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장 < 마족 > 1. 짹짹. 찌르르르~. '우웅. 저 놈의 새는 남 자고 있는 것도 안보이나? 쳇, 누가 숲 속 아니랄까... 자 ..잠깐! 숲?' 시끄러운 새들의 노랫소리에 잠이 깬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으윽!"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마자 나는 가슴에서 전신으로 퍼지는 통증 때문에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침대에 눕혀야 했다. 풀썩. '침대?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는 분명 숲 솦이었는데? 결계가 숲 속에 있었으니 당 연히 내가 쓰러진 장소는 풀밭이어야 할테고... 일어나야 하는 장소도 풀밭이 되야 정상인데? 아, 그 발자국 소리!' 의식을 잃기 전에 희미하게 들렸던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기억한 나는 그 소리의 주인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의식을 잃을 당시 난 그 소리가 아슬란의 것이 아닐까?하는 절망적인 생각을 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 렇게 무사히 살아 있는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런 생각은 틀렸던 모양이다. '아슬란이 아니면 누구지?' 쉽게 발견할 수 없고, 아무나 들어 올 수도 없는 결계. 그 안에 사는 사람. 분명 쓰러진 나를 이곳으로 옮겨준 이는 이곳에 사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죽음의 숲처럼, 이곳은 분명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숲인데... 이곳에도 이노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흠~. 그러고 보니 결계도 이노의 것과 비슷했지. 커다 란 규모의 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노가 사용한 법칙대로 결계를 만들어야 된다 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어.' 비슷하게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숲. 그리고 이노의 오두막집이 있는 곳과 비슷한 식의 결계. 갑자기 뭔가 불안한 느낌이 나를 엄습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노와 비슷한 사람이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풀어지려던 마음을 바싹 긴장시켰다. '이런 결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이노보다 더하진 않더라도 비슷 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사람임이 분명해.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노 말고도 존재할 수 있을까? 대체...' 그런데 그 때였다. 내가 궁금해하던 존재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오~. 일어났군. 몸은 괜찮나?" 듣기 좋을 정도로 연륜이 베어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쟁반을 든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저..저 자는!' 풍성한 희 머리카락에, 덥수룩한 흰 수염. 환하게 웃고 있는 눈가에는 잔주름들이 가득했지만,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한 마음이 들게 했다. 얼핏 보이는 모습 만 보면, 그는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 하지만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운. 좋아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내게 다가오는 노인에게 서 나는 마족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란에게서 느꼈던 기운보다 확실하면서도 강한 마족의 기운을! "왜 그러나? 혹시 몸에 문제라도 있는 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노인이 고개를 웃음을 거두며 내게 다가왔다. "아. 아닙니다." 이 노인이 무슨 의도로 나를 도왔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에 대 답을 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내가 알기로 마족이란 인간과 상극이라 가까이 할 수 없는 종족이었고, 그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즉, 가까이 하면 해를 입는 존재가 바로 마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족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내 몸이 긴장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족이 이런 식으로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가? 인간들을 이용하기 위해 연극 같은 것을 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호..혹시 이것도 연극? 하지만 왜?' 노인이 내 몸을 건드리기 전까지 나는 갑자기 떠오른 수많은 의문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봐 청년, 내 말 들리나?"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허허... 아무것도 아니네. 이것 좀 먹어보라고 불렀던 거지." "이건?" "약이라네. 자네 몸이 안좋은 것 같아 내가 준비한 걸세." "아니, 전 괜찮은.. 으윽." 의도를 알 수 없는 노인이 건네주는 거라 나는 거절의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절묘한 순간에 가슴의 통증이 전해와 내 손은 결국 노인이 건네주는 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허허, 그러게 그냥 받지 그랬나. 자네 몸이 낫는데 도움을 주는 귀한 거라네. 뭐, 이곳에서는 별로 쓸 일이 없지만 말일세."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가 약을 먹기를 기다렸다. '이게 뭐지? 수상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몸으로 안 먹겠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흠~. 할 수 없지.' 눈과 코로 약으l 성분을 알아내려고 하던 나는 의외로 노인이 건낸 약물이 꽤 내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호오~. 이건!' 꿀꺽 꿀꺽. 노인이 건네준 약물의 성분을 안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손에 들린 약물 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이것은 예전 내가 궁에서 생활했을 때, 유모가 내게 먹인 보양약과 같았던 것이다. '통증을 없애주면서 심장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약. 그러고 보니, 냄새도 거 의 흡사하군. 이 노인 의학에 관심이 꽤 있는 건가? 의외로 잘 만들었어.' 목구멍을 넘어가는 약의 맛과 향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쓰고 역겨운 냄 새가 유모가 줬던 것보다 배는 강했던 것이다. '웩~.' "허허, 잘 먹는 걸? 꽤 독한 건데.' "아, 괜찮습니다. 이런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먹어오던 거라." "호오~, 이런 귀한 약을 말인가?" "...네." 눈을 빛내는 노인의 모습에서 나는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네 꽤 부자인가 보군? 이 약은 값나가는 약초만 필요로 하는 건데 말일세." "아, 네." 노인의 대답에 나는 손에 들린 빈 그릇을 넘기며 방 주변을 훑어 봤다. 깔끔하지만 필요한 것 이외의 물건은 보이지 않는 방. 혹시나 하고 둘러본 방안에는 란이 없 었다. "저, 혹시 저와 함께 쓰러져 있던 여자는 보지 못했습니까? 푸른색의 긴 머리에 보 라색 눈을 한..." "알고 있네. 자네와 같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여기 없네." "아니, 왜?" 아픈 가슴을 끌어안으며 몸을 무리하게 일으킨 나는 다급한 마음에 노인에게 그 이 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가씬 자네보다 심하게 다쳤더군. 그래서 나보다 좀 더 괜찮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데려갔지." "다..다쳐요?" 이유를 알 수 없는 노인의 말에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결계를 넘는 당시 란은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내가 란의 몸안의 마나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움직여줬기 때문에 결계를 통과하는 동안 그녀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어야 했던 것 이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내가 생각한 결과와는 다르니! "어디를 얼마나 다쳤습니까?" "음... 몸 전체를 다 다쳤네. 뭐, 생명엔 지장 없으니 그렇게 흥분하지 말게나. 조 금만 더 요양하면 일어날 수 있을테니..." '조금만 더 요양? 그 정도로 다쳤단 말인가? 하지만... 다칠만한 일은 없었는데? 혹시 결계를 통과할 때 다른 원인이라도 있었던 건가? 음~. 란의 성격이라면 그런 고통쯤은 티내지 않을 수 있었겠지. 내가 결계 통과 전에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으니까. 하지만 전신이 망가질 정도라면 고통이 장난아니 었을텐데...' 답답한 마음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흠~. 보아하니, 자네, 그 아가씨와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군. 걱정 말게. 정말 얼마 있으면 일어날 수 있을테니. 몸에 흉터같은 것은 안남을 테니 그리 걱정할 것 없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노인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자, 난 급히 손을 가로 저었지만, 노인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깐~! 왜 마음대로 오해를 하고 그러는거얏-! 에휴~.' 씨익 웃는 노인의 모습에 나는 억지로 따라 웃어줬지만, 속으로는 겉과 다른 엄청 난 절규를 토해냈다. 노인이 알 수 없도록. "아, 그건 그렇고 이곳은 대체 어딥니까? 왜 이곳 주변에 그런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는 겁니까?" "자네... 모르고 들어온 건가?" "네?" 뭔가를 생각하는 듯, 노인은 지금까지완 다른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들어왔다라... 그럴 수도 있었겠군. 하지만 목숨이 위 험할 정도의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이 안으로 들어오다니.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 을텐데, 말해 줄 수 있겠나?" "아~!" 대단한 추리력을 가진 노인의 말에 나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놀란 눈을 해야만 했다 '보통 노인이 아니군. 그 정도까지 추리해내다니. 하지만, 사실을 말해야 하나? 눈 앞의 노인이 나를 구하고 약까지 먹인 걸로 봐서 내게 해를 줄 의사는 없는 것 같 지만, 이 자 역시 아슬란과 같은 마족. 아슬란과 아는 사이로, 내게서 뭔가를 얻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누군가를 쫓고 있었습니다. 제가 쫓던 그 자는 결계 부근에서 사라지더군요. 그 자가 거기서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면 그곳에 결계가 있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어 쨌든 그 후, 우리는 결계 이외의 그 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어, 이 안으로 들어오 게 됐습니다. 그 자를 찾기 위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노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느낀 바대로라면, 이 노인은 거짓과 진실 정도의 구분은 충분히 할 능력을 가졌으므로.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흠~. 그랬군, 그랬어. 자네가 쫓던 존재는 분명 꼭 찾아야 하는 자였나 보군. 쫓 고 쫓기는 관계인 걸로 봐서, 그 자는 자네에게 원수정도의 인물일테고... 아닌가?" "아니, 맞습니다." 핵심으로 쉽게 접근한 노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 노인... 위험한 인물이군. 이렇게 예리하다니. 그리고 잘못 거짓을 말했다가는 금방 알아차렸을거야. 음~.' 심상치 않은 노인의 추리력에 나는 몸을 긴장시키며 노인의 다음 말을 들었다. "그랬군... 하지만 이 결계 안으로 들어온 이는 자네와 그 아가씨뿐이었다네. 내가 이래 보여도 이 주변에 쳐져 있는 결계에 관해서는 가장 예민한 존재거든? 자네들 이외의 존재는 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어." 가슴을 퉁퉁 뚜드리며 믿어달라는 노인의 모습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일거야. 나와 란이 결계를 넘자마자, 발자국 소리가 들렸으니까. 결 계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찾을 정도라면, 이 노인의 말대로 결계에 매우 민감한 존재임이 확실하겠지.' "그런데, 자네가 쫓던 자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나?" 궁금한 듯 두 눈을 빛내는 노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가 쫓는 자는 알려진 자가 아닐뿐더러, 아는 사람들도 적습니다. 제가 말씀드려 도 알지 못할겁니다." "흠~. 듣고보니 그렇겠구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노인의 눈빛에 가득했지만, 그는 내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눈치가 빠른 만큼, 내가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한걸 그도 안 것이다. "아, 내가 이거 아픈 사람을 붙잡고 뭐하는 건지~. 푹 쉬게. 궁금한 건 다음에 물 어보고. 우선 자네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네, 아직은 움직이는데 무리가 있을테 니... 그럼, 난 나가보겠네~." 노인은 내 입에서 다음 질문이 떨어지기 전에 빈 그릇을 챙기고는 방을 나갔다. "아..." '아직, 물어볼게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하지만, 아직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 도의 휴식이 필요해... 결계를 통과하면서, 심장에 커다란 무리가 간 것 같으니 말 야.' 결계 통과에 이 정도의 상처를 입을지 몰랐던 나는 고개를 흔들며 심장에 모여 있 는 마나를 풀었다. 몸 안의 상처를 빨리 낫게 하려면 많은 마나가 필요했기 때문이 다. '자체 치유를 하려면 활동적인 마나가 있어야 하지. 묶여 있던 마나만 풀린다면, 나는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고통에서 보다 빨리 해방될 수 있을거야.' 생각이 끝나자마자, 나는 심장에 묶어뒀던 마나의 끈을 풀어버렸다. 그러자 순식간 에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마나가 내 몸 구석구석까지 흘러들기 시작했다. "으..윽."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마나 때문에 심장의 상처가 아려왔지만, 그와 비례해 자체적 으로 몸을 치료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마나 덕분에 그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슬란이 이곳에 없단 말이지? 노인의 말에 의하면 그렇지... 하지만, 노인이 거 짓말을 했다면? 분명 그 노인은 마족이었어. 그것도 순수마족...' 생전 처음 보는 노인, 그것도 마족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기에 나는 몸이 회복 되는 대로 이곳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몸이 회복된 나는 노인의 놀랍다는 시선을 무시한 채 그에게 이곳 안내를 부탁했다 자신을 리먼이라 소개한 노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내게서 거두지 않았지만 , 그렇다고 내 부탁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슬란을 찾아야 한다. 그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 리먼이 안내한 곳.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마을이었다. 결계의 크기가 너무 큰게 아 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였지만, 내 눈은 그 결계의 크기가 이 마을을 감싸 는 것엔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이 마을...' 리먼의 집은 결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마을까지는 꽤 많이 걸어야 만 했다. 그래서 처음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난 결계 안에 존재하는 그의 이웃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착각을 했었다. 리먼의 안내로 걸어온 길은 대부분이 누군가 지난 흔적이 전혀 없는 숲이었기에 난 리먼의 이웃 역시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높은 언덕에 도착한 나는 그 아래 마을의 모습을 본 뒤 내 생각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리먼이 단순히 마 을에서 떨어져 지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저들은?!' 내가 서 있는 언덕과 마을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아름다운 여인, 청년, 노인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그들은 보통 마을 사람들과 다 를 바 없이 일상적인 자신들의 일에 푹 빠져 있었다. 바쁜 듯 하지만, 모두 여유롭 게 해내는 모습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마을 사람 들과는 달랐다.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난 그들에게서는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내 옆의 리먼과 흡사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 마족이란 말인가? 그것도 순수한?!' 마족, 지금 내 앞에는 혼혈이 아닌 순수 마족들이 즐비해 있었다. 수를 셀 수도 없 을 정도로... '이..이건 대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리먼을 쳐다봤다. 그라면 내게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먼은 마을을 쳐다보며 내 시선을 미리 피해버렸다. '이 자는 내가 마족을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내가 직접 이 자에게 물어야 하는 건가?' 혹시 실수하는 게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항 이었기에 나는 힘겹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리먼... 뭣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질문인가? 물어보게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연 리먼을 향해 나는 심호흡을 깊게 하며, 마음을 불안 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곳은 마족 이외의 존재는 살지 않는 것입니까?" 반짝. 순간 나는 리먼의 눈빛이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 쳐다본 그의 눈빛은 예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눈빛으로 되돌아와 있었기에 난 내가 잠시 착 각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호오~. 마족이란걸 알 수 있는 게로군." "...네." 역시 리먼은 내 생각대로 이곳이 마족들만이 존재하는 마을임을 시인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런 마족들의 일원이라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리먼은 잠 시 뭔가를 생각한 후에야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대로 이곳은 마족 만이 사는 마을이라네. 그 이외의 종족은 없지." "역시...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죠?" 마족의 마을. 리먼의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에 나는 당연히 그의 말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먼은 의외로 쉽게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누군가 우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걸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네." "네? 그게 무슨?" "자넨, 마족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곧 내가 알고 정보를 그에게 알렸다. "제가 알기로 마족이란 피를 좋아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종족이라 알 고 있습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즐기는 종족이 마족이라고 말입니다." 아니냐는 눈빛으로 리먼을 쳐다봤지만, 그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 었다. "자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 "역시 자네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갖고 있었구먼. 하아~. 뭐, 사실 예전 우리들이 자네가 말한 식의 본능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 그 때문에 그런 편견이 팽배해 자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일테고." "그럼, 아니라는 것입니까?" 의야함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반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아니네." "그..그런!" "마족이 피를 좋아하는 본능을 가진건 사실이지. 하지만 모두 그런 법은 아니라네. 개중에는 그렇지 않는 마족들도 있지. 물론, 그들은 인간들의 사회에 파고들어 그 들을 괴롭히는 일 따위는 하지 않네. 그래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일세." 새로운 사실들. 리먼의 입에서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대부분의 마족들은 그렇지 않았지. 즉 피를 좋아하지 않는 마족 들은 소수였던 것일세. 그래서 그동안 마족들은 자네가 생각하는 식의 편견에 사로 잡힌 말들을 들어야 했고... 하지만 뭐, 이런 말들은 지금 해도 소용없는 것이겠지 ?" "......" 자조적인 목소리로 내게 의견을 물어오는 리먼. 하지만 난 선뜻 그의 말을 받아드 릴 수 없었다. 리먼이 꺼낸 이야기는 내가 지금가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사뭇 달랐 기 때문이다. 즉, 리먼이 마족의 입장에서, 나는 인간의 입장에서 마족에 대해 알 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만들어져, 내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리먼의 말을 믿어야 하는건가?' 혼란스러움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레드 사이어. 란이 갖고 있던 레드 사이어의 말에 따르면 마족은 내가 알고 있던 그런 사악한 존재가 맞아. 피를 원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즐기는 ! 하지만 리먼의 말대로 예외는 있어. 레드 사이어도 그런 예외에 속하겠지.' 결론을 찾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내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표정을 살피던 리먼은 한번 부드럽게 웃음을 보이고는 이야기의 요점으로 다시 나 를 이끌었다. "이곳에 마족 이외의 존재가 살지 않는 이유를 물었던가? 그것은 피를 추구하는 마 족의 낯을 보기 싫어하던 이 때문이지. 하아... 뭐, 그 덕분에 피를 좋아하는 마족 이외의 다른 마족들도 모두 이곳에 갇히게 되었지만 말일세." 다시 고개를 흔드는 리먼. 그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안타까웠는지 잦은 한숨을 쉬며 말을 했다. "가..갇혀요?" "그렇지. 우린 말 그대로 이곳에 갇힌 거라네. 그래서 이렇게 마을을 형성한 채로 모여 살고 있는 것이고..." 리먼의 말에 나는 그제서야 마족의 습성에 대한 사실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마 족은 공동체 생활보다는 자유롭게 홀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마을 을 이루고 살 정도의 공동체 의식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마을을 이룰 수 없는 종족이라는 것을 말을 말이다. '음, 리먼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마을을 형성한 것이 되 는 건가?' "그럼, 이곳 생활은?" 공동체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족이 마을을 이뤘으니 그들의 생활이 잘 되지 않으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의 모습 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의 인간 마을처럼 아무 무리 없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리먼의 대답에 의해 증명되었다. "물론, 우린 잘 생활하고 있네. 마을을 형성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족들 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런 본능 정도는 무시할 수 있으니까. 뭐, 그 덕분에 피에 대한 욕구나 살기에 대한 본능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지." "네?" 본능이 사라진다는 리먼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본능이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먼은 내 말을 부정하며 자신의 말을 이었다 "사실이네. 믿기 어렵겠지만, 지금 그들은 보통 인간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 도로 마족으로서의 본능을 상실한 상태지. 자네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가?" 리먼의 거짓 없는 목소리에 내 시선은 다시 언덕 아래 마을로 갔다. 그렇게 활발하 진 않지만, 밝은 느낌이 드는 마을. 내 눈에는 리먼의 말대로 평범해 보이는 모습 의 마을이 보일 뿐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싸움, 약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 이다. 웃음과 담소에 익숙한 마족들만이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본능이란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인데... 리먼의 말이 맞단 말인 가? 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상황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본능을 없애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죠? 본능이란..." "그래, 본능이란 쉽게 없앨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그런 본능도 세월 앞에서는 아 무것도 아니라네." 내가 어떤 의문을 품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리먼은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월. 자네는 몇 백년이라는 세월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마을에서 살아 본 적이 있나? 아무것도 없는 마을에서? 물론,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네. 처음 이곳 에 갇힌 우리들은 인간 대신 마족들을 대상으로 서로 죽이고 이용하고, 약탈하고.. 그런 본능에 따른 행동들을 해왔지. 하지만 그것도 몇 십 년이네. 점점 줄어가는 종족의 수에 우리는 본능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몇 백년... 그 본능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네. 이제 우리들은 자네가 생각하는 마족으로서의 본능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지." '그..그런 건가?' 설득력 있는 리먼의 말에 내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지고 말았다. 리먼의 말은 그 어 느 것 하나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진실 어린것 이었다. 내가 보기에 리먼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으므로. '음... 이런 곳에 아슬란이 있을 것 같지 않군. 마족들이 존재하는 곳이라 아슬란 이 이곳을 찾아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니. 아니, 잠 깐, 아슬란이 찾아와?' 리먼은 자신들이 이곳에 갇혀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런 갇혀진 장소에 아슬 란이 들어온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그렇게 허술한 결계라면, 이들은 이미 오래 전 에 이곳을 나갔을 것이므로. 하지만 몇 백년동안 리먼의 말대로 대륙에는 마족의 존재가 사라졌었다. 즉, 멸종되었다는 말이 퍼질 정도로 그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 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그 렇다면?! '아슬란이 이곳에 들어왔을리 없다는 결론이군! 결국 나와 란은 그에게 속은 건가? 우리들만 이곳에... 헉! 아..아니 잠깐만! 뭐지? 아무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견 고한 이 결계를 들어온 우린 어떻게 된 거지?' 순식간에 복잡했던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가 되버렸다. "리넨? 자네 왜 그러나?" "리먼! 잠깐, 이 마을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머릿속 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게." 리먼은 흥분한 내 모습에서 내가 갖게 된 의문을 이해한 모양인지 아무런 반대 없 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나는 언덕에 리먼을 남겨두고 곧바로 그 아래의 마 을로 몸을 날렸다. '아슬란이 없으면... 그가 마을에 정말 없다면... 그럼...' 심각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가슴은 마을을 2번씩이나 뒤질 동안 멈추지 않았다. 아 니, 오히려 그 후, 아슬란이 없음이 확실해 지자, 그 두근거림은 배는 더 빨라졌다 "헉헉. 여..역시 없다." 상체를 숙인 채 숨을 고르던 나는 마치 짙은 안개가 깔린 곳에서 회오리바람에 휩 싸인 듯한 기분을 맛봤다. '그렇다면 뭐지? 나와 란이 통과한 그 결계란 뭐란 말인가! 몇 백년간 이곳에서 나 가지 않은 마족들을 보면... 본능을 잠재우며 마을까지 만든 이들을 보면, 분명 이 결계는 아무도 못 나가는 결계다. 호..혹시, 이곳은 이노의 결계처럼 밖에선 들어 오기 쉬워도 안에선 나가기 어려운 결곈가? 그렇다면 아슬란은 그 사실을 알고 우 리들을 이곳에 가둔 건가?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 점을 이용해?' 결계에 손을 넣고 있을 때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결계 안에 완전히 몸이 들어오면, 못나가게 될지도 몰랐다. 아슬란이 없는 마족들의 마을이 내게 그런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안돼! 안돼---------엣!' '이..이런 일이!' 머릿속의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건가?' 하지만 아슬란을 쫓던 당시 난 결계를 나가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 다. 그때는 오직 이 안에 아슬란이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뭐 , 결국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후회를 하고 있지만. 웅성웅성.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뭐지?' 이상함에 고개를 든 나는 잠시 나를 둘러싼 꽤 많은 수의 마족들을 보고 의야해 했 다. 그들은 주변에서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철창에 갇힌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인간! 어쩌면 이들에게 나라는 인간은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몇 백년간 마족 이외의 존재는 보지 못한 그들에게는... 하지만 이리 저리 나를 훑어보는 그들의 시선은 달갑지 않았다. '쳇, 기분이 더 안 좋아지려 하는군.' 고개를 돌려 그들의 시선을 피해봤지만, 이미 외부 존재로 낙인찍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마족들에게 둘러싸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와 그들을 돌려보내기 전까지는. '리먼?' 익숙한 모습이 내 시야를 가리자, 순식간에 마족들이 하나 둘씩 내게서 떠나갔다. "마을 구경을 한다더니,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겐가?" 주변의 마족들이 사라지는걸 확인한 리먼은 고개를 돌려 내게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다 돌아본 건가?" "네." 힘이 빠져 있는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리먼은 내 등을 토닥이며 활짝 웃었다. "흠~. 보잘 것 없는 마을이라 실망을 한 건가 보군. 뭐, 그건 그렇고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세. 자넬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어서 말야." "저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 어느 정도 그들이 나를 보고자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던 나는 리먼의 말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뭐, 가는 길에 자네랑 같이 온 아가씨도 만나보고." '아, 란. 그러고 보니 그녀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깜박했군.' "그러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앞장서서 걷는 리먼을 바라보며 그가 나를 안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내게 다가와 앞으로 해야 할 일 들에 대해 하나 둘씩 짚어주는 것처럼. 하지만 이내 난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들 을 떨쳐버린 후, 리먼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선은 리먼이 말한 대로 란과 다른 마족들을 만나본다. 그리고 그 후, 이곳을 빠 져나갈 생각을 해봐야지! 리먼의 말대로라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겠지만 내 눈으 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의 말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겠지.'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진실 때문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흔들리던 마 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 리먼에게 그와 같은 미소를 건넸다. "다 왔네." 내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던 리먼이 크진 않지만 웅장한 느낌이 드는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여긴 마을에서 나이 많은 마족들이 모여 시간을 때우는 곳이라네. 뭐, 늙으면 젊 은이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없으니 이런 곳에서라도 잡일을 해야 하지. 아, 자네를 보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할 일 없는 늙은이들이라네. 허허." 어깨를 으쓱거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나를 안내한 리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건물 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선 나는 이곳이 리먼의 말처럼 단순 한 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웅장한 느낌의 건물. 내부 구조도 보통의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군. 무게 가 느껴져. 마치 중요한 회의를 하는 건물처럼 말야.' 왕성에서도 이런 느낌의 방을 본 기억이 있었기에 나는 리먼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인물.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아마 장로급의 능력 있는 마족들이 분명했다. 리먼의 말대로 힘없는 늙은 마족이 아닌. '결계를 통과한 나를 만나보고자 하는 자라면 보통 늙은 마족일 리가 없지.' 아까 리먼이 내 주변에 몰린 마족들을 쉽게 물리치던 모습을 떠올린 나는 조용히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나를 보고자 하는 인물이 이 마을에서 꽤 힘이 있는 자라고 하면, 리먼도 그런 마 족들 중 하나겠군.' "이쪽일세." 리먼이 먼저 안내한 곳은 란이 잠들어 있는 아늑한 방이었다. 방안에는 란과 그녀 를 돌보는 다른 마족 한 명이 있었는데, 그녀는 나와 리먼을 보더니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자네를 보고싶어 하는 다른 늙은이들은 이곳을 나간 후, 만나보도록 하지. 자네에 겐 그 늙은이들보다 이 아가씨에게 더 많은 관심이 쏠릴테니~." "리먼!" 쓸데없는 말을 하는 리먼에게 따끔한 한 마디를 건내봤지만, 그는 그저 한번 웃어 준 후, 내 말을 흘릴 뿐이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 잠이 들었을 거네. 저 아가씨는 자네처럼 회복력이 크지 않아서 말일세." "네, 저 잠시 혼자 란을 살펴보고 싶은데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머금으며 분위기를 편안하게 해주는 리먼. 그는 내 말에 눈빛을 빛내더니 능글맞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차! 이 늙은이가 눈치가 없었군. 하하하, 그럼 난 밖에서 기다리지. 즐거운 시 간 되게~." 리먼은 분명 뭔가 크게 오해를 한 게 분명했지만, 난 힘들게 그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내가 오해를 풀려고 하면, 저번처럼 그 오해의 깊이를 더 크게 만들게 뻔 했으므로. '즐거운 시간은 무슨! 쳇. 뭐, 어쨌든 혼자 란을 살펴볼 수 있어서 다행인건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간 나는 아직은 제 혈색을 다 찾지 못했는지 창백한 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도 한번 이런 식으로 란에게 다가갔던 적이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때완 달리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를 그녀에 대한 걱정을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리먼의 말대로라면 머지 않아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했는데, 이 불안감은 뭐지?'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란을 바라봤을 때도 난 아무런 느낌도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녀를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와 그녀를 잇는 인연 의 끈이 너무 얇았기 때문일까? 란을 걱정하는 마음이 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내가 무리해서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 행동을 한건 가?' 예전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의문들이 하나 둘씩 떠올라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마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젠장. 왜 쓰러져 갖고 내가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드냔 말야!' 덥썩. 알 수 없는 기분 때문에 화가난 나는 가녀린 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말랐군. 아니, 원래 이렇게 가늘었었나?' 언제나 강한 척 하는 란이었기에 난 그녀의 손목을 잡은 후, 잠시 당황해야만 했다 예전에 이미 한번 잡아본 적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란의 모습과 행동에 의해 다 잊혀진 듯, 가는 란의 손목이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런, 또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흐를 뻔했네. 지금은 그저 란의 몸 상태를 알아보 면 되는 것인데 말야.' 란 때문에 이상해지려던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이후 천천히 란의 몸을 살피 는 것에만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잠시 후 란의 몸은 여러 조각으로 분해되 듯, 내 머릿속에 하나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리먼의 말대로 란의 몸은 만신창이가 다되었군. 하지만 지금은 꽤 많이 호전되었 어. 그동안 다른 마족들이 그녀를 치료해줬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왜 이 정도로 몸 이 망가진 거지? 결계를 통과하는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그녀의 몸에 있는 마나를 내가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가 안가. 몸 구석구석, 상처를 입 지 않은 곳이 없군. 마치 전기가 흐르는 곳에 모두 노출된 생물처럼 전신이 모두 망가져 있어.' 다른 마족들이 란의 몸을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란은 더 많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치료라곤 해도, 단순히 란의 몸에 그들의 기운을 불어넣었을 뿐이군.' 만신창이가 된 란. 그녀가 다친 것은 겉이 아닌 안이었다. 즉, 몸 안이 갈기갈기 찢어진 듯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의 치료라는 것은 마나 이외에는 없다고 판단 한 듯, 란을 치료한 이들은 모두 그들의 기운을 불어넣어 란을 치료한 것 같았다. '하긴, 약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을 발라 낫게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니, 그 방법 밖에는 없었겠지.' 하지만 내 눈에 그들의 치료는 매우 허술해 보였다. 이곳 저곳 아직도 치료할 부분 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내 손으로 치료했더라면, 이 정도로 오래 침대에 누워 있을 필요는 없었을텐 데... 하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게 얼마 전이니 생각해봐도 소용없는 일인가?' 한숨이 절로 나온 나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안정시킨 후, 란의 다친 몸 안을 치료하기 위해 마나를 움직였다. 란의 마나는 이미 나에 의해 여러 번 움직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내 의지에 의해 잘 움직여줬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 란의 몸에는 마족의 기운이라 부를 수 있는 흐름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마족들이 치료해서 그런거겠지? 흠~.' 이전보다 강해진 마족의 기운. 란의 변화에 놀라워하며 나는 서서히 그녀의 몸을 하나 둘 씩 치료해 나갔다. 내가 갖고 있던 마나. 즉 내 몸에 돌아다니는 마나 자 체가 상처 난 곳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성질을 갖고 있었기에 그런 흐름에 익숙한 나는 란의 마나를 그와 같은 흐름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여러 번 마나를 움직여 주자, 란의 마나는 그 흐름에 익숙해졌는지 점점 줄여나가는 내 의 지에도 알아서 척척 원래의 움직임을 유지해줬다. '이제는 약간의 인도만 해줘도 알아서 움직이는 건가? 그럼, 내 마나를 조금 더해 줘도 괜찮겠군.' 이미 흐름을 익힌 란의 마나였기에 난 그 안에 내 마나를 조금 더 넣어 란의 치료 를 돕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까지 다친 거지?' 최초의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자, 난 누워 있는 란을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른 사파이어 색의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늘어뜨리고 조용해 눈을 감고 있는 란.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란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계를 통과하는 동 안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온몸에 새겨야 했다. '어째서 이 정도까지 다친거지?' 란을 보기 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의문. 즉 그녀의 상처정도였다. 리먼의 말을 미 리 듣긴 했지만, 정말 그 정도까지 다쳤을 줄은 몰랐었다. 내가 결계를 통과하다 다친 것은 마나를 뭉쳐놨던 심장에 무리가 갔기 때문이었다. 뭉쳐있는 마나가 결계의 흐름을 따라주지 못했기에 심장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하지만 란의 경우는 나와는 달랐다. 충분히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 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 내부는 모두 상처가 나 있었으니... '란의 무엇인가가 결계에 맞지 않았던 건가? 마나는 절대 아닐테고... 뭔가 다른게 있었던 것일까?' 란의 몸에 마나를 조금씩 계속 주입시키면서 나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이어봤다. '이 주변에 쳐져 있던 결계가 이노의 결계와 차이가 있긴 있었지. 이곳의 결계에는 알 수 없는 흐름의 알갱이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시될만한 것이라 난 별로 신 경쓰지 않았는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 하지만 난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 헉!' "나와 란의 차이!"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꽤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란은 반인마족이다. 나는 인간이고. 그 알 수 없는 흐름이 마족의 피가 흐르는 존 재에게만 작용하는 것이라면?!' 머릿속에 생각의 결론이 번뜩이자 나는 란의 전신에 나 있는 상처가 이해가 갔다. 확신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를 만나보고자 했던 마족들. 그들과 이야기 해보면 알겠지. 그들이 날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결계를 통과한 것일테니!' 어느 정도 스스로 움직이는게 가능해 지자, 나는 란의 몸에 더 많은 마나를 불어넣 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혼자서 잘 치료할 수 있겠지. 그럼 머지 않아 침대에서도 일어날 수 있겠고.' 란의 혈색이 웬만큼 돌아온 것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 을 리먼에게로 갔다. 리먼은 란이 있는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내가 나오는 소리 에 고개를 들어, 내게 의외라는 눈빛을 던져 나를 의야하게 만들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하지만 그런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는 걸? 연인이 걱정될텐데 조금 더 있다가 나와도..." '으윽. 저것 때문이었나?' 다시 시작되는 리먼의 오해에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의 다음 말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껄껄웃으며 또 다른 오해를 하며 내 신경을 건드릴 뿐이었다. "하하하. 알았네, 이 늙은이가 젊은이들의 일에 꼬치꼬치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이 거늘... 내가 깜박했네~." '하아~. 내가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하든 리먼의 귀에는 다른 뜻으로 들리겠지.' 이번에도 나는 리먼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고자 했던 마족들은 내 생각대로 장로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 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방의 문을 열자마자 느낀 그들의 기운을 보면 확실했다. '리먼처럼 모두 한 가닥 할 만한 마족들이군.'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모두 여섯 명, 리먼과 나까지 합쳐도 열 명이 안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마주치자마자 마치 수백 명의 시선을 받는 것 같은 착 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안게나." 직사각형의 탁자에 왼쪽 오른쪽 세 명씩 앉아 있었고, 양 끝에 두 개의 의자가 놓 여 있었는데 리먼은 남은 두 개의 의자 중 한 곳에 나를 앉혔다. '이런, 이건 마치 회의하는 것 같잖아? 편안하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 었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꺼낸 리먼의 말에 나는 이 같은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리먼은 당연하다는 듯, 내 맞은편에 앉으며 회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시 작했다. "자,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리먼은 두 손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조용했던 장내는 잠시 소란스러워졌 고, 그 소란스러움은 한 마족의 입이 열리면서 끝없는 질문으로 변해버렸다. "자네가 결계를 넘은 인간인가?" "어떻게 결계를 넘을 수 있었지?" "이곳은 어떻게 찾은 것인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온 것인가?" 양 쪽에 앉아 있던 여섯 명의 마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속에 담고 있던 궁금증들 을 모두 털어 내,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이들이 물어오는 것들. 그것들 중 대부분은 이곳 에 오기 전, 리먼이 내게 물어왔던 거였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해준 터였고... "리먼!" 나는 의자에 어깨를 깊숙이 기대고 편하게 앉아 있는 리먼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해줄 의무는 그에게 있었으므로. "하하하, 이거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 모두 흥분하지 말고 자리에 앉게나." 말속에 담긴 내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소란스러 운 장내를 진정시켰다. "질문을 하기 전에 리넨에 대해 설명하는걸 깜박 했구먼.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인물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얼마 전 결계를 넘어온 인간이라네. 이름은 리넨이라 고 하지." 웅성웅성. 리먼은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길 기다리는 사이 내게 미안하다는 미소를 보내줬다. '입에 발리 말처럼, 내게 사과를 하는 건가? 아니 놀리는 거겠지. 일부러 나에 대 한 설명 없이 상황을 지켜본 것을 보면 후자가 확실해.' 마족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경계심이 이는 순간이었다. "리넨은 누군가를 쫓기 위해 이 주변에 왔다가 결계를 발견했다고 하더군. 아, 물 론 그 누군가는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말해주지는 않았다네. 에, 또 결계를 통과한 것은 그 존재가 이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지 아마?" 맞냐는 듯 쳐다보는 리먼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즉, 리넨은 우연히 결계를 발견한 후, 오해로 이 곳에 들어온거지. 우리가 이곳에 있다거나, 결계 안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말일세." 웅성웅성. 리먼은 내게 잘하지 않았냐는 듯, 미소를 보여줬지만, 난 그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으드득. 사람 열받게 하는데 소질이 있군, 리먼. 저런 식이라면 설명을 해준 게 소용없게 되버리잖아. 아니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켜 내게 더 많은 질문이 쏟 아지게 되겠군.' 내 생각은 머지 않아 증명되려는 듯, 아까와 비슷한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만! 하나씩만 물어보시지요. 제 머리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한꺼번에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두 할 수 없습니다." 따끔한 한 마디였기 때문인지 자리에서 이탈했던 내 말이 끝나자, 흥분했던 이들이 하나 둘 씩 제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험험, 미안하게 됐네, 리넨군. 자네의 존재는 몇 백년 만의 맞이하는 놀라운 일이 라서 말일세." '아마 이곳에 갇힌 이후, 처음이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란색의 덥수룩한 수염을 갖고 있는 늙은 마족이 입을 열 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장로회의를 하는 곳이라네. 리먼은 우리들의 의견을 수렴 해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고." "아, 그렇습니까?" 나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하며 아무 설명 없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리먼을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게 별 소릴 다한다며 노란 수염의 마족 을 쳐다볼 뿐이었다. '능구렁이.' 고개를 몇 번 가로젓자, 노란 수염을 가진 마족이 그 사실에 대해 몰랐냐는 듯 질 문을 해왔다. "아닙니다. 리먼이 이곳에 오기 전 모두 설명해줘서 알고 있었습니다." 리먼이 쳐다보든 말든, 나는 그의 물음에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흠. 그렇다면 하나씩 질문을 시작하지. 그래도 되겠나?"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니 당연히 그래도 되지요." 노란 수염의 마족은 잠시 내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곧 두 눈에 강한 의지를 담은 후, 내게 질문을 던졌다. "험험, 리넨군. 이곳 결계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겠나?" 이들의 관심사는 아마도 결계를 나가는 방법인 듯,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그것에 대 해 물어왔다. '하긴, 결계 안에서 몇 백년간 갇혀 지냈으니 그럴만도 하지. 하지만 내가 쓴 방법 이 이들에게도 통할까?' 내가 사용한 방법을 써서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자가 몇 이 될지 몰랐기에 그들의 희망 어린 눈빛을 마주할 수 없었다. "결계라는 것은 마나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모임이 어떤 규칙을 갖 고 있느냐에 따라 결계의 성질이 달라자겠지만요. 저 같은 경우는 결계에 흘러다니 는 마나, 즉 결계를 구성하는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마나의 흐름을 알아낸 후, 제 몸 안에 흐르는 마나도 그와 같은 움직임으로 움직였습니다. 결계와 제 몸에 아무 런 악영향도 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웅성웅성. 아무렇지 않다는 듯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의 효과는 리먼까지도 자리 에서 일어서게 만들 정도로 컸다. "그게 정말인가? 자네가 꽤 높은 클래스라는 것은 알아봤지만 그 정도의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웅성거림 사이에서 제일 처음 입을 연 것은 리먼이었다. 그는 내 말을 믿을 수 없 었는지 탁자까지 세게 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그럼 제가 어떻게 이곳에 와 있겠습니까?" "음... 하지만 그 방법은..." "제가 결계를 통과한 방법이 10 클래스가 되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때문입 니까?" 혹시나 하고 말을 꺼냈지만 그것이 리먼이 말하고자 한 질문이 맞았던 것 같았다. "알고 있었군." "네. 하지만 예외라는 것이 있지요. 10 클래스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10 클래 스의 방법을 쓸 수 있는 예외 말입니다." "그게... 음. 자네를 보니 가능한가 보군." 굳은 표정으로 나를 살피던 리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자리에 몸을 기댔다. "예. 하지만 전 완벽하게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에 대한 대가를 치뤘죠." "음. 그렇군. 혹시나 했지만 자넨 역시 그 방법으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었어." 조용히 입을 다물며, 나와의 대화를 끝내는 리먼. 그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나와 리먼의 대화가 끝나자 주변의 웅성거림도 같이 끝이 나는 것 같았다. 리먼이 다시 불씨를 살리기 전까지는. "계속 질문들 하게. 난 생각 좀 해봐야겠어." '헉. 뭐..뭐야!' 잠시 조용히 리먼을 쳐다보던 나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는 나를 편하게 놔두질 않았던 것이다. "리넨군, 결계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통과하면서 뭐, 이상한 점 느끼지 못했나?" 아까의 노란 수염의 마족이 다시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하아~. 또 시작된 것 같군. 하지만 이왕 시작된 질문. 쳇,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 들이 있으니 끝까지 가주지.' "이상한 점이라니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마음을 다잡고 나자, 이전보다 훨씬 그들의 질문을 대하기 쉬웠다. "음. 결계 통과를 방해하는 뭔가 말일세." '뭔가라고? 혹시 이들이 말하는 방해요인이란 란을 다치게 한 그것인가? 그럼 이곳 을 둘러싸고 있다는 결계는 정말 마족을 가두기 위한?'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몸이 바싹 긴장되는게 느껴졌다. "혹시 마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헉. 그..그것을 알고 있었나?" 마족들의 반응은 내가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이 되었다. 즉 혹시나 하던 생각이 서서히 사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아니, 란을 보고 알았습니다. 반인마족인 란을 보고 말입니다." "......!" 내 말이 핵심을 찔렀는지, 그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동안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결계에는 마족을 가두기 위한 것이지. 즉, 마족이 아닌 존재는 결계통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이야. 이곳 을 감싸는 결계를 통과할 자가 거의 없다곤 해도 말이지." '역시, 그것이 마족들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군. 그래서 란이 그렇게 심하게 다쳤던 것이었고. 흠~. 반인 마족이 그 정도라면 순수 마족은 장난이 아니겠군.' "그럼, 그 동안 시도를 해보셨다는?" "그렇다네. 하지만 성공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네. 이 결계를 통과하려면 그만한 실력이 되어야 했고, 마족이 아니어야 했으므로. 그래서 우리들은 실력이 되도 마 족이 아닌 이가 하나도 없었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네." "란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렇지. 자네와 함께 온 그 아가씨. 반인 마족을 제외하고는 말일세." 그제서야 나는 이들이 왜 그토록 란의 몸에 신경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란은 이들이 나가는데 필요한 마지막 수단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란을 구한 이유가 이곳을 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습니까?" "음. 솔직히 말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다친 아가씨를 그냥 내버 려둘 수 없었다네." 리먼의 말. 그들은 마족이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변했다는 리먼의 말을 떠올리며 나 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본성이 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심었다. 지금까지 바라본 이들은 충분 히 경계할만한 대상이었으므로. "다른 질문을 해도 되겠나?" 내 표정을 살피던 훤칠한 키의 노마족은 끄덕이는 내 모습에 질문을 나직한 목소리 로 꺼냈다. "이 곳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 속의 마나. 그 흐름에 대해서 말일세." "네?"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키가 큰 노마족은 말을 풀어 내 이해를 도와줬 다. "우리도 이 안에서 결계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네. 물론, 그 조사 과정에서 수많 은 피해를 입어야만 했었지. 어쨌든, 자네가 결계에서 느낀 마나의 흐름과 우리가 알아낸 흐름이 같은지 알아보려는 것이네. 만약 같다면 뭔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아, 그렇군요." 그제서야 그들의 말을 이해한 나는 천천히 내가 느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내 말에서도 그들의 표정은 밝아지지 못했다. 즉, 그들 말 했던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에서 느끼는 마나의 흐름과 밖에서 느꼈던 마나의 흐름이 다르단 말인가? 신중 에 신중을 기한 결계군.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대단한 실력을 가진 이임이 틀림 없겠어.' 잠시동안 나는 이 일이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아래로 숙였었다. 하지만 가만히 상황을 정리하던 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헉. 이런. 결계의 흐름이 안과 밖이 다르면 나 역시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잖아! 얼마 없던 가능성이.' 이들이 나를 불러 질문을 던진 것은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질문에 대 답을 하며, 정보를 캐던 나 역시 그런 입장이었고. 그런데 우리를 막고 있는 결계 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장내의 분위기는 더 어두울 수 없을 정도로 가라 앉아버렸다. 무거운 침묵으로 계속되었던 회의가 끝난 것은 란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들 려오면서였다. 생각지도 못한 빠른 란의 회복 때문에 회의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 었다. 아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던 회의는 란을 핑계로 끝났던 것이다. "아니, 벌써 깨어났단 말이오? 아직은 며칠 더 두고 봐야 할 줄 알았는데?" 한 노마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과장된 행동을 보이자, 탁 자 양쪽에 앉아 있던 다른 마족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 했다. "어..어서 가봅시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렸는지 가서 살펴봐야 하지 않 겠소." "그렇지요. 어서 갑시다." 그들은 무의미한 무거운 침묵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는지 하나 둘 씩 회의실을 나갔다. '쳇. 이렇게 끝나는 건가? 회의라고 하면, 대책을 내놔야 하는게 아니었나?' 막막한 상태로 끝내버리는 회의 때문에 내 기분은 별로 좋지 못했다. '란이 의식을 찾았다는 것은 내 치료 덕분이겠지.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란의 몸 자체가 내가 움직여뒀던 마나의 흐름을 잘 따랐기 때문인가? 흠~.' 나는 란이 일어난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회의실에 그 대로 남았다. 아직은 좀 더 이곳에서 생각해볼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할 일을 정리하려던 나는 아직 방에 남아 있는 리먼에 의해 생각을 중단해야만 했다. "자넨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낮은 목소리에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회의실에 남아 있는 이는 나뿐인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의자 깊숙한 곳에 몸을 의 지하고 있는 리먼이 있었던 것이다. '저들을 따라 이곳을 나간게 아니었나?'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을 보내는 리먼 때문에 나는 잠시 당황해야만 했다. "무슨 말이지요?" "자네가, 그 란이라는 아가씨의 기운을 되찾는데 도와줬냐고 물은 것이네." "......!" '알고 있었던 건가? 저 눈빛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군.' 대단한 눈썰미를 갖고 있는 리먼. 그의 판단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미 확신 하고 있다는 리먼의 표정에서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군. 대단한걸, 리넨? 자네의 능력을 내가 과소평가 했는지도 모르겠어." 리먼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면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주시하겠다는 뜻의 눈빛을 보내면서... '뭐야, 왜 저렇게 기분 나쁘게 보는 거지? 마치 저건 내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게 되면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같잖아?' 리먼의 눈빛은 예전 드루젤에게서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더 능 글능글한... 하지만 난 도저히 리먼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리먼 사이에 그런 관계가 만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건 나와 관계 없을 게 분명했고, 내가 그의 일을 방해할 이유 또한 없는게 확실했다. 이런 상황 에서 저런 눈빛이라니. 하지만 리먼은 피식 웃으면서 좀 전의 표정을 지워버렸다. 내가 좀 전, 리먼의 표정을 잊어버리게 만드려는 듯. "회의가 흐지부지 되어버렸군. 뭐, 궁금한게 있거나 하면 내게 물어보게나. 어차피 저들은 아는게 별로 없으니 말야." '하아~. 뭐야? 그럼, 내가 이곳에 올 필요가... 하아~. 아니군. 내가 이곳에 온 이 유는 리먼이 편해지기 위해서겠지. 노마족들의 궁금증을 리먼이 나를 이용해 풀어 주려고 한 것 같으니까 말야.' 리먼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억지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참, 그 아가씨에게 가보겠나?" "아닙니다. 저는 나중에 가도록 하지요." 많은 노마족이 란에게 질문을 퍼부으러 간 것을 알았기에 나는 란과의 대화를 나중 으로 미뤘다. 지금 가서 란을 본다고 해도, 대화가 어려울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리먼도 내 생각을 이해했는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뭐, 그렇다면. 이젠 뭘 할건가?" "결계에 가봐야죠.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호오~. 결계에 가는건 이곳을 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 리먼에게 나는 그저 웃음을 보여줬다. 리먼의 웃음에는 이곳 을 나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과, 나가는 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란이 제일 처음 본 것은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고, 그녀는 곧 여섯 명의 노인들도 볼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처음 보는 노인 여섯 명이 자신 을 둘러싸고 있다면 놀랄 만도 했지만, 란은 그런 것을 무표정하게 받아들였다. 머 리 회전이 빠른 란은 순식간에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미 자신에게는 그들의 곁을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다. 의식을 잃었다 되찾은 것, 편안한 침대에서 깨어난 상황 등이 그녀에게 여섯 노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기에 란은 당황하지 않 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그녀는 태연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여섯 명의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마족의 기운! 그녀가 알기로 노 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확실히 그녀의 몸에 흐르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다 른 점이 있다면, 노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더 맑고 무겁다는 것 뿐. "누..누구?" 자신이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했던 마족들이 여섯 명이나 자신의 곁에 다가와 있자, 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아, 이거 숙녀 앞에서 실례를 했군. 우리는 이 마을의 장로들이네. 얼마 전, 자네 는 결계를 통과하는 동안 몸을 다쳐 결계 바로 앞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었지. 쓰 러진 자네를 리먼이 제일 먼저 발견해 우리들에게 데려왔었다네. 다친 자네를 치료 하기 위해서 말일세." 매우 마른 노마족이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란에게 자세한 상황 설명을 해줬다. 란 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여섯 노마족 뒤를 급 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 리넨은..요?" 이노와의 생활이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높임말을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에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는지, 란은 자신 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인자한 표정과 편안한 말투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노마 족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자신의 말투를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리넨이라면, 자네와 같이 있던 그 청년을 말하는 것이겠군. 그는 지금 리먼과 같 이 있네. 아마 지금쯤 리먼과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 아마 이곳에는 나중에 찾아올 것이네." "아, 네." 란은 리넨이 보이지 않아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죠?" "흠~. 한 일주일 정도?" "네? 일주일이요?" 란은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지 아름다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노마족들은 오히려 일주일이 짧다는 식의 대답을 하며 , 란을 더욱 놀래켰다. "자네는 생각보다 매우 빨리 의식을 되찾은 것이네. 보통 그 결계를 통과하면, 죽 게되니 말야." "주..죽다니요?" 그녀가 듣기로 리넨은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고, 자신 또한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 고 있었지만, 현재 몸을 움직이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결계를 통과하면 , 보통 죽게 된다니! 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그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결계는 마족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네. 즉, 마족에 게는 치명적인 결계라는 말이지. 안에서 나가는 것이나,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나 마족들에겐 불가능하다네. 마족 외의 경우에도 특별히 뛰어난 존재가 아닌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럼, 그럼. 이 친구 말처럼 아가씨가 결계를 통과한 후, 살아 있는 것은 매우 행 운이라는 말이네. 뭐, 그건 아가씨가 반쪽 마족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반쪽 마족. 란은 그들의 말에서 인간보다는 마족을 더 우선으로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지 피식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오면서, 그녀가 갖고 있는 인간 의 피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은 이들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 만 란은 그렇게 생각하는 노마족들의 말이 거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마음 에 들었다. 자신이 반인마족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주고, 그 사실에 경멸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기에. "그 결계라는 것이 마족의 기운을 더 많이 갖고 있을수록 치명적이라는 말인가요?" "호오~. 그렇지. 잘 이해하는군. 매우 똑똑해." 흥분하지 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들의 말을 이해한 란을 바라보며, 여섯 명의 노마족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리넨은 저보다 덜 다쳤겠군요." "그렇지. 그 청년은 갖은 능력이 뛰어나 우리들의 도움 없이도 자체 치유를 했다네 . 굉장한 청년이지." 란이 리넨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노마족들은 리넨을 띄워주 면서 란과의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들이 느끼는 것처럼 머리 회전이 빠른 란은 그들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말을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그 결계요, 마족을 가두기 위한 것이라는데 그럼 이 마을이 마족들의 마을이라는 말인가요?" "그렇다네." 혹시나 하던 생각이 맞아떨어지자, 란은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 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족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리넨과 같이 쫓은 아슬란을 제외하면. 사실 란은 그런 악한 아슬란이라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었다. 자신과 같은 기운을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인자한 마족들 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하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이 마을이 마족들의 마을이라고요?" "왜,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가?" "네."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란의 대답에 노마족들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란에 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럴려면, 우선 몸을 완전히 회복시켜야지. 그럼, 그럼." "네..." 란은 자신이 지금까지 리넨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꽤 많이 감성적으로 변했다는 생 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말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노마족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이들과 함께라면 지금보다 더 마음 속의 감정들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 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을 만난 것 같은 느낌. 자신의 친아버지조차 가족이라는 느낌이 없었던 란이었 다. 자신의 외모만을 인정하는 역겨운 남자라는게 그녀가 갖는 아버지에 대한 느낌 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노마족들. 분명 이들은 그녀가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지금 란은 이들이 자신의 가족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편안하고 포 근한 가족같다는... 서로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는지 란과 노마족들은 그 후, 꽤 오랫동안 더 대화를 나 눴다. 일상적인 것들에서부터, 조금은 개인적인 질문까지.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한 대화였지만, 노마족들과 란은 그 대화가 즐겁게 느껴졌는지 시종일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었다. "이런, 시간을 너무 붙잡고 있었던 것 같군. 너무 즐거워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란은 우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말해주고 싶은 것도 많을 테지만, 깨어나자마 자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누면 회복된 몸에 무리가 될지 모르니 좀 더 쉬도록 해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말을 놓게 된 것인지, 노마족들과 란은 지금의 말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 그들이 가겠다는 말에, 갑자기 마음이 허전했는지, 란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허허, 아쉬운가 보구나.