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의 아이 - 프롤로그 : 신계의 어느 날 -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이 세계의 질서가 어지럽혀질 것이 눈에 선합니다” 격한 목소리들이 주신전을 들썩거리게 하고 있었다. 7명의 최고신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졌으며, 그 안에는 신계에서 가장 냉정한 성품을 가졌다는 ‘지혜와 판단의 여신’인 아테나이의 목소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신 휘하 8대 최고위신의 회합은 신계에서도 드문 일. 정작 이 일에 대하여 해명을 해야할 최고신인 ‘자애와 치료의 여신’ 세레스와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진 주신 쥬피스만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침묵을 고수했다. 한참 동안 목소리를 높이던 7명의 신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을 알아채고, 하나씩 입을 봉하며 주신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기 마련, 주신의 여덟자식 중 ‘용기와 의리의 신’인 포세이스는 의리 없는 형과 누나들이 속속들이 입을 닫을 줄도 모르고 끝까지 목청을 높여 외치다가 안그래도 큰 자신의 목소리만이 주신전 안을 채우자, 뒤늦게 당황하고 얼굴을 붉혔다. 한동안 신들의 목소리로 들끓던 주신전안이 침묵속에 잠겼다. 주신의 눈은 세레스를 향하고 있었고, 세레스 또한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한 숨을 내쉬며 주신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의견은 잘 알았다. 그리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법은 만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니면 내가 노망이라도 났을까 염려하는 것이냐?” 순간적으로 스산한 기운이 주신전을 맴돌았다. 아버지라고는 칭하지만, 인간들과 같은 혈육의 위치가 아닌 피조물의 위치인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지상에서 수많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높은 능력을 자랑하는 최고신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신계의 법 또한 주신의 권능의 발현이었으며, 주신의 의지일 뿐이다. 오늘 당장 그 법을 바꾼다고 해도, 떠들어대던 신들을 모두 소멸한다고 해도 주신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작업(?)이 하나 더 생길 뿐이지, 크게 지장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무’로부터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이므로. 형만한 아우는 없다던가? 맏형인 포이브론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감히 저희가 어찌......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뒤를 이어 이미 중앙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세레스를 제외한 일곱신이 일제히 형의 혹은 오빠의 뒤에서 덩달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서야 알게 모르게 기세를 돋구었던 주신 주피스는 굳었던 얼굴을 펴며, “되었으니 일어나라!” 하고 손을 휘휘 저었고, 역시 세레를 제외한 일곱신만이 얼른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이전보다는 훨씬 공손해진 자세로 서서 주신의 눈치를 살폈다. 실상, 주신은 너그러웠다. 존재의 처음이며 끝이라 여겨지는 그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늘상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신은 주신이었던 것이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드디어 주신은 의외로 세레스가 아닌 포이브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보거라” “예” “말해보아라” “신과 드래곤을 모두 수용할 존재는 인간 뿐이니, 존재의 처음은 인간으로 끝은 신보다 높으리라” 약간의 술렁거림이 진정된 후, 주피스는 입을 열었다. “세레스” “네” “네 아이는 나의 창조물이 아니며, 또한 신이 될만큼의 수련을 거친 영혼도 아니다. 갓태어난 영혼은 나의 창조물이 아니고는 신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압니다” “그럼에도 너의 아이는 너의 기운을 받았으며, 더더군다나 드래곤의 능력까지 물려받을 것이다. 이는 이 세계 웬만한 신보다 더 큰 능력이니 균형을 어지럽힐 것이다.” “......” “허나, 내가 너희에게 자율의지를 주었으며, 감정을 가지게 하였으니, 나의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너의 사랑은 가히 완전에 가까운 바,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세레스야. 그 아이를 너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다 하였지만, 네 생명은 원래 내 것이다. 그리고 법 또한 법이로구나. 균형을 깨뜨린 너는 벌을 받아야 한다.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 죽음을 언급할 때에도 흔들림없던 세레스의 표정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란, 목숨처럼 사랑하는 그녀의 반려와 규율을 어기고 잉태한 그녀의 아기.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는 그리고 그녀의 큰오빠의 예언으로 보건데 그녀의 아기는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주신의 가차없는 판결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세레스의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닫혀진 공간의 차원으로 보낸다. 그 아이는 17년간 가장 천한 환경에서 자라야 할 것이다. 그 이후로는 환상계로 보낼 것이다. 세레스는 그 동안 자식과의 어떠한 만남도 불허한다. 또한, 세레스의 반려인 드래곤도 동일기간 강제 동면에 처한다” 적막함이 감돌았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던 신들조차도 세레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닫혀진 세계의 시간은 모든 차원의 시간 중 가장 늦은 곳으로 그곳의 17년이라면, 환상계와 신계의 시간으로는 무려 1700년에 해당했던 것이다. 드래곤이야 그 동안 동면한다면, 잠시 자고 일어난 것이나 다름 없으나, 세레스의 소임이 지워진 것은 아니므로, 1700년을 반려와 혈육을 만나지 못하게 함이니, 어찌보면 가장 잔인한 일이 될 수 있음이었다. 허나, 주신의 처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너의 무분별한 행위로 인한 과한 능력을 가지게 될 그 아이는 능력에 합당한 카르마를 짊어질 것이며, 생의 마지막에서 인간과 같이 아테나이의 저울로 심판되어 모자랄 경우 합당한 생으로 윤회하게 될 것이다.” “아버님. 그것은.....” 끝까지 말없이 처벌에 수긍하던 세레스조차도 이 부분에 대하여 무언가 항의를 하고자 했으나, 가차없는 쥬피스의 말에 가로막혀버렸다. “규칙은 규칙이다. 모든 생물은 타고난 능력만큼의 카르마를 가지는 것. 그 선행의 빛이 능력에 미치치 못한다면, 미물부터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세운 법이니, 결코 깨어질 수 없다” 회합, 아니 어쩌면 재판이랄 수 있는 순간이 지나자, 세레스는 무너지듯이 엎드려 오열했다. 처음에는 균형을 언급하면서 핏대를 올리던 다른 신들도 주신의 가혹한 판결에 오히려 세레스를 위로하기 급급했다. 그들은 저마다 태어날 아이가 자신들의 조카라면서, 결코 방치하지 않겠다 약속했으나, 아테나이만은 저울의 주인이므로 말을 꺼내지 못한채 난처한 표정으로 세레스의 주위를 서성일 뿐이었다. 그런 아테나이의 귀에 포이보스는 미소를 지으며 속닥거렸고 돌연 환해진 얼굴로 아테나이는 다시 세레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제서야 세레스는 아버지 주신의 자애로움이 끊겨지지 않았음을 느끼고 약간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 1988년 대한민국 서울 전국이 올림픽의 열기로 달아오른 어느 날 늦은 밤, 은평구에 위치한 천사의 집 앞에는 포대로 싸여진 갓난아기 하나가 버려졌다. 올림픽 중계방송을 본답시고 거실에 한 데 모여 응원열기에 휩싸인 아이들을 모두 방으로 보낸 김장로는 평상시처럼 천사의 집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취침기도를 시키고 문단속을 하다가 철문 앞의 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눈도 못뜬 아기는 탯줄조차 완전히 여물지 않은 모습으로 보아,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것이 분명했다. 더더군다나, 웬만한 부모라면 아니 혼자 몸으로 낳은 어머니라고 해도 메모라도 한 장 써넣기 마련인데, 그러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2004년 4월 1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은평구 S고교 2학년 3반 교실 8시 자율학습 시간에나 겨우겨우 달려오던 학생들이 거의 모두 교실에 앉아있었다. 반장인 은호와 부반장인 지혜가 교탁 앞에 서서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규율반이면서 이 반에서 한 주먹 한다는 정후가 나서서 교탁을 몇 번 발로 찬 다음에야 어느 정도 반장의 말이 들릴 정도가 되었다. “흠흠.. 얘들아, 그럼 어제 나온 의견대로 전체 진행은 지혜가 하도록 할꺼야. 조를 나누어야 하니까 모두 조용히 해” 하복을 단정하게 입은 지혜는 겉보기에는 모범생의 전형이라 할 정도로 얌전해 보였다. 165cm 정도의 키에 보기 좋은 체격, 은빛 안경테가 하얀 얼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고, 교칙에 나와 있는 교복착용의 ‘예’를 보여주는 듯이 단정한 하얀 양말에 단화를 신은 모습이었으니까. 선생님들도 지혜의 이름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남녀공학에서는 드물게도 전교1등을 주로 하는 지혜라면 다들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부정확하다고는 하지만 1학년 때 실시한 IQ 검사에서 158이라는 수치를 보여주어 ‘과연...’하는 감탄사를 자아냈다고 한다. 하여,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지혜는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이쁜 학생일 수 밖에 없었다. 흠이 있다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양호실에 들락거리고, 조퇴가 잦다는 정도랄까? 하지만, 그야말로 ‘어른들은 몰라요’ 가 정답이었다. 상기된 내용은 학생들이 그야말로 재수없어 할만한 표본이라 하겠다. 그런데, 지혜는 전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실제로 귀찮아서 절대 하지 않겠다는 모종의 운동 - 본인이 직접 나선 낙선운동이랄까? - 덕에 부반장이 되었을 뿐이지, 실제로 이 반의 모든 권력은 지혜에게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어른들이 몰라요라는 문장의 비밀은 무얼까? 후에 나오니 비밀이다. 암튼 지혜는 말한다. “아이 정말 귀찮어. 걍 번호로 할테니까 알아서들 해. 1번부터 6번 00조, 7번부터........” 한동안 번호와 조에 대한 호명이 이어진 후 “자 오늘은 무슨날?” “만우절” 반장인 은호의 말에는 마지못해 들어주던 아이들이 지혜의 유치할 법한 질문에는 유치원생들처럼 입을 모아 대답을 한다. “오늘 목표는?” “하루 종일 놀기” “좋아, 좋아. 1교시는 1조 담당이다.” 아이들은 조별로 모여, 해당되는 조에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작전수립에 몰입했다. 지혜는 늘상 하던대로 빈둥거리면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수거했는데, 수거가 끝나자마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는 쩝쩝거리는 것이었다. 이는 매일 아침의 행사로서, 지혜의 도시락 기부 시간이라 명명한다. 지혜를 동경하는 일부 아이들은 아예 지혜 전용으로 도시락을 싸올 정도였고, 냄새 안나는 반찬으로 짜여진 도시락은 자율학습 시간을 비롯하여, 거의 매 쉬는 간마다 지혜의 뱃속에 들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양을 먹어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희야, 이거 먹어봐 응?” “으이구 되었다. 너나 많이 먹어라.” “아잉~! 한 개 밖에 안먹었잖어. 이거 맛있다니까~~” “이x아, 내가 너냐? 도시락 한 개면 되었지. 멀 또 먹어?” “훔... 애정이 식은거야. 엉엉~!” “눈에 물기라도 묻히구 우는 척해라. 헉~! 그렇다구 침바르냐?” “아앙, 다희는 내가 싫은가봐. 얘들아 다희가 날 싫어해” 이 또한 매 시간 벌어지는 일이다. 한지혜와 김다희. 어찌보면 참으로 안어울리는 둘은 무척 친한 친구였던 것이다. 선생님들 눈을 피해 온갖 놀이(?)의 선봉에 서서 아이들의 우상인 동시에 선생님들께 이쁨받는 존재인 한지혜와 성적은 평범을 달리고 앞머리는 늘상 얼굴을 뒤덮은 약간 어두운 분위기의 다희의 관계는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는 언벨런스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혜가 워낙에 다희를 쫄쫄 쫓아다니는 관계이다 보니 지혜에게 접근하기 위해 다희의 주변에도 예전과는 다르게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물론, 그나마 틱틱거리면서 하는 대꾸조차 지혜 이외의 사람에게는 잘 안하는 다희이고 보면, 그 모인 사람이라는 것도 얼마 안가서 썰렁해지지만 말이다. ‘만우절’이라는 거창한 날, 아이들은 조별로 준비한 기타등등을 이용하여, 어떤 시간은 오락으로 어떤 시간은 선생님의 잡담같은 이야기로 거의 성공을 이루었다. 오전의 혁혁한 전과를 기뻐하면서 점심시간은 그 이야기로 더욱 수다거리가 풍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성공은 모두 지혜의 놀라울 정도의 준비와 조사에 입각한 것이었다. 