설이던 레오니아는 그 고갯짓에 힘입어 입을 열었다. "서쪽…… 첫 번째 탑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말이 끝난 그 즉시, 프란은 레오니아의 목덜미에 들이댔던 검을 떼어냈다. "좋아. 후회하지 않게 해주지." "당신, 꼭 남자애 같군요." 레오니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프란은 쑥스러웠는지 계면쩍게 웃으며 검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드레스가 드레스이니만치 검을 뽑는 건 순간적으로 했어도 도로 집어넣는 건 쉽지 않았다. "에잇,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제기랄 놈의 드레스!" 무라고 한참이나 꿍얼댄 끝에 검을 집어넣는 데 성공한 프란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복도 저편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섰던 레오니아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시즈. 이건 당신에게 첫눈에 반한 제가, 이진느님의 눈을 피해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입니다.' * * * 프란은 온몸의 털이 비쭉 설 만큼 긴장한 채 움직였다. 성 안에 진입한 이상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 생각할 만큼 프란은 바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프란의 옷이 워낙 특이했던 탓에, 숲 덤불을 통해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도움이 되는 건지, 영 안 되는 건지.' 프란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일린이 일전을 대비해 소란스러웠다는 점이다. 몰려든 어중이떠중이가 워낙 많았기에 제대로 된 검사를 추려내는 시험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프란은 시끄럽게 웅성대는 정원을 지나 서쪽 탑 근처로 움직였다. 허나 막상 서쪽 첫 번째 탑에 도착했 을 때, 프란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레오니아의 말대로 탑 앞에 세 명의 검사들이 서 있었던 탓이다. '후우. 장난 아닌데?'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그들은 탑에 기댄 채 다소 나태하게 서 있었지만, 전해지는 공기만으로도 예사 상대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들을 한꺼번에 상대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것도 저 인 간들이 모두 세라딘임을 안 지금에야. 프란은 드레스 자락 아래 감추어진 루니아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닥치는 대로 베고 들어가 버려?' 그게 가능할 턱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프란 자신이 안다. 반의 검을 가졌다 해서 반이 되는 건 아니니까. 잠시 생각하던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신이 있다면, 몇 번이나 그녀를 배반하고 또 도와준 그 빌어먹을 신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이번에도 무슨 수를 내주겠지. 프란은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탑 근처에 있는 회색 건물 뒤편에 숨었다. 언제 뛰어나가야 될지 모르기에 프란은 옷매무새부터 가다듬었다. 흙이 잔뜩 묻은 옷을 가볍게 털고 가발도 한 번 정리했다. 그런다고 이 끔찍한 차림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프란은 그 지겨운 시간 동안에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꼼짝 않고 기다렸다. 틈을 보였다간 세라딘들이 눈치 채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지러울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세 시간은 훌쩍 넘겼을 터다. 밤은 새카맣게 제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프란은 침을 삼키며 루니아 블레이드를 쓰다듬었다. 작게 떨리는 그 검이 그녀에게 침착하라 고 속삭이는 것 같아, 프란은 문득 웃음 지었다. '걱정 마. 잘 될 거다.' 그 순간이었다, 프란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인 것은. 여자 하나가 가볍게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 니들도 인간이니 화장실은 가야겠지!' 프란은 속으로 아자 하고 소리를 쳤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이젠 두 사람 남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고 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게 분명한 저 여자도 곧 돌아올 것이다. 어찌됐든 프란은 천천히 탑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라딘 둘은 희한한 옷차림에 희한한 화장을 한 프란이 나타나자 기겁하며 검을 뽑았다. "악! 괴물이다!" "으아악!" 그야말로 끔찍한 반응이었다. '괴물이라니? 너무하잖아, 이 자식들아!' 프란은 울적해졌으나 그렇다고 긴장감을 풀지는 않았다. 먹혀라, 먹혀라!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시온님을 뵈러 왔습니다." 성공이다. 목소리가 제법 곱게 나왔다. "뭐?" 세라딘 둘은 그 뜻밖의 말에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이진느님이 보내셨습니다. 아드님이 적적하실 것 같다고." 시온은 바람둥이니까 여자 한둘 보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그렇게 싫어하는 대마왕한테도 여자를 밀어 넣는 희한한 집안이니까. 프란은 그렇게 생각해서 짜낸 말이었으나, 세라딘 둘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럴 리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게다가……."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프란을 위아래로 죽 한 번 훑어보았다. 할 말이 있긴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심성 고운 남자를 대신해, 동료 여자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시온님은 너 같은 여잔 영 취향이 아니다." 프란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런 여자 취향인 남자가 흔한 건 아니지.' 잠시 고민하던 프란은 자기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잘못 알고 계시네요. 시온님이 특이한 차림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일부러 꾸미고 온걸요?" 세라딘 둘은 그게 말이나 되냐는 듯한 얼굴로 프란을 보았다. 시온이 이 탑에 유폐된 지 벌써 십여 일이 지났다. 그사이 이진느만 간간히 저 탑 위로 올라갔을 뿐, 자켄린 조차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방이다. 세라딘 입장에서도 시온이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얼마나 적적할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그들이다. 게다가 시온은 여자라면 깜빡 죽는 사람이니 어머니가 그걸 배려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만약 프란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꾸미고 들어왔다면 차라리 통과가 쉬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라딘들은 이런 이상한 여자가 눈 높은 시온을 상대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진느님이 허락하신 건가?" "그럼요."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세라딘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 "확인해보고 올 테니 그동안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세라딘 여자로선 이까짓 괴상한 여자 하나 동료가 못 막을 리 없다고 생각해 한 행동이었다. 여자는 저편으로 뛰어갔다. 긴장이 되었던 프란은 얼굴이 굳는 걸 막기 위해 억지로 웃어보였다. 생긋. "웃지 마!" 하지만 웃음에 대한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남자가 소리를 쳤던 것이다. "엉?" "웃으니까 진짜 무섭다." 입술 언저리가 경련하는 걸 보니 진심인 것 같다. '로지아. 난 네가 정말 존경스럽다.' 프란은 어디서나 당당한 로지아를 생각하며 땀을 닦았다. 그래도 프란은 남자를 은근히 훑어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둘이 나란히 선 채 1분이나 흘렀을까. 프란이 오기 전 잠깐 볼일을 보러 갔던 세라딘 여자가 저 멀리서 돌아오고 있었다. "여, 베키! 빨리 이리 와." 세라딘 남자가 손짓한 그 순간이었다. "아니……!" 남자는 깜짝 놀랐다.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괴상한 미소만 짓고 있던 프란이 인정사정없이 머리를 디밀었던 탓이다. 검을 뽑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프란은 무식하게 돌진해 남자의 배를 머리로 쾅 들이박았다. 단단하기론 차돌 못지않은 프란의 머리다. "윽!" 저 멀리서 돌아오고 있던, 베키라 불린 여자가 경악한 채 속도를 높였다. 적이 풀을 밟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시간이 없어! 남자가 몸을 숙이는 틈을 타, 프란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쉬익! 루니아 블레이드의 시린 빛에 남자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건 찰나였을 뿐이다. 남자는 어느 틈엔가 뽑아든 검으로 프란의 어깨 쪽을 노렸다. 프란은 가볍게 몸을 돌려 공격을 흘렸다. "반드시 이긴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가 했던 공격을 그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리 호릭호락하게 당해줄 리 없다. 챙! 남자는 잔뜩 힘을 준 채 검을 횡으로 휘둘러 프란의 공격을 막았다. 쐐액! 남자가 재차 공격을 했다. 프란은 그 공격을 피해 몸을 훅 낮추고는 검끝으로 상대의 발을 노렸다. 남자는 놀라 한 발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이쪽으로 다가온 세라딘 여자, 베키가 남자의 앞을 막아 서며 프란을 향해 검을 날렸다. "에잇!" 프란은 베키의 공격을 검으로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했다.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은 오른팔을 든 채, 이편을 향해 검을 위아래로 휘두르려는 베키를 몸으로 밀어붙였다. '이 계집애가!' 베키는 순간 당황했고 그 바람에 뒤에서 자세를 정비하고 있던 남자까지 비틀거려야 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세라딘이었다. 한 발 물러섰던 그들이 다음 순간 지체 없이 프란을 양옆으로 포위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프란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두 개의 검이 프란을 사이에 둔 채 뚜렷하게 달빛을 반사한다. 프란은 조심스레 뒷걸음질 치면서 콧잔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끔찍한 화장이 번져 더더욱 끔찍한 형상이 됐지만 프 란은 알지 못했다. 프란은 그 상태로도 히죽 미소 지었다. '역시 실력자들이랑 싸우는 건 재밌어.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만 빼면.'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면서도 프란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긴장해 있었다.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충만한 자신감이 그녀의 온몸을 채운다. 그 기백 때문인지 세라딘 둘은 쉽사리 프란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들은 먹잇감을 사냥할 때 맹수가 흔히 그러듯 틈을 노리며 프란 주위를 천천히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있던 프란은 한순간 뭘 생각했는지 루니아 블레이드를 반쯤 비틀어 쥐었다. 다음 순간, 세라딘 둘은 정말로 당황해야 했다. '뭐 하는 짓이지?' 프란은 탑 옆에 있던 거대한 나무에 검을 박아 넣더니, 그 검에 의지한 채 공중제비 넘기를 했다. 루니아 블레이드를 지렛대로 사용하다니! 세라딘 둘이 그 검의 정체를 알았다면 더 기겁했을 것이다. 프란은 여태까지 겪은 거의 모든 경험을 되살려 이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반, 런스, 헤냔, 히스, 하질리언…… 그 모든 사람들을 구경하고 그 모든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얻었던 경험들을 살려, 온몸의 감각을 찌릿하게 세운 채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 걸린 건 시온이니까. "이얍!" 공중에서 한 바퀴 돈 프란은, 순간적으로 헤냔이 하질리언과 싸웠던 때를 흉내 냈다. 프란은 세라딘 여자, 베키를 노렸다. 둘 중 누구를 공격할지 몰라 당황했던 베키는 움찔하며 검을 똑바로 세웠다. 하지만 바로 그게 실수였다. 베키가 검을 들어 막는 순간, 프란이 손에서 힘을 빼버렸던 것이다. "아악!" "이 녀석이!" 허나 베키를 제압했다고는 해도 프란은 남자에게 등을 보인 차다. 프란이 베키의 손목을 발로 비틀고 있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남자의 검이 프란의 목을 노렸다. 쐐액! '뭐지?' 하지만 자신 있게 공격했던 남자의 검은 먹잇감을 사냥하지 못했다. 이 괴상한 차림의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였던 탓이다. 프란은 베키의 손목을 밟은 그 상태 그대로 몸을 뒤로 빼곤, 부드럽게 공중제비를 넘었다. 제비를 넘으면서 세라딘 남자의 어깨를 짚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너무도 유연해 우아하기까지 한 움직임이다. 남자의 얼굴에 당혹을 넘어 경악이 서렸다. 하지만 세라딘답게 그는 경악을 수습하며 재빨리 돌아섰다. 남자의 어깨를 짚고 넘었던 프란은 막 땅에 착지한 차다. 그런 프란을 향해 남자의 검이 인정사정 없이 다가왔다. '제길! 너무 빨라!' 프란은 남자쪽을 향해 돌아서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막을 순 없었다. 공격에서 틈을 찾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몇 번의 눈속임과 돌출 행동으로 타격을 줄 순 있어도 이처럼 정식으로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피할 재간이 프란에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검을 쥔 손에 있는 대로 힘을 주는 한편,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상대가 막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검이 한순간, 이 비정상적인 행동 때문에 궤도를 이탈했다. 푸욱. "익!" 프란의 배를 노렸던 공격은 예상치 않게 프란의 옆구리를 길게 찢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프란에겐 충분한 타격일 테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어야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옆구리에 검이 박힌 프란이 스산하게 웃고 있었던 탓이다. 그 웃음에서 남자는 프란이 바로 전 순간 해냈던 계산을 눈치 챘다. '피하지 않고 공격을 받은 다음 시간차로 움직일 생각이었나?' 남자는 당혹에 젖은 채 프란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힘껏 뽑아냈으나, 간발의 차이로 공격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프란은 자신의 옆구리에 검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되로 줬으면 말로 받아라, 이자식!' 프란은 속으로 소리쳤다. 남자가 프란의 살에서 뽑아낸 검을 서둘러 쳐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다.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그대로 보인채, 프란은 남자의 심장을 노렸다. 콰직! 루니아 블레이드가 목표점에 정확히 꽂혔다. 남자는 헉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대로 절명이다. 심장이 고요히 잦아드는 소리를 고스란히 전해 들으며, 루니아 블레이드는 적의 피를 탐욕스레 먹어치웠다. 프란은 그 검을 공중에서 한 번 휘익 돌렸다. '빌어먹을, 그 주인에 그 검이군. 이 검도 괴물이야.'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동료를 잃은 베키가 광분해 달려 들었다. "죽어!" 프란은, 그러나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프란 자신은 눈치 채지 못했으나 한 타임을 움직일 때마다 순식간에 적과의 거리를 계산해내는 그녀의 검은 반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카르멘 가의 검'이 아닌 '반 특유의 검'과 말이다. 그리고 세라딘 여자, 베키의 검이 프란을 두 토막 낼 듯 다가온 바로 그 순간! 프란은 순식간에 왼다리에 감춰뒀던 또 다른 검을 꺼냈다. 헤냔이 사줬던 그 조잡한 검이다. 검신도 힐트도 모두 짧아 루니아 블레이드보다 훨씬 숨기기 쉬웠던 검. 프란은 망설임 없이 그 검을 내던졌다. 하질리언이 표창을 던질 때 취하는 완벽에 가까운 포즈로, 그러나 표창보다 검이 무겁다는 걸 알기에 있는 힘껏! 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그 검은 베키의 몸 어디도 맞히지 못했다. 하지만 프란은 그 검이 특별한 성과를 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다. "젠장!" 베키가 신경질적으로 그 검을 쳐냈을 때, 프란은 이미 베키의 가슴언저리에 육박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사태를 인식한 베키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너, 대체 정체가 뭐지?' 베키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대답 없이 프란의 검만이 화려한 호선을 그렸다. 콰직! "으윽!" 루니아 블레이드는 순간적으로 괴력을 발휘했다. 베키의 배에 꽂힌 그 검이 그녀의 내장을 있는 대로 헤집는다.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프란은 더더욱 검을 깊게 밀어 넣었다가 한순간 온 힘을 다해 뽑았다. 오싹, 전율이 일 만큼 요란한 핏방울들이 프란의 얼굴을 향해 튀어 올랐다. "흐, 헉……." 피를 잔뜩 쏟아낸 베키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그 모습을보는 프란의 눈가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제길!' 허나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약해지지 마라, 프란 프리텐! 확실히 하기 위해, 프란은 몸을 숙인 베키의 가슴께를 등을 통해 찔렀다. 퍽! 곧 탑 근처가 완전한 정적에 감싸였다. * * * 프란이 베키의 심장을 찌른 그 시각, 반은 키네온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카펫이 방 전체를 덮고 있는 그 조용한 방 안에서, 키네온은 했던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지겹군.' 반은 키네온의 말을 반쯤은 듣고 반쯤은 귓가로 흘려버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된 이 응접실은 늘 푸른색 화초가 싱싱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화초들은 평소 떄완 달리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있다. 이 방의 화초들만은 키네온이 취미삼아 직접 가꿔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내 말을 듣고 있소, 카르멘 경?" 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키네온은 아직도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두 시간 반 동안 되풀이되었던 그 말들을 정리하면, 사실 간단했다. '어쩔 수 없었다. 카르멘가의 황금문을 부수려 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평소의 반이었다면 횡설수설하는 키네온의 말을 단박에 잘라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반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키네온에게 더 강한 압박을 가하리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벌써 백만 스물세 번은 들은 것 같다. "이해해주리라 믿겠소." '드디어 끝났군.'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은 또렷한 시선으로 키네온을 보았다. 이런 사과를 받으려고 온 그가 아니었다. 검사들은 문제가 없다. 카르멘 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원치 않았던 반이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뒤다. 검사 쪽은 카르멘 가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문제는 마법사였다. 위저드 리그는 아일린이 노심초사하며 만든 대 단체다. 죽었다 깨어나도 아일린 외의 장소에서 그만한 마법사들이 다시 모이는 일은 없을것이다. 반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반이 입을 열었다. 키네온은 흠칫 반을 보았다. "카세타의 궁중 마법사들을 빌려주십시오." 키네온으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무어라?" "대가는,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때 지불할 겁니다." 키네온은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는 이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반은 방금 대가라고 말했다. 반이 마법사를 빌리는 건 카르멘 가주로서가 아니었다. 지금 반은 아일린 가주로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를 빌려간 반이 아일린을 탈환한다면, 그 대가 역시 아일린 가주로서 줄 것이다. 그때 깨끗한 호수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아바마마?" 반은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목소리의 주인공은 키네세스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반은 잠시 난감해진다. 키네세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얼굴이었다. 반은 그얼굴에서 키네세스의 엄청난 걱정을 단박에 읽을 수 있었다. 감정에 무딘 그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키네세스의 야윈 얼굴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카르멘 경? 그대가 만약 내 딸과……!" "그만두세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 챈 키네세스가 단숨에 말을 끊었다. 그 뜻밖의 반응에 키네온의 눈이 커졌다. "더 이상 그런 식은 싫습니다, 아바마마. 일단은 결정하세요. 마법사들을 내줄 것인지, 내주지 않을 것인지." 키네세스는 그 이상 단호할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강해졌군.' 반은 순간 그렇게 느꼈다. 말 그대로다. 키네세스는 반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몇 달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키네세스를 성장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키네온이 결정을 내린 후 그녀와의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 키네세스와 반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던 키네온은 한숨을 쉬었다. "마법사들을 빌려주겠소. ……아일린의 가주." * * * "후." 프란은 피에 젖은 루니아 블레이드를 수거하며 숨을 뿜었다. "나 진짜 많이 늘었나 보네." 프란은 스스로의 성장을 칭찬해주며 애써 웃으려 했다. 그러나 발밑에서 뒹굴고 있는 두 구의 시체가 그녀의 입술을 계속 경련케 했다. '얼마나 죽이면 이런 게 익숙해질 수가 있냐?' 프란은 반에게 묻고 싶었다. 멍한 얼굴을 했던 프란은 다음 순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돼. 시온을 만나고 나서.'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몹시도 무거운 그 시체들을 질질 끌어당겼다. "미안." 프란은 두 구의 시체를 탑 안쪽에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서 그녀는 시선을 올렸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안에서 보니 이 탑, 꽤 높은것 같다. 프란은 계단에 한 발을 올렸다.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시온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 * * 프란은 탑 안을 날듯이 뛰어올라갔다. 밖에서 볼 때보다 안에서 볼 때가, 안에서 볼 때보다 직접 올라갈 때가 더 높게 느껴지는 이상한 탑. 프란은 한 층을 올라가고 난 뒤에야 이 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깨달았다. 한 층에 계단이 마흔 여덟 개나 있었던 것이다. "뭔 생각으로 이런 건물을 만든 거야. 돈 거 아냐?" 투덜거리곤 있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 이진느에게 사실을 확인하러 갔던 세라딘 여자가 곧 이진느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단장님이 여길 안전하게 떠났어야 할 텐데." 프란은 중얼거리면서도 계단을 쉴 새 없이 밟았다. 얼마나 숨차게 계단을 올랐을까. 마침내 프란은 4층 방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다행히 4층에 있는 방은 하나뿐이었다. '여기 있는 거지, 느끼버터?' 레오니아는 이 방에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프란은 그래서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자기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문이 닫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쾅! 하지만 방 안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은 프란은 깜짝 놀라야 했다. 프란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닫힌 것이다. '마법은 마법인가 보군. 저걸 어떻게 다시 열지?' 시온 역시 저 문을 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갇힌 뒤 나오지 못했을 거고. 프란은 머리칼을 집어 뜯으며 자학했다. '다리로라도 고정했어야 하는데, 바보 자식! 으아악!' 프란의 죄 없는 머리칼이 한 움큼 뜯겨나간 그때였다. "누구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프란의 귀를 파고들었다. 프란은 머리에 손을 얹은 그 상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문 여는 소리에 깼는지 저 안쪽에서 유령 같은 그림자가 비척비척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있었다. 달마저 구름에 숨은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이 흐릿하지만, 프란은 그 자리에 선 남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프란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곤 여태껏 했던 모든 걱정을 담아 그를 호명했다. "느끼 버터!" "……프란?" 어차피 들어올 건 이진느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온이다. 그래서 그는 '느끼 버터'라는 호칭에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시온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시선만을 돌려 어둠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이편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다.' 프란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어둠이 눈에 익자 희미했던 시온의 실루엣이 점차로 뚜렷해졌다. 시온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해 그 잘난 얼굴이 지저분해져 있었고, 도대체 며칠이나 밤을 샜는지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머리는 산발이다. 밥도 제대로 안 먹은 것 같다. 가뜩이나 날씬했던 자식이 더 홀쭉해지지 않았는가.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했던 시온이었기에, 그 모습은 프란에게 큰 충격이었다. 프란은 몇 번이고 속으로 제길,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꼴인줄 알았으면 더 빨리 왔어야 하는 거였다. "진짜…… 프란이야?" 프란이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 때, 시온은 한 발 한 발 프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 흔히 그러듯, 의심과 환희가 혼란스럽게 섞인 얼굴을 한 시온은 이게 꿈은 아닐까 멍하니 생각했다. 방이 어두웠던지라 저 편에 선 프란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시온은 안타까움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 때, 구름에 숨었던 비나룬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의 눈이 굳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피가……." 시온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프란의 온 몸이 피에 젖은 걸 봤기 때문이다. "아, 이거? 내 피 아니다." 닦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씩 한 번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허나 시온은 속지 않았다. 프란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이려 안 그 순간, 그녀가 움찔하며 옆구리에 손을 가져가는 것도 동시에 보았디 때문이다. "다쳤지? 거기." 정확히 옆구리를 가리킨 시온 때문에 프란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래봬도 영광의 상처다." 프란이 으하하 웃으며 말했음에도 시온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더니 길쭉한 약병 하나를 들고 왔다. 깨끗한 붕대도 함께다. "괜찮은데……." 프란이 몸을 뒤틀건 말건 시온은 프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곤 그녀의 옆구리에 약을 발랐다. 따끔따끔한 약이 상처를 훑은 후, 시온이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붕대를 감는다. 이 다정한 손길 때문에 프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난 치유마법, 잘 못하니까." "소를 하늘로 날렸다는 전설은 들었다." 프란이 농담하듯 말하자 그제야 시온이 웃었다. 시온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아무 거리낌 없이 팔을 들어 프란의 얼굴은 닦아내기 시작했다. 기겁하는 프란의 손을 가만히 치워내며, 시온의 최고급 원단으로 만든 자신의 상의로 피투성이인 프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고." 프란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우후 하고 외치면 차라리 편하련만, 굳어 있는 시온의 눈동자는 진지할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애달픈 얼굴을 하고 있던 시온의 얼굴에 한 순간 금이 쩍 갔다. 시온은 가만히 팔을 내리곤 뚫어져라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거의 다 지워진 탓에, 지금 막 프란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는 시온이었다. "어이." 프란이 불길함에 불렀을 때, 시온의 어깨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프란은 시온이 왜 그러는지를 바로 눈치 챘다. 프란이 제기랄 하고 중얼거리는 동안, 시온의 어깨가 약 10초간 조용히 경련했다. 그리고 10초후, 더 이상 참지 못한 시온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와하하하!"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얼굴을 했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게도, 시온은 위까지 경련할만한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눈 꼬리에 눈물까지 매달려 있는 걸 보니 보통 웃긴게 아닌가 보다. 프란은 이를 으득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 "하하하, 예술인데! 그 화장 대체 누가 한 거야? 게다가 번졌어. 와하하!" "웃긴 거 아니까 그만 해라." "하하하하!" 프란이 신경질을 내건 말건 시온은 진심으로 웃었다. 그 큰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왁자하게 웃으며 시온은 프란을 보았다. '아아, 즐겁다. 프란이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지는구나.' 잠시 생각했던 시온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화장 못하는 일곱 살 여자아이가 한 것도 그것보다는 낫겠다, 프란. 다음엔 나한테 맡겨." 그 말에 프란이 시온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맡기긴 뭘 맡기라는 거냐." "사랑의 힘으로 아름답게 해줄게." 시온은 오른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프란은 그 느끼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방금 전에 시온이 짓고 있던 애달픈 표정보다는 차라리 이 느끼함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빛은 전형적인 폐인 마법사 같은 시온 아일린은 계속해서 웃었다. 얼마나 그렇게 웃었을까. 시온은 천천히 웃음을 거뒀다. 그리고는 차분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말했다. "무사했네? ……옆구리 상처는 빼고." "까딱없다." 프란이 당차게 대꾸하자 시온은 활짝 팔을 벌렸다. "그래, 무사했던 거야……." "이 느끼 버터 놈, 시간 없다니까!" 프란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시온은 이미 손을 뻗어 프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는 프란의 쇄골에 단숨에 얼굴을 묻었다. 프란의 존재를, 프란이 무사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싶은것이다. '무사했다. 무사했어. 진짜 프란이다.' 프란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피에 젖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잠깐 뒤로 밀려났던 재회의 기쁨이 이제야 비로소 밀려왔다. 프란을 품에 안은 시온은 한동안 말조차 잇지 못했다. "야, 이거 놔!" 길길이 날뛰고 있던 프란은 한참 만에 결국 몸에서 힘을 빼고 말았다. 마치 뮤처럼 자신의 품에 꼭 매달린 시온니 안쓰러워서다. 프란은 어설픈 손놀림으로나마 시온의 등을 잠시간 다독여주었다. 그러면서 프란은 입을 열었다. "어쩔 셈이야?" 딱 한마디였지만 시온은 프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그는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무사한 덜 봤으니 오늘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나가고 싶어." 이럴 줄 알았다, 이 자식. 프란은 활짝 웃었다. 시온이 아일린 가주자리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처음부터 알고 있던 프란이다. "너 대마왕한테 선전포고까지 했잖아?" 시온이 보낸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프란은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시온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프란을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 정말은 조금도 원하지 않아." "뭐라고? 그럼 그걸 정말 네가 보냈단 말이냐?"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이진느가 시온의 이름을 훔쳐 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뭘 생각했는지 프란의 눈이 움찔 떨렸다. "날, 만나고 싶어서라고?" 시온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넌 그 자리 원하지 않았잖아." 프란은 울컥거리는 심장을 안고 물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 좀 작작해라, 응?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넌 네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이 있잖아. 그걸 잡아! 네가 희생해도 조금도 기쁘지 않단 말이다!" 시온은 얼굴이 붉어진 채 외치고 있는 프란을 보았다. 생각하는 그대로 계산 없이, 사심 없이, 그대로 말하는 솔직한 프란. 시온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아님…… 모른 척하는 거야?" 프란의 어깨가 굳었다. 시온의 눈이 오롯이 프란을 향했다. "널 사랑하니까, 프리나." 농담이 완전히 사라진 시온의 눈이 프란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시온은 나직하게 덧붙였다. "너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으니까." * * * 키네온이 나가고 난 응접실, 반과 키네세스는 단둘이 남겨졌다. 할 말은 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련만 키네세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동안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당신은 알기나 할까?' 키네세스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반에게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염집의 여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공주.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언어가 되지 못한 마음은 키네세스의 여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리게 만들었다. "애써주셨다 들었습니다." 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하며 반이 입을 열었다. 키네세스는 한참 동안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간신히 그 말에 화답할 수 있었다. "도움이 못 되었는 걸요."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진심으로, 키네세스는 반의 도움이고 싶었다. 키네세스는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만 포기하라고, 저스티스 경은 죽었다고 소리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모든 충격과 절망 속에서도 키네세스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렸다. 그는 돌아올 거라고. 무사히, 언제나의 모습으로. 한참의 침묵을 뚫고 키네세스가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당신의 카르멘도, 아일린도 원하지 않아요." 이번에도 공주의 말은 진심이다. 반은 그걸 알고 있었다. "당신이 떠날 때 내게 그랬어요. 돌아오면 답을 주겠다고." 계승식을 위해 떠나던 날, 반은 키네세스에게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돌아와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야말로 대답해야 한다. 몇년간이나 오롯이 자신만을 향했던 공주의 애정에 답해야 한다. 반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반이 막 한마디를 뱉어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반은 움찔했다. "지금 당신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가문과 왕가, 마법사와 검사, 아일린과 카르멘…… 그러지 말아요. 그 모든 문제들과 나를 연관시켜 생각하지 마세요." 키네세스는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해주세요. 당신이 안정되면, 당신이 가문을 찾으면…… 그때, 오직 나만 생각하고 답을 해줘요." 호수빛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더욱 청초해진 공주가 웃는다. 그런 키네세스가 몹시도 아름답다는 것을, 반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다만 하나는 기억해줘요, 카르멘 경. 공주라는 신분 따위 상관없을 만큼, 당신이 누구였든 상관없을 만큼, 그만큼이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키네세스는 완전한 여인의 얼굴을 한 채 말했다. * * * 고백 같은 건 많이 들어봤다. 득시글한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싸움 잘 하는, 왕 형님 같은 공주' 취급 받아본 적도 있다. 로네이트에 있을 때도 인기는 만점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 당황해 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랑을 고백해온 사람은 여태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프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젠 '헛소리 마!' 하고 날아 차기를 먹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프란이었다. 저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프란은 있는 대로 오두방정을 떠는 것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이,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곧 너희 어머니가 올 거다. 그 전에 나가야지."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시온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시온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을 느끼면서도 프란은 사방을 있는 힘껏 들쑤셨다. 외부에서밖에 열 수 없다고 한 문이 닫혀버렸으니 사실상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프란은 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설마 어디엔들 틈이 없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프란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온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그거, 형님 검?" 검집만 봐도 안다. 아무 무늬가 없는 검은색의, 그러나 자신이 감싸고 있는 것이 천하제일 명검임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검집. 저 검집이 숨기고 있는 것은 분명 루니아 블레이드! '도대체 왜 저걸 프란이?' 저 검은 그 자체로 가주의 상징이다. 카르멘 가 가주의 둘도 없는 표식이란 말이다. 시온의 경악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문을 빵빵 차대고 있던 프란은 이번엔 벽을 향해 다가갔다. "형님 검, 맞지?" 안 되면 벽을 박살내면 되지, 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프란이 엉?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시온의 눈은 루니아 블레이드의 검집에 고정되어 있었다. 프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검집을 툭 건드렸다. "이거 말이냐? 대마왕이 빌려줬어." 그 대답에 시온은 허탈한 듯 웃었다. "형님이 그걸 빌려주다니……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어 마지막 말을 할 때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프란은 벽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부로 만든 것도 아니고 벽이 박살날 리없다. 프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온을 돌아보았다. "너도 빨리 마법 좀 써봐라. 너랑 나랑 같이 하면 어떻게든 될 거 아냐?" 프란의 말에 시온이 가까이 다가왔다. 드디어 힘을 쓰겠군, 하며 프란이 기대하며 올려다보는 가운데, 시온은 가만히 손을 뻗어 프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곧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프란. 나는……." 그때였다. "쥐새끼 같은 년!" 쾅! 문 열리는 소리에 프란과 시온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최악이다!'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 밖에 그 여자, 이진느 아일린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라딘 여섯, 정초원 인사 다섯과 함께였다. 초조하게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던 프란은 그 인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레오니아를 발견했다. 레오니아는 무심한 얼굴, 우리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법한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둘러대기 위해 위장을 했었는지 레오니아의 팔엔 쓸린 자국까지 나 있었다. 프란은 그런 레오니아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멋있는 여자네.' 프란은 눈을 빛냈다. 모두가 이 탑 안에 갇히는 황당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프란을 도와주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니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 바람에 마법에 의해 자동으로 닫혔어야 할 문은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였다. 프란은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모두 열둘. 시온이 마법을 쓰고 자신이 그사이에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 영 탈출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진느가 고함을 쳤다. "저승길에 제 발로 들어왔구나!" "내게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시온이 빈정거리듯 말을 받았다. 이진느는 그 말을 무시하며 세라딘을 향해 눈짓을 했다. 눈짓의 의미를 간파한 세라딘 여섯은 엄중한 얼굴로 시온에게 다가왔다. 일단 시온의 신병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건들지 마!" 프란은 순식간에 검을 뽑더니 그것을 가로로 누이며 시온의 앞을 막아섰다. 이진느의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검의 정체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루니아 블레이드군. 저년 검부터 빼앗아!" 세라딘이 시온와 프란을 둘러쌌다. 프란은 이를 악물었다. 둘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될 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프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의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세라딘조차 일순 망설였다. 프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프란이었지만 그녀의 눈만큼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프란이랑 같이 가면 참 좋겠다.' 그 눈을 보며 시온은 생각했다. 이대로 프란을 안아들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이따위 짓거리 모두 때려치우고. 그러나 시온은 웃었을 뿐이다. 프란은 순식간에 그 웃음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프란도 하루 이틀 봐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란은 영 엉뚱한 오해를 했다. 시온이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걱정마라, 느끼 버터. 같이 나가자!" 엄청난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란은 포기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마로 여기를 뚫으려 하고 있었다. "주제에 마법사니까 너도 도와라." 나직한 프란의 말에 시온은 파안대소할 뻔했다. '주제에 마법사'라니. 내가 그렇게 신용 없는 인간인가? 시온은 손을 뻗어 프란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곧장 뱉어냈다. "프란. 난 안 가." 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세라딘은 물론이고 이진느조차 얼굴을 굳혔다. 나간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를 땐 언제고 저게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프란 역시 경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뭐? 어째서?"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형님이 내 앞에 온다면 모든 게 설명될거야." 프란의 눈동자가 이 뜻밖의 말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시온, 그런 눈으로 말하지 마라. 세상이 다 끝장난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프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진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저년을 잡아!" 프란만 확보하면 원하는 대로 시온을 부릴 수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이진느는 그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진느는 싸늘한 시온의 눈을 마주해야 했다. '이 녀석 도대체……!' 이진느가 서늘함을 느꼈을 때, 시온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말려 올라갔다. "어머니. 여기를 감싸고 있는 결계는 6써클 후반이더군." 이진느가 움찔했다. 위저드 리그와 이진느가 알기로 시온은 아직 6써클 중반의 마법사였다. 그래서 시온을 가둔 이 방을 감싸고 있는 결계는, 그의 말대로 6써클 후반의 마법이었다. 지금은 방문이 열려 있어 출입이 가능하지만 이 상태로도 결계는 작동하는 것이라서, 이 안에선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7써클 이상이 아닌 한. 프란이 막 공격에 막 돌입하려던 그 때, 시온은 입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라딘 여섯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시온이 공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온의 온몸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빛났다. 프란이 침을 꿀꺽 삼키는데, 시온이 씩 웃어보였다. 그의 이마엔 땀이 맺혀있었다. "내가 아직도 6써클로 보이지? 하긴, 어머니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뭣이?" 시온은 손을 척 들었다. 프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온의 몸에서 뻗어 나온 빛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이게 처음 써보는 거지만 아무래도 나, 7써클에 진입한 것 같거든." 이진느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 순간, 프란은 자신의 온몸을 뒤덮는 찬란한 빛을 보았다, "느끼 버터. 이 자식!" 프란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예전에 아일린 가에서 탈출할 때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아본적이 있다. 시온이 플라이를 시전 했던 그때! 그때도 이렇게 온몸이 흩어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시온! 야!" 프란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서 곧장 흩어졌다. 그리고 프란의 온몸을 감쌌던 그 눈부신 빛이 멎었을 때 그 자리엔 프란도, 프란의 커다란 목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공허. 시온만이 프란이 사라진 그 공간에 비틀거리며 서 있을 따름이었다. "시온, 너?" 이진느는 눈을 부릅떴다. 나머지 사람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경악에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온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온의 어깨가 파도처럼 들썩인다. 처음으로 7써클 마법을 시전 한 것이니 그로서도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시온 도련님……." 세라딘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온을 불렀다. 마법을 잘 알지는 못해도 한 써클을 건너뛸 때마다 적어도 십 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써클이 높아질수록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모두가 놀란 것은 시온이 7써클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진느가 경악을 대신해 소리쳤다. 시온은 웃으며 답했다. "난 진짜 천재일지도 몰라. 며칠 전부터 느낀 건데, 내 안에서 마나가 7개로 원을 그리더라고." 이 사실을 자켄린이 알았더라면 그는 정말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십년 안에 7써클을 마스터할 거다, 라는 말조차 제자의 재능을 십분 인정하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단 몇 달 만에 이 괴물 같은 시온 아일린은 6써클을 마스터하고 7써클로 진입해버린 것이다. 이 속도라면 7써클을 마스터하는 기간 역시 예상보다 훨씬 짧아질 것이다. "그럼 왜?" 이진느가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왜 여기서 나가지 않았던 거지!" 시온은 힘없이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7써클 마법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어서, 그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래도 시온은 어머니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글쎄. 곧 형님이 돌아올 텐데, 도망치는 건 성에 안 차잖아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프란은 그 바람의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렸다. "이 미친 자식…… 미친, 미친 자식……."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프란은 라어 강 바깥으로 정확히 워프 되어 있었다. 예전처럼 누군가가 받아줘야 할 정도로 거친 마법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안전하게 모래사장으로 워프된 것이다. 시원한 공기가 주변을 맴도는 지금에야 프란은 알 수 있었다. 시온은 혼자서도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어쩔 셈이냐, 너……." 프란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주먹이 까졌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으련만, 질퍽한 모래사장은 부드럽게 프란의 주먹을 감쌌을 뿐이다. "제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와주겠다고 들어갔는데 오히려 폐만 끼쳤다. '아직도 모르겠어?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널 사랑하니까, 프리나. 너 말고는 갖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시 한 번 선명하게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입술을 깨물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로 돌아갈 것이다.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멈추지 못했다 해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 * * 프란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일었던 아일린 가는 거짓말처럼 다시 고요해졌다. 느지막한 새벽에 있었던 소동들이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 깨끗하게 지워져간다. 그러나 아일린 가의 모두가 다음 날을 준비하는 그 아침에도 이진느 아일린만은 핏발 선 눈으로 어제의 소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오니."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이진느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레오니아를 불렀다. 레오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레오니아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어젯밤 소동에 그녀가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밧줄에 쓸린 자국을 만들어낸 덕이기도 했지만, 이진느가 레오니아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가 더 컸다. "네가 보기엔 시온이 무슨 생각릉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이진느의 질문에 레오니아는 당혹했다. 어머니가 모르는 아들의 심리를 제삼자인 자신이 알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다만 레오니아는 자신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대던 프란을,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시온이 갇힌 탑 앞으로 달려 나가던 그 자신만만한 뒷모습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 위로 더없이 쓸쓸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시온의 얼굴이 겹쳐졌다. "무슨 속셈인지를 모르겠어."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닌 듯, 이진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프란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 굴었던 녀석이 프란이 나타난 순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다니.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래도 이진느는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었다. 시온은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던 걸 보면 7써클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비밀로 할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란이 위험에 처하자, 시온은 자신이 7써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만방에 공개했다. 그만큼이나 프란이 중요하다는 증거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이진느는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레오니…… 젠을 데려와라." 이진느의 앞에서 다소곳하게 양손을 모으고 있던 레오니아의 눈이 일순 커졌다. 방금 전 이진느가 말한 '젠'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도 익숙했던 탓이다. "일곱 번째 세라딘 말인가요?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무언가를 말하려던 레오니아는 이진느의 눈을 보며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진느는 대꾸를 용납지 않는 위압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레오니아는 직감적으로 이진느가 생각한 바를 눈치 챘다. 상대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약점을 잡으면 된다. 그것이 이진느 아일린이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다. 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터. 이진느는 시온의 확실한 약점인 프란을 잡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젠이라니!' 레오니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제 1장_탑에 갇힌 왕자님' 끝 - 제 2장_거짓말 프란은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형님이 내 앞에 온다면 모든 게 설명될 거야.'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프란은 죄 없는 말을 자꾸만 채찍질했다. 어찌나 서둘러 달려왔던지, 6일이 걸렸어야 할 귀환이 4일 만에 끝났다. 그사이 안 입고 안 씻고 안 잔 프란의 몰골은 거지가 '아이고, 형님. 그동안 고생 많았소.'하고 넙죽 엎드릴 만큼 지저분해져 있었다. 거기다가 동방 여왕 화장이 어찌나 독했던지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은 탓에, 프란의 얼굴은 공포 수준이었다. 국경 지대에서는 병사들이 귀신이라 며 야단까지 피웠다. '드디어 도착이다.' 그 모든 수난을 넘어 마침내 카르멘 가의 황금문 앞에 도착한 프란은 숨을 헐떡이며 문지기들 앞으로 다가갔다. "헉!" 그러나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 문지기들조차 프란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 꼴이 그렇게 심한가?' 프란은 민망함을 느끼며 나야, 하고 말했다. 허나 문지기들은 '이 도깨비가 누구든지 간에 황금문을 지켜 보이겠다!'라는 굳건한 의지로 무장한 채 프란을 향해 장창을 들이대고 있을 뿐이었다. 프란으로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할 수밖에. "이것들 보라고. 나, 프란 프리텐이란 말이다!" "뭣이?" 생각도 못했던 듯, 문지기들은 창을 내려놓은 채 서둘러 프란 앞으로 달려왔다. 문지기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프란의 얼굴을 보고 있던 그때였다. "프리나. 꼴이 그게 뭐야?" 프란은 목소리가 난 뒤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부른 맹수마냥 프란 쪽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흑발의 남자가 보인다. 하질리언이다. "어딜 갔다 온 거냐?" 문지기들이 문을 여는 사이, 프란은 옆에 선 하질리언을 향해 물었다. 카세타에 연고지라곤 없는 하질리언이 저택 밖에 나와 있는 게 의아했던 탓이다. "심심해서 산책했어. 나한텐 아무 일도 안 시켜서 시간이 남아돌거든." 하질리언은 그렇게 답함과 동시에 프란의 위아래를 침착하게 훑어보났다. 하질리언이 대뜸 웃음부터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던 프란은 예상외로 한참 동안이나 하질리언이 웆지 않자 도리어 당황했다. "어, 어이. 왜 안 웃는 거냐?" "네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웃을 마음도 안 나." 담담한 얼굴로 '심하군'이라는 평을 내리는 폼이 아무래도 진심인것 같다. 프란은 이 자식, 하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이상한 차림인 게 하질리언 탓도 아닌데 뭐 어쩔 것인가. 괜히 뒤통수나 슬슬 긁어대는 프 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표정이 안 좋네. 일이 잘 안 풀렸어?"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다. 루니아 블레이드도 갖다 주고 앞으로의 일도 의논해봐야지. 마음을 굳힌 프란은 반의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섰다. 그제야 프란 이 어딜 가는지 눈치 챈 하질리언은 기겁한 얼굴로 프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혹시 미남한테 가는 거야?" 하질리언이 반을 호명하는 단어는 어느새 '미남'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 왜?" 프란이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자 하질리언의 얼굴이 망가졌다. '네 얼굴 보면 미남이 기절할 거야. 나나 되니까 참고 보는 거지.' 하질리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얼굴레 묻은 그 이상한 것부터 좀 지우고 가지 그래? 게다가 미남, 지금 방에 없어." 프란은 놀랐다. 아일린 가와의 일전을 앞두고 가문을 비우다니 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떄문이다. "어디 갔는데?" "나야 모르지. 오후쯤 나갔어. 곧 올 거야." 하질리언은 프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내 방에 가자. 너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녀에게 말해 화장 지우는 용액과 솜을 얻어온 하질리언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엄청난 작업이겠군. 화장이 아니라 독이다, 독.' 며칠 동안이나 이 상태로 있었다면 자연히 지워져야 하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한 화장인 건지 지워지기는 커녕 아예 프란의 피부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아악! 아파!" 한순간 프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화장 지우기 용액으론 무리라는 생각을 한 하질리언이 손톱으로 프란의 얼굴을 긁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됐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하질리언의 손을 단호하게 쳐낸 프란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리곤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화장은 때로 만들어 벗기려는 것이다. "프리나. 나 궁금한게 있어." 여전히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면서, 프란은 고개를 돌려 하질리언을 보았다. 그런 프란의 얼굴에 손바닥 길이만 한 긴 떄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이젠 심한 게 아니라 참혹하군.' 하질리언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프란이 물었다. "뭔데?" 프란의 얼굴이 웃기긴 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자기 할 말을 못할 하질리언이 아니다. "네 빚 말이야, 언제 끝나?"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빚이라. 때로 화한 화장을 잡아당기며 프란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시온을 데려오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대마왕이 그랬었다. 그러나 프란은 떠나는 그 순간부터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시온을 신경쓰느라 빚을 생각할 여유 따윈 전혀 없었던 것이다. 빚쟁이 주제에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싶어 프란은 웃었다. "나도 몰라. 