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쉬도록 해라. 우리에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네, 그럴께요." 노마족들은 자신들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는지, 란에게 휴식 을 취하라는 말을 건낸 것이었지만 란은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즉, 란은 그들과 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호의를 무 시할 수 없었기에 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들의 뜻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란은 문을 닫고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그들을 말을 떠올렸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지금의 아쉬운 마음같은 것은 잊어버려도 되겠지~." 란은 시간이 많다는 말이, 이곳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 채, 이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리넨이 오면,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줘야지. 할아버지 같으신 분들과 즐거운 대 화를 나눴다고." 란은 노마족들이 나간 후, 꽤 오랫동안 행복한 표정을 얼굴 한가득 머금었다. 결계-1 리먼이 안내한 결계는 내가 갖고 있던 희망을 무참히 무너뜨렸다. 결계 안으로 들 어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갖게된 희망이었 는데, 상황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게 들어오는 것보다 더 어렵단 말인가?' "하아~." 요즘 들어 툭하면 터져 나오는 한숨이었다. '마족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게 불가능하게 만들 어졌지. 물론 나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야. 그런데 성격 이상한 존재가 이 완벽한 결계에 더 손을 댔어. 쳇. 외부인은 들어올 확률을 남겨둬도, 나가게는 못하겠단 심보로 말야. 으윽. 정말 사람 열받게 하는덴 뭔가 있는 결계야.' "하아~."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자,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한숨이 흘러 나왔 다. 리먼의 안내로 이곳을 찾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째다. 아슬란을 쫓다가 이곳에 온 지도 반달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무런 진척도 없이 이 곳에 갇혀 지내는 신세니 당연히 한숨이 안나올래야 안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쳇, 리먼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다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아 좋아했었는데, 사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어. 내가 이 결계를 나가지 못하리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겠지 뭐. 젠장.'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 결계를 쳐다보자, 아름다운 숲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결계만 없다면 바로 내 앞쪽에 존재하는 숲으로 달 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그것이 그저 상상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결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처럼 '누군가의 접근도 허용치 않다니. 그동안 접근하려고 일주일간 거의 이곳에서만 생 활했는데... 젠장. 대체 어떻게 만들어 놓은거냐고!' 이제는 화를 낼 기운도 없는지 불만스런 말들은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눈앞의 결계는 이전 모습 그대 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아무런 동요없이... '정말 리먼의 말대로 이게 시간 낭비일 뿐일까?' 난 이 결계를 접한 후, 며칠 있다 리먼을 찾았었다. 혼자 해결해 볼 생각도 있었지 만, 아무런 진전이 없어, 그를 찾았던 것이다. 나보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결계를 지켜본 리먼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와의 대화에서 얻은 것은 막막함뿐이었다. 그 역시 몇 백년동안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줄이는 희생까지 하면서 연구를 한 그였지만, 그 역시 나처럼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것이다. "하아~." 내 상황과 결계 밖의 아슬란이 떠오르자, 내 입에서는 또 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리넨, 역시 여기 있었네?" "아, 란..." 골똘히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난 란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 가 말을 걸었을 때야 겨우 그녀의 접근을 알 정도로... '경계심을 풀었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 혹시 요 며칠 사이에 그녀의 능력이 발전했다는?' 활기찬 웃음을 얼굴 한가득 머금고 나를 찾아온 란. 이곳에서 생활한 며칠동안 그 녀는 평범한 소녀의 모습을 급속도로 되찾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싸늘한 모습은 찾 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밝고 생기 발랄한 미소가 란에게 더욱 어울리게 보일 정도 니... "아직,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거야?" 축 쳐진 내 모습과 잦은 한숨을 들었는지,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 다. "어, 뭐 그렇지." "리먼 할아버지에게 물어봤는데도 그런거야?" "...응." 해결 방법이 막막하다는 내 말에 란의 밝았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녀의 표정 변화는 기운 없는 내 걱정 때문이지, 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 아 니었다. '리먼 할아버지라. 이곳에 온 이후, 마족들과 같이 생활하더니 금새 그들과 친해진 모양이군. 할아버지라... 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금새 할아버지라는 말을 쓰기엔 무리가 있는 존재들인데...' 그들이 뭔가 알 수 없는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난 그들을 대하는 란의 태도가 조금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볼을 수 없었던 생기 발 랄한 모습을 하고 있는 란이었기에 난 그것에 대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근데 이곳까지는 웬일이야?" 란의 상처가 모두 나았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명목상 요양을 하는 중이었 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대부분 마족들과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그녀의 방문을 묻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란은 그런 내 질문에 조금은 서운한 표정을 지 어보였다. "아, 별거 아냐. 그냥 오늘 내가 쿠키를 구웠는데, 오랜만에 맛있게 만들어져서 너 줄려고 갖고 왔어." "쿠키?" 갑작스런 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쿠키라니... 하지만 그녀는 내 표정을 못봤는지 등뒤에 들고 있던 커다란 바구니를 자랑하듯, 앞으로 가져왔다. "거기에 담아 온거야?" "응~! 짜잔~." '헉, 이..이게 뭐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난 란의 놀라운 변화에 입을 쩍 벌렸다. 짜잔이라니... 차가 움의 대명사였던 란이 저렇게 변했을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난 그저 멍한 눈 빛으로 란을 쳐다봐야 했다. "왜 그래? 나... 이상해?" 머뭇거리는 내 눈치를 살피는 란.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 보고 있는지 깨닫고는 손과 머리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냐. 이상하기는~. 예전보다 훨씬 보기 좋아." "정말?" "응." 우물쭈물 하던 란이 활짝 웃어보이더니 주변에 앉을만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허허... 며칠 안본 사이 저렇게까지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건가? 마족들과 친하게 어울리는게 란에게 나쁘지만은 않은가 보군.' 그들이 란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이 매우 크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그녀에 게 해야 할 말들을 묻어두기로 했다. 사실 이곳의 마족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마족 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마족은 마족이라는 생각 을 갖고 있었기에 그들과 보이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란과는 달리 말이 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이걸 말려야 하나?' "참, 리넨. 나 그저께부터 리먼 할아버지랑 타쿠야 할아버지한테 정령술 배우고 있 다~!" "뭐? 정령술?" "응~." 자랑하는 듯한 란의 말에 나는 다시 놀라야만 했다. 난데없이 정령술이라니? 하지 만 즐거운 듯 앉을 자리를 만드는 란을 바라보니 그 놀라움을 겉으로 표현할 수 없 었다. 지금 그녀에겐 그저 편한 대화상대가 필요한 것뿐이지, 충고를 해줄 상대가 필요한게 아니었으므로. '란을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들이 란에게 정령술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래서 궁금증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와중에도 난 그런 것은 내색 안하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배우게 된건데?" "웅~, 내가 우연히 아이들이 노는 정령놀이를 봤거든." "정령놀이? 그게 뭔데?" 정령술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정령놀이는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난 란의 대답을 기다려야 했다. "아, 마족들이 정신 정령들에 대해 매우 큰 친화력을 갖고 있는 것 알고 있지? 왜 저번에 이노가 말했잖아~." "응, 알아." 나도 마족들이 정신 정령과의 친화력이 크다는 사실을 들은 기억이 있었기에 란의 말에 조용히 동조해줬다. 그러자 란은 말하는 것에 신이 났는지 바구니의 음식들을 하나 둘씩 꺼내면서 즐겁게 입을 열었다. "그거야. 이곳에선 어린 아이들도 정신 정령들과 계약을 맺나봐. 그리고 그 정령들 을 이용해 동물들을 부리더라고~. 참 신기하지 뭐야? 근데 내가 지나가다가 그걸 발견하고 신기하게 쳐다보니까, 애들이 나보고도 해보라고 하더라? 호호호. 그래서 나도 해봤지~. 웅, 처음엔 잘 안 됐지만 애들한테 요령을 조금씩 배워가다 보니 곧 익숙해지더라고. 계속하니 재미도 느낄 수 있었고." "그러다가 더 배우고 싶어서 리먼을 찾아간 거야?" "아, 아냐. 그때 우연히 리먼 할아버지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어. 내가 정신 정령들 을 소환해 애들과 같이 노는 걸 본 모양이야. 친절하게도 리먼 할아버지는 내게 더 배우고 싶으면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고 하셨지. 물론, 난 할아버지를 찾아갔고~ . 그래서 할아버지께 배우게 된거야." "타쿠야 라는 마족은?" "아, 타쿠야 할아버지는 리먼 할아버지랑 친군데, 타쿠야 할아버지가 더 정령술을 잘 하나봐. 리먼 할아버지께서 내게 한 명의 할아버지를 더 소개시켜 주신거지. 그 래서 지금 그 두 분한테 정령술을 배우고 있어~." 활짝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란. 그녀의 모습에 나는 따라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뭔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정령술 배우는 것에 푹 빠져 있는 란에게 그 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배웠어?" "아직은 아냐~. 하지만 잘 따라오고 있다고 할아버지들께서 칭찬해주셨어~." "잘됐네? 이 기회에 잘 배워둬~. 정신 정령들을 다루는 것은 마족들이 가장 잘 할 테니 그들에게서 잘 배워두라고." "응~." 란은 내가 그들을 마족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지만, 크게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란에게 정령술이라. 배워두면 좋겠지.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해. 갑자기 란과 친해 진 것도 그렇고 말야. 란이 반인 마족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외부인인데 말야. 정령 술이라는 것을 그렇게 막 가르쳐줘도 되는 건가? 뭐, 그동안 생활에 무료했기 때문 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긴 하지만 말야.' 그들이 란에 대해 너무 잘 대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껴야 했지만, 눈앞의 란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그런 불안들은 저 깊은 곳으로 자취 를 감춰버렸다. '뭐, 그들이 몇 백년동안 이곳에서 무료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지. 아니면, 란이 그들을 잘 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란은 그들과 같은 마족 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니까...' "리넨, 빨리 와서 먹어봐~. 응?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거든? 먹고 말 좀 해봐." "그래." 나는 란의 환한 미소에 좋은 쪽으로 생각을 끝내기로 했다. 지금은 나쁜 쪽으로 든 생각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저택. 유투 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전쟁이 끝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비병들에 의해 외부인의 접근이 통제되었던 저택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 은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바로 라피에르의 일을 도와주는 저택의 주인 그래도스 드 리플러스 때문에 말이다. 그는 왕성이 복구될 때까지 자신의 저택에서 나라의 대, 소사를 의논하자는 라피에르의 제안을 받아드린 것이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그가! 예전 유투 왕국이 평화로울 때, 왕국의 모든 일을 총괄했던 그랜도스. 그때 그랜도 스는 갖고 있는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그를 믿고 따르는 엄청난 규모의 세력 덕분 에 유투 왕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까지 불렸었다. 즉, 그는 맡은 바 일을 모두 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안토니오 드로이드 카스프리시안이 세 상을 뜬 이후, 그는 왕국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땠었다. 마치 유배당한 것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까지... 왕이 드루젤로 바뀐 이후에도 그는 조용히 자신의 저택에서만 생활을 했었다. 왕국 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그는 무관심한 눈으로 지켜봤을 뿐이다. 즉, 그는 자신 이 전에 그토록 열심히 지키려 했던 유투 왕국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땠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존재는 컸는지 왕위에 올라 있던 드루젤은 그런 그 랜도스의 존재에 대해 언제나 불안해했었다. 그가 움직이기만 하면, 드루젤 자신이 얻은 지위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루젤이 죽는 순간 까지도 그랜도스는 직접적으로 왕국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물론 드루젤이 죽은 지금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긴 했지만. 똑똑. "들어오너라."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서재의 문이 두들겨지자, 그랜도스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 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커다란 문을 들어서는 이는 검푸른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청년, 바로 라이 너였다. 그는 매우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 앞이었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하지만 그랜도스는 라이너의 눈빛에 일렁이는 반가운 감정을 읽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편안한 자리로 아들을 이끌었다. "그래,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대화나 하자고 불렀다." 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그랜도스는 오늘에서야 겨우 자신의 아들과 대화할 시간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평소완 달리 크게 나왔다. 그는 지금껏 라이너 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던 적이 없었다. 바쁜 왕국의 일에 파묻혀 있었기에 라이 너를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앉거라." "네." 그랜도스가 라이너를 안내한 자리에는 이미 하인들이 다녀갔는지 먹음직스런 다과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보아하니, 꽤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데... 카니국 엔 갔었던 것이냐?" 말수가 많은 그랜도스는 아니었지만, 그는 오랜만에 평소의 모습을 잃으며 꽤 많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천천히 물어보고 싶어도, 빨리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그의 생각이 표출되기라도 한 듯. "잘 지냈습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카니국에도 가봤고요." "오오~! 네가 그곳에!" 설마 하던 생각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인지 그랜도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게 있었다. "네." "그래, 그곳은 어떻게 갈 수 있게 된 것이냐?" 이야기가 길어짐을 알았는지, 라이너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후, 그동안 있었 던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색하지 않으려던 감정을 그랜도스는 아들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라이너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그랜도스의 무표정. 그런 무표정이 오늘 라이너 앞에서 계속해서 깨졌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든 아들과의 대화시간 때문일까? 장성해 돌아온 아들의 늠름한 모습 때 문일까? 그랜도스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보기 힘든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라이너는 처음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 면서 라이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또한 그랜도스와 같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 해갔다. 그리고 그런 둘은 점점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만들면서 즐겁게 대화를 이 끌어갔다. "흠~.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동안 네 실력이 는 것은 당연하구나. 너무 위험한 여 행이었던 것 같군." "네. 하지만 다시 그런 일이 제 앞에 닥치더라도 전 지금과 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 다." "후후, 그래. 네가 가는 길 앞엔 리프네리욘님이 계시니까..." 그랜도스는 라이너가 리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고 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과거 라이너와 같은 길을 걸었던 걸었으므로. "그건, 그렇고 이제 이야기 해보거라. 보아하니 넌 라피에르 저하께서 왕위를 자꾸 미루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야. 혹시, 리프네리욘님 때문이냐?"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네 말에 따르면 그 분께서는 왕위에 관심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저하 혼자만의 생각인 건가?" 그랜도스는 얼마 전 라피에르가 유투 왕성을 함락시킬 때, 가장 큰 역할을 했었다. 그건 바로 라피에르의 부탁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 이다. 그가 모셨던 주군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 예로 드루젤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랜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라피에르를 도와 왕성 함 락을 유도했다. 바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라이너가 그러길 바랬기에... 그리고 같 은 이유로 그는 지금, 유투 왕국의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이런... 더 힘들어지겠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랜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면서 탁자 위의 차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그리 신경쓰지 말거라." "하지만..." 라이너는 왜 자시의 아버지가 움직였는지 알고 있었다.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는 그가 왜 움직였는지를... 몸과 마음을 단련했기 때문인지, 그의 눈에 아버지의 진 심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됐다, 그건 그렇고 넌 이제 어찌할게냐?" "......" 라이너는 리넨이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한 말을 생각하며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죽음의 숲으로 가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리넨님은 제가 라피에르 저하의 곁에서 그분을 지켜드 리길 바랄테니까요." "음. 그래." 그랜도스는 라이너가 이곳에 머물고 싶기보다는 리넨을 찾아가고 싶어한다는 사실 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입가에 미 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너와 같이 온 그 두 명의 마법사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고 있느냐?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귀찮은 일에는 일찌감치 그림자를 감추는 그들이었기에 그랜도스는 그들의 일에 대 해 알 수 없었다. 전쟁에 그토록 큰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는 그들에 대해서... "그들은 저와 같이 행동할 겁니다." "응?" "그들은 저와 같이 리넨님과 약속을 했기에 그분이 오실 때까지는 왕국의 일을 도 울 겁니다." 그랜도스는 라이너의 입에서 더 자세한 말이 나오길 바랬지만, 더 이상 말하길 꺼 려하는 라이너의 태도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들이 도와준다면 나로서는 다행한 일이지. 아니, 왕국으로서는 말이다." "네." 나직한 한숨을 쉬는 그랜도스의 모습에 라이너는 요즘 마음에 걸리는 이들의 움직 임을 떠올렸다. 표면적으로 드루젤이 죽으면서 끝난 전쟁.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 때문에 전쟁 때의 긴장감을 놓을 수 없음을 떠올린 것이다. 전쟁 후, 왕국 곳곳에 남아 있는 폴보트 연합국의 병사들. 그리고 마치 유투 왕국 이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듯 행동하는 연합인들. 그 모든 것들이 그랜도스와 라 이너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런, 이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버렸군. 널 부른 이유는 네 이야기를 듣기 위 함이었는데 말이다. 허허." 그랜도스는 이미 라이너의 그간 행적에 대해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하지만 아들과 더 있고 싶었기 때문인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며 라이너의 입이 열리도록 유도 했다. "네, 하지만 제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전 이번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 는데요?" 라이너도 대화를 끝내기 싫었던 것일까? 그는 그랜도스의 말에 응하며 지금껏 보여 주지 않던 미소를 잠깐이긴 했지만 얼굴에 한가득 담았다. 한편, 그랜도스와 라이너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저택의 끝에 위치한 라이 너의 방에서 트레모스와 키에라도는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것은 이들과 같이 있으면서 중재 역할을 해왔던 라이너가 사라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이들은 각자 다른 방을 썼지만, 언제나 아침에 눈을 뜨면 그들은 라이너의 방 으로 몰려왔다. 이곳에 리넨이 올 때까지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키에라도는 유일한 체스 상대자인 라이너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고, 심심함에 몸부림치던 트레 모스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와 신나게 싸우는 것이 취미이자 습관인 트레모스로 서는 전쟁이 끝난 이후 생긴 심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키 에라도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동안 라이너의 존재로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없었던 트레모스. 그는 오늘 기회 를 포착했는지 라이너의 존재가 멀게 느껴지는 순간 키에라도에게 시비를 걸었다. "내가 왜 이 늙은이와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허어~. 그 놈 말은 똑바로 해라! 나이를 따지면 나보다 네 녀석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리고 내가 너를 찾아왔냐? 네 놈이 나를 찾아왔지!" 심심하기는 키에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평소 무시했던 트레모스의 말에 키에라 도가 간단한 대답으로 응수했던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 트레모스는 자신이 던진 미끼에 물고기가 입질을 하자, 바로 낚싯대를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어쭈구리! 난 당신을 찾아온게 아냐. 라이너를 보러 온 거라고! 흥. 그리고 말을 들어보니 내가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데 말야. 그럼, 말투부터 고쳐야지, 이 버릇없는 영감탱이야!" "뭐..뭐시라? 이것이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동안 지금처럼 심한(?) 말을 한 적 없었던 트레모스였기 때문인지 키에라도는 적 지 않은 충격을 받으며, 주먹진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참을 수 없다, 이 녀석!" "흥~. 그럼 어쩔건데? 힘없이 비실거리는 그 몸으로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이..이... 화이어 볼-!" 순식간에 분노한 키에라도의 손에 붉은 덩어리는 생기더니 빈정대는 트레모스의 안 면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콰콰쾅! 공격은 몸의 중심을 창가에 두고 있던 트레모스에게 좀 전의 공격은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상대가 손을 쓸 줄 알고 있었는지, 자신에게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피해, 키에라도가 애꿎은 라이너의 방만을 회손시 키게 만들었다. "그렇게 늦어서야 어림없지~. 그런 공격으로는 따뜻한 바람도 못 일으킨다고, 늙은 이~!" "이것이 보자보자 하니까! 인시너레이트(incinerate)!" 우우웅~! 화르르륵~. 트레모스의 말에 화가 났는지, 키에라도는 자신의 몸 안에 갇혀 있는 마나를 순간 적으로 개방한 후, 최고의 불 공격을 트레모스를 향해 날렸다. 마그마의 열기를 뿜 어내는 인시너레이트. 키에라도의 마나가 뭉쳐지자, 엄청난 열기가 순식간에 방안 을 훑더니 트레모스가 서 있는 벽을 허물어 버렸다. 화르르르륵. "이크~!" 하지만 이번 역시 키에라도의 마법은 트레모스의 몸을 맞출 수 없었다. 조금 전에 파이어 볼에 의해 무너진 벽 밖으로 트레모스가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영감탱이~! 밖에서 보더라고~. 크크큭." "이놈, 거기 서지 못하겠냐!" 휘릭~. 바람을 가르며 사라진 트레모스 뒤로 키에라도가 독기 어린 시선을 하며 그 를 쫓았다. 내 앞을 가로막은 결계는 나를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 넣었다. '젠장, 이젠 이곳에 얼마동안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겠군. 대체 왜 안 되는거야?' 셀 수 없을 정도의 도전이 있었지만, 내게 찾아온 것은 실패라는 단어뿐이었다. 그 리고 그 실패는 처음으로 내게 좌절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아슬란의 존재에 대한 걱정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발은 언제나 결계가 있는 장소로 향했고, 내 머릿속에는 결계를 빠져나갈 방법들 이외의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종의 강박관념과도 같은 것이 생겨나 버린 것이 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점점 마족들에게서 고립되어 갔고, 처음 내게 관심을 보였 던 리먼 조차도 이제는 더 이상 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철저히 혼자가 된 나는 아무런 진전도 없이 하루 하루를 결계 앞에서 보냈던 것이다. "제기랄!" 복잡해진 머리 탓인지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쳇, 늘어가는 것은 욕밖에 없군. 이 결계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나가는 건 문제도 아닐텐데 말야. 하지만... 하아~." 결계 파괴가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했기에 나는 조용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 숨을 내쉬었다. 만약 좀 전에 말한 말이 가능했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갇혀 있지 않았을 것이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으로는 결계를 통과할 수 없으니... 하아~. 아슬란 그자가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오지만 않았어도... 아슬란...' 머리도 식힐 겸 편안히 몸을 바닥에 뉘인 나는 잠시 결계라는 벽에서 멀어지기로 했다. 막연히 정신력만 혹사시키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한눈 파는 행동은 내게 미처 지금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모든 원인이 되는 아슬란에 대한 생각을 말이다. '아슬란. 내가 이곳에 갇히게 된 이유는 아슬란 때문이지. 그자가 나와 란을 이곳 으로 유인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갇히게 된거란 말야. 유인... 흠, 그자는 왜 이곳으로 온 거지? 다쳤기 때문에? 처음엔 아슬란이 이 결계 안으로 나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줄 알았지. 다친 몸으로 나와 란을 상대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생 각에서 말야. 하지만 나중에 이곳에 아슬란이 없음을 알고는 생각을 바꿨어. 이곳 은 나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아슬란이 나와 란을 이곳으로 유인한 거라고 말야. 하지만...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혼자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생각을 정리해 가던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 까?라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결계에 대해 벗어날 수 있었다. '아슬란이 나와 란을 이 안으로 넣으려 했다면, 그 자는 분명 결계 밖에 있었을 거 야.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아슬란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지. 그땐 그 자가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에서 별로 크게 문제삼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 지 않군. 그때 아슬란은 결계 밖에 있었던 거야! 어쩌면 어딘가에서 기척을 숨기고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런! 내게서 기척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 은 내 공격이 성공한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의미하잖아!' "이럴 수가. 그게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몸이 다쳤을 때, 기척을 숨기는 것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어 렵다. 마나를 가둬두고 있던 몸이 다치게 되면, 마나에 대한 제어력이 줄어들기 때 문에 마나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원래의 성질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 때 문에 기척을 숨기려는 일, 즉 마나를 몸 안에 가둬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는 일은 평소의 몇 배는 더 힘든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내 공격에 상처입고 도망 치는 와중에도 내게서 기척을 완벽하게 감췄다. 그것은 그 자가 다친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거짓... 아슬란이 그럴 이유라도 있는 건가? 나와 란을 이 안으로 유인할만한 이 유라도?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이상했어. 나와 란이 처음 그 자 앞으로 갔을 때, 아슬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쳐다봤지. 그리고 우리를 어딘 가로 유인하듯 천천히 움직였어. 내가 나중에 속도를 더 냈을 때 보니, 그 자는 처음 움직였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단 말야. 일부러 천천히 우리를 이곳으로 유 인한거야! 하지만 왜? 거짓행동으로 다친 척 하면서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이유 가 대체 뭐지?' 잠시 복잡한 머리를 유인하기 위해 꺼낸 주제였지만, 이상하게 아슬란에 대한 생각 은 더욱 복잡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부러 우리를 기다리면서까지 이곳으로 유인한 이유! 단순히 가둬두기 위함이라 면 말이 되질 않아. 폴보트 연합에서부터 이곳까지 우리를 유인했으니까 말야. 음. .. 왤까? 내가 라피에르에게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아슬란 이 지금까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잖아? 이상해. 이전에도 나는 전 쟁 중에 라피에르를 만난 적이 있어. 그 때는 막지 않고, 지금 막는다는 건... 뭔 가 말이 안 돼. 그럼 다른 이윤가?' 아슬란이 나와 란을 이곳에 유인한 이유에 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 끝 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의문은 그 끝을 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성미였기에, 나는 란이 다가와 내 생각을 방해하기 전까지는 아슬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리넨? 뭐하고 있어? 쉬는 거야?" "아, 왔어?" "응~." 감겼던 눈을 뜨니, 눈앞에는 태양을 등지고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머리카락을 아래 로 늘어뜨린 란이 있었다. 요즘 들어 모습보기가 힘든 란이었기 때문인지, 난 오랜 만에 보는 란의 표정이 전보다 더욱 밝아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데 리넨 침울해 보인다? 혹시 오늘도 실패야?" "뭐, 그렇지." 이미 꽤 오랫동안 내가 이곳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안 란이었기에 그 녀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결계 통과는 힘든가 보다." "그래. 내 능력으로는 이 밖으로 나가는게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야. 아무리 해봐 도...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까. 결계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말야." 마음이 답답했기 때문일까? 내 입에서는 또 현실 불가능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은 란의 눈빛을 빛나게 만들었다. "결계 파괴? 정말 그 방법 밖에 없는 거야?" "응? 왜 그래, 란?" "아, 아냐. 음... 아무것도 아냐. 그건 그렇고 리넨 오늘..." 눈을 빛내던 란. 그녀는 내 반응에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으 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결계라는 단어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난 그녀의 말을 끊고 대답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뭔데 그래?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잖아? 말해봐. 결계에 대해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 움찔. 그럴 리 없다는 생각으로 무심결에 던진 말이었지만, 란은 생각 외로 내 말 에 몸을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저..정말이야? 뭔가 알고 있어? 말해봐, 란! 알고 있다면 말해줘." "그..그게. 이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음." "란!"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기 위해 난 말하길 망설이는 란에게 목소리를 조금 높 여 그녀를 다그쳐야만 했다. "음, 알았어. 말해줄게. 하지만 내가 말한 내용에 대해 아는 척은 하지 마. 알았지 ?" "알았어." 결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란. 그녀가 아는 사실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로 막힌 벽을 뚫을 수 있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내가 리먼 할아버지와 타쿠야 할아버지한테 정령술을 배우고 있다는거 알지?" "응." "지금까지 그분들에게서 배운 졍령술은 사실 나도 놀라울 정도야. 즉, 지금까지 놀 라울 정도로 발전했다는 말이지. 뭐, 리먼 할아버지께서 이상한 약 같은 걸로 나를 많이 도와주셨기 때문도 있지만..." 결계와 동떨어진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란.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궁금증은 그 깊이를 더해갔지만 난 그녀의 말을 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시작하 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거라는 생각에. "어쨌든 그분들의 아낌없는 가르침에 나는 그 가르침을 능가할 정도로 배움을 습득 해갔어. 그리고 정령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수록 할아버지들이 내게 보내는 기대의 눈빛은 더욱 깊어갔지. 그렇게 지금까지 내가 정령술을 익히면서 강해질수 록 그분들은 나보다 더 기뻐하셨어. 그러다가 얼마 전, 그분들은 내게 어느 장소로 데려가 주셨어." "장소?" 이야기의 핵심으로 접근하려는 것 같자, 나는 다시 확인하듯 그녀의 말을 집고 넘 어갔다. "응. 장소.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곳과 관련되어 있어. 할아버지들은 이 마을에서 금지에 해당하는 곳이라며 그곳으로 날 안내해주셨는데, 그곳은 이 마을을 뒤덮고 있는 결계의 중심부라고 하셨지." "결계의 중심?! 왜 너를 그곳으로?" 마을의 금지인 곳에 외부인인 란을 데려가다니.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기에 난 고 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어. 그분들은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하시거든? 하지만 결계를 나가는 방법은 결계 파괴 이외에는 없다고 하셨지. 그래서 그 일을 내게 부탁하신 거야." "......!"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몸을 바짝 긴장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말을 계속 잇는 란을 막지는 않았다.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결계의 중심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은 나와 너 밖에는 없다고 했어. 리넨, 너는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냈 기 때문에 내게 부탁을 하신 거지." "결계... 파괴를... 네게 부탁했다고?" "응. 왜 그래, 리넨?" 말을 더듬는 내게 란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몰라서 하는 말이야?" "뭘?"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란. 나는 순간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여야만 했다. "그들이 왜 내게 결계 파괴에 대한 부탁을 안했다고 생각해? 내가 이곳에서 결계 통과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했어? 아냐. 그들이 내게 그런 부탁을 안한 이유는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거야. 네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알겠군. 예전에 한번 리먼이 나를 찾아와 결계를 나갈 방법 에 대해 좀 알겠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내 대답은 지금과 같이 '아니 다'였어. 그때 리먼이 내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결계를 파괴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냐며 운을 띄웠었어. 난 그게 농담인줄 알고 웃으며 지금 이 방법에 매달리겠 다고 했지. 하지만 네 말을 들어보니 농담이 아니었군. 리먼은 나를 떠본거였어. 그들은 이곳에서 나가길 원해. 하지만 난 그들과 함께 이곳을 나갈 생각이 없지. 그들과 함께 나가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야. 내 행동과 대답에서 리먼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내게 결계를 파괴하는 방법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을 안한게 분명해 그들은 내가 나중에라도 너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들을 도울 널 막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게 분명할테니까." "리넨, 그게 무슨 말이야?" 흥분한 내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란이 설명을 요구해왔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은 마족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란. 너도 알겠지만, 마 족들의 본성은 결코 선하다고 할 수 없어. 지금 이들의 모습이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야. 이게 연극일수도. 아니면 괴롭힐 인간이 없기에 임시적으로 이렇게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리넨!" 마족들에 대해 안좋은 일면을 말했기 때문인지, 란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분들을 그렇게 모욕하지 마! 이곳 마을에 갇혀있는 마족들은 네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악한 존재들이 아냐. 모두 선량하단 말야. 마족들이 모두 악하다고 누가 그랬 어? 그분들이 내게 얼마나 잘해주는데?" "란아. 왜 이렇게 순진하니? 그들이 외부인인 네게 아무 이유 없이 정령술을 가르 쳤겠어? 그들이 왜 네게 그렇게 잘 대해주는데? 다 네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처음엔 나도 그들에 네가 마음에 들어 정령술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보니 다른 이유 때문이었군." "아니야! 할아버지들은 단지 내게 도움을 요청한거라고. 강요한게 아니란 말야. 내 가 거절할 수도 있는 문제야 이건!" "하아~. 네가 내게 결계 파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넌 그 부탁이란 것을 거절 할 수 있었겠니?" "......" 내 말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란은 입을 다문 채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잘 들어. 결계 파괴를 위해서는 결계의 중심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 왜 그 일 을 네게 부탁했는지 알아?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면 죽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네가 반인마족이라 그 위험부담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은 변치 않는단 말야. 결계의 중심부야. 네가 나와 함께 결계를 통 과한 결계는 중심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넌 거의 죽을 뻔했었어. 바로 발견되어 도움을 받았기에 살아 있는 것이지. 네가 정령술을 배우고, 리먼의 특별 제조약을 먹어서 강해졌다고 해도 결계의 중심부로 들어가 결계를 파괴하는 것은 어리석게 목숨을 버리는 일이야! 그 일 그만 둬. 그들은 널 이용해 이곳을 나 가려는 걸 부탁이라는 말로 듣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라고!" "아냐-! 그만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더 이상 네 말은 듣지 않겠어. 나 이만 갈 래. 잘 있어." 란은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내게 간단한 인사말만을 전한 후, 황급히 몸을 돌려 달 리기 시작했다. "란-!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마! 죽을지도 모른단 말야-!" 커다란 소리로 멀어져 가는 란에게 말을 건냈지만, 그녀가 내 말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마족들이 나와 란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그들이 착하게 변했기 때문이 아닌, 나와 란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어.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닌 란이겠지. 결계를 파괴해 그 들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은 란일테니.' 내가 이 정도로 말을 했는데, 란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리 큰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변함 없었다. '란에게 가족처럼 잘 대해준 이들이 지금까지 없었기에, 이들의 존재는 란에게 특 별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진실하지 않다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 는 것일지도...' 그들이 진정으로 란을 걱정하고 좋아한다면, 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결계의 중심부 로 그녀를 안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란을 그곳으로 안내했고, 란 에게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부탁을 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보인 모습이 진실이 아 니라는 사실을 보이면서 말이다. '어쩌면... 아슬란은 이것을 위해 나와 란을 이곳으로 유인했을지도 모르겠군. 아 니 란을... 그러고 보니 아슬란의 눈은 내가 아닌 란을 쫓고 있었어. 내가 그를 쫓 을 때도 그는 란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고, 나와 싸울 때도 그는 란이 오자마자 도망가듯 몸을 움직였지. 란이 더해진다고 그에게 위협이 될 리 없을텐데 말야. 아 마도 이용할 수 있는 존재가 내가 아닌 란이기 때문이겠지? 이 마을의 마족들이 내 가 아닌 란을 쫓는 이유와 같이 말야. 음~.' 아슬란이 원하는 것. 란을 이용해 얻는 것! 난 그것을 조금 전 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 갇혀 있는 마족들을 결계 밖으로 꺼내주는 것! 어쩌면 내가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이곳의 마족들의 심성이 바뀐 것일지도...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을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슬란이라는 존재가 끼어 있었다. "란이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앞으로는 이곳에서 결계를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보는 것 이외에 란도 감시해야겠어. 젠장, 하나같이 마족들은 내 머릴 아프게 만드는군! " 리넨과 란, 그리고 마족들이 갇혀 있는 결계안. 언제부터인가 그곳에는 싸늘한 기 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로 리넨이 경계심을 갖고 마족들을 대하면서 생겨난 기운 이... 그것은 란이 리넨에게 결계의 중심에 대해 말한 이후 점점 고조되어 갔다. 하지만 그것은 리넨 한 사람만 그럴 뿐, 마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리넨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을 무시하며 행동할 뿐이었으니까. 리넨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못해도 별 상관이 없다는 듯... 그런 분위기 속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란 뿐이었다. 가운데서 서로를 꺼리는 이들 을 대해야 했던 그녀는 알게 모르게 많은 생각을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늘 결론을 얻은 것 같았다. "란, 준비 됐느냐?" "아, 네." 오두막집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결정을 알 렸다. "많이 망설이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단다. 이곳에서 몇 백년 동안 지내온 우리들에게 바깥 세상은 그리 의미 있는 곳이라 할 수 없으 니 말이다. 그냥 너무 오랫동안 갇혀 지내다 보니 밖에 대한 동경심 같은게 생겼을 뿐이란다. 결계 밖도 이곳과 같은 곳인데... 허허. 일종의 환상 같은게 남아 있는 거겠지. 란아, 어려우면 다시 집으로 들어가자꾸나." 리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흔들리는 란의 등을 토닥여주며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 회를 줬다. 그는 란이 지금까지 결계 파괴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았 던 것이다. 리넨과 의견충돌이 있어 둘의 사이가 서먹서먹하다는 것도... 하지만 란은 리먼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으며 자신의 결정을 그대로 밀었다. "아니에요, 전 이미 결정했는걸요. 이대로 망설이기만 할 수는 없어요. 망설인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리넨도 결계를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 같 고... 제가 결계를 부수겠어요." "음,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만 가도록 하자." "네." 란의 확고한 마음을 알았는지, 리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등을 밀어 길을 인 도했다. 란의 망설이는 발걸음을 보다 쉽게 뗄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인 듯. "리넨, 미안해." 란은 오두막을 떠나면서 나직한 한마디를 입 밖으로 뱉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리 먼이 듣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인 채 말이다. 란이 다시 뒤돌아보지 않은 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 을까? 그녀는 리먼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떼면서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 았다. 그녀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오직 앞만 보며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긴장하지 말거라. 몸이 그렇게 굳어서야 되겠니?" "네에." 아무말없이 걸음만 옮기는 란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일까? 리먼은 걸음을 옮기 며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되돌아 오는 것은 힘없는 란의 목소리 뿐이었다. "리넨 때문이냐? 그 녀석의 말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아..알고 계셨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리먼의 말에 란은 깜짝 놀라 잠시 걸음을 멈출 뻔했다. "리넨 녀석이 결계 파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녀석은 우리들이 이곳을 나가면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할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 이다." 씁쓸한 리먼의 목소리에 란은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움츠러들 것은 없단다. 리넨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 의 이유가 있을테니. 그렇지 않겠니?" "네." 자상한 리먼의 말에 란은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며 지금까지 숙 이고 있던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 그것은 그녀의 능력을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라도 하듯, 란의 주변에 평소보다 많은 마나가 생겨났 다. 리먼에 의해 흔들리던 마음을 바로 잡은 란. 그녀는 자신이 몸 안의 마나를 내 뿜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리먼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결계의 중심까지 편 안한 마음으로 걸어갔다. 웅성웅성.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누군가의 웅성거림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푸른 숲 속의 공터 . 결계의 중심지라 알려진 그곳은 그 주변의 숲과는 다르게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공터였다. 란은 이미 예전에 한번 와 본 적 있었기에 그곳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 다. 그녀는 이곳이 너무도 많은 마나가 몰려 있는 장소이기에, 이 주변에는 생물체 들이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전에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누가 와 있는 건가요?" 결계의 중심부는 마족들 사이에서도 금기로 정해져 있어, 아무나 접근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 웅성거림은 한 두 마족이 내는 소리가 아닌 듯 했다. "왜 모두 이곳에?" 의문 가득한 눈을 공터 안쪽으로 돌린 란은 결계 중심부에 모여 있는 많은 마족들 을 바라보며 리먼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마치 밤의 축제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족들의 존재에 대해서. 결계 안의 존재들 중 리넨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모인 듯, 결계의 중심부에는 지금 까지 마족들의 접근을 막았다는 말이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곳에 갇힌 이후, 처음으로 결계 밖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내가 모 두를 이곳으로 불렀단다. 어차피 결계가 파괴되면, 이곳은 더 이상 금지가 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음, 그렇군요." 리먼의 설명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염원을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족들 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결계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그곳 에 모인 마족들은 하나같이 상기된 표정으로 란을 쳐다봤는데, 이는 아마도 란이 결계의 중심을 파괴해, 마을을 뒤덮고 있는 결계를 없앨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갖 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란아, 부담 갖지 말거라. 실패해도 너를 탓할 마족은 없을테니. 그리고 몸에 무리 가 간다 싶으면 그냥 나오거라. 알겠지?" "네." 부드러운 리먼의 목소리가 란의 긴장감을 풀어줬는지, 굳어 있던 란의 근육이 풀린 듯 싶었다. "자자, 모두 조용! 이곳에 모이라고 한 것은 수다를 떨라고 그런게 아닙니다. 란이 무사할 수 있게 격려나 해주셔야지요." 리먼에 조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자, 그제서야 수많은 마족들은 란에게 다가가 그 녀의 몸을 걱정하는 말을 건내고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랬다. 마족들의 인사가 모두 끝나자, 리먼과 6명의 장로들은 란이 결계의 중심부로 쉽게 들어갈 수 있도 록 그 주변의 마나를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장로들은 규칙적인 배열을 일그러뜨 리면 결계 안에 약간의 틈이 생긴다는 것을 몇 백년동안의 실험 끝에 알아냈던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은 란이 결계 안으로 모습을 감추면서 다시 한번 증명됐다. 결계의 중심부를 향해 손을 뻗어 마나를 내뿜고 있는 7명의 마족들, 그들은 매우 많이 힘들어하는 표정으로 연신 땀을 흘렸다. 견고한 결계의 중심부이기 때문인지 그곳의 마나를 일그러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마족, 그것도 능력이 뛰어난 장로 7명이서 엄청난 마나를 내뿜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으윽, 이대론 안되겠군. 이대로 가다간 란이 결계 안에서 마나에 의해 압사 당할 지도 모르겠어!"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지, 리먼은 불안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감았던 눈을 떠 좁혀지 는 결계의 틈을 바라봤다. 란이 들어간지 몇 초가 자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결계의 틈이 닫히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웅성웅성. "우리들도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장로님들을 도웁시다!" "그럽시다!" 자발적인 행동. 그들을 위해 결계의 중심부로 들어간 란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그들도 느꼈는지, 수많은 마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장로들의 곁에 모여들어 결계의 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많은 마족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지, 점점 줄어들던 결계의 틈은 다시 처음 란이 들어갈 때와 비슷한 정도의 크기로 벌어졌다 하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처럼, 벌어진 틈의 움직임은 점점 좁아지려 했다. 엄청난 마나의 소모. 결계의 틈을 향해 손을 뻗은 수많은 마족들의 몸은 순식간에 땀에 젖어 축축하게 변했고,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구겨 져 있었다. 마족들이 평균 7~8 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지금 그들이 하는 일, 즉 결계를 구성하고 있는 마나의 배열을 흩뜨리는 것 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결계의 중심부에 틈을 만드는 일은 결계 자체에 틈을 만드는 것보다 몇 십 배 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곳은 결계를 지탱하고 있는 중심부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더욱 견고한 배열로 마나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들 은 결계의 중앙으로 가는 길에 틈을 만드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의 엄청난 마나를 바다에 버리는 일이 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그들이 결계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사실 지금 그들이 하는 것처럼 마을을 두르고 있는 결계에 힘을 썼으면, 지금보다 훨씬 큰 틈을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계의 틈을 만들어진 다고 해도 이들은 결코 결계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계의 틈 안으로 들어가 살아서 결계 뒤로 갈 마족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즉, 그들이 마족인 한, 그들은 결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상황이 이랬기에 마족들은 결국 반인마족인 란의 도움으로 결계 자체가 파괴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녀가 결계의 중심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엄청난 마나를 쏟아 부 으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틈을 만든다고 모두가 그 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으윽." "끄응." 여기 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결계 쪽으로 뻗은 손을 내리려 하지 않 았다. 결계 밖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족 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 안을 채우고 있는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것이다 "조금만... 으윽,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를수록, 탈진해 쓰러지는 마족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아지려는 결계의 틈은 그들의 행동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편, 마족들이 엄청난 마나를 쏟아 붓고 있을 때, 리넨은 리먼의 오두막집에서 괴 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으윽, 모..몸이..." 비틀거리는 리넨. 엄청난 두통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는 한 손으로 머리 를 감싸며 간신히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이건 리먼의 짓이 확실해. 크윽. 이 집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 같군. 젠장. " 인상을 찌푸린 리넨은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한 후에야 겨우 리먼의 집을 나올 수 있 었지만, 오두막집 앞마당에 발을 내딛자마자, 리넨은 재 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털썩. 먼지를 흩뿌리며 쓰러진 리넨은 몸을 기면서까지 최대한 오두막집에서 멀어 지려 했다. "미향을 뿌려 놓았다니!" 리넨은 바닥에 몸을 드러누운 채, 조용히 눈을 감고는 그가 자면서 들이마신 미향 을 몸밖으로 내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넨은 눈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도를 거슬러 올라오는 뭔가를 느끼며 눈을 떠야만 했다. "쿨럭, 쿨럭. 이..이게 뭐야?" 마나를 움직이다 갑자기 혈액이 역류하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기침을 한 리넨이 었지만, 그의 손바닥을 적신건 붉은 선혈이었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느낌은 받은 리넨이었지만 토혈할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기에 손바닥의 피를 바라보는 리넨의 표 정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 가득했다. "피..피가 왜? 혹시 내가 들이마신 미향 때문에? 단순히 잠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 었단 말인가? 란 주변에 내 마나를 배치해 그녀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날 잠들게 했던게 아니란 말인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인지 리넨은 곧 다시 눈을 감으며 몸 안의 마나를 움직 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토혈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인 듯, 그는 그 뒤 계속되는 혈 액의 역류에도 그와 같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기를 수 차례.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한 리넨이었지만, 피를 토하며 눈을 뜬 리넨은 뭔가를 알겠다는 표정 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쿨럭, 쿨럭. 이제 알겠군. 내가 자면서 들이마신 미향은 단순한게 아니었어. 냄새 가 꽃향기와 비슷해 그 정체가 뭔지 몰랐는데, 몸 안의 마나를 움직일수록 피가 역 류하는 것을 보니, 이건 분명 잠자는 파티마를 깨우는 파르코다마가 분명하군. 쿨 럭. 파티마를 썼다니. 리먼. 으드득." 리넨은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리먼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이까지 갈며 리먼 의 이름을 되뇌였다. "내 몸에 벌레가 들어 있었다니! 젠장,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생활했다니 정말 한 심스럽군!" 리넨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존재가, 그것도 마족이 주는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먹었다 니... 내 자신에 대해 너무 자만하고 있었나 보군. 나보다 더욱 뛰어난 존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야. 쳇, 다친 심장을 치료하라는 명목으로 준 리 먼의 약. 약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 뒤로도 꽤 여러 번 그에게서 받아먹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안에 파티마가 들어가 있었던 거로군. 눈으로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생물인 파티마. 잠자고 있는 동안에는 그 존재 유무를 알 수 없다더니 정말이 로군. 파르코다마의 향기에 의해 깨어나기 전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물이니... 리 먼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건가? 제기랄!" 리넨은 손에 묻은 붉은 피를 바닥에 스윽 문지르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지금까 지 했던 행동을 다시 반복하기라도 하려는 듯. "내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분명 지금 상황을 보면, 란과 리먼은 결계를 파괴 하기 위해 집을 나선 것 같으니 말야. 리먼... 머리 좋군. 란은 결계가 파괴되면, 몸이 망신창이가 될 것이고, 나는 그들이 이곳을 나가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파티마를 복용시켜뒀으니 말야. 하지만 리먼 당신은 나를 너무 과소 평가했어. 아 무리 파티마가 한번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숙주를 죽일 때까지, 활동을 정지하지 않는다지만 난 파티마에 목숨을 잃을 존재가 아니란 말이닷!" 리넨은 각오를 단단히 다지듯, 말을 내뱉은 후, 다시 몸 속의 마나를 움직이기 시 작했다. 결계의 중심부로 들어간 란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엄청난 압력의 마나와 싸워야 만 했다. 결계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중심부였기 때문인지, 란의 발이 안쪽으 로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그녀는 몸 안의 피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맛봐 야 했던 것이다. "으~."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신음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다른 고통 어린 소리 에 의해 금방 자취를 감춰버렸고, 그 뒤에도 또 다른 소리가 결계 안을 계속 돌아 다녔다. 리넨과 함께 결계 안으로 들어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란의 고운 이마를 심하게 찌푸려뜨렸고, 그녀의 피부 또한 군데군데 피멍을 새겼다. 사실 란이 몸을 망치면서까지 걸어온 길의 기리는 매우 짧았다. 그녀가 걸어가야 할 거리 또한 결코 멀다고 할 수도 없었다. 편안한 자세로 열 발자국 정도 걸으면 도착할 짧은 거리 뒤에 결계를 움직이고 있는 주원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란에게 자신을 거부하는 결계 안에서 그 정도의 거리는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안에서는 결계 밖에서의 걸음과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없었던 것 이다. 특히 마족의 피가 섞여 있는 란에게는! 마족의 피가 흐르는 존재라면 누구든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결계. 그리고 그 힘이 가 장 강하게 몰려 있는 중심부. 란은 지금 그곳을 향해 목숨과도 바꾸는 어려운 발걸 음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준 마족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한 채... 그녀는 자신이 다치더라도 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포기할 수... 없어!" 강한 의지가 담긴 말. 란은 그런 식으로 몸의 고통을 잊으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아 앞으로 조금씩 걸어 나갔다. 정령술을 배우면서 쉐이트론이 자신에게 선물한 반지의 마나를 자유 자재로 사용하 게 된 란. 그녀는 마을에 머무는 동안 리먼과 그 외의 마족들에게서 보다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정령술을 배웠다. 아니 정확히는 정신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나 활용법을 말이다. 그 덕분인지 란은 강한 마나가 응집해 있 는 결계 안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결계의 틈을 찾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귀찮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란의 부탁을 마족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쓰면서 기꺼이 들어줬다.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들을 그녀에게 가르쳐주면서... 그리고 란은 그들 의 가르침을 완벽히 습득해 단기간에 실력을 매우 높여 그들의 가르침에 보답했다. 란을 따뜻하게 감싸줬을 뿐 아니라 그녀의 소망을 흔쾌히 들어줬던 마족들. 그들 에 대한 기억은 란으로 하여금 결계 속으로 자신의 몸을 기꺼이 밀어 넣을 수 있도 록 도와줬다. 그 마음이 닿은 것인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기어가는 것보다 느린 것 같던 란 의 앞에 결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의 집합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이게 결계의 중심?" 목표물을 찾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란의 표정에는 고통보다는 기쁨이 가득했다. 이 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란의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 는 결계 안으로 들어온 이후, 사라졌던 반짝거림을 되찾았던 것이다. "찾..았다..." 스윽. 환한 미소를 지은 란은 남은 힘을 다해 서서히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 녀의 앞에 존재하는 영롱한 빛의 작은 보석을 향해... 그녀는 한눈에 눈앞의 보석이 바로 마을을 뒤덮고 있는 결계의 중심에 해당하는 존 재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보석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강 력한 마나와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몸 때문이었다. 탁탁. 결계의 중심을 찾았다는 생각은 란의 몸을 지금까지와는 달리 빠르게 붉은 보석의 곁으로 다가가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육체의 고통은 관심의 대상에 서 제외되기라도 한 듯 란은 기쁜 표정으로 마나의 집합체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 리고 그녀는 단번에 목표물을 향해 몸을 이동한 후, 서서히 붉은 보석의 빛에 이끌 려 오른 손을 그 보석 가까이에 가져갔다. 영롱한 붉은 빛에 유혹당하듯, 그녀의 손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 앞으로 뻗어갔던 것이다. 치지지직! 하지만 아름다운 꽃 에는 가시가 있듯 황홀한 아름다움을 지닌 보석 역시 란의 손길을 거부했다. 즉, 보석 주변에서 일어나는 붉고 푸른 불꽃들이 란의 손을 감싸며 그녀의 살을 태웠던 것이다. 잠시 기쁨에 고통을 잊은 란이었지만 마나의 집합체는 그녀에게 다시 엄 청난 고통을 선사하듯 아름다운 불꽃을 내뿜었다. 하지만 란은 그런 현상에 움찔거 리는 모습을 한번 보여줬을 뿐 보석을 향해 내뻗는 자신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크륵... 크륵." 마나의 흐름을 거스르며 손을 뻗는 란의 움직임이 붉은 액체를 그녀의 입가에 흐르 게 만들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 없이 그대로 목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석의... 파괴가... 결계의... 파괴..." 자신이 해야할 단 한가지의 일만을 생각하며 란은 심하게 떨리는 근육의 경고를 무 시한 채 붉은 빛의 보석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오른 손가락에 껴져 있던 쉐이트론의 반지도 붉은 빛과 같은 세기의 자체적인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위~잉! 마나의 압력을 같은 마나로 밀어내기 위해 란은 쉐이트론의 반지에서 강력 한 마나를 내뿜었던 것이다. 반지의 마나는 천천히 움직이던 란의 오른 손을 꽤 빠르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란 은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붉은 보석을 오른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보석을 움켜쥐는 순간 란은 오른 손으로 전해오는 엄청난 충격에 손을 잠시 떼어 야만했다. "캬아~~악!" 그것은 고통을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고통이 찾아 왔기 때문이다.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고통. 몸이 가루가 되는 것 같은 고통이... 하지만 란은 곧 이를 꽉 깨물며,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붉은 보석을 다시 꽉 움켜잡았다. 자신의 마나를 직접적으로 보석에 집어넣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으드득! 꽉 다문 란의 입 사이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피 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며 더욱 커다란 고통이 그 녀의 몸을 휘감도록 만들었다. 붉은 보석이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녀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더욱 몸 깊은 곳으로 불러드렸던 것이다. 부들부들... 하지만 란의 몸은 그녀의 의지에서 벗어나려는 듯, 심한 경련을 일으 키며 깍지껴진 그녀의 손가락이 서서히 풀려했다. 그녀의 손아귀에 있는 붉은 보석 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질 수 없어!" 손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것인가? 엄청난 고통으로 몸의 감각마저 잃은 란 이었지만 그녀는 손가락의 깍지가 풀려지기 전에 자신의 모든 마나를 손아귀에 있 는 붉은 보석 안으로 쏟아 부었다.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마지막 보호막까지 거두면서... 파바박. 치직, 치지~익. 결계를 유지하는 마나의 배열이 란의 마나에 의해 흩뜨려지자, 란의 손은 순식간에 더욱 강력한 붉고, 푸른 전기 속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움직이는 정신력이 끊어지려는 상황에서도 마나의 주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고통에 주 저앉아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마족들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 이 그녀를 보내면서 한 걱정이 담긴 힌마디를 위해서도... <란아, 몸에 무리가 간다면 바로 빠져 나오거라... 