지혜는 각 선생님들의 성격과 취미 등등을 줄줄 꿸 정도의 사전지식을 갖추고 각각의 약점을 공격하는 지침을 내렸던 것이다. 예를 들어 절대 수업을 빼먹지 않는다는 역사 선생님은 아직도 한 시간을 ‘놀았다’라는 지각이 없으실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시는 이 선생님은 정통역사 이외에도 여러 가지 야사를 알고 있었고, 수업 중에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이 이야기들을 하다 곁길로 새어서 한 시간을 진창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이 선생님의 시간에 편성된 조는 삼국지 게임을 능통하게 하는 몇몇을 주축으로 하여 각각의 캐릭에 대한 질문을 해대었고, 별 쓰잘 데 없는 오락게임이라는 통념이 깨어진 이선생님은 그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혼자 열심히 하면서 조자룡을 최고의 무력을 가진 캐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등등의 결론을 마구 내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 캐릭들이 나왔던 주요 사건들이 줄줄이 옛날 이야기식으로 나왔음은 물론이다. 정신을 차려 삼국지 이야기를 접어놓으니, 이번엔 에이지 시리즈를 통달한 녀석이 세계사를 훑어댄다. 결국 한 시간 동안 아이들은 게임을 주축으로 한 옛 이야기나 신화 등등에 대하여 즐겁게 떠들고 답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후일담으로는 이 선생님은 이후 삼국지 게임 시리즈와 에이지 시리즈에 빠져서 PC방에서 몇 달을 죽치고 살았다는 후문이 있다. 최근에 결혼한 수학담당 한 선생님은 사모님과의 열애담을 털어놓았고, 원래 분위기 잘 타시는 과학담당 선생님 시간엔 아예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다시 배열한 후 파티장 분위기를 만들어서 준비한 다과와 함께 오락을 하면서 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실상 지혜는 웬만한 전략게임이나 RPG 게임은 랭킹에 들 실력이었고, 세련된 화장발을 빛내며 무도회장 및 미팅자리를 들락거림은 물론, 마당발을 이용하여 새끼치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연예인들의 웬만한 비화를 줄줄이 꿰고 있는 그야말로 ‘잘 노는 학생’의 진수였던 것이다. 실제로, 지혜의 오빠의 경우는 학교 공부에 실증을 내고 독학으로 14살에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 20살에 3개 부분 박사학위를 따낸 천재 중의 천재였는데, 그 오빠마저 지혜의 머리에는 두 손을 들었다고 하니 대충 능력을 알만한 노릇이다. ‘풋, 정말 못말려.....’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로 가려진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다희는 지혜의 황당한 애정공세를 몇 번 받아 넘긴 후 스스로의 행운에 감사했다. 사실, 지혜를 만나기 전까지 다희는 거의 왕따 직전의 은따였다. 그나마 여러 번의 쓰라림 끝에 ‘왕따’에서 ‘은따’가 되었다고나 할까? “김다희, 수업 끝나고 교실에 남아라”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정말로 님자를 붙여주고 싶지 않은 치졸한 인간이었다. 학기초 면담 때 다희가 ‘천사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안 후로는 마치 다희를 벌레취급 하듯 했던 것이다. 분명히 도벽이 있어 전과가 있는 아이가 반에 있었는데도, 아이들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 때마다 다희를 족쳤다. 처음엔 너무 속상해서 원장 선생님께 말씀도 드려보았다. 다희에게 성을 붙여주신 김장로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학교까지 찾아와 담임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차별’없이 대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미소를 지으면서 당연하다고 대답한 담임은 그 다음날 하루종일 다희를 벌세웠다. 물론 핑계는 있었다. 그 전 날 벌세운 시간에 아이들에게 말했던 내용 - 교과서에도 없는 내용 -을 질문해놓고는 대답을 못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해 봐도 별 소용 없음을 이미 다희는 알고 있었다. 말대꾸를 했다는 죄명이 하나 더 붙을 테니까. 선생님이 다희를 미워한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들은 다희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다희는 외톨이가 되었고, 그러한 무시가 괴롭힘으로 이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희는 흔히 말하는 ‘왕따’가 되었던 것이다. 다희는 왜 선생님이 자신만을 그렇게 미워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몇 달이 지나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별 거 아닌 이유로 다혜를 윽박지르면서 체벌을 하던 그 담임은 “너 니가 잘난 줄 알지?” “......” “쓸 데 없이 영악한 년. 공부만 잘하면 다냐? 태생도 모르는 년이면 답게 굴어야지. 네가 자꾸 나서니까 되는 일이 없어” 다희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 선생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일부러 시험을 평범하게 본 이후 알 수 있었다. 늘상 2등을 하던 명호라는 아이의 엄마가 학교로 찾아와 보란 듯이 아이들에게 간식을 돌리고, 담임이 늘상 타령을 하던 비품 몇 개를 사놓고 갔기 때문이다. 그랬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의 성적이 오르면, 담임에게는 여러 가지가 생겼다. 특히 1등을 한 애의 부모가 잘 사는 경우에는 더더욱. 학부형들이라고 다 똑같을까마는, 다희의 담임이 워낙 소문난 이고 보니 웬만한 부모들은 일년간 열심히 갖다 주고 아이가 구박받지 않는 선에서 안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자진하여 그리 하는 학부형의 경우 엄청난 물량공세로 편애받는 자식을 만들 수 있었고. “다희야 수업 끝나고 머할 거야? 응응?” 씁쓸한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 앞에 쑤욱 내밀어진 얼굴이 있었다. 당연히 지혜다. “다희야~~ 우리 자기야~~~ 아앙~!” “헉...” 여간해서 감정 변화가 없는 다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지혜의 강도 높은 애정공세는 후유증이 엄청나다. ‘또 먼 짓을 하려나?’ 소리 내어 말했다가 나타날 후환이 두려워 속으로 궁시렁거린다.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아픈만큼 성숙(?)해진 다희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응 왜?” “아이~~ 우리 다희는 대답두 너무 이뻐~~~” 아아, 이건 보통 일이 아닌가보다. 이 레파토리는 지난 번 엄청난 부탁(?) 때와 흡사하지 않은가. 남들이야 모를 일이지만, 하루 이틀 겪어온 것이 아닌지라, 더럭 겁부터 나는 다희였다. 이런 속마음과 달리 다희는 지혜를 보면서 어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드러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숙였던 고개를 드는 것이지만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6교시가 강적이잖어. 도와줄꺼지?” “응... 헠. 뭐?” 반사적으로 준비된 대답을 읊어놓고 다희는 기겁을 하면서 지혜를 보았다. ‘6교시라면... 안돼애애애~~~~~~~~~~’ 이미 나간 대답이다. 만일 지금 철회하면 처음 거절한 것보다 몇 배는 강도가 높은 고문이 뒤따를 것이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아니, 어차피 후회할 일도 아니다. 처음부터 거절했어도 지혜의 성격상 결국 승낙을 받을 것이 뻔하니까. 유독 지혜에게는 약한 자신을 질책하면서 다희는 6교시 담당인 체육선생님을 떠올렸다. “지혜야” “응?” 기다렸다는 듯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단하는 지혜. “저어.. 그 도와달라는 것이...” “아, 별거 아냐. 서 선생님은 오락 프로그램 매니아잖어~! 요즘 유행하는 거 알지? 기왓장 격파. 너는 시범으로 딱 열 장만.. 아니다, 너무 시시하지? 열 다섯장만 깨면 된다 머~!” “그, 그건...” “응? 너무 시시하니? 그럼 스무 장으로 할까?” “앗, 아니야~! 열다섯 장 할게” “응 그러지 뭐. 흠... 스무 장이 더 쇼킹할텐데.. 아깝군...”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지혜는 6조 아이들 쪽으로 갔다. 물론 가서 몇 마디 지시한 후에, 빵 몇 개와 우유 두 개를 들고 말이다. 그 날 다희는 언뜻 텔레비전에서 본 여자들의 폼을 떠올리면서, 기왓장 열 다섯 개를 격파했다. 물론, 그 여자들이 하던 대로 온 몸을 날려서 그 충격으로 깬 것처럼 시늉을 했고, 마지막 한 장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깨어지도록 힘조절을 해야만 했다. 실지로 기왓장을 격파하는 것보다 억지로 깨는 듯한 연기와 아슬아슬하게 깨어지도록 하는 힘조절이 훨씬 어려웠지만 말이다. 이를 본 체육선생님은 거의 한 시간 내내 준비한 기왓장을 혼자 깨보느라 진땀을 흘렸다. 물론, 다희가 15장을 깨었으므로 자신은 20장을 깨겠다고 오기를 부렸기 때문에 한 시간 종이 칠 때까지 아이들은 자유시간을 가졌다. 결국 떼로 몰려들어 질문을 하는 아이들에게 이리 저리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느라 다음 쉬는 시간에는 속으로 진땀을 흘려야 했고, 남학생들에게는 신기+황당+괴물 이라는 의미 섞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물론 아이들은 피나는 연습의 결과 + 사전 조작 이라는 어설픈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체육시간에조차 그저 중상에 속하는 실력을 보이는 다희이다 보니...... '딩동댕동' 왜 벨소리는 저 소리여야 할까? 미도레솔 솔레미도 도미레솔 솔레미도. 저절로 외워지는 계명을 읊으면서 다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찌되었던 마지막 교시가 끝났고, 오늘은 종례도 없다 하였으니 - 이 부분에서 아무래도 만우절 스페셜 골탕을 의식한 담임 선생님의 선제방어가 아닐까 의심하기는 하였지만 - 한시바삐 교실을 떠야겠다고 생각하는 다희였다. 10살 이래로 여태껏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평범 유지’라는 굳건한 인생관에 크게 타격을 받은 날인만큼... 데미지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할 밖에.... “다희야~~~” ‘난 못들었어, 못들은거야. 암...’ 고개를 숙이고 교실을 나가면서 다희는 뒤에서 부르는 지혜의 목소리를 못들었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덮썩’ ‘허겈...’ 틈을 비집고 들어와 팔짱을 끼는 지혜를 피할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귀지 파줄까?” “으,,, 응???” “잘 안들리나봐~! 우리 이쁜 다희 귀에 귀지가 팍 막힌게... 기달려봐.. 어디 있더라???”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는 지혜를 앞에 두고 만화에 나오는 큼직한 땀방울은 이럴 때 뒤통수에 매다는 거군 하는 뜬금없는 상상이 되는 다희였다. 일단 말하면 실천에 옮기는 지혜의 성격을 아는지라, 상상만 하고 있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 아냐.. 귀가 막힌게 아니구. 생각하다가 못들었나봐. 왜?” “어머? 그게 아니야??? 아깝다~~~! 무릎베어 높고 다정하게 귀파주려구 했는데...” 상상만해도, 아니 상상하기도 싫은 그림이 머리위로 떠올랐다. 다희는 다시 한 번 큰 땀방울을 상상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너 그런 것도 가지고 다니니???” “아아니, 평소엔 안가져다니는데~~! 네가 요즘 귀가 좀 나빠진 것 같아서 어젯밤에 챙겨놨지 머~~~!” 태연자약하게 다시 요지경같은 가방안으로 그 물건을 감추어버린 지혜의 대답이라니. ‘아, 내 팔자야. ’ 속말은 했지만, 실은 다희가 지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다희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지혜도 포함되어, 첫 손에 꼽힐 정도였던 것이다. 지혜보다 더 애착이 가는 사람이라면 김장로님 정도일까? 하지만, 김장로님께 사랑을 주고 받는 아이는 다희만이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아이들의 아버지였으니까. 그리고 지혜는 다희의 속사정을 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아, 그런데 무슨 일로? 늘 바쁘잖아?” “엄머~~~ 무슨 섭한 말을~~~ 나야 우리 다희랑 항상 같이 다니고 싶지만, 네 생활을 보장해주느라 참은거지~~~!” 친한 친구라고 해서 그들이 늘상 같이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지혜는 그 수많은 업적들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PC방과 무도회장, 미팅장소 이르기까지 추종자들을 줄줄 이끌고 다녀야 했고 다희는... “다희야 오늘도 아르바이트???” “응” 바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천사의 집에서 기본적인 것들이 해결되지만, 안그래도 힘든 재정상태에 근래 침체된 경기로 기부금까지 줄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희는 자신의 용돈을 받아 챙길만큼 어리지도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더더군다나, 다희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아주 특별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니까. 아버지는 다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셨지만, 다희는 자신도 즐길 수 있고 도움이 된다면서 중학교 3학년 때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 그럼 같이 가자. 나도 오랜만에......” “너,, 너도 가게?” “응??? 나도 갈래” 당연하게 옆에서 따라나서는 지혜를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어지는 다희였다. 