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흐릿했던 의식이 점점 또렷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계속 잠들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잠이든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아마, 태양이 62500 번 정도 떠오르고 졌을 것이다. 나의 시야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아직 눈을 뜨지 않아서 그렇군. 아직 잠이 덜깬걸까, 여전히 흐리멍텅한 기분이다. 나는 올라가지 않으려는 눈꺼플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끼하나 자라지 않는 황량한 동굴. 하지만 내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만큼 내게 이곳보다 더 편한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구궁- 웅크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자 웅장한 진동음이 동굴안을 가득히 매웠다. 나는 간단한 동작을 행한것 뿐이지만, 내 몸은 대단히 거대했기 때문에 이 동굴이라는 비좁은 세계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조금 주의를 기울여야 겠군. "───────" 완전히 몸을 일으킨 나는 포효로서 내 기상을 내가 지배하고 있는 공간 전체에 알렸다. 귀로 들리는 포효는 아니지만 내 권속아래 있는 지역에 사는 생명체는 이것으로 나의 기상을 알아차릴 것이다. 뭐, 사슴이나 토끼같은 이성이 없는 동물들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나는 태양이 몹시도 보고 싶어져서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동굴 벽에 나의 몸이 닿지 않도록 주의 했기 때문에 아까처럼 부담스런 진동음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정체된 동굴안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유동적인 대기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하늘에는 내가 기대했던 찬란히 빛나는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은 이미 지평선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대단히 실망스러웠지만 상관없다. 다음날, 태양이 떠올라 하늘의 중앙에 위치할 때까지 이곳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니까. 태양은 금방 죽어 없어져 버리는 덧없는 생명들과는 다르게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유일하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나는 천상을 향해 있던 시선을 지상으로 내려 내 앞에 펼쳐진 드넓은 수해(樹海)를 바라보았다. 내 권속아래 있는 영역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침묵하는 숲'이다. 나의 보금자리가 위치한 뒤쪽에는 그 이름에서도 짐작 할 수 있듯이 지독히도 험한 절멸(絶滅)의 산맥이 존재하고 있다. 나조차 기억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의 저편부터, 침묵하는 숲과 절멸의 산맥은 그 두지역을 한꺼번에 합쳐, 요르간드 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나는 이 요르간드를 지배하는 백룡, 화이트 드래곤 루루렌칼리체. 내가 위치한 이곳은 내가 몸속에 품고있는 거대한 냉기의 영향을 받아 눈이 쌓일만한 기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변의 풍경와는 전혀 무관하게 눈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느긋하게 아래를 내려다 보던 나는 눈이 가득쌓인 숲속 안에서 미약한 생명체의 존재를 감지하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그 가녀린 존재감에 나는 조심스레 머리를 아래로 내려 숲쪽을 바라보았다. 그 존재감의 주인은 싱그러운 녹빛의 긴 머리카락과 투명하고 동그란 청록색의 눈동자를 가진 어린 요정족의 소녀였다. 그녀는 내가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것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저 그녀의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뺨을타고 떨어질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자세히보니 몸의 곳곳에는 무언가에 긁혔는지 빨간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 가여운 존재에 연민을 느끼며 조용히 이 작은 요정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풀숲을 완전히 헤치고 나와 내가 있는 공터에 다다른 어린 요정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나의 모습에 무언가에 홀린듯 눈동자를 흐렸다. "이것은…?" 나는 의도적으로 나의 존재감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이 어린 요정으로서는 그녀의 눈앞에 내가 보여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가질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드, 드래곤…!" 이제서야 내 정체를 알아차린듯 싶다. 나는 이 작은 요정과 눈높이를 맞출정도로 고개를 내려 그녀를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갑작스레 얼굴을 가까이 하자 기겁할 정도로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다. "위, 위대한 배, 백룡 루루렌칼리체님." 내 이름을 알고있군… 보기가 불쌍할 정도로 몸을 바들바들 떠는 이 작은 요정이 나는 꽤나 귀엽게 느껴져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에 이내 영문모를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저, 저를… 잡아먹을 건가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으니 그런 생각을 할법도 하지만… 이 요정 소녀는 큰 착각을 하고 있군. 용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요정족의 소녀여. 이것은 요정의 언어가 아니다. 용의 구강 구조는 통상의 언어를 구사하기에 알맞지 않다. 아마 이 요정의 머리속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뜻만이 가볍게 울려 퍼질것이다. 이것은 드래곤의 언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상대방에게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지는, 절대로 오해라는 것이 있을수 없는 완벽한 언어이다. "흑-" 요정은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렸다. 목놓아 우는것 까지는 아니지만 뺨으로 눈물이 계속 주룩 주룩 타내렸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이 어린 요정은 울음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루루렌칼리체 님" 한참을 울던 그녀는 내가 아무말 않고 계속 지켜만보고 있자 눈물을 닦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칼리체로 좋다. "카, 칼리체 님" 루루렌칼리체란 이름은 아무래도 길다. 이름이란 존재의 힘을 담고 있고, 그것을 중요시 하는 드래곤으로서 이름을 축약하여 부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쨌건, 방금까지만 해도 바닥에 주저 앉아 무기력한 모습으로 울기만 하고 있던 요정 소녀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까지 두려움이 담기긴 했지만 결심이 선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저는 루그란 숲의 요정 칼리아넬 이라고 합니다." 루그란 숲이 이 넓은 수해의 어느곳에 위치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아무말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다. 칼리아넬 이라는 어린 요정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흐느끼는 것 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부디… 부디, 루그란 숲의 요정들을 구해주세요! 외부에서의 침략자가 루그란 숲의 생명의 열매를 노리고 제 자매들을 해치고 있어요!! 루그란 숲의 미천한 요정이 감히 요르간드의 지배자께 부탁드립니다!" 침략자라 하면… 인간이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인간이 행하는것 같은 조잡한 마력 행사가 계속 느껴져 왔다.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이냐? 그녀가 속한 숲의 요정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든가 하는 문제는 나와 아무련 관련이 없다. 나는 그저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 처음으로 본 이 요정에게 약간의 흥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의외로, 칼리아넬 이라는 어린 요정은 내 물음에 그 즉시 답을 해왔다. "… 저, 저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이 작은 요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확실히 결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이 작은 요정의 존재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때문에 그녀가 제시한 보상은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을 구하겠다는 그 각오는 실로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그것을 대가로 받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것은 거래할 수 있는 물건같은 것이 아니니 할 수 없지. -좋다. 칼리아넬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활짝 웃었다.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얼굴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분명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다른 생명체들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능숙하지 않아 생기는 오해일 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나. 나는 즉시 내 권속 아래의 방대한 마력을 행사하여 그녀를 물리적 힘을 갖는 구로 감쌌다. 마력 행사에 민감한 요정인 만큼 그녀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챈것 같았다. "카, 칼리체님. 이건…?"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등에 접혀져 있는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생명체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 진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칼리아넬의 눈동자에 경외, 경악 등의 감정이 퍼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물론 그녀 역시 마력 구로 감싸여진 채로 내 옆을 따라오고 있다. 눈깜짝할 사이에 드높은 허공으로 올라오자 칼리아넬은 거의 기절이라도 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칼리아넬을 감싸고 있는 마력 구는 모든 질량에 관한 법칙을 무시하니 관성같은것 따위로 그녀가 위험해질 일은 없다. 하늘에서 넓은 수해를 내려다 보던 나는 그녀가 말한 루그란 숲을 금방 발견하고 날개를 펼쳐 활강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저곳은… 침묵하는 숲의 중심, '세계수'가 있는 곳이로군. 나와 같이 거대한 생명체가 이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면 굉음이 날법도 하지만 내 마력으로 대기를 고착시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소리 없이 하늘을 날수 있었다. 아래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요정과 인간의 무리들이 보인다. 인간들의 수가 요정보다 월등히 많아 요정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생명을 잃은 요정과 인간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 그들에게는 불행이겠지만 바닥에 흩어진 시체들은 썩어서 이 숲의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 "이제 그만하고 생명의 열매를 넘겨주는게 어떻겠습니까? 저로서도 더이상의 희생자를 내기 싫고 이대로 가다간 당신들의 전멸은 뻔합니다." 인간들의 리더로 보이는 흑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멀지만 내가 원하면 거리 따위는 격하고 무슨 소리든지 들을수 있다. 그나저나 저 인간, 요정어(語)를 알고 있군. 요정들의 사회는 대단히 폐쇄적이기 때문에 외부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어 요정외의 종족이 그들의 언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랄만한 일이다. "칼리체님…!" 칼리아넬은 초조한 기색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독촉에 응하지 않고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생명의 열매는 단 하나의 개체를 위한것. 인간은 단 한명의 인간을 위해 수십, 수백의 목숨을 버릴수 있는 건가요?" 그의 말에 대꾸한 것은 푸른색 머리카락의 요정이었다. 그 요정은 자신들이 멸망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치 일상의 것을 묻는 듯한 단조로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인간은 대답했다. "이해 관계가 얽혀 있다면 인간은 그럴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과 같은 요정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겠지요. 자, 제가 먼저 했던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지요. 생명의 열매만 넘겨준다면 더이상 당신들을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푸른 머리카락의 요정이 가느다란 세검을 들어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정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종족이다. 아마, 어떤일이 있어도 저 인간의 말에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대답은 처음과 변함없을 겁니다." 인간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허공에 손짓했다. 그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공격을 가하라는 일종의 사인인듯 했다. 자, 이쯤이 내가 나서야할 시기인것 같군. 허공에서 머물고 있던 나는 빠른 속도로 아래로 하강했다. 요정들과 인간들은 자신의 머리위로 갑작스레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자 의아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드, 드래곤!?" 아까 요정의 언어로 이야기했던 인간은 나의 등장이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정들도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정과 인간, 양쪽 모두 내가 등장하자 마자 즉시 전의를 잃어버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나는 최대한 나무들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지상에 착지했지만 내 발밑에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깔리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수백 그루 이려나. "거… 거짓말이야! 이런 생명체가 존재한다는건 말이 되지 않아!" 그는 내 존재 자체를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이다. 일반적인 피조물들의 입장에서 우리 드래곤들은 그 존재를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생명체다. 그래, 애초에 이 필멸(Mortal)로 가득찬 세계에 드래곤과 같은 불멸(Immortal)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 부터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 "루그란 숲의 미천한 요정이 감히 위대한 요르간드의 지배자, 루루렌칼리체 님을 배알합니다." 나는 저런식의 인사가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미천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낮추고 나를 한없이 위로 끌어 올린다. 요정들은 다른 종족보다 그 직관이 탁월하여 드래곤이란 종족에 대한 진실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보기 때문이지만 나는 다른 종족이 우리 드래곤들에 비해 미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모두 다 존재의 이유가 있기에 생명을 부여 받아 살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에 미천하고 고귀한 차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루그란 숲의 요정, 칼리아넬이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청각으로 인식되는건 아니지만 나의 뜻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그것을 들은 인간들의 얼굴에는 한없는 당혹감과 절망감이 어렸다. "칼리아넬이 루루렌칼리체 님께 너무나 무례한 짓을 저질렀군요. 굳이 이런곳 까지 찾아오시게 만들다니…" -무례한 일은 아니다. 그녀는 나에게 그녀 자신을 주어 루그란 숲의 요정을 구해 달라 했으니, 나는 이 일에 대한 대가를 보고 너희들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내 뜻이 그녀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는지 그녀는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선 내 옆에 떠있는 칼리아넬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 네가…!"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칼리아넬의 눈가에는 다시 물기가 어려 있었다. 감정보다 이성의 지배를 더받는 요정답지 않게 참 눈물이 많인 녀석인것 같다. 나는 머리를 아래로 내려 바닥에 주저 앉아 있거나 실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하자 그들은 금방이라도 죽을것만 같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대들은 어째서 생명의 열매를 필요로 하는가. 내 뜻에 대답한 것은 아까 요정족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인간의 남성이었다. 그는 마치 영혼이 나간듯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제 딸의 생명을 살릴수 있는 것은 이곳에 있는 생명의 열매 밖에 없습니다!!" 그는 내 머리가 그보다 한참 위에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지 못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는지 거의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다 시피 말했다. 아니면 나의 존재로 인해 느껴지는 두려움을 떨쳐 낼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드래곤이시여! 제 딸은 십 칠년을 살아오면서 몸이 아파 집에서 한번도 나가지 못하고 생을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런 제 딸이 이번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거라는 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열매… 오직 생명의 열매만이 제 딸의 생명을 구할수 있습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 남자의 처절한 목소리 만이 들려왔다. 그의 뒤에 있는 많은 수의 인간들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고 그를 바라보며 원망하는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으며 모든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제 곧 생명의 열매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만 있으면 내 딸, 에넬은 고통을 벗고 자유롭게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는데--!! 너무나 억울 합니다! 드래곤 이시여!!" 그는 나에게 무엇을 호소하는가. 나에게 동정이라는 감정을 이끌어 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분노를 나에게 전하려 하는 것인가. 어느쪽이든 그것이 나에게 전해질 일은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의 말이 옳다. 만약, 나라는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이 없었다면 그대는 생명의 열매를 얻었을 테고, 그대의 딸은 그대가 원하는대로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겠지. "천재지변이라… 그 말대로군.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빼들어 나에게 겨누었다. 나의 비늘하나 베지 못할것 같은 그 철제 무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하찮다. 하지만 그 무기를 쥐고 있는 인간의 의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용기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나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도 그 의지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존재를 둘이나 보는군. -그대는? 단순한 텍스트로는 표현될 수 없는 나의 물음이 그의 뇌리로 파고 들었다. 내가 원하는 답은 그를 이루고 있는 근본, 나라는 실로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 앞에서 감히 무기를 겨눌수 있는 그의 용기의 원천. "로엘가스트 연맹의 백익(白翼),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 하지만 지금은 단지 죽어가고 있는 딸의 아버지로서 당신의 앞에 서있는 거요!" 아버지라… 그런 단어는 우리 드래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길래 그는 나에게 검을 겨눌수 있는 것일까. 어쨌든 그는 내가 원하는 답을 이야기해 주었다. -생명의 열매, 아니 그에 준하는 것을 주겠다. 내 말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기를 굳게 쥐고 있는 그의 팔이 주체할 수 없듯이 떨려 왔다. 내 앞에 우리 드래곤들이 존재했을 때부터 지니고 있는 고유한 힘, 신력(神力)이 휘몰아 치며 무언가를 창조 할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되었다. 생명의 열매가 지니고 있는 능력의 매커니즘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것과 비슷하게, 아니 완전히 똑같게 만드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숨을 한번 들이킬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내 눈앞에는 백색의 빛을 발하는 인간의 손톱 크기만한 자그마한 구가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느릿한 속도로 그류벨 이라는 인간의 손에 날아 들었다. 그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돌아가라. 완전한 생명의 열매는 아니지만 네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 어째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류벨이나 칼리아넬 같은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들을 좋아할 뿐,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이런 행동에 대한 이유가 되지는 못하겠지.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다. "…루루렌칼리체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진 드래곤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관대한 자비로움에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내가 인간에게 알려진 드래곤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고? 인간들의 사이에서 드래곤의 모습은 어떻게 비추어 지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무말 않고 가만히 있자 그류벨은 다시 나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다음 그 휘하에 거느린 인간들을 데리고 얌전히 침묵하는 숲을 벗어났다.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그저 존재만으로 그들은 내가 두려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뒤를 힐끔 거리며 사라졌다.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루루렌칼리체 님. 당신은 칼리아넬 이라는 댓가를 받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존속보다 더 커다란…" 인간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들을 이끌고 있던 푸른 머리카락의 요정이 내게 말했다. 마지막 말이 걸리긴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 나는 호의로 요정들을 도운게 아니라 그녀의 말대로 댓가를 받고 도운것이기 때문이니. -칼리아넬은 필요 없다. 감사하다는 말 또한 할 필요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내 의지를 전했다. "에…?" 여전히 내 옆에 떠있던 칼리아넬은 느린 속도로 하강하여 땅위에 안전하게 발을 딛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내 마력이 눈을 한번 깜짝일 시간에 주변으로 흩어졌다. 칼리아넬은 당혹감이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 하지만 저는 저를 드린다는 조건으로 칼리체 님을…" -네 존재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건 그저 변덕이 었을뿐, 너희들은 그저 이것을 우연히 찾아온 행운쯤으로 취급하여라. "제가 도움이 안된다니요! 저는, 저는…" 내 말에 칼리아넬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리둥절 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나를 그렇게 두려워 하던 어린 요정이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는것 때문에 내게 화를 내다니. 아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요정치고는 어지간히 감정 변화가 극심한 녀석인것 같군. "무, 무슨 무례냐! 칼리아넬!" 나는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아래로 내려 칼리아넬의 청록색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 보며 내 뜻을 전했다. -너는 아까전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고결한 의지를 잃어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인간이나 요정이나, 나는 그런 자들을 좋아하지. "감사… 합니다. 칼리체님." 칼리아넬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모든것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어째서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할 필요 없다고 말했을 터다. 난 이제 그녀에게 조금 질려 버렸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이성의 끈을 놓고 광활한 천공을 라보던 나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태양이 완전히 지평선 뒤로 넘어가 주변이 어둠으로 휩싸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좋아, 해가 떠오를때 까지 얌전히 동굴 앞에서 기다려 볼까. 나의 아늑한 보금자리에 거대한 몸을 뉘이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회상한다. 영원이란 시간을 살아가는 드래곤에게 있어 가장 흥미로운 일은 그간 겪었던 일을 반추하며 깊은 사색에 빠지는 일이다. 최근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요정 칼리아넬과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라는 인간이 나에게 느끼게 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나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세계의 근원에서 방대한 양의 지식과 지혜를 얻는 나지만 감정에 관련된 것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머리속에 다른 화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 그러고 보니 그때의 그 그류벨이란 인간은 로엘가스트 연맹의 백익이라는 지위에 있다 하였었다. 인간은 서로 모여 살기를 좋아한다. 많은 수의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면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단체가 필요하다. 로엘가스트 연맹이란 그런 단체에 해당하는 것일까? 눈을 감고 스스로의 사고에 침잠하던 나는 누군가가 내 보금자리에 접근하는 것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야했다. 그 누군가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활화산 같이 강렬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아마도 그는 나와 같은 드래곤, 아마도 화기를 지배하는 레드 드래곤일 것이다. 나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동굴 밖으로 나와 이곳을 방문한 존재를 맞았다. -오랜만에 보는군, 로나벨아크하임. 그는 적발을 길게 기른 젊은 인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마치 허공에 계단이 존재하듯 두 다리로 허공을 걸어 나에게로 다가왔다. "하, 이런곳에 쳐박혀 궁상을 떨고 있는 것은 여전하군." 말투가 좀, 아니 많이 무례하긴 해도 진심은 아니다. 포악하고 제멋대로인게 그의 본질이니 나는 그런것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네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걸 알아채고 안부차 들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좋은데, 어쨌든 날 위해서 일부러 이곳에 찾아오는 수고를 해주다니, 상당히 기쁘군. 나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에 눈을 흐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본질은 드래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 역시 그의 진실된 모습이다. "흥, 별로 기쁜 표정은 아닌것 같군." -드래곤에겐 표정이 없지. 하지만 너에겐 있는걸 보니 인간들에게 꽤나 물들은 모양이군. 로나벨아크하임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를 즐기는 특이한 드래곤이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드래곤 답지 않게 굉장히 감성적이기도 한 녀석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양 귀쪽으로 올리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인간들은 정말로 흥미로운 존재들이야. 찰나의 시간을 살아감에도 그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것을 이뤄내고 또 파괴하지. 너와 비교한다면, 네가 백년동안 하는 일보다 인간이 일년동안 하는 일이 더 많을 거다." -어리석은 말이로군.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일과 인간들이 이뤄내는 하찮고 작은 일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는 혀를 쯧쯧- 찼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난 잠시 할말을 잃었다. "네가 너무 게으르다는 거다. 천년이 넘도록 이곳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지겹지도 않나?" -이곳은 네가 생각하는것 만큼 그리 따분한 곳은 아니다. 당장 며칠전만 해도 흥미로운 일이 있었지. 로나벨아크하임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동작 하나 하나가 정말 놀랄 정도로 인간을 닮아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으면 저런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인간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루루렌칼리체, 너는 너의 권역에서 단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던가." -그렇다. 그런데 오늘은 좀 집요한것 같군.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종종 찾아와 자신처럼 인간들 사이에 섞여 그들의 사회를 겪어보라고 종용하곤 했다. 하지만 그도 내가 거절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별 기대를 안하고 그저 습관처럼 권할 뿐이었다. 의미 없는 행동을 계속하는 로나벨아크하임의 행동은 내가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다. 그가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너무나 물들어 버린 탓일까. "오늘은 네 눈에서 흥미가 느껴지거든. 전에는 없던 일이지. 네가 방금 언급한 그 흥미로운 일때문인것 같군." 로나벨아크하임의 생각은 정확했다. 나는 며칠전 루그란 숲에서 만난 요정 칼리아넬과 그류벨 이라는 인간 덕에 다른 종족이 살아가는, 요르간드의 외부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 단지, 나는 보고 싶은것이다. 그런 고귀하고도 고결한 혹은 순수한 의지를 갖고, 행할 수 있는 생명들을. 물론, 모든 인간이나 요정이 그들 같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직은 외부를 돌아볼 생각은 없다. "어련 하시겠나. 근 천년을 가까이 이곳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로나벨아크하임은 내 코앞까지 다가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노을빛과 같은 붉은색 눈동자에 내 호박색 눈동자가 맺힌다. "루루렌칼리체, 우리 드래곤은 더 없이 완벽한 생명체다. 진정한 불멸성을 버렸다 해도 이 세계에서 우리를 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지.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불멸성을 내팽개치는 순간, 시간이라는 흐름속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그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나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로나벨아크하임은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온전히 전하려는듯 한마디 한마디를 진지한 표정으로 신중하게 입밖으로 내고 있었다. 드래곤들에게는 뜻의 전달 과정에서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통상의 언어보다 더 수준높은 의사소통 수단이 있다. 하지만 로나벨아크하임은 그런 의사소통 수단을 쓰지 않고 항상 이런 저급의 언어로만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그의 뜻을 재해석 해야만 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로나벨아크하임이 원하는 것인 모양이다. 최대한 온전히 나에게 자신의 생각이 전해지길 원하면서 단순한 언어로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그는 실로 모순되었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언제까지고 온전히 그 모습을 간직할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진정한 불멸을 버리면서 생명체가 되어버린 우리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야." 로나벨아크하임은 거기까지 말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나에게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망각이란 것을 모르는 존재,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을 겪으면 언제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오겠지. "아, 오늘은 내가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군." -언제든지 너만 떠들었었다. "흥! 이런 멍청한 백룡 같으니라구. 난 이만 가보겠다." 그의 표정을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가 기분이 상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째서 기분이 상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공간을 찢고 다른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건 장거리 공간 도약을 하며 찢겨진 시공간의 끈(String of space-time)몇가닥 뿐이었다.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다시 동굴로 들어가려던 나는 누군가가 또 이곳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별일이군, 하루에 두번씩이나 방문자가 있다니. 익숙한 기운이었다. 주변에 동화되어 알듯 모를듯 희미한 향기같이 느껴지는 그 존재감은 요정의 것. 그 존재감의 주인은 전에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었던 칼리아넬이었다. "꺅!" 풀숲과 눈을 헤치고 나온 칼리아넬은 내가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깜짝 놀란듯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칼리아넬의 긴 녹빛 머리카락이 바닥에 퍼져 마치 새로운 풀숲이 생겨난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볼품없어 보이는 초록색 열매. 그것은 바로 인간들과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생명의 열매였다. "루, 루그란 숲의 요정들을 대표하여 미천한 요정 칼리아넬이 위대한 지배자 루루렌칼리체 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것을…"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했을터. "…" 칼리아넬은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생명의 열매를 떠받치고 있었다. 요정이란 족속은 이상한 곳에서 무척이나 고집이 세다. 아니, 자존심도 무척이나 세지. 그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나에게 생명의 열매를 전달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그들의 자존심을 세울뿐이다. -생명의 열매를 나에게 바치게 되면 너희들이 피흘려 그것을 지켜낸 의미가 없지 않느냐. "빼앗기는 것과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부디,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저희 루그란 숲의 요정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 표시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게 그거 같지만 말이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생명의 열매를 받았다. 칼리아넬은 자신의 손에서 갑자기 생명의 열매가 붕- 하고 떠오르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용건은 이것으로 끝인가. "저… 개인적으로도, 제 부탁을 들어주신것 대단히 감사합니다. 칼리체 님에게 보잘것 없을지는 몰라도 제 스스로가 무언가-" 칼리아넬은 바닥을 쳐다보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요정이란 족속은 이렇지… 한번 은혜를 입으면 그것을 갚지 못해서 안달이다. 반대로 원한을 가지면 그 역시 죽을때까지 잊지 않지. -전에도 언급했듯 네 보답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조그만 요정이 나같은 드래곤에게 어떠한 보답을 할 수 있을까. "잇-! 도움이 되지 못한다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가렸다. 칼리아넬의 눈에는 또다시 무례를 범한 자신에게 어떠한 처벌이 내려질지 두려워 하는 기색이 어리고 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와 같은 상황의 반복이지 않는가, 이것은. 나는 꽤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를 즐겁게 해보아라. "네에…?" 움츠러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칼리아넬은 내 말에 놀랐는지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의외였던가. -근 천년동안을 아무일 없이 지내자니 슬슬 무료해 지는군. 내 옆에 머물며 나를 즐겁게 해보아라. 어떤 방법이든 좋다. 가만히 보고있기만 해도 심심하지 않은 요정이기에 나는 한동안 그녀가 내곁에 머물며 나를 즐겁게 해주길 원했다. 칼리아넬은 아직도 내가 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듯 눈만 깜빡 거릴 뿐이었다. 그 이후로 칼리아넬은 나의 보금자리 옆에 자리를 잡은채 종종 동굴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서 조잘거리며 동굴안의 지독히도 정체된 공기를 상당히 가시게 만들었다. "그래서요 오늘 전에 말했었던 대지의 요정이 호수의 요정에게 결국 고백을 했거든요." 고백이라, 무엇을 고백한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내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경쾌한 기분이 드는 화려한 손짓 발짓을 해가며 내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듣고있는 나보다 더욱 재밌어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그 도도한 호수의 요정이 볼품없는 대지의 요정이 눈에 차기나 하겠어요? 결국 호수의 요정이 고백을 거절하니까…" 사실, 칼리아넬이 해주는 이야기 보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배는 더 흥미로웠다. 다채롭게 변하는 표정과 가느다란 고음의 목소리, 경쾌한 움직임. 신기할 정도로 생동감이 넘치는 녀석이다. "으응- 그런데 칼리체 님은 제 이야기가 재미있으신가요? 표정이라고는 전혀 없으신 분이니,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피…" 칼리아넬은 내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난폭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건지 전보다 훨씬 편하게 나를 대했다. 가끔 너무 버릇이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다시금 그녀의 활기찬 음성을 들으면 그런 생각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무척이나 흥미롭군. "… 정말 이에요?" -그렇다. 무엇 때문에 두번 말하게 하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그녀는 내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짓고는 작은 아기새처럼 조잘거리며 혼자 신이나는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제는 제가 칼리체님께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겠어요?" 날 재밌게 해주는 것이 도움이라는 범주안에 속하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퍽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칼리아넬은 그게 그렇게 기쁜지 환하게 웃었다. "칼리체 님은…" 한참이나 조잘거리던 그녀는 이야기가 다 끝나자 바위에 걸터 앉았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녀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로, 자상하신것 같아요." 자상하다라… 내가? 이런 평가를 들어본건 처음인지라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다. -그런가. "네, 여전히 가끔은 무섭기도 하지만… 아, 요새들어 생각해봤는데 그건 이 어두컴컴한 동굴 때문인것 같아요." 확실히, 내눈에는 이 동굴 내부가 환하게 보이지만 요정인 그녀의 눈에는 어두컴컴하게 보일수 밖에 없겠지. 나는 빛이 없어도 아무런 무리 없이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드래곤의 눈은 어둠뿐 아니라 그 어떠한 것도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 자체로도 마법과 같은 것이니까. 칼리아넬이 매일매일 찾아와 나에게 그날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얘기해 주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는것이 어느샌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무료하지 않아 좋았지만, 칼리아넬 역시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이야기 하는것에 어떤 재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체 님은 지겹지도 않으세요? 벌써 이주일 째 이곳에 누워 계시고만 있잖아요." 기억에는 없지만 나는 아마 수천년을 이곳에서 지냈을 것이다. 고작 이주일동안 가만히 있었다고 지겨울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호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좀 따분한것 같긴 하군. "으, 정말이지…" 칼리아넬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흘려 들으며 나는 외부에서 온 누군가가 내 영역을 침범하는것을 느꼈다. 정말, 요새는 무료하지 않아 좋은것 같군. 내 영역을 침범한 자의 발걸음의 끝은 아마 내가 있는 이곳일 것이다. 그 자는 아마, 인간이겠지. -누군가 오는군. 칼리아넬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동굴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자가 이곳에 도달하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자는 이제 막 내 영역에 발을 딛었을 뿐이니까. "… 전 누군가가 접근 하는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어요." -그 자가 이곳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다. "칼리체 님은 그렇게 먼 곳에 있는것 까지 느낄 수 있는 건가요…?" 그녀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니, 내 존재감이 곳곳에 퍼져 있다. 그것은 마치 이 지역 전체에 넓은 그물을 친것과 진배없어 누군가가 내 영역안으로 들어오는것 정도야 간단히 눈치챌 수 있다. "그 자는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오는 건가요?" 아무리 내가 먼거리의 침입을 알 수 있어도 그 목적까지 알 수 있는건 아니다. 하지만 이 작은 요정은 내가 그것까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지. 백년조차 잠깐으로 느껴지는 내게 일주일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난 침입자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무료한 일상에 변화를 줄 존재이기에 나는 오히려 그 자가 이곳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 있길 바랬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인간들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험하다. 침묵하는 숲 안에는 극히 사나운 맹수들이나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는 벌레들이 득시글 하니 말이다. 밤에는 마물(魔物)마저 나오는 모양이니 운이 좋지 않으면 그것들과 조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침입자는 꽤 강한 능력을 가진 자인것 같다. 그 자는 아무런 상처 없이 이곳까지 당도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내 보금자리 안을 조용히 울리는 침입자의 발소리. 예상대로 침입자는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자랑하는 인간이라는 종족이었다. 그 자는 마력을 다룰수 있는 자인지 시야 확보를 위해 자신의 앞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광구(光球)를 띄우고 전진 하고 있었다. 그 자는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는 인간의 청년이었다. -인간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요르간드의 지배자… 화이트 드래곤, 루루렌칼리체 님이십니까?" 그는 내가 갑작스레 뜻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바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말했다. 동굴안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메아리가 인다. 칼리아넬의 목소리는 이곳에서 메아리를 만들지 않고, 나는 성대를 통해 언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메아리는 내게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왔다. -그렇다. "저는 인간들 사이에서 현자라 불리우는 인간, 베르센크 드… 아니, 인간의 성 따위는 드래곤의 앞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겠지요." 인간들 중 특히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현자라 불리는 모양이다. 그들의 사회에서는 꽤나 떠받듬을 받는 지위겠지. "로엘가스트 연맹의 백익,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 에게서 루루렌칼리체님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류벨… 전에 생명의 열매를 노리고 루그란 숲으로 침입했었던 그자로군. 그가 요르간드에서 돌아간 날과 베르센크라는 인간의 현자가 지금 나를 찾아온 날과는 그리 많은 날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에게서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찾아온 모양이군. "지금까지 알려져왔던 다른 드래곤과는 달리 무척이나 자비로운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것은 정말 사실인 모양이군요." 인간의 현자는 그가 만든 빛으로도 뚫어지지 않는 깊은 어둠 사이로 내가 있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자비로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목숨은 하찮은 벌레나 우리 드래곤에 이르기까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현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까지 나에게 무엇을 청하고자 왔는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 도저히 저의 미천한 지식과 지혜로는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때문에 루루렌칼리체 님의 지혜를 빌리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에게 있어선 더 없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어둠속에서 해메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원하는 답을 낼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괴로워 하고 있었다. 베르센크 라는 인간의 현자는 딱딱한 동굴의 바닥에 갑자기 털썩- 하고 무릎을 꿇었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으로 증명하는 것입니까--!? 신은… 신은 어째서 인간이라는 종족을 창조하였습니까?" 다짜고짜 시작된 자신의 종족에 대한 의문은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토해 내듯, 격정적이고 격렬하게 터져나와 나에게 전해졌다. 그의 커다란 목소리가 이 동굴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인간은 정말 추악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요정과 같은 순수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은 드래곤과 같이 강인하지 못해 군집을 만들었으며, 그 군집은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그의 말은 전혀 논리적이지 못했다. 그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대로 입밖에 내뱉듯, 그의 말은 두서 없고 무질서 했다. 베르센크라는 인간의 현자는 아마도 정신적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다. 자신의 종족의 추악한 면을 보고는 염증을 느끼고,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나에게 물으러 온것인가. 지금껏 그가 보아왔던 인간의 모습들을 모두 나에게 전하려는 듯 그의 말은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나는 그 자신이 본 풍경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는 드래곤과 같은 완벽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일 뿐이기에 나에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채 절반도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 들어간 그의 감정만은 나에게 확실히 전해진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종족에 대해 한없이 절망하고 있었다. "… 부디, 답해주십시오. 인간은, 도대체, 무엇으로, 증명되는 것입니까." 한참을 말하던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힘겹게 다시 그가 나에게 묻고자 했던 질문을 씹어뱉듯 말했다. 물론 답을 줄수는 있다. 어쨌든 나는 '신'의 입장에서 인간의 존재의의를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베르센크 라는 인간의 현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답은 아닐것이다. -인간이 드래곤에게 인간의 존재를 묻다니, 무슨 소린가. "분명, 가장 신에 근접한 생명체인 드래곤은 그 대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부디, 제게 답을 해주십시오." 곤란하군, 내가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기 위해서는 나역시 그가 보았던 것을 보고 겪었던 것을 겪으며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인간에 대해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자신의 존재 마저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는 이 인간의 현자에게 반드시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언짢은 일이었다. 지금껏, 내가 마음 먹어 이루지 못한 일은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가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라. 베르센크는 금방이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것 같은 절망적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바닥에 뉘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동굴안에 구구궁- 하는 거대한 진동 소리가 울리자 인간의 현자는 뒷걸음질 쳤다. -돌아가서 기다려라. 약간의 시간이 흐른뒤에 네가 원하는 답을 해주겠다. 좋다, 로나벨아크하임. 네가 원하는 데로 한번 인간들의 사회라는라는 곳을 겪어보기로 할까. 베르센크는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갔다. 제발 지금 당장 답을 달라고 나에게 사정을 하긴 했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그는 놀란 표정을 짓고는 그것을 수긍했다. 드래곤인 내가 인간에게 대답을 해주기 위해 움직인다니 그것에 놀란 것이겠지. 하지만 최근부터 외부에는 한번 나가보고 싶었고,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결코, 인간의 현자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를 위한 일이 되겠지만. "네!?" 칼리아넬은 내가 요르간드를 나간다는 말을 듣자 동그란 눈이 되어 동굴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 하지만 칼리체 님이 어떻게…" -무엇이 문제인가. "칼리체님은… 저기, 그러니까 인간들 사이에서 활동하기에는 몸이 너무 크시지 않나 싶어서요." 역시 이 어린 요정소녀는 나를 항상 즐겁게 해준다. 물론이지, 이 모습으로 인간들의 사회를 겪어보려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들의 사회에 섞여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지. 나는 칼리아넬에게 그녀의 걱정을 종식시킬 답안을 유쾌한 기분으로 말해주었다.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면 되지 않나. "에-" 그녀는 할말을 잃은듯 하다. 드래곤은 신력(神力)과 마력(魔力)의 지배자. 자신의 몸을 다른 종족으로 변화시키는것 따위,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마음먹은 김에 당장 요르간드의 외부로 나가고자 한다. 칼리아넬,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너는 너의 마을, 루그란 숲으로 돌아가 있거라. "…" 칼리아넬의 표정이 흔들렸다. 왜 저러는 걸까, 마을로 돌아가면 귀찮게 나에게 매일 찾아오지 않아도 되니 좋은것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 제안에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렇다면, 계속 이곳에 남아있겠다는 말이냐. 이 동굴은 드래곤인 나에게 있어선 더없이 편안한 보금자리지만 칼리아넬 에게는 춥고 으스스한 공간일 뿐이다. 내가 돌아올때 까지 이곳에 남아있겠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허락을… "칼리체 님을 따라가겠어요!" 의외의 발언이군.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기껍다. 그녀는 보고만 있어도 무료함 따위를 느낄수 없는 재미있는 존재이니까. -좋다. 내심 내가 거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조마 조마한 얼굴을 하고있던 칼리아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말이 나온김에 나는 지금 당장 인간의 모습으로 화(化)하려 했다. 나는 신만이 가진다는, 무엇이든 이루어 내는 힘, 신력(神力)과 세상의 근원에서 비롯된, 세계의 법칙을 원하는 데로 조종하는 힘, 마력(魔力)을 한껏 끌어올렸다. 드래곤의 몸을 인간의 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실로 거대한 힘이 필요하다. 원래 이런 거대한 힘의 행사에는 응당 그 주변에 적지 않은 여파가 전해지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내 강대한 마력으로 대기를 고착시키고 있으니, 오히려 이상하리 만큼 주변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민감한 기감을 가진 요정인 칼리아넬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숨을 죽인채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으로 변할때, 나는 그 모습을 설정할 필요는 없다. 어느 모습으로 변하든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즉, 아무런 마법적 설정 없이 인간으로 변했을때의 모습이 나의 또다른 진정한 모습인 것이다. "와앗-!" 칼리아넬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는 천장이 순식간에 나의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아득해 지는듯한 기분이었다. 그 이상한 기분에 잠시 눈을 감고 떴을 때, 나는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있었다. 그토록 아늑했던 이 공간이 이제는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카, 카, 카, 칼리체님…?"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요정안을 가진 칼리아넬은 내가 보이겠지만 나는 전혀 그녀를 볼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 만으로 그녀가 어디쯤 있는지 짐작할 뿐이다. 뭐, 간단히 용의 힘을 약간만 개방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잠시, 내 존재감을 고의로 방출시키자 내 눈은 본래의 것에 반절도 미치지 못하나 어느정도 쓸만한 능력을 가진 드래곤 아이로 변모하였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나와 눈높이가 거의 비슷해진 칼리아넬의 경악 어린 표정이었다. -무얼 그리 놀라는 거지. 아직까지 육성을 통한 뜻의 전달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나는 기존의 의사소통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칼리아넬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아무 대답없이 그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기… 뜬금없지만." 칼리아넬의 얼굴에는 아직도 내가 행했던 거대한 마력 행사에 질린듯, 경악어린 표정이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아니면, 내 모습이 이상한걸까. "칼리체 님은 여성이셨나요?" -아니다. 우리 드래곤에게 성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그런가요…" -하지만 네가 보기에 내가 여성체로 보인다면 인간의 여성으로서 그들의 사회를 겪어보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에-" -즉,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성별을 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을 해준 나는 짙은 호기심을 가지고 내 몸을 만져 보았다. 말랑 말랑하고 보드라운 인간의 피부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져 왔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떨까, 거울이라도 있으면 내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동굴에 거울 따위는 없다. 하지만 내가 원하다면 거울과 같은 기능을 가진 물체는 얼마든지 임의로 생성이 가능하다. 나는 앞으로 손을 들어 마력을 행사했다. 드래곤의 모습일 때와는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때는 마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련의 동작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해서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이 크게 반감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약간의 차이는 날 수 밖에 없고, 그 차이는 마력의 집중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그 집중도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허공에는 내가 원하는 빛을 반사시키는 적당한 크기의 마력장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내 모습은 그곳에 비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어리석은 짓을 했군. 몇백년 만의 실수 인가. 내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동굴은 약간의 빛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어둠으로 휩싸인 공간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나의 모습을 마력장에 비추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공적으로 빛을 창조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진정한 태양빛 아래서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지. 칼리아넬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의 모습일 때와는 다르게 그녀와 눈높이가 비슷하니 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빛이 있는 밖으로 나와 다시 빛을 반사시키는 마력장을 생성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내 모습을 비추었다. 거의 엉덩이 까지 닿는 길고 매끄러운 백발에 이 주변에 깔려 있는 눈과 같이 차가운 느낌의 하얀 피부, 칼리아넬 만큼이나 자그마한 체구, 가녀리고 부드러운 몸의 선이 그녀가 나를 여성이라 착각할만 하다. 동그란 눈동자는 드래곤일 때의 모습과 같이 투명한 호박색의 빛을 띄고 있었다. 몸에는 내가 이미지 했던 간단한 백색의 천옷이 입혀져 있었다. 백룡인 나의 본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인간일 때의 나의 모습도 온통 백색으로 점칠 되어 있었다. -내 모습, 어떠한가. 일단 인간과 비슷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칼리아넬에게 지금 나의 모습의 평가를 부탁했다. 그녀는 아까와 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며 마치 중얼거리듯 말했다. "…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것으로 끝인가. "죄, 죄송해요… 제 말솜씨는 그리 좋은편이 아니라 칼리체님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어렵답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것 같군. 내가 그녀에게 듣고자 하는 것은 내 모습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아니다. -이 모습이 인간의 사회에 위화감 없이 어울릴수 있는 정상적인 모습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무, 물론이죠! 하지만… 조금, 아니, 많이 눈에 띄는 모습이시네요." 눈에 띄는 모습- 이라는건가. 나는 그녀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마력장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의 모습과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도 키가 더 크고 탄탄한 근육이 잡힌 강인해보이는 몸에 이목구비를 형성하고 있는 선이 나보다 훨씬 강했다. 간단히 말해, 내 모습은 로나벨아크하임의 모습에 비하면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인간들은 겉모습으로 그 존재의 대부분을 판단한다는데 이렇게 연약하게 생겨서야, 인간들의 사이에서 얕보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일단은 그것보다 인간들의 사회에 가서까지 지금 방식의 의사소통을 쓸수는 없는 일이다. 언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겠지. "아-" 성대를 울려 음성을 낸다는것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선일이다. 지금까지의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소리를 내어 의사소통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와아, 목소리가 참 예뻐요." 내 목소리는 거의 칼리아넬의 것과 근접하게 가늘었다. 하지만 활기찬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내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은 듯한 느낌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 그런데 칼리체님. 요정어나 인간들이 쓰는 언어를 알고 계시나요?" "몰랐다면… 지금 너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겠고, 루그란 숲… 에서 인간들을 고이 돌려보내지도… 못했겠지." 육성을 통한 의사소통은 너무나도 생소했기에 나는 능숙하게 요정어를 구사하면서도 중간 중간 말을 멈추는 구간이 있을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이런 의사소통 방식에 익숙해질수 있을 것이다. "바보같은 질문이었군요." 칼리아넬은 자신의 머리를 콩- 때리고 혀를 내밀며 웃었다. "그럼, 이제 가보기로 할까." "에- 버, 벌써요?" 요르간드는 대단히 넓기 때문에 인간의 발걸음으로 이곳을 단시간에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는 저번에 로나벨아크하임이 했던 것처럼 공간을 찢고 요르간드의 외곽과 나와 칼리아넬이 있던 공간을 이어 단숨에 공간을 도약했다. 칼리아넬은 처음겪어 보는 장거리 공간 도약이 너무나도 신기한지 계속 들뜬 표정을 짓고 허공에 남아있는 몇가닥의 시공간에 끈에 계속 시선을 주었다. "나보다는 네가 인간들의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테니, 안내를 부탁할게." "네, 그런데… 칼리체님이 그런 말투를 쓰신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말투?" "머리속에 칼리체 님의 뜻이 전해질때 제가 상상했던 칼리체 님의 말투와는 너무나도 달라서요. 그때 제가 생각한 칼리체 님의 말투는 굉장히 위압적인 고어체 였어요." 고어체라… 내가 원래 쓰고있던 의사소통 방식은 뜻을 바로 뇌리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거겠지. "이게 가장 무난한 인간들의 말투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러니?" "네, 맞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칼리아넬은 신이 난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제 나도 표정이란 것을 지을수 있겠군. 입꼬리를 올려 미소라는 것을 지어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것 같다. 칼리아넬이 뭐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표정이란 것을 지어볼 수 있겠지… 로나벨아크하임 처럼. 요르간드의 외곽은 인간들이 종종 출입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얄팍한 길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와 칼리아넬은 어렵지 않게 그 길을 찾아 느릿한 발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칼리체님, 어디로 가실거에요? 인간의 현자에게 답을 주기 위해- 라는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행로를 정하기는 조금 무리일듯 싶은데요." "일단은 로엘가스트 연맹이라는 곳으로 가보도록 하자." "아, 전에 그 인간이 말했었던…" 우리는 얼마 걷지 않아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끝에 자그마한 인간들의 마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흥미를 가지고 멀리서 보이는 그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굵직한 목책에 집들로 보이는 인간들의 구조물에서는 하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그런데… 칼리체님." 칼리아넬은 뺨을 긁으며 몸을 움츠렸다. "생각해보니, 길을 모르는데요…" "상관없어. 시간은 많으니, 길은 몰라도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찾아가는건 불가능하지 않겠지." 인간의 마을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초라해 보였다. 칼리아넬은 도시라는 곳을 가면 내가 기대하는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어쨌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마을은 무척이나 볼품 없었다. 마을에는 흙길을 중심으로 일, 이층 정도 되어보이는 건물들이 드문 드문 서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별로 규칙성 없어보이는 건물들의 배열이었다. 내가 서있는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으로 저 아래쪽에도 건물들이 서있었는데, 하나같이 투박한 목재로만 만들어진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이 가여운 생명체들이 내뿜는 활기가 이 마을 곳곳에 배어 있는것 같아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 마을은 천천히 둘러보던 나는 곧 나와 칼리아넬이 인간들의 집중된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칼리아넬은 마을로 들어오기전에 인간들과는 다른, 뾰족한 귀를 간단한 인식 장애 마술로 숨겨서 그녀가 요정이라는 이유로 인간들의 시선을 받을 이유는 없다. 요정이 인간과 유일하게 다른것은 바로 그 뾰족한 귀와 분위기 뿐이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감각이 둔하기 때문에 분위기 만으로 칼리아넬이 요정이란 것을 알아챌리가 없다. 설마, 정말 이곳의 인간들이 그녀가 요정인 것을 눈치챈것은 아닐테고. "칼리아넬, 인간들이 왜 우리를 쳐다보는거니?" "칼리체님이 너무 예뻐서 그런게 아닐까요?" 내가 예뻐서 그렇다고? 확실히 사물이든 생명체이든 간에 아름다운 것에는 자동적으로 시선이 가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내 모습은 요정의 미적 기준 뿐만 아니라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도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누나!" 짧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내 허리정도 까지 오는 키의 자그마한 인간의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누나…? 그것은 나를 지칭하는 말인가. "누나들은 요정이에요?" 옆에서 칼리아넬이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웠다. 이 자그마한 인간의 어린아이는 마술로 그녀의 뾰족한 귀를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칼리아넬이 요정인것을 간파해 낸것인가. "나는 아니지만 얘는 요정이 맞단다. 인간의 꼬마야." "와아-! 정말 요정이에요?" 꼬마의 커다란 목소리에 기존보다 더욱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서로 귓속말을 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인간들도 있었고,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인간들도 있었다. 하여간 인간들의 집중된 시선을 느끼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꼬, 꼬마야." 칼리아넬이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드래곤의 모습일 때는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그녀와 눈높이를 맞출 정도가 되니 그런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귀엽게 보인다. "쳇, 전 꼬마가 아니에요 요정님. 보로스 라는 이름이 있다구요."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께 무슨 무례냐, 보로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인간이었다. 그는 구부정한 허리에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할아버지!" "무례를 용서하시오, 요정님들. 그럼 자, 이쪽으로." 의외로 그 늙은 인간은 칼리아넬과 나를 보고도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별다른 놀라는 기색없이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다짜고짜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는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일단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 이 자그마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늙은 인간의 집이 위치해 있었다. 아까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집안은 외부의 볼품없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허름했다. "누추하지만 이리로…" 그는 탁자를 나와 칼리아넬의 사이에 두고 볼품없는 목재 의자에 앉았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는 힘이 다 빠진듯한 동작으로 들고 있던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았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죽음이 얼마 남지않은 듯한 모습이다. 늙음이라는 것이 없는 우리 드래곤들은 절대로 저런 모습을 할 수 없겠지. "왠일이시오,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는 때도 아니고 이렇게… 뭔가, 부탁할 일이라도…?" 대충 영문을 알겠다. 이 마을은 정기적으로 침묵하는 숲에 사는 요정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나 보다. "아니요 저희는…" 칼리아넬 역시 그러한 사실을 눈치챈듯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는 하얗게 샌 눈썹을 들어올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인간들의 언어에도 빨리 익숙해질겸 그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요정들이 아니에요. 저희는 그저 이곳을 지나가던 참이랍니다." "아, 이 늙은이가 오해를 했나 보군." -칼리아넬, 내가 백룡이란 것은 인간들의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비밀이다. 왠만하면 발설하지 말아라. 옆에서 칼리아넬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것이 보인다. 굳이 그렇게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눈에 보이게 할 필요는 없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요정과 자주 거래를 하는 모양인가봐요? 요정은 외부에 대해 상당히 폐쇄적인걸로 알고 있는데." "말하는 걸로 보아하니 당신은 요정이 아닌 모양이군요." 노인은 축늘어진 눈꺼플을 들어올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세월에 의한 풍파가 엿보인다. "하지만… 인간도 아닌것 같군." 이렇게 빨리 내가 인간이 아니란 것을 간파당하다니, 나의 어디가 인간으로 보이기에 부족한 것일까. 나는 원래 했던, 별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뒤로 미룬채로 그에게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무릇 인간은 감정이 있기에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떠올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 하지만 당신의 얼굴에는 전혀 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표정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오." 노인의 어조는 답답하리만큼 느리고 흐릿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전달되었다. 과연, 표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단시간에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게 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수천년동안 표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으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드래곤이라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어쨋든 그것으로 나는 이 늙은 인간과의 대화에 흥미를 잃었다. 이곳으로 온것도 이 인간의 오해에서 비롯된것. 더이상 나와 칼리아넬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 "저기 근데, 길좀 물어도 될까요…"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칼리아넬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용건이 하나있었군. 그곳에서 로엘가스트 연맹의 가장 가까운 도시 까지는 인간의 발걸음을 기준으로 약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지금, 나와 칼리아넬은 그 도시로 향하는 구불 구불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무료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르른 녹음 사이로 비추는 찬란한 햇살이 내 눈을 찔렀다. 인간의 안구는 너무나도 나약하다. 나는 채 이초를 버티지 못하고 그 눈부심에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용의 눈이라면 하루종일 태양을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그것이 조금 불만이었다.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바로 하늘위에 빛나는 저 태양을 내 손에 넣는것.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아, 저기 또 마을이 보이네요." 칼리아넬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산길 저너머를 가르켰다. 전에 방문했었던 그 마을보다는 훨씬 커보이는 규모의 마을이었다. 나는 여전히 표정을 지을수 없는 얼굴로 무엇이 그리 좋은지 헤실거리고 있는 칼리아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빛 머리카락에 언제 앉았는지 그녀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은 푸른 나뭇잎을 떼어 주었다. 칼리아넬의 반짝거리는 청록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미약하게 떨렸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는 어느샌가 발그레한 홍조가 어려 있었다. "헤헷-" 그저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 떼주었다고 저리 좋아하다니, 나로서는 아직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나와 칼리아넬은 저번처럼 불편한 시선의 집중을 겪지 않기위해 얇은 로브에 후드를 뒤집어 쓰고 몸을 가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인간의 마을에 진입하지 않아 후드까지 눌러쓰지는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될것이다. 고작 외모 하나로 그렇게 뻔히 보이는 불편한 시선을 주다니, 인간들은 생각보다 단순한 종족인 모양이다. 어쨌건 이 로브는 전에 방문했었던 마을에서 인간에게 간단한 최면 마술을 사용하여 획득한 것인데, 그것이 아직까지 좀 내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인간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방식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제부터라도 인간들의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재화를 인간의 방식으로 얻어보고자 한다. 뭐, 그것도 기회가 된다면 말이지만. "이제 이 마을만 거치면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네요." 그 이후의 계획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이번의 마을은 상당히 거대한 규모였다. 새하얀 포석이 깔린 길을 중심으로 꽤 커다란 석조 건물들이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나와 칼리아넬은 마을을 들어서면서 부터 후드를 눌러썼다. 때문에 전처럼 불편한 인간들의 시선이 사전에 차단되어 마을을 구경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비록,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지만 그렇게 노골적인 시선은 아무래도 내 기분을 다소 언짢게 만들기 때문이다. "굉장히 번잡한데요?" "그렇네." 칼리아넬의 말대로 주변에 지나다니는 인간들은 각 거리가 수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전에 방문했었던 마을들과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다. 번화한 도시의 외관 보다 인간들 수의 변화가 가장 인상적이게 느껴졌다. "저, 칼리체님…" "응?" "저 배고파요."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가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곤 한다. 그녀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칼리아넬이 나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와 칼리아넬은 'Inn' 이라고 휘갈겨 써진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저런 문자가 쓰여진 건물은 여관이라는 곳이었다. 난 아직 인간들의 문자까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한계였다. 벌써 해가 지평선 너머로 지고 있었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갈 생각이었기에 여관으로 들어온것은 적절한 행동이었다. 여관에서는 식사도 해결되는것 같으니 말이다. "어서오십오." 이곳의 주인은 머리카락이 많이 듬성듬성한 다소 늙어보이는 인간이었다. 그는 후드를 눌러쓴 우리를 보고 약간 수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시선은 타당하다. 모습을 숨기려는 자가 수상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쨌건 간에 그의 목적은 숙식을 제공함으로써 재화를 취득하는 것이기에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두명이 묵을만한 방과 한명이 먹을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주세요. 아, 왠만하면 육류는 제외하구요." "예… 알겠습니다." 내 가느다란 목소리가 의외였을까,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을 했다. "이제부터 이런일은 네가 하는것이 좋겠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익숙치가 않거든." "알겠어요, 칼리체님." 목재로 만들어진 탁자에 그녀와 나는 마주보고 앉았다. 그녀 역시 숲에서만 살아오던 요정, 이런일이 전혀 익숙치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당히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품속에서 화폐를 꺼내 그녀에게 모두 넘겼다. 잠깐동안 주변에 앉아서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던 인간 몇몇의 시선이 내가 재화를 품에서 꺼내자마자 이곳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금방 다른곳으로 흩어져 버렸다. 금방 따뜻한 스프와 야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음식이 나왔고, 칼리아넬은 후드를 쓴채로 음식을 먹을수는 없었기에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내려 얼굴을 드러내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인간들의 미적 기준으로는 칼리아넬의 모습역시 대단히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후드를 벗자마자 노골적인 시선이 잠시 이곳으로 집중되었다가 흩어졌기 때문이다. 할일이 없는 나는 손으로 턱을 괴고 음식을 먹고있는 칼리아넬을 관찰하였다. 스푼 이라는 철제 물건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스프를 떠서 입으로 집어 넣는다. 포크로 채소를 찍어 입으로 넣어 우물거리며 먹는것이 꽤 귀엽게 보인다. 나는 인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행동하는대로 따라서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 생각에 입각하자면 나 역시 칼리아넬을 따라 음식을 먹어야 하겠지만 아직까지 몸속에 저런 물체들을 넣는다는게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먹는다는 행위까지는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인간들만 음식이란 것을 먹는것도 아니니, 굳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까지 내가 그런 이상한 기분을 감수하며 음식을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카, 칼리체님도 드셔보실래요?" "아니." 내 빤한 시선에 그녀가 불편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주변에 가득찬 인간들을 둘러 보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인간들보다 더욱, 그들은 활기에 차있었다. 조용한 요르간드에서만 살아온 나는 이정도로 시끄럽게 떠들고 웃는 인간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조금 멍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어떤 인간의 남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슨 의미가 담긴 미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화답을 위해 잠깐 손을 들어주었다. 붉은색의 머리카락에 상당히 잘생긴 모습의 청년인 그는 허리에 기다란 장검을 차고 있었다. 이제 나도 인간들을 꽤 보아온지라 그들의 미적 감각에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제 외모의 상중하 정도는 어느정도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 "죄송해요 칼리체님, 음식을 먹어야 하는 저 때문에…" 그렇게 한참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칼리아넬이 침울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인간들에게로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칼리아넬은 손에든 작은 스푼으로 자신의 입술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응?" "저, 칼리체 님을 이렇게 기다리시게 만들고." 칼리아넬은 굉장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그녀를 기다리기만 하니 상당히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편해졌다는 것에서 나는 그녀가 내가 드래곤이라는 존재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녀는 여전히 내 존재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신경쓰지 마. 너를 기다리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정말 잠깐의 시간이니까. 그리고 그 시간에 인간들을 관찰하고 있으니 아무런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은 아니란다." "그, 그런가요…?" 인간들은 여전히 쉴새 없이 떠들고 움직인다. 항상 느긋하게 태양을 바라보며 지내던 나로서는 그들의 활기찬 행동이 대단히 신선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모습에 계속 시선을 빼앗길수 밖에 없었다. 짧은 그들의 수명 때문일까, 그들은 순간 순간을 불태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렇게 쉴새 없이 행동하기 위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 아마도 그것은 욕망이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중 욕망이라는 감정에 가장 충실한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위해 심지어 같은 종족 마저도 거리낌 없이 해한다. 그것이 가시화 되어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것이 바로 전쟁, 단순히 욕망만으로 그정도 규모의 전쟁을 일으킬수 있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다. 전에 인간의 현자가 나에게 찾아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물었던 이유도 아마 그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욕망이지만, 그들을 추하게 만드는것 역시 바로 욕망일 테니까. 어찌되었건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있어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과연, 로나벨아크하임은 이러한 재미로 계속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는 실제로 인간들의 생활에 참여하기도 한다. 단순히 바라만 보고 있는 나와는 느끼는 바가 많이 다르겠지. 어찌되었건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를 수 있는 거대한 힘인 마력과 신력이 아닌 바로 시간이다. 느긋하게 인간들을 관찰하다 보면 로나벨아크하임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자네, 들었나. 마경(魔境)에서 엄청난 수의 마물(魔物)들이 나와 그쪽에 있던 군대가 절반이나 죽었다는걸 말이야." "하, 또 용병들의 몸값이 오르겠군. 그만큼 죽을 위험도 높아지겠지만 말이야." 옆쪽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인간들의 대화였다. 그나저나 마경(魔境)이라…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곳은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알맞은 토양과 기후, 식량 자원을 갖춘 곳이다. 다만, 그곳에 음차원의 마력이 몰려 계속 마물이 나온다는 것을 빼면. 인간들은 아마 그곳을 개척중인듯 싶다. 거의 이 대륙의 1/3 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욕망은 끝을 모르고 끝없이 영토를 확장중인듯 하다. "자칫하다간 이 지역도 위험해 질지 모르겠어, 마경과 가까우니 말이야." "그러게 말일세." 칼리아넬이 식사를 마친후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이 건물의 위층에 있는 숙소로 올라갔다. 나는 휴식이라는 걸 취할 필요가 없지만 칼리아넬은 하루에 한번씩 꼬박꼬박 휴식을 취해줘야 한다.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보니 하늘에는 태양이 지평선 끝자락에 걸려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가자." "죄송해요 칼리체님…" 그녀도 의미없이 같은 말을 두번 반복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일년이란 시간도 나에게 있어선 찰나에 불과한데 그녀는 단 하루같이 하찮은 시간을 지체하게 했다해서 뭐 그리 미안함을 느끼는 걸까. 두번 말하기 번거로운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변을 어둠이 잠식해 가고 있었지만 인간들은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밤이 되니 인간들의 숫자가 더 많아진것 같다. 좁은 길을 많은 수의 인간들이 다니니, 마치 군집을 이룬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자지 않고 창문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태양이 떠오를때 까지 미동도 않고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눈은 실로 연약하고 불확실하여, 어둠속에 어른거리는 사물과 깊은 어둠에 휩싸인 인간들의 구조물이 몽환적이게 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너무나도 정밀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것 보다 이쪽이 더 나은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우응… 칼리체님?" 칼리아넬이 일어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여전히 창밖을 응시했다. 매일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이제 곧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러고 계셨던 거에요?" "용은 보통의 생명체와는 다르게 휴식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아. 내려가서 음식을 먹고 출발할 준비를 하도록 하렴. 나는 일출을 바라보고 내려갈테니." "칼리체님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매일 일출은 꼭 챙겨보시네요?"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찬란한 빛이 넘어오며 세상을 비추는 풍경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풍경이 단지 외견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것에 매료되어 있는것은 아니다. 태양이 뜨고 진다는 실로 단순한 법칙앞에 온 세계가 그에 순응하고 그에 맞추어 구축된다는 그 시스템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고, 정교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응, 그것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니까." 아마도 그 말이 내가 한 모든 말중에 가장 강렬한 감정을 띄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에. 칼리아넬은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나와 칼리아넬은 아침 일찍 마을을 나와 태양이 하늘의 한복판에서 약간 더 간 위치에 있을 때까지 걸었다. 활기찬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있다가 정적인 산길을 보고있자니, 굉장히 따분한 느낌이다.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을때는 일주일을 가까이 미동도 않고 있을 자신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저기, 칼리체님.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신데…" "응." "배고픔이나 뭐 그런걸 느끼시지는 않는 건가요?" 칼리아넬의 말에는 짙은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긴, 신기하기도 하겠지 그렇게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던 내가 순시간에 이렇게 자그마한 인간의 몸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의 우거진 풍성한 풀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푸르른 풀잎 사이로 군데 군데 하얀 햇빛이 비춰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내가 지금 완벽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부분에만 한정되어 있어. 그 예로 난 아직까지 성별을 갖고 있지 않아." "네?" 그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이다. 나는 느릿하게 걸으며 조금 나른한 기분으로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부분만 인간이 된거지, 내가 드래곤이라는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뭐, 내가 원하면 본질까지도 완전히 변하게 할 수 있지만." 톡. 그때,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위를 바라보았다. 위에는 자그마한 다람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람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나무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바닥을 바라보니 자그마한 도토리 조각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 머리를 가볍게 친 그 느낌의 원인은 아마 그것인것 같다. 칼리아넬이 옆에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왠진 모르지만 이 상황 자체에서 기묘한 '기시감' 이 느껴진다. 어쨌든 그녀에게 설명을 계속한다. "… 쉽게 말해 외모, 감각,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의 용량 같은 것들이 바로 인간의 레벨에 맞추어 진거야. 나는 인간의 번거로운 생리현상까지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여, 역시 대단하네요… 그런식으로 칼리체 님이 원하는 데로 몸을 변형하려면 고려되어야 하는 마력적 처리가 엄청 날텐데요." "나는 용이니까." "…" 역시 세계의 근원에서 비롯된 힘, 마력과 친숙한 종족 답게 그녀는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것 같다. 칼리아넬은 이제 마을에서 어느정도 벗어난것 같자, 쓰고 있던 후드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많이 답답한 기분이겠지. 그녀는 시원함을 느끼며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는 가느다란 미소를 짓고 눈을 감았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는듯 싶었다. "답답하면 너는 후드를 쓰지 않아도 좋아. 인간들의 시선이 불편한것은 나이니까, 너는 상관없잖니." "아, 아니에요. 저도… 저도 인간들의 시선이 불편해서 그런것 뿐이에요." 그런데 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거지? 역시 칼리아넬은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든 요정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고 마침내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었을때 느끼는 지적 만족감은 상당히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칼리아넬의 경우는 이성으로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것 같다. 드래곤의 사고는 세계의 근원에 걸쳐 있어, 이 세상에는 내가 이해하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 많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접할때마다 나는 반가움을 느낄수 밖에 없다. "아, 저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상념에 빠져있던 나는 칼리아넬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칼리아넬의 말대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보아왔던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음식을 만들때의 연기가 아니었다. "조금 먼것 같네." 나는 거리를 가늠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의 눈은 이정도의 거리도 쉽게 식별하지 못한다. 아마 칼리아넬이 지금의 나보다는 감각능력이 더 뛰어날 것이다. "지금의 발걸음이라면 두시간 뒤면 도착하겠네요." 두시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요정의 시간 체계인 모양이지. 우리 드래곤들에게는 시간의 경과가 의미가 없기에 시간을 재는것 역시 의미가 없다. "… 저곳으로 가보자." "네!" 그녀의 말대로 두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얼마 걷지 않아 우리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언덕을 넘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이유를 알아차렸을때 칼리아넬은 입을 가리고 근처에 서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표정을 지을줄 모르는 얼굴로 마을, 아니 마을이었던 곳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땅위에 지어진 거의 모든 인간의 구조물들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인간이었던 듯한 지저분한 고깃 덩어리 들이 불에 그을려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드문 드문 인간이 아닌 이형체(異形體)들의 신체 조각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시체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다. 이곳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칼리체 님!" 나무에 기대어 있던 칼리아넬이 갑작스레 나에게로 안겨왔다. 인간들의 시체가 타는 불쾌한 냄새 대신 기분좋은 향기가 후각을 통해 화악- 하고 내 후각을 타고 뇌리로 들어온다. 칼리아넬이 나에게 안기기전에 잠깐 보았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던것 같다. "너무 끔찍해요…! 무, 무서워요 칼리체 님." 칼리아넬은 아직 어린 요정이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영향을 받는, 아직 덜 성정한 어린 아이다. 불쾌한 모습으로 스러져가는 생명체 였던 것들을 바라보기 껄끄러운 것이겠지. 그녀의 외모는 인간의 기준으로 십 오세 정도. 하지만 정신 연령은 그 나이대의 인간보다는 훨씬 높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녀가 아직 덜 성장한 어린애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저 광경에서 어떻게 해야 두려움이라는 감정마저 느낄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것들은 그저 생명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진 고깃덩어리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나에게 안긴 칼리아넬을 양 팔로 부드럽게 안아주며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어째서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에게 의지하는 것을 받아줄 수 밖에 없다. 내 품에서 훌쩍이는 칼리아넬에게서 신경을 끄고 나는 천천히 이형체의 조각들을 살폈다. 그것들에게서 풍기는 이질적인 향기가 그것들이 바로 인간들이 마경(魔境)이라 부르는 곳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에 인간들이 떠들던 대화가 생각났다. 최근들어 마경에 있는 마물들의 수가 늘어났다고 했던가… 이 마을은 마경에서 나온 마물들의 희생지인 모양이다. "칼리체님은 이 광경이 끔찍하지 않으세요…?" 칼리아넬이 내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르 뺨을타고 흘러내렸다. 끔찍하다구…? "…" 나로선 그저 불쾌함을 느낄 뿐이다. 영혼을 잃은 고깃덩어리 들이 바닥을 뒹구는 광경은 누구든 좋아할 광경이 아닐 테니까. 나는 칼리아넬의 머리를 부드럽게 내 품으로 눌러 내리며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이런 광경을 만들어 놓은 것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것일까. 아직까지 불에 타오르고 있는걸로 보아 이 광경이 만들어 진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것 같다. 어쨌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칼리아넬이 이 자리에 있는걸 힘들어 하니 얼른 떠야겠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괜히 이곳에 왔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 우리가 왔던 길에서 약간 떨어진, 왼쪽에 나있는 커다란 길로 무언가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의 나보다 감각이 배는 민감한 칼리아넬은 이미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그곳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칼리체 님, 이소리는…?" 나타난 것은 꽤 화려해 보이는 마차와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말을 탄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은빛으로 빛나는 철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의 갑옷의 가슴팍에는 비상하는 푸른 독수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도, 도대체 이건…!" "저기 누군가가 있습니다!" "아가씨,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인간들 역시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 중 두명은 풀숲에 토악질을 하며 섭취했던 음식물들을 게워내고 있었다. 유쾌한 광경은 아니군. 스르릉- 제일 먼저 나의 앞에 달려온 인간의 남성이 허리에 차고 있던 철제 무기를 빼들었다. 그 무기에서 반사된 햇빛이 내 눈을 자극하여,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옷자락을 쥐고 있는 칼리아넬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네, 네놈들이냐! 이런 짓을 한것은!" "헤밀턴! 고작 두명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아, 저…" 헤밀턴이라 불린 인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무기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내가 보기에 굉장히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짓고는 손에 들린 무기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는 우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입니다." 정신없는 인간이군. 칼리아넬은 그들을 보더니 더욱 겁먹었는지 나를 안고있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답답하군. "그나저나 당신들은 어째서 이곳에 있소?" 목소리의 주인은 방금 헤밀턴이란 인간을 진정시킨 자였다. 대단히 강인해 보이는 거대한 체구에 거뭇 거뭇한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인간 남성이었다. 약간 가늘게 뜬 그의 날카로운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도 방금 이곳에 도착했어요." 내 가느다란 목소리가 의외였는지,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 뜨며 말했다. "로브를 쓰고 있어 몰랐는데, 어린 아가씨였군." 헤밀턴이라는 인간에게 그렇게 말했어도, 그는 약간의 의심을 풀고 있지 않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힘없는 어린 인간의 소녀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긴장된 기류가 풀려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어라, 어제 여관에서 보았던 아가씨들 아냐?" 어제 식당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던 붉은 머리카락의 인간 청년이었다. "누구…?" 칼리아넬이 살짝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칼리아넬은 조금 진정이 된듯 내몸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팔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는 모를거에요. 저는 당신이 안고 있는 분과 안면이 있으니까." "칼리체님, 언제 저분과…" "잠시 눈이 마주쳤을 뿐이야."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멋쩍은듯 뒷머리를 긁었다. 뒤에서 우리들을 보고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나와 그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자 완전히 의심이 풀린 모양이었다. "아가씨들은 언제 이곳에 오셨소?" "우리는 저쪽 길을 따라서 왔어요. 이곳에 도착한지는 얼마 안되요." 그의 질문에 칼리아넬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외부에 비춰지는 나의 성별은 완전히 여성으로 굳어져 가는것 같다. 별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이것참… 그럼 들을 이야기가 없겠군." "이 마을은 마경(魔境)에서 나온 마물들에 의해 파괴 당했어요." "물론 이 광경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지만… 아가씨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저는 마력을 다룰줄 아니까요. 이 곳에서 희미하게 마경의 냄새가 느껴져요." 내 말에 그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쳐지나 갔다. 인간들 중 마력을 다룰줄 아는 자는 극히 소수이니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인간들 사이에서 마력을 다룰줄 아는 자는 마술사 라고 불린다. 나는 바로 그 마술사 행세를 하며 인간들의 사회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놀랍군. 마술사라니… 아, 그것보다 실례했군. 내 이름은 베리오스 엘크란체, 니하크할룬까지 모시고 있는 아가씨를 호위하고 있는 중이오." "제 이름은 칼리아넬이에요."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칼리아넬의 소개에 화답했다. 꽤 예의바른 인간이군. 나는 이제 완전히 긴장이 풀린듯한 칼리아넬을 내게서 살짝 떼어 놓으며 말했다. "칼리체 입니다." 지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내 모습 역시 나의 진실된 모습이다. 달리 다른 이름으로 소개할 이유가 없지. "칼리아넬 양과 칼리체 양이로군. 이름이 비슷한데, 혹시 자매요?" "아, 아니에요." 칼리아넬은 왠지 상기된 얼굴로 나를 힐긋 바라보며 그의 말을 부인했다. 아깝군, 그것을 긍정했다면 나와 칼리아넬을 소개하기가 한결 편했을 텐데… 하지만 머리색이 다르니 어쩔수 없으려나. "이거 실례했군." "베리오스님! 아가씨좀 말려 주십시오! 안된다고 해도 한사코 밖으로 나오려고 하십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베리오스는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베델,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베델이라는 청년은 그들과는 다르게 은빛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의 등에는 인간들이 석궁이라 부르는 듯한 물건이 매어져 있었고 허리에는 인간들이 가장 많이 쓰는 무기, 검이라는 철제 무기를 비스듬히 차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손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다친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군, 붕대라는건 상처를 감싸는데 쓰는 물건이 아니던가. 아무튼 그의 모습은 저들과는 비슷한 구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들으셨겠지만, 제 이름은 베델입니다. 니하크할룬까지 저 아가씨를 호위하기로 계약한 용병이죠." 용병이 뭔진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것은 나중에 칼리아넬을 통해서 들으면 될터. 그런데 칼리아넬은 어떻게 이렇게 인간들의 사회에 관해 잘 알고있는 걸까. 어린 나이인 그녀가 인간들의 사회를 돌아다니며 체득한 지식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다른 요정에게서 들은 거겠지. "베델… 대륙을 구했던 위대한 영웅의 이름이군요?" "예, 맞습니다." 칼리아넬의 물음에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어려 있엇다. 칼리아넬은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지. "그나저나 지독하군요, 이런짓을 한 놈들은, 마물… 이라고 했던가요?" "네, 이런 짓을 한 존재는 마물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이런 행위를 하는것이 그들의 본질을 따르는 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을 해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역시, 사람이 이런 짓을 할리가 없죠. 그들은, 그 저주받은 마물들은 반드시 응징을 받을겁니다. 이건 정말…" 여전히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침통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단순히 그가 불편해 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마물에 대해 언급했나 싶었지만, 그는 이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저…" "칼리체라고 불러주세요." "아, 예. 칼리체는 계속 후드를 쓰고 계신데,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건가요? 저번에 봤을때도 후드를 쓰고 있어서…" 그렇지, 후드를 쓰고 있는 것은 상대로부터 나를 감추는 행위이고 그것은 상대로부터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아까 베리오스라는 남자가 경계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마 내가 계속 후드를 쓰고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나는 후드를 벗어내렸다. 후드속에 감춰두었던 기다란 머리카락이 샤르륵- 소리를 내며 내 등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베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은 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저 표정은. "칼리체, 당신…" "뭐에요! 그런 시선은 실례잖아요." 칼리아넬은 톡 쏘는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베델은 다시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미… 미안합니다." 그의 시선이 어디가 실례인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가 나에게 실수한 일이 있던가? 그리고 칼리아넬은 왜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저, 그런데 백발이라니 굉장히 드문 색이네요." "이상한가요?" 나는 머리카락을 한움큼 집어 내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다른 모든 색을 배제하는 듯한, 지극히도 하얀 백색이 눈앞을 가득 매웠다. 내 비늘과 같은 백색, 이 색은 내가 백룡이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 아뇨. 이상하다니요. 굉장히 아름다운 색이죠, 백색은." "대충 정리가 끝난듯 하군. 아가씨들,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한것 같…" 그가 불려갔던 원인이 되었던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베리오스라는 인간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의 나만큼이나 표정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에 약간의 경악이 스쳐지나 가는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을뿐, 그는 다시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음, 이곳은 위험한것 같으니 저희들을 따라오시는게 어떻습니까. 혹시, 목적지가…?" "로엘가스트 연맹이에요." "아, 아까 말했다시피 우리도 니하크할룬, 로엘가스트 연맹의 도시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물이 나올지도 모르는곳에서 아가씨둘만이 이동을 하기에는 위험하니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처럼 자연스럽게 인간들의 사회에 녹아들어가는 것은 불가능 할것 같다. 인간들이 보기에 특이한 이 외모나, 표정이라는 것을 짓기 힘든 얼굴은 인간들에게 큰 위화감을 주는것 같다.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반가운 제안이었다. 처음으로 인간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다. "친절한 분이군요,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있지 않아 베리오스는 다른 인간들을 인솔하여 이 폐허가 된 마을을 급히 떠났다. 아마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라는 인간에게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겠지. 지금 그 아가씨라는 인간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나에게 굉장히 호기심이 어린 시선을 보내면서. 두가지 성별중 여성이란 성별은 남성보다 존중받는 성별인것 같다. 그들은 나와 칼리아넬을 여자라는 이유로 그들이 모시고 있는 아가씨가 타고있는 마차에 오르게 하였다. 물론, 그전에 이 소녀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겠지만. 그녀는 자그마한 체구에 길고 매끄러운 흑발을 가진, 인간들의 기준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미색을 가진 소녀였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에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갈듯 가녀린 체구로 보아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투명한 청색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에네리아 룬헤임 바루에르라고 해요." 바루에르라. 인간들은 성으로 그들의 혈족을 구분짓는다. 바루에르라는 성은 예전에 들어본적이 있는 것이었다. 아, 전에 그 인간,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 정말이지 공교롭게도 그가 살리고자 했던 딸이 바로 내 눈앞에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앉아있었다. 내가 준 생명의 열매에 준하는 효과를 가진 하찮은 마력의 부산물에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겠지. 어찌되었건 나에게도 맞섰던 그의 고결한 의지는 그 결실을 맺었고, 나는 그 결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칼리체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칼리아넬이에요." "두분다 굉장히 아름다우신 분들이네요. 특히 칼리체님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탄의 기색이 어려있었고, 또한 무언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 또한 떠올라 있었다. "정말 인간이 아닌것처럼 아름답네요. 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정말 처음봐요. 아, 실례되는 말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네리아라는 소녀는 자그마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별로 실례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니까. 인간이 아닌것처럼- 이라는 말을 들은 칼리아넬은 약간 몸을 들썩이며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에네리아는 그런 칼리아넬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것 같다. "어째서 인간이 아닌것 같나요?" "음… 어째서냐고 물으시면." 칼리아넬이 조금 주목을 받겠다고는 말했긴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나는 인간들에게 평범하게는 다가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를 보는 인간들은 모두 눈동자에 기이한 감정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곤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칼리체, 당신의 아름다움이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어렸을때부터 몸이 아파 지금껏 저택을 벗어나본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볼수있는 세상의 광경은 저택의 내부만으로 굉장히 제한적이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저를 안타깝게 여겨 외부의 풍경을 저택 안으로 옮겨오셨답니다." 나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의 아름다움이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저명한 화가의 예술작품, 마력으로 풍경을 백지위에 고정시킨 그림이나, 너무나도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 저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접하고 그것을 느껴왔어요." 그녀는 갑자기 숨이 가빠오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고, 숨이 약간 거칠어졌다. 나는 에네리아의 자그마한 손을 잡았다. 그녀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잡음으로써 나와 그녀는 마력적 연결을 이루게 되었고, 내게서 비롯된 마력이 그녀에게로 흘러들어가 그녀의 신체활동이 안정을 이루게 조정했다. "어, 어떻게 된거죠? 갑자기 몸이 가뿐해졌어요." "나는 마술사니까요. 그런데, 몸이 좋지 않은가요?" "아뇨, 바로 얼마전에 큰 병에서 치유되었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약간 남아있는것 뿐이에요." 그녀는 내가 마술사라는 말에 흥분했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더니 자그마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에네리아는 내 요청대로 이야기를 계속해주었다. "… 그런 수많은 아름다움을 접하며, 저는 형편없지만 어느정도 그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이 생기게 되었어요. 그런 안목이 생긴뒤로 제가 생각한 것은 이것이에요, 바로 어떤 완벽한 아름다움도 결점이 있다는 것." 칼리아넬은 약간 심통이 난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요정이다. "저는 당신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음,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쉽게 말하자면 당신의 아름다움이 도가 지나쳐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랄까요. 당신의 아름다움에서 흠이라는 것을 찾아볼수 없었어요." 그런 거였나. 에네리아의 눈은 정확하다. 이 모습은 마력과 신력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이니까. 하지만 이것 역시 진실한 내모습. "헤- 저좀 이상하죠? 처음보는 사람한테 이런 소리까지 하고… 그동안 저택에만 머물러 있어서 제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게 서툴거든요. 제 말에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말은 잘했으면서, 에네리아는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처음보는 저에게 당신이 느끼바를 진솔하게 말해주다니, 고마워요. 당신은 순수한 인간인것 같네요. 전 당신같은 인간, 좋아해요." "에-" 에네리아의 내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던것 같다. 칼리아넬 만큼이나 귀여운 인간이군. 옆에서 칼리아넬이 몸을 들썩이는 것이 느껴진다. 왜 그러지? 잠시 의아한 시선으로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던 나는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자 시선을 바깥으로 던졌다. 마차의 흐릿한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태양이 지며 세상에게 전하는 저 붉고, 서정적인 빛은 일출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황혼은 흔히 끝이나 쇠퇴로 묘사되곤 하지만 다음날 또다시 이 세상으로 떠오를 태양이 아닌가. 나는 종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드래곤. 하늘위의 저 태양과 영원의 삶을 살아가며, 세계의 그 어떠한것도 내게는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권태로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아가씨, 죄송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해야될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열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으니까요."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며 베리오스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노숙이라 해봐야 그녀에겐 별로 불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마차는 충분히 컸고, 쿠션은 대단히 푹신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불을 피우고 있는 베델을 힐끗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와 칼리아넬은 바깥으로 나갈게요." "아, 아니. 그러지 마세요. 자리는 충분한 걸요." 세명이 누워 자기엔 충분치 않지만, 일단 그녀의 호의는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니, 괜히 자는척하며 그녀에게 불편을 주지 않아도 된다. "로엘가스트 연맹으로 데려다 주시는것만 해도 고마운데, 잠자리 까지 신세질수는 없는 일이지요. 저희는 나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에네리아는 굉장히 아쉬운 표정이다.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와 칼리아넬이 그녀와 같이있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음, 그렇다면 칼리아넬 만이라도 여기서 재워도 될까요?" "아, 아니에요- 칼리체님! 저도 괜찮아요…!" 칼리아넬은 팔까지 내저으며 거부의사를 표하고는 나를 따라 마차를 나왔다. 조금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의 저녁 공기가 나를 반겼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를 풍겼다. "아, 칼리체 거기 서있지 마세요. 연기가 간다니까요." 베델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인간들에게 있어 불은 굉장히 중요한 도구이다. 요정처럼 어둠속에서 미약한 달빛만으로 시야를 확보할 수 없는 없는 인간은 불로 시야를 확보하고, 불로 그들이 먹을 식량을 익혀 먹으며, 불로 엄습하는 추위를 피한다. "칼리체님, 뭘 그렇게 멍하니 있으세요?" 칼리아넬은 베델이 피워놓은 모닥불에 다가가 앉아 손바닥을 불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모닥불에서 피어나오는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은지 칼리아넬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인간의 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와 마찬가지로 차가움과 따뜻함 등 을 느낄수 있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본 감각이라 나는 약간의 생소함 마저 느꼈다. 드래곤은 그 강력한 몸으로 인해 고통, 차가움, 뜨거움 등의 여러 감각으로 부터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전에 따뜻함을 처음 느꼈을때가 아마 로나벨아크하임의 레어에 방문했었을 때였지. 레드드래곤답게 그의 레어는 용암위에 지어져 있었으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모닥불의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칼리아넬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와 같이 손바닥을 펴고 모닥불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주변에는 은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야영에 필요한 장비들을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저도 저들을 도우러 일어나야 겠군요. 돈 받아먹으면서 일하는 주제에 쉬는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도…" "아, 아뇨. 칼리체는 그냥 계세요. 당신같이 어린 아가씨에게 일을 시키면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겁이 나니까요." 베델은 옅게 미소지으며 일어났다. 그가 떠난 모닥불은 나와 칼리아넬의 것이 되었다. 다른 인간들은 아직 분주히 움직이며 쉴 생각이 없는것 같았다. "칼리체 님." "응?" 일렁이며 춤추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서 들려온 칼리아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의 붉은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상기되어 있는것처럼 보였다. "며칠 되진 않았지만, 인간들을 보니 어떠세요?" "글쎄." 아직까진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좀더 깊이 그들의 사회에 들어가 그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생활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들 중에는 너만큼 귀엽고 재밌는 녀석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 표정이 무슨 표정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무, 무슨…! 놀리지 마세요!" "어째서 놀린다고 생각하는 거니? 난 진심이야." "우…" 정말, 어째서 놀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래서 다른 종족의 언어는 불편하다. 자신의 진심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오해와 불화가 잦은 거겠지. 하지만 이 불완전한 언어는 그 불완전함으로 내게 흥미를 준다. 방금 칼리아넬의 알 수 없는 오해와 같이. "스, 습격이다!!" 이제 해가 막 떨어질려는 찰나, 주변을 감돌던 공기가 단번에 뒤바꼈다. 정말이지 갑작스럽군. "무슨일 일까요?" 주변에 보아오던 일행이 아닌 다른 인간들이 뒤섞여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들은 서로 강철로 만든 무기를 빼들고 그 무기를 서로 맞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바로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에네리아인것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쪽으로 다가갔다. "아가씨들은 이쪽으로 오지마시오!" "카, 칼리체님…!" 순식간에 주변은 비명과 쇳소리, 신음으로 가득찼다. 벌써 바닥에는 싸늘하게 식은 인간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습격자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 하나 하나는 무장이 이들보다 못하지만 수가 월등히 많았다. "베델! 이쪽으로 와서 마차를 지키게!" "알겠습니다!" 내가 책임질 범위는 칼리아넬 뿐이다. 이들이야 서로 싸우던 말던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시선을 마차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에네리아라는 인간의 소녀는 나와 인연이 있다. 거기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그류벨이라는 인간의 딸이기도 하고, 그녀의 죽음을 방관하기에는 마음이 편치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녀에게 큰 위협이 될만한 일은 없는것 같다. 마차 주변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베리오스와 베델은 무척이나 강했고, 습격자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실력은 그 수를 한참이나 웃돌 정도였다. 베델이 수평으로 한번 휘두른 섬광과도 같은 일격에 습격자들 둘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이렇게 전력차가 큰데… 습격을 주도한 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던 것일까. "칼리아넬,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렴." "네." 칼리아넬의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뿐만 아니라 내 팔을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도 잔 경련이 느껴져 왔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걸까. 설마, 칼리아넬은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내가 누구인지 잊어 버린건 아닐까. "으아악!!" 생의 마지막에 남기는 단말마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가 최후에 세상에 남기는 자신의 흔적인 만큼 크고, 처절했다. 상황은 금방 정리되고 있었다. 베리오스는 더이상 마차 주위로 덤벼드는 자가 없자 약간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완전히 긴장을 놓아버린건 아닌 모양인지 계속 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숲 저편에서 갑작스레 마력의 유동이 느껴져왔다. 하지만 아직 인간들이 느낄 정도의 커다란 마력 유동은 아니었다.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의 감각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보통의 인간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마력적 감각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의 유동은 점점 커져갔고,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아무말 없이 서있었다. 그 마력의 유동이 마력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의 감각에도 포착되었을때는 이미 그 마력의 행사를 막기에는 늦어있었다. "제길, 마술이군! 저쪽이다!" 베리오스가 검끝으로 풀숲을 가르키고, 그쪽으로 인간들이 몇명 달려나갔지만 섬광처럼 쏘아져 오는 그 마력의 응집체를 막을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베리오스는 몸으로라도 그것을 막을 작정인지 앞으로 나와 자신에게로 쏘아져 오는 마술의 결과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몸으로 막는다 하여도 저 마력은 그의 몸을 해체하고, 그의 뒤에있는 마차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다. 그가 죽고, 그 마술의 결과를 막을 수 있다면 내가 나설일은 없었을 테지만… 어쩔수 없군. 나는 그의 앞으로 뛰어나가 오른손을 들었다. 내 앞으로 쏘아져온 그 강력한 마력의 결집체는 내가 휘두른 손짓에 허무로 돌아가 허공에 흩어졌다. 이것을 쏘아보낸 자는 이미 도망가고 있었다. "고… 맙소." "…" 그는 검을 늘어뜨린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은 모두 멍청한 표정을 짓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뭣들 하는거냐! 주변에 아직 위험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샅샅이 수색해라!" "저, 베리오스…?" 마차의 문이 살짝 열리고 에네리아가 그 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안으로 점칠되어 있었지만, 주변을 보자 상황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아직 마차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아직도 위험한건 마찬가지 입니다." "기사분들은 많이 다쳤나요?" 뭐라고 더 말할것 같던 베리오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는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에네리아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다시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차분한척 하려 하지만 내눈에는 그녀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것이 보였다. 베리오스의 뒤에서 얼어붙어 있던 칼리아넬이 마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더니 그제서야 정신이 든듯 나에게로 달려왔다. "칼리체 님!" 그녀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로 안겨왔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전에도 그랬던것 처럼 그저 그녀의 반응에 맞추어 응할 뿐이다. "아가씨는 무척 수준이 높은 마술사였군요." 베리오스의 눈빛에 미약한 경악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나를 강렬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손짓만으로 이미 이루어진 마력 행사를 흩어버릴 정도면 아가씨는 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라 불리워야 하겠군요." 내가 행한것은 세계의 법칙을 뒤흔들수도 있는 이적(異跡)에 달하는 마력 행사이다. 원래 마력의 본질은 그러한 것이나 부족한 인간들의 능력으로는 그 본질을 제대로 이끌어 내지 못하기에 마술(魔術), 말그대로 수준낮은 술수 밖에 부리지 못하는 것이겠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어쨌든 도움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아뇨, 이쪽 역시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목적지까지 편하게 우리를 마차로 이동시켜줄 예정이니 말이다. 간단한 손짓 하나로 그런 조력을 얻을 수 있다면 이쪽이 더 이득이 아닌가. 뭐, 저쪽은 손짓이라는 간단한 행위의 결과로 목숨을 구원 받았겠지만, 나는 나의 기준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내게 있어 그 손짓은, 아니 손짓 뿐만 아니라 그 결과 까지도 정말로 보잘것 없는 것이다. "그럼, 마차로 들어가 주십시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겠습니다. 방금과 같은 습격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리아넬과 함께 다시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적의 시체를 수습할 필요는 없다! 모두 지금 당장 출발한다!" 마차 밖에서 베리오스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마차라는 격리된 공간 때문에 약간 억눌린듯한 느낌이었다. "칼리체와 칼리아넬은 어디 다친곳 없나요?" 그녀의 물음과 함께 다시 마차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닥과 닿은 바퀴의 진동은 이 마차에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사소한 인간들의 기술에서도 놀라움을 느낀다. "네, 칼리체님 덕분에 아무대도 다친곳 없어요." 방금 까지만 해도 바닥에 뒹굴던 시체와 전투의 열기로 새파래진 표정을 짓고 있던 칼리아넬이지만, 지금은 어느새 그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표정은 조금 좋지 않아도 목소리는 밝았다. 에네리아는 칼리아넬의 말에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내 외견은 십대 중반의 조그만 인간 소녀에 불과하다. 그녀가 보기엔 내가 그 교전에 참여하여 칼리아넬을 보호 할만한 힘을 갖추지 못한걸로 보일것이다. 그 시선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마술… 아니, 마법사 이니까요." 내 말이 끝나자 에네리아의 얼굴에는 짙은 경악의 표정이 어려있었다. 베리오스의 점잖은 반응에 비하면 상당히 과격한 놀람의 표현이었다. 그래봤자, 눈이 크게 뜨이고 손으로 입을 가린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것 뿐이지만. "그… 마법사라구요?" 인간들이나 요정들이나 했던 말을 반복하게 하는것은 똑같군. 나는 목소리로서 그녀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저랑 동갑이거나 더 어려보이는데, 마법사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마력 행사가 가능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연맹에도 마법사라 불릴 정도의 인물은 채 다섯명도 되지 않는데…" 그녀가 마법사의 수준을 말함에 있어 나이를 언급했다는 것은 나이가 많을수록 마력적 행사가 점점 거대해 짐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긴, 마력이라는 힘은 가지고 있는 재능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어요. 나이도 물론 그가 소유하고 있는 마력의 힘에 비례하긴 하지만, 재능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을 정도로…"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에네리아의 얼굴에는 또다시 발그레한 홍조가 어려있었다. "아, 저 죄송해요. 마법사 앞에서 재능과 나이에 관한 마력의 수준을 논하다니,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아니, 오히려 좋은 정보였다. "아니요, 그것은 저도 모르고 있던 일이니까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그런데… 말이 나온김에 물어볼게요, 칼리체는 몇살인가요?" 알 수 없다. 인간들의 연도 계산 방식에 따라 내 나이를 말하라니, 가능할리가 없다. 내가 살아온 세월은 길고도 길었고, 그동안 인간들의 연도 계산 방식은 고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진실한 나이를 묻는 것이 아니니 음, 적당히… "열 일곱살이에요." "와아- 저랑 동갑이네요, 칼리아넬은 몇살이에요?" 질문의 화살이 칼리아넬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요정의 연도 계산 방식이 인간들이 그것과 일치할지가 의문이었다. "백 다섯살이요." "에…" 아니, 일단은 그녀도 인간으로 행사하고 있었던가. 에네리아는 상식을 벗어나는 대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살풋 웃었다. "아, 아니… 잘못 말했네요, 저는 열 다섯살이에요." 칼리아넬은 표정이 모두 읽힌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기분이 쉽게 외부로 표출 된다는것, 그것이 표정이든 몸짓이든 간에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녀가 순수 하다는 거겠지. 나는 칼리아넬을 힐끗 바라보았다. 인간의 기준으로 십 오세라면 납득 할만했다. "칼리체는 정말 대단하네요, 어린 나이에 벌써 마법사라 불릴 정도고." 에네리아가 창밖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비하면 저는 정말로 보잘것 없네요, 항상 아버지에게 짐만 되고… 괜히 고집을 부려 밖에 나왔더니 이렇게…" 물론이다, 드래곤인 나와 인간인 그녀를 비교한다면 그녀는 분명 나에비해 보잘것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그녀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력적 능력을 기준으로 자신과 나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당신은 보잘것 없지 않아요." "네?" 내 말이 너무나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어서 그런걸까, 나를 바라보는 에네리아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당혹감 마저 어려 있는것 같았다. 물론, 그녀를 본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내가 그녀의 가치를 매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주위의 인간들은 아니지. "자신의 가치는 자신에 의해서 판단되지 않아요.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에네리아의 의아한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한 존재의 가치는 그 스스로에 의해 평가될 수 없어요, 모두에게 외부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그리고 그 세계와 교류하고 살아가는 이상, 자신의 가치는 외부에 의해 평가받을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리고 그 가치의 기준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만이 아니겠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인간의 언어로 이렇게 많은 말을 해보긴 처음이다. 아직도 어색한 위화감이 감돈다. "그러니 외부에 의해 당신이 보잘것 없다- 라고 평가받기 전까지는 당신은 보잘것 없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 그런가요…" "우우, 칼리체님 말이 너무 어려워요." 말이 어렵다고? 이것이 통상적인 언어가 가진 한계이다. 드래곤의 언어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칼리아넬에게 전달했다면 분명, 그녀는 이해했을 것이다. "어쨋든 고마워요… 저도 칼리아넬 처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것은 저를 위로해주는 말이지요?" 에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위로- 라는 건가. 나는 단순히 그녀의 말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틀려서 그것을 지적하고 내 생각을 말한것 뿐이지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인간의 언어중 오해- 라는 것이 부른 바람직한 결과라 할 수 있겠군. 마차는 쉴새 없이 가도를 달렸다. 다음날이 되어 다시 해가 뜨고 태양이 중천에 위치할 때까지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에네리아의 얼굴은 딱 보기에도 굉장히 창백해져 있었다. 또다른 습격이 있을지 몰라 갈길을 재촉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목적지에는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그녀는 곧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체는 언제 잔건가요…?" 에네리아는 무척이나 지친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깨어난 후나 내가 깨어있는 모습만 보여주었으니 의아할 만도 하겠지. "에네리아가 잠들어 있을때 잠깐 잤어요." "에- 피곤하지 않으세요?" "글쎄요, 조금 피곤한것 같긴 하네요." 나는 대충 대답하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아넬이 내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벌써 정오가 다되어가는데, 이 녀석은 왜 일어나지 않는 건지… "우웅, 칼리체님… 헤헷." 이것은, 잠꼬대 인가. "칼리아넬은 칼리체를 정말로 좋아하는것 같네요. 꿈속에서도 이름을 부를 정도면…" "…"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칼리아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글쎄, 날 좋아한다고? 그것은 나에게 생소한 감정이라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내가 태양을 갖고 싶어하는 것과 똑같은 감정일까 그것은. 어차피 에네리아의 말은 그냥 해본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그것은 내게 잠깐의 사색에 빠질 화두를 던져준다. "아! 드디어 저기 니하크할룬이 보이네요." "니하크할룬?" "네, 우리 바루에르 가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도시에요. 이제부턴 안심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상당히 거대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기다랗게 늘어선 성벽이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마을과는 달리 확실히, 이곳은 인간들의 힘이 집중된 곳이다. 굳건히 서있는 거대한 성벽은 내게 마치 인간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벽이라는 구조물은 인간이라는 종족밖에 사용하지 않으니까. 때문에 그 성벽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성벽이라는 것은 외부의 위협을 완전하게 막아준다. 때문에 인간들은 그 성벽안으로 몰려들었고 곧 그곳은 인간들의 문화와 권력의 중심지가 된다. 뭐, 이제는 인간들도 마력을 다룰줄 알게되고 그들이 가진 힘이 커져가면서 이제 이런 성벽은 거의 반은 상징적인 의미로 남게된것 같지만. 마차가 그곳으로 다가가자 성벽에 서있던 인간들이 급히 움직이며 성문을 여는것이 보인다. "칼리아넬, 그만 일어나렴. 목적지에 도착했어." 나는 내 어깨에 기댄 칼리아넬의 몸을 흔들며 말했다. 곤히 자고있던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그녀는 금방 눈을 떴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니하크할룬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어려 있었다. 아마도 루그란 숲에서의 일이 기억나는 것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왔던 마을은 작고 조용해서 그때 루그란 숲을 습격했던 거대한 인간들의 군집을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이 도시는 그간의 마을과는 규모 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칼리아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때로는 언어보다 간단한 행동 몇가지가 의도를 전달하는데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칼리아넬은 놀란듯이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배시시 미소지었다. "아, 저기 저택이 보여요." 바루에르 가문의 저택은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구조물이었다. 저택의 주위는 온통 검은색의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장미 넝쿨이 그 철창들을 감싸고 있었다. 장미 넝쿨에는 빨간 장미들이 피어있어 굉장히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저택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입구에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잘 정돈된 정원이 푸른색으로 치장되어 있는 저택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철창으로 된 문이 열렸고 마차는 천천히 그 안으로 진입했다. "아가씨, 어서오십시오." "아, 집사." 마차의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인물은 반백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인간의 노인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가 이 저택을 관리하고 있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나와 칼리아넬도 그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베리오스가 내가 마차에서 내릴때 손을 내밀었는데,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마차에 내린다음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안한 듯한 표정으로 내민 손을 등뒤로 집어넣었다. "뒤에 계신분들은…?" "아, 손님이에요." 손님인가.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이만 가볼까 했지만, 그류벨 이라는 인간을 다시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저기… 보수는 선불로 받았고, 저는 이만 가볼까 합니다." 뒤에서 젊은 인간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델이었다. "아, 베델도 저택에 좀 머물다가 가세요. 아무리 보수를 받고 일하셨다지만… 그때 보여주었던 당신의 활약은 그 보수 이상이었어요." 나는 그 상황을 별로 주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느정도의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가씨의 말씀대로 머무르다 가게. 난 자네가 다른 무례하고 신의 없는 보통의 용병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 자네는 이 호의를 받아들일만하네." "아, 저…" "그렇게 해주실거죠, 베델?" "예에…" 환하게 미소짓는 에네리아의 얼굴에 그는 얼결에 대답을 한것 같았다. 베리오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베델이란 인간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그류벨 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용병이란 보수룰 받고 원하는 일을 해주는 직업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상당량의 재화를 쥐어주고 인간 사회의 안내를 시키는것은 어떨까. 인간들의 재화따위 눈깜짝할 사이에 산더미 만큼 창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에 빠져있다 고개를 들어 시야에 잡힌 건물의 내관은 외관 만큼이나 대단했다.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이나, 주변 곳곳에 세워진 화려한 장식물들의 배치는 상당히 신경써서 고려한 느낌이 풍겼다. 거의 모든 장식물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통일성의 사이로 미묘한 변화가 엿보였다. 감탄할만한, 품격있는 내관이었다. 그리고 이 품격있는 공간의 중심에 그 모든 품격과 화려함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한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오오, 에넬.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단다." "꺅!, 아… 아버지!" 그류벨이라는 인간은 전에 봤을때의 그 강인하고 굳건한 인상은 다 내팽겨 친채로 에네리아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렇지, 이제서야 실감이 난다. 에네리아라는 소녀가 바로 그류벨이 나에게 그런 고결한 의지를 보일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그에게 에네리아는 그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관계, 자식과 부모라는 관계가 바로 나라는 거대한 공포에 맞설수 있는 힘을 주었다. 저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언제까지 저를 어린애 취급하실 거에요!" "하하, 이 아버지에게 에넬은 항상 어린애란다." 그는 에네리아를 바닥에 내려놓고서야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은 나에게서 우뚝 멈추었다. 그의 눈이 커지며 역력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설마 이 모습만 보고 내가 백룡, 루루렌칼리체 라는것을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가 칼리아넬이 요정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때 내 옆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시력으로 그 정도 거리의 사물을 판별하기란 어려웠으므로 눈치채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역시나 이쪽을 훑은 그의 시선은 나에게서만 오래 머물렀을뿐, 칼리아넬은 금방 스쳐 지나갔다. 이정도라면 그가 눈치챘다고는 생각 할 수 없겠지. "그런데 저쪽에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저 청년은…?" "아, 돌아오는 길에 만난 분들이에요. 저분들께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요." "그렇구나." 그는 에네리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고는 이쪽을 주목했다. "본인은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요. 에네리아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니, 아버지 된 자로서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칼리체 입니다." "칼리아넬… 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뒤로 쏙 숨어 버렸다. 그류벨의 의아한 눈동자가 이쪽으로 닿는다. 하지만 그는 칼리아넬의 반응을 단순한 수줍움이라고 생각했는지 희미한 미소만 짓고 말았다. "베델 입니다." 베델은 아까의 약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베델의 모습 역시 이런 화려한 공간에 전혀 위축되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이 있었다. 저런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자들은 모두 그 거대한 존재감이 그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것, 나의 드래곤 아이(Dragon's eye)는 그것을 충분히 꿰뚫어볼 수 있다. "자, 일단 들어오게. 손님들이 올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손님을 접대할 준비가 갖추어 지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까." 손님 접대라는 것은 식사를 말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조금 기다리다 우리를 데리고 간 것은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 곳이었다. 그 테이블에는 나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여러가지의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하긴, 거의 정오를 넘어가는 시간이니… 보통 이때가 인간들이 음식을 먹는 시간이었지. 칼리아넬은 인간들의 음식이 입에 잘맞는지 맛있게 그것들을 먹고 있는것 같았다. 나야 음식이란 것을 먹지 않으니 먹는 흉내만 낼 뿐이지만. "칼리체 양은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뭐, 특별히 다른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음식들은 모두 훌륭해요, 다만 문제는 제가 소식가라는 점이지요." "칼리체. 그러다가 당신, 키 안클걸요? 성장기의 소녀는 많이 먹어야 키가 쑥쑥 큰다구요." 그렇게 말하는 에네리아도 많이 먹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배당된 음식의 양은 내것에 비하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보통의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의 양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그나저나 그녀의 말대로 인간들은 십대일때 가장 많은 육체적 성장을 겪으니 그녀의 말대로 많이먹어야 키가 크는 모양이다. 내 현재 키는 인간들의 평균키에 미치지 못하니 그녀가 그런 말을 할만도 하다. 상당히 키가 큰 베델에 비교한다면 지금 내 키는 그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한다. "실례되는 말이구나, 에넬. 그러는 너도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잖니?" "우… 제 입장에선 이것도 많이 먹는 거라구요." 칼리아넬은 그녀의 말에 자신의 접시에 놓인 음식의 양과 에네리아의 접시에 놓인 음식의 양을 비교하는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베델은 그런 칼리아넬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작게 미소지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건, 무슨 의미가 담긴 행동일까. 시간은 흘러 해는 어느새 다시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고 주변엔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저녁식사에 참여하지 않고 테라스로 나와 차가운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얇은 옷만을 입고 있어 좀 춥기는 했지만, 그만큼 상쾌한 기분이 들어 나는 멍하니 어둠에 휩싸인 인간들의 도시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는 인간들이 환하게 밝혀놓은 불들이 있어, 완전한 어둠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렇게 자연을 거슬러 밤에도 낮과 같이 불을 환하게 밝혀놓는 종족은 인간 밖에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때문일까. "아, 여기 있었군요 칼리체." 듣기 좋은, 부드럽고 낮은 인간의 목소리. 베델이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한데, 춥지 않아요?" 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때 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이 감각을 춥다- 라고 하는 건가. 그것이 맞다면 그의 말대로 나는 지금 추위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냉기를 지배하는 백룡이 추위에 떨고 있다니 꼴이 조금 우습다. "그, 그러면 왜 여기 계속 나와있어요?" 그는 급히 자신의 겉옷을 벗더니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의 온기가 옷에 남아 있어 그것을 두르고 있는 나는 무척이나 따뜻함을 느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러면 베델이 춥지 않겠어요?" "아뇨, 저는 별로… 그리고 추위에 떠는 여자아이를 놔두고 어떻게 저만 따뜻하게 입고 있을 수 있겠어요?"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로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여자아이라는 것은 보호받는 존재인가? "그런가요…?"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기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칼리체는 이상해요." "…" 이상하겠지, 나는 아직 인간들의 사회에 전혀 익숙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베델 쪽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새하얗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아, 노인들에게서는 볼 수 있죠. 하지만 노인들의 백발은 칼리체의 머리카락처럼 아름답지는 않잖아요." 단순히 외모에 관한 이야기인가. 확실히 인간들에게선 노인이 되지 않고서야 백발을 가진자는 아마 인간들중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보다 다섯살은 어린 나이에 마법사라고 하고, 한번도 웃는 모습은 못보겠고, 그렇다고 칼리체가 그렇게 차가운 사람은 아니잖아요?" 에네리아를 구해줬을때의 일을 보고 판단하는 건가. "하아, 미안해요. 술을 마셨더니 조금 취했나봐요.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어쩐지 아까 베델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베델이 이렇게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인간에게는 정말 재밌는게 많은것 같군. "베델." "음?" "당신은 용병이라고 했죠." "그렇죠, 용병이죠. 내가 할 줄 아는거라고는 검밖에 없으니 그걸로 먹고 살려면 제가 용병일 수 밖에." 그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었다. 베델은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으로 도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는 지금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에- 어떤 일이죠?" 베델은 내 말에 갑작스레 정신을 차린듯 기대어 있던 테라스에서 떨어져 또렷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쉬운 일이에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를 데리고 다니며 안내를 해주세요. 기한은 제가 원할때 까지. 대신에 당신이 원하는 만큼 재화를 드리겠어요." "에…" 그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의뢰 내용이 너무나 이상한 거겠지. 그것보다 내가 그에게 지불할만한 재력이 있음을 먼저 증명해야하나? 나는 내 옷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전에 창조해둔 보화를 꺼내 그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그에게 보여주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의뢰이고, 칼리체같은 미인이 하는 부탁 이란거 거절하기 굉장히 힘드니까요." "…" "하하, 표정은 없어도 의아해 하는 기색은 나타나네요. 이유같은건 묻지말아요." 이상한 인간이군. 어쨋든 그가 내 부탁을 수락했으니, 이곳을 떠나면 그를 따라다니며 인간들의 사회를 살펴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인간들 사이에 껴서 어떤 역할을 해볼 수도 있고.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이것…" 나는 내 어깨에 두르고 있던 옷을 다시 벗어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정말 따뜻했어요." 왠지는 모르지만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것 같다. 나는 그를 테라스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나며 생각했다. 따뜻한 감각이란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것이라고… 감각을 거의 느끼지 못하던 드래곤의 몸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인간들의 풍부한 감정은 바로 그러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나도 하루에 한번씩 인간들처럼 잠을 자볼 생각이다. 역시 인간에 대해 깊이 느끼려면 그들의 생활을 따라하는 것이 좋겠지. 수십, 수백년을 주기로 그리고 거의 그 주기와 동일한 시간을 수면으로 보내는 나로서는 하루에 한번씩 꼬박꼬박 잠을 잔다는게 무척이나 이상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가진 마력과 신력의 힘으로 이 신체를 보다 인간의 것과 동일하게 만들면 쉽게 이루어질 일이다. 자고 싶지 않아도 피곤하게 되어 잠이 들겠지. 그만큼 내가 이 몸으로 사역(使役)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은 점점 줄어만 가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수면이란 것은 이리도 달콤하고 기분 좋은것이었던가. 나는 지금 하얀색 시트가 깔린 커다랗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에서 깨기 바로 직전의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조차 보질 못했다. 그것이 무척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이 생소하고도 기분좋은 감각으로 그 언짢음은 보상된다. 약간 열려진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청명한 새들의 지저귐도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눈꺼플 바깥으로 느껴지는 환한 햇빛이 이리도 기분좋게 느껴질 수 있다니. "어, 칼리체 님…"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다.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처음엔 컸다가 점점 그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칼리아넬에겐 미안하지만 난 아직도 이 나른한 느낌에서 헤어나오기가 싫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헤에, 칼리체 님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좀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온 모양이다. "… 자는 모습은 정말로 귀여운데, 역시 이 모습에선 칼리체 님이 백룡이라는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그것은 참으로 불편한 침묵이었다. 더이상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칼리아넬은 내 옆에서 내가 잠을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쩔수 없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먼저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칼리아넬이었다. "이제부터 인간의 삶에 보다 익숙해 지기 위해 인간들 처럼 하루에 한번씩 수면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단다." 내 발언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인지,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칼리아넬은 얼굴이 터질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난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내 상식내에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만한 발언은 하지 않은것 같은데… "카, 칼리체님. 다 듣고 계셨군요!" "…"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것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혼잣말은 평이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어째서 내가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것에 대해 저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으음, 내 자는 모습이 귀엽다는 말?" "으우와앗! 죄송해요!" 칼리아넬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빽- 하고 소리쳤다. 그 발언에서 그녀가 나한테 잘못한것은 없는데 왜 그녀가 나에게 죄송하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요정이나 인간이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것들 투성이다. "왜 죄송하다는 거니? 내 현재 모습이 귀엽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기 쉽다는 소리이고, 그것은 곧 칭잔이지 죄송하다고 해야할 것이 아니잖아." "에- 그게…" 그녀는 우물쭈물 하며 나에게 그녀의 죄송함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역시, 칼리아넬은 아직 미숙한 어린애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조차 언어로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다니. 나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는 얇은 흰색의 천옷이 스르륵 흐럴내리며 새하얀 피부가 보인다. 아마, 내가 여성의 성별을 갖는다면 이 몸은 좀더 부드러운 곡선의 굴곡을 가질 것이다. 아직까지 성별을 정하진 않았지만 곧 정해야 할것이다. 인간의 사회를 느껴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그들과 근접한 모습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별이 없는 인간이라니, 말이 되질 않지. "응?" 울상을 짓고 있는 칼리아넬 쪽을 바라보다 커다란 전신 거울이 벽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거울의 앞으로 다가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이 모습이 귀엽다는 건가… 나는 손을 들어 내 볼을 콕 찔러 보았다. 손끝으로 몽실 몽실하고 보드라운 인간의 피부 감촉이 느껴져 왔다. "칼리체 님, 뭐 하고 계신가요?" "아무것도… 가자." 이곳에서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인간의 여성을 따라 간곳은 커다란 창문이 달려있는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그 커다란 창문으로 환한 태양빛이 들어와 이 응접실에 배치되어 있는 수많은 장식물들에 반사되어 내 눈을 어지럽혔다. 응접실의 중앙에 그류벨이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쇼파에 앉아 이상한 향기가 나는 흑갈색의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나와 칼리아넬은 그쪽으로 다가가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군. 칼리체 양, 칼리아넬 양."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태양이 이제 막 떠올라 세상에 그 환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지금은 아침이다. 하지만… 좋은 아침이란건 무슨 뜻인가. 좋은것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나쁜것도 있는것, 그렇다면 나쁜 아침도 있다는 소린가? 인간들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도대체 무슨 기준을 가지고 좋고, 나쁜 아침을 구분하는 것일까? "어째서, 좋은 아침이지요?" "음…" 그는 내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칼리아넬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요정과 인간들 사이에서 '좋은 아침'이라는 내가 이해 할 수없는 단어가 동일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질문에 답을 못한채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저 칼리체님…" 칼리아넬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뭐라고 하는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뭐, 됐다. 주변에 그류벨과 칼리아넬 말고는 아무도 없는것 같으니 굳이 인간으로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는다. 그저 내 정체를 밝히고 '좋은 아침'이라는 것에는 어떤 뜻이 들어있는 건지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보는군,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 "그 무슨, 내가 칼리체 양을 언제 본일이 있다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내 모습에서 도저히 백룡의 모습을 연상할 수 없는지 그는 전혀 알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것은 내가 완벽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에 나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다. "카, 칼리체님…?" 옆에서 칼리아넬이 당황스런 얼굴로 내 옷깃을 붙잡았다.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류벨과는 이미 한번 마주한적이 있으니 상관없다. "나는 요르간드의 지배자, 화이트 드래곤 루루렌칼리체다." 그류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곧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나와 칼리아넬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은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 과연… 당신에게서 느껴지던 그 지독한 위화감, 역시 인간이 아니었군…" 역시 아직까지도 나의 인간 흉내는 미숙한지 미리 나에게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뭐 저리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거지. "그런데 그 모습은…" "이 모습이 나의 인간일 때의 모습이다." "지금 인간으로 변해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미, 믿을 수가 없군요. 그렇게 거대했던 몸체가 이렇게 조그만…" 그는 굉장히 혼란스런 표정이다. 그의 사고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상식이란 것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원래 마법이란 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깨는 힘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이런 조그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그로선 기절할만큼 놀랄 일인 것이다. "그것보다, 이곳에는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인간의 현자에게 답을 주기 위해서다." "무슨, 인간의 현자라면 설마…?" 그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에네리아가 들어왔다. 칼리아넬은 여전히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류벨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잠 자버리고 말았네요." 에네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다가 그류벨의 딱딱히 굳은 표정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처럼 해라, 어째서 그리 긴장하는 것이냐. 지금의 나는 그저 인간의 사회를 체험하기 위해 나온것 뿐이다. 내 뜻에 그류벨은 어느정도 평정을 되찾았는지,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에네리아를 맞았다. "좋은 아침이구나 에넬." 에네리아는 웃으며 그류벨의 인사에 대답했다. 또 좋은 아침이란 소리군. 에네리아가 나오자 그류벨과는 얘기할 틈도 없이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는 어제 먹었던 저녁보다 훨씬 간소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약간의 과일과 물만 마시고 보통의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베델은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의 감정은 인간의 표정으로 발현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인간이 짓는 수많은 표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는 여전히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칼리체, 그런데 왜 칼리체는 한번도 웃질 않는거에요? 아, 그러고보니 나, 칼리체가 웃는것은 고사하고 다른 표정을 짓는것 조차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칼리체는 표정이 없는 사람치고는 그렇게 차가운 편은 아니잖아요?" 자신의 앞에 놓인 부드러운 흰빵을 뜯으며 에네리아가 내게 말했다. 어제 베델에게 들었던 것과 동일한 얘기군. 그녀의 말에 그류벨은 몸을 크게 움찔하였다. 그나저나… 공교롭군, 표정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 저런 말을 하다니. 나는 한입 작게 베어 물었던 사과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그녀에게 내가 표정을 지을수 없는 진정한 이유를 말해 줄 순 없다. 그렇다면 납득할만한 변명을 생각해야 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그럴듯한 변명은 떠오르지 않는다. 사고의 정지는 필연적으로 내가 침묵을 유지하게 만들었고, 내가 침묵하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류벨이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나와 에네리아를 번갈아 가며 바라 보았다. "미, 미안해요. 해서는 안될 질문이었나봐요…?" "아뇨, 에네리아가 제게 미안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단지, 제가 표정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네? 아, 그, 그래서 그 이유는 뭔가요?" "그건 아마도 제가 인간들의 사회에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진실을 말하였다. 거짓을 말하는 것도 익숙치 않고, 마땅한 변명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진정한 정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 피하면 될 일이다. "인간들의 사회에서 살아오지 않았다구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에네리아 뿐만 아니라 베델까지도 내게 궁금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류벨은 이미 내 정체를 아는 인간이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관심이 있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아왔어요." "그, 그런… 무척이나 외로웠겠어요." 에네리아는 양손을 가슴께로 모으고 내게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홀로 완벽한 존재, 외로움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아뇨, 외롭지는 않았어요. 거기다가 최근에 칼리아넬을 만나 같이 살게 되었으니까요." 칼리아넬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어째서 홀로 산속에서 살았나요? 칼리체의 부모님은…" 이번에 입을 연것은 베델이었다. 이상하게도 항상 활기에찬 듯한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게 부모는 없어요… 아, 그러니까." 한 단어가 생각난다. 인간들은 부모가 없는 자를 이렇게 부르지. "고아, 고아에요 저는." 그들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은 어째서 일까. "아, 칼리체… 미안해요, 괜한걸 물어서…" "아뇨,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째서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지는 모르겠다. 부모가 없다는 것에 단순한 유감을 표하는 것일까. 그 이후로 우리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침묵이 감돌았다. 내 발언이 문제인것 같지만 나는 어째서 그것이 이 침묵의 원인이 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 칼리체. 그럼 당신이 살고 있던 숲속에서 나온 이유는 뭔가요?" 식사가 끝난후 베델은 내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준비하고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구경 하려고 나온거죠. 제가 살던 심심하고 조용한 숲속과는 달리 이곳은 무척이나 흥미로운곳 같아서요." "아, 그렇다면 어제 당신이 내게 제안했던 그 의뢰는…" "네, 당신을 안내자로 삼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딱히 목적지는 없으니, 당신을 따라다니는 것과 동일한 말이긴 하지만요." 그는 어째서인지 기쁜듯 환하게 미소지었다. "최선을 다해 안내해 드릴게요. 용병일을 해오며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으니까 칼리체에게 보여줄 곳도 많을거에요." 역시 이 인간을 고용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그를 앞세워 인간들의 사회를 살펴보는 쪽이 더 손쉬울 것이다. "의뢰… 라니요?" 에네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칼리아넬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제가 칼리체에게 이곳 저곳을 안내 해주기로 했거든요." 베델의 말에 그녀는 왠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델이 우리랑 같이 간다구요?" 칼리아넬은 기껍지 못하다는 눈빛이다. "왜? 내가 같이 가는게 마음이 들지 않니? 거기다가 그 제안은 칼리체가 먼저 나한테 한거라구." 베델은 툴툴거리며 칼리아넬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델과 칼리아넬의 대화가 조금 낯설게 들린다. 그것은… 말투의 차이였다. 가만히 그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니 베델은 나랑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칼리아넬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칼리아넬을 대하는 그의 태도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베델, 언제부터 칼리체를 그렇게 편하게 대했나요?" "음…? 뭐, 칼리아넬은 어린 여자애고 하니까요…" "흥! 나는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하하, 그렇게 말하는게 네가 어리다는 증거란다." 칼리아넬과 베델은 서로 티격 태격하며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그들의 말은 내게 닫지 않는다. 베델은 칼리아넬이 어리다는 이유로 저렇게 편하게 대한다. 물론, 칼리아넬은 인간보다 월등히 긴 시간을 살아가는 숲의 요정이고, 베델은 백년도 채 살수 없는 인간이니 실은 칼리아넬의 나이가 더 많을 것이다. 어쨌건 베델의 저런 태도는 그녀의 어린 외모에 기인해있다. 겉보기에 나와 칼리아넬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인다. 그렇다면 베델이 나에게도 칼리아넬 처럼 대해야지 그의 논리가 들어 맞는다. "베델, 원래 인간들은 자신보다 어린 인간에게는 편하게 대하는 건가요?" "인간들…? 아, 뭐 대부분 그렇긴 하죠." 그러고보니, 인간들 각각의 사회적 위치를 구분하는 기준중 하나에 나이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우리 드래곤들에게는 사회적 위치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쉽사리 잡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저는 칼리아넬 처럼 편하게 대하지 않는 건가요?" "…" 내 물음에 베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난감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그건…" 나는 인내심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칼리체가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랄까요. 아,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참… 뭐라고 해야할지." "맞아요, 칼리체는 편히 대하기가 쉬운 타입이 아니에요." 에네리아가 베델의 말에 동의했다. 내가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본인으로서는 참 알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이 그러하다면, 저를 칼리아넬 처럼 편하게 대해주시길 바래요." 인간들의 사회로 유연히 녹아들려면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 져야하지 않겠는가. 베델을 재화로 고용한 이유에는 그런것도 어느정도 계산되어 있었다. 칼리아넬은 나보다 인간들의 사회에 대해 훨씬 잘 아는 것은 분명하나, 내가 원하는 만큼 인간들의 사회에 능통하지는 못하다. "그, 그럴까…?" 베델의 머뭇거리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 칼리아넬은 여전히 그가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를 완전히 외면해 버릴 것이지, 어째서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일까. 베델은 테이블의 접시 위에 올려져 있던 사과를 들어올렸다. 그것에는 아까 내가 한입 베어먹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 그건 아까 제가 먹다 만건데요." 베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상관 없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납득하지 못했다. 그 주위에는 내가 손도 대지 않은 사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어째서 내가 먹던 사과를 가져가는 걸까?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어색한 동작으로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나서자 제일먼저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정원의 꽃에서 비롯된 기분좋은 향기가 확 풍겨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싸늘하고도 청량한 아침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것이 느껴진다. "기분 좋지요? 저도 항상 이곳에 와서 바람을 쐬곤 해요. 향긋한 꽃 향기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전날 꾸었던 기분 나쁜 악몽까지도 다 날아가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뒤에서 들려온 에네리아의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떳다. 어느새 내 옆에는 에네리아가 서서 나를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악몽을 꾸나요?" "제 몸이 낫기 전까지는요.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이 굉장히 좋지 않았거든요. 이런곳 까지 나와서 바람을 쐬는것도 힘들 정도로." 꿈이라는 것은 아직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우리 드래곤들은 꿈이라는 것을 꾸지 못하니까. "… 지금은 건강해 보이는데요?" "아버지 덕분이에요. 아버지는… 저를 위해 침묵하는 숲까지 가셔서 생명의 열매라는 것을 가져 오셨거든요. 죽어가는 모든 것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전설속의 열매, 세계수의 과실… 생명의 열매 말이에요. 저 때문에 가문에 큰 도움이 되는 숲의 요정들과의 거래를 그만두고 그들을 적대하면서 까지 말이에요." 나는 담담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정확히 그것은 생명의 열매가 아닌, 생명의 열매가 가진 수많은 기능중 하나를 극대화 시킨 마력의 결집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진정으로 '생명의 열매'였을 것이다. "놀라지 않는군요?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 역시 믿지 않는건가요. 생명의 열매라니." "나는 생명의 열매가 실재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에네리아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내 말에 그녀가 놀란 모양이다. 그녀는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하긴, 당신은 마법사 였지요- 라고 중얼거렸다. "하여간 저는 아버지가 구해오신 생명의 열매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몸을 원하는데로 움직일수 있게 되자 이 저택의 바깥이 보고 싶어진 저는 아버지를 졸라 잠깐 동안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때, 칼리체를 만난거죠." "…" "저는 정말 기뻤어요. 곧 죽으리라 생각했던 제가 거짓말처럼 병상에서 일어나 마음껏 돌아다닐수 있다는것 자체가 말이에요. 하지만 종종 이런 생각이 들곤했었어요… 생명의 열매라는 보물을 저 개인에게 쓴것은 정말로 아까운 일이 아닐까- 하구요." 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 인간은 자신을 너무 무가치하게 생각하는것 같다. 그녀의 아버지에 비하면 한없이 나약한 정신력이다. "내가 전에 했던 말을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후훗,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가 '했었어요'라고 말했잖아요. 당신이 해준 말은 그리 길지도 장황하지도 않았지만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칼리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내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정원에서 풍기는 향기보다 더 기분좋은 향기가 후각을 통해 들어왔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내 볼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칼리체, 당신… 사실, 여자 아니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안건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나는 아직까지 성별을 정하지 않았다.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보니 가슴이 전혀 없잖아요." 에네리아의 자그마한 손이 내 가슴에 얹혀진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가슴은 봉긋 솟아있었다. 그녀는 금방 내게서 떨어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네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샐쭉 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반칙 아니에요? 여자인 나보다 예쁘다니… 그래선 정말 여자라고 오해받는게 당연하잖아요." "…" 오해받아도 상관은 없다만. "아, 미안해요. 혹시, 기분 상했나요?" 난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야기의 주제는 나의 성별, 그것에 대해 에네리아가 나에게 실수 한게 있었던가. "아니, 역시 남자분께 여자보다 아름답다고 하는것은…" 겉모습이 여성의 모습이라면 나는 당연이 여성이란 성별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에네리아가 나를 남성이라 판단해 버렸으니, 지금 여성으로 변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겠지. 일단은 그녀에게 적절한 변명이 필요하겠다. "아니요, 많이 들은 얘기라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여자라고 오해받는게 익숙해서 이제는 그것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걸요." 내 급조한 변명을 그녀는 별다른 의심없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병이 낫긴 했지만 아직도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라서 오랜시간동안 바깥에 있기가 힘드네요."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내게 인사했다. 난 인간의 인사는 잘 몰라 그저 고개만 살짝 숙여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칼리체님."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있어 햇빛이 차단된 어두운 방에서 그류벨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빛은 커튼사이로 들어와 방안이 아예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벽에는 에네리아와 닮은 성숙한 인간 여성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 반대쪽 벽에는 여러가지 철제 무기들이 마치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다. "햇빛을 싫어하나?" 나는 탁자 앞쪽에 마련된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씁쓸히 웃고는 대답했다. "네, 싫어합니다." 단호한 대답이군. "…" "에네리아에게서 네가 내게 맞설수 있었던 용기의 원천을, 나는 찾을수 없었다." 잠깐 동안의 침묵끝에 갑작스레 꺼낸 내 말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드래곤에게는 부모나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건 없다." 드래곤은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해 왔다. 자신을 만든, 부모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으며 필요치도 않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를 이해할 수 없을겁니다. 혹여, 당신이 자식을 가질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 자식을 갖는다라. 확실히 그와 같은 상황이 되면 나도 무언가 느낄수 있는 것이 있을것이다. 내가 여성이나 남성으로 변하면 다른 인간 사이에서 자식을 볼 수 있으므로 그의 말은 상당히 솔깃한 것이었다. "그것보다.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계속해 주십시오. 현자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오셨다니… 혹시, 그 현자는 베르센크라는 자입니까?" 그는 나에게 질문을 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확인일뿐. "그렇다." "죄송합니다. 그에게 괜한 말을 하여 귀찮게 해드리고 말았군요. 그런데, 베르센크가 루루렌칼리체 님께 물었던 질문이 무엇인지 제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물었던것은 인간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류벨은 약간 수염이 난 턱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질문에 답해주시기 위해 인간들의 사회로 나오셨다는 말씀입니까?" 같은 말을 계속해서 묻는군. 이것은 인간이란 종족 자체의 습관인것 같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과거에 물었던 일을 계속해서 되묻는다. 번거롭긴 하지만 계속해서 대답해 주어야 겠지. 입을 열려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너에게 묻고 싶은것이 있다." 그의 기색으로 봐선 베르센크라는 현자와 아는 사이인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베르센크와 어떤 관계인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내가 궁금해 하는것에 대한 답을 그에게 듣고, 인간들의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그에게 약간의 도움만 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말씀하십시오." 전과 달리, 이제 그류벨은 내 앞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해를 입힐 드래곤은 아니라는 판단을 한 모양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베르센크의 물음에 답해주기 위해 너희 인간들의 사회로 나온것이다. 그의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인간이란 종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겠지. 따라서 나는 너에게 인간들의 사회 구조에 대해 자세히 듣기를 원한다." "사회 구조라 하심은…" 그는 갑작스런 내 물음에 생각에 잠긴듯 턱을 괴고 깊은 사고로 침잠하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대략적인 상황만 알려주어도 된다. 나머지는 직접 체험해 볼 생각이니까. 음, 일단은 네가 속해 있는 로엘가스트 연맹이라는 곳에 대해 먼저 설명해 보아라." "음, 로엘가스트 연맹은 이 지역에 강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거대한 가문들의 연합입니다. 저희 바루에르 가문도 로엘가스트 연맹을 지탱하고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지요. 로엘가스트 연맹의 맹주는 델라피르 가(家)가 맡고 있으며 델라피르 가 외에 강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가문을 백익, 홍익 이라 명명하며 권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 그류벨이 자신을 소개할때 로엘가스트 연맹의 '백익'이라 했었던 거였군. "로엘가스트 연맹의 상징은 사익조인데, 백익이나 홍익도 여기서 따온 것이죠. 사익조의 두 날개는 붉은색이고 나머지 두 날개는 흰색이니 말입니다." "…" 사익조는 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생물이다. 그것은 이미 천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인간들이 그 생물을 기억하며 한 단체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니, 참 재밌는 일이다. 사익조의 날개는 그 이름대로 네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홍익, 백익의 이름을 가진 가문은 바루에르 가문을 포함해 총 넷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류벨은 한쪽에 놓여진, 놋쇠로 만들어진 주전자에서 컵으로 물을 따라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재개했다. "로엘가스트 연맹의 남쪽에는 풍요로운 대지를 가진 아나키스트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로엘가스트 연맹처럼 처음에는 거대한 가문들의 연합으로 시작되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단 하나의 가문만이 다른 가문들 보다 월등한 힘을 가지게 되어 그 가문에 모든 이권이 돌아가 결국 단 한명의 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꽤 흥미로운 이야기다. 드래곤들은 단체라는 것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비록 인간들의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거대한 단체, 로엘가스트 연맹이나 아나키스트 왕국이란 것은 나에게 꽤 생소하고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로엘가스트 연맹과 아나키스트 왕국 사이에 카스텔 공화국이라는 조그만 소국이 있습니다. 차지하고 있는 토지가 굉장히 작긴 하지만 카스텔 공화국은 로엘가스트 연맹과 아나키스트 왕국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며 축적한 부가 상당하여 연맹과 왕국 사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곳입니다. 물론, 이 대륙에는 크고 작은 여러 나라들이 있습니다만 일단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국가는 제가 언급한 세곳, 우리 인간들의 세계는 그렇게 세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마치 단순히 글을 읽는듯한 따분한 어조의 설명이었지만 나는 그 내용만으로 충분한 흥미를 느꼈다. 아니, 흥미 진진해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로나벨아크하임의 제안을 그렇게 거절했었는데… 인간들의 세계를 듣는것 만으로 이렇게 들뜨다니, 스스로에게 비웃음이 나왔다. 그류벨은 다시 컵에 물을 따라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전에도 말했었던것 같지만… 루루렌칼리체 님은." "칼리체로 되었다." 내 말에 그는 놀란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체님은 굉장히… 친절하신것 같습니다. 단지,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직접 인간들의 사회로 들어갈 생각을 하시다니 말입니다." 내가 친절하다고? 아니, 나는 제멋대로에 별로 남을 배려할 생각이 없는 드래곤일 뿐이다. 내가 인간들의 사회로 나온것은 그저 내가 인간의 현자의 질문에 답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일뿐, 그 현자를 위한것이 아니다. 뭐, 결국 결과는 인간의 현자를 위한것이 되겠지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그의 방을 나왔다. 오랫동안 어두운 그류벨의 방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쏟아지는 환한 햇살에 나는 눈이부셔 잠시 눈을 감았다. 얇은 눈꺼플은 쏟아지는 햇빛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나는 눈을 감았음에도 눈앞에서 느껴지는 아른거리는 햇빛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칼리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기 싫었다. 지금은 그저 이대로 몽환적인 기분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를 부른 이는 내가 그런 기분에 침잠하지 못하도록 내 어깨를 잡았다. "뭐하고 있어?" 멍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사고가 마비되었는지 이 인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칼리체?"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완전히 정신이 깨었다. 베델이었다. 그는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아파? 불러도 반응 없고, 멍한 표정에…" 아직까지 나를 그렇게 편히 대하는게 껄끄러운지 그의 어조는 어색함에 젖어 있었다. "… 괜찮아요." 나는 약간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내 어깨에 올려진 그의 굳은살 박힌 커다란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나른하고 멍한 느낌을 털어내기 위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엉덩이 까지 닿는 묵직한 느낌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의 습관이었다. 영원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시간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에 나는 시간을 잊고 태양이 지평선에서 떠올라 다시 지평선 뒤로 넘어갈때까지 그것을 방금과 같이 정신을 놓고 바라보곤 하였다.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왜 불렀나요, 베델." 그는 코를 긁으며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냥 지나가는 길에 멍한 표정을 하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불러봤어. 혹시, 방해되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는 내 즐거움을 방해했다. "미, 미안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아무런 의문을 보이지 않고 내게 사과했다. 베델은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언제나 하고 있던 일이었고, 또 태양이 떠있는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보잘것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신경쓸것 없어요." 내 말에 그는 내가 바라보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곳에는 작열하는 태양이 높이 떠있겠지.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게 그것을 묻지는 않았다. "칼리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야?" "오래있을 생각은 없어요." 내 말에 그는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베델은 이곳이 마음에 안드는 듯한 모양이었다. "휴, 다행이군.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데, 칼리체는 어떻게 생각해?" "상관없어요. 그런데 베델은 이곳이 불편한가요?" 베델은 양팔을 내저으면서 까지 내 말을 부정했다. 이곳이 불편하지 않다면, 그는 어째서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거지? "무, 물론 몸이야 더할나위 없이 편하지. 하지만 과분하다고 할까, 나같은 서민이 이곳의 너무나도 푹신한 침대 같은것에 익숙해 졌다가는 큰일 날것 같아서 말이지, 하하." "…" 나는 그를 앞에 두고 그의 말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푹신한 침대에 익숙해지면 왜 큰일이 난다는 것인가.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그는 푹신한 침대에 익숙해지면 큰일이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깊이 내면으로 깊이 빠져들던 나의 사고가 급격히 현실로 돌아왔다. 베델이 그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있었다. "아, 미, 미안. 별것 아닌 말에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왜인지 그는 무척이나 당황스런 표정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나저나 칼리아넬에 이어 베델에게서도 내가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군. 확실히, 내 외모는 귀여운 모양이다. 나 스스로는 지금 나의 외모가 귀여운 것이라고 인식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델이 내일 이곳을 떠나자 했으니 오늘이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일 것이다. 다음날, 나는 그류벨을 찾아가 우리가 당장 그의 저택을 떠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속으로 상당히 안심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류벨은 분명 내가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인간은 이해하기 힘든 생명체다. …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생각 해보면 나는 인간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까지 분석하고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그런 분석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욱더 인간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칼리체. 설마, 미리 언질도 없이 방금 그류벨님한테 가서 떠난다고 말하고 오는 거야?" 평소와 같이 시간을 잊고 별다른 생각없이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내 앞에는 베델이 서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내 눈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 "뭐? 실례잖아. 갑자기 찾아가 대뜸 지금당장 떠난다고 하면…" 실례라고…? 떠나고 싶을때 떠난다고 말하는게 어째서 실례라는 걸까. 그의 말대로 인간들은 떠나기 전에 미리 말을 해두어야 예의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하하, 그렇게 복잡한 표정 짓고 있으면 내가 미안한데…" "어째서 실례인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나는 그에게 나의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내가 인간들의 사회를 돌아다닐 동안 계속 내 옆에 있을 인간이니,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모두 그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사실, 나같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리 실례되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류벨님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고, 그런 직위에 오른 사람들은 예의와 품위를 굉장히 중요시 여겨. 네가 한 행동은 그들의 예의와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야." "사회적인 지위의 고하에 따라서 예의가 다르게 적용된다는 말이에요?" "응, 맞아."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어째서… 아니, 그만두자.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없는 우리 드래곤 같은 존재들이 그것을 단시간에 이해해 낼리가 없지. 그것은 인간들의 사회를 돌아다니며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칼리체!!" 뒤에서 나를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가 들린곳을 바라보았다. 에네리아가 치맛자락을 들고 급히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칼리체, 오늘 이곳을 떠난다면서요?" "네." 무엇이 문제인걸까? 에네리아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 "왜 그러나요?" "너, 너무 급히 떠나는것 아닌가요. 이곳에서 좀더 쉬시다 가는 것이…" "아뇨, 제의는 고맙지만. 저는 좀더 많은 곳을 빨리 구경해 보고 싶어요." 내 말에 에네리아는 더이상 할말을 잃었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와 표정은 계속 흔들리고 있어, 그녀가 내가 이곳을 떠난다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그럼 어쩔수 없지요…" 에네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이곳을 떠나실 건가요?" 이미 오늘 떠난다는 말을 했으니 그것을 묻는 것은 아닐것이다. 정확한 시간을 묻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칼리아넬을 데리고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에요." "그… 렇군요." 나는 그녀가 실망해 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같은건 생각나지 않는다. "칼리체에게 정이 드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너무 그렇게 낙담하지 마세요.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법, 잊지 않고 있다면 결국 어렵지 않게 다시 만날수 있을겁니다." 에네리아는 베델의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아무말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저것은 명백히 이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다. "하하, 귀여운 아가씨로군." "베델은 그녀가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물론, 저 아가씨는 네가 떠나는게 아쉬운거겠지, 이때껏 집안에만 있었다면 자기 나이대의 여자아이를 만나는게 처음일테니까." "그게, 어째서요?" "으음, 그렇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녀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꺼야. 평생동안 집안에만 머물러 있다가 생긴 친구니 그녀가 생각하는 의미가 각별하겠지." 친구라… 친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것은 로나벨아크하임 이었다. 그 이외에 딱히 떠오르는 자는 없군. "실제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꾸준히 병문안을 오는 다른 친구가 있는지도 모르지 뭐. 이건 그냥 내 추측일 뿐이야." 어조가 가벼운걸로 보아 베델은 이 상황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고 있는것 같았다. 문득, 이런 사소한 상황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천성이 이러니, 어쩔수 없는 일이지. 확실히 대도시는 지금 까지 거쳐왔던 어느 마을보다 볼만한 것이 많았다. 특히 도시의 중앙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탑 시계와 그 앞에서 중력의 힘을 거스르며 위로 솟구쳐 오르는 분수에 나는 시선을 빼앗길수 밖에 없었다. 원 모양에 시침과 분침이라는 것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그 구조물은 내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들의 시간 체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잠시동안 그 탑 시계를 관찰하였는데,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거리와 그동안 내가 느낀 시간을 비교해 보니 시침이 저 원을 한바퀴 도는 걸로는 하루를 다 표시할 수 없었다. 아마도 시침이 원을 두바퀴는 돌아야 하루가 지나는 모양이었다. "시계가 그렇게 신기해?" 베델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탑 시계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네, 이 시계는 그 모습만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떠올릴수 있으니까요. 사고의 화두를 던져주는 것이라면 저는 어떤 것이든 기꺼워요." 시계는 둥그런 원을 열 두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놀라울 정도로 시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계산한다. 인간들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싶은 생각에 시계를 만들게 된 것일까. 저 시계를 토대로 돌아가고 있는 인간의 인생이 흐릿하게 보이는것 같다. 시침이 저곳에 위치하고 있을때, 인간은 밥을 먹을 것이며 시침이 저곳에 위치하고 있을때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 나갈것이며 시침이 저곳에 위치하고 있을때… "…"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내 얼굴에 튀기는 시원한 분수의 물방울에 나는 사고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베델은 여전히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를 띄고 있었고 칼리아넬은 이 도시의 풍경이 신기한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긴 하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껀가요?" "글쎄, 나는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떠돌이 용병이라서 말이야, 딱히 목적지 같은 곳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어디든 좋아요." "흐음, 지금 생각해보니 참 곤혹스러운 의뢰란 말이야. 네가 가는 곳도 아니고 내가 가는 곳을 안내해 달라니…" "뭐가 그리 어려워요? 그냥 베델이 알고 있는 장소중 볼만한 곳을 칼리체 님에게 안내하기만 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칼리아넬이 톡 쏘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베델은 약간 쩔쩔 매는듯한 기색이다. "그, 그래 볼만한 장소…" "너무 어렵게 생각할것 없어요, 베델. 제게 그 볼만한 장소라는 곳을 안내해 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요, 다른 곳에 가서 용병에 걸맞는 다른 의뢰를 받아도 괜찮아요." "그, 글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에 그건 좀…"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언어는 이렇게나 불편하다. 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는 상당히 수고스러운 노력이 동반된다. "당신이 인간의 사회라는 범주 안에서 행동하기만 하면 되요. 아, 그래요. 베델은 저에게 의뢰를 받아 그것을 수행중인게 아니에요. 제가 없었을 때를 가정하고 베델이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는 그저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라고 생각하구요." "정말… 원하는게 그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델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알았다는듯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나키스트 왕국 쪽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무엇 때문에 그곳으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단지 인간들의 사회, 그 자체일 뿐이니까. 베델의 개인사정 같은건 관심 없다. 역시랄까, 칼리아넬과 단둘이서 다닐 때와는 달리 길을 몰라서 헤매이지도 않고 능숙하게 걷기 편한 길을 안내했다. "베델, 당신은 이 대륙 전부를 돌아다녀 본건가요?" "응? 아, 그건 아니지. 설마 아무리 방랑벽이 심한 나라고 해도 이 넓은 대륙 전부를 돌아다녀 보았겠어? 거기다가 이 대륙의 절반 이상은 마경(魔境)이잖아." "그러고보니 그 '마경'이란건 도대체 뭔가요?" 칼리아넬이 나와 베델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폐쇄된 요르간드에서만 살았었던 칼리아넬은 마경이란 곳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마경이란 곳은 모르면서 어떻게 인간들의 사회는 잘 알고있는 걸까? 머리속에 잠시 시덥지 않은 의문이 스쳐지나간다. "음, 마경이란건 말이지…" 베델은 난감한 얼굴로 중얼 거렸다. 기색으로 보아 머리속으로 마경이란 곳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을 하는것 같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칼리아넬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디에서 살았길래 마경도 모르는거야? 이거 설명하려다가 생각해보니 좀…" 그의 어조는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했지만 칼리아넬은 몸을 움찔하며 그의 말에 반응했다. 정말 내심이 그대로 행동에 반영되는 녀석이다. 하지만 베델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별 관심이 없는듯 이내 마경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마경에 대해 알려진건 그리 많지 않아.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은 마경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마물들이 살아간다는 것이지. 신을 모시는 자들의 말로는 그곳이 악마에게 물든 땅이라는데…" 베델은 좀 탐탁치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좀 미심쩍단 말이야… 어쨌건 마경은 마물들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굉장히 풍요로운 땅이고 사람들은 군대와 마술사들의 힘을 이용해 조금씩 마경을 개척하고 있어." "피, 뭐에요 그게- 결국 아는건 별로 없고 단순히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땅이라 이거네요." "음-"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뭐, 그렇게 되는군." "으으, 찝찝해요." 얌전히 뒤를 따라오던 칼리아넬은 갑작스레 찌푸린 얼굴로 불만을 표하며 말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우리는 곧 쉴만한 곳을 찾아 노숙을 할 예정이었다. "찝찝 하다니?" 찝찝하다- 라는건 무슨 감각일까. 칼리아넬의 표정과 이상한 어조에서 미루어 보아 그리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닌것 같았다. "몸을 씻고 싶어요." "그렇다며 별로 문제될게 없겠는데." 베델은 풀숲을 헤치며 능숙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통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길이 전혀 나있지 않은 풀숲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얼마 가지않아 노숙에 적당한 공터가 있다고 했다. "왜요?" "우리가 가려는 곳 옆에 자그마한 강이 흐르고 있거든." 한참을 풀숲을 헤치고 나가는데도 베델과 칼리아넬은 별로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내쪽은 기다란 수풀 때문이 발이 자꾸 걸리는데 말이다. 칼리아넬은 원래 숲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요정이기 때문에 숲이 자신의 집처럼 편안할 것이다. 하지만 베델은 인간인데… 아무래도 그는 이런 곳을 굉장히 자주 돌아다닌 모양이다. 이런 곳에 쉴만한 공터가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풀숲을 헤치고 다니는 그의 동작이 굉장히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가 헤치고 지나가 바닥으로 누운 풀들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하니 방금전까지 보다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훨씬 수월해 졌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자 허공을 가득 매운 나뭇잎 사이로 석양의 붉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것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휴, 드디어 다왔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우리가 머물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공터였다. 야영을 하기 위한 준비는 전적으로 베델이 맡았다. 나는 그를 돕고자 했으나 그는 내 도움을 거절했다. 자신은 이런 일이 굉장히 익숙하니 내가 돕지 않아도 준비를 원활히 끝마칠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칼리아넬은 강쪽으로 몸을 씻으러 갔고 할 일 없는 나혼자 우두커니 쓰러진 나무 위에 앉아 멍하니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델이 내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까, 평소엔 시간을 죽이는 일이 쉬웠지만 지금은 왠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칼리체도 씻으러 가게?" 그저 잠깐 이 근처를 걸어볼 생각이었지만 베델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겹게 풀 숲을 헤치고 걷다보니 어느새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강은 생각보다 그리 크진 않았다. 나는 이곳까지 풀숲을 헤치고 오느라 지친 몸을 나무에 기대어 쉬게 만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칼리아넬을 찾았다. 저 아래 쪽에 칼리아넬이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보였다. 나는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떨어져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으로 조금 다가가자 물장구를 치고 있는 칼리아넬이 보인다. 기다란 녹빛 머리카락이 물을 머금고 달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새하얀 빛을 발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달빛을 머금어 마치 은발이 된듯한 광경이었다. 새하얀 그녀의 살결이 어두운 강물에 대비되어 더욱 새하얗게 빛난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그녀의 몸이 아름답다고 할만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이 퍽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 누구?"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건만 칼리아넬은 금방 내가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칼리체 님!?" 어째서인지 그녀는 가느다란 팔로 몸을 가리며 물속에 그녀의 모습을 숨기고 머리만 빼꼼히 내밀었다. 나는 강가에 있는 쪼개어진 바위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왜 그러니? 내가 있으면 몸을 씻는데 방해가 되니?" 말을 꺼내고 보니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정들 사이에선 상대방의 몸을 씻는것을 보는것이 금기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 아뇨 방해가 되는건 아니에요." 하지만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그고 벌게진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칼리아넬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됐다. 나는 옷을 입은채로 물속에 들어갔다. "에, 에엣! 칼리체님?" 발끝에서부터 정신이 확들게하는 예리한 느낌이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의 기다란 백색의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다. 이것이 차가움이라는 감각이구나. 나는 이런 감각을 처음 느껴보기 때문에 그 감각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눈을 감았다. 뜨거움이야 로나벨아크하임의 용암에서 느껴보았지만 냉기를 지배하는 나는 차가움을 전혀 느낄수가 없었다. 정작 냉기를 지배하는 내가 냉기를 느낄수 없다니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함 보다는 그리 기분좋은 감각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청량하게 일깨워 주는 이 자극적인 느낌은 익숙해 질수록 괜찮은것 같다. 나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강물의 물살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며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옆에서 몸을 씻는 칼리아넬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칼리체님. 언제까지 물속에 있을 거에요?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감기 걸리고 말거라구요." "그런가."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고 다시 야영지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감기라니… 드래곤인 내가 감기에 걸릴리가… 없다- 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으니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심할 필요가 있겠군. 강에서 걸어 나오고 나서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가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있는 달이 강물 속에도 떠올라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양손으로 물을 떠서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내 손에 담겨 있는 물에도 역시 달은 떠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칼리아넬은 왜 칼리체에게 님이라는 걸 붙여서 부르는 거지? 그냥 칼리체가 살던 숲속에서 만난 사이 아니야?" 다음날, 지루하게 이어지는 흙길을 걸으며 베델은 우리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칼리아넬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려다 갑작스레 말을 흐리며 내쪽을 당황스런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그런 칼리아넬의 표정이 귀여워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응?" "처, 처음부터 그렇게 불러서… 음, 그, 그러니까…" "아하! 알겠다. 너도 칼리체의 분위기에 압도 당한거지?" 내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에게서 전에도 그런말을 들었었던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는건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칼리아넬은 알아서 납득한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내 쪽을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네, 맞아요." "하하, 역시 나만 그런게 아니라니까." 베델은 이쪽을 힐끗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저런 가벼운 태도로 미루어보아… 농담, 이라는 건가?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이 길을 태양이 지평선으로 넘어갈때 까지 아무일 없이 지루하게 걸을줄만 알았다. "잠깐, 멈춰라!" 우리만 있는줄 알았던 산속에서 여러명의 인간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더니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다. 그들의 손에는 철로 만들어진 무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베델은 나와 칼리아넬의 앞을 막아서며 무기를 빼들었지만 그들의 압도적인 수를 보고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얼핏보아도 그들은 삼십명이 넘어 보였다. 그들은 이미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몇명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활이라는 무기까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뭐, 뻔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들의 무리중 앞으로 나선것은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가 있는 험악한 인상의 인간 남성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이 약간 사나워 보이기도 한다. "가진 것을 모두 내놓게, 목숨의 위협은 전혀 없을거라 약속하지." "말도 안되… 이런 곳에 산적이라니." 그 험악한 인상의 남성은 베델의 말에 눈쌀을 찌푸렸다. "요즘 아나키스트 왕국의 정세를 듣지 못한 모양이군?" "무슨 말이지?" 그 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것을 일일이 자네에게 설명해야할 이유는 없지. 우리도 목숨까지 뺏고 싶지는 않다. 얌전히 가진 돈만 전부 내놓고 가라." 칼리아넬은 내게 꼭 붙어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커다란 몸집을 하고 있었고, 저 남자의 명령이 내려지면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를 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신, 평범한 산적은 아닌것 같은데… 왜 이런일을 하고 있는거지?" "하, 평범한 산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잔말 말고 돈이나 내놓고 가게. 거기 자네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에게 험한꼴 보이지 않으려면 얌전히 내 말에 따르는게 좋을걸세." "…" 이들은 재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인 베델에게는 재화가 중요하고, 쉽게 내어줄수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베델이 가로막고 있는 앞으로 나섰다. "카, 칼리체!" "음, 그러니까… 얼마나 원하지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은 얼빠진 표정만 짓고 나를 바라볼뿐 얼마의 재화를 원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 이유모를 침묵에 어리둥절 했다. 잠깐 뒤에 그 자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순순히 우릴 따라와라." "가, 갑자기 무슨…!" 베델이 검을 앞세워 내 앞을 가로막자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자들 역시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치켜세웠다. 그 압박감이 굉장히 심할 텐데도 베델은 한치의 물러남 없이 여전히 검을 들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항은 소용없다. 이 많은 수를 상대로 네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까지 지킬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 내가 나선게 잘못이었던가? 그들은 어째서 내가 나서자 마자 이렇게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일까. "순순히 따라와라." 베델은 무기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그 무기가 별로 유효한 결과를 가져올수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는 이 산적들에게 감시를 받으며 그들의 아지트가 있을 법한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포박같은 조취는 취해지지 않았다. 삼십명이나 되는 인원이 감시하고 있으니 그런 것이겠지. "카, 칼리체님…" 칼리아넬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팔을 꽉 붙들었다. 나는 내 팔을 붙들고 있는 칼리아넬의 손을 그녀가 조금 진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베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가끔 내쪽을 가끔 바라보는데, 굉장히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리체, 절대로 내 곁에서 떨어지지마." "네." 어느정도 가다가 산적으로 추정되는 무리는 우리의 눈에 가리개를 씌웠다. 베델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이렇게 제압당한 상태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리개는 아마도 우리가 그들의 아지트로 가는 길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조취가 틀림 없었다. 좀 불쾌하긴 했지만 나는 얌전히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이것 역시 인간 사회의 체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돈만을 위해 여러명의 인간들이 조악한 조직을 결성하여 인적이 드문 산길을 지나는 다른 인간들의 재화를 강제로 취하는 것이 산적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내가 재화를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들의 아지트로 끌고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이 산적들을 이끌고 있는 자로 보이는 남자가 내 얼굴을 보자 기색을 달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바로 나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도착했다. 그들의 눈가리개를 풀어 주어라." 그리고 내 눈에 비친 광경을 보며 나는 대단히 의외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아지트는 아지트라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얄팍하지만 확실히 외부의 위협에 확실히 방비가 되어있는 목책 안으로 작긴 하지만 평범한 인간들의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당신들은…" "대화는 우리들의 대장과 해라. 잔말 말고 따라와라."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강압적이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베델은 그의 말에 다시금 표정을 굳히며 나와 칼리아넬 옆에 서서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인간의 어린 아이들이 뛰쳐나와 그들을 반겼다. 그들은 얼굴에 작게 미소를 띄우기도 했지만 우리를 끌고 가고 있어서인지 그저 그 뿐일뿐 아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나는 천천히 마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부유한것 같지는 않지만 지나다니는 인간 여성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와 활기가 묻어 있었고, 앞서 본대로 아이들은 신나게 마을 안을 뛰어다녔다. 실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을안을 감돌고 있었다. "이상하군, 이들은 정말로 산적인걸까?" 베델이 마을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우리를 마을의 외곽쪽에 있는 자그마한 집으로 데려갔다. 이들을 이끌던 남자가 잠깐 그 집에 들어가더니 누군가와 함께 다시 집을 나왔다. 약간 빛바랜 짧은 금발에 단단한 몸을 가진 인간의 남성이었다. 그는 마치 강철을 연상시키는 듯한 단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아넬이 내 손을 꽉 쥐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당신이 이곳의 두목인가." 베델이 내 앞으로 나서며 나에게 향하던 그의 시선을 차단했다. "무례하군, 지금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상기해 보는것이 좋을것이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던 남자가 으르렁 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베델에게 말했다. 하지만 베델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채 그들의 대장이라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베델에게 무시당한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만두게, 로렌츠. 그래, 내가 이곳의 두목이네. 그리고 자네들은 이 산적 소굴에 잡혀온 것이고… 좀더 공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나도 계속 자네를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할 자신이 없어진다네." "산적 소굴이라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베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베델의 뒤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참, 곤란한 손님이 찾아 오셨군…" 곤란한 손님이라는게 나를 뜻하는걸 모를 정도로 나는 눈치 없지 않다. 다만, 그가 왜 나를 곤란한 손님이라 칭하는지 그것이 궁금할뿐. "그래, 아가씨는…" "칼리체에요." "이 건방진 청년보다는 훨씬 예의가 바르군. 아, 내 이름은 그란셸 이라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나를 꽤 조심스레 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집안의 영애이길래 이 산길을 넘어오는데 달랑 호위 한명만을 대동하고 오는거지?" 이 남자는 나를 인간의 유력한 가문에 속한 여자로 판단한 모양이다.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그의 잘못을 수정해 주기로 했다. "뭔가 착각을 한것 같은데, 전 그저 평범한 소녀일 뿐이에요."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길 바라오, 아가씨. 우린 그다지 협상에 능하지 않은 산적들이니까. 솔직히 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란셸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나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아직 인간들의 사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의 말뒤에 깔린 것들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도대체 무얼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지 알길이 없군요." "설마… 당신들 칼리체를 귀족 가문의 딸로 판단하고 인질로 잡을려는 생각이었나!" 갑자기 베델이 옆에서 끼어들며 말했다. 계속해서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칼리아넬은 겁에 질려 아무말도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후우." 그란셸은 한숨을 쉬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딱히 인질로 잡을 생각은 없었다네, 다만 덮치고 보니 그 아가씨가 상당한 거물인것 같아서 이렇게 복잡한 일이 된것이지." "잠깐만요, 도대체 뭘 보고…" 이 인간들은 이상하다. 도대체 나의 뭘 보고 내가 귀족 가문의 영애라고 판단하는 걸까. "일단 이들을 감옥에 가두어라. 도무지 이야기가 통하질 않는군. 차가운 감옥에서 머리를 좀 식히다 보면 슬슬 대화를 하고 싶어 지겠지." 그란셸은 내 말을 끊으며 그들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이봐, 당신…!" 베델이 성이난듯 격렬하게 그들에게 저항했지만 검은 뽑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검을 뽑았다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만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이곳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탈옥을 우려한 탓일까, 그들은 우리를 감옥의 방 하나에 모두 몰아넣지 않았다. 나는 나를 강제하며 감옥에 넣은 자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없이 나를 거칠게 감옥안으로 몰아 넣었다. 그리고 그는 급히 감옥 밖으로 나갔는데 얼굴이 조금 벌게져 있었던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가 잡았던 팔목을 문질렀다.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새하얀 피부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것이… 바로 고통이었는가. 강력한 신체를 가진 드래곤으로서 고통은 대단히 느끼기 힘든 감각이다. 드래곤의 비늘을 뚫고 신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한정적이니까. 때문에 나는 그 생소한 감각에 한참을 멍이든 팔목을 바라보고 감각하다가 감옥안의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감옥의 안은 햇빛이 들어 오지 않아 어둡고 축축했다. 어딘가 불쾌한 냄새가 나는것 같기도 하다. "칼리체 님! 괜찮으세요?" "칼리체!" 칼리아넬과 베델의 목소리가 이 좁은 공간을 울린다. 나는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주변은 무척이나 어두워 그들이 어디에 갇혀있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감옥은 상당히 좁은것 같으니 그리 먼곳에 갇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목소리는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베델, 칼리아넬?" "후, 별일 없었던 모양이군. 정말 다행이야." "…"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자 잠시간 침묵이 흐르다 가느다란 칼리아넬의 목소리가 다시 이 공간을 작게 울렸다. "이제 어쩌죠?" "글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정말로 산적이지는 않은것 같아." "무슨 말이죠?" "음, 그러니까-" 베델은 잠깐 콜록 거리며 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제길,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군. 뭐, 그들의 태도가 그렇게 무례하지 않았다는 거야." "이게 무례하지 않다고요!? 정말 무례한건 어떤건지 겁이나네요!" 칼리아넬은 베델의 말에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탁탁- 소리가 들려오는걸 보니 틀림 없었다. "음, 보통의 산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단 말이야. 그들이 만약 그냥 산적이었다면 아마 칼리체를 가만 두지 않았을거야." "저를 어떻게 했을 거란 소리죠?" "그-" 베델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다시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나는 의아해 하며 조심스레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물기가 없는 곳을 찾아 앉았기 때문에 옷이 물에 젖을 일은 없다. "알려고 하지 않는게 좋아."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은 제게 큰 즐거움이에요. 베델, 저에게 그런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단 말인가요?" "으, 이 이야기는 전혀 즐겁지 않을거야!"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더이상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음, 어쨋든 그리고… 이렇게 번듯한 마을도 있고 말이야. 산적이 마을안에서 산다는것, 들어본적 있어? 그것도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다 있는 정상적인 마을말이야. 그리고 그들… 대단히 절도 있어 보이는 움직임이었어. 마치, 군대 같이 말이야." 인간의 산적이란 것에 대해 아는것은 거의 없지만 베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럼, 베델은 이들이 산적이 아니라면…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것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적어도 진짜 산적들의 손에 있는것 보다는 안전하다는 말이지." 말을 하고선 그는 후-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칼리체, 칼리아넬. 내가 너희들의 호위로 있는데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상대는 삼십명도 더 넘어보였어요. 거기다가 활을 가진 자도 있었잖아요." 의외로 칼리아넬이 나서서 그를 위로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 하다가 이 공간이 어두워 베델에게 보이지 않을거란걸 깨닫고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었다. 왠지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벽 높이 있는 자그마한 철창 사이로 하늘이 보여 대강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은 벌써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후각은 금방 마비되어 이미 이 공간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흐르는 이 축축한 물기는 익숙해 지기가 힘들다.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가져왔어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를 통해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식사를 담은 그릇을 철창 사이로 밀어넣는 것이겠지. 식사는 내가 있는 철창 안에도 들어왔다. 식사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흰빵과 고기, 그리고 스프였다. 흠, 이런 산속에서 밀가루와 고기라니… 사정이 나쁘지는 않은것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까지 먹는다는 행위에 익숙치 않아 그 음식을 한쪽 구석에 옮겨 내버려 두었다. "저기…" 식사만 전해주고 갈줄 알았던 그 여성은 뭔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 하실말씀 있으십니까?" 베델의 목소리는 딱히 적의에 물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불쾌해 하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건지 대답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오고 있었다. "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금방 이곳에서 풀려날 수 있을거에요. 그란셸은 당신들을 이곳에 가두어 두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나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그의 행동은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것이니, 너무 미워하지는…" "…" "미, 미안해요. 당신들을 강제로 이런곳에 가두어 두고 미워 하지말라니 너무 이기적인 말이겠죠." 베델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한 어조로 말해서 미안합니다. 묻고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아, 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 마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산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산적이라면 이런 마을을 만들 이유가 없잖습니까." "사실… 그란셸들은 산적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아나키스트 왕국은 후작파와 백작파가 나뉘어 심각한 내전중에 있어요. 그 와중에 피해받는건 바로 우리와 같은 평민들이죠…"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전이 지속되자 점점 왕국의 치안은 엉망이 되었고, 곳곳에는 도적떼가 들끓었어요. 정말 살기가 힘들어졌죠. 그란셸은 사람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작은 마을을 만들었어요. 도적떼의 위협도, 귀족들의 횡포도 없는… 이 마을을 말이에요." "…" "그란셸은 그를 따르는 마을의 남자들을 데리고 다른 도적떼 들을 소탕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물을 빼앗아 오거나 돈 많은 귀족들을 습격해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이 마을을 유지하고 있어요." 뭐라고 한마디 할만도 하지만 베델은 아무말 없이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옆쪽에서 칼리아넬이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러다 몸이 상하는게 아닐까, 조금 그녀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랬, 군요. 그동안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녀서 아나키스트 왕국이 내전중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가요?" 그녀는 베델이 갇혀있는 창살에서 물러나 내가 있는 창살로 다가왔다. 그녀는 잠시 내가 저쪽으로 치워놓은 음식들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먹어두는게 좋을거에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들었어요. 그렇게 굶고 있다간 그 아름다운 미모가 상할거에요." 꽤 상냥한 목소리다. "괜찮아요. 그러니 이 음식 칼리아넬이나 베델에게 전해주지 않겠어요? 어차피 저는 먹지 않을테니까 이렇게 놔둬 버리면 아깝잖아요." "카, 칼리체- 그녀의 말대로 뭐라도 먹어두는게…" 난 말없이 그녀에게 음식이 담겨 있는 접시를 내밀었다. 그녀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름이 칼리체로군요, 예쁜 이름이네요." "당신은…?" "전 캐시에요. 듣던 것과는 달리 칼리체는 귀족가의 아가씨는 아닌 모양이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란셸은 여러분을 금방 풀어줄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계세요." 글쎄,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그래도 걱정은 없다. 그들이 우리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마력을 이용해 이곳을 부수고 탈출하면 되니까. 그들이 우리의 앞을 막는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라면 왠만한 인간은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없다. 뭐, 본래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양에 비하면 이것은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나는 좀더 인간과 가까운 모습을 하기 위해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을 점점 줄여왔다. 마력이란 힘은 세계의 근원에서 비롯된 힘. 그것을 가까이 할 수록 인간이 가진 속성과는 점점 동떨어 지는 것이다. 캐시가 이곳을 나간후 나는 잠깐 잠이든것 같았다. 벽에 기대어 고개를 꾸벅이며 졸다가 옆에서 베델이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칼리체! 칼리아넬!" "… 무슨 일인가요 베델?" 내 목소리가 조금 낯설게 들린다. 졸음에 젖어 있어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베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급했다. "아무래도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주변에 무언가 달라진 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까전만 해도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던 감옥 안이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빛은 벽위에 달려있는 철창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 키가 그곳까지 닿을 정도는 안되 바깥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추측해 볼수는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화재에서 비롯된 불빛일 것이다. "제길, 도대체 무슨 일이지…" 베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급히 이곳으로 들어왔다. "캐시?" "시, 시간이 없어요. 당신들은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되요!"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면서 손에 쥐고 있는 열쇠를 정신없이 자물쇠에 맞추어 돌렸다. 철컥- 하는 소리가 나며 굳건히 닫혀 있던 감옥문은 끼익- 하는 소름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캐시는 내가 있던 감옥의 문을 열어준후 칼리아넬, 베델 차례로 문을 열어주었다. "도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요?" "아무래도 그란셸에게 당한 산적들이 복수하기 위해 그들끼리 뭉쳐 이곳을 공격하고 있는것 같아요. 마을의 남자들이 모두 외곽으로 나가긴 했지만… 오래 버티기 힘들거에요. 그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캐시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깊은 불안감은 어쩔수 없는듯 그녀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명확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당신들은 뒷길로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물론, 그쪽에도 산적들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는 그 길뿐이 없어요." 캐시는 급한 걸음으로 감옥을 나섰다. 나와 칼리아넬, 베델도 그녀를 따라 감옥을 나갔다. "맙소사…" 감옥을 나오자 눈에 보이는 것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이었다. 캐시의 말로는 마을의 남자들이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나갔다고 했지만 이미 그 방어선은 뚫려버린 모양이었다. 마을에는 이미 산적들이 들어와 약탈과 살인을 행하고 있었다. "아, 안돼!" 캐시는 겁에 질린듯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저놈들…!" 베델은 불타고 있는 마을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지 주먹을 꽉쥔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그의 선량해 보였던 얼굴은 분노를 띄고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주의 깊게 베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의 얼굴은 처음 그를 만나서 마물에게 당한 마을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베델?" 칼리아넬이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그제서야 마을을 바라보던 시선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 마을을 탈출…"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캐시를 바라보았다. 베델은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일견 그의 얼굴은 괴로워 보이기 까지 했다. "탈출… 할 수 없어 나는." 저 멀리서 인간들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베델, 하지만…!" "미안해! 물론, 나는 칼리체의 의뢰를 받았고… 하아." 칼리아넬의 말을 자르며 베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깊은 고뇌에 침잠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칼리체, 칼리아넬. 나는 도저히 이 광경을 그냥 보고 넘길순 없어." "베델, 당신이 저 상황에 참여한다고 크게 달라지는것은 없을거에요." 베델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말이 맞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냥 이 광경을 지나칠 수 없어. 칼리체, 너는 마술사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곳을 빠져 나갈수 있을거야, 그렇지?" "네." "그렇다면 캐시를 데리고 그녀가 말한 길로 이 마을을 빠져나가도록 해." "베델은요!?" 칼리아넬은 울음을 터트릴것 같은 목소리로 마치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베델은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도 반드시 이곳을 빠져 나갈게. 그러니, 일단 너희들 부터 이곳을 빠져나가도록해. 자, 시간이 없어!" 그는 그 말만 남겨두고 허리에서 검을 뽑고는 불타고 있는 마을로 달려 나갔다. 베델은 달려가다가 잠깐 뒤돌아 보아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칼리체님… 어쩌죠?" 칼리아넬은 바닥에 주저앉은 캐시를 부축하며 나에게 물었다. 글쎄, 그의 말대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이 마을을 빠져나가기는 조금 탐탁치 않다. 그는… 어째서 이들을 위해 싸우려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들을 잡아 가둔 이들을 원망하고 미련없이 이 마을을 탈출해야 하는것 아닌가. 보통 인간들은 그렇게 사고하는게 아닌가? "베델을 따라가 보자." 나는 칼리아넬과 캐시를 데리고 마을 안쪽으로 걷고 있었다. 감옥이 마을의 최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침략자인 산적들에게 발견될 위험도는 낮지만 그것보다 나랑 있는것이 더 안전하니 그냥 그녀들을 데리고 왔다. 멀리서 본대로 마을의 집들에는 곳곳에 불이 붙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이 꽤 넓어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데에는 별다른 위험이 없었다. "…" 뒤에서 캐시의 억눌린 신음이 들린다. 괴로울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곳이니… 드문드문 시체가 보이긴 하지만 의외로 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도 미리 어딘가로 대피했던 모양이지. 그리고 지금 이 마을을 침략한 산적들이 몰려들고 있는 곳이 바로 그 대피처 일것이다. "정말 너무해요…" 칼리아넬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가까운 시체로 다가가 그 모습을 보았다. 인간이었던 그 고깃 덩어리의 죽음은 목을 관통당함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어린 소년이었는데, 죽음의 직전에도 자신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는듯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생명을 잃은 까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 난 잘 모르겠다. 베델이 이 모습의 어디에서 그렇게 강렬한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는지 말이다. 시체에서 시선을 돌려 시끄러운 쇳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싸울수 없는 인간들을 모두 그곳으로 피난시키고 최후의 방어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그들의 싸움은 굉장히 격렬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휘젓는 베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 난장판 사이에서 한손에 은빛 검을 들고서 거의 온몸을 이용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사나운 육식 동물같은 움직임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검이 산적 한명의 몸을 거의 부술 정도로 휘둘러진다. 그 동작은 굉장히 경쾌해보였지만 그 경쾌한 동작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별로 경쾌하다고 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산적을 베고 지나간 검은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다시 휘둘러 진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위로 그보다 더욱 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진다. 처음으로, 인간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혼자서 거의 수십명에 달하는 산적을 홀로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아까 그에게 했던 내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 혼자의 힘으로 이 상황을 바꿀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칼리체 님,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요?" "난 최대한 관조적인 입장에서 인간들을 바라보려고 해. 그러니 이 싸움에 내가 개입하는건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란다." "그렇군요…" 칼리아넬은 내 말에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명백히 내가 저들을 돕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이번에는 그녀가 원하는데로 움직여줘 볼까. 난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마술이라는 수법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단순히 미약한 저주만을 담은 마력 덩어리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마, 마술인가요?"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캐시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칼리아넬 역시 놀란 얼굴로 내가 생성한 마력 덩어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목숨을 사라지게 할만큼 강한 것들은 아니다. 아니, 목숨을 앗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힘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저들을 타격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간단히 목숨을 잃을수 있다. 나는 산적들을 향해 마력덩어리들을 모두 쏟아내었다. 매의 활공 속도 정도로 날아간 그 마력덩어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산적들에게 명중했다. 그들은 갑자기 뒤에서 느껴진 강렬한 충격에 기겁한듯 뒤를 돌아보았다. 서로 검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정도의 주의력 분산은 치명적이다. "으, 으아악!" 유쾌하지 못한 인간의 비명 소리가 시끄럽게 허공을 찢었다. 한 서너번 정도 저급한 마력 덩어리들을 날려주니 이미 상황은 거의 정리되고 있었다. 산적들은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서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거나 목숨을 구걸했다. 그들은 이들보다 결속력이 훨씬 약한 모양이다. "귀, 귀, 귀신인가…!" 난 마지막 마력 덩어리를 날려 보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무지는 내 마력 행사를 귀신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로 탈바꿈 시켰다. 산적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아직 표정을 잘 읽을줄 몰라 한참을 봐야 깨닫는 나도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역력한 공포의 감정을 읽을수 있었다. 재미있군, 인간의 무지는 공포를 일으키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내가 쏘아낸 마력 덩어리의 근원을 찾아보려는 의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칼리체 님…" "나 스스로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네가 원하는 것이니 들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단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칼리아넬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칼리체 님."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체, 여기는 왜왔어! 도망가라고 했잖아… 라곤 하지만 뭐, 이제 위험한 일은 없을것 같네. 아, 그리고 아까 그 마술, 칼리체가 도와준 거였지?" "네." 어느새 베델이 이곳으로 다가와 있었다. 솔직히 나는 좀 깜짝 놀랐다. 저 먼곳에 떨어져 싸우고 있던 베델이 잠깐 칼리아넬과 대화하는 사이에 이곳에 와 있으니 말이다. "휴, 자네. 걸음 한번 빠르군." 베델의 뒤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그란셸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격렬한 싸움의 흔적으로 피가 곳곳에 튀겨 있었다. 아, 물론 베델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오, 그란셸 무사했군요!" "캐시? 당신이 왜 이곳에…" 캐시는 그란셸에게 달려들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안으로 안겨드는 그녀를 안았다. "정말 걱정 했어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마을은 정말 큰일일 테니까요." "그런말 마시오, 캐시. 이 마을은 나 혼자 만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는게 아니오. 이제 이 마을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지 않소? 아참 그것보다…" 그는 하던말을 끊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란셸은 내게 허리를 깊게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꽤 자존심이 쎈 인간으로 보이는데 조금 의외였다. "저에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요. 전 그냥 베델을 따라와 그가 하는 일을 도운것 뿐이니까요. 전 원래 이 마을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고자 했답니다." "카, 칼리체! 무슨 말을…" 난 의아한 표정으로 베델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음… 그렇다 하더라도 도움을 받은건 사실이지. 어쨌든 진심으로 당신들에게 감사를 표하겠소. 당신들은 이 싸움에서 정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소. 아마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해 졌겠지." 그란셸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산적들과 맞서 싸우던 남자들은 허둥지둥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치우고, 집에 붙은 불을 끄기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산적들과 맞서 이기긴 했지만, 마을이 이렇게 완전히 파괴되어 버려서야 의미가 없지 않나 싶다. "유감이네요, 그렇게 노력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이 이렇게 타버렸으니 말이에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마을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의 차가울 정도로 단호한 말에 캐시가 깜짝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 마을은 그의 노력의 결실이 아닌가. … 그의, 모든것이 아니던가. "마을 따위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만들수 있소.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마을의 사람들이오." "그란셸…" 캐시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란셸은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우리에게로 옮기며 물었다. "그럼 묻겠소, 우리를 왜 도와준것이오? 나는 당신들을 잡아 가둔 장본인이오. 나에게 그리 감정이 좋지는 않을텐데." 난 베델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단지 베델을 따라온것뿐. 그러니 이 결과는 전적으로 베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난 딱히, 당신을 도운것이 아니오." "…"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이 마을의 사람들을 그저 두고 볼수만은 없어서 나선것 뿐이오." 담담하게 말했지만, 베델의 목소리는 분명히 강한 울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사이에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단지 마을 사람들이 걱정되서 그랬다… 이말인가?" "뭐, 그렇소."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고요히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베델은 단지 이 마을 사람들이 항거할 수 없는 폭력에 무력히 당하는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이 싸움에 참여했다고 했다. 인간들의 행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이득이란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베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베델은 내가 보고자 했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그란셸이라 하네." "베델이오." "베델… 고대에 존재했던 위대한 영웅의 이름이군. 좋은 이름이야." "… 당신은 어째서 이런 산속에 틀어박혀 산적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는 잠시 아직도 불타고 있는 마을로 시선을 주며 짧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난 사실 이 나라, 아나키스트 왕국의 기사였네." "기사? 아니 기사가 왜 이런곳에서…" "기사 였다고 했네. 물론, 지금은 기사가 아니지. 자네도 알다시피 아나키스트 왕국은 거대한 내전을 겪고 있네. 나는 그 내전의 틈바구니에서 죄를 뒤집어 쓰고 기사라는 칭호를 빼앗겨 버렸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라도 내전에 희생받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구하는 일 밖에는 없지. 뭐, 확실히 방법은 잘못 되었지만 말이네." 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베델은 그의 말을 듣고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란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그의 분노는 어디를 향해 있는 것일까.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 내전에 희생받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그란셸에게? 그에게 기사라는 지위를 빼앗은 아나키스트 왕국의 위정자에게? 나는 알 수 없다. "아가씨는 귀족이 아니었군. 호위를 맞고 있는자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를 내팽개치고 마을 사람들을 구하러 달려올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음…" 베델은 신음을 흘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하다는 표정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맙소사, 아가씨는 마술사였나… 우리에게 순순히 잡혀준게 궁금하군." 하지만 그란셸은 그다지 내게 대답을 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어쩔것이오? 마을은 완전히 타버렸고, 당신들은…" 베델은 뒷말을 흐렸다. 이렇게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마을을 원상태로 복구하자면 돈도, 시간도 많이 들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정도의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뭐,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지금 까지도 그래왔으니까 말이야." "…" "그것보다 자네는…" "그냥 용병이오." "용병이라, 그것보다 자네는 기사라는 직위가 어울릴것 같네만. 아니, 이미 자네의 마음 가짐은 기사 이상이네." 베델은 그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칼리체, 저번에 말했던… 너의 의뢰에 대한 보수 말이야." "네." "으, 저기 그러니까 말이야…" 어째서인지 그는 대단히 곤란해 하는 기색이었다. "재화를 원하는 만큼 드린다고 했었죠." "음, 그래. 저기… 의뢰비를 선불로 줄 수 없을까? 미, 미안해. 난 아무래도 이런 얘기는 좀 불편해서…" 난 그가 원하는 만큼의 재화를 주었다. 베델은 내 품속에서 엄청난 금액이 나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에게서 그 재화들을 받아들고는 그것을 전부 캐시에게 주었다. "마을의 재건에 이것을 쓰도록 해요." "어, 어떻게, 이렇게 큰 돈을…" "그란셸에게 주면 그는 아무래도 이것을 받지 않을것 같거든요. 당신이 이것들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가 떠나거든 그란셸에게 건네 주세요." 캐시의 눈가에 맑은 액체 한줄기가 주르륵 타내렸다. "미안해요. 거절하지 못하는 제가 한심하군요." 베델은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우리는 곧 그 마을을 떠났다. 아니 그곳은 이제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는 폐허일 것이다. 하지만 그 폐허는 다시금 그곳의 인간들의 노력과 희망을 머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을로서 부활할 것이다. "하아,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는데. 모두 줘버리고 말았네. 역시 나는 부자가 되기는 틀린 걸까나."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모두 줘버린거에요? 베델 몫을 남겨두고 주어도 되지 않았어요?" 칼리아넬이 그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물었다. 왠지 베델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약간은 부드러워 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금액 전부 주어도 마을의 재건에는 약간 모자를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나야 돈이 필요해 지면 또 의뢰를 해결해서 별면 되니까 말이지. 내게 그렇게 큰 돈은 필요 없어." 그 정도의 재화가 마을의 재건에 불충분 했단 말인가? 인간들의 경제 개념이 별로 없는 나는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재건에 충분한 재화를 주었을 텐데 말이다. "하아, 그것보다 칼리체,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난거야? 나에게 그렇게 많이 주어도 되었던 거야?" 그의 물음에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변명을 말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남겨준 유산이에요. 제 헐렁한 옷속에 공간 왜곡 마술로 이루어진 공간에 모두 보관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준 재화는 그것의 일부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어요." "… 칼리체, 실은 엄청난 부자였구나." 내게는 하등 쓸모 없는 것들이지만 말이다. "이 산만 넘으면 커다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말을 사면 그때부터 좀더 편한 여행이 될 수 있을거야." 그가 내가 힘들어 한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나는 지친 기색을 보이고고 있던 모양이다. 베델은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깐 이곳에서 쉬어가자고 말했다. 나는 생소한 감각인 고통을 호소하는 다리를 매만지며 가까운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오늘은 왠지 컨디션이 굉장히 좋지 않다. 날씨도 그리 서늘하지 않은데 몸이 으슬 으슬 떨리는게 왠지 추운것 같은 기분이 들고 긴 잠을 잤다가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러웠다. "칼리체 님, 다리 아프면 제가 좀 주물러 드릴까요?" 칼리아넬은 나만큼이나 다리가 가느다랗지만 힘들어 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숲의 요정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활기 넘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칼리아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칼리아넬은 바위에 걸터 앉은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내가 신고 있던 짧은 부츠를 벗기고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다리를 주물렀다. 약간의 고통이 수반되긴 했지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마치, 잠에서 막깬듯한 나른한 기분에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칼리체 님, 다리가 이지경이 될때까지 아무말 없이 그냥 걸으면 어떻게 해요." "미안해 칼리체. 아무말 없이 잘 따라 오길래 이렇게 힘들어 하는줄은 정말 몰랐어." "난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 한없이 시간이 많은 나야 목적지 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지만 목적지 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지연 시키게 할만큼 내가 느끼는 다리의 고통은 고려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다. "아나키스트 왕국에 가는게 그리 급한 일은 아니잖아. 힘들면 바로 말 하라고, 참을 이유가 없잖아." 베델은 약간 화난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뭔가 화날 일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네, 그럴게요." "칼리체 님 다리가 정말 하얗고 가느다랗네요. 너무 예뻐요. 저도 이런 다리를 갖고 싶은데, 제 다리랑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 난 정말로 곤혹스런 기분을 느꼈다. 물론 이 신체의 다리와 그녀의 다리를 바꾸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꽤 커다란 고통이 수반 될… "하하하!!" "칼리체 님,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하고 계세요? 설마, 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신건 아니겠죠? 에… 농담이에요, 농담." 베델은 대놓고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고 칼리아넬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그맣게 킥킥대는 소리로 인해 그녀의 그런 노력은 별로 소용이 없었다. 농담이란것, 내게는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낀 나는 아무말 없이 칼리아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주었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 보며 수줍게 웃었다. "아, 하하… 웃어서 미안. 하지만 칼리체 정말…" 베델은 웃음을 멈추고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다 갑자기 하던 말을 끊고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요, 베델? 누가 당신하고도 다리 바꿔달라고 하던가요?" "하하, 그건 아니고." 칼리아넬은 짖궂은 미소를 띄우고 베델에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하고라도 웃어보고 싶었지만, 역시 아무래도 나는 아직 표정을 지을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싸우는 듯한 소리가 나는데…" "싸우는 소리요?"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말이야." 그의 말에 칼리아넬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최소한 가시거리 안에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고 올게. 금방 돌아올테니까…" 베델이 말대로 그를 따라갈수록 어디선가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친 고함소리,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와 누군가가 이곳에서 싸우고 있다는 추측은 확신으로 변하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뒤로 한시도 쉴새 없이 이런 재밌을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것 같다. 항시 한가로운 생활을 하던 나로서는 마치 정신없는 폭풍우에 휘말린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칼리체, 칼리아넬… 어째서 나를 따라오는 거야?" "저야 뭐… 칼리체 님을 따라가는것 뿐이에요." "호기심이란 감정이 저를 움직이게 만들어서요." 베델은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자신을 조심히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저번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이런 풀숲에서의 베델의 움직임은 마치 야생동물과 같았다. 나도 조심스레 바닥에 깔린 풀들을 밟고 있지만 아무리해도 베델처럼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었다. "저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사한 꽃처럼 밝은 색으로 치장된 마차였다. 하지만 그 마차에는 인간들의 몸에서 나온 붉은 피가 이리저리 튀겨있어 그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마차를 둘러싸고 지키고 있는 인간들,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을 지키고 있는 인간들… 아, 말은 이미 두마리가 죽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포위하고 습격하고 있는 인간들…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구도였다. … 아, 에네리아라는 인간의 소녀를 만났을 때도 이와 동일한 상황이었지. 다른 것이라면 지금이 낮이고 그때는 밤이라는 것뿐이다. "아무래도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검을 빼드는 베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겪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베델이라는 인간은 보통의 다른 인간들과는 무언가가 다른것 같다. 보통 인간은 거의 모든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베델이라는 인간은 거의 모든 행동이 타인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서 홀로 다른 속성을 가진 베델이라는 인간을 이상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에 검을 빼들고 그 싸움에 참여하고 있었다. "꺅!, 칼리체님 저러다가 베델이 다치겠어요!" "칼리아넬, 너는 저 인간을 싫어하는것 아니었니?" "우… 물론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게된 인간이 상처입는 것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요." 알게된, 이라는 건가. "애송이, 상관 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라!"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천을 감싸고 있는 인간 하나가 베델에게 그렇게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저번에도 보았지만 베델의 움직임은 굉장히 크고 거칠다. 그리고 그 만큼 검에 깃든 파괴력도 따라서 강해진다. 습격자들 중 그의 검을 제대로 막아 낼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제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베델은 내가 보아왔던 어떤 인간들 보다 가장 강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는것 같다. "콜록, 콜록." "에-? 칼리체 님?" 아까보다 더 어지럽고 추워진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 나는 그것이 단순히 기분탓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확연한 이상이 나타나서야 지금 내 몸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내 가녀린 외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금 내가 화(化)하고 있는 이 몸은 그리 건강하지 못한것 같다. 이 알 수 없는 몸의 이상은 아마 그때, 갇혔던 감옥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눈앞에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검을 들고 싸우고 이쓴 베델의 모습이 두개, 세개로 나뉘어 보인다. 인간의 몸은 이다지도 나약했던가, 그저 그 감옥에서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고 이렇게 쇠약해 지다니… "하아, 칼리아넬…" 나는 더이상 서있을 수 있는 기력을 잃고 힘없이 칼리아넬에게 기댈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거의 안다시피 나를 부축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칼리체 님! 괘, 괜찮으세요? 아아, 도대체 왜…!" 내 모습을 보면 괜찮지 않다는 걸 알텐데, 왜 저런 질문을 하는걸까.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힙겹게 입을 열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괜찮지 않아." "몸이 불덩이 같아요! 칼리체 님!, 칼리체 님!?"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점점 의식 속에서 멀어져 간다. 난 더이상 서있을 힘을 잃고 눈을 감고 말았다. 의식을 이어나갈 힘마저 잃은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음…" 참으로 꼴사나운 일이다. 드래곤인 내가 연약한 인간의 신체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신까지 잃을 줄이야… 그리고 무척이나 언짢게도, 정신이든 지금도 내 몸을 움직일 힘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거의 온 몸의 힘을 짜내어 마치 돌덩어리 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플을 들어올렸다. 환한 태양빛이 가장 먼저 내 눈을 자극했다. 나는 그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옆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칼리아넬이 보였다. "칼리아넬." 