바로...> 자신의 몸을 생각해주는 그들의 마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흐 릿해져 가는 그녀의 의식을 다시 선명하게 되돌려줬다. 그녀가 보석을 파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말이다. 위윙~~! 치직, 치직! 란의 흐려지던 의식과 같이 줄어들던 소음은 그녀가 정신을 되찾자마자, 이전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을 흔들어었다. 보석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자신 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란의 손에 전기 불꽃과 마나의 진동을 이용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흔들면서 란이 자신을 놓을 수 있게끔 말 이다. 하지만 란은 그런 상황에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 했다. 마치 점점 맑아지는 정신이 그녀에게 힘을 더해주기라도 하듯. "크큭... 내..내가 이겼어! 그만 없어져...버렷!" 찌직, 지직... 위윙~~, 펑! 퍼버벙! 그녀의 미소가 최 절정에 도달하자, 그녀의 손 안에 자리하던 붉은 보석은 금이 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그녀의 손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녀의 맑은 정신이 결국 그녀에게 최종적인 싸움의 승리자라는 이름을 안겨줬던 것이다. 쿠르르르르릉! 위위위~잉! 그리고 란이 싸움의 승리자가 되면서 그녀를 속박하던 결계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 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란은 손안에서 느껴지던 고통의 원인이 사라지면서 그대로 의식을 잃어 결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결계가 한순간 에 사라지는 모습을... 털썩. 란의 몸은 결계가 사라지기 전 바닥에 쓰러지며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란 이 파괴한 붉은 보석은 확실히 결계의 중심이 맞았는지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마나 가 만든 공간에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결계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마족들도 결 계가 사라지면서 더 이상 마나를 낭비하지 않아도 됐고... "서..성공한건가?" 더 이상 자신의 몸에서 많은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지 않자, 결계 밖에 있던 리먼은 몸을 떨며 희열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성공?" "결계가 사..사라졌단 말입니까?" "결계가!" 몸의 마나를 전부 쏟아 내던 마족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고통이 아닌 미소가 자리잡 고 있었다. 탈진해 몸을 가누기도 힘든 마족들의 얼굴에도... "라..란이 성공했군!" 이때 마족들 중 바닥에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서 있던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마 을에서 가장 강한 장로들이 아직까지 몸의 중심을 잡은 채 바닥에 서 있다곤 하지 만, 그들도 탈진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포기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그들의 마나를 빼앗던 결계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드디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이군!" 리먼은 후들거리는 발에 힘을 주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계가 존재했던 장소로 몸 을 움직였다. 눈이 아닌 몸으로 결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 그의 몸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휙휙. 허공을 향해 그는 손을 휘저어 보았다. 그의 손을 막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하지만 그의 손은 아무런 막힘 없이 그의 의지 대로 움직였다. 더 이상 그의 몸을 막는 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리먼에게 확신시켜주면서 말이다. "크하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이곳에서의 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되었군!" "저..정말 사라졌다!" "결계가 없어졌어!" 리먼을 시작으로 그 뒤 몸의 기력을 되찾은 이들은 하나 둘씩 리먼과 같은 행동을 하며, 결계가 있었던 곳으로 몸을 이동해 결계가 사라진 것을 재차 획인하며 기뻐 했다. "지겨운 이곳 생활도 끝난 것이군... 이게 모두 란의 노력덕분이야. 크하하하하." "아, 란은 어떻게?" 그제서야 떠오른 것인가? 마족들은 란의 존재를 떠올린 이후, 시선을 허공이 아닌 주변으로 옮겨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아, 저기 있다!" 한 마족이 가리킨 곳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옷과 심하게 그을리고 탄 피부를 가진 여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결계에 들어가기 전, 란이 입었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을 가진 여인이... 하지만 그녀는 란과 동일인 물이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많이 상해 있었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란과 동인인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손가락에 쉐이트론의 그녀 에게 준 반지가 이전 모습 그대로 자리해 있었으므로... "많이... 다쳤군." 란의 모습을 발견한 리먼은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다른 톤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 다. "란, 정신이 있느냐?" 리먼은 쓰러진 란을 자신의 품으로 옮겨 흔들어보았지만, 란은 그의 부름에 응답을 할 수 없었다. "란, 란? 안되겠군. 이대로는 대답을 들을 수 없겠어." 알 수 없는 말을 꺼내며 리먼은 란의 타 들어간 옷 위로 손을 올렸다. 그는 란이 겉보다 속이 더 많이 다쳤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가 의식을 되찾도록 도와준 것이 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란의 두 눈은 꼭 감긴 채 떠지지 않았다. "그녀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 꽤 오랫동안 란의 몸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리먼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리먼의 곁에 있던 다른 장로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 우리를 도와줬으니 최소한 선택권은 줘야하지 않겠나?" "선택권?" "그렇지. 이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한 선택권." "흠. 하지만 란은..." "으..응..." 리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던 장로는 란의 신음소리에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오, 란아. 정신이 드느냐?" "리..리먼 할아버지?" "그래, 나다. 알아보겠느냐?" "아, 네..." 리먼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란을 바라봤다. "하..할아버지... 겨..결계는?"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너를 안고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 결계는 파괴되었단 다. 수고했다, 란아." "아! 제..제가 이겼군요..." "그래, 네가 이겼다." 란은 리먼의 얼굴에 비친 기쁨을 발견하자, 자신의 승리에 대한 의심을 모두 떨쳐 버리고는 그와 같은 기쁨의 미소를 얼굴에 내비쳤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 후, 얼 마 안가 사라져야만 했다. 희미한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리먼의 질문 때문에. "아, 그 전에 란아.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느냐?" "네?" "넌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할 것이냐? 아니면 리넨과 함께 할 것이냐?" "그..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리먼의 말에 란은 고개를 갸우뚱거려야만 했다. 아직 무언가를 생 각하기 힘든 몸이었기에 그녀는 더욱 리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린 이제 이곳을 떠나려고 한단다. 우리를 이곳에 가둔 존재가 결계의 파괴를 알 고 다시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곳을 나가는게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물론 바깥으로 가는 길이 열린 지금, 이곳에 더 있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다." 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연 리먼의 모습에 란은 두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아 직도 그녀는 리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리먼, 내가 이야기하지. 자넨 너무 말을 돌려한단 말야." 리먼과 같이 란에게 정령술을 가르쳤던 타쿠야가 란의 시야로 몸을 움직이며 리먼 의 말을 자세히 풀어줬다. "란아, 넌 자신도 잘 알다시피 마족이면서 인간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네가 반인 마족이 아닌 마족과 인간의 갈림길을 확실히 했으면 하는구나." "네?" "네가 앞으로 마족으로 살아갈지, 인간으로 살아갈지 말해달라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은 마족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인간으로 살 아간다는 것이니..." 그제서야 이해를 한 것인가? 란은 흐릿한 의식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몸도 잊은 채, 멍한 표정으로 타쿠야와 리먼을 쳐다봐야만 했다. "그..그게 무슨... 그것을 나눠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녀가 알기로 마족과 인간을 경계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는 그런 질문을 꺼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리먼은 그녀와 다른 생각인 듯, 란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이유가 있고 말고. 앞으로 우리들의 앞엔 지금까지 우리를 구속하던 결계가 없을테니 말이다." "......!?" "더 이상 우리 앞에 결계가 없는 이상, 우리들은 결계에 갇히기 전의 모습으로 돌 아갈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마족, 즉 우리들의 본능에 맞는 모습일테니." "그..그런?" 당연하다는 리먼의 말에 란의 불안에 떨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조금 전 그녀가 들은 말은 이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살지 않을거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 이다. "다시 한번 말해줘야 이해를 할 수 있겠느냐? 우린 네가 지금까지 보아온 모습을 더 이상 보이지 않겠다는 말이다.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행동할 그 어떤 이유도 없 으니까." 리먼은 란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얼굴의 부드러운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이런, 내가 그토록 정신 정령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 고 일렀거늘, 지금 보니 아직 일정 경지까지 가려면 멀었구나." "리..리먼 할아버지 그게... 하아, 하아. 그게 무슨 말이죠?" 란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오자, 오른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 녀는 리먼과 타쿠야의 말을 믿고 싶지 않은 듯, 계속해서 전과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리먼의 입에서는 그녀가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면서 묻는 구나. 마족으로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모르지 않을텐데? 지 금까지 네가 봐왔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말이다." "그..그럼 지금까지의 모습은... 그건 뭐였나요?" 설명의 요구하는 란의 말에 리먼은 그저 즐거운 미소를 보여줄 뿐이었다. "필요에 의한 모습이었을 뿐이란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결계 속에서 동족상잔을 계 속하며 지낼 수는 없으니까." "거..거짓이라는 말인가요? 제가 봤던... 모든 것이?" 환한 미소를 보이는 리먼을 향해 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리먼의 말을 부정하 기라도 하듯, 아니 자신이 꺼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기라도 하듯... 하지 만 리먼은 그런 란의 행동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거짓이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보여줬던 감정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것일 뿐이었으니... 마족에게 감정이란 것은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란다. 반인마족인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냐?" "으...으..."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리먼은 몸을 부르르 떠는 란을 한참동안 쳐다본 후,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놓아줬다. "역시 이해 못하는 모양이로구나. 그럼 네가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 걸로 해석해도 되겠느냐?" "......" 란은 지금까지 가족이라 생각하고 믿었던 이들에게서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리먼의 말을 머릿속으로 끌고 들어올 수 없었다. 자신이 착각의 늪에 빠져 혼자 허우적거 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란의 모습을 보면서도 리먼은 자신의 말을 모두 내뱉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거라. 너를 속인건 아니니까. 네가 원해서 정령술을 가르 쳐줬던 것이고, 네 의지에 의해 결계를 부순거니까 말이다. 난 네게 결코 강요라는 것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옆에서 네 결정을 도와줬을 뿐." 어깨를 으쓱하는 리먼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허공을 바라보던 란의 시선이 리먼 을 따라갔다. "저..저를 속였어요. 모두... 그랬던 건가요? 저를... 아니, 나를...!" "네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해야지, 남의 탓을 해서야 되겠니?" 마지막 잡고 있던 란의 끈. 그것은 그녀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마족들의 입에서 리 먼과 비슷한 뜻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주르륵. 그리고 그 끈은 끊어지면서 란의 눈에서 붉은 액체를 흘리게끔 만들었다. 투명하면서도 붉은 액체를... "마음을... 마음을 열어 내 모든 것을 줬건만... 나..나를 속이다니!"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란. 그녀는 지금까지의 말투를 순식간에 바꾸며 슬픔과 분노 를 동시에 나타냈다. 자신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녀에게 마족들의 말 은 강력한 비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다친 몸을 완전히 정지할 수도 있을 정 도의!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그 주변의 마족들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흠~, 역시 넌 마족보다는 인간에 가깝구나. 그런 감정적인 면에 치우쳐 모든 행동 을 하니깐 말이다. 뭐, 알고 있었기에 결계를 없앨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이..익!" "어..어, 그렇게 흥분해서야 되겠느냐? 네 몸은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 이가 되어 있으니 조심해야지." 혼신의 힘을 다해 리먼의 발을 잡으려던 란은 그의 말대로 움직이던 손을 중도에서 멈춰야만 했다. 그녀의 몸 안에서 격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 기 때문이다. "쿠..쿨럭, 쿨럭. 퉤퉤." "리먼, 아까 란의 몸을 치료했던게 아닌가?" 타쿠야는 리먼이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악화된 상태를 보이자, 의야한 듯 질문 을 던졌다. "아, 그거 말인가? 결계의 틈을 만드는데 엄청난 마나를 소비했는데, 이 아이에게 나눠줄 마나가 어디 있겠나? 난 단지 란의 잠재력을 끌어 올려줬을 뿐이야. 이 아 이가 정신을 차려,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도록 말이지." "호오~. 그렇다는 것은 이미 란과 더 이상 함께 활동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말 이지 않나? 필요 없는 존재에게는 더 이상의 투자는 없을테니 말일세." "크큭. 잘 아는군." "그럼, 왜 일부러 의식을 잃은 란을 깨운 건가?" 질문을 하던 타쿠야는 리먼과 비슷한 종류의 미소를 보이며 두 눈을 빛냈다. "자네, 이유를 알면서 묻는군." 능글맞은 그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리먼은 바닥에서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란을 쳐다봤다. "크큭, 역시 그런건가?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이전의 자네 모습을 보게되다니 감회 가 새롭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즐기는 자네를 말일세. 뭐, 란이 반만 인간이긴 하지만 말야." 지금까지 본적 없는 모습을 보이는 마족들... 란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처음에는 혼란을 느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들의 비 아냥거리는 말투에 그녀는 지금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자신의 믿음에 응하기는커 녕, 오히려 그 믿음을 배신한 그들의 모습에 란은 그들을 좋아했던 감정의 몇 십 배에 달하는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 분노를 표출할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즉 그녀에게는 의지를 벗어난 근육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이..익." 부들부들 떨리는 란의 근육들. "왜 그러느냐? 즐겁지 않은게냐? 지켜보는 것이 아닌, 고통을 당하는 입장이라 그 런가? 하지만 난 오랜만에 나에 의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존재를 보니 기쁘기 그 지없군." "용서... 못햇!" 쉬익~! "이크, 아직 힘이 남아 있었던 게냐?" 리먼은 자신의 발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마나의 공격을 가뿐한 움직임으로 피한 후, 숨을 헐떡이는 란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나야 네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반지에 의해 공급이 된다고는 하겠지만, 그것을 움직일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을텐데... 호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공격 하고 싶었던 게냐?" "주...크륵, 쿨럭 쿨럭." "흥분하지 말거라. 네 분노는 우리가 아닌 너 자신을 향해야지. 네가 멋대로 우리 를 믿고 네가 멋대로 생각한 것이니까 말이다. 크큭. 하지만 네 모습을 보니 분명 넌 우리들에게 좋지 못한 존재가 될 것 같구나, 이용할만한 가치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제 그만 작별을 해야겠구나."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네, 리먼." "그런가? 오랜만에 분노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를 봐서 그런지 시간 가는줄 몰 랐었군." 리먼은 타쿠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란에게서 멀어졌다. 손에 점점 강하 게 뭉치는 마나를 란을 향해 날리기 위해서인 듯, 그는 란과 일정거리를 떨어지려 한 것이다. "이제 작별이군. 그 동안 즐거웠다. 잘 가거라 란." 휘익~! 리먼의 입이 닫히자 마자, 그의 손에 뭉치기 시작했던 마나는 순식간에 날 카로운 비수로 변하더니 란의 가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날카롭게 변한 마나는 란의 몸에 닿기 전에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목표의 몸을 반으로 갈 랐을 뿐, 애초의 목표인 란의 몸에는 상처하나 만들지 못했다. 서걱. 휘이~~잉, 쿠 쿵. 빗나간 마나는 란의 왼쪽에 존재하는 숲으로 향한 것인지 잠시 후, 무성한 나 뭇가지가 붙어 있는 나무의 윗 부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누..누구냣!" 자신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깨닫자, 리먼은 주변을 경계하며 자신을 방해한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몸의 마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오감으로 상대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리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매우 기쁘군. 그건 그렇고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 기로 한건가?" "리..넨?!" 리먼의 공격을 무효화시킨 것은 리넨인 듯, 나무 뒤에서 모습을 "왜 그렇게 놀라지? 내가 멀쩡히 서 있는게 신기하기라도 한 건가?" 싸늘한 눈빛으로 리먼을 한번 쏘아본 리넨은 바닥에 처참한 몰골로 쓰러진 란을 살 피기 위해 몸을 숙였다. "...뭐,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당황한 모습을 금새 감추는 리먼. 그는 리넨이 자신에게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원래의 능글능글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별거 아니었지, 네가 파티마를 쓴 것을 늦게 알아서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린 것만 빼면 말이다." "호오~! 그것이 파티마라는 것도 알았단 말인가? 역시 보통 내기는 아니군. 그래 몸에 대한 회복은 다 한 것이냐? 파티마는 제거됐나?" "그것이 그렇게 궁금하다면..., 바인딩(binding)!" 리넨은 리먼의 말에 대답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다가 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바인딩 마법을 써서, 리먼의 다리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갑작스런 공격이라 리먼은 미처 자신을 잡아당기는 땅을 뿌리칠 수 없어 리넨의 다음 공격을 그 자리에서 받 아야만 했다. "액시드 스톰(acid storm)~!" 푸르스름한 연기가 마치 고체라도 되는 듯 빠른 속도로 리먼을 향해 날아갔지만 리 먼과 그 주변에 있던 다른 마족들의 손에 의해 그 연기는 잠시 후, 그곳에서 자취 를 감춰야만 했다. 독연기는 꽤 광범위하게 퍼지는 속성이 있기에 리먼 주변의 인 물들도 모두 방어 태세를 가춰야만 했던 것이다. "콜록, 콜록. 확실히... 파티마는 제거한 모양이군.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니, 더 확인 시켜줘야겠어, 이대로 손을 멈출 수는 없지!" 리넨은 백 여명의 마족들 가운데서 오직 단신으로 그들 모두를 상대하겠다는 듯, 엄청난 마나의 기운을 내뿜으며 살기 흩뿌렸다. 이 주변의 마족들이 매우 강한 존 재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들 몸에 마나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라도 하듯, 리넨은 지금의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란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었다니! 란의 너희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버리려 했건만!" "흥! 우린 란에게 강요라는 것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어려운 일 을 하겠다고 했을 뿐이라고!" 리넨의 분노 어린 말에 어려 보이는 마족 아이가 반발하듯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 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리넨의 살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너희들이 그렇게 몰고 갔기에 란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 그녀 탓이 아니다 !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리라 생각지 않는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닷! 파이어 스톰(fi re storm),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리넨이 느끼는 분노는 보통이 아닌지, 그의 몸 전체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의 열기를 대변하듯, 장내에는 순식간에 엄청난 화염과 돌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강력한 불바람이 그곳에 서 있는 이들의 몸 을 흔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넨과 그 곁의 란은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고 요한 모습을 유지했다. "쳇, 보아하니 몸을 완전히 회복한건 맞나 보군. 그렇다면 널 상대할 필요는 없겠 지. 굳이 힘들게 얻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크크크큭." 리먼은 불바람 속에서 간신히 몸을 보호하며 바람이 이끄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날카롭지 못한 리넨의 공격을 알아보고 기회를 포착해 몸을 피했던 것이다. 슈슈슉. 슈슝. 그리고 리먼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족들 이 하나 둘씩 모습 감추기 시작했다. "어림없다! 내 앞에서 도망이란 것을 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자신의 손으로 죽여도 시원찮은 이들이 사라지자, 리넨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그들 과 같이 몸을 허공으로 날리려 했다. 이대로 그들을 놓칠 수는 없다는 게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넨은 움직이려던 발을 그대로 바닥에 고정시켜야만 했다. "리넨! 지금의 넌 우리를 따라오기보다는 네 옆에 쓰러진 란을 구하는게 우선인 것 같은데? 안그런가?" "......!" 약올리는 것 같은 리먼의 말이 틀리다고 할 수 없었기에 리넨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들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그저 재자리에서 커다란 소리로 그들을 향 해 분노 어린 소리를 지르면서... "으득, 네 놈들! 좋다. 하지만 지금 보내주는 그 목숨은 머지 않아 다시 내 손으로 접수하겠다!" 멀리서 리먼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리넨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바로 자리에 주저앉아 피를 토해야 했기 때 문이다. "쿠..쿨럭, 쿨럭. 켁켁... 너무 과장된 해동을... 쿨럭, 한 것 같군... 크윽." 파티마의 제거가 완전히 끝난게 아니었나? 리넨은 오른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왼손으로 흘러내리는 입가의 피를 닦았다. "리..리넨? 왜 그래? 어디 다친...크윽, 다친거야?" 의식의 끈만을 간신히 잡고 있던 란은 갑작스런 리넨의 모습에 놀라, 몸의 고통마 저도 잊은 채, 리넨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그녀가 본 바닥의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당황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란의 모습에 리넨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몸 안에 기생충이 살아 있어서 말야... 크윽. 그것의 활동 을 억제하던 마나를 마족들을 쫓기 위해 썼더니 몸에 무리가 된 모양이야." "리..리넨!" 그제서야 란은 리넨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연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수많은 마족들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몸에 무리가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 자신의 마나를 밖으로 내뿜었다는 것을... 주르륵. 란은 또 다시 마족들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붉고 투명한 눈물을 흘려야 만 했다. 눈가의 핏줄이 터지기라도 한 듯, 점점 진해져 가는 피눈물을... 스윽. "이런, 별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 기생충을 없애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거야. 시간이 없어 아직 살려두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울 지마." 리넨은 란의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들을거지? 이것 봐, 몸이... 쿠..쿨럭." "리넨!" "크큭, 괜찮아... 나보단 네 몸이 더 상한 것 같은데 뭘. 어디 보자... 이거 정말 나보다 더 오랫동안 침상에 누워 있어야 되겠는걸?" 피식 미소지어보이는 리넨의 모습에 란은 또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천 천히 끄덕였다. "이런! 또... 거야? 내가... ...란? ......" 단시간에 너무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란은 리넨의 잔소리를 끝 까지 듣지 못한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리넨의 품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정신을 잡고 있던 긴장감을 놓고 말았기 때문이다. <연금술사>-42-1 지겹게 이어지던 전쟁이 끝난지 이미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길다고 할 수 없 는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옛 모습을 되찾아가려고 노력했다. 이미 끝나버린 전쟁에 대해 생각해봤자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픈 기억뿐이라 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며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듯, 평화를 되찾아 가는 유투 왕국에는 다시 피의 바 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서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쉬익-! 서걱. "꺄악-!" "크헉-!" 붉고 끈적끈적한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양쪽 손에 든 미친 남자가 자신을 피해 도 망가던 아녀자와 사내를 향해 손에 든 검을 내던지며 괴기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 다. "크르르르 퉤. 크큭. 좋아, 좋아! 모두 죽어라-!"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근육을 가진 그 남자는 자신이 던진 검에 의해 몸이 관통당한 두 시체에서 다시 검을 뽑고는 다른 목표를 향해 피묻은 검을 휘둘렀다. 휘~익. "꺄아--악! 사람 살... 크륵!" 털썩. 사람이 휘두르는 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검이 순식간 에 여인의 몸을 양단하며 사내에게 비릿한 피비를 선사했다. "크하하하, 죽어라!" 사람들의 피로 사내의 온몸은 예전에 붉은 피에 흠뻑 젖어버렸지만 그는 싫은 기색 없이 오히려 더욱 즐거워하며 검을 계속 휘둘렀다. 자신의 몸에 더 많은 피가 묻 게 만들기라도 하듯... 유투 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아한 분위기의 건물은 한 미친 사내에 의 해 전쟁터로 변해갔다. 커다란 건물의 이름 값처럼 이곳에는 꽤 강한 기사들이 여 러 명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사내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사내의 온 몸을 뒤덮고 있는 비정상적인 근육은 기사들의 검을 모두 튕겨냈기 때문이다. 일층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미친 사내의 무차별 살인 행각은 지금 건물의 마지막 층 , 그것도 건물 끝부분에 위치한 피가 묻지 않은 깨끗한 장소까지 오고 말았다. "이놈! 이곳은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받아라--앗!" 타앗. 육중하게 닫힌 문 앞에서 한 기사가 손에 든 검을 가슴 깊이 끌어당긴 후, 미친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지금까지 미친 사내를 막던 이들과는 다른 빠르기 를 갖고 있었던지, 미친 사내는 미처 기사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검에 몸을 그대 로 내줘야만 했다. 챙강! 하지만 미친 사내의 몸 안으로 들어가야할 날카로운 기사의 검은 마치 육중 한 벽에 부딪힌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여..역시 소용없단 말인가?" 절망적인 목소리를 내뱉은 기사는 멍한 시선으로 손에 들린 반토막의 검과 그의 앞 에 있는 미친 사내의 가슴을 번갈아 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 고, 미친 사내는 왼손의 검을 들어 기사의 몸 안으로 쑤셔박았다. 푸욱! "크아~~악" "크크크크, 죽어라." 처참한 비명을 지른 기사의 몸이 순식간에 미친 사내의 손에 들려 허공에 띄워졌다 사람의 몸무게 정도는 가뿐히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인지, 미친사내는 아무런 어려 움 없이 기사의 몸을 기다란 검에 완전히 관통당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잠시 후 기사의 손에 들려 있단 반쪽 검은 바닥에 떨어지며 기사의 생명이 다했음 을 알렸다. 챙강. 하지만 미친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기사의 몸을 향해 계속해서 검을 찌르 고 휘둘렀다. 푹푹푹푹. 처음에 이미 미친 사내의 검이 기사의 심장을 꿰뚫어 기사의 목숨을 빼 앗았지만 미친 사내는 자신의 몸을 향해 달려든 기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 지, 검에 의해 몸이 관통당한 기사를 들어올려 오른 손으로 그의 몸을 몇 번이고 더 찔러댔던 것이다.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비정상저인 근육의 힘 때문인지 사내의 손에 의해 공격당한 기사의 몸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뼈까지 잘라버리는 미친 사내의 공 격에 검에 꽂혀있던 기사의 몸이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기덩어리로 변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미친 사내는 왼손에 들려져 있는 검에서 사내의 고깃덩이 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오른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투두둑. 투둑. 미친 사내는 마지막 기사의 살덩어리가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러 나 미친 사내의 발은 다시 굳게 잠겨진 문 앞에서 멈춰야만 했다. 덜컹덜컹. 안 밖 에서 강력하게 잠긴 문이 사내의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덜컹덜컹. 죽은 기사들 이 끝까지 지키려던 인물은 꽤 중요한 지휘에 있던 인물인지 육중한 문은 사내의 손 힘에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크크륵, 죽어, 죽어~!" 하지만 강하게 잠겨있던 문은 미친 사내가 몇 번 왔다갔다하며 몸을 부딪치자, 힘 없이 부서져 나가며 기사들이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인물을 미친 사내 앞에 그대로 드러냈다. "크크크크..." "히~~익~! 다..다가오지마랏!"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 안의 인물은 문이 열리자마자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뒷 걸음질 쳤고, 미친 사내는 찌푸렸던 인상을 피며 멀어져 가는 사내를 향해 발을 앞 으로 내딛었다. "저리갓!" 휙휙, 쨍그랑! 퍽. 겁에 질린 뚱뚱한 사내는 커다란 쿠션을 가슴에 끌어안고 미친 사내의 걸음을 막기 위해 주변의 물건들을 잡히는 대로 미친 사내를 향해 집어 던졌다. 커다란 꽃병에 서 두꺼운 책들에 이르기까지, 뚱뚱한 사내의 손에 의해 공중을 날게 된 물건들은 다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미친 사내의 몸에 부딪혀 깨지거나 구겨질 뿐, 뚱뚱한 사내가 원한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으으...윽. 저..저리가~!" 더 이상 도망갈 공간이 없는 뚱뚱한 사내. 몇 차례 꽤 무거운 물건들을 던지고 밀 면서까지 시간을 벌어봤지만 그는 끝내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의 길 을 막고 있는 벽을 원망해야만 했다. "저리가란 말야~~앗!" 처절하기까지한 소리였지만 미친 사내는 그 소리에 입가의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 들뿐이었다. 피를 갈구하는 잔인한 미소를... "죽어. 죽어. 죽어... 죽엇-!" "살려줘, 살려줘... 으아~~, 으아~~~악" 낮게 시작되던 미친 사내의 중얼거림은 목표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졌고, 뚱뚱한 사내 역시 피비린내가 점점 다가올수록 비명의 소리를 키웠다. 미친 사내의 '죽어' 라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라도 하듯... 하지만 천과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뚱뚱한 사내의 비명소리는 막을 내렸다. 아무런 힘도 없는 뚱뚱한 사내에게는 미친 사내의 무지막지한 힘을 막을만 한 재주가 없었던 것이다. "피..피... 피..." 건물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도 불구하 고 미친 사내는 아직도 피가 모자란 듯, 살아 있는 자를 찾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 웠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이는 기쁨을 다시 맛보고 싶기라도 하듯, 그는 미친 듯이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뚱뚱한 사내가 마지막 생존자였는지, 그 건물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피에 굶주린 미 친 사내는 어딘가에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만한 인물이 숨어 있을거라고 생각하 는 듯, 그 건물을 떠나지 않았다. "피....피...." 그런데 그때였다. 미친 사내의 생각이 맞았는지, 건물의 1층에서 두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다다닥. 그들은 마치 윗층에 있는 미친 사내의 존재를 알기 라도 하듯, 곧장 계단으로 이동해 미친 사내를 행해 다가왔던 것이다. "피다, 피... 크크크큭." 그리고 그 소리가 점점 다가올수록 미친 사내는 입가에 다시 피를 갈구하는 미소를 진하게 만들었다. 피를 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라도 하듯, 미친 사내는 다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을 기다렸다. 덜컹! 미친 사내에 의해 부서졌던 문이 완전히 벽에서 떨어져나가며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젠장. 이번에도 한발자국 늦어버렸군! 혹시나 했는데 저번과 상황이 같아." "뭐야, 또 멍청한 근육질이야?"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두 명의 사내였다. 냉정하게 보이는 갈색 머리 카락의 사내와 황토색 털털하게 보이는 황색 머리카락의 사내, 바로 리온과 크릭이 었다. "매번 늦는군, 매번..." "리온, 저 자식 내가 처리해도 될까? 침을 질질 흘리는게 비위가 상하는데 말야."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는 인물이 대체 누구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살인을 알리는 것이란 말인가? 중얼중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리온은 크릭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렸다. "어이~! 리온. 저 자식을 내가... 이런." 언제나 리온에게 물어보고 행동을 하는게 습관이 됐는지 크릭은 그래도 끝까지 리 온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미친 사내의 육중한 몸 때문에 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휘익, 챙강. "크아~. 죽어, 죽어..." 진한 피비린내보다 심한 악취가 뿜어져 나오는 사내의 입. 오른 손에 들린 검으로 미친 사내의 공격을 막은 크릭은 인상을 찌푸리며 미친 사내를 향해 오른발을 내뻗 었다. 퍽. 힘에 있어서는 리온보다 세다고 자부하는 크릭이었지만, 근육질의 미친 사내에게는 소용없는지 크릭의 발은 미친 사내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흥! 어림없다." 하지만 크릭은 그런 사내의 방어를 노리기라도 했는지, 왼발을 박차 몸을 띄우며 잡혀있는 오른발을 축으로 미친 사내의 안면을 향해 왼발을 휘둘렀다. 휘익, 퍼~억 . 몸의 무게를 이용해 힘을 배가시킨 뒤 돌려차기였기 때문인지 크릭의 발은 미친 사내의 목을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어지는 성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런 공격으로 도 미친 사내의 몸은 여전히 불쾌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크륵, 크륵..." "이 자식 이 정도로는 소용없다는 말인가? 쳇, 그렇다면!" 크릭은 그제서야 검을 쓸 생각을 했는지 스릉. 청량한 소리를 내는 자신의 검을 뽑 아든 후, 미친 사내의 복부를 향해 빠르게 내질렀다. 채챙. 하지만 크릭의 검은 지 금까지 그랬듯이 미친 사내의 몸을 관통할 수 없었다. "아이고, 손이야. 이 녀석 몸이 돌로 만들어... 아! 키에라도가 아론 녀석들은 돌 보다 강한 몸을 갖고있다고 말했었지?" 크릭은 자신의 검을 튕겨낸 미친 사내의 몸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 죽어..." 휙휙. 강한 바람이 불 듯, 크릭을 향해 미친 사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 로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검은 크릭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었다. "흥! 그렇게 무작정 휘두르는 공격은, 아무리 빠르고 강하다고 해도, 내게는 위협 적이지 않다고~!" 크릭은 미친 사내의 공격에 콧웃음을 치며 검신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위위윙 . 크릭이 검신에 힘을 불어넣자, 순식간에 크릭의 옷은 바람 속에 갇히기라도 하듯 , 심하게 펄럭거렸다. 그리고 그와 같이 그가 들고 있는 검 주변에도 두꺼운 노란 색 기운이 만들어졌다. "검기라면 네 녀석의 몸둥아리 정도는 쉽게 자를 수 있다고~!" 신이 난 것일까? 크릭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공격 속에서 몸을 이리 저리 피하며 즐겁게 공격할 틈을 찾았다. 미친 사내의 공격이 매우 빨라 눈에 보이 지 않았지만, 그 주변을 움직이는 크릭의 몸 역시 그에 못지 않아 노란색의 선만이 보일 뿐이었다. 무작정 휘두르는 미친 사내의 공격. 그는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검술은 갖고 있지 못하는 듯,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 크고 작은 상처 만 입을 뿐이었다. 크릭의 앞에서 미친 사내는 더 이상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이다. 그렇게 크릭이 미친 사내와 놀 동안, 리온은 한번도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 은 채, 방안을 조사했다. "음... 죽은 자는 폴보트 연합의 인물... 이곳은 우리가 그들에게 정해준 건물인데 이번 역시 이곳에 머문 폴보트 인물은 죽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폴보트 인물을 죽이고 있는 거야... 팽팽한 양국간의 견제를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쳇, 계속 일이 이렇게 진행된다면, 조용히 처리할 수 없을텐데... 그러면 당연히 폴보트 연합의 추궁을 받게... 자..잠깐만! 혹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는 자는 살 인을 막기 위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살인에 대한 누명을 씌 우려고? 헉! 그럴 수도 있겠군. 살인 현장에 대해 너무도 자세이 알고 있는 상대와 늦게 도착하는 쪽지... 이건 결코 살인현장을 막기 위함이 아냐! 크릭, 그만 놀고 가자!" 리온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미친사내쪽을 향해 소리치고는 안색을 굳혔다. "내 생각이 맞다면,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들을 발견하게 되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어. 그러면 라피에르 저하께 폐를 끼치게 될지도... 크리~~익! 시간이 없다. 빨리 끝내란 말야!" 쿠쿵. 리온의 다그침이 미친 사내의 몸을 쓰러뜨리기라도 한 듯, 리온의 입에서 소 리가 나자마자, 미친 사내의 몸이 양분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알았으니 그만 앵앵거려. 처리했다고, 처리~. 근데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야~, 리온~~! 벌써 갔냐?" 크릭은 아쉬운 듯, 쓰러진 시체를 쳐다보며 리온에게 말을 건냈지만, 그의 말을 들 어야 할 리온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그는 크릭에게 말을 건낸 후, 곧 바로 그 방을 떠났던 것이다. "뭐가 그렇게 급한거야? 쳇, 이 시체를 갖고 가야 되는지, 아닌지는 말해줘야 되잖 아? 음... 뭐, 이번엔 급한 것 같으니 굳이 갖고 갈 필요는 없겠지?" 크릭은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낸 듯, 어깨를 으쓱이며 방문을 나서 리온을 쫓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생각보다 빨리 리온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와 실력이 비슷한 리온이 사라진 시간을 생각한 다면 크릭은 한참을 뛰어야 겨우 리 온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밖으로 나 간 리온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리온은 정말 아무 런 움직임 없이 바닥에 서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리온, 바쁘다고 나가더니 왜 그렇게 서 있는... 어라?" 의야한 듯, 리온을 쳐다보던 크릭은 뭔가 이상함에 몸이 긴장함을 느꼈다. 전신을 무장한 수십 명의 폴보트 연합의 군사가 리온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에 그는 일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리온?" 크릭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리온에게 들으려는 듯, 그에게로 걸 어갔지만, 곧 폴보트 연합군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고 말았다. "멈추시오! 당신들이 왜 모이던 영주님이 머물고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지 설명해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오." "하긴 뭘했다는 것이야? 당연히 안에서 생 날리를 피우는 녀석을..." "크릭! 아무 말도 하지마! 저들이 무엇을 물어오든,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입밖에 내지 말란 말이다!" "잉? 왜..왜?" 크릭은 리온이 정색을 하며 소리를 지르자 말을 끊기는 했지만, 리온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 만 이해할 수 없는 리온의 말을 폴보트 연합군들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것인가? 우리 쪽 병사가 우연히 모이던 영주님께 편지를 전하러 왔 다가 봤다던 건물 안의 상황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손을 부르르 떨며 상황을 오해한 폴보트 연합군들은 리온과 크릭을 대하는 태도를 순식간에 바꾸며, 그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한 상황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희들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들이 하는 행동을 막지 말도록!" "어이~. 이봐,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우리들은..." "시끄럽다! 변명은 내가 아닌, 미드 아르엘 대공께 하도록!" "이봐, 리온. 이거 설명을 해줘야 하는거..." "크릭. 조용히 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 "리..리온?" 당황한 크릭은 리온의 강경한 말에 멍한 표정이 되어 폴보트 연합군들의 포박을 그 대로 받아야만 했다. 상황이 이상한 방향 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이 분명했고, 폴보 트 연합군들이 뭔가를 오해한게 분명했지만, 리온이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크릭은 연합군들의 행동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금술사>-42-2 모이던 영주의 죽음은 폴보트 연합과 유투 왕국 사이에 흐르던 견제를 더욱 팽팽하 게 만들었다. 폴보트 연합에서 파견한 몇몇의 영주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던 중, 모이던 영주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투 왕국을 이끈 다고 할 수 있는 라피에르의 양팔인 리온, 크릭과 함께. 드루젤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을 당시에는 서로 힘을 합치는 위치에 있던 양국이었 지만, 적이 사라진 지금은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기에 그 긴 장감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의 끈은 점점 가 늘어지기만 할 뿐, 뚝하고 소리내어 끊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열 쇠를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리온과 크릭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당신들이 모이던 영주를 죽였나요? 그 집에 있던 모든 이들을 죽였나요?" 어두 침침한 지하 감옥에서 엘벤트의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 만 그의 질문을 받은 리온과 크릭은 입을 굳게 다문 상태로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 다. "이봐요! 당신들이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안 좋은 쪽으로 흐르고 있는 거잖아요! 다시 전쟁이라도 일으키고 싶으신 건가요? 어렵게 찾은 평화를 이 렇게 쉽게 부수려는 건가요?" 엘벤트는 며칠 째, 침묵만을 고수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하아... 그만 두죠.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당신들이 말을 해줄리 없으니. 그동 안 강력한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제가 이런다고 대답을 들을 수 있을리 없 겠죠." 엘벤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솔직히 당신들이 모이던 영주를 죽였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동안 옆에서 당 신들을 보아온 내 판단에 의하면 당신들은 만큼 평화를 원하고 있는게 분명하니까 요. 그렇죠?" "......" 엘벤트는 리온과 크릭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의심이 갔지만, 인 내심을 발휘해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분명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거에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건 저 뿐인 것 같더군요. 연합국을 움직이는 미드 아르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 은니... 물론 폴보트 연합에 계시는 카란님도요. 그러니 당신들이 그분들의 생각을 바꿔놔야만 해요.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다고 악화된 상황이 좋아지는 건 아니니 까요. 네?" "......"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리온과 크릭을 설득하는 엘벤트였지만, 이번 역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하아... 정말이지. 구제불능이에요. 벌써 며칠째 이곳을 다녀가지만 한마디도 하 지 않는군요. 이런다고...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엘벤트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 그만 그곳을 떠나려 했다. 더 이상 입아프게 말해도 그들은 자신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기에. 하지만 되돌아가려고 움직이던 엘벤트의 발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멈춰 섰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네? 방금 뭐라고 했죠?"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상황이 더욱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네 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인지 리온의 차가운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졌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는게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엘벤트의 말. 하지만 리온은 그런 엘벤트의 말에 나직한 한 숨을 쉴 뿐이었다. "말좀 해봐요!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건가요?" "넌 아무것도 모르는군." "네?" "아무것도 몰라. 폴보트 연합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말이지 ... 어쩌면 연합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이해할 수 없는 리온의 중얼거림에 엘벤트는 급기야 화를 내며 그들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철창을 두 손으로 흔들었다. "대체 뭐에요?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욧!" "잘 들어라. 꼬마! 네가 우리말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말하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니까. 그동안 꽤 여러 번 이곳을 찾아와 보여줬던 네 모습이 진실인 것 같기에 말해주는 거다." 흥분하며 목소리를 키웠던 엘벤트는 무게 있는 리온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 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함정에 빠졌다. 모이던 영주가 머물고 있던 곳으로 가기 전에 하나의 편지 를 받았었지. 물론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곳을 찾았다." "그 전이라고요? 그..그럼 그동안 사라졌던 폴보트 연합의 인물들이 모두 모이던 영주처럼 죽었다는?" "그래.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 눈으로 발견한 인물은 모이던 영주가 두 번째 였으니." "두 번째요?' 엘벤트는 지금의 상황이 단순한 오해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 지만, 리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는 그 생각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처음 우리가 편지를 받은 것은 모이던 영주에게로 가기 며칠 전이었다. 그 편지는 라피에르 저하 앞으로 왔는데, 모이던 영주의 일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가 죽게 될거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 "즉 그것은 바로 살인에 대한 경고장이었지. 처음 그 편지를 받은 우리들은 설마하 는 생각으로 종이에 적혀 있는 장소로 가봤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 후였다. 그곳에는 비정상적인 근육을 가진 한 남자만 있을 뿐, 모두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그런?!" 엘벤트는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에 놀라며 온 몸을 떨어야만 했다. "대충 보아도 그 안에서 벌어진 살인은 그 비정상적인 근육을 가진 인물이 한 것이 지. 우리는 그 인물을 제압해 상황을 알아보려 했지만, 그 자는 이미 이지를 상실 한 후였기에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키에라도 할아범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비정상적인 근육은 인위적으로 만든거라고 했다. 보통 인간도 강한 검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말이다. 게다가 그런 근육 위에도 꽤 강한 방어마법도 걸려 있어 창칼로는 상처도 낼 수 없도록 되어 있 었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크릭은 엘벤트가 조용히 있자, 그가 이해를 못했다고 판단 하고는 리온이 하지 않은 말을 이어서 해줬다. 하지만 그런 설명으로도 엘벤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야? 이해가 안가는 거냐?" "...지금...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가요?" "뭐? 너 이 자식 뭐라고 했어? 거짓말? 이게 거짓말 같이 보이냐?" 조용히 입을 연 엘벤트의 말에 철창 안의 크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꽤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해서 말을 해줬더니 뭐라고? 거짓말? 이게 죽고싶어서 환 장을 했나!" 크릭은 엘벤트의 말에 적지 않게 화가 났는지 그동안 꽤 자제해 왔던 말투를 서슴 없이 남발하며 두 손으로 철창을 뒤흔들었다. "흥! 그럼 아니라는 건가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비정상적인 근육을 가진 남자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진실을 말해달라고 했는데, 거짓말이나 지어내다니요. 흥, 그 런 말에 잠시나마 속은 제 자신이 한심하군요!" "이..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크릭, 잠깐만. 꼬마의 말을 더 들어보자고." 크릭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온이 흥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크릭은 막무 가네였다. "됐어! 이런 자식의 말을 더 들어서 뭐해? 내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이런 철 창쯤은 단번에..." "크릭!" "...아..알았어. 쳇.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 조용히 있으면!. 맨날 자기만 잘났어. .. 중얼중얼." 리온의 말에 크릭은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는 투덜거리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 췄다. "흠흠. 아까 하던 말, 한번 더 들을 수 있을까?" 분위기 전환을 위해 리온은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야 다시 엘벤트에게 질문을 던 졌다. "아. 당신들이 말한 비정상적인 근육의 남자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 누군가 치운 모양이군. 그 짧은 사이에 그렇게 하다니... 아니, 아니면 발 견됐는데 아무도 모르게 빼돌린 건가?" "이봐욧! 지금 그게 무슨 말이죠? 이제는 거짓말도 모자라, 폴보트 연합을 모욕하 는 건가요?" "흥분하지 마라, 꼬마. 난 단지 혼자 중얼거린 거야. 네가 믿던 말던 내 알바 아니 지. 처음엔 그저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입을 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가 믿던지 안믿던지 상관안하겠어. 보아하니 넌 아직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 못하는 것 같으니까." "뭐..뭐라고요?" 리온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흥분에 몸을 떠는 엘벤트를 홀로 남겨둔 채, 원래 의 자리로 돌아왔다. "한가지만 더 말해주지. 폴보트 연합인지 아니면 제 삼의 세력인지는 알 수는 없지 만, 그들은 유투 왕국과의 전쟁을 원하고 있다. 전쟁을 통해 흘리는 피를 보기 위 함인지, 아니면 대륙에서 유투왕국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서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 만 말이다. 아, 어쩌면 둘이 아니라 하나일지도 모르겠군." 어둠 속에서 울린 마지막 말이었지만, 엘벤트는 그 말에 콧웃음만 칠 뿐이었다. "흥! 제가 그런다고 믿을 것 같나요? 유투 왕국을 도와 전쟁을 끝낸 연합이에요! 그런데 다시 전쟁을 할 리 없잖아요?" "......" 자신의 생각이 맞음을 확인 받고 싶은 엘벤트였지만, 그는 끝내 그들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하아... 커다란 목소리로 내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었지만 소용없는 것 같군... 그 들의 목소리에서 단 한 점의 거짓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하아~." 지하 감옥 밖으로 나온 엘벤트는 들어갈 때보다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기 때문인지 자신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곳에서 뭐하는 것인가?" "...네?" 갑자기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엘벤트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리온과 크릭이 갇혀 있는 장소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 기에 그는 더욱 손에 힘을 줬던 것이다. 하지만 엘벤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의 모습 은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금발머리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은 오늘 이곳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인물이었 기 때문이다. 이곳의 영토와 건물이 유투 왕국, 즉 라피에르의 소유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지금 은 왕국 쪽에서 폴보트 연합의 편의를 위해 내준 곳이기 때문에 그가 이곳에 들어 오기 위해서는 연합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특히 지금처럼 양국 간의 관계에 커다 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리온과 크릭이 갇혀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상황에 서도 라피에르는 연합 쪽의 인물인 엘벤트에게 추궁하듯 묻고 있었다. 이미 그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곳에서 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 잠시 아래 내려갔다 오는 길입니다." "리온과 크릭에게 말인가?" "네." 엘벤트는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라피에르의 눈빛에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라피에르의 행동에 자신이 이처럼 주눅들 필요가 없음을 알았지만, 상대의 입장이 이해가 갔는지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뭐, 일종의 감시인가?"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갑작스런 라피에르의 말에 엘벤트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상대의 말을 정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사실을 말하기 전에 라피에르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됐다. 연합 쪽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감시할 만도 하지. 아, 그리고 우린 미 드 아르엘 대공의 허락을 받은 상태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지?" "아, 네. 그렇게 하십시오." 굳이 엘벤트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라피에르는 그와의 선을 딱 그으며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지하 감옥 안으로 사라졌다. "하아~." 라피에르의 등장으로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는지 엘벤 트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축쳐진 몸을 움직였다. 라피에르의 모습에서 그는 양국 간의 분위기를 실감했던 것이다. <연금술사>-42-3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 분명 사람들이 라피에르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살벌한거지?" 란을 데리고 유투 시로 들어온 나는 주변에 쫙 깔린 군사들과 팽팽하게 조여드는 긴장감에 의야해 하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몸을 이동했다. 이런 분위 기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분명 이곳으로 오기 전에 들린 마을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했는데? 흠~. 유투 시에 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수집한 정보라서 틀리기라도 한건가? 아니면, 그 짧은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건 전쟁이 끝났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 니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잖아?" 폴보트 연합국과 유투 왕국의 군사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선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 럼 행동하는 모습에, 나는 선뜻 왕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성문을 지나 라피에르를 만나러 갈 수 없잖아? 아니, 성문은 고사하고 길을 걸어가는 것도 제지를 받겠군.' "히유~, 란. 너도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전쟁이 끝난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야. 그렇지 않아? 란?" "......" 말소리 자체가 들리지 않는 건지 란은 여러 번 물어보는 내 질문에도 아무런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런. 또 저 상태야? 마족들을 쫓겠다는 걸 괜히 끌고 온건가? 하지만 몸이 완전히 나은게 아니라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대답이 없는 란을 쳐다보니,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 다. 마치 자신의 힘없는 몸을 탓하듯 그렇게 란은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 그 중심으로 들어갔던 란은 생각보다 몸이 크게 상했기 때문에 치료를 한 후에도 심한 움직임은 어려웠다. 예전의 건강을 되찾으려면 아 직 내게 꽤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 고 란은 지금도 계속 마족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족들의 마을이 있었던 곳에서 보인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아~. 생각할수록 답답하네. 자기 때문에 마족들이 도망가게 된 것은 알겠지만, 뿔뿔이 흩어진 마족들을 무슨 수로 찾냐고?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나는 간단히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떨 쳐버렸다. 지금은 이상한 란의 상태보다는 주변의 분위기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관두자, 내가 뭐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니 이렇게 혼자 머리아파할 필요는 없겠지 . 그건 그렇고, 이 주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냐? 라피에르가 잘 있는 건 확실한건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이런 상황이라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말이니까. 생각보다 많은 폴보트 연합군들의 모습에서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는 일말의 불안감을 안으며 되도록 빨리 왕성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 다. '이런 곳에서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겠어. 우선은 라피에르에게로 가는게 급선무인 것 같으니 말야.' 마음을 정리한 나는 주변에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후, 란의 차가운 손목을 잡았다. 멍한 상태에서 마족들만을 되뇌고 있는 그녀를 같이 데리고 갈 방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란이 내 행동에 움찔하며 고개를 약간 들었다. '뭐..뭐지? 손목을 쳐다보는 건가?'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곳으로 같이 눈을 굴린 나는 뜻밖에 그녀가 내 손을 바라보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쳐다보네? 잡지 말라는 건가?' 마족들과의 일이 있은 이후, 말수가 크게 줄어버린 란은 예전보다 더욱 사람들을 꺼리게 되었다. 유투 시로 오는 동안에도 일체 사람들을 가까이 하려고도 하지 않 았고... 내 손목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란의 모습에서 나는 그 같은 사실을 떠올리 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서서히 뺐다. "란, 유투 성으로 텔레포트 할거니 내 옆에 잘 붙어 있어."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나는 원래의 화재로 돌아갈 겸, 입을 열었다. 하지만 란은 그런 내 노력을 무시하며 엉뚱한 말을 꺼낼 뿐이었다. "...리넨의 손... 따뜻하다." "응?" 이해할 수 없는 란의 말에 순간 난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난 데없이 따뜻하다는 말이라니? 하지만 내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 듯, 그녀는 다시 한번 따뜻하다는 말을 하며 어색한 웃음을 보여줬다. "따뜻해..." '대체 저게 무슨 말이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란의 말에 궁금증이 일었지만, 말수가 현격하게 준 란이 대답 해줄 것 같지 않았기에 난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한 후, 그녀에게 다시 한번 텔레 포트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란, 유투 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알았어. 다른 곳에... 정신 놓고 있지 않을테니, 걱정마." 란이 조금 전의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말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다 알겠 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의 멍한 표정을 지운 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거 대체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거야? 내가 손목을 잡아서 그런건가? 하지만 그런 것 같고 지금까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을 리가 없잖아? 정신을 딴 곳에 놓고 있 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뭔가 이해가 안가는데?' 발랄했던 모습을 잃어버린 후, 란의 행동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게되 었음을 실감하며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또 머리가 아파 오는군. 이런 건 깊게 생각해도 안좋으니 이쯤에서 그만둬 야지.' 조급한 마음이 가득했던 나는 란에 대한 생각을 대충 정리를 한 후, 바로 그녀를 대리고 유투 성의 탑으로 몸을 이동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성안으로 들어 가려는 것이었기에 나는 일부러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는 키에라도의 탑을 선택했던 것이다. 같은 시간, 유투 성에서 라피에르는 키에라도, 트레모스, 그리고 라이너와 함께 지 하 감옥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렵게 만든 면회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경비병들에 의해 밖으로 안내되었던 것이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누군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거야. 저 둘을 이용해서..." "함정..." 결론을 내리는 키에라도의 말에 그와 같이 있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들 역시 키에라도와 같이 리온, 크릭을 만난 이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확실히 편지를 보낸 자는 유투 왕국과 폴보트 연합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려 하고 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래. 전쟁이 끝나는걸 원치 않기라도 하는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음..." 라피에르의 말에 트레모스가 끼어들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전쟁?" "그렇지. 두 나라를 이간질 시켜서 얻는게 뭐겠어? 전쟁 아니겠냐?" "하지만 지금까지 지겹게 이어졌던 전쟁이 겨우 종식됐는데, 그걸 다시 일으키려는 자가 과연 있을까요?" 전쟁을 직접 겪은 라피에르는 그 단어가 얼마나 많은 피를 포함하는지 잘 알았기에 트레모스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그런 라피에르의 의견은 트레모스 가 아닌 키에라도에 의해 꺾여야만 했다. "그건, 네 희망사항일 뿐이지. 나도 인간이라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내가 느 낀 바로 인간들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그 결과 커다란 이익 이나 권력을 얻게 되면, 충분히 전쟁의 파장을 외면해 버리지." "호오~. 영감, 잘 아는데?" "이놈! 영감이라니! 이것이 아직도 매운맛을 보지 못한게냐?" 진지한 한마디로 분위기 잡으며 라피에르의 어린 생각을 바로 잡아주려던 키에라도 는 자신의 말에 꼬투리를 잡는 트레모스를 무섭게 째려보며 경고조의 말을 내뱉었 다. 하지만 트레모스는 그런 키에라도의 반응이 즐거운지 오히려 더욱 그의 화난 반응을 유도하며 약올리는 말만을 골라했다. "흥~! 매운맛은 무슨~! 저번엔 내가 지루해서 중도에 그만 둔거라고! 그걸 갖고 자 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사흘이라는 시간동안 겨루면서 네가 먼저 손을 놨지 않느냐! 그건 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니면 뭐냐? 중간에 혼자 멋대로 그만둔 주제에!" "뭐라고? 이 영감탱이가?" "이것에 또 하지 말라는 말을!" "왜왜? 저번에 못 다한 싸움을 다시 하겠다는 거야?" "네가 먼저 그만둬 놓고서는 그만뒀다니! 보자보자 하니까~!" "보지 않으면?" 퍼버벙! 점점 고조되던 그 둘의 말싸움은 결국 마법 싸움이 되면서 왕성 안의 정원 을 크게 손상시켰다. 다행히 그들이 그동안 대화를 나누며 걸어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여전히 같은 자리, 즉 폴보트 연합군들의 군사가 깔린 곳에 있었다면 그들은 이번 일로 또 다른 꼬투리를 그들에게 잡혀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아~. 또 시작이군... 뭐, 다행히 성안에서 싸움이 일어나 다행이지만..." 진지해지려는 분위기를 망치는 트레모스와 키에라도의 모습에서 라피에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과 현 상황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 려고 한 자신이 바보였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 이다. 물론 그의 곁에서 라이너가 그와 같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트레모스와 키에 라도를 쳐다봤고... "이번에도 꽤 오래가겠군요." 라이너는 어느새 하늘로 올라가 빛줄기를 만들며 움직이는 트레모스와 키에라도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어조로 한마디 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안좋으니 일찍 끝냈으면 해. 저들의 말대로 언제 전쟁이 다시 터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니까..." "네..." 라피에르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그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라고 리넨이 붙여준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도움만큼이나 방해 가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절대 멈출 것 같지 않던 그 둘의 싸움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과 같이 한 순간에 멈춰버리며 그 둘이 하늘에서 바 로 땅바닥으로 내려오는게 아닌가? "어라? 이..이게 대체?" 