소식 - 환상계 실버 드래곤 유스테우스는 주신의 판결을 그가 보낸 ‘천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판결의 장면의 영상을 본 후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물었고, 동면을 위한 주신의 배려가 일주일 남았음을 전해들었다. 이미 에인션트급인 유스테우스는 차기 실버 종족의 수장으로 당연시 되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뛰어남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헤츨링 시절 골드 드래곤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그에게 세레스 여신이 우연히 관심을 두게 된 것부터가 그 시발점이랄까? 하지만, 이를 화근이라 일컬음은 다른 드래곤이나 신들의 관점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세레스에게 연정을 품어온 유스테우스에게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그는 영상에서 포이브론, 아테나이, 세레스로 이어진 귓속말을 헤아려 추론할 정도의 머리는 가지고 있었다. 능력을 봉인하여 이세계로 던져질 자식이 아테나이의 저울에 달리는 것. 불가능할 정도의 능력에 대한 선행의 빛.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세레스의 아이를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주신의 배려를 눈치챘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유스테우스는 동면에 앞서 친우인 골드 드래곤 하비어스를 불러냈다. 세레스의 아이에 관한 일은 신계에서조차 쉬쉬하는 일이지만, 세레스와 유스테우스의 사이를 줄곧 지켜본 하비어스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스테우스와 하비어스는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비어스는 유스테우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친우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태어날 아이의 능력 또한 대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전혀 손해날 것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700살이 될 때까지 이 둘을 제외한 헤츨링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과, 골드와 실버의 속성적인 친분 덕에 숙명적으로 친구가 되었던 이 둘은 4300살의 에인션트 드래곤의 시절의 말엽에 용언으로 하나의 약속을 하게 되었으니...... *************************************************************************** 유스테우스가 각종 결계와 가디언들로 장시간의 동면을 예비할 무렵, 하비어스는 발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단 약속한 것이지만, 일단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크게 당할 것이 필요한 용 한 마리가 있었고, 해야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유스테우스와 반려의 인연을 맺은 골드 드래곤 아인시아의 레어에서는 약간의 소음(?)이 발생했다고 한다. 물론, 드래곤에게 약간의 소음이었지만 그 주변의 오크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당일 일어난 약간의 소음이라는 것이 에인션트 급 드래곤 두 마리의 피어와 메테오 몇 번, 공간 왜곡 몇 번과 브레스 세 번이었으니... 그나마, 드래곤 레어 주위의 결계로 인하여 브레스가 카이로 산맥을 망가뜨린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파동 덕에 주변에 살던 오크 종족의 임산부들은 불행히도 ‘반산’을 해야만 했고... 소심한 고블린들 중에는 심장마비로 몇 십 마리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잘 날던 와이번 한 마리는 추락사했지만 말이다. 이후, 세레스에게 미안함을 가졌던 아테나이가 아인시아의 레어에 강림했다는 소문이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17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밝혀질 듯... ************************************************************************ ‘자애와 치료의 여신’ 세레스는 이 1700년간 가장 사랑받는 여신이 되었다. 자식을 멀리 보내고 연인과도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세레스는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다. 그녀의 신전의 신관들은 믿음에 따라 엄청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여신의 강림을 받은 대신관 하이레우스의 경우는 죽지만 않으면 소생시킬 수 있다고 할 정도의 치유력을 발휘했다. 몇몇 신들의 신전이 인간들의 욕심과 신들의 무관심이 뒤섞여 권력을 탐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 것에 반해 - 창조와 무력의 신인 헤파이토스의 경우 신관들보다는 오히려 전사들과 드워프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점이나,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테이아가 유희하면서 꽃미남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점을 굳이 들고 싶지는 않다. - 신관들 중 가장 믿음이 돈독하고 순수한 영혼을 골라내어 대신관 자리를 직접 잇게 한 세레스의 신전은 대신관의 판단에 따라 성력이 곧 등급이 되었으므로, 그 어떤 비리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뛰어난 신성력과 여신의 사랑에 힘입어 하이레우스의 후계는 이후 1700년간 12명의 대신관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수명이 보통 60-80세인 대륙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들은 지극한 장수를 누렸던 것이다. 실제로 중간의 몇 몇 신관은 엄청난 수련으로 인해 인간계와의 인연이 그들의 육체적인 수명보다 빨리 끊어졌다고 한다. 세레스는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주신전에 대한 지극한 복종심을 가르침으로써, 주신전의 번영을 돕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실제로 여덟명의 최고신들은 강림도 하고 이적도 일으켰지만, 주신의 강림은 차원의 균형이라는 이유로 거의 불가하다시피 했고, 각 분야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있는 최고신들의 구체성은 추상화된 주신의 권위보다 인간들에게 작용하기 쉬웠다. 하여, 최고신들의 의도로 주신전이 대륙에 자리하고는 있었으나, 경배하는 이들은 오히려 8대신에 훨씬 못미쳤고, 이에 대하여 그간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세레스는 엄청난 권능을 가진 그녀의 대신관을 위시한 신관들이 반드시 주신전에서 일정기간 봉사하게 만들었고, 평생 아프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지라, 사람들은 치료의 영험을 가진 세레스와 그녀가 확연하게 고개숙인 주신의 권위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륙이 생긴 이래로 주신전의 번영은 최고조를 이루었고, 각 제국과 왕국의 왕족들은 그들의 권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주신의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아르바이트 겉으로는 마지못한 표정을 고수하고 터덜터덜 걷는 다희의 옆에는 달랑 팔짱을 끼고 다희와는 대조적인 웃는 얼굴에 경쾌한 걸음걸이를 선보이는 지혜가 부록처럼 매달려 있었다. 172cm에 호리호리한 체형. 스커트로 된 교복만 아니라면 가려진 머리와 걸음걸이, 분위기는 다희를 남학생처럼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더더군다나, 긴 다리로 퍽퍽 내딛는 보폭은 그다지 작지 않은 지혜가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달려가는 폼을 만들었으니, 복장만 아니라면 풋풋한 한 쌍의 커플(?)로 보이리라. “지혜야.” “응? 왜애?” “그만 좀 매달려라” 어찌 보면 충분히 무안해할 만한 다희의 툴툴거리는 말에 지혜는 마치 애정표현이라도 들은 듯한 애교 띈 미소를 섞어서 지체없이 대답을 건넸다. “싫어~!” “휴~!” “둥둥 뜨는 것 같아서 좋단 말야” “팔 아퍼” “엄살. 하나두 안아프면서.” “히유~~” 대꾸해봐야 결코 지혜를 이길 수 없음을 다희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향한 주위의 시선들을 의식하면서 혹시나, 역시나의 일을 반복하게 되다니. 평범을 궁극의 목표로 삼은 다희에게 남들보다 큰 키는 재앙이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도 마치 대충 내려놓은 듯했지만, 지나치게 윤기가 흘러서 마음에 안드는데 말이다. 실제로 머리의 윤기 제거를 위해 빨래비누, 세수비누, 궁극에는 주방용 세제까지 동원해 보았으나, 마치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다희의 머리카락은 한동안 유행하던 블루블랙 염색을 한 후 바로 미장원에서 나온 듯한 검푸른 색과 윤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약간의 투닥거림이 있은 후에 거의 비슷한 구도의 대화 아닌 대화를 해가면서 참 잘 어울리는 이 커플은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약간 허름한 3층 건물. 좁은 계단을 올라 - 여기서도 안그래도 좁은 계단을 굳이 팔짱을 끼고 올라가려는 지혜의 고집 덕에 몇 번을 벽과 사이좋게 부비부비 한 끝에 - 다희의 직장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여학생치고는 저음에 속하는 다희의 조용한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꺄아~! 오랜만이에요~! 방가방가~!” 하트표시라도 날리는 듯이 온갖 포즈를 취하면서 맑고 높은 톤의 지혜의 목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어? 지혜까지 웬일?” “꺄아! 역시 절 보니 너무 반가와서 말문이 막히셨군요. 오랜만에 몸 좀 풀까 해서 말이죠. 적당한 상대 하나 붙여주세요. 네? 아니다~! 오빠랑 할까? 음 기왕이면 꽃미남이 좋은데... 오빠도 괜찮지. 아냐... 신음소리를 내기엔 실력이 너무 좋으니까......” “......”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사악한 여왕님같은 포즈를 취해가면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내뱉는 지혜에 의해 도장 안의 기온은 순식간에 떨어진 듯 느껴졌다. 도장. 그런데 무슨 도장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은 변두리의 도장이고 보니 학생들은 태권도를 배우기도 하고, 합기도에 격투술을 배우기도 한다. 우슈 동작을 연습하는 사람도 보인다. 결국 이 도장의 사범은 이러한 여러 분야에 모두 자격이 있다는 것인데...... 강일도 사범. 흔치 않은 ‘무가’ 출신이다. 그의 친가와 외가는 각기 알아주는 한 유파의 종주에 속하는 이들이었고, 괜찮은(?) 2세의 생산을 위하여 정략결혼을 했다는 후설이 있는 강사범의 부모였다. 혹자는 두 유파의 대련에서 둘이 눈이 맞아서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뒤로 만나다가 뛰어난 2세를 미끼로 양가의 부모를 설득했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던 저런 이유던 간에 불행히도 강사범 이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기에 강사범은 외가와 친척의 줄다리기 끝에 양쪽을 오가면서 수련을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사범 스스로가 무술을 좋아했다는 경지를 넘어 무술광이라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고, 양 가의 가전무예를 모두 익힌 강사범은 좀더 나은 경지를 위함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이런 저런 무술들을 주워익혀서 현재는 알려진 대부분의 무술의 유단자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허름한 도장을 운영하게 된 것은 양가의 줄다리기에 지쳐 이것 저것 배우러 돌아다니다가 돈이 없어 선배가 운영하던 태권도장의 사범이 되면서였다. 미국에 태권도를 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선배가 도미한 이후에 강사범은 ‘관장’이라는 별로 원하지 않는 타이틀까지 함께 가지게 되었다. 다희는 옷집에나 있을 듯한 상자같은 탈의실에서 도복을 갈아입고는 늘상 하던대로 초등부와 유치부 아이들의 동작을 교정해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다희 또한 한 종목이 아닌 여러 종목의 아이들을 별 구애 없이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편에서는 입맛에 맞는 꽃미남이 없다면서 서른 살의 강사범에게 오빠를 외쳐가며 낙지처럼 들러붙어서 대련하자고 외치는 지혜가 있었다. 팔에 붙었던 지혜가 강사범으로 목표를 바꾸자 다희는 약간의 연민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연민이란 물론 지혜의 목표물이 된 강사범에 대한 것이었지만...... 강사범은 이제는 전혀 무리 없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다희를 보면서 - 실제로는 지혜를 무시하기 위해 - 자꾸만 자신만의 세계에서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벌써 6-7년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그들의 첫 만남을...... “안녕하세요?” 도장문이 열리면서 쉰 살은 넘어 보이는 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당시 관장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마침 수업이 없던 시간이라 느긋하게 쉬고 있던 강사범은 습관적으로 벌떡 일어나 마주 예를 표했다. “네 어서오십시오” “저, 어제 전화로 문의를 드렸는데, 이 아이를 좀 가르쳐 주십사 하구요” 참 편안하고 온화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이 뒤로 돌려져 있던 손을 슬쩍 당기자, 어린 여자애 한 명이 보였다. 