일단 남은 건 1천5백만 케트." "뭐라고?" 하질리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났던 탓이다. 로이네트 시절 현상금이 3천5백만 케트나 됐다는 데서 눈치챘어야 했다. 1천5백만 케트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액수를 빚질 수 있는 건데?" "나도 궁금하다. 빌어먹을 아버지 같으니." 말은 험하게 뱉었지만 프란의 얼굴에는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다. 의외로 빨리 갚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질리언은 더더욱 놀라응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많이 나아진 거라면 처음엔 대체 빚이 얼마였다는 소린가? 하질리언은 때로 화한 화장 찌꺼기가 온 얼굴을 뒤덮어 더 이상은 사람의 형상이 아닌 프란이 갑자기 안쓰럽게 느껴졌다. "빚은 왜?" 화장을 다 밀어냈다 싶었던 프란이 자신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제야 프란이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본 하질리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프리나. 그 빚 다 갚으면 나랑 사업하지 않을래?" "엉?" 프란은 뚱딴지같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사업 파트너론 최고거든. 나도 이제 용병 생활 접고 뭔가 건실한 일을 하고 싶고. 로이네트에서 일하면서 모아둔 돈이 좀 있어. 네가 동의만 한다면 사업 자금은 내가 댈게. 프리텐 가 일으키는 일부터 시작해도 상관은 없고." 프란은 곧장 대답을 못했다. '사업이라고?' 물론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빚을 다 갚고 나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락케이드를 데려오는 거지만, 프리텐 가의 사업을 재건하리라는 꿈도 한 번쯤은 꿔봤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빚의 액수를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꿈이었을 뿐이지만 꿈꾸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기사 서임을 받는다면 아버지의 옛 거래처들과 다시 인연을 맺는 일도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상상이 구체화될수록 프란은 가슴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왜 또 이 모양이야?' 하질리언은 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프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관찰의 시선이었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프란은 깨닫지 못했다. "괘, 괜찮은 생각이다. 빚 다 갚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한참 만에 하질리언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상기한 프란이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질리언이 히죽, 참으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뭐, 뭐냐. 그 얼굴은!' 순식간에 소름이 돋은 프란이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하질리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라비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프리나. 됐어. 그 건은 다음에 얘기하자고." 프란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의아한 얼굴을 해야 했다. * * * 반은 궁성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피곤하다' 마차 안에서 반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키네온으로부터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을 빌리는 데 성공한 반은 요즈음 빈번하게 궁성에 출입하고 있었다. 처음에 7써클 마법사 라톤을 위시한 궁중 마법사들은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지?'하는 얼굴로 반을 맞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은 궁중 마법사들 자신의 손으로 카세타 제 2궁을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장본인과 손잡고 그의 집을 되찾는 작전에 합류해야 한다니. 반으로서도 인사조차 제댜로 하지 않은 마법사들과 손잡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게다가 천생이 검사인 반과 천생이 마법사인 그들은 작전을 짤 때도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해서, 오늘 역시 수확이 전혀 없다고 해도 좋았다. "가주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며 정중하게 말했다. 반은 마차에서 내려섰다. 궁중 마법사들과 다투다시피 하고 돌아온 지금도 반의 일정은 다 끝나지 않았다. 식사를 한 직후 그는 검사들의 검을 봐주러 가야 한다. 그일이 끝나면 마린이 싸들고 올 어마어마한 서류들의 러브 어택을 감당해야 하고 그 후엔 룬 등의 아인켈, 켈리 등의 비켈린을 대동한 채 카르멘 가 검사들과 작전을 상의해야 한다. 프란이 아일린으로 떠난 직후 꼬박 열흘간, 반은 이토록 무리한 일정을 감당하고 있었다. 장미 정원을 지나친 반은 저택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반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쯤엔 늘 저택 문 밖에서 대기하곤 하던 호위무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히죽히죽, 속을 알 수 없게 웃어대는 이상한 남자가 호위무사들을 대신해 저택 앞에 죽치고 앉아 있을 뿐이다. "여! 미남." 이상한 남자, 하질리언은 반이 보이자마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꼴을 보니 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성싶었다. "미남이라고 부르지 마라." 반의 차가운 대꾸에 하질리언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런 걸 신경 썼던가, 미남? 난 내가 미남이라고 부르면 재깍재깍 돌아보기에 '너도 네가 미남인 줄 알긴 아는구나.'하고 생각했는데." "헛소리." 이 차가운 대꾸에도 하질리언은 굴하지 않았다. "내가 널 '가주님'이라고 부르는 건 웃기잖아? 그렇다고 '저스티스카르멘 경'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미남이 제일 적당하다고. 왜, 너 미남 맞잖아?" 능글능글한 말투였다. 헤냔이라면 기가 질려 악 소리를 냈겠지만 반에겐 통하지 않았다. 반은 하질리언이 떠들건 말건 완전히 무시한 채 저택 안으로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래도 하질리언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반의 뒤통수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을 붙였다. "미남, 요새 통 못 자더라? 요전에 보니까 새벽 네 시에도 불이 켜져 있더라고." 그 소리에 반은 걸음을 멈추었다. 확실히 요즘 못 자긴 했다. 엄청난 업무를 헤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쏟아지는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던 매일 매일이었다. 반이 걸음을 멈추는 걸 확인한 하질리언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요새 일정이 여섯 시부터지? 체력도 좋지. 어떻게 하루에 두 시간도 안 자면서 그렇게 멀쩡하냐? 하지만 오늘로 그것도 끝이다. 이젠 푹 자도 될 거야." 반은 마침내 돌아서고 말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이젠 걱정하느라 잠 설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하질리언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이 오싹함을 느낄 틈도 없이, 하질리언이 말을 이었다. "프리나 왔거든. 네 방 앞에 있을 거야." * * * '바보 같은 소리.'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요 며칠 강행군 속에서도 잠을 못 자긴 했다. 하지만 그건 아일린 가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어서였지, 프란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하질리언을 향해 '헛소리'라고 일침을 가하고 나서, 반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방금 전까지 온몸을 뒤덮고 있던 끈적끈적한 피로가 거짓말처럼 싹 가셨다는 점이다. 게다가 반은 스스로가 의식할 수 있을 만큼 서둘러, 거의 뛰다시피 하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은가!' 누구에게 변명하는지도 모르는 채 반은 속으로 외쳤다. 그러는 사이에도 발은 착실하게 움직여서, 정신을 차렸을 때 반은 어느덧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있다.' 그래. 정말로 거기에 프란 프리텐이 있었다. 뒤돌아 앉아 있긴 하지만 저 화려한 금발은 분명 프란의 것이다. 어디 가서 안 오나 했던 호위무사 둘은 프란을 사이에 두고 잔뜩 신이나 뭐라고 시시덕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 가주님!" 호위무사 하나가 반을 발견했는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 두 사람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프란이 자신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린 순간 반은 흠칫하고 말았다. 10여 일 만에 돌아온 프란의 상태가 영 이상 했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꼴이지?' 프란은 돈 주며 입으라고 해도 거절할 법한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생선 비늘로 만든 것 같은,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슴밑까지 푹 파여 있는 옷이다. 옷만 해도 충분히 이상한데 씻지도 않았는지 프란의 온몸은 진흙과 먼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워낙에 무표정이라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반은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반의 경악을 알 리 없는 프란이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자." 당혹을 수습하며 반이 말했다. 호위무사들이 서둘러 방문을 열어주었다. 프란은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반의 뒤를 따랐다. 곧 철컼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이 들어간 방문이 잠겼다. 문이 닫힌 후, 호위무사 둘은 얼굴을 맞댄 채 한참이나 쑥덕거려야 했다. "근데 쟨 무슨 저런 옷을 입고 있대?" "그러게. 살다 살다 저런 옷은 처음 봤다. 여자 옷 입은 거 처음 봤는데, 저런 거라니." "진짜 괴상하군. 저런 취향이라면 불쌍할 정도다." 프란이 그 말을 들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아니야! 절대 아니란 말이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 * * 방 안에 들어선 반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프란은 곤란한 낯빛으로 그런 반을 보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도 반은 프란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씩 웃어보이던 녀석이 침울한 표정이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다. "여기요." 프란은 반에게 검을 내밀었다. 검을 받아들며 반은 프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프란은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예상대로다. 반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프란은 그 얼굴이 묘하게 기뻐 보인다고 느꼈다. '착각이겠지. 기쁠 리가 있나.' 반이 루니아 블레이드를 말없이 허리에 차는 것을 보며, 프란은 고민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나질 않자 프란은 곧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에라. 그냥 말하자!' 프란은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저택에 들어가서 시온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만났다고?" 무심히 루니아 블레이드를 만지고 있던 반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는 반이기에, 프란은 그가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온과 만났다는 게 저렇게 놀랄 일인가 생각하자 프란은 기분이 나빠졌다. '아일린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프란은 자존심이 상했다. 사람을 얕봐도 분수가 있지. "만났지만 시온은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의로 남아 있겠다고 그랬습니다." 한참 만에 반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뭐라고 그러던가?" "가주님이 자기 앞에 오면 모든 게 설명될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프란은 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담긴 것이 걱정과 혼란이라는 것을 반조차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다. 프란은 초조한 듯 물었다. "어쩔 겁니까?" "아일린을 친다."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 때문에 프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시온을 데려올 기회를……." "싫다." 단칼이었다. '그렇게 자를 건 없잖아. 사람 민망하게시리!' 프란은 속으로 소리쳤다. 한 번 실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하니 꼭 못 믿을 녀석 취급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프란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시온은 스스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프란은 믿고 있었다. 시온은 절대 반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을거라고 말이다. 프란이 그런 생각 때문에 멍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데, 반이 기습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부터 다시 수행을 시작해라." "뭐요?" 프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너도 인간이냐, 앙? 나도 여독이라는 걸 좀 풀어야 할 거 아냐! 하루쯤은 쉬게 해달라고!' 얼굴로 말을 하는 프란을 보며 반이 무심하게 물었다. "불만인가?" '으윽.' 그래. 빚진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야.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댔다. 한참을 구시렁거리면서도 프란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반은 웃을 뻔했다. 우거지상을 한 채 억지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프란의 표정이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겠지.' 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며 얼굴로는 '싫어, 이놈의 자식아!'하고 말하ㅏ면서도 대답은 늘 공손하게 '알았어요.' 였질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분 나쁠 법한 일인데도 반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게, 졸음이 왔다. '왜?' 몸이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조금씩 감긴다. 10일 동안의 수면 시간을 다합쳐도 서른 시간을 넘기지 않은 자신인 만큼 잠이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프란이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고 있는 저 모습을 보면서 며칠 동안이나 이루지 못하던 잠이 쏟아지다니. 해괴한 노릇이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한순간 반은 재빨리, 또 한 번 누군가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했다. 하질리언의 그 음흉한 미소가 생각나서 몹시 불쾌해지는 반이었다. "왜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반의 미간이 좁혀진 걸 눈치 챈 프란이 물었다. 프란이 오렌지색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걸 보던 반은 화급히 말했다. "나가봐라." '뭐야, 진짜?' 웃기는 녀석, 하고 중얼거리면서 프란은 등을 돌렸다. 그 등에 대고 반이 잊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내일부터다." '알았다고 그랬잖아, 이놈의 대마왕!' 프란은 벌레 삼킨 듯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문을 열었다. 문을 쾅 소리 내어 닫으면서 프란은 몇 번이고 나쁜놈,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프란의 마음속에선 두 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고 있었다. 진짜 사람 부려먹기 좋아하는 못돼 처먹은 대마왕이지만 그 대마왕의 얼굴을 본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 아닌가. 당장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라는 것도 뭐, 생각해 보면 늘 있었던 일이다. '으아, 몰라. 피곤해 죽겠다. 일단은 자고 생각하자!' 고개를 휙휙 저은 프란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잘 거다. 잘 거라고!' 그날 밤, 프란은 씻을 틈도 없이 잠들렀다. 카리스라는 마법사에게 당했던 예전처럼 잠의 여신이 눈꺼풀에 수면의 가루를 뿌린 것 같았다. 프란은 물처럼 깊은 잠 속에 저항 없이 몸을 맡겼다. 새벽이 안개 빛 목소리로 노래할 때까지, 프란은 꿈조차 꾸지 않고 잤다. 프란은 몰랐다. 그날 밤 반 역시 거의 같은 상태로 잠들었다는 걸. * * * 아일린 가와의 일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주듯 카르멘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요즘 정신없이 바빴다. 평소에도 여덟 시간이상 검술 훈련을 하는 견습생들은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 검술 연습에 매진했고, 집사장 마린을 비롯한 집사들은 전투에 필요한 예산 측정등으로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이토록 바쁜 카르멘 가 사람들 중에 유독 여유로워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주방 소속 하인들이다. 어차피 매일같이 수천인 분의 음식을 만들어내던 그들이니 입이 조금 더 늘어났다 해서 힘에 부칠 까달기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방장은 오늘도 힘이 넘쳤다. 이 넘치는 힘으로, 주방장은 어제 막 돌아온 힘없는 주방 보조 프란 프리텐에게 물었다. "너말이다. 정식으로 주방에 취업할 생각은 없냐?" "전혀 없는데요." 프란은 감자 껍질을 서걱서걱 깎아내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 바람에 진지하게 물었던 주방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의 감자 깎기 기술은 이제 최고급이지. 난 오랫동안 신중하게 지켜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건 네게 요리사로서의 싹수가 보인다는것!" 프라이팬을 휙 내밀며 말하는 주방장 떄문에 프란은 결국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에잇! 제 검은 생선이나 감자를 다듬기 위해 갈고 닦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너 지금 생선과 감자를 무시하는 거냐?" 주방장이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프란은 오늘도 주방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푹 자긴 했지만 어깨뼈가 두둑 소리를 내는 걸로 봐선 그 수면도 충분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주방장은 몇 번이나 윽박질러도 '아, 글쎄. 내 검은 식칼이 아니라니까요!'라고 대거리하는 프란과 실랑이하느라 오늘도 반의 새우튀김을 태웠다. "세인트 레이크 씨에서 잡아온 최고급 새우들이! 아, 안 돼!" 통곡하는 주방장을 보며 프란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프란의 옆에서 당근을 깎고 있던 뮤가 그런 프란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프란, 아파 보여.'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뮤만은 알고 있었다. 프란이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감자를 깎다보니 옆구리를 움직여야 해서 프란이 간간히 인상을 찌푸렸던 탓이다. "많이 아파, 프란?" "응? 어, 어떻게 알았어?" 놀라는 프란을 향해 뮤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프란의 부대에 담긴 감자를 가져와 깎기 시작했다. 프란은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 대신 뮤의 부대에 담겨 있는 당근을 꺼내 들었다. "프란도 참." 가볍게 원망하는 듯했던 뮤는 이윽고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곧 전투가 일어날 테고 사람들이 다쳐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순간이 뮤에겐 무엇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프란 역시 뮤 옆에서 나란히 감자를 깎으며 조금쯤 행복한 기운을 느꼈다. 걱정은 산더미 같지만 그래도 이 착한 소녀에게까지 그 걱정을 넘겨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근데 프란. 들었어?" "뭘?"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뮤를 바라보았다. 뮤는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프란이 가까이 가자 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주님이 제 3공주님이랑 결혼한대." "엉?" 프란은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결혼이라니? 멍한 얼굴로 돌아보는 프란의 눈에 몽롱한 얼굴을 한 뮤가 보였다. "프란이 아일린 가로 떠난 사이에 가주님이 궁성에 가셨거든. 그때 두 분 중 한 분이 청혼을 하셨나봐. 그래서인지 가주님, 요새 궁에 자주 드나드셔. 그게 다 키네세스 공주님과의 결혼 준비를 위해서래, ……믿어져? 그 차가운 가주님이 결혼을 한다니!" 물론 반은 키네세스와의 결혼 준비를 위해 궁성에 가는 게 아니라 마법사들과 '전쟁'을 하러 궁에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개 하녀인 뮤가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이 핑크빛 염문은 이미 카르멘 가의 나이 어린 소녀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손에 넣을 수 없는 아름답고 차가운 가주가 공주님과 결혼한다는 사실에서 이상한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중이었다. "소문을 들어보니까 가주님, 일전에 사선을 넘나드셨다며? 죽는다고 생각했더니 키네세스 공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아닐까? 아아, 진짜 로맨틱해!" 뮤는 꿈꾸는 눈동자로 말했다. 그렇게 허공을 향해 달콤한 눈빛을 던지고 있던 뮤는 한참만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프, 프란?" 이제 이 주방에선 프란 프리텐하면 감자 깎기의 초절정고수로 통한다. 그런데 그 절정고수께서 웬일인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뭉텅뭉텅 감자 살을 베어내고 잇었다. "왜 그래?" 뮤는 나사가 빠진 표정으로 감자만 깎고 있는 프란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초점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뮤가 건드려도 모르는 것 같다. 프란은 감자 깎는 일을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처럼 죽어라고 감자만 깎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보다 못한 주방장이 다가와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갈겨버릴 때까지 말이다. * * * '결혼? 대마왕이?' 프라이팬으로 얻어맞은 머리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건만 프란은 오늘도 '습관'의 힘으로 반의 방을 향해 크레인을 끌고 가고 있었다. 아직도 뮤가 했던 말이 현실로 와 닿지 않은 프란이었다. "하하하, 대마왕이 결혼을 한다네? 애가 태어나면 대마왕 2세다, 와하하!" 큰소리로 웃어봤자 바보가 된 느낌일 뿐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 무, 물론 공주님이 대마왕을 좋아하는 특이한 취미를 갖고 계신건 알고 있었지.' 공주의 마음은 사랑에 대해 별로 고민해본 적 없는 프란에게도 강한충격을 남길 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그 마음이 드디어 전해진 거라면 그건 분명 크게 축하해줄 만한 일이다. 공주님은 대마왕을 정말로 좋아 하고, 그런 공주님과 함께라면 대마왕도 언젠가 활짝 웃을 수 있을 테니. 케인을 위해 울어주는 일도 언젠가 가능하겠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큰 위로니까. '뻥쟁이 같으니.' 허나 축하해줄 만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프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전, 아일린 가로 갈 때 대마왕은 그랬었다. '그녀와는 결혼하지 않는다.'라고. 그런 주제에 사선을 넘어서 돌아오자마자 하는 일이 키네세스와의 결혼 준비라니. 뮤의 말대로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한 순가, 공주를 향한 사랑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쌩쌩 꼬마!" 반의 방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는 프란을 발견하자 기쁜 듯 다가왔다. 어젯밤에 프란이 돌아오자마자 방 앞에 앉혀놓고 이것저것 캐물었던 두 사람은, 그러나 프란이 어제와는 다르게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뭐 잘못 먹었냐?" "얘 상태가 왜 이래?" 평소의 프란이라면 방정을 떨면서 두 호위무사의 이야기에 맞장구쳐 줬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 한두 개가 핑핑 나가 있는 프란에게 평소의 행동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안에 있지?" 프란은 크레인을 툭툭 치며 물었다. 형식상의 질문이었고 사실은 문을 열어달라는 뜻이었으나 호위무사 둘은 고개를 저었다. "안 계신다." 프란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분명 어제, 내일 당장 일을 시작하라고 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 주제에 밥 갖고 왔더니 먹지도 않고 대체 어딜갔단 말인가. 그래도 곧 돌아오겠지 싶어 프란이 그 자리에 서 있는데, 호위무사 한 명이 프란의 어깨를 쳤다. "아침 일찍 '궁성'에 가셨다. 문제가 좀 생겼나봐. 내 생각에 넌 오늘 쉬어도 될 것 같다." 그 순간 프란은 방금 전 뮤가 해줬던 말이 실체가 돼서 눈앞에 나타남을 느꼈다. '가주님 요새 궁에 자주 드나드셔. 그게 다 키네세스 공주님과의 결혼 준비를 위해서래.' 가슴이 말도 못할 만큼 아파진 건 그때였다. * * * '세키에 여신님. 저한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케이온 기사단의 마스코트, 헤냔 키에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헤냔이 카세타 왕실이 특별히 허락한 '휴가'에서 돌아와 기사단에 복귀한 지 이제 3주쯤 되었다. 기사단은 헤냔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장소였다. 그래서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를 기쁘게 만들어줘야 마땅했다. 무시무시한 마이페이스 하질리언의 공격도 더 이상 없지 않은가. 그러나 뜻밖에도 헤냔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죽어버릴 거야." 매일같이 저딴 말을 하는 인간이 옆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헤냔은 당장 달려가 그 사람의 손목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리고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 만한 곳인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을 거다. 그러나 헤냔이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딱 두 명 있다. 그리고 방금 전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한 사람은 그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시끄러워, 아나." 헤냔은 검을 닦으며 말했다. 이 무심한 반응에 더욱 화가 난 듯 아나이스는 고함을 질렀다. "날 두고 여행 따위나 가버린 주제에 이렇게 냉정할 수사 있어? 게다가 키르, 너! 성격도 이상해졌다고. 내가 아는 키르는 이렇지 않았어. 얼마나 순진했는데! 나의 순진빵 키르를 돌려줘!" "……누가 너의 순진빵 키르란 거야?" "타락한 주제에!" 밑도 끝도 없는 비난에 헤냔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좀 살자, 아나이스.' 하질리언에게서 드디어 탈출했다 싶었는데 이젠 타자를 바꿔 아나이스가 헤냔을 괴롭히고 있었다. 평소의 아나이스가 슬슬 약을 올려가며 헤냔을 놀렸다면 최근의 아나이스는 그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예전의 그녀라면 이렇게 우는 소리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죽겠다고 말하면 '죽겠다고? 하하하. 어디 죽어보시지! 앙? 죽어보라고!' 하며 등을 뻥뻥 차댈 어이없는 인간이 바로 저 아나이스기 때문이다. 그래도 헤냔은 아나이스가 왜 이렇게 죽는 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런스 카르멘 때문이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땐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다. 단장님과 아나이스가 사귀다니? 천지가 세번 개벽하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 줄 알았다. 기사단이 이 일을 가지고 떠들 때도 '아나, 이젠 헛소문까지 내는 구나.'하고 오히려 아나이스를 동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짜 환장할 노릇은 이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데 있었다. 아나이스의 방에서 런스의 자필로 씌어진 '러브레터'가 나오는 순간 헤냔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장님, 이건 진짜 아니지 않습니까? 단장님이 뭐가 아쉬어서!" 절규하는 헤냔의 뒤에서 아나이스는 음흉하게 웃으며 '이제 그만 인정하시지.'하고 소리를 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런스가 뭔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일만 끝나면 곧장 돌아올 테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런스 카르멘은 아직까지도 행방불명이었다. "아무래도 물어봐야겠어. 진짜 못 참겠다고." "뭘?" "달링은 처음에 키네세스 공주님이랑 같이 갔었어. 그 후로 뭔가 다른 임무를 맡았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어쩌면 아직 거기에……." 아나이스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혹시 아직 아일린에 남아 있는게 아닐까?'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탓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단장님이 아일린 가로 갔었다고?" 헤냔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나이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아나!" "뭐?" 갑작스러운 헤냔의 말에 아나이스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같이 가자니, 어디로? "저스티스 카르멘 경이 마법사들을 만나러 오기로 한 날이야. 직접가서 물어보자고!" 아나이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얼굴에 다소 안심한 헤냔은 여태까지 백 번 정도 참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기분이 너무도 안좋아 보여 여태 못했지만 사실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그 말을. "대신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단장님을 '달링'이라고 부르면 너와 절교해버리겠어!" 헤냔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협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짖궂게 웃었을 뿐. "달링을 달링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순진빵 키르?" "순진빵 키르라고도 하지 마!" 헤냔은 버럭 화를 냈다. * * * '생각보다 더 힘들군.' 궁성 뜰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반은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궁성마법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던 그다. 반은 그들과 대화할수록 마법사들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실력으로 서열이 분명히 정해지고 그 서열이 곧 법인 검사들의 세계와는 달리, 마법사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해온 듯싶었다. 생각하는 건 또 어찌나 엉뚱한지 반으로서는 어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오늘 아침만 해도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아침도 못 먹고 왔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어제 회의 기록이 없어졌어요.'였다. 마법사는 모두 천재라고 얘기한 게 어디의 어떤 바보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그래도 이왕 온 것, 작전 토의나 진행하려고 했던 반이다. 하지만 다섯 시간이 지나도 불평만 가득 늘어놓을 뿐인 '마법사 놈들' 때문에 반은 휴식을 선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휴식한다." 그런데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반의 심기를 잔뜩 건드리는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멘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스티스 경." 헤냔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헤냔의 뒤에 선 훤칠한 여기사는 딱 세 번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반은 그 여기사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나이스 폰 그란젤이라고 했었지. 두 사람은 다급한 얼굴로 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꽤 오래 기다린 성싶었다. "무슨 일인가." "달링 아직 아일린 가에 있습니까?" 반은 아나이스의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달링이라디? "아나!" 마음속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는 반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헤냔은 얼굴이 빨개진 채 아나이스의 팔을 꾹 붙잡았다. 아나이스가 움찔하는데, 헤냔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 단장님, 그러니까 런스 카르멘 경이, 아직 아일린 가에 있습니까?" 반은 잠시 망설였다. 런스가 아일린 가에 있다는 건 룬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반이다. 그러나 런스를 빼낼 뾰족한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런스가 카세타전체로부터 사랑받는 케이온 기사단장이니만치 이진느도 쉽게 해하지못할 거라는 셈은 있었다. "진짜로 거기 있는 겁니까?" 반이 침묵을 지키자 헤냔이 놀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이 남자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 정도는 헤냔도 안다. "그래." 그 순간 아나이스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언제나 쾌활하던 아나이스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 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홍조를 머금고 있던 헤냔의 얼굴도 질려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나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요구했다. 반은 아인켈 탈주 과정에서 있었던 런스의 희생을 짧게 설명했다. 아나이스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밝히는 남자들조차 얼굴을 붉힐 정도의 저질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아나이스지만, 그녀는 사실 연애소설을 수백 권 소장하고 직접 쓰기도 할 만큼 마음만은 여린 여자다. 헤냔은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아무말 않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아나이스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폭발직전의 화산처럼, 아나이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서렸다. "아나!" 그 얼굴을 한 채로 아나이스는 등을 돌렸다. 헤냔이 놀라 불렀건만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헤냔은 놀란 얼굴로 그런 아나이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아직 반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의식하곤 고개를 돌렸다. 헤냔의 눈에 들어온 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헤냔은 그 얼굴에 슬며시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뭡니까, 당신은? 단장님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수하였는데.' 반이 저토록 냉정한 걸 보니 분노가 치민다. '단장님. 이딴 남자한테 충성하지 말란 말입니다!' 멀리 있는 런스에게 속으로 소리치며 헤냔은 인상을 그었다. "단장님은 무사하겠죠?" "아마도." 간결한 대답이다. 헤냔은 가슴을 폈다. "그럼 됐습니다. 단장님은 제가 구할 테니까." 자못 도전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한 헤냔은 인사조차 하지 않고 반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 그런데 아나이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가려던 헤냔이 한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고민하던 헤냔은 고개를 휙 돌리곤 건물 안으로 돌아가려는 반을 향해 소리쳤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 반이 헤냔을 돌아봤다. "프, 프리나는 어떻게 됐습니까?" 물어보는 헤냔의 얼굴은 다시 붉어져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두 단장님 중 한 명이 위험한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묻지 않을 수 없었던 헤냔이다. 걱정이 가득 배어 있는 순진한 소년 기사의 얼굴을 보면서, 뭘 생각했는지 반의 미간이 가만히 좁혀졌다. 한참 만에 반은 차갑게 답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헤냔은 망연한 얼굴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은 등을 돌려 궁성마법사들에게로 돌아갔다. * * * 반이 궁성으로 간 차라 프란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평소라면 '아자, 검 수련!'하고 외치며 뛰어나갔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프란은 그냥 방 안에 처박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놀부 심보도 아니고 대마왕 결혼 소식에 왜 기분이 나빠지냔 말이지. 프란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를 방해하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프란, 안에 있어?" "뮤?" 프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자신이 프란에게 심란한 헛소문을 전해줬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채, 이 핑크색 머리칼의 소녀는 문 밖에서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프란.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나가지 않을래? 가주님도 안 계시잖아. 심부름거리가 있는데 프란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짐짓 태연한 척 얘기하고 있지만 목소리완 달리 뮤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심부름은 핑계고, 뮤는 프란과 함께 외출하고 싶었다. '괜찮을까?' 프란은 망설였다. 반이 만약 자신보다 일찍 돌아온다면 또 그 못돼먹은 성질머리를 부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은 뮤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뭐. 어차피 잠깐 나갔다 올 거고 대마왕은 공주님이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지.' 생각하다 말고 프란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돌아온 어제, 대마왕이 집을 비웠던 것도 키네세스를 만나러 궁성에 갔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은 죽어라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넌 연애질이나 한 거냐!' 프란은 홧김에,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좋아, 뮤. 뭐 사러 가는 건데?" 그 허락에 신이 난 뮤는 공중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헤헤. 윗분들만 드실 싱싱한 생선!" 하필 생선이냐,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프란이다. * * * 카르멘 가의 황금문을 나선 프란은 뮤의 인도에 따라 촐랑촐랑 걸어갔다. 뮤는 그런 프란 때문에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누가 뭐라 해도 뮤 입장에선 프란과 처음하는 데이트인 것이다. 프란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자신들 쪽을 바라보는 것도 너무 기분이 좋다. '프란, 멋있어.' 뮤가 보기에 프란은 정말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언뜻 미소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시원시원하게 아름다운 여성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거리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간에 한 번씩 프란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거니까 누구든 건드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뿌듯함과 독점욕을 동시에 느끼며 뮤는 프란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무서운 눈으로 쫓아 보내고 있었다. 막 프란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남자도 '다가오면 물어뜯을 거야.'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뮤의 기세에 눌려 물러섰다. "무슨 일 있어, 뮤?" 유난히 기세등등한 뮤를 보며 프란이 물었다. 뮤는 그러나 아무 일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프란을 중앙시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씽씽, 완전 씽씽! 맛좋은 사과 맛보고 가세요!" "언니! 이 옷 한번 입어봐. 이 옷은 언니를 위한 거야!" 시장에 한 발을 내딛자마자 열기가 후끈 전해졌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시장 전체에 넘쳐흐르는 원초적인 삶의 열기가 프란의 마음속을 깊게 한 번 휘젓고 지나가던 것이다. 값을 깎아 달라고 투정하는 손님, 입으론 절대 안 된다면서도 속으론 얼마나 깎아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가게 주인 사이의 가벼운 실랑이가 사랑스러울 만큼 생기가 있어서, 프란은 저도 모르게 뮤만큼이나 들뜨고 말았다. "이쪽!" 가득 쌓인 사과를 보며 침을 삼키고 있는 프란을 뮤가 휙 잡아끌었다. 뮤는 중앙 시장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수산 시장으로 들어섰다. "진짜로 많잖아. 우오!" 수산 시장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프란은 감탄하고 말았다. 중앙 시장 안에 위치한 수산 시장은 로네이트에서도 도매상이 내려올 만큼 규모가 컸다. 뮤는 익숙한 걸음으로 시장 골목 곳곳을 누비다가, 유달리 큰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주인 없어요?" 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큰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뮤? 흥정을 할 생각이야?' 생선 가게 주인을 눈앞에 둔 뮤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평소의 뮤를 알고 있는 프란으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뮤가 누군가. 그야말로 '꿈꾸는 소녀'다. 상처입어 약해진 사람을 자상하게 안아주는 따뜻한 소녀이기도 하다. 그런 소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시장의 흥정과 어울릴 턱이 없다. '여차하면 내가 도와줘야지. 뮤는 마음이 여리니까. 에이, 왜 흥정하는 일에 마음 약한 뮤를 보내?'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비싸다는 게 말이 돼요? 저번에 왔을 때는 분명 10% 이상 쌌다고요!" 가격을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는 듯 뮤가 생선 머리를 퍽 내리쳤던 것이다. 아니, 뮤에게 이런 면이! 프란은 놀랐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가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거짓말은 안 통해." "방금 거짓말이라고 했어요? 하녀이긴 해도 난 카르멘 가 소속이라고요. 뭐가 아쉬워서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죠?" 뮤는 시장 상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카르멘 가 가주인 대마왕도 거짓말 엄청 잘 하는걸.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프란은 조심스레 속삭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가게 주인과 흥정하고 있는 뮤는 한없이 진지했다. "카르멘 가엔 생선 따윈 산지 직송으로 배송된다고요. 배가 좀 늦어져서 사러 왔는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해요. 한두 마리 사는 것도 아니고 무려 4백 마리씩이나 살 거라고요!" "아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4백 마리라는 말에 회가 동한 듯 가게 주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면서 뮤는 속으로 후후 웃었다. '걸렸군.' 평소의 여린 소녀는 거기 없었다. 프란은 뮤를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4백 마린데 안 깎아주면 그게 사기라고요." 뭐가 사기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뮤는 결국 가격의 10%를 깎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도 끝은 아니었다. 한참이나 강공으로 밀어붙였던 뮤가 프란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 즈음 '연약한 소녀'모드로 돌변했던 것이다. "아저씨, 조금만 더 깎아주세요. 전 사실 말단이에요. 예상 금액을 넘으면 마녀 같이 괴팍한 집사장님한테 혼난단 말이에요. 흑." 순식간에 마린을 마녀 집사장으로 만든 뮤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마린은 예상 금액 따위 상관 않고 '밥에 돈을 아끼는 건 죄야!'를 소리치며 무조건 최상급을 주장한다. 하지만 뮤는 알뜰살뜰하게 흥정을 한 끝에 처음 가격보다 15%나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주문할 수 있었다. "헤헤." 흥정에 성공한 뮤는 기쁜 듯 웃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구먼. 하고 많은 주방 식구 놔두고 왜 뮤에게 생선 주문을 시켰는지.' 프란은 그 모습을 보며 땀을 닦았다. * * * 진주홍. 연분홍. 연보라. 감청. 네 가지 빛깔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으며 색의 경계를 허문다. 하늘은 각 색들을 공들여 직조해 노을을 만들어냈다. "뮤, 너 대단하다." 프란은 노을 아래서 웃고 있었다. 수산 시장을 빠져나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고 평범한 여자 친구들처럼 거리를 산책한 둘은 이제 카르멘 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껴야 잘 살잖아. 아무리 카르멘 가라도 그건 예외 없어." 뮤는 새침하게 답했다. 으아, 귀여워!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프란은 한순간 뮤를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통의 여자애들은 이런 걸까? '그러고 보면 나, 여자 친구가 없었네.' 정말이다. 시커먼 남자애들 사이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여자애들과 어울릴 시간도 여유도 전혀 없었다. 로지아 같은 소녀도 만났으나 그녀는 결코 전혀 절대 평범하지 않았고, 게다가 친구라고 불릴 만큼 자주 어울린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평범한 소녀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은 예전의 프란을 동경의 대상으로, 친구가 아닌 왕자님으로 여겼다. '뮤가 내 첫 번째 여자 친구인건가?' 프란은 자신의 팔에 팔짱을 낀 채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뮤는 즐거워보였다. 그 얼굴을 보며 사심 없이 헤벌쭉 따라 웃었던 프란은 한 순간 엇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뮤를 정말로 좋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성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뮤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남자'로서 좋아하지 않았는가. '이, 이래도 되나?' 프란이 죄책감 때문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뮤가 갑자기 프란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프란은 난감한 얼굴로 뮤의 오목한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걸음을 옮기면서,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조그맣게. "프란." "응?" "나 엄청 멋진 남자랑 연애할 거야. 프란만큼이나 멋진." 갑작스러운 그 말에 프란은 재빨리 뮤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어 표정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프란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뮤가 자진해서 고개를 들었다. 프란의 예상과는 달리 활짝 웃는 얼굴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나랑 놀아줘야 해?" 카르멘 가로 돌아왔을 때도 프란은 느꼈다. 이 작은 소녀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해준다는 것을, 그러니 매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준비했다는 듯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뮤는 지금 말했다. 예전의 그 마음을 예쁘게 간직하고 앞으로 나갈 테니 죄책감 따윈 가지지 말라고. "당연하지!" 콧잔등이 시큰해진 프란이 씩 미소를 지으며 한 대답에 뮤가 헤헤 소리를 내며 또 웃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천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네가지 빛깔의 머리카락이 뒤섞인 듯했던 노을이 흩어지고, 남색 연료가 풀린 듯 안으로 깊어져가는 하늘. 프란은 다소 걸음이 느린 뮤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이제 20분쯤 더 걸으면 황금문이 보일 것이다. 대마왕이 돌아왔을지 아직 안돌아왔을지 모르겠지만, 설사 혼난다 하더라도 프란은 오늘의 외출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프란의 옆에선 뮤가 작은 새처럼 종알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프란, 그때 스잔이 뭐라고 그랬야 하면……."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다정하게 뮤의 말을 받아주고 있던 프란의 얼굴이 삽시간에 얼어붙은 것은. '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기가 올라 프란은 몸을 떨었다. 즐겁게 수다를 풀어놓고 있던 뮤는 그런 프란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뮤가 모르는 사이 프란의 눈동자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프란은 온몸의 감각을 세운 채로 사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냐, 이 시선은?' 혹시나 착각인가 싶어서 다시 한 걸음을 뗐다. 그러나 이번엔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신과 뮤 쪽을 향한 명백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이젠 더 이상 그것은 시선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진 완전하게 갈무리되어 있던 기운이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사방을 채우고 있었으니. 분명하다. 이건 살기다. "어째 좀 으스스하지 않아? 아직 추워지려면 멀었는데." 살기를 단순한 추위 정도로 착각한 뮤가 이상하지 않느냐는 듯 물었다. 바로 그 순간, 프란은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완강하게 뮤의 팔을 잡아당겼다. 웃고 있던 뮤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채 걸음을 멈춰야 했다. "왜 그래? 아파." 뮤는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프란은 대답 대신 다시 뮤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쪽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제야 뮤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뮤가 '무슨 일이야?'하고 겁에 질린 듯 물었을 때, 프란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카르멘 가에서 몇 년을 있었지만 검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뮤는 프란이 뽑아든 그 검을 보며 몸을 떨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을 거면 차라리 앞으로 나와!" 프란은 검을 앞으로 한 번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상했다. 이 거리엔 원래 사람이 없긴 했지만 지금은 행인이 아무도 없다.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옷깃을 붙잡은 뮤가 떨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더 긴장이 되는 프란이었다. "나오라니까!" 프란이 다시 한 번 소리쳤을 때였다. "맹물은 아닌가 보군. 하긴, 베키와 준을 죽였다고 했으니." 프란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꺾었다. 그러나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길옆으로 좁게 뻗어난 골목길에서인가? 아니면 지붕 위? 그것도 아니면 저편 거리 너머? 프란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검을 꾹 쥐었을 뿐이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나 혼자야."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간지럽게 들려왔다. "근데, 이 여자앤 뭐지?" 오싹! 이번엔 분명히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정확히 프란의 등 뒤에서 들렸으니까. '기척이 전혀 없었어!' 프란은 뮤를 왼쪽 팔에 낀 채 얼른 180도 회전했다. "안녕?" 그러자 보였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여자 하나가 방금 전까지 뮤가 있던 그 공간에 서 있는 모습이. 여자는 20대 후반처럼 보였다. 아직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건만 프란의 관자놀이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로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는 이 여자가 내뿜는 기운이 웃는 얼굴과는 달리 너무도 무시무시했기 떄문이다. 여자는 옅은 붉은색 머리카락에 자주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키는 프란 정도였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은 프란이 들고 다니던 실버 블레이드보다도 훨씬 컸다. 가녀린 여자가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다. '기운이 엄청나잖아!' 검을 쥔 프란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베키나 준보다도, 어쩌면 셀키보다도 훨씬 더 강할지 몰라! 적은 자신이 단언했듯 혼자건만 프란은 천지사방 어디로도 달아날 곳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프란은 얼른 뒤에 있는 뮤를 돌아봤다. 2대 1의 상황이라곤 해도 뮤는 평범한 소녀다. 실제로는 프란이 뮤를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인것이다. '괜찮아, 뮤. 내가 꼭 지켜줄게.' 프란은 뮤에게 안심하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눈앞의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프란은 이 여자가 아일린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아까 그녀가 베키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시온을 만나러 가는 길에 프란이 죽였던 여자의 이름이었다. 프란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 "목적이 뭐냐?" 여자는 대수롭잖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답했다. "널 데려가는 것." "이진느가 보냈나?" "정답." 진짜 치 떨리는 여자다, 이진느 아일린. 시온이 남아 있겠다고 말한 상황임에도 더 단단히 시온을 결박할 수단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도대체가 그 녀석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 녀석 눈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있어? 얼마나 쓸쓸한 눈을 하는지 본 적이 있냐고! 그러고도 어머니야?' 프란은 온몸을 잠식하려는 분노를 삭이려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도망 안 가. 하지만 뮤는 상관없다. 보내줘." "네 뒤에 있는 여자애?" 여자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 "싫은데?" 여자가 비웃듯 말한 그 순간이었다. 여자는 여태까지 느긋하게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달려 들어왔다. 대비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여자의 검이 프란을 노린다. * * * 쾅! 향이 좋은 홍차와 갓 구운 뜨끈한 스콘을 옆에 둔 채 서류를 넘기고 있던 이진느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폭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온이 방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젠, 어디로 갔습니까?" 시온의 상태는 프란과 만났던 때보다 더 심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해쓱한데다가 눈의 핏발이란 핏발은 모조리 서 있다. 그는 피로에 찌들다 못해 절어 있는 몰골이었지만 진초록 눈동자만큼은 무서운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어디 갔냐고 물었습니다!" 시온이 재차 소리쳤다. 프란이 다녀가고 난 뒤, 시온은 더 이상 탑에 유폐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위저드 리그의 7써클 마법사 로디가 감시관 역으로 늘 시온을 따라다니게 되었을 뿐. 로디의 말에 따르면 시온은 최근, 매일같이 마법 연구만 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하지만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그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이진느는 불안해질 뿐이었다. "일하러 갔어." 이진느가 대꾸하자마자 시온은 입가에 냉소를 걸었다. "젠은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으로 따져서 세라딘에서 네 번째입니다. 아니, 레이와 사이먼이 죽었으니 이젠 두 번째로군. 그런 젠이 지금 상황에서 아일린 가를 지키는 것보다 더 먼저 수행해야 할 일이란건 대체 뭡니까?" 분명 질문이었건만 시온은 이미 자기가 한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것같았다. 시온의 입가가 분노로 떨리는 것을 알면서도, 이진느는 서류만 넘겼다. "시온 아일린." "대답부터 하십시오." 시온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진느는 또 한 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내 배 아파 낳은 아들인데 그 아들이 두렵게 느껴진 것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시온은 사실 아주 이성적인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폭발해서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저 눈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보냈다. 그것뿐이야." "그딴 거짓말……!" 시온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이진느는 조용히 시온의 옆에 있는 감시관 역의 마법사 로디에게 손짓했다. 시온을 잠재우든지 해서 데려가란 뜻이다. 그런데 그때, 시온이 마법을 구사하려는 로디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같은 7써클 이라곤 해도 이제 막 7써클에 진입한 시온이 상당한 연륜의 로디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로디는 멈칫했다. 그 역시 이진느와 마찬가지로 시온의 눈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다. 로디가 망설이는 사이 시온은 다시 이진느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입니다. 이게 내 한계니까." 무슨 말인가 해서 인상을 찌푸리는 이진느의 눈에 부들부들 떨리는 시온의 주먹이 보였다. "이번 한 번만, 정말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빤한 거짓말에 속아주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시온의 얼굴엔 명백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다음은 절대 없습니다. 각오하십시오.' 하지 않은 말을 갈무리하며 시온은 등을 돌렸다. 누구든 그때 시온의 눈을 봤다면 살인이라도 낼 기세라고 생각했을것이다. * * * 시온이 이진느를 찾아갔던 그 시각, 뮤 이레아스는 완전한 공포에 빠져 있었다. "으, 아, 으아, 으……." 실성한 것처럼, 혹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뮤의 말은 단어가 되지 못하고 계속 갈라지기만 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공포 때문에 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프란. 프란. 프란. 프란.' 뮤가 생각할 수 있는건 오직 하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프란뿐이다. "별거 아니군." 붉은 머리칼의 여자, 아니 세라딘의 실력자 젠은 입술을 비틀며 웃고 있었다. 그런 젠의 눈에 엉망진창으로 상처 입은 프란이 보였다. 그 상태로도 프란은 아직까지 뮤의 앞을 가로막은 채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재밌는 상대야' 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란은 분명 자신에게 한참 못 미친다. 그래도 뒤에 서 있는 핑크색 머리 계집애만 모른 척했다면 몇 합쯤은 대등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란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움직임으로 몸을 놀리면서 젠의 공격 범위로부터 뮤를 보호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 따위는 걸레조각이 되든 말든 뮤만 무사하면 된다는 식이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죽이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젠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운이 좋긴…… 빌어먹을, 퉤!" 어이없다는 듯 프란이 침을 탁 뱉었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가 섞여나왔다. '제길!' 프란 역시 알고 있었다. 젠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는 하나도 입히지 않았다. 미칠 노릇은 '심한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는 핸디캡을 가진 저 여자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이상하다. 자신은 살려두겠지만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뮤를 죽여 버릴 거다. 