처음으로 겪는 상황에 라피에르는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앞에 내려선 트레모스와 키에라도를 쳐다봤다. 그들에게서 그들이 싸움을 멈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궁금증을 설명해줘야 할 트레모스와 키에라도는 아무말 없이 놀란 표정으로 왕성을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 "이 기운은 분명!" "확실히 이건 녀석이다!" "녀석이라니요? 녀석이 누구...! 호..혹시?" 라피에르는 그들의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두 눈을 번쩍 뜨며 그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라피에르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던 라이너도 한 모양이었다. "혹시 형이 성에... 와... 음." "리넨님이...아." 하지만 그 둘의 궁금증을 풀어줄 트레모스와 키에라도는 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견을 나눈 그들은 라피에르 와 라이너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왕성 안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이런 우리도 이럴게 아니군!" 탕! 문을 부스듯 열고 들어온 이는 키에라도로 트레모스보다 간발의 차가 빨랐다. 그는 자신이 느낀 기운이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방안을 급히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 다. 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이를 먼저 찾은 것은 트레모스였다. "리넨. 야, 너 이 자식 지금 오면 어쩌자는 거야? 심심해 죽는 줄 알았잖아." 트레모스는 자신이 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다른 방에서 문가로 걸어나오는 리 넨을 키에라도보다 먼저 발견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오~, 트레모스 오랜만이다. 잘 지냈..." "리넨. 드디어 왔구나! 그래 갔던 일은 잘 됐냐? 쉐이트론은? 그는 어딨지?" "아, 그게 그는 죽음의..." "너 이 자식 너무 오래있었잖아? 금방 나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먼저다. 이 녀석! 리넨. 쉐이트론은? 그가 어딨다고?" "뭐라고 이 영감탱이가?" "이 녀석이 또?" 리넨은 자신에게 질문을 하다, 말꼬투리로 말싸움을 하게된 그 둘을 어이없게 바라 보더니 힘빠진다는 듯, 소리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리넨의 모습을 보 지 못했는지, 트레모스와 키에라도는 조금 전 싸웠을 때보다 더욱 사납게 서로를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봐들! 싸우지 마~앗! 대체 건물 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서로 마나는 왜 끌어 올리는데? 서로 그만 노려보고 아까 하던 질문이나 하라고." 리넨은 머리가 아파오는지 오른 손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며 주변의 푹신한 의자 깊숙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서 있는 자세로 그들의 질문을 받을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 우선 키에라도부터! 트레모스, 넌 별로 할 말 없는 것 같으니 나중에 물어봐 라. 키에라도, 아까 질문이 뭐였소?" 키에라도는 리넨의 말에 트레모스에게로 향해졌던 시선을 간신히 돌릴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버릇없이 자신에게 덤비는 트레모스와의 싸움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넨이 트레모스보다 자신에게 먼저 기회가 줬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는 화를 삭혔다. 지금 그에게는 싸움보다 중요한 사항이 있었기에... "리넨. 쉐이트론, 그는 어딨지? 설마 이번에도 너 혼자 온 것은 아니겠지? 저번에 이 녀석들이 왔을 때도 쉐이트론은 없었단 말이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뒤 입을 열었기 때문인지 키에라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부드럽게 들려왔다. 하지만 힘들게 가라앉혀 질문을 한 키에라도는 그만한 대가를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던 리넨이 열린 문으로 뛰쳐들어오는 라피에르와 라이너에게 둘러싸여졌기 때문이다. 다다다다다다닥. "리넨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치시거나 한 것은 아니신지요?" "형~~~." 라이너는 리넨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위 아래로 굴리며 그의 몸이 어디 상 하지나 않았는지 살피며 질문하기에 바빴고, 라피에르는 리넨을 발견하자마자, 그 의 품으로 파고들어 버려 리넨이 키에라도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봐,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단 말이다! 썩 저리 가지 못할까?" "형~~~.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보고 싶었단 말야~~." "리넨님. 혹시 아프셔서 앉아 계시는 겁니까? 어디 안좋은 곳이라도..." "이봐! 내 질문이 아직 안끝났다니까?" "형아~~~." 간신히 리넨이 조용히 시켜놨던 장내가 다시 시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한번 입이 열리기 시작한 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리넨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던 것이다. 그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까지... "모두 그만! 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시끄러운거야? 좀 조용히 못해? 내가 어디 가 냐? 어디 가냐고~~~옷!" <연금술사>-42-4 시끄러운 방안을 조용히 시킨 후, 나는 꽤 오랫동안 그들의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라 궁금한게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했던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는... 라이너와 라피에르 때문에 그 시간이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아~. 이제 겨우 끝난건가? 한 사람씩 정리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알고보 면 간단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 이곳에 도착했던 기억이 있는 나는 어느새 창 밖이 어두워 졌음을 보고는 눈앞의 이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늘어졌는지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어디 보자, 키에라도는 쉐이트론이 전쟁 끝나고 온다는 소리에 기뻐하고, 트레모 스는 내가 돌아와서 더 이상 심심해하지 않는 것 같고, 라이너는... 녀석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고... 라피에르는..." "형아~~." '여전히 내 허리에 매달려 있고... 에휴~. 녀석 안본 사이에 많이 컸군. 이제는 내 가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이야... 힘이 세졌어.' "형아~, 형아~~." "라피에르, 이제 그 형아라는 소리는 그만하는게 어때? 너도 이제 어린 아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니? 아무리 내 앞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유투 왕국을 이끌어가는 사 람인데... 안 그래?" "웅... 하지만 형아, 유투 왕국을 이끌어가는건 잠시 뿐이야..." "잠시?" 라피에르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내가 되묻자, 녀석은 뭔가를 감추듯 웅얼거린 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앞으론 형아~라고 안할게~." 화사한 미소를 보이는 라피에르는 마지막으로 나를 형아라고 부르고 싶었는지 그 단어를 강조하며 지금까지보다 더 끈끈하게 불러 내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 줬다. "하.하.하... 그래. 아, 참. 그건 그렇고 네 곁에 왜 항상 보이던 이들이 없냐? 리 온과 크릭 말야. 무슨 일이라도 시킨거야?" 오랜 인사를 끝마치고 주변을 둘러본 나는 그제서야 라피에르의 근처에서 항상 맴 돌던 녀석들이 없음을 알고는 그와 같은 질문을 꺼냈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해서는 안되는 거였는지 말을 꺼내자마자, 나는 장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껴 야만 했다. '뭐지?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가라앉는거야? 혹시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 긴건가? 전쟁으로 그들을 잃은...? 그런 건가?' 전쟁이 사람 목숨을 얼마나 간단히 빼앗아 가는지를 생각해 낸 나는 그럴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라피에르의 입이 열려 사실을 알기 전 까지는... "아니, 그런게 아냐. 지금 그들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 "지하감옥?" 난데없이 감옥이라니? 그들이 살아 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쉰 나였지만, 갑작 스런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온과 크릭은 라피에르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라피에르가 그들의 전부라고 해도 될만 큼 그들의 충성심은 대단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니? '혹시 그들이 라피에르를 배신했나?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잖아?' 잠깐 머릿속에 그런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난 이내 말이 성립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없는 동안 일이 어떻게 진행된거야? 리온과 크릭이 감옥에 있다니? 말이 안되잖아? 그들을 네가 가뒀을 리도 없고? 그렇지 라피에르?" 이상하게 돌아가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내 입에서는 여러 가지 가 능성들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말과 동시에 화기애애했 던 주변의 분위기도 같이 가라앉히면서... "그들을 가둔건 내가 아니야." "그럼? 너말고 여기 그들을 가둘만한 인물이 존재... 설마 폴보트 연합?" 침울해하는 라피에르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단어에 나 자 신도 놀라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응... 그들이 리온과 크릭을 가뒀어. 조금 전에 이 자리를 비운 이유도 그들의 얼 굴을 잠시 보려고 연합군들이 있는 건물 지하 감옥에 갔다 오는 길이야." "폴보트 연합이? 리온과 크릭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거냐? 유투 왕국에서 그들을 감 옥에 넣으려면 보통의 사건으로는 불가능 할텐데? 혹시 성밖의 그 이상한 분위기도 같은 이유 때문인거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라피에르의 고개는 내 생각이 맞다고 말 해줬다. '그들이 라피에르의 양팔을? 이건 너무 빠르잖아? 폴보트 연합 쪽에서 언젠가 라피 에르를 위협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전쟁이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부터 라피에르의 양팔을 잡은거지? 아니, 어쩌면 지금이 적기인가? 유투 왕국이 다 시 예전 모습을 찾기 전이...' 미드 아르엘 대공의 야망을 알아본 나는 그가 언젠가 전쟁이 끝난 이후, 유투 왕국 을 자신의 연합국 밑으로 가져가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의 곁에 키에라도를 붙 여둔 거였는데, 내 생각처럼 상황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키에라도가 있는 상 황에서 리온, 크릭이 그들 손에 잡혀간 것을 보면. "자세히 설명해봐. 대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거야?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지?" 나라간의 일에 별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 일은 내 동생의 일이었기 에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라피에르가 그들 없이 홀로 서기엔 아직 어렸기에 리온 과 크릭의 일을 무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일어난 일 때문이야. 전쟁이 끝난 후, 우리들은 폴보트 연합의 도움을 받으며 유투 왕국의 예전 모습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었지. 뭐, 도움이라고는 해도 사실, 폴보트 연합의 일방적인 명분뿐이었지만. 뭐, 어쨌든 그들은 협력이라는 말 아래 자신 쪽의 사람들을 몇 명 유투 왕국으로 보냈었어. 그리고 일이 벌어진 거지 ..." "일?"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 라피에르는 침울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응. 얼마 전부터 갑자기 폴보트 연합 쪽에서 보낸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살해되기 시작한거야." "살해?" "응, 살해. 처음엔 물론 그들이 살해되는지 몰랐어. 단지 언제부턴가 그들의 행방 을 알 수 없을 뿐이었으니까. 즉 우리측과 폴보트 연합 쪽은 그들이 잠시 자신들의 일을 잊은 채, 다른 볼일을 보는 걸로 생각했던 거지. 사실상 그들이 우리들을 도 와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명분으로 사람만 보냈을 뿐, 하는 일은 없었던 인물이란 말 이지?" "응. 그런데 정확히는 일주일 전에 내 앞으로 하나의 편지가 보내진 거야." "편지?" 난데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녀석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고, 받는 사람의 이름만 있는 편지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편지는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내 방에 놓여졌었어. 즉 홀연히 나타난 거지. 처음엔 뭔가 아무 생각 없이 뜯어봤는데, 안의 내용은 꽤 놀라운 거였어." 녀석은 차츰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듯, 그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털어놨다. 그 때의 상황뿐만 아니라 심정까지도. "그 안에는 폴보트 연합 쪽에서 보낸 이들 중, 한 명이 언제, 어디서 죽을 거라는 말이 적혀 있었거든? 처음엔 물론 장난인줄 알았지.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내게 편 지를 전할만한 인물이라면, 장난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에 있는 이들과 상의한 후, 리온과 크릭을 그곳에 보냈었어.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정말 살인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지." "상황을 막을 수 없었나?" 그들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라피에르의 말을 유도했다. "없었어. 하지만 폴보트 연합 쪽에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다행히도 그 자가 죽은건 인적이 없는 장소였거든? 난도당한 채로 죽었지만..." "뭐야? 사실을 숨긴거냐? 폴보트 연합 쪽에 사실대로 말하면 되잖느냐? 그러면 너 희가 누명을 쓸 필요없이 깨끗하게 상황이 끝났을텐데?" "그게... 상황이 그렇게 안됐거든... 우리가 그 살인자를 죽였어..." "뭐? 대체 어쩌다가?" 일이 잘못되는 방향 쪽으로 계속 흘러갔기에 나는 답답한 마음을 숨김없이 나타냈 다. 라피에르 녀석을 질책하는 시선도 숨기지 않은 채. "하아~. 계속해봐.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지말고, 끝까지 이야기해 보란 말야." 마치 어린 아이가 소중한 그릇을 깨버린 후, 숨기고 있다가 들켰을 때처럼, 라피에 르는 내 질책 어린 말에 고개를 조금씩 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이려고 죽인건 아니었어. 연합 쪽 인물을 죽인 녀석이 다짜고짜 리온과 크릭을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이게 된거지." "그리고?" 내 말투 속에 담긴 질책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라피에르는 내 입에서 재촉 하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재촉하는 말에 입을 연 것은 라피에르가 아닌 키에라도였다. "그리고는 뭐. 왠지 상황이 우리 쪽에서 연합인물을 죽인 것 같이 되어버려 그 일 을 은패하기로 했지. 보지 못한 걸로 하기로 말이야. 그리고 나중에 내가 그 살인 자의 시체를 봤는데, 인공적으로 몸의 능력을 키워놨더군. 보통 사람도 리온과 크 릭을 상대할 수 있게끔 말야. 게다게 그 몸 겉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더군. 검 같 은 무기를 튕겨내는... 그러니 리온과 크릭이 어쩔 수 있었겠어? 살의에 똘똘 뭉친 녀석을 제압하는게 안되는데?" "아, 이해는 됐으니, 그만 하시오. 그 다음은 라피에르에게 듣고 싶으니." 나는 키에라도의 말에 그가 라피에르를 꽤 아낀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굳어진 표정 을 풀 수 있었다. 키에라도는 라피에르의 뒤를 봐주는 것이 귀찮다며 항상 투덜거 리고 있었지만, 실상은 꽤나 녀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뭇거리는 라피에르 를 자진해서 감싸주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라피에르에게 상황을 듣고 싶었기에 녀석에게 다시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라피에르? 그 다음은 어떻게 된거지? 그러다 연합 쪽에 사실이 들통난거야?" "아니. 두 번째 편지가 나한테 왔어." "두..두 번째?" "응. 그 편지에는 또 연합 쪽 인물이 죽는다는 말이 적혀 있었지. 물론 시간과 장 소까지..." "뻔히 보이는 함정에 또 갔단 말이야?"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나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하지만 라피에르는 그 편지를 함정으로 보기엔 어렵다는 말을 하며 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형, 그때 당시, 우리는 그 편지를 함정으로 보기 어려웠어. 뭐, 지금 보면 함정이 분명하지만... 뭐, 어쨌든 그때 그 편지에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아달라는 뜻이 들어 있었단 말야." "뭐? 막아 달라는 뜻? 그렇게 적혀 있었냐?" "어? 아..아니." "그런데 그런 생각은 왜 한거야? 말투가 그랬던 거야? 내가 보기엔 별로 그랬을 것 같지 않은데? 혹시 그때 편지가 있으면 갖고 와봐. 내가 한번 보자." "아, 응." 라피에르의 어리숙한 행동에 저절로 답답해진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녀석이 편 지를 갖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 "리넨. 나도 그 때 편지를 같이 봤는데... 녀석의 말 대로였어. 마치 우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보였단 말야. 가서 막아다라는 것처럼." "키에라도? 당신도 라피에르와 같이 그 편지를 봤단 말이오? 또?" "아, 이곳에 있던 인물들이 모두 봤지. 저기, 저 녀석은 빼고." "트레모스? 녀석은 왜?" 구석에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녀석을 쳐다본 나는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녀석 을 쳐다봤다. "야, 넌 왜 그 편지를 안본거지?" "그 때 난 이곳에 없었어." "없어?"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의 말에 또 한번의 질문을 던졌지만, 내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편지를 가지러 간 라피에르가 대신해줬다. "아, 형. 트레모스는 내가 다른 곳의 일을 봐달라고 잠시 보냈었어." "일이라니?" "유투 시에서 떨어진 곳의 일을 해결하려면, 단 시간에 먼 곳까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이 필요했거든? 키에라도나 트레모스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분들이..." '호오~. 분? 트레모스에게도 분이라는 말을 쓰네? 녀석. 예전엔 같이 놀지 말라고 투정을 부리더니 지금은 트레모스에게 말을 높이는 군?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런건 가? 아니면, 녀석이 드래곤이라서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건가?' 나는 라피에르의 말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투 왕국을 단시간에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면, 먼 곳의 일까지 한번에 손봐야 해. 내 손이 닫지 않는 곳의 일을 천천히 해결하려면, 단 기간 안에 왕국을 복원시킬 수 없거든?" "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키에라도는?" "아, 나는 그때 막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길이었지. 생각보다 빨리 끝났거든?" "그렇군. 알겠소. 무슨 말인지. 라피에르 그럼, 그 편지 좀 줘볼래?" 나는 키에라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문제의 편지를 받기 위해 라피에르에게 손을 뻗었다. 녀석의 말대로 그 안에 그런 뜻이 적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나는 편지를 열어 그 안의 내용을 보기 전, 그것을 란에게 빼앗겨야만 했다 탓! 언제 일어나 내 손의 것을 나꿔챘는지도 모르게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서 편지 를 빼앗아 갔던 것이다. "뭐..뭐야?" 주변의 사람들도 갑작스런 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나와 같은 황당한 표정 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란은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편지를 쳐다볼 뿐 이었다. "란? 왜 그래?" 부르르~. 미세하긴 하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는 란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 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이 편지... 그들이 보낸거야..." "그들?" 심하게 떨려오는 란의 목소리. 분노가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뭔가 알 것 같 았지만 쉽게 짐작이 가지는 않았다. '그들? 란이 저렇게 분노할 정도라면 결코 좋은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그녀 에게나 나에게나 말야. 그들이라... 호..혹시 마족?' 란이 분노의 감정으로 몸을 떨 정도라는 사실에, 나는 마족이라는 단어를 떠오릴 수 있었다. 요 근래 그녀의 몸을 분노로 휘감을 수 있는 존재들은 그들 밖에 없었 으므로... "란! 혹시 그들이라는 건, 마족들을 말하는 거야?" "뭐, 마족?" "마족이라니?" "난데없이 웬 마족이냐?" "마족을 만나보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라이너까지 놀라움을 표할 정도로 마족이라는 말은 대단한 것이었는지, 순식간에 장내에 있던 이들의 시선은 나와 란을 향하게 됐다. "리넨! 설명해봐라. 갑자기 마족이라니? 그리고 저 아이는 그들이라고 했다. 마족 이 하나가 아닌, 여럿을 만나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키에라도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며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건 란에게 물어보시오.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그녀가 알고 있을테니... 란, 넌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그 편지가 마족들이 보낸 거냐?" 끄덕.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이.. 이 편지에 적혀 있는 글씨. 그 안에는 비애의 상급정령인 멜리스의 기운이 담겨져 있어. 매우 미세하긴 하지만... 같은 정령들을 다룰 수 있는 내 눈에는 확 실히 보여!" "정신정령 말이야?" "응. 분명 정신계 정령을 다루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마족이 편지 안에 멜리스의 기운을 담아 둔거야. 이 편지를 읽고 슬픔을 느끼도록..." "라피에르! 란 말이 사실이냐?" "스..슬픔?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아. 왠지 저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편지를 쓴 자가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막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슬픔에 잠긴 것처럼 느껴 졌어. 마치 내가 도와주고 싶도록 말야." "흠~.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군." 라피에르의 대답에 키에라도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이... 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그들이 결계를 나간 이후,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나는 갑 자기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들과 나와는 아무 연관이 없을 줄 알았기에... 앞으로 얼마간은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내가 생각하는데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되버렸어. 마치 그들에게 뒤통수라도 맞은 것 같군.' 고개가 절로 가로 저어졌다. 그들의 일은 조금 후에 생각하려 했는데, 그들은 그것 을 바라지 않는 듯, 내게 먼저 시비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비는 생각 외 로 빨리 다시 나를 찾아왔다. 콰쾅. 퍼버벙.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며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멍 하니 있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혹시 그들인가?'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내게는 왠지 그럴 것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응? 이게 뭐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군. 누군가 싸우고 있는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말야." "...기운이 느껴져! 그들의 기운이!" 란의 한마디가 우왕좌왕하던 장내를 자시 쥐 죽은 듯 조용히 만들었다. 왜냐하면 존재가 확인된 적 없는 마족을 다시 언급한 란의 말이 방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소 란이 일어난 장소로 순식간에 가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금술사>-42-5 리온과 크릭이 갇혀 있는 곳, 즉 폴보트 연합군들이 지키는 지하감옥은 매우 어둡 고 습해 사람들이 지내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아무리 감옥이라 시설이 좋을 필요 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곳의 지하감옥은 오랫동안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상 황이 더더욱 안 좋았다. 지하 사방의 벽들은 어둠 속에 오래 갇혀 있었음을 증명하 듯,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는 곰팡이들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그 곰팡이들은 차가운 지하의 물기마저 빨아드리는지 축축하고 습한 기운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젠장, 이거 계속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거야? 이런 철창은 그냥 부수고 나갈 수 있잖아?" 크릭은 코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간간이 곰팡이 냄새가 나자, 코를 두 손가락으로 잡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을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좀 전에 저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린 이곳에 서 한발자국도 움직이면 안돼." "왜?" 리온은 자신의 나직한 말에 크릭이 따짓듯 묻자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 다. "몰라서 묻는거냐? 아니면 알면서 투덜거리는거냐?" 크릭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도 힘겨웠는지, 리온은 평소와 다른 식의 대답을 하며 크릭을 외면해버렸다. "쳇. 너도 이곳이 싫긴 싫은가 보구나? 말장난 좋아하는 네가 그렇게 딱잘라 말하 는 것을 보면 말야." "알았으면 그 시끄러운 입 좀 다물어라. 신경이 쓰여 쉴 수도 없잖아." "쉿! 잠깐 조용히 해봐." 크릭의 투정이 리온에게 전염됐는지 리온은 안하던 행동을 하며, 크릭의 말투를 따 라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말투에 크릭은 평소와 달리 흥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리온이 입이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만들었다. "왜 그러는 거야?" 지금까지의 목소리보다 훨씬 작은 소리로 입을 연 리온은 크릭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라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그것도 거의 인기척 없이 말야." 크릭의 말에 리온은 몸을 긴장시키며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 웠다. 그러자 잠시 후, 그는 어렵지 않게 누군가 자신들이 갇혀 있는 공간으로 오 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지? 누가 이 밤중에 이곳에 들어오는거야?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걸어왔던 인 물은 없었는데?" 발자국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존재는 잠시 후, 리온과 크릭 앞까지 다가왔지만 그는 철창 앞에 존재하는 횃불 밑까지는 다가오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그는 바로 횃불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이다. 어둡고 습한 지하 감 옥에는 오직 그곳에만 횃불이 놓여져 있었기에, 리온과 크릭은 어둠 속에 숨은 존 재의 그림자만 조금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흔들리는 횃불 사이로 어렴풋이. "누구냐? 누군데 이 밤중에 이곳에 들어온 것이지? 폴보트 연합군인가?" "......" 상대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자, 크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이는 그저 조용히 그곳에 서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크릭의 말에 대답했던 것이다. 조용히 손을 뻗어 그들이 갇혀 있는 철창을 가리키면서. "뭐..뭐냐?" 끼이이이잉~. 인위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듯, 잠시 후 어둠 속의 존재가 가리킨 철 창 즉, 크릭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철창이 미세한 소리만을 내며 부드럽게 양쪽으 로 벌어졌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두꺼운 철창을 너무도 쉽게 구부러뜨린 것이다. "너..넌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거지? 손을 내 뻗은 존재가 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일에 리온과 크릭은 자신들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그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상대방의 행동에 그들 은 다른 질문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릭과 리온은 자신들의 떨리는 목소 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뿐, 질문에 대한 상대의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상대는 그런 그들의 행동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답변이 아 닌 자신의 말만을 꺼냈던 것이다. "...나와라." "......?!" 너무도 나직해 자세히 들으면 알 수 없을 것 같은 말이 어둠 속의 존재에게서 흘러 나왔지만 리온과 크릭은 그 조용한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어 둠 속의 존재가 말하는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릭이 그 흡인력에 빨려 들어가 철창 밖으로 한걸음을 내딛일 정도로... "크릭!" "아...!" "연합 쪽 인물이 아닌가? 누군데 우리를 이곳에서 나가게 하려는 거지?" 리온은 크릭의 몸을 뒤로 잡아당기면서, 의심스러운 사내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어둠 속의 사내는 이번 역시 자신의 말만을 하며 그 질문을 싹 무 시했다. "살인을 막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막지 못했더군. 쓸모 없이 덜컥 붙잡 히기나 하고." "편지?! 네가 보낸 것인가? 왜 그런 편지를 보낸거지? 우리를 잡히게 하려는게 아 니었나? 연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려고 그런게 아니냔 말이다!" "흥분하지 마라. 시끄럽게 해서 좋을게 뭐가 있다고 언성을 높이느냐?" "......!" 리온은 사내가 말하기 전까지 자신이 언성을 높이는 줄도 몰랐는지, 사내의 말에 몸을 흠칫 떨며 입을 다물었다. "나와라. 너희들은 이 안에 있기보다 밖에 있어야 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 "이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리온과 크릭은 벌어진 철창 안에서 어둠 속으로 사내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하 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그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어이~, 이봐!" "거기 서. 서란 말이야!" 어둠 속에서 사내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작게 들려오자, 리온은 어찌할 줄 몰라하 며 옆의 리온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런 젠장~. 리온, 이렇게 이곳에 있는건 안되겠어. 저 자를 쫓자!" "음..." "철창이 열렸다고~! 그를 쫓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잖아? 가자~. 가자, 리온!" "안돼, 이상하단 말야. 그 자가 철창을 이렇게 만든건 분명 우리들을 유인하기 위 해서야. 그의 말대로 그는 우리가 이곳을 나가길 원하니까." "하지만 리온. 지금 저 자를 쫓아가면, 저 자의 정체와 편지를 보낸 이유를 알 수 있단 말이야!" "...그건..그렇지만..." "쳇, 이제 희미한 발자국 소리도 거의 안들리잖아? 리온. 난 저 자를 따라가겠어! 그러니 넌 네 마음대로 하라고!" "크릭~!" 리온은 뒤늦게 철창 밖으로 나가버린 크릭을 불렀지만,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사내를 쫓기 위해 뛰어갈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쳇~.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수상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에잇. 그렇 게 무책임하게 행동하면 어떻게 해? 쳇, 크릭, 같이 가~!" 리온은 잠시 철창 안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다가 크릭과 같은 결론 을 내린 것인지, 몇 마디 투덜거리는 말을 내뱉고는 앞서 사라진 이들을 따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리온은 철창을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릭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들이 갇혀 있 는 감옥을 지키는 이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어, 그의 걸음을 막는 이가 아무 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크릭을 따라잡았을 때, 그의 시야에는 문제의 사 내가 보이지 않았다. "크릭, 그 자는?" "사라졌어." "뭐?" "마법사였나봐.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어." "그런..." 리온은 혹시나 하던 생각이 역시나가 되버리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 자가 왜 우리를 나오게 만든거지? 뭔가 찜찜해. 크릭! 이대로는 안되겠어. 어 디로 사라진지 모르는 그를 찾아 이곳을 돌아다니기보다는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 가자. 지금 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자고. 어때?" 리온은 자신의 꺼낸 말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했기에 바로 크릭이 그러자는 대답 을 할 줄 알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크릭?" 리온은 결국 생각하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야만 했다. 크릭이 왜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는 크릭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하려 했던 것이다. "크릭, 내 생각이 어떻..." "안 돼, 리온. 우린 철창 안으로 못 들어가." "왜? 이유가 뭔데?" 리온은 답답한 마음에 따지듯 물었지만, 크릭은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 를 흔들었다. "저기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엄청난 살기를 내뿜는 녀석을 보면, 내가 왜 이 러는지 알거야." "살기를 내뿜는...녀..석?!" 리온은 그제서야 누군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지?"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주변이 어두웠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물론 상황은 같아 상대 역시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 분 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정확히 그들을 향해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정확히! "주변에 우리밖에 없으니 저 자가 내뿜는 엄청난 살기는 우리들에게 오는게 확실하 겠군.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말야."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자와 한팬가?" "글쎄. 얼굴이 보여야... 헉! 저 자는 데칸티스... 분명 우리를 가둔 미드 아르엘 의 아들, 데칸티스 아르엘이야." "데칸..티스?! 저 녀석이 왜 이곳에 나타나 우리를 죽일 듯 노려보는 거지?" "그 이유를 내가 아냐?"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뻗어 내려오는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대공의 아들 데칸티스였다. 그는 오른 손에 그의 애검을 꺼내들고 리온과 크릭에게로 그 검의 날을 세웠는데, 그 날에는 그들을 향한 살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너희들... 감옥을 나와 어디로 가려 한 거지?" 음침한 목소리가 데칸티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는데, 그 소리는 지금까지 그들이 알 던 데칸티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딜 가려던 것은 아니오. 수상쩍은 사내가 우릴 밖으로 유인했기에 이곳으로 왔 을..." "흥. 누구에게 그런 거짓말을 믿으라는 거냐! 분명 너희 둘을 가둔 나와 아버지를 죽이러 나온 것이겠지. 그렇지 않느냐?" 데칸티스는 흥분한 듯 언성을 높이더니 이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높이 쳐들어 리 온과 크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이것 보시오. 상황이 충분히 의심스럽다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이렇게 갑자기 검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슨 행동이요! 우린 아무런 반항 없이 다시 감옥으로...헉 !" 쉬~익! 조용히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리온은 그와 크릭 사이를 가르는 데칸티스의 검 때 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이보..." 쌔~엥~. 아래로 떨구어지던 데칸티스의 검은 마치 푹신한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떨 어지자마자 튕겨 올려지며 시끄럽게 떠드는 리온의 안면으로 향했다. "헉." 폴보트 연합 쪽에서는 한 손가락에 꼽는 검사, 데칸티스. 그의 검술은 리온이 말을 하며 피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검을 갖고 있지 않은 리온으로서는 몸을 굴러야지만 겨우 데칸티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흥. 쥐새끼처럼 잘도 피히는군. 하지만 너희들 손에는 검이 없다. 크큭." "너 이 자식. 보자보자 하니까." 크릭은 가만히 있는 자신들을 먼저 공격해온 데칸티스를 무섭게 노려보며, 육중한 몸을 데칸티스에게로 날렸다. 데칸티스의 몸이 리온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는 그 기회를 노려, 상대를 제압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칸티스는 크릭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크릭이 다가오는 기운을 느끼자마자, 몸을 회전하면서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주변에 투명한 막을 만든 것이다. 공격과 방 어가 동시에 되는 형식의 행동으로... 결국 크릭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데칸티스의 움직임에 놀라 달려들던 몸에 제동을 걸어야만 했다. 그대로 달려간다면 빠른 속도 로 원을 그리고 있는 검에 그대로 몸을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젠장!" 욕을 내뱉으며 크릭은 왼쪽 다리를 바닥에 길게 뻗어 빠르게 앞으로 내뻗는 몸의 속도를 줄이고는 데칸티스의 방어범위에 속하지 않는 발목을 공격했다. 강력한 공 격은 아니었지만 성공한다면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기에 크릭은 미끌어지는 몸의 힘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리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은 바닥의 모래를 자욱하게 끌어올려 주변을 흩뜨리는 효과를 보였기에 데칸티스의 신경을 잠시 잡아 둘 수 있었다. "크윽." 복숭아뼈가 있는 부분을 정확히 가격했기 때문인지 데칸티스의 몸은 순식간에 무게 중심을 잃고는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흔들렸는데, 크릭이 데칸티스의 몸을 밀어내 는 힘을 이용해 그의 다른 발목도 같이 밀자, 흔들리던 데칸티스는 순식간에 바닥 에 몸을 굴려야만했다. 털썩. 크릭이 먼지를 일으킨 것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데칸티스의 커다란 몸이 한꺼번에 쓰러지자, 그에 못지 않은 먼지가 자욱히 솟아올랐다. "리온, 괜찮아?" 크릭은 데칸티스가 다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리온을 부축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 다. "으..응. 하지만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아, 이대로는 힘들어." 리온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검으로 사용할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에 바빴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감옥으로 조용히 돌아간다고 해도, 데칸티스가 지금과 같은 공격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란 사실을 리온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지. 우리를 공격한 저 놈을 박살내기 위해서는 맨손보다는 무기가 있는 편 이 나으니까!" "그래. 지금 저 자가 우리들에 대해 갖고 있는 살기는 말로 해결될 정도가 아니지.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저 자를 제압하는 것 밖에 없어." "저 자식을 그냥 제압한다고?" "뭐, 어쩌겠냐? 저하께 폐를 끼치면 안되니, 제압한 뒤, 어디 묶어두던가 해야겠지 ? 우리가 감옥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에~. 또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리온의 의견에 크릭은 투덜거리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도 리온의 말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크으으윽. 네놈들. 감히 내게 상처를 입히다니! 죽어랏!" 리온과 크릭이 상황 대처 방안을 의논하고 있을 때, 데칸티스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엄청난 살기와 함께 검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쉬익~! 콰콰쾅!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격. 크릭의 발차기 때문에 몸을 바닥에 굴렀기 때문인가? 데칸티스는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검기를 사용하며 리온과 크 릭을 향해 마구자비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뭐얏? 저 자식 검기도 쓰잖아? 간단히 매운맛만 보여줘서는 안되겠는걸?" "크릭! 감옥 앞에 쓰러져 있는 보초병의 검!" "좋았어!' 크릭은 리온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만든 후, 전 속력으로 데칸티스에게서 몸을 뺐 다. 그가 울컥하는 성격이 강하기는 하지만 검기를 쓰는 상대를 맨몸으로 상대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릭은 리온과 같이 검을 손에 쥐기 전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서걱. 콰콰쾅. 리온과 크릭은 그들 못지 않은 속력으로 따라붙으며 검기를 계속해서 날리는 데칸티스의 공격을 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피했다고 해도, 걸기에 의해 잘려진 건물이 무너져 그들을 뒤덮는 것까지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에 무사한 몸으로 지하감옥 바로 앞까지 오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을 해냈다. 몸 여기 저기 긁히고 잦은 상처가 나 있었지만, 리온과 크릭은 한 손에 데칸티스의 검과 같은 무기를 들었던 것이다. "네 이놈. 그 동안 네 마음대로 공격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앗!" "흥, 맛좀 봐라." 크릭과 리온은 손에 검이 들리자 마자, 데칸티스와 같은 검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상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을 하려는 듯, 그들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최고의 공격을 데칸티스를 향해 쏟아 부었던 것이다. 리온과 크릭이 검을 쥐자마 자, 상황은 역전되며, 데칸티스가 밀리기 시작했다. 데칸티스가 연합 쪽에서 손에 꼽는 검사라고는 하지만, 리온과 크릭 역시 그에 못 지 않는 검술 실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대 1의 싸움. 비슷한 실력의 세 사람이 었기에 데칸티스는 순식간에 지금까지완 반대의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래도 그는 리온과 크릭에 비해 결코 밀리지는 않았다.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는 자세 때문에 리온과 크릭이 쉽게 그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끝내 리온과 크릭의 몸에 커다란 상처를 입헤게 만들었다. 사악~! 촤라락! "저..저 자식이 감히 내 몸에 상처를!' 크릭은 꽤 크게 찢어진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며, 선홍색의 피에 분노의 입김을 내뿜었다. "죽여버리겠어!" 리온 역시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상대를 죽일 듯 쳐다보며 검을 쥔 손 에 힘을 더더욱 가했다. "죽어--엇!" 그들 셋의 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잔혹해져갔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더더 욱 황폐해져갔다. 데칸티스가 무너뜨렸던 건물들을 리온과 크릭이 다시 무너뜨리며 건물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은 그 셋에 의해 빠른 속도 로 옛 모습을 잃어갔던 것이다. 조용히 일을 처리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려던 리온과 크릭은 자신들의 계획도 잊 어버렸는지, 눈에 핏줄을 세우면서까지 데칸티스를 몰아갔다. 물론 그 둘은 파괴력 이 강한 공격들만 골라, 데칸티스에 대한 분노를 토해냈다. 데칸티스 역시 그 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격방법으로 호응을 해갔고... 데칸티스도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둘에 대해 분노를 토해내며 온 몸의 힘을 쥐어짜듯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연금술사>-42-6 건물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그곳의 위치를 파악해 텔레포트 한 나와 일 행들은 그곳에서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 말았다. 리온과 크릭, 그리고 데칸티스가 서로 엄청난 살기를 뿜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싸움이였다면 내 가 말을 잃을 정도까지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여야 하는 원수를 상 대하듯, 온 몸을 피로 물들인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싸움을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왜?'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움직이는 그들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표정 하나 하나까지 모두 들어왔기에 나는 그들이 지금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공격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몸의 균형을 잘 못잡는 데칸티스의 움직임까지도... "헉! 데칸티스의 팔이!" "......!"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칸티스였기에 내 눈은 자연 그의 움직임 을 따라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비틀거리는 움직임이 허전한 왼쪽 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놀라움에 헛바람을 들이켜야만 했다. 유난히 붉게 보이는 그의 옷. 어둠 때문인가?라는 생각으로 그저 스치듯 지나치려 했지만, 내 눈은 그의 허전한 왼쪽 팔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왼쪽 몸 전체를 계속해서 붉게 물들이고 있는 잘려진 팔이 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싸우는 거지?' 같은 편이라고 하면, 할 수도 있는 그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서로를 죽이지 않으 면 안될 정도로 기압을 가득 넣고 있었다. 데칸티스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자를 정 도로 리온과 크릭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살기는 엄청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살 기가 불러일으킨 상황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의문에 싸이게 만들었다. "이..이건 뭔가 잘못됐어! 오늘 낮에 저들의 얼굴을 볼 때까지만 해도 저런 싸움을 일으킬 것 같지 않았는데? 그리고 어떻게 감옥에서 나왔지? 저들을 말려야 해. 이 건 뭔가 잘못된 거야! 리온~! 크릭~!" 라피에르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더니 험악하게 싸우고 있는 녀석 들 틈으로 달려 가려했다. 녀석은 그들의 싸움을 말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는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싸움터로 날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몸 은 제자리에서 흔들리기만 할 뿐, 앞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그만 둬. 아무리 네가 저들과 친하다고 해도, 저들의 싸움은 말릴 수 없어. 너만 다칠 뿐이라고." 란이 라피에르의 어깨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얏? 그렇다고 이렇게 보고만 있자는 거야? 이것 놔! 저들을..." "라피에르!" 라피에르가 란의 행동에 괜한 화풀이를 하기 전까지 나는 그저 멍하니 데칸티스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란의 팔을 뿌리치는 라피에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 는 그녀 대신 녀석을 붙잡아야만 했다. 이상하게 전개되는 상황과 란의 말이 나로 하여금 라피에르를 붙잡게 만든 것이다. 이성을 잃은 녀석이 지금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었기에. "널 위해서 말리는게 아니다." 내 품에서 바둥거리는 라피에르에게 란은 싸늘함이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를 내뱉고 는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이해할 수 없는 란의 말에 라피에르가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란의 눈동자를 쫓았 지만 란은 끝내 그런 녀석의 요구를 무시했다. 그녀는 입 아프게 말로 설명하고 싶 지 않은 듯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고개를 돌린 것이다. 하지만 란은 고개를 돌 린 채, 라피에르의 머릿속에 생겨난 궁금증을 다른 말들로 사라지게 만들어줬다. 지금 녀석의 머릿속에 있는 궁금증보다 더 중요한 사항에 대한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녀는 라피에르와 그 외의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린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마족이 이곳에 있는 줄 알았지만 이곳으로 나를 인도한 기운 은 마족의 기운이 아닌 그들이 부리는 정신 정령의 기운이었다." "정신정령? 뭐야? 여기서도 정신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래. 그들과 매우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정신정령이 이곳에 있어." "란! 설마, 그렇다는 것은 이 모든게 그 정신정령 때문이라는?" 놀라움에 라피에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 나는 잠시 그녀와 허공에서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번갈아 봤다. 내 생각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을 다시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서 나는 란의 말과 함께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저들에게서 강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분노의 상급정령, 란시스트 니까." 술렁. 서서히 란과 나 사이의 대화가 이해가 됐는지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성까지 잃으며 몸부림쳤던 라피에르까지도. '하긴 란의 말대로라면, 상황이 이해가 가는 군. 크릭이 조금 욱하는 성질이 있긴 하지만, 그의 옆에는 항상 냉철한 리온이 있지. 즉, 크릭이 아무리 흥분해도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지는 않는다는 말이야. 그런데도 지금 상황은 데칸티스의 팔까지 잘라버린 상태라면? 해답은 하나군.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변했다는...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노의 상급정령 란시스트라는! 흠~. 그럼, 이 주변에 마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정신 정령을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마족. 정신 정령이 마음대로 리온, 크릭 그리고 데칸티스를 유린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 나는 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으므로. '마나를 통해 마족의 존재를 찾는 건가? 하긴 지금의 란이라면 가능할지도... 이곳 에 정신 정령의 기운이 있다는 것도 나보다 그녀가 먼저 알아냈으니. 흠~. 란이 마 족들에게서 정령술은 제대로 배우긴 배운 모양이군. 마나를 느끼는 것도 수준급인 데 거기다 미세한 정령의 기운마저도 느끼고 있으니 말야.' 솔직히 나는 란이 정신 정령에 대한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곳에 존재하는 이상한 마나의 느낌을 깨닫지 못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미처 다른 기운을 내뿜 고 있는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라피에르의 방에 있을 때, 그녀가 느 낀 기운을 내가 느끼지 못했듯이 이번에도 란이 나보다 먼저 마나의 기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정령의 존재를 찾았다. '내가 정신 정령과 친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신경을 써야만 느낄 수 있으니 말야. 흠, 그건 그렇고 저들을 더 이상 내버려둬서는 안되겠어. 잠시 후, 이곳이 시끄러 워질게 분명하니, 그 전에 저들을 막아야지.' 란에게 정신 정령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머지 않은 곳에서 연합군들이 몰려들고 있 는 것을 느끼고는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연합군들 속에 미드 아르엘이 있을게 분 명했기에 더더욱 나는 저들의 싸움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양국 간의 관계가 최악이 되기 전에 막기 위해서... "이봐, 저들의 싸움은 내가 막겠어. 그러니 너희들은 이곳으로 몰려올 연합군들이 함부로 행동 못하도록 해줘. 키에라도도 마찬가지로. 알았지?" 이곳에 오자마자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지만, 이 런 문제가 생긴 원인이 나에게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나는 군말 없이 소란 을 피우는 녀석들에게로 몸을 날렸다. "헉, 리넨! 아무런 준비 없이 그곳으로 가면 안돼! 너도 정신 정령에 휩싸일 수 있 단 말야!" "휩싸인단 말인가? 리넨님!" "헉! 형~!" 란의 걱정스런 말을 시작으로 남은 녀석들이 멀어져 가는 내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 나는 그저 그들을 향해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을 뿐, 나아가는 몸을 멈추지는 않 았다. 이미 이곳을 어지르는 녀석들의 싸움을 말리러 가기 전, 나는 란이 어떤 이 유로 라피에르를 막았는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 정령에게 유린 당할 정도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기에 저들에게 괜찮다고 뜻으로 손을 흔든 것이다. '흠~.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꽤 빠르게 움직이며, 검기를 무차별적으로 날리는 녀석들이 바로 앞에서 보이자, 나는 앞으로 나아가던 속도를 줄이며, 그들을 제압할 방법을 생각해 봤다. 최대한 빠르게 녀석들을 제압할 방법을... '이런 상태에서라면 내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저 속으로 뛰어들어 말을 건다 면, 오히려 공격당하고 말겠지? 저들의 이성은 란시스트에 의해 마비되어 있으니까 말야. 그렇다면, 저들이 내 말을 듣도록 란시스트를 제압해야겠군. 좋아!' 대충 생각이 정리된 나는 란시스트가 움직이는 마나를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 켰다. 정령이 분노를 일으키게 하려고 움직이는 마나만 제압한다면, 녀석들의 이성 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뭐야? 이거? 정신 정령이 쓰는 마나는 저 녀석들의 몸 안에 있는 거잖아? 그럼, 저 녀석들의 마나를 내가 제압해야 한다는? 하지만 그러면 저 녀석들 몸이 상할텐 데? 정령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마나의 흐름을 막아야 하니까 말야. 음~. 다른 방법 은 없나?' 녀석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정신 정령을 제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나 는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별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정신 정령들은 전체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는데 쓰는 마나는 녀석들의 몸에서 얻고,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는데 필요한 마나는 마족에게서 얻는 것 같으니, 주변의 마 나 흐름을 아예 차단해봐?' 세 명의 인간들이 싸우는 범위가 그리 좁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난 그 방 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일정 공간에 하나의 막을 만들고, 외부로부터 마나의 유입이 없도록 만들어봤다. 하지만 결과는 별로 달라진게 없었다. 슈슉, 콰콰쾅. "죽어~엇!" 파괴력이 강한 공격만을 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녀석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쳇, 소용없잖아? 보아하니, 연합군들은 이미 도착한 것 같은데... 에잇, 정신 정 령이니, 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 녀석들의 몸을 제압하고, 주변에 마나가 흘러 갈 수 없도록 만든 후에 말야.' 란의 말대로 주변의 사람들이 분노의 정령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 기 위해, 나는 주변에 쳐둔 막을 거두지 않은 채, 눈앞을 어지러피는 녀석들을 제 압하기 시작했다. "이봐! 시간 없으니 반항은 하지 말라고! 우선은 움직임이 둔한 데칸티스부터다!" 치료가 우선시되는 이유도 있었지만, 제압하기 가장 쉬운 상대였기에 나는 비틀거 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데칸티스에게로 순식간에 텔레포트했다. 녀석의 몸 뒤로 순식간에 이동한 것이었기에 나는 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녀석의 몸을 빠르게 내 몸으로 묶을 수있었다. "슬립(sleep)!" 강력한 수면 마법이 가장 효과적일거라는 판다는 녀석의 몸이 힘없이 내게 안기면 서 증명되었다. "호오~, 이거 괜찮은데? 이봐, 리온과 크릭! 너희들도 이와 같이 내게 제압되어야 겠어." "으으으... 죽...어... 죽어...." 어깨를 으쓱하며, 리온과 크릭을 쳐다본 나였지만, 녀석들은 꽤 오랫동안 란시스트 에게 물들어 싸움으로 기력을 탕진했기 때문인지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쳇, 반항은 몸에 안좋다고~! 근데, 데칸티스 녀석, 덩치값은 하는걸? 뭐가 이렇게 무거운 거야? 라이트(light)~!" 녀석의 중량을 줄인 나는 움직이는 속도를 빠르게 가속해, 나를 향해 치켜세운 녀 석들의 검이 내뻗기 전에 그들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수면 마법을 걸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속도에 있어서는 최고의 기술을 습득했기에 나는 순식간에 두 녀석 모두 내 품에 안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으윽, 젠장~! 이거 가볍게 해도, 들기가 힘들잖아? 란~~! 이 녀석들 좀 어떻게 해 봐! 우선 재워두긴 했지만, 정신 정령은 없애지 못했어. 주변에 마나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을 쳐놨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가 가질 않을거야. 너는 괜찮은거지 ? 히유~." 나는 두 손으로 들고오기도 힘든 녀석들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힘들다는 뜻으로 생 기지도 않은 땀을 닦듯 흉내를 냈다. "응, 그러는 리넨은?" "아, 나는 문제없어. 내가 원하지 않는 마나는 내 몸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니까. 들어온다 하더라도, 내 제어권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네. 조금만 있어봐, 이들 몸에 있는 란시스트는 내가 빼낼 수 있 을 것 같으니까."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란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인 후, 나는 어느새 이곳을 향 해 밀쳐드는 연합군들을 막고 있는 이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무슨 짓이오? 가..감히 나의 아들을!" 데칸티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인가? 대공은 흥분한 듯, 붉은 얼굴로 악을 쓰고 있었 다. "잠깐 진정하십시오. 저들은 지금 분노의 정령에게 휩싸여 있기 때문에 치료를 해 야 하는 상태입니다. 저들 주변에 갔다가는 분노의 정령 란시스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저도 저들이 걱정되지만, 분명 모두 무사할 겁 니다." "무사? 당연히 무사해야지. 안 그랬다가는 유투 왕국이 무사하지 않을테니까!" "대..대공!" 미드 아르엘은 흥분한 듯,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키에라도와 트레모스를 째려보며, 라피에르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의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 이다. "흥~! 정신 정령인지 뭔지 말을 만들어 내는건 넘어가겠소. 하지만, 저 둘이 감옥 에서 나온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내 아 들이 팔을 잃은 이유는?" "그..그건..." "대공,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마족 때문이오. 지금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마족 때문이란 말이오. 저들이 싸운 이유도, 당신 아들이 팔을 잃은 이유도, 그리고 우 리가 이곳에 모여 있는 이유도 모두 마족 때문이니 다른 오해는 하지 마시오." 머뭇거리는 라피에르의 어깨를 잡으며, 나는 미드 아르엘의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그를 대했던 말투도 바꾸며 강력하게 우리 쪽의 의견을 말해준 것이다. 하지만 미드 아르엘은 그런 내 말에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흥! 믿을걸 믿으라 하시오, 당신네들이 지금 폴보트 연합을 우습게 보는 것이오? 설마 유투 왕국이 도움을 준 폴보트 연합을 이렇게 대할 줄은 몰랐건만... 결국 이 렇게 되었군. 앞으로 양 국간의 관계에 대한 책임은 그쪽에 있을 것이오. 연합 쪽 인물을 차례로 죽인 것도 모자라, 내 아들까지 살해하려 하다니!" "대공!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린 결코 폴보트 연합국의 도움을 모른 채 하려 한 적 이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지금의 상황을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라피에르 드로이드 카스프리시안! 난 내 아들을 보고 싶은데,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이곳을 임시긴 하지만, 연합 쪽에 빌려준 곳인데 그런 곳에서 주인행세를 하려는 라피에르 저하, 들어가도 될런지요? " "...그렇게 하십시오." 라피에르는 자신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미드 아르엘의 말에 충격을 먹은 듯, 고개를 숙이며, 연합군들을 막고 있는 트레모스와 키에라도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앞을 막고 있던 막이 사라지자, 연합군들은 순식간에 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데칸 티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서 우리를 포위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위협을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라피에르를 위로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썼다. "라피에르, 지금은 상황이 안좋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연합 쪽에 지금의 상황 을 잘 설명하면, 나중엔 우리의 말을 믿어줄테니까..." "형... 정말 그럴까?" "그래..." 그렇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지만, 나는 굳이 내 진심을 녀석에게 말 해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 녀석의 몸에서 란시스트의 기운을 모두 빼 낸 란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리넨~!" 왠지 불길한 느낌에 나는 라피에르를 데리고 란에게로 뛰어갔다. 다급하게 나를 부 르는 란의 표정에서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심각성은 란 의 귓속말을 들으면서 더욱 깊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리넨, 큰일이야. 저 대공이라는 자! 그 자 몸 속에도 란시스트가 있어!" "뭐?" 조용 조용 말하는 란.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 다. "그..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좀 설명해봐. 전혀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나도 조금 전까지 모르던 사실이었어. 그들은 내게 저런 것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 지 않았거든..." "뭔데?" "정신 정령은 숙주를 필요로 해. 물론, 직접 자신의 몸에 불러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숙주지. 하지만 정령의 주인이 원하는 때, 그 정령의 기운을 퍼 트릴 수 있나봐."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란의 말에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와 귀를 기울이 고 있는 트레모스, 키에라도, 라이너, 라피에르의 존재도 잊은 채. "예를 들어볼게. 내가 어떤 존재를 1시간 후에 분노에 휩싸이게 하고 싶어. 하지만 1시간 후, 그 존재는 내 곁에 없지. 그럼 난 어떻게 하지?" "서..설마, 정령을 인간의 몸에 깃들게 하고... 나중에 자신의 의지를 보내, 그 정 령이 자신의 속성을 숙주에게 느끼게 만든다는 말이야?" "역시, 이해가 빠르네. 바로 그거야. 저 대공이라는 자를 보기 전까지 난 그저 보 이는 상대에게만 정신 정령을 쓸 수 있는줄 알았는데... 그래서 이 주변에서 마족 을 찾은 거였는데... 그게 아닌가봐." "이..이럴 수가. 그럼, 대공이 발작(?)을 일으키게 되면, 그 주변에 있는 존재까지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는... 그런 말이잖아!" "......!" "헉!" 란이 말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줬는데 그것은 아마도 좀 전 , 나와 라피에르 조차 알아보지 못한 리온과 크릭의 상태를 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문제가 심각하다. 결계를 나간 마족들이 모두 좀 전과 같이 몇 몇의 인간들의 몸 에 정령을 심었다면... 그리고 한 순간에 그것들에게 활동하라고 명령을 한다면!' 조금 전에 전쟁을 일으킬 듯이 말한 미드 아르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상 황이 연출될게 뻔했다. '위험해... 마족들을... 그들을 어서 잡지 않는 한, 지금의 상황은!' "리넨! 저들... 지금 저 쪽에 있는 인간들 중 꽤 많은 수가 분노의 정령을 품고 있 어! 혹시나 하고 자세히 살펴본 건데... 이런 일이! 활동하지 않으면 알아내기 힘 들어 몰랐는데... 꽤 많은 수야!" <연금술사>-43-1 란의 말은 작게 생겨난 파장을 순식간에 몇 십 배로 불려놨다. 우리는 그녀가 말한 가능성이 사실로 변하게 되는 순간 이곳이 아수라장으로 변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 았던 것이다. '큰일이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기라도 한다면 양 국간의 전쟁이 재발되는걸 떠나 서 대륙이 피바다에 씻길지도 모르겠어. 좀 전에 리온, 크릭 그리고 데칸티스가 서 로 싸울 때의 모습을 보니, 마족이 부리는 정령들의 힘이 대단한 것 같았는데 말야 ... 마족들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다니.' 난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 마족이란 인간보다 강한 존재라고 밖에 생각해 보지 않 았었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약간의 서적에 적혀 있는 글과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말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계 안에서 본 마족들의 모습은 인위적 으로 만든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대로는 안되겠어. 라피에르를 다른 곳으로 보낸 후, 생각해봐야지. 언제 저들이 우리를 향해 검을 휘두를지도 모르니까. 그 상태에서 마족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 라피에르가 정신 정령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안 나는 최대한 빨 리 녀석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리온과 크릭도 영향을 받을 정도니... "상황이 안좋으니 라피에르 넌 리온, 크릭을 데리고 라이너와 같이 리플러스 경의 댁으로 가라. 성보다는 그곳이 더 안전할테니." 나는 잠들어 있는 리온과 크릭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주며, 상처를 치료했다. 그들이 라피에르를 잘 보좌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준 것이다. 하지만 라피에르는 나의 그런 모습에서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형은? 형은 같이 안가?" "난 이곳에서 란과 함께 저들을 막을거다. 어디에 있을지 모를 마족들도! 나와 란 은 정신 정령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해야지." 나와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불안감을 갖고 있기라도 한 걸까? 녀석들은 내 말이 계속되는 동안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히유~, 저 눈빛을 보면 같이 가고 싶어지잖아? 하지만 그건 안될 일이지!' 고개를 흔들어 녀석들의 눈빛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나는 단호한 어조로 그들을 이곳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봐, 너희들의 걱정은 알겠지만, 안전한 곳에 있는게 나를 돕는 거다. 이곳에 있 으면, 내 주의력이 분산될 뿐이니까. 지금까지 한 두 번 해어진 것도 아니잖아? 그 때마다 난 무사히 돌아왔다고. 기억하고 있지? 그러니 걱정말고 가봐." <라이너,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라. 네 실력을 믿어 라피에르를 맡긴 거니까. 그리 고 나에 대한 걱정은 말아라. 이번에도 무사히 다녀올테니. 알겠느냐?> 나는 불안해하는 라이너에게 마나를 흘려 다시 한번 녀석을 안심시킨 후, 그들 옆 에 서 있는 키에라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키에라도, 미안하지만 저들과 같이 리플러스 경의 집으로 가주겠소? 저들 만으로는 불안해서."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인 키에라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 부탁을 거 절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기에 스스럼없이 그에게 녀석들을 부탁했다. 이런 상 황이라면, 키에라도는 이런 저런 조건을 붙이며 나를 어렵게 하지 않을게 분명했으 므로. 하지만 그의 투덜거림은 빠지지 않았다. "흥. 또 귀찮은 일을 시키는군.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내가 아니면, 저 녀석 들을 어떻게 무사히 지키겠냐? 그리고 저 녀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대륙이 잠잠 해지는 시기가 더 길어질지 모르니까. 그럼 쉐이트론을 보기 힘들어지지 않겠냐?"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는 듯, 키에라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쉐이트론을 거론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가기 전에 리넨아. 그 마족에 대해 좀 더 알려줬으면 하는데? 보아하니 너희 둘과 꽤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말야." "그래, 죽음의 숲에서 마족들을 만난거냐? 어떻게 마족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지? 정신 정령에 대해서도 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나와 란의 대화를 듣고 있었기 때문인지 키에라도와 트레모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며, 나와 란에게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을 독촉했다. "음~, 그러고 보니 시간이 없어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었군. 나와 란은 너희가 떠난 이후 머지 않아 죽음의 숲을 떠났다. 그리고 라피에르를 찾아 연합으로 갔지. 하 지만 그곳에서 우린 아슬란을 만나게 됐다." "아슬란?" 아슬란에 대해 처음 듣는 그들은 내 말에 궁금하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질문을 던 졌다. "그래 아슬란. 그 자는 마족이지. 그것도 꽤 강한 마족." "헉, 마족을 만나셨단 말입니까? 리넨님, 어디 다치시거나..." "라이너. 지금 내 모습 보면 모르겠냐? 난 멀쩡해." 가슴을 탁탁 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명을 했지만, 라이너는 그런 내 말보다는 자신의 눈을 믿는지 이미 라피에르의 방에서 살펴봐 이상이 없는 나를 또 이리저리 훑어봤다. '라이너 녀석, 제 2의 유모가 되려는 건가? 요즘 들어 부쩍 걱정이 늘었단 말야?' "저 녀석은 마치 네 엄마라도 되려는 모양이지? 항상 네 걱정뿐이라고! 