그 아이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난 순간 강사범은 인상이 굳어졌다. 아홉 살? 열 살 ? 대충 그 정도는 되었으리라. 하얀 얼굴은 온통 멍투성이였고, 긁힌 듯한 상처까지 보였다. 상당히 예쁜 얼굴인 듯한데 멍자국이 너무 심해 원래의 얼굴을 확실하게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이는 낯을 가리는지 고개를 숙인 채였고, 중년인의 팔에 꼭 매달려 있었다. 마치 그 손과 팔이 아이의 생명줄이나 되는 듯이. “새로 입관할 학생이 있다고 관장님이 전해주고 나가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굳어진 인상을 억지로 펴면서 가능하면 부드러운 소리로 두 명을 좁은 사무실로 이끌었다. 도장 내 구석에는 사무용 책상 하나와 그 앞으로 작은 탁자 하나, 좁은 이인용 소파와 일인용 소파가 초라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강사범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또 이 아이도 유행한다는 왕따를 당한건가?’ ‘아니면 불량배?’ 최근 들어 도장에 오는 부류 중에는 아이가 맞는 것을 보다 못한 부모들이 제 몸 하나라도 간수하게 해 달라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무술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아이들의 경우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마음이 약하여 스스로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니게 될 때까지 버텨내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어찌 어찌 아이가 도장에 다닌다는 것을 알아낸 주위 아이들이 더 심한 폭력을 행사했던 일도 있었다. 아무튼 비슷한 예로 성공적으로 일(?)이 처리된 경우는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강사범은 이러한 일들을 미리 설명하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면 쓸 데 없는 희망을 가지게 해서는 안된다. 부모야 내 아이가 어디서 맞지만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로의 결과는 참으로 나타나기 힘들다. “몇 학년이죠? “3학년입니다” “이름은요?” “김다희에요” 의례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동안 아이는 마치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지나치게 존재감이 없는 아이. 강사범은 별로 대답을 들으리라 생각지 않으면서도 다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답이 없으면 그걸 트집삼아 의욕이 부족하면 안된다고 설득할 참이었다. “다희라고 했니? 너 여기 왜 왔는지는 아니?” 의외로 아이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강사범과 눈을 맞추었다. 아이의 눈은 깊고 맑았다. 또래 치고는 약간 낮은 음성의 대답이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무술을 배우고 싶어요” “왜? 널 때린 사람들을 때려주려고?” “아니오” “그럼?” “맞을 만한 일을 안했을 땐 안맞으려구요. 그리고, 맞아도 좀 덜 아프게 맞고 싶어서요” “뭐?” “맞을 때 아픈것도 힘든데, 맞고 나면 며칠동안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무술을 배우면 맺집도 생긴다면서요?” “......” “저 안 맞게 해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차라리 맞는 것에 익숙해져서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만 되어도 좋아요” 기가 막혔다. 아이의 눈에는 원망도 가식도 없었다. 다만 말하는 내용 그대로의 간곡한 진실을 담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 옆의 중년인은 그런 아이가 안타까운 듯이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눈에 약간의 습기를 띄고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사범은 후회할지도 모를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무술이란 도전, 그의 도전은 패배를 두려워한 적이 없다. 오늘 지면 다시 노력해서 이기면 되는 것이니까.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야. 적어도 1년, 네 능력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어. 그리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다만 네가 3년 정도만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결과는 약속할 수 있다. 그래도 하겠니?” “네” 아이의 대답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 날로 강사범의 제자가 되었다. 물론 그 아이가 다희였다. 당시 다희를 도장에 데려간 것은 지나친 왕따로 인해 하루도 몸 성할 곳이 없었던 다희를 보다 못한 장로님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실 다희는 자신이 도장에 다닐 정도의 돈을 지원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희가 사범에게 한 말들을 장로님에게 전해 듣자, 아프지 않으면 좀 더 도움아 되리라는 것과 장로님을 더 이상 걱정시키지 않으리라는 다짐 하에 도장을 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다희가 무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희는 가르치는 것 이상을 소화했고, 시키는 것보다 더 많이 노력했다. 기초체력이 필요하다며 시킨 꽤 괴로운 훈련들을 군말없이 묵묵히 해냈다. 강사범은 꽤 괜찮은 제자 하나를 들인 듯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유파의 무술들을 조금씩 다희에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다희는 멍이 조금 작아지긴 했지만, 1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맞고 다녔다. 실상 3개월이 지났을 때, 악을 쓰고 덤빈다면 웬만한 또래 아이 하나 쯤은 거뜬히 이길 실렸이었을 텐데도 늘 맞고 오는 다희를 보면서 아이들이 집단으로 덤벼 몰매를 주었거니 생각했던 강사범이었다. 하지만, 또래의 아이들끼리 겨루기를 시켜 본 결과 강사범은 황당한 현실에 직면했다. 다희는 상대 아이를 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희의 무술은 피하기와 방어만 있고 공격이 없었다. 분명히 격파 등에서는 뒤떨어지지 않았고, 공격 방법을 가르칠 때에는 잘만 하던 녀석이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아이였다. 강사범은 굳이 다희에게 공격을 종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희는 몰매를 맞으면서도 피하거나 방어만 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되었던 다희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었고, 어느 날인가부터 다희의 얼굴이나 몸에서 멍이 사라졌다. ‘나보다 나을지 모르지’ 강사범은 다희의 심성을 살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무술인의 자세로서 부동심을 말하기는 하지만, 얻어맞으면서 그것도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얻어맞으면서 그것을 지키기는 어렵다.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하면 새로운 투지를 키우면 되는 노릇이지만 분명히 때려눕힐 수 있는 상대에게 공격을 하지 않고 막기만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짐승과 다르다고는 하나,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생물에게 반감과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은 타고난 생존의 본능이 아닌가? 어찌되었던 대련에서 공격을 하지 않는 다는 점을 제외하고 다희의 무술은 나무랄 데 없이 아니 상당히 훌륭하게 늘고 있었다. 결국 다희가 중3이 되었을 때 강사범은 유치반과 초등학교 저학년 반의 아이들의 지도를 맡겼다. 그 후 현재까지 다희의 지도 대상이 되는 학생들의 연령은 늘어났고, 성인과 다름없는 체격을 가지게 된 이후로는 저녁 시간대의 호신술 전문반 하나도 다희의 담당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참을 강사범에게 들러붙어 이런 저런 황당한 언변을 펼치던 지혜는 결국 싫증이 났는지 슬금 슬금 도장 앞쪽의 다희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사람 얼굴이 표현할 수 있는 색상표라고나 할까? 온갖 색상을 오가던 강사범의 얼굴이 드디어 제 색을 찾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즈음에 반대편에서는 다희가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사제간인데, 어찌 상대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된 것인지. 그 원흉이 사제간을 옮겨감에 따라 혹자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다른 하나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짐 싸서 이동하는 착각의 나래를 펴고 있었으니...... ‘설마 수업 중에 어쩔라고? 열심히 수업하는 척 하자’ 다희는 오한이 드는 감각을 무시하면서 학생들의 지도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지혜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아이들이 연습하고 있는 앞으로 스르륵 다가서 있었다. 열심히 연습을 하던 아이들이라고 해봐야 아직 어린 나이들이다. 눈앞에 웬 이쁜 누나 혹은 언니가 그야말로 눈을 반짝이며 서 있으니, 자연 하나 둘 연습하던 동작을 멈추고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결국 다희가 동작을 고쳐주던 아이마저 지혜 쪽으로 눈을 돌렸으니, 더 이상 무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얘들아~!” 별안간 지혜는 스스럼없이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아이들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혜에게 더욱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다희조차도 지혜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가질 않았으니 지혜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야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한 편에서는 지혜의 마수에서 벗어나자마자 사태를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는 강사범이 있었다. 내가 당할 때는 몰라도 남이 당하는 것은 왜 이리 재밌는지, 절로 입가에 새는 미소를 잡느라 강사범은 다시 한 번 이미지 관리를 해야만 했다. “어? 대답이 없네. 도장에 왔으면 씩씩하게 대답을 해야지. 다시 부를테니 네~! 하고 대답하는거야. 알았지?. 자아~! 얘들아~!” “네~!” 어느 새 지혜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아이들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허긴 지혜가 저런 일을 한 것이 한 두 번 이던가? 고등학생들조차 꼼짝 못하는 아아주 특이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바로 지혜인 것이다.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낸 지혜는 만족의 웃음을 띄우면서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연습만 하기 지루하지?” “네에~!” 이번에는 대답 소리가 조금 커졌다. 실제로 정해진 시간 내내 반복적인 연습을 하는 것은 어린 학생들로서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아니니까. 거기에 앞에 나타난 예쁜 여학생을 보니 틀림없이 이 지루함을 타파해 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이러한 반응을 마치 짐작학 있었던 듯, 지혜의 입꼬리는 한 단계 더 올라갔고, 기어코 계획했던 말을 하고야 말았다. “실력 향상에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고수들의 대련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때? 너희 사범님 솜씨 보고 싶지?” “네~! 우와아아~!!!!!!!!!!” 그다지 많지도 않은 숫자가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도 있구나, 누군가 보면 감탄할만한 반응이었다. 이쯤에서야 지혜의 속셈을 알게 된 두 명의 반응을 역시 정반대였다. 다희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조금씩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강사범은 이제는 어린 제자들보다 더 기대만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희의 대련을 본다는 것은 사부인 강사범으로서도 극히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련이란 것이 서로 공수가 되어야 하는데, 다희는 죽어라 방어만 해대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과 대련을 시키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흠, 그리고 보니 쟤네 둘이 대련하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지? 일 년쯤 되었나보군’ 일 년. 지혜가 다희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아무튼 대련은 이미 정해진 사실처럼 순차를 밟아가고 있었다. 