프란의 몸에 검을 들이댈 때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 광기 어린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뮤를 위해서라도 절대 쓰러질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저 여자를 이긴다지? 뮤를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프란이 생각하는 그 사이에도 젠은 가볍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프란은 순식간에 상념을 걷어치우고 검을 비틀어 쥐었다. '못 본다.' 프란은 달려오는 젠의 모습을 눈으로 좇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못 읽을 테니까. 차라리 감각에 의지하는 게 낫다. 프란은 몸이 시키는 그대로 젠을 향해 뛰어올랐다. 쉬익! 프란은 필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공격을 몸으로 막는 대신 검을 들이댄 것이다. 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두 사람의 검이 잠시 얽힌다 싶더니, 프란이 있는 힘을 다해 젠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젠은 어린애 장난이라도 하는 듯 사뿐하게 한 발자국을 물러선 후, 재차 몸을 날려 프란을 공격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동작 한 동작이 확실한 여자다. "이익!" 프란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젠의 동작을 따라갔다. 챙! 처음으로 한 합, 두 사람의 검이 치열하게 얽혔다. 젠이 그 공격을 흘리려는 순간, 프란은 거침없이 무릎을 들어올렸다. 퍽! 젠은 검을 마주하고 있을 때 무릎을 들어 올려 상대의 복부를 공격한 프란을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복부를 얻어맞은 채 그대로 검을 들어 목이라도 날려버리면 어쩔 텐가? 무릎에 힘을 주느라 막을 틈도 없을텐데. 젠의 그 호기심을 비웃듯 프란이 소리쳤다. "넌 날 못 죽인다고 했지? 하지만 난 널 죽일 수 있다." 그 말에도 젠은 웃었을 뿐이다. "무리야. 그 전에 저 여자애가 죽어." 젠은 손가락으로 뮤를 가리켰다. 뮤는 그 손가락 끝이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걸 느끼자 몸을 조그맣게 말고는 무섭게 떨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젠은 프란이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하면 틈이 생기지. 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프란의 공격을 간단히 흘려 넘겼다. "젠장!" 있는 힘을 다한 공격을 이처럼 간단하게 흘릴 줄은 몰랐기에 프란은 당혹했다. 젠은 그것 봐, 하고 비웃는 듯 뮤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에 경악한 뮤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아악!" "안 돼!" 프란의 간절한 목소리가 뮤의 비명을 덮었다. 두 사람이 뭐라고 외치건 간에 뮤를 향해 가로로 길게 검을 휘두르려했던 젠은,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강한 손을 느꼈다. 어느 사이엔가 프란이 재빨리 뒤돌아서 젠의 목덜미를 잡아챘던 것이다. 하지만 프란의 필사적인 노력을 무시하듯 젠은 다시 훌쩍 그 손을 피해 덜덜 떨고 있는 뮤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젠은 뮤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그리고 검 실력은 한참 아래인 주제에 그 같은 유연성과 스피드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프란이 또 한 번 젠의 목덜미를 낚아챘던 것이다. 젠은 결국 쳇 소리를 내며 뮤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이제 알겠군. 내가 저 여자애를 공격하면 넌 힘이 난다, 이거지?" 젠은 농담 같은 소리를 전혀 웃지 않고 했다. 어느새 뮤 앞에 다시 자리를 잡은 프란은 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프란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다. 어쩌면 방금 전 뮤를 보호하기 위해 행했던 그 악착같던 수비가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지쳐 쓰러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 젠은 무리한 탓에 다리가 떨리고 있는 프란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젠의 눈에 프란의 선명한 오렌지색 눈동자가 비쳤다. '재수 없어' 젠은 기분이 살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먹지 않는 눈동자가, 자신보다 약한 자를 보호하고 있는 필사적인 움직임이, 입술을 꾹 깨물고 진지하게 자신을 보는 프란의 그 모든것이 젠은 몹시 불쾌했다. 그래서 젠은 천천히 공격하려던 처음의 마음을 버렸다. "귀찮아." 마음을 먹은 그 순간, 젠은 바람처럼 달려왔다. 몸을 뒤로 젖히는 등의 예비 동작조차 전혀 없었다. 이미 프란의 약점도 강점도 뮤라는 걸 눈치 챈 젠이다. 뮤만 죽인다면 프란은 여태껏 보여줬던 것 같은 한계 이상의 힘을 내진 못할 것이다. 젠이 뛰어오는 걸 보며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뮤의 가슴에 자신의 등을 밀착했다. 죽어도 뮤를 죽게 하진 않을 거다, 라는 단단한 각오가 들어간 동작이다. 그러나 젠의 이번 공격을 대체 어떻게 막지? 도무지 수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도 프란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젠을 똑바로 응시했다. 젠은 공중에 크게 뜬 상태에서 검을 아래로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프란이 그 검의 방향을 읽기 위해 온 신경을 검 끝에 집중하고 있는데, 젠이 프란을 공격하려는 듯 정면에서 검을 휘둘렀다. '내 쪽이다.' 젠의 공격 궤도가 정해졌다고 생각한 프란은 검을 뻤었다. 허나 바로 그 순간, 프란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제기랄! 속임수야!' 느낀 건 한순간이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젠은 공중에 뜬 상태에서 몸을 길게 틀었다.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대는 프란을 살며시 피해, 그녀는 오른팔을 유연하게 뻗었다. 넉넉지는 않으나 프란의 뒤에 있는 뮤를 찌르기엔 충분한 거리다. 프란은 미친 듯이 다시 검을 뻗었다. 그러나 프란은 알았다. 이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뮤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젠의 검은 이미 완전한 무방비 상태인 뮤의 목덜미를 겨냥하고 있었다. '안 돼! 제발! 뮤!'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던 그 때. "카르멘 가 사람인가?" ……뜻밖에도 목소리가 들렸다. * * * 프란의 검 따윈 의식도 하지 않은 채 똑바로 뮤의 목을 노리고 있던 젠은 목소리가 들린 순간 멈칫했다. '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프란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젠은 누가 끼어들건 말건 상관 않고 뮤를 해치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젠은 어느새 프란과 뮤로부터 한 걸음 훌쩍 물러서 있었다. 그리고서 젠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뮤를 짓누르다시피 해서 보호하고 있던 프란도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건 마찬가지다. '들어본 목소리인데.'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묵직한 저음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놀라운 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시하다는 듯 프란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던 젠이 잔뜩 긴장한 채 검을 세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려고 한참이나 애썼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먼저 프란을 알아보았다. "넌 '그' 시종이군. 지금 곤란한 상황인가?" '보고도 모르냐!' 꼴을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하는가 싶어서 프란은 어이가 없었다. 허나 다음 순간, 프란은 불평 따위는 쑥 들어갈 만큼 놀라운 광경을 봐야 했다. 성큼 한 발자국 다가온 그 남자가 검을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싸울 생각인 성싶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젠을 향해 남자가 달려들었다. 앞서 젠이 그랬듯 도약 동작조차 없이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게다가 그 움직임이 젠보다도 훨씬 빨랐다. "뭐, 뭐야?" 그 모습을 보면서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남자의 실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했으나 프란이 그처럼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대마왕같이 싸우잖아?' 그랬다. 남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반과 비슷한 움직임으로 싸우고 있었다. 반만큼이나 압도적으로 빠르고, 반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베는가 싶으면 찌르고, 찌른다 싶으면 베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가 다음 순간 틈 없이 가까워진다. 남자의 검과 젠의 검이 섞인 건 몹시 짧은 순간이었다. 강렬한 스파크가 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때, 두 사람의 검이 재빠르게 떨어지더니 다시 한 번 정신없이 섞였다. 눈으로 쫓아가기가 힘들 만큼 현란한 움직임이다. 그렇게 몇 번인가 검 섞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젠의 팔에서 핏방울이 솟아올랐다. "당신, 어떻게 여길!" 부상을 입은 순간 젠은 분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말하는 대신 입술을 꾹 깨물더니 그대로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그냥 가는 거야? 진짜? 정말?' 프란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데, 지붕 위에 올라선 젠이 프란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을 뿐이다. 젠은 남자를 쏘아본 것을 마지막으로, 지붕들 각각을 놀라운 속도로 밟으며 곧장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뒤쫓을 생각은 없는 듯 사라지는 젠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나?" 남자가 프란과 뮤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가 이건 모두 환상이라고, 다 귀찮아진 젠이 너와 뮤를 죽였다고 말하면 오히려 그 편이 더 믿기 쉬울 것 같은 프란이었다. 그러나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도대체 뭐야?' 대마왕이라면 저런 괴물 같은 짓도 가능하겠지만 분명 대마왕은 아니다. 젠을 쫓아 보낸 주제에 남자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프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엇다. 어, 이 얼굴, 아는 얼굴인데. 가까이 다가온 그 얼굴을 보며 프란이 생각했을 때였다. 프란의 뒤에 있던 뮤가 울며불며 소리를 지른 것은. "헤이튼님!" 그제야 프란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남자의 이름은 헤이튼 카르멘. 대마왕의 외삼촌이다. * * * 오늘 반에겐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 각각은 반을 당혹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첫째로 오늘 그는 헤냔에게 '시종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일 당장이라도 들킬 법한 거짓말을 했다. 스스로도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랬다. 둘째로 그 거짓말의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프란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뮤라는 하녀와 함께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화가날 일인데 시도 때고 없이 온갖 부상을 혼자서 다 입는 프란은 오늘도 또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셋째로 그 상처투성이 프란을 로네이트에 있어야 할 헤이튼이 데려왔다. "왜 돌아왔나?" 반은 낮은 목소리로 앞에 서 있는 헤이튼에게 물었다. 아직도 안정되지 않은 뮤는 마린이 데려가고,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몸에 상처가 많이 생겻다는 진단을 받은 프란은 하질리언과 함께 있었다. 그 사이 헤이튼은 묵묵한 발검음으로 반의 방에 따라온 차였다. 반은 방 안엔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룬과 켈리도 있었다. 룬과 켈리는 세라딘과 결탁한 적이 있던 헤이튼을 엄중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은 룬과 켈리를 뒤에, 헤이튼을 앞에 둔 채 입을 열었다. "시종의 설명을 종합해보니 일곱 번째 세라딘, 젠 같더군. 세라딘에 협조했던 너라면 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의 목소리는 얼음같이 싸늘했다. "다시 묻지. 왜 돌아왔나?" 헤이튼은 고개를 들었다. 그 추운 로네이트가 이 남자에겐 나쁘지 않은 곳이었는지, 헤이튼은 떠날 때보다 오히려 혈색이 좋아보였다. 팔뚝에 여러 개의 새 검상이 생긴 것 역시 제자들을 돌보는 일도, 스스로 실력을 쌓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렷이 증명하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헤이튼은 입을 열었다. 조용하게 꺼낸 말이었으나 그 말의 내용은 그를 제외한 이 방 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며칠 전 정초원 인사라는 자가 찾아왔소. 다시 한 번 손잡자고 말하더군." 성질 급한 룬은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반의 앞이라는 걸 상기하며 간신히 참았다. 언제나 침착해 종종 여자 케인으로 불리곤 했던 켈리 역시 순간적으로 검집에 손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예상 밖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반은 미간만 좁혔을 뿐이다. "그래서?" "거절했소." 헤이튼의 목소리는 반만큼이나 담담했다. '웃기지 마라. 한 번 세라딘과 결탁했던 너 따위를 믿을 것 같으냐?' 룬은 뛰어나가 헤이튼의 멱살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조용한 켈리의 눈이 그를 가로막았다. 반은 감정이 서리지 않은 얼굴로 헤이튼을 보고 있었다. "왜 거절했나?" "일전에 내가 패했기 때문이오." 헤이튼은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냐는 듯 대답했다. 뼛속까지 검사. 반과 겨뤄서 졌으니 이제 카르멘 가의 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룬은 이를 부득 갈면서 헤이튼을 노려봤을 뿐이다. 헤이튼은 그런 룬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재차 말을 이었다. "또한 빚을 졌으니." 반은 그 빚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헤이튼의 반역사실을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고 검술 스승이라는 명목 하에 그를 로이네트로 보내준 것을 말하는 거다. 반은 무심하게 물었다. "날 돕겠다는 뜻인가?" "가주님!" 어림없다는 듯 룬이 소리쳤지만 이번에도 켈리에 의해 저지당했다. 룬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헤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왔습니다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없는 것보단 나은 정도가 아니었다. 헤이튼은 카르멘 검술의 정수 중의 정수를 익힌, 라니아 대륙에 단두 명만 존재하는 카르멘의 정통 승계자 중 한 명이다. 반과 검을 겨뤘을 때도 한순간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승부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런 헤이튼이 전투에 참여해주기만 한다면 반이 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한 번 배신한 놈은 두 번 배신하기도 쉽습니다!' 룬은 반의 뒤에서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반의 대답은 간결했다. "알았다. 출발은 2주 후다." '으아악! 가주님!' 분개하는 룬과 침착하게 서 있는 켈리를 뒤에 둔, 근 몇 달 만에 이루어진 외삼촌과 조카의 재회는 이처럼 간단하게 끝났다. * * * 헤이튼은 예전에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섰다. 꽤 오랫동안 로이네트에 머물렀건만 매일같이 청소를 한 듯 방은 여전히 깨끗했다. 심지어 방을 나서며 정리했던 전등갓의 각도까지도 그때와 똑같아 보일 정도로. '미안하다. 저스티스.' 그 전등갓을 보며 헤이튼은 속으로 반을 향해 사과했다. 패했기 때문에, 또 빚을 졌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말하다니 웃음이 나올 정도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형국이 되었군.' 헤이튼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돌아온 진짜 이유는 아까 반에게 얘기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 '제 2장_거짓말' 끝 - *********************************************************************** 새군님의 노고가 포함되서 같이 삽질하리라 굳게 다짐한 류화입니다. 오타는 거의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아마 띄어쓰기가 잘못된게 있을지도 몰라요. 양해해주세요. 줄정렬은 기본타입으로, 핸드폰 텍스트뷰어든 어느곳에서 무리없이 읽을 수 있게 작업해놨습니다. 그럼 즐감상해주세요! 3. 질투 부스럭부스럭 잠귀가 유난히 밝은 8써클 대마도사의 이마빡에 힘줄이 돋아났다. 은근히 예민해서 잠을 자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자켄린이다. 오늘만해도 겨우 한 시간 전에 잠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와서 물건을 뒤지고 있는, 갈아 마실 불한당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실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딱 한 명을 제외하면 어떤 간 큰놈이 감히 자켄린같은 대마도사의 잠을 깨울 수 있겠는가. "바보 제자놈아, 뒤지더라도 좀 신사적으로 할 순 없겠냐? 네가 여자를 다룰 때 하듯이 말이다." "스승님. 표현 한번 저질이우."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저질로 만들어버린 시온 때문에 정말로 화가 난 자켄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시온은 성인 남자 다섯 명이 세로로 나란히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특별 주문 제작된 자켄린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런 시온의 옆으로 꼴 보기 싫은 감시관 역의 위저드 리그원, 로디가 보인다 로디는 자켄린이 노려보자 목을 움츠렸다. 자켄린은 그 모습을 무시하며 시온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요즘 양심이란 게 아예 없어졌어!" 자켄린의 말을 귓등으로 휙휙 흘려 넘기며, 시온은 여전히 자켄린의 책상 위를 뒤지고 있었다. 마법사에게 연구재료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시온이 하는 짓을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그는 자켄린의 분노에 찬 8써클 마법을 맞고 뼛조각 하나 못 남긴 채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온은 자켄린에게 있어 유일한 예외. 그걸 알기에 시온은 태평스런 얼굴로 자켄린의 책상 위에서 비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양심 없는 제자가 물건 좀 빌려가겠수." 남의 책상 뒤져 연구재료를 강탈하려는 주제에 말은 잘 한다. "빌려가긴 뭘 빌려가? 돌려준다는 걸 전제로 가져가는게 빌려가는거다. 네가 돌려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냐!" "쫀쫀하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잖소." 얄밉게 대꾸하는 시온 때문에 자켄린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쫀쫀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은 알아? 네놈한테 필요한 건 일전에 다 줬다! 뭐가 아쉬워서 내 걸 건드려?" 그러자 시온이 뒤돌아보았다 "이건 안주셨잖수." 시온은 손에 든 비커를 흔들었다. 보고 있던 자켄린의 눈이 왕방울만 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야, 그건!" 내 비장의 재료란 말이다! 하고 외치려는 자켄린을 향해 시온이 씩 웃어보였다. '음? 잠깐.' 길길이 화를 내려다 말고 자켄린은 멈칫했다. 오늘의 시온이 지나치게 유쾌해 보인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자켄린은 시온을 빤히 보았다. 최근 시온은 무척 저기압이었다. 젠인지 잼인지 하는 세라딘여자가 보이지 않는 게, 아무래도 프란에게 간 것 같다며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던 제자였다. "뭐 좋은 일 있었냐?" 시온은 비커를 계속 흔들며 자켄린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젠이 돌아왔어요. 혼자."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기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다. 그게 그렇게 좋은가 싶어서, 자켄린은 비장의 연구 재료를 강탈당하고서도 미소짓는 수 밖에 없었다. "스승님." 시온은 비커를 든 채 자켄린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자켄린의 바로 앞에 선 시온은 스승의 귀에다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감시관 로디는 귀를 바짝 세웠으나, 시온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시온의 귓속말을 들은 자켄린의 표정이 이상했다. 자신의 장(丈)이 왜 저러는가 싶어 바짝 긴장하는 로디의 귀에 자켄린의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박혔다. "내, 내가 널 제자로 거둔 건 평생의 실수다." 충분히 사처가 될 만한 말이건만 시온은 유들유들하게 웃었을 뿐이다. "평생의 자랑을 잘못 말한 거 아니우?" 제자의 뻔뻔한 낯짝을 보며 스승은 한숨을 내쉬는 수 밖에 없었다. * * * 헤이튼이 돌아왔건만 카르멘가에선 달라진 게 없었다. 기적과 괴물 사이에 위치한 엄청난 회복력의 소유자 프란 프리텐은 일주일 만에 젠에게 당한 모든 부상을 완치시켜 하질리언으로부터 '제 3의 종족'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번엔 반드시 이겨주겠다며 주먹 쥐고 일어난 프란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던 뮤는 5일간 거의 말도 못했다. 그나마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상당히 안정된 듯 보여서, 프란은 잔뜩 졸였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놓을 수 있었다. 헌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냐?' 프란은 분명 그날 반의 허락도 없이 외출했고 부상까지 입은 채 돌아왔다. 이만하면 반의 특기인 '사람 얼려 죽이는 눈빛'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반은 그날의 일로 프란을 나무라거나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주일간 방에서 쉬라는, 정말로 대마왕답지 않은 아량까지 베툴어주었다. 이것만 해도 놀라기엔 충분한데 여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반이 짬짬이 틈을 내어 누워 있는 프란의 방에 들렀던 것이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반은 서 있고 프란은 누운 채 영양가 없는 이야기나 주고받았을 뿐이니. 사실 그때마다 프란의 마음속에선 반에게 불쑥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이, 대마왕. 너 정말로 공주님이랑 결혼하는 거냐?' 하지만 프란은 번번이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별것 아닌 그 질문이 무지맞기 쑥스럽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래서 프란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질문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 * * 분에 넘치는 휴가를 누렸던 프란은 일주일 만에 다시 반의 시종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었다. 전투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기에 반의 하루 스케줄은 프란의 피를 바짝바짝 말리다 못해 골수까지 쪽쪽 소리 내어 빨아먹을 만큼 살인적이었다. 새벽 여섯 시에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 두 시에 끝나는 엄청난 일과. 그 스케줄을 딱 3일 경험한 프란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주, 죽을 것 같아. 자, 자고 싶어.' 판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심한 다크 써클이 생긴 데다 얼굴까지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은 프란은 새벽 두 시쯤 좀비처럼 빌빌대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냐? 대체 뭘 몰래 먹은 거야, 엉?'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은 궁중 마법사들에게 갈 때만은 프란을 떼놓고 갔다. 딱 세신만에 돌아와 잠깐 눈 붙이고 있는 프란을 인정사정없이 깨우긴 했지만 말이다. '쑥스러워서 날 떼놓고 가는 건가? 아님 공주님이랑 둘이 만나는데 방해돼서?' 다를 땐 전혀 필요 없는 데까지 데려가면서 궁성은 꼭 혼자 가는 걸 보며 프란은 의심을 굳혔다. 그러고 보면 정황상 짐작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요즘 대마왕이 전혀 화를 안 내고 있다. 원래도 버럭 화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요새는 사람 한둘쯤 쉽게 얼려 죽일 것 같았던 그 무시무시한 냉기류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대마왕이랑은 좀, 아니 전혀 안 어울리지만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갑자기 따뜻해졌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가끔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었다. 아일린가 탈환을 놓고 오로지 그것만 생각해야 할 대마왕이 뭘 그리 고민하고 있는지 프란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고민의 원인이 키네세스와의 결혼준비라면 의문 가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쿵! "으악!" 생각에 빠져 있던 프란은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앞서 걷고 있던 반이 언제부터인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 넋을 잃고 걷다가 반의 등에 머리를 박아버린 프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크악! 부딪쳤어!'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반이 프란 쪽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예?"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프란은 눈을 껌뻑거리는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냐면 어, 네가 요새 대마왕답지 않게 꽤 착한 오로라를 뿜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 그건 아마 키네세스 공주님 때문일테고.' 프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곧이 곧대로 이야기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프란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보고 섰던 반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혀졌다. '으아아악!' 프란은 뜨악했다. '미간 좁히기'는 대마왕이 화가났다는 걸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식이라 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저렇게 미간을 좁힌 걸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다. 프란이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을 못하자 반이 재차 물었다. "요즘 계속 멍하지 않나?" 역시 미간 좁히기가 나타나자 목소리도 단번에 차가워진다. '그렇게 티가 나나?' 프란은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었다. 프란은 자신도 왜 이렇게 반의 결혼 문제에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설명하진 못한다 해도, 이 문제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왜? 빚으로 묶인 일개 시종인 자신이 대마왕이 결혼하든 말든 거기에 대체 왜 신경을 쓴단 말인가. 떡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빚이 깍이는 것도 아닌데. 거듭 왜 이러는 거냐고, 너 미친거 아니냐고 스스로를 닦달해봤자 이유를 알 수 없던 프란이다. 평소라면 뭐가 됐든 대꾸했을 프란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반의 미간이 더더욱 좁혀졌다. 반은 아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내 시종이다. 네 행동은 내 위신과도 관계가 있다." 하긴 내가 요즘 이상하긴 좀 이상했지, 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반성하고 있던 프란이었건만 그 말을 듣는 순간엔 기분이 팍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신 좋아하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공주님이랑 결혼 준비하는 건 위신에 좋은 짓이냐?' 프란은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번에도 프란이 대답 대신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프란은 얼굴이 약간 부은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프란이 훅 하고 한숨을 한 번 쉬었을 때였다. 반이 뜻밖의 말을 툭 하니 뱉어낸 것은. "시온 때문에, 그러는 건가?" 프란은 하마터면 '뭐?' 하고 소리칠 뻔했다. 시온이라니.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시온 얘기는 왜 나온단 말인가. "시온이 걱정돼서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냐고 묻는 거다." 프란은 혼란스러움에 입을 걸렸다. '아. 물론, 물론이지.' 매일 밤 시온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반의 결혼 문제에도 신경이 쓰이는 프란이다. 반이 노려보고 있었건만 프란은 도저히 사실대로 얘기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대마왕이야 '나도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네가 결혼하는 거 때문에 신경 쓰여.'라고 말해봤자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라고 대답할 게 분명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말을 뱉어냄과 동시에 프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반의 몸 전체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소 누그러져 있던 은보라색 눈동자도 예전 그때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는 게, 어쩐지 예감이 안 좋다. '아니. 왜 또 이러는 거야?'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어 프란은 반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반은 프란이 도전적으로 바라보자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을 뿐이다. 반은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묻고 있는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가만히 주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당황한 것은 반이 아니라 기세등등하게 눈을 들었던 프란이었다. '제, 제길.' 프란은 속으로 욕을 했다. 반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라색 안에 은색이 맴도는 그 신비로운 빛깔 때문에도 그렇지만 아무리 침잠하고 또 침잠해 봐도 바닥에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심연이 그 눈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견디지 못한 프란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고개 숙인 프란의 목덜미에 반의 말이 꽂혔다. "내일 아침은 한 시간 일찍 가져와라." '이놈의 대마왕이!' 프란이 온몸으로 불평을 표현하는 사이 반이 차갑게 말했다. "불만인가?" "그야 당연.....!" 허나 프란이 당연히 불만이지, 라고 채 다 외치기도 전에 반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저게 진짜! 남의 말은 들어야 할 것 아냐!' 프란이 뒤에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사이에도 반은 저벅저벅 멀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힘이 실려 있으나 언제나 우아하게 걷던 대마왕답지않게 걸음소리가 투박하다. 화가 난 것 같은 소리다. 프란은 복도 끝 어둠으로 완전히 사라진 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화낼 사람은 나란 말이다!" 공주님이랑 결혼한다면 자신한테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내일 아침은 한 시간 일찍 가져오라니? 도대체가 무슨 심술인지 모르겠다. 사라졌다 싶었던 대마왕의 뿔이 '흐흐흐, 난 죽지 않는다' 하고 소리치며 다시 솟아오른 느낌이랄까. 생각하다 말고 프란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일단은 방에 가자. 생각할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잠을 자야지.' 내일도 수면 부족 때문에 빌빌거리긴 싫었다. 프란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의 방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요샌 일정이 많다보니 잘 때쯤엔 늘 배가 고파서 오늘은 주방에서 빵도 하나 슬쩍 해온차다. 침대에 누워서 빵이나 뜯어 먹다가 잠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대마왕 때문에 나빠졌던 기분이 좀 풀리는 것도 같았다. 기다려라, 내 푹신푹신한 침대야! "어?" 하지만 푹신푹신한 침대가 있는 방 앞에 도착했을 때 프란은 방에 돌아왔다는 평온한 안도감 대신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언제나 똑같은 모양이던 자신의 방 앞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품안에서 빵을 꺼내들어 입에 물고 있던 프란은 무릎을 꿇듯 몸을 구부렸다. "머냐, 이건?" 문 앞에 놓여 있는 건 한 아름의 장미꽃다발이었다. 송이가 큰 장미가 반쯤 핀 채 화사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런데 그 장미의 빛깔이 특이했다. 이런 색의 장미가 있었던가? 프란은 의아함에 장미를 빤히 들여다봤다. 장미는 금색과 오렌지색이 반쯤 섞인 황홀한 빛깔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오오, 하고 감탄하고 있던 프란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잠깐.' 얼굴 하나가 장미꽃다발 속을 스쳐가는 게 보였다. 장미꽃이라는 낯간지러운 선물. 게다가 이렇게 특이한 빛깔의 장미를 방 앞에 놓아둘 사람은 프란이 아는 이들 중 딱 한 명뿐이었다. 프란은 얼른 꽃다발을 들어올렸다. 꽃다발 안에는 황금빛으로 테를 두른 짤막한 메모가 꽂혀 있었다. 프란, 나야 길쭉하니 시원시원한 글씨다. 프란이 막 그 글씨를 읽었을 때, 꽃다발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한 마리 나비가 솟아올랐다. 나비는 장미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역시 너냐. 느끼 버터?" 프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온이 카르멘 가를 떠나기 전 마법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나비가 분명했다. '금색이랑 오렌지색이 꼭 프란 같지?' 하고 물었던, 시온 아일린. 멤는 딱 두 줄뿐이었다. 세벽 네시. 중앙광장의 아산 동상 앞에서 만나. 왜 하필 새벽 네 시인지 프란은 알고 있었다. 여섯 시엔 반의 방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반에게 말하지 말고 나오라는 뜻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마왕은 예지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한 시간 일찍 오라고 말했었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지금 나가선 안 된다. 늦어버릴 테니까. 그래도 프란은 메모를 움켜쥐었다. 어쩔 수 없다. 무조건 가야 해. 이건 시온을 설득할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니까. '느끼 버터 녀석, 아일린가에서 빠져나온걸까? 이 장미는 대체 어떻게 보낸 거지?' 의문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일단은 가야 했다. 프란은 말을 달렸다. 카세타의 지리에 서툰 프란이었지만 다행히 중앙광장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불꽃놀이 때, 헤냔에게 진실을 알려주러 간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오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시온은 뭔가 결심한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인간하나가 고민을 하든 말든 자연은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을 걷으며 보랏빛 하늘이 펼쳐지고 이어 희부연 우윳빛이 떠오르나. 새벽이 온몸으로 자신의 향기를 발하며 카세타 전체를 덮는 사이, 프란과 프란의 말은 밤과 새벽의 경계를 가르며 끝도 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카세타 4대 왕 아산의 동상이 점처럼 조그맣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도착했다 싶어, 프란은 말고삐를 다소 느슨하게 잡았다. '조용하다.' 시간이 이른지라 중앙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프란은 말고삐를 나무에 묶어둔 채 아산 동상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멀어서 동상앞에 누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프란은 급한 마음에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프란의 눈에 뒤돌아선 사람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시온?' 중앙광장에 선 채 뒤돌아선 그 남자는 회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시온인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키를 보니 얼추 시온 같기도 했다. 프란은 반가운 마음에 냅다 소리쳤다. "느끼 버터!" '제길, 진짜 너냐? 그러게 내가 갔을 때 함께 돌아왔으면 좋았잖아!' 프란은 막 그렇게 외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로브를 입은 그자가 프란 쪽으로 돌아섰다.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 얼굴이 똑똑히 보인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려왔던 프란의 얼굴이 굳어진 건 그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였다. "어? 왜....?" 프란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시온이 있기로 한 자리에서 프란을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은 시온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산 동상 앞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이 사람 역시 프란이 아는 이였다. 프란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를 호명했다. "할... 아버지?" 거기에 서 있는 건 노년의 대마도사, 쟈켄린 밀러였다. * * * 묵직한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한참이나 크게 열려 있던 프란의 눈동자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침착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 할아버지를 보낸 게 시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대화를 해봐야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자켄린이 한 걸음씩 프란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프란은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대화하려고 다가오는 사람치곤 자켄린의 상태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눈이 잔뜩 위로 치켜 올려진데다가 입 주위를 씰룩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았다. '이 할아버지한테 잘못한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프란이 움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선 바로 그때, 자켄린이 벼락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네 이 녀석! 또 할아버지라고 불렀겠다!" 엉? 하고 눈을 크게 뜨는 프란을 향해 자켄린의 세필나무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검사의 본능적인 방어술로도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딱! "악, 아파!" 방망이에 그대로 얻어맞고 만 프란은 이마를 움켜쥔 채 몸을 숙이는 수 밖에 없었다. 돌 머리인 자신에게 이만한 타격을 주다니, 얼마나 힘을 줘서 내리친 건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프란의 이마엔 금세 퐁 하니 혹이 돋아났다. 자켄린의 손맛은 처음 만났던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왜 때립니까? 할아버지 맞잖아요!" "젊은 오빠다!" "크악!" 또 다시 한 대 맞고 말았다. 자켄린은 정말로 화가 난 듯 숨까지 쌕쌕거리고 있었다. "탱탱한 언니들이 오빠, 오빠 하며 달려든다고!"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자켄린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기색마저 감돌았다. '그,그게 노년의 대마법사가 할 말입니까?' 프란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래도 프란 프리텐은 노인 공격의 철칙을 갖고 있는 건전한 인간성의 소유자다. 당혹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 프란은 일단 인사를 하기로 했다. 프란은 주책바가지 대마법사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사부터 할게요. 저번에 구해주신 일, 고맙습니다." "흥. 별거 아니야. 나 정도의 대마법사한테 그 정도는 껌이지." 진심을 담아 인사했건만 자켄린은 기세등등한 채 잔뜩 뽐내며 답할 뿐이었다.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그 말투가 농담 하나도 안보태고 일곱 살 짜리 어린애 같다. '선혈의 마법사면 뭐 하냐고? 엄청 유치한 성격인데.' 그렇게 생각하자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프란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았다. 특히 자켄린은 프란의 온몸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프란이 의아한 얼굴을 하든 말든 자켄린 본인은 진지했다. 노골적이긴 했으나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진 않는 자켄린의 시선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간 후에야 프란은 궁금했던 것을 물을 수 있었다. "대체 여긴 왠일입니까? 느끼 버터는요?" 자켄린은 틈 없이 대답했다. "나랑 같이 가자, 꼬마야."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꽃다발 보낸 것도 할아버지예요?" '할아버지'라는 말에 이마빡에 힘줄이 빠직 돋아났지만 자켄린은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 다 발휘해서 이번엔 참았다. 프란이 눈을 굴리며 묻고 있는 폼이, 아무리 지적해줘도 고쳐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오빠인 내가 왜 저딴 망발을 들어야 하냐고! 자켄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대답해주었다. "꽃 보낸건 시온이야. ..... 빌어먹을 놈, 그딴 장미 만들 시간에 7써클 마법에나 매진할 것이지. 남들은 되고 싶어도 못 되는데 그 놈은 제 재능에 감사할 줄을 모른단 말이야. 내 비커까지 훔쳐가고.... 어쩌다가 내가 그 놈을 제자로 맞아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내가 제자 연애에 관여하느라 국경을 넘어 다닌다는 걸 알면 대륙이 부웃을 거다. 쪽팔려서 살 수가 있나..." 대답을 해준다는 게 그만 시온에 대한 원망으로 뻗어나가 한참이나 뭐라고 구시렁거렸던 자켄린은 프란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 때에야 헛기침을 하며 세필나무 방망이로 땅을 한 번 쾅 내리쳤다. 권위적으로 보이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프란은 '땅은 왜 갑자기 왜 찍는 건데요?' 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가 8써클 마법사라는 걸 알면 대접 좀 해줘!' 자켄린은 속으로 불을 뿜었다. 그래도 그는 프란의 의문에 답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온은 못 와. 그나마 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 나한테 널 부탁한 거지. 같이 가자."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갑작스레 나타난 자켄린과 그 자켄린의 이상한 행동에도 굴하지 않고 프란은 물었다. 자켄린의 화법이 우스꽝스럽긴 해도 그 화법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우습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 일이 해결될 때까지 네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이겠지." 무심한 자켄린의 말에 프란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내가 왜 숨는데요? 빚도 아직 빌어먹게 많이 남았는데." "네가 아일린으로 오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아니, 사실 카르멘가도 충분히 위험하지. 시즈한테 손대는 건 힘들겠지만 이진느도 너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고." 아무렇지 않게 죽음 운운하는 자켄린의 말에 프란의 팔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자켄린의 말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이진느에게 프란 하나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프란을 압도했던 젠의 존재가 그를 증명하지 않는가. 자켄린은 입술을 꾹 깨문 프란을 향해 웃어보였다. "시온은 널 걱정하는 거야." "그래서 할아버지를 보낸 겁니까?" '할아버지가 아니라니까!' 자켄린은 화를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래. 녀석은 널 지켜주고 싶은 거지." 그때였다, 꾹 쥔 주먹이 떨린다 싶었던 프란이 냅다 고함을 지른 것은. "웃기는 소리하지 마세요!" 자켄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프란은 자켄린이 인상을 긋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이 됐다면 시온은 나랑 같이 왔어야 됐어요. 난 숨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몸 하나는 내가 지킬 수 있고! 대체 시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흥분한 탓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프란을 보며 자켄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고집불통이곤.' 자켄린은 구슬리듯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온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라. 그놈 지금..." 자켄린은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한순간이나마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자함이 깃들었던 자켄린의 얼굴에 순식간에 8써클 대마법사 특유의 위엄이 들어섰다. "왜요?"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왜 그러나 싶어 프란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자켄린은 프란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프란의 어깨 너머 저편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있나 싶어서 프란도 자켄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프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야? 여긴 어떻게 왔어?'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프란은 도무지 이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한데 짜고 자신을 놀래주는 이벤트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굳어 있는 프란을 대신해, 자켄린이 한숨 쉬듯 거기 선 남자를 호명했다. "가주"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반이었다. '여기엔 어떻게?' 자켄린은 프란이 말했나 싶어 얼른 프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주먹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크게 벌어진 프란의 입 때문에, 자켄린은 묻지 않고도 프란이 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어떻게 굴러가는 노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자켄린을 향해,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반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자켄린 밀러." 싸늘한 목소리였다. * * * "여긴 어떻게 오셨소?" 마법사는 원래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족속들이다. 반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몰고 올 나쁜 사태보다도 반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가 궁금했던 자켄린은 그것부터 물었다. "내가 묻고 싶군." 반이 답한 그 순간 자켄린은 살기를 느꼈다. 명백히 반에게서 뿜어져 나온, 명백히 자신을 향한 살기였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정말 무시무시하구먼. 시즈의 살기는.' 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평화로움 그 자체인 자켄린은 입 안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것을 눈치 챈 반 역시 재빨리 루니아 블레이드를 뽑았다.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프란은 당혹감도 잊고 찌릿지릿한 투기들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진짜 장난 아니다.' 그야말로 최강의 검사와 최강의 마법사 사이에 끼인 꼴 아닌가. 뭐든지 다 알고 있는 듯 굴었던 계승식의 '목소리'는 반을 향해 '대륙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 라고 했다. 그런 반이 검사 측 대표라면 자켄린 역시 마법사 대표로서 손색이 없었다. 전 대륙에 세 명밖에 없는 8써클 마법사니까. 한순간 프란은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분명 굉장할 테지. '미친거냐! 정신차랴!' 프란은 그러나 그 유혹을 순식간에 떨쳐냈다. 둘이서 싸웠다간 이 중앙 광장 전체가 초토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아니, 중앙광장뿐인가. 수도 일부가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당혹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으악, 싸우지들 맙시다!" 프란은 두 사람 사이를 떡 하니 대자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우습기까지 한 모습이었으나 반도 자켄린도 전혀 웃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녀석을 보내주시오, 가주. 난 오늘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니오."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건방지군." "허락치 않는다면 실력 행사를 하겠소." 8써클의 대마도사가 실력 행사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겁먹지 않는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단신으로 적군 2만명을 섬멸했다는 선혈의 마법사, 자켄린 밀러다. 그러나 반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겁이 다 뭔가. 오히려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봐라."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프란은 냉담하게 잘도 뱉어대는 반의 멱살을 단박에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해보긴 뭘 해봐?" 이 난데없는 반말 공격에 반이 흠칫했다. "수도를 엉망으로 만들 셈이냐? 앙?" 자켄린마저 움찔하는 가운데, 프란은 자켄린의 바로 앞에 와서 섰다. 반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입 안으로 워프 주문을 완성했던 자켄린은 슬그머니 프란 쪽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때 반이 바람처럼 다가왔다. 반은 자켄린의 손이 프란의 팔이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켄린의 손은 아슬아슬하게 프란을 놓쳤다. "아프잖아!....요!" 프란이 버럭 소리를 쳤지만 반은 손을 풀지 않았다. "이리 와라, 꼬마야." 반에게 어깨를 잡힌 프란을 향해 자켄린이 손짓했다. "시끄럽다!" 대답한 것은 프란이 아니라 반이었다. 그는 프란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프란은 으악 하고 방정맞은 소리를 내며 몸을 빼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반의 손아귀 힘은 더욱 강해져 갈 뿐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란은 자켄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난 안간다고 했습니다. 안 간다니까요!" 자켄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다." "네 놈이...!" 순간 프란은 등줄기에서부터 타고 오는 한기를 느꼈다. '대마왕, 진짜 화났다.' 프란의 느낌 그대로였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서렸던 것이다. 자켄린은 그 모습을 보며 담담히 세필나무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반은 왼손으로 프란의 어깨를 잡고 오른손으론 루니아 블레이드를 든 채 그런 자켄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프란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주쇼, 스승님. 그렇게만 해주면 됩니다.' 비장의 비커를 훔쳐가던 날 시온은 그렇게 말했다. 그 비장의 비커안에 든 비장의 재료로 색깔 특이한 장미 따위나 잽싸게 만들어선 손에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끝없이 불평하면서도 시온이 준비한 선물을 프란의 방 앞으로 보냈던 자켄린이다. 자켄린은 시온의 부탁대로 프란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싶었다. 설사 최강의 검사일 반과 싸워야 한다 해도. 팽팽한 공기가 세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세 걸음. 충분하다.' 반은 순식간에 자켄린과의 거리를 계산했다. 이 거리라면 자켄린이 주문을 시전하기도 전에 자신의 검이 자켄린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자켄린도 반과의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힘들지도 모르겠군. 상대는 보통 검사가 아니니까. 할 수 없지, 뭐.' 속으로 투덜거린 자켄린이 막 공격주문을 캐스팅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나라고요, 가든 말든 하는 건. 가도 내가 가고 안 가도 내가 안 가는 거라고! 왜 둘이서 난리야?" 프란이었다. 자켄린이 멈칫하는 가운데 프란은 새되게 소리를 높ㅇㅆ다. "빌어먹을, 난 안 간다고 했잖아요. 날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고 내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도 내가 정해!" 프란은 탕 하고 발을 굴렀다. "다시는 도망자로 살지 않아요. 비겁하게 숨는 일 따위 하지 않습니다.!" 자켄린은 그러나 세필나무 방망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프란은 에잇 소리를 내며 반의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반의 손을 쳐낸 프란이 양팔을 벌렸다. 반은 본의 아니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뭐 하는 건가! 반이 소리치려는 그 순간 프란이 큰소리로 말했다. "안전한 곳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건 할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자켄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전보다 중요한 것?' 그딴 건 없다. 제일 중요한 건 언제나 자신의 안전이다. 자켄린은 비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 비웃음을 받고서도 프란은 단호한 눈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진 자의 눈빛. 자켄린은 그 눈 때문에 잠깐 흔들렸다. '너는 지금 자존심이나 의지, 혹은 도의를 말하려는 건가. 정말 그까짓 게 네 안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자켄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프란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안 갑니다. 하지만 느끼 버터에겐 고맙다고 전해주십쇼." 프란은 반의 앞을 막고선 발에 힘을 주었다. '느끼버터. 나는 도망가지 않아. 한 번은 너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지만 두 번은 아니야.' 자켄린은 무서운 눈으로 프란을 바라보았다. 프란은 그 눈을 담담하게 마주했다. 선명하게 빛나는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보면서, 자켄린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프란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게 '도망가지 않는다.' 는 단순한 사실이란 걸, 자켄린은 그 순간 알았다. '좋은 여자를 골랐구나. 바보 제자 놈아.' 그렇게 생각하며 자켄린은 힐끔 프란의 뒤에 선 반을 보았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반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자켄린은 웃을 뻔했다. '하지만 시온, 그 좋은 여자를 잡는 건 쉽지 않겠다.' 자켄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반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프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았다, 그렇게 전하지. 후회하지 마라." 프란은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자켄린은 나직히 워프를 외쳤다. 검을 뻗으면 잡을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반은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살기 어린 눈으로 빛에 감싸인 자켄린을 보았을 뿐이다. "곧 봅시다, 시즈." 한마디를 남긴 자켄린의 모습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프란은 자켄린이 서 있던 앞을 바라보았다. 자켄린이 거기에 있었다는걸 증명할 만한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켄린의 뒤편에 있던 제 4대 카세타 국왕, 아산의 동상만이 그 위용을 뽐내며 프란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프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반은 팔짱을 낀 채 프란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프란은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온 겁니까?"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은 재차 물었다. "제 뒤를 밟았습니까?" "그런 적 없다." "그럼 대체 여긴 어떻게 왔는데요?" 반은 네살배기 아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산책 차 나와 봤다." 프란은 어이가 없었다. "가주님은 장미 정원에서 산책하잖아요." "오늘은 멀리 나왔다." 프란은 허허허 하고 실성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새벽 네 시에 말입니까?" "내 마음이다." 프란은 속으로 발악했따. '내 마음이고 네 마음이고, 도무지 믿을 만한 말을 해야 믿지!' 프란은 언젠가 반이 사기 치겠다고 마음먹으면 크게 한 건 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보니 진짜 그렇다. 절대 진실일 리 없는 말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하고 있질 않은가. "내가 바보로 보입니까? 바보로 보이냐고요!" 프란이 뭐라고 하건 간에 반은 저벅저벅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왔냐고 묻잖아요!" 반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반은 절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 사실은 헤어지며 했던 말을 취소하려고 프란의 방에 갔었다는 사실을. 한 시간 빨리 나오라고 한 게 괜한 심술이었음을, 반은 방에 들어가 눕는 그 순간 알았다. 마음이 꺼림칙했다. 자신이 피로한 만큼 프란 역시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걸 반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프란은 여자..........다. 아무리 팔팔대며 돌아다닌다 해도 체력은 자신보다 한참 약할거다. 고민하던 반은 '원래 시간에 기상' 이라는 짤막한 말을 해주려고 프란의 방에 갔다. 그러나 그를 맞은 건 부스스한 얼굴의 프란이 아니라 시온의 필체가 박혀 있는 금테 둘린 메모와 꽃다발뿐이었다. 방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 반은 재빨리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새벽같이 말을 갈기를 손질하고 있던 마구간지기 라훌이 '아니, 이 시간엔 왠일로?'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건 말건 반은 미친 듯 말을 몰아 이곳으로 왔다. 왜 긇게 서둘러서 달려왔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반은 이렇게 대답할 참이었다. '빚이 남았는데 도망가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반은 빠른 걸음으로 말을 세워둔 곳으로 갔다. 결국 진실을 듣지 못한 프란도 제기랄, 하고 투덜거리며 자신의 말을 반의 옆으로 끌고 왔다. 벌써 스무 시간 가까이 잠을 자지 못한 탓에 프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반은 구시렁거리며 말 위에 올라타는 프란을 보며 생각했다. 여기로 와서 다행이라고. 거리는 벌써 환해져 있었다. * * * 카르멘가 검사도 아니고 아일린가의 일원도 아니다. "심심해." 그래서 하질리언에겐 달리 맡겨진 일이 없었다. 요즘 하질리언은 황금문 주위를 슬슬 돌아다니거나 장미 정원을 산책하는 일로 소일하고 있었다. 오늘도 하질리언은 아침 식사를 들고 장미정원에 퍼질러 앉았던 참이었다. '꽃향기 맡으며 식사하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카세타 녀석들은 모르겠지.' 로이네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호사를 누리며 빵을 한 입 베어 먹은 하질리언의 눈이 한 순간 크게 뜨였다. 장미 정원 저 편에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질리언의 눈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도련님!" 장미 정원을 가로 지르고 있는 사람은 헤냔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던 헤냔은 하질리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움찔했다. "하, 하질리언 씨?" 헤냔은 이제 자신이 '도련님' 이란 단어에도 발끈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하질리언을 불렀다. '후후, 길들여졌군.' 하질리언은 속으로 웃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웬일이야?" 반가워하는 하질리언과는 달리 어떻게든 하질리언만은 피하고 싶었던 헤냔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나이스의 '죽어버릴 거야' 공격에 시달렸던 헤냔은 하질리언의 공격을 받아낼 체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상대를 무시한 만큼 못된 성질머리를 가지지 못한 헤냔은 입을 여는 수 밖에 없었다. 오늘만은 절대 이 사람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카르멘 경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사무적인 대답에 하질리언은 섭섭한 얼굴을 했다. "섭섭해, 도련님. 그 동안 한번도 안찾아왔잖아. 이젠 내가 필요 없어졌구나?" "그만 좀 놀리십시오!" 