쯧쯧, 남자 가 돼서 저게 뭔지~. 험험, 그건 그렇고 리넨 그 아슬란에 대해서 더 말해봐." 트레모스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라이너의 행동에 혀를 찼지만, 곧 녀석의 싸 늘한 눈빛에 화재를 돌리며, 내가 아슬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아슬란은 내게 있어 둘도 없는 원수야. 복수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 그 자가 한 일은 나로 하여금 복수의 길로 가게 만들었지." "무슨 일을 했는데?" "내 부모님을 죽였고, 나를 죽이려 했지. 그리고 아리아와 드루젤마저 절망의 구렁 텅이로 몰아갔어."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아슬란이라는 마족이 어머니와 드루젤 형을 어떻게 하기라 도 한거야?" 내 말 때문인지 라피에르의 두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아슬란이 아리아와 드루젤을 도와주는 척하다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 밖에는 몰라. 그 때문에 드루젤이 죽기 전에 그렇게 변한걸지도 모르겠군." "그..그자가... 어머니와 형을!" 라피에르는 밝혀진 원흉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며, 살기를 불태웠다. 어디로 표출해 야 할지 모를 녀석의 살기가 아슬란이라는 목표에 정착한 것이다. 라피에르의 가족 을 앗아간 아슬란에게... "리넨, 아슬란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자가 마족이라면, 지금의 일과 관련이 있는건가?" 이야기가 옆으로 세려하자, 키에라도가 나서 내게 질문을 하며, 원래의 초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 아슬란은 나와 란을 이용해 마족들이 갇혀 있는 결계 안으로 유인했소. 우리 가 그 결계를 파괴해 마족들을 밖으로 나오게끔 말이오." "흠~. 상황을 보아하니, 너희가 결계를 파괴한 모양이었군. 마족들이 사라진 줄 알 았는데, 결계에 갇혀 있었다니... 대단한 결계임이 분명하군." 키에라도는 나와 란의 어리석음을 탓하듯, 잠시 질책하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 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우리를 위로해줬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마족은 쉬운 상대가 아니니깐 말이다. 자세한 건 물어보지 않으마. 어차피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으니까. 그럼 결계에서 나온 마족들이 아슬란이라는 자와 같이 있겠군. 뭔가를 꾸미면서 말이야. 그렇지?" "아마도 그럴 것이오. 유투 왕국과 폴보트 연합과의 이간질, 많은 이들의 몸에 정 신 정령을 심어 놓은 것... 이건 모두 그들의 짓임이 분명하니까. 어쩌면 연합 쪽 에 그들과 손잡은 이들이 몇 몇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문제의 심각성에 나는 말을 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런 심각한 현실을 만든 것이 내 탓이라는 생각에 다시 가슴이 무거워졌기 때문이 다. '히유~, 란은 나보다 더하겠군.' 잠시 주변에 말이 없어지자,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트레모스가 내게 질문을 꺼내기 전까지. "리넨, 그 결계를 나온 마족들... 수가 어느 정도 되지?" "글쎄? 내가 알기로 한 백여 명 되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 란?" "으..응. 하지만 그들 중, 아이들도 꽤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위험한 존재는 7~8 0명 정도일거야. 물론, 그들 중 강력한 존재는 장로 7명뿐이고. 나머지는 6~7클래 스의 마법사와 비슷한 경지니까." "장로들의 실력은?" 트레모스는 질문의 상대를 란으로 바꾸며 궁금한 다른 상항을 물어봤다. "상급 정령을 한번에 두 종류를 소환하는 정도? 리먼, 타쿠야 둘다 내게 정령술을 가르쳐줄 때, 그 이상의 정령은 소환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그 정도일꺼야." "호오~, 장로들이라면 내 싸움 상대가 되겠는걸? 그동안 지루했었는데, 이제 괜찮 은 실력의 상대를 만날 수 있겠군." 트레모스는 키에라도가 강한 살기를 보내오는 것도 무시하며 기분 좋은 듯, 떠들기 시작했다. "마족들을 상대해 본 것은 꽤 되어 잊어버렸는데, 이 기회에 다시 기억해낼 수 있 겠군. 리넨, 이번 싸움에 나를 빼면 안되는거 알지?" 녀석은 장난끼 있는 미소에 나는 커다란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녀석의 말속에 들어있는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다, 트레모스.' 하지만 녀석은 고마움에 가슴이 찡한 나를 오랫동안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만한 태 도로 거드름을 피우며 감동하고 있던 내 표정을 굳게 만든 것이다. "정신 정령 둘이라... 별거 아니잖아? 내가 나서면 그냥 한방에 쓰러질게 뻔한 녀 석들인데~ 크크큭." 트레모스는 자신에게 정신 정령은 소용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지, 자신감 넘치는 말로 과장된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란은 그런 트레모스의 말에 일침을 놓으며 고 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물론 정령을 부리는 자가 너보다 약하다면, 네겐 별 문제 되지 않겠 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강력하게 작용하니까. 게다가 정령의 수가 적어도 그 정령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은 꽤 강력해. 하나의 정신 정령으로도 적게는 한 두 명 , 많게는 수십 명을 서로 죽이게 만들 수 있지." 트레모스는 조리있는 란의 말에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마족의 정신 정령이라... 흠`. 이봐, 혹시 정신 정령에 대항할 방법은 없는 게냐? " 뭔가 쉬운 방법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키에라도는 조용해진 란에게 질문을 던지며 희망이 담긴 두 눈동자를 반짝였다. 하지만 이번 역시 란은 고개를 흔들며 절망적인 사실만을 알려줬다. 키에라도를 대하는 말투에 신경을 쓰면서. "없어...요. 정신 정령의 주인보다 강하지 않으면, 정령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해 ..요. 방법은 마족을 죽이는 것 뿐." 란은 할아버지 모습의 키에라도에게까지 반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그에게 어설픈 높임말을 하며 설명을 마쳤다. "흠~, 결국 결론은 마족을 섬멸하는 것뿐이군. 뭐, 할 수 없겠지. 다시 마족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말이야. 뭐, 대충 마족에 대해 알았으니, 난 이만 이 녀석들을 데 리고 가보지. 이곳에서 자세한 이야기까지 길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럴 시간도 없고. 리넨, 더 할말은 없냐?" 키에라도는 란의 말투가 약간 귀에 거슬렸는지 이마를 찌푸렸지만, 그것에 대해서 크게 문제삼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바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돌리는 것을 보면 . "없소. 저 녀석들을 잘 보호해주는 것 이외에는 부탁할게 없소. 라피에르. 너는 리 플러스 경과 지금의 문제를 의논하고, 그에 대한 유투 왕국의 대응책을 알아봐라. 물론, 내가 마족들에 대해서 최대한 처리해 볼테니 크게 걱정은 하지는 말고." <아슬란에 대해서는 잊어라.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할테니. 우리 가족과 유투 왕국에 대한 복수는 내가 할테니 너는 나라와 백성에 대해서만 생각해라. 그것에 네 의무 니까. 알았느냐?> 왠지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 나는 녀석의 머릿속으로 마나를 흘려보내며, 가슴속에 담겨졌던 말들을 꺼냈다. 아슬란에 대한 이야기가 있은 후, 녀석의 두 주먹은 꽉 쥐어진 채, 전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뜻을 충분히 이해한 것인지 라피에르는 머릿속에 울린 말에 대한 대답으로 놀 란 표정을 지운 후, 내게 편안한 미소를 보냈다. "형, 걱정하지마. 형 말대로 내가 할테니까. 하지만 형도 조심해야해. 알았지?" "후훗, 그래. 키에라도 그만 가보시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흠~, 그럼 난 이만. 리넨, 나중에 보자." 그렇게 작별인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키에라도는 끄덕여지는 내 모습을 본 직후, 녀석들을 데리고 내 눈앞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텔레포트로 그들 모두를 데리고 리플러스 경 댁으로 간 것이다. "모두 갔군. 좋아, 이제부터..." "리넨, 왜 말을 하다가... 호오~ 이건!" 나는 라피에르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앞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해 트레모스, 란 과 함께 의논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에 나는 주의 를 끌려던 행동을 멈춰야만 했다. '대체 이 살기는?' 등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의 정체는 바로 연합군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분노의 정령이 활동을 하기라도 한 듯, 그들에게서, 데칸티스의 팔이 잘렸을 때에 그들이 보여줬던 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살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빨리?' 채채챙! 살기를 느꼈다고 생각되는 순간, 연합군의 병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처음은 정신 정령에 의해 지배받는 몇몇의 병사들만이 검을 뽑아 들었었다. 하지만 곧 그 주변에서 어리둥절해 있던 병사들까지도 정신 정령의 영향을 받게 됐는지 먼저 검을 뽑은 이들과 같이 살기를 내뿜으며 검을 높 이 치켜들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상대해주지." 결의를 다진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연합군들을 상대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들보다 더 강력한 살기를 뿜는 이들의 존 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건, 설마?' "리넨, 마족들이야!" "호오~, 이 기운이 마족? 상대할 만 하겠는걸?" 설마 했던 생각은 란의 말로 사실이 되고 말았다. 나보다 마족의 기운에 대해 더 민감한 란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연 합군들 보다 강한 살기를 마나에 흘려보낼 수 있는 존재는 마족 이외에는 없었으니 까. '라피에르 일행을 먼저 보내길 잘했지만... 이해가 안갈 정도로 갑작스러운 전개군 . 생각보다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어. 무차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야.' 뭔가 일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것 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란, 트레모스. 너희들은 연합군들을 맡아줘. 난 마족들에게 가볼테니." "뭐야? 나보고 상대도 안되는 이들을 맡으라고?" "리넨, 나는..." "란, 너는 아직 완쾌된 상태가 아니잖아. 마족을 상대하기보다는 저들을 상대해 줘 . 트레모스는 란 곁에서 엄호해 주고. 이쪽 일이 다 끝나면 그때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도 늦지 않을테니. 알았지?" "쳇, 그래, 알았다. 하지만 너 혼자 해결하지는 마라. 내게도 좀 남겨주라고." "알았어." 서로를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그들이었지만, 란과 트레모스는 내 결정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둘다 입술을 앞으로 쭈~욱 내밀고 있었지만... "후훗, 그래. 그럼 난 이만 간다~. 있다가 보자고~!" '트레모스가 있으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정신 정령을 다루는 것은 란을 따라갈 자가 없으니, 환상의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후훗, 그럼 난 마족 들을 상대하러 가볼까?' 란과 트레모스의 대답을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연금술사>-43-2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던 유투 왕국과 폴보트 연합은 몇 시간 전 서로 잡아당기던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우왕좌왕하며 갈 길을 잃은 힘을 서로를 향해 내뿜어버리 고 말았다. 처음에는 끊어진 줄에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서, 그리고 그 후에는 그들 의 주변을 맴돌며 그들을 부추기는 정신 정령과 마족에 의해 그들은 끊임없이 이유 도 모른 채, 손에 들린 무기를 휘둘러야만 했다. 크아~~악! 서걱! 컥~! 채채챙! 한순간에 폴보트 연합군이 머물던 성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 차고 말았다. 어디선가 시작되어 점점 퍼져나가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한순간에 그 성은 안팎이 모두 날카로운 소리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피가 튀고 살이 떨어져 나가도 그들의 움직임은 전혀 멈추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도 아픔도 죄책감도 느낄 수 없는 듯, 성 안팎에서 자신들이 이유도 모르는 움직임을 지속시켰던 것이 다. "후훗. 이런 장관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진 줄 알았는데, 다시 보고 있자니 기억 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군. 향수를 느끼 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일세." 성의 높다란 지붕 위에서 늙은 노인 한 명이 느긋한 자세를 취하며 지상의 피튀기 는 모습을 여유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리먼, 이번 일이 과연 잘 한 것인지 모르겠네. 아슬란은 예전부터 우리보다 뛰어 나지 않았나? 그의 일을 이렇게 망쳐도 되는건지..." "크큭. 타쿠야, 자네 결계 안에서 오랫동안 지냈더니 어째 겁이 더 는 것 같네? 아 니면 예전 아슬란에게 된통 당한게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인가? 뭐, 아슬란이 우리 들보다 강하긴 하지. 하지만 그는 혼자고 우리는 여럿이네. 물론 그건 지금 뿐이겠 지만, 상관없지 않나?"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 리먼의 곁에 서 있던 타쿠야는 친구의 말에 불안감을 억누 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린 모두 각자 원하는 대로 행동할 것이니 아슬 란이 일일이 우리를 쫓을 수는 없겠지." "바로 그걸세. 아슬란이 우리들에게 했던 행동들을 보면 이 정도의 방해는 괜찮다 고 생각하는데? 녀석은 너무 건방져. 말도 안되는 이유로 우리를 자신의 아래 두는 것 말일세. 우리가 그 녀석의 비유를 맞출 필요는 없지. 힘을 되찾은 이 순간부터 는 말일세. 크하하하. 얼마 전 자네도 내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나? 저 아래서 피맛 을 즐기는 이들도 물론 찬성했고~. 크큭. 너무 걱정 말라고. 다 잘 될테니~. 즐겨 보게, 타쿠야~! 이제 우린 자유 아닌가?" 아슬란을 방해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 것인지, 리먼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타쿠 야를 쳐다봤다. 그도 자신처럼 현 상황을 즐기는게 어떻겠냐는 시선을 보내면서. 하지만 그런 리먼의 행동으로도 타쿠야는 자신의 불안감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는지 여전히 두 주먹을 꼭 감싸쥔 채, 풀지 않았다. "......" "타쿠야? 자네 왜 그리 불안해하는 건가? 후우~. 정 그렇게 불안하면 먼저 이곳을 떠나도록 하게. 이제 자네나 나나 우리들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없어졌으니 혹시 올지도 모를 아슬란을 피해 지금 가고 싶은 곳으로... 타쿠야?" 리먼은 아무 말 없는 친구를 위로하려는 생각으로 그를 먼저 이곳에서 내보내려 했 지만,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타쿠야의 모습에 히단 말을 중도 에서 끊었다. "타쿠야? 자네 왜 그러나?" 리먼은 타쿠야의 모습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앉아 있던 자세를 흩트리며 타 쿠야의 옆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식은땀을 흘리는 타쿠야의 모습에서 리먼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원래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은 편이긴 했지만, 식은땀까지 흘리며 두 손을 떨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도... "또야." 나직한 저음이 타쿠야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들리지 않 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또? 그게 무슨 말인가?" "또 누군가 내가 소환시킨 정령을 강제로 정령계로 돌려보냈어." "뭐라고?" 불안에 떠는 타쿠야의 모습에서 리먼은 정말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정신 정령을 주인의 허락 없이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물질계 정령도 마찬가지겠지만 정신 정령은 대부분 인 간의 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물질계보다 더했다. "어떤 정령이었지? 하급 정령이었나?" 그럴 거라는 생각이 가득한 리먼의 말이었지만, 타쿠야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 었다. "내가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 줄 아나? 당연히 내가 부릴 수 있는 상급 정령, 란시 스트였네!" "란시스트..." 리먼은 타쿠야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란시스트의 이름을 되뇌였다. 믿기 싫은 사실 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그는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계속 중 얼거렸다. "처음에는 자네였지. 자네가 그 애송이 몸에 박아 놓았던 란시스트가 자네 허락 없 이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같은 일이 내게서 일어나고 있네. 자 네 말대로 처음엔 우연히 그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우연이 두 번 겹치면 그것은 우연이 될 수 없네. 누군가 정령을 돌려보내고 있는 거야. 그것도 정신 정령을 다 루는 존재가!" 타쿠야는 정신 정령이 들어 있는 인간을 죽이더라도 그 정령이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일을 방해하는 누군가를 정신 정령을 다루는 존재로 단정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리먼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리먼!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지 말라고! 이건 심각한 문제야. 정신 정령을 다루는 누군가가 우리 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가 누구일 것 같나! 인간들이 정신 정령을 다룬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아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상급 정령을 돌려보낼 수는 없어! 자네도 알고 있지? 이건 분명 아슬란이야. 그 자가 우리가 한 행동을 알고 이곳으로 온 거라고!" 타쿠야는 불안감을 주체할 수 없는지 언성을 높이며 리먼의 어깨를 잡고 정신 없이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런 타쿠야의 행동에 리먼은 오히려 지금까지 그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었던 불안감을 씻어냈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면서. "크큭. 타쿠야, 진정하게. 아슬란은 아니야." "응? 그..그게 무슨 말인가? 아슬란 말고 또 누가 있다는... 설마? 아니야, 그럴리 없어." 뭔가를 떠올렸는지 타쿠야는 리먼의 몸을 흔들던 손의 움직임을 잠시 멈췄지만, 이 내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다시 양손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아니, 분명 그 녀석들이야. 리넨이라는 인간,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대단 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똑똑하지. 지금쯤이라면 란의 몸 을 다 치료했을지도 모르네. 란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결계까지 파괴한 아이라고. 그 아이가 상처를 다 치료했다면 상급 정령들을 돌려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 그녀의 몸에는 엄청난 마나를 공급해주는 반지가 끼어져 있으니까, 그렇지 않나?" "음... 그건 그렇지. 그럼 아슬란이 아니라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것인지 타쿠야는 리먼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불안감은 여전했는지 타쿠야는 리먼의 어깨에서 떨어진 손을 다 시 꼭 감싸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크큭, 제법이야. 그때 리넨이 멀쩡하지만 않았었더라도 그 두 녀석들을 죽였을텐 데... 결계를 나오는 기념으로 말일세. 하지만 뭐, 기회를 놓쳤으니 별 수 있겠나? 다음에 녀석들의 몸이 망가졌을 때, 다시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정신 정령이 통 하지 않는 인물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많으니까. 그렇지 않나?" "물론, 그렇지." "응?" 리먼은 불안감 가득한 떨리는 타쿠야의 목소리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변한 것에 이상함을 느끼며 고개를 타쿠야 쪽으로 돌렸다. 그가 알기로 타쿠야의 몸에서 이런 종류의 목소리는 흘러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아니 사흘만이니 그리 오랜만은 아닌가? 리먼, 타쿠야?" "아..아슬란!" 리먼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뒤덮은 한 사내가 타쿠야의 몸 을 제압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이상을 물러났다. "으으..." 타쿠야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마법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고통스런 표정과 신음소 리를 흘릴 뿐, 아슬란의 행동에 이렇다할 반항을 하지 않았는데 그의 눈동자는 믿 기 싫은 현실 때문인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리먼은 그런 타쿠야를 한 손으로 잡고 있는 아슬란,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오라가 눈에 선명히 보이는 아슬란이 지금 얼마나 분노해 있는지 깨달으며 물러섰던 몸을 더욱 뒤로 뺐다. 리먼은 아슬 란의 몸을 감싼 오라가 말해주듯, 지금 그가 온 몸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상 태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깨닫자마자, 리먼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상대의 능력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 곧 평소의 평정을 되찾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능글맞은 얼굴로 아슬란을 향해 질 문을 던지긴 했지만. "주변에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다니~ 놀랍군. 그 런데 이곳은 어떻게 왔나?" "왜? 내가 와서는 안되는 곳인가? 그럴리는 없을텐데 리먼?" 아슬란은 살기를 온몸으로 흘리며 자신과의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리먼을 향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의 오른손에 목을 붙잡힌 타쿠야를 질질 끌면서. "물론, 그럴 리는 없지. 하지만 우리에게 일을 맡겨놓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궁금 해서 말야." "크으~~윽." 리먼의 말에 아슬란은 입을 열어 대답하기 전에 먼저 타쿠야로 하여금 리먼의 말에 대답하도록 만들었다. 즉 아슬란은 타쿠야의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서 그의 목뼈가 조금씩 어긋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리먼은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슬란의 행동을 재밌게 쳐다봤다. 자신과 꽤 친한 친구사이지만 그 목 숨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아슬란에게 아린 것이다. "너희가 아니라 너일텐데, 리먼? 난 네게 일을 시켰을 뿐이다. 라피에르에게 편지 를 전하라고. 그런데 그것 이외의 일들도 한 모양이더군." 높낮이 없는 싸늘한 목소리. 아슬란의 몸 주변의 검은 오라를 보면 분명 그는 분노 한 상태였지만, 그의 목소리나 행동은 전혀 분노한 마족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겨우 계획의 차질이 생겼다고 타쿠야를 그러는 건가?" "겨우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너희처럼 단순히 피를 보려는 마족에게는. 하지만 난 단순한 피는 원치 않는다. 정성들여 세운 계획을 차츰 차츰 진행시켜 완성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래서 몸의 힘을 완전히 되찾은 후, 바로 몇 십 년의 계획을 진행 시켜왔고." "호오~. 괴짜인 성격은 여전하군만, 아슬란. 결론 적으로 같은 인간의 피를 보는 것인데, 몇 십 년씩이나 시간을 투자해 계획을 세우니 말야. 뭐, 물론 나도 그런 식으로 인간의 피를 보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네. 자네와 달리 난 그 기간이 길어야 1년이지만 인간들을 이간질시켜 피를 보는 것도 꽤 재밌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우 리는 강력한 결계에서 몇 백년을 갇히며 본능을 억눌러왔다네. 참을 수 없을 정도 로까지. 뭐, 간단히 말해 악의는 없었다는 거지. 우리는 자네의 계획을 몇 달 빨리 앞당겨주면서 몇 백년 간의 욕구불만을 푼 것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 "크아~~악!" "몇 달이라..." 아슬란은 오른손가락이 타쿠야의 목살을 찢고 들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오른손 에 주는 힘을 줄이지 않았다. 타쿠야의 몸에서 점점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 또 한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닌 듯, 아슬란은 숨을 가쁘게 쉬는 타쿠야를 놓아주지도 않 았다. "몇 십 년을 기다려온 계획을 몇 달 당겨줬다는 건가? 전혀 고맙지 않군. 난 누가 내 계획을 망쳐놓는걸 싫어한다고 이미 너희들에게 말했을 텐데? 그래서 너희가 결 계에서 나온 이후, 바로 불러들여 그 사실을 말했었고.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대륙의 인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말이야. 그런데 내 말을 듣지 않다니, 몇 달을 참을 수 없었나 보지?" 콰직. 으드득. 리먼의 말에 고개를 흔들던 아슬란은 아무 변화 없는 표정과 목소리 톤과는 달리 오른 손에는 약간의 변화를 줬다. 무거운 몸을 계속 끌고 다니고 싶 지 않았는지, 그는 타쿠야의 목뼈를 완전히 으스러뜨린 것이다. "이런, 이런. 화가났다고 해도 그렇게 같은 동족을 허무하게 보내서야 쓰나?" 꽤나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리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타쿠야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타쿠야가 조금 전까지 그와 친하게 대화를 나눴던 사이의 마족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훗~.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다. 그의 뒤를 네가 따라가게 될테니." 타쿠야라는 짐을 떨쳐버린 아슬란은 지금까지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리먼에게 다 가가며, 검은 오라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다. "어..어이, 이봐 아슬란. 진정하라고~! 자네가 나를 이렇게 핍박해서는 안되지. 저 아래에서 양국을 이간질시키려던 계획을 망치는 이들이 안보이나? 저들이 정신 정 령을 쓰는 한, 자네가 나중에 전쟁을 일으켜 모두 죽이려고 하는 인간들은 이곳에 서 죽게 되네~. 그러니 내게 저들을 설득하도록 만들어야지. 저들과는 결계 안에서 꽤 친하게 지냈...큭!" 슈슉, 치지지지직, 퍼버벙! 리먼은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엄청난 속도의 검은 마나 덩어리에 놀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거리가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의 실력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 는 날카로운 검은 마나 덩어리를 말을 하면서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꽤 시끄럽군, 리먼. 늙으면 그렇게 말이 많아지는 건가? 내가 너를 공격하는 이유 는 저들이 더 이상 정신 정령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뭐? 그..그게 무슨?" 리먼은 목소리에 짜증이 섞인 아슬란의 변화도 알아보지 못한 채, 놀라움에 말을 더듬었다. "이런, 몰랐나 보군. 난 히에로스와 계약을 맺었다." "헉! 정신 정령왕... 히에로스와! 그래서 우리를 제어할 수 있다는 듯, 자신감이 넘쳤던 거로군. 그럼, 난 내 무덤을 판 건가?" "크큭.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한 모양이군." 정신 정령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는 정령왕 히에로스. 그런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 다는 아슬란의 말에 리먼은 자신의 생각에 허점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슬란이 분노하더라도, 자신은 그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 즉 자신은 아슬란의 약점을 갖고 있으니 괜찮을거라는 착각을 말이다. 리먼이 잠시 자신의 말을 듣고 멍한 모습을 보이자, 아슬란은 그 기회를 잡아 이번 에야말로 리먼의 목숨을 끊어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상대를 공격했다. 슈슝, 쿠 르르르릉.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폭발음이 들려왔지만, 리먼은 여전히 자욱한 먼지 속에서 아슬란의 앞에 있었다. 온 몸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긴 했지만. "크윽, 이런, 이런. 이거 약간 스치기만 한건데도 오른쪽 어깨가 타들어가는 것 같 군. 큐어 포이즌(cure poison), 힐(heal)! 어이, 잠깐만!" 슈슈슝~. 슈슝, 펑벙. 쿠르르르릉. 검은 마나가 스친 부분의 상처를 빠르게 치료한 리먼은 다시 자신을 향해 손을 드 는 아슬란을 향해, 멈추라는 말을 꺼냈지만, 아슬란의 마나는 리먼의 말을 듣지 않 았다. "이런, 젠장. 아슬란! 이렇게 우리를 핍박하려는 거였으면, 왜 리넨과 란을 보내 우릴 결계에서 꺼낸 거냐?" 아슬란의 공격을 피한다고 피한 리먼이었지만,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현 란하게 움직이는 공격을 모두 피하지는 못했기에, 그는 독기를 내포하고 있는 검은 마나에 의한 상처를 상처 치료마법과 해독 마법을 같이 쓰며 치료하기에 바빴다. "너희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너희를 필요로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까." "그럼 왜?" 상처를 치료하기 전에 다시 또 다른 곳에 그보다 더 깊은 상처가 만들어졌기 때문 인지, 리먼의 얼굴에는 어느새 능글맞은 표정이 지워져 있었다. "그녀가 만든 결계를 부수는게 제 1 목적이었지. 뭐, 못 부숴도 상관은 없었고. 난 그저 게임을 했을 뿐이다." "그녀라니, 설마?"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음에 짜증이 났는지, 아슬란은 이마를 조금 찌푸 린 후, 고개를 갸웃둥거리는 리먼에게 꽤 많은 수의 마나를 날려보냈다. 슈슈슉. 쉬~익! 콰르르릉! 쿠웅. "이 놈의 아슬란, 말하는... 헉!" 슉, 퍼벙. 아슬란은 리먼의 불만어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봐줄 필요를 못느끼는 건지 상대의 말을 무시하며 공격을 계속했다. "너희가 결계에 몇 백년 동안 갇혀 있을 때, 나 역시 그 시간을 몸 치유에 써야만 했다. 그녀 때문에 몇 백년이라는 시간을 버린 것이지." "복수인게냐?" "그렇게 말한다면, 하지만 내 실력으로 그녀에게 직접적인 복수는 불가능하지. 그 녀가 세상을 조용히 하기 위해 만든 결계를 파괴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그 결계는 파괴되어도 그만 파괴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물론 너희가 내 일을 방해하 기 전까지는 전자가 좋다는 착각을 했었지만." "호오~. 꽤 소극적인 부분이 있는걸, 아슬란? 크큭, 인센디어리 클라우드(incendia ry cloud), 파이어 블래스트(fire blast)!" 반격을 시작한 리먼은 인화성 있는 구름 마법을 아슬란 주변에 놓아, 그의 움직임 에 방해를 준 뒤, 그 안으로 강력한 화염을 쏟아 부었다. 파파팟! 화르르륵! 그러 자 순식간에 푸른 불꽃이 튀며, 아슬란 주변의 구름이 화염덩어리와 합쳐 엄청난 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늘을 찢을 것 같던 불길은 곧 검은 구름에 휩싸 여 삭으러 들었다. "겨우 이 정도인가?" 리먼은 검은 마나 속에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아슬란을 곤혹스럽게 쳐다보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게...!" 아슬란은 자신의 공격에 슬슬 움직임이 둔해져오는 리먼을 바라보다 그가 순식간에 텔레포트로 모습을 감추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리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저 허공에서만 피한 것에 아슬란은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곧 얼굴에서 놀람을 지우고는 리먼을 따라 몸을 허공에서 감췄다. "날 짜증나게 만드는군. 이런다고 네 목숨이 보존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리먼이 아무리 멀리 텔레포트로 몸을 숨긴다고 해도 아슬란은 곧 리먼을 추적할 자 신이 있었기에, 사라진 리먼에 대해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숨을 접수하고, 지상의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거라는 사실에 짜증이 일었을 뿐이다. <연금술사>-43-3 란, 트레모스를 남겨두고 마족들을 향해 몸을 옮긴 나는 그곳에서 믿지 못할 광경 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십 명의 마족들과 백 여명의 인간들이 서로 누구의 피를 더 많이 흘리게 할 수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인정사정 없 이 베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런 미친.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이곳 이외의 다른 여러 곳에도 마족들이 분포해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 쪽의 상황 역시 이곳과 별 반 다를게 없겠군' 이곳으로 오는 도중 나는 처음 느꼈던 마족들 몇몇 군데 동시에 나타나며 그 수를 순간적으로 늘렸을 때, 상황이 급박하게 변했을 거란 사실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마족들 모두가 분노의 정령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인간 처럼 행동하며 무자비한 살상을 할 줄은 몰랐다. 마족들이 피를 좋아하고, 살인을 즐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 정도가 이렇게 심 하리란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계 안에서 본 마족과 동일 인물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군. 몇 백년간 갇혀 지내면서 저런 본능은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단지 참고 있었던 것뿐인가?' 리먼의 말을 모두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믿고 있었던 나는 피와 살이 튀기는 현 실에서 잠시 머리 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크아~~악", "죽어~! 죽어~." "피다~~. 크하하하." 챙챙, 서걱. 끊임없이 병장기들이 요란하게 부딪치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사람들의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분노와 두려움의 감 정에 휩싸여 아군이든 적군이든 자신의 곁에 있는 이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연합군 들과 광기 어린 눈으로 선홍색 피를 추구하며 돌아다니는 마족들이 한바탕 난장판 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를 해야겠군. 이 난장판을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허공에 멈춰 잠시 아래의 상황을 지켜봤던 나는 상황 해결 방법을 생각한 이후, 바 로 몸을 아래로 내던지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상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상대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가늘고 날카로운 검 이 좋겠지? 물론 그 파괴력은 강력해야하고!' 위이잉~! 가속도가 생겨 아래로 떨어지던 나는 마족을 공격할 무기를 마나를 이용 해 오른 손에 만들고는 허공에서 미리 정해놨던 목표를 향해 오른 손에서 연두빛으 로 빛나는 마나 검을 부드럽게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스윽~. 바람조차 일어나지 않는 공격. 검이 빨라서가 아니었다. 검술에 대해 그리 잘 아는 나는 아니었지만, 내게로부터 일정 거리에 있는 마나는 내 몸처럼 다룰 수 있었기에 나는 검이 나아갈 공간의 마나를 갈라 마족이 내 공격을 알아차리지 못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등을 돌리고 있던 마족은 내 검이 자신의 몸에 닿기 바로 직전에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내 공격을 옆 으로 흘려버렸다. 치지~익. 꽤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내 검은 상대의 옷과 살을 조금 스치고 지나갔을 뿐, 치명적인 상처는 내지 못했다. "누구냣!" 핑~, 타탓. 마나의 검을 콜드 빔(cold beam)으로 튕겨내며 고개를 돌린 마족은 내 가 결계 안 마을에서 한번 본 적 있는 마족이었다. "호오~, 이게 누군가? 리넨이라고 했던가? 살아 있었군.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난 이 상 그 목숨은 여기서 끝이겠지?" 휘~익. 나를 알아본 마족은 섬뜩한 붉은 동공의 크기를 순식간에 키우더니 좀 전의 반격으로 옆으로 무게 중심이 쏠려 있던 내 몸을 왼 손에 들려있던 검으로 그어 올렸다. '크윽, 뭐가 이렇게 빨라?' 채챙, 빠르게 상대의 검을 튕겨내며 몸을 뒤로 뺐지만, 마족은 나의 그런 행동을 예상했는지, 싸움을 즐기는 듯한 얼굴로 곧바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채챙, 타타탓. 푸른 잔불꽃들이 여기저기 튀기며 정신 없이 움직이는 나를 더욱 혼 란스럽게 만들었다. 실전 경험의 부족 때문인가? 쉽게 생각했던 마족은 생각 외의 빠른 반격으로 나를 당황시키며 밀고 들어왔다. 그는 검과 마법을 동시에 쓰며 나 를 교란시켰는데, 나는 라이너와의 대련이 꽤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인 지, 눈 앞 마족의 공격에 방어에만 주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무 의식적으로 뒤로 가 있던 검의 힘을 증폭시켜 옆구리 쪽으로 올라오는 상대의 검을 튕겨냈다. 채챙, 파팟. 하지만 내가 밀어낸 검은 뒤로 밀리는 순간, 다시 내 발목 부분으로 날아들었고, 그와 동시에 움직임을 구속하는 마법 또한 나를 향해 날아 왔다. 먼지를 일으키며 뒷걸음치던 내 발은 마족의 마법을 피하느라 순간 엇갈리게 됐고, 그 결과 나는 원치 않는 상대의 공격 범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젠장, 한쪽 발이 바인딩 마법에 걸렸잖아!' "쉬운 상대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별거 아니군. 크큭. 죽어~엇!" 비웃는 미소가 마족의 입가에 생기는 순간, 위로 치켜들었던 마족의 검이 내 머리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쳇, 처음이라 그런지 매우 당황스럽군.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나를 어쩌지 못해.' 정신 없어 당황한 자신을 속으로 진정시킨 나는 상대의 마법 때문에 생기는 마나의 흐름을 찾아 흩트린 후, 묶여 있는 발을 풀어 상대의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의 위치 를 옆으로 조금 옮겼다. 사~악! 바람을 일으키며 마족의 검이 내 몸 옆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그 검이 내 옷과 살을 어쩌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태연히 숙였던 몸을 펴며 반 격에 나섰다. '주변 마나를 이용하면, 이 정도의 상대는 별거 아니다.' 나는 또 다른 공격을 시도하는 마족을 쳐다보며 그가 서 있는 공간의 마나를 내 쪽 으로 급격히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상대로 하여금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것이 다. 그리고 순간이긴 하지만 상대의 양 팔 중, 하나를 묶은 나는 그의 왼손에 들린 검 또한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그가 좀 전에 내게 썼던 바인딩 마법을 썼다. 넓 은 거리는 불가능했지만, 마족과 나 사이의 거리는 겨우 2m 정도, 즉 내가 주변의 마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범위에 드는 거리였기에 바인딩 마법은 확실히 마 족의 몸을 묶어둘 수 있었다. "크윽, 대체 뭘 한 것이냐?" "네가 내게 했던 마법. 그동안 많이 공격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 고정되어 있는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주변 마나를 이용해 상대의 움직임과 공격에 제약을 가한 나는 쉽게 내 손의 검을 상대의 몸에 쑤셔 넣을 수 있었다. 사사삭. 푹. 마족의 공격으로 인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는 몇 달 동안의 안정적인 생활로 인해 굳어 있던 몸을 벗어 던질 수 있 었던 것이다. '내가 이곳의 피비린내를 더욱 짙게 만들지도 모르겠군.' 서걱, 툭. 검을 옆으로 베면서 바인딩 마법을 해제하자, 마족의 가슴이 두부 베어 지듯 잘려지면서 의지할 곳을 잃은 몸이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즉, 나는 기분 더러운 살인의 시작을 그렇게 알린 것이다. 수십 명의 마족들 중, 첫 마족. 그의 죽음은 상황에 대해 별 다른 변화를 주지 못 했다. 즉, 미친 듯이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족들에게는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마족들의 행동에 안도하며, 도망가지 않는 그들을 하나 둘씩 바닥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은 차례로 바닥에 쓰러지면서 내 몸의 긴장감을 점점 높여 나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줬다. '헉헉, 이제는 무의식중에 내 몸이 상대의 공격에 반응하는군. 아니, 처음부터 그 랬지만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건가? 아무튼 힘들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이곳에서 행해지는 피의 축제를 멈추게 할 수 있겠어.' 마족 하나 하나를 쓰러트리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이 지쳤다. 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마나 덕분에 몸의 피로는 금방 풀 수 있었고 잔가 지 상처들도 그 마나로 순식간에 치유해, 마족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약점이 될 수 있는 사항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히유, 이제 겨우 여덟 명이니... 멀었군.' 아직도 장소를 이동시키지 못한 나는 다른 곳의 상황도 빨리 제어해야한다는 생각 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마족들이 하나씩 쓰러질 때마다, 그들이 소환시킨 정신 정 령들 또한 정령계로 돌아갔지만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정신 정령들이 여전히 자신 의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주변은 별 다른 변화가 없군, 여덟이나 죽였는데도... 쳇, 빨리 마족들을 처리하 지 않으면, 연합군들이 전멸할지도 모르겠어. 뭐, 유투 왕국의 군사들이 아니라 다 행이긴 하지만 저들도 사람이니 최대한 빨리 마족들을 쓰러뜨려야겠지.' 손에 남아 있는 살을 베는 감촉과 마법으로 몸이 폭발하는 광경이 뇌리에 각인되어 정신적으로 꽤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마족을 그저 몬스터라고 치부하 며 그런 잔인한 행각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씩 떨궈냈다. 죽음의 숲에서 보았던 영 상을 떠올리며, 이들이 그곳의 몬스터들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족들이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이곳에서의 모습이 대륙 곳곳에서 재연될 테니, 저들이 떠나기 전에 그들의 계획을 저지시켜야지.' 마음을 다잡은 나는 연합군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는 마족에게로 몸을 날렸다. 연합 군들과 유투 왕국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마나 검을 쳐들은 나는 잔인한 살인행각 을 멈추지 않고 있는 마족을 향해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아직 연합군에 내준 성안에 수 십 명의 마족들이 존재하는데도 불 구하고, 그들이 부리는 정신 정령들이 모두 한순간에 정령계로 돌아 가버린 것이다 '헉,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치켜들었던 검을 아래로 떨구며 몸의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그런데 당황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는지, 순간적으로 그곳 에 있던 몇 몇의 마족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보이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저들도 당황한다?! 정신 정령이 사라진 것은 저들의 의지가 아니라는 말? 하지만 누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현 상황은 마족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기에 나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마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들이 정신 정령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 쪽이 훨씬 유리하니, 좋았어~.' "내..내가 왜 너를...?" "크윽~. 이..이 피는..." 제정신을 찾은 연합군들은 자신이 왜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는 듯, 우왕좌왕하며 혼란스러워했지만, 난 그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줄 겨를이 없었다 그 시간에 마족들을 하나라도 더 처리하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정신 정령이 정령계로 돌아간 사실에 소심해진 그들이 언제 이곳을 떠나 대륙 곳곳에 숨어버릴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내 움직임은 더욱 바빠졌다. '란과 트레모스들도 이제 연합군들을 신경쓰지 않고, 마족들을 상대할 수 있겠군. 좋아.' 정신 정령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 그들이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 긍정 적으로 현 상황을 바라보기로 했다. 깊게 생각해서 결말이 나는 일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희망적이던 상황은 성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면서 절 망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은 이곳을 떠나야할지 말아야할 지 망설이던 마족들을 하나 둘 씩, 다른 곳으로 가게끔 만들었다. '안돼! 대체 누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공격을 해서 저들의 경각심을 높이는 거야?' 쉽게 흉내낼 수 없는 폭발력을 느끼며, 나는 그 연쇄적인 공격을 하는 자가, 매우 강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혹시 트레모스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암흑의 기운이 그 장소에서 느껴지자마자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지 고 말았다. '어두운 암흑의 기운이라면 트레모스일리 없지. 그럼 누구지? 꽤나 익숙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내가 아는 이는 아니겠지. 지금까지 이처럼 강한 기운을 느꼈다는 기 억은 없으니까.'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마족들을 모두 쫓을 수 없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갑작스런 상 황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마족에게로 몸을 날렸다. 모든 마족을 상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 명의 마족이라도 수를 줄이는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 지만 나는 갑자기 나타나 길을 방해하는 누군가 때문에 목표로 했던 마족을 놓쳐야 만 했다. "누가 감히 내 길을 막... 어라?" 소리를 버럭 내지르려던 나는 상대의 익숙한 뒷모습에 당황하며, 그의 모습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그리고 노인의 모습에서 내가 아는 누군가의 특징이 하나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몸이 서서히 흥분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회색의 머리카락 과 흐린 기운의 마나 등, 노인의 특징은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은 누군가의 그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리먼! 재발로 나를 찾아오다니. 크큭, 내가 너를 찾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선가? " 나에 비해 약하다고 할 수 없는 리먼이었지만, 그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몸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언제라도 그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리먼은 살기를 뿜는 내게, 즉 자신을 죽이려는 내게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며 반가움을 표했다. 마치 나를 보고 싶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런 리넨이었군? 꽤 강한 존재라 내 친구들인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녀석들은 모두 도망간 건가? 뭐,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런지 반갑구만, 리넨.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일세.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무슨 수작이냐? 너를 죽이려는 내가 반가울 리 없을텐데?" 리먼의 의외의 반응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조금 뒤로 미뤘다. 불안감 을 갖고 녀석을 향해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실수의 요지를 갖게 되는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다. "크큭, 물론 평소였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보통 상황이 아니지 않나?" "그게 무슨... 헉, 이 가운은?!" 교묘한 말솜씨로 내 접근을 막던 리먼은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옷의 사나 이를 바라보며 즐거운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강력하게 다가 오는 사내의 기운에 몸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까 폭발을 일으켰던 그 자다. 가까이에서 이 자의 기운을 느끼는 아까의 섬뜩함 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헉! 이..이 자는...!' "아슬란?!" 사내의 몸을 감싼 검은 오라를 보는 순간, 나는 그 자가 아까 내가 느꼈던 암흑의 기운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 자가 바로 아슬란이라는 사실 은 사내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검은 옷의 사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로 헛 바람을 들이키며 입을 쩍 벌려야만 했다. 아 슬란과 검은 오라의 주인이 동일인물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어떻게 수용할 수 없 었기에. "리넨, 자네도 아슬란을 알고 있었나 보구만? 혹시나 했는데, 그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역시 아슬란과는 구면인 것 같아. 그렇지 아슬란? 자네도 리넨을 만나본 적이 있는 거지?" "리먼, 내게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 리먼이 친숙하게 아슬란에게 말을 꺼냈지만, 아슬란은 감정의 변화 없는 표정으로 리먼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허허, 자네 그렇게 차갑게 나올 필요 없지 않나? 여기, 꽤 오랜만에 보는 친우도 있는데 말일세~." '예전에 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다. 그때는 지금의 리먼처럼 흐릿한 회 색 빛의 마나였는데, 지금은 칠흑 같은 어둠의 마나라니! 예전엔 나를 이용하기 위 해 본 실력을 숨겼었단 말인가?' 아슬란의 실력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며, 나는 무의식중에 그에게서 또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결계안으로 들어간 인간이 살아 있다니? 리먼, 어찌된 일이지?" 나를 힐끔 바라본 아슬란은 리먼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듣는 것만으로도 추위를 느낄 것 같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넉살 좋은 리먼은 여전히 입가에 미 소를 풀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이런~. 그럼, 자네는 리넨이 그곳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한 겐가?" "죽였다고 하지 않았었나?" "쿠쿡. 이보게, 난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처리했다고만 했었지 죽였다고 안했네.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은 자네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이지. 즉 난 그것을 수정해주 지 않았다는 말일세. 그때 나는 몸에 힘이 없어 녀석을 죽일 능력이 안됐거든? 물 론, 그 덕분에 자네를 상대할 아군이 생겨난 거네만." 아슬란과 리먼의 대화를 듣던 나는 뭔가 둘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 다. 지금 보여지는 둘 사이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그것과 많이 틀렸던 것이다. '잠깐, 왜 리먼이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아슬란이 왜 리먼에게 살기를 보내는 거지? 둘이 같은 편 아니었나? 아슬란에 의해 나와 란이 결계에 들어갔고, 그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 마족들이 풀어준 것일 텐데? 그리 고, 지금 일어나는 이런 살인도 아슬란이 저들과 합작해서 하는 행동일텐데... 아 니, 잠깐! 아까 느껴졌던 폭음. 지금 생각해보니, 그곳에서는 아슬란 이외에 누군 가가 더 있었지. 바로... 리먼!'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리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운을 다시 검토한 나 는 그것이 아까 아슬란의 기운을 느꼈던 곳에 있던 누군가의 기운과 일치한다는 사 실을 알 수 있었다. '아슬란과 같이 있었던게 리먼이라... 분명 아슬란은 누군가와 싸웠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강력한 폭음을 냈던 것이야. 그리고 그곳에는 리먼 이외의 존재는 없었지. 그렇다면 둘이 싸웠다는? 흠~. 그렇다면 지금 리먼의 행동이 이해가는군!' 뭔가 상황이 내가 유리한 쪽으로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자, 아슬란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보게, 리넨.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된 것 같은데, 어떤 가? 나와 같이 손잡지 않겠나?" "무슨 말이지?" 사실 리먼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난 차갑게 그의 말을 모 른 척 했다. "허허, 모른 척 하기는~. 뭐, 설명해주지~. 아슬란 조금만 기다려주겠나? 크큭. 리 넨, 자네는 혼자의 힘으로 아슬란을 상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어림없는 소 리지. 자네와 난 실력면에서 그리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지 않나? 그런 내가 아슬 란과 잠깐 겨뤘을 뿐인데, 이 모양이라네. 하나보다는 둘. 크큭,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아니겠나?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문제는 아슬란을 처리한 후, 하자고~." 능글맞게 아슬란에게 양해를 구한 리먼은 말을 끝내면서 나와 협상을 맺게 되어 기 쁘다는 듯, 혼자 허공에 손을 악수하듯 흔들었다. 물론, 그런 리먼의 행동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고... 아니 할 수 없었다. 리먼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 만,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기에 나는 조용히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지금의 내 실력으로 아슬란을 상대해 이길 자신이 없었으므로. "쿠쿡, 역시 자네는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구만." "시끄럽다, 리먼. 무슨 말을 하나 한번 들어본 것인데, 알고 보니 네가 이곳으로 도망친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군. 하지만 잔머리를 굴렸다고 해도, 내 손에 죽는다 는 사실에는 변함없으니 그렇게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쪽의 인간 역시 마찬가지니 까. 어차피 그 쪽도 내 계획을 망칠 인물이 분명하니, 미리 손을 쓰는게 좋을테지. 어렸을 때, 실패한 계약을 이행하는 의미에서도~. 크큭, 크하하하!" 아슬란은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어 웃음을 터트리면서 멍하니 있던 나와 리먼을 향 해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슈슈슝, 쿠쿠쿠쿠쿵. 콰르르르릉. 그는 몸의 기운을 순식간에 끌어올려 리먼과 나 의 머리 위에 엄청난 기운의 암흑 구름을 만들어 낙뢰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낙뢰 공격으로도 모자람을 느꼈는지, 나와 리먼을 향해 가늘고 얇은 얼음 칼날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쏘아댔다. 슈슉, 슈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늦게 느껴질 정도로 아슬란의 공격은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그 누구의 그것보다 위협적이었다. 예전 아슬란이 나를 공격했을 때 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헉헉, 장난 아니군!' 만약 내가 리먼의 등장에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힘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자칫 몸에 상처가 날 수도 있을 정도로 아슬란의 얼음 칼날은 위협적이었다. '아슬란과 싸워 이겼다는 이노. 물론, 그것이 몇 백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 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나를 죽일 듯 공격했던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거로 군. 그녀는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나를 갖고 실험했던 거였 어. 젠장~. 이노 덕분에 저번 아슬란의 실력이 진실인줄 알았건만 아니잖아! 이건 대체 뭐가 이렇게 강해?' 정신 없이 아슬란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슬란이 분명 9클래스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9와 10 클래스 사이가 이 정도일 줄이야!' 마법의 단계, 즉, 클래스의 단계 사이의 차이가 대단하리란 것은 알았지만, 난 9와 10의 차이가 이 정도일 줄은 아슬란의 진실된 실력을 보기 전까지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1과 2 클래스의 차이보다 2와 3클래스 차이가 크고, 그보다는 3과 4클래스 사이의 차이가 크듯, 9와 10 사이의 차이가 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나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젠자~~앙!' <연금술사>-43-4 예고 없이 시작된 아슬란의 공격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먹구름과 그 구름에 섞여 있는 전류들... 그리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얼음 칼날은 내게 반격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받아본 적 없는 차원의 공 격들. 아슬란이 나와 리먼을 향해 뿌려대는 공격들은,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도 받아 보지 못한 강력한 것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슬란의 진짜 실력인가? 대단하군.'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날카로운 공격들이 아슬란의 손에서 연이 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공격들은 멀쩡한 건물을 폐허라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 도로 변화시켰다. 콰콰쾅. 퍼벙. 아슬란의 공격과 그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쏘는 나와 리먼의 마나가 주변의 건물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리넨, 그렇게 멍하니 피하고 있지만 말고, 반격을 해야 하게나! 반격을!> '리먼?' 아슬란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에 익숙치않던 나는 싸움이 시작된 이후, 계속 아 슬란에게 끌려 다니던 처지였다. 반격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아슬란은 내게 틈 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리먼은 나보다는 좀 더 여유가 있었는지, 내 머릿 속에 답답한 마음을 실어서 보내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말을 전해오다니. 리먼, 실전 경험이 나보 다 많은 것은 인정해야겠군. 아니, 아슬란과 전에 싸워본 적이 있어서 그런건가? 아무튼 무시못할 실력이군.' 머릿속으로 대화하는 것은 트레모스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내가 놀라운 마 음으로 리먼의 말에 응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거지? 지금 상황은 아슬란의 공격을 피하기도 벅찬데?> <호오~, 자네도 이런 식으로 말을 전달 할 수 있었나? 대단하군.>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닐텐... 이크!> 아슬란은 나와 리먼이 협공하기로 한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숨돌릴 틈 없 는 빠른 공격을 해왔다. 그는 냉정한 판단으로, 내 허점을 여지없이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쉬익~!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얼음 칼날을 느끼자마자, 리먼과의 말을 끊으며 몸을 돌렸지만, 옆구리 쪽의 옷이 잘려져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제길~! 지금까지 아슬란이 싸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노가 조심하라고 한 이유를 알겠군. 보통 마족과는 차원이 다르잖아!' <리넨! 아슬란을 신경썼어야지! 자네, 그렇게 하다간 아슬란을 처치하기 전에 먼저 가는 수가 있다고~!> <쳇, 아슬란을 처리할 자신은 있으면서 하는 말인가?> 내 말이 도중에 끊어짐을 알고, 리먼이 비웃듯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그도 나와 그리 다른 처지는 아닌 듯,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시 후에 들을 수 있었다. <자네와 나의 합공이 잘만 된다면, 아슬란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을 것이네. 이곳 에 있는 검은 구름을 없애지 않고 이용하면서 말일세.> <구름을 이용? 그게 무슨 말이지?> 아슬란이 기척을 감추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전류가 흐르는 구름은 내게는 방해 의 요인이었다. 눈과 귀가 어두운 구름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름을 이용하자니? <아슬란이 구름을 이곳에 씌워놓은 상태에서 우리를 정확히 공격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의 기척을 손바닥 보듯 하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걸 역이용할 수 있어! 지금쯤이면 자네도 아슬란의 공격에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겨난 것 같으니, 기척 정도는 감출 수 있겠지?> 사실 리먼의 말대로 난 기척을 감추려 했다. 어두운 구름에 몸이 익숙해지면서 반 격의 기회를 노리려 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끌려다닐 수는 없었기에. <할 수 있다.> <좋아~. 하지만 바로 기척을 감추지는 말라고! 우리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하니까. 아슬란이 우리 기척을 느끼고 공격할 때, 그의 마나가 쏘아져 나오지. 그것을 느 껴 아슬란의 위치를 파악하는 거네. 물론, 파악하자마자, 바로 기척을 숨겨 아슬란 에게로 다가가 그를 공격해야 하지.> 아슬란의 공격을 피하려면, 꽤 정신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인지 리먼은 빛의 속도라 고 느낄 정도로 말을 빠르게 내뱉고는 내가 대답하기까지 기다려줬다. <어려운 요구군. 하지만 듣고 보니 그 방법 밖에는 없을 듯 하군.> <바로 그거네. 하지만 아슬란의 이목을 그리 쉽게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내가 자네를 엄호해 주지.> <엄호라..., 같이 공격하는게 낫지 않겠나?> <보통의 경우라면, 그렇겠지만. 아슬란이라면 상황이 다르네. 하나가 공격하나, 둘 이 공격하나 별 차이가 없지. 단, 공격하는 자 이외에 그의 신경을 잡아끄는 존재 가 있다면, 자네의 공격이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네. 어떤가? 해볼텐가?> 쉬쉬쉭. 퍼벙. 펑펑.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아슬란의 공격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공의 확률을 높이려면, 리먼 보다는 내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기척을 숨기는 것 이나, 아슬란에게 기습을 하는 것이나 내가 그보다 더 유리했던 것이다. '뭐,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좋겠지.' <리먼, 당신 말대로 내가 아슬란을 공격하겠다. 그러니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만들어라.> <물론~! 나도 상대가 아슬란인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네. 그럼, 열심히 하게나~.> 리먼은 내 반응이 기뻤는지, 희망적인 어조로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와 가까운 곳 에서 아슬란의 이목을 끄는 것 보다는 먼 곳에서 그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 내가 아슬란을 기습하는데 더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부터인가?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한 힘을 자랑하는 아슬란이지만, 이번엔 내게도 리먼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리 쉽게 지지는 않겠지!' 마음을 다잡은 후, 아슬란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콰르르르릉! 채 채챙! 얼음 칼날이 튕겨지는 소리와, 강력한 화력을 지닌 화이어 볼이 어둠의 구름 사이로 번쩍이며 리먼의 모습이 보였다. '아슬란을 자기 쪽으로 유인하는 건가? 음~. 좋아, 그럼 나도 시작하지!' 나보다 더 강력한 반격으로 아슬란의 이목 끌기에 성공한 리먼. 그 덕분에 나는 아 슬란의 위치를 찾는데 생각보다 적은 시간을 소모했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강력한 마나의 시발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아슬란의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같은 자리에서 리먼을 공격하는게 아 니었기에, 그의 바뀐 위치를 계속 파악해 기습을 시도하는 것은 어려웠다. '움직이는 아슬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더욱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게 어 렵군.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몸을 바짝 긴장시킨 나는 내 쪽으로 날아오는 아슬란의 마나를 느끼며, 그가 계속 해서 자신의 위치에 변화를 주는 곳을 하나의 커다란 원으로 잡았다. 상대가 내게 계속 공격을 해오면 해올수록 많은 자료를 얻어, 그의 움직이는 범위를 줄여나가,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다. '느껴진다. 처음엔 두서 없이 몸을 이동시켜 나와 리먼을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펴보니, 일정 범위에서만 무작위 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군.' 한번 그의 위치가 정해지자, 계속 움직이는 아슬란이라 해도, 다음에 그가 어디로 움직일지는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그가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있다고는 해도, 그 가 쏘는 마나 덩어리의 기척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기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먼, 지금이야! 더 강하게 발악하라고!> <이보게, 리넨. 발악이라니~! 교양있는 말을 써야지~.> 내 말에 투덜거리는 리먼이었지만, 그는 내 요구를 정확히 들어줬다. 내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투덜거리면서도 아슬란이 놀라 정도의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그의 공격이 아슬란의 몸에 닿을 확률을 없었지만... '저렇게 무의마한 것처럼 보이는 공격을 하니, 발악이라는 말을 쓰지~.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리먼이 아슬란에게로 마나를 쏘아 보낼 때를 포착해, 나는 주변의 마나를 갈라 내 가 아슬란에게 조용히 다가갈 길을 만들었다. 아슬란의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순간, 그리고 그의 몸이 다른 곳으로 움직여 또 다른 마나를 쏘는 그 순간, 나는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온 신경을 쏟아 부었 다. 몸을 최대한 그에게 가까이 붙일 수 있도록, 다음으로 아슬란이 도착할 공간을 포착한 것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불가능한 기습이 뻔했지만, 나와 아슬란의 시 야를 막고 있는 검은 먹구름 때문에 이 계획은 가능하게 변했다. '이 때다!' 주변 마나를 갈라, 길을 만들고 아슬란의 곁으로 다가간 나. 검은 먹구름이 끝나는 순간 눈에 보이는 아슬란에게로 다가가 인시너레이트(incinerate) 마법을 쏘았다. 마그마의 온도를 갖고 있는 강력한 화기의 불덩이를 날카롭게 만들어 아슬란의 몸 을 뚫도록 빠르게 마나를 쏜 것이다. 퍼버벙! 화르르르륵! 다른 곳, 즉 리먼이 있을 법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아 슬란은 갑자기 검은 먹구름을 뚫고 나오는 나라는 존재에 놀라 미처, 내 공격에 몸 을 피하지 못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아슬란이 내 공격을 눈치채고 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내 몸뿐만 아니라, 내 마나까지도 내 몸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런 능력은 아슬란이 엄청난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서..성공인가?' 아슬란의 몸에 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고, 눈앞에 확실히 불길에 휩싸인 아슬란이 보였지만 난 안심할 수 없어, 그의 몸에 제 2, 제2의 인시너레이트를 쏘아보냈다. 가까이 다가가기에도 강력한 불길에 녹아들 것 같았지만, 아슬란이라는 막강한 존 재에 이 정도의 공격으로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지직. 치직. 샤~악. 전기가 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내 뒤에 존재했던 검은 먹구름이 사 라지고 있었다. '이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 내 공격이 아슬란에게 먹혔다는?' 그가 만든 먹구름이었기에, 그런 희망을 가진 나였지만, 깨끗하게 변한 허공에서 리먼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아슬란에게로 빠르게 돌 려야만 했다. '리먼이 사라졌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아.. 아슬란은? 헉!' 기쁨이 들어찼던 마음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무엇이든 녹일 수 있을 것 같던 불길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먹구름을 없앤 것은 내 공격에 대한 방어를 높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훗, 꽤 정교한 기습이야. 저번에도 그랬지만, 확실히 기척을 숨기고 다가오는 것 은 인정할만한 실력이군. 둘이 합작을 해서 더 그런거였나? 하지만 이제는 소용없 는 것 같군. 쥐새끼는 도망쳐버린 것 같으니, 큭큭." 주변을 한번 휘~익 둘러본 아슬란은 나를 비웃는 듯, 말을 내뱉으며, 불에 휩쓸렸 던 몸을 툭툭 털었다. 마그마와 같은 열기의 불꽃 속에서 그의 옷만이 불길에 그을 린 것 같은 결과를 나았기 때문이다. '으득! 겨..결국 난 또 속은건가? 그 자식은 나와 손을 잡아도 아슬란을 이길 수 없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나를 이용해 도망갈 틈을 찾으려 한 것이고? 으드득!' 잠시나마 아슬란이란 존재 때문에 리먼에게 의지를 했던 나는 한심스러워지는 자신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서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크크큭. 간사한 쥐새끼는 내가 처리할테니 흥분을 가라 앉히는게 좋지 않을까? 지 금은 나와 싸우는 중이니... 뭐,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다크 블레이드(dark blade)!" 사-악! 말을 하다 도중에 갑자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아슬란은 순식간에 내 곁에 다가와 검은 칼날로 내 몸을 양분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세 한 음만이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위험하닷!' 리먼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미처 아슬란의 공격에 대한 준비를 못한 나는 그의 검이 내 몸에 닿기 전에 허공에 떠 있던 몸을 옆으로 돌려, 그의 공격을 피하려했다. 하지만 아래로 떨어지려던, 그의 검이 바로 방향을 틀어 옆으로 옮겨진 내 몸에 씌 여져 있던 보호막을 쉽게 깨기 시작했다. 처음 튕겨내는 것 같이 보이던 내 몸의 보호막. 하지만 그것은 곳 검은 마나로 만 들어진 날카로운 검 날에 의해 점점 틈을 만들어 내 몸을 아슬란에게 그대로 내놓 으려 했다. "안돼-엣!" 마음이 흔들리던 상황에서의 공격. 나는 아슬란의 공격을 받을 준비가 몸으로나 마 을으로나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와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우선은 그의 공 격권에서 떨어져 나와, 그를 상대할 마음가짐을 가져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검 날만을 신경쓰며 움직이려던 내게 아슬란이 회심을 미소를 지으며, 다른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다크 블라스트(dark blast)!" 두 가지의 공격으로 내가 도망갈 틈을 빼앗으려는 속셈으로 아슬란은 그런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공격은 오히려 내가 아슬란에게서 멀어질 기회를 제공했 다. 퍼버벙! 강력한 아슬란의 공격이 내게 직격으로 먹히면서 내 몸을 튕겨냈기 때문이 다. "젠장! 그 사이 까먹었었군! 그놈의 팔찌! 다크 에로우(dark arrow)!" 프로시아 덕분에 아슬란과 거리를 벌린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을 날려, 그와의 거 리를 더욱 벌렸다. 아슬란이 검은 마나를 이용해 암흑 마법으로 내게 공격을 시도 했지만, 빠르게 그와의 사이를 벌리는 내게 그의 공격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우선은 사이를 더 벌린 후, 그를 상대할 방법을 알아봐야겠어. 그의 공격 범위에 서 반격은 생각할 수 없을테니!' 나 혼자사 지금의 아슬란을 상대할 수는 없었기에 난 우선 그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몸을 최대한 다른 곳으로 날렸다. 이미 그보다 더 빨리 날 수 있음은 예전에 증명되었기에, 사이를 벌린 후, 그를 공격할 틈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 슬란은 예전에 자신의 모든 실력을 내보였음이 아님을 알리듯, 나를 빠르게 쫓아왔 다. '제길!' 