지혜는 아이들의 호응을 얻어 다희를 앞으로 끌어내고는 아이들을 벽 쪽에 주욱 몰아넣었다. 가능하면 공간을 넓히려는 것이다. 그래놓고 움직이지 않으려는 다희를 질질 끌다시피 중앙으로 데려다가 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사범이 앞으로 나섰다. 심판을 보려는 것이다. 설명이야 길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졌고,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다희는 엉겹결에 중앙에 지혜와 마주 섰다. “자 그럼. 준비~!” “잠깐만요~!” 의외로 이건 지혜였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범에게 지혜는 머쓱하게 웃고는 자신의 옷차림을 가리켜 보이더니 손가락 1개를 펴 보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틈에 어디론가 가려는 다희였지만, 어느 새 지혜와 한 편이 되어버린 강사범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너 지금 보내면, 난 죽음이라구.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제자야!” “어째, 즐거워보이십니다.” “에이, 서,설마...” 의외의 일격에 움찔하긴 했지만, 강사범은 굳굳한 자세를 유지했다. 자신이 즐기던 즐기지 않던 지혜의 마수에 걸려 든 이상 다희야 어차피 희생양이니까. 그 사이 손가락을 꼽아 예고했던 대로 채 1분이 걸리지 않아 득달같이 도복으로 갈아입은 지혜가 나섰다. “아, 참 시작하기 전에 말이야. 얘들아 나랑 너네 사부랑 누가 더 셀까?” “사부님이요~!” “그래, 아무래도 그래보이지?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거든. 그래서 말인데, 대련은 이렇게 할 거야. 너네 사부는 공격을 못하는 거지” “에엡?”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일부에서는 ‘그런 게 어딨어?’, ‘너무 불공평해’ 등등의 투덜거림이 들려왔고, 다희는 축 쳐졌던 입꼬리 끝을 살짝 올림으로써, 고마움을 표시했다. 더불어 강사범 또한 ‘역시’ 하는 표정으로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듯이 나섰다. “이놈들아, 너네 사부가 내 수제자란 말이다. 여기 이 누나처럼 이쁘고 가냘픈 여학생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 대사부까지 나타나 편을 드니 아이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공격을 하지 않는 다희의 무술에 대하여 아는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이러한 배려는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은 지도하는 다희에 대한 배려였다. 사람에게 공격을 못하는 사부한테 누가 무술을 배우고 싶겠는가? “자 그럼 차렷. 경례!” 상호간의 인사를 마치게 한 후 신호에 따라 대련은 시작되었다. ‘쟤가 가냘프다고?’ 엄청난 속도로 대시하는 지혜의 주먹과 발차기를 막아내면서 다희는 속으로 신음을 터뜨렸다. 이 또한 겉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안봐도 입으로 울음소리를 낼 지혜의 행동이 뻔하다. 지혜의 공격은 엄청났다. 적절한 타이밍에 주먹과 발을 써댔고, 때론 몸을 낮추어 다희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공격을 하고, 때로 점프까지 해가면서 신나게 공격을 퍼부었다. 겉보기에 근육이 많이 안생기는 여성의 신체적 특성에 가려졌던 지혜의 파워는 다희로써도 만만히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와~! 대단하다!” <-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의 소리 “저 언니 멋지다!” <- 유치반 여자 어린이의 소리 “호오, 많이 늘었는데? 그 동안 놀고만 있진 않았나보군” <- 강사범의 소리 지혜의 화려한 공격은 꽤 오래 이어졌다. 처음엔 지혜의 공격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희에게 감탄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토록 화려한 지혜의 공격은 모두 다희의 가드 위에 떨어지거나 다희의 몸을 비껴갔다. 아니 공격이 비껴 간 것이 아니라 다희가 모두 피해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결국 대련은 공격을 하다 하다 지친 지혜가 털썩 주저앉아서 특유의 징징거리는 소리를 냄으로써 끝이 났다. “아앙~! 너무해. 한 대도 안맞아주고~! ” 여기까진 있을 수 있는 대사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낼 지혜가 아니다. “우리 다희가 내 주먹을 퍽 맞고 아악 하고 내는 이쁜 신음소리를 들으려고 했는데 오늘도 실패네? 아이 아쉬워라! 다희야 한 대만 맞아라 응?” 아, 이번엔 대중적인 큰 땀방울이다. 체육관 공기는 순식간에 썰렁해졌고, 당황한 강사범은 아이들을 얼른 불러모아 당일 교육을 종료했다. 그 와중에 같이 샤워하자는 지혜를 어렵사리 뿌리친 다희는 1년 후 도전하겠다는 선언을 받고서야 지혜의 돌발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풋. 1년 후라... ’ 지혜의 선전포고 같은 말보다 1년 후에도 지혜가 곁에 있을 거라는 사실이 든든했다. 늘 다희를 괴롭히는 듯이 보이지만, 무뚝뚝한 다희의 속을 꿰뚫어보고 강압하듯이 앞으로 이끌어서 사람들 사이에 넣어버리는 지혜는 참 속 깊은 친구였다. 아침마다 도시락 수거 쇼도 실제로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다희의 사정을 잘 아는 지혜가 일부러 꾸미는 일이라는 것도 다희는 알고 있었다. 그런 친구였다. 지혜는. 아이를 사랑하는 신들 - 신계 - “이제 100년이 남았군” 포이브론이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옹기종이 모여서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던 그의 형제 자매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거울같이 보이는 둥그런 물체가 있었고, 그 안에는 하나의 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닫혀진 세계에서 우리의 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아요. 그래도 저 지혜라는 아이 덕에...... 휴~!” 아테나이의 안타까운 말이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잇자, 자리에 모여 있던 신들은 덩달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용기와 의리의 신’인 포세이스가 성급하게 나섰다. “그러게 내가 힘을 선물로 준다고 했잖아. 육신의 힘이야 닫혀진 세계에서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데 왜 못하게 제한하구 야단이야?” “허이구, 여자애가 무식하게 힘만 세서 어쩌라구?” ‘암흑과 파괴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빈정거렸다. 그녀 또한 자신의 속성을 하나도 못가지게 한 다른 신들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세상에, 파괴의 여신의 조카가 공격을 못하다니. “아테나이의 선물만 너무 크게 작용하는 거 아니에요?” ‘복수와 명예의 신’ 헤르메스가 뒤를 이어 의견을 내 놓았다. “무슨 소리야? 내 선물도 제대로 작용을 했다구”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이아가 즉각 반박을 하고 나섰지만, 뒤이은 여러 신들의 구박에 금방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럼 뭐하냐구 저렇게 다 가리고 다니는데......” “네 선물 덕에 저 애가 무슨 일을 당할 뻔 했는지 200년 전에 못봤어?” “해도 정도껏 해야지. 엘프도 없는 저쪽 세계에 너무 과했잖아” “차라리 중상 정도의 외모가 나았을거라구” “맞아, 맞아!” 여러 신들이 한 목소리로 구박을 하자, 당황한 아프로디테이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와앙~! 다들 날 미워하는거야? 난 내 조카가 가장 아름답길 바랬을 뿐이라고. 그 애의 정해진 반려로 봐도 일반 외모로 될 일이 아니잖아? 왜 나만 가지고 그래? 그리고 내 선물은 저 애가 10살 때에는 아무 작용도 안했잖아!” 그랬다. 아테나이는 태어나자마자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고, 다른 신들도 그 이후 몇 백 년의 주기로 아이의 생일마다 선물을 주었다. 아프로디테이아의 선물은 12세 생일날 전해졌고, 다른 몇 몇 신들의 선물도 이미 주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닫혀진 세계의 특징상 신들의 선물은 상당한 제약을 받았고, 그중 몇 가지만이 발현될 수 있었다. 신들이 준비한 선물은 포이브론과 아테나이의 판단과 동의를 거쳐 극소수만이 아이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창조이래 가장 큰 육신의 힘을 가졌던 헤라클레스에게 주었던 힘을 선물로 하려는 포세이스와 헤파이토스의 시도는 두 신의 만류로 좌절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세레스가 저 아이를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일런지도......” 갑작스런 아테나이의 발언에 신들은 우울한 분위기속에 다시 침묵했다. 아이의 생 17년간 성격 급한 포세이스와 헤파이토스는 몇 번이나 몰래 닫혀진 세계에 가겠다고 요란을 떨었고, 페르세포네는 휘하의 마족을 몰래 보내려는 시도를 하다가 들켜 빈축을 샀으며, 헤르메스는 이 모든 소란 중에 은근 슬쩍 복수의 쇠사슬을 이세계로 공간으로 밀어넣다가 눈치 빠른 포이브론에게 저지당했다. ‘고귀한 혈통의 조카가 당한 그 수많은 일들을 만일 세레스가 보았다면...... ’ 장내의 침울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회복시킨 이는 포이브론이었다. “그래도 지 엄마랑 똑같잖아? 누가 자애의 여신 딸래미 아니랄까봐. 저 아이 성품에는 그늘이 없어. 아직 영혼에 흠집도 안생겼다구. 보통 인간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영혼에 그늘이 없다. 흠집이 없다는 것은 훗날 있을 카르마의 저울에 큰 요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든 신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맏이는 맏이인 것. 포이브론의 말로 인해 바닥으로 가라앉던 신들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밝음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조카 반려의 교육은 잘 되어 가는거유?” “흥 난, 맘에 안들어. 드래곤이 뭐야 드래곤이? 신족도 아니고” “이번에 마왕된 애가 괜찮다니까요” 포세이스와 헤르메스 페르세포네가 줄줄이 입을 열어 질문과 불만을 토로했다. “잊지 말아라. 그 아이는 신족이자 드래곤의 자손. 유스테우스의 뜻을 거스를 참이냐? 누가 뭐래도 그 아이의 아버지인것을!” 약간의 질책이 섞인 포이브론의 일갈로 금방 잠잠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반려를 언급했던 포세이스는 그것 보라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한 번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 반려인 애는요?” “잘 크고 있더군. 어차피 골드드래곤이란 종족은 신족 바로 아래의 최고단계 영혼인만큼 그 아이에게 크게 도움이 될 거야” “혹시, 거부하진 않던가요?” 걱정스러운 아테나이의 물음에 역시 성미 급한 포세이스가 목청을 높였다. “노란 도마뱀이 내 조카를 거부한다고? 지가 먼데? 영광으로 알 일이지” 흥분해서 더 소리를 치려던 는 몇몇신에게 붙들려서 조용히 밟히는 영광을 얻어야만 했고, 질문의 주체는 포세이스에서 아테나이로 넘어갔다. “감정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거기에 드래곤은 단계가 높다보니 스스로의 탐구에만 열중하는 경우가 더 높은데......” “언니, 제가 있잖아요. 걱정할 일도 많구려~! 그애는 이미 우리 조카의 포로가 된 지 오래랍니다.” 모처럼 아프로디테이아가 나서서 큰소리를 쳤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속성을 잘 아는 신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모쪼록 그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상계로 조카가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 2002년 그 날은 도장에 좀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다희가 주관하는 교육은 이미 끝났지만, 돌아가도 시끌벅적한 ‘천사의 집’에서 숙제를 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사무실에서 하고 가곤 했는데, 오늘은 그 양이 좀 많았던 것이다. 다희의 나이 15세, 학기 초에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다희에게도 천사의 집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다희는 수강료를 낼 필요가 없었고 - 실상 이 또한 강사범의 배려였으리라 - 일하는 시간에 비하여 꽤 많은 급료를 받고 있었다. 어차피 다희를 통하여 돈을 벌려는 목적이 없었던 강사범이 실제로 다희가 맡은 반의 수강료의 대부분을 급료로 환원해 줬기 때문이다. 강사범에게 인사를 하고 도장문을 나선 것은 얼추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골목 골목을 돌아가야 하는 길이지만, 이제 어느 정도 실력도 생긴 터라 어두운 길이 무섭지는 않았다. 얼른 가서 도와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다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15살의 다희는 단발머리를 곱게 기르고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슬쩍 보기만 해도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이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은 소녀의 얼굴이었지만, 조금씩 성숙해지면서 그녀의 외모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음을 아직 다희는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이었다. 가장 으슥한 골목을 돌아섰을 때, 크고 마디가 거친 손들이 튀어나오며 다희의 몸을 끌어댔다. 