절대로 안 휘말리겠다고 다짐한 지 1초만에 하질리언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헤냔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질리언이 몹시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다. 천성이 착한 헤냔은 금방 미안해져서 앗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사실 하질리언 씨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말이 안 통할 정도로 심한 마이페이스라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너무했던 것 같아 헤냔은 사과의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헤냔이 막 입을 열려던 그때, 하질리언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허탈한 듯 말하는 것 아닌가. "도련님도 제법 세파에 물들었군. 놀린다는 걸 이렇게 빨리 눈치 챌 줄이야." 이젠 한숨도 안 나오는 헤냔이었다. "그만 좀 하라고요." 하질리언은 웃었다. "한 번도 안 보러 와서 섭섭했던 건 사실이야. 도련님." 헤냔은 이번에도 금새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질리언은 그 순진한 반응을 보며 속으로 음흉하게 웃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헤냔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하질리언 씨. 프리나는 왜 이렇게 늦는 거죠? 돌아왔어도 진작 돌아왔어야 하는데...." 제 아무리 최강의 마이페이스라도 이번만큼은 롤라는 수 밖에 없었따. '프리나는 왜 이렇게 늦는 거죠' 라니? 프란은 벌써 옛날에 전에 돌아왔잖은가. "무슨 소리야? 프리나는 저택에 있잖아." 그 말에 헤냔이 놀란 얼굴을 했다. "예? 하지만 저스티스 경이 아일린가에 갔다고 했는데요?" "그러니까, 돌아왔잖아?" "예?" 헤냔의 얼굴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헤냔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제 낮에도 저스티스 경을 봤는걸요. 분명 혼자였습니다." 헤냔은 요 며칠 빈번히 반과 마주쳤다. 반이 궁중 마법사들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주 궁에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반은 혼자였다. 온갖 곳으로 프란을 끌고 다니는 반이 혼자인 걸 보면 프란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헤냔은 반과 마주칠 때마다 물었다. 프리나 돌아왔느냐고. 그러나 반은 매번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저스티스 경이 분명히 아직 안 왔다고 그랬는데." 헤냔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이상한 데서 눈치 빠른 하질리언은 사태를 파악해버렸다. "언제 돌아왔습니까?" 순진한 눈으로 물었던 헤냔은 이윽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젯밤에 돌아온 겁니까? .... 많이 늦었네. 다친 덴 없나요?" 그렇게 말하는 헤냔을 보며 하질리언의 얼굴이 빨개졌다. "왜 그러십니까?" 헤냔은 하질리언의 얼굴이 난데없이 붉어진 것에 놀라 물었으나, 하질리언은 대답 대신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을 뿐이다. "푸, 으하하하하!" "하질리언 씨?" 하질리언은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이, 이거 진짜 걸작이잖아, 걸작! 하하, 안 어울리는 짓 좀 하지 말라고! 으하하하! ... 크크, 자식.... 귀여운 구석이 있었잖아? 하, 하하하하!"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둔하기론 곰 저리 가라인 헤냔은 특유의 칠판 얼굴로 '왜 웃는지 설명 좀 해주십시오.' 라고 말했으나 하질리언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미남. 프리나가 도련님이랑 만나는 게 그렇게 싫었어? 응?' 싸늘한 반의 얼굴과 겹쳐 생각할 수록 더욱 웃겨서, 하질리언은 마침내 장미 정원을 데굴데굴 구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숨이 넘어가도록 웃으면서도 하질리언은 끝내 헤냔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 * * 하질리언이 장미 정원에서 구르느라 온몸에 가시가 박혀 악 소리를 내면서도 웃고 있던 그때, 프란과 반은 저택을 향해 말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감자 못 깎았네. 주방장님한테 무지 혼나겠다." 주방장의 무지막지한 프라이팬 공격을 떠올리며 프란이 중얼거렸다. 분명 혼잣말이었건만 그 말을 용케 들은 반이 말했다. "어차피 안 갈 생각 아니었나?" 프란은 발끈해서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소립니까, 그게!" "여기 왔다가 삼십 분 만에 돌아갈 생각이었나 보군." "윽." 프란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확실히 그랬다. 여차하면 식사 시중에 늦는 것도 각오했던 그녀다. 프란으로부터 대답이 없자 반은 다시 말을 재촉했다. 얼마나 그렇게 둘 다 침묵한 채 말만 몰고 있었을까. 프란의 머리로 한 가지 꺠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대마왕은 말을 타고 있다. 말을 타고 있으니 돌아보기가 쉽지 않을 거다! 바꿔 표현하면 반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곤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며칠 동안이나 못했던 질문이 프란의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왜 궁에 갈 때는 혼자 갑니까? 안 그랬잖아요." 반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움찔 떨렸다. '어깨까지 떨릴 만큼 쑥스러운 거냐.' 프란은 지레짐작했다. 다시 한 번 거짓말 처럼 가슴에 통증이 왔다. 그러나 프란은 애써 그 통증을 무시하며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쌩뚱맞은 프란의 말에 반이 물었다. "뭐가 말인가?" "데리고 가도 괜찮다고요. 어차피 소문 파다하게 퍼졌는데 제가 본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반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지?" "아, 글쎼. 쑥스러워하지 말라니까!" 프란은 버럭 소리를 쳤다. 아예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형국이었지만 반은 당황한 나머지 그것을 지적하지도 못했다. 반의 난감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내친 김에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공주님과 결혼 준비하는 거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요." 반은 즉시 달리던 말을 멈췄다. 그리곤 말 머리를 뒤에 있는 프란 쪽으로 돌렸다. '으악! 말 머리를 돌리면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거구나!' 깨달은 지 1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 '최고의 말할 기회'의 약점을 발견해버린 프란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무슨 말인가?" 반은 '이런 바보 자식!' 하며 자학하고 있는 프란에게 물었따. "에?" 이번엔 프란이 의아해할 차례였다. "내가 뭘 한다고?" "키네세스 공주님이랑 결혼한다고 저택에 소문이 파다하게...." 프란은 멍하니 답했다. 그 뜻밖의 말이 반에겐 어이없을 수 밖에. 자신은 꼴 보기 싫은 마법사들을 만나러 가는데 그걸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원체 소문에 신경 쓰지 않는 반이긴 했다.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런 건 헛소문인 게 당연하잖은가!" 미간이 좁혀진 채 소리친 반 때문에 프란은 응? 하는 소리를 내야 했다. '헛소문?' 몇날 며칠을 언제 물어볼까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헛소문이라니? "뭐, 뭡니까? 그게 헛소문이었다고요?..... 결혼 안 합니까?" "안 한다고 말했잖은가!" 반은 버럭 화를 내듯 말하곤 다시 말 머리를 돌렸다. 반은 앞서가건만 프란은 말고삐를 잡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뭘 생각했는지 프란이 얼른 말을 달려 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 그럼 왜 안데리고 가셨는데요? 쑥스러워서 그런 거 아니었습니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 때문에 프란이 묻는데, 반이 퉁명스레 답했다. "시끄럽다." 반은 갑자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좀 천천히 가라고요!" 반이 너무 말을 빨리 달렸기에 프란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제 4장 작전 반은 프란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향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유달리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걷고 있던 반이 뭘 발견했는지 한순간 흠칫 걸음을 멈추며 몸을 세웠다. 보고 또 봐도 자신의 방 앞에 서 있는 건 헤냔이었다. "어, 헤냔!" 자리에 멈춰선 반과 달리 프란은 곧장 소리를 지르며 헤냔 쪽으로 달려갔다. 황금문 사건이 있었던 날 헤어지고 그 뒤론 처음 보는 헤냔이다. 로이네트에서 함께 지내며 정이 들긴 들었던 모양으로, 몇 주 만에 헤냔을 만난 프란의 표정에선 반가움이 묻어났다. "프리나!" 헤냔 역시 프란을 발견한 그 순간 달려오기 시작했다.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헤냔의 발그레한 얼굴이 풋풋하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프란을 마주하며 헤냔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진심을 담아 소리친 헤냔에겐 당혹스럽게도, 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영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너한테까지 젠 이야기가 흘러들어갔냐?" 아일린가에서 돌아온 건 꽤 된 일이고 자켄린 일은 방금 전에 있었던 거니 헤냔이 알 턱이 없다. 그러니 '무사해서 다행' 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건 젠 사건밖에 없다고 생각한 프란이었다. '쪽팔려 죽겠네. 엄청 깨진 그 이야기가 왜 헤냔한테까지 가냔 말이다.' 부끄러움에 머리를 긁는 프란을 보며 헤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젠이라니?" 헤냔으로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젯밤에 돌아온 거 아니었어? 하루 사이에 또 무슨 위험한 일이 있었나?' 헤냔은 아직까지도 반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장미 정원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파안대소했떤 하질리언이 끝까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만큼, 사람 의심할 줄 모르는 헤냔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둔한 헤냔이라고 해도 자신과 프란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헤냔은 이 혼란스러운 사태를 정리하기 위해 당혹 가운데서도 입을 열었다. "난 젠이란 사람 몰라. 내가 다행이라고 한 건 아일린가에서 돌아온 걸 두고 한 말이야." 사태 파악이 전혀 안 된 프란이 엉? 하는 소리를 냈다. 둔한 걸로 따지면 프란도 헤냔에 못지 않았다. 하질리언처럼 웬만한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아차렸을 진실의 갈피를 전혀 못 잡았던 것이다. "언제 적 얘길 하는 거냐? 새삼스럽게 무슨." 헤냔의 입이 벌어졌다. '언제 적 얘기? 새삼스러워?' 그제야 헤난은 사태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프리나. 아일린에선 대체 언제 돌아온..." 헤냔이 막 언제 돌아온 거냐고 물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여태까지 둘의 뒤에 서 있던 반이 갑작스레 헤냔을 소리쳐 부른 것은. "헤냔 키에르!"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말 가로막기였다. "무슨 일입니까, 카르멘 경?" 헤냔은 인상을 찌푸린 채 반을 보았다. 대화를 방해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런 헤냔과 눈을 마주한 반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 런스가 그렇게 가르치던가?" 갑작스럽다 못해 생뚱맞은 말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헤냔은 얼이 빠졌다. '런스가 그렇게 가르치라던가' 라니? 멍하니 입을 벌렸던 것도 잠시, 헤냔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자신과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모욕당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슨 뜻입니까?" 헤냔은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여긴 왜 왔는가?" 질문을 다시 질문으로 받아치는 반의 미간은 여전히 좁혀져 있다.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다. '여긴 왜 왔냐고?'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헤냔의 얼굴이 뭘 떠올렸는지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 헤냔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그랬다. 전할 말이 없었다면 프란이 왔다는 걸 몰랐던 헤냔이 여기로 왔을 리 없었다. 얼굴 마주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반이나, 아나이스 때문에 잔뜩 지친 자신을 더 지치게 만들 게 분명한 하질리언을 굳이 찾아와서 만날 필요는 없는 거니까. 즉, 헤냔 자신은 지금 공적인 신분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헤냔은 순식간에 부끄러워졌다. 런스가 그렇게 가르쳤냐고 한 건 공적 입장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적인 관계에 몰입해버린 자신을 질책하는 말임에도 분명했다. '아무리 프리나가 반가웠다 해도, 상황이 이상하다 해도, 난 이야기를 먼저 전해야 했어.' 공식 칠판 헤냔의 얼굴을 통해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강직한 소년 기사가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입술을 깨무는데, 반이 쐐기박듯 말했다. "나는 바쁘다. 잡담은 나중에 하고 내게 할 말부터 하도록." 이런 실수를 반에게 지적당했다고 생각하자 헤냔은 분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헤냔은 입술을 꾹 깨물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반에게 먼저 이야기를 전해준 다음 프란과 이야기를 나눠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헤냔이 막 입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반이 헤냔의 옆에서 멀둥한 얼굴로 서 있는 프란에게 말한 것은. "넌 마린에게로 가라." "엥? 왜요" 프란은 황당했다. 여태까지 방으로 잘 가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마린은 무슨 마린인가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란 역시 뭔가 찜찜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헤냔이 공적인 일을 끝내면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은 그녀였다. 그러나 반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을 뿐이다. "마린에게 맡겨둔 일이 있다." "좀 있다 가면 안 됩니까?" 헤냔하고 얘기 좀 하게, 라는 뒷말은 생략한 채 프란이 물었건만 반은 단호했다. "안 된다." "어,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가..." 프란이 말하자 반의 미간이 다시 한 번 확 좁혀졌다. "가라 하지 않나!" '에이 씨. 왜 신경질은 내고 난리야? 마린한텐 또 왜?' 프란은 투덜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 * * 오랜만에 만난 프란이 고개만 까딱하고 마린에게 달려간 후, 헤냔은 반의 방에 들어와 용건을 꺼내고 있었다. "케이온 기사단 소속 서른 명과 디센 기사단 열 명이 합류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뭣 때문인지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던 반이 그 말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헤냔은 그 얼굴을 보며 부연했다. "폐하께서도 윤허하셨습니다." 케이온 기사단 소속 서른 명에 디센 기사단 소속 열 명이라니? 키네온이 만약 반에게 기사들을 붙여주고 싶었다면 모두를 붙여주든지 두 기사단 중 하나를 통째로 붙여주든지 했으리라. 그래서 이 어정쩡한 숫자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출발을 이틀 앞둔 지금에 와서야 합류 의사를 밝혀온 건 또 무슨 이유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반은 말했다. "필요 없다." 이 냉담한 대답에 헤냔은 버럭 화를 냈다. "그렇다면 카르멘 경이 아나이스를 말려보십시오!" '아나이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이었다. 화를 냈다는 사실에 아차 싶었는지 헤냔은 그 이상 말하는 대신 등을 돌렸다. "할 말은 전했습니다. 출발하는 날 뵙겠습니다." 얼른 프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헤냔이었다. * * * "뭐야, 이거?" 프란은 투덜거리며 다시 반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굴기에 있는 대로 속도를 높여 뛰어갔건만, 마린은 서류 더미에 묻혀 낑낑대며 신음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의 다 죽어가는 몰골로 프란을 돌아보며 마린은 '왜?' 라고 물었다. "부른 거 아니었어?" "응? 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다 말고, 마린은 호호호 소리 높여 웃었다. "잉. 내가 보고 싶었으면 그렇다고 말해. 이상한 핑계 댈 필요 없어!" "크악! 떨어져!" 기미에 눈곱에, 머리엔 기름이 좔좔 흐르는 마린이 있는 힘을 다해 엉겨 붙는 것을 간신히 떼어놓고 프란은 다시 반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뭐야? 대마왕이 착각을 다 하고. .... 많이 피곤한가?" 짐짓 걱정을 하며 프란이 걸음을 옮기는 그 사이, 헤냔은 온 저택 하녀들에게 마린의 방이 어디냐고 물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헤냔은 결국 프란을 만나지 못했다. 궁성보다 넓은 데다 더할 나위 없이 기괴한 구조를 가진 저택 전체를 빙빙 돌아 겨우 찾아갔건만 거기 있는 건 마린뿐이었다. "프란? 아까 들렀다 갔는데." 헤냔은 마린의 대답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시간을 충분히 허비했던 헤냔은 슬픈 얼굴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숨 돌릴 겨를 없이 바빠졌던 헤냔은 결국 출발 당일까지도 프란을 만나지 못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프란이 자켄린과 얼굴을 마주했던 후로도 벌써 하루가 지나, 이제 출격까지는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카르멘 가의 공기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곤두서 있었다.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주방 식구들까지도 스태미나 요리를 만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정도다. "내일이군" 그 긴장된 공기 한가운데서 문득 룬이 말했다. 출발을 하루 남긴 상태에서, 룬과 켈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가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놀랍게도 대 아일린 작전은 아직까지도 공표되지 않은 상태였다. 몇주간이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했건만, 반이 번번히 그 모든 작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에게 뭔가 생각하는 게 있으리라 짐작하는 룬이긴 했으나 아직까지도 작전이 하달되지 않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가주님이 오십니다." 그 불안한 마음을 안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반이 들어섰다. '가주님! 믿습니다!' 룬은 여신을 숭배하는 신도의 눈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오늘이야말로 작전이 하달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정신을 완전히 집중한 채 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은 그런 모드를 향해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반이 입을 열었을 때, 룬은 누구보다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눈은 점차로 흐려지기 시작해, 반의 설명이 끝날을 무렵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 * * "뭐라고? 카르멘 경이 오지 않는다고?" 카세타 궁중 마법사 중 유일한 7써클인 라톤은 어이가 없었다. 라톤 뿐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입을 떡 벌리고 있긴 마찬가지다. 출발이 내일이건만 마지막으로 작전을 토의해야 할 반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탁에 동그렇게 모여 앉은 채 반을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은 반 대신 들어온 검은 머리칼의 여자 때문에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당신은 뭐요?" "당장 카르멘 경을 불러오시오! 밤새 토의해도 모자랄 텐데 이게 무슨 짓이지?"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선 검은 머리칼의 여성은 비켈린의 임시 대장인 켈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돌아오자마자 소리 소리를 지르며 왜 반은 안 왔냐고 난리를 치는 마법사들을 고요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엉망이군' 카르멘가의 지하에서 지내며 첩보 활동을 주로 했던 그녀였으나 이마법사들은 본 적이 있었다. 카세타 반란 때 이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의 켈리는 복면을 하고 있었던지라, 마법사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가주님의 말을 전하러 온 켈리 월입니다." 요란법석을 떨어대는 마법사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켈리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마법사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켈리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순간에 회장을 압도할 만한 침착한 카리스마가 켈리의 눈에 맺혀 있었다. '그 주인에 그 부하.' 라톤은 켈리의 싸늘한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왜 당신을 보냈다는 거요? 직접 안 오고!" 라톤은 모든 마법사들을 대신해서 질책하듯 물었다. 켈리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아까 들은 반의 말을 마법사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가뭄 때의 논바닥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나는 너희들을 카세타 왕실에서 빌렸다.'" 켈리의 말에 마법사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런 마법사들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켈리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너희와 작전을 상의하기 시작한 건 3주 전이지. 하지만 아무런 소독도 없었다.'" 소득이 없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도 카세타 반란 진압 때 제 2궁을 무너뜨린 사실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던 마법사들이다. 그 모든 것이 반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마법사들은 반이 말을 할 때마다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모조리 동원해 시비를 걸었다. 원활한 토의가 이루어질 리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불평 따위 용납할 마음 없다. 내 작전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너희를 내게 빌려준 왕에게 가서 따지도록.' 이상이 전하신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건방진!' 마법사들은 공통적으로 생각했지만 반의 부하인 켈리 앞에서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마법사들은 조그마한 목소리로나마 저네들끼리 반을 욕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법사들은 조그마한 목소리로나마 저네들끼리 반을 욕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톤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일동 조용! 우선 작전을 들어봅니다." 라톤은 7써클 마법사에 80살 노인이다. 실력도 그렇고, 연륜에서도 밀리는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나 다름없는 라톤의 말에 웅얼거리던 입을 조용히 닫았다. 마법사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듯 켈리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작전은 이렇습니다." 켈리는 마법사들을 향해 반이 세웠고 또 카르멘 가의 모두를 경악시켰던 그 작전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켈리의 설명이 다 끝났을 때, 라톤을 비롯한 모든 마법사들의 눈에서도 일제히 초점이 사라졌다. "당신네 가주는 미친 거 아니오?" 한참 만에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켈리는 대답이 없었다. * * *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마법사들은 아직도 투덜대고 있었다. 어젯밤 켈리가 전해준 작전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됐다. 그러나 따지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었다. 출발 하루 전에야 기습하듯 작전을 전달해준 것도 침착하게 작전을 고쳐보자고 할 틈을 안 주려는 의도에서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궁중 마법사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쩔 수 없잖은가." 라톤은 뒤에서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켈리가 다녀간 뒤, 총 서른 두 명인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 중 라톤을 제외한 서른한 명의 마법사가 키네온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왕에게 반의 작전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설명하며 파견을 취소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출발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왕이 한 번 뱉은 말을 주워담는 게 가능할 턱이 없었다. "이제 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대들은 저스티스 앞에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인가?" 괜히 키네온의 역정까지 얻어 들은 마법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카르멘가에 올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대망의 출발일이다. '놀랍군.' 우는 소리를 내는 마법사들을 이끌고 카르멘가에 도착한 라톤은 그렇게 생각했다. 숨 막히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멘가의 검사들과 견습생들이 모두 모인 카르멘가의 안뜰은 장관이었다. 기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라톤은 목을 길게 빼야 했다. 라톤은 아련한 얼굴을 한 채 카르멘 가의 검사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당신에게 빚을 졌지, 저스티스.' 제 2궁을 무너뜨리기 전, 두려움에 떠는 마법사들에게 라톤은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은 그의 말에 따라 제 2궁에 마법을 쐈었다. 허나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마법사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원색적인 욕을 들은 건 라톤이 아니라 반이었다. 라톤이 짊어져야 할 경질마저 모조리 반이 짊어졌던 것이다. '이 작전도 그때만큼 말이 안 되지만 나는 이번에도 당신을 믿어보겠소.' 라톤이 그처럼 향수에 젖어 있을 때였다. "둘 다 그만해!" 라톤의 오른편에서 그의 생각을 박살내며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진지한 분위기에 누가 이렇게 방정맞은 소리를 내나 싶어 돌아보는 라톤의 눈에 카세타 궁중 마법사와 함께 출발했던 소년 기사, 헤냔 키에르가 보였다. * * * 헤냔은 울고 싶었다. 케이온 기사단에서 서른 명, 디센 기사단에서 열 명. 이 마흔명의 기사들은 상관도 없는 카르멘가에 끌고 온 것은 아나이스였다. "같이 가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아나이스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기사들을 찾아가 런스가 아일린 가에 잡혀 있다며, 만약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을 보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 라는 무시무시한 엄포를 놓았다. 그 기세에 눌린 것도 눌린 것이지만 런스가 억울하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안 카세타의 기사들 몇몇이 검을 들고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왕가를 지키는 기사들이기에 앞서 그들 역시 감정이 있는 사람이니까. 이미 마법사들까지 빌려준 마당에 기사들은 안 된다고 말할 명분도 없는 키네온이 피곤하다는 듯 허락했으니 공식적으로도 문제는 없었다. 헤냔의 고민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난 아나이스 폰 그란젤. 헤냔에게서 대충 얘기는 들었지. 호, 듣던 것보단 훨씬 멀쩡한데?" 헤냔의 옆에 선 아나이스는 웃고 있었다. '어떡하지?' 그 웃음을 보며 헤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이 사람들이 만나고 말았어!' 아나이스와 헤냔 앞에는 하질리언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헤냔 키에르가 처한 가장 끔찍한 현실이었다. 공포로 떠는 헤냔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하질리언은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듣던 것보단 멀쩡하다니? 나에 대해 뭐라고 말했던 걸까, 도련님은?" 하질리언이 헤냔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웃는 낯이다. 그 얼굴에 불길함을 느낀 헤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질리언은 아나이스를 향해 반갑다는 듯 손을 내미는 중이었다. "반가워, 아나이스. 나는 하질리언. 나도 네 얘기는 들었지." "뭐라고 그랬는데?" 아나이스가 궁금하다는 듯 물으며 하질리언의 손을 잡았다. 하질리언은 그 손을 마주잡아 가볍게 흔들며 답해주었다.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너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멀쩡해." "흐응. 뭐라고 말한 걸까, 키르는?"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헤냔이 불안감으로 떨고 있는 가운데, 하질리언과 악수를 끝낸 아나이스가 씩 웃었다. 그녀는 '제발 재앙아, 피해가라.'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헤냔의 목에 오른팔을 척 둘렀다. "하질리언. 넌 우리 키르가 천연기념 순진빵인 거 알고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헤냔이 올려다보는데 하질리언이 히죽 웃었다. "당연히 알지. 우리는 '사랑을 위해' 적색 산맥으로 도망갔던 사이거든." 헤냔은 일순 이를 악물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거짓말로, 그들을 찾아왔던 세라딘을 돌려보내기 위한 술책 아니었던가! 너무나 어이가 없어 대꾸조차 못한 헤냔이 얼어 있는 사이, 옆에 있는 아나이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뭐야, 키르? 그랬던 거였어?" 아나이스가 팔을 풀며 헤냔을 보았다. "그랬구나. 네가 카르멘 경하고 있을 때면 늘 얼굴이 붉어져서 혹시 하고 의심하긴 했어. 그래도 정말 그럴 줄이야." 반이 아니라 반과 늘 함께 다니는 프란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던 것이었건만 아나이스는 감 잡았다는 표정일 뿐이다. 아나이스는 얼굴에 섭섭함을 단 채 주먹을 쥐며 분연히 소리쳤다. "실망이야, 키르! 왜 여태 말 안했어? 동료의 성적 취향 정도 못 받아줄 이 몸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아나?' 헤냔의 눈이 마침내 풀리고 말았다.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는 헤냔을 무시한 채, 아나이스가 하질리언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 당신이 키르랑?" 하질리언은 대답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긍정이라고 생각한 아나이스가 하질리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앞으로 우리 키르 잘 부탁해. 부족한 게 많은 녀석이지만 귀여우니까, 돌봐줄 가치는 있어." "당연하지. 너 마음에 드는데?" "응, 나도." 마침내 정신을 차린 헤냔은 버럭 화를 내며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는 수 밖에 없었다. "둘 다 그만해!"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인간들을 만나게 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울부짖는 헤냔이었다. * * * '아이구야. 많기도 많다.' 프란은 도열한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로서는 카르멘가의 검사들이 모두 모이는 걸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아도 되나 싶어,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로브를 뒤집어쓴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이나 마흔 명 남짓한 기사들은 어디에 파묻혀 있는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이 많은 사람들이 카르멘가에 기숙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프란의 등으로 땀이 흘렀다. '진짜 무시무시한 집안이다.'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킨 채, 수십 년 동안이나 함께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서 있는 카르멘가 검사들의 몸에서는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전율로 털이 곤두선다. "가주님!" "가주님이다!" 프란과 나란히 나온 반을 보며 모여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프란의 옆에 선 반은 그 사람들을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오직 반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헤냔만이 하질리언과 아나이스 사이에 끼어 그곳을 보지 못했다. "그만 하라니까!" 한참 만에 악마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벗어난 헤냔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헤냔의 눈에도 반이 들어왔다. 반은 카르멘가 검사들이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도 이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발 아래 둔 위압적인 주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한 치의 동요도 없는 냉정한 시선. 헤냔은 주의를 돌아보았다. 순간 헤냔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 저 남자라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와 닿았던 탓이다. '저스티스 경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인지 알기나 할까?' 그때였다. '아. 프리나다!' 어쩔 수 없는 경외감을 머금고 긴장되었던 헤냔의 눈이 한순간 기쁨을 담은 채 가늘어졌다. 반의 옆에 서 있는 프란을 보았기 때문이다. 헤냔은 하질리언과 아나이스가 합자해낸 악몽도, 곧 전투가 있을 거라는 사실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래, 언제 돌아왔으면 또 어떤가. 프리나가 저렇게 무사히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을.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헤냔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인건 그때였다. '응?' 프란의 손에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를 쥐고 있는 프란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안 해!' 하고 소리치며 난장판을 벌일 것 같은 기운이 프란의 온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란은 그 얼굴을 하고서도 사람들 쪽으로 걸어 나왔다. 헤냔을 비롯한 모두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프란이 두루마리를 좍 펼쳤다. 순식간에 두루마리에 가려진 프란의 얼굴은 아직까지도 우거지상이었다.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냐고!' 두루마리를 손에 든 프란은 속으로 꽥꽥 소리를 질렀다. 반은 오늘 아침 난데없이 이 두루마리를 휙 던지며 '네가 읽어라.' 라고 말했다. 모두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작전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프란은 이를 갈면서도 두루마리를 받아드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하라면 해야지.' 이놈의 얼어 죽을 빚,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프란은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큰소리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두루마리의 글자들은 반이 어젯밤 손수 쓴 것으로, 거기에 적혀 있는 건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룬 로스!" 프란의 쨍쨍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번졌다. 긴장된 얼굴로 서 있던 룬은 이름을 듣는 순간 기쁘다는 얼굴로 한발을 내딛었다. 자랑스레 어깨를 좍 편 룬의 얼굴을 보며 프란은 다음 이름을 읽었다. "켈리 월!" 비켈린 임시 대장 켈리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프란은 이어 란돌, 로키, 케신, 하질리언 등의 이름을 불렀다. '뭐지?' 사전에 작전을 들은 바 없던 헤냔의 눈은 사람들의 이름이 연신 울려 퍼질수록 더욱더 둥그레지고 있었다. "헤냔 키에르!" "어?" 이미 이름이 불렸던 하질리언이 멍하게 서 있는 헤냔을 자신의 옆으로 잡아당겼다. 헤냔이 설명해달라는 얼굴로 하질리언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아나이스 폰 그란젤!" "에? 나?" 아나이스 역시 작전을 들은 바 없던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름이 불린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나선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하고 중얼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또 다시 하질리언과 아나이스 사이에 끼어버린 헤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프란은 장장 62명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사람들은 입술을 꾹 깨물며 한 걸음을 내딛거나, 아니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거나, 아니면 화가 난 얼굴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한 명의 이름을 남겨둔 프란은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삼켰다. '다 부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올려다보는 사람들 앞에서 프란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프란 프리텐."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프란은 두루마리를 접었다. 얼굴이 흐려져 있던 헤냔은 그 순간 인도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프리나랑 같이 하는구나.' 이제 작전을 설명해주겠지 생각하며 헤냔이 올려다봤던 그때였다. 헤냔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내며 반이 말한 것은. "출발한다." '잠깐 ! 이 63명이 뭔지 설명 안 해줬잖습니까?' 헤냔이 놀라 생각하든 말든 카르멘가의 육중한 황금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이다. * * * 시온은 책을 읽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잡고 씨름했더 [6써클 막바지에 있는 당신을 위해 씌어진, 세상에 다시 없을 천재가 쓴 위대한 마법서]가 아닌 [7써클 초반에 있는 당신을 위해 씌어진,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가 쓴 위대한 마법서]를 한단계 뛰어넘은 것일 뿐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7써클 마법은 몹시 난해했다. "흐음. 여태까지처럼은 안 되는 건가?" 어려워야 하는 게 당연하건만 넘치는 재능으로 여태껏 마법 단계들을 휙휙 넘어왔던 시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약관 19세로 7써클에 진입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다니, 전 대륙에 있는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천인공노하며 쳐 죽일놈이라며 날뛰었을 것이다. 시온은 책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유심히 읽어 내리며 몸 안에 있는 마나들을 가만히 회전시켜 보았다. 일곱 개로 원을 그리는 마나들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느낌인데? 시온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시온 아일린!" 문이 열리더니 자켄린이 뛰어 들어왔다. 문을 부술 기세로 들어온 자켄린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켄린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마법서를 읽고 있는 여유로운 얼굴의 시온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냐?"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이건만 시온은 웃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왜 그러쇼? 스승님이 쓴 책을 읽고 있는데." 자켄린의 얼굴에 일순 주체할 수 없는 흐뭇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잠시였을 뿐이다. 시온이 자신이 쓴 책을 읽고 있다는게 기쁘긴 했으나, 지금은 그 기쁨을 즐길 때가 아니었다. 자켄린은 시온의 앞에 저벅저벅 다가와 책을 탁 소리 내어 덮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내일이다. 내일! 시즈가 드디어 여기로 온단 말이다!" "그 말이었도?" 자켄린은 초조함과 걱정을 담아 소리쳤건만, 시온은 흥미 없다는 듯 귀를 휘적휘적 후빌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응? 어쩔 셈이야?" 크게 소리를 지르다 말고 자켄린은 흠칫 몸을 사렸다. 감시관 역의 로디가 어디서 듣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 그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괜찮소. 내가 방금 전에 재웠으니까." "재워?" 그 뜻밖의 말에 자켄린의 눈이 커졌다. "술 먹인 다음 슬립 걸었소. 자기는 술 먹다 그냥 잠든 줄 알겠지. 내일 오후까진 잘 거요." 그 말에 자켄린의 얼굴이 다소 퍼졌다.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시온. 어쩔 거냐?" 스승의 얼굴을 보며 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면서 묻지 마쇼." 시온은 잠시의 침묵 후 말을 이었다.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밖에 더 있겠소?" 자켄린의 얼굴에 있는 대로 금이 간 건 그때였다. 자켄린은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걱정이 어린눈으로 소리쳤다. "너 정말 그렇게 할 거냐? 정말로?" 스승의 그런 얼굴을 보면서도 제자는 빙긋 웃었을 뿐이다. * * * 늦은 밤이다. 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뒤척였던 이진느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내일이구나' 이진느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창문을 덮고 있는 갈색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새카만 밤과 물 먹은 별들이 이진느의 창을 화려한 빛으로 수놓았다. 그러나 이진느는 그 모든 별 대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비나룬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내일이다. 내일이면 시즈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두려울 것이라곤 없던 이진느 아일린의 몸도 한순간 작게 떨렸다. 허나 다음 순간, 이진느는 단호한 눈동자로 비나룬을 노려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약속을 지켜, 로웬." 비나룬이 자신의 남동생이자 반의 아버지인 로웬 아일린이라도 되는 양, 이진느는 그 달을 있는 힘껏 쏘아보며 말했다. "만약 네 혼령이 있다면 네가 수호해야 하는 건 시즈가 아니라 나와 시온이야."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일이야말로 오랫동안 미루어져왔던 로웬과 자신의 '그 약속'이 지켜질 것이다. 이진느는 한참 동안이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내일인가.' 이진느가 비나룬을 바라보며 잠 못 이루고 있던 그 시각, 헤이튼 카르멘 역시 달을 보고 있었다. 작전을 전해들은 헤냔 키에르라는 소년 기사가 말도 안 된다며 날뛰었든 말든, 내일이면 반이 세운 작전대로 아일린가와의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루이사 누님, 보고 있소? 내일이오.' 대답이 있을 리 없다. 헤이튼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5장 선택 프란은 고개를 들었다. '죽이는데?' 하늘이 청명하다. 길일을 잡은 건지, 날씨가 기가막히게 좋다. 힘들여 움직여도 땀이 나지 않을 만큼 선선하면서도 볼 끝에 닿는 바람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음유시인들과 기록사가들은 청명한 하늘 아래서 저마다 펜과 종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화구를 준비해온 사가도 있다. 그들은 녹색 망토를 걸치고 아일린가 뒤쪽에 있는 작은 동산에 모여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녹색망토도 갈가리 찢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지 못했다. 이 싸움은 분명 굉장할 거야. 동산 위의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많이도 몰려왔군." 죽은 스탕달 제외, 원로원 서열 2위인 레오니아의 아버지 유렌은 동산 위에 모여선 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긴 자신이 음유시인이었다해도 이 자리엔 꼭 와보고 싶었으리라. 아일린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은 지금까지 없었고 오늘을 제외하면 앞으로도 없을 테니. 유렌을 비롯한 아일린가 인사들은 라어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성곽에 올라서 있었다. 카르멘가에서 반 일행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게 한참 전의 일이었기에 도착일이 오늘이라는 것 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니" 하지만 막상 반 일행이 아일린 가 앞에 당도 했을 때 아일린가 인사들은 물론, 근처에서 오늘의 일을 기록하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까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성벽 위에 서 있던 이진느 역시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탓이다. '무슨 짓이지, 시즈?' 반과 함께 오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도 적었다. 게다가 그 중 대다수가 이진느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진느는 아일린의 안뜰을 내려다보았다. 아일린 가가 끌어 모은 검사들은 수천에 달했다. 적이 들어오는 그 순간 달려들어 당장 싸움을 시작할 인원만 그 정도다. 이 검사들을 움직일 사람은 세라딘이니, 아무리 합동 훈련을 거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승산은 충분했다. 이진느가 이토록 많은 검삳ㄹ을 고용한 이유는 오직 하나, 카르멘 가 검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카르멘가의 검사들이 움직였다는 소식도 들었던 이진느다. 그런데 저 보잘것없는 인원은 도대체 뭔가! 반과 함께 오고 있는 건 채 백명이 될까 말까 한 적은 수였다. '어딘가에 숨겨둔 건가?' 이진느는 재빨리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라어 강 저 너머까지 또렷이 보일만한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르멘가의 검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이백 명이 아니니 절대 근처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아일린가 사람들이 당혹해하는 그 사이, 반 일행은 라어 강 바로 앞까지 다가서고 있었다. "미친 짓입니다." 반의 왼편에 서 있던 라톤은 갑작스런 그 말에 시선을 돌렸다. 말을 꺼낸 건 붉은 눈동자를 한 나이 어린 기사, 헤냔이다. 헤냔은 반을 쏘아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 작전이 정말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반은 담담하게 답했다. "성공한다." "성공할 리 없습니다." 헤냔은 단호하게 말했고 그 순간 앞서 가고 있던 룬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았다. "우리를 야토지 마라." "얕보는 게 아닙니다!" 헤냔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소리쳤지만 반은 돌아보기는커녕 걸음만 재촉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헤냔은 갑작스레 들려온 그 목소리에도 인상을 펴ㅣ 못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반의 오른편에서 말을 재촉하고 있던 프란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반의 오른편에서 말을 재촉하고 있던 프란이었다. 헤냔에게서 대꾸가 없자 프란은 헤냔을 돌아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헤냔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뭔가 따로 들은 게 있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프란이라고 해서 따로 들은 말이 있을 리 없다. 웃고는 있지만 프란 역시 걱정에 잠겨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프란은 무표정한 얼굴의 반을 보았다. 그 사이에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헤냔은 소리치고 있었다. "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 카르멘 경. 문을 열 까닭이 없다고요!" "시끄럽다." 헤냔의 말을 일축하며 반은 시선을 올렸다. 아일린 가의 건물들은 여느 때처럼 웅장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란이 이름을 불렀던 63명과 32명의 카세타 마법사, 그리고 반으로 구성된 백 명도 채 안되는 일행이 이 거대한 건물들 앞에 서자 그들은 더더욱 초라해 보였다. 아일린가는 천연의 요새다. 라어 강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다 석문을 뚫고 들어가는 것도 엄청난 부담을 요구한다. 수만이 달려들어도 정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반 일행을 보고 있던 이진느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이진느 역시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전투에서 지면 모든 게 끝이다. 시즈가 정말로 계승식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면, 그래서 그가 이 성을 탈환하고 증명을 보일 수 있다면! 아니, 이진느가 세라딘을 동원해 반을 방해했다는 것만 알려져도 그녀는 끝장이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진느는 성곽의 난간을 꽉 부여잡았다. 이진느는 반이 카르멘가의 검사들을 동원해 아일린의 석문을 부수고 이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진느 자신은 아일린가 안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병사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석문이 부서질 때쯤 반의 병사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게 뻔했다. 그때 모아두었던 검사들을 동원해 쓸어버리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이진느다. 그런데 반은 고작 백 명도 안 되는 사람들만 데리고 왔다. 이진느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진 않을 텐데. 여긴 위저드 리그원이 있다. 너희같이 적은 인원은 마법으로 한 번에 없애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이진느가 생각한 그때였다, 반이 입을 연 것은 라톤이 마법을 건 덕분에 반의 목소리는 아일린의 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순간 이진느는 반이 가져온 카드가 무엇인지 벼락같이 깨달았다. "난 계승식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런!' 이진느는 속으로 욕지기를 뱉었다. "그럴리가!" "거짓말하지 마라!" 아일린 가 사람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한 동여다. 그러나 그들은 반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미 리온과 이진느의 연극에 크게 한 번 감명 받았던 사람들 아닌가. 동요를 눈치챈 이진느는 리온을 향해 얼른 눈짓을 했다. 빨리 부정하라는 의미였으나 어리석은 리온은 이미 떨고 있었다. '시,시즈. 지,진짜 시즈다.' 압도적인 공포다 먼거리라 시즈의 얼굴이 보일 리 없다. 그러나 리온은 시즈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다고 생각했다. 시즈가 가장 믿었던 케인 칼슈비도의 죽음을 조장한 것도, 시즈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던 것도 리온, 바로 그다. 그렇기에 저 싸늘한 시즈가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리온은 공포감에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차기 원로원장!" 그 공포를 몰아낸 건 이진느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한참 동안 넋 나간 얼굴로 벌벌 떨고 있던 리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리온은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진느의 눈이 시즈 못지않은 지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온은 떨리는 손을 앞으로 모았다. 원로원 인사들이 의아한 듯 그를 보고 있었기에 리온은 뭐라도 한마디 해야 했다. "문을 열어라. 나는 계승식을 완수했다!" 다시 한 번 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듣지 않기 위해 리온은 이진느를 보았다. 이진느의 눈 끝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리온은 온몸에 있는 용기를 모조리 짜내어 고함을 질렀다. "거, 거짓말 하지 마시오! 다,당신은 계승식에 실패했소! 나는 봤소!" 위저드 리그 소속 마법사가 마법을 건 덕분에 리온의 목소리 역시 반의 그것처럼 저 멀리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당신은 스탕달 어, 어른을 죽였고 비, 비켈린 대장도 죽였소!" 공포로 떨리는 리온의 목소리는 아일린 사람들에게 '반에 대한 분노'로 읽혔다. 아일린 측에서 우우우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 야유가 반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반이 뭐라고 반박하려는 찰나였다. 프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지른 것은. "아무리 대마왕이라도 케인을 죽였을 것 같으냐, 이 머저리 자식아! 내가 봤다! 가주는 계승식을 완수했다고! 거짓말 하는 건 네놈 자식이잖아!" 프란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성공을 못했다고 말한다거나 이상한 술수를 썼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이해하겠다. 대마왕이야 늘 그런 식으로 오해를 받아왔으니까. 그건 언제나 위압적으로 사람을 제압해왔던 대마왕의 원죄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대마왕이라고 해도 가장 믿는 케인을 죽여서까지 이 자리를 유지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모르는 거야? 수하라는 사람들이 그런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프란은 화가 났다. "내가 봤다고. 내가 거기 있었어. 네놈의 자식은 보지도 못해놓고 무슨..." 프란의 목소리가 컸던지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 목소리가 성벽까지 닿았다. 프란이 씩씩 소리를 내며 뭐라고 더 외치려는데, 반이 팔을 들어 프란의 가슴께를 막았다. 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반을 올려다 보았다. 반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요!" "지금은 아니다."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 일행은 잠시간 침묵에 빠졌다. "모두 장전.... 위저드 리그원들은 마법을 쓸 준비를 하도록!" 그 사이 이진느가 소리를 질렀다. 성곽 위의 병사들이 말없이 화살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위저드 리그원들 역시 마법을 준비하는 그 순간이었다. 이진느의 옆에 서 있던 유렌이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뭐야!' 이진느는 유렌을 노려보았다. 유렌은 반 못지않은, 사람 하나 둘 정도는 시선으로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진느의 무시무시한 눈을 피하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시즈의 말을 못 들었소.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본 다음 공격해도 늦지는 않을 거요." 이진느는 이를 아득 물었다. 그녀의 분노에 찬 시선이 유렌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레오니아에게로 향했다. 네 애비 하나 단속하지 않고 무얼 한 게냐! 이진느의 시선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반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문을 열어라." 반은 아일린의 석문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온전하게 되찾는다.' 아일린가를 부술 수는 없었다. 달랑 백 명이서 이 앞에 나선 것이 도박이라는 건 반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석문을 부수고 들어가 아일린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세타 왕국의 제 2궁을 부쉈던 인간이 자기 집안은 멀쩡히 돌려받고 싶어 한다고 조소해도 상관없다. "시즈! 당신이 성공했다면 증명을 해보이시오!" 성벽에서 유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렌은 원로원 소속이다 아일린의 전통을 가장 중시하는 집단의 일원인 것이다. 만약 반이 성공을 증명할 수 있다면 유렌은 지금이라도 원로원을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라딘과 정초원이 초조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반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건 그 순간이었다. "지금은 보일 수 없다." 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온 천하에 비밀이 밝혀진다면 아일린의 계승식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사정을 알 리 없는 유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마조마해하던 이진느는 소리 높여 웃었다. "호호호! 뭣들 하느냐? 화살을 발사해라!" 이진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성곽에서는 날카롭게 조준한 화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진짜 많다...' 날아드는 화살을 보면서 프란은 입을 떡 벌렸다. 그 수많은 화살들은 마치 색깔이 있는 굵은 소나기 같았다. * * * "미친 짓이라고 했잖습니까!" 헤냔은 고함을 질렀다. 혹시 검사들을 사방에 숨겨놓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 탓인지 이렇게 적은 사람들만 왔음에도 불구, 아일린은 석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화살만이 날아들고 있을 뿐이다. 잘못하면 한순간 온 등에 화살이 꽂힌 고슴도치가 될지도 모른다. "우라질!" 아나이스는 욕을 내뱉으면서도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그 모습은 그리 우아하지 않았으나 헤냔 역시 똑같이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반을 비롯한 소수의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들은 빚과 같은 속도로 화살을 감쪽같이 피해내고 있었다. 루니아 블레이드는 아직도 검집안에서 잠들어 있다. 누구보다 우스운 동장으로 화살을 쳐내고 있던 프란은 슬쩍슬쩍 몸만 틀면서도 완벽하게 화살을 흘러내는 반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냐, 너 잘났다.' 다행인 것은 반 같은 괴물이 아니라도 지금 온 사람들 대다수가 화살에 의해서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반과 함께 이곳에 온 사람은 아인켈과 비켈린을 포함, 최강의 실력을 자부하는 검사들인 것이다. 반이 손수 고른. 이들이 정작 피해야 할 것은 화살이 아니었다. "라이트닝 볼트!" "썬더 라인!" 눈부신 광구들이 하늘 저편에서 솟아올랐다. 헤냔은 으 하고 한 번 신음했다. 위저드 리그원들은 화살들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반 일행을 향해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거리는 상당히 멀었지만 적군과 아군이 완벽히 분리된 상태라 마법사들은 더 효과적으로 공격에 임할 수가 있었다. 첫번째 빛이 보이자 반은 라톤에게 눈짓을 했다. 눈짓의 의미를 알아들은 라톤은 궁중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보호막!" 반의 작전이 마땅찮긴 해도 지금 명령을 거부하면 전원 몰살될 가능성이 높기에, 궁중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반이 흥정 비슷한 것을 해가며 마법사들을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이들에게 공격계 마법을 쓰라고 말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공격계 마법을 전혀 이용하지 않은 채, 방어계 마법만 계속 쓰라고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법사들은 재빨리 나누어져 검사 두 사람씩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서른두 명의 딱 두 배인 검사들은 이 작전을 위해 뽑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로텍트!" 검사 두 명과 마법사 한 명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팀들은 힘의 배분관계에 따라 짜여 있었다. 5써클 마법사가 가장 강한 검사 두 명과 한 팀을 이루고, 가장 강한 7써클 마법사가 가장 약한 두 명의 검사와 팀을 이루는 식이다. "실드!" "호오." 프란은 물론 제일 강한 검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반과 한 팀을 이룬탓에, 그녀는 가장 약한 5써클 초반 마법사의 방어 아래 들어가야 했다. 잔뜩 긴장해서 검을 뽑아들고 있었던 프란은, 그러나 마법이 날아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공격계 마법이 방어계 마법과 부딪치면서 상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불꽃놀이 같잖아. 진짜 대단한데?" 즐거워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라톤은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이라곤 없군.'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프란과는 대조적으로, 반은 담담한 얼굴을 한채 프로텍트를 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프란도 이상하지만 저렇게 비정상적으로 무표정한 반의 얼굴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저번에도 목격하긴 했으나 라톤은 그 무심한 얼굴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라톤님........." 반과 프란에게 프로텍트를 친 5써클 마법사는 울 듯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들 이상해요. 제정신이 아니에요.' 마법은 유성우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란은 눈을 빛내며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었고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는 5써클 마법사의 안색은 그에 비례해 점점 더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라톤은 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우리가 방어계 마법만 쓴다고 해도 한계가 있소. 