한편 트레모스와 란은 갑자기 제정신을 찾은 연합군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른 마족들을 향해 몸을 이동시켰다. 리넨의 부탁을 들어줬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이었기에 그들은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둘 씩 사라지는 마족들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피투성이의 연합군들이 그들을 맞이할 뿐, 그들의 적인 마족 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젠장, 이게 뭐야? 왜 도망가고 난리야?" "마족들에게 뭔기 이상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야. 정신 정령들이 모두 정령계로 돌 아갔으니!" 란이 의견을 내봤지만, 트레모스는 이미 사라지려는 마족들을 향해 몸을 날린 후였 다. 퍼버벙! 쿠르르릉! "이봐, 나를 상대해야지 어딜가냐고~옷!" 언제 꺼냈는지 모를 은빛의 실피아가 도망가려던 마족의 몸을 향해 순식간에 공격 을 퍼부으며 주변에 멍하게 서 있던 연합군들을 놀래켰다. 하지만 그런 트레모스의 공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그 자리에 존재하던 마족들이 모두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일이 이렇게 되면, 심심하...잉? 이건 뭐야?" 트레모스는 주변에 더 이상 마족이 없음을 알고는 멀찌감치 서 있는 란에게로 가려 했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마나의 폭발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이 기운은... 마족?! 호오~. 누군지 몰라도 매우 강력한 존재군!" 갑자기 사라진 마족들 때문에 열이 받아 있던 트레모스는 싸울만한 상대가 나타났 다고 생각한건지, 입가에 다시 미소를 만들며 란에게 다가가 순식간의 그녀와 함께 마나가 느껴지는 곳으로 텔레포트했다. 트레모스는 리넨이 자신에게 란을 맡겼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찮긴 했지만 그녀와 함께 몸을 이동시킨 터였다. 물론, 그녀 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고...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강력한 마족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지 트레모스와 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내가 무섭다고 다들 피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응? 폭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 존재가 다시 폭음과 함께 트레모스의 범위에 포착되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강력한 기운의 마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트레모스는 폭발이 일어난 곳의 장소를 파악해 텔레포트를 하려던 행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 때문에 그와 란은 그곳에서 몸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잉? 마족?!" 그와 란의 바로 머리 위에 꽤 강해보이는 마족! 허공에 나타난 마족은 텔레포트로 몸을 이동시키는 중이었는지, 허공에 멈춘 채, 다른 곳으로 몸을 이동하려했다. 하 지만 땅위에서 자신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짓는 트레모스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이동하려던 몸을 잠시 멈춰야 했다. "리먼~! 으드득!" "호오~, 네가 아는 녀석이냐? 내뿜어지는 살기로 보아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녀석 은 아닌 것 같은데.. 크큭! 모두 사라진줄 알았는데, 알아서 내 앞에 나타났군~. 크큭!" "젠장~! 하필 이런 곳으로... 쳇!" 스~윽! 란이 뿜어내는 살기와 그의 곁에서 내뿜는 트레모스의 살기에 맞서 싸울 자 신이 없었는지, 리먼은 능글능글한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급하게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가 본능적으로 느끼기에 트레모스의 강력 한 기운을 이길 만한 실력에 자신에게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트레모스와 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느꼈듯이, 트레모스는 그보다 강한 존재였 기에... "어라? 마족이 내 앞에서 사라져? 한번은 용서해도 두 번은 없다! 내 눈에 띄였으 니, 나와 겨뤄봐야지~!" 강력한 마기를 내뿜는 마족에게로 가려던 트레모스는 리먼의 등장에 계획을 즉시 수정한 후, 란을 데리고 바로 리먼을 쫓았다. <연금술사>-43-5 아슬란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전속력으로 하늘을 날던 나는 무서운 속도로 나와 의 간격을 좁혀 들어오는 아슬란에 대한 공포감을 맛봐야만 했다. 예전 그가 자신 의 모든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을 때보다 몇배의... '제길. 빠르게 달리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간격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슬란과 나 사이의 간격은 더 이상 줄어 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몸 속에 드래곤 하트가 없었다면, 난 이미 예전에 아슬란에게 잡혔겠군.' 대기의 마나를 갈라 그 안으로 달리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많은 정신력과 마나를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즉, 드래곤 하트에서 무한한 마나가 내게 흘러들지 않았다면 , 난 이미 예전에 아슬란의 손에 어떻게 되었을거란 뜻이었다. '이대론 안돼. 시간 낭비도 이럴 수는 없지. 그리고 이렇게 계속 아슬란에게 쫓길 수도 없는 일이고!' 어느새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아슬란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생각하려고 했던 바로 그 생각 을... 아슬란에게 쫓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아슬 란과의 거리가 좁히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여유는 갑자기 상황이 뒤바뀌면서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됐다. "헉! 아..아슬란!" 아슬란도 나와 같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순식간에 내 앞으로 텔레포트를 해 내 앞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아슬란에게서 멀어져야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복잡하게 방향을 전환 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깜박했어!'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지만, 상황은 이미 늦은 후였다. 순식간에 좌표를 계산하 고 텔레포트로 몸을 빼는 것보다 이렇게 대기의 마나를 갈라 도망치는 것이 더 안 전하고, 더 신속하다는 점을 알았기에 아슬란에게서 도망칠 때 이 방법을 쓴 나였 다. 텔레포트로 도망쳤을 때, 바로 따라오는 아슬란을 피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 기에, 확실한 방법으로 아슬란을 떼어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내 예상을 덮고 나를 따라왔을 뿐 아니라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내게 당혹감을 안겨 줬다. 규칙적으로 앞으로만 가던 나를 아슬란이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텔레포트로 나를 따라잡은 것이다. '앞으로만 달리는 목표가 있다면, 쉽게 목표의 속도를 느끼고, 목표가 잠시 후에 도착할 앞 좌표를 계산할 수 있겠지. 어리석었어! 그저 멀어져야만 한다는 생각 때 문에!' 다급한 상황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아슬란을 얏잡아 본 것 같았다. "도망은 여기까지다. 너도 리먼 못지 않는 도망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시간을 이렇게까지 낭비하게 만들다니!" 조금은 화가난 듯, 아슬란은 살기가 뒤섞인 목소리로 나게 일침을 놓더니 바로 리 먼이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쌔~엥, 쉬쉬~익! 아슬란의 손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바늘이 나를 향해 날아 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야만 했다. 피할 공간조차 주지 않는 아슬란의 날카로운 공격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공경을 그대로 받을 나는 아니었다. 피할 공간이 없다면, 아슬란의 공격이 내 몸에 닿지 않게 하면 되는 일 이었으니까! '에어 쉴드(air shield)' 공기를 압축한 방어막을 만든 나는 몸을 빠르게 뒤로 빼 면서, 아슬란이 공격이 내 몸에 닿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공기를 압축 해 만든 방어막은 아슬란의 공격에 맥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파파파팟!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음을 내던 아슬란의 바늘 공격은 내 보호막에 닿자 마자, 보호막을 너무도 쉽게 뚫고는 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이런!' 당황한 나는 미처 제2의 방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엄청난 위력의 공격을 가하는 아슬란에 대한 충격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 기 때문이다. '내게 충격은 있다고 하더라도, 보호막으로 어느 정도 아슬란의 공격을 막을 수 있 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강력하다는 말인가?' 절망에 빠져버린 나는 그대로 내 몸이 고슴도치가 되어버리는 줄 알았다. 채채채챙 ! 하지만 상황은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던 제2의 보 호막이 나를 감싸고 있기라도 하듯, 아슬란의 공격을 모두 튕겨냈던 것이다. 그것 도 아슬란이 위험에 빠질 정도의 속도로... 쉬쉬쉭~! 내 몸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에 튕기듯 날아간 아슬란의 공격은 마치 거 울에 반사되어 날아오듯, 그를 향해 되돌아 간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나처럼 당 황하지 않고 쉽게 그 공격들을 무산시켜버렸다. 퍼퍼펑~! "제기랄! 네가 그 빌어먹을 팔찌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군!" '아! 프로시아!' 또 잊어버리고 있던 내 생명의 은인, 프로시아. 아슬란이 짜증내는 목소리에 나는 한 가닥의 희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프로시아가 있다면, 아슬란의 공격에 방어막을 치며 체력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겠지. 이것은 세계 최강의 방어구니까.' 내가 어떤 방어막을 내 몸 주위에 친다고 해도, 그것은 프로시아의 능력에 미치지 못할게 뻔했다. 게다가 좀 전처럼 아슬란의 공격에 맥없이 부숴지고 말테니 소용도 없을테고! '프로시아 덕분에 아슬란의 공격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군. 공격에만 주력할 수 있겠어!' 한가지 과제가 해결된 것처럼, 나는 암흑을 빠져나갈 밝은 빛줄기를 발견한 것 같 았다. 그리고 그런 희망은 소극적이던 나를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인센디어리 클라우드(incendiary cloud), 파이어 블라스트(fire blast)~!" 나는 상대 주변에 인화성의 구름을 두껍고 넓게 형성한 후, 그 안에서 냉정함을 잃 은 아슬란을 향해 강력한 불덩어리를 날렸다. 모든 공격이 주변의 마나를 가르면서 시도한 것이었기에 내 마나들은 아슬란이 피하기 전에 그의 몸 근처에서 폭발했다 인화성의 두꺼운 구름이 파이어 블라스트가 지나가자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루면서 , 아슬란을 가둬버린 것이다. 게다가 파이어 블라스트는 그 화기를 아직 간직한 채 아슬란을 공격했다. 콰콰콰쾅~! 엄청난 화기를 담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시야를 가렸지만, 난 안심하지 않고 또 다른 공격을 가했다. 아슬란이라면 이 정도의 공격은 쉽게 무마시킬 능력이 있 었으니까. '에어 블라스트(air blast),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압축된 공기와 번개 공격으로 또 다른 장애물을 아슬란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내게 시간을 벌어다줄 공격일 뿐이야! 진짜 공 격은 다른 것이지!' 아슬란이 번개, 불, 바람등에 시달려 시야가 좁아지게 만든 후, 그의 빈틈을 노려 기척도 없이 접근하려는 것이 내 진정한 목표였던 것이다. '기척을 숨긴다! 그리고 아슬란이 화가나 주변의 공격을 쳐내고 있을 때, 그의 곁 으로 다가가 일격을 가하는 거다!' 생각은 짧았고, 내 몸은 어느새 아슬란의 곁의 불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어둡지 않 은 텔레포트는 쓰지 않았다. 텔레포트의 경우, 순식간에 상대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지만, 그 주변의 마나 파장은 어쩔 수 없었기에 내 기척을 아슬란에게 그대로 내놔야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의 상대였다면 그런 공격도 꽤 쓸만한 방법이었겠 지만, 상대가 아슬란이라면, 찰나의 순간이라도 나를 공격할 수 있었기에 무턱대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 하지 않은 것이다. 마나를 가르며 몸을 이동한다면, 순식간 에 그의 곁으로 보다 안전하게 다가갈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런 내 판단은 맞아떨 어지는 것 같았다. 마나를 갈라 그 안으로 몸을 움직인 나는 머지 않아 강력한 불 바다 속에서 손을 휘젓고 있는 아슬란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난 듯, 무자비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요동치는 아슬란을! '이때다. 이 공격은 이미 아슬란의 허를 찌른 적이 있었던 방법. 공격만 강력하고, 목표만 정확하다면, 아슬란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온 몸을 바짝 긴장시킨 나는, 아슬란이 내 접근을 눈치채기 전에 그의 후방으로 접 근하던 몸에 가속도를 더 붙여 더욱 실패의 여지를 줄였다. 그리고 그가 놀라 고개 를 돌리는 순간, 손에 뭉치고 있던 엄청난 마나 응축을 그의 가슴 왼쪽을 겨냥했다 심장이라 하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곳이었기에, 그곳을 겨냥해 공격을 가했 던 것이다. 하지만 잘 짜여진 각본은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황하면서 고개를 돌려야 하는 아슬란이 냉정한 눈빛으로 내 접근을 알기라도 한 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덥썩! '헉!' 뒤늦게 상황의 뒤틀림을 깨달은 나. 아슬란의 가슴을 향하고 있어야 할 내 팔은 순 식간에 아슬란의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에게로 갔어야 할 마나 덩어리도 어 느샌가 다른 공간에서 터지고 있었다. 콰쾅~. '어떻게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나를 잠시 패닉 상태로 몰고 갔다. 순식간에 나를 제압하면서 내가 쏘는 마나를 파악해, 다른 공간으로 보내버리다니! "또 다시 같은 수법인가? 당황한 표정이 볼만하군." 내 움직임을 다 파악하고 있기라도 한 듯, 아슬란은 내 오른 손목을 붙잡은 채, 득 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알았지?" "네가 내게 접근하는 그 순간 짧지만, 네 기척을 느끼고 방어하기엔 충분하다. 한 두 번이라면 몰라도, 그 이상이라면 내겐 충분한 일이지. 그리고 이번엔 네가 이런 식으로 내게 접근할 줄도 알았고. 이제 장난은 끝이다!" 내 공격을 무마시킨 아슬란은 곧바로 왼손에 잡힌 내 손목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후, 오른손을 내 심장에 댄 후, 그대로 마나를 분출했다. 멀리서 쏘는 공 격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가까이에서 내 프로시아의 방어기능을 무너뜨 리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어..엄청난 마나가...' 내가 하려던 공격을 그대로 나에게 되돌려주는 아슬란. 그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내게 엄청난 크기의 마나를 빠른 속도로 쏘아보냈다. 내게 지금까 지 느끼지 못했던, 위협적이고도, 강력한 마나가 내 몸 바로 앞에서 터졌던 것이다 쿠쿠쿠쿵~! "크아~~악!" 지금까지의 폭발보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다. 워낙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보니, 아슬란의 강력한 마나의 크기보다 소리가 작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폭발 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마치 내 몸 안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내 몸이 심장을 시작으로 진동하면서, 혈액이 그대로 역류하는 듯한 느낌 이 들었던 것이다. "쿠아~~악!" 쿨럭, 쿨럭. 끊임없이 피가 내 몸밖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아슬란은 그런 내 반응 에 오히려 싸늘한 미소를 거뒀다. "이럴수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도 방어를 한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아슬란의 목소리가 내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프로시아가... 나를...' 끊임없이 피가 식도를 타고 입 밖으로 흘러나왔지만, 난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심장에 큰 무리가 갔지만, 자체 치유능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 는 나였기에 순식간에 몸 안에서 제자리를 이탈한 장기들을 바로 잡았던 것이다. 갈기갈기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것들에 일일이 신경쓸 겨를이 없었 다. 아슬란이 잠시 공격의 틈을 보였을 때, 반격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맥없이 당하지만은 않는다. 내가 도망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반대로 아슬란 역시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는 않는 상황! 어렵게 그의 곁으로 접근할 필요 도 없는 상황이닷!' 아까 실패했던 공격이 다시 내 왼손을 타고 그대로 아슬란의 가슴 쪽으로 다가갔다 몸 안의 상처는 대충 움직일 수 있다록만 만든 다음, 시간을 쪼개 몸의 마나를 아 슬란을 향해 쏘아보낸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의 공격에 의해 심장이 타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내 공격은 불안전했다. 탓! 자유로웠던 왼손이 아슬란의 오른 팔에 의해 너무도 쉽게 방향을 틀어야 했던 것이다. "흥! 아직도 날 뛸 기력이 남아 있는 것이냐? 편안히 최후를 맞이하는게 좋을텐데! " 마치 마지막 생명이 꺼질 때, 발악을 하는 생명체를 보듯, 아슬란은 거슬린다는 표 정으로 허리춤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필요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단검. 아슬란이 꺼낸 것은 날이 매우 날카로워보이는 단검이었다. "마나를 모두 튕겨낸다면, 마나가 아닌 것을 네 생명을 가져가겠다!" '에어 쉴... 쿨럭, 쿨럭!' 쉭~! 지이이잉~, 파파파팟! 환상을 보는 것인가? 프로시아가 이 정도로 대단한 마법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는 아슬란과 같은 표정으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경각을 금치 못했다. 투명한... 보이지 않는 결계가 나를 감싸고 있듯, 아슬란의 단검이 내 몸 바로 앞 에서 불꽃을 튀기며 나를 들어오지 못했다. 마나를 이용한 공격이 아닌데도 불구하 고, 그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젠장~! 그 계집이 만든 물건이 이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지상의 물건으로는 파괴가 불가능 할 것 같은 프로시아! 하지만 아슬란은 포기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생각한 듯, 내 오른손목을 자르려는 듯, 팔을 휘두른 것이다. 파파파파팟! 하지만 그 역시 아슬란의 단검은 내 살에 다가오지 못 한 채, 날카로운 검날이 불꽃을 내며 허공에 맴돌았다. "이..이! 죽어~~엇!" 퍼퍼펑! 콰르르릉! 분노를 표출하기라도 하듯, 아슬란의 공격은 계속해서 나를 향 하기 시작했다. 파괴되지 않는 프로시아. 내게서 떨쳐버릴 수 없는 프로시아를 향 해. 그리고 그 프로시아를 차고 있는 나를 향해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내 오른 손 목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 손으로 내 심장에 댄 상태에서... 그러자, 자연 내 몸 안의 모든 것들은 심하게 요동치게 되었고, 뜻밖에 그 상황에 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드래곤 하트의 무한한 마나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 몸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무한한 마나가 상처를 치유하 기 위해 쏟아져 나왔지만, 곧 아슬란의 공격에 의해 그 마나는 몸 안에서 심하게 요동치게 된 것이다. 원래의 경로를 이탈한 채... 리먼의 파티마 덕분에 심장에 무 리가 가 있던 상황이었는데, 아슬란의 공격 덕분에 내 심장과 드래곤 하트는 내 의 지로부터 벗어났다. '크아~~~악!' 지금까지 죽음의 위기를 한 두 번 넘겨본 내게 아니었지만, 지금의 고통은 지금까 지 내가 느꼈던 그 어떤 고통보다 그 정도가 심했다. 몸 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나를 엄습한 것이다. 신음소리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프로시아가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내 몸 안에 그대 로 두려했기 때문에 그 고통은 더더욱 컸다. 퍼퍼펑~! 콰콰쾅! 목숨의 위협을 느끼자, 저절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 많은 마나가 흘러나왔 고, 그 무한한 마나는 아슬란의 공격에 의해 원래 움직이려던 경로를 이탈해, 나를 괴롭혔다. 지금까지 나는 프로시아가 내게 마나를 저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역할과 몸을 보호해주는 역할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제어 불가능의 마나를 흘러나가지 못 하는 상황에서 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까지 나를 괴롭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크아~~~악! 제어... 제어해야 한다! 몸 안의 마나를 제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크윽~!' 아슬란의 모든 공격이 내 몸밖을 튕겨졌지만 그 강력한 마나의 진동은 내 몸 속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 얼굴의 핏기를 가시게 만들었고, 내 의식의 끊을 놓으려 했다. "호오~, 이게 네게 고통을 주간 하는 모양이지?" 식은땀을 끊임없이 흐르는 내 모습을 본 것인지, 아슬란은 어느새 다시 냉정한 표 정으로 돌아와 나를 괴롭히는 행위를 계속했다. 퍼퍼펑~! 콰르르르릉~! 그 공격들이 내 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슬란은 숨길 수 없는 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이미 본 상태였기에 그런 시간 낭비인 것 같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제어... 제어!' 몸 안의 마나만 내가 제어할 수 있다면, 프로시아 때문에 나가지 않고 요동치는 마 나는 내게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 다. 아슬란의 끊임없는 공격이 더욱 집요해지면서, 그나마 한줄기 있던 인내의 끈 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크아~~~악!' 그나마 요동치는 마나를 조금이라도 억눌렀던 마지막 힘. 그것이 사라지자, 심한 움직임으로 요동치는 몸 안의 마나는 몸 구석구석 심한 움직임으로 돌아다니기 시 작했다. 온 몸의 근육을 뒤집어엎고 핏줄이란 핏줄은 모두 살 밖으로 튀어나오게끔 만들었다. 심지어 두 눈동자마저도 엄청난 압력에 의해 빠질 것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몸을 치유하려고 흘러들었던 마나가 아슬란에 의해 제 위치 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래곤 하트의 본래 위치인 심장 바로 위에 손을 얹고 계속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아슬란 덕분에... 물론, 드래곤 하트에서 마나가 흘러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아슬란의 엄청난 힘의 마나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자극에 드래곤 하트가 녹아든 심장은 폭발 직전의 힘을 모두 쥐어짜듯, 엄청난 마나를 쏟아냈던 것이다. '크윽~! 프로시아를 벗어야 햇!' 최강의 방어구, 프로시아. 하지만 난 지금 살기 위해 그것을 벗으려 했다. 아슬란 이 그토록 벗기고 싶어하던 프로시아를 자진해서 벗으려 했던 것이다. 다른 존재가 억지로 벗기려면 절대 불가능한 프로시아지만 그 것을 이미 벗어본 적 있는 나라 면 상황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오른손이 프로시아를 벗기려는 행동을 방해했다. 내가 고깃조각과 함께 토하는 핏물을 바라본 그는 프로시아가 내가 득만 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어림없다!" 벗으려는 자와, 그걸 막으려는 자. 원래의 상황이었다면, 대등한 접전이 있었는지 도 몰랐다. 하지만 난 이미 지칠 대로 지치니 상태였기에 아슬란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크..크윽. 몸 안의 마나를... 헉헉, 프로시아로 쏟아 붓는닷~!'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하긴 했지만, 모두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프로시아로 유도는 가능했기에 나는 아슬란의 힘에 대항해 프로시아에 마나를 쏟아 부었다. 몸이 산산 이 부숴지는 것 이상의 고통 쯤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기에... 지이이이잉~! 파파파파팟! 눈부신 불꽃들이 프로시아 근처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마나는 1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몸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 아슬란과 마찬가지로 시간 낭비인 것 같은 행동을 계속 했던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순... 크윽. 그럴 순 없어~~~엇!' 그런데 그렇게 길기만 한 상황이 계속 될 것만 같던 순간이었다. 마나 다루기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던 나였지만, 그 생각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으려고 한 순간이었다.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마나의 10분의 1도 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해 그런 생각을 한 나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빠져나갈 수 있는 돌팔구를 찾기라도 한 듯, 몸 안의 나머지 10분의 9의 마나가 서서히 프로시아 쪽으로 다가갔던 것이 다. 무의식중에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몸도 느끼기라도 한 듯이! "크으으으~윽!" 처음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슬란도 자신의 힘에 반발하는 내 힘을 느꼈는지,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느껴진다. 몸 안의 모든 마나가 프로시아로 집중되는 것을!' 아슬란 덕분에 심한 움직임을 보이던 몸 안의 무한한 마나들. 그것들은 차츰 아슬 란의 공격 횟수가 줄어들자, 내 의지에 따라 심한 움직임 그대로 프로시아를 누르 는 아슬란의 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질 줄 아느냐~앗!" "가라~~~앗!" 콰콰콰콰쾅~! 퍼버~엉! 찌직, 찌직, 파직! 촤라라라라랏~! '이게 죽는 것인가? 더 이상... 더 이상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군...'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내 형상이 사라지는 것 같던 순간. 몸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폭발도, 그 폭발의 여 파가 나를 밀어내는 것조차도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몸의 모든 감각이 마비된 듯, 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내 몸이 모두 사라졌기에 내가 감각을 못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 흐릿하게 보이던 시야는 어느새 암흑으로 변해버렸고, 그 사이에서 간신히 보이던 희뿌연 연기들도, 그 안에 있을 것 같던 아슬란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난 지금까지 끈질기게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아슬란은 엄청난 마나 폭발에 자칫 의식을 잃을 뻔했다. 평생 단 한번 느껴봤던 충 격, 그것을 다시 느끼면서 그는 또 한번 의식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슬 란은 누구완 달리, 엄청난 마나 폭발 속에서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으으윽! 이..이게 대체!" 엄청난 고통에 시선을 자신의 왼손으로 옮긴 아슬란은 자신의 왼손이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 정도의 살덩어리가 되었음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손가락의 형체가 남아 있을 뿐, 살이나 근육, 심지어는 뼈마저 한곳에 뭉친 것 같은 형상이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살덩어리 군데군데 박혀 있는 은백색의 파 편들도... "리프네리욘은?" 자신의 살에 꽃혀 있는 파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아슬란은 바로 파편을 손 목에 차고 있던 리넨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허공에 리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 간 건가?"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아슬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미 금 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리넨의 모습과, 자신의 왼손을 바라본 아슬란은 리넨이 그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은 무의 식적으로 움직인 오른 손에서 생성된 방어막 덕분에 그나마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 지만, 자신의 왼손은 하나의 살덩어리가 되었다. 아슬란은 리넨이 그런 상황에서 방어를 했을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던 리 넨이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그리고 그는 그 주변 리넨이라고 생각되는 생명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리넨이 갖고 있던 힘 정도 되는 마나를 보유한 존재는! "크윽. 인간 한 놈 때문에 이런 고생이라니! 도망간 마족들도 내 골치를 썩게 만들 더니... 한낱 인간이!" 아슬란은 자신의 왼손에 회복마법을 건 후, 곧바로 그 자리에서 몸을 감췄다. 그의 계획 중, 잘못된 부분을 한시라도 빨리 고치기 위해, 그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연금술사>-44-1 폴보트 연합을 움직이는 사람 중 한 명인 미드 아르엘 대공. 그는 자신의 아들 데 칸티스가 유투 왕국의 기사들에 의해 팔을 잃자, 유투 왕국과 전쟁을 선포하려 했 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군대를 몰살시켜버린 마족들 역시, 그는 유투 왕국의 숨은 병사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하, 이대로 가다가는 아르엘 대공의 말처럼 전쟁이 다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리플러스 경은 아들에게 들은 긴박한 상황에 긴급 회의를 열며 라피에르에게 자신 의 의사를 전달했다. 날이 밝아오는 이른 시각에 그의 저택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서재에서 회의가 열린 것이다. 유투 왕국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몇몇과 함께. 이 긴급 회의는 연합국과의 문제가 있은지, 며칠만에 겨우 회의를 열릴 수 있었다. 중요한 수뇌부들을 리플러스 경의 저택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 소모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모인 만큼, 그들의 회의는 중요한 안건만을 언급하 며, 신속하게 진행됐다. "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갑자기 나타난 마족들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심각합니다." 회의를 하는 동안에는 모두에게 높임말을 쓰는 라피에르. 그는 리플러스 경에게 대 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 지금 마족들이라 하셨습니까?" 아직 마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다른 귀족들은 너도나도 라피에르의 말에 눈 을 동그랗게 뜨며 확인에 나섰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마족이 맞습니다. 몇 백년 전에 사라졌다고 하는 그들이..." "마족이라... 저하, 마족이 위험한 존재인가요?" 잊혀진 존재인 마족. 젊은 아르넨은 그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다른 나이든 귀족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보통 마족들의 능력은 7~9 클래스 정도의 마법사와 맞먹는다고 했으니, 확실히 위험한 존재지요. 게다가 그들은 정신 정령이라는 것을 써서 사람 들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봤으니 분명한 사 실입니다." 웅성웅성. 라피에르의 말은 조용하고 심각하던 회의장을 일시에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리플 러스 경은 그런 장내를 한마디로 조용히 시킨 후, 회의를 지속했다. "자자,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이 정도로 놀라서야 되겠소? 마족의 위험성은 그 것뿐이 아니오." "리플러스 경, 그럼 또 있단 말입니까?" "전쟁을 일어나고 있는 원인!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족들의 소행인 것 같소. 피를 원하고, 이간질로 희열을 느끼는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소. 게다가 한 순간에 연합군사들을 대부분 전멸시킨 것 또한 마족들의 소행이었소. 물론 연합 군들 서로 죽게 만드는 방법으로 말이오." 웅성웅성. 좋지 못한 사실들이 하나 둘씩 드러날 때마다,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조용해 졌다를 반복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런 장내의 분위기를 라피에르와 리플러스 경이 번갈아 가며 유도해 나갔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미드 아르엘 대공이 그 마족들을 우리들 측의 사 람들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오해를?" "이번에 마족들은 연합 군사들에게만 손을 쓴 것에 대한 아르엘 대공의 생각이오. 게다가 이번에는 리온과 크릭이 정신 정령에 휩쓸려 그의 아들인 데칸티스의 팔을 잘랐습니다." "이런!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길래 상황이 그 지경까지 오게 한 것인가? 자네들! " 흰 수염을 날리며 한 귀족이 라피에르 뒤에 서 있는 리온과 크릭을 째려보며, 열을 냈다. 그들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도 되는 것마냥 노인은 화를 냈던 것이다. 하지 만 라피에르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문제는 저들이 아니오. 저들이 데칸티스의 팔을 자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황 은 별반 다를게 없을테니..." "저하 말씀이 옳아요. 제가 상대해본, 미드 아르엘은 야망이 꿈틀거리는 인간이었 으니까요." "아르넨,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아르넨이 회의에 끼어들며 의견을 내놓자, 옆의 글로빈이 작 은 목소리로 정색을 하며 그녀의 말투를 꾸짖었다. 아르엘 대공은 연합군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기에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지 만 아르넨은 오히려 글로빈을 탓하며 자신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작은 목소리이 긴 했지만 못 듣는 이 없을 정도의 크기로 아르넨은 미드 아르엘의 흉을 보며 글로 빈 다신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회의실의 다른 사람들도 그녀 자신 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흠~, 어쨌건 전쟁 중, 제가 그와 만나며 느낀 점은 그가 꽤 커다란 야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하를 도와 유투 왕국과 전쟁을 한 이유도, 죄송한 말씀입 니다만, 전쟁 후, 저하를 누르고 왕국을 연합 밑으로 두던가 아니면 왕국 자체를 없애버릴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웅성웅성. "전쟁이 끝난 후인데도 불구하고 미드 아르엘이 유투 시에 남아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죠. 불필요한 그들이 왕국에 남아 있으려는 이유! 다른 이유가 있을 까요?" 아르넨은 조리 있는 어투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말을 끝냈다. 하지만 그런 아르넨의 말에 놀라지 않는 몇 몇이 있었다. 라피에르를 비롯해 머리가 미드 아르 엘 대공과 직접 만나봤던 몇몇... 그들 역시 아르넨의 말에 내심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하, 그럼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전쟁이 진정 불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대륙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걱정이 가득한 귀족이 불안한 듯 목소리를 떨며 질문을 던졌다. 모든 해결책을 라 피에르가 내려줘야 한다는 생각인 것인지 그는 회의의 뜻도 잊은 채, 라피에르에게 대뜸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귀족의 말에 라피에르는 고 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저희에게는 꽤 강한 마법사들과 형님이 있으니까요. 그 분들이 있다면, 충분히 악화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혀..형님? 저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런 발언은 충분히 충격적이고도 남았다. 라피에르에게 형이라고 하면, 드루 젤과 리프네리욘 뿐. 하지만 그 둘은 이미 모두 죽어버린 상태였다. "리프네리욘 형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헉! 리..리프네리욘 전하께서?" "설마, 그럴 리가?" "확실합니다. 강력한 마법사가 되어 돌아왔으니까요. 이곳에서 저를 도와주고 있는 마법사들 역시, 형님의 친구들입니다." "허허, 갑자기 강력한 마법사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나 했더니... 리프네리욘 전하의 친구셨다는?!" 라피에르의 옆에 앉아 있는 키에라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존경을 눈빛으로 바 뀌자, 라피에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서서히 리넨의 존재가 긍정적으로 변해 가 는 것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라피에르는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리넨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는 의도 또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형님께서 제 때에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왕국은 이미 오래 전에 힘을 모두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게 움직이셨던 형님 덕분에 지금 왕 국이 이 정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형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말 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형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마족을 상대 하고 계시니 더더욱 그럴수야 없지요." 라피에르는 점점 사람들의 뇌리에 리넨이라는 존재가 들어차기 시작하자, 한결 가 벼워진 마음으로 그들에게 잊혀진 리넨이라는 존재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번 마족 소탕이 가능하게 만든 것도 그이며, 모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하는 것 또한 그가 하 는 일이라는 세세한 부가설명을 해주면서 라피에르는 그들에게 잊혀진 리넨의 뛰어 난 능력에 대해 상기시켜준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왕국을 살리기 위해 힘쓰고 있 는 것 또한 리넨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빼지 않으면서... "저하! 지금 리프네리욘 전하에게 왕위를 양보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형님이 저보다 더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원래 왕위는 형님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형님께 예전 모습의 왕국을 되찾아 주려고 움직이 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라피에르는 자신의 말에 동조하긴 하지만, 리넨보다는 자신에게 아직도 더 많은 점 수를 주는 이들을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말에 동 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모든 것의 우선이 리넨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라피에르의 뜻을 그곳에 모인 다른 이들도 모두 느낀 것 같았다.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진 않았지만, 라피에르의 말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겁니까? 강력한 마법사들이 마족들을 상 대한다고는 해도, 연합군을 상대하는 것은 우리니까요." "네, 그렇지요. 우리는..." 라피에르는 조리 있는 말투로 회의장에 모인 이들의 의견을 하나로 묶어 회의를 빠 르게 이끌어 나갔다. 한편, 미드 아르엘 일행은 폴보트 연합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텔레포트를 할 줄 알 만한 마법사가 그들 곁에는 없었기에 그들은 마차를 이용해 연합국으로 떠났던 것 이다. "엘벤트군. 데칸티스는 어떤가?" 팔을 잃은 이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아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인지 대공은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엘벤트에게 아들의 상태를 물었다.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데칸티스는 아직도 모든 의욕을 잃은 상태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검술을 더 이상 펼칠 수 없게 되었으니..." "으드득, 내 이 유투 왕국 놈들을!" 대공은 연합국에세 한 손에 꼽는 검사를 잃은 것보다 자신의 아들이 불구가 되었다 는 사실에 분노하며 왕국에 대한 분노를 터트렸다. 알 수 없는 희귀한 방법으로 연 합군들을 거의 전멸시킨 유투 왕국에 대해... "연합에 도착하면, 바로 법황과 의논해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대공님! 전쟁이라니요? 지금껏 대륙은 수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현 상황이 아무리 안좋다고 해도, 전쟁이라는..." "됐네. 자네가 피비린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간 나라간의 일 이네. 부득의하게 피를 흘릴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것이니까." 엘벤트는 대공의 말에 동조를 하지는 않았지만, 긴 말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작게 가로 저으며, 그와의 대화를 끝냈다. 연합국을 움직이는 것은 그와 법 황, 둘이었기에, 그는 속으로 법황을 설득해야 겠다는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다. 눈앞에서 전쟁을 언급하는 대공의 말이 실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보게, 아무래도 데칸티스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법황을 만나본 후, 저택으로 찾아오게나. 저 녀석을 옛 모습으로 되돌 릴 수 있는 존재는 자네 밖에 없는 것 같으니 말일세." "그렇게 하지요." 평화의 신을 모시는 엘벤트로서는 대공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 자신도 데칸티스가 슬픔을 딛고 일어섰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으니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대공께서는 마족이라는 말을 믿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분명 내가 느낀 그 기운은 매우 사악한 기운으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 한 것이었단 말야. 정말 유투 왕국의 말대로 마족들이 세상에 나온 것인가? 그들 때문에 양국간의 사이가 악화되는 건가? 음~,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일리는 있어. 리온과 크릭이 말해준 사실도 마음에 걸리고... 카란님께 찾아가면, 이번 일을 한 번 신중히 의논해 봐야겠군. 위니아도 돌려드리고.' 엘벤트는 조용히 자신의 손가락에 껴져 있는 축복의 반지 위니아를 쓰다듬으며 머 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연금술사>-44-2 '따뜻하...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내가 제일 처음 느낀 감각은 따뜻함이었다. 아슬란과의 싸움 으로 감각을 모두 잃은 줄 알았던 나는 태양 빛이 피부에 닿자, 잃었던 감각을 되 찾았던 것이다.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손가락뿐만 아니라 몸의 감각이 없는... 으 아~악!'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근육에 힘을 준 나는 갑자기 나를 엄습하는 엄청난 고통에 놀라 그대로 힘을 빼야만 했다. '이런... 근육이 뒤엉켜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군. 아슬란이 프로시... 아! 프로시아!' 갑자기 떠오른 프로시아 생각에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뜬 후, 바로 손목을 쳐다봤 다. 아니, 쳐다보려 했다. "으..아...아...악~!" '젠장~!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건가? 드래곤 하트가 있고, 외부의 자극이 없는 한 자체 치유가 되어야 할텐데?' 이상한 상황에 나는 바로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려면, 지금의 내 상태가 어떤지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다른 생각 없이 늘 해오던 일처럼 마나를 움직여 몸 안의 상태를 알아보려던 나는 뜻밖의 변화에 놀라 하던 일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이럴 수가! 드래곤 하트가... 무한한 마나가... 사라지다니? 어떻게? 프로시 아가 없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마나는 심장으로부터 퍼져 온 몸으로 가야 되는게 아닌가? 그 후엔,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말야! 그런데 심장에서 느껴져야 할 풍족하던 마나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다니?' 몸을 움직일 수 없는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 는 것 같은 상황이 나를 불안한 늪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마나... 마나를 느껴 몸 상태를 하나씩 알아보자고. 사라졌을 리 없잖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난 천천히 날뛰던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내 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레짐작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쁜 쪽 으로... 하지만 주변의 마나를 이용해 몸 안의 상황을 알아볼수록 내게 남아 있던 한 가닥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말... 정말 사라졌단 말인가? 어..어떻게?' 의문은 금방 풀렸다. 내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마나와 그와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 있는 아슬란의 마나가 프로시아에 뭉쳐 있다 그대로 충돌해 프로시아를 파괴하 며 그 여파를 내게 끼쳤던 것이다. '나는 프로시아를 벗으려 했고, 그는 그걸 막았으니 당연히 둘의 마나는 프로시아 를 중심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고, 결국 안과 밖에서 밀려드는 엄청난 마나에 프로 시아가 깨졌다는 것이로군. 그리고 그 여파로 나는 죽은목숨이 되었고... 모르긴 해도 아마 드래곤 하트와 내 생명이 교환된 것 같군.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보 면 말야. 그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없겠지. 있었으면 좋겠지만... 하아~.' 예전 마법을 배우기 전의 몸 상태로 가버리고 만 듯, 나는 내 몸에서 마법을 사용 할 수 있을 정도의 마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옛날 보통의 인간보다 더 적은 마 나만을 갖고 있던 몸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대기에 흘러 다니는 마 나의 양만을 갖고 있는 상태의 몸으로... '제기랄! 아슬란을 막으려면... 그의 계획을 저지하려면... 하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나는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힐 겸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싶은 생각에 커다란 한 숨을 내쉰 것이다. 하지만 그 한숨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입을 여는 것 조차 고통스러웠기에 마음대로 한숨을 푹푹 내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하군. 한심해~. 난 이제 낮을 레벨의 마법밖에 쓸 수 없는 건가? 9클래스의 마법사가 졸지에 이렇게 몸 움직일 힘도 없이 변해버렸으니... 하아~. 얼마동안 이 상태로 누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텐데, 그동안 근 육통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몸의 상처는 말이 아니겠지. 나도 인간인 한 , 자체 치유 능력은 있었을텐데도 말야. 그것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히유~.' 모든 것들이 나와 동떨어진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 다급하게 생각했던 아 슬란의 일도. 내 몸의 마나가 사라진 일도 모두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멀게 느껴졌 던 것이다. '이게 의욕 상실인가? 그런 건가? 이렇게 쉽게 의욕 상실이라는 것을 느끼는 건가? 쳇! 그럴 순 없다고! 난 아직 죽은게 아니잖아?' 난 아직 가보지 못한 영역이 남아 있었다. 환생이라는 것을 해서, 전생에 접해보지 못했던 마법과 마나를 알게된 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냐, 이대론 안 돼! 이노가 말한 신의 영역으로 가는 길이라는 10 클래스! 난 아 직 그곳으로도 가보지 못했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은가? 어림없는 소리! 몸이야 움직이게 하면 되는 것이고, 마나야 다시 모으면 될꺼야! 난 이미 9 클래스의 마법 을 통달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난 마나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특출하 지 않은가!'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기력해진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는 자기 합리화도 필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처음 마법을 배울 때를 생각하자. 난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마나를 다루는 실력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으니,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복잡하던 머릿속을 깨끗하게 청소해줬고, 내 가슴에 자리한 희망이라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다시! 좋았어~! 그럼, 무엇부터 해볼까? 몸을 치료하는 것부 터? 그래. 예전 이노가 내 드래곤 하트를 봉인했을 때와 상황이 같으니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겠지. 주변의 마나를 끌어다 쓰는 것은 쉬우니까. 그럼 3~4 클래스 정도의 마법은 쓸 수 있겠지. 정령들도 부릴 수 있을테고.' 그 때와 상황이 다르다면, 드래곤 하트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었지만, 난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밝아진 기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머릿속을 깨끗이 비웠다. '마나를 모은다. 그리고 몸 내부부터 치료해 나간다. 찢어진 장기나, 엉킨 근육, 어긋난 뼈등...' 손볼 곳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우울해할 틈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아무런 불평 없이 마나를 끌어모아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다 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기쁨도 만끽하면서... 하지만 의외로 상처가 깊었기 때문인지, 장기 치료를 끝마치자, 주변의 마나가 바닥나고 말았다. '이런,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몸을 움직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어. 이곳은 죽음의 숲과는 달리 마나의 흐름도 느리고, 마나도 매우 연하게 흩어져 있으니까. .. 하아~.' 바쁘게 몸을 치료해나가던 나는 갑자기 마나가 바닥나면서, 그 많던 일들이 일시에 사라지자, 허탈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나를 우울한 상태를 유지시키는 방향 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쳇, 또 이런 저런 잡생각들이 나를 지배하려하는 군. 몸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아 니 아슬란과 싸움이 있은 후니 다치지 않았을 리 없겠군. 몸이란 다치라고 있는 것 이니... 쳇. 이럴 땐, 몸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어. 몸이 없다면, 다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야. 호오~. 그럼, 영혼만 있게 되는 건가?' 투덜거리던 나는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애써 이상한 쪽으로 전개되는 생 각을 막지 않았다. 시간 때우기가 될지도 몰랐지만, 어느 정도 흥미도 느낄 수 있 었기에 난 일부러 그 생각을 이어갔다. 골치 아픈 생각으로 머리 아파하는 것보다 는 이게 더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혼이라... 내가 환생한 것을 보면, 영혼은 있는 것이겠지. 물론, 몸과 분리되는 영혼이 말야. 그래야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이 말이 되겠지? 흠 ~. 뭐, 그건 그렇다고 하고, 몸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혼만 있다면 어떨까? ' 정형화된 마법의 세계가 아닌, 어린 아이들의 막연한 마법을 접하는 것처럼 나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생각을 전개해나갔다. '몸이 없다면, 영혼은 자유롭겠지. 그럼... 쉽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겠네? 5 클래스가 되야 시전할 수 있는 텔레포트도 필요 없이 말야. 그저 생각해서 원하는 곳으로...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잖아? 내가 차원을 넘어온 것처럼 공간 뿐만 아니라 차원까지도 넘나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 크큭. 재미있는 생각인데?' 마치 신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의기양양해진 상태로 기분 좋은 상상의 나래 를 펼쳤다. '텔레포트를 시전하려면, 우선, 가봤던 곳이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 이니까. 뭐, 그래서 좌표라는 복잡한 것을 계산하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영혼만 있다면? 후훗~. 마음이 가는 데로 생각을 하는 순간 원하는 장소에 갈 수 있겠어. 호오호오~! 이거, 그 뿐이 아니겠는걸? 텔레포트 이외의 마법들도 사용할 수 있겠 어! 영혼이라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들어가고 싶은 곳에 들어갈 수 있으 니까. 즉, 의자나 집. 심지어는 마나에도 내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겠어. 마나에 동화된다라... 이거 꽤 매혹적인데?' 시간 때우기라고 생각했던 영혼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내게 흐르는 시간을 잊게 만 들었다. 즉 내 주변에 이미 원래 있던 양의 마나가 그대로 채워져 있었지만, 난 그 걸 미처 느끼지도 못한 채 시간 때우기라고 생각했던 생각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 다. '마나에 동화되면, 드래곤 하트가 문제가 아니겠군. 이 세계에 퍼져 있는 마나가 모두 나의 것이 되어버리니 드래곤 하트보다 낫지 않겠어? 당연히 무한한 마나를 얻게 되는 것이겠지. 내가 마나고 마나가 내가 되는 거니까. 그리고, 내 몸을 내가 움직이는게 되니까, 마나 역시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로 성질 변화를 시킬 수 있겠 어! 크큭, 이건 내가 꽤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내 자신이 마나가 되 어버린다면, 지금까지 보다 훨씬 신속하게 내가 원하는 강력한 마법을 실현할 수 있겠어. 문제될게 없겠군! 아무것도.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니까. 오옷, 이거 대단한 발견이야~!' 길었던 생각을 결론과 함께 끝마치며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단순한 몸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생각이었지만, 꽤 거창한 결론을 도출해냈기 때문인지 난 자신과 내가 생각해낸 것들에 대해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재밌어. 가능하다면 하고 싶은걸? 이 몸만 없다면 말야. 몸만 없다면... 그리고 영혼을 내가 제어할 수 있다면 좀 전에 생각했던 것이 불가능하리란 법은 없지. 그 럼~!' 재미있는 발상에 나는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노가 말한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 내 생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거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겠는걸?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소용없 을지 몰라도 한번 해보고 포기하는게 나을테니까!' 한번 결심이 서자, 나는 몸 치료는 뒤로 한 채, 영혼과 몸을 분리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시도가 될 수도 있었지만, 난 이런 행동을 황당하다 는 말 한마디로 묵살해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는 그것이 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전혀 진전이 없잖아?' 몸의 변화도 어떤 낌새도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괜한 행동을 한게 아닌가?하는 생각 이 고개를 드는 걸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그 행동을 포기하지는 않 았다. 뭔가 현 상황에 대한 돌파구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찝찝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죽은 사람만이 가능하다잖아? 난 살아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안됐던 것이겠지. 자연의 섭리 상, 육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때, 영혼이 그 곳을 떠나니까 말야. 난 아직 움직이니 떠나지 못했던 것이겠지, 다른 이유는 없었 을 거야. 흠~. 그럼 육체를 죽여야... 아냐아냐, 그럴 수는 없지. 이렇게 마음에 드는 몸을 그냥 그대로 버리기는 너무 아깝잖아? 영혼만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싶 은 마음은 없으니까... 난 단지 영혼만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은 거잖 아? 흠~, 어떻게 해야 하지?' 한번 생각이 막히자, 수 만 가지의 의문들이 연속해서 떠오르며 두껍게 막힌 눈앞 의 벽을 허물려고 했다. '몸이 죽는다. 실제로 죽일 수는 없으니... 생각으로만 죽여볼까? 생각! 즉, 영혼 이 자신을 담고 있는 몸이 죽었다고 느끼면 몸에 대한 구속력은 사라지고, 몸을 죽 이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영혼은 주변의 모든 것들과 동화될 수 있겠지? 오오~예 ! 그럼 되겠는걸?' 여러 가지의 생각들 중, 하나가 두꺼운 벽에 구멍을 뚫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생각을 정리해 나간다면, 눈앞의 두꺼운 벽은 형체를 감출 것만 같은 느낌도 함께 말이다. '내 몸이 죽었다. 즉, 내가 죽었다라는 것을 자신에게 납득시켜야겠어. 그래야 자 유로워질 수 있을테니...' 벽의 구멍에서 쏟아지는 하나의 빛줄기를 좀더 크게 만들기 위해, 나는 눈을 감은 채, 나를 죽이기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내 몸에 검을 대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의 나를 즉, 영혼과 육체를 묶어두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향해 검을 든 것이다. '죽어, 죽어, 죽어...' 나를 따뜻하게 감싸던 태양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지만 태양은 그 후, 몇 번이나 더 내가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규칙적인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었 다. 물론 그 동안 나는 한눈팔지 않고 수많은 나를 생각 속에서 죽였고... 솔직히 얼마나 많은 나 자신을 생각 속에서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죽여도 저건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시간 낭비와 같 은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양과 달이 번갈아가며 나를 지켜본 지 4일 째 되는 날, 나는 작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자신을 죽이는 일을 반복하던 나는 어느 순간 상상 속에 존재 하는 날카로운 검에 공포심을 느꼈다. 저 검이 내 몸을 가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과 함께, 두려운 감정이 생겼던 것이다. 상상 속일뿐이라는 생각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듯, 생각 속의 내가 실제의 나라도 된 것처럼, 나는 생생한 느낌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두렵다. 무섭다. 하지만 이 검을 멈출 수는 없다.' 검 날이 내 목을 빠르게 긋기까지 난 엄청난 두려움에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죽기 싫다는 생각과 검과 함께 움직이는 손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공포심에 휩싸였던 나는 편안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 뒤의 안락함을 셀 수도 없이 느낀 나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검을 쥔 손의 망설임도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한 단계, 한 단계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나는 생각 속에서 하나씩 허물을 벗듯 발전해갔다. 육체와 영혼이 떨어지지 않게 꼭꼭 묶어둔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상상 속에서의 나는 수 차례 다시 태어났고, 수 차례 다시 죽어갔다. 모든 생과 죽 음은 내 관할이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그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상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도... 이때 나는 내 몸의 변화를 미처 알지 못했었다. 상상 속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실 제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매듭을 풀기 전까지는... <연금술사>-44-3 폴보트 연합에 도착한 미드 아르엘 대공은 아들을 저택에 남겨둔 후, 엘벤트와 함 께 곧바로 법황이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앞으로 연합이 취해야 할 일에 대해 법황 과 회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투 왕국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회의를... 단 미드 아르엘 대공이 참석한 회의는 그와 법황, 단 둘 뿐이었다. 왕국과는 달리 연 합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대공과 법황 단 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만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대공, 왕국 쪽에서 지금 우리 연합군의 군사를 모두 내쫓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강력한 기사들을 쓰는 것으로 봐서, 예전 드루젤이 왕위에 올랐을 때, 우 리 군사들의 대부분을 몰살시켰던 의식 없는 기사들을 투입시킨 것 같소. 그 뿐만 이 아니오. 그들은 내 아들의 팔을 잘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측 중요 인물들을 하 나 둘씩 모두 죽였소. 도와주려고 보낸 이들을 말이오!" 법황의 질문에 미드 아르엘은 열을 올리며, 유투 왕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 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법황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그 는 침까지 튀기며 말을 이었던 것이다. "허허, 그들이 기어이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 한단 말입니까?" "아마 그럴 것이오. 마족이라는 존재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우리를 내쫓은 것 을 보면, 확실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오." "마족? 지금 마족이라 했습니까?" 법황은 대공의 말에 잠깐 두 눈빛을 빛냈지만 대공은 미처 법황의 그런 변화를 알 아보지 못했다. "그렇소. 몇 백년 전에 사라진 마족을 대뜸 꺼내 그들 때문이라고 말을 하다니! 이 건 연합군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이기게 도와준 우리를 무시하는 것 이오. 우리 군사들이 서로를 죽였다니!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하시오? 분명 이번 일은 왕국이 중간에서 교묘한 수작을 부린게 틀림없소. 즉 그들은 우리를, 폴보트 연합을 은연중에 무시하며 바보취급하는 것이란 말이오." 미드 아르엘은 이미 전쟁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것인지 강렬한 적의를 나 타내며, 법황의 의견의 유도했다. 하지만 법황은 마족이라는 단어만을 곱씹을 뿐, 미드 아르엘의 말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 보시오. 법황!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기나 하는 것이오? 유투 왕 국은 우리와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오. 비겁한 수단을 써서 연합의 힘을 무너뜨린 다음에 말이오. 이대로 당하고 있어서야 되겠소!" "음~. 마족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그런단 말씀이지요?" "그렇소!" "뭐, 어차피 발드르 님의 세상을 만들려면 전쟁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발드 르 님의 뜻에 대항하는 마족과 힘을 합친 유투 왕국이라면 말이오! 그들에게 갱생 의 기회를 이번 전쟁으로 주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 "음... 알겠소. 법황께서도 역시 왕국과의 전쟁에 동의하셨다고 생각하고 일을 처 리하겠소." 미드 아르엘은 법황이 마족이라는 거짓의 말을 사실로 믿듯 말하는 이유는 몰랐지 만, 그의 입에서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자 머릿속에 맴도는 궁금증을 날려버렸다. 평화의 신을 모시는 그의 입장에서 마족이라는 말 자체를 입에 담는 이들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인종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럼, 나는 사람들에게 회의의 뜻을 전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단 둘만의 회의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쪽으로 의견 합일 을 본 그들은 바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회의를 빠르게 마친 것이다. 하 지만 법황은 회의의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평화의 신, 발드르를 모시는 신자 같 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크큭, 그분께서 평화로운 대지를 만드신다는 뜻이 이런 의미였나? 하긴, 마족들 이 판을 치지 않는 이상은 발드르님의 권위가 서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 라진 마족들을 다시 불러들이다니... 뭐, 그들이 위험하긴 하지만, 그분께서 알아 서 처리하실게 뻔하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몇 백년만에 찾는 신전의 권위 가 될테니까." 법황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했 다. 그런데 그런 발걸음과 밝았던 표정은 자신의 방문을 열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 졌다. 평소보다 더욱 어두워진 자신의 방을 바라본 그는 자신이 기다리는 누군가가 이미 이 방에 들어와 있을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존경하고 모시 는 위대한 분이... "오..오셨습니까?"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며 버황이 단 하나 켜져 있는 촛불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 겼다. "......" "오늘... 미드 아르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신의 깊은 뜻을 조금 엿볼 수 있었습 니다." "내 뜻?" 침묵을 지키던 어둠 속의 인물은 법황의 말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 는 그의 말에 어둠의 존재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네, 당신께서 마족들을 이용해 평화의 대지를 만드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족이라고 했나?" "네." "미드 아르엘이... 마족에 대한 언급을 했단 말이지?" "네. 하지만 그는 마족의 존재를 믿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마족이라는 말로 연합국에 겁을 주려는 속셈인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호오~, 그렇다는 것은 너는 믿고 있다는 말이고?" "네? 설마...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맞다. 내가 마족들을 갇혀 있던 곳에서 나오게 만들었지. 그들을 이용하면 계획이 더 빛을 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지." "아, 역시 당신께서..." 법황은 자신의 생각이 모두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둠 속의 인물이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계획을 망쳤지. 유투 왕국 에서 일어난 일도 그들이 내 계획을 망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음... 그랬군요. 하지만 그들이 인간들을 죽이며 활기 칠수록, 신전의 권위와 발 드르님이신 당신의 권위가 높아지는게 아닙니까? 과거 몇 백년 전, 마족들이 세상 에 활기칠 때, 이곳 발드르 신전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장소였는지 아시지 않 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활기 칠수록 우리들에겐 이득이 된다는..." "후훗, 그런 건가?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럼, 마족들을 내버려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법황은 혹시나 어둠 속의 존재가 마족들을 모두 잡아 가두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확인 질문을 던졌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하지만 유투 왕국 측에서 그들을 내버려둘지는 잘 모 르겠다." "으드득. 왕국 쪽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미드 아르엘과 상의한 끝에 왕 국과의 전쟁을 다시 하기로 결정했으니, 그들에게 그런 시간은 없을 겁니다." "후훗, 그래. 그럼 평화의 대지를 만드는 일에 계속 힘을 쓰도록 해라." "네!" 법황은 모든 일이 척척 진행되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생각한 평화의 대자로 가 는 길이 그리 멀지 않은 것만 같은 생각에 그는 마음이 들떴던 것이다. 하지만 그 런 마음은 갑자기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척에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누구냣!" 그가 모시는 존재가 아닌 다른 누구! 법황은 어둠 속에서 다른 존재를 느끼고는 목 청을 높였다. 그러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존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법황에게 보여줬다. "너..넌!"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란님." "엘벤트...구나. 하긴, 대공이 돌아왔으니, 너 또한 같이 오는게 당연한 일이겠지. " "예. 근데, 설마 제가 좀 전에 본 상황이 진실은 아니겠지요? 어둠 속에서 카란님 과 대화를 나눈 이는 분명 악한 존재가 분명했는데..." "음. 봤단 말인가? 네가 봐서는 안되는 것을? 내가 하려는 일은 중대한 일이다. 발 드르님의 평화를 만드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 일에 방해 요인이 있어서는 안되지." 법황은 뭔가를 결심한 듯, 나직한 웃음을 지으며 엘벤트를 쳐다봤다. "서..설마 그 말뜻은 저를 제거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악한 존재와 계약이란 것을 맺은게 사실이라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악한 존재라니! 그 분은 바로 발드르님이시다!" "카란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언제부터인가 카란님께서 자비보다는 파괴를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그 악한 존재를 발드르님이 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나요? 그런, 말도 안되는!" "시끄럽다! 그 분은 평화의 대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시다! 그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것쯤은 지상 낙원을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카란님! 발드르님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지상 낙원이라 함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 그 자체입니다. 낙원을 만들기 위해 살생을 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가 뜩이나 전쟁은!" 엘벤트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법황이 이질적으로 변한 것에 대해 분노하며 목청 을 높였다. 자신이 우연히 이 방에 들어와 법황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계속 그의 손에 놀아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전쟁을 일으키셨던 일 뒤에 카란, 아니 당신이 있었다니! 당신은 더 이 상 발드르님을 모시는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당신에게는 법황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 다!" 배신. 엘벤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이가 이렇게까지 타락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악한 존재를 도와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그의 존재에 대해! "설마, 왕국에서 연합군의 사람들이 죽어간 것도 당신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설마 그런 것입니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이 썩은 대륙이 낙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 성한 피로 한번 대륙을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발드르님의..." "그만! 