많이 해본 양, 한 손은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은 허리를 안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풀어보려고 버둥거려 봤지만, 그녀를 잡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억지로 구석진 곳에 끌려간 다희는 그제서야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동네 시장과 골목의 좌판들에서 일정한 권리금을 받으러 돌아다니던 덩치 큰 세 남자였다. 아무리 도장에 다닌다고 해도 15살의 다희가 이쪽 일을 전문으로 하는 성인남사 셋을 당해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다른 상황에서 격투가 붙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띄워놓고 치고 빠져야 할 상황인데, 이미 힘의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잡혀 있었으니 단순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사내들은 음탕한 말을 질껄이면서 자기들끼리 순서를 정했다. 다희도 15살. 그들의 대화가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알 나이였다. 이들은 장소를 옮길 생각도 없는지 한 남자가 뒤쪽에서 다희의 양여깨를 잡고 주저 앉자, 다른 두 명의 손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사내의 거친 손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손은 스커트를 들추고 있었다. 한 사내가 다희의 턱을 거칠게 쥐고 입을 대려 했을 때, 아테나이의 선물이 진가를 발휘했다. 처음의 버둥거림 이후, 이것 저것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잠하던 다희가 도리질을 치면서, 위험해요~! 하고 말한 것이다. 안된다는 따위의 말이 아니었다. 위험하다니? 사내들이 잠깐 움찔한 순간 소녀는 크게 기침을 해댔고, 입 밖으로 피가 튀어나왔다. “에잇 재수없어 이게 뭐야?” 사내들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다. 소녀는 입을 손으로 막고 겨우 호흡이 가라앉자 한 마디를 내뱉었다. “결핵은 쉽게 옮습니다.” 위급한 순간 튀어나온 그녀의 한 마디와 그 이후의 각혈이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눈으로 본 증거가 있는 다음에야...... “하지만, 저년 저 도장에서 애들을 가르친다구” “맞아, 결핵에 걸렸다면서 그럴 수가 있는거야?” 손에 들어온 먹이가 아쉬웠는지 사내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대었다. 그럼에도 불쑥 나서서 그녀를 덮치는 이는 없었다. 이를 알아챈 다희는 가라앉은 어조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 무술을 배웠습니다” 말 끝에 다시 한 번 기침을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재수없어. 가자” 사내들 중의 한 명이 내뱉었다. “그냥 가자구?” 그래도 욕망을 추스르지 못한 한 사내가 어물쩍댔지만, 다른 사내의 말에 일언반구없이 뒤를 따라 침을 뱉고는 떠나갔다. “야 울 어머니가 저걸루 죽었어. 저거 잘못하면 평생 간다구” 사내들이 떠난 후에도 잠시 멍하니 있던 다희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피가 튄 곳들을 닦아냈다. 그녀는 그 날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며칠간 밥을 못먹는 다희를 걱정하는 아버지께 넘어져서 혀를 살짝 물었노라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앞머리를 길러 얼굴을 가렸다. ************************************************************ 신계의 구성 주신 쥬피스 : 빛의 신이며 최고의 신. 일정한 속성이 없다. 8명의 최고신들은 쥬피스로부터 속성을 부여받고 창조되었다. 8명의 최고신 ‘예언과 음악의 신’ 포이브론 ‘지혜와 판단의 여신’ 아테나이 ‘자애와 치료의 여신’ 세레스 ‘용기와 의리의 신’인 포세이스 ‘복수와 명예의 신’ 헤르메스 ‘암흑과 파괴의 여신’ 페르세포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이아 ‘창조와 무력의 신’ 헤파이토스 미래를 향한 발걸음 [1인칭 시점 전환]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일까?’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 조건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교회에서 배웠는데, 나는 부모님에게조차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일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원장 아버지는 유독 나를 더 연민에 찬 눈길로 보곤 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적어도 약간의 흔적이라도 있었다. 잘 부탁한다는 메모. 이름이랑 출생년월일이 달려 있는 메모. 꼭 찾으러 다시 오겠다는 메모. 경제가 안좋아짐에 따라 멀쩡한 가정의 아이들도 먹고 입히는 것 자체가 힘들다면서 부모 중의 한 명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가면서도 뒤돌아 눈물 섞인 이별을 하곤 했다. 간혹 그렇게해서 연락이 끊어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부모가 다시 찾으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원망 반 그리움 반으로 부모를 그리는 아이들. 나처럼 눈도 뜨기 전에, 달랑 버려진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적어도 생물적인 본능이 남아있다면 아무리 잔인한 모정도 그렇게 하기는 힘든 것이다. 냉정한 판단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보지 못한 부모님에 대하여 원망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그리움 뿐. 어머니, 엄마. 기억날 수도 없는 그 얼굴을 이리 저리 생각해 보아도 눈도, 입도, 코도 떠오르지 않는다. 소설에 흔히 나오는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 아무리 물일을 해도 거칠어지지 않는 내 손을 볼 때, 어머니의 손도 그러하지 않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구체성이 전혀 없는 상상의 끝에는 아련하게 가슴끝이 찡해온다. 하지만, 싸아~ 소리 나는 듯한 내 마음의 저 쪽에서 밀려오는 부모님에 대한 나의 마음은 따뜻함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를 버린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실거라는 웃기지 않는 믿음이 한 켠에 굳건하게 존재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원장님의 연민 어린 시선이 오히려 미안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가끔씩 ‘너처럼 머리 좋고 이쁜 아이를......’ 하면서 환경의 보조를 못내 아쉬워하시는 모습에도 그저 나로 인하여 염려를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 들 뿐이다. ‘천사의 집’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 같은 ‘고아’들도 있지만, 저쪽 두 개의 건물에는 세상 사람들이 ‘장애인’이라고 일컫는 아름다운 이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들을 보아 온 나로서는 ‘비장애인’들보다 그들의 영혼이 훨씬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이는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나 세상 사람들의 호사스러운 감상에 의한 느낌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들과 함께하면 더 마음이 편안했다. 물론, 밖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예민한 코로 확 들어오는 그다지 좋지 않은 ‘향기’에 구역질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엔 그것이 참 미안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고, 환경이 그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내가 냄새에 예민해서 구역질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체질인 것이다. 하여, 현관 문을 열면 그 냄새에 익숙해질 동안 나는 조용히 서서 기다린다. 신기하게도 코를 자극하던 냄새는 몇 분 정도 되면 금방 익숙해지면서 신경 밖으로 밀려나간다. 오늘은 희연이와 미수언니, 은지언니가 있는 방에 갔다. 희연이는 12살, 미수언니랑 은지언니는 18살로 나보다 2살이 많다. “다히다아~” 가장 말을 잘하는 희연이가 비명처럼 나를 불러댔다. 미수언니와 은지언니도 조금씩 몸을 움직여 방을 기어 내게로 다가오려고 했다. “언니, 내가 갈께~” 힘들게 움직이는 언니들을 만류하고 달려든 희연이에게 안긴채로 나는 엉거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희연이는 내게 달라붙어 제어가 안되는 침칠을 하면서 뽀뽀를 퍼부었다. 나도 사랑스런 마음에 희연이에게 뽀뽀를 해 주었다. “잉 언니들 질투하나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언니들은 질투를 모른다. 그저 사랑을 줄 뿐이다. 처음 이 건물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달려드는 몇 명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팔을 잡고 몸을 껴안고 여기 저기 거침없이 뽀뽀를 해댄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조용히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조건없는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자식을 그리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체는 바로 이들이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나를 사랑하기만 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가족들. 유독 특이한 독서취향을 가진 덕에 이런 저런 책들을 읽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보시면 질색을 하실 종교서적이나 영혼에 관한 책들도 꽤 있었다. 그 중 한 책에는 내가 절감하는 내용이 나타나 있었다. 성경에 가장 낮은 자가 크게 되리라는 부분이 그 책의 내용과 더불어 내게 와 닿았다. 책에는 윤회하는 영혼들 중, 윤회의 마지막에 가까워져 완전한 영혼이 될 수록 조금씩 짊어지는 짐이 옅어진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의 가장 헐벗고 못가지고 어려운 이들이 된다고 했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내면 윤회의 고리가 끊어진단다. 그리고 그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들과 같은 정신지체인들이다. 이기적이고 싶어도 결코 이기적일 수 없는 선함의 표본같은 이들. 그건 그거고 할일은 할 일이다. 이번 주는 봉사하는 분들이 많이 못오셔서 이쪽 건물의 세 방에서는 목욕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세 명의 목욕을 시켜주었다. 좋은 시설이 있었다면 물에 담그어서 해 줄 수 있을텐데,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것이 어려워 대야에 물을 퍼서 날라가면서 수건을 적셔서 몸을 닦아 주었다. 머리를 감기는 것이 늘상 어려웠는데, 이제는 팔 힘이 많이 생겨서 예전보다는 수월하다. 많이 움직이기 힘든 두 언니들에게는 특히 신경을 써서 물기가 남아있지 않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베이비파우더를 꼼꼼히 발라주고 옷을 입히고 나니 밤이 너무 늦어버렸다. 이곳에 들어올 때만큼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앞머리를 뒤로 넘겨 핀으로 찔러 놓았다. 사실 편리를 위한 것도 있지만, 나와 눈을 맞추고 싶어할 것이라는 느낌이 괜히 들기 때문이다. ‘고마와. 사랑해!’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닌 ‘어어’ 거리는 소리를 내는 언니들의 음성이 내 머리에는 이렇게 들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오랜 기간 봉사하신 이모님들 - 장기 거주하면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이모님들이라고 한다 - 이나 자원봉사로 오신 전문가들 - 장애인 교육이나 진료하시는 분들 - 도 언니들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내는 내 능력을 희한해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신음같은 어어 소리로 들리고, 나 또한 그렇게 들린다. 그럼에도 나는 그 소리들이 날 때마다, 때로는 소리가 나지 않아도 이러 저러한 말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곤 했다. 능력을 가진 만큼의 시련. 자만심이 아니라, 나의 타고난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남을 알고 있다. 일단 머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지혜만이 그 사실을 대충 미루어 짐작하리라. 지혜가 재미로 푸는 물리학 수식을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들킨 이후로, 나는 억지로 몇 개의 수식을 풀어줘야만 했으니까. 지능검사 때는 너무나 놀라버렸다. 문제가 너무 쉬웠고, 답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대충 상식 선에서 110정도를 받으리라 생각하고 개수를 맞췄는데, 정확하게 110이 나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원장아버지는 어렴풋이 짐작하신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성적표를 가져가면 더욱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기만 하셨으니까. 