기력이 없는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내 말이 들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것 때문에 오히려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었다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그런 내 작고 힘없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마치 괘종 시계처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던 고개를 퍼특 들었다. "칼리체 님!" "읏…" 마치 비명과도 같은 큰 그녀의 목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 막 정신이 든 나는 방안이 울리자 내 머리속도 울리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즈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방이라고…? "칼리아넬, 여기는 어디니?" "가까운 마을의 여관이에요. 베델이 칼리체 님을 안고 몇 시간이나 쉬지않고 뛰어서 이곳에 도착 했어요. 그때 칼리체님 정말로 아파보여서… 금방이라도 죽을것만 같았어요." 과연, 이 일로 내가 하고 있는 이 모습은 무척이나 허약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가벼운 충격으로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 "칼리아넬! 칼리체가 깨어난 거니?" 방문이 벌컥 열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베델이 뛰어들어왔다. 칼리아넬의 큰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정도였나 보다. "아, 칼리체…! 정말 다행이야!" "제가 정신을 잃은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넌 꼬박 하룻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정말, 어제는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구!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말을 하지 않고 있었어!?" 으윽, 그가 큰 소리를 지르자 머리가 더 울린다.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왜 화를 내는거죠? 제 몸이 안좋아져서 베델이 해를 입은것이 있나요?" 생각해보니 베델이 나를 여기까지 안고 오느라 꽤 힘이 들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걸까? 이상하게도, 그는 내 말을 듣자 더 화난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너에게 화를 내는거라고 생각하니, 칼리체?" "그렇지 않으면 베델이 저에게 화를낼 이유가 없지 않나요? 아, 여기까지 저를 안고 오느라 힘이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사과 할게요. 음,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 재화를 좀더 지불하면 만족하시겠죠?" "… 칼리체!" 으웃, 아까보다 한층 더 커진 목소리다. 물론, 방금 보다 훨씬 더 화가난 모습이다. 나는 머리가 울리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을 날 노려보더니 이내 커다란 발걸음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가버렸다. 그는 나가면서 방문을 세게 닫았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한차례 더 머리가 울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칼리체 님이 잘못 하셨어요." "내가? 어째서?" "에휴, 저건 베델이 칼리체 님을 걱정해서 저렇게 화가 난거잖아요. 그가 칼리체 님에게서 해를 입었다는 생각에서 화가 난게 아니라구요." "왜 날 걱정하는데, 화를 내는거지?" "그건 칼리체 님이 베델의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고 재화로 이야기를 돌려서 그렇잖아요. 베델은 자신의 걱정이 재화로 보상된다는 것에 모욕을 느낀걸지도 몰라요. 아, 그리고 칼리체 님에 대해선 저도 화가 나 있다구요."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하기가 대단히 힘든것 같다. 칼리아넬의 말이 무척이나 모순되게 들린다. "그 말은 내가 확실히 그에게 잘못을 했다는 거니?" "네, 그래요. 그럴때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거에요. 아셨죠?"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라고-? 걱정, 걱정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완전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째서 걱정을 끼치면 미안해야 하는거지? 자신이 걱정을 당해야할 일을 당했는데, 어째서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하는 것인가. 확실히, 나는 걱정이라는 감정을 품어 본적이 없다.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응, 알았어." 완전히 납득은 못했지만 일단은 대답을 해두었다. "알았으면 저에게도 그 말을 해주세요. 저도 무척이나 칼리체 님을 걱정했다구요, 정말…!" "…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칼리아넬은 내 손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여전히 내 신체는 기력을 되찾지 못한 모양이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는 잠을 깬 직후의 몽롱한 기분을 즐기며 창밖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짙은 어둠을 뚫고 내 시야로 들어오는 수 많은 빛들이 있었다. 이곳은 니하크할룬 만큼이나 번화한 모양이다. 이런 풍경은 적당히 발달한 마을 같은 곳에서는 볼수 없는 것이니까. 잠깐 동안 밖을 바라보던 나는 아직도 통증을 호소하는 몸을 추스르며 방을 나왔다. 아까 정신이 들었을 때는 미처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간단한 가구들만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아마도 여관인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베델과 칼리아넬은 어디있는 거지? "으읏-"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방문을 열었다. 끼익- 하고 오래된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비좁은 복도를 울렸다. 뭐, 방의 풍경에서도 눈치챘었지만 이 여관은 그리 고급스러운 곳이 아닌가보다. 벽을 짚으며 아래로 내려가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장먼저 들려왔다. 정신이 그리 뚜렷하지 못한 관계로 그 소리는 정확히 들리지 않고 그저 웅웅- 하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 칼리체 님!" 칼리아넬은 나를 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올려 흔들어 보였다.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외모는 이곳에서 꽤 도드라져 보이기에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녀와 베델은 한 테이블의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켜서 먹고 있었던 도중이었다. 베델은 나를 보더니 아무말 않고 시선을 탁자로 돌려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내게 화가 나 있는 모양인듯 싶었다. 일단 그것보다 곤란한 것은 내 몸이 아직까지 말을 잘 듣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잠시 주변에 신경을 끄고 나는 여관의 나무벽에 몸을 잠시 기대었다. 이러다간 다시 쓰러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겠군. 정말이지 한심할 정도로 허약한 몸이다. 로나벨아크하임 처럼 튼튼해 보이는 신체로 변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쨋든 이것은 내 또다른 진실한 모습이니, 그것은 생각으로만 그칠뿐이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현재 내 진실한 모습을 바꿀 정도로 나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사고가 이런것에까지 미친것일까. 확실히 지금의 내 상태는 사고 마저도 제대로 통제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참에 나는 누군가가 내 몸을 거의 들어올리다 시피 부축하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버렸다. 살이 닿아있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강인하고 단단한 신체, 베델이었다. 이 기회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베델, 칼리아넬에게 어째서 당신이 화가 났었는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 여전히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건 제 잘못인것 같으니, 사과할게요. 음, 그러니까… 걱정끼쳐서 미안해요 베델." 그는 나를 약간 놀랐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 아니야. 나도 보호해야할 너희들을 내버려 둔채로 그들을 도왔으니, 결국 나도 잘한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화내서 미안해, 칼리체." "괜찮아요." 이상한 대화였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자 그도 내게 사과를 한다. 그렇다면 내 사과는 받아들여 진것인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인가. 뭐, 그의 기색으로 봐선 내 사과는 받아들여진 모양이지만. 확실히 언어로서 전해주지 않으면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만능의 언어만을 쓰던 나이기에 겪는 곤란함일지도 모른다. 아마, 로나벨아크하임이었다면 머리속으로 방금의 대화를 분석해 볼 시간도 필요 없이 단번에 이해했겠지. 인간들의 사회에 나온지 꽤 오래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이들에게 익숙해 지려면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베델이 도왔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베델의 멀쩡한 모습을 보니, 그들에게 베델의 도움은 확실히 유용했던 모양인데요." 칼리아넬의 도움으로 의자에 앉은 나는 고개를 살짝 움직여 그녀의 조력에 답한 뒤에 베델에게 물었다. "아, 그게 말이지…"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마차에는 아나키스트 왕국의 공주님이 타고 있었대요. 나중에 감사 표시를 할테니 왕궁으로 찾아오라고 그랬다는 걸요?" 정말이지 공교로운 일이군. 대뜸 가서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더니, 이 나라의 공주가 타고 있었다고? 기가 막힌 우연이다. 요르간드에서 나오자 마자 인연이 닿은 인간과 만나는것 보다는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에네리아를 만났던 일도 참으로 놀랄만한 우연이 아닌가. 어쨌든 그렇다면 그것은 베델에게 상당히 기쁜일이 아닌가. 왕족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위정자, 그들이 감사 표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기대어 베델에게 내려질 것이다. 베델은 운이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기뻐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으음, 너무 부담스러운걸. 뭣 모르고 뛰어들었더니 설마 내가 왕족을 구하게 될줄이야… 거기다 나같은 용병 따위가 뭐가 대단하다고 왕궁으로 찾아오란 말까지 남겼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나저나 왕족이 습격을 받다니 무슨 일인가요? 아마 전에 들었던 이 왕국의 내전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지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렇겠지." 아나키스트 왕국의 내전은 국왕파와 귀족파가 나뉘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습격받은 것은 왕족이니 습격자들은 이 나라의 귀족들일 것이다. "나야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칼리체와 칼리아넬에게는 좋은 기회인것 같네. 왕궁안에 들어가 본다는것, 평민으로서는 평생중에 한번을 겪기도 힘든 경험이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베델은 그곳에 가기싫은것 같은데, 가지 않아도 상관없는것 아닌가요?" 하지만 난 심드렁했다. 인간들의 왕궁 따위야 내가 보고자 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마법으로 보든, 직접 보든간에 말이다. "그건 안돼. 자그마치 공주님이 직접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구. 그 말을 무시하면 그 공주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아, 그렇네요." 베델과 칼리아넬이 아침을 먹는 사이 나는 그들 옆에 앉아 아무말 없이 의자에 몸을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엉덩이 까지 닿는 긴 백발이 내 몸을 타고 흘러 내려 바닥까지 닿았다. 평소 같았으면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지 않게 추스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없어 맥없이 의자에 앉아있기만 했다. 여관 내부에서 나를 멍청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많은 인간들의 시선이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그 불편함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피로함을 이기지 못했다. 잠깐 졸았던 걸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주변의 풍경이 꽤 변한것 같았다. 베델은 말을 사러 가겠다고 여관을 나갔고, 칼리아넬은 저쪽에서 이 여관에서 일하고 있는 소녀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꽤 밝게 웃고 있는 걸로 보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전까지만 해도 인간을 꽤 경계했는데… 칼리아넬은 이제 인간들에게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인간들의 집중된 시선을 받고 있었다. 아까 만큼 노골적인 시선들은 아니지만 힐끔 힐끔 쳐다보는 것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들에게 외모라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요소인 모양이다. 어딜가나 나를 바라보는 인간들의 시선은 변하질 않는다.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될만큼 내 외모는 인간들에게 대단한 주목을 받는다. "저기…" 몸이 약해지니 감각도 무뎌져 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말을 거는것에 놀라 나는 흠칫하고 잠깐 몸을 떨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고동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의 청년이었다. 얇은 천옷 위로 들어나는 발달된 상체와 구릿빛 피부가 꽤 인상적이었다. 이 허약한 몸과는 달리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는군.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한동안 나와 눈도 못 마주 치고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이 인간 도대체 지금 뭘하려는 거지? "…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서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디 저와 사귀어 주십시오!" 잠시 이 공간안에 정적이 찾아온다. 인간들은 모두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다들 내가 어떤 대답을 해줄지 기대하고 있는 모습들인것 같다. 나는 이 상황이 퍽 흥미로웠다. 그의 나의 외모로 인한 구애로 내가 약간이나마 인간들의 사회에 관여되었다는 느낌이랄까… 조금 바보같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사귄다라. 뭐, 나쁘지 않을것 같다. 인간들의 연애라는 것을 해보는 것도. "좋…" "칼리체! 말을 사왔어. 저기있는 마구간에 잠시 맡겨두고 오는 길인데…" 긍정의 대답을 하려는 찰나 베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당황한 눈으로 내쪽을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이 이곳으로 모여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에게 구애를 했던 인간의 청년은 다소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베델을 바라보았다. 베델 역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 칼리체에게는 무슨 볼일이지?"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베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찬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에게 반했다면서, 저랑 사귀어 달래요." "뭐…?" 어쩐지 그 청년은 대뜸 나에게 구애를 했던 처음의 그 기세가 점점 사라지는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점점더 초조해지는 얼굴로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나와는 아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여, 역시… 죄, 죄, 죄송합니다. 바, 방금전의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나는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 청년은 우당탕- 하는 뭔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여관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 떠들썩한 웃음이 여관 안을 가득 매웠다. "으하하하! 나질, 저 청년 소심쟁이 답지 않게 저렇게 대담한 고백을 하나 싶더니, 결국 대답도 듣지 못하고 도망쳐버리는 구만 그려!" "허허, 척보기에도 자기에겐 터무니 없이 과분한 아가씨처럼 보이니 겁이난 거겠지." "뭐지요… 저 인간." 칼리아넬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어이없다는듯 망연한 표정으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델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칼리체, 그가 도망치지 않고 남아있었다면 뭐라고 대답할려고 그랬어?" 여관을 나오며 베델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내게 물었다. 지금까지 쉬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힘이 나진 않지만 전처럼 픽 쓰러지는 일은 없을것 같다. 나는 여관을 나서자 제일먼저 내 눈을 찌르는 찬란한 태양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좋다고 할려 그랬어요." "… 네?" "뭣!?" 칼리아넬과 베델 둘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뭘 그리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거지? "어, 어째서요? 그가 마음에 들었나요?" "글쎄, 마음에 들었다기 보단…" 다시 생각해보니 인간들의 연애라는 것을 해보고 싶어도 방금과 같이 소심한 자하고와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연애라는게 해보고 싶어서." "그, 그, 그런가요…" 난 의아한 눈으로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말을 더듬는 것을 보면 그녀는 명백히 당황을 하고 있는 중인데 말이야. 베델역시 말은 안하고 있지만 칼리아넬 만큼이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뭔가, 인간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내가 그들의 사고 기준에서 벗어난 대답을 한 모양이지. 그런데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인데, 지금까지 칼리아넬의 반응은 인간들과 상당히 흡사했다. 요정의 사고 방식은 인간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데도 말이다. 요정들이 감각하는 세계와 인간들이 감각하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니 그럴수 밖에 없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금방 인간들을 이해하는것 같고, 그들의 사고 방식에 쉽게 동조하는것 같다. 처음봤을때 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그녀는 참 특이 한 요정인것 같다. "자 어때, 괜찮지?" 그것은 말을 말하는 것이었다. 털에 윤기가 흐르고 몸집이 커다란 것이 꽤 건장해 보이는 말이었다. 말은 두마리인데… 그렇다면 한 말은 둘을 태우게 되겠군. "말 세마리를 구하는 것은 무리였어.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팔려는 사람이 두마리 밖에 팔려고 하지 않아서 말이야." "잘됐네요, 저는 말을 탈줄 모르거든요. 칼리아넬은 탈줄 아니?" "아마 제가 태워달라고 부탁하면 태워줄거에요." 아, 그렇지. 요정은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그 능력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말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칼리아넬이나 베델중 한명과 말을 같이 타야한다. 그녀의 말에 베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무슨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칼리체 님, 저랑 같이타요. 우리는 베델보다 몸무게가 훨씬 적어서 말이 받는 부담이 적을 거에요." 칼리아넬은 약간 급해보이는 어조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찰때 마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기 때문에 나는 칼리아넬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자그마한 등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말에서 떨어질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참, 칼리체 님. 몸에서 좀더 힘을 빼세요. 그렇게 힘을 주고 있으면 더 불편하다구요." 칼리아넬은 평지를 걷고 있는 듯, 편해 보이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미소가 묻어있었다. "…" 이 상태로 거의 한나절을 꼬박 달려야 왕궁에 도착한다니, 많이 괴로울것 같다. "헤헷, 칼리체 님 지금 너무 귀여워 보이는거 아세요?" "그런가." "그런 불안한 표정하고서 담담히 말해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구요." "…" 으음, 아무래도 칼리아넬의 머리속에 생각하고 있던 나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변경된것 같다. 어쨌든 나로서는 그녀의 미묘한 태도의 변화가 기껍다. 전까지만 해도 나를 드래곤이라는 이유로 지나칠 정도로 의식했었기 때문이다. 난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입을 열려다 재빨리 다시 입을 닫았다. …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베델은 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자, 예정보다 시간을 늦추어 마을에 들러 쉬었다. 나 때문에 여정이 지체되는 것이 조금 언짢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몸은 너무나도 허약해서 조금만 무리를 해도 바로 반응이 오는 것이다. 저번 마을에서도 느낀것이지만 왕궁으로 향하며 들린 마을은 모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의 양상이 점점더 심각하게 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권력을 갖기 위한 다툼… 나는 권력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드래곤이기에 그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권리로 이 정도까지 싸울수 있다니, 신기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뿐. "아, 드디어 왕궁이 보인다." 정확히는 아나키스트 왕국의 수도, 아나킨 이었다. 왕궁의 거대한 첨탑이 거대한 도시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멀리서 보이는 왕궁의 위용은 대단했다. 아무래도 인간들은 저 첨탑의 높이가 왕궁의 영광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듯 하다. 아나킨은 거대한 회색빛 성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보수를 잘하는 건지 아니면 한번도 외부의 침략을 받아본 일이 없는건지 성곽은 흠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아나킨으로 진입하는 데에는 신분증이 요구되었지만 미리 그류벨에게서 내것과 칼리아넬의 것을 받아놓았었기 때문에 문제될 일은 없었다. 아나킨은 과연 왕국의 수도라 칭할만큼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도시 보다도 거대하고 화려했다. 멀리서 볼때는 몰랐는데 아나킨으로 진입하고 나니 안쪽에 성곽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중 성곽, 그것 하나 만으로도 아나킨이 얼마나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의 화려한 풍경과는 반대로 이곳의 인간들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나키스트 왕국 안에서 내전의 그림자가 드리워 지지 않은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크게 눈에 띄일만한 내전의 흔적 같은건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못보고 지나쳤는지도 모르지만. "와아, 이곳은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좀 무섭기도 해요. 제가 살던 루그란 숲의 느낌과는 완전히 정반대거든요." "칼리아넬이 살던 숲은 어땠는데?" 베델의 물음에 칼리아넬은 루그란 숲을 회상하는 듯 눈빛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저, 고요할 뿐이었어요. 간간히 느껴지는 숲속 동물들의 존재감, 가루처럼 퍼져나가는 싱그러운 풀 냄새, 밤새 소리 없이 풀잎에 내린 투명한 아침이슬… 특히, 아름다운 꽃에서 얻어 먹는 달콤한 꿀이 정말 정말 좋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 처럼 하얗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나밖에 볼 수 없는 신비의 조각이 어려 있어, 그제서야 나는 이녀석이 요정이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델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칼리아넬은 고향을 정말로 좋아하나 보구나." "네." 고향이라… 칼리아넬과 베델에게 고향이란 단순히 자신이 태어난 특정한 지역- 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는것 같다. 고향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드래곤인 나로서는 그들의 아련한 감정이 어린 얼굴을 보고 그런 추측을 해보는 것이 한계이다. 그렇게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내성으로 까지 들어간 우리는 꽤 커다란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베델은 이곳의 길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인지 이 여관까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우리를 안내해 왔다. 아마도 전에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는 모양이지. "와아-" 아나키스트 왕국의 왕궁은 가까이서 보자 멀리서 본것보다 더욱 거대하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볼때는 보이지 않았던 사소한 장식들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고, 고개를 올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아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왕궁의 입구는 마차도 여러대 지나갈 수 있을듯한 거대한 아치형의 문이었다. 그곳에 여러명의 인간들이 두꺼운 갑옷을 입고 투구까지 쓴채로 손에는 거대한 할버드라는 무기를 들고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그들의 철제 갑옷위로 화려한 아나키스트 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천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베델이라 합니다. 공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이쪽은 일행입니다." 그 공주라는 인간이 미리 언질을 두었던지 왕궁의 입구를 지키는 게이트 키퍼(Gate Keeper)들은 별다른 제지없이 우리들을 통과시켰다. 베델이나 칼리아넬이나 왕궁으로 들어오자 약간 주늑이든 표정으로 안내자의 뒤를 따랐다. 난 맨 뒤에서 그들을 따르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왕궁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내전을 겪고 있어서 그런지 성내에 주둔하는 병사들의 수가 굉장히 많아보였고,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인간의 마술사들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마술사 들은 내가 확연히 느낄수 있는 마력 파장을 내뿜고 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곳으로." 왕궁의 복도는 차갑고 딱딱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위에 깔린 푹신한 피같이 붉은 융단으로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공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안내자는 우리들을 복도에 남겨두고는 가버렸다. "어때, 정말 화려하지? 단순한 장식물에도 괜히 압도되는 듯한 기분이라니까." "무척 아름답네요." 감탄하며 내관을 감상하는 베델과는 달리 칼리아넬은 담담해 보이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인위적인 꾸밈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요정인 그녀로서는 베델과 같은 감정을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복도의 한쪽에 세워져 있는 인간의 기사 형상을 한 갑옷과 그 갑옷에 들려진 무기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과 함께 내 손끝이 얇게 베이는 것을 느낀다. 당장이라도 쓸 수 있는 진짜 검이었다. "칼리체 님, 부주의하게 아무거나 막 만지시니까 그렇게 다치시잖아요." 칼리아넬은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책망하고 살짝 베인 내 손끝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상처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칼리아넬의 혀가 가느다랗게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보듬었다. "아, 그럴 필요는 없는데…" "헤헷." 칼리아넬은 내 손을 잡은채 빙긋 웃었다. 묘한 기분이군. "칼리아넬은 칼리체를 정말 좋아하는 구나." 베델은 왠지 모르게 약간 붉어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그 말에 대답치 않고 고개를 숙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반응이로군. "공주님께서 지금 당신들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다시 따라와주십시오." 아까 그 안내자가 우리에게 돌아오고는 그렇게 말했다 "아, 예." 베델은 긴장한건지 평소보다 조금 뻗뻗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목소리 만으로 인간의 사소한 감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되다니, 나도 어느 정도는 인간들에게 익숙해 진 모양이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긴 하지만 말이다. 공주라는 인간은 인간들의 미적 기준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의 나 만큼이나 기다란, 바다와 같은 짙푸른 빛의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예쁘다. 그리고 이곳은… 아마도 응접실인 모양었다. 내 키의 세배는 될법한 커다란 창문으로 환한 햇빛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화려한 장식들이 그 빛을 반사시켜 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는것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그녀의 응접실은 그녀 본인의 이미지와 상당히 잘 들어맞는것 같다. "어서오세요,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걸 보면. 그때 아프다던 일행이 기력을 찾는데 시일이 좀 걸린 모양이군요." 공주의 목소리는 다소 차갑게 들릴 정도로 또렷하고 강한 어조로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다시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긴장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베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몸을 숙여 보이는 그의 동작은 언뜻 보기에도 꽤 기품 있어보인다. "만나서 반가워요 여러분. 본인은 아나키스트 왕국의 제 1 왕위 계승자인 메릴렌 에니치오 엘브릿드라 합니다." 인사를 하며 그녀는 나와 칼리아넬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외모 때문에 대단히 놀란 모습이었지만 나에게 오는 관심은 그저 그뿐일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용건이 있는것은 베델 뿐인듯 하니까.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우리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녀는 시녀에게 차와 쿠키라는 것을 내오라 지시했다. 시녀는 마치 기다렸다는듯 우리의 앞에 공주가 말한것을 내보였다. "우선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요, 그때 그대가 아니었다면 본인은 분명 아바마마에게 큰 누가 될만한 역할을 강요 받았겠죠." "아, 당치 않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없었더라도 공주님의 기사분들이 공주님을 그들의 좋지 않은 의도로부터 수호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흐음, 하는 비음을 살짝 흘리며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찻물을 홀짝였다. 무슨 맛일까- 하는 생각에 나도 내 앞에 놓여있는 차를 마셔보았는데 그것은 그저 향이 나는 뜨거운 물일 뿐이었다. "본인은 분명 전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대의 존재가 그 전투의 승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답니다." "음, 아니 저는 그런뜻이 아니라…" "됐습니다. 그런 사소한 얘기로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마릴렌 공주는 냉엄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베델은 그런 그녀에게 꽤 쩔쩔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느긋하게 아무 맛도 안 나는 이상한 뜨거운 물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옆에 앉아있는 칼리아넬을 힐끗 바라보았다. 칼리아넬은 이 무거운 분위기에 약간 주늑이든 표정이긴 했지만 투명한 눈동자로 마릴렌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베델, 그대를 용병으로서 고용하고 싶어요." "네?" 의외로군. 용병인 베델의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그녀가 이 내전에서 위태로운 위치에 서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 꽤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째서 저를 이렇게 직접… 저는 한낱 용병일 뿐입니다." "이 내전은 이 나라의 모든 세력을 거의 양분하다 시피 하고 있는 슈테른 백작과 에라딘 후작의 충돌로 인해 시작되었죠. 나이들고 쇠약해진 아바마마는, 정확히 권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왕실이 그 두 귀족을 제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마릴렌 공주 스스로 언급하기에 꽤나 껄끄러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상의 것을 말하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에-?" 갑작스레 이런 말을 꺼내는 공주에게 베델은 무척이나 당황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해내야 해요. 네, 이 손에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꺼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의도는 간단해요. 그대를 고용하고 싶다는 것. 하지만 먼저 그러기 전에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죠. 그것을 듣고 제 제의에 응할지 말지는 그대의 선택이에요. 아, 그리고 먼저 이것…" 공주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시녀가 공손히 공주의 손에 비단 주머니를 올려 놓았다. 마릴렌 공주는 베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나에게 도움을 준것에 대한 감사 표시에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대의 도움은 그 주머니의 든것 이상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나에게 그 이상의 보답은 무리에요." 그녀는 대단히 솔직한 성격인것 같다. 드높은 권위에 기대어 있는 인간들은 저런식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려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력이든, 재력이든 간에 말이다. 하물며 그 말을 듣는 베델이 용병이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니요, 이것만으로도 제게는 과분합니다." 베델은 그녀에게서 받은 비단 주머니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흠,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제 아까 제가 제안했던 것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마릴렌 공주는 베델을 빤히 쳐다본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시선은 베델이 그녀의 제안에 동의를 하든 거절을 하든 아무런 흔들림이 없을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저는 이미 의뢰를 수행중에 있습니다." 베델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쪽을 흘깃 쳐다본다. 전에 내가 말했던 것을 까먹은 모양이다. "저는 처음에 베델에게 제 의뢰를 제안할때 다른 의뢰를 받아도 상관없다고 말했었어요. 그러니 공주님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저를 신경쓸 필요는 없어요." 공주의 시선이 내쪽을 향한다. 그 시선엔 약간의 호기심이 담겨있는것 같지만 내게 그 호기심을 해소할 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으음, 칼리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베델의 답을 예상한다. 그는 분명 그녀의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베델은 자신의 앞에 곤란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한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야. "알겠습니다. 제 미력한 힘이나마 공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아무래도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공주님의 의뢰를 받아들임으로써 수도에 몸이 묶이게 되었어." 베델은 마릴렌 공주의 응접실을 나오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유명한 명소 같은걸 보고 싶어 하던것 아니었어?" 아, 전에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것은 내 사정을 설명하기가 곤란해서 그런식으로 말했을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인간들의 사회에 섞여 생활하는것. "마릴렌 공주의 의뢰를 해결하고 가면 되잖아요?" "하지만 시간이 굉장히 오래걸릴것 같은데…" 베델은 나와 칼리아넬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제게 가장 하찮은게 바로 시간이에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러니 베델은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영원을 살아가는 나에게 시간은 길가를 굴러다니는 돌보다도 더 가치가 없다. 인간의 수명의 수십배를 살아가는 칼리아넬 에게도 시간은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닐 것이다. "으음." "그나저나 그때 베델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나 보군요. 공주가 저렇게 당신을 고용하고 싶어 하는걸 보면." 나는 닫혀진 응접실 문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아아,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말이야." 난 어렵지 않게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때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정말 대단했어요. 베델이 전투에 참여하자 마자 기세가 반대로 기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전 베델만큼 검을 잘쓰는 사람은 본적이 없어요." 칼리아넬이 손벽을 짝- 하고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감탄하는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꺼림찍 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성품상 타인을 해하는 기술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 역시 무력을 그리 높은 가치로 삼고 있지 않다. 정작 나는 어느 누구도 굴복 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으면서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대단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군." 바닥은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는 짧은 금발 머리카락에 칼날 같이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는 장신의 남성이었다. 허리에는 기다란 장검이 매어져 있었고, 단단해 보이는 철제 건틀릿을 끼고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칼날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가 기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정도면 이제 나도 꽤 하지 않는가. 풍기는 분위기 만으로 인간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지 금방 판단을 내릴수 있으니 말이다. 뭐, 내 추측이 맞는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누구십니까?" 베델은 마치 맹수가 다른 맹수를 경계하듯 조심스레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바로했다. 나는 베델이 팔짱 끼고 있던 손을 풀어 허리에 매어져 있는 검의 근처로 가져갔다는 것을 눈치챘다. "기사 베르딧이오. 그 외에 자질구레한 설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군. 공주님을 호위했던 다른 기사에게서 들었소, 당시 당신의 활약을 말이오." 베르딧이라는 인간은 강한 어조로 몰아 붙이듯 베델에게 말했다. "그렇소?" 베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검 근처에 위치한 채다. 마치 둘이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군. "저기요, 이봐요. 정확한 용건이 뭐지요?" 나는 키가 큰 둘이 서로만을 노려보고 있으니 자그마한 내가 보이지 않을 까봐 까치발을 들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베르딧이라는 자는 그제서야 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깜짝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말 없이 잠시 나를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미안하오, 아가씨. 공주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공주님보다 아름다운 소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말이오… 잠시 실례되는 시선을 보내고 말았군. 그리고 용건은 이미 아까 말했소. 바로, 당신의 실력을 보고 싶다고." 베르딧은 정중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다가 마지막엔 다시 베델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베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나오시오." "난 솔직히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소. 왕궁에는 공주님을 수호할 뛰어난 기사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당신과 같은 용병을 고용했으니 말이오. 나같은 기사들에겐 그것은 모욕과도 같은 일이지." 폭신한 잔디가 깔려있는 공터로 나와 베델과 마주서며 베르딧은 그렇게 말했다.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베르딧이라는 인간은 정말 솔직한 성격인것 같다.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권위에 기대어 말하고 있던지 말이다. 베르딧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베델을 노려본다. 햇볓을 반사해 은빛으로 빛나는 그의 검은 소리도 없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왔다. 베델도 역시 검을 뽑으며 그와 마주섰다. "미안하지만, 나도 공주님이 어째서 나같은 용병을 고용했는지 잘 모르겠소." "그것은, 지금 내게 보여주면 될일이지." 그리고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캉-! 귀가 멀듯한 소리가 대기에 울려 퍼지며 섬광과 섬광이 맞닿았다. 검과 검이 맞닿았던 공간엔 날카로운 불똥이 튀며 시야를 어지렵혔다. 검을 부딪히고 있는 둘에게서 바람과 같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는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둘의 검은 빠르게 서로에게 휘둘러 졌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서로에게 닿는 공격은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검을 휘두르는게 아니라 검이 인간을 휘두르고 있다고 느껴질 만한 모습 이었다. 검이라는 무기 하나를 쥐고 인간이 이렇게 강해질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나는 감탄해버리고 말았다. 난 더이상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 힘든일을 그만두고 내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칼리아넬은 나와 다르게 그들의 움직임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투명한 청록색 눈동자가 그들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었다. 베델과 기사 베르딧은 이제 이 공간 전체를 이용해서 서로 검을 부딪히고 있었다. 방금 까지는 서로 제자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했다는 것인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는듯 검에 서로를 죽일듯 흉흉한 기세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 공간은 이제 완전히 위험지역으로 변해 있었다. "칼리아넬, 물러서자." "에, 네?" 나는 손을 뻗어 칼리아넬의 상체를 뒤로 밀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말이야." "아, 네… 그런데 베델 괜찮을까요? 잘못하다간 크게 다칠것 같은데…" 확실히 이제 단순한 겨룸의 수준은 벗어난 모습이었다. 온 몸으로 검을 휘둘러 서로 부딪히는 그 모습은 마치 거센 폭풍과도 같아 누가 와도 말릴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칼리아넬을 뒤로 밀며 그녀의 앞에 나와 있었기에 날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러진 검조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미 그것은 내 발 아래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꼽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차가운 한기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리체!" 베델이 놀란 얼굴로 내게 달려오며 외쳤다. 그의 손에는 부러져 버린 검의 손잡이가 들려 있었다.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것참, 부러진 검조각이 바로 앞에 박혔는데도 눈하나 깜짝 안하는군. 아가씨는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담력도 대단한가 보오." 베르딧이 스르륵-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검집에 검을 회수하며 베델의 뒤에서 말하며 다가왔다. "후우, 다행이야. 하마터면 네가 크게 다칠뻔 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건데." 오히려 칼리아넬의 상태가 더 좋아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상태로 멍하니 바닥에 꼽힌 칼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 칼리체님…"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렴." 그렇게 놀랐던 것일까. 나는 칼리아넬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칼리아넬의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채로 진정할 줄을 몰랐다. "하, 하마터면 칼리체 님이 저를 감싸다가 다칠뻔 했잖아요!" 칼리아넬은 베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미, 미안해." "그와 더불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서 마음이 편치 못하군. 나도 사과하겠소." 누구에게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후우, 어쨋든 나의 패배요. 기사 베르딧." 베델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패배가 아니라 당신의 검의 패배겠지. 그나저나 이제야 공주님이 왜 당신을 고용했는지 알겠군."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베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당신같은 실력자라면 공주님께 큰 도움이 되겠지. 지금은 한명이라도 실력자가 필요한 상황이니까 말이야. 솔직히 말해 믿기지가 않을정도군. 용병들 중에 당신같은 실력자가 있었다니." "후, 과찬이오." "그나저나 내가 당신의 검을 부러트려 버렸으니- 나중에 쓸만한 검을 하나 가져다 주겠소." "아니, 그럴 필요는-" "부디 거절하지 마시오." 기사 베르딧은 그렇게 말하고는 베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베델은 그 강렬한 시선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였다. 난 신기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록 무기 때문이긴 하지만 베델을 패배시킨 인간은 그가 처음이었다. 비록 내가 베델이 누군가와 전투하는 것을 많이 보았던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간 베델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의 힘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순수한 육체의 힘이 아니라 무언가 마술적인 힘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기사 베르딧, 팔 밑이 조금 긁혔네요." "음, 어느새 이런 상처가… 싸움에 집중하다보니 미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군. 아, 그보다 좀 떨어져 주시겠소, 아가씨?" 그는 내가 그에게 다가서며 팔을 가르키자 움찔 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상한 반응이로군,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칼리체 에요. 상처좀 보여주시겠어요?" 비록 피부만 살짝 긁힌것 같지만 피가 상처에서 끊임없이 배어나오고 있어 모양새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난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해준 댓가로 이 인간에게 약소한 호의를 베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선 머뭇거리다가 이내 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난 그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가 약간 움찔- 하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잘 단련된 근육, 단단한 느낌이다. 나는 눈깜짝할 사이에 마력을 전개해 상처 부위의 생체 조직의 재생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거의 마법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 높은 마력 행사였지만, 본래 힘의 일부밖에 쓰지 못하는 지금의 나로서도 순식간에 마술을 완성시킬수 있었다. "아가씨, 마술사 였소?" "네." 정확히 내 수준 정도라면 마법사라 불려야 되는것 같긴 하지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아, 미안하오. 마술사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말만 들어서 조금 놀라고 말았소." "그런가요." "어쨌든 정말 고맙소, 아가씨." 그는 내게 고개를 까딱 숙여보이더니 베델과 뭐라고 몇마디 대화를 나눈후 횅하니 이곳을 떠나 버렸다. 뭔가 바쁜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껍게도, 베델뿐만 아니라 나와 칼리아넬 역시 왕궁에 머무를수 있었다. 마릴렌 공주가 베델에게 거는 기대가 꽤 큰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사 베르딧 에게서 내가 마술사라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녀에겐 분명히 내가 마술사라는 사실이 전해 졌을 것이다. 그녀는 내전을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전력을 찾길 원하는 모양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같은 인간들의 분쟁에 깊게 개입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나는 이곳에서 그저 마력을 약간 잘 다룰줄 아는 소녀, 아니면 소년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 난 커다란 창문앞에 마련된 흔들 의자에 앉아서 밖을 내려다 보았다. 바깥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보이고 있었는데, 정원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모양인지 연못의 표면은 잔떨림 조차 없이 고요했다.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는 고요한 연못의 표면은 마치 깨끗한 거울과도 같아 하늘위에 떠있는 백색의 달을 비추어 내고 있었다. 그 광경이 주위에 드리워져 있는 거대한 나무들과 대단히 잘 어울렸다. 아마도 이 방을 만든 자의 의도에 이 풍경이 속해 있었을 지도- 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잠도 오지 않는데, 저 연못을 좀더 가까운 곳에서 구경해 보아야겠다. 바깥의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아까 까지만 해도 지나다니던 왕궁의 시녀들이 보이지 않아 이곳에는 내 발걸음 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별 생각없이 연못으로 다가간 나는 누군가 이미 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베델과… 마릴렌 공주? "… 런곳에서 뵙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하게 들려온다. 바람이 불지 않아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평소 자주 오는곳이에요."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둘은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존재를 숨기게된 나는 나무뒤에 기대어서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니 굳이 가지 않아도 되요. 이 풍경은 한달에 한번밖엔 볼 수 없는 것이니까요.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서 독차지할 정도로 욕심쟁이는 아니에요." "그, 그렇습니까." 베델은 그녀의 말을 듣고 연못을 떠나려는 몸을 멈추어 세웠다. 하지만 신분이란 차이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베델은 꽤 불편해 보였다. 마릴렌 공주는 베델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서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세상이 멈춰 버린것 같은 침묵이 흐르고 마릴렌 공주의 목소리가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 그 침묵을 깨트려 버렸다. "이 나라의 사람들,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지요?" "네? 아- 네." 베델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얼결에 답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요. 저도 충분히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까요." "… 도대체 어쩌다가 백작과 후작이 충돌하게 된겁니까?" 그는 긴장했음이 역력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뻔한 이야기지요. 이 나라의 세력 대부분을 그 두사람이 나누어 쥐고 있으니, 둘이 서로를 견제 하는건 필연적인 일이었어요. 그 견제가 점점 커지고 커지다 보니 이런 지경에 이른거죠. 근본적인 잘못은 왕실에 있다 하겠네요. 왕실이 그들을 휘어잡을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까요." "대체 어쩌다가…"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인 내가 여자라는 것과 쇠약하신 아바마마가 오랫동안 왕의 자리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죠. 그들은 내가 왕위에 오르는걸 방해하고 있어요." 마릴렌 공주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철저히 감정이 배제된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지금 까지 내가 본 어느 인간보다 가장 감정이 없는 인간이다.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일단 겉보기가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약하게 나마 감정이 실리고 있었다. "왜 일개 용병인 당신에게 공주인 제가 이런 이야기 까지 하는지 모르겠군요. 보름달은 기이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인 모양이네요." "시, 실례했습니다. 공주님." "아뇨, 그래도 왠지 그대에게 말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베델은 아까부터 허둥지둥이고 공주는 끝까지 차분한 모습이다.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둘의 대화는 보는것 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다. "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건방진 귀족 둘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올 생각이에요." 공주의 대답은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방법이 막막 하군요. 왕실의 세력이 두 귀족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요. 말 그대로 영광만이 남은 왕실이죠." "…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공주님. 아, 물론 제가 최선을 다한다 해서 공주님이 고민하는 문제가 해결되는건 아니지만요." "용병같지 않은 사람이군요. 그대가 내게 그렇게 말할 정도의 의리는 없을텐데요. 유감스럽지만 이 상황에서 당신에게 돌아갈 의뢰비도 그리 많을것 같지 않구요." 다소 차게 말하는 공주에게 베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전 정처 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니는 일개 용병일 뿐이지만, 아나키스트 왕국은 제 조국이거든요." "…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아참, 연못은 구경하지도 못했군. 그렇게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구냐, 이곳은 공주님이 가계신 곳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달이 구름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부드러운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너는…!?" 그는 너무나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이 아니구나! 당신은 누구지!?" 역시 현자라는 건가, 이 모습을 보고 단번에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해 내다니… 그는 내가 인간의 사회에 나오게된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했던 현자 베르센크 였다. "나다, 인간의 현자." 나와 그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돈다. "…. 설마, 당신은- 백룡, 루루렌칼리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환희가 깃든다. 나를 본게 그렇게나 반갑단 말인가? "어,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리고 인간의 모습이라 해도 이 모습 역시 진실한 나, 네가 생각하고 있을 대역 따위가 아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는 기이한 감정이 깃든 눈을 하고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실례지만, 잠시 몸을 만져보아도 되겠습니까." "응." 내가 긍정하자 그는 내 백색의 머리카락 부터 만져 나가기 시작한다. 머리카락, 이마, 눈썹을 따라 이어지는 코까지 그의 손길이 닿는다. 그의 마치 지극히 귀한 어떤것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은 내 입술, 턱을 따라 가느다란 목, 쇄골에 까지 이른다. 그의 손길이 조금 간지러웠기에 나는 고개를 약간 움츠리고 말았다. "정말,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군요." 현자라서 그런걸까, 단순히 보이는 걸로는 납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인간…" 말 되는군. 난 결코 인간이 아니지만 지금은 완벽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인간처럼 허기 따위의 생리 작용을 겪는건 아니지만. "놀랐습니다. 설마, 루루렌칼리체 님을 이런곳에서 만나게 될줄이야." "칼리체 라고 불러라." "칼리체- 입니까. 과연, 그 모습에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군요." 바보, 그냥 이름뒤에 세글자일 뿐이다. 그런데 방금 까지와는 분위기가 달라진것 같은 느낌이다. 지독히 염세적이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녀석이 지금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이런 사랑스런 소녀의 모습으로 이 왕궁에서 만나게 될줄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아직 소녀인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꽤 키가 컸기 때문에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차가운 손으로 내 얼굴을 매만지며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 만지작 거려라. 그만하면 놀라움은 가시지 않았나?" 내 목선을 훑던 그의 손이 흠칫 하고 떨린다. "아, 실례했습니다." "칼리체!!" 베르센크가 내 얼굴에서 손을 때기도 전에 뒤에서 베델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의문이 들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지?" 솔직히, 좀 놀라고 말았다. 바보같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호의로 다가가던 베델이 미약하긴 하지만 명백한 적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베르센크에게 묻고 있었다. 베르센크는 풀어진 표정을 순식간에 굳히고는 베델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베르센크 드 마하이브." "… 당신, 현자였나?" "그렇다." "요새는 현자라는 자가 어린 소녀를 희롱하기도 하나?" 둘은 서로를 차갑게 노려본다. 베르센크야 그렇다 치더라도 베델의 반응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 그때, 산적들에게 붙잡혔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닌것 같았다. 베르센크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내가 용이라는 것을 다른 자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다. 베델과 대화하다가 자칫 실수를 할 수 있으므로 용의 언어로 베르센크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그는 알았다는 뜻인지 나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희롱이라니?" "그럼 칼리체에게 한 그 행동이 희롱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생각해보니 베르센크의 행동이 희롱으로 보일 여지도 있었던것 같다. 베르센크는 나를 보며 이놈은 뭡니까- 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시선에 답해 주지 않았다. "본인의 허락을 받고 한 행동이오. 그렇지 않소, 칼리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델의 얼굴이 구겨졌다. 베르센크는 품속에서 금색 줄이 달린 시계를 꺼내며 말했다. "예상치 않은 일로 시간을 보낸것 같군. 후, 내가 현자라는걸 알면서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자네는 어리석은건지 용감한건지 모르겠네. 아 물론 나는 얼토당토 않게 신분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그런 자들과는 다른 사람이네. 그리고 내 행동에 오해가 생길 여지는 많았네만." 신분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하고 말할때의 베르센크의 어조는 지나치도록 냉엄했다. "자네는 좀 신중해질 필요가 있는것 같군. 아니면…" 그는 내쪽과 베델을 번갈아보며 재밌다는듯, 하지만 조금 날카로운 모습으로 웃어 보였다.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칼리체, 나중에 보지요." 베르센크는 내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미끄러져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칼리체, 현자와 알고 있던 사이야?" 물론, 현자가 나를 찾아온 적은 있지만, 사실대로 대답해서야 내가 그에게 말해놓았던 깊은 산속에서 살아왔다는 말에 헛점이 생기게 된다. 베델과는 오랜 시간을 같이 있게 될것 같으니 그런 헛점을 만드는 것은 현명치 않다. "아뇨, 오늘 처음만난 사이에요." "그래? 그럼 그가 어째서 너에게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던 거였지? 설마 네게 협박을 한건 아니었고?" "협박이라니, 어째서죠?" "그, 그야… 칼리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미인이니까." 베델의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어째서 그렇게 종결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협박같은건 없었어요. 내 몸을 만져도 되겠냐는 물음에 응한것 뿐이에요." "그러면 안되! 여자애가 처음보는 남자에게 몸을 만져도 된다고 말하다니, 그런건…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해야 되는거라구." "그런가요." 그저 몸을 만지는데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일단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왕궁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푹신한 침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며 가끔 베델이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뿐이었다. 칼리아넬은 주로 아름다운 왕궁의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보이는 정원에 기다란 녹빛 머리카락을 가진 예쁜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창문에 턱을 괴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원의 연못에서 물을 튀기며 놀던 그녀는 문득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칼리아넬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짓한다. 같이 놀자는 건가? 뭐, 나쁘지 않겠지.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칼리체 님, 뭐하고 계셨어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단다." "와아! 이것보세요, 연못이 정말로 아름다워요. 전 인간에게 이렇게 연못을 아름답게 꾸밀수 있는 능력이 있는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녀는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 확실히 감탄이 나올정도로 잘 조형된 모습이다. 저번에는 어두운 밤이어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칼리아넬은 양손을 뒤로하고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연못 주위의 돌 위에 올라섰다. 이끼가 끼어 미끄러워 보이는데… "칼리아넬, 조심…" "꺄앗--!" 해- 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칼리아넬은 돌 위에서 미끄러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부주의한 그녀를 탓하며 나는 급히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나는 양손을 벌려 칼리아넬을 뒤에서 끌어안아 그녀가 물에 빠지는 것을 간신히 면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 한쪽이 물에 젖는 것까지는 어쩔수 없엇다. "조심해야지." 칼리아넬의 눈부시도록 새하얀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그녀에게서 마치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춰드는 햇빛같은 향기가 느껴졌다. 봉긋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 위로 올라간 내 손으로 그녀의 생명의 고동이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가까이서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느껴본적이 있었을까. 칼리아넬의 생명의 고동에 내 마음까지 편안해 지는 기분이다. 타인의 생명, 그것을 느끼는 것이 이리도 기분좋은 일이었던가. "카, 칼리체님…" 너무 오래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녀를 끌어 안은 내 팔을 풀려고 했다. "아, 아니에요! 그대로 잠깐만 있어주세요." 불편한것 아니었나? 나야 이렇게 있는것이 기분좋으니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나는 풀어내려는 팔로 다시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칼리아넬의 몸은… 이렇게나 작고 부드러웠구나. 이상한 기분이다, 살과 살이 맞대어 지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일은. 하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용의 모습을 하고 있을때는 절대로 느낄수 없던 감각이다. 어딘가 마음 한켠이 흡족해 지는 느낌. 인간과 요정과 같은 생명체들은 아마 이렇게 체온을 교환하는 행위에서 풍부한 감정이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체, 칼리아넬. 거기서 뭐하니?" "우으앗!"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랐는지 칼리아넬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끌어안고 있던 내 팔을 풀고는 후다닥 나에게서 물러났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군. 목소리의 주인은 베델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아넬이 돌 위에서 미끄러져 연못에 빠지려는 것을 막아주었어요. 그녀는 별로 신중치 못한 성격이니까요." "우, 칼리체님…" 신중치 못한 성격이라는 내 평가에 불만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니 말을 바꿀 생각은 없다. 내 머리속에 이미 그녀는 그렇게 평가되어 있다. "그, 그랬구나. 아, 그것보다… 내가 잠시 왕궁에서 나가야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미리 이야기 해두려고 왔어." "무엇 때문인가요?" "그란셸들… 기억하지?" "물론이지요. 그 때로 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사실 시간은 수백, 수천년이 지나도 난 그들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용은 망각이란 것을 모르는 존재이니까. "그란셸은 원래 아나키스트 왕국 출신의 기사잖아. 그래서 그에게 도움을 얻으려고해. 아직 왕실에 대한 충성은 깊은것 같으니, 공주님을 돕기위해서 라고 말하면 그는 분명히 우리를 도와줄거야." 글쎄, 그가 공주를 도와줄지 확신은 못하겠다. 무엇보다 그는 기사라는 지위를 이곳에서 빼앗기지 않았는가. 하지만 뭐, 그것은 베델이 해야할 일이고. "오래걸리지는 않겠군요?" "응, 그가 있는곳이 그리 먼곳도 아니니까. 그가 마을을 얼마나 재건했는지도 보고와야지." 베델은 기분좋은듯 미소를 지었다. 그란셸이 재건 했을 마을을 머리속에 그려보는듯 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완벽히 재건을 하지는 못했을듯 싶다. "언제 출발할건가요?" "아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려 그래. 그리고 칼리체…" 그는 갑자기 진지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처럼 그렇게 몸을 함부로 허락해서는 안되. 나는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로… 크흠, 걱정되." 공연히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한다. 나를 걱정해 주는 말이니, 별로 납득하지는 않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칼리아넬도 건강하게 있어. 금방 다시 올거야." 그는 정말 지금 당장 그곳으로 떠나려는듯,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 정원을 나가버렸다. 칼리아넬이 나에게 다가오며 추궁하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카, 칼리체님. 베델이 방금 한말이 무슨 소리죠? 몸을 함부로 허락하다니, 도대체 그게…" 베델이나 칼리아넬이나 참으로 쓸데없데 없는 것에 신경을 쓴다.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 말에 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나타냈다.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다. 베델이 왕궁을 출발한지 벌써 삼일이 지났다. 왕궁측에서 필요한건 베델 밖에 없을텐데, 나와 칼리아넬에게 주어지는 대접은 꽤 괜찮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나와 칼리아넬은 그저 평민일 뿐인데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로엘가스트 연맹에서도 나와 칼리아넬은 우리의 인간사회에서의 신분에 맞지 않은 좋은 대접을 받았던것 같다. … 그것의 원인은 이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던가.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내 얼굴을 매만졌다. 지금에서야 나는 현재의 나의 외모가 인간들에게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의 근원에 대한 링크가 거의 없는 인간들은 그래서 인지 그 개체의 본질보다는 껍데기의 모습에 더 연연해 하는것 같다. 따라서 나의 아름다운 외모는 인간들에게 베델의 무력보다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아가씨는…" 왕궁의 복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정원에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전에 베델과 겨루었던 기사였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저쪽 나무위에 앉아있던 새들 몇마리가 푸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칼리체, 라고 했었소?" "네, 칼리체라고 불러주세요. 음… 안녕하세요, 기사 베르딧." "아, 안녕하시오." 왠지 그는 다소 당황한 기색이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나와 마주치고 있던 눈동자를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옮겼다. "베델이라는 자는 어디갔소? 일부러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더군." "그는 기사 그란셸을 만나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잠시 왕궁을 떠났어요." "… 지금 기사 그란셸이라고 했소!?" 그가 갑자기 외치다 시피 말하는 바람에 나는 깜짝놀라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던 푸른 나무 잎사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나무 잎사귀는 팔랑거리며 차가운 왕궁의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네, 이곳으로 오다가 만난적이 있었어요. 그리 좋은 만남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는 산적질을 하고 있었거든요." "뭐라고!!" 기사 베르딧은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며 내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한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그의 악력은 대단했다. 팔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나는 왠지 모르지만 눈가에 물기가 맺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가 했던 말이 불충분 하다는것을 깨닫고, 곧 말을 덧붙였다.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 가문의 마차만을 습격했대요. 그들의 목숨은 빼앗지 않구요.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흉악한 산적질은 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라는군요." 새삼 내가 예전보다 인간들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을 느낀다. 기사 베르딧의 반응만을 보고서 그가 어째서 내 말에 화를 내는지 순간적으로 읽어내고 그가 화를 그나마 누그러 뜨릴만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가.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나 스스로에 대해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랬… 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분이, 그분이 산적질이라니…!" 내 팔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아직도 얼얼한 팔목을 매만졌다. 이 몸의 반응으로 보아 인간은 어느정도 이상의 고통을 느끼게 되면 본능적으로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가 쥐었던 팔목을 바라보니 새파랗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아, 저기…" 기사 베르딧은 혼자의 상념에서 벗어나 팔목을 매만지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미안하오 아가씨.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괜찮아요." 나는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이 몸이 다소 놀랜 모양이다. 저번에도 느낀거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모습은 정말 한심할 정도로 허약하다. "괘, 괘, 괜찮소 아가씨? 이, 이것참…" 이 인간도 같은말을 두번 반복하게 하는군. 이미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은 나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요즘들어 왕궁안이 분주해지는 듯한 기색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곳에 머문지 며칠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왕궁안을 돌아다니는 시종들은 거의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최근들어 뭔가 바쁜 일이 생긴듯 그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인원마저 늘어난듯 해서 무척이나 시끄러워진 느낌이다. "곧 국왕폐하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무도회가 열릴 예정인데… 모든 귀족들이 참여해야 하는 행사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하는 모양이오." 탄생일… 이라. 인간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일까. 그것도 그들이 임의로 정하 날짜 계산법으로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탄생일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 그런데 모든 귀족들이 참여한다면, 이 내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슈테른 백작과 에라딘 후작이라는 자들도 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굉장히 소란스러워 질지도 모르겠다. 과연, 기사 베르딧의 말대로 그 이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 왕궁의 입구로 화려한 마차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마차들은 모두 하나같이 크고 화려했지만 그 마차를 끄는 말들의 수는 두마리에서 여덟마리까지 제각기 달랐다. 아마 신분에 따라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의 수가 다른 모양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칼리체님은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몇시간 동안 내내 창밖만 바라보시는 거에요?" 칼리아넬은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다리를 흔들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창밖의 광경이 꽤 흥미로웠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돌아서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순간, 내가 내려다 보고 있던 창문아래서 꽤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공간이 찢어지며 시공간의 끈 몇가닥이 허공으로 흩날린다. 찢어진 공간 사이로 나타난 것은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남성과 어린 소녀였다. "이런, 사소한 실수로 엉뚱한 곳에 와버렸구나. 하지만 왕궁안은 맞는것 같으니 다행이군." 내가 지금껏 들어본 인간의 목소리중 그보다 냉정한 목소리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는 상당히 강대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아마 인간들 사이에서 마법사라고 불리울 것이다. "네, 아버지." 뒤이어 들린 소녀의 목소리는 차라리 남자의 목소리가 더 낫다고 느껴질만큼 지독히도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였다. 소녀는 예쁜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거의 나만큼이나 표정이 없어, 지금 내가 있는 방안 찬장에 들어있는 인형이란 물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인간에게 저 소녀처럼 인형같이 보이지는 않을까.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눈동자는 차가운 느낌이 감도는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지독히도 공허해 살아있는 인간의 눈동자라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소녀는 텅빈 눈동자로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남자를 따라 어딘가로 가버렸다. "칼리체 님…?" "응." "왜 그러세요? 갑자기 저에게 대답하려다 말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시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난 기대어 있던 창문가에서 벗어나 방안의 풍경을 시선안에 두었다. 이제는 이 풍경이 무척이나 익숙해졌다. 인간들의 사회에 들어와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이 왕궁안이라니, 참으로 재밌는 일이다. "그나저나 베델은 괜찮을까요? 벌써 일주일이 넘은것 같은데." "글쎄."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것은 그다지 무의미한 일인것 같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인간들 보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비록 기사 베르딧 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무기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런것 뿐이었다. 난 베델이 기사 베르딧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별로 의미는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똑똑. 갑작스레 문쪽에서 목재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노크라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문을 두드려 봄으로써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들어가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행동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칼리아넬은 노크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목소리로 문에다 대고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것은 인간의 현자, 베르센크였다. "칼리체 님의 목소리가 아니라서 놀랐는데, 다행히 계셨군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베르센크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 보이고는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다. 칼리아넬은 그런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주늑이든 모양이다. "그녀는 숲의 요정이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굳어져 있던 그의 표정은 따뜻하게 풀리고,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도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카, 칼리아넬 이에요." "예, 칼리아넬 양. 저는 베르센크 라고 합니다. 사실 뒤에 더 붙는 쓸데없는 말들이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닌 당신에게는 무의미한 이야기겠지요." 칼리아넬은 갑작스레 변한 그의 분위기에 당황한 모양이다. "실례지만, 칼리아넬 양의 겉모습은 인간과 다른점을 전혀 찾아볼수가 없군요." "그것은 내 마력에 의한 것이다." 내가 허공으로 손을 내젔자, 그녀의 인간처럼 뭉툭한 귀가 뾰족하게 변하고 그녀의 존재감이 사뭇 달라졌다.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무엇보다 요정과 인간의 가장큰 차이점은 존재감에 있다. 내 마력에 의해 숨겨졌던 그녀의 요정으로서의 존재감이 이 방안을 가득 매웠다. 굳이 묘사하자면 내게 요정의 존재감은 막 일어났을 때의 기분좋은 나른함과 같았다. "과연… 인식 장애 '마법'이군요." 내가 다시 허공으로 손을 내젓자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 인간과 전혀 다를것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칼리아넬은 내 신속한 마력 유동에 놀란 모양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날 찾아온거지?" "며칠 뒤에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베르센크는 국왕에게 전혀 존칭의 예를 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전혀 거침이 없었고, 오히려 나는 그가 약간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들어서 알고 있다." "칼리체 님도 그곳에 참석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반가운 제안이다. 대다수의 인간들을 통치하는 인간 위정자 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내 인간으로서의 신분은 평민이기 때문에 귀족들만이 모이는 무도회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현자라 불리며 떠받듬을 받는 베르센크의 도움을 받는다면 지금의 내 신분으로도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겠지. "좋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거지?" "물론, 칼리체 님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좀더 자세히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지요. 저는 당신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과연, 그렇군. "칼리아넬, 너도 나를 따라 인간들의 무도회에 참여해 보지 않겠니?"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죄, 죄송해요. 아무래도 저는 그런 자리에는…" 어째서 내게 죄송한지 모르겠군. 나는 그저 제안을 했을 뿐이고, 그녀가 제안을 거절함으로서 내게 온 피해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전보다 나를 편하게 대하긴 해도 아직까지 나를 어려워 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럼 있다가 칼리체 님의 체형에 맞는 드레스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거절하겠다." "네? 하지만 무도회는…" "인간 여성이 드레스라는 옷을 입은 모습을 보았는데,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더군. 설마, 그 옷을 입어야만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건 아닐테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현자라는 신분으로 그 정도야 해결할 수 있을테지." 게다가 드레스를 입자면 내가 현 상태에서 벗어나 완벽한 인간의 여성으로 변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마력의 양이 너무 많아 현재의 상태로서는 피곤한 일이다. 아직 어떤 성별로 할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옷 따위로 성별을 정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 알겠습니다." 왠지 그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뒤 무도회가 시작될때 다시 뵙지요. 하지만 칼리체님, 무도회때는 그래도 어느정도 격식에 맞는 옷은 입어주셔야 합니다. 드레스가 아니더라도요. 그곳은, 그런 자리거든요." 그런 자리- 라는게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말대로 어느정도 격식은 갖추어 주는게 현명하겠지. 무도회는 오늘 열릴 예정이었다. 며칠뒤에 열릴줄 알고 멍하니 창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그 사실을 알고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시작했다. 무도회 라는건 음식과 음료를 차려놓고 춤을추며 노는것이라 알고 있다. 사실 그 외에 더 복잡한 사항이 많겠지만,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정도. 나머지는 겪어보면 될 일이다. 나는 거울앞에 서서 시녀들이 가져온 옷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베르센크가 보내준 옷인데, 여성이 입어도 되고 남성이 입어도 될만큼 성별의 구분이 모호한 옷이었다. 이 옷은 입기가 상당히 어려워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내가 성별이 없다는 것을 시녀들에게 들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녀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것 같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몸매가 좀 빈약한것 같으니 옷의 맵시를 잘 살려야 겠다고 말한것 뿐이었다. "어떠니?" 난 거울앞에서 몸을 돌려보며 칼리아넬에게 물었다. "와아, 정말 예뻐요 칼리체 님." 그녀는 내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내 단장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난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불편하지만 꽤 아름다운 옷을 입은 내 모습은 평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놀라운 일이다. 단순히 몸에 걸친 이 천쪼가리로 같은 존재가 이렇게도 달라보일수 있다니 말이다. 이래서 인간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중요시 하는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어쨋건 간에 난 그것이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화려한 의복은 이것을 만든 인간들 스스로의 안목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도회는 커다란 연회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나는 다소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붙잡고 베르센크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것은 휘황 찬란한 불빛이었다. 돔(Dome)형식으로 만들어져, 굉장히 거대한 천장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그 사방에는 마술로 창조한 황금색 빛무리가 이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정말 굉장하지 않나요?" 베르센크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내게 묻고 있는 대상은 아마도 내가 감탄했던 화려한 장식물이 아닐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베르센크 님. 대단히 오랜만에 연회에 참여하시는것 같군요." "반갑소 예니르 남작. 국왕 폐하의 생신이니 아무리 이런 자리가 싫은 나라도 어쩔수 없는 일이지." 예니르 남작이란 자는 베르센크에게 나에 대해 묻고 싶은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그의 지독히도 냉소적인 태도에 별로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채 고개만 살짝 숙이곤 다른 무리로 섞여 들어갔다. "예니르 남작. 줏대 없이 이리저리 자신이 줄을 대는 세력을 옮겨다니는 졸렬할 인간이지요. 평소같으면 내게 말도 못건냈을 텐데, 아마 칼리체 님 때문에 같잖은 용기를 내본 모양이군요." 베르센크는 등을 돌리고간 그를 경멸하며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몇명의 귀족이 접근해 베르센크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의 변함없는 냉소적인 태도에 기가죽어 몇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계속해서 나를 힐끔 거리는 걸로 보아 내게 목적이 있는듯 싶었다. 그렇다면 내게 직접 말을 걸면 될일인데, 어째서 그들은 베르센크를 통하려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별일이로군, 자네가 이런 자리에 참석하다니 말이야. 국왕폐하의 생신이라 그렇다는 대답을 하려거든 그만두게나. 난 자네가 그런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걸 알고 있네." "오랜만이군요, 에라딘 후작님." 말을 걸어온자는 백발이 히끗히끗 섞여있는, 황혼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있는 인간이었는데 키가 대단히 크고 온몸에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이 붙어 있었다. 그저 서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주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에라딘 후작이라면… 이 내전을 일으킨 장본인중 한명이로군. "그 건방진 태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쳐질 생각을 하지 않는군 그래." 하지만 그 위압적인 덩치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상당히 온화했다. 베르센크는 이자의 앞에선 방금과 같이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의 말엔 냉소적인 어조가 배어 있었다. "이젠 그 말이 후작님이 저에게 하는 인삿말로 굳어진것 같군요." 후작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짓더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숙녀분을 내게 소개시켜 주지 않겠나. 설마 내게도 아까 그 청년들 처럼 퇴짜를 놓지는 않을테지?" 베르센크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내 손을 잡고 나를 그의 앞으로 이끌었다. "이분은 로엘가스트 연맹 너머 마경과 접해 있는 거대한 영지, 요르간드를 지배하는 군주, 칼리체 리블란셰 님 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를 쳐다보며 감탄의 기색이 어려있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데 내 이름뒤에 붙인 리블란셰라는건 뭐지? "뭐, 뭐라?" "믿기질 않는 모양이시군요. 현자로서의 제 명예를 걸고 다시 한번 말씀 드리죠. 이분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마경과 접해 있는 거대한 대지, 요르간드를 지배하는 군주라 했습니다." 베르센크의 말엔 후작 뿐만 아니라 나또한 놀라고 말았다. 그는 내가 용이라는 사실을 다른 인간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말한 사실만으로 내가 용이란 것을 추측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암도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요르간드라는 지명도 현세의 인간들에겐 완전히 잊혀진 이름일테니 말이다. "소, 솔직히 말해 믿겨지질 않는군. 설마, 그 베일에 가려진 땅을 지배하는 군주라니, 이런 어린 소녀가…" "본인의 앞에서 실례입니다. 에라딘 후작님." "아,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로드 리블란셰. 저는 이 아나키스트 왕국의 후작인 데임 드 에라딘이라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동작은 무엇을 의미하는거지? 난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칼리체 님, 그에게 당신의 한쪽 손을 맡기면 됩니다." 베델의 말에 난 그의 두껍고 커다란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는 그대로 내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내 손등위에 입을 맞추었다. "이쪽 예법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후작님, 칼리체 님에 관한건 함구해 주십시오. 제 초대로 조용히 아나키스트 왕국을 유람하러 오셨기 때문에 괜히 정체가 밝혀져 번거로운 일을 겪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물론입니다." 그는 한쪽 손을 배위에다 대고 부드럽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후작은 베르센크와 대화하며 내게 궁금한 점을 간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이쪽을 힐끔 거리는 걸로 보아 내가 대화에 참여하길 원하는 모양이지만, 그에겐 안타깝게도 난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런 당황스런 일을 벌인 베르센크가 알아서 수습하길 원하는 것이다. 후작이 아쉬운 표정으로 다른곳으로 가버리자, 나는 그의 옆구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찌르며 말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거지?" "칼리체 님의 정체가 들킬것을 염려하고 계신다면, 그 염려는 무의미 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베르센크의 말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별로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는 내 의도에 위배된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말하자 그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냉소적인 표정은 상상할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게 말했다.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칼리체 님의 뜻은 결코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아름다움 만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거든요." 할 말이 없어졌다. 확실히 이 외모 때문에 보통의 인간들의 눈길을 피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갖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보면 꼭 취하려 하고 말죠. 그런 자들을 대비해 칼리체 님이 그들이 간과할 수 없는 강력한 신분으로 위장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되어 독단적으로 행동했습니다. 혹시, 기분이 상하신건…" 난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상한건 아니지만 조금 놀란건 사실이다. 어쨌든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의 행동은 납득할만 하다. 난 더이상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아까 내 이름뒤에 붙였던 리블란셰 라는 건 뭐지?" "아, 리블란셰 라는 것은 인간의 고어(古語)로 '백색'이란 뜻입니다. 그야 말로 당신에게 걸맞는 단어 아닙니까." "그렇군." 확실히, 지금 나는 호박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희다. 하얀 피부, 하얀 머리카락… 그가 나의 모습을 보며 그런 단어를 떠올린건 당연한 일일지도. 이제부터 내가 인간들의 사회에 있을때는 그것을 성으로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베르센크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슈테른 백작이군요." 베르센크는 지금 막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라면… 전에 방의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보던 정원으로 시공간을 찢고 나타난 그자로군. 그의 뒤로 금발을 길게 기른 소녀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따라들어오고 있는 소녀는 그의 걸작품이지요. 에카테야르 드 슈테른, 백작의 앙녀지요. 그의 손에 만들어진."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 소녀는 뛰어난 마법사인 백작의 손에의해 만들어진 전투를 위한 인형, 호문클루스 입니다." 베르센크는 내가 깜짝놀랄 정도로 지독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난 알것 같다. 그녀는 생기없는 텅빈 눈동자로 멍하니 백작의 등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녀를 계속 바라보며 베르센크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로 물었다. "저 호문클루스에 대해 자세히 듣고싶군." "저 가여운 인형은 본래 저와 같이 웃고 울고 떨어지는 낙엽에 쓸쓸함을 느끼며 타인과 마주잡은 손에서 따뜻함을 느낄수 있는… 인간이었을 겁니다." 베르센크는 격렬한 분노를 느끼는듯 주먹을 꽉쥔 두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저것의 무엇을 보며 이런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는건 많지 않습니다. 그저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사역하는 백작이 인간이었던 소녀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살인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 밖에는요." 살인 기계라… 저 소녀는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다. 육체적인 강함은 그가 말한 살인 기계라는 표현을 붙일수 있을 정도로 강해 지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저 소녀가 갖고 있는 힘은 마력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는 뜻인데, 지금의 나로서는 그녀에게서 마력을 느낄수 없다. 놀라운 일이다. 내가 현재 아무리 본래의 힘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함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지금 내가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힘은 인간이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수준이 낮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서 마력을 느낄수 없다는 말은 그녀가 지금의 나보다 더 강한 마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된다. 어디까지나 내 가정이 맞을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국왕폐하께서 드십니다!" 귀청을 울리는 관악기 소리와 함께, 인간들 몇명이 붙어야 겨우 열릴법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귀족들이 연회장에 들어올때 사용한 문과는 다른 것이었다. 난 에카테야르 라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웅성거리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순식간에 침묵을 지킨다. 내전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다 하더라도 아직 왕실에 위엄은 남아있다는 것인가. 국왕으로 보이는 인간은 곧 죽을듯, 힘이 없어보였다. 내것과는 다른 윤기없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 국왕은 마릴렌 공주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보기만 해도 힘겨워 보이는 동작으로 그의 왜소한 몸과 대비되는 거대한 왕좌에 앉았다. "모두, 본인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오. 모쪼록 편하게 이 자리를 즐기다 가길 바라오." 힙겹게 입을 여는 국왕의 목소리엔 거의 귀찮음 마저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많은 수의 인간을 통치하는 지배자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저런 노쇠한 국왕역시 내전이 일어난 원인 중 한가지일 것이다. 국왕의 길지 않은 말이 끝나자 잠시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하고, 인간들은 서로 짝을 지어 연회장의 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몽환적이게 느껴지는 광경이다. 귓가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음률의 노래와, 몸을 움직일때마다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는 화려한 의복, 시야를 어지럽히는 반짝이는 불빛들… 인간들의 연회라는것, 그리 나쁘지는 않은것 같다. "너는 저들과 어울리지 않는가?" "제가, 저들과 말입니까?" 베르센크는 팔짱을 끼고 커다란 대리석 기둥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그 모습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명백히 '거절'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떠나겠다. 이 구석진 자리에 있어선 인간들의 모습이 잘 보이질 않는군." "하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의 추파를 감내하셔야 할겁니다." 그게 무슨말이지- 하고 물으려 고개를 돌렸으나 베르센크는 이미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연회장 이곳 저곳을 돌아보았다. 인간들은 알게 모르게 두 집단으로 나뉘고 있는것 같았다. 언뜻 봐선 전혀 눈치챌 수 없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인간들의 행태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작파와 백작파로 나뉘고 있는 것이겠지. 난 사방에 널려 있는 인간들을 부딪치지 않게 조심히 다니며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어두운 커튼 뒤에서 입을 맞추는 남녀, 서로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부딪치며 웃으며 떠드는 인간들. 이곳의 분위기는 기묘하다. 들떠있으면서도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미약하게 나마 드래곤 아이가 내게 진실을 전해주는 것인가. 인간들은 정말 수많은 페르소나를 쓰고 있었다. 온통 가식으로 가득찬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 왠지 모르게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여기." 훤칠한 키를 가진 시종이 내 손짓에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다. 난 그가 들고 있던 쟁반위에 올려진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난 유리잔을 천천히 내 입에다가 갖다 대었다. 약간 서늘한 느낌이 나며 씁쓸하고 달콤한 액체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아직 몸속에 무언가를 넣는것이 익숙치는 않지만 노력 해보아야 한다. 인간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입장이 되보아야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아가씨,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청년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와인에 대해 물었다. 다소 당황스럽지만 대답을 해주어야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런, 대단히 고급스런 미각을 지니고 계시군요. 그 와인은 베로드 사십년 산으로 굉장한 고가 품인데 말입니다." "당신은…?" "아, 이거 실례했군요. 저는…"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하는 자신의 소개는 내게 전혀 닿지 않는다. 그저 이 연회장안의 분위기에 취해 멍하니 그의 말을 흘려보낼 뿐이다. "아가씨도 제게 당신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 칼리체 리블란셰 에요." "혹시, 외국에서 오신 분인가요? 이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분이라면 진작에 이름이 알려졌을 테니 말입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베르센크에게 배운데로 그가 내민손에 내 손을 얹었다. 역시나 그는 내 손등에 그의 입을 맞추었다. "아, 정말 황홀하군요." 뭐가 황홀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는 내 옆에서 계속 떠들어 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겐 별로 흥미가 없었고, 그는 곧 대단히 실망한 표정으로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접근에 약간 지쳐버린 나는 연회장의 구석으로 이동해 단단한 대리석 벽에 등을 기대었다. 다시 손에 잡은 와인을 천천히 홀짝이며 연회장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나는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감정한 눈을 하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내 인사에 그녀는 천천히 내게로 텅빈 시선을 보낸다. 지금까지 멀리 있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어 몰랐는데, 그녀는 대단히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이 그런 예쁜 얼굴과 어울려 그녀는 정말 생명이 없는 인형같이 보였다. "누구신가요?" "칼리체, 칼리체 리블란셰." "전 에카테야르 드 슈테른 입니다. 특별히 볼일이 없으시다면 제게 말을 걸지 말아주시길 바래요." 지독히도 공허하고 무감정한 목소리, 지금까지 항상 감정에 점칠되어 있는 인간들을 보다 이런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인간을 보게되니 정말 신기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닌 나보다도 더 인간의 감정이 없는것 같다. "볼일이 있어." 내게서 멀어졌던 시선이 다시 돌아온다. "나와 춤을 추어줘." 나와 에카테야르 사이에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나는 그녀가 대답을 할때 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여자고 당신도 여자에요." 전투 인형이라 길래 보통의 인간에 비해 사고가 부족한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위화감을 느낄정도로 무감정 하긴 하지만 스스로 사고 하고 있었다. 난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춤을 추는 자들은 모두 남녀로 쌍을 지었지 같은 성별끼리 춤을 추고 있지는 않았다. 같은 성별끼리는 춤을 추지 않는 것이 상식인듯 하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아니다. "난 여자가 아니야." 딱히 남성인것도 아니지만.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놀람의 표현인가, 인형같은 호문클루스에게 그런 감정이 남아있던가. 아니면 그녀는 그저 눈을 깜빡인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좋아요." 의외로 그녀는 내 제의에 응했고 나는 지금껏 봐둔대로 그녀의 손을 맞잡고 인간들이 춤을 추고 있는 연회장의 중앙으로 나왔다. 여기 저기서 인간들의 놀란 시선이 집중된다. 한번 본것은 거의 모두 기억해내는 나는 인간들이 하는대로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다른 한손으론 그녀의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추어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난 내 몸이 움직이는데 그리 쓸만한 몸이 아니란걸 알고 있었고 때문에 생각만큼 능숙하게 춤을 출수 있으리라 생각치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이 몸은 유연성만은 꽤 괜찮은지 아까 잠깐 봐둔 인간의 춤을 별다른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었다. 투명한 유리알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에카테야르와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그녀의 좀더 몸을 밀착시켰다. 사실 에카테야르와 춤을 추자고 한것은 그것을 기회로 호문클루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지금 화(化)하고 있는 이 몸은 그저 보는것만으로 진실을 꿰뚫을수 있는 드래곤 아이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신체적인 접촉으로 그녀와의 링크를 얻어야만 했다. 난 춤을 추는것에 집중하며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들여다 보았다. 그녀에겐 깜짝 놀랄만큼 강력한 마력이 깊숙히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통상의 마력과는 다르게 이 호문클루스의 마력은 말뚝같이 느껴지는 무언가를 중심으로 억지로 고착되어 있었다. 아마 그것이 이 호문클루스를 이루는 핵심일 것이다. 이걸 백작이라는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인간의 마법 수준으로 이런 고도의 진식을 이루어 낼리가 없다. 내가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는게 아니다. 이것은 만약에라도 나올수 없는, 그야 말로 거의 근원에 다다를수 있는 수준에 가까운 기술이다. … 분명히 이것은 뭔가 다른 힘이 개입된 것이다. "당신, 뭘보고 있는거죠?" 목덜미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에카테야르는 내가 뭘하고 있는건지 대강 눈치를 챈건지 서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는 경쾌한 스텝을 밟고 있는 채다. "네가 호문클루스라는 것을 확인했어." "그렇다면, 당신을 죽여야겠군요. 아버지는 제가 호문클루스 라는 것이 알려지면 절대로 안된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녀는 담담히 그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겠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나와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아버지 보다 강력한 마법사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당신의 전투를 미리 상정해본 결과 저는 당신을 거의 구할의 확률로 이기게 될겁니다." 과연, 그녀는 현재의 나보다도 훨씬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제손에 죽게 될거에요." "그런가." 그리고 노래가 끝날때까지 태연하게 춤을 춘 나와 그녀는 노래가 끝나자 서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헤어졌다. 그녀가 연회장의 구석쪽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다 나는 아까보다 인간들의 시선이 더욱 집중되어 있다는걸 깨달았다. 이런 주목이 불편한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베르센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볼만한 광경이었습니다. 칼리체 님." "무엇이 말이야?" "소녀와 소녀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다니요. 뭐, 그래도 칼리체님은 그렇다 치고 저 인형도 인형답게 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보기는 좋았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같은 성별끼리 춤을 추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건 나는 춤을 추느라 지친 몸을 벽에 기대어 쉬게 하고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베르센크가 있는 연회장의 구석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선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연회가 끝나고 나서를 조심해야겠군. 지금의 나의 몸은 대단히 연약해 쉽게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좀 곤란하겠지. "내 그토록 자네의 사정을 봐주었건만, 이제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군!"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에 의해 연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열어붙었다. 연회장 내부를 흐르던 음악은 이미 멈춘뒤다. "역시나, 이런 일이 일어날줄 알았습니다. 국왕의 탄신일이라 그냥 넘어갈수도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베르센크의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바라본 연회장의 중앙에서는 예상했던대로 백작과 후작이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후작님께서는 내 사정을 봐주셨다고 하셨소? 내 영지를 슬금슬금 기로채려는 것이 그 사정을 봐준다는 말인가?" "같은 소리 반복하게 만들지 말게. 그곳은 원래 나의 영지였네. 뭐, 더이상 말해도 알아먹을 것같지는 않군." "잘 보셨소. 오늘 이자리를 빌어 당신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오!" 미리 계산된 상황인듯 백작의 말은 빠르고 한치의 지체도 없었다. 후작은 잠시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중무장한 기사 열명 정도가 연회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폐하. 저는…" "마법사인 내가 두려운가 보군?" 백작은 후작의 말을 자르며 이죽거렸다. "백작, 모종의 준비를 하고 왔다는것을 알고 있다. 폐하께서 계신 이자리에서 피를 보기 싫으니 조용히 물러나는게 좋을걸세." 백작은 아무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연회장을 나가버렸다. 그 뒤를 표정이 없는 인형같은 소녀, 에카테야르가 따랐다. 당연한 소리지만 연회는 거기서 끝이났다. 방금까지는 그래도 국왕의 탄신일이라고 왕궁안이 들떠있는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싸늘한 냉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귀족 두명에 의해 왕실이 이 정도로 휘둘릴 정도라면 왕실의 권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연회가 싸늘하게 마무리 된 후 난 밖으로 나와 싸늘한 밤공기를 느끼며 가만히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나는 내 몸을 꿰뚫으려 차가운 밤공기를 헤치며 날아오는 한줄기 섬광을 느꼈다. 콰앙!! 내가 순식간에 전개시킨 마력장에 섬광이 부딪히는 소리가 대기를 찢는다. 내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난 그 섬광에서 느껴진 무게감에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적절한 장소 선택이다. 인적도 드물고 시야도 어둡다. 아니, 이건 이런 으슥한 장소에 멍하니 있던 내 잘못이군. 그나저나 설마 연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습격할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그걸 막을 줄이야. 역시, 당신은 마법사였군요." 지독히 무감정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카테야르는 연회장에 있을때와 마찬가지로 간편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만, 허리에 거의 그녀의 키만한 얇다랗고 초승달 처럼 크게 휜 검을 차고 있었다. 저것은 통상적인 소드(Sword)도 블레이드(Blade)도 아니었다. 에카테야르는 그 기형적으로 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검집에서 무기를 빼들었다. 그녀의 손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그 흉기는 하늘에 떠있는 희미한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였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달려올텐데, 그냥 물러갈 생각은 없니?" "그전에 당신의 생명을 멈추겠습니다." 순식간에 그녀의 검에 마력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 마력은 그녀만의 마력체계를 따라 가공, 발현되어 결국 이적에 비견될만한 힘이 그 검에 깃든다. 나조차도 깜짝 놀랄정도로 신속한 마력의 발현이었다. 에카테야르는 무기를 앞으로 세우고 내게 달려들었다. 난 아까처럼 다시한번 마력장을 전개시켰다. 방금과 같이 다급한 상황은 아니어서 그 수준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 -에카테야르는 앞세운 무기를 내 앞에 아무런 장벽도 없는 것처럼 느리게 휘둘렀다. 내 마력장이 소리조차 없이 잘려나간 걸까. "읏!" 허공에 붉은 액체가 튀어오른다. 그와 함께 별로 익숙해 지기 싫은 감각, 고통이 나를 엄습해왔다. 마지막에 기묘한 위화감 때문에 뒤로 몸을 날렸기 때문에 내 상처는 그녀의 무기에 한쪽 팔이 깊게 베이는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이것은 얕은 상처는 아니다. 난 다른 팔로 상처입은 팔의 상처를 꾹 눌렀지만 붉은 피가 끊임없이 팔을 타고 흘러내려 매마른 땅바닥을 적셨다. 이제서야 왜 그녀의 무기가 저렇게 생겼는지를 깨달았다. 그녀의 무기에 찌르기라는 것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전적으로 베기만을 위한 무기이다. 에카테야르는 마법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으로 베기만을 위한 무기에 베기라는 속성을 이끌어 내어 그것을 극한까지 극대화 시킨다. 그것엔 아찔할 정도로 고도의 기교와 마력량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그렇게 극대화된 무기로 베지 못할것은 아무것도 없게된다. 그것이 내 마력장이든 가장 강도높은 금속이라는 타이탄이든 간에 말이다. 실로 피할 수 없는 재앙에 비견될만한 마법이 아닌가. 누구도 그녀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죽게될겁니다." 담담히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그럴지도." 난 담담히 그녀의 말에 답했다. 진심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 이상의 힘을 개방할 생각은 없다. 현재 난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이곳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니까, 죽을때도 인간같이 죽어야 한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줄 알았던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놀랍게도, 감정을 찾아볼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미약하게 의혹이 담겨 있었다. 출혈이 심하기 때문일까, 몸이 점점 차가워 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내 몸안을 흐르고 있었던 붉은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이?" "죽는것이 두렵지 않나요? 지금 까지 내가 죽여온 자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하며 내게 목숨을 구걸했죠, 두려워 한다는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이 두렵다라. 아니 두려운 죽음인가. 확실히, 모든 생명체 들은 생을 갈구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때부터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타인을 죽이고 그 죽음을 밟고, 또 밟고 올라가 자신은 생을 이어나간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인간도, 요정도, 하물며 벌레조차 일부러 죽음을 맞이하려는 자들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내게는 죽음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아쉬울 뿐이지. 아마도 나는 죽음을 몇번 경험해 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아마도'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내가 죽음을 겪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며 몇번이나 기억을 리셋해 왔으니까. "글쎄…" 난 말끝을 흐리며 여전히 그 기형의 무기를 내게 겨누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버틸만 하지만 서서히 눈앞에 가물가물해 지는것 같은 기분이다. 이대로 있다면, 난 확실히 죽음에 이르게 되겠지. 하지만 아직 죽음을 경험해볼 마음은 없으니, 난 최대한 나를 죽이려는 그녀를 저지하고자 마음먹었다. "칼리체!!" 아는 목소리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깜짝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뛰어온 사내는 며칠전 왕궁을 떠났었던 베델이었다. 마침 이런때 왕궁으로 돌아오다니, 그는 예지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칼리체!! 도대체 이게 무슨… 괜찮은거야?!" "전혀 괜찮지 않아요.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째서 그렇게 담담히 얘기하는거야!" "그것보다… 그녀를 조심하세요." 그제서야 베델은 에카테야르에게 신경이 미친듯 싶다. 그는 허리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검을 뽑더니, 그녀를 겨누었다. 그녀또한 어느새 베델에게 검을 겨루고 있었다. "칼리체… 라고 했던가요? 제가 있는한 그녀를 살려 데려갈순 없을겁니다." "너는 누구지? 네가 칼리체를 이렇게 만들었나?" 베델은 흥분한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아마도 분노 같았다. "네, 제가 칼리체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제 정체는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시지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닐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맹수처럼 베델에게 달려 들었다. 다시한번 그녀의 무기에 이적에 달하는 힘이 깃든다. 내가 베델에게 그녀의 막을수 없는 검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전에 둘은 이미 서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베델의 검은 그녀의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기는 베델에게 닿지 않았다. 다만, 베델의 동강난 검이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이게 무슨…!"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간단히 말할게요. 무엇으로도 그녀의 무기를 막을 수는 없어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베델은 내 말에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체, 조금만 참아. 내가 곧…" 그는 말을 끝낼 틈도 없이 몸을 날려야 했다. 에카테야르가 다시한번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델은 그런 그녀의 공격들을 아슬아슬 하지만 확실히 피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나는 깨달았다. 저 호문클루스의 공격은 전혀 체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시키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재앙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베델은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희미한 달빛에 건물 안의 풍경이 아릿하게 비춰진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무기 창고였다. 검, 활, 창, 폴암 등등 그밖에 내가 이름모를 무기들이 까마득하게 그 안에 들어서 있었다. 베델은 급하게 그곳에서 검을 집어 들었다. "다시한번 해봐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내 공격은 막을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 난 힘없이 벽에 기대어 주저 앉았다. 이틈에 상처에 간단한 재생 마술을 걸어두었다. 이걸로, 적어도 출혈 과다로 죽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이 마술은 수준이 낮은 것이어서 내 신체 대사를 이용해 재생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는 없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솔직히 베델이 그녀에게 이길수 있으리라 생각치 않는다. 지금의 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력의 힘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상태다. 그런데 에카테야르라는 저 호문클루스는 그런 나를 압도하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정도의 마력이라면 인간들의 사회에서 상처입는 일은 없으리라 예상했건만. "칼리체, 조금만 참아." 뭘 참으라는 거지? 고통…? 하지만 이제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일까, 점점 시야가 흐릿해져 가며 졸린 기분이 든다. 내 몽롱한 기분을 가르듯, 베델의 검은 그녀에게로 쏘아져 나간다.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그의 검은 다시 에카테야르에 의해 반으로 잘려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무엇이든 가를 수 있는 무기라 해도 베델이 들고 있던 검을 두동강 내느라 속도가 느려지는 바람에 베델은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베델은 몸을 굴려 그녀가 들고 있는 '재앙'을 피한뒤 다시 무기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창이다. "소용 없습니다." 그는 에카테야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내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난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베델의 눈에 알 수 없지만, 어떤 격렬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너 역시 소용없다." "…" "몇번이고 내 무기를 자르고 또 잘라라. 그러면 난 몇번이고 무기를 들어 다시, 또 다시 너와 맞서겠다." 에카테야르는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본다. "베델, 이 자리를 피하세요. 저 때문에 당신이 목숨걸 필요 없어요." 기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힘이 없어, 그에게 들렸는지도 의문이다.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 베델에게 들려온 말에 나는 그가 내 말을 들었다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안돼, 그럴 수 없어." 어째서-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난 더이상 말할 기력조차 잃어버려 그저 에카테야르와 베델이 부딪치는 것을 보고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싸움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에카테야르는 거침없이 그에게 뛰어들어 초승달 처럼 크게 휜 검을 섬광처럼 휘두른다. 베델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그 재앙과도 같은 검을 몸을 젖혀 피해 내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들고 있던 무기를 희생하여 죽음을 피해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변에 있는 무기를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내어 그녀에게로 휘두른다. 대부분 에카테야르가 공격하고 베델이 피하는 식이지만, 간간히 베델의 날카로운 공격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베델이 공격할 때나 공격 받을때나 항상 반드시 그가 들고 있는 무기는 반으로 쪼개져 그 가치를 잃는다. 그럴때 마다 베델은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끝없이 무기를 집어 든다. 에카테야르는 베델만큼 빠르지는 않아 베델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그녀의 무기에 베델의 공격역시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헉… 헉…!" 잠시 그녀와 거리를 벌린 베델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여전히 그녀를 향한 채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에카테야르는 숨조차 거칠어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는 두동강 난 무기들의 잔해가 마치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그나저나 이런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걸 눈치채지 못한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문득 주변이 소란스럽다는걸 깨달았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물들어 있어야 할 밤하늘이 붉게 빛나고 있다. 어디선가 불이 난게 틀림 없다. "놀랍군요. 이 마법을 쓰고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다니." 에카테야르는 베델을 겨누고 있던 무기를 내리며 말했다. "나 역시 마법을 썼으니까." 그는 바닥에 널린 부서진 무기들을 가르키며 씩 웃었다. "혼자가 수백명이 되는 마법이다." "과연, 당신의 신체 능력은 정말 마법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그 많은 무기를 모두 파괴 당할때까지 지치지 않고 버티다니 말입니다." 에카테야르의 말대로 베델은 아직도 사납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숨이 찬듯 가슴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에카테야르를 향해 있는 그의 검끝은 여전히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여전히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를수 있으리란 것은 명백해 보인다. 에카테야르는 한손으로 베델에게 무기를 겨누면서 다른 한손으론 품속을 뒤져 기다란 체인 줄이 달려 있는 시계를 꺼내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허용한 시간이 끝나버렸군요. 칼리체, 당신을 죽일수 있으리라 확신했건만…" 그녀는 그 기형적으로 휘어진 검을 검집에 넣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반드시 당신의 목숨을 취하겠습니다." 베델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에카테야르는 공간을 찢고는 다른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엔 공간 도약을 하면 반드시 보이는 잘려진 시공간의 끈 몇가닥이 흐트러져 있었다. "뭐, 뭐지? 이건… 마법인가." 그는 공간 도약 마법을 처음 보는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느껴지자 긴장이 풀린 나는 그대로 정신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시야가 점멸되며, 마치 잠이 들듯 나의 의식은 깊이 침잠하기 시작한다. "… 복은… 게… 겁니… 세요. … 명에 지장은…" "… 감사드… 럼 얼마… 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목소리는 중간중간 끊어져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 "…" 간간히 뭐라 말하는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알아 들을수 없게 뭉게져서 들려온다. 수만 마리의 벌떼가 귓가에서 잉잉거리듯 지독한 소음이 뇌리를 매운다. … 기분 나쁘다. 누군가가 내 손을 꼭 잡는것이 느껴진다. 작고 부드러운… 여성의 손이다. 그리고 머리속을 가득 메우던 소음을 뚫고, 울먹임이 가득한 가녀린 목소리가 짙은 먹구름 사이를 뚫고 비치는 햇살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칼리체 님, 일어나세요…!" "칼… 리아넬." 뿌연 시야로 싱그러운 녹빛이 가득 보인다. 아마, 칼리아넬의 머리카락이겠지. "카, 칼리체 님! 정신이 드세요!?" 그녀가 거의 비명을 지르다 싶이 말하자, 머리가 울려 고통스러웠다. "칼리아넬, 진정해. 그렇게 소리지르니까 칼리체가 괴로워 하잖아." "베델…" "완전히 정신이 들어?" 시야가 점점 또렷하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또렷해진 시야엔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칼리아넬과 베델의 얼굴이 비춰진다. 그들의 얼굴에서 시야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탁자 위에는 이름모를 노란색 꽃이 꼽혀져 있는 꽃병이 있었고, 그 위에 있는 창문엔 하얀색 커튼이 달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안락한 느낌의 방이로군.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죠?" 목소리가 듣기 싫게 갈라져 나온다. 하지만 베델은 눈살도 하나 찌푸리지 않고 내 물음에 대답했다. "넌 삼일간 정신을 잃고 있었어. 왕궁 의사의 말로는 그 당시에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정말, 이렇게 깨어난게 다행이야." 재생 마술을 조금 늦게 걸었던게 화근이었나, 정말 죽을 뻔했군. "흑… 흐윽… 칼리체 님…!" 투명한 액체가 내 얼굴에 떨어진다. "전 칼리체 님이 정말 죽는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흐윽… 으와앙-!" 칼리아넬은 내가 덮고 있는 새하얀 이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난 내 얼굴에 묻은 액체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녀의 눈물이다. 이 눈물을 보이게 한 원인은 아마도… 나.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대수롭지 않은것 같으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전에 그녀에게 배웠던 말을 기억해냈다. "걱정끼쳐서 미안해, 칼리아넬. 걱정끼쳐서 미안해요, 베델." "정말… 정말 다행이야." 베델은 칼리아넬 처럼 울음을 터트리진 않았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 전해져 온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난 또다시 잠이 들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다. 다시 내가 눈을 떳을때는 이미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 늦은 저녁이었다. 계속 침대속에만 머물러 있어서 일까, 답답하다는 기분을 느낀 나는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쌀쌀한 밤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약간 춥긴 하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칼리체? 아직 몸이 좋지 않을텐데, 밤바람을 쐬면 좋지 않아." 깜짝 놀랐군. 베델은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나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 침대속에만 누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 그렇게 당당히 말하니, 정말 뭐라 하기가 그렇구나."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가 입고있는 검은색 코트를 내게 둘러 주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었지… 난 아무말 없이 내게 너무 큰 코트 자락을 여미며 남아있는 그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하다. "갔던 일은 잘 되었나요?" "갔던 일…? 아아, 잘 되었지. 그란셸은 약간 고민하긴 했지만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어. 얼마 안있어 이곳으로 오겠지. 새로 창설할 기사단의 단장을 맡아주기로 했거든." "하지만 그는 귀족들에 의해…" "맞아, 귀족들에 의해 내쫓긴 그를 다시 불러들여 기사로 삼는 다는것은 귀족들에게 반(反) 하겠다는 얘기지." 공주의 결단… 인가. "후우, 이런 얘기보다는 말야." 난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지금의 화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이야긴가. 그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칼리체, 네 이야기를 들려 주지 않겠어? 난 도통 네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음 그러니까…" 베델이 말끝을 흐린다. 그는 내게서 인간이 아닌것 같은 위화감을 느낀것일까. 아니,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른다. 요즘들어 나는 좀 더 인간들의 모습에 가까워 지고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무 이야기라도 꺼내볼까… "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요?" 하지만 역시 난 내가 먼저 화제를 제시하는 것에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로나벨아크하임과의 대화에서도 항상 그랬지… 내가 먼저 화제를 꺼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참 수동적이로군. "큼, 그걸 내게 되물으면 곤란한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아무거나 들려줘. 아, 이거 좀… 바보같은 이야긴가?"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난처해한다. 생각해보니 인간과 이렇게 오래 대화한건 처음이었다.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얼른 말을 이어나가도록 하자. "전에도 말했다 시피 전 어릴적부터 혼자서 산속에서 살아왔죠. 가끔 찾아오는 한 친구 빼고는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 "그래서인지 전 감정 표현도 능숙치 못하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원활하지 못하네요. 그래서 인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어요." "아,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건 조금만 있으면 익숙해 질거야. 칼리체는 차고 넘칠만한 매력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가요?" 매력 있다니, 다행이군. 그때, 공중에서 검은 물체가 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깜짝놀란 나는 테라스의 난간에 매달려 바닥으로 떨어진 물체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약간의 잔디가 깔린 바닥에서 액체 같은것이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는것이 보일 뿐이었다. "오, 맙소사." 베델은 깜짝 놀라며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무슨 일이죠?" "… 아마도 자살인가봐." 자살이라고. 자-스스로를-살-죽인다- 라고? 스스로 죽는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고민해왔던 일이다. 난 이미 삶의 가치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오래 살아왔고, 그것 때문에 몇번이고 기억을 리셋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고작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자살이라고? 방금 떨어진 자가 어떤 이유로 자살을 선택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면 부디 그렇게 되었길 바랄 뿐이다. "이봐, 아직 살아 있다구! 얼른 들것을 가져와서 옮겨야 겠어!" 날카로운 외침이 고요한 밤공기를 찢었다. 떨어진 자를 왕궁을 지키는 경비병이 금방 발견한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큰 소리가 났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라는 건가요?" "뭐긴 뭐야. 살아서 다행이라는 거지." 그는 내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 시야는 왜 가렸었던 걸까. "살아서 다행이라구요? 어째서죠?" "음, 그러니까… 칼리체, 네 말은 지금 저 사람이 죽어야 마땅했다는 거야?" 베델은 다소 곤혹스런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자는 죽었어야 해요." "칼리체…!" 그는 화가난 표정이다. 내가 뭔가 잘못 말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알 수 없다. "왜 그러죠?" "…" 그는 내 물음에 잠시 침묵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후 다시 고개를 들며 내게 물었다. "너는 왜 그가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 길지 않은 생명을 스스로 포기할만한 이유를 전 상상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이유가 무척이나 괴로운 것이라는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베델은 아무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길이에요, 죽는게 살아있는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거죠. 그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는데 거기에 타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겠죠.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심한 고통을 동반하지요. 그러니 두번 시도할 필요 없이 단번에 죽어주는게 편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방금의 자살 시도 실패는 불행이네요." 난 말을 마치고 난간에 기대었다. 붕대로 감은 팔에서 욱씬- 하는 고통이 느껴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통이란 감각은 여전히 익숙해 지기 힘들다. "…나." "네?" "화가 난다구!" 그의 격한 외침에 난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베델의 눈에 분노라는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칼리체, 너는 죽음이 살아가는것 보다 낫다고 생각한적이 있니?" "네." 수도 없이, 수도 없이 떠올렸던 화두다. 난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편히 죽음에 닿기도 여의치 않다. 내 존재는 이 세상의 지탱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난 머리가 좋지 않아 네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분명,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사는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거야. 그래, 정말… 사는것 보다 죽는게 나은 사람이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베델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고작 그 말 뿐이었지만, 너무나 단호해서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나를 바라보는 베델의 눈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나를 와락 껴안았다. 얇은 셔츠 위로 그의 단단한 몸이 느껴진다. 답답함을 느낄정도로 나를 안은 그의 팔이 세게 죄어온다. "베델…?" "그리고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질수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내가 앞으로는 그렇게 슬픈 생각은 하지 않도록 만들겠어." "아, 네…" 당돌한 인간이다. 내 생각을 바꾸어 보겠다고 말하다니 말이다. 물론, 그는 내가 용인것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안해.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해버려서." 그는 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괜찮아요. 따뜻해서 좋았어요." 밤바람이 많이 쌀쌀해졌다. 난 베델의 코트를 걸치고 있음에도 추위를 느낀다. 하지만 베델은 얼굴이 벌게진걸 보니 그리 추위를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다음날, 베델은 공주에게 결과를 보고 하러 간 모양이다. 백작과 후작의 갈등은 이제 전보다 더욱 가시화 되고 있었다. 아나킨의 성벽 밖에 주둔해 있는 백작의 군대가 그 증거였다. 덕분에 왕실내의 분위기는 꽤 흉흉해 진 모양이다. 비록 백작의 군대의 검끝이 향하는 대상이 왕가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리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되는 걸까요?" 칼리아넬은 입을 삐죽내밀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글쎄, 베델의 의뢰가 끝날때 까지…?" "우우." 나는 또다시 창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무척이나 지겨워 졌지만 팔에 입은 상처 때문에 마음데로 바깥을 돌아다닐수 없다. 사실 무시해도 될 일이지만 칼리아넬이 필사적으로 말리니 어쩔수 없는 일이다. "칼리체 님. 머리카락좀 만져봐도 될까요?" 이상한 요청이군.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백발은 엉덩이까지 닿을 정도로 길어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을때면 바닥에 닿을 정도이다. 그것 때문일까, 칼리체는 내 머리카락을 일종의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지 빗질을 하거나 머리를 땋으며 듣기 좋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 아름다운 백색이에요.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 눈이 부실 정도로요." 칼리아넬은 내 뒤에서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와 함께 간질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헤헷."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느낌은 공중에 붕 뜬것처럼 아득하고 편안한 느낌이어서 나는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감기전에 이제막 떠오르기 시작했던 태양은 이제 하늘의 중앙에 걸려 그 찬란한 빛을 지상에 뿌리고 있었다. 칼리아넬은 색색 소리를 내며 곤히 침대위에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그녀가 손을 바뒀는지 귀 양옆으로 약간의 머리카락이 땋아져 있었다. 바람에 흩날려 불편했는데 잘되었군. 잠시 칼리아넬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난 로브를 입고 후드를 푹 뒤집어 쓴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외로 왕궁 바깥으로 나오는 데에는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하긴, 이미 왕궁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신분이 증명되어 있는 것이니 그렇군. 왕궁 바깥의 모습은 내가 기대하던 모습이었다.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인간의 어린 인간의 아이들, 재화를 얻기 위해 목소리 높여 자신들의 상품을 광고하는 상인이라는 인간들,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음유시인. 수많은 인간 군상이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정신이 멍해지는데, 과연 내가 저런 곳에 참여 할 수 있을까. "거기 서라! 거기 서라 이놈! 누가 저놈좀 잡아주시오!" 굵은 인간 남성의 커다란 목소리가 시끄러운 거리의 소리를 압도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한 소년이 품에 무언가를 들고 인간들 사이를 헤치며 달리고 있었고, 그 굵은 몰소리의 주인인 듯한 자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들은 내가 있는 곳으로 맹렬히 달려 오고 있었다. 소년은 다급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가다 누군가의 발에 걸렸는지 내 바로 앞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품에 들고 있던 것은 기다란 막대같은 빵이었다. 그것들은 데구르르 굴러 내 발치에 멈추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아마도… 바게트 라고 부르던것 같다. "이놈! 잡았다 이놈!" 소년을 쫓아온 남자는 건장해 보이는 체격에 우락 부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운 그들을 중심으로 인간들이 모여들었다. 이 상황이 흥미로운 구경 거리라도 되는듯 하다. "오늘 팔아야할 빵을 이렇게나 많이 훔쳐가다니, 거기다가 땅바닥에 버려놔서 못쓰게 만들어 놨잖아! 이놈, 어떻게 보상할 셈이냐!" 남자는 소년의 멱살을 잡고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한손으로 든걸 보니 저 남자, 힘이 꽤 센 모양이다. 나는 내 발치에 굴러온 기다란 빵을 들어올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흙이 묻어 못먹을 꼴이 되어 있었다. "크윽!" "어디서 이놈이 도둑질을 하고도 눈을 치켜떠!? 아무래도 너같은 놈은 경비대에 보내버려야 겠다!" 경비대라는건 일종의 치안 조직인 모양이다. 소년의 눈에 깊은 곤혹스러움이 어린다. 경비대에 넘겨지게 되면 골치아픈 모양이다. "제가 돈을 지불할테니 그 소년을 풀어 주지 않겠나요?" 웅성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인간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뭐야, 너 이 도둑놈이랑 무슨 관계라도 있니?"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은 지금까지 날 대하던 인간들과 같지 않게 경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어려보이는 목소리 때문인것 같다. 이제야 보편적인 인간들의 사회적 룰이 내게 적용되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뇨,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렇다면 상관 마라." 난 품속에서 대강 잡히는 대로 재화를 손에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내 손은 자그마해서 많은 재화를 집을 순 없었지만, 그것도 남자에겐 충분한 양인지 그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고, 고작 이런 도둑놈 하나를 구하려고 이런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어디 부자집 아가씬가 본데, 동정심 때문이오?" 재화의 힘 이라는 것일까, 나를 대하는 그의 말이 다소 정중해졌다. 그나저나, 동정심이라… 난 고개를 저었다. "흠, 어쨌건 그렇게나 많은 돈을 지불한다면 난 굳이 이놈을 경비대에 넘길 필요가 없지." 남자가 소년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쿵하는 소리가 나며 소년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상당히 아파보인다. 일단은 내버려 두자… 난 남자에게 손에 쥐고 있던 재화를 넘겨주었다. 그는 약간 떨떠름하면서도 기쁜듯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흘낏 바라보고는 아무말 없이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구경거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쪽을 힐끔거리며 처다보긴 했지만. "너, 나를 왜 구해줬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들이 몯 사라지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지저분하게 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보인다. 그의 눈동자 색은 예쁜 석양 빛이었다. "아까는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동정심 때문이겠지…? 왜, 귀하게 자라서 좋은것만 보다가 나같은 꼴을 당한 녀석을 보니 괜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던가?" 상처입은 맹수처럼 소년은 으르렁 거리며 내게 적의를 보였다. 그를 도와준 이유, 라. "나는…" 한쪽 팔에 입은 상처가 욱씬거린다. 역시 아직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닐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되지 않은건가. 거기다 조금 어질어질 한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이 세계에 참여해보고 싶을 뿐이었어." 그래, 그것이 너를 도와준 이유.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보이는 인간들의 사회에 억지로나마 이렇게 참여해 보았다. 그것은 참 야릇하고도 가슴벅찬 경험이었다. 많은 생명체가 군집을 이루고, 내가 그 틈에서 한 '역할'을 수행해 본다라… "…" "난 가볼게." "이, 이봐. 잠깐만!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거야?" 이런, 그가 알아차릴 정도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나 보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지만, 갑자기 몸에서 힘이 풀려 휘청 거리고 말았다. "어, 어이!" 소년은 급히 내게로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뭐, 뭐, 뭐야 갑자기!?" 왠지 모르지만 그는 대단히 당황해서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 그의 몸에 기대어 있는 나는 그의 움직임에 머리가 아파왔다. "괜, 찮아. 부축해주지 않아도."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난 겨우 똑바로 섰다. 그리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다. 별 문제는 없을것 같군. 적어도 전처럼 정신을 잃는다던가 하는 불쾌한 경우는 없겠지. "저기, 일단 우리집에 가지 않겠어? 걷는것도 무리로 보이는데…" 소년은 왜인지 대단히 조심스런 기색으로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의 집이라… 뭐, 나쁘지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만." 그는 바닥에 떨어져 흙이 묻은 지저분한 빵들을 주워 다시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는 내 의아하다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쩔수 없잖아. 이런거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나는 소년의 간단한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길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는 몰랐는데, 그의 몸에서 맡기가 꺼려지는 냄새가 난다. 말해두는게 좋을까. "여자애는 몸에서 이렇게 향긋한 냄새가 나는구나." "응?" "아, 아니 그러니까. 저기… 여자애랑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적, 한번도 없어서." 그는 굉장히 당황한 표정이다. "내가 무슨말을 하는건지… 그보다도, 너 이름이 뭐야?" "칼리체 리블란셰. 네 이름은?" "로제야." "뒤에 붙이는 이름은?" 로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본다. 뭔가, 또 내가 말 실수를 한 모양이다. 인간들의 사회는 못할말이 뭐 이렇게 많은지… 정말이지 골치아프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나같은 평민이 성이 있을것 같아?" 그는 굉장히 기분이 상한 표정이다. "미안." "어!?"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내가 한 말을 못들었단 말인가. 청력이 좋지 않군, 하고 생각하며 난 번거로움을 무릎쓰고 다시한번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구." "아, 저기 그러니까 음…" 그는 또다시 당황한 모양이다. 정말, 내 한마디 한마디가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 건지 이제는 다소 답답한 기분 마져 느껴진다. "곱게 자란 귀족가의 아가씨 같은 네가 그렇게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말이야." 곱게 자란 귀족가의 아가씨- 라는 인간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모양이지…? … 그만두자,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인과 관계를 생각하다보면 더욱 골치아파질것 같다. 인간이란 종족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족속들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네가 날 도와줬던 일에 대해서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구나." 로제는 겸연쩍게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그, 저기… 고마웠어."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건 내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한 행동이니까." "뭐야 그게…! 너, 꽤 상냥한것 같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냉정한 말을 하네." 음, 방금 한 말이 냉정한 말이었던가. 그나저나, 나에게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인간은 처음이라 굉장히 신선한 기분이다. 그 어느때 보다도 로제라는 이 소년과 대화할 때가 내가 가장 인간들의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라는 기분이 든달까. "자, 여기야." 그가 가르킨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것 처럼 굉장히 낡고 작은 건물이었다. 로제는 잘 열리지 않는 나무문을 거의 잡아 당기다 시피 열어 나를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어두운 집안에 퀘퀘한 냄새가 난다. 딱잘라 말하자면 로제의 집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공간보다도 초라했다. "네가 보기엔 이게 집같아 보이지도 않겠지만… 이곳이 바로 내 소중한 집이야." 그는 품안에 들고 있던 더러워진 빵들을 얄팍한 탁자위에 내려놓고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로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다녀왔어요. 오늘은 먹을만한 빵을 여섯개나 구했어요. 나오셔서 좀 드셔보세요. 아, 그리고…" 로제는 난감한 얼굴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콜록, 콜록."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듯한 매마른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로제의 어머니의 것이겠지. "미안하구나 얘야. 일어나기가 힘들구나, 조금 있다가 이곳으로 빵을 몇조각 가져다 주지 않겠니? 일단 네가 배불리 먹고선 말이다." "예, 어머니…" 로제는 침울한 얼굴로 그의 어머니가 있는 방의 문을 닫고 나왔다. "어머닌 다시 잠드셨어. 요새 들어 부쩍 주무시는 일이 많아. 어디가 많이 편찮으신것 같아… 전처럼 건강하게 움직이시면 좋을텐데." 슬픔이 가득 묻어나오는 얼굴이다. 어머니, 라… 그류벨과 에네리아가 생각나는군. 그들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였지.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다. "너는 네 어머니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니?" "물론, 물론이지! 하지만… 내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그류벨과 에네리아나 로제나 그의 어머니나 둘은 비슷한 관계인것 같다. 인간들에게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내게는 아예 그런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 금방 이해하리라고는 생각치 않지만 말이다. "후, 아 그것보다 너, 이제는 좀 괜찮니?" "음, 아아…" 내 몸에 관해 묻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죽지 않을 정도면 상관없다. 이 몸이 어찌 되든간에 말이다. 애초에 별로 관심도 없던 일이다. "에, 그것보다 점심 때인데…" 로제는 창밖을 힐끗 바라보더니 탁자위에 올려둔 흙묻은 빵을 들어 조심스레 털었다. "아- 너도 하나 먹을…" 그는 내게 자신이 턴 빵을 내밀다가 이내 낭패라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미안, 네게 이런 빵을 권하다니… 역시 더럽지?" 난 아무말 없이 그가 내민 빵을 받아들었다. 로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깃든다. 물론 더럽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별로 먹을수 있을것 같은 꼴은 아니지만, 일단 호의를 보여줬으니 약간은 받아들여 주는것이 예의겠지. 나는 빵조각을 약간 뜯어 입안으로 넣었다. 약간 마른듯한 빵의 질감이 혀로 느껴진다. 아직은 미각이란 것에 대단히 미숙하여, 지금 느끼고 있는 빵의 맛이란것을 묘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아니, 일단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꺼려지니 말이다… "헤, 의외네. 당장 화를 낼것 같았었는데 말이야." "화를…? 어째서?" "어째서냐니 그게…" 됐다. 이 소년과의 대화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답답하다. 나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손을 저어 보였다. "그나저나, 너 왜 계속 로브를 쓰고 있니? 답답하지 않아?" "시선이 불편해서." 로제의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난 아무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큼 쉬었으민 이 몸도 원하는 데로 움직여 주겠지. 그 쉬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 벌써 가게?" "응, 꽤 오래 나와있었거든. 날 찾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는 꽤 아쉬워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또 거리에 나올일이 있다면 작게나마 만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인간들이 하는 것처럼 손을 크게 흔들어 그와 일별했다. "칼리체! 도대체 어딜갔던 거야!?" "잠깐, 왕궁 밖에…" "그 몸으로 외출을 했었다고? 그것도 왕궁 밖을!?" 베델은 내 말을 자르며 성난 어조로 내게 쏘아붙였다. 정말 화가 많이 난듯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화를 내고는 있지만 내 모습을 훑어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나에 대한 걱정이 보이는 듯 하다. 나보다도 더 내 몸을 걱정하는것 같군. 솔직히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 인간은 타인을 걱정해, 저렇게 까지 화를 낼 수 있는 걸까. "미안해요. 저, 이렇게 남의 관심을 받는것은 처음이라 경솔하게 행동하고 말았네요." 수천년, 아니 수만년을 혼자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나는 아직 나와 관계된 타인의 입장까지 생각하며 행동하기가 힘이든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라는 문장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어떤 일을 행하려 할때는 내가 걱정을 끼칠 대상에게까지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베델은 내가 말을 하자마자 바로 표정이 풀리고 이내 난감해 하는 얼굴로 바뀌어 버렸다. "미안해 칼리체. 내가 너무 화만내서… 아직 너는 거리낌 없이 홀로 행동하는게 더 익숙할 텐데도 말이야." 음, 알아주는군.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 너를 알고, 너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나뿐만이 아니라 저기 칼리아넬도 말이야." 그의 손가락이 가르키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말대로 칼리아넬이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베델과 다르게 내가 용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런 걱정 역시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알겠어요." "후, 그래." 내가 베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내 어깨를 다소 세게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듯 화들짝 놀래며 요란스레 내게 사과했다. "아… 미안, 미안해! 어깨를 너무 세게 잡고 있었던것 같았는데, 아프지 않았어? 나도 모르게 그만…" "조금 아프긴 했지만, 견딜만 했어요." "으으, 칼리체… 그렇게 말해서야 내가 지금까지 한 얘기가 소용이 없잖니." 으음, 정말 골치 아프군. 나는 이제 그만 하라는 식으로 베델에게 손을 내저었다. "하하, 알았어. 조금씩 익숙해져가면 될거야. 널 걱정하고, 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말이야. 내가 장담하건데, 칼리체, 너는 너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정말 많이 생길거야. 너… 왠지 정말 걱정하게 만드는 타입이니까 말이야." 그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음, 그러고 보니 칼리체, 네가 막 깨어났을 때는 경황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말야, 그때 너를 공격했던 그 여자애는 도대체 누구야? 왜 너를 공격했던 거지?" "에카테야르 드 슈테른, 슈테른 백작의 딸이죠." "그녀가 왜 너를…" 어디선가 둥- 하는 파동음이 전해져 왔다. 굉장히 깊고 기다란 울림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베델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졌고,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나중에 대답해줘. 지금은 급한일이 생겨서 말야. 칼리체, 전처럼 그렇게 마음대로 나가면 안되. 칼리아넬, 그녀를 부탁해." 나를 완전 환자 취급하는군. "무슨 일일까요? 갑자기 저렇게 급히 나가다니…" 칼리아넬은 탁자위에 아무렇게나 걸터 앉아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인간들의 도시에 처음 들어왔을때는 그렇게 주늑들어 있는 모습이더니 이젠 꽤나 적응한 모양이다. "아마도 성 바깥에서 백작이 공격을 개시한 거겠지." "에… 그러면 이곳이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넌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되. 내가 지켜줄 테니까." 흠, 저번에 맥없이 에카테야르라는 호문클루스에게 당해버려서 별로 설득력 없을지는 모르지만… 칼리아넬이 위험에 처한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녀는 내 책임아래 있으니까. "헤헷." 칼리아넬은 볼을 발그레 하게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기분좋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며 이들의 미적 감각에 완전히 적응한걸까, 처음으로 온전히 칼리아넬의 외모 때문에 그녀가 귀여워 보인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아무말 없이 손을 들어올려 칼리아넬을 가르켰다. 칼리아넬의 의아하다는 듯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하지만 이내 그 눈동자는 촛점을 잃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힘을 잃고 쓰러지려 했다. 난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쓰러지는 것을 급히 안아들어 편안히 탁자 위에 눕혀 주었다. 침대까지 옮겨주기에는 지금의 내 근력이 부족하다… 탁자위는 아마, 불편하겠지. 조금 미안하군. 그녀에겐 잠깐 동안 잠드는 마술을 걸어두었다. 억지로 잠이 들긴 했지만, 그녀의 몸엔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다. 베델에게 그런 설교를 듣긴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얌전히 이곳에 있을 생각이 없다. 지금 내게 중요한건 인간들의 갈등의 최고조인 전쟁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난 다시 아나킨의 거리로 나왔다. 전과는 다르게 아나킨의 시민들은 방금전의 파동음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눈치챈건지 다들 불안해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기분 나쁘고 끈적한 불안감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 전쟁의 여파가 직접적으로 이곳에 전해진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단은… 인적이 드문 골목에 들어가 시선을 피한뒤, 중력을 역전시키는 마술로 공중으로 날아올라 인간들의 전쟁이란 것을 관전할 계획이다. "…" 후드 사이로 계속 삐져나오는 백색 머리카락을 밀어넣으며 걷던 나는 전혀 의외의 광경을 바라보고 말았다. 거리 구석에서 예쁜 금발의 소녀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인간들의 전쟁을 관찰할 생각 따위는 지워져 버렸고, 나는 못박힌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에카테야르, 그녀가 지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조금 위험할것 같긴 하지만 나는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에카테야르." 내 목소리에 하늘을 향해있던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에카테야르는 얇아 보이는 흰색의 전신 망토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무기를 휴대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아, 칼리체…" "그래, 그런데 너는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지? 너의 아버지를 도와야 하지 않니?" "아버지, 아버지…" 놀랍게도, 에카테야르는 혼란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문클루스라는건 원래 감정이 없는 인형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에카테야르는 아버지, 아버지… 라고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올려다 보던 하늘과 같이 푸른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어딘가 고장나 버린건가. "날 죽이려 하지 않을거니?" "당신은… 지금은 됐습니다." 그녀에게선 아무런 적의가 보이지 않는다. 많이 보아온건 아니지만, 에카테야르는 평상시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현재 그녀는 마치… 진짜 인간처럼 보인다. 에카테야르는 아버지,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고, 아무말 없이 계속 허공만을 쳐다보며 서있었고, 나 역시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져서서 계속 그녀를 지켜보았다. "…" 하늘엔 비도 내리지 않는데 그녀의 뺨에 가느다란 물줄기가 타고 내린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허공을 쳐다보고 있을뿐이다. "우는 거니?" 물기를 담았지만, 여전히 텅 비어보이는 공허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번에 했었던 그녀와의 링크(Link) 때문이었을까, 눈이 마주친 그 잠깐동안에 그녀와의 동화(同化)가 일어났었던것 같다. 의식과 의식이 마주하는 교차로에서 나는 그녀의 내면을 잠깐동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끈적한 검은 물감을 덕지덕지 바른듯한, 지독히도 검고 불쾌한 그 세계에 그녀는 옴짝달싹 할 수 없게 갇혀 있었다. 언젠가 부터 말살되어버린 그녀의 모든 감정은 모두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억눌러서는 안될것을 억눌린채로 그녀는 속으로 괴롭다고, 괴롭다고 수천, 수만, 수억번이나 홀로 되내이고 있었다.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괴로운데도, 진실로 아무렇지 않은 모순적인 자신이 정말 견딜수 없게 현기증이 인다. …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아마, 이 잠깐의 링크로도 정신이 파괴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나… 나조차 굉장히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그녀가 느끼고 있는 세계는… 정말로 형편없었다. 좀더 과격한 표현을 쓰고 싶지만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이정도가 한계다. "너는…" 진심으로, 그녀를 죽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엾게도… 에카테야르는 가장 고귀한 영혼마저 침범당한채 온몸이 사슬에 꿰인것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더욱 동정이 이는것은 그녀 자신이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외면해 버릴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독히도, 정말 지독히도 이상하게 만들어진 인형이군… 나는 자그맣고 하얀 내 손을 내려다 보았다. 작은 동물하나 죽이지 못할것 같은 그 연약한 손에 파괴적인 힘이 깃든다. 온몸에 흩어버렸던 마력과 신력이 되돌아 오기 시작한다. 인간에 가깝게 존재했던 내 신체는 그것으로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버려 더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게 변해버린다. 눈은 본래의 모습일 때와 마찬가지로 사납게 위아래로 찢어진 동공을 갖게 되었고, 이빨은 날카로운 육식 동물의 그것처럼 변해버렸으며, 손톱과 발톱은 강철처럼 단단한 강도를 갖고 길게 자라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손에 깃든 아무 형체 없는 거대한 힘은 내 의지를 받아 이 세계에 물리력을 행할 수 있는 형태로 변이했다. 세계의 근원에 들어있는 정보에 근거하여, 내 손안에 깃든 강력한 힘은 신이 물질계의 영혼을 거둘때 사용하는 영혼 수확기(靈魂 收穫機, Soul Harvester)라는 아무런 색을 띄지 않는 꺼림직하고 거대한 낫모양으로 화(化)했다. 인간의 가장 거대한 도시중 하나인, 이 아나킨이 붕괴할만한 거대한 마력 행사였지만 나는 그보다도 더 거대한 마력으로 이 공간 자체를 아예 고착시켜 버렸다. 때문에 다른 이의 눈에는 그저 나의 손에서 아무런 소리 없이 거대한 낫이 솟아나온걸로 보일것이다. 나는 그것을 아무렇게나 쥐고 그녀에게로 휘둘렀다. 이것은 몸을 움직여 피할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휘둘러진 이상 그것으로 반드시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건 이 세계에 몸담고 있다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다다른 마법이다. 공간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이 영혼 수확기가 이 공간에 존재하는것 만으로도 이 공간에 물질계에 있어선 안되는 신력(神力)이 퍼져나간다. 이것으로 그녀의 상처입은 영혼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세계의 근원으로 향할 것이다. 바로 그러기 위해 현세에 불러와서는 안되는 이 신화적 물건을 불러들인 것이니까. 하지만 영혼 수확기의 날은 그녀의 목숨을 취하지 못하고 바로 그녀의 목끝에 멈추어 버렸다. 에카테야르는 나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혼 수확기는 이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야말로 신역(神域)에 다다를 만한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이 영혼 수확기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눈치 챘을 것이다.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란 것을. 그리고 모든 마술적 행위의 산물과 인위적인 조작이 무효화 되는 그 앞에, 그녀는 잠깐동안 미소로서 내게 고귀한 의지를 전해왔다. 희망-!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그곳에서… 그녀는 희망이란 것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영혼 수확기를 손에서 흩어버리고 말았다. 온몸에 충만하게 끓어오르던 마력과 신력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내 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다를바 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 왠지 눈물이란 것이 나올것 같은 느낌이다. 손을 들어 눈가를 훑어보았지만 실망스럽게도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칼리체, 당신은…" 언제 미소를 지었었냐는듯 그녀의 얼굴은 처음에 보았던 완벽한 인형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버지의 계획을 간단히 방해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군요. 그때 어째서 제게 그렇게 쉽게 당해버렸는지가 정말 의아하네요." 그녀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확연한 태도 변화였다. "에카테야르." 내가 인간들의 세계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개입하리라 마음먹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구해주지."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어떤 무기를 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파동음이 대기를 울리자 에카테야르는 황급히 돌아가버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성벽을 넘어 백작의 진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군. 나는 인간들의 전쟁을 관전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나도 인간으로서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까도 마음먹었다 시피 보이지 않는 실에 묶여있는 인형인 에카테야르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왕궁내의 분위기는 의외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성의 바깥에서 성으로 공격을 감행중인 백작의 목적은 왕실이 아닌 후작이었고, 성을 방어하는 병사는 후작의 진영에 속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수도의 성벽이 두 귀족에 의해 마음대로 좌지우지되고 있으니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후작을 성밖으로 내보내기로 한거에요?" 베델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하찮게 여겨지는 용병인 주제에 작전 회의에도 참여했던 모양이다. "응. 먼저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기 위해선 저 두 귀족을 싸움을 강제로라도 아나킨에서 벗어나게 만들 필요가 있어." 당연하겠지. 하지만 이들이 후작을 수도에서 내쫓을 힘이 있을까. 만약 후작을 내쫓는다 해도 그가 왕실까지 적대해 버리면 상황은 대단히 절망적이다. 지금까지 줏어들은 소문에 의하면 후작의 세력은 백작을 크게 압도하고 있다. 힘없는 왕실까지 상대하는 일은 그에게 무리가 아닐것이다. "베델." "응?" "공주에게 말해주세요. 제가 도와주겠다고 말이죠." "칼리체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성벽쪽을 바라보던 칼리아넬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 무슨 소리야.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라구. 거기다가 마술사인 네 도움은…" "아, 듣지 못했던 모양이군요, 베델. 전 마법사에요."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다. 칼리아넬은 불안한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체 님! 왜 저런 슬픈 싸움에 참여하시려는 거에요? 저런것… 너무 바보같아요. 동족끼리 싸우는것 자체가 바보같고 싸우는 이유도 바보같아요. 온통 바보 투성이에요. 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계속 바보, 바보 하고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칼리아넬의 눈에 간절함이 어린다. 정말, 이런걸 간단히 무시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란 말야. "구해야할 소녀가 있어." "그, 그게 누구죠?" 왜인진 모르지만 칼리아넬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묘하게 날 노려보는게 내가 뭘 잘못 말한게 있나 싶을 정도다. "에카테야르 드 슈테른" "칼리체님을 상처 입힌 나쁜놈이잖아요! 어째서 그녀를 구하려는 거에요?!" … 반응이 상당히 격하군. 솔직히 말해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소리를 지르니 깜짝 놀라 살짝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는 꽤나 박력있는 면도 있었군. "어, 어이…" 베델이 옆에서 손짓하며 칼리아넬을 말리려 하지만 그녀는 깜짝놀라 뒤로 물러나는 나를 따라오며 계속해서 내게 쏘아 붙인다. "그것 때문에 저번에 며칠이나 정신을 잃고 계셨잖아요! 저번에도, 저번에도 계속 위험한 일만 계속 하고선! 이…!" 칼리아넬은 자그마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러고 보니 칼리아넬은 요정치고 꽤나 감정에 지배받는 타입이었지 아마. "칼리체!! 바보 바보!!" 그녀는 항상 내 이름뒤에 붙이던 '님'도 빼먹어 버리고 빽 소리를 지르더니 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닫아버리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 당황스럽군. "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요?" "아니, 이렇게 동요하는 칼리체의 모습은 처음봐서 말이야. 네게 칼리아넬은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인가 보구나." 소중한… 이라.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단어를 음미한다. 확실히 그녀는 내게 소중한 존재다. 그녀는 내 책임하에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지켜주어야할 최우선 대상이다. "음, 하여간 공주에게 그렇게 말해주세요. 만약 전투가 있다면 제게도 참여할 기회가 있도록 말이에요." 미소를 머금었던 베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진다. "절대 안돼." 왠지 피곤하군… 어찌되었건 내가 행동을 옮기는데에 베델의 동의가 필수적인 요소는 될 수 없다. 나는 바로 공주에게 찾아가 내가 마법사이고, 당신들을 도와주고싶다고 말했다. 마릴렌 공주는 실제로 내가 마법사라 불리울 만한 강력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후 경악과 의심의 눈초리가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나서니 의심되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공주가 내 도움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베델과 칼리아넬의 의견을 무시한 댓가로 칼리아넬은 더이상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베델은 계속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나를 대했다. 베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칼리아넬의 화는 금방 풀어 주어야 하겠는데… "마법사 님! 사령관 님으로 부터의 전갈입니다. …" 그 뒤로 수일이 지난후 저번에 만났었던 그란셸이라는 인간이 왕궁으로 돌아와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으며, 아나킨의 모든 병사를 통술하는 군 사령관이 되었다. 병사는 사령관이된 그란셸의 명령을 내게 하달했다. 딱히 특정한 행동을 취하라는 명령은 아니고 가볍게 말하자면, 주의사항 같은 것들이었다. 아마도 내가 어리게 보이니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내 눈앞에서 얼굴을 붉히고는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 젊은 인간 병사도 아마 '이 조그만 여자애가 마법사라고…?' 따위의 생각을 품고 있겠지. "알겠습니다." 난 병사의 말에 대강 대답하며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벽 너머에는 두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후작 나머지는 백작의 진영이었다. 그렇다, 놀랍게도 후작의 군대를 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후작은 거의 분노로 보일법한 유감을 왕실에 표했으며 백작은 자신만큼 신사적이지 않을거라는 말을 남긴채 이를 갈며 아나킨을 떠났다. 이제 마릴렌 공주는 백작과 후작의 군대 사이에서 지극히도 얇은 방패만을 가지고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녀가 해낼수 있을까. "칼리체, 여기에 있었구나." 베델이 바람에 휘날리는 적발을 쓸어넘기며 성벽 위로 올라왔다. 난 잠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인간의 군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우, 정말 이 전쟁에 참여해야겠니? 음, 그러니까… 그녀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말야."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장소거든, 이곳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광기에 빠져 계속 살인을 해나갈수 밖에 없는 이 장소는 네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 비록 네가 마법사라 할지라도 말이야." 베델의 눈동자엔 또다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굳건한 신념같은 빛이 어린다. … 그에겐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그의 제안에 거절할 것이 분명한데도, 일단 그의 눈을 마주하며 그의 말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여 싶어 지는 것이다. 물론 실제론 고개를 저었지만 말이다. "몇번을 말해도 소용없어요. 전 그녀를 꼭 구해주고 싶으니까요." "정말… 단지 그 이유 때문이야?" 베델에게 에카테야르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언급했었다. 그가 내게 들은것은 그녀가 백작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는 것. 예상대로 베델은 분통을 터트리며 꼭 에카테야르를 백작의 손에서 구해내야 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그가 분노를 표하는 것을 바라보며 느꼈던 묘한 안도감은 무엇일까. 이 인간은 언제나 한결 같을 것이라는 내 기대감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베델은 내가 그녀를 구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했다. 웃기는 일이다. 정작 자신은 그 사실에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분노를 표했으면서 왜 내게는 전쟁에 참여할만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베델 때문이기도 해요. 당신, 보기보다 무모한 면이 있으니까 다칠까봐 걱정 되거든요." "응…?" 내가 못할말이라도 했는지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명백히 당황한 기색이다. "왜그래요 베델?"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것보다 말이야…" 그는 멋쩍은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칼리아넬 하고는 아직도 말하지 않고 있니? 칼리아넬은 네가 걱정되서 그런 소리를 한거야. 그러니 화내지 말고…" "화나지 않았어요. 단지, 칼리아넬이 저를 피할 뿐이죠." 내가 칼리아넬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지. 오히려 나를 걱정해서 그런거니 고맙다고 해야 할려나. 하지만 의아스러운 것은 그녀는 내가 백룡이란 것을 알고 있을텐데도 이 몸을 걱정하는 것이다. 계속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아직 정신이 덜 성숙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연약한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그, 그러니. 어쨌건 너희들이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다." 베델은 전처럼 내 머리위에 손을 얹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머리위로 올려진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칼리아넬이 일방적으로 화를 낸것 뿐이에요. 전 그녀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니 화해라는 말은 맞지 않겠지요." "그, 그래. 칼리체는 참 마음이 넓구나." 그는 후우- 하며 한숨을 쉰다. 어째 마지막에 한 말은 그리 진심이 들어간것 같지 않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에카테야르에게 다가갈수 있을까. 지금 아나킨의 앞마당에서 전투중인건 후작과 백작이고, 이쪽 왕실의 군대는 그 전투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후작과 백작중 어느한쪽이 승리한후 아나킨을 도모하기를 기다려야 하는건가. 나 홀로 나설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흩어버린 마력을 조금만 되돌려 놓는다면 저 정도 숫자의 인간의 무리들은 문제될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으로서 내 마음대로 저들을 휘저어 놓는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지금의 난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 인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힘과 방법으로 그녀를 구할 것이다. 백작과 후작은 서로 군대를 아나킨 가까운 곳에 배치해 두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왕의 생일이 끝나자마자 전쟁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서로가 서로를 전혀 신용하지 않은 것이지… 뭐, 깊은 갈등을 빚고 있었으니 어쩔수 없었으려나. 성벽 너머로 전쟁의 함성이 들려온다. 저 멀리보이는 평원에선 백작의 군대, 후작의 군대… 뭐 이런 구분은 불필요한… 그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해가 지평선 뒤로 넘어가고 노을이 질때가 되면 어디선가 까마귀 떼들이 날아와 바닥에 쌓인 고깃 덩어리들로 파티를 벌인다. … 불쾌한 냄새가 이곳까지 풍겨오는것 같군. 요새 나는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성벽위에서 저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지낸다. 성벽위에서 보초를 서는 왕실의 병사들은 수도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겁이 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이들은 백작과 후작의 병사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수준일 것이다. 이래가지고 마릴렌 공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작과 후작을 거부한 것일까. 정말 이길 자신은 있는건가. 아니, 그녀에겐 지금이 유일한 기회이겠지.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닐것이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이틈에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중앙 권력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백작과 후작,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겨버린 후에는 그녀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란 요원한 일일 테니까. "어라, 넌 누군데 여기 있는 거니?" 아직 굵어지지 않은 가느다란 소년의 목소리. 나는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모습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소년이다. 몸에 안맞는 커다란 투구와 가죽 갑옷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소년은 창대를 아무렇게나 쥐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순간, 얼굴이 굳어 버렸다. 왜 저러는 거지. "다, 당신은 혹시 여신님인가요?" 여신…?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를 하지 못해 난 잠깐동안 고민을 해야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가 내게 여신이냐고 묻는지 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난 여신이 아냐. 그리고 로제… 어째서 네가 여기있는 거니?" "내 이름을 어떻게…? 이 목소린… 서, 설마." 그가 팍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린다. 예쁜 석양빛의 눈동자… 전에 거리에서 보았던 그 소년이다. 설마 이런 곳에서 재회하게 될 줄이야. "칼… 리체?" "응." "너, 너, 너, 너어…!?" 나도 깜짝 놀랐다. 무슨 반응이 이리도 격한지… 로제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동그란 눈으로 자신이 놀랐다는 것을 마구마구 표현하고 있었다. "도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거야? 이곳은 위험하다구!" 난 성벽 바깥을 힐끗 바라보았다. 백작과 후작의 진영은 조용했다. 그리고 저들끼리 싸우느라 이곳까지 공격이 닿을리도 없다. 결국 이곳이 위험하다는 그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흠, 어쨌건 로제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어야 겠군. "난 마법사야." "어…?" 그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듯, 다소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물음을 무시하며 말했다. "넌 왜 여기있니? 네 어머니는 어쩌고." 로제에게 가장 중요한건 그의 어머니일 것이다. 어째서 그의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머지않아 전쟁터가 될 이곳에 나온걸까. "어, 어쩔수 없잖아…! 내 힘으로 다른 일을 해서 어머니를 모실수는 없으니 병사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온거지 뭐. 여기선 숙식도 해결해주니 굶을 걱정없고, 봉급도 어머니께 가니…" "하지만, 이곳은 죽을수도 있는 곳이잖아?" 난 로제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고뇌와 괴로움이 짙게 어려 있었다. 그는 치열하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생명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눈동자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는 냄새를 풍기는 자들 역시 좋아하지. "어쩔수… 없잖아." 그는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그래, 나처럼 말도 안되게 강대한 힘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닌 평범한 피조물들은 필연적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을 겪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 낼수 밖에 없겠지. 나는 그가 부럽다. 내게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란게 발생할 일이 있을까, 이렇게 인간을 '가장'하고 있을때가 아닌 진실된 내 힘을 다 드러내고선 말이다. 아무래도 내게는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진정으로' 평범한 피조물들을 이해할 날은 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 "으, 응?"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뭐가 묻어서 보기가 민망한 건가. 손으로 대강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뭔가, 묻은건 없는것 같은데… 난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이 싸움에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으, 응! 고, 고마워…" 네가 다치면, 내가 두번째로 본 자식과 부모의 관계라는게 깨지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어쩐지… 그건 굉장히 탐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 감정이란 것은 정말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와 헤어졌다. "칼리체, 우울해 보여." "제가요?" 우울해 보인다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우울함이라는 것일까. 베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칼리아넬과 다툰게 걱정되는 거지? 지금쯤이면 아마 정원에 있을테니, 가서 화해하는게 어때?"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원인은 칼리아넬에게서 기인한건 아니지만, 지금 그녀의 화를 풀어주는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공기가 얼굴을 때리며, 약간 멍해져 있던 정신을 일깨운다. 밤 하늘은 평소와 다르게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지 않았다. 아마도 성 밖에 진을치고 있는 후작과 백작의 진영에서 곳곳에 세워놓은 횃불들로 인한것 같았다. 나는 인간들에 의해 훼손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칼리아넬이 있다는 정원을 향해 걷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의 현자, 베르센크를 보게 되었다. 그는 눈빛을 흐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평소의 시니컬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아 나는 그가 원래 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깨달았다. "아, 칼리체 님. 오랜만이군요." "그리 오랜만에 보는것 같지는 않다만…" "하하, 저희 인간들의 기준으로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면, 오랜만인거죠.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어리석은 질문이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는 대답없이 공허한 웃음을 흘리곤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이라… 벌써 이런 질문을 받을때가 온건가. 하지만 아직은 그가 원하는 답을 간단히 내려줄수 있을 정도로 내가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 충분치 않다. 그래도 내가 느낀점을 약간이나마 말해주어야 겠지. "인간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살아가더군." "뭐, 그렇지요…" "항상 무료하게 살아가는 내가 인간에게서 가장 인상적이게 느낀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았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던 베르센크의 눈에 약간 생기가 깃드는것 같다. 그는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표정만으로 원하는 바를 읽을 수 있는 이 능력은 참 신기한것 같다. 굳이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있으니까. "인간들은 사회를 이루지, 그리고 그 사회속에서 인간은 정지할 수가 없다. 외부의 요인 때문에 말이야… 지금 나는 '경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 지요." 베르센크는 약간 힘겨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는 이득은 없을지라도 손해는 겪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지. 때문에 너희 인간들은 항상 경쟁이란 것에서 발을 뺄 수 없는 것이다." "…" "말하자면, 너희 인간들의 삶을 주도해 나가는것은 너희 자신이 아니라 바로 타인이라는 것이다. … 때문에 경쟁하지 않는,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는 너희는 반드시 도태될수 밖에 없다." 그래, 이게 사회를 이루고 있어 끊임없이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인간과 홀로 완벽해 사회를 이룰 필요가 없는 우리 드래곤의 가장 큰 차이다. 베르센크는 아무말 없이 내 말을 곱씹고 있다.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인간들의 사회를 살펴본지 얼마되지도 않은 내가 금방깨달은 내용이니, 현자라 불리는 그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리 없다. 나는 다만, 내가 그동안 느낀바를 간단히 말해주었을 뿐. "네, 칼리체 님이 말한 내용역시 제가 인간에 대해 슬퍼할 수 밖에 없는 또하나의 이유겠지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정원 쪽에 볼일이 있거든." 칼리아넬을 만나봐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만남에 시간을 좀 빼앗겨 버리고 말았군.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려 정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인, 이라는 건가…"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사의 손에 잘 다듬어진 풀숲을 헤치고 시야에 들어온 정원의 호수위에 칼리아넬이 서있었다. 호수의 표면에 올려진 그녀의 발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형성되어 호수의 중앙에서 끝으로 물결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마력 행사다. 호수의 표면은 칼리아넬 정도의 질량이 서있을 수 있을만큼 표면 장력이 강하지 않다. 그녀의 마력 행사는 인공적인 냄새를 거의 찾을 수 없어, 나는 그녀가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호수위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것 치곤… 꽤나 정교한 마력 행사였다. 인간으로 치면, 칼리아넬 역시 뛰어난 마법사겠군. 이런 단편적인 것만 보고선 내리는 판단이지만 말이다. 나는 잠시 칼리아넬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나무뒤에 서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아래 비친 칼리아넬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꽤 성숙해 보인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지금은 우울한 빛을 띄고 있어서일까. "하아- 칼리체 님…"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내 이름을 언급한다. 아마도 나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칼리아넬." "으으와앗-! 카, 칼리체 님!" 내가 불쑥 나타나자 그녀는 크게 당황했는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첨벙-! 하는 소리를 내고는 물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왠지 미안한걸… 칼리아넬은 한참 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않다가, 내가 계속 그 자리에 있자 숨을 참지 못했는지 푸홧- 하는 소리를 내며 호수의 표면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그 모습이 대단히 귀여워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로나벨아크하임처럼 나도 이들에게 꽤 많이 물들어 버린걸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이리 나오렴." "…" 내 말을 듣지 않고 그녀는 오히려 호수속으로 고개를 더 넣었다. 이젠 청록색으로 반짝 거리는 투명한 그녀의 눈동자와 녹빛 머리카락밖에 보이질 않는다. "칼리아넬?" "으우! 죄송해요 칼리체 님!"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긴채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기다리면 다시 올라 올테지만… 나는 부츠를 벗었다. 하얗고 뽀얀 맨발로 약간은 따가운 풀의 느낌이 전해져 온다. 발이라 해도 피부는 꽤 얇아서 꽤 간질간질 하다. 나는 부츠를 땅바닥에 남겨둔채로 몸을 던져 호수 속으로 들어왔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으로 차가운 한기가 깃든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서 보이는 호수속 풍경은 환한 달빛으로 인해 선명하게 보였다. 칼리아넬은 호수의 바닥 한 가운데서 눈을 꼭 감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긴 녹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져 달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두운 곳에서 환히 빛나는, 숨겨진 에메랄드를 보는 느낌이랄까. 물속에서… 음, 팔 다리를 이렇게 움직여야 하나. 잠깐 당황했지만, 곧 물속에서 균형을 되찾고, 나는 칼리아넬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는지 꼭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듯 그녀의 입에서 약간의 공기 거품이 맺혀 위쪽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고선 호수 바닥을 가볍게 차고 호수 표면으로 떠올랐다. "푸하-!" 나는 여전히 칼리아넬을 세게 끌어 안은채로 숨을 가다듬었다.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이리 괴로워 해야 한다니, 조금 불편하군. "카, 칼리체 님…" 차가운 물의 느낌, 봉긋 솟은 그녀의 가슴과 쿵쾅 거리며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박동, 그리고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내 피부위로 전해져 온다. 나는 그 감각을 느끼며, 눈을 감고선 물었다. "왜 내게서 도망치려는 거니?" "그, 그야… 칼리체 님이 제게 화가 났으니까…" 흠… 어리둥절 하군. 내가 칼리아넬에게 화가 난게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화난게 아니었나. "내가 어째서 네게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거니?" "… 제가 제멋대로, 소리치곤… 무례하게…"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긴다. 딱 보아도 대단히 난처해 하는 모습이다. "우,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으와아앙! 죄송해요!! 칼리체 님. 흑, 절 싫어하지 흑, 말아주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흑…" 말을 하며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음, 그러니까…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울수 밖에 없다. 칼리아넬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와 그녀는 물에 흠뻑 젖은채로 호숫가에 앉아 몸을 말리고 있었다. 싸늘한 밤바람 때문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군. "이제 좀 진정이 되니?" "네에…" 칼리아넬은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게 화를 냈던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던 걸까, 며칠동안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지냈는데,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나는 내가 본래는 용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칼리아넬에게 주지시키려는 것을 그만 두기로 했다. 나는 현재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렇다면 칼리아넬이 나를 인간으로 보고 걱정해 주는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미안해." "네…?" "네 생각은 안하고 멋대로 행동해서 말이야. 하지만… 에카테야르를 구하려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단다." "… 그런가요." 칼리아넬의 목소리에 약간 활력이 깃드는것 같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고, 내가 그녀를 싫어하게 될까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던것 같다. 내가 그럴리 없다는걸 그녀에게 확실히 인식시켜 주고, 이제서야 그녀는 확실히 안정을 되찾은듯 싶다. 그런데… 그냥 내게 화를 낸것 만으로도 이렇게 큰 부담을 갖다니, 칼리아넬은 내가 많이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칼리아넬." "네." 음, 그러니까… "너는 나를 좋아하니?" "네에-!?" 어딘가 잘못된 질문이었나? 그녀는 나조차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 하고 떨 정도로 격렬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얼굴이 터질듯 붉어지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 좋아해요." 마치 중요한 어떤 것을 고백하듯, 그녀는 급격히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구나." "… 칼리체 님은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 라는 건 내가 태양을 좋아하는 것과 동일한 것일까? 그것은 내가 고귀한 의지를 가진 자를 좋아한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 인것 같다. 어쨌든 어떤 의미로든 내가 칼리아넬을 좋아하는건 사실이다. "나도 널 좋아해." 칼리아넬의 귀여운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게 탐탁치 않은 건가? "의미가 틀려요." "응?" "의미가 틀리다구요. 칼리체 님이 저를 좋아한다고 말한것과, 제가 칼리체 님을 좋아한다고 말한건 서로 의미가 틀리다구요."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이다. 이제 아까의 그 시무룩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화가 풀린것 같아서 다행이군. 그런데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가 다르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어디가 틀린거니?" "흥, 그런건 칼리체 님이 스스로 찾아봐야할 문제라구요." 칼리아넬은 다소 쌀쌀맞게 나에게 쏘아붙인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남겨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나는 얼떨떨 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찾아봐야 한다라…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횃불에 의해 오염된 하늘이지만 커다란 달만은 고아한 빛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칼리아넬, 그녀가 남겨둔 말은 지금의 내게는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것 같다. 성벽 밖에선 후작과 백작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뿌연 먼지와 모래가 군마와 인간들에 의해 뿌옇게 피어오르고, 이곳까지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후작과 백작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싸움의 원인 정도야 알고 있다. 자세한 사정은 관심이 없어 모르지만, 후작과 백작은 영지 사이에 있는 작은 평야의 소유권을 두고 싸우고 있다 한다. 서로의 이익이 걸린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저 병사들은 이 싸움에서 이겨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있을까. 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의 명령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니?" 누군가의 손이 턱- 하고 내 머리에 얹힌다. 위를 올려다보자 베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것이 보인다. "베델…" 아, 이참에 그에게 물어봐야 겠군. "응?" "칼리아넬이 절 좋아한대요." "어? 아, 서로 화해했구나! 잘되었어!" 그는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이 인간은 별일도 아닌것 가지고 굉장히 기뻐하는 군… 하지만 왠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래서 저도 좋아한다고 대답했죠." "응, 그래서?" 왠지 기분이 묘하군. 내 말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은 꼭… 뭐랄까, 나를 대견하다는 듯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왠지 대화가 다소 유치해진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무시하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칼리아넬이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것과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한것이 서로 다른 의미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도저히 어떤 뜻인지 모르겠는데, 베델은 알것 같나요?" "…" 그의 표정이 왠지 미묘하다. 이해가 가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 아, 내가 벌써 이렇게 표정을 능숙하게 읽을수 있게 된건가? "그, 글쎄다." "모르겠나요?" 실망스럽군. 그라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역시 그에 대한 해답은 내 스스로 찾아야만 하나… 나는 베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성벽 바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전과 다르게 굉장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것 같다. 어쩌면… 오늘안에 결착이 날지도. "백작이 승리하고, 후작은 패배해서 급히 자신의 영지로 후퇴했다는군." 침대에 엎드려서 '빨대'라는 요상한 물건으로 컵속에 달콤한 액체를 마시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말하는걸 들어보니, 원래 후작측의 전력이 백작측보다 월등했나보죠?" "응, 백작이 도저히 이기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사실 왕실쪽에서 보자면 백작보다 후작이 승리하는게 더 낫거든. 그런 식으로 아나킨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아직 후작은 왕에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는것 같았으니 말이야." "백작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요?" 이 '빨대'라는게 신기한지 나를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던 칼리아넬이 베델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칼리아넬은 '충성심'이란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까? 요정에겐 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백작은, 글쎄… 어떨려나." 베델은 대답하길 주저하고 있다. 백작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형편 없는 모양이다. 아나킨에서 쫓겨나 앙심을 품고 있을 후작이 승리하는게 더 낫다고 평가할 정도니 말이다. 어쨌건, 지금이 기회인것 같군. 나로선 후작측이던 백작측이던 왕실측이던 어디가 이득을 보든간에 관계 없다. 내겐 에카테야르를 구하면 그뿐인 것이다. 베델에겐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일단은 좀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것 같아." 난 좀더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그것이 지루해질 즈음에 밖으로 나와 성벽위로 올라갔다. 성벽바깥의 평원엔 베델의 말대로 백작의 진영밖에 보이질 않았다. 이제부터가 문제로군, 백작이 왕실을 적대하느냐, 하지 않느냐. 사실 어느쪽이든 마릴렌 공주로서는 탐탁치 않겠지만 말이다. "아, 오랜만이오. 칼리체 양."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성벽의 계단으로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 당신은." "이런, 벌써 내 이름을 잊은 것이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안녕하세요, 기사 베르딧. 당신의 이름을 잊을리가 있겠나요. 그때 베델과 싸우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으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망각이 없는 내가 그의 이름을 잊을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것 아니었소."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는것 같다. 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곤,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소?" "백작의 진영을 보고 있었죠. 저들이 곧 이곳을 도모할 지도 모르니까요." "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에 참 거침이 없구료. 그런데 아가씨가 그런것엔 왜 신경을 쓰는것이오? 아가씨는…"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의아한듯 바라본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마법사로서 공주를 돕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보다. "베델과 같이 저도 공주님을 돕기로 했거든요." "흠, 마술사가 분명 큰 전력인것은 맞지만…" 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이다. 아마도 어린 소녀로 보이는 내가 전장에 참여한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내가 마법사라는 말을 하면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분명 바뀔테지만, 굳이 시선을 바꾸고자 그러말을 할 필요가 없기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다시 성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음, 어쨌건 전투가 시작되면 아가씨는 뒤로 빠지시오. 아무리 마술사라 해도…"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 아니오. 그것보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는게 좋겠소. 그렇게 바람에 휘날리게 되면 적의 주의를 끌지도 모르니 말이오." 그의 말에 나는 내 긴 백색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분명,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있다가 칼리아넬에게 묶어달라고 부탁해볼까… 라고 생각하는 찰나, 백작의 군대가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성벽 위에 병사들은 모두 동요한채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베르딧은 심각한 얼굴로 급히 성벽을 내려갔다. "어쨌든 조심하시오, 아가씨." "당신도 다치지 마세요!" 내 외침에 그는 뒤를 힐끗 돌아보고 씩- 웃더니 다시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군.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야 인간들 사이에 섞여, 그들의 갈등에 '참여' 하는 것이다. 기대… 까지는 아니지만,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 될것 같다. 백작의 군대는 성문에서 약간 멀찌기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일단은 대화를 해볼 생각인가? 확실히 이정도 거리라면 서로 얼굴이 보이고 목소리가 충분히 닿을만한 거리다. 내 예상대로 백작의 진영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성문 앞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슈테른 백작이군. 성벽엔 그란셸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모두 창을 치켜세우고, 꼿꼿히 서있었으나 모두 표정들이 불안한게, 그리 믿음직해 보이진 않았다. 백작은 그런 성벽위의 병사들을 힐끗 보고는 피식-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당장 군대를 거두시오, 슈테른 백작. 아나킨의 성문 앞에서 지금 당신의 군대고 취하고 있는 행동은 반란과 하등 다를게 없다는걸 모르는 것이오!?" 성문의 바로 위에서 그란셸이 백작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란셸… 이번 일이 당신이 안고 있는 책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일이 되겠군. 그의 모습은 산적의 두목 노릇을 할때나, 아나킨의 사령관을 맡고 있는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하-? 기사 그란셸?" 백작의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그란셸처럼 크게 외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이곳까지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아마도 마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미 파면당한 기사가 사령관이라니, 왕실의 수준도 알만 하군." 슈테른 백작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적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란셸은 그의 모욕적인 말에도 평정을 유지하며 딱딱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정녕 왕실에 반기를 들 셈인가, 슈테른 백작?" "흥, 이름 뿐인 왕실 따위에…" 백작은 비웃음을 흘리며 허공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 빠른 속도로 거대한 마력이 모이며, 그 거대한 마력 행사로 바닥에 있던 모래와 먼지가 휩쓸려 나간다. 그란셸은 본능적으로 백작이 마법을 시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쏴라!" 성벽 뒤에 숨어있던 석궁을 든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쿼렐을 발사했다. 백작은 마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완전 무방비. 하지만 백작이 바보가 아닌이상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겠지. 멀리서 팅- 팅- 하고 쿼렐이 튕겨나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작의 앞에는 어느새 기다란 금발을 기른 예쁜 소녀가 마치 그믐달 같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에카테야르… 그녀는 백작앞에서 날아오는 쿼렐을 쳐내고 있었다. 마력장 같은 것은 구사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쿼렐은 수도 없이 날아왔고, 그녀는 그것을 일일이 쳐내지 못하고 몇발 정도가 몸에 박혀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채로 여전히 쿼렐을 쳐내고 있다. "…" 화살받이 로군. 백작은 냉정한 눈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선 성문 쪽으로 손을 가볍게 내리 그었다. 공간을 격하고, 찢어버리는 마법. 그 강대한 마력의 행사 앞에, 단단해 보이던 성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이, 이게 마법이란 말인가…"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린다. "전군, 아나킨을 함락시켜라!!"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마술로 퍼져나가는 듯한 백작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마, 막아라! 모두 성문쪽으로 내려가 저들을 막으란 말이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들이 발작적으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모두 성문쪽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막아내기는 힘들겠지. 나는 성문쪽을 힐끗 바라보곤 이미 성벽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백작과 말위에서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에카테야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꽤 하는군… 저 인간. 방금 성문을 부숴버린 마술은, 아니, 마법은 성문이 있는 공간과 자신의 앞에 있는 공간을 연결시킨 후, 손에 강력한 파괴 마술을 머금고 그 공간을 그어버린 것이다. 그냥 물리력을 가진 마력을 성문에 날려 버렸다면 내가 막아낼수 있었을 텐데… 백작은 아마 에카테야르에게서 내 존재를 들은것이겠지. 어쨌든 지금이 기회다. 나는 성벽을 잡고,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렸다. "마, 마법사님!?" 뒤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들이 막 성문 안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나는 성벽에서 뛰어내려 중력 역전의 마술로 성문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히, 히익-!?" 내가 갑작스레 머리 위에서 나타난 탓일까, 인간들은 괴상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성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한채 주춤주춤 물러 섰다. "카, 칼리체!? 거기서 뭘하는 거야!!" 인간들의 시끄러운 함성 소리에 섞여 베델의 고함 소리가 흩어졌다. 주변이 너무나도 시끄러워 하마터면 듣지 못할뻔 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광경은 그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베델은 마술을 쓰지 못할텐데… 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때, 베델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옆에 착지했다. 성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백작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나도 화들짝 놀라서 그만 바닥에 넘어질뻔 했다. "너 제정신인거야!? 맙소사!, 혼자서 성벽에서 뛰어내려 성문 앞을 막아서다니!!" 베델은 다급하게 검을 뽑아들며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제가 성문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저들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우리 앞에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의 병사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할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그만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 베델이 흉악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일단 너는 빨리 성문 안으로 들어가라구! 여긴 내가 막아설 테니까!" 베델은 나를 세게 밀치며 말했다. 그는 어지간히 당황했던지 힘조절을 하지 못한채 나를 있는 힘껏 뒤로 밀었고, 나는 거의 뒤로 나동그라지듯 밀려나고 말았다. "앗-!"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 바닥에 살짝 쓸린 걸까, 피부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통증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상처를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급히 베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는 단신으로 저 커다란 성문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야아아!" 병사 여러명이 베델에게로 달려든다. 자신들의 압도적인 수를 믿은듯 그들의 얼굴엔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베델이 기다란 장검을 뽑아들고, 온몸을 이용해 휘두르는 듯한 위압적인 횡베기가 행해지자 그들은 그 표정 그대로 몸이 반으로 갈라진채 바닥으로 나뒹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내 얼굴에 까지 튄 피를 닦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베델." 그는 성문의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수십명의 병사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의 긴 장검이 한번 휘둘러 질때마다 병사들 몇명이 피를 튀기며 허공으로 솟구친다. 이미 그의 검이 미치는 영역에 들어오는 자는 그 목숨이 없는것이나 진배 없다. 인간이… 마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저렇게 강한 힘을 소유할 수가 있을까. 뒤를 힐끗 돌아보니 성문으로 달려왔던 병사들은 베델을 도와줄 생각도 못하고 멍청히 서있었다. 저것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피잉,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나는 마침내 우려했던 것이 등장했다는걸 깨달았다. 전에 보았었던 나무로 만든 장거리 무기. 이름이… 활, 이라고 했었던가. 아무리 베델이라지만 자신의 검의 영역에 미치지 않는 곳에서의 공격은 도무지 어쩔수가 없겠지. 베델에게로 끊임없이 달려들던 백작의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이내 그들 사이로 활을 가진 병사들이 나와 베델을 겨누었다. "… 칼리체, 도망쳐!" 그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앞으로 세우며 내게 말했다. …이 인간은 구제할 수 없는 바보다. 도무지 나는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군. 여기서 내게 도망치라고? 그건 그가 그 자신의 목숨보다 내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째서…? 하지만 의문을 해결할 시간은 없다. 나는 달려나며 베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난 알지 못하겠다. 내가 그의 앞을 막아섬과 동시에 베델을 겨누고 있던 수십발의 화살이 발사되었고,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마력을 전개했다. 마력이 마치 화산처럼 급격히 폭발하며 내 앞엔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전개되었다. 그 증거로 수십발의 화살이 바로 눈앞에서 튕겨났다. "후우…" 아슬아슬 했군. 손을 들어올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저 화살을 온몸에 꽂은채 숨이 멎고 말았겠지. 인간의 몸은 마술을 사용하기 전에 이런 선행 동작이 행해져야 해서 불편하단 말야… "카, 칼리체! 도대체 너…" "베델, 당신은 제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었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순히 강한 확신만을 가지고 내게 했던 말. "지금 당신의 행동이 그 말에 부합되는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게 언행이 불일치 해서야 제 생각을 바꿀만큼 설득력을 가질수 있겠나요?" 베델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얼굴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야. "당신 혼자서 싸우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이 그렇게 경외하는 마법사 잖아요?" "그래도… 넌 어린 여자애 잖아." "…" 그만두자. 이 인간과는 이런 류의 대화는 도무지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난 아무말 없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저도 같이 하죠." "너…!" 곧 바로 백작의 병사들이 우리에게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이 날 말릴 틈은 없었다. 차라리 나는 그것이 기꺼웠다. 나는 베델과 등을 맞대고 넓은 성문을 지키기 위해 양옆으로 뛰어드는 병사들까지 모두 상대해야 했다. 정말… 아나킨의 병사들은 뭘하고 있는거야. 베델은 거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며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다. 하지만 나는 목숨을 빼앗는것이 탐탁치 않아 그저 손을 휘둘러 마력장으로 상대의 팔 다리를 잘라 내었다. 근원의 신비에 그리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마력장. 때문에 이미지만 할 수 있다면 이 마력장을 검으로 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말 말을 안듣는구나 칼리체는." 내가 왜 이자의 말을 들어야하지? 그는 아마도 스스로가 내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그가 그리 생각하는것도, -나는 나에게 달려드는 병사의 다리를 마력장을 휘둘러 잘라낸다.- 나쁘지 않겠지. 아니, 오히려 기꺼워 해야하나. 인간과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은것이 아닌가 그것은. 나는 베델을 힐끗 바라본다. 전투 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 그는 지금 내게 있어, 가장 '특별한' 인간이다. 난 그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제와는 그 생각의 원인이 다른, 무언가…… 이것이, 걱정이란 건가? "칼리체." "…" 베델이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막무가내로 우리에게로 달려들던 병사들이 조용히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금발의 소녀와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슈테른 백작이 나타났다. 상대방 측의 가장 강력한 전력이 지금 이곳에 등장한 것은 베델에게는 불행이겠지만, 내게는 상당히 기쁜 일이다. 하마터면 저 많은 병사들 사이를 돌파해 저들을 찾아야 할뻔 했다. "단 두 명이서 성문을 막고 있다니, 무슨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도 아니고… 그대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슈테른 백작이 무 감정하지만, 일견 비웃는 듯이 들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에카테야르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투명한 유리알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둘의 성격이 비슷하니, 이렇게 보니 정말 부녀지간 같이 보인다. 실제론, 백작의 일방적인 지배이지만… "베델이오." "칼리체." "베델…?" 백작이 픽- 하고 웃는다. "이름한번 잘 지었군. 고대 영웅의 이름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서있는 베델이란 이름을 가진자는 단 두명이서 성문을 막는 것으로 영웅적인 행적을 남기고 있고 말이야." 그는 마치 농담하듯이 말했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여전히 냉막한 채다. "그리고 칼리체… 라고 했나. 정말 인간같지 않은 미모로군. 거기다가 마법사라…? 내 노리개 정도로는 딱이겠군." "당신…!" 베델이 분노한 표정으로 슈테른 백작을 노려보았다. 장검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백작은 그가 아닌 바로 나를 조롱하고 있는데, 화는 베델이 내고 있다. 그 사실에 나는 이유없이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베델의 분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는 지금 일부러 베델을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슈테른 백작님." "말은 필요 없지 않나. 단 두명이서 성문을 막은것은 대단하긴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라네. 에카테야르, 둘을 해치워라." 그는 내 말을 무시하며, 에카테야르에게 손짓했다. 난 앞으로 걸어나오는 에카테야르를 잠깐 바라보다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다. 성문을 제외한 성벽엔 공성 병기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작과의 전투에서 공성병기가 전혀 필요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백작은 후작을 이기는 것을 확신하고 아나킨 까지 도모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성벽에서 백작의 병사들에게로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지만 이곳은 성문 바로 앞이었기 때문에 이곳까진 화살이 닿지 못하는 모양이다. 뒤를 잠깐 돌아보자 아나킨의 병사들이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창대를 들고 우리의 뒤쪽에 서있었다. 재미있군, 한 무리의 군대가 나와 베델, 단 두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니 말이다. 잠깐 주변 상황을 모두 살펴본 나는, 앞으로 걸어나온 에카테야르를 무시한채 백작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저 호문클루스를 만든 지식과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지요?" "무슨 소릴…" 백작은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마력을 개방시킨 내 드래곤 아이(Dragon's eye)로는 그가 동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역시, 저 힘은 온전한 백작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저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저 호문클루스의 수준은 인간의 마술 지식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최상의 신비에요. 어디서 그런 지식과 힘을 얻은것이지요?" 이제 백작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채, 명백히 굳어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흥, 그 힘이 내것이 아니라 해도 내가 너에게 대답을 해야할 의무는 없지 않나? 에카테야르, 그녀를 죽여버려!" 에카테야르의 손에는 어느새 그믐달 모양의 검이 들려있다. 순식간에, 그녀의 무기로 강력한 마력이 스며들고, 그녀는 내게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백작이 그녀에게 모종의 마술을 건 것인가… 이거, 피할 수 없겠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사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내 몸은 그 사고에 따라가지 못해 너무나도 느리게 느껴졌다. 그녀가 천천히 내게로 짓쳐드는 것이 보이고, 나는 곧 나의 죽음을 예감했다. 음… 여기서 죽어야 하다니, 어쩔수 없군. 내가 체념을 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선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누군가는 바로 베델이었다. "베델…?"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돌아볼 시간조차 없는 것이겠지. 베델은 기사 베르딧에게서 새로 얻은 장검을 똑바로 세운채로 에카테야르에게 맞설 준비를 한다. … 멍청하게 내 앞을 막아서다니, 이 구도는 정면으로 그녀에게 맞서 그는 저번처럼 그녀가 휘두루는 재앙을 벗어날 기회조차 없다. 곧, 그는 나에게 향하는 공격을 가로막고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어째서 이 인간은 이렇게 목숨을 쉽게 포기하는 것이지? 물론 대답은 알고 있다. 바로, 나- 때문에. … 그는 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된다. --------------------------------- 그래서, 나는 시간을 멈추었다. --------------------------------- 나에게로 달려들던 에카테야르도, 백작의 병사를 노리던 화살도, 나를 노려보고 있는 백작도,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베델도 모두 정지해 버렸다. "후…" 나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인간의 사회속에서 어울리며 살아갈때는 필요 이상의 힘은 쓰지 않기로 생각했건만, 이 인간 때문에 그 생각을 깨버리게 되었군. 난 정면에서 베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굳은 결의로 다져진 미남형의 얼굴… 쳇, 그냥 바보다 이놈은. "하아, 정말 바보같군." 사실 시간을 멈추는 이 마술은… 마법에도 미치지 못한다. 즉, 그리 수준높은 것이 아니란 소리다. 그저 내게서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속도를 한없이 무한으로 수렴하도록 수정하면 되는 것이니까… 다만 인간이 이 마술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은 수명 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명을 가진 인간이 이 마술을 사용한다면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서 자연사 해버리고 말겠지. 그야말로 이것은 이 세계에서 무한의 수명을 가진 우리 드래곤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술이다. 반대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물들의 시간을 늦춰, 정말로 시간을 멈추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지금의 이 모습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난 베델을 못마땅하게 흘겨 보다가 괜히 정강이를 한대 걷어찼다. 하지만 그의 정강이는 꽤 단단해서 내 발 역시 아파옴을 느꼈다. "…" 자, 어차피 도가 넘치는 힘을 사용했으니, 그냥 이대로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야 겠다. 백작에게는 정말로 유감이지만… 내게 흐르고 있는 시간을 본래대로 돌리게 되면 그는 아마 완전히 사기당한 기분이 들겠지. 미안하군, 백작. 나는 느린 걸음으로 에카테야르에게 다가갔다. 검을 휘두르기 직전의 동작으로 멈추어 있는 모습. 한 생명을 베어내기 직전인데도 그녀의 눈빛엔 아무런 감흥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참으로 불쌍한 모습이다 이것은. 손바닥을 그녀의 뺨에 대어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내게 전해졌다. 그녀의 정신과 마음역시 이렇게 차갑게 얼어붙어 있겠지. "…" 이게 무슨 느낌인지 나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가슴이 묘하게 답답한 것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해 나는 이것을 빨리 털어내 버리고 싶었으나 이것은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서 잔류할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에카테야르의 뺨에 갖다 대었던 손을 때고, 차가운 눈빛으로 베델을 응시하고 있는 백작을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인간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든채 자신의 종으로 만드는 불쾌한 기술을 이 소녀에게 시전한 자다. 이 자는 지금껏 내가 보아온 인간이라는 종족의 모습에서 크게 어긋나있다. 아마도 현자 베르센크는 이런자들만을 주로 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종족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역시, 드래곤인 나는 잘 모르겠다. 문득 로나벨아크하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면 내가 궁금해 하고 있는 부분을 쉽게 해결해 줄수 있을텐데. 뭐, 쓸데없는 생각은 여기서 관두고 일단 백작과 에카테야르의 링크부터 끊어야겠군. 나는 마력과 신력을 끌어올려 내 본연의 힘을 불러들였다. 내 눈은 다시금 강력한 드래곤 앙로 변모했고, 나는 그것을 통해 백작과 에카테야르의 링크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실처럼 보였다. 난 손을 들어 그 링크를 끊는듯한 행동을 해보였다. 행위엔 의념이 깃들어 있다. 그것의 가장 간단한 예는 지금 내가 마치 실처럼 보이는 링크를 끊으려 손을 휘두른것이다. 하지만 실처럼 보인다 해서 링크라는 것이 실제로 실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실을 끊는것처럼 손을 휘두르는 행위는 무용하다는 말이지. 그러나- 내 행동으로 백작과 에카테야르를 잇던 단단한 링크는 거짓말처럼 간단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내게는 행위에 담긴 의념을 어렵지 않게 현실화 시킬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끝났다. 나는 멈추었던 시간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와아아아! 중간에 뚝 끊긴것처럼,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여유로운 기분으로 베델에게로 달려들던 에카테야르가 우뚝- 멈추어 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음? 뭐하고 있는 거냐 에카테야르! 그자를 베어버려라!" 백작의 명령에도 그녀는 아무 반응 없이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듯,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를 조종하던 실과 너의 영혼을 더럽히던 그 검기만 하던 세계에서 해방된 기분이 어떠니, 에카테야르. "…" 그믐달 모양의 칼이 힘없이 그녀의 손에서 늘어져 버린다. 그녀가 무방비하게 헛점을 보이자 베델이 섬광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라면 저항하지 않는 에카테야르를 다치게 할리가 없을 테니까. 내 생각대로 베델은 그녀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했을뿐, 그녀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봐, 정신차리라구 아가씨." 베델은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력이 흩어진 그녀의 가느다란 몸이 베델의 품속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이, 이럴수가…! 링크가 사라져 버리다니!?" "제가 끊어버렸습니다. 슈테른 백작, 호문클루스라는 것은 그 존재 만으로도 너무나 불행한것 아닌가요?" 나는 말을 하고난 뒤, 그런 말을 꺼낸 내 자신 스스로에게 놀라버렸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우연찮게 눈을 마주친 베델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보내왔다. "당연히 불행하지. 하지만 그 불행은 내것이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것과 나의 링크를…"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베델의 품에 안겨있는 에카테야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두고 '그것'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백작은 그녀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지도 않는 건가. "하지만 에카테야르를 잃는 것으로 이 전투의 승부가 결정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직 내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려는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의 야망이 나라는 변수 하나 때문에 산산히 깨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저번에 그류벨의 일에 끼어들때도 그랬지만, 인간의 원망이 나를 향할때마다 나는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슈테른 백작." 그란셸이었다. 그는 뒤에서 군대를 지휘해야할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훤히 보이는 성벽 앞으로 나와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기사 그란셸. 허세 따위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하지만 그란셸이 허세를 부리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무슨 비장의 수라도 있는 것일까.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던 나는 어느샌가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는걸 눈치챘다. 겁을 먹어 창대도 제대로 들고 있지 못하던 아나킨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에 행해지는 공격에 반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들이 한순간에 저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나킨의 병사들이 선전하고 있다 해도 백작의 병사들은 강병, 패색이 완연히 짙어지는 것을 간신히 벗어나 평수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이제는 어느 쪽이 이기게 될지 예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군. "이이…! 어차피 성문을 뚫려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성문을 돌파해라!" "칼리체!" 분노에찬 백작의 외침이 다시금 성문을 향하자마자, 베델은 나에게로 다가와 품에 안고 있던 에카테야르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몸은 무척이나 가벼워서 근력이 약한 나라해도 손쉽게 부축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녀를 부탁해! 나는 저들을 막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당신 혼자서 어떻게 저 많은 수를…" 그는 내 말도 듣지 않은채 몰려드는 백작의 병사들을 막으러 앞으로 달려나갔다. 정말 골치아픈 인간이라니까. 앞으로 달려나간 베델은 앞으로 달려나간 힘을 이용해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휭-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며 두명의 인간이 그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 베델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적어도 지금 그의 움직임에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것에 대한 주저함은 없어보인다. 전쟁이란 것에도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이라는게 있는걸까, 베델은 그런것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난 전쟁이란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이야아아아!!" 베델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정말로 혼자서 성문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 뒤로 덜덜 떨고 있던 병사들이 귀가 먹먹해 질정도의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성벽을 끼고 싸우는 병사들과 다르게, 그들은 백작의 병사와 바로 무기를 맞대야 하기 때문에 그 부담이 더할 것이다. 공포에 떨고 있던 저들이 무엇 때문에 없던 용기가 생겨 저렇게 달려들수 있는 걸까. 나는 에카테야르를 품에 안은채, 그 자리에 계속 서서 베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결국 왕실은 백작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백작을 붙잡지는 못했고, 여전히 그의 영지에는 그의 세력이 남아있을 것이다. 후작도 그럴것이고 말이다. 왕실은 완전한 승리는 거두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리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올라갔겠지. 창문 밖으로 부상자들을 옮기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그곳에서 시선을 떼고, 커튼을 치고는 뒤돌아 서서 침대쪽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는 에카테야르가 기다란 금발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린채 잠들어 있었다. 백작의 딸로서, 그녀는 왕실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그녀가 백작의 꼭두각시 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호문클루스라… 결국 백작에게 그 이야기는 듣지 못했군. 음… 그녀를 통해서, 어떻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무시무시한 재앙을 휘두르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리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백작의 지배에서 해방된지 얼마 안된 상태, 그렇다면 그녀에게 아직 잔류 마력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잡은 손을 통해 그녀를 살펴보았다. … 이것은, 흐릿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아직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그렇다면, 좀더 강력한 링크가 필요하겠군. 나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타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진다. 과연 눈을 뜬 후의 그녀는 억눌려 있던 감정을 되찾고, 내게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 모를 일이다. 쓸데 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나는 그녀의 입을 약간 벌리고 그녀의 입에 내 입을 맞추었다. 가장 강력한 링크(Link)는 서로 입을 맞추어 마력의 통로를 연결 시키는것, 이제 어렵지 않게 그녀에게 남겨진 '흔적'의 출처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인간이 사역하기에는 너무나 고도의 기교와 마력 체계를 필요로 하는 기술, 호문클루스의 제작 비법은… 마경(魔境)에서 비롯된 것이군. 그녀의 내면에 남아 있는 호문클루스의 흔적이…, 아니 그녀는 여전히 호문클루스인것이 맞다. 그녀는 그저 호문클루스라면 피할 수 없는 타인의 지배를 피해간 것일뿐… 근원까지 끊어버리는 나의 마법으로 말이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더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의 기억을 갖고 있는 내 지식속에서도 마경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외부 세계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그런것일수도 있지만. 에카테야르와의 링크로 알아낼것을 모두 알아낸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파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 그녀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는 나로선 알수가 없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잠시 네게 남았던 잔류 마력을 살펴본것 뿐이야." 나는 에카테야르의 위에서 내려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얼마 동안이나 슈테른 백작의 지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에게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얼굴에 띄우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백작의 지배에서 풀려난 기분이 어떠니?" "백작… 아버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것이겠지. 호문클루스의 마법은 생각마저도 통제할 수 있는 마법이니, 그녀는 아마 처음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사고하는 중일 것이다. "내가… 어떻게 된건가요?" 아무래도 그녀에겐 일단의 상황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것 같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상황 설명 말이다. "당신을 기억해요." "…" 아무말 없이 내게서 한참이나 설명을 듣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나는 아마도… 필사적으로 죽고 싶어했던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이 그 바램을 실현시켜 주려 했었죠." "응." 에카테야르는 눈가를 찌푸렸다. 순간, 내가 뭔가를 실수 했나 생각했지만, 그녀가 눈가를 찌푸린 이유는 단순히 커다란 창문에서 들어오는 환한 태양광에 눈이 부셨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 약간의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또한 끝까지 아버지… 아니 백작의 지배에서 탈출하고 싶어했죠." "응, 그랬어." 그래,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구하리라 마음먹었던 이유. 그렇게 간단히 언급하지 마라,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고결하고, 또 훌륭한 의지 였으니까. 음, 내 표현 부족에 스스로 언짢음을 느낀다. 그녀는 대단하다. 호문클루스의 마법, 그 영혼마저 옭아매는 저주를 그녀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라해도 그녀를 이렇게 온전히 구하지는 못했겠지. "그리고 당신이 그런 나를 백작의 손에서 구해주었군요, 고마워요." 아직 익숙치 않을 탓일까,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백작의 지배하에 있을때와 별 다를게 없어 보인다. 고저가 없는 딱딱한 목소리에, 인형같은 얼굴. 하지만 그녀는 이제 분명히,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흥, 하지만 방금 당신의 행동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잠든 사이에 입술을 훔치다니, 무척이나 불쾌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파렴치한." 음… 그래, 보통의 인간이다. 나는 깨어난 에카테야르와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기로 했다. 그녀는 묵묵히 내 뒤를 따르며 느리게 고개를 돌리며 정원 곳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정원 구경이 목적이라기 보단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자신의 신체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그녀는 백작의 지배를 받고 있을때의 기억이 있는 걸까. "그때의 기억이요…?" "응." 내 물음에 그녀는 생각해보는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부분, 부분은 기억이 납니다만 대부분의 기억은 제 머리속에 남아있지 않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가요, 칼리체 씨." "으음." 어쩐지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다소 적대적인것 같다. "칼리체 님!" 저쪽에서 녹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발소리도 나지않게 달려오더니 내게 폭- 안겨 버렸다. 이젠 상당히 익숙해진 행동이다. "아무데도 다친데가 없어보여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칼리체 님! 그런데…" 칼리아넬의 동그란 눈이 내 등뒤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카테야르에게로 향한다. 그녀의 눈이 사납게 변한다. "이 나쁜 여자애는 왜 멀쩡히 서있는거지요?" 이런, 곤란하다. "당신은 누군데 제게 그런 말을 하는건가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에카테야르의 얼음장 같은 태도에 칼리아넬은 주춤 주춤 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은 사납게 변한채로 에카테야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흥, 나는 칼리아넬…" "당신의 이름을 묻는게 아닙니다." 에카테야르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자,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훨씬더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까. "아, 모두 여기 있었구나!" 베델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등장했다. 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로선 그의 등장이 대단히 기꺼웠다. "오, 깨어났구나! 그러니까 이름이… 에카테야르, 였던가." 그는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에카테야르를 마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니…?" 베델, 당신이 이 상황을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군. "하아, 둘다 무슨 고집이 그렇게들 쎈지… 정말 힘들었다." 베델은 테라스의 난간에 양팔을 기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을 느끼며 테라스의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붉은 석양빛에 물든 정원은 나를 괜히 별것도 아닌 사색에 잠기게 만든다. "수고하셨어요." "하핫, 뭐 수고랄것 까지야." 베델은 기쁘게 미소짓는다. "칼리체, 네가 말한대로 에카테야르를 백작의 손에서 구했구나." "네, 구해내었죠." 나는 정원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그에게 대꾸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이 정원이 아니라, 베델의 반응이었던것 같다. 나는 정원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지만, 베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선 나를 응시하는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분이 어때?" 이상한 질문이네… 그저 동정심에 행한 일에 기분을 묻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한 질문에 나는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흐흠, 그래?" 베델은 내 대답은 뭐든 좋다는 듯, 연신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서서 정원을 바라본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볼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그는 내 반응에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넌 많이 변했어, 칼리체." 변했다구, 내가? 물론 변하기야 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결코 변치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말 뿐이니까. "어디가요?" "음, 뭐랄까… 반응이나 사고가 조금 인간다워 졌다고나 할까, 솔직히 널 처음 봤을때는 인간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 마음 한켠이 조금 뜨끔한 기분이다. 확실히 그때는 내가 인간들의 사회에 얼마 나온지 않되었기 때문에 외부에 보여지는 내 행동은 상당히 미숙해 보였을 것이다. "어때, 산골에서만 살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대끼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 그래, 베델은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는 산골에서만 살아 다른 인간과 교류가 없어 인간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는 내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기쁜 모양이다. 그에게 다소 미안한 기분이 드는군… 그가 알고 있는 내 신상은 진실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내가 백룡이란 사실을 밝히는 것은 웃긴 일이지. "응…?" 베델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진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자, 그는 마치 '잘했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씨익- 하고 웃음지었다. 내 표정이 조금 이상했던 것일까, 그는 약간 당황하며 내 머리에서 손을떼었다. "아, 혹시 기분 상했니? 나도 모르게 괜히 널 볼때마다 머리를 쓰다듬는것 같애서…"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저 머리를 쓰다듬는건데, 기분이 상할리가 없지. "아아, 그것보다 칼리체, 네게 다시한번 사과해야겠는걸…" "왜요?" "괜히 너까지 싸움에 말려들게 했으니까 말이야. 놀라지는 않았니? 사람이 바로 앞에서 죽는 광경은 무척이나 끔찍하니까 말야." "제가 스스로 자초한 일인걸요." 처음으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전투에 참가한 것이 그리도 마음에 안드는 걸까. "너무 위험한 짓이었어. 그러다가 네가 잘못되면 어쩔뻔 했어?" 그는 팔짱을 낀채로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냉엄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나는 이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베델은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내가 전투에 참가한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납득가지 않는 점이 아직 남아있다. 나는 인간들에게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나의 참가는 반겨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델이 그런 나의 행동에 대해 화를 내는것은 그가 이 전투의 승리보다 내 안위를 더 중요시 한다는 걸까… 뭐, 궁금한건 지금 그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그에게 진정하라는 뜻에서 그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흐트러져 버렸다. "베델, 전투의 승리보다 내가 더 중요했던 건가요?" "… 으, 으, 으응?" …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붉어진것 같다. "마법사인 내가 전투에 참여한다면 승률은 오를것이 분명한 일인데, 베델은 그런 나를 말리려 했잖아요. 그것은 베델이 전투의 승리보다 나를 더 우선시 했다는것 아닌가요?" "으으, 그렇게 너무 직선적인 어조로 말하지 말라구. 무서우니까."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직선적인 어조라고? 그럼 어떻게 물어봤어야 했단 말이지? 이제 인간의 사고방식을 어느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오게 되면 나는 그 생각에 자신이 없어진다. "아닌가요?" 어쨌든 대답이나 듣자. "마, 마, 맞아." 그의 얼굴은 이제 금방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붉어져 있었다. 이 질문이 그가 이정도로 당황할 만큼 이상한 것이었던가? 의아하군. 밤바람이 더 싸늘해 지자 추워진 나는 테라스에서 벗어나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아마, 벽난로라고 했던가? 이것은 무척이나 감탄할만한 발명품이다. 난 이 벽난로 근처에 흔들 의자를 가져다 놓고 눈을 감고서 온기를 쬐었다. 따뜻한데다가 부드럽게 흔들 거리기 까지하니, 무척이나 나른한 기분이 든다. 내 본래의 몸으로는 절대로 느끼지 못했을 감각… 난 점점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타닥 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을 보며, 나는 내 보금자리에 몸을 뉘이고 과거의 행적을 반추했던것 처럼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비록 오랜 시간을 이곳, 인간들의 사회에서 보낸건 아니지만… 많다면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리고 그 일들을 겪고 나니 로나벨아크하임이 했던 말이 약간은… 아주 약간은 이해가 가는것 같기도 하다. 내 이런 모습을 보면, 너는 이제 '멍청한 백룡'이라는 그만해줄까, 로나벨아크하임.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이 문득, 그를 생각케했다. "칼리체 님!" 내 회상을 방해하며 당혹감이 깃든 목소리로 이 공간의 고요한 분위기를 깨트린것은 칼리아넬 이었다. 난 과거를 회상하는 중에 방해를 받는것에 익숙치 않아, 잠깐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었던것 같다. 아까 막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던 칼리아넬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내 눈앞에 서있으니까. "… 무슨 일이니?" "그, 그 나쁜 여자애… 그러니까 에카테야르가 인간들에게 잡혀갔어요!" 칼리아넬은 양팔을 가슴께에 모으고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당황해 하고 있다. 그녀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도… 칼리아넬은 역시 착한 녀석이다. 그나저나… 걱정하던 일이 터져버렸군. 왕국의 수도 아나킨으로 공격을 감행했던 백작, 그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이다. 마법사로 알려진 내가 잠깐 그녀를 맡고 있긴 했지만… 반역자가 되어버린 백작의 딸이라고 알려져 있는 에카테야르는 결국 이렇게 잡혀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더이상 에카테야르에게 도움을 주어야할 이유는 없다. 나는 영혼까지 침범당한 그녀가 너무나도 불쌍해 그녀를 호문클루스라는 족쇄에서 구해주었고… 다만, 그 뿐이다. 그 이후로 그녀가 반역자의 딸로서 왕실에게 어떤 처분을 받든간에 나는 별로 상관할 일이 아니란 말이지. 죽임… 당할려나. 나는 여전히 내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리아넬이 에카테야르의 신체적 존속을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해줄수 있다.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역시, 한번 인연을 맺은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는것은 물론… 아무렇지도 않지만… 음, 기분이… 영 찜찜하다고나 할까. "일단 베델에게 가보자." 그 말을 하며, 나는 내가 알게 모르게 베델에게 꽤 믿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으음, 역시나…" 베델은 에카테야르가 끌려갔다는 소릴 듣고 침음을 삼켰다. 그도 에카테야르가 왕실에 억류될 것이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무슨 바보같은 생각을… 그는 '인간'이 아닌가. 나도 예상한 것을 그가 예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칼리체, 에카테야르는 아직도 그… 마법을 쓸 수 있어?" 그 마법이란 '벤다'라는 속성을 무한으로 수렴하는 마법을 가르키는 것이겠지… "네, 백작의 지배력을 끊었다고 해서 그녀가 갖고 있던 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마력을 사역할 수 없을거에요. 백작과의 링크가 끊어지며 그녀는 자신의 마력 체계를 재구축 해야했을 테니까요." "다행이구나. 지금 여기서 그녀가 그 힘을 사용해 왕실에 반항했다면 무척이나 곤란 했을테니 말이야." 베델은 한숨을 쉬며, 다소 안도한 어조로 말했다. "뭐가 다행이에요? 그 말은 에카테야르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 인간들에게 잡혀가서 무슨일을 당할지 모른다는거 아녜욧!" "하하, 칼리아넬… 너, 그녀를 싫어하는것 같더니 실은 걱정하고 있었구나?" 베델은 나즈막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인간은 남의 머리를 쓰다듬는게 취미인걸까…? 칼리아넬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녀가 조종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에카테야르가 원해서 그렇게 된 일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거든요." 그녀는 잠깐 동안 몸을 숙이고 있다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며 외쳤다. "아! 그거에요, 조종!! 왕실의 사람들도 에카테야르가 조종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녀를 풀어주지 않을까요?" 난 그녀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그만 깜짝놀라, 옆에 앉아있던 베델의 발을 밟고 말았다. 미안해요 베델- 하고 조용히 중얼거리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안다해도 왕실은 그녀를 풀어주지 않을꺼야." 베델은 어두운 안색으로 칼리아넬의 말에 대답했다. "네-? 하지만… 하지만 에카테야르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된게 아니잖아요!? 슈테른 백작이라는 자 때문에, 그자 때문에…" "내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에카테야르가 백작의 딸이고, 백작은 반역 행위를 했고, 그녀는 그곳에 참여했었다는 것이지." "에에- 그런게, 그런게 어딨어요!? 그녀는 그냥… 조종당했을 뿐인데…" 칼리아넬의 안색이 무척이나 어두운걸 보니, 그녀는 에카테야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다. 원래 인간을 무서워했던 그녀였으니, 더욱 그럴지도 모르지. "걱정하지마." 베델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우습게도, 난 아무 근거 없이 결의만 가득찬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아마 여기 일꺼야." 베델은 작은 수풀 뒤에 숨어서 머리 위쪽의 창문을 가리켰다. 칼리아넬이라면 모를까… 그는 자신이 저 작은 수풀 뒤에 완전히 숨어지리라고 생각하는걸까. 음, 쓸데 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우리는 지금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 마릴렌 공주의 방일거라 추정되는 창문 아래에 숨어있다. 베델은 그녀를 직접 설득시킬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왜 이런 시각에, 몰래 만나려는 것일까. 몰래 만나려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 시간이면 공주도 잠들어 있을텐데. "으음… 저정도 높이라면 어떻게든 올라갈수 있겠는걸." 저 높이를…? 대충 내 키에비해 네 다섯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다. 내 키가 작다곤 하지만 저정도 높이는 그냥 올라갈수 있는게 아닌데… 새삼 베델의 무지막지한 신체적 능력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게 된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중력을 역전시키는 마술을 사용하면…" "왕실내에도 마술사는 있어, 네 마력 행사가 그들에게 걸리지 않을거라 장담할 수 있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 능력은 대단히 제한적인 상태라 그의 말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 칼리체 님과 저는 어떡하구요?" 칼리아넬이 내 옆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음, 그건…" 베델은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둘다 내가 안고 뛴다." "헤에- 베델, 자신있나요?" 칼리아넬은 비음을 흘리며 베델에게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엔 의심스런 미소가 돌고 있는 것이- 당신이 그걸 할 수 있겠나요? 라고 비꼬듯 묻는것 같다. 요정이란 녀석이… 이렇게 인간다운 표정을 짓다니, 그녀에게 감도는 신비가 왕창 깎여나가는 느낌이다. "할 수 있을거야."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없는것 같기도 하다. 그저 확신하지는 못하는 건가? "그럼 칼리체 님 한명만 안고 뛰면 저곳에 도달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한명만이라면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러면 너는…" "저는 어렵지 않아요." 칼리아넬은 베델의 말을 끊으며, 자신의 행동으로 증명하려는듯 가볍게 도움닫기를 한뒤 벽쪽으로 도약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탄력있는 점프력으로 한순간에 그녀는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공중에서 몸을 돌려 반대편의 나무를 차더니 창문위에 도달해 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기 까지 난 소리라고는 나무를 찰때 조그맣게 툭- 하고 난것이 다였다. 그 소리조차 너무 작아서 아마 우리가 있는곳 정도까지 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카, 칼리아넬?" 베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고 있다. "흐흥,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 이런 일로 다시한번 그녀가 요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군. 그나저나 이러고 있으니 그녀의 치마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베델도 그걸 보았는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칼리아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있는데… 음, 언급하지 않는게 그녈위해 좋을것 같다. "카, 칼리체. 잠깐 실례할께." "네, 얼마든지." 베델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난 눈을 꼭 감았다. 붕- 하고 거친 풍압에 내 백색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흔들린다 싶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창가 위로 올라와 있었다. "후에-! 이만큼의 높이를 단 한번의 도약으로 올라오다니, 당신 정말 인간?" "뭐, 뭐야 갑자기 그런 말투는…" 베델은 칼리아넬의 말에 대꾸하며 나를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주었다. 눈을 뜨고 대강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 셋은 창가쪽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네모난 돌덩이 위에 올라서 있는 상태였다. 살짝 몸을 숙여 창문 안쪽을 바라보았는데, 안쪽은 불을 완전히 꺼두었는지 어둠에 깊게 잠겨 있어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데 이거… 어떻게 열지." "베델, 바보죠?" 베델은 칼리아넬의 말을 무시하며 끙끙대며 창문을 밀었지만, 안에서 잠궈두었는지 창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습지만, 싸늘한 새벽 바람이 휑 하고 불어오자 나는 빨리 공주의 방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으… 춥다. 옷을 너무 얇게 입었나.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베델이 연것도 칼리아넬이 연것도 아니었다. "들어오세요." 창문을 연것은 다름아닌 마릴렌 공주였다. "아… 하하, 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왠지 잠이오질 않더군요. 그나저나 당신들은 도대체 왜 이곳에… 대강 이유를 알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녀는 탁자위에 놓여진 촛대에 불을 붙이고는 침대위에 걸터앉아 처음 만났을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싸늘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했다. 공주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에카테야르를 벌하실 생각입니까?" 베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왕실의 귀족들 대부분은 그녀를 처벌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백작에게 조종당한것 뿐이라구요!" 칼리아넬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분한 감정을 느끼는지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댔다. 마치 억지를 부리는 순수한 어린애 같은 모습이다. 마릴렌 공주는 칼리아넬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고는 있지만…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그녀가 조종당했다 하더라도, 명분이라는게…" "애써 그렇게 냉정히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베델의 말에 마릴렌 공주는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전 공주님이 상냥한 사람이란걸 알고 있습니다. 상냥한 분이 아니라면 그때 제게 그런 이야기들을 하셨을리가 없을테니까요. 공주님도 그녀를 벌하는 것이 그리 탐탁치는 않으시겠죠?" 내가 그때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내용을 말하는 걸까. "…" 공주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에카테야르가 잡혀 있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우리는 그녀를 구해 지금 당장 조용히 이곳에서 사라지겠습니다." 흐릿한 불빛 사이로 공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게 보인다. 그녀는 무엇에 동요하고 있는 걸까. "당신은 용병이지만, 아나킨을 구한 영웅입니다. 보상과 명예를 모두 마다하고 지금 당장 그녀만을 구하고 이곳을 떠나겠다구요?" "그렇습니다." "이상한,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그녀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가 왠지 슬퍼보인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입을 완전히 다물어 버렸다. "당신들이 구하고자 하는 그녀는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요. 지하 감옥은…" 마릴렌 공주는 곧 한숨을 쉬더니, 우리에게 그녀가 갇혀 있는 감옥의 위치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녀는 왜 이런 사실을 이토록 쉽게 알려주는 걸까…? 베델이 이렇게 늦은 밤에 몰래 공주를 찾은것부터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지만. 뭔가… 공개적으로 공주에게 에카테야르의 사면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나는 내 짐작이 대강 맞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공주가 잠깐 언급했던 인간들의 '명분'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겠지. 머리속이 다소 복잡하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저희는 시간이 없으니 얼른 에카테야르를 구해 아나킨을 빠져나가겠습니다." "베델." 베델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공주는 그를 불러세웠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일국의 공주가 왕실을 구해준 사람에게 해줄수 있는게 이런 말밖에 없다니…" 그는 약간 놀란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다 이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뒤돌아 서는 베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공주의 눈빛에 아련한 감정이 맺혀 있는것 같다. 베델이 창문쪽으로 나가자 그의 뒷모습을 향해있던 공주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당신도요… 신비로운 마법사 님." 난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칼리아넬과 함께 창문쪽으로 나섰다. 아직 왕실을 괴롭히던 후작과 백작의 갈등은 끝난것이 아니다. 둘은 모두 살아있고, 공주는 그들을 이겨내야만 하겠지. 결국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만 하겠지만… 나는 베델을 힐끗 돌아보았다. 