저쪽은 우리보다 수도 많고......" 라톤은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선혈의 마법사'가 나오는 순간 우리는 모두 끝일 거요." "알고 있다." 프란은 힐끔 반의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끝' 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따. 문득 프란이 중얼거렸다. "시온의 특기가 방어계라고 들은 것 같은데." 반은 한참만에야 대꾸했다. "치유계는 엉망이다." 반의 대답은 어쩐지 심통 맞게 들렸다. 그럼에도 프란은 씩 웃었다. "그래도 여기 있었으면 가주님도 좋아했을걸요. 보기와는 달리 굉장하잖아요, 그 녀석." 반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있는 대로 생색냈을 거다." "생색 좀 내면 어때서요? " "보기 싫다." 라톤은 이 만담 콤비에게 화를 내는 수 밖에 없었다. "둘 다 이 상황에 좀 집중할 수는 없소? 방어계 마법이 공격계만큼 체력 소모가 크지는 않다곤 해도 이 상태로 몇 시간이고 버틴다는 건 무리란 말이오!" 비명에 가까운 라톤의 외침에도 반은 차분하기만 했다. "알고 있다." '진짜 알고 있는 거요?' 믿기로 했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라톤의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반은 계속해서 성곽을 주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사이에도 마법은 계속해서 날아들고, 만나고, 깨지고, 상쇄되면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팍. "아이고!" 반과 프란을 보호하고 있던 5써클 마법사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방금 날아든 마법이 6써클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번은 버텼지만 짧은 시간 안에 프로텍트를 복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던 그 마법사는 당황한 채 웅얼거렸다. "미, 미안합니다. 나, 나는 아직 5써클이라서........" "지금 그런 말할 때가 아니잖아. ....... 으악, 온다!" 프란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몸을 왼편으로 날렸다. 반은 얼른 마법사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서 그는 마법사를 오른쪽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으아악!" 마법사는 짐짝처럼 튕겨져 나갔다. 반 역시 재빠르게 마법의 공격 범위에서 빠져나갔다. 콰콰쾅! 날아든 마법은 6써클의 체인 볼트였다. 세 사람이 서 있던 땅 주위가 거짓말처럼 움푹 파였다. 프로텍트 아래서 보호받고 있던 사람들마저 일순 땅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다. "진짜 장난 아니네." 프란은 땀을 닦으며 헤, 하고 어린애처럼 미소 지었다. "각오해라." 반이 말하자 프란은 발랄하게 답했다. "언제나 각오만만 프란 프리텐입죠." "..........온다!" 두 사람이 곡예단처럼 몸을 날리는 걸 보고 있던 헤냔의 얼굴은 질려있었다. 이번에도 프란 팀의 5써클 마법사는 꽥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헤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들 미친 거야. 이런 작전에 동의하다나." "미쳤다고 해도 좋아." 헤냔의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냔과 팀을 이룬 아나이스다. 아나이스의 두 눈동자가 결의로 빛나는 것을 보자 헤냔은 조금쯤 감동하고 말았다.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아나이스 폰 그란젤은 기사인 것이다! '미안해, 아나. 역시 난 널 오해하고 있었나봐.' 허나 늘 그랬듯 헤냔의 감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나이스가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진지하게 말을 이었던 것이다. "우리 자기를 위해서라면 홀딱 벗고 싸울 수도 있어.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냐." "....... 그거 뭔가 핀트가 어긋난 각오인 것 같은데." 헤냔의 한숨에도 아나이스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앞쪽을 똑바르게 주시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내 주변엔 제정신인 인간들이 없어. 그렇게 한탄하며 헤냔은 검을 꾹 쥐었다. '나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헤냔의 눈동자가 빛났다. * * * "정말......... 할 거냐?" 반과 프란이 마법을 피해 달리면서 마법사를 공처럼 주고받던 그때, 자켄린은 떨리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시온은 말없이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시온의 얼굴에는 아직도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온의 손에는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도구가 들려 있었다. 빨간 구슬이 달린 마법 증폭기. 시온이 열여섯 되던 해 자켄린이 손수 만들어준 것이다. "어쩔 수 없잖소?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만 다시 생각해봐라." 자켄린은 사정하듯 말했다. 시온은 그런 자켄린을 올려다보았다. 걱정 가득한 스승의 눈이 보인다. 한 밤중에 쳐들어가 비장의 연구 재료를 훔쳐가도, 사랑하는 여자를 안전한 곳에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해도, 말로만 화를 낼 뿐 늘 들어주었떤 스승이다. 시온은 알고 있다. 자켄린은 단순히 제자가 필요해 자신의 옆을 지키는 게 아니라는 걸. 오랫동안 함께 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연대의식. 그건 혈연과도 유사한 애정이었다. 시온은 그래서 자켄린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자신을 아껴주는 스승을 위해 무엇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스승님' 시온의 마음속 목소리를 자켄린이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자켄린의 눈동자가 흐려지는데. 시온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스승을 불렀다. "스승님." "다시 생각해봐라. 응?" 시온은 미소 지었다. "이젠 도망치는 것도 무리잖소?" "하지만......." 자켄린이 뭐라고 말을 이으려는 순간, 시온이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부탁입니다." 그 단호한 한마디에 자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탁이라고 하면 언제나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말이 되건 안되건 간ㄱ에. 자켄린을 바라보는 시온의 눈은 당당했다. 선택에 대한 후회도 결과도 오롯이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깃든 눈. 어른의 눈이다. '언제 이렇게 컷나, 이 녀석.' 자켄린은 순간 그런 감상에 빠졌다. 처음 만났을 때 시온은 게으르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성장해서도 만년 어린애로, 세상이 원하는 것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하며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편법으로 낚아채려던 녀석. 웃음 한 번 말 한 번으로 원하는 것을 거의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 한 번도 정면승부를 하지 않던 제자였다. 그런데 그랬던 시온이 저처럼 당당한 눈을 한 채 스승에게 부탁하고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자켄린은 가슴이 뻐근해졌다. "보여주고 싶은거지?" 자켄린이 문득 물었다. 그 질문에 시온은 눈이 반월모양으로 휘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말씀. 내가 멋진 남자라는 걸, 프란한테 보여줘야죠." 그 말에 자켄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겠지.' 자켄린은 시온의 옆 얼굴을 안타까이 보았다. * * * '곧 끝나겠군." 이진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세타의 궁중 마법사들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위저드 리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위저드 리그원들 중 7써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하나도 나서지 않은 상태인데도 벌써 저쪽에선 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질 않은가.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진느님?" 이진느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진 유렌의 옆에 서 있던 레오니아가 어느새 이진느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방금 전 유렌의 돌발 발언 때문에 다소 기분이 상해 있었던 이진느였으나 레오니아의 얼굴을 대하자 그 불쾌감은 조금쯤 누그러졌다. 레오니아는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왜 성문을 열고 한 번에 쓸어내지 않으십니까? 워낙 소수라 검사들을 푸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요." "카르멘 가 검사들이 안 보이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 어딘가에 매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만한 장소는 없어 보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우리는 여기에 가만히 앉아 피 한 방울 안흘리고 시즈를 잡을 수 있어.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다면, 난 도박하지 않을 거야." 이진느는 느긋하게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세라딘들은 그런 이진느의 뒤에 한 줄로 도열한 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 일행이 서 있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쪽의 상황은 그야말로 악화일로였다. 프로텍트가 깨진 팀만 벌써 열개나 된다. 3명씩 한 팀을 짜고 있었던 걸 상기하면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 '깨소금 맛이다!' 한순간 세라딘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룬과 켈리가 속해 있던 팀의 프로텍트가 깨졌기 때문이다. 물러서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룬은 마법의 위력을 무시한 채 버텼다가 하마터면 한 방에 비명횡사할 뻔했다. 켈리가 '이래서 아인켈은 안 되는 겁니다.' 라는 한마디와 함께 룬을 밀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방금 그 말 당장 취소해라, 켈리!" 룬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켈리는 대꾸 한마디 없이 또다시 날아오는 마법을 피해 사뿐하게 몸을 날렸을 뿐이다. "켈리!" "시끄럽습니다, 아인켈 대장. 마법사나 챙기십시오." "제길!" 룬은 이미 체력이 소진돼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카세타 궁중마법사를 옆구리에 꼇다. 그리고서 그 역시 몸을 날렸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반이 흔들렸다. 아직 굳건한 프로텍트를 자랑하는 라톤 역시 경미한 지진을 느꼈다. 라톤은 어느새 자기 옆에 온 반을 향해 말했다. "5써클 마법사가 우리 중 대다수지. 있는 대로 마나를 짜내 기절하기 직전일 거요." "6써클 마법사들은 더 버티겠군." "그래봤자 30분이오." "알고 있다" '안다고 말하면 단 줄 아시오!' 라톤은 이를 악물었다. 반의 심산을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 라톤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반은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어라! 나는 계승식에서 돌아온, 하나밖에 없는 너희들의 주인이다!" 일순 리저드 리그원들이 망설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반은 소리쳤다. "문을 열면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공격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 "헛소리야. 신경쓰지 말고 계속 마법을 써!" 이진느가 히스테릭하게 고함을 쳤다. 이진느의 바로 옆에 붙어선 리온 역시 소리를 지른 건 마찬가지였다. "시즈는 잔혹한 살인자일뿐이오!" 그사이 이진느와 리온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유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유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계승식을 완수했다면 오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 속에서도 유렌은 반의 저 자신만만한 태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혹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렌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 챈 이진느는 인상을 찌푸렸다. 만약 유렌이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고 얘기한다면, 그래서 지금 원로원이 분열된다면 이만한 곤란도 없다. 세라딘을 시켜 지금 처치할까? 이진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쾅! "어이쿠" 또다시 프로텍트 하나가 깨졌따. 하질리언이 속한 팀이었다. 프로텍트가 깨진 그 순간, 마법사는 든든한 보호막에서 짐짝으로 격하되었다. 마법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면 그와 팀을 이루고 있던 두 명의 검사들이 번갈아가며 그를 밀치고, 보호하고, 집어던졌다. 처음 프로텍트가 깨진 팀의 일원이었던 반과 프란이 하는 것을 본 검사들이 그들을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을 극한으로 쓴 상황에서 짐짝 취급을 당하자 몇몇 마법사들은 너무도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따. * * * "오, 이거 꽤 스릴 있어." "무슨 소리야, 프리나." "의외로 피하는 거 쉽지 않냐?"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데!" "그건 네가 약해서 그렇고." 하질리언과 프란은 즐겁게 소리치며 마법을 피하고 있었다. 헤냔은 그 둘이 긴장감 없이 뛰노는 것을 보면서 있는 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비관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저 둘이 이상한 것이지. 사실 아나이스와 헤냔이 속한 팀의 프로텍트도 깨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다음번엔 깨질 것 같은데요." 둘의 담당이던 6써클 마법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나이스가 웃었다. "곧 짐짝이 되겠네." 마법사는 새침하게 답했다. "살살 던져주세요."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파트너들 때문에 헤냔은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 "긴장하란 말이야, 둘 다!" "충분히 하고 있어, 키르." 지금 피하고 있는 것이 공격범위가 크지 않은 마법들이라 그렇지, 만약 정말로 거대한 마법, 이를테면 7써클 마법 같은 것이 날아온다면 프로텍트의 보호를 벗어난 사람들은 수가 없다. 꼼짝 없이 죽는 수 밖엔. 그것을 알고 있기에 저 멀리에서 핏빛 망토가 보였을 때 헤냔은 숨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선혈의 마법사!" 라톤의 입에서도 정말적인 신음소리가 나왔다. * * * 아일린의 성벽에서 날아오던 마법들이 일순간에 멈췄다. 바람마저 정지한 느낌. 누군가가 어깨를 짓이기는 듯한 압박감이 사방을 에워쌌다.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던 6써클 이하의 위저드 리그원들은 피같이 새빨간 망토를 걸치고 나타난 자신들의 장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빨리 좀 오시지. 그랬으면 우리가 체력 소모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자켄린의 피빛 망토를 보는 것은 위저드 리그원들도 처음이었다. 자켄린은 웬만해선 전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특히나 명분이 없는 싸움에는 절대 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헀다. 적 2만은 단신으로 섬멸했던 그 공포와 전율의 순간 입고 있었다던 저 핏빛 망토를 실제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오늘이야말로 8써클 마법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마법을 볼 수 있을것이다.' 라는 기대감으로 전투마저 잊고 눈을 빛내는 마법사들은 보면서 자켄린은 쓴웃음을 지었따. 더 높은 마법에 대한 마법사의 욕망을 말릴 자는 없다는 걸 지금 순간에 또 한 번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거야말로 성장의 발판이지.' 자켄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진느는 의외라는 눈으로 자켄린을 돌아보았다. '왜? 참전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자켄린이 입고 있는 저 새빨간 망토는 참전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켄린의 그 강대한 마법이라면 지금 당장 시즈의 온몸을 터뜨려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진느가 미소 지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 시온 도련님?" 세라딘들은 자켄린의 핏빛 망토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자켄린에게 시선을 뺏겨도 세라딘만은 자켄린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한 인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세라딘의 말에 자켄린의 등 뒤를 바라본 이진느는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정말로 거기에 시온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온의 손에 들린 것은 마법 증폭기였다. "무슨 일이지, 시온?" 이진느가 물었다. 대답한 것은 시온이 아니라 자켄린이었다. "......시즈와 싸울거요." "뭐라고?" 그 뜻밖의 대답에 이진느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너도 정신을 차렸구나, 시온!' 이진느는 시온의 팔을 위저드 리그원 쪽으로 이끌었다. "좋다, 시온. 여기에 와서 서라. 여기에 와서......" "어머니." 나직한 목소리였따. 이진느가 돌아보자 시온은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니지." "뭐?" 시온은 자켄린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이진느가 놀란 얼굴로 눈을 부릅뜬 사이, 자켄린의 핏빛 망토가 시온을 휘감았다. 바람 때문에 요란스레 펄럭이는 그 망토가 마치 핏빛 깃발 같다. 그리고 이진느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떴을 땐 거대한 깃발로 화한 핏빛 망토도, 시온도, 자켄린도, 이미 그 자리엔 없었다. "시온!" 이진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 * * 라톤은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신이...........8써클의 전설적 마법사, 자켄린.........밀러?" 라톤이 덜덜 떨며 물었음에도 자켄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따. 아일린의 성벽에서 반 일행이 있는 강변으로 순식간에 워프해온 자켄린은 사방을 고요히 훑어보고 있었따. 아군이 내려갔기 때문인지 아일린의 성벽에선 여전히 공격이 멈춘 상태였다.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은 자켄린의 핏빛 망토를 보며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 검사들이야 8써클의 대마도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은 뼈저리게 알고 있따. 한 써클이 올라갈수록 그 차이는 현격해진다. 특히 6써클부터는 세제곱을 해도 그 차이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상대는 무려8써클인 것이다. 공포감에 떠는 궁중 마법사들의 절절한 기운을 느낀 검사들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마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새파랗게 날이선 침묵을 고수하고 있을 때, 단 한 사람만이 긴장 따윈 모른다는 태도로 성큼 자켄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또 보네요, 할아버지." 라톤은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꼬맹이." 자켄린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웃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공기는 사람들을 말려 죽게 할 만큼 긴장되어 있었다. 팽팽한 공기. 저렇게 웃다가도 지금 당장 마법을 시전하면 뼛조각 하나 남지 않고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할아버지 맞잖아요, 뭘. 주름도 는 것 같구먼." "뭐라고!" 웃고 있던 자켄린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따.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발하지 마!' 라톤은 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은 자켄린의 실력을 몰라서 깐죽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켄린이야말로 그녀를 아일린의 지하 감옥에서 탈출시킨 사람이었으니까. 그 엄청난 마법, 마블렌으로 만들어진 감옥의 절반을 날려버렸던 무서운 사람. 뿐만 아니라 자켄린은 반의 살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유일한 사람이다. 웃고 있을 뿐, 프란의 손바닥에도 땀이 맺혀 있는 건 모두와 마찬가지였따. "생각보다 빨리 만났구려, 시즈." 자켄린은 고개를 돌ㄹ 반에게 인사했다. 반은 대꾸 없이 자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주먹을 꾹 쥐며 곧 불어올 피바람을 생각했던 그 순간이었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크게 떨린 것은. 자켄린의 망토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느끼 버터?" 모두가 자켄린을 신경 쓴 나머지 그의 뒤에 있던 시온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프란이 입을 열었을 때 모두는 눈을 홉뜨는 수 밖에 없었다. 자켄린의 긴 망토 뒤에 숨듯이 서 있던 시온은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 어이?" 프란은 놀라서 시온을 불렀다. '네가 도대체 여기에 왜? 왜 내려왔지?' 사람들 앞으로 나선 시온은 자신을 호명한 프란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서 그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다. 당장이라도 시온이 '여기에 합세하려고 내려왔지.' 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프란은 시온의 배에 주먹이라도 내꽂으며 '이놈의 자식, 진짜로 늦었잖아!' 하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프란이 생각한 그대로 행동하기 위에 막 한 발짝을 떼려는 그때였다. 시온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걷힌것은. 프란은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건만 이상하게 시온은 혼자인 것 같았다. 여기가 아닌 저 어디 먼 곳에,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그런 시온의 얼굴은 몹시도 피로해 보였다. 무언가를 걸머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필연적인 피로감, 자신을 잡고 있던 무언가를 깨뜨리고 필사적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자가 짊어져야만 하는 필연적인 삶의 무게. 프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금. 잡아야 해. 이 녀석.' 뭔가를 하려고 하고 있다. 뭘 하려는지 모른다. 하지만 막아야 한다. 지금 당장 막아야 해! 프란은 다급하게 시온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결사적인 움직임이다. 시온은 프란의 그 손을 보지 못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탁합니다, 스승님." 시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켄린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카세타 궁중 마법사들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자켄린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음에도.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은 한기와 경외감이 모든 마법사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8써클 마법인가?' 리톤마저 얼어 있는 그사이, 빛은 가공할 만한 속도로 주변을 휘어감았다. 시전과 공격의 사간차가 명백히 보이는 7써클 이하의 마법과는 달리 순간적인, 그래서 더더욱 두려운 마법이다.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있는 그 때에도 프란만은 오로지 한 점, 시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잡아야 할 것 같은 그 피로한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던 프란은, 그러나 빛이 멎은 자리에서 허무한 공동(空洞)을 목격해야 했다. "......... 느끼 버터......." 시온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프란은 허공을 잡은 자신의 손을 앞으로 펼쳤다. 햇빛만이 그 손 안에 남아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간 거지? 자켄린의 몸에서 뻗어 나왔던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자켄린의 마법이 시온을 빨아들인 건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프란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자켄린의 마법이 도대체 왜 시온을 향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프란은 저도 모르게 오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로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여기 있다는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프란은 시선을 돌렸다. 제발 부탁이다. 방금 전처럼 거기에 있어줘! 프란은 온 마음을 조여 오는 불안감으로 또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간절함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서 진심으로 절망했다. '대마왕?' 없다. 없었다. 반이 없다. 거기에 남은 것도 공동뿐이다. '어, 어디에?' 뭘 생각했는지 프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프란은 재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또 누군가 사라진 사람이 있나? 그러나 모든 이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긴 해도 사라진 사람은 없었다. 반과 시온, 그 두 사람외에는. 보다 못한 헤냔이 한 걸음 프란 쪽으로 다가왔다. "저쪽이야, 프리나" 헤냔은 프란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붙잡은 채 왼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프란의 시선이 헤냔의 손을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아일린의 석문과 가까운 위치, 헤냔이 가리킨 바로 그 지점으로. 프란은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자신이 서 있는 강변에서 20휴나쯤 떨어진 곳, 더불어 여기보다 아일린에 20휴나쯤 가까워진 바로 그 위치에 반과 시온이 서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대체 뭐야?' 그 두 사람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반원형의 결계에 둘러싸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프란은 앞을, 이 이상한 사태의 원인인 자켄린을 보았따.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자켄린의 멱살을 잡았다. 그 바람에 넋 나간 얼굴로 반과 시온쪽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프란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반원형 결계에 시선을 빼앗겼던 라톤도 마찬가지다. 라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프란의 '행패'에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따. '그, 그만!'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라톤이 프란의 팔을 떼어내려는데, 프란의 목소리가 다시금 높아졌따. "이게 무슨 짓이냐고!" * * * 프란이 자켄린에게 소리치고 있떤 그때, 결계 안의 반은 깊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레 이 결계 안으로 워프 되었으니 반으로서도 당혹할 만했다. 그러나 반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상한 답답증이 전신을 감쌌다. 계승식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호흡을 압박하는 공기. 이건 결계인가? 잠시간 그렇게 생각한 반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 답답한 공기 안에서, 자신과 단둘이 결계에 갇힌 신세가 된 시온 아일린은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곧 시온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우. 형님?" 유쾌한 목소리였다. * * *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자켄린이 친 결계는 7써클 이하의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마법 안쪽에 있는 반과 시온을 지금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범위도 무척이나 넓었다. 무엇보다도 그 은은한 결계의 테두리가 아름다워, 상황만 아니라면 충분히 감탄사를 터뜨릴 법했다. 거듭 무슨 짓이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켄린의 멱살을 놓고 프란은 얼른 결계 쪽으로 달려 나갔다. '말도 안 돼!' 프란은 거침없이 검을 뽑아 그 결계를 쳤다. 쾅! 프란은 침을 삼켰다. 계승식 때와 똑같다. 마법은 타인의 침밉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프란은 검을 들고 또 한 번 결계를 쾅쾅 내리찍었다. 그러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계는 광고하고 고집스럽게 버티며 프란의 공격을 비웃을 뿐이었다. 쉬익! "제길!" 갑작스러운 파공음에 놀란 프란이 얼른 몸을 틀었다. 아일린 쪽에서 화살이 한 대 날아온 것이다. 자켄린이 함께 있는 쪽은 마법으로 공격할 수 없고 시온이 함께 갇힌 결계에 마법을 가하는 것도 찜찜하니 프란에게만 화살 공격을 한 것이 분명했다. 또 한 대, 소리를 내며 화살이 날아왔다. 프란은 욕지기와 함께 몸을 틀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프란은 검을 들어 화살을 쳐냈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프란은 화살을 피해 다시 자신이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자켄린의 바로 앞이다. "시온을 봐서 방금 네가 나한테 반말한 건 참아주겠다." 자켄린은 다가오는 프란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위협적인 말이었으나 프란은 주눅 들지 않았다. "안 참아도 좋으니까 설명해줘요. 빨리!" 프란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진짜로 굉장한 여자를 골랐구나, 빌어먹을 제자 놈아.' 그 예상 밖의 반응에 자켄린은 웃을 뻔했다. "보고도 모르겠나? 결계를 쳤다." "그 정도는 보면 알아요. 내 말은 대체 왜.......!" 대체 왜 두사람만 가뒀냐는 겁니다. 소리 지르던 프란의 목소리는 천천히 잦아들었다. 어쩌면 프란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아름다운 결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러나 그런 건 거짓말일 거다.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 프란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조숙한 아이의 시선으로 자켄린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의심이 틀려기를 확인시켜주길 바라는 간절한 눈이다. 자켄린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녀석은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도대체 뭘? 제기랄, 대체 뭘 말이야!" 라톤이 프란의 거친 말에 헉 하고 숨을 삼키는데, 자켄린이 담담하게 답했다. "...........자신에게도 의지가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 프란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자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아일린의 성벽 위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일린 쪽에서도 이 사태가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가장 당황한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진느다. 그녀는 결계 안에 갇힌 시온과 반을 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자켄린과 시온의 멱살을 끌고 오고 싶은 그녀였다. '어쩔 생각인 거지, 시온 아일린?' 이진느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 * 반과 시온은 얼굴을 마주한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시온은 흘끔 반의 오른손을 보았다. 반은 루니아 블레이드의 검신이 바닥 쪽을 향하도록 잡고 있었다. 그 팔이 공격 의사가 없다고 강변하는 듯해서, 시온은 미소 지었다. 반이 씹어뱉듯 말한 건 그 순간이었다. "이건 무슨 수작인가."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좀, 질투가 나서요." "질투?" 반이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분연을 해달라는 뜻이 분명했지만 시온은 더 진하게 미소 지었을 뿐이다. 시온은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를, 보라색의 긴 머리칼을, 흠 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몸을 천천히 한 번 훑어보았다. 드래곤 앞에 던져놓아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검을 뽑아들 저 강한 사내의 단단한 육체를. 시온은 문득 물었다. "날 믿소, 형님?" 반은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믿지 않는다." "형님답네." 시온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문지르며 무심하게 답했다. 그리고는 다소 맥락 없이 물었다. "있잖소, 형님. 왜 사람은 뭔가를 원하게 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는 걸까요? 거기 있는 건 지옥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끈을 놓지 못하지. 자기 인생까지도 모조리 저당 잡히면서." 시온의 앞뒤 없는 말에 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세키에 여신이 정말로 있다면 집착 따위의 감정은 남겨두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이상하지 않소?" 반은 그 뜬금없는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형님이랑 둘이서 선문답이라도 하는 것 같네.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그쳤다. 시온은 무섭게 굳어진 진초록 눈동자를 하고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지 마쇼, 형님. 내가 와서 기쁘죠? 반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온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나한테 보여주려고 이렇게 한 거지? 아니었다면 이랬을 리 없잖아." 반이 대답을 못하는 가운데 시온은 양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시온의 손에서 엷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반이 땅 쪽으로 늘어뜨린 검의 힐트를 꾹 쥐었다. 반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싸울........ 건가?" 시온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물론이지, 형님. 질투에 눈이 먼 남자는 무섭걸랑." 결심을 한 듯 반이 루니아 블레이드를 바로잡는 가운데, 시온이 말투를 확 바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참. 나 얼마 전에 7써클 마법사가 됐어요. 아무리 형님이라도 날 꺾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 * * 프란은 멍한 눈동자로 결계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켄린이 친 결계의 범위가 넓다고 해도 7써클 마법이 허용될 만큼 넓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범위가 넓지 않은 대신 재빠르게 터질 수 있는 마법을 골라 구사하고 있었다. 2써클의 파이어 애로우를 여러대 한꺼번에 날리는 식으로 말이다. 반은 멀찍이 선 채 그 마법들을 피해내고 있었다. 반은 마법이 다가오기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건 그다지 좋은 마법이 아니었다. 거리가 확보되자 시온이 5써클의 마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썬더라인!" 피한다 하더라도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는 마법이었다. 공격범위가 그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반은 왼편으로 춤을 추듯 원을 그리며 길게 돌아섰다. 검으로 흘리든 마법의 한쪽을 쳤지만 마법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공격 때문에 반은 가볍게 한 번 튕겨져 올랐다. 망토의 왼편이 흉하게 지져졌다. "라이트닝 애로우!" 반이 주춤하는 사이, 시온은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반은 물 흐르듯 몸을 움직여 이번에도 순식간에 피해냈다. 팍,팍, 팍, 공기중에 터지는 마법들이 반의 주변에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반이 시온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마법사와 검사의 싸움은 의외로 검사에게 유리하니까. 마법사가 주문의 시전 단계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검사는 언제 어디서든 검 한자루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공격할 수 있다. 마법사들이 주문 시전까지 자신을 보호해줄 검사와 파티를 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반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흘릴 뿐 시온을 향해 다가지 않았다. "내가 이래서 형님을 좋아하지." 입 안으로 주문을 캐스팅하며 시온이 말을 걸었다. "무슨 뜻인가?" 방어할 자세를 잡으며 반이 대꾸했다. "중요한 순간에 의외로 다정하잖소. 괜찮습니다, 맘껏 공격하시라고." "헛소리 마라." "왜요, 겁납니까?" 시온은 가볍게 도발했다. 반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아직도 시온의 의중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반이었다. 반이 계속해서 망설이자 시온이 씩 웃었다. "봐주다가 망신당하는 법이죠. ..... 라이트닝 볼트!" 반은 아차 싶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라이트닝 볼트는 무시무시할 만큼 컸다. 원래 라이트닝 볼트는 원거리에서 성벽의 일부분을 날릴 수도 있을 만큼 큰 마법이다. 게다가 방금 전 시온과의 대화로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피할 만한 시간적 여유조차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은 괴물 같은 속도로 그것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반의 몸이 흐려진다 싶더니 어느 순간 마법을 뒤로 흘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휘익!........ 라이트닝 볼트!" 휘파람을 한 번 분 시온은 연타 공격을 날렸다. 방금 전 거짓말 같은 속도를 냈던 반은 이번엔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래서 검을 들었다. 루니아 블레이드의 푸른색 검휘가 가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라이트닝 볼트의 한가운데를 재빠르게 베고 지나갔다. 허나 반의 루니아 블레이드가 아무리 대단하고 반이 아무리 강한 검사라고 해도 마법이 전부 무력화될 리는 없었다. 그래서 반은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몸을 오른편으로 날렸다. 그래도 마법의 한 부분에 맞는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퍽! "대마왕!" 바깥에서 보고 있던 프란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달려와 결계의 막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반도 시온도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밖에서 안을 볼 수는 있어도 안에서 바깥을 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프란의 목소리도 그녀가 겨계를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프란은 그런 두 사람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공격을 흘리듯 맞은 반이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는 가운데, 시온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불의 화살들은 반의 어깨와 가슴과 팔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것은 1써클의 마법이었기에 반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모조리 쳐냈다. 그러나 자세를 정비하고 시온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반은 깨달아야만 했다. 몇 개의 화살들은 더 큰 마법을 준비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형님, 진짜 가우." 시온은 웃고 있었다. 그야말로 환하게. 프란은 더 이상 검으로 결계의 경계를 칠 힘도 없었다. 프란의 주위에서 검을 휘두르며 화살을 쳐내고 있던 헤냔은 프란의 옆얼굴을 안타까이 보았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무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는 헤냔도 가슴이 아팠다. "썬더 웨이브!" 다음 순간 시온이 시전한 건 6써클의 마법이었다. 다시 말해, 결계 안에서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이라 해도 좋았다. 반은 고요히 그 마법이 자신의 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미쳤어?" 프란은 다시금 결계의 은색 경계를 내리쳤다. 마법의 빛이 어마어마한 것이, 가만히 있다간 정말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루니아 블레이드가 차고 날카롭게 호선을 긋는다. 그러나 시온은 느긋하게 반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저 공격을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 공격이나 슬슬 준비하면 될터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진한 먼지가 일었다. 반은 몸을 돌릴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치명타였겠는데?'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것과 비슷한 걸 한번만 더 맞으면 아무리 자신의 사촌형이라 해도 다시 일어서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파이어 애로우를 오른손에 막 생성시킨 참이었던 시온은 어느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해야 했다. '아아. 살을 내주고 뼈를 깎을 셈이군.' 마법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온 반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그걸 정통으로 맞고 움직이다니, 인간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다. 그러나 아픈 몸을 이끌고도 반의 검은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다. 시온은 가볍게 파이어 애로우를 날렸다. 공중에 한 번 크게 뜬 반은 그것을 반 토막 냈다. '신기합니다. 형님. 1써클짜리라곤 해도 마법이 반 토막 나는 건, 언제 봐도.' 시온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온의 손에 1써클 마법이 맵혔다. 그러나 반의 검은 마법이 터져 나오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반은 귀신같이 스피드를 높여 시온에게 접근했다. 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만한 상처를 입고도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다. 쉬익! 루니아 블레이드는 시온의 몸을 두 토막 낼 듯이 다가왔다. 지금 당장, 크게 호선을 그은 그 검이 그대로 휘둘러지기만 해도 시온의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자로 토막 날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자켄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시온의 활약에 환호하고 있던 이진느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다. "멈춰"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이 사태를 방관해야 하는 프란은 무력감에 죽을 것 같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프란은 있는 대로 목소리를 돋워 소리를 질렀다. "죽이지 마! 죽이면 안 돼! 제발 ! ....... 대마왕!" 프란이 그렇게 소리쳤던 때였다. 들었을 리가 없는데, 들릴 리도 없는데, 반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느려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시온을 두토막 낼 것 같았던 반의 검이 멈칫 공기중에서 정지했다. '아아.' 프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공격은 끝난게 아니었다. 반은 위아래로 크게 한 번 휘둘렀던 검을 정확히 시온의 목젖에 들이댔다. 시온은 양손에 불의 화살들을 들고 있었지만 그것을 반을 향해 날리지는 않았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는 그런 시온을 통째로 잡아먹을 듯 빛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지?" 검을 가까이 가져다 댄 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거냐고 묻는거다, 시온 아일린!" 시온은 답이 없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시온은 입가에 묻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 웃음에 화가 난 듯 반의 검이 한층 더 시온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온이 반의 검 앞으로 반걸음 다가온 것은. "형님. 난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아일린을 원해본 적이 없어요."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졌다고요, 형님." 반의 루니아 블레이드가 흠칫 떨렸다. 놀람 때문에 그런것이었지만, 그건 마치 시온을 죽이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이진느가 성벽 위에서 벼락 같이 고함을 지른 건 그때였다. "문을 열고 당장 시즈를 죽여!" 그 순간 반은 보았다. 시온 아일린의 입술과 눈 끝이 동시에 호선을 그리는 것을. 진초록 눈동자는 가늘어지며 그 아름다운 빛을 숨겼다. 그 눈은 반에게 묻는 것 같았다. '형님, 아직도 모르겠소?' 반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시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반을 향해 시온이 무심하게 말을 뱉었다. "시간은 충분했수?" "너!" 반이 비명을 지르듯 불렀을 때 시온은 손가락을 탁 튕겼다. "행복하쇼." 결계는 그 순간 깨졌다. 굳어 있는 반의 앞에 자켄린의 핏빛 망토가 나타났다. 자켄린은 시온을 양팔로 감싸고 있었다. 반이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붉은 망토가 한 차례 펄럭였다. '어디로?' 반은 그 망토를 잡고 묻고 싶었다. '시온 아일린.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 반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자켄린의 망토를 부여잡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망토는 의지가 있는 생물처럼 바깥으로 휘어지며 반의 손길을 피했을 뿐이다. 그 무심한 망토 사이로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 책상에 형님 앞으로 쓴 편지가 있습니다. 꼭 읽어주쇼." 목소리는 꿈결처럼 아릿하게 흩어졌다. "......... 를 용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석문이 열렸다. 뚫린 석문 사이로 아일린이 고용한 검사들이 노도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 * * "빨리 시온을!" 이진느는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이대로 시온이 사라져선 절대 안된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이진느는 열린 석문으로 나간 검사들이 자켄린의 망토를 부여잡기를, 그래서 자켄린이 시온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자켄린과 시온은 이미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시온!" 이진느는 절망적으로 시온을 불렀다. 이진느가 아래를 바라보는 가운데, 반은 피로한 표정으로 다시 검을 세우고 있었다. 일어선 반은 재빨리 라어 강 주변을 살폈다. 곧 반의 얼굴이 다소나마 밝아졌다. 언제부터였는지 카르멘의 검사들이 라어 강 저쪽, 숲 덤불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작전은 간단헀다. 아일린 쪽에서 문을 열게 만든다. 어떤 형태든 좋았다. 저쪽이 '여기엔 백 명뿐이다.' 라는 걸 믿고 있는 한, 결국은 문이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카르멘 가 검사들은 반 일행보다 두시간 늦게 진군하기로 약속했었다. 라어 강을 정점으로 사방에서 흩어진 채 진군해 라어 강에서 반과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시간이란 모험은 충분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사이 아일린에서 거대한 마법이라도 나왔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시온 아일린.' 시온이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 풀리지는 않았으리란 걸 반은 알고 있다. 어쩌면 그래, 시온의 말대로 그가 나서주길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형님이 내 앞으로 오면 모든 게 설명될 거라는 그 전언이 이런 의미였음을, 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훌륭하군, 시온" 강변 저편에서 진군하고 있던 헤이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온 때문에 카르멘가 검사들은 생각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아일린 가 사람들의 시선을 경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과 시온이 결계 안에서 싸우는 동안, 아일린가의 모든 사람들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맙소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이진느는 신음을 흘렸다. 라어 강 주변에서 갑작스럽게 검사들이 보인 것이다. 석문이 열리고 도개교가 내려오자, 카르멘의 무수한 검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반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자신이 카르멘가 검사들을 이끌어야 한다. 룬과 켈리가 날듯이 달려와 그런 반의 옆에 섰다. 켈리가 입을 열었다. "시온님이 시간을 벌어주셨군요." 반은 대답 없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결계에서 나오는 순간 뛰어왔어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은 탓이다. 반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켈리가 멈칫했다. 바로 그때, 아일린 가에서 가장 먼저 뛰어나온 검사 하나가 반을 노리고 들어왔다. 마법에 당한 만큼 반도 체력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 공격이었다. "가주......!" 룬은 흠칫 검을 들었다. 그러나 필요 없는 움직임이었다. 반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린 상태 그대로,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루니아 블레이드는 날카로운 잔광을 반사하며 가로로 한 번 누웠다 일어섰다. 피가 흩뿌려지고 적이 쓰러졌건만 반은 그쪽을 보지도 않았다. 적을 베어버리려고 준비하고 있던 룬은 반의 검이 먼저 움직인 것에 놀라 침을 꿀꺽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네?' 라고 되물었지만 카세타 궁성에서 반이 프란을 구해오는 걸 지켜봤던 켈리는 그 질문을 알아들었다. 프란 프리텐, 그 시종의 행방을 묻는 것이다. 카르멘의 검이 공격 태세를 갖춘 것과 마찬가지로 아일린 가에서도 엄청난 인파들의 검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재빠르게 돌진하는 켈리의 검은 머리칼이 길게 휘날렸다. 켈리는 반에게 등을 보인 상태로 말했다. "시온님이 사라진 순간, 함께 없어졌습니다." 제 6장 빚과 빛 "넌 대체 얼마나 사람을 더 놀래 켜야 속이 시원하겠냐!" 프란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온은 속편한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프란은 길길이 날뛰면서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하고 소리쳤다. 그래도 시온은 아랑곳 않고 한 걸음 프란에게 가까이 왔다. 그들은 아일린 가에서 멀리 떨어진 작센 평원으로 워프 되어 있었다. 자켄린이 한 것이다. 자켄린은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네가 정말로 배신한 줄 알았잖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시온은 미소 지었다. "어머니한테는 어떤 말도 소용없었어. 그러니 보여줘야 했어. 완전히 포기시켜줘야 했어........ 뭐, 그런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프란은 할 말을 잃었다.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는 시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누가 이진느를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시온을 묶어두기 위해 프란에게 젠을 보냈던 그 여자를. 그러니 아들은 이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자신의 마음을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자신은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걸. 프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시온이 말했다. "프란. 우리 바로 몇 주 전에 봤잖아? 그런데도 되게 보고 싶었다?" 프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심한 탓에 풀렸던 주먹이 다시 쥐어졌다. 프란은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그녀는 시온의 어깨를 팡팡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바람둥이면 좀 바람둥이답게 말해라. 뭐 그렇게 식상한 말을 다 하냐?" 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잖아. 너랑 있을 땐 바람둥이가 아니니까." 프란은 주먹을 꾹 쥐었다. "넌...... 진짜, 뭐가...." "난 원하는 거 없다고 했잖아, 프란 말고는." 모든 것에 다 초탈한 사람 같은 말투였다. '진짜 감당 안 되는 녀석. 뭐가.........뭐가 이래?' 무섭게 흔들리는 프란의 눈을 응시하며 시온은 프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함께 가줄래?"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온은 바람둥이라고 생각했다.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져봐서 재미있어 봬는 자신에게 잠깐 홀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저토록 깊은 마음으로부터 차마 도망칠 수 없었을 테니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망쳤다. 저 마음이 거짓이라 믿으며 탈출구를 만들고 시온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매번 달아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시온의 말에 프란은 그 비겁한 도망이 더 이상은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했다. "... 평생 웃게 해줄게." 시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 * 아일린의 석문이 열리고 수천의 병사들이 뛰어나온 데다 방금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던 카르멘 가 검사들까지 우르르 한데 몰려오자, 라어 강변은 엉망친창이 되었다. 시온과 반이 싸울 때부터 손에 땀을 쥐고 필사적으로 전투를 기옥해나가고 있던 음유시인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아아. 기록한다, 기록한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잊어버릴 수 없도록 생생하게!' 음유시인들과 기록사가들이 눈을 빛내며 펜대를 놀리던 그때, 켈리와 룬을 비롯한 비켈린과 아인켈은 석문이 다시 닫히지 못하도록 잽싸게 달려가 그 고정대부터 잘랐다. 그 사이 검사들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진형을 짜고 정비하고 할 틈도 없다. 언제나 콤비를 이루는 헤냔과 아나이스는 그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등을 맞댄 채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촤악! 아나이스는 가볍게 몸을 날려 달려오던 적 하나를 베었다. 헤냔도 두명의 적을 재빠르게 해치운 뒤 다시 아나이스에게 등을 밀착했다. 그러다 한순간, 아나이스가 빈정거림인지 감탄인지 모를 어투로 말했다. "제대로 미친 것 같아. 적이 보이긴 하는 건가?" "카르멘 경?" "말고 누가 있어?" 정말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헤냔의 시선이 저쪽, 반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의 검이 한눈파는 헤냔의 심장을 똑바르게 노리고 들어왔다. 헤냔은 아차 싶어 몸을 길게 틀었다. 그러나 팔 윗부분이 길게 베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정신차려, 키르! 너까지 미치면 어떻해?" 당혹한 헤냔을 보며 아나이스가 소리쳤다. 헤냔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싸움에 임했지만 그래도 저편이 계속 신경 쓰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스티스 카르멘 경이 검을 휘두르는 건 나도 많이 봤어. 저 사람 미친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 하지만 그래도...' 헤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는 아니었잖아.' 반의 보라색 머리카락은 휘장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헤냔이 예전에 봤던 것 처럼 조용하고 고고하게 미친 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반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세라딘이 고심해서 고른 검사들의 팔다리가 종이처럼 잘려나갔다. 그런 반과 함께 카르멘가 검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아일린 쪽 검사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죽여! 그냥 함께 다 죽여!" 이진느는 길길이 날뛰며 위저드 리그원들을 독촉했다. 아군과 적군이 한데 섞이자 마법을 쓰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던 위저드 리그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망설이고 있는 가운데, 이진느의 진초록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망설이지 말고 다 죽여! 어차피 저들은 아일린에서 고용한 사람들일 뿐이잖아? 7써클 마법사들! 체력은 충분할 거다. 얼른 죽여!" 이진느가 새되게 고함을 지르는데,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유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뭐?" 이진느는 한 걸음 물러서며 비틀거렸다. 유렌은 그런 이진느 눈앞에 리온을 들이밀었다. 리온은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포가 계속되자 이성적인 사고 체계가 마비된 것 같았다. 그는 오직 '시즈, 시즈, 시즈.' 라고, 반의 이름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진느는 짜증과 경멸이 섞인 눈으로 리온을 보았다. "시온 도련님이 사라졌고 차기 원로원장은 이 지경이오." 유렌의 그 말에 이진느의 몸이 떨렸다. "그래서?" 유렌은 단호하게 답했다. "난 시즈가 말하는 그 '증명' 이라는 걸 들어야겠소." * * * "가주님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아인켈 최고연장자 로키는 밀고 내려오는 적을 베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반의 검이 너무 무모했기 때문이다. 이건 꼭 죽기 직전에 히스가 썼던 검 같다. 앞뒤 계산하지도 않고 체력을 아끼지도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저 죽자고 상대를 도륙하기만 하는 검. 뒤를 살피지 않고 전진만 하는 검. 루니아 블레이드가 어찌나 빠르고 날카롭게 상대를 베어가고 있었던지, 검은 이미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반의 얼굴에도 피가 튀어 있긴 마찬가지다. 반의 오른손은 단호하고 절도 있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로키는 그의 검에서 너무도 선명한 광기를 읽었다. "몸을 보호하면서 싸우십시오, 제발!" 옆에 있던 란돌도 소리쳤다. "체력 소모가 심했습니다. 이젠 저희들한테 맡기셔도 괜찮습니다." 사방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반에게선 대꾸가 없었다. 그는 그저 검을 휘둘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는 과묵한 켈리마저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렇게 무모하게 움직이시면 상처가 터집니다!" "이미 터졌어!" 룬이 신음하듯 소리쳤다. 그랬다. 피로 흠씬 젖어 있어서 몰랐는데, 반의 오른팔 상처는 이미 다 터져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지끈거릴 지경이다. 그런데도 반은 아랑곳 않고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말려야 돼. 말려야 돼!' 사람들이 눈으로 말하고 있다. 반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라. 신경쓰인다." "하지만 가주......!" "가라 하지 않나!" 반이 외치자 모두는 입술을 깨물고 일단 흩어졌다. 반을 말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을 저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일을 빨리 매듭짓는 편이 나았다. 반이 막 혼자서 등을 돌린 그 순간, 저편에서 검 하나가 날카롭게 달려왔다. 정확하게 오른팔을 노린 공격이었다. * * * "시온." 프란은 말을 삼키며 망설였다. 그러나 시온은 독촉하지 않고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더 서두를 이유도 없는 시온이다. 더 보여 줄 마음, 더 해주고 싶은 망리야 한정도 없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사랑에 빠진 자가 내는 무리한 욕심이라는 걸 시온은 알고 있었다. "나는 말이다.........." 프란은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떤 장애가 와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넘던 그녀였건만 지금 이 순간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 돼. 그래선 안 된다. 프란은 고개를 들어 아까부터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시온의 눈을 응시했다. '시온은 모든 것을 걸고 나한테 말하고 있는 거다. 나도 진심을 다해 시온의 마음에 답해야해.' 프란은 마침내 어깨를 폈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분해지는 걸 보면서 시온은 이제야말로 대답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시온......." 시온은 응 하고 말했다. "난 지금......." 프란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컥거린다. 단어를 고르고 또 골라봐도 그 모든 단어들이 진심을 전하는 데는 한참 부족한 것 같다. 마음을 정확히 보여주는 단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을 이야기해야 한다. 거짓말 같은 걸 하면 안 된다. 프란은 몇 번이고 그렇게 되새겼다. 그래. 정확하게 이 마음을 말할 수 없다면, 다만 한 점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해야지. 프란은 그렇게 결심하고 깊게 한 번 숨을 내뱉었다. "나도 잘 모르겠긴 한데, 있잖아........" 