정보산업 고등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내 결심은 처음으로 강력하게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꺾여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받을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엊그제 원장아버지와 한 참을 이야기한 후에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3인칭 - 원장 아버지와의 대화] “다희야” “네, 아버지” “얘야, 제발 내 앞에선 그 앞머리좀 치우렴. ” 농담처럼 하시는 말씀에 그제서야 아직도 앞머리로 가리고 있던 얼굴이 기억나서 얼른 핀을 꽂아 머리를 뒤로 넘겼다. “에구 우리 딸, 이쁘기도 하지. 근데 왜 그 얼굴을 그렇게 가리는 게냐?” “그냥요. 별로 안이뻐요” 실제로 다희는 자신의 외모에 대하여 아름답다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 가끔 지혜를 보면서는 호감가는 외모라는 생각을 했지만, 자신의 얼굴은 2년 전의 그날 이후로는 스스로도 자세히 바라본 일이 없었으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이기보다는 욕망에 젖은 손을 내밀던 사내들의 얼굴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들은 증오스럽다기보다는 가련해 보였다. 다희가 그들의 눈에서 본 것은 두려움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정상적으로 보자면 다희가 그들을 두려워야 할 터인데, 두려움을 보다니. 그리고 보면 다희를 때리던 반 아이들에게서 보였던 것도 두려움이었다. 약간의 상념에 잠겨있는 다희의 귀로 원장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제대로 된 성적표를 가져오렴” “......” “다희야. 큰 사람이 되거라. 네가 전력을 다 한다면 학비가 좀 많이 들어도 의대에 갈 수 있을거야. 그래서 이곳을 위해 네 손을 빌려주면 안될까?” 아버지의 간곡한 말에 다희는 자책했다. ‘평범’하게 살아서는 크게 도움이 되기 힘들겠다는 것을. 다희의 생각에는 ‘평범’하게 고교를 졸업한 후 천사의 집의 봉사자가 되어 사는 것미래를 그리고 있었지만, 능력을 발휘한다면 가장 아쉬운 것들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희의 표정이 변하는 듯하자, 원장아버지의 말은 조금 더 힘있게 이어졌다. “내 욕심이라고 해도 좋단다. 우리들 곁에 제대로 된 의사 한 분만 있었으면 좋겠구나. 요즘은 내신이라는 게 있어서, 입시만 잘 본다고 되는 건 아니잖니? 네가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의견일 뿐, 네 생각이 다르다면 뜻대로 하렴. 네가 그냥 졸업해서 봉사자로 남는다고 해도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할 말을 끝낸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다희의 모습을 보면서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고, 다희는 나름대로 인생의 항로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예측과는 좀 다른 길이기도 했다. 2004년 5월 1일 “오늘은 섭섭한 소식이 있다” 종례를 하러 들어오신 담임 선생님은 자못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나름대로 교사의 소명을 다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담임을 맡은 지 두 달이 되도록 그리 신경도 쓰이지 않았던 학생이었다. 환경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모범생인 지혜가 감싸고 돌고 있었고, 비뚤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한 달 전의 격파 사건이 입을 타고 전해져 오긴 했지만, 금방 잊혀졌던 것이다. 늘상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이. “다희가 오늘부로 학교를 자퇴했다. 아마 학교에서 보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구나. 김다희! 나와서 인사해라” 순간 교실의 아이들은 다희보다는 지혜를 쳐다보았다. 지혜는 평소답지 않게 쇼크를 받았는지 한 마디 말도 없이 입을 벌리고 허얘지는 안색으로 다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희야~!” 순간 선생님도 놀랄 정도로 째지는 목소리가 지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희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슬쩍 입 모양으로 ‘나중에’라고 말한 뒤 교탁 앞으로 나섰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또래답지 않은 딱딱한 인사말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인 다희는 평소의 걸음걸이를 유지한 채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종례는 그걸로 끝이 났다. 물론 지혜와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겠지만... “말을 해봐” 평소의 과장된 애교는 다 어디로 집어 던진 것인지, 굳어진 표정의 지혜가 탁자 너머의 다희를 다그치고 있었다. 지혜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다희의 팔을 잡아 끌고 학교 앞에 있는 까페로 와서는 줄창 인상을 쓰다가 말문을 열었다. 다희 또한 지혜에게만큼은 심중을 터놓고 싶었기에 별 저항 없이 끌려왔고, 지혜에게 그 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천사의 집’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는거야?” “응” “돈을 벌고 의학공부를 하겠다고?” “응” “잠깐만, 네가 검정고시를 봐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실력이란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돈은 무슨 수로 번다는거지?” “주식” “헉.. 얘가 정말??? 너 제정신이니? 주식에 투자해서 성공할 확률이나 아는 거야? 주식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자본력과 비례하는 거라구. 그냥 공부해서 되는 게 아냐. 주식 전문가들의 예측도 성공률이 20%도 안 된다는 거 정말 몰라?” “응 알어” “야, 지금 장난하냐? 얼른 설명해봐. 나 누구 때문에 학교에 있는지 모르는거니? 너 정말... 나를 친구로 생각하기는 하는 거야?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인상을 쓰며 다그치던 지혜의 말이 끊어지는 바람에 지혜를 쳐다보았던 다희는 크고 쌍커풀 진 지혜의 눈에서 그렁거리는 눈물을 보고 당황했다. 덕분에 다희는 짧게 끊겨하던 대답 대신 다시 장황한 설명에 들어갔다. “지혜야, 널 친구로 생각하니까 말하는거야. 내가 누구한테 이런 말을 하겠니? 원장아버지께도 아르바이트 하면서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그 이후에 전액장학금으로 학교에 갈 자신이 있다고만 말씀드렸어. 주식 이야기는 너한테만 말한 거야.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끊어지는 건 아니잖아. 넌 내가 어디 사는지 무얼 하는지 늘 알 수 있을꺼야. 약속해.” “정말?” “응” “그럼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줄래” “뭔데?” “들어준다고 약속부터 해” 다희는 차마 눈물을 하면서 하는 지혜의 첫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지혜는 너무나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응 말해” “얼굴 좀 보여주라” “머, 머야??” “얼굴 좀 보여 달라고. 나 너 안지 일 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네가 앞머리 자르거나 넘기면, 널 못 알아 볼 지도 몰라. 응?” 결국 다시 울 태세를 취하는 지혜를 달래기 위해 다희는 늘상 주머니에 있던 핀을 들고 앞머리를 들어올려 꽂아 보였다. “으악~!” 고개를 든 다희의 얼굴을 쳐다본 지혜는 말 그대로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떳다. 어찌나 얼굴을 들이대는지 코가 맞부딪힐 지경이 되어서. “왜? 내 얼굴이 이상하니?”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거리면서 지혜를 쳐다보는 다희. 그 천진난만한 표정에 지혜는 남자가 아님에도 코피가 쏟아질 것 같았다. “얼른 핀 빼라” 다희는 지혜의 반응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내 얼굴이 그렇게 보기 힘든가? 거참. ’ 일면으로는 좀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생긴 것과 상관없이 지혜가 좋아해 주리라는 굳건한 믿음의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런 다희의 마음에 지혜는 한 번 더 못을 박는다. “야, 절대 얼굴 보이지 마. 알았지? 네 얼굴은 그대로 무기야 무기” “응” 무안한 표정으로 - 그래봐야 보이지도 않지만 - 대답하면서 한 구석 서운해지는 다희였다. 코미디 프로그램에 자주 나타나던 ‘추녀’들의 무기라는 얼굴. 이렇게 받아들인 다희였고, 다희의 얼굴을 함부로 내놨다간 세상 남자들 다 과출혈로 사망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지혜였다. 이쯤이면 동상이몽도 극에 달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날의 결론은 엉뚱하게도 같이 자퇴를 하겠다는 지혜를 뜯어말리느라 30분간의 지독한 격투를 벌인 끝에 - 지혜는 자신이 물주가 되어 주식투자를 하자는 둥,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동시입학을 해야 한다는 둥의 핑계를 댔다. - 간신히 이런 저런 조건을 내밀고 지혜의 ‘우정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다희의 주식투자에 관한 포부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이후 내내 다희는 인터넷을 이용한 소규모 코스닥 투자를 시도했고, 확률과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다희는 국내 자료보다 오히려 주식이 오래 된 외국의 원서들을 먼저 탐독했고, 국내 주식시장이 미국 등이 걸어온 길을 대부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물론, 기초적인 공부도 했으며,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난데없이 자퇴하겠다는 의사를 설득하느라 원장아버지와 장시간에 걸친 토론을 해야 했고, 흔쾌히 내주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비를 가불하는 다희를 강사범이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다희가 학교를 자퇴한 후 다희의 17번째 생일을 목전에 둔 ‘천사의 집’에서는 17세가 되는 다희를 위한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 주일 전에 다희는 몇 장의 문서를 가지고 원장아버지의 사무실로 찾아가 면담을 신청했다. 물론 거창한 절차 없이 노크하고 들어갔을 뿐이지만. “아버지. 이거 받으세요” “그게 뭐냐?” 김장로는 대견한 눈으로 다희를 반기면서, 다희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물론, 다희의 능력을 믿기는 했지만, 검정고시를 단 번에 패스하고 대입마저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통과할 줄은 몰랐다. S대에 수석입학할 수 있는 점수를 가지고도 한의대로 유명한 K대에 입학한 것이 학교측에서 제시한 보조금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입학절차가 끝난 후였다. 다희는 가능하면 한의학도 복수 전공이나 부전공으로 하고 싶다면서, 미안해하는 김장로를 되려 위로했다. ‘기특한 녀석’ 어린 시절, 세상에 대한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한 점이 아직도 미안하건만, 다희는 그런 구김살 없이 누구보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주었다. 그리고, 무리하달 수 있는 자신의 말을 몇 배로 되갚아버린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으로 다희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든 원장은 황망함에 말을 삼켰다. “이, 이건.....” “신탁증서에요. 이쪽은 통장사본이구요. 원본은 여기 있어요” “이게 다...???” 황당한 액수가 적혀있는 신탁증서와 통장을 받아든 원장은 머리 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네가 무슨 수로....?” 그저 물음표로 점철되는 아버지의 표정에 다희는 미소를 머금고 그 간의 주식 투자 결과를 전했다. 마치 대기업에서 상사에게 하는 프레젠테이션의 모습이랄까? 능숙하게 자금과 주식의 현황에 대하여 설명하는 다희의 모습에 원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제겐 너무 컸어요. 조금이라도 돌려드려야죠.” 담담하게 내뱉는 말과 달리 요약한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크게 무리만 하지 않으면 신탁수입만으로 손쉽게 ‘천사의 집’을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라니. 밖으로 퍼진 말들의 파장을 생각하여 이 일은 원장아버지와 다희의 비밀로 남았다. 물론, 미성년자인 다희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집안의 어른들을 설득하여 대리자들을 구해준 지혜만은 그 간의 사정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반려 뒹굴~ 뒹굴~ 뒹그르르르... 턱~! “아효 머리야” ‘역시 방안 뒹굴기를 하기엔 내가 너무 자랐나? ’ 하고 때 늦은 자각을 해버리는 레디아나였다. 역시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것은 모든 생애의 진실인 걸까? 약간의 상념에 잠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는 것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그의 모습. “아후~! 저리 가란 말이야~!!!” 뒤늦게 잠시 정신을 놓은 것을 탓하는 레디아나였으나, 이미 구체적인 윤곽으로 눈앞을 맴도는 듯한 영상은 지워질 기색이 없다. 