항상 남을 못 도와줘서 안달인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와 칼리아넬, 에카테야르의 일만 아니었으면 그는 아마 공주를 끝까지 도왔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뭣들 하고 있는건가?"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우리는 당황해서 고개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홱 돌렸다. 벌써 발각 된건가…?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깨닫고 손에 약간 모아두었던 마력을 흩어버렸다. 기절시키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군. 목소리의 주인은 현자, 베르센크였다. "칼리체…?" 그는 베델을 의식했는지 현명하게도 내 이름 뒤에 '님'같은 것 따위를 붙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난 잠깐 이자와 할말이 있으니 먼저 가서 에카테야르를 구해주지 않겠나요, 베델. 그리고 칼리아넬도." 베델에게서 주저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내가 없다고 해서 에카테야르를 구하지 못할 일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동요하는 걸까. 그가 굳이 나와 같이 가겠다고 주장한다면 조금… 곤란한데 말이야. "알겠어, 금방 에카테야르를 구해서 이곳으로 올게. 칼리아넬 가자!" "어…? 저, 저기…!" 베델은 왠지 가기 싫어하는 것으로 보이는 칼리아넬을 억지로 끌다시피 데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감옥은 그리 먼곳에 있지 않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는 겁니까, 칼리체 님." "그래, 에카테야르를 이곳에 놔두었다간 분명히 죽임을 당하고 말테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녀가 죽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질 않습니까?" 베르센크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물론이다. 나야 상관없지… 하지만 베델과 칼리아넬은 가만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칼리아넬과 베델이 사라진 방향을 고갯짓으로 가리키자, 그는 현자답게 바로 그것을 알아들었다. "그들 때문이군요… 어리석습니다. 그녀를 구출하고 이곳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추격대가 파견될 것입니다. 뭐, 그때의 전투를 보니 추격대 따위에 어찌될 친구는 아닌것 같지만요." "어리석다…?" "네, 어리석습니다. 그 커다란 공로와 명예와 부를 내팽개 치고 반역자의 딸을 구하러 가는 그가 어리석지 않다면 이 세상에 그 누가 어리석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베델은 확실히 어리석은 자로군."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 다른 인간들로 하여금 진실한 마음을 이끌어 내었다. 내가 과연 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있을까. "하하, 그렇게 말씀하셔도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역시 현자 녀석, 눈치가 빠르군. 그는 잠깐동안 침묵을 지키다 다시 입을 열었다. "… 역시 칼리체 님은 상냥한 분이셨습니다." "응?" "에카테야르라는 호문클루스 말입니다. 결국 칼리체 님이 구해주셨잖습니까." 아아,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군. 하지만 그런것으로 내가 상냥하다니… 별로 탐탁치 않은 평가였다. 나는 그저, "그 녀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하, 그게 상냥하다고 하는 겁니다." "…" 아니, 그 표현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베델이나 칼리아넬에게 어울리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아무말 없이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곳을 떠나시면 한동안은 보지 못하겠군요. 저는 언제쯤 당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글쎄… 네가 죽기전에는 들려주겠다고 약속하지." "그것 참 안심이 되는군요." 순간 바람이 세게 불어와 내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휘날렸다. 나는 팔을 벌려 긴 머리카락을 안아 내 품에 고정시켰다. 머리카락을 자르던가 묶던가 해야지, 바람이 불때마다 이렇게 귀찮다니… "사실…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때 보았던 그 거대한 드래곤이 지금 저보다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게 말입니다." 소녀는 아니지만 말이다… 뭐, 굳이 그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신경 쓸거 없다. 내가 만약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분명 지금 이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이게 내 본질이란 소리지." 태어났다면… 이라. 나는 태초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을테니 사실 저것은 틀린 가정이다. "호오, 그렇습니까…" 난 고개를 돌려 칼리아넬과 베델이 사라졌던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실루엣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벌써 에카테야르를 데리고 돌아온 모양이다. … 정말 능력도 좋은 인간이다. 베델은. 베르센크도 베델들이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시볼 그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루루렌칼리체 님." "응."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생각했다. 베르센크, 네가 원하는 답은 어쩌면… 베델이란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좀 떨어지시죠, 이 파렴치한." 지금 우리는… 정확히 말해 나와 에카테야르는 함께 하나의 말을 같이 타고 있었다. 아마 이 말은 베델이 마구간에서 훔쳐온 모양인데. 아, 그는 놀랍게도 훔쳐온 말이 있던 자리에 말에 상응하는 재화를 얹어두고 도망쳤다고 한다. 정말 다른 의미로 대단한 인간이야. 음, 어쨌든 얼결에 내가 에카테야르와 함께 말을 타게 되었는데… 아, 물론 고삐는 그녀가 쥐고 있다. 나는 말을 탈줄 모르니까. 문제는, 그녀가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나와의 신체적 접촉을 꺼린다는 것이다. … 입술이 닿은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허리를 꽉 잡지 않으면 내가 떨어질지도 몰라." "흥." 그녀는 그렇게 되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조심해! 말하고 있다가 혀를 깨물지도 몰… 윽!" 이미 저번에 한번 경험해봐서 그 정도 쯤이야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의를 주던 사람이 혀를 씹는 경우는 뭘까요, 베델. "바보로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에카테야르도 혀를 걱정하는건지 빠르게 말하고는 바로 입을 닫아버렸다. …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군. 나는 에카테야르의 허리를 꽉 안은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게 많은 일을 겪게하고, 느끼게 해주었던 아나킨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문득 그때 잠깐 만났었던 로제라는 소년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다치지 말았어야 할텐데 말야… 베르센크는 추격대가 파견될것이라 말했지만 아직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마릴렌 공주가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뭐, 모를 일이다. 하여간 추적이 없다는건 우리로선 기꺼워할 일이지. 한참 동안 말이 땅을 박차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가 시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 졸음이 쏟아짐을 느꼈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기에 느낄수 있는 이 노곤함, 나는 그것을 즐기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이 졸음을 참울수 밖에… "그만, 이제 좀 쉬었다 가도 되겠어." 막 동이틀 무렵이 되서야 우리는 이름모를 숲속에서 말을 멈추어 세웠다. "후암- 너무 졸려요." 칼리아넬은 말에서 폴짝 뛰어내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길게 하품하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애써 참았던 잠이 다시 몰려왔다. "…" "에카테야르?" 모두 지치고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루터기나 커다란 바위에 털썩 앉아 버렸다. 하지만 에카테야르만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고삐를 쥐고 빤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야 물어볼 기회가 생겼군요… 당신들은 어째서 저를 구해준거죠?" "응?" "어째서 저를 구해준거냐구요. 당신은 아버지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니 왕실에서 큰 포상을 내릴텐데, 왜 그걸 포기하고…" 에카테야르는 베델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백작을 아버지라고 칭하는군… 아직 과거의 기억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건가. "응, 그건… 아무 죄도 없는 네가 사형을 당할 판이니, 어쩔수 없는 일이잖아."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베델을 에카테야르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녀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그녀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베델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큰 이익을 내팽게 친것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베르센크와 똑같은 평가로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베델은 당신을 구하려고…" "바로 그게 어리석단 말입니다." "흥! 바보-! 너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구해진거다, 뭐!?" "이젠 말을 막하시는군요…!" 둘이 싸우는건가? 베델은 둘 사이에 껴서 난감한 얼굴로 그녀들에게 손을 내젓고 있다. 꽤나 애 먹는군… 나는 팔로 턱을 괴고 느긋한 심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감상하기로 했다. 추격자들도 아직 이곳에 도달하기까지는 먼 모양이고. 아니, 아예 안올지도 모르지. "카, 칼리체- 너도 좀 말려줘!" "…" 이런 형식의 갈등은 전쟁이란 것과는 달리 꽤 유쾌한 느낌이라 나는 슬그머니 베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난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 위에 엎드려서 다리를 흔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가 한판 벌여서 그런지 둘다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으로 아직까지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 베델은 가까운 곳에 냇가를 발견해, 그곳에서 씻고 있는 중이었다. 음… 아직까지 왕실에서의 추격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냈는데 아직까지 추적이 없다는 것은, 이후로도 추적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아마 내 생각대로 공주가 모종의 조취를 취해준 모양이다. 다행인 일이지, 그들의 추격을 피해 계속 이동하려면 무척이나 번거로울테니 말이다. 지나친 여유로움에 권태감을 느끼고 있는 나지만 그런 종류의 바쁨은 아무래도 싫다… 엎드린채 앞으로 내민 손에 노랑색 나비가 날아든다. 손을 간지럽히는 이 감각은 내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때만 느낄수 있는 것. 단순히 나비가 내 손안에 날아든것 만으로 나는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또한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내 손안에 잠시 머물던 나비는 날개를 팔랑이며 다른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다소 아쉬움을 느끼며 주먹을 쥐고 나비가 남겨 놓은 미약한 존재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당신, 그런 표정도 지을줄 아는군요."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새 에카테야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어떤 표정?" "… 그런 표정." 난 엎드려 있던 바위에서 내려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표정이 도대체 무슨 표정이란 거야. "제 입술을 빼앗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는것 하며, 단 한번도 웃지 않는걸로 미루어 보아 저는 당신을 파렴치한에다 냉혈한으로 판단했었습니다." "으음…" … 무슨 소릴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좋은 소리를 하는것이 아니란건 확실히 알아 들었다. "지금은 아니란 소린가?" "당신이 파렴치한인건 확실하지만 냉혈한이라고 판단했던것은 조금 재고해봐야 겠군요. 방금 당신이 나비를 바라보며 지은 표정은 굉장히 따뜻해 보였으니까요. 아… 내가 어쩌자고 이런 소리를…" 그녀는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어제 발견한 냇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씻으러 가는 걸까. 그런데 혼자 말하다 갑자기 화를 내다니, 정말 모를 인간이군.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베델?" "음, 글쎄…" 칼리아넬의 물음에 베델은 허리에 매어져 있는 검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내가 행선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지 않아서 다행이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습은 깊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아나키스트 왕국에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많았는데…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니 원. 한동안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저 때문에… 미안하군요." "앗, 딱히 너를 두고 한 말이 절대 아니었어! 미, 미안해-!" 에카테야르의 한마디에 베델은 쩔쩔매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어디든 괜찮아요. 베델이 안내해 주는데로 따라가기로 했으니까-" "칼리체, 그건 내 부담을 덜기 위해서인지 더하기 위해서인지 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구나…" 어감이 조금 미묘했나? 어쨌든 간에 우리들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아나키스트 왕국에서 빨리 몸을 피해야 한다. 때문에 정말 어디든 상관 없다고 말한건데 말이다… "결정했어, 우린 카스텔 공화국으로 간다!" 카스텔 공화국이라…? 분명, 로엘가스트 연맹과 아나키스트 왕국 사이에 있는 조그만 소국이라고 들은적이 있다. 베델이 무슨 이유에서 그곳으로 가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난 나에게 재미있는 경험만 하게 해준다면 좋다. "아, 베델." "응?" "가는 길에 잠시 바루에르 가문의 저택에 들릴수 있을까요?" "그, 그곳에…? 들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왜?" 그류벨 룬헤임 바루에르, 내가 가장 처음만난 인간이라 할 수 있는자.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의지를 똑바로 관철시킬수 있었던 원인, 에네리아 룬헤임 바루에르. 그 둘을 지금의 내가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베델에게 본 목적을 똑바로 말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에네리아가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요." "아, 그래…" 베델은 내가 단지 그 이유만으로 바루에르 가문에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것 같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 그럼 일단 바루에르 가문부터 들리도록 하자." 베델이 하품을 하며 말이 있는 쪽으로 가고 나서 나는 에카테야르 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는 어디 가고 싶은곳 없니?" 그녀의 무감정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호문클루스에서 벗어난 그녀는 지금 접하는 세상이 무척이나 낯설것이다. 나는 그 때문에 그녀와 내가 상당히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처음 접하는 이 인간들의 사회가 무척이나 낯설으니… "가고 싶은 곳…" 기억나지 않는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쫓는듯, 그녀는 눈빛을 흐린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가을이 되면 금빛 물결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곳, 석양이 지면 그곳은 항상 제 가슴이 두근거릴… 다홍빛으로 가득 물든 세계가 되곤 했죠. 저는 항상 그 광경을 높은곳에 올라가 내려다 보곤했어요…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서 제가 그곳을 정말로 안다- 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가고 싶은 곳은 바로 그곳이에요." "…" 호문클루스가 되기 전… 을 말하는 걸까. "언젠가, 내가 그곳에 데려다 줄까?" 불쑥 그렇게 말하고는 나 스스로 놀라버렸다. 나도 모르게 나는 어떻게 그녀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겠다는 장담을 했을까. 스스로 의도치 않은 발언에 잠깐 몸이 굳어 있을때, 에카테야르가 내게 희미한 미소를 보여주었던것 같았다. 흔들 흔들, 세상이 흔들린다. 위 아래로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세상은 내게 불쾌한 어지러움을 안겨준다. 역시 말이라는 동물을 타는 것은 아무래도 싫다. 나는 눈을 감은채로 베델의 단단한 등에다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어지럼증이 덜해질까? "카, 칼리체…? 아직도 안 좋니?" "네, 조금 힘드네요." 난 그 상태로 고개만 돌린채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이 있는쪽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 자주 다투긴 해도 사이가 좋아졌는지 간간히 미소를 띠며 대화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칼리아넬에게 에카테야르는 두번째로 가까이서 접하는 인간이었구나. 에카테야르는 베델과 달리 그녀와 같은 여성이니, 대화 화제가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카테야르, 희미하긴 하지만 미소짓고있다. 그 미소는 굉장히 예뻐서 내 시선을 계속 빼앗는다. 나도 저런 미소를 지어볼 수 있을까. 베델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한쪽 팔을 풀어 얼굴을 만져보았지만 미소가 지어지지는 않은것 같다. "베델." "응?" "미소짓는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글쎄…" 내 질문이 무척이나 이상할법 한데도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는듯 말끝을 흐렸다. "그런 질문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해." "왜죠?" "미소라는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것이거든. 그러니 칼리체, 네가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언젠간 너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수 있을 테니까. 아니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미소를 지어보았을 수도 있고 말이야." 베델의 대답엔 언제나 그렇듯, 한줄기의 따스함이 베어 있었다. "아, 이제 곧 니하크할룬에 도착하겠구나. 저녁때가 되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말야." 그는 먼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저 멀리 도시의 윤곽이 보이는것 같기도 하다. 그류벨과 에네리아,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군. "흐음…" 어두워진 니하크할룬의 거리는 내 기억속의 그때와 분위기가 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약간의 어두움이 덧씌워져 있었다. 베델도 그것을 눈치챈건지 의아한 시선으로 도시 전역을 훑고 있었다. "이곳은… 아나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꽤 발달한 도시군요." 에카테야르가 신기한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 표정이 조금… 그래 보이네요." 칼리아넬도 도시 전역을 감도는 어두움을 눈치챈건지,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 어찌되었건 일단 여관부터 잡자고." 베델이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는 듯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게 서로 맞부딪 치더니 말을 끌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칼리체." "응?" 에카테야르 였다. 그녀는 싸늘한 밤 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채 내게 다가와 베델과 칼리아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제서야 묻는거지만… 당신, 정말 남자인건가요?" "…응." 갑자기 이건 왜 묻는거지? 사실 성별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달가운 주제가 아니다. 난 아직 여성도 남성도 아니니까, 대답을 하기 위해선 항상 거짓을 섞어야만 한단 말야. 거짓말이란것… 만능의 언어를 쓰던 내게는 익숙치 않은 것이니까, 항상 불편함을 느낀다. 에카테야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믿을 수가 없다는 걸까. 일단, 나는 그녀가 납득할 수 있도록 그녀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놀랐는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게 보인다. 난 그녀의 손을 잡은채 내 가슴께로 붙잡은 손을 얹었다. 여성은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있으니, 직접 확인시켜주면 일단 그녀는 납득할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져 그 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뭐, 뭘하는 건가요…!?"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한두걸음 물러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은 마치 붉은 사과처럼 벌게져 있었다. "왜 그래?" "우으…" 내 물음에도 그녀는 대답치 않고 고개를 홱 돌려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베델과 칼리아넬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또 내가 뭔가 잘못해버린 모양이다. 의도치 않은 잘못을 그녀에겐 이걸로 벌써 두번째로 범해버리고 말았군. "난 마굿간에 말을 묶어놓고 올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들어가 있어." 베델은 그렇게 말하곤, 말의 고삐를 잡은채 여관 뒤쪽으로 돌아가버렸다.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여관의 창문… 하지만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것은 그 불빛 말고도 또다른 하나가 있었다. "칼리체 님. 뭐하세요, 안들어가고…?" "지금 들리는 이 소리…" 무엇으로 내는진 모르겠지만, 듣기 좋은 가느다란 소리였다. 고, 저로 구분되는 그 예쁜 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인다. 하지만 조그만 창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노래 말씀하시는 거에요?" "노래…?" "안에 음유시인이 있나 보군요." 음유시인…? 나는 중얼거리며 에카테야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는 흥- 하며 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화가 풀릴려면, 한참 시간이 지나야 할것같군. 나는 한숨을 쉬며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소리는 가느다란 줄이 여러개 달린 알 수 없는 도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탁자 위에 걸터 앉아서 그 도구를 이용해 소리를 내며 노래라는 것을 부르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로나벨아크하임? 지금 이곳에 어째서 네가… "…" 의미 없이 흥얼거리는것 같기도 하고 그가 들고 있는 도구에서 나는 소리로 그의 말이 묻히는것 같기도 해서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이 뭐라고 노래부르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여관 안의 모든 인간들은 그의 노래 소리에 완전히 매료되었는지 여관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에게 단 한명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에요…" 칼리아넬은 양손을 맞잡은채 눈을 감았다. 말은 안하지만 에카테야르도 그녀와 비슷한 심정인듯 하다.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이 녀석을 만날 줄이야. 그는 평소 거침없고 사나운 성정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채로 노래를 마쳤다. "와아아아-! 저, 청년 정말 대단한걸!" "이봐, 한곡 더 불러 주지 않겠나!?" … 등의 감탄사와 환호성이 떠들썩하게 여관 안을 울렸다. 나도 모르게 귀를 막을 정도로 대단한 환호성이었다. 여관 지붕이 들썩 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와아, 정말 대단했어요!" 칼리체는 흥분해서 볼이 발그랗게 달아올라진 채로 손뼉을 짝- 하고 쳤다. 하지만 나는 굳어진 채로 입구에서 그대로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로나벨아크하임… 서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만나서 일까, 정말 묘한 기분이다. 그 묘한 기분 때문에 나는 선뜻 그에게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거나, 금화를 건네는 사람들을 모두 상대해 주며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내가 미리 그의 인간일때의 모습을 알아두지 않았다면, 아무런 위화감 없이 지나갔을 정도로 그는 완전한 인간 처럼 보인다. "칼리체?" 굳어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에카테야르가 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으며 악수하는 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칼리체… 라고?" 그가 진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 나는 인간들의 표정을 왠만큼 식별할 수 있는데, 그의 미소는 상당히 악해보여 왠지 꺼림찍한 감정이 들었다. "으…" "칼리체 님?" 저녀석, 왠지 눈빛이 이상한데… "잠시만요, 실례하겠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그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내게로 다가왔다. 긴 다리로 성큼 성큼 다가오는게 왠지 두렵다. "루루렌칼리체!" "으음, 오랜만이군. 로나벨아크…" "하하하! 너 정말 엄청나게 게으르고 어리석고 답답하고 하여간 내 속을 어지간히 긁어 놨던 그 루루렌칼리체가 맞는거냐!" 그는 내 말을 끊어 먹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칼리아넬은 대충 그의 정체를 눈치 챘는지 얼굴이 파리하게 변하고 있었고 에카테야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이놈 내가 루루렌칼리체라는 걸 확신하면서 뭘 또 묻고 있는 거냐… "내가 좀 게으른건 맞지만 어리석고 답답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만… 그리고 언제 내가 네 속을 긁어놨었다는 거냐." "너… 이게 본 모습이냐?" 그는 내 말을 무시하며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본 모습이라…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한다. 뭐가 잘못 되기라도 한걸… "흐엑-!" 나도 모르게 나온 이상한 비명에 나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로나벨아크하임은 양 손을 내 겨드랑이 사이에 넣어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는 꽤 장신이고 힘이 세서 조그만 나로선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짓이냐." "그 게으르고 어리석고 답답한 루루렌칼리체의 인간일 때의 모습이 이런 귀여운 꼬맹이라고? 흐흐, 정말 재밌구나, 재밌어!" 그런데 그 '게으르고 어리석고 답답한'이란 수식어는 안붙여 줬으면 좋겠는데. "날 내려놔라, 네가 흉폭하고 예의없고, 하여간 성격이 무지 안좋다는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난 더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어깨에 걸쳐 놓은채 내 한쪽 볼을 주욱-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녀석, 정말 사정없이 세게 잡아당기고 있다…! "너… 우으!" 뭐라 말하고 싶지만 그가 계속 볼을 잡아당기고 있어서 소용 없었다. 그냥 그의 어깨에 매달린채 버둥 거릴수 밖에… 모양새가 별로 좋지 못하군. "얘들아 미리 방은 잡아 놨…"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베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전히 로나벨아크하임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건, 그의 목소리가 멈춘뒤 꽤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다는 것이다. "칼리체를 내려놔라." 베델의 목소리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에게서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는데,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그는 웃고 있는것 같았다. "이 녀석은 누구냐, 루루렌칼리체." "루루렌칼리체라고…?" 로나벨아크하임의 말에 베델이 의문을 갖는다. 이 도움이 안되는 녀석, 배려심 없게 그렇게 본명을 막 말해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난 한숨을 쉬며 원망스런 마음에 녀석의 가슴을 발로 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중요한건 루루렌칼리체, 네 녀석이 지금 내가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는 무척이나 악독한 말을 하며 또다시 내 볼을 잡아당겼다. "칼리체를 내려 놓으라고 말했다." 이제 베델의 손은 허리에 차여 있는 검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저것은 명백히 무력 행사를 하겠다는 의도. 로나벨아크하임의 연주로 들떠있던 여관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참 의외로군. 베델은 이렇게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참 열성적인 녀석이로군. 알았다. 이 녀석을 풀어주지." 성격 더러운 로나벨아크하임이 이렇게 쉽게 물러설리가 없는데… 그는 어깨에 매고 있던 나를 얌전히 바닥에 내려주더니 날 보고 빙긋 웃고는 저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 나름대로의 배려, 라는 걸까? "… 칼리체, 괜찮니?" "물론이죠. 애초에 그냥- 장난일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얼얼해진 볼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 대답엔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대응한 베델에게 질책하는 듯한 뉘앙스를 담았지만 그는 깨닫지 못한것인지 모른척 하는 것인지 굳어진 표정이 풀릴줄 몰랐다. "그는… 누구지?" "음 그러니까…" 인간의 상식에 기대어 나와 로나벨아크하임의 관계는… 뭐라고 해야하나- 형제? 친구? "일단 방부터 잡고 얘기하지 않겠나요? 시선이 무척이나 불편한데요." 에카테야르가 불쑥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방금의 사태 때문인지 그녀의 말대로 인간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 라고?" "네." 가장 가까운 관계라 한다면… 원래 형제 정도가 맞겠지만, 그건 이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겠지. 로나벨아크하임과 나는 생긴것도 완전히 다를 뿐더러 머리색 부터가 확연히 차이가 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너는 줄곧 산골에서만 살았다고…" "네, 그가 가끔 놀러오기도 했었지요." 가끔 와서 인간들의 사회를 겪어보라 종용하곤 했으니 난 지금 틀린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루렌칼리체라는 이름은?" 내 본명이 언급되자 저쪽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칼리아넬이 안절부절 하고있다. 그녀 자신이 잘못한것도 아닌데 뭐 저리 걱정스러워 하는지… "제 본명이에요. 그냥 부르기는 너무 길어서 그냥 이름 뒤쪽의 세글자 '칼리체'만 쓰고 있지요." "왜 본명을 미리 가르쳐 주진 않은거야?" 왠지 추궁당하는 기분이군… 이 아니라 명백한 추궁이군 이건. "중요한게 아니니까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섭섭해 하는 걸로 보이는데…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든다. "예쁜 이름이네요. 루루렌칼리체라… 그렇다면 그냥 앞의 두글자를 따서 쓰지 그랬나요? 루루… 무슨 귀여운 강아지 이름 같군요." "…" 음, 왠지 모르게 모욕당한 기분이다. 어쨌든 베델들의 추궁에서 벗어난 나는 다시 로나벨아크하임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왔다. 아까 그도 계단을 통해 이쪽으로 올라오는걸 봤으니 이 층에 있는 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까와 같은 괴상한 괴롭힘을 당하긴 싫지만… "여, 루루렌칼리체." 공교롭게도 방을 나오자 마자 로나벨아크하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던 건가? "아까와 같은 일은 절대 사양이다." "지금은- 봐주도록 하지." 이런 건방진 녀석. "그렇게 눈살 찌푸리지 말라고, 예쁜 얼굴 망가지니까 말야." "내가 인간으로 화해 있는 지금 이 모습이 그렇게도 이상한가?" 난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져 보았다. 아무런 이상은 없을 터인데… "아니, 그 모습이 네 성격에 비해 백배는 더 귀여워서 그런거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베델도 그렇고… 이 녀석도 거리낌 없이 잘도 쓰다듬는군. 나는 그의 손을 탁- 하고 쳐내며 말했다. "오늘 네 무례함은 도가 지나치군, 로나벨아크하임." "흥, 뭐가 말이냐." 그는 인상을 확 구기며 또다시 내 볼로 손을 뻗어왔다. "하, 하지마!" 난 그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그 커다란 키로 날 덮쳐 누르며 볼을 잡아당기는데… 어찌할 바가 없다. 날 내려다 보는 시원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마력을 날릴 수도 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는게 좋을거다." "…" "자, 일단 잠깐 내려가서 얘기라도 좀 할까? 그렇게 내 말을 안듣던 네가 어떻게 인간들의 사회로 나오게 되었는지, 이 몸은 무척이나 궁금하군." "여기 맥주 두잔만 가져다 주게." 로나벨아크하임은 허공으로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맥주… 라는 알 수 없는 물건을 주문했다. 그러고서 그는 의자를 뒤로 당겨 느긋하게 기대어 앉았다. 저 폼은… 아마 나를 면밀히 관찰하려는 것 같다. "볼이 빨게진게 참 귀엽구나, 루루렌칼리체." "네놈 때문이잖아." 난 괜히 볼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놈이 인정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볼이 발갛게 부어올라버렸다. 이제 아픔은 느껴지지 않지만… 여전히 화끈거린다. "맛있게 드슈." 머리가 약간 벗겨진 중년의 인간 남성이 탁자 위에 갈색빛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잔을 놓고 약간 퉁명스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나를 힐끔거렸던것 같다. 사실 그 뿐만 아니라 이곳에 남아있는 인간들의 대부분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훔쳐보고 있지만…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는 거냐." 나는 그가 내미는 잔을 조심스레 받으며 대답했다. "왠지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것 같지 않나?" 로나벨아크하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이 시선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시선이 불편하다면 좀 적당한 외모로 바꾸지 그래? 네 모습은 인간들에게 지나치게 아름답게 비춰지니까 말이다. 애초에 우리 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신비는 이 세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그 거대한 신비가 가장 발현되기 쉬운것은 육신, 바로 생김새 이기도 하고. 게다가 인간은 껍데기에 꽤 비중을 두는 종족이니까 말이지." 대강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지금 이 모습도 내 진정한 모습중 하나이니, 나는 이것을 버릴 생각이 없다." "하하, 그 말을 들으니 역시 우리도 같은 드래곤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되는군. 은룡과 흑룡녀석도 그런 소리를 했었지." 은룡과 흑룡이라… 기억을 리셋하고나서 그들을 만나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과 이름은 내 기억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뭐, 나는 빼고. 인간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기 위해선 위화감 없는 적당한 외모가 좋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잔을 들더니 알 수 없는 갈색 액체를 벌컥 벌컥 마셨다. 그가 잔에서 입을 떼었을 땐 이미 그 양이 반이나 줄어있는 상태였다. 원래 저렇게 마시는 건가…? 나도 이 녀석을 따라 입에 잔을 대고 벌컥 벌컥… "콜록, 콜록-!" 뭐, 뭐야 이거… 목이 무지하게 아파 눈물마저 찔끔 나왔다. 마치 무언가가 목안을 톡톡 쏘는듯한 이상한 느낌이다. "하하하-!" 로나벨아크하임은 이런 내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바다으로 탁자까지 치며 킬킬대고 있었다. … 왠지 이녀석 정말로 미워지려고 한다. "이 톡쏘는 이상한 액체의 정체는 뭐냐." "응? 아까 들었지 않나, 맥주라고… 술의 일종이다." "이게 술이라고…?" 내 기억속에서 술은 적색의 달콤한 액체라고 기억되어 있는데… 종류가 다른가 보군. 나는 간단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묻겠다, 루루렌칼리체. 너는 어떤 연유로 인간들의 사회에 나와볼 생각을 하게 된거냐. 이 녀석, 내 제안은 모두 무시했던 주제에 말이다." "음, 일단 그건… 미안하게 됐군."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기분이 상할만도 하다. 그가 제안했을 때는 응하지 않다가 갑자기 이렇게 인간들의 사회에 섞여 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녀석의 제안에 응했었다면, 지금까지의 경험을 할 수 없었겠지. "간단히 말하자면, 한 인간의 물음 때문이었다." "물음이라고…?" "그래, 인간은 무엇으로 증명되냐는- 그런 물음이었지." 망각을 모르는 나는 그때 내 보금자리에서 그의 물음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베르센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듯 했다. "호오… 드래곤에게 그런걸 물으려 오다니 별난 녀석이군." "그래, 별난 녀석이지. 하지만 나는 그의 그런점이 마음에 들어 꼭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에 대해 아는게 없어 대답해 줄 수 없었지." "잠깐." 로나벨아크하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우리 드래곤들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이미 알고 있잖아? 그 대답은…" "그 대답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원에서 전해져오는 지식에서의 인간의 존재 이유는… 결코 베르센크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들이 존재해야할 '이유'일 뿐이니까. 비슷한 말이지만, 둘은 다르다. 존재의 증명은, 그 이유는 마치 땅에 씨앗을 심었더니 싹이 돋았더라- 하는 수준의 것이 될수 없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있다. 그러니 그 증명은 인간들, 그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흥,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군." "응?" "애초에 너는 그래 왔으니까… 아닌척 하지만 너는 네가 가엾다고 생각하는 존재를 그냥 보고 넘기지 못했지. 정말… 바보같다고 해야하나 상냥하다고 해야하나."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잔에 있는 액체를 모두 비웠다. 난 또다시 방금의 고통을 겪고싶지 않았기에 조심스레 액체를 홀짝였다. 그래도 입안이 따가운 것은 어쩔수 없군… 도대체 이건 무슨 맛으로 먹는거지. "뭐, 하여간 너무 인간들에게 빠지지 마라. 그들은 우리와 달리 잠시간을 살아가는 덧없는 생명체니까 말이야. 사실 인간이든 뭐든 간에 우리에겐 뭐든지 덧없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로나벨아크하임의 신력과 마력이 퍼져나가며 이 도시, 니하크할룬을 장악했다. 인간의 수준으로서는 꿈도 꿀수 없는… 그야말로 마법을 뛰어넘은 마력행사였다. "너…" "인간들에게는 꽤 거대한 이 도시도 우리 드래곤들 앞에서는 고작 이정도 수준에 불과하니까말야." 나는 눈살을 찌푸린채 그의 손 안을 바라보았다. 이 도시는 이미 로나벨아크하임 손안에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였다. "이렇게 간단히 주먹을 쥐어버리는 것 만으로…" 그는 주먹을 쥐기 직전에 주변에 퍼트려 놓았던 마력과 신력을 흩어버렸다. 그 힘을 흩어버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이 도시는 그의 움켜쥠에 의해 멸망당했을 것이다. "펑- 하고 사라져 버리니까." "흥, 네가 그렇게 쓸데 없는 짓을 하며 말하지 않아도 그정도 쯤은 알고 있다. 아까부터 그랬지만 나를 완전히 바보취급 하는군." 사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 이 녀석의 장난은… 스케일이 너무 크다. "너 바보잖아." 조금 울컥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이라니. "아냐." "맞잖아." "아냐." 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 녀석과 대화하면 할 수록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기분 나쁜 웃음을 계속 흘리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 이 녀석은 분명 조롱의 달인이다. 그런데 이녀석… 아까 자기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들어가기에 위화감 없는 적당한 외모가 좋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지금 이 녀석이 화(化)해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 모습은 왜곡된 것이라는 것이 될려나. "로나벨아크하임." "응?" "네 본 모습을 보여다오." 음…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딱잘라 내 요청을 거절했다. 표정을 심각하게 구기는 것이 로나벨아크하임은 인간일때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왠지 그러니까 더 보고 싶어졌지만… 겉모습 만을 보고 즐기는 것은, 이 녀석 같으니 그만 두자.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그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자, 그럼 안녕이다." "응?" "응은 뭐가 응- 이야? 내일이면 이제 한동안 얼굴 볼일이 없겠지. 그러니 미리 인사하는 거다. 뭐, 운이 좋으면 금방 다시만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군." 뭐, 우연히 만난 사이니까 말이다. 로나벨아크하임도 인간 사회에서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겠지… 난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에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묻고 싶은게 많았었는데… 좀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우리 용들은 영원을 살아가니, 나중에 만날때 묻고 싶었던 것을 잘 간직해 두었다가 물으면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에 남아있는 일말의 아쉬움을 지워 버렸다. 나도 이제 슬슬 피곤해 지는군, 그만 올라가서 수면이나 취해 볼까. "으음…" 다음날, 나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 거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인지…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이란 것은 마치 잡힐것 같으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 아련한 환상 같은 것이었다. 나의 무의식이란 바람이 텅 비어져 있는 기억속에 남겨놓은 연흔. 꿈이란 것 자체의 느낌은 좋았다. 머리속에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모든것이 일련의 파노라마 처럼 내 머리속에 좌르륵-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흥미로운 한편의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로나벨아크하임이 내 꿈에 나와 볼을 잡아 당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그가 내 볼에 준 고통이 너무나 심해 나도 모르게 그 경험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난 수면을 취할 때 입는 편안한 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으려다. 멈칫- 하고 말았다. 꽤 여성스러운 라인을 갖고 있지만, 결코 여성의 것이 아닌 내 몸. …슬슬 한쪽의 성별을 정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성별이야 언제든지 옷을 갈아입듯, 손쉽게 바꿀수 있는 것이니까.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바깥을 바라보는 에카테야르 였다. "왜 그러고 있니? 예쁜 얼굴 망가지게." 의외라는 듯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 로나벨아크하임이 나에게 했던 말을 그녀에게 해본 것이지만… 에카테야르는 실제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여전히 감정없는 눈동자가 조금 걸리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라…? 나, 이정도로 인간의 외모를 평가할 수 있게 되었군. 외견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인간에게 물든걸까, 그렇다면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닌데 말이다. "별일이군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 난 대꾸없이 에카테야르의 맞은 편에 앉아서 턱을 괴고 환한 태양광이 내리 쬐고 있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이 찡그려질 정도의 환한 햇빛… 여전히 기분 좋다. 그러고 보니 매일 보던 일출을 요즘들어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일출인데… 손가락을 창문 위에 대고 탁탁 두드려 본다. 손톱이 유리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낸다. 아…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이 나를 새롭게 한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시각, 청각, 촉각, 미각이 좋다. 별것 아닌 이것들이 권태로움에 젖어 있는 내게 생기를 느끼게 해준다. … 나는 그저 일출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을 찾은걸지도 모른다. "베델과 칼리아넬은-?" "칼리아넬은 아직 잠들어 있고, 베델은 말을 팔러 나갔어요. 카스텔 공화국 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면 되니 굳이 직접 말을 탈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것참 다행이군. 마을 타는 일은 무척이나 고역이니 말이다. "제가 보기엔 그저 당신을 배려 하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말이에요." "음-" "그는 당신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나봐요. 어제 그 로나벨아크하임이라는 희안한 이름을 가진 남자를 만난 이후로 말이에요. 뭐, 루루렌칼리체라는 당신 이름도 이상하긴 하지만." 뭐, 용의 이름이니 인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 밖에 없겠지. 그녀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반쯤 뜬 눈꺼플 아래로 보이는 청량한 푸른색 눈동자가 약간의 우울함을 담고 있는것 같다. "무슨 생각하니?"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채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나는 무얼해야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죠. 당신이 내게 쥐어준 자유는, 내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니까…" 에카테야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표정이 굉장히 드문 그녀의 미소는 무척이나 예쁘다.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지독한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에서 나오는 미소이기에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값지다고 생각했다. 값을 매길수 있는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 나는 문득 태양을 갖고 싶은 마음과 똑같이 그녀의 미소도 내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불가능 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아… 내가 원하는 것은 왜 항상 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내 손에 잡히지 않기에 나는 그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건 아닐까. "이제 더이상 아버지… 아니, 슈테른 백작의 통제는 없어요. 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까지 내 의지대로 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되니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드는 군요." 좁지만 안락한 새장에서 드넓은 하늘로 내팽개쳐진 아기새 같은 기분이라는 건가…? 그녀가 있던 곳이 '안락한' 새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내게 주었던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아주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제와서 한번 더 말하는 것이지만… 정말 고마워요, 칼리체." "그…" 난 말문이 막혔다. 이제는 선명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에카테야르에게 나는 '단지 네가 불쌍해서 그랬을 뿐이야. 나는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한 일이니, 네가 고마워해야할 필요는 없지-'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왜일까? "흥, 그렇게 멍하니 보지 말아요. 고맙다는 말이 뭐 대단한 말이라고…" 빤히 바라봐서 그런걸까,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어, 벌써 일어나 있었어?" 마침 적당한 타이밍에 베델이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벌써라니요, 벌써 아침을 먹을 시간도 지난것 같습니다만…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건 그 녹색 머리 꼬맹이 밖에 없다구요." "누가 꼬맹이에요!?" 마치 짜기라도 한듯, 에카테야르가 말을 끝내자마자 칼리아넬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소리쳤다. 그녀는 꼬맹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듯 씩씩 거리며 다가와 내 옆에 의자를 가져와 털썩 앉으며 에카테야르를 노려보았다. "하, 하하…" 베델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우리는… 정확히 나를 빼고 아침 식사를 마친후 여관 밖으로 나왔다. 예정했던 대로 카스텔 공화국에 가기전에 잠깐 바루에르 가문에 들릴 생각이었다. 딱히 볼일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류벨과 에네리아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이곳인가요…?" 에카테야르가 약간 놀람이 깃든 눈동자로 바루에르 가문의 저택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거의 아나키스트 왕국의 후작급에 해당되는 규모의 저택이군요." 로엘가스트 연맹은 아나키스트 왕국과 달리 법적으론 신분제가 아니니까 에카테야르로서는 조금 햇갈릴 수도 있겠군. 여러개의 유력 가문이 모여 이루어진 나라, 로엘가스트 연맹… 아나키스트 왕국과는 정치 행정 자체가 완전히 다른것 같으니 말이다. 뭐, 법적으론 신분제가 아니라지만 이곳에도 역시 명확한 신분이라는게 존재하고 있다. 인간들처럼 군집을 이루는 생명체들은 필연적으로 계급이란걸 갖게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곳은 바루에르가(家)의 저택입니다. 볼일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저택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자, 미늘 창을 들고 있는 경비 한명이 다가와 말했다. 두꺼운 갑옷과 잘 벼려진 무기도 그렇고… 무장이 꽤나 본격적이다. "아, 우리는 이곳에 볼일이 있습니다. 용병 베델이 찾아왔다고… 안에 전해주시겠습니까?" "오, 용병이었소? 그렇다면 진작에 말을 할것이지. 조금만 기다리시오." 음… 경비병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한것 같다. 저런 본격적인 무장도 그렇고, 그들의 눈에 어려 있는 날카로움 까지, 거기다 용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것 같은 태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갔던 경비병이 다시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달려오느라 약간 흐트러진 투구를 고쳐쓰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저택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망각을 모르는 나는 과거의 기억에 지금의 모습을 대조해본다. 정원사의 손질로 약간 모습이 변한 정원만 제외하면 외견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다. 아, 저기는… 에네리아가 내 뺨에 키스했던 곳이었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탁 트여진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바람이 기분좋은곳… 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외견적으로 그때와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저택의 내부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변해 있어 나는 그때의 기억과 지금의 이곳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저택 내부를 수호하고 있는 병사들이 무척이나 많아진것 같다. 그들은 모두 날카로운 미늘창을 쥐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채 2인 1조로 철통처럼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씩 외부인인 우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오기도 했다. 끼익-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저택의 문이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난 왠지 이 소리에 불길함이 담겨져 있는것 같다고 생각했다. "…"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홀의 계단위에 걸려 있는 그류벨의 커다란 초상화였다. 저 초상화가 의미하는 것은… "오랜만이군요, 모두." 계단을 내려오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흑발의 소녀… 에네리아 였다. 그녀는 칠흑같이 새까만 원피스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장신구 역시 모두 검은색이었다. 잦은 웃음과 밝은 분위기가 감돌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는 깊게 가라앉아 있어 그때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많이 변해 있었다. 계단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며 다소의 우울함이 깃든 미소를 보내고 있는 저 검은 소녀는 내 기억속에 있던 그 에네리아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푹신한 침대에 걸터 앉아 홀로 중얼거렸다. 에네리아는 우리를 환대했고, 우리에게 쉴수있는 방을 각각 하나씩 제공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이 가문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그류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일은 그녀가 지시했고, 하인들은 그녀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어떻게 된 일인걸까. 뭐, 그녀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면 해결될 수 없는 의문이긴 하지만… "아가씨, 주인님께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내게 생명의 열매가 필요하다 외치는 그류벨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나는 어느새 방안을 들어와 있는 시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시녀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채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겠어요…" 시녀는 아무말 없이 나를 안내했다. 그녀에게 이 저택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물을 수도 잇었지만… 아무래도 에네리아, 본인에게 직접 듣는게 낫겠지. "…" 저택의 복도를 지나다니는 시녀들은 바깥의 흉흉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모두 어두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약간의 감흥을 느끼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녀는 어떤 방문앞에 나를 데려다 주고,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게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문고리를 잡고 열기… 전에, 노크란걸 해야겠지. 똑똑- 맑은 나무소리. 그리고 에네리아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았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네리아가 목재 의자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엔 약간의 회한이 담겨 있는것 같기도 했다. "여기 앉으세요, 칼리체." 그녀는 맞은편의 의자를 가르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설마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를 찾아오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 이후로 그리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저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에네리아." "아, 그렇죠…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았었지요… 그랬지요… 하지만 저에겐 그 시간이 지금껏 살아온 시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었답니다." 잠깐의 침묵.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인간은 표정만으로 감정을 나타내지는 않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에네리아. 그류벨… 님은 어디계시죠?" 하마터면 '님'을 빼먹을뻔 했군. "아버지라면…… 이미 돌아가셨어요." … 드래곤 이외의 생명체는 모두 필멸의 존재이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왠지 좋지 않은 기분이다. 자신의 딸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내게 그 고귀한 의지를 관철했던 인간. 기억을 리셋한 뒤에 처음으로 내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던 인간이기에 나는 그를 대단히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하아…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칼리체. 하지만… 당신은 그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변한것 같군요. 여전히 표정은 거의 없지만 말이에요." "…" "후후, 그래도 이제 좀 인간 같아 보여 괜히 친근감이 드네요. 전에는 아예 손에 잡힐것 같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보였었거든요, 당신은. 마치 신비의 종족 요정을 보는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실제로 본적은 없지만 말이죠." 사실 요정은 칼리아넬 이지만… 대강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는 이해한 것 같다. 인간의 요정에 대한 이미지를, 나는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때 아직 인간이란 종족에 익숙치 못했던 나에게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처음만나는 사이에서 느끼는 그런 낯설음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에게서 느끼는…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 라는 감정. "당신도 많이 변했군요, 에네리아." "전… 변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뜻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나는 그녀가 느끼고 있는 상실감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물론, 궁금하다. "…" "당신과 처음 만났을때 암살자들이 마차를 공격했던것 기억하시나요? 그때 당신이 제 목숨을 구해주었었지요." 그녀는 옅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저 습관처럼 얼굴의 근육을 조금 꿈틀거린것에 불과했다. 실제의 그녀는 조금도 미소짓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암살자들은 제 외가에서 고용한 자들이었어요. 바루에르 가(家)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남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 저만 죽는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모든것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거죠. 하지만… 결국 저는 이렇게 살아남았죠." 나는 여전히 아무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것 같은데… 어쩌면 그녀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일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자 그들은 결국 아버지를 죽게하고 말았어요. 이제 바루에르 가(家)의 사람은 저밖에 남지 않은거죠." 이쪽도 권력과 재화에 관한 문제인가… 아나키스트 왕국에서 있었던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것 같다. "후후, 하지만… 이것 보세요 칼리체." 그녀의 손안에는 강대한 마력아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정도의 수준이라면… 거의 마법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아버지는 내게 이 힘을 남겨주셨어요. 생명의 열매… 그 힘으로 저는 당신처럼 강력한 마력을 사역하는 마법사가 될 수 있었지요. 아버지가 제게 남겨준… 소중한…" 에네리아는 스스로 어깨를 감싸안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에네리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번에 폭발하는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에네리아는 갑자기 내 목을 끌어 안고서 머리를 어깨에 묻었다. 때문에 지금 그녀가 울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나는 주저하다가 칼리아넬에게 해준것처럼 그녀의 등을 가볍게 감싸안았다. "미안해요, 왠지… 당신에게는 모두 말해버려도 괜찮을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짧게 웃었다. "저는 복수할거에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한 외가의 사람들 모두에게…"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결의'라기 보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더 가까운것 같았다.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던 병에서 나은 직 후, 자신을 지탱해 주던 아버지의 사망… 그녀로서는 견디기 어렵겠지. 그녀는 이런식으로 스스로를 다잡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제게 준 이 힘을 이용해 그들을 직접 응질할 수 없어요. 물증이 없으니까… 그래서 저는 외가와 가문전을 치를거에요. 서로 모든것을 걸고…!" "…" 그녀는 이미 내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나저나 가문전이라… 언뜻 들은 이야기인데, 여러개의 유력 가문으로 이루어진 로엘가스트 연맹에선 가문끼리의 다툼이 일어날 경우, 그것을 실시한다고 한다. 그것은 각 가문에서 사람이 나와 각기 일 대 일로 맞붙은뒤, 더 많은 승리를 쟁취한 가문이 상대 가문을 마음데로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너무 극단적이어서 최근 수십년 동안 연맹에서 가문전이 일어났던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걸 위해서 에네리아는 용병을 찾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저택의 정문에서 중무장한 병사의 모습과 베델이 용병이라 하자 쉽게 들여보내준 그들의 행동이 이해된다. 에네리아… 네 안에 있는 생명의 열매는 본래 나에게서 기인한 것이었지. 그 열매 안에는 용감히 내게 맞섰던 그류벨의 의지가 들어있다. 그류벨, 에네리아… "힘들겠군요, 에네리아."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줄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냥 이런 의미없는 말을 중얼거리는것 밖에는. "네,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목을 끌어안은채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에 전해져 조금 간질했다. "칼리체… 절 위로해 주겠어요?" 에네리아는 내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녀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에카테야르 보다 약간 더 밝은 하늘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여운 에네리아, 나는 위로에 익숙치 못해… 오히려 나는 그런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을 좋아하지. 하지만 지금은 잠깐 내게 기대어도 좋단다. 나는 네게 해줄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고, 해줄수 있는것이 있더라도 도움을 주진 않겠지만… 필멸자들의 모든 아픔을 그저 받아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되는 백룡, 불멸을 가진 드래곤이니까.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에네리아는 베델에게 찾아와 제안했다. "가문전…?" 베델은 가문전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본걸지도 모르겠지만, 언뜻 그의 눈동자에 일말의 섬뜩함이 스치고 지나간것 같았다. "네, 그래서 당신을 고용하고 싶어요. 일인 용병단인 당신에게 이런 의뢰는 가장 반겨야 할겨야 할 대상이 아닌가요?" 일인 용병단이라… 말 그대로 여럿이 모여 이루는 용병단이라는 집단의 역할을 단 한명이 한다는 말이겠지. 베델은 일인 용병단이었구나… 새삼 그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여준 무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혼자서 집단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도 납득 할만 한다. "호오, 과연… 어디서 들은 이름이라 생각했더니, 너도 일인 용병단이었나." "당신은…!" 에네리아의 뒤쪽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자는… 로나벨아크하임 이었다. 그걸로 헤어진줄 알았건만… 이런 곳에서 또 만나게 되다니. "로나벨아크하임…" "하아, 정말 우연이군, 루루렌칼리체. 헤어지자 마자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마주치게 될줄이야. 세상은 정말 좁아, 그렇지 않아?" "…" 굳이 별 의미 없는 말에 대꾸를 할 필요는 없겠지.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에네리아가 고개를 갸웃 하며 나와 로나벨아크하임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온다. "뭐, 그냥 오랜 친구 사이지." 그는 긴 적발을 쓸어올리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너도'라고 했겠다? 그렇다면 로나벨아크하임도 역시 베델과 마찬가지로 일인 용병단이라 불리는 모양이군.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용병을 하고 있었을 줄은… 음, 그렇다면 로나벨아크하임도 역시 에네리아에게 고용된 걸까. "빙고, 나도 역시 이 예쁜 아가씨에게 아주 비싼 값으로 고용된 상태지. 이 아가씨, 얌전한 얼굴에 비해 씀씀이가 아주 화끈하다니까." "나는 아직 아무말도 한 기억이 없는데…" "너, 표정이 없는것 같아도 의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드러나니까 말야. 아직 감정 컨트롤 미숙이지, 꼬맹아." 로나벨아크하임의 어조는 훨씬더 무례하고 품위 없게 변해 있었다. 그는 흉폭하지만… 으음, 에네리아를 두고 '이 예쁜 아가씨'라고 칭하거나 '얌전한 얼굴에 비해… 화끈하다니까'와 같은 발언은 정말 의외란 말야. 그는 약간 거만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멀찌기서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는… 정말 한 명의 인간이 되어, 하나의 인격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게 아닐까. 나는 아마도 이런 내 생각이 맞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말한대로 저분은 제게 고용되어 있어요. 그도 베델, 당신과 마찬가지로 일인 용병단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 "다시 한번 요청하겠어요. 베델, 제게 고용될 생각이 없나요?" 그는 고민스런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 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현재 나에게 고용되어 있는걸 신경쓰고 있는 걸까. 전에 그런걸 신경쓸 필요 없다고 그렇게나 말했건만… "좋… 습니다. 가문전이라는 극단적인 항쟁이 꺼림찍 하긴 하지만… 옛 일도 있고, 그저 모른척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고마워요, 베델. 보수는 두둑히 드릴게요." 에네리아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베델은 여전히 탐탁치 않다는 얼굴이다. 보수같은건… 아무래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겠지. "가서 무슨 얘길 하고 온건가요?" 방에 남아 또다시 에카테야르와 티격태격 하고 있던 칼리아넬이 우리가 들어오자 반색하며 물었다. "으음, 그리 긴 얘기는 아닌데… 간단히 말하자면 또다시 에네리아에게 고용되어 버리고 말았어." "어떤 일로요?" 핵심을 찌르는 에카테야르의 물음, 베델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가문전 때문에." "그게 뭐죠?" 요정인 칼리아넬이나 아나키스트 왕국 출신인 에카테야르는 둘다 그게 뭔지 모르는 눈치다. 베델은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전에 인연도 있으니, 조금쯤은 도와줘도 상관없지 않나요? 베델, 무지 싫다는 얼굴이네요." 칼리아넬은 찬장위에 올려진 오리 모양의 장식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에- 나 그렇게 티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나." 그녀의 말에 베델은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가문전이라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꺼림직 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것 같다. 가문전의 결과가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러야 겠군요. 다행이네요, 베델. 여행 경비가 거의 다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이곳에서…" "에, 에카테야르! 그 얘기는 칼리체 앞에서 하지 말라 그랬잖아!" 베델의 말에 그녀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음… 여행 경비가 부족하다고? "재화라면 제가 얼마든지…" "그, 그것 때문에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던거야!" 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베델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낸다. 내가 여행 경비에 필요한 재화를 제공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던가?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을 그렇게 펑펑 쓰지 말라고. 나중에 돈이 다 떨어지면 어쩔 생각이야 정말… 너는 성인이 아니라 돈 벌기도 힘들텐데." "저 정도 미모라면, 돈을 벌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것 같은데요?" "에카테야르…!" 이번엔 에카테야르와 베델이 싸우는 건가… 하지만, 방금 전의 베델의 말에 나는 흠칫 하고 말았다. 확실히, 인간의 기준에선 나같이 재화를 펑펑 쓰고 다니는게 말이 안되는 얘기겠지. 그것도 단순히 여행만을 위해 말이다. 로나벨아크하임도 용병이란 직업으로 재화를 벌고 있고… 아니, 그놈은 단순히 인간들의 생활을 체험해 보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언제까지 내가 창조해낸 재화로 인간들의 세계를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 좋아, 그럼… 인간들의 방식으로 돈이란걸 벌어보기로 할까. 그날 밤이었다. 나는 전에 에네리아가 내 뺨에 키스했던 정원에 나와 밤바람을 쐬고 있었다. 이제 점점 날이 따뜻해져 오는게… 곧 여름이 될듯 싶다. 이렇게 날씨의 변화를 생생히 느낄수 있는 인간의 몸이 되니, 고작 계절의 변화만으로도 나는 꽤 깊은 감흥을 느낀다. 으음, 이제 이런 치렁치렁한 옷도 입지 못하게 되겠군. "여어, 루루렌칼리체." "앗-!" 갑작스레 누군가가 뒤에서 목을 감싸안는 느낌에 나는 너무나 놀라 전처럼 또다시 괴상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로나벨아크하임…" 인기척이라도 좀 내줬으면 좋겠군.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는 그에게서 어떤 냄새가 난다. 이 냄새는 분명… 술냄새. 자세히 보니 이녀석, 왼손에 술병을 들고 있잖아. "아크함이라고 불러라. 인간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불리니 말야." "나는 칼리체 라고…" "흥, 그건 내 마음이지." 그는 내 말을 끊어먹으며 내 목에 감고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제멋대로인 녀석. 자신을 아크함이라고 불러주길 바라면서 내 요구는 들어주지 않다니, 그나저나 아크함이라… 꽤 괜찮은 느낌의 이름 아닌가. "설마 네 녀석을 이곳에서 까지 만나게 될줄이야. 그런데… 너, 인간들 사이에선 용병 일을 하고 있었나?" "그래, 용병의 일이 가장 삶을 활활 불태우는것 같은 느낌이라 말이지. 인간의 삶은 보장되어 있지 않아,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거든. 나는 그것을 몸소 느껴보고 싶었다." 그 투쟁의 느낌을 가장 생생히 느낄수 있는게 용병이라, 이 말인가? 목숨걸고 재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니…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녀석… 역시 흉폭하다. 내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로나벨아크하임은 술병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내용물을 들이켰다. 전에도 그렇고… 이놈, 술이란걸 좋아하는건가. "나도 줘봐."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그는 의외로 선뜻 내게 술병을 건네주었다. "입 댄거다." 그게 뭐 어쨌다고…?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걸까, 그의 행동과 언행엔 꽤나 깊게 인간의 냄새가 베어있다. 인간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 내게 충고하더니, 정작 자신은 어쩌고 있는지…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 전과 같이 무척 따가운 술일 수도 있으니까… 술병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 안에 있는 액체를 조금만 마셔보았다. "콜록, 콜록!" 약간 넘기긴 했지만, 입에 머금고 있던 대부분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무지 쓴데다가 목으로 넘어간 약간의 액체들이 속에서 불을 뿜고 있는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뭐지… 이거,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거냐. "그거 무지 독한 보드카다. 네가 그걸 못넘길줄, 나는 알고 있었지." 불쾌한 녀석. 내가 입가를 닦고선 그에게 술병을 집어던지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잡아챘다. 로나벨아크하임은 얼굴이 벌게져 아직도 기침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킬킬 거리며 웃어 댔다. 정말 정강이라도 한대 차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녀석이다. "어때, 한 입에도 정신이 멍해지는것 같지 않아?" 그의 말대로 조금 멍한것 같긴 하다. 어지러운것 같기도 하고… 뭔가, 평상시와는 달리 사고 회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이게 '술에 취했다'라는 건가. "으음, 조금…" 후우- 하고 한숨을 쉰다. 용의 힘을 조금만이라도 갖고 있었다면 내가 술이라는 인간의 창조물에 이정도로 정신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뭐, 조금 취하고 보니 이 술이라는 물건도 그리 나쁜것 같지는 않다. 설마, 술이란거… 맛 때문이 아니라 이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마시는게 아닐까. "술 한번 먹이니 조용해졌군, 루루렌칼리체." 그는 술병을 또다시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저놈은 저걸 저리 급하게 마시고 어지럽지도 않은걸까. "너는 점점 더 시끄러워 지는것 같다." 하아, 정말 영양가 없는 대화로군. 두 용이 고작 인간들의 창조물을 가지고 이런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흥, 또다시 볼이 꼬집히고 싶나보군." 유치한 협박이군. "…"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묻겠다." "뭘?" 그는 불량스런 태도로 한번 더 술병을 입에 대고 남은 술을 모두 마셔버린뒤, 술병을 뒤쪽으로 휙- 하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래도 정원쪽으로 던지지 않는 걸 보면 어느정도 배려는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돈을 벌고 싶은데, 너처럼 용병 같은걸 할 생각은 없고." 갈등의 정점, 싸움을 업으로 재화를 버는 것,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하아-?" 그는 내 말이 의외라는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벌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게, 괜히 위압적이게 느껴졌다. "돈을 버는 방법이야 많지만… 네가 그럴 필요가 있나?" 물론 재화야 마음데로 창조할 수 있지만… 나는 인간들의 세계에 완전히 참여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생각을 로나벨아크하임에게 말했더니, 그는 또다시 킬킬대며 성실한 녀석이군- 이라고 중얼거렸다. "뭐, 내일 거리에 나가 보든지. 일거리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중에서 네가 하기 편한걸 찾으면 될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그의 뒷모습을 쫓다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눈을 감았다. 가문전 까지는 대강 일주일 남은것 같고, 그 뒤에 니하크할룬을 떠날 것이니,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간단히 할 일을 찾아봐야 겠다. 다음날, 일거리를 찾아 니하크할룬의 거리로 나오긴 했는데… "카스텔 공화국에서 들여온 야채들입니다-! 한번 보고가세요!" "거기 가는 아가씨- 요새 델라피르에서 유행하는 최신 의복들 좀 보고가세요! 어머 정말 유행하는 복장이라니 까요-!?" 아무래도 저런 요란스런 동작과 커다란 목소리를 요구하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흐음, 아무래도 로나벨아크하임에게 좀더 자세한 조언을 구할걸 그랬나… 아니, 왠지 그녀석이라면 도움은 되도 내가 난처할 것 같은 일을 알려줄게 틀림없다. 그냥 온전한 내 힘으로 찾는게 현명하겠지. 그나저나 정말 생기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 나도 이제 저런 곳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조금 설레는 기분이다. 수천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내가 고작 이런것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인간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건 아닐까. "…"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거리를 걷다 어떤 건물 앞에 멈춰섰다. 별로 볼것없는 초라한 건물이었지만, 내가 이 곳에서 멈춰 선 이유는… 벽에 붙어 있는 하얀 종이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 때문이지만. '단기 고용' 이거… 물론, 일할 사람을 찾는 다는 소리겠지? 끼익- 이곳의 문은 무척이나 낡은듯, 커다란 마찰음을 내었다. 다소 어두침침한 내부, 잔 때가 묻어 있는 나무 탁자, 벽… 모두 하나 같이 오랜 세월을 머금고 있는듯 했다. "낮에는 술을 팔지 않습니다." 얄팍한 천조각으로 잔을 닦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내게 그렇게 말했다. "바깥에 벽보를 보고 왔는데요." "음?" 그제서야 남자는 닦고있던 컵을 내려놓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날 보자 놀란 얼굴로 들고 있던 천 조각을 떨어트렸다. 내 모습을 처음보는 인간은 언제나 저런 반응이니, 이제는 놀랄것도 없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는 거리에 있던 거의 모든 인간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아, 아아. 그, 그렇소?" "한 일주일 정도만 여기서 일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무, 물론이지! 그럼 오늘부터 일해줄 수 있겠소?" 역시 외모라는건 굉장한 힘을 갖고 있다. 인간들의 시선으로 성인아닌 어린 내게 고용주인데다가 꽤 나이를 먹은 그가 저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니 말이다. 왠지 이 미모를 이용해 재밌는 일을 해볼수도 있을것 같은데…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지. 이 술집… 아, 이곳이 술집이라는 사실을 나는 처음에 모르고 있었다. 그냥 술도 파는 음식점인줄 알았는데, 설마 술만을 파는 곳이었으리라고는… 어쨌든 이 술집의 주인은 내게 맞는 유니폼을 건네며 해야할 일을 알려주었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긋 웃으면서 인사하는거다. 자, 이렇게." 술집 주인, 그러니까 이름이… 그래, 마커스 라고 했던가. 음, 그는 지금 내게 인사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양손을 배 위에 올리고 허리를 깊게 숙인다. "어서오세요-!" 뒤이어 나오는 친절한 목소리… "간단하지? 하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거란다. 손님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려면 일단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줘야 하니까. 자, 너도 한번 해보렴." 간단하지만… 왠지 내게는 전혀 간단한 일이 될 것 같지 않다. "저… 미소를 지을줄 모르는데요." "뭐…?" 흠, 미소를 짓지 못한다는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주인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니, 그것보다 그는 지금껏 미소를 한번도 지어본적이 없다는 내게 더 놀란것 같았다. "…" 한가하군. 왠지 술을 마시려는 손님은 주로 저녁 시간을 이용한다는 근거 모를 말을 듣고 나는 유니폼을 입은채 벽에 기대어 치맛자락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이 유니폼… 왠지 가슴쪽이 푹 파여 있고, 치마가 무척이나 짧아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그 때문에 나는 일단 여성으로 변할 수 밖에 없었다. 가슴이 너무 파여 있어 여성으로 변하지 않으면 상의가 그냥 흘러내려 버리니 말이다. 설마 고작 이런걸로 내가 성별을 정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뭐, 잠깐 동안 임시로 변한 것이긴 하지만. "칼리체, 곧 손님이 오실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여성으로 변한 나는 목소리가 좀더 가느다랗고 얼굴선이 여리하게 변해있었다. 눈에 확 들어올만큼 커다란 변화는 아니었지만. "감이다." "…" 왠지 아무런 근거 없는 그의 감은, 놀랍게도 맞아 떨어졌다. 끼익- 문이 열리며 여러명의 인간이 웃고 떠들며 이곳으로 들어온다. 자, 앞에 나가서 배운대로- 배위에 양손을 얹은 뒤 허리를 굽히고, "어서오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와아,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왠 천사같은 아가씨가 이 칙칙한 가게에서…" "하하, 이 사람이! 칙칙한 가게라니!" 칙칙한건 사실인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탁자위에 맥주가 출렁이는 커다란 잔을 여러개 올려 놓는다. 기존에 있던 손님이나 새로 술집에 들어오는 손님이나 대화의 화제는 모두 나였다. 그들은 모두 자주 이 술집에 출입하던 단골인듯, 주인인 마커스와 편하게 나에 대해 대화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 주문좀 받아주쇼!" "아, 네에- 조금만 기달려 주세요!" 무지 바쁘다. 이 인간들이 나를 놀리듯, 저쪽에서 주문하면 이쪽에서 주문하고 또 저쪽에 가 있으면 다른곳에서 나를 불러댄다. "저… 여기 맥주 두잔이랑 닭 한마리… 요." 왠일로 젊은 남자였다. 지금까지 이 술집에 오던 남자들은 모두 중년의 나이였는데 말이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터질듯 붉어진 얼굴로 어쩔줄 모르며 내 다리나 가슴쪽에 시선을 보냈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 맥주 두잔이랑, 닭 한마리 주문하셨어요." 나는 주문을 확인하며 계산서에 주문 목록을 적어 넣었다. "저, 저기요…!" "네, 더 주문하실게 있으신가요?" 막 몸을 돌리려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주문서를 들었다. "그… 그게, 저…" 그는 시선을 둘 곳을 모르는듯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러저리 굴렸다. 빨리 주문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다른곳에서도 주문을 위해 나를 부르고 있단 말이다. "가, 감자 튀김도 추가해주세요!" "… 네, 감자 튀김 하나 추가요." 다시 펜을 들고 주문서에 감자 튀김을 써넣었다. "와하하하하-! 저 청년, 뭐 할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고작 감자 튀김 하나 추가라니!"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뒤쪽 테이블에서 터져나왔다. 어째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에도 있었던 듯 한데… "오늘은 네 덕분에 젊은이들도 이 술집을 찾아오는구나." 내가 술잔을 가지러 카운터 쪽으로 가자 마커스가 은근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내게 속삭였다. "네?" "원래 젊은이들은 이렇게 낡은 술집은 잘 오질 않거든. 근데 언제 입소문이 퍼져 나갔는지 왠일로 젊은이가 찾아오다니, 다 네 덕분이란다." 뭐, 그 소문이 뭔진 모르겠다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끼익- 이제는 익숙해진 저 마찰음, 또 새로운 손님이 오는 모양이다. 자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서오세요-!" 난 미소를 지을줄 모르기 때문에 재빨리 허리를 숙여 내 무표정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근데… 끝이 닳은 저 부츠, 낯이 익다. 고개를 들자, 그곳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베델이 서 있었다. "너, 너어…"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으음…? "여기 맥주요." "아, 고마워." 베델은 이 술집의 영업이 끝날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벌써 그가 앉아있는 탁자 위에 쌓여있는 술잔이 열잔을 넘어가고 있다. 저것들… 다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 걸까. "베델,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군요." "뭐, 그렇지…" 그는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복장이 어지간히도 부담스런 모양이다. 이제 영업도 끝난것 같으니,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올까나. "마커스 씨. 이제 옷, 원래대로 갈아입어도 괜찮겠지요?" "아아, 물론. 영업이 완전히 끝났으니까 말이야. 이제 문도 닫아야 할 시간이고… 하지만 뭐, 저 친구는 칼리체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준것 같으니, 내가 특별히 봐주지." 난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베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네요, 옷 갈아입고 올테니까 여유롭게 마시고 있어요."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유니폼이 잔뜩 걸려있는 어두운 방에 들어왔다. 이 허약한 몸으로 몇시간 동안을 왔다갔다 하며 주문받고 술잔을 나르려니 정말 힘이 든다. 돈을 번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음, 그나저나… 봉긋 솟아오른 가슴과 부드러운 몸의 곡선, 나는 지금 여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도 곤란한 것이… 에네리아와 에카테야르는 내가 남자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미리 성별을 정하지 않은 내 실수이긴 하지만… 왠지 이대로는 조금 곤란하군. 마력과 신력을 아주 약간만 개방해 나는 다시 나의 몸에서 성별이라는 것을 없애 버렸다. 여성의 모습일 때의 나는 그 여성스러움이 너무 티가 나서 도저히 여성이라는 것을 숨길수가 없다. 그러니 다시 무성으로 돌아올 수 밖에… 또다시 한숨을 쉬며 벗어논 유니폼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방을 나왔다. 마커스는 다시 얄팍한 헝겁 조각을 가지고 유리잔을 닦고 있었으며, 베델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마커스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 칼리체." "무슨 얘기 하는 중이었나요?" "하하, 말도 마라. 이 친구가 네게 입힌 복장이 너무 지나치지 않냐고 내게 한바탕 설교를 늘어 놓고 있던 중이었단다." 확실히 노출이 좀 과한 의복이긴 했지. 그 때문에 나는 어쩔수 없이 여성으로 변해야 했고 말이다. "칼리체, 이 친구가 네 애인이냐?" "아, 아, 아닙니다!" 내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베델이 빠르게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왠지 그는 그 질문에 무척이나 당황한것 같은 모습이었다. 흠, 신경 쓰이는건가? 탁자를 짚고 몸을 숙여 베델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애인이라… 사랑이란 감정으로 맺어진 남성과 여성의 관계, 인가. 후세를 생산해 종족을 보존시키려는 목적이 있기도 하다. 아니 나는 주된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인간들은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단언할 수는 없겠지. 흐음- 인간의 기준으론 나도 꽤 매력적이게 생겼으니, 혹시 베델도 나에게 그런 마음으르 품고 있는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엄지손톱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일이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자. 시간이 너무 늦어서 모두 걱정하고 있을거야." "으음, 벌써 돌아가려 하나? 내 지금까지 기다린게 가상해서 가게문을 좀더 있다 닫을려 했더니 말이야. 자네 아직 술도 남은것 같고…" "아, 하하. 괜찮습니다." 베델은 잔에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는 나를 끌고 술집을 나섰다. 왜이리 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운 술집에서 고요한 거리로 나오니 산뜻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술이란게 뱃속으로 들어가면 인간들은 무척이나 시끄러워져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너어- 무슨 일을 하나 했더니 설마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을 줄이야! 너는 미성년자 잖아! 위험한 일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나를 탓하는 건가? "하지만 베델이 말한 것처럼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주인도 나쁜 사람은 아닌듯 했고…" "음- 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라는게 술이 들어가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어서, 저기 그러니까 칼리체 같이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괜한 수작을 걸고 싶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 꽤나 구체적이로군. "베델의 걱정은 무용(無用)해요. 설마 마법사인 제가 제 몸하나 지키지 못할거라 생각하는건 아니겠죠?" "그… 렇긴 하지만 어쨌든 위험하잖아." 언제고 생각하는건데 이 인간의 나에 대한 걱정은 조금 도를 지나치는것 같다. 어찌 생각해보면 에네리아를 생각하는 그류벨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나를 에네리아에게, 그를 그류벨에게 대입시키면…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던가? "흐음-, 걱정 마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베델의 걱정은 무용하다니까요." 그 다음날부터 베델의 걱정어린, 하지만 조금 귀찮은 염려를 들을 일은 없었다. 그도 며칠뒤에 있을 가문전에 참가해야 하니, 여러모로 준비할게 많이 있는 것이겠지. 뭐, 그래서 덕분에 편하다는 소리다. 그나저나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는 뭘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매일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다투긴 해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서로 잘 어울려 노는것 같기도 하고… 끼익- "아, 어서오세요!" "음- 무척 볼품없는 집이로군." "하하, 뭐 어떻습니까, 형님. 계집들을 끼고 놀것도 아니고, 가끔 이렇게 소박한 곳에 와서 조용히 술만 마시는 것도 괜찮겠지요." 문을 열고 들어온것은 다소 거만해 보이는 청년 둘이었다. 뭘 어떻게 한건진 모르겠지만, 한껏 모양을 낸 머리에 고급스런 검은색 셔츠와 가죽 바지, 그리고 셔츠의 깃에 달려 있는 어떤 문장이 새겨진 조그마한 뱃지- 딱 보아도 '나 돈이 좀 있소' 하고 써붙인것 같은 모습이다. … 내 표현에도 이제 슬슬 인간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나오는것 같군. "호오- 정말 대단한 미소녀로군." "확실히. 델라피르에서도 저 정도의 미모는 보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왜 이런 촌구석에 있는지…"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그들은 독한 브랜디를 주문하고서 내가 돌아서자 나에 대해 떠들어 댔다. 목소리는 조금도 줄이지 않아, 나에게 모두 들릴 정도였다. 근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외모를 평가받기는 또 처음인데 말야… 아직 이른 저녁이라 손님이 별로 없어 비교적 조용했기 때문에 드문드문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주일 후였나, 가문전이." "형님도 참. 불과 오일 뒤요." 가문전에 대한 언급이라니…? 그렇다면 이들은, 에네리아의 외가 쪽 사람들인가. "불쌍하게 됐습니다. 본적은 없지만 에네리아… 라고 했던가. 우리 사촌 동생 말입니다." "흥, 뭐 우리야 나쁠것 없지. 바루에르 가문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면 바로 우리가문이 로엘가스트 연맹의 백익(白溺)자리를 맡게 될테니 말이야." 그들은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맑은 소리 뒤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술맛은 나쁘지 않군 그래." "뭐, 그렇네요." 그 이후로 그들의 입에서 가문전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가문전…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들의 입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조금 집중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아, 그나저나 겨우 이틀째인데 일이 너무 힘들다. 역시 이런 나약한 몸으론 육체 노동은 무리인가. 그래도 대충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직접 몸으로 체득하게 되니 감회가 조금 남다르군.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것에 대한 '노동'의 댓가로 재화를 받아 집을 사고, 먹을 것을 사고… "어이, 거기 아가씨." "네?" 가문전에 관해 이야기했던 그들이다. "아까부터 유심히 살펴봤는데, 우리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더군. 어때, 좀 더 자세히 들려줄테니, 일이 끝나고 우리와 한잔 하는건? 더불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 이런곳에서 일하고 받는 보수의 열배 쯤 되는 돈을 주지." 내게 그렇게 말한건 형 쪽이었다. 술에 꽤 취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내게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o'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뭐지 저거, 돈이라는 소린가? "혀, 형님!" "어때 아가씨? 난 아가씨가 참 마음에 들거든." 마음에 든다니, 고마운 이야기긴 하지만 그들을 따라가서 까지 가문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 괜찮아요. 그리고 저는 남을 즐겁게 하는데는 별로 재주가 없어서요." 이곳의 보수에 열배라는 말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뭐…? 하하하! 이것참, 정말 순진한 아가씨로군." 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이나 웃어대더니 탁자위에 금화 하나를 올려두고 동생과 함께 술집을 나갔다. 지불해야 할 금액을 가볍게 초과하는 금액을 두고가다니… 역시 돈이 많은 인간인가 보군. 근데, 그것보다 그 남자, 대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마지막에 내게 남겼던 그 웃음 소리가 무척 신경쓰인다. 어쩐지 바보 취급 당한것 같다고나 할까.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이구나. 아마, 이 지역을 통치하는 바루에르 가문과 가문전을 치르러 왔다고 했었나… 이거 잘못하다간 지불해야할 세금이 늘어나는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은 해도 별 걱정없는 표정으로 마커스는 탁자위에 올려진 금화를 집었다. "흐흐, 돈이 많은 도련님들은 이렇게 씀씀이가 커서 좋단 말야. 나중에 또 와주슈-" 그는 금화를 한번 깨물어 보더니 그들이 나간 문쪽으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에스페란셰 가문이라… 에네리아는 제대로 자신의 가문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의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 바루에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그녀가 좀 가엾다고 생각했다. 정말, 인간들의 갈등이란 이렇게나 비정하다. 아까 그 인간들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바루에르 가문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반긴다면 모를까. 듣자하니 에네리아는 그들의 사촌 동생, 인간들의 혈연 관계라는 것은 꽤 긴밀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금전적인 이득 앞에서는 덧없이 스러져 가는 걸까. 나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며 복수하겠다고 끝없이 속삭이던 에네리아… 이 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나올지는, 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수고하셨어요." 탁자와 의자를 대강 정리하고 지금껏 일하던 술집을 나섰다. 손안엔 오늘의 일에 대한 보수로 은화 스무개가 들려 있는 상태… 이걸로 뭘 할까나? 짤랑 거리는 은화를 손안에서 굴리며 걷던 나는 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린 인간의 아이가 거적데기를 둘러쓰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이상할게 없지만… 그 어린 아이가 기대어 있는 건물 때문에 나는 걸음을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바루에르 가(家)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무척이나 화려한 건물. 재화를 상당량 보유한 인간이 사는듯한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저택뒤의 그림자 속에 힘없이 기대어 주저앉아있는 어린아이. 정말 묘한 대비다. 고작 이 손안에 들려 있는 금속 덩어리 따위로 인간은 저렇게 커다랗고 화려한 집에서 살 수도 있고, 저 어린아이 처럼 거적데기만을 뒤집어 쓰고 무력하게 그림자 속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돈… 물건을 교환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속, 기호- 자신들이 만들어 낸 관념에 자신들이 지배당하고 있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 내가 다가가자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어린 아이가 나를 올려다 본다. 그 눈동자에 들어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무력감?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원망? 아니면, 절망? 하지만 어린 아이는 곧 그런 감정들을 눈깜짝할 새에 지워버리고 헤헤- 하고 바보같이 웃으며 내게 말한다. "헤, 헤헤- 한푼만 줍쇼, 어르신." 어르신… 이라니? 어두워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손을 내보거라." 방금 일을 끝내고 아직 여성으로 변했던 성별을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아,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느다랗고 여렸다. 그 때문일까, 어린 아이는 조금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손을 내밀었다. 짜르릉- 하고, 맑은 소리가 나며 어린 아이가 내민 양손에 내게 들려 있던 은화 스무개가 모두 떨어진다. "앗-!" 놀란 모양인지, 어린 아이는 앙상한 몸을 요동치며 거적데기 사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광원(光源)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저, 정말 이걸 모두 제게 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 돈은 네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린 아이는 혹여 내 마음이 변할까 걱정하는듯 은화들을 재빨리 품속에 넣어 놓고서 땅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내게 고개를 숙이며 연거푸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외쳤다. "…" 나는 그 모습을 고요히 쳐다보다 그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은화 이십개… 그걸로 가난에 지친 저 아이는 잠깐 동안이나마 배를 부르게 할 순 있을 것이다. 결국엔 은화를 다 써버리고 다시 골목에 돌아가 거적 데기를 뒤집어 써야 하겠지만. 즉, 내가 한 일은 근본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도 은화를 줘버리다니, 나는 어리석은 짓을 했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란 감정은 들지 않는다. "호오- 루루렌칼리체." "아크함?" 적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이 양 손에 노출이 심한 의복을 입고 있는 인간 여성 둘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만 가봐도 좋아.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았으니, 자- 특별 서비스다!" 로나벨아크하임은 품속에서 뭔가를 잔뜩 집은뒤 그녀들에게 아무렇게나 건네주었다. 짤랑- 거리는 소리로 보아 아마도… 돈인듯 했다. "어머, 잘생긴 오빠가 씀씀이도 장난이 아니네-?" "나중에 또 와요, 잘 대해줄테니까!" 두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로나벨아크하임으로 부터 멀어졌다.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다, 이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허무한 미소. "쳇, 재미없는 것들이군." "뭘하는 거냐, 아크함." "아아, 성실하시군 위대한 백룡 루루렌칼리체 님은. 꼬박꼬박 아크함이라고 불러주는걸 보면 말야." 왠지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싸늘한 시선. "… 방금까지 기분 좋다며?" "왠지 널 보니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실은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저 골목 구석에 쳐박혀 있는 거지에게 오늘 네가 번 돈을 모두 준 이유는 뭐냐?" 그는 긴 다리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며 물었다. "글쎄…" "흥, 그렇게 대답할줄 알았다. 언제고 그랬지… 너는." 언제고 그랬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설마, 내가 기억을 리셋하기 전의 일을 이야기 하는 건가. "호오, 그런데 너- 오늘은 꽤 좋은 모습을 하고 있구나." 굉장히 차가운 느낌… 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너무나 차서 살갗에 닿는것 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좋은 모습- 이라는건 지금 내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걸 말하는 건가. "로나벨아크하임… 너, 오늘은 좀 이상해 보이는군." "그냥 심술을 부리는 거니까 가만히 있어라. 피하지 말고." 목덜미에 닿는 그의 손이 너무 차가워 움찔 거리며 그의 손길을 피하던 나는 그 말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석양빛 눈동자는 저 멀리, 아득한 시간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통해 무엇을 바라보고, 느끼고 있는 걸까. "그 모습으로 내게 잠깐의 즐거움을 주지 않겠나, 루루렌칼리체." "… 아까 어떤 인간도 그 소릴 하더군. 그 즐거움이란게 도대체 뭐냐. 나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재주는 없는데." "내가 자세히 알려줄까?" 탁- 내 부츠의 뒤끝이 벽에 닿았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나를 벽쪽으로 밀어붙인채 손으로 내 턱을 잡고 내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왠지 강압적인데, 이녀석. "차갑군." 그의 싸늘한 손가락이 내 목선을 훑는다. "너는 따뜻하군.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열이 많아." "놓아라." 나는 그가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 답답해 그의 품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즐거운 일에 대해 알려준다 하지 않았나, 루루렌칼리체." 목을 훑고 있던 그의 차가운 손이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 옷속을 파고 드는게 느껴진다. 싸늘함이 맨 살갗에 그대로 전해진다. 그대로 옷 안을 훑던 그의 손길이 갑자기 멈추어섰다. "너, 속옷도 안입고 있냐." 항상 여성의 모습으로 있는건 아니니 속옷까지 입는건 좀 곤란하지… 로나벨아크하임은 왠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있다. 그의 시선은 왠지 내가 한심하다는 것 같아 보여 다소 기분이 상한다. "더 안하나?" 내 가슴에 닿은 그의 손이 멈춰있어 재촉을 해보지만 그는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내 옷 속에서 손을 뺐다. "시시하군,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거기다 가슴도 이렇게 작고… 하긴, 애한테 뭘바라겠냐 만은." 괜한 심술이군. 아까도 말했던 것이지만, 오늘의 로나벨아크하임은 정말로 이상하다. "흥,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옷자락이나 바로 해라." 내가 노려보고 있던가? 그는 자신이 들춰놓은 내 옷자락을 꽤나 섬세한 손길로 정리해 주고, 풀렸던 몇개의 단추를 잠궈 주었다. 난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희미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마저 띄고 있었다. 이런걸 보면 꽤 친절한데, 방금과 같이 제멋대로인 모습도 보이고… 이 녀석도 어지간히 변덕스런 녀석이다. "가문전 준비는 잘 되어가나?" "흠- 준비라고 할게 뭐 있겠어. 시시한 인간들은 손가락 하나로도 가볍게 제압이 가능하지. 난 너처럼 쓸데없이 힘을 억눌러 놓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는 피식 웃으며 바람결에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나를 내려다 보는 그의 얼굴이 꽤나 오만함에 물들어 있는것 같다. 인간들을 상대로 저런 감정을 품어봐야 아무 소용 없는데. 얄미운 녀석, 그의 상대가 대단히 재치있는 인간이어서 이 녀석에게 골탕좀 먹여줬으면 좋겠다. 이것은 단지, 희망 사항으로 끝날 뿐이겠지만. 콩- "아얏!" 머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너 내가 가문전에서 골탕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마음을 읽는 마법은 우리들, 용밖에 못쓰는 고위의 마법이다. 하지만 그 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면 굉장한 규모의 마력 유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다 티가 난다니까? 꿀밤은 그 발칙한 생각에 대한 벌이다." "… 으음." 건방진 녀석. 그 이후로 시간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나는 미리 말했던 대로 약 일주일간 그 술집에서 일을 했고, 총 은화 백 이십개를 벌 수 있었다. 원래 백 사십개 지만, 전에 그 거지꼴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준 것을 제외하면 백 이십개. 결론적으로, 금화 한개와 은화 스무개를 번 것이다. 일주일간 그토록 힘들게 일했는데, 고작 금화 한 개라니… 나는 지금껏 꽤나 터무니 없는 재화를 써오고 있었구나. 뭐, 인간의 기준이지만. 어쨌든 꽤 귀중한 경험이었다. 인간들의 금전 감각을 몸소 느낄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만약 몰랐다면, 나는 내가 써대는 재화에 관해 이런식으로 생각해볼 기회는 없었겠지. 재화 따위야 언제든지 창조할 수 있지만, 나는 지금 진지하게 인간들의 삶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리고… 시간이 되어 바루에르 가문의 가문전이 다가왔다. "칼리체 님, 가문전 이라는것… 저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어떻게 가문이 가진 모든것을 걸고 싸워 상대방의 것을 빼앗는게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는거죠?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 상상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지. 칼리아넬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가문전이 이루어질 예정인 넓은 언덕 위 이다. 구름이 끼어있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다소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그럼 너는 저택에 남아있어도 되.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단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고개를 저었다. "으응- 그래도 칼리체 님을 따라갈래요." "그래…" 에네리아는 바루에르 가문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호위들의 모습중엔 전에 그녀를 처음만났을때 보았던 베리오스라는 기사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각오가 가득차있을 것은 분명하다. 바루에르 가문의 모든것, 그게 이 비극적인 내기의 조건이니까. 아마 그것엔 그녀의 목숨까지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것은 상대방의 가문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어쨌든 이기는 쪽은 상대방의 목숨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에카테야르?" 그녀는 등뒤에 그녀의 키와 엇비슷한 창을 메고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나 꾸밈도 없는 밋밋한 강철 창대에 보통의 창들보다 약간 긴 창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창이었다. 아니, 문제는 지금 그녀가 왜 그것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인데. "뭔가요, 칼리체?" 그때 났던 화는 풀린 걸까, 무감정한 목소리긴 하지만 그때처럼 적대감이 담겨 있진 않았다. "너, 등에 매고 있는 그 창은, 어째서?" "저도 바루에르 양의 가문전을 돕기로 했거든요. 한명이 부족해 다른 용병을 고용하려는 것을 보고, 저를 써달라고 했죠." 에카테야르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다. 문제야 없지만, 지금껏 살인 병기만으로 살아온 그녀이니까… "쓸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전 단지… 나를 구해준 당신들을 도우려는 것 뿐이니까." "…" 우리를 돕는것이라고? 에네리아를 돕는게 아니라? "당신들의 목적은 바루에르 양의 가문전에서의 승리. 제가 그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당신들을 돕는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논리적이긴 하지만… 왠지 핀트가 어긋난것 같은데. 뭐, 아무튼 간에 나는 에네리아를 직접적으로 돕진 않지만, 그녀의 패배를 바라진 않으니 상관없겠지. 에카테야르의 전투 능력은 지금의 나보다도 탁월하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우리에게 해주려는 그녀의 마음 자체가 꽤 기쁘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에카테야르는 흥- 하며 고개를 돌린다. # 목적지는 니하크할룬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평평하게 넓게 펼쳐진 언덕 위에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이 먼저 자리잡고 바루에르 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덕 주변은 상당히 많은 나무들로 둘러 쌓여 있어, 외부의 시선을 거의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 정말 이런 적당한 장소를 어떻게 찾아냈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에스페란셰 가문의 깃발 주위에 몰려 있는 병사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에네리아가 데려온 바루에르 가문의 병사들보다 조금더 많은 수였다. "오랜만이구나 에네리아." "…" 호감 가는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채 친근한 듯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에네리아는 그와 말도 섞기 싫은 눈치였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 답했다. "네, 오랜만이네요 외숙." "그래, 네가 가문전을 선언한 이후로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한 세 달 정도 된것 같구나." "…"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지만 눈빛 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정말 유감이구나. 같잖은 오해로 바루에르 가(家)와의 사이가 이렇게 틀어지게 되다니… 아직도 다시 생각해볼 마음은 없는거냐, 에네리아." "…" 에네리아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렬한 증오의 감정, 거대한 마력을 사역하고 이적을 이루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현세에 구현해 상대를 토벌(討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막는 것은 다만, 인간들의 사회에 얽힌 복잡한 이해관계. 하지만 가문전에 그녀 자신은 나설 수 없다. 가문의 주인이 직접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이 가문전의 규칙이니까. 마법사인 그녀로서는 좀 애석한 일이겠군. "안녕하시오, 바루에르 양. 나는 바르멘토 휴겔 그리엣타라고 하오. 바루에르 가 와 에스페란셰 가 와의 가문전의 참관인 역을 맡게 되었소." "반갑습니다 그리엣타 씨." 배가 약간 나온 대머리 중년인이 나서 에네리아와 악수를 나누었다. 참관인이라… 이 비극적인 경기의 심판쯤 되는 모양이지? 나는 검은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쓰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려 상황을 살폈다. 바루에르 가 와 에스페란셰 가는 서로 약 십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저들 무리에 전에 술집에 왔었던 두 형제도 보인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서 멀리 떨어져 에네리아를 바라보고 있는것 같았다. 그들뿐 아니라 여러명의 어린 아이, 젊은 여성, 중년의 여성, 심지어 노인까지- 에스페란셰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나온것 같다. 에네리아 한명 뿐인 바루에르 가(家)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할것 같으니, 뒤로 물러나 볼까. 오늘의 나는 완벽한 방관자이니 말이다. "나는 이 가문전의 결과를 연맹의 모든 날개들에게 한치의 거짓도 없이 알릴 것을, 이 세계, 페트라발름을 창조한 하늘과 대지와 질서와 혼돈의 신의 이름으로 굳게 맹세하겠소. 모두, 공정하게 가문전에 임해주길 바라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 바르멘토가 모든 것을 걸고 연맹에게 그 사실을 알리게 될 것이오." '신'의 이름 이라… 지금껏 나는 몇번이나 기억을 리셋해 왔는진 모르지만 '신'의 존재는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내 근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가 가득 낀 길을 걷는 것처럼, 꿈처럼 아득한… 정말 오랜, 오랜 옛날의 기억- 그만두지, 이런 생각은. 바르멘토 라는 인간의 나름대로 엄숙한 선언이 끝나자, 가문의 대표와 가문전에 나설 자들 다섯명이 전면에 나섰다. 로나벨아크하임- 아니, 아크함, 베델, 에카테야르, 에네리아의 호위기사 베리오스, 그리고 이름 모를 바루에르 가(家)의 기사. 다섯 중 셋이 바루에르 가문의 사람이 아닌데… 뭐, 용병을 고용할 수 있는 '재력'이나 강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인맥'도 역시 가문의 힘이니… 말 그대로 가문의 모든것을 걸고 싸우는 가문전이다. "자, 그럼 시작하시오." 싸늘한 바람이 언덕을 훑고 지나간다. 잠깐 로나벨아크하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며 피식- 하고 웃고는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나도 가만 있을 순 없어서 손을 가볍게 흔들어 그에게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리는 순간, 이번엔 베델과 눈을 마주쳤다. 로나벨아크하임 쪽을 힐끗 바라보는 것을 보아 그와 나 사이에 오고간 무언의 인사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왠지 불편한 것 같은 시선으로 로나벨아크하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에게도 역시 팔을 흔들어 주며, '잘해요 베델'하고 입을 벙긋 거렸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내 입모양을 보았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것 같은 모습이다. 내 응원은 꽤 효과적이 었던 모양- "칼리체 님-" "응?" 칼리아넬이 내 옷자락을 당기며 나를 불렀다. 앞쪽에선 첫번째로 가문전을 치를 인간들이 나서고 있었다. 바루에르 가문 쪽에선 이름모를 기사, 에스페란셰 가문에선 굉장히 험상궂고 덩치가 큰- 남성이었다. "아크함이라는 사람, 정체가 뭐에요-? 지금껏 칼리체 님하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물어보질 못했었어요. 칼리체 님의 진짜 이름을 알고, 친한 친구라는 그는- 도대체 누구죠?" "그의 본래 정체는 화룡, 로나벨아크하임." 서로 꾸벅 인사를 하고 검을 겨눈다. 아니 에스페란셰 가문 쪽의 사람은 가시가 여러개 박힌 쇠공을 들고 있다. 그 쇠공엔 단단해 보이는 체인이 연결되어 있는데… 저런걸 철퇴 라고 하던가? "화, 화룡이요! 그도 루루렌칼리체 님과 마찬가지로 드래곤이란 말인가요!?" "응, 성질 더러운 녀석이니까 조심해. 하지만 그 녀석, 나처럼 인간들 사이에 있을때는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흉내낼테니까-" "세, 세상에…"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칼리아넬에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옆엔 백룡인 내가 있는데, 칼리아넬은 뭐가 그렇게 놀라운 걸까. 용을 처음 보는것도 아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칼리아넬은 무척 귀여웠지만… 일단, 지금은 가문전에 집중해 볼까- 하는 순간, 이미 상황은 끝이나 있었다. 철퇴가 훙훙- 하고 흉악한 소리를 내며 휘둘러 지자, 바루에르 가문의 기사는 그것을 검으로 막았다. 하지만 철퇴는 검을 부러뜨리고, 단단한 판금 갑옷으로 보호되어 있는 그의 가슴을 때렸다. 퍽- 하는 굉장한 소리가 나며 바루에르 가문의 기사는 약 삼미터 정도를 뒤로 날아가 바닥에 쳐박혔다. 무사할까-? "으읏-!" 내 팔을 꼭- 잡는 감촉에 옆을 바라보니 칼리아넬이 내 팔을 감싸쥐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러게 저택에 남아있으라니까…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쓰러진 기사쪽을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흐르는 붉은색의 액체, 일어나지 않는 몸뚱이. 그의 몸엔 이미 영혼이 남아있지 않았다. "에스페란셰 가문, 1 승." 담담한 목소리로 바르멘트 라는 사람이 선언한다. 무척 비정하군. 칼리아넬은 울음을 터트릴것 같은 기세로, 내 팔을 더 꼭- 끌어 안는다. "… 그의 시체를 수습해오세요. 최대한 정중하게. 비록 지긴 했어도, 가문을 위해 죽은 사람이에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에네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언덕엔 잠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역시 무르구나, 에네리아. 단 한 수에 져버린 한심한 기사에게…" 그녀의 외숙은 잠시 한심하다는 시선을 가슴이 함몰되어 죽은 시체에게로 보낸다. "한 가문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사람이 그렇게 무르면 안된단다. 자, 이제 이런 힘든 가문전 같은건 여기서 그만 두고 이 외숙에게 오렴, 양녀로 받아줄테니 말이다. 여린 네게 이런 참혹한 가문전은 너무 힘들지 않니." "…" "고집은 그만 피우고. 저 어린 소녀까지 목숨을 잃게 할 순 없잖니. 쯧쯔-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저런 소녀까지 가문전에…" 그는 혀를 쯧쯧- 차며 바루에르 가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아마 에카테야르를 말하고 있는듯 하다. "닥치세요, 지금 당장 내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흥-" 그녀의 외숙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경고합니다 바루에르 양. 가문전 중에 각 대표는 서로에게 인신 공격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번 더 이 사항을 어길시, 바루에르 가(家)에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 바르멘토의 냉정한 목소리에 에네리아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두번째로 가문전을 치를 분들, 나와주시오." 시체가 수습되자, 서로의 가문에서 두번째로 가문전을 치를 인간들이 나섰다. 에스페란셰 가문에선 두꺼운 판금 갑옷에 투구를 쓴 기사가 나섰다. 그는 오른손엔 커다란 메이스를 들고 왼손엔 굉장히 커다란 타워 실드를 들고 있었다. 그야 말로 온몸을 강철로 두른 인간이군… 그 상대로 나선 자는 가느다란 단창을 들고 있는 금발의 소녀, 에카테야르 였다. 강철의 기사, 가는 창 만을 들고 있는 어린 소녀. 도저히 상대가 안될것 같은 대비였다. "어이, 진심이냐." 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투구 사이로 투덜거린다. "이런 솜털도 빠지지 않은것 같은 어린애와 싸우라니, 바루에르 가(家)도 정말 너무 하는군…" "가문전 중에 사적인 말은 삼가해 주시오." 바르멘토가 주의를 주자 그 기사는 바로 말을 멈추었다. 에카테야르는 창을 아무렇게나 쥐고 그 끝을 강철의 기사에게로 향했다. 창을 쥐는 법이 틀렸던 걸까, 그는 에카테야르를 보고 실소를 짓는다. 그녀는 원래 그믐달 모양의 기형검을 사용했었는데… 아나키스트 왕국에서 탈출하며 잃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 찾을 필요는 없겠지- 그것은 그녀가 살인 병기로서 살아있던 시절을 의미하는 물건이니까. "크게 다쳐도 원망 마라." 강철의 기사는 절도 있는 기합을 지르며 에카테야르에게로 달려들어 메이스를 휘둘렀다. 사실, 크게 다치는 수준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것 같은 위협이다. "에카테야르-!" 칼리아넬이 주먹을 꼭 쥔채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렇게 티격태격 하더니, 결국 걱정해 주는군. 순간, 그녀의 창 끝에 마법급의 마력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그 마력은 창 끝의 '꿰뚫는다'라는 속성을 끌어내 강화시키고, 강화시키고, 또 강화시킨다. 눈을 한번 깜빡할 시간에, 창의 '꿰뚫는다'라는 속성은 수백, 수천번도 더 넘게 강화되고 그 강력함은 '무한대'로 수렴한다. 그녀가 사용하던 '벤다'라는 속성이나 '꿰뚫는다'라는 속성이나 크게 다른것은 없으니- 저런식으로도 쓸수 있겠군. 거대한 마력의 사역으로 그녀 주위로 대기가 흔들린다. "우웃-!" 그 흔들림에 동요한 강철의 기사는, 에카테야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지른 창날에 오른쪽 어깨를 꿰뚫렸다. 내밀었던 방패 역시 손쉽게 꿰뚫린건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겠지만, 그 기사는 들고 있던 메이스를 놓쳐 버렸다. 어깨가 꿰뚫렸는데 무기를 들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이… 게 도대체 무슨!?" 푹- 하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소리가 나며 그의 어깨에 박혀 있던 창이 빠져 나왔다. 붉은 피가 퓨웃- 하고 치솟아 오른다. 에카테야르는 자신에게 튀기는 피를 피하며 말했다. "당신이 졌어요." "말도 안돼! 그 가느다란 팔로 방패와 함께 판금 갑옷까지 뚫어버렸다고!? 뭔가 속임수가 있는거 아냐!!" 상식을 벗어나게 하는 힘, 그것이 마법이지. "그럼 한번 더 해볼까요? 그렇게 되면 내 창날은 이번엔 당신의 심장을 꿰뚫을 거에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그렇게 말하니, 더 박력있어 보인다. 기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내가, 졌다." "바루에르 가문, 1승." 바르멘토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렇게 선언했다. 이로서 상황은 일대 일인가. 각각 상대를 일합씩에 끝내다니, 두 가문 사이에 더욱 강렬한 긴장감이 감돈다. "무슨 장난을 친 건진 모르겠지만… 그리 호락 호락하게 되진 않을 거다, 에네리아." 그녀의 외숙은 무척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그렇게 말했다. "에카테야르, 대단하네요-" 주변을 흐르는 경직된 분위기 때문인듯, 칼리아넬은 내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 때문에 귀가 좀 간질간질 하다. "음… 그녀도 마법사니까, 일반 기사정도야 가볍게 이기는게 당연하겠지." 나는 사실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이 싸움에서 이겼든 지든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녀가 상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 앞의 싸움에서 미루어 보아 가문전에선 상대를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조건에서 그녀가 상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왠지 흡족한 기분이군. # 세번째는 에네리아의 호위기사 베리오스 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는 대단한 실력자 같았지만, 상대 역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 아슬한 차이로 져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목숨은 잃지 않고 왼팔에 약간의 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이로서 상황은 2 : 1 바루에르 가문이 이기기 위해서는 로나벨아크하임과 베델, 둘 모두 이겨야 한다- 라는 조건이 성립되는군. 네번째로 나선건 로나벨아크하임, 그의 싸움은 내가 언급할 필요 조차 없었다. "윽-!" 하고, 답답한 신음을 내며 상대는 그의 발 밑에 고개를 떨구고 쓰러지고 말았다. 정적이 흐른다. "저자는… 아, 아크함!? 소문으로만 듣던 개인 용병단인가… 듣던 대로 무시무시한 실력이군." 그 목소리에 에네리아의 외숙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뭐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한건지 내게는 보이지도 않았다. 로나벨아크하임은 잠시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 보다 몸을 홱 돌려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아마, 일분도 지나지 않았을 거다. 적당히 자제좀 하는게 좋을것 같은데… 모든 인간이 얼빠진 표정으로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상식을 너무 가볍게 초월해 버리고 있는것은 아니냐, 로나벨아크하임. 그는 내 따가운 시선을 흘리며 에네리아에게 말했다. "어때, 아가씨. 비싼 고용비 값만큼은 하지? 내가 후회하지 않을거라 했잖아." "확실히- 감탄할만한 실력이군요." 에네리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바루에르 가문, 2승." 아직도 얼이 빠져있던 바르멘토가 이제서야 승리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것은 하나, 베델 뿐이다. 언뜻 본 베델의 얼굴은 어느때 보다도 무섭게 굳어 있었다. 방금전 로나벨아크하임의 말도 안되는 힘 때문일까, 아니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다는 긴장 때문일까. 어쨌든 이로서 에네리아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리게 되었군. "저자는… 마물 사냥꾼, 베델!? 말도 안돼! 바루에르 가는 개인 용병단을 둘이나 고용한건가!" 베델은 용병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사람인지, 상대방 용병 쪽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나왔다. 그런데, 마물 사냥꾼… 이라고?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납득은 할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 화려하게도 보이는 그 커다란 동작과 항상 그의 등에 걸려 있던 석궁은 인간에게 쓰기엔 별로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들이 마지막에 내세운 사람은 아마 베델의 상대는 아닌 모양이지? 마지막이어서 그런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에서 시작되었고, 베델이 여러번 휘두른 검에- 상대방은 쉽게 검을 놓치고 말았다. "…" "…" 베델은 아무말 없이 목에 검을 들이대었고, 상대는 아연한 표정으로 양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르멘토의 선언. "바루에르 가문, 3승." … 굉장히 싱겁군. 로나벨아크하임이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오분도 채 걸리지 않은 전투였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에네리아, 네게 개인 용병단이라 불리는 자들이 둘 씩이나-!" "글쎄요, 하늘이 제 억울함을 보고 도운걸지도 모르지요." 하얗고 고운 에네리아의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지어졌다. 원래 저런 표정은 모르던 소녀였는데… 새삼, 그녀가 정말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의 외숙을 노려보다가 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싸늘함과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왠지 씁쓸한것 같은 표정- 하지만 곧 그 표정도 사라지고, 그녀는 바르멘토를 향해 외친다. "자, 그리엣타 씨. 최종적으로 바루에르 가문의 승리를 선언해 주시지요." # "칼리체 님, 저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요?" 칼리아넬이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을 가르키며 물었다. 어린 아이부터 젊은 인간, 늙은 인간… 성별, 연령이 다양한 인간들이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글쎄, 어떻게 될까나… "에네리아가 원하는 대로 되겠지." 가문전은 가문의 모든것을 거는것, 그것은 가문에 속한 인간의 목숨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니까. "그리엣타 씨, 뭐하시는 건가요? 어서 바루에르 가문의 승리를…" "흐음- 바루에르 양,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것 같군요." 바르멘토가 에스페란셰 가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착오라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무슨 말씀인가요?" 에네리아는 태연한 목소리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것 같기도 하다. 바르멘토는 에네리아가 의외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약간 움찔- 하는 듯 하다. "저는 바루에르 가문의 승리를 선언하지 못하겠다는 소리입니다." "어째서죠?" "그건 내가 설명해주마, 에네리아." 그녀의 외숙이 나서며 히죽- 하고 웃었다. "당신이 설명할 이유가 없을테네요?" "이유가 없기는- 바르멘토는 결코 바루에르 가문의 승리를 선언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우리 에스페란셰 가문에 매수되었거든?" 헛- 하고 바루에르 가문의 기사들이 놀란 숨을 들이키는 것이 들린다. 이런, 바보같은- 매수라니, 사람을 재화로 산 것인가. 절로 눈쌀이 찌푸려 지는 일이다. 인간들이 정한 규칙은 그들의 돈으로 이렇게도 쉽게 깨져 버린다. "…" 에네리아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바루에르 가문의 기사들의 손이 모두 검의 손잡이로 움직이고, 그것은 에스페란셰 가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흐하하하-!! 어리석구나, 너무나도 어리석어 에네리아! 내가 가문전에 패했다 해서 곧이 곧대로 에스페란셰 가문의 모든 것을 내게 넘길줄 알았느냐!?" 그는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손바닥을 탁- 하고 쳤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지 이 언덕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풀 숲을 헤치는 그 요란한 소리가 언덕을 울렸고, 곧 사방에서 활을 든 병사 수백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모두 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우리쪽을 겨누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 되어 버린 형세로군. 이래서야 이곳에서 쉽게 빠져나가기는 어렵다. "이 무슨 비열한…!" "이게 무슨짓이오, 바르멘토! 참관인인 당신이 돈을 받고 가문전의 결과를 무시하다니!!" 성난 고함이 허공을 가득 울렸다. 참관인이 었던 바르멘토는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에네리아의 외숙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이건 어떠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네리아를 바라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가문전은 우리가 승리했고, 내가 바루에르 가문에 대해 내린 결정은 말살! 이곳에 있는 너희들만 죽인다면, 세상 그 누가 진실을 알겠는가? 그리고 니하크할룬에 남아있는 바루에르 가의 재화와 저택,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내 것이 되는 것이지, 어떠냐 에네리아?" "…" "너무 겁 먹진 말거라. 지금 무릎 꿇고 내게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아, 다만 마법은 쓰지 못하도록 두 눈을 실명시키고 팔 다리의 모든 근맥을 자르는 것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참, 쓸데 없는 생각은 말거라. 아무리 네가 마법사라고 해도 이 많은 수의 궁수들을 이길순 없을테니 말이야." 그의 지독한 조롱에도 에네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녀의 조그만 어깨가 조금씩 떨린다. 절망하고 있나? 슬퍼하고 있나? 분노하고 있나? 그런건가, 에네리아? "후후, 후후훗, 꺄하하하-!" "…" "…" 싸늘한 침묵이 흐르고, 곧 이 언덕엔 그녀의 자지러질듯한 웃음 소리만이 울렸다. "웃어…?" 그녀의 외숙은 깔깔 거리며 자신을 조롱하듯 웃는 그녀를 향해 인상을 구겼다. "너무 절망적인 상황에 그만 미쳐버린 모양이군. 외숙으로써 가만 보고 있을순 없지. 자, 이제 그만 끝내라."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쪽을 포위하고 있는 에스페란셰 가문의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으- 으악!" "사, 살려줘!" 포위중인 에스페란셰 가문의 병사들 뒤로 바루에르 가(家)의 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 등장해 그들을 닥치는 대로 배어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냥 쏴라! 저들을 쏘란 말이다!" 화살이 이쪽으로 날아들었지만, 명중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에스페란셰 가문의 병사들은 바루에르 가문의 병사들에게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고, 매복에 당황한 나머지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은것이다. "정말, 정말 정말 머저리야- 당신은. 내가 아직도 그렇게 멍청하고 순한 계집애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후후-" 그렇게 말하며 외숙을 비웃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다른 사람으로 보일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감정없이 평안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네, 네년이-!" "내가 곧이 곧대로 이들만 이끌고 가문전을 나왔을것 같아? 내가 당신의 그 추악한 일면을 알고 있는데?" 그녀는 또다시 자지러질듯이 웃더니, "혹시나 말이야… 당신이 그냥 가문전을 끝으로 내게 죽으면 어쩔까 싶었어. 그런데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당신의 그 똥물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내면의 얼굴을 모두에게 드러냈잖아." "크으-!!" "장소를 못가리고 아무대서나 오물을 갈겨대는 개- 처럼 자신의 더러움을 드러내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꼴이라니! 정말 걸작이지 뭐야?" 더 없이 유쾌한듯, 허리를 꺾고 웃어대는 그녀의 눈빛은 묘한 잔혹함에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외숙은 너무나도 커다란 분노에 할말마저 잃은듯, 그저 주먹을 쥐고 손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에요, 아버지.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에요. 드디어…" 광기어린 눈동자로 그녀는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독한 마이너스 감정이 그녀의 마력을 타고나와 주변을 흘렀다. 아마 실제로 그녀 주변의 온도가 몇도 쯤 내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놀랐다. 긍정적이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순수한 놀람. 나는 단 몇달 내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화해 버린 에네리아는 인간 자체에게 정말 놀라고 말았다. 그란셸의 죽음은 그녀의 모든것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정도로 의미가 큰 것이었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것인가? 바루에르 가의 병사들은 곧 손쉽게 풀숲에 숨어있는 궁수들의 목숨을 모두 빼앗았다. 그리고 모종의 지시가 있었던듯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을 빙 둘러싸고 더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수의 차이로 그가 고용한 용병들과 기사들은 이미 모두 제압당한 상태였다. "이럴, 이럴리가 없어. 도대체, 이럴수가…!" "꺄하하하! 왜 그러시죠, 외숙? 설마 제가 당신을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적어도 목숨만은 보장할테니, 그렇게 겁먹은 얼굴은 하지 마세요, 후훗." 에네리아는 입술을 핥으며 마치 요염한 악마처럼 웃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 어쩔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 정말이냐-? 정말 목숨만은 보장해 주는거냐!?" 그는 다급하게 외치며 간절한 표정으로 에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목숨… 이 세상 그 어느 생명체도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없겠지. 용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흐응-?" "부, 부, 부탁한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목숨만은…!" 에네리아의 태도가 살짝 변하자 그는 아까의 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비굴한 목숨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광경이었다. 원한, 복수… 그녀는 지금 그런 감정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수줍게 웃으며 내 뺨에 키스하던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지 오래였다. "칼리체." "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베델이 속삭였다. "만약 내가 돌발 행동을 한다 해도 절대로 내 편은 들지마. 지금의 에네리아는 정말 위험해 보이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네게 해가 갈수도 있어." "잠깐만요, 베델. 도대체 무슨…?" 그는 대답하지 않은채, 날렵한 걸음으로 에스페란셰 가문을 둘러싸고 있는 바루에르 가문의 병사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베델… 언뜻 본 그의 얼굴은 깊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뭘 할 생각일까. "흐음, 어쩔까나?" "제, 제발-! 내가 잘못했다, 에네리아! 무슨 말을 해도 용서할 수 업겠지만, 제발, 제발 목숨만은…" 목숨을 구걸하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추했다. 인간의 현자, 베르센크… 그는 인간들의 이런 모습만 보아왔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절망이 약간이나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응, 그럼 네발로 엎드려서 개처럼 짖어봐." "… 큭!" "어머, 안할꺼야? 그럼 그렇게나 소중한 당신의 목숨, 내가 가져가도 되?" 주저하던 그는 에네리아의 말에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개의 울음소리를 내는 인간이 한명 생겨났다. 에네리아의 얼굴에 남아있던 잔혹한 미소마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그녀는 지독한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엎드린채 개처럼 짖고 있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되, 되었느냐, 에네리아. 시키는 대로 했으니 목숨만은…" "목숨? 꺄하하핫-! 개 흉내를 내더니 지능도 개 수준이 되어버렸나봐? 내가 정말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당신의 목숨을 살려줄줄 알았어? 비열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죄는 그 어떤 행위로도 용서받을 수 없어!" 그녀는 옆에 호위로서 서있는 베리오스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고 외숙의 목을 겨누었다. "야, 약속하지 않았느냐!" "어머, 설마 정말로 믿었었어? 그냥 당신이 좋아하는 거짓말을 나도 해본것 뿐이야. 항상 남에게 하던걸 자신이 당하니, 기분이 어때?" "…" 그녀의 외숙은 이제 완전히 체념한듯 고개를 떨구었다. "으, 으아앙-! 엄마, 무서워!" 한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제 어미의 품에 뛰어들었다. 바루에르 가의 병사들에 의해 붙잡혀 있는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는 어린아이 울음소리에 고개를 번쩍들며 에네리아에게 말했다. "나, 나는 어찌되어도 좋다…! 가문의 사람들은, 나를 제외한 다른 가문의 사람들의 목숨만은 반드시 살려주겠다고 약속해 다오." "…" "제발! 이렇게 부탁하마! 복수의 대상은 나 하나로 족하지 않느냐, 내 가문의 모든 것을 가져가도 좋다. 하지만…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다오!" … 뭐지? 방금 자신의 목숨을 구걸 하던, 그 인간이 맞는건가? "비겁해." 에네리아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균형을 잃은 검의 끝이 그녀의 외숙이 목을 살짝 긁어 핏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비겁하다구! 내가 무슨 고통을 맛보았는지 알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하나남은 가족이 사라지는,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남지 않는, 그런 고통이야!" "제발…!" "그 입 다무세요, 외숙! 난 당신에게 나와 똑같은 고통을 안겨 주겠어! 가문의 사람들 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뭔가 울음이 섞인것 같기도 한 외침을 내지르고, 에네리아는 힘이 빠진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 가문의 사람들을 한명 한명 죽일꺼야, 당신은 살려둔채 말이야.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느껴. 곧 당신이 느낄 그 고통이 내가 겪었던 고통이니까." "아, 안돼! 제발 그만둬!" 비통한 외침. 하지만, 왜일까- 가족의 목숨을 구걸하는 그의 모습이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던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보인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목숨… 그녀가 앞으로 걸어나가며 손을 휘둘렀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에스페란셰 가문의 청년 한명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밀쳐진듯 앞으로 굴러 나왔다. 마술, 인가. "아가씨가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제가…" 베리오스가 나서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음-" 그는 감히 에네리아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이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 하다. 나는… "그만두세요, 에네리아." 베델…? "카, 칼리체 님!?" 지금껏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던 칼리아넬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비명과 같은 외침을 삼켰다. 그는 검을 뽑아들고, 에네리아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베델? 당신은 제게 고용된 상태에요." 순식간에 그녀의 앞을 바루에르 가의 기사들이 막아섰다. 베델과 그들 사이에 갑작스레 적대적인 기류가 흐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저 인간은. # "또 나서는 군요, 저 바보같은 남자가… 칼리체,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요?" 에카테야르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에네리아와 대치하고 있는 베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걱정하는 건가? "왜?" "왜- 라니요, 당신, 베델을 도와줄 생각이 없는거에요? 지금 무척 위험한 상황이잖아요." 확실히… 에네리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고, 베델은 굳건히 서서 비킬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원치 않는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군. "내가 왜 도와야 하지? 누구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해. 그러니 베델의 행동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할 필요는 없는 거지." "… 당신, 멍해 보이는 표정에 바보같이 착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은근히 냉정한 면도 있었군요." 착하다라… 인간의 기준으로, 선(善)을 행한다는 것인가? 그건 인간이 자신들의 사회를 원활히 유지하기 위해 대중에게 권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용인 내가 그것까지 따를 필요는 없겠지. "뭐, 상관 없어요. 당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제가 나서는 수밖에." "너는 왜 그를 도우려하는거지?" "바보-! 애초에 내가 이런 가문전에 나선것도 당신들을 돕기 위해서 였다구요." 그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병사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만약 전투가 일어난다면 바로 그것에 가세할 생각인것 같았다. "칼리체 님…" "칼리아넬,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마렴." … 왠지 마음이 편칠 않군.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할까. "베델, 왜 내 앞을 막아서는 거죠!?" 에네리아의 앙칼진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에네리아,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은 단언코 잘못된 일입니다. 저들을 보세요! 노인부터, 어린애 까지… 아무런 힘없는 사람들 뿐이라구요! 그런 저 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구요!?" "네, 에스페란셰 가문의 인간들을 모두 죽이기 까지 내 복수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숙도 저처럼… 가족 없이 혼자가 되는 고통을 겪어 봐야 해요! 그것도 가족이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에네리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진심인가, 그녀는. 자신이 당한것을, 그대로 되 갚아 주겠다라…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는 난 아무래도 관심 없다. "당신만 괴로워질 뿐이에요! 원수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겠다고, 복수하겠다고 저항도 제대로 못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면…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편해지겠나요? 아뇨, 장담하건데… 상냥한 당신은, 평생 그 죄책감을 지고 살아야 할 거에요." "…"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흐른다. 이제 에네리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베델을 노려보고만 있다. 베델은 자신을 압박하는 에네리아의 마력과 자신에게 겨누어진 수십개의 창칼을 바라보며 오연한 눈빛으로 검을 앞으로 세운다. … 그것은 결사의 의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베델, 저 인간은 한번도 본적 없는 타인들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있다. 그들을 목숨걸고 지킨다 해도 자신에게 이익이 오는 것도 아니다. … 그만의 정의(正義), 인건가. 그는 항상 그래왔다. 산적들에게 습격당한 마을을 구하고, 두 귀족에 의해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이젠 복수의 슬픔과 증오, 광기에 빠진 에네리아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사람들과 그녀 자신마저 지키려는 것인가. "고, 고맙네. 베델, 이라 했던가…?" 에네리아의 외숙은 어느샌가 몸을 추스르고 간절한 눈빛으로 베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자는 이곳에서 베델뿐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내게 말 걸지 마시오. 난 바루에르 가문에게 행했던 당신의 추악한 행동을 무척이나 증오하오. 그리고 착각하지 마시오! 난 당신의 편을 드는게 아니라, 이보다 더 커다란 비극을 막으려는 것 뿐이니까!" "으…" 그는 베델의 기세에 눌려 신음을 흘리고 뒷걸음질 쳤다. 에네리아는 그의 모습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모든 시선은 오직 베델, 그 하나만을 향해있을 뿐이다. "마지막이에요. 당신, 정말로… 나를 막겠다는 생각인가요?" "그렇습니다." "설령 당신이 내게 목숨을 위협받게 한다해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후우… 난 마법사에요. 일개 검사인 당신이 제게 이길 수 있을것 같나요?" 그의 마지막 대답은 '그렇습니다'로 끝나지는 않았다. "전 결코 당신을 이기기 위해 이곳에 당신을 막고서 서있는게 아닙니다. 에네리아, 부디 다시한번 생각해 주세요. 당신은 정말로, 복수를 위해 저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인가요?" "…" 에네리아는 대답이 없다. 그녀의 눈동자가는 곧 불안감이란 감정으로 물들어 버렸다. 너무나도 확신에 찬 베델의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애써 감추고 있던 본래의 유약한 성격 때문일까. 흔들리는 눈빛은 베델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의지할 것을 찾는듯 흐릿하게 떨려 온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 칼리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모든 이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다. 굳은 결의가 얼굴에 나타나 있는 베델, 나를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는 칼리아넬, 병사들 사이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에카테야르, 그녀의 외숙, 에스페란셰 가문의 사람들. 하아… 자기 일 정도는 스스로 결정하란 말이다. 하지만, 나는… "… 베델은 에네리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히 말할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 그것은 우리 드래곤들 조차 마찬가지. 나는 힐끗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이 부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가 담긴 눈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생각해보면, 대단한 인간이야. 그런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정의가, 저 정도로 흔들림 없이 자신의 내부에 우뚝 서있으니까. 자신이 가진 '신념', 그것이 틀리지 않다고 확신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세상엔 그저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만이 있을 뿐이에요. 에네리아, 당신의 선택이 불러올 결과가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당신은 베델을 치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룩하세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 뒤의 말까지 주절주절 내뱉고 싶진 않다.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거냐, 내가 말한 그대로다. 이 세계는, 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는 결국 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네가 살아가고, 감각하는 그 세계는 바로 너 만의 세계, 그 속에서 다른 누구의 개입도 의견도 필요 없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한채, 그렇게 이야기 한다. "흑-" 에네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볼을 주르륵 타고 흘러 내렸다. "… 내가, 내가 그럴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저들을 죽이고, 나와 똑같은 고통을 타인이 겪게 하고선, 그런 식으론 행복해 질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눈을 감으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으아아앙-! 하고 그녀는 어린애 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칼리체 님…" 칼리아넬이 한숨을 내쉬며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나를 바라보며, 그럴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베델.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창대를 내리는 에카테야르. 아아, 이 무슨… 바보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재미있군, 루루렌칼리체." "로나벨아크하임…" "역시 너다운 생각이다. 넌 정말…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질 않는구나. 넌 예전의 내게도 그렇게 말했었지. 뭐가 이상하냐는 듯, 그저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이야." "너…?" 그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 트렸다. 또다시 과거의 나- 에 대한 말인가. 가끔 그가 나를 보며 오랜 추억에 젖는 듯한 저 시선… 괜히 갑갑한 기분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이야기 라서 그런 것일까. "아아, 흥이 떨어졌다. 좀더 즐거운 광경을 볼 수 있을것 같았는데. 난 또다시 새로운 재미를 찾으로 떠나야겠군." 로나벨아크하임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이곳에서 멀어져 갔다. 이렇게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걸까? 하긴, 워낙에 변덕스런 녀석이니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는 다른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은채, 이 언덕을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다. # 에네리아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원흉인 외숙 까지도. 원래, 그녀는 이렇게나 유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원수의 목숨 조차 빼앗지 못할정도로 모질지 못한. 베리오스나 다른 바루에르 가(家)의 가신들은 한사코 그녀의 외숙과 매수된 가문전의 참관인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지만, 그녀는 그저 쓴웃음을 지은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난 그녀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 모두가 떠난 언덕, 소수만이 남은 에스페란셰 가문의 병사들과, 가솔들, 그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의 외숙만이 이곳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모두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짓… 원래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에네리아, 그녀에겐 약간의 호의를 베풀어도 되겠지. 아니, 호의라고도 할 수 없으려나. 그래, 이건 그저 내 변덕일 뿐이다. 마력과 신력이 개방된다. 거의 완벽한 인간에 가까운 내 신체가 그 강대한 신비에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 어지러이 흔들렸다. 내 눈은 이미 동공이 위 아래로 찢어진 용의 눈을 하고 있었고, 등에선 날개가 돋아나려 하고 있었다. "다, 당신은…!?" 그녀의 외숙만이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내 존재가 보이지 않는 다는듯, 여전히 숲 주위에 흩어진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 이외에 다른 인간이 나를 인식하는 것을 허락치 않기 때문이었다. - 잘 듣거라, 어리석은 인간. "히- 히익!?" 그는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마술사가 아닌 그도 느낄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마력과 신력으로, 나는 절대로 인간일 수 없다- 라는걸 말이다. 그는 즉시 양 무릎과 팔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혹시- 시, 신이십니까!?" 내게 흐르는 신성(神聖)은 신이라고 칭하기엔 부족함이 많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 난 드래곤이다. "드, 드래곤…?"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다. 무척 혼란스럽겠지, 다짜고짜 드래곤이라니, 믿기 힘들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내 거대한 존재감은 결코 거짓이 아닐테니… - 그래, 나는 요르간드를 지배하는 화이트 드래곤, 루루렌칼리체. "…" 이미 그는 할말을 잃은채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에네리아 룬헤임 바루에르, 그녀는 내 권속 아래 보호 받는 인간이다. 그러니, 앞으로 한번 더 내 심기를 언짢게 한다면 네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가 고작 인간 하나를 위해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이야. 나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채 내 존재감을 그에게서 지워 나갔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작 인간이, 내 의지가 담긴 선언을 듣고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지. 아마 그는 평생 에네리아에게 손도 대지 못할 것이다. 후… 정말, 괜한짓을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권속 아래 보호 받는, 이라… 나도 꽤나 유치해진것 같군. # "어라? 칼리체 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니." "음, 잠깐동안 칼리체 님이 사라진것 같았었는데…" 마력에 민감한 요정답게 그녀는 그 잠깐 동안의 부재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내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캐묻진 않았다. "헤헤, 칼리체 님…" "응?" 그녀가 헤픈 웃음을 지으며 내 팔을 감싸 안았다. "에네리아, 정말 다행이에요." "뭐…" 그녀의 선택이지. 딱히 다행이라 할 것도 없다. 칼리아넬은 바루에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할때 까지 이유모를 미소를 지으며 계속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 "아가씨가 부르십니다." 저택에 돌아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무렵, 시녀 한 명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시간은 열 한시. 수면을 취할 시간인데, 이렇게 늦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복도는 벽에 걸린 초로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래도 빛이 충분하지 않아 복도는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방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으니, 찾아가는데 별로 어려울건 없었다. -똑똑 이제는 익숙해진 노크를 먼저 하고, 안에서 '들어오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문을 열었다. 작고 동그란 탁자위에 촛불 하나와 여러개의 병이 올려져 있었다. 이 냄새는… 술, 인가? "아, 칼리체. 왔군요." 낮에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네리아…" "자, 여기 앉으세요. 그렇게 서있으면 다리 아프잖아요." "…" 내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는 투명한 유리컵에 갈색의 액체를 따르고, 그것을 내게 건네었다. 술 맞군. 그녀는 언제부터 이걸 마시고 있었을까. "제일 먼저… 당신과 베델에겐 고맙단 말 부터 해야할 것 같군요." "베델은 여기 없…" "일부러 부르지 않았어요. 당신에게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든요." 그녀는 내 말을 자르며 고개를 숙였다. 술을 많이 마신걸까, 아니면 붉은 촛불 때문에 그런걸까,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과 베델이 아니었다면, 분명 나는 외숙과 에스페란셰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을 거에요. 그리고 베델의 말대로… 저는 불행해 졌겠지요. 전 그렇게 강한 인간이 아니니까요." "…" 난 아무말 없이 컵에 따라진 갈색 액체를 마셨다. 비싼 건가…? 전에 로나벨아크하임과 술집에서 마셨던 그 술이랑은 맛이 차원이 달랐다. "그래요, 그저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고맙다고…" 그녀는 뭔가 주저하듯, 또다시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에네리아, 후회하지 않나요? 외숙을 살려둔것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는데." "물론 후회해요. 지금도 후회하고, 앞으로도 후회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제 나약함을 깨달은 뒤에 어떻게 해도 그를 죽일 수가 없었어요. 바보같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제게 화를 낼지도 몰라요." 술에 약간 취한걸까, 그녀는 후후- 하고 실없이 웃었다. "너무 힘들어요. 외톨이가 되어버렸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바루에르 가문엔 저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았어요. 지금까진 외숙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 전 무얼 보고 살아야 하는 걸까요?" "…" 그녀는 대답을 바라고 묻는게 아니었다. 아니, 저것은 스스로에 대한 물음. 외숙에 대한 복수심 만으로 살아온 그녀는 이제 그녀 스스로를 지탱할 다른 것을 찾아봐야 하겠지. 희미한 촛불에 비친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옅은 슬픔에 물들어 있었다. "칼리체…"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당신은 항상 고독에 잠겨 있는것 같아요. 베델과 칼리아넬, 그리고 에카테야르라는 소녀와 함께 하고 있지만, 당신의 존재감은 항상 그 속에 붕 떠있죠. 어때요, 내 말이 틀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이라… 용은 언제나 고독할 수 밖에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모든 생명체 들이 스러져 나가고, 환경이 변하고, 시대가 변해도 용은 언제나 그대로 일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고독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고독… 그 고독을 내게 조금 만이라도 나누어줄 순 없나요, 칼리체?" 고독을 나누어 달라… 인가, 나는 눈을 감았다. 우스운 일이다. 한낯 인간이 영원을 살아가는 용의 고독을 나누어 달라고…? 우습고, 또 우스운 일이지만… 그녀가 내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저… 그 말에 내 심장이 잠깐이나마 두근 거렸으니까. 잠깐 동안이라도 눈을 감고 뜨면 덧 없는 세월에 스러져갈 하찮은 생명 이지만, 그래도 왠지 잠깐이나마 뭔가… 따뜻한 느낌을 받았던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에네리아는 내게 꽤 가치 있는 인간이다. "아…" 내 손가락 끝에 닿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이마부터 턱까지 매력적인 그녀의 얼굴 곡선을 따라 내 손가락이 내려간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땠다. "…" 그녀는 기대감이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그것은 기대감인가, 아니면… 나를 향한 다른 인간의 감정인가. … 모를 일이지. "하지만, 미안해요. 내 고독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난 처음부터 홀로 존재해 왔고, 언제 올지 모르는 종말의 끝에서도 난 여전히 혼자일 테니까요." "…왜, 어째서죠?"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사랑해요, 칼리체! 당신이… 당신이 내 존재 이유가 되어줄 순 없을까요, 아니 되어 주세요. 난, 더이상…"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 달려 들어 안겼다. 갑작스레 내게 안겨든 그녀를 지탱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에네리아는 내 위에서 깊은 슬픔이 잠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가여운 인간. 평생을 저택 안에서만 살다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던 아버지가 죽고, 그 복수마저 사라져 버린 지금, 그녀에게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대안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이용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 "칼리체…"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인간의 신체 부위중 가장 감각이 예민한 곳, 입술을 통해 그녀의 가쁜 숨결이 전해져 온다. 에네리아는 입을 맞추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왠지 정신이 아득해 진다. 그녀를 가여이 여기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그대로 그녀의 일방적인 마음을 받아 주고만 있었다. "날… 안아줘요." # 다음날, 날씨는 꽤 서늘했다. 바루에르 저택의 지붕에 걸터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걸까,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난 조금 따뜻해 질까 싶어 긴 머리카락과 어깨를 동시에 감싸 안으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곳이 가장 높은 곳이어서, 넓은 저택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문전을 치르고 난 후, 바루에르 저택의 내부는 평화를 되찾았다… 라고 해야 하나. 평소와 같이 저택 안을 순찰하는 경비들이 없어 왠지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곧… 이곳을 떠나야 하겠지. 가문전이 끝나기 전 까지만 머물기로 했으니까. "…" 에네리아… 그녀는 내게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었다. 너무나도 커다란 고통은 상냥하고 밝았던 그녀를 잔혹하고 비관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단지, 아버지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죽었다- 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어땠을까. 내 가장 '소중한 것'이 다른 존재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면…? 아마 큰 유감을 보이며 내 소중한 것을 앗아간 그 존재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렸겠지. 그리고… 그 뿐이다. 무척이나 아쉽겠지만, 나는 그것으로 끝이겠지. 언제 그랬다는 듯이, 소중한 것의 추억을 영원한 기억 한 구석에 침잠시킨 채로 언제나 처럼… 아…! '기억의 리셋' "…" 애초에 나는 왜 기억을 몇번이고 리셋했을까. 모든 것을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왜 모든 것을 잊어야 했지? 지금까지 한번도 의문을 갖지 않았던 일들이 사고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로나벨아크하임… 전에 그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언제까지고 온전히 그 모습을 간직할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진정한 불멸을 버리면서 생명체가 되어버린 우리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야.' 라고, 시간의 흐름… 진정한 불멸의 버림…. 그리고, 기억의 리셋. … 완전히, 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로나벨아크하임… 이제서야 네 말이 조금 이해가 가는것 같기도 하군.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루루렌칼리체, 과거의 기억을 리셋한 나. … 인간의 연약함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고독이나 애초에 그 근원은 별로 다른게 없었던 걸까. 너도 별로 강한 존재는 못되었던 모양이구나, 과거의 루루렌칼리체. 하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그 존재의 기억. 서로 다른 시대를 기억하는 지금의 루루렌칼리체와 과거의 루루렌칼리체는 분명, 다른 존재일 것이다. "로나벨아크하임…" 한번도 기억을 리셋하지 않은 유일한 용. 모두 동등한 권능과 힘을 갖고 있지만, 가장 과거의 '신'에 근접한 자는 어쩌면 그가 아닐까. … 쓸데 없는 생각만 잔뜩 해버리고 말았군. "칼리체…? 도대체 거기서 뭘 하는 건가요." 지붕의 끝에 걸터 앉아 두 다리를 흔들고 있던 나는 아래에서 들려온 새침한 소녀의 목소리에 허공을 향해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야 했다. 에카테야르… 로군. 내 대답이 없자, 그녀는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 건물과 건물 사이의 벽을 밟고 마치 고양이 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이곳까지 올라왔다. 선명한 금발이 그 움직임에 잠시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시리다. "왠지 우울해 보이는 군요." 글쎄, "네가 우울하니까 내 모습이 우울하게 보이는것은 아니니?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대로 세상을 감각하니까." "흥, 바보같은 소릴 하는걸 보니, 정말 우울한 모양이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언제나와 다르지 않게 표정이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내 옆에 털썩- 걸터 앉았다. "떨어지면 위험할텐데, 이곳엔 네가 안전하게 딪고 내려갈만한 구조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당신이 구해주면 되잖아요?"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내가 그녀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듯, 그렇게 말했다. 왠지 그냥 웃음이 나올것 같은 기분이다. 표정을 지을줄 모르는 내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 하겠지만. "… 역시 당신,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 맞았어요. 그때 그렇게 매몰차게 말해서…, 미안해요."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불어오는 바람에 목소리를 싣듯,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우…" 그녀는 얼굴을 약간 붉히고 나를 노려보았다. "창피하게 하지 말아요. 그때 에네리아에게 했던 말… 그런 대답이 어디있어요? 결국 당신은 에네리아 자신이 행복해질 선택을 하라는 거였잖아요. 그 대답엔 당신 스스로의 생각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어요. 철저히 에네리아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았죠. … 내 말이 틀린가요?" "…" 글쎄… 어떨까? "분명, 에네리아도 그걸 눈치챈 걸꺼에요. 정말, 별것도 아닌 말이었지만." "… 고마워." "에-?" "결국 너도 날 위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잖니?" "흐, 흥- 괜한 착각 하지 말아요." # "결국 떠나는 군요… 칼리체." 에네리아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허탈한 듯, 그렇게 속삭였다. 떠난다- 라, 난 아무곳에도 가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영원히 지키고 있다. 결국 먼저 떠나버리는 건, 너희 인간들이 아니던가.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 베델은 짐을 챙겨든 채 멀찌기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요." "아아, 아아-! 칼리체!" 그녀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며 나를 끌어 안았다. 품 속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부드러운 몸, 향기로운 체향.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겠지요. 당신… 연약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꽤 고집이 있으니까요." "…" 그녀는 살아갈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도, 외숙에 대한 복수심도- 시간의 흐름속에 몸을 맡기면 언젠가 망각이란 이름의 파도가 덮쳐와 약간의 흔적만을 남긴채 그것들을 쓸어 가겠지. … 그녀는 결국 자신이 살아갈 또 다른 이유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망각을 모르는 나는 끝없이 펼쳐진 기억의 한 페이지에서 그녀를 영원히 추억하게 되겠지. 내 고독을 나누어 달라고 했었던 당돌한 인간… "칼리체." 눈 깜짝할 사이 그녀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이번만큼은 나도 그녀의 등을 감싸안아 그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거에요. 그날밤, 누구보다 따뜻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던 당신을… 정말이에요." 영원. 그 달콤하고도 한없이 쓰디쓴 단어,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입에 담는 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종말에 이를 때 까지 정말로 그 영원을 잊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서 세계의 근원에 까지 그녀의 염원이 닿는다면, 그녀의 종말 자체는 '영원으로 가는 문'이 될 것이다. "잘 있어요, 에네리아." 이제, 안녕. # "…" 왠지 묘한 침묵이 감도는것 같은데… "으음, 에네리아가 칼리체를 정말 많이 좋아했었나 보구나." 얼굴이 약간 벌게져 있는 베델이 뺨을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왠지 뾰로통해 보이는 칼리아넬, 평소와 같이 무표정 하긴 하지만 왠지 화가 나 보이는 에카테야르. 아아, 곤란한 요정과 인간들이로군, 왜들 이러는거지. 불편한 분위기에서 나는 일단 궁금한 것을 베델에게 물었다. "카스텔 공화국 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 도보로는 한 일주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 먼 거리는 아니로군. "설마 걸어갈 생각인가요? 말을 타고가면 금방 갈 수 있을텐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빙빙 꼬며 에카테야르가 말했다. 말을 타고 간다… 나에겐 별로 기껍지 않은 일이다. 그건 엉덩이가 너무 아파. "뭐 돈도 아낄겸, 그리 먼곳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베델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배려, 인가… 아무튼 고맙군. 나와 베델 사이를 오간 눈빛을 눈치챈 것일까 에카테야르가 샐쭉한 얼굴이 되어 칼리아넬에게로 가버렸다. 에카테야르가 알게 모르게 칼리아넬을 놀리고, 그녀는 발끈해서 그 놀림에 충실한 반응을 보여준다. … 지금껏 많이 당해왔을 텐데, 칼리아넬은 에카테야르가 재미로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 정도로 순진한걸 보니 요정이라는게, 역시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말야." 베델이 끄응- 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을 꺼냈다. "역시 칼리아넬도 너와 마찬가지로 고아인거야?" 흐음… 언젠가 이런 질문이 있을줄은 알았지만, 대화의 화제로 꺼내기 껄끄러운 주제라고 생각했는지 베델의 목소리는 작게 낮춰져 있었다. 고아라, 요정들의 탄생은 한 자연물에 오랫동안 모여 있는 정(精)에 의해 탄생한다. 그 정에 머금은 신비가 상대적으로 적다면 인간 소녀같은 모습의 요정이 되고, 상대적으로 많다면 정령(精靈)이 되는 건데… 그렇다면 칼리아넬의 부모라고 할 법한 존재는… 그녀가 탄생한 정(精)이 머물던 자연물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걸 그대로 베델에게 말해줄 수는 없는 일이고.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럼 둘이서 오랫동안 같이 산속에서 살았던거네?" "음, 그렇지요." "하하, 그럼 둘은 자매같은 사이 겠구나. 나이로 치면 네가 언니, 칼리아넬이 동생이고… 이름도 비슷하잖아?" 그게…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군. 난 잠깐 고개를 돌려 여전히 에카테야르와 티격태격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얇은 흰색 원피스 차림에 녹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소녀. 그러고보니 그녀는 제멋대로 나를 따라왔는데, 그녀가 살던 마을에선 난리가 난게 아닐까. 그때 그 요정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칼리아넬은 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존재인것 같은데. …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할 이유는 없지만. "… 칼리체." "네?" "너, 평소에 숨기고 다니는거 많지?" … 왠지 날카로운 지적이군. "그렇게 뜨끔 하다는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네가 네 신상에 대해 말을 안한것엔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그렇지?" 베델은 그렇게 말하고선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상하리 만큼 선명한 신뢰를, 그는 내게 보내오고 있다. "언젠가는 모두 말해줄게요." 그리고 나는 그 신뢰에 홀린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 그러고보니! 베델… 마물 사냥꾼 이라고 했었죠?" 칼리아넬이 에카테야르를 매섭게 노려보며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오며 베델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거라기 보다는… 그저 에카테야르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것 같군. 그나저나 마물 사냥꾼이라… 가문전에서 확실히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으응, 별것 아냐. 그냥 용병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리는것 뿐이지." "마물… 주로 마경(魔鏡)에서 출몰한다는 알 수 없는 괴물들을 말하는 거죠?" 에카테야르가 새침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뭐, 그렇지. 마경을 개척하느라 안달이 난 사람들은 한 사람의 용병이라도 아까우니까 지불하는 보수가 상당히 크거든." "위험하잖아요! 마물 사냥꾼이라고 불릴 정도면 그곳에서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했다는 거에요?" 베델은 칼리아넬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아마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싸워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한나도 없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지. "당신 등에 있는 그 석궁… 마물을 잡는데 쓰는 것이었군요." "응, 이건 사람에게 쓰는 무기가 아니니까." 흐음… 그런 위험한 곳에서 오래 일해왔다면 보수로 받은 재화가 상당할 텐데, 별로… 그래보이진 않는군. "뭐, 꽤 오래된 일이야. 그 일에선 완전히 손을 땠고…" 그의 외견은 이제 고작 이십대 초반, 마경에 대해 꽤 오래된 일- 이라 말할 수 있다는 건… 소년시절부터 목숨을 건 싸움을 해왔다는 건가. "그만, 그만.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별로 유쾌한 일도 아니고." 본인이 말하기 싫어한다면, 어쩔수 없지. 그에 대해선 나중에 듣기로 할까. # 내 시야에는 구름도 나무도 없었다. 시원할 정도로 탁 트인 시야엔 어두운 남색빛 하늘에 걸려 있는 수만, 수억개의 별들이 쏟아져 내릴듯 백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밤하늘을 보아왔지만 이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밤하늘… 신들이 창조한 것들 중 최고의 걸작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드래곤인 나의 마음조차 조금이나마 동하게 하는데, 인간들은 밤하늘을 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런 아름다운 밤하늘이 없었다면, 인간들의 감수성이 지금의 반 정도로 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 아니, 어쩌면 과거의 나도 저 밤하늘을 만드는데 참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 괜히 모닥불에 나뭇가지들을 던져 넣었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얇은 나뭇가지들을 집어 삼키며 타들어 간다. 하아, 오늘은 달도 없는 밤이로군. 덕분에 별빛이 잘 보이기는 하다만… 모두들 얇은 모포를 두른채 따뜻한 모닥불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에카테야르, 칼리아넬, 베델… 만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의 일들이 너무 인상적이라 그런걸까, 이제는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뭐, 언젠간 다시 혼자가 되겠지만. 화룡 로나벨아크하임, 은룡 레테닌시에스케, 흑룡 베른헬체이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와 함께 영원을 걸어갈 드래곤 들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로나벨아크하임은 최근에 만났으니 그렇다 치고, 레테닌시에스케나 베른헬체이스와 한번 정도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 "음… 칼리체, 아직도 안자는 거니?" 베델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로나벨아크하임 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선명한 적발이 삐죽삐죽 솟아있어 눈 앞에서 타오르는 모닥불과 비슷한 재미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냥,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옛 일들이라… 좋은 추억, 많이 갖고 있니?" "글쎄요, 좋은 추억… 이라." 좋은 추억의 기준이란 뭘까- 하는 재미없는 생각이 먼저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털며 눈을 감았다. 이젠 인간의 말을 그렇게 하나하나 분석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좋은 추억도, 나쁜 추억도 없어요. 제 기억속에 남아 있는 건, 그저…" 그저 아무 일도 없는 무료한 회색빛 풍경 뿐이지. 나는 거기서 말끝을 흐렸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쁜 추억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아직 칼리체는 어리니까, 앞으로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채워나가면 되니까 말야." 베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채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조금 건방지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쨌든 일찍 자두는게 좋겠다. 잠을 많이 자야 키가 많이 크거든. 칼리체도 언제까지 어린애 모습으로 남아있을 생각은 없지?" 그러면서 그는 나를 애써 모포에 눕혔다. 이것참, 이런 노골적인 어린애 취급이라니… 그의 태도에 약간 곤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눈을 감았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은 그의 말대로 잠을 자두는게 현명하다. 내일 일어났을때 피곤하면 오랫동안 걷기 힘드니 말이다. # 우린 그가 말한대로 약 일주일이 걸려 카스텔 공화국에 도착했다. 공화국이라… 이곳은 아나키스트 왕국이나 로엘가스트 연맹과는 다르게 커다란 도시 하나가 국토의 전부인 국가였다. 왕이 없고, 귀족도 없는, 신분이 없다는 그곳.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은 존재하겠지,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처럼 군집을 이루어 생활하는 생명체들 사이에서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간에 말이다. "정말 무척이나 큰 도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에카테야르는 편한 여성 여행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쁜 외모와 무표정한 얼굴이 그녀를 왠지 귀족가의 영애, 정도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제 그녀의 허리엔 검이 차여 있지도, 등에 창을 메고 있지도 않았다. 에카테야르가 의아한 눈빛을 내게 보내온다. 너무 빤히 바라본 탓일까… 어쨌든 그녀가 더이상 무기를 쥘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흐음, 바루에르 가문에서 받은 돈도 상당하니 오늘은 고급 여관에 묵어 볼까?" 베델이 유쾌한 목소리로 그렇게 제안하자, "와아, 대 찬성-! 이제 딱딱한 땅바닥에서 덜덜 떨며 자야하는 노숙은 정말로 사절이에요- 흐읏흥-♪" 그렇게 신이 나는 걸까, 칼리아넬은 콧노래 마저 부르고 있다. "카, 칼리아넬. 그렇게 큰 목소리로 떠들지 마.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주변을 지나다니는 인간들은 칼리아넬에게 귀엽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에카테야르는 그것이 창피한 모양인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를 말렸다. 이것참… "에카테야르, 곤란해?" 칼리아넬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물었다. 저 표정은 영락없는 장난 꾸러기다. "… 곤란해." "와아-! 고급 여관이다! 이제 노숙은 절대로 싫어요-!" "칼리아넬!" 에카테야르가 곤란해 하자 칼리아넬은 신이 나서 더 커다란 목소리로 사방에 떠들어 댔다. 영락없는 어린애 로군. 실제로도 어린애가 맞긴 하지만. 베델은 그런 두 소녀의 모습을 보고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카스텔 공화국… 내 흥미를 끌만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 "이곳이 괜찮을것 같은데?" 도시의 크기가 무척이나 큰 만큼, 곳곳에 위치해 있는 여관 중에서 고급 여관을 찾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태양은 저쪽 산 언저리에 걸쳐져 있었고, 세계에는 황혼의 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네, 적당한것 같군요." 나는 베델의 말에 대답하며 눈 앞의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너무 호화스럽지도 않고, 적당히 고급스러운 이 여관엔 이제 막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내관도 꽤나 깔끔하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묵는 걸로…"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의아한 얼굴로 그 소리가 들린곳을 바라보자 어두운 고동색 머리카락을 가진 해사한 인상의 소년이 바닥에 뭔가를 떨어트린채로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엔 갈색 봉투에서 떨어진 사과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부,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으응…? 다짜고짜 결혼해 달라니, 이 무슨… 거기다 이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정말로 진심인 모양이다. 모두들 벙찐 표정으로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소년이 갑자기 내게 물어왔다. "혹시, 나이가…?" "여, 열일곱."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으니 나도 모르게 미리 설정했던 나이를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 소년… 굉장한 박력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사과들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은채 손으로 수염도 나지 않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음, 원래 나는 연상 취향은 아니지만… 아니, 한 살 정도의 차이는 그다지…" "어이- 이봐." 베델이 내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얹으며 나섰다. "당신은 누구지?" 소년은 그제서야 나에게서 눈을 떼고 베델을 바라보았다. "음, 그건 네가 할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베델 역시 이 상황이 난감한듯, 어색한 표정으로 뺨을 긁으며 그렇게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홱 돌려 베델을 무시하더니 다시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 인간은 그 개체가 무척이나 많다. 각각의 인간은 각각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가치도 인간의 수 만큼이나 많겠지. 그러니 이 세상엔 통상적인 사고 방식으론 이해하지 못할 인간도 꽤나 많을 것이다. "무, 무시하지 말아주세요!" "아, 미안…" 본의 아니게 무시하고 말았군. 아무리 황당한 제안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진지함을 보인다면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 주어야 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딱-! 하는 굉장한 소리가 나며 소년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못난 동생이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군요." 쓰러진 소년 뒤에서 나타난 것은 소년과 같은 어두운 고동색 머리를 하고 있는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뭘로 때렸길래 저런 굉장한 소리가 났을까. "아, 괜찮아요." 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굉장한 미인이시군요. 그 때문에 동생이 이성을 잃고 그런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나 봅니다. 일행 분들에게도 재차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아,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놀란것 뿐이니까요." 베델이 나서서 대답했다. 상대편 청년은 베델을 보더니 호오- 하고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베델을 아는 자인가? 하지만 베델은 상대방을 아는 기색이 없는데. 하지만 그 표정은 정말 잠깐동안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고, 베델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러분들도 이 여관에서 묵으시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오, 저희도 그렇습니다. 이것도 나름대로 인연인데, 저녁이나 같이 한끼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동생의 무례를 사죄하는 뜻에서 제가 사겠습니다." "음,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베델은 거절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그 청년이 한사코 한끼를 사겠다고 권하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승낙했다. 칼리아넬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에카테야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베델 뒤를 따라 여관안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들, 남이 산다고 무턱다고 비싼것만 주문하진 않겠지? # "죄, 죄송합니다." 설마 우려하던 일이 발생할 줄이야.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은 이 여관에서 제일 비싼 음식을 각각 주문하고 말았다. 칼리아넬은 그렇다 치고… 에카테야르 까지 이런 심술궂은 짓을 할 줄은 몰랏다. 내가 잠깐 그 쪽을 힐끗 바라보자, 그녀는 포크를 입에 문채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흐음… "하하,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들께 한끼 식사를 대접할 수 있다는게 영광이지요." 자신의 이름을 슈렌토, 라고 밝힌 청년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베델 이후로 또 이렇게 친절한 인간을 보는건 처음이로군. 내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슈렌토 라는 인간의 주위에 흐르는 공기는 호의로 가득차 있었다. "자, 그리고 칼리체 씨에게 제대로 사과해야지 슈우." 아까 갑작스레 내게 결혼해달라고 말했던 소년의 이름은 슈우. 지금은 그의 형 손에 잡혀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형의 말을 거역할 생각은 없는듯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누나.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에요!" "이 녀석이 그래도?" 으음- 누나, 인가.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라 굉장히 낯선 느낌이다. 큭큭- 하고 옆에서 들려오는 숨죽인 웃음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카테야르가 나를 보며 꽤나 귀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니, 귀여운 표정이 아니라 저건… 비웃음인가? "…" … 에카테야르는 나를 소녀가 아닌 소년으로 알고 있으니, 웃을만도 하군.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앞에 놓여진 스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외부에서 오신 여행자분들 같으신데… 카스텔 공화국에 오신건, 역시 관광 목적이신가요?" "음- 뭐, 그런 셈이죠." 관광이라… 꽤 본격적인 말이로군. 하지만 뭐, 틀린것도 없나. "흐음, 유감스럽게도 때를 잘못 맞춰 오신것 같군요. 지금 이 카스텔 공화국은 정치 관련 문제로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 하거든요." 정치 문제라… 어딜가나 이 문제는 끊이질 않는군.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인가. "무슨 일입니까?" 베델이 의아한 기색으로 묻는다. "외부인인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는 '선거'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선거… 들어본 적이 있다. 공화국의 국민이 투표를 통해 '의원'을 뽑고, 그 의원들이 정치를 해나가는 형태 아닌가, 개인적으로 꽤 높은 수준의 정치 형태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네,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여러군데를 돌아다녀본 베델은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왕국출신인 에카테야르나 요정인 칼리아넬은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빠르겠군요." 슈렌토는 냅킨으로 입가를 슥슥 닦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지금은 그 선거 기간입니다. 기존의 의원들이 물러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원들이 뽑힐 시기이지요." "하지만 그게 왜…" 칼리아넬의 물음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상대 세력에 있는 의원의 재당선이나 새로운 의원의 당선을 방해하려는 자들 때문입니다. 심지어 폭력까지도 불사할 정도로 그들 사이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흉험한 암투가 많이 일어나니까요." … 과연,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이해가 가는군. 지금 이 시기가 공화국을 통치할 위정자 들을 뽑는 시기이고, 그 때문에 의원 후보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공방이 오가기 때문에 관광을 하기에는 지금 이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얘기로군. 아나키스트 왕국이나 이곳이나 어딜가나 그리 좋지 않은 시기인것 같아 기분이 좀 언짢다. 그나저나 의원이라… 꽤 흥미를 끄는 정치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 삐걱, 삐걱- 늦은밤, 잠이 오지 않는 나는 밤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여관 뒤쪽 공터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이것… 단단한 나무 가지에 질긴 밧줄을 매고 그 밧줄 사이에 넓은 판자를 끼워둔 모양새였다. '그네'… 라고 하던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건지 알 수 없는 이것은, 쓸쓸한 느낌으로 공터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네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세상. 몸의 무게 중심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손도 대지 않은채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게, 꽤나 흥미롭다. 역시, 인간들은 재밌는 것을 많이 만든단 말이야. "어라, 칼리체 누나?" 슈우로군. 그는 얇은 잠옷위에 두꺼운 코트만을 걸치고 있었다. 흐음, 별로 볼만한 모양새는 아닌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 보다시피." 굉장히 붙임성이 좋은 소년이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엔 친근감이 잔뜩 뭍어나온다. 아직, 어린 소년이라서 그런걸까…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내게 다가와 자신이 입던 코트를 내 어깨에 얹어주었다. 베델이 그랬다면 모르겠지만, 어린 소년인 슈우가 이런 행동을 하니 왠지 우습다. 괜히 어른 흉내를 내고있는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흥, 너무 그렇게 보지마. 아직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나는 누나에게 청혼을 한 남자라구." 그렇게 말하는 슈우의 목소리는 상당히 건방지게 들렸다. "…" 음… 역시 이 인간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그네도 참 오랜만이네…" 슈우는 내가 앉아있는 그네의 밧줄을 만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랜만?" "아- 으응, 이 그네는 내가 어렸을 적에, 이 여관의 주인 아저씨가 만들어 준 거야. 형하고 꽤 친한 사이어서, 어렸을 적 이곳에 놀러오던 나를 꽤 귀여워 해주셨어." 이 그네는… 슈우를 위한 것이었군. 그렇게 말하는 슈우의 얼굴은 어린 소년의 것 답지 않게 약간의 그늘이 져 있었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네, 비켜줄까?" "아, 아니.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제 그네같은 것은 타지 않아. 그럼 지금 그네를 타고 있는 나는 어린애란 소리? 됐다, 그런 뜻은 아니겠지. "너와 너의 형은, 이 도시에서 사는것 아니니? 왜 여관에서 머물고 있어?" "그건…" 아무 생각없이 한 질문에 슈우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사실, 우리 형은 카스텔 공화국의 의원이야." "그래…?" 그랬었군. 슈렌토가 이곳의 의원이었다니… 그렇다면 아까 왜 우리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걸까.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 굳이 처음만난 우리에게 자신이 의원이라는 것을 밝힐 이유는 없었던 것이겠지. "응, 그런데 정치 문제로… 아버지와 엄청 다툼이 있었나봐. 아버지가 엄청 화나셔서 형보고 집을 나가라고 했고, 형은 주인과 친분이 있던 이 여관에 머무르게 되었어. 다툰 이유를 자세히 물어봐도 형은 내가 어린애라고 제대로 대답해 주지도 않고…" 슈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 아버지와의 다툼이라… 에네리아와 그류벨, 로제와 그의 어머니, 내가 지금껏 본 인간의 부모자식 관계는 그렇게 간단히 흐트러 질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에네리아, 어머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선 로제. '정치 문제'라는 것은 그런 관계 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는 걸까. 아니, 내 생각이 지나친 걸지도 모르지. "그놈의 공화국, 공화국. 형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공화국 노래를 불러대는지 몰라. 그것 때문에 형은 매일 이상한 아저씨들이랑 다투고, 화를 내고, 다쳐서 들어온적도 있어. 난 형을 그렇게 만든 공화국이 싫어. 차라리 로엘가스트 연맹이나 아나키스트 왕국처럼…" 슈우는 우울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이건 못들은 걸로 해줘. 칼리체 누나." 그는 스스로의 말에 화들짝 놀라 내게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전에 내가 형한테 그런 소리 했다가 엄청 혼났거든. 절대로 형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내가 굳이 그런걸 네 형에게 말할리가 없지… 인간의 꼬마야. 나는 내 어깨에 둘러져 있던 코트를 벗어 슈우에게 건네 주었다. 바람도 쐴만큼 쐬었고, 이제 슬슬 들어가볼 생각이다. "어, 들어갈려고?" "응, 춥잖니." 슈우는 왠지 아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헤어짐의 인사를 하고는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몇개의 촛불만이 켜져 있어, 여관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잘 보이지 않는 계단을 조심스레 딛으며 위층으로 올라간다. 짙은 어둠으로 시각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자, 괜히 또 쓸데없는 생각이 사고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슈렌토… 슈우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공화국 이라는 것 자체에 지대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것 같다. 공화국이라… 로엘가스트 연맹, 아나키스트 왕국과 비교해보자면 공화국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것은 일반 평민들의 정치적 자유인가… 그 정치 형태가 원활히 이루어 지고 있는것은 둘째치고 말이다. 음, 아무래도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의 정치 형태 따위에 큰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슈렌토는 공화국이라는 그의 이념에 따라 사는 인간이라고… 따로 이익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강요한것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이념(理念)말이다. # 다음날, 나는 꽤 상쾌하다고 할 수 있는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확실히 노숙만 하다 편한 침대에 누워서 자니, 굉장히 편하다. 으음, 왠지 육체에 정신이 귀속되는것 같은 기분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칼리체 씨."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가장 먼저 날 반긴것은 슈렌토 였다. 그는 이미 식사를 끝마쳤는지 식후에나 마시는 커피를 여유롭게 음미하며 미소짓고 있었다. … 좋은 아침이라. 예전에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물어본 일이 있었었지.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지만, 이제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딸랑- 여관의 문쪽에 매달아 놓은 종이 울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 항상 미소짓고 있는 얼굴… 베델이로군. "어라, 칼리체, 벌써 일어났구나. 항상 늦잠만 자던데- 오늘은 왠일이야?" … 내가 항상 늦잠만 잤다고? 확실히…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그 나른함을 즐기느라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다만. 그의 손엔 여러개의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그 유리병속엔 찰랑거리는 하얀 액체가 들어있는데… 저게 뭐지? "자, 칼리체. 이거 하나 마셔."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에게서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꽤 차다. "아아, 설마 이 근처에 목장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니까. 이른 아침에 도시를 둘러보다 발견해서 신선한 우유를 싸게 얻어왔어." "호오… 미르첸 씨의 목장인가 보군요. 확실히 그 농장의 우유는, 훌륭합니다." "하하하-" 화제가 통한건지, 베델과 슈렌토는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 흐음- 그나저나 우유라…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유리병의 뚜껑을 손쉽게 열 수 있었다. … 일회용인가? 냄새는… 뭐라 해야할까, 고소하면서도 비리다고 해야하나. 입을 대고 그 액체를 천천히 마셔보았다. 맛은 냄새로 느꼈던 것 그대로 고소하면서 비렸다. 그리 나쁘지는 않군. "아, 다 마셨어?" 베델은 내게서 빈병을 가져갔다. 그의 손엔 아직도 우유라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두개 남아 있는데…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의 몫인 모양이군. "우유… 라는게 뭐지요?" "칼리체, 우유를 한번도 마셔본적이 없니?" "네, 산골에만 살아서…" 적절한 변명이 된 모양인지, 베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는 젖소에게서 얻어낸 것으로, 막 자라나는 소년 소녀들에게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설명은 슈렌토가 대신할 모양이군.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나를 신중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칼리체 씨는 분명, 나이가 열 일곱이라 했었지요?" "네." "하지만 외견은 열 일곱이라기엔 조금 어려보이는 군요. 키도 작고… 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유심히 살펴본다. "우유는 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니 키도 작고, 발육 상태도 좋지 않은 칼리체 씨는 우유를 많이 먹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의 시선이 향하다 마지막엔… 가슴인가? "슈, 슈렌토 씨!!" 베델이 당황한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슈렌토는 베델에게 놀란 모양인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음, 대단히 죄송합니다, 칼리체 씨. 저는 지나치게 솔직해서… 가끔 이렇게 실례가 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합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흐음- 의원이라면 사회적 신분이 꽤 될텐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굉장히 공손해 보이는 모습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무슨 실례를 했다는 건진, 잘 모르겠군. "괜찮아요.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제 성장에 대해 조금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물론, 거짓이다. 이런 말은 외부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 완전한 인간에 가깝게 보여지기 위한 '가장'일 따름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이상, 이 모습 그대로인채 내 시간은 영원히 멈춰있을 것이다. "칼리체, 그런 고민도 하는구나…" 베델의 중얼거림으로 나는 내 '가장'이 적절히 먹혀들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슈렌토, 슈우와 헤어졌다. 슈우는 여전히 나와 결혼하겠다고 떼를 써댔지만, 슈렌토에게 다시한번 머리를 얻어 맞고선 조용히 우리와 헤어졌다. … 지금껏 만난 인간들 중에 가장 곤란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인간이었다. 뭐, 계속 그 여관에 머무른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만나겠지만. 아무튼, 현재 우리는 여관을 빠져나와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뭐랄까… 굉장히 화려하네요." 칼리아넬은 검지 손가락 끝을 살짝 물고서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도시의 이곳 저곳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 도시는 지금껏 거쳐왔던 그 어느곳보다도 가장 화려하고, 깔끔했다. "카스텔 공화국은 굉장히 부유한 나라니까…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로엘가스트 연맹과 아나키스트 왕국 사이에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있어. 그 모든 이익이 이 도시 하나에 집중되고 있는거지." … 베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별로 관심없는 이야기다. 앞으로 느긋하게 베델이 안내할 광경을 구경하기만 하면 되겠지. # 확실히, 재화에 여유가 있는 인간들일수록 즐길 유희거리가 많은 모양이다. "아주 먼 옛날에, 베델이라는 위대한 용사님이 있었어요-" 간단하게 꾸며진 무대위에 실로 매단 인형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등장했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검을 쥐고 있는 인형이었는데, 그리 잘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 앞에 앉아서 연극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의 어린아이들에게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연극… 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꽤나 흥미롭다. 인간이 아닌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하나의 사건을 재현해 내는데, 재현자의 우스꽝스런 목소리나 표정 등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경에는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못된 마왕님이 살고 있었답니다." 마왕이라… 어감 좋은 표현이다. "베델, 저기 당신이 마왕과 싸우고 있어요." 칼리아넬이 베델의 옆구리를 찌르며 키득 거렸다. 으음, 연극의 진행이 무척이나 빠른듯 하군. "으윽- 난 저렇게 못생기지 않았어. 그리고 이름가지고 놀리는 건 그만 두렴, 이 못된 아가씨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칼리아넬의 머리를 가볍게 콩- 하고 때렸다. … 잘 어울려 주는군. 꽤 시간이 지나고, "… 그렇게, 용사님은 마왕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공주님과 결혼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 답니다." 연극이 마무리 되었다. "와아-!" 인간의 꼬마들 사이에서 요란한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굉장히 단순한 구조로군. '정의'로운 인간 용사가 '악한' 마왕을 물리치고 종국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인가. "고작 인형극을 보면서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가요, 칼리체." 에카테야르가 내 어깨를 가볍게 톡톡, 치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마왕이라… 절대 악의 존재를 설정함으로서 그를 퇴치하는 용사의 정의로움을 부각시키고, 어린 인간들에게 선(善)이라는 가치를 권장하는 것인가. 연극 자체의 재미를 떠나, 왠지 묘한 기분이 느껴진다. 인간은 근원과의 링크(Link)가 없기 때문에, 이 세계에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로 태어나게 된다. 아무것도 물들지 않은 백지 위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도 역시,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겠지. 연극, 이렇게 자연스런 방식으로… 지배자들은 그들 사회에 맞는 인간들을 교육시킬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면 좀 지나친 발상인걸까. 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이 연극을 끝까지 보게 되었다. "칼리체는 의외로 이런걸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베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다가와서 그렇게 말한다. 아니,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자, 다 봤으면 또 다른걸 보러 가자구요!" 칼리아넬은 신이 난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 끌며 그렇게 외쳤다. 그녀는 요정인 주제에… 인간들의 놀이 문화에 푹 빠진 모양이다. # 그 이외에도 흥미를 끄는건 꽤 많았다. 단순히 힘을 겨루는 팔씨름 판이라던지, 커다란 천막 안에서 행해지는 간단한 서커스, 인간들의 미적 감각을 엿볼수 있었던 예술품 전시관이라던지… 인간들은 이런것을 소재로 유희를 즐기는 구나, 하고 나는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그 뿐, 드래곤인 나로서는 그들의 유희거리 자체엔 별로 흥미가 돋질 않았다. 팔씨름… 단순히 힘을 겨루는 것에 어떤 재미가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전시관에 있던 예술품들은 나도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가 가장 나았던것 같기도 하군. "와아- 정말 대단했어요!" 하지만 칼리아넬이나 에카테야르, 베델은 꽤 즐거워 보이는 모양이니, 그걸로 되었다. "칼리체, 즐겁게 구경했니?" 베델의 물음에 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희 거리 자체엔 별로 흥미가 돋질 않았으나, 그 유희 거리를 즐기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꽤나 흥미로웠다. 와아아------! 갑작스레 어디선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모양인지, 칼리아넬은 들고 있던 빵조각을 떨어트려 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리죠?" 그렇게 묻는 에카테야르의 시선은 그 함성 소리가 들려온 장소를 향해 있었다. 굉장히 커다란 원형 모양의 건물… 그곳을 바라보는 베델의 표정이 왠지 딱딱하게 굳는다. "뭐하는 곳인가요? 가보고 싶어요. 저렇게 큰 함성이 날 정도라면, 분명 무지 무지 재밌는 곳이겠죠?" "… 아니. 결코 그렇지 않을거야." 베델은 씁쓸한 표정으로 칼리아넬의 말을 부정했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는 냉엄하게도 들렸다. "가보고 싶군요." "별로, 네가 보기에 좋은 곳이 아냐." 베델은 내 말에 딱잘라 그렇게 말했다. "으음,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이지요. 저는 꼭 가보고 싶은데요." 그의 미간이 좁혀 진다. 한참동안 조잘거리던 칼리아넬은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는 구나. 후… 하지만, 그 고집이 한번도 꺾인 적이 없으니… 정말, 보고 싶은 거야? 저곳은 무척이나 추악한 곳이야." 추악한 곳이라… 더욱 궁금해 졌다. "보고 싶어요." 베델은 한숨을 쉬고는, 알았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베델은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은 결코 데려오려 하지 않았다. 칼리아넬은 나와 같이 있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에카테야르에 의해 여관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에카테야르는 칼리아넬과 달리 그곳이 뭘하는 곳인지도 별로 관심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야." "…" 그는 그 원형 모양의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 서있던 인간에게 꽤 많은 재화를 지불하며, 내게 다시한번 그렇게 말했다. 도대체 뭘하는 곳이길래 베델이 그토록 꺼려하는 걸까. 뭐, 그것도 곧 바로 눈앞에 펼쳐지겠지만. 높은 계단을 따라 위로 천천히 올라가자, 와아아아----! 아까도 들었던 그 커다란 함성소리가, 귀가 멀어 버릴듯, 가까이서 들려왔다. 무언가에 흥분해 있는 수많은 인간의 강렬한 감정이 가까이서 느껴져 오자, 조금 어질한듯한 기분이었다. …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리 도취시키고 있는 걸까. 그것은 이 거대한 원형 건물의 한 가운데 있었다. "아…" 건물의 가운데는 천장이 뚫려 있어 환한 햇살이 들어와 그 광경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널브러진 고깃 덩어리, 그것은 불과 몇 분 전만해도 살아 숨쉬고 있었을 인간의 몸뚱이였다. 영혼을 잃어 버린 몸에서 혈관을 타고 흐르던 붉은 체액이 바닥 곳곳에 지저분하게 튀어 있었다. 시체들은 무언가에 의해 절단된듯, 반토막이 난채 모두가 보는 앞에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시체들 가운데 누군가가 서있다. 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는 인간 남성. 그가 검신이 흑색인 검을 높이 들어올린다. 그의 발 밑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인간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 무엇이라 외친다. … 주변의 인간들이 무엇이라 외친다. 하지만 제대로 들리지는 않는다. 내 옆에 서있던 베델은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쩌면 이 광경을 내게 보여주고 싶은게 아니라, 그가 보고싶지 않았던건 아닐까. "죽-----" 여러명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여 알아듣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귀로 한 인간이 외치는 소리가 똑똑히 들어왔다. "죽여버려!!" … 죽여? 흑색의 검을 들고 있던 남자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인간의 목을 베어내었다. 부릎뜬 눈이 감기지 않은 인간의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가며 흰 바닥에 붉은 자국을 남겨 놓는다. 와아------! 다시한번 귀가 멀듯한 함성. 그 함성안에 깃든 감정은… 희열. 이곳에 모인 수 많은 인간들은 다른 인간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 희열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 … 모르겠군. 정말 모르겠다. 나는 이 불쾌한 광경 어디에서 희열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흑색 검을 들고 있던 인간이 자랑스럽게 검을 치켜 올린다. 그러자, 이 원형 건물 안에 또다시 환호성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 피냄새가 가득한 곳이군, 이곳은. "역시 페리우스야. 과연, 집정관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용할만한 사람이라니까!" "정말 화끈하군!" 이름이… 페리우스 인가보군. 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가 들고 있는 검에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바로 저 검인가. 마검, 헬스탄. 듣던대로 검날이 완전히 흑색이군 그래." "솔직히 좀 섬뜩하기도 하네. '마검'이라지 않나." 바로 옆에 있던 인간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베델은 여전히 관심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마검, 마검이라… 인간의 시선으론, 저것이 마검으로 보이나 보이는 모양이군. 하지만 저것은… 강렬한 어둠을 내포 하고 있는 검 형태의 저것은… 용의 비늘이다. 약간 반투명한 흑색 빛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저 비늘의 주인은… 베른헬체이스 겠지.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강대한 힘, 그 자체를 인간에게 넘겨준 걸까. 용에겐 고작 하찮은 비늘하나 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선 개인이 갖기는 절대로 불가능한, 거대한 힘이다. 저런것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니. "칼리체…?" "… 돌아가죠." # "흐음… 페리우스 말인가? 이 작은 공화국에서 아마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요, 아가씨. 아주 유명한 사람이지." 느긋한 인상의 여관 주인은 그 인상만큼 여유로운 동작으로 탁자 위를 닦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더러워진 천 조각을 한번 접어 다시 탁자를 닦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그는 한 삼년전 쯤일까… 좀 서늘한 계절일때 이 도시에 들어온걸로 기억하오. 그는 공화국에 오자마자 바로 투기장으로 나가 돈을 벌었지. 아마 상당한 돈을 벌었을 거요. 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진적이 없으니까. 하긴, 투기장에서 진다는 건 바로 죽음을 뜻하긴 하지만 말이오." 투기장이라… 아까 베델과 같이 가서 본, 그 이해 못할 광경을 연출한 원형 건물을 이르는 말인가 보군. 그런데, 그곳에서 돈을 벌었다니… 역시, 그곳도 재화로 연결된 공간이었군. "집정관에게 고용되었다는 소리는 무슨 말인가요?" "음… 어린 아가씨가 참 별난데 관심을 갖는구료." 나는 의자에 앉아 탁자위에 엎드린채 손가락으로 탁자 표면에 보이는 나무결을 훑으며 여관 주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랑 대화하는게 그렇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페리우스가 투기장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자, 집정관이 그를 호위로서 고용하게 되었지. 사실 말이 호위지, 사실은 그를 이용해 반대파에게 무력 시위를 할 생각일 거요. 아차, 어린 아가씨에게 이런건 좀 복잡한 이야기겠군." 흐음- 반대파에게 무력 시위를 하기 위해서, 라. 확실히,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을 검 모양으로 가공해 그것을 무기로 쓴다면, 아마 왠만한 인간들 중에선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아마, 투기장에서의 그의 무패 기록도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에서 기인한 것이겠지. 그 비늘 하나엔 현재의 내가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거의 두배 정도 되는 힘이 깃들어 있으니까.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정말로 거대한 힘. 그것을 그릇되게 휘두른다면 인간들의 말대로 '마검'이라 부르기에 충분하겠지. 본래 그 비늘 자체는 아무런 대가 없이 내려주는 순수한 힘에 불과하건만… "개인적으로 좀 미친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하오. 돈은 충분히 벌었을 텐데 왜 아직까지도 그 흉악한 투기장에 나가고 있는지… 가만 보면 그저 살인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타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서 어찌하면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원래대로라면 나는 여관 주인의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시간전, 투기장에서 보았던 그 광경은… 그곳에 있던 모든 인간은, 살인을, 즐기고 있는것 같지 않던가. "하하, 그렇게 겁먹을것 없소, 귀여운 아가씨. 말이 다소 험해 놀랐나 보군." 여관 주인은 내가 자신의 말에 겁먹은 건줄 아는 건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솔직히 조금… 불쾌함을 느낀다. 그 어떤 생명체도 타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으며 즐거움이란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속성 중 하나인가. 딸랑- 여관 입구에 달린 종소리가 난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으윽-!" "아니, 슈렌토! 괜찮은가?" 여관 주인은 헐레벌떡 입구쪽으로 달려 나갔다. 어딘가 다친 모양인지, 슈렌토가 비틀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오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괘, 괜찮습니다. 아저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설마, 아직도 그녀석 들에게 당하고 다니는건 아니겠지. 응?" "으음… 별것 아니니까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슈렌토는 신음을 흘리며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겨우 의자에 앉았다. 옷 곳곳에 피가 물들어 있었고 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흐음, 여러명에게 구타당한 흔적인것 같군. "아직도 안자고 있었습니까, 칼리체 씨." 여관 주인이 상처를 소독할 도구들을 가지러간 사이, 그는 비실비실 미소를 흘리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여관 주인에게 페리우스란 사람에 대해 듣고 있었어요." "… 페리우스, 말입니까."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씁쓸함 만이 남는다. 전에 슈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나는군. 자신의 형이 공화국이라는것 때문에 많은 사람과 다투고, 싸우고 한다고 했었었지… 지금 보이는 그의 상처들도 그에 기인한 것일까.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군요. 싸움박질을 하고 다니는 한량 같은 녀석이라는 평가를 들어도 할 말 없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농담이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하하- 하고 짧게 웃었다. 살짝 입을 벌리며 가지런히 정리된 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다행히 이는 나가지 않았나 보군. "공화국, 이라는것 때문인가요…?" "…" 그는 잠시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슈우에게서 쓸데 없는 말을 들은 모양이군요, 칼리체." "공화국이라는게 대체 뭐길래, 당신이 그렇게 모든걸 버리면서까지 매달리는 건가요?" 그것을 위해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의 사이도 틀어지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의 진지한 태도로 보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때 까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겠지. 공화국…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위해, 이 인간은 어째서 그의 모든것을 걸고 있는 걸까. "공화국… 공화정은, 제 모든 것입니다. 제… 이상입니다." … 그 말을 할때, 그의 모습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만. 분명,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카스텔 공화국은… 공화국이 아닌가요?" 뭔가 말이 이상하게 되었군. 하지만 그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카스텔 공화국은… 솔직히 말해 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상태 입니다. 차라리 집정관의 왕국이라 부르는게 낫겠지요." 다소 놀라고 말았다. 베델처럼 항상 부드럽고, 친절할것 같은 그가, 그 이야기를 할 때 만큼은 맹수처럼 으르렁 거리듯 차고, 날카로웠다. 집정관…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슈렌토의 선명한 적의는 분명 그를 향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진정한, 공화국 인가- "진정한 공화국을 이룩함으로서 당신이 얻는 이익은요?" 그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공화정은 제 이상(理想)이라고 말이지요." 그 후로 슈렌토는 입을 열지 않았고, 곧 소독 도구를 찾아온 여관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그를 치료했다. 이상… 이라. 그가 말하는 '진정한' 공화정은 그가 원하는 이곳에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이란 것은 말 그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어떤것'이니까. 그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소리를 한 것이겠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인간은 한없이 어리석다. 자신의 힘으론 결코 손에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모든것을 버리며 그곳으로 달려 나가려는 걸까.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은채, 오직 정면을 향해서만. 그 행동엔 결코 옳고, 그름이란 것이 없다. 그의 말대로 그는 자신의 이상을 좇을 뿐이니까. … 우습군. # "슈렌토는 나간건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여관의 홀(Hall)을 둘러보며 주인에게 물었다. "아이고, 말도 마시오 아가씨. 그렇게나 많이 다쳐 놓고선, 아직 움직일 수 있다며 중얼거리고는 또 밖으로 나가고 말았소. 도저히 어쩌지 못할 고집불통이니 원." 주인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슈렌토 씨가 다치다니, 무슨 말이니?" 또 목장에서 얻어온 모양인지, 베델은 내게 우유가 담긴 유리병을 건네며 물었다. "진정한 공화정을 위해 싸우는 모양인가봐요."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 예전엔 천천히 삼키는 것도 거부감이 들어 힘들었는데, 이젠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진정한 공화정 이라구?" 베델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탁자위에 남은 유리병을 올려두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더 묻지는 않았다. "흐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무리하면 안될텐데. 거기다 싸우다니, 그 사람 평생 책만 읽고 살아온 사람 같았는데 말야." 꽤나 박한 평가로군. 하긴, 수 많은 마물과 싸워온 베델의 입장에선 누구든 우스워 보일 것이다. "왠일로 이틀 연속으로 일찍 일어나는 군요, 칼리체." "헤- 에카테야르의 말대로 늦잠꾸러기 칼리체 님이 왠일이세요?"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이 동시에 위층에서 내려오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흐음- 늦잠꾸러기라니, 그 괴상한 표현은 대체 뭐지. 그나저나 이들 사이에서 내 기상 시간에 대한 평가가 이리 좋지 않았다니, 앞으론 좀 달리 생각해 봐야 겠군. "자-" 베델이 내 머리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어딜 가볼까?" # 글쎄, 별로 즐겁지는 않았다. 부유한 도시인 만큼 인간들의 출입은 많았고, 그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나는 기분이 약간 언짢을 정도로 번잡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은 여전히 즐거운듯 했다. 베델도 그리 따분하지는 않은 모양이고… 나는 이제 상당히 인간의 감정과, 인간 그 자체에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인간들의 사회에서 겉돌고 있다. 항상 홀로 존재하는 용이라는건… 그런 것이지. 고독, 그 자체. 아마 내가 '사회'라는 것에 진정으로 익숙해 질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태양이 지고 또다시 밤이 찾아온 후 인간들은 잠이 들었다. "…" 나는 다소 권태로운 기분으로 여관 건물의 옥상위에 걸터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고요한 풍경. 바로 이것이, 내게 익숙한 것이겠지. 낮에 그 시끌 벅적한 풍경은 아무래도 익숙해 질래야 전혀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 드래곤의 천성, 이겠지. 나는 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저 멍하니 흐릿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베르센크, 그의 질문에 나는 답을 찾았나? 대답은 아직 아니- 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내 생각보다 복잡했으며- 예상하곤 있었지만, 내 사고 체계를 어지럽힐만한 행동을 보여주는 자들도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 그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 것일까. 이 세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을 가진채, 우리 드래곤이 정말로 타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내 손을 내려다 보았다. 순식간에 마력과 신력이 모여들며, 이 공간에 존재하는 힘의 총량보다 훨씬 강력한 힘, 그 자체가 이 조그만 손 안에 깃든다. 이것을 펑- 하고 터트리는 것으로, 카스텔 공화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겠지. 나는 손 안에 깃들었던 힘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늘 위에 걸려있는 보름달에 날려 버렸다. 공간을 격하고 뿜어진 그 힘에 의해, 달에 거대한 흠집이 남는 것이 이곳에서 보였다. … 언젠간 가능할 것이다, 타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 '영원'을 가진 드래곤이 이 세계에서 이루지 못할것이 있을것 같은가. "하…" 괜한 심술을 부렸군. 딸랑- 여관의 문이 열림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래서 들려와 나는 여전히 옥상위에 걸터 앉은채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저 붉은 머리카락은… 베델? "이 시간에 이런곳으로 부른 이유가 뭡니까, 슈렌토." "죄송합니다, 베델. 긴히 할말이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들으면 괜히 걱정할까 싶어 이렇게 바깥으로 불러내게 되었습니다. 언짢았다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굉장히 정중한 어조와 목소리. 베델의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분명… 슈렌토라는 인간이다. 둘이 뭘하고 있는거지. "아, 아닙니다. 바깥까지 나오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지요." "하하, 그래도 죄송합니다." "아니래두요." 바보같은 인간들. 왠지 서로에게 사과하는게 괜히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바깥 바람도 쌀쌀하고 하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것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물론입니다." 슈렌토는 갑작스레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베델, 분명 당신은 '마물 사냥꾼'이라 불리는 개인 용병단이었지요?" "그… 렇습니다만." 알고 있었군, 베델이 개인 용병단이라는 것을. 그때 그 눈빛의 의미는, 그런것이었나. 베델은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당신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용병을 고용하겠다는 목적은, 자명하다. 어떤 목적이든 간에 바로 '무력'이 필요하다는 것. "… 어떤, 목적에서 입니까?" 갑작스런 제의에 당황한 것일까, 베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렇게 물었다. "제 이상을 위해섭니다." 슈렌토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용병인 당신은 아마 저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특히, 아나키스트 왕국 출신인 당신은 요. 하지만 제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 입니다." 베델은 뭐라 말하고 싶은듯 입을 떼었지만, 계속 이어지는 슈렌토의 말에 결국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겁니다. 공화정… 대다수의 시민의 투표로 뽑힌 대표들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것. 말은 간단하지만, 이 공화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는 잠깐동안 계속 쉽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몇번이고 중얼거렸다. 나는 옥상위에서 턱을 괴고, 느긋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나라는 현재 집정관 혼자의 손에 완전히 좌지우지 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입니다. 본래 의원들의 협의에 의해 이끌어져야 할 이 나라는, 원로원의 힘을 등에 업은 집정관 혼자만의 손으로 이끌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 "이것은 진정한 공화국이 아닙니다.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집정관 혼자가 이끈느 이 나라가 어째서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단 말입니까." 베델은 아무말 없이 석상처럼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물론 영리한 집정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에서 티가 나지 않도록 행동하고 있습니다. 분명, 가시적인 폐해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지요. 모두가 무엇이 문제냐고 제게 묻습니다. 아버지 또한 제게 묻습니다. 집정관이 '조금' 부패하다 한들, 현 상황에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겁니다." "…" "카스텔 공화국은 부유합니다. 굶어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지금의 이 생활에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요? 집정관에 의해 틈이 생긴 이 공화정이 수십년 수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상태로 남아줄까요?" 슈렌토의 목소리가 격정적이게 들려온다. 한 인간의 모든것을 담은, 혼을 담은 목소리. 그제서야 나는 완전히 이해했다. 아, 슈렌토라는 이 인간은… 자신의 이익도, 주변의 시선도, 돌아갈 집도, 아버지도 모두 버린채 '공화정'이라는, 그가 미래의 이상(理想)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정말로 모든것을 걸었구나, 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믿는 것은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그의 행동은, 그의 믿음은, 수백, 아니 수천년이 지나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베델. 현명하지는 않은 생각입니다만…" 슈렌토는 잠시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선 집정관의 항거할 수 있는 '무력'에 대항할 수단은 마찬가지로 '무력'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군요." 그리고 그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 당신이." 아무말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베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믿는 그것이 정말로 옳다면." 그는 기쁜 듯, 미소지었다. "어찌 내가 힘을 빌려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서 나는 걸터 앉아있던 곳에서 일어났다. 하늘에 떠있던 달에 새겨진 흉터는 어느새 거짓말처럼 지워진 채였다. # "사과 하나 주세요." "아, 여기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사과 하나에 해당하는 재화를 꺼내어 눈 앞의 인간에게 건넨다. 그는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내 모양새에 놀란듯 했지만,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고선 곧 그 놀란듯한 표정을 풀었다. 아삭- 길을 걸으며 손안에서 굴리던 사과를 한입 베어먹는다. 인간들은 모두 저들 끼리의 일에 빠져 아무런 의미없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간단한 이야기다. 나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도 나를 모른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관계에선 그 어떠한 의미도 있을 수 없겠지. 그러므로 '서로 안다'라는 것은 의미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서로간의 그 의미는, 결국 무엇으로 이어져 있는 걸까. 아삭- 사과를 한입 더 베어먹으며 쓸데 없는 생각을 허공에 흩어 버린다. 사소한 화두 하나 만으로도 수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때에는 그리 좋지 않은 습관이 되는것 같다. 이 모습으론, 영원이라는 시간을 품을 수 없을테니까. "한푼만 주세요… 한푼만." 건물과 건물 사이,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끊어질듯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잠깐 멈추어섰다가 전과 다르게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딜가나 재화라는 힘의 영역에서 벗어난 인간은 존재하는군. 이곳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카스텔 공화국이다. "…" 베델이 안내해 주었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앞으로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채워나가면 되니까 말야'라고 웃으며 말했던 베델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는, 내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했던것 아닐까. 아무런 여과 없이 보여지는 이런 일상의 광경이 아니라. "어라, 칼리체 누나!" "슈우…" 내게 '의미'를 가진 인간이군. # "다시는 못볼줄 알았어! 형이 이제 더이상은 여관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었거든." 슈우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띄우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카페라고 부르는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니, 이곳은 커피라는 액체를 주문하여 그것을 마시며 대화하는 공간인듯 하다. 창문엔 얇은 커튼을 달아 놓아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빛을 연하게 바꾸어 놓았고, 곳곳엔 소박하지만 고풍스러운 장식이 달려 있었다. 오래된 나무 패에 부드러운 붉은색 리본, 다소 화려한듯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커다란 양탄자… 곳곳에 전시된 조형물이 이루는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군. 하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것은 내 앞에 놓여져 있는 이것. 커피… 이미 알고 있는 인간의 기호품이다. 향은 좋은데, 맛은 쓴 이상한 검은 액체. 하지만 슈우가 주문한 것은 향도 좋으면서 맛도 달았다. 으음… 두 감각을 만족시키니 그리 나쁘진 않다. "누나, 아직도 그 여관에 머물고 있지?" "응." "형은 어떻게 지내?" 헤어진지 고작 일주일도 안된것 같은데… 슈우는 자신의 형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전에 다쳐서 돌아온적이 있었어." 불과 이틀전의 이야기이지. 나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홀짝이며 슈우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형은 여전하구나." 하지만 그 근심어린 표정 가운데서도 희미한 안도감이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슈렌토… 그러니까 네 형이 집에 나와서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고 있는데, 네 아버지는 별말씀 없으시니?" "왜 없으시겠어. 처음엔 언제나 그렇듯 며칠안에 들어오겠거니, 했는데 이번엔 꽤나 시간이 지났으니까. 노발 대발 하셔서…" "…" 그런가. 슈우는 계속해서 뭐라고 떠벌떠벌 떠들어댔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턱을 괴고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솔직히 그의 말은 그다지 영양가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어제 무엇을 했고, 뭐가 재미있었다는 둥, 언젠가 시간이 있으면 자신과 같이 놀러가자 등의… 일상의 이야기 들이었다. 내게는 그것이 '일상'이 아니겠지만. 하지만 슈우의 말은 결국 형에 대한 걱정으로 종결되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그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자 하늘엔 어느새 붉은색 석양이 지고 있었다. "누나는 참 말수가 적은 사람이구나… 지금까지 나만 신나게 떠들어댄것 같아." "왜, 재미 없니?" "아니, 그래도 누나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잖아." 슈우는 헤헤- 하고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 나같은 어린애의 말을 누나처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야. … 간단한 농담조차 진지하게 생각하는건 조금 그랬지만." 슈우는 약간 투덜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뒤에 그렇게 덧붙였다. 보통 인간 어린아이의 말은 그다지 존중받는 편이 아닌가 보군… 하지만 슈우는 자신의 의지를 언어로서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사를 아무런 무리 없이 상대에게 전할 수 있다- 내게 그정도라면 상대를 존중할 가치는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의사 표현이 아질 덜 여문 미숙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해도. "이제 슬슬 가봐야 겠어. 우리 가문은 통금 시간이 엄격하니까 조금만 늦어도 크게 혼이 나거든. 아, 커피 값은 내가 계산할게." "내것은 내가…" "으응- 내가 살게." 슈우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카운터로 달려가 자신이 먼저 모든 커피 값을 계산해 버렸다. # "그럼 나중에 또봐, 누나. 안녕-!" "잘가렴." 손을 흔들어, 멀어져 가는 슈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석양이 지고, 카페에서 나와서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주위에 깔려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아까 늦게 들어가면 크게 혼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나와의 대화가 그 혼남을 감수할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 뭐, 상관없겠지. 이대로 여관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니. 조금만 더 이 거리를 돌아다녀보기로 할까. … 저녁의 풍경은 낮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재화를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사물들을 풀어 놓고 커다란 목소리로 광고하는 인간,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타 국가의 관광객. 시선을 끌기 위한 요란한 이벤트… 다른것이 있다면,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묘한 분위기랄까. 오히려 낮일때보다 좀더 고양되어 있는것 같은 느낌이다. "---해야 합니다!" 그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뇌리를 관통하듯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적당한 크기의 나무 박스를 밟고 서있는 슈렌토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엔 벽에 몸을 기대어 서있는 베델의 모습도 있었다. "여러분-!" 그의 커다란 고함 소리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그리고 그의 연설에 주변으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 또한 후드를 뒤집어 쓰고 그 인간들 사이에 섞여, 조용히 그의 연설을 들었다. 아니, 내가 듣고 있는 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공화정이 옳은건지, 옳지 못한것인지는 관심 없다. 내게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슈렌토 의원, 하지만 그 말은---" "이보시오!---- 지금도 공화국은---" 슈렌토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당혹감도 없이 여전히 흔들림 없는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그 반론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처음엔 별 관심없는 빛을 띄고 있던 인간의 눈동자들이 점차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것을 걸고 있는 슈렌토의 의지가 모두에게 전해진 것일까… 하지만 그뿐, 슈렌토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크게 좌우되니까, 슈렌토의 주장이 옳다해도 그저 생각만으로 그칠 뿐이겠지. 아직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자신의 피해가 없기 때문에. 슈렌토의 격정적인 연설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리고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인간은 없었지만, 그의 말이 그럴듯 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은 늘어난채 공화국 곳곳으로 흩어져 버렸다. "후우…" 슈렌토는 한숨을 쉬며 나무박스 위에서 내려왔다. 그만큼 오랫동안 큰 목소리로 떠들었으니, 무척이나 힘이 들겠지. 베델이 뭐라 말하며 한숨을 쉬는 슈렌토에게 다가가는 순간, "슈렌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군." 깊은 음울함이 깃든 인간 남성의 목소리. 그는 마검, 헬스탄. 아니, 베른헬체이스의 비늘로 만든 검을 허리에 비스듬이 차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 위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베델이 표정을 굳히며 앞으로 나서 슈렌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냐, 이자는. 그새 보디가드라도 고용한 것인가?" 슈렌토는 잠시 아랫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페리우스… 집정관에게 전하시오. 난 당신들의 부조리에 더이상 안이하게 대처하지 않겠다고 말이오." "크흐흐- 그 결과가 고작 이 애송이 하나란 말인가?" 나는 조용히 골목에 숨어들어 그들의 행동을 살피기로 했다. "간단히 말하지, 슈렌토 의원. 집정관은 더이상 당신을 살려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은 이 평화로운 카스텔 공화국에 큰 위협이 되." 페리우스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로군. 누구보다 카스텔 공화국을 위하는 페리우스가 큰 위협이 된다니. "질리는군… 당사자를 앞에 두고 죽이겠다고 선언하다니, 그것도 거리 한 복판에서." "뭐, 그렇군. 암살을 명 받았긴 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모르게 죽이기만 하면 되는것 아닌가." 정신이 좀 이상한 인간인가. 죽여야할 대상의 앞에 나타나 다른 사람들 몰래 죽이겠다니… 아니면 그만큼 그가 자신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이 큰 것일지도 모르지. "이곳에서 검을 뽑는 미친짓은 하지 마시오. 조용한 곳으로 따라갈테니 말이오." 그렇게 말하며 슈렌토는 베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를 믿는 건가.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아무리 나라도 거리 한 복판에서 검을 뽑는 미친짓은 하지 않아." 페리우스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상황은 그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는것 같군. 어떻게 해야할까… 페리우스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히 강력하다. 아무리 강한 베델이라 해도 용의 힘이 깃든 마검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며 기척을 죽이고 어딘가로 향하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 "설마 일이 이렇게 간단하게 풀릴 줄이야." 도시의 최외곽, 나무가 우거진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그들은 멈추어 섰다. 페리우스는 손을 바로 검의 손잡이에 갖다 대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정말 간단하게 풀릴지는, 실제로 해보아야 알 일이겠지." "꽤나 자신만만 하군." 페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 거렸다. 2m는 되어보이는 커다란 체구의 그가 저런 흉악한 표정을 지으니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생긴것 만으로도 기세의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같군. "슈렌토, 물러 서시오." "조심하시오, 베델. 저자의 검은 '마검'이라 불리며,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듯 하오." 스르릉- 하고 베델과 페리우스는 동시에 검을 뽑았다.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만으로도 웅웅- 하고 대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심상찮은 기색을 베델도 느낀건지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졌다. 둘은 짙은 어둠을 꿰뚫고 서로를 노려본다. 주변의 대기가 그들이 내뿜는 긴장된 분위기로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찌르르- 울던 벌레소리도 없어지고, 짹짹- 하고 소리를 내던 산새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나무에 기댄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특별히 몸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존재만을 남긴채 모든것을 자신의 세상에서 지워나가고 있으니까. 하아- 작은 숨소리의 틈, 그것을 노려 베델이 검을 세우고 쏜살같이 페리우스에게 달려 들었다. 그는 베델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에 놀랐는지 조금 흐트러진 동작으로 검을 세워 일격을 막았다. 캉-! 귓가에 윙- 하는 소리가 잔류할 정도로 강렬한 충돌이었다. "하-!" 하지만 페리우스는 곧 동작을 안정시키고 흑색 검을 넓게 휘둘러 베델을 자신의 영역에서 몰아내었다. 어두운 밤, 흑색의 검은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베델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채 황급히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실례했다. 애송이는 아니었군… 네 녀석, 뭐하다 온 놈이냐?" "이제와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겠지." "그렇긴 하군…" 둘은 그 한번의 격돌로 서로의 실력을 확인한듯, 또다시 쉽게 맞부딪치지 못했다. "어째서 너같은 실력자가 슈렌토 의원에게 고용되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그는 그리 돈이 많지 않은데 말야." "나를 당신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시오." "하-? 용병이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해 움직인단 말인가? 그것참, 이해못할 친구로군." "당신의 이해까진 바라지 않소." 베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페리우스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베델은 그런 행동을 예상한 것인지 별로 어렵지 않게 첫 공격을 막았고, 그 뒤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공방이 수어번 이어졌다. 캉, 캉-! 검과 검이 맞부딪칠때마다 눈부신 불똥이 튀기며 주변을 잠깐동안 밝혔다. … 베델의 검에 점점 흠집이 많아지고 있다. 용의 비늘 보다 강도가 강력한 금속은 존재하지 않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다. 결정적인 공격이 보이지 않는 지금, 이대로 가다간 베델의 패배가 예상된다. 나는 손바닥에 마력을 모으고, 고민했다. 이대로 베델을 도와야 할까…?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베델과 페리우스의 검은 쉴새 없이 부딪치며 공간을 찢고, 대기를 흐트려 놓는다.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인간의 전투보다 가장 강렬하다. 검이 휘몰아 치고 있는 저 공간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산산히 찢겨나가 버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은 흔적도 없이 갈갈이 찢겨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마치, 마술같은 광경이로군. "슈렌토, 얼른 도망가시오! 빨리!" "그렇겐 안되지!" 베델은 자신의 패배를 예감한듯, 다급한 목소리로 슈렌토에게 외쳤다. 덩달아 페리우스의 마음도 다급해진 모양인듯, 그가 쥐고 있는 마검에서 뿜어지는 마력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을 느꼈다. "으윽-!" 페리우스의 마검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베델의 검을 마치 뱀처럼 휘감았다. "크흐흐흐…" 그는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듯, 눈이 풀리며 이상한 웃음을 흘려댔다. 이상하군, 용의 비늘에 저런 식으로 이상한 영향을 인간에게 끼칠 만한 것은 없는데… 베델에게 휘둘러 지는 그의 검이 한층 더 강력한 힘을 품었다. 그 검엔 검은 마력, 음차원의 신비까지 깃들어 '노화'의 기운을 뿌려댔다. 그 검과 맞부딪치는 베델의 검이 눈에 띄게 녹슬어 가기 시작했다. … 아무리 베델이라 해도 용의 비늘이라는 거대한 신비를 극복하기는 쉬운일이 아니겠지. "끝이다!" 페리우스는 완전히 녹슬어 버린 베델의 검을 손쉽게 두동강 내어 버리고, 발로 그의 복부를 차버렸다. 베델은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수 미터를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베델…" 아직 죽지는 않았다. 다만, 정신을 잃어버렸을 뿐. 용의 비늘이라는 거대한 신비를 상대로 그는 정말로 오래 버텨 주었다. "거기서 멈추시오, 페리우스. 당신의 목적은 나 하나뿐, 굳이 그를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소?" "싸움에서 패한자는 승자에게 목숨을 맡겨야만 하지, 슈렌토 의원." 아아, 그의 말대로다. 싸움이란건 본래 그런 것이지. "…" 나는 앞으로 걸어가 베델이 놓쳐버린 검을 집어 들었다. 녹슬고 두동강이 나버린 볼품없는 검… 손잡이에서 축축한 액체가 느껴졌다. 이것은… 피, 로군. 그는 손바닥이 찢어져 검의 손잡이가 피로 축축해 질때까지 검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냐!?" … 이것이 검을 쥐는 느낌이로군. 이미 동강나고 녹슨 상태이지만, 여전히 상대를 해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흉기를 앞으로 들어올려 본다. "설마, 칼리체?" "그렇습니다." "안돼! 도망쳐!" 슈렌토는 그렇게 외쳤지만… 나는 별로 도망갈 생각이 없다. 이 장소에서 나의 부재는 곧 베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뿐만 아니라, 저 검… 베른헬체이스의 비늘. "뭐야, 일행이었나." 페리우스는 처리해야할 놈이 한명더 늘었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어이, 이봐 꼬마야. 그렇게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덜덜 떨고 있으면 어떡하니?" 짐짓,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나는 그가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거칠게 후드를 젖혔다. 경악, 그리고 곧 탐욕으로 물드는 그의 눈동자에 무감정한 내 호박색 눈동자가 맺힌다. "정말 아름다운 계집이군." "안돼! 칼리체에게 손대지 마!" 페리우스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슈렌토를 신경질 적으로 차 버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슈렌토는 움직일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카, 칼리체…" 재미없군. 나는 온힘을 다해 동강난 검을 페리우스란 인간에게로 휘둘러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검날을 잡아채고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앙탈부리나, 아가씨?" "건방진 인간이로군." "뭣-" 페리우스는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서있던 자리엔 대기가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진 얼음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순발력이 좋군. 재빨리 대기의 이상을 알아채고 피하지 않았다면, 그는 뇌수마저 얼어붙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섬뜩한 재주를 부리는 군, 아가씨. 그것이 말로만 듣던 마술인가?" 페리우스는 입술을 핥으며 섬뜩하게 웃었다. 나를 향하는 그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적'을 보는 시선이다. "칼… 리체?" "베델이나 간호해 주거라, 인간." 나는 다소 언짢은 기분으로 슈렌토에게 그렇게 말하고 페리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필멸자여, 손에 들고 있는 분에 넘치는 거대한 힘을 놓을 지어다. # 세계의 근원을 관통하는 만능의 언어, 그것이 나의 의지를 담아 눈 앞의 인간에게 여과 없이 전해 진다. "이게, 도대체…!" 마검 헬스탄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내 의지가 깃든 만능의 언어는 그저 입 밖으로 내어 놓는것 만으로도 그의 행동을 제한한다. 본래의 힘을 개방해 놓고 언어를 발휘했다면, 그는 그 검을 즉시 손에서 떨어트려 버렸을 테지. "무슨 장난이냐-!" 그의 얼굴에 감돌고 있던 미묘한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장난같은게 아니다. 인간. 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흑룡, 베른헬체이스의 비늘 한조각. 그리고 너는 그 힘을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다." 가느다란 내 목소리가 마치 다른 존재가 말하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뭐라고, 흑룡의 비늘? 이 계집이 정신이 나갔나!" 페리우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굳게 쥐고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검을 든 높이 솟은 팔. 단숨에 베어버릴 생각인가. 나에게로 달려드는 그의 얼굴엔 한가득 불안이 묻어나온다. 무엇이 불안한거지…? 결국,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들고 있는 그 검, 아니 베른헬체이스의 비늘 자체가 거대한 '불안 덩어리'라는 것을. -네 공격은 결코 내게 닿지 않을 것이다. 나의 '선언'이 있은 후, 나에게로 향하던 그의 검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어 나갔다. "이게…!" 그는 이제 두려움마저 깃든 얼굴로 미친듯이 내게 검을 휘둘러댔다. 그 검에선 이제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강렬한 음차원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닿는것 만으로도 상당량의 생기를 강탈당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내 옷자락이나 스칠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 "헉-! 헉-!" 이제 그의 호흡은 완전히 흐트러 졌고, 휘두르고 있는 검의 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너, 너는 누구냐!? 이런 마술이 있다는 것, 들어본 적도 없다! 너는…!" -내가 그걸 네게 말해야할 이유는 없지. 그는 뇌리로 울리는 나의 만능의 언어에 깊은 공포감을 내비쳤다. "인간이 아니구나…! 인간이…" 페리우스는 쉴새 없이 휘두르던 검을 늘어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 않았다.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이로군. 나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주변에 퍼트려 놓았던 '신비'를 회수했다. 인간은…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힘과 약감의 감정을 고양시켜 주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쉽게 무너져 버린다. 감정이란 것은 인간에게 있어 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약점이기도 하지. … 이런 목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보아온게 아닌데… 조금 씁쓸한 느낌이군. 나는 그의 손에서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을 회수했다. 페리우스는 내 거대한 '신비'를 마주하며 정신력을 모두 소진해 버린 모양인지, 아무런 저항없이 순순히 그것을 내게 넘겨 주었다. 힘의 자격… 이라. 사실 그런 말을 입밖에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타 존재가 갖고 있는 힘을 어떤 기준으로 재단하여 자격을 운운한다는 것인가. 힘이라는 것엔 자격도 뭣도 없다.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돌아오는 결과의 영향을 그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느냐, 있지 않느냐의 문제일뿐. 그것을 감내해 내지 못한다면, 그저 담담히 파멸을 맞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을 내려다 보다 페리우스라는 인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이것을 빼앗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다. 나의 이런 행동의 결과는 그저 내게 의미를 가진 인간, 베델이나 슈렌토를 위한 것일 뿐이니까. 페리우스에게 내 존재는 그저 갑작스레 찾아온 재앙에 불과하다. 그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겠지. 나는 그의 목에 이 검을 겨누며 물었다. "싸움에서 패한자는 승자에게 목숨을 맡겨야만 하지- 라고 너는 말했었다." "…"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담담히 받아들이겠는가?" "죽여라." 그의 대답엔 일체의 주저함도 없었다. 페리우스… 이 인간도 나름대로 뚜렷한 기준을 세우고 힘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힘이 미치는 결과가 인간들 사이에서 옳고 그르고 하는 것의 문제를 떠나서. 나는 그의 목에서 검을 치웠다. "죽이지 않겠다. 여기서 떠나라." "나를 조롱하는 거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식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내게 모욕이오." - 재미있군. 싸움에서 패한자는 승자에게 목숨을 맡겨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패배가 반드시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지. 그저 네 목숨은 굳이 내가 손수 끊어야할 가치가 없을 뿐이다. 그저 조용히 이곳에서 사라지거라, 필멸자. 그는 내 뜻에 이를 갈며 휘청거리는 몸으로 이곳을 벗어났다. 나는 그가 이 공간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출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고요히 응시했다. "칼리체, 당신은 도대체…?" 쓰러져 있는 베델의 몸을 추슬러 주며 일어서는 슈렌토의 얼굴엔 깊은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전 뛰어난 마법사에요. 마검을 들고 있다 하나 일개 검사에게 지는 일은 없어요." 그는 영리한 인간이다. 그저 '마법'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는 내가 펼쳐 놓은 힘을 납득하지 못할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랬… 군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슈렌토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영리한 인간이니까- "베델을 치료하기 위해 먼저 가주시겠나요.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칼리체." 슈렌토도 상황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지만, 정신을 잃은 베델을 부축해 도시로 돌아가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니… 나는 그들을 먼저 보내고 손에 들고 있는 흑색의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검 헬스탄이라… 인간들이 붙여준 이름이겠지. 실없이 중얼거리며, '마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 나는 마검 헬스탄. 나를 쥐는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부여받게 될 것이다.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울렸다. "…" 설마 이것은, 자아(ego)…? - 무엇을 하고 싶나? - 무엇을 하고 싶나? - 무엇을 하고 싶나? 끝없이 속삭이는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그저 목소리일 뿐이다. - 내가 이루어 주겠다. 나를 쥐고, 네가 원하는 그곳을 향해 휘두르거라. 나는 불쾌함을 느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질낮은 장난을 한것이지… 이것은 자아 따위가 아니다. 수준낮은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엔 어떠한 마법적 힘도, 신비도 어려있지 않다. 정말로, 그저 목소리일 뿐이다. "…" 이것을 손에 든 인간은, 이 목소리를 듣고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자신은 이 목소리에 이끌려서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을 풀어놓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이 목소리의 알 수 없는 이끌려서' 이 생각을 하게 하는게 이 검의 목적일 것이다. 사실 그 목소리엔 아무런 힘도 들어있지 않다. 이 검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대가없이 힘을 나누어주는 정말로 '친절한' 존재다. … 정말 불쾌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이 아닌가. 이것은, 인간에 대한, 누군가의, 시험이다. 그야말로 마검(魔劍)이로군. # 한대 얻어맞긴 했지만, 슈렌토는 그리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베델은 결국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 침대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는 그저 신체적으로만 다친게 아니라 마검이라는 거대한 신비를 마주함으로써 그 마검에 흡수된 생기 때문에도 상처 수복이 더딜 것이다. 뭐, 마검과 부딪치며 흡수된 생기가 그리 많진 않아, 조금만 쉬면 생기 정도야 금방 회복할 수 있을테지만… "…" 난 베델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기대어 놓은 마검… 이제 저것은 그냥 '마검'일 뿐이다. 인간을 유혹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 그것에 이제 베른헬체이스의 비늘- 같은 의미는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다. 저것은… 베른헬체이스, 그가 직접 자신의 비늘을 뽑아 만들어 인간들의 세계에 떨어트려 놓은걸까. "으음-" 이제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그는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멍한 빛을 띄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를 향한다. "… 굉장히 무서운 꿈을 꾸었어." "…" "또다시 그 검은 그림자에게 모든 것을 잃고… 너마저도 잃고, 나 혼자 남겨져 '그것'을 찾아 전 세계를 고독하게 떠도는 그런 꿈 말이야." 마검의 기운이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일까, 그는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상태는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베델은,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이야기인가…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야-" 나는 한숨을 쉬며 선명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빨리 잠에서 깨는게 좋겠군요, 베델." "… 응?" 멍하던 그의 눈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온다. 그제서야 그는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 칼리체? 도대체 이게…" "당신은 페리우스와 싸우고, 여섯 시간 정도를 정신을 잃은채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의사의 말로는 갈비뼈가 몇대 부러졌다는데, 그것 보다는 마검에게 흡수당한 생기를 회복하는데 주력하는 편이 좋을거에요. 부러진 갈비뼈에는 제가 간단한 재생 마술을 걸어두었으니까-" "자, 잠깐! 페리우스와의 싸움은 어떻게 된거야? 난 분명히…" 베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검을 끝까지 쥐고 있느라 찢어진 그의 손엔 역시 마찬가지로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페리우스는 제가 패퇴시켰어요. 그의 검도 빼앗었구요." 나는 마검 헬스탄을 기대어 놓은 벽쪽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베델의 시선이 내 검지를 따라 마검으로 향한다. 그는 그것을 보더니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칼리체…, 네가?" "… 아무래도 당신은 마법사라는 존재를 너무 우습게 보는것 같군요."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저 검에 깃든 거대한 신비를 상대하기는 무척이나 힘들었겠지만… 그는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 속여 넘길수 밖에 없군. 베델은 내 말에 뭔가 말하려는듯 입술을 달싹 거리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칼리체. 덕분에 목숨을 구했구나." "… 어쨌든 아직 새벽이니 좀더 눈을 붙여두는게 좋을 거에요." 나는 그의 부담스런 감사 인사를 빗겨 내며, 창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 태양이 떠오르기엔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나도 다소 피곤하긴 하지만,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는 베델을 뒤로하고, 나는 벽에 기대어 두었던 마검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 나는 그네가 걸려 있는 여관의 뒤쪽 공터로 나왔다. 곧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걸까, 밤 바람이 그렇게 싸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자신이 마검 헬스탄이라고 주장하는, 아니 그렇게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게 만들어진 이 검은 흑색의 검날로 주변에 깔린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어 가볍게 휘둘러 보았는데 검날이 보이지 않아 무척이나 이상한 기분이다. - 무엇을 원하나? "…" - 무엇을 원하나? 또다시 귓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 보다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저 천상위에 떠있는 광명의 태양, 그것을 가져다 내 앞에 내려다 보아라. 마검 헬스탄."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엔, 약간의 오만함 마저 깃들어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검에게선 더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다고? 그런건 이세상에 없다. 거의 신에 가까운 생명체인 우리 드래곤도, 결국 하지 못하는 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세계의 근원속에 갇혀 있는 진짜 신들도 마찬가지다. … 쓸데 없는 생각은 털어버리고, 나는 이 검을 매개로 마력과 신력을 집중시킨다. 억제하고 있던 신비가 풀리며 동공이 위아래로 찢어지고,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며 등에서 날개가 돋으려는 건… 억제 하는게 좋겠지, 옷이 찢어지니까. 이 검을 통한 세계의 근원과의 링크로, 내 마력과 신력은 곧 이 검이 본래 존재했던 위치에 닿는다. 근원에 기억되어 있는 그 위치는… 물론, 흑룡, 베른헬체이스. 들끓었던 마력이 가라앉으며-, 거대한 마력 행사에 의해 퍼져나갔던 대기가 다시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덕분에 긴 백발이 거칠게 휘날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게 닿는 타 존재의 '만능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 어떤 건방진 존재가 나와의 링크를 시도 하나 싶었더니… 너였군, 냉기(冷氣)와 수기(水氣)의 지배자- 백룡, 루루렌칼리체. - 오랜만, 이라 해야하나, 베른헬체이스. 초기화된 내 기억속에 그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 오랜만이라… 영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랜만이라는 말은 조금 우습군. 서로의 진심을 전할 수 밖에 없는 만능의 언어. 베른헬체이스는 진심으로 오랜만이라는 용어를 비웃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수만, 수억, 아니, 셀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을 살아가며 고작 몇천년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건, 오랜만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기엔 우스운 일이겠지. - 그런데, 무슨 일인가 루루렌칼리체. 너의 연락이라면 물론, 반가워 마지 않는다만, 그래도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 베른헬체이스는 꽤 호의적인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 마검 헬스탄, 이것은 네가 만든 장난감인가? - 마검 헬스탄이라… 그래, 그것은 내가 나의 비늘을 뽑아 만든 재미난 창조물이다.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그것은 지금 네 손에 있나보군. 역시… 이건 베른헬체이스가 직접 만든 것이었나. - 어째서인가, 베른헬체이스. 너는 인간의 무엇을 보고자 하기에, 이런 불쾌한 물건을 만든 것인가. - 난 그것을 통해 보고자 했다. 권태감 만이 가득하던 그의 목소리에 강렬한 흥미가 깃든다. 아마 인간이라면 저 목소리에 웃음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왠지 그가 공허한 웃음을 짓고 있을것 같은 느낌이었다. - 인간의 모든 추악함을. 인간의, 모든 추악함 이라니… 그것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과 반대 되는 것이 아닌가. 이 검으로, 인간의 추악함을 보고자 했다고… - 그것은 내가 불과 수십년전에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그 물건은 내가 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내게 보여주었지. 대가 없는 힘. 그리고 그 결과는… -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드물게 그 힘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 검을 원하는 다른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 결국, 그들도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검에 휘둘리지 않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나약함이었을 뿐이지. 그의 만족스러움이 느껴진다. 나는… 그의 만족스러움에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솔직히, 나는 베른헬체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불유쾌한 광경 어디에서 흥미를 찾는다는 걸까. - 네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루루렌칼리체. - 호의는 고맙군. 이것으로 되었다. 난 그저 이검이 만들어진 이유를 그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을 뿐, 그의 흥미거리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 아, 언제라도 한번 마경에 와주었으면 좋겠군. 마경…? 이 세계와는 반차원 정도 어긋난, 음차원의 마력이 떠도는 그곳. 베른헬체이스는,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어둠과 동화되어 보이지 않는 흑색의 검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반사광이라고는 없는 검… 빛마저 흡수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경이라… - 나는 이곳에 머무르며 한 인간을 보고 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인간을 모두 하등하게 취급하며, 하염없이 영원만을 쫓는 인간이지. 영원을 쫓는 인간. 불멸을 쫓는 필멸.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필멸이 불멸이 되는 경우는, 영원이 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특징 아닌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무지로 인한 일말의 가능성을 믿으며 끊없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최근에 만났던 인간, 슈렌토 역시… 그런 인간이지 않은가. -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이 인간이 영원을 쫓으며 뱉어내는 흥미로운 부산물들을 네게 보여주고 싶다. 