더 이상 그 더러운 입에서 발드르님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 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이기는 하나, 그 이전 전 발드르님을 모시는 신자! 당신보 다는 발드르님이 제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분을 모욕하는 행동을 하 는 당신을... 아무리 제 스승이라고는 하지만, 당신을 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크큭, 네가 용서를 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어차피 나도 너를 살려 서 이곳을 내보내려하지 않았으니까. 이로드!" 법황은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로드를 불렀다. 오직 자신의 명령에만 움 직이는 그에게 엘벤트의 목숨을 빼앗으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요즘 들어 이상하 게 신성 마법 쪽의 힘이 현저히 준 그는 엘벤트를 상대하기 위해 이로드를 부른 것 이다. 냉정한 판단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는 그라면, 아무런 질문 없이 엘 벤트를 처리해줄 것이므로.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이로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로드!" 법황은 그 후, 몇 번이나 커다란 목소리로 이로드를 불렀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그와 이로드 사이를 막고 있는 문이 열리지 않기라 도 하듯.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 법황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성 마법을 제대로 사용 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축복의 반지 위니아를 갖고 있는 엘벤트를 확실히 이길 자신 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이로드를 내세워 엘벤트를 제거하려던 법황. 하지만 그는 회심의 미소를 거두며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아야 했다. 물론 엘벤트는 법황과는 반대의 입장으로 변했고... "당신의 호위를 자청하는 이로드는 어디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군요. 저를 없애려 하신다면, 당신이 직접 손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두근. 엘벤트는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매우 떨고 있었다. 자신보다 모든 것이 월등 한 위치에 있는 법황을 상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위니아를 바라보며, 엘벤트는 발드르님의 축 복을 생각했다. 자신의 손에 축복의 반지가 끼어져 있는 한,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발드르님의 축복은 자신을 향해 있을거라는 생각으로 불안감을 씻기 위해 서였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너를 상대해야겠구나. 어디 그 동안 얼마나 실력을 쌓 았나 직접 확인해 볼까? 함(harm)~!" 법황은 상황의 불리함 때문인지 흐릿한 회색의 마나를 이용한 선제 공격으로 엘벤 트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헉, 발드르님의 이름으로... 크윽!" 타타타탓! 간단한 마법은 주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법황. 그의 공격 마법은 주문 을 외워야만 하는 엘벤트의 몸에 깊진 않지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성직자들의 마 법은 대부분 치료와 보조 마법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공격 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의 마법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약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엘벤트의 경우는 보호 마 법을 채 시전하기 전이었기에 약한 공격으로도 꽤 옷이 너덜너덜해 지고 말았다. "이건?" 그러나 엘벤트는 자신의 상처 입은 몸을 보고 괴로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쁜 표정 을 지었다. 법황의 공격에 정통으로 맞은 그의 가슴이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설마 했는데, 신성마법에 대한 능력이 떨어졌군요? 저번 위니아에 손을 대지 않으 려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긴 했는데... 그 자 때문이겠죠? 사악한 그 자를 발드르 신이라 믿으며 따랐을 때부터?"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며 엘벤트는 그 사이 자신을 공격한 법황을 쳐다봤다. "헉헉..." 가쁜 숨을 내쉬는 법황. 좀 전의 공격이 그에게 꽤 큰 무리를 줬는지, 법황은 허점 투성이인 엘벤트에게 제2의 공격을 날리지는 못한 채,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 다. "...내가 이렇게 힘을 못쓰는 이유는 물론 네가 말한 것이 맞기는 하다. 발드르님 을 직접 모시기 시작한 다음부터 이렇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내가 지상 낙 원을 만들기 위해 짊어지고 가는 짐의 일부일 뿐이다. 피로 대륙을 깨끗이 씻어야 진정한 신도들만이 있는 발드르님의..." "그만! 아직도 그 소립니까? 그 자는 발드르님이 아니란..." "시끄럽다! 너와 나 사이에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텐데?" 엘벤트는 쇠약해진 법황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얻었다. 저런 상태라면,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법황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것이 엘벤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 쇠약하 게만 보였던 법황은 그 뒤, 빠른 공격으로 엘벤트를 여러 번 위기에 빠트렸다. 몇 십 년이라는 경험의 차이가 법황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엘벤트의 경우, 법 황과는 달리 공격마법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더더욱 불리한 위치였고... 타타탓! 파파파팟! 엘벤트가 법황의 공격에 쓰러지기 전까지 그 곳은 끊임없는 격 타음과 주문을 외우는 엘벤트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크큭, 하아~. 이제 그만 가줘야겠다. 공격마법을 허술히 한 너 자신을 원망해라." 법황은 성한 곳이 없는 몸을 바닥에 질질 끌며 뒤로 도망가는 엘벤트를 바라본 후, 마지막으로 남겨둔 힘으로 엘벤트에게 최강의 공격마법을 선사했다. "발드르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신의 뜻을 거역하는 이에게 신성한 손이 응징을 가하리라, 플라잉 피스트(flying fist)~!" 신성마법밖에 모르는 법황. 하지만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공격 마법이라고는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엘벤트에 게 이기기도 힘들만큼.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법황은 마지막 힘을 남겨뒀다. 움 직이지 못하는 적에게 가하는 공격이라면 한번 정도는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 낭비로 볼 수 있는 체력 소모전까지 하면서 그는 엘벤트를 움직이거나 방어하지 못 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황의 계획은 맞아떨어지는 듯 싶었다. 법황의 입 에서 최강의 공격 마법이 시전됨과 동시에 엘벤트의 목숨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하 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벤트에게로 향하던 거대한 주먹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엘벤트의 손이 번쩍이는 빛을 내자마자, 바로 방향을 틀어 법황에게로 튕겨져 나갔다. 엘벤트가 끼고 있는 축복의 반지 위니아가, 법황의 공격을 반사시 키기라도 하듯, 같은 신의 공격을 모두 막아버린 것이다. 휘익~!, 쿠쿠쿠쿵! 하늘에서 떨어지던 거대한 주먹은 그대로 방향을 대각선으로 틀어 법황을 향해 날 아갔다. 발드르 신의 힘이 들어 있는 위니아를 끼고 있는 자에게 발드르 신의 힘을 빌려 쓴 공격은 통하지 않는 듯, 법황의 공격은 오히려 엉뚱한 인물을 공격한 것 에 대한 벌을 받듯, 자신의 공격을 되돌려 받은 것이다. "크아~~악!" 가로 세로, 족히 3m 씩은 되는 듯한 거대한 주먹이 마지막 힘까지 짜낸 법황의 몸 을 그대로 내리쳐 버렸다. 비스듬하긴 했지만 주먹이 지나간 자리의 바닥은 모두 10Cm 이상은 족히 파진 매우 강력한 공격이었기에 법황은 몸의 반이 부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법황은 그 상황을 미처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이런 일이 어떻게?" 엘벤트는 자신과 떨어진 곳에서 생겨난 폭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경악하고 말 았다. 자신에게 왔어야 할 법황의 마법이 자신이 아닌 법황 자신에게 떨어졌기 때 문이었다. 몸의 반을 잃은 법황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허공을 쳐다볼 뿐 이었다. "호..혹시, 위니아가?!" 자신이 손을 쳐들어 법황의 공격을 막으려 한 사실을 떠올린 엘벤트는 그럴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반지를 쳐다봤다. 법황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마지막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을 때... '어째서... 어째서? 내 손에 피가 묻어 신성마법의 위력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엘벤트에게 보낸 공격이 내게 돌아온 것이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법황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게 만 들었다. 이미 살 수 없는 그가 되었지만, 의문을 풀기 전까지는 쉽게 죽을 수 없다 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사라진 줄 알았던 어둠 속의 존재가 법황 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해줬다. <궁금한가? 네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 어둠 속에 있었던 존재는 법황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그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해줬다. 마치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난 네가 이미 말한 적이 있었다. 난 발드르 따위가 아니라고. 하지만 넌 그 말을 믿지 않았지. 아니 오해한 건가?> '서..설마?'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끈을 잡으며 법황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었나? 크큭. 난 너와 계약한 마족에 불과하다. 우리와 관계가 안 좋은 신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런 친절한 설명은 네 목숨이 끝 나기 전까지는 해줄 필요가 없었지만.> '그..그런!' <인간이란 동물은 언제나 목숨이 끝날 때, 후회를 하더군. 지상 최고의 성자라는 너조차도 말이다. 아니 나와 계약을 맺을 걸로 봐서는 사람들이 너를 성자라고 생 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군. 그렇지 않나, 카란?> '당신이... 당신이 발드르님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아~, 평화의 대지를 만드는 일 말인가? 물론, 거짓이었지. 쉽게 말해 넌 내게 이 용당했던 것이다. 마족이 왜 마족이겠나? 인간들의 말을 따르자면, 자신들을 속이 고 자신들의 피를 흘리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가짜 계약이라는 것을 하면서 말 이다. 그걸 모르는 너 같은 광신도들은 오히려 마족들의 좋은 먹이감이 될 수 있지.> '그럼, 내가 틀렸다는? 내 수제자인 엘벤트가 맞았다는?' <당연한 것을 묻고 있군. 네 잃어버린 몸의 반쪽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네 가 틀렸다는 사실을? 물론, 내 계획이 완벽했기에 네가 그런 실수를 범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넌 발드르를 모욕한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의 분노를 받 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결과는 네가 자초한 일이다. > 즐거운 듯한 상대의 목소리에 법황은 의욕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의문을 제 시했다. 자신의 엄청난 실수로 인해 지상 낙원이 아닌, 지상 지옥을 만들어 버린 법황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내게 그런 것들을 말해주는... 거지?' <그건 간단하다. 너와의 계약을 모두 지킬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면 될까? 내가 필 요한 부분까지 이용하다, 쓸모 없어지면, 방해물을 제거하듯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뭐,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너 같은 인간에게 대답을 해주는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솔직한 이 유는 내가 인간들끼리 싸워 죽이는 모습을 즐기기 때문이니까. 물론 그 싸움을 붙이는 것은 내가 되어야 하고! 크하하하.> '그런...!' 자신이 신이라 믿었던 존재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인지 법황은 분노에 이를 갈고 싶 었다. 하지만 의식을 유지시키는 것조차 힘든 그에게 그런 일은 무리였다. 그저 꺼 저가는 의식으로 단어 하나를 겨우 만들어낼 수 있을 뿐. <아, 아직이다. 그동안 내 뜻을 잘 따라준 네게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지. 이대로 널 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만, 난 이만 바빠서 가겠다. 더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 그럼, 삶의 마지막을 괴로움에 몸부림 치라고~! 크하하하.> 법황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지는 존재를 느끼며 의야한 생각이 들었 다. 이 상태가 된 자신을 무엇으로 더 괴롭힌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둠 속의 존재가 사라지자마자, 굳 게 닫혀, 전혀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부서지듯 열린 것이다. 콰쾅! "헉, 카..카란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는 이로드였다. 그는 아무리 해도 열리거나 파괴되지 않는 문을 법황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부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이상하게 문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갑자기 문이 버럭 열리기 전까지 는... "네가... 네가 카란님을 이렇게 만든 것이냐?" 이로드는 문이 열린 직후, 법황의 모습에 경악하며,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쓰러진 법황을 살리려는 듯, 급하게 이로드는 뛰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검술밖에 없었기에, 그는 죽일 듯 노려봤다. 사실 이로드에게 법황은 발드르신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생명을 구원받은 적 이 있는 이로드에게 법황은 어버이인 동시에 그만의 신이였던 것이다. 이로드에게 그런 존재인 법황이 죽어가고 있었으니, 그의 분노가 엘벤트를 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방안에는 그와 법황 둘뿐이었으니까. "죽어라~~앗!" 이로드는 상대게 법황의 수제자라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법황에게 상처 를 입힌 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무리 법황의 수제자라고 해도! 그리고 그는 사건의 진위를 가리려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법황이 저렇게 된 이유는 엘벤트 때문이 확실히 알 수 있었기에... 다다다다닷! 이로드의 몸은 법황의 곁에서 순식간에 엘벤트가 있는 곳으로 쏘아져 갔다. 그리고 그런 이로드를 바라보며 엘벤트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몸을 끌어 당 겨,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폴보트 연합에서 데칸티스와 겨룰 수 있을 정도, 아니 그 이상의 검술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로드였기에 엘벤트는 다친 몸을 이끌고 일어서야만 했던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쉽게 당 할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제대로 된 공격 마법을 하나 사용하려면, 긴 주문을 외워야 하는 엘벤트에게 그런 행동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빠른 움직임과 검술을 갖고 있는 이로드에게 엘벤트는 앉아 있든, 서 있든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이 다. 그저 검을 한번 가볍게 휘두르면,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이 이로드 에게는 있었기에... 그러나 이로드는 자신의 분노를 가득 담은 검으로 엘벤트의 몸을 벨 수 없었다. 갑 자기 들려오는 법황의 목소리에 그의 모든 움직임은 시간이 멈추듯, 일시에 딱, 멈 추고 만 것이다. "이로...쿠..쿨럭..." 그리 큰 목소리라고는 이로드는 살아서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법황의 목소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엘벤트에게로 향하던 검을 바로 거둬들였다. 자신의 실력이 라면, 엘벤트의 목숨은 그가 원하는 순간 세상과 작별을 시킬 수 있었기에, 지금 순간 그는 엘벤트 보다는 법황을 선택한 것이다. "카..카란님! 말씀하시리 수 있으시겠습니까? 엘벤트! 네 놈이 살고 싶다면, 어서 카란님의 몸을 치유해라! 네 실력이라면, 카란님을 살릴 수 있을 것 아니냐!" "하..하지만!" "엘.벤.트!" 이로드의 살기 어린 말에 엘벤트는 쓰러질 뻔한 몸을 다시 일으켜 법황에게로 다가 갔다. 엘벤트는 평화와 자비의 신 발드르를 모시는 신자였기에, 법황이 아무리 자 신이 공격한 인물이었다고는 해도, 죽어 가는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의 마 음 역시 법황을 치료하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엘벤트는 이로드의 말에 발길을 법황 쪽으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몸의 반을 잃고, 생명의 불이 꺼져 가는 심지에 마지 막 기름을 부은 법황은 엘벤트의 힘으로 살려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이 미 초인적인 정신적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엘벤트는 법황을 치료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거두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이었던 법황임을 알기에, 죽는 순간 그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중도에 잘못된 길로 갔다고는 해도... 그래서 엘벤트는 자 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 마법으로 법황의 꺼져 가는 심지에 보호막을 쳐줬다. 바람이 불어 생명이라는 불씨를 꺼트리지 않게 하기 위해... "카란...님." "시끄럽다! 네가 카란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지금 이 분을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엘벤트의 말에 이로드가 발끈하며 열을 올렸지만, 법황의 말 한마디로 그의 성난 모습은 그대로 수그러들었다. "그만...하거라. 그리고 엘벤트. 죽어 가는 내게 시간을 줘서 고맙구나. 너를 죽이 려던... 나였는데..."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 발드르님의 뜻을 펼쳤을 뿐입니다. 카란님께서 그렇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역시... 쿨럭, 쿨럭." "카란님!" 이로드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숨 넘어가는 기침을 하는 법황을 붙잡았다. "쿨럭, 쿨럭. 이로드야..." "네." "넌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란다." "오해라니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잉과응보란다... 내가 엘벤트를 공격하려다, 발드르님의 벌을 받게 된 것이지... 암, 이게 모두 내가 뿌린 씨앗에 대한 일이란 말이다." "카란...님?" 엘벤트는 갑자기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법황의 모습에 의야함을 감출 수 없었다. 죽는 순간이 되면, 모든 잘못을 깨달으며, 잘못된 과거를 후회한다고는 했지만, 이 건 너무도 갑작스런 변화였기 때문이다. "엘벹트... 난 그 자가 정말 발드르님이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자는 단지 마 족이었을 뿐이었다. 전쟁을 일으켜... 피를 보려는 마족..." "마족!" 엘벤트는 이곳 저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법황의 말을 듣고 크게 느끼는 점 이 있었다. 마족이라는 존재가 대공의 말처럼 거짓이 아닌, 유투 왕국의 말처럼 진 실이라는 것을... 그는 크게 깨달은 것이었다. "전쟁은 일으켜선 안 된다. 대공을... 대공을 말려라. 더 이상 커다란 죄를... 지 을 수 없으니... 대공을... 쿨럭!" "카란님! 괘..괜찮으십니까? 엘벤트! 대체 치료를 어떻게 했기에..." "이로..드..."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카란님께서..." "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엘벤트가 내게 시간을 준 것이니 고마워해야지... 난 내 자신을 죽이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엘벤트 때문에..." "이로드!" "알겠습니다." 싸늘하게까지 보이는 이로드였지만, 법황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로드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법황인 자신을 살릴 수 있다면, 충분히 그럴 녀석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 문인가? 법황은 명령조의 어조로 이로드에게 당부의 말을 건냈다. 꺼저가는 마지막 불씨로 그는 이로드에게 걱정되는 부분을 전한 것이다. "이로드, 넌 내가 죽더라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된다. 넌 내가 없는 이 발드르 신전 을... 지켜야 하느니라." "카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란님께서 죽는다는게..." "이건 명령이다. 내 죄를 네게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지만... 하아~, 네가 내 죄를 씻을 만큼... 이 신전에 공헌을 해줬으면...하는......." "카란니~~임!" "카란님!" 이로드는 법황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법황은 말을 하던 도중, 치료 마법 을 계속 걸고 있는 엘벤트를 무안하게 만들 생각이었는지, 중도에서 목숨을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이로드는 자신이 법황의 말을 막았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 말을 못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너무 저주스럽고,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법황을 따라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신이 자신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기 때문 에,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숨을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그는 자신 의 주인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을 명령 후로 미룬 것이다. 법황이 원하는 바 대로... "엘벤트, 가라. 가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다시 내 눈에 띄는 날이면, 넌 살 아남을 수 없을테니까. 카란님께서 너를 옹호해 준 것은 알고 있다. 그 분께서 인 과응보라고 하셨지만, 그분이 그렇게 된 것에는 네가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 분명 하니까! 가라! 가서 카란님께서 네게 말한 일, 즉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일 을 수행해라! 그것이 네가 살 길이 될테니! 물론 그 동안 나는 너를 도울 것이다. 카란님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넌 네 손에 끼어져 있는 그 반 지를 이용해 법황이 되라. 물론! 그것으로 진짜 법황이 될 수 없다. 진짜 법황은 카란님 뿐이니까. 넌 단지 흉내만 내면서 법황이라는 직위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로드는 반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법황의 피묻은 육신을 가슴에 안고는 엘벤트에게 싸늘한 말을 던졌다. "...고맙습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해주시겠다니...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전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그 일에 대해서는 걱 정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카란님의 일은..." "시끄럽다! 어렵게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다~앗!" 이로드의 절규에 엘벤트는 뭔가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최대한 빨리 미드 아르엘에게 찾아가 그가 내린 결정을 되돌려야 했기 때 문이다. <연금술사>-44-4 미드 아르엘은 유투 왕국이 연합국에게 한 행위를 대륙에 알리며, 연합국민들의 분 노를 불러 일으켰다.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는 국민들에게 미드 아르엘은 다시 전쟁 을 일으켜야만 하는, 즉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식시킨 후, 그들에게 자신의 행 동에 동조하게끔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미드 아르엘의 생각대로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명분 있는 전쟁이라고는 해도, 커다란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또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요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미드 아르엘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며 전쟁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폴보트 연합이 아닌 유투 왕국까지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생각을 더욱 탄탄하 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팔을 자른 유투 왕국을 응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데킨타스는 그와는 생각을 달리하는 듯, 그의 뜻을 반대하고 나섰다. 엘벤트가 그 의 치료를 마저 하기 위해 찾아온 이후, 데칸티스는 더욱 많이 횟수 그를 찾아와, 전쟁을 중단시키는 쪽으로 자신을 설득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드 아르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들이 팔을 잃은 것 때문에, 그 충격으로 잠시 피를 보고싶어하지 않아 않는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던 모양이다. 며칠 동안 계속 그를 찾아와 그와 뜻을 같이 하지 않을 거라며, 모든 것을 잊고 싶 다고 한 아들이 그를 떠난 것이다. 자신의 몸을 가누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기 힘든 데칸티스가! 땡땡~! 벽시계가 울리며 시간을 알려오자, 미드 아르엘은 매번, 아들이 자신을 찾 아오던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문을 열고 들어올 아들이 없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들과 열띤 공반전을 벌이던 그 시간이 말이다. "아버지, 제발 그만두십시오. 피를 흘려 얻은 대륙이 지금의 폴보트 연합보다 좋다 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땅은 누구의 소유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있는 땅을 쓰는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쓸데없이 피를 흘려, 그 땅의 주인이 되려 하는 것은 만용일 뿐입니다. 수많은 피를 필요로 하는!" 허전한 소매를 펄럭이며 열변을 토하는 데칸티스를 보며, 미드 아르엘은 아들이 일 어나 자신을 찾아 온 것에 대한 기쁨 보다는 슬픔을 느꼈다. "왜 내 생각을 이해 못하는 게냐? 이건 다 너를 위해서다! 왜 전과는 다른 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지? 엘벤트 군이 왔기 때문이냐? 그가 네게 이런 말을 하게끔 설득시킨 것이냐?" 전의 그 당당하던 아들이 팔 하나를 잃음으로 해서 180도 달라진 모습에 미드 아르 엘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엘벤트 때문이 아닙니다. 팔을 잘린 이후... 전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 팔을 잃은 후,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었던 저는 갑자기 지금껏 제가 해오던 신념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모든게 선명하게 보였 죠.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권위욕에 들어차, 사람들을 무시했는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이 제 자랑인 듯, 전 우월감에 빠졌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팔을 잃은 직후, 제가 무시했던 사람들은 제게 오히려 동정의 눈빛을 보내더군요. 세상을 모르는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 입니다. 그때 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을 핍박하거나 무시할 권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각들이 모두 바뀐 것이지요. 그런데 모두 같은 인간을 죽이다니요! 그것도 터무니없는 이유인 전쟁으로 말입니다. 팔이 잘 린 후,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일 땐, 느껴보지 못했던 생명의 소중함을요! 아버지, 제발 그런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느끼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버지의 욕 심으로 그런 일을..." "시끄럽다! 네가 이렇게 소심하게 변하다니! 옛날 커다란 포부를 지녔던 내 아들 데칸티스는 어디로 간 것이냐? 분명 저 엘벤트 녀석이 온 이후부터겠지." 엘벤트 군에서 바로 엘벤트 녀석으로 호칭이 바뀔만큼, 미드 아르엘은 화가 머리끝 까지 나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이 이런 꼴로 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소심해진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데칸티스는 자신이 싫어 하는 인간류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팔 하나를 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대공. 이번 전쟁의 배후에는 마족이 버티고 있습니다 피를 흘려 유투 왕국과의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폴보트 연합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조용히 하게! 또 그 마족타령인가? 왜 모두들 마족을 언급하며, 내게 겁을 주려는 게지? 마족은 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진 존재다! 그리니 그런 말로 내 화를 돗구지 말게나. 자네가 데칸티스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와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주제 넘는 발언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네! 이미 법황은 나와 뜻을 합쳐, 전쟁을 하 기로 했거늘, 자네가 무슨 힘으로 그 일을 막겠다고 나서는 겐가?" 언제나 데칸티스와 같이 자신을 찾아와 전쟁을 중단하라는 말로 자신을 설득시키는 엘벤트를 바라보며, 미드 아르엘은 그를 자신의 저택으로 부른 게 실수였다는 생 각을 강하게 했다. 그만 오지 않았어도, 그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속썩이지 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아버지, 마지막입니다. 정말로 전 오늘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설득하는 걸 그만 둘 겁니다. 그러니 한번만 더 신중히 생각해주세요." "오오, 데칸티스! 정말이냐?" 미드 아르엘은 아들의 뒷말을 싹 무시하고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앞의 말만을 들 었다. 그는 아들이 뭐라고 하든 전쟁에 대한 뜻을 굽힐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런데, 정말 멈출 수는 없는 겁니까?" "음... 네가 전쟁이 싫다고 하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이미 준비는 막바지에 들어 갔다. 이 상태에서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정령 네가 전쟁이 싫다면, 그 동안 어디 조용한 곳에 가 있으려므나. 그게 괜찮을 것 같지 않느냐?" "아버지..." 미드 아르엘은 자신의 뜻을 꺾는 것에 아들이 포기했음을 알고는 속으로 기쁨의 환 호성을 내질렀다. 아들이 그의 앞에서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기 전까지... 땡땡~. 정오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들이 없는 현실로...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어디 조용한 곳에 가 있으려고 떠난 것이겠지... 그럼, 그 렇고 말고. 녀석, 말이라도 하고 갈 일이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미드 아르엘은 애써 그런 사실을 외면 해 버렸다. 아들이 지금은 자신을 떠났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신에게로 돌아 올거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뭐냐? 결국 전쟁을 일으키겠단 말이냐?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던 미드 아르엘은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살며시 감았 던 눈을 번쩍 떴다. 문이 열리는 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그의 바로 코앞에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누..누구, 헉! 다..당신은?"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 때문에 미드 아르엘은 경계의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뜻 밖에도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이는 그와 안면이 있는 자였다. 긴 은발 머리와, 은색 의 수염을 늘어뜨린 기품 있는 노인은 바로 얼마 전부터 라피에르의 곁에서 그를 보좌해주고 있는 인물인, 키에라도였던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무단 침입이라고 할 수 있는 키에라도의 등장에, 미드 아르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몸을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 별거 아냐. 내가 봐주고 있는 녀석이 있는데, 귀찮은 부탁으로 날 달달 볶잖 아. 싫다고 해도 이 녀석이 며칠 동안 내게 사정 사정 하지 않겠어? 그래서 뭐, 그 일이나 해결하려고 온 거야." "그..그일?" 오른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해주는 키에라도를 보며, 미 드 아르엘은 뭔가 불길한 생각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키에 라도를 안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 노인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 마법 사인지 미드 아르엘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눈으로 직 접 본 그의 신위는 지금까지 그가 본 그 누구보다 뛰어났으니까! "그 일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아, 그렇게 떨지마. 간단한 거니까. 내가 귀찮아서 그런 거지 사실은 간단한 거야 ." 나름대로 무게를 잡고 평정심을 유지한 척 한 미드 아르엘이었지만, 키에라도는 떨 고 있는 그의 심정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미드 아르엘 에게 긴장을 풀라고 충고했다. "그 간단한게 대체 뭐냔 말이오? 이렇게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함부로 들 어오면서 하고자 하는 것이 대체..." "아, 그것 참 시끄럽네. 나도 오고 싶어서 온게 아냐. 그 녀석이 하도 에걸복걸해 서 내가, 응? 뭐야? 사람 부르게?" 키에라도는 문 쪽으로 다가가 사람을 부르려는 미드 아르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 로 저었다. "미안하지만, 이 방에는 내가 하나의 막을 씌워놨어. 즉, 그 막이 있는 한 저 문은 열리지 않을거고, 너와 나 또한 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지." "대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설마, 라피에르가 당신을 이곳에 보낸 이유가, 나를 죽이기 위함이라도 되는 것이오?" 미드 아르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안좋은 가능성. 결국 그는 키에라도가 설명해주 기 전에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하지만 키에라도는 그의 희망을 여 지없이 무너뜨리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알고 있었나? 꽤 머리가 돌아가는 걸?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네가 생각한 이유가 맞아. 녀석의 부탁이 너를 죽이는 것이었기에 내가 온 것이지... 뭐, 사실 그 녀석은 끝내 내게 부탁하면서도 나를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과 싸웠지만... 그 녀석은 비겁한 행동인 암살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거든~. 꽤 모순되지 않아 ? 너를 죽이라고 내게 부탁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을 자해하는 그 녀석이 말야. 어떻게 보면 마음이 여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독한 것 같기 도 하고 말야... 하지만 라피에르 그 녀석은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거절하는 내게 매달리면서 눈물 을 흘렸어. 널 죽여달라고... 왜 인지 아나? 그건..." "......?" 키에라도는 혼자 중얼거리듯 미드 아르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이야기를 계속했 다. 석연치 않은 일을 하기 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연 키에라도였기에, 그 는 미드 아르엘의 얼굴을 쳐다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이 이야기는 상대 에게 설명을 해주는게 아닌,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하는 이야기였으므로... "그건 바로 백성들의 피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전쟁의 참옥함을 경험한 그 녀석은 다시 그와 같은 지옥을 백성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지.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야. 그럼, 그럼... 백성을 사랑하 는 녀석이니 그럴만 하지. 하지만 재수 없지 않아? 나이를 몇 살이나 먹었다고 쪼 그만 녀석이 나도 안하는 행동을 하냐고? 쳇쳇. 요즘 것들은... 마음에 안들어. 뭐 , 그 모습 더 보기 싫어서 내가 이곳에 온거지. 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지?" 키에라도는 혼자 중얼거리던 말을 끝내다 미드 아르엘이라는 존재를 생각했는지 고 개를 들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혼잣말이긴 했지만, 상대가 이해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죽이겠다는 말 아니오? 흥! 백성들의 피를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런 어둡지 않은 핑계로 날 죽이려는 당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 마시오! 전쟁에서 승리 할 자신이 없으니까, 당신을 이리 보내, 나를 죽이려는게 아니오? 수뇌가 없는 연 합국을 치는 것은 쉬운 일일테니... 왜? 나를 죽인 후, 법황도 죽이러 갈 것이오? 아니면, 벌써 죽이고 오는 길이오? 이런 비겁한..." 미드 아르엘은 자신을 죽이려하는 강력한 상대를 바라보며, 화가 나는 심정을 그대 로 토해냈다. 전쟁에서 승리해, 하늘 아래 최고의 자리에 오를 꿈을, 그리고 집을 나간 아들이 그런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꿈을 눈앞의 노인이 모두 빼앗아 가려했기 때문이다. "뭐, 법황에게 먼저 가긴 했어. 죽이려고 결정한 너보다는 설득할 수 있는 법황이 더 쉬웠으니까. 평화의 신을 모시는 그라면 전쟁을 싫어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 자 는 이미 세상이 존재하지 않더군. 신전에서 그의 존재가 사라진걸 쉬쉬하고 있긴 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이럴 수가... 법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드 아르엘은 키에라도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마족들이 판치 는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좀 너무한 면이 있거든?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 나면, 인간들은 대륙에서 살아갈 힘을 잃을지도 모르고 말야." "제길, 또 그 마족 타령이오? 왜 나를 보는 이들마다 마족을 언급하는 거지? 과거 몇 백년 전에 이미 사라진 그들을..." "누가 사라졌다는 거지?" "헉! 누구냣?" 흥분한 미드 아르엘과 키에라도는 밀폐된 공간에 나타난 제3의 존재에 놀라 저마다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미드 아르엘의 경우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기운을 내뿜는 존재 때문에, 그리고 키에라도는 자신이 만든 막을 자신이 모르는 사이 뚫고 들어온 것에 대해...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나도 꽤 놀란 상황이니까 말야." 검은 옷에 검은 긴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타난 사내. 그는 굳어 있는 두 명 의 인간들 사이로 걸어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유투 왕국의 그 꼬마가 내 뒤통수를 칠 줄은 예상치 못했지. 내 계획을 망치려는 녀석들이 마족 이외에 또 있을 줄은 말다. 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곳으로 온 건 데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 "마..마족? 서..설마 아슬란?" 천천히 미드 아르엘에게로 다가가는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던 키에라도는 떨리는 손을 불끈 쥐며 질문을 던졌다. 강한 방어막은 아니라고 해도,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기척도 없이 뚫고 들어온 상대에 대해 키에라도 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호오~. 역시 강한 인간들은 내 존재를 단번에 알아보는군. 내 도움이 필요한 멍청 한 인간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데 말야. 하지만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의외 였어. 내가 그렇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나?" "으드득." 여유롭게 말을 받는 아슬란을 바라보며, 키에라도는 큰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그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달리 미드 아르엘은 꽤 밝은 표정으로 아슬란을 쳐다봤다. 마족이란 존재를 조금 전까지 부정하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나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기운을 내뿜는 아슬란의 모습에서 미드 아르 엘은 마족의 무서움을 기억해 냈는지 끊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도움? 당신이 저를 도와준다는... 말씀 이십..니까?" "뭐, 그렇지. 이곳에서 네가 죽어서는 안되니까." "흥! 그 이유는 전쟁이 멈추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소리냐?" 아슬란에게 미드 아르엘을 빼앗긴 키에라도는 자신이 너무 여유를 부렸다는 것을 후회하며, 몸 안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언제라도 아슬란이 빈틈을 보이면, 바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키에라도의 모습 에도 아슬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키에라도를 무시한 채, 여전히 미드 아르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물론, 난 전쟁이 계속되길 바란다. 어때, 인간이여. 너 역시 전쟁을 하고 싶지 않 은가? 내가 폴보트 연합을 전쟁의 승리국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러니..." "웃기지 마라! 전쟁은 일어나선 안되는 것이다." 슈슈슝, 퍼벙, 퍼펑~! 키에라도는 미드 아르엘을 유혹하는 아슬란의 말을 막기 위 해 끌어 올렸던 마나를 그에게로 쏘아보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쳐놨던 막이 망가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으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을 아슬란에 퍼부었던 것이다. 한편, 리넨은 유투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숲 속에서 깨달음의 문을 열기 위해 마지막 도약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자신을 끊임없이 죽 여가던 리넨은 마침내 영혼과 육체의 마지막 매듭을 풀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 냈던 것이다. 호기심에 시작된 하나의 생각이 그의 현 상황을 180도로 바꿔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게 된 것은 이런 리넨의 노력 덕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지막 관 문은 그리 쉽지 않은 듯, 리넨은 며칠 째, 두 눈을 감고, 죽은 듯 누워 있어야만 했다. 뚝뚝.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리넨의 온 몸에서는 굵직굵직한 땀방울이 빠른 속도로 맺혀 그의 몸을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까지 살랑살랑 부는 숲 속에서 뭐가 그리 더운건지 리넨은 온 몸의 수분을 모두 쥐어짜듯, 비정상적인 양의 땀이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리넨은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마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 하기라도 하듯, 리넨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편하게 잠자듯 누워 있 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그곳에서 그치지 않았다. 몸의 수분이 모두 나왔는지 일순간에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던 땀이 딱 멈추더니, 건조하게 바싹 마른 리넨의 몸이 물을 발아들이듯,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더욱 신기한 일은 그 마나가 리넨의 몸에 닿자마자, 좀 전에 노폐물과 함께 섞여 나왔던 땀과 같은 액체 로 변해 흡수됐다는 거였다. 마치 사막의 모래가 물기를 흡수하듯, 리넨의 몸은 주 변의 마나를 끊임없이 빨아들여 부족한 수분을 보충했다. 우둑우둑. 액체로 변한 마나가 리넨의 몸에 들어가자, 미세하게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아 가던 엉킨 근육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육 뿐 아니라 어긋난 뼈까지도 흡수된 마나에 의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즉, 보기 흉하게 튀어 나왔던 리넨의 근육과 핏 줄, 그리고 어긋났던 그의 뼈들이 모두 제자리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리넨이 눈을 감고 영혼과 육체를 떼어내려는 노력을 한 이후, 꾸준히 진행되던 몸 의 변화가 마나를 흡수하면서부터 가속력이 붙은 듯, 빠르게 리넨을 원래의 모습으 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휘잉~~잉. 갑자기 그 주변에서 살랑살랑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 이 리넨에게로 흡수되듯, 빠르게 몰려들어 그의 몸을 띄우기 시작했다. 회오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 리넨은 회오리바람의 눈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파격적인 변화에도 리넨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편안한 자 세로 잠자듯,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이 된 것이기라 도 하듯... 그리고 그렇게 이상한 현상들은 그 후로도 계속 지속되는 듯 싶었다. 리넨이 두 눈을 번쩍 뜨기 전까지는! 번쩍! 평생 뜰 것 같지 않던 리넨의 눈은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떠 지며 주변의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일으켰다는 것을 증명 하듯, 리넨은 눈을 떠 모든 이상 현상들을 멈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리넨은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눈을 감기 전 불안한 눈빛으 로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보면... "...되..된건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리넨은 움직이지 않는 입을 몇 번 움직이고는 말을 내뱉 었다. "마..말이 나오잖아?" 마치 소리를 처음 내보는 아이처럼 리넨은 신기한 듯,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만 졌다. "헉, 소..손도 움직이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꽤 정교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혹시 누가 나를 치료해주기라도 한 건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 리넨이었지만, 이네 고개를 흔들며 그런 생각을 떨쳐버 렸다. "장소가 그대로인 걸로 봐서는 그럴리 없군. 그럼 대체 어떻게...? 설마 내가 하려 던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내 몸을 변화시키기라도 한건가?"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넨은 눈을 감고 조금 전, 자신이 성공했던 일, 즉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일을 시도하며 몸을 자연에 그대로 내맡겨 봤다. 마치 자신이 자연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의 원인을 찾기 위해 리넨 은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러자 라낸운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는 마치 몸 밖에서 자신의 몸을 관찰하듯,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신기하군. 모든 매듭을 푸는 순간, 눈앞이 하얀빛으로 변하면서, 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는데... 그게 꿈이 아니란 말이잖아? 내 몸을 보길 원하니 바로 몸을 볼 수 있는 걸로 봐서, 분명 내가 원하는 곳을 보려 한다면 순식간에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야. 게다가 내 몸의 겉모습 뿐 아니라, 그 안의 근육들과 세포 하나하 나 까지도 모두 보이니..." 리넨은 완벽하게 치료된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자신 의 몸을 바라보는 순간 몸이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몸을 구성하는 것 하나, 하나 가 자연의 섭리대로 움직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절로! "이건 분명 내 앞을 막던 한계를 뛰어 넘었기에 가능한 일일텐데... 자연과 하나가 되려 하자, 영혼은 따로 몸밖으로 나온 것 같고, 몸은 몸 나름대로 자연이 되어버 렸어! 설마 이게 10클래스는 아니겠지? 왠지 신의 영역 같잖아? 아, 마나! 마나를 끌어 모아보면 알겠지! 내 실력이 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야." 순간적으로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떠올린 리넨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마나를 끌어 모아봤다.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그는 희망을 갖고 그와 같은 일을 시 도한 것이다. 하지만 리넨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마나를 몸에 모을 수 없었 다. "이상하다? 여전히 안되잖아? 하지만 좀 전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은 가능할 것 같았는데? 프로시아가 없는 한, 마나를 모으는 건 안된다는? 흠... 아냐,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내가 자연과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때, 무한한 마나 가 모두 내 것이된 것 마냥... 자..잠깐!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시키기 전에 난 이 미 내 자신이 마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지. 저..정말 그게 가능 한걸까?" 자신의 몸을 거울도 없이 허공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리넨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구 체적인 존재, 즉, 마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자 그는 드래곤 하트 를 얻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마나를 가슴 벅찰 정도로 느낄 수 있었 다. "헉헉... 이..이건!" 리넨은 좀 전 그가 느낀 감정, 즉,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느낌에 숨이 막 힐 정도였다. 세상의 모든 마나가 그의 것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그를 휘감았던 것이다. "하아, 하아~. 이.. 이 마나를 모두 사용할 수 있긴 한 건가?"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느낀 그 모든 마나, 즉 세상의 모든 마나가 리 넨의 손길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꿈틀대며 리넨을 반겼던 것이다. 하지만 리넨은 무한한 마나를 갖고도 10클래스 이상의 마법은 시전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마음대로 될 것 같긴 했지만, 그것들을 실제로 리넨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리넨은 예전 9클래스였을 때보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있 었지만,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이거... 내가 잠시 미쳤었던 것 같군. 잠시 신의 영역을 본 것 같고, 신이 된거라 고 생각했으니 말야. 조금 그곳을 맛볼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말이군 아직은!" 리넨은 그 후, 몇 번이나 더 높은 경지로 가려는 몸부림을 쳐봤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자, 어깨를 으쓱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갑작스런 그의 변화도 대 단한 행운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리넨은 지금 얻은 능력만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 들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리넨은 자신이 얻은 결과에 만족 스런 미소를 지으며 앞머리를 뒤로 넘겨 땀을 닦았다. "내가 더 강해진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우선은 지금에 만족해주지. 지금은 더 높은 경지보다는 아슬란을 저지하는게 더 급하니까. 지금이라면 예전처럼 쉽게 당하지 는 않을꺼야." 리넨은 아슬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눈을 감고 아슬란의 위치를 찾 기 시작했다. 리넨은 이제 자연과 동화되어, 원하는 곳이 아무리 멀다 해도 코앞에 펼쳐진 것처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금술사>-44-5 라피에르는 갑자기 사라진 키에라도 때문에 안절부절못한 채, 유투시를 어슬렁거리 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서 리온과 크릭 역시 그의 불안감을 이어 받아 불안해하고 있었고... 하지만 라이너만은 다른 이유로 불안한 듯,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라피에르에게서 등을 돌린 채...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시 내가 너무한 부탁을 했기 때문인가?" 라피에르는 화까지 내며 귀찮아하던 키에라도를 떠올리며, 그가 사라진 이유가 자 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는 이유는 리넨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가 원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라피에르는 더더욱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하아~. 키에라도가 떠나셨다면... 그래서 왕국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모 두 내 탓이건만... 하아~." "저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심심하셔서, 어디 다른 곳에 바람 쐬러 가 신게 분명할 테니까요." "분명히 그럴겁니다, 저하. 그러니 너무 걱정하시지..." "그럴리 없다. 그 분은 형님의 부탁이 있은 후, 한 순간도 내 주변을 떠난 적이 없 지 않았느냐. 모두 내가 그 분의 영역에 존재하는 범위에서만 움직이셨을 뿐... 그 리고 유투시를 모두 뒤졌어도, 어디 그분의 흔적이나 찾을 수 있었느냐? 하아~, 이 건 모두 내 탓이다." 라피에르는 리온과 크릭의 말에도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키에 라도는 자신의 억지스런 부탁에 질려 이곳을 떠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지금까지 존재감 조차 느껴지지 않던 라이너가 몸을 돌려 라피에르 곁으로 다가간 것이다. "저하, 두 명의 사람이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으..응?" 사람들이 많은 유투 시에서 누군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지만, 라피에르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전한 라이너에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라이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말을 자신에게 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 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라피에르의 생각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많이 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사실로 판명 났다. "저들은 폴보트 연합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사제복을 벗은 엘벤트와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데칸 티스가 라피에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하아... 이거 운이 좋았군요. 저희는 저하를 만나는 것이 꽤 힘들 줄 알았 는데..." "엘벤트와 데칸티스? 어떻게 이곳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 적국이라 할 수 있는 폴보트 연합의 수뇌들이 자 신의 눈앞에 나타나자, 라피에르는 의야함을 감추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당장이라 도 손에 들린 검으로 상대를 찔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아무런 무기도 없이 유투 왕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투 시까지 들어오다니! "어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보시다 시피, 악의를 갖고 온 것은 아닙니다. 데칸티스도 과거의 일은 잊었으니까요." 라피에르는 엘벤트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데칸티스에게 돌렸지만, 그의 생각 과는 다르게, 데칸티스는 정말 리온과 크릭에 대한 분노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초탈한 사람처럼, 그에게서는 엘벤트와 같이 그 어떤 악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 조용한 곳으로 가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라피에르는 일행들과 엘벤트, 데킨타스를 이끌고 사람의 통행이 거 의 없는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은 분명 보통 이유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라피에르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매우 정확했음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인가? 마족이... 법황을?" "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줄 알지만 발드르님을 모시는 신전의 대 표자로 저하의 불안감을 해소해 드려야겠지요. 마족이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갔 습니다. 설마 마족들이 이 정도까지 세상을 어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유투 왕국에 이어... 이제는 폴보트 연합까지... 하지만 폴보트 연합을 이끄는 두 분들 중, 카란님의 영향력이 있는 곳은 이번 전쟁 에 참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란님께서 죽기 전에 대공의 뜻에 동의를 하셨지만, 곧 그분께서는 그 결정을 후회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대공이 전쟁에 대한 준 비를 어려움 없이 진행시키고 있지만 전쟁에 직접적인 움직임은 없을 겁니다. 지금 카란님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이로드라는 기사가 대공의 일을 막으려 하고 있으 니까요." 엘벤트는 자세한 이야기가 아닌, 대략적인 이야기들로 법황의 실수에 대해서는 언 급을 피했다. 그는 카란 엘 디그너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끝까지 좋았으면 하 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범한 실수는 발드르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방향 으로 갔기 때문이지, 그가 발드르님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정말 법황께서 돌아가셨단 말이냐?" "그래요. 제가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라피에르 저하 께서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으셨다면 끝까지 숨겼을거니, 이해해주세요." 데칸티스의 놀라운 목소리에 엘벤트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법황 의 죽음을 아직은 알려선 안된다는게 엘벤트의 생각이었기에 지금껏 데칸티스와 함 께하면서도 그는 데칸티스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음, 그래. 뭐,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까지는 없다. 더 이상 난 폴보트 연합의 데칸티스가 아니니까..." "데칸티스,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라피에르는 엘벤트에 이어 폭탄 발언을 하는 데칸티스를 쳐다보며 커진 눈동자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충격적인 발언에 라피에르는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기 때문 이다. "이 팔... 왼쪽 팔이 잘린 후, 저는 변했습니다. 아버지와 연을 끊을 만큼... 그래 서 전쟁을 원하시는 아버지와 대립하다 집을 나와버리고 만 것이죠.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신 정령이라는 것에 이용당할 정도로 허술했던 제 자신을 바꾸고 싶었기에... 뭐, 아직 모두 바뀌진 않았지만, 엘벤트를 계속 따라 다니다 보면 서서히 바뀌겠지요." 데칸티스는 라피에르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 의 이야기를 하듯, 무미 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그리고 말을 끝내며 그는 리온과 크릭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다는 눈빛으로 불안감이 남이 있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 결국 연합 쪽에서 보이는 전쟁의 기운은 미드 아르엘 대공 이 주도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연합군이 반으로 갈라진 상황이 됐으니,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군. 유투 왕국 또한 전쟁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게 하 려고 하는 상황이니... 설사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야겠지." 라피에르는 엘벤트와 데칸티스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이 이번 일로 꽤 큰 성장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엘벤트에게서 느껴지던 앳되고 어린 모습은 이 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데칸티스 역시 자만심이 넘치던 모습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인지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이 다. "그 말씀 믿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대륙에 전쟁이라는 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내 모든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은 지킬 것이야. 더 이 상 대륙을 피로 씻을 수는 없으니까." 확인차 되묻는 엘벤트에게 라피에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안심시켰 다. 그들이 자신을 안심시켜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면 보답으로... "그렇군요. 저희가 이곳에 온 목적이 저하의 한마디 말씀으로 모두 해결되네요. 그 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어딜 간다는 건가?" 갑자기 떠나겠다는 엘벤트의 말에 라피에르는 그들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라피에르로서는 그들을 유투 왕국에 붙잡아 두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벤트는 그런 라피에르의 뜻을 먼저 알아 차렸는지 고개를 흔들며 정중한 인사로 라피에르의 뜻을 꺾었다. "저와 데칸티스는 대륙을 떠돌아 다닐겁니다. 저희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 는 곳을 찾아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음... 그렇게 확고한 신념을 갖고 대답을 하니... 더는 못 잡겠군. 그럼, 몸조심 하게나. 자네들이 준 소중한 정보는 내 필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데 쓸테니! " "네, 그럼 안녕히..." 사라져 가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라피에르는 키에라도 때문에 복잡했던 기분이 다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너무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자신의 힘으로 대륙 전쟁을 막아볼 결심을 한 것이다. "가자!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다. 저들처럼, 우리도 뭔가 백성들을 위해, 대륙을 위해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 리온과 크릭은 활기를 되찾은 라피에르의 모습에 기뻐하며, 앞장선 라피에르를 빠 르게 쫓아갔다. 하지만 그들 셋을 천천히 쫓는 라이너는 아직도 답답한 것 같은 어 두운 표정 그대로였다.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라이너는 아직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아~, 리넨님... 제발 무사히시길..." 사람들이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을 때, 란과 트레모스 는 전쟁이 아닌, 마족들 즉, 대륙에 퍼져 있는 수 십 명의 마족들 때문에 잠을 제 대로 자지 못했다. 결계를 나온 마족들이 대륙에 퍼져 나쁜 짓을 하는 동안, 그녀 는 리넨이 있는 유투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트레모스가 그런 란을 따라다니는 것은 자신의 취미활동을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해 서였고... 결국 그 둘은 리먼을 쫓아 본격적인 마족 사냥을 시작한 란과 트레모스 는 리먼을 죽인 후에도 쉬지 않고, 다른 마족들 찾아 하나 둘씩 그들의 목숨을 끊 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쉬~익, 털썩! 툭툭. 란의 깨끗한 검술에 의해 마족의 육중한 육체가 반으로 갈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쉐이트론에게 선물 받은 반지를 낀 이후, 그녀는 예전과 비교 해 눈에 띄는 검술 실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지가 제공한 마나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용해 활용할 수 있었기에... "이봐, 그만두는게 어때? 아니, 그만두라는 건 좀 그렇고, 좀 쉬는게 어때? 어떻게 된 여자가, 그렇게 독하냐? 리먼이라는 그 마족을 죽였으면, 마족에 대한 분노는 좀 줄어들어야 하는거 아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도가 지 나치다고..." 트레모스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레드 사이어를 허리춤에 차는 란 을 바라보고는 꾸짖듯 한마디했다. 레드 사이어가 피를 흡수하는 검이라는 것은 알 았지만, 요 사이 마족의 피를 빨아들이면서 그 색이 더욱 진해진 것 같아, 란에게 그와 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트레모스의 말에도 란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리먼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닌 너다." "그거야, 네 몸이 아직 덜 회복되었기 때문 아니냐? 그러니 당연히 내가 리먼인지 뭔지 하는 그 마족을 반 죽여놨던 거지. 하지만 그의 목숨을 끊은 것은 네가 아니 냐?" 트레모스의 말에 란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간단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른 마족을 찾기 위해 그 자리를 떴다. 트레모스가 자신을 따라오던 말던,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쳇, 뭔 여자가 저래? 리넨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현격하잖아? 이봐, 내가 없으면 무사히 마족을 없앨 수 없잖아? 아직, 네 수준에서 강한 마족은 무리 아냐?" 점점 작아지는 란을 쳐다보며, 트레모스는 발악하듯 입을 열었지만, 싸늘한 란의 반격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마족들을 찾는 건 너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 싸우고 싶다면, 네가 나를 따라 와야 할거야. 내가 너를 따라가는게 아니라!" "쳇, 어떻게 된게, 성격이 하나같이 저 모양들이야? 이거 내 신세가 왜 이러냐고? 라이너 녀석이랑 같이 있을 때도 찬밥신세더니... 리넨이 아니면서 난 왜 이렇게 대하냐고~! 쳇쳇쳇!!" 란의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트레모스는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면서 툴툴 거렸다. 괜히 골이 난 트레모스는 란을 따라가지 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시야에서 란이 사라지자, 그는 바로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바닥에 있던 발 을 급히 뗐다. 솔직히 강한 마기를 뿜는 마족이 아니면, 그는 란의 말대로 그녀보 다 마족을 찾는 능력이 딸렸던 것이다. "젠장! 리넨이 상대했던 그 검은 기운의 녀석이라면, 리먼이라는 마족보다 더 재미 있었을 텐데... 리넨... 그러고 보니, 녀석의 기척이 유투 왕국에 있을 때,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던데... 그 강한 존재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기라도 한 건가? 흠~. 설마 녀석, 다치진 않았겠지? 그 녀석이라면... 하아~. 리넨이 부럽군." 트레모스는 그 때, 자신이 괜히 란의 분노한 표정에 리먼을 따라간게 아닌가?하는 후회가 들었다. 리먼보다는 그 검은 기운의 녀석이 훨씬 그의 흥미를 끌었기에... "그 녀석의 존재를 다시 느낀다면 그때처럼 그냥 지나치지는 않... 잉? 이..이 기 운은!" 트레모스가 투덜거리며 란을 쫓던 때였다. 란의 뒷모습이 꽤 크게 보이는 순간, 그 는 예전 유투 왕국에서 느꼈던 적이 있는 엄청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란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거대한 마나 폭발로 인한 에너지의 분산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들에게까지 그 기운을 생생하게 전달했던 것이다. "마족이닷! 그..그것도 엄청난 실력의!" "마족? 크크큭, 역시 마족이란 말이지? 하긴, 검은 기운이 팍팍 느껴졌으니 그럴테 지... 크하하하~." 란과는 달리 트레모스는 그 존재의 느낌에 기쁜 듯, 어깨를 활짝 펴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그 존재의 등장이 기쁘기라도 한 듯, 트레모스는 통쾌하게 웃었던 것이다. "뭐가 그리 좋은 거지? 그 존재가 마족이라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있지만, 이 정도의 거리에서 내가 느낄 정도의 기운을 내뿜는 다는 것은 네가 그 존재의 상 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설마 그걸 모르는건 아닐텐데?" "흥!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내가 질 경우는 없을테니. 물론 너의 경우는 상대가 되지 않을테지만. 크큭. 이번엔 나 혼자 가겠다. 거대한 마나 폭발을 보면, 분명 그자를 상대하고 있는 녀석이 있는 모양이니까, 그것도 매우 강한! 어쩌면 나 정도 의 실력자일지도 모르겠군. 난 그 상대가 시간을 끌 동안 가봐야겠다. 넌 방해가 될테니 이곳에서 기다리던지, 원래 혼자 가려던 곳으로 가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트레모스는 아까 란의 말에 복수를 하듯, 장난끼 있는 목소리로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을 장난스럽게 바꾸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모습을 감췄다. 빨리 그 강력한 존재와 싸우고 싶기라도 한 듯, 트레모스는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텔레포트를 한 것이다. 멍한 표정의 란을 혼자 남겨두고... "이런... 정말 혼자 갔군. 하긴 난 그의 말대로 방해가 될테니... 하지만 괜찮을까 ? 이 정도로 강력한 마족은 결계 안에서 본 적이 없는데... 설마 아슬란인가? 하지 만 그때 내가 본 아슬란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 하아~." 란은 고개를 흔들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폴보트 연합이 있는 방향을 향해... <연금술사>-45-1 아슬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정 말로 그렇게 쉽게 그 자의 위치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저 눈을 감고 마나에 나를 맡기자마자 난 아슬란의 검은 기운을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마치 아슬란이 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리고 아슬란의 기운을 느끼자, 마자 내 몸은 아슬란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해 버렸다. 좌표를 계산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만으로도 아슬란이 있는 곳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퍼퍼펑~! 아슬란의 존재만을 느끼려 했기 때문에 그가 누구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미처 파악 하지 못한 나. 나는 급히 아슬란을 상대하고 있는 자를 쳐다보기 위해 자욱한 먼지 가 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누가 아슬란을 상대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연기가 다 가시기 전 에, 피부로 느껴지는 익숙한 마나의 기운이 그 존재에 대한 정보를 내게 알려왔던 것이다. "키에라도! 