시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은 정말이지 온 마음으로 시온의 진심에 답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가장 솔직하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나 지금, 대마왕이 무지 걱정되거든." 차분하게 듣고 있던 시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싸움이 어떻게 됐을지.... 걱정돼서....." 시온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세이피안의 맑은 하늘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프란은 그런 시온의 반응을 보면서도 억지로 입술을 뗐다. "..... 진짜 걱정돼서.......난........"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걱정돼서 미치겠다. 반이 너무도 신경 쓰여서 시온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조차 없다. 그것이 프란의 진심이었다. 프란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시온은 프란의 눈을 마주하지 않고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온의 얼굴은 잘 볼 수가 없었지만 그의 어깨를 넘어 허리께까지 내려온 은발은 지금 이 순간에도 햇빛을 받아 빛나며 프란의 눈에 그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은색은 무척 아름다웠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 빛이 마치 시온의 마음 같다. 후회할지도 몰라. 프란은 가슴속에서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감정 따위로 시온에게 갈 수는 없다. "넌 날 아껴주겠지. 나도 그걸 알아. 하지만 같이 갈 수 없어." 시온은 마침내 시선을 내리고 프란과 눈을 맞추었다. 가늘게 휘어지거나 단호하게 굳어지던 저 눈동자가 이토록 슬프게 보일 날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빚이 남았거든" 시온은 아무 말 없이 팔을 벌렸다. 그리고서 그는 프란을 품에 안았다. 프란의 금색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은 채, 시온은 한참이나 숨을 멈추었다. 프란은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전 처음으로 양팔을 들어, 시온의 등을 감싸기까지 했다. 프란은 시온의 등을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이게 마지막 포옹이 될 것임을 프란도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프란은 이 품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빚 말이야?" "그래" "돈으로 갚을 수 있는 그런 빚이 아닌거지?" ".....응" 시온은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프란이 어깨를 꽉 안았다. "프리나. 넌 내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빛이었어." 시온은 천천히 말했다. "........... 정말 고마워. 내 앞에 나타나줘서." 프란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한마디만 해도 그 말이 곧장 눈물이 될 것 같아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프란은 작게 말했다. "나도....... 고마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시온에 대한 실례다. 그래서 프란은 말했다. 온 마음을 담아서,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해도 자신이 정말로 시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시온의 어깨가 움찔했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어.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시온.' 프란의 속마음을 들었던 것일까? 시온의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 * * 반은 오른팔을 찔렸다. 꽤나 깊숙이. 세라딘이다. "죽어!" 세라딘의 일원인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반은 검이 박힌 상태 그대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다소 마른 편인 그의 몸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세라딘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저 멀리서 놀라 달려오고 있던 헤냔은 그 광경에 치를 떨었다. '진짜 정 안가는 남자다.' 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음에도 반은 지혈조차 않았다. 다음 상대를 맞았을 뿐. 켈리와 룬은 이미 석문 너머까지 진입한 상태였다. 이제 곧 이 싸움은 끝날 것이다. 부상까지 입은 반은 쉬어도 되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베어 넘겨야 할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심장이 욱신대고 있었다. 이럴 때는 검을 휘두르는 게 제일이라는 것을 반은 알고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머릿속이 하얗게 비도록. "미남! 죽고 싶어?" 반의 옆에 다가온 검사 하나를 베어내며 하질리언이 소리쳤다. 반은 하질리언의 검은색 눈동자를 돌아보았다. "질투로 눈이 돌았군, 눈이 돌았어." "헛소리 마라" "보기 흉하다, 미남." "헛소리 말라고 했잖은가!" 반은 날카롭게 다음 적을 베며 답했다. 그러나 하질리언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 상태로 가다간 대마왕이 아니라 대마왕 할아버지라도 죽을지 모른다는 ㅐㅇ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저 상태로 계속 검을 휘두르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프리나는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해." "시끄럽다!" 하질리언은 혀를 찼다. '진짜 솔직하지 못한 놈일세.' 반은 앞으로 뛰어나갔다. 하질리언이 귀찮아서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하질리언은 길게 날리는 반의 보라색 머리칼을 따라가려 했다. 다가가서 반을 보호해줘야 한다. 반은 분명 강한 검사지만, 진짜 강한 검사지만, 지금은 정상이 아니었다. 상처도 심하다. 그러나 하질리언이 반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검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질리언은 쳇 소리를 내야 했다.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 표창을 겨누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도와주기는 커녕 내 앞가림하기도 급급하군.' 하질리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반은 한순간 비틀거렸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어지러울 만도 했다. '가버린 건가?' 반은 전혀 검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도는 현격히 떨어졌다. 그는 평소처럼 날카롭게 간격을 계산하고 검에 집중해 싸우는 게 아니라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상대를 도륙하고 있었다. 평소에 쌓아놓은 실력이 없었다면 죽어도 당장 죽었을 것이다. 같은 편인 사람들이 돌아보기에 그 광경은 아찔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릴 수가 없다. 누가 저 상태인 반을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심장을 옥죄게 하는 검을 쓰면서도 반은 계속해서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도저히 머리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버린 건가.' 대체 어디로 말인가? '아직 빚이 남았지 않나! 아직 1천 5백만 케트가 남아 있다! 너는 내 시종이다. 내 허락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다!' 눈앞이 잠시 흐릿해지더니 다시 또렷한 상이 맺혔다. 여태껏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살아왔다. 어느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생길라치면 진저리치며 밀어냈다. 소중한 건 결국 약점과 등가다. 열네살 때 맞이했던 그 많은 시종들. 독을 타며 배신하거나 반을 도와주다 결국 자객에게 암살당한 수많은 그들. 일부러 멀리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도록, 그러나 배신하지 못하도록 그들에겐 오직 공포만 주었다. 다가오지 마라! 다가오면 너는 나를 해하거나 혹은.........죽는다. 프란 프리텐에게도 그리하려 했다. 공포만을 주려 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왜 그 녀석 몸에 감시핀을 달았던가. 어째서 전투가 끝나자마자 그토록 정신없이 달려가 녀석을 알아들었던가. 왜 검상 따위보다 녀석이 살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나. 왜 나를 속인 그 눈이, 그 얼굴이 그렇게나 마음에 밟혔나.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으려 했나. 왜 마지막이라 생각한 순간에 떠올린 게 그 얼굴이었나. 왜 녀석이 시온이나 헤냔과 함께 있을 땐 그토록 화가 났나. 한참 동안이나 떨어져 있을 땐 도대체 왜 미움보다도 증오보다도 배신감보다도....... ...... 그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널 해치려고 생각한 적 없어. 죽이려고 생각했던 적도 없어! 나는, 나는 오히려.........!' '아버지, 차가운 사람이었습니까?' '열네 살의 자신에게 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깟 거 겁내다가 케인을 위해 울어주지도 않을 겁니까?' '결혼, 안하는 겁니까?' 무수한 목소리들이 스텨지나간다. 반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이제 알겠다. 적색산맥에서 마지막으로 생각난 그 얼굴이 왜 프란 프리텐이었는지. 들어와 버렸던 거다. 닫아버렸던 빗장을 그 넉살좋은 얼굴로 슬그머니 열고, 한 줄기 빛처럼, 들어와 버렸던 거다. 그때 왼편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반은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세웠다. 챙!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졌다. 반은 고개를 흔들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때가 아닌데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자신을 채찍질하지만 머릿속이 멍해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싸웠던 검의 무게가 이제야 느껴졌다. 오른팔에 입은 상처 탓인지 평소엔 무게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볍던 루니아 블레이드가 지독히도 무서웠다. 챙! 반에게 검을 들이댄 것은 이번에도 세라딘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더라? 반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각 집단에 속한 멤버의 이름은 모두 외우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그 이름만이 머리에서 휘발되어버린 듯했다. 옅은 붉은색 머리칼과 자주색 눈동자. 호리호리한 몸이건만 그에 걸맞지 않는 큰 검을 든 이 여자. 반은 한참이나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애썼다. 챙! 다시 한 번 검이 맞부딪쳤을 때야 반은 이름을 기억해냈다. 젠 헐리. 광기의 검으로 유명했던 일곱 번째 세라딘이다. "이 상태인 너에게도 진다면 세라딘의 이름이 아깝지!" 반의 검이 그렇게 소리친 젠을 향해 곧게 뻗어나갔다. 젠의 심장을 노린 공격이다. 그러나 젠은 특유의 비웃음을 입에 매단 채 그 검을 옆으로 흘려버렸다. 그리고는 검의 궤도를 순식간에 바꿔 반이 했던 그대로 그의 심장을 노렸다. 챙! 반의 검이 아찔한 차로 젠의 공격을 막아냈다. 젠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걷혔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상태인데도 반의 검이 여전히 위협적이었던 탓이다. 한참 동안 줄다리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검이 얼굴을 맞댄 채 힘겨루기를 했다. 무시무시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던 것도 잠시, 한순간 젠이 움찔했다. 힘을 잔뜩 주었던 탓에 반의 상처로부터 피가 샜던 것이다. 그 피가 젠의 눈에 튀었다. "악!"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반이 다시 한 번 젠의 심장을 노렸다. 그러나 젠은 반사적으로 몸을 반대쪽으로 돌려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반의 검이 젠의 심장을 비껴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찌른다. 지금 당장 몸이 기울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건만 젠은 검을 쥔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죽어라!' 채 검을 뽑아내지 못한 반의 손이 움찔했다. 쉬익! 젠의 검이 다가오는 동안 반은 천길 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어찔한 느낌을 받았다.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면서 몸이 쑥 하고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 딱 한 번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어머니 루이사와 겨뤘을 때, 어머니가 마치 사활을 건 듯 자신을 몰아세운 적이 있었다. 끝에서 끝으로 몰려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건 적색산맥에서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와도 또 다른 느낌이었다. 챙! '시즈, 넌 도대체!' 젠은 경악했다. 좌우로 휘둘렀기에 아직 젠의 몸에 검을 놓아둔 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짓말처럼 공격을 막았던 것이다. 반은 핀치에 몰렸을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누군가' 처럼, 압도적일 정도의 스피드로 젠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공격을 막았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빛나는 것응ㄹ 보는 젠의 몸엔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이젠 정말로 끝이다!' 젠은 튀어나오려는 경악성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키에 여신이 젠에게 미소짓는 것인지, 반의 오른팔이 경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은 그 상태로도 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젠은 그 공격을 아까와는 사뭇 다른 여유로운 동작으로 막아냈을 뿐이다. 그 순간, 반의 눈에 젠이 두 명으로 분열되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어지러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렀나. 반은 흐릿한 정신으로, 분열된 두 명의 젠 중 하나에게 검을 날렸다. 젠의 입가가 비틀리듯 위로 올라간 건 그때였다. "끝이다, 시즈!" 휭 하고 공기 중으로 검이 빠져나갔을 때야 반은 깨달았다. 허공을 찔렀다는 사실을. 젠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반이 검의 궤도를 수정하려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젠의 검이 달려들었다. 반이 렌을 벨 때 그랬듯, 또한 적색산맥에서 만났던 세라딘을 벨 때 그랬듯, 동료를 죽게 만들었던 그 수법으로 똑같이 복수하려는 듯 젠의 검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반의 목을 통째로 날리려는 것이다. "헉!" 그 정체절명의 순간 반은 보았다. 광기에 불타는 젠의 눈보다도 젠의 손에 들린 검보다도 젠의 배를 관통하고 튀어나온 초라한 검신을 더 먼저. "아?" 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녀의 배를 뚫고 나온 검은 당연하다는 듯 젠의 내장을 헤집고 있었다. 일순 반의 머릿속이 암전되었다. 확! 젠의 피가 반의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안 그래도 피에 젖어 있었던 반이지만 이번 피는 훨씬 더 뜨겁고 묘하게 질퍽한 느낌이었다. 젠은 입을 벌린 그 상태 그대로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반은 그런 젠의 뒤편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을 ㅂ았다.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검의 주인을. "뭐 하는 거냐?" 잔뜩 화가 난 목소리다.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했냐? 꼴이 왜 그 모양이야?" 따따따 말을 뱉어낸 그 자가 반의 앞을 막아섰다. 반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햇살 아래 더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머리칼을, 무엇에도 겁먹지 않는 더 단단한 어깨를, 생각보다 가는 허리를,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저 뒷모습을. "빌어먹을, 다쳤으니까 가만히 있어! 내가 너보다 많이 약해도 한 번 정도는 못 지켜줄 정도는 아니니까!" 그래, 프란 프리텐이다. * * * 자켄린은 라어 강변에서 다소 떨어진 숲 덤불에 프란을 워프 시켜 주었다. '무사한 거지, 대마왕?' 프란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라어 강변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너무도 신경이 쓰였기에 지금 당장 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반을 당장 발견한다는 건 무리였다. 프란의 시야에 들어온 강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수많은 아수라들이 제각기의 검을 들고 지옥처럼 엉겨 싸우고 있었다. 그 속에서 프란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비켈린 임시 대장 켈리였다. "빨리 가주님을 찾아가십시오.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말릴 사람이 없다니? "빨리!" 켈리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프란을 저편으로 밀었다. 프란은 그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지만 찾아가라 말한다 해서 찾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프란은 적의 몸뚱이와 아군의 몸뚱이를 한꺼번에 밀어내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적의 검과 창과 화살을 얼마나 쳐냈던가. 드디어 프란은 반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겨우 찾아냈더니 반이 이 지경이다. 어울리지 않게 피 칠갑이 되어서는 말이다. "뭐 하는 짓이야?" 은근히 자기 몸을 챙기지 않는다. 은근히 어린애다. 은근히 제멋대로다. 은근히 돌봐줘야 한다. "다쳤으면 가만히 있었어야지!" 많이 다쳤다, 적색산맥에서 봤던 때처럼. 프란은 이를 악물며 반의 앞을 막아섰다. 자신이 방금 전 반을 구했다고 자각할 틈도, 방금 죽인 사람이 일전에 만난 젠이라는 것을 상기 할 틈도 없이 한 행동이었다. 다만 프란은 여기에 와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쉬익! 프란은 반을 뒤에 둔 채 다가오는 공격에 맞섰다.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 프란의 뒤에서 반은 천천히 몸을 세우고 있었다. 힐끔 돌아본 프란은 벼락같이 고함을 질러야 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피가 엄청 많이 난단 말이다!" 그때였다. 반이 홀린 듯 프란을 향해 손을 뻗은 것은. "...... 가지 마라." "어?" ".......... 여기에 있어." 프란은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란이 멍하게 얼어 있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의 검 하나가 그들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 검은 순식간에 달려온 하질리언의 검 앞에 가로막혔다. 하질리언은 멍청하게 서 있는 프란과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린 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때와 장소를 좀 생각해라, 미남.' 그때 아일린의 성벽에서 마법으로 증폭시킨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습니다." 룬의 목소리였다. 제 7장 상처투성이 진실 "싸움은 끝났습니다!" 룬의 커다란 목소리가 성곽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이진느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진느님!" 레오니아가 당혹한 목소리로 불렀건만 이진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 손질되어 있던 그녀의 은발이 아래쪽에서 올라온 먼지 때문에 잔뜩 흐트러졌다. 얼어붙어 있는 위저드 리그원들을 밀쳐내며 이진느는 달렸다. '...... 끝났어.' 세라딘도 서넛만 남긴 채 모두 절명한 상태다. 시온은 떠나고 원로원조차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지금, 이진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 이었다. 이진느는 아직까진 고요한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리곤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로 들어섰다. 이진느는 방의 왼쪽 끝에 위치한 고풍스런 책상 앞으로 다가가 떨ㄹ는 손으로 모든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번째 서랍에서 그녀가 찾던 정사각형 형태의 연보라색 곽이 나왔다. 이진느는 그 곽을 꽉 한 번 움켜쥐었다가 열었다. 곽 안에는 검지 두 개만 한 길이의 침이 누워있었다. '로웬, 약속했었잖아. 그 자리는 나와 시온에게 주겠다고.' 이진느는 이를 악물었다. * * * 이진느가 열일곱이고 정확히 열 달 차이 나는 남동생 로웬이 열여섯일 때, 로웬은 대륙에 유명세를 떨치는 소년이었다. 루이사에 못지않았다. 로웬은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누구도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흔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의 시즈처럼. 로웬은 조각 같은 미남이었고 한순간에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특이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한동안 교류를 끊고 지내던 레키슈안과 거래를 다시 튼 것도 전대 가주를 따라 시험차 협상에 참석했던 열다섯의 로웬이었다. 레키슈안국왕은 이 어린 소년에게 협상 내내 주도권을 뺏겼다. 전대 가주였던 아버지는 그때부터 한 점 의심 없이 로웬이 차기 가주가 될 거라고 믿었다. 이진느도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열 일곱의 이진느는 가주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다. 그녀가 바랐던 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로웬. 카르멘의 여식이 왔어." 그날은 이진느가 루이사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친구 하지 않을래요?' 라는 루이사의 말을 기분 좋게 되새기며 이진느는 로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쯤 아버지와 만나고 있을 거야. 재미있는 여자였다." "응. 나도 한번 만나볼 생각이었어. 그런데 누나, 밥은 먹었어?" 누구에게나 무표정한 로웬이었지만 그는 이진느에게만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로웬이 웃을 때면 얼마나 귀여운지, 이진느를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아직. 같이 먹을래?" "응" 5대 가주와 19대 가주, 30대 아일린 가주 부부는 오누이였다. 세이피안에서는 근친 간 결혼이 혀용되어 있었고 아일린 가 역시 남매 부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진느는 믿었다. 시간이 지나 로웬이 계승식에서 돌아왔을때, 그의 성인식에 나란히 서게 될 여자는 자신이라고. 한 치의 의심없이 철이 들면서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정초원의 주인이 될 사람, 로웬과 함께 아일린을 이끌 사람은 자신이라고. * * * "당신 같이 무례한 사람은 처음이야." "내 어디가 무례했단 거지?" "지금 여자가 어쩌고 했지 않나! 재수 없어 죽겠어, 정말. 지가 뭐라고" 루이사와 로웬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전통적으로 여권이 신장돼있는 세이피안의 사람치고는 예외적으로, 로웬은 다소 가부장적인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는 카르멘의 다음 가주가 여자가 될 거라는 '헛소문'이 돌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뭐가 헛소문이라는 거죠?' 라고 묻는 루이사를 향해 로웬은 격식을 갖춰 답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가 검의 가문을 이끈다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습니까. 당신에겐 검보다는 꽃이나 보석이 어울릴 것 같군요." 로웬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루이사는 버럭 화부터 냈다. "나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그 화려한 미모가 아깝게도 루이사는 자신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로웬 같은 반응을 보이는 남자들이 하도 많아서였다. 루이사는 진심으로 검을 사랑했기에 검을 버리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언제나 마뜩찮았다. 그래도 남자들은 굴하지 않고 연모의 정을 표현했다. 특히 신생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하리나스 백작 같은 경우 어찌나 귀찮게 굴며 연서를 써대는지 루이사는 머리털이 뽑힐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로웬은 루이사라는 이름의 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아일린의 차기 가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군. 당신 보다는 당신의 누이가 가주가 되는 편이 낫겠어. 이진느는 얼마나 고상하고 차분했는데. 누이의 반의 반에도 못미치는 그따위 소갈딱지로 어떻게 아일린을 이끌겠어?" "뭐라고 했지, 방금!" 아직 어리다곤 해도 협상 때마다 냉정을 잃지 않던 로웬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탁자를 쾅 쳐야만 했다. 이 곱상한 여자가 아일린의 계승 후보라는 자신의 존재 기반을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웬이 화를 내건 말건 루이사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여리하게 생긴 도련님?" "내가 여리하게 생겼다 해도 여자 하나 못 꺾을 것 같나!" "방금 '여자 하나' 라고 했어?" 루이사의 얼굴빛이 변했다. "당장 검을 뽑아라. 묵사발을 내주지!" "뭐, 뭐라고?" "왜 그렇게 놀라지? 아일린의 자식들은 검도 안 들고 다니는 건가?" "오냐, 지금 당장 상대해주마!" 둘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저잣거리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둘다 자기 가문이 세상 제일이라고 믿었고 둘 다 자신들이 가주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자존심을 긁자마자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잊었다. "뭐 하는 거야, 로웬?" 문 앞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진느는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둘 다 양대 가문을 이끄는 사람이 될 테니, 아일린 가 가주는 남매에게 루이사와 잘 지낼 것을 당부해둔 차였다. 다른 때는 빈틈하나 없는 로웬이 웬일로 저렇게 실수를 한담. 이진느는 그렇게 생각하며 옷깃을 추슬렀다. 문안에선 아직도 고함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 * * 상상도 못 했다, 정말로. 어떻게 그 여자가 로웬의 심장을 빼앗을 수 있었는지. 아직도 그날의 다툼이 생생한데 어떻게 그들이 그처럼 열렬하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지. 루이사는 한 달 체류 일정으로 아일린에 찾아 왔었다. 그녀가 떠날 때, 열 여섯의 로웬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어. 이제 다시는 볼 일 없겠지 ! 흥, 속이 다 시원하네." "이상한 여자라고 할 것 까지야. 난 마음에 들던데" 로웬은 시선을 확 꺾었다. "누나가 그 여자의 진면목을 못 봐서 그래. 선머슴도 그런 선머슴이 없어. 얼굴만 예쁘면 단 줄 알아? 여자가 좀 조신해야지!" "로웬. 그 얘기를 세이피안 여성들에게 했다간 네 머리털이 하나도 안 남아 있을 거란 얘기는 해야겠구나" "알 게 뭐야? 난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반려를 맞을 거야." 로웬은 웃었다. "누나 같은 사람 말이야." 알고 있을까, 로웬은. 그때 자신이 얼마나 예쁜 얼굴로 웃었는지. 그 웃음에 이진느가 얼마나 설레었는지. * * * 루이사가 아일린을 재방문한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다. "오랜만이에요, 이진느. 헤헤, 나 또 왔어." 루이사가 방문했던 그 달은 이진느와 로웬이 딱 두달 간만 동갑이 되는 때였다. 루이사가 도착한 날, 반강제적으로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던 열 아홉의 로운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이진느의 옆에 서 있었다. 2년이 지났건만 아직 앙금이 풀리지 않은 듯한 그 모습을 보며 루이사가 천진하게 말한 건 한순간이었다. "와. 못 본 사이 더 미남이 됐구나, 너." 펑! 축포를 쏘아올린 것처럼 로웬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옆에 서 있던 이진느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발개진 얼굴이었다. "그딴 입에 발린 말 따윈 하나도 안 기뻐!" "얼굴 빨개졌는데?" "거, 거짓말 하지 마라!" 열 아홉의 로웬은 이미 거물급 수완가로 성장해 있었다. 이제 어떤 자리에 나서든 냉소가 가득한 입매로 상대방을 능란하게 코너로 몰고 갔던 것이 그즈음의 로웬이었다. 그런데도 루이사의 한마디에 로웬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함부터 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진느는 '루이사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일린은 재미있는 가문입니다. 며칠 더 머물러도 될까요?" "좋소, 루이사. 얼마든지." 로웬가 이진느의 아버지였던 전대 아일린 가주는 루이사의 활달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천지사방을 분간 없이 싸돌아다니는데도 결코 천박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여자. 루이사 개인의 매력 뒤에 숨겨진 카르멘가 가주 후보라는 메리트 역시 아일린 가주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허락을 받은 루이사는 그 후로 아일린의 온 집단을 돌아다녔다. "한판 붙어요." "곤란합니다. 아가씨는 손님이고......" "빨리! 카르멘가 정통의 검은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요?" 상대가 넘어오지 않으면 루이사는 웃으며 도발도 했다. "흐응. 겁나나 보네." 처음엔 사양했던 검사들도 결국은 이 깜찍한 숙녀와 검을 섞어야 했다. 루이사는 그때마다 정말로 즐겁다는 얼굴로 겨뤘다. 가끔은 이겼고, 가끔은 비겼으며, 더 가끔은 패했다. 허나 승패 따위는 상관없다는 양 루이사는 매번의 경기마다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아일린 사람들은 이 왈가닥 아가씨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 카르멘의 여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로웬 아일린이 루이사가 검을 겨루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검을 겨루는 현장마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이번엔 졌군. 아일린을 지키는 검사들이니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잘난 척하지 마. 다음번엔 이길 테니까 두고 보기나 해." "그 실력으로 카르멘가를 계승할 수는 있겠어?" "너나 잘 하셔!" 둘 사이에 흐르고 있던 공기는 묘했다. 둘은 허물없이 어울려 같이 사냥을 했고 가끔 격렬하게 말다툼을 했으며 그러다가도 환하게 웃으며 서로 장난을 쳤다. 격이 맞는다거나 하는 느낌을 떠나,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땐 오직 둘만이 속할 수 있는 경계가 즉각적으로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이진느는 불안해졌다. 루이사가 먼 곳을 볼 때 그녀를 곁눈질하는 로웬의 눈이 깊어서였다. '설마 아니지, 로웬? 그 여자는 카르멘의 딸이야. 그렇게 웃지 마, 로웬. 그 웃음은 나만을 위한 것이었잖아.' 이진느의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 * * 넉 달이나 아일린에 머물렀던 루이사가 떠나기로 한 날, 로웬은 이진느를 찾아왔다. "누나, 도와줘." "뭘?" 그때 이진느는 아일린 가의 상단 조직표를 짜고 있었다. 정초원을 맡으면 어차피 하게 될 일, 미리 연습할 겸 했던 일이다. 그런 이진느를 바라보며 로웬은 한참이나 망설였다. 뭔가 중요한 부탁인가 싶어 이진느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로웬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을 때, 이진느는 자신이 쥐고 있던 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 루이사가 좋아." 이진느는 순간 숨을 멈췄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진느의 부릅뜬 눈을 로웬은 보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자가 갖는 치명적인 결함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자신과 상대 외엔 아무도 배려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지금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넌 루이사를 싫어했잖아. 꼴 보기도 싫다고 했잖아." 이진느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마음속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못했던 말들이 엉망진창으로 섞여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로웬, 나는! 오직 정초원의 주인이 되기 위해 살아온 나는!' 로웬은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 애달픈 표정이 이진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인정하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실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열여섯 그해부터 어찌 할 바를 모를 만큼 끌렸다." 이진느는 숨을 헐떡였다. "도와줘, 누나. 내가 그녀에게 청혼한다면 두 가문에서 들고 일어날게 뻔해. 우리가 결혼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누구도 우리를 지지하지 않겠지. 하지만 누나.........누나라면 아일린의 영감들도 설득할 수 있을거야. 누나가 사람을 설득하는 수완이 뛰어난 건 알고 있어. 제발, 제발 이 한 번만 내 편이 되어줘." 이진느는 더 이상 자존심이고 뭐고 지킬 겨를이 없었다. 그 도도하던 이진느 아일린은 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내가, 내가 이렇게나.......... 너를 사랑하는데." 로웬의 은색 눈동자가 이진느에게 못 박혔다. 그 눈은 뜻밖의 진실을 전해들은 충격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며 이진느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야. 그래도 이진느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알았다. 제발 마음을 돌려!' 이진느의 간절한 얼굴을 보며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누나를 사랑해. ㅡ것만은 사실이야." 이진느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이 그녀의 얼굴을 참혹하게 망가뜨렸다. "하지만 나는 누나를 여자로 볼 수 없어. 우린 피를 나눈 남매야." "그런 건 상관없어. 5대 가주와 19대 가주, 30대 아일린 가주 부부도 오누이었잖아!" 이진느의 발악 같은 외침을 들으며 로웬은 표정을 굳혔다. "미안해. 난 이ㅔ 루이사가 없는 일상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누나가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도와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사랑에 빠진 남자다. 그 잔인함에 이진느의 온몸이 떨렸다. "널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이진느의 눈에서 눈물이 비처럼 떨어졌다. "그따위 역사가 백 년을 사랑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하루만큼도 열렬히 널 사랑할 수는 없어. 절대 그럴 수 없어!" "상관없어. 누나가 날 얼마나 사랑하든 난 그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하니까." 로웬은 침착하게 답했다. 그 확신에 찬 말들을, 상대의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짓이기는 덜 성숙한 남자의 불같은 열정을, 그 참혹한 단어 하나하나를, 이진느는 이때껏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누나. 만약 그녀가 이대로 떠난다면......... 나는, 나 로웬 아일린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에게 가겠어. 내 모든 것과 다름없는 아일린을 버리고 그저 그녀의 남자로, 로웬으로 살겠어." 아일린이 로웬의 가장 중요한 존재 기반임을 알기에 이진느의 눈에서는 한 순간 초점마저 사라졌다. 맙소사. 이진느는 북받쳐 오르는 탄식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제발 도와줘." 이진느는 싸늘하게 심장이 굳는 것을 느꼈다.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수 없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도 없어. ".........로웬." 이진느의 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랑은 그 순간 그렇게 끝나버렸다. 마음속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자마자 이진느는 한순간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런 이진느의 어깨를 잡아주며 로웬도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도 이진느는 잊어본 적 없다. 그녀가 아닌 루이사를 위해 흘리던 로웬의 눈물을. "미안.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누나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줄게." 어린애 같아. 이진느는 그렇게 생각했다. 키가 188지나나 되는,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된 로웬이 어린애 같다고. 이진느는 조용히 로웬의 손을 치워냈다. 그리고서 그녀는 꼿꼿하게 섰다. 로웬이 등지고 선 창 밖으로 녹색의 비나룬이 보였다. 그 달빛을 받은 남동생은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진느는 자기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겠어, 로웬. 좋아. 내가 나서서 사람들을 설득하겠어." 로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 얼굴 역시 이진느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 대신......." "그 대신?" 로웬이 긴장하여 바라보는 가운데 이진느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다음 대 가주로 내 자식을 지명한다고 맹세해줘." * * * 루이사가 아이를 낳던 날, 이진느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동침했다. 반보다 한 살 어린 시온은 그렇게 태어났다. '약속을 지켜!' 이진느는 번번이 로웬에게 시온을 데려갔다. 침묵만이 세 사람 사이를 맴돌았건만 로웬은 그 침묵 속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로웬은 일부러 반에게 차갑게 굴었다.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상단을 관리하고 계약을 재체결해야 하는 로웬이기에 애초에 반과 지낼 시간조차 많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마저도 의식적으로 반을 멀리한 것이다. "반은 카르멘 가에만 정을 붙이는 게 좋아. 아일린 가와의 거리는 멀면 멀수록 좋지." 반이 유년의 대부분을 카르멘 가에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반의 일곱 번째 생일날에야 이진느는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조카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웃으며 반에게 키스해주었지만 속에선 시퍼런 칼이 빛나고 있었다. 반이 자연스럽게 아일린과 멀어지도록 사랑하면서도 자식과 거리를 두는 로웬을 생각하자, 그런 애정을 받고 있는 반을 보자, 증오가 멈추지 않았다. "반이 스무 살이 되면 모든 걸 다 얘기해줄 생각이야. 아직 계승 후보가 결정되려면 멀었으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로웬이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허나 로웬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로웬!" 로웬이 불의의 사고로 죽던 날, 이진느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울었다. 온몸의 습기란 습기는 그때 모조리 빠져나가 다시는 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을 만큼 펑펑 울었다. 평생을 저주하던 루이사 카르멘이 함께 죽은 건 기뻤지만 로웬이 죽은 것은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이 정말로 로웬을 향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집착이었는지도 이젠 분명치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용서할 수 없었다. 약속조차 지키지 않고 가버린 로웬을. 일평생 루이사와 반만을 사랑했던 로웬을. 이진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어린 반을 향해 증오를 불태웠다. '내 사랑을 박살낸 루이사 카르멘의 피를 받은 꼬마야, 기억해둬라. 너는 영원히 아일린의 가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가주가 되는 건 내 아들이야. 로웬이 약속했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은 네가 아니라 시온이라고!" 그러나 로웬이 채 유언을 남길 틈도 없이 죽었으므로 그 맹세는 오직 이진느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제 와 그 약속을 밝혀봤자 원로원이 믿을 리 없었다. 열네 살의 반이 원로원장 스탕달의 빠른 조치 아래 가주 승계자가 된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네가 아니야!' 그래서 이진느는 이날 이때껏 내밀하게 준비를 했다. 헤이튼과 손을 잡고 카세타에 반군을 지원하고 세라딘을 꼬드기고 원로원을 속이며 일을 꾸며왔었다. "성공이, 목전이었는데." 이진느는 곽 안에 든 침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만일에 만일을 위해 언제나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독침. 귀밑을 찌르는 순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 허나 막상 그 침을 쓸 상황이 닥치자 이진느는 팔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진느는 입술을 악물었다. 순식간에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침을 들어 올렸다. 어떤 계산도 틀린 건 없었다. 오직 하나, 시온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을 뿐. 이진느는 침을 귀 쪽으로 가져갔다. "으!" 그런데 이진느가 귀밑에 침을 찌르려던 그 순간, 그녀의 손목이 뒤편으로 강하게 꺾였다. 침을 든 이진느의 오른손이 누군가의 단단한 손가락에 감겨 있었다. 이 강하고도 차가운 여자의 손목은 쥐었을 때 단 한줌밖에 되지 않을 만큼 가늘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책망하듯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이진느의 손목이 떨렸다. "놔!" 이진느는 팔을 강하게 휘저었지만 상대는 손목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놓으라니까, 헤이튼!" "그럴 수 없소!" 헤이튼은 이진느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더 견디지 못한 이진느의 손에서 침이 떨어져 내렸다. 헤이튼은 그제야 이진느의 손을 놓고 침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당신을 죽게 놔둘 순 없소."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나가는 헤이튼의 등을 보는 이진느의 진초록 눈동자가 일그러졌따. 곧 그녀의 입술이 잔인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단 한 번 있었던 불장난의 대가인가?" 헤이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운명이란 이토록 잔인한 것이다. 루이사가 아이를 낳던 날, 이진느는 어쩔 수 없이 카르멘 가에 갔다. 그러나 루이사와 로웬이 환희에 가득한 얼굴로 반을 안아들던 밤, 로웬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춤을 덩실덩실 추던 그 밤, 이진느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방을 뛰쳐나갔다. 로웬 또래의 앳된 티가 남은 남자를 꺼리낌 없이 유혹했다. 이름도 몰랐다.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고열로 정신을 잃어 로웬의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 일의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그건 그냥 실수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검 외엔 아무것에도 집착하는 게 없던 당신이 한 때나마 나와 손잡았던 걸로 충분히 의리는 지켰어. 이 이상 상관 마." 이진느는 헤이튼을 향해 한 발 다가갔다.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열망만이 지배하는 눈으로 이진느는 헤이튼을 보았다. "난 시온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소. 카르멘 가에서 몇 번 도움을 줬던 게 다였지. 그나마도 시온이 모두 거절했지만." "침을 내놔!" 헤이튼의 말 따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이진느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헤이튼은 나직하게 대꾸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시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소, 이진느. 이제 와 내가 아버지라고 밝힐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이진느가 발악하든 헤이튼에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최강의 검사인 헤이튼에게 이진느의 육탄 공격이 통할 리 없다. 헤이튼은 이진느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세우며 말했다. "시온이 왜 여기에 남았었는지 생각해봤소? 왜 그런 연극을 했는지는 생각해봤소?" 이진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온. 열 달 동안 배 아파 낳은 내 아들. 헤이튼은 이진느의 얼굴을 보며 작게 덧붙였다. "시온은 시즈를 배신할 수도 당신을 두고 갈 수도 없었던 거요." 시즈를 도움으로써 시즈가 당신을 해할 수 없도록 만든 거지. 똑똑한 녀석이니까. 헤이튼은 마음에 담은 말을 마저 하지는 않았다. 더 말하지 않아도 자리에 주저앉은 이진느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런스 카르멘은 잔뜩 긴장한 채였다.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은 들을 수 있었지만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다급한 듯한 그 발소리는 런스의 방 바로 앞에서 뚝 멈췄다. 도대체 누구지? 날 베러 온 사신인가, 아니면 날 구하러 온 동지인가. 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열쇠 저 열쇠를 꽂아보는 듯 덜그럭대는 소리가 멈추고 딸깍,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마저 빼앗겼던 케이온 기사단장은 일단 의자를 가슴팍까지 올리며 공격태세를 갖췄다. 그가 막 그것을 머리 위까지 치켜 올린 그때였다. "자기!" 런스 카르멘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사람이 뛰어 들어온 탓이다. 그자는 런스가 채 의자를 내려놓을 틈도 없이 달려오더니, 의자를 저 멀리로 차올림과 동시에 런스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튕겨나간 의자는 박살나 있었다. "아, 아나이스?" 런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아나이스가 런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기! 자기! 걱정했어!" 아나이스의 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지금 당장 치료해야겠는데.' 런스는 그 상처를 보자 가슴에 메어지 듯 아팠지만 아나이스 본인은 런스를 만났다는 기쁨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런스는 그런 아나이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울지 마. 난 괜찮아. 상처 하나 없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얼마나........." 런스의 가슴팍에 눈물이 점점이 묻어났다. 런스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며 망설인 끝에, 이곳에 갇혀 있는 내내 연인에게 해주고 싶었던 그 말을 속삭이듯 전했다. "보고 싶었다, 아나이스." "나, 나도. 나도, 자기!" 아나이스는 얼굴을 붉히며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이 환상적인 닭살커플을 향해 퉁퉁대는 목소리가 날아든 것은. "진짜 못 봐주겠습니다, 단장님." "헉! 헤냔!" 런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헤냔은 옆구리에 양팔을 척 올린 자세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런!' 런스는 쑥스러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품에 안긴 아나이스를 떼어내려 했지만 아나이스가 필사적으로 옷깃을 움켜쥐고 있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헤냔의 날카로운 적색 눈동자를 보면서, 런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대체 몇 살 차입니까? 양심이 아무리 없어도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서로 좋아한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내가 우리 자기 좋아한다는 건 너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잖아!" 아나이스가 대거리했지만 헤냔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건 네 일방적인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그리고 뭐야, '자기' 라니! '자기' 라니! 달링도 모자라서 이젠 '자기' 야? 게다가 너, 언제부터 단장님한테 반말했어? 내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닭살을 떨 건 또 뭐고!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거야, 아나?" "흥, 안 보여. 난 우리 자기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친구를 헌신짝처럼 버리겠다, 이거지?" 헤냔이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사이 런스를 멋쩍게 웃고 있었다. '놀릴 줄 알았는데 화내네? 차라리 화내는 게 낫지.' 런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여태까지 화를 쏟아냈던 게 거짓말이라고 말할 듯, 헤냔 키에르가 세이피안 오뉴월 햇살보다도 훨씬 더 맑고 찬란한 웃음을 입에 건 것은. 그 웃음을 본 순간 런스의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축하드립니다, 단장님." 헤냔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런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헤냔은 배를 잡고 있었다. "백년짜리 놀림감에 당첨되셨습니다! 하하하, 무서하셔서 기쁩니다." 헤냔이 웃으며 한 그 말에 런스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헤냔, 나날이 능글맞아지는군. 처음엔 그렇게 순수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아나이스가 재빨리 맞장구쳤지만 헤냔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할 만한 자격은 두 사람한테 없을 텐데요!" 런스와 아나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헤냔과 아나이스가 런스를 구출했던 그 시각, 카르멘 가 검사들과 비켈린, 아인켈들은 아일린가 곳곳을 뒤져 반란의 주모자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이진느 아일린은 의외로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은 채 자신의 방에 얌전히 앉아 있억 ㅏ장 쉽게 포박할 수 있었다. 이진느가 침착한 얼굴로 포승줄에 묶이자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은 의아한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악을 하며 저주의 말을 내뱉어도 이상하지 않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룬을 그 차분한 태도에 더더욱 흥분해 지금 당장 죽이겠다며 난리를 쳤다. '케인이 죽은 것도, 히스가 죽은 것도 바로 이 여자 때문이 아니었나!' 한 번 마음먹으면 무식하게 돌진하는 저 룬의 살기등등한 표정에, 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인켈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룬의 살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이진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룬이 그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들었을 때였다. "추태는 그만두시오!" 엄중한 목소리가 룬을 막아섰다. 시선을 홱 돌리자 헤이튼이 보였다. 룬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망가졌다. "왜, 한때 손을 잡았던 동지가 몰락하는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리시나?" 빈정거리는 룬의 말에도 헤이튼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직 저스티스가 깨어나지 않았소. 이번 일은 그에게 맡기는 게 옳을 터." "외부인은 닥치고 있으시지!" 룬의 뒤에 서 있던 란돌이 거칠게 말을 뱉었다. 룬이 간만에 마음에드는 말을 하는구나, 하는 얼굴로 란돌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짧은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여태까지 룬의 오른편에 선 채 룬이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켈리가 보다 못해 나선 것이다. "아인켈 대장. 가주님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죽일 수는 없습니다." 룬은 켈리를 노려보았다. 켈리의 검은색 눈동자는 그런 눈의 분노를 반사하기만 할 뿐 별다른 감정을 닮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켈리라고 해서 자신의 대장을 죽게 만든 이진느가 좋아서 보호하는 것일 리 없다. 반도 없는 상태에서 일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을 뿐. '케인과 똑같군. 이 무표정한 얼굴이라니.' 룬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켈리를 노려보았다. "가주님이 안 죽일 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죽이실 거다." "당신은 가주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담하지 마십시오." 상대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으며 켈리가 대꾸했다. 확실히 자신은 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룬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켈리는 말을 이었다. "일단은 위험한 사람들을 모두 가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비켈린들은 이미 그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일어나시면 처리하시겠죠." "너 잘났다!" 룬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선 고함을 질렀다. * * * 꼭 이진느를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반은 빨리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반은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 모습이 적색산맥에서 발견했을 때와 비슷해서, 프란은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안 죽어. 그때보단 훨씬 괜찮은 상태니까." 독심술이라도 하는지 하질리언이 말했다. "그, 그러냐? 그때보단 나은 상태인 거야?" 의학지식이 전무한 프란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러자 하질리언이 권위자의 얼굴을 한 채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안 간다고 생각하면서도 프란은 조금이나마 안심했다. "7써클 마법사란 사람이 치유마법도 써줬으니 곧 일어나겠지." 하질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누운 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질리언도 적색산맥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의 반을 떠올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피투성이였던 그때도 무섭게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운 저 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최고의 가문에다 검은 말도 안될 만큼 강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고? 진짜 복도 많은 자식이군.' 약간의 질투와 함께 반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단 하질리언이 한순간 툭 내뱉었다. "그런 주제에 왜 질투의 화신이냔 말이지. 안 어울리게." "어?" 프란이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담긴 초조함과 걱정을 읽으며 하질리언은 웃었다. "미남 말이야. 의외로 질투가 많더라고. 할 때 하더라도 장소는 구분 해야지, 내참." 프란으로서는 영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요전에도 그러더니 요즘 들어 이상하게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지껄이는 하질리언이다. '아니, 요새만 그러는 게 아니었지. 마이페이스 자식.' 프란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켈리는 프란과 하질리언에게 반의 신변을 일임했다. 어디선가 의사가 불려나와 지혈을 하고 상처를 감싸고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또한 7써클의 위저드 리그 마법사라는 로디가 힐링 치료를 해주는 동안, 프란과 하질리언은 꼼짝 않고 반의 옆에 앉아 있었다. 로디는 왠만한 상처는 감쪽같이 아물었지만 깨어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마법 덕분에 생체기가 없어진 반의 얼굴을 보며 프란은 생각했다. 가지 말라고, 여기에 있으라고, 반은 말했다. 그토록 간절한 얼굴은 처음봤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던 그 손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것조차 프란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악! 대체 뭐냐고!'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워져 곧장 뇌가 텅텅 비는 희한한 경험을 하며 프란이 입을 벌렸다. 그런 프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또 한 번 툭 하니 말을 던졌다. "근데 걔도 미남이더라. 왜 네 주위엔 미남밖에 없지? 나까지 포함해서." 뜬금없이 나온 그 말에 프란이 인상을 그었다. "뭔 소리냐?" 하질리언은 웃으며 프란의 머리를 툭툭 쳤다. "시온인가 하는 사람." 프란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하질리언은 괜히 이 화제를 꺼냈나 싶었으나 이 정도에 물러선다면 마이페이스라는 별명이 아깝다. 그는 곧 '알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미남이랑 많이 닮았던걸?" "사촌이니까" "왜 돌아왔어?"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다. 프란은 곤란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프란의 그 얼굴 때문에 하질리언은 미소 짓는 수 밖에 없었다. "빚이........." 빚이 아직 남았으니까, 하고 답하려는 프란의 말을 하질리언이 잽싸게 끊었다. "핑계대지 말고." 이번에도 직격탄이다. 프란은 완전히 급소 맞은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을 즐거이 바라보며 하질리언은 흥흥, 하고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물론 속으로. "적색산맥에서 미남 데려왔을 때, 네가 어떤 얼굴 했는지 모르지? 하질리언은 혼란스러운 빛을 내고 있는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바보 같은 프리나. 내가 괜히 애인 운운한 게 아니야.' 하질리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그때, 곧 죽을 것 같은 얼굴 하고 있었어. 난 그런 네 얼굴 처음 봤다." 프란은 멍한 얼굴을 했다. 그때, 그 순간의 적색산맥. 그날은 눈보라가 치지 않아 식량을 구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던 때였다. 헤냔과 제법 농담도 주고받으며 운수 좋은 날이라고 낄낄거렸을 정도로. 그러나 적색산맥 한가운데에 누워 차갑게 식어가는 반을 발견했을 때 프란의 머리속은 새카맣게 뒤덮이며 암전되고 말았다. '..............대마왕?' 거짓말.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프란의 몸은 뛰고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반으의 얼굴을 봤을 땐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었다. 이미 굳어 있던 피와 얼어버린 머리칼, 새파랗게 질려 있던 반의 입술 색깔이 모두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힌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면서 오직 하나, 지금 이대로 반을 죽게 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땐 그 생각뿐이었다. 헤냔의 등에 반을 업힌 뒤 무슨 정신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던 것만 기억난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프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내 식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긴 해도 눈치가 영 없는 건 아니야." 하질리언은 프란의 어깨를 쳤다. "솔직해져라, 프리나. 그게 행복해지는 첫 번째 조건이야." * * * 솔직해지라니? 하질리언이 나간 방, 프란은 홀로 반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아까 전과는 달리 꽤나 편하게 숨을 내쉬는 반을 보며 프란은 하질리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하진, 빨리...........죽을 것 같단 말이다........' 반이 죽는다고 생각했을 땐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왜 하질리언에게 그토록 절박하게 매달려야 했을까. '대마왕이 너무 걱정돼서.' 게다가 시온을 거절하면서는 왜 그따위 말을 했나. 거절의 말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튀어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자신을 위해 기사 직위를 버릴 각오마저 하며 적색산맥까지 따라온 헤냔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하질리언도 아닌, 뿔달리고 못돼빠진 저놈의 대마왕이 뭐가 그리 걱정되었기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 프란은 반이 누운 침대에 머리를 푹 박았다. '기절하겠네, 진짜.' 이상한 건 머리가 이렇게 복잡한데 아까부터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키네세스와 반이 결혼한다는 헛소문을 들었을 때와는 달리 불쾌감은 없으나, 속이 체한 것같이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이상한 울렁증 속에서 프란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 * * '여긴?'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반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땀을 많이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했다. 그러나 그런 신체적인 불쾌감 따윈 느낄 틈도 없이, 반은 무엇을 찾는 것인지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허공을 맴돌던 반의 시선이 한 점에서 멎었다. 자신이 누운 침대에 볼을 댄 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프란이 보인다. 반은 나직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있다.' 시온과 함께 가지 않고 돌아왔다. 반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프란은 여전히 깊은 잠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잠든 주제에 어쩌면 이렇게 곤하게 자는지 모르겠다. 거의 제 안 방에 드러누운 격으로, 프란의 입에선 침까지 질질 새고 있었다. '못 말리겠군.' 프란은 몹시도 피곤했던 모양으로, 반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침대가 흔들리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오히려 요란한 소리로 입맛을 쩝쩝 다시기까지 한다. 