루루렌칼리체. 왠지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쁨마저 어려있는것 같다. 어둠을 지배하는 흑룡, 베른헬체이스. 그가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은 분명, 내게는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닐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 한번 가보도록 하지. 그의 말에 흥미가 동하고 말았다. - 기쁘게 맞이하겠다. 백룡. # 결국 그 날,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필연적으로 몸은 피로함을 느꼈지만, 용의 힘을 약간이나마 개방한 나의 정신력에 그 피로는 전혀- 라고 할만큼 무의미 하다. 동이 틀 무렵, 나는 여관앞에 서서 싸늘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저쪽으로 보이는 산 기슭에서 붉은 태양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일출을 감상하는 것이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항상, 언제고 하던 일인데… 영원을 살아가는 나는 이 광경을 수천, 수만, 수억- 아니, 셀수 없을만큼 많은 날들을 보아왔겠지. 그럼에도 내가 이 모습에 질리지 않는 것은, 그 억겁의 시간동안 변하지 않았던 태양의 진리 때문일까. 불멸에 있어 우리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의 신비를 갖고 있는 존재를 꼽는다면, 아마 이 태양일 것이다. 이 세계의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지 않는 이상, 저 태양은 언제고 지고, 또 떠오르겠지. 그래, 내가 방금 생각했던 것처럼 절대 불변의 '진리'인 양.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긴 백발을 쓸어 넘기며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1초, 2초, 3초가 지나고 채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태양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연약한 인간의 안구는 영원의 태양을 계속 응시하고 있는것 만으로도 시각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헉- 헉-!" 이런 이른 시간에, 누군가가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눈부신 태양광에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에 붕대를 감은채, 열심히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는 인간은… 슈렌토였다. "슈렌토…? 여관에서 자고 있던게 아닌가요?" "헉- 하아… 칼리체,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숨을 고르고,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침착하던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있어,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요?" "집정관은 제 행동을 무척이나 위험하게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제 저에 대한 페리우스의 암살이 저지 되자, 약간의 항의를 무릎쓰고라도 저를 공식적으로 처리해 버릴 생각인 모양입니다. 더불어, 저에게 협력했던 당신들도요!" "…" 곤란한 일이로군. 하지만 카스텔 공화국의 집정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당연히 이 도시로 한정된다. 그렇다면 그저 이 도시를 빠져나가 다른 국가로 국경을 넘어 도망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일이 이렇게 될 정도로… 집정관의 권력은 그 뿌리가 단단해진 모양입니다. 모두 제가 우려하던 일이죠."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칼리체! 베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건 알지만,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베델, 칼리체. 당신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건가요." 에카테야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칼리체와 함께 나를 따라나오며 무척이나 불만스러운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 하지만 슈렌토의 말대로 그에 대해 설명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벌써 바깥이 소란스러워 지고 있었으니까. 베델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착실하게 여관비를 카운터에 지불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항상 그의 허리에 걸려있던 검이 보이지 않아, 왠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설마 당신들에게 까지 이런식으로 피해가 갈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슈렌토. 저도 당신의 의견에 찬동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고용된 겁니다." 태양이 어느새 완전히 그 모습을 천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슈렌토도 하늘을 힐끗 바라보고는 다급하게 우리에게 외쳤다. "모두들, 빨리 이곳을 떠나십시오! 곧, 집정관의 병사들이 저와 당신들을 잡기위해 이곳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도시가 봉쇄되는것은 물론이구요!" "슈렌토는 어쩔 생각인가요?" 칼리아넬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와 대화를 얼마 대화를 나누어 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의 목소리엔 걱정기가 역력했다. "저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슈렌토, 당신도 우리와 함께 도망칩시다!" 베델은 내 부축을 받으며 그에게 외쳤다. 하지만 슈렌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이곳에 남겠다는 것은, 곧 그가 자신의 죽음을 얌전히 받아들이겠다는 것. "바보같은짓 하지 마시오, 슈렌토! 당신은 완전한 공화정을 이룬 카스텔 공화국을 보고 싶어하던게 아니었소! 그 바램을 버리고, 얌전히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이오!?" "… 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 바램은 현재로선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 해도! 당신의 바램이 이루어 질수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건 정말 머저리 같은 짓이오!" 하지만 베델의 말과는 달리, 슈렌토는 포기한 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두고 부드럽게 미소짓는 저 얼굴에 보이는 것은, 이유를 모를- "모든 것을 포기한게 아닙니다, 베델. 나는 나의 죽음으로서, 집정관의 부당한 권력을 카스텔 공화국 시민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내 죽음은 결코 헛된게 아닙니다. 장담컨데, 집정관은 현재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자신만만함. 자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죽음이란건 한 생명체가 갖고 있는 세계가 완전히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의식의 단절이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것은 어떤것이든 의식이 없는 생명체 에게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슈렌토는, 온몸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자신에게 너무나도 가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카스텔 공화국의 시민들의 가슴에 남게될 흔적. "베델… 가죠." "무슨 소리야 칼리체! 슈렌토가…!" "뒤를 돌아보십시오, 베델." 슈렌토는 베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칼리체, 칼리아넬, 에카테야르… 당신이 지켜야할 존재는 셋이나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현재 상처 때문에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요. 부디, 당신의 책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옳바른 판단을 내리기를 바라겠습니다." "… 크으!" 베델은 잠시 우리를 돌아보더니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베델은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가자." 슈렌토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 베델은 카스텔 공화국을 빠져나올때 까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부축을 받으며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바닥을 노려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도시의 문이 봉쇄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던지, 도시 밖까지의 추격은 없었다.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지요.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았고… 베델, 당신도 더이상 움직이기는 힘들어 보이니까요." 나는 끙끙 거리며 그를 부축해 단단한 돌 위에 그를 앉혔다. 이곳은 도시 외곽의 조그마한 숲이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 들어오는 풍성한 나뭇잎, 부드러운 바람, 지저귀는 새들,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는 조그만 다람쥐들… 방금 그 도시에서 있었던 비극과는 무척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차라리 비라도 내리고 있으면, 참담해 하는 베델의 마음에 위로라도 되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베델, 괜찮아요?" 나는 칼리아넬이 조심스럽게 그의 붕대를 다시 갈아주는 것을 힐끗 보고는 방금 빠져나온 카스텔 공화국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높이의 성벽이 둘러져 있는 도시 국가… 슈렌토, 슈우- 슈우와는 어딘가로 같이 놀러가자고 약속한것 같았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키란 무리인것 같다. 슈우… 그는 그의 형이 집정관의 병사들에게 붙잡힌걸 알면 무척이나 슬퍼하겠지. 슈렌토, 그가 꼭 죽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니, 그가 말하는 기색을 봐선 완전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혹시, 라는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상관없겠지. 이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인간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그는 인상적인 모습으로 내 기억속에 기록될 것이다. "베델, 당신은 어째서 슈렌토를 그렇게…" "… 난 부당함을 보고 절대로 뒤돌아 보지 않겠다고 맹세 했으니까. 딱히 슈렌토를 위한것은 아니었어." 베델은 약간의 머뭇거림을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참담함으로 깊게 잠겨 있었다. 부당함이라… 그의 말대로, 베델은 그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한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오늘… 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슈렌토가 베델에게 나와 칼리아넬, 에카테야르의 존재를 상기시켜주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저런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집정관의 병사들과 맞섰을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아나키스트 왕국의 왕궁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던 베델. 하지만 이 인간은 자신의 말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그가 말하고 있는 범위에 '자신'은 과연 포함되어 있을까. "슈렌토는… 카스텔 공화국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어. 그가 꿈꾸는건 분명, 모두가 살기 좋은 낙원 이겠지. 물론, 현실에 존재하진 않겠지만." 그는 씁쓸하게 후후- 하고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 노력이 너무나도 고귀해 보였어. 선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정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는 나지만, 그래도 그에게선 뚜렷한 진심이 전해져 왔어. 그리고 나는 그의 의견에 감화되어, 무력이나마 보태서라도 그의 의견이 현실에 실현되는… 아니,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고 싶었어." "…" "비록 나와 그는 친구…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관계였지만. 그래도 그는…" 베델은 말끝을 흐리며 괴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정말로 그곳에 남지 못한게 분해서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 인간은 자신이 정의의 화신이라도 되는줄 알고 있는건 아닐까. "후우…" 난 한숨을 쉬며 점점 어두워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조금 비꼬긴 했지만, 역시 베델이란 인간은… 뭔가 다르다. … 그것보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이동해야겠군. 아직 집정관이 우리에 대한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나뭇가지는 이정도 크기면 되나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중 그나마 큰 것을 들어올리며 베델에게 물었다. "으응- 적당한 크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베델은 뭐랄까… 무척이나 껄끄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미안해, 이런건 원래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아뇨, 이건 원래 당신이 해야할 일이 아니었어요. 당신 혼자 하겠다고 우겨 댔으니 지금까지 그랬었지…" 나는 처음에 집었더 나뭇가지와 비슷한 크기의 것을 찾으며 약간의 불만을 담아 그에게 쏘아붙였다. 우리는 결국 다른 마을에 도착하지 못한채, 이름모를 조그만 숲속 공터에서 노숙을 하게 되고 말았다. 점점 여름이 되어가며 날이 따스해 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밤바람은 꽤 찼다. 모닥불 정도는 피워두는게 좋겠지. 하지만 베델은 몸을 다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고, 나와 칼리아넬, 에카테야르가 나서 손수 쓸만한 나뭇가지들을 구해와야 했다. 칼리아넬은 그녀의 자그마한 손에 어울리는 너무 작은 나뭇가지들을 구해와 별로 쓸모가 없었고, 에카테야르가 그나마 쓸만한 크기의 나뭇가지들을 가져왔지만… 왠지 모르게 모두 젖어있는 상태여서 불을 붙일수가 없었다. 내것을 제외하면, 모두 쓸모가 없군. "저쪽에 작은 계곡이 있더군요. 거기서 가져왔어요." 음, 쓸만한 나뭇가지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쓸만한 정보는 가져왔군, 에카테야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살짝 흘겨 보았다. 물에 젖은 나무가지에 불이 붙을리가 있겠냐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것 뿐인데, 뭔가 기분이 상했던 걸까. "강이라… 아무런 준비 없이 도시에서 도망쳐야 해서 오늘 저녁은 꼼짝없이 굶어야 하나 생각했더니, 꽤 운이 좋구나." 베델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힘이 없어보이는 미소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그런데 강에서 먹을만한 것이라면… 물고기 인가? # 물고기… 인간들은 간혹 생선이라고도 부르는것 같은데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건지, 나는 짐작도 못하겠다. 어쨌든 베델이 저 위에 걸터 앉아서 우리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요령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 나무 작살을 이렇게 잡고…" 작은 대거로 끝을 대강 다듬어 만든 나무 작살의 가운데를 잡고 베델이 시범을 보인다. "이렇게!" 손목의 탄력으로 나무 작살을 휙- 소리가 나게 빠르게 앞으로 뻗었다가 회수한다. 으음, 저 정도로 빠르게 하지는 못할것 같은데… 나는 성의 없게 만들어진 작살을 잡고 조용히 물속을 응시했다. 부츠를 벗은 맨 발바닥으로 딱딱한 자갈들의 감촉이 느껴진다. 방금, 이름 모를 수중 생명체가 내 발 끝을 살짝 물고 간것 같은데… 물고기를 잡으려면 가만히 있다가 순식간에 움직여야 한다니, 일단은 그 통증에 반응하지 않기로 하자. 약간을 기다리자, 꽤 커다란 물고기가 내 주변에 나타났다. 그리고 내 발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는… 아마도 지금이 기회이겠지. 작살을 뻗어서… 첨벙-! "에, 그게 뭐에요- 칼리체 님." "풋-" 한 요정과 한 호문클루스의 조롱 소리가 들려온다. 으음, 이상하군, 베델이 보여준 그대로 행했는데… "동작이 너무 느려, 칼리체." 베델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우울한 얼굴로 봐선 아직도 슈렌토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얼굴이다. 나는 작살로 물고기가 보이는 대로 대충 푹푹 찌르며 물가를 헤집었다. 뭐, 운이 좋으면 하나 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작살 끝에 뭔가 걸리는 감각이 있었다. "…" 그리 크진 않지만, 그리 작지도 않은 이름모를 물고기가 내 작살 끝에 걸려 애처롭게 몸을 퍼덕이고 있었다. 물고기 몸에서 나온 혈액이 계곡물을 타고 퍼지는 광경이 꽤 예쁘다고 생각하며, 나는 작살을 뭍으로 내보냈다. "아… 뭐야, 한마리 잡은거야?" "운이 좋았어요." "그, 그러게- 난 기분이 상해서 괜히 화풀이 하는 줄 알았는데… 어쨌든, 다행이구나." 기분이 상하다니, 에카테야르에게선 약간의 조롱을 받은건 확실하지만 내가 작살을 물고기가 보이는대로 찌른건 나름대로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이 몸은 신체적 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베델이 보여준 방법 그대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요원한 일이니, 대강 되는되로 휘두르는 것이 물고기를 잡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던것 뿐. 하지만 뭐,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겠지. 그 덕분인지, 베델이 꽤 풀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 꽤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물고기를 총 네 마리 정도를 잡을 수 있었다. 마술을 사용한다면 단번에 수십 마리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이런 일에 쓸데 없이 '신비'를 남발하는 일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겠지. 먹을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것도 아니고 말이다. # 타닥, 타닥-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살은 다 발라먹고 뼈만 남은 물고기를 불속에 던져 넣었다. 하얗던 물고기 뼈가 불속에 들어가자 타오르기 시작하며 색이 까맣게 변한다. 내 비늘도 태우면 저렇게 까맣게 변하게 될까? 실없는 의문이로군. 애초에 보통의 불로는 조금의 그을림조차 남지 않을테니. "칼리체, 너는 안씻으러 가도 되니?"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는 아까 그 계곡으로 몸을 씻으러 갔다. 하지만 나는… 칼리아넬은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꺼려하는 분위기고, 에카테야르는 나를 남성이라 알고 있으니… "네. 저는 아직 깨끗하니까요." "그, 그래." 아직- 이 아니라, 내 몸에 담겨 있는 신비는 내게 인간의 생리 현상, 땀 등으로 인한 노폐물이 몸에 쌓이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그러므로 내 몸은 항상 청결을 유지하게 된다. 옷에 먼지나 흙이 뭍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베델, 아직도 슈렌토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나요?" "응,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겠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도록 하지. 그것보다 그에게는 따로 해야할 일이 있지 않던가. 나는 무릎을 감싸고 앉아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들을 떼어내며 그에게 말했다. "베델, 당신과 저와의 계약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죠." "… 그게, 무슨 소리니?" 베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은 걸까, 아니면 갑작스런 말에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걸까. 전자든 후자이든 간에 이것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말해야할 필요가 있겠지. "처음에 당신과 계약할때, 제가 원하는 만큼, 무기한을 조건으로 당신에게 이곳 저곳을 안내해 달라고 했었죠. 그 대신 저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재화를 준다고 했었구요." "그랬지." 이제서야 생각 나는 모양이군. "제가 원하는 것은 여기 까지에요. 저는 이제 따로 가야할 목적지가 생겼거든요. 그러니 이제 더이상 당신의 안내는 필요 없게 되었어요." 그에겐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일까, 베델의 표정은 지금껏 보았던 어느 때 보다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일견, 그의 얼굴은 화난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가.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리며, 우리 둘 사이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베델은 한숨을 깊게 쉬며 옆에 놔두었던 물통을 입에 대고 물을 꿀꺽 꿀꺽 마셨다. "… 따로 가야할 그 목적지 라는게, 어디인데?"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목적지는… "마경이요." "뭐?" 베델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도그럴 것이… 마경은 보통 인간은 가지 않으려는 곳이니까. 인간들에게 마경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땅이다. 인식은 그러면서 땅은 잘도 개척하고 있지만. "마경에는 도대체 왜 가겠다는거야?" "마경에는…" 적절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굳이 이 인간에게 변명을 해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껏 같이 동행해온 인간이니 어느정도 진실은 말해줘도 되겠지. "친구의 초대 때문에요." 생각해보니, 에카테야르를 호문클루스로 만든 마법에 달하는 기술도 마경에서 나온 것이었지. 가는김에 그것도 알아보면 되겠군. "치, 친구라고…? 친구가 마경에 살아? 그리고 연락은 어떻게 되었고?" "네, 그 친구는 지금 마경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원래 이 시기쯤 되면 한번 마경에 들리기로 약속했거든요." 거짓을 말하는건 탐탁치 않지만… 베델에게 진실을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수가 없군. 에카테야르와 칼리아넬, 그녀들도 마경에 데려가야 할지는…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칼리아넬은 원래부터 내 정체를 알고, 처음부터 나를 따라왔으니 별로 문제될건 없지만, 에카테야르… 그녀는 굳이 나 때문에 마경으로 가는 위협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테니까. "으음…" 당연하게도 베델은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내 변명이 그리 치밀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기에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델은 내게 더 추궁하지 않고, "나도 따라가겠어!" "… 에?" 계약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당신과의 계약은 이미…" "그, 그런건 상관없어! 그냥 내가 따라가고 싶은것 뿐이니까." … 이상한 인간이군. 더이상 뭐 얻을게 있다고 나를 따라오겠다는 거지. 하지만 뭐, 그가 따라온다고 해서 딱히 문제될건 없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라지.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계약이 아닌 이상, 당신에게 지불할 재화는 더이상 없을거에요." "물론, 상관없어." 그는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 으음… 아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역시 가끔이라도 씻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좋겠지. 나는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상태이니 말이다. 물론 내게 몸을 씻는것은 아무쓸데 없이 번거롭기만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나는 지금 아까 물고기들을 잡았던 그 계곡에 왔다.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가 먼저 이곳에 몸을 씻으러 가긴 했지만, 이 정도 시간이면 그녀들도 목욕을 끝냈을 테지. 아직 끝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계곡은 꽤 넓으니까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일부러 반대편으로 돌아오기까지 했으니까. 나는 평평한 돌 위에 옷을 모두 벗어 놓고선 알몸인채로 물가 앞에섰다. 싸늘한 바람이 맨 살에 느껴져와 무척 추웠다. 나는 발가락을 살짝 물 속에 넣었다가 바로 뺐다. 물은 싸늘한 바람보다 훨씬 더 싸늘했다. "…" 풍덩- 온 몸에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 히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피부가 얼얼해 지며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계곡물이 너무 차가운데… 나는 손을 들어 물을 머금어 묵직해진 머리카락 때문에 물속으로 목까지 몸을 집어 넣었다. 그대로 서있으면 무거워진 머리카락 때문에 목이 아프니까. 첨벙- 팔을 들어 대충 몸을 씻는다. 그저 물로 몸에 붙어 있는 노폐물들을 쓸어 내는것 정도의 의미 밖엔 없지만… 나는 달빛으로 투명한 물 아래 비춰지는 내 가느다란 몸을 바라보았다. 다른 어떠한 색은 배제한 새하얀 피부. 보통 인간들이 갖고 있는 흉터나 잡티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몸이다. 음… 괜히 상처라도 좀 내고 싶은 기분이다. 첨벙- 베델… 이제 그와 나와의 관계는 더이상 계약 관계가 아니게 되었다. 전에 그와 나와의 동행은 용병과 고용주 간의 계약이 그 이유가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가 나를 좇겠다는 이유는… 이 아름다운 몸 때문인가. … 쓸데 없는 생각이군. "꺄아-!" "하지맛!" 조용히 몸을 씻고 있는데, 갑작스레 익숙한 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을 지르곤 있지만… 그 비명은 결코 다급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장난… 을 치고 있는 건가. 나는 몸을 일으켜 계곡 저쪽 끝을 바라보았다. 첨벙, 첨벙- 하고 물을 튀기는 소리가 나며 두 소녀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실, 딱히 마주쳐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와 그녀들은 마주쳐서는 안되니까. 아니 그런데, 어째서 그녀들이 이곳에… 나는 분명히 그녀들이 간 곳의 반대쪽으로 왔을 터인데… 설마, 헤엄쳐서 온건가. 나는 그녀들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뭍쪽으로 올라가 편평한 바위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걸터 앉았다. 상체만 물 위로 나온 모양새가 되었는데… 그녀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한다. 발견되도 그리 상관은 없지만. "꺄하- 그만해, 에카테야르!" "…"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티격태격 하더니… 주로 소리를 지르며 웃음을 터트리는건 칼리아넬 이었지만, 에카테야르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칼리아넬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놀이… 라는건- 그래, 어린 생명체들의 정상적인 행동 패턴이지. 진심으로, 저것은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첨벙- 그녀들은 계속해서 장난을 치며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들킬것 같군. "이만 갈까? 칼리체 님하고 베델이 기다릴지도 모르니까." "…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는 왜 그 남자에게 굳이 '님'자를 붙여서 부르는 거니?" "에- 칼리체 님은… 칼리체 님이니까." 칼리아넬이 머뭇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칼리체 님은, 칼리체 님이니까- 라, …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녀의 사고 속에서, 나는 '칼리체 님'이라는 이미지 만으로 존재 한다는 것인가.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나와 그녀가 아무리 친해진다 해도 그녀는 요정, 그리고 나는 이세계 모든 생명체 들을 간단히 압도하는 '신', 그 자체니까. "바보, 그런 대답이 어딨어?" 꽁-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아, 아파!" … 괜히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한건진 모르겠다. 에카테야르는 또다시 칼리아넬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괴롭힘도 결코 장난의 범주를 벗어나는 건 없다. 다만, 나는 그것으로 에카테야르가 사실 상당히 짖궂은 성격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아아, 나쁘지 않다. 희미하고 고아한 달빛 아래, 차가운 계곡 물 속에서 알몸인 두 소녀의 귀여운 장난을 바라보는 것도. … 상당히 여유롭군. 내 아늑한 보금자리에 몸을 뉘인채 눈을 감고 몇백년이고 몇천년이고 과거의 기억을 반추 하는 것도 여유지만, 지금 이렇게 몇분 동안 이나마 느끼는 감정도 역시 여유겠지. "거기, 누구지요!" 하지만, 내가 여유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내 모습이 에카테야르에게 발각되며 깨져 버렸다. … 애석한 일이로군. "나야." "카, 칼리체!?" 에카테야르는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팔로 가슴을 가렸고, 칼리아넬은 벌게진 얼굴로 물속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에카테야르는 그렇다 치고, 칼리아넬은 내가 성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참 부끄러움도 많은 요정이로군. "당신이 왜 지금 이곳에 있는거죠?"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이정도 시간이면 너희들이 목욕을 끝마쳤을 거라고 생각했고, 혹시 끝나지 않았더라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반대편으로 돌아온건데." "읏-!" 즉, 나는 잘못한게 없다. 괜히 이쪽으로 헤엄쳐 온것은 너희들이 아닌가. 하여간 에카테야르도 내가 잘못한게 없다는걸 아는지 입술만 깨물며 나를 노려보다가 슬며시 칼리아넬처럼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왠지, 웃음이라도 나올것 같은 꽤나 유쾌한 기분이었다. 손을 들어 만져본 입가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지만. "뭘 그렇게 창피해 하니?" "도대체 당신은…!" 나는 물결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든 인간들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고 판단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에카테야르는 그저 내가 남자- 라고 말했을 뿐인것이 눈에 보이는 이 아름다운 모습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걸까. 인간들 사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이는… 아직 까지 내게는 어렵다.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면 되잖니?" "그,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당신은… 남자 잖아요!" 이제 에카테야르의 얼굴도 칼리아넬 만큼이나 붉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데?" 양 팔을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한다. 무성이라곤 하지만, 이 외모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여성이라고 판단할 만큼 아름다운 것. 하지만 에카테야르는 그렇게 생각치 않나 보다. 뭐, 상관 없겠지. 첨벙- 하고, 나는 들어올렸던 양 팔을 아무렇게나 물속에 다시 집어 넣어 버렸다. 에카테야르… 이제 정말로 완전히 호문클루스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모양이다. 완벽한 인간의 사고대로 행동하고, 내 언사에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화를 낸다. 물론, 나는 그 '인간의 사고'라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제 거의 완벽하게 인간의 사고를 따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호문클루스, 그 불유쾌한 거대한 마력 행사는 피시전자의 몸에 커다란 부담을 준다. 호문클루스의 제작 작업이란 것은, 인간은 버틸 수 없는 거대한 신비를 몸에 담는 과정이니까. 즉, 과도한 신비를 담았던 에카테야르의 몸은… 보통의 인간보다 세월을 견디는 힘이 월등히 약하 다는 이야기 이지.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남은 시간을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 괜한 염려로군. 내가 동정을 느끼고 직접 구해준 인간이라서 그런걸까, 쓸데 없는 애착을 갖게 되는군. 하지만 그녀는 결국 세월속에 스러져갈 허무한 먼지에 불과하다. "카, 칼리체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그것도 알몸의 아가씨 둘을, 앞에 두고 말이죠. 무슨 음흉한 상상이라도 한건 아닌가요?" 음흉한 상상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 에카테야르는 내게 자갈을 던졌다. 물론 맞진 않았지만… 그녀는 모닥불을 피워둔 자리로 돌아온 뒤 내게 화가난 표정을 지은 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괜한 농담을 했군. "에카테야르… 무슨일 있었니?" "흥-!" 베델의 물음에 그녀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지만… 음, 굳이 내가 그에게 해줄 이야기는 없다. … …… 꽤 시간이 흐르고, 낮을 주 무대로 사는 생명체들이 잠들 시간이 찾아왔다. "마경… 으로 가겠다구요?" 그녀는 우리의 새로운 목적지가 마경이라는 말에 눈빛을 흐리며 계속 마경, 마경- 하고 중얼거렸다. 평범한 장소라면 모르겠지만 그녀가 위험을 감수하며 우리를 따라 마경을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에카테야르와 헤어지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응, 너는 어떻게 할거니? 마경은 무척 위험한 곳이니, 너는 따라오지 않는게…" "칼리체, 당신은 그때 분명, 호문클루스의 기술이 마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었지요." 그녀는 푸른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마경에 가야할 이유가 있어요. 저를 호문클루스라는 족쇄에 묶어둔 저주 받을 마법을 확인하기 위해서 라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엔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린다. 저것은… 호문클루스라는 유쾌하지 못한 마법을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 일까. 아니, 그녀의 눈에 가로새겨져 있는 감정은 결코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분노 일 수 없다. 호문클루스 일때 그녀의 감정과 이성은 모두 거대한 암흑에 먹혀져 있었으니까. 가여운 인간이다, 에카테야르는. 그녀는 자신이 당한 그 비정상적인 마법에 대해서 진정으로 분노할 수 없을테니까. 따라서, 그녀는 그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인가. "좋아." 칼리아넬은 당연히 내가 인간들의 사회에서 보호해야하는 대상이니, 데려가야 겠지. 베른헬체이스, 네가 맞이 해야할 손님은 나뿐만이 아니게 되었군. # 우리는 가까운 마을에서 말을 사, 쉬지 않고 달려 마경으로 향했다. 조금 쉬어도 될법 한데, 베델은 아직 낫지 않은 상처까지 갖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쉬려 하지 않았다. 가끔 보이는 그의 표정이 아직도 슈렌토의 일을 염두해 두고 있는듯 했다. 슈렌토… 그는 결국 카스텔 공화국의 집정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까. 생각해 보면, 슈렌토는 우리에게 성 조차도 알려주지 않았다. 의원이라면 그의 가문은 분명 유력한 가문이 었을텐데… 그는 우리와 온전한 '인간'으로서 만났던 것이다. 성이나, 가문이나, 온갖 쓸데 없는 것들은 모두 제외해 두고. "저기 뭔가 보여요!" 칼리아넬은 꽤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거의 한달 동안이나, 무료한 일상을 보냈으니, 뭔가 특별한게 보이면 저리도 반가워 할만도 하다. 요정인 그녀는 드래곤인 나 만큼의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저것은…." 멀리서 높이 매달아 놓은 깃발이 보인다. 저 깃발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은… 아나키스트 왕국의 것이군.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베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인다. 자,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푸르른 풀들이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초원. 이 탁 트인곳에선 도망갈 곳도 없다. 아직 저들과 마주치진 않았으니, 저들이 우리를 쫓을 이유는 없겠지만. "일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이곳은… 마경 바로 앞이니까." 마경 바로 앞, 이라는게 무슨 이유라도 되는 걸까. 베델은 그렇게 말하며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에카테야르는 좀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말 없이 베델을 따랐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 지며 아나키스트 왕국군의 막사가 여기저기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주둔하고 있던 모양이군. "이보시오! 거기 지나가는 여행자 분들!"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우리는 약간의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말을 그쪽으로 몰아 멈추어 섰다. 조금 걱정 되긴 하지만… 베델이 별 문제 없을거라 했으니, 일단 그의 말을 믿어보는 수 밖에. "이곳엔 무슨 일이시오. 아시고 온건진 모르겠지만 이 평화로운 초원 앞은 바로 그 공포스런 마경이라오." 우리에게 말을 건자는 빛나는 은빛 풀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기사였다. 그의 눈초리엔 우리의 정체에 대한 의혹이 엿보였지만, 일단 목소리는 꽤나 호의적이었다. 나는 로브와 후드를 깊게 눌러쓴채 마상 위에서 이 군대를 대강 훑어 보았다. 여기저기 긁힌 갑옷과 약간 찌그러진 투구… 옷자락 끝에 묻은 정체모를 핏자국, 핏발이 서있는 눈. 분명, 이 군대는 최근에 전투를 치른게 틀림 없다. "우리는 용병입니다. 용병들이 마경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지요." "하하, 이 친구들, 한건 크게 노리고 오는 건가 보군. 목숨이나 잘 챙기게! 저 저주받은 마경에서 살아 남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지급되는 보수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이지만, 그게 쉬워야 말이지…" 기사는 눈가를 씰룩이며 흥미로운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눈에 우리의 정체에 대한 의혹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뭐, 걱정해 줘서 고맙소, 기사 양반. 살아 남아 한건 크게 챙기고, 언젠가 당신을 다시한번 보게 되면, 내가 한턱 크게 쏘겠소." "하하, 처음보는 젊은 친구가 호언 장담을 하는군. 방금 말했던 대로 목숨이나 소중히 하게."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베델에게 뭔가를 휙 던졌다. 베델은 말 위에서 그가 던진것을 몸을 틀어 멋지게 낚아 챘다. "움직임이 좋군. 행운을 비네, 젊은 용병 친구. 아, 뒤에 있는 작은 친구들도 물론." 그는 피식 하고 웃으며,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다. 척 봐도 우리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기사가 '용병 친구'라니… 아나키스트 왕국의 왕궁에서 보았던 기사와는 그 모습이 너무나 달라 조금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자, 가자." 베델이 그에게서 건네 받은것은 물통이었는데, 물이 가득 들어있는건지, 출렁이는 소리가 난다. # "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 "… 어떻게 된 일이지요?" 에카테야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천천히 몰고 있는 베델에게 물었다. "마경 때문에 그래. 마경을 개척하기 위해 각 국가가 고용하는 용병의 수는 엄청나고, 저들도 그런 용병들을 많이 보아왔으니까… 뭐, 이젠 용병 한둘 정도야 전혀 수상하게 보이지 않는 다는거지, 일부러 마경으로 찾아올 정신나간 사람도 없고 말이야." "우리는 일부러 마경을 찾아온 거 아니에요?" "…" 칼리아넬의 말에 베델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에 우리는 졸지에 정신나간 사람이 되고 말았군. "그것도 농담이라고 한거야, 칼리아넬?" "노, 농담이 아냐!" 비꼬는 듯한, 에카테야르의 목소리와 당황한 칼리아넬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마경… 이라, 저주받았다고 화자되어지는 영역.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거대한 숲이다. 내 영역에 속해 있는 침묵하는 숲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더 훨씬 더 거대할것 같은 숲이었다. 햇살하나 안들어올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나뭇잎, 이리저리 늘어진 덩굴… 숲의 내부는 한낮이라도 무척이나 어두컴컴 하겠지. 마경의 실제 크기는, 현재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지의 면적보다 훨씬 더 크다. 인간들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열심히 마경을 개척해 대는 것일 것이다. 본격적인 전쟁 보다는, 마경을 개척하는 것으로 영토를 늘리는게 훨씬 더 쉬울 테니까. 하지만 영토를 얻기 위해선, 마경에서 나오는 마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마경의 내부로 들어가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 "저곳이… 마경인가요?" 칼리아넬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인간보다 근원의 링크가 강한 요정인 그녀는,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반차원 정도 어긋난 저 마경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음차원의 마력을. 음차원의 마력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든지 끔찍하게 여겨질 테지만, 요정인 그녀로서는 특히 더할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마경에서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건지도 모르지. 칼리아넬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내 옷자락을 움켜 잡았다. 그저 보는것 만으로도 반응이 이런데… 그녀를 데리고 마경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일단 가까운 마을로 가서, 준비를 하자. 카스텔 공화국에서 급히 도망쳐 나오느라 짐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으니까." # 확실히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하다. 주변의 자연 환경이 험한 산지이든, 비옥한 평지이든, 바다이든 간에 그에 맞춰 잘 살아가니까. 숲의 요정, 호수의 요정과 같이 한 지형지물에 묶여있는 요정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죽음의 냄새가 풍겨저 나오는 마경 근처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니,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다.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꺼려지는게 음차원의 마력인데도 말이다. "마을에 생기가 없어보이네요." 에카테야르는 마을을 둘러 보며 중얼거렸다. "… 근처에 마경이 있는데, 생기가 있을리 없겠지." 베델은 이러저리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칼리아넬은 축 늘어진 채로 아무말이 없었다. 칼리아넬이 조금 걱정 되는군. 그녀는 요정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음차원의 마력에 크게 영향을 받을 테니까. 우리는 곧 허름한 여관 하나를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두워 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경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는 내일 하기로 했다. "칼리체… 당신의 친구는 도대체 뭘하는 사람인가요? 그냥 말로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런 끔찍한 곳에 살고 있다니, 도대체…" 저녁을 시켜 먹으며, 에카테야르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글쎄…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있을턱이 없지. 애초에 그는 인간이 아니니까. "만난지 굉장히 오래되서 지금은 뭘하는지 모르겠어." 덧없는 변명을 해본다. "당신, 나이가 열 일곱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오래 전이라면…" … 슬슬 정체를 숨기는데 한계가 드러나는군. 나는 에카테야르의 의혹에 답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더 캐묻지 않았다. 베델도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이 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 저녁 식사는 무척이나 형편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여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마경에서 불어오는 듯한, 스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왠지 이곳은 이런 바람마저 상쾌하지 못한것 같군. 나는 바람에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긴 하얀 머리카락을 끌어 안으며 마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깊은 어둠에 잠긴 마을… 이곳은 마경의 개척자 들을 위한 마을이다. 마경을 개척하기 위해 온 아나키스트 왕국이나 로엘가스트 연맹의 군대, 아니면 마물 사냥을 목적으로 온 용병들에게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고, 그것을 대가로 재화를 받아 먹고사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해, 그것은 비정상이다. 애초에 마경 근처라는 것 만으로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 증거로 이곳엔 작은 풀벌레 소리 하나 조차 들려오지 않고 있다. 낮에는 새 한 마리 날아오르는 것 조차 보지 못했다. 아마, 이곳에서 사는 인간들은… 보통의 인간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들일 테지. 그렇지 않다면, 굳이 생명체가 본능적으로 피하는 이곳을 택해 살아갈리 없을 테니까. 이해 관계,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일부의 인간들은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않으려는 마경의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라는 건가. 역시, 인간들은 너무나 복잡하다. 그것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근원에서 완전히 벗언나 종족이기 때문일까. "여기 있었구나, 칼리체." 끼익- 하고 문을 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붉은 머리카락의 잘생긴 인간 청년이 들어왔다. "절 찾고 있었나요?" "아니, 찾은건 아니고… 나도 바람좀 쐴겸 올라온 거야." 그는 어색하게 콧등을 긁적이며 내 옆에 다가와 섰다. 베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투명한 눈동자로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슈렌토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 응." 그는 머뭇거리다 내 물음에 긍정했다. 잊기가 정말 힘이드는가 보군. 인간에게 죽음이란건 영원한 종말이니까- 죽은 사람은 어떠한 수를 써도 다시 볼수 없다. 모든 존재를 아득히 초월하는, 근원 그 자체인 드래곤인 나에게 소생의 권능은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권능을 사용할 생각이 없다. 죽음, 그 절대적인 법칙을 거스르는 힘은 자칫 잘못하다간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으니까. 그 정도로 살아있음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은 우리 드래곤들도 어려워할 정도로 절대적인 진리이다. "지금 만큼 내게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 "그때, 내게 힘이 있었다면…." "힘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거란 소린가요. 집정관의 병사들을 모두 죽이고 무력을 이용해 슈렌토를 공화국의 지도자로 앉혔을 거란 얘기인가요? 당신은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원하나요?" 내 말에 그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 넌 내 마음을 너무 신랄하게 흐트려 놓는구나, 칼리체. 내게 힘이 있었다 해도 방금 네가 말한대로 행동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최소한, 그의 목숨은 구해줄 수 있었을 거야. 비겁하게 등을 돌리고 도망치지 않았어도…" "그것은 결국, 당신의 만족을 위해서 인가요?"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불의로 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부조리로 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베델은 그의 고귀한 의지와 묘한 강박 관념 사이를 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그가 종국에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그는 침묵한다. "힘이 필요한가요?" 유혹하듯, 내가 그에게 속삭인다. 베델은 멍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 인간을 가장하고 있는 무표정한 내 얼굴이 보인다. "당신은 나를 따라서 왔다고 말 하지만 분명 당신에겐 마경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렇죠?" '또다시 그 검은 그림자에게 모든 것을 잃고… 너마저도 잃고, 나 혼자 남겨져 '그것'을 찾아 전 세계를 고독하게 떠도는 그런 꿈 말이야.' 페리우스와의 전투 후, 음차원의 마력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며 잠꼬대 처럼 했던 그 말, 내가 알아채지 못할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의 내면에 숨겨진 아픔은- 분명, 마경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나를 따라오겠다는 말로 네가 숨겨놓은 의식의 뒷편을 무시하려 하지 말아라, 인간. 나는 다시한번 묻는다. "힘이 필요한가요?" "… 칼리체, 오늘은 왠지 네가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아주 유혹적인 악마." 악마라…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옆에 놓아두었던 마검 헬스탄을 집었다. 스르릉- 주저없이 검집에서 검을 뽑은 나는 검날을 쥐고 끝에서 끝까지 한번 훑었다. 손바닥이 크게 베이며 붉은 피가 흘러나와 검날을 흠뻑 적셨다. 흑색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처럼 내 피를 순식간에 흡수했다. "카, 칼리체…?" 흑룡의 비늘, 거기다가 백룡인 내 피까지 머금은 이 검은 그에게 원하는 만큼의 힘을 가져다 줄것이다. 물론, 대가는 없다. 이제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은 진정으로 마검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베델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이제 정말 너를 모르겠구나… 칼리체." 베델은 내게서 검을 넘겨 받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마경에 간다고 하시었소?" 잔뜩 때가 껴 바깥이 노랗게 보이는 창문.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는 검은색의 얼룩이 묻어있는 탁자… 하여간, 더러움을 상징하는 온갖 모든 것들이 이 여관안에 잔뜩 널려 있었다. 마경 근처가 아니었다면, 바닥에는 벌레들이 들끓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네, 그렇습니다만." 베델은 아침으로 나온 오트밀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떠먹으며 대답했다. "흠, 이곳에 온걸 보면 사정은 알겠지만… 요새 마경은 평소때 보다 더욱 끔찍한 곳이라네. 최근 여러 마을에서 아이들이 실종된 건, 마경이 집어 삼켜버렸기 때문이란 소문도 있고… 마물들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오는 모양이니 말일세." "아이들이… 실종되었습니까?" "아아-" 여관 주인은 담배를 태우며 성의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인간 아이들의 실종이라… 나도 아직은 마경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지 못했으니, 딱히 떠오르는건 없다. 베른헬체이스가 쓸데 없이 인간의 어린아이를 데려갈 이유도 없고 말이다. 베델은 여관 주인의 말을 듣더니 심각한 표정이다. "신경 쓰이나요?" "으응, 조금." … 조금이 아닐테지. 분명, 이 인간은 속으로 끙끙대며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아이들을 구하려 노력할 것이다. 마경 때문에 실종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도, 마경으로 끌려간 것이라면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군. 여관 주인의 말 때문인지 칼리아넬은 내게 불안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에카테야르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듯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다. 여관 주인이 아무리 위험하다 겁을 준다 할지라도 나는 칼리아넬이나 에카테야르 때문에 마경으로 들어가는걸 미룰 생각이 없다. 마경이라는- 내가 모르는 공간이라는 것에 대한 흥미도 흥미이지만… 베른헬체이스,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으니까. 말하는 걸로 봐선, 베른헬체이스는 기억을 리셋하기 전의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일부러 리셋한 기억이라면, 굳이 다시 떠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끼익- 듣기 싫은 마찰음이 여관 안을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오는 두명의… 요정? "아…?" 칼리아넬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순간, 경악어린 빛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경 근처에서… 요정이라고?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다. "드디어 찾았군요, 칼리아넬."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 분명, 내 기억에 기록되어 있는 목소리다. 오늘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의 개수조차 모두 기억하는 나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은… "레피린체!" 그래, 그런 이름이었군. 로브의 후드를 젖힌 여자는 푸른 머리카락에 깊게 가라앉은 눈빛을 지닌, 성숙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요정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 난다. 그녀는 내가 칼리아넬의 요청을 받고 루그란 숲으로 갔을때, 그류벨과 대치하고 있던 요정이었지. 아마도 이곳까지 따라온 목적은 아마도, 칼리아넬인 모양이군. "설마 마경 근처까지 왔을줄이야…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세계수를 져버릴 생각이었나요, 칼리아넬." 마치 잔잔한 노래를 하는것 같이 들리는 요정어(語)였다. 세계수라… 그랬군, 칼리아넬은 세계수의 정(精)에서 태어난 요정이었던 것이다. "돌아가야 합니다. 칼리아넬. 세계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성장을 마치고 싶은 생각은 아니겠지요?" 옆에 있던 또다른 요정이 레피린체의 말을 거들었다. 단 둘만이 온건가… 난 단 음료가 들어있는 유리컵을 입가에 대고 마시며, 유리 사이로 보이는 두 요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요정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신비로 인해 유리로 인한 빛의 굴절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칼리아넬과 같은 미숙한 요정과는 확실히, 격이 다르군. "자, 잠깐만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도대체 알아들을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고는, 그리고…!" 베델은 양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다 완전히 얼어버렸다. 요정과 인간이 외모에서 유일하게 확연히 다른 특징, 뾰족한 귀를 보아버린 모양이다. 크기는 인간과 그리 다를것 없어서 머리카락 사이에 잘 보이지 않도록 가려져 있었을 텐데, 베델도 눈썰미가 꽤 좋군. "설마, 요정?" 와장창- 하고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여관주인이 접시라도 놓친걸까? 나는 유리컵 주변에 약간 흘려버린 음료를 할짝이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지금껏 칼리아넬을 데리고 다니던 '인간'인가요?" 매끄러운 인간의 언어. 그류벨과 대화할때도 알았지만, 레피린체라는 저 요정은 칼리아넬이랑은 다르게 왠지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 그렇습니다." 베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신없이 대답했다. 인간에게는 신비의 종족으로만 알려진 요정이 대뜸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거니, 그럴 수 밖에. "어떤 경로로 당신이 칼리아넬과 동행하고 있는건지 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레피린체는 말끝을 흐리며 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 눈빛으로 봐선 이미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듯 했다. "칼리아넬은 우리 루그란 숲의 세계수에서 태어난 요정이며, 앞으로 모든 요정들을 이끌 여왕이 될 소녀입니다." "에…?" 침묵이 흐른다. 칼리아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에카테야르와 베델은 경악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여왕. 사실, 그 말은 요정들 사이에선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레피린체는 칼리아넬이 여왕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인간이 말하는 여왕과 요정이 말하는 여왕의 의미는 아무래도… 전혀 다르 겠지. "하지만 칼리아넬은…" 베델은 칼리아넬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린다. 난 저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칼리아넬의 주변에 흐르는 요정 특유의 신비와 뾰족한 귀가 인식 장애 마술로 가려져 있으니, 겉보기로는 진짜 인간과 다를게 없다. …이제 정체를 숨기는 일은 그만해도 되겠지. 난 칼리아넬의 정체를 숨겨주던 나의 신비를 거두어 들였다. 종이에 물이 젖듯, 요정의 존재감이 주변에 스며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 "칼리아넬… 정말, 요정이었구나." "미, 미안해요. 지금껏 줄곧 숨기고 있어서…. 언젠간, 언젠간 제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런걸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채, 어색한 분위기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자- 이만 돌아갑시다, 칼리아넬. 숲의 자매들이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하, 하지만!" 칼리아넬은 다급한 표정이 되어 주변을 돌아본다. 아직도 놀란 표정이 가시지 못한 베델,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있는 에카테야르… 그리고, 나에게 와서 그녀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의 입이 열릴듯 말듯, 벙긋 거린다. 칼리체… 님- 눈에는 눈물이라도 흐를듯 잔뜩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곳에 남는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찾아온 요정을 따라 루그란 숲에 돌아가는 것인가. 내가 그녀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나를 따라왔고, 나는 나를 따르는 그녀를 보호해 주었을 뿐이다. 최종 결정은, 그녀가 내리는 것이다. "칼리아넬! 설마,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건 아니겠지요?" "…" 그녀는 분명, 이곳에… 정확히 말하자면 내 곁에 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루그란 숲에 있는 그녀의 자매들을 완전히 져버릴수도 없는 것이겠지. 칼리아넬에게 있어, 나의 무게는 루그란 숲에 있는 그녀의 자매들과도 동일한 걸까. "칼리아넬, 아무래도 너는 돌아가는게 좋겠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네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다잖아.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는건 아무래도…" 베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굉장히 놀랐을 텐데도… 그의 말엔 여전히 칼리아넬을 향한 배려와 친절이 들어있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여전히 눈물을 글썽 거리며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다. "칼리아넬." "칼리아넬, 돌아가야 해요." 흔들리던 그녀의 시선이 결국 나에게 고정된다. … 그녀의 눈빛은 나에게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내가 자신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기를 원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애석하게도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 … 어리석은 요정. 결국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군. "칼리아넬, 네가 나를 따라오든, 루그란 숲으로 다시 돌아가든 그것은 온전히 네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그것에 엉뚱히 내 의지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야 하겠지." "카, 칼리체 님…" 나를 바라보는 슬픈 눈빛. -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은 매번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군요, 칼리체 님. 당신의 자아는 너무 단단해서 제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칼리체 님은 정말로… 그 누구도 필요치 않는, 홀로 완벽한 드래곤이군요. 저는 항상 그것이 두렵고, 안타깝답니다. 당신이… 전 당신이 필요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좀더 성장해야겠지요… 저의 연약한 자아는 당신의 차가운 단단함에 깨어져 버릴테니 말이에요. 언젠간, 언젠가는, 당신이 저를… 두려워 하길 원하고 있어요. 머리속을 관통하는 칼리아넬의 말들… 이것은 마치, 만능의 언어 같군. 여전히 나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린 요정의 소녀- 재미있군, 내가 자신을 두려워 하길 원하고 있다고…? - 기대하겠다. 칼리아넬은 슬프게 미소지었다. 이별은 갑작스레 덮쳐오는 파도와 같아, 한꺼번에 모든것을 쓸어가고 허무밖에 남겨 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허무 밑에는 재회가 숨겨져 있어 그 허무를 결코 영원한 허무로 만들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적은 요정으로서는 더욱 그렇겠지. 그러니, 나는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 결국, 칼리아넬은 그녀를 찾으러 온 요정들을 따라 이곳을 떠났다. 어떻게 칼리아넬이 이곳에 있다는걸 이렇게 정확히 찾았는지 모르겠군. 요정들 사이에는 그들끼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생체 탐지기라도 가진 걸까. … 실없는 얘기로군. "칼리체, 당신은 칼리아넬이 요정이란걸 알고 있었나요?" 에카테야르의 물음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에카테야르의 눈동자는 내가 원래부터 칼리아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말은, 그것에 대한 확인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처음부터 정체를 밝히지 않았었나요? 그것도 인식 장애 마술로 존재감과 뾰족한 귀까지 숨기면서…."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서였어. 칼리아넬이 요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보통의 인간 사회를 제대로 겪어볼 수 없었을 테니까." 난 거짓말을 무척 꺼려한다. 하지만 거짓은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덩이가 불어나듯, 규모가 커지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흐응-" 에카테야르는 묘한 비음을 흘리며 나를 미심쩍은 듯이 바라본다. 정말, 이건 방법이 없군. 칼리아넬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꽤 치명적인 일이었다. 나는 줄곧 그녀와 함께 산속에서 살아왔다고 말했으니, 칼리아넬이 요정이라면, 나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밖에 없겠지. "하하, 그만하자구- 에카테야르. 칼리아넬이 딱히 나쁜 의도로 그런짓을 한것도 아니고… 칼리체를 위해서라잖아. 그리고 굉장히 놀라운 일 아니니? 에카테야르, 네 친구가 전설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던 요정이라잖아!" 베델은 사람좋은 얼굴로 하하, 하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음, 지나치게 낙천적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나의 곤란함을 무마시켜주기 위해서인지…. "친구…." 다행히도 베델의 말이 먹혔는지 에카테야르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그녀의 가느다란 금발처럼 희미하게 스쳐지나간다. 에카테야르는 마경으로 다가갈 수록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빛바랜 갈색 망토 자락을 여미며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불쾌한 바람이로군. 마경에 자란 나무들은 나뭇잎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분명, 이 바람은 마경쪽에서 불어오고 있다. 이런 확연한 '모순'으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마경이란 곳에 대해 공포심을 가질수 밖에 없겠지.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칼리체의 친구는 취향이 참… 특이하구나." 눈 앞에 불길한 모습으로 서있는 마경. "네, 그 친구가 취향이 좀 특이해요." "… 그 친구란 자도 칼리체, 당신처럼 무척이나 이상한 사람인가 보군요." 마경의 불길함 때문일까, 서로 별 시덥잖은 말을 건네며 우리는 마경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풍경은 무척이나 단조롭다. 약간 어두운 빛을 띤 나무, 나무, 나무, 그리고 나무. 사방에서 사정없이 뿜어지고 있는 이 불길함이 아니라면, 이곳은 그저 울창한 숲일 뿐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마경의 단편일 뿐이겠지. 마경은 인간들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보다 더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이곳을 완전히 개척해 내려면, 몇 천년, 아니 몇 만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벅, 저벅- 바닥엔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깔려있다. 주변에 울려 퍼지는 것은 전부 우리가 그 나뭇잎을 밟는 소리. 그 이외에 어떠한 소리도 이곳에선 들려오지 않는다. 마경으로 들어오자 불쾌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멎었고, 나뭇가지에 무성히 자라있는 나뭇잎은 미동하나 없다. "그런데 칼리체, 길은 알고 있니?" 하아? 무슨 바보같은 소릴 하는건가, 이 인간은. "베델… 마경안에 길이란게 있을것 같은가요." 난 이제 바닥에 끌릴것 같이 길어진 백색 머리카락을 옷가지 처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칼리아넬이 머리 손질을 해줄때는 편했는데… 굽이 높은 부츠를 신던지 머리를 자르던지 해야겠군. "베델은 그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잖아요. 이 마경 안에서 그 친구가 있다는 위치를 정확히 알고는 있는 건가요?" 에카테야르가 다가와 내 긴 머리카락을 묶어주며 물었다. "아, 고마워." 위치라… 물론, 내가 알리가 없지. 그런데 순간, [인간의 냄새다.] 무척이나 불쾌한 느낌의 목소리가 이 공간을 울렸다. "방금… 뭐라구요?" "난 아무말도 안했는데?" 나는 에카테야르가 묶어진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 보고는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에카테야르와 베델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 졌다. 아니, 실제로 어두워 진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 주위가 어두워졌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베델과 에카테야르는 이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건지 긴장된 기색으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간의 냄새다.] 이것은 언어가 아니다. 그저 강력한… 의념일뿐. 마물이 언어 따위를 가지고 있을리 없지. 쉭쉭- 거리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우리의 주변을 메우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주변의 풍경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히히히! 헤스켈론의 인간들이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구나!] [살을 찢고, 뼈를 부수고, 피를 마시며 내장을 잘근잘근 씹어주마! 크르륵-! 네 머리통만을 온전히 남겨둔채 네 몸이 먹히는걸 보여주겠다. 킬킬킬!] [약해 빠진 헤스켈론의 인간들! 나브락사스의 인간들 보다 맛있을 거야!] 저열한 웃음 소리- 끈적한 음차원이의 마력이 점점 주변을 잠식해 들어가며 그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끄으으으─] 비릿한 피냄새. 이 끔찍한 목소리들은 마물들이 내는게 아니다. 마물들에게 먹혀버린 생명체들의 공포로 형상화된 의념, 그 자체가 이 주변에 떠돌며 내는 환청이다. 그런데- 헤스켈론 이라면 마경의 외부, 즉 보통의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을 말하는 것 같군. 그렇다면 나브락사스는 바로 마경을 말하는 것인가? '나브락사스의 인간'이라… 한낱 마물로 인한 의념 따위를 신뢰할 순 없겠지만… 그 말은, 이 마경에도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일까. "이거 왠지 위험한것 같은데…." "왠지가 아니라 확실히 위험한 상황인것 같군요." 하지만 둘의 목소리엔 그리 심각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베델이야 마물 사냥꾼이라 불리 정도로 마물과 수없이 싸워 왔으며, 에카테야르는 아직 감정 표현이 미숙한것 같으니까. … 어쨌든 난 여기서 쓸데 없이 마물과 전투를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니, - 물러나라 음차원의 찌꺼기들. [키아아악─!] 푸드덕 거리는 소리,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 퍽- 퍽- 하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온갖 소리가 우리가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사방을 향해 울려 퍼졌다. 개 중엔 마치 인간과도 같은 발걸음 소리가 섞여 있었다. 소리는 다양했지만 그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 이 공간에서의 퇴거. 하찮은 마물들 따위는 내 만능의 언어에 깃든 그 작은 힘조차 이기지 못한다. 그저 살아가는 생명체를 음차원으로 인도할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지저분한 것들- "어떻게… 된거지?" "글쎄요,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물들이 물러나는것 같군요." 언제 가져온건지, 에카테야르는 가느다란 은빛의 레이피어를 허리춤의 검집에 꽂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짧은 치마가 살짝 들리며 보인건데, 그녀의 뽀얀 허벅지엔 작은 단검이 매어져 있었다. 내가 여관에서 뒹굴고 있는 사이 준비를 꽤 철저히 했던 모양이군. 저벅, 저벅- 또다시, 나뭇잎을 밟는 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마물의 것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다. 베델과 에카테야르는 다시 긴장된 기색으로 각자의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가 이내 드러난 자의 모습에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거두었다. 울창한 나무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불쑥 나타난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검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아니, 남자라고 해아햐나… 하여간, 겉보기에 성별이 무척이나 애매한 인간이었다. 몸에 피가 흐르지 않는듯, 질리도록 창백한 피부. 퀭한 동공. 보통의 인간이 봤으면 무척이나 꺼림찍해 할 용모였다. 마치, 마경과도 같은 불길함이 감도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루렌칼리체 님. 저는 베른헬체이스 님의 시종으로 당신의 안내를 명받았습니다." 아─!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베른헬체이스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소모품과 같은 마법의 꼭두각시 일 뿐이다. 용의 힘을 개방해 놓지 않아서 그런건지, 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안내하도록 하세요." 약간의 유쾌함을 머금은 내 가느다란 목소리. "영광입니다." 이 기분나쁜 인형은 무척이나 정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우습구나 로나벨아크하임. 나를 초대하며 이렇게나 정중한 인간의 예법을 구사하는 인형을 보내다니, 꽤나 재치있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데리고 가는 이 두 인간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이것으로 내가 꽤 유쾌해 졌다는건 사실이다. "자- 이쪽으로." # "당신 친구의 이름이 베른헬체이스인가요?" 베른헬체이스가 만든 인형의 뒤를 따라가며, 에카테야르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왠지 꺼림찍 하다는 표정이었다. "응." "당신이나 당신 친구들의 이름은 모두 이상하군요. 전에 그 용병도… 풀 네임이 아마 로나벨아크하임이라고 했었지요?" 기억력도 좋군. "루루렌칼리체, 로나벨아크하임, 베른헬체이스… 모두 하나같이 평범한 이름들은 아니네요. 혹시, 당신들 부모님끼리 미리 약속하고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은건 아니겠죠?" 에카테야르에게 감탄했다. 부모님들끼리 미리 약속하고 이름을 지었다… 라는 건 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날카로운 통찰력이 아닌가. 결국 우리가 모두 '드래곤'이라는 결론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겠지만. "저, 에카테야르. 칼리체는 말이야…." 베델이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고아야." 아아,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나. 베델은 꽤 사려깊은 인간이니, 에카테야르가 부모님을 언급했을때 내 기분이 불편했을수도 있다는게 신경쓰인 것이겠지. 에카테야르는 조그만 붉은 입술을 달싹 거리다 말했다. "미안해요, 칼리체. 농담이 적절치 못했군요." "…" 음, 농담이었나. 베른헬체이스의 인형은 주변도 돌아보지 않은채, 똑바로 앞만 보며 무작정 걸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붕뜬 검은 그림자처럼 인형은 긴 풀숲과 덩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것 같았다.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얼마나 걸었을까. 온통 음차원의 마력을 머금은 나무뿐인 풍경인 마경이라 그런지 시간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경의 안으로 들어갈 수록 점점 검붉은 색으로 변하는 태양 때문이기도 하겠지. 본래의 세계에서 반차원 정도 어긋난 곳이라서 그런지,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인간의 감각이 다소 뒤죽박죽- 이란 느낌이다. "도착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루루렌칼리체 님. 저의 주인이신 베른헬체이스 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거대한 흑색의 성. 그것은 마경의 한가운데,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장대한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해 마치 거짓말 같은 모습. 베른헬체이스의 비늘같은 칠흑의 성에서 말도 안돼는 거대한 신비가 느껴져 왔다. 저것은… 마물들의 시체로 만든 성이로군. 겉보기에 성은 단단한것 같은 검은색 돌로 쌓아져 있지만, 그 검은색 돌은 본래 마물들의 시체- 그것은 베른헬체이스의 세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강력한 권능으로 이루어 진것이다. 뭐랄까, 무척이나… 악취미로군. "마경에… 이런 거대한 성이라구요? 칼리체, 베른헬체이스라는 당신의 친구, 대체 뭘하는 사람이죠?" "… 마경안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 구우우웅─ 너무나도 거대한 신비를 품고 있는 구조물은 주변의 대기를 왜곡하고, 마치 어떤 짐승이 울음소리를 내듯, 무척이나 깊게 깔린 어떤 진동이 주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 마치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게이트를 지나 안으로 들어간 성의 내관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성의 내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오직 검은색 돌로 만든 조각상들이었다. 조각상들을 이루고 있는 검은색 돌들도 역시 본래는 마물의 시체.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조각상들의 모습은 그 시체들의 생전의 모습들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으론 상상도 할 수 없이 기괴하게 생긴 생명체들. 지나치게 거대한 입이나, 이빨, 날카로운 손톱, 지독한 독이 발라져 있는 꼬리- 온갖 흉악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 마물들이 시간이 멈춘 모습으로 성의 내부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마물의 조각상이라니, 지옥같은 광경이구나." 베델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곳엔 한 조각상이 있었다. 다른 조각상들과 마찬가지로 그 조각상도 역시 마물의 시체로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이 조각상이 다른 조각상과 다른것은 그 모습이 '인간'이라는 것. 그는 그것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조각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베른헬체이스라는 네 친구는… 인간에 대해 무척이나 비관적인 모양이구나." "꼭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나른한 듯, 아니면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 같은 목소리. 그리고 뒤에서 내 목을 휘감는 새하얀 팔. … 목에 닿는 느낌이 무척이나 차다. 베델과 에카테야르가 놀란 얼굴로 내 뒤쪽을 바라본다. "네 기억엔 없겠지만… 다시 만나서 기쁘군, 루루렌칼리체." 베른헬체이스, 그가 내 귓가를 간질이며 작게 속삭였다. 소름끼치는군. 뭘하는 거지 이녀석은.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베델, 이쪽은 에카테야르 라고 합니다. 칼리체와는 마경밖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었지요." "…." 베델은 갑작스런 베른헬체이스의 등장에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과 에카테야르를 소개했다. 그런데, 에카테야르는… 왠지 마음에 안든다는 눈초리로군. "그렇습니까. 저는 베른헬체이스.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루루렌칼리체 와는 꽤 오랜 친구 사이지요." 베른헬체이스는 내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천천히 물러났다. 그제서야 나는 몸을 돌려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가 흑룡 아니랄까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흑색으로 치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가는 성장 과도기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소년인지 소녀인지, 성별을 모를 애매모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베델과 에카테야르에게 인사하는 모습, 얼굴에 띈 미소가 놀랍도록 자연스럽다. 어찌보면 로나벨아크하임보다 더 능숙한것 같기도 하군. "제 친우의 동행분들 이라니 마땅히 따로 시간을 갖고 친교를 나누어야 하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은 지라,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무, 물론 입니다." … 지나치게 정중하다. 꽤나 흉폭한 로나벨아크하임과는 정반대로군. "자- 그럼 손님들을 각자 쉴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언제 이곳에 온건지 모를 베른헬체이스의 인형 둘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살아있는 것들이 아니니, 존재감이 없어 불쾌하군. "아, 그럼… 있다가 보자, 칼리체." "…." 베델과 에카테야르는 베른헬체이스의 인형들의 안내를 따라 다른 곳으로 가버리게 되었다. … 왠지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되었군. 그들이 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던 베른헬체이스의 얼굴과 마치 인간과도 같았던 동작이 뚝- 하고, 사실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홀(hall)에서 이야기 하기는 곤란하니, 나의 공간으로 가도록 하지, 루루렌칼리체." 완전히 매말라 버린 무기질 같은 목소리로 베른헬체이스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는 앞으로 뚜벅, 뚜벅- 걷기 시작했다. # "설마, 다른 인간들을 데려올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군." 베른헬체이스가 안내한 공간은 천장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아무런 기둥도 없이 건물 내부에 이 정도로 넓은 공간이라니… 틀림없이 베른헬체이스의 신비가 작용해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 성 전체가 상식을 뛰어 넘는 신비, 그 자체이지만. 하지만 이 모든것은 베른헬체이스의 마력이 끊어지기만 하면 단숨에 무너져 버려 냄새나는 마물의 시체로 변해버릴 모래의 성에 불과하다. 별로 재미없는 환상이로군.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하군." "아니, 딱히 방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전의 그 모습은…." - 무슨 착각을 하는건지 모르겠군. 네가 인간을 가장하는 것을 보고, 나도 그것에 따라준것일 뿐이다. 그 인간들은 네 정체를 모르는것 같고, 너는 정체가 열리지지 않길 바라는것 같으니 말이다. 아니면… 뭔가 잘못된 것이기라도 한건가. 내 행동은 친한 인간들 사이에선 통상적으로 행하는 행동이라 생각하는데. 배려, 인건가. 베른헬체이스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 그리고 어둠이 가득한 허공에 나타나는 두개의 거대한 자색의 드래곤 아이. 순식간에 이 공간에 베른헬체이스의 존재감이 가득찬다. 조금 괴롭군.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들군, 베른헬체이스." - 정말 완벽하게 인간을 가장하고 있군. 네 자신의 힘을 억지로 억누르면서 까지. 사방으로 퍼지던 그의 존재감이 점점 멎어들어간다. "뭐, 그런 셈이지." -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을 가장하며 행동하는게 흥미롭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무척이나 재미없는 연극같군. 재미없는 연극이라… 베른헬체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는군. "하지만 너도 여러가지 인간의 행위를 보며 즐거워 하고 있지 않은가? 이곳으로 나를 초대한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나?" "후후, 피차 마찬가지란 소리군, 루루렌칼리체." 거대한 흑색의 용이 사라지고, 인간의 모습인 베른헬체이스의 형상이 허공에 점점 뚜렷히 맺히기 시작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베른헬체이스의 얼굴에 맺히는 부드러운 미소. 이제는 알 수 있다. 저것은, 나보다도 완벽한 '가장'일 뿐이다. "그럼, 네가 이 연극을 끝낼 생각이 없는 동안, 친한 '인간' 친구로 지내보자구, 루루렌칼리체." # 이름 모를 향긋한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는 긴 테이블과 번쩍이는 황금 촛대, 반짝이는 은접시… 여러개의 붉은 와인. 옆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론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온통 어두운 공간에 촛대가 테이블만이 빛을 받고 있었다. 하나의 광원으로 인한 확연한 음영, 무척이나 몽환적인 모습이다. 어둠이란 것은 완전히 밝히지 않으면 은닉이란 속성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그것은 '신비'와 닮아있다. "너를 따라온 인간들은 걱정하지 마라. 이보다 더 호화로운 대접을 해주고 있으니까." 베른헬체이스는 탁자 위에 올려진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그것참 고마운 일이지만… 굳이 나에겐 이런 인간식의 대접을 할 필요는 없을텐데." "흐응-" 그는 와인의 라벨을 보며 검은색 셔츠 깃을 만지작 거리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네가 그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엔 서로 인간 친구로서 지내 보자고 말했을 텐데. 설사 네 연극이 그 인간들에게만 보여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이 번거로움은 번거롭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루루렌칼리체." 그는 탁- 하고 소리를 내며 탁자위에 와인병을 올려두었다. "블레오르 62년 산 와인, 인간들 사이에선 목숨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는 큰 가치의 와인이지. 아, 실제로 인간들이 이것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건 아냐. 그냥 가치가 그렇다는 것이지." 갑작스레 와인… 인가. "썩힐 수록 부드러워 지고, 깊어지며, 빛깔이 아름답고 향과 맛이 그윽해 진다는군. 아- 말을 잘못했군, 숙성시킬 수록." "…." 썩힐 수록, 숙성 시킬 수록… 두 말의 과정과 결과는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두 단어가 구분지어져 쓰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베른헬체이스는 그 연유를 알고 있을까.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는 피식- 하고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인간들의 말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나는 이 값비싼 와인이나 싸구려로 취급 받는 와인이나 그다지 맛의 차이를 못느끼겠더군. 오직 이것을 만든, 인간들 만이 온전히 느낄수 있는 것이겠지." 과연, 그런가… 우리 드래곤들은 애초에 미각이란게 없으니까,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감각을 빌려 올 수 밖에 없다. 그런 우리들이니, 인간들이 주장하는 미묘한 맛의 차이 따위는 쉽게 느끼기 어렵겠지. "언제까지 서있을건가, 루루렌칼리체. 친한 친구 둘이서 아주 오랜만에 만났으니 밤을 새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나." 희극적이군. 베른헬체이스가 대놓고 연극을 하는 것이 보여, 무척이나 희극적이다. "꽤나 유쾌해 보이는군." 나는 베른헬체이스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아까 딴 와인을 내 쪽에 있는 크리스탈 잔에 따르고 있었다. 금방 잠들것 같은 나른한 표정,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언뜻 여성스런 분위기를 내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턱선이 그 분위기를 중화시키고 있었다. "아직 능숙하지 못하군, 너는. 난 지금 별로 유쾌하지 않아, 그저 그런 척을 하고 있을 뿐이지- 라곤 해도… 루루렌칼리체, 너와 이런 저급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인간을 가장하고 있는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베른헬체이스는 자신의 잔에도 대충 와인을 따르고는 한쪽에 던져 두다 시피 와인병을 놓았다. 그의 검은 셔츠 끝자락에 붉은 와인이 튀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라니, 영광이라 해야하나, 베른헬체이스? 속으로 재미없는 농담이라 생각하며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처음 아나키스트 왕국의 왕궁에서 와인을 마셨을 때의 맛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나는 객관적으로 이것과 그때의 것을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베른헬체이스의 말대로 큰 차이는 느낄수 없다. 그저 이것이 조금더 떫고, 달고- 하는 것의 차이만 느낄뿐. "마경에도 인간이 사나?" "물론, 살아가고 있지. 자신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말야." 베른헬체이스는 상당히 능숙한 동작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를 썰었다. 좋다, 나도 드래곤 둘이 하는 이 웃기지도 않는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지- 나도 그렇게 마음먹으며 내 앞에 놓여진 간단한 음식을 집어먹었다. "그 인간들중 하나가… 네가 흥미있어하는 인간인가?" "뭐, 그렇지.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지금 해봐야 아무 소용 없을거다. 이런 저급의 언어로 내가 들려주는 말과 온전한 네 생각으로 보는 그들의 모습은 전혀, 라고 해도 될만큼 다를테니까." … 그 이야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 로군. 짠- 하고, 나와 그는 서로의 잔을 들고 가볍게 부딪혔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모르겠군." "예전과 똑같군, 너는… 쓸데 없이 진지하다는 것이 말이야. 인간에 관해선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그리고 이 행위에 들어있는 의미는 그저 기원(祈願)일 뿐이지." 그는 포크로 미리 잘라 놓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가져다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런대로 맛있군." 담백한 감상이군. 음, 예전이라면… 역시 내가 기억을 리셋하기 전을 언급하는 것이겠지. 과거에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전에도 생각했던 대로 기억을 리셋하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루루렌칼리체 라는 고유명사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안을 담고 있는, 한 존재를 구성하는 기억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나벨아크하임이나 베른헬체이스가 '예전과 그대로군' 하는걸 보면 나도 어쩔수 없는 천성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베른헬체이스." 묻겠다. "과거의 나는… 어떤 존재였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음이다, 이것은. 이미 나 스스로 리셋해 버린 과거의 자신을 다시 기억해서 어쩌겠다는 것일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대답이 듣고 싶다. "그건 너 답지 않은 질문이로군. 스스로 지워버린 기억을 내 입을 통해 듣는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지? 인간들 사이에서 연극을 오래하다보니 그 배역에 너무 심취한건 아닌가, 루루렌칼리체. 그 '유희'가 너무 즐거운 나머지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덧없는 질문이긴 했다. 그런걸 알면서도 베른헬체이스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은, 그가 말한대로 인간들에게 너무 심취했던 탓일까. … 사실, 그것이야 말로 웃기는 소리지. 그 말대로 배역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면 차라리 더 흥미롭겠군. "불쾌한 조롱이로군." "그래…?" 베른헬체이스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빈 크리스탈 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만능의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 이었다면, 방금과 같이 네 마음에도 없는 질문은 내게 닿지도 않았겠지. 마치… 게임을 하고 있는것 같군. 만능의 언어의 부재로 네 의지는 내게 확실히 닿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네 마음을 떠볼 수 있는 말을 제시한 후, 네 반응을 보고 진심을 유추해 내지." 게임-놀이- 이라, 재미있는 발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드래곤들의 관점일뿐. 다른 생명체 들에겐 이런 저급의 언어가 결코 놀이일순 없겠지. 베른헬체이스의 관점 대로라면, 저급의 언어로 인간들 사이에서 섞여 생활하는 것은 단순히 '유희'거리로 보이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저급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을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이니까. "난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 없다." "물론이다. 너는 하찮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진지하니,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이겠지." … 가차 없는 녀석이군. "그런데, 네가 데려온 인간들 중… 베델, 이라고 했던가?" 일순간, 그의 자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 "넌 그 인간을… 알고서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베른헬체이스의 입가에 재밌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델이 마경과 무언가 관련이 있다는건 알고 있지만… 베른헬체이스가 갑자기 그 인간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선 아는게 없다. 나는 내쪽 크리스탈 잔에 담겨있던 붉은 와인을 비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신경써서 알아보지 않았다면, 아무리 백룡인 너라도 알 수 없겠지. 그것은 '내것'이니까." "… 아까 전부터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베델이란 인간에게 내가 따로 신경써야할 무언가가 있던가?" 그의 말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베델이란 인간의 몸엔." 그것은- "내 피의 일부가 흐르고 있다." 베른헬체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히 다시 와인을 따라놓은 잔을 비웠다. 꽤 마셨군, 이제 병에 남은 와인은 반도 되지 않는다. 음, 그런데 피의 일부가 흐르고 있다는 말은…. "네 후손이란 소린가." "아아- 그래, 한 오백년 전 쯤이었지. 나는 인간 남성의 모습으로 마경에 사는 한 인간 여성을 안았다. 그리고 자식을 낳았지." "… 무슨 목적으로?" 오백년 전 쯤이라면… 인간의 인식으론 꽤 오래전의 일이군. 그는 잔에 남은 와인을 장난스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 인간 여성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 사랑이라? 가당찮군. 베른헬체이스는 나를 보더니 킬킬 대며 웃기 시작했다. "작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으로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루루렌칼리체. " "무척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별로 유쾌하진 못한 농담이었다. 내 입장에선 괜히 그에게 조롱당한 기분이니까. "그리고 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네가 화하고 있는 모습에 성별이 없다는 것은-. 그것은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이니까." 킬킬대며 조롱하듯이 웃었던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진다. 정색을 하는게 아니라, 원래 그 웃음은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게 아니다. 그 농담을 하는 베른헬체이스는 사실, 한 없이 차갑다. 그가 아까전부터 완벽하게 인간을 가장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베델의 몸속에 베른헬체이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겠지. 물론, 진짜 용의 피가 아니라 베른헬체이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의 것이겠지만. "그의 몸엔 약간의 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음, 나의 생각이 그 즉시 부정 당해 버렸다. "뭐, 용의 피라고 하기도 민망하긴 하지만. 그저 커다란 신비가 담겨 있는 피라고 하면 적절하겠지. 그 피의 근원은 물론 나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인간에게 용의 피를 물려주다니…. 인간의 모습으로 낳은 자식은, 드래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저 베른헬체이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때의 유전자를 가진 '다른 인간'일 뿐이겠지. 용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을거라 기대하는건 무리이니까. "어째서?" "흥미였다. 인간이 어디까지 용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이었지." 실험이라… 베델이 살아있는 것을 보면, 그 실험은 성공했나 보군. "내 피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엷어져 갔다. 하지만 고작 인간의 피론, 아무리 미약하다 하더라도 용의 피를 이길순 없지. 내 피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현대에 이르른 피가, 베델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소리로군. "음차원의 마력을 지배하는 흑룡의 피. 베델이란 인간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보통의 인간처럼 보이기엔 불가능할테니까." 그러고 보니, 베델의 왼팔엔 항상 붕대가 감겨 있었지… 항상 긴 소매자락으로 감추고 있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난 그를 처음보았을때 잠깐 보였던 붕대가 아직까지 매어져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것이… 베델이 억누르고 있는 베른헬체이스의 피 일까. # 마경에선 일출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줄기 아쉬움을 느끼며 살짝 들춘 커튼에서 물러났다. 결국, 나는 베른헬체이스와 밤을 꼬박 새어버리고 말았다. 무척 피곤하긴 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돈 아니다. 인간의 몸이란 참 불편하지- 라고, 새삼 느낀다. 하루 정도 수면을 취하지 못한 것으로도 이렇게 심한 피로함을 느끼니까. "…." 하지만 베른헬체이스는 색색- 거리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정말 성실한 녀석이다. '네가 이 연극을 끝낼 생각이 없는 동안, 친한 '인간' 친구로 지내보자구, 루루렌칼리체,' 라고 했던 말을, 정말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까. … 피곤함에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베른헬체이스는 지금 완벽한 인간이다. 왠지… 잠들지 않은 나만 손해본 느낌인걸. 하지만 이제와서 다시 수면을 취할 생각은 없으니… 나가 볼까.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나는 베른헬체이스의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제일먼저 보이는 것은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어두운 복도- 저벅, 저벅- 내 발소리만이 복도를 울린다. 이 어두운 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는 베른헬체이스, 단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그의 인형일 뿐. 한없이 무거운 적막이 흐른다- 우리 드래곤을 무척이나 닮은 성이로군. "하아-" 크게 숨을 내쉬어 본다. 폐부로 성안의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며, 몽롱해진 정신이 약간이나마 제대로 돌아오는것 같은 기분이다. 조금, 신경이 쓰인다. 흑룡의 피를 억누르고 있는 베델… 지금껏 그런 기색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무튼, 그렇다면 그에게 마경은 그리 힘든 환경이 아닐 것이다. 음차원의 마력을 지배하는 흑룡의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으니까- 오랜 시간동안 마물 사냥꾼이라 불릴 정도로 마경에 있었던 것이 이해가 가는군.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마, 미쳐 버렸을테지. 에카테야르도, 베델도 그렇고 내 주위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평범치 못하군. 무척이나 공교롭게도 말이다. "아, 칼리체?" 보이지도 않는 일출을 느끼며 멍하니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중,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베델…." "마침, 이 성의 시종에게 물어 찾아가던 중이었는데- 잘됐구나." 언제나 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설마, 밤을 샌거니? 친구와 사이가 무척 좋아보이던데… 할 이야기가 많았나 보구나." 사이가 좋다라. 베른헬체이스의 연극은 확실히 훌륭하게 먹혀 들어갔군. 실제 그와 나 사이에 '사이가 좋다'라는 평가는 다소 껄끄럽다- 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는 내게 꽤 호의를 가지고 있는것 같다. 나도 그에게 달리 꺼려하는 감정이 있는것도 아니고. "네, 좀 여러가지로… 많았지요." 왠지, 베델은 별로 탐탁치 못한 표정이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는 걸. 나보다도 어려보이는 소년이 이런 거대한 성을 가지고 있다니 말이야. 그것도, 마경에." … 베델이란 인간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꽤 영리한 편이라고 봐야겠지. 여러가지 의혹이 사방에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것은- 나를 향한 선명한 '믿음'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베른헬체이스는 '소년'으로 이 인간에게 비춰졌나 보군. 소년이라 칭하기엔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저도 베른헬체이스에 대해 아는건 그리 많지 않아요. 그가 어째서 이 성의 주인인지, 마경에서 살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해요. 한가지 확실한건 저와 베른헬체이스는 꽤 깊은 친분이 있다는것 뿐이지요." "…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는 베델의 눈동자는 안도한 기색과 함께 의혹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에게 거짓을 말한건 아니다. 실제로 나는 베른헬체이스라는 용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오늘 그를 '처음' 만나는 것이다. # "마경에… 인간이 살고 있다구요?" 그래, 그렇다는군. 에카테야르는 머리띠로 긴 금발을 질끈 묶으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를 위로 묶어올려 드러난 목덜미가 눈부시게 희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요? 마경에 인간이 살고 있다니… 마경에 인간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국가들이 마경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개척하는 것 아니었던가요?" 분명, 그렇지만… 근원이라는 나의 지식 도서관에 그것에 대한 정보는 없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의문에 답하지 못했다.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제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지. 다행히 베른헬체이스도 협조해 준다고 하니…." "친구라면서요, 당연히 협조해 줘야 하는것 아닌가요?" 에카테야르는 치마를 들추고 허벅지에 작은 단검집을 차며 나를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글쎄, 친구라… 나와 베른헬체이스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인지는 모르겠군. 나랑 꽤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 조차 '친구'라고 칭하기엔 조금 껄끄러운 면이 있는데 말이야. 인간의 관점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 인간들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선 다른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만지만, 드래곤은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자신을 제외한다면 셋 밖에 되지 않으니까- 거기다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용이란 생물은 언제나 고독하다. 하지만 나 자신은 고독이란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지. "응, 그렇지 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에카테야르의 시덥지 않은 의문을 종식시킨다. "사실, 이건 각 국가의 고위 관계자들 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마경은 우리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지보다 더 넓은 면적을 갖고 있다나봐." 벽에 기대어 있던 베델이 등지고 있던 벽을 밀치며 몸을 바로세웠다. 그의 뒤엔 마물의 시체로 만든 불쾌한 베른헬체이스의 성이 서 있었다. 성의 게이트는 우리에게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베른헬체이스의 성을 거점 삼아, 마경을 탐험할 생각이다. 아니… 탐험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미개척지라고 하기엔… 이곳에도 인간이 살고 있다는데 말이다. "마경이 더 넓다구요…? 그들은 왜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거죠?" "글쎄, 종교적인 문제도 있고…, 각 국가의 지배자들은 모두 마경을 비하하고, 개척해야할 대상으로 국민들에게 조명시켜야 했으니까… 거기다 그런 말로 마경에 관한 두려움을 더 가중시킬 필요는 없겠지." 그래, 인간들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도 굉장히 넓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카스텔 공화국, 아나키스트 왕국, 로엘가스트 연맹. 총 세개의 국가를 돌아다녔지만, 나는 아직 인간들이 차지한 대지의 1/10도 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넓은 미지의 마경이라니, 인간들이 두려움을 품기엔 충분하겠지. "자- 출발해볼까." 베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밝았지만, 마경 저 너머를 바라보는 눈빛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 마경의 나무들은 모두 음차원의 마력을 가득 머금고 있는 귀목(鬼木)이다. 마경엔 정상적인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개중에 음차원의 마력을 가득 머금은 것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부정으로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물 만이 마경의 유일한 위협은 아니란 소리지. "…." 마경의 풍경은 마치 연한 회색 물감을 온통 덧칠해 놓은것만 같다. 안개인듯, 시야를 가리지만- 그것은 결코 안개 따위가 아니다.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가까워 진다. - 끼히히히히히!! 이 세계의 생명체들의 두려움은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그것은 물이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흐르는 이치와 같아, 세계를 일그러 뜨리고 알 수 없는 이면세계의 생물이나 재앙을 형상화 시킨다. 방금 들린 희미한 웃음 소리도 그런것들 중 하나이겠지. "성의 시종이 알려주기론… 인간의 마을은 성에서 북서쪽에 있다고 했어." 성의 시종…? 베른헬체이스의 인형을 말하는 모양이군. "북서쪽이요? 이곳에선 태양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북서쪽이 어딘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에카테야르의 물음에 베델은 등뒤에 매고 있는 얄팍한 배낭에서 뚜껑이 덮여 있는 납작한 원통형의 물건을 꺼냈다. 나침판… 인가. 인간의 훌륭한 발명품 중 하나다. 베델은 나침판의 뚜껑을 열었고, 미간을 좁혔다. 나침판의 바늘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 마경안에서 아무런 신비를 갖지 못한 인간의 통상적인 물건이 제 기능을 하리라 기대하는건 아무래도 무리이겠지. "우린 제대로 북서쪽으로 가고 있어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칼리체. 나침판도 소용이 없는데." 에카테야르가 허벅지에서 단검을 꺼내 나무에 약간의 상처를 내고 순식간에 단검을 회수했다. 아무렇게나 휘둘렀던 창이나 그 기형의 검과는 달리 단검술에 대한건 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모양이다. 혹시 길을 잃어버릴까봐 표시를 해두는건가보군. 그녀가 낸 상처에서 수액이 흘러나온다. 붉은색… 이로군. 마치, 피같다. "방향 정도야 마법으로 알 수 있지." "…." 에카테야르는 분한 표정이다. 그녀도 역시 마법사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마력을 신체의 강화나 특성 극대화 정도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니까. "흥! 방향을 알 수 있는 마법이라니요? 그런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톡 쏘듯 노려보고 있다. 베델은 팔짱을 끼고 재밌다는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뭐지, 이 상황은. 확실히, 방향을 알 수 있는 마법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 북쪽 이니 동쪽이니 하는 개념은 모두 인간들이 정한것 이니까. 근원에 그런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기 할까?" "뭐… 라구요?" 내 제안이 의외였던가- 에카테야르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꽤 재밌는 유희거리 아닌가 인간의 '내기'라는 것은. 무지를 바탕으로 서로의 의견을 제시한 뒤, 실제를 확인 함으로써 서로 걸었던 재화나 청원을 쟁취하지. 이 경우엔 틀림없는 내 승리이지만. 뭐, 재미있지 않겠는가- 그녀를 조금 도발해 보도록 할까. "질것 같니-? 그런 마법같은건 들어본적도 없다며?" "…." 나는 도발이나 조롱같은걸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충분 하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먹혀든 모양인지 에카테야르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좋아요. 어디 해봐요! 방향을 알 수 있는지, 없는지!" "내기 내용은?" "이긴 사람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기!" … 위험하군. '무엇이든' 이라는 말보다 위험한건 없지. 무엇이든 들어주기라… 좋다. 내가 질일은 없을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내기가 아니더라도 방향을 찾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이건 현재 내가 사역하고 있는 마력의 절반 이상을 사용해야 하는 대마법이다. 인간들 중에 이것을 사용할 조건이 되는 자는 아마 손으로 꼽을 정도 이겠지. 마력이 된다해서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게 한가지 있다. 나는, 태양을 좋아한다. 이 마법은 태양을 쫓는 마법. 용의 모습일 때는 한낯 눈짓으로도 발동되는 신비 이지만 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찮은 인간의 모습으론 그리 간단히 되지는 않는 마법이다. 손을 들어 올린다.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며 대기가 흔들린다. 모든 마력이 내 마력 체계를 따라 재 배열되고, 그것은 오직 하나를 향한다. 광명의 태양….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 인식 할 수 있도록 그 마력을 빛으로 전환한다. 마력 행사 끝- 눈을 떴을때, 하늘로 향해 있는 내 손 끝엔 붉은빛을 발하는 실이 마경의 '악의'를 뚫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하늘 저편을 향해 있었다. "그게… 뭐지?" 베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인간에게 이 마법은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지. 태양을 쫓는다는 건, 그들이 수용할 수 없는 너무나도 거대한 신비일테니까. 베델과 에카테야르는 내 손 끝에 연결되어 있는 붉은 줄을 꺼림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지워 버리는게 좋겠군. "제 손 끝에 연결되어 하늘을 향해 있는 이 붉은 줄의 끝에 태양이 있어요." 붉은 줄은 직선. 그러니, 붉은 줄이 향하는 곳이, 지금 태양이 위치한 곳이다. 이정도라면 방향 정도야 쉽게 알 수 있겠지. "확실히… 그렇다면 방향을 쉽게 알 수 있겠는데? 지금이 대강… 아침 식사를 마치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니까…." "트, 틀렸어요! 당신이 졌어요, 칼리체!" 에카테야르는 잔뜩 약이 오른 표정 으로 버럭- 하고 외쳤다. 방향을 계산하던 베델이 찔끔- 하고 놀라 이쪽을 바라본다. "왜?" 에카테야르, 꽤나 귀여운 얼굴이군. 아직 미 성숙한 어린애 답게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건가? "그건 방향을 찾는 마법이 아니에요! 그냥 태양을 찾는 마법이잖아요!" 확실히… 태양을 찾는 것이 곧 방향을 찾는 것과 직결되긴 하지만… 냉엄하게 따지자면 방향을 찾는 마법은 아니다. … 이래서 저급의 언어는 불편하다. 언어의 모호함을 이용하다니. 하지만 에카테야르도 약간 억지라는 걸 아는지 그리 당당하지는 못한 표정이다. 베델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밌는지 아까전부터 계속 싱글거리고 있다. "… 그렇게 말하면 할말이 없네. 내가 졌어." "너, 너무 가볍게 승복하는거 아닌가요?" "그럼 네가 진걸로…." "아니에요! 제가 이겼어요!" 음, 좋다. 그럼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에카테야르. 가여운 인간의 소녀. 한낯 흥미로 내기를 했다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세계 정복 같은, 같잖은 소원일지라도 말이다. 그럼, 묻는다. "… 원하는게 뭐니?" "당신은 분해 하지도 않는 군요, 칼리체. 사람이 참- 장난스런 악의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해야 할지…." 에카테야르는 팔짱을 낀채 나를 흘겨보고 있다. "내 분해하는 모습을 보는게 소원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소원이군. 분함이란 감정은 내게 전혀 익숙치 못한 감정이니까. 영원을 살아가는 내가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분함이란 감정을 느껴야 할까…. "그, 그럴리가 없잖아요!" 다행인 일이다. 그녀가 그것을 원했다면, 나는 어떻게든 분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을 테지만…. 어쨌든 곤란한건 곤란한 것이니까. "그럼 원하는게 뭔데?" "정말… 뭐든지 들어줄건가요, 칼리체." 에카테야르의 푸른눈이 서늘하게 빛나며, 똑바로 날 향한다. "응."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베델이 그녀의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는지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등을 떼며 표정을 살짝 굳혔다. 아직, 에카테야르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걷보기엔 화를 내고, 기쁨을 느끼는 인간과 동일하게 보이지만 그녀는 아직도 분명 호문클루스의 잔재가 깊게 남아 그것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빌 텐가, 에카테야르- 중요한 무언가가 결핍된, 인간의 소녀여. "제 소원은…." 음- "말해봤자 칼리체는 이루어 줄 수 없을거에요. 당신이 뭐, 신이라도 되는것 처럼 말하네요?" 그녀의 소원을 기다린 내게 돌아온 것은 가벼운 핀잔 이었다. 그래…, 그녀는 나를 아직 평범한 인간이라 알고 있었지. 내가 인간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이나마 잊은 내 꼴이 우습다. '소원'이라는 말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용은 '소원'이란 것을 결코 가질 수 없을테니까. 영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영원이란 것 때문에 우리에게 소원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생이란건… 그런것이다. "그럼… 내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음- 그럼 잠시 미뤄두어도 되겠지요? 지금은 당신에게 시킬 일이 생각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에카테야르의 모습이 마치 만족스런 고양이 같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방향을 알게된 우리는, 마경안에 있다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주변의 광경은 어두운 숲에서 변하는 것이 없으니, 무척이나 지루하다. 마물이 또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분명, - 물러나라 음차원의 찌꺼기들 이라고 말했었으니까.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용의 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마물이라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런데 다짜고짜 마경안의 마을을 찾아가서 뭘 어쩔 생각인가요?" "그건…." 베델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처음에 이곳에 온 목적은, 내가 베른헬체이스를 만나기 위해- 라는 이유였지만. 이제 그 목적은 에카테야르와 베델에게로 넘어갔다. 둘 모두 마경과는 깊은 관련이 있으니, 확인하고 싶은게 많겠지. 괜히, 베델의 왼쪽 팔로 시선이 향한다. 긴 옷자락으로 가려, 붕대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이지만. "일단 가보자." "무척이나 계획성이 없는 발언이군요." 하지만 일단 마경의 인간을 찾아가 보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우리에겐 정보가 없으니까. 베른헬체이스 녀석, 협조해 준다고 해놓고선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 딱히… 내가 그의 도움을 바라는것은 아니지만. "어쩔수 없잖아?" 베델은 부드럽게 웃으며 에카테야르의 머리에 손을 턱- 하고 올리고는 쓰다듬는다. 그러자, 에카테야르는 약간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 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순간, 주변에 알 수 없는 마력의 파동이 느껴져 왔다. 이건 분명… 음차원의 마력이로군. "여기서 뭘하는 거지, 인간들? 설마, 마을을 벗어난 탈주자 들인가?" 신경질적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다만, 어조가 통상적인 인간들의 언어와는 크게 달라서,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곧 모습을 드러내었다. 긴 검은색 머리카락에 치렁치렁한 푸른색 로브, 손에 들고 있는 긴 삼지창. 그리고… 등에 돋아있는 두쌍의 흑색 날개. 그 날개에 돋아 있는 비늘은… 드래곤의 그것이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양쪽 모두, 서로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베델이 제일먼저 침착을 되찾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자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저거… 인간인가? 등에 용의 날개가 돋아있는 인간 따위는 들어본적 없는데. "캬아악-! 헤스켈론의 인간들이 이곳은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앞에 캬아악, 하는 울부짖음은 분명, 인간이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 이상한 생물체의 정체는 뭐지. "헤스켈론의 인간?"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적대적인 기운에 베델은 마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뒤로 물러났다. 역시나… 헤스켈론 이란 단어는 마경의 바깥을 지칭하는 말이었군. 그렇다면, 동시에 나브락사스 라는 단어는 바로 마경을 가리키는게 확실할테지. "건방진 헤스켈론의 인간이 이렇게 나브락사스의 깊은 곳 까지 들어오다니! 네 녀석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들고 있던 삼지창을 허공에 위협적으로 휘두르자, 푸른색의 뇌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저 마력은 분명… 베른헬체이스의 것이다. 베른헬체이스… 너는 이곳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잠…!" 잠깐, 이라고 외칠 새도 없이 여자는 날개를 활짝 펼치며 제일 먼저 에카테야르 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쪽이 약해 보였던 걸까- 하지만 호문클루스 였던 에카테야르의 전투 능력은 무척이나 뛰어나다. 에카테야르는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삼지창의 끝을 바라보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시켜 그것을 가볍게 피해낸다. 허벅지에서 뽑아낸 단검에 마법급의 마력이 깃들고, '베기'라는 속성을 무한에 가깝게 수렴한다. 그리고 휘둘러진 그 단검은… 의외로 삼지창에 가볍게 막혀버렸다. 그렇다고 저 삼지창에 에카테야르의 마법을 막을 수 있는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건 아닌것 같았다. "속성을 끌어내어 무한으로 극대화 시키는 마법이군. 무척이나… 조잡하다!" 그녀는 그렇게 외치며 삼지창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횡으로 휘둘렀다. 캉-! 하는 굉장한 소리가 대기를 찢으며 에카테야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간신히 바닥에 착지한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 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가 아니었다면, 그 공격으로 그녀는 단번에 양팔을 잃었을지도 모르겠군. "조잡한지 아닌지는 더 해봐야 확실히 알 일이겠지? 날개 여자-?"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며 에카테야르가 빈정거렸다.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연약해 보이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걸까… 저 알 수 없는 생명체의 경계망에 나는 상당히 벗어난 상태이다. "헤스켈론의 인간치곤 제법 강한 것 같군. 하지만 그뿐이다. 하등한 인간이 상위 인간인 나에게 이길수 없다는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무척이나 이상한 어조…. 하지만 대충 뜻은 전해져 온다. 그나저나 '상위 인간'이라고 말했겠다…? 상위 인간, 상위 인간이라…. 재미있군. 스르릉- 베델이 표정을 굳히며 마검을 뽑아내었다. 오랜만에 대기를 접하는게 반가운듯, 마검은 웅웅- 거리며 섬뜩한 소리를 사방에 울려댔다. 내 피를 머금은 마검 헬스탄의 검날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신의 축복…? 그게 어째서 네 손에 있는 것이냐-! 인간!" 마검 헬스탄을 보자, 날개 여자의 눈빛이 단번에 변한다. 그런데… '신의 축복'이라니,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단어인가… 베른헬체이스. "신의 축복? 그런것, 난 모른다. 이것은 그저 마검 헬스탄일 뿐이다." 그녀의 적의가 더욱 거세지자 베델은 에카테야르에게만 싸움을 맡기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들린 마검이 소리도 내지 않고 휘둘러 진다. 백룡과 흑룡의 신비를 동시에 머금은 '마검'은 대기고 뭐고 휘둘러진 선에 따라 모든것을 잘라낸다. 날개 여자는 감히 그것에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그녀의 뒤에 서있던 일직선 상의 나무와 풀들이 스윽- 소리를 내며 모조리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검은 그 사물들에 닿지도 않았다. 거대한 마력 행사가 한바탕 숲을 휩쓸고 간듯한 모습이다. "베델… 그 검은?" 그는 에카테야르의 물음에 답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마검을 들고 있는 베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지금 베델은 저 검을 통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크으으-" 날개 여자는 또다시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번의 휘두름으로 모든 전의가 사라진 모습이다. 무척 무시 무시한 모습이긴 했지. 고작 단 한번의 휘두름이, 강력한 마법 같았으니까. "감히, 감히- 하위 인간 따위가 '신의 축복'을 들고 우리 상위 인간을 겨누다니…!" "아까부터 거슬리는 군요. 인간에게 하위고 상위고 하는 개념이 도대체 어디 있는거죠? 혹시, 당신처럼 등에 날개가 붙어 있으면 상위 인간인가요?" "하찮은 말싸움으로 쓸데없이 말을 섞을 생각 따위는 없다. 인간." 우리를 바라보는 날개 여자의 눈빛에 비치는 건 분명, 오만이다.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바라보는 시선.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치 않는 인간이라…. 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을 분명 '상위 인간'이라 했었지.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을 아직 인간이라 생각하는 걸까. … 이미 인간이라는 단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겠지. 중요한건 저 여자가 베델이나 에카테야르같은 보통의 인간에게 하등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파지지직-! 처음 봤을때 처럼 그녀가 들고 있는 삼지창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겼다. 그녀는 푸른 전류가 휘몰아치는 창을 들고서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서로의 공격이 닫지 않는 거리. 하지만 여자가 창을 휘두르자 그 창을 감돌던 푸른 전류가 이쪽으로 뿜어져 나왔다. "웃-!" 다들 몸을 틀어 그 전류를 피했다. 전류는 바닥에 흉한 흉터를 남기고, 몇 그루의 나무를 휩쓸어 버렸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전류에 의해 불이 붙은 나무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마경의 나무도 타긴 타는군. 그나저나 전류를 유형화 시키다니….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날개의 도움으로 공중에 올라간 여자는 계속해서 전류를 머금은 창을 휘둘러 그것을 우리에게 쏘아보냈다. 물론, 베델과 에카테야르에게 공중에 떠있는 적을 요격할 방법은 없다. 그저 피하기에 급급할뿐. "역시 쥐새끼들처럼 도망다니는 역할이 어울려, 너희 하등 인간들은!" 여자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허공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전류들을 쏟아내었다. 계속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나에게도 전류가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이크- 팔을 약간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살갗에 닿진 않았지만, 전류가 스치고 지나간 옷자락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칼리체-! 조심해요!" 에카테야르가 또다시 쏘아지는 전류에 단검을 던지며 외쳤다. 허공에 던진 그녀의 단검은 저 여자가 쏘아낸 전류를 흡수하고 새까맣게 탄채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 떠있는 그녀를 에카테야르와 베델이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은 그녀를 대지로 끌어 내리는것.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마력으론 그녀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 나는 인간들에게 마법사라 불릴 정도의 높은 수준의 마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저 여자는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다. 심지어 호문클루스 였던 에카테야르의 마력보다 더욱더. 인간의 사회에서 절대로 위험에 처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힘이었건만… 마경이란 곳에선 평범 이하가 되는군. 아무튼, 이 정도의 마력으로도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충분하지. 신비를 개방하고, 마력을 나의 마력체계를 통해 가공, 현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마력을 유형화 시킨다. 내 마법이 향할 곳은 그녀의 등 뒤에 붙어 있는 용의 날개. 인간에겐 어울리지 않는 용의 날개를, 꺾어주겠다. 이미지 하는 것은 창이다. 고대부터 폭넓게 사용되었던 인간의 무기. 상위 인간이라 자신을 칭하며 인간을 하등하게 보았던 여자여, 그 인간의 무기에 분수에 맞지 않는 용의 날개를 잃을 지어다. 파챵-!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실제론 청각을 통해 감각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의 모든 마력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두개의 창이 허공에 생성되고, 날개 여자가 경악할 틈도 없이- 공간을 격하고 두개의 창이 그녀의 날개를 꿰뚫는다. 순간적인 엄청난 마력의 사역에 공간이 뒤틀리고, 대기가 퍼져 나간다. "꺄아아악-!!"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으며, 그녀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후우…." 모든 마력을 한번에 소진해버려 조금 지치는군. 퍼억-! 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쳐박히는, 굉장한 소리가 난다. 뭐,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 내렸으니까…. 저 여자, 살아있기는 한지 모르겠군. "하아…." 베델이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마검 헬스탄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묘한 기분을 느끼겠지. 저 검을 들고 있는 동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내 피를 머금은 저 검은 이제 조잡한 목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 자신의 손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지. "…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좀더 빨리 사용하는게 좋았을 거라 생각되는 군요, 칼리체." 에카테야르도 숨을 헐떡 거리며 단검을 치마 아래의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땀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금발을 떼어내며 투덜거렸다. "으음…." 변명거리가 없군. 그런데 순간, 삐── 하고 시야가 점멸되었다가. 정신을 차리자 나는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에카테야르의 품에 안겨 있었다. "괘, 괜찮아요 칼리체? 갑자기 왜그래요?" "…." 정신없군.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마력을 방출해 버렸더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역시, 이 몸은 너무나 허약하다. 마경에선… 이 몸에 담을 수 있는 신비를 좀더 늘리는게 좋겠다. 아무래도, 마경 밖처럼 아무런 분쟁없이 여행을 다닐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칼리체? 무슨 일이야?" 베델이 쓰러진 여자를 찾아 업고오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여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멀쩡해 보이는군. 적어도 외적으로 상한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속이 상했는지 입가에 한줄기 피가 흐르고 있을 뿐. 아, 내 마법에 의해 찢어진 날개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마력을 한번에 소진해 버렸더니, 몸에 힘이 빠져 버려서…." 베델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등뒤에 매고 있던 여자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놓았다. 나는 에카테야르의 품에서 벗어나 나 혼자의 힘으로 서려 했지만, 아무래도 힘이 다 빠져 버려서… 무리인듯 싶군. "앗-!" "잠시 이러고 있을게, 에카테야르." "아, 알았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에카테야르의 뒤에서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른채 기댔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 정도야 들어주겠지. "이 여자, 자신을 상위 인간이라고 말했었지…. 처음에 우리를 보고 마을의 탈주자라는 오해를 하기도 했었고." 베델은 복잡한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을의 탈주자… 라는 말이 조금 걸리는 군. 하지만 아직 알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가장 좋은 선택지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깨워 직접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 하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적대감을 표시하던 이 날개 여자가 순순히 대답해 줄지는… 확실치 않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없군. 베델은 나무에 기대어 놓은 배낭에서 단단한 밧줄을 꺼내어 그녀의 몸을 묶었다. 내 마법에 꿰뚫린 날개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손에 묻자, 그는 잠시 움찔, 하는 기색을 보였다. "깨울거죠?" "앗-!" 내가 입을 열자 에카테야르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 내 입김이 목덜미가 간지러운 거군. "미안." "돼, 됐어요." 베델은 잠시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날개 여자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응, 이렇게 단단히 제압도 해놓았으니, 깨어나서 우리를 해치겠다고 날 뛸 일은 없겠지." "살아있기는 한건가요?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니까." 그는 어깨르 으쓱하며 날개 여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댔다.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었는데… 저런 걸로 일어날까? … 라는 내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여자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네놈들은…!" 여자는 우리들을 보고 깜짝 놀라 발버둥을 치다,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을 깨달은 듯 이를 악물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선 마법도 쓸 수 없겠지. "얌전히 있어 주시오. 그렇게 움직여 대다간 상처가 더 벌어질 테니까." "크으-!" 상황을 금방 깨달은 모양인지, 여자는 얌전해졌다.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는 눈은 변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로 헤스켈론의 인간이 나브락사스를 침입한건진 모르겠지만 허튼 착각은 마라. 나는 마왕을 모시는 13 영주의 많고 많은 제자 중 한명일 뿐이니까!" 너야 말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나저나 '마왕'이라고 했겠다? 거기다 13영주 라는 말까지… 꽤 쓸만한 정보들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군. "마왕… 이라고?" 베델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린다. 에카테야르는 마왕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연극이나 동화속에서만 나오는 말 아닌가요? 마왕이라니…." "더러운 헤스켈론의 인간들!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살아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여자는 분노한 기색으로 다친 날개를 부르르 떨며 그렇게 외쳤다. "헤스켈론이란건… 이 땅의 밖을 이르는 말인가?" "흥! 그럼 그것말고 헤스켈론을 이르는 다른 말이 어디있겠는가, 인간!" 그럼 역시, 나브락사스라는 말은 마경을 이르는 말이로군. 베델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수염도 나지 않은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채로 서있었다. "이봐요, 마왕은 뭐고 13 영주라는건 또 뭐죠?" "…." 그녀는 그제서야 우리가 그녀의 말로 정보를 얻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에카테야르의 물음에 전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저 배낭에 있는 후춧가루를 코로 넣어주겠어요." 에카테야르는 냉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협박했다. "에, 에카테야르…!" 베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카테야르의 표정은 담담하다. 그런데 후추라는건… 식용이 아니던가. 코로 넣겠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그틈에 베델의 가방 속을 뒤져 까만 후춧가루가 들어있는 조그만 유리병을 꺼냈다. 동물을 사냥해온 뒤 고기를 불에 구울 때, 베델은 항상 이걸 그위에 옅게 뿌렸었지…. 참고로 굉장히 비싸다고 들었다. "후춧가루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날개 여자가 에카테야르를 매섭게 노려보며 표독스럽게 외쳤다. 마경에는 후추라는게 없나보군. 아니면 다른 고유 명사로 불리고 있던지. 음…. 궁금한 것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적 경험이다. 말로 들은것은 그저 뇌리에 기억될 뿐이지만, 직접 경험하는건 몸이 느낀 감각까지 뇌리에 기억되지. 궁금해 하는 점을 보다 구체화 시켜 기억에 저장할 수 있다는 소리다. 후추를 코에 넣는다라…? 킁킁, 하고 유리병의 입구에 코를 대고 공기를 들이켜 보았다. "… 지금 뭐하는 건가요, 칼리체." 나는 재빨리 에카테야르에게 후춧가루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넘겼다. 왜 그녀가 후춧가루를 코에 넣겠다고 협박했는지 알 것 같다. 이건 꽤 괴롭다. "하하하-!" 베델이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 에카테야르는 결국 날개 여자의 코에 후춧가루를 집어 넣지 못했다. 한참동안 웃음을 터트리던 베델이 그녀를 말렸다. 덕분에 날개 여자는 코에 후추가 들어가는 고통도 모르고 얌전히 밧줄에 묶여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날개는 대충 응급 치료를 해 주었지만… 그래도 꽤 안쓰러운 모습이다. "괜찮아?" "동정은 필요 없다, 마법사! 애초에 네가 나에게 상처를 입힌게 아니더냐!" 그건… 그렇군. "마을은 이쪽이오?" "흥!" 베델이 날개 여자에게 물어 방향을 확인했지만, 그녀는 그리 협조적이지 않다. 음… 그나저나 아직도 머리가 어질거린다. 한번에 소진해버린 마력이 다시 돌아오고 있긴 하지만 마력을 사역하는 매개가 되었던 몸은 만신창이인 그대로다. 나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침묵하는 숲에서 이렇고 있다면… 푸르른 녹음 사이로 환한 햇살로 기분이 나아졌겠지. 하지만 마경에선 환한 햇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검붉은 색으로 변색되어 있는 태양, 대기에 떠도는 음차원의 마력이 빛을 왜곡시키고 있다. "칼리체, 괜찮아요?" 에카테야르가 내 뺨에 손을 대며 물었다. 내 몸에 열이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손이 차가운건지, 그녀의 손이 얼음장처럼 느껴졌다. "… 열이 있군요." "별거 아니야. 한꺼번에 너무 큰 신비를 사용하려 하니 몸이 견디지 못했던것 뿐, 조금만 지나면 곧 몸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오겠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불과 몇 시간 뒤에 난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헤스켈론의 인간은 허약하구나, 고작 그 정도 마법을 사용했다고 죽는 소리를 하다니." 날개 여자가 비꼬며 말한다. 음… 죽는 소리를 한 기억은 없는것 같은데. 에카테야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그 허약한 인간들에게 잡힌건, 어디 사는 누구씨죠?" "이-!" 날개 여자가 이를 갈고 있다. "음… 칼리체, 좀 쉬었다 가는게 좋을까?" 베델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대답으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이런 일로 쉴 필요까지는 없겠지. "정말 괜찮겠어?" "방금도 말했잖아요, 조금만 지나면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지만 베델이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걸으며 이 몸에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을 좀더 상향 조정해야겠군. 마력이라는 신비의 힘을 이런 식으로 재단하는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나는 괜히 손에 걸린 나무 껍질을 약간 뜯어내며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등을 떼었다. 손에 느껴지는 나무의 촉감은 마경 밖의 그것과 그리 다르진 않다. "날개 여자, 이름이 뭐야?" "… 흥."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내 물음을 무시했다.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다니, 정말 어지간히도 비협조적이로군. 뭐, 좋다. 이름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녀를 계속 날개 여자, 라고 부르면 될 일이니.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날개 여자는 굳게 입을 다문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곧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생각할게 많은 것이겠지. 마왕이니 13 영주이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잔뜩 듣고 말았으니까. "마을이다…!" 한동안 오래갈것 같았던 그 침묵은 베델의 나즈막한 외침에 깨어져 버렸다. 그곳은… 정말, 마을이었다. 마경밖의 마을과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굴뚝이 있는 벽돌집 여러개가 별다른 규칙없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다. 잠깐, 마경의 인간들은 뭘 먹고 사는 거지.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먹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경은… 보통의 생물체는 살 수 없는 필멸의 땅이 아닌가. "아…." 에카테야르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흐릿한 푸른색 눈동자는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짜악-! 갑작스레, 굉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한 인간이 비명을 지르며 더러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엎어진 그 인간의 등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울것 같은 일자형의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채찍… 이로군. 뭘… 하는거지? 자세히 살펴보자 마을 안쪽엔 커다란 밭이 있었다. 여러 인간들은 그 밭을 조악한 농기구를 이용해 갈고 있었고, 그 주위엔 채찍을 든 인간들이 감시하는 것 같은 모양새로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상황이오?" 베델은 당황스런 목소리로 날개 여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보면 모르겠나? 저것은 '사육'이다, 하등한 인간." 날개 여자는 이를 드러내며 냉기가 흐르는 미소를 지었다. '사육' 이라고…? 인간이 가축을 키우듯, 인간이 인간을 키우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본 뒤 다시 마경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밭을 제대로 갈지 못하자 용서 없이 등에 내리쳐 지는 채찍. 채찍을 맞은 인간은 비명을 지르며 땅에 나뒹군다. 하지만 곧 재빨리 다시 일어나 농기구를 잡아들고 밭을 갈기 시작한다. … 마경에서 자라는 식용 식물은 논외로 치고, 도대체 저 상황은 무어란 말인가. 정말 그녀의 말대로 저것은 사육 인가? "채찍을 들고 있는 자들은 모두 당신과 같은 '상위 인간'들이오?" "흥, 그렇다." "그렇군…." 스르릉- 하고 베델이 검을 뽑아들었다. 검붉은 검날이 웅웅- 하고 떨리기 시작했다. "… 지금의 내겐 힘이 필요해." 베델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베델…?" 무엇이 그의 내면을 자극하는거지? 그는 분명, 이 마경이란 공간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저 광경을 바라보며 한없이 떨리는 그의 눈빛에 깃든 감정은 놀랍게도… 약간의 공포와 끝없는 괴로움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부조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악을 향하는 검은 누구보다 빠르게- 믿음은 불변의 다이아몬드와 같이 굳세게, 나의 신념은, 결코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검일지어니-!" 그는 마지막에 크게 외치며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채찍을 들고 있는 '상위 인간'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저렇게 다짜고짜 검을 빼어들고 덤벼 들다니, 왠지 그답지 않다. 하지만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이미 교전은 벌어지고 있었다. 베델이 마검을 들고 횡으로 길게 휘두르자 검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두 명을 먹어치워 버렸다. 베델의 얼굴이 창백해 진다. "… 사육이라는 말을 듣고 분노한 건 알겠지만, 왠지 베델답지 않군요. 이 여자를 감시하고 있어줘요, 칼리체. 전 그를 도울테니." 에카테야르는 그렇게 말하고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아 양손에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들은 당신만큼 강하지는 않은가보군." 날개 여자는 그녀의 동족들이 당하고 있는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들과 날 같은 수준 선상에 놓고 판단하지 마라, 인간. 나는 제 2 영주님의 직속 제자이니까." 역시 이곳에서도 계급이란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상위 인간' 중에서도 낮은 계급에 속하는 모양이군. 계급은 그 개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도 반영하는듯, 이 날개 여자와는 달리 베델과 에카테야르의 검에 힘없이 스러져 나갔다. 베델은 마치 그들에게 원한이라도 가진듯한 모습으로 거칠게 검을 휘둘렀고, 검이 한번 휘둘러 질때마다 적어도 한명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베델에겐 수 없이 쏟아져 내리는 마술도, 심지어 마법까지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검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마술과 마법은 그보다 더 커다란 신비에 힘없이 쓸려 나갔다. '사육' 당하고 있던 인간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베델과 에카테야르를 바라보고 있다. "웃기는군, 저 자는. 우리가 그와 똑같은 하등한 인간들을 사육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는 건가?" 날개 여자는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런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이유로 베델의 저런 갑작스런 행동을 설명하긴 부족하다. 그는 저렇게 다짜고짜 검을 휘두를 인간은 아니니까. 난 약간 심드렁한 기분으로 저 일방적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인간인가?" 뜻밖의 물음을, 날개 여자가 나에게 던졌다. 나는 베델과 에카테야르가 싸우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날개 여자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질문이네." 내게서 무언가를 느낀걸까, 감이 꽤 좋군. "…." 날개 여자는 더이상 그것에 대해 언급은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으아악-!"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소리-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저들은 베델의 공격에 상당수가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 순간에 시체가 되어버린 저들은… 상위 인간? 하지만 겉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다를게 없었다. 이 날개 여자의 경우가 특이 케이스인가…. 아니면 계급이 높은 상위 인간들은 그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다. "베델, 그만해요!" 에카테야르가 베델에게 다가가 그를 말렸다. 이미 상위 인간들은 이 장소에서 황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베델은 그들을 쫓으려다 에카테야르의 외침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너희들은 이 만용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곳은 내 스승이신 제 2 영주님의 영지… 너희는 너희가 저지른 일에 대한 마땅한 응징을 받을 것이다!" "…." 싸늘함이 깃들어 있는 날개 여자의 말을 흘려 넘기며 나는 여전히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는 그녀를 데리고 베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인간의 시체들. 그리고 '사육'되고 있던 인간들이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한듯, 몸을 웅크리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베델…?"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통해, 무엇을 본 것일까… 그의 과거의 기억? 그를 묶어두고 있는 족쇄? 도대체 그가 마경에 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무엇이지.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보았다. 붉은색 피로 잔뜩 물들어 끈적거리는 그의 손이 마치 얼음장 처럼 차가웠다. # "수습 불가로군요. 저 사람들은 벌벌 떨며 제발 살려달라는 말만 할 줄만 알 뿐, 도대체 대화가 통하질 않아요." 에카테야르가 허리에 손을 얹은채 투덜거렸다. 나는 사육 되던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을 힐끗 바라보았다. 에카테야르의 말대로 그들은 벌벌 떨고만 있을뿐, 텅 빈 눈엔 어떠한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저런 상태도 될 수 있는 거군. 정말, 가축과 다를게 없다. "… 저들과는 제가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볼테니까 당신은 베델에게 가보세요, 칼리체." 에카테야르가 베델이 있는 곳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옷을 입은채 나무 아래 바위위에 걸터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바위에 앉아있는 베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베델…?" "…." 대답이 없다. "아깐 왜 그랬나요? 좀더 신중할 수도 있었는데…." "… 인간이 인간에게 사육되는 광경을 보고, 어떻게 가만 있을수 있겠어." 착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엔 별로 진심이 깃들어 있는것 같지 않았다. 마치 기계적으로, 자신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듯- "일단 피에 젖은 옷부터 벗는게 좋겠군요." 나는 왼손으론 그의 손을, 그리고 오른손으론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겉옷을 벗기려는 순간, 그가 내 손을 탁- 하고 급히 쳐냈다. 꽤 힘이 들어간 모양인지, 쳐내진 손이 갑작스런 타격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베델…?" "미, 미안해." 그는 재빨리 옷자락을 추슬렀다. 그 사이로 살짝 왼손에 감고 있는 붕대가 보였다. 아, 내게 붕대를 감은 왼팔을 보이지 않으려 함인가. "… 지금은 좀 혼자 있게 해줄래? 나중에, 좀더 시간이 지나고 내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모두 말해줄 테니까. … 너에겐 말이지."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둘이 싸웠나요?" 내가 베델에게 떨어져 에카테야르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베델이 내 손을 쳐내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싸운건 아니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일단은 혼자 있고 싶대." "… 그렇군요." "저 사람들 하고는, 얘기해 봤니?" 내가 그쪽을 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인간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했을 것 같군. 내 예상대로 에카테야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셈이죠? 아까의 전투에서 우리가 놓친 자들이 가만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이곳은 그들의 땅이다. 날개 여자가 말한대로, 분명 어떤 응징이 돌아오게 되겠지. 나는 날개 여자가 있는 곳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무에 묶인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기로 하자. 아까 놓쳐버린 자들이 증원을 끌고 올지도 모르니까." 추측형으로 말하긴 했지만, 이것은 거의 확신이다. 다시 베른헬체이스의 성으로 돌아가 그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편이 좋을까…. 이젠 모호해져 버렸다. 나는 마경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에카테야르는, 베델은 마경에서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지? 특히, 베델… 당신이 입을 열지 않으면- 확실한 목적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에카테야르." "네?" "너는 지금껏 너를 지배했던… 호문클루스라는 마법 기술의 기원을 마경에서 찾고나면, 그 뒤엔 뭘 할꺼니?" "…." 그녀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 "대답해 주시오." 베델은 날개 여자에게 다가가 그렇게 말했다. 스르릉- 하고 그의 허리에 차고 있던 마검의 검끝이 그녀의 하얀 목을 향한다. "… 무엇을 말이지?" "방금과 같이 마경엔… 사육되는 인간이 많소? 아니, 당신들 상위 인간은 당신들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을 사육 하고 있소? 그런 것이오?" 의외로, 베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니, 허탈하게도 들리는것 같았다. 아까 채찍을 맞으며 일을 하던 인간들은, 우리가 해를 끼칠거라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그렇게 대놓고 두려움을 표현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통술하던 상위 인간들이 사라지자, 그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듯 했다. 베델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아랫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날개 여자는 베델의 위협 탓인지는 몰라도 그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 마경… 이란게 나브락사스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 상위 인간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간은 모두 사육되고 있지." 드넓은 마경…. 그렇다면, 방금과 같은 풍경이 수도 없이 많을 거란 이야기로군. 재미있군. 그나저나 사육이라 해서… 실제로 저 인간들을 먹는건 아니겠지. "그렇군…." 베델은 그녀의 목을 겨누던 검을 회수했다. "베델,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는게 좋겠어요. 아까 도망쳤던 그들이 더 많은 동료를 이끌고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 에카테야르의 말에 베델은 잠시 무겁게 침묵했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거지. 설마, 그는 자신이 마경의 사육되고 있는 모든 인간을 구해주겠다는 허무 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 실없는 생각이다. 그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겠지. "베델." 에카테야르의 재촉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기로 하자. 그 뒷 일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두어도 되겠지." 마지막 중얼거림은, 우리에게가 아닌 그 자신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작스레 주변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마물인가…? 라는 기대를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소란스러움은 아까 도망쳤던 상위 인간들의 것이겠지. "벌써 왔나봐요!" "…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자." 에카테야르의 다급한 외침에 베델은 이를 악물며 사육되던 인간들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전에 사육되던 인간들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지 없이 외부에서 행해지는 명령에 가축처럼 따르는 인간들. 저들을 구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 그저 동족을 구하기 위함… 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서로 같은 종족이란 것에 그리 큰 애착이 없어. … 난 여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무슨 꼴이지, 라이네?" 쉭쉭- 거리는 뱀과 같은 목소리에 우리는 우뚝 멈추어 섰다. 허공에 검은 기류가 모여들며, 마치 인간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냈다. 아니, 검은 기류가 모두 모이고 나타난 것은 실제의 인간이었다. "헤슈발츠…!" 묶여 있던 날개 여자가 분한 기색으로 이를 악물었다. 라이네 라는 건, 날개 여자의 이름이었군. 그렇다면 헤슈발츠라는 저자는… 그녀와 동급의 또다른 상위 인간인가. "이곳까지 들어온 헤스켈론의 인간은 처음 보는군." 그의 시선이 우리를 향한다. 저 여자와 처음만났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마치 깔보는 듯한 시선. 그리고 약간의 경멸. 남자는 펄럭거리는 검은 옷자락에서 손을 드러내었다. 그 손엔 검은색 비늘이 잔뜩 돋아있고,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자라 있었다. "비늘 손 남자로군요." 에카테야르가 작은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어느새 주변은 다른 상위 인간들로 인해 원형으로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현재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위기인가. "하등한 금발 계집, 주제를 모르는 입은 수명을 단축 시킬뿐이다. 그러니- 내키는 대로 나불거리지 않는게 좋겠지."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손톱을 앞으로 내밀었다. 곧 또다시 전투가 일어날 것이라는건 명확해 보인다. 곤란하군… 숫적으로도 딸리는 데다 라이네라는 날개 여자는 어느새 풀려나 날개를 퍼득거리고 있었다. 아직 내게 관통당한 상처가 낫지는 않아 전투에 보탬이 되기는 무리겠지만…. "비켜라." 베델은 갑작스레 등장한 그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건방진 인간,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한지 모르겠군." 남자의 어조는 라이네라는 여자보다 더 꼬여있어 제대로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목소리에 깃든 확연한 적의는 정확히 전해져 왔다. "…." 베델은 아무말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더이상의 대화는 무용하다는 걸까…. 지금까지 베델의 태도는 마경의 인간들은 모두 적이다, 라고 단정짓고 있는것 같다. "거기 있는 백발 계집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미색을 가지고 있군. 곧 그 작은 입술에서 터져 나올 신음 소리가 기대되는데." 그렇게 말하며 뱀같은 남자는 다소 불쾌하게 느껴지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음, 백발 계집은… 날 말하는 거로군. "헤슈발츠! 품위 없는 말을 지껄이는 짓은 그만 둬라!" 라이네는 부축을 받으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라이네. 한낯 하등한 인간들에게 붙잡힌걸 부끄러운줄이나 알아야지…!" 그는 날개 여자를 보고 으르릉 거리다가 이쪽을 보고 다시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흐음- 저 만족감이 향하는 곳은 바로 나다. 이미 그는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뭐, 실제로 저쪽의 상황이 유리하기도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바보같은 놈! 저 남자가 들고 있는 검을 잘 보란말이다!" "…." 헤슈발츠라는 뱀같은 남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진다. 저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은 이들에게 꽤나 큰 의미를 갖는다. 혹시, 자신들이 상위 인간이라 주장하는 이들의 머리위에 서있는 마왕이란 자는 베른헬체이스가 흥미를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인간이 아닐까. … 영원을 쫓는다는 인간. "에카테야르, 전투가 시작되면 너는 칼리체를 데리고 전력으로 이곳에서 도망쳐. 어디로든 말이야." 베델은 베른헬체이스의 성을 염두해 두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도망이라니… 이 포위에 도주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내가 기회를 만들테니 말이야." 베델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하며 긴장된 기색으로 검을 앞으로 세웠다. "칼리체, 나는 내가 아나키스트 왕국 출신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야. 내 진정한 출신지는… 마경이야." "네…?" 베델의 작은 속삭임에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선수를 칠 생각인가. "하-!" 지금껏 단 한번도 기합 소리를 내지 않던 그가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만큼 마검을 통제하기가 힘들어 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검에서 검은 폭풍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뱀같은 남자를 덮쳐 들었다. 그는 마치 웃음같은 소리를 내며 온 몸이 나풀거리는 검은 조각으로 변해 그 기운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등한 인간이 주제에 맞지 않게 신의 축복을 들고 있구나] [건방진 너의 팔 다리를 끊코 산채로 잡아먹어 주지] [키히히히히!!] 마치, 마물의 그것처럼 사방에서 여러명이 말하듯이 남자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할 수 있다면-!" 베델은 크게 외치며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검에 깃든 강대한 음차원의 마력과 뱀같은 남자의 마력이 충돌한다. 사방의 대기가 진동하고, 악몽이 휘몰아친다. [죽여죽여!심장을파먹고뇌수를마시며네사지를싸늘한시체가되어버린너의입에쳐박아주지너의어머니와아버지의무덤을파헤쳐뼈를씹고내배속에들어있는네시체덩어리들을토해내어죽음마저희롱해주겠다크히히히히-!] 그것은 진실로 악몽이었다. 사방으로 울리는 마물의 저주, 그리고 저주. 음차원의 마력과 음차원의 마력의 충돌은 통상적인 마력간의 충돌보다 더한 세계의 왜곡을 가져 오게된다. 아무튼… 상당히 불쾌하군. "어둠의 마법-! 내게도 그 마법의 준하는 힘을 다오, 마검이여!" 베델이 힘을 갈구한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은채 휘몰아 치는 악몽 속에서 마검에 기대어, 힘을 갈구한다. 내 피를 머금은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은 인간에게 있어선 무한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마검이 주인의 바램에 웅웅- 하고 떨리며 폭발적인 힘을 사방에 행사한다. 저 검은 정확히 베델이 원하는 만큼의 힘을 줄 것이다. 뭐든지 아낌 없이 베푸는 자애로운 어머니 같이. "베델!" 에카테야르의 외침, 흔들리는 대기. 갑작스레 폭풍이 올려온듯, 바닥에 깔린 나뭇잎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에카테야르의 금발과 내 백발이 섞여 어지럽게 흔들린다.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마물의 저주. [저 녀석이 맛있겠는걸] [난 다리를 먹겠어!] [난 머리! 날 바라보는 눈동자 부터 먹어 치울꺼야!] 모두 환청이다. 이곳에서 희생된 인간들의 공포가 형상화된 불쾌한 환청. "칼리체, 미안해요. 나는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어요…. 난 베델을 도와 저들과 싸우겠어요! 당신은…." 에카테야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행 중에 가장 전투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걱정되는 건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용하다. "명예를 소중히, 악을 향하는 검은 누구보다 빠르게- 믿음은 불변의 다이아몬드와 같이 굳세게." 베델이 인간을 사육하던 인간들에게 덤벼들기 전에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렸던 말이다. 이건… 인간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기사도'라는 건가. 베델이 항상 그렇게 용감하게 나설 수 있는 것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말 덕택이겠지. … 나쁘지 않군. 나는 에카테야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베델을 놔두고 도망가는 것은 명예를 버리는 일인가? 저들은 악인가? 베델은 우리를, 우리는 베델을 믿고 있는가?" 에카테야르는 잠시 입술을 달싹 거리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군요, 칼리체." 별 다른 뜻이 있는건 아니다. 그저 나도 이 전투에서 회피하지 않고, 힘을 보태주겠다는 것이지. 에카테야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허벅지에서 단검을 빼어들었다. 눈 앞에선 베델이 흑색 기류에 휩싸인 검을 휘두르며 비늘 손 남자와 부딪치고 있었다. "당신이… 호문클루스의, 제 기원을 알게 되면 그 뒤엔 어쩔거냐고 물었었지요." "…." 캉-!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가 찢어진다. 흑색 기류에 휩싸인 마검이 비늘 손 남자의 손톱 두어개 정도를 잘라내어 버렸다. 하지만 그리 유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주변은 다른 상위 인간들이 모두 포위한 상태이고, 아직 날개 여자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약속했잖아요, 당신이… 저를 제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구요." 그래, 그랬었지…. 어딘가에서 충동적인 마음으로 덜컥 해버렸던 그 약속. 에카테야르는 그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도 가만 있을순 없겠군. # "감히, 인간 따위가!" 베델에게 잘렸던 손톱이 순식간에 다시 돋아났다. 그의 몸이 마치 거대한 검은색 망토로 이루어진듯, 어지러이 흔들린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 단순히 무기와 무기의 부딪침이 아니었다. 거대한 신비와 신비의 부딪침. "그럼 당신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하등한 너 따위와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사실, 내 모든 신경은 베델과 비늘손 남자에게로 쏠려 있다. 하지만 내 거대한 정신은 그곳에 신경을 할애 하면서도, 착실하게 다른 상위 인간들을 공격해 나가고 있다.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그렇게 커다란 힘은 필요치 않다. 그저 몸을 관통시키거나 베어내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상처만을 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마력을 발현 시킨다. 현세에 형상화 되어 검푸른 색으로 빛나는 나의 마력은 모두 푸른색의 새로 변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푸른 깃털, 날카로운 검은색 부리. 사방으로 날아라- 간단한 의지를 담은 내 마력은 모두 새처럼 움직이며 말 그대로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으아악-!" 커다란 고통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 높은 비명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나의 푸른 새들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때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겼다. 피융- 하고, 빛살처럼 내게 쏘아지는 흰빛의 마술을 단단한 마력장으로 막아낸다. 역시, 쉽지 않다. 여러개의 마술을 받아낸 나의 마력장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흔들린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행하는 일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웃기는군, 우월한 우리가 하등한 너희들을 사육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너희 헤스켈론의 인간들이 너희보다 하등한 가축을 사육하는 것과 전혀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쉴새 없이 움직이던 베델의 검이 허공에 멈춘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 바람이 할퀴고 간것 같은 상처가 생기며 피가 튀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아- 이들은 애초에 보통의 인간들 과는 사고의 방향 부터가 다르다. 베델은 더이상 이들과 대화할 필요가 없겠지. 무엇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베델은 이들과 싸울수 밖에 없다. 인간과 상위 인간. 재미있군, 애초에 상위 인간이란 기준은 저들 스스로가 정한 것 아닌가. 이 갈등의 원인도 결국은 그것. 하지만 내가 보기에 베델이나 호문클루스 였던 에카테야르나 날개 여자나 비늘손 남자- 모두 같은 인간일 뿐이다. 이들은 이들 스스로가 서로에게 금을 그어놓고 싸우고 있을 뿐이다. "… 틀렸다." 이제 온몸이 흑색 기류에 뒤덮여 있는 베델이 마치 씹어 뱉듯, 그렇게 말했다. 진득한 음차원의 마력에 의해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왜곡되어 무척이나 음울하게 틀렸다. 그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비늘손 남자, 날개 여자, 아니면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수많은 다른 상위 인간들? 아니, 그의 분노는 눈 앞에 있는 것을 향하고 있지 않다. "하- 무엇이 틀렸다는 것이냐!" 쐐액- 하고,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비늘손 남자, 헤슈발츠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베델에게로 날아들었다. 베델이 검을 앞세워 앞으로 달려 나간다. 아니… 그는 지금 검을 앞세워 헤슈발츠와 맞서는게 아니다. "베델!!" 에카테야르의 날카로운 외침. 그를 감싸고 있는 검은 기류가 마치 장막이 벗겨지듯 흩어져 나간다. 마검으로 부터 받은 힘을 흩어 버리고 있다…? 베델이 양 옆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결국, 종국에 그는 마검의- 아니, 베른헬체이스의 그리고 내 힘의 도움을 받지 않는군. 정말… 오만한 인간이 아닌가. "-틀렸다! 너희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마검의 힘을 흩어버린 베델의 목소리가 이제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교차하는 서로의 검과 손톱, 그리고 눈빛. 혈액이 튀어 오른다. 베델의 검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비늘손 남자의 손톱은… 베델에게 닿지 못했다. … 스스로를 상위 인간이라 주장하는 자에게 인간이 이겨 버렸군. 그것도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 이런 결과를 낳게 한 것일까. 단순한 힘의 차이…? 아니, 분명 마검의 힘을 제한다면 비늘손 남자가 베델보다 월등히 강했다.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군. "내가… 내가 고작 이런 하등한 인간에게 지다니!" 비늘손 남자, 헤슈발츠는 깊게 베인 옆구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치명상이다. 살아남기는 힘들겠지. "흐흐, 흐흐흐- 이렇게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지!" 상황 판단이 빠르군. 그는 곧 그에게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아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주변은 비늘손 남자의 패배에 잠깐 소강 상태에 들어가 있다. "헤슈발츠!" 날개 여자의 깜짝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저 남자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로 앞의…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온몸에서 강대한 음차원의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이미 목숨을 도외시한 그는 자신의 몸은 신경쓰지도 않은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마력을 끓어올렸다. 그리고 허공에 생성되는 거대한 죽음의 창. "죽어라!!" 아, 거대한 음차원의 마력을 머금고 있는 저것은, 정말 말그대로 죽음의 창이다. "카, 칼리체에-!!" 베델이 몸을 돌려 그것을 저지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칼리체!" 에카테야르의 비명. 그리고 섬광처럼 내게 쏘아지는 죽음의 창. 그것은 다급해 생성시킨 나의 마력장을 뚫고,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 속에서 울컥- 하고, 비릿한 무언가가 올라온다. 굉장히 고통스럽군. 눈 앞이 흐릿해 진다. 나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관통당한 심장은 이미 회생될 수 없을 정도였고, 이 몸을 흐르던 생명이 점점 그 순환을 멈추는 것이 느껴진다. 죽음이 다가오는군. 바닥에 쓰러진채 잠깐 고개를 돌려보자 내 백색의 머리카락에 바닥에 퍼져 붉은 액체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저 피는… 내 것이겠지. "하아-." 왠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내뱉는 가쁜 숨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하하하-!" 불쾌한 비늘손 남자의 웃음 소리와 함께 의식이 멀어진다. # 죽음이란건 이렇게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게 찾아왔다. 난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렀다. 차가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채- 가슴엔 휑한 구멍이 뚫려있다. 그곳에서 나온 붉은 혈액이 넓게 퍼져 매마른 흙바닥을 적시고 있다. … 힘없이 감겨 버린 눈. 그 모습엔 어떤 고통도, 분함도 없다. 그저 아쉬움만이 남아 있을뿐…. 그래, 정말 아쉬움 뿐이로군. 하아- 난 육신의 허물을 벗은채, 정신체인 상태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통상적인 죽음따위로 내가 멸망에 이를 리가 없지. 하지만 베델과 에카테야르가 알던 인간 칼리체는 이곳에서 확실하게 숨이 끊어져 버렸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모든걸 내팽개치고 보금자리로 돌아가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 정말 곤란한 상황이로군. "으, 으- 으아아-!!" "칼리체!!" 베델의 비명과도 같은 괴성. 에카테야르는 이미 죽어버린 내 시체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내 죽음을 슬퍼해 주는군. … 당연한건가. 그들과는 꽤 오랜 시간을 여행해 왔으니까. "눈을 떠봐요, 칼리체! 설마 이대로 죽어버리는건 아니겠지요!?" 어리석군. 저 비늘손 남자의 마법은 정확히 내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나의 죽음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확고하다. 나는 에카테야르의 품안에서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내 시체에 다가갔다. 내 모습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비춰 졌었군. 처음에 보금자리를 나오며 마술로 거울을 만들어 내 모습을 보았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다. 편안히 눈만 감은 모습이다. 에카테야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너-! 죽여버리겠다!" 베델이 망연 자실한 표정으로 내 시체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마검을 들고 비늘손 남자에게로 달려들며 외쳤다. 그것을 날개 여자가 삼지창을 들고서 막아선다. 하지만 비늘손 남자도… 딱히 죽이겠다고 달려들지 않아도 금방 죽을것 같은걸. 베델이 베어버린 허리에서 출혈이 심해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날개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다 명령을 내렸다. "모두 한꺼번에 공격해라!" 이제 정말 위기다. 에카테야르는 내 죽음으로 전의를 상실한 상태. 그리고 이성을 잃어버린 베델이 저들을 모두 감당해 낼 수 있을까. … 아무래도, 내가 도와줘야 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나는 스스로에게 놀라버렸다. 이미 인간으로서 죽어버린 내가 저들을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나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다. "그만두세요!" 그런데, 갑작스레 선명한 소녀의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풀숲에서 나타난 것은 하얗게 빛나는 검을 들고 있는 인간 소녀였다. 놀랍게도 그녀에게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 느껴진다.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힘. 갑작스레 나타난 저 소녀의 정체는 도대체…. 소녀는 갑작스레 그 전투에 참여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사방에 휘둘렀다. 그녀를 막아선 상위 인간들은 힘없이 베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죽은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순식간이다. 그리고… 압도적이다. 베델보다 검을 더 잘쓰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아니, 이미 인간의 기준에서 저 힘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도약해 전투의 한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소녀뒤로 나타난 또다른 여자, 은이라도 녹여 입힌 것처럼 선명한 은발… 정신체인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멍한 잿빛 시선. 이런 피로 물든 광경에 어울리지 않는 순백색의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천옷을 입고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내 시체앞으로 다가왔다. 놀라는 에카테야르에게서 내 시체를 뺏어 들고, 그녀는 정신체인 나를 올려다 보며- '괜찮겠지?' 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저 여자는… 은룡, 레테닌시에스케. 어째서 지금 여기있는 거지? # 눈을 떴다. 묘한 기분이군… 죽음에서의 회귀는. 레테닌시에스케가 날 되살린 건가.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설마,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줄이야- 바보 백룡." 상황 판단이 어려운 지금, 내 혼란스런 정신을 관통해 무감각한 여성의 목소리가 뇌리를 꿰뚫고 전해져 왔다. 뿌연 수증기.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물속에 잠긴 하얀 알몸의 아름다운 은발 여자와… 아까 하얗게 빛나는 검을 들고 있던 소녀. 아니, 잠깐. 이곳은 욕실인가? "네가 날 되살린건가, 레테닌시에스케." "설마…? 그렇게 한심하게 죽어 자빠진 백룡을 되살려 줄만큼, 나는 마음이 곱지 않아." 칼날이 선듯한 말 내용에 비해 어조는 상당히 나긋나긋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렸다. 난 의아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레테닌시에스케는 자신의 긴 은발만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뿐,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 옆의 어려보이는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온도가 너무 낮아, 베른헬체이스." 은룡이 손가락으로 물을 튀기며 그렇게 말했다. "이것참… 요구가 많은 용이로군."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저쪽에 베른헬체이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는 전에 봤을때와는 다르게 완전히 성장한 인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베른헬체이스의 성인가. 그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튀기자, 은룡의 표정이 만족스럽게 변했다. 온도를… 올려준 모양이군. "베른헬체이스…." "아, 루루렌칼리체. 방금 있었던 일은 유감이로군. 죽음을 겪는 일은 우리 드래곤들에게도 그리 흔한 경험이 아니지. 기분은 어떤가?" "…." 그는 꽤 유쾌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렇게 말했다. 왠지 어질거리는군. 죽음에서의 생환에 대한 부작용일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내가 아직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대충 되살려 놓고, 이대로 방치해 뒀다는 건가. 그것도 편하게 목욕을 즐기면서. 로나벨아크하임보다 더한 놈이로군, 은룡은. "네 육신을 되살린건, 저기 은룡 옆에 붙어 있는 인간이다." 저 소녀가…? 하지만, 인간에게 부활의 권능 같은건 있지 않을텐데. "처음뵙겠습니다, 백룡 루루렌칼리체 님. 저는 백색의 좌에 서있는 인간, 리체르아 벨크세른 이라고 합니다." 백색의 좌, 라… 내가 가지고 있는 근원에서의 지식에선 그것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육신을 되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인간이라니…. "모르는 모양이로군, 루루렌칼리체." 레테닌시에스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꽤 호의적이었다. "인간이란 종족에 주어진 근원에 대한 신비는 무척이나 적다. 거의 근원에서 완전히 벗어난 종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선 근원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마술사, 마법사의 수가 무척이나 적지." 레테닌시에스케는 뜨거운 물 속에서 쇄골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뻔한 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실은 인간이란 종족에게 주어진 신비가 적은 것이 아니었어. 편파되어 있을 뿐이었지." … 편파되어 있다? 웃기는 일이군. 인간이란 종족만이 그 내부에서의 신비가 편파되어 있다니. "그 편파의 결과가 바로 이 인간이다. 리체르아 벨크세른, 스스로 인간에 대한 수호를 자처하는 두개의 좌 중, 백색의 좌를 맡고 있는 인간이지." 한 종족이 받아야할 대부분의 신비를 단 두 개체가 모두 이어받았다는 건가. "… 대강 알겠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의 육신을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이로군." 부활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인간이라…. "그건 루루렌칼리체 님이 드래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었다면 혼이 육신에서 금방 떠나버렸을테고, 그랬다면 육신을 되살렸다 해도 혼은 돌아오지 않아 완전히 되살아났다고 말하진 못했겠지요." 우리 세 용들 사이에서 리체르아라는 소녀는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신기히다는 듯, 나와 베른헬체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밌는 인간이로군. "나와 함께 있던 인간들은 어떻게 됐지?" "그들은 저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곳에서 탈출 했습니다. 하지만… 렌 님이 너무 급하게 루루렌칼리체님을 데리고 공간 도약을 해버린터라 그들에게 자세히 사정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정말, 배려심이 없으시다니까요." 렌 님… 이라는건 레테닌시에스케를 말하는것 같다. 이름이 기니 저렇게도 줄여 부르는군. 칼리체 보다 훨씬 효율적인걸. …아무튼 중요한건 그녀가 은룡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 자체 이다. 그것은 리체르아라는 인간이 용으로서의 레테닌시에스케에게 꽤 친근감이 있다는 뜻이니까. 은룡은 용으로서도 그녀를 꽤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흥, 전대 백색의 좌들과는 오랜 친분이 있었다. 그녀가 마경을 지배하는 인간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보호차 따라왔지." 꽤나 신경써 주는군. 그런데, 마경을 지배하는 인간이라 함은, 마왕이라 불리는 그 인간인가. "그는 어째서 만나려 하지?" "그자는 세계의 균형을 깨려하고 있습니다. 마경 밖의 국가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영향력을 미치려 하고 있고, 최근에 들어서 그 행동이 더욱 가시화 되고 있죠. 전 그것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그를 만나려 합니다." 솔직히 동의는 못하겠군. 그녀가 말하는 '세계의 균형'이란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다. 뭐… 스스로가 인간의 수호자라고 칭하니, 나쁠것은 없겠군. 그나저나 걸리는게 있다. 오래전부터 마경 밖의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라고 말했었지…. 그렇다면, 에카테야르를 잠식했던 호문클루스 기술도 그것의 일부인 걸까. 곳곳에서 느꼈던 마경의 마력도 그녀의 말대로라면 설명이 된다. "아무튼 드래곤 셋이 한곳에 모이다니, 거의 만년 만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기념비 적인 일이로군." 베른헬체이스는 유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는 여전히 인간을 연기하고 있다. "로나벨아크하임도 불러볼까?" 시덥잖은 농담이로군. 나는 이제 피가 굳어버려 딱딱해진 옷을 힘들게 벗어 그런 시덥잖은 농담을 하는 베른헬체이스에게 던져 주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어쩔건가, 루루렌칼리체." "저 인간이 살려주었으니, 아직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살아봐야겠지." 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레테닌시에스케와 리체르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희와 함께 마왕을 보러가겠다. 그곳에서… 나와 함께온 인간들도 만날 수 있을테지." # "하아…." 온몸이 불에 타는듯이 뜨겁다. 마법에 의해 꿰뚫린 가슴엔 흉터 하나 남지 않았지만, 죽음에서 생환했다는 사실 자체가 몸에 큰 무리를 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 육신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의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허약한. "난 솔직히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군." 바로 코 앞에서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몽롱한 정신을 깨워 눈을 뜨니, 베른헬체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나는… 그에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무엇이 말이냐." "그렇게 철저하게 인간의 행세를 하는것 말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까지 인간의 행세에 집착하는 것이지?" 집착이라…? 그는 틀렸다. 나는 인간 행세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 "이왕 할거라면 철저한게 좋잖아?" 태연한 말투 때문일까, 그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 졌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이 고통은 무척이나 하찮아서 내가 굳이 인간 행세를 그만두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베른헬체이스는 이런 하찮은 고통조차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겠고. "무척이나 성실한 분이로군, 백룡 님은." 어디서 들어본것 같은 빈정거림 이로군…. "그러는 너야말로 팔 아프게 굳이 나를 직접 안아서 옮겨줄 필요가 있는가, 베른헬체이스. 이 성 안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네 것 일텐데도?" "너를 직접 옮기던, 마술을 이용해 옮기던 결과는 같지 않은가? 요는 가능하느냐 불가능 하느냐의 차이지." 내게 죽음의 고통이 하찮듯이, 그에겐 과정 따위야 어찌되건 상관 없다는 건가. 뭐, 굳이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 난 그가 날 안기 편하게 몸을 살짝 틀었다. "… 너와 같이 다니던 인간들이 무척이나 슬퍼 하겠군." 베른헬체이스는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꺼냈다. "그래…." "네 생존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아도 괜찮겠나?" 생존 사실이라 하니 왠지 우습군. 이 세상에 진실로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확실히 나는 죽었다고 인식되었겠지. 거기다 레테닌시에스케가 아무말 없이 내 시체를 채 가버렸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리지 않아도 되. 어쨌든 그들과는 마왕의 앞에서 만나게 될테니까." "…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난 알아. 그들은 꼭 그곳으로 올 것이다." 그래, 난 안다. 베델의 분노는 이 모든것의 원흉을 향하고 있다. 인간을 사육하던 인간. 그가 억누르고 있는 과거의 비밀. 그 모든 열쇠는, 마왕이라 불리는 자가 쥐고 있다. "베른헬체이스, 너는 전에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는 인간이 있다고 말했었지." "그랬지." "그자는… 지금 마왕이라 불리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나타난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네 피, 네 비늘, 네 마력까지 준것은… 어떤 의도에서 인가?" "보았던 모양이군. 내 파편을 갖고 있는 인간들을…." 뭐, 인간에게 달려 있으니 무척이나 볼품없어 보였지만. 아무튼, 베른헬체이스는 무엇을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베른헬체이스의 권능은, 소수의 인간에게 거대한 힘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힘은 필연적으로 계급의 분화를 낳았고, 상위 인간, 하위 인간으로 나누는 쓸데 없는 기준이 되었지. 베른헬체이스는 아무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난 괜히 그의 가슴팍을 퍽- 하고 때려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그것을 통해 보고자 했다, 인간의 모든 추악함을-' 전에 그가 말했던 말이 떠오른 순간, 나는 침대 위에 내팽개 쳐졌다. "편히 쉬어라. 그 육신의 회복을 위해서 말이지." 묘하게 조롱하는 어조로군. 그는 어딘가에서 순식간에 의자를 가져오더니, 침대 앞에 그것을 놓고 앉아 내게 친절하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난 아직까지 영 어색하군. 이런… 인간 같은 행위를 한다는게 말야." 그러는것 치고는 꽤 능숙한데. "쉬라면서?"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게 아닌가, 루루렌칼리체. 묻고 싶은게 많을 텐데?" 그래, 레테닌시에스케가 말했던 백색의 좌나 마왕이라 불리는 자에 관한 이야기 등 그에겐 묻고 싶은게 많다. 하지만… 굳이 그걸 지금 알 필요는 없겠지. 그에게 묻지 않아도, 곧 알게 될테니까. 베른헬체이스는 내 궁금중을 풀어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듯 하지만 말이다. 나는 필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는군." 베른헬체이스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때렸다. 그 고통은 지금 느끼고 있는 부활의 후유증가 겹쳐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좋은 얼굴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 잠이 쏟아진다. # 부활이란건 단순히 훼손된 육체의 수복 만을 이르지 않는다. 이미 육신에서 떠나버린 영혼까지 불러들여야만 진정한 부활의 완성이다, 라고 할 수 있겠지. 백색의 좌 라 칭해지는 인간의 소녀가 행한 내 육체의 수복은 말 할 것도 없이 대단하다. 하지만 영혼마저 불러들이는 완전한 부활, 소생은 이 세계에서 오직 드래곤 만이 가능한 거대한 마력행사이다. 영혼에 관련된 신비는 필연적으로 신력(神力)이 개입되어야 하니까. 아무튼, 백색의 좌가 내 육신을 소생시킨건 내게 다시 인간 칼리체 로서 베델과 에카테야르에게 돌아갈 수 있는 명분이 된다. 나 스스로가 내 몸을 소생시켰다면, 나는 거기서 베델과 에카테야르를 다시는 인간으로서 만날 수 없었겠지. 그래서 백색의 좌에 의한 내 부활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슨 생각하세요, 칼리체 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선한 인상의 소녀. 백색의 좌- 라 불리는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인간'이다. "너희들은… 내 죽음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내가 감지했다." 레테닌시에스케- 그랬군…. "난 너처럼 쓸데 없이 인간 행세를 하느라 힘을 억눌러 놓지 않지. 반경 수킬로 내의 공간은 항상 내 권속안에 들어와 있다. 그곳에서 나와 맞먹는 신비를 갖고 있는 한 바보 백룡을 발견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 왠지 심통이 난것 처럼 보이는군, 은룡. "렌 님께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꽤 걱정하셨답니다." 백색의 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인간의 착각일테지, 드래곤에게 죽음에 대한 걱정은 전혀, 라고 할 정도로 무용 하니까. 짧은 반바지에 긴 셔츠, 허리에는 복장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검이 매어져 있다. 내 시선이 그 검을 향하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건 백색의 좌를 상징하는검, '광휘' 에요." 검 이름이 광휘 인가. 확실히, 그때 본 그 백색의 빛은 이 검이 '광휘'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저 겉모습만이 그 이름을 나타내는건 아닐테지. 백색의 좌라…. "루루렌칼리체." 나긋나긋한 목소리. 내 육체를 소생시킨 후, 욕실에다 팽개쳐 둔 후 자신은 여유롭게 목욕을 즐긴… 어쩌면 로나벨아크하임보다 더 악질적인 녀석이다. "육천년 전에 기억을 리셋시켰더군." "…." 그래… 벌써 육천년이나 되었나. 망각을 모르는 나는 기억을 리셋한 직후의 느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근원과 링크된 지식을 제외하고 모든것이 사라진, 그 공허함- 남은건 오직 자기 자신과, 세계 뿐이었지. - 난 널 사랑한다. 레테닌시에스케의 뜻밖의 말에 나는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것은 만능의 언어, 은룡의 뜻에 거짓은 없다. - 그리고, 널 증오하지. "… 그래?" 백색의 좌, 리체르아가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온다. 만능의 언어가 전해지지 못한 그녀는 내가 혼자 중얼거린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 작게 대답하며 은룡을 바라보자, 그녀는 무심한 시선으로 긴 은발을 쓸어올리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도 특별한 대답을 기대했던건 아니었고, 나도 딱히 그녀가 말한것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 우리의 걸음 뒤로 베른헬체이스의 성이 점점 멀어져 간다. # "역시- 마경은 굉장히 불쾌한 곳이에요." 마경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숲은 우거지고, 빛이 들지 않아 어두워 졌다.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희미하게 퍼져 있었는데, 아마도… 피냄새 같았다. 하지만 이런 감각도 모두, 마경이란 비틀린 공간이 만들어낸 환상이겠지. "그렇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백색의 좌의 말에 수긍해주고는 레테닌시에스케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긴 옷자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린 채로 스스로 떠있는 양탄자 위에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 속옷이 훤히 보이는군. "저 녀석은 항상 저러고 다니니?" "아, 렌 님은…." 백색의 좌, 리체르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다가 대답했다. "뭐- 그렇지요. 움직이는걸 무척이나 귀찮아 하시니까요. 평소에는 하루 종일 욕실에서 늘어져 주무시는 적도 있으시니 까요." 목욕을 좋아하나? 확실히…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온몸이 늘어져 기분이 좋게 되지. 하지만 하루종일 그러고 있기는, 힘들것 같군. 그런데, 평소에는… 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은룡과 함께 생활하고 있니?" "네, 매일 제 집에서 저러고 지내세요…." 리체르아는 예의 바르게 답했다. 내 표정이 미묘해 지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게으른 분은 아니에요." "…." 모순이로군. "내가 아무리 움직이는걸 싫어한다 해도 너에 비할까, 백룡." 자고 있던게 아니었나. 레테닌시에스케는 양탄자 위에서 몸을 일으켜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뭐라 할 순 없겠군. 나는 수천년 동안 내 보금자리에 박혀 나온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 시간은 바람이 흘러가듯, 알게 모르게 지나갔다. 레테닌시에스케의 존재감 때문에 우리들을 중심으로 반경 수 킬로 이내의 마물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인간들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보이는 풍경은 항상 나무, 나무, 그리고 또 나무다. 마경은 뭐랄까… 정말 나무가 많군. "레테닌시에스케, 너의 목적은 백색의 좌의 보호 뿐인가?" 심드렁한 시선이 나를 향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내 목적은 그것뿐이다. 마경에서 마왕이라 불리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하건, 백색의 좌가 말하는 세계의 균형이 깨지던 나와는 관계 없는일이다. 하지만 루루렌칼리체- 너를 만날걸 알았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리체르아가 약간 섭섭하다는 눈으로 레테닌시에스케를 바라보았다. … 도무지 태도를 종잡을 수 없군. 어떨때는 호의적이다가도 이럴 때는 나에게 미약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과거의 나는 은룡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나 보군. 별 상관은 없는 이야기지만. "루루렌칼리체 님, 그런데… 당신이 원래 같이 다니던 일행 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관심없다. 어쨌건 그들과는 결국 목적지에서 만나게 될테니까-" "흐음- 냉정하시군요." 리체르아는 의외라는 눈빛을 내게 보내며 말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대충 알것 같군…. "하지만 그 분들이 부유성 앞에 도달하기는 무척 힘들거에요. 많은 수의 마물도 마물이지만… 이 대지를 지나가는 이상, 13영주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부유성이라…. 신화 시대에 존재했던 유적을 말하는 모양이군. 중력의 영향을 벗어난 신비로운 돌로 만들어진 성… 그것이 마경에 있었다니.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굉장히 거대한 신비다. 인간들의 금전 감각으로 따지자면 부유성의 조각 하나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훨씬 가치가 크겠지. 의미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운명이겠지." 운명, 나는 스스로의 말을 비웃었다. 사실 운명같은건 없다. 이건 그저 저급의 언어로 인해 만들어진 흥미로운 단어일 뿐이지. # 얼마나 걸어온 걸까… 마경내에서 태양이 보이는 곳은 베른헬체이스의 성이 유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침, 저녁같은 시간흐름 정도는 알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모르겠군. 하늘은 짙은 검붉은 빛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그 빛깔이 이제 막 굳기 시작하는 피의 색 같았다. "이제 슬슬 마경의 중심부가 보이겠군." 그런 레테닌시에스케의 말이 있은 후 얼마 안있어, 나무만이 반복되던 풍경이 끝났다. 거대한 분지가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그 분지 위로 거짓말 같이 거대한 대지가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아니, 저것은 대지가 아니다. 성… 이로군. 리체르아가 말했던, 부유성- 인가. 부유성은 이렇게 먼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길고 두꺼운 쇠사슬에 의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부유성을 고정시키는 그 쇠사슬 들은… 분지 곳곳에 박혀 있는 거대한 말뚝에 묶여져 있었다. "아-" 리체르아가 미약한 신음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부유성 아래에 마물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 [────────] [────────] 손에 닿지 않는 부유성을 향해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한 마물이 다른 마물을 밟고 오른다. 또다른 마물이 그 마물을 밟고, 밟고, 또 밟고…. 그 밑에 깔린 마물은 붉거나 푸른 채액을 내뱉으며 죽어간다. 수천, 수만의 수를 셀수도 없는 마물들이.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 지는, 아니 정확하게 그들이 품고 있는 인간의 공포의 사념체는 뭉그러지고 일그러져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들 각자가 내는 소리는 거대한 저주가 되어 이 공간을 휩쓸고 있었다. "이, 이건…." 리체르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온다. 백색의 좌라는, 인간의 모든 신비를 짊어진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거대한 저주를 극복할 순 없는것인가. "시끄러운 녀석들이다." 레테닌시에스케는 눈살을 찌푸리며 허공에 손으로 선을 그었다. 거대한 파동처럼 퍼져나가는 마력과 신력. 그것은 그녀의 손 동작을 따라 마물들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거대한 마력의 행사로 대기가 흔들리며 내 백발이 위로 솟구쳤다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물들은… 침묵했다. "렌 님-" 리체르아는 입을 가리며 괴로운 목소리로 은룡을 질책하듯 불렀다. 이 먼곳에서도… 진득한 피냄새가 올라오는것 같군. 침묵하는 마물. 그것은 단 하나밖에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죽음이지. 레테닌시에스케의 손동작 하나로 부유성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던 마물들은 모두 온몸이 터져 육편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던 마물들이 저런 모양새가 되어있으니, 모양새는 아까보다 더 끔찍하다. … 마물들에게 유감이군. "저들은 음차원의 마력으로 생겨난 찌꺼기 들이니 그리 마음쓸것 없다." "그래도 저처럼 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모습은, 상대가 아무리 끔찍한 마물이라도 너무 섬뜩하네요." 백색의 좌는 금방 심경을 정리한 모양인지,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와 레테닌시에스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눈 앞에서 수만의 마물이 한번에 죽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금방 침착을 되찾는군. 인간의 초월자라…. 나는 문득, 그녀에게 흥미가 생겼다. '인간은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인간들의 사회에 있게 했던 현자의 질문에, 그녀는 뭐라고 답할까. 물론 정말로 그녀에게 그것을 질문할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 그 질문은 온전한 내것이니까. "너는 거대한 신비를 가지고 있지만… 마법사 처럼 중력 반전의 마법 따위는 사용할 수 없으니 특별히 내 옆에 타는 것을 허락하겠다, 리체르아." "흐응- 영광인데요." 백색의 좌는 빙그레 웃으며 레테닌시에스케의 양탄자에 몸을 실었다. 부유성 까지 날아갈 생각인가 보군. 사방에서 부유성으로 연결된 저 거대한 쇠사슬을 통해 가도 되지만… 확실히 그편이 편하겠지. "너는 알아서 따라와라, 루루렌칼리체." … 매몰차군. # 창공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부유성의 모습은 통상적인 성과 그 겉모습이 크게 다른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연유에선지 바닥에 잔뜩 흩어진 커다란 돌조각을 피해 바닥을 딛으며, 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바라본 부유성의 성벽엔 푸른 이끼와 덩굴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성벽은 곳곳엔 금이가 있었고, 성문은 잔뜩 녹이 슬어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우리는 성문이 반쯤 주저앉아 생긴 틈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척이나 쓸쓸한 곳이군요." 리체르아의 목소리엔 마이너스 적인 감정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련한 것을 그리는 듯한, 그런 감정- … 이곳은 광기어린 마경의 분위기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이 공간 전체가 한 존재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다." 레테닌시에스케가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그렇게 말했다. 한 존재… 라는 것은, 아마도 마왕이라 불리는 자겠지. "하지만 이 공간 전체를 지배한다는건…." 그래,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거대한 힘이다. 리체르아는 말끝과 함께 표정역시 흐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마왕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경고엔 분명 무력이란 수단 역시 적지않게 고려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마왕이란 인물의 힘은, 그 무력이란 수단이 그리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란걸 보여준다. … 아마 레테닌시에스케는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이상, 그녀를 돕지 않을 것이다. 백색의 좌도 그런 사실쯤은 알고 있겠지. 그런데, 탁- 누군가의 존재감이 무언가가 잔잔한 수면위로 솟아오르듯, 갑작스레 느껴져 왔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불길하게 서있었다. "손님들이시군요,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의외로, 깊게 뒤집어쓴 어두운 후드 안에서 나온 목소리는 상당히 맑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주변에 감도는 분위기는 불길해서, 무척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이곳을 지배하시는 마왕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나브락사스의 서부를 총괄하는 제 1 영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여러분께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지요. 그러니 저는 그저, 마왕님의 종일 따름입니다." 그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마왕님께서 당신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느릿하게 손짓하며, 그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성안으로 들어올것을 종용했다. 성 내부의 짙은 어둠에 그의 모습이 동화되어 사라져 간다. 리체르아는 잠시 허리에 매어져 있는 검, 광휘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다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레테닌시에스케도 팔짱을 낀채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 나는 잠시 뒤를 바라보았다. 높은 창공에 떠있는 부유성,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무척이나 아득하다. …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하-" 뻔하지 않은가. 베델, 에카테야르… 자신들의 기원을 쫓아 도달할 장소는 결국 마왕이 있는 이곳, 부유성일 테지. … 기다리고 있겠다. 나도 몸을 돌려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성의 내부로 들어갔다. # 제 1 영주라는 남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작은 등불을 들고 앞서 걷고 있었다. 부드러운 황색의 빛에 드러난 성의 내관은 외관과 마찬가지로 관리의 손길이 전혀 닿아있지 않았다.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의 긴 그림자가 마치 아지랑이 처럼 어른 거린다. 곳곳에 흩어진 크고 작은 돌조각, 깨어진 계단의 파편들… 산산히 부서져 이제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석상, 금이간 벽 사이로 잔뜩 자라고 있는 이끼. 과거에 이곳에서 큰 전투라도 있었던 듯한 모습이다. "…." 바닥엔 두껍게 깔려 있는 먼지로 인해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마경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 이 성은, 완전히 버려져 있는 모습이다. 사방에 짙게 드리운 쓸쓸함, 그리고 허무함. "당신은…." "제게 어떠한 것을 물어도 소용 없습니다, 백색의 좌. 저는 마왕님께 당신들을 모셔오란 명령을 받았을 뿐이고, 모든 대화는 그분을 통해 하시게 될겁니다." 제 1 영주는 리체르아의 말을 자르며 그렇게 말했다. 저 자는 그녀가 백색의 좌 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군. 그렇다면, 마왕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진배 없겠지. "…." 리체르아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걷다, 커다란 문 앞에서 그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가 등불을 위로 들어올린다. 그 문에는 양각으로 어떤 광경이 묘사되어 있었다. 상당히 마모되어 있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강 훑어보면 과거에 부유성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던 풍경인것 같다. … 굉장히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군. 훌륭한 조각술이다. "마왕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제 1 영주가 우리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 이곳에서 나는 방관자일 뿐이다, 리체르아." 레테닌시에스케가 여전히 불길하게 서있는 제 1 영주를 힐끗 바라보며 리체르아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알고 있습니다." "도움은, 아직도 인간 행세를 끝내지 않고 있는 저 바보 백룡에게 기대하면 되겠지." 은룡의 말에 백색의 좌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본다. 글쎄… 나도 그리 돕고 싶은 마음은 없는걸. 애초에 그녀가 내게 도움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나보단, 백색의 좌인 그녀가 사역하는 마력의 힘이 월등히 강력할 테니까. 제 1 영주는 잠시 우리쪽을 말없이 바라보다 커다란 문을 한 손으로 밀었다. 기기긱- 하고 바닥이 끌리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왕 님, 말씀하신대로 손님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문의 안쪽은 대단히 넓은 공간이어서, 그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 리체르아가 입을 가렸다. 눈이 크게 치떠지고, 동공이 크게 열린다.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그것은, 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굉장히 거대한 장치였다. 사방을 감싸고 있는 유리벽 안에 붉은 빛을 띈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유리벽에 투명한 관이 중앙에 위치한 의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뽀글- 하는 기포와 함께, 그 관을 통해 붉은 액체가 의자에 흘러 들어간다. "어떻게, 저럴 수가…." 유리벽 안에는 고깃덩어리 들이 둥둥 떠있었다. 인간의 팔이었던, 혹은 다리였던, 몸통이었던…. 그리고 검은색 실이 물결을 따라 나부끼는, 아- 저것은 머리로군. 물결에 의해 머리가 방향을 돌려 이쪽을 향한다. 부릎뜬 눈동자, 살짝 벌려져 있는 입이 이것이 과거의 어떤 인간의 머리였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리체르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에 오신걸 환영하오, 백색의 좌. 그리고 백룡과 은룡." 여자도 남자도 아닌것 같은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그는 유리벽에서 빠져나온 관이 연결되어 있는 의자에 걸터 앉아 있었다.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긴 흑색 머리카락.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선명한 자색 눈동자가 베른헬체이스를 연상케 한다. "네가 마왕이라 불리는 자인가, 인간." 레테닌시에스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오, 은룡. 앞서 부른대로 나는 그저… 마왕일 뿐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당신을 따르는 인간들을 모두 상위 인간이라 명명 해놓고 이제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다? 망상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저는 상상도 할 수 없군요!" 리체르아가 표독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손은 이미 '광휘'의 손잡이에 가있었다. 마왕이라는 자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확연한 적대감이다. "아아-" 의자에 앉은채, 그가 몸을 뒤로 크게 젖혀 기대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우습다는 얼굴로 리체르아를 내려다 보았다. "나브락사스에 이어 헤스켈론 까지 손에 넣으려는 내 의지를 방해한건 항상 그대들 이었지, 백색의 좌. 아니- 오늘날에 이어서 까지 말이야." "…." "인간은 싫다. 시간의 흐름속에 덧없이 스러져 가는 인간이 싫다. 그래서 나는 영원을 갈구했지, 갈구하고 또 갈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었지. 그리고 나는 영원을 갈구하며 얻은 힘으로 이곳, 나브락사스를 완전한 내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진정한 영원에 좀더 가까워 졌지." 갑자기, 첨벙- 하고 유리벽 안의 붉은 액체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리체르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유리벽을 바라보았다. 유리벽 안엔… 살아있는 인간이 들어있었다. 그 인간은 액체로 가득차 있는 환경에 당황스런 눈동자로 사방을 둘러보다 이내 사방에 떠있는 고깃 덩어리들에 놀라 발버둥쳤다. 그리고 유리벽 너머의 우리에게 시선이 미쳤다. 인간은 주먹으로 유리벽을 쾅쾅- 하고 쳐댔다. 액체로 인해 나오지 않는 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모양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안돼!" 리체르아가 비명처럼 외치며 순식간에 '광휘'를 빼어들고 유리벽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백색의 빛을 발하는 검, 빛은 그 이름대로 찬란한 광휘-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광휘는 보잘것 없는 유리벽에 캉-!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검이 가로막히며 전해진 반탄력에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펼쳐진 광경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검을 늘어트렸다. 인간이… 붕괴하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눈동자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 붉은 액체에 내던져진 인간은 온몸이 서서히 피부가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며 '분해'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 퍼져나가는 붉은 물결- 아, 원래 이 액체는 붉은 색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저 인간의 몸에서 나온 피가 유리벽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액체를 더욱 붉게 만든다. "백색의 좌, 그대의 검, '광휘'는 분명 강력하다. 하지만 수백년을 이어 내려온 나의 영원을 향한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을테지." 마왕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로 향하는 유리관의 액체의 색이 더욱 진해진다. "당신은… 저 유리벽 너머로 내던져진 인간의 생명력을 모두 흡수하고 있었군요!?" 리체르아는 분노가 가득찬 목소리로 외쳤다. 흡수하고 있군요, 있군요- 하고 메아리가 울려퍼진다. 마경에서 소위 '상위 인간'이라 불려지는 자들이 행하던 '사육'. 아- 정말로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그들은 정말로 모두 마왕에게 '먹이'로 바쳐지기 위해 키워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저는… 당신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무엇에 대한 경고인가?" "당신들이 헤스켈론이라 부르는, 우리 세계에 대한 손길을 더이상 뻗치지 말라는 경고였지요." 리체르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린다. 레테닌시에스케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마왕이 뒤로 깊게 기대었던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빼며 부드럽게 웃었다. "경고 '였지'요, 라?" "네, 이제 경고는 과거형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여기서… 당신을 저지하겠습니다." "… 하찮군." 쾅- 하고, 우리와 마왕의 사이에 거대한 유리판이 내려왔다. 이것은… 붉은 액체를 담고 있는 저 유리벽과 같은 것이로군. "회피하는 건가요!?" "지금은 너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 무력으로 나를 저지하겠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조금 머리를 식히는게 어떠한가, 백색의 좌." "… 가소롭다는 건가요." 분하다는 얼굴로, 리체르아가 유리판을 통해 마왕을 노려본다. 마왕은 아무말도 않고, 웃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그래, 가소롭다.' 라고 대답하는것 같았다. "쉴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제 1 영주가 태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리체르아의 분노어린 시선이 그를 향하자, 그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에게 분노를 표출하시면, 물론 저는 당할 수 밖에 없겠지요. 제 힘은 백색의 좌인 당신에게 못미치니까요." "…." 그의 말을 듣고 리체르아는 아무말 없이 '광휘'를 다시 검집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쉴곳이라… 이런 다 부숴진 성 안에 우리가 쉴곳이 있을까.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듯, 제 1 영주가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이 오실걸 알고, 미리 정리해둔 방이 있습니다." 그렇군…. 일단은 이곳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할까. # 큰 창문엔 흰색 커튼이 쳐져 있고, 한쪽 구석에 침대만이 덩그러이 놓여져 있었다. 깔끔하긴 했지만, 많은 것이 무척이나 결여되어 있는 방이었다. … 아무튼, 지금의 내게, 부유성의 방 따위는 전혀 관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걸터 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 그곳엔 내 행동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레테닌시에스케가 서있었다. "루루렌칼리체, 쓸데 없이… 리체르아를 배려해 주는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모른척 하지 마라. 태연히 방으로 안내된 후, 다시 마왕이라는 건방진 녀석을 찾아가려는 이유는 리체르아를 배려하기 위함이 아닌가." 정말, 웃기지도 않는 녀석이군- 하고 레테닌시에스케가 적대감을 가득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 작게 중얼거렸다고 해도 내 귀에 모두 들리고 있으니, 의미는 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 내가 그녀를 배려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너도 가겠는가?"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레테닌시에스케는 다시 마왕이 있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여전히 흑색 로브를 뒤집어쓴 제 1 영주가 그곳에 서있었다. 마치, 우리가 다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는 우리가 다가오자 아무말 없이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다시 보아도 신기하군, 그 의자는- 저 유리벽 너머의 생명력 들을 그곳으로 집중시키는 건가?" 레테닌시에스케의 물음이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마왕에게로 향했다. 그는 목소리에 미약한 웃음기를 담고서, 대답했다. "그렇소, 은룡. 나는 이것을 이용해 하등한 인간들의 생명력을 이용해 영원을 이어나가고 있지- 정말, 멋지지 않은가?" "아아- 물론 멋지고 말고." 갑자기 마왕의 의자 뒤에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흑발의 여성이 나타났다. 입은 웃고있지만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저 무기질 같은 자색 눈동자- … 베른헬체이스 인가. 이번엔 인간 여성의 모습이군. 베른헬체이스는 친근하게 마왕이란 자의 어깨의 손을 올리며, 마치 자랑스러운 어떤 것을 소개하듯, 우리에게 말했다. "소개하지, 칠백년 전부터 흔들림 없이 영원을 쫓고 있는, 카야릴 이다." 카야릴… 마왕의 이름인가. "그 이름은 내가 영원을 추구하면서 부터 잊어버렸다, 베른헬체이스." "내가 기억하고 있지 않니?" 베른헬체이스는 마왕의 뺨을 쓰다듬으며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왕, 카야릴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드리워 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왕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고 있는 베른헬체이스의 새하얀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쳐냈다. "조롱하지 마라!" - 그러는 너는 수 많은 다른 인간들의 생명을 조롱하며 그 영생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뇌리를 관통하는 만능의 언어. 눈살을 찌푸렸던 마왕이 그 말엔 인상을 피며 대답했다. "다른 인간들의 생명…? 드래곤인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정말 웃기는군. 너희 드래곤들에게는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짐짓 걱정하는척 말하다니, 정말이지 우습군." 베른헬체이스가 킬킬 대며 웃는다. "내게 하등한 인간들의 생명은 바닥에 꿈틀거리는 벌레와 다를게 없다. 그런 하찮은 생명들을 이용해 영생을 이어나가는게 뭐가 잘못되었는가?" "건방진 인간이로군." 레테닌시에스케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그는 웃음지을 뿐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마시오, 은룡. 위대한 만능의 언어를 사용하는 당신 드래곤들이 인간들의 것인 저급의 언어의 존대, 평대 같은 것에 아랑곳이나 하겠는가?" 그런것 까지 알고 있는가, 그래, 요는 우리 드래곤들에게 얼마나 그의 의지를 온전히 전할 수 있느냐가 되겠지. 그가 존대를 사용하건, 심지어 욕설을 사용하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그는 태연스레,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발 아래로 둔다. 그의 말에 주저함이란 없었으며, 마치 확고한 진리처럼- 단언하듯 자신의 영원을 위해 다른 생명들이 죽어도 상관없다 말하고 있었다. "네 영원은, 베른헬체이스가 가져다 준것인가?" 나의 물음엔 흑룡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이 인간이 영원을 위해 어디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도구를 아주 조금 제공해 주었지." 흑룡이 요염하게 웃으며 내쪽을 바라보았다. … 아주 신이 난것 같군. "아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 카야릴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베른헬체이스가 제공해준 그 '도구'만으로 마왕 카야릴은 마경 전체에 군림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다른 생명을 통해 영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칠백년이라…, 우리 드래곤들에겐 아주 잠깐의 시간일 따름이다. 하지만 인간이… 칠백년이란 세월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이 있는가.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영원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 지지 않은 것인가. 나는 지그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느긋한 모습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는 의자에 앉아-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이 성 내에 감도는 짙은 침묵과, 허무함, 그리고 쓸쓸함은 무엇인가- "정말, 너는 영원을 바라고 있느냐?"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내뱉어 지고 말았다. 은룡과 흑룡, 모두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왕, 카야릴은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영원을 바란다.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의 미래도 역시 그럴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도 역시 그럴 것이다, 라. 그래…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 나는 그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마왕이 영원을 이어가기 위한 장치를 바라보았다. 아아, 정말인가. 정말 이것으로 마왕 카야릴은 우리 드래곤과 같은 영원을 얻을 수 있는가. # 다음날이 되어, 나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성의 꼭대기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내 백발이 나부껴 위로 휙- 하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이곳은 바람이 부는군. 저 아래의 마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대기가 정체되어 있는데 말야. … 카야릴, 그는 수많은 생명을 죽여, 영원으로 향하려 한다. 자신을 '마왕'이라 지칭하는 이유는, 그 모든 업보를 자신이 지려 함인가, 아니면 그것조차 위에서 오연히 내려다 보기 위함인가. 아무래도 후자의 것이 맞겠지. 그래서 그는 마(魔)의 왕(王)이다. "높은 곳을 좋아하나, 루루렌칼리체." 루루렌칼리체라… 단지 '칼리체'라고 불려진 일이 너무나도 오랜 옛날의 일인것 같다. 실은 시간이 아주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글쎄, 딱히 높은 곳을 좋아한다 말할 수는 없겠군.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것은 좋아한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대답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 싸늘한 존재감은… 은룡의 것이군. "그래…?" 그녀가 내 등뒤에 섰다. 의외로군,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 오다니 말이야. 그녀는 나늘 사랑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한다고 말했었다. 상반된 두개의 감정을 언급하다니…. 그러고보면 로나벨아크하임도 가끔 내게 원인모를 분노를 보이곤 했었다. 나는… 모르겠군. 나 스스로가 잊어버린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고민하다니, 꼴이 우습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분명, 그건 내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행한 일일테니까. 내게 스스로가 행한다는건, 그런것이다. "그리멀지 않은 과거에 너와 같이 다니던 인간들이 바로 이 부유성 아래에 와있다." "이렇게 금방… 말인가." 나는 죽음을 겪고, 베른헬체이스의 성에서 하룻밤을 보낸후 레테닌시에스케, 백색의 좌와 함께 거의 일직선으로 이 부유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이, 고작 하루 차이로 그 거리를 따라잡있다고…? "안내자가 있는 모양이다." 나와 달리 전 감각을 개방시켜 놓고 있는 레테닌시에스케는 그것까지 금방 잡아 내었다. 안내자라 함은…. "흑룡의 날개를 달고 있는 여자로군." 날개 여자? 분명, 라이나라는 이름이었지. 그들이… 어떻게 함께 하게 된 것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먼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미약한 인간의 시력은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잡아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곳으로 올라오겠지. 곧, 결말을 볼 수 있겠군. 나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왠지모를 씁쓸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 성의 중앙을 관통하는 아주 커다란 기둥을 중심으로 거대한 나선형의 계단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이 부유성의 아주 거대한 홀(Hall). 그리고 이 홀의 중심에 카야릴이 서있었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백색의 좌. "생각을 달리 먹지 않은 모양이군, 유감이다." 나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계단의 난간에 기대었다. 이곳에선 저 아래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레테닌시에스케도 내 옆에 멈춰 섰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마왕. 나는 애초에 당신이 행하는 일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 내가 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데?" "몰라서 묻는 건가요, 당신은…." 리체르아가 냉엄한 목소리로 그를 질책한다. 그녀의 목소리엔 강한 신념이 깃들어 있어, 그 의지가 무척이나 선명하게 전해진다. 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시작해, 논리적으로 끝났다. 그 말의 내용은 온통 마왕, 카야릴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대 백색의 좌는 말이 무척 많은 아가씨로군. 그런 말 만으론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을걸? 자, 내게 너의 힘을 증명해보라! 그 힘이 700 년을 이어온 내 의지를 뛰어넘는다면, 내게 너의 의지를 관철 시킬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는 인간에게 그런 통상적인 논리가 먹혀들리는 만무. 리체르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에서 '광휘'를 뽑아들었다. 찬란한 백색의 빛이 주변을 밝히며, 짙은 어둠을 몰아낸다. 마왕 카야릴은 아무런 미동 없이 담담한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신비를 짊어진 저 백색의 좌 를 간단히 이길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마왕, 당신을 패퇴시키겠습니다!" 리체르아의 목소리가 성의 넓은 통로 덕에 쩌렁쩌렁 하게 울린다. 마왕은 기꺼이 그 도전을 받아 들이겠다는듯, 환히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베른헬체이스는 내가 그를 처음보았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쪽 구석에 팔짱을 낀채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세 용이 지켜보는 전투라…. 그러고 보면 모양새가 참 재미있다. 베른헬체이스는 마왕 카야릴을, 레테닌시에스케는 백색의 좌 리체르아를, 나는… 베델을 통해 인간에게 관여하고 있다. …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화악- 하고 눈부신 빛이 마왕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그 빛의 근원지는 리체르아가 들고 있는 '광휘'. 하지만 그 빛은 마왕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어둠에 먹혀버렸다. 마왕의 몸을 잔뜩 감싸고 있는 것은 거대한 음차원의 마력… 그리고 희미한, 용의 힘이다. "당신의 힘은 700 년을 이어온 의지이지만, 제가 들고 있는 검 광휘는 인류의 역사를 함께 해온 의지입니다!" "웃기는군!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네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마왕이 몸이 어둠으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지며 웃음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쿠구구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바닥이 흔들렸다. 설마, 이 성… 무너지는건 아니겠지. 성이 낡아 있어 약간은 걱정이 된다. 리체르아가 입술을 깨물며 사방으로 흩어진 어둠을 쫓으려는 듯,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검이 한번 휘둘러 질때마다 마치 별빛이 사방에 뿌려지듯, 아름다운 백색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 확실히… 저 검이 갖고 있는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마왕은 그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주변의 어둠으로 그 빛을 모두 살라먹고 있다. 어둠을 쫓는 빛이 아닌, 빛을 쫓는 어둠. "하-!" 기합을 내지르며, 리체르아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녀가 노리는건, 어둠으로 화해 사방으로 퍼진 마왕. 그녀는 마치 천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허공에서 강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마왕의 모습에 저지되고 말았다. "이곳은 나의 영역. 멋대로 불쾌한 빛을 뿌리게 놔둘수는 없지!"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 리체르아의 몸은, 떠오를 때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바닥으로 처박혀 버렸다. 자욱한 먼지와 돌조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다.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으로 흩어졌던 마왕의 모습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는 중력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다는듯, 오연한 표정으로 허공에 발을 딛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리체르아는 그토록 강하게 바닥으로 내쳐졌지만, 큰 상처는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강하군요, 마왕." "단지 강하다는 말로는 나를 표현할 수 없으리라. 나는 네가 내뿜는 광명의 빛이 전혀 먹히지 않는 무저갱의 어둠일지니-" 마왕이 조롱하듯 웃으며 말한다. "크-" 그 단순한 공방에서 리체르아는 자신이 마왕에 비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광휘를 쥐고 있는 하얀 손은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한듯, 분함으로 옅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질 수 없습니다, 마왕. 이렇게 허무하게 져버린다면, 이미 죽어버린 전대 백색의 좌를 볼 낯이 없어지니까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난간에 기대어 있던 몸을 뒤로 뺐다. 저 아래에서 퍼진 먼지가 이곳까지 올라와 옷이 더러워 지고 있었다. "어떤가, 루루렌칼리체." 뒤에서 만족스러움의 가득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른헬체이스… 그는 히죽 웃으며 어때-? 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마경에 버려져 모든 것을 잃은 하찮은 인간이, 지금- 인간의 모든 신비를 짊어진 두개의 좌중 백색의 좌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저자의 힘이 아닌, 네가 건네준 힘이지 않은가." 흑룡은 고개를 저어 내 말을 부정했다. "고작 그 힘만으론 결코 백색의 좌를 이길 수 없다. 정말, 그의 말대로 인것이지. 그는 내 힘을 기반으로 700 년이란 시간을 강철같은 의지로 강해지고, 또 강해졌다. 그리하여 지금, 그는 마왕이란 이름으로 이곳 나브락사스에 군림하고 있지." "…." "뭐, 그 의지가 향하는 방향이 저 백색의 좌가 보기에는 그다지 옳은것 같지는 않지만 말야." 상관 없잖아- 하고, 덧붙이며 흑룡은 기분좋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이었겠지. 베른헬체이스는 인간에게 힘을 주고, 그 힘에 도취되어 파멸로 향하는 인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광경에서 그가 정말로 재미를 느꼈을지는, 난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언젠가 자신의 힘을 주었던 인간이 파멸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 힘을 가지고, 자신에게 엄습하는 파멸마저 압도하여 자신이 인간이란 것 마저 부정하고, 그들의 피와 살을 이용해 영원으로 이르려 하고 있다. 과연… 베른헬체이스가 흥미를 가질만도 하군. "꺄아-!" 그때, 쾅-! 하고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와 함께 리체르아가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녀가 쥐고 있는 '광휘'는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방관하고만 있을건가, 레테닌시에스케" "리체르아는 아직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내 말에 레테닌시에스케는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상관할 것은 아니겠지. 리체르아가 검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눈에 띄게 줄어든 그녀의 빛에 비해 마왕의 어둠은 전혀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손상이 없었다. "넌 내게 졌다, 백색의 좌." "난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지지않았다고 하곤 있지만… 이미 그녀는 더이상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바닥에는 그녀가 흘린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흐음-" 마왕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히 압도적이로군, 이렇게 신속하게 결론이 나다니…. "네 목숨을 지켜줄거라 믿고 있는 은룡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라면 소용없다고 말해주고 싶군. 내가 네 팔이나 다리를 조금 못쓰게 만든다고 해서 은룡이 도와줄리는 없을테니까. 말그대로 목숨만 부지해 주는 것이지." "…." "드래곤이란 그런 존재지." 마왕이 시선을 올려 이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 그의 말이 옳다. 레테닌시에스케는 정말로 그녀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이상 나서지 않겠지. "절 너무 얕보시는군요, 마왕. 제가 그런것도 모르리라 생각했나요? 그런것을 모두 감수하고 당신과 이렇게 맞서고 있는 거랍니다." 각오는 되어 있다, 그말이군. "… 그렇다면 어쩔수 없군. 내게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수 밖에."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마왕." 리체르아는 다시금 광휘를 고쳐잡았다. 순백색으로 빛나던 광휘는 이제 군데군데 그녀의 피를 머금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며 성의 문이 열렸다. 털석 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바닥에 쓰러졌다. … 바깥을 지키고 있던 상위 인간이로군. 상위 인간은 죽지는 않았지만, 온통 피투성이가 된채였다. "…."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 입구에 서있는건… 붉은 머리의 청년과 금발의 예쁜 소녀였다. 베델과, 에카테야르…. # 그리고 그 뒤로 나타난 것은 날개 여자였다. 이름이… 라이나라고 했었지. 분명 적이었던 그녀가 어떻게 저들과 함께 있는 걸까. 그간 만나지 못한 잠깐의 시간동안 베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항상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띄우던 그의 모습을, 지금은 전혀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현재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짙은 그림자였다. "헤스켈론의 인간들과…." 마왕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제 2 영주의 제자로군." 찌푸려진 그의 얼굴이 날개 여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묻고 있었다. 날개 여자는 즉시 앞으로 나와 마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마왕에게 보이는 것은 극도의 경의였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마왕님." 나는 여전히 높은 나선 계단위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베델들은 아직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것 같다. "왜 네가 헤스켈론의 인간과 같이 있는 것이지? 네가 그들과 한자리에 서있을 정도로 품격이 낮다고 생각하나?" 마왕이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자 리체르아는 잠시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날개 여자는 자신들을 가볍게 패퇴시킨 백색의 좌가 시야에 들어오자 잠깐 움찔, 하며 몸을 떨었다가 마왕에게 대답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호오?" 마왕은 흥미롭다는듯, 그녀에게 눈짓했다. "마왕님은 상위 인간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모두 하등하니, 가축처럼 취급하며 대화할 가치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음, 분명 그랬지." 마왕 카야릴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날개 여자는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들, 헤스켈론에서 온 인간들이, 하등하다고 말씀하셨던 인간들이 저희와 같은 의지를 갖고, 신념을 갖고 행동할 수 있는 겁니까? 가축과 같다고 했던, 그 하등한 인간들이 말입니다." 그제서야 카야릴은 그녀의 뒤에 서있는 베델과 에카테야르의 모습에 신경이 미친 모양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라이나." "예, 마왕님."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는 키메라인 너희들이 보통의 인간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육하게 하기 위한 내 거짓말이었다." "예…?" 태연스런 마왕의 말에 날개 여자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의 입가에선 웃음이 가실줄을 몰랐다. "흠, 제대로 못알아 들은것 같군. 그럼 다시 한번 말해주겠다. 그것은 흑룡의 피를 이용해 만든 키메라인 너희들이 '진짜 인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육하게 하기 위해 내가 했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 날개 여자는 충격받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거짓말이지요, 마왕님?" "음… 수백년 동안 내가 했던 거짓말은 그것 단 하나다. 거짓말은 약자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수단이라 생각하니 말이다. 이 나브락사스의 지배자인 내가 더이상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아, 아아-" 날개 여자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어쩔줄을 몰라했다. 지금껏 천대하며 무시했던 '하위 인간'들이 '진짜 인간'이었고, '상위 인간'이라 칭했던 자신들은… 마법으로 합성된 생물 '키메라'였다, 라…. 대강 예상은 했지만… 그리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군. "마왕, 당신…!" "당신이 바로, 마왕이로군." 리체르아의 말을 자르는, 차분히 가라앉은 남성의 목소리. 백색의 좌, 키메라, 마왕, 호문클루스, 그리고 용이 가득한 이 공간에 온전한 인간 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발을 딛었다. 스릉- 하고 검집에서 검을 빼어드는 소리, 그것은 마검 헬스탄- "저건, 흑룡의 비늘!?" 리체르아가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경악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곧 베른헬체이스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베른헬체이스 님. 인간들 사이에 당신의 비늘을 떨어트려 놓다니…!" "베른헬체이스 라고?" 베델이 고개를 살짝 돌려 어둠속에서 재미있다는듯 웃고 있는 흑룡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어찌되든 상관 없다는 듯 다시 눈 앞의 마왕을 직시했다. "너는… 그리 멀지않은 과거에 이곳, 나브락사스에 있었던 그 꼬마로군. 왼팔에 억눌러둔 흑룡의 기운 때문에 나는 너를 주시하고 있었지." "내 왼팔에 살고 있는 이 악마의 정체가 흑룡의 기운이었나? 뭐… 지금 와서 그건 그리 중요한게 아니겠지." "네 어미와 함께 도망친 이곳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 사육되던 과거가 그리워서는 아닐테고…." 마왕의 조롱에 베델은 마검을 들어올려 검끝을 그에게로 향하게 했다. 상위 인간들을 상대할때 잠깐 보이던 그의 두려움은 이제 완전히 가신 후 였다. 그리고 선명한 목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빚까지 모두 한꺼번에 청산하기 위해 왔다. 빌어먹을 마왕." "하, 하하, 하하하-!!" 마왕 카야릴의 웃음소리가 성의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아, 그리고…." 그의 시선이 베델의 옆에 서있는, 인형같이 아무런 표정이 없는 금발 소녀에게로 향했다. 마왕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좀더 진해졌다. "정말 걸작이로군. 그 옆에 있는건, 호문클루스 마법의 프로토 타입(Proto Type)이 아닌가?" 마왕은 에카테야르를 물건 취급하듯 말했다. 그런데, 호문클루스 마법의 프로토 타입… 이라고? 에카테야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당신, 그게 무슨 소리지요? 제가 호문클루스 마법의 프로토 타입이라구요?" "이것참…. 과거의 잔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성가시게 하는군. 하지만 그만큼 반갑기도 하니, 특별히 네 물음에 친히 대답해주지. 그렇다, 너는 내가 나브락사스의 모든 키메라들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연구한 마법의 기초가 되는, 호문클루스 마법의 프로토 타입이다. 다시 말하면, 시험용이란 소리지." "시… 험용?" 시험용이라는 말에, 에카테야르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시험용, 시험용이라…? 마왕 녀석, 여러 사람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어 놓는군. 마왕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헤스켈론의 어떤 귀족가에서 마력에 재능을 보이는 여아를 납치해와 신화시대에나 있었던 호문클루스 마법을 부활시켜 만든것이 바로 너다." "…." "그리고 단순히 시험용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은 너를, 내가 곧 지배할 헤스켈론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내보냈지. 나브락사스에선 하찮은 힘을 가진 호문클루스지만, 헤스켈론에선 강대한 힘을 가진, 말 잘듣는 마법사일테니까." 에카테야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지그시 마왕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을까. 그녀의 기원, 호문클루스에 대해 알게된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네게 무척이나 고맙군. 덕분에 나는 나브락사스의 모든 인간들을 근본적으로 조종하게 되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들의 생명을 내것으로 만들 수도 있게 되었지. 그리고 종국에 나는 헤스켈론의 인간들까지… 호문클루스 마법을 발전시킨 지배 마법으로 그들의 모든것을 차지할 것이다. 전 세계 인간들의 생명을 나라는 하나의 통로를 통해,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지!" 나는 난간을 잡고 있던 왼손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손이 무척 차가웠다. "… 널 죽이겠다, 마왕." 베델은 그 말을 듣고,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했다. "안돼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당신은 그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을거에요!" 리체르아가 앞으로 나서려는 베델을 막아섰다. "당신… 그때 우리를 구해줬던 아가씨로군요. 당신에게도 묻고 싶은게 많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그때 나타난 은발 여자는 또 누군지, 그리고… 칼리체의 시체는 어디 있는지! 지금은 비켜주십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베델은 리체르아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를 밀어냈다. 이미 마왕에게 큰 상처를 입은 그녀는 베델의 손에 비틀거리며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마왕은 느긋한 모습으로, 베델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설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언젠가… 이런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선천적으로 흑룡의 피를 이어받은 너, 그리고 후천적으로 흑룡의 피를 주입받은 나. 사실, 마왕이란 자리에 어울리는 것은, 네쪽이다, 인간. 무엇 때문에 그 팔의 힘을 억누르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것은… 내가 결코 쥐어서는 안될 힘이다. 이것을 내게 허락하는 순간, 나는 분명 마왕- 당신처럼 되겠지." "… 웃기는군." 마왕 카야릴이 처음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힘을, 너는 결코 쥐어서는 안될 힘이라고!? 실로 무지하고, 어리석도다. 그렇기에 네가 잃은 것이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어머니도, 여동생도, 그리고…." "닥쳐-!! 그런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허공에서 베델과 마왕의 시선이 교차했다. 베델은 더이상 분노한 기색을 억누르지 않으며 몸을 낮췄다. 아아- 바로 마왕이, 베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이었던 것이군. 둘 사이에 더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남은건, 서로 전력으로 맞부딪치는것 뿐. # 베델이 마검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마검의 검날을 중심으로 검은 기류가 서서히 휘몰아 치기 시작했다. … 그는 여전히 힘을 원하는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 음차원의 마력은 강렬한 죽음의 기운을 불러들였다. 마왕의 마력과 마검의 힘이 부딪쳐 공간을 왜곡시키고, 대기를 떨려오게 하고 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두는 자신의 마력으로 마왕과 베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의 파동을 차단했다. 평범한 인간이 이곳에 있다면, 채 1분도 되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겠지. 그만큼 이곳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 힘의 파동은 통상적인 것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다. "네가 들고 있는 검도 그 뿌리는 네 왼팔에 깃든 힘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왼팔의 힘은 억누르면서, 그 검은 사용하겠다?" 마왕이 으르렁 거리듯, 적의를 내보이자, 슉슉-! 하고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을 마력이 마치 창처럼 변화하여 베델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베델이 횡으로 검을 휘두르자 파챵, 하는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력화 되고 말았다. "그래, 이 검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존재에게 받은 것이니까. 나는 이것으로… 마왕이라 불리는 너를 이겨 보이겠다!" 가장 소중히 여기던 존재라…. 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저 큰 동작은, 분명 마물이란 이형체를 잡으며 익숙해 졌을법한 움직임. 인간 이상의 마수를 상대하는 그의 검이, 마왕을 향해 날아들었다. 캉-! 하고,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마왕의 손에도 검이 들려 있었다. 검날부터 손잡이까지, 온통 흑색으로 이루어진, 지독히도 기묘한 검. 저것은… 음차원의 마력으로 형상화 시킨, '재앙'그 자체이다. "루루렌칼리체, 도와줄 생각이 없는가?" "글쎄…." 레테닌시에스케의 물음에 나는 왠지 초조해 지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베델과 에카테야르 에게 이미 죽었다고 인식이 된 내가, 굳이 모습을 드러내어 그를 도와야 할까? 나는 베델이 꼭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보기엔 마왕이 하는 짓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뿐, 꼭 잘못된것 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 웃기는군. 내가 인간이 정한 가치 따위를 따를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옳은것이라 해서 내가 그것을 좇을 필요도 없고, 틀린것이라 해서 내가 그것을 멀리할 이유도 없지. 나는…. "이야아아-!" 마왕과 검을 부딪치던 베델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종으로 크게 휘둘렀다. 검에서 나온 거대한 흑색의 마력이 성의 내벽을 손상시키고, 기둥을 잘라놓았다. 쿠구궁- 하며 또다시 지반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후두둑, 하고 머리위에서 돌조각이 떨어져 나는 기대어 있던 난간에서 다섯걸음 정도 물러났다. "베델!" 가만히 보고있던 에카테야르가 허벅지에서 단검을 빼어들어 전투에 가세했다. 백색의 좌 리체르아도 그 전투에 최대한 빨리 가세하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마왕에게 받은 타격이 너무 커서 아직도 회복중이었다. 완전히 죽음에 이른 내 몸은 그렇게 쉽게 고쳤으면서, 자신의 몸은 그렇지 못하다니, 아이러니 하군. 마왕은 손에 들고 있는 '재앙'을 크게 휘두르고 몇걸음 정도 물러 나더니, - 너희는, 나를, 이길 수, 없다! … 만능의 언어? 마왕의 입에서 불완전 하긴 하지만, 분명… 만능의 언어가 발현되었다. 저것은, 우리 드래곤들에게만 허용된 영역인데. 상당히, 불쾌하군. 나는 여전히 구석에 박혀 전투를 구경하고 있는 베른헬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도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 망할 녀석. "이건…!"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초월한 드래곤들만이 사용한다는 언어이지. 이것은 의지를 담는것 만으로 이 언어를 듣는 존재의 행동을 강제한다." 흑룡 녀석, 설마 카야릴에게 저정도 까지 권능을 허락해 주었을 줄이야.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말도 안되는 소리!" 베델의 검이 사방에서 휘어져 마왕에게로 쏘아졌다. 그리고, 발현된 만능의 언어는- 베델의 행동을 강제했다. "베델!" 에카테야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리고… 후두둑-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붉은 선혈. 마왕에게로 향했던 그의 모든 힘은, 만능의 언어의 강제를 받아 도로 그에게로 돌아왔다. 마지막에 몸을 틀어 치명상 만은 피한듯 했지만, 깊게 베인 어깨로 왼팔은 쓸 수 없었고, 오른쪽 다리에 마치 무언가가 찢고 지나간듯한 심각한 상처가 나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은채, 마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넌 내게 이길수 없다 인간." "고작…!" 탁- 하고 거칠게 바닥으로 내려찍은 마검의 검끝이 바닥을 파고 들었다. "고작 말 한마디로, 다 이긴듯 우쭐 대지 마라, 마왕─!!" 휙, 하고 바닥을 살짝 파고들었던 검을, 몸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도록 휘두르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깨어져 순식간에 주변엔 자욱한 돌먼지가 생겨났다. 그리고 베델은 빠른 움직임으로 자욱하게 피어오른 돌먼지 사이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마왕에게 이런 식의 시야 차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눈 앞을 다득 매우는 폭발에 재빨리 몸 주위에 마력장을 둘렀다. 콰과광-! 베델이 검의 마찰로 일으킨 불씨가, 주변을 가득 메운 먼지에 붙어 폭발을 일으켰다. … 분진 폭발? 단순히 가루만 날려 있다고 해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데…. 베델은 이 성을 이루고 있는 돌덩이의 재질과 검으로 일으킬 수 있는 먼지까지, 모두 계산하고 있었던 것일까. 먼지가 가라앉고… 베델은 마력장을 쓸 수 없는 에카테야르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있던 리체르아를 감싸고 있었다.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마검의 마력이 회수되었다. "… 통했나?" 놀랍게도, 마왕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전혀 의외인 베델의 공격이 어느 정도는 통했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뿐이다. 마왕에게 저정도의 상처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 "의미 없는 일이다. 아무리 네가 흑룡의 비늘을 들고 있다곤 하나, 나를 이길 수 있을것 같나? 적어도 네 뒤에 있는 백색의 좌 정도는 되어야 적게나마 가능성이 있을터." 마왕은 비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향한 베델의 공격이 전혀 소용 없다고 말하고 있다. 벌써, 마왕의 상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강함-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포기해라. 네가 무슨 일로 다시 마경에 돌아온건진 모르겠지만,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하고 그 검을 내어놓는다면…." 마왕 카야릴은 자비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통없이 죽여주겠다." 베델은 아무말 없이 다시 검을 앞으로 세운채, 맹수처럼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빨처럼, 흉험한 기운을 뿌리는 마검이 마왕의 검에 부딪쳤다. 지직- 하고, 같은 음차원의 마력끼리 부딪치는 검은 스파크가 튀기고, 순식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방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캉, 캉, 캉- 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대기에 퍼지는 걸로 알 수 있었다. 에카테야르는 그들의 주위로 음차원의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탓에 더이상 그 전투에 끼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베델…!" 그녀의 간절한 외침. 마왕의 몸에서 순간, 음차원의 마력이 크게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휘둘러진 마왕의 '재앙', 그 힘에 멀리 튕겨져 나간 마검. "아, 안돼-!" 음차원의 마력이 이글거리는 검이 베델에게로 찔러져 들어왔다. 베델은 이를 악물더니, 왼팔을 들어올려 그 검을- 쩌엉--! 하는 소리. 아니 이것은 청각으로 감각하는게 아니다. 온몸으로 감각하는…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 마왕의 '재앙'과 베델의 왼팔의 충돌에 의해 순간적으로 아주 강력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검의 기운에 의해 찢어져 나간 옷과 붕대 아래로 드러난 것은, 칠흑처럼 검은 '불길함'이었다. 저런 모습이라 붕대를 감고 다닌거였군. 흉측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베델?" 그가 슬픈 얼굴로 드러난 왼팔을 가리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에카테야르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굉장하군, 순수한 흑룡의 피가 발현된 힘은…." "내게는 저주스러운 것이지." 바닥에 떨어진 마검을 집어들고, 베델이 씁쓸한듯 중얼거렸다. "정말 불공평 하단 말이지. 내가 그토록 원했던걸, 너는 '저주'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야." 성 내부는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분진 폭발에 마력에 의한 여파 등으로 멀쩡한 것이 없었다. 내가 서있는 나선형 계산의 아래쪽도 모두 부숴져서 통상적인 방법으론 내려갈 수 없겠군. "뭐, 됐다. 이제 이 재미없는 장난질을 끝내지. 죽어라, 인간." 마왕의 손에 거대한 흑색 구체가 모여들었다. 저것은, 말도 안되는 거대한 양의 마력이 모여들어 생성된, 선명한 죽음의 결정체- 베델은 지쳐서 미약하게 경련하고 있는 팔로, 다시 마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베델에게로 쏘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땅이 찾아와야 할 파멸은, 결국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막아내었으니까. "칼… 리체?" 나는 아직… 아직까지는 인간을 가장하고 있다. # "네가, 네가 도대체… 어떻게!!" 부릅뜬 눈동자, 그리고 쉴새 없이 떨리는 동공. 역시, 이미 죽어버렸을 내가 다시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었을까. 나는 마왕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저릿한 손을 가볍게 털며, 그에게 말했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다시보는것 같군요, 베델."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베델의 갑작스런 행동에 약간 놀랄수 밖에 없었다. 눈을 잠깐 깜빡인 사이에 어느새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손뒤로 돌린채 나를 끌어 안고 있었다. 쉴새 없이 두근거리는 베델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얼굴에 전해져 왔다. … 너무 힘차게 끌어안은 나머지 고통마저 느껴지는군.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구나, 칼리체! 어떻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으로, 신이란 존재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 어리석은 인간.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군. 그가 내 생존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는게 느껴진다. "내 소원을 들어주었군요, 칼리체." 에카테야르… 베델이 나를 놓아주자 그녀가 물기어린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 우는건 처음 보는군. 눈물이란 극단적인 감정의 표출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치 않은 것이다. "소원?" "당신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가지 들어준다고 했었잖아요." 그래,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마경의 숲속에서 인간들이 만든 내기라는걸 잠깐 했었지. "그때, 죽어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당신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였어요. 내 소원은… 당신이 살아나는 거니, 반드시 그 소원을 들어달라고."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때는 이미 죽어버린 뒤여서,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되살아 난게 아니다? 수많은 말들이 머리속에 떠올랐지만, 그 중에 입밖에 낼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와 맞서겠다는 거요, 루루렌칼리체." 나를 배려한걸까, 마왕은 나를 백룡이라 부르지 않고 루루렌칼리체라 불러주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내 정체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 마왕 카야릴은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강대한 힘을 가진 백룡, 화이트 드래곤인 내가 그를 적대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아니, 그는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진정 '용'으로서 그를 제지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아니, 진정으로 너와 맞설자는 내가 아닌… 여기있는 베델이란 인간이다." 곳곳에 입은 크고 작은 상처, 서있는것 조차 힘이 들어 보인다. 나는 마왕에게서 등을 돌려 베델의 정면에 서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여러가지 감정이 보인다. 인간은 놀랍군. 저렇게 많은, 상반된 감정을… 한 얼굴에 담아낼 수 있으니까. "…." 단순히 마검만으로는 마왕을 이길 수 없다. 그가 품고 있는 어둠은 700 년을 이어져 내려온 의지.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마경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생명. 카야릴은 정말로, 강한 인간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베델, 나를 믿을 수 있나요?" "뭐?" "당신이 구하려는 자들은 누구죠. 마경 밖의 인간, 마경 안의 인간, 아니면 마왕에게 생명까지 저당잡힌 수많은 키메라들 까지?" 그는 강철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들, 모두." "아무도 당신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걸 몰라요. 당신은 당신의 노력을 전혀 몰라줄 그들과, 에카테야르, 그리고… 나를 '믿을' 수 있나요?" 내가 묻는것은 단순한 신뢰에서의 믿음이 아니다. 그보다 좀더 근본적인, 자신과 타인 모두를 포함한- 굳건한, 믿음. 나는 그에게 그것을 묻는다. 베델은 나를 내려다 보고,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부드럽게, 그리고 선명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믿겠다." 믿는다가 아닌, 믿겠다 였다. … 나는 그것으로, 그의 의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나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다. "칼… 리체." 베델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검을 들어요, 당신은 마왕을 쓰러트려야 하잖아요?" 난 그의 뒤로 물러섰다. 그가 다시 검을 앞으로 세우고, 검끝을 마왕에게로 향했다. 마왕 카야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무리에요, 루루렌칼리체 님!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 잖아요!" 백색의 좌… 나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베델은 이제 전처럼 싸울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출혈, 그리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커다란 상처로 그의 정신은 혼미한 상태이겠지. 베델이 다시 마검에 음차원의 마력을 두르려 했다. "그러지 마요, 베델." "하지만…." 마검의 힘이 아니라면, 나는 마왕의 상대가 되지 못해- 라는 건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베델, 네가 마왕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마검 자체에 있지 않다. "나를 믿는다고 했나요." "…." 잠시 멈칫 거리던 베델은, 끌어 올리던 음차원의 마력을 서서히 지워 버렸다. 이제 마검은 보통의 검보다 조금더 날카로울 뿐인, 평범한 검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대로, 마왕을 베어버리세요." "뭐?" 나는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베른헬체이스의 비늘… 그것은 분명, 대단히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그것으론 결코 마왕을 이길 수 없다. … 검에 스며든 나의, 백룡의 피. 그것은 나의 힘의 원천이자-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 우리 드래곤의 힘의 원천이다. 통상적인 힘과는 다른 백룡의 피는 그 어떤 힘보다 의지에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베델, 네가 말한 믿음이 진실이라면- 모두를 구할, 모두를 믿겠다던 그 믿음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마검에 깃든 나의 피는 분명, 네가 마왕을 벨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 베델은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는 베델의 눈빛이 무척이나 선명하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왕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앞으로 걸어나오는 베델을 바라보며 강대한 힘을 끌어 올렸다. 지금까지는 비교도 안되는 강렬한 음차원의 마력- 마왕 카야릴도, 무언가를 느낀걸까.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던 베델이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마왕의 몸 주위로 떠오른 음차원의 마력이 여러개의 창으로 변화하여 빛살처럼 베델에게 날아들었다. 베델이 들고 있는 흑색의 검이, 베른헬체이스의 비늘에서 서서히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저것은, 나의 색인… 백색. 백색의 좌의 빛마저 살라먹던 어둠이 베델이 쥐고 있는 빛엔 감히 대항하지 못한채, 쫓겨 나간다. 순식간에, 베델은 마왕의 눈앞에 도달했다. "…." 마왕은 아무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수많은 힘들을, 베델에게로 날렸다. 저 수많은 신비들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 하나, '죽음'. 하지만 베델은 오직 믿음만을 담은 검으로 그 죽음을 모두 빗겨 낸다. 심지어 마왕이 발현했던, 만능의 언어까지- 그리고 그의 검은, 마왕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죽어라, 마왕!" 베델은 검을 내지르며 그렇게 말했고, "기꺼이." 마왕은 마지막 저항마저 그 빛에 의해 부숴져 버리자, 양팔을 벌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베델의 검이 마왕의 몸 정중앙을 관통했다. 투둑, 투둑- 하고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진다. "마, 마왕님…." 지금껏 넋나간 표정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날개 여자가 주춤거리며 마왕에게 다가갔다. 베델이 그의 몸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내자, 그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무너져 버렸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 "… 역시, 나는 아직 멀었군. 고작 검에 몸이 관통하는 걸로… 이렇게 죽음에 이르니 말이야. 결국, 700 년에 걸친 나의 영원은 이렇게나 덧없는 것이었군." 후후 하고 웃으며 마왕, 카야릴이 자조했다. 입에서도 울컥, 하고 피가 새어나왔다. "당신이 졌소, 마왕." "그래. 내가 졌다, 인간. 아니… 베델." 나는 왠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카야릴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긴 흑발이 어지럽게 바닥에 퍼져 있었다. 의복은 벌어져 하얀 속살을 내비치고, 상처에선 피를 꾸역꾸역 뱉어내고 있었다. 마왕은 결국, 인간에 불과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카야릴, 너는 어째서 드래곤과 같은 영원을 바랬지?" 점점 흐려지는 듯한 시야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바닥에 쓰러진채 나를 똑바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 글쎄, 잘 모르겠군." "…." "나는 왜 영원을 바랬을까? 그 이유는, 내가 영원을 바랬던 이유는 700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오며 모두 잊어버렸다." 베델은 마왕의 몸에서 뽑은 검을 바닥에 힘없이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는 검을 줍지 않은채, 똑바로 죽어가는 마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줄곧 영원을 바랬던건, 단순히 지금껏 해온 관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기나긴 세월에 결국 내 근본을 이루는 것마저 잃고, 그저 생명을 이어나가기만 했을 뿐이지. 종국에, 영원으로 이루려 했던 내 목표는 잔인한 시간 앞에 영원,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왕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나는 어쩌면, 누군가가 이런 나의 영원을 끝내줄 이런 상황을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군…." "마왕님!" 날개 여자가 비명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눈물을 터트렸다.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마왕을 위하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이곳, 마경에 사는 '상위 인간'들의 모든 것은, 마왕이었다는 걸까. "아아- 더이상 그 명칭을 나를 부르지 마라." 마왕은 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영원을 잃어버린 나는 더이상 마왕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 카야릴일 뿐이지." 하아, 하고 그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점점… 추워 지는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어간다. 그리고 찾아온, 검은 침묵- # 카야릴이 바닥에 쓰러지고 숨을 거둔 후, 이 공간엔 무거운 적막만이 흘렀다. 어둠속에서 베른헬체이스는 어느새 모습을 감추어 버렸고, 레테닌시에스케는 이쪽으로 부터 등을 돌리고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무하네요…." 에카테야르가 바닥에 떨어진 마검 헬스탄을 주워 들며 말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죽어버린 마왕의 시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끝없이 영원을 바라며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했던 자의 종말은, 결국… '인간'이었다. 카야릴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 에카테야르의 말대로다, 남은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먼지나 돌조각 같은, 허무함 뿐. "끝까지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군요." 백색의 좌, 리체르아가 '광휘'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자신의 영원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 자신의 영원을 위해 흑룡의 피를 이용한 키메라를 창조했다. 그리고 헤스켈론이라 불리는 마경 밖의 세계 역시 정복하려 했지. 하지만… 끝은 어떠했는가. 팔을 벌리며, 베델의 의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죽음 앞에선 그의 눈빛에… 후회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마왕은 죽고, 세계의 평화가 지켜지게 되었구나." 무척이나 싸늘하지만, 아름다운 음색. 그리고 약간 웃음기가 깃든 목소리였다. 레테닌시에스케가 얼음장 같이 차가운 푸른색 눈동자로 이곳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말안에 깃든 웃음기는… 비웃음일까, 아니면 인간들을 향한 축하 인걸까. "렌 님…!" 은룡은 잠시 리체르아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마치 그림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레테닌시에스케는 애초에 백색의 좌의 안전을 걱정하여 동행한 것이니 그녀의 안전을 위협할 요소가 사라진 지금, 계속 이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겠지. 백색의 좌는 내 시선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렌 님은 항상 저런 식이시니까요…." "돌아갈거니?" "네, 돌아가야지요. 원래 저는 마왕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곳에 왔던 것이니까요." 리체르아는 쓰게 웃으며 정작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죠, 하고 덧붙였다. "베델… 이라고 했던가요, 당신." "…." 아무 대답도 없는 베델에게 리체르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백색의 좌, 리체르아 벨크세른 입니다." "백색의 좌라는 건…." "들어본적이 있어." 베델이 에카테야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의 과거를 괴롭히던 마왕의 존재를 손수 지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색의 좌와 흑색의 좌, 인간이라는 종족을 초월한 힘을 가진 자들. 그 이름은 아주 머나먼 과거 부터 내려왔으며, 현재 까지도 전설로서 남아있지. 설마, 실제로 존재했었을 줄은 몰랐지만…." "어머, 그렇게 간단히 믿어주시는 건가요?" 베델은 에카테야르로 부터 마검 헬스탄을 건네 받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검에서 나온 흰빛… 그것에 이 검의 어둠이 구속 받고 있으니까. 그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자신이 백색의 좌라 해도 믿을 수 밖에 없겠지." 그는 쓰게 웃으며 마검을 검집에 집어 넣었다. 웅웅- 하고 마검에서 옅게 떨리던 소리는 그것으로 완전히 멎어 버렸다. 놀랍게도 베델은 이제 마검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왕을 벨 때의 당신은 백색의 좌라 불리는 나보다 강했어요." "…." "당신은… 정말로 강한 사람이군요. 칼리체 님과의 대화, 모두 들었어요. 당신은 당신만을 위해 마왕을 벤게 아니었어요, 모두를 위해…." 그래, 그녀의 말대로 베델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다. 백색의 좌 처럼 선천적으로 강대한 신비를 부여받지 않은 인간이 이보다 더 강할 수 있을까. "그만하시오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되었소." 베델은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모를 눈동자로 이미 숨을 거둔 마왕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희미한 미소마저 띈듯한 흰 얼굴…. 베델의 입이 아무런 소리 없이 벙긋 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입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너의 영원은 내가 가져가겠다, 마왕' … 과연 베델이 가지고 가겠다는 영원은 무엇일까. 분명, 마왕이 말하던 영원과는 조금 다른 것이겠지. # 우리는 리체르아와 헤어졌다. 딱히 동행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우리의 새로운 목적지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 마왕이 사라진 마경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아니, 마경은 언제든 아무 소리 없이 무척이나 적막한 곳이었지만… 이곳에 흐르던 분위기가 크게 달라져 버렸다. 여전히 마경엔 큰 '어긋남'이 주위에 가득 퍼져 있었지만…. 전과 같은 큰 불길함은 느낄 수 없었다. 마왕은 말 그대로, 정말 이 마경을 '지배'하고 있던 모양이군. "정말… 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마왕이라는 그 괴물같은 자를 베델이 해치운것도, 죽은줄만 알앗던 칼리체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도…." 에카테야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정말, 칼리체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베델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잠깐 괴로움이라는 감정이 맺혔다 사라진다. "… 그런가요?" "그렇게 태연히 그런가요, 라고 되물을게 아니잖아요!" 깜짝 놀랐다. 에카테야르가 화난 표정으로 내게 달려들어 손날로 내 머리를 딱-!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리쳤다. 그것이 무척이나 아파서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뭐, 칼리체 다우니까…. 하지만 이번엔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다." 베델은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에카테야르와 마찬가지로 손날을 이용해 내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나는 두명에게 맞아 열이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잠시 뒤를 바라보았다. 주인을 잃었음에도 아무일 없다는듯 허공에 떠있는 부유성…. 시간이 흐르고, 마경 밖의 인간이 마경을 개척하며 이곳에 까지 이르게 되면, 저 성은 다른 모습으로 변하거나 새로운 모습을 맞이하게 되겠지. 아니면 마왕 아래에 있던 여러명의 영주들 중 한명이 저곳을 차지하거나 말이다. … 마왕이 죽은 후, 1 영주라는 인물은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그의 시체를 수습한건 날개 여자 였고, 그녀는 베델에게 반드시 마경안의 '사육'되는 인간들을 해방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좋은 결말인가…? 드래곤인 나로서는 이 결말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인 이들이 판단할 일이겠지. # 우리는 마경을 빠져나와 다시 아나키스트 왕국으로 향했다. 아나키스트 왕국으로 가자는 내 말에 베델도 에카테야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니, 그것 말고도 그들이 내게 묻지 않은것은 굉장히 많았다. 도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 돌아온건지, 그리고 내 정체는 무엇인지…. 베델은 마왕을 이긴 그 힘이 마검의 것이 아닌, 검이 머금은 내 피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정체를 말하는 순간, 이 묘한 관계는 금방 깨어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나키스트 왕국으로 향하는 이유는, 현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니까. "…." 달그락, 달그락 하고 마차 안에 기대어둔 짐이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잡아 소리가 안나게 제대로 세운다음 다시 푹신한 짚단 위로 올라와 누웠다. 