어떻게 이곳에?" "쿨럭, 쿨럭. 리넨?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켁켁." 아슬란을 상대하느냐고 많이 다친 모양인지, 키에라도의 몸에는 꽤 심한 상처가 여 기 저기 나 있었다. "괜찮은 것이오? 어쩌다 이 지경이..." "네 눈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케켁... 저 마족, 힘만 무지막지하게 쎈 저 놈을 상 대하는데? 저 녀석 마치... 그 미친 여자 같잖아? 아니.. 쿨럭, 쿨럭. 그 여자보다 강한 존재는 없지. 어쨌든 그 여자보단 아니라고 해도, 내 상대는 아니다..." 겨우 겨우 버텨, 아슬란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던 것인지, 내 팔에 안긴 키에라도 의 몸은 매우 무거웠다. "호오~, 이게 누구야? 리프네리욘이군! 죽지 않고 살아 있었나? 더 강해져 나를 찾 아오다니 놀랍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지? 네 특유의 마나 기운 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면 말이다." 아슬란은 키에라도의 곁에 나타난 내가 예전 그와 싸웠던 나와 동일인물인 줄 몰랐 는지, 자욱한 먼지가 다 가신 후에야 날 아는 척 했다. 확실히 예전 내가 갖고 있 던 마나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인지 그는 내 얼굴을 보기 전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이다. 마나를 몸 안에 축적시키는 존재는 몸 안의 마나가 자연적으로 그 몸에 동화되기 때문에 각자마다 개성 있는 마나의 기운을 갖게 된다. 그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 기에 아슬란에게 당하기 전, 난 드래곤 하트라는 특유의 마나 기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잃어버린 후,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특정 기운을 가질 수 없었다. 내 몸에 마나 자체를 축적시킬 수 없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개성 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기운이 없다는 것 자체가 앞으로 내 특징이 될 테 니까. "무슨 일이 있기야 했지. 하지만 그런 것을 굳이 네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 "크큭,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 아슬란은 급격히 변한 내 모습에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섣불리 내게 공 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고맙게도 말이다. 즉, 그는 내게 키에라도에게 말을 건낼 시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줬던 것이다. <키에라도, 당신은 좀 쉬는게 좋겠소. 아슬란은 이제부터 내가 상대할테니...> "쿨럭, 그..그럼... 하아~, 그럼 내가 이 몸으로 저 녀석을 상대할 줄 알았냐?" 아슬란이 눈치채기 전에 난 키에라도의 머릿속으로 내 생각을 전달했다. 즉, 난 그 에게에게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짧은 언질을 주며 싸움에서 빠지라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의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다친 그에게 그런 말 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키에라도는 그런 내 말에 오히려 장난스런 어조 로 답해주며,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풀어줬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키 에라도는 자신의 식으로 내게 말해준 것이다. '크큭,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과 표정이라니... 재미있는 분이야. 크큭. 아, 이 럴 때가 아니지. 곧 이곳에서 더 과격하게 아슬란과 싸우게 될텐데, 그런 곳에 다 친 키에라도를 놔둘 순 없지 않겠어? 키에라도 덕분에 아슬란이 이곳에 붙잡혀 있 는 것일테니... 보다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겠어.' <키에라도, 이곳은 곧 시끄러워질테니, 유투 왕국으로 가 있으시오. 물론, 싸움이 끝날 때까지 이 근처로 와서는 안되오.> "이..잉? 그게 무슨... 쿨럭..." 키에라도는 내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난 그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그를 유투 왕국으로 텔레포트시켰다. 아슬란이 곧 내게 공격을 가할 것 같은 느낌 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한치의 틀림도 없이 맞아 떨어졌다. 콰르르르릉~! 키에라도의 모습이 내 품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아슬란의 엄청난 마기가 나를 뒤덮 었던 것이다. '마나의 흐름이 마치 내 것인 것 같군. 아슬란이 공격해 오는 것이 무의식중에 모 두 느껴지니 말야.' 이미 느낀 움직임이라 그런지, 아슬란의 강력한 공격은 꽤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 다. 하지만 워낙 강력한 마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슬란의 공격을 피한 난, 그 여파에 휩쓸려 몸의 중심을 잃어야만 했다. '이런? 이거...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자만할 정도는 아닌가 본데? ' 잠재의식 속에 아슬란을 이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는지, 나는 그 의 공격을 맞받을 생각보다는 피할 생각을 먼저 했었다. 내 실력이 그를 뛰어 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실수했군. 상대는 아슬란. 난 지금 보통 마족이 아닌, 아슬란을 상대하고 있 는 거라고~!' "크큭,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 가뿐하게 내 공격을 피하는 것을 보면 말 이다. 칭찬해주지, 리프네리욘." 잃었던 중심을 다시 되찾으며, 나는 그와의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아슬란을 향해 엄청난 살기를 내뿜었다. 그의 말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지만, 화가 났던 것이다. "흥~! 네 칭찬 따위는 필요 없다. 내 손에 죽게 될 녀석의 칭찬 따위는!" 하지만 살기 가득한 내 목소리에 아슬란은 콧웃음을 칠 뿐이었다. "내가 왜 네 손에 죽어야 하지? 난 죄를 지은 기억이 없는데?" 능청을 떠는 것인지, 아슬란은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네가 지금하고 있는 만행에 대한 자각도 없단 말이냐?" "마족이 피를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건가?" "그렇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아슬란의 모습에서 나는 공격도 멈춘 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족이 피를 원하는 것은 본능이다. 밥을 먹고살려는 것과 같은 본능일 뿐이지. 단지 마족에게서 쾌락이라는 본능은 살고자 하는 욕구와 대등할 정도로 강할 뿐이 다. 설마 그 본능대로 행동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겠지?" "흥, 그런 본능은 없는게 낫다! 다른 생명을 단순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무자비하 게 죽이다니! 그게 어디 말이 된단 말이냐?" "크큭. 그건 너희 인간들의 입장일 뿐이다. 네가 마족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지는 모르겠군. 생각하는 기준 자체가 다를테니..." "......!" 순간적으로 나는 논리 정연한 아슬란의 말에 하마터면 고개까지 끄덕일 뻔했다. 인 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슬란이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지, 마족의 입장에 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슬란의 입가에 생긴 미소를 본 나는 그런 생각 을 머릿속에서 곧바로 삭제해 버렸다. "흥, 네 말이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족이 아닌 인간. 즉, 굳이 내가 마족 의 입장에서 너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아슬란!" "쿠쿠쿡. 역시 꽤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인간들에게 기회를 준 것밖에는 죄가 없다." "기회?" "그렇다. 그들의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준 것뿐이란 말이다. 전쟁 역시 인간들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으키는게 아닌가? 난 단지 옆 에서 그들을 도와줄 뿐이다. 그들의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흥, 네가 그들을 그냥 도와주기만 했다는 말을 나한테 믿으라는 것은 아니겠지? 넌 야망이 없던 인간에게 그것을 심어주고, 옆에서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 인 간을 부추겼을게 분명하다. 즉, 네 즐거움을 위해 인간을 하나의 꼭두각시로 만들 었다는 말이다. 어디 내 말이 틀렸느냐?" "호오~. 그렇게 나오니 변명의 말이 안 떠오르는군. 크큭.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래서 어쩔거지, 리프네리욘?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실력으로?" "그렇다~! 그리고 나를 예전의 나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건 두고봐야 알 수 있겠지. 크하하하." 아슬란은 조금 전 내 몸의 중심을 잃게 만들었던 공격과 비슷한 것을 내게 쏘며 나 와의 대화를 끝냈다. 이번 역시 내가 그의 공격에 중심을 잃을거라 생각한 것인지, 그는 몸을 뒤로 빼며 느긋하게 내 반격을 기다렸던 것이다. '흥~! 그런 여유는 여기까지닷~!' 나는 자신의 공격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아슬란을 쳐다보며, 마음을 단단하게 다잡 았다. 그에게 나를 공격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아슬란을 향해 몸을 날렸던 것이다. 타앗~! 아까와 같은 강력한 마나 덩어리가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난 오히 려 그 마나의 정면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피해야 할 상황이었건만 나는 그러지 않 았다. 내가 목표로 하는 반격은 아슬란의 마나가 바로 코앞에 있어야 가능했기 때 문이다. 쉬쉬쉭! 아슬란의 마나를 향한 속도를 더욱 높이자,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상대의 공격은 피하는 방법과 맞받아 치는 방법이 있지. 피하는 것은 아무런 성과 도 얻을 수 없으니, 맞받아 쳐야겠지? 아슬란의 공격을 피한 후, 그의 허점을 파고 느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일 테니까!' 아슬란을 공격하는 방법은 그가 내게 쏜 검은 마기가 몸에 닿기 전, 머릿속에서 찰 나의 시간동안 정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차자마자, 내 손 에는 아슬란의 마기 못지 않은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마나를 끌어 모아 순식간에 아슬란의 그것과 대등한 정도의 마나구를 만든 것이다. 과거처럼 한정된 공간의 마나만을 모아 쓸 수 있는게 아닌 무한의 마나, 무한의 거리에 있는 마나까 지 모두 끌어 쓸 수 있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말 그대로 그 마나를 전부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세계의 마나고 마나가 내가 될 수는 있었지만, 아직 그 합일의 경지는 완벽하지 않았기에 10클래 스의 마법을 쓰는데 필요한 마나 이상은 가져다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 드래곤 하트가 내 몸에 있어 무한한 마나를 제공해 준다고는 해도, 9클래스 이상의 마나 량을 끌어 쓸 수 없던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 했다. "간다~~~앗!" 우우우우우~웅, 파앙~! 쿠르르르르릉. 타탓, 타탓! 콰콰콰쾅~!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마나를 아슬란이 쏜 마나를 향해 던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 의 공격을 향해 몸을 날린 이유를 실현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 어난 것이다. 즉 내가 끌어들인 마나와 아슬란의 마나가 정통으로 마주치자마자, 처음에는 대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발음이, 그리고 그 후에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 은 소리가 나와 아슬란 사이에서 울려 퍼지더니, 결국은 공간을 뒤흔들 정도의 현 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크으~~윽!' 몸에 꽤 두꺼운 보호막을 치고 있긴 했지만, 마나 끼리의 충돌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을 훨씬 강력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저 멀리 튕겨냈다. 튕겨나가는 동안 충격을 줄이기 위해 바로 주변의 마나에 나를 합일 시켰지만, 그래도 멀리 날아가 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크윽, 이거... 생각보다 장난 아닌걸?' 공간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폭발이 일어났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잃고 있었다. 대기에서 마나를 끌어다 쓰는 입장이라, 그 마나와 연결되 어 있었는지, 불규칙적으로 튀고 있는 마나의 모습이 느껴진 것이다. '대..대단해. 주변의 건물들은 이미 형체를 갖고 있지도 않잖아? 내가 생각했던 결 과도 뒤엎을 정도로... 예상외야. 하지만 이게 내게는 득이지. 만반의 준비를 한 내가 이 정도니, 아슬란은 나모다 더했을 것 아냐? 내가 자신에게로 쏘아져 가는 이유를 깨닫지 못했을게 분명할테니~!' 아슬란의 모습에 대한 추측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이번 역시 내 예상을 뒤덮으며 내게 당혹감을 선사해줬다. 실전 경험이 많은 모양인지, 아슬란은 내 예측 불허의 행동에 대한 준비를 나보다 더 했던 것이다. "알고 있었던 건가?" "크큭,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뭔가 있으리란 것은 예상하 고 있었지. 아무런 대책 없이 내게 내 공격을 향해 날아왔을 리는 없을테니까." 아슬란은 이 정도의 변칙적인 공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옷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는 다시 공격의 자세를 취했다. '젠장, 이 정도의 폭발로도 치명적인 상처는 낼 수 없단 말인가? 안되겠어. 아무래 도 아슬란이 미처 방어하지 못할 때, 즉 허점을 보일 때 공격을 가해야겠어. 정신 만 집중한다면 아슬란이 사용하는 마나의 흐름 정도는 알 수 있을테니 그의 움직임 역시 예측할 수 있겠지,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슬란의 상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보다 신중한 공격 을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무자비적인 공격보다는 날카롭게 허를 찌르 는 효과적인 공격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 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콰가가가강~. 파파파팟~. 퍼버벙. 아슬란과의 접전이 계속 되었지만, 나와 그는 서로 처음과 같은 공반전만 계속 할 뿐, 서로 이렇다할 핵심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즉 아슬란은 내가 미처 그의 허점을 찾았다 하더라도, 내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나는 아 슬란이 움직이는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그의 공격을 예상하며 대처해나갔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와 아슬란이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고, 작은 자갈조차 먼지로 화해버렸다. '젠장, 아슬란은 자신의 빠른 움직임과 신속함, 그리고 노련한 싸움 실력을 이용해 내가 미처 그의 허점을 찔러 공격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 는 시간 낭비가 되어버릴 텐데... 치명적인 상처가 아니면 서로 금방 치유되니... 하아~.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상황이 잘 풀리지 않자, 내 머리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 머리는 아슬란의 공격을 느끼고 피해야 하는 것과 그의 허점을 파고 들어야 하는 것 등을 계산해야 했고, 뭔가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공격법 또한 생각 해 아슬란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얻었다고 할 수 있는 능력 때문 인지, 아직은 자연스럽게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없었다. '으윽, 대체 아슬란은 왜 저렇게 강한거야?' 답답한 상황의 반복 때문에 난 어느새 여유가 남아 있던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난 바짝 긴장된 상태로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답답 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슬란 역시 열을 내며 나를 향해 처음 으로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분노가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로! "리넨! 대체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 이건 10클래스를 넘어 선 그 이상이지 않나? 단순한 발전으로 9클래스를 넘어선게 아님은 분명하군! 며칠 사이 이렇게 나와 대등한 실력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면 말이닷~!" 슈슝~, 파앙~. 슈슈슈슝, 파방, 파앙~. 타타타탓~! 아슬란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에서 검은 칼날과 같은 모양의 마나가 수도 없이 나를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내게 별다른 치명상은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화풀이하듯 나를 향해 어마어마한 수의 마나 덩어리를 쏘아 보낸 것이다. 하 지만 그 공격 하나하나는 무작위적인게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 정교한 방향과 속 도로 나를 향해 위협하듯 날아온 것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목숨이 위협당할 정도의 ... 하지만 난 그 모든 공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왼쪽 가슴 위, 하나. 오른쪽 목과 발목의 복숭아 뼈, 각각 두개. 심장과 옆구리 셋...'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아슬란의 마기가 담긴 날카로운 칼날들이 하나 하나 손에 잡히듯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들은 내가 아슬란의 공격을 무사히 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갑자기 공간을 뚫고 내 뒤로 나타난 어떤 존재는 제외하고 말이다. "크아~~악! 이게 뭐얏?" '이 목소린, 트레모스?' 파아아아앙~! 탓탓탓탓! 익숙한 목소리와 기운에 나는 순간 아슬란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튕겨버렸 다. 마나의 흐름을 더욱 세세히 느끼도록 아슬란의 공격을 이용해 나를 단련할 필 요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트레모스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나타난 이상에는! "야,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뭐야? 리넨 너였냐? 나야 당연히..." 콰콰쾅! 콰쾅! "뭐야 저렇게 예의 없는 녀석은? 지가 강하면 다야? 말하고 있는 것도 안보인... 흐헉!" <조심해, 트레모스! 상대는 아슬란이라고! 그렇게 여유롭게 있다간 큰코 다치기 십 상이니 몸을 긴장시켜야 할거야.> 옆의 트레모스를 향하는 아슬란의 공격을 막아주면서 나는 녀석에게 마나로 내 말 을 전달했다. 시끄러운 폭음이 가득찬 공간에서는 말보단 마나를 이용해 녀석의 머 릿속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는게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녀석 역시 그런 것을 금세 깨달은 것 같았다. <뭐야? 저 녀석이 아슬란? 뭔 놈이 저렇게 강해? 자기가 마족임을 잊은 거야? 대충 봐도 10클래스잖아? 10클래스는 드래곤만이 될 수 있는... 어라? 그러고 보니, 너 ! 예전의 네가 아니잖아? 뭔가 깨닫기라도 한거냐?> 아슬란과의 공반전을 하면서도 녀석은 여유롭게 나와 대화를 나눠갔다. 모두 10클 래스인 존재가 2대 1로 싸우고 있었으니, 나와 녀석은 아슬란과 달리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네.> 쿠우우우웅. 콰콰콰쾅. <쳇, 저 녀석은 끈질기기도 하네. 공격을 멈출 생각을 안하잖아? 쳇, 어떻게 된게 게나 소나 다 10클래스야? 10클래스는 드래곤만의 영역인데... 쳇쳇~!> '쿠쿡, 녀석. 나한테 언제나 잘난척하는 것을 낙으로 삼더니, 이젠 그게 안될 것 같으니 툴툴거리는 건가?' 심각한 싸움이 계속 진행되는 중이었지만, 트레모스의 등장은 나로 하여금 화기애 애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조력자, 그것도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 은 아슬란을 상대하는데 있어 이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트레모스, 아슬란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개개인으로 따진다면 우리보다 나 으면 나았지, 못한 존재가 아니니까 말야.> <쳇,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뭐냐?> <응?> 콰드드드드... 파파팟~! 펑펑. <쳇, 내가 해야 할 일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뭔가 해줬으면 하기 때문 아니냐? 아슬란의 허점을 만들어 줄까?> 녀석은 그동안 나와 꽤 많이 생활했기 때문인지 내가 말하기 전에 이미 내가 원하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단한걸? 바로 그거야. 아슬란의 허점을 만들어줘! 내가 그를 공격할테니!> <쳇, 역시나~. 재미없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군.> 트레모스는 이미 내가 부탁한 일을 행하면서 하기 싫다는 듯한 말을 전했다. 몸은 내 부탁을 들어주지만, 버릇처럼 나오는 툴툴거림은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호오~, 이거 트레모스 녀석, 키에라도와 닮아가잖아? 그동안 둘이 티격태격하며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지? 저렇게 툴툴거리는 모습이 닮은 것을 보면 말야... 뭐, 이런 말을 직접 하면, 둘 다 아니라고 난리를 피우겠지만~. 후훗.' 트레모스가 마나를 내뿜는 아슬란에게로 빠르게 날아가자, 나는 그 즉시 입가의 미 소를 거두고는 아슬란의 마나를 보다 세세하게 느끼려 했다. 트레모스가 내게 결정 적인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녀석이 다쳐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을 도와야 한다. 아슬란에게서 허점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 공 격의 흐름을 녀석에게 말해줘야겠어. 내가 느낀 후, 전달해주는 거라 100% 정확하 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움은 되겠지. 트레모스가 아슬란의 정교한 공격을 무사히 피해야 아슬란으로부터 허점다운 허점을 만들 수 있을테니!' 생각은 길었지만, 그것이 끝남과 동시에 트레모스는 아슬란의 공격을 내게서 먼저 들을 수 있었다. <물의 성질을 담은 마나다. 왼쪽 허리 아래! 암흑의 기운이 등뒤에서도 다가와!> <젠장~. 뭐가 이리 복잡해? 야, 근데 넌 안피하냐? 왜 나한테 그런 것들을 말해주 고 있는데? 네가 저 녀석을.. 이크~! 저 녀석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해야 하는 것 ...> 녀석은 아슬란의 공격을 피하며, 내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나 역시 트레모스와 같이 아슬란의 공격을 피하며, 그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제길~. 너 대체 얼마나 강해진거냐? 한 사람이 맞긴 한거냐?> <조심, 왼쪽 위에서 급하강한다!> 카앙~! 퍼버버벙.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을 전달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녀석에게 아슬란의 공격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굳이 녀석과 아슬란을 쳐다보며 말해줄 필요 가 없는 것들이었다. 눈을 감고도 마나를 보듯 느낄 수 있는 나였기에, 셋이 싸우 고 있는 공간의 마나 정도는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슬란 의 공격 모두를 트레모스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아슬란이 마나를 쏘아보 내는 것을 내가 미리 읽는다고는 해도, 그의 공격 속도가 내 말보다 빠른 경우가 꽤 됐기 때문이었다. 퍼어어어엉~! 바로 지금처럼... <얌마! 왜 지금은 말 안 해줬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내가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건 아슬란의 공격 중, 10의 6 정도야. 그러니...> <쳇, 됐다. 그런건 진작에 말해줬어야지? 괜히 마음놓고 있었네~!> 트레모스의 투덜거림이 끊임없이 흘러들었지만, 난 녀석의 말이 그리 싫지 않았다. 마음을 놓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는 말고 같았으니까. '나를 그렇게나 믿는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만들어준 기회를 헛되이 할 수 없지. 기필코 성공시키고 만다~!' 하지만 그런 다부진 생각과는 달리, 트레모스의 노력과 나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 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0클래스의 존재가 체력적으로 지치는 일은 거의 일어나기 힘든데,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이 지쳤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겨우 쓸만한 허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둥근 끈이 트레모스의 등장으로 한쪽 귀퉁이가 잘리기라도 한 듯, 아슬란의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것 같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이때다!' 굵직한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닦을 새 없이, 나는 아슬란이 트레모스 와 나를 향해 쏘는 공격들 사이에 커다란 허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나를 끌어 모으는 순간. 지금까지는 찾을 수 없었던 틈이 아슬란에게서 느껴졌던 것이 다. 새로운 공격을 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올리는 그 순간이 말이다. '죽어라~~앗!'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내가 공격하는 순간.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 주 변의 마나가 아닌, 아슬란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겨 그곳에서 마나 덩어리를 형성했 다. 즉, 나는 그곳의 마나로 아슬란이 즐겨 쓰는 날카로운 칼날을 형성한 것이다. 목표까지 날아가는 동안 얻는 힘을 능가할 정도의 마나를 집어넣어! "헉!" 내 주변에서 만들어 아슬란을 향해 쏘는 것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아슬란 바로 곁에서 만들어진 칼날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찰나의 차이라고 해도, 나와 아슬란 사이에서 그 정도는 대단한 차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런 공격으로 아 슬란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 '내가 마나이고, 마나가 나니 아슬란의 몸을 덮고 있는 보호막 또한 내 뜻대로 없 앨 수 있겠지! 이번 공격은 아슬란에게로 빠르게 날아가는 칼날이 아니니 속도의 힘이 없다. 하지만 보호막이 없다면, 그런 것은 소용없겠지?' "크헉!" 내 예상은 들어맞았는지, 허공에서 만들어낸 칼날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아슬란의 보호막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슬란은 내가 벌려 놓은 보호막의 틈을 재빨리 알아채고는 내가 마지지 못하도록, 더욱 강화시켰다. <그렇게 해도 이번 공격은 네게 치명상이 될 것이다. 파~!> 마지막 한마디가 될지도 모르는 말을 아슬란에게 전한 나는 보호막 안으로 들어간 어마어마한 마나 덩어리를 그대로 폭파시켰다. 마치 화기를 지닌 물건이 불을 만나 폭발하는 것처럼, 그리 심한 상처를 낸 것 같지 않던 내 마나는 아슬란의 보호막 안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아슬란의 몸에 치료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 파파파파팡~! 쿠릉쿠르르릉. "크아~~~악!" 찢어지는 듯한 아슬란의 비명 소리에 나와 트레모스는 아슬란의 공격을 피할 때완 달리 허공에 몸을 멈추고는 갈기갈기 찢어진 아슬란을 조용히 바라봤다. "뭐냐? 끝이 화려한걸? 안에서 폭발하는 공격이라... 꽤 참신하네? 리넨?" "으..응? 아, 그래... 근데 너 몸은 괜찮냐?" 아슬란의 최후를 바라보던 나는 이제 더 이상 대륙을 어지럽힐 존재가 없다는 사실 에 멍한 기분이 들었다. 아슬란을... 내게 공포를 느끼게 한 아슬란을 내 손으로 죽인 것에 대해 난 아직 실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옆에서 트레모스가 내게 뭐라고 대답을 하는지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하아~, 아슬란이... 죽었다. 모든 은원의 중심에 서 있던 그를!' 아슬란의 죽음이 이뤄지는 순간 둔하게 움직이던 심장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되뇌일 수록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게 더 이상 근심거리는 없을거라는 것과 안좋 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 빠르게...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인해 심장의 움직임이 최고가 되었을 때, 나는 목청이 터질 정도의 웃음 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 크하하하하~!" "리넨? 임마, 너 왜 그러냐? 설마 미친건 아니지?" "크하하하하~" "리네~~~엔!" <연금술사>-45-2 아슬란이 죽고 대륙의 혼란이 어느 정도 정돈되자, 라피에르는 나 몰래 엄청난 일 을 꾸미기 시작했다. 처음 난 녀석의 음모의 심각성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그저 ' 뭔가 꿍꿍이가 있구나'라는 식의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녀석의 음흉한 속을 들여 다봤다면, 녀석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그때 난 어리석게도 녀석의 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팡파라라~~ 팡파라라~~ 환상적인 팡파레가 울려퍼지며, 유투 시를 한껏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 오늘이 바로 유투 왕국의 왕위 계승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라피에르가 공식적으로 유투 왕국을 이끌어 나게 되는 날... "이야, 이거 성대한걸? 인간들의 이 정도 축제는 처음 보는 군! 어이, 리넨. 안 그 러냐?" 아슬란의 죽음 이후, 유투 왕국에서 호의 호식을 하며 지내던 트레모스는 오랜만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왕성의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의견을 물어왔다. "당연하지. 왕위 계승식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라피에르가 왕 이 되는거 아니겠냐? 녀석이 한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혼호와 지지는 당연한 것이지~! 그럼, 그럼~!" "매우 자랑스러운 모양이네?" "당연!" 나는 라피에르가 왕위 계승식 준비로 한창인 동안 한가한 트레모스, 라이너와 함께 왕성 주변과 유투 시를 둘러보고 다녔다. 나 또한 왕위 계승식은 눈으로 처음 보 는 것이었기에 녀석 못지 않게 신기했던 것이다. '이렇게 여유롭게 거닐어 본게 얼마 만이지? 참 좋구나~.' 아직 모든 마족들이 사라진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예전처럼 마구잡이 살생을 벌이 고 있지 않았기에 왕국은 꽤 꼼꼼하게 왕위 계승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란 역시 지금은 왕성에 돌아와 머물고 있는 상태였고... '그러고 보니, 란도 참 대단한 고집이었어. 질질 끌고 오다시피 해서야 겨우 이곳 으로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 마족의 일을 모두 처리하기 전까지는 오지 않겠다니, 말이 돼? 그들을 언제 찾아내려고... 뭐, 아슬란이 죽은 이후, 정신 정령들을 다시 되돌려 받은 그들이 좀 교활한 방법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리 급할건 없잖아?' 라피에르가 유투 왕국을 이어받게 되어 기뻤기 때문인지 모든게 긍정적으로 생각하 게 된 것 같았다. "근데 리넨. 이번에 정말 라피에르가 왕 되는거 맞냐?" "당연하잖아?" "하지만 네가 형이잖아? 그러니 네가 왕위를 계승해야 되는거 아니냐?" "아, 난 또 뭐라고. 아니야. 난 이미 라피에르에게 왕위 계승에는 관심 없다고 말 했었거든." "흠~. 그렇군." "근데, 왜?" 뭔가 숨기는 것 같은 트레모스의 모습에 나는 찜찜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이 내게 저런 질문을 하게 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뭔 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트레모스는 간단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 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인간들은 뭔가를 이어받을 때, 나이순이잖아?" "정말 그 이유 뿐이냐?" "그럼~. 우와~! 저건 뭐야? 신기한걸?" 트레모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내 입이 열리기 전에 먼 곳에서 자리를 펼치고 앉은 행상인에게로 달려갔다. "라이너,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혹시 그 이유 알고 있냐?" "네..네? 아니요. 그저 궁금했었나 보죠. 리넨님 뭔가 문제라도?" "흠~. 아니다." '정말이겠지? 뭐, 속이는게 있어봤자, 별거겠어?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오늘 라 피에르의 모습을 보니 정말 기뻐하는 것 같던데~ 후훗, 녀석. 많이 늠늠해졌어. 이 제는 나라를 이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나는 라이너에게 고개를 살짝 가로로 흔들고는 트레모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예전보다 나를 따라다니는게 더 심해진 것 같아.' 내 곁에서 두 발자국 이상을 떨어지지 않으려는 라이너를 쳐다보며 나는 고개를 가 로 저어야만 했다. 아슬란의 일이 있은 후부터 라이너는 마치 이제는 절대로 내게 서 떨어지지 않기라도 하겠다는 듯, 만사를 제쳐두고 나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리 플러스 경이 그를 부르는 경우가 있더라도 녀석은 철저히 무시하며 나를 따라다니 는 일에 몰두했다. '하아~. 느긋한 평화가 조금 귀찮은 일을 선사하기도 하는군...' 라이너의 행동에 조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녀석의 그런 행동 에 대해 직접적으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라이너의 그런 과잉보호적인 행동이 나 쁘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리넨님. 이제 곧 식이 시작될텐데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그럼, 저기 발발거리며 싸돌아다니는 녀석 데리고 어서 성으로 가자." "네." 녀석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트레모스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트레모스, 라이너와 함께 식이 열리는 강당에 도착한 나는 식 준비가 거의 끝났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가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모두 엄숙한 태도로 강당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히유~, 이곳은 어떻게 된게 매일 볼 때마다 그 모습이 현격하게 달라진단 말야? 전보다 더 화려해졌어. 준비 많이 했겠는걸?' 천장의 등과 주변의 화초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던 나는 갑자기 나를 툭치는 라 이너 때문에 강당 구경을 멈춰야만 했다. "왜 그래?" "저기... 그가 왔습니다." "그? 그가 누군데?" 별로 내키지 않는 다는 듯, 입을 연 라이너를 바라보며 의야해 하던 나는 녀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헉, 쉐이트론이잖아? 언제 온거지? 아! 키에라도와의 약속이 있었지? 전쟁이 끝나 면 오겠다던... 크큭, 약속을 지켰군. 쉐이트론~!" 나는 아직도 탐탁치 않다는 시선을 쉐이트론을 쳐다보는 라이너의 등을 한번 세게 쳐주고는 쉐이트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키에라도, 란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피에르의 왕위 계승식에 찾아온 그를! "오오, 리넨이군요. 모습을 보아하니, 그동안 꽤 큰 성취를 얻은 듯 합니다?" "응? 아, 그게 그렇게 됐어. 근데 이노는? 같이 안온 모양이네?" "네. 그녀는 요즘 또 새로운 실험에 몰두 중이라 저만 이곳에 왔답니다." "흠~, 그럼 이곳에서 며칠 머무는 건가?" 키에라도의 질문 공세를 모두 받으려면 며칠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런 질문을 던졌던 거였지만, 쉐이트론은 내 질문에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럼?" "난 쉐이트론과 함께 죽음의 숲으로 간다. 물론, 왕위 계승식이 모두 끝난 다음에! " 기대 가득찬 눈빛으로 쉐이트론 대신 대답을 해준 키에라도는 얼마 후에 있을 쉐이 트론과의 질의 답 시간이 매우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호오~. 그렇게 된 것이로군? 나도 라피에르의 왕위 계승식이 끝나면 한 며칠 있다 가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후훗. 어디 갇혀 지낸다는 것은 조금 답답한 일이 지." 나는 키에라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즐겁게 대 화를 나눴다. 키에라도, 쉐이트론, 그리고 내 옆에 있던 란도 나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라이너와 트레모스는 별로 못마땅하다 는 눈빛으로 그런 우리를 쳐다봤고... 하지만 나는 지금의 평화로운 대화 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자자,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부터 유투 왕국의 왕의 계승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팡파라라라~ 팡파라라라~ '아, 어느새 시작된 모양이군. 라피에르는 도착한 건가?' 웅성거리던 강당은 팡파레가 울려 퍼지자마자,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엄숙한 분위기 로 변했다. 그리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오늘의 주인공인 라피에르를 찾기 시작했 다. '흠~, 주변에 움직이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찾기가 좀 수월하군. 아! 저기 있네? 녀석 번쩍번쩍하게 차려 입었군. 하긴 유투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는 자리인데 저 정도는 되어야지!' 즐거운 마음으로 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마지막 왕위를 상징하는 금 왕 관을 받는 라피에르를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황태자를 상징하는 금빛 팔찌를 빼고 금빛 왕관을 받는게 계승식의 순서였기에 나는 녀석이 내가 준 팔찌를 놓고 왕관을 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녀석이 왕국의 정식 왕이 되는... 잉?' 하지만 녀석은 무슨 할 말이 있었는지, 무릎까지 꿇고 있던 자세를 일으키더니 강 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여러분, 제가 이 왕관을 받기 전에 한마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잉? 무슨 소리야? 저런 건 계획에 없었잖아?' 웅성웅성. "제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저를 도와 왕국의 어려움을 헤쳐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들 중 오늘날의 제가 있을 수 있도록 해준 형님에게 그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형님,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이..이런 젠장. 이..게 뭐야?' 웅성웅성. 사람들 앞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나를 불러내다니! 경악도 이런 경 악은 없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헉!'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추려던 나. 라피에르 말대로 녀석 앞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인파 속으로 가려던 나를 피했다. 즉, 나 만을 남겨두고 모두 뒤로 두 세걸음씩 물러났던 것이다. 모든 이의 이목이 내게 집 중 될 수 있도록. '이게 대체?' 뭔가 뒤통수를 크게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형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라피에르, 이 일이 네가 꾸민 것이라면, 식이 끝난 이후 가만히 두지 않겠다. 으 드득.> 분노가 섞인 한마디였지만, 라피에르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터벅터벅. 내키지 않는 걸음을 걸어 녀석의 옆으로 도달하자, 라피에르는 그 특유 의 말솜씨로 음흉한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제 옆에 있는 사람, 즉 제 형님은 바로 죽었다고 알려진 리프네리욘 드로 이드 카스프리시안입니다. 유투 왕국의 정식 왕위 계승자인 것이지요." <라피에르! 너 지금 뭐하는...> "그리고 이곳에 있는 황태자의 팔찌도 사실 형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 왕 위 계승도 저보다는 형님께서 해야 옳은 것이지요." 당혹한 마음에 녀석을 제지해 보려했지만, 라피에르는 머릿속을 울리는 내 말소리 가 들리지 않는지 하고 있는말을 계속 이었다. "솔직히 이번 대륙의 평화는 모두 형님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유투 왕국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형님과 형님의 친구분들 때문이었지요. 사실 저 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은 저보다 형님에게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 이 왕관을 형님께서 받으셨으면 합니다." "와~~~!" 녀석의 설득력 있는 말은 웅성림을 순식간에 환호성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제길! 이거 철저히 당했잖아?' 당혹감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미 내 편을 들어줘야 할 사람들 중, 내 눈을 마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라이너까지도! '이건 분명 라피에르와 사전에 짠게 분명해! 제길! 이런 있을 수도 없는 일이! 하 지만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험험, 여러분 잠시만 조용히 해주십시오. 라피에르의 말대로 제가 바로 유투 왕국 의 정식 황태자였던 리프네리욘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미 죽은 이름으로 왕실 명부에서도 지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살아 있다고는 하나, 이미 죽은 자로 되어 있는 상태. 그런 제가 어찌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겠습니까. 전 저 보다 라피에르가 왕위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 동생이지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 력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나보다 탁월하니까요." '크큭, 이 정도면 되겠지?' 내가 생각해도 꽤 잘 꾸민 말이라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라피에르는 그런 내 말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 았다는 듯, 녀석은 의기양양해 하는 내게 폭탄 선언을 던진 것이다.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알겠습니다. 그럼, 저 왕관은 제가 받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왕국이 모두 안정을 되찾았을 때입니다." "그게 무슨?" "아직 제 나이도 어리고 하니, 전 형님께서 아직 완전한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 유 투 왕국을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유투 왕국을 다스려도 될 정도가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왕관을 그때까지 형님께서 받아 주십시오." "와~~~. 그래라. 그래라~! 받아라. 받아라~." 군중 심리를 이용한 것인지, 라피에르는 내게서 절규가 터져나오도록 만들었다. '크아~~악! 이러면... 이러면 거절할 수 없잖아? 완벽한... 완벽한 덧에... 걸리고 말다니~!' 왕위 계승식이 끝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되었을 뿐이었다. 즉 유투 왕국의 최고 의 자리에 오른지 일주일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난 그 일주일이 마치 10년은 된 듯한 착각을 받아야만 했다.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 고, 그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눠야 했던 일주일은 내게 10년이라는 생명을 빼앗아 간 것과 같은 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이 라피에르가 내 곁에서 도움을 주긴 했었다. 나보단 녀석이 그들과 안면이 있 었기에... '젠장! 이럴 것이면, 자기가 왕이 될 것이지! 이건 나를 골탕먹이려는 거야! 크아~ ~악!' 또 다시 괴성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녀석과의 약속은 약속! 난 1년이라는 시간동 안 피폐해진 유투 왕국을 예전의 성대했던 모습 그대로 만들거라는 생각을 또 가슴 깊이 세기며 그 괴성을 짓눌렀다. 1년 후, 녀석이 아무말 못할 정도로 오아국을 일으킨 다음 이 모든 것을 녀석에게 떠넘길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다짐으 로도 괴로운건 괴로운 거였다. "폐하, 아..아니, 리넨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라이너는 내가 폐하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내 호칭에 대 한 말을 정정하고는 집무실 안으로 식사를 가져왔다. "으드득. 라이너! 난 아직 너를 용서한게 아니다! 너까지 나를 속이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만!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식사는 거기 두고 나가봐라. 혼자 생각할 여유좀 가져보자고~!" "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쳇쳇! 키에라도와 쉐이트론은 지금쯤 죽음의 숲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 이런 구속의 기분은 느끼지 않으면서 말야... 그리고 얼마 전 떠난 트레모스와 란 역시도 그럴테고..." 시끌벅적하던 존재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 이곳, 왕성이 이렇게까지 조용하고 지루 한 곳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시 돌아와 기분이 좋긴 했지만... 그것도 잠 시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가 나를 짓눌렀던 것이다. "하아~. 그때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란과 트레모스가 떠나던 날을 떠올리며 나는 부러운 표정으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 을 회상해봤다. 홀가분하게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이봐, 정말 가는거냐?" 가지 말라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내가 안쓰럽긴 했는지, 트레모스가 내 어 깨를 토닥거려줬다. "이봐, 친구~! 열심히 하라고. 똑똑한 동생을 둔 탓이니 어쩌겠어?" "쳇! 트레모스! 지금 약올리는 거냐? 위로는 못해줄망정... 하아~. 됐다. 너한테 위로 받을 생각을 한 내가 잘못이지. 란? 너도 정말 갈거냐? 마족이야 천천히 처리 해도 되잖아?" "후후. 리넨. 마치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데? 너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내가 뿌린 씨야. 내가 거둬야지. 아슬란이 죽어 정령왕과의 계약이 깨진 지금, 난 위험해진 마족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마족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전까 지는..." 웃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는 란이었지만, 이때 만큼은 그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하아~, 그래그래. 마음대로들 해라~. 에휴휴~ 내 신세야~. 쳇! 하지만 두고 봐라! 1년 후에는 내가 너희들을 약올리게 될테니까!" 란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기에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왕성에 갇히게 된 나는 심 통이 났기에 란의 진지한 말에 툴툴거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가 죽은 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떠나는 그들에게 폭탄 선언 비슷한 것을 하며 , 그들을 약올리기로 했다. "1년?" "그래! 너희들이 모든 마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내가 1년 동안 유투 왕국을 제정비 할거라고! 1년 후면, 너희들과 상황이 달라졌을걸?" "호오~, 리넨 정말이냐? 1년 후에는 성을 떠나는 거냐? 그럼 나도 같이 가자. 나야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 란을 따라다니는 것뿐이니, 원하는 때라면 언제든지 너를 따라갈 수 있잖아?" 박쥐처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트레모스의 모습에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사람 약올리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녀석에겐 그 정도가 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야, 임마! 어딜 때려? 그리고 너 나하고 한 약속 아직 안지켰어! 나중에 나와 원 없이 대결해 준다고 했었잖아?" "뭐야? 지금이라도 나와 싸우자는 거냐? 난 유투 왕국의 왕이라고! 어디 때려봐~! 확 쫓겨나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으라고~." 왠지 왕이라는 자리가 꽤 유용한 것 같아 기분이 우쭐해졌지만, 그것도 잠시 1년이 라는 시간을 떠올린 나는 화사하게 웃던 미소를 감췄다. "흥~! 인간들이 다 똑같지. 왕이든 평민이든 내겐 같아! 그냥 지금 확~!" "왜? 때릴려고?" "쳇, 관둔다~! 나도 귀찮은 일은 별로니까. 아직 유희를 끝내고 싶지도 않고. 하지 만 1년 후에는 내가 거는 싸움을 피할 수 없을걸?" 이를 부드득 가는 트레모스는 그렇게 나를 한번 째려보고는 내게 바싹 다가왔던 몸 을 뒤로 뺐다. "리넨, 정말 1년이면 이 나라를 정비할 수 있어?" "응, 아마도. 불가능이 어딨겠어? 내가 하는데? 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어? 근 데, 그건 왜?" 머뭇머뭇 거리며 입을 여는 란을 보며 나는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다. "음... 아니, 나도 너와 여행을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 내가 1년 후에, 마족의 일을 모두 처리한다면, 그러면 나도 너와 같이 여행할 수 있을까?" "크큭. 뭐야? 겨우 그거였어? 당연하잖아? 여행이란 여럿이서 할수록 재밌으니까. 트레모스! 넌 예외다! 뭐, 1년 동안 란을 도와 일처리를 잘한다면 생각해보지~." "됐다, 내 참 더러워서. 전엔 안그러더니, 왕위에 오르고 나서 완전히 쪼잔 덩어리 가 되어버렸다. 너!" "뭐라고? 트레모스 이 녀석~!" "소리지르면 뭐? 이곳에서 한판 벌리겠다고? 나야 좋지~! 어디 해봐, 해봐~!" "에휴휴~, 내가 참는다~." 트레모스는 아까 내가 자신을 약올린 것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장 난스러운 미소로 입을 쫘~악 찢고는 히죽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리넨 잘 있어. 이만 가볼게. 1년이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빨리 할 일을 하러 가야지. 너도 그 동안 열심히 해. 그럼 1년 후에 보자." "에휴~. 그래그래. 가라 가~. 에휴휴~~~." 녀석들은 기죽은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보이고는 그대로 서재에서 모습을 감춰버 렸다. "하아~. 1년이 과연 란의 말대로 빨리 지나갈까?" <연금술사>-에필로그 대륙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왕국 유투. 폴보트 연합의 법황이 죽고, 미드 아르엘 대공이 사라진 이후, 대륙을 이끌어 가는 나라는 오직 유투 왕국 하나 뿐이었다. 단 하나의 나라가 대륙의 모든 대소사 일을 처리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유 투 왕국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것도 왕위 계승식이 있은 후부터 1년 내내 말 이다. 유투 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문제가 생겨도 그것은 적어도 1주일 내에 문제가 해 결될 정도로 유투 왕국은 신속함을 보였고, 그런 믿음직스런 모습에 백성들은 서서 히 유투 왕국에 믿음을 주며, 유투 왕국의 국민이라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크로아 왕국이나, 폴보트 연합이 사라진 후였지만, 유투 왕국은 그 모든 일을 세 나라가 있을 때보다 완만히 처리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1년 째 되는 해, 유투 왕국은 리넨이 왕위가 된 것을 축하하는 1주년 파티 가 거대하게 열렸다. 1년 동안 왕국의 모습을 너무도 완벽하게 바꾼 리넨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파티는 라피에르가 주관해서 열리게 된 것이었다. "라피에르, 네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유투 왕국과 과거 아버님께서 이끌어가던 때와 비교를 해보면 어떻냐?" 리넨은 파티가 열리기 몇 시간 전에 자신의 집무실로 라피에르를 불러 대화의 시간 을 가졌다. 서류가 잔뜩 쌓인 집무실을 어색해 하던 리넨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1년이 지난 지금, 그의 모습은 집무실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자연스러울 수 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런 변화를 라피에르는 흐뭇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물론, 지금의 유투 왕국이 과거보다 훨씬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지. 아니, 이상이 라고 해도 될 정도야. 하지만, 형! 아직 내가 왕국을 맡기엔 부족한 점이 한두군데 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게 떠넘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러니 오늘 파 티에서 말썽 일으키면 안돼~. 알았지?" "허허~. 뭐야? 1년 만에 물어보는 질문인데, 아니라는 대답이냐?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다니... 하아~. 이 형은 슬프구나~" 리넨은 라피에르의 대답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모르고 있다가 상처를 받기라도 한 듯, 한껏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라피에르는 리넨이 지금 자신을 놀리 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 씨~익 웃음을 보인 후, 당부의 말을 남 기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형~! 형이, 내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거 다 아니까, 그런 연극은 하지 말라고 ~ 쿠쿡. 그럼, 일 다보고 있다가 파티장에서봐~. 파티 준비를 완벽히 할려면, 내가 마지막으로 훑어봐야 하거든? 아! 내가 준비해둔 옷 입는 것 잊지 말고, 알았지? 그거 준비하느냐고 내가 두 달이나 고생했다고~. 입고 온다고 약속하지? 또 저번처 럼 평상복 입고 오면 안되! 명색이 유투 왕국의 왕이 말야~ 그러면 안되잖아! 알았 어?" 라피에르는 마치 리넨의 엄마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리넨의 일에 하나하나 모두 간 섭을 하다가 리넨이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본 후에야 잔소리를 끝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책상에 푹 쓰러져 있던 리넨이 울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아~, 저 녀석 잔소리는 정말이지, 돌아가신 어머니 못지 않다니까... 머리가 다 아프네~. 한번 왔다 가면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하니... 에휴~. 뭐, 그것도 오늘로 써 끝이지만 말야." "리넨님, 정말 오늘로서 왕성 생활을 접으실 겁니까?" 라이너는 라피에르가 나간 후에 모습을 드러내며, 리넨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리넨이 오늘로서 왕성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물론! 내가 네게 말한 것은 너 몰래 나갔다가 또 네가 성떠나서 고생할 것 같아서 였다. 네 녀석은 그러고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라피에르는 그럴 수 없지. 쿠쿡. 왕국을 이끌 수 있는 존재는 나와 그 녀석 밖에 없잖느냐~. 1년 동안 내가 뼈빠지 게 고생했으니, 이제 녀석이 할 차례지~." 리넨은 라피에르를 골탕먹이는게 즐겁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라이너는 그가 지금 꽤 큰 걱정을 가슴속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피에르가 왕국을 잘 이끌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아닌, 하나뿐인 가족인 자신이 떠난 후에, 그 허전함을 라피에르가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말이다. "리넨님..." 라이너는 리넨에게 뭔가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조용히 서류들을 정리하는 리 넨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정한 결정을 리넨이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피에르가 이 일을 보게 될테니, 일의 진행상황을 알기 쉽게 해줘야겠지? 그게 형의 도리니까 말야. 어디 보자, 이건 여기, 저것도 여기... 중얼중얼." 리넨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서류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책상에 빠르게 하나씩 쌓아 올렸다. 모든 서류가 책상에서 제자리를 찾았을 때, 리넨은 책상 서럽 속에 있던 손때 묻은 공책을 꺼내 그 서류들 위에 올려놨다. "어디 보자~. 이제 다 된건가? 아! 편지... 편지를 깜박했군! 녀석이 나를 찾으러 다닐지도 모르니까." 리넨은 가슴속에 뒀던 흰 종이를 조심스럽게 꺼내고는 그것을 허름한 공책 사이에 살며시 끼웠다. "1년 동안 세계 각지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친히 그곳의 문제를 해결했었지. 그러 면서 그곳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을 한 명 씩 뽑아 마을을 움직이는 사람으로 임 명했고... 모두 믿을만 한 사람들이고, 능력들도 출중하니, 내가 했을 때보단 시간 이 걸리겠지만... 녀석이라면 잘 해낼거야. 저 공책에 자세히 적어 놨으니까 말야. 그렇지 라이너?" 리넨은 자신을 납득시키듯 입을 열다가, 라이너에게 동의를 구했다. 한 명 보다는 두 명의 생각이 동일하다면 걱정을 반 정도는 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라피에르 저하께서는... 잘하실 겁니다." "그래! 녀석이라면~! 자, 이제 갈까? 아, 그 전에 라이너, 라피에르가 말한 그 옷 좀 갖고 와. 입어볼 기회는 없겠지만, 녀석이 정성들여 준비한 옷인데 기념으로 갖 고 가야지." "네." "아, 빨리 갔다 와. 트레모스가 조금 전에 이곳에 들렸었잖아. 란과 함께 유투 시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으니 빨리 그리로 가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라이너와 함께 유투 시로 나온 리넨과 라이너는 그곳에서 몰라 보게 강해진 트레모 스와 란을 볼 수 있었다. 트레모스야 원래 강해졌으니 그렇다고는 하지만, 리넨이 느끼기에 란은 1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야~. 오랜만인걸? 근데, 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라보게 강해졌 는데? 아, 마족들은? 다 해결한거야? 내가 1년동안 대륙의 일을 해결하면서 보니, 아직 살아 있는 마족들이 꽤 되는 것 같던데? 어떻게 된거야?"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리넨은 란에게 궁금했던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후후, 리넨. 천천히 물어봐도 다 대답해 줄테니, 그렇게 숨넘어갈 듯, 안 물어도 돼. 우선 1년 동안 나는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어." "뭐? 저..정령왕? 정신 정령왕 히에로스를 말하는거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리넨을 바라보며, 란은 희미한 웃음을 보여줬다. "맞아. 정령왕 히에로스와 계약을 맺었어. 아슬란과의 계약이 파괴된 히에로스였기 에 그게 가능했던 거지. 하지만 계약을 맺은건 극히 최근이야. 그 전에는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거든." "헐~. 놀라운걸? 네가 강해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령왕과 계약을 맺을 정도까 지 됐다니..." "후후, 아냐. 마족들 중, 정령왕과 계약할 만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야. 세상 구 경을 자주 하고 싶은 히에로스였기에 나와 계약을 맺어준 거지." "누가 그래? 히에로스가?" "뭐, 비슷하게 말했으니, 그럴거야." 리넨은 겸손하게 웃는 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랜만에 보는 옛 친구 의 발전이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참, 그건 그렇고, 마족들은? 그들은 어떻게 된거야?" "쳇, 란이 정령왕과 계약을 맺는 통에 모두 죽일 수는 없었어." 리넨에 질문을 대답을 한 것은 란이 아닌 트레모스였다. 그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을 앞으로 쭈~욱 내밀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것이다. "정령왕과 마족이 어떤 관곈데?" "쳇, 저 녀석이 글쎄, 모든 마족들이 다 나쁘지는 안다잖아. 마족 중에 어린 아이 도, 여자도 있는데 그런 그들까지 모두 죽일 수는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들 모두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거지. 정 령왕에게 부탁해 갱생의 여지가 있는 마족들에게 기쁨의 상급 정령 로이엘을 심어 둔 거야. 란이 제어할 수 있는 마족에 한에서 말야." "호~오, 그래서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던 것이로군?" "그래. 쳇쳇, 그 덕분에 나는 이리 저리 끌려다니기만 했다고! 손이 근질거려 혼났 네~. 아, 뭐, 그것도 너를 만났으니 이제 해결되겠지만, 리넨. 설마 잊은건 아니겠 지? 쿠쿡. 그래. 안 잊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의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조용히 리넨 옆에 붙어 있던 라 이너가 입을 열었다. "저, 리넨님 성을 나오긴 했는데, 이제부터 어디로 가는 겁니까? 특별한 목적지라 도?" "으~음, 글쎄?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 생각났다. 그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네가 검술을 배웠다는 그 섬나라!" "카..카나국 말씀이십니까?" "카나국? 거기가 어디야? 처음 듣는데?" 트레모스가 리넨과 라이너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리넨은 그런 트레모스으l 말을 무 시하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카나국! 거기에 한번 가보고 싶었어. 특별히 정한 장소도 없으니 그리로 가 보자. 대체 어떤 인물들이 있는 곳이기에 네게 그렇게 강한 검술을 가르쳤는지 알 고 싶거든? 서적에도 알려지지 않은 카나국이니까 말야." "호오~, 그런 곳이 있단 말이야? 리넨, 어서 가자! 좌표는 어떻게 되는 곳이야?" 트레모스는 리넨의 말에 흥미를 끌었는지 호기심 어린 두 눈으로 리넨의 어깨를 흔 들며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리넨은 그런 트레모스의 말에 고개를 단호하 게 흔들었다. "우린 무한한 시간동안 여행을 떠나는 거야. 좌표같은 걸 알아서 텔레포트로 휙~ 가버리는 건 여행의 재미가 아니라고! 우린 도보로 보트 시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탈 거야. 라이너, 이 방법이 맞지?" "네!" "좋았어~, 그럼 출발하자고~!" 리넨은 즐거운 여행의 시작을 알리듯, 활기찬 목소리로 출발을 외쳤다. 리넨이 왕국을 떠난 후... 유투 왕국은 라피에르가 왕위를 이어 받아 리넨이 기초를 잡아뒀던 모습 그대로 유 지해가며 태평성대를 이뤘다. 더 이상 이룰게 없을 정도로 유투 왕국은 완벽한 나 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왕국을 이끄는 라피에르는 단 한가지 이루지 못 한게 가슴속에 있는 듯, 가끔 집무실에서 창문을 열고는 멍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 다보곤 했다. "형..." 라피에르는 성을 떠난 리넨이 그 후, 단 한번도 유투 성으로 찾아오지 않은 것이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지, 가끔 오늘처럼 멍한 시선으로 창문을 바라봤던 것 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산들바람이 그의 고민을 씻어주려는지, 찡그렸던 라피에르 의 이마를 펴지게 만들었다. 팔랑~. 바람과 함께 흰 봉투가 날아와 근심 가득한 라피에르의 앞에 떨어졌던 것이 다. "이게 뭐지?" 바람이 전해준 종이 봉투에 호기심이 인 라피에르는 그 종이를 들어 펼쳐봤다. 꼭 꼭 싸여진 봉투였지만, 궁금증에 눈이 반짝이는 라피에르의 손에서 그 봉투는 순식 간에 찢겨져 나가고, 흰 종이만이 그의 손에 남았다. 촤르르륵. 라피에르의 손에 들린 흰 종이는 하나의 편지였다. 그가 잘 아는 누군가 의 필체가 담긴... "혀..형!" <사랑하는 동생, 라피에르에게...> 잘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유투 왕국이 잘 돌아가고, 안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 으로 봐서는 잘 지내고 있겠지? 이 형은 그렇게 믿고 있단다~. 참, 이거 성을 떠날 때 이후,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 는 것 같네? 그동안 연락도 못하고 지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편지를 보 냈으니, 용서해 주겠지? 뭐? 그렇게는 안된다고? 후훗, 녀석. 단단히 삐진 모양이 구나. 하지만 내게는 네 화를 풀어줄 방법이 하나 있지~. 뭐냐고? 그건 편지 나중 에 써줄테니 아래로 눈 돌리지 말아라. 험험~. 그럼,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기로 할까? 성을 떠난 나는 라이너, 트레모스, 란, 나 이렇게 넷이서 대륙을 떠돌았지, 처음엔 카나국. 아, 카나국은 리플러스 경의 고향이야. 내가 알기로 그도 유투 왕국을 떠 난 것으로 알아. 어떻게 아냐고? 내가 지금 카나국에 와 있는데, 리플러스 경이 우 릴 쫓아 왔지 뭐야? 지금 카나국에 온 것은 두 번째 인데, 몇 년 전 이곳에 와보니 , 리플러스 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지 뭐야? 깜짝 놀랐다니까? 영감탱이가 참 오래 도 살지~ 크큭. 아, 이야기가 잠까 옆으로 셌네? 어디까지 했더라? 음~, 그래. 여행이야기 하다 말 았지? 요즘 하도 생각을 안하고 지내다보니, 정말 머리가 돌이 됐어. 험험. 어쨌든 처음 카나국에 들렸다가, 거기서 질릴 때까지 지내고, 그리고 죽음의 숲으로 갔었 어. 내게 꽤 큰 도움을 준 이노와 쉐이트론, 그리고 키에라도가 그곳에 있기 때문 에 그들을 볼 겸 말이야.사실은 신의 영역에 대해 이노에게 물어볼게 있어서였지만 말야. 아 근데, 키에라도가 정말 아직까지 그곳에서 죽치고 있더라고~. 이노가 나가라고 구박을 해도, 절대 나갈 생각을 안해. 쉐이트론도 키에라도와의 대화에 재미를 붙였는지, 화를 내는 이노를 설득시켜 아직까지도 키에라도가 그곳 에 있게 만들었지. 쿠쿡.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겨. 애들처럼 장난치는 키에라도, 쉐이트론과 그들을 야단치는 이노. 마치 엄마와 아이들 같다니까? 어쨌든 그곳에서 꽤 재밌게 보내, 오래 있고 싶었지만, 이노의 눈치가 장난이 아니라서, 그곳을 나 왔지. 키에라도를 데리고 가라고 이노가 협박했지만, 우리가 그곳을 떠나는 동안, 키에라도가 숨어 있는 통에 그럴 수 없었어. 아마 지금도 쉐이트론과 대화를 나누 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물론, 이노의 무서운 눈칫밥을 먹으면서 말야. 크큭, 아~. 그리고 죽음의 숲을 떠난 다음, 여기 저기 대륙을 떠돌아 다녔어. 너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지. 물론,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 였지만, 그래도 여행 도중,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네 이름을 들을 때면 자랑스러워지는건 어쩔 수 없더라고. 크큭, 역시 넌 내 자랑스런 동생이야~. 시간도 넉넉하겠다싶어, 대륙도 꽤 꼼꼼히 돌아다녔거든? 그런데 그러다가 신의 대 리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지 뭐냐? 신의 대리인 알지? 왜 엘벤트 녀석 있잖아. 그 녀석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불렸었지. 그래서 혹시 그 녀석인가?하는 생각에 신 의 대리인에 대한 소문을 쫓아갔는데... 쿠쿡, 역시나 엘벤트 녀석이었더라고. 꽤 최근에 만났는데, 역시 나이를 먹었더라고~. 꼬맹이 제자 녀석도 한 명 데리고 있 어서 놀랬어. 그녀석이 벌써 제자를 키우다니 말야. 오랜만에 만난 녀석 곁에는 데칸티스가 없었거든?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녀석이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더라고. 너도 궁금하지? 글쎄 엘벤트 그 자식이 데칸 티스와 여행을 하던 중, 옛 폴보트 연합의 대공의 저택으로 가게 되는 일이 생겼데 ... 연합이 없어진 후였기에 가지 않으려는 데칸티스를 설득해서 엘벤트 녀석이 억 지로 끌고 가는 일이 있었데. 그런데 그곳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미드 아르엘을 만났다지 뭐야? 예전의 그 권위 적이고, 오만하던 미드 아르엘이 아닌, 평범한 어부 생활을 하는 미드 아르엘을 말 이야. 놀랍지 않아? 어쨌든, 데칸티스는 완전히 바뀐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 반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하더군. 쿠쿡. 결국 데칸티스는 죽을 줄 알았던 아버지를 만난 이후, 엘벤트와 헤어지게 된거지. 그래서 엘벤트 녀석이 외로움을 달랠 겸 제자 녀석을 한 명 만든거래. 근데, 왜 데칸티스가 의절까지 한 미드 아르엘의 집에 남은 줄 알 아? 그가 한 한마디 때문이었데. 왜 어부생활을 하느냐는 데칸티스의 물음에 미드 아르엘은 돌아올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자신은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는 생활을 한다고 했어. 데칸티스는 바로 그 말 한마디에 아버지의 집에 남은 거지... 엘벤트 녀석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만나 놀랐던지~. 미드 아르엘의 모습이 하도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인지 선뜻 믿어지지가 않더라 고~. 크큭. (아, 결국, 나중에 엘벤트 녀석에게서 알아낸 주소를 추적해 미드 아르 엘을 만났어.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뜬 후더라고. 아들을 만난 기쁨에 삶을 지 속시켜 왔던 단 하나의 끈이 풀린 거지. 이야기를 듣고 보면 참 안타까워... 라피에르야. 내가 그동안 네가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가지도 않았던 것은 바로 데 칸티스와 미드 아르엘의 이야기를 듣고 생긴 노파심 때문이야... 절대 그럴리 없겠 지? (이것 농담인거 알지? 미드 아르엘이 죽은건 사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거지... 넌 그보다 훨씬 젊잖아~.) 참, 보트시에 남은 데칸티스는 그래도 잘 살도 있더라~. 가정도 꾸미고 말야... 뒤 늦은 결혼이었지만, ㅋㅋ 참, 넌 결혼했냐? 이 형님보다 먼저해서는 안되는데... 크큭, 아, 이건 농담이다. 이미 네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아, 그 후엔 레지 산맥에 존재하는 트레모스의 집에도 가봤는데, 썰렁하게 큰 동굴 이더군. 괜히 가봤단 생각을 했었지... 크큭. 뭐, 그 후엔 사라진 크로아 왕국에도 가봤고... 대충 대륙의 구석구석을 모두 한번씩 돌아본 거야. 이제 여행도 다 해봤으니, 네게 한번 찾아가 보려고. 내가 편지를 네게 쓰는 이유 는 바로 그거지. 내가 너를 찾아간다는 것 말야. 참! 이것 만으로 내가 네게 용서 받을거라는 생각은 안해. 그래서... 험험... 그 왜 있잖아... 네가 준비한 그 휘양찬란한 흰색 옷... 기억하냐? 그거 입고 가기로 했다. 아직 한 번도 안입어봐서 아깝기도 하고... 네가 점수 좀 딸겸~. 그럼, 기다리고 있어라. 아마 편지가 네 손에 들어간 이후, 머지 않아 날 볼 수 있을거야. 근데 이 옷 정말... 입을 생각하면... 너무 화려해... 아, 트레모스하고, 라이너가 부른다. 란이 저녁 식사를 했는데, 다 됐다 네? 요즘 란의 요리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지? 최고야 최고. 정말 순식간에 그렇 게 변할 수가 없어. 혹시 기쁨의 상급 정령 로이엘을 우리들 몸에 심어둔거 아니야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말야. 앗! 저 녀석들이 다 먹어치우겠네. 나 이만 가볼게. 리플러스 경까지 합세한 모양 이야. 저 양반이 생각보다 식성이 좋더라고. 그럼, 나중에 보자~. 밥 먹으러 뛰어가면서 리넨이... 라피에르는 마지막에 휘갈겨 쓴 리넨의 편지를 바라보며,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혀..형..." 그가 죽기 전에 형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하늘이 이제야 들어주려는지, 라피에르는 리넨의 편지에 가슴이 벅차왔던 것이다. 뚝뚝. 그동안 흘려본 적 없던 짠 액체가 리넨이 보낸 편지 위애 두어 방울 떨어지 자, 라피에르는 깜짝 놀라며, 조심스럽게 편지의 물기를 잘 닦고는 글씨가 번졌나 확인하며 눈가의 물기도 닦아 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왕실에서 버릇없이 뛰어다니는지, 자가마한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방 바로 밖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졌던 것이다. "하라뻐지, 하라뻐지~~~!" 말광량이 손녀가 할아버지를 찾고 있는지,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를 시끄 럽게 만든 것이다. 콰~앙! 그런데 소녀가 찾는 할아버지가 라피에르의 방에 있다고 생각한 건지, 복도를 떠들 썩하게 만든 소녀는 편지를 들고 있는 라피에르에게로 뛰어왔다. "하라뻐지~~!" "오, 퓨리아~! 이 할아버지를 찾았느냐?" 라피에르는 한 손으로 귀여운 금발머리의 소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귀여워 죽겠다 는 듯, 소녀의 부드러운 볼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퓨리아를 쫓아온 병사들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소란을 피운 퓨리아를 쫓아온 병사들에게 이제는 괜찮으 니 그들의 일을 하라고 알린 것이다. "꺄르르를~. 웅웅~, 퓨리아가 하라뻐지 찾아다녔쪄. 군데 하라뻐지 손에 든 건 뭐 야?" 소녀는 쭈글쭈글한 라피에르의 손에 들린 흰 종이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편지를 처음 보는 듯, 소녀는 모든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 이건 편지라는 거란다. 할아버지에게 형님이 한 분 계시거든? 그 분이 내게 보낸 것이지. 여기 적힌 글을 보면, 할아버지의 형은 아마 며칠 후에 이곳에 오실 지도 모르겠구나. 퓨리아는 그 때 꽃단장을 해야겠지? 할아버지의 형님이니까, 예 쁘게 보여야지~. 아, 그리고 이 편지는 할아버지의 두 번째 보물이 되었으니 소중 히 관리해야겠구나." "우~웅?" 퓨리아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라피에 르가 하는 말을 어린 퓨리아가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피에 르는 소녀가 이해를 못해도 상관이 없었는지, 자세한 설명은 해주자 않았다. 라피 에르는 그저 손에 들린 리넨의 편지를 허름한 공책과 낡은 편지가 들어 있는 서랍 에 조심스럽게 넣어두고는 퓨리아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은 채 말이다. "형님에 내게 놀라운 소식들을 전해줬으니 나도 형님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줘야 겠지? 네가 글로리아의 소녀라는 사실과, 글로빈과 아르넨이 결혼했다는 사실... 그 외에도 많지만, 이 정도로도 놀라겠지? 아니, 어쩌면 형님께서는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구나~. 퓨리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아, 이러고 있을게 아니구나. 형님 이 오실테니 어서 형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지~! 여봐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T_T 쥘주리 드뎌 끝났습니다.... 다 끝내고 나니... 약간 허무하긴 하네요~ >_< 하지만! 그래도 완결을 했다는 것에 만족감이~~~~ (아, 이제 편안한 휴식을~ 캬캬캬~) 리플 많이 달아주세요~ >_< 마지막이니~ 쿄쿄~ 참, 후기 써서 올릴께요~ ㅎㅎㅎ 그럼, 전 이만~ 스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