반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손으로 슬쩍 어깨를 건드려봤으나 프란은 미동도 않고 계속 자고 있을 뿐이다. "으으." 그래도 의자에 앉은 채 엎드린 상태로 자는 게 편할 리 없다. 꿈속에서 맛있는 걸 먹는 와중에도 영 자세가 불편한지, 프란은 앉은 채 몸을 뒤척이는 신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뭘 생각했는지 반은 한순간 시선을 돌려 방문을 보았다. 문은 잠기지 않은 상태다. 잠시 고민하던 반은 한참 만에 다소 망설이는 걸음걸이로 방문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소리내지 않도록 주의해 방문을 잠갔다.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반은 다시 프란에게 다가왔다. 반은 이번에도 한참 동안 망설였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간에 한 번 이거다 싶으면 바로 밀어붙이는 그닺비 않은 태도였다. 프란은 오우거 저리 가라 할 만큼 큰 숨소리를 쌕쌕 내쉬며 잠에 빠져 있건만, 반은 몇번이고 프란의등을 찌르거나 어깨를 치는 등 조심에 조심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란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푹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누워서 자라, 바보 같은 녀석.' 반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프란의 몸을 안아들고 침대에 눕혔다. 잠을 방해받은 듯 잠시 인상을 써서 반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던 프란은 곧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반은 비밀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어쌔씬처럼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 방에서 나왔다. * * * "가주님!" 방 밖으로 한 걸음을 뗐던 반은 하마터면 놀란 소리를 낼 뻔했다. 문밖에 룬이 서 있었던 탓이다. 룬은 막 문을 열 참이었던 듯했다. 정말이지 다행으로 반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장면'을 룬이 정면으로 봤다면 그 포커페이스마저도 지켜지지 않았겠지만. "이제쯤이면 깨어나실 줄 알았습니다. 저, 이진느를..........!" 사정도 모르는 채, 룬은 반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흥분해 소리쳤다. 다른 모든 일보다 이진느부터 처리하자고 말하려 했던 룬이다. 하지만 반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온의 방에 가겠다." "예?" 예상치 못했던 그 말에 룬이 눈을 크게 떴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주인의 뜻에 반한 적 있었던가. 룬은 바로 꼬리를 내리고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는 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하는 행동은 꼭 강아지 같은 이 사내에게 반의 무심한 목소리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따라오지 마라." '흐흑, 가주님!' 보기보다 마음 약한 룬은 버림당한 아낙네의 시선으로 멀어지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반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 * * '많이 달라졌따.' 반은 시온의 방으로 들어셔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온의 방은 이곳이었다. 어린아이가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 전쟁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방. 어쩌다 한 번 아일린에 들를 때면 반은 늘 이 방에 왔었다. 가정교사가 미인이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던 열 살 무렵의 시온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도 열네 살전의 기억일 뿐, 그 후로는 이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 어린 기억에 따르면 그때 이 방은 대륙 곳곳에서 구해온 장난감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방은 다양한 종류의 마법 증폭기들과 정령석, 마법서, 비커와 실린더 등의 마법 도구들로 가득 차 있다. 방 가운데에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바로 방금 전까지 본 것 같은 자켄린 저작의 7써클 초반 마법서가 그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책 위론 흰 봉투가 놓여 있다. 반은 망설임 없이 봉투를 뜯었다. 형님.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게 형님 맞소? 길쭉하니 시원스런 글씨. 시온의 필체다. 반은 아랫줄로 시선을 옮겼다. 만약 이 편지를 읽는 게 형님이라면 이 편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님이 본 거였으면 좋겠소. 내 말은, 다 읽으면 태워버리란 말이우. 정신 건강에 나쁜 내용이고 누가 읽어서 형님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먼저 말해두는데, 이 글 읽고 자괴감에 빠진다거나 하면 가만 안 둘 테니 알아서 하쇼. 몇 번이나 얘기했듯 난 의지가 있는 인간이고 그 자리는 내 스스로 거절한 거유. 명심하쇼. 거기까지 읽었을 때 반은 이 편지가 심상찮은 내용임을 알았다. 편지는 딱 한 장이었다. 서론이 무척 긴 것을 고려하면 본론은 반 장도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평소에 말 많고 유쾌한 시온답지 않게, 이야기를 서술하는 부분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로웬과 이진느 사이의 약속 부분을 읽었을 때 반은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로웬은 네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계승식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반은 주먹을 꾹 쥐었다.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온몸에 번졌다. 그래도 반은 시온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렸다. 형님. 혹시나 해서 또 한 번 당부합니다. 죄책감 가지지 마십시오. 형님이라면 계승식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겠지? 그걸로 된 거 아니우. 난 원하지 않고 형님은 증명했으니까. 형님, 알고 있겠지? 형님이 아일린의 단 한 명뿐인 주인이라는 걸. 형님의 등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와 생명이 얹혀 있다는 걸, 그걸 잊지 마쇼. 다음 줄은 망설이며 쓴 듯 몇 번이고 고친 흔적이 있었다. 형님이 만약 내게 한 가지 답례를 하고 싶다면 어머니를 레키슈안으로 보내주세요. 평생, 아무 물의 일으키지 않도록 내가 모시고 살겠습니다. 약속할게요. 편지를 다 읽은 반은 시온이 자켄린과 함께 사라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행복하쇼' 이런 편지를 남긴 주제에 막상 떠날 땐 그 말이 다였다. 싱긋 웃으며, 경쾌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겨우 그 말이 전부였다. 반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무너지지 않는다. 네 말대로 난 아일린의 주인이니까. 또한 너는 네 의지가 있는 인간이니까.' 반은 시온의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영원히 모를 것이다. 시온은. 반이 얼마나 그를 부러워했는지. 자신의 발자국이 닿은 모든 곳이 페허가 되어 스러지는데, 시온이 지나가면 그 모든 곳이 환한 빛이었다. 쾌활한 미소와 으쓱하는 어깨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또 용서받으며, 그러나 어떤 것에도 진정으로 마음을 주지 않던 시온. 모든 사람이 그런 시온을 사랑했다. 그 여유로운 미소를 동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나뿐인 사촌동생. 밀어내고 또 밀어냈는데도 시온은 성큼성큼 흙묻은 발로 매번 반의 마음에 깊숙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 발자국이 지워질 때쯤 되면 '야아, 형님. 오랜만이우?' 그런 소릴 하며 또 찾아왔다. 발자국은 도장처럼 남아서, 전투를 위한 작전을 짤 때마저 반은 시온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경계했던 주제에 시온은 배번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오래된 발자국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시온은 배반하지 않았다.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금 흙 묻은 그 발로 성큼성큼 이곳을 찾아오길, 바람 냄새가 묻은 그 목소리로 '여, 형님!' 하며 웃어주길, 반은 바랐다. 제 8장 장례식과 환영회 전투가 있었던 때로부터 고작 2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린은 원래의 모습으로 거의 복원되어 있었다. 폭풍 같던 그 2주동안 아일린가에선 많은 일이 있었다.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대표적인 예다. 카르멘가에서 묵묵히 일을 수행해왔던 켈리가 비켈린장으로, 유렌이 차기 원로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자켄린이 사라져 공석이 된 위저드 리그장 자리는 잠시 비워두기로 결정했다. 그 모든 개편 가운데 레오니아가 한시적으로만 정초원을 맡기로 한 것이 가장 파격적인 인사라면 인사일 것이다. 리온을 교수형에 처한 것 외에, 반은 반역자들에게 별다른 벌을 내리진 않았다. 심지어 살아남은 몇 안되는 세라딘들조차 목숨을 부지했다. 그들은 아일린가에서 쫓겨나긴 했으나 그 출중한 검술실력이 어디가는 건 아니니 금세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반이 한 가장 의외의 선택은 이진느를 놔준 것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가주님!" ".........시끄럽다." 반은 시온의 편지를 비밀에 붙였기에 아인켈과 비켈린의 반말은 무척 심했다. 그러나 반은 그 모든 반대를 뚫고 시온에게 이진느를 보냈다. 켈리의 인도에 따라 이진느는 레키슈안으로 갔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나 헤이튼이 로이네트로 돌아가기 전 레키슈안에 들러보고 싶다며 이진느와 같은 날짜에 출발했다는 것 외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비켈린 소속의 케신 등이 적색산맥으로 출발했다. 추운 곳에 꽁꽁 얼어붙어 있을 케인의 주검을 찾아오기 위해서였다. 또한 란돌과 로키가 히스의 주검을 찾기 위해 카세타로 떠났다. 조만간 가겠다는 말과 함께 라톤을 비롯한 궁중 마법사, 헤냔을 비롯한 기사들도 돌려보냈고 카르멘 가의 검사들 역시 집으로 귀환했다. 이제 저택에 남은 외부인은 프란과 하질리언뿐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가운데 엄청난 진통이 있었던 2주간이 지나갔다. 헌데 이 2주간 가장 경악할 만한 사건을 겪은 사람은 뜻밖에도 아일린가 외부인인 반의 시종, 프란 프리텐이었다. * * * 프란은 요새 해일이 몰아치는 바다를 뗏목 하나에 의지해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배가 뒤집히면 그대로 익사할 것처럼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던 것이다. 반은 아일린가를 되찾은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 없이 행동했다. 아니, 행동하려 했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졸려 죽기 일보직전인 프란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나 반은 이제 프란이 비틀거려도 '똑바로 서!' 라고 말하지 않았고, 프란이 깐죽거려도 면박주지 않았다. 실버 블레이드를 돌려줬을 때도 꽤나 다정한 태도였다. 어딜 봐도 명백한 변화였다. 그것만으로도 프란이 혼란스러워하긴 충분했다. 거기에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또한 자리에 누울 대마다 '가지마라, 여기에 있어.' 라는 반의 말이 백만 번 정도 반복되며 에코로 윙윙대는 바람에 프란은 요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곤죽이 돼 있던 프란의 머리속을 더더욱 곤죽으로 만들 만한 사건이 아일린 탈환 후 정확히 14일이 지났을 때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가주님의 시종." 그날 밤 프란에겐 어딜봐도 수상쩍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세필나무 방망이를 짚은 세 명의 노인이었다. 확인해 볼 것도 없이 위저드 리그원들이다. 프란은 그들을 보는 즉시 본능적으로 창문을 깨고 달아날 뻔했다. "으아악, 끈질긴 것들!" 레이니아 왕비 초상화 건으로 죽도록 시달렸던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한이 드는 프란이었다. 이제 가문이 잠잠하다 싶으니 또 덤비는 것이라 생각한 프란이 막 창문을 향해 뛰어간 순간이었다. "자, 잠깐. 여긴 2층이오!" '네놈들이 언제 그런 거 걱정하면서 나 따라다녔냐!' 프란은 분노에 차서 창틀에 한 발을 올렸다. 여차하면 그대로 뛰어내리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보이는 움직임이다. "그만 좀 하라고, 이 빌어먹을 스토커들아! 이제 충분하잖아!" 내가 옛날에 네놈들 동료인 카리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알긴 아냐! 프란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말을 억지로 누르며 창문틀을 잡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세 명의 마법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프란 앞으로 다가왔다. 프란은 반사적으로 몸을 창문 밖으로 반쯤 내밀었다. "제발 얘기를 들어보시오. 우린 거래를 하러 왔소." 거래라니? 프란은 이 뜻밖의 단어에 놀랐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아니 빚더미밖에 엇ㅂ는 자신과 무슨 거래를 하잔 말인가 싶어서다. 프란이 여전히 털을 비쭉 세운 동물처럼 긴장한 채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위저드 리그원들이 일제히 소리를 쳤다. "우리에게 초상화를 파시오!" "엉?" 프란은 창틀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제야 안심한 세 명의 노인이 프란을 향해 우두두 달려왔다. 도무지 한평생 연구실에서 몸 웅크리고 살아왔던 노인들이라곤 믿을 수 없는 날쌘 동장이었다. 집념에 가득 찬 그들의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프란의 팔엔 소름이 돋아났다. 마법 연구를 위해선 자기 몸에 독물도 투여할 이 무시무시한 인간들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프란이 움찔 실버 블레이드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대려는데, 개중에 나이가 적어 보이는 위저드 리그원이 소리쳤다. "그림의 소유자가 당신이라고 들었소. 맞소?" 그림이라니. 위저드 리그원들과 얽힐 그림이라곤 딱 하나밖에 없다. 변태 보일린의 집에서 가져왔던 레이니아 왕비의 초상화. 온갖 사람들, 특히 위저드 리그원들이 닮았다고 생난리를 쳐대는 바람에 뱀장어처럼 몸을 꼬아야 했던 바로 그 그림말이다. "내 거라고 말하긴 좀 애매한데......." 일단은 훔친 거니까, 하고 생각하는 프란을 향해 위저드 리그원 하나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애매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오? 분명 전(前) 비켈린 대장, 케인 칼슈비도가 초상화를 가져와서 소유자는 당신이니 조심해서 다루라고 했단 말이오." 확실히 이 가문에서 레이니아 왕비 초상화의 소유권을 주장할 사람이 있다면 프란뿐이다. "파시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위저드 리그원이 난데없이 소리쳤다. 말이 파시오지, 그 눈빛 때문에 프란에겐 '그림을 팔지 않으면 당장 너를 산채로 데려가서 마법 재료로 쓰겠다, 우어!' 로 번역되어 들렸다. "뭘 말이야?" 프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긴 뭐요, 초상화지! 대체 우리 얘길 뭐로 들었소?" "엉?" 이번에야말로 진정 놀랄 차례였다. 이미 가져갔던 물건을 팔라니? 게다가 그 그림은 전리품 비슷하게 가져온 것이라 프란에겐 별다른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 보고 있으면 '어디가 닮았단 거야!' 하고 데굴데굴 구를 수 밖에 없는 민망한 그림이기도 했다. 프란이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인상을 쓰는데 그 얼굴을 오해했는지 위저드 리그원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상화는 우리한테 너무도 소중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오. 당신이 갖고 있어봤자 감상밖에 더 하겠소? 하지만 우리는 다르오. 그 초상화에서 여러가지를 알아낼 수도 있단 말이오." "뭘 알아낼 수 있다는 건데?" "대륙 최고의 여인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제, 뭘 먹었는지, 드리비아와의 성생활은 어땠는지!"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적은 마법사가 물어주길 기다렸다는 양 잽싸게 소리쳤다. 고작 그거냐 싶어 프란은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그림 한 장에 얼마나 많은 기억과 정보가 담겨 있는 줄 아시오? 그런데도 그림의 원래 주인인 당신이 신경 쓰여서 이런 짓 저런 짓도 아직 못해봤소." '이런 짓 저런 짓은 대체 뭐냐!' 프란은 속으로 불을 뿜었다. 바로 그 순간, 여태껏 아무 말 없이 간절한 눈으로 프란을 보고만 있던 중간 나이대의 위저드 리그원이 앞으로 나섰다. 시온의 감시관이기도 했고 반을 치유해주기도 했던 7써클의 마법사, 로디다. 로디는 프란의 바로 앞에서 조그맣게 주문을 외웠다. 프란이 흠칫 물러서는데 일순 그녀의 눈앞에서 은빛이 번쩍하고 일어났다. 마법이다! 프란이 속으로 소리치기가 무섭게 빛이 멈추면서 눈앞에 거대한 자루가 드러났다. "이 자루를 열면 실험에 사용했던 시체가 들어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현실 가능성이 있는 상상을 하며 프란이 음습하게 물었다. 자루의 모양이나 크기가 성인 여성이 웅크린 크기와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프란의 의심을 부정하며, 위저드 리그원들이 자루의 윗부분을 고정하고 있던 끈을 풀었다. 그러자 방금 전 마법을 쓸 때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밝은 빛들이 자루에서 앞 다투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프란은 경악 때문에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루 안에 가득 담긴 건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였다. "지금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최선이오. 부디 그림을 넘겨주시오." 위저드 리그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프란은 경악으로 얼어붙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물정 모르는 마법사들답게, 위저드 리그원들은 하나같이 '왜? 모자라? 안돼. 그걸로 참ㄴ아줘.' 라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 케트쯤 될 거요. 위저드 리그원들 모두가 전장에 불려나가 반년을 꼬박 뛰어야 벌 수 있을까 말까 한 돈이지. 제발 모자라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모자랄 리가 없잖아!' 이 정도 금화라면 빚을 갚고도 남는다. 남는 것도 보통 남는 게 아니라서 프리텐 가를 일으키고도 또 남을 것이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우리는 지금 당장 레이니아 왕비에게 가겠소!" "가긴 어딜 간단 거냐!......... 으악! 악! 어이!" 프란이 소리쳤건만 위저드 리그원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들어올 땐 문 열고 들어온 주제에 나갈 땐 마법을 썼던 것이다. 프란이 딴소리 하기 전에 사정 설명하고 금화 놓고 튄다는 게 원래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날 밤, 위저드 리그원들은 성공했다며 날뛰었고 프란은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잤다. * * * 프란의 현재 심경은 딱 두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뭐지, 이건.' 빚을 갚을 수 있다. 빚을 갚고 대마왕과 이별할 수 있다. 진짜로 이번엔 영원히 안녕이다. 그것이야말로 카르멘 가에처음 들어서던 순간부터 프란이 간절히 바라왔던 것이었다. "뭐냐고, 이 어이없는 사태는!" 몇 달 전의 프란이었다면 바로 반의 방에 들어가 기세등등하게 금화 자루를 집어던지고 '끝이다, 빌어먹을 대마왕아!'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뭔가. 크레인을 질질 끌고 반의 방에 가고 있는 이 발은.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발이 왜 움직이느냔 말이다. '아악! 아악! 아악!' 프란은 있는 대로 오두방정을 떨며 반의 방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혼돈의 탭댄스를 췄다. 그런데 프란의 저질 탭댄스를 가로막으며, 반의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례식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룬의 목소리였다. 프란은 그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 몸을 세웠다. 또 누가 죽었나 싶었던 것이다. "언제 돌아온다고 했나?" "두 팀 모두 모레 올 겁니다." "돌아오는 즉시 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프란은 그제야 얼굴 하나가 앞을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케인...........' 케신 일행이 케인의 주검을 찾으러 갈 때, 하질리언과 더불어 머리짜내가며 지도를 그려줬던 기억이 그제야 떠오르는 프란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레 돌아온다. 차가운 적색산맥에 묻혀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던 그 남자, 얼음 같은 그 땅에 묻힌 채 주인이 데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말없던 남자의 주검이. "음?" 반과의 대화를 마치고 문을 열었던 룬은 크레인을 잡은 채 꼼짝 않고 얼어 있던 프란을 보며 놀란 소리를 냈다. '이놈, 안 들어가고 뭐해?' 프란은 룬이 열어놓은 문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반은 문에서 등을 돌린 상태, 그러니까 프란을 등진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젠 들어가도 된다." 룬은 프란의 팔을 쳤다. 그러나 프란은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반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룬은 '제길, 이놈. 또 나를 무시했겠다! 이 아인켈 대장을!' 하고 씩씩거리며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프란은 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거기에 선 채 반의 등만 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빛 사이로 사라질 것 같은 그 등을, 강해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아픔을 참고 있을 뿐인 그 등을. 얼마나 그렇게 보고 섰을까. 가슴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아니야, 프리나. 아직은 못 가.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프란에겐 너무도 분명하게 들렸다. * * * 두 남자으 ㅣ주검을 찾으러 갔던 각각의 팀은 시간을 맞춘 듯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카세타에서 히스의 주검을 가져온 란돌과 로키에겐 지친 기색이 없었지만 적색산맥까지 다녀와야 했던 케신 일행은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대장!' 석문 앞에 선 채 케신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현(現) 비켈린 대장 켈리는, 케인의 관이 보인 순간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나머지 비켈린들도 눈을 꾹 감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가주를 대신해 목숨을 던진 분이다.' '자랑스러운 대장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가주 앞에서 울 순 없다. 비켈린들은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입술을 짓이기고 주먹을 있는 힘껏 쥐면서. 그러나 그런 그들과 달리 이미 눈시울이 ㅓㄹ겋게 충혈 되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이제 온 거냐, 이 무정한 자식들아?" 룬은 두 개의 관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무지 멈춰지지 않는 감정들이 이 사내의 온 눈동자를 채우고도 넘쳐서, 룬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주님은 아일린을 성공적으로 되찾으셨다. 너희들, 보고 있었겠지? 분명히 하늘에서 웃으면서 보고 있었겠지?' 케인가 히스. 둘 다 룬에겐 무척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룬은 울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었다. 아일린 가의 모든 사람들은 성 안에 있는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 광장에는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함께였다. 지금 막 도착한 히스와 케신 외에도 아일린 가 탈환에서 희생된 다수의 사람들이 관 안에 누운 채 광장에 있었던 것이다. 아일린 가 사람들은 죽어서도 아일린의 영지에 묻힌다. 그것은 아일린가의 무수한 불문율 중 하나였다. 그리고 희생된 이들의 장례식을 다소 늦추게 만든 두 개의 관이 수많은 관들 옆에 누운 순간,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손을 모아주십시오." 장례식을 위해 신전에서 데려온 신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손을 모았다. 발밑까지 길게 흘러내려오는 나풀나풀한 법복을 입은 신녀는 천천히 제문을 읽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어깨를 떨며 울었고 몇몇 사람들은 입술을 물며 눈물을 참았으며 몇몇 사람들은 먼 하늘을 보았다. 프란의 옆에 서 있던 반은 하늘을 보는 쪽이었다. 반은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하늘을, 지금 당장이라도 조각 날 것 같이 투명하고 맑은 세이피안 하늘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프란은 반의 움켜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보았다. * * * 케인을 비롯한 모두가 따뜻한 언덕에 묻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반은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사람들은 썰물처럼 흩어진 뒤였다. 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추억하는 사람이 같은 이와 한데 모여 밤 내내 죽은 자를 추억하는 자리를 마련했지만, 반은 어떤 추모회에도 가지 않았다. 자신이 참석하면 모두가 마음껏 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례식 내내 한마디도 못했던 프란도 반을 따라 그의 방에 들어선 건 마찬가지였다. 합동 장례식은 생각보다 예식이 복잡해서,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괜찮은 거냐?' 프란은 마음속으로 반에게 물었다. 가뜩이나 말이 없는 반은 하루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케인의 관이 땅 속에 묻히는 그 순간에마저도. 반은 아무 말 없이 벽장 앞으로 갔다. 벽장 안에 진열되어 있는 파인트를 꺼내든 반은 단번에 뚜껑을 열었다. 온 방 안에 술 냄새가 확 번졌다. 검사는 왠만해선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적은 기운이라도 분명한 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은 마시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왜 안 울어? 울란 말이다. 이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아!' 보고 있는 게 괴로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반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파인트를 병째 마시기 시작했을 뿐. 일반 술잔보가 훨씬 작은 잔에 따라 천천히 마셔도 취할 수 밖에 없는 그 술을, 반은 꼭 물처럼 들이켰다. '반.........당신이 다시 웃기를 바랍니다.' 케인은 그렇게 말했다. 숨이 끊기는 그 순간마저도 스스로가 아닌 반을 걱정하면서. 반은 프란이 앞에 있다는 것마저 잊은 듯했다. 한 병, 두 병, 세 병. 프란은 지칠 줄 모르고 술과 원수진 사람처럼 병을 비워나가는 반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 해주고 싶지만 도무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는 프란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프란은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병, 두 병. 반이 총 다섯 병의 파인트를 마셨을 때에야 프란은 입을 열었다. "저번에 생각한 건데......" 술기운에 눈이 약간 붉어진 반이 프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의 눈동자에 들어온 프란은 괴상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한 대 때리자마자 큰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한 어린애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몰라 하는 사람처럼, 프란의 얼굴은 당혹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옛날에 케인이 울지 말라고 했던 건,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아요." 기껏 말했는데도 반으로부턴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프란은 주먹을 꾹 쥐고 말을 이었다. 케인이 정말로 바랐던 것을 프란이라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프란은 말해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강해지라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강해지지 않아도 되잖아요." 반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 채로 프란은 계속 말했다. "이건 진짜로 마지막이고......"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창을 통해 얼굴을 내민 달빛이 돌아선 프란의 어깨를 반쯤 잡아먹고 있었다. ".........여기엔 아무도 없으니까." 프란이 돌아선 지 한참 만에 뒤에서 술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반은 그 후로 무언가를 했겠지만, 프란은 뒤돌아서 있었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다만 프란은 바랐다. 반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케인의 죽음을 슬퍼해줄 수 있기를. 자신의 짐을 이 순간에나마 잊고 순수하게 반 개인으로서, 케인을 위해 울어줄 수 있기를. 프란은 뒤돌아선 상태로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반은 나가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울어도 되니까. 안타까움 때문에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인 프란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등 쪽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 것은. "어?" 프란의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믿을 수 없어서 프란은 돌아설 수 조차 없었다. 프란의 등에 얼굴을 묻은 반이 팔을 뻗어 프란의 허리를 감은 건 그때였다. 놀란 프란은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러질 못했다. 프란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대마왕............' 반의 얼굴이 닿은 등이 축축했기 때문이다. * * * 프란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해가 이미 창문에 걸렸건만 밤 내내 한숨도 못 잔 것이다. 결국 프란은 이불을 걷으며 벌떡 일어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잿밤 내내 얼마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뒹굴었던지, 프란의 머리에는 다섯 마리의 까치가 집을 짓고 있었다. "........ 한숨도 못잤다." "그래 보인다." 혼자서 중얼거리던 프란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정신을 완전히 놓고 있었긴 놓고 있었나 보다. 하질리언이 방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눈치 채지 못한 걸 보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하질리언은 프란의 침대 앞에 선 채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프리나. 도대체 뭐야?" "뭐가 또?" 프란은 힘없이 되물었다. 어젯밤에 자신을 뒤에서 안았던 주제에, 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금세 잠들어버렸다. 그 바람에 미친듯이 놀란 상태로 방에 들어와 엉겁결에 침대를 번쩍 들었던 프란이다. 이젠 대마왕의 얼굴을 대체 어떻게 봐야 하나. 심란해서 더 이상은 생각할 여유도 기력도 없는 프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호통을 쳤다. "금화 말이야!" 갑작스러운 '금화' 라는 말에 프란이 움찔했다. "봐, 봤냐?" "침대 밑으로 비죽 나와있는데 못 보는 게 이상하겠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말 안 했어?" 하질리언은 침대 밑에 놓여 있는 자루를 툭툭 찼다. 위저드 리그원들과의 일방적인 거래가 끝난 후, 일단 침대 밑에 금화 자루를 처박아뒀던 프란이다. 그런데 노크 한 번 없이 불쑥 들어온 하질리언이 이 거대한 자루는 뭔가 싶어 풀어봤던 모양이다. "빨리 말해!" 하질리언의 눈이 이런 엄청난 비밀을 감추고서도 자신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프란에 대한 배신감으로 떨리고 있었기에, 프란은 한숨을 쉬면서도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설명해주는 수밖에 었었다. 그러나 위저드 리그원들과 있었던 모종의 거래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하질리언은 어이없다는 듯 묻고 있었다. "레이니아?" 말을 하진 않았지만 '네가? 흥,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하고 비웃을 법한 얼굴이었다. '나도 아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프란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대답해주었다. "현상 수배전단 기억 안 나냐? 네가 양심없이 예쁘게 나왔다며." 금세 말뜻을 알아들은 하질리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레이니아 왕비였다고?" "응" 자초지종을 들었음에도 하질리언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봐도 안 닮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어떻게 네가 감히 대륙 최고 여인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를 보는 일이 유쾌할 리 없다. 프란의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고 하고 있던 그땨, 간신히 당혹을 수습한 하질리언이 물었다. "그래서?" 프란은 인상을 그었다. "뭐가 그래서야?" "왜 빚 갚고 안 떠나는데?" 이번에도 정곡을 찌른 하질리언의 질문 때문에 프란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커튼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눈가로 모였다. 한참이나 뒤척이며 그 햇빛을 피하려 했던 반은 한순간 깜짝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토록 독한 파인트를 다섯 병이나 물처럼 마셨건만, 어젯밤 기억은 한순간의 왜곡도 없이 그대로 기억 속에 재생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프란을 안았던 기억이 떠오르자 반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졌다. 잔뜩 당황한 와중에도 반은 얼른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이 된 지 오래다. 이제 30분 후면 프란이 음식을 갖고 올 시간이다. 반은 후다닥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로 당황한 채였지만, 반은 일단 샤워실로 향했다. 그러나 샤워를 하면서도 어젯밤의 기억은 집요하게 반의 머릿속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 기억에 하질리언의 불쾌한 웃음소리가 겹쳐서 들려와, 반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런데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도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몇번이나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반의 귀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반은 물을 틀어놓은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프란을 봐야 할지 아직 결정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에겐 다행스럽게도, 약간 열린 샤워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목소리는 프란의 것이 아니었다. "가주님, 키네세스 공주님이 오신답니다!" 정말로 기쁘다는 듯 외치고 있는 그 목소리는 룬의 것이었다. * * * 아직 이른 새벽이건만, 카세타 왕실의 문장이 찍힌 마차는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키네세스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자신이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초조했던 것이다. "아!" 한순간 키네세스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키네세스의 눈 속으로 아일린의 장엄한 모습이 들어왔다. 전투가 있었기에 상당 부분 무너져 있을 거라는 키네세스의 예상과는 달리, 아일린가는 처음 그녀가 여기 왔을 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뻗어나가 있는 첨탑들과 세월의 품위를 머금고 있는 성곽들,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조각된 아일린의 석문마저도 그대로다. 그 모습을 보며 키네세스는 적이 안심했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심하기가 무섭게 이번엔 또 다른 걱정거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어떡하죠? 예상보가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어요." 마차 안으로 고개를 다시 넣으며 키네세스가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일린 탈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전언을 듣자마자 키네온에게 반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던 그녀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진 그 즉시, 키네세스는 이곳으로 향한 참이었다. 그러나 너무 서둘렀던 모았이다. 아직 일곱시도 되지 않았는데 아일린 가의 석문이 보이는 걸 보면. "이른 아침에 도착이라니, 부끄럽네요." 키네세스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하는데, 그녀의 수행원이자 보디가드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기사가 잽싸게 말을 받았다. "무슨 그런 말씀을? 사랑하는 분을 더 일찍 볼 수 있잖아요." 키네세스와 동행한 여기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나이스였다. 런스가 아일린에서 안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걸 알기에, 런스를 대신해 키네세스의 수행원을 자처했던 그녀다. 아나이스의 호탕한 대답에 키네세스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날 놀리는 건가요?' 키네세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나이스를 보았다. "그란젤 경은 얼굴이 확 피었군요. 좋은 소식이 둘리던걸요?" 장난스럽던 아나이스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에, 에이. 설마 벌써 퍼졌을 리가 없어요. 달링이 저한테 청혼했다는 얘기는." 손사래 치며 말하는 아나이스 때문에 키네세스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케이온 기사단의 한 명 한 명이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 해왔던 키네세스였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아나이스다. "그란젤 경이 기사단 모두에게 자랑하고 다니는 걸 제가 봤는걸요? '이젠 기정사실이다. 형수님이라고 불러!' 라며 키에르 경한테 소리치는 것도 들었고." "에엣! 그런 걸 보셨단 말입니까? 부끄러워요, 공주님!" 말은 '부끄러워요.' 인데 얼굴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공주님도 확 잡아당기세요. 덮치는 겁니다. 저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자랑스레 말한 아나이스 때문에 키네세스는 이번에도 웃어야 했다. "무리에요, 그란젤 경. 덮치다니." "해보면 별거 아니랍니다."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무서운 말을 잘도 해대는 아나이스 폰 그란젤. 올가을 그녀가 런스 카르멘과 결혼할 거라는 사실은 아직까지 (모두가 아는 ) 비밀이다. "키네세스 공주님!" 마차가 석문 앞에 멈춰서자마자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던 룬이 달려나왔다. 심지어 룬은 그답지 않게 정중한 태도로 마차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처음 키네세스가 아일린에 왔을 때 보였던 사무적인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룬이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내민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던 키네세스 공주는 '환영합니다.'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룬의 밝은 표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룬. 그때......" 그때 내가 도움이 못되었지요, 라고 말하려는 키네세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룬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천만에요, 공주님! 우리들 중 누구도 공주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아일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완전히 공주님 덕이었는걸요. 왕실 마법사를 빌려주기 위해 공주님이 애쓰셨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공주님을 원망하는 놈이 있다면, 이 룬! 이 룬 로스가 대갈통을 부숴버릴 테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하!" 룬은 호방하게 웃었다. "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공주님! 저희는 무조건 환영입니다." "무엇을요?" 그렇게 묻는 키네세스를 향해 룬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벌쭉 웃어 보였다. '반드시 여주인이 되어주십시오!' 키네세스가 도착한 일주일 뒤, 아일린 가에선 공주 환영회와 아일린 탈환 기념을 겸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 * * 하질리언은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하여간 이상한 집안이라니까. 일주일 전엔 장례식을 하더니 오늘은 파티를 한다고 그러고. 뭐가 이래? 순식간에 파티 준비가 끝나는 이 수상할 정도로 민첩한 속도는 또 뭐고?...... 하긴,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지." "다 좋은데 왜 여기서 옷을 갈아입고 난리야? 미쳤냐?" 하질리언이 막 넥타이핀을 고정하고 있던 그때, 침대에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던 프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질리언이 영 비정상적인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방 놔두고 왜 남의 방에 와서 옷을 갈아입는단 말인가? 아무리 서로 이성으로 보는 사이가 아니라 해도 여자가 보는 앞에서 바지까지 갈아입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네 방으로 가란 말이다! 네 방으로!" 프란이 소리를 질렀건만 하질리언은 싹 무시하며 미소 지었을 따름이다. "왜 저기압이지, 프리나? 미남이 일주일 내내 공주님이랑 둘이 있어서? 넌 요 며칠 미남 얼굴도 못 봤지?" "시끄럽다!" 하질리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남 같은 말투 쓰지 마. 웃겨." "시끄러! 대마왕이 공주님이랑 있든, 일주일 동안 못 봤든 그게 뭐 어떻다고? 일주일 동안 검 연습 한번 실컷 했네!" 허나 말과는 달리 프란의 표정은 과희 좋지 않았따. 일주일 전 키네세스가 도착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프란은 반을 단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 밤, 장례식이 있었던 그 밤이었다. 심지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룬이 며칠ㄷ ㅗㅇ안 방에서 쉬어도 좋다는 말까지 해왔다. 그래서 프란은 정원 뜰에 나가 하루 내내 검 연습만 했다. 그사이 반은 무섭게 불타오르는 룬과 아인켈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키네세스와 더불어 아일린 각처를 돌아다니거나 함꼐 식사를 했다. "프리나, 봐바. 이렇게 보니까 나도 꽤 멋있지 않아?" 갑작스레 들려온 하질리언의 목소리에, 프란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확실히, 평소완 달리 회색 정장을 차려 입고 넥타이까지 멘 하질리언은 제법 근사해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면 뭐 하겠는가. 어릴 때부터 하질리언과 함께 자라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프란에게 그 모습은 호박에 줄긋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오우거 입술에 립스틱일 뿐이었다. "하나도 안 멋있다, 이 자식아." "내가 미워도 거짓말은 안 되는 거야, 프리나." 프란이 거짓말 좋아하시네, 하고 비웃어봤자 저 마이페이스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무너뜨릴 수 있을리 없다. 하질리언은 옷깃을 탁탁 털며 각을 잡는 것으로 치장을 ㄹ끝냈다. 그리고는 아직도 침대에 앉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프란을 향해 히죽히죽 또다시 기분 나빠 보이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늦기 전에 너도 옷 갈아입어." "옷은 무슨 옷? 이거면 충분해." 프란은 ㅅ자신이 입고 있는 시종 경장을 무심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웃고 있던 하질리언이 못된 딸 가르치는 어머니처럼 한숨을 푹 내쉰 건 그때였다. "정신 차려, 프리나. 상대는 일국의 공주님이라고! 그런 옷으로 대체 어떻게 상대를 하겠다는 거야? 전투복을 마련해야지, 전투복을! 하여간에 기본이 안 되어 있다니까." "..........제발 네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생각해라." 오늘도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는 하질리언을 보며 프란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아물이 말해도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완고한 어머니에 대한 반항 같다. 하질리언은 그런 프란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누르며 다시 한 번 히죽히죽 웃었다. "프리나. 물론 넌 지금도 충분히 예뻐." 하질리언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프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 무섭다. 진심으로 무서워, 이 자식.' 공포로 떠는 프란을 향해 하질리언이 말했다. "그렇지만 넌 충분히 더 예뻐질 수 있어. 바탕이 나쁘지 않으니까. 어차피 여자인 거 다 들통 났는데, 메이드복이 아니라 시종복을 입고 있는 것도 예전부터 거슬렸어. 오늘은 못 빠져나간다! 하하!"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프란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 * * 파티 시작까지 삼십 분을 남겨둔 아일린의 회장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그릇을 옮기고 꽃을 정리하는 하녀들의 발소리가 여지없이 울리는 가운데, 누구보다도 꼼꼼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잠정적으로 정초원장을 대리하고 있는 레오니아다. "똑바로 못하겠어?" 한순간 뭘 발견했는지 레오니아가 도끼눈을 한 채 소리쳤다. 그 바람에 회장 안에서 파티 준비를 하고 있던 모든 하녀들은 허깨를 움츠려야 했다. 현재 레오니아는 하녀들에게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 물처럼 조용한 여성이건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 돌변하는 게 또 레오니아였다. 일전 장례식 준비 때도 레오니아에게 단단히 당했던 하녀들은 이번엔 도대체 무슨 트집을 잡을까 생각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손을 모아야 했다. "거기, 너! 그릇에 묻은 티가 보이지도 않아?" 티라고 해봤자 돋보기로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마한 것이었다. "커튼은 이게 뭐지? 리본이 너무 꽉 조여졌잖아!" 커튼을 담당하고 있던 하녀의 안색이 하얘졌다. "식탁보는 왜 이래? 정중앙에 장미가 보이도록 깔라고 얘기헀는데 오른쪽으로 2지나나 쏠려 있어, ....... 한 테이블에 초는 열두 개씩만 놓으라고 했지! 너무 어두워도 너무 밝아도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 이봐, 너 앞치마가 삐뚤어졌어! 내가 그런 것까지 지적해줘야 하니? 그리고 너. 어딜 보는 거야? 너 말이야, 너! 케이크를 거기에 두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쪽으로 가져와!.... 넌 머릿수건을 좀 더 단단히 고정하도록!" 쉴 새 없이 흠집을 찾아내는 레오니아를 보며 모든 하녀들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완벽에 완벽을 가하도록 훈련을 받은 그녀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처럼 지적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레오니아는 파티 준비를 위해 태어난 여신 같았다. '가주님이 성인식만 치르면 넌 그날로 당장 강등이라고! 그걸 알아야지.' '공주님도 오셨고 말이야. 이제 성인식도 얼마 남지 않았어!' 하녀들은 잔뜩 풀 죽은 얼굴을 하면서도 속으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찌됐든 하녀들의 피눈물로 준비된 파티가 곧 시작될 것이다. * * * 대륙 최고의 연주가들이 혼을 다해 만들어낸 음악이 파티장 안을 달콤하게 채웠다. 크리스털 받침대 위에 올려진 수백 개의 초가 빛나는 가운데,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산해진미가 곳곳에 놓여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회장 바닥은 사람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했고, 로이네트 산지의 최곡브 원목으로 만든 테이블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테이블보에서 새겨진 연한 핑크의 장미 자수보다 훨씬 붉은 생화 장미가 테이블 위에서 향기를 발하는가 하면, 흠잡을 데 없는 몸가짐의 시종과 하녀들이 웃는 얼굴로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오늘의 파티는 아일린 가 탈환 기념을 겸해 준비된 것이기도 한만큼, 아일린 외부의 인사들도 상당수 초청되었던 차다. 반이 계승식을 완수하고 돌아온 아일린의 주인이라는 사실, 모든 반대파를 몰아내고 흠잡을 데 없는 가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질수록 좋기 때문이다. 아일린가의 파티는 그동안 대부분 비공개로 개최되곤 했다. 내부 인사들끼리 모여 거나하게 즐기는 자리 정도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아일린 방문 기회를 맞은 세이피안 귀족들은 만사 다 제치고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오늘이 아니라면 언제 라어 강의 그 도도한 물결을 볼 것이며 저 정교한 석문을 볼 것인가? 오는 내도록 감탄을 연발했던 귀족들이 레오니아의 감독 하에 준비된 완벽한 파티장에 할 말을 잃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네.' 아일린은 전투의 흔적 따위 한 달 안에 지워버리고 이처럼 화려한 파티를 열 수 있는 대단한 저력의 가문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레오니아는 사람들의 놀란 얼굴을 보며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레오니아의 품위 있는 얼굴 위로 잠시간 향수가 번졌다. '누가 뭐라 해도 이진느님은 훌륭한 정초원장이었어. 난 그분 옆에서 그분이 하는 일을 보고 배웠지.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해야 해.' 레오니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비켈린 대장 켈리 역시 초청된 사람들의 반응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카르멘가에서 몇년간이나 숨죽이는 생활을 감내했던 그녀인만큼, 아일린가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켈리는 손님들의 반응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옆에서 그 큰 입을 더 크게 벌리고 웃어대는 룬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죠, 아인켈 대장?" 룬은 파티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상태였다. 어찌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이미 술을 세 병쯤 마신 취객처럼 보일 지경이다. "내 꿈이 이루어질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켈리! 일주일간 난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 가주님한테까지 일이 올라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어. 그 덕에 가주님은 공주님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셨지, 으하하하하!" 켈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시급한 서류를 가지고 반의 방에 갈때마다 그 앞을 막아서던 룬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주님과 공주님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묻어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던 룬이었다. "공주님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여주인상이다! 아름답고 상냥하며 영리하시고 무엇보다 행동력이 강한 분이지. 공주님의 진면목을 못 본 네가 내 말을 못알아듣는것도 이해 안가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공주님은 가주님과 천생 배필이야!" 허나 목에 힘줘가며 말한 룬 무안하게, 켈리는 무뚝뚝하게 답했을 뿐이다. "글쎄요." "글쎄요, 라니?" 룬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켈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룬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이 당신은 모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해서 룬은 순식간에 기분이 상했다.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라. 날 무시하는 표정 짓지 말고." "됐습니다, 아인켈 대장." "너! 난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룬이 길길이 날뛰었으나 켈리는 차갑게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눈을 보는 거다, 켈리!" 룬이 씩씩거리든 말든 이미 파티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악사들이 함께 온 연인들을 위해,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인연을 만들어내는 이들을 위해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아직 파티의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자연스레 춤을 추고 있었다. "가주님이 오십니다!" 이윽고 회장 입구에서 주인공의 입장을 알리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란돌의 목소리다. 룬은 별을 백 개쯤 집어넣은듯 눈을 빛내며 입구를 보았다. 과연 그의 기대대로, 키네세스와 반이 나란히 입장하고 있었다. 정말로 잘 어룰리는 한 쌍이다. 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그토록 여주인으로 섬기고 싶어 하는 키네세스 공주는 반의 팔짱을 낀 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룬의 얼굴도 행복감으로 달아올랐다. * * * 회색 정장에 넥타이까지 멘 주제에 아직도 하질리언은 파티장에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방에 들어와 '물건' 을 꺼내든 차다. "후후후." 하질리언은 음흉한 미소 지으며 침대 한편에 고이 모셔뒀던 드레스를 집어들었다. 이 차림 그대로 파티장에 가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프란을 방에 감금해둔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던 하질리언이다. '언젠가는 오라비한테 고마워하는 날이 올 거야, 프리나. " 하질리언은 콧노래를 부르며 드레스에 손상된 곳은 없나 살피고 있었다. 드레스는 파티가 열린다는 걸 3일 전에 알았던 하질리언이 아릴린가 영지 안의 최고급 상점에서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었다. 서른벌의 드레스 후보를 놓고 하루 종일 고민했던 하질리언은 마침내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선택할 수 있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드레스는 무척 비쌌다. 그 돈이 어디서 났냐고? '뭐, 프리나를 위한 거니까 프리나가 투자해야지.' 요 일주일 검술 연습으로 기지맥진한 채 잠들었던 프란이다. 하질리언은 프란이 자는 사이 몰래 방에 들어가, 금화 몇 개를 슬쩍해 이 드레스에 모조리 투자한 참이었다. 도둑질을 한 주제에 하질러은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질리언이 고른 드레스는 훌륭했다. 절벽인 프란의 체형을 고려해 가슴이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를 고르는 배려까지 했던 것이다. 보석이 잔뜩 박혀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디자인이 훌륭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질리언은 드레스를 품에 안은 채 프란의 방으로 갔다. "이거 안 열어? 나가면 넌 내 손에 죽는다!" 방에 갇힌 프란은 철책에 갇힌 야크처럼 날뛰고 있었다. 문에 몸을 쿵쿵 찍어대는 폼이, 바깥에서 걸어놓은 자물쇠가 박살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폭력적인 프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하질리언은 전혀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하질리언은 두려울 게 하나도 없다는 테도로 밖에서 잠근 문을 열려 했다. 발밑에 무언가가 밟히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건 뭐야?" 하질리언의 발에 밟힌 것은 장식이 없는 흰 상자였다. 하질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5분전에 프란의 방문을 잠그고 방으로 갔던 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없었는데? 하질리언은 상자를 들어 올리곤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보았다. 하질리언의 얼굴에 쩍 하고 금이 간 건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 나 죽네, 나 죽어." 하질리언은 배를 잡고 웃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그야말로 예상외의 물건이었다. * * * 회장 안의 분위기는 반과 키네세스가 동시에 입장한 순간부터 끝 모르게 고조되고 있었다. 세이피안의 남성 귀족들은 모두가 반 앞으로 다가와 한마디씩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모두들 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시도 안 떨어지더니 너무하잖아?" 남성 귀족들과는 반대로, 귀족 영애들은 반에게 한 걸음도 접근하지 못했다. 아일린 가주를 노리고 왔건만 아까부터 우락부락한 남자가 한 걸음을 옮기려 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봤던 탓이다. 그 남자는 두말할 것 없이 룬이었다. 그러나 룬이 없었다 해도 그녀들은 결국 반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림으로 그린 듯 반과 잘 어울리는 키네세스 때문이다. "공주면 다야?" "얼굴은 소녀같이 사랑스러운 주제에 몸매 좋으면 다야?"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팔다리는 비쩍 말라서 글래머면 다야?" 욕을 한다는 게 결국은 죄다 칭찬이 대버리고 마는 키네세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 때문에 귀족 영애들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감히 반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저토록 높은 신분의, 게다가 아름답기까지한 공주를 제치고 반의 옆자리에 선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시기의 눈초리로 키네세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저 정말 행복해요." 그 모든 질투와 선망의 눈초리를 한꺼번에 받으며 키네세스가 말했다. 공주의 눈동자는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태까지 누려왔던 모든 행복을 합친다 해도 최근 일주일 치의 행복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일주일 전, 아일린에 도착한 키네세스는 반에게 말했다. "카르멘 경, 이건 좀 불공평한 것 같지 않나요? 전 당신에 대해 잘 알지만 당신은 저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일주일간은 저한테만 집중하세요. 답은 그때 들어도 늦지 않으니까." 여태껏 다소 수줍은 듯 반에게 접근해왔던 키네세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반마저 한순간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으니까. 하지만 키네세스로서는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아나이스가 남자는 그렇게 잡는 거라고 충고하지 않았더라도 그리 했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곤란한 낯빛을 했던 반은 한참 만에 침묵으로써 키네세스의 그 당돌한 제안을 수락했다. "오늘은 저하고만 춤추기로 한 거예요, 카르멘 경." 키네세스가 잊지 말라는 듯 반에게 말했다. 반은 대답이 없었지만 그 침묵이 긍정이라는 건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던 키네세스다. 이대로라면 오늘 대답은 좋다, 일지도 몰라. 키네세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그 순간, 키네세스를 응원하는 듯 음악마저 바뀌었다. 발이 저절로 까딱거릴 만큼 경쾌한 왈츠! 키네세스는 활짝 웃었다. "기억나나요, 카르멘 경? 제 생일날 이 곡에 맞춰서 춤을 췄잖아요." 그 말에 반도 악사들이 연주하는 섬세한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키네세스의 말대로다. 우연의 일치인지 무엇인지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이 멜로디는 카세타 왕궁무도회 때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키네세스는 반을 향해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자는 뜻이다. 반은 그 가냘픈 손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라고. 진짜 잘 어울리지?" 룬은 헤벌쭉 웃으며 주변 사람에게 물었다. 룬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드레스를 바다처럼 펼치고 있는 키네세스의 얼굴은 세상을 다 얻은 만족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긴 해도 스텝을 옮기는 반의 움직임 역시 그의 검만큼이나 멋졌다. '가주님.' 허나 와인을 마시고 있던 켈리만은 반의 시선이 계속 란돌이 서 있는 회장 입구 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문을 향해 온몸을 밀어붙이고 있던 프란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이 문이 박살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프란의 이 무식한 행동을 가로막으며, 갑자기 딸깍 하고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허리꼐에 매달린 실버 블레이드를 냅다 뽑아들었다. 사람 하나 잡을 기세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하진!" 프란은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나 프란의 응징대상인 하질리언은 잽싸게 복도 저편으로 달려 나가 안전을 확보한 뒤였다. "너 거기 안 서?" 프란이 요란하게 외치며 복도 저 끝에 서 있는 하질리언에게 뛰어가려는데, 하질리언이 신변의 위협마저 무릅쓴 채 목소리를 크게 돋워 소리쳤다. 물론 발은 계속 프란의 반대쪽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프리나. 밑을 봐!" "속을 줄 아냐?" 프란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하질리언을 쫓아가는 것은 포기했다. 해야 할 말을 마친 순간 하질리언이 그야말로 전력질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우당탕탕 들려오는 걸 보니 정말로 절박하게 도망가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눈이 돈 채 실버 블레이드를 든 프란의 몰골을 봤다면 누구나 하질리언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발 한번 빠르군." 프란은 졌다는 듯 중얼거리며 실버 블레이드를 검집에 다시 꽂았다. 