우리는 지금 한 친절한 농부의 마차를 얻어타고 있었다. 펄럭이는 천막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 마경안에서 보던 하늘과는 과연, 그 느낌이 다르다. "오랜만의 평화네요." 바로 옆에서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나를 바라보는 두개의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 했다. "그렇네…." "칼리체, 당신이 마경에서 찾고자 했던건… 찾았나요?" 그래, 찾았지…. "응." "다행이군요. 나는… 마경에서 결국 내 기원을 찾아 내고 말았지만,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에카테야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단조롭고, 얼굴은 평온해서 나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해 볼 수 없었다. "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진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에카테야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에 하는 말은… 꼭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겠지. 글쎄…. 나는 그 물음에 답을 해줄 수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할 건지는, 스스로가 정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에카테야르, 너는 호문클루스라는 네 기원에 대해 알게된 것이… 후회되니?" 배낭에서 숱통을 꺼내어 물을 마시던 베델이 문득, 그렇게 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을 바라보며 에카테야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진실이 항상 좋은것 만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진실이란건 꾸며진 거짓보다 씁쓸할 때가 더 많다. "… 아뇨, 후회하지 않아요." 에카테야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선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은 그것으로 된거야. 후회하지 않는다는건, 정말… 대단한 것이니까." "베델, 당신은… 후회하지 않나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불쑥 그렇게 물었다. 베델은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왕을 저지했어. 마경 밖의 인간들을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육되던 인간들을 구했어, 마왕에게 강력한 마법으로 지배받던 그들도… 결국엔 깨닫게 되겠지. 그럼에도 나는, 후회해." "당신은 잘해냈어요 베델! 칼리체의 말대로 아무도 당신의 노력을 알아주지 못해도, 당신은…!" 에카테야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하지만 베델은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 후회하고 있다고? "남이 알아주지 못한다는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다시 입을 열었다.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부조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악을 향하는 검은 누구보다 빠르게- 믿음은 불변의 다이아몬드와 같이 굳세게, 나의 신념은, 결코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검일지어니." 저것은… 사육되고 있는 인간들을 보았을때, 베델이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던 말이다. 나는 누워 있던 짚단에서 몸을 일으켜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마경밖으로 탈출했을때, 나에게 검을 가르쳐줬던건 이미 퇴역한 늙은 노기사 였어." "…." "그는 이미 늙어서 내게 제대로된 검술을 가르쳐 줄순 없었지만, 그 말만큼은 아주 똑바로 가르쳐 주었어. 발음만 틀려도, 아주 호되게 혼이 날 정도로 말이야." 과거를 회상하는 베델의 눈이 흐려진다. 즐겁다는듯, 그의 얼굴이 또다른 미소가 피어 오른다. "기사가 되길 원했나요?" "어, 응. 그랬었지. 하지만 평민은 기사가 될 수 없더라고." 내 물음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랬었군… 베델은 원래, 기사가 되고 싶어 했구나. "정말 바보처럼 매달렸어. 마경에서 탈출해 백지 같던 내 머리속을 가득 매운건, 오직 그 기사도란 것 뿐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바보같지만…." "아뇨, 결코 바보같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베델은 잠시 놀란눈으로 에카테야르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아냐, 역시 다시 생각해도 바보같아. 하지만… 나는 평생 그것을 버릴순 없을것 같아." "…." 그것이 이 인간을 지탱하던 것이었나. 어릴적 퇴역한 노기사에게 배운 '기사도'라….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다. 어리석은 인간. 하지만 700 년을 살아오며, 강대한 음차원의 마력을 사역하고, 마경을 지배하던 마왕을 무너트린건 베델이란 인간의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믿음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입가를 매만졌다. 내 입가엔 또다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후회해. 바보같다고 생각하는 기사도를, 평생 믿을거라 말하는 어리석은 나이니까…." 어리석은데다, 오만하기 까지 한 인간이로군. 하지만 내 기분은 꽤 유쾌했다. 나는 다시 푹신한 짚단에 누운채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나키스트 왕국의 수도, 아나킨이 보이고 있었다. 마경에서 빠져 나온지도 벌써 꽤 되었군. 왠지 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안그래도 빠른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는것 같다. 지금 느끼는건… 아쉬움이란 감정일까? 글쎄…. # 아나킨으로 들어가는 저 성문…. 보수한것 같지만 공성전의 여파로 희미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베델과 내가 저곳을 지키고, 에카테야르를 구해냈었지…. 그렇게 잠시 과거의 기억에 잠겨 있는 사이, 마차는 금방 성문을 통과했다. 아나킨의 내부는 별로 달라진게 없었다. 인간들은 여전히 활기에 가득차 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왕궁의 모습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릴렌 공주… 결국 왕권을 수호하고, 강화시키는데 성공한 것일까? "감사했습니다. 여기 약소하지만 사례를…." "허허, 그저 태워주기만 했을 뿐인걸. 사례 같은건 주지 않아도 괜찮네." 마차의 주인은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베델의 사례를 거절했다. 그는 우리를 거리 한복판에 내려주고는 다른 볼일이 있는지 어딘가로 가 버렸다. "이것참…." "그런데 우리…. 그 때, 그런식으로 이곳에서 도망쳐 나왔었는데, 다시 이렇게 돌아와도 괜찮을 까요?" 에카테야르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고 있는 베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랬지… 어쨌든 우리는 이곳에서 도망쳤던 몸이다. 그 때 이후로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 아무튼, 조금 껄끄러운건 사실이지. "괜찮을 거야." 나는 느긋하게 대답하며, 왕궁 쪽을 바라보았다. 현자 베르센크, 내가 이렇게 인간을 가장하며, 인간들의 사회를 떠돌게 한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그의 질문…. 나는 지금, 그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왔다. 즉,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순간, 내가 더이상 인간을 가장할 이유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베델, 에카테야르와의 관계는… 연약한 유리처럼 산산히 부숴져 버리고 말겠지. "일단은 여관 부터 잡을까요?" "응, 그렇게 하자. 그런데… 좀 싼 곳으로. 이제 돈이 거의다 떨어졌거든." 베델이 난감한듯, 에카테야르의 제안에 그렇게 대답했다. … 크게 줄어든 재화가 우리의 여정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군. # "어서오세요!" 여관은, 굉장히 허름하고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간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 이곳은… 주점을 겸하고 있는 모양이군. 여러 인간들이 잔을 부딪치며, 쓴 액체를 삼키고 있다. … 역시 나는 저 술이라는 것을 왜 일부러 마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판단력을 흐트러 트리고, 신체의 제어를 힘들어지게 하는 저것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시는 걸까. 아마도 드래곤인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어라? 너는…." 우리가 들어오자 묘하게 조용해진 여관의 분위기에 조금 불편해 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전보다 훨씬 길어져 점점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백발을 뒤로 넘기며, 내게 말을 건 인간을 바라보았다. 처음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때, '어서오세요!' 하고, 힘차게 인사했던 인간이군. 붉은 머리카락,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매… 하지만 이제는, 그때보다 인상이 크게 부드러워 졌다. "로제?" "칼리체?"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무, 무사 했구나! 난 그 전투 이 후로 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서, 어떻게 된 줄 알고…." "너야 말로 무사했구나…. 어머니는, 건강하시니?" 로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때의 그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제는 완전히 건강해 지셔서 일을 다니실 정도야!" 다행이군. 하나뿐인 목숨을 걸며 소년병에 지원했던 그의 의지는 헛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꽤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로제, 손님들을 계속 그렇게 붙잡고 있으면 어떡하니?" "아, 죄송해요!" 로제는 카운터 쪽을 향해 소리치더니, 있다가 다시 얘기하자고 내게 속삭인 후 황급히 일을 하러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음식 접시나 술잔을 들고 테이블을 왔다갔다 하거나,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구나. 꽤 힘들어 보이지만, 소년병 같은것 보다는 훨씬 안전한 일이지. 전과 같이 빵을 훔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칼리체, 아까 그 소년은…?" 주인에게 숙박비를 지불하고 열쇠를 얻어온 베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성벽에서 소년병을 하던 애 였어요. 길거리에서 곤란한 상황을 도운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만날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죠."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로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 스쳐지나가던 인연이, 다시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해가 지고- 언제나 처럼 밤이 찾아왔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라 밤이 되어도 쌀쌀한 공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난 반팔의 얇은 셔츠를 위에 입고, 방 안 창문앞에 섰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아직도 인간들의 통행이 많아 활기가 가라앉질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인간 사회에 머무는 동안 자주 이렇게 창문 앞에 서서 멍하니 거리의 인간들을 바라보곤 했었지…. 지금처럼 내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바라 보았던 인간들은, 모두 어땠지? "…." 하아- 베델과 에카테야르는 내가 목적지를 다시 아나킨으로 잡은것에 대한 이유같은건 전혀 묻지 않았다. … 이제 끝낼 시간인가. 인간으로서의 가장도, 그들과 함께 했던… 길면 길고, 짧으면 짧았다고 할 수 있는 여행을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년 이란 시간은 금방 흐르고, 그 이상의 수명을 가지지 못한 인간인 그들은, 금방 멸망에 이르고 말겠지. 그것은 결코 빗겨낼 수 없는 필멸자의 숙명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한줌의 흙이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망각을 모르는 나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겠지. 내 안에서 그들은, 영원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 재미있군. 드래곤이라는 것은 어떤 무언가를 영구히 보존하는 그릇 같지 않은가. 자신은 수천, 수만, 수억의 생명을 기억하고, 또 그만큼의 죽음을 기억하며 말이다. 뭐, 쓸데없는 생각은 이제 관두고 슬슬 현자를 찾아가 보기로 할까. 나는 가볍게 허공에 손을 저어, 시공간의 문을 열었다. 이제와서 힘을 억누르고 인간 행세를 하는것은 우습겠지- 이미 이 도시, 아나킨은 나에게 장악되었다. 이곳에서 현자가 있는 위치를 추적하는 것 정도는 숨을 쉬는것보다도 더 간단한 일이다. 타닥, 타닥- 하고 끊어져 가는 시공간의 끈이 보인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나는 앞으로 한걸음 발을 딛었다. 눈을 감고, 뜸으로서 시야를 닫고, 다시 개방하자 허름했던 여관 방안이 고급스럽고 정갈한 집무실 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책상위에 앉아서 양피지 조각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베르센크는 갑작스럽게 내가 나타나자 당황해 할말을 잃은듯 이곳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책상위에 가득 쌓여있는 문서들과 노란색 액체가 담겨 있는 컵…. 툭, 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난리가 날것같은 위태한 모양새로군. "백룡… 님?"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응, 나다. 인간의 현자." "아, 물론 알기야 알지요. 너무 갑작스럽게 등장하셔서 굉장히 놀랐을 뿐입니다."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떤 열망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더 예뻐 지셨군요." "… 그런 말은 인간 여성에게나 어울리겠군. 재미 없는 농담은 그만 두지, 현자." "…." 마음에도 없는 농담이었다는 듯, 베르센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감정없는 인형처럼…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강렬한 열망이 그런 느낌을 모두 해소시킨다.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를 몸소 찾아오신건 역시… … 그때 했던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기 위해서 입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굳게 닫힌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허공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마력으로 의자를 생성시키고, 그곳에 다리를 꼬고 걸터 앉았다. 이제와서 용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주저함은 없다. … 인간으로서의 가장은 이제, 끝날테니까. "그래. 지금, 네 질문에 답을 주겠다." 그의…, 베르센크의…, 인간 현자의 얼굴에 어떠한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저것은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질문에 대한 환희? 아니면…. 현자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베르센크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내가 잠깐동안 걸어왔던, 과거 행적의 근원이 되는 물음을 다시 한번 던졌다. "인간은, 무엇으로 증명되는 겁니까." 나는 대답했다. "인간은, 인간의 존재는… 믿음으로 증명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인간 현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믿음, 믿음이라고…!? 아무말도 없었지만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마치 내게, 그렇게 따지는것 같았다. "어째서 입니까. 어째서 인간이… 믿음으로 증명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만능의 언어를 아는가? 내 의지로 그에게 내 의사를 전한다. 이것은,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사용하는 저급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신비- 만능의 언어. "만능의 언어…? 들어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주먹을 쥐며 고개를 흔든다. 저 흔듬은 무엇에 대한 부정인 걸까- 아무튼, 대답은 저런 짧은 문장으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겠지. 나는 입을 열지 않고, 우리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내 뜻을 그에게 전했다. - 이것이 바로 만능의 언어이다. 내 뜻을, 한치의 거짓없이 전할 수 있는 완벽한 언어이지. 이 언어에 결코 거짓은 없으며, 사용자의 모든 진실이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그런게…!"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베르센크는 내가 말하는 만능의 언어를 부정하고 있는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면 '만능의 언어가 있다'라는 의사를 그에게 전하는 수단이 되는 언어가 바로 '만능의 언어' 이니까. 현자는 지금 내 말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란 것을, 근본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 더이상 이 언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인간들은 우리 드래곤과 같은 만능의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또한 근원으로 부터의 링크가 거의 없는 너희들은 근원과의 링크가 상대적으로 강한, 요정들처럼 대략적으로나마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지도 못하지." "그… 렇습니다. 저희 인간들은 칼리체 님이 말씀하신대로 드래곤들 처럼 만능의 언어를 가지지 못했고, 근원과의 링크도 없습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너희 인간들은, 완벽한 소통의 언어가 없는 인간들은, 근원과의 링크가 없는 인간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그리고 행동을 너희들 만의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길게 늘어진 나의 백발을 손으로 둥글게 꼬며 말을 이었다. "그 어떤 누구도, 상대방이 겉으로 내뱉는 말과 생각이 일치하는지 알지 못하지." "…." 이제 현자는 아무말 없이 내 말을 듣고만 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너의 부모가, 연인이, 친구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는가?" "그… 것은, 어떤 위대한 마법으로도, 결코 증명해 낼 수 없는 문제 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소통이 없는 인간은, 자신의 사고를 제외한 그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 "그렇기 때문이다." "예…?" 그렇기에- " << 그렇기에 인간은, 상대를 믿는것 밖에는 할 수 없지 않은가? >> " 순간적으로, 현자의 얼굴이 멍해진다. 다른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상대도 나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인간은 서로를 불신해야 하는가? 전란에 빠져 혼란해진 나라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귀족들을 상대로한 도적질을 자행하던 기사, 귀족들의 손에 흔들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한 공주, 아버지를 위한 마음에 본성마저 흔들릴뻔한 가녀린 소녀,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공화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인간, 자신의 과거를 잃고, 살아갈 이유를 잃은 호문클루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해도, '베델'이라는 과거 위대했던 영웅의 이름을 가진채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는 존재를 목숨걸고 저지시킨 인간…. 내가 지금껏 보아온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근원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무엇을 믿은 것이었지? 인간은 타인을, 그리고 세계를, 그 어떠한 수단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 보아라. 나는 만능의 언어로, 그에게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을 전했다. 경악하는 인간의 현자에게로 내 모든 느낌이 그에게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한번 대답하겠다." "…." 잠깐의 침묵 뒤에, 그는 이제 꽤 담담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믿음으로 증명된다. 바로 이것이… 드래곤인 나의 대답이다, 인간의 현자여." 나는 최근에 깨닫게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물었다. "만족하는가?" # "그렇습니다. 아니, 그랬지요…. 인간은 항상 믿는것 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베르센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했던 그의 표정이 한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언가에 대한 불신? 의지? 믿음? 당혹? 분노? …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그를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서서히 사그라 들고, 그의 얼굴은 다시 담담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담담함은 무척이나 공허한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내가 지금 앉아있는 마력의 의자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어느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 믿음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구나, 인간의 현자여." 나는 허공에 생성시켰던 마력의 의자를 파괴해 버리며 다시 두 다리로 바닥에 섰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공허한 눈동자… 글쎄, 베르센크는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절망했다기 보다는, 단지- 그의 믿음을 찾지 못한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이 믿음이란 것을 전해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은- 베르센크, 너 스스로 찾아야할 것이다." "…." "이것으로 너에게 대답을 주기 위한 나의 여행은 끝이났다. 비록 너의 질문 때문이긴 했지만… 그간 인간들에게서 겪은 느낌은 꽤나 씁쓸한것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은, 꽤 즐거웠지." 하아- 하고 많은 말을 한 뒤에 느껴지는 힘겨움에 잠시 한숨을 쉬고, 나는 현자에게 말했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너희 인간들은." 그래… 그리 나쁘진 않았어. # 내가 돌아가고 난뒤에 현자는 어떤 얼굴을 했을지 난 예상할 수 조차 없었다. 그는 결국 내 대답을 납득하지 못했을 수도, 아니면 납득했을 지도 모르지. 뭐, 이제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나는 그의 요청대로, 대답을 해주었으니까. "…." 현자에게 대답을 해주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인지 주변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왕궁…. 찌르르- 하고 우는 풀벌레 소리가 왠지 처량하게 들려온다. 이왕 이렇게 온것, 전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정원이나 다시 가보는게 어떨까…. 호수안에 비친 달이 참 아름다웠지. …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며 나도 꽤 감상적이게 되었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결국 발걸음을 그때의 그 정원으로 옮겼다. 부스럭 거리는 풀소리, 그리고 약간의 수고로움과 함께, 내 눈앞엔 아름다운 정원이 위치해 있었다. 아, 그런데… 미리 와있던 인간이 있었군. "당신은…?" 처음에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던 시선이 이윽고 놀라움으로 바뀐다. 푸른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마릴렌 공주였다. "당신이 지금 여길 어떻게!?" "마릴렌 공주… 당신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것을 보면, 이 왕국은 완전히 당신의 손에 장악된 모양이군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표현에 상당히 거리낌이 없군요, 당신. 아무튼 간에…." 마릴렌 공주의 시선이 나를 떠나, 어딘가를 쫓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듯, 잠깐 동안 사방을 둘러보다 이윽고 다시 나에게 멈추었다. "당신이 있다는 것은, 베델… 도 아나킨에 와있다는 것이겠지요?" 베델…? 내가 있다는 것이 어째서 베델도 있다는 것으로 귀결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베델이 아나킨에 와있는것은 사실이니,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다행히도 그때 추격자들이 당신들을 잡지 못한 모양이군요." "공주님이 손을 썼던 것이죠?" "아닙니다. 나는 그 추격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 거짓말을 하는군. 딱히 용의 힘을 억제하지 않고 있는 나는 이런 간단한 문장의 거짓, 진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 그녀의 거짓말은, 아마도 자존심 때문인 걸까. 정말, 인간이란… "베델은 왜 찾는 것이지요?" "나는…." 마릴렌 공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를 이 왕국의 기사로 임명하고 싶습니다." … 기사 베델이라? 기사 베델… 나쁘지 않군. 아아, 정말 나쁘지 않다. # "나를… 기사로 임명하겠다고?" 다음날 아침, 베델은 스프를 떠먹고 있던 스푼을 탁, 하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마릴렌 공주가 그러더군요. 그녀는 오늘, 베델을 왕궁으로 데려와달라고 제게 부탁했어요." "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베델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맑았고, 여관 안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눈가가 찌푸려 졌다. 뭘 그리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기사라는 직책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닌가. 역시 이 인간은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기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잖아요."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에카테야르도 갑자기 고민에 빠진 그를 이해할 수 없는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으로 빵을 뜯었다. "글쎄, 이제와서 기사가 되기는 좀 그렇고…. 그도 그런게 나는 지금껏 용병으로만 살아와서 기사들이 지켜야할 예의나 규범같은게-" "잠깐만요." 에카테야르가 베델의 말을 끊으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빵을 뜯었다. 마치 하늘 같이 푸른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사납게 쏘아보고 있었다. 하음- 왠지 나른한 기분이군. 나는 몸을 뒤로 빼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도 기사도를 생각하며, 지키던 당신이 지금 스스로 기사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요, 설마?" "아, 그건…." 베델이 우물쭈물 하며 에카테야르의 시선을 피했다. "에카테야르의 말대로에요. 베델, 당신은 기사가 될 자격이 있어요." "하지만 평민은 법적으로 기사가 될 수 없…." 답답한 인간이군. 무엇 때문에 자신이 기사가 되는것을 꺼려하는 것이지. 나는 탁자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베델은 곤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뭐 때문에 기사가 되길 싫어하는 거죠?" "싫어하다니, 난 그저…." "당신은 분명히 기사가 되는걸 그리 탐탁치 않아 하고 있어요. 과거에 그렇게 열망했던 기사라는 것이 실제로 눈앞으로 다가오니, 막상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가요?" 단숨에 그를 몰아 붙여 본다. 베델이라는 인간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척이나 이상한 인간이어서 이런식으로 대답을 강요하지 않으면, 본심을 듣기 힘들다. 에카테야르도 대답을 기다리는지 포크를 입에 문채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런건 아냐." 베델은 확실하게 그것을 부정했다. "그럼 무엇 때문이죠?" 나는 에카테야르가 뜯어놓은 빵조각을 하나 집어물며 물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 베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기사가 되면…." 그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채 말을 잇지 못했다. "베델." 내 재촉에 그는 얼굴이 벌게진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온 말은…. "기사가 되면, 너희들과 함께 여행할 수 없잖아." 에카테야르는 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떤 감정이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른듯,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난 항상 상대가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견을 '존중'하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힘들것 같군. "베델, 기사가 되도록 하세요." 내가 지금껏 입밖에 내어 놓은 인간의 어떤 언어보다 지금의 말이 가장 강한 울림을 담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과 함께 여행이라…. 나는 포크로 하얀 접시에 담겨 있는 야채를 찍었다. 싱싱한 야채는 아삭, 거리는 소리를 내며 포크에 힘없이 찍혀 내 손을 따라 올라왔다. "칼리체…?" 창문늘 통해 들어오는 백색광, 그것에 비친 야채의 색채가 무척이나 선명하다. 나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는 기사가 되어야 한다. 왜냐면, 나는 이제 더이상… 이들과 함께 여행하지 않을 테니까. # "멋져." 내 앞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카테야르가 서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 가슴을 강조한 듯한 장식들이 늘씬한 그녀의 몸에 잘 어울렸다. 환한 금발 머리카락과 흰색의 드레스 색의 조화도 꽤나 봐줄만 하군. "꽤나 간단한 감상평이로군요. 그런데…." 에카테야르는 허리에 손을 얹은채 새침한 표정으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왜 옷이 그대로지요?" "번거롭잖니." 인간에게 의복이 갖는 의미란…. 난 눈빛을 흐리며 멍하니 내 앞에 서있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돌기둥과 곳곳에 표현되어 있는 절제감이 언뜻 신성함 이라는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는 건물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베델은 마릴렌 공주에게 기사 서임을 받는다. "이제 곧 시작할 시간이지?" 나는 태양이 지상과 이루는 각도를 살피며 대강 시간을 재보았다. 난 이제, 전과 달리 태양광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 괜찮을까요? 대충 듣자하니, 평민에게 기사직을 내린다고 많은 귀족들이 반발 했다고 들었는데요." "글쎄… 그건 베델이 극복해내야 할 일이겠지." 난 그렇게 말하며 건물의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이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얇은 옷을 통해 느껴지는 그 감각에 난 잠시 몸을 떨었다. "칼리체… 오늘 좀 이상해 보이는 군요, 무슨 일 있나요?" 에카테야르가 약간 초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내게 그렇게 물었다. 이상해 보인다구…?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진 백발이 내 고갯짓에 흔들리며 무게감을 전해 왔다. 흔들리지 않도록 목 앞쪽으로 머리카락을 모두 넘겨 품에 안았는데…. 꼴이 좀 우습겠군. "그러고 있으니 인형 같아서 무척이나 귀엽네요." "그래…?" # 건물안은 개방되어 있었다. 사방에 커다란 기둥이 서있었는데, 그 기둥 사이로 밝은 태양광이 새어나와 건물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 뚜렷한 음영 때문인지, 건물의 안을 흐르는 분위기는 무척이나 엄숙했다. 저 앞에 기사 정복을 입고 있는 베델이 서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은, 글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또각, 또각- 건물의 바닥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높은 계단 형식으로 이루어진 제단 같은 곳에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했다. 이제 곧 이 나라, 아나키스트 왕국의 여왕이 될 마릴렌 공주였다. 그녀는 계단 아래 서있는 베델을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나라의 기사가 되기를 원하는 그대, 가까이 오라."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한 건물안을 울렸다. 베델이 천천히 계단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저쪽엔 베델과 친분이 있는 두 명의 기사, 그란셸과 베르딧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은채 계단 쪽을 향해 걸어가는 베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베델이 나와 에카테야르의 앞을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작게 눈짓을 해왔던것 같다. … 그가 계단 앞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왠지 너무나 느리게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베델은 계단 위까지 올라가 공주의 눈 앞에 당도했고, 절제된 동작으로 천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대의 이름은?" "베델 입니다." 물론 마릴렌 공주는 베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일종의… 절차 같은 것인 모양이군. 마릴렌 공주가 계속 해서 입을 연다. "베델, 그대는 기사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스르릉, 하고 공주는 얇다란 의식용 장검을 허리에서 빼내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베델에게 겨누었다. "물론입니다." "그대는 항상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에 맞서겠다 맹세하겠는가?" 그는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고, 그가 생각하는 불의에 맞서 왔다. 조금… 묘한 기분이군. 인간들의 기사 서임식이라…. "맹세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명예와, 타인의 명예를 모두 소중히 하겠다고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그대는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슴 깊숙히 간직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그럼 이것으로-" 마릴렌 공주는 들고 있던 장검으로 베델의 양 어깨와 머리를 검면으로 한번씩 두드린 후에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델은 아나키스트 왕국의 기사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짝짝짝- 가벼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건물의 분위기 탓일까, 주변을 울리는 박수 소리도 무척이나 절제된 느낌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베델에게 가장먼저 다가간 것은 두명의 인간 남성이었다. 그란셸과 베르딧이로군. "정말 축하하네. 역시 자네는 용병보다는 기사가 어울리는 사람이야." "뛰어난 검술은 가진자가 동료가 된다는 것은, 내게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이지. 기사가 된것을 축하하오, 베델." "… 아직도 조금 얼떨떨 하군요." 베델은 약간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들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인간의 신분이란 것을 체감할 수 없는 나는, 평민이 기사가 된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제대로 와닫지 않는다. 아무튼… 그가 꿈꿔왔던 기사가 되었으니, 잘 된 일이 아닌가. "축하해요, 베델. 기사 정복을 입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아직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멋지네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베델에게 다가간 에카테야르가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항상 옅은 미소만을 짓던 에카테야르가, 오늘은 아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마워, 에카테야르." 베델은 에카테야르가 내민 손을 잡고 기쁘게 웃었다. 그란셸과 베르딧은 슈테른 백작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녀를 회상하는지, 조금 꺼림찍한 표정이었지만 마릴렌 공주가 직접 에카테야르에 대한 추적 의사를 거두었으니 달리 할말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 너는!?" 베델의 기사 서임식을 보러온 사람들 중에 흰 머리가 히끗히끗 섞여 있는 금발의 중년의 남성이 갑작스레 경악스런 비명을 터트리며 앞으로 뒤쳐 나왔다. … 공주가 내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었군. 그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에카테야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똑, 똑같아…! 저 환한 금발, 제 어미를 닮은 푸른 하늘색 눈동자, 목덜미에 있는 점까지…!" 마왕은 그녀를 아나키스트 왕국의 한 귀족가에서 납치했다고 했었지…. 나는 공주에게 부탁해 과거에 딸을 납치당한 일이 있는 귀족을 이 기사 서임식에 특별히 초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사 서임식이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에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이로군. "분명, 너는… 너는, 내… 딸이다!" 벌써 몇년이 흘렀을 텐데도, 한눈에 성장한 자신의 딸을 알아보다니… 역시,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것은 무척이나 특별한것 같다. "당신이 제… 아버지라는 말인가요?" 에카테야르는 멍한 표정이 되어 중년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네 아버지다. 한눈에 알아보았지…. 너를 잃어버린 몇년 전부터 한시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너를 그리고 있었으니까!" 에카테야르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아… 버지?"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양팔로 자신을 껴안고 있는 그를, 마주 껴안았다. … 에카테야르는 그를 기억하지 못할테지. 하지만 기억이 없다고 해서, 그녀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주는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닐것이다. 나는 깜짝놀란 얼굴로 두 부녀를 바라보고 있는 베델의 뒤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결말이지요?" "칼리체, 너 혹시…?" 난 베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에카테야르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안겨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것이겠지. 아무튼 이것으로… 그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련한 기억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다는 황금빛 풍경…. 에카테야르의 고향은 노란 벼가 잔뜩 심어져 있는 거대한 농지가 있는 곳이 아닐까. 뭐, 이것으로… 나는 그녀의 고향을 보게될 일은 없겠지. "정말 너를 얼마나 찾아 해메었던지…! 공주님이 이 서임식에 직접 초대해 주지 않았다면, 너를 절대 찾지 못했을거란다!" "공주님이…?" 에카테야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공주가 있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공주는 이미 계단에서 내려와 어딘가로 사라진 채였다. 그녀가 직접 베델에게 와서 축하 인사를 해줄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다행이다, 다행이야. 거의 십년 동안이나 너를 찾지 못해 나는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줄 알았단다. 그런데 이렇게 몸 성한 모습을 보게되니, 정말 다행이야." 그는 계속 다행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눈물이란건 슬플때만 나오는줄 알았는데… 너무 기쁠때 나오기도 하는 군. "자, 얼른 우리 영지로 돌아가는게 어떻겠니? 네 어미도 너를 보면 기절할만큼 기뻐할 거다." 에카테야르가 당황스런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는…."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아버지를 향했고, 그녀의 입이 열리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당신이 제 아버지라는게 실감이 나질 않아요…." "…." "저는 과거의 기억이 없어요. 제가 기억하는건 요 몇달간의 일 뿐. 거기다 아버지라는건… 어떤 것이지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에카테야르는 천천히 그를 자신에게서 떼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라는 단어의 뜻을 모른다는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단지,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오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괜… 찮단다. 그런식으로 잃어버린 딸이 완전히 무사하길 바라는건 사치겠지." 그녀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에카테야르는 계속 입술을 달싹 거리는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지만 차마 말이 안나오는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넌 분명 내 딸이 맞단다. 내가 네 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하지만 말아다오." "…."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에, 에카테야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 서임식이 끝나고 나와 베델, 에카테야르는 시야가 탁 트여 석양이 잘 보이는 노천 카페로 왔다. 왠지 나른한 기분이다. 베델은 기사가 되었고, 에카테야르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다.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모두 끝났다. "칼리체, 무슨 생각해요?" 빨대를 가지고 커피 위에 잔뜩 얹어져 있는 거품같은 것을 휘젓다가, 옆에서 들려온 에카테야르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베델에게 들었어요. 제 아버지… 라는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온건, 당신이 마릴렌 공주에게 한 부탁 때문이지요?" "응." 눈치가 빠르군. 옆을 힐끗 바라보자 베델이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앞에 놓인 커피에는 전혀 손도 안댄 채다. "고마워요, 라고 해야할까요." 그녀는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묘하게 쓸쓸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모금 홀짝였다. 컵을 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무척이나 섬세해 보인다. "아버지… 와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에카테야르는 아직도 아버지, 라고 말하는게 어색한듯 하다. "…." "아버지는 제가 어릴적에 있었던 일을 잔뜩 늘어놓긴 했지만, 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어요. 아니, 오히려 가슴 한켠이 따스해 지는 느낌이었어요." 글쎄, 나는 홀로 존재하는 드래곤이기에 그녀가 말하는 따스함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칼리체, 이젠…."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컵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이젠 우리를 떠나버릴 건가요?" 대충 눈치를 챈건가…. "무슨 소리니?" "최근, 당신의 행동이… 마치, 상황을 정리하는것 처럼 보였어요. 베델이 기사가 되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듣자 마자, 꼭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저에게 제 아버지를 찾아주었지요." "…." 베델은 아무말 없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컵을 만지작거리고 있는게… 무척이나 불안해 보인다. 나는…. "내 여행은 현자에게 대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에카테야르." "현자? 대답이라구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니, 저것은 대답을 바라고서 묻는 것이 아니겠지. "네 여행이… 끝났다구?" 베델 역시 에카테야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내게 물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인간들의 사회에 있을 이유는, 더이상… 없지 않은가. "네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것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어. 언제까지고 우리 곁에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지만…." 역시… 라고 해야할까. 아니,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지금까지의 일로 간단히 눈치챘었겠지. 베델과 에카테야르가 그것을 모른척 했던건… 이런 식으로 나마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나는 앉아있던 탁자에서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체…?" "알고 있겠지만, 내 진짜 이름은 루루렌칼리체. 나는 침묵하는 숲과 절멸의 산맥을 지배하는 백룡이에요." "백룡… 이라구요?" - 그래, 나는 너희 인간들과는 달리 영원을 살아가는 드래곤이지. 드래곤의 언어인, 만능의 언어가 베델과 에카테야르에게 스며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속에서 퍼지는 내 음성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정말… 인간이 아니군요." 마력을 개방한 내 드래곤 아이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손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려 하고 있다. 근질근질한 등에서 드넓은 창공을 비행할 수 있는 날개가 돋아나려 한다. "칼리체…." - 이제 끝낼 시간이다. "칼리체!" 베델이 내게 단숨에 달려왔다. 마력을 개방한 나는, 이제 그의 동작을 아주 간단하게 따라잡을수 있었지만… 그의 행동을 피하진 않았다. 그는 나를 자신의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안돼, 가지마 칼리체-!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것 같던 네가 어째서 이렇게 간단히… 떠나버린다고 말하는거야!" - 놓아라, 인간. "… 그런식으로 애기하지마요, 칼리체." 에카테야르가 마치 울음을 터트릴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정말 잔인하군요,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죽었다 살아나 제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이제는 그런식으로 말하며 저희에게서 완전히 멀어져 버리려는 건가요!?" "…." 깜짝 놀랄만한 반발이로군. 만남과 헤어짐은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온다. 나는 항상 그것에 익숙해져 있지. 다른 세 개체의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항상 죽음이란 방법으로 내게 헤어짐을 고하니까. "베델, 일단은 이 손을 좀 놓아주지 않겠나요…?" "안돼! 내가 이 손을 놓아버리면, 넌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거잖아!" 사실 그가 내 몸을 놓느냐, 놓지 않느냐는 내가 이 공간에서 사라지는데 전혀, 라고 할만큼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라도 날… 붙잡고 싶은 것일까. "이제 가야해요." "왜, 왜! 어째서! 어째서 지금이여야만 하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리의 곁에 있어 줄 수는 없는 거니?" 가까이서 나를 내려다 보는 베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다. 조금만 더, 라…. 어리석군. 이미 내가 내 본래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이 관계는 끝이 났다. 이제는 더이상… 예전의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 "칼리체, 너는 나에게… 구원, 이었어." 그는 여전히 나를 껴안고 있는 채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의미없이 마물을 사냥하고, 공허하게 용병일을 하던 내게… 무언가 텅 비어 있는듯한 너는, 내 자신을 비추는 맑은 호수와 같았지." "…." "너는 투명한 눈동자로 여과없이 인간을 비추어 내고 있었어. 항상 인간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너는 아무것도 없던 내게 어떤 열망을 불어넣었던것 같아." "…." "… 너를 사랑하고 있어, 칼리체." 사랑.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아주 가까이서 느껴진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두근거림일까, 곧 있을 나의 대답…? 아니면 내가 떠나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 저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지 못하는 드래곤인 나는, 아마 영원의 끝에 이르기까지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난 사랑이란 감정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해요." "칼리체…." 에카테야르는 이미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눈물이 하얀 볼을 타고 내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 베델과 에카테야르를 좋아했던것 같아요." 베델은 멍하니 나를 내려다 보다가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정말… 떠나야만 하니?" "…." 이미 대답은 필요 없겠지. 베델은 그저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진한 아쉬움에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석양이 사라지고, 밤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로, 나도 저 석양처럼 사라져야 하겠지. "즐거웠어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나는, - 행복하길. 만능의 언어로 그들의 행복을 강하게 염원한채 그들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마지막에 본 그들의 슬픈 표정을…, 나는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베델, 그리고 에카테야르…. 내게 가장 소중했던 인간들이여, 안녕. - 1 부 끝 * * * - 2 부 시작. 간만에 보는 나의 보금자리가 무척이나 낯설다. 그것은 아마, 내가 아직 인간의 모습을 벗지 않고 있기 때문이겠지. 빛이 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어두컴컴하고 거대한 공동. 이곳에선 베델, 에카테야르와 함께 했던 흔적을 떠올릴 수 조차 없었다. "…." 마력과 신력을 개방했다. 이제 연약한 인간들을 배려해 힘을 억누를 이유도, 숨길 이유도 없다. 내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지금껏 내가 화(化)하고 있던 모습이 순식간에 스러져 나간다. 낮아져 있던 시야가 점점 높아져 가고, 연약한 인간의 시야로는 결코 볼 수 없던것들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대한 드래곤의 육체…, 그리고 찾아온 침묵. 나는 혼자가 되었다. # 눈을 감았다. 그러자, 느리게만 흘러가던 시간이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을 개방한 나에게, 그것이 생생히 느껴진다. 해가 지고, 떠오르고, 지고, 그리고 또다시 떠오르고…. 허무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며, 의식의 한켠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 마치 앨범을 펼치듯 내 머리속에 생생히 전해진다. 망각이란 것을 모르는 나는, 처음 인간들의 사회에 나갔을 때 만난 인간들에 대한 인상을 마치, 일 초 전의 일처럼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침묵하는 숲에서 만난 칼리아넬, 그리고 딸을 위해 생명의 열매를 약탈하러 왔던 그류벨, 그의 딸 에네리아, 마왕, 리체르아, 에카테야르, 베델…. 그들과의 만남, 그리고 이별의 기분, 또 느낌- 요정인 칼리아넬을 제외하면, 이제 그들은 한줌의 흙이 되어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지워져 버렸겠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하지만 내 기억속에서는 언제고 방금전에 겪은 일처럼 만날 수 있는 인간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감정은… 아쉬움, 단 하나 밖에 없다. …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흘러갔지만, 난 그것이 무척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 눈을 떴다. 나는 잠이 들었던 걸까? 아니,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진정으로 잠이 들었다면, 적어도 1800000 번 정도 태양이 뜨고 졌겠지. 잠시 의식을 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날카로운 드래곤의 감각은 태양의 뜨고 짐 마저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290000 정도 태양이 뜨고 진것 같군.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790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일테지. … 아무래도 난 그 때의 인간들에게 아직도 약간의 미련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인간들의 기준으로 세월을 가늠해 보았으니 말이다. 세상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내게 이 정도의 세월은 잠깐 눈을 감고, 뜬 정도의 시간에 불과하지만 인간들을 비롯하여 이 세계, 페트라발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 들에겐 커다란 '변혁'을 겪을지도 모르는 긴 시간이었으니까. 잠시 인간으로 변해 또다시 새로이 변해 있을 그들의 사회를 경험을 해보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생각으로 그칠 뿐이었다. 잠깐의 유희 거리 정도로는 괜찮겠지만, 굳이 그 잠깐의 흥미를 위해 번거로운 일을 행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뭐, 잠깐 내가 지배하고 있는 영역을 한번 둘러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것 같군. 나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내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거대한 공동을 나섰다. 바깥은 이제 막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려는 시각이었다. 찌르르- 하는 소리를 내는 풀 벌레, 싸늘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 그리고 바닥에 잔뜩 쌓여있는 눈을 소복, 소복, 하고 밟는 짐승의 발소리가 주변을 가득 매웠다. 그리고 점점 온 세계를 환한 빛으로 가득 채우는 환한 여명,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여러 마리의 새가 얌전히 접혀져 있는 내 거대한 날개 위에 날아들었다. 지금의 나는 내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귀엽고 조그만 생물들에게 나는 조금 거대한 나무에 불과할 것이다. 잠깐 하늘을 날아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그만 두어야겠군. 가만히 있어야할 나무가 갑자기 날개를 펼치면, 새들이 크게 놀랄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들은 또다시 푸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날개 위에서 떠났다. 잠시 새들의 작은 존재감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내 보금 자리가 있는 곳에서 아래에 넓게 펼쳐진 침묵하는 숲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빛 아래 드러난 모습은, 드래곤인 내 몸보다 훨씬 더 거대한 나무. 그리고 그 나무를 중심으로 자연과 한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구조물들. 그 구조물들의 모습은 전부, 언뜻 보면 자연의 일부라고 착각하고 아무런 의혹 없이 넘어갈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아니, 저것은 자연, 그 자체로군. 믿을 수 없게도, 저 거대한 나무 근처엔 자연물 만이 가질 수 있는, 거대한 신비의 결집체가 펼쳐져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저 나무는… 칼리아넬의 고향이 있던 루그란 숲의 '세계수'라는 것. 저것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저렇게까지 성장하다니, 요정들의 노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세계수의 주위에 있는 거대한 건물들은- 모두, 요정의 것이군. 저 정도의 규모라면… 과거에 내가 본 인간들의 가장 거대한 도시, 아나킨을 가볍게 능가하는 정도이다. 요정들의 도시, 아니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내 영지내에 위치한 요정들의 국가라…. 정말 흥미롭군. # 난 오랜만에 찾아온 흥미에 마음이 동해 세계수를 중심으로 위치한 요정들의 도시를 돌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온통 백색의 깃털을 가진 한 마리의 조그만 새로 화(化)한 나는 날개를 퍼득거려 세계수의 위로 날아올랐다. 가까이서 보는 요정들의 도시는 꽤 아름다웠다. 아직 어둠에 잠긴 도시는 사방을 날아다니는 어떤 벌레의 꽁무니에서 나는 빛으로 희미하게 밝혀지고 있었다. 요정의 건축물 곳곳에 새겨진 그들만의 아름다운 문양이나, 용도를 모를 이상한 오벨리스크 같은 구조물 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그런걸까, 세계수의 무성한 잎들 아래 서늘한 그늘이 쳐진 광장엔 소수의 요정들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치, 인간들의 도시를 보는것 같지만… 이들에게선 인간들에게 느낄 수 있는 시끌벅적함이나 다소 지나친듯한 활기 같은것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짹짹- 하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올라 내가 울음 소리를 내어보자, 한 요정이 내 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도 마주 웃어주고 싶지만, 새의 모습으론 미소를 지을 수 없으니, 상당히 애석하군. 나는 다시한번 울음 소리를 내고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 약 열 시간 동안을 열심히 날아다니며 이 도시를 살핀 나는 최종적으로 지면으로 드러난 세계수의 거대한 뿌리위에 지어진 거장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 안으로 날아들었다. 요정들의 건축물엔 인간들의 그것과는 달리 창문이란게 존재하지 않아,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드나들기에 무척이나 편리했다. 아니, 요정들은 오히려 새나 작은 동물들의 출입을 반기는 듯, 내가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모이 따위를 주려 하기 일수였다. 아- 물론, 모이 따위는 먹지 않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이곳은. 우리 네거스텐 제국 황궁에 비교할만 한걸요?" 창문이 없는 창가에 날아들어 잠시 날개를 접고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우리 제국의 황궁이 이곳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황녀님." 그에 뒤이어 들린 목소리는 무척이나 싸늘하고, 절제된 듯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듣자하니 요정의 청각은 우리 인간보다 배는 좋다던데…. 라퓌셸, 당신 말을 듣고 요정들이 자존심 상해 우리들을 박대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성은 가벼운 농담조 같은 여성의 물음에도 역시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쳇, 하고 여성이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저쪽 통로에서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들은 요정이 아닌 인간이었다. 가장 앞서 있는 화려한 의복의 금발 여성과,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무뚝뚝한 인상의 흑발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뒤엔 금발 여성의 시녀인듯한 자들과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소수의 기사들이 절도 있는 모습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흑발의 남자가 황녀, 라고 칭한 여성은 아직 앳된 모습이 사라지지 않은, 그럼에도 대단히 고귀한 분위기가 흐르는 소녀였다. 그녀는 날 바라보고는, 손바닥을 짝-! 하고 치며 감탄사를 흘렸다. "어머!" "황녀님?" 황녀라는 소녀는 내 모습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듯, 남자의 말에도 고개를 전혀 돌리지 않았다. "저것봐요, 저렇게 깃털이 온통 하얀색인 새는 처음봐요!" "정말… 이군요." 라퓌셸이라는 남자는 나에게 시선이 미치고는, 나와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왠지 눈빛이 심상치 않으니,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하기로 하자. "아앗-!" 내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황녀라는 소녀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분명, 네거스텐 제국이라 했었지. '제국(帝國)'이라…. 큰 변화는 아니지만, 요정도 이만큼이나 발전했는데, 인간들의 수준은 얼마나 발전했을지 궁금해 지는군. 나는 날개를 퍼득이며, 좀더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대충, 건물 곳곳에 위치한 창가를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데… 왠지 내 마음을 끄는 공간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지금껏 봐왔던 어떤 요정의 건물보다 가장 화려한 내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의 창가로 날아들어 날개를 접은 나는, 어느새 창가 가까이에 서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녹빛의 머리카락에 청록색 눈동자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요정의 모습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머, 정말 귀여운 새네." 그녀는 귀 옆으로 내려온 양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땋고, 뒤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성숙한 인상의, 무척이나 아름다운 요정이었다. 그녀의 얼굴과 분위기는 아련한 기억속에 남겨진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부리를 비비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넌 어디서 온거니? 한번도 본적 없는 새인데." … 설마 새에게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건 아니겠지. 이젠 성숙한 여인이 된 모습이지만 조그만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며 웃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그때처럼 천진 난만했다. 칼리아넬…. 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자매들을 구해달라던 그 조그만 소녀가 이렇게나 훌륭하게 성장했군. "여왕님." "응?" 칼리아넬이 뒤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녀의 뒤엔 또다른 요정이 허리를 숙이고 서있었다. 여왕님, 이라… 그래, 칼리아넬은 요정들의 여왕이 되었구나. 그때 칼리아넬을 데리러 왔던 요정들 한명이 분명 그런 언급을 했었지. … 요정들도 이젠, 인간처럼 왕국을 이루게 된건가. "네거스텐 제국의 친선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여왕님을 직접 만나뵈고 싶어 해요." "그러니…?" 칼리아넬은 약간 맹해 보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왕이 되었어도 그녀의 천성은 별로 변한것 같지 않은것 같군, 음. 제국의 친선 사절단이라면… 아까 본 그들을 말하는 건가. 이제 요정들과 인간은 소규모가 아닌, 국가대 국가로서 교류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인간들인지 요정들인지, 내 영역에 해당하는 침묵하는 숲 여기저기를 꽤나 바꾸어 놓은것 같다. 과거에 침묵하는 숲에 살던 생명체 들은 요정들을 비롯하여 정령, 마물 등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결국 이런 결과를 보아하니, 이 숲의 패권은 요정들이 가져간 것이겠지. "미안해, 작은 새야. 놀아주려 했더니 지금은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안되겠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련?" 칼리아넬은 정말로 미안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더니, 느릿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버렸다. 제국 사절단의 방문을 알리러온 요정은 나를 힐끗 보더니, 역시 그녀를 따라 어딘가로 가버렸다. … 경과가 궁금하니,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할까. # "그런데, 요정도 여왕이 있던가요? 제가 최근에 본 서적에 따르면, 요정들은 서로를 모두 평등하게 생각하며, 따라서 왕이란 존재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마 요정들이 말하는 '여왕'이란 단어는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여왕'이란 단어와 완전히 뜻이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녀 님. 그들에게 여왕은 단지 대표에 불과한 걸지도 모르지요." 드문 드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목소리의 주인들은… 아까 보았던 제국의 황녀와, 그녀의 호위기사 처럼 보이는 라퓌셸이라는 인간이군. 아마 칼리아넬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지? "에- 그게 뭐야. 그럼 결국 라퓌셸도 정확히는 모른다는 거잖아요." "물론입니다, 황녀 님. 인간인 우리가 요정인 이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서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이런 친선 교류가 필요한것 아니겠습니까." 황녀라는 인간은 라퓌셸이라는 남자를 곤란하게 만들어 보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는 결코 그녀에게 당하지 않았다.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친선 교류라…. 나는 짧은 새의 다리로 창틀을 간신히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은 바람이 꽤 불고 있어, 말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 이곳엔 비록 창문은 없지만, 간단한 마술 따위로 외부와 간단히 단절 시켜논 모양인지 안으로 들어오자 이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까 그 새가 다시 보고 싶어." "그 새라면… 그 흰 깃털의 새 말입니까?" "응, 내가 본 새가 그 새말고 또 다른 새가 어디있겠어요?" 황녀의 말투가 오락가락 하는군. 존대를 썼다, 평대를 썼다가…. 그녀는 아마 라퓌셸이라는 인간에게 꽤 친근한 감정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음,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새는… 바로 나잖아. … 일단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겠군. 쓸데없이 번거로운 일을 당하기는 싫으니까 말이야. "어머, 여러분들이 네거스텐 제국에서 오신 분들이로군요." 그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이, 하늘하늘한 긴 천옷을 입은 칼리아넬이 바닥에 긴 옷자락을 끌며 등장했다. 바닥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나뭇잎들이 있어 그녀의 옷자락에 걸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인간들은 건물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철저히 하지만, 요정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창문이 없는 창틀도 그렇고 말이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여왕님. 저는 네거스텐 제국의 제 1 황녀, 펠테넨시아 레스펜텐 레 프리체오르, 라고 합니다." 펠테넨시아 레스펜텐 레 프리체오르, 라고? "반가워요, 저는 칼리아넬 이라고 해요." 하지만 그 대답으로 돌아온건 칼리아넬 이라는 이름 달랑 하나. 인간과 요정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대목이군. 저렇게 긴 이름이라니… 인간들은 그들의 영광이 이름의 길이에 비례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걸까? 팔백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하군. 황녀의 옆에 서있는 라퓌셸이라는 남자는 정중한 모습으로 칼리아넬에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들의 대화에서 내가 깊게 새겨들을 만한건 그리 많지 않았다. 인간들은 요정의 왕국과 정말 '친선' 관계를 위해서 온건지, 이 대화에선 인간들이 말하는 '이권'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칼리아넬도 꽤나 능숙해졌군. 누가 보더라도 그때의 미숙한 꼬맹이의 모습을 상상할 순 없겠지. 뭐, 그때를 상상해줄 존재는 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곳에 세워진 저 목재 조각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여왕님." 한참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 도중에 황녀라는 소녀가 방의 한쪽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녀가 가르킨 곳에는 거대한 날개와 긴 목, 그리고 긴 꼬리를 가진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도 궁금하던 것이었다. 도대체 저건… 무엇을 표현해 놓은 것일까. "저것은…." 칼리아넬이 말끝을 흐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깃든것은 무척이나 아련하고, 따스한 감정…. 용의 눈을 일부 개방하고 있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그녀가 무척이나 솔직한 요정이라 그런걸까, 칼리아넬의 감정이 온전히 내게 전해지는 기분이다. "우리 요정들이 살아가는 침묵하는 숲과 저 뒤로 보이는 무척이나 험한 산맥, 아마… 절멸의 산맥이라 불리고 있었지요?" 설마…. "그 두 공간을 통틀어 우리는 요르간드라고 부른답니다. 그리고 저 조각상은 그 요르간드를 지배하는 화이트 드래곤, 루루렌칼리체 님이에요." 맙소사, 저 형편없는 조각상이 나라고? … 할 말이 없어지는군. "드래곤… 이라구요?" 인간의 황녀는 자신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혹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 의혹은 칼리아넬이 미처 알아채기 전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요정들의 여왕인 칼리아넬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할까, 그것을 염두에 두는 모양이다. "네, 드래곤이요." 태연한 칼리아넬의 대답에 황녀는 잠시 입술을 달싹 거리다 대답했다. "… 그렇군요." 아무래도 인간의 황녀는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해 믿음이 가질 않는 모양이다. 뭐, 그도 그럴것이 우리 드래곤들은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없으니까. 한 세대가 백년이 채 가지 않는 인간들에게 우리 드래곤이란 존재는 '실제'로 인식되기가 무척이나 힘이들지. # 네거스텐 제국의 황녀는 약 삼 일 동안을 이곳, 요정들의 왕국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삼일째가 되는 날이다. … 숲의 요정 칼리아넬이 지배하는 요정 왕국의 이름은 '셰텐'. 그 단어에 어떤 뜻이 있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그저 칼리아넬과 펠테넨시아 황녀의 대화에서 그런 정보를 얻었을 뿐. 나는 작은 날개를 열심히 퍼득여 칼리아넬이 머무는 가장 화려한 건물안을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날아다녔다. 뭐, 눈치채지 못하게 날아다녔다곤 하지만… 마술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요정들의 눈을 피하기란 어려운 일. 칼리아넬은 여러번이나 내 존재를 눈치 챘고, 그때마다 나를 바라보며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씩 인간의 황녀도 내 존재를 눈치챘는데, 그때마다 항상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눈동자가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듯, 부르르 떨리곤 했다.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다, 그 동안 눈에 익어버린 두명의 인간을 발견하곤, 나뭇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 날아들었다. … 그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이곳은 어떠셨습니까, 황녀님."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야. 우리 제국 황궁의 경직된 분위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여유가 넘치고, 음- 자유롭기도 하고…." 황녀 펠테넨시아는 라퓌셸이라는 남자의 물음에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희미하게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와 볼에 생겨난 보조개가 꽤 귀엽게 보였다. 그녀는 화려하고 긴 드레스 자락을 잡고, 까르르 웃으며 가느다란 다리로 세계수의 가지에 올라가 몸을 한바퀴 빙글 돌렸다. "화, 황녀님! 그런 행동은 무척이나 위험합니다! 얼른 이쪽으로!" 짖궂은 면도 있었군, 이 황녀. 나는 이 작은 소동에서 잠시 눈을 떼고, 요정들의 도시 외곽에 설치된 거대한 오벨리스크 들을 바라보았다. … 한동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저것은 팔백년 전의 인간과 요정으로선 상상도 못했던 거대한 마법의 결집체다. 마력을 머금은 돌, 마력석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의 언어들. 사방에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이루는 힘의 방향은, 현재 세계수의 가지 중심에서부터 요르간드의 외곽을 향하고 있다. 즉, 인간과 요정은 '장거리 공간 도약 마법'을 완성했다는 것이지. 나무 아래서 떠들고 있는 펠테넨시아 황녀와 라퓌셸이라는 기사도 아마 저 거대한 마법의 결집체를 이용해 이곳 요정의 왕국 셰텐으로 왔을 것이다. 하긴 약 800 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게 뿐 아니라 요정에게도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이 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이정도의 발전은…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시간이 흐르고, 태양이 저 멀리 절멸의 산맥의 허리에 걸렸을 무렵, 라퓌셸과 함께 잠시 산책을 나갔던 황녀는 그녀가 이끌고온 수행원들을 데리고 세계수의 앞에 서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머물진 않았지만, 여왕님의 왕국에서 아주 감명 깊은 인상을 받았답니다." "후히 평가해 주시니 무척이나 고맙네요, 인간의 황녀님." 칼리아넬은 귀를 쫑긋, 하고 움직이며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이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인가…. 내 예상대로 인간들은 세계수의 중심에서 마법을 이용해 단숨에 그들의 제국으로 장거리 공간 도약을 할 생각인 모양이다. 인간들의 제국은 그렇다 쳐도, 외부에서 공간 도약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세계수라는 요정들의 심장부로 설정하다니…. 드래곤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단숨에 저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 "…." 나는 다소 지루한 심정으로 그들의 작별 인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두리뭉실하게 말하길 좋아하는 요정이나, 지배 계층으로 갈 수록 말이 복잡하고 많아지는 인간들이 만난만큼 별 같잖은 수사법과 표현으로 인사가 길어지고 있다. … …… ……… 작열하는 태양,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 저들은 양산 따위를 드리워 놓고, 아직도 여유롭게 이야기 하고 있군. 그리고, 드디어 인간들과 요정들은 서로 최종적인 작별을 고했다. 그 동안의 지루함을 달랠겸 나는, 짹 짹- 하고, 새의 울음 소리를 내어 보았다. "여기 있었군." 순간,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갑작스레 흑발의 인간이 등장했다. 나는 이 갑작스런 등장에 무척이나 놀라 하마터면 부리로 이 인간의 머리를 쪼아버릴뻔 했다. "울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찾기 힘들었을 거야." 그는 내가 날아갈 틈도 없이 잽싸게 나를 잡아 새장에 가두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새장의 문이 굳게 닫혀 버리고 말았다. "미안하군, 하지만… 황녀님이 너를 너무 간절히 원하시는것 같아서 말이야." 그는 라퓌셸이라는 황녀의 호위 기사였다. 그것보다… 무척이나 황당한 심정이군. 내가 이런식으로 인간의 손에 새장에 갇혀 버리다니, 꼴이 정말, 무척이나 우습다. 톡 톡, 하고, 부리로 새장을 쪼아보았지만 역시나 강철로 만들어진 새장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음, 일이 이렇게 되면 조금 곤란한데…. "같이 온 시녀가 새장을 갖고있지 않았더라면, 포획하기가 힘들었을뻔 했군." … 그 시녀는 왜 요정들의 왕국을 방문하면서 새장을 갖고 온건지 의문이 드는데, 넌 그렇지 않나, 인간. 라퓌셸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와 한참 동안이나 눈을 마주치다 피식, 하고 웃었다. "마치 지능이 있는 새 같군." 그 뒤로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하고 그가 덧붙였다. # "황녀님." "아, 라퓌셸. 어딜 다녀온 거에요? 한참이나…." 펠테넨시아 황녀는 질책하는 목소리로 라퓌셸을 보며 말하다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깜짝 놀란 눈동자가 새장안에 들어있는 나를 향하고 있다. "라퓌셸, 당신…." "황녀님이 이 새를 너무 귀여워 하시는것 같아서, 잠시 시간을 내어 포획해 왔습니다." "어머!" 황녀는 들고 있던 깃털 부채로 입을 가리며, 내게 다가왔다. 좀더 큰 행동을 취하고 싶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있어 자제하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괜찮겠어요? 이 새는 요정들이…." "괜찮겠지요. 며칠동안 살펴보았는데 이 새는 계속 셰텐의 주위를 날아다닐뿐, 딱히 주인이 있는건 아닌 모양입니다." … 날 계속 주시하고 있었군, 이 인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뭐, 어떻습니까.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것 같은데, 이대로 황녀님의 애완 동물로 삼으시지요. 이렇게 잡아온 제 성의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냉정한 라퓌셸의 목소리에, 황녀는 잠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새침한 목소리로 그에게서 새장을 집어들었다. "그러기로 하지요. 당신이 몸소 잡아온 성의도 있으니까요." … 음, 잠시 이대로 인간들의 발전된 모습을 살펴보는것도 괜찮겠지만, 당장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이 새장에서 탈출해야겠다. 아무래도 이런 꼴은… 무척이나 우스우니까. "고마워요, 라퓌셸." 황녀는 내가 들어있는 새장을 안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정작 라퓌셸이라는 인간이 황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무척 황당한 일이긴 하지만 저 인간이 어디 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그랬겠는가. 이런 경우엔 오히려 지루함에 부주의해졌던 나를 탓해야겠지. 이런걸… 방심, 이라고 하려나. 아니… 나에겐 방심이라는 말도 별 의미가 없겠군. 이런 조그만 인간들은 어떤 방법을 써도 내게 유요한 해를 끼칠수는 없을테니까. "얘는 뭐를 먹을려나?" "일단 평범한 모이를 주어 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 인간들의 말을 무시하며, 나는 마차의 창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 있었기에 인간들과 요정들의 장거리 공간 도약 마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는 보지 못했다. 마차엔 약 2 초 정도 중력이 사라졌고, 다시 중력이 돌아오자, 침묵의 숲이 아닌 인간들이 지배하는 대지를 달리고 있었다. 팔백년만에 보는 인간들의 세계…. "…." "그렇게 기쁘십니까 황녀님." "응, 너무 귀엽잖아." 그녀는 새장을 꼭 끌어 안은채 얌전히 날개를 접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귀여운 인간이로군. 마차라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 있어서일까, 항상 기품있는 태도를 유지하려던 펠테넨시아의 얼굴이 그녀 나이대에 맞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제일 먼저 제 1 황자님의 생일 파티 준비를 하셔야 할겁니다." "…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꺼내는 건가요?" … 별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이군. 난 그들의 대화에서 관심을 완전히 끈채 다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새장은 너무 낮은곳에 있어 마차의 창문으론 파란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조급해 할건 없겠지. 느긋하게 이들이 보여주는 풍경이나 감상하기로 하자. 그러니까… 새장 안에서. # 마차는 금방 이들이 말하는 '황궁'이란 곳으로 진입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밖에 없었으니, 내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들의 대화뿐이 없었다. … 팔백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언어는 별로 변한것이 없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차는 천천히 멈추어 섰고- 끼익, 하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마자 보이는 풍경은 허리를 굽히고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수많은 인간들. 거의 수백명이나 될법한 규모로군. 제국의 황녀라…. 대충 보아도 그 권위가 과거의 기억에 남아있던 왕국의 공주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 새장은…." "내 처소안에 옮겨 놓아라." 황녀의 목소리는 마차안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다소 싸늘하게 들려왔다. 나는 황녀의 손에서, 그리고 무엄하게도 나를 생포한 기사, 라퓌셸, 그리고 황녀의 시녀의 손에 거쳐 어딘가로 이동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새장 위엔 얇은 천이 덮여져있어, 나는 바깥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짹 짹- "어머, 울음 소리가 정말 귀여운 새네." 온 몸의 깃털이 순백색이어서 그런걸까, 황녀의 시녀들은 새장위에 덮인 흰천을 들추면서 까지, 내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런 관심을 이용해 잠깐 동안 바깥의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황궁이란 곳의 내관은 무척이나 화려하긴 했지만, 실망스럽게도 내가 원하는 커다란 변화는 없군. 팔백년 전의 건축 양식이나 지금의 건축 양식이 비슷하다니…, 뭐, 아직 일부만 보았을 분이기에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순 없겠지만…. 덜컹- 하고, 새장안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나서 지면이 단단히 고정된듯 한게… 아마도 이 새장을 어딘가에 내려놓은것 같군. … 황녀의 방 안인걸까. 그런 내 의문에 대답하듯, 펄럭, 하고 새장을 가리던 흰 천이 없어졌다. 제일 먼저 내 감각을 자극한 것은 향긋한 냄새였다. 무엇을 뿌려 놓은건진 몰라도 이 향기는…. 아, 향수를 뿌려두기라도 한것 같군. 방 안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방보다 넓고, 화려했다. 방안을 치장하고 있는 색은 거의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빛과 붉은색이 대부분이어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얘좀봐, 꼭 방안을 감상하듯이 고개를 돌리는것 같지 않니?" "어머, 정말…! 듣자하니, 황녀님이 요정들의 왕국에서 잡아온 새라는데…, 그래서 그런가 무척이나 영리한 새인가 봐." 가정과 결론이 납득이 가지 않는 대화로군. 이 인간은 요정들의 나라에 사는 새가 인간들의 나라에 사는 새 보다 더 똑똑하다는 어떤 확신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야생에서 잡아온것 치곤, 너무 얌전한것 같지 않니?" "그러게… 네 말대로 요정 왕국의 새라서 그런가?" 글쎄, 그런 확신이라기 보다는… 그냥 저 두 인간의 흥미로운 화젯거리 정도 밖에 안되는것 같군. 일단은 얌전히 새장속에 있다가 인적이 드물어 지면 새장에서 나가 바깥을 둘러보는게 좋겠다. … 기대 되는군. 인간은 다른 종족과는 다르게 끝없이 갈등하고, 또 경쟁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진보를 낳고, 그 진보는 충분히 내 기대를 만족시킬 정도로 가시화 되어 있겠지. 어쩌면 인간은 하늘을 나는 신비를 발견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차보다 더 발달된 이동 수단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르지. 잠깐 사이에 수십 가지의 가능성이 머리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시녀들은 다른 일이 있는지 내가 들어 있는 새장을 내버려 두고 그렇게 떠들며 이 방에서 사라졌다. # 황녀 펠테넨시아는 다른 바쁜 일이 있는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시간 까지 그녀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녀들은 가끔가다 들어와 새장에 모이나 물등을 넣어주곤 했지만… 그것들을 내가 먹을리가 없지. 조금더 있다가 인적이 드물어 지면, 이 웃기 지도 않는 새장안을 나서야겠다. 내가 사라짐으로서 호된 질책을 받을 인간이 있을 테지만…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지. 내가 그들을 위해 계속 새인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살짝 젖혀진 커튼 사이로 아스라한 달빛이 들어온다. 팔백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지만, 저 달빛은 낮의 태양처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새장안에 갇힌 상태라 그런걸까, 기분이 좀 그렇군. "…." 곧 인적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인공적인 불빛이 크게 줄어들었다. 시간은… 자정 즈음인가- 펠테넨시아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은 채다. 팔백년전의 아나키스트 왕국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네거스텐 제국이란 곳에서도 파티는 새벽까지 길게 이어지는 모양이다. 낮에 지나가는 말로 제 1 황자의 생일 파티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황녀가 아직까지 방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인 모양이군. 나는 공간을 찢고 새장의 외부와 연결해, 새장에는 아무런 흠이 가지 않도록 내 몸을 바깥으로 옮겼다. 그리고 더이상 새의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 마력과 신력을 움직여 내 신체를 재구성한다. 거대한 마력 행사에 대기가 심하게 흔들리려 했지만, 나는 그것 조차 내 힘을 이용해, 쓸데없는 피해가 퍼져나가지 않도록 대기를 단단히 고착시켜 버렸다. "흐음…." 이 모습을 하는것도 팔백년 만이로군. 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긴 백발이 바닥을 쓸었다. 하얗고 작은 손… 가느다란 팔다리, 얇은 손톱-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팔백년 전에 거울을 통해 본 내 모습이 머리속에 단단히 각인 되어 있기에 그런 말 조차 어색하다. "제국의 황궁, 인가." 일부러 목소리를 내어본다. 당연하겠지만… 뭐, 별다른 이상은 없군. 나는 꽤 기대감에 차올라 더 폭 넓어진 시야로 방안의 풍경을 뇌리에 담았다. … 딱히 방 안의 풍경은 팔백년 전이나 다를게 없다. 특별히 눈에 띄는 물건도… 존재하지 않는군.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음, 아마 인간들은 좀더 거시적인 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을 테지. 나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내가 지금껏 들어있던 새장을 치우고, 새장이 놓여져 있던 탁자위에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 네거스텐 제국의 황궁은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무척이나…, "평화롭군." 아니, 저 풍경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과연 평화로움인가? 내가 평화로움이라 인식하는 근거는 무엇이지? 음식을 만드는지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굴뚝, 가도를 천천히 달리고 있는 마차, 저 너머 성벽에 보이는, 창과 검을든 인간들…. 그 인식의 근거는… 지금 내려다 보이는 이 풍경이, 아주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팔백년 전과 현재를 비교해 봤을때, 인간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실망이 크군, 인간들이여. … 이렇게 되면, 내가 현자에게 팔백년 전에 대답했던 그것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지난 팔백년간 인간들이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지? 달칵- 순간, 문이 열렸고- 내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어두운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누구냐!?" 황녀 펠테넨시아….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가 이내 창가에 서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은듯, 그 자리에서 못박힌듯 멈추어 섰다. "… 그대는 누구지?" 고압적인 어투지만, 이미 힘을 잃어버린 목소리는 그 어투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나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녀에게 너희 인간들은 어째서 팔백년 이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진보하지 못한 것이지, 라고 물어봐야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건 없을 것이다. 아니, 어떤 인간도 내 물음에 대답할 수 없겠지. 결국, 내 의문은 나 스스로가 이들 사이에서 찾아야 할 수 밖에 없다. - 미안하군. 나는 새장속의 새가 되어줄 수 없다. 사실 내가 미안해야할 이유는 없지만, 펠테넨시아는 그 작은 새가 드래곤인 나인지 전혀 몰랐을 테니까…. 너의 귀여운 새를 빼앗아 가서 미안하군, 인간. "도, 도대체…!" 그녀의 경악스런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의 눈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네거스텐 제국, 수도의 상공. 넓게 펼쳐진 인간들의 도시가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내가 위치한 곳은 아주 높은 곳이었다. 아마 이 정도 높이에 손이 닿을 수 있는 생명체는 우리 드래곤 밖에 없겠지. 살이 에일듯한 추위, 희박한 대기- 생존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이지만, 온몸에 마력과 신력을 두르고 있는 내게, 그것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네거스텐 제국의 수도…. 확실히 과거의 인간들의 도시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복잡해 졌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도시의 크기만 확장되었을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언어, 건축 양식, 생활 양식… 그 수많은 것들이 거의, 라고 할만큼 진보하거나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현자에게 말했던, 무한히 경쟁하는 인간이 전혀 라고 할만큼 변화하지 못했다고? … 나는 심지어 분함 마저 느낀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풍경이 네가 팔백년 전에 현자에게 말했던 그것은, 잘못되었다 라고 고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것이 무척이나 불쾌하다. … 그래서, 나는 무얼 원하고 있나? 물론, 이 불쾌함을 제거하길 원하고 있지. 마음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내가 느끼는 이 불쾌함을 없애기 위해선, 우선… 인간들이 어째서 800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화'를 겪지 못했는지 나 스스로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지. 발전, 그리고 진보…. 드래곤인 내 눈에 보일 정도로 거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인간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 사이에서 아무리 천재라 떠받들여 지는 자라도, 심지어 800 년전의 그 현자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지. "…." 나는 역전시켰던 중력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지상으로 육체를 낙하 시켰다. 하지만 마력과 신력을 온몸에 두른 현재의 내 육신은 아무런 대기의 저항도 느끼지 못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지상에 사뿐히 안착했다. 어둠이 완전히 드리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저택의 창문에는 따뜻한 느낌의 환한 황색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고급스런 의복을 입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인간들,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들이 도로를 천천히 지나다니고 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이들은, 내가 공중에서 굉장한 속도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완전히 숨긴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인간들 중에서도 많은 재화를 갖고 있는 자들, 다들 그런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귀족'이라 불리는 자들의 저택이 모여있는 구역이다. … 재화를 많이 가진 인간은, 대체로 그렇지 못한 인간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이들은 내게 간단한 물음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봐." 내 부름에 요상한 지팡이를 손에 들고 거들먹 거리며 걷던 한 중년의 남성이 걸음을 멈추어섰다. "이봐… 라고? 에잉- 목소리로 보아하니 아직 어린애인것 같은데, 너무 무례하구…." - 쓸데 없는 말은 그만두고, 내가 묻는 것에나 답해 주었으면 좋겠군, 인간. "뭐, 뭐야!?" 뇌리를 울리는 만능의 언어에 놀란 모양인지 그는 깜짝 놀란 모습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뭐, 놀라든 말든 상관 없다. 내가 물었으니, 그는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반드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 묻겠다. 아까도 말했듯 거대한 '번혁'은 짧은 수명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결코 달성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의 변혁은 대부분 '지식의 전승'으로 이루어지지. 800 년이 지나도록 인간 사회에 변화가 없는 것은 분명 그 '지식의 전승'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 인간들의 지식 전승은, 무엇으로 이루어 지는가? "지식의 전승? 아아, 교육을 말하는가 보구료.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 우리 제국 최고의 상아탑,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를 말하는 것이겠지." 내 물음에 단번에 정신이 장악 당한 인간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라…. 내 의문을 풀기 위해선 그곳에 가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군.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이 인간에게 다른 기억을 덧씌운뒤,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인간은 정신을 차린듯, 금방 눈의 초점이 돌아오더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황급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내가 덧씌워준 기억은,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난 그저 그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상을 재생해 그의 과거의 기억에 맞추어 끼워넣어 주었을 뿐이니까. # 원래의 의도는 세계수를 중심으로 거대한 도시를 세운 요정들의 모습을 둘러보기 위해 보금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될줄이야. 또다시 이런식으로 이들 사이에서 인간을 연기하게 되다니. 딱히 곤란한것도, 힘든것도 아니지만… 인간을 가장하는 것은, 역시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불쾌함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는 제국의 수도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결과, 아카데미는 무척이나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커다란 규모만 보아도 이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지식의 전승이 무척이나 수준 높은 것임을 기대할 수 있겠군. 물론, 규모가 수준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강 모은 정보로는 이곳, 루블라브룸 아카데미가 인간들의 사회에선 그 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저곳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지식 전승의 수준은 상당히 신뢰할만 수준이라 예상해 볼 수 있겠지. "거기, 좀 비키시오!" 나는 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외침에 몇발자국 옆으로 물러섰다. 그 뒤 바로 커다란 마차가 위협적인 속도로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난 그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백발을 정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발전하진 않았을진 몰라도… 800 년 전 보다는 길거리가 훨씬 복잡해 졌다. 번잡한 것을 꺼려하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치명적이라 할 수 있겠군. 나는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블라브룸 아카데미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필수적인 것은 이미 모두 확보해 두었다. 인간들의 정신을 조종해 '칼리체 리블란셰'라는 이름을 만들어 두었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데 필요하다는 재화 역시 충분할 정도로 창조해 두었다. … 그밖에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면, 나는 또다시 용의 힘을 사용해야겠지. 인간들 사이에서 불필요한 힘을 쓰는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이번의 내겐 알아내야할 확실한 목표가 있다. 탁, 탁- 신고있는 검은 구두 끝에 닿는 거친 감각- 그 아래로 붉게 물든 가로수의 낙옆이 떨어져 내린다. 구두 아래로 바스라져 내리는 건조한 낙옆의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가을… 인가. 덜컹,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마차가 내 옆을 지나갔다. "…." 그리고 나는,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의 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지식과 지혜를 원하는 자, 그 배움의 무게 만큼 재화를 손에 쥐고, 상아탑의 문을 두드릴 지어다.' 역시 재화… 인가. 과거 800년 전보다 상대적으로 재화를 갖지 못한 '평민'들의 권리가 상당히 신장된 지금에도 인간들 사이에서 재화의 힘은 여전하군. 아무튼 저 글귀, 무척이나 노골적이군. # "이 시기에 입학이라…. 아, 물론 아직 새학기가 시작된건 아니네, 리블란셰 군. 안심해도 좋아." … 애초에 불안해 한적도 없다만.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찻잔을 입에서 떼고, 그것을 식탁위에 내려 놓았다. 찻잔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김이 창문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흩어지고 있다.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아직까지 다소 놀란 감정이 깃든 눈으로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고 있는 대머리의 중년 남성이 보인다. "새학기는 언제 시작되는 건가요?" "음, 얼마 남지 않았네. 당장 이틀 후면 새학기가 시작되고, 지금은 조용한 이 아카데미 안이 곧 지식을 배우려는 학생들과 진리를 탐구 하는 학자들로 가득찰걸세. 아, 물론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준 높은 교수들도 함께 말일세." 남성의 목소리는 조금 가볍고, 말이 빨라 다소 경박하게 들려왔다. "자네는… 어디보자." 그는 내가 작성해 놓은 서류를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흐음- 칼리체 리블란셰…, 평민…, 나이… 십 육세…." 리블란셰… 백색이란 뜻을 갖고 있는 인간의 고어이다. 팔백년 전에 현자 베르센크가 지어준 성이지. 그리고 나이는 신경써서 설정했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선 십 육세부터 고등 교육이 시작되는 모양이니까. "… 자넨 고아로군." "네." "아,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선 뛰어난 성적을 낸 학생이 아니라면 많은 재화를 지불해야 하니까 말이네. 자네는…." 주절 주절 말이 많은 인간이군. "후견인이 있습니다." "그렇군, 후견인인가…." 다행히, 그는 후견인이 누군지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것까지 물었다면 나는 있지도 않은 후원자에 대해서 거짓 사실을 만들어야 했을테고,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그의 기억에 적절히 관여해야 했겠지. 그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인간. "뭐, 서류상의 하자는 전혀 없네. 자네는 이제부터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학생 자격을 부여받게 되었네. 아카데미내에서 통하는 신분증은 이틀 후에 있을 입학식때 받으러 오게. 그리고 기숙사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힐끔힐끔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건물 일층에 있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을걸세. 방 배정은 마찬가지로 입학식 당일날 나올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하고." … 내가 남성이라고 말한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로군. 뭐, 그도 그럴것이 내 외견은 아무래도 여성에 가까운 모양이니까. 아무튼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선 남성이냐 여성이냐 둘중 한가지를 택해 서류에 기재해야 했을 뿐이니까. "서류상에 쓰여있는 몸이 수치에 맞추어 제복을 지급해 주도록 하겠네. 아, 그리고… 아카데미 내에서는 항상 제복을 입고다녀야만 하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학칙을 어김으로서 내려지는 징계는 상당히 무겁네. 아, 물론 휴일은 사복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네." 정말 복잡하군. 인간들은 지식의 전승에 이렇게 쓸데 없어 보이는 규칙들이 필수적인거라 생각하는 걸까. "음, 군소리가 많아서 좀 지루한 모양이네만… 자네도 잘 알다시피 우리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자네같은 평민이 아닌 귀족이 대부분이네. 아무리 평민의 권리가 예전과 달리 상당히 신장되었다 하더라도…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일세. 부디, 이 말을 잘 새겨듣길 바라네." 약간의 걱정이 깃든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평민, 그리고 귀족이라… 차라리 신분을 평민이 아닌 귀족으로 기재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이상으로 인간들의 사회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 그리고 고작 인간의 신분 따위가 내가 원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고맙습니다. 그럼, 입학식때 다시 뵙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걷는데, 통로의 옆에 커다란 창문이 달려 있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그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넓은 부지. 그리고 분수가 있는 커다란 광장, 아카데미 전체를 감싸고 있는 푸르른 숲.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는 식당이나 여러가지 여가시설 같은 것들이 잘 갖추어 져있다. 그런것들 때문인지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는 네거스텐 제국 수도내에 있는 또다른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흥미롭군. 이제 이틀 후면, 인간들이 배우는 지식을 체험해 볼 수 있겠군. 물론, 이곳에서 지식은 내가 보기에 무척이나 조악한 수준이겠지만, 그들이 그 지식을 자신들의 식대로 해석해 놓은것은 비록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나를 충분히 즐겁게 해줄수 있을것이다. 나는 건물을 나와 천천히 아카데미 내부를 살펴보기로 했다. 지도는 한번 가볍게 스쳐 보는 것으로도 이미 내 머리속에 완전히 기억된 상태다. 아까 그 대머리 남자의 말대로 아카데미 내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한참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아까 건물에서 내려다본 분수가 있는 곳에 가 걸터 앉았다. "…." … 이런, 바닥에 물이 튀겨 있어 바지가 조금 젖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분수대의 물을 튀기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이내 물에 비친 희미한 모습에 물을 튀기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분수대의 물에 비친 희미한 모습은 분수대 꼭대기에 달려 있는 커다란 동상이었다. "아-." 동상은 어떤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가 들고 있는 검은….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동상의 아래쪽으로 옮겼다. 그곳엔 동상이 묘사하는 남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베델'. … 하지만 베델이란 이름은 팔백년 전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고대 영웅의 이름이다. 저 동상이 내가 아는 그 베델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찾아온 아련한 기억에 잠시 눈빛을 흐렸다. … 저 동상은 팔백년 전에도 이름을 널리 떨쳤던 고대의 영웅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베델이 고대의 영웅을 대신해 새로운 영웅이 되어버린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는 정말 그의 이름에 걸맞게 되었군. 주변을 지나가고 있는 인간들 중 하나를 붙잡아 물어보면 쉽게 알 일이겠지만 나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 나는 저 동상이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베델일거라 믿는다. 마왕에게서 영원을 가져가겠다고 중얼 거렸던 베델, 오백년을 이어왔던 마왕의 의지를 꺾고, 그는 인간들에게 기억됨으로서 영원을 이어나가는게 아닐까. 네가 중얼거렸던 영원은 혹, 그것이 아닌가- 베델? "후후." 나는 가볍게 웃었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 저 동상은 팔백년전의 베델이 아닌 고대 영웅 베델일지도 모르고, 그가 중얼거렸던 영원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이 동상과 오랜 과거의 잔재를 연결해 보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지 않은가. # 이틀이 지났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새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의 이틀을, 나는 고급스런 여관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곳으로 아카데미의 제복이 배달되어 나는 제복을 입고 아카데미로 향할 수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 겉옷은 금색의 실들로 치장이 되어 있었다. 음… 그밖에도 상당히 화려한 문양과 장신구가 달려 있었지만… 너무 복잡해서 그것을 상세히 묘사할 수는 없다. 아무튼 많은 재화를 지불한 만큼, 제복은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거울을 보니… 꽤 어울리는군.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여관을 나섰다. 아카데미의 입학식은 약 한시간 뒤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뭐, 굳이 꼭 참가할 필요는 없다곤 하지만… 봐두는것도 나쁘진 않겠지. "…."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를 향하는 길에는 덜컹, 거리는 마차들이 짧은 간격 으로 여러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귀족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편하게 마차를 이용하는 모양이군. 얼마 걷지 않아 당도한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입구는 상당히 붐볐다. 나처럼 제복을 입은 귀족의 소년 소녀들이 각자의 수행원의 도움을 받아 마차를 내리거나,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몇몇은 친분이 있는지 약 세 네명씩 그룹을 지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아버지가 내게 게발트 해에 새로지은 별장을 선물해 주셨어! 알지? 네바론 가문과 경쟁적으로 차지하려던 그곳 말이야." "어머, 용케도 결국 그 땅을 너네 가문이 차지한 모양이네!" 소년의 치기어린 목소리에 뒤이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품위없는 것들…." 옆에서 대단히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긴 흑발을 양옆으로 묶은 소녀였는데, 그녀는 옆을 돌아본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려 아카데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이곳의 학생인 모양이었다. 품위라…. 나는 여전히 의기 양양하게 떠들어 대고 있는 소년의 옆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 입학식은 전에 보았던 분수가 있는 커다란 광장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이미 한번 와본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별 어려움 없이 광장을 찾아갈 수 있었다. 광장에는 여러개의 목재의자가 줄을 지어 놓여져 있었는데… 아마도 그곳에 앉으란 의도이겠지? …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하늘엔 구름 한점 없었고, 아무런 여과없이 따가운 태양볕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입학식에 참가한 학생들은 광장에 놓여진 의자의 수를 모두 채우지 못했다. … 나도 이런 따가운 태양볕 아래에서 오래 있기는 싫군. 그러므로 오늘 날씨가 좋다는 말은, 정정할 필요가 있겠지. 지금 내게 있어 이 날씨는 나쁘다. 구름이라도 조금 끼어서 주변의 온도가 좀 낮았으면 좋겠지만…. 나는 목에 단단히 매어진 카라와 넥타이를 살짝 풀어 내며 한숨을 쉬었다. "…." 저 앞에 아까 냉소적인 말을 내뱉었던 흑발의 소녀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마치, 자로잰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품속에서 시계를 꺼내어 보는군. 그러고보니, 학장이 입장할 시간이 다되었는데. 난 그녀에게서 관심을 끄고,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입구에서의 다소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상당히 다행인 일이다. 나는 번잡한 것을 상당히 꺼려하니까. "아, 안녕?" "… 안녕." 옆에서 들려온 갑작스런 인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 의자에 이제막 앉으려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연한 갈색머리… 그리고 그 외에 이렇다할 특징 있는 외견을 갖고 있진 않은 인간이었다. 다만 눈꼬리가 좀 쳐지고 얼굴 선이 얇아 상당히 유약해 보이는군. … 팔백년 전의 경험 덕분에 이런 쓸데 없는 분석이 가능해졌군. 아무튼, 나는 그가 나에게 특정한 의도로 말을 걸기 위해 인사를 한줄 알고,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는 입만 벙긋 거릴뿐 어떤 이야기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입만 벙긋거리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버리고 말았다. … 무슨 의도로 인사를 건넸는진 모르겠지만, 참 싱거운 인간이군. "여러분." 아, 학장이다.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샌 노인이 앞쪽에 마련된 단상위에 올라가 서서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우선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입학한걸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 입니다. 익히 알고 있듯,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는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대대로 유능한 인물을… …." … 지루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학장의 말에 집중하던 나는 곧 그의 이야기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저 인사 치레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말에서 관심을 꺼버렸다. 학장의 말에서 관심을 보이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은것 같다. 그래도… 듣는 척 정도는 하고 있는것 같은데. 나는 의자를 끌지 않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보이는 뒤쪽의 학생들의 시선이 잠깐 집중되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학장은 눈마저 감은채 이미 자신의 연설에 빠진듯, 내가 일어난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 아까 내가 뜬금없이 인사를 해왔던 소년은 무엇에 긴장한 건진 모르겠지만, 딱딱히 굳어있는 기색이다. 이곳에서 쉽게 나갈 수 있도록 조금 비켜달라고 요청하고 싶지만…. 모습이 상당히 딱해 보이니 그냥 뒤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 "음…? 입학식에 참가하지 않은 모양이군, 리블란셰 군." 이틀전 아카데미 입학에 대한 서류를 제출했을때 본 남자가 내게 아카데미의 학생증을 내밀며 물었다.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일까… 사무실의 안이 무척이나 분주해 보인다. 나는 그가 내미는 학생증을 건네 받으며 대답했다. "학장의 말이 쓸데 없이 길고, 아카데미에 대한 자랑으로 점칠되어 있어 더이상 그 말을 듣는 것은 쓸모 없다고 판단되어, 입학식 도중에 자리를 떴습니다." 흐응, 어디보자… 칼리체 리블란셰 고등부 1학년 E - 103 마지막에 쓰여진 문자는 아마도… 기숙사의 방 번호를 의미하는 것 같군. "… 그, 그런가?" 학생증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보자, 그는 벙찐 얼굴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서 그런 모양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신분이 고작 평민밖에 되지 않지…, 언사에 조금 신경쓰는 편이 좋을것 같다. "하하하-! 얼굴은 깜짝 놀랄만큼 순하고 곱게 생긴 주제 하는 말은 정말 걸작이잖아!"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린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채 한쪽 벽에 기대어 있는 소년이었다. 뒷머리만 길게 기른 짧은 와인색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소년은 누구라도 주목할 만큼 선명한 녹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는데, 눈빛이나 얼굴선이 무척 날카로워 인상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흐음, 이것봐라- 이름은, 칼리체 리블란셰. 신분은…, 평민? 하…? 이 루블라브룸 아카데미 안에서 고작 평민 밖에 안되는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야?" 그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친근한듯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채 내 학생증의 내용을 읽고 있었다. 다소 공격적인 언사와는 달리, 얼굴은 짖궂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봐, 리블란셰. 평민이 귀족에게 그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면, 귀족은 그런 평민에게 어떤 조취를 취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 글쎄… 내가 그걸 알리가 없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 음, 이상한 녀석이군. 그 이후로 별다른 말 없이 벙쪄 있는 소년을 내버려 둔채, 나는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쳇, 재미없는 녀석이군." 잠깐, 그렇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린것 같았다. # 이곳이 기숙사인가… 수업은 내일 시작한다고 했으니, 일단은 안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야겠군. 역시 많은 재화를 지불해야 하는 만큼, 기숙사는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훌륭하게 가공된 대리석으로 지어진 기숙사는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철문 에서부터 인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저 철문의 이음새에 먼지가 쌓여있지 않은걸 보면… 철문은 단지 '입구'로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해가 질 시간이 되면, 저 철문은 닫히고 이 기숙사는 폐쇄 상태로 변하게 되겠지. … 아무튼 내가 기숙사 안으로 발을 들여 놓자, 적지 않은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역시, 이 여성스런 외모가 문제가 되는 모양일까. 이곳은 남녀 기숙사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 기숙사 안에 여성스러움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하게 여겨지는 일일 테니까. 상대적으로 인간들 사이에선 남성의 사회적 위치가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류에 남성이라 기재해 남자 기숙사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 정도로 주목을 받을걸 알았으면 여성이라고 기재하는 편이 더 나을뻔 했군. 뭐, 어찌되었건 이제와서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 아직 입학식이 진행중이기 때문일까, 기숙사 내에 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학생증에는 E - 103 이라고 적혀 있었지… 내부의 구조가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금방 찾을 수 있을듯 하다. 1층, 2층… 아, 이곳이로군. 난간에 손가락을 올리고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의 폭신 폭신함을 느끼며 느긋하게 기숙사의 내부를 한바퀴 돌아본 나는, 한 방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문 패에 정확히 E - 103 이라고 양각으로 찍혀 있으니, 정확 하겠지. 문고를 잡고 문을 열려던 나는, 한 방에 두명이 생활한다는 것을 떠올리곤 손을 멈추었다. … 룸메이트, 라고 말하던것 같군. "…." 혹시 먼저 와있을지 모르니, 노크를 해보는게 좋을것 같다.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 똑- 하는 목재 특유의 울림이 귓가에 들어옴과 동시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내 시야에 드러나는 인물은, 어깨까지 기른 붉은색 단발… 기분좋게 휘어져 있는 반달 모양의 붉은색 눈, 짖궂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전체적으로 해사해 보이는 얼굴의 소년. 아니- 이자는 단지 인간 소년, 따위가 아니다. 그때와 모습은 다르지만… 난 알 수 있다.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다. "안녕?" 태연한듯 인사를 건네는 이녀석은…, 나는 불쾌함에 인상을 찡그리며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지, 로나벨아크하임?" "너무 매몰차게 말하는것 아닌가…? 우리는 근 천년만에 다시 만나, 서로 반가워 해야할 친한 친구 사이잖아?" 뭔가 심하게 과장된듯한 말인것 같은데. 그는 넓은 방안, 구석에 있는 침대에 가서 걸터 앉아 붉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해사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눈이 요염하게 휘어진채다. … 잘도 저런 표정을 짓는군. 나는 아카데미 사무실에서 지급받은 간단한 짐들을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먼저 한 질문에 대답이나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뭐, 우연이다." 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답이군.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를 즐겨 하지. 그래서 어쩌다보니 인간들의 교육 기관에 오게 되었고, 이제부터 그 생활을 즐겨보려 하는 참이다." "그런가…?" 가볍게 수긍하는 척을 하며, 그의 맞은편에 위치한 또 하나의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어쩌다보니, 라… 정말 편한 변명이로군. 인간들의 사회에서 생활하다 어쩌다보니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되었고 어쩌다보니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인가…? 그것은 재고할 가치도 없는, 확연한 거짓이다. 더이상의 추궁은 의미가 없다. 뻔히 보이는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진실된 의도를 말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겠지. 아무튼, 나는 그의 등장으로 기분이 무척이나 언짢아졌다.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자 마자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로나벨아크하임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걸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무튼 편히 쉬라고, 룸메이트. 아, 그리고 난 이곳에서 철저한 인간이니,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말이야." 어련하시겠나. "…." 로나벨아크하임… 그의 의도가 내게 반(反)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의 등장은 내가 현재 향하려는 목표가 분명 이곳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겠지. 적어도…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 "으음…." 잠자리는 팔백년전의 노숙에 비하면 무척이나 따뜻하고 안락했다. 무엇으로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부드럽고 체온을 받아 금방 따뜻해 지는 이불과 적당히 푹신한 침대가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게 만든다. 하지만 난 인간의 육체를 가짐으로써 아침에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나른함을 금방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맡에 희미하게 켜둔 등잔은… 아마 살짝 열어놓은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으로 인해 꺼져 버린 모양이다. 나는 책상위에 올려둔 빗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기며, 두명이 쓰는것 치고는 꽤나 넓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 내 반대편에 놓인 침대는 잘 정돈된 채였다. 마치, 이곳에서 누구도 잔적이 없었다는 듯, 그 자리엔 싸늘함 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로나벨아크하임은 이미 나간 모양이로군. 아카데미의 강의 시작 시간은 열시이니, 시간은… 약 한시간 정도가 남아있다. 내가 오늘 들어야할 강의는…. 나는 들고온 간단한 짐을 힐끗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짐 속 노트에 간단히 적어두긴 했지만 이미 머리속에 모두 한치의 오차 없이 기억하고 있으므로,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 마도 공학, 마경 개척 시대의 역사, 그리고… …. … 과목들은 대부분 인간의 마술적, 기술적, 그리고 역사적 발전에 대한 것들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지. 아무튼… 이제 슬슬 나가보기로 할까. # 교정(校庭)에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화단에 가득 심어져 있는 형형 색색의 꽃들과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풀들의 색채가 태양광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난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것에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처럼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드문 드문 보이고 있었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따로 강의실을 갖고, 매 강의 시간마다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실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꽤나 높은 신분의 인간 자제들이 대부분인 곳 치고는 상당히 의외인 방식인것 같은데. "…." 뭐 그렇다곤 해도… 고등부에 막 입학한 나같은 처지에 놓인 학생들은 일정한 클래스로 나누어져 필수로 들어야할 교양 과목을 듣는게 대부분이다. 이 경우엔 클래스대로 정해진 강의실에 교수가 찾아오는 방식이지. 선택 과목은 필수 과목이 모두 끝난 후에. 효율적인 방식… 이라고는 말 못하겠군. 일단, 나는 아직 이곳에 대해 아는게 그리 많지 않으니까. "어이, 거기 하얀 머리!" 음, 하얀 머리라… 난 뒤에서 들려온 괴이한 호칭에 몸을 빙글 돌려 나를 부른자를 바라보았다. 아, 어제 그 개구쟁이 같은 인상의 와인색 머리카락 소년이군. 그는 넥타이는 아무렇게나 풀어 헤치고, 양 손을 주머니에 넣은채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역시 그가 그리 단정하지는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기색으로 보아하니, 주변의 학생들이 그를 다소 꺼려하는 듯한 분위기다. "응?" "아니, 별다른건 아니고. 어제 사무실에서 잠깐 네 서류를 볼 일이 있었는데, 같은 클래스 더라고. 뭐, 일년간 오랜 시간을 볼 사이인데 친분이나 쌓을겸 해서 말이야." … 상당히 거침이 없는 인간이군. 그나저나 친분이나 쌓을겸 이라고? 말투가 상당히 제멋대로 인데다 성격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터라 그 말엔 신뢰가 가지 않는다. "…." "쳇, 역시 재미없는 녀석이군. 사실… 입학식 당일날 우리 클래스의 강의실을 확인 안해서 그런데…."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약간 멋쩍은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클래스의 강의실을 확인하지 않다니… 그건 좀 치명적인것 같은데, 인간 소년. … 아무튼 나는 곤란에 빠진 그를 데리고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나와 그가 속한 것은 '클래스 C'. 아마도 고등부 1 학년은 클래스 A, B 그리고 C 가 전부인듯 하다. 각 클래스의 인원이 총 얼마나 되는지는… 음, 잘 모르겠군. "내 이름은 카리에르제야." 강의실을 찾아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그가 불쑥 그렇게 말을 꺼내었다. 이름이라… 태도나 주변의 시선을 보아할때 그는 분명 '힘'을 가진 귀족가의 자제라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래…?" "아아, 무슨말 하고 싶은지 알아. 이름 뒤에 붙는 그 쓸데 없이 긴 망할 성은 도대체 어디있냐는 거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희극적인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소 거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희극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일종의 분노… 인것 같군. 상대방에게 이런 식으로 거리낌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인간은 처음보는데. 단순히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걸까, 아니면 이런식으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후자일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고마웠다. 이곳이 클래스 C 의 강의실인가? 무척이나…." 강의실 문에 올린 그의 손이 우뚝, 하고 멈추었다. 문에 달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 그의 눈빛이 흐리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것은… 아카데미의 입구에서 냉소적인 말을 내뱉었던 흑발의 소녀로군. "빌어먹을, 설마 설마 했지만 내가 저 재수없는 계집애랑 같은 클래스가 되다니! 당장 클래스를 배정하는 인간을 아카데미에서 잘라 버리라고 해야겠군!" "…." 나는 갑작스레 분노를 터트리는 카리에르제에게 놀라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재수 없는 계집애…?"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평민이라면 눈치라도 빨라야 할것 아닌가?" 그는 잠시 강의실 안을 노려보며 씨근 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녀는 메니치오 공작가의 장녀… 그리고 나는 네르세반 공작가의 차남이다. 이정도면 설명이 되었겠지?" 글쎄, 그렇게 말해봐야 인간들의 귀족 가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대답했다간 그의 미간에 파여있는 골이 깊어질까 염려되어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귀족들이 가득한 이 넌덜머리 나는 편가르기 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겠군, 리블란셰. 배움의 전당? 상아탑? 실은 다 아주 웃기는 소리지!" 내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건지, 카리에르제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채로 내뱉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어쩔수 없다는 기색으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보다, 편가르기라…. 비록 어린 인간들이 과거로부터 쌓아온 지식을 배우는 곳이긴 하지만, 아카데미란 곳도 분명 하나의 작은 '사회'. 이곳 내에서 역시 권력에 관한 인간들의 다툼이 있는건, 정말이지 어쩔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 강의실 안에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내부의 무늬였다. 천장에서 부터 시작된 다소 화려한 느낌을 주는 무늬들이 줄지어서 교수가 서야할 단상쪽의 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강의실 내부를 꾸미는 색과 벽지가 주는 느낌은 절제였고, 때문에 화려한 무늬는 시선을 천장에서 부터 단상 으로 집중 시키고 있었다. … 꽤나 공들인 기교로군. "…." 간간히 웅성거리던 소리는 카리에르제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며 완전히 멎어버렸다. 그는 강의실 안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잠시 멈추어 서서 메니치오 공작가의 장녀라는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곧 비웃음 비슷한 표정을 그녀에게 지어 보이더니 아무말 없이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학생들이 앉는 곳은 단상을 중심으로 높이가 점점 높아지며 원형을 이루는 구조 였기에 그가 앉은 곳은 강의실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흑발의 소녀는 앙칼진 표정으로 카리에르제를 마주 노려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 음, 아마 강의실의 내부에 흐르고 있는 이 싸늘한 분위기의 원인은 저 둘 인게 틀림없지만, 뭐 상관도 없는 내가 저런 쓸데없는 일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나는 금방 그들에게서 관심을 끄고 중간 정도 되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교수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 딱 잘라 말해 내가 선택한 과목이 아닌, 다른 교양 과목들은 모두 내게 전혀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었다. 인간들의 고급 예절이나 황실의 계보 등 따위를 내가 알아서 무얼 하겠는가.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는 세월에 원래의 형체는 찾아볼 수도 없게 변해버리는 무형의 지식들…. 아무튼, 오전 수업은 모두 끝이 났고, '점심 시간'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정오부터 약 두시간 정도가 이 '점심 시간'이라는 것인데…,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인간이 음식물을 취하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봐야 한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시간에 두시간이라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배정했다는 것은 시간을 무척이나 헤프게 쓰는것이 아닌가. 인간들은 잠시의 시간이라도 부족하다는듯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여유, 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이들은 모두 인간들의 큰 가치로 치는 재화를 충분히 갖고 있고, 별달리 부족함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여기다 리블란셰!" 그런 생각을 하며 느긋한 시선으로 고급스런 레스토랑 같은 식당에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발랄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히 맑고 선명한 목소리여서, 주변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그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목에 정갈한 냅킨을 두른채 나이프와 포크로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로나벨아크…." "이곳에선 아크함 이면 된다. 리블란셰. 아크함 드 셸먼" 팔백년 전의 그 이름 그대로 로군. 뭐,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탁, 하고 그가 고기를 잘라내 그 조각을 포크로 집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우물, 우물 하고 그의 볼이 움직인다. "반대편에 앉아도 좋아. 친구 한명없이 어디서 음식을 먹을까 하고 두리번 대는 네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여서 말이지." 나는 그의 반대편에 앉으며 말했다. "웃기는군." 그는 피식 하고 웃더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뭐 먹을래? 내가 사도록 할게." "난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이곳은 단지 잠깐 구경하러 온 것 뿐이니까." 왼팔로 턱을괸채, 나는 그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 그런가." 로나벨아크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 덩이의 스테이크가 그의 손놀림에 의해 정확한 비율로 잘려 나간다. 그리고 잘려 나간 조각은 포크에 의해 신속하게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목에 두르고 있는 냅킨이 전혀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는 스테이크 조각에 묻은 소스를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먹는것 그 자체에만 열중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또다시 인간을 가장할 생각이라면, 이런 음식들을 먹는 편이 좋을텐데? 아카데미의 생활은 상당히 규칙적이라 다른 인간들이 네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 의심을 가질 여지가 많을 것이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는 포크를 이용해 또다시 고기 조각을 입속에 집어 넣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피처럼 붉고 탁하다. "상관없다. 지금은 팔백년 전처럼 철저히 인간을 가장해야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곤란해질 일이 생긴다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기억을 조작해 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그런 일은 되도록이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게 좋겠지. "…." 로나벨아크하임은 침묵을 지키며 신속하게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모두 입속으로 넣었다. 접시위에는 스테이크가 놓여 있던 부분에만 소스가 묻어 있었다. 그는 혀로 입술에 묻은 소스를 마저 핥아 먹고는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리 인간을 가장해 보아도 먹는것 만은 어찌되질 않아."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먹음으로서 생명체는 살아갈 생체 에너지를 얻고, 성장할 힘을 비축한다. 고등한 지능을 가진 종족은 먹는것에서 맛의 즐거움마저 느끼지. 그렇지 않나, 루루렌칼리체?" … 상당히 뜬금없는 이야기로군. 먹는 것, 이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지? 고기를 잘라 입에 넣고 이빨로 그것을 씹어 분해시킨다. 그리고 배속으로 대강 분해된 그것을 넘기지. 그 후, 고기는 체내에서 소화되어 포식자에게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 이외에 다른 것이 있는건가?"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목에 두르고 있던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 "인간들이 고기를 먹으며 느끼는 감각은 무엇일까? 너는 느낄수 있나, 루루렌칼리체?" 로나벨아크하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뒤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웃음을 그친 후, 아무래도 나는 모르겠어,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는 왜이렇게,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느끼는 감각을, 그는 온전히 느끼고 싶기라도 한 걸까. …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소리로군. "뭐, 그냥 해본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가만히 있다간 네 녀석에게 또 쓸데 없는 소리를 들을것 같군 그래. 그러니 난 먼저 자리를 뜨겠다." 탁, 하고 그는 의자를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인간 아크함' 으로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점심 잘 먹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룸메이트. 나는 클래스 B 이니까, 심심하면 아무때나 찾아오라구." 그는 손을 허공에 휘적휘적 젓듯이 흔든 다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식당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은채 사라져 가는 로나벨아크하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양송이 스프를 가져와 먹어 보았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말한대로, 나 역시 이 음식은 그저 활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원이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고, 나는 접시에 조금 남은 양송이 스프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하늘에 석양이 지고 있다. 나는 그런 하늘을 올려다 보며 양 손을 허리뒤로 마주잡고 천천히 클래스 C 의 강의실로 향했다. 오후의 수업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교양 과목이 아닌 내가 선택한 과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봤자 아직 내가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뭐, 고작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음… 아무튼 간단한 필기구와 교재가 클래스 C 의 강의실에 남겨져 있었기에,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강의실에 들려 그것을 가져가야 했다. "어머-!" 그런데, 어디선가 여자아이의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하고 시선을 돌려보니 건물의 뒤편에 제복을 입고 있는 여러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일까. "…." 상황의 정황을 아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서서 학생들의 어깨너머로 슬쩍 살펴보니, 한 소년이 주변의 모두에게 둘러 쌓인채 몸을 다람쥐 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으, 으으-"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평민. 귀족을 모욕해 놓고,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는게 불만이라는 건가?" 아아, 아카데미의 입학식 때 입구에서 보았던 그 소년이다. 분명, 아버지가 자신에게 별장을 선물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있었지. 그는 냉엄한 표정을 지은채,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하는게 좋겠다, 일케스. 겁을 먹은채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잖아." 나는 주변에 서있는 나무에 등을 기댄채 묘한 기분으로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녀석의 이름이… 일케스 로군. "아니, 이런 한심한 녀석에게는 귀족의 권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게 좋겠지." 일케스는 그렇게 말하며 간단히 주변의 만류를 뿌리쳤다. 곧, 윽- 하는 억눌린 신음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년에게서 튀어나왔다. 그의 배에 파고 들었던 일케스의 발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두꺼운 가죽 부츠 같은데, 무척 아프겠군. "귀족은 괜히 귀족이 아니다. 요즘엔 평민의 권리가 상당히 신장되어 너같이 잘못된 착각을 하는 녀석들이 많은것 같지만, 자고로 귀족이란…." … 의미 없는 말들이 이어진다. 그들이 만든 경계, 그들이 만든 가치- 드래곤인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다. 나는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는, 곧 그 자리를 뜨려했다. "하-?" 순간,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허공을 꿰뚫었다. 그 짧은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도 선명한 나머지, 모두의 시선이 즉시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집중되었다. "카리에르제…?" 일케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카리에르제의 인상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괜히 친한듯이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이 천한 종자야. 졸부가 돈으로 귀족을 사더니, 역겹게도 그 자식 새끼가 귀족의 권위를 운운하며 떠들고 다니는군." 얼굴을 약간 덮은 와인색 머리카락 사이로 마치 짐승처럼 빛나는 날카로운 눈동자가 일케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너어-! 네가 아무리 공작가의 아들이라고 해도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결투 신청을 하도록 해라, 일케스." "윽…!" 일케스라는 소년은 카리에르제에게 무척이나 화가 난듯, 붉어진 얼굴로 분한 표정은 짓고 있지만, 감히 그에게 대항하려 들진 않았다. 카리에르제… 그는 집단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저 소년을 구해주기 위해 온것일까. "가, 가자! 이 정도면 처벌은 충분한것 같고, 더이상의 불필요한 응징은 내 품위를 손상시킬수도 있을테니까." 일케스와 그를 따르는 듯한 일단의 소년의 무리는 그것으로 이 곳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카리에르제, 저 성격 나빠 보이는 소년이 등장하니,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어 버리는군. "고, 고마…." 카리에르제는 인상을 구기며 고마움을 표하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인사하지 마라, 평민. 본의 아니게 도움을 주긴 했지만 나 역시 너처럼 주제도 모르는 녀석은 점심에 나왔던 그 빌어먹을 당근 보다도 더 혐오하니까 말이다." … 왠지 그의 표현이 무척 이상한것 같지만, 아무튼 이것으로 상황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할까, 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카리에르제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다소 짜증이 섞인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간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피식 하고 웃고는 건물 사이를 지나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흠, 리블란셰…, 리블란셰." "…." 나는 책상위에 오늘 지급받은 서적들을 올려놓으며 침대에 업드려 내 성을 중얼거리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방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책들을 정리한 후였다. "인간의 고어(古語)로 '백색'이란 뜻이잖아? 이렇게 노골적인 단어 선택이라니…."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실 '현자가 지어준 성'이라는 변명은… 음, 별로 유효하지 않겠군. "비꼬는 거니?" 그렇게 물으며 탁, 하고 책을 책상위에 세게 내려놓아 보았다. 왠지 모르게… 돌아오는 시선은 비웃음이다. "네가 책상에 책을 소리내어 내려놓은 것은, 네 불편한 심기를 알리고자 한 비언어적인 행동이지만 네 멍해 보이는 표정이 그것을 모조리 무력화 시키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아는가, 루루렌칼리체." … 망할 녀석. 나는 가장 두꺼운 책을 집어 그에게로 휙-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채로 간단히 내가 던진 책을 피해버렸다. "이크-! 이봐 리블란셰 군, 인간들 사이에선 이런말이 있지- 말로 안되니 폭력을 사용한다고."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하나 더 집어서 등 뒤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의외로 이번엔 명중한 모양인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로 안되니 폭력을 사용한다…, 와 같은 인간식의 비꼼은 드래곤 사이에선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 우리가 진정으로 '대화'를 할 생각이라면, 만능의 언어를 사용했을 테니까. … 나는 우리 드래곤들 사이에서 '소통'의 불능은 없으리라 굳게 믿는다. "상당히 아프군."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그에게서 던졌던 책을 받아든 나는 이제 책상위에 올려둔 책들을 천천히 책장속에 꼽기 시작했다. "이봐, 리블란셰 군."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던 손을 멈추었다. 상당히 거슬리는군. "그 '리블란셰 군'이라는 호칭좀 그만두지 않겠니?" 로나벨아크하임은 히죽,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칼리체." 리블란셰 군 이나 칼리체 나 내면에 깔린 그의 장난기에는 변함이 없다는걸 잘 안다. 하지만… 나로선 그에게 칼리체라고 불리는 편이 훨씬 낫다. "그나저나 너는 어째서 남성 기숙사로 오게 된거지? 뭐 특별히 의도하는 바라도 있는건가?" … 대화의 내용이 점점 시시해져가고 있는것 같지만, 아무튼 대답해주어야 겠지. "현재의 나는 남성 이니까." "아-?"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 일그러진 표정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는, 난 잘 알지 못하겠다. … 아니, 저 표정은 단지 '일그러짐' 일 뿐이다. 인간의 감정 같은 것은 일체도 담겨있지 은 채다. "왜?" "넌 아무래도 아직 인간 남성과 여성을 확실히 구분짓지 못하는것 같군, 루루렌칼리체." 내 외모가 여성에 가깝다는건 알지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건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지금의 나를 자세히 살펴보기만 해도 가슴이 없으니까. "흥, 대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군. 긴말하지 않겠다. 이미 그 모습을 많은 인간들에게 보인 상태이니 그 인간들의 기억을 전부 조작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깨 길이 정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게 좋을거다." 흐음, 긴 머리카락이 여성스러움 중의 하나라는 건가. 아무튼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사실, 용인 내가 인간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에 좀더 자연스럽게 녹아들 필요가 있겠지.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일출을 보고난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의 충고대로 긴 머리를 어깨 정도의 길이로 잘라버렸다. "…." 지금 내 손엔 가위로 잘라내 버린 긴 흰색의 머리채가 들려있다. … 무척이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등까지 덮던 머리카락이 사라지자, 시원하기도 하지만… 일단, 머리가 무척이나 가벼웠다. 몸을 돌려 거울을 보자, 단순히 머리를 잘랐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머리를 자르기 전의 모습과는 내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달랐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전보다는 훨씬 남성다워 보이는군. 뭐… 상대적으로 말이지. 상당하게 깔끔하게 잘랐기 때문에 따로 더 다듬을 필요는 없을것 같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랐던 가위를 원래 들어있던 서랍에 넣고, 잠시 머뭇거리다 잘라내 버린 긴 머리채를 잘 갈무리해 함께 그 서랍에 넣어두었다. "…."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내 가느다란 목을 한번 휘감고 가는 바람은, 이제 수습하기 곤란할 정도로 나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지는 못했다. … 약간 아쉬운 마음도 있군. 높은 곳에 올라가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바람의 흐름을 느끼는 사소한 행동은 꽤나 즐거운 유희였는데- 으음, 내게 머리를 자르라고 충고했던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가 일출을 보기도 전에 방을 나선 후였다. 아직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침에 녀석의 모습을 본적이 한번도 없군. 게다가 오늘은 일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어났으니, 늦잠을 잤다고 할 수도 없는데…. 도대체 뭘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 오전 강의가 끝났다. 나는 가방에 책을 집어 넣으며, 양 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려 기지개를 켰다. 강의실의 앞쪽에는 마치, 아무렇게나 휘갈겨 놓은듯한 필기 내용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글씨가 상당히 이상해서, 나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약간 힘들었다. 저런걸… 필기체 라고 했던가. 편의를 위해 문자를 뒤틀게 써 놓은것. 실제로, 저것은 정말로 편한가? 잠시 깃펜을 들었다가 놓았다. 으음 … 나는 잘 모르겠군. "…." 나는 고개를 돌려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오늘은 아침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나의 아름다운 외모가 어디에서든 훌륭한 이슈거리가 된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그 따가운 시선들의 원인은… 아마도 내가 그 긴 머리카락을 한번에 잘라내었기 때문이겠지. 창밖에 보이는 모습은 따분한 교정이 유일했기 때문에, 나는 다소 지루한 시선으로 책상을 내려다 보았다. 다른 인간들의 눈을 의식해 필기하는 '척'하는데 필요한 양피지 조각이나 깃펜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꼬박 두시간을 기다려야겠군. 아, 그렇다면… 잠시 낮잠이라도 자는게 어떨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것 같다. "저기, 리블란셰… 라고 했었지?" 막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는 도중, 어떤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분명… 우리 클래스의 여학생이로군. "응, 맞아." 나는 고개도 끄덕여 주었다. "…." 상당히 쭈뼛쭈뼛한 기색이다. 용건이 있어서 말을 걸어온게… 아니었나? "왜 그러니?" "저… 머리는 갑자기 왜 잘랐나 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인간이로군…. 자신이 질문해놓고 자신 스스로가 민망해 할 거라면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하는 걸까.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그녀에게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 "…." 갑자기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해왔던 같은 클래스의 여학생을 뒤로 하고, 나는 강의실을 나와 복도로 진입했다. 복도는 다소 차가운 느낌을 주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대리석 바닥과 상반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는데, 학생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다소 더러워져 있었다. 나는 그 융단의 푹신함을 느끼며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점심시간동안 잠깐 낮잠이라도 잘 장소를 물색해 보기로 할까…. "어라, 칼리체!" 어, 그러니까…. "… 아크함?" 아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녀석이로군. 그는 예쁘게 생긴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와 함께 거의 팔짱을 낀듯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아, 같이 식당이라도 가는 모양이로군. "오전 강의는 모두 끝난거야? 그럼, 너도 같이 식당에 가지 않을래?" 선명하게 웃으며, 내게 그렇게 묻는 로나벨아크하임은 이곳,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있는 여느 학생들과 전혀 다를게 없어보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미안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서. 나중에 부탁할게."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아, 그리고 오늘은 기숙사 방에 늦게 들어갈 예정이니까 먼저 자도록 해." … 단단한 가면. 로나벨아크하임은 아직도 다소 어색한 나와는 달리 능숙하게 연기를 끝마치고, 옆에 있는 여학생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그의 연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보내고 잠시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있자, 어머, 너 쟤랑 아는 사이니-? 라는, 소녀의 목소리가 아래쪽 계단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는군. 흐음, 슬슬 나가 보도록 할까. "…." 이제 슬슬 늦가을에 접어드는 날씨라 그런지, 기온이 상당히 쌀쌀해 지고, 주변의 풍경이 앙상하게 매말라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난 양 팔로 차갑게 굳은 어깨를 문지르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아, 그래. 저기 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목재 의자가 좋겠군. 의자는 여러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혼자서라면… 편하게 누울수도 있겠군.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터 앉으며 머리위를 올려다 보았다. 낙엽이 쓸쓸한 모습으로 매마른 풀숲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주변의 매마름은 곧 다가올 봄의 재탄생을 기약하는 것…. 그러고 보니, 계절의 순환역시 정말 질릴 정도로 긴 시간동안 반복되어온 것이로군. 하루를 주기로 끊임없이 뜨고 지는 태양처럼- 태양과 다른 것이라면, 계절은 계속 해서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 반복된다는 것이겠지. 죽음과 탄생… 그리고 반복이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생각이 날듯, 말듯한 미묘한 기분이었다. 아니, 망각이 존재하지 않는 내게 생각이 날듯 말듯 하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지. "…." 이것은 분명, '기시감'이다. 내가 기억을 리셋하기전, 내가 느꼈던 감각, 그리고 생각이 지금 이곳에 다시 펼쳐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시감은 절대로 잡히지 않는… 마치, 대기중에 흩날리는 미세한 먼지들과 같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누군가가 멈추어 섰다. 이 아련한 감정에 그다지 눈을 뜨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눈을 떠주는게, 내 앞에 걸음을 멈춤으로서 '대화'를 걸어온 타인에게 존중을 다하는 일이겠지. "당… 신은?" 눈을 뜬 내 눈앞에 서있는건 선명한 금발을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무척이나 잘 가꾸어진 풍성한 금발과, 약간의 놀람이 어린채 나를 바라보는 싱그러운 녹빛의 눈동자는, 들여다 보는 것 만으로 그녀가 고귀한 핏줄의 태생임을 알게 해준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감싸고 있는 정갈한 의복은…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제복이로군. 그녀는 검지와 중지로 천천히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놀라운 상황을 겪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인듯 했다. 네거스텐 제국의 황녀 펠테넨시아. 곤란하게도 설마, 그녀 역시 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아니, 조금만 생각해 보았더라면 예상할 수도 있었을 일인데…. "누구시죠?" 일단은 모른척을 해본다. … 다행히 그것이 먹힌걸까, 황녀는 내 물음에 약간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녀와 마주쳤던 그때는 어두운 밤인데다 머리카락이 짧아졌으니, 확신할 수는 없을 테지. 나는 입술에 손가락 끝을 댄채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녀인 그녀가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이곳을 다니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너무 공교롭군. 나는 왠지 그녀와의 두번째 만남이 우연에서 이루어 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개입된 느낌이다. 노골적으로 내게 접근한 로나벨아크하임, 황녀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각…. 마치 코끝을 못살게 간질간질 거리는것 같군. "아니…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요." 황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가를 예쁘게 찡긋거리며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있는 채였다. 하지만 확신이 없는 이상 더이상 나를 추궁할 순 없겠지. 일단은 이걸로 간단히 넘어가는 건가. 잠시 침묵이 흐르다 그녀가 내게 의외의 것을 물었다. "혹시, 너… 일학년 이니?" "네, 그렇습니다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약간 허리를 숙였다. 긴 금빛 머리채가 어깨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분위기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혹시나 했지."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 흐음- 붙임성이 꽤 좋은것 같군.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 얘기는 많이 들어요." 사실 들어본적은 한번도 없다. 이것은 단지 그저 그녀와의 대화를 유연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한 말일뿐. 나는 그녀가 나에게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를 살펴보았다. 황녀…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에 위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선 그리 오만한 빛은 보이지 않는것 같다. … 이상한 인간이군. "나는 내년이면 이곳을 졸업하게돼." 삼학년… 이라는 건가. 그나저나 처음만난 사이에 나누는 대화치곤 꽤나 뜬금이 없다. 그녀는 양손을 뒤로 맞잡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니,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는 채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채 내가 아닌 어떤 아득한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힘을 억누르지 않은 용의 눈 때문에 자꾸 쓸데 없는 것이 보이는군…. "… 산책하던 중이셨나요?" "아… 미안. 그러고 보니, 우리 초면인 사이에 아직 서로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구나." "전 칼리체 리블란셰에요."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저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이 제국의 황녀라는 사실을… 어째서인지, 내게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은걸까. "나는 펠이라고 불러줘." 펠이라… 펠테넨시아라는 이름의 맨 앞글자로군. 이 인간, 어쩌면 상당히 단순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펠인가요?" "으, 으응."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학년과 클래스가 다른 그녀와는 일부러가 아닌 이상, 직접적으로 접촉할 기회는 상당히 적겠지.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 하는 지금의 행동은 무용하지 않다. 아무튼, 나는 이미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아는체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이런곳… 좋아하니? 잘 조형된 곳이긴 하지만, 상당히 후미진 곳이라 발길이 무척 뜸한 곳인데." "전 조용한 곳이 좋거든요." 잠시 낮잠을 자려고 했었거든. 하지만 갑자기 불쑥 등장한 이 황녀 때문에 내 원래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뭐, 말하는 투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이곳을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지만. "보이는 대로구나?" 보이는 대로 라면…, 내가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것처럼 생겼다는 걸까? 어떻게 그런걸 구별할 수 있을까- 따위 같은, 수가지의 생각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 제가 얌전해 보이나요?" 아마도 핵심은 이것이겠지. 순간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들에 스스로에게 웃음이 나온다.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것처럼 생겼다', 라. 약간의 통찰조차 없었던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난 가끔,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정한 결론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조각처럼 모이고 모여, 이루게 되는 하나의 거대한 퍼즐같은 것이니까. 현재, 내가 쫓고 있는것 역시… 그럴것이다. # 펠테넨시아와는 간단한 잡담을 나누다가 헤어졌다. 내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여성으로 오해받는 일은 없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의 충고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봐야겠군. "리블란셰." "예." 교수의 부름에 나는 앞으로 나가 그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탁, 탁- 하고 내가 목탄으로 매끈하게 닦여진 석판 위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수식을 써나가는 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 내가 보기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계의 법칙들에 관한 지식은 수준이 무척이나 조악하고, 그 폭이 좁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응용하여 그들의 편의에 그것을 적용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훌륭하다 할 수 있겠지. "대단히 신속하고, 훌륭한 풀이로군. 하지만 그런식의 접근은 좋지 않네, 리블란셰 군. 물론 결론된 도출은 거의 완전한 정답에 가깝지만 이런 식으로 풀이를 전개해 서야…." 교수는 석판에 쓰여진 내 풀이과정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마치, 계산은 이미 머리속에서 모두 이루어진 후 이고, 그저 풀이과정의 구색만 맞추기 위해 중간중간 필수적인 부분만 써놓은것 같군." … 제대로 짚었군. 나는 이어지는 교수의 말들, 이를테면- '너무 머리만 믿는것은 좋지 않네.', '이런 단계적이고 확실한 풀이과정을 사용해야 실수가 없다네.' 와 같은 소리를 들으며 자리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터 앉으며 왼팔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그만두었다. 이런 식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무척이나 힘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의를 진행하고, 듣는 인간들에게는 실례되는 생각이겠지만, 지금 이 강의에서 전승되는 지식은, 인간의 발전에 대해 논할 수준이 결코 되지 못한다. 내게 시간은 무척이나 많고, 좀더 고등한 지식을 배우는 상위 학년이 되기까지는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로나벨아크하임 때문일까, 왠지 초조함이 느껴지는것 같기도 하다. "…." … 강의가 끝났다. 오늘은 강의가 일찍 끝나는 날이라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엔 태양이 꽤나 높은 위치에 걸려있었다. 바로 기숙사로 돌아갔다간, 얄미운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은데. "리블란셰, 머리가 무척 좋은가보네?" 의자를 빙글 돌리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옅은 붉은색 단발에 양 뺨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귀엽게 보이는 소녀였다. 전부터 가끔씩 먼저 말을 걸어와 약간의 친분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다. "글쎄…." "부럽다. 나는 이렇게 계산이 많은 과목은 성적이 좋지 못하거든." 타인의 지능을 부러워 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머리가 별로 좋지 못한 편인가…? 그나저나 성적이라…. 학력 테스트 라는게 각 학기마다 두번 있다고 들었다. 시험… 이라는 것인데, 모두들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것을 언급할때마다 이곳 학생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으니까. 그저 습득한 지식을 확인해보기 위함인데, 어째서 꺼려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타당한 성적을 얻을 수 있을거야." "어머, 리블란셰는 성실하구나?" "…." 글쎄, 성실하다고 해야할지 어떻다고 해야할지. "수업이 마음에 차지 않니?" 나는 의외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에 다소 놀라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리셰 드 레베링턴, 듣기로는 어딘가 지방 귀족의 딸이라고 하던데… 꽤나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 가문인듯 했다. "그럼 아카데미의 부지 한쪽 구석에 위치한 장서관에 가보는게 어떻겠니? 듣기로는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서가 있다고 들었어." 네리셰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장서관이라… 뜻하지 않은 인물에게서 좋은 정보를 얻었군. # 그녀에겐 꽤나 깊은 감사를 표해야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마땅히 타당한 보상을 해주어야겠지. 따라서 나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녀는 내게 윙크하는 모습을 한번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윙크라는 것은 한쪽눈을 찡긋하는 것으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일종의 사인이라 알고 있다. 다만, 그녀가 내게 그런 윙크를 요청한 이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한 보답을 꽤 마음에 들어했던것 같았다. "…." 아, 이곳이로군. 난 가방에 들어있는 책의 무게에 다소 뻐근해지는 어깨를 두어번 정도 두드리며 내 눈앞에 서있는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딱잘라 말해, 건물의 외관은 아카데미 내의 여러 건물들에 비해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곳곳에 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고, 그 세월동안 계속해서 증축을 해왔는지 그런 흔적들이 확연하게 남아있어 다소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증축을 계속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 장서관이라는 곳에 모여있는 자료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나로서는 기꺼운 일이다. "…." 장서관은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그곳으로 발을 들인 나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종이책의 냄새에 정신이 약간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책이라는 것… 인간의 지식 전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매체중 하나이지. 어디보자…, 나는 내 키보다도 두배는 더 커보이는 책장을 올려다보며, 그 중 아무거나 하나를 빼어들었다. 책의 표지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흐응- 규모가 규모인지라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군.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책의 표면을 한번 훑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먼지가 벗겨지고, 먼지 아래 있던 희미한 문자들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먼지와 함께 세월마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특별히 찾는 책이라도 있니?" 그때,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것은 군청색 머리의, 키가 상당히 큰 청년이었다. 그는 읽고 있었던 듯한 책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덮으며 이곳으로 다가왔다. 이 장서관의 관리인인가…? "딱히 찾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만, 당신은…?" "난 패링이야. 네가 그 유명한 '칼리체 리블란셰'로군. 그 특이한 백발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지. 아, 나는 내년이면 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삼학년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편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불만은 없겠지?" "불만은 없어요." 묘한 느낌의 인간이군. 꽤나 거침없는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잔잔하게 가라앉은 청색의 눈동자는 쉴새 없이 내 모습을 훑고 있다. 상당히…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인간, 이라는 느낌인데. "그나저나, 유명하다는 것은…?" "뭐 여러가지 이유에서 말이지, 후배 님." 후배 님인가. 꽤나 친근한 듯한 느낌이군. "사실, 네게 말을 건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야.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들 중에 눈이 확 띄어질만한 미인이 있다고 들어서 말이지, 그것도 남자인 주제에." 다소 딱딱한 어조 때문에 농담… 으로는 들리지 않는군. 나는 약간 난감한 기분으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굉장히 단순한 이유로군, 호기심이라…. "패링 선배님은-" 선배님, 이라는 말이 왠지 어색해 입끝에서 불편하게 감돌았다. "장서관에 자주 드나드시나요?" "그렇게 보이니?" 대화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이어져 나간다. 나는 그것에 조금 묘한 기분을 느낀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런식으로 약간의 '친근감'을 갖은채 대화하는 것. 패링이라는 이 청년도 그렇지만,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펠테넨시아 황녀나 클래스의 인간들도 모두 그리 어렵지 않게 말을 걸어오고, 간단한 일들을 청원해 왔었다. '아카데미'라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일까…. "… 이곳에선 아주 살다시피 하는 편이지. 나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는 품에 안고있던 세권의 책중 한권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장서관의 자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군. 잘하면 간단한 도움 정도는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괜히 말을 걸어 방해한건지 모르겠군." "아니요, 오히려 감사했어요." 패링이라는 인간은 웃음을 흘리며, 그럼, 장서관에 대해서 필요한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라구- 라고 말하며 책장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 말에 깃들어 있는것은, 희미한 호의. 원래 성격이 친절한건지, 아니면 다른 인간들처럼 내 아름다운 외모에 매혹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게 호의를 보내오고 있으니, 깊게 생각할건 없겠지. 그럼, 저녁이 되기 전까지… 천천히 이곳을 둘러보기로 할까. # 일단, 장서관을 돌아다니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간을 상당히 많이 투자해야겠다, 라는 것이었다. 건물 외부에 수많은 증축의 흔적을 보고 예상했던 것이지만… 이건 너무나도 넓군. 게다가 어떤 책장은 높이가 굉장히 높아서, 위에 있는 책을 꺼내려면 사다리라는 이상하게 생긴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도 있었다. … 조금 곤란한데 말이지. "앗-" 품에 한아름 가득 안은 책들중 맨 위에 위치한 책 한권이 바닥으로 떨어질뻔 했다. 다행히 중심을 잘 잡아 떨어지진 않았지만. 책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뻗은 발 밑에 긴 무늬가 보였다. 바닥의 자재는 목재 였는데, 아마도 나무의 결이 도드라져 나온듯 했다. 나는 그것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책장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책장의 모퉁이를 돌아, 책을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커다란 탁자에 품에 안은 책들을 모두 내려놓았는데, 탁자 반대편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카리에르제… 로군. 풀네임은 카리에르제 드 네르세반 이었나. 다소 곱상하게 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그는 어떤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그 옆에도 책은 내가 가져온 것만큼이나 가득 쌓여 있었고, 책들 사이에 흰 종이가 껴 있었다. 뭘하는 거지? 나는 가져온 책을 내버려두고 그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책에 너무나도 집중한 나머지 내가 접근한것 조차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다. 내 움직임에 의한 바람이 그의 와인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평소 보이던 다소 짖궂어 보이는 개구쟁이의 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책 사이에 끼어져 있는 종이, 책 밖으로 드러난 흰 부분에 씌여진 글자는… 비, 공정? 하늘을 나는… 배, 라는 뜻인가. 아니,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종이 위에는 그 '비공정'이라는 것에 대한 그림과 주석이 잔뜩 달려 있었다. 깃펜으로 쓰고, 고치고, 또 쓰고한 흔적이 가득해서 종이가 거의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쉽게 찢어질것 같지 않은걸 보면, 종이의 질이 무척 좋은것인가 보다. "카리에르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리블란셰." "네가 알려준게 이름 밖에 없잖니." 뭐, 성을 언급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뒤로 다가가 그가 읽고 있는 책을 살펴보았다. 제목이… '원리' 인가. 무엇에 관한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군. "뭐, 좋을대로 해라. 다만, 내 일을 방해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방해되었다면 미안해. 그런데… 비공정 이라는게 뭐니?" "너…." 그의 눈이 가늘어 지며 번뜩이는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겨진다. 그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당혹과, 약간의 분노. 나도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참견하는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종이에 가득 적어놓았던 '비공정'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이 쏠린다. 저것은 내게… 중요한 '소재'가 될 수도 있다. "그냥… 취미일 뿐이다. 너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야." "한번 보여줄수 없을까?" 내가 책 사이에 끼어있는 종이로 시선을 던지자 카리에르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건방지구나, 평민. 아카데미 내에선 신분을 내세우지 않는게 원칙이지만 나는 네르세반 공작가의…." 그는 말을 하다말고 '네르세반'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어놓자마자 인상을 더욱 구겼다. 왠지 그는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무척이나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가 위협적으로 으르렁 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안될까?" 다시 한번 물으며 카리에르제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돌리고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내게 느린 동작으로 종이를 건네 주었다. 종이는 상당히 오래 되었는지, 곳곳에 누른 얼룩이 묻어 있기도 했다. 어렸을적 부터 써왔던 것인지도 모르겠군. "비웃으면 날려버린다, 평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으로 접힌 종이를 폈다. 아까전에 카리에르제의 어깨너머로 본 대로 '비공정'이라는 물체의 대략적인 모습과 설명이 잔뜩 적혀 있었다. 이건…. 무척이나 형편 없다. '비공정'이라는 물건은 매끈한 유선형의 몸체로 디자인 되어져 있었다. 그의 그림 실력은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인지, 상당히 조악해 보이기 까지 했다. 하늘을 나는 원리…, 의외로 꽤 뛰어난 수준의 지식과 기술이 접목되어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중력 반전'을 시키는 마도 과학 부분의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 딱잘라 말해, 이것은 현실화 될 가능성이 없는, 그저 '상상의 물건' 일 뿐이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책들… 이 책들로, 카리에르제는 '비공정'이라는 물건의 뼈대를 상상해 내고, 그것에 살을 붙여가고 있었던가. 나는 그에게 그 종이를 건네 주었다. 꿈… 이라는 것일까. 하늘을 날고 싶은 꿈? 글쎄… 그다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상상해 낸 이 물건이 현실화 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커다란 진보가 되겠지. "멋져." "뭐…?" "멋지다구, 너는… 하늘을 날고 싶은 거니?" 그는 왠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나는 하늘을 날고 싶다기 보다는…." 카리에르제가 말끝을 흐리며 종이를 품속에 황급히 집어 넣었다. … 그의 얼굴이 벌개져 있는것 같기도 하군. 아무튼, 그 혼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상상을 현실화 시킬수는 없겠지. 나는 아주 잠시 동안… 그러니까, 나무에서 떨어진 잎이 바닥에 닿을 때 까지의 시간 동안 생각에 빠졌다. 팔백년 동안 이상하리만큼 진보가 없었던 인간들의 사회, 내가 그곳에 결정적인 '진보'라 할 수 있는 물건을 탄생시켜 보면 어떨까. 아, 생각을 잘못했군. 만약에 그렇게 되면, '비공정'이라는 물건을 탄생시켜 인간들의 사회에 결정적인 발전을 불러오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닌 '카리에르제'이어야 한다. 드래곤인 내가 주체가 되어 불러오는 변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 보여주었으니까 됐지? 나는 이만 가봐야 겠어. 아, 그리고…." 그는 자료들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마, 리블란셰.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누구에게라도 이 일을 말한다면,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어 주겠어."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엄한 경고를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 곤란하게 될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별로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다. 나는 그가 떠난 자리를 내려다 보며, 상당히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 "전 가볼게요, 패링 선배 님." "아, 벌써 가는건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책을 잃고 있던 패링은 내가 장서관의 출구로 나서자 나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장서관을 나가려다, 다시 몸을 돌려 그에게 물었다. "카리에르제… 라고 아시나요?" "흠, 왜 모르겠어? 네르세반 공작가의 차남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상당히 유명한 편이지." 유명… 하다고? 뭐, 그다지 얌전한 인간은 아닌듯 하니까. "그는 장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편인가요?" 패링은 내 물음에 간단히 대답했다. "나만큼이나." 그리고 그는 그 간단한 대답에 네르세반 가(家)의 차남은 입학하기 전부터 장서관을 이용해왔어, 라고 덧붙였다. 예상 대로로군. # 어느새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번 쉬는 주말로, 오전 오후, 모두 강의가 비어 있다. 나는 다소 답답한 제복을 벗어버리고 하얀 셔츠를 걸친채 침대에 걸터 앉았다. 주말엔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을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 복장으로 밖에 나가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나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와 조금 나른해진 몸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책상위에 떠놓은 차가운 물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 뭐야, 하나도 시원하지 않은데…. 아무래도 로나벨아크하임 녀석이 찬물을 마셔버리고, 미지근한 물을 채워두었나 보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방안을 휙휙 둘러보았지만,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욕을 하러 가기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또 어딘가로 나가버린 모양이지…. 나는 다시 컵을 들어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아카데미의 입구가 개방되어 있는것이 보인다. … 평소에는 통행이 금지되던 아카데미의 밖이, 주말엔 허용된다고 하니 한번 나가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것 같군. 그럼, 마음먹은 김에 잠시 외출이라도 해볼까. #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외출 절차는 상당히 번거로웠다. 학생증을 제출하고, 외출 사유,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귀환할 시간 등 꽤 많은 것을 얄팍한 양피지에 써넣어 제출해야 했다. "어라, 리블란셰?" 깃펜을 쥐고, 양피지에 천천히 외출 사유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데,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 은은한 향기가 코끝으로 들어와 뇌리로 퍼져 나갔다. 마치 벌꿀처럼 달콤한 향기. 이건… 음, 향수 인가? 나에게 다가온 인간은 와인색 머리카락에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소년이었다. 카리에르제…, 그의 손에도 역시 나와 같이 외출 사유를 적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너도 외출을 할 생각인가 보네." "응." "뭐,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써 넣어라. 나는 먼저 갈테니까." 그는 꽤 친근한 모습으로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손에 들려 있는 양피지를 아카데미 사무 창구에 제출했다. 전에 장서관에서 있던 일 때문일까… 그는 내게 약간 호감을 가진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런데 카리에르제가 들고 있던 양피지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것 같았는데… 설마, 받아들여진건가? 나의 의아하다는 기색을 읽은듯, 카리에르제는 내게로 다가와 가볍게 픽,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가의 아들이라는게 이럴때는 무척이나 편리하지. 그 번거로운 사유서를 일일이 써서 제출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야." 카리에르제는 다소 희극적인 목소리로, 비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그의 어조는 마치 '공작가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저 아카데미에서 외출할때 편하다- 라는 것 정도로 격하시키는 듯 하다. "아무튼… 열심히 하라구, 평민!" 신분의 힘… 인가. 나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과 내 손에 들려 있는 양피지 조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다. 인간의 신분 차이를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본적이 또 있었을까…. 고작, 아카데미에서 외출하는 일 정도로. … 재미있군. # 과연, 세월이 흐르기는 흘렀는지 거리의 풍경은 과거와는 거리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일단은 이 도시의 규모부터가 과거와는 비교도 없을 만큼 거대하니까. 정작, 중요한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게 문제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제 어깨 정도로 짧아진 머리카락을 귀뒤로 쓸어 넘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규모의 아카데미가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등지고 서있었다. 아카데미의 입구엔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이 몇명 보여, 나는 왼손으로 태양빛을 가리며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네리셰 와… 그녀의 친구들인가. 주말엔 꽤 많은 학생들이 외출하는 모양인지, 평소에는 한산한 아카데미의 입구가 다소 붐벼 보이기 까지 했다. 나는 벽에 기대어 한동안 아카데미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 곧 기대어 있던 벽에서 몸을 떼고 수도의 거리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 거리를 지나다니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 어떤 자는 높게 묶은 긴 머리를 하고 있고, 어떤 자는 손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짧은 머리를 하고 있기도 하다. 아니, 저 인간은… 그냥 대머리인가. 툭, 하고 어떤 인간이 나와 어깨를 가볍게 부딪치고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힐끗 돌려 그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미 없는 스침. 발에 채일듯, 넘쳐나는 수많은 개체의 인간들…. 그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방금과 같은 우연한 부딪침 처럼.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내 눈앞을 지나가는 인간들의 수만해도 수십명을 가볍게 넘어간다. 모두 각양각색의 생김새, 옷을 입고 있지. 그리고 나는, 그 모든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번 스쳐지나가고, 잠깐 얼굴을 본 인간이라도, 망각을 모르는 나는 그것을 생생히 떠올릴수 있다. 드래곤인 나에겐 그 사소한 스침조차,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 나는 길거리에 늘어선 노점상 들 중 한곳에서 재화를 지불하고, 노란 색의 쥬스를 사 빨대를 꽂아 입에 물었다. 시큼한 맛의 액체가 길다란 빨대를 통해 입속으로 들어온다. … 느긋하게 돌아다녀 보기로 할까. "얼마에요?" "은화 두개요." "어머, 너무 비싸다- 조금만 깎아주시면 안되요?" 아카데미가 위치한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서민'들이 사는 블록이 나오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저런 대화가 들려온다. 아카데미 주변에 위치한 거주구는 주로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식의 흥정은 듣기가 어렵지. … 이제 나도 상당히 익숙해 졌군. 막 보금자리에서 나와 인간들의 사회에 섞여 들었을 때는 '좋은 아침' 이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아니, 그 말은 아직도 완벽히 이해가 가진 않지만. 나는 이제 약간 남은 쥬스를 마저 마시며, 깨끗하게 닦인 대로 위를 바라보았다. 하얀 벽돌위로 쏟아져 내리는 태양빛이 반사되어 약간 눈이 부시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인간들이 재화를 주고 받으며 식재료를 거래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 이곳에선… 아니, 이 시대에선 존재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천조각을 이어 만든 얄팍한 꾸러미에 푸른색의 싱싱한 야채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왼팔에 걸쳐 놓은 여성은 허리를 굽히며, 바닥에 늘어놓은 싱싱한 식재료 들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쏟아진 옅은색의 갈색 머리카락… 식재료를 팔던 상인은 평민들 사이에선 흔치 않은, 섬세한 눈썹과 이목구비, 그리고 깊은 기품이 깃든 눈동자에 다소 당황한것 처럼 보였다. "여기가 좀 상해 보이는데요?"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식재료중 하나를 짚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보신거요, 이건…." 상인은 양손을 내저으면서 까지 그녀의 말을 부정했지만, 결국 서너번 정도 오간 대화 끝에 가격을 약간 깎아주었다. 그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구매한 식재료 들을 꾸러미에 넣었다. 꽤나 능숙해 보이는걸. "으응, 오늘 저녁은…." 저녁 식사 메뉴를 생각하고 있는가. 그녀의 얼굴은 전과 다르게 무척 평안해 보인다. 평범한 일상에 젖어있는 모습. 나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여리한 뒷모습, 가느다란 팔 다리. 무척이나 연약해 보이는 신체이지만, 그녀의 힘은 육체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지. 인간의 모든 신비를 안고 있는, 두개의 좌중 하나. 백색의 좌, "리체르아." 무척이나 놀란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 내가 바로 한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신체가 약간 성숙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당… 신은." 놀람으로 크게 치떠진 그녀의 동공이 곧 줄어들며, 경직되었던 입가가 부드럽게 풀린다. 그것은 마치, 봉오리 져있던 꽃이 천천히 개화하는것 과 같은 모습이라 나는 마치 무언가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았다. 백색의 좌, 리체르아의 눈에 퍼지는 아련한 감정은- "백룡 님." "어떻게…." 라고, 입을 열었던 나는 그 '어떻게'라는 시작점으로 이어질 질문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이런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루루렌칼리체 님은, 짧아진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거의 달라진게 없어 보이네요." 그녀는 양손을 가슴께로 모으며, 기뻐하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의 달라진게 없다, 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인간'. 팔백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백색의 좌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팔백년이란 세월을 초월할 수는 없다. "이런곳에서 이야기 하긴 조금 그러니… 저희 집에 오시지 않을래요, 백룡 님." 그녀는 왼손에 들고 있는 꾸러미를 살짝 들어올리며,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 드릴게요' 라고 덧붙였다. 아카데미로 귀환해야 할 시간은 두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리체르아의 집은 수도의 외곽 쪽에 위치해 있었다. 재화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상류층의 저택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집은 충분히 고급스럽고, 훌륭했다. "저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루루렌칼리체 님은 거실에서 느긋하게 쉬고 계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장을 봐온 꾸러미를 들고 주방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가버렸다. 나는 거실 내부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집의 내부를 살펴 보았다. 바닥에 넓게 깔려 있는 따뜻한 붉은 색의 카펫, 창가 쪽에 위치해 있는 기묘한 모양의 조각상이 인상적이다. 장식품들과, 약간의 술이 들어 있는 찬장. 소박한 느낌의 샹들리에- 창 밖으론 그녀가 가꾼듯한, 작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 온다. 코 끝을 아릿하게 자극하는, 희미한 향기.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평범한 집이로군. 지글, 지글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백색의 좌가 요리를 하기 시작한듯 싶다. … 팔백년 전 은룡, 레테닌시에스케와 함께 마경으로 향했던 리체르아. 그녀는 마왕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베델이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마경 밖의 세계를 구했다. 재미있게 되었군. 오백년을 살아오며 영원에 이르고자 했던 마왕을 부정한 그녀가 팔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니….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강력한 것이 못된다. 처음에는 무언가의 이유로 영원을 원했던 마왕이지만, 오백년이 지난 후에 그는 결국 영원으로 이루고자 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종국에, 유구한 세월에 지친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베델에게 거의 내어주다 시피 종말을 맞이했었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이유조차 잔혹하게 쓸어가 버리는 세월… 그녀는 어떻게 팔백년이라는 세월 동안 생명과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 푹신한 쇼파에 몸을 묻은채 얼마의 시간동안 생각에 빠졌을까… 눈을 뜨고 나니 이미 리체르아가 저녁 식사를 모두 준비한 뒤였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에 몸을 안착했다. "특별히 아끼던 재료들을 써서 저녁을 만들었어요. 맛있게 드셔주시면 무척 기쁘겠네요, 백룡 님-." "칼리체로 되었다." 리체르아는 하얗게 웃으며 몸에 두른 앞치마를 벗어 옆쪽 의자에 걸어 놓고, 내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양손을 눈 앞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기도… 하는 건가? 아카데미의 식당에서 인간들이 식사 전에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종종 봐왔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확실히, 지금 '기도'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거지?" 백색의 좌인 그녀는 지금의 인간들이 믿고 있는 신이 모두 거짓이며, 실제 신은 이 세계를 유지하는 시스템(System)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신을 향한 기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걸 알고 있을 텐데. 리체르아는 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기도가 모두 끝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어떤 '믿음'에 기도하는 건가?" 기도가 꼭 신을 향한 청원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음- 아무래도, 저 스스로에게, 일까요." "…." 자신 스스로에게 기도한다는 것인가. 얄궂은 일이군. "그렇게 물으니, 저도 궁금해 지네요. 제가 누군가에게 기도 하는 건지…." 리체르아는 또다시 웃어 보였다. … 기분 탓일까,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희미한것 같다. "저도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팔백년 전에, 자신이 '영원'으로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잃어버린 마왕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식탁위에 놓인 여러 음식을 중, 잘 익어 김을 내뿜고 있는 고기 한 조각과 드레싱이 되어있는 신선한 야채를 포크로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맛있군." "루루… 아니, 칼리체 님은 무척이나 상냥하시군요. 드래곤은 저희 인간의 음식에서 '맛있다' 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칼리체 님과 같은 드래곤들은 그저 단맛, 쓴맛, 신맛… 등을 '느끼기만' 할 뿐이지요." 리체르아는 왠지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포크를 움직이며, 그녀가 준비한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 정말 오랜 시간이었어요." 아련한 감정을 담고 있는듯한 그녀의 목소리- 그래, 너희 인간들에게 팔백년이란 세월은 말이지…. "아마, 저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거에요. 과거에도, 또 미래에도." "너는…." 그녀는 접시에 담겨 있는 따뜻한 스프를 스푼으로 떠먹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은… 정말 말도 안되게 강력한 생명체지요?" "…." "그렇게 강력했던 마왕…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했던 그조차 오백년이란 세월 동안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지요. 결국, 베젤…, 아니 베델이었나요?" 리체르아는 멋쩍게 웃었다. "하여간, 그의 손에 마왕이 오백년 동안 갖고 있던 깊은 허무가 종말을 고했지요." "그래…." 지금도 불과 몇분전에 겪은 일처럼,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따뜻한 음식과 타닥 타닥, 타들어 가며 온기를 내뿜는 난로에 몸이 점점 늘어지고 있긴 하지만. "하지만 저는… 팔백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요. 게다가 마왕이 수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며 이어갔던 영생을 저는 단지 한 존재의 손짓으로… 정말,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어나가고 있구요." "…." 그녀가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는… 은룡에게 있었나. "이미 짐작하고 계신듯 하네요. 네거스텐 제국의 여제(女帝), 레케트리셴 문." "…." "제게 영생과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을 부여해 주신, 렌 님이에요. 저는 영생을 누리길 원하지 않았지만… 렌 님은 제가 죽음으로 이 세계에서 지워지길 원하지 않으셨나 봐요." 리체르아는 그런 말을 하며 왠지 허무한듯 하면서도, 기쁘게 웃었다. 레테닌시에스케… 그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간에게 영생을 부여한 것일까. 끝없이 스러져 가는 한 생명체에 대한 미련…? 그렇다면, 은룡은 진작에 자멸하고 말았겠지. 갑작스레 내가 다니고자 마음먹은 아카데미에 등장한 로나벨아크하임, 그리고 인간들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은룡…. 분명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 "어머, 렌 님이 네거스텐 제국의 황제라는 것은, 모르고 계셨나봐요?" 리체르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거스텐 이라는 나라보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라는 곳에 더 집중했었으니까. 그래도… 설마, 인간들의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무슨 생각이지… 은룡. 은룡과 화룡,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나, 백룡…. 나는, 이것이 절대로 우연은 아닐거라 생각한다. 수상쩍은 태도의 로나벨아크하임만 봐도 그렇지만, 은룡은….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탁자위에 올려진 와인잔을 잠깐 입술에 데었다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이유는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단서가 너무 적다. "칼리체… 님." "응?"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희미해진 미소와 함께 한참 동안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렌 님…, 만나보시지 않겠어요?"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런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이미 아카데미에 복귀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 … 뭐, 상관 없겠지. 귀가 시간에 늦으면, 징계가 있다고 듣긴했지만… 약간의 번거로움 정도야 감수하기로 하자. 내 앞에서 걷고 있는 리체르아는 눈부시도록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로브의 끝부분에 금실로 간단한 모양의 테두리가 수놓아져 있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은룡 이 있는 곳이라면…, 아마도 네거스텐 제국의 황궁, <피에셰트> 겠군. 저 의복은 그곳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자격' 쯤 이라도 되는걸까. … 모를일이지만. "거리에 유난히 활기가 도는것 같지 않나요?" 리체르아는 양손을 등뒤로 깍지껴 잡은채, 큰 동작으로 몸을 빙글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네가 더 활기에 차있는것 같군, 백색의 좌. "글쎄…."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어둠에 물든 거리를 바라보았다. 영구발광(永久發光)마법 등으로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밤에도 빛을 얻은 인간들은, 낮 만큼은 아니지만 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리체르아의 말처럼 유난히 활기가 도는 지는…, 잘 모르겠군. 인간인 그녀가 캐치해 내는 미묘한 감각을, 드래곤인 나는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안있어, 요정 여왕이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라더라구요. " "요정 여왕…?" "네, 전에 나라간의 친교를 나누기 위해, 황녀님이 요정들의 나라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백색의 좌의 말이 길게 이어진다. 나는 그녀의 말을 간단히 흘려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영구발광마법등 때문인지, 하늘엔 평소보다 별들의 숫자가 훨씬 적어보였다.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하지만 달조차 희미하게 보인다. 요정 여왕이라…, '칼리아넬'이 이곳에 방문하게 되는군. 과거엔 그렇게나 폐쇄적이었던 요정들이 인간의 한 국가와 친교를 나누기 위해… 그것도 여왕이 직접 방문한다니, 정말 별난 일이로군. 아무튼 칼리아넬이 이곳에 온다고 해도, 그녀와 내가 마주칠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이 나라에 방문한 기간 동안 아카데미 안에만 있을 것이며, 칼리아넬이 일부러 아카데미 까지 방문한 일은… 아마도 없을테니까. "그러고 보니, 요정들의 나라는… 칼리체 님이 지배하는 요르간드에 속해 있죠?" 리체르아는 내가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응." 요르간드, 그 대지엔 요정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종족들도 살아가고 있지…. 내가 그 이후로 잠든지 팔백년….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지금 요르간드에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나의 존재를 잊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혹시… 요정들의 여왕을 알고 계시나요?" "…." 글쎄, 안다고 하면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녀와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처음 요르간드를 나오며, 마경에 들어갈때 까지…. 그러고 보니, 칼리아넬과 함께한 시간들 중 그렇게 인상적인 기억은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무척이나 아름답겠죠? 아름답다고 칭송되는 요정. 그 중에서도 여왕이니까…." … 요정들이 여왕을 선출하는 기준은 미모였나?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황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고개를 한참은 올려야 끝이 보이는 거대한 규모…. 장식적인 면은 제쳐놓고 라도, 이 정도의 규모라면,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인간의 구조물 보다 거대하다. 그때, 제국의 상공에서 봤을때도 그랬지만…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군. 리체르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황궁을 위아래로 훑어 보다 나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곳은… 적어도 정문은 아닌것 같군. "황제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그녀는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에게 다가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 멀어서 그 뒤론 말 소리가 잘 안들리는데. 아무튼 경비병 들은 별로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요구를 수용했고, 그녀가 나에게 통과해도 된다는 듯이 손짓했다. 리체르아를 따라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한발, 두발, 그리고 황궁과 바깥의 경계에 해당하는 부분에 발을 내딛었을때, 나는 본능적으로 어떤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칼리체 님…?" 레테닌시에스케…. 은룡이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 이 제국을, 진심으로 지배하고 있나?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나는 리체르아에게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는 의아한 기색으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황궁의 내부는 대강 보아도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조형되어 있었다. 첨탑과 첨탑을 연결하는,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돌 다리나 높은 건물로 인해 가려진 시야 등으로 더욱 그렇게 느끼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규모 만으로는 '제국'이라는 단어의 격에 어울린다 할 수 있겠군. … 황궁의 내부엔 감상할 거리가 무척이나 많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무척이나 이상한 것이 시야에 들어와 나는 걸음을 멈추어섰다. "…." "아, 그거요?" 리체르아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눈치챈듯, 엷게 웃으며 말했다. "렌 님이 직접 지시해서 만든 조각상이에요." 새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굉장히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 그 조각상의 형상은… 우리들의 본 모습, 드래곤이었다. 인간들의 제국 심장부에 용의 조각상이라…. 나는 리체르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대부분의 인간은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못하니, 이런 조각상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을테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나, 백색의 좌. 하지만 나는 이 조각상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깊은 불쾌감을 느낀다. 가장 거대한 인간들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황궁 한 가운데 위치한 용의 조각상…. 이것은 마치… 인간을 조롱하는 것 같지 않은가. # "리체르아 님 과… … 찾아오셨습니다." 거대한 문에 새겨진 기하학 적인 무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안에서 극도로 정중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릴듯 말듯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은룡의 허락을 맡는듯 싶은데…. 옆을 바라보자 백색의 좌가 양손을 가슴께로 모은채 알게 모르게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진건지 천천히 문이 열렸고, 내 시야에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는 은룡의 모습이 들어왔다. 옥좌의 양 옆으로 거대하게 솟아있는 짐승의 형상… 눈은 루비로 만들어 졌는지 새하얀 빛을 받아, 붉은색으로 반짝 거렸다. 옥좌의 앞에 서있는 자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인간의 재미있는 기교 정도로 보인다. 쿵- 하고 문을 닫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이 화려하기 그지 없는 공간에서 나와 리체르아, 그리고 은룡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리체르아와…." 천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은룡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들린다. "루루렌칼리체, 로군." 레테닌시에스케의 목소리는 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가늘고, 부드러운 음색을 담고 있었다. 마치 은을 녹여 입힌듯한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우고, 거동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보이는 화려한 의복을 입은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얼굴에는 자애롭고, 나긋나긋한 미소. … 저번에 봤을 때와는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군. "렌 님." "오랜만이로군, 리체르아. 그간 찾아오지 않아 무척이나 지루했었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리체르아와 대화하고 있는 은룡에게 다가갔다. "레테닌시에스케." "네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무척이나 의외로군." 은룡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팔로 턱을 괴었다. 다리를 꼬며 드러난 다리가 눈이 부시도록 새하얗다. … 마치, 심드렁 하다는 듯한 모양새로군. "나도 네가 이런 곳에서 인간들의 황제 놀이를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거기다 그 모습은…." 앳됀 모습이 가시지 않은 소녀의 모습이다. "인간들의 황제 노릇을 하기에 적절치 않아보이는데." 은룡의 얼굴에서 점점 거짓 미소가 사라져 간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한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여전히 나긋나긋하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적합하다. 내가 네거스텐 제국을 지배하기 시작한지 이십년. 인간들은 내 나이를 삼십대 후반 정도로 알고 있지." "…." "하지만 인간들은 세월을 빗겨가게 하는 내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통치를 칭송하고 노래했다. 그리고 불노라는 '비상식적인' 사실은 인간들로 하여금 나를 '신성'시 하게 만들기 충분했지." 레테닌시에스케는 재밌다는 듯,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지금 이 제국의 신민들에게, 나는 신이다." "… 인간을 조롱하는 건가?" 은룡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은, 우아한 음색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대기를 타고 퍼져 나간다. 신, 신이라고…? 우습고, 또 우스운 이야기다. 사실, 은룡이 '신'을 언급하는 이 상황부터가 사실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 … 질 나쁜 농담이다. 하지만 확실히 늙지 않는 외모로 인한 신비감으로, 인간들이 은룡을 신성시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군. "글쎄, 그렇지도 모르겠군." "렌 님…." 리체르아가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지만, 은룡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펠테넨시아 라는 인간은…." 내가 황녀를 언급하자, 은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는 내 딸이다." "인간… 으로서 그녀를 낳았단 말인가?" 그렇게 물으며, 대화에서 소외되어 있는 리체르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표정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떠오른 저 감정은 아마도, 분… 함? "그래. 하지만 흑룡 처럼 용의 피를 주입시키는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인간은 용의 피를 받기엔 너무 하등해. 펠테넨시아의 존재는 내가 인간의 황제 자리에 있기 위한 구색을 맞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인간'인 리체르아가 바로 옆에 있는데 잘도 말하는군. 아무튼… 은룡의 인간에 대한 평가 따위는 전혀 관심 없다. 그것보다, 황녀 펠테넨시아가 은룡이 화하고 있는 '여제, 레케트리셴 문'의 딸이라는 것은….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은룡을 바라보았다. 화룡이나 은룡. 나는 이런식의 행동에서 아무런 근거를 느낄 수가 없다. 그야 말로 안개 속을 걸어나가는 느낌…. 그들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위해 내 주변에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들에게 내 머리속에 두리뭉실 하게 떠도는 의문을 직접적으로 물어볼 생각은 전혀 없다. … 묻는다고 대답해 줄 정도였으면,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일부러 내 곁을 감시할리가 없지 않은가. 은룡은 내가 이곳, 네거스텐 제국에 있던 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런 척을 하고 있을 뿐이겠지. 백색의 좌에게는 감사해야겠군.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공간에 화룡뿐만 아니라 은룡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계속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내 고려범위 내에 은룡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가…." 그래도 너무하는군. 펠테넨시아와 은룡이 화하고 있는, '레케트리셴 문' 의 겉모습 나이차는 전혀, 라고 할 만큼 나지 않는다. 인간들은, 당연히 그것을 의심하려 들텐데. …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닐테지만. "일말의 애정 정도는 있다. 거짓된 모습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탄생한 아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몸이 낳은 자식이니까." 은룡은 그렇게 말하고서 후후- 하고 웃으며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애를 낳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소녀의 모습이라 그 동작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보인다. "…." 끝까지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조롱을 멈추지 않는군. 일말의 애정, 그리고 이 몸이 낳은 자식이라…. 웃기지도 않는군. 나는 잠시 목을 매만졌다. 처음 부터 끝까지, 같은 드래곤인 내게도 꾸며진 '레케트리셴 문' 으로서의 가면을 벗지 않는 은룡이 무척이나 탐탁치 않았다. "지금 이 몸으로 네 아이를 낳아줄 수도 있다, 칼리체." … 뜬금없는 말이로군. 화들짝 놀라는 리체르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지금 이 모습으로 너와 내가 교미를 하여 인간의 아이를 낳아, 이 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올려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제국의 황제? … 은룡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야만 네가 우리 사이에서 낳은 인간의 아이를 간접적으로 조종해 인간들의 혁신을 꿰할 명분이 서질 않나?" 가느다랗고 나긋나긋한 은룡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그것은, 은룡의 말에 담긴 울림이 내게는 너무나도 치명적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레테닌시에스케,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거지…?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마법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마력 행사는 상대가 자신보다 정신력이 한참은 낮을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나와 레테닌시에스케 사이에서 그 마법은 무용하다. 그러므로, 은룡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 "어때?" 레테닌시에스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양 손으로 치맛 자락을 들어올렸다. 그 동작에 따라, 매끈하고 길게 뻗은 흰 다리와 하얀 레이스가 달린 속옷이 드러났다. 나는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만능의 언어로 말했다. - 더이상의 조롱은 용납치 않겠다, 은룡. "루, 루루렌칼리체 님…!" 내 고요한 분노가 담긴 마력의 기운이 쏜살같이 대기를 가르며 레테닌시에스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뚝- 뚝-,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붉은 피. 은룡은 아무런 미동도 않은채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불쾌감이 밀려온다. # 나는 지체하지 않고 황궁, <피에셰트>를 나섰다. 인간들이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는 시간…. 싸늘한 정적만이 남은 거리엔 나 혼자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 은룡의 나에 대한 간파에 오랜만에 진심으로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 그것 뿐이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몸통의 반쪽이 어둠에 먹혀 버린 반달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모양인지, 하얗게 빛나는 달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탁- 하고 걸음을 멈추어섰다. 아까도 떠올렸던 것이지만, 생각을 읽는 마법 따위로 은룡은 절대로 내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내 행동이나 말을 듣고 그것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닐테지. 그만큼 나는, 내 의도를 외부에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뜰 정도의 시간에 수백, 수천 가지의 가능성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도… 은룡이 내 의도를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밖에 없겠군. 과거에 리셋해 버린 내 기억. 아마도 나는… 잊어버린 과거에도 역시, 지금과 똑같은 의문에 도달했었던게 아닐까. # "으음…." "힘내라, 칼리체. 다 네 그릇된 행동에 대한 책임이 아니겠냐." 그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책임. 하지만 이것은…. 나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고개를 들어 잠시 주의를 환기시켰다. 기숙사 1층에 위치한 휴게실. 옆쪽엔 커다란 벽난로에, 고급스런 목재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쇼파와 탁자가 가득해 무척이나 편안하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황색 불빛과, 깔끔한 카펫으로 인해 꽤 안락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음- 아무튼, 상당히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것보다, 좀 골치 아프군. 이 녀석, 저쪽에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떠들고 있는 저 인간의 무리로 좀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손에 쥔 깃펜으로 끝없이 늘어진 긴 양피지에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사유와 반성을 줄줄이 적어 내려 가고 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내 이런 모습을, 앞뒤로 의자를 흔들어 대가며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고 말이다. 그것도, 의자에 거꾸로 앉은채로. 저 모양새, 무척이나 신경쓰인다. 의자는 원래 등받이를 등에 대고 앉는 물건이 아니던가. 하지만 거꾸로 앉아 등받이에 양팔을 기대어 앉는 모양새도 꽤나 편해 보이니까. "… 또 얼토 당토 않는 생각을 하고 있는게 눈에 보이는구나, 칼리체." "너, 방해된다." 내가 지금 양피지에 적어내려가고 있는 것은 '반성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기숙사의 통금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이다. 반성, 반성은…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 이긴 한데…. 상당히 곤욕스럽다. 드래곤은 후회라는 것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후회라는 것을 단어적 의미로만 아는 나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뭐, 일단은 로나벨아크하임이 알려준대로 무조건 잘못했다고 쓰곤 있지만…. 이런식으로 의미 없는 말을 길게 이어써야 한다니 조금 번거롭군. 반성문 오십장이라…. "은룡을 만난 모양인가 보군." 그는 나른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제복을 입은 한 인간 여성이 지나가며 인사하자 로나벨아크하임은 금방 몸을 일으키며 활기차게 응수했다. "어, 안녕- " 꽤나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는 모양이군, 화룡. 나는 들고 있던 깃펜을 손에서 빙글 돌리며, 거짓 가면을 쓰고 있는 그를 다소 나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 은룡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기로 하겠다, 로나벨아크하임. 그것에 대한 화제는 나를 상당히 언짢게 하니까. "…." 내가 아무말이 없자, 녀석은 금방 흥미를 잃었는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며,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다. "…." 팔백년전에 들었던 그 멜로디로군. 하, 언제나 그랬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는 것은 내게 상당히 묘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게다가 이번엔 로나벨아크하임 까지 있으니까…. 인간의 군중속에 존재하는 두 개체의 용- 인간의 탈을 쓰고서, 불완전한 언어로 소통하지. 나는 우리 드래곤들 사이에선 소통의 불능은 없을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어라, 뭐하냐 평민." 갑작스레 머리를 턱- 하고 누르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카리에르제가 뚱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한쪽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게 딱히 목적이 있는것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던 길인 모양이었다.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는데…. "반성문…? 너 뭐 잘못한거 있냐?" 그는 내 어깨 너머로 양피지의 내용을 훑더니, 입에 넣고 있던 무언가를 뺐다. 하얀 막대기, 그리고 그 끝에 달린 빨간색의 구체…? "어제 통금 시간을 지키지 못해서…." "헤에, 규칙을 어길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로나벨아크하임 쪽을 힐끗 살폈다. 둘이 같은 클래스는 아닌지라 아는 사이는 아닐텐데…. "아크함 드 셸먼… 이었나." "네르세반 공작가의 차남 이시군. 칼리체와는 친구?" "그…." 로나벨아크하임의 아무렇지도 않은 질문에 허를 찔린듯,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친구라고 할 것 까진 없겠지. 저 녀석은 그러니까…." 로나벨아크하임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몸을 앞쪽으로 바짝 붙히며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룡…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 녀석의 행동은 인간의 그것과 거의 다를게 없어 위화감을 느낄때가 많다. "내 부하다." …어? # 그때 카리에르제가 입에 물고 있던것은 막대 사탕이라는 물건이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내가 몇개를 가져다 주어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무료할때마다 하나씩 입에 넣곤 했다. 핥으면 단맛이 나며, 조금씩 줄어드는 구체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막대와 연결되어있어 손에 끈끈한 액을 묻히지 않고, 단맛을 즐길수가 있다. 인간들은 기묘한 물건을 많이 만든단 말야. "리블란셰-" "네…?" 강의를 듣다보니 처음과는 다르게, 이제 주름이 약간 접힌 책을 가방에 넣으며, 멍하니 서로 떠들어 대고 있는 인간들에게 시선을 주고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얼굴에 약간의 주름이 져있는 중년의 남성…. 마경의 역사를 가르치는 그리함 교수 로군. 강의중 항상 입버릇 처럼 '마경 개척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인상적인 인간이다. 가장 위대한 업적…. "반성문은 다 썼나?" "네." 그는 깐깐해 보이는 은테 안경을 올려쓰며, 말을 이었다. "통금 시간을 어기다니…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었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는 무척이나 엄격한 만큼 반성문 같은것 보다 더 큰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었으니까. 특히, 자네같은 평민은 말이야." 그리함 교수는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자네는 뛰어난 인재인 만큼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말일세. 앞으로 더욱… 정진해주길 바라네." "…." 교수의 등이 멀어져 간다. 몇몇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지만, 그 시선도 곧 흐트러졌고 나는 잠시 입에서 빼놓았던 사탕을 다시 입에 넣었다. … 아무래도 저 교수가 내가 큰 처벌을 받지 않도록 도와준 모양이다. "저 깐깐한 교수한테 무척 잘 보인 모양인가 본데?" 앞쪽에 앉아있던 카리에르제가 의자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런가…?" "뛰어난 인재 라잖냐." 그는 턱을 괴고 그리함 교수가 사라진 쪽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찡그려진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그리함 교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듯 하다. "… 인기 좋은걸, 평민. 뭐, 여러가지 의미에서 말이야. 이곳의 귀족들은 항상 능력있는 평민들을 찾고 있거든." 그런 의미였나…. 흐음- 능력있는 평민, 인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도 장서관에 갈꺼니? 그- 비공…." "마, 말하지마!" 카리에르제는 깜짝 놀란 기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바닥으로 내 입을 가렸다. … 꽤나 거친 반응이로군. 단지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진다는 것인가. "비밀이니까… 이런 곳에서는 비공정에 대해 말하지 말아달라고, 칼리체." 그는 여전히 내 입을 막은채로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얼마나 급했는지 그는 '평민'이나 '리블란셰' 로만 불렀던 나를 칼리체로 부른것도 눈치채지 못한듯 했다. 속눈썹 하나 하나까지 모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카리에르제는 매서운 눈길로 나를 노려보다 얼굴을 약간 붉히며, 내게서 떨어졌다. "무슨 사내 자식이…." 그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가버렸다. … 이상한 반응이군. "장서관에 간다." 그는 클래스를 나가기 전 문에서 어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그는 확인도 하지 않은채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 흐음- 그럼 나 역시 잠시 휴식을 취하다 장서관으로 향하기로 하자. 비공정의 이론적 완성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은것도 그렇지만… 그 많은 서적에서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의 실마리를 찾을 수 도 있을테니까. 일단, 가방을 놓으러 기숙사로 돌아가야겠군. "칼리체 리블란셰." 상당히 싸늘하게 들리는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흑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소녀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카리에르제 에게서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 라고 들었던 인간이로군. 이름은 아직 듣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귀족에 대한 예를 갖추려 애쓰지 않아도 좋아. 원칙적으로 루블라브룸 아카데미 내에서 모든 학생에 대한 대우는 평등해야 하니까." 음… 애초부터 예를 갖추려는 생각은 없었다만. "… 무슨 일이야?" "괜한 참견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한마디 하고 싶어서 말이야." 굉장히 당찬 성격인지, 소녀의 어조엔 거침이 없었다. "뭔데?" 그녀는 아주 잠깐 동안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눈가를 찌푸리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곧 입을 열었다. "귀족의 눈에 띄어 출세하기를 원한다면, 그녀석 과는 어울리지 않는게 좋을꺼야." 그녀석 이라 함은…? 나는 다시 문이 있는 뒤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카리에르제, 말인가. "그래, 카리에르제 드 네르세반. 네르세반 공작가의 망나니 차남 말이야." "…." 망나니 차남이라…. 그래도 왠지 망나니 라는 말이 그에게 어울리는것 같기도 하다. 가끔 보는 아카데미 내에서의 모습은 인간들이 말하는 '불량'이라는 모습에 상당히 어울리는 것 같으니까. "출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뭐…?" 인간 사회에서의 출세라…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지. 이 소녀는 출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내 말이 무척이나 의외였다는듯, 놀랐다는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다. … 아카데미 내에서 '평민'은 귀족의 눈에 띄어 출세하는 것밖에는 목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니, 아무래도 그 추측이 맞는것 같다. 음, 이럴땐…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눠보는 사이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 였던가. "내, 내가 너를 왜 걱정하겠어. 나는 다만…!" 잘못 짚은 모양이다…. # 아카데미의 어떤 통로를 지나던 중이었다. 아카데미는 규모가 굉장히 크고, 거대해서 사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거미줄 처럼 뻗어있는데, 때문에 몇몇 통로는 인적이 드문곳이 많았다. 이곳도 그런곳들 중 하나인지, 주변에 인적이란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조용함을 기꺼워 하며, 가방을 품에 안고 그곳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 나는 탁,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걸음을 멈추어섰다. 통로의 벽에 장식품 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 …『세계전도』, 라니. 무척이나 흥미롭지 않은가. 과거 인간들의 세계는 마경을 제외한 지역, 그러니까… 아나키스트 왕국, 카스텔 공화국, 로엘가스트 연맹을 제외하면 주목할 곳이 없었지. 즉, 그 세개의 국가가 세계의 전부였다는 말이다. 뭐… 나머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구역은 숲의 요정, 물의 요정이나 정령 그리고 기타 소수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과거 만이 아닌 현재까지도 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니까. 나는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세계전도』의 표면을 쓸어 보았다. 약간의 먼지가 묻어 나오는 걸로 보아, 청소는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것 같다. 그리고 다소 거친 질감…, 유화 물감으로 그린건가.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허리에 손을 얹고서 고개를 들어 『세계전도』를 훑어 보았다. 네거스텐 제국 말고도 여러개의 나라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서…. 하지만 아직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지역은 수없이도 많았다. 지형지물도 제대로 표시가 안되어있고, 그저 위험하다는 뜻인지, 붉은 색으로 칠해 놓은 곳들…. 겨울의 감옥, 신의 정원, 심연의 바다, 그리고… 초열의 대지. 그 밖에도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지역들이 지도 여기저기에 퍼져 있지만, 일단 내가 주목한 것은 그것들이었다. 모두, 우리 용들이 지배하고 있는, 신비로 가득찬 땅…. 겨울의 감옥… 은 아마도 나의 영지, '요르간드'를 인간들이 부르는 말이겠지. 신의 정원은 은룡, 심연의 바다는 흑룡, 그리고 초열의 대지는 로나벨아크하임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서려있는 곳이다. 그 외에 인간들의, 아니, 이 세계에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차지하는 공간은… 이렇게나 적다. "흐음…." 나는 한동안 생각에 빠진채 지도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 『세계전도』가 있던 통로를 통해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문의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려다가, 멈칫- 하고 말았다.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은데…. 하지만 이곳은 남자 기숙사라 여성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음, 아무튼 내 방인건 틀림 없으니, 문을 열어보기로 하자. 긱- 하고, 나무가 살짝 긁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문을 열었다. "어머!" 놀란 여성의 외침…. "칼리체, 지금 오는 거냐." "바로 나갈 생각이다만…." 나는 내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 놓으며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로나벨아크하임 쪽을 바라보았다. 같은 1 학년인걸로 보이는 여자애 인데, 로나벨아크하임이 데려온 모양이로군.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다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아, 아크- 내게 거짓말을 했구나, 사귀는 여자는 나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아크…? 아크함 이란 이름의 애칭쯤 되는 모양이로군. 그나저나…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거지. "아- 이 녀석은 내 룸메이트야. 즉,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거지. 너도 들어봤을 텐데, C 클래스의 칼리체 리블란셰 말이야." … 나와 면식이 없는 인간에게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듯이 언급할 정도라면 내 이름이 꽤나 알려진 모양이군.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는데, 로나벨아크하임의 붉은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재미있다는듯, 길게 휘어지는 눈. "거, 거짓말…." "아냐, 정말이야. 이 녀석은…." 로나벨아크하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침대에 걸터 앉은채 의아한 얼굴로 로나벨아크하임을 올려다 보는데, 갑작스레 그가 내 상의를 덥썩 하고 붙잡았다. "너…."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내 상의는 그의 손에 의해 한번에 벗겨지고 말았다. "자, 보라구- " "꺄아!" 로나벨아크하임이 데려온 여자애는 마치 못볼꼴이라도 본듯, 얼굴이 벌개 져서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고,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저렇게 요란스레 행동했다간, 기숙사의 사감에게 들킬텐데 말이지. 음… 그나저나 저런 격한 반응이라니, 내 몸이 흉하기라도 한걸까. "하하하!"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현명하지 못했다, 아크함." 나는 그를 흘겨보며 가볍게 쏘아붙이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그의 손에서 내 상의를 뺏어 들었다. 그, 뭐라고 해야할까… … 이녀석, 솜씨가 상당히 좋군. 아카데미의 제복은 상당히 복잡한 구조라서 한번에 벗기기가 쉽진 않을텐데. "크흐, 뭐가 현명하지 못했다는거냐, 칼리체." 무엇이 그리 재밌던지, 그의 목소리엔 계속해서 웃음소리가 묻어나온다. "… 그녀가 크게 당황했잖아."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 들며, 로나벨아크하임이 입을 열었다. "인간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보기전 까지는 믿지 못하니까 말이야." "…." 로나벨아크하임, 무슨 얘기가 하고싶은 걸까. 그는 맞은편의 침대에 털썩, 하고 주저앉으며 몸을 뒤로 길게 젖혔다. "단순한 언어 로는 인간을 완벽하게 납득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이상하지… 우리가 보기엔 정말 이상한 일이야.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상대방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 아니, 그녀는 단순히 착각을 했던것에 불과한것 같다만. 나는 그렇게 말하려 입술을 잠시 떼었다가, 나를 바라보며 조롱하듯 미소짓는 로나벨아크하임의 모습에 그만두었다. '소통의 불능' 을 말하는가…. 로나벨아크하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팔백년 전의 여러 인간들에게서 찾았다. 바로 '믿음' 이라고…. 이 녀석은… 어쩌면 내가 팔백년전에 겪은 일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을 모두 지켜 보고서, 지금 내게- "망각을 모르는 우리가, 과거의 기억이 흐릿해 졌다고 느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가다 보면…." 그는 그렇게 입을 열며 답답한듯, 약간 거친 동작으로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내었다. "셀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 그렇지 않나? 루루렌칼리체." … 그래, 그의 말대로 홀로 몇백년, 몇천년을 보금자리에서 지내다 보면, 남는 것은 오직 상념… 그리고 상념 뿐이다. 지금 이 방안을 흐르고 있는 공기의 흐름, 살갗에 느껴지는 옷감의 느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광의 각도, 그리고 계속해서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꺼내는 로나벨아크하임에 대해…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동시에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용의 인식 능력이란건, 정말 쓸데 없이 거대하기만 하니까. "하지만 세계의 기원부터 지금까지, '영원'의 시간동안 그 모든 일들을 기억 하는 나는 점점…." 로나벨아크하임…. "그 무수한 생각들이 사라져 가고, 결국… 내가 인식하는 세계는 단 두가지로 갈라져 버리게 되더군." 단, 두가지…? "나… 화룡, 로나벨아크하임이 보는 세계는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못한것으로 아주 간단하게 나뉘어 지게 되어버렸다, 라는거다." 그는 피식, 하고 웃으며 마치 농담을 하듯, 정말 간단하지? 라고 덧붙였다.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못한것…? 그래, 네 말대로 그 구분은 유치할 정도로 굉장히 간단해 보인다만…. "…." "네가 보는 세계는 어떠한가? 루루렌칼리체." 나는 손끝으로 입술을 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 나는 기숙사에서 나온 뒤, 장서관으로 향했다. 장서관에서 향하는 도중 하늘을 올려다 보니, 하늘이 점점 먹구름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 비라도 올려는 모양이군. 다소 거세게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을 정리하며, 나는 장서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 화악- 하고 풍겨오는, 오래된 서적이 품은 냄새…. 그리 나쁜 냄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아, 칼리체로군. 책이라도 보러왔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장서관 내에 흐르는 분위기에 어울려, 마치 속삭이듯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패링 선배…." 군청색 머리를 뒤로 깔금하게 빗어넘긴 그는 탁자위에 다리를 걸치고 앉은채, 손에는 자그마한 책을 들고 있었다. 별로 단정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군.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가 앉아있는 탁자 앞까지 걸어왔다. "카리에르제는 왔었나요?" "물론, 왔지." 그는 언어 뿐만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으로도 내 물음을 긍정했다. 딱히 궁금했던건 아니다. 이 물음은 단지, 확인 일뿐. 나는 카리에르제를 찾으러 장서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내게 꽤 호의를 갖고 있는 듯한 인간, 패링에게 몇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저, 패링 선배님…." "응? 뭐, 궁금한거라도 있어? 말해보도록 해,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범위 내라면 흔쾌히 들어줄테니까." 친절한 인간이군. 그가 행하는 언어에서 내게로 향하는 호의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나는 기꺼워 하며, 입을 열었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서 평민이 성공하는 방법은, 귀족의 눈에 띄어 출세하는것 밖에는 방법이 없나요?" "흐음- " 패링은 그제서야 책에서 완전히 눈을 떼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미간에 살짝 접혀 있는 주름….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은, 약간의 분함. 그리고… 수긍. "뭐, 꼭 그런건 아니지만…." 그는 탐탁치 않다는 기색이다.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지. 귀족의 눈에 띄어 출세하는 것, 말이야. 굳이 물을 것도 없지 않나, 후배 님. 하지만… 의외인걸. 칼리체, 너 무척 순진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핵심을 가차없이 찌르고 있잖아?" 패링은 들고 있던 책을 탁자위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 역시 평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느끼는 그 '자존심 상함'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게 인간의 '평민'이라는 계급은 단지 카테고리, 그 이상의 의미 이상은 느끼지 못하겠으니까. 음… 아무튼,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딱히 그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에 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가 저에게 그러더군요. 출세를 하고 싶은 생각이라면, 네르세반 공작가의 차남, 그러니까- 카리에르제 와는 어울리지 말라고요." "…." "하지만 네르세반 공작가는 대단히 위세 있는 가문이 아니던가요?" 나는 '위세'라는 말에서 심한 지루함을 느낀다. 왠지 이런식으로 인간의 하찮은 권위를 언급하는 행동이 무척 탐탁치 않다. "그런 가문의 차남과의 친교라면…." "좀더, 주변 상황에 관심을 가져보는게 좋겠구나, 칼리체." 패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가 앉아있던 탁자 오른쪽에 위치한 난로로 다가갔다. 그는 난로위에 놓인 주전자를 이쪽으로 가져오더니, 탁자의 서랍에서 컵을 두개 꺼내어 주전자의 내용물을 그곳에 따랐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약간의 수증기와 함께, 익숙치 않은 향기가 콧가를 간질였다. "자- " 그는 내게 두개의 컵 중 하나를 건넸다. …음- 차, 인가. 별로 마시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미 따랐으니 어쩔수 없겠지. 나는 그에게서 컵을 건네 받아 양손으로 컵을 감쌌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감각이 손바닥을 엄습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주변 상황에 관심을 가져보란 말은… 무슨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의 의미야. 정말, 애가 순수한건지 어떤건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한모금 홀짝였다. 나도 그를 따라 차를 한모금 마셔보았다. 향기로운 냄새와는 달리, 맛은 굉장히 썼다. 나는 찻잔에서 입을 떼며 생각했다. 순수하다라- 그의 순수함의 기준은, 인간 사회의 생리에 얼마나 익숙하냐, 익숙하지 않느냐를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아직까지 그런것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그의 말대로, 나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찻잔 너머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런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곳은 많다. 인간, 너도 그 정보의 제공원 중에 하나지. "네르세반 가의 차남은 말이야- " 그는 담백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가문에선 거의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 없어. 즉, 카리에르제 드 네르세반이 가지고 있는 권세는, 가문의 이름 정도가 다라는 말이지. 가문의 위세는 제국의 동령주 전역에 걸쳐있어, 이 제국의 여제, 레케트리셴 문 마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말이야." "어째서, 인가요?" "뭐, 간단한 이야기야. 원래, 네르세반 가문은 대대로 걸출한 기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가문이지. 실제, 현재 네르세반 가의 가주 역시 이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기사이고 말이야." 패링은 입을 가리고 잠깐 하품을 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네르세반 가문의 차남은 기사 수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하더라고, 지금 장서관에 죽어라 드나드는걸 보면, 그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는것 정도야 쉽게 알 수 있고." "… 그것 뿐인가요?" 그렇다면, 네르세반 가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기사의 검이다. 하지만 카리에르제는 그 손에 검을 쥐려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가문의 위세에서 배제된 이유란 말이군. "뭐, 그것도 그렇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가 첩실의 자식이란것도 있지." 첩실…? 정식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자식이라는 건가. 나는 조용히, 그것을 납득한다. 정통성. 나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명분. "그렇군요." "하지만 의외인걸,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가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패링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멈칫- 하더니 이내, 아니- 뭐, 의외일것도 없나. 하고 짧게 덧붙였다. "아마도 그녀는… 요새 아카데미 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는 너를 그네들 세력 밑으로 끌어들이고 싶은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대답은 추측조로 말했지만, 나는 아마도 패링의 추측이 거의 맞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라면, 공작가의 장녀인 그녀가 굳이 나에게 그런 '충고'를 해줄 필요가 없었겠지. 흐음- 이제 패링에게서 쓸만한 이야기는 모두 들은것 같으니, 카리에르제를 찾으러 가볼까. "여기, 차 잘마셨어요." 나는 남아있는 차를 모두 마시고,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패링은 다소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차, 무척 쓴데…. 그걸 한번에 마셔버리고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다니, 너- 굉장한 녀석이구나." "…." 이상한 곳에서 묘한 평가를 받는군.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패링이 나를 불러세웠다. "카리에르제를 만날 생각이라면, 지금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기색을 돌리는 나에게, 패링은 차를 한번 홀짝이며 말했다. "그의 형이 와있거든." # 카리에르제의 형이라면… 네르세반 공작가의 장남인가. 카리에르제와는 달리, 가문의 권세와 권위를 모두 발휘 할 수 있는, 정통의 후계자. 패링에게 간단하게 들은 애기로는… 둘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장서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카리에르제가 자주 머무는 탁자를 찾아 나섰다. 손가락으로 몇권의 책을 훑으며 책장 사이의 통로를 걷고 있는데 책장과 책 사이로 익숙한 모습의 탁자가 보였다. 그리고,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가 조용한 장서관을 울렸다. "싫다고 했잖아!" "조금 진정 하는게 좋겠구나, 카리에르제." … 카리에르제의 형, 이라는 인간인가. 좁은 책장 사이로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카리에르제를 질책하듯 말했다. "나는 네가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부러 이 루블라브룸 아카데미까지 찾아온 수고를 봐서라도, 그런식으로 말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구나, 동생아." "…." 카리에르제가 쳇, 하는 소리를 내며 뭐라 중얼거린것 같지만 거리가 가깝지 않아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검술을 다시 시작하라고 까지 말하진 않겠다. 지금 나이에 검술을 시작해 봐야 웬만한 노력으론 네 또래 소년들의 수준에도 못미칠테니 말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또한 가문의 수치가 될테니." 카리에르제의 형이라는 자의 목소리는 냉엄하고, 가차 없었다. 그를 상대하는 카리에르제가 다소 위축되어 있는 것을, 나는 책장 너머에서도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와의 약혼은 반드시 응해주길 바란다. 아무 쓸모 없는 너이니, 그런 일에라도 '우리' 가문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언급한 우리, 라는 단어에서는 왠지 비웃음- 비슷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리에르제는 그의 말에 커다란 분함을 느끼는듯 하다. "그 계집애는 정말 싫다고!" "어린애 처럼 굴지 말아라. 귀족으로서 누릴 권리를 모두 누렸으면, 응당 그에 따른 의무 또한 이행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과 동시에 펄럭, 하고 망토가 허공에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약혼 이라. 아무래도, 두 공작 가문간 사이의 일종의 계약 같은 건가. "빌어먹을… 웃기지마! 귀족으로서 누릴 권리?! 누가 말이면 단줄…! 사람을 제멋대로 이용하려 하지 말란 말이야!" "…." 카리에르제의 격한 반항 때문인지 둘 사이엔 한동안 대화가 끊켰다. "왜 싫다고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녀는 무척 훌륭한 여성이다.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미모에 드높은 학식, 그리고 기품. 거기다 우리 가문에 비견될만한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라는 신분. 듣기로, 제국 각지에서 그녀에게로 향하는 구혼이 끊이지 않는다더구나. 딱잘라 말해, 네게는 과분한 여성이다." "…." 약혼이라는 단어가 오가는 관계였군, 카리에르제와 그녀는. 나는 책장에 등을 기대어 그녀를 대하던 카리에르제의 태도를 생각했다. 완전히 적대적. 그것은 그녀 쪽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하지만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그네들의 감정과는 별반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았지…. 특히, 이런식으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경우에는 말이야. "너…." "손대지마!" 그의 형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탁자위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인다. "하, 비공정…? 여전히 쓸데 없는 짓을 잔뜩 하고 있구나, 너는." 그 목소리에는 완연한 조롱기가 가득담겨 있었다. 그는 잠시 경멸하듯이, 탁자위에 늘어져 있는 서적들을 바라보다 냉정한 목소리로 카리에르제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다. 멍청한 동생 녀석의 고집을 상대하는 것도 피곤하고, 해야할 일도 많으니까…." 카리에르제의 형은 품속에서 금색의 체인이 달린 시계를 꺼내어 보고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볼때까지,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동생아." "…." 또각, 또각- 차가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가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카리에르제는 고개를 숙인채, 마치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듯,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카리에르제." "뭐, 뭐야 너! 그런곳에서 갑자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책장에 기대어 있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치, 상처입은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것 같았다. "설마, 엿들은건 아니겠지?" 패링에게서 그의 형이 와있다고 듣긴 했지만…. "본의 아니게 말이지." "너…!" 카리에르제는 화가 난듯 주먹을 쥐며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찰나의 순간, 그의 눈동자에 폭풍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들…. 나로서는 그 복잡한 감정들의 인과 관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뭐, 됐다.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은 얘기도 아니고, 또 귀족들의 사교계에는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왠지…." 그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쓸며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네게 화내는 건 왠지 벽에다 대고 화를 내는것 같은 느낌이니까 말야." 그리고 카리에르제는 작은 목소리로 이상한 녀석.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벽에다 대고 화를 내는것 같은 느낌- 이라는 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인간들의 비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군. 실제 벽에다 대고 말해보아도, 난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후- 하고 잠시 입김을 불어보았다. 패링이 준 차의 향이 입안에 잔류하고 있는것 같았다. "…." 그는 평소의 장난기로 가득한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비공정'에 관한 종이 뭉치와 서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금의 일 때문일까… 오늘은 이만할 모양이로군. 나는 양손을 등뒤로 돌리고,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와줄까?" "아니, 됐어. 자료가 그리 많은것도 아니고…. 이 무거운 서적들은 네 그 가느다란 팔로는 들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 음,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서적이나 정리해 달란 소리인가. "읏- " 그의 말대로 탁자위에 잔뜩 놓여저 있는 서적들은 현재 이몸의 부족한 근력으로서는 들어올리는게 고작이었다. 카리에르제는 끙끙 거리며 책장에 책을 꽂는 나를 보며, 재밌다는듯 웃었다. 나는 계속해서 책을 꽂아넣으며, 그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비공정이라는 걸 만드려는 거니?" "글쎄, 왜일까…." 카리에르제는 책상 위에 잔뜩 늘어져 있던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칫- 했다. 글쎄, 라니, 이 인간은 무척이나 어리석게도, 자신이 하는 일의 동기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어렸을 때 부터, 꿈이었어." 예상했던 대로 꿈… 인가. 닿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이상향…. 나는 그런것들을 꽤 좋아하는 편이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중 하나이니까. 나는 눈빛을 흐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꿈의 내용은, 인간을 닿을 수 없는 하늘에 대한 동경…? "내가 '전환점'이 되는거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내 예상을 넘어섰고, 또한 지독히 오만했다. 나는 그 말에 무척이나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전환점, 이라고?"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인간은 지난 수천년간 끊임없이 발전해 왔어. 우리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고, '근원'이라는 세계의 신비를 알아내 마술의 힘까지 손에 넣었지. 그리고 그 힘으로 마경을 개척하고, 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까지 이루어 내었어." 그래, 그 발전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음차원으로 오염되어있던 마경의 개척과 정화는, 인간들의 세계를 더욱 크게 넓혀주었지. 단순히 영토의 넓이 문제만이 아니라. "그래서…?" "하지만 거기까지야. 우리 인간은 지금, 수백년째 더이상의 큰 발전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 학자들이나 마법사들, 그리고 신을 모시는 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지만… 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 심지어 그 의문은 이종족 에게까지 닿았었지만…." 해결되지 못했겠지.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에 들고 있는 두꺼운 책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인간들도 알고 있는가. "때문에 내가 그 발전을 해내 주겠다는 거지. 생각해봐, 하늘을 나는 기계가 발명되기만 하면 이 세계는 크게 달라질거야!" 카리에르제는 신이 난 기색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통신, 교통… 모두 그가 말하는 대로다 발명되기만 한다면 이 세계는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될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소 건조한 느낌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가 가진 자료와 능력으로는 실제의 비공정을 만들어 내는것은 불가능 하다. 이론도, 기술도 충분치 못하지. 거기다 단 한명이 그런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은 농담거리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한심하게 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금 호의적인 감정이 가는군. 이 가여운 생명체가, 자신의 종족을 위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 비가 쏟아지는군. 아, 방금 창문 밖이 번쩍 했다. 뒤이어, 우르릉- 하는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강의실에 앉아 있던 여자애들 중 몇몇이 꺄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투둑, 투둑- 하고 빗물이 창가를 때린다. 비오는 날은 내가 좋아하는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민감한 인간의 몸으로 비를 맞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다. 음- 비가 와서 그런걸까, 나는 오늘 따라 차분하게 내려앉은 내 백색 머리카락을 만족스런 기분으로 한번 쓸어 보았다. "크흠- " 교수도 큰 천둥 소리에 다소 놀랐는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내일 부터는 여제께서 직접 지시한 국가적 축제 기간이므로 며칠간 강의를 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업을 게을리 하지 말고…." 교수의 말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미 들뜬 기색으로, 교수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흐음, 국가적 축제 기간이라…. 그것은 요정 여왕의 방문 때문이다. 이종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인간들로서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이종족과의 접촉을 취하는건 처음이겠지.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 뒤로 몇마디만 더 떠들어 대더니, 곧장 강의실을 나갔다. 곧, 강의실 안이 서로 잡담을 나누는 소리로 가득찼다. 화제거리는 물론 요정 이었다. "요정이라… 생각만 해도 들뜨는데!" "그러게, 요정들은 모두 눈이 확 뜨여질 미녀들 밖에 없다니까…." "이보게나 친우들, 미래에 나라를 이끌 귀족인 우리들이 그런식으로 밖에 생각을 안해서 어쩌겠는가. 이건 인간과 이종족간 최초의- " "시끄러워 이 애늙은이!"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으니, 재미있는 말들이 들려 오는군…. "칼릿체- !"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주변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 하고 치며 나를 불렀다. 옅은 붉은색 머리카락의 소녀…. 같은 클래스인 네리셰였다. 나는 의자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왜?" "칼릿체는 축제 기간 동안 뭐할꺼야? 아직 정확히 몇일 동안 쉰다고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칼릿체…? 미묘하게 발음이 다르군. 그녀는 내 이름을 잘못알고 있는 것일까. "저… 근데, 내 정확한 이름은 칼리체야." "아, 그거야 당연히 알지!" 네리셰는 내 어깨를 장난스레 툭, 하고 때리며 그렇게 말했다.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니, 그녀는 허리를 약간 숙이며 웃었다. "칼릿체 쪽이 혀를 더 굴리는 편이라 귀엽잖아." "…." 납득이 안가는 이야기군. 그것보다, 축제 기간 동안 무얼 할것인가- 인데. 글쎄, 딱히 예정은 없다만…. 나는 머리속에서 생각한 것을 그대로 그녀에게 읊어주었다. "딱히 예정은 없어." "헤헷, 그래?" 네리셰는 얼굴에 미소를 띄운채 내게서 멀어져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아, 문을 넘기 전에 안녕-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네오긴 했지만. … 뭔가 용건이 있던것 아니었나?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나는 가방을 어깨에 매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잠시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곧 이 나라를 방문할 요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 단 한명을 제외하면.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레쥬에브. 그녀는 고운 얼굴에 선명하게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을 띄운채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잠시, 바깥에서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또다시 우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애들은 또다시 짤막한 비명을 질렀지만, 레쥬에브는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을 짓지 않은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견, 그녀의 얼굴은 마치 그 여자아이들을 비웃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상의에 달린 검은색 레이스를 정리하며, 앞문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나 역시 강의실을 나섰다. # 해가 저 멀리 보이는 산 너머로 넘어가고, 곧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기숙사 방안 책상앞에 앉아, 거의 보이지도 않는 창밖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 보고만 있었다. … 여전히 비는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일 쯤 되면 그치려나. 약간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이 촛대를 흔들어 댔다. 바람에 의해 흔들린 촛불이 방안의 음영을 어지럽힌다. "…." 비가오는 소리를 제외하면, 방안은 조용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점심 무렵에 휴게실로 간다고 하고 기숙사 방을 나서더니, 밤이 된 지금 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직 인간들과 어울리고 있는 걸까. 나는 책상앞 의자에 앉으며 등을 뒤로 길게 빼 편하게 앉았다. … 조금, 무료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일까… 고작 이정도 시간의 경과에도 약간이지만, 무료함을 느끼고 있다니. 아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는 아니겠지. 중요한건, 지금 내가 인간들의 사회내에 있다는 것이니까. 그 동안 인간들의 생활 패턴에 익숙해 져버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책상앞에 앉아, 살짝 열린 창문 밖을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대로 이 몸이 썩어 없어 질때까지라도 보고 있을 수 있을것 같았다. 톡, 하고 거센 바람에, 차가운 빗물이 창문 사이로 들어와 눈가를 때렸다. 그리고 그 빗물은 천천히 내 뺨을 타고 내려 턱에 맺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마치 눈물을 흘리는것 같은 느낌, 이랄까. 눈물이라는걸 흘려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건 좀 우습지만. 나는 뺨으로 타고 내린 빗물의 흔적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당연하지만, 축축했다. "…." 나는 조용히 의자를 밀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무료함을 달랠겸 잠시 휴게실에 가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 의외로, 휴게실은 많은 소년 소녀들로 가득차 있었다. 보통 이 시간 대의 휴게실은 한적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관심을 가진채, 휴게실 안을 둘러보았다. 휴게실 안은 여러개의 촛대가 있어, 마치 낮처럼 환했다. …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군. 저쪽 기둥에 기대어 흥미로운 눈길로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는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 그 반대편에서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카리에르제… 그 외에도 클래스C 에서 강의를 같이 듣는 인간들도 간간히 보인다. "저 녀석, 정말 굉장한데?" "벌써 열명째야." … 무얼하고 있는거지? 나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들을 흘려 들으며, 잔뜩 모여있는 인간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 이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이 어떤 소년과 마주 앉아 일종의 게임 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판. 그 나무판 위에는 일정한 간격을 기준으로 교차된 줄들이 무수히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줄의 교차점에 놓여진 성, 말, 왕관 등의 모양을 하고 있는 나무 조각들이었다. 나무판의 양옆, 로나벨아크하임 쪽과 반대편 소년쪽에는 금화가 쌓여 있었다. 다소 빈약해 보이는 소년쪽에 비하면, 로나벨아크하임쪽의 금화는 거의 한아름 이라고 해도 될만큼 가득했다. "자, 체크메이트!" 그는 한 나무 조각을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으… 졌다." "하하하, 정말 못하는구나 너희들! 내게 도전할 사람 또 없냐?" … 으음. 로나벨아크하임은 유쾌하게 웃으며, 반대편 소년쪽에 있던 금화를 모조리 쓸어갔다. 일종의 내기였던 모양이다. 본 장면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이 게임의 룰을 한번에 파악할 수 없었다. "정말 굉장한데, 아크함!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금화를 쓸어담았잖아!?" "너희들이 성원해준 덕택이지. 덕분에 용돈이 두둑해 졌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탁자위에 쌓여진 금화들중 몇개를 집어 허공으로 던졌다. 구경하던 소년들중 몇몇이 장난스레 그 금화들을 낚아 챘다. 그래도 가장 큰 화폐 단위 인데, 주로 귀족들이 다닌다는 루블라브룸 아카데미 여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취급을 당하는군. 문득, 팔백년전의 어떤 기억에서 보았던 풍경과 대비되어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번엔 내가 도전하겠어." 앞으로 나온건 기둥에 기대어 구경만 하고 있던 흑발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가 앞으로 나오자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는 소년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는 인간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순간, 그녀에게 신경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잠깐 감지되었던것 같았는데…. "메르시오 가의 공녀님이잖아! 저, 이름이…?" 로나벨아크하임은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물었다. "레쥬에브,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아, 레쥬에브. 그 아름다운 모습 만큼이나 예쁜 이름이군요!" 이름이 레쥬에브 였군. 로나벨아크하임의 약간 과장 된듯한 언사대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녀에게는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본래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이런 요구는 하지 않지만, 지금껏 내게 많은 금화를 헌납해주신 가여운 분들과의 형평성을 위해 금화나 그 이외에 것을 걸어주셔야 겠습니다, 아가씨?" 그 말에 잠깐 동안 주변에서 장난스런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야 물론이지." 레쥬에브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는 것으로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답했다. 그녀는 품속에서 푸른색의 보석을 꺼내들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 그래, 보석 또한 인간들의 사회에서 커다란 가치를 갖는 물건중 하나지. "상급의 사파이어야. 거기 쌓여 있는 금화만큼의 값어치는 할거라 생각하는데?" 자존심이 세군. 방금 본 광경으로 도전자는 로나벨아크하임이 가지고 있는 금화만큼 값어치 있는것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동일한 가치의 보석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말이지…. "자, 그럼 나는 지금껏 해왔던 대로 이 금화 전부!"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믿을 수 없어…!"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가 끝을 알렸다. 약간 긴장감 마저 도는 분위기에서 시간이 흐르고, 결국엔 결착이 났다. 결론만 말하자면, 레쥬에브의 패배였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을 수 없다고 말은 했지만, 이미 패배를 인정한듯한 모습이었다. "와하-! 여러분들! 그럼, 이 사파이어는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나벨아크함은 신이난 기색으로 사파이어를 낚아 채갔다. 레쥬에브는 흥, 하고 약간 화가난 기색으로 등을 돌렸다. … 음, 보면서 대충 게임의 룰을 이해했는데 그녀는 결코 못한게 아니었다. 오히려, 수는 굉장히 훌륭해보였다. 다만, 상대가 좋다고 낄낄대고 있는 한심한 인간의 탈을 쓴 드래곤이어서 그런것이지. "그럼, 다음 상대는 나다!" "오, 벌써 다음 도전자인가?" 앞으로 불쑥 나선것은 뒤에서 조용히 게임을 지켜보던 카리에르제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레쥬에브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화가난 기색으로 카리에르제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 어떤 감정이 오고갔는지, 대충 알만하군. 점점 흥이 오르는지, 주변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카리에르제는 주변의 성원에 일일이 답해주며, 로나벨아크하임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 …… "아- " 극히 짧은 시간이 지나고, 결착이 났다. 말할것도 없이, 카리에르제의 패배였다. 그것도 굉장히 신속한. 주변에서 레쥬에브와 카리에르제의 미묘한 감정 싸움을 이해한 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둘 모두 똑같이 로나벨아크하임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게임을 한 시간으로 따지면 레쥬에브의 압승이었다. 카리에르제는 보기힘든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깐동안 자리를 이동해 가져온 음료를 카리에르제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내가 준 음료를 한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쉬었다. "뭐야, 너도 보고 있었냐? 이거 정말 창피한데…. 저 계집애에게 져버리다니!" 역시 로나벨아크하임과의 내기는 별로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군…. 로나벨아크하임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탁자위에 가득 쌓인 금화를 세고 있었다. 그는 금화를 한줌 쥐며, 만족스런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자, 나하고 또 해볼 사람?" … 아직도 할 셈인가. "하는 사람마다 족족 지는데, 이거 할맛 나겠어?" 한 소년이 셔츠의 깃을 당기며 작게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이제 호응은 별로인 모양이다. 그를 한심함이 가득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며 카리에르제가 한모금 마시고 다시 건네준 음료를 입에 대고 있는데 문득, 투명한 컵 너머로 로나벨아크하임과 눈이 마주쳤다. …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거기, 네르세반 공자님! 그 녀석을 붙잡아!" "뭐…?" 카리에르제는 로나벨아크하임의 외침을 듣고 잠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이내 그의 의도를 이해한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덥썩, 붙잡았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비틀어 보았지만, 내 완력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란 무리였다. "이게 무슨…!" "미안하군, 칼리체. 하지만… 잠시 어울려 줘야겠어!" 나는 카리에르제에게 끌려가 로나벨아크하임의 반대편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원망스런 눈으로 카리에르제를 흘겨보았지만, 그는 얼굴에서 장난스런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오, 이게 누구야?" 로나벨아크하임은 조금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까전부터 무척이나 과장된 언사와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주변의 호응은 나쁘지 않았다. "… 무슨 속셈이냐." "뭐, 속셈 까지야…. 별다른 생각은 없어. 그냥, 한 판 해보자는 거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역시 이녀석은 너무 무례하다. "어때?" 뭐, 못할것은 없다만…. 잠시 몸을 뒤로 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꽤 기대에 찬 시선을 내게로 보내오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걸어오는 인간은 없었지만, 나는 아카데미에 여러가지 의미로 이름이 알려진 편인 모양이라 모두들 상당한 관심이 깃든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거절하기도 곤란하군. "… 알겠어." "좋아, 자 그럼 내기 내용은…!" 내기 내용이라…. 하지만 난 지금 금화나 그에 준하는 재화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이 금화 모두. 그리고 칼리체, 너는- " 찰나의 순간, 로나벨아크하임의 붉은색 눈동자가 마치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칼날처럼 느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식의 별 의미도 없는 인간의 내기에, 무엇을 부여하고,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줘야해?" … 그것은 그 자신이 아니면 모르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탁, 탁- 서로 말을 옮기는 소리와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 하고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주변의 인간들은 나와 로나벨아크하임의 손동작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지, 말을 옮길때마다 달라지는 그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 사실,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백룡인 나와 화룡인 로나벨아크하임 사이에, 이런식의 머리를 쓰는 게임은 전혀 의미가 없다. 나는 말을 하나 옮기고, 상대방이 내 한 수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예상한다. 그외의 다른 변수조차 모두. 그리고 상대의 대응에 대응할 다다음의 수. 그리고 그 다음의 수. 그런식으로 나는 이 게임이 끝날때 까지의 수를 모두 머리속에서 한꺼번에 계산해 버린다. 하지만 상대가 나와 같은 사고 능력을 가진 드래곤이어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탁- 결국, 로나벨아크하임의 말이 내 말 하나를 쓰러트렸다. 이제 내게 남은 말은 왕,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로나벨아크하임도 마찬가지. 결국, 둘 모두 왕을 제외한 상대방의 말을 판에서 모두 소거해 버렸다. 이래서야, 결착이 날리가 없지. "승부가 나질 않는걸." 로나벨아크하임은 기지개를 키듯 양팔을 머리뒤로 들어올리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은 아직도 조용한 채다. 나는 두개의 말만이 남은 판에서 손을 떼며, 소파 위로 몸을 깊게 기대었다. "… 무승부?" 가느다란 레쥬에브의 목소리가 게임의 끝을 알렸다. 뒤이어 감탄하듯, 여러 인간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대단한데. 이런 '이상한' 게임은 처음봤어." 주변에 울리는 감탄중, 내 마음을 자극하는게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로나벨아크하임쪽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게임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인간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식으로 불필요한 자극을 줄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흐음, 내기 내용은 어떻게 되는거지?" 그렇게 묻는 로나벨아크하임에게 나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답했다.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양쪽 모두 없던걸로 하는거지 뭐." "아쉬운데 말이야." … 로나벨아크하임도 결국 결과가 이리 될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내 따가운 시선을 빗겨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바로 눈 앞에 놓여진 누군가의 손에 동작을 멈추어섰다. 도자기처럼 새하얀 손 위에 노랗게 빛나는 금화가 여러개 얹어져 있었다. 손에서 팔, 어깨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양쪽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하기로 하지 않았니?" "뭐, 어울려 줘서 고맙단 거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 칼리체." "…."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인간들중 몇몇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한것을 느낄 수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의 손 위에 놓인 금화는 결코 많지 않다. 하지만 귀족이 아닌, '평민'인 나에게는 상당히 많은 량이다. 소수이지만 평민이 있는 이곳에서, 로나벨아크하임이 별다른 이유없이 금화를 건네는 것은… 조금 미묘하게 오해를 살 수가 있지. … 나는 그의 손 안에서 금화를 넘겨 받았다. 그런데, 금화를 넘겨 받고, 회수되어야 할 그의 손이 내 손을 덥썩 잡고 나를 확- 끌어 당겼다. 갑작스런 힘에 자리에서 일어나게되어 앞쪽으로 엎어지려는 나를 로나벨아크하임이 단단한 힘으로 붙잡았다. 그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깨동무를 한 채로 웃으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아, 칼리체는 나와 오랜 소꿉 친구인데, 워낙 숫기가 없어서 매일 혼자만 놀아. 그러니 얘랑 친하게 지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내 머리위에 손을 턱, 하고 올리더니 몇번 쓰다듬고는 내게서 떨어졌다. 말하는 투로 봐서, 로나벨아크하임은 귀족 세력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지만, 소꿉 친구라…. 다소 황당한 기분으로 로나벨아크하임 쪽을 쳐다보자, 그는 내게 가벼운 조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에게서 금화를 받기 전, 그 잠깐 동안의 머뭇거림을 눈치챘던 것일까. 친한 친구라고 주변에 알려 버리면, 귀족과 평민간의 미묘한 어긋남을 다시 되돌려 놓을수 있을 테니까. … 꽤나 신경써주지 않는가. # 으음- 이른 아침의 기상은 쉽지 않다. 수면은 육체를 옭아매고, 수면에 옭아매어진 육체는 정신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기상의 쉽지 않음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나른함이 좋다. 일어나기 직전에 느껴지는, 몽환적인 느낌. 가늘게 뜨여진 눈으로 부서지는 햇살, 그리고 몸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만족스럽다. 모두, 용의 육체가 아니기에 느낄수 있는 것들이지. "이봐, 칼리체.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만." 출렁- 하고 침대가 깊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내 침대위에 걸터 앉은 모양이다. … 그런데, 일어날 시간이란건- "오늘은 축제 기간으로, 강의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내 귀에 나의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색, 나른함을 가지고 있어서 일까. "하, 무슨 소리냐. 오늘은 요정 여왕이 이 도시에 도착하는 날이다. 인간들이 분명, 볼거리들을 잔뜩 준비해 놨겠지." 로나벨아크하임이 침대 위에 걸터 앉은채 다리를 흔들어 대고 있는지 침대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 그나저나, 인간들이 준비했을 그 볼거리를 보러가자는 건가, 지금. "하찮군." "흥, 매몰차게 말하는군." 그렇게 말하는 로나벨아크하임도 그다지 의미를 두고 있진 않았는지 그정도의 작은 투덜거림으로 끝날 뿐이었다. "하지만… 곧, 이 도시로 찾아올 요정 여왕이 팔 백년전 너의 마음을 잠깐 잡아 끌었었던 그 요정인데도 말이냐?"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은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 알고 있었나?"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 팔백년전의 여행에서 너희들과 나는 우연히 한번 마주친적이 있으니까."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나를 내려다 보고있다. 나는 조금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침대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요정 여왕, 칼리아넬…. 그녀와 나는 과거의 인연이 있지.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인연의 굵기가 그리 얇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녀와 같이 고결한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가 마음에 들었고,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 하지만, 그뿐이다. 지금와서 내가 그녀를 만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그저 요정들의 여왕으로서, 그녀가 그녀의 종족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흐음… 요정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요정 역시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게 언젠가는 멸망에 이를 필멸자라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지. … 긴 시간일 테지. 그녀의 기억속에서, 나의 존재가 흐릿해질 세월은. 혹여, 그 세월이 지나고… 드래곤인 나조차도 알지 못할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친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루루렌칼리체." "아니, 잠시… 그녀에 대해 회상했을 뿐이다." "흠- " 로나벨아크하임은 걸터 앉아 있던 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존재가 사라지며, 침대는 그가 앉아있던 흔적을 탄력으로서 지워버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의 기억과 다시 조우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루루렌칼리체." "응…?" "망각을 모르는 우리 드래곤들은, 과거의 기억을 방금전에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느끼지. 가만히 눈을 감고 과거의 기억을 꿈을 꾸듯 재생해면, 다시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지 않나? 과거의 기억을 일부러 찾아가 조우할 필요도 없이 말이지." "…." 그는 씩- 웃으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일 뿐이다. 현재에서 과거의 기억은, 그 과거와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어. 현재라는 시간에서 다시 과거의 기억을 만나, 그 기억을 현재의 것으로 다시 갱신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갱신된 기억이 다시 과거로 밀려날 지라도 말이야." … 그런가.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군. 졸린 눈을 비비며, 그에게 뭐라고 말할려는 순간, 나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침대 위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녀석, 베개를 얼굴 위로 집어던지다니…. 그 뒤로 조롱기가 가득한 무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론은, 일어나란 말이다. 이 멍청아." # 아카데미의 교정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음, 어제 밤까지 비가 와서 더욱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풀잎과 꽃잎들은 모두 축축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대기는 청량한 습기가 가득했다. 나는 계단 위에서 아카데미의 입구를 내려다 보았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을 검은색 철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 축제 기간 중에는 아카데미 내외로 출입이 자유로이 허용되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하니 로나벨아크하임이 그런 제안을 했었던 것이겠지. 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교정을 한바퀴 돈 뒤, 아까 잠깐 있었던 계단에서 멈춰섰다. 아카데미의 정문에서 이곳까지 희미한 무지개가 보이는것 같았다. 잘못봤나 싶어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는데…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리면, 무지개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태양이 다시 나타나자 마치 환영처럼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태양광의 왜곡이 이루어 내는 재미있는 광경이다. 언젠가, 내 보금자리 앞에서 이 세계에 존재했던 어떤 무지개 보다도 가장 큰 무지개를 만들어 보는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나는 탁- 하고 바닥에 가볍게 발을 굴렀다. 바닥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아, 발을 구르는 소리가 다소 둔탁하게 들려왔다. 누군가 주의를 끌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스스로의 생각속에 빠지는 좋지 않은 버릇이 나올뻔 했다. 버릇 같은것이야 의식만 한다면 간단히 없앨수 있는 나지만…, 나는 이 버릇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아니, 이 버릇은 버리기 싫다. "…." 로나벨아크하임이 말한대로 잠깐 동안 인간들이 행하는 '축제'라는 것을 보러가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그 녀석의 무례한 방해로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리기도 했고…. 나는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아보며,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아카데미의 정문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레쥬에브, 인가. 평소와 달리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긴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만큼 압도적인 미모를 지닌 존재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 원래 웃음기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시기에 외출하는 것이라면… 그녀 역시 요정들을 맞이 하는 '축제'를 보러가는 것일텐데. 흐음- 저 얼굴을 보면, 화가 나는 일이라도 있다던가? "…." 그 잠깐 사이에,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뭐, 저 인간과 현재의 나 사이에 딱히 친분이 있는것도 아니고. 쓸데 없이 내가 상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겠지.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던 것을 멈추고, 정문을 통해 아카데미를 나섰다. # 네거스텐 제국의 수도는 상당히 절제된 느낌의 도시였다. 규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마치 머리위에 항상 신성한 존재를 두고 있는듯 했고, 특히 귀족들의 주거지로 들어서면 주변이 고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 연유가 종교이던, 아니면 그 외의 것이었던 간에, 현재 도시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요정 여왕의 방문 때문이겠지. "엄마, 정말로 요정들이 오는거야?" "응, 정말이란다." "엄마가 그저께 읽어줬던 동화책에 나오는 그 요정?" "그렇단다." 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가던 어머니는 자신의 옷자락을 당기며 묻는 아이를 내려다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건물 벽에 기대어 나를 스쳐지나가는 두 모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인간들에게 본래 요정은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요정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숲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것도 있지만… 요정은 '근원'에 인간보다 좀더 깊숙히 발을 걸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인간에게 요정은 더이상 동화책에서만 등장하는 존재가 아니게 되겠지. 방금 나를 스쳐지나간 두 모녀의 대화처럼, 요정이 공식적으로 인간들의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요정 여왕 칼리아넬의 선택인가. "…." 나로서는 요정들의 그런 결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은 없겠지. 나는 그저 인간과 요정들 사이에서 한발 물러나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평화가 계속 되면 좋고, 분쟁이 일어나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흐아암- " 괜히, 하품이 나오는군. 나는 하품덕에 물기로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건물 벽에서 등을 떼었다. 정오가 다가오기 때문일까, 선선했던 바람이 조금씩 온기를 머금어 가는것 같다. 그것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얘기론, 요정들의 방문은 아직 먼 모양인가 본데…. 나는 어딘가로 통하는 지도 모를것 같은 골목길로 접어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게 지어진 건물 사이로 보이는 푸른색 하늘이 좁다. … 계속 헤매이다 보면, 요정들이 이 도시로 진입할 대로가 나올것이다. 주변의 인간에게 위치를 물어도 좋겠지만, 아직 시간이 많은것 같으니- 시간을 소모하기 위해 조금 헤매어 보기로 하자. "…." 귀족이 아닌 평민들 주거지의 도시 구획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전에 이 도시의 상공에 있을 때, 아래를 내려다 본 기억으론… 이곳은 마치 거미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 야옹- 하고, 어디선가 들려온 고양이의 울음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작은 나무통 위에 검은색 고양이가 어둠속에서 울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노란색 눈동자- 비교할순 없겠지만… 그래도 비교하자면 그것은 내 호박색 눈동자의 빛깔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것에 미약한 끌림을 느껴 고양이에게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생물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캬앙-! 하고 앙칼진 소리를 내며 내 손에 세줄기의 상처를 입히고 도망가 버렸다. 이유없이 작은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에 당한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한번 혀로 한번 핥짝이고, 고개를 들어 보았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골목은 방금까지 느꼈던 깔끔하고 절제된 느낌이 상당히 사라져 있었다. 주변이 건물에 가려져 어둡기 때문일까… 벽에 묻어 있는 때와 곳곳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로 이곳은 음습한 분위기 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 골목에서 여러명의 인기척이 느껴져 왔다.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개중 몇명은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이상했다. " -랬는데, 그년이- " " -보같은 소리 마- "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와, 나는 그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골목은 좁았고, 그쪽으로 걸어가는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던 그들은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 지자, 어둠속에서 드러난 그들의 몰골을 딱 잘라 말하자면, 지저분했다.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와 덮수룩한 수염. 원래는 다른 색이었을 셔츠가, 땟국물로 변색되어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와 마주치다 걸음을 딱- 하고 멈추어섰다. 동시에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이게… 뭐야?" 세명중 한명이 나를 동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이상한 말이군. 세명은 모두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서히 다가왔다. 세명중 가운데 서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붙잡아."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가는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들에게 붙잡혀 주었다. "무슨 일이죠?" 나는 그렇게 물으며, 가운데 있던 남자를 쳐다보았다. 행동과 언사로 봐서, 이 남자가 이들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것 같은데…. 그와 눈을 마주치자 내가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불쾌함이었다. "흐-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왜 혼자서 이런 지저분한 골목을 걷고 있을까?" 그의 눈동자가 어떤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생명체인 이상, 어떤것에 대해 욕망을 품는것은 당연하지만… 그 욕망의 대상이 나를 향하니, 그리 유쾌하진 않다. "잠깐, 이 옷은 루블… 뭐시기 아카데미의 제복인데?" 리더 격인 남자가 인상을 구겼다. "멍청한 녀석,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닥치고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이 순진한 아가씨를 데려다 잽싸게 해치워 버리자고! 우리가 이정도 미모의 계집을 범해볼 기회가 또 어디있겠어?" 내가 입고 있는 제복을 언급한 남자는 조금 꺼림직한 표정이었지만, 내 팔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당신들은… 마치, 짐승같군요." 나는 조용히 내 감상을 그들에게 말했다. "하…? 이 계집애가 지금 상황파악이 안되나." 계집애… 아직도 내 외모는 왠만하면 여성으로 비추어 지는 모양이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당신들은 이성보다 본능이 월등히 앞서는것 같으니, 그렇게 말한것 뿐이에요." "이봐, 조용히 하라구. 안그랬다간 험한 꼴을 보게 해줄테니까." 한 남자가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나이프를 꺼내어 내 목에 들이 댔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뱀이 쉭쉭- 거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별로 이 이상 대화가 통할것 같지는 않다. "흐, 이 살결좀봐. 좋은것만 먹고 자란 아가씨라서 그런가?" 목덜미 위로 간질간질한 손길이 느껴진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폐쇄된 골목이라는 배경덕인가… 나는 무분별히 발산되는 이들의 욕망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들의 의식을 잠깐 동안 끊어줄 마법의 힘을 끌어 올렸다. "잠깐." 막 이들을 기절시키려는 찰나, 뒤에서 얼음장 같이 싸늘한 소녀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누, 누구냐!" 내 목에 나이프를 들이대고 있던 남자가 당황함이 가득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엔 아무도 없었으니… 놀랄만도 하군. 나는 나이프에 목이 베이지 않게 고개를 약간 뒤로 빼며, 시선을 돌렸다. 검은 코트를 입고,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가 어둠속에서 걸어 나왔다. 하얀 피부와 다홍빛 입술을 제외한 모든것이 흑색으로 점칠된 소녀였다. 그녀는 다소 짜증이 뒤섞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 뭐야, 오늘 무슨 날인가? 이쁜이가 둘이나…!" 남자의 목소리에 또다시 욕망이 섞여들었다. "흥, 말을 섞기조차 꺼려지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군." 남자의 말을 자르는 목소리가 마치 칼날 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녀는 마치 경멸하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좁은 골목에 긴장된 분위기가 흐른다. "뭐라고…? 이년이 뭘 믿고!" 나를 붙잡고 있던 한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그녀에게 달려 들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하고 멈추어 섰다. 그녀가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놀랍군. 그녀의 지배에 의해 은밀히 마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마력을 다루는 수준이 인간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력이 빠르게 움직이고, 근원의 신비가 지상으로 발현되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력의 배열이 내게는 보였다. 저 마력을 움직이고, 배치하는 그녀의 마력 체계는,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단언하건데, 그녀보다 강력한 마력의 사역자는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꺽- " 나이프를 들고 있던 남자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내 목위에 놓여져 있던 나이프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 살갗에 작은 상처를 내었다. 나는 손 끝으로 상처가 난곳을 훑으며, 나를 붙잡고 있던 인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빠져나간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저 초점이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망가진것 처럼 보이는군. 나는 단단히 붙들려, 시퍼렇게 멍이든 팔목을 주무르며 시야를 흐렸다. 저건… 공포의 감정을 극대화 시킨 것인가.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 흑발의 아름다운 소녀, 레쥬에브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명령했고, "으, 으아아!" 그녀가 발현 시킨 마법에 의해 다리까지 덜덜 떨며 공포에 질려 있던 인간들은 그 명령을 신호탄으로,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이곳에서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말할것도 없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것보다… 잠깐 동안 보았던 그녀의 마력 체계가 신경쓰인다.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인간보다 가장 근원에 근접한 마력이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나조차도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마력을 은닉하고 있었다니…. 동시에 내 사고에 떠오르는 것은 백색의 좌, 리체르아였다. 인간이면서 이정도의 신비를 가지고 있는 자는 그녀밖에 없지. "으- 어쩌자고, 내가." 레쥬에브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로선 나를 방금전의 위협에서 구해내는 일이 그리 기껍지 않았던 모양이다. 음, 일단은…. "고마워." 나는 나를 붙들고 있던 인간에게서 묻어나온 것이 분명한 먼지를 털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내 감사에 그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방금 그들을 노려볼때와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음, 상당히 부담스런 시선이다. 레쥬에브는 한쪽 손을 허리에 얹고, 앙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런 뒷골목은 방금같은 천박하고 더러운 녀석들이 장악하고 있는게 당연하잖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꼴이라니…!" 분개하는 듯한 그녀의 움직임에 양갈래로 묶은 흑발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음… 마땅히 변명할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잠시 시간을 죽일겸 일부러 헤매었다고 솔직히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겠지. 보통의 인간은 그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 너는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걸 알았니?"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강한 의문을 담아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레쥬에브는 내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채 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으음, 꽉 다물어진 저 작은 입술이 내 의문의 해결을 위해 열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들것 같군. 레쥬에브는 잠깐 동안 아무말 없이 나를 노려보며 부드러워 보이는 다홍빛의 입술을 매만지다가, 아무말도 없이 몸을 돌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인간은… 뭘하고 있던걸까. 나는 그녀가 사라진 어둠속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주변으로 시야를 옮겨보았다. 앞, 뒤로 뚫린 통로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몸을 숨길 곳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레쥬에브가 내 뒤를 밟지 않은 이상, 내 위험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녀가 내 뒤를 밟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 위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곳이라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겠지. … 레쥬에브는 아마 저곳에서 도시의 정경을 지켜보고 있던게 아닐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 메니치오 공작가의 장녀…. 그 이외의 것은 아는게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마법을 할줄 안다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방금 나를 그 같잖은 위협에서 구해주었을 때도, 그녀는 내가 자신이 마법을 쓰는지 알아채지 못하도록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마력을 행사했지. 겉으로 보기엔 그 불량해 보이는 인간들이 레쥬에브의 박력에 밀려 달아났을 뿐이다. 결국… 레쥬에브는 자신이 마법을 할 줄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 되는군. 거기다 그정도 수준의 마력 행사는…. 아무튼, 갑작스레 흥미를 끄는 인간이군. # 와아아아아- 주변은 환성이 가득했다. 여러 인간이 질러대는 소리에, 귀가 멍해지며 또한 정신까지 멍해지는 느낌이다. 바닥은 요정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분홍색의 꽃잎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인간이 가득한 길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꽤나 환영해 주지 않는가. 은룡… 아니,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있는 황궁, 피에셰트 쪽을 잠깐 바라보던 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분홍색 꽃잎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하늘에서 뿌려질 때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인간의 발에 밟혀 상당히 더러워져 있었다. 요정들은, 자신들을 환영한다고 뿌리는 저 꽃잎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시선을 흐리며 바로 앞에 보이는 두꺼운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저 인간들 덕분에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나는 요정들을 볼 수 없었다. 건물위로 올라가면 볼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볼만큼 가치있는 광경은 아니다.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에 끼워진 꽃잎의 감촉이 보드랍다. 나는 꽃잎을 살살 문지르다 이내, 손 안에서 바스라 트렸다. 힘없이 떨어지는 꽃잎… 손가락에는 옅은 붉은색 흔적이 묻어 있었다. "…." 나오긴 했지만… 딱히 한 일은 없었군. 꽃잎으로 인해 남은 흔적을 비비던 손가락이 멈추어섰다. 딱히 한 일은 없다, 라고 생각했나. 매 하루 하루마다 숨가쁘게 일어나는 일들 때문일까, 나는 그것들에 익숙해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 고작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고작 하루- 하루건 한달이건 일년이건 백년이건 천년이건,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간 세월이 그렇게나 긴데도. 나는 미약하게 웃음지으며 벽에서 등을 떼었다. 이만, 들어가기로 할까. "…." 하지만 내 발걸음은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누군가의 앞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평범한 갈색의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쓰고 있는 인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아까 만났던,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한패인 자인가? "무슨 볼일이라도?" 로브는 아무말이 없다. 나는 의아스런 시선을 던지며, 찬찬히 모습을 훑었다. 조금 작은 체구…, 로브로 인해 드러나는 몸선이 상당히 제한적이라 모습을 예상하기가 힘들다. 확실한건, 저 가느다란 몸으로 봐서 로브를 쓰고 있는 이자는 아마도 여성 일듯 싶다. "정말, 그때와 달라지신게 없군요."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로브에서 새어나왔다. "…." … 아아, 나는 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팔백년 전, 오랜 잠에서 깨어난 내게 강한 의지를 보여 나를 기껍게 했던 요정의 소녀. 이제는 그 가느다랗던 목소리에 성숙함이 더해져 지금의 나를 마주하고 있는가. "짧아진 머리카락만 빼면 말이에요." 그녀는 후드를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풍성한 녹빛 머리카락이 답답한 후드속에서 쏟아졌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청록색 눈동자, 맑은 그 눈동자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이 맺힌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그녀는 마치 울것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하고서 팔을 벌리며 나를 끌어 안았다. 마치, 싱그러운 풀냄새 같은 그녀의 체취가 한가득 느껴졌다. 나를 안은 칼리아넬의 몸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아넬…." 설마,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차림새를 보면 몰래 저 행렬에서 빠져나온듯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다는걸 알아내었을까. "칼리체 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나를 바라보는 그 호박색 눈동자가 보고 싶었어요. 정말, 긴 시간이었어요. 긴 시간 동안 저는 많은것을 얻고, 또 잃었지만 정작 제 머리속에 든것은 오직, 칼리체 님 뿐이었어요." "…." 그런가. 내게는 잠깐동안 잠들었다 일어난 시간이었지만… 요정인 그녀에게도 팔백년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겠지. 주변의 인간들은 모두 대로로 진입하는 요정들에게 모든 정신이 팔려, 뒤쪽의 우리들에겐 아무런 시선이 닿지 않았다. 재미있군, 요정의 여왕이 바로 뒤쪽에 있는데도. "칼리체 님. 잠깐 동안만이라도… 제가 지금껏 칼리체 님에게 해고 싶어했던걸 해도 될까요?" 이상한 청원이로군. 하지만 못들어줄것도 없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는, 촉촉하고 따뜻한 어떤것. 그것이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맞춤이란 행위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이 입맞춤에 들어있는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칼리체 님." 칼리아넬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활짝 웃어 보였다. 눈가에는 작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 이런식으로 재회하게 될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나는 방금까지 칼리아넬의 입술이 닿아있던 내 입술을 매만지며, 칼리아넬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찾았니?" 내 질문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칼리아넬은 양팔을 등뒤로 넘긴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흥, 칼리체 님은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함…? 나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 내가 아무말이 없자, 그녀가 나즈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칼리체 님은." "너는, 많이 변했구나." 알게 모르게 다소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던 그때의 그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무척 당돌해 졌다고 해야하나- "그럼요! 무려, 칠백년 하고도 구십년인 걸요?" 그렇게 말하며, 칼리아넬은 양 손으로 내 오른손을 감쌌다. 인간보다 체온이 약간 낮은 요정의 손은, 기분 좋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 그래, 칠백년 하고도 구십년, 인가. "칼리체 님은 그 시간동안 하나도 변하시지 않으셨지만, 어린 저에게는 큰 변화를 겪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요. 철 없이 칼리체 님을 따라나가 인간들의 세계를 구경하고, 또 느끼고… 결국, 여왕이 되기 까지는요." 칼리아넬의 표정이 묘하다. 그녀는 기쁜것 같기도 했고, 슬픈것 같기도 한 두가지 감정을, 모순적이게도, 모두 한 표정에 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의 뒷편에서, 나는 괴리를 느꼈다. 아주 짧은 침묵- 아니, 사실 그것을 침묵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칼리아넬이란 요정과 백룡인 나 사이에 아주 잠깐동안 정적이 흐르다 지나갔다. 그 찰나의 정적이란건 내가 용이기에 느낄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아, 어떻게 칼리체 님이 있는곳을 알았냐고 물어보셨죠?" 칼리아넬은 손벽을 짝- 하고 치며, 즐거운듯 웃었다. "저, 사실 칼리체 님이 새로 변해 창가로 날아들었을 때부터 칼리체 님을 알아봤어요. 왜- 그도 그럴것이, 그 정도로 완벽한 백색의 깃털을 가진 새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뒤이어 수줍은듯, 얼굴을 붉힌 칼리아넬의 말이 작게 이어졌다. "거기다, 저는 항상 칼리체 님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는…." 그랬던가. 알면서도 태연히 모른척을 하다니, 확실히… 칼리아넬은 칠백년 하고도 구십년 동안 많이 성장한 모양이다. "그리고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영혼들에게 부탁했어요, 부디- 칼리체 님을 제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게 해달라구요." "…." "감히 용을 제 시야안에 두겠다니… 제 주제에 맞지 않고, 굉장히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칼리체 님이 계속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히 제 부탁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 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칼리체 님을 놀래켜줄 생각으로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났는데…." 칼리아넬은 샐쭉하게 웃어보였다. 지금의 웃음 에서 만큼은 성숙함이 약간 사라져, 마치 팔백년 전의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 "어때요, 놀라셨나요?" 나를 진정으로 놀라게 할 수 있는것은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는 않군. 대신, 팔백년전 어떤 인간으로부터 얻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나는 답했다. "응, 놀랐어." # 칼리아넬은 황궁, 피에셰트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 동안 내내, 내 손을 잡고서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녀는 이제 한 종족의 수장을 맡고 있기에 원하는데로 하지는 못하겠지. 그녀와는… 기회가 닿는다면 또 다시 만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닿기도 그리 어려울것 같진 않고. "…." 로나벨아크하임이 말한대로다. 어린 소녀일 적의 칼리아넬의 모습 역시 내 기억속에 생생히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이 현재 그녀의 모습은 아니니까. … 기억의 갱신. 그러고 보면, 용들 중 한번도 기억의 리셋을 하지 않은 로나벨아크하임은 나보다더 훨씬 더 많은 기억을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방금의 나와같이 과거의 기억에 현재의 기억을 덧대고, 또 덧대 왔겠지. 하지만… 그가 과거 기억의 장소 전역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의 기억이 전부 덧대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흐음- "…." 쓸데 없는 생각을 접고, 아카데미로 돌아가기로 했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은 인간이 켜놓은 불들로 인해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원래, 칠흑같이 검은 밤하늘에, 하얗게 빛나고 있어야할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조명에 의한 것이겠지. 마음이 약간 상한채,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돌아가는 길은,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축제로 인한 불빛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도시의 외곽으로 걸어나갔다. 축제 때문일까… 도시의 외곽엔 적막이 흐를 정도로 인간이 없어 보였다. … 이제서야 별빛이 보이는군. "후으- " 한숨을 내쉬며 골목 사이를 걸어나갔다. 이렇게 외곽쪽을 통해서 아카데미로 향하면 시간이 지나치게 걸리지만… 그것보다 내가 번잡한걸 좋아하지 않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야옹-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별빛을 감상하며 걷고 있는데, 갑작스레 앞쪽 골목에서 검은색 고양이가 튀어 나왔다. 저건… 아까전 내 손등에 상처를 낸 그 고양이로군. 이런곳에서 또다시 마주칠 줄이야. 야옹- 고양이는 내 모습을 보더니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골목안으로 숨어버렸다. 울음 소리가 아까전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약하게 들리는데…. 골목 안을 잠깐 살펴보니, 고양이는 멀리 벗어나지 않고, 버려진 널판지 위에 웅크리고 앉아 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아무래도… 이 고양이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 드래곤과 달리, 일반 생명체는 살아가기 위해서 매일 반드시 '먹음'으로서 에너지를 섭취해야 하니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나는 고양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안으며 앉았다. 고양이는 달아날 힘도 없는지 그저 경계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이 가여운 생명체에게, 간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허공에 가볍게 손짓했다. 간단한 손짓이지만, 그 손짓이란 기호는 마력과 신력을 동반했고, 세계의 법칙을 움직였다. 과정은 거창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 거창함의 결과물은 내 손위에 놓인 한덩어리의 유기물이었다. 나는 그것을 고양이에게 주었다. 고양이는 잠시 경계를 풀지 않다가 이내 유기물 덩어리로 다가가 그것을 조금씩 뜯어 먹기 시작했다. 이 작고 가여운 생명체의 미각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그것은 허기와 에너지를 제공해 줄뿐 아무런 맛도 없을 것이다. 변덕스런 내 호의에 맛까지 동반되리라 기대하는건 무리다, 고양이. 고양이를 잠시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는 찰나, 나는 허공에서 아주 강력한 마력 행사 여러개가 한꺼번에 발현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고, 유기물을 뜯어먹는 고양이는 평온해 보였다. "…." 이런 곳에서 갑작스런 마력 행사라…. # 일어나고 있는 마력 행사는 무척이나 복잡하고 정교한 마력 체계에 의해 발현되고 있었지만, 그 성질과 방향은 무척이나 일관되고, 직선적이었다. 그것은, 인간치고는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흐음- " 붉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다. 외부에서 이곳으로 향하는 모든것을 차단하는 결계에 의해 세계가 붉게 보여 시각으론 그것이 저확히 무엇인지 확인하기가 쉽진 않다.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강대한 마력 행사, 그리고 그것에 의해 여러개의 생명이 덧없이 져버린다. 뭐,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겠군. 사방에서 떨어지는 저 붉은것은 인간이었던 고기덩어리 들이다. "죽어라!"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머리 바로 위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말, 그 말도 이제 질리네- 좀더 색다른 말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싸늘함을 내재하고 있는,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 그에 뒤이어 끄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내 바로 앞쪽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벽 앞쪽에 놓여져 있던 쓰레기통 위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 졌다. 붉은 액체를 바닥에 잔뜩 묻히고 있는 그것은, 인간의 시체였다. "아직도 남은 녀석이 있나?" 사냥감을 찾는 포식자 처럼 섬뜩함과 은근한 요염함을 담은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그녀는 고양이 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그 높은 건물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어져 내리더니, 쏜살같은 빠르기로 나를-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진한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너는…!" 나를 향하던 죽음의 그림자가 아슬하게 빗겨나, 내 뒤에 있는 벽을 향했다. 콰앙-!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레쥬에브 였다. "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거지?!" 그녀는 오른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장갑의 손등 부분에 박힌 붉은색 보석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쥬에브는 내 시선이 그 보석을 향한다는 것을 눈치채자, 황급히 코트의 소매로 그 빛을 숨겼다. "내 물음에 당장 답해. 대답 여하에 따라 너도 바닥에 늘어져 있는 저 시체처럼 될 수도 있어." 레쥬에브는 냉엄한 목소리로 나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자세는 나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양손은 긴 코트 자락속에 숨긴채 양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도 가깝고…. 아니면, 그녀 자신이 언제라도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인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 "우연은 없어. 내 결계를 통과할 정도라면, 너 역시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한 마술사라는 얘기가 되니까." … 곤란한데. "무슨 오해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난 저들과 관계 없어. 그저 지나가다 강력한 마력 행사가 느껴지길래 무슨 일인지 보러 왔을 뿐이야." "흥,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 마력을 다룰줄 안다는걸 숨겨왔었구나." 그녀는 비난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것을 꼭 알려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정작, 마력을 다룰줄 안다는걸 숨긴건 너잖아. 아까 낮에 그 불량한 사람들도 네가 마법으로 쫓아버린거지?" 레쥬에브는 윽-, 하는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런곳에서 뭘하고 있는거니?" 사방에 늘어진 시체들… 그것은 따로 의심해볼 필요도 없이, 모두 레쥬에브가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시체들과 레쥬에브의 관계를 통찰해 보기가 힘들군.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것을 네게 답해줄 이유는 없지 않겠니? 그리고… 아직 너에 대한 오해도 풀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는것 치곤, 상당히 무방비한 모습이다. 내가 만약 실제로 그녀의 적이었다면, 난 지금 무방비한 그녀의 등을 공격했을 것이다. 레쥬에브… 이 일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허술해 보이는 인간은 아닌것 같은데- "이들은 레케트리셴 문이 내게 보낸 암살자 들이야. 정확히는 레케트리셴 문의 측근들이 보낸 암살자, 라고 해야겠지만." 레쥬에브는 코트 자락을 추스리며 그렇게 말했다. 레케트리셴 문 이라면…. 나는 눈살을 살짝 지푸리며 입을 열었다. "오해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며?" "일단, 무방비한 내 등을 네가 공격하진 않았으니까- " 그녀는 빙글, 하고 내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긴 흑발과 긴 코트 자락이 원심력에 의해 잠시 붕- 떠올랐다가, 이내 차분히 가라 앉았다. … 시험이었다는 건가. "위험한 짓 이었어." "그만큼 나는 내 실력에 자신이 있거든. 나는- " 그 뒤의 레쥬에브의 말이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인간의 모든 신비를 짊어지고 있는 좌 중 하나이니까." 그때 그녀에게 잠깐 느꼈었던 감각이 이것이었던가…. 인간의 신비를 짊어지고 있는 두개의 좌중 하나라면…. 레쥬에브가 흑색의 좌- 로군. 그녀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얹으며,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하는데, 이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리블란셰." "그런것 치곤, 너는 너무 많은것을 내게 말해준것 같은데…?" 레쥬에브는 손가락을 입술에서 때며, 내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건물에 의해 가려졌던 달빛이 그녀에게 비춰지며 그녀의 모습이 달빛에 온연하게 드러났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인간의 기준을 약간 벗어나있는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를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 그녀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 끌어드리고 싶다, 라는건…. "레케트리셴 문의 측근이 보낸 암살자- 라는 말에서 눈치챘겠지만, 내가 최종 적으로 제거해야 할 적은 이 나라의 황제야." 무려 제국의 황제가 최종 적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레쥬에브의 눈빛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념 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제국의 황제, 레케트리셴 문은 인간이 아니야." 놀랍군…. 레쥬에브는 레케트리셴 문이 실은 은룡, 레테닌시에스케 라는 것을 아는건가. 내가 아무말이 없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레케트리셴 문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 하지만 실제 모습은 그녀의 딸인 황녀 보다도 어려보이지. 그리고 다방면으로 인간이라고는 생각도 안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 물론, 능력이 뛰어나다는건 나쁠게 없지. 하지만- " 그녀는 잠깐 한숨을 쉬며, 저 멀리 보이는 축제의 불꽃에 시선을 주었다. "황제와 직접 눈을 마주쳐본 나는 알고 있어.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는걸." 음, 상당히 부족한 근거로군. 레쥬에브도 그걸 아는지, 내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자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황제가 인간이 아니든 말든 통치만 뛰어나면, 만족스럽지 않아?" "그건 틀려." 그녀는 마치 노려보듯 나를 바라보며,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싶을 정도로 강한 의지가 깃든 말이었다. '그건 틀려'…. 일말의 오만함마저 느껴질 정도로군.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나가야해. 그런데 인류의 가장 거대한 국가의 황제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그 자리에 인간이 앉아있지 않다니, 그렇게 되서는… 안돼." … 강한 인간이군. 나는 이런 자들을 싫어하지 않지. "왜 네가…?" 채 이어지지 않은 질문에도, 그녀는 흔들림 없이 대답해왔다. "말했잖아. 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신비를 가진 좌 중 하나- 인간에게 주어진 신비를 인간을 위해 쓰지 않으면 어쩌겠어? 이건- " 아아, 그런건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말이야?" … 인간은 남의 인정을 바라는 생물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했던 질문을, 흑색의 좌에게 던져 보았다. 그녀가 하려는 일은 결국 인간을 위한 일. 하지만 인간들 중 누가 그녀가 하려는 일을 알고 있을까. 아니, 통치만 훌륭히 한다면 지도층이 인간이던 그렇지 않던 상관 하지 않을 인간들도 많겠지. 레쥬에브는 전혀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듯, 눈이 동그래졌다. "글쎄… 생각해보면 좀 억울한것 같기도 한걸.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건 '나의 개인적인 신념'에 있어 중요한 일이니까."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 라는 것이로군. 과거, 누군가에게 들었던 대답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군. 흑색의 좌, 그녀의 의지는 고귀하다. "그래서- " 레쥬에브가 나를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협력해 줄거야?" 그녀는 옷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다소 오만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약간 협박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네가 이 일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나는 네 의지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너를 끌어들이려 했겠지만…. 네가 이 광경을 목격한 이상 나는 지금 네 답을 들어야 겠어." 꽤나 강압적이군.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확실히 이런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겠지. 그나저나, 이제 슬슬 피냄새에 코가 마비되어 가는것 같군. 저 시체들도 슬슬 수습해야 할텐데.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대기를 어지러 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협력하지 않는다고 하면…?" "협력하지 않겠다면…." 그녀는 꽤 요염하게 웃어보였다. 웃음은 보통 호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저 웃음에 호의가 담겨 있다고 보긴 힘들겠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제는 인간들의 표정에 어느정도 익숙해 졌으니 알 수 있다. 꽤 귀여운 위협이지 않은가. "음, 나는- " 그녀가 갖고 있는 신념과 곧 해내려는 일이 누군가에겐 악이되고, 누군가에겐 선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흑색의 좌라 불리는 이 소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어느정도 범위 내에서 협력해 주기로 할까. "협력하도록 할께." "좋아." 레쥬에브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적은 이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네가 그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까지 준비한 세력은 얼마나 되니?" "그건…."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나의 드래곤 아이(Dragon eye)로 그녀의 마음속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인간, 꽤 철저해 보였는데 의외로 좀 허술한 구석이 있다던가…. "내 세력은 메르시오 공작가가 전부야. 이 제국의 황제가 인간이 아니라는건 최근에 안 사실이니까." "메르시오 공작가…?" 그녀의 가문이로군. 하지만 가문의 주인은 그녀가 아닌 메르시오 공작일텐데…. 그녀의 아버지 역시 그녀가 흑색의 좌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레쥬에브는 옆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병들고, 가세가 기울어 명예만 남은 가문이지만… 그래도 공작가라서 왠만한 귀족 가문 정도의 전력은 될 정도야. 그리고 난, 우리 가문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고. 가문의 원로 들도 내 말을 함부로 거역하지 못하지." 완전히 장악했다 함은- "카리에르제… 그러니까, 네르세반 가문과의 약혼도 네 의도라는 거니?" 그 얘기를 꺼내자, 레쥬에브는 상당히 불편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응. 네르세반 공작가는 황제도 상대하기 껄끄러워 할 정도로 거대한 가문이니까. 하지만 나도 약혼 대상자가 설마, 그 녀석 일줄은 몰랐지." 뭐, 전부터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카리에르제와 레쥬에브는 과거에 어떤 악연이 있는 모양이지? "대단한걸- " "뭐, 뭐가?" 내가 보기에 인간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의 약혼이란건… 희생의 의미가 강해보인다. 상대적으로 남성의 지위가 높은 인간들 사이에서 결혼 대상의 여성은 일종의 물건 정도로 취급되는 경우도 있지. 레쥬에브는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뜻하는 바를 위해 네르세반 가문의 힘을 원한다는 것이 아닌가. "왜, 약혼이란건… 네 개인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잖아?" 긴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미약한 감탄은 그녀에게 온전히 전해졌는지 레쥬에브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리 대단한건 아냐!" … 인간은 빠르게 성장하는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이니까. "음… 그런데, 저 시체들은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니?" 잠시 레쥬에브의 눈빛에 진한 경멸이 스치고 지나간다. "흥, 저건 수습할 필요도 없어." 너무 매몰찬것 아니냐, 라는 말을 꺼낼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체들 위에 희미한 연기 같은게 나타났다. 아니, 저건…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로군. 연기는 점점 짙어지며, 서서히 시체가 분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빨리 감아 시체를 부패 시키는 것처럼 현실성이 상당히 결여된 광경이었다. "이건…." "저들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아니라고…? 아니, 그녀는 틀렸다. 저것은 인간이다. 세계의 진실을 꿰뚫어 보이는 내 드래곤 아이가 그렇게 고하고 있는데- 분해되고 있는 시체에 다가간 나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눈, 코, 입이 제멋대로 붙어 있는 생명체를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 하지만 백룡인 나조차도 이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수가 없는데…. 내가 모른다는 것은, '근원'에 조차 이 생명체에 대한 정보가 존재치 않다는 것. 이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체인 이상, '근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 다음날, 나는 간단한 점심을 챙겨 카리에르제와 옥상위로 올라왔다. 이곳은 루블라브룸 아카데미 내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이라 아카데미 내 뿐만 아니라 저 아래로 수도의 풍경이 보기 좋게 내려다 보였다. 축제기간이라 그런지 항상 제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차 있던 아카데미가 상당히 휑해 보인다. 나는 점점 더워져 가는 바람을 맞으며, 입안에서 단 맛이 나는 막대 사탕을 굴렸다. "흐아암- 다들 즐거운가 보네?" 카리에르제는 기지개를 켜며, 난간에 팔을 걸치고 몸을 앞 뒤로 흔들 거렸다. 무척 위험해 보이는데…. 막대 사탕을 입에서 빼고, 그를 말리려다 그만두었다. 떨어져 죽을것 같으면 내가 구해주기로 하지. 그는 잠시 동안 계속 그렇게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다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으니, 곧 카리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한심하다는 듯한 기색도 섞여 있는것 같군. "요새 막대 사탕을 자주 먹는것 같다?" "응, 이것은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해." "쳇, 뭐가 훌륭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카리에르제는 마치 이죽거리듯, 중얼거렸다. …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무료함을 느끼고 있는걸까. 나는 입안에서 굴리던 막대 사탕을 입에서 빼며 그에게 물었다. "먹을래?" 나 역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걸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 것이니까. "뭐? 설마, 네가 먹던걸 말하는 거냐?" 그는 뜨악, 하는 표정이다. 음… 아무래도 카리에르제는 막대 사탕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모양이다. "… 응." 그의 반응에 내가 조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분노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소리쳤다. "이 녀석이, 새것도 아니고 먹던걸 주려 하다니…! 더럽잖아!" 하지만 새것이 없는걸…. 가져온 막대 사탕은 이미 다 먹어 버려 막대 만이 내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더럽다는 말은- "더러워?" "더러워!" "왜?" … 대화의 수준이 굉장히 유치해진것 같지만, 궁금한 것은 확인해 보아야 겠지. 카리에르제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은채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침이 묻었잖아." "…." 나는 사탕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이 사탕엔 내 타액이 묻어있다. 하지만 이것이 더러운 거라면…. 잠시 입술을 매만져 보았다. 어제, 칼리아넬이 내게 한 입맞춤의 감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입맞춤에서 칼리아넬은 나와 잠시 타액을 교환 했었지. 그것은 더러운 것인가? …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 입맞춤도 더러운 건가?" "그- " 카리에르제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사탕을 입에 넣었다. "… 이, 입맞춤은 더럽다고 보기 힘들지!" "어째서?" 왠지 모르게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너는 그 차이도 모르냐! 입맞춤은 사랑하는 남녀 끼리 하는 거고, 네가 먹을래? 하고 내민 그 사탕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 … 그 둘 모두 타액이 교환되는건 다를게 없는데, 이해하지 못하겠군. "달라?" "달라! 거기다 너는 남자잖아. 남자 녀석 침이 묻은걸 어떻게 먹어!"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카리에르제가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 꽤나 신경질 적이군. 확실히… 입맞춤과 내 사탕은 그 대상이 이성과 동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 그리고 사랑하는 남녀, 라- 입맞춤을 끝내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칼리아넬의 모습이 떠오른다. 과연, 어떨까…. "그럼…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너는 내가 준 사탕을 먹었을까?" 카리에르제는 또다시 말문이 막힌듯,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대답했다. "… 안먹어." … 대답에 약간의 텀이 있군. 안먹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타액의 교환이라는 것에 대해 동성과 이성 사이에는 꽤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너- 뭔가 납득했다는 표정 짓지마! 방금 그 질문은 실험이냐!" "…." 으득, 하고 사탕을 씹었다. 사탕 조각이 이빨에 달라 붙어 입안이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 "흥, 정말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카리에르제는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중얼거린다고 했지만, 사실 모두 들릴 정도였는걸. "칼리체, 그 막대기 줘 봐."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던 카리에르제가 내가 걸터 앉아있는 벽돌 쪽으로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방금 타액의 교환은 사랑하는 남녀가 아니면- " "누가 네 침을 먹겠대!? 쓸일이 있어서 그런다!" 정말 화를 자주 내는 인간이군. 카리에르제는 내 손에서 사탕에 끼워져 있던 막대기를 뺏어 가더니, 다시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뭘 하려는 거지…? "…." 잠시 그의 눈이 신중하게 아래를 쫓더니, 막대기를 들고 있는 손이 올라갔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있는 난간 쪽으로 다가가 보니, 그의 눈동자가 쫓고 있는건 한번 본적이 있는 소년이었다. 전에… 다른 학생을 평민이라는 이유로 괴롭히던, 그 인간이로군. "카리에르제, 너 뭘하려는- " 내 말이 끝나기 전에, 그의 손에서 막대기가 떨어졌다. 막대기는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다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막대기가 향하는건…. "야, 뭐하는 거야. 숨어!" 멍하니, 그 막대기의 궤적을 쫓고 있는데, 카리에르제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나를 뒤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아래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녀석이 이런 끈적한 막대기를 내 머리위로 던진거냐!? 나와라! 무례한 녀석!" 아무래도 카리에르제가 던진 막대기가 그 인간의 머리에 명중한 모양이다. 옆에서 카리에르제가 입을 가리고, 킬킬 대며 웃는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장난… 인가. "왜 그의 머리 위로 막대기를 던졌니?" 그는 아직도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야, 저 녀석이 마침 이 건물 아래를 지나가고 있어서지." "장난이 대상이 누구였든 상관 없다는 건가?" 카리에르제는 잡고 있던 내 어깨를 놓으며, 잠시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적 하며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통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바로 눈앞에 짖궂음으로 반짝이고 있는 카리에르제의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이마를 문질렀다. 굉장히 아파서 이마에 불이라도 나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꾸 재미없는 질문 할래? 아무튼, 아직도 아래에서 성을 내고 있는 그 녀석은 너와 같은 평민을 괴롭혔던 녀석이잖아. 통쾌하지 않아?" "글쎄…." "… 그런식으로 말할줄 알았다."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양 손을 머리위로 올리고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드러누웠다. 그가 드러눕자, 뿌연 흙먼지가 주변에 잠시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제복이 더러워질텐데?" 카리에르제는 그 상태로 눈을 감은채 말했다. "하,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이 제복을 빠는건 내가 아닌, 이 아카데미의 고용인 들인데 뭐." "그래도… 너희들이 말하는 품위라는게 있잖아?" 인간의 상식에 기대어, 그렇게 말해보았다. 인간들이 말하는 '품위'라는 것을 언급하려니,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기도 하다. "흥, 귀족인 나보다도 평민인 네가 오히려 더 귀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보다도 일단, 기본적으로 옷이 더러워진다는 점이 있긴 하다만. "… 너와 이렇게 대화하고 있으면, 귀족이고 평민이고 하는 기준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야." 귀족과 평민의 기준이라…. 그것은 내가 보아온 인간들의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기준이라 생각한다. 지난 팔백년간, 인간들은 어떠한 발전도 이루어 내지 못했지만… 왕국이 제국으로 변모하고, 지식의 전승을 적극적으로 담당하는 아카데미가 생겨나는 등, 규모와 제도적인 면에서 변화를 이루어 내었지. 하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의 벽은 팔백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조금도 옅어지지도 짙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카리에르제 옆에서, 무릎을 끌어 안으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막대기를 머리에 맞고 화를 내고 있던 그 인간은 어느새 모습을 감춘 뒤였다. "내가 '귀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물어보았다. "글쎄… 그런것 보다는… 평민 녀석들에게선 열등감이 보이거든. 능력 같은걸 떠나,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태생같은 것에서 말이야. 뭐, 아카데미 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너의 그 '위대한' 미모도 한 몫 하지만 말이야." 뒤에 중얼거린 의미 없는 말은 넘어가고…. '태생'이라는 말에서 카리에르제의 목소리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것처럼 들려왔다. 그나저나, 열등감이라…. 그렇군. 평민이라 명명되어진 인간들은 자신들 보다 경제적, 사회적 면에서 훨씬 더 우월한 귀족에게서 태생적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 그리고 인간이 아닌 내가 그런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고. 그러니 카리에르제는 내게서 열등감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왠지 텅 비어보여, 멍청해 보이는 너에게서 열등감이란 감정을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말이야. 읏차- " 멍청해 보인다고…? 누군가에게서 많이 들었던 소리로군. 그는 말을 끝내고서, 상체를 튕겨 몸을 일으켰다. 다시 주변에 일어난 먼지들에 나는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리에르제는 먼지를 피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손가락으로 저 멀리 보이는 황궁을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저- 기 보이는 황궁, 피에셰트에 방문한 요정이라는 존재들이 아마, 너와 비슷할것 같아." "…." 인간 같지 않다는 면에서 말이지…? 나는 속으로 쓰게 웃음 지었다. # "괜찮겠어?"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다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 보았다. 카리에르제가 책을 넘기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책 옆에는 '비공정'에 관련된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뭐가?" "축제 말이야. 나는 즐기지 않아도 상관 없지만… 너는 놀러가지 않아도 되냐는 거지." 아아, 그쪽의 이야긴가…. 나는 창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저녁이 되어, 산 너머로 붉은색 태양이 느긋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아카데미 내는 적막했다. 모두 축제를 즐기러 간 것이겠지. 아마 기숙사의 휴게실에서도 학생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는 상관 없어. 그런것에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겠고…." 나는 보던 책을 덮고, 책장 사이로 책을 꽂아 넣었다. 제목은 '타 종족의 관점으로 바라본 인간' 이었다. 이것 역시 그다지 흥미롭진 않았다. "나는 오히려 네가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게 의아스러운데." 항상 흥미를 찾아다니는 그의 눈동자가 축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인 일이다. 그 흥미의 찾음이 심지어 짖궂은 장난으로 종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아카데미 내에서 상당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흥, 너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 하는군." 카리에르제는 깃펜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놓으며 양 손을 머리 뒤로 옮기며 의자를 뒤로 젖혀 몸을 흔들 거리기 시작했다. 항상 위험한 장난을 즐기는군, 이 인간은. 저러다가 뒤로 넘어지면 뒤가 꽤 아플텐데. "그런 건전한 축제는 재미 없다고. 애초에 축제의 취지 부터가 타 종족과의 교류를 축하하기 위해- 어휴, 말하는 것 만으로도 닭살이 돋는군." 건전한…? 건전하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럼 건전하지 않은 것은 재미있어?"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며 왠지 이상해 보이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물론이지. 건전하지 않은 쪽이 건전한 쪽 보다는 훨씬 재미있지. 건전함은 꽉 막힌 현대 도덕의 전형! 불건전함은 규정된 그 답답한 틀을 깨어버림으로써 느껴지는 일탈을 느끼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야! 어때, 솔깃하지 않아?" 글쎄, 별로 솔깃하진 안하만…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이해가 가는군. 인간들이 이루는 사회를 원활히 유지하기 위한 도덕…. 그 제한됨을 깨버림으로서 느끼는 일탈이라. … 애초에 '제한'이란게 없는 나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조금, 솔깃한 것 같기도…." 카리에르제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방금 지었었던 그 이상한 표정을 또다시 지어 보였다. … 어딘가 음흉해 보이는군. "흐음- 그럼 우리는 우리 끼리의 축제를 즐기러 가볼까?" "그건…." "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일단, 하던것 부터 끝내고 말이야."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쳐 나갈것 처럼 보이던 카리에르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책상위에 늘어놓은 서적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탈…. 그렇게 말은 해도, 자기가 최우선으로 정한 사항은 어기지 않는군. 나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 그가 서적을 보며 적어내려 가고 있는 것을 잠깐 훑어 보았다. 그가 현재 매달리고 있는 것은 '비공정'의 추진부가 될 부분 이었다. … 굉장히 엉성하긴 하지만, 놀랍게도 어느정도 틀은 갖추어져 있었다. 이것에 내가 갖고 있는 지식만 조금 보태면 비공정이란 물건은 오래지 않아 이 시대에 등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인간에 의한 혁신이 아니게 되겠지. "굉장히 복잡해 보이네?" 모르는 척을 하며, 옆에 놓여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 그거? 비공정의 핵심이 될 부분인데, 당연 하잖아. 하지만… 어려워. 비공정의 추진부가 되어야 할 부분은 마도 공학으로 이루어 지는데, 나는 마력에 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 일단은 크게 그림을 그려나가는것 부터 시작하는 거지."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서적에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그래…?" 나는 그의 옆에 집어 들었던 종이를 다시 내려 놓으며, 천천히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리에르제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이 가긴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조차 잘 되지 않고 있다. 주변에 있는 인간의 시선을 의식해 느린 속도로 이 장서관의 책을 읽어나가고 있지만… 벌써 반을 조금 넘게 읽어 그 지식을 정립해 보았는데도, 내가 찾는 해답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나는 무엇이든 손에 넣고,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소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바심을 내봤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나는 그 답답함을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월에 아무렇지도 않게 비껴내며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 밖은 완전히 어둠이 덮인 상태였다. "…."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를 메우고, 머리카락을 흐트러 트리며, 뺨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하늘엔 수맣은 별들이 보인다. … 묘한 감흥이 드는군. "아, 오늘은 바람이 꽤 쌀쌀 하네, 여름답지 않게." 카리에르제가 옆에서 모습을 불쑥 드러내며 말했다. 하던 일은 대충 끝맺음을 지은 모양이었다. "…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것 같지 않아? 밤하늘은 언제나 볼때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해. 질리지도 않지. 이 하계(下界)의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야." 하계…? 재미있는 농담이로군. 나는 눈을 감으며 별것 아닌 것에 약간 놀랐다. 그토록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도,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이 밤하늘의 별빛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루루렌칼리체라는 용이 밤하늘의 별빛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엔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일종의 공유, 라는 걸까…. 새삼스레 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 "별은 신이 빛을 부숴서 밤하늘에 뿌려놓은 거라고들 하잖아?" 음, 인간의 신화는 잘 모르겠다만, 재미있는 표현이군. 빛을 부숴서 뿌려놓았다라…. "실제로 보면 어떤 모습일까, 부숴진 빛이라는건…. 뭐, 빛을 부숴서 뿌렸다는 바보같은 말부터 좀 의심이 가긴 하지만." 카리에르제는 창틀을 양손으로 짚더니, 몸을 가볍게 웅크렸다가 뛰어올라 창틀에 걸터 앉았다. 정말, 얌전히 있질 못하는 녀석이군. "글쎄, 부숴진 빛이라면…." 실제로 나는 빛을 부숴 버릴수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나는 적당히 응수하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비공정이 완성된다면, 아마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저 별들이 정말로 빛을 부숴서 뿌려놓은 건지, 아닌건지 말이야." "…."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 이내 다시 천공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야를 흐렸다. 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있다. 그것은 드래곤인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별들은 '세계의 끝' 너머,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만들어 졌으니까. 별을 만지고자 하늘로 끝없이 날아올라도, 결국 '세계의 끝'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히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세계의 끝'이라는 말 그대로 거기까지. 하지만 별빛은 그 뒤로도 이어져 있지.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마, 로나벨아크하임이라면 알고 있겠지. 과거, 우리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었을 시절,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저 별들을 만들어 놓았을까. "…." 나는 아마, 가능성… 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끝 뒤로 이어지는 수많은 별들… 그것은 각각이 모두, 갖가지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 동등한, 또다른 세계들이 아닐까. 이와 같은 세계들이 수도없이 펼쳐진 밤하늘…. 과거의 내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나는 아마 그런 생각으로 별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칼리체!" 짝- 하고 갑작스레 카리에르제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것이 굉장히 따가워서,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등을 살살 문질렀다. "이런 계집애들 같은 얘기는 그만두고, 이제부터 우리는 '일탈'을 즐기러 가보는게 어떨까?" "일탈…?" "그래, 일탈 말이야." # 벽이 갈라지고 때가 잔뜩 타있어, 상당히 움침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간판이 있을 법한 곳을 바라 보았다. 다행히도, 간판은 멀쩡히 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간판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앞뒤로 흔들렸다. 간판에 쓰여 있어야 할 글씨는 세월에 의한 것인지, 완전히 지워져 버려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단순히 저녁이라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 끼익- 카리에르제가 문을 열어 재끼자 듣기 싫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자, 들어와." "응." 그래도 안은 비교적 깨끗해 보였다. 바닥과 벽엔 수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먼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훑어보니, 벽에 걸쳐져 있는 대걸래도 보인다. 장사는 잘 되지 않는지 손님으로 보이는 인간은 없었다. "음? 어린애는 받지 않는다."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우리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가 들어와도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계속 컵을 닦고 있었다. "이봐, 얼굴이나 제대로 보고 그렇게 말하는게 어때?" 카리에르제가 툴툴 거리며, 주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은 그제서야 컵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 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그 인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얼굴엔 관자 놀이부터 턱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나있었다. 그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 아아- 이게 누구야, 우리 가게의 유일한 단골, 별난 도련님 아냐?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군 그래." "뭐, 그동안 일이 많았으니까…. 전에도 그랬지만 요새도 장사가 잘 안되나 보네. 파리만 날리고 있잖아?" 카리에르제는 파리를 쫓듯 손바닥을 이리저리로 휘둘렀다. 물론, 파리는 실제로 이곳에 없지만. 장사를 하는 그에겐 꽤 씁쓸할 법한 농담인데도, 주인은 다시 한번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을 뿐이었다. 나는 계속 주변을 둘러보며 카리에르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뒤의 그 아가씨는 도련님의 애인인가? …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난생 처음보는군. 아, 그러니 빤히 바라보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아가씨." 거친 인상과는 다르게 꽤 예의바른 인간이군. 아가씨는 아니지만…. 그 말을 듣자, 카리에르제는 킬킬 거리며 말했다. "음… 기대를 깨서 미안하지만, 얘는 그냥 친구야. 그리고… 남자라구." 주인은 한참 동안이나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유리컵을 닦으며 말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그것참, 세기(世紀)적인 비극이로군." 나는 그 말에서 웃음의 포인트를 찾을 수 없었지만, 카리에르제는 자지러 질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세기적인 비극이라…. "아무튼, 오랜만에 왔는데 매상좀 크게 올려줄게. 여기서 제일 비싼 술을 있는데로 꺼내 갖고와." "알았다구, 도련님. 그럼, 아무 곳이나 좋은 테이블을 골라서 앉아 있으라구. 잠시, 뒤의 창고에 가서 술을 내올테니 말이야." 주인은 그 거구를 느긋한 동작으로 일으키며, 뒤쪽에 나있는 또다른 문을 열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술을 내오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걸릴듯 싶다. "조금 더럽지만… 여기 앉아. 냄새는 나지 않으니까 괜찮지?" 나는 카리에르제가 가리키는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듯 흔들 거렸다. 이곳은 역시… 술집, 이겠지. "이곳의 주인은 덩치도 크고 얼굴이 무척 험악하지?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은근히 섬세한 면도 있고…." 벽에 붙어있는 촛대에서 나오는 빛이 아른거린다. 건물 내의 조명은 몇 없었기 때문에 음영이 사방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카리에르제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로 그것에 불을 붙였다. 후으- 하고, 그는 그것을 입에 물고 숨을 들이켰다. 곧, 매캐한 연기가 주변을 덮었다. 담배… 라는 물건이군. "일탈 이라며…? 어째서 이곳에 온거야?" "하아…? 어째서라니, 강도가 조금 약하긴 하지만 술을 마시는 것도 충분한 일탈이라고. 미성년자는 술을 마시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음, 아니면 좀더 좋은곳에 데려갔어야 했나…." … 뒤쪽의 알 수 없는 고민은 제쳐 두고. 법적으로 금지라고…? 팔백년 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뭐, 세월이 흐르며 바뀌어 버린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충분히 일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허름한 곳으로 온거야? 귀족인 너라면- " 이런 식으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수준에 관해 언급할 때면 나는 항상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 든다. 이런것은, 너무나도 익숙치 않은 것이니까. "좀 더 좋은곳에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흥,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평민. 그렇게 노골적인 질문은 기분이 상하니까, … 라고 말은 해도, 네가 그러니… 별 느낌도 없네." "그래…?" 문득, 팔백년 전에 인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자주 상하게 했던것을 떠올렸다. 그때 보다야 훨씬 나아졌겠지만… 아직도 나는 카리에르제가 어째서 그런 질문에 기분이 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인 일이지만…. "너를 위해 이곳에 온거야. 너, 시끄러운 곳은 좋아하지 않잖아. 그리고 주인하고 안면도 있는 사이니까…."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을 꺼내며, 어딘가 어색한지 뺨을 긁었다. "배려 해준거야?" "흥, 알면 묻지마. 그게- 나 이런건 조금 익숙치 않으니까." 배려해주는게 익숙치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아마 카리에르제는 지금껏 나 이상의 친분을 가진 존재가 없었다는 걸까.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에서, 통상적으로 친분이란게 커질수록, 배려 역시 그에 상응하니 말이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겠지만…. "자, 여기 술 내왔다, 도련님들." 언제 왔는지, 주인이 탁자위에 여러개의 술병과 컵을 내려놓았다. 꽤 오래되었는지, 술병엔 먼지가 묻어 있었다. 먼지가 묻어있는 곳이 듬성듬성 한걸 보면, 이 남자가 먼지를 조금 털고 가져온 모양인데…. "내가 직접 담근 술이다. 그래서 이름은 없어…. 도련님들이 지어주는것도 나쁘진 않겠지." … 지어달란 이야긴가? 카리에르제가 술병의 주둥이를 쥐어들고 위로 들어올렸다. 병 안의 술이 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지 사이로 보이는 술의 색이 흑빛이었다. "믿을만 한거야? 직접 담근 술이 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거라니…." 주인은 어느샌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컵을 닦고 있었다. "난 술에 관해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구." "흐음… 그래?" 쉽게 납득을 하는 것을 보면 카리에르제는 주인에 대해 별로 의심이 없는듯 하다. 방금전의 그 말도 별뜻 없이 그냥 해본것 같고…. 나는 손끝으로 술병에 있는 먼지를 쓸어 보았다. 술이 별로 맛없다는 것은 팔백년 전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도 술이 그다지 맛이 없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는듯 하고…. … 아무튼, 지금은 카리에르제가 말하는 일탈 이란 것을 느껴 보도록 하지. "자- " 카리에르제가 간단히 술병을 따고, 내게 컵을 건네었다. # "으, 으윽…." 카리에르제는 내 목에 팔을 두른채 내 부축을 받아가며 걷고 있었다. 술이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많이 마시니 이렇게도 되어버릴 수 있군. 하지만 나 역시도 그리 멀쩡하진 않다. 머리가 어질 하고, 시야가 무척이나 흐려 보인다. "너, 괜찮냐?" 이상하게 발음이 꼬인,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괜찮지는 않지만… 적어도 너보다는 괜찮은것 같아." 그러니 내가 부축을 하고 있지. 카리에르제는 할말을 잃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그 많은걸 다 마셔버렸으니, 이 정도로 취할만도 하지. 술만 마시다가 결국, 술의 이름은 짓지 못했다. 주인이 그럴 생각이 없는 이상, 다음 손님이 올때까지 그 술은 여전히 이름없는 술 일테지. "…."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길가엔 인기척이 적었다. 아카데미까진 거리가 꽤 되는데… 이 인간을 부축해서 끌고갈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온다. 근력이 딸려 벌써부터 숨이 거칠어져 오는것 같다. "야, 힘들어…?" 또다시 꼬인 발음이다. "응." "…." 말수가 굉장히 적어졌군. 나는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른뒤, 흘러내린 카리에르제의 팔을 다시 들쳐맸다. … 힘겹군. 일탈… 의 댓가일까. … 재미없는 농담이었군. "…." 평소엔 또렷하게 보이는 거리의 불빛들이 지금은 마냥 흐리게 보여, 마치 재미없는 환상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인간들은 이런것을 느끼려고 술을 마시는건가…? 이 녀석은 그런걸 느낄새도 없이 곯아떨어져 버린것 같지만. 카리에르제를 부축하며, 한 노천카페 앞을 지나갈때였다. 파라솔테이블이 잔뜩 놓여있는 곳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손님은 한쌍의 남녀 밖에 없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시야가 흐릿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 나는 인간- "루루렌칼리체…?" -이 아니로군.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흑색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길게 기르고 있는 남자였는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무기질적인 자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베른헬체이스?" 그는 아무말 없이 내게 다가와 정신을 잃은 카리에르제를 넘겨 받았다. 나와 다르게 베른헬체이스는 아무런 무리 없이 그를 들어올렸다. "고맙군." "여전히 귀찮은 일을 돌아서 가려하지 않는군, 백룡." 흑룡, 베른헬체이스…. 이녀석이 무슨 일로 이곳에 있는 걸까. 고개를 돌려, 그가 앉아있던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흑룡의 등장으로 술이 약간 깬 모양인지, 은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그마한 찻잔을 입에 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할것도 없이 저 소녀는 은룡. 이 제국의 지배자, 레케트리셴 문 여제겠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은 마력이란게 상식 보다는 비상식에 기울어져 있는 인간 사회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에 신비를 사용하는건 우스운 일이겠지." 베른헬체이스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없이 빙그레 웃었다.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대단히 정교하게 조형된 웃음…. "그런가…. 아무튼, 그 육신은 다소 지친것 같으니… 여기서 조금 쉬고 가는게 어떤가, 루루렌칼리체. 드래곤 끼리 이렇게 모이기도 참 드문 일이니 말이야." …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베른헬체이스가 갑자기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듣고 싶고. 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은룡은 나에게 곁눈질로 잠깐의 눈짓만 보냈을 뿐,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베른헬체이스는 테이블에 앉아 턱을 손등에 기댄채 나와 은룡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잠깐 동안의 수면이었다…. 재미있게 지켜보던 한 존재의 종말은 내게 적지 않은 아쉬움을 가져왔었지." '마왕' 말인가…. 정말 아쉬움을 느끼는건지 어떤진 모르겠지만… 그 일 이후로 흑룡도 나와 마찬가지로 약 팔백년 간, 짧은 수면에 들었던 모양이군. … 깨어난건 나보다 조금 늦은 모양이지만. "일어나 보니, 이게 왠일인지… 게으른 백룡은 또다시 인간들의 사회에 나와있고, 은룡은 인간들의 황제 노릇에- " "쓸데 없이 사설이 길군, 흑룡. 굳이 인간의 흉내를 내려할 필요는 없다." 레테닌시에스케가 찻잔에서 입을 떼며, 다소 냉엄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베른헬체이스의 말을 끊었다. 흑룡은 내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는군…?" "…." 베른헬체이스… 인간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다는 은룡의 말을 조롱하고 있군. 하지만 은룡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을뿐,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옆쪽 의자에 기대어둔 카리에르제 쪽을 바라보았다. 여름이지만, 밤바람이 꽤 쌀쌀했다. … 빨리 기숙사로 데려가 주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길, 인간. - 잠에서 깨어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용들이 한 곳에 모여있더군. 흔한 일이 아니라, 작은 흥미가 일어서 잠시 찾아와 봤다. 베른헬체이스가 만능의 언어를 사용하는것 만으로도 주위에 흐르는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만능의 언어는 그 자체에 최상위의 신비를 담고 있다. 주위의 공간이 모두 그가 사용하는 만능의 언어에 따라 움직이려 하니,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 공간에 발을 디디는것 만으로도 굉장한 위화감을 느낄것이다. 은룡은 내 쪽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카페는 내가 재화로 하루 동안 사버렸다. 그러니, 쓸데 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지, 백룡."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이군…. "인간의 사회에서 재화란 무척이나 편리하지…. 굳이 마력을 사용한 신비로 인간을 이공간에서 퇴거 시키지 않아도, 재화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하니 말이야." 은룡은 마치, 마법같은 힘이지… 라고 작게 덧붙였다. 마법같은 힘이라… 드래곤 답지 않은 감상이로군. 나는 눈을 감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가느다란 육신은 여전히 술기운에 지배받고 있어, 손에 닿는 입김이 뜨거웠다. - 너희들은…. 흑룡이 눈을 가늘게 뜨며, 뜻을 이어갔다. - 몇번이고 반복해온 그 일을 또다시 할 생각인가 보군. 몇번이고 반복해온, 이라고…? 베른헬체이스가 알 수 없는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지금 이곳에 모여있는 레테닌시에스케와 로나벨아크하임의 의아한 행동들을 모두 꿰뚫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흑룡은 은룡을 힐끗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 만을 올리며 옅게 웃음지었다. …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레테닌시에스케는 아무말이 없었다. - 루루렌칼리체. "…." - 이번엔 기억의 리셋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너를 볼때마다 마음이 꽤 불편하니 말이다. '이번엔'… 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같은 이유로 기억의 리셋을 해왔다는 건가. 방금 그의 말과같이 몇번이고, 몇번이고 계속해서…. - 쓸데 없는 말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베른헬체이스. 금방이라도 베른헬체이스에게 쏘아질듯이, 은룡 주위의 마력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같은 드래곤 끼리의 마력 행사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지만, 그것으로 레테닌시에스케의 불편한 심기는 흑룡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베른헬체이스는 싸늘하게 식은 자색 눈동자로, 은룡의 위협을 빗겨내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 루루렌칼리체, 지금 네가 찾으려 하는 진실은 너를 제외한 모든 용들을 적대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아니, 심지어는 너 자신 까지도 말이야. 베른헬체이스의 싸늘한 인간의 눈동자가, 그런데도 너는 계속해서 그 진실을 쫓는 일을 계속해 나갈것인가, 라고 묻고 있었다. 레테닌시에스케는 눈을 감은채,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 모든 용들을 적으로 돌린다, 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리 놀랄일도 아니지. "그건, 위협인가?" - 위협이라 봐도 좋겠지. 흑룡은 그것을 긍정했다. 나는 그 위협에 마치 선언하듯, 만능의 언어로 내 본의를 흑룡과 은룡에게 전했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내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내 의지를 가로 막을 정도로 내게 가치있는 존재가, 너희들은 되지 못하니까. 드래곤 끼리의 전투만큼 어리석인 일도 없겠지만… 설사, 너희들 모두가 내게 마력과 신력의 칼날을 돌린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꺾이지 않을 힘과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은룡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흑룡은 내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후우- 하고 손안에 다시 입김을 불어 보았다. 술기운이 다소 가신듯, 입김은 아까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 "으…." 육신은 고통을 호소하고, 그 고통에 따라 내 입술에선 자그마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힘들게 눈꺼플을 들어올렸다. 흐릿하던 시야가 눈을 몇번 깜빡이자 조금씩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 간단한 무늬가 들어간 천장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듯 어지러이 흔들거렸다. 실은 지진 따위가 아니라 내 정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겠지만. 입안이 마치 모래를 머금고 있듯이 까끌한 느낌이었다. "어? 정신을 차렸구나." 마치, 환상처럼 들리는 부드러운 소년의 목소리…. 그것이 아련한 내 정신을 깨운다. 창문은 열려있는듯, 쌀쌀한 아침 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평소 같으면 상쾌한 기분이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굉장히 추워서 나는 어깨를 감싸안았다. …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자- " 나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으로 그가 건넨 컵을 받아들었다. 안엔 미지근하게 식은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입안으로 그것을 조금 넘겼다. 까끌했던 입안이 나아지는것 같다. 으음…. 술이란건 당시의 판단력을 흐리게도 하지만… 다음날까지 육신에 이런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는군. 인간이 어째서 술이란걸 마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흐음- 어제, 은룡과 흑룡을 만난 모양인가 본데…." 로나벨아크하임은 창틀에 걸터 앉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평소와는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다르군. 그 자리엔 없었지만… 화룡은 어제 흑룡이 내게 했던 말들을 알아챈게 아닐까. 하지만 눈치챘다고 해서, 로나벨아크하임은 어쩔 작정일까. "…." 베른헬체이스는 내가 쫓는 일이 같은 드래곤들을 적대시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나 자신 까지도. 질 낮은 농담 따위로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는 그것을 만능의 언어로 말했으니까. … 유감스럽지만 그 말에 거짓은 없다. 로나벨아크하임… 너는 나와 적대시 하게될 입장이 된다면, 어쩔 것인가. 그는 여전히 묘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붉은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약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치사한 녀석들이군 그래. 나도 좀 불러주지 그랬어? 아주 오랜만에 넷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지." "… 넷이서 만담회라도 열자는 건가?" 홀로 완벽한 용들 끼리의 만남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용들 모두는 본래 한갈래에서 뻗어나온 형제 자매들 정도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인간식의 관점일 뿐이지, 실은 서로 완벽하게 단절된 개체일 뿐이다. 이 녀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 이제 꽤나 쓸만한 농담도 할 줄 알잖아?" 그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잡았다. 가끔 그에게 굉장히 놀라곤 한다. 나도 인간의 사회에 꽤나 녹아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저 정도로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표정을 지을 수는 없다. … 나는 알고 있다. 로나벨아크하임, 드래곤인 그의 표정에 깃든 저 감정들은, 진짜다. 그건 그렇고…. 나는 불편하게 눈을 감으며 말했다. "흔들지 마라." "왜?" "… 어지럽단 말이야." 어지러움을 호소해도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로나벨아크하임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고작 육신의 고통에 불평을 호소하는 것은 지양하고 싶지만… 저 비웃음 같은 미소는 분명, 나를 조롱하는 것이기에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그의 손을 어깨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 기숙사 휴게실에 있는 쇼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좋은 날씨였다. 음, 보통 '좋은' 날씨라고 이야기 하는건… 역시 인간들은 대부분 햇빛이 쨍쨍한 날씨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비가 오는 날씨를 좋아하는 인간들은 햇빛이 맑게 비춰지는 날보다는 비가 오는 날이 '좋은' 날씨일텐데 말이다. 과거, '좋은 아침' 이라는 말에 의문을 가졌던 생각이 난다. … 누군가가 얼버무려, 아직도 나는 '좋은 아침' 이란게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했지만. "…."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가 아카데미의 입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창문을 통해 내 시야에 들어왔다. … 요즘들어 흑색의 좌는 저런 머리 모양을 자주하고 다니는군. 인간들에게 있어,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문득 떠올라, 나는 양 손으로 내 백색 머리카락을 쓸어 보았다. 그녀처럼 머리 모양을 바꾸어 보는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 일이다.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레쥬에브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밖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 지 모르겠군. 아무튼, 나는 멀지 않은 과거에 그녀에게 협력한다고 말했었다. 그녀가 어떤식으로 내게 협력을 요청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협력하는 것으로 나는 메르시오 공작가라는 유력 가문의 세력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내가 그녀에게 협력하는 대신, 받는 보수는 그 정도겠지. 패링이라는 인간의 말에 따르면, 이 아카데미에서 평민이 가장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유력 귀족가의 눈에 띄어, 그들의 세력에 일조하는 것이니까. … 음, 나로서는 아무래도 의미도 없는 이야기기다만. "어라, 칼리체 아냐?" 카리에르제가 기숙사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약간 구부정 하고 들어오는데다, 안색이 무척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아파?" "모르는척 하지마! 어제 술을 그렇게나 많이 마셨잖아! 그런데, 너는… 숙취란 것도 없냐? 꽤나 멀쩡해 보이는데." 그는 쇼파에 거의 드러눕듯이 앉으며, 약간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그런데 숙취라면… 아침의 그 어지럼증을 말하는 건가 보군. "막 일어났을 때는 많이 어지러웠지만… 지금은 괜찮아." "…." … 왠지 모르게 분하다는 표정이다. 무엇이 그렇게 분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일탈은 즐겁다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무척이나 괴로워 보이는군. 술을 마실 당시에는 무척이나 들떠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긴 했지만…. 그때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윽…! 이 자식이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갑작스레 화를 내는 터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끙끙 거리고 있는 모양새라, 카리에르제의 분노는 그리 위협이 되지 못했다. 어째서 그 말이 놀리는 것이 되는건진 모르겠지만… 기분이 상한것 같으니, 가볍게 미안하다는 한마디 정도는 해주기로 하자. "미안." "…." 그는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다. "왜?" "아니, 그렇게 깔끔하게 미안하다고 해버리면 왠지 이쪽이 할말이 없어지니까 말야…." … 이상한 인간이군. 카리에르제는 어색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뺨을 긁다가 이내, 쇼파에 편하게 드러누워 버렸다. 기숙사 사감에게 휴게실의 쇼파에 눕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종종 듣긴 했지만… 지금 카리에르제에게 그것을 상기 시켜줄 필요는 없겠지. 축제 기간인지라 휴게실이 텅 비어 버렸으니까. 나는 내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얇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아카데미를 이정도로 비우고 있는건 어째서지? 축제 기간에 잠시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거리에서 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평민들 이었어." "… 너는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 마. 그리고 그건- " 카리에르제는 눈빛이 약간 흐리며 왠지 모르게 건조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축제 기간동안 귀족들은 대부분 황궁으로 초대 받아 머물고 있으니까…. 요정 여왕의 방문을 맞아 황궁에서도 성대한 파티를 여는거지." 음, 황궁에서 열리는 성대한 파티인가…. 정작 요정들은 그런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것 같은데 말이지. "…." 카리에르제는 쇼파에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 그 모습이 어딘가 기분이 상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곳에 카리에르제가 남아 있다는 것은… 황궁에 초대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 귀족들의 복잡한 사정 따위는 그리 알고 싶진 않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이후로 그것에 대해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 그에게 이 주제는 무척이나 껄끄러운듯 했다. # 일탈의 댓가로, 숙취에 고생하는 카리에르제를 내버려 두고서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거의 여름에 접어 들고 있어서 그런지, 날이 무척이나 뜨거워 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계절에 맞추어 이 제복의 모양도 곧 바뀔 것이라 그랬었지…. 카리에르제는 그것이 무척이나 기꺼운듯 했다. 그건 여학생들의 치마가 짧아져서, 라는 이유 였었지. 그것이 어째서 기꺼운 것인지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바스락-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고자, 나는 잔디가 잔뜩 난 곳으로 들어섰다. 앞으로 천천히 걸으며 내 발에 밟혀 몸을 뉘이는 잔디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물론 한번 밟는다고 잔디가 죽진 않겠지만… 왠지 밟을때 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잔디가 내는 비명소리 처럼 들려오는것 같았다. 점점 안으로 들어갈 수록 아카데미의 건물들은 멀어져 갔고, 결국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달했을때는 주위가 거의 숲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전히 드높은 아카데미의 건물들이 나무 너머로 보이긴 하지만. "…." 옷자락을 추스리며, 나무의 수액이 옷에 묻지 않게 조심스레 나무를 등지고 잔디위에 앉았다. 눈을 살짝 감자,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미풍이 머리카락을 흔들며 귓가를 간질이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기분이다. 오늘은 아무런 예정도 없으니, 늦은 밤이 되어 다음날이 될때까지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 바스락- 하고, 어디선가 잔디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이런 깊숙한 곳까지 아카데미의 학생이 들어오리라 생각하는 것은 무리고… 게다가 지금은 축제 기간이라 많은 학생들이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까. 아마, 그 소리의 주인은 작은 짐승 따위 일듯 하다. 바스락, 바스락- 하지만 곧,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이 소리…. 아무래도 내 추측은 틀린 모양이군. 나는 한쪽 눈만 가늘게 떠서 소리의 주인을 찾아 보았다. "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금발…. 보기좋게 굴곡이 잡혀 있는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아카데미의 제복이었다. 놀란듯 입을 가린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고, 곧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두 눈을 모두 뜨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펠 선배님." 펠테넨시아 황녀…. 레케트리셴 문, 은룡의 딸이로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괜히 그녀와 다시 만나니 쓸데 없이 그런 점이 상기된다. "자고 있었나 본데… 내가 방해한것 같네." "아뇨, 아직 잠들기 전이었으니까요." 무엇이 웃겼는지 황녀는 풋-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펠 선배님이 이런 곳에는 무슨 일이세요? 축제 기간이라 모두들 아카데미를 비우고 있는 참인데…." "글쎄…." 그녀는 양 손을 등뒤로 돌리고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지금껏 내가 기대어 있던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이런 곳에서 황녀와 마주치다니, 우연… 이라기엔 조금 그렇군. 괜스레 목이 뻐근해져, 나는 고개를 위로 치켜 들어올렸다. 푸른 녹음 사이로 햇빛이 비춰들고 있어, 시야가 흐려졌다. 어쩌면 은룡은… 자신의 딸인 펠테넨시아를 매개로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나는 그런 파티는 왠지 내키지 않아서 말야." 황녀 인데도 말인가…?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펠테넨시아 황녀는 어딘가 씁쓸 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고, 그녀의 얼굴은 다시 부드럽게 미소짓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가요…?" "응, 그런데… 굉장히 의외였어. 이런 곳에까지 들어와 낮잠을 자는 귀여운 후배가 있을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귀여운 후배 인가…. 어색한 어감이로군.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에 우연히 마주친 것도 그렇고, 어쩌면 우리는 사고의 방향이 비슷한게 아닐까?" '우리' 라…. 이 경우에서의 '우리' 라는 건 굉장히 생소하게 다가오는군. 가볍게 웃으며 말하는게, 농담일게 분명하지만. "하지만 펠 선배님은 낮잠자러 이곳에 들어오시진 않으셨겠지요." "아, 물론이지- " 인간 사이에서의 혈통은 아무래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황실의 핏줄이라는건 내게 눈에 띄일만한 차이를 준다. 깍듯한 예법을 요구하는 이 아카데미에서도 그녀의 절제된 미소라든지, 손동작 하나에서 조차 인간들 사이에서 기품이라 부를만한 어떤것이 묻어 나오는것 같다. "난 사실…."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어째 얼굴이 점점 벌게지는것 같기도 하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입을 열었다. "… 놀리면 안되, 칼리체.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사실, 상식적인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 놀리면 안되, 라는 말에서는 왠지 냉엄한 기색 마저 묻어나온다. 순해 보이긴 해도 역시 타인을 부리는 입장에 서온 황녀라는걸까. 나는 왠지 심드렁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술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며 말했다. "난 이 아카데미 내부 어딘가에 있다는 정령을 찾고 있어." "정령… 이라구요?" 그렇다면, 그것은 상식적인 입장에서 납득 안될것은 아닌데…. 정령은 실존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 머뭇거림을 당혹 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인지, 펠테넨시아의 얼굴이 마치, 사과처럼 빨갛게 상기되었다. "응.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했잖아…." "…." 어쩌면 인간들은, 드래곤 만큼이나 인간들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령을 전설 정도로 취급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정령에게는 가여운 일이로군. "그 정령이 설마, 이 근처에 있다는 건가요?" "으응." "펠 선배님은 정령을 왜 찾으시는데요?" 내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황녀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으응-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거든." 소원을 들어준다고…. 재미있는 이야기군. 하지만 재미와는 별개로,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기록에서 잊혀진 정령이 전설이 되어 인간들의 입에 그렇게 오르내리는게 아닐까. "물론, 정말로 그걸 믿는건 아니야. 그냥…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거든. 아카데미의 뒤쪽 숲속에 아름다운 정령이 사는데, 그 정령을 찾으면 정령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 그럼, 펠 선배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을 찾으러 잠시 산책을 나오신 거군요?" 흐으응, 가벼운 산책에도 거창한 이유를 붙이는군. 정령을 찾으러 나왔다라… 괜찮은 이야기다. "어머, 얘는- " 황녀는 볼을 붉히며, 그제서야 그 나이대의 소녀다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숲속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까진 빛이 많이 들지 않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숲속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데, 노란색의 나비 한마리가 날아와 코 끝에 앉았다. 깜짝 놀라 한번 눈을 깜빡이자 나비는 어딘가로 날아올랐고, 그것을 보고 황녀는 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체는- 만약 정말로 정령이 있고, 그 정령이 소원을 들어준다면, 어떤 소원을 빌것 같니?" 이제 서서히 웃음이 잦아든 황녀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는 아직까지도 미약한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 만약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태양이 갖고 싶다고 소원을 빌거에요." 대답이 의외였을까, 옆에서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작게 잦아들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가 나비가 앉았던 코끝을 살짝 문지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펠 선배님은 어떤 소원을 빌고 싶으세요?" "아, 나는- "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아득한 무언가를 바라보듯, 짙고 흐릴 뿐이었다. # 바스락, 바스락- 풀숲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갈 수록, 수풀은 무성해져 갔고 나무잎은 울창해져 주변을 비추는 햇빛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이곳 어딘가에 정령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펠테넨시아의 말은 신용하기 어렵지만… 시간도 많으니, 한번 확인해 보는것도 괜찮겠지. 정령은 오랜 시간을 머금은 자연물에 스며든다. 아니, 스며든다는 표현 보다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다는 표현이 적합 하겠지. "하암- " 잠이 들려다 말아서 그런걸까, 괜히 하품이 새어 나왔다. 정처 없이,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몇시간 동안이나 풀숲을 걷다가 나는 이내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어 세우고 말았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듯한 넓은 공터가 숲속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 한가운데 서있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 "…." 상당히 묘한 광경이로군. 나는 가만히 서서 저 커다란 나무를 빤히 바라보다 공터 안으로 천천히 들어선뒤 공터 가운데 서있는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나무는 고개를 들어올려야 끝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굉장히 컸다. 나무 표면 곳곳에 입은 상처, 그리고 나무 주변에 떨어진 수많은 잔재들이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거의… 만년을 가까이 살아온 나무로군.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나무의 표면을 쓸어 보았다. 딱딱한 나무 껍데기가 투둑, 하고 내 손길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척이나 공교롭게도, 이 나무는… 정령이 깃든 나무로군. 너무 작위적인 상황이라고 생각되는데 이건…. 나는 미약하게 언짢음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들어 나무의 위쪽을 바라보았다. - 흥, 이제서야 찾아온거야?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시지! 바보, 멍청이-! 만능의 언어와 비슷하지만… 결코 만능의 언어는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입에서 나오는대로 자신의 의사를 상대에게 전달하기만 할 뿐인 저급의 언어와 다를게 없다. "…." 이 나무에 깃든 정령인가…. 정령이 장난을 좋아한다곤 하지만, 이 정도 세월을 머금은 정령이라면 내가 숨기지 않는 이상, 내 본래 정체 정도는 간단히 파악할 수 있을텐데. - 여긴 뭐하러 온거야? 바- 보! 또다시 나무에서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것도, 소녀의 것도 아닌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 그런데 이 정령은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처음부터 욕을 퍼붓고 있군. - 멍청이! … 욕은 바보, 멍청이 두개 밖에 모르는 듯 하지만. 나는 잠깐 입술을 달싹 거리다가 나무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 멍청이! 욕이 반복되는군…. "이제서야 찾아온거야…, 라는건 무슨 소리지, 나무의 정령…?" - …. 정령은 답이 없었다. 하지만 정령이 깃든 나무의 가지는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해, 나는 내 말이 이 정령에게 어떠한 동요를 가져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 장난 하지마, 루루. 순간, 사악- 하고 공기를 가르고 무언가가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저 정령이 쏘아내는 기운은 내 심장을 뚫고 이 육신은 생명 활동을 정지 했을 것이다. "루루… 라고?" 내 이름에서 앞글자 두개만 따온건가. 하지만… 칼리체 라고 불리는 일은 있어도, 루루라고 불린 기억은 없는데. 이 정령은 도대체… 뭐지? - 어째서…. "…." - 어째서 화를 내지 않는거야? 모르는척 하지마! 항상 내가 루루 라고 부르면, 너는 유치한 이름이라고 거칠게 화를 내곤 했잖아! 유치한 이름…? 영문을 모를 정령이로군. 루루라고 불러놓고, 대뜸 왜 화를 내지 않느냐니….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나무에다 대고 말했다.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나무의 정령. 나는 요르간드의 지배자, 화이트 드래곤 루루렌칼리체다." - 루루 맞잖아! 목소리가 아닌 의지가, 마치 목소리처럼 날카롭게 뇌리에 울려퍼졌다. 동시에 방금전 나를 위협했던 그 기운들이 또다시 내게 쏘아져 내렸다. 내게 닿은것은 한개도 없었지만…. 굉장히 거친 정령이로군. "나를 알고 있나?" - 자꾸 장난 치지마, 루루. 태양이 이백 팔십만 번도 더 뜨고, 새가 찾아와 내 열매를 팔백만 번이나 파먹고, 내 잎들이 삼백만 번이나 지고 다시 자라고, 그것을 양분 삼아 이 숲이 무성히 우거진 후에야 나를 다시 찾아와놓고, 자꾸 그렇게 장난 칠거야, 응…? "…." 말은 길게 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대략 팔천년 정도인가…. 나는 아무말 없이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이 정령은, 내가 기억을 리셋하기전 나와 친분이 있던 녀석인것 같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서, 정령에게 말했다. "네가 아는 루루렌칼리체는 없다. 왜냐면 나는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나기 전에 기억을 한번 리셋했으니까. 그때의 루루렌칼리체와 지금의 루루렌칼리체는 아마, 네게 다른 존재이겠지." 나뭇가지를 흔들며, 동요를 보이던 나무는 처음에 보았을 때 처럼 얌전해 졌다. - 정말…? "그래, 정말." - 정말, 정말?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 - …. 정령은 아무말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다시 한번 이 나무를 쳐다보았다.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었던 과거의 잔재…. 기억을 리셋하기 전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우연 치고는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었잖아! 반드시 이곳에 와야할 일이 있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기억이 없다는게 무슨 말이니, 루루? 정령은 맹렬히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령의 분노는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 다시 찾아오겠다고? 반드시 이곳에 와야할 일이 있었다고? 내가 괜한 거짓말을 했을리가 없지. 거기다가 지금 기억에는 없지만 이렇게 이 정령을 다시 찾아오게 되지 않았는가. "…." 잠깐의 순간, 나는 내가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 나무의 정령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했다. 바로, 과거의 루루렌칼리체가 바로 나를 이곳으로 오게끔 인도한 것이다. 과거의 루루렌칼리체가 내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거란 말이 실현이 된 이 시점에서, 나는 과거에 내가 사용했던 마법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었다. … 나는 미래마저 조종하는 신비를 발휘했던 것이다. - 루루? 내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나무의 정령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령의 목소리는 마치 부드럽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도 같은 구석이 있어, 나를 조금 나른하게 만들었다. "미안하군." - …. 정령은 내 말뜻을 금방 이해한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설마, 팔천년 동안 나를 기억하고 있을 존재가 나와 같은 드래곤 말고도 있었을 줄이야…. 자신을 알고 있던 누군가의 기억에서 자신이 잊혀진 다는건… 유감스런 일일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혀짐을 당하는건, 우리 드래곤들 밖에 없을줄 알았건만…. - … 괜찮아. 팔천년의 기다림은 정령인 나에게도 정말 길고도 길었지만 결국, 너는 기억을 리셋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를 찾아와 주었잖니? 정령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선량했다. 이 정령이 내게서 바라보고 있는건,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는 루루렌칼리체가 아니라 그저 '루루렌칼리체' 그 자체가 아닐까. "그래…." 팔천년의 기다림이라….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오른손을 뻗어, 나무의 거대한 몸체에 손을 대었다. 까끌까끌한 나무 껍데기가 손 바닥으로 부터 느껴져 왔다. 또한 이 정령이 가지고 있었던, 과거 루루렌칼리체의 모습까지도. #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내 앞에 서있던 거대한 나무는 지금의 반도 안되는 크기로 줄어버렸고, 무성한 숲으로 가득했던 주변은 그저, 넓은 초원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정령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기록을 더듬어 팔 천년전의 과거로 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채 주변을 모두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온통 백색으로 자신을 물들인 어린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옷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짧은 하얀 천을 가볍게 두르고 있는 과거의 나는 새하얀 다리를 드러내놓은 채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깔고 앉은 하얀 천 부분에는 짓눌린 풀이 남겨 놓은 녹빛의 얼룩이 약간 묻어 있었다. …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이 모습과 완벽하게 동일한,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분명히 여성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 루루, 햇살이 따갑지는 않니? "따갑지 않아." 지금보다 약간 더 가느다란, 나른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 그런데, 내가 너에게 나를 '루루'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했지 않았니?" - 싫어, 루루라고 부르는게 좋아. 잠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매일 같이 말해도 소용이 없군…. 내 말을 이렇게 까지 거역하고도 이 세상에 멀쩡한 녀석은 너밖에 없어." 과거의 나는 하얀 손톱을 눈 앞으로 들어올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듯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보는 지금… 참 묘한 기분이 드는군. - 왜냐면, 루루는 나를 사랑하니까…? 정령은 확인하듯, 손톱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는 과거의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과거의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채,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 이라…. "…." 나는 두어번 정도 눈을 깜빡거리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하얀 소녀에게로 다가가 섰다. 같은 공간, 하지만 다른 시간. 그 시공간의 거대한 간극(間隙)을 초월해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과거의 나를 내려다 보았고, 그녀는 아래로 내리깐 시선을 들어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 잠깐의 침묵.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거야."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의 시선을 피하듯,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했다. - 무슨 얘기야? 나무의 풀잎이 바스락거렸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거야. 아주… 긴 시간동안." - 왜? 정령의 의문은 간결하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답을 해주어야 할 과거의 루루렌칼리체의 호박색 눈동자는 결코 간결하지 못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몸을 가리고 있던 천조각이 마치 낙옆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천조각엔 갈색의 흙과 작은 풀잎 따위가 묻어있었다. "글쎄…." 과거의 나는 양손으로 등 뒤로 늘어진 긴 백발을 쓸어 내리더니 몸을 한바퀴 빙글 돌렸다. 원심력에 의해 공중으로 떠올랐던 백발이 엉덩이로 내려올 즈음, 등뒤엔 거대한 백색빛 용의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과거의 루루렌칼리체는 그 날개를 가볍게 접는 것으로 알몸을 가렸다. "나는 이곳에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두고 갈거야." 과거의 루루렌칼리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나무의 껍데기를 쓸었다. 나긋나긋한 그 손짓과 눈빛은 일견 굉장히 요염해 보이기도 했다. - 어떤건데?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이곳에 돌아올거야. 기다려 줄 수 있지?" 기다려 줄 수 있지, 라는 말은 물음의 형식을 띄고 있긴 했지만 결코 물음 따위는 아니었다. 오만한 기운이 돌고 있는 루루렌칼리체의 호박색 눈동자는 그것이 강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 물론, 당연히 기다릴게. "나는 반드시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될거야." 과거의 나는 날개를 살짝 펄럭이며,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방금 이 말은 정령에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나' 에게 말한 것이다. "반드시…." … 그것을 마지막으로 눈 앞에 펼쳐졌었던 영상이 멀어져 간다. # 세계는 어지러이 돌아가고, 아주 길고 먼 시공간을 뛰어 넘었던 나의 정신이 현실로 복귀 하는게 느껴졌다. 툭, 툭-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푸른 풀잎 위로 떨어져 내리는 붉은 물방울이었다. 그 물방울 들은 풀잎 위에서 바닥으로 또르르 떨어져 내려, 바닥으로 스며들어 갔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비릿한 쇠맛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 힘을 잔뜩 억누른 인간의 육신에서 육천년에 가까운 시공간을 뛰어 넘는 이적을 발휘하는 것은 아무래도 신체에 좀 무리가 가는군. - 루루? "그랬었군…." 나는 하얀 소매로 입가를 슥- 닦았다. 하얀 천 위로 붉은 기운이 넓게 번져 나갔다. 출혈은 아직도 멎지 않고 있었다. - 루루, 괜찮니? "응." 마치, 꿈을 꾼듯한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꿈을 꾸지 않는 드래곤인 나로서는 이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 과거의 루루렌칼리체, 하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는 이곳에 중요한 어떤것을 두고 간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내뱉은 말들은 모두 정령에게 하는 말들 같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시공을 넘어 과거로 돌아갈 것을 예상해 두고 있던 말이었지. 즉,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이런식으로 행동하도록 미래를 조작했던 것이다. 미래를 조작하는, 세계의 규칙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이적을 발휘하면서 까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 나는 생각을 멈추고, 내 앞에서 천천히 가지를 흔들어 대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육천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나를 기다려온 정령…. 과거의 나는 이 정령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었지만, 실은 이 정령은 그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핸 매게체에 지나지 않았다. …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로서는 탐탁치 못한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었군. 이 정령에게는… 미안함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 아, 오늘은 주말이다. 그렇다고 해봐야 지금은 요정 여왕의 방문을 환영하는 성대한 축제가 열린 상태라서 평일에도 아카데미 수업은 없지만 말이다. 뭐, 그렇다고 주말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건 아니다. 주말에는 불편한 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을 수 있으니까. "…."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인간들의 주말이란것에 이런 의미나 부여하고 있는걸까. 음… 나도 이제 꽤나 이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교정에 있는 자그마한 벤츠에 혼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카리에르제는 어딘가에서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아침 일찍 기숙사를 빠져나갔고, 로나벨아크하임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지 오늘 하루종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요즘은 축제 때문에 아예 아카데미 내부의 인원이 절반으로 줄은듯한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교정의 중앙 너머를 바라보는 동안, 약간 센 듯한 바람이 불어와 내 긴 백색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막 양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려는 찰나,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머리끈에 생각이 미쳐 그것을 꺼내었다. 하얀 손 위에 올려진 머리끈은 단정한 검은색이었다. 내 머리카락이 백색이니 이걸로 머리를 묶으면 끈이 상당히 도드라져 보이겠군. 대강의 감상을 끝낸뒤, 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쥐고 뒤쪽으로 한번에 묶어 버렸다. 매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를 머리끈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고정시켜버리니,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확실히, 바람에 흩날려다니는 머리를 정리할 필요가 없으니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든다. "리블란셰…?" "응?" 뒤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긴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쥬에브… 로군. "머리… 참 잘 어울리는구나. 귀여워." "응, 고마워." "아니, 너 말고 머리끈이 귀엽다고." … 음. 그녀는 흥,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내고는 치맛자락을 정리하고서 내 옆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와 동시에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어지럽혔다. "내게 따로 용건이라도…?" "주말에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나 싶어서 말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축제 기간이잖아?" 레쥬에브는 앞으로 고개를 약간 숙인 바람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내게 물었다. "그냥… 바람쐬고 있는 거야. 축제에도 별로 관심은 없고 말이야." "그러니?"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난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란한 축제와는 별개로 한적한 교정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레쥬에브, 난 너에게 협력을 약속했었어." 은룡에게 대항하려는 유일한 인간…. 갑작스레 카리에르제가 생각났다. 스스로의 종족의 정체(停滯)를 깨닫고, 거대한 변혁을 꿈꾸는 인간. 그는 내 눈앞에 있는 이 인간과 닮은꼴이다.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내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니?" 내 의문은 타당하다. 난 레쥬에브에게 레케트리셴 문 여제, 즉 은룡의 실각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제안도 그녀가 먼저 했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레쥬에브는 내게 그에대한 간단한 언질조차도 없었다. 흑색의 좌라곤 하지만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녀가 어떻게 제국의 여제로 자리해 있는 은룡을 몰아낼지, 미약한 호기심이 드는 것이다. 그녀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인간이 아니란건 알지만, 실제 그 정체가 드래곤이라는것 까지는 모른다. … 하지만 난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하-?" 그녀는 어이없다는듯, 헛웃음을 흘렸다. "바보냐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있겠다고 너에게 일을 시키겠어?" "…." "잘 들어 리블란셰.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이 제국의 최고 권력자를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일이야. 그것도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업은 것도 아닌, 나 개인이 말이야." 레쥬에브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는 듯한 기색이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내게 숙인채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단 기간에 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해도… 난 그녀에게서 체념의 빛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레쥬에브는 내 쪽으로 숙인 몸을 다시 일으키며,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일개 아카데미 학생인 네게 바라는건 없어. 물론,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네게 어떤 일을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건 네가 근 미래에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요직에 올라가는거야. 내 일을 도울 수 있을 만큼." … 긴 시간을 상정하고 일을 꾸민다는 건가. 아주 생각이 없진 않군. 그게 가장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주요 직위에 올라가고서도 널 계속 도울 마음이 남아있을까?" 그녀가 곤란하게 여길만한 말을 한번 던져본다. 레쥬에브는 잠시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약간 한심스럽다는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출세 할 생각도 없는 녀석이 무슨…." 그래… 난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너는 출세할 생각이나 해. 카리에르제 따위하고 어울리지나 말고! 내가 봤을때 너는 그런 점이 너무 미숙해. 처세술 이라곤 아예 모르는 사람같단 말이지…!" 엄청나게 쏘아 붙이는군…. 그녀는 깊은 자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풀나풀한 그녀의 치마가 살짝 위로 떴다가 하얀 무릎 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뭔가 멍한 기분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고 있자니, 어느새 그녀는 몸을 돌려 저쪽 건물 뒷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 레쥬에브도 자신이 하려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알긴 아는 모양이로군. "후으…."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인간의 제국은 인간이 통치해야 한다.', '인간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오직 인간이 결정해야해.' 레쥬에브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몰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가능에 가까운걸 알면서도…. 기특한 인간이란 말이지. # 요정 여왕의 방문을 환영하는 축제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 칼리아넬을 한 번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그쳤다. 천년 전 쯤의 인연이 있긴 하지만 현재 내 생활에서 그녀와의 접점은 찾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딱히 용무는 없다는 이야기다. "읏- "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려댔다.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불고 구름도 잔뜩 껴있다.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듯 하다. 여전히 거칠게 흩날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장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축제 기간이라 수업도 없고, 인간들의 서적이나 뒤적거려볼 요량이었다. "아, 칼리체구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평소와 같이, 장서관의 입구쪽엔 패링이 책을 읽고 있었다. … 아니, 읽는다기 보다는 책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듯 하다. 그러고 보니…. 난 평소와 뭔가 다른 분위기에 장서관 안을 대강 슥- 훑어 보았다. … 인간이 굉장히 많다. "왜 멍하니 서있어? 공부하러 온거 아니었어?" 패링이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종이 조각을 책뒤로 넘기며 내게 물었다. "공부… 요?" 새삼스러운 이야기군. 애초에 아카데미라는 곳이 인간들의 지식 전승을 위해 있는 곳인데.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나는 보통의 인간들이 하는것처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곧 답을 해주었다. "그래, 공부. 장서관은 분위기도 조용하고, 학업에 필요한 서적들이 많으니까 자주 이용되고 있지. 거기다 이제 곧 '시험'이 다가오니까." … 시험?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 "시험이라면, 어떤걸 말하는거죠?" 내 질문에 패링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인간들에게서 한번도 관찰할 수 없었던 대단히 기묘한 표정이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칼리체. 네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줄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아카데미에서 치르는 시험도 모른단 말이야?" "…."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필기도구와 책을 내려놓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 "시험이란건- " "…." 패링에게서 시험이란 것에대해 대강 설명을 들었다. "지금까지 배운것에 대한 테스트로서- " 테스트라…. 지식을 확인해 본다는건가? … 이해했다. 인간에게는 드래곤과는 달리 망각이란 것이 있으니까. 습득한 지식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지 한 번 '시험'해볼 필요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과… 이 많은 인간들이 시험을 본다고 하니, 갑자기 공부를 하는것과 상관이 있는 이야기인가? … 패링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 -시험이 끝나면 성적이 나오는데- " 그의 말에 따르면, 성적은 시험을 우수하게 치른 인간부터 내림차순으로 정렬해 놓은 일종의 표라고 한다. "하지만 왜 굳이 성적을 나누는 거죠?" "아… 그건 '우리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 패링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우린 귀족이 아니야, 칼리체. 평민이 제국의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이곳을 졸업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같은 평민은 아카데미에서 돈과 시간만 날린 셈이지. 이곳에서 배우는 지식은 물론 중요하지만, 평범한 평민의 삶에선 쓸모가 없거든. 즉, 성적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이야기야." 관료가 되지 못한다면,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이라도 배우는게 나았겠지- 라고 그는 덧붙였다. "…." 성적과 미래라…. "그래서… 자, 봐봐. 공부를 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평민이잖아." 그의 말에, 나는 장서관 내부를 다시한번 둘러 보았다. 누가 귀족이고, 누가 평민인지 얼굴만 보고서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의 옷차림을 살펴보자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공부하고 있는 이들의 신분은 평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 좋은 성적을 거두면, 제국의 관료가 된다. 뭔가, 내가 알고 있던것과는 좀 다르군. … 아니, 많이 다르다. 아카데미란건 단순히 인간들의 지식 전승의 수단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적어도 평민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유효한 신분 상승의 수단이 아닌가. "이제 알겠지? 축제가 끝나면 얼마 안있어서 시험기간이니까… 미리미리 준비해두는게 좋지." "… 그렇군요." 레쥬에브가 말했던 것도 이것이었군.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제국의 관료가 된 뒤에 자신에게 조력하라고. 신분을 '상승' 시킨뒤에 말이지…. 새삼스럽게 놀랐다. 인간은 정말 주변의 모든걸 '도구'로 사용하는군. 패링에게 간단한 감사 인사를 표하고, 책장으로 가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시험이고 성적이고… 어찌되었든 나와는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다. # 장서관 내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져 있었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목이 대단히 뻐근했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올리는데, 따뜻한 무언가가 목 뒤로 턱하니 얹어졌다. 내 목 뒤로 얹어진건 누군가의 손이었다. 그 손은 내가 뭐라고 말할틈도 없이 내 목 뒤를 거칠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얏-!" 눈물이 핑 돌정도로 아프다. 재빨리 앞으로 몸을 빼 뒤를 돌아보니,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손을 들어올리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투명한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머금지 않은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크함…."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채, 그는 방금까지 내가 읽고 있던 책을 가져갔다. "흠… <<제국의 지리>> 라, 굉장히 쓰잘데기 없는걸 보는군." 꽤나 냉담한 목소리로군…. 그는 곧 가져갔던 책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 놓았다. 나는 그의 쓰잘데기 없다는 표현에 약간의 반발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런식으로 생각하면 인간들의 서적에선 볼만한게 전혀 없겠지…. 난 그저, 인간들이 자신들 주변의 지형지물을 어떤식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인간들에게 주변에 있는 산이나 평야, 강들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기본적인 의, 식, 주가 모두 주변 지형과 연결되어 있지. 거기다 그들은 나처럼 하늘을 날 순 없으니까…. 그들의 인식 범위는 대단히 국소적이다. 그리고 그만큼 자세하지. 거기다 인간들이 주변 환경에대해 해석해 놓은 글을 보기만 해도,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듯한 느낌이다. "그래…?" 그는 내 맞은편에 털썩, 하고 앉더니 양 다리를 책상위로 턱 하니 올려 놓았다. 내 이야기엔 전혀 흥미 없다는 기색이다. 난 잠시 책상위에 올려진 그의 다리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장서관엔 무슨일로?" "아, 주변을 지나가는데 마침 비가 와서 말이지." 아크함은 그렇게 말하며 창문 밖을 가르켰다. 그의 말대로,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오는것 같지는 않지만…. 다시보니, 그의 옷의 어깨부분이 살짝 젖어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장서관으로 들어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듯 싶다. … 그의 말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정도로 최근, 나는 아크함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것 같으니까. 그의 기색으론, 그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과 반(反)하는것 같아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좀 심하게 생각하자면… 로나벨아크하임은 현재 내게 적이나 다름없지. … 전에 그가 내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드래곤들을 적으로 돌릴지도 모른다는 얘기였었지. 으음…. "…."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툭, 툭- 하고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이 많아지고 있었다. 장서관에서 기숙사 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되니까, 비를 맞지 않을꺼라면 슬슬 돌아가야 겠는데…. 문득, 고개를 돌려 아크함 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그는 책상위에 발을 올린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 … 미래라는 것은 전지전능에 가까운 우리 드래곤들도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나는 상상한다. 레드드래곤 로나벨아크하임…, 너를, 적으로 돌리는 것을. 하지만 적으로 돌린다고 해서, 이 녀석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없겠지. 드래곤은 불사의 존재니까.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불사의 존재가 서로 싸우게 되면… 결국 남는건 세상의 멸망밖에 없다. 그래서 내 상상력은 결과의 끝에 가 닿질 않는다. …이제는 돌아가야겠군. # 기숙사로 돌아가는길에 비를 좀 맞고 말아서 내부에 있는 목욕탕에서 간단히 몸을 씻었다. 이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상당히 익숙해 져서, 별다른 어색함이 없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시원한 쥬스를 가져와 의자에 앉아 조금씩 홀짝였다. 달콤하고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상당히 좋다. 연약한 육체라는건 불편한 부분이 상당히 많지만, 그 덕에 이런 감각도 느낄수 있음으로 그다지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문득, 설명할 수 없는 생소한 감정이 내 입술에서 웃음을 비집게 나오게끔 했다. 정말로 익숙해 졌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생활하는 것에…. 의자를 뒤로 깊게 넘기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마도 기술로 만들어낸 마법등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난 그곳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 손가락으로 인간들은 참 많은것들을 만드는군…. 인간은 필멸자(Mortal)다. 그래서 손가락은 유한하다. 하지만 그들이 그 손가락으로 만들어 놓은, 혹은 이루어 놓은 지식과 기술들은 유한하지 않다. 대와 대를 이어 끝없이 이어져 나간다. 그것이, 나는 이상스럽게도 대단히 감동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무엇이 잘못된걸까…. 더 이상 인간을 비롯한 지적 피조물들이 끝없이 이루어 나갈것 같던 변혁을 멈추게 된 것은. 시선을 돌려, 카리에르제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여러가지 수학 공식과 그림들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는 종이 뭉치들이 보인다. 인간은 날지 못한다. … 저 종이뭉치들은 인간을 저 드넓은 창공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오늘 내가 장서관에서 보았던 <제국의 지리> 에서 살펴보았던 인간의 조악한 인식 범위를, 끝도 없이 넓혀줄 수 있겠는가? 내가 대단히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의 변혁이 멈추었다고 생각되는 이 시점에서,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기껍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 어제부터 시작된 비가 오늘까지 계속 되고 있다…. 창가로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렸다. 밋밋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천장이 보인다. 손이 닿지 않는 천장엔 미약하게 먼지가 약간 쌓여 있었다. … 요정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축제도 거의 끝나가는군. 칼리아넬을 생각하니 조금 재미있다. 그녀는 현재 가장 거대한 인간의 나라인 네거스텐 제국의 지배자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는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현재 그녀의 능력이면 레테닌시에스케의 정체를 간파했을지도 모르지.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요정과 인간의 미래를 의논하는 자리에 요정은 있지만 정작 인간은 없으니…. 칼리아넬이 은룡을 상대로 잘 해냈을까? …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은룡이 인간들을 위해 요정들과 진지하게 의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레쥬에브가 말했었던 것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들의 제국은 인간이 통치해야 한다.' 그래…, 인간의 일은 인간이 결정해야 겠지. 레테닌시에스케…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같은 드래곤이 상대면 이리도 골치아프군…. 읏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건 단서를 모으는 일 밖에 없다. # 우산… 이라는 물건이 있다. 철제 뼈대에 기름을 먹인 가죽을 씌워논 것인데 평소에는 가지고 다니기 쉽게 접을수 있게 만들었다는게 재미있다.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 새삼 '도구'라는 것에 대해 감탄이 나오는군. 어찌되었든 나는 그 우산이라는걸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며칠전 펠테넨시아 덕분에 우연히 만났었던 정령을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아니, 우연… 으로 만난건 아니었지. 나와 그 나무 정령의 만남은 과거의 내가 미래를 조작한 결과였으니까. 단서는… 그 정령 가까이에 있다. 풀숲을 스치고 나아갔다. 물에 젖은 풀들이 사박, 사박, 하는 소리를 낸다. … 기억에 따라 한참을 걸어 숲으로 들어가자, 곧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 난 들고 있던 우산을 내렸다. 이곳은 바깥과는 별개의 공간인듯, 비는 오지 않았다. 다만, 하늘엔 영롱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 아, 루루구나…! … 루루라는 호칭은 굉장히 어색하군. "안녕." 인사를 하며, 정령의 본체인 나무로 다가갔다. 나무는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빛이 어쩐지 전에 보았을때 보다 약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무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따뜻한 약동, 같은게 전해진다. - 다시 찾아오는데 상당히 오래 걸렸어! 그렇게 바빠!? "미안…." … 이 정령에겐 정말로 미안한 짓을 했다. 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나무껍질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무껍질은 당연하게도, 까끌까끌 했다. - 루루…! 그동안 뭐했어? 이 정령은 정말 기분 전환이 빠르군…. - 나는 계속해서 해가 지고, 뜨는걸 바라보았어. 그건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거였었잖아? 그리고 비가 오고, 눈이 오는것도 보았어.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걸 느꼈어. 밤이 찾아오면 떨어지는 별똥별을 계속 세어보기도 했어. "…." - 별똥별을 계속해서 세었어. 그렇게 세어본게 아마 수천, 수만개쯤 되었을거야. 너무 많아서 다 세진 못했어. 기나긴 세월…. 사랑이라는걸 알게 된 정령은 외로움이라는 것도 동시에 알게되었는지, 조잘조잘 혼자서 떠들어 댔다. 난 나무에 기댄채 그것을 계속해서 들었다. 언제까지고… 들을 수 있었다. - 아, 그런데…. "응?" - 나, 이곳에서 나가보고 싶어. 상당히 뜬근없는 얘기로군…. 정령은 절대로 자신의 본체가 있는 곳을 떠날 수 없다. 아니,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이 정령이 왜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 그래." 그래서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요청을 수락했다. 나무에서 발해지는 빛이 아까보다도 한층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 정령이 들어갈 육신을 하나 창조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것은 상당한 힘이 필요한 거대한 마력 행사다. 그것을 이런 곳에서 행하기엔 주변 환경이 조금 마땅치 않지. 그래서 나는 정령의 념(念)을 내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이 육신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 그러기 위해선 내가 반대로 정령의 형태로 내 몸을 나와야 했다. "아, 내가 루루의 몸으로 움직일 수 있다니, 신기해!" 정령은 내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신기해 하고 있었다. 육신을 가진다는게 허락되지 않는 존재라서 그런지 몸을 움직이는게 대단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 타인의 입장에 서서 내 육신을 바라본다는게 좀 이상한 느낌이군. 감정이 풍부한 정령이라서 그럴까, 내 얼굴은 활발하게 움직이며, 지금 정령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있었다. -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응!" 정령은 금방 육신이란 것에 적응 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처음 겪는다는듯, 정령은 내 몸을 가지고 자신의 본체 주위를 뛰어 다니며 즐거워 했다. …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흡족하군. 정령에게, 과거의 나는 못 할 짓을 했다. 단지 메세지의 전달을 위해, 이 정령을 메신저의 수단으로 사용했었지. 이 정도 일로 기뻐해준다면 나야말로 기껍다. "나, 루루의 진짜 몸도 겪어보고 싶은데… 안될까?" 정령은 어깨 아래로 흘러나온 백색 머리카락을 신기하다는듯 매만지며 내게 그렇게 물었다. 글쎄, 그건… - 곤란한걸. "어째서…?" - 그건 인간의 육신이라 네가 아무런 문제 없이 들어가서 움직일 수 있지만… 내 본체의 경우엔 네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너라는 관념이 내 육신에 융화되고 말거야. 정령은 관념체….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존재안에 발을 딛는 순간, 그 가여운 존재감은 해체되어 사라지고 말겠지. "어, 어쩔수 없네…. 그래도 이 몸도 상당히 즐거워." 정령은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어보였다. … 나로선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이겠지. "근데, 이 모습좀 바꿔 줄 수 있어?" - 어째서? "이 몸은 내가 전에 봤었던 루루의 몸이 아니거든." 그래…. 이 정령이 기억 하고 있는건, 현재의 내가 아니니까. 정령의 기억속의 나는 과거의 루루렌칼리체다. 과거의 루루렌칼리체라면… 성인 여성의 몸을 하고 있었지. 어차피, 정령이 이 구역을 벗어나 다른 곳을 보고 싶다고 한다면, 현재의 모습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다. 난 어려울것 없이, 정령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 바깥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정령은 우산 따위는 쓰지 않은채 비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 정령은 양 팔을 벌리고 비를 맞으며,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듯 계속 미소를 지었다. "육신을 가진다는건 이런 느낌이구나…." - 즐거운가? "응, 너무나 즐거워. 봐봐- 빗방울에 몸에 맞아서 튕기는걸… 이런 느낌을 뭐라고 하더라…? 그래… 간지럽다. 너무 간지러워." 그렇게 말하고 정령은, 히히- 하고 웃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 …. 다만, 문제는… 혼자라면 상관 없겠지만, 아카데미의 밖으로 나와 시가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지.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내 육신을… 정확히는 이 정령을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 다른 인간들이 쳐다보던 말던, 정령은 알바 아니라는듯 그저 비를 맞으며 즐거워할 뿐이었다. - 다른 인간들은 신기하지 않나…? "내가 살아온 세월이 반 만년이야. 그동안 나를 찾아온 인간이 한 명도 없었을까봐…? 그런건 하나도 신기하지 않네요- !"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듯 하다. 하지만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면, 상대도 없이 혼자 떠들어 대는걸로 비춰질텐데…. … 요새들어 자주 깨닫는 것이긴 하지만, 난 정말 인간이란 종족에게 많이 물든 모양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다니…. 속으로 쓴 웃음이 나왔다. 망각을 모르는 나는, 한번 인간이란 종족에게 적응한 이상 계속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이런 느낌 따위는 언제고 빨리 털어버리는게 좋겠다. 정령은 어린애 같은 걸음 걸이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어색한 걸음 걸이지만… 그 걸음걸이에선 어쩐지 급함이 느껴졌다. 인간들의 사회에 처음 나오는 이 정령이 목적지로 삼을만한 곳은 없을텐데…. - …. 하지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정령이 향하는 곳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 정령이 향한 곳은, 인간들의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탑 위였다. 바깥에서 봤을때 탑의 끝에 거대한 시계가 있었던 걸로 보아, 아마도 이곳은 시계탑인 모양이지. 그 시계탑의 계단을 올라가며, 정령은 벽에 묻어있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계단에 앉아서 빛이 들어오고 있는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거의 꼭대기 까지 올라가자, 내부에는 외부에 있는 시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장치가 끼릭- 하는 소리를 내며,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 "이게 루루가 나에게 알려준 '시간'이란 녀석이구나." - 시간…? "응."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기계장치를 가르켰다. "한 시간, 하루, 한 주, 그리고 일 년." 시간이란 관념 말인가…. 시간이 무의미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을때가 아니면, 인간들의 시간 체계는 상당히 유용하니까. … 그러고보니, 이 정령도 인간들의 시간 체계를 잘 알고 있었군. 그건 과거의 내가 알려준 것이었었나…. "시간은 끼릭, 끼릭 거리는 소리가 나네…?" - 아니, 이건 단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기계 장치일 뿐. 이것이 인간들의 시간, 그 자체는 아니다. "이해가 안가는걸…." 음…. - 단순히 말해, 이 기계장치가 멈춘다고 시간이 가지 않는것은 아니지. 그제서야 정령은 내 말을 이해한듯 하다. 하지만 정령에게 그것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듯,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계장치가 있는 곳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거대한 시계가 있는 부분 위에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정령은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인간들의 도시를 보고, 긴 감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밖은 어느새 밤이 되었고,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정령은 비에 젖어 뺨에 착 달라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어 귀 뒤로 넘기고는, 상체를 앞으로 뺐다. "대단해! 무언가가 잔뜩 반짝 거리고 있어!" - 인간들이 만든 인공 불빛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어둠을 쫓아내고, 밤이란 시간마저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다른 종족이 어둠에 순응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지. 정령은 한참동안 별다른 대꾸 없이, 멍하니 비가오는 도시 저편 너머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정말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봐." - 그런가…. 정령은 계속해서 인간들이 밝혀놓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발을 길게 기른 늘씬한 인간 여성의 모습…. 본래 내 육신이건만, 가느다란 팔 다리가, 비로 인해 몸에 옷이 착 달라붙어 드러내고 있는 몸의 부드러운 곡선이, 모두 원래 내것이 아닌 정령의 것이었던것 같이 느껴졌다. 정령은 탁한 호박색 눈동자를 크게 치뜨고, 여전히 인간들의 도시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엔 내 시선과는 다르게 평가라는게 없다. 좋다, 싫다를 떠나, 자연 그 자체에 가까운 정령은 어둠이란 자연을 거슬러 밤에 붉을 밝히는 인간들에 대해서 순수하게 놀라워 하고 있었다. 정령이 하고 있는 모습이 원래 내 모습이라는건 아무 상관없이, 그냥 그 모습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과거의 루루렌칼리체가, 어쩌면 정말로… 이 정령에게 반한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허무한 자조와 함께 덧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과거의 내가 정말…? 답은 공허하다. "사실… 정말로 이렇게 데리고 나와줄지는 몰랐어. 무리한 부탁이란건 알았거든. 육신이란게 없는 정령에게 육신을 달라니…." - …. "설마… 네 몸을 빌려줄 줄이야." 정령은 히히- 하고, 인간의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정령은 스스로의 몸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사랑하던… 루루렌칼리체의 모습이야. 백룡 루루렌칼리체도 아니고,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루렌칼리체도 아니고… 그냥, 나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편히 쉬던… 여자애의 모습을 한 루루렌칼리체의 모습이야." - 너…. "알고있어, 내가 사랑하던 루루와 지금의 루루가 거의 완전히 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르다는걸…." 내 육신을 입고 있는 정령의 얼굴이 하늘에 잔뜩 낀 검은 먹구름처럼 흐려졌다. 그리고 곧 구름이 낀 하늘에서 비가오듯, 정령의 얼굴에서도 비가 내리는듯 했다. 투명한 액체가 눈가에 맺혀, 볼을 타고내렸다. … 우는, 건가? 모르겠다. 울고 있는 건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바람에 날려 얼굴로 떨어지는건지. "사랑해, 루루." 정령은 스스로의 몸을 감싸안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던 루루렌칼리체에게 향하는 것인가? 난 정령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던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 사랑이란게 정말 뭔지…. 팔백년 전 쯤, 베델이란 인간이 내게 말했었던 것도 사랑이었지. 인간이 내게 사랑을 말했었고, 정령도 내게 사랑을 말했다. 하지만 영원을 살아가는 드래곤인 나는 정말로 사랑이라는게 뭔지 모르겠다. 사실, 사랑이라는건… 유한한 존재들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까. 영원성… 불멸, 끝이라는게 없는 나에겐, 사랑이라는 감정은 절대로 허락될 수 없는 영역이다. 아무리 정령이 사랑을 내게 속삭여도, 나의 굳건한 정신은 그에 응하지 못하고, 그 불응으로 인하여 일방통행일 뿐인 그 가여운 감정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연민으로 환원된다. 왜… 어째서 이 정령은 나같은 존재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과거의 나는… 이 가련한 정령을 정말로 단지, 메신저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고작 기억의 쌓음이 나를 구성하는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 과거의 루루렌칼리체에 대해, 망각을 할 수 없는 존재인 내가 망각의 벽을 느낀다. 그 망각의 벽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나는 전에 인간의 현자에게 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용이라는 존재가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이 정령을, 진정으로… 사랑했었음을. - 응, 나도 사랑해(-ㅆ었다). #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내 육신을 되찾았고, 정령은 다시 나무로 화했다. … 나무에서 발하는 빛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 예상하고 있었지. 정령은 거의 육 천년 동안이나 존재해왔다. 그 존재가 이제 시간에 흩어져 버릴때가 된 것이다. - 루루… 네게 말은 못했지만, 눈치채고 있었겠지? 정령의 수명은 거의 반 만년… 나 정도면 굉장히 오래 산거지. 후드드득- 하고, 나뭇가지가 마치 손짓처럼 흔들렸다. "응…." 아무리 오래 살아가는 존재라도…, 결국은 죽음이 찾아온다. - 내 의식은 곧 흩어질거야. 난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다시 완전한 어머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하지만 난 이걸 죽음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어, 루루. "그래…." 나는 나무껍질에 부드럽게 손바닥을 올렸다. 투둑, 하고 껍질 조각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에게서 나오는 빛은 거의 사그라들어 있었다. - 마지막 부탁이 있어. "…." - 내 의식이 흩어지고 나면, 이 나무에 열매가 맺힐거야. 네가 그 과실을 취하고, 씨앗을 땅에 심어줘. 루루… 네가 원하는 곳에. "그럴게…." 나는 정령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 그 자체인 정령에겐 이름이란건 없다. 정령의 본체인 나무의 이름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정령의 이름이 될 순 없겠지. 이 정령이 남기는 씨앗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자아를 획득한 강력한 정령이 머문 나무의 씨앗이니까. 그 씨앗에서 자라난 나무 역시 자연의 정(精)에서 자아를 획득하여 정령이 될 것이다. 미래에, 나는 그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 줄 것이다. - 그래도… 의식이 흩어지기 전에, 루루를 봐서 좋았어. 정령은 히히- 하고 웃었다. - 세계는 유한하다. "응?" - 반 만년 전에 루루가 나와 헤어지기 전에 남긴 말이었어. 루루와 다시 만나게 되면, 꼭 그 말을 다시 해달라고 했었지. 세계는 유한하다…? 이게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남긴 메세지인가? "… 고마워." 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내 앞에 있는건 그저 평범한 나무일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뒤로 돌아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별빛이 아스라하다. 구름에 가려, 달은 보이지 않는다. "…." … 풀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툭, 투둑- … 어느새 이 공간에도 비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에 기댄채 비를 맞으며, 계속해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이 선명하게 보이던 하늘이, 이제는 완연한 먹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비가, 머리카락을 적시고, 뺨을 때렸다. 비가 뺨을 타고, 턱을 타고, 목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태양이 떠오를때 까지, 계속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 그리고 구름이 걷히고, 하얀 태양광이 내게 내리쬐었다. 눈을 깜빡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계속 바라보는데, 하늘에서 빨갛고 동그란 물건이 내 허벅지로 떨어져 내렸다. 하얀 허벅지에 벌건 자국을 남기고 내 옆으로 굴러가는 그 물체는… 나무의 열매였다. 오른손으로 열매를 집었다. 열매의 표면은 매끈하고, 딱딱했다. 아삭, 하고 열매를 한입 베어먹었다. 열매는 달콤하고, 즙이 많았다. # 해가 뜨고나서, 나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 내부를 순찰하는 인간에게 지금의 모습이 발각되지 않도록, 나는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새벽에 내린 이슬이 그대로 머리카락에 남아 있어, 고개를 약간 흔들자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에 물기가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아직까지 성인 여성의 몸을 하고 있어서인지,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평소의 내 시야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정령이 좋아했던 모습…. 외견은 원래 내가 했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지만, 긴 머리카락과 곡선이 뚜렷한 몸이 두드러진다. "…." 방 안에 룸메이트로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곳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출렁, 하고 침대가 부드러운 반동을 내게 전해온다. 손을 들어, 들고 있던걸 눈앞으로 가져왔다. 과실을 먹고 나니, 그 안에 이 커다란 씨앗이 들어 있었다. 정령이 남긴 마지막 부탁…. 정령은 내게 그러한 부탁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 이상하군. 묘한 기분이 든다. 정령이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 정령은 항상 내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정령뿐 아니라, 지금껏 내 주변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존재들은 모두. 내 기억은 인간들의 그것처럼 색이 바래지 않는다. 모두 방금 겪은 것인양, 생생하게, 다시 재생시킬수 있다. … 영원히, 추억안에서 남는 것이다. 내가 본래의 모습을 하고, 아주 긴 시간동안 잠을 청할때, 그러한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곧, 그러한 모든 것들을 덧없이 흩어버린다. 모두들 너무 빨리 죽어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게, 거의 모든 것은 깊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드는걸까? 내가 정령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하는 걸까? … 재미없는 농담같은 이야기로군. "…." 씨앗을 품속에 넣었다. 언젠가 이것을 심고, 나무가 자라고, 그곳에서 또다시 정령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테지…. 정령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세계는 유한하다'라고 내게 전해달라고 했었다고 한다. 유한하다 라는건… 시간적인 의미인가, 공간적인 의미인가…. 공간적인 의미라면,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태양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한없이 하늘로 올라가 보았던 나는 더이상 진행할 수 없는 거대한 벽… '세계의 끝'을 느껴보았다.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것으로 나는 이 세계가 공간적으로 유한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의미로 세계가 유한하다는 의미인가…? 나도 알지 못하는, 이 세계의 끝이 정말로 있기는 있단 말인가…? 확신은 없다. 나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다. #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잠에 들었던 인간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했다. 음… 오늘도 여전히 수업은 없는 모양이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디론가로 가버렸고, 평민들은 모두 시험을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는듯 했다. 할 일이 없는 나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교정 안을 거닐었다. 햇빛은 상당히 뜨거워, 거의 완연한 여름에 다다른듯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양산이란걸 들고 다니는 인간도 있었다. 우산과 별로 다를게 없어보인다만, 좀더 얇고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는듯 하군…. 그런데… 평소보다 아카데미 내부가 조금 소란스러워진 느낌이다. 시끄럽다는건 아니고… 단지 인원이 좀 늘어난 듯 하다. 축제가 끝나 모두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툭- 하고 머리를 때렸다.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맞은 부위를 살살 문지르며, 무릎을 굽혀 내 머리를 때린 물체를 집었다. 색이 바랜듯한 누런색, 그리고 까끌까끌한 감촉…. 양피지로군. 하지만 양피지는 원래의 모양이 아닌, 이리저리 접혀 처음 보는 형태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양피지는 한 꼭지점을 기점으로 입체적인 모양을 띄도록 접혀 있었는데, 마치 하늘을 날 수 있게, 인위적으로 '날개'를 형성시킬 의도로 만들어 놓은 모습이었다. "…." 뭘까 이건,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올려 이 양피지가 날아온듯한 건물 위쪽을 두루 살펴보았다. … 한 건물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 아직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건물인듯, 내부엔 아무런 사물도 없었다. 나는 컴컴한 건물 내부의 어둠을 등뒤로 넘기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짚으며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작은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고 올라서, 마침내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끼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거친 마찰음이 들려왔다. 녹이 잔뜩 슬어 있는지, 문을 민 손에도 누런색의 녹이 묻어나왔다. 환하게 떠있는 태양이 비치는 옥상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의 주변엔 내 머리를 툭, 하고 때린것과 같은 양피지 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으앗…!" … 그 누군가는 카리에르제였다. "뭐, 뭐야 너는…! 깜짝놀라게 이렇게 예고없이 등장하지 말라구!" 예고…? 옥상문을 여는데 노크가 필요한 줄은 몰랐군. "길을 가는데 이게 내 머리를 때려서 말이야." 그는 내가 내민 손에 들린 종이를 힐끗 보더니 픽- 하고 웃으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 앉았다. "일이 잘 안풀려서 심심풀이로 만든 장난감이야." "장난감…?" "응, 장난감." 장난감이라…. 나는 내가 가져온 종이 조각을 잠깐 입술에 물고, 손에 묻은 녹을 털어내며 카리에르제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 조각들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것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이건… 무엇을 위한 물건이지. 장난감이라 함은 단순히 유희를 위한 건가…. "일이 잘 안풀리다니? 공부라도 하는거야?" 카리에르제는 내 질문에 와락- 하고 인상을 구겼다. "이 녀석이…! 내가 공부같이 하찮은 것으로 지금 이러고 있겠냐!" 저기 있는 장서관에서 열심히 공부중인 평민들과는 사뭇 다른 견해로군. 평민과 언행이 별로 다를게 없는 카리에르제도 역시 귀족은 귀족이다. 공부따위는 안중에도 없는것 같았다. 그렇다면 역시…. "비공정… 인가?" 그는 잠시 아무말이 없었다. "후우- " 깊은 한숨…. "답답해. 하늘을 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걸까? 마법사라는 녀석들은 자력으로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본적은 없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마법사 같은 능력을 가질수도 없는것 아니겠어?" "…." "나… 그래도 천재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하늘을 나는것' 정도의 물건을 만드는데 필요한 지식은…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좀… 어렵네." 그의 말은 마치 푸념을 늘어놓듯, 두서가 없었다. 카리에르제는 그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 서서,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울해져서… 잠깐 기분전환이라도 하고 있었어." "그래…?"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다, 갑자기 카리에르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맞다! 그 장난감의 사용 용도를 알려줄게." 용도…? 그는 주변에 널려 있는 종이조각 몇개를 줍더니, 품에 넣고선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 뭘 할 셈이지? "뭐해? 빨리 이리로 와." 카리에르제의 말에 따라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 섰다. 이 건물은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꽤 높은 건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아카데미의 풍경이 그런데로 잘 보였다. 바람이 불어와, 나와 카리에르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그는 아무말 없이 계속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아, 이제 바람이 멎었네." "…." 바람이 멎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잘 봐. 날린다!" 카리에르제는 품속에 가지고 있던 종이조각들을 허공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 본래 종이는 허공에서 느릿느릿 팔랑거리며 떨어지지만, 카리에르제가 이상한 모양으로 접은 그 종이들은 일직선으로, 꽤 멀리 까지 날아갔다. '날아갔다.' 시야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는 그 종이들이 허공을 나는 모습이 너무나도 즐거워서 못견디겠다는 얼굴이었다. "날았지?" "…응." … 저렇게 해서 저 종이가 내 머리를 때린거로군. 나는 난간에 기대어 여전히 날아가고 있는 종이들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그나저나… 정말 멀리도 날아가는군. … 누군가는 우연히 나처럼 저 종이에 머리를 맞을 수도 있겠다. "멋져." 나는 담백하게 감상을 말했고, 카리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얘기 들었니?" "무슨 얘기?" 카리에르제와 헤어지고 나서, 교정의 구석진 곳 의자에 앉아 있는데 등 뒤에서 두런두런 말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우리 제국에 방문한 요정여왕과 여황폐하께서 아카데미에 시찰하신다는거!" "엑-!? 시찰이라니…. 거기다가 요정여왕하고는 왜…?" "아카데미가 유명하니까… 여황폐하께서 요정여왕에게 구경시켜주려는거 아니겠니?" "설마…." 여황폐하와 요정여왕이라…. 나는 고개를 돌려,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인간 둘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제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은 인간 소녀 두명이었다. 또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나누었는지 둘은 입을 가리고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요정이 그렇게 예쁘다면서?" "여황폐하보다 아름다울까…? 그러고보니 여황폐하가 이제 거의 마흔살이 다되가는데… 모습은 아직도 소녀같단 말이야." "피에셰트에는 젊음을 유지하는 마법의 약이라도 있는게 아닐까…?" … 깔깔 거리는 웃음 소리와 함께 두 소녀가 내게서 멀어져 갔다. 칼리아넬과 레테닌시에스케….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군.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있는 아카데미로 시찰… 을 나온다는건가. 나는 잠시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생각했다. 시찰을 나온다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떠한 작위성을 느낀다. … 은룡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 "아, 칼리체…!" 반가운 기색이 담긴 여성의 목소리에, 나는 감고있던 눈을 떴다. 내 이름을 부른건, 긴 금발에 선량한 인상을 가진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그녀는 펠테넨시아 황녀…, 은룡의 딸이었다.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이네요, 펠 선배님." 그동안 그녀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 역시 이 제국의 황녀로서 요정여왕의 방문을 환영하는 축제에 나가있어야 했기 때문이겠지. 음, 축제가 시작된 직후 며칠간은 모습을 보였었던것 같은데…. "산책 중 이신가봐요?" "으응…. 좀 생각할게 있어서…." 펠테넨시아의 얼굴이 흐려진다. 저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근심이 있다는게 분명해 보인다. 혹시…. "혹시 레케트리셴 문 여제께서 아카데미에 방문하는것 때문에 그러시나요?" "너…!" 그녀의 얼굴이 약간의 놀람으로 물든다. 나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 놀람이 납득으로 변하는걸 천천히 지켜보았다. "… 알고있었구나, 내가 황녀라는걸." "숨기시려면 좀더 치밀하셔야 했죠. 여황폐하와 다른 금발이라는 외양은 은폐에 유용하지만 펠 선배님이 황녀라는걸 아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적지 않은듯 하니까요." 펠테넨시아 황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칼리체는… 굉장히 직설적이구나." 그녀의 얼굴에서 쓸쓸한 미소는 곧 걷어졌다. "근데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너는 내가 황녀라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나 보구나?" "아무렇지 않진…." 통상적인 경우, 평민이란 계급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겐 신분이 절대적인 힘을 갖겠지. 나는 그것을 연기해 보려 했으나, 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뭐, 그다지 상관은 없다. 활동하는데 불편을 느낀다면, 이 인간의 조악한 기억을 적당히 조작해 버리면 될 일이다. … 물론, 최악의 경우에만 그리 되겠지만. "괜찮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신분을 숨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 "남들이 알아서 알아보는건 상관없지만… 난 이곳에 있을땐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평범한 학생이고 싶어. 황녀라는 드높은 신분은 종종 내가 보고 느껴야할 광경을 애초에 보지도 못하도록 가려버리기도 하거든." 그런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게요." "응. 칼리체는 입이 무거워 보여서, 신용할 수 있을것 같아." … 입이 무거워 보여?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 보았다. 작은 입술이라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을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입술을 만지작 거리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펠테넨시아가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선 처음 들어보는 표현인데… 그저 관용적인 표현이었나보군.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느릿한 동작으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인간들과는 동작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게, 아무래도 이런게 인간들이 부르는 말로 '기품'이라는것 같았다. "걱정이 있으신가요?" "후후, 그렇게 티났니?" 펠테넨시아는 앞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어머니… 여황폐하께서 아카데미를 방문하시는것 때문에 그래. 지금껏 어떤 가시적인 성과도 보여드리지 못했는데…." 가시적인 성과라… 무엇을 말하는 걸까?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성적? 아니면, 앞으로 이 제국의 관료들이 될 능력있는 평민이나 귀족들과의 친분? 혹은…. 이어져 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그 어떠한 것도… 아무리 위대한 성과라 해도 레케트리셴 문 여제, 은룡에게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여전히 선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부담스러워. 오라버니와 황좌를 놓고 다투어야 하는 내가…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내가…." 펠테넨시아의 염원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걸 알고 있는 나는, 그녀에게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은룡은 무슨 생각으로 그녀와 그녀의 오라버니라고 하는 인간을 낳은걸까. 그 육신으로…. "…." "어머, 내가 너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미안, 칼리체. 내가 여기서 한 말은 모두 잊어주길 바래. 쓸데없는 말을했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마지막 말에는 단호하고, 얼핏 냉엄하기까지 한 의지가 깃들어 있어, 나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는 작별인사를 남겨두고, 내게서 멀어져 갔다. … 나는 새삼스레 은룡이 그 육신으로 어떤 인간과 펠테넨시아를 낳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보니, 단 한번도 이 제국의 여제에게 남편이 있다는 말 따위는 들어본적이 없다. # 다음날, 담당 교수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요정 여왕 칼리아넬의 아카데미 방문으로 인해, 예정되었던 시험이 미뤄졌다는 것을 알렸다. 작게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인간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작은 동작으로 클래스C 강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 통보에 표정이 굳은 사람도 있었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표정이 크게 변한 인간들의 신분은 대부분 평민이었다. 교수가 강의실 내부를 나가자,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상당히 들뜬듯한 표정이 되었다. "칼릿체!" 내 이름에 들어가있는 묘한 강세…. "응?" 내 어깨를 톡, 치며 날 부른건 같은 클래스의 네리셰라는 인간이었다. "공부는 열심히 했니? 아무리 시험이 미뤄진다곤 해도 여왕폐하의 아카데미 방문이라는 일정이 있으니, 시간이 더 줄어든 것이나 다름 없을텐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 하며 '굉장히 시끌벅적할테니까.' 라고 덧붙였다. … 뭐, 나야 공부 따위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그럭저럭." "우와…. 완전 여유로운것 같은데?" 네리셰는 다소 초조한 표정이었다. … 왜 초조한 표정을 짓는 걸까. 시험에 많은 것이 걸린 평민들과 다르게 그녀의 신분은 귀족이다. 시험 성적에 연연할 이유 따위야- "큰일이네. 나는 공부 하나도 안했거든. 아버지가 이번에도 성적이 떨어지면 용돈을 반으로 삭감한다고 했는데!" … 이유가 있었군. 용돈을 위해서 인가…. 하지만 나는 그녀의 성적으로 인해 용돈의 삭감이 결정된다는 논리의 구조를 이해하진 못했다. 귀족들은 자식이 지식을 습득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손해라도 보는걸까. "하지만 이 시기에 공부하기도 그렇고… 무려 요정 여왕이라고 하잖아? 요정이 그렇게 예쁘다던데, 여황폐하보다도 아름다울까?" "음, 글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강으로 대꾸해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험을 가볍게 말하는 네리셰와는 달리,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시험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나는 그들 사이에 자리한 긴 간극을 바라본다. 그저, 바라만 본다. #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요정여왕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소식 덕분에, 아카데미는 대단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나는 그 소란스런 분위기 안에서 침묵을 지키다가, 장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장서관 내부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란스러움 때문일까… 안에는 평소보다 자리한 인간들의 수가 적었다. "아, 칼리체. 아카데미가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넌 언제나 성실하구나." 장서관의 입구쪽에서 패링이 보고있던 책을 덮으며 나를 반겼다. 그렇게 말하는 이 인간이야 말로… 정말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군. 시선을 힐끗 돌려 그가 보고 있던 책 표지를 보니 『 여왕폐하를 위하여! 』라고 적혀 있었다. 여왕폐하… 라는건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말하는 걸까. 상당히 최근에 출판된 책인가보군. "여왕폐하를 위하여…?" "아, 이 책은- " 패링이 책 표지를 들어보이며 내게 멋쩍은듯 웃었다. "여황폐하께서 아카데미를 방문하신다니, 어쩐지… 흥분이 되서 말이야." 흐음…. 나는 패링이 흥분된다고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 단순히 높은 계급의 사람이 온다는 것에 대해 흥분이 된다고 하는 걸까, 아니면…. "패링 선배님은 여황폐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르는 것은, 언어를 사용해 물어볼 수 밖에 없다. "아, 글쎄…." 평소, 만능의 언어를 통하지 않은 소통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나지만… 이번엔 왠지- 답답함을 느꼈다. "위대하신 분이지. 여황폐하는." 확답하듯 말하는 그 대답에, 나는 단단한 벽을 느꼈다. 위대하신 분이라…. "네거스텐 제국 개국이래, 이정도로 국가의 수준을 끌어올린 통치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 패링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또다시 멋쩍게 웃으며 불경죄가 될지도 모르니까, 라고 작게 속삭였다. "단지 그 뿐인가요?" "단지 그 뿐이라니…? 아니, 그것 말고도 여황폐하는 정치적인 면이나 군사적인 면이나 모든 면에서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했지. 중앙에서 통제하기 힘들었던 지방의 강력한 귀족들을 모두 꺾어 발 아래에 두고, 골칫거리였던 주변의 다른 강국들도 모두 평정해버린지 벌써 십년이나 다되가는걸." 패링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는 내가 약간 열성적이다, 라고 느낄정도로 열렬히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 대해 '찬양' 했다. "난 여황폐하가 완벽한 군주라고 생각해. 여러 귀족들이 난립할 수 없도록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거든. 왜, 예전 역사서에 보면 지나친 권력이 위대했던 통치자들을 망친 경우가 적지않게 있잖아? 여황폐하는 그야 말로 철인이야!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며, 백성들에겐 자애롭고, 적에게는 가차없지." "…."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건… 우리같은 평민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해. 당장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평민이 입학하는것만 해도 사실, 십년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 여기서 배우는 수준의 고등교육은 평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지." 패링의 말이 이어진다. "여황폐하는… 한명의 '완벽한' 인간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면 모두가 얼마나 찬란한 영화를 누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생각해."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숨을 골랐다. 심지어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인간은… 레케트리셴 문 여제, 를 그렇게 생각하는군. 흑색의 좌, 레쥬에브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나가야해' … 라고 했었지. 내 눈앞에 있는 이 패링이라는 인간은,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통치가 훌륭하다면, 역시 상관없다는 쪽일까…? "크흠, 흥분해서 너무 떠들긴 했는데… 어디가서 내가 이런말을 했다는 얘길 떠들어 대면 안되, 칼리체." "아, 왜죠?" 패링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야- 나같은 평민이 감히 여황폐하에 대해 평가했다는 말이 높으신분들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겠어? 이건 불경죄라구 불경죄…." 아, 그래. 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책장쪽으로 다가가 아무책이나 손에 집히는 걸 집어 들었다. # 다음날, 아카데미에 있는 자라면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전 인원들이 나와 입구에서 부터 길게 줄을 이루어 서있어야 했다. 역시 인간이 많다 보니, 시끌시끌한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군중속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거리를 두며, 고개를 돌려 모여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열기를 띈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 레쥬에브, 이런데도 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 은룡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황의 인기는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도 더 거대한듯 하다. "어머, 칼리체. 이런데서 뭐하니? 여황폐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 말고는 일생동안 없을텐데?" 내 뒤에서 누군가 내 등을 툭, 하고 치며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클래스인 네리셰라는 인간과 그녀와 친한 몇명의 인간이 서 있었다. '일생동안' 이라…. 보통의 평민에게는 역시 그렇겠지. 그런 보통의 평민을 연기하고 있는 나도 역시, 여제를 보기 위해 저 군중속으로 파고 드는 연기를 해줘야 하는걸까. 하지만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 "난 괜찮아. 저런데 껴서 파고들 자신도 없고…." "어머? 남자애가 패기 없이 그게 뭐니?" 그녀의 뒤에 있는 인간 한명이 '칼리체는 그런 편이 더 사랑스럽지.' 따위의 얘기를 하자, 그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말없이, 그러한 광경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 저기, 기분 상했니?" 웃음을 터트리다, 네리셰가 뒤돌아 나를 보며 양손을 모았다. 사과… 의 의미인가. 별로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만. "아니, 그런건- " "미안하다는 뜻에서, 여황폐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내가 데려가줄게!" 괜찮다,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셰는 내 손을 잡아 끌고 군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귀족의 권위와 힘을 이용해 길을 열리라고 예상했던 나는 의외로 그녀가 앞에서 인간들의 틈새를 요리조리 파고 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가며, 나는 나 자신이 정말로 인간의 사고방식에 많이 물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들이 형성해 놓은 관념에 의해 예상이긴 하지만, 섣부른 판단을 내리다니…. 하지만 나는 곧 그러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인간의 사고방식 같은 관념의 찌꺼기는, 마음먹기만 하면 아무렇지 않게 털어낼 수 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있을때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취하는게 이치에 맞겠지.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네리셰의 손에 이끌려 대로가 훤히 보이는 가장 앞줄에 도달하고 말았다. 별로, 은룡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여황폐하와 요르간드에서 온 요정여왕께서 들어오십니다." 아, 요르간드…? 인간들은 아직도 그 지명을 쓰고 있나보군. 커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입구쪽에서 여러명의 인간과 요정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들어오는건 역시… 은룡과 칼리아넬 이로군. 그들은 마차도 아닌, 말을 타고 내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은룡의 긴 은발과 황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화려한 차림새… 저 의복으로 말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군. 칼리아넬은 요정이니, 어떤 복장을 하고 있어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은룡 앞에서 말을 몰고 있는 저 남자는…. "음…." 그녀의 또다른 자식인가보군. 인간들의 신분으로 따지자면, 저자가 황자겠지. 그는 약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은룡과 똑같은 은발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아카데미 내부로 진입했다. 그들이… 정확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지나갈때마다, 그 근방에 위치한 인간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인간들이 워낙 많어서인지, 나는 그 광경이 왠지 파도가 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와…! 저 여자가 요정들의 여왕님인가? 요정들은 정말 예쁘구나! 여황폐하에 비해서도 별로 손색이 없어보여!" 네리셰는 칼리아넬의 미모에 집중하고 있나보군…. 나는 은룡과 칼리아넬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네리셰의 뒤쪽에 숨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환호성 따위를 지르는 인간은 없었다. 인간들은 모두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은룡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칼리아넬은… 이런 분위기에 어쩐지 조금 주늑이 든 모습이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군중속에 섞여서 은룡쪽을 바라보고 있는 펠테넨시아 황녀와 흑색의 좌, 레쥬에브를 발견했다. 군중속에 섞인 그들의 표정은 상반되었다. 펠테넨시아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은룡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룡과 눈이 마주쳤는지, 펠테넨시아가 환하게 웃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확인하자 마자, 나는 은룡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은룡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행렬이 조금 앞으로 진행되자, 은룡과 칼리아넬 뒤로, 약간의 거리를 띄우고 간단한 무장을 한 기사들과 요정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들의 선두에 서있는건… 백색의 좌, 리체르아. 그녀는 갑옷도 입지 않은 간단한 차림새에 검 하나만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저 검은… 백색의 좌의 '광휘' 겠지. … 은룡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존재감을 지웠다. 아무리 은룡이라해도 이 속에 섞여있는 나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은룡이 지나가고, 나는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들어올렸다. 허리를 들어올리자 마자 보이는건, 레쥬에브였다. "아…." 그녀의 주변 모든 인간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녀 혼자만이 허리를 숙이지 않고, 투명한 자색 눈동자로 은룡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군중의 시선은 은룡에게로 집중되어 있었기에, 레쥬에브가 허리를 숙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인간은 몇 되질 않는다. 하지만… 은룡을 수행하고 있는 무장을한 인간들은 모두 그녀의 '불복종'을 알아보지 않겠는가. 은룡은… 레쥬에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에서 은룡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살짝 보이는 은룡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것 같았다. #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요정 여왕인 칼리아넬이 지나가자, 모여있던 인간들은 곧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틈에 섞여 흩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나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 고요히 서있는 레쥬에브를 바라보았다. 은룡과 그녀를 수행하는 인간들은 허리를 숙이지 않는 레쥬에브를 못본척 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 이후로, 레쥬에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채, 마치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있었다. 저건… 무슨 표정일까. "…."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저 이 공간에 그녀와 같이 서서, 그녀를 바라봐 주고 있을 뿐이다. 레쥬에브와 은룡 사이에 어떤 교감, 혹은 대화가 오갔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레쥬에브는 곧 정신을 차렸고, 주변을 둘러보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다. "어리석었어." 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 보였다. "어리석었지…. 하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어. 바로 그 기만적인 가식을 벗겨내고 싶었어.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볼 생각도… 했어." …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 대한 레쥬에브의 증오는 내가 상상했던것 보다 더 거대했다. 아마, 그녀에겐 '흑색의 좌' 라는 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자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도 그녀에게 '인간'을 강조하는 걸까.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비극이다. 나는 은룡의 뒤를 따라오던 한 명의 인간이 있음을 기억한다. 그녀의 이름은 리체르아. 레쥬에브와 똑같이 인간의 가장 커다란 신비를 갖고 있는 '백색의 좌' 이다. 과거에, 그녀 역시 레쥬에브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해서' 마왕을 쓰러트리려 했다. 레쥬에브 역시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서' 레케트리셴 문 여제, 은룡을 쓰러트리려 한다. 나는 그녀들이 필연적으로 가까운 미래에 부딪칠 것을 확신한다. 인간의 가장 큰 신비를 가진 단 두명뿐인 백색의 좌와 흑색의 좌가…. 은룡으로 인하여- 난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신…!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였던가요?" 등 뒤에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레쥬에브의 얼굴이, 곧 당황으로 물들었다. 팔짱을 끼고,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건 펠테넨시아 황녀였다. "황녀 전하…." 레쥬에브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예를 취했다. 하지만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예라는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보였다. 펠테넨시아 역시, 레쥬에브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예,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입니다." "제국의 명가(名家)중 하나인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가 그 군중들 앞에서 감히 여황폐하께 정면으로 반(反)하는 태도를 보이다니, 그게 용납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레쥬에브는 아무말 없이, 펠테넨시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펠테넨시아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레쥬에브가 어째서 여황에게 반기를 드는 건지…. 레쥬에브도 그 이유에 대해 그녀에게 말을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 는." 황녀의 시선이 나에게 돌려진다. 열기를 머금고 있던 눈동자가 나에게 머무르면서, 희미하게 흐려진다. 쉽게 느껴지는 그녀의 강렬한 감정에 나는 다소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왜 여기있는거니, 칼리체?" "저는- " 답을 하려다, 레쥬에브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흥, 하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해명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도움을 주지는 않겠다는 거로군. 그럼… 어쩔수 없나. "레쥬에브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거든요." "뭐…?" 펠테넨시아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는 무척 놀란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의외로, 저쪽에서 모른체 하고 있던 레쥬에브도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은 왜 저러는거지…? "칼리체 네가- " "…." "그렇담, 나와의 만남도… 의도적인 거였니?"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조금 씁쓸함을 느끼며,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황녀 전하와의 친분엔 아무런 의도도 없었어요. 그건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펠테넨시아는 완전히 믿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더 추궁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 내가, 이런식으로 다른 인간과 직접적으로 반(反)하는 일이 있었던가? 난 이런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의 사회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런일을 겪는것도 어쩔수 없겠지.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경고하는데, 칼리체. 몸 성히 아카데미를 다니고 싶다면, 그녀와의 친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게 좋을거야. 여황 폐하께서는… 그녀의 노골적인 반기(反旗)에 대해 아무말씀도 안하셨지만, 난 결코 그렇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상처입은 동물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주저하는 그 발걸음이, 나로하여금 내가 했던 말을 스스로 부정하길 원하는듯 해보였지만, 나는 그녀를 붙잡지도, 그 이상 변명하지도 않았다. 나는 말없이, 그녀가 모습을 완전히 다 감출때 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칼리체." "무엇이?" 갑작스런 레쥬에브의 사과에, 나는 머리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펠테넨시아 황녀 말이야. 나는 너와 그녀가 그렇게 깊은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어. 황녀가 너에게 왜 여기 있냐고 물었을때, 내가 적절히 변명을 해 줄 수도 있었는데… 난 그러지 않았어." 아, 그런 얘기인가…. 확실히, 레쥬에브가 다른 말을 해주었었다면, 펠테넨시아 황녀가 나로 인해 저렇게 상처받을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황녀도 알게 될 일이었지. 너와 내가 여황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걸 말이야."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레쥬에브 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 내 말에 이상한 점이 있었을까…? 레쥬에브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군… 그녀의 주위를 감돌던 차가운 껍질같은게, 순식간에 벗겨져 버린 느낌이다. … 그것에 대해 통찰해 보는건 그만두기로 했다. 오늘은 표정만으로 그 인간의 감정 변화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나 자신이 인간에게 많이 물들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감정이란건 내가 완전히 알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것 같다. "나는 레쥬에브, 네가 진심으로…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몰아내는데 성공하길 바래." "응? 어… 으응. 그래야지." 그래….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 한다.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의 갈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에 드래곤 같은, 외부의 힘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의외인걸…." 레쥬에브가 거의 속삭이는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가?" "나는 네가 그렇게 딱 잘라 내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어…. 상대는 제국의 황녀이고, 너는 아무런 힘도 없는 평민이니까. 솔직히, 가능성 없어 보이는 여제의 실각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황녀에게 말 할 필요는 없었어. 너 자신을… 걱정해야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그녀에게 평범한 평민이 아니라는 인식을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힘이 없든 있든, 그녀는 강한 인간이고, 여제를 실각시키려는 의지를 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에, 나는 적지 않은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냥… 그 뿐이다. "바보." "응?" "바보라구. 용감하다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거야. 나같은 대귀족도 아니고 일개 평민이 자기 안위도 생각치 않고 그렇게 말하다니." 이그-! 하는 소리를 내며, 레쥬에브는 내 팔을 살짝 꼬집었다. 그 고통에, 나는 찔끔, 하고 그녀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섰다. 바보 라고 말은 해도… 기분은 꽤 좋아보이는군. "뭐, 걱정하지마. 여제도 아니고 힘없는 황녀 정도야… 아직 메르시오 가(家)는 예전의 위세를 잃긴했어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건재 하니까." 보호… 해 주겠다는건가? 솔직히 별 필요는 없다만… 나쁜 기분은 아니군. 그나저나, 힘없는 황녀라…. 펠테넨시아에게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 은룡과 칼리아넬은 잠시 동안 이 아카데미 내에서 머무를 예정인듯 했다. 둘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가장 큰 건물인 중앙탑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주위를 무장을 한 인간 병사들과 요정들이 에워싸고 경계를 섰다. 나는 멀찌기서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탑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끝이 보일 정도로 길었다. 이 탑을 지은 의도가 하늘에 닿기 위해서 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 주변의 경계를 서는 요정들은 이따금씩 탑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아마 이 정도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인간의 기술력에 감탄하는 듯 싶었다. 은밀히 강력한 마력을 개방해 내게 쏟아져 내려오는 빛을 투과시켰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빛이 몸을 투과하도록 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마력이 필요했고,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는 발휘 할 수 없는 힘이었지만, 나는 등쪽에 용의 날개를 돋아나게 하는 것으로 그것을 해결했다. 날개가 돋음에 따라 찢어진 상의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옷 조각들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내 마력에 의해 조그만 흔적 조차 남기지 않고 가장 작은 단위로 분해되고, 또 분해되었다. "…." 나는 내게 적용되는 중력을 반전시켜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인간 병사들과 요정들은 내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빛을 무한대로 투과하게 함으로써 몸이 투명해진 까닭이다. 나는 그들을 잠시 내려다 보다가 탑쪽으로 다가갔다. 칼리아넬 정도라면 내 마력행사를 은폐하는건 간단하지만, 상대가 나와 같은 드래곤인 은룡이라면 거동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게 좋겠지. 나는 강력한 마력에 의해 주변의 대기가 밀려 나려는 것을 더 강력한 마력을 이용해 그것들을 고착시키면서, 탑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탑의 곳곳에는 뻥 뚫린 창 들이 있어 안을 살펴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레테닌시에스케와 칼리아넬은 그다지 높은 곳에 있지 않았다. 칼리아넬이 창가 쪽으로 몸을 내밀고 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굉장하네요. 이 정도로 높은 탑이라니… 세계수 보다도 높은것 같아요. 아, 나중에 좀 더 높이 올라가 볼 수 있을까요?" … 여왕이라는 높은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칼리아넬의 얼굴은 천진해 보이기 까지 했다. 그녀의 뒤쪽으로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죠. 하지만 다리가 굉장히 아플 텐데요…." 흩날리는 칼리아넬의 머리카락 뒤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건, 은발을 길게 기른 인간 여성이었다. 레케트리셴 문이라는 인간을 연기하고 있는… 은룡이다. "괜찮아요. 요정의 다리는 아주 빠르고 튼튼하거든요." "아… 그런가요?" … 대화가 꽤 일상적이군. 예상과는 달리, 은룡은 칼리아넬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었나보다. "그런데 이곳은… 아카데미, 라고 했나요?" 칼리아넬은 몸을 빙글 돌리고는 은룡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그렇답니다." "교육 기관… 이라고 했었나요? 그런데 인간들은 어째서 이런 기관이 필요한 거죠? 지식을 위한거라면 나이를 많이 먹은 일족의 어른에게- " "인간들은 요정들 만큼 수명이 길지 않답니다, 요정 여왕님." 칼리아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룡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수명이 길지 않은 우리 인간들은- " '우리 인간' 이라…. 너무나 어색하군, 은룡. "한 생에 동안 이룰 수 있는 것이 극히 한정 되어있지요. 때문에 교육 이란 것을 통해 지식을 전승하고, 발전시키는 거에요. 만약 교육이 없다면, 인간이 발전 할 수 있는 한계는 고작 해봐야 한 세대의 수명 정도겠지요?" "그렇군요…. 인간들은 수명이 짧으니까…." 계속해서 은룡과 칼리아넬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 중에 내가 신경써서 들을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둘은 즐겁게 대화를 하는 듯 했고, 은룡은 칼리아넬에게 정체를 드러낼만한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 그저 친선 교류인가. 나는 한동안 그들을 지켜보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를 잇는 휴게실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나는 필연적으로 휴게실로 먼저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휴게실 내로 진입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건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였다. … 평소 휴게실은 젊은 인간들이 내뿜는 활기로 가득했었는데, 무슨 일이지? 대충 일의 소요를 파악만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나는 휴게실의 중앙에서 소로를 노려보며 대립하고 있는 두 소녀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펠테넨시아와 레쥬에브였다. 펠테넨시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지금껏 본적 없는 싸늘한 눈길로 레쥬에브를 바라보고 있었고, 레쥬에브는 푹신한 의자에 앉은채 무표정한 얼굴로 펠테넨시아를 마주보고 있었다. "휴게실에서 벌일 일은 아닌듯 하니… 오늘은 이만 하지요." 내가 들어온 시점이 소강 상태였는지,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정도에서 마무리 될 듯 했다. 펠테넨시아가 여자 기숙사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가볍게 눈 인사를 보냈지만,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날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여자 기숙사 쪽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 음, 완전히 미움받고 있군. 주변에서 구경을 하던 다른 인간들은 웅성거리며 모두 흩어져 버렸고, 레쥬에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다가, 그녀 역시 여자 기숙사 쪽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정말, 무슨일인지 모르겠다." 내 어깨를 툭치며, 말을 걸어온 것은 카리에르제였다. 그는 심란한 얼굴로 그녀들이 올라간 여자 기숙사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메르시오 가(家)가 펠테넨시아 황녀와 척을 친건가?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서야…." "그녀가 걱정돼?" 내 물음에 카리에르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내 등을 짝-! 하고 내리쳤다. 그는 당치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약혼녀 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와 그녀는 사이가 안좋다고! 걱정은 무슨. 다만- " 카리에르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너한테 이런 말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냐, 라고 중얼 거렸다. 그는 곧 손을 저으며 내게 말했다. "신경쓰지마. 메르시오 가(家)쪽에서 황녀와 척을 칠만한 일이 있었나, 하고 생각해 본것 뿐이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 하지만 카리에르제는 이 일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듯 했다. … 말과 행동이 다른 인간이군. 나는 그에게서 얻어맞은 등을 문지르며 내 방으로 올라갔다. # "오랜만이네, 칼리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별로 반갑지 않은 인사가 나를 반겼다. 나는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앉아 별다른 생각없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산 너머로 완전히 가라앉고,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 침묵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공간을 맴돌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창밖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빛이 모두 사그라들때까지. 나와는 반대편에 있는 침대에 앉아있던 로나벨아크하임이 입을 열면서 침묵은 깨졌다. "정령과는 벌써 만났었나 보군." … 나는 화룡의 그 한마디에 많은 생각을 했다. 아주 많은 생각을. "알고… 있었군."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유지된 침묵에서 아주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화룡과 은룡만이 모든걸 알고, 내가 모르는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군. 나는 '앎'의 한계를 느꼈다. 그것은 내게 익숙한 경험이 아니어서,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에, 나는 매우 드물게 소리내어 웃어 보였다. 서로의 침묵만이 감도는 이공간에, 작은 내 웃음 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갔다. 화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 밖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다른 존재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한건가…? 하지만 나는 곧 묵묵히 그 초조함을 흩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겠지. 그 때문에 미래까지 조작한 내가, 원하는 것에 가 닿지 못할리가 없다. 언제나처럼 시간을 흘려내기만 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얻은 후엔 아마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손을 허공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으갹- 하는 이상한 신음 소리가 절로 새어나옴과 동시에 계속해서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느라 혹사 당한 근육들이 어느정도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세계는 유한하다."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던 화룡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적의마저 담겨 있는것 같았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남긴 말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로나벨아크하임은 가볍게 나의 말을 긍정했다. 그 가벼움엔, 정말로 아무런 막힘이 없어 나는 조금 미심쩍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제일 먼저, 나에게 요르간드 외부의 일을 겪어볼 것을 종용한건 이 녀석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짧은 여행동안, 몇번 정도 이 녀석과 마주친 적이 있었지. 그것은 우연이었나…? 내가 현재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요르간드 바깥 세계의 일을 겪어 보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종용한건 로나벨아크하임. 지금 내 옆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는 것도 로나벨아크하임. … 모순이로군. # 나는 아침 일찍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대편을 보니 로나벨아크하임은 여전히 잠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그에게 다가가 코에 손을 갖다대어 보았다. 손에는 느릿하고 규칙적인 숨결이 전해져 왔다. 그는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군….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이 정도로 정교하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수면에 빠지는건 당연하겠지만… 이 녀석이 진지하게 인간을 연기하는건 왠지 납득하기 힘들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다시 수업이 시작되는데…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의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동안 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씻고, 기숙사를 나섰다. 아직 고요한 교정을 걸어, 강의실로 들어왔다. 드륵-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큰 강의실 내에 메아리가 퍼지듯 잠깐 동안 울렸다. 큰 창문으로 맑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맨 뒤쪽 자리로 걸어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은 뒤,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책상위에 펼쳤다. 종이라는 하얀 매체위에 검은색 잉크로 쓰여진 인간들의 문자가 보였다. 펜을 꺼내어, 잉크가 쓰여지지 않은 공간에 낙서를 해보았다. 이 '낙서'라는건 최근에 배운건데,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지루함을 느끼는 인간들이 그 지루함을 잠깐동안이나마 잊어버리고자 만든 간단한 유희거리였다. 전에 클래스의 어떤 인간의 책을 잠깐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인간의 책은 온통 낙서 투성이로 되어있었지만, 간단한 유희거리로 한 낙서라고 하기엔 상당한 수준이어서 잠깐 놀란 적이 있었다. '지식의 전승' 이라는걸 배우는 인간도, 가르치는 인간도 모두 긍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도 몇몇 있었던것 같다.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창가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발견했다. 짹- 소리가 들리더니, 새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새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펜으로 책에다가 그 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새의 모습은 한번 본 것으로 족했으므로, 나는 다른곳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얀색 종이에만 신경을 쏟으며 새를 그렸다. "…." '그림'이라는 것에 익숙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꽤 잘그린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펜을 놓았다. 문득, 인간들이 왜 그렇게 타인을 갈구 하는지 진정으로 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그린 그림으로 인한 것이지만… 인간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평가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지. … 쓸데 없는 생각들이었다. 나는 펜으로 꽤 잘그린듯한 새의 그림을 찍찍 그어 지어버리고는 의자를 조금 뒤로 젖혀 편한 자세로 강의실 안을 바라보았다. 너무 일찍 나온 탓일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 강의실 안으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나는 살짝 잠이들었고 정신이 들었을땐 꽤 많은 인간들이 강의실로 들어온 후였다. "잠이 부족했어?" 부드러운 와인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 카리에르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꽤 오랫동안 인간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 깨달은건데, 나는 햇빛을 받고 있으면 몸의 피로와는 상관없이 그냥 잠에 빠져드는것 같다. 내가 용의 몸을 하고 있을때, 오랫동안 태양이 지고, 뜨는것을 계속해서 바라만 본것과 관련이 있을까…? "평소와 다르게 꽤나 시끄럽네." 카리에르제는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의 말대로 주변은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시끄러웠다. 여러 인간의 말 소리가 섞여, 내게는 그냥 웅웅- 거리는 소리들로만 들려왔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들이 모두 하나 같이 요정여왕과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카리에르제가 가방에서 여러개의 종이 뭉치들을 꺼내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요정 여왕에 대해 관심 없니?" "글쎄… 먼 발치서 바라만 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그들이 확실히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겠더라고. 평범한 인간과는, 뭐랄까- 존재감이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 음…. "관심있나보네?" "멍청이." 카리에르제는 냉정하게 말하며, 들고 있던 종이뭉치로 내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건 말그대로 그냥 종이뭉치일 뿐이라서 하나도 아프진 않았다. "이제 조금이야…. 조금만 더 하면 내가 그렇게 꿈꾸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걸 볼 수 있는데 내가 다른것에 정신이 팔릴수 있겠어?" 그는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가볍게 흔들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 어느때 보다도 밝아 보이는 미소였다. 나는 턱을 괴고, 그가 구겨진 종이뭉치들을 조심스럽게 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걸… 조금만 더 하면 현실로 다가오게 할 수 있다고…? 나는 현재, 나 자신이 조금 동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리에르제가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비공정' 이라는 물건이다. 그는 지금 그것의 완성을 거의 목전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채 완전히 성장하지도 않은 인간 소년 단 한명이 그것의 이룩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건가…? 나는 솔직히 이 작은 인간 한 명이 그것을 이 시대에 이루어 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챈 인간이 있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꽤 놀라게 하는군…. 나는 굳이 만능의 언어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사용하는 불완전한 언어에도 온전히 진심을 담을 수 있다는걸 보여주듯이, 그에게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정말… 기대하고 있어." "완성하게 되면 너에게 제일 먼저 보여줄테니까… 그래, 그렇게 기대하고 있으라구." # 하루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오늘따라 잠이 오질않아 기숙사 앞으로 나와 작은 연못가 앞에 앉아있었다. 손에 잡히는 작은 돌을, 연못가 안으로 던져 보았다.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연못가 안에 떠있던 풍경이 이지러졌다. 하지만 그런 이지러짐은 잠시였고, 연못은 곧 잠잠한 표면으로 돌아왔다. 상상해보았다. 카리에르제가 말하는 '비공정'은 어떤 물건일까, 하고. 물론, 그것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물건이라는건 알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원리로, 어떤 방식을 이용해서 하늘을 나는걸까? … 순수한 마법이 아닌, 마도 공학만으로 어떤 물체로 하여금 하늘을 날게 하는건 인간들에게 있어선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카리에르제에겐 특히 더 그랬겠지. 그런데 카리에르제가 보여주겠다는건 단순한 이론일까, 아니면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서 나마 실제로 물체가 하늘을 나는걸 보여주겠다는 걸까? 나는 그런 한가로운 생각들을 하며, 다시 한번 연못가로 돌을 던졌다. 흐려진 물의 표면은 내 모습도, 별도, 달도… 모든것을 어지러트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물의 표면은 아까처럼 다시 잔잔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잔잔하게 돌아온 물의 표면에서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내 뒤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역시, 이 아카데미 라는 곳에 계실줄 알았어요 칼리체 님." "칼리아넬…." 그녀는 내게 다가오더니, 내 옆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 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라는 질문은 필요 없겠다. 그녀는 드래곤인 나를 시야 안에 두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의 요정이니까. "여왕이라는 자리는 역시 불편하네요. 칼리체 님이 이곳에 계시다는걸 알고 바로 만나러 오고 싶었는데…." 약간 투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한 뒤, 칼리아넬은 내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어리광 부리는것 같나요?" "글쎄…." "농담이에요. 저도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인채는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대로다. 앞으로 흘러내린 녹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섬세한 손가락이나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몸의 아름다운 굴곡이 이제 칼리아넬을 어린아이라고 말하기엔 어렵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체님은…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건가요?" "…." "역시, 인간들과 관련된 일이겠죠?" 칼리아넬은 빠르게 물러서며,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네거스텐 제국의 지배자… 레케트리셴 문 여제 라고 했던가요? …인간이 아니더군요." 역시, 알아차린건가. 칼리아넬은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한것 같다. "그녀는 아마도 칼리체 님과 똑같은 드래곤이겠지요?" "그래. 그녀는 실버 드래곤. 은룡, 레테닌시에스케다." "어째서 인간들의 여제를 하고 있는 걸까요?" 칼리아넬은 의문조로 말하긴 했지만, 궁금해서 묻는다는 투는 아니었다. 나는 호수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나와 마주하는 칼리아넬의 눈빛이 왠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어째서 칼리체 님은… 은룡이라는 분처럼 하지 않는 걸까요?" "무슨 뜻이지?" 그녀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내 어깨에 기대었다. 요정들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칼리아넬은 내 어깨에 기댄채, 마치 속삭이듯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봤을때, 현 시대의 인간들은 포화 상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발전해 있어요. 이 페트라발름에 있는 다른 어떤 종족들 보다도. 압도적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에요." "…." "그것은 은룡이라는 분이 인간들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드래곤이란 존재는 이렇게 개입하는것 만으로도 한 종족이라는 범주(Category)자체를 몇단계나 끌어올릴 수 있어요. 칼리체 님도…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좀 더 본격적으로 나서도 되지 않나요?" 그렇게 속삭이는 칼리아넬의 목소리가 마치, 유혹하는것 처럼 들려왔다. 좀 더 본격적으로… 라.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 역시 은룡처럼 전면에 나선다면 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더 신속하고, 편하게 얻을 수 있겠지." 칼리아넬은 아무말 없이 계속해서 내 어깨에 머리를 묻은채 내 말을 들었다. "네 말대로 드래곤은 강력한 존재다. 은룡처럼 통치하는 것 만으로 한 종족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고, 인간들이 위대한 업적이라 칭송할 만한 것도 수십개는 손쉽게 달성할 수 있겠지." 나는 잠시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햐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을 한 드래곤을 영웅이라 믿으며, 자신들이 불합리한 현실을 한순간에 바꾸어 버리고 모든걸 이상적인 방향으로 처리하것을 믿으며- " 영웅…. 걸맞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은룡역시 이곳에선 이곳의 인간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퇴보하는것이나 다름 없어." 그래… 흑색의 좌가 내게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나아가야 해' 라고 말했었던 것 처럼, 나 역시. "나는 인간들이… 영웅이란 존재 없이 나아가기를 원한다." 칼리아넬은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침묵을 지키며 잠깐동안 함께 연못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연못엔 물고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찰박- 하고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칼리체 님은 정말… 변하지 않는군요. 저는 이렇게나 변했는데…. 그래서 이렇게나 성장 했는데도 칼리체 님을 의지하는 걸까요?"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칼리아넬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칼리체 님, 부탁이 있어요." 칼리아넬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나는 그것을 쉬이 넘기지 않고,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어질 뒷 말을 기다렸다. "이곳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게 되면, 요정들의 왕국에 와서… 제가 죽을때 까지만 저와 함께 사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아넬은, 여전히 내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죽을때 까지… 라고 해봤자, 내게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다. 칼리아넬이 바라는건, 그 찰나와도 같은 나의 시간인가. 고작 그것이라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가, 그녀에게 대답해 주었다. "알았어." "… 약속이에요?" 응석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군. 나는 그녀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다시한번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약속할게." # "전 칼리체 님의 긴 머리카락을 정말 좋아했는데… 아쉽네요." 칼리아넬은 어깨에서 잘려나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그날 밤 칼리아넬과 나눈 마지막 이야기가 되었다. "다음에 칼리체 님을 뵐 때는,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가 되겠네요." 그리고 칼리아넬은 느린 발걸음으로 내게 등을 보이며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어둠속에 마치 녹아들어가는 칼리아넬의 긴 녹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잠시 멎었던 밤 벌레들의 우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날, 칼리아넬과 은룡은 아카데미에서 더 머무르지 않고, 금방 떠나버렸다. 그들이 떠나가자 소란스러웠던 교정이 조용해진 느낌이다. 그들이 떠나자, 오후 부턴 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불만이 폭발할듯 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이런저런 행사로 학업이 너무나도 많이 밀려 어쩔수 없다는것 같았다. 나는 불만의 기색이 가득한 인간들 사이에 앉아, 목소리의 고저가 없는 교수의 이야기를 흘리듯 들었다. 교수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진 않았지만, 그 내용은 내 기억의 언저리에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 나가고 있었다. "… 후로 우리 인간은 많은 발전을 거두고- " 교수의 목소리가 자장가라도 되는듯, 내 앞에 앉아있는 인간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질듯 말듯 까딱거렸다. 나는 그 까딱거림에 어떤 박자라도 있는게 아닌가, 하고 그 뒤에서 머리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머리의 움직임에 따라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교수는 이쪽의 태도불량을 눈여겨 보고 있는듯 했지만, 딱히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기술과 마도공학의 발전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요." 흥미로운 이야기군. 인간들도 스스로의 정체를 눈치챘다는건가? "지금까지 발전 속도의 그래프가 수직에 가깝게 치솟고 있는것과는 반대로 말이지요.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인류의 한계다, 라고 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비단 저 뿐만 아니라 제국의 고위 관료들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국내 최고의 교육기관인 우리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대한 지원이 끊이질 않는겁니다." 예산 역시 아주 높게 책정되어 있지요, 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 교수의 억양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졸고 있던 자에겐 큰 자극이었는지, 내 앞에서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던 인간이 깜짝놀라 고개를 세웠다. "열심히 하셔야 되는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에- 하는 김빠진 대답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교수는 탐탁치 않은 얼굴을 한 채 품속에서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지금까지의 수업에 대한 테스트가 시작되니, 모두들 열심히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는 곧 강의실을 나갔다. 결국, 내 앞에서 고개를 까딱거리며 졸던 인간은 그대로 앞으로 엎어져 버렸다.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수식이 무색하구나. 안 그래?" 옆에 앉아있던 카리에르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확실히 강의를 듣는 태도가 바르지 않은것 같긴 하군. 그래도 개중엔 열심히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그 중엔 레쥬에브 역시 껴 있었다. 그녀는 교수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모양 좋은 펜으로 빈 종이에 계속 필기를 하고 있었다. 망각이 있는 인간들에게, 저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카리에르제의 공책을 보니, 한 페이지 잔뜩 낙서가 되어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그는 씩 웃으며 내게 공책을 내밀었다. "왜…?" "다른 페이지도 봐." 다른 페이지…? 공책의 앞쪽으로 페이지를 넘기자, 강의의 내용과는 완전히 별개인듯한 낙서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개중엔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 단순히 낙서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그림도 있었다. "쓸데 없이 수준이 높은거 아냐?" 옆에서 네리셰가 내 어깨 쪽으로 고개를 집어 넣으며 끼어들었다. "쓸데 없다니? 맙소사, 이건 예술이라고…! 넌 너네 집에 걸려 있는 수준높은 그림을 감상하면서 아, 쓸데 없이 수준이 높구나- 라는 생각을 하냐?" 카리에르제의 반론이었다. 네리셰는 그의 반론에 할 말을 잃은듯 벙찐 표정이었다. 곧 그녀는 원래의 표정을 회복하고, 어이가 없다는듯 팔짱을 낀채 카리에르제를 흘겨 보았다. "흥, 예술도 예술 나름이지. 강의 시간에 필기 대신 낙서한게 예술이 된다는 소리는 전혀 들은적이 없는데?" 카리에르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낙서는 왜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이런 고정관념이 아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인류 발전에 저해되는 요소 중 하나라고." "이-! 자꾸 말도안되는 소리 할래!?" 네리셰는 카리에르제의 뻔뻔함에 화가 난 듯 했다. 나는 그들의 다툼을 흘려 들으며, 카리에르제의 공책을 천천히 넘겨 보았다. 그의 낙서엔 하늘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 거대한 뭉게 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 하늘을 날고 있는 날개 가진 인간. 일출… 그리고 일몰. 흐음, 이 낙서는 카리에르제의 욕망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던 내 손이 어느 한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그건 어떤 인간의 옆 모습이었다. 어깨까지 기른 짧은 머리카락에, 섬세한 얼굴 선… 시선은 앞을 응시하는 듯 마는듯, 흐릿해서 구별이 가질 않았다.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힘겨운듯, 손이 약간 떨린 흔적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진짜 같이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건… 내 옆모습이로군. 내 스스로의 옆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때, 잘 그렸지?" "응." 카리에르제의 물음에 긍정했다. "어디 봐봐." 네리셰가 내 손에서 공책을 뺏어들더니 그림을 보았다. 그림을 보고 치떠지는 그녀의 눈이 순수한 놀람을 담고 있었다. 카리에르제는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거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와는 반대로 네리셰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때?" "그래, 이건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겠군." 네리셰가 분하다는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네리셰가 놓고 간 그림을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 보았다. 이 그림엔 상당히 흥미가 간다. 이 그림이야 말로, 내가 인간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나 진배없으니까. 그림을 자세히 살피던 나는, 그림의 내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 있는걸 발견했다. 웃음… 이군. 내가 강의를 들으면서 항상 미소를 띄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음…." 카리에르제를 힐끗 보니, 그는 창가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짧은 와인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는게 보인다. 그림은 내 모습과 정말로 흡사했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 희미한 미소…. 나는 내가 인간의 강의를 들으며 웃음짓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이것은… 카리에르제의 주관이 상당히 섞여있는 것이겠지. 이게 카리에르제에게 보이는 내 모습인거다. 난 그림을 보며, 그림안에 있는 내 모습을 따라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 * * 강의는 오후부터 시작되었지만 다음날은 주말이란 이유로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다. 강의를 마치고 분분이 흩어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나는 다음날 주말이라는게 어째서 강의가 일찍 끝나게 되는 이유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방을 챙겨 어깨에 걸치고 강의실을 나왔다. 다음주에 있다는 시험 때문인지, 대부분 인간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창 밖을 바라보니 하늘 가득 먹구름이 낀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 했다. "칼리체, 기숙사로 돌아가는거니?" "아, 응."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 네리셰가 그녀의 친구인듯한 여성들과 함께 있었다. 그녀들은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며 이쪽을 향해 이해하지 못할 시선을 보내왔는데 네리셰가 그런거 아냐! 라고 일갈하자 수군거림이 멈췄다. "그럼 안녕! 나 주말간 저택에 있을거라 그동안은 못볼거야." 네리셰는 그렇게 말하며 밝은 표정으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응, 잘 지내." 나는 그렇게 답하고,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손을 흔듬, 몸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기호…. 점점 익숙해 지는군. 그녀들은 곧 입구쪽으로 사라졌다. "…." 잠시 그대로 멍하니 서서,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잔뜩 몰려 있는 먹구름에 태양은 빛을 잃을듯 말듯, 희미한 붉은 색으로 반짝거렸다. … 태양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복도가 조용해졌다는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창밖에서 내리는 비가 투둑, 하고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우산같은건 가져오지 않았는데. 평소 같으면 그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왠지 내키지 않는다. 나는 입구쪽으로 발을 내딛으며, 머리 위로 간단하게 물리력을 갖는 마력장을 둘렀다. 동그랗게 형성된 마력장에 진행이 막힌 빗물이 내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밟고 있는 대지는 잠시동안이나마 빗물에 젖는걸 피할 수 있었다. 다른 인간들은 모두 기숙사쪽으로 돌아간 모양이고… 때문에 내가 마력을 행사하는걸 볼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상당히 많이 내린다. 쏴아- 하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빗물에 미처 배수로로 빠지지 못한 물들이 평평한 바닥에 물길을 만들어 내었고, 그런 물을 차단하지 못한 내 신발에 적게나마 물기가 스며들었다. 차갑다….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와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이것을 단순히 소리 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간단히 수식을 해보자면, 높낮이가 다른 음이 조화를 이루어내면서 만든 듣기 좋은 소리…. 아, 이건 인간들이 음악이라고 칭했던 것이군. 눈을 감고, 그것을 감상했다. 나는 인간들이 음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것이 빗소리와 썩 잘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음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방금과는 다른 느낌의 음이었다. 그리고 그 음에는 희미하게나마 마력의 힘이 깃들어있어 내 흥미를 끌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음에 마력의 힘을 깃들여 특정한 의도를 꾀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음에 마력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확연히 느껴지는 이 마력 패턴은… 흑색의 좌의 것이로군. 나는 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꿰뚫고, 내 시선은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목재… 로 만들어진듯한 커다란 사물 앞에 앉아 길고 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치고 있었다. 손가락이 그 사물을 건드림과 동시에 음이 퍼져나가는걸 보니, 아마도 저 사물이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라는 물건인 모양이다. 약간 흥미가 인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평소엔 잘 사용하지 않는듯한 건물이었다. 잘 청소되어 있긴 했지만, 건물 구석 군데군데에는 아직까지 치워지지 못한 먼지들이 관심받지 못한 시간과 함께 쌓여있었다. 나는 희미한 촛불로 밝혀진 복도를 걸으며,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음은 느긋하게 이어지다가 빠르게 이어지기도 하고, 그 간격에 따라 긴장감을 주기도 했고, 나른함을 주기도 했다. 음악이란건…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흥미로운 것 같다. 어느새 나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꽉 닫혀지지 못한 문 틈으로 레쥬에브가 눈을 감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런 동작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허공에 가득 떠서 조정되고 있는 그녀의 마력체계를 발견하였다. 소리와 함께 느껴지던 마력의 정체는 이것이었나…. 나는 벽에 기대어 그녀의 연주와 그녀의 마력체계를 동시에 감상했다. 흑색의 좌…. 인간들의 가장 큰 두개의 신비중 하나. 그 마력체계는 당연하게도, 보통의 인간들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허공에 펼쳐진,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신비가 수많은 톱니바퀴에 의해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근원에 맞닿아 있는 신비. 그것을 구성하는 톱니바퀴 개개의 수준도, 인간들의 수준에선 납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드래곤인 내게 빗댄다면 그녀가 이루고 있는 마력 체계 전체가 나의 마력체계의 작은 톱니바퀴 보다 못할테지만, 그런 비교는 상당히 가혹하겠지. 아니, 나는 그런 모든걸 떠나서 그저 그녀의 마력체계가 이루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 자체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탑 같다. 레쥬에브는 긴 손가락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이미 하나의 계(界)를 이룬 그녀의 마력체계를 조율하고 있었다. 조율은 단순히 효율성이라는 일방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군더더기 없는 그 단순함이, 그것이 이룬 극한의 정교함과 대비되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곧 연주는 멈추었고, 그녀는 팔을 아래로 내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벽에 기대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꺅!" 이런, 놀란 모양이군. "여기서 뭘 하는거야!" "길을 가는데 듣기 좋은 소리가 들리길래…." 듣기 좋은 소리 라는 칭찬 때문일까, 화난듯 치켜올라간 그녀의 눈썹이 약간 내려오는걸 발견했다. "아직도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단 말이야?" 레쥬에브는 품속에서 작은 시계를 꺼내어 보더니 말을 이었다. "수업이 끝난지 거의 네 시간이 다되어가는데…." "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그러는 너야말로 돌아가지 않고 뭐하는 거야? 다음주에 바로 시험이 시작되는데." 그렇게 말은 했는데… 그러고보니 그녀에게 시험이란건 별 의미가 없겠군. 레쥬에브는 이 사회에서 높은 계급에 속한 인간이니까.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시험은 원래 평소 실력대로 보는거야. 난 시험기간이 다가온다고 특별히 공부 시간을 늘리거나 한 적은 없어." 상당히 치기 어린 목소리로군…. "그런데 너… 봤어?" 무슨 이유에선지 약간의 머뭇거림이 들어간 물음이었다. 목적어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나는 금방 그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한 마력체계였어." 담백한 칭찬이었다. 그녀의 마력체계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훌륭했으니까. "음… 그러고보니 너도 마력의 힘을 사역할 줄 아는 자였지!" 레쥬에브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듯, 손바닥을 짝- 하고 치며 말했다. 그 동작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잠시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왔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야 마력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편이 아니니, 그녀는 내 수준이 형편없는 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기억에 남지 못한 것이겠지. 뭐, 그녀가 인식하는 내 마법의 수준이야 중요한게 아니니까. "그런데 너는 마력 체계의 구축을 특이한 방식으로 하던데." 나는 이 텅빈 방안에 쓸쓸히 서있는, 큰 세월을 빗겨낸듯한 악기에 다가가며 지나가듯 말했다. 손가락 끝으로 악기의 표면을 쓸어 보았다. 약간의 먼지와 함께 유약을 바른듯, 매끄러움이 느껴졌다. 곳곳에 보니, 유약칠이 벗겨진듯한 흔적이 보였다. "특이한 방식이라고 할 것 까지야…." 레쥬에브는 팔짱을 끼고, 내 말이 마음에 안든다는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렸을적, 이 힘이 내게로 이어지면서 부터 쭈욱 해오던 습관이었으니까. 마력체계의 구축은… 뭐랄까, 피아노를 연주하는것과 비슷해서 말이야." 그녀는 옅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웃음엔 희미한 추억, 같은게 깃들어 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이 악기는 피아노,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나 보군. 나는 레쥬에브가 연주하던 때를 기억하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동작을 따라 이 피아노라는 것에 달려있는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눌러보았다. 엉성하지만, 그럭저럭 그녀가 연주했던 그 음이 피아노에서 흘러나왔다. 레쥬에브의 얼굴에 약간의 놀람이 깃드는것 같았다. "너… 원래 피아노 칠 줄 알았어?" "아니." 음… 마력체계의 구축이 이 피아노라는 악기를 연주하는것과 비슷하다라… 대강 알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네 말은 음을 한번만 듣고 바로 따라서 칠줄 안다는 거야?" 레쥬에브가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눈은 동그랗게 떠진채, 가슴께에 모은 손은 어떤 기대 같은것을 담고 있는듯 했다. "아니, 음을 듣고 따라하기 보다는 네 손동작을 보고 따라했다는게 맞겠지." "와아- 대단한데! 지금 그 말은 네가 무슨 천재라도 된다는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지금까지의 삭막한 표정이 무색하게 활짝 웃어보였다. … 하지만 나로선 그 웃음을 이해할 수 없다. "…." 내 침묵에서 느껴지는 의아함을 깨달은걸까,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아니, 미안. 나… 피아노 치는걸 무척 좋아해서 말이야. 왠지, 내가 연주했던 그 곡을 네가 일부분이나마 따라해주어서 기뻤어. 아, 이것도 따라할 수 있겠어?"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내 옆으로 붙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악기를 두드렸다. 그녀의 손동작을 빠짐없이 기억한 나는 그녀를 그대로 따라해 연주해 보였다. 나는 가까이서 보이는 그녀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얀 뺨이 희미한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 그렇게 기쁜걸까. 나는 계속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녀를 따라하며 생각했다. 이런게 공감… 이라는 건가. 사회성이 강한 인간들은 타인과의 어울림을 위해 곧잘 이런것을 추구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기억에 입각한 간단한 이 동작들로, 이 작은 인간이 이렇게 기뻐하는걸 보니 나 역시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 역시도 공감… 이라고 하기엔 무리겠지. 애초에 나는 이런것을 연주함으로서 진실된 깊은 감흥 같은것 따위는 느끼질 못하니까. 내게 이것은 그저, 듣기 좋은 소리일 뿐이다. 레쥬에브는 한 구절을 연주하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따라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 정말 굉장히 즐거운 모양이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 과정을 반복하다 이내, 약간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아, 미안해. 내 주변엔 피아노를 칠 줄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서 말이야." "나도 칠줄은 모르는데… 그냥, 네 동작을 따라한 것일뿐." 그녀는 투명한 자색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팔을 꼬집었다. … 은근한 통증이 올라온다. "왜…?" 레쥬에브는 대답없이 빨간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다. … 알수 없군. 그녀는 피아노 앞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귀여웠어 칼리체." "응?" "귀여웠다고. 내 연주를 더듬더듬 따라하는데, 귀여운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더듬더듬이라…. 그래도 그녀의 손동작 그대로 따라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보기엔 엉성한 부분이 있었나보다. 그것보다 귀엽다라… 그리 많이 들어본적 없는, 흔치 않은 평가였다. "그래?" "응, 나는 외동이니까. 가끔 생각했거든. 내게 동생이 한명 있어서 같이 피아노 같은걸 치거나 하면 어떨까 하고. 난 그게 무척 재밌을것 같거든." 동생… 인가. 같은 배에서 태어난 아이들. 나로 따지자면 은룡이나 흑룡, 화룡이 나에겐 형재 자매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상상으로라도 레쥬에브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위치에는 도저히 둘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그녀의 얘기에 도저히 공감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작은 인간에게 공감하려 해본다는것도 우스운 이야기겠지만. 따라서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긍정의 의미를 담지 않은 긍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 모두 다음주가 시험이라는걸 의식해서인지, 주말은 물흐르듯 조용히 지나갔다. 장서관에 책을 보기위해 들려보기도 했지만, 워낙 인간들이 많아 자리가 없어 단념하고 나올수 밖에 없었다. 시험…. 인간들 모두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열심인 모습이었다. 시험이 시작되는 아침엔 식사조차도 숙연하게 이루어지는듯 했다. 인간들 몇명은 공부좀 했냐- 따위의 말을 떠들어댔는데,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던것 같다. 시험에 진지하게 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귀족들이었다. "칼리체 공부좀 했냐?" "뭐, 어느 정도는…." 나는 가방에서 필기구를 꺼내며 간단히 대답했다. 카리에르제가 책상위에 엎드린채,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긴장감이 별로 없는듯 하다? 평민들은 모두 벌벌 떨고 있는데 말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의 방향이 향하는 곳을 시선으로 쫓자, 그의 말대로 정말 벌벌 떨고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 패링이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평민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계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 그들로서는 필사적이겠지. "아, 너는 후견인이 있다고 했었나? … 그런걸 떠나서 넌 교수들에게 평가가 좋았으니까 시험정도야 잘 보겠지. 뭐, 힘내라." 그렇게 말하고서 카리에르제는 그대로 고개를 팔에 파묻어 완전히 엎드려 버렸다. 카리에르제는 시험에 대한 어떠한 의지도 없어 보였다. 나는 곧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머니에서 잘 접어놓은 종이조각을 꺼내었다. 총 삼일동안 치뤄지는 시험과목이 적혀져 있는 종이였는데, 받아놓고 아직까지 본적이 없었다. 어디보자… 오늘은- [기초 교양과 사회] [마도 공학] [제국의 역사] [현대 수학] 총 네 과목이로군. 다른 날도 모두 네 과목이었고, 마지막 날만 세과목이었다. 이렇게 해서 총 열 한과목이 되는군. 너무 기초적인것이라 여겨지는 몇개의 과목들은 시험조차 치러지지 않는다. 덜컹- 시험 시간표를 보고 있는 도중, 교수가 들어왔다. 머리가 하얗게 샌 나이 많은 인간이었는데, 품에 갈색의 종이봉투를 안고 있었다. 저 안에 시험지가 들어있나보군. 내 예상대로 그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던건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시험문제들이었다. "…."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긴장감에 얼굴이 굳어있다. 난 그런 주변의 분위기를 흘려보내며, 내게 내밀어지는 시험지를 받아보았다. 검은 잉크로 좋은 필체의 문자들이 가득했다. 모두 직접 쓴 모양이다. 그걸 필사… 라고 했던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종이를 문질러 보았다. 눈으로 보고 예상했던것 보다 질이 좋다. 그 질 좋음이 내게 시험은 내 생각보다도 인간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대변하는듯 하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니 이미 인간들은 손에 펜을 쥐고 열심히 무언가를 종이위에 휘갈기고 있었다. "모두들 풀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힘이 들어간 노인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지만, 나를 제외하고 그를 주목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아시겠지만 커닝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으며, 만약 이를 어길시에는 영점처리를 당하게 됩니다. 긍지높은 우리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선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사태가 발생한적이 없으며, 수준높은 이곳에서 교육받는 여러분들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리라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교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문제를 풀지 않고 뭘 하느냐는 시선인듯 했다. … 문제나 풀기로 하자. # "흐아아암-- " "참 힘이 빠지는 하품 소리네." "시끄러." 카리에르제가 옆에 앉은 인간과 티격태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펜 촉을 잡고 책상위를 두드렸다. 시험 도중에 이 펜의 잉크가 나오지 않아 시험을 감독하는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펜으로 바꾸어야 했다. 꽤 많은 재화를 지불하고 구입한 펜인데… 잉크가 다 달기라도 했나? 펜의 뚜껑을 열고 위로 치켜올려 안쪽을 살펴보았다. 음…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펜을 살짝 흔들었는데 그곳에서 잉크가 한방울 떨어져 뺨에 묻고 말았다. 옆에서 카리에르제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가끔 그런때가 있지. 자." 네리셰가 낄낄대는 카리에르제를 노려보며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감사를 표한뒤 손수건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런때가 있다니? 너도 이런 적이 있다는거야?" 카리에르제가 다시 낄낄대기 시작했다. 네리셰는 뚱한 표정으로 카리에르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잉크가 다 떨어진줄 알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보려다 종종 칼리체 같이 얼굴에 잉크가 묻는 경우가 있단 말이야. 흥, 잉크가 다 떨어질때까지 펜을 써보지 않은 너는 잘 모르는듯 하지만." 웃음이 멈췄다. 카리에르제는 조금 쓰리다는 표정으로 네리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으로 그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통찰해보았다. "… 정곡이다?" "쳇. 이 녀석에게 이따위 소릴 듣다니." 좋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걸 보면 내 통찰이 틀리진 않았나보군. "그나저나 시험은 잘 봤니?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제가 특히 어렵던데…." "음, 그건- " 카리에르제와 네리셰가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몇몇 문제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서로 자신이 맞다고 주장하며 언성을 높였다. 결과는 어차피 시험이 끝나면 나올터, 내게 그것은 무용한 짓으로 보인다. "바보냐 너는. 마경의 개척은 이미 대륙력 사용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구!" "그건 함정이야! 문제에서 '마경의 개척'이라는 문맥의 의미는- " … 말이 길게 이어진다. 이미 시험지는 거두어졌고, 여기서 뭐라고 말하든 결과는 바뀌지 않을텐데…. 하지만 의외인 것은 이러한 광경이 강의실 내부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인정받고, 자신의 말이 모두에게 정답이라 여겨지는 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틀린자는 그와 정반대로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후회도, 자책도 그 안에 모두 들어있지만… 이곳에서 시험의 정답을 확인해서 누군가가 맞고 누군가가 틀리던 간에 결과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언성을 높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언뜻 내 의견이 문제의 정답이길- 하고 기원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사소하지만, 내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너는 어때? 잘 본 것 같아?" 그 화살이 내게 돌아왔다. 새삼, 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집단에 있다는 것이 상기된다. "아는건 답을 적어넣었고, 모르는건 비워두었는데." "뭐야 그건… 누구나 다 그렇지 뭐." 네리셰가 실망스럽다는듯 내게 곁눈질 했다. 하지만 그 말대로다. 망각이 없는 내게 아는것은 모두 정답일테고, 모르는 것은 습득한 적이 없는 지식들이다. "모르는게 몇번 문제였는데?" 카리에르제였다. "다섯번째 문제였어." 내 대답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아, 그 문제… 확실히 너무 어려웠지. 배우지도 않은걸 도대체 왜 내는거야." 그는 문제를 풀며 고심에 휩쌓였던 수십분 전을 회상하는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알지 못하는 문제여서 바로 넘어갔지만, 카리에르제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꽤 머리를 싸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건… 사고력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을 묻는 문제였다. 고민은 필요치 않았을 텐데…. "그런데 비워두었다니 무슨 말이야? 그 문제, 내가 기억하기로 객관식이 었는데…." 객관식…? 문제를 제시한 뒤, 여러개의 답안을 보여주고 그 중에 선택을 요구하는게 객관식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가 비워두었다는 내 말에 의아함을 표하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불완전한 언어가 갖는 재밌는 점 중의 하나이지. "말 그대로. 모르는 문제여서 답을 쓰지 않았는데." … 반응이 이상하군. 네리셰와 카리에르제 모두 입을 살짝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무척… 좋지 못하다. "바보냐 너는! 찍기라도 해야지 비워 두는게 어디있어? 문항이 네 개 였으니, 아무거나 찍어도 확률은 25%! 그 높은 확률을 그냥 걷어차 버렸단 말이야!?" 찍기…? "찍기라는게 뭐지?" 네리셰가 옆에서 한숨을 쉬는게 들린다. "어쩜 이리도 순수하실까 칼리체 씨는…. 카리에르제, 너와는 정 반대다. 난 너네 둘이 왜 친한지 모르겠어." 카리에르제가… 이를 가는군. 굉장히 화가 난 모양이다. "아니 찍는게 뭐가 어때서? 당연한거 아냐 그건!" … 둘은 한참이나 티격태격 하다가 내게 찍기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간단히 말해, 찍기라는 것은 정답은 모르지만 주어진 네 개의 문항중 반드시 하나는 정답일게 분명하므로, 그 중 마음에 드는 번호를 골라 그것을 답으로 삼아 제출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를 푸는데 있어 요구되는 일반적인 능력인 사고력과 지식 같은것은 배제하고 오직 운 만을 믿는 방식이었다. 그 문제를 푸는데 필요한 지식과 사고력이 없어도, 답만 맞으면 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방식이군…. 그것은 실로 타당하다. 이곳에서 성적이란건 이곳을 졸업한 뒤, 자신에게 부여되는 등급표 같은 것이다. 어떻게해서든 좋은 등급을 받고 싶겠지. 시험에서 제시되는 문제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에 따른 결과가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모르는 것은, 단순히 모르는 것에 불과하니까…. 이러한 사고의 차이가, 이런 사태를 일으킨 것이겠지. # 며칠 간의 시험이 모두 끝났다. 다른 인간들은 모두 하나 같이 시험 잘봤냐- 라고 묻고 다니는듯 했다. 대답은 모르겠어, 잘 못봤어, 잘 본듯 해 등등으로 나뉘긴 했지만 나는 내 성적이 어디 속하게 될것인지 예상할 수가 없다. 나는 아는것은 모두 답을 했고, 모르는 것은 답을 비워두었다. 내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아는 것은 모두 정답이겠지….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두 틀렸다. 그것은 내가 접하지 못한 지식의 영역이었고, 나는 그것들에 대해 '찍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성적은 바로 내일 나오는 모양이다. 인원이 그리 많지 않으니, 채점에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 소요되지 않는 모양이지.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는 인간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어두운 표정을 하는 녀석도 있었고, 시험을 잘 본 모양인지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인간도 있었다. 시험 결과야 어찌되었든 시험이 끝났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인간도 적지 않았다. 나 역시 그들의 무리에 섞여 강의실을 나오는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의 뒷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친구인듯한 인간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지 손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레쥬에브…. 오늘 그녀는 머리를 풀어헤쳐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등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뒤로 넘기는걸 보니 정리가 잘 안되는 듯 싶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등을 돌렸다. "아, 칼리체…?" 평소와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안녕, 시험은 잘 봤니?" 다른 인간들 처럼 시험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 아 뭐, 그럭저럭." 레쥬에브의 대답은 담백했다. 그녀는 시험이란 것에 그리 관심있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시험이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닐테지. "그런데 그 소식 들었어?" "어떤 소식?" 시험이 관심이 없다는걸 반증하기라도 하듯, 레쥬에브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하기 전에 견학을 나간다고 하더라고." 견학이라고…? 