그리고는 훅 하고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간을 끌기 위해 하질리언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프란의 눈에 하질리언이 아까 발견했던 상자가 들어온 건 그 때였다. 상자는 열린 상태다. 프란은 뭔가 싶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음?" 상자 안에 담긴 것은 뜻밖에도 A라인을 잔뜩 강조한 푸른빛의 드레스였다. 결코 화려하지도 장식이 많지도 않았으ㅏㄴ 잔뜩 잡힌 프릴 때문에 수수해 보이지도 않는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디자인이, 어쩐지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 시온이 입혔던 그 드레스랑 참 비슷했다. '이 자식이!' 프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질리언이 놓고 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프란이 신경질적으로 그 드레스를 꾹꾹 누르는데, 뜻밖에도 잘 접혀 있던 드레스 안에서 메모가 나왔다. 프란은 있는 대로 욕을 하며 메모를 들어 올렸다. 메모에는 딱 한 줄, 아니 딱 한마디 밖에 없었다. 입어라. 프란은 얼어붙었다. 이런 말투를 구사하는 사람은 프란이 아는 한, 한 명밖에 없었다. * * * 프란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비, 빚이 있잖아? 빚이 있으니까 입는 거라고!' 자기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을 하느라 프란은 벌써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레스를 입기로 결심하는 데만 장장 20분을 소요한 프란의 앞에 더 큰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무지 이 드레스를 어떻게 입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어떻게 묶는 거냐?" 프란은 울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리 부근에 길게 늘어진 줄을 리본으로 묶어야 한다는 것까진 눈치 챘지만 도무지 어떻게 묶는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아아악! 입어봤어야 알 거 아냐!" 프란은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프란은 스스로 화장이란걸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핀을 꽂는다거나 예쁜 머리장식을 한다거나 하는 일도 해본 적 없었다. 드레스?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을 때 적이 공격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세이피안 견습 기사단 시절에도 파티에 드레스를 입고 간 적이 없을 정도다. 시온이 억지로 입혔을 때나 데이메르 저택에 잠입하기 위해 입었던 적도 있지만, 그때도 시온의 하녀들과 락케이드가 입혀줬을 따름이다. 로지아의 하녀가 입혀준 건 드레스가 아니라 생선껍데기였으니 논외로 하자. "이건 또 왜 이렇게 안 올라가? 미치겠네." 프란은 얼굴을 우그러뜨린 채 뒤편에 있는 지퍼를 올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억지로 하려고 해봤자 상태만 안 좋아질 뿐이다. 이러다 드레스 터지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자 프란은 삽시간에 불안해졌다. 그 때였다. "안에 있어요?" 문 밖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니아?" 프란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더니 정말로 그녀, 레오니아가 들어섰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던 레오니아는 프란이 머리는 산발이고 뒤로 묶어야 할 리본은 떡하니 배 중앙에 무슨 매듭처럼 묶은 채 드레스 뒤쪽에 달린 지퍼를 채우기 위해 낑낑대고 있는 걸 보며 얼어붙고 말았다. ".........켈리 씨가 당신이 안 온다고 해서 와봤더니, 그 꼴은 뭔가요?" "엉? 켈리 씨?" 프란은 그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레오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제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 레오니아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프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프란은 등 지퍼를 반쯤 연 채 질질 끌려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순박한 눈을 한 채로. * * * 아인켈 소속인 란돌은 회장 입구에 선 채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터라, 이젠 입장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진 차다.때문에 다소 방만한 자세로 서 있던 란돌은 한순간 깜짝 놀라 몸을 곧게 세웠다.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헉! 완전 내 스타일!' 란돌은 입을 벌렸다. 키는 168지나쯤. 꽃만 꺾던 여성들은 감히 가질 수 없는, 운동으로 다져진 균형 잡힌 몸이 보인다. 엷은 푸른빛의 A라인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반쯤 틀어 올린 상태로, 드레스 밑으로는 흰색 구두를 신어 완벽한 코디를 자랑하고 있는 그 여성. 귓가에 매달린 진주 귀고리도 차림에 잘 어울렸다.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진하지 않다. '말이라도 한 번 걸어봐?' 아인켈 소속이라곤 해도 란돌 역시 카세타 귀족 출신이다. 다가오는 여성이 세이피안 귀족 영애라고 생각한 란돌은 한 발자국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 우아한 여성이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기회다!' 흑심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던 란돌은 얼른 다가가 그 여성의 팔을 부축했다. 그걸 삼아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팔을 잡은 그 순간, 란돌은 기절할 뻔했다. "어, 고맙다. ........ 제기랄 놈의 구두, 불편해죽겠네." 차림과는 안 어울리는 거친 말투, 거기다 익숙한 목소리이기까지 하다. 한참이나 이 목소리가 누구 목소리더라 하고 생각하고 있던 란돌은 한순간 발작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존재할 리 없는 괴물을 본 것처럼 란돌이 마구 손가락질을 했다. "으, 으아아악! 프, 프란 프리텐?" "엉. 왜?" 뭐가 문제냐는 듯 대꾸하는 프란을 보며 란돌은 입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온몸이 무거웠다. 허리를 잔뜩 졸라맨 드레스가 한 발자국을 움직일 때마다 몸을 옥죄고 있었고, 발바닥은 고통 때문에 끝없이 춤을 춰야 했다는 이야기 속 여자아이에게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쿡쿡 쑤시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기에, 프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란돌이 너무 놀라서 소개조차 하지 못한 차라, 회장 안에 있던 프란의 지인들도 지금 들어서고 있는 것이 가주의 시종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호오." "누구지?" 프란을 자신의 방에 데려갔던 레오니아는 '완벽하게 준비한 파티를 망치는 건 있을 수 없으니 당신도 완벽하게 꾸며야겠어요.' 라고 말하며 반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구두와 귀고리까지도 내어줬다. '피부는 좋군요.' 라고 말하며 화장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배려에도 불구하고 프란은 우거지상이었다. 무엇보다 발이 문제였다. 레오니아의 구두가 프란에게 맞을 리 없었던 것이다. '으악, 너무 아파!' 프란이 고통에 몸부림치건 말건, 회장의 사람들은 프란을 보며 나직한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뭐지?' 반의 손을 잡은 채 스텝을 밟고 있던 키네세스는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프란 쪽을 돌아보았다. 키네세스는 깜짝 놀랐다. 자신과 비슷한 물빛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물론 카세타 꽃중의 꽃이라 불리는 키네세스에 대면 그 미모가 못한 게 사실이지만, 그녀를 제외한다면 이 회장의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설마, 프란?' 키네세스는 한참만에야 그 여성이 프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깨달은 그 순간 키네세스는 흠칫 어깨를 사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반을 무의식중에 쳐다보았다. '아.' 일순 키네세스의 호수빛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방금 들어온 프란을 향해 못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놀라움은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을 만큼 또렷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키네세스는 순식간에 불안감에 휩싸였다. 예전에 키네세스는 프란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의 빚은 자기가 갚겠다고 말한 프란을 향해 반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키네세스 자신을 향해서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웃지 않았던 반이, 그렇게 말한 프란에게는 냉소 없이 웃어보였다. 애써 묻어두고 있던 그 사실을 상기하자 키네세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카르멘 경!" 참지 못하고, 키네세스는 소리 내어 반을 불렀다. 입을 꾹 다문 채 홀린 듯 프란을 보고 있던 반이 그 소리에 흠칫 키네세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경의 파트너는 저잖아요. 아직 음악이 끝나지 않았어요." 반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스텝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초.' 딱 10초였다,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 드레스 차림의 프란과 마주쳤던 것이. 반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그 여성이 묘하게 눈에 밟혔었는지, 1년이나 지난 후에도 그 여성을 기억할 수 있었는지. 검을 보는 데는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썰미가 왜 그때는 작동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반은 프란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키네세스를 보아야 했다. 키네세스는 작은 새처럼 떨고 있었다. 반은 키네세스의 손을 잡은 채 다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은 키네세스의 ㅗㄴ을 잡은 채 다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의 품에 안긴 채 음악에 몸을 맡기면서도, 키네세스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반의 눈길이 계속해서 프란 쪽을 향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 * 프란은 반과 키네세스가 춤추는 것을 보았다. 둘은 끝도 없이 스텝을 밟고 있었다. '아주 체력이 남아도시는구먼.' 프란은 쳇 소리를 냈다. 카세타 왕궁 무도회 때도 둘이서 춤을 췄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때 반을 키네세스 쪽으로 밀어냈던 건 다름 아닌 프란 자신이었다. '생일을 맞은 여자를 울리진 말아야죠.' 프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는 대마왕을 좋아하는 희안한 취미를 가진 키네세스 공주님이 불쌍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뭐, 뭐가 다르다는 거냐?' 프란은 저도 모르게 재빨리 누군가를 향해 변명했다. 그리고는 기분이 나쁠 만큼 잘 어울리는 대마왕과 공주님을 향해 등을 돌려버렸다. 뭐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계속 추고 난리냐? 프란이 그런 생각을 하며 와인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프리나, 맞지?" 프란은 순식간에 불쾌감을 떨쳐버리곤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단장님!" 혹시 했는데 역시 야샤휘다. 아일린가에서 파티를 한다고 하니 세이피안 귀족이자 기사단장인 아샤휘도 참여했던 모양이다. 아샤휘가 무사히 귀가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란이었지만, 막상 건강한 얼굴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프란은 발의 고통도, 배를 죄어 오는 리본의 압박도 잊은 채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아샤휘는 순수하게 감탄하고야 말았다. 예쁘게 잘 키워낸 딸을 보는 심정이랄까. "오늘은 정말 '몰라보게' 예쁘구나." 분명 칭찬이건만 프란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안 어울리는 거 다 아는데요, 뭘." "그게 무슨 소리냐?" 아샤휘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저편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샤휘는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보는 프란인데, 이대로 두고 가기가 망설여졌던 것이다. 프란은 그런 아샤휘를 향해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곧 오마." 아샤휘는 그렇게 말하곤 등을 돌렸다. 돌아선 아샤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아갔던 프란의 눈이 어느 순간 확 굳어졌다. 아샤휘와 동행한 듯한 두 명의 여인이 보였던 탓이다. 그 두 여인은 세이피안은 물론 라니아 대륙 어디를 가든 절대 볼 수 없을 기괴한 옷차림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젊은 여성은 머리에 새 한마리의 깃털을 다 꽂은 것 같은 붉은색 관을 얹고, 속옷 형태에서 아주 조금 길어진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이든 여성은 더 심했다. 몸에 뻗어 나온 저것이 과연 깃털 장식인지 창인지 의심될 정도다. 그 여성의 주위엔 저절로 지름 1휴나의 원이 생겼다. 말할 것도 없이 로지아와 그녀의 어머니였다. "오늘도 굉장하네." 사람들이 쳐다보건 쑥덕거리건 아랑곳하지 않고 파티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녀들을 보며 프란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래,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새삼 진리를 깨달은 프란이 두 주먹을 불끈 쥔 그 때였다. "프리나?" 잔뜩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옆쪽에서 들린 소리다. '누구야?' 오늘 참 아는 사람 많이 만나네.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프리나라고 부른 걸 보면 아일린 가 사람은 아니다. 프리나이던 시절 알던 사람 중엔 그리 나쁜 인간이 없었다. 다들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 역시 그들을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프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프리나로 살던 시절의 그녀가 싫어했던 몇 안 되는 인간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 인간은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프리나 맞지? 세상에, 여기서 만나다니!"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자 프란이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그자는 프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프란은 벌레를 천 마리쯤 털어 넣은 얼굴로 그 남자를 보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 표정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프리나, 나야. 기억 안 나? 찰린이라고!" 근 1년 만에 보는 것이지만 기억을 못할 리가 없었다. 찰린 마리케리티. 빚 액수도 모르는 주제에 결혼만 해주면 빚 갚아주겠다고 말하던 옆집 귀족 녀석이었다. * * * 찰린은 침을 있는 대로 튀기며 프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다니, 이건 운명이 분명해!" 운명은 무슨 얼어죽을 운명이냐, 라고 생각하며 프란이 노려보든 말든 찰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와, 못 본 사이 훨씬 더 예뻐졌구나! 역시 내가 첫눈에 반한 상대다워. ..... 그동안 내가 얼마나 널 찾아다닌 줄 알아?" 프란은 결국 입을 여는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거절했을 텐데. 네 형편없는 부하 녀석을 통해서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요샌 어떻게 지내고 있어? 아, 너한텐 미안한 일이지만 난 결혼했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프란은 다소 안도했다. 가정이 있는 녀석이라면 의외로 정말로 반가워서 말을 건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찰린의 말이 프란의 안도감을 박살냈다. "쳇, 지지리 못생기고 매력도 없는 여자랑 결혼했단 말이야. 이렇게 프리나랑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그런 여자랑은 결혼 안 하는 건데. 진짜 꿈만 같다, 프리나. 우리 밖에 나가서 단둘이 얘기 좀 할까?" "......... 한 대 치기 전에 닥쳐." 프란이 꿇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말했건만 찰린은 못 들은 척 하며 제 할 말만 할 뿐이었다. "빚은 갚았니? 아주 많았다며?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그 빚 갚아줄 수도 있어. 이번에 우리 영지 땅값이 좀 올랐거든. 수익을 좀 짭짤하게 봤지. 아! 내 별장에 놀러가지 않을래? 분명 마음에 들 거야. 둘이서 한 달쯤 묶고 오는 거야. 어때?" 찰린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기며 프란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패야 잘 팼다는 소리를 들을까.' 이대로 이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발로 주요 부위를 가격하는 게 좋을까? 검이 있다면 가격이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치근대는 이 빌어먹을 자식의 얼굴에 검상이라도 하나 만들어줬음 좋겠다고 프란은 생각했다. 레오니아가 드레스 차림에 검 메는 게 아니라며 실버 블레이드를 빼앗지 않았다면 큰 사단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웅성웅성.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프란은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올리는 프란의 눈에, 허옇게 질린 찰린이 보였다. 뭐지 싶어 시선을 더 들었던 프란의 눈이 한순간 굳어졌다. "내 시조에겐 무슨 볼일인가? 마리케리티 가의 천박한 장남." 숨막히는 존재감이었다. 자신보다 10지나는 더 큰 반이 손목을 붙잡은 탓에, 찰린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왜, 왜........ 아, 아일린 가주가.........' 아일린 가와 카르멘 가의 전투로 인해 이미 대륙엔 반의 정체가 파다하게 퍼진 참이었다. 최강의 검사이자 대륙 최고의 부자. 그러나 그런 수식어보다 바로 뒤에 서서 자신의 손목을 지금 당장이라도 뒤틀어버릴 듯한 이 악력과 저 차가운 얼굴이 더 무섭다. 찰린은 덜덜 떨면서도 방금 전 반이 했던 말을 상기하려 애쓰며 물었다. "시, 시종? 프리나가 말입니까?" 찰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프란을 보았다. "무슨 볼일이냐고 물어싸, 찰린 마리케리티." 들떠 있는 파티 분위기는 그 순간 착 가라앉아버렸다. 연주자들마저 당황하여 음악이 멈춘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반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지금 반의 얼굴은 대마왕 그 자체였다. 찰린 같은 허약한 귀족쯤 머리부터 아작아작 사탕처럼 씹어 먹을 무서운 대마왕 말이다. 룬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당혹하여 말을 못하는 가운데,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며 유일하게 미소 짓는 사람이 있었다. '이 녀석들 옆에 있으면 평생 심심하진 않겠군.' 하질리언이다. * * * 키네세스 환영회와 아일린 가 탈환 기념을 겸한 성대한 파티는 새벽이 가까워질 때쯤에야 끝났다. 키네세스와 반은 그제야 단둘이 남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그들 사이에서 하얗게 죽어나갔을까. 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 그러나 반보다 먼저 키네세스가 입을 열었다. "카르멘 경! 오늘 파티는 멋졌어요." 키네세스의 눈동자는 쳐다보기가 괴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 카르멘 가에서도 같은 파티를 열어주겠어요? 아바마마와 함께 꼭 참석할게요." 반으로부터 대답이 없건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까 당신이 그쪽으로 가버렸을 땐 너무 놀랐어요. 그래도 돌아와서 저와 마지막까지 춤을 춰주신 건 기뻐요. 오늘.........." 뭐라고 말하려던 키네세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어머, 왜 이러지? 키네세스는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다시 정신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카세타로는 언제 돌아오나요? 아바마마가 기다리고 계세요. 마법사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참! 그란젤 경과 런스 경이 결혼한다는 건 알고 있나요? 그란젤 경은 비밀이라고 하면서도 왕궁 전체에 소문을 내고 다녀서, 애는 셋 낳을 예정이라는 걸 아바마마까지 알 정도가 되고 말았답니다. 키에르 경은 남자 들러리 따윈 안 하겠다고 소리치지만, 아무래도 그란젤 경이 납치를 해서라도 시킬 것 같아요. ..... 두 사람,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분명 행복하게 살 거에요. ........그리고......" 키네세스의 말이 뚝 끊겼다. '더 이상은 무리야.' 키네세스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반을 올려다보았다. 키네세스의 눈동자에서 다시금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공주는 아름다웠다.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여성은 대륙 전체를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다. 어떤 남자가 그녀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반은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봐왔던 키네세스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 키네세스는 심장박동소리가 몇 배로 확대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카르멘 경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한 키네세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며, 반은 마침내 말했다. "..........미안합니다." 키네세스의 눈이 커졌다. '누가 당신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게 만드나요?' 새파랗게 질린 키네세스의 몸이 절망으로 떨렸다. 공주는 어깨를 모은 채 한참 동안 말없이 흐느꼈다. 또다시 대화가 단절된 둘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내려앉았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키네세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몸을 떨면서도, 눈물을 채 숨기지 못하면서도, 키네세스는 입을 열었다. "숨김없이 대답해주세요." 반은 키네세스를 응시했다. 키네세스는 한참 동안이나 드레스 자락을 만지며 말을 삼키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프란인가요?" 그 말과 함께 키네세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 * * 카세타도 따뜻한 지방이건만 세이피안엔 미치지 못할 것 같다. 마차에 한 발을 내밀다 말고, 키네세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게트 빵 모양을 한 구름들이 둥둥 떠가는 것을 보고 있는 키네세스를 향해, 그녀를 배웅 나왔던 룬이 섭섭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벌써 가십니까?" '파티가 어제 끝났는데, 가주님이랑 더 오래 계셔야죠!' 룬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키네세스는 룬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아름다운 공주님은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시선을 돌렸다. 키네세스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 중엔 룬이나 켈리, 반뿐만 아니라 프란도 있었다. 키네세스는 프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있는 대로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프란 역시 잠을 못 잤는지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많은 도움을 받았어, 당신한텐.' 프란이 아니었다면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프란에게 평생 보답하지 못할 만큼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비록 그때는 여자인 줄 몰랐지만. '카르멘 경!' 룬 등에게 작별의 인사를 끝마친 후 마차에 올라서는 듯했던 키네세스가 한순간 뭘 생각했는지 있는 힘껏 몸을 돌렸다. 그리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반을 향해 달려왔다. 사람들이 모두 눈을 홉뜬 가운데, 키네세스가 반의 뺨에 키스한 건 그 순간이었다. "엑?" "어어?" 한 나라 공주가 외간 남자에게 키스를 하다니! 모두가 경악 속에 지켜보고 있었건만 그중에서도 눈을 제일 크게 뜨고 있는 건 프란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말 한마디 못하고 입만 떡 벌린 가운데, 키네세스가 웃어보였다. 그녀는 반의 귀에다 대고 반만 들을 수 있도록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포기 못하겠어요, 카르멘 경. 너무 오래 지켜온 사랑인걸요." 속삭였던 키네세스는 이번엔 모두에게 들리도록 똑똑히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키네세스는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모든 사람들이 얼어 있는 가운데, 카세타 왕실의 마차가 출발했다. 제 9 장 행복의 조건 프란은 거울 앞에 선 채 어깨를 좍 펴고 있었다. "뭐, 이제 됐어." 한순간 프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공주님이 옆에 있으니까 이젠 괜찮겠지.' 떠나기 직전, 키네세스는 반에게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건 분명 성인식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뜻일 거다. 그렇지 않다면 한 나라의 공주가 남들 앞에서 그토록 대담하게 키스를 했을 리 없다. 프란은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언제 어느 때든, 아무리 힘들어도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아일린의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죄수들을 경악시키며 잘도 웃었던 프란이다. 모든 역경을 웃음 한방으로 넘겨버리는 사람, 그게 바로 프란 프리텐이니까. "하하하. 진짜 웃긴 표정이네." 그러나 오늘, 거울 속 프란은 분명 웃고 있음에도 울상이었다. * * * 반은 화가 난 걸음걸이로 프란의 방을 향해 걷고 있었다. 식사시간이 이미 30분이나 지났는데도 프란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간 반은 노크도 하지 않고 프란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왜 이렇게 늦나!" 소리쳤던 반은 움찔했다. 반조차도 처음 볼 정도로 수없이 많은 금화가 프란의 방 안에서 번쩍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은 그 금화들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뒤 자루에 옮겨 담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서 난 거지?' 제일 먼저 반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그거였다. 그런데 그때, 금화로 가득한 자루를 끈으로 봉한 프란이 몸을 일으켰다. 자루 하나는 바닥에 놔두고 다른 하나는 어깨에 멘 채였다. "그건 뭔가?" 금화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반은 물었다. 당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화 자루를 둘러멘 프란은 대답 대신 반을 향해 다짜고짜 금화 자루를 내밀었을 뿐이다. 거의 던지다시피 해서 건네준 프란 때문에, 반은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생각대로 자루는 묵직했다. "1천 5백만 케트입니다." 반은 흠칫 프란의 눈을 보았다. 프란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남은 빚, 방금 모두 정산한 겁니다." 나직한 그 목소리에 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 얼굴을 보며 프란은 말을 이었다. ".......오후에 나가겠습니다." 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린 빚으로만 이어진 관계다. 이제 그것도 끝이고.' 프란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 * 멀쩡한 화폐를 놔두고 금화를 사용하는 해괴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반은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위저드 리그원들을 모두 데려와라!" 무슨 정신으로 방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만큼 당황한 채, 반은 룬에게 명령했다. * * * 프란은 묵묵한 얼굴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단출한 짐이다. '진짜 끝났다.' 처음 프리텐 가를 떠날 때, 프란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의지할 검 한자루도, 최소한의 돈도, 지인조차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더미는 머리카락을 자르게 했고 남장을 하게 했고 기사 서임의 기회도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충분한 시간조차 잊었다. 그 참혹한 빚은 세이피안에서의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박살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란은 빚을 모두 갚았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지도 모른다. 7천만 케트를 1년 만에 갚은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프리나 프리텐. 그녀는 위험의 순간 가주를 구하고 지켰던 사람이다. 계승식의 두 주인공 중 하나였으며, 아일린 가주가 가문을 재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여성이기도 하다. 아일린의 직계이자 천재적 소질의 마법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청혼했건만 그것마저 거절한, 금발의 여성. 빚은 깨끗하게 청산되었다. 이제 이 대단한 여성을 구속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부터 뭘 하지?' 프란은 턱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은 프리텐 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락케이드의 가족을 데려오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기사 시험에 재도전해서 세이피안의 여기사로서 인생 제 2막을 여는 거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 검을 논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온다면 아이들을 불러 모아 무상으로 가르치는 것도 프란의 오랜 꿈이다. 욱씬. 프란은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에 멍한 얼굴을 했다. 맥 빠진 얼굴의 자신이 거울을 통해 그대로 반사되고 있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청사진이 갑자기 저편으로 물러난다. 총 천연한 컬러의 미래가 회색빛으로 퇴조하고 불쑥 한 얼굴이 솟아났다. 대마왕. '아, 괜찮아. 괜찮아. 공주님이랑 행복하게 살길 빌어주자.' 빌어먹을.. 또다시 가슴이 아파오고 있었다. 이건 병도 아니고 뭐란 말인가. 프란이 제길, 소리를 내며 짐을 다 챙긴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하질리언이 들어온 것은. 어젯밤의 드레스는 참 예뻤고 그걸로 미남의 심장은 확실히 뚫렸으니 공주님의 키스 따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 했던 하질리언이다. 허나 하질리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고민하거나 기뻐하는 프란이 아니라 이제 막 짐을 다 챙기고 떠나려는 프란이었다. "왜 짐을 싸고 난리야?" 하질리언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프란은 그런 하질리언을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갚았다, 빚." 프란은 반으로 줄어든 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 가겠다고?" "응." "미남은 어쩌고?" 하질리언은 놀라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프란은 담담했다. "이제 괜찮아. 아, 너도 같이 갈래? 일전에 나랑 사업하고 싶다고 그랬잖아." 생각났다는 듯 프란이 말했으나 하질리언은 그 말에 답하는 대신 인상을 구겼다. "이건 너답지 않아." "뭔 소리야?" 프란은 대수롭잖은 듯 대꾸했다. 그러나 하질리언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마이페이스 모드 따위 걷어치우고, 다정하고 다감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말했지, 솔직해지라고! 그게 행복해지는 첫 번째 조건이란 말이야. 왜 모르는 거야, 너는! 보고 있는 내가 이렇게 분명히 알 정도인데 왜 인정 안해? 왜 도망가고 난리야, 너답지 않게!"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프란이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은. "젠장, 그럼 날더러 어쩌란 거냐?" 엄청난 고성이었다. 놀란 나머지 하질리언은 눈을 크게 떴다. 부릅뜬 하질리언의 눈에, 지금까지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던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엉망진창으로 떨리는 게 보였다. 감정이 있는 대로 격해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라, 이런 상태에서도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프란은 하질리언을 향해 소리 소리를 질렀다. "너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 내가 저 빌어먹을 대마왕을 좋아 한다는 얘기라도 듣고 싶은 거야?" 하질리언은 입을 벌렸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프란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딴 감정 때문에 평생 동안 대마왕의 시중을 들란 말이냐? 공주님이랑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한순간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는데! 너 정말 그러길 바라는 거야?" "프리나, 너......." 하질리언이 멍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프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잡지 마라, 하진. 같이 갈 거 아니면." 문을 열며 말한 프란이 떠난 뒤, 하질리언은 넋 나간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 * * 반은 발밑에 흩어진 금화를 뚫어지게 보았다. 방금 전 위저드 리그원들로부터 레이니아 초상화 건에 대해 들었던 반이다. 언제나 미친 마법사 놈들이라고 말했던 반이긴 했으나, 이번 일로 그는 확실히 알았다. 위저드 리그원들은 머리가 돈 게 분명했다. 어떻게 자신의 허락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위저드 리그원들은 '3천만 케트밖에 안 들었어요.' 라고 순진한 얼굴로 말해서 반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반은 창 앞에 바짝 붙어 섰다. 행동력 무서운 프란답게, 그녀는 이미 저택을 나서서 바깥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냐?"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반은 고개를 돌렸다. 이 저택 안에서 자신한테 반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하질리언밖에 없다. 하질리언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반의 바로 앞에 섰다. 하질리언은 콧등을 문질렀다. "그 공주님이랑 결혼할 거야?" 반은 차갑게 답했다. "대답할 의무 없다." "대답 안 해도 알지. 넌 안 해. 왜냐하면, 프리나를 좋아하거든." 반은 말없이 하질리언을 노려보았다. 하질리언은 반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분노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부끄러움 같기도 했다. 하질리언은 그 복잡한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며 말했다. "사람 안 믿지?" 시온이 했던 질문과 비슷하다. 반이 대답하지 않자 하질리언은 다시 물었다. "나도 안 믿어?" 이번엔 시온의 질문과 똑같다. "믿지 않는다." "왜? 난 널 목숨 걸고 구해주고 도와줬는데?" "믿지 않는다." 하질리언은 웃었다. "정말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지 않는다는 말조차 못하는 법이지. 넌 진짜 솔직하지 못해. 그게 네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다 끝나 ㄴ마당에 앞으로도 그럴 필욘 없잖아?" 하질리언은 곧은 눈으로 반을 보았다. 그러나 반은 하질리언이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다시 시선을 창가로 내렸다. 프란은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노릇인지, 프란은 자신의 방 쪽을 돌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반이 그 모습을 눈으로 좇는 것을 보다 못한 하질리언이 벽을 탕 쳤다. "바보냐?" 반이 시선을 다시 돌리자, 하질리언은 버럭 소리쳤다. "넌 프리나가 멋진 여자라는 걸 알아! 프리나만큼 멋진 여자가 다시 네 앞에 나타나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도 네가 모르는 게 뭔지 알아?" 반은 아무 말도 않았다. 그런 반을 향해 하질리언이 쐐기 박듯이 말했다. "너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거다." 너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거다, 라니. 하질리언의 말 따위 아무렇지 않게 격퇴해왔던 반이었건만 그 순간은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전쟁, 싸움, 이 따위 거 이제 안 해도 된다는 소리야. 멋진 여자를 잡아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너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아도 된다는 소리라고!" 반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사랑이라니, 누가. "진짜 못 봐주겠네. 네가 일곱 살 짜리냐? 사랑이라는 말 처음 들어보는 얼굴을 하게?" 하질리언은 똑바로 창문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 프란의 그림자가 걸렸다. "나 말고는 너한테 충고할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시건방질지 몰라도 충고한다." 이미 충분히 시건방지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하질리언은 말을 마저 이었다. "오해 한 번으로 헤어지기엔 너무 질긴 인연이었잖아, 너희들. 안 그래?" 하질리언은 씩 웃었다. "놓치면 죽을 때까지, 죽을 만큼 후회할 거다." 하질리언의 말이 끝난 그 순간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반이 창가에서 몸을 떼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앞을 가로막듯 서 있던 하질리언의 몸을 밀친 채, 반은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반의 뒷모습을 보고 섰던 하질리언은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거봐. 난 '사랑의 카운슬러' 하질리언이라니까. 왜 아무도 안 믿어?" * * * 프란은 저택 밖으로 나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등에 진 금화는 몹시도 무거웠다. 아무리 무거워도 계속 지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가벼운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이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한다. "다시는 볼일 없겠지." 프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빚 때문에 끌려간 카르멘 가에서 처음 만났다. 딱 봤을 땐 여자도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데, 3초 같이 있어보니 세상에 악질도 그런 악질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최악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딱 어울리는 별명도 붙여줬다. 대마왕. 그런데 참 이상도 했다. 임무에서 돌아오면 자신을 죽도록 괴롭히는 그 얼굴에 늘 안심이 되곤 했다.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가슴이 뜨끔거렸다. 함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걸 잘 할 줄 모르는, 그렇게나 강한 주제에 사실은 자기 세상이 무너질까봐 견고하게 자기 성벽만 지키고 있는 어린애. 그래서였을 것이다. 혼자 둘 수가 없었던 것은. 매번의 순간마다 걱정이 돼서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은. 그때였다. "악!" 프란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가 뒤에서 우악스러운 힘으로 자루를 잡아당겼던 탓이다. 하질리언인가 싶어 프란은 인상을 그으며 돌아보았다. '왜?' 허나 하진이 아니었다. 거기에 서 있는 건 대마왕, 반이다. 반은 뛰어온 듯했다. 어울리지 않게 얼굴엔 땀까지 맺혀 있다. 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없다. 무슨 일인가 해서 바라보는 프란을 향해 한참 만에 반이 입술을 뗐다. "내가...........말이다." 프란은 한순간 상황도 잊고 웃을 뻔했다. '내가 말이다.' 라니? 대마왕과 어울리지 않는 화법이다. 프란은 웃음을 터뜨리려다 말고 반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케인이 죽을 때..........." 프란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내가 말이다' 와 '케인이 죽었을 때' 가 이어지는 말 같지 않아서 웃긴다. 하지만 케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프란이 올려다보는 가운데 반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 다시 웃길 바란다고 했다."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따. "이제 가문은 안정되었다." 아까부터 말이 뚝뚝 끊어지고 있다. 대마왕이 이런 적이 있었나? 기억컨대 전혀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프란은 반을 또렷히 보았다. 반은 그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저편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딱히 고생할 일은 없을 거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렇겠지, 대마왕이 고생할 일은 더 이상 없겠지. 프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문맥의 앞 뒤고 전혀 안 맞는다. "열네 살 때부터." 또 화제 전환인가 싶어 프란은 당혹했다. "......웃어본 적이 거의 없다." 프란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공주님이랑 결혼하면......." "그녀와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순간 반은 여태까지 머뭇거렸던 것과 달리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화가 난 듯 씩씩거리기까지 한다. '어? 그렇지만.......' 그 키스는 뭐였는데? 하고 생각하는 프란을 향해 다시 말했다. "난 웃고 싶다. 이제 진짜 가주가 되었으니까." 웃으면 되잖아!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프란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반의 얼굴이 진지해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반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침묵이 길다. 반은 한참 동안이나 침을 삼키거나 시선을 돌리거나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프란이 어깨를 한 번 주물렀을 때야 반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웃으려면 네가 있어야 될 것 같다." 갑작스러운 그 말에 이놈의 금화, 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프란의 두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야말로 눈을 흡뜬 것이다. 반은 이번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반은 프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지 마라." 반의 머리칼 위로 햇빛이 쪼개지고 있었다. * * * 날씨는 쾌청했다. 구름이 한 점도 없어 새파란 도화지가 끝없이 하늘에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바람은 강한 편이다. 그 바람 때문에 평소라면 쇄골 정도에 늘어져 있던 프리나의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휘날렸다. "아가씨. 이쪽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호에!" "프리나, 이건?" "2호에 실어!" 검은색 바지에 카키색 윗옷을 걸친 프리나는 사방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질문하는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프리나의 눈앞에는 출항 대기 중인 배가 두 대 있었다. 큰 배는 아니었지만 돛을 단 폼이 제법 늠름하다. "처음이니까 다들 힘내자고!"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붙인 프리나를 향해, 두 대의 배에 세이피안 특산물이 든 상자들을 그득하게 쌓아올리고 있던 하질리언과 케이가 웃어보였다. "당연하지." "네!" 약 세 시간 후, 두 대의 배가 항구에서 출발했다. 방금 물건을 식도 떠난 이 배들의 목적지는 레키슈안 항만이다. * * * 무사히 첫 선적과 첫 출항을 끝낸 프리텐 가 사람들은 잔뜩 들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날을 위해 밤에 땀나도록 세이피안 전체를 돌아다녔던 프리나의 얼굴이 제일 기뻐 보인다. 풀앙이나 불시의 재앙 때문에 저 두 대의 배가 난파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윈 머릿속에 전혀 없는 듯한 모습니다. "으, 죽인다!" 프리나는 맥주를 한 잔 죽 들이키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베라가 따라 웃었다. "아가씨는 먹는 것도 참 복스럽단 말이에요."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러네. 락케이드는 내 아버지나 다름없고 베라는 락케이드의 며느리니까,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시누이랑 올케 같은 사이라고. 가족이란 말이야."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으며 프리나가 툴툴 거리듯 말했지만, 베라는 ㅕㅇ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예, 아가씨." "에잇!" 불평을 하는가 싶던 프리나는 웃고 말았다. 락케이드 가족과 하질리언, 그리고 자신이 함꼐 지낼 작은 저택을 사고 남은 군를금은 천만 케트였다. 프리나는 그 돈을 굴려 프리텐 가의 부흥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검 연습에도 매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얼마 전 이 저택엔 헤냔이 다녀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던 헤냔은 결국 머물렀던 일주일 내내 프리나와 검만 죽어라고 섞은 뒤 돌아가 버렸다. "아직 끝 아니다. 다시 해!" "벌써 검 떨어뜨렸잖아." "제길!" 헤냔은 요 몇 달 새 무섭게 성장했다. 무엇이 그의 안에 있던 잠재력을 폭발시켰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이제 헤냔을 애송이나 소년 기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헤냔의 적색 눈동자는 가끔 뭘 생각하는지 깊은 빛을 띄었으며, 그 눈빛만큼이나 그의 검도 깊어졌다. "대체 뭘 먹는 거냐? 왜 이렇게 나날이 좋아지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프리나를 향해 헤냔이 밝게 웃어보였다. "난 밥 먹어." ".......너, 하질리언화 되는 거 알고는 있냐?" "그, 그럴 리가 없어." 헤냔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예전부터 라이벌 삼고 있던 상대가 성장하는 건 심각한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언제나 함께 걸어갈 사람이 있는 거니까. '그래도 이대로 계속 지기만 해선 체면이 말이 아니지.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프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헤냔은 베라와 락케이드가 만들어주는 가정적인 요리가 너무 좋다며, 석달에 한 번씩은 꼭 찾아왔다. 헤냔이 올 석 달 후를 기약하며 프란이 단단히 결심을 하는데, 그런 프리나를 보며 탁자 위를 정리하던 베라가 웃었다. "후후. 하질리언 씨한테 다 들었어요, 아가씨." 하질리언이라는 말이 들린 그 즉시 프리나는 불안해졌다. "그놈이 또 뭐라고 헛소리를 했는데?" "두 분 정말 로맨틱해요." 갑작스러운 그 말에 프리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왜 이러냐는 듯 베라가 프리나의 어깨를 꾹 찔렀다. "2년. 딱 2년이라 그랬다면서요." "어, 으, 어?" 이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프리나의 얼굴이 발개졌다. 방금전 신나서 단박에 털어 놓은 맥주 때문은 아니었다. "나라면 금새 달려가 품에 달려가 품에 안겼을 텐데. 아가씨는 어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어요? ........... 우아, 아가씨 빨개졌다. 꼭 토마토 갔아요!" 베라는 깔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프리나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뒤통수만 슬슬 긁고 있자, 지켜보는 베라의 입가엔 장난기가 매달렸다. "아가씨. 약속했던 2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거 묻지 마!" 헤냔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사람들이 전부 하질리언화 되고 있어, 라고 생각하며 프리나가 화를 내려는데 베라가 그에 아랑곳 않고 다시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그 집안 성인식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라면서요." 대답을 못한 프리나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입만 뻐끔거리는 프리나를 보며 베라의 얼굴에 더 짙은 장난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프리나가 당혹하며 속으로 으악 하고 소리치고 있던 그때, 당혹으로 부터 그녀를 구출하는 하질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나! 미남 왔다." 프리나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베라는 그 모습을 보며 청춘인걸, 하며 연신 웃고 있었다. * * * 1년전. "가지 마라." 프란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계승식을 함께 했으면 성인식도 함께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반은 화내듯 말했다. 성인식이라니? 엄청나게 당혹했던 프란은 이 중요한 순간에 농담 비슷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저, 케인이 살아 있었다면 케인이랑 결혼했겠네요?" "헛소리!" 정말 멋대가리라곤 하나도 없는 이 두 사람,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하고 부끄러워 속으로 괴로워하는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한 차례 지나갔다. 그 낯간지러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반의 얼굴이 계속 붉어지는 가운데, 한참이나 생각하던 프란이 어깨를 폈다. "난 지금 프란 프리텐입니다." "알고 있다." 반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답했다. 그런 반을 머쓱하게 보며,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프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지만 무, 물어볼게요. 나, 날 좋아합니까?" "그런 질문은 반칙이다." 프란은 이번에야말로 웃을 뻔했다. '프리나. 솔직해져라. 그게 행복해지는 첫 번째 조건이야.' 아일린 탈환 직후 하질리언이 했던 말이 나직하게 들리는 듯했다. "나, 난............ 조, 조, 좋아, 하,합니다." 부끄러움에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프란은 용기를 내어 간신히 말했다. 비록 말투가 딱닥해 고백하는 게 아니라 시비 거는 것 같긴 했지만. 그때였다. 반의 은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진 것은. 프란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반은 웃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밝게, 쑥스러움 따위 없이 정말로 기쁘게.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런 얼굴로 반은 웃었다. 저 냉정한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면 무서울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무섭기는 커녕 적색산맥의 딱딱한 얼음들조차 단번에 녹여버릴 듯 황홀한 미소다. '너야말로 그런 얼굴은 반칙이다.' 프란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심지어 난 아직 프리나 프리텐도 아닙니다. 프란 프리텐이지." 반은 듣고만 있었다. "2년. 딱 2년 안에 기사 서임을 받고 프리텐 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겁니다." 말하다 말고 프란은 숨을 들이켰다. "그, 그, 그리고 그, 그때가 되면......." 프란은 억지로 쥐어짜듯 말을 이어나갔다. "다, 다시 한 번 ........ 마, 마, 말.........." 제길. 말이 꼬인다. 프란은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그러나 반은 완전하지도 않은 프란의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반은 다시 미소 지었다. 프란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 번 말해줄래?' '응.' * * * 시즈 아일린 반 저스티스 카르멘은 지금 스물한 살이다. 아일린 가에선 프리나든 누구든 당장 납치해 성인식을 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좋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일을 때려치울 거라며 하녀들이 원성을 높이고 있다. 아직도 정초원장을 대리하고 있는 레오니아의 참을 수 없는 깐깐함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카르멘 가의 마린은 '오호호호!' 하고 웃으며 1년 전부터 웨딩드레스 제작에 들어갔다. 반이 그만두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카르멘 전속 의상 담당 막스가 매일같이 수백 장의 디자인을 스케치하며 호들갑 떤다는 신빙성 있는 풍문이 아일린 가까지 전해진 걸 보면. 프리나 프리텐은 지금 스무 살이다. 프리나는 세이피안 기사 시험을 준비 중이며, 프리텐 가의 가주로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막 시작한 무역일이 잘 되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프리텐 가의 넓지 않은 뜰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반은 그 노을을 맞으며 서 있었다. "반!" 부르는 소리에 반은 돌아섰다. 프리나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석양보다 아름답게 반이 웃는다. ************************************** 두등 두등 !!!! 드디어 에필로그 입니다.. 흐으 류화;;손가락이 곱아서 죽을것 같아요 ㅠㅠ 자자자 달려봅시다!! 에필로그 레이니아는 몸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에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지었을 뿐. 얼마나 행복한 일생이었나. 그녀는 억지로 눈을 열어 자신의 하나뿐인 반려, 드리비아 레키슈안을 보았다. 드리비아의 눈은 젖어 있었다. '울지 말아요, 왕이여.' 레이니아는 손을 뻗었다. 고통 때문에 팔이 떨려, 레이니아의 손이 드리비아의 뺨에 닿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레이나, 부탁이다.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레이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깊숙이 침투한 병은 왕비의 몸을 수 달째 갉아먹고 있었다. 받아들이세요. 레이니아는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라고 드리비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니아는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리비아가 먼저 죽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슬픔에 레이니아의 몸이 떨렸다. "나의 레이나." "말하세요. 나의 드리비아." 드리비아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왕이 되기는커녕 적색산맥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렸을 테지. 당신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고 은인이었으며......... 오직 하나뿐인 내 행운의 여신이었소. 당신만 곁에 있으면 내게 불가능이란 없었어." 나도 마찬가지예요. 레이니아는 고통에 겨워 입술만 달싹이며 답했다. "당신은 늘 나를 지켜주었소. 적으로부터, 악운으로부터." 드리비아는 눈물을 삼켰다. 젊은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는 그녀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돌이켜보건대 보호를 받은 것은 언제나 드리비아 자신이었다. 드리비아의 눈물이 레이니아의 볼을 적셨다. "...........내세에서는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소?" 레이니아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걱정 말아요, 레이나. 백 년, 천 년...... 아니, 만 년이 걸린다 해도, 영겁의 시간을 돌아서라도 나는 당신을 반드시 찾아내겠소. 어리석게도 처음엔 당신을 몰라볼 수도 있을 거요. 허나 결국은 알아보겠지. 당신이 이번 생에 날 찾아냈듯 나 역시 당신을 찾아낼 거야." 레이니아는 눈물 맺힌 얼굴로도 웃었다. 레이니아는 싸락눈처럼 끊어지는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그 말에 답했다. "아니. 내가 다시 당신을 찾아낼 거예요. 백 년, 천 년, 만 년이 걸린다 해도." - 레키슈안의 음유시인이자 소설가, 그러나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한 불우한 작가인 (故) 유시안의 역사소설 [레키슈안의 초대 국왕 드리비아 레키슈안과 그 불멸의 연인 레이니아] 제 25장, '레이나의 죽음' 중에서 - "저 왔어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로디는 읽고 있는 책을 덮었다. 최근 위저드 리그에 영입된 18세의 5써클 마법사 카나가 어느덧 로디의 연구실에 들어서 있었다. 카나는 한참 동안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며 연구실을 두리번 거렸다. 마침내 카나의 시선이 한 점에서 멎었다. "이 초상화는 못 보던 거네요." 카나는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초상화 속에는 오렌지색 눈동자에 부드러운 금발을 한 아름다운 여성이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레이니아 왕비야." 로디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저 초상화는 3천만 케트 상당의 금화를 주고 얻은 위저드 리그 전체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초상화의 원래 소유주와 벌였던 박진감 넘치는 거래 자리에 함께 있었던 로디에게 저 그림이 둘도 없는 자랑임을 물론이다.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이건 '그분' 이잖아요." 그 말에 로디가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좀 닮았을 뿐이야. 레이니아 왕비 쪽이 백배는 아름답다고." "아니, 그런 말을 막 해도 돼요? 상대는............" 카나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로디가 그 말을 냉정하게 끊으며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정초원장 따윈 절대 안 하겠다며 아직도 기사 노릇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지. 가주님 같은 분이랑 결혼을 했으면 포기하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도무지 좋아하려 해도 좋아할 수가 없어! 가주님은 왜 키네세스 공주님을 그렇게 보내버린 거야? 지금 봐바. 공주님은 카세타의 실세로 떠오르고 있다고. 벌써부터 카세타 최초의 여왕이 탄생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 죽겠어." 카나가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요. 로디는 항상 그분 얼굴만 보면 좋아 죽잖아요. 정초원장도 뭐, 레오니아 씨가 잘 하고 있고." "그러니까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거야!" "말이 안 될 건 또 뭐람." 카나의 조그마한 소리를 들었는지 로디가 버럭 화를 냈다. 그 때문에 카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뭐라고 구시렁거려야 했다. 그러나 그 구시렁거림도 잠시였을 뿐이다. 뭔가가 떠올랐는지 카나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로디! 로디는 그 소문 들었어요? 레키슈안에 천재 마법사가 있대요." 로디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카나가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레키슈안 왕가가 신주단지 모시듯 한대요. 그런데 영 거짓말 같아. 5년 만에 7써클을 마스터하다니 그런 바보 같은 얘기가 어디 있어요? 그것도 아직 스물넷밖에 안 된대요, 스물넷! 그걸 믿으라고 낸 소문이야?" ".....실존하는 인물 맞아." 중얼거리듯 말한 로디를 돌아보며 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디도 아직 7써클에서 '빌빌대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진짜 있다고요?" 위저드 리그장의 자존심을 엉망진창으로 유린하며 카나가 말했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지만 로디는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에이, 실존할 리가 없어요. 이 소문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더 있거든요. 그 사람 스승이 대륙에서 행방을 감춰버린 선혈의 마법사라잖아요. 웃기는 소리 아니에요?" '하나도 안 웃겨.' 로디는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어차피 안 믿을 것 같았기에 그냥 말을 말았다. 수다스러운 카나는 로디에게서 대답이 없자 금세 화제를 돌렸다. "아참, 로디. 복도에서 어떤 남자를 봤는데요. 키는 이 정도고 머리는 녹색, 눈은 붉은색이었어요." "아아." 로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누구예요?" "헤냔 키에르. 카세타 케이온 기사단의 차세대 기사단장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지. 가주님은 내색 안 하시지만 비켈린으로 들이고 싶어 하는 모양이더군." "헤. 귀엽게 생겼던데. 아직 미혼인가?" "알아서 뭐 하게?" 로디가 무심하게 대꾸하자 카나가 혀를 쏙 내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나는 힐끗 로디 쪽을 보았다. 로디는 아까부터 나달나달해진 역사소설책에 손을 얹은 채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마법서도 아니고 웬 역사책, 그것도 소설책인가 싶어서 로디가 목을 쭉 뺏다. [레키슈안의 초대 국와왕 드리비아 레키슈안과 그 불멸의 연인 레이니아] 제목 한번 길다 싶어 카나가 쿡쿡 웃었다. 그런 카나를 보며 로디가 갑작스레 물었다. "카나. 넌 전생이나 환생을 믿나?" "그런 거 믿는다면 마법사 해먹겠어요?" 카나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되바라진 말투였으나 로디는 나무라지 않았다. "카나. 이건 너한테 처음으로 해주는 이야긴데, 내가 진짜 놀라운 걸 발견했거든?" "뭔데요?" 카나가 눈을 반짝 빛냈다. 로디는 카나에게 드리비아 레키슈안과 레이니아 왕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전설적 커플의 이야기는 대부분 베일에 가려 있어서, 로디도 소설책의 내용을 재구성해서 들려준 거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반쯤 들은 카나가 화를 냈다. "지금 왜 가주님 러브 스토리를 마음대로 변색하는 거죠? 가주님을 황폐한 마음을 가진 왕으로, 프리나님을 이상한 여자로 바꿨을 뿐이잖아요!" 로디는 말없이 카나를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가 왜 하필 얘기 상대를 너로 정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노망이 났나 보군." 로디는 카나를 무시한 채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참으로 길었던 역사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레이니아가 드리비아를 두고 죽는 순간의 이야기다. 로디는 마법사 실격이라도 좋으니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