전혀 들어보지 못한 얘기로군. "무슨 견학?" "황실에서 주관하는 건데- " 레쥬에브는 거기 까지 말하고 나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에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인듯 했다. 그녀에겐 황실이란 것은 곧 레케트리셴 문 여제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지…. 그리고서 그녀는 이상한 말을 했다.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 이라고 하더라고." "위대함을, 증명하는?" 이상한 말이로군.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이라니…. 레쥬에브는 내 반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주위로 스쳐 지나가는 밝은 표정의 다른 인간들과 그녀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인다. 마치, 그녀 혼자서 다른 세상을 살아가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 위대함을… 증명하는." 레쥬에브는 마치 곱씹기 라도 하듯, 그 단어를 천천히 말해 보였다. 하지만 이 내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풀었다. "하아- 자세한 내용은 나도 아직 몰라.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인간이 아닌 여제가 주변의 모든 나라를 굴복시키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 지금이야 말로 본색을 드러내리라 생각해. 위대함의 증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건지." 흥미가 가는군….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이라니. 도대체 어떤식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일까? "뭐, 실제로 어떤 일을 하려는지는 가보아야 제대로 알겠지만 말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레쥬에브는 빙긋 웃었다. "미안해. 시험도 끝났는데 어두운 얘길해서. 방금 얘기했던것처럼 실제로 가봐야 아는 일이니까…." "그건 그렇지." 내가 동의하자 레쥬에브는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봐.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서 쉬어." 레쥬에브가 멀어져 간다. 건물의 창문을 통해서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카데미의 정문으로 향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른 인간은 시험에 대한 부담이 무척 큰 듯 바로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인데… 그녀의 기색으로 봐선 휴식따위의 목적으로 아카데미 밖으로 외출하는건 아닌듯 싶다. 아마, 내게 방금 얘기했던 일 때문이 아닐까. 그녀로서는 상당히 외로운 싸움이군…. # 시험이 끝나자 기숙사 휴게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모두들 시험이 끝난 홀가분한 분위기를 즐기는듯 했다. 개중엔 알코올이 든 음료를 가져와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감에게 제제를 받는 인간도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에서 멀찌기 떨어져 있다 침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 밤은 왠지 잠이오지 않았다. 겉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희미한 촛불들이 밝히고 있는 기숙사의 복도를 지나 입구로 내려갔다. 가는길에 기숙사 휴게실을 지나쳤는데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입구의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늘엔 커다란 달이 떠있어, 지상으로 선명한 은빛을 내려보내오고 있었다. 밤벌레가 우는 소리와 함께 여름이란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기숙사의 휴게실에 있던 음료를 가지고 근처에 있는 목재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기숙사는 아카데미내에서도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아카데미 뒤쪽에 있는 숲이 바로 보였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맛과 함께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젠 이런것도 꽤나 익숙해졌다. 의자의 등받이로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도 오지 않는데…. 천천히,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음… 800 년 전 쯤이군.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인간들의 세계를 체험했다. 베델이라는 인간과 호문클루스 에카테야르, 지금은 요정들의 여왕이 되어 있는 칼리아넬과 함께 인간들이 지배하는 대지를 여행했다. 탐탁치 않은 일들도 있었지만, 기꺼운 일들도 있었다. 현재는 그때와 달리 인간들이 지배하는 땅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지만… 나는 아카데미라는 인간사회의 일부분에 불과한 좁은 공간내에만 머물러 있다. 인간들이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 지식을 전승하는 기관인 이곳에 인간을 가장하고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내가 찾는 것은 요원하기만 하다. … 나는 초조해 하지 않는다. 덧없이 사라져 가는 필멸자들과 달리, 나는 무한한 시간을 가진 불멸자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때까지, 나는 무한한 시간을 이곳에 투자할 것이다. 눈을 뜨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모든 것이 필멸로 가득한 이 세상에 불멸을 가진 드래곤이란 존재가 있다는게 말이 안되는 일인듯 느껴졌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남긴 말, '세계는 유한하다.' 아무리 거대한 마력과 신력,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힘을 가진 드래곤이라는 존재라 해도… 역시 세계에 포함된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무한한 드래곤이 유한한 세계 안에 있을 수 있을까? "… 알 수 없군." 애초에 신이었던 우리는 어째서 자유라는 것을 갈망했을까. 그저 세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었을 뿐인 우리들이… 어째서 그 미약했던 의지로 자유를 갈구하고, 이 필멸의 세계에 신화로서만 존재하던 드래곤의 모습을 띄고 강림했을까. 거기서 기억의 결락이 생긴다. 그리고 그 기억의 결락은 필연적으로 나는 어째서 기억의 리셋을 했느냐, 라는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음…."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질문은 현재의 나로선 답을 할 수 없는 문제다. 답을 할 수 없음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을, 나는 가볍게 털어버렸다. 또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은 달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달이 뜨고, 해가 지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나는 영원이란 시간을 존재한다. 그리고 언젠가… 필멸자 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모든 것의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 결론이 어떠한 것이든. "…." 슬슬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해 볼까. 인간의 생체리듬은 일정해서, 지금 잠을 자두지 않으면 활동해야될 낮에 졸음이 몰려오게 된다. 불편한 몸이지만, 난 그 불편함이… 그리 싫진 않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순간, 나는 막 내딛으려던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숲 쪽에서 거대한 마력 행사로 인한 대기의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 콰앙-! 하고 무언가가 터져나갔지만, 그것은 청각으로 감지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력에 의해 대기가 찢어발겨지는 '느낌' 이었다. 이 정도로 과격하고 거대한 마력 행사라니…. 그 마력 행사에서 느껴지는 의도는 명백한 파괴였다. 누군가 전투를 벌이고 있기라도 한걸까. 나는 내 마력을 완전히 은폐시켜버리고 어둠속에 숨어들었다. 지금의 내 존재감은, 시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이상,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덩이와 다를바 없다. 이것으로 내가 발각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 '느낌' 이 감지되는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몇번이나 거대한 마력 행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충격파나 마력의 파동등은 숲의 근처 이상으로 뻗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거대한 마력으로 이 숲 전체에 결계와 비슷한 마력술식을 전개한 까닭이다. 800 년 전 이후로 통상적인 인간의 마법을 본 일은 없는데… 그 동안 그들은 마법에서도 어느정도 발전을 이루긴 한 모양이다. '추상'에 불과했던 인간의 마법이 지금은 어느정도 구체화 되어있다. 마법에 노골적인 '의도'를 심을줄 알게되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군. 어쨌든 조금 더 전진하자 마력 행사의 근원지에 도달 할 수 있었다. 거대한 마력 행사를 일으키며, 그 힘으로 서로의 목숨을 취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흑색의 좌, 레쥬에브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는 세 명의 정체모를 인간이 그들이었다. 레쥬에브는 그 세명에게서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그들 뿐만 아니라 전에 보았던 자연적이지 않은 생명체들 역시 그녀를 함께 공격하고 있었다. 그 생명체들 개개의 수준은 하찮았지만, 적지 않은 수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어 레쥬에브가 꽤 애를 먹는 모습이다. 그녀는 흑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력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라도 그녀가 머물고 있던 자리엔 어김없이 흑색 마력의 창이 날아와 꽂혔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휘두르는 손에 따라 경로가 왜곡되어 주변에 있는 나무에 날아가 꽂혔다. 개중엔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도 있어, 나는 압도적인 마력을 온몸에 둘러 그것들이 내게 닿기 전에 다시 무(無)로 환원시켰다. "하앗-!" 피하기만 하던 레쥬에브가 허공에 크게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끼고있는 장갑의 보석부분이 붉게 빛나며 그녀의 앞으로 거대한 마력행사가 행해졌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대기가 떨리고, 대지가 진동했다. 거대한 불길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탐욕스럽게 주변의 대기를 먹어치우며 타들어갔다. 그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간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불길에 먹혀 버렸다. "꺼지지 않는 성화(聖火)라니!" 로브를 입고 있는 인간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그렇게 외쳤다. 꺼지지 않는 성화…? 그것은 틀림없이 레쥬에브가 일으킨 저 불의 이름이었다. 인간은 마법을 구체화 시키는 방법으로 작명(作名)을 택한게 틀림 없다. 뭐,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니까. 이름을 갖는 것 만으로도 추상(抽象)은 구체(具體)로 나아간다. 하여간 그 '꺼지지 않는 성화' 라는 마법은 앞으로 나와있던 그녀의 적들을 불태우고 나서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듯 레쥬에브의 주변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타올랐다. 불길이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덕분에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어린 계집이 정말 대단하구나. 그 정도의 마법을 그토록 손쉽게 발현시키다니." "… 알았으면 이만 물러가세요. 모두 죽여버리기 전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싸늘했지만, 가느다란 어린 소녀의 목소리인지라 그다지 위압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부족한 위압감을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채워주는 것이 그녀의 곁을 머물고 있는 불꽃이었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게 있는것 같군, 메르시오의 작은 아가씨." 로브의 삼인 중 가운데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젊은…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거 허공에 손을 까딱하자 어둠속에서 수 없이 많은 괴 생명체들이 튀어나왔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되, 인간이 아닌 것들… 내 근원의 지식으로도 파악 할 수 없는 생명체들이었다. "오늘은 우리도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네. 그저 그런 마법사라고만 생각했던 아가씨가 실은 예상했던 것을 가볍게 압도하는 마력을 사역한다고 해도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손을 한번더 들어올렸다. 그게 신호라도 된듯 어둠속에서 더 많은 수의 생명체 들이 튀어나왔다. "이 정도 수의 '그림자' 들과 황실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 멤버 세 명 정도라면 아무리 그쪽이라도 힘들겠지. 그렇지 않은가?" 조롱하는 듯한 상대의 말에 레쥬에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게 보였다. 그림자라… 저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을 부르는 명칭인가 보군. 네크-네르프로넨은 인간들 집단의 이름인 모양이고. 거기다 황실 마법 기사단이라니… 인간은 마법이란 힘을 본격적으로 전투에 이용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레쥬에브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서… 그건 얌전히 죽기라도 하라는 뜻인가요?" 로브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굉장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군. "물론, 그쪽이 우리도 편하겠지만… 아가씬 얌전히 죽어줄 스타일은 아닌것 같군." "그만, 쓸데 없는 대화는 되었다! 얼른 저 계집을 죽여!" 옆에 있던 자의 끼어듦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였던 숲 속이 다시 시끄러워 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지능은 갖춘듯 차례로 달려드는 '그림자' 들 뒤로 로브를 뒤집어쓴 인간들이 간간히 마법을 날려댔다. 레쥬에브는 압도적인 마력으로 모든 공격을 받아내었지만,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육신으론 역시 힘든 모양인지 계속해서 지쳐가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체력이 그녀의 몸에 차고 넘치는 마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 그녀를 상대하는 세 명의 인간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모두 합쳐도 레쥬에브에게서 느껴지는 것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전투의 전문가였다. 그들의 마력체계는 오직 전투 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마법은 신비한 힘인 마력의 사역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쓰이는 화살과 같았다. 반면, 레쥬에브에게 마법은 신비의 사역이었다. 파괴만을 위한 힘이 아니었다. …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군. 슬슬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까. 아직 아무것도 찾은게 없는 지금, 내가 가진 힘을 인간들의 전면에 드러내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지만…. 많은 수의 그림자들이 그녀를 쉴새없이 공격했다. 모두들 한 번에 공격하는게 아니라 차례로 돌아가며 그녀를 공격하는걸 보니, 공격의 의도는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는게 아니라 단순히 그녀를 지치게 하는데 있어 보였다. 그림자들이 그녀를 묶어둘 동안 로브를 입은 세명의 인간은 거대한 마력을 사역해 각자의 마법을 완성시켰다. 그들의 마법은 모두 강렬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마력이란 힘을 오직 생명의 살상이란 목적에만 사용하는 듯, 그들의 마법에선 일말의 신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저건… 마법이라기보다는 그냥 힘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들이 발현시킨 마법은 추상을 거부하고 무한한 구체화로 수렴해갔다. 그들의 마법은 각각 거대한 화염 덩어리, 마력의 창 같은 것 따위로 변했고 그것은 곧 레쥬에브에게로 쏘아졌다. 레쥬에브는 한 순간 강대한 마력을 퍼트려 그림자들의 공격을 떨쳐버렸지만 저 정도의 공격을 막을만한 신비는 사역하지 못했다. "꺄아앗- !" 강한 마력을 담은 힘들이 그녀를 강타했다. 콰앙-! 하고 강한 빛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며, 바닥에 가득했던 풀들이 뽑히고 대지가 뒤집히며,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쓰러졌다. 강한 폭발로 인해 수축되었던 대기가 팽창하며 사방으로 바람이 불어나갔다. 나는 폭발로 인해 멍멍한 귀를 매만지며 이리저리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르고, 다소 가라앉은 눈으로 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레쥬에브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희미한 빛을 발하는 마력장이 보였다. 아마 급하게 저것을 발현시켜 공격을 막은 모양이다. 하지만 공격을 모두 막지는 못한 모양인지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는게 보였다. "끝이군." 로브를 뒤집어쓴 인간 중 한명이 그렇게 말한 뒤 앞으로 걸어나오며 손을 저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그림자들이 적의를 무르고 뒤로 물러나며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레쥬에브는 희미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생성시킨 마력장은 결국 대기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완전한 무방비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긴 했지만… 전투의 승패는 마력의 총량 만으로 결정되는건 아니지." 앞으로 나온 인간은 얼굴에 비웃음을 띄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레쥬에브는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직도 눈빛이 희미한게, 방금전의 폭발이 그녀에게서 잠깐 동안 청각과 시각을 가져가 버린게 틀림 없었다. "당신들은…?" "말했지않나? 황실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이라고." 레쥬에브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을 쳐 죽이다 보면 언젠간 윗대가리들이 기어나올 줄 알았지." 레쥬에브는 말이 끝나자마자 이 공간 전체에 마법을 중첩 발현시켰다. 잠깐 대화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마법을 두 개나 완성 시켰던 모양이다. "젠장! 어서 죽여!" 마법 기사단이라는 인간들이 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이 다급하게 소리친것과는 반대로 레쥬에브는 느린 뒷걸음으로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레쥬에브가 무엇을 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다. 인식 장애 마법과 함께 이 공간의 마력을 뒤틀어 버렸나…. 마력의 비틀림은 마력을 매개체로 세계를 감각하는 인간들의 감각기관을 마비시킨다. 레쥬에브는 그들의 감각을 빼앗는것과 동시에 그들의 인식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렸군. "하아, 하아- " 하지만 레쥬에브가 입은 타격도 만만치 않은지 그녀는 눈을 감고 그들에게서 떨어진채로 숨을 가다듬었다. … 레쥬에브가 승기를 잡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녀가 입은 타격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공간의 마력을 뒤트는 정도의 강력한 마력행사를 언제까지고 유지하고 있을 순 없다. 저 마법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적들은 다시 감각을 회복하고 그녀를 공격할 것이다. "흐윽…." 그녀는 힘없이 나무에 기대었다. 그녀가 입은 타격이 내 생각보다 더 큰 듯 하다. 지금 저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다음 기회는 없을 터인데…. "… 놀랍군. 그 짧은 순간에 마법을 완성시켜 우리의 이목을 흐리다니." 이미 그녀의 적들은 감각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레쥬에브가 힘겹게 눈을 뜨는게 보인다. 초점이 없는, 흐릿한 눈이었다. 그녀는 이미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아까 본 '꺼지지 않는 성화'도 그렇고… 인간같지 않은 힘이로군. 이 계집은 황제 폐하 곁에 붙어있는 그 '불사'와 비슷해…." "정말 그런듯 하군." 나는 그들의 짧은 대화에서 마음에 걸리는 단어를 감지했다. 황제의 옆에 있는 '불사' 라고…? 불사라는건 분명, 죽지 않는 다는 뜻이다. 죽지 않는 자가 황제의 옆에 있다…. 설마 그건… 백색의 좌, 리체르아를 이르는 말인가. 아마, 내 추측이 맞겠지. 레쥬에브가 흑색의 좌이니 그들이 그녀에게서 리체르아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는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손으로 채 피어나지 못한 꽃을 꺾는다는게 무척이나 아쉽군. …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는 재목인데."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말투였다. "쓸데 없는 소린 관두지. 이 계집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제 폐하에게 반기를 보였다." 그렇게 말하며, 네크-네르프로넨 의 한 명이 작은 단검을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레쥬에브는 어둠속에서 달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싸늘한 단검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이상 그녀에게 반항할 만한 힘은 없는듯 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녀는 절망도 체념도 보이지 않았다. 싸늘한 분노를 자색 눈동자에 숨긴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했는데, 어쩔수 없군. 지금은 내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것 보다 레쥬에브의 목숨을 지키는게 더 중요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평소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이야 말로, 나에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 멈춰라. 내 만능의 언어에 레쥬에브의 가슴으로 향하던 단검이 멈추어섰다. 하지만 나의 '멈춰라' 는 단지 그의 팔의 근육을 향한 '멈춰라' 가 아니었고, 그 인간을 구성하는 관념과 육체… 하나의 개체라는 포괄적인 범주를 향한 '멈춰라' 였다. 때문에 나의 '멈춰라' 에 레쥬에브의 심장을 향하던 단검뿐 아니라 그의 사고, 심장 박동, 혈액의 흐름 따위가 모두 멈추었다. 그에게 속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지' 했다. 물론, 그의 생명 역시 '정지' 했다. 털썩- 생명을 잃은 육신은 힘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바닥에 쓰러지며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크게 치떠진채 살기를 머금고 있던 두 눈은 자신의 생명이 멈추었다는것도 깨닫지 못한듯 했다. 레쥬에브를 구하기 위해서 라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이런식으로 앗아간다는건 역시 꺼려지는 일이다. "누, 누구냐!" "이봐 정신차려…!" 남은 두 명중 한명은 갑작스레 나타난 나를 경계했고, 나머지 한 명은 쓰러진 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 녀석 죽었, 어!" "뭐라고!?" 나를 경계하던 한 명도 이미 목숨을 잃은 자에게 시선을 빼앗길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보기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인간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 다는게 이해가 가질 않겠지. 그것은 이들에게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인 것이다. "너… 이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 인간들에게 상식을 벗어난다는 건 냉정한 판단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일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좁혔다. 후드 아래로 벌벌 떨고 있는 눈빛이 보인다. 피조물들은 모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과 같이 이성을 가진 피조물은 그 이성으로 두려움을 떨쳐내고, 맞딱드린 상황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상식을 벗어나는 힘으로 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지만 그것이 이들의 이성을 이길만큼 강한 두려움은 아니었나보다.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도망가버리면 편하게 될 일을…. "칼… 리체?" 나무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레쥬에브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듯한 시선이 상당히 따갑다. 아무튼 일단은 아직 남아있는 두 명을 상대해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은 나를 적이라 판단하고 벌써 마력을 사역해 마법을 발현시키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그저 파괴만을 위한 마력의 사역… 마법이라고 부르긴 좀 민망하다. "죽어라!" 적의를 잔뜩 담은 말과 함께 내게 화살의 형태를 한 마력 덩어리가 날아왔다. 화살이란 구체적인 형태를 띄고 있으므로 파괴력이 강하긴 하겠지만… 진짜 마법 앞에서 이런 것들은 무용(無用)할 뿐이다. 거대한 신비는 작은 신비를 잡아먹는다.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인간의 손이란건 굉장하다. 인간은 손으로 도구를 집고, 지식을 전승시키며, 마력을 사역한다.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문화, 기술… 그 밖의 여러가지 업적들. 인간은 이 손으로 거의 모든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은 단순히 손이 아니고, 인간이 사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의 정점이다. 손만으로 이자들이 사역하는 정도의 신비는 숨쉬는 것 보다도 더 쉽게 해체할 수 있다. 손-가장 거대한 신비-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내게로 향하던 모든 마력행사의 산물들이 전부 무(無)로 돌아간다. "이게 무슨…! 그걸 막아내는것도 아니고 없애버리다니!" 쉼 없는 경악이 내게로 전해진다. 동요하는 그들에게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도망쳐도 좋다." "도망… 이라니!" 후드 밑으로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가 두려움을 먹어간다. … 어리석군. 압도적인 힘 앞에서 힘 없는 분노는 무기력 하기만 하다. 생명을 빼앗는 일이 꺼려지는 일이긴 해도 필요하다면 어쩔수 없지. "여제 폐하께 반기를 드는 반역자들을 앞두고 도망은 없다! 여제 폐하를 위하여…!" "여제 페하를 위하여!" 남은 두명은 크게 외치며 품속에서 검을 빼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외침이 두려움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그 자리를 용기라는 이름의 감정으로 가득 채운다. 인간의 강렬한 감정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마저 이렇게 간단히 먹어버린다. 여제 폐하를 위하여, 라니…. 불쾌한 일이다. 은룡, 레테닌시에스케가 형성해 놓은 거대한 뒤틀림이 보이는 듯 하다. 나는 씁쓸함을 느끼며 마력을 사역해 몸속에 들어있는 수분을 얼어붙게 하는 것으로, 두 인간의 목숨을 순식간에 거두었다. 뭐, 그들의 각오야 어쨌든… 죽음은 이토록 허망하다. "…."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레쥬에브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어 주저 앉은채,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인 듯한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칼… 리체, 이게 도대체- "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둘러주었다. 격렬한 전투로 그녀의 얇은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하얀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레쥬에브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둘러준 내 겉옷을 잡아 당기며 얼굴을 붉혔다. … 으음, 인간들이 나체를 보며이면서 느끼는 수치심이란건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다. "으읏…." 레쥬에브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녀에게 둘러준 내 겉옷이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상처가 심하군….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죽는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피로 물든 손이 질척질척 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화악- 하고 풍겨왔다. "…." 마력을 사역해 레쥬에브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재생 마법을 걸었다. "칼리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야!?" 나는 당혹과 경악이 동시에 머물고 있는 레쥬에브의 자색 눈동자를 다소 가라앉은 눈길로 들여다 보았다. 상처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이 정도의 급속 재생 마법은 필연적으로 술자의 생명력을 가져간다. 재생 마법은 마력을 생명력으로 환원시키는 마력 행사지만 마력이 전부 생명력으로 환원되지는 못하니까. 부족한 부분은 술자의 생명력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엔 내가 내 수명을 깎아 자신을 치료해 주는걸로 보이겠지.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게 맞는 말이겠지만 다행히, 나는 인간이 아니다. 문득, 정말로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레쥬에브의 상처를 치료할 재생 마법을 걸었을까…? "칼리체…." 레쥬에브가 슬픈 표정을 하고 중얼거린다. … 그녀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것을 확인했다. 사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 '만약'이란 가능성은 내게 없다. 나는 어떤 일을 함에 앞서 가능성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겐 그저 '하느냐', '마느냐' 의 문제이다. 이런식의 만약- 이란 가정만큼 무의미한게 없겠지…. "괜찮아?"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칼리체 리블란셰… 도대체 정체가 뭐지?" 레쥬에브는 내게 그렇게 물으며 계속해서 초조한 손길로 내가 둘러준 겉옷의 옷깃을 여몄다. 상의가 많이 찢어져서 그런지 계속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내 겉옷도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옷 사이로 하얀 속살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아직 앳되긴 하지만 인간 여성의 몸이 그리는 곡선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보, 보지마! 뒤로 돌아서 얘기해!" …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이나?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몸을 돌리고나서 입을 열었다. "정체가 뭐냐라고 물을것 까지야…." "그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사역은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 대강 얼버무리려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냉엄했다. "…." 나는 침묵을 지켰다. 어떤 변명을 해도 모두 거짓말 밖에 나오지 않겠지. 나는 거짓을 말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거짓보다는 침묵을 택했고, 흑색의 좌는 그녀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것이다. 골치아픈 상황이 되긴 했지만 그때 흑색의 좌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건 없었다. "… 네가 말 하기 싫다면, 더 캐묻지는 않을게." 의외로 상당히 힘빠진 말이 들려왔다. 나야 그 편이 훨씬 편하지만… 너무 간단히 단념하는것 아닌가? 살짝 뒤를 돌아보니, 레쥬에브가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떨리는 입가와 눈빛이 자존심이 상한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것 같기도 했다. 이 이상의 감정은 더이상 통찰해 볼 수 없었다. "네 정체가 무엇이고, 네 의도가 어떻든 간에… 너는 결국 자신의 수명을 깎아 나를 구해주었으니까." 그렇지…. 그녀가 보기에 방금의 재생 마법은 틀림 없이 내게서 큰 생명력을 앗아갔을 테니까. 그 때문에 정체에 대해선 더 묻지 않겠다는 건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로군. "흥,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마! 아무리 네 정체가 의심스러워도 자신의 수명을 깎아 나를 구해준 사람에게 뭐라고 할 정도로 내가…." 말을 하는 도중, 레쥬에브의 목소리에선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결국, 마지막 단어를 말할 땐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되었다. 조금 풀이 죽어보이는 모습이다. "고마워, 칼리체.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에서 죽었겠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레쥬에브는 내게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신분으로 공작가의 장녀인 그녀가 평민인 칼리체에게 고개를 숙이는게 쉬운 일은 아닐것 같은데. 하지만 정중한 감사 인사와는 반대로 레쥬에브는 고개를 들자 거의 노려보는것 같은 눈빛을 한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받은 네 생명력은… 이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갚아주겠어." "알았어." 뭐, 기대해 보도록 하지. # "자, 마셔." 레쥬에브에게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을 받아들었다. 컵 안을 들여다 보니 검은색의 약간 걸쭉한 액체가 들어 있었는데 굉장히 달콤한 향이 났다. "고마워, 잘 마실게." 한 모금 마셔보았다. 따뜻한 액체가 차갑게 식은 몸을 녹여주는듯 했다. 거기다 액체는 무척이나 달콤해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마치 그… 초콜렛이란걸 그대로 녹인듯한 맛이군. 레쥬에브는 나와 마찬가지로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나와 그녀의 앞으로 달빛에 휩싸인 기숙사가 보였다. 숲 속에서 있었던 전투의 뒤처리를 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때문에 얼마 안있어 동이 틀 것이다. "방심했어. 아카데미 내부에까지 자객을 보내올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레쥬에브는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 입어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빌려준 겉옷은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준다고 약속했다. 나는 옆에 앉은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들은 왜 항상 너를 비밀리에 노리는거지?"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명분이 없으니까. 나는 공식적으로 우리 메르시오 가문이 여제에 대해 반기를 표하도록 지시한적이 없어.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도 모두에겐 비밀이지. 난 철저히 어둠에서 활동해왔어. 그러니 그들 역시 어둠에서 나를 없애려고 할 수 밖에 없지." 명분이란건가…. 어렵지 않은 이야기로군. "겉으로 보기에 나는 아무런 힘이 없는 평범한 여자애니까. 공식적으로 날 치고 싶어도 칠만한 구석이 없겠지. 그렇다고 우리 메르시오 가문이 힘을 완전히 잃은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그들로서는 편한 얘기야. 자객을 보내 나 한 명만 없애버리면 되니까." 그런데 그 자객이 계속 실패했고, 결국엔 황실 마법 기사단이란 단체에 속한 자들까지 찾아왔다는 이야기로군. 그렇다면, "… 점점 더 위험해 질 것 같은데." "응. 네크-네르프로넨 녀석들을 세 명이나 죽여버렸으니까. 저쪽도 앞으론 물렁하게 상대하진 않을거야.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기 힘들거야." 레쥬에브는 다 마셔버린 종이컵을 손 안에서 구겨버렸다. "방심했다… 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정말 한심했어. 고작 네크-네르프로넨 세 명에게 그렇게 밀리다니." 조그맣게 발을 구르는게 굉장히 분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분노는 타당해 보인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품고 있는 신비는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인간 세 명에게 밀릴 정도가 아니니까. '그림자'라는 알 수 없는 생명체의 개입도 있었지만…. 아, 벌써 동이 터 오고 있다. 나는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는것을 느끼며 컵에 남아 있는 액체를 모두 마셨다. 이름 모를 달콤한 액체는 조금 식어 있었다. 컵을 어디다 버릴까 고민하는데, 레쥬에브가 옆에서 중얼거리듯 말하는게 들려왔다. "다음엔… 준비된 마법사라는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보여줄게, 칼리체." # " -리체." 으음, 정신이 몽롱하다. 눈꺼플은 그 어느때보다도 무거웠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이렇게 포근했었던 적은 없었다- 라고, 인간적인 감상을 해볼려는 차에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칼리체! 얼른 정신차려. 복도의 게시판에 성적이 게시됐어. 등수 뿐만 아니라 과목별 점수까지 모두! 세상에 어쩜 이리 잔인한 일이…!" 잔인한 일이라고…? 네리셰가 자꾸 채근대서,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 이끌려 복도로 나왔다.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곳곳에 설치된 게시판마다 모여 있었다. 복도는 나즈막하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했고, 어디선가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도, 반대로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도 들려오는듯 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가며, 모여있는 인간들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모두 점잖게 서있긴 했지만, 시선은 그 어느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며 게시판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곳이 사람이 좀 적네. 여기서 확인해 보자!" 네리셰는 적당한 게시판을 하나 찾아 그 앞에 나를 데려와 자리를 잡고는 게시된 종이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듯 했다. 나는 그제서야 다른 인간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게시된 종이를 주목했다. 하얀 종이 위로 '표' 라고 부르는 네모난 도형들이 가득했다. 그 도형들 안엔 누군가의 이름과 과목, 숫자가 들어가 있었다. 과연… 이러면 누가 어느정도의 성적을 받았는지 한눈에 파악하기 쉽겠군. 그런데 네리셰가 이게 잔인한 일이라고 했던건…. "꺄악--!" 옆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소리는 복도를 크게 울릴 정도로 컸고, 적지 않은 수의 인간들이 이쪽을 주목했다. "성적이 떨어졌어…." 시선은 금방 흩어졌다. 흐음, 성적이 떨어지다니, 어디보자- 『 네리셰 드 레베링턴 - 클래스 석차 18 위(位) - 학년 석차 56 위(位). 』 … 그리고 그 뒤로 각 과목당 배정된 점수가 줄지어 이어져 있었다. 음- 클래스 별로 인원이 약 40 명 정도에 학년으로 따지면 대강 120명 정도 되니, 따져보자면 그녀는 중간 보다 약간 나은 성적을 받은 셈이다. 그럼, 과목별 점수는- "점수까지 보지마, 칼리체! 이건… 내가 이번 시험에 집중을 못해서 그래! 평소엔 이런 실력이 아니니까…!" … 이해할수 없군. 왜 나에게 변명하는거지? 나는 네리셰의 성적을 가지고 그녀에게 추궁 같은걸 할 생각이 없다. "알았어." 나는 간단히 대답하며, 이 '성적표' 라는걸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성적을 받은 당사자가 어느정도 수준에 속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성적표의 정렬 순서는 이름순이 아닌 성적순이었으니까. 옆을 보니 네리셰는 계속 상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양호한 수준이다. 어떤 인간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도 있었다. … 나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울음 소리를 흘리며, 다시 한번 성적표를 들여다 보았다. 네리셰가 했던 말을 이해하겠다. 잔인하다, 라고 했었지. 인간에 대한, 이렇게 적나라한 평가표가 있을까…? 그간 겪어왔던 기억들을 회상해 보았다. 개개인 인간의 능력은 각기 천차만별이었다. 무력이 뛰어난 인간도 있었고, 지력이 뛰어난 인간도 있었다. 그들이 '예술' 이라 부르는 것에 재능을 보이는 인간도 있었으며, 임기응변이 뛰어난 인간도 있었다. … 가 뛰어난 인간도 있었다. … 가 뛰어난 인간도 있었다. 눈을 한번 깜빡일 사이에 수 많은 '…가 뛰어난' 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비해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평가할 수 없다. 능력이라는 것에 객관적인 기준은 없으니까. 그것은 비단 인간들의 사회 뿐 아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이 아카데미의 인간들과 했었던 게임이란 것과 같지 않다. 게임에선 어떤 말이 다른 말 보다 더 뛰어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명백하니까.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더 강한 말이 약한 말에게 이긴다.' 하지만 이건… 게임 같은게 아니지 않은가. 성적표라는건 인간을 그저 '성적'이라는 기준하에 평가하고, 이렇게 모두가 볼 수 있게 게시한다. … 마치, 일종의 게임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잔인하다. "무슨 생각해 칼리체? 쓸데 없이 고민하는 표정 짓지 말고 얼른 네 성적이나 찾아봐. 어휴… 결국 또 용돈이 떨어지겠구나." … 뭐,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을 접고, 네리셰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부분부터 천천히 내 이름을 찾아나갔다. … 쉽게 찾아지지 않는군. 120 명이 좀 넘는 인원의 이름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으니 금방 눈에 띄질 않는다. 차분하게 위에서 부터 찾아 보기로 할까. 그런데 학년 1위가… 아는 이름이로군. 『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 클래스 석차 1위(位) - 학년 석차 1위(位) 』 똑똑한 인간이군. 내 이름은 좀더 아래에 있으려나…. 그리고 나는 시선을 얼마 내리지 않아,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 칼리체 리블란셰 - 클래스 석차 3위(位) - 학년 석차 7위(位) 』 아…? 성적이 상당히 괜찮은데. 과목별 점수를 보았다. 점수가 나와있는 곳에 조그맣게 (100점 만점기준)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국의 역사 - 100 마도 공학 - 90 기초 교양과 사회 - 23 현대 수학 - 98 │ │ 기초 인문학 - 40 종족 전쟁 - 98 인류의 변혁(선택 과목 - 교수 레먼데일) - 100 슈헬츠만 의 '도구'(선택 과목 - 교수 슈헬츠만) - 100 … 이건 그야말로 적나라하군. 관심있던 분야들만 좋은 점수를 받고, 신경쓰지 않은 과목은 다른 인간들과 비교해 봤을때 턱없이 낮은 점수다. 성적이라는 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관심 없는 과목은 강의때 교수에게 들은 지식이 전부다. "칼리체 대단한데? 네가 학년 석차 7위야! 너,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은것 같은데 점수가 대단- " 말을 이어나가던 네리셰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세상에 무슨 점수가 이렇게 극단적이야!?" 다른 인간들의 성적을 살펴 보았다. 대부분 과목별로 받은 점수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나처럼 성적을 받은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선택 과목들이 모두 하나 같이 질릴 정도로 어려운 것들이네… 근데 세상에, 선택 과목들은 전부 만점을 받다니. 기초 교양과 사회 같이 쉬운 과목은 고작 23점을 받아놓고서!" 네리셰의 목소리가 상당히 크다. 적지 않은 인간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다. 확실히 다른 인간들에게도 내 성적은 이상해보였는지, 그것에 대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데…. 예상… 이라기 보다는 성적이란것에 관해,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 강의실에서 나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뭐야, 시험 잘 본 칼리체 씨 아냐?" 카리에르제가 다소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채 벽에 기대어 서있다. 시험이 끝난 직후라 오늘은 딱히 출석할 필요는 없는 날이었다. 때문에 오늘 카리에르제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니?" "어떻게 알기는… 네리셰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온 복도를 진동하던데. 잠깐 내 성적 확인하러 들렸다가 들었어." "그래…." 그의 와인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벽에 기대고 있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며 잠깐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철 없는 계집애지? 성적이 떨어짐으로 인해 용돈이 깎인다는걸 학년 내에 소문내려는 것도 아니고 말야…." "네리셰 말이야?" "걔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냥 철부지인 건지, 순진한 건지… 평민들은 성적에 목숨을 걸 정도야. 아무리 귀족이라 성적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곤 하지만 성적을 고작 용돈에 결부시키는걸 그렇게 크게 떠드는건 좀 아니지." 그 괴리감이 좀 크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카리에르제의 말 대로다. 귀족에게 성적은 체면치레일 뿐이지만 평민에겐 목숨을 건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니까. 네리셰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을 인간이 적지 않을테지. "너도 좋지 않아, 바보야." 그렇게 말하며 카리에르제는 품속에서 막대 사탕을 하나 꺼내더니 포장을 뜯고 입에 물었다. "왜?" "왜, 라니…."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게도 막대 사탕을 건네었다. 나는 그것을 건네받고 손안에 들고 있다가 역시 그처럼 포장을 뜯고 막대 사탕을 입에 물었다. 달콤한 맛과 향이 입안에서 퍼져 나간다. … 인간의 귀족들만 먹을 수 있다는 고급과자였다. "귀족 녀석들이야 별로 신경 안쓰겠지만, 평민들이 보기에 너는 성적가지고 장난친 놈으로 밖에 안 보일꺼야. 그 정도로 극단적인 성적이라니…. 조작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걸? 거기다 너, 사실 열심히 공부했다면 학년 1위(位)정도는 아무런 문제 없는거 아냐?" "과연." 무슨 말인지 알겠군. 성적가지고 장난친 놈이라…. 본의아니게 그런 성적이 나오긴 했지만, 성적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평민들은 카리에르제가 말한것 처럼 생각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아마, 네리셰의 말 만큼이나 내 성적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과연이 아니야. 과연이!" 카리에르제는 답답한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약간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역시 그들과 같은 평민이야. 나나 네리셰 같은 귀족이 아니라. 그들은 성적이란걸 굉장히 중요시 한단 말이야. 그걸 농락한 너에게 무슨 보복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 농락이라니…. 어쨌든, 그런 얘기인가. 그런데 보복이라니… 상상력이 닿지 않는다. 내 성적을 보고 상했을 그들의 기분에 대한 보복이라는건가? 알듯 말듯 하게 그 보복의 밑에 깔려 있을 감정의 이름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시기, 질투, 열등감…. 잊고 있던건 아니다. 다만, 인간에겐 그런 마이너스한 감정도 있었었지…. 카리에르제는 와그작- 소리를 내며 사탕을 씹어먹더니 남은 막대기를 화단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뭐, 너야 어쨌든… 나는 학년 27위 정도면 가문에 체면치레 할 정도의 성적은 받았고, 오늘은 피곤하니 휴게실에서 낮잠이나 자야겠다." 카리에르제는 양 손을 머리 뒤에 대고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날 스치고 지나갔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더니 내게 말했다. "아,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이야기해. 어렵지 않게 해결해 줄테니까." 그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볼을 긁었다. … 부끄러움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얘기?" "바보. 아무튼 말이야. 그럼 난 간다!" 카리에르제와 헤어졌다. # 카리에르제가 말했던 보복이란 것에 대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되었다. 성적이 나와 그걸 확인하고 휴식을 취하러 기숙사에 홀로 돌아가는 도중, 나는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 "칼리체… 라고 했나? 잠깐 따라와 볼래?" 우리 클래스에서 같이 강의를 듣는 인간이었다. 신분은 평민이고, 이름은 프엘고 라고 했던걸로 기억한다. 그리 눈에 띄는 편은 아닌 인간이어서 얼굴이 낯설다. "무슨 볼일이지?" 그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덩치도 좀 있고, 원래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서 상당히 박력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인상을 구긴채, 그는 주변의 이목을 신경쓰는듯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내 나즈막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 명백히 악의를 갖고 있는듯한 모습이지만, 나는 그를 따라가 주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흐음… 이게 카리에르제가 말했던 보복이라는 건가. 그에게서 풍기는 명백한 적의를 생각한다면, 그 예상이 틀림 없을듯 하다. 카리에르제가 무슨일 있으면 얘기하라, 라고 했던 말은 그가 이런 상황을 예상했고, 내가 카리에르제에게 이 상황을 알린다면 그가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겠지. 호의는 기껍지만, 카리에르제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프엘고는 나를 데리고 그늘이 진 건물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곳엔 그를 제외한 두 명의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신분은 역시 평민 이었다. 한 명은 약간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프엘고와 마찬가지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각각 레디난도, 슈렐헤그 라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할 얘기란?" "잘난척 하지마 이자식아! 넌 이쯤 되어서도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르겠냐?" 프엘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양 손으로 내 어깨를 쳐 나를 밀쳐냈다. 꽤 강한 힘이라 나는 여러 발자국 뒤로 밀려나 결국 건물의 벽에 등이 닿을 수 밖에 없었다. 나머지 두 명도 곧 이쪽으로 다가와서, 총 세 명이 나를 벽에 몰아넣고 둘러싼 형국이 되었다. "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민인 주제에 귀족과 좀 어울린다고 잘난척 하지마!" 잘난척…? 타인에게 과시하듯 으시대는것 말인가? "나는 잘난척 한적이- " "닥쳐!" 다시한번, 프엘고라는 인간이 거칠게 내 어깨를 밀쳤다. 강한 충격에 매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프엘고는 화풀이 하듯, 내 가방을 걷어찼다. 굉장히 세게 걷어찬 모양인지 가방이 터져버렸고, 내용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인데… 다리 힘이 굉장히 센 모양이다. 나는 저 멀리 굴러간 가방을 쳐다보다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프엘고를 바라보았다. "저, 프엘고… 너무 심하게는 하지 않는게- " 겁먹은 듯한 표정을 한 레디난도 라는 인간이 그를 말렸다. "무슨 소리야! 오늘 이자식 성적 못봤어? 완전 장난쳐 놓은 수준이잖아! 너는 화도 나지 않아?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귀족도 아닌 평민이란 자식이…!" "그래, 칼리체 라고 했던가? 오늘 몸 성히 기숙사에 들어가진 못할줄 알아라. 다른 평민들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귀족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네가 귀족이 된건 아니란 말이야." 프엘고에게 슈렐헤그라는 인간이 호응했다. 그는 유약해 보이는 레디난도하곤 다르게 적극적으로 프엘고에게 동조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소 난감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성적이 그렇게 나온건 고의가 아니고, 귀족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딱히 내가 귀족이 되었다는 생각도 해본적 없어." "이 자식이! 말이면 단줄 알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프엘고의 주먹이 내 가슴을 때렸다. 숨이 막히는 듯한 통증과 함께, 나는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다시 벽에 기대었다. 프엘고와 슈렐헤그는 내게 가한 그 폭력으로 약간 흥분한듯 눈이 벌게져 있었다. 레디난도 역시 더욱 겁먹은듯한 표정을 짓긴했지만, 내게 보내는 시선은 역시 미약한 적의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카리에르제가 말했던 보복… 인가. 그들의 눈동자는 시기와 질투, 열등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성적으로 장난친 적도, 귀족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잘난척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호소는 이들에게 무의미하다. 그것은 명백한 오해다. 애초에 드래곤인 내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사소한 관념들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며 이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오해란 것은 받아들이는 자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사실 내 진심은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들은 내가 우쭐댄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찰나의 시간동안 생각했다.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 서로의 진심은 알 수 없고, 인간은 단지 믿는것 밖에 할 수 없다. 믿음의 기반은 대단히 연약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믿는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다. 소통은 불모하다. # 지금껏 내게 호의를 보이는 인간은 많았지만, 적의를 보이는 인간은 몇 없었다. 나는 그것의 이유를 내 아름다운 외견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못생긴것 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선호하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이러한 아름다움이 인간들의 사회에 녹아들어가는게 적절한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까지의 일들로 나는 그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내 외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내게 이렇게 뚜렷한 적의를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이들의 경쟁 구조속에 '참여' 했기 때문이다. 경쟁에선 남을 도태시키고 자신이 위로 올라서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 경쟁에 많은 의미를 두는 자라면, 다른 경쟁 상대들이 '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평민이다. 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턱없이 약한, 사회적 약자다. 그런 이들이 귀족을 경쟁에서의 '적' 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나는 발을 크게 휘둘러 프엘고의 가슴을 걷어찼다. 내 근력은 상당히 약한 편이지만, 나는 발에 회전력을 실음으로서 약한 근력을 보충했다. "크악!" 가슴을 맞은 프엘고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프엘고를 바라보며 계속 생각했다. 원래, 나는 이들에게 '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귀족을 '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소수인 평민들이 같은 평민인 나를 '적'으로 인식했었을까? 내가 보기에 이들은 단결력이 강하다. 귀족들이 대부분인 이 루블라브룽 아카데미에선, 자신과 같은 평민이 같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겠지. "이야앗- !" 소리를 내지르며 나는 향해 달려드는 슈렐헤그를 살짝 피해, 몸을 숙여 빠르게 그의 뒤로 돌아갔다. 텅빈 그의 등을, 나는 발을 들어 걷어찼다. 원래 그가 향하던 방향에 내 힘까지 더했더니 그는 스스로 벽을 향해 달려가 거기에 머리를 들이 받는 신세가 되었다. "히익!" 레디난도라는 인간은 슈렐헤그가 완전히 쓰러지자 겁먹은 비명을 지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보기엔 아마도 다음엔 내가 자신을 때리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계집애 같이 생긴 녀석이!" 충분한 타격을 주지 못했었는지, 프엘고가 금방 바닥에서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에게로 향하는 그의 주먹을, 고개를 숙여 피했다. 이 가느다란 팔로 프엘고의 주먹을 정면에서 받을순 없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산발적인 그의 공격을 몇차례 더 피해내었다. "쥐새끼 같이 자꾸 도망치지 말란 말야!" 그는 자꾸 공격을 피하는 나를 묶어둘 심산인지, 덮치듯 나에게 달려들었다. 동작이 커서, 빈틈이 보였다. 나는 말아쥔 주먹으로 그의 명치부근을 때렸다. 허윽-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명치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섰다. … 이들이 내게 화가난 이유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들의 경쟁자체를 조롱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인 내 성적은, 내가 진지한 태도로 시험에 응하지 않고, 일부러 점수를 떨어트렸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을 테니까. "…." 나는 여전히 명치를 움켜쥐고 있는 그에게 달려가, 체중을 실은 발길질로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는 곧 바닥에 쓰러졌다. "으으…." 내 시선이 유일하게 서있는 레디난도 에게로 향하자,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듯, 표정을 굳혔다. 그는 주먹을 앞으로 내세우며, 입을 열었다. "더, 덤벼!" 이것참…. "… 그만하자. 이 녀석들, 네가 데리고 가주겠어?" 그는 자존심이 상한듯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누그러진 기색이 나와 싸울 태세는 아니었다. "끄윽- 우릴…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야." 슈렐헤그는 벽에 머리를 박는 동시에 정신을 잃은듯 했지만, 프엘고는 여전히 의식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용돈타령 하는 귀족들 따위야 어쨌건,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우리의 미래가 달린 일인데! 네가 뭔데 우릴 조롱- " "오해야."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프엘고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때문에 그가 내 말을 믿고 정말로 오해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여전히 같지않은 변명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진 통찰해 볼 수 없었다.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선, 후자인듯 하지만…. 나는 찢어져버린 가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흩어져 버린 내용물들을 모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찢어진곳 사이로 내용물이 다시 새어나오지 않도록 잘 신경써야 했다. … 여전히 쓰러져 있는 프엘고와 멍한 표정의 레디난도, 정신을 잃은 슈렐헤그를 나는 잠시 씁쓸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본래 이들의 화가 풀릴 정도로 적당히 맞아줄까도 생각했다만… 그쪽보다는 적당히 반격해 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내가 이 인간들의 오해로 인한 감정 따위를 포용해 줄 필요까지는 없겠지. 가방을 싸매고 건물의 앞쪽으로 다시 걸어나오다가 팔짱을 낀채 벽에 기대어 있는 흑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발견했다. "레쥬에브…." "저 녀석들을 상대로 마법을 사용할 순 없으니 영락없이 얻어맞으리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싸움도 잘하네?" "봤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인간은 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서 이 사태를 구경하고 있는거지? 그리 유쾌한 일도 아니었다만…. 떠오른 의문에 대해 생각하다 이내 결론에 도달했고,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호의적인 표정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혹시… 걱정했어? 내가 저들에게 맞을까봐?" "아, 아냣!" 레쥬에브는 얼굴을 화악- 붉히며 나를 밀쳤다. 불행하게도, 그녀와 나 사이엔 찢어진 가방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밀침에 겨우겨우 수습했던 가방의 내용물들이 다시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곤란한 심정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드니, 어느새 레쥬에브가 저쪽으로 달려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뒤를 돌아 붉은 혀를 낼름 내밀더니,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그녀와 피아노라는 악기를 연주해보았을 때도 저런 행동을 보였었지…. 이제야 혀를 내민다는게 어떤 행동인지 대강 알겠다. … 귀여운 인간이군. # 어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자신의 분함을 내게 폭력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해결하고자 했다. 나는 그런 시도의 내면에 깔린 그들의 생각, 감정을 납득했다. 하지만 납득은 이해가 아닌 것. 나는 그들의 그런 시도를 무력화 시키고, 마찬가지로 폭력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갈등을 해소했다. 해소했다…? 아니, 그건 폭력을 이용해 침묵시킨것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내게 오해를 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오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런 것이겠지…. 나는 그들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고 만 것이다. "무슨 생각해?" "아니, 아무것도…." 로나벨아크하임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선 무슨- " 고민하는 표정이라고…? 나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인간의 연약한 눈으론 태양을 똑바로 올려다 보지 못하기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조금 아래로 내렸다. 뜨겁고 환한 여름의 태양…. 그 때문에 양산 이라는걸 들고 태양빛을 막아보려는 시도가 많이 보였다. 주로 인간 여성들에게서 양산이라는 물건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유를 물으니 피부가 타는걸 방지하기 위해서, 라는 대답을 들었다. 피부가 타면 뭐 어떻다는거지…? "그렇게 하늘만 보고 걷다간 너희 클래스를 놓칠지도 몰라. 앞에도 신경쓰고 걷는게 어때?" 시야 위로 양산이 드리워졌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양산을 들고있군. 양산을 들고 있는 손이 하얗고, 섬세하다. 손의 주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이었다. 정말…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나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라도 띄우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는데…. 로나벨아크하임. 화룡은 정말로 '인간'처럼 보인다. 단순히 인간을 연기하는게 아니라, 그 자신이 완전히 인간이 되어버린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건 꽤 오래전부터 든 생각이다. 인간들의 사회에서 처음 화룡과 만났었던 때를 기억한다. 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가 거의 완벽히 인간을 연기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쓸데 없는 참견이다." 나는 손을 들어 달라붙는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오늘따라 까칠하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예상하지 못한 돌발행동을 했다. 그는 입을 벌려, 이를 드러내고 내 손을 물었다. "앗! 무슨 짓을…!" 주변에서 이쪽으로 시선이 쏟아지는게 느껴진다. 현재 우리는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레쥬에브가 말했던 '견학' 을 위해서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클래스의 수십명이 고작이었던 평소와는 다르다. 난 쓸데 없는 소요로 인간들이 나를 주목하는걸 원하지 않는다. "놔."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돌아올 수 없다는게 더 적절한 표현이겠군. … 이 녀석, 왠지 점점 더 세게 무는것 같은데. 나는 상당한 타격을 감수하고 그의 입에서 손을 확- 하고, 빼버렸다. 그의 이에 쓸린 손등이 화끈거린다. 통증이 느껴지는 손등을 매만지며 불평해보았다. "짐승같은 짓이로군." 내 말을 듣고 로나벨아크하임은 소리내어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잘 조성된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한참을 웃더니, 내게 질문했다. "인간을 좋아해?" … 이상한 물음이로군. 인간을 좋아하느냐고? 질문의 의도를 조금도 짐작해 볼 수 없었다. 나는 옆을 지나가는 인간 꼬마를 피해 걸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주변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거리의 인간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 견학을 위해 나온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즐거움을 공유하는 소리…. 난 시끄러운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싫어하는 편도 아니다. … 뭐, 그런것과 비슷하군.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 "그래?" 기묘한 기분이다. 나 이외의 다른 용과의 대화가 만능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게. 지금껏 인간들의 사회에서 마주치며 계속해서 그래왔지만… 난 지금, 이 대화에서 명백한 '이상'을 느꼈다. "짐승같은 짓이라고 했었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거리의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흥미는 통상적인 의미의 흥미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인간의 어린아이가 바닥에 기어다니는 개미를 보고 흥미로움을 표하는것 같았다. 그건, 순수하지만… 잔혹하다. "그것은 인간의 기준이 아닌가? 문다는 행위는 야만적인가? 그것은 품위가 없나? 애초에 품위라는게 도대체 뭐지? 짐승같은 짓이라는건… 인간의 입장에서 비하의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나? 그렇다면, 너는 인간인가?" 이상한 질문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 주변의 풍경이 점점 빗겨나간다. 지금껏 내가 속했던 모든 풍경들이 허상인것 같다. … 나는 그 느낌들을 가볍게 털어내며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군. 결국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거냐." "왜 그렇게 진지하게 인간을 연기하고 있냐는 거다. 사고 구조마저도 인간과 유사하게 조정할 정도로. 이 하찮은 피조물들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들은 아무것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로나벨아크하임의 손에 거대한 이적이 깃들었다. 마력과 신력이 끝없이 압축되고 압축되어, 아무런 신비조차 깃들지 않아도 그것의 순수한 에너지 만으로도 이 도시를 간단하게 날려버릴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은 평화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의 일상을 완전히 날려버릴 힘이, 그들이 가장 하찮게 여기는 시간인 1 초도 되지 않아 깃들었다는 사실도 모른채. 나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고, 그 역시 담담하게 나를 마주했다. 금방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손 안에 깃든 힘을 해방시킬것 같았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내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다. 사실, 허망하게 끝날 수 있는 세상같은건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건 우리 드래곤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 만으로…. 세계는 하찮아 보인다. 본연의 힘으로 감각하는 세계는 너무나도 연약해, 마치 먼지나 허상 같이 느껴진다. 그것에서 무엇이 중요하냐고? "내가 납득할 수 없어서다." 인간들을 좋아 하느냐…?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다. 내 행동에 있어서 그런건 고려 밖의 일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 무언가를 좋아해서, 무언가에 얽매여 행동하지 않는다. 어째서 인간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추어서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무엇을 지불하고, 희생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것은 결코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방금 대답한대로, 단지… 내가 납득할 수 없어서이다. 그것에 관해 발생하는 일들은 모두 나의 책임이다. 무언가를 위해라는 변명 따위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이런 상황, 이런 배경에서 나는 이런 말을 반복해서 해왔던것 같다. 그 묘한 기시감 때문에,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단지 네가 납득할 수 없어서라고?" 화룡이 다시한번 웃는다. 웃음엔 아무런 의도가 없다. "정말 끝도 없는 오만함이로군. 다시 한번, 그 오만함을 깨트려주마." 다시 한번… 이라고? 내 기억 리셋 이전의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과거의 나를 최종적으로 방해한건, 로나벨아크하임… 너, 였군. # 아카데미의 모든 인간들은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수도(首都)의 '자유 광장' 이라 이름 붙여진 거대한 공간에 모두 모였다. 이곳엔 아카데미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도 많이 모여있었다. 고급스러운 소재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도 있었고 평범한 옷을 입은 인간, 볼품없어 보이는 옷을 입은 인간, 나이든 인간, 어린 인간… 수 많은 각양 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광장의 한 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화려한 의자 여러개가 놓여 있었는데, 의자 하나를 한 가운데 두고 다른 의자들이 그 의자를 둘러싸고 빙 둘러져 있는 형태로 놓여져 있었다.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이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군. 나 역시 광장의 가운데를 보며 서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팔을 툭툭 건드렸다.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어린 인간 소녀였다. 그녀는 투명한 자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쥬에브, 로군. "아크함 드 셸먼이었던가? 아까 전에 봤는데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던데… 그 녀석이랑 친해?" 아크함 드 셸먼…. 화룡 녀석이 인간행세를 하며 사용하는 이름이다. 나는 담백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것을 부정했다. "상당히 친해 보이던데…." 그렇게 보인다면 어쩔수 없겠지…. 해명할 필요까진 없는 일이다. "안 친하다면 다행이고. 그 녀석은 완전히 망나니라서 말야. 여성 편력이 아주 화려하다던데… 그런 녀석은 정말 질색이야." 여성 편력? "무슨 얘기?" 무슨 이유에선지 레쥬에브는 볼을 붉히며 내 팔을 꼬집었다. 분명 전에 꼬집혔던 그 자리와 완전히 동일했다. "그런게 있어!" 모를 일이로군. 그나저나, 망나니라… 상당히 유쾌한 평가지 않은가.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을 하려는걸까. 예감이 좋지 않아…." 레쥬에브는 표정을 흐리며 광장 가운데 놓인 이상한 배치의 의자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의자에 무언가 마법적 처리라도 되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내가 보기에 의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뭐, 그녀는 흑색의 좌이니 그런것 정도는 간단하게 간파하겠지. 나는 의자로부터 시선을 떼고 광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 많은 인파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인파 속에서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쪽을 바라보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시선을 의자쪽으로 돌렸다. "나온다." 레쥬에브가 속삭이듯 나즈막하게 말했다. 무엇이…? 라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웅장한 나팔 소리와 함께, 인파가 순식간에 갈라졌고 제일먼저 갈라진 인파사이로 창을 든 병사들이 들어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황녀 펠테넨시아, 그리고 아직 이름은 모르는 황자가 들어섰다. 젊은 두 자식 앞에 서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너무나도 젊어 보였다. 세 명이 남매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 은룡을 시야 안에 두며 용의 감각을 서서히 개방시켰다. 극도로 날카로운 용의 감각에 이 공간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느껴져왔다. 수 천명은 될법한 인간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만들어 내는 압도적인 정보량을, 나는 묵묵히 받아들이며 은룡이 광장 가운데 마련된 화려한 의자에 앉는것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이미 은룡이 등장할때부터 '여제 폐하 만세!' 라는 문장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거대한 광장에 수 천 명의 인간들이 한 명이 된것처럼 '여제 폐하 만세!' 를 외쳐대니, 목소리 만으로 이 공간을 진동시켰다. 정말 대단한 인기로군…. 은룡의 뒤를 따라오던 백색의 좌, 리체르아가 은룡이 앉아있는 의자 뒤에 자리잡았다. 은룡의 양 옆자리엔 황녀 펠테넨시아와 황자가 앉았다. 그 주변을 화려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에워쌌다. 아마, 저 '고귀한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겠지. 옆에 서있는 레쥬에브가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붉은 보석이 박힌 장갑을 주목했다. 아마 저 장갑이 흑색의 좌를 상징하는 물건이겠지. 정확히는 저 붉은 보석이. 리체르아의 '광휘' 와 동일한 물건일 것이다. 레쥬에브는, 전투까지 상정하고 나온것인가…. 그렇다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것 같은데. 은룡이 손을 들어올렸다. '여제 폐하 만세!' 라고 외치던 인간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광장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손짓 하나로 모두를 침묵에 이르게 하는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마법 같았다. 은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외쳤다. "죄인을 데려오라!" 소녀같이 가느다란 낭랑한 은룡의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은룡의 말이 끝나자마자, 처음 은룡이 등장했던 곳에서 남루한 차림을 한 사내가 두 명의 기사에게 양팔을 붙잡힌채 끌려나오고 있었다. 수 천 명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역시 순식간에 경멸과 분노, 멸시로 바뀌었다. 악의 섞인 수 천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 사내는 애처로울 정도로 움츠러 들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를 잡아끄는 기사의 손길에 자비는 없었고, 그는 곧 은룡의 앞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은룡은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시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지?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는 듯, 레쥬에브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살짝 치며 말했다. "듀그베르 라는 남자야. 이년동안 살인에 방화, 강간, 강도 수 많은 범죄행위를 저질러온 악질중에 악질이지. 그런데 머리가 비상한건지 그 동안 한 번도 꼬리를 잡히지 않았어. 한 반 년전쯤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 에 의해 붙잡혔지. 그는 이미 종신형을 받았을 텐데…."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덧붙였다. "수도의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범죄자야." 그리고서 레쥬에브는 다시 광장의 중앙을 주목했다. 의아한 눈빛이 한가득인게 지금 이 자리에 이미 형벌이 정해진 범죄자가 왜 나왔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은룡의 옆에서 옷을 잘 차려입은 관리인듯한 남자가 나오더니, 기다란 양피지를 꺼내어 큰 목소리로 읽었다. "듀그베르 레드죤. 32세. 항구도시 네리젠 출생. 12 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살인죄, 6 명의 여자를 강제로 간한 강간죄, 23 회의 강도 행위, 3 회의 방화행위 등의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8개월 전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중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에 의해 검거,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현재 7 개월간 지하감옥 '세르제니움' 에 투옥중." 저 남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인가…. 이미 종신형을 선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듀그베르 라는 남자에 대한 악의가 사방에서 느껴져왔다. 누군가는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고, 누군가는 허공으로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 아무래도 좋다. 이 범죄자가 왜 이곳에 있으며, 왜 많은 네거스텐 제국의 시민들과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불러 모은 걸까. 은룡은 저 남자를 통해, 어떻게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는 것일까. 듀그베르의 범죄 행위를 읊은 관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잠시 동안 광장엔 침묵이 감도는 듯 했다. 다른 인간들은 지금 범죄자가 왜 이자리에 나온건지에 대한 의문 보다는 저 남자에 대한 적의가 더 커보였다. 은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범죄자에게로 걸어나왔다. 발목까지 닿는 긴 은발이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하며 은빛을 뿌렸다. 그녀의 머리위에 씌워져 있는 극도로 화려한 황제의 관, 바닥에 끌리는 화려한 의복이 듀그베르 라는 남자를 숨을 쉴수 없을 정도로 압박하는게 보인다. 은룡의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기사들의 근육이 긴장하는게 내 감각에 포착되었다. 은룡과 듀그베르 라는 남자의 거리는 불과 두 세 발자국 거리. 범죄자가 갑자기 은룡에게 달려들 가능성도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그것을 머리속에서 흘려보냈다. 저 남자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미 그녀가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몸이 눌려 숨조차 쉬기 힘들어 하고 있다. 묘한 광경이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와 가장 비천한 자가 한 자리에 모여 수 천의 시선을 받고 있다. 인간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모두 들어라, 나의 백성들이여." 은룡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마치 직접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미약한 마력이 담겨 있음을 눈치챘다. "이 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이미 종신형을 선고 하긴 했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 형벌이 이 자가 죽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목소리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사고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에, 미약하게 용의 기운이 섞여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용의 존재감이 인간들의 머리속을 파고 들며, 사고를 마비시킨다. 하물며 그녀가 떠들고 있는 말이 진실일 따름에야- 레쥬에브를 보니,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은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녀에게, 은룡의 존재감은 말도 안되게 거대하게 다가올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은룡처럼 기운을 외부로 흘리지는 않았지만, 레쥬에브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나마 웃어주었다. 여제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 자의 하찮은 목숨으론 어떤 가혹한 형벌을 가해도 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보상할 수 없다. 절대로." "…." 모두가 침묵하며 은룡만을 바라보고 있다. 형벌, 이라…. 사회를 이룬 인간이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게 법이라는 것 정도 밖에는 모르겠군. 하지만 은룡의 말엔 납득이 간다. 그 어떠한 형벌로도 그에게 죽은 자들의 목숨을 보상할 순 없겠지….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거냐, 레테닌시에스케. "그래서 나는 이 자에게 새로운 형벌을 내리기로 했다! 듀그베르… 너는 영원토록 네거스텐 제국의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라!" 나는 거기서 비틀림을 느낀다. 평생도 아니고… '영원' 토록? 은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듀그베르를 내려다보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잔혹한 선고를 내렸다. "너는 이제부터 네가 언제 태어났는지 잊을 것이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도 잊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잊을 것이다. 다만 너는 모두에게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만 알게 될 것이다." "아… 으, 으아- " 듀그베르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짐승처럼 애처로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은룡의 뒤로 투구를 쓴 네른-네르프로넨의 기사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마력을 전개해 거대한 마법의 발현을 시작했다. 은룡은 그것들로 부터 한걸음 물러나 만족스런 표정으로 발현되는 마법을 바라보았다. 마력의 전개가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건…. 이곳으로 몰려드는건, 이 세계의 어디서든 존재하는 순수한 힘, 마력이 아니었다. 현계에는 존재해서는 안 될 힘, 음차원의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나는 묵묵히 발현되고 있는 마법을 바라보았다. 음차원의 마력은 듀그베르의 사고를 파고들어 모든것을 파괴했다. 그야 말로 모든 것이었다. 그가 살아온 기억, 그의 이름, 그의 가치관… 그가 그이기 위한 모든 것들. 단순히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 아니다. 이것은 그에게서 '인간'을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비워진 자리를 단 한가지의 사고가 채웠다. '네거스텐 제국을 위해' 그야말로, 은룡의 말대로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 마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눈치채지 못한채,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마법이 발현되고 있는 단상 위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레쥬에브만 그것을 눈치챈듯 잡고 있는 손에서 강한 압력이 느껴져 왔다. … 마법의 발현이 끝났다. 은룡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인 듀그베르는 이제 지워졌다. 방금전 내가 했던 말대로, 이 자는 영원토록 네거스텐 제국의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게 될 것이다. 죽음조차, 그의 봉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은룡의 말대로다. 음차원의 마력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진실로 죽음조차, 그의 봉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영혼마저, 이곳에 빼앗겼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며칠전 레쥬에브를 습격했던 '그림자' 들을 떠올렸다. 그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내가 근원의 지식에서도 그런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이건… 인간들이 음차원의 마력에 손을 댄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로군. 그리고 그런 인간들 뒤엔… 은룡이 있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은룡의 뒤에 석상처럼 서있는 백색의 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을 모를 표정으로 은룡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리체르아…. 이건 네가 과거에 목숨걸고 저지하려 했던, '마왕' 과 다를게 없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방금 실현된 마법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니까. 이 마법은 우리 제국에서 범죄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죄를 범한다 해도 상관 없다. 그 이후로 그 자는 이 자처럼 영원토록 우리 제국을 위해 봉사하게 될 것이니까." 은룡은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양팔을 벌리며 웃었다. "범죄라는 사회적 죄악을 사회에 대한 무한한 봉사로 환원한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이다. 나의 백성들이여!" 그리고 인간들은, 환호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환호하는 인간들에 대한 명백한, 기만이다. # 은룡은 자리에서 퇴장했고, 광장에 몰린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흥분에 들뜬채 흩어졌다. 이곳까지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인솔해온 교수들은 이곳에서 해산한다고 말했다. 아카데미의 인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레쥬에브와 함께 광장에 남아있다가 주위의 인간들이 모두 흩어진 후에 아카데미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리 흑색의 좌라고 해도, 그녀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여물지 못한 어린 인간이다. 한 인간이 음차원의 마력에 의해 완전히 말살되어 가는 과정을 진실로서만 지켜본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기엔… 조금 힘들겠지. 품속으로 안겨, 계속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등을 조금 당황스런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레쥬에브는 한참을 울더니 내 품에서 빠져나와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눈이 빨갛게 부은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내게 등을 보이고 멀어져갔다. 오늘 그런 광경을 보고… 레쥬에브는 은룡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은룡은 압도적이었다. 성난 폭군처럼 인간을 휘어잡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이끌어 가고 있다. 방해하는 자는 없고, 그녀를 지지하는 인간들만 이 제국에 수 없이 산재해있다. 오늘 본 광경은, 거의 전부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지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인간들은 열렬한 환호를, 여제에게 보냈다. 그 광경을 보고 레쥬에브는 극도의 혐오를 느끼지 않았을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오직 자신만이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흑색의 좌를 꽤 괴롭게 할 것이다. 만약 레쥬에브가 포기한다 해도, 나는 투덜거리는 식으로라도 그녀를 탓할 수 없겠군. 조금 쓴 기분으로 몸을 돌려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골목의 모퉁이서 평상복을 입은 아름다운 은발의 소녀가 걸어나왔다. … 복장을 제외한다면, 그 모습은 완벽한 레케트리셴 문 여제 였지만 주변을 지나는 인간들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묘한 위화감 속에, 그녀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땠어? 루루렌칼리체." # 레테닌시에스케와 함께 광장 근처에 있는 노천 카페를 찾아 차양이 드리워진 곳에 자리를 잡은 뒤, 간단한 음료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인간은 주문을 받자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 인간의 담백한 태도는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라는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의 증명이었다. 거대한 마력이 그녀의 주위를 돌며, 정보를 왜곡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상당히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군…. "대화를 위한 공간인가?" 나는 그렇게 물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엔 주로 한 쌍의 인간 남녀가 짝을 이루어 앉아 있었다. 서로 부드럽게 웃으며, 작은 소리로 재잘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차분한 분위기로군. "응." "왜 이런 장소로 오자고 한거지?" "방금 네가 했던 말에 답이있지."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 주문은 그녀가 했던 터라, 내 앞에 놓인 이 음료의 이름이 무엇인진 잘 모르겠다. 나는 컵을 들어 향을 맡아 본 뒤, 한모금 홀짝였다. 향은 좋은데 맛은 굉장히 썼다. 앞을 보니 은룡이 선량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 음료의 쓴 맛은 틀림없이 이 녀석의 의도일 것이다. … 그나저나 방금 내가 했던 말에 답이 있다는건, 대화를 하기 위해 나를 이런 장소로 데려왔다는게 맞겠지. 하지만, 굳이 대화를 위해서…? 드래곤인 우리가 대화를 위해, 인간이 조성한 공간을 이용한다고? 무척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다. 다들, 태초부터 사용해왔던 만능의 언어는 잊어버리기라도 한건가? 나는 은룡이 기울인 컵을 다홍빛 입술을 가져다 대는걸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자는 거지?" 은룡은 입술만 축이는듯 컵에서 입을 금방 떼었다. 부드럽게 내려놓은 컵 안의 내용물엔 희미한 떨림 조차 없었다. "대화는 네가 하고 싶을텐데?" 부정할 수 없군.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일들을 하는 거지? 방금 전이야 네가 인간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며 일을 처리해 별 문제가 없었지만…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인성을 말살하여 사회의 노예로 쓴다는건 좀 심하군. 지금이야 잠잠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반발하는 인간이 나올 것이다." "뭐야, 정책적 조언인가?" "말도 안되는 소릴…." 은룡은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었다. 그 부드러운 웃음소리는 마치 얼마전 들었던 듣기 좋은 피아노 소리 같았다. … 여느 인간 여성 못지않게 '품위' 있게 웃는군. 화룡도 그렇고 은룡도 그렇고 왜 이렇게 자연스럽고, 진지하게 인간을 연기하는거지? 떠오른 의문은 또다시 다른 의문으로 이어지고, 복잡한 실타래 처럼 둥그렇게 얽혀 사고의 바닥을 굴러다닌다. 거기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은룡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새가 지저귀듯 이야기했다. "소수의 인간을 철저히 희생시켜 절대 다수의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마침, 그 소수의 인간은 지금껏 주변에 수많은 해악을 끼친 범죄자이지. 게다가 마법의 힘으로 자아를 빼앗긴 인간은, 그 자신이 다수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마저 모른다." 그녀는 작은 다홍빛 입술을 열어 달콤하게 덧붙였다. "가책은 없다." 소수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수를 위한다는건가…. "그게,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이라는건가?" "하, 그럴리가?" 은룡은 다시 웃었다. 하지만 방금전의 얌전한 웃음과 달리 이번의 웃음은 꽤 공허하고, 어쩐지 경멸의 감정마저 담겨 있는 듯 했다. 잿빛 시선이 흉폭하게 변하며 나를 쏘아보았다. "인간의 위대함…? 루루렌칼리체, 인간에게 위대함의 작은 조각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하는건가?" "…." 아무런 말이 없는 나에게 레테닌시에스케는 나를 몰아붙이듯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천하고, 멍청한 족속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걸 알면서도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주목하고, 탐욕에 모든걸 던지고, 아무렇지 않게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 딱잘라 부정할 수는 없는 이야기로군…. 인간에 대한 은룡의 악의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면, 은룡은 어째서 인간의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흐음- " … 지금껏 날카로운 기세를 보이며 나에게 쏘아붙였던 은룡은 컵을 다시 입술로 가져다 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부드러운 미소마저 머금은 하얀 얼굴이, 방금까지의 경멸은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왔고, 은룡이 그것을 곧 깨트렸다. "… 이 육신으로 낳은 자식이 둘 있지." "황녀 펠테넨시아와… 황자 말인가?" "그래." 은룡은 손으로 턱을 괴고 새끼손가락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내리깔렸고, 긴 은빛 속눈썹이 불규칙 적으로 깜빡 거렸다. 주변의 시선이 적지 않게 은룡에게 집중되고 있다. 그녀 주변의 마력이 정보를 왜곡시키며 인간들에게 그녀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아니라는걸 인식시키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화(化)하고 있는 육신에서 퍼져 나오는 아름다움과 기품마저 왜곡시키는건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자라고 칭해지는 이들이지. 왜 그런지 아나?" "…."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길 꺼내는지 모르겠군.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은룡의 이야기는 따라가기가 힘들다. 나는 아무말도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은룡은 손을 아랫배에 얹으며 말했다. "이 몸으로 낳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 익숙한 이야기로군. "단지 그 뿐이다. 고귀하다고 칭해지는 데에는 별다른 자격이 없다. 그저 지배 계층의 자식이기만 하면 되는거야." 이야기를 들으며 손을 뻗어 컵을 잡았다. 아직 열이 빠져 나가지 않은 컵은 굉장히 따뜻해서, 손이 녹아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컵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 그곳에 담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똑같은 맛인데도, 방금만큼 쓰진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는 누구지?" 레테닌시에스케는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한 명은 노예고, 한 명은 반역자다." 노예와 반역자라고…? 은룡은 담담한듯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순간, 은룡이 인간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나에게 반(反)하여 반역을 일으킨 자가 있었지. 그는 곧 제압되고, 사형을 앞두게 되었다. 내 앞으로 끌려나와 무릎꿇은 그는 무척이나 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 반역자라…. 그땐 내가 내 보금자리에서 잠들어 있을 때였겠군. 은룡이 인간들의 황제 노릇을 한지도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다. "난 그에게 죽기전 마지막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그는 나를 조롱할 목적으로 사형당하기 전에 나를 범해보고 싶다고 말했지." 은룡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를 추종하는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나를 모욕한 그를 죽이려했지. 하지만 나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그는 나를 안았다." "…."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가 지금의 황자이지." … 미약한 불쾌감이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게 느껴졌다. "황녀는 평상복을 입고 홀로 산책을 나온 나를, 마구간을 청소하던 노예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 몸을 덮쳐 태어나게 되었지. 내가 여제라는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욕망이 목숨보다 우선하던가?" 은룡은 그렇게 말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는 은룡의 웃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의도가 어느정도 읽히는듯 하다. "이건 황실에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황자와 황녀도,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몰라." "…." "재미있지 않나, 백룡? 많은 인간들이 나의 자식들과 나를 가장 고귀한 피로 떠받들길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실상 그들의 아버지는 가장 천한 신분인 반역자와 노예이며 신성의 강림이라고 믿는 나조차도 그들이 경멸하는 자들과 놀아났지." 그렇게 말하며, 은룡은 네거스텐 제국의 인간들에게 자주 보여주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극한 아름다움, 시간을 빗겨나가는 외모… 그 신비로움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녀를 신성(神聖)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인간들의 '신성' 은 주변의 모든 나라를 굴복시키고, 네거스텐 제국을 '인간'이라는 종족의 이름과 동일한 위상을 갖게 만들었다.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절대적인 권력을 획득했지만, 그것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은 많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떠받들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떠받드는 신성… 고귀한 피가 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천한자의 것에서 나왔다, 라…. "정말… 무엇이 고귀한 피라는 거지?" 은룡은 자신의 팔을 들어보이며 말을이었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노예이건 간에 나에겐 모두 하찮은 인간일 뿐이다. 이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푸른 색인가?" 그렇게 말하며 레테닌시에스케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었다. 뽑혀진 검날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났다. 곧 검날은 손목을 향했고, 부드러운 살을 갈랐다. 동맥을 건드린건지, 상당량의 피가 튀며 그녀의 화려한 의복을 적셨다. 내 얼굴로 까지 튄 피가 뺨을 타고 주르륵 내려오는게 느껴졌다. 물론, 피는 붉은색이었다. 주변의 인간들이 우리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룡은 재미있다는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에 연연하겠지. 황자와 황녀의 아버지가 사실은 반역자와 노예라는걸 공표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은룡은 차분히 가라앉은 쟃빛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테이블과 바닥엔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했다. 안 그래도 하얗던 그녀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변해간다. 하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은룡의 시선엔 일말의 변함도 없다. 지금 내게… 그 대답을 강요하는건가? "유쾌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겠지." 이 강성한 제국을 지탱하는건,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신성… 단지 그것 하나뿐이니까. 은룡은 내 대답에 만족했다는듯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하군, 은룡. 정말로…. 나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모든 불쾌감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인간을 향한, 정말로 지독한 '조롱'이군." 이게 은룡의 진심이다. '인간'들의 황궁 내부에 있던 거대한 '드래곤'의 조각, 황자와 황녀의 태생의 비밀,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는 마법, 인간의 가장 강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자가 실은 드래곤이라는 사실 자체까지, 모두 하나같이… 인간을 향한 은룡의 조롱일 뿐이다. 은룡은 내 말을 듣자, 지금껏 자연스럽게 몸에 두르고 있던 인간적인 분위기를 모두 벗어버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은 표정을 잃었고, 벌어진 손목의 상처에서 배어나오던 피는 순식간에 멈추어버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은발 소녀의 아름다운 쟃빛 눈동자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끔찍하게 찢어졌다. 은룡의 쟃빛 시선 속에서, 나는 그녀가 만능의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 인간은, 가치가 없다.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황혼의 빛으로 완전히 젖어 있었다. 나는 내 그림자를 보며 길을 걷다, 뒤를 돌아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최근 일출과 일몰을 감상한 적이 없었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고 느낀다. 머리속에서 떠돌고 있던 수천, 수만개나 되는 사고의 방향들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거짓말처럼 종결되었다. 그런것을 느끼며, 나는 내가 진심으로 태양에 매료되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길을 지나다니는 인간들에게 방해 받지 않기위해, 건물의 벽에 등을 기대고 언제까지고,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마력을 머금어 극도로 민감해진 시각은 태양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잡아내고, 나는 태양이 완전히 져 대지에 어둠이 내릴때까지 황혼을 바라보았다. "…." 언젠가, 이곳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면… 요르간드로 돌아가 그간 못보았던 태양의 일출과 일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끝나면 칼리아넬에게 가기로 했으니, 태양의 일출과 일몰을 감상하는 장소는 아마 그녀의 옆 자리가 되겠지…. 나는 옛날처럼 칼리아넬이 조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편하게 몸을 뉘이고 수십… 아니, 수 백년 동안 태양만을 감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태양이 지고 나서도 그 자리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은룡은 인간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만능의 언어는 불 필요한 해석의 다양성을 잘라내고, 은룡이 말하는 진심만을 내게 전해주었다. 은룡이 지금껏 인간들의 황제 노릇을 하며 해왔던 모든것이, 단지 내게 '인간은 가치가 없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 벌였던 일들이란걸 깨닫는다. 하지만 은룡은 아직 모든걸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가치가 없다' 라는 말엔 생략된 것이 있다. 그건… 단순히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 말에 생략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은룡이 말한 가치라는건… 도대체 무얼 위한 가치라는 걸까. 머지 않아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내가 리셋해 버린 나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 결론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것들이 단 하나의 것으로 귀결될 거라는걸 확신한다. # "으아-! 슬슬 방학이구나." 카리에르제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더욱 붉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한껏 몸을 뒤로 젖힌탓에, 목재로 만든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방학…?" 내 물음에 그는 태양빛에 마치 상기된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말했다. "그래, 방학! 시험이 끝났으니, 응당 그에 대한 휴식시간도 있어야겠지. 날도 슬슬 너무 더워지고 있고 말이야."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방학 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는 방학을 이용해 잠깐 바다로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러 이야기를 꺼내었다. … 계획들은 하나 같이 모두 한껏 여유에 물든, 즐거움을 위한 계획들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적당히 응수해주며 대화를 계속 이끌어 나갔다. " -그래서, 이번 방학은 아주 알차게 보내볼꺼란 말씀!" 힘찬 결의로, 카리에르제는 이야기의 끝맺음을 지었다. … 그와의 대화에서 유추해보자면, 방학이란건 약 50 일 동안 학업을 쉬는걸 말하는것 같다. 음, 상당히 긴 시간동안 강의가 쉬게 되는 셈이다. "아, 강의실이 모두 문을 닫기는 하지만 기숙사는 방학 동안에도 계속 이용할 수 있어. 물론, 그건 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때의 이야기지만 말야." 기꺼운 이야기로군. 다른 주거지를 구하는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곳은 편의를 위한 시설이 꽤 많으니까…. 요컨데, 자잘한 수고스러움을 많이 덜어준다는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할거야? 집으로 돌아갈거야?" "아니, 집으로는 가지 않아." 카리에르제는 내 물음에 딱 잘라 답했다. 전에 보았던, 고압적인 태도를 가진 그의 형 때문일까…. 그는 그의 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듯한 눈치다. "그럼 너도 기숙사에서 지낼 생각이야?" "잠깐, '너도' 라는건… 칼리체, 너… 진짜 기숙사에서 지낼 셈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 대답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을까… 카리에르제는 묘하게 일그러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재미없는 녀석이구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서 도대체 뭘 하겠다고…." 이상한 녀석이군. 자기는 마치 기숙사에서 지내지 않을것처럼 말하다니….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책상위에 엎드렸다. 아마 그대로 몇 분간 눈을 붙이기라도 할 생각인듯 했다. 나는 카리에르제에게서 시선을 돌려, 레쥬에브의 빈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분명, 어제의 일 때문이겠지. "…." 은룡이 말했던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은 아카데미 내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모양이다. 모두가 하루종일 그 마법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면, 모두들 그 마법에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회의 악인 범죄자를, 모두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니 정말로 위대한 마법이다, 라고 떠들어 대는 인간이 대부분이었다. 정작 그 마법을 시전당하는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은룡의 이야기 대로다. 대상자가 끔찍한 범죄자로 한정되었으므로, 가책은 없다. … 아무튼, 레쥬에브의 빈 자리가 계속 눈에 밟힌다. 상당히 신경쓰이지만 그것은 그녀가 홀로 감내해야할 일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그녀에게 어떠한 도움이나 한 마디의 말조차도 해주지 않겠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앞으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게되든, 온전한 그녀의 의지로 결정하길 바란다. 만약 그녀가 인간들의 세계에서 은룡을 몰아내는걸 포기하려 마음먹는다 할지라도 어쩔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래도 그녀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 시험이 끝나고 방학을 앞둔 시점이어서 그런지 강의는 여유롭게 진행되었고 평소보다 빠른 시간에 끝났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놀까, 따위의 대화를 하며 강의실을 나갔다. 가방을 매고 건물을 나왔다. 천공에 떠있는 태양은 아직 한창이라는걸 과시하듯, 찬란한 빛을 지상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여유로운 한때로군…. 나도 오랜만에 외출이나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아카데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외출을 위해 증을 끊기 위해서였다. 똑, 똑- 하고 노크를 한 뒤,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에 있는 인간들은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음료를 마시거나, 서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났다라는 여유로움은 학생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여러가지 잡다한 일들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 중 한 인간에게 다가가 외출증을 요구했다. "아, 칼리체… 칼리체 리블란셰. 맞지?" 중년의 인간 남성이 내게 인장이 찍힌 외출증을 건내며 말을 걸어왔다. 한번도 본적 없는 인간인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외출증을 받아들고,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확실히, 외출증에 이름 같은건 쓰여있지 않다. "네, 제가 칼리체에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에게 의문스런 시선을 보내었다. 다행히, 그는 내 시선을 이해하고 멋쩍은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미안하구나. 네가 워낙 유명해서 말이다. 평민 중에 시험에서 그 정도의 성적을 거둔건 너 밖에 없으니까. 거기다 과목도 지독하게 어렵기로 유명한 과목이 대다수 였으니 말이다." 그는 대견하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 남자도 아마 평민인 모양이다. 귀족들로 가득한 이 아카데미에서 평민이라는 단 한개의 공통점 만으로, 나와 너를 나누는 경계의 선은 이토록 얇아진다.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 사무실을 나왔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게, 확실히 영향력이 크기는 큰 모양이군…. # 아카데미 밖을 나온다 해도 다른 인간 학생들처럼,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일은 없다. 친구들끼리 거리를 걸어다니며 구경을 하거나 대화를 하고, 물건을 사는게 그들의 즐거움인듯 했다. 내가 그런것에 즐거움을 느낄리는 만무하고… 오늘은 그냥 산책차 도시를 한 바퀴 걸어보기로 했다. 그저 걷는것 뿐이지만, 도시의 크기는 상당해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예상한다. 흥미를 끄는게 있다면 내 발걸음을 잠깐이라도 멈추게 할 수도 있을테고…. 그렇게 한껏 여유로운 기분으로 활기가 넘치는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의 인간들은 언제나와 같이 치열했다. 특별한 엠블렘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도시의 치안대는 분주히 도시 내부를 순찰하러 다녔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다른 인간들의 시선을 끌어 물건을 팔고자 했다. 물건을 사려는 인간과 가격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들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온다.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 평민들의 거리가 조용한 귀족들의 거주 지역보다는 산책하기에 더 좋다. 인간들이 내뿜는 활기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자면, 태초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끝없는 내 권태감이 일순간이라도 날아가버리는듯 했다. 나는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이곳 저곳을 여유롭게 살폈다. 한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다 나와 부딪혀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고, 비참하게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거지에게 몇푼 안되는 재화를 쥐어주기도 했다. 귀족의 화려한 마차를 보기도 했고, 그 마차가 주변의 배려 없이 빠른 속도로 가도(街道)를 지나가며 뿌린 먼지를 맡아 작게 욕설을 하는 평민을 보기도 했다. 가난한듯, 이리저리 기워진 옷을 입고 있는 인간의 어린 아이에게 간단한 먹거리를 사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그만 아카데미로 돌아가자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나는 더러운 바닥에 거의 엎드린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을 보고 멈출수 밖에 없었다. 그 인간은 한 손에 더러운 천조각을 들고 필사적으로 더러운 오물이 묻은 바닥을 닦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묻은 정체모를 그 오물은, 형성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얄팍한 천조각으로 닦여지지 않았다. 바닥에 문질러지던 천조각은 더이상 쓸 수 없을 만큼 헤져 버렸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천조각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더러운 상의를 벗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 그 인간의 이름은 듀그베르 레드죤. 바로 어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 에 걸린 첫번째 희생자였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마음을 지워버리고 그를 관찰했다. 그는 '청소'의 형태로서 사회에 봉사를 하는듯 했다. 그 오물을 모두 닦은 그는 다른 장소로 이동해 오물이 묻은 곳마다 자신의 상의를 이용해 깨끗이 닦아 내었다. 오물을 청소하고, 이동하고, 오물을 청소하고, 이동하고, 오물을 청소하고, 이동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능이 어딘가 망가진듯한 눈빛을 한 그의 사명은, 오직 더러운 오물을 찾아내는 것 뿐이라고 굳게 믿고있는 듯 싶었다. 몇몇 그를 알아본 인간들은 바닥에 엎드로 오물을 닦고 있는 그를 발로 걷어차며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인간들이 그를 어째서 때리고 조롱하는지 이해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못한채 오물을 닦아내는 것에만 열중했다. 열심히 바닥을 닦아내던 그의 상의가 완전히 헤졌다. 그러자 그는 하의를 벗어, 오물을 청소했다. 하의 마저 헤졌다. 그는 속옷마저 벗어, 바닥을 청소했다. 그와 마주치는 인간들은, 그의 알몸에 비명을 지르거나, 불쾌함을 표시했다. 곧 신고를 받은 도시 치안대가 와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말을 거는 치안대의 인간들에게 간단한 대답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어두운 골목으로 끌려가 얻어맞았다. 온 몸을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남겨진건 치안대의 인간이 던져준,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더러운 의복 뿐이었다.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있는 것일까, 그는 그 더러운 의복을 입고 다친 다리를 끌며 또다시 바닥을 들여다 보며 거리를 전전했다. 더러운 것을 발견한듯, 그는 즉시 바닥으로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그의 손엔 더러운 것을 청소할만한 도구가 없었다. 그는 또다시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두말할것도 없이,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의 무언가가 그에겐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가 옷을 벗으려는 순간, 그에게 늙은 노파가 다가와 큰 천을 건내주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딱딱한 바닥을 닦아도 쉽게 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천이었다. 그는 노파에게서 천을 받아들곤, 또다시 열심히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노파는 너무나도 슬픈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듀그베르, 내 아들아….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그렇게 큰 죄를 저지르고, 무사히 넘어가지 않을줄은 알았건만…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다! 이건 차라리… 사형을 당하는 편이 나았겠구나, 아들아!" 저 인간의 어머니… 인가. 노파는 열심히 바닥을 닦는 듀그베르의 뒤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듀그베르에게선 대답이 없다. 그 대답없는 듀그베르의 뒤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서서 눈물을 흘렸다. 듀그베르를 알아보고, 험악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온 인간들은 그의 어머니를 발견하곤 불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일수였다. 어머니…, 라는 건가. 문득, 과거에 요정들의 숲을 습격해 생명의 열매를 강탈하려 했던 그류벨이라는 인간과 그 딸인 에네리아 라는 인간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버지와 딸이었고, 이들은 어머니와 아들이지만… 그 둘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에네리아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어, 가슴에 대어보았다. 두근, 두근- 평온하기만 한 심장박동이다.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은 정말로 그저, 생각 뿐이었을까…. 그래, 나는 인간들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내게 무척 불쾌하게 다가오는군. 잠깐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칼리체 님…." 결이 좋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인간 여성이었다. 전에 만났던 때와 같이, 그녀는 먹거리 들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그녀의 하얀 손엔 채소들로 가득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백색의 좌 였다. "리체르아…." 그녀는 어깨 너머로 오물을 닦고 있는 비참한 모습의 듀그베르와 그의 어머니를 힐끗 보더니, 내게 쓸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칼리체 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해도 될까요?" # 백색의 좌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 소박한 느낌의 샹들리에… 기본적인건 바뀐게 없었지만 이런저런 가구들의 배치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집의 현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며 그것을 언급했다. "전에 왔을 때와는 내부 구조가 좀 달라졌군." 내 말에 리체르아는 집 안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인채 마치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 주변 환경을 바꾸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버티기가 너무 힘들거든요." 평소와 동일한, 아주 평안한 어조였지만… 나는 그 말에서 그녀가 가진 괴로움의 단편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못들은 척하며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의 푹신한 솜은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내 몸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몸이 상당히 편하군. 리체르아는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식탁위에 올려놓은뒤, 나를 돌아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 드릴게요." 그녀는 새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 조리용으로 사용되는 자그마한 칼을 꺼내어 사가지고 온 재료를 썰기 시작했다. 리체르아가 요리를 하며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대기를 타고,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내게도 전해졌다. 대단히 평화로운 분위기로군…. "…."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불 위에 올려둔 냄비에서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가 나며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리체르아는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며 식탁위에 접시를 올리고, 이미 조리가 끝난 음식을 배치했다. 접시의 옆으로 아담한 나이프와 포크, 스푼이 차례로 올려졌고, 식탁의 한 가운데를 싱그러운 향을 내뿜는 과일이 장식했다. "칼리체 님, 거의 다 되었어요. 식탁에 앉아주시겠어요?" 나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식탁의 의자를 빼고, 그곳에 앉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식탁에 많은 음식이 올려져 있으니 대단히 푸짐해 보였다. "자, 오늘의 메인 요리랍니다- !" 리체르아는 마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 불위에 올려져 있던 냄비를 단숨에 들어 식탁위로 옮겼다. 메인 요리라는 위상에 걸맞게, 냄비에선 훌륭한 향이 풍겨져 나왔다. "남부 지방에서 들여온 질 좋은 포도주에 끓인 소고기 스튜랍니다. 이거라면 불모한 칼리체 님의 미각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거에요!" 불모하다니…. 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당히 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내 미각이 기능을 못하는건 아니니까. 리체르아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한쪽에 곱게 개어 두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하얀 앞치마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백색의 좌가 요리를 하다가 국물 따위를 옷에 튀긴다거나 하는 일은… 정말 농담거리도 안되는 이야기겠지.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듯한 흑색의 좌와는 달리, 그녀는 기본적으로 검을 사용하는 인간이니까. 시야를 잠깐 돌리자, 내가 방금전까지 앉아있던 의자 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검, '광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자, 어서 드셔보세요." 기대감이 가득한 리체르아의 눈빛에, 나는 스푼을 들어 스튜를 떠먹어 보았다. 부드러운 고기의 육질과 함께, 입안에서 아련한 달콤함이 퍼져나갔다. 나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진정으로 그 음식의 맛을 느낄 수는 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평가 정도는 가능하겠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도 따뜻한 맛이었다. "굉장히 맛있는 걸." 내 말을 들은 백색의 좌는 어린 소녀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별다른 수식어는 쓰지 않았는데… 그녀는 내 담백한 평가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포크를 이용해 잘 버무려진 샐러드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걸 바라보았다. 곧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스튜뿐만 아니라 샐러드도 그녀가 의도한대로 맛있게 버무려진 모양이다. 백색의 좌…. 인간의 가장 거대한 신비를 쥐고 있는 두 존재중 한 명. 하지만 그 존재를 앞에두고 있는 내게는 그녀가 그냥 평범한 인간 여성처럼 보였다. 나는 어색한 손길로 식기를 들어,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었다. 아카데미에서 대량으로 만든 음식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내게는 이 모든게 단지 단순한 관념으로만 받아들여질 뿐인데… 어째서 이건 아카데미의 것과는 다른 맛이 나는걸까.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조리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특별한 조미료 같은건 쓰지 않는듯 했다. "저번과는 달리 음식을 꽤 많이 드시는것 같은데요, 칼리체 님?" 리체르아는 그렇게 말하며 식기질이 서투른 내게 한 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썰린 고기를 덜어주었다. 그것은 상당히 기분좋은 호의 였다. "그건 네 요리 솜씨가 전보다 훨씬 향상되었다는 것의 증명이겠지." "맛있다는 말을 이상하게 돌려 말씀하시는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짖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입맛을 불모한 미각이라고 하더니, 어지간히 맛있다라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덜어준 고기를 한점 찍어먹고 나서 말했다. "어른을 놀리는게 아니다." 그 말을 듣고, 리체르아는 조금 벙찐 표정을 하더니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계속해서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식탁 중앙에 놓인 과일을 들어 그것을 가볍게 한 입 베어먹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것 같던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하, 하아…. 죄송해요. 하지만 칼리체 님이 그런 농담을 하실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아니… 누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칼리체 님은 어른이겠지요." "당연하다." 다시 과일을 한입 베어먹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 칼리체 님은 하나도 변하신것 같지 않으신데, 많이 변하셨군요." 모순된 말이로군. 나는 베어먹은 과일을 빈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변했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다는게 올바른 말이겠지." 변했다는 말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색다른 평가로군…. 칼리아넬은 내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었는데. 이건 백색의 좌가 인간의 입장에서 나를 본 탓일까. "그런가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손을 뻗어 내가 두 입 정도를 베어먹고 내려놓은 과일을 가져가 남은 과육을 아삭- 하고 베어먹었다. 턱을 괴고 맑은 과즙이 묻어있는 리체르아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내 어깨 너머로 인간성을 배제당한 듀그베르를 봤음을 기억한다. 백색의 좌…, 흑색의 좌와 더불어 진실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왜 움직이려 들지 않는가. 생(生)의 존속을 은룡에게 저당잡혀 있어서 인가? 아니, 인간으로서 팔백년을 넘게 살아온 그녀다. 리체르아는 온화하고 밝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안에 깃든 압도적인 허무가 보인다. 현재의 백색의 좌에게 생존의 필요성이라는게 존재하기는 할까…. 리체르아는 작은 스푼으로 따뜻한 스튜를 떠먹으며 말했다. "전에 렌 님이 아카데미에 갔을때 유일하게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귀여운 여자아이가 흑색의 좌, 이지요…?" … 알고 있었나. 나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눈을 하고 있더군요. 그녀의 눈은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차 있고, 렌 님을 바라보는 시선엔 흔들림이 전혀 없었어요. 모두가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 상황에서 홀로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면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요?" "마왕을 앞에 둔 과거의 너 같았지." 리체르아는 낙엽이 모두 떨어진 가을 풍경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 었나요… 제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과거를 회상하는듯 했지만… 인간의 미약한 기억력으론 과거에 가 닿기 힘든지,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소고기 스튜에선 아직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전 그냥… 마왕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만났었다는 기억밖에는 나지 않아요. 드래곤인 칼리체 님에게 팔백년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겠지만 저에겐 억겁보다도 긴 시간이었거든요." "…." "손을 뻗어 안간힘을 다해 기억을 잡으려고 했지만… 기억은 마치 작은 모래알들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렇게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들이었는데도…. 저는 그때 시간이 너무 잔인하다는걸 깨달았어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잔인해요."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인간은 망각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백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주제에,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가여운 피조물이니까. "일기를 쓰기도 했었어요. 매일 꼬박꼬박 쓴 건 아니지만… 무려 팔백년 동안 쓴 기록이라구요. 양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리체르아는 가볍게 웃으며 팔을 벌리곤 산더미 처럼 쌓여있는 일기들을 묘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웃음이, 그저 잘 조형된 정원과 같은 것이라는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수 있었다. "어느날 문득 제 일기가 가장 사실적인 역사적 사료(史料)가 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도 그럴것이… 팔백년 동안의 기록이니까요." "정말 그렇군." 리체르아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 정도라도 되었나 보다. "하지만- " 그녀는 다시 쓸쓸한 표정이다. "기록은 기록일 뿐이더군요. 근 과거의 기록은 어렴풋이 떠올릴 수라도 있었지만, 너무 먼 과거의 기록은 아예 제가 겪은 일이 아닌것 같았어요. 그저, 과거의 내가 이러한 일을 했구나… 정도로만 받아들여 진달까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행적이라…. 무척이나 묘한 기분이겠군. 망각이라는게 없는 나로서는 절대로 겪지 못할 일일 것이다. "그건 완전히 죽어버린 기억이에요. 기록으로도… 잃어버린 기억을 붙잡을 수는 없었어요. 그건 과거의 제가 무엇무엇을 했다, 정도의 단편적인 사실을 늘어놓은 종이에 불과하죠." "… 기억의 사라짐이 아쉬운가?" 내 물음에, 리체르아는 눈빛을 흐렸다. "아쉽다라는 정도로 표현된다면 다행이겠지요. 제 영혼의 일부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듯한 느낌이에요." 창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거리의 불빛이 창문을 통과해 희미하게 빛났다. … 오늘도 아카데미에 늦게 복귀하게 되겠군. 뭐,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 기억에 남아있는 단 한 문장이 있어요." 단 하나의 문장…? "그게 무엇이지?" "끝없이 영원을 추구하다가, 영원을 추구한 목적을 잊어버렸다구요.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아요.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마왕이 했던 말이로군. 그래, 그는 끝없이 영원을 추구했었지… 하지만 무엇을 위해? 하지만 마왕은 기나긴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그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목적은 잊혀지고, 수단이 목적이 되었다. 하지만 백색의 좌는… 추구했던 목적도, 당연히 그걸 위한 수단도 없지 않았던가. "지금의 너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거지?" "…." 리체르아 에게선 대답이 없다. 지금 그녀를 떠받치고 있는건 텅빈 허무, 그리고 또 허무 뿐이다. 그 허무엔 그녀의 검인 광휘, 인간의 거대한 신비, 은룡이 보여주었던 마법, 듀그베르의 비참함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백식의 좌라는 사실 마저도, 의미를 잃고 허무로 침잠하고 마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잔인한 시간이 그녀에게서 모든걸 빼앗아 버리고 말았구나…. 나는 진정으로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의를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나라면 은룡이 지탱하고 있는 너의 생명을 고통없이 끊어줄수 있다. 너는 죽음을 원하느냐?" 리체르아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렌 님이 주신 생명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꿈을 꾸듯 흐려졌다. 백색의 좌는 역시… 은룡을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영원히 답이 없을 감정에 매달린 채, 리체르아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정말 고마워요, 칼리체 님." 리체르아는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만든 소고기 스튜는 완전히 식어있었다. # 짹, 짹- 점심시간… 나는 홀로 야외의 의자에 앉아 달콤한 쥬스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약간 걸쭉한 느낌이 드는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그리 크지 않다. 처음 먹는다는 행위를 했을때와 지금의 느낌은 아주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지금에 이르러 나는 어째서 이 행위가 익숙해 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흐응…." 쭉- 하고 빨대를 이용해 액체를 빨아 올렸다. 기압차를 이용해 편리하게 액체를 섭취하는 이 방법은 역시 꽤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백색의 좌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늦은 시간에 기숙사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저번과 같이 반성문 따위의 처벌을 예상했지만… 그 예상과 달리, 내게 지워지는 처벌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짹- 하는 작은 새소리와 함께 머리위 나무가지에 앉아있던 새가 날개를 퍼득거리며 내 발치로 내려왔다. 나는 작은 새에 시선을 빼앗겼다. 바닥에 벌레라도 있는 모양인지, 새는 부리를 이용해 바닥을 쪼고 있었다. 한참 무른 흙바닥을 쪼며 원하는 것을 찾던 새는, 곧 입에 꿈틀 거리는 벌레를 물고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새로 인해 흐트러졌던 방금전의 생각을 잇는다. 아마도 그건, 내 성적이 놀라울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겠지. 처벌을 담당하는 교수는 상당히 깐깐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어제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운 어조중, 그는 내 성적에 관해 언급을 했다. 예상은 틀림없다. 그렇게 되니, 우습게도… 성적이란 것의 힘에 대해 실제로 체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 별로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은룡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런 곳에 있었어?"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였다.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들자 매끄러운 흑발을 기른 아름다운 인간 소녀가 책망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을 쥬스 한 컵으로 때우는 거야? 그러니 남자애인데도 몸이 그렇게 가느다랗지. 좀 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게 어때?" 레쥬에브…. 오전 수업엔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의아함은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보고 해결되었다. 그녀는 아마, 지금 막 아카데미로 복귀한 모양이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자색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듀그베르라는 인간이 영혼을 빼앗기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그녀는 거기 없었다.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던 그녀도, 거기에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곧고 서늘한 빛깔은 띈 투명한 눈동자였다. 그 날 내 품에 안겨 울었던 것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걸까, 매끄러워 보이는 하얀 뺨에 붉은 홍조가 올라왔다. "뭐,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거야!" 그녀는 얼굴을 붉힌채 몸을 약간 숙이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 조금 안심했다, 고 해야할까. 그녀는 나와 약간 거리를 벌린채 의자에 앉았다. 먼 곳을 응시하는듯한 레쥬에브의 옆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신기루 같았다. 긴 눈꺼플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것이… 금방 사라질듯한, 아련한 잔향 같다고 느껴졌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날은… 미안했어. 그때의 내 행동은 단순히 도망치는것 밖에는 되지 않았으니까." 내리깔린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는 듯 했다. 도망치는 것에 대한 사과…. 도망치는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거기다- "… 아니, 네가 나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 잘못된 짓을 했던가. 상의가 눈물로 잔뜩 젖어버리긴 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으…!" 레쥬에브가 아랫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명백히 화가난 표정인데… 내 말의 어떤 부분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모르겠다. 또다시 침묵이 지나갔다. 차가운 쥬스를 담았던 용기가 내 손의 체온에 의해 그 차가움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쥬스 용기를 뺨에 대보았을 땐, 시원한 느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칼리체, 너의 마법에 대한 영역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흑색의 좌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날, 여제가 보여주었던 '신비' 는 통상의 것이 아니었어. 그 힘은 과거의 신화 마저도 그대로 재현해낼 수도 있을 정도의 거대한 것이었어." 동그랗게 말아쥔 그녀의 작은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다. 압도적인 힘에 대한 공포… 일까. "…." 공포…? 신비에 대한 영역이 인간의 정점에 닿아있는 그녀는 은룡의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공포 정도로 설명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너도 마력을 사역하는 자라면 알겠지? 마법은 흔히,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힘이라고들 하잖아." 환상을 현실로- 라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로군. 그러고 보니… 인간들의 마법관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본 인간의 마법은 마력을 파괴 가능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것 뿐이었다. 그들 수준의 차이는 그저 환원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상하느냐- 정도의 것이겠지. … 현대 인간의 마법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그렇, 지." 조금 거리낌을 느끼며, 레쥬에브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내 어색함에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게서 느낀 신비는 단순히 환상을 현실로 가져온다, 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 여제의 경우엔- " 레쥬에브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마치, 너무나 어려운 말을 꺼내기라도 하듯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환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 현실에 재현시키는 것이지." "현실에 재현시킨다고?" "… 그래." 레쥬에브는 힘겹게 동의했다. …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까. 마력은 '근원' 이라 불리는 곳을 기원으로 한다. '근원'은 말그대로 '근원'을 뜻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 그곳엔 없는것이 없고, 세계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곳은 없고, 따라서 그것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관념속에서- 라는 것으로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현실에 실재한다. … 말도 안되는 거대한 모순 덩어리. 그래서 나는 인간들의 해석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들이 보기에 '근원' 이란 것은 완전한 '환상'으로 보일테니까. 그래서 인간들에게 있어, 마법은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다. … 하지만 드래곤이란 존재는 어떠한가. 레쥬에브에게 은룡의 신비는 환상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딱히 현실로 가져올 필요가 없는, 그 자리에서의 '재현'. "신비는 그보다 더 거대한 신비를 이길 수 없어. 내가 '인간' 인 이상…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이기는건 불가능해." "…." 흑색의 좌는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이기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역시, 흑색의 좌는 은룡을 몰아내는 것을 포기하려는 것인가.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먼 숲속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빈 용기를 뺨에 대어 보았다. 매끈한 재질의 표면이 뺨을 통해 느껴져왔다. … 포기하는 것이 좋겠지. 목숨은 두 개가 아니고, 그녀가 실패할 것은 자명하다. 그것을 포기한다는건 너무나도 합당한 일이다. 아무리 쉬지 않고 파멸을 향해 달려 가는 필멸자라 할지라도, 먼 미래에 종결될 자신의 목숨을 현재에 거는건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미안하지만… 칼리체, 넌 여기서 빠져줘야겠어." … 이상한 이야길 듣는군. 그녀가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라, 나 보고 빠져 달라고…? 내가 의아함을 표하기도 전에, 레쥬에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보자, 그녀는 밝은 태양을 등진채 선명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이건 예상 밖의 일이야. 나에게 참여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겠지. 나 역시 사소한 조력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지만… 이건 네게 죽음을 강요하는 일일 뿐이잖아?" 은룡의 압도적인 신비를 가감없이 체험하고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거기다 오히려 약속되었을 나의 조력조차, 흑색의 좌는 거절하려 하고 있다. "…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되는거지?" 나는 아주 드물게, 질책하는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것을 레쥬에브도 눈치 챈 건지, 놀랐다는 듯 눈이 동그래진다. 하지만 동그랗게 된 눈은 곧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뻔하지. 그것이 설사 죽음으로 직행하는 길이라 해도, 나는 그만 둘 수 없어. 오히려 이번 일로 확실해 졌는걸. 그런 짓을 하는 여제가, 아무리 훌륭하게 인간을 통치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녀석일리 없지." … 아연해 지는군. 단순히 그것 만으로, 흑색의 좌는 지금까지의 일을 계속하겠다는 건가….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 고독한 길이 될 텐데. 그 고독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고독속에서 존재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 흑색의 좌의 모습에서… 역시, 나는 과거 백색의 좌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리고 흑색의 좌가 계속해서 은룡을 적대시 한다면, 그녀는 언젠가 결국 백색의 좌와 부딪치게 될 것이다. 백색의 좌가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유는 단지… 그 생명이 은룡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리체르아는 말했었지. 그녀의 대답에서, 나는 잘 쌓아 올려진 탑이 완성을 앞두고 뜬금없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백색의 좌와 흑색의 좌가 부딪친다는 일은, 얼마만큼의 비극인가. 아니, 인간의 모든 신비를 지닌 두 개체가 서로 충돌한다는 건 은룡의 인간을 향한 '조롱'의 최종적인 완성일 뿐이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칼리체. 원래는 꽤 먼 미래를 내다보고 너를 끌어들였었는데, 나는 그 미래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졌어. 내가 파멸하든, 여제가 파멸하든… 금방 끝을 보아야 겠지." "끝까지 도와주겠어. 나는 네 생각보다 약하지 않아. 전에 네크-네르프로넨에 의해 위기해 쳐해있던 너를 구한건 누구였지?" 하지만 레쥬에브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네게는 그럴 이유가 없어. 나를 도와주기 시작한것도 애초에 네가 내 정체를 본의 아니게 눈치채서 그런거였잖아. 네크-네르프로넨의 일은… 부끄럽긴 하지만, 방심해서 그런 것이니까. 정상적인 경로라면 그들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어." 냉엄한 눈빛….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다. 네크-네르프로넨의 습격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척 운이 좋지 않은 경우였겠지. 그녀는 정점의 신비에 이른 '좌' 이니까. "너는 정상적인 경로로 성공해 여제의 곁에 오르도록 해. 내가 여제를 몰아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그때 가서 네가 나를 기억해주는것 만으로도 나는 족해." "…." "오늘은 단지, 너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온거야. 난 이제 더 이상 아카데미엔 오지 않을거야. 이제 더 이상… 평소의 일상을 이어나갈 순 없을 테니까." … 그녀를 붙잡을 이유가(방법이) 없다. '인간' 인 칼리체는 흑색의 좌인 레쥬에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감정을 억제한, 무기물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안녕이야. 다시 보는 일은 없길 바래." 그런 냉정한 말을 남기고, 흑색의 좌는 몸을 돌려 나와 일별했다. # 마지막에 남긴 말대로, 레쥬에브가 아카데미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지나가는 말투로 그녀가 속한 클래스의 인간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곤 했지만 집안의 사정으로 아카데미를 그만두었다는 말들 뿐이었다. 집안의 사정이라…. 귀족 사회는 폐쇄적이다. 그런 폐쇄적인 귀족 사회에, 고위 귀족에 속하는 레쥬에브의 자퇴가 인간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 일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인간들의 귀족 사회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던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무슨 일이지, 그 녀석…." 황혼에 물들어 있는 건물 옥상에서, 카리에르제가 기지개를 켜며 레쥬에브에 대한 말을 꺼내었다. 그도 레쥬에브가 어째서 자퇴한건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글쎄, 들은 바로는 집안 사정 때문이라는듯 한데." 가볍게 답하는 나를, 카리에르제는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왜?" "아니, 너… 메르시오 그 계집애하고는 무척 친한거 아니었어? 자퇴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꽤 담담해 보인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글쎄…." 답을 하지 않는 나를, 카리에르제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 이상의 추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화제를 그것으로 끝맺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신경쓰일까봐 말은 못했지만, 나는 네가 그 계집애랑 사귀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사귄다…? 음- 연애, 라는 건가…. 나와 흑색의 좌의 모습이 그렇게 비춰지기도 했나보군. 하지만 흑색의 좌는 애초에 카리에르제와 결혼할 상대 아니었던가. 카리에르제가 나와 레쥬에브 간의 관계를 그렇게 오해했다면, 그로서는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메르시오는 너와 약혼하지 않았었니?" "그래서 그런 기대를 했었지. 네가 그 계집애를 낚아채 가길 바랬거든." 그렇게 말하고나서, 카리에르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보면, 그는 레쥬에브와의 약혼을 무척이나 꺼려했었지. 그리고 그것은 레쥬에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보니… 너는 왜 메르시오를 싫어하게 된거니? 그녀는 공작 가문의 영애인데다 아름다움으로 유명하고 두뇌도 명석한, 이상적인 여성 같은데." 그런 일반적인 견해를 카리에르제에게 내밀어 보였다. 그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어보였다. "성격이 맞질 않는달까…. 그 녀석과는 만났을 때부터 이런저런 악연으로 엮여 있어서." …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을 듯 하다. "무엇보다 그런 모든걸 떠나서 이건 아주 비겁한 정략 결혼이야! 나는 가문에서 버리는 패에 불과하니까 쇠약해진 메르시오 가(家)나 붙잡아 보라는 거지. 메르시오 공작은 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하는 처지고, 자식은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라는 어린 소녀 한명 밖에 없으니까. 즉, 좋은 먹잇감이라는 거지."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 하나를 옥상 바깥으로 차버렸다. 돌은 그의 발에서 추진력을 받아 꽤 멀리까지 날아갔다. 날아가는 돌의 궤적을 쫓았다. 모두가 기숙사로 돌아갔을 시간이라, 교정을 돌아다니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돌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떨어졌다. 돌이 지면과 맞닥뜨렸고, 딱- 하는 소리가 조용한 교정을 울렸다. "…." … 뭐, 그런 이야기인가. "공작가라곤 하지만… 메르시오 가문엔 공작이라는 위(位)에 걸맞는 힘은 없어. 명예라는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만한 세력은 아무것도 없을 터인데, 그녀는 정말 홀로 은룡에게 맞서려는 걸까. 카리에르제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바닥엔 엷은 흙이 모여있어서 미약한 먼지가 일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먼지를 흐트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음… 그러고보니 칼리체, 너는 누나나 여동생 없어?" 멍하니 그의 옆에 앉아 석양을 응시하고 있는데,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 들려왔다. 누나나 여동생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자,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건 다른 용들이었다. 카리에르제가 생각하는 그런 형제, 자매들은 아니겠지만… 다른 용들이 내게는 누나나 여동생 같은 것 따위에 해당되겠지. 하지만 그런걸로 카리에르제에게 있다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없는데. 그건 왜?" "별건 아니고… 만약 있으면 소개나 시켜달라고 하려고 그랬지." … 알 수 없는 이야기로군. 귀족인 그가, 평민이라고 알고 있는 내 누나나 여동생과 교제를 나누어야할 이유가 있을까. 몇가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가 입을 다문 이상 이 화제를 다시 언급하진 않았다. # 방학이라는 행사가 내일로 다가왔다. 상당히 긴 휴식이라는 것 때문일까, 교정은 나조차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들떠 있었다. 안타깝게도, 방학이란건 내게 그다지 기꺼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지식 전승 과정을 천천히 돌아보며 '이상'을 발견해야할 나에게 방학이란건 쓸데 없는 시간의 공백일 뿐이니까. 하지만 요새 들어 지식 전승 과정중에 그러한 '이상'을 발견하리란 기대치가 상당히 낮아지고 있다. 틈이 있을때 마다 장서관을 드나들며 빈틈없이 인간들의 과거 기록을 살펴보았지만 이렇다할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간은 그저 이 시점에 이상스레 정체하고 있을 뿐이다, 라는 결론이 도출될 뿐이다. 방학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기 때문에 강의는 대단히 널럴하게 진행되었고, 점심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다. 강의가 끝나고 필기구를 챙기는 나에게, 카리에르제가 다가오며 물었다. "칼리체,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는거냐?" "아니, 잠깐 장서관에 들릴 생각인데- " 카리에르제는 눈살을 찌푸리곤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알았어. 방학 하루 전까지 장서관이라니, 정말 지독한 녀석이구나. 난 오늘 외출해서 바깥에서 놀고올 생각인데, 너도 생각있으면 늦기전에 날 찾아와. 너 정도야 언제오든지 끼워줄게." "응, 알았어." 카리에르제가 손을 흔들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 뒤를 몇명의 인간이 뒤따른다. 오늘은 상당히 여럿이서 이런저런 유희거리를 즐겨볼 생각인듯 했다. 가방을 챙겨들고, 건물을 나와 장서관으로 향했다. 카리에르제의 말대로 방학 하루 전이라는 걸까… 장서관엔 인적이 전무하다 시피 했다. 끼익- 하고 문을 열었다. 평소엔 어느정도 있는 인원마저도 없어서 그런듯, 끼익- 하는 마찰음이 평소보다 더욱 크게 들려왔다. 장서관의 내부는 이상하게 평소보다 어두웠다. 문을 통해 들어온 빛에 내 그림자가 내부에 드리워질 정도였다. 입구에 선 채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자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원이 아예 없어서 그런지 평소엔 환하게 밝혀두는 마법 전등들과 양초들이 모두 꺼져 있었다. 오직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만이 내부를 밝히는 조명의 전부였다. 뒤를 돌아 문을 당겨 닫았다.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차단되자, 장서관 내부는 더욱 어두워 보였다. "아… 칼리체 구나.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어둡지? 방학 바로 전이라 쓰는 인원은 전무한데 불을 켜두면 상당히 낭비라서… 마법 전등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상당하다는 모양이야." 탁, 하고 책을 덮으며 푸른 머리의 청년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상당히 작은 목소리였지만, 장서관 내부에 소리는 전무해 아무런 문제 없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환하게 빛나는 조명이 있었는데, 상당히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그 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패링 선배는 방학 전인데도 장서관을 관리하고 있나요?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을텐데…."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응수했다. "아무도, 라는 말은 틀렸지. 칼리체, 네가 찾아왔으니까." 그렇긴 하다만… 문이 닫혀있었다면, 난 별다른 이견 없이 기숙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전에도 느꼈지만, 패링 선배는 정말로 책을 좋아하시는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조명을 바라보았다. 철로 만든 골격에 얇은 유리판을 끼워 놓고 안에는 작은 접시가 들어있었다. 접시엔 약간의 액체가 담겨있었는데, 빛은 그 액체에 붙은 불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저건 아마도, 기름… 인 모양이군.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지. 네 말대로 방학 전인데도 장서관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그러는 칼리체야 말로 책을 정말 좋아하는것 같은데? 방학인데, 친구들이랑 가볍게라도 놀러라도 가지 그랬어. 학년이 올라가면 정말 놀 틈이 없을텐데." 그는 충고하는듯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가 찾아온걸 상당히 반기는 기색이었다. 공감… 이라는 걸까. 책을 좋아하는 패링으로선, 역시 책을 좋아하는듯 보이는 내가 싫지 않겠지. 하지만 그에겐 유감스럽게도, 실제로 나는 책이란 매체를 딱히 좋아하는건 아니다. "… 글쎄요." "하하, 뭐 네 마음이겠지만. 자- " 패링은 발치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었다. 그것은 그의 옆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물건이었다. "이건… 뭐죠?" "랜턴 이라는 물건인데, 몰라? 영구 발광 마법등이 보급되기 전까진 수도에서도 흔히 쓰이던 물건이야. 마법등이 없는 지방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는데… 이걸 모르는걸 보면, 칼리체는 수도 출신인가 보구나." "… 그런 셈이죠." 형태가 상당히 달라지긴 했지만, 아주 먼 과거에 본 적이 있는 물건이다. 베델, 칼리아넬, 에카테야르와 여행할 시절엔 마법등이라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패링은 품속에서 성냥을 꺼내고, 한참을 낑낑 대었다. "마법등이 전역에 보급되어 있는 수도에서는 그다지 쓰지 않는 물건이라…." 그는 멋쩍은듯 성냥에 익숙치 않은 이유를 그렇게 변명했다. 곧 화르륵, 하며 새로 꺼낸 랜턴에도 불이 붙었다. 그는 그것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조명이 전부 켜진것 보다는 못하지만 책을 읽기에는 문제 없어. 오히려 책을 읽는데 운치가 있는것 같기도 하고." 읏- 하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 보기보다 상당히 무겁다. 손잡이 쪽이 녹슬어 있는지 랜턴이 살짝 흔들리며 끼이익- 하고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었다. "아, 기름이 떨어지면 언제든 그걸 들고 이쪽으로 찾아와. 기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무도 쓰지 않으니 재고가 상당히 남아서…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겠지." "고마워요, 패링 선배." 그는 대답없이 웃어보이며 다시 책을 들어올렸다. 이제 방해되지 않게 나도 못 읽은 책을 읽으러 가보아야겠다. 그에게서 멀어져 몇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린 패링이 다시 책을 놓고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패링 선배는… 최근에 있었던 여황폐하의 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항상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어두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표정을 풀어 버리며 말했다. "칼리체… 출세하고 싶다면, 내 의견 같은건 듣지 않는 편이 좋을거야." …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지만, 그것은 명백한 '거부'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어둠속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패링… 그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열렬한 찬양자였었지. "그건, 어떤- " 그는 한숨을 쉬며, 책을 완전히 책상에 내려놓았다. "평민인 내가 감히 여황 폐하의 결정에 강렬한 분노를 품었다는 얘기야." "…." 난 아무말 없이 잠깐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그가 다시 아무일 없다는듯,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방학 하루 전, 기숙사 내부는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소란스러움이라 해서 별다른게 아니라 잘 시간이 되어서도 안 자고 기숙사 휴게실에 모여 떠들고 있는것 뿐이지만…. 대화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여럿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모두 거절하고 조용한 옥상으로 올라왔다. "…." 휴게실에 비해 그나마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훑었다. 더운 여름인데다, 많은 인간이 모여있는 휴게실은 다소 답답한 감이 있다. 난간에 기댄채, 수 많은 빛으로 밝혀져 있는 인간들의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대한 네거스텐 제국의 도시…. 더이상 발전이 없는, 정체된, 그래서 이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의 도시는 현 시대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먼 과거로부터 지금껏 쌓아올린 기술과 마법, 문화의 결정체. 손바닥을 들어 눈 앞을 가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에 의해, 도시는 손바닥 하나로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는다. … 실망이다. 내게는 짧은 시간이었다만… 그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인간은 고작 이 정도 밖에 이룩하지 못한건가. 잠에서 깨어난 뒤, 처음 인간들의 모습을 보며 품었던 그런 의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휘이잉- 하고, 간만에 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불어온 바람이 대기를 진동시켜, 내게 전해지는 도시의 불빛을 아련하게 왜곡시켜 놓는듯 하다. 도시를 둘러보다가 시선이 황궁 피에셰트에 있는 거대한 첨탑에 가 멈추었다. 그것이 매우 웅장한 건축물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하늘을 찌를듯 뻗은 동체…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마치 밤 하늘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것같다. 과거의 인간들은 저런 높은 첨탑을 짓는걸 꺼리기도 했었다. 무언가를 하늘 높이 쌓아올린다는 것이, 마치- 감히 신에게 도전한다는걸 연상시켰기 때문이라는 얘기였었지. "…." 쓸데 없는 생각들만 계속 떠오르는군. 나는 난간에서 멀어져 옥상 한가운데에 멈추어 선 뒤,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털썩, 하고 드러 누워 버렸다. … 등에 닿는 딱딱한 바닥이 차갑다. 종종 이런 자세를 취하는 카리에르제에게 품위를 운운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 어떠한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바닥에 누워 버릴수 있는건 나 자신이다. 머리카락에 흙이 묻고, 깔끔하게 세탁된 제복역시 더러워 졌지만… 이런것 따위에 내가 신경쓸 필요가 있겠는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검은 바탕에 흰 물감이 뿌려진듯, 하늘엔 수 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정말 수 없이 많은 별들이다. 인간의 눈으론 볼 수 없는 별들이 볼 수 있는 별들 보다도 훨씬 많다. 그래서 드래곤인 내 눈에 보이는 별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질 정도로 많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모래알보다 밤하늘의 별이 더 많지 않을까. "음…." 실제로 모래알을 모두 세어 별이 많은지 모래알이 많은지 비교해볼 생각도 있지만, 그건 나로서도 상당히 여유가 있을때나 실행해볼 일이다. 그건 천년이 걸릴지 만년이 걸릴지 정말 모르는 일이니까. 뭐, 이 일이 끝나고 약속했던 칼리아넬과의 시간도 시간의 흐름에 의해 모두 과거로 지나가게 되어버리면…. 그러니까, 모든게 다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후, 나를 기억하는 자가 모두 사라져 버렸을때, 그때 가서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래알을 세어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듯 하다. 일단은 하늘에 걸려 있는 별의 수 부터 세어보기로 할까. 하나, 둘… 별다른 생각 없이 별을 새다가, 별은 실재 하는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먼 과거에, 나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수 있는 곳까지 날아가 보았다. 하늘엔 더이상 진행할 수 없는 '세상의 끝' 이 존재했고, 별은 그 너머에 미약한 빛을 내 뿜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세상의 끝 너머에는 사고의 영역도 닿지 않는다. 근원의 지식에도 '세상의 끝' 너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드래곤인 나 역시 완전히 '모르는 영역'이다. 세계는 유한했다. 하지만 그 유한함을 넘어, 그곳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그랬었지… 세계는 유한하다고. "음…." 그런것 쯤이야 현재의 나 역시도 알고 있단 말이다. 끼익, 탁- 하고 경첩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옥상에 올라온 모양이다. 다른 인간이 있는 곳에서 계속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순 없겠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와 흙을 툭툭 털어내었다. 아직 고개를 돌려 옥상으로 올라온 인간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 "당신은…." 그건 많은 감정을 안고 있는 목소리였다. 얼핏 들으면 반가움을 안고 있는것 같으나, 실상 그것은… 적의에 더 가까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과 별빛을 받아 아스라이 빛나는 그녀의 금발이 눈부시다. 달빛 아래서, 그녀의 머리칼은 얼핏, 은빛을 띄고 있는것 같기도 했다. 다소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 펠테넨시아 황녀, 그녀 역시도 떠들썩한 기숙사의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시원한 밤공기를 쐬고 싶어서 나왔는지 모를일이지만, 어쨌든 그녀가 옥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무언가 말을 걸어올 법도 했지만, 펠테넨시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이제와서 그녀에게 별달리 할 말은 없다. 그녀는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걸음을 옮겨 난간으로 다가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펠테넨시아 황녀는 레쥬에브의 일로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겠지. 배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나를 무시하는데, 굳이 이제와서 아는척을 해 번거로운 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눈치채지 못하게 사라져 볼까- "칼리체." 투명한 펠테넨시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 네?" 대답을 하며,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펠테넨시아는 여전히 난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그녀는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어디로 간거지?" 왠지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였다. 여제의 딸인 그녀의 입장으로선, 여제를 적대시하는 레쥬에브의 갑작스런 부재가 당연히 신경쓰이는 것이겠지. 펠테넨시아는 황녀라는 그녀의 지위로 나를 위협해 레쥬에브의 행적을 쫓을 수도 있다. 아니, 보통 그것이 당연하겠지. 나 역시 레쥬에브의 행적을 모르는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펠테넨시아의 목소리는 그런것을 모두 제쳐두고 그저 의무감에 못이겨 레쥬에브의 행적을 묻는듯 했다. …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들린다. 아무튼, 대답은 해야하겠지. "모르겠어요." "… 거짓말." 예상한 반응… 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없다. 나를 강하게 추궁할 법도 하지만 힘빠진 그녀의 목소리에선 그런 의지를 읽을 수 없다. 잠깐의 침묵이 나와 그녀의 사이를 지나간다. 펠테넨시아 황녀는 여전히 난간 너머를 바라보며,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는걸 얌전히 털어 놓는게 좋아, 칼리체. 나는 너를 고문해서라도 그녀의 행적을 알아낼 수 있어. 내가 신호만 보낸다면 네가 이곳에서 도망치기 전에 너를 제압할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으니까." 그제서야 펠테넨시아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군…. 협박조의 말이 분명한데도, 그녀의 말엔 계속해서 아무런 의지가 없어 그저 머리속으로 생각했던 대사를 읽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펠테넨시아는 어째서 레쥬에브가 여제를 적대하는지 모른다. 레쥬에브가 흑색의 좌 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런 권력도 힘도 없는, 그저 공작가(家)의 외동딸일 뿐인 레쥬에브가 감히 여제를 적대시 한다는 사실조차 이해가가지 않는 일일테지. 거기서 황녀는 어떤 의문에 도달한게 아닐까…? 내가 본 그녀는 적어도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 나는 그녀의 말에 응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여황 폐하께서 이번에 벌인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돌려 말하길 좋아하는 인간들… 특히, 그러한 성향이 강한 귀족이라는 계층의 정점에 서있는 그녀에겐 너무 직선적인 말이었을까, 순식간에 그녀의 분위기가 변했다. … 그나마 온화한 빛을 띄고 있던 눈빛마저도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채 팔짱을 끼며 위압적인 자세로 내게 말했다. "벌인 일… 이라니, 예전의 정을 봐서 봐주는것도 한도가 있단다, 칼리체. 여황 폐하에 대해 좀 더 공손한 어조를 쓰지 않으면 험한 꼴을 당할거야." 공손한 어조… 라. 우습군. 그런것 따위야 어찌되든 좋다. 나는 펠테넨시아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메르시오는 어째서 여황 폐하에게 반기를 든 걸까요?" "무… 슨 바보 같은 소릴. 그녀의 이유따윈 아무런 상관이 없어. 감히 여황폐하께, 어머니에게 반기를 든 것만 해도…!" 그런건가…. 전에도 어느정도 눈치를 채 왔지만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향한 그녀의 추종은 다소 맹목적인 감이 있다. … 아니, 그냥 맹목적일 뿐이다. 다시, 나는 방금전 했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여황 폐하께서 했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펠테넨시아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앞으로 걷고 있을 뿐이지만,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가면 그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치, 내가 금기를 범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맛! 여제께서 했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무슨 바보 같은 소릴…. 여황 폐하께서 무얼 하시든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녀가 평소에 유지하고 있던 모습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그녀의 그러한 외침은 내게 그러한 생각을 강요하는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을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성한 지도자, 레케트리셴 문 여제. 그것을 따라가기만 할 뿐인 인간들. 그런 인간들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 를 따라가려 하는 황녀, 펠테넨시아. "황녀님이 생각하시기엔…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소수의 인간을 희생해, 다수의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형벌' 은 계속해서 집행되고 있다. 처음엔 극악 범죄를 저지른 듀그베르 한 명 뿐이지만, 지금와서 살펴보면 어떨까…. 듀그베르와 같은 처벌을 받는 인간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 어조에 질책은 없다. 나는 순수하게 그녀의 생각을 묻는 것 뿐이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나는 그들이 서로를 죽이던, 인간성을 말살하여 노예로 만들던 상관할 생각이 없다. 그것을 비난할 생각 역시 없다. 그것이 '인간'의 선택이라면… 그 끝이 그들 자신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비극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 인 은룡의 선택이지 않은가. "…." 대답은 없다. 동경의 대상인 어머니, 감히 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위대한 업적. 황위 계승권 자인 그녀로서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완전 무결한 '이상' 이었겠지. 그것을 조금이라도 쫓기 위해 펠테넨시아 황녀는 요정 왕국에 방문하여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 내고, 평범한 다른 귀족들 처럼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지금껏 노력해 왔다. 지금껏 보아온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그녀에게 있어서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더이상 완전 무결하지 않다. 그것은 펠테넨시아 황녀가 여제가 벌였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 가련한 인간이다. 그저, 한 없이 여제의 뒤를 쫓기만 하던 황녀. 하지만 그 바램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절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여제는 인간이 쫓을 수 없는 용이고, 더 이상 그녀의 이상조차 아니다. "황녀 님, 당신은…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지요?"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렸는지 까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펠테넨시아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표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평민 주제에 아는 척 그렇게 말하지마…!" … 별로 부드럽게 들리진 않았나 보군. 하지만 평민 주제에 라니…, 그런 하찮은 것 따위가 나와의 대화를 회피하는 핑곗거리가 되어선 안된다. "제가 귀족이었다면 황녀님은 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셨을까요?" "무슨- " 그녀의 말을 끊는다. "제가 귀족이 되어드릴까요?" … 펠테넨시아는 벙찐 표정이다. 물론, 그녀의 황당함은 타당하다. 귀족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태생의 문제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펠테넨시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고, 인과를 조정하고, 그네들이 긴 시간동안 쌓아올린 혈통이라는 것도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장담하건데,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수 초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식으로 나는 그녀에게 내가 평민에서 귀족이 되는 과정을,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여주듯 보여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귀족의 위(位)를 획득하면,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겠는가? … 모두 농담짓거리들이다. 그녀는 단지, 사소한 한 발자국을 내딛질 못하는 것이다. 내 질문에 '예' 라고 답하는 것은,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결정에 반(反)하는 일이다. 하지만 반(反)한다고 해서, 그녀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뭣도 아니다. 펠테넨시아는 그저 어머니의 수 많은 의견들 중 하나에 반대하는 것 조차도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나 사소한, 발 걸음 하나를…. 나는 그녀가 마음을 고쳐먹고, 나와 레쥬에브를 적대하는걸 포기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레케트리셴 문 여제, 즉 은룡에게 갑작스레 치밀수 없는 반감이 들어 레쥬에브에게 조력하길 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펠테넨시아라는 인간이 절대적인 은룡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했으면 좋겠다는것 뿐이다. 마치, 흑색의 좌가 다른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이 아닌 여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처럼. … 그런 가여움 뿐이다. "무례…!" -하구나, 라는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내 몸을 홱 돌려 거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옥상에서 내려가 버렸다. 여전히 화가 나있는 듯 하지만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기 전, 나는 말아쥔 그녀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 잠시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문 너머를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바닥에 누워 버렸다. … 느긋하게 별이나 새고 있기로 할까. # 방학이 시작 되었다. 아카데미의 대다수의 학생들은 모두 자신들의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기숙사에 남아있는건 나와 카리에르제,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몇몇 평민 학생들 뿐이었다. 기숙사가 텅 비어버릴 정도가 되었다고 해도, 식당에서 식사는 꼬박꼬박 나오는듯 하고… 평민 학생들은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또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카리에르제는 주로 휴게실에서 노는 듯 했지만, 이따금씩 장서관으로가 하루종일 그곳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나 역시 자주 그를 따라 장서관으로 갔는데, 그는 여전히 계속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듯 했다. 곧 완성을 앞두고 있다고 했었지…. 카리에르제가 생각한 비공정이라는 물건은 어떻게 하늘을 날 것인가. 종종 그와 관련된 그의 종이뭉치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나는 일부러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정말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공정이라는 물건이… 아니, 최소한 그 이론이라도 완성된 모습을 보고 느낄 즐거움은 완성되고 난 후에 온전히 느끼고 싶다. "하암- " 나른한 정오다. 침대에 누운채 창문을 열어두었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 들어와 몸을 식혀주었다. 남성의 몸이 여성 보다는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런 무더운 여름은 더욱 그렇다. 만약 여성의 몸을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있을순 없었겠지. 아니, 지금은 어차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니 상관 없으려나…. "…." 기숙사 내부는 아무런 소리 없이 극도로 고요했다. 이곳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소리 뿐이었다. 눈을 감고, 오랜만에 내 보금자리에 들어온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완전한 고요에 이르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먹고, 강의를 듣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 강의를 듣고, 장서관에 가서 책을 보고, 가끔 외출을 해 도시를 둘러보고, 기숙사의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산책겸 교정을 거닐고…. 그 수 많은 시간과 공간 속에 무수한 타인이 존재하고 있다 이 방 조차 2 인 1 실이니까, 심지어 잠을 잘 때까지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런 기분은… 상당히 오랜만이라고 해야하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내 보금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고 누워 있기만 한다면 인간의 모습으로 화(化)한 의미가 별로 없겠지.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흰 셔츠를 대강 걸쳐 입고 방을 나왔다. # 시끌벅적한 거리로 나왔다. 방학 중에는 따로 외출증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자유롭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데… 물론, 통금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래도 통금 시간을 넘기지만 않으면 저녁에도 거리를 돌아다녀도 된다는 방침이다. 확실히, 방학이군. 평소처럼, 나는 별다른 목적없이 거리를 돌아다닐 요량이었다. 요란스런 도시의 중앙 광장이나 상가 쪽은 이미 가보았으니, 외곽쪽이나 돌아보도록 할까. 하지만 외곽으로 가기 위해선 일단… 상가 쪽을 지나가야 하겠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상가 쪽으로 진입했다. 이곳엔 물류 이동을 위해서인지 가끔 커다란 마차도 지나다니기 때문에 동선 결정에 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상가가 들어선 구획은 평소와 다를게 없었다. 신선한 채소, 과일 등을 팔거나 갓 구운 빵, 시원한 음료들을 팔았다. 옷이나 모자 등을 파는 가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건 먹거리 쪽이었다. "위성 도시에서 금방 들여온 채소가 쌉니다, 싸요!" "한 번만 보고 가세요- !" … 이곳은 정말 언제나 시끄럽군. 그런 것들을 지나 외곽쪽으로 걷고 있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 군중 속에서 큰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저 무리속에 신기한 볼 거리라도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잔뜩 서있는 인간들의 머리 사이로 무엇이 있는지 보려는 시도를 했다. "윽…." 까치발을 들고 보아도,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 몸은 키가 좀 작다…. 포기하고 그냥 지나칠려는 찰나, 또다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 강한 호기심은 인간의 특성이고, 그들의 친구이자 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모처럼 나도 그 호기심이란 녀석을 발휘해 볼까. 인간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예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장사진을 치고 있지는 않아 어렵지 않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앞에는 자그마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고급스런 옷차림에 모자를 쓴 인간이 한 명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뒤엔… 커다란 수조가 마련되어 있었다. 놀랍군…. 커다란 수조 안에 있는건 인어(人魚) 였다. 남부 해협에 살고 있다는 유사 인류…. 인간은 그들과 자신들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만 실제, 유사 인류와 인간의 뿌리는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런데 대륙 한 복판에 인어라니… 이곳까지 잘도 데려왔군. 인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체는 미끈한 물고기의 그것이었지만… 벌거벗은 상체는 인간의 어린 소녀와 전혀 다를게 없다. 하얗고 매끄러워 보이는 살결에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이 인상적이다. 물빛을 띄고 있는 인어의 긴 머리카락이 수조 안을 수놓고 있었다. 인어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의 시선이 두려운건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벌거벗은 상체에 대해선 별다른 부끄러움이 없는듯 했다. 뭐, 물속을 살아가는 그들이 옷을 입는다는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겠지. 나는 주변에 모인 인간들을 주욱 돌아보았다. 주로 남성들이었는데, 인어를 순수한 감탄의 시선으로 쳐다보는 자도 있었지만… 노골적인 탐욕을 띄고서 바라보는 자도 있었다. "인어는 뭍 에서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물 속에서만 말을 할 수 있지요. 인간과는 발성기관의 차이가…." 앞에 나와있는 인간이 열심히 인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 그러고보니, 저 인간의 목적은 뭘까. 인어가 들어있는 수조를 놓고 관람료를 받는건 아닐테고- "인어는 물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의 노래는 굉장히 아름답지요. 아, 지금 노래를 부르라고 시킬순 없습니다. 그들은 도도한 종족이니까요. 정 이들의 노래를 듣고 싶으시다면 이틀 뒤 열리는 노예시장에 오셔서- " 아… 노예, 인가. 인어를 자세히 살펴보니, 꼬리 비늘쪽에 날카로운 무언가에 꿰뚫린 흔적이 있다. 작살같은것 따위에 꿰뚫려 인간들에게 붙잡힌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노래와는 확연히 달랐다. 물 속에서 울려퍼지는 인어의 목소리는 마치, 악기가 연주되는것 같은 소리였다. 인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아름다운 음률에 인간들은 완전히 매료되어 사르르 눈을 감기도 하고, 노래하는 인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하- " 인간은 알아듣지 못하는 인어의 언어로, 그녀는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는 길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질것 같은 아름다운 음률들은 곧 끝나버렸고, 인간들은 그녀에게 환호를 보내었다. 인어의 표정이 미묘하다. … 내 기분도 좀 미묘하군. 인어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치환할 순 없겠지만… 인어는 그 아름다운 음률 속에 인간을 향한 강한 증오와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들은 인간들은 자신에게 환호하고 있으니…. "자, 그럼 부디- 이틀 뒤에 세크터널 홀에서 열리는 노예 시장에 많은 분이 참여해 주시기를…." 모자를 쓴 인간은 그렇게 말하고서 커다란 천을 수조에 덮어버렸다. 그렇게 인어는 인간들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인간들은 아쉬운 한숨 소리를 내며 서서히 이곳에서 흩어져 갔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 이상한 것은… 이곳은 평민들의 거리이기 때문이다. 노예라는걸 얻기 위해선 설사 이들과 같은 인간이라 해도 상당히 많은 재화를 지불해야 하는걸로 알고 있는데 하물며 인어라면…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재화를 요구하겠지. 평민들이 거의 대부분인 이런 곳에서 이런 '광고' 따위를 해봐야 별로 소용 없는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는데 곧 그 이유에 대해서 금방 납득 할 수 있었다. 평민이라고 보기엔 힘든, 고급스런 옷을 한 인간들이 방금전의 모자쓴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귀족은 아니었다. 아마 저들이 인어를 구입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귀족들에게 인어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이겠지. 생각해보면, 이런 요란스런 행사를 정숙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가득한 귀족들의 거리에서 벌인다는것도 이상하겠군. 뭐, 그런 구조인듯 하다. 음- 재밌는 구경이었다… 라기엔 조금 그렇군. 나는 멍하게 천이 덮여져 있는 수조를 바라보았다. 인어는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 노래는 과거에 대한 회상인듯 했다. 따뜻한 해수와, 바다속을 아름답게 수놓는 산호초…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물고기의 군집. "자, 얼른 들어다 놓자구." 몸에 가득 근육이 붙어있는 인간 남성 여러명이 나와 인어가 들어있는 수조를 들었다. 모자를 쓰고 있던 인간은 방금 전과는 달리 냉정한 목소리로 실수로라도 수조가 깨진다면 목이 달아날 거리고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난 그들이 멀어져가는 광경을 꽤 오랫동안… 시야에 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 도시의 외곽쪽으로 나왔다. 외곽엔 높은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을 따라서 길게 길이 나 있었는데 성벽의 높이 때문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성벽으로 다가가 위를 올려다 보았다. 성벽의 높이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고개를 한참이나 들어야 위쪽이 보였다. 성벽 위에 꽂혀 있는 깃발이 바람으로 인해 천천히 펄럭이고 있었다. 인간들의 주요 도시엔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 성벽이란 녀석이 세워져 있다. 전쟁을 상정하고, 그에 대한 대비적인 차원에서 만든 건축물…. 도시를 모두 둘러쌀 정도의 거대한 규모는 당연히 많은 인원들의 지속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겠지. 대비적인 차원이란건, 쓸모가 없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곳은 거대한 네거스텐 제국의 심장부. 과연 이곳까지, 이 성벽을 필요로 할 만한 적이 도달했었을까…? 답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네거스텐 제국의 역사를 대강이나마 훑어본 기억에 의하면, 이 도시는 단 한번도 침략 받은 적이 없다. 요컨데, 이것은 쓸모가 없었다는 이야기지.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돌과 돌 사이의 홈을 살짝 훑어 보았다. 우수수- 하고 돌 사이에 채워놓은 모래들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 성벽이 무용(無用)하다는 이야기를 할 셈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침략 전쟁은 비일비재하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성벽을 짓는 일은 타당한 일이다. 특히, 이런 한 나라의 수도와 같은 곳에는. 전쟁이 나든, 나지 않든 간에… 뭐,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나는 애초에 이런 성벽을 지을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왕국' 에 근접하는 규모를 이루어낸 요정들은 성벽이라는걸 알지 못한다. 그정도 규모도 아직 이루지 못한 다른 종족들은 말 할 필요도 없을테고…. 오직 인간만이 성벽을 짓는다. 나는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이 성벽을 쌓는걸 상상할 수 없다. 아, 이제 막 왕국으로서의 격식을 갖춘 요정 왕국이라면 모르겠군. 근 미래에 그들이 '인간들' 과의 분쟁이 없을거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요정들도 성벽이 필요하게 되겠지. … 다시 한번, 성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돌 하나 하나를 쓸어 보았다. 돌의 일부가 깨어져 버린것도 있었고, 어떤 곳은 돌이 완전히 빠져 구멍이 나버린곳도 있었다. 그럼에도 성벽은, 인간의 그 어떤 창조물 보다도 가장 단단하다. "흐아암- " 팔을 길게 빼고 하품을 했다. 이것저것 둘러보며 오는 동안 어느새 시간도 정오를 훌쩍 지나 있었다.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도시의 외곽인 만큼, 인적은 드물었고 주변은 상당히 조용했다. … 당연하게도, 이곳은 도시의 중앙 만큼 볼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 외출 목적이 볼거리를 찾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상관은 없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몇 명의 인간들을 발견했다. 인간이 사방에 가득한 인간들의 도시에서 인간을 발견했다는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느냐만은… 그들의 행동이 상당히 특이했다. 등에 커다란 짐을 얹고 이동하고 있는 것을 봐선, 무엇인지 모를 자재 따위를 옮기는듯 한데…. 그들은 힘에 부치는듯 몇번이고 짐들을 등에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짐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급한 팔놀림에 의하여 다시 등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그들은 또다시 짐을 떨어트려 버리고 만다. … 그렇게 무거운 짐이라면 조금 쉬었다 가도 될텐데 말이야. 문제는 그게 아니고, 그들의 얼굴에 아무런 기색이 없다는 점이다. 몇번이고 짐을 놓칠 정도면 상당히 힘들다는 것인데…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기묘한 위화감이다. 성벽에 기대어 서서 유심히 그들을 관찰하던 나는 곧 그 위화감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저것은 은룡이 말했던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 의 희생물 들이다. 그 이후로 며칠 지나지도 않은듯 한데… 벌써 이 정도로 수가 불어난 건가. … 뭘 옮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공익'에 관련된 것일테지. 은룡이 말했던 대로라면, 범죄를 사회에 대한 봉사로 환원 하는 일이니까.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서, 그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몇명은 계속 짐을 떨어트리고 들어올리고를 반복하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곧, 어디선가 경비병의 복장을 입은 남자가 두 명 오더니, 시체를 확인하고는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은 시체의 얼굴로 떨어졌다. 시체는 곧 두 명의 손에 이끌러 어디론가 질질 끌려 사라져 버렸고, 짐을 옮기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쓰러진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은채 여전히 물건을 옮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봉사의 방향은 도시의 청결 유지나 무언가를 옮기는 일 밖엔 없는건가…? 인간성을 모조리 빼앗긴 인간에게 고차원 적인 일을 하리라 기대하는건 무리이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한건데, 기분이 조금 나빠져 버렸다. … 이런 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겠지. 만약, 이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죽음 뿐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조차도 이들의 봉사를 막지 못할거란 은룡의 말을 생각해보면, 시체를 또다른 어딘가에 사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체가 쓰일 곳이 있다면… 거름, 인가?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로군. # 외곽을 따라 꽤 오랫동안 걸었다. 하늘엔 어느새 붉은 노을이 져 있었다. … 평소 같다면 슬슬 아카데미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지금은 방학 중인지라 밤까지 여유가 있다. … 그렇다고 딱히 볼일이 있는건 아니다. 슬슬 돌아가 보기로 할까.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위해 대로로 진입하고 나서 몇걸음을 걸었을까. 지금껏 보지 못한 한 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 수 많은 검들이 있었다. 석양을 받아 빛나는 은백색 검신들이 눈부시다. 이곳은… 무기를 파는 곳인가? 살짝 허리를 숙여 가게 안쪽을 보니, 내부엔 창이나 도끼등의 무기들도 있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잠시 미루고, 가게 쪽으로 향했다. 입구엔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내려놓은 긴 천이 걸려 있어,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야했다. 어두운 내부에, 수 많은 무기들이 있었다. 비릿한 쇠냄새와 가죽 냄새 등이 코를 찔렀다. "음? 어린 아가씨가 이런 무기점엔 왜 오셨을까…?" 안쪽에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있는 중년의 인간 남성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약간 벗겨진 남자였는데,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일단, 틀린 부분을 정정해 주어야겠지. "아, 저는 아가씨가 아니구요. 무기들을 구경하러 왔어요." "엥? 아가씨가 아니라구…?" 남자는 당황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한참 동안 유심히 쳐다보았다. "뭐야, 좀 여리한 사내 녀석이구만!" … 방금전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르군. 그는 커다란 손을 들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 뭐냐… 너도 기사가 되고 싶어 검 같은걸 사고 싶어서 온거냐?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지만, 일반인에게 무기는 팔지 않는단다. 간간히 찾아오는 기사 님 들에게라면 모를까, 기본적으로 이것들은 모두 군에 납품하는 것들이니까." "…." 너도, 라는 말은 검을 사기 위해 찾아오는 소년들이 있나보군. 듣자하니, 기사 라는 것은 소년들에게 꽤 선망 받는 직업인듯 하다. 하지만… 조금 의외로군. 돈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무기는 팔지 않는다는 건가. "에잉… 그 놈의 기사, 용병 문학이 애들 여럿 망쳐놓은것 같단 말야. 개나소나 찾아와서 돈만 주면 무기를 파는지 안단 말이지…. 돈만준다고 쉽게 무기를 팔아버리면 도시의 치안은 어떻게 하란 소리인지." 남자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아무래도 나 역시 남자가 언급한 '개나소' 라는 집단에 이미 포함된 걸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런데, 무기점의 입구 쪽에서 갑작스런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이, 주인장 계시오?" 한 남자가 입구에 걸린 천을 걷으며 들어왔다. 검은 머리를 짧게 기르고 있는 인간이었는데, 몸에 딱 달라 붙는 상의로 인해 드러난 근육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아, 예 기사님. 여기 있습니다." 기사… 인가. 그의 어깨에 붙어있는 마크-엠블렘- 은 어디서 본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레쥬에브를 죽이려던 제국의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의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진열되어 있는 검을 구경하며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어떤것에 대한 감탄으로 물드는듯 하더니, 곧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런 무기점에 어린 아가씨는 무슨 일로 오신건지…?" "아, 저는- " 답을 할려는 찰나,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뭐야, 사내 녀석이었나…." 굉장히 실망했다는 어투였다. … 이 무기점의 주인이라는 인간과 반응이 거의 다르지 않군. 흠… 내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좀 더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을듯 하군. "이보시오 주인장. 저번에 샀던 검보다 더 튼튼한 녀석은 없소?"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는 나를 무시하고 주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 좋은 검은 많이 있습죠. 다만, 저번에 구입하신 검도 상당히 좋은 녀석이었기에 그것보다 더 좋은 검을 원하신다면…." 내 존재가 무시된채 대화가 계속되고 있다. 나는 천천히 진열된 무기쪽으로 다가가 느긋하게 그것들을 구경했다. 무기점의 주인이 신경쓰이는듯 이곳을 힐끗 쳐다보긴 했지만, 단지 구경하는 것이 문제가 될 일은 없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듯 하다. "흐응…." 진열된 무기의 종류는 가지 각색이었다. 지금껏 인간들의 사회를 돌아보는 동안 나는 수 많은 인간들의 '도구'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곳엔 내가 알고 있는 무기들보다 모르는 무기가 훨씬 더 많았다. 모양만 봐서는 도대체 이런 무기를 어떻게 쓸 수 있지- 라는 의문이 드는 무기들도 있었다. … 가장 다루기 쉬워 보이는 무기는 창이었다. 그 때문일까, 인간 병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지. 나는 무기를 천천히 둘러보며,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 쪽에도 계속 관심을 두었다. 네거스텐 제국에 얼마나 많은 무력 집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내 흑색의 좌를 친 것은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이다. 적잖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지. 그 기사는 무기점 주인에게 자신의 검을 내밀고 있었다. 주인은 그의 무기에 손을 대는것 조차도 황송하다는듯 허리를 숙이며 그의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런 손동작으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검은 순백의 은색을 띄고 있었다. 아무런 흠집조차 나지 않은 검의 날이 마치 유리 같기도 했다. 주인은 검을 뽑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한참을 살피더니, 의아하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님, 하지만 이 검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군요. 굳이 검을 바꾸실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기사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당신은 상인이 아니라 장인이군. 맞소, 검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 기사는 선명한 시선으로 무기점 주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검이 아니라 나에게 있소. 지금까지는 이 검으로 충분했지만, 앞으론… 더 좋은 검이 필요하오." "아, 그러시다면야- " 기사는 무기점 주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곳 최고의 검을 가져다 주시오. 가격이 얼마가 되든, 기꺼이 지불하도록 하지." 처음에 힘있게 시작했던 그의 말은, '가격' 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무언가 어쩔 수 없는 것에 침식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말에 거짓은 없어 보인다. 무기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안있어 기사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손엔 검집에 수납되어 있는 검이 들려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별다른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저희 무기점의 최고의 검입니다. 수도 서쪽에 위치한 대장장이 공방에서 수 십년 만에 나온 최고의 걸작이라고 화제가 되었었죠. 모종의 문제로 인해 이것을 제가 얻게 되긴 했습니다만…." 기사는 그의 손에서 검을 넘겨받더니, 단숨에 그것을 뽑아 보았다. 내가 보기엔 아까의 것과 별 다를게 없어 보였지만, 기사의 눈은 이미 감탄으로 물들고 있던 중이었다. "정말로 훌륭하군. 얼마요?" # "끄응…." 무기점을 나오자 눈 앞에 서있는 기사가 어딘가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 공교롭게도, 이 기사와 동시에 무기점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는 본래 쓰던 검을 처분하고, 지금은 방금전 새로 산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는 새 검을 사느라 많은 재화를 지불한 것에 대해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듯 했다. 인간들의 사회는 재화로 거의 모든 물건을 교환할 수 있다. 단지 욕망 뿐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도 인간은 재화를 필요로 한다. 예전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인간이 상실감에 빠져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인간들에게 재화는 중요한 가치다. "큰 돈을 지불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검인가 보네요." 기사에게서 느껴지는 흥미로움에, 나는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으응? 뭐, 그렇지. 그런데 너는…." 의아스런 시선이 나를 향한다. 무엇에 대해 의아스런건진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자기 소개는 해주어야 겠지. "칼리체 리블란셰 라고 해요.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재학중인 학생이지요." "엘코어 셰른 이라고 한단다. 아까도 들었다시피 나는 기사지. 그런데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학생이 무기점엔 도대체 무슨 일로…?" 엘코어… 라는 이름이군. 이름과 성 중간에 아무 단어도 없는걸 보니 이 남자는 본래 평민이었던 모양이다. "지나가던 길에 호기심이 동해 구경차 들어가 보았어요. 어렸을 적엔 저도 기사를 꿈꾸었거든요." 좀 더 풍성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해본다.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행세하기 위해선 거짓말은 어쩔 수 없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는 인간일 테니까. "하하, 남자아이라면 어렸을 적 다들 한번쯤은 다들 기사를 꿈꾸지.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야." 남자아이라면 그런건가…. 기사는 멋쩍은듯 어깨를 한번 들썩 거린다. "세른 씨는 꿈을 이루신 거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다소 흐려졌다. 그것은 명백히 탐탁치 않아 하는듯한 모습이다. 막상, 원하던 꿈을 이루고 나니 별로- 라는 이야기인가. 인간들에게 있어, 꿈이라는건 이상(理想)이다. 그 이상엔 현실에 관한 것은 대부분 배제 되어있지. 오직 그것의 좋은 점만을 보고, 꿈을 이룩한 뒤에 얻을 달콤한 과실만을 생각한다. 뭐, 그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국, 인간은 그것으로 인해 강한 추진력을 얻고, 결국 꿈을 이룰 수 있으니까. 어디에선가 들은적이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손에 넣는것 보다, 그것을 기대하는걸 더 좋아한다고 했던가. 꿈이란걸 꿀 수 없는 내가 이런 이야길 하는 것도 우습지만…. "음, 리블란셰 라고 했던가? 내가 바빠서 말이야 오래 대화할 수는 없어서…." "아,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제가 기사님의 시간을 뺏고 있었군요." 예의바른 모습으로 그에게 사과한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기회가 닿는다면 또 보자- 라는 알 수 없는 인사를 남기고 등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 "저기- ! 그런데 검은 왜 새로 사신거지요?"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한번도 쓰지 않은듯한 멀쩡한 검을 바꾸려는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 검을 구입하고 보인 그의 커다란 상실감에서, 새로운 검에 대한 지불은 그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약간 초과했었던 것이겠지. 그는 앞으론 더 좋은 검이 필요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 이유는 그의 단순한 개인 사정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서 여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려는 흑색의 좌를 떠올렸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성(理性)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명백한 넘겨집기다. 그러한 판단은, 내가 흑색의 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 엘코어 라는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나를 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의아함에 가득차 있다. 하지만 곧 그는 내 질문에-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지금껏 내 인생에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일이니까. 최고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을 뿐이야." -라고 대답해 주었다. # 자신의 이름을 엘코어라고 밝힌 기사와 헤어진 후 도시의 외곽을 따라 걷다가 저녁이 되어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짙은 어둠에 내린, 아무도 없는 교정이 고요했다. 나는 그런 어둠과 고요 속에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눈을 감는다. 사실,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눈을 뜨건 뜨지 않건 별다른 차이도 없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피부로 느껴지는 일말의 바람 마저도 없었다. 나는 넓은 교정 한가운데 서서 깊은 어둠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 생각했다. 은룡 레테닌시에스케가 실행을 명한 마법은 인간의 인성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그 마법은 범죄를 저지른 소수의 인간을 철저히 희생시켜, 다수의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소수의 희생은 다수의 행복에 묻힌다. 그들이 하물며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범죄자인 경우에야….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필연적으로 반발을 낳는다. 인성을 빼앗는 마법은, 눈이 먼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야 여제의 철저한 통제로 범죄자에게만 그 마법이 적용되고 있지만… 은룡이 인간들을 영원히 지배할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온전히 인간의 손에 떨어진다면, 필연코 끔찍한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아니, 은룡의 통치가 계속 된다고 해도 그러한 방법은 과연 단 한번의 부작용도 낳지 않을 수 있을까…. "하아- " 인간은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 다. 그 마법으로 인해 이미 극도의 반발심을 가져버린 인간들이 있다. 지금이야 감히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 보이지야 못하겠지만… 인간은 참을성이 강한 피조물이 아니다. 어느 순간, 어떠한 방향으로든 불만은 터져나오고 말 것이다. 그것은 또 어떠한 재앙을 가져오게 될 지…. "…." 조금 더 어두운 교정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숙사 내부로 들어갔다. 기숙사 휴게실의 문이 살짝 열려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붉은 빛을 내뿜고 있는 랜턴이 커다란 탁자 중앙에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 저건, 장서관에 있던 것과 동일한 것이로군. 탁자 앞엔 랜턴에서 나오는 붉은 빛과 똑같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카리에르제가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엔 흰색 종이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카리에르제는 깃펜을 입에 물고 열심히 그 종이뭉치들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그것에 너무 몰두하느라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하다.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 너머로 종이들을 살펴 보았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져 있는 문자와 그림들이 빽빽했다. "으음…." 카리에르제가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게 들려온다. "…." 한참을 그의 뒤에 서있는데도 그가 나를 알아차릴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니?" "으아악- !!" 그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작이 워낙 커서 일어나던 그의 몸이 탁자를 툭- 하고 쳐 버렸고, 그 위에 놓여 있던 종이 뭉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런 그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몸을 감싸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버렸다. …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무시할 수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카리에르제는 반대편 의자 까지 물러나 있었다. 그는 멋쩍은듯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으- 놀랐잖아, 임마!" … 나도 깜짝 놀라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까지 놀랄 일이었나. 일부러 미리 인기척까지 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는데. 카리에르제는 가슴께를 감싸쥔 채 이쪽을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튼, 그가 나 때문에 크게 놀랐다는 사실은 틀림 없다. "미안, 그렇게까지 놀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카리에르제가 그만큼 종이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정말… 심장 떨어지는줄 알았단 말야."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원래 자리로 돌아와 떨어진 종이 몇 장을 회수해 다시 탁자위로 올려놓았다. 그런데, 심장이 떨어진다고…? … 흠, 놀랐다는 것의 관용적 표현인 모양이지. 예전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인간의 말을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없다. 인간들에 대해서는 전부- 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꺼내었다. "뭔가 잘 안돼?" "… 음." 그는 대답없이 섬세해 보이는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나는 휴게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초침이 틱, 틱-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꽤 긴 침묵이 지나간다…. "처음에, 새를 보면서… 날개에 대해 생각했어." 카리에르제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탁- 하고 랜턴에서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와 카리에르제 모두 랜턴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을 내내 새가 날아오르는 것만 관찰하고 있기도 했었어. 아주 오랫동안 그걸 보고, 나는 결국 나만의 날개를 생각해 낼 수 있었지. 그게 실제로 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응." 가볍게 대답하며, 그의 이야기에 호응했다. "많은 것이 필요했어. 내가 원하는 것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선 상상력 만으론 충분하지 않았지. 필요한 것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고, 대장간으로 직접 찾아가 내가 만든 설계도를 건내주어 실제로 그것을 만들어 보기도 했고…." 그의 말이 길게 이어진다. 평소와 같지 않게, 카리에르제는 과거의 회상 속에 파묻혀 원래의 표정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둠속이란 특수성 때문일까… 카리에르제의 기색이 평소완 많이 다르다. " -하지만, 결국은 안돼. 나는 이것을 이룰 수 없어. 하늘을 난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 인류가 꿈꾸어 왔던 거잖아? 나 혼자서, 그 수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에 그것을 이룩하겠다는 것은 역시… 너무나도 큰 오만이었나봐." 카리에르제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한계를 이야기했다. … 그의 체념이 느껴진다. 예상했었다. 그의 말대로,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늘을 난다는 것을 동경했겠지. 그것을 시도하려 해본 사람이 비단 카리에르제 혼자 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수천년 동안의 시도, 그리고 실패를 카리에르제 개인 혼자서 뛰어 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음…." 거기까지 말하고서, 카리에르제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그의 침묵에 동조하다가 이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네가 지금껏 만들어온 그것을 보여줄래?"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종이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에게서 넘겨 받은 종이를, 나는 꽤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다. … 모든 구조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론대로라면, 카리에르제가 만든 이 '비공정' 이란 물건은 정말로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체념하려는 이유는- "추진부가 문제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물건을 하늘로 띄울만한 힘을 낼 수 있는게 없어. 아주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내리듯 내려오면 추진력을 낼 수 있을까? … 그게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긴 한데, 그것도 되진 않겠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렇게 높은 언덕이 있을리도 없고 말이야." "… 그렇구나." 카리에르제의 말 대로다. 그가 설계한 이 물건엔 '심장' 에 해당하는 물건이 부재한다. 날 수 있다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주 강력한 추진력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 현재 인간의 '기술'력으론 그러한 추진력을 낼 수 없다. "…." 내가 이 물건의 완성에 도움을 주어도 되는지, 아닌지 고민했다. 나는 인간들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지양한다. 특히, 그것이 인간들의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일 끼칠만한 것이라면. 언젠가 칼리아넬이 내게 말했었지. 바라는게 있다면 어째서 은룡처럼 인간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느냐고- 그때, 나는 인간들은 영웅이란 존재 없이 나아가길 원한다, 라고 대답했었다.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얘기해 달라구. 아, 이제와서 발뺌할 척은 하지마. 가끔 너에게 그와 관련된 문서를 보여준 적은 있지만, 지금 네게 보여준 그것이 최종 완성본이라고. 즉, 넌 이미 발을 들여놓은거야." 뭐야, 결국 포기한다는 이야긴 아니로군. "그런가…." 마지막에 말한 그의 문장에 마음이 간다.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 라는 건가. 그래, 현재의 나는 거의 완전한 인간으로 행세하고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기술로 그에게 도움을 주는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 나는 탁자위에 그가 주었던 종이를 내려 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마법이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카리에르제로서는 내 질문이 굉장히 뜬금없이 느껴졌겠지만, 그는 꽤 성실한 태도로 답해주었다. "글쎄, 전쟁에 쓰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 같은것…?" 과연, 그러한 인식인가…. 인간은 정말 마법이란 힘을 파괴로 밖에 환원 시킬줄 모르는군. 흑색의 좌, 레쥬에브가 내게 말했었지. 인간의 마법은,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힘이라고. 카리에르제가 난다는 것을 환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은 틀림없는 마법이다. "마법은,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힘이라고 그랬었지." 그래, 그렇게 말했다. # 나는 누런 종이위에, 카리에르제가 만든 비공정의 심장부 역할을 할만한 것을 그려넣어 보았다. 비공정이 하늘에 뜨기 위해서 필요한건 오직 비공정의 진행 방향과 반대 되는 방향으로 작용될 추진력 뿐이다. 사각, 사각- 펜이 종이 위를 지나다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카리에르제는 완전히 침묵한채 내 손만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다. "…." 내가 그에게 도움을 줄 일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다. 인간들의 마법으로 가능한 마도 공학 지식을 적용해 추진력을 낼 수 있는 장치를 종이위에 그림으로서 설명하는 것 뿐이다. … 마도 공학의 발전은, 신비의 힘인 마력을 한 지점에 머물게 하는 미스틱 쥬얼(Mystic jewel), 마력석(魔力石)의 발견으로 부터 이루어졌다. 흔히 마력석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평범한 보석이다. 보석엔 본래 마력을 머물게 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다. 순도가 높을 수록 그 힘은 커지는데, 인간들은 보다 효율적으로 순도 높은 보석에 마력을 주입할 수 있는 기술을 발견했다. 내가 구상할 추진체는 바로 그 마력석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너 그림 진짜 못그린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카리에르제가 킥킥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으응…." 알아볼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카리에르제의 가벼운 놀림을 넘기며 계속 추진체가 될 물건을 그렸다. 마도 공학에 대한 지식이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한 카리에르제를 위해, 그림 곳곳엔 화살표로 설명과 함께 주석(註釋)을 달아놓았다. 그 과정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중간에 랜턴에 있는 기름이 다 달아버려 카리에르제가 여분의 기름을 가지러 가기도 했었다.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려, 어느새 다음날 이른 새벽이 되었다. "…." 구상 자체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머리 속에선 추진체를 구성할 수 있는 수 많은 방법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 현대의 인간이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방법을 골라야 했다. 그 과정에, 상당한 고심이 동반되었다. 추진체의 에너지 효율에 무게를 둔다면, 현대 인간의 수준으론 그러한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현대 인간의 이해에 무게를 더 둔다면, 비공정이 뜰만큼의 추진력을 낼 수 있는 추진체를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추진체의 효율과 현대 인간의 이해 수준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 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비공정이 겨우 뜰 수 있을 정도의 효율 정도를 발휘하는 추진체를 구상하기로 결정했다. 그 정도야 마력 구조체 배열의 방법론에 불과하기에, 비상한 사고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겠지. "끝났… 어?" 내가 종이 옆쪽에 펜을 내려놓는것과 동시에 카리에르제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는 대단히 졸린 기색으로 눈을 비비며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응." 하지만 내가 긍정의 대답을 하자마자, 그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는 누워 있듯이 머물러 있던 푹신한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이쪽으로 다가왔다. 느릿하게 옮기는 그의 발걸음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기대감을 품고 있는듯 하다. 카리에르제는 곧 내곁으로 다가왔고 약간 떨리는 손으로 추진체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창 밖으로 태양이 떠오르며 기숙사 휴게실 내부로 창문을 통해 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밝은 태양빛에 별빛이 가려지듯, 랜턴의 불빛이 사그라 들어간다. 햇빛은 곧, 카리에르제가 들여다 보고 있는 종이에도 닿았다. 햇빛에 의해 종이의 내용들이 뒤쪽으로 비춰져, 그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내 쪽에서 보였다. 그는 오직 추진체가 낼 수 있는 힘에 대해 주석을 단 부분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칼리체,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추진체라는 물건이 어떤 원리로 힘을 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만 취하고 있었더니, 몸이 삐그덕 거리는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에 쓰여진, 이 추진체가 낼 수 있는 힘이 진짜라면… 비공정은, 정말로, 하늘을 날 수 있어! 칼리체, 이 종이에 쓰여진 내용은… 진짜지?" 카리에르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 그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비단 목소리뿐만 아니라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눈동자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의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분명, 대단한 희열이겠지. 반면, 나의 마음에 남은건 다소의 씁쓸함이다. 하늘을 나는 비공정의 등장은 분명 대단한 일이고, 그것은 틀림없이… 인류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에 인간이 아닌 드래곤인 내가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수 없이 많은, 다른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가능성이 있다. 내 개입은 그런 수 많은 가능성을 모두 배제해 버리고, 인간을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길 강요한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것은,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정말 대단해!" 카리에르제는 크게 기뻐하고 있다. …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후회는 나에게 허락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일은 카리에르제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요, 정체되어 있는 인간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결정일 뿐이다. 후회하지 않는 나는 인간이 아니고, 다만… 드래곤일 뿐이다. "칼리체!" 그의 기뻐하는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다가오는 카리에르제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너무나도 기뻐하는 얼굴이다. 와락- 하고, 그는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달려드는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나는 그의 몸을 버티지 못하고 몇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넘어질뻔 했지만 겨우 버티고 섰다. 카리에르제는 여전히 나를 껴안고 있는 채다. "넌 정말 대단해. 왜 진작에 너와 상담하며 비공정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비공정의 동력을 마법에서 끌어올거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내가 생각하는 마법은, 그저 사람을 죽이는 힘이었거든." 그저, 사람을 죽이는 힘… 이라. "네 말대로야. 마법은 정말로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힘이었어. 마침내, 정말로… 내 꿈이 이루어 지려고해." … 하늘을 난다는 것. 본래는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희열을… 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 카리에르제에게 안긴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어느새 어제가 가고 오늘이 찾아왔군. "저… 근데 이만 놓아주지 않을래?" 조금, 숨이 막힐 정도다. 하지만 카리에르제에게선 대답이 없다. 한 번 더 그러한 청원을 하려는 찰나, 어깨쪽에서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할지…. "카리에르제, 혹시 울어…?" "쳇, 배려 없기는…. 이럴땐 가만히 있어주는 거라고."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 카리에르제는 내가 만든 추진체를 자신이 만든 동체에 결합시킨 설계도를 그렸다. 그는 그 설계도를 수도 내에 있는 가장 훌륭한 대장장이 공방에 건네주어 첫 비공정을 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에 별 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설계한 동체는 사람 한 명도 타기 힘든, 아주 작고 조악한 것이니까. 물론, 그 조악하게 만들어진 동체를 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뭐, 날 수 있는 물체 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이 기술을 발판삼아 인간이 탑승 가능한, 좀 더 커다란 탈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 그것은 결코 순수한 인간의 기술이 아니다. 비공정의 추진체 부분은 드래곤인 내가 인간에게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비공정의 등장으로 인해 다가올 인간의 혁신은, 드래곤인 루루렌칼리체가 개입된 것이라는 것이지. 그 사실 자체가, 마음 깊숙히 박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리에르제에게 비공정의 설계도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부터, 결정은 내려져 있었다. 나 자신이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을거란 믿음에서 비롯된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인과관계마저 비틀어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닥칠 일을 지금 알 수 있는건 아니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이다. 나는 단지… 내 결정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담담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 결과가 나의 파멸로 치닫게 된다 하더라도. …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나 자신을 현재에 존재하도록 가능케 하는, 시공을 장악하는 내 거대한 마력(魔力)과 신력(神力)이 이것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 한 걸음 내 딛은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긴 수면이 끝나고 보금자리에서 깨어난 뒤 인간들의 사회에 들어온 이유는 인간들의 정체(停滯)에 커다란 의문을 느꼈기 때문이었지…. 카리에르제의 비공정 완성은 이 의문을 정면에서 해결하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때문에 나는 답에 거의 다다르렀음을 느낀다. "흐아아암…." 뒤에서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하품 소리의 주인공이 카리에르제라는 사실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아직도 안 자고 있던거야?" "응." "나 처럼 잠깐 눈이라도 붙이지…. 피곤하지도 않아?" …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피곤한것 같기도 하다. 긴 숨을 내쉬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은 완연한 오후의 풍경이다. 창에서 들어오는 나른한 햇살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오랫동안 눈을 감지 않고 있었던 탓인지,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눈가를 비볐다. … 상당히 따끔거린다. "괜찮아." 계속 눈을 비비며 카리에르제에게 답했다. "뭐,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할 말은 없지만…." 그는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다 내게 말했다. "칼리체, 이 설계도… 지금 당장 대장장이 공방에 넘겨주고 오려는데, 혹시 같이 가주겠어?" 손바닥으로 눈물자국이 남은 뺨을 닦으며, 카리에르제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묘한 열기를 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응, 같이 가볼까." # 카리에르제는 자그마한 가죽 가방에 설계도를 넣고 그것을 어깨에 맨 채 내 옆을 걷고있는 중이었다. 이따금씩 흥미로운 구경거리 따위가 있으면, 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르키며 내게 한가로운 잡담 따위를 걸어왔다. 누군가와 함께 거리를 걷는건 이게 처음이라서 그럴까… 홀로 걷는 것 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나는 며칠전 노예라는 상품으로서 이 거리에 있던 인어를 떠올렸다.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생각은 곧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인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가련한 존재였을 뿐이다. "… 그런데 그거 먹어봤어? 바다에서 잡은 오정어라는 징그러운 생물이 있는데, 그걸 구워서- " 한창 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의 의외성에 대해 떠들던 카리에르제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카리에르제, 너는… 비공정이란 물건을 만들어서 무얼 하고 싶은거니?" "…." 그는 인간의 정체(停滯)를 깨닫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비공정을 만들어내어 결국 자신이 '전환점' 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에게서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실현이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꿈은 꿈일 뿐이고, 고작 '개인'일 뿐인 그는 그런 도약을 단숨에 이루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정지'에 주목하고 있던 내가 그를 도왔고, 현재 그는 자신이 꿈꾸던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글쎄, 뭘 하고 싶다기 보다는…." 답이 조금 애매하군. "…." "음, 예전에 너한테 내가 '전환점' 이 되고 싶다고 했었던 적이 있었지. 그 말대로라면 그게 목적이긴 한데." 그는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듯, 뺨을 긁적거렸다. "계속해서 이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결국… 하늘을 날고 싶다, 라는 마음 뿐이더라고. 전환점이니 뭐니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말이지." 그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와 네가 만든 물건은 하늘을 나는 것이잖아? 무얼 하고 싶냐라는 질문은 그래서 이상해. 하늘을 나는 물건으론, 당연히 하늘을 날아야지." "… 그렇구나." 나와 '네가' 만든 물건이라니…. 그 말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다. 어쨌든… 당연한 이야기로군. 질문은 어리석었다. 그의 말대로 하늘을 나는 물건으론, 당연히 하늘을 날 수 밖에 없다. … 다시 그와 잡담을 하며, 길을 걸었다. 조금 비좁은 길에서 나와 마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큰 길에 진입했다. 공간이 넓어져서 인지, 방금전의 길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다. "아, 그런데 칼리체, 너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뭘 할꺼야?" 길을 걷는 도중, 카리에르제는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해왔다. 졸업하면 이라니…. 내게는 존재 할 수 없는 가정이다. 3 년이 지날때 까지 내가 찾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내게는 그 뒤가 없다. 조금 심드렁한 느낌으로, 대답을 했다. "황실의 관리가 되어야지." 내 답을 들은 카리에르제는 굉장히 의외란 표정이었다. 아니, 이미 의외라는 걸 뛰어넘어 상당히 놀란 얼굴이다. "…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답이다. 정말로. 너는 절대로 황실의 관리 따위는 하지 않을것 같아." 관리 '따위' 라니…. 그것은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모든 평민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유효한 신분 상승의 수단이니까. 황실의 관리가 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 이라는 것을 피력해 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학력 시험이라는 것에서 부터 이미 탄로가 난 일이다. 나는 황실의 관리가 되고 싶어하는 인간 평민을 연기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고 해서 문제될건 없다. 나는 위화감 없이 인간들의 사회에 녹아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니까. "아…." 뭔가 평범한 대답을 하려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는걸 발견했다. 그의 시선은 다소 먼 곳을 쫓고 있었는데, 그 시선의 끝엔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커다란 마차가 있었다. 말이 네 마리나 붙어서 끌고 있는, 상당히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였다. 크고 화려하다는건… 마차 안에 상당히 높은 신분의 인간이 타고 있다는 뜻이겠지. 마차가 다가올수록 카리에르제의 얼굴은 계속해서 흐려졌고, 마차가 나와 그의 옆에 멈추어 섰을때 그의 얼굴은 괴로움 마저 품고 있는것 같았다. 커다란 마차가 길 한복판에 멈추어 통행을 방해하는데도, 주변의 인간은 마차를 피해 분분히 흩어졌다. 마차를 끄는 마부는 그런 광경을 다소 으시대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카리에르제에게 공손한 인사를 건네었다. 하지만 카리에르제는 그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마부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말의 엉덩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에서 누군가의 발이 나왔다. 고급스런 가죽 구두가 신겨져 있는 발이었다. 곧 발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리에르제와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 눈매는 살짝 치켜올라가 사나워 보였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듯한 시선은 오만해보였다. 그는 흐트러져 있는 망토 자락을 한번 펄럭이는 것으로 정리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너를 보게 될 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그의 미간이 한껏 찡그려져 있었다. 눈 앞에 나타난 인간은 아카데미의 장서관에서 한 번 본적이 있었던 카리에르제의 형이었다. "이쪽도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냥 지나가지 그랬어?" 가시가 잔뜩 돋은 말투였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잔뜩 들었다만, 동생아… 네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말들이 있어서 말이다." … 음, 이곳에서 말인가? 대화하고 있는 둘에게서 조금 멀어져 주변을 둘러 보았다. 큰 길이라곤 하나 커다란 마차가 길 한복판에 서있다. 지나다니는 인간들이야 크게 문제될건 없지만… 다른 마차가 온다면 지나가는데 상당히 곤란함을 겪을듯 하다. "이곳에서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처럼 아카데미로 찾아오라구." 카리에르제 역시 불편한듯,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형의 반응은 냉엄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때야 아카데미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덤으로 네게도 찾아간거였지만, 너와의 대화만을 위해 아카데미에 방문할 시간은 없다." 픽- 하고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형을 이해해다오. 그리고 하찮은 네 시간과 소중한 내 시간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건 정말 화가 치미는 일이니까." "…." 카리에르제의 얼굴이 다소 붉어졌다. 분노… 로군. "그, 래서… 내게는 무슨 일로?" 뭔가가 잔뜩 억눌려져 있는듯한 목소리로, 카리에르제가 물었다.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네 약혼녀에 관한 이야기다." 레쥬에브…. 카리에르제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꽤 관심이 가는 이야기로군. "…." 별다른 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카리에르제에게 그의 형은 방금전과 같이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서 자퇴했다고 들었다. 별로 바람직하진 않은 일이지만… 그 정도의 일이 그녀의 명예에 흠집을 내긴 힘들지. 하지만 여황폐하께 단독 알현을 요구했다는 이야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단독 알현… 이라고? "공작가의 여식이라 해도 그녀가 작위를 가지고 있는건 아니지. 이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알고 있는거냐, 카리에르제." "왜 그 계집애 얘기를 나한테 묻는거야…?" 카리에르제에게서 마찬가지로 질문을 들은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카리에르제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강렬한 경멸을 품고 있었다. "이런 한심한 녀석. 아무리 네 녀석이 덜떨어진 망나니 같은 녀석이라 해도 정도가 있는 거다." 거의 분노마저 품고 있는듯한 말투였지만,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큰 변화는 없었다. … 감정을 상당히 잘 제어하는 인간이로군. "잘 들어라. 그녀는 너와 결혼해 앞으로 우리 네르세반 가문 사람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선 그녀가 가진… 아니, 정확히는 메르시오 가문이 가진 명예를 우리 가문으로 끌어오고 싶은 것이지 그녀에게 난 흠집까지 끌고 오고 싶은건 아니다." "…." 카리에르제는 고개를 숙인채 말이 없다. "왜 너한테 묻느냐고 했었나? 그것은 그녀가 네 약혼녀이기 때문이지. 아무리 공작가의 여식이라고 해도 이미 쇄락한 가문의 어린 계집 따위도 휘어잡지 못하는 거냐? 필요한게 있다면 이 형에게 말하라고 얘기했을터인데…."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카리에르제를 노려보던 그는 이내 한숨을 쉬더니 한쪽 발을 마차의 발판에 걸쳤다. 용건은 그게 다 였던 모양이다. 아무말 없이 마차에 오르려던 그는 발판위에 서있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카리에르제에게 물었다. "아, 혹시… 그녀에게 어떤 흠집이라도 난다면 파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동생아?" 긍정도, 부정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은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한심한 녀석…! 그건 이미 공표된 일이다. 그녀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는 이상, 네가 기대하고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 카리에르제의 뒤로 잠깐 물러선 내가 신경쓰이는지, 그는 내쪽을 잠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를 향한 주목은 그게 전부였다. "귀족의 의무를 다해라, 카리에르제." 그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겨놓고 마차안으로 올랐다. 마차가 약간의 흙먼지를 날리며 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카리에르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움직이질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고개를 들며 내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미안, 이만 움직일까…?" # 그 후로 카리에르제는 말이 별로 없어졌다. 역시… 아까전 그의 형이 말했던 말들이 신경쓰이는 것이겠지. 나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귀족의 의무, 라고 했었나…. 나로선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레쥬에브와 결혼하는게 그의 의무라는 이야긴지, 아니면 결혼 따위는 수단이고, 단지 가문의 세를 불리는 것이 그에게 부여된 의무라는 것인지. "…." 카리에르제의 일과는 별개로 뜻하지 않은 인물에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레쥬에브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게 단독 알현을 청원 했다는 것…. 그것은 끝을 보겠다는 이야기겠지. 물론 여제가 그 청원을 받아들일 때의 이야기겠지만, 은룡이라면 절대로 그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쩔 셈일까. 여제의 암살을 기도하기라도 할 생각인가. … 뭐, 크게 틀리진 않겠지. 여제를 절대로 이길 수 없을거라 생각하면서도, 파멸을 향해 치닫는 흑색의 좌가 가엾다고 생각한다.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긴, 인간은 예전부터 그랬었다.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체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어차피 멸망을 향해가는 필멸자라서 그런걸까. "아, 저기다." 카리에르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꽤 큰 건물이었는데 입구에서 거친 쇳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깡, 깡-! 하는 소리가 규칙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온다. "들어가보자." "응."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카리에르제의 뒤를 쫓았다. 대장장이 공방이라고 했었지…. 내부에 있는 창문이 상당히 작아서, 낮인데도 굉장히 어둡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 때문인지, 자그마한 탁자위에 작은 랜턴이 놓여있어 주변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랜턴…. 요새들어 정말 자주보는 물건이군. 건물 안쪽으로 작은 문이 나 있었는데, 쇳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희미한 빛과 뜨거운 열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음… 아마 저곳에서 열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듯 하다. 대장장이라고 하면, 금속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자들이니까. 랜턴이 놓여 있는 탁자 앞에 작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카리에르제는 그 인간을 발견하고 그의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탁자를 치며 말했다. "어이, 좀 일어나 보라구." "음…. 으음, 음?" 그는 눈을 비비며 졸음에서 깨어났다. "아, 전에 한 번 이곳에 찾아왔었던 도련님이구만. 이번엔 무슨 일로…?" 카리에르제는 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설계도를 꺼내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설계도를 넘겨받더니, 아직도 남아있던 졸린 기색을 모두 지우려는듯 고개를 털었다. 다소 주름이 진 손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접혀져 있던 종이를 펼쳤다. 그의 손에 난 주름처럼, 미간에도 주름이 잡히는게 보인다. 그는 꽤 한참동안 그것을 들여다 보고서 입을 열었다. "이걸 만들어 달라는 건가? 저번에 부탁 받었던 물건과 마찬가지로 도통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가 없는 물건이군." "뭐… 어디 쓰일지야 어쨌든간에, 만들 수 있겠지? 마법적 처리도 해야되는 복잡한 물건이긴 하지만 수도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불리는 당신들이니까." … 어떻게 들으면 기술에 대한 인정 같기도 하고, 도발 같은것 따위로 들리기도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카리에르제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잠깐동안 설계도를 더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소만, 시간이 좀 걸릴듯 하군 마법적 처리가 들어가는 물건은 우리도 좀처럼 만든적이 없는 물건이라서…." "… 꼭 좀 부탁해. 당신들이 아니라면 어디 부탁할 곳도 없다구." 남자는 카리에르제의 반응에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의 상식에선 귀족가의 도련님이 저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이 이해가가질 않겠지. 카리에르제는 인간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신분이다. 그러한 신분으로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닌, 부탁을 한다는 것에서 카리에르제가 어느 정도로 비공정의 완성에 신경쓰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확실히 카리에르제의 말대로, 최고 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다른 곳을 찾긴 힘든 일이겠지. 카리에르제의 간절함을 이해한다. "알았소, 맡겨만 주시오 도련님. 설계도대로 만들어 드리지." 남자는 꽤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 카리에르제와 건물을 나왔다. 바로 기숙사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그는 나를 데리고 도시의 북쪽으로 걸었다. 수도의 북쪽엔 커다란 산이 있었는데, 그 산 앞쪽에 언덕이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그 언덕을 올랐다. 멀리서 볼땐 작아 보였는데, 실제로 올라보니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렀다. 카리에르제는 평지를 걸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보폭으로 언덕을 올랐다. 뒤쳐지지 않게 그를 따라가려니 점점 숨이 가뻐왔다. 결국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고 나서,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하아, 하아…." "뭐야, 완전히 저질 체력이네, 너." 저질 체력이라니…. 하지만 이래서야 반박할 수도 없군. 카리에르제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네거스텐 제국의 수도를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의 옆에 서서 그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언덕의 높이가 꽤 되어서인지 도시가 작아 보인다. 도시에서 언덕을 봤을때도, 이렇게 높을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지. 인간의 몸을 하고 있을때의 원근감이란, 무시할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덕에 자라난 한 나무로 다가가 등을 기대고 섰다. 조금 휴식을 취하자, 쉴새 없이 두근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되어간다. "후…." 마지막으로 숨을 한번 더 고르며, 언덕 위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곳의 여름은 꽤 짧다고 했었지…. 벌써 가을이 다가오는 것일까,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 불어온 바람으로 인해 떨어진 나뭇잎이 코 바로 앞으로 팔랑 거리며 떨어졌다. 떨어지던 나뭇잎을 쫓던 시선은, 언덕 아래를 쳐다보고 있는 카리에르제에게로 가 멈추었다. … 아까 전 만났던 그의 형에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오자고 한거야?" 카리에르제는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며 외치듯 말했다. "바로 이곳이야!" 방금 전의 좋지 않은 표정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그의 얼굴은 활짝 펴져 있었다. 혹은 모두 잊어버린것 같기도 하다. … 그런데, 무엇이? 별 다른 말 없이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그제서야 그는 생략된 말을 해주었다. "곧 만들어질 비공정 말이야, 이곳에서 시험 비행을 해보는 거야! 어때? 높이도 상당하고,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위험할 일은 없어. 물론, 도시쪽으로 날리면 안되겠지." 그는 손가락으로 다른 방향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도시의 반대편에 작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비공정을 저곳으로 날려볼 생각인듯 싶다. 이건, 이를테면… 사전답사인 셈인가? 초원을 잠깐 바라보다가 카리에르제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전의 활기참은 금방 사라지고 없었다. 눈꼬리는 축 처지고,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별다른 감정을 띄고 있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내가 '우울' 이라고 알고 있는 인간의 표정이다. 오늘 이 인간의 감정 변화는 무척 변화무쌍하군…. 나는 자리에 앉아 나무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 다시 한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언젠가 들었던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연주 소리가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와 닮았다는 편이 맞겠지.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게로 쏟아지는 햇빛 역시 흔들렸다. 그것이 눈꺼플 위로 쏟아져 나는 눈을 감고 있음에도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시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또다시 나뭇잎 몇 개가 떨어져 뺨과 코 끝을 스치는게 느껴졌다. "뭐야, 기껏 경관이 좋은 곳에 같이 올라와 주었더니, 잠이나 자고 있는거야?" 카리에르제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가까이에 있는데도, 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다. … 그런데, 딱히 잘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거기다 같이 '올라와 주었' 다, 라니…. 그래서야 이곳에 올라오고 싶어한 사람이 나 인것 같군. 어디까지나 이 언덕에 올라오고 싶어했던 주체는 카리에르제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눈 앞에 누군가의 무릎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묘한 표정으로 카리에르제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저기, 너 말이야…." "응."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지만 알 수 없는 것에 가로막혀 주저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런 주저함이 무색하게, 카리에르제는 금방 담백한 기색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 무엇에 대해서…? 라는 의문까지 갈 것도 없겠지. 그의 감사는 비공정을 완성하는 것에 대한 나의 조력이다. … 아무튼, 고맙다는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마침내 비공정을 완성했다는 감격과 함게한 감사였기 때문에, 많은 격정적인 감정이 유리된 듯한 지금의 담백한 감사인사는, 그래서 더욱 진정으로 들려온다. "응." "… 뭐야, 그런 간결한 대답은." 카리에르제는 불만스런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보통, '괜찮아, 우린 친구니까' 라던가 '도움이 되어서 기뻤어' 라는 감동적인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거기다 솔직히 '도움이 되어서 기뻤어' 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말 이니까. 사실은 하나도 기쁘지 않다. 드래곤인 루루렌칼리체의 도움에 의한 인간의 변혁은 내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다. …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려 하지만 금방 모두 흩어버렸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어쨌든 후회는 없다. "그래…?" 카리에르제는 별다른 말 없이 내 옆에 앉았다. 살짝 닿은 어깨에 따뜻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똑바로 앞을 보고 있다. 네거스텐 제국의 수도를 너머, 좀 더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나도 시선을 돌려 그처럼 앞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마주한채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으니, 바라보고 있는 곳도 같다. 아니, 같지만… 결코 같지는 않겠지.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언덕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덕분에 머리위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몇 개나 팔랑팔랑 하고 떨어져 내렸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긴 백발에 붙은 나뭇잎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태양이 산 허리에 걸릴 때 즈음이 되어서 카리에르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를 만나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이란 건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 '만약' 이라는 말은 본래는 모르고 있던 말이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한탄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알고 있는 인간들에게 배운 말이니까. 그런 내게 '만약' 이란건 없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칼리체,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무엇하나 이루지 못하고,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다가 별 의미 없는 삶을 살다가 갔겠지." "…." 하늘이 붉어지고,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 지고 있다. "오늘 말이야… 형에게서 그런 심한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어. 과거엔 나 자신을 향해 분노하고 화를 냈었어. 비공정을 비웃는 형을 향해 아무것도 반박할 수 없었거든. 어쨌든 형의 말은 옳았고, 그것이 현실이었지." 조금씩 어둠이 내리자, 주변에서 찌르르- 하고, 벌레 우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벌레 울음 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손을 무릎에 모으고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어. 물론 기분은 나쁘지만, 형에게서 어떤 심한 말을 들어도 적어도 오늘만큼은… 괜찮을 것 같았어. 설계도가 든 가방이 어느때 보다 묵직하고, 든든했거든." 그는 희미한 웃음 소리를 흘렸다. 크지 않은,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충만함으로 가득찬 웃음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카리에르제의 이야기가 계속 들려온다. "형이 뭐라고 하든 간에, 결국에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을 이루었거든. 물론, 비공정이 하늘을 난다고 해도 바뀌는건 없을 거야. 형의 태도는 그대로 일테고, 정략 결혼이 취소되는 일 따위도 없겠지. 그리고 나는 여전히 가문의 천덕꾸러기 인 채로 남아있을 거야." … 카리에르제의 꿈은, 그의 현실의 희망과 직결되지 않는다. 조그만 비공정이 겨우겨우 하늘을 날았다고 해서, 카리에르제 개인에게 바뀌는 일 같은건 없다. 뻔한 이야기다.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편리한 일은 그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아도 돼. 화를 내고, 슬퍼하지 않아도 돼. 사실, 인류 발전의 전환점 같은 이야긴 아무래도 좋았어. 하늘을 난다는 것은… 온전히 나 자신 만을 위한 것이었나봐." "…." 그런 이야기인가…. "그래서 네게 정말로 감사해, 칼리체." 조용히,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이야기를 끝마쳤다. 하지만 나는 숙인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내게 감사하다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이율배반적이게 들린다. 나와 카리에르제는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장소를 바라보고 있지만 역시… 나와 그는 바라보고 있는 곳이 같지 않다. 같을 수가 없다. # 그날 밤은 달이 굉장히 밝았다. 나는 기숙사 옥상에 나와 상당히 쌀쌀해진 밤 바람을 쐬고 있었다. 기숙사 난간에 걸터 앉아 품 속에서 정령의 씨앗을 꺼내었다. 보통의 씨앗보다 훨씬 큰 정령의 씨앗은, 자그마한 내 손 위에 올려져 상대적으로 더 커 보였다. 달빛을 받아 푸른 빛을 띄고 있는 씨앗엔 미약한 신비가 깃들어 있다. 씨앗은 싹을 틔운다. 그때가 되면 이 미약한 신비는 더 없이 커져 새로운 생명을 품고, 그 생명에 자연의 정(精)을 깃들게 할 것이다. …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칼리아넬에게로 찾아가 그녀의 도시에 이 씨앗을 심을 것이다. 본래 내 보금자리 주변에 심을 생각도 했었지만… 내 보금자리 주변은 모두 눈과 얼음으로 가득 차 있다. 신비마저 머금고 있는 이 씨앗이 고작 그 정도 환경의 불모로 싹을 틔우지 못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좀 더 좋은 환경이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내 보금자리 옆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 요정 왕국의 중심부… 세계수의 옆이라면 이 씨앗도 잘 자라줄 것이다. 칼리아넬과 함께 하며, 성장할 씨앗을 지켜보는 미래를 잠깐 상상해 보았다. … 나쁘지 않군. 약간의 즐거움이 느껴질 것 같은 미래다. 꺼내었던 씨앗을 다시 품속에 넣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네거스텐 제국의 황궁, <피에셰트>를 바라보았다. … 카리에르제의 형이 레쥬에브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게 단독 알현을 요청했다고 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따로 그녀의 의도를 통찰하려 해 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명백한 정면에서의 도전이니까. … 꽤 신경써서 주시해야겠지. 레쥬에브는 내 도움이 필요없다 말했지만 나는 그녀를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다. 만약 은룡이 약간이라도 진심으로 나온다면, 레쥬에브는 은룡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전에 한 번 은룡의 진실된 힘을 느낀적이 있는 레쥬에브라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쥬에브는 포기하지 않았다. … 마음을 먹었다. 만약 은룡이 '인간'으로서가 아닌, '드래곤'으로서 진실로 그녀를 상대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 더 밤 바람을 쐬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도시의 외곽에서 시작된 강렬한 마력 파장이 느껴졌다. 익숙한 마력 파장은, 레쥬에브의 것이었다. 지체할 것 없이 발 밑에 마력장을 생성시켜 하늘로 도약한 뒤, 중력 반전 마법을 발현시켜 허공에 몸을 고정시켰다. 마력 파장이 느껴진 곳은… 오늘 오후에 카리에르제와 갔었던 언덕 근처였다. # 커다란 불길이 살아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불길은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마력에 의해 발현된, 마법적인 불꽃이었다. 그것은 예전에 본적이 있던 신비다. 레쥬에브가 발현시켰던 적이 있던… '꺼지지 않는 성화' 라는 이름이었지. 불꽃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했다. 잠깐 동안 태양을 잃은 세상에, 다시금 태양이 떠오른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천공에 존재해야 하는 법. 지상으로 내려온 태양은 거대한 재앙에 불과하다. 레쥬에브는 그 거대한 불길의 한 가운데 서있었다. 그녀는 온 몸을 흑색의 로브로 가리고 있었는데, 머리에 커다란 후드를 푹 뒤집어 쓰고 있어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온통 흑색으로 점칠된 그녀에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색이라곤, 손에 끼고 있는 장갑에 박힌 붉은 보석의 빛 뿐이었다. '꺼지지 않는 성화' 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녀를, 스무 명 정도 되어보이는 인원이 포위하고 있었다. 개중엔 활을 든 자도 있었고 검이나 창을 든 자도 있었다. 무기는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의 복장은 동일했다. 연약한 인간의 눈을 잠시 버리고 용의 눈으로 그들의 의복을 들여다보니, 역시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의 엠블렘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전에 무기점에서 만난 적이 있던 엘코어라는 기사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대치하는 그들에게서 잠깐 시선을 떼고 도시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치솟는 불길이 굉장한데도, 저쪽에선 이쪽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 공간 전체에 전개된 광범위 인식 장애 마법으로 인한 것이었다. 흑색의 좌… 그녀는 저 정도로 거대한 신비를 이곳에 불러들었으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거대한 결계도 역시 동시에 유지하고 있는 건가. 과연… 전에 레쥬에브가 '방심' 했다고 말했던게 납득이 간다. 저렇게 강대한 힘을 가진 '좌' 의 인간이 아무리 수가 많다곤 하나 그 보다 미약한 신비를 사역하는 인간들에게 그렇게 간단하게 패퇴할리가 없다. "말도 안돼! 이런 말도 안되는 마법 같은건, 들어본 적도 없어!"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불길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레쥬에브의 손이 그곳을 향했다. 그녀의 주변에서 뱀의 혀처럼 넘실거리고 있던 불꽃이 푸른 바닥을 태우며 외침의 주인공 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불길은 그 앞으로 달려든 여러명의 네크-네르프로넨 기사들에게 제지당했다. 저런 강대한 마법의 불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똑같은 마법 뿐이다. 저들이 들고 있는 개개의 무기에도 적지 않은 신비가 깃들어 있는듯 했다. "물러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잿가루로 만들어 버리겠어!" 사방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과는 반대로, 얼음장 같이 차가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상당히 앳된 목소리인지라 협박에 어울리는 박력 같은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것 따위야 꺼질줄 모르는 불길들이 대신하고 있다. 기사들은 그녀의 말에 응하지 않은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주 잠깐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기사들은 수 명씩 짝을 이루어 레쥬에브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들에겐 여지없이 레쥬에브의 손이 휘둘러졌고, 강대한 불길이 사방을 태우며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하지만 수가 여럿인 기사들은 신비를 머금고 있는 무기를 휘둘러 불길을 조금씩 살라 먹었다. 그런 광경이 사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처음 넓은 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레쥬에브는, 사방에서 쇄도해 들어오는 기사들에 의해 조금씩 공간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인간들은… 뭘 하는 녀석들이지. 대강 보기에도, 저들은 저들보다 강대한 신비를 상대하는데 익숙한 모습이다. 하지만 장악한 공간을 점점 내어주고 있는 레쥬에브는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레쥬에브의 장갑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장갑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보석을 매개로 하여 그녀의 손에 순식간에 거대한 마력이 모여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마력을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물리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거대한 마력체계가 떠올랐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찰칵찰칵…! 허공에 있는 마력체계는 마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가며 그녀의 작은 손에 모인 거대한 마력을 모두 그녀의 '성화'로 전환시켰다. 그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붉은 빛으로 타오르던 불길이 모두 청색으로 변했다. 조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기다. 성화는 빠르게 산소를 소모 했고, 주변에 있는 모든 공기를 빨아들이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그 진동에 의해 짧은 내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으아아악-!"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들 대부분은 레쥬에브의 마력체계가 떠오를때 부터 이상을 느끼고 몸을 뺐지만 미처 그러지 못한 인간 몇몇은 목숨이 위중할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입어야 했다. 기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마도 부상을 당해 바닥에 쓰러진 인간들의 이름을 부르는듯 싶었다. 레쥬에브는 부상자들의 목숨까지 가져가진 않았고, 뒤로 물러서 그녀를 노려보던 몇명의 인간이 앞으로 나와 부상자들을 뒤로 옮겼다. 그녀는 그런 광경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 죽일 생각이 전혀 없군. 저들은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각오로 검을 들고 있는데도 말이지. 힘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인가…? 자신과 반(反)하는 이들의 목숨을 취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것을 이룰 자신이 있다는 건가. 나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존재의 생명을 앗아가는걸 꺼린다. 그것은 한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과 진배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이미 세계를 벗어난 힘을 지닌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력한 힘 앞에서,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지 빼앗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 하다. 어리석군. 저런식의 '자비' 로 인해 살아남은 그녀의 적은 결국 그녀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여황 폐하께 반기를 들려 하는 것인가?"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어조로, 레쥬에브에게 그런 질문이 던져졌다. 덕분에 잠깐의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타닥, 하며 바닥의 풀들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레쥬에브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상한 일이네…. 지금껏 당신들을 상대하면서 그런 말을 들은적은 한번도 없는데 말이지." 공격할 의지가 없다는 뜻일까,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앞으로 나선 자는 전에 한 번 나와 마주친 적이 있던 엘코어 라는 이름의 기사였다. 짙은 어둠속에서 레쥬에브가 불러 일으킨 마법의 불 만이 유일한 조명인 이곳에서 그의 얼굴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거야 말로 더욱 이상한 일이로군. 너는 지금껏 몇명의 기사들의 목숨을 뺏어왔고, 몇 번은 우리도 너를 죽일뻔 했었다.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도 근본적인 이유조차 모르고 있다니…." "엘코어! 쓸데없는 질문은 필요 없을 터다!" 그의 옆에 서있던 기사가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사이에 서있는 그는, 주변의 불들 보다도 더욱 타오르는 형형한 눈동자를 하고서 엘코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코어는 옆으로 나선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런 상황이 이해가 가나? 우리가 지금껏 계속해서 죽이려 해왔고, 지금도 그러려고 시도중인 이자는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라는 아가씨라네.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로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가씨지. 더불어 그녀는 내일 여제폐하와 단독 알현이 예정되어 있다네." "…." 엘코어를 제지하고 나선 기사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였다. … 그러고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지. 레쥬에브는 황실 마법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에게 항상 목숨을 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 공식적으로 그녀, 그리고 메르시오 공작가에게 행해지는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그녀는 내일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단독으로 알현이 예정되어 있기 까지 하다.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만, 엘코어… 여황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든 간에 우리로서 그런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것까지는 허용되어 있지 않네. 네크-네르프로넨은 그저 여황 폐하의 검일 따름이네." 여황 폐하의 검일 따름이라…. 그야 말로 최고의 신뢰로군. 기사라는 인간들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보아왔던게 있어서 어떤 생각을 기반으로 움직이는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것을 더욱 중요시 하는 자들…. 그들은 숭고한 믿음에 기대어 검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겠지만… 그러한 자들이 내가 생각하는 '기사'라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흐리게 만들 수 는 없다. 내 기억속에 인간의 기사는, 과거에 내게 아주 큰 감흥을 주었던 '베델'이라는 인간으로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저 인간의 신뢰와 믿음의 방향이 인간이 아닌 드래곤인 은룡을 향해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 눈에 안개를 끼게 할 뿐인 신념이다. 엘코어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나는 가끔 그런 것들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네." "엘코어…!" 엘코어는 분노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동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괴로움일까… 그는 입술을 질끈 씹은채 바닥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서 레쥬에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명한 시선이었다. "말해주게. 어린 소녀에 불과한 당신이 왜 홀로 여황폐하를 적대하는 것인지." "…." 레쥬에브는 잠시 침묵한채 서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허공에 몸을 고정시킨채 침묵하고 있는 그녀를 주목했다. 나는 전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인데도 괜찮겠느냐고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상관 없다고 대답했었지. 누구의 이해도 인정도 바라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동시에 누구의 이해도 인정도 바라지 않았었다. … 어려운걸까.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군." "단신으로 여황폐하를 적대하고 있는 미친짓을 하고 있는 아가씨 만큼은 아니겠지." 그의 거친 응수에 레쥬에브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곧 잦아들었고, 레쥬에브는 그에게 대답했다. "우리들을 통치하고 있는 여제는, 인간이 아니니까." "…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엘코어는 다소 날카로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옆에서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트릴것 같았던 그의 동료는 겨우 그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기색으로 엘코어와 레쥬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쥬에브가 불러들인 성화는 단 한순간도 그 불길이 누그러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하, 당신은 그게 정말 단순한 이유라고 생각해?" "그- " 엘코어가 뭐라고 답할려는 찰나에, 그의 동료가 레쥬에브에게로 검을 향한채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외침이 허공을 찢었고, 레쥬에브의 성화가 더욱 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잠깐의 대화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누군가의 성난 외침을, 레쥬에브는 담담히 흘려 넘기며 성난 불길로 답했다. 또다시 기사들은 몇명씩 짝을 지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아까의 재판이다. 레쥬에브의 마법은 인간들 중에선 최상위에 해당하는 신비다. 그녀의 성화를 상대하는 것이 그저 '검' 에 불과해선, 그녀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레쥬에브가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들을 패퇴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상하게도 저들은 강력한 신비를 상대하는데 굉장히 익숙해 보이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저 정도의 신비 앞에선 무릎을 굽힐수 밖에 없겠지. # 전투는 거의 밤새 계속 되었었다. … 말이 과거형인 이유는 결국 전투에서 어느쪽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떠오르고, 수도로 부터 전투의 은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들은 물러났다. 결국, 레쥬에브가 여제와 단독으로 알현을 하기로 되어있다는 날이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들은 레쥬에브에게 오늘이 찾아오는걸 막기 위해서 그런 전투를 벌였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레쥬에브는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었고, 결국 오늘의 태양을 볼 수 있었다. … 그런점에서 보면 그 전투는 레쥬에브의 승리, 라고 할 수 있을까. "…." 무엇하나 결론이 나질 않은 상황이다. 승리라고 해봐야 별로 의미도 없는 일이겠지. 나는 밤새 이루어졌던 흑색의 좌와 네크-네르프로넨의 전투를 지켜보고서 바로 황궁의 입구로 찾아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다. 잠을 못 자서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또렷하게 깨어있다. 아무리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고 하나, 정신은 육체에 속박되지는 않는다. 짹, 짹- 이른 아침, 청명한 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소리가 듣기 좋다. "으응…."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뒤로 젖혔다. 푸드득, 하고 날개를 흔들며 새가 공중으로 날아올르는 것이 보인다. 팔랑팔랑 거리며 새가 남기고 간 깃털이 허공에서 느리게 떨어져 내렸다. 하늘로 손을 뻗어 깃털을 잡아보려 했으나, 때마침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손에 막 들어오려던 깃털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아…." 아쉬움을 느끼며,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런데 아쉬움… 이라니. 새의 깃털을 손에 넣지 못한 것에 대한…? 그런 생각을 하며 흩날리는 백발을 쓸어올리다 문득 예전에 잘라버린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이 났다. 등을 덮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 었는데…. 머리카락이 가지고 있던 묵직함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로선 종종 자른 머리카락에 대한 상실감이 들때가 있다. 그렇지… 이번에도 꽤 오랫동안 인간의 몸을 한 채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래도 그 동안 머리가 조금씩 자라 어느덧 어깨를 가볍게 덮을 정도가 되었다. 다시한번 그 때처럼 긴 머리카락을 갖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 하겠지. "야 혼자서 너무 멀리까지 뛰어가지마!" 멀리서 인간의 어린아이 여러명이 무리를 지어 뛰어다니는 것이 보인다. 무엇을 하며 노는 건지는 전혀 파악이 되질 않지만 웃고 있는 얼굴에 그늘은 없었고, 모두 한 없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얘들아 조심해!" 그들의 뒤에서 한 소녀가 손을 입에 모으고 그렇게 외쳤다. 어른이 없는 그 무리에서, 그녀가 아이들의 보호자쯤 되는듯 싶었다. 그 때문일까…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녀 역시 어린아이들과 별로 다를게 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누나 빨리와!" "응, 알았어." 곧 그 무리가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아이들을 봐주고 있던 소녀… 레쥬에브와 그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진 않는것 같은데. 동갑, 혹은 오히려 그녀쪽이 레쥬에브보다 연상이겠지. … 그런 생각을 하니, 레쥬에브 역시 실은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별로 의미는 없는 이야기지만…. 지워지는 책임이 꼭 살아온 세월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꽤 재미있는 이야기다. 만약 책임이 세월에 비례한다면, 나는 얼마나 거대한 책임을 지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것이 무엇에 관한 책임이든 간에 말이다. 나른한 기분으로 시간을 흘리고 있는데, 주변 모두의 시선을 끌 정도로 크고 화려한 마차가 황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큰 마차에서 나온건 작고 어린 흑발의 소녀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외모는 대단히 아름다웠고, 의복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들은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흑색의 좌. 내가 기다리고 있던 인간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작은 뒷모습… 레쥬에브는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녀와 대화를 하며 고개를 숙이던 경비병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경계어린 눈길을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계속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황궁의 경비병이 이쪽을 향해 주목할 때가 되어서야, 레쥬에브는 그들의 경계어린 기색을 통해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빠르게 몸을 돌렸고, 덕분에 결 좋은 흑발이 공중에 붕 떴다가 차분하게 내려 앉았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놀람과 의혹이 깃들고, 이내 천천히 사라져 가는 것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리블란셰?" 싸늘한 목소리로 나마 그녀가 나에게 아는체를 하는걸 보고나서, 경비병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을 지웠다. 나는 잠깐 동안 경비병에게 향했던 주의를 마저 차단했다. …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자색 시선이 차갑다. 거기다 리블란셰, 라니….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군. 그녀를 너머 너무나도 거대해 가깝지만 멀게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 내에 위치한 거대한 첨탑 덕분에, 이것들을 모두 시야에 담으려면 주변의 하늘 역시도 시야에 포함시켜야 한다. 구름 한점 없이 맑아서 일까… 평소보다 하늘이 훨씬 높아 보인다. 불어오는 바람도 다소 쌀쌀해져 있어서인지 마치, 겨울 하늘 같다. 정말로 겨울이 오려면 좀더 시간이 지나야 하겠지만. 아직 가을도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까지야." 그 어느때보다도 냉엄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레쥬에브는 무언가를 예리한 칼날로 자르듯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싸늘한 태도에, 오히려 뒤에 서있는 경비병들이 찔끔한 기색이었다. 그것은 비단 그녀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마력이 넘실거리며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따로 할 말이 없는, 아주 깔끔하고 명백한 적의였다. "분명히 다시 보는 일이 없길 바란다고 말했을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 음, 그래도 이런식으로 나를 극도로 거부하다니,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경험이라 어떻게 진정시켜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건 내 앎의 원천인 '근원'의 지식에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한 적이 없는걸." 잠깐 동안 생각을 하다가, 내 '동의'라는 것으로 그녀에게 호소해 보았다. "난 지금 장난을 하자는게 아냐…!" 사나운 기색으로 그녀는 내 어깨를 살짝 밀쳐내었다. 어깨를 밀쳐내는 힘은 살짝이었지만 물리력을 가진 명백한 신체적 거부는, 시도 가능한 어떠한 협상의 여지조차 밀어내 버리는것 같았다. … 상당히 유감스럽군. "돌아가, 리블란셰. 이건 내 일이야. 너는 네 일을 하고. 너에겐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거 아냐?"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여전히 싸늘하긴 하지만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레쥬에브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해야할 일이라니…. 그것은 혹, 출세 같은 것을 이르는 것인가? 내게 그런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레쥬에브가 보기에 그것은 내게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레쥬에브가 나의 조력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일까. 여제에게 도전하는건 자살이나 다름없으니, 목숨을 보전하고 출세하라고? "별로 그러고 싶진 않은걸…." 누그러들었던 그녀의 기색이 다시금 이빨을 드러냈다. 강력한 마력에 의해 대기가 떨리며 긴 소매 사이로 희미한 붉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빛은… 흑색의 좌를 상징하는 물건에서 발현되는 것이겠지. "바보같은 소리 하지말아. 이건 명백한 경고야…! 네 동의고 뭐고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구." "…." "네가 의외로 강력한 마력을 사역하는건 알고 있지만… 모든 마력을 힘으로 환원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이길순 없을거야. 여제를 알현하기로 한 시점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어. 그 사이 너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리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것 같아." … 어려운 일이군. 하지만 반대로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보면 그리 어렵지 만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쩔수 없지. "알았어. 네가 정 그렇다면 별 다른 도리가 없지." "… 그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음울한 얼굴로, 레쥬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금 당장 여황폐하께- " 내 입으로 은룡을 여황폐하 라고 지칭하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다. "알현 신청을 해야겠는걸." 내 말을 들은 레쥬에브는 아예 맥이 탁 풀린 얼굴이었다. 그녀는 웃는듯 마는듯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계속 바보같은 소리만 하는구나…." … 레쥬에브의 생각은 분명 틀리지 않다. 평범한 평민일 뿐인 소년이 당장 제국의 여제에게 알현을 신청하겠다니, 농담으로도 들리지 않겠지.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내가 평범한 평민 소년일 뿐인 때의 이야기다. 꼴이 이상하긴 하지만 이대로 은룡을 불러 보기로 할까. 이런식으로 하면 나는 레쥬에브와는 따로 여제에게 알현을 신청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나의 조력을 거절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것들은 모두 무의미 하게 된다. 은룡은 분명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레쥬에브는 어느새 성문 앞까지 길게 이어진 가교를 따라 걷고 있었다. 힘을 약간 개방하고, 은룡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려는 찰나 삐걱 거리며, 마차 따위가 드나드는 성문 옆에 위치하고 있는 자그마한 쪽문이 천천히 열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레쥬에브가 놀란 얼굴을 한 채 그대로 가교 한 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어 서 있었다. 살짝 열린 쪽문 사이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발을 한 소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즉시 들고 있던 창을 내리고 무릎을 꿇었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듯 멍하니 서있던 레쥬에브도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모습을 드러낸 은발의 소녀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 본인이었다.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곳엔 시선조차 주지도 않고 바로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 들어오렴, 칼리체." ………. 인간이 지금껏 쌓아온 모든 보편적 가치와, 약속과, 관념, 관습, 그리고 모든 것이, 깨져버린 유리 조각같이 되어버려 더러운 흙 바닥에 뒹굴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인간 소년인 칼리체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단 한 번도 만난적이 없다. 만난적이 있어선 안 된다. 나는 황궁 내에 길게 이어진 길을 걸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길 옆엔 자그마한 정원과 연못이 있었다. 연못 옆에는 화려한 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데, 꽃에서 꿀을 얻으려는 나비들과 벌들이 잉잉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더불어 그런 광경이 무색하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웃고 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얼굴까지도…. 언제나 그랬지만, 더욱 더 은룡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 보다도 나와 은룡의 뒤에서 발걸음 소리를 죽인채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흑색의 좌에게 신경이 훨씬 더 쓰였다. 만난적이 있어선 안되는 나와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만난적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버렸을 때…, 나를 돌아보던 그녀의 표정을 기억한다. "…."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에 의해 반사된 밝은 빛이 잠시 차단 되었다가 다시 눈으로 새어 들어왔다. 엉키고 엉켜 더이상 풀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실타래 같다. 그것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날카로운 칼로 잘라내는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당당하게 성문으로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어. 그 동안 몰랐는데… 보기보다 꽤 남성적인 면도 있는데?" 레케트리셴 문 여제… 은룡은 그렇게 말하고서 양 팔로 내 오른팔을 감싸안으며 몸을 내게 밀착시켰다. 보기좋은 곡선을 그리는 가슴이 부드럽게 팔에 와닿았다. … 인간이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자신의 매력을 피력하고 싶을 때, 이런 식의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명백한 유혹이다. 그리고… 조롱이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것은 저열하다. 하지만 나도 그녀도 실은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내게 이것은 저열한 것이 아닌, 그저 단순한 조롱으로만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흑색의 좌 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흑색의 좌는… 인간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서, 현재 걷고 있는 길의 끝 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동안 들리지 않던 레쥬에브의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또각- 거리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다지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군. 레쥬에브는 과거에 내게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몰아낼 의사를 내비쳤고, 내 조력을 구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나는 가까이서 그녀에게 협력 했었지. 하지만 실은 나와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아는 사이였다…, 라는게 되어버리는군. 그리고 그런 인과를 바탕으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추측해 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여전히 은룡에게 안겨 있는 팔을 바라보았다. … 그냥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라 여제의 어린 정부(情夫)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부끄러움 타는 거니? 귀여워라…."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것으로… 틀림없이 그렇게 받아지리라 생각 되는군. 계속해서 이런식의 조롱을 받아들이고만 있는 것도 상당히 곤혹스런 일이다. 안겨 있는 팔에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 모은 뒤 그녀의 몸 안으로 마력을 옮겼다. 마력을 타인의 몸으로 옮기고 그것을 힘으로 환원하는 과정은 고도의 마력 가공 공정을 요구하지만 내게는 인간의 몸으로 숨을 쉬는 것보다도 간단한 일이다. 외부에서 유입된 마력에 은룡이 반응하기 전에, 나는 그 마력을 모두 터트려 버렸다. 내 마력은 그녀의 심장을 부수고 위를 녹이며 장을 끊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생체 기관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대단한 고통이다. 인간의 몸으로 화(化)한 드래곤이라고 해도, 통각이 없는건 아니니까. 이 몸으로 죽음을 한번 겪어본 내가 잘 알고있다. 은룡은 팔을 잡혀 있는 나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잠깐 동안 멈칫거렸다. 온 몸의 근육이 멈추고, 잿빛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었다.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몸은 완전히 죽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은룡은 거짓말처럼 곧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깐의 멈칫거림 동안, 내게 파괴당한 모든 생체 기관들과 생명을 수복된 것이겠지. 파괴된 심장이 재생되고, 온 몸의 장기에 다시 피를 공급한다. 방금전까지 핏물에 불과했던 장기들은 다시 제 형체를 갖추고 새 피를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한다. 여제의 붉은 혀가, 미처 억누르지 못하고 새어나와 입술에 묻어있는 핏방울을 핥았다. "… 별로 재미없네." 곧 은룡은 내 팔을 놓아주었고, 후각을 자극하던 향기가 멀어졌다. 길을 걷다, 전에 보았던 적이 있는 용의 석상을 지나쳤다. 황궁의 한 복판에 위치한 드래곤의 모습을 한 석상…. 나는 석상을 스쳐지나갈 때까지 계속 그것에 시선을 던졌다. 이쯤 되면 레쥬에브도 은룡의 정체를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또각, 또각- 텅빈, 그래서 더 넓어 보이는 황궁의 복도에 세 명의 발걸음 소리를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반사된 새하얀 태양빛에 차가운 발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오니 아찔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환상을 걷는것처럼 모든걸 잊은채 걷기만 하다보니, 어느새 알현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온통 흰 대리석 벽과는 다르게 따뜻한 색을 가진 목재 문이 보이니, 아련했던 환상에서 돌아오는 기분이다. 아니, 이 문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문이다. 주변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은룡이 직접 앞으로 나서 문고리를 잡고 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 아까 직접 성문으로 나올때도 그랬지만 현재 은룡의 행동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여제라는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는것 같다. "…." 알현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문에서 부터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융단의 끝에는 화려하고 커다란 의자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작은 의자가 늘어서 있었다. 방문자를 위한 의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부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아." 화려한 의자 뒤에서 연한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인간 여성이 걸어 나와 의자의 옆에 섰다. 허리에 매고 있는 익숙한 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하지만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아련한 시선. … 백색의 좌. 전에 백색의 좌의 집에서 그녀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의 음식은 다른 인간이 만든 것 과는 다르게 맛있다고 느꼈었지. 그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느릿하게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아- 기어이, 이런 상황이 오고야 말았군.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어느새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제의 위상에 걸맞는 오만한 시선도, 기색도 아무것도 없이 선명한 시선으로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레쥬에브 쪽이겠지. 본래 알현을 신청했던 레쥬에브에게 이제서야 은룡의 관심이 도달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랬던것 처럼, 레쥬에브가 아무말 없이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보이는건 그녀의 뒷 모습….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고, 나는 뒤로 물러섰다. "메르시오 공작가의 장녀,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입니다." 보통 인간의 권력자에게 향하는 굴종과도 같은 인사를 생각해 본다면, 그저 자기소개처럼 들리기도 하는 간단한 인사였다. 상대가 강대한 제국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는 여제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굉장한 무례겠지. 하지만 이곳에 그런 무례를 탓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 난 인간의 황제를 향해 인사하는 법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레쥬에브의 것엔 듣기좋게 치장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단숨에 칼로 쳐 내버려 진 것처럼 노골적으로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레쥬에브는 살짝 허리를 숙이고 다시 몸을 세웠다. 그녀는 똑바로 은룡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이것은 정말로 자기소개일 뿐이로군. 은룡에게 자신이 누군지 명확하게 인식시키는 과정일 뿐인 것이다. 그 광경이, 지금껏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은룡의 태도와 대비되어 선명하게 보인다. "아, 메르시오 공작의 딸이로군…. 어린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과 명석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데, 오늘 보니 그 말에 과장은 없는것 같구나." … 레쥬에브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제 쪽에서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예의를 차렸다. 그것이 마치, 거대한 벽 같다. "감사합니다." 대답은 담백하다. 레쥬에브는 이따금씩 리체르아에게 시선을 주곤 했었는데, 그녀가 상당히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레쥬에브는 리체르아가 백색의 좌라는 사실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내게 알현을 요구 하였느냐?" "그것은- " "작위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저 공작의 딸일 뿐인 네게는 본래 알현을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것을 알고 있느냐?" 단조로운 어조의 목소리가 레쥬에브의 말을 자르며 쏘아졌다. 나즈막한 목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은 알현실의 공간을 희미하게 울렸다. 레케트리셴 문 여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온화한 미소는 어느새 식어 자취를 감춘 채였다. 나는 등 뒤의 벽에 기댄채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응- 그럼 내게 할 이야기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라면, 네 가문에 벌어질 일 역시도 예상하고 있겠구나." 여전히 단조로운 어조였지만, 말 안에 든 뜻은 명백한 위협이었다.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한가한 얼굴로 가지런히 기른 손톱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하지만 이 위협은 목적이 없다. 그저 담담한 어조로 레쥬에브에게 그녀가 짊어져야할 책임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레쥬에브 본인이 아닌 그녀의 가문…. 나는 메르시오 가문에 대해 아는것이 거의 없다. 귀족 중에서는 최고의 위(位)를 가진 공작 가문이라는 것과, 공작인 그녀의 아버지가 병석에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이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인간들에게 가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다. 가족… 이라는 것. 지금껏 인간을 보아오며,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하려는 자들도 많이 보아왔다. 숭고하고 고귀한 의지를 가진 자들도 그랬으며, 심지어 비열한 인간도 그것 앞에선 자신의 목숨이 하찮아졌다. … 과거에 그류벨과 에네리아라는 아버지와 딸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딸의 소생을 위해 드래곤인 내게 맞섰고, 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생이 바뀌었었지. 레쥬에브도 아마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흑색의 좌 라고는 하나, 그녀 역시 한 명의 인간.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사촌이며, 또 누군가의 형제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내가 알지못한, 피로 이루어진 또다른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을 것이다. 그 피로 이루어진 관계 송두리째를, 그녀는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모든것을 감수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그렇게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질문해본다. "물론입니다." 대답은 놀랍도록 선명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말아쥔 손은 가늘게 떨리고, 대지를 딛고 서있는 다리는 가냘펐지만 그녀는 은룡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녀의 등 뒤에 있는터라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 투명한 눈을 하고서 은룡을 바라보고 있겠지. "그렇다면 좋다." 레쥬에브의 각오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은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말해보거라.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레쥬에브가 말했다. "… 여황폐하께서는 인간이십니까?" 모든 인간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신성(神聖)으로까지 취급되는 존재,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에 부정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듯, 레쥬에브는 거침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여제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인간을 이끄는 자는, 마찬가지로 인간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당신은…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됩니다!" 나는 레쥬에브의 매끄러운 흑발이 그녀의 격한 움직임과 함께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을 본다. 그녀의 말을 들은 은룡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과 옆에 서있는 백색의 좌의 눈이 미약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나는 본다. 무어라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채, 나는 그저 여기에 서서… 바라만 본다. "인간은 나로 인해 크게 발전하고, 지금껏 역사에 없던 위대한 성사(成事)를 구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너는, 내 지배가 잘못된 것이라… 그렇게 말하는 건가?" "나는 당신이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마법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무엇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레쥬에브는 은룡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것을 말한다.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과 함께 나를 습격한 '그림자' 라는 존재…. 그것은 당신의 그 마법에 당한 인간들이 죽음을 겪고 그렇게 거듭나는 것이겠지요?" 나 조차도 기원을 알 수 없던 그 기이한 생명체의 정체가… 실은 은룡의 마법에 당한 인간들이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은룡은 인간들에게 그 마법을 보여주기 전에, 이미 그 마법을 써왔다는 이야기로군. … 레쥬에브의 말을 들은 은룡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스치고 지나간다. 드래곤인 나도 간파하지 못한 것을, 레쥬에브는 간파해 낸 것이다. 나는 레쥬에브의 능력이 내가 가진 능력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내 생각에 그칠뿐인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 중에 드래곤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녀가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기에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던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비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기에 볼 수 있는 것. 나와 같은 드래곤인 은룡의 마법을 순수한 인간이기에 간파하고, 인간이기에 그것을 전면에 나서 비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서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내가 느끼는 것은, 비열한 만족감이다. "그렇다. '그림자' 들은 본래는 인간이었지.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너희들의 법으로, 너희들의 도덕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을 모두 무한한 사회봉사의 자원으로 환원한다. 그들의 철저한 희생으로 너희들은 너희들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심지어 전쟁에서도 해방 될 수 있다. 그들로 인해 다수는 행복하며, 그 행복감은 소수의 불행 정도는 가볍게 덮어버릴 수 있지." 은룡은 덧붙였다. "물론 크게 보면 이 일 자체가 너희들의 '도덕'에 다소 어긋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전에도 말했다시피, 궁극적으로 이것은 많은 인간들을 행복하는 일이다. 그래, 필요악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군." "…." "인간에게 주어진 거대한 신비, 흑색의 좌여. 어차피 많은 인간은 번민하고 갈등하며 서로 싸우고 헐뜯고 추하게 몸부림치다 죽어간다. 그럼에도 너는 이것이 마냥 잘못된 일이라 매도하고, 비난 할 수 있겠는가?" 또다시 레쥬에브에게로 질문이 던져졌다. 잠깐 동안, 자그마한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아니, 실제로 이곳에 있는 누구도 숨은 쉬고 있지 않다. "나는- " 고요하게 가라앉은 대기가 흔들렸다. 나즈막한 목소리지만, 주변이 너무나도 적막했기에 상대적으로 그것이 폭풍을 몰고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순수하게 증오할 수 있었습니다." 은룡에게 돌아간것은 반론이 아닌 증오였다. 순수한 증오… 드래곤인 은룡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 그것은 은룡의 말과는 전혀 다른 것에 기반을 두고있다. 그렇기에 레쥬에브는 은룡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기에 증오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당신에게… 인간은! 그저 조롱의 '수단'일 뿐이잖아!" 정말로 폭풍이 몰아쳤다. 레쥬에브의 긴소매 속에서 붉은 빛이 터져나왔다. 강대한 마력의 해방에 의해 사방으로 바람이 몰아쳤고, 그로 인해 입구가 부서지고 내부의 기물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벽에 부딪쳐 깨지고, 부서지고, 터져버렸다. 그 혼돈의 와중에서 레쥬에브는 강대한 마력의 창을 완성했다. 그것은 지금껏 인간에게서 본 적이 없는, 가장 강대한 신비의 결집체였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인과 관계를 무시한 그 창은 어디에서든 존재하며, 또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준 신(神)격에 이른 저 위대한 마법은,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미래에서도 존재하며 은룡의 심장을 꿰뚫을 때 까지 모든 공간과 시간에서 쏘아져 나갈 것이다. 좁은 공간이, 강력한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붕괴하고 있다. 천장에선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이따금씩 커다란 돌덩어리가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인간은, 당신의 도구가 아니야."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와 함께, 레쥬에브의 손에서 창이 사라졌다. 그 창은 먼 과게에서 부터 은룡의 심장에 닿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도약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곧,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은룡의 것이 아니었다. …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배신 당해 버렸다. 보이지 않아 막힐 수 없는 레쥬에브의 창은, 찬란한 빛을 뿌리는 위대한 검에 의해 막혀 있었다. 창을 막은 검은 허공에서 경쾌하게 휘둘러졌고, 여전히 은룡의 심장에 닿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도약하던 창은 모든 가능성을 배제당한채, 현재에 남아 스러져갔다. … 레쥬에브의 창을 막은 검의 이름은 광휘. 광휘의 주인인 백색의 좌 리체르아는 은룡의 앞을 막아선 채, 무감각한 눈빛으로 흑색의 좌인 레쥬에브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그걸 그렇게 간단하게 막아내었어…?" 당황함이 가득한 레쥬에브의 말에서 느껴지는건 심한 배신감이었다. 그녀가 발현시킨 마법은 단순한 신비를 아득히 뛰어넘어 거의 신의 힘에 이를만한 거대한 이적(異蹟)이었으니 그녀가 배신감을 느끼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애석한 것은 백색의 좌가 들고 있는 검 '광휘'가 레쥬에브의 마법보다 더 상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비가 그보다 더한 신비에 먹히듯, 이적역시 그보다 더 강한 이적 앞에선 힘을 잃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시간선과 공간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이라니… 역사에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위대한 마법사도 방금전과 같은 마법을 발현시킬 능력은 없었겠지요." 거의 태양과도 같은 환한 빛을 뿌리던 광휘에서 그 빛이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레쥬에브의 창을 막기 위해 전개되었던 검의 힘이 다시금 그 안으로 갈무리 되고 있는 까닭이었다. 빛이 완전히 멎자 광휘는 화려하지만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단단하게 갈무리된 힘으로 인해, 그 검은 빛을 내뿜고 있을 때 보다도 더욱 예리하고 강해 보였다. 그것은 광휘를 바로 눈 앞에 두고 있는 레쥬에브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둠을 쫓아내는 위대한 빛…." 레쥬에브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빛이 멎은 광휘의 모습을 보고나서, 그녀도 리체르아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겠지. 그녀와 같이 인간의 신비를 짊어지고 있는 두개의 좌 중 하나. "설마, 당신이… 백색의 좌?" 리체르아는 여전히 은룡의 앞을 막아선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검은 어느새 레쥬에브를 향해 겨누어진 채였다. 리체르아의 기세를 보고 레쥬에브도 다시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녀의 소매속에서 마치 불길이 타오르는듯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어째서…! 어째서 나와 같은, 좌의 인간인 당신이 인간이 아닌 것의 편에 서있는거지?" 레쥬에브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고, 그 즉시 리체르아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주위를 떠돌고 있는 강력한 마력이 형체를 가지고 백색의 좌에게로 쏟아질것 같았다. 백색의 좌, 리체르아는 레쥬에브의 적개심을 무감각한 얼굴로 받아 넘기며 답했다. "내겐 더이상 인간의 '좌'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 역시 과거엔 당신처럼 강한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지만… 그것은 기나긴 세월의 풍파에 모두 부서지고 없어져 버려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죠." "당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흑색의 좌… 이름이 레쥬에브, 라고 했었죠." 백색의 좌는 쓰게 웃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그 힘엔 아무런 책임도 부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 무슨 말이지?" 백색의 좌라는 당혹스런 변수 때문에 일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당히 초조할법 한데도 불구하고, 차가운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레쥬에브에게선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싸늘할 정도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녀는 백색의 좌와 은룡을 동시에 경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은룡은 여전히 화려한 의자에 앉은채 턱을 괸채 흥미롭다는듯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흑색의 좌로서는 다행이게도, 은룡은 개입할 의지가 없어보였다. "그건- " 마치 평소의 대화처럼, 단조로운 어조로 리체르아가 말을 이어나갔다. "레쥬에브, 당신이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걸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흑색의 좌와 백색의 좌…, 그것은 단지 인간 전체가 가져야할 신비가 단 두명의 인간에게 편중된 것일 뿐이죠." 딱히 신경쓰고 있는것 같지 않은데도 리체르아의 검, 광휘의 끝은 레쥬에브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 까지 모두 놓치지 않고 쫓고 있었다. … 인간의 수명을 이미 아득히 뛰어 넘어버린 그녀다. 아무리 레쥬에브의 마력 사역의 수준, 마법이 이적에 달했다 하더라도 거의 팔백년 동안이나 단련된 리체르아의 검술을 경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쎄, 팔백년이란 시간이라면 어떨까…. 오랫동안 존재해온 것엔 그 시간을 증명하는 신비가 깃든다. 그것은 비단 사물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비는 리체르아의 검술 같은, 보이지 않는 것에도 깃들 수 있는 힘이다. 전승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팔백년 동안이나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라면 틀림없이 그녀의 검술도 신비에 가까이 이르렀을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서있나요?" "…." 리체르아의 물음에 레쥬에브는 침묵한다. "방금 말한것처럼, 인간을 위한다는 것 때문이겠죠. 무엇이 당신에게 그런 이유를 제공했나요? … 당신이 가진 힘 아닌가요? '흑색의 좌' 라는 자리가 당신 스스로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설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으로 하여금 이 자리에 서게 만들지 않았나요?" 레쥬에브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의 침묵을 미약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백색의 좌의 검 끝이 살짝 내려갔다. "… 그만두세요, 흑색의 좌. 당신이 느끼는 모든 책임은 허상입니다. 애초부터 힘에 책임이라는 것은 없으며, 힘은 그저 힘일 따름이죠." 힘은 그저 힘일 따름이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한숨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허상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백색의 좌의 말대로 힘은 그저 힘일 따름이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리체르아 역시 그녀가 잊어버린 팔백년 전, 레쥬에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었다. 희미하게 나마라도 그것을 기억하지는 못하는 걸까. "아까, 당신은 '모든것'을 각오했다고 했었죠. … 그런 각오는 하지 마세요. 현재 당신을 둘러싼 모든것을 좀 더 소중히 여기세요." 마지막 말이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인듯, 길고 깊은 울림을 품고 있었다. … 백색의 좌는 머리속에서 수 많은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퍼져버려 잊혀져간 기억을, 레쥬에브를 보며 힘겹게 회상하고 있는게 아닐까. 시간도, 공간도, 이유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 리체르아와 레쥬에브는 서로 닮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레쥬에브는 소리내어 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그만두라는 건가요? 이봐요,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난 당신의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킨 거라구요." 레쥬에브가 차갑게 말 했다. 나는 여전히 벽에 기댄채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백색의 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이 좋은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채 우울한 눈빛으로 바닥이 아닌 먼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방금전의 그 창보다 레쥬에브의 말이 아프다. 견뎌내기 더 힘들다. 반란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듯, 백색의 좌도 과거의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기억조차도 나지 않겠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로 구성된 현재의 자신…. 백색의 좌는 후회하는가…? 그러고보니, 이것을 백색의 좌의 일로만 생각하는 나 자신도 우습다. 나 역시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기억을 리셋한 나 자신과도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은가. "돌이킬 수 있다.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나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상황을 관전하고만 있던 은룡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마력을 거두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간다면, 오늘 이 일은 없던 일로 해주겠다. 이것은 레케트리셴 문 여제라는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비웃음이 가득한 말이었지만, 마지막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벽에서 등을 떼고 벽을 따라 은룡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방금전의 마법으로 천장에서 떨어져내린 돌이 발에채여 부서지고, 뿌연 먼지를 날렸다. 옆으로 조금 멀어지니, 만족스런 표정의 은룡과 당혹감이 가득한 레쥬에브의 얼굴이 교차되는 것이 보였다. … 어째서, 라는 의문이 제일 먼저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겠지. 하지만 의문이야 어쨌든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은룡의 말은 진심이다. 백색의 좌라는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방해가 있었다. 방금전의 난리에도 불구하고 황궁의 병사들이 왜 들이닥치지 않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곳은 황궁 안이기 까지 하다. 여제가 가진 힘도, 레쥬에브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염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레쥬에브로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게 최선일 것이다. 현명하고, 당연한 일이다. 이 모든것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니, 정말 축복과도 같은 일이기까지 하다. …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은룡의 인간을 향한 조롱도, 완성되겠지. "당신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게 있는것 같아." 붉은 빛이 쏟아지고 있는 레쥬에브의 손이 앞을 향했다. 리체르아와 은룡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자색 눈동자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당신의 말에 부정하지 않아요. 당신의 말대로, 힘은 그저 힘일 뿐이지. 힘 자체는 의지가 없고, 그러므로 그것은 눈이 먼 축복과도 같은 거에요." 내려갔던 리체르아의 검이 다시 앞으로 세워지며 레쥬에브를 겨누었다. 은룡의 제안은 제안 받아진 이에게 일고의 고민의 여지도 남겨주지 못한채 휴지조각 처럼 바닥에 버려졌다. "당신의 말처럼 힘이 내게 책임을 부여해 이 자리에 서있는게 아니에요. 그 반대에 가깝지. 힘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단정적인 말이다. 다른 모든것을 자르듯이 배제하는 그 말은, 그 만큼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레쥬에브는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오히려 당신에게 묻고 싶어요. 과거에 당신이 무슨 일을 했었는진 모르겠지만… 당신은 힘이 당신에게 책임을 부여해 그 자리에 서있었던 건가요?" 리체르아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멍한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피어났다. "… 기억나지 않는군요." "그래요? 그렇다면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거라고 생각해요. 죽고 싶지 않다면, 거기서 비키는게 좋을 거에요." 레쥬에브의 위협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리체르아가 말했다. "그럴 순 없지요. 모든것이 무의미인 저에게, 이것만이 유일한 유의미니까요." 그리고 둘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레 부딪쳤다. 그것은 순수한 힘과 힘의 겨룸이었다. 허공에 떠도는 거대한 신비가 그대로 힘으로 환원되어 서로에게 쏘아졌고, 덕분에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의 잔해들이 산산히 부서져 밖으로 튕겨나갔다. 이대로 가다간 곧 천장마저 무너질것 같다. "…." 백색의 좌와 흑색의 좌가 격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들의 격돌은 인간의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까닭이었다. 힘과 힘이 마찰하며, 대기엔 시뻘건 열의 흔적이 남겨졌고 그로 인해 발생된, 들리지 않는 고주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주변에까지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 힘과 힘의 대결에, 나는 물리력을 갖는 마력장을 온몸에 둘러 몸을 보호해야했다. "핫!" 날카로운 기합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레쥬에브는 신비를 형체를 가진 수 많은 무기로 환원시켜 리체르아에게로 그것을 쏘아냈다. 사방에서 방어하기 어려운 각도로 쇄도하는 수 많은 마력의 무기들을 리체르아는 강력한 이적인 광휘 단 한자루만 가지고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들어오는 세가지의 힘을, 단 한번의 휘두름으로 무력화 시킨다. 그리고 두번째로 검이 휘둘러 졌을땐, 뒤와 앞, 그리고 머리 위에서 한꺼번에 덮쳐지는 마력의 빛이 한번에 사그라 들었다. 그것은 3 차원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힘을, 2 차원인 선으로 끌어내리는 것과 진배 없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백색의 좌의 힘은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이라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녀가 막을 수 없는 방향이라는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리체르아가 검을 앞으로 세우고 몸을 움츠렸다. 움츠린 그녀의 몸이 펴졌을 땐, 레쥬에브가 전개한 수십개의 마력장을 단 한번의 찌르기로 모두 찢어발기고 그녀의 심장 앞에 도달해 있었다. 빛과 같은 속도로 내질러진 광휘가 레쥬에브의 가슴을 찔렀다. 아니, 찌른것 처럼 보였다. 레쥬에브는 단거리 공간 도약으로 이미 리체르아의 뒤로 가 있었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공간 도약을 할 때 생성되는 시공간(time-space)의 끈이었다. 금방 모습을 감출것 같았던 시공간의 끈은 리체르아의 검을 묶어 그녀의 움직임을 봉했다. "읏- !" 리체르아가 미약한 신음을 흘리자마자, 콰앙-! 하고 그 자리에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 내뿜어졌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레쥬에브의 '꺼지지 않는 성화' 라는 마법이었다. 불은 대기를 살라먹고 사방으로 재를 뿌렸다. 안에 있는 모든게 빠르게 연소되고 있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 따위는 저 안에서 단 십 초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레쥬에브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본래 검사였던 리체르아와는 달리, 그녀의 몸은 평범한 그 나이대의 소녀의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온전히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그 이름대로 꺼지지 않아야 할 성화는 빛을 잃으며 힘없이 꺼져 버렸다. 꺼져버린 성화 속엔 성화보다 더욱 강한 빛을 발하는 광휘가 있었다. 리체르아의 의복은 이리저리 찢어지고 그을려져 있어 그녀의 하얀 살결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머리카락 한 가닥 조차 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쳇…!" 불평할 틈은 없었다. 관전하고 있는 내가 눈을 감았다 뜨자, 리체르아는 이미 레쥬에브의 앞에 서있었다. 대기를 가르는 소리도 내지 않은채, 광휘가 휘둘러졌고 리체르아는 푸른 빛을 발하는 마력의 검을 발현시켜 그것을 막아 내었다. 하지만 레쥬에브의 검은, 채 이 초도 광휘를 막아내지 못한채 유리조각처럼 산산히 깨어져 버렸고, 그 틈을 타 레쥬에브는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레쥬에브가 물러서자마자 그녀가 있던 자리엔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고, 그것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투둑- 하고 튀어오른 수많은 돌조각이 내 발치까지 튕겨져 나와 뒹굴었다. 난 손바닥을 양 옆으로 흔들며 피어오른 먼지를 걷어내었다. … 곧 시야가 회복되었다. 둘은 약간 거리를 벌린채 대치하고 있었다. 레쥬에브와 리체르아의 모습은 상이했다. 레쥬에브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리체르아는 그을리고 찢어진 의복을 제외하면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 명백한 레쥬에브의 열세였다. 둘은 동일한 '좌'의 인간이다.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총량은 크게 차이가 없지만,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레쥬에브가 가지고 있는 신비의 결집체, 광휘가 검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상대와 부딪치고,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형태이다. 반면, 레쥬에브가 지니고 있는 흑색의 좌의 상징은 보석의 형태로, 단지 마력 사역의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줄 뿐인 것이다. 물론 그것 만으로도 레쥬에브의 것은 광휘에 전혀 손색이 없는 기적같은 물건이지만… 단순한 마력의 사역으로는 결코 광휘, 그 자체를 뛰어넘는 이적을 발휘할 수는 없다. 거기에 오랜 시간을 들여 갈고 닦여진 리체르아의 검술 역시 신비에 이른 것이니 레쥬에브가 그녀에 밀리는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닐테지. "포기하세요. 당신은 저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거에요." "닥… 쳐! 더, 러운, 배신자!" 숨을 헐떡이면서도, 레쥬에브는 서늘한 자색 시선으로 리체르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체르아는 건조한 눈으로 레쥬에브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 어린애로군요. 이상만으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흑색의 좌.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가, 과연 지금의 여황 폐하에 의한 통치보다 더한 성세를 구가 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 확실히, 그것은 회의적인 이야기로군.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인간이 아닌 자가 그저 조롱뿐인 의도로 인간을 통치해 설사 발전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 발전? 대륙의 통일? 위대한 시대의 도래? 어느것 하나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이룬것은 없어. 모두 언제고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남이 일방적으로 쥐어준 불명예스런 성취일 뿐이야. 그런것 따위는 모두 허상이야!" 그렇다. 그래서 나 역시도, 인간이 영웅없이 나아가기를 원한다. "…." "백색의 좌…! 인간은 아직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 리체르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을 하고서, 검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인간들이 이미 예전에 날아가 버린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 중 몇몇은 은룡의 곁으로 다가가 검을 들어올렸고, 대다수는 리체르아의 앞으로 나서 레쥬에브에게로 검을 겨누었다. … 황실 마법 기사단, 네크-네르프로넨이로군. 그들이 진입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성이 걸어들어왔다. 네크-네르프로넨을 이끌고 들어온 자는 은룡의 딸인 펠테넨시아였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 "황녀…!" 레쥬에브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백색의 좌 혼자만 해도 감히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인데, 신비를 상대하는데 익숙한 마법 기사단까지 들이 닥쳤다. 단언하건데, 이 상황에서 레쥬에브에게 승산은 없다. "흐음, 아무도 이 근처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말했었을 텐데…." 냉엄한 은룡의 목소리에도, 펠테넨시아는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긴급 상황에서 마법 기사단에 대한 제 지휘권을 발동하였습니다, 여황폐하. 이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추후, 이 건에 대한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펠테넨시아. 하지만 내 명령을 어긴 책임이란 것은 언제나 엄중한 것이며, 내 딸이라 해도 그것엔 가감이 없음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은룡은 관심없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은룡의 뒷모습을, 레쥬에브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멀찌기서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레쥬에브의 손을 바라보았다. 결의는 보답받지 못하고, 그녀와과 같은 인간인 이들에게 가는 길이 막혀있다. 이것은 모두 이들과 같은 인간을 위한 일일진데… 거대한 구조 안에서 반기를 든 한 명의 인간은, 가진 힘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이렇게나 나약하다. 펠테넨시아는 멀어져 가는 은룡의 뒷모습을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레쥬에브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황궁으로 진입할때부터 이미 수도에 있는 메르시오 저택은 제 명령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어요. 현재, 메르시오 가문의 식솔들은 모두 제 손아귀에 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메르시오 공작까지 생포할 수는 없더군요. 저택에 마법기사단이 들이닥쳤을 때, 이미 그는 죽어있는 상태였으니까." "…." 레쥬에브는 침묵한다. 그랬었던가…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였다니, 애초부터 그녀가 지켜야 했었던 것은 없었던 셈이로군. "투항하세요. 투항한다 해도 당신에게 주어지는건 사형 밖엔 없겠지만… 남아있는 당신의 가솔들은 살아 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나마 얻게 되겠지요." 펠테넨시아는 레쥬에브를 노려보다가 뒤쪽에 있는 나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나 역시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황녀 전하…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마법 기사단을 물리시고 저와 그녀 만으로 끝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리체르아가 펠테넨시아의 앞으로 나서며 그렇게 말했다. "일개 호위 기사일 뿐인 당신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거죠? 지금까지 여황폐하를 보호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지위를 깨닫는 편이 좋겠군요. 이 자는 반역자 입니다! 그런 주제넘치는 요청이라니…." 가시가 잔뜩 돋혀있는 펠테넨시아의 말에, 리체르아는 별다른 감흥 없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이미 그녀가 그렇게 반응할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반응 덕분에 펠테넨시아는 더욱 화가 난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침착함을 되찾고,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마법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되도록 죽이지 않고 제압하도록 하십시오. 감히 여황폐하께 반기를 든 반역자는 모든 제국 국민이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해야 마땅할테니…!"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다른 자들과 다르게 투구에 검은 술을 달고 있는 자가 펠테넨시아의 명령을 수령했다. 마법 기사단의 지휘관쯤 되는 인간인듯 하다. 지휘관은 각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기사들은 각기 짝을 이루어 산개해 레쥬에브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고 하나, 그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 레쥬에브로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로군. 검을 들고 레쥬에브에게 접근하는 기사들 중에는, 전에 마주친적이 있던 엘코어라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든 검은 다른 자들의 것보다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그의 검은 새 것이었다. 잠깐동안,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빛으로 내게 많은 것을 전하려 시도하는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레쥬에브에게서 등을 돌려 다른 자들에게 검을 겨누는 인간들이 몇몇 있었다. "무슨 짓이냐, 엘코어!" 투구에 검은 술을 달고 있는 지휘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엘코어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할 틈도 없이, 등을 돌린 인간들은 이미 그들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인간이 있었고, 상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도망치게, 소년!" 엘코어라는 이름의 기사는 나에게 그렇게 외치며 다른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와 검을 맞대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순식간에 레쥬에브에게로 다가갔다. 상황이 이런데도, 레쥬에브는 고개를 숙인채 움직일 의지가 없어보였다. "도망치자, 레쥬에브." "… 필요 없어. 이미 모든게 불가능해졌어. 그리고 어차피 너 역시도… 배신자잖아. 더러운, 여제의 정부(情夫) 같으니…!" 체념이 섞인, 깊은 절망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 레쥬에브를 잡아 끌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뒤에선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이 선 소리가 쉴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놔!" 가느다란 외침과 함께, 손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레쥬에브가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을 상당히 세게 잡고 있었는데, 그것을 억지로 뿌리친 모양이었다. "이 배신자! 여제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도 모른척 내게 접근한거였다니…!" … 정부(情夫)라는 곤란한 오해는 제쳐두고서라도, 여제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건 도무지 부정할 방법이 없군. "…." 레쥬에브의 커다란 눈망울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밝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물은 금방이라도 볼을 타고 흘러내릴것만 같았다. 여제를 만나고 나서부터 긴장감으로 억눌려 졌던 그녀의 감정이, 여제의 시야를 벗어나자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 언제나 그렇듯, 이런 식으로 내게 호소하는 인간의 감정을 위로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레쥬에브는 결국 눈물을 참아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봐…." 그녀의 말은 거의 애원에 가까운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거짓일지라도 아무렇게 꾸며낸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말과 동일하게 들린다. 나는 그런 그녀의 간절함을 외면했다. 거짓 변명으로 레쥬에브를 납득시킨다…? 어리석은 이야기다. 거기다 이 경우엔 그녀가 일부러 납득 당해주는 것이겠지. 그건 그저 모른척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이건…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꾸며진 변명 따위를 듣길 원할 정도로, 나의 배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는 걸까. "나와 레케트리셴 문 여제는 너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어." 사실을 말한다. "…." "하지만 그것이 나와 여제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라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는 아니야." 여전히 대답은 없다. "레쥬에브, 나는 여제의 편이 아닌 네 편이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한 없이 공허하다. 누구의 편 이라는 말을, 솔직히 나는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 말은 힘이 없으며, 그렇기에 공허하다. 나는 단어의 표면적인 뜻 만을 빌려, 그녀에게 호소하고 있을 따름이다. 잠깐동안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레쥬에브를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이번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뒤에선 여전히 날이 선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그녀의 손을 잡은채 달렸다. 이곳에 도달하는 길은 무척이나 복잡해, 마치 미로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옳은 길을 겪어본 이상,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기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길수 있었다. 쇳소리는 멀어지고 주변은 점차 조용해져 갔다. … 계속 달렸다. 옆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스쳐지나 가고, 자그마한 연못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용의 모습을 한 석상도 지나쳤다. 뒤에선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레쥬에브의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달리며, 뒤에 남겨진 자들을 생각한다. 엘코어 셰른, 이라는 이름이었지…. 내가 아는 그는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이고, 레쥬에브와 몇 번의 전투를 행했다. 나는 엘코어와 우연히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무기점에서 였었지…. 그는 거기서 검을 샀다. 그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이 멀쩡해 보였기에 나는 그에게 어째서 새로운 검을 사냐고 물었었다. 그는 지금껏 인생에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일을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검을 산다고 대답했다. 바로,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게… 오늘처럼 반기를 들기 위해. … 정확한 동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와 딱 한번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뿐이다. 부족한 정보는 필연적으로 많은 가능성을 짐작해 보게 하지. 그는 레쥬에브 처럼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와 동일한 생각을 한 것일까…, 아니면 레쥬에브와 전투를 겪다보니, 그녀의 생각에 감화된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참 얄궂은 이야기로군. … 그의 생각이야 어쨌든, 그와 그를 돕는 동료들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 하면서까지 레쥬에브를 구했다. 지금껏 섬기고 있던 군주에게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 생각을 멈추고,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었다. 생각해 보았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답이 필요한 문제도 아니겠지. 내가 걸음을 멈추자, 레쥬에브는 내 손을 놓고 힘 없이 벽에 기대었다. 그녀는 굉장히 지친듯, 눈빛은 흐렸고 가느다란 다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은룡을 노리고 발현시킨 신비… 그것은 아마 그녀가 사역할 수 있는 마력의 수준을 뛰어 넘은 마법이었을 것이다. 감히 인간의 몸으로 아무렇지 않게 발현시킬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다. 그에 합당한 반작용이 이제서야 그녀의 연약한 몸에 돌아오고 있는 것이겠지. … 그땐 당연했겠지만, 그녀는 정말로 뒤를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있는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지금껏 우리가 달려온 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평화에 젖어있는 한적한 길이다. 누군가 우리를 쫓고 있는 듯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황궁이 워낙 거대해서 대처 속도가 늦는걸까, 아니면 그저 은룡의 여제로서의 대응이 미적지근한것 뿐인 걸까. 아마,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룡은 백색의 좌인 리체르아와 흑색의 좌인 레쥬에브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보고서, 이제 만족한 모양일까…. "돌아, 가야, 해." 아직도 호흡을 고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레쥬에브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 아무도 없는 길 너머를, 볼 수 있는곳 까지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가면, 너는 죽어." 고요한 대기를 어지럽히던 그녀의 호흡이, 일순 멎는게 느껴졌다. 레쥬에브는 아마도 내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을테지. "그들을 남겨두고 나만 도망가라는 이야기야?" 그런 질문을 들은 후,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거칠게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들은 내 동료가 아니야! 불과 조금전 까지만 해도 그들은 내 적이었어.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은 나를 도왔고, 지금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 오히려…, 오히려 적이었기에- !" 뒤를 돌아보았다. 레쥬에브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며 매마른 바닥을 적셨다. 또다시 울고 있는 모양이다. … 울음이 정말 많은 인간이로군.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미약한 안도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강철처럼 단련된 굳건한 의지로 타협을 모르고 홀로 여제를 적대시해왔다. 누구의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그렇기에 또한 조력도 없었다. 모든것을 혼자서 생각하고 계획하며, 실행에 옮겨야 했다. 아직 미성숙한 인간의 자아가 그것을 모두 감당해 낼 수 있었을까…. 흑색의 좌 라는 힘만 제외한다면 그녀는 아직 어린 평범한 인간 소녀에 불과하다. 꼭 살아온 세월이 길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게 많다, 라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녀가 울고 있는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것 같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시한번 말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가는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야."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은 당연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뻔히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그런 모습은 가여우면서도… 사랑스럽지만. "칼리체… 너는, 이해할 수 없는거야?" … 방금의 말을 이르는 것인가. 다소 당황스럽군. 나를 향한 여러가지 감정적인 호소는 많았지만, 이해를 구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끌어 손을 내 가슴 위에 대게했다. … 레쥬에브의 손은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땀으로 젖어있었고, 다소 차가웠다.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내 심장 박동이 전해져간다. 두근, 두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동하는 심장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눈 앞에서 많은 생명이 스러져 가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인간을 보아도, 나를 적대하는 존재를 앞에두고도… 내 심장은 언제나 이렇게 평안하게 박동할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내 심장을 이보다 더 빨리 뛰게 할 수 없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녀의 작은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다소 소란스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소리의 주인공은 나와 레쥬에브를 잡기 위해 다가오는 인간들이 낸 것이라는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시 레쥬에브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그녀는 마치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내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왔다.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엉망진창이야…." … 그래, 정말 엉망진창이로군. # 레쥬에브와 함께 황궁 [피에셰트]를 나왔다. 황궁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은 온통 땀에 젖어 완연히 지친 기색을 보이는 레쥬에브를 이상하게 바라보긴 했지만 결국, 우리가 그곳을 나가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반란' 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감이 무색할 정도였다. … 뭐, 아무리 황궁에서의 대처가 미적지근 하다 해도 나와 레쥬에브를 쫓는 추격은 계속 되겠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곧 쓰러질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레쥬에브를 부축하며 잘 보이지 않는 골목길을 통해 이동했다. 그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 일단은… 이 도시를 벗어나야 하겠지. 레쥬에브는 완전히 힘이 빠져 버렸는지, 축 늘어져 완전히 내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겨우겨우 부축하며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하늘을 보고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며 도시 밖으로 나가는 문을 향해 걸었다. "꺄앗- !" 발 밑에 있는 자그마한 돌에 걸린 모양인지, 레쥬에브는 균형을 잃고 더러운 골목길 바닥에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나도 그녀와 같이 넘어질뻔 했다. 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운이 좋지 않군. 더러운 골목길엔 여러가지 물건들이 어지러이 버려져 있었는데, 그 중엔 산산조각난 유리조각도 있었다. 그 유리조각 중 하나가 그녀의 왼팔에 박혀 있었다. 다행이라면 유리조각이 그리 크지 않아 상처가 깊진 않았다. 하지만 상처가 깊지 않더라도 출혈이 있다는건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레쥬에브의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데다, 현재 그녀와 나는 도망치고 있는 입장이니까. "괜찮아?" 그녀는 힘 없이 대답했다. "으응, 괜찮아."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괜찮아?' 라는 질문은 쓸모가 없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전혀 괜찮지 않다. … 애초에 이런 질문 자체가 불필요했군.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에서 유리조각을 뽑아내었다. 퓩- 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 피가 튀며 내 손과 팔목을 적셨다. 피는 끈적하고, 또 따뜻했다. "…." 꽤 아팠을 텐데도 레쥬에브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아무래도 통각까지 마비된 모양이다. 인간에게 통각은 중요한 감각이다. 생을 구가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요소를 최대한 빨리 제거할 필요가 있고, 통각은 그런 위해 요소를 가장 빨리 감지하고 제거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그런 통각까지 마비되었다는건… 그녀의 몸 상태가 굉장히 심각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조용히 그녀의 상처에 내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재생 마법을 걸어두었다. 레쥬에브는 자신에게 상처가 생긴것도, 내가 그 상처에 마법을 건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튼… 출혈은 곧 멈출것이다. "계속 움직이자." "응." 아까 전보다 더 밀착해서 레쥬에브를 부축하며 이동했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그녀의 눈이 계속 감기려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것 같은 모습이다. … 지금 정신을 잃으면 굉장히 위험하다. 그녀의 자아가 잠깐이라도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들어가버리면, 현재 그녀를 엄습하고 있는 강력한 마력 반작용이 그녀를 이루고 있는 관념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버릴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신격(神格) 마법을 펼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레쥬에브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통각이 마비된 그녀에게, 현재 유효한 자극은 대화밖에 없다. "날씨가 참 좋지?" "응…." "배고프진 않아?" "응…." 일상적인 말을,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여 보았다. 계속 그렇게 말을 걸면서 도시의 입구까지 이동했다. 모두 동의를 구하고 의견을 묻는 정도의 쓸데 없는 말들이었지만, 단 기간내에 이렇게까지 많은 말을 해본건 처음이다. 도시의 입구에 도착했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들어 졌을 거대한 문은 이미 예전에 그 목적을 잃어버린채 활짝 열려 있었다. 도시를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자유였기에,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에게서의 제지 같은건 없었다. 다만, 축 늘어져 있는 레쥬에브쪽이 신경 쓰였는지 경비병들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이봐, 거기 괜찮은가?" 그에게 적당히 변명을 하고서, 수도를 나왔다. 도시의 바깥에도 적지 않은 수의 거주구가 있었지만 적어도 도시 안쪽 보다는 훨씬 한적하고 한산했다. 계속 그녀를 부축하며 도시의 옆에 위치한 산으로 올라갔다. 다닐만한 길이 별로 없고 나무와 수풀들이 우거진 이곳이 몸을 숨기기엔 최적의 장소인듯 하다. 거기다 먼곳 까지 도망칠 여력은 더 이상 없다. 레쥬에브는 한시라도 빨리 휴식을 취해야 한다. 아직까지도 추적자는 없었지만, 만약 추적을 시작한다면 나와 레쥬에브는 금방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도시의 입구까지야 골목길을 통해 이동했지만 결국 도시를 나갈땐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통해 나갔다. … 목격자가 있는 것이다. 산을 오르다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꽤 높이 올라온 모양인지, 도시의 전역이 어느정도 내려다보였다. 이 도시에서도 꽤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 평소에 생활하던 루블라브룸 아카데미로 돌아갈 일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동시에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곧 비공정이 완성될텐데… 그때, 나는 그와 함께 비공정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그와 비공정을 날리기로 했던 작은 언덕이 저 아래쪽에 보인다. 카리에르제는 내가 없다 해도 비공정을 날려 볼 것이다. 운이 좋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가 날리는 비공정을 볼 수도 있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언덕을 쳐다보다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빛나는 석양에 의해 도시는 붉은 빛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어디에선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도 보였다. "아!" 마치 한숨 같은 탄식을, 레쥬에브는 뱉어냈다. 짙은 열기를 띄고 있는 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다가 사라져 간다. 저 멀리 보이는 연기 때문일까… 레쥬에브는 내 부축을 거절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몇걸음 비척거리며 걷다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것은… 명백한 화재에 의한 연기다. "저택이 있는 방향이야…." 레쥬에브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메르시오 가(家)의 저택이 불타고 있는건가…. 펠테넨시아의 말대로라면 메르시오의 저택은 레쥬에브가 황궁에 있을 때, 이미 한 번 습격을 받았을텐데. 나는 레쥬에브의 옆으로 다가가 서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눈으로, 그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레쥬에브는 은룡에게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감당할 모든 것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말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러한 모든 것들을 각오 하고 있었다. "내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는 이미 며칠전에 돌아가셨어…." 그랬었지. 펠테넨시아도 그렇게 말했었다. "이미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할 것이 없는데도, 내가 어릴적부터 태어나고 성장했던 저택이 불타는 모습은- " 무언가에 매인듯, 레쥬에브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레쥬에브는 목까지 차오른 그 무언가를 억지로 삼켜내었다. "미안해. 이럴 때가 아닌데…." 레쥬에브의 사과를 흘리며 나는 다시 주저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양 팔로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체, 너는 왜 나를… 이렇게까지 돕는거야? 너는 도대체… 누구야?" "…." 대답을 나중으로 미루며, 나는 다시 레쥬에브를 부축해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수풀들을 헤치고 걸으며 생각했다. 레쥬에브는 후회할까…? 은룡을 앞에두고,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나는 지금, 그녀가 조금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녀도 인간인 이상 후회하지 않을 순 없겠지. #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던져 넣었다. 가지에 불이 붙고, 점점 까맣게 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 사이로 약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모닥불이 조금 흔들거렸고, 그 모닥불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도 흔들거렸다. 옆에 가져다 놓은 마른가지 더미에서 적당히 손에 잡히는 것을 집고 하나 더 불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 미약한 충격에 이미 재가 되어버린 가지들이 흩어지며 빨간 불똥을 살짝 튀겨댔다. … 도망치고 있는 입장에서 불을 피워 올리는건 그다지 현명한 일은 아니지만, 레쥬에브를 생각하면 별다른 도리가 없다. "…." 불속에 가지를 하나 더 던져넣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마른 풀과 나뭇잎을 깔아놓은 바닥에 레쥬에브가 고요한 얼굴을 하고서 잠들어 있었다. 아직 따뜻한 계절이라곤 하나 산 바람은 생각보다 더 매서웠다. 특히 태양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고요한 새벽은 더욱 더 그렇지. 자신의 수준을 뛰어 넘는 마법을 발현시킨 반작용에 출혈까지 있어 안정된 휴식이 절실한 그녀로선, 이 추위가 상당히 치명적일 것이다. "추… 워." 웅얼거리듯, 잠꼬대 같은 소리로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직 정신을 차린건 아니었다. 나는 잠깐 동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얇은 옷이어서 별 도움은 안되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테지. 옷을 덮어주고 목까지 끌어올려 주는데, 손목에 얼음같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레쥬에브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으응." 내 질문에 그녀는 마른 흙바닥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목말라?" "응…." 이곳에 자리를 잡기전 주변에 물이 있는 계곡을 확인해 두었기에 물을 구해오는건 어렵지 않다. 잠시 물을 어떻게 이곳까지 떠올지 생각하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손바닥 몇개는 합쳐 놓은듯한 큰 나뭇잎을 발견했다. 저것을 모양좋게 구부리면 목을 축일 정도의 양은 어떻게든 떠올수 있을 듯 하다. "잠깐만 기다려. 물을 떠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또다시 손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 가지마!" 음, 하지만…. "하지만 가지 않으면 물을 떠올 수 없는데?" "물 같은건, 괜찮아."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 물을 제공하려는 일을 어째서 거절하는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얌전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레쥬에브는 또다시 잠들어 버린걸까…. 그녀에게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은 감고 있고,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선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것으로 지금 그녀가 깨어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찌르르- 아직 따뜻한 계절이라 그런걸까… 밤 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붉게 타들어가고 있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또다시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희미한듯 하지만 나름대로 세차게 타들어가고 있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몸에 쌓인 피로가 물려오는 느낌이다. 피곤이란건 무척 번거롭고 귀찮은 느낌이지만, 일단 그것에 몸을 맡기고 나면 무척이나 아늑하고 편안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 든듯한 레쥬에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래 하얀 얼굴이었는데도, 주간에 있었던 일들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욱 새하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살짝 열린 다홍빛 입술과 부드럽게 내리깔려 있는 눈썹들이 무척 섬세하다. 쌕, 쌕- 하고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호흡이 듣기 좋다. … 위기를 앞두고 있음에도, 잠들어 있는 인간은 이렇게나 평안해보이는군. "…."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고 있는데, 레쥬에브가 잡고 있는 손에서 미약한 이끌림을 느꼈다. 잠들어 있는 와중에도 레쥬에브는 내 손을 자꾸만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미약한 손의 온기 마저도 아쉬울 정도로 추운걸까. 거의 힘이 느껴지지도 않는 레쥬에브의 손에서 팔을 빼고 모닥불에 마른가지를 더 많이 넣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생각이 바뀌어, 그 이끌림대로 그녀의 옆으로 좀 더 가까이 옮겨 앉은 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손의 온기가 꽤 마음에 든건지, 레쥬에브는 내 손을 품에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것이 마치, 작고 여린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 꽤 시간이 흘렀다. 아니,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동이 터오려는듯, 검은 하늘이 점점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주변도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냉기를 쫓기 위해 피워둔 모닥불은 나의 조그만 수고에 의해 여전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때까지 계속 하늘을 쳐다보며 별의 운행을 관찰하던 나는, 주변에 밝아짐에 따라 인간의 눈으론 더 이상 별을 쫓는것이 불가능해지고 난 후에 레쥬에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얼굴을 보고 인간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건 그다지 익숙치 않은 일이지만, 그녀에게 느껴지는 기색으로 보아선 어제보단 훨씬 나아진듯 하다. 적어도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마력을 사역한 후에 찾아오는 거대한 상실감과도 같은 반작용 정도는, 어느정도 떨쳐내 버린듯 했다. 음… 이것은 꽤 고무적인 일이다. 세계의 질서를 잠깐이나마 재편할 정도의 강력한 마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 고작 반나절 정도의 고통이라면…. 물론, 그 고통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잠깐이라도 자아를 놓아버렸다면 마력의 반작용은 순식간에 레쥬에브라는 인간을 이루는 관념을 모조리 해체해 버렸겠지. 그것은 텅 비어버린 인간이 된 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고요한 죽음에 이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 아무튼 레쥬에브의 마력 사역 수준은 정점에 이르렀다. 마력을 사역해 이 계(界)에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단언코 레쥬에브는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압도한다. 그점에 있어선 백색의 좌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겠지. 다만, 문제는… 백색의 좌의 검, '광휘' 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 어떤 신성한 물품 보다도 더 강력한 존재감을 갖고 있다. 품고 있는 힘의 총량이야 어쨌든… 그 격(格)에 있어서, '광휘'를 능가하는 도구는 아마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레쥬에브가 마법으로 리체르아를 꺾지 못하는 이유이다. "으음- " 레쥬에브가 미약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곧 눈을 떴고, 여전히 그 옆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잘잤니?" "…." 대답도 없이 눈을 계속 깜빡깜빡 거리는 것이, 현재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곧, 그녀는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손을 어디다 넣고 있는거지?" 내 손은 물론 그녀의 가슴께에 위치해있다.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보고 나는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밤새도록 끌어안겨져 있던 손은 혈액이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압박이 풀린 손에 곧 혈액이 흐르며 저릿한 느낌과 함께 손이 발그렇게 달아올랐다. 나는 저릿한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네가 모닥불 만으로는 온기가 부족했던 모양이야. 어제 밤, 네가 자면서 내 손을 끌어 안길래 그대로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나 잔 가지를 모아둔 곳에 다가가 한개를 집어 불에 던져 넣었다. 나무 가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설마, 밤새도록 모닥불을 피울 수 있을 줄이야. 나무에게는 굉장히 유감스러운 의견이지만, 땔감으로 굉장히 효율이 좋은듯 하다. "그랬… 구나." 그렇게 말하며, 레쥬에브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내 겉옷이 스르륵 흘러 내렸다. 그녀는 잠깐동안 내 겉옷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어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는데도, 레쥬에브의 얼굴은 발그랗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는 춥지 않았어?" "춥지 않았어. 난 추위에 강한 편이거든." 그렇게 답해주고 나서 레쥬에브가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든 뒤, 그것을 걸쳤다. 계속 그녀의 몸 위에 덮여있던 것이었기에 온기가 남아있어 꽤 따뜻했다. # 나는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는 태양이 뜨자마자 주변에 먹을만한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오래 찾아보지 않고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의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긴 나무가지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열매를 딸 수 있었다. 인간의 작은 손으론 들 수 있는 양의 한계가 있었기에, 나는 기껏 입은 겉옷을 다시 벗어 그곳에 열매를 담아야 했다. 그런데… 이게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열매 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일단 내가 한 입 먹어보기로 했다. "음…." 솔직히 어느 정도면 먹을 수 있고, 먹을 수 없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나로서 먹는 다는 행위는 삼키기 좋게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뿐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일단은 나도 인간의 육신으로 화(化)해 있고, 그런 내 미각에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음, 괜찮지 않을까. "…." 가져가보기로 했다. 본래 있었던 장소로 가니, 어느새 모닥불은 꺼져 있었고 그 자리엔 재만 남아 있었다. 레쥬에브가 누워 있던 자리에 따온 열매를 놓아두고 다시 겉옷을 걸쳤다. 그러고 나니, 반대편으로 갔던 레쥬에브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죽어있는 작은 산짐승을 들고 있었는데, 마력으로 단숨에 관통시켜 목숨을 취한듯, 시체엔 약간의 핏자국 외엔 상처가 없어보였다. "이런곳에 과일 열매가 있었어?" 산짐승을 내려놓으며, 레쥬에브가 내가 가져온 열매를 살펴보았다. "응, 운이 좋게도." "그런데 이거…." 레쥬에브가 내가 한입 베어먹은 열매를 들어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먹을 수 있는건지 없는건지 몰라서 일단 한 입 먹어보았는데, 그다지 문제는 없을것 같아."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거, 독 있는거야." … 저런, 유감스럽게도. "완전히 익은 것에 한에서긴 한데… 네가 먹은게 덜 익은 것이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그건 독이 없거든." 레쥬에브는 그렇게 말하며, 완전히 익은걸로 보이는 커다란 열매들을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내 수고로 획득한 열매들이 아무 의미 없이 풀숲 너머로 사라져 가는 것을, 소소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큰일날뻔 했잖아…! 먹을 수 있는건지, 없는 건지를 먹어보고 판단하겠다니, 완전히 익은 열매를 먹었으면 어쩔뻔 했어!" "미안…." 꽤 심하게 화를 내기에, 나는 즉시 사과했다. 무지에서 오는 실수는, 나 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지. 다시 모닥불을 피우고, 식사할 준비를 했다. 레쥬에브가 잡아온 산짐승은 날 것으로 그대로 먹을 수 없기에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해야했다. 날카로운 도구는 없었지만, 그것은 레쥬에브가 날이 선 칼 처럼 이용할 수 있는 마력장(磨力場)을 손에 전개하는 것으로 간단히 대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쥬에브는 막상 짐승의 시체를 앞에 두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어있는 시체라 해도… 속을 헤집는건, 징그럽다는 건가. 이해할 순 없지만, 현재까지 인간의 생활을 바라보며 그들의 기묘한 이중성에 대해선 어느정도 납득할 순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나와 같은 드래곤을 제외한 생명체가 그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해쳐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그에따라 굳이 자기 손을 이용해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도, 재화를 지불함으로써 먹음직스럽게 가공된 살덩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레쥬에브와 같은 귀족 계급의 인간은 그런 노골적인 과정을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겠지. 내 입장에서만 보자면, 먹기 위해 식물을 꺾는 것이나 동물을 해치는 것이나 별 다를게 없지만. "내가 할까?"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냐, 내가 할 수 있어." 레쥬에브는 내 조력을 거부하고, 더듬거리는 손길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했다. …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아 보이는군. 저래서야 저걸 먹을 수 있을까. "나… 꼴사납지?" 미리 떠 놓은 물로 손을 씻으며 그녀는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했다. "나와 같은 인간은 수도 없이 죽여놓고, 이제와서 이미 죽은 짐승의 시체를 손질하는게 무엇이 어렵다고…." "…." "하지만… 다른것 같아, 칼리체. 마력을 사역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한 생명체를 죽이는 것과, 직접 손을 써서 죽이는 것은." … 나뭇가지를 잘 다듬어 레쥬에브가 잘라놓은 고깃덩어리를 꿰어 모닥불에 구웠다. 지글지글 거리며 고기가 익어가고, 산짐승 특유의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레쥬에브는 내가 가져온 열매 하나를 손에 올려놓고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시선으로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 면은 적당히 익은것 같아 꿰어 놓은 고깃덩어리를 반대로 돌리고 있는데, 문득 레쥬에브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요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또 눈물인가…. "미안해. 나, 완전히 울보 같지?" "글쎄… 우는게 잘못은 아니니까. 울고 싶다면 우는게 좋다고 생각해." 울음소리 없이 고요히 눈물만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더듬었다. 부드러운 피부와 가지런히 정렬된 속눈썹이 느껴진다. … 신체적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격동으로, 나도 저렇게 눈물을 흘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흘릴 수 정도가 되면, 지금 레쥬에브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 익은것 같아." "응."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고기가 노릇노릇 잘 구워진듯 하다. 모닥불에서 고기를 빼고 레쥬에브에게 건네고, 나 역시 내게 할당된 고기를 가져와 한 입 베어 먹었다. 아무런 조미료도 더해지지 않은 고기의 맛엔, 이 이름모를 짐승이 살아있을 당시 가지고 있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우습게도, 나는 이제서야 '먹는다' 라는 행위를 실감했다고 생각했다. "으읏…." 레쥬에브는 고기를 몇점 베어먹더니, 입맛에 맞지 않은듯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 더 먹을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녀는 대신 내가 가져온 열매를 먹었다.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었지? 나, 그곳에서 좀 씻고올게." "응, 그렇게 해." 어제 그렇게 도망치느라 옷이고 몸이고 모두 땀에 젖어 버렸겠지. 나는 수풀 사이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 모습을 보며, 남아있는 고기를 한 점 더 베어먹었다. 고기는 무척이나 기름지고, 노린내가 났다. # 레쥬에브가 몸을 씻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나는 긴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주변에 가득한 울창한 숲에선 나뭇잎끼리 서로 스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태양은 어느새 천공의 정중앙에 위치하게 되었고,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환한 햇빛이 앞다투어 쏟아지고 있었다. … 이 산은 네거스텐 제국의 수도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니다. 어째서 추격이 아직까지 따라붙지 못했는지 의문이지만, 아무튼 추격은 있을 것이다. 레쥬에브는 어느정도 체력을 회복한 모양이지만, 만약 백색의 좌가 그 추격에 가담하여 온다면 또다시 그녀에겐 승산이 없다. "이제 어쩔까… 더 먼곳으로 도망치겠어?" 하얀색 끈으로 머리를 묶는 그녀에게, 선택을 물었다. "도망…?" 레쥬에브는 끈을 묶던 손을 멈추고, 멍한 얼굴로 되묻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엇으로부터? 내 목숨을 위협하는 네크-네르프로넨의 창칼? 아니면, 여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내 생각으로부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는건 한 번으로 족해.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고. 만약, 여기서 목숨을 잃더라도… 나는 적어도 내 생각에 동의해주고, 그것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해." 엘코어 셰른, 이라는 이름의 기사였지…. 레쥬에브는 네크-네르프로넨과 전투를 벌이면서 그와 여러번 마주쳤겠지만, 그와 대화를 나눈건 몇마디 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레쥬에브의 최대의 이해자가 실은 그녀와 지금껏 여러번 서로 검을 겨누었던적이 있던, 적이란 말이다. … 그는 살아 있을까. 나는 그가 살아남아, 레쥬에브와 만나길 기원한다. 지금으로선 레쥬에브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은 그 기사이겠지. "그리고… 너 역시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지." 그렇군, 나 역시도…. "칼리체,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어. 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데다 마력을 사역하는 수준도 믿겨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 가끔, 나는 너 역시도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쥬에브의 자색 눈동자 안에 나의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맺혔다.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나의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레쥬에브는 무언가 말하려는듯, 다홍빛 입술을 오물거렸다. 두어번 정도 그것을 계속 반복하던 그녀의 입술이 완전히 열렸다. "너를 좋아해, 칼리체." 그것은 갑작스런 고백이었다. 나는 잠깐동안,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좋아한다는게 뭔지 잘 모르겠어." 좋아한다는건 선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레쥬에브가 말하는 '좋음' 은 아니겠지. 나는 그녀가 말하는 '좋아한다' 라는 말에 어떤한 의미가 담겨있는지 알고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내가 온전히 답하기 불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나는 그저 '사실' 을 답할 뿐이다. 의외로, 레쥬에브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한다는건 그리 어려운게 아닌거 같아." "…." "나는… 네가 나와 관련된 일로 다치거나,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위해 이렇게 애쓰는게 정말 좋으면서도, 또한 그것으로 인해 네가 상처입는걸 원하지 않아. 그것이 못견디게 두려워." 계속 말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네가 누군지 묻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아주었으면 해. 그걸 들으면,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나는, 나는- 다만, 언젠가 네가 나에게 네가 누구인지, 어디서 살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내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조차 모르겠으니까." … 그리 어려운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내게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인것 같다. 레쥬에브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양팔을 벌리고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몸과 몸이 밀착했고, 옷 위로 봉긋 솟아오른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느껴졌다. 나를 끌어안은채, 그녀는 내 귓가에… 조용하지만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로, 내 일에 상관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칼리체…." 그녀가 얼굴을 묻은 내 어깨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 레쥬에브는 또다시 나를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밤이 될 때까지 우두커니 남아있었다. 달과 별이 뜨고, 희미하고 부드러운 밤의 조명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나는 자리에 앉아,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채 오늘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울고 있는 밤 벌레의 소리를 들었다. 레쥬에브는 또다시 죽음을 각오했다. 오늘을 믿으며, 내일을 믿지 않는 그녀는 생사가 불투명한 미래에 내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레쥬에브를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애초에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조차 없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눈을 감은채 그 뒷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눈을 뜨고, 나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작은 인간조차 곁에 둘 수 없다니… 이 손에 깃들게 할 수 있는 힘과 권능이 아무리 강력하고, 위대하고, 마치, 기적같다 하더라도 별로 쓸모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고 그녀가 내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좋아한다, 좋아한다는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망각이 없는 기억으로 그 장면을 아무리 되집어 보아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자리잡은 감정을 파헤치고 통찰해 보아도 내 이해는 그곳에 가 닿지 않는다. … 난 여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 시간이 빗겨 나간다. 달과 별이 지고, 태양이 떠오르고… 하늘에 구름이 끼기도 했고, 비가 오기도 했다.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나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이후로 다섯 번째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마력 파장이 느껴져 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큰 두개의 힘이 마주치는 그곳에선 지상과 하늘이 바뀌고, 가장 위대했던 것이 가장 천박하게, 가장 천박했던 것이 가장 위대하게 바뀔 수 있는 힘과 법칙의 환원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세계의 질서가 몇번이고 재편되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일이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흑색의 좌와 백색의 좌의 싸움은 그 이후로도 삼일 동안 이어졌다. 삼일 동안 누군가 혹은 누군가에게 쫓고 쫓기는 것을 반복하는 듯, 두 명의 인간이 내뿜는 마력 파장은 몇 시간의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밤이 와도 모든 산짐승과 벌레 들은 침묵을 지켰고, 어느새 바람이 부는 방향마저 바뀌었다. 그리고 어느 기점을 시작으로 더 이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느 때 처럼 달과 별이 떠올랐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산짐승과 벌레들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던 몸은 굉장히 삐그덕 거리긴 했지만, 나는 온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경고를 무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시간을 빗겨 버리니,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지금… 지나가는 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가…? … 풀숲을 헤치고 걷다가 숲 한가운데 작은 공터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아무것도 방해가 될 것 없는 공터엔 은빛을 띄고 있는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그 공터의 한 가운데엔 작은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 기댄채 검에 꿰뚫려 있는 인간의 시체가 있었다. 검에 꿰뚫려 목숨을 잃는다는건, 당연하겠지만… 무척이나 고통스런 경험이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인간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절대적인 평화에 젖어있는듯 했다. 아무런 힘 없이 늘어진 양 손은, 반대로 모든것을 내려놓은듯 가벼워 보였고 달빛에 비춰진 하얀 얼굴엔 희미한 미소마저 띄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듯, 바닥에 잔뜩 번져 있는 붉은 피가 아직 굳지 않은채 마른 땅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관통하고 있는 검을 보았다. 달빛 아래 오연히 빛나고 있는 검은… 백색의 좌의 것인 '광휘' 였다. # "리체르아 벨크세른…." 거의 팔백년이나 된 이름을 중얼거리며 몸을 완전히 숙이고, 이제는 더 이상 숨쉬지 않는 인간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다. … 생명이 쓸쓸히 떠나가 버리고 더 이상 미동조차 없을 신체는, 영원히 이렇게 미소를 짓고 있겠지. 나는 리체르아의 몸을 꿰뚫고 나무에까지 깊게 박혀 있는 광휘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는 식어버려 굳어져가고 있는 끈적한 피가 손잡이까지 묻어 있었다. 다시 검의 손잡이를 놓고, 손을 들여다 보았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녀의 혈관 안을 흐르고 있었을 새빨간 피…. 이것은 생명의 상징이다. 피가 묻어있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생명의 맛은 비리기만 했다. "하…." 저번에 그녀에게 음식을 대접받았던 것을 회상한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간이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느꼈었지. 리체르아가 만든 음식은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났었다. 한 번 더 백색의 좌에게서 식사를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그럴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되어버렸군. 죽음은 예외없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 죽음에, 리체르아가 도달했다. "죽음은 만족스럽나?"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 돌아올리 없지. 나는, 그녀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걸까.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다시 광휘의 손잡이를 잡고서 힘을 주어 천천히 당겼다. 리체르아의 몸을 관통해 나무까지 박혀 있던 검은 천천히 주인의 몸에서 날을 거두었다. 그리고 검에 의해 나무에 지탱되고 있던 리체르아의 몸은 힘을 잃고 수풀이 잔뜩 자라 있는 바닥에 소리없이 부드럽게 쓰러졌다. 검이 뽑힌 부분에서 다시 피가 나와 바닥으로 번져 나간다. 백색의 좌는… 죽었다. 나는 레쥬에브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백색의 좌를 꺾고 그녀의 목숨을 가져갔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흑색의 좌의 마법은 백색의 좌의 광휘를 뛰어넘을 수 없다. … 순간,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에 눈을 감았다. 과거의 기억속에 있던 베델이라는 인간과 마왕이라 불리던 인간, 두 명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마왕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영원을 쫓았고, 그 동안 어째서 자신이 영원을 쫓았었는지 잊어버렸다고 했다. 목적은 잊혀지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목적을 망각한 마왕은 자신에게 강하게 대항하는 베델이란 인간에게 목숨을 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영원을 갈구 했던 그는, 마지막에 와서 오히려 기꺼운듯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색의 좌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망각의 힘에 과거를 거의 잊어버렸지만, 마왕이 했던 그 말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말했는지, 언제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그 말만은 기억했고, 이제서야 이해했다고 말했었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백색의 좌의 몸에, 백색의 좌의 검인 광휘가 박혀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쥐고 있는 광휘의 손잡이의 감촉이, 무척이나 어색하다. 나는 바닥에 평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듯한 백색의 좌의 몸 위에 광휘를 올리고, 식어버린 그녀의 손을 잡아 광휘의 손잡이를 쥐어주었다. 어쨌든 이것은… 백색의 좌의 검이었으니까. 달빛을 등진채, 오랫동안 백색의 좌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리체르아가 어떻게 생을 살아왔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녀와 자주 마주친 적도 없고, 따라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조그만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은룡의 곁에 머물며 영생을 부여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은룡과 백색의 좌의 일은, 명백히 내가 모르는 영역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만- 그저, 쓸쓸할 뿐이군. 몸을 돌려 백색의 좌가 기대어 있던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았다. 바닥을 적셨던 그녀의 피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저 멀리 산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껏 그래왔던것처럼 환한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태양 빛과 함께 부드러운 선을 가진 은발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나를 시야에 담는듯 하더니, 아무말 없이 이쪽으로 다가와 이젠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인간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죽음을 택했군." … 아니, 리체르아는 죽음을 택한게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었던게 아닐까. 불멸자인 내가 필멸자의 생각을 알 순 없겠지만, 과거에 마왕이라 불리던 이도 그러했고 거의 영생을 획득한 것이나 다름 없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신비도 그러했다. 그들의 죽음은 타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실은, 그들 스스로가 그들 자신을 죽인것이나 다름없다. 은룡은 리체르아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숙였다. 반짝거리는 은발이 리체르아의 몸 위로 쏟아졌다. 은룡은 손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숨을 거둔 리체르아의 이마위에 고요히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태양빛은 눈을 감아도 막을 수 없었다. "루루렌칼리체." … 상당히 오랜만에 듣는듯한 이름이군. "리체르아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나의 관여를 끝내겠다. 난 더이상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 흑색의 좌에겐 반가운 소식이겠군.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그 이후에 찾아올 모든 일들을 감내하여야 한다. 레쥬에브는 은룡을 앞에두고, 스스로가 그렇게 말했었다. "내 손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강력한 인간의 제국은 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곧 갈갈이 찢겨져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증오하고,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겠지." 언제나 인간을 조롱해왔던 은룡은, 그저 사실을 말하는 듯한 어조로 담담하게 인간의 미래를 단정하였다. … 그 말대로 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껏 보아온 인간의 모습을 보자면 은룡의 단정은 틀리지 않을것 같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보다 퇴보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은룡은 아무말 없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다가 백색의 좌의 시신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죽은 리체르아의 손에 쥐어져 있던 광휘는 그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은채 이곳에 남아있었다. #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걸어서 산을 내려왔다. 입고 있던 옷엔 리체르아의 피가 군데군데 묻은 채다. 광휘는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 언젠간 누군가가 인연에 따라 그곳을 찾아와 광휘를 발견하고, 리체르아 다음 대의 백색의 좌가 되겠지. 그땐, 백색의 좌가 된 누군가가 리체르아 처럼 가련한 운명을 겪질 않길 바랄뿐이다. … 내려오는 길엔 드문드문 인간의 시체가 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동일한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굳이 가까이가서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것이 네크-네르프로넨의 것이란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죽어버린건가…. "…." 시체들을 뒤로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별 생각없이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도구에 의지하지 않고, 맨 손으로 수풀을 헤치다보니 손이 날카로운 풀의 옆면에 베여 피가 맺히고 따끔거렸다. 짐승처럼 상처를 핥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틀동안 거의 잠을자지 않았더니 굉장한 피로가 몰려온다. 피로 정도야 어떤 방법으로든 간단히 털어 버릴 수 있지만… 일단, 목이나 축여보기로 할까.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나무 뒤로 작은 산짐승들이 모여 목을 적실법한 작은 샘이 보였다. 막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이곳에 나보다 먼저 온 인간이 있음을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샘가 앞에 두 명의 인간이 있었다. 한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쓰러진 인간을 향해 날카로운 단검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명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듯한 소녀는 레쥬에브 였고, 그런 그녀를 향해 단검을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여자는 황녀인 펠테넨시아였다. … 오늘은 이곳 저곳에서 내가 아는 인간들이 죽임을 당하고, 또 죽이려 하는군. 나는 나무에 기대어 서서 고요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샘 앞에 쓰러져있는 레쥬에브는 정신을 잃은듯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흑색의 좌를 죽이려 한다면 펠테넨시아에겐 지금이 기회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단검을 들어올린채였다. 단검을 쥐고 있는 펠테넨시아의 손은 계속 가늘게 떨리며 그녀가 레쥬에브를 죽이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레쥬에브를 찌르지 못한채 단검을 손에서 떨어트리고 말았다. 떨어지며 돌에 한번 부딪친 단검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다니다 내 발치에 와서 멈추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 앉아버린 펠테넨시아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 칼리체?" 펠테넨시아는 당황스러운듯 했지만, 곧 그런 기색을 감추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서 전처럼 강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죽이지 않는군요." "…."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샘으로 다가가 양 손을 모양좋게 모아 물을 떴다. 아직 따뜻한 계절이지만, 샘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것을 마시려던 나는, 아까전 손에 묻은 후 굳어있던 리체르아의 피가 차가운 물을 타고 섞여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한 모금, 그 물을 마셨다. 약간 비릿한 향이 났다. 남아있던 물을 털어버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쥬에브를 주목했다. 정신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상처를 입거나, 전처럼 강력한 신비를 사역한 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듯 했다. 조금 휴식을 취하면 금방 정신을 차릴수 있을것 같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던 펠테넨시아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을 걸어왔다. "여황폐하의 호위기사인 벨크세른과 메르시오의 대화에서 모두 들었어." … 그랬던가. 그 '모두' 라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정말이었어. 지금껏 이 제국을 지배하던 어머니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의 목소리엔 조금씩 격한 떨림이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 "하- 지만, 그게 어때서- ?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이 나라를 이끌었고, 역사에 있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강대한 제국을 완성하셨는데- !" 펠테넨시아는 돌연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여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지금껏 어떤 상황에서도 제국의 황녀에 걸맞는 모습을 가장해왔던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도 어머니를 존경하고, 따라가려 애썼는데…." 나는 아무말 없이 펠테넨시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는데- 왜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 거지? 내 아버지가 마굿간을 청소하던 노예라서…? 그런건- 그런건, 애초에 어머니가 잘못한 거잖아!" 펠테넨시아의 말이 앞 뒤가 맞지 않게 두서없이 이어진다. 어째서인지 나를 보고나서,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을 잃은 모양이다. … 그녀의 말대로 아무래도 펠테넨시아는 흑색의 좌와 백색의 좌의 전투 이후, 은룡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들은듯 하다. 확실히, 은룡에게 펠테넨시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간이겠지. 은룡은 그들이 고귀한 핏줄이라 믿는 것에, 아무도 모르게 천한 것이라 여겨지는 노예의 피를 섞었다. 은룡에겐 펠테넨시아의 존재도 그저 인간을 조롱하기 위한 그런 수단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기쁘기도 해. 그토록 노력해도, 넘을 수 없던 벽이 실제론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 였으니까. 나는 애초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으려 하던 것이었어!" 울음을 터트리면서, 동시에 그녀는 웃음 역시 터트렸다. 상반된 감정이 한꺼번에 섞여 터져나오는 그 광경은, 무척이나 기괴하게 보이기도, 쓸쓸하게 보이기도 했다. "황녀님은- " "칼리체, 아니- 당신들은…!" 펠테넨시아는 내 말을 끊으며, 갑자기 증오가 섞인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는거지? 당신은 어째서 흑색의 좌라 불리우는 이 소녀의 옆에서 인간을 지켜보는 것이지?" 그녀는 명확히 '우리 인간' 이라고 말하며 나와 자기네들을 서로 구분지었다. 그것은 펠테넨시아가 이미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날 보고나서 이렇게 이성을 잃어버린 것인가…. 은룡은, 정말로 전부를 그녀에게 말해준 모양이다. "…." 펠테넨시아는 잠깐동안 레쥬에브를 내려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메르시오는, 항상 곁에 있던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 질문이 굉장히 쓰다. 레쥬에브는 이미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가 스스로 밝힌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같은 드래곤이란 사실은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래서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어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당신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입맛에 맞게 인간을 가지고 놀려는 속셈이겠지…. 그렇다면 사라져버려! 더 이상 이 소녀를 이용하려 하지마!" 이용이라…. 어찌보면 그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 나는 차분한 대화를 통해 펠테넨시아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몇가지 오해를 풀려 했으나, 곧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어디서 꺼냈는지 어느새 손에 또다른 단검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었다. … 그리고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려서 일까,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다는 그녀의 손은 근거를 모를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런 강렬한 감정으로 휩싸인 인간을, 나는 불완전한 언어로 설득할 자신이 없다. … 오해하고 있는 채로도, 그리 나쁠건 없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샘가 앞에 쓰러져 있는 레쥬에브의 모습을 깊게 시야 안에 담았다가 몸을 돌려 그 장소에서 벗어났다. 이제 정말로, 두번다시 레쥬에브의 옆에 인간으로서 함께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레쥬에브와 하룻밤을 머물렀던 곳에 도달했다. 그곳엔 아직 모닥불을 지핀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쪽 옆엔 아직도 마른 가지들이 약간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날 밤 내가 땔감을 좀 과도하게 많이 가져왔던 모양이다. "…." 남은 땔감들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곳에선 산 앞에 있는 작은 언덕과 네거스텐 제국 수도 전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늘에 떠있는 태양은 무정하게 뜨고, 지고를 반복한다. 언제나 그렇듯, 당연하게. 그것은 거의 죽음에 필적하는 절대성이다. 때문에 나는 태양을 사랑했고, 몇 백년 동안이나 저것이 지고, 뜨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었다. … 지금은 더욱 더 그것이 간절하군. 그저, 태양을 바라보는것 만이… 진정한 내 바램이다. 하-, 절대로 지칠리 없는 내가 지쳐버리기라도 한건가. 아주 잠깐동안 석양을 바라보다가 이대로 내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려가 저 도시에 도착한 후에,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겠는가. 다시 인간들의 사회에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정작 내가 쫓고 있는 '인간의 정체(停滯)' 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아낸 사항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들의 지식 전승의 장인 아카데미에 다시간다 한들, 정말로 내가 바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 회의적인 이야기군. 지금까진 내게 주어진 무한한 시간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제 그곳에서 더 머무르는건 별로 의미가 없을 듯 하다. 나는 내려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카리에르제가 비공정을 날리기로 계획한 언덕으로 향했다. … 오래지않아 도달한 언덕은 고요했다. 나는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자라있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며 무릎을 감싸고 자리에 앉았다. 태양이 거의 산 허리를 넘어갔고, 주변은 점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카리에르제가 대장장이 공방에 설계도를 맡긴 이후로 며칠이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있든 없든, 아무튼 카리에르제는 비공정을 날려보기 위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를… 기다려 보기로 할까. 나는 나무에 기댄채 천천히 눈을 감으며 몰려드는 피로에 몸을 맡겼다. #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주변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 가늘게 눈을 떴다. 하얀 태양빛이 가늘게 뜬 눈꺼플 사이로 들어오지 못해 안달이었다. …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환한 빛을 가렸다. 천천히 시야가 회복되며 초점이 회복되었다. "이봐, 도련님! 이거 여기다 두면 되는건가?" "이런- ! 아니, 경사진곳 말고 평평한 곳에 두란말이야!" … 시끄러운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완전히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굉장한 광경이 눈 앞에 보였다. 건장한 인간 남성 여러명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를 들고 이리저리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손가락으로 한 장소를 가리키며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기계를 들고 있는 남자들은 태양빛 아래에서 땀을 뻘뻘흘리며 소년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 저런 무거운걸 완력만으로 들어서 옮길수 있다니, 정말 굉장하군. 나는 완전히 정신을 차린 후, 몸을 일으켜 나무에 기대고 앉아 얌전히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한참동안이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카리에르제의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군소리 없이 그의 말대로 따랐고, 곧 그 거대한 기계를 평평한 바닥위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후아…." "이, 이봐- 나, 팔에 쥐가 난것 같아! 누가 쥐좀 풀어줘." 기계를 내려놓자마자 그들은 모두 바닥에 주저 앉으며 그토록 거대하고 무거운 것을 결국 성공적으로 옮긴것에 대한 감상평을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 카리에르제는 만족스러운듯 기계를 이리저리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보며 미소를 짓더니,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인간들 중 한명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무게가 정말 만만찮았을 텐데, 정말 수고했어. 이걸로 좋은 술집에 가서 이쁜 여자 한 명씩 끼고 술이라도 마시라구." 그에게서 작은 주머니를 넘겨 받은 남자는 그 크기에 약간 실망한듯 쓴 표정으로 그것을 넘겨받았지만, 주머니를 열어보고 나서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살짝 열린 주머니 사이에서 보이는 주화가 내뿜는 금빛이 이곳까지 닿고 있었다. "하하하! 과연, 부잣집 도련님은 통도 크시군! 굉장히 무겁긴 하지만 고작 물건을 나르는 것으로 이정도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이 일을 하려 들걸세. 고맙네, 도련님!" 남자는 즉석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카리에르제로부터 받은 금화를 분배하고 나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두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 저들은 카리에르제가 고용한 인부들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가죽 가방속을 뒤적거리고 있는 카리에르제에게로 다가갔다. 뭘하는가 싶어 멀뚱히 보고 있는데, 그는 가방속에서 잘 조형된 조각상을 꺼내더니 바닥에 꽂아두었다. 조각상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카락 부분만큼은 실로 만든듯 바람에 따라 휘날리고 있었다. 특이한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각상은 양손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부는 세기에 따라 양 팔이 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조각상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육신이 가능한 움직임을 벗어나는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카리에르제는 그것을 바닥에 놓고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등뒤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건 뭘 하는 물건이야?" "으- 앗! 깜짝이야!" 집중하고 있는 중에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서 그랬는지, 그는 바닥에 주저 앉으며 목이 꺾일 정도로 뒤를 홱 돌아보았다. "일어났으면 기척이라도 내란 말야!" 그는 씨근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 이곳에서 자고 있었는진 모르겠는데 말야. 하도 곤히 자고 있길래 내버려두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쳇." 카리에르제는 흙이 묻지도 않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의아스런 시선으로 그 물건을 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가 주먹을 쥐더니 내가 있는 곳으로 냅다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넌 임마, 그동안 도대체 어디에 가있었던 거야! 그 동안 수도에서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기나 해?" 나는 그가 휘두르던 주먹을 피하려 뒷걸음을 치다가 돌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졸음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듯 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나는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으- 무슨 일이 있었니?" 레쥬에브와 함께 이곳으로 도망친 이후, 수도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는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카리에르제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보고 만족스러운듯한 웃음을 짓더니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반란이 있었던 모양이야. 많은 병사들이 동원된 반란은 아니었다곤 하지만… 여황폐하가 암살될 위기를 겪었다고 해. 그것도 반란에 가담한 일부 네크-네르프로넨의 손에. 덕분에 저 인부들을 성 밖으로 끌고 나오는데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 네크-네르프로넨…? 레쥬에브 드 메르시오에 의한 반란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이야기가 퍼진것은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그랬지… 네크-네르프로넨의 기사 몇몇도 마음을 돌려 레쥬에브를 도와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게 반기를 들긴 했었다. 그 중에서 엘코어 라는 기사의 이름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반란을 일으킨 네크-네르프로넨은 어떻게 되었대?" 이런 질문은 그에게 상당히 의외였을까… 그는 잠깐 멈칫 거렸지만, 이내 이야길 해주었다. "글쎄… 소규모 반란에 그쳤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해. 뭐,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사로잡혀 지하감옥에 갇혀 사형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곤 하지만." … 그랬군. 그렇다면 엘코어라는 기사는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의 생사는 불분명 하겠지만, 그렇다면 어쨌든 레쥬에브는 엘코어를 만나 볼 수 있겠군. 그 정도로 나는 만족한다. "오늘은 굉장히 답지 않은 질문들이네…. 뭐, 그것보다 이것 봐- 완성된 비공정이야." 카리에르제의 말에 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를 주목했다. 아니, 대부분 금속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역시 무게 때문일까… 목재로 이루어진 부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기계의 꽁무니엔 내가 설계해준 추진체도 잘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이걸로는 인간 한 명 타기도 힘들다. "굉장, 한걸." 그래도 이것은 굉장하다. 하늘을 향한 인간의 첫 발걸음인 것이다. "그렇지?" 그는 허리에 손을 대고 자랑스럽게 웃었다. 조금 멍한 기분으로 비공정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는데, 카리에르제가 불만스런 어조로 내게 말했다. "뭐야, 그렇게 완전히 남의 것 보듯이 하지 말라고. 네가 기여한 부분도 정말로 적지 않아. 네가 없었다면… 나는 추진체 때문에 몇년, 아니 수십년을 골머리를 썩었을지도 모르지." … 그랬지. 하지만 역시 그것은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달갑지 않다 해도 그 말에 이견은 없다. 내가 아니었다면 분명,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겠지. "언제 날릴 생각이야?" "아, 잠깐만 기다려 봐. 지금은 바람이 너무 강해서." 카리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곤 아까의 그 석상을 다시 내려다 보았다. 석상의 팔이 바람에 밀려 바람개비처럼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건 뭐 하는 물건이니?"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서, 나도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석상은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팔이 이렇게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꽤 우스워 보인다. "아, 이건 풍기(風旗)라는 물건이야.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도구인데- " 카리에르제의 간단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런데 기(旗, flag)라니…. 별로 기처럼은 생기지 않았는걸. 하여간 그는 바닥에서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는 그것을 인상을 쓰고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 뭐, 나는 그것을 봐도 언제 비공정을 날리기에 정확한 바람이 부는지 알리가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그의 옆을 지키고만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꽤 세서, 그 동안 어느정도 기른 내 하얀 머리카락도 이 풍기 라는 물건과 마찬가지로 휘날리고 있었다. …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마침내 카리에르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지금이다!" 풍기의 양팔은 아까보다는 조금 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듯 분주하게 비공정 주위를 돌아다니며 안전장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비공정을 지탱하고 있는 바퀴앞에 놓인 고임목을 제거하고, 바닥에 깔린 레일을 다시한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공정의 꼬리 부분으로 이동해 추진체 부분에 손을 올렸다. 그 안에는 안이 비쳐보이는, 순도 높은 마력석이 들어가 있었다. 카리에르제가 추진체에 일련의 조작을 가하자, 추진체는 마력석에 있는 마력을 빨아 들였고, 곧 그 힘은 물리력으로 환원되어 뒤로 쏘아보내지기 시작했다. … 추진체의 역할은 그것이 전부다. 이제 결과는 카리에르제가 설계한 동체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위이잉- 물리력이 대기를 밀어내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미리 만들어진 레일을 따라 천천히 비공정의 동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카리에르제를 보니 그는 눈을 눈을 크게 치뜨고 움직이는 비공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눈은 숨길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심장은 그 기대감으로 터질듯이 뛰고 있겠지. … 그 소리가 모든 소음을 뚫고, 이곳까지 들려오는듯 하다. 작은 레일에서 벗어난 비공정은 언덕의 경사를 타고 아래로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우와아- 앗!" 영문모를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카리에르제는 비공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처음에 비공정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 느린 속도로 움직였지만, 경사를 타고 조금 더 미끄러져 나가자 도저히 인간의 뜀박질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비공정을 따라잡을 기세로 넓은 언덕을 뛰어 내려가던 카리에르제는 발 밑에 있는 돌을 보지 못하고 그만 걸려 넘어져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그 뒤를 따라가던 나는 덕분에 뛰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 하지만 고통도 그의 강렬한 기대감을 잠시나마 꺾을 수 없었다. 꽤 아플텐데도 카리에르제는 아무렇지 않게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퀴가 지면에서 살짝 떠오르고 있는 비공정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풀밭을 구른 탓에 머리카락이나 옷에나 잔뜩 풀들이 묻어있고, 얼굴에도 얕은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멀어지는 비공정의 뒷모습을 열망에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이 결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비공정은… 하늘을 날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인간이 만든 쇳 덩어리인 비공정이 유유히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날았… 다!" 소감치고는 굉장히 소소했지만, 그 짧은 한 마디 안에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이 지금껏 겪은 모든 감정이 집약되어 있는것 같이 들려왔다. 정말이다. 비공정은 '날았다'. 그는 여전히 비공정의 뒤를 쫓으며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곧 그의 눈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리에르제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껏 형에게서 끝없이 현실을 강요 받으며, 이상을 부정당해 왔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형의 현실을 꺾어버렸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인간의 역사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인공물을 하늘에 띄웠다는 성취감에 휩싸여 있지는 않을까…? "하, 하하, 하하하하하- !" 그는 양손을 크게 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이었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그 웃음엔 우월감이나 성취감 같은것 따윈 섞여있지 않았다. 정말로 그저,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오는듯한 맑고 상쾌한 웃음소리였다. "…." 그저 '날렸다' 라는 생각 뿐인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꽤 오랜만에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볼 수 있었다. "하- " 웃음이란건… 입술 사이에서 이렇게 비실비실 튀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군. 아무튼, 이것으로 된 것인가. 어째서 지금껏 인간이 발전하지 못했는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 인간은 앞으로 한 단계 나아갔다. 중력에 관한 신비를 이해할 정도의 강력한 마력 사역자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인간은 도구에 의지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도구를 이용해 땅을 정복하고, 도구를 이용해 바다를 탐험했던 것처럼. 인간의 정체(停滯)가 지금, 이 순간에 깨어졌다. # 카리에르제는 여전히 감격에 젖어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와는 다르지만, 어떤 감흥을 느끼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비공정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내 감각이 인간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마력이 빠르게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을 감지했다. 육신에 구속되어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것 밖에 감각할 수 없던 내 감각이 강제적으로 본래의 수준으로 개방되었다. 대단히 갑작스러운 '이변'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 기묘한 오한이 들었다. 거의 드래곤의 수준까지 도달한 강대한 마력은 놀랍게도, 사역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며 번개가 치는 것과 크게 다를것이 없다. 즉, '세계' 자체가 이 마력의 사역자였다. 그 강대한 마력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리에르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 이라는 감정을 그 순간에 철저히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허무로 돌아가 버릴걸 알면서도 나 역시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세계' 가 끌어 모은것과 같은 수준의 마력이 내 손에도 모였다.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론 행할 수 없는 마력을 끌어모은지라 몸 안의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지는게 감지되었다. … 좁은 공간에 이정도로 과도한 마력이 모여 있으니, 인간의 감각기관에도 역시 무리가 오는것이 느껴졌다. 제일 먼저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귓가를 간질이던 바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선명한 색을 감지할 수 있었던 눈은 이제 형체밖에 감지할 수 없었다. 세계가 온통 흑백으로 변해간다. 아무리 마력을 감지 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인 카리에르제 역시도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이상'을 눈치챘는지, 드디어 비공정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것이고, 마력을 사역할 수 없는 카리에르제는 당연히 그것을 볼 수 없다. "뭐, 지…?" 그 어리둥절한 한마디가 카리에르제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강대한 마력은 이 세상에서 카리에르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지워가고 있었다. 그의 몸이 강대한 마력에 의해 최소한의 단위로 분해되고 있었으며 시간선과 공간에서조차 그는 완벽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모든 '인과'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껏 그가 이루워 왔던 모든것이 전부 없던 일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강하게 대항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카리에르제에 대한 세계의 억지력으로 부터 그를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세계' 에 대항하는건 드래곤인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강대하다곤 하나, 나 역시도 이 세계에 속해있는 존재… 그런 내가 세계 자체에 대항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애초에 세계는 대항할 수 있는 존재조차 아니다. 내 행동은 잔잔한 바다에 가장 강력한 마법들을 퍼붓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바다는 잠깐동안 강한 파도가 치며 거대한 파문이 일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잔잔한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 세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애초에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이며, 세계는 그러한 모든 일들을 무제한으로 수용할 수 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껏 내가 살아오며 사역했던 마력보다 더 많은 마력을 세계에 퍼부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이룩해 놓은 문명을 몇번이고 파괴하고, 창조하고를 반복할 수 있을만큼 압도적인 마력이었다. 일전 레쥬에브가 은룡을 향해 발현했던 강력한 신격 마법 따위는 수 억번, 아니 수 백억번이나 발현시킬 수 있을만한 양이었다. 공간이 찢어지고 시간이 흔들리며 이 세계의 생명체들이 무수히 쌓아놓은 관념이 유리조각 처럼 산산조각 깨져 나간다. 하늘을 날던 새들은 바닥을 기며, 바닥을 기던 곤충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 순간만큼은 '하늘'은 더 이상 '하늘' 이라 부를 수 없었으며 '땅' 역시 '땅' 이라 부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맑은 하늘에 눈이 내리고, 비는 땅에서 부터 하늘로 내렸으며 대지에 깊게 뿌리 박고 있던 나무는 모두 뿌리를 드러내고 동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계에 대항할 수 없다. 세계의 법칙을 재편하고, 뒤흔들고, 아예 부숴 버릴 수 있을만큼 압도적인 힘과 신비가 모두 무(無)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대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도, 나는 바로 눈 앞에 있는 인간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건가…? "크- !" 세계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앞으로 달렸다. 어리석지만, 손을 뻗어 카리에르제를 잡으려 했다. 마지막까지…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길게 뻗었다. 강력한 신비에 '손'이라는 관념조차 파괴되고, 그것은 그저 뼈로 형체가 유지되고 있는 긴 살덩이에 불과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뻗었다. 뻗어서, 사라져 가고 있는 그에게 닿아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일을 멈추려 했다. 그것이 불가능한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는 종말이 찾아올때 까지 여전히 그 표정을 지은채, 결국 이 세상에 무엇하나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모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허무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단 일 초가 지나갔을지도 모르고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월 만큼이 더 지나간건지도 모르겠다. 시간 관념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이후, 파문이 잠잠해지는것 처럼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긴 살덩이였던 것은 '손'이 되었고, 새는 다시 하늘을 날았다. 벌레는 다시 땅을 기었으며 눈과 비는 그쳤고, 나무는 다시 대지에 뿌리를 박고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 모두 한바탕 거짓말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은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을 향해 뻗은 손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흑백이었던 세상이 천천히 선명한 색을 띄고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것이 나를 조롱하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뻗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담담한 이성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정말로,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건가? 이렇게 덧없이 순식간에 모두 허무로 환원되고 만건가? … 아니! 부정한다. 그가 만든 비공정이라면- 인간이 한 걸음 나아갔다는 흔적, 증명인 비공정이라면…!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늘엔 여전히 한 물체가 날아가고 있었다! … 아니, 정확하게는 날아가고 있는게 아니었다. 그저,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비공정의 형체를 하고 있지 않았다. 지체할 것 없이 마력을 사역해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빠르게 그 물체가 떨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카리에르제는 어째서 세계의 억지력을 받아 사라졌으며, 하늘을 날 수 있는 도구였던 비공정은 더 이상 어째서 비공정이 아니게 되었는가- ! 나는 그 모든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다. 물체는 작은 숲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쿵-!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고, 그 커다란 소리에 고요하던 숲속은 깜짝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 소리와 사방으로 도망가는 산짐승의 발걸음 소리로 가득찼다. 허공에서 바닥으로 부드럽게 착지한 나는, 떨어진 물체로 향하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나는 멍하니 바닥으로 떨어진 물체를 내려다 보았다. 잠깐 동안, 이 물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감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인식 그 자체를 지저분하게 조롱하는 것 같은 물건이었다. 눈을 비볐다.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한번 물체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마치 눈앞에 끼었던 안개가 걷히듯 물체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게 인식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참동안 아무생각도 하지 않은채 눈을 감고 몇 시간이고 그곳에 서있었던것 같다.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한번 그 물체를 주목했다. "…." 이것은…, 내가 설계했던 추진체였다. 인간인 카리에르제가 설계했던 비공정의 거대한 동체는 그와 마찬가지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려 없던 일이 되었고… 드래곤인 내가 만든 추진체만이 남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과거의 내가 나에게 남겼던 말이, '세계는 유한하다.' 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이름모를 산속에 우두커니 서서 비공정의 추진체였던 물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이제는 비공정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카리에르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인간이 남긴 잔재…. 세계 자체가 그를 거부하고, 깨끗이 지워버린 이상 그에 대한 기억은 오직 나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살아가며 많은 흔적을 남긴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첫 호흡을 내쉬었던 집, 유년시절에 있었던 흐릿한 추억, 꿈을 키워갔던 장소인 아카데미, 친교를 나누며 즐겁게 사귀었던 친구, 그리고 형제, 자매, 부모…. 카리에르제가 남겼던 모든 흔적… 그것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간에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누구의 기억에도 그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루말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움직였으며, 그 힘은 분명히 존재했었던 인간 한 명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런 힘을 발휘한 세계는 지금 나에게 마저 간섭하려 하고 있었다. "…." 세계가 속삭인다. 카리에르제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은 사실 원래부터 없었던게 아닐까? 만약 그가 정말로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지금껏 살아왔다는 증거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걸까? 살아왔었다는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면, 그는 원래부터 없던게 아닐까? "…." 아니면… 애초에 네 기억부터 잘못되었던게 아닐까? 네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할 수 없는 기억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끝없이 속삭인다. 그리고 사실 그 속삭임대로다.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이 있었고, 그가 하늘을 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세계의 힘이 작용하면서 부터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은 원래부터 없던 존재가 되어버렸다. … 인과 자체가 뒤틀어져 버린것이다. 그래, 그 말대로 이런 경우엔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속삭인다.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은, 처음부터 없 었 다.' … 세계 자체는 자아가 없다. 그것은 태초부터 그저 존재해오기만 했었던 것이며, 때문에 지금 내 머리속을 울리는 이 현상은 모두 비와 바람 같은 자연현상과 크게 다를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내가 카리에르제를 기억하고 있는 이상, 계속 이런식으로 속삭이며 영원히 계속되겠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는 말한다. "우습군, 그것은 증명 자체가 불필요하다. 내가 어째서 그가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가?" '증명하지 못한다면, 거짓이다.' 나는 인과율을 초월하며 모든 필멸자들을 설득시킨 세계의 의지를 만능의 언어로서 담담히 밀어낸다. - 나는 증명으로서 타자(他者)를 설득하고, 그것으로 내 기억을 확고히 해야할 이유가 없다. 내 기억과 인식, 자아는 세계가 시작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완전무결했으며, 그렇기에 나는 선언한다. 힘을 실었다. - 카리에르제라는 인간은, 존재했었다. 선언과 동시에 속삭임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세계는 곧 나를 다시 설득하려 들 것이다. 이 속삭임은 카리에르제를 잊어버리거나 죽음에 도달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망각도 죽음도 모르는 불멸자이므로 기억의 리셋 따위를 하기 전까지 설득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기억의 리셋을 해야할 이유 따위도 되지 못하므로 난 영원히 이 속삭임을 들으며 존재해야 하겠지. … 속삭임 따위야 영원하다 한들 어떠한가? "후…." 그리고 드디어, 나는 답에 도달했다. 세계는… 말하자면, 커다란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그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것은 언뜻 무한으로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명백히 끝이 있는 유한이다. 그 유한한 세계에 무한에 가까운 드래곤이 네 개체나 존재하고 있다. 그것으로 그릇은 이미 꽉차있는 것이다. 다른 개체가 그릇을 채울만한 공간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리에르제에 의한 인간의 변혁은, 이미 꽉차있는 그곳에 물을 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넘쳤고, 넘친것은 더 이상 그릇안에 있을 수 없다. 그가 세계의 억지력을 받아 사라진것은, 넘친 물이 더 이상 그릇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태양은 매일 아침 일정한 방향에서 떠오르며, 모든 필멸자들의 끝은 죽음이다. 그것과 아무것도 다를게 없는 일이란 이야기다. 세계라는 그릇이 드래곤이라는 내용물로 이미 꽉차 있는 상태라면 인간은 물론, 아직 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다른 모든 종족들의 발전까지도 불가능하겠지. 드래곤이 네 개체나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 세계는 영원히 정체된 상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왜 그릇에 물이 차고 넘친 다음에야 이것을 알게 된 것일까. 나 역시도 은연중에 이 세계는 이미 무한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로나벨아크하임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결국 모든 드래곤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를게 없는 일이라고 했었지. 정말, 그의 말대로다. 설마 나 자신조차도, 나의 적이었을 줄이야…. # 결론은 내려졌다. 그리고 더 이상 인간을 가장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인간' 임을 유지하기 위해 제한해두었던 모든 속박을 벗어버렸다. 내 몸은 중력의 구속에서 벗어나 점점 하늘로 날아올랐다. 등에선 용의 날개가 옷을 찢으며 펼쳐졌고, 손에선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연약한 인간의 눈은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 용의 눈으로 변모하여 지상 구석구석이 확연하게 내려다 보이게 되었다. 나는 잠시 그대로 허공에 멈추어 서서 용의 눈을 통해 이 세계를 둘러보았다. 세상은 커다란 막에 뒤덮인 구(球)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 대륙에서 벗어나 푸른 바다를 갈 수 있을때까지 나아가본 필멸자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끝에 '세계의 끝' 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론 무슨수를 쓰더라도 더 이상 나아갈수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근거없는 믿음에 불과해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실제로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대륙을 둘러싼 거대한 바다, 그리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천장이 존재하고 있는 하늘, 이것이 이 세상의 전부인 것이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지만 새삼스레, 나는 이곳이 굉장히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비공정이 완성되어 필멸자들이 하늘을 날고,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너무 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나와 다른 드래곤들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니…. 나를 제외한 다른 드래곤인 화룡과 은룡, 그리고 흑룡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시작은 화룡인 로나벨아크하임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로 하여금 아무 의미도 없을 필멸자의 생활을 둘러보길 종용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요르간드에서 나와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희박한 대기가 숨통을 죄어온다. "하아…."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선 마지막 호흡이 될 숨을 힘겹게 내뱉으며, 동시에 대기로부터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을 그만두었다. 마지막 숨을 내뱉고 나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근 천년동안의 과거가 감은 눈 속에서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히 지나간다. 내가 만난 수 많은 필멸자들의 삶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렇게나 수 많은 타인과 섞여있으면서도 서로 닮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수 만큼 제각각의 세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 난잡함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 아둥바둥이었다. 서로 맞물리지 않으려 하면서도 맞물리고, 질척거리며 꿈틀거리는 그 모습은 비참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윽." 역시… 나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굳이 옳은 것이든, 옳지 않은 것이든. 행복한 것이든, 행복한 것이 아니던 간에. 이제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을 부를 것이다. 그는 내가 답을 얻길 바랬었으며, 또한 바라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을것이다. 자, 이제 그의 진의를 물어볼 시간이다. 결심이 선 뒤, 만능의 언어로서 세상을 울려 로나벨아크하임을 부르려던 나는, 품속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옷 속을 뒤져 손에 쥔 것은… 푸른빛을 발하고 있는, 정령의 씨앗이었다. #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돌아온듯한 느낌이다. 나는 허공에 띄워져 있던 몸을 땅에 부드럽게 착지시켰다. 이곳은 내가 지배하는 대지인 요르간드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침묵하는 숲이다. 대기는 축축했고 땅은 질척거렸다. 위를 올려다 보니,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지상으로 따뜻한 비를 내려보내고 있었다. 주변은 희뿌연 안개와 투둑- 거리며 나뭇잎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시선을 비스듬히 들어 안개를 꿰뚫어 보았다. 뿌연 안개 너머, 내 본래 몸보다도 거대한 나무가 고요히 서있는게 보였다. 요정왕국 중심부에 위치한 세계수… 나는 정령의 씨앗을 그 곁에 심으려 한다. 나는 인간도 용도 아닌 모양새를 한채 펼쳐진 날개를 접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안개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무 사이를 걷는도중, 나는 수 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풀숲을 헤치며 먹을 것을 찾는 산짐승, 나무를 쪼아대며 벌레를 찾는 새, 그리고 고요히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숲의 요정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속엔 순수한 호기심 밖에 없었다. 폐쇄적인 요르간드 안에 살며, 자연에 가까운 존재인 그들이 처음보는 내게 호기심 이외의 다른 감정을 품기란 어려운 일일테지. 시선을 못본척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 나무만이 가득한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 요정들의 왕국엔 인간들의 '성벽' 과도 같은, 너와 나를 구분짓는 경계라는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울타리 조차 없다. 때문에 어디서 부터가 거주구이고 숲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겠지. 세계수를 둘러싼 숲… 그 자체가 그들의 집이며 터전이었다. 희미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과 같이 알듯 모를듯 옆을 스쳐지나가며 결코 오래 머무는 법이 없는 노랫소리도 희미하게 귓가를 스치는듯 했다. "…." 앞으로 나아갔다. 세계수가 시야에 단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무성히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아직 앳된 요정들의 얼굴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인간들과는 다르게 경계심이란건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세계수에 완전히 다가가기전, 찾을수 없던 경계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것을 경계심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 요정들이 인간처럼 국가를 이루었다는걸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언덕에 가벼운 무장을 한 요정들이 내쪽을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속에 희미하게 섞여있는 감정은… 은근한 두려움? 저들은 고요하지만 확실하게 주변으로 퍼지고 있는 내 존재감을 읽고, 내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선명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요정이 내게로 다가왔다. 요정은 노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는 나이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지만… 내 앞에 서있는 이 요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어린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노래하는듯한 어조로 내게 인사했다. "요르간드를 지배하는 백룡님께 인사드립니다. 저희 요정들의 왕국엔 무슨일로 오셨는지요?" … 인간들처럼 복잡한 미사여구나 쓸데없는 말이 철저히 결여된, 선명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선명한 질문과는 별개로, 그녀는 내 앞에서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요정은 기감이 상당히 민감한 모양인지, 희미하게 퍼지는 내 존재감조차도 견디기 힘든것 같았다. 그나저나 용건이라…. 나는 눈 앞에 있는 요정을 위해 슬쩍 존재감을 없애고 손을 내밀며, 마찬가지로 노래하는 듯한 요정어로 답했다. "이 씨앗을 세계수의 옆에 심으려고 왔단다." 푸른 머리카락의 요정은 내 손에 들린 작은 씨앗을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어보였다.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는 씨앗이군요." 용건이 확인되자 요정들은 어렵지 않게 길을 내주었다. 그들은 어째서 내가 씨앗을 심으려 하는지에 대한 의문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듯 했다. 요정 '왕국'이라…. 나는 그들의 행동을 보며 요정이란 종족이 어째서 국가를 이루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국가를 이루었다기엔 이들의 행동이 너무나 무르다. 내가 이 대지를 지배하는 드래곤이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는 이들이 '제국' 을 이뤄 걷잡을수 없이 거대해진 인간에 대항하기 위해 군집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요정들의 성향을 생각해 봤을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왕국을 이루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려울것 같다. 뭐, 나는 아직 인간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았다고 할 수도 없을뿐더러 요정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게 없으니 모든건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그들을 뒤로하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세계수로부터 뻗어나온 뿌리가 보였다. 뿌리라곤 하지만 세계수 자체의 크기가 워낙 컸기에 뿌리조차 고개를 한참이나 들어야 모두 보일만큼 거대했다. … 뿌리 하나가 웬만큼 자란 나무 하나보다도 더 거대한것 같군. "흐음…."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자연의 가장 강대한 신비중 하나인 세계수의 주변엔, 그 영향을 받아 정(精)을 머금고 있는 나무들이 굉장히 많았다. 개중엔 자아를 획득해 정령이 된 나무도 적지 않았다. 역시… 이곳이 이 씨앗을 심기에 최적의 장소인것 같다. "아- "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 잠시 눈을 감은채 따뜻한 비를 맞으며 그것이 대지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빗방울은 하나가 아니지만, 눈을 감은 상태로 쏴아- 하고 비가 대지에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비라는게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온 세상을 뒤덮을 듯, 압도적으로 들려오는 빗소리 사이로 작은 웃음소리 같은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소 높고 가느다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다소 먼 곳에 위치한 세계수의 뿌리위에 작은 요정들이 모여있는게 보였다. 그들은 뿌리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자신들의 몸보다도 커다란 나뭇잎을 하나씩 머리위에 들고 비를 피하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누군가에겐 재밌게 말을 하는 재주라도 있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그곳에선 또다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보니, 빗소리에 묻혔던 말소리가 조금씩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 " …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다. 그들이 있는 뿌리 밑까지 다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요정의 어린아이들 사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녹빛의 요정 한 명이 보였다. 그녀는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나뭇잎을 머리위에 쓰고서 그들에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어 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꽤 재미있는 모양인지 아이들 사이에선 탄성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새가 지저귀는것 같은 웃음소리가 퍼져나오기도 했다. 나는 썩 유쾌한 심정으로 녹빛의 요정이 어린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한참동안이나 지켜보았다. "앗, 여왕니임- 저기 누군가가 있어요!" … 별로 발견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좀 가까이 있었던게 화근이었나보다. 떠들썩 하던 그들 무리는 어린아이 한 명의 외침에 곧 잠잠해졌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아름다운 요정 여성 한 명이 두꺼운 빗줄기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투명한 청녹빛 눈동자와 내 호박색 눈동자가 마주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커다란 나뭇잎을 떨어트렸다. 내리는 비와함께, 나뭇잎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녀는 조금씩 비에 젖어갔다. 아이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 리체?" 중얼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인데도, 그것은 선명하게 내 청각을 건드렸다. 칼리아넬…. 그녀는 모든 요정을 지배하는 여왕이 되어서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정도로 여전히 이야기하는걸 좋아하는군. "안녕."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에게 나는 요정어로 인사를 건넸다. # 모여서 이야기를 듣던 요정의 아이들은 모두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 돌아가버렸다. 칼리아넬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내 굵은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나는 칼리아넬과 함께 나와 그녀를 모두 덮을 정도로 큰 나뭇잎을 쓰고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떠들썩한 아이들이 사라져버리니 나와 칼리아넬 사이에 잠깐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나뭇잎을 함께 쓰기위해 그녀와 가까이 앉아 있는 탓에, 맞닿은 어깨에서 다소 서늘한 요정의 체온이 전해져왔다. 쏴아아- 비는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의 가지와 나뭇잎을 타고 내리는 빗물은 어디엔가 고여 있다가 한꺼번에 풀려나온듯, 나뭇가지 사이로부터 마치 폭포처럼 흘러 내렸다. … 비의 양이 상당히 많은 탓에 쓰고 있는 나뭇잎으로도 비를 피할 순 없었다. 칼리아넬은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듯한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속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듯 몸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나뭇잎으로도 막지 못한 빗물이 그녀의 녹빛 머리카락으로 부터 흰 목덜미, 그리고 가느다란 쇄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숨조차 쉬는듯 쉬지 않는듯, 미동도 없는 칼리아넬의 모습은 긴 팔을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드리우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와 다를게 없어 보였다. 그녀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먼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에 잔뜩 스며든 물기를 짜내며 칼리아넬의 시선을 쫓아보았지만, 특별히 그녀가 주목할만한건 발견되지 않았다. … 아니,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수풀 사이를 계속 들여다 보니 노란 나비 한마리가 힘없이 날개를 팔랑거리며 비를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나비는 빈틈없이 내리는 비 사이로 힘겹게 날개를 움직이다 이내, 나뭇잎에 맺혀 있던 커다란 물방울을 맞고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 닿아있는 어깨에서 칼리아넬이 잠시 몸을 움찔하는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눈길로 수풀 사이의 치열한 미시 세계를 쫓고 있었다. "그곳에서… 원하는 것은 찾으셨나요, 칼리체 님?" 요정어가 아닌, 능숙한 인간의 언어였다. 팔백년이 넘은 일인데… 용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응, 찾았지." 담담한 긍정에 칼리아넬은 내 어깨에 부드럽게 머리를 기대왔다. 아니, 기대려 했지만 내 키가 그녀보다 작은 탓에, 결과는 내 머리에 그녀의 머리를 기댄 모양새가 되었다. 칼리아넬은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체 님은 그때보다 키가 더 작아지셨군요. 그리고 저는… 더 커졌구요." 그때보다 더 어린 모습을 하고 있는터라, 어쩔수 없는 일이지. 나는 나 스스론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끝이 없는 영원한 생을 구가하는 탓에 모든 시간의 흐름은 나를 빗겨 지나가며, 그래서 내겐 성장이란 요소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것 같다. 어린 소녀였던 칼리아넬이 내 옆에 다 성장한 모습으로 앉아있는걸 보며, 나는 시간의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가 수명이 특히 긴 요정족이어서 가능한 것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다른자들처럼 죽음에 도달해 비와 바람,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겠지. 백색의 좌가 시간의 무정함에 대해 탄식했던것을 생각하며 머리위에 쓰고 있던 나뭇잎을 고쳐잡았다. 나뭇잎 위에 잔뜩 고여있던 물들이 촤악- 하고 쏟아져 내렸다. … 흠, 훨씬 가벼워졌군. 갑자기 가벼워져 바람에 펄럭거리는 나뭇잎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놀랐었지. 그렇게 조그맣던 요정이 나라를 만들고, 그곳의 여왕이 되어있을 줄이야…." "여왕이라고 해서 별 대단한건 없어요. 애초에 왕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것에서 따온것에 불과하고… 제가 이런 자리에 서게 된 것도 세계수에서 태어난 요정이라는것 때문이니까요." 그러고서 칼리아넬은 그저 대표자일 뿐이지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고서 그녀는 긴 녹빛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훑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머금어져 있던 물기가 빠져나오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때 네거스텐 제국에 방문했을때 주변의 다른 요정들이 저를 그렇게 떠받들었던건 그저 인간에게 보여주기위한 것이었구요. 그저… 우리 요정들도 인간처럼 집결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으니 얕보지마라- ! 정도였겠죠?" "음… 그렇군." 칼리아넬은 잠시 물기를 머금고 있는 세계수의 뿌리를 부드럽게 쓸어보더니 나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인간들의 사회에 꽤 머무르셨던 탓일까요, 칼리체 님도 익살이 많이 느셨는걸요? 제가 여왕이 되었다는 것에 놀랐다는 말을 하시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권위와 영광이라 해도 칼리체님에게 놀람조차 될 수 있을까요?" "…." 음… 칼리아넬의 성장을 완전히 체감한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얌전히 저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데, 칼리아넬이 갑자기 강하게 안겨왔다. 내 작은 몸으론 그 힘을 해소하지 못했고, 때문에 나와 그녀는 경사진 뿌리 위에서 몇바퀴나 굴러야 했다. … 정신을 차려보니 쓰고 있던 나뭇잎은 저 아래로 펄럭거리며 떨어지고 있었고, 우리는 따뜻한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칼리아넬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내린 빗방울이 떨어져내려 내 뺨을 타고 흐르는게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눈 앞에, 칼리아넬의 투명한 청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어딘가 눅눅한 비냄새와 함께 요정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칼리체 님, 이젠 제가 두려워졌나요?" 베델이라는 인간과 함께 마경으로 들어가기전 칼리아넬이 했던 말이었다. 언젠가, 자신을 두려워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조금… 그런것 같기도 하군." 칼리아넬은 가벼운 미소조차 짓지 않은채 투명한 눈동자로 내 호박색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 보더니, 내 목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조금 따끔했던것 같다. … 빗줄기가 한층 더 거세지고 있다. 그치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런 기세라면 비는 며칠동안이나 지속될듯 하다. "잠시 이대로 있어주세요." 칼리아넬의 청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칼리아넬이 잠시라고 말하긴 했지만 우리는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동안 비를 맞으며 세계수 뿌리 위에 누워 있었다. # 세계수의 뒤로 돌아가자, 그곳엔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요정들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 오벨리스크 같은 길쭉한 탑… 그리고 요정들의 왕궁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 재미있는건 그런 건축물 모두가 그저 자연의 일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주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조화에도 치명적인 결점은 있었는데, 그것은 칼리아넬이 머물고 있는 왕궁이었다. 오직 이 왕궁만이 주변의 조화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 왕이라는 것이 본래는 요정의 것이 아니어서 그런걸까…. 칼리아넬을 따라 그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엔 창문이 없었고, 때문에 비와 바람, 나뭇잎들이 안으로 아무렇게나 들어와 건물 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 왕궁이라고 칭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흐르고 있다. 아마 나와 칼리아넬 이외엔 이 건물안에 있는 다른 요정은 없는 모양이다. 문마다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인간들의 황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천장에서 드리워져 있는 긴 넝쿨줄기를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옆에서 개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에, 나와 칼리아넬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올라온건지,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아 울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칼리아넬은 개구리를 보며 작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조심스럽게 개구리를 들어 창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그녀는 개구리가 어딘가로 폴짝폴짝 뛰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쾌한 친구에요. 가끔 침실에까지 찾아들어와 시끄럽게 울어대 곤한 잠을 깨울때는 조금 곤란하지만요." 흐음, 개구리가 침실에까지 들어와 잠을 깨우는건가…. 정말 유쾌한 친구로군. "오늘처럼 비가 올땐 낮부터 여러 마리가 찾아와 요란하게 울어대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시끄럽다기보단 신이 난달까요…? 가끔, 악기를 들고 그들의 소리에 맞춰 재밌게 연주하기도 한답니다." 개굴 거리는 소리에 맞춰 연주를 한다고…?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언제라도 들려드릴게요." 언제라도. 그 말이 시사하는 바가 심장으로 차갑게 파고 드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언제라도 내가 칼리아넬이 개구리와 함께하는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 칼리아넬의 방에 도착했다. "자, 옷 갈아 입으세요." 칼리아넬은 비에 젖은 옷을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내게 하얀 옷을 내밀며 말했다. 받아든 옷의 감촉이 다소 까끌까끌하다. 나는 잘 개어진 옷을 양 손으로 잡고 펴보았다. 그것은 작은 원피스 형태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옷이었다. "이 옷은…." 그리 멀지 않은 기억속에 있는 형태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한 이 옷은… 칼리아넬이 어릴적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다른 옷이 없으니까…." 칼리아넬은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은채 턱을 괴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엇다. … 옷에 맞는 성별 따위가 신경쓰이는건 아니다. 다만, 이 옷 자체가 과거 기억의 언저리에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 뿐.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옷을 힘겹게 벗고 나서, 대강 몸에 남은 물기를 닦은 뒤 칼리아넬이 준 하얀 옷을 입었다. 몸에 닿는 까끌까끌한 감촉이 그리 나쁘지 않다. "잘 어울리네요, 칼리체 님." "그런가…." 나는 그저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것 뿐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칼리아넬은 과거 자신이 입었던 옷을 내가 입은것을 보고서 굉장히 기쁜것 같았다. 그녀는 손에 작은 끈을 들고 내게로 오더니 이제는 꽤 자란 내 백색 머리채를 부드러우누 손길로 묶기 시작했다. 다소 차가운 칼리아넬의 손길이 목덜미 쪽을 건드릴때마다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탁자에 작은 촛대가 놓여 있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방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칼리아넬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촛대에 불을 붙여 두었고 희미하지만 따뜻한 빛이 방 안에 가득차 있었다. 요정의 건축물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씩 바람이 들어와 촛불을 흐트려 놓기도 했지만 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었다. … 흔들거리는 불을 멍하니 보았다. "다 됐어요." 칼리아넬은 내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나와 조금 떨어져 이리저리 내 모습을 살피는듯 했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작게 웃음 짓고서 말했다. "너무 예쁜 요정족 소년 같아요." 소년…? 나는 치맛자락 끝을 잡고 잠깐 들었다 놔보았다. 굉장히 가벼운 소재이기 때문인지 치맛자락은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천천히 내려왔다. "글쎄, 소년이라기보단 소녀가 아닐까." "어머, 요정족의 소년들은 모두 지금 칼리체 님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답니다. 무엇보다도…." 칼리아넬은 끈으로 묶어 올린 내 머리카락을 쓸며 말을 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묶고 다니거든요." … 관습, 같은 것인가. 이 복장도 인간들과는 다르게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양이다. #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별 시덥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창 밖으로 이따금씩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고, 여전히 비는 그칠 기색이 없어 보인다. 어느새 칼리아넬은 입을 다문채 내 옆에 누워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고, 나는 품속에 있는 정령의 씨앗을 생각하며 인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천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건축물의 지붕은 비를 완전히 막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완전히 막지 않았다, 라고 해야겠지. 듬성듬성 난 구멍 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툭, 툭-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인간의 시계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바닥에 물은 고이지 않았다. 바닥도 천장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막혀 있지 않았고,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다. 물은 그 틈으로 빠지고 있었다. 이 건물… 주로 목재로 만들어진것 같은데, 이렇게 물이 새도 아무 문제가 없는건가? 그런 사소한 의문들이 가볍게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의문들을 해결해야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칼리체 님." 졸린 듯한 목소리로, 칼리아넬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전히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채였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느다란 팔로 내 몸을 구속하듯 감싸안았다. 내 머리를 가슴께에 끌어 안고서 칼리아넬은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제가 죽을때까지 함께 있어준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렇죠…?" 뺨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 그랬지." 히히, 하고 칼리아넬은 먼 과거에 그랬던것처럼… 어린아이 같이 웃었다. 천진하고, 너무나 만족감에 찬 웃음소리라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가 죽은 이후에도, 칼리체 님은 저를 영원히 잊지 않으실테죠?" "용은 망각이 없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것 만으로도 칼리아넬은 만족한듯 나를 끌어안고서 천천히 잠이 들었다. 곧 새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로 가득찼다. 그녀가 잠이 들고서도 나는 한참동안 곁에 누워 있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에서 몸을 빼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창 밖 가득 보이는 거대한 세계수는 희미한 빛을 발해 주변의 어둠을 쫓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뒤를 돌아 칼리아넬이 평온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 칼리아넬…." #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빗줄기가 꽤 옅어져 있었다. 그렇게나 끝없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요정의 왕궁을 뒤로한채 나는 칼리아넬과 걸어왔던 길을 거꾸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할만한 도구는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껏 새로 갈아입은 옷이 다시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래도 머리카락은 칼리아넬이 묶어준 덕에 비를 맞아도 목덜미나 뺨에 많이 달라붙진 않았다. 잔뜩 비에 젖어 축축한 진흙길을 천천히 걸었다. 나는… 죽을때까지 함께 있어 달라던 칼리아넬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아니, 지키지 않을 것이다. "…." 지금껏 해왔던 모든 크고 작은 약속들을 기억한다. 나는 모든 약속들을 지켜왔다. 기억에 없는, 먼 과거의 나 역시도 약속을 지켜왔을 것이라 확신한다. 강력한 권능과 무한한 시간을 가진 내게, 지키지 못할 약속이란건 없었다. 첨벙-! 물이 가득 고여있는 곳을 밟은 탓에 흙탕물이 튀겼다. 흙탕물은 맨 다리와 하얀 치마에 튀겨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도달한 답이 나 자신의 파멸일걸 알았더라면, 나는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아니, 할 수 없었겠지. 지키지 못하는 약속엔 의미가 없다. 그런 무의미를, 칼리아넬에게 남겨주게 될 줄이야. "아…." 이것이 후회인가? 지금껏 나는 후회라는 관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설령,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어 현재에 큰 결점을 남길지라 해도 나는 그것들 모두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과거의 잘못이 시간을 넘어 현재에 책임으로 돌아온다면, 기꺼이 그 책임을 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 뿐이었는데….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경우에 나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못한다. 내가 앞으로 맞이할 것은 파멸이고, 그 파멸 이후에 나는 칼리아넬에게 아무것도 보상해 줄 수 없다. 그녀에겐, 무의미만 남는 것이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칼리아넬이 잠들어 있는, 조금 쓸쓸한 느낌이 도는 요정의 왕궁을 잠시나마라도 한 번 더 시야에 담아두고 싶었다. 어째서…? 나는 망각이 없다. 한 번 시야에 담은건 영구히 기억에 저장된다. 나는 어느때건… 백년이 지나건, 천년이 지나건, 만년이 지나건, 억년이 지나건간에 방대한 기억속에 저장된 기록들을 아무런 제약없이 회상할 수 있다. 모든것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칼리아넬이 머물고 있는 왕궁의 크기, 그 건물의 벽이 어떠했는지, 건물 안에 은근히 풍기던 비 냄새는 어땠는지, 칼리아넬이 유쾌한 친구라고 말했던 개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울음소리를 내었는지, 그녀가 자신의 방에서 내 머리카락을 묶어주었던 부드러운 손길과 희미하게 후각을 어지럽혔던 체취… 정말로, 모든 것들을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도… 다시 한번 칼리아넬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것을… 내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후회, 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묘한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나도… 후회라는걸 하는군.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은 앞으로 나가려는 발걸음을 제지했지만, 나는 그 의미없는 충동을 흩어버렸다. 칼리아넬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느릿한 발걸음이지만, 쉬지 않고 걷다보니 어느새 다시 세계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거대한 뿌리가 얼기설기 얽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뿌리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으로 부드러운 흙을 조금 퍼내었다. 퍼낸 흙엔 붉은 몸을 가진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렁이는 몸을 꿈틀거리며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땅으로 떨어졌다. … 어디로 가는걸까. 지렁이는 긴 몸을 이끌고 몸부림치며 계속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지렁이의 모습을 쫓다, 품속에 손을 넣어 계속 지니고 있던 정령의 씨앗을 꺼내었다. 그것을 파낸 땅에다 넣고, 위에 흙을 다시 덮었다. 깊게 묻을 필요는 없겠지…. 덮은 흙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이것으로, 정령과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원래부터 정령이 깃든 나무에서 비롯된 씨앗이기도 하고, 자연의 가장 거대한 신비인 세계수가 옆에 있으니, 이 씨앗은 금방 성장하여 다시금 정(精)이 깃들고 의지를 갖게 될 것이다. 새로이 태어난 정령에게 직접 이름을 붙여 불러주고 싶었는데… 그 바램은 그저 바램으로만 끝나게 되었군. 몸을 일으켰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고, 조금씩 걷혀가는 검은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 새벽이다. # 몸을 띄워 하늘로 올라갔다. 대기는 점점 희박해지고, 대지는 짙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고 거친 바람이 불어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힘없이 휘날렸다. 공중으로 끝없이 올라가던 나는 어느 순간, 위를 쳐다보았다. 짙은 대기를 뚫고 보는 별빛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반짝이는 별들이 검은 밤하늘에 끝도 없이 수놓여 있었다. 허공에 몸을 뉘였다.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니, 눈앞에 펼쳐진 수 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검은 세계만이 전부인것 같았다. "아- " 정말… 너무나도 거대하고 웅장하다. 밤하늘은 저 웅장함 만으로도 지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위대하고 영광된 존재라 해도 그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을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손끝으로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이것은… 세계의 끝이다. 이 이상으론 무슨짓을 해도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너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문을 품었었다. 존재하지 않는데도, 어째서 세계의 끝 너머로 저 수많은 별들이 보이는 걸까. 존재하지 않는데도, 어째서 세계의 끝 너머로 이곳보다 더 거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이제서야 그 의문의 답을 알 수 있다. 저것은… 우리 드래곤들의 존재로 인해 잃어버린 세계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흔적만이 남아 지금도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있다. 그 사실이… 몹시 견디기 힘들다. "…." 오랫동안 그렇게 허공에 누워 있었다. 거센 바람 때문일까, 칼리아넬이 묶어주었던 머리끈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텅 빈 허공을, 내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수놓는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날은 밝아지고 천천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수 없이 보아온 일출의 모습이건만… 나는 더 이상 그 모습에서 예전같은 즐거움은 찾을 수 없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채,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낼때까지 나는 이글거리는 저 거대한 구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태양은 지고, 떠오른다. 그것은 절대 불변의 진리….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 영원. - 로나벨아크하임. 만능의 언어에 의해 화룡의 이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허공에 지진이 나기라도 한듯, 대기는 웅웅 거리며 떨고 구름이 갈라졌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모든 속박을 벗어던졌다. 인간의 나약한 육신은 사라지고, 강대한 마력과 신력이 온 몸 구석구석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비늘과 발톱, 하늘을 가득 덮는 거대한 한 쌍의 백색 날개….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니,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까지만 해도 온 몸 구석구석을 맴돌던, 냉기. 떠오른 태양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어 놓았던 바람…. 그 모든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내 감각에서 사라져간다. 너무나 강대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용의 신체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용안(龍眼)으론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금 내가 있는 세계의 끝에서 부터 반대편에 있는 세계의 끝까지… 그 중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정확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허공을 맴도는 짙은 구름조차도 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 수 없었다. … 저 멀리서, 내 부름에 응한 화룡이 이쪽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허공에 계단이라도 있는듯 한발자국씩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냥 보기엔 작은 걸음이지만, 그가 그 작은 걸음을 옮길때마다 그의 신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크게 바뀌고 있었다. 화룡은 곧 내가 있는곳까지 도달해 내 앞에 섰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인간 행세는 이제 그만두는 건가?" - 더이상 인간을 연기할 필요는 없어졌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까. 로나벨아크하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듯 하다. 바로 저 표정- 인간의 감정도 없으면서, 마치 그것을 가지고 있는듯 천진하게 연기하는 저 얼굴. "인간을 연기하면서까지 원하는 것이 있었다고…? 참으로 의외로군. 무엇보다, 원하는 것이 있었다는것 자체가 말이야." 그래, 그 자체가 말이야… 하고 다시한번 중얼거리며 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활짝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축하해. 내 빈약한 상상력으론 드래곤이 인간 행세까지 해 가면서 얻고 싶은게 있었다는것 자체가 이해가 안되지만 말이지." … 날개를 한 번 펄럭였다. 거대한 날개는 가볍게 움직이는 것 만으로도 대기를 온통 흐트려 놓았다. 우리의 밑에 유유히 떠가고 있는 구름이, 내 날갯짓에 일어난 바람에 의해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거의 태풍같은 바람이 몰아쳤지만, 로나벨아크하임은 머리카락 한 올 조차 흩날리지 않았다. - 내가 원하던 것은 어째서 이 세계가 정체(停滯)되어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네게 물을 것이있다. "그게 무엇이지?" - 너는 이 모든것을 알고 있었나? 모든것, 이라는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화룡과 은룡의 방해에서부터, 그가 나로 하여금 인간들의 사회를 체험해 보도록 종용했던것. 그리고 내 기억의 리셋까지. 만능의 언어는 모든 정보를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로나벨아크하임에게 전달했다. 따라서 소통에 있어, 오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쎄…."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대해 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근육을 움직여 만들어낸 비틀어진 웃음을 얼굴에 띄운채, 나를 빤히 바라만보고 있을 뿐이었다. … 뭐, 답해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껏 미심쩍은 그의 행동과 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지못하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지만, 모든 의문을 해결해야할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할 것은- "그래서 어쩔생각인가? 세계의 정체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우리 드래곤들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지. 너는 화룡인 나나 은룡, 흑룡 중 한 개체를 이 세계에서 소거시키기라도 할 셈인가?" … 생각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그것보다, 당연히 예상했던 것이긴 하지만… 역시 화룡은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태초부터 현재까지, 모든것을 보아왔던 용. 내가 이제서야 발견한 것을 그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 그것은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지. 드래곤은 불멸의 존재다. 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죽음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가 신이었던 때처럼, 드래곤인 현재 역시도 세계를 이루는 시스템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는게 꼭 죽음만을 의미하는건 아니지. "그래서…?" 로나벨아크하임은 대답을 재촉한다. … 따로 생각해볼 것도 없다. 내 결심은 우리의 존재가 세계의 정체의 원인이라는 것을 들었을때부터 정해져 있었지. - 내가 이 세계로부터 물러나겠다. 드래곤 모두가 이 세계로부터 사라질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필멸자들이 필사적으로 세계라는 그릇을 채워나간다 한들, 그들은 나 혼자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반도 채우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사라지는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굳이 은룡과 화룡, 그리고 흑룡에게 까지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또다시 질문한다. "어떻게? 용은 죽을 수 없는 존재다." - 공간 도약을 할때 생기는 시공간(Space-time)의 끈을 잡고 공간의 틈에서 영원히 머물겠다. 죽을 수 없는 내가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방법은 그것이 유일하니까. 공간을 도약할때, 도약하는 개체는 아주 잠깐동안 음차원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뭐, 아주 잠깐이라곤 하지만 그때 머무르는 시간은 무한히 0 에 수렴한다. 때문에 머물게 된다- 라는 말도 조금 어폐가 있긴 하다. 그곳은 명백한 허수의 세계다. 모든 사물이 그림자를 가지듯, 이 세상은 그러한 음차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마력을 이용해 공간도약을 하는 매커니즘에서 아주 잠깐동안 필요로할 뿐인 요소인 그곳에 주목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그곳에 가게 된다면 나 역시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조악한 속임수일 뿐이지만 그것은 죽음이 없는 나를, 이 세상에 죽음이라고 인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그것이 네 결론인가?" 나는 긍정한다. - 그렇다. 내 긍정에 로나벨아크하임은 얼굴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띄우며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다. 허수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존재인 너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무(無)를 강요받게 될 것이고 드래곤의 불사성은 그것을 거부하게 되겠지." 그는 내 결심을 철저히 조롱하기라도 하듯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나는 너무나 인간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의 행동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루루렌칼리체, 너는 그 끝없는 모순의 틈바구니 속에서 찢기고, 불타고, 박살나며 살아있는 것에 대해 끝없이 조롱받으며 천한것처럼 멸시받고, 철저히 능욕당할 것이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가 그런 위험을 겪는게 가당찮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내 팔을 벌리고, 내게 물었다. " -그런데도 너는, 사랑해마지 않는 저 필멸자들을 위해 허수의 세계로 들어가 희생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희생이라고…?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물었다. "세계가 정체한다 한들 어떠한가? 과연 필멸자들은 발전하기 전보다 발전한 후가 더 행복할 것인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꼭 옳은 일인가? 누가 그것을 정하지?" 화룡의 의문은 옳다. 정체된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옳은일? 잘못된 일? 그것은 모두 필멸자들의 관념이다. … 로나벨아크하임은 나에 대해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군. 나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사랑해마지 않는 필멸자 들이라고…? - 전에도 말했을 텐데, 로나벨아크하임. "…." - 나는 지상의 저 가여운 필멸자들을 위해 허수의 세계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희생이라 말하는 것이 우습군. 그것은 잘못되었다. 사랑을 언급하는 것에서 부터 이미 우스운 일이었다. 은룡이나 화룡은 나를 백룡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 나는 그저 나의 존재 자체가 정체의 이유라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너와 마찬가지로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껏 오롯이 홀로 존재해 왔다. 내 자아는 타자(他者)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어떤 형태로든 내가 타자의 존재 자체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걸 원하지 않는다. "…." - 로나벨아크하임, 말하자면 이것은 '책임' 인 것이다. 신으로 존재했던 우리가 자유를 원해 필멸자들의 신화를 뒤집어 쓸때부터 깃들었던 것이지. 그것엔 필멸자들의 발전 따위야 끼어들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화룡이 이빨을 드러내며 외쳤다. "지독히도 오만하구나 백룡이여. 정말 지독히도 오만해…!" 로나벨아크하임은 나를 이해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나를 오만하다고 말하는 그에게 내 뜻을 전했다. - 드래곤이란 존재는 본래 필멸자들의 신화였지. 신화는… 그저 신화로써만 남았어야 했다. # "이번에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군, 루루렌칼리체." 이번에도, 라고…? 로나벨아크하임은 방금 보였던 이빨을 거둔채 지루하다는듯 들어올렸던 양팔을 그대로 내려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로나벨아크하임의 붉은 눈이 짙은 권태감으로 휩쌓여 있었다. … 전부터 어느정도 예상했었던 일이다. 결국, 최후에 나를 막을 적은 화룡인 로나벨아크하임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껏 취하고 있던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본래의 몸으로 돌아갔다. 작은 인간의 몸은 가차없이 버려졌고, 본래 그가 있던 자리에 붉은 동체를 가진 거대한 용의 모습이 생겨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거대한 동체가 생긴탓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기가 밀려나며 태풍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덕분에 그나마 남아있던 구름은 자취를 감추고, 이제 밑에서도 나와 로나벨아크하임의 모습이 선명히 보일 정도가 되었다. 이곳은 세계의 끝이지만, 워낙 거대한 몸을 가진 나와 화룡이 한 자리에 있으니 지상에서 우리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할리 없다. 잠시 시선을 돌려 지상을 내려다보니, 수 많은 필멸자들이 경악어린 눈으로 나와 화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드래곤이라는 개체가 아직 신화속에서만 나오는 존재인줄로만 아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상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니, 로나벨아크하임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은, 붉은 시선. 마치 태양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비늘을 전신에 두르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낸채 로나벨아크하임은 나를 향해 명백한 적의를 표하고 있었다. 나 자신 역시도 드래곤이긴 하지만… 적으로 드래곤이란 개체를 접하니, 굉장히 놀라운 느낌이다. 발톱 하나하나, 이빨 하나하나가 모두 신격 마법에 필적하는 강대한 권능을 지니고 있다. 그 무엇으로 저 비늘을 뚫고 살과 뼈를 헤집을 수 있으며 그 무엇으로 저 이빨과 발톱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 모든 가능성이 회의적이다. '평범한' 신격 마법같은건 그와 나의 싸움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어떤 강력한 공격 마법이라도 저 비늘에 막힐 것이며, 그 어떤 강력한 방어 마법이라도 저 이빨엔 찢어발겨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적으로 둔 로나벨아크하임 역시도 마찬가지겠지. - 로나벨아크하임, 이번에도… 라니,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거대한 붉은 날개를 펼쳐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만능의 언어로 답했다. - 눈치챘을 텐데. 너와 나는 지금 이런 상황을 몇번이고 재현해왔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너는 세계의 정체를 눈치채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려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아주 성공적으로 막아왔지. 성공적으로, 막아왔다…? 이것을- 몇번이고 말인가. -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백룡.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과거에서부터 그래왔듯이 말이지. 그것은 단언이었다. 내 의지가, 그리고 행동이 그에게 가차없이 부정될 것이라는 걸 예언하는 그의 말이 대단히 불쾌하다. - 지나가버린 과거에 기대어 말하지 말아라. 너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 그렇다. 하지만 너 역시도 미래를 알지 못하지. 로나벨아크하임이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였다. 거대한 동체가 마치 빛처럼 쇄도해 왔다. 대기가 그의 빠른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지금쯤 지상엔 한바탕 폭풍이 불어닥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쩍 벌린 입에서 거대한 이빨이 번뜩였고, 그것은 곧 내 목을 물어 뜯었다. 용의 이빨은 상대를 해하는 모든 신비를 합친것보다도 더 거대한 힘을 담고 있다. 그것으로 꿰뚫지 못하는 것은 없으며, 그것이 지닌 신비는 이미 죽음에 이른것을 다시 한번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죽음. 죽음. 그리고 또 죽음- 무(無)로 인도하는 수많은 관념들이 내게로 들이 닥쳤다. 농부가 농작물을 베어내듯, 어부가 그물을 끌어올리듯, 저것은- 생명의 수확이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용의 이빨이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는 창이라면, 용의 비늘은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방패다. 모든 물리적, 마력적 충격을 마찬가지로 무(無)로 환원시키는 신비. 이것을 뚫을 수 있는건 없다. 그래서 용의 이빨과 비늘의 충돌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든 꿰뚫는 창, 무엇이든 막는 방패. 그것은 절대성과 절대성의 충돌이며, 절대성은 부정될 수 없기에 절대성이다. 때문에 그 사이에선 거대한 모순만이 발생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로나벨아크하임은 애초에 나를 물어 뜯지 않은게 되었다. 나는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가까이 붙은 그의 동체를 찢으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로 모순이니, 나는 발톱을 휘두르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주변에 모순의 파편만 뿌린채 서로의 공방은 계속해서 무의미로만 돌아가고 있다. 삐------ 청각으론 감각할 수 없는 소리가 난다. 아니, 애초에 청각으로 감각할 수 없는데 이것을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는 삐그덕 거리며, 모든 모순들을 끝없이 받아들였다. 인과율의 비틀어 짐으로 인해 공간과 시간이 뒤틀어졌고,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모순을 발생시키려는 로나벨아크하임에게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 그만,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 무슨 의미가 있냐고? 로나벨아크하임은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동체로 나를 그대로 들이받았고, 나와 그는 한데 엉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인간이 있었다면, 분명 고막이 터져버렸을 거대한 소음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린 나와 로나벨아크하임의 동체는 지상에 재앙과도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엄청난 충격량에 우리가 떨어져내린 곳에 있던 모든 사물은 흔적도 없이 쓸려 버렸고, 거대한 크레이터가 남았다. 아직까지 가라앉지 못한 거대한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이곳은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오지였기 때문에 우리의 추락은 단지 지형만 파괴하는것에 그칠 수 있었다. - 너를 끝없이 죽임으로써 허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잔뜩 피어오르고 있는 거대한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화룡의 붉은 눈이 더욱 붉게 빛난다. 동시에 그의 눈은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마력과 신력을 움직였고, 곧 주변엔 거대한 불덩어리 수십개가 나타났다. 붉게 타오르는 그 불덩어리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 하얗게 타올랐다. 너무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한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순식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수 많은 나무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고, 남아있던 거대한 호수는 원래 없었던것 처럼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많은 생명을 품고 있었을 대지는 이글거리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용해되어가고 있었다. 그저 마력을 응축시키기만 했을뿐인 마력 덩어리지만… 저것 하나하나가 가진 힘은 전에 흑색의 좌가 발현시켰던 '꺼지지 않는 성화' 보다 한참은 우위에 있는 신비였다. 곧 그것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 이곳은 점점 죽음의 대지가 되어가고 있다. - 그렇다면 너는… 나와 영원히 싸우겠다는 건가? 대답을 듣지 못한채,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이 발현시킨 강력한 마력 덩어리들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해도 내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엔 전혀 변함이 없다. 거대한 날개를 가볍게 휘두르는 것으로 그의 모든 공격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 일대 전체를 모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대한 힘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화룡은 대답했다. - 필요하다면. 대답을 듣고서, 나는 다시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리 둘의 싸움은 주변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친다. 가볍게 휘두른 발톱이나 이빨이 연약한 필멸자들에게 재앙보다도 더 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하늘로 날아올라 그에게서 멀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한 곳은 거대한 드래곤의 몸도 작아보일만큼 방대한 규모의 대협곡이었다. 이곳이라면… 괜찮겠지. 지금껏 이곳으로 날아온 나는 다시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내 뒤를 따라온 화룡이 다시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채 내게 달려 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빨을 드러내 그의 날개죽지를 물어 뜯었다. 우리는 서로 엉켜붙은채 허공에 몸을 고정시킬 힘을 잃고 거대한 협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동안 나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로나벨아크하임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가 가진 모든 수단을 이용해 대응해왔다. 발톱이 비늘을 긁고, 날카로운 이빨이 몸을 찢어발기려 했다. 단지 육체적 수단을 이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협곡의 최하단까지 떨어져 내리는 동안, 우리는 수 천, 수 만의 신격마법을 교환했다. 로나벨아크하임의 불은 모든 것을 녹여내렸고, 내가 지닌 냉기는 마찬가지로 모든것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협곡은 계속해서 형태를 잃어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무슨… 무의미한 짓이란 말인가. 결국 협곡에 바닥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 소용없다. 우리는 서로를 죽임으로서 해결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설령 네가 나와 영원히 싸운다 해도 내 결심을 돌릴 순 없을 것이다. 내 뜻에 그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긴 목을 들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이미 협곡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이 공간을 한번 훑어 보는듯 하더니- - 물론이지. 긍정했다. - 먼 과거로부터, 너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화룡은 그렇게 말하고나서, 날개를 펼치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나 역시 날개를 펼치고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끝없이 빛을 거슬러 오르던 그는 결국 나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끝에 도달했고, 거기서 그는 몸을 돌려 지상을 내려다 보았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곳… 전 대륙 전역이 한 눈에 들여다 보인다. 현재 전 세계라 할 수 있는 대륙을 내려다 보는 로나벨아크하임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 필멸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백룡. 내가 너의 오만함을 깨트려주지. 로나벨아크하임은 태양을 등지고, 목을 들어올려 평범한 필멸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숨을, 들이켰다…? 용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가 숨을 들이킨 순간, 태양은 희미하게 빛을 잃는것 같았다. 로나벨아크하임이 가진 대부분의 마력과 신력이 한 점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가진 대부분의 마력과 신력이 그의 목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 조차도 경악할 정도의 힘의 집중이었다. 그 집중은 이미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 시간이 빗겨흐른다.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어떤 강력한 힘이라 해도 현재 로나벨아크하임 앞에선 모두 그 힘을 맥없이 잃어버리고 만다. 저것은,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주변 일대는 한 점에 집중된 강대한 힘에 영향을 받아 완전히 텅 비어버린 진공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빛조차도 굽어지고, 공간이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 무엇으로 저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껏 존재해왔던 어떤 관념을 들어 저것을 묘사해본다 한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강대한 힘의 기류에, 허공에 고정시킨 내 몸조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상을 내려다보니, 세계 전역을 강타한 명백한 이 '이상' 에 모든 필멸자들이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연약한 눈을 가진 저들이 그 태양 바로 앞에 있는 화룡을 바라볼 수 있을까. 화룡의 입이 벌어졌다.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용의 가장 강력한 권능이 지금 발현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저 권능이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닌, 지상이었다. 용의 숨결…! 만능의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이 지상으로 쏘아졌다. 나 역시 동일한 권능으로 그의 숨결을 막을 시간은 없다. 아니, 설령 내 숨결로 저것을 막는다 해도 그 결과는 강대한 힘의 충돌로 인한 모든 생명체들의 절명일 것이다. 날개를 펼치고, 쏘아져 내리는 그의 숨결 앞으로 나아갔다. 화룡의 숨결이 비늘에 닿았다. 비늘은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숨결이라는 비이상적인 힘 앞에서 무력하게 그 절대성을 잃었다. 절대성은 극복할 수 없기에 절대성이건만…. 이 육체를 하고서 처음으로, 고통이 느껴졌다.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 몸에 닿았고, 그것은 내 비늘을 녹이고 살을 찢으며 뼈를 부수었다. 모든 저항이 숨결 앞에서 그 힘을 잃는다. 나는 이 강력한 육신으로도 화룡의 숨결을 막을 수 없었고, 그의 숨결은 내 몸을 관통해 지상의 대륙 끝에서 끝까지 쏘아져 나갔다. 아…. 숨결이 닿은 인간의 도시나 기타 지형물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태양보다도 강한 열기를 담은 화룡의 숨결은 그것에 닿은 사물을 재조차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철저히 소거시켜 나갔다. 필멸자들이 생에 마지막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수가 죽었는지, 그 수를 세기도 아득하다. 그리고, 세계가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졌다는건, 단순히 숨결이 대륙의 끝에서 끝으로 쏘아졌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말로, 저 막대한 힘을 지닌 숨결이 그어놓은 선 위 아래로, 대륙은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 로나벨아크하임! 날개가 완전히 녹아내려버리고, 육신에 커다란 타격을 받은 나는 더 이상 허공에 몸을 고정시킬 힘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을 인내하며, 나는 이 세상 전체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숨결은 이미 모두 다 토해져 더 이상 파괴를 행하진 않았지만, 후폭풍이 남겨져 본래 생명체가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졌던 세계의 온도를 한계 없이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이 세상에 생명체라는 것은 우리 드래곤 밖에 남지 않게 된다.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나는 힘을 짜내어 허공으로 숨결을 뿜어 내었다. 화룡의 그것과는 달리, 강력한 냉기를 품고 있는 내 숨결은 허공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던 세상의 온도를 정상적으로 내려놓기 시작했다. 쿠웅-! 지상에 떨어져 내린 나는 힘없이 몸을 바닥에 뉘였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나는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푸른 대지 위로 붉은 용의 피가 호수라도 만들것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몸을 뉘인 내 앞에 날개를 접고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 너는, 세상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작정인가? 화룡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발톱을 들어 이미 비늘이 녹아버린 내 몸을 헤집어 놓았다. 호수를 만들 정도로 많은 양의 피는, 이제는 강을 만들 정도로 급속도로 불어나 지상을 적셨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고통이 온몸을 엄습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내 고통에 개의치 않고 발톱과 이빨을 이용해 비늘이란 절대 방패를 잃은 내 몸을 제 멋대로 헤집어 놓았다. 그는 과감하게 나의 뼈를 드러내고, 살을 찢으며 붉은 피를 마음껏 마셨다. 나는 묵묵히 모든 고통을 견뎌내며 내 몸을 헤집는데 열중하고 있는 화룡의 동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본래는 날개의 형태를 하고 있었을 뼈를 이빨로 뜯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을 그만두고서 물었다. - 왜 나의 숨결을 막아섰나, 루루렌칼리체. - 네 숨결로 인해 발생되는 파괴를, 내가 원치 않는 까닭이다. 화룡은 내 대답을 듣고, 모든 마력적 방어를 잃은 내게 신비를 발휘해 내 몸을 변형 시켰다. 내 육신에 억지로 작용하는 이질적인 힘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주변에 있는 모든게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아니, 이 경우엔 그냥 내 몸이 작아졌을 뿐인가. 로나벨아크하임의 힘에 의해 변형된 나는, 백색 머리카락을 가진 피투성이 인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래 육신이 가지고 있던 상처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현재 나는 금방 죽음에 이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겠지. 곧 그의 마력이 강력한 사슬이 되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내 몸을 옭아 매었다. … 그런데, 이 모습에 무슨 의미가 있지? "어쩔 생각이냐." 로나벨아크하임은 긴 목을 내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들어라. 그게 신이었을적, 네 본래의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말인가?" - 그건 본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신의 형상이지. 너는 인간이나 요정이나 인어같은 지성을 가진 모든 종족들이 어째서 모두 비슷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적이 없는가? … 의문을 가져본적은 있다. 하지만 그 답은 근원의 지식에 담겨 있지 않은 것이었고, 그것을 하찮은 의문이라 여겼기 때문에 호기심을 금방 거두었었지. 그런데, 이것이 신의 형상이라고…? - 그것은 지성을 가진 피조물들이 모두 신의 형상을 본따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제각기 환경에 적응해 신체를 변화해 나가며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지성체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사랑에 빠지기까지 하지. 쿨럭,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피를 뱉어내었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 네가 부정한다 해도, 너는 우리를 닮은 이 생명체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은룡은 인간을 조롱했다. 그래서 너로 하여금 이들은 가치가 없다, 라고 판단하길 원했지.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은룡은 그것에 관해 무력했고, 결국 또다시 너는 이것에 도달하게 되었다. 은룡이 가치가 없다 라고 했었던건 그런 이야기였나…. '이들은 (네가 희생할) 가치가 없다.' … 다들 웃기는군. "나는- " - 더 이상 네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네가 내 설득을 들어먹을리 없듯이, 나도 네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 없다. 소통하기를 그만두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의 말 그대로이니까. 타협은 없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해보았다. 하지만 온 몸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 같은 로나벨아크하임의 마력이 방해다. 그는 지금 나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것에도 역시 아무런 의미는 없다. 화룡의 숨결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그것은 내 불멸성에 일말의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타격을 받은 내 신비는 얼마지않아 회복될 것이며, 그땐 이런 구속같은건 내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 현재 너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강력한 용의 숨결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같은 드래곤을 상대로 해서야… 별다른 힘을 발휘하진 못하지. "…." - 나는 다시한번 숨결을 뿜어내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필멸자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겠다. "뭐… 라고?" 그렇게 되면 내가 허수의 세계로 가려는 이유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것을 상상하자,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 속에서 부터 치고 올라오는것 같다. 이미 필멸자들의 세상은 화룡의 숨결에 의해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한 번 더 그러한 재앙이 쏟아진다면…. - 하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최악의 선택이다. 로나벨아크하임은 현재 내 몸보다도 더욱 거대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 루루렌칼리체, 이것은 애초에 우리들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완성시킨 세계다. 이 세계의 모든 필멸자들은 쇠퇴하고 멸망하고를 반복해왔다. 지금은 인간들이 득세하는 시대지만 과거엔 요정들이 대륙을 지배하기도 했었고, 그보다도 더 과거엔 인간도 요정도 아닌 다른 종족이 지배권을 갖고 있기도 했었었지. "…." - 나와 너, 그리고 은룡과 흑룡이 완성시킨 이 '영원' 속에서, 세계는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네가 이미 완성된 이 '영원' 을 깨려하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들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며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처음에 우리는 자유를 원했었다. 고작 세계가 원활히 굴러가기 위한, 신이라는 부속품에 불과했던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자아를 확인하고, 처음으로 자유를 생각했었을때, 그때 우리가 느꼈었던 그것을 너는 기억할 수 있는가? … 기억하지 못한다. - 아무튼, 너 역시 이렇게 완성된 '영원'의 부속품이며, 그래서 나는 네가 이 세계에서 물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방식이 네가 고통을 주는 방향이라 해도 말이지. 애초에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기도 하고. 화룡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날개에서 일어난 태풍같은 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흙먼지가 잔뜩 휘날렸다. - 제안을 하지. "무슨 제안이지…?" - 기억을 리셋해라. 리셋하지 않는다면… 나는 모든 피조물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고, 리셋한다면 다시 네가 이 답에 도달할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리고 그때가서 다시 결착을 짓는것으로 하지. # 과연…. 이런 것이었나. 나는 과거에도, 그보다 더 먼 과거에도,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더 먼 과거에도 역시, 로나벨아크하임과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해왔던 것인가. … 불쾌감이 목구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것 같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이 격렬한 감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깊은 곳에서부터 발현되어 지금껏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성을 위협했다. 화룡에 의해 결박되어 있는 신체가 이성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 격렬한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나는 이 구속을 풀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렸다. 나는 무력한 모습으로 여전히 흙바닥에 구속된 채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이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 왔었지?" 그는 허공에 뜬 채로 지상에 묶여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 글쎄,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의 수 만큼 되지 않을까. 지금은 강렬한 태양빛에 가려 보일리 없는 별들이지만… 드래곤인 나는 태양의 찬란함 뒤에 숨어 있는 수 많은 별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의 별들이 하늘위에 촘촘히 박혀있다. … 저 만큼이나, 우리가 이것을 반복해 왔었다고. 태초부터 지금껏… 그 정도로 압도적인 과거의 기억이 그에게 남아있다면, 화룡이 과거에 기대어 나의 실패를 확신한 것이 납득이 간다. "하- " 그의 말대로다. 나는 오만했고, 그 오만은 화룡의 단순한 파괴 행위로도 깨어져 버릴 정도로 무력한 것이었다. 화룡의 협박과도 같은, 저런 웃기지도 않는 제안을 나는 거절할 수 있는가? 거절할 수 있는가? 거절할 수 있는가…. 공허한 자문만이 머리속을 감돈다. … 우리가 완성시킨 영원. 시작도 끝도 잊혀지고, 그저 끝없이 반복되기만 할 뿐인…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나와 로나벨아크하임 역시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기억을 리셋하는건 간단한 일이다.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면 나 자체를 이루는 관념은 무너지고 그것을 메우고 있던 기억 역시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겠지만… 용의 불멸성은 내가 포기해 버린 나를 이 세상에 억지로 붙들어 맬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재구성되고, 지금까지의 기억만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백룡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다시 태어난 나는 또다시 이곳에 이르게 되겠지. 내가 나이기를 포기해 기억을 버린다 해도, 나는 백룡 루루렌칼리체니까. 기억이 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엔…? 또다시 화룡에 의해 기억을 리셋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처럼 몇번이고, 몇번이고 부정당할 것이다. … 답은 없으며, 영원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로나벨아크하임, 너는 네가 말한 영원을 위해 수 없이 나를 막으면서도 어째서 나로 하여금 다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 거지?" 처음에 나로 하여금 인간들의 사회를 겪어 볼 것을 종용했던 것은 로나벨아크하임이었지. 화룡은 수 많은 나를 부정해 왔으면서도, 어째서 또다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일까. - 희망이다. 희망이라고…? - 수 없이 많은 루루렌칼리체가 있었다. 모든 루루렌칼리체는 결국 자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종말을 택했고, 나는 그것을 막아왔다. 앞으로도 그럴테지. 하지만 나는 미래를 모르기에 희망을 품는다. 이것을 무한히 반복해 나가다 보면, 언젠간 이 영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래의 불투명성에 기대어, 근거도 없는 희망을 말하는 것 만큼 무력하고 어리석은 것은 없었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었지. 나보다 더 오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그는 더욱 그러할텐데…. 그런데도 로나벨아크하임은 지금 희망을 말하는가? 희망을, 말하는가? "이 영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고…?" - 그렇다.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네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그렇다면… 그 중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 네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화룡은 진심이다. 만능의 언어는 사용자의 생각과 의지를 아무런 장애 없이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 진실로, 저것엔 거짓이 없다. 나는 더럽고 차가운 흙바닥에 로나벨아크하임의 마력에 구속당한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거의 산 처럼 보이기도 하는 거대한 붉은 동체가 온통 시야를 가리고, 피처럼 붉고 거대한 용의 눈동자가 고요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저 커다란 눈동자에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맺혀있다. 긴 백발이 붉은 흙이 가득한 대지에 아무렇게나 퍼져있다. 본래는 신의 형상이었다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인간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알몸의 소녀가 호박색 눈을 치뜬채 용의 눈을 마주하고 있다. "하하…."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일부러 연기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희미하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웃음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급작스럽게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 만물이 침묵하고 있는 듯한 고요한 언덕 위에서, 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가느다란 인간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 … 정말이지, 견딜수가 없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화룡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것을 '희망'이라 칭하며, 입에 담는다고…? 그래, 필멸자가 희망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희망은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기에 희망이라 칭해질 수 있었고, 불가능한걸 알면서도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질것 같은 희미한 그것을 붙잡고 현실을 이어가는 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꽤 좋아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욕망이라는 것과는 동떨어진 존재인 까닭이다. 손에 쥐고 싶은 것도, 반대로 손에서 놓고 싶은것도 없었다. 어떻게 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그것에, 나는 흥미를 가진 것이다. … 희망은 필멸자의 것이다. 그런데도 나와 같은 드래곤인 로나벨아크하임은 필멸자의 것인 희망을, 불멸자의 입으로 언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희망으로 언급된 존재가 바로 나라고…? 화룡을 향한 내 비웃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맺힌 내 모습엔 이제 명백한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변함 없는 담담한 태도로 내 모든 비웃음을 묵묵히 받아들이고는 다시 뜻을 전해왔다. - 결정해라. # "좋다. 지금까지의 내 모든 기억을 지우겠다." 수 많은 과거의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결국 그의 강요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 결국, 내 모든것이 이렇게 무의미로 돌아가고 마는군. 나는 눈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의 눈동자를 시야에 담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서서히, 나는 온 몸에 힘을 뺐다. 지금껏 나라는 관념안에 차곡 차곡 쌓아진 선명한 기억들을 모두 하나씩 꺼내보며, 그것을 내 바깥으로 버렸다. 기억이란건 이미 내 일부였으므로, 나는 나 자신 역시 하나씩 버려야했다. 그것은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처럼 그저 버리기만 하면 될 뿐인, 요령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거대한 상실감이 다가온다. 스스로 나 자신을 죽이며, 지금껏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것들이 모두 내 밖으로 빼내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세계의 이상을 명백히 깨닫게 해주었던 카리에르제의 비공정, 은룡에게 대항했던 레쥬에브와 그녀의 손에 목숨을 잃은 리체르아. 은룡의 딸인 펠테넨시아 황녀. 인간들의 지식전승의 장인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들과 수 천년을 기다려 내게 과거의 말을 전했던 정령. "…." 그보다도 더 먼 과거에 있었던 일들….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는 인간과 맞섰던 베델, 호문클루스 라는 이름으로 칭해졌던 기술의 희생양인 에카테야르, 그리고 작은 요정이었던 칼리아넬…. 그들과 있었던 일들 역시 깨끗히 내 안에서 날아가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죽어간다. 하지만 내 불멸성은 내 죽음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가 비워낸 부분을 채운다. 이제 나는 내가 스스로를 죽이는 이유도 알지 못한채, 기계적으로 내 안의 모든것을 밖으로 버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어째서…? 하지만 밖으로 꺼내어지기 시작한 내 모든것은 이미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 끝없는 상실감만이 나를 채운다. 아- 최종적으로 내 머리속에 떠오른것은, 산허리에서 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찬연한 태양이었다. 나는 내 보금자리 앞에서 몸을 뉘인채, 언제까지고 그것이 떠오르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강한 육신을 지닌 내게… 그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내일은 떠오를까? 아니,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온 세상에서 어둠을 쫓는 저 거대한 구체가 언제까지고 저런 빛을 발하는건 어려운 일일테니까. …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나는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 많은 과거 역시 그래왔다고 내일에도 역시 그러하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의문 역시… 맥 없이 사라진다.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도 없는 어둠속으로 천천히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그것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이, 텅빈 상태일 뿐인 내게 거짓말처럼 딱 한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세계는 유한하다.' 세계…? 유한하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상한 문장 하나를 붙잡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무언가 뜻을 품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언어라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게 없으므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리 없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고, 답이 나올리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에 매달렸다. 지금 느껴지는 이 이유모를 상실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저 문장을 해독하는 일 밖에는 없는것 같았다. 근거없는 믿음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완전히 어둠으로 침잠되어 있는 내 세계에 천천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근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부터 들어오는 정보임을 자각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무엇인지, 나를 벗어난 외부세계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있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이었다. 흘러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며, 나는 '만능의 언어' 라는 것이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자리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매달려왔던, '세계는 유한하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이해한 것은 고요한 세계속에 머물러 있던 내겐 대단히 거대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내가 있던 이 세계를 뒤흔들었고, 그로인해 나는 눈을 뜨고 말았다. … 아, '눈을 뜨고 말았다.' "…."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보인다. 지금까지 와는 다른, 거대하게 펼쳐진 외부세계가 '나'와 '너'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껏 나밖에 없던 세계에 '너' 라는 것이 들어온게 대단히 신기했기에 나는 이 외부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길 원했다. '근원'으로 부터 전해진 정보가 있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골자만을 설명하는 것이었고, 내가 알길 원하는 것은 그 골자를 뒤덮고 있는 살덩이들이었다. - 눈을 떴군. 온통 붉은 색으로 뒤덮힌 '너' 가 만능의 언어를 이용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거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내 앞에 있는 '너' 가 나와 같은 드래곤이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잠깐동안, 나는 '너' 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고민은 말그대로 잠깐 뿐이었고, 나는 만능의 언어를 이용해 말을 걸어온 '너' 에게 마찬가지로 만능의 언어를 이용해 반응을 할 수 있었다. - 너는 누구지? 내 반응에 '너' 는 대답했다. - 나는 화룡, 로나벨아크하임이다. 화룡…. 나는 근원의 지식으로부터 이미 화룡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의 이름이 로나벨아크하임이라는 것 역시도. 나는 눈 앞에 있는 그를 확실하게 인식하며, 화룡이라는 드래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을 좀 더 확고한 것으로 강화시켰다. 그렇게 '너' 는 로나벨아크하임이 되며, '나' 는 백룡, 루루렌칼리체가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이미 확고한 것이었으므로, 확인같은 불필요한 절차는 필요하지 않았다. - 너는 기억을 리셋했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떤가? 기억을… 리셋? 나는 단숨에 그의 말을 이해했다. 나는 태초부터 존재해왔으며, 내 인식이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나의 인식과 동시에 시작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세계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었고, 이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선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어야 한다. 내가 기억을 리셋했다는 사실은 따로 의문을 가질 여지가 없다. 하지만 왜? … 의문은 해결될리 없다. 그 이유는 이미 사라져 버린 내 기억속에 있을 것이므로. 일단 의문은 털어버리고, 나는 잠깐동안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게 꽤 호의를 가지고 있는것 같았으며, 그는 나와는 다른 풍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능의 언어를 이용해 내게 많은 지식을 전해주었다. 나 혼자서도 이 세계를 인식하는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지만, 역시 옆에서의 조력이 있으니 나는 빠르게 나 이외의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고맙군. 그런데 너는 이러한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인가? 너의 조력이 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나 혼자서도 아무런 무리 없이 알아챌 수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도움은 필요치 않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한것 같았다. 그는 곧 이곳을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정말로, 내게 이런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온 것 뿐인가…. - 잠깐. 나는 막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그를 붙잡았다. 이왕 그가 찾아온 것,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한 의문을 확실하게 해결하자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 내 언어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던 것일까. 로나벨아크하임은 이해할 수 없는 기색을 보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이제 막 기억의 리셋을 끝낸 네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고? 그게 이상한 점인가…. 아무튼, 나는 지금껏 품어왔던 의문을 언어에 담아 그에게 전하려 했다. - 그렇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의문을 언어에 담는 순간, 지금까지 있었던 아주 짧은 인식의 과정이 모두 산산조각 날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예감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스스로 피어오른 환영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나는 그 의문을 언어에 담았다. - 세계가 유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 아, 그것을 언어에 담는 순간- - 루루렌칼리체- ! 너는 분명 기억을 리셋했을터!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거지? 화룡의 말에 반응할 수 없었다. 이 순간, 나는 지금껏 나 스스로가 버려왔던 기억의 파편 일부가 내게로 다시 깃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는 유한하다. 로나벨아크하임으로 부터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게 깃드는 기억의 파편들은 모두 이 문장 하나를 설명하기 위한 조각들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기억은 완벽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내겐 그 조각들을 완벽한 하나로 만들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 대답해라! 로나벨아크하임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날개를 펼쳐 그의 공격을 피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깐 아래를 바라보니 그 역시 날개를 펴고 나를 쫓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 위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며 생각했다. 뒤죽박죽이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하나씩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완전히 완성되었을 때, 나는 세계의 끝에서 멈추어 있었다. - 루루렌칼리체! 내 뒤를 바짝 쫓은 화룡이 이를 드러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했다. 절대로 되찾을 수 없는 기억을 되찾았기에, 내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헛점 투성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기억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어도, 믿을 수는 있었다. 과거의 나든, 그보다도 더 과거의 나든… 그것은,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기에. 기억이 나를 구성하는게 아니니, 설령 지금의 내 기억이, 도달한 결론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내가 하려던 일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정령의 입을 빌어 내가 나에게 전했던 문장…. 그것은 과거의 내가 발현시켰던, 가장 거대한 이적이었다. 드래곤의 모든 권능을 발휘해도 닿을 수 없는… 거대한 마법. 때문에 그 마법은 필연적으로 어떤 매개체가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거의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있는 내가 그 매개체가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단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기나긴 세월동안, 나는 그렇게까지 무력하지 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와서 매개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이유도 없고 말이다. -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과거를, 기억해 낸거지? - 답지 않군. 방법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또다시 이곳에 도달했다는 것 뿐이지. 로나벨아크하임은 거대한 신비를 끌어올렸다. 그는 그 신비로 나를 공격할 수단을 만들며, 뜻을 전해왔다. - 그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중요한 것은, 여전히 네가 무력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여전히 무력하다고…? - 네가 허수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필멸자들의 생명을 거두겠다. … 그것은 이상하군. 나는 지금껏 이 위협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단 말인가? 그가 필멸자들을 모두 죽이는 것과, 내가 이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내가 되찾지 못한 다른 기억으로 인해 그러한 것이라 추측해 볼 순 있겠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의 내겐 저 뜻이 위협으로 받아들여질만한 기억은 없다. 때문에 나는 답한다. - 상관없다. 답하며, 공간을 찢었다. 찢어진 공간의 단면에서 시공간의 끈이 어지러이 흘러나오며, 그것은 곧 어떤 형태를 형성했다. 그것은 '문' 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 루루렌칼리체…. 너는 정말로, 우리가 완성시킨 이 안정된 영원을 깨트려 버리겠다는 것이냐. 파괴와 재생을 영원히 반복하는,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 세계. 그와 다른 드래곤들은 모두 이것을 영원이라 부르는 것인가. … 나와 로나벨아크하임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강대한 힘을 가진 두 개체가 주변에 접근해 있었다. 용의 눈조차 멀게할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은빛, 그리고 그것을 모두 먹어치울것 같은 심연의 어둠…. 아마도 저들이 은룡과 흑룡이겠지. 하지만 그들은 나와 화룡의 일엔 참견하지 않은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 과거의 나는 세계가 유한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 덕분에 또다시 이곳에 이를 수 있었지. 유한하다. 유한하다는 것은 영원이 아니다. 과거의 내가 어떤 경로로 저런 결론을 냈는진 알 수 없다. 알고 싶은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튼, 나는 유한하다는 것으로 이들이 완성시켰다는 영원을 부정했고, 다른 길을 찾았을 뿐이다. - 너희들에겐 그럴지 모르겠지만, 내게 그것은 영원이 아니다.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이, 현재의 나 역시도 과거의 나에게 동의한다. - 지금 내가 열려고 하는 이 문이, 내게는 영원이겠지. 추측형으로 끝나는건, 내게 존재하는 기억이, 모두 과정을 배제한, 결론으로 이르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 많은 과거… 그 과정을 버려가면서 까지 내가 도달하고자 했던것. 그래, 말하자면 이것이 '영원으로 가는 문' 이겠군. - 루루렌칼리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등졌다. 저 목소리에 응할 이유가 없다. 내게, 나 이외의 다른 존재의 이해는 불필요하다. … 자, 이제 문을 열겠다. 끼이익- 절대로 소리가 날리 없는데도, 내게는 마치 문이 그런 소리를 낸것처럼 느껴졌다. 문 안의 세계는 허무로 가득차 있어서, 도무지 시각으로는 감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문 안의 세계로 들어섰다. 허수의 세계로 들어선 나는, 문을 닫기전 문득 바깥을 바라보고 싶었다. 몸을 돌렸다. 아- … 나의 부재로, 세계는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하늘위와 바다 너머를 굳게 막고 있던 세계의 끝이 무너지고, 세상은 무한에 가깝게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의 경계에 걸쳐서, 확장되어 가는 세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밤 하늘 위에 그저 빛나기만 했던 별이 모두 형체를 갖추었다. 하지만 별은 여전히 우리의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를 거대한 암흑의 공간이 메웠다. 그 공간은 굉장히 거대했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라고 해도, 그 공간의 거대함엔 비교조차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머물렀던 세상과 차원을 달리하는 저 거대한 공간은 곧 '우주' 라 불리우게 되었다. 바다 너머에 굳게 자리잡고 있던 세계의 끝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며 우리의 세계를 재형성 시켰다. 나는 곧 새로이 형성된 우리의 세계가 하늘에 떠있는 별과 별로 다를바 없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은 곧 '행성' 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제는 실제로 존재하게 된 하늘위에 저 수많은 별들 하나하나가 모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동일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 이렇게나. 이렇게나 많은 가능성을, 나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군. 나는 여전히 문의 경계에 선채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필멸자들이 아둥바둥 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저 지상…. 지금까지의 좁았던 세계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 세계는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거대해졌다. 저들이 너무나도 거대해진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채울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아마, 반도 채우지 못할지도 모르지. 뭐, 그래도 상관없다. 이 세계는 이제 저들의 것이다. …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럽다(만족했을 것이다). * * *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문을 닫기직전, 바깥에 있던 한 개체가 나와 마찬가지로 이 공간에 들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사라지는것은 나 혼자만으로 충분했으므로, 나는 다시 문을 열려 했으나 이미 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와 함께 문 안으로 들어선 자는 로나벨아크하임이었다. 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해할 수 없군. 너는 내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퉁명스런 적의를 담고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 멍청한 백룡 같으니. 아니, 그건 대답이 아닌것 같은데…. 그리고 오히려- - 멍청한 건 너다. [Epilogue] 쿵-! "메르시오 공작님, 이게 마지막 입니다." 하아- 마지막이라고 해도…. 나는 한 손으로 들고 있던 펜을 굴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상위로 올라온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노려보았다. 말그대로 대륙을 반으로 갈라놓은 거대한 '재앙' 덕분에 안그래도 혼란스러웠던 네거스텐 제국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펠테넨시아 황녀가 펠테넨시아 문 여제가 된지 이제 반 년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그 재앙은 그야말로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황자와의 황위 쟁탈전에서 수 많은 관료들이 교체되었고, 덕분에 숙련되지 않은 신진 관료들이 비워진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국은 여전히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있다. "으- "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잠깐 휴식이라도 취할 요량이었다. 창문을 살짝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이 되어,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 때 이후로 반년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펠테넨시아 황녀를 도와 여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고생한게 있긴 하지만 말이다. … 제국은 혼란스러워도 반짝거리는 야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는 저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끔 과거를 회상할때가 있다. 그 때, 백색의 좌와의 싸움에서 차라리 내가 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의 삼일동안 이어졌던 백색의 좌와의 싸움은, 끔찍한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졌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싸움은 치열했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자신의 검, 광휘를 내게 내주다시피 하며 죽음을 택했다. 백색의 좌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진작에 그녀의 검에 무릎을 꿇었겠지. 아직도 그때의 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거의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검에 생명을 잃으며,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이란…. 왜 후련하단 표정이었을까. "하아- " 복잡한 생각은 말자. 지금은 이 제국을 안정시키는데 온 정신을 집중할 때다. 하지만 가끔 마음이 흔들릴때도 있다.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내게 했었던 말…. 그것을 부정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니까. … 그나저나, 칼리체는 왜 아직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걸까? 이미 모든 일은 끝났고, 더 이상 내가 그를 거부해야할 이유도 없어졌는데. "…." 갑자기 기분이 나뻐졌다. 창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펜을 쥐었다. 지금은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그 녀석을 찾아봐야겠다. 칼리체, 고백을 했으면 확실히 대답을 해주어야 할거아냐…. # 녹빛 머리카락을 가진 요정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서, 요정 왕국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세찬 바람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것 같았다. 기억나지도 않는 먼 과거에, 칼리아넬이라고 이름붙여진 그 요정은 지켜지지 못한 약속에 매달려 거의 백년 동안 백룡, 루루렌칼리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리아넬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루루렌칼리체에 대해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요정은 한 감정을 깊이 간직하는 종족이었고, 그 슬픔의 크기는 십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점차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손쉽게 붙잡을 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루루렌칼리체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 이곳은 루그란 숲이라 불리는 작은 곳이었고,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세계수의 열매를 빼앗기 위해 잔혹한 인간들이 무기를 들고 침략해 왔었다. 그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칼리아넬은 산맥의 지배자에게로 향했고, 놀랍게도 지배자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때의 첫 만남….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이 되어서도, 칼리아넬은 그때의 기억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째서 루루렌칼리체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걸까. 약속했으면서…. 절대로 약속을 어길리 없는 존재이면서. 거의 백년 동안이나 루루렌칼리체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과 그가 절대로 약속을 어길리 없는 믿음이 계속 충돌해 왔었다. 칼리아넬은 사실과 믿음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지 못한채 자신의 왕국을 잊었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십년 전, 세계가 반으로 갈라졌던 거대한 재앙과 그 후에 느껴졌던, 너무나도 거대한 신비의 사역…. 요정은 애초에 신비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종족이었고, 그 중 세계수에서 태어난 요정인 칼리아넬은 그때, '세계의 끝' 이 무너졌다는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사실과 믿음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루루렌칼리체의 죽음- 하지만 용은 불멸자이기 때문에 칼리아넬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믿음 하나로 버텨왔건만….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와 칼리아넬의 몸이 흔들렸다. 눈을 감고 있던 칼리아넬은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그녀의 가벼운 몸은 결국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던져졌다. "아…."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지금껏 발을 딛고 있던곳이 멀어져만 간다. … 눈물이 나는걸까,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시야가 흐려짐에 따라, 그녀의 의식 역시 희미하게 흐려졌다. 사실,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게 아니라 하늘을 날고 있는게 아닐까? 칼리아넬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았던 매끄러운 흰색 동체를 떠올린다. 살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며 칼리아넬은 아래로 추락했다. 그녀는 마력을 사역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그저 중력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비겁한 생각이지만,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감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그녀에게 미래는 없었고, 오직 루루렌칼리체와 함께 했던 과거만이 있었다. … 그녀의 회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바램도 이어지지 못했다. 칼리아넬은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받치고 있는건, 루루렌칼리체가 떠났을 밤에 심어진 정령의 나무였다. 아직 완전한 의지조차 갖지 못한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가지를 뻗어 떨어져 내리는 칼리아넬의 몸을 받았던 것이다. 완전히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 가지 몇 개는 힘없이 휘어지고 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나무 위에서 멍하니 그가 떠났던 밤을 회상하다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울어서 눈물샘이 이미 말라버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터져버린 눈물은 그칠줄 몰랐다. 칼리아넬은 자신을 받아준 나무를 끌어안고 끝없이 눈물을 흘렸고, 정령의 나무는 그녀의 눈물을 받아주며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 - 슬픔을 느끼는가, 은룡. - 근거모를 소리를 하는군. - 그렇다면, 어째서 너 역시 이 세계를 떠나려 하는가? 그래도 더 이상 루루렌칼리체는 만날 수 없다. - 백룡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녀석이 만들어 놓은 이 세계에 더 이상 머물기가 싫어서이지. - 그런가…. 그렇다면, 떠나가기 전에 이곳에 흔적을 남기고 가는건 어떤가? 나 밖에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조금 쓸쓸해서 말이야. - 쓸쓸하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는군. 뭐, 좋다. 내 권능을 이곳에 내려놓고 떠나도록 하지. 그리고 모르고 있었나 본데, 백룡도 이미 오래전 이곳에 흔적을 남겼었다. 아주 하찮은 것이긴 하지만. - 그랬던가? 그런데… 권능이라니, 그것을 어디에 놓고 떠나겠다는 거지? - 물론, 백룡이 남긴 하찮은 것에 남기고 떠나야지. << 영원으로 가는 문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