결국 발딱 일어나 어디론가로 향하는 그녀. 상사병의 약은 사랑하는 님의 모습밖에는 없는 법이지. “에디우스야~! 노올자~!” 어쩐지 유아틱한 리듬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의 골목 골목에는 저런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건만. 아깝다. 그놈의 교육열이 뭔지. 요즘은 누구야~ 학원가자~! 이런다면서? 허겈.. 이건 아니고. 푸른 숲이 우거진 인가라고는 절대 찾아볼 수 없을 듯한 깊은 산 속에 어울리지 않게 하얗고 낮은 울타리를 쳐 놓은 통나무 집이 덜렁 하나 서 있다. 레디아나는 그 집 대문(?)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듯이 같은 소리를 반복한다. “에디우스야~! 노올자~!” “에디우스 공부한다. 나중에 놀거라~!” 에 또, 이것도 많이 들어본 소리다. 학교 숙제라도 밀릴라치면 부모님이 부르러 온 친구들에게 외치던??? 하지만, 이 정도에 물러갈 레디아나가 아니었다. “확 집 부셔버린다?” “...” 환한 빛과 함께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의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이 점점 커져갔다. “안돼애애~!” 집 안에서는 황금 빛으로 둘러싸인 듯한 두 명의 남자가 튀어나왔으나, 이미 늦어버려서 현신한 거대한 레드드래곤의 몸집에 자그마하던 통나무집은 단박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 그렇다! 레디아나는 1100살 정도 먹은 젊은(?) 레드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통나무집에서 나온 두 명의 남자는? 얼핏 살펴보면 형제처럼 보이는 두 남자는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공부를 하다 나온 듯 한 명은 분필을 다른 한 명은 펜과 책을 손에 꼭 쥔 모습으로. “레디아나~!” “네, 아버님” 형처럼 보이는 남자가 이를 바득 갈면서 얼굴 한 쪽에 십자마크를 형성하면서 힘을주어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생글거리는 얼굴의 저 말이다. “내가 왜 아버님이냐?” 이제는 두 개로 늘어난 십자마크를 달고 그래도 고룡의 권위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하비어스. “응, 에디우스가 울 자기니깐, 하비어스님은 당연히 저의 시아버님이~! 아이 몰라~! 다 아시면서~!” 자 이쯤해서 작가의 상상 속의 이 모습을 다시 그려보자. 레디아나는 본체로 현신한 상태 10미터에 가까움 몸체를 비비꼬면서 안그래도 빨간 비늘을 노을처럼 물들이면서 웅웅 울리는 소리로 저 대사를 말한 것이다. 반면, 그 앞다리 하나만한 인간의 모습을 한 하비어스는 그 앞에 무게를 잡고 서 있었으니. ‘쯧쯧, 그러게. 본체로 애교는 무리다!’라는 결론을 내고야 마는 작가다. 하지만, 아직 어린(?) 드래곤에게 점잖은 고룡(?)이 일방적을 화를 내기도 무안한 법, 하비어스는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레디아나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그 전에. “폴리모프” 레디아나를 인간으로 강제 폴리모프 시키고 말이다. “어머, 친절도 하셔라.” 방긋 방긋 웃어대는 얼굴을 보면서, 두 부자는 머리 뒤쪽에 큼지막한 땀방울을 매달렸다. “레디아나, 네가 우리 에디우스를 좋아하는 거야 이해하지만, 에디우스의 반려가 될 수는 없단다” 하비어스는 사실 한 번만 더 말하면 천 번은 될 듯한, 늘상 하던 대로의 레파토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마치 처음 듣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레디아나가 묻는다. 이 정도면 정말 강적이 아닐 수 없다. 드래곤이 망각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은 오크들도 상식으로 아는 진.실.이었건만. 수없이 들은 이야기, 대답도 명확한 물음을 저토록 초연하게 해 내다니. 내심 감탄을 하면서도 진저리를 내는 하비어스였다. 하지만, 어차피 몇 대사 더 남았으니 마저 해야만 한다. “에디우스에겐 정해진 반려가 있다” “그게 누군데요?” “동면 중인 골드드레곤 유스테우스의 아이지” “그 드래곤이 어딨는데요?” “그건 비밀이다” “솔직히 말씀하세요. 그거 저 쫓아내려는 거짓말이죠?” “용언으로 맹세하면 다시는 안 올꺼냐?” “싫어요 머~!” 여기까지. 정해진 순차가 끝났다. 다음 차례는 “레디아나” “앙 에디우스~!” “나 공부해야 하니까 나중에 와” “어제두 그제두 그 전날도 그랬잖아. 그러지 말고 나랑 유희나 가자~! 성룡이 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두 아빠랑 같이 살아야 하는거야?” “배울 게 남았으니까” “뭐가 그렇게 많어? 에디우스 혹시 머리 나쁜 거 아냐? 골드족이라면 웬만한 공부는 하루나 늦어도 한 주면 끝나잖아. 에효~! 우리 2세가 걱정된다아~!” 이쯤되면 침착한 골드 드래곤이라고 할찌라도 어느 정도 화가 날 법도 하련만, 이 대화도 벌써 수십 수백 번을 오갔던 터라, 에디우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레디아나” “응 왜?” “내가 동생으로 널 이뻐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내 반려를 사랑해” “만나보지도 않은 반려를?” “응”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응” 이쯤되면 오히려 레디아나 쪽이 할 말이 없어진다. 늘상 반복되는 패턴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표정 변화가 적은 에디우스가 레디아나를 상대하기엔 제격이었던 것이다. 괜히 나섰다가 혈관마크만 몇 개 만든 하비어스가 한탄할 만도 하다. “낼 또 올께!” “...” 어느 정도 상심할 만도 하건만, 여전히 굳센 포즈로 당당히 워프로 사라지는 레디아나였다. “복구” 용언으로 통나무 집을 원래 모양대로 만든 하비우스는 아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 없는 절차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들어가자마자 공부를 시작해야할 하비어스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한참을 침묵하고 있었다. 에디우스는 그런 부친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말없이 기다렸다. “에디어스” “네 아버지” “날 원망하니?” “아니오” “내가 용언으로 한 약속만 아니면......” “저의 반려를 정해주심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 “기다리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얼른 공부하죠” “그래” 이들이 하고 있던 공부는 여러 가지였다. 골드 드래곤의 속성상 마법을 다른 종족보다 잘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이들은 마치 매니아처럼 인간들이 개발한 조잡한 생활마법까지 모두 연구했다. 물론, 연구라봐야 마법의 실행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법이 생활에 주는 편리함과 응용 정도였지만. 더불어, 유희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에디우스가 인간 생활에 적응 할 수 있도록 환상 마법을 이용하여 각종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에디우스는 어설픈 유희를 즐긴 드래곤들보다 대륙의 정세에 훨씬 밝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에디우스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요구한 것은 바로 ‘닫혀진 세계’의 지식이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환상계’보다 훨씬 앞서가는 고도의 과학. 그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세계에서 올 반려의 지식보다 못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스테우스의 주장이었고, 이는 에디우스도 공감하는 바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의 공부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근래에 들어서는 주식 연구까지 하고 있었으니,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물론, 이들에게 그 많은 정보들을 제공한 이는 7명의 최고신들이었고, 눈 감고 아웅하기 식으로 이세계의 정보를 이들에게 마구 유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 처음 아인시아의 레어에 설치되었다가 지금은 통나무 집으로 옮겨진 - 영상장치를 통하여 이미 다희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이아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 세계에서 올 자신의 반려에게 이미 온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이건 꽤 오래된 일이라, 헤츨링 시절 공부를 하기 싫다는 투정을 부릴 때 하비어스가 주로 쓴 방법이 “다희가 싫어할텐데. 무식한 드래곤이 반려라니.” 라고 슬쩍 중얼거리는 것이었고, 이 말은 몇 번을 거듭해도 늘상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 영상장치는?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아테나이가 아인시아의 레어에 강림했다는 뒷소문은 사실이었음이 틀림 없다는 증거랄까? 아무튼 얼마 안남은 반려의 귀환을 기다리며, 에디우스는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반대로 절대 겉보기처럼 맹하지 않은 레디아나는 에디우스나 하비어스에게 돌릴 수 없는 온갖 미움과 원망을 보지도 못한 그 반려에게 퍼부어대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희의 17번째 생일 2005년 7월 7일 오늘은 다희의 17살 되는 생일이다. 천사의 집 에서는 모처럼 풍요로운 재정상태를 이용하여 다희의 생일 잔치를 준비했다. 실상, 그 생일이라는 것이 다희가 버려진 날일뿐이지만, 이래저래 잔치는 즐거운 일이란 것은 공통적인 일. 주인공이 준비를 돕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밖으로 내몰린 다희는 지혜와 약속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건널목 맞은편에서 손을 흔드는 지혜가 보인다. 역시, 시간보다 10분은 일찍 나온 듯 한데, 지혜에게 못당한다고 생각하면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지혜는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무엇이 그리 조급한지 건너편에서 연신 신호등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차피 둘이 만나서 가기로 한 곳 - 지혜는 특별선물을 해 준다며 백화점에 같이 갈 것을 종용해 놓은 상태였다 - 이 다희가 서 있는 편이었기에 다희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지혜를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지혜는 단거리 주자처럼 달려들었다. 웃으면서 그런 지혜를 보고 있던 다희는 절반을 넘어오는 지혜와 멈출 생각을 안하고 달려드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안돼~!!!!!!!!!!!!!!!!!!” “끼이이익~~~~~. 텅~!, 털썩”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났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차는 엄청난 힘으로 지혜를 들이받았고, 지혜는 실끊어진 인형처럼 하늘을 날아 털썩 소리와 함께 추락했다.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사람들의 소리들. 마치 슬로우로 재생되는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모든 장면이 흐릿해졌다. 뒤늦게 달려나온 운전자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지혜의 모습에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 멍하니 서 있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교통단속을 하던 순경이 이 모습을 보고는 정리에 나설 때까지 다희는 흐릿한 영상들과 소리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구급대원들이 몰려들어 응급조치를 하기 시작하자, 다희는 제발 악몽이길 바라며, 지혜의 옆으로 다가갔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엄청난 힘으로 밀치고 다희는 생전 처음 목청을 높여 외쳤다. “ 내 친구에요. 같이 가게 해주세요. 내 친구란 말이에요~!!!” 의식을 잃은 중환자에 그나마 지인이 있다는 말에 반색한 구급대원들은 그러나, 상태로 보아 구급차에는 공간이 없다면서 순찰차를 권했고, 다희는 순경과 함께 응급실로 가면서 당시의 정황에 대한 질문에 차분히 답했다. 차에는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도 타고 있었는데, 푸른 신호등에서 사고가 났다는 부분에서는 목청을 높여서 아니라고 부인했다. 다희는 자신의 친구를 치었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로 찬 눈. 하지만, 진실은 진실이었다. 순경은 다희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당시 사건 현장에서 증인 격으로 몇 명의 신원을 파악해두었다고 덧붙였다. 그제서야 부인해도 소용 없음을 안 가해자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렇게 뛰어올 줄은 몰랐다고 다시 변명을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지혜를 찾았지만, 이미 지혜는 수술실로 옮겨진 후였다. 일단 뇌 속의 피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운이 좋다면 살아날 수 있지만, 식물인간이 될 확률도 있다는 것이었다. 지혜의 식구들은 7월 1일 지혜의 오빠가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미국으로 날아간 후였다. 그나마 다희에게 금전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미국의 오빠에게 연락을 하고, 보호자로 원장 아버지를 불러냈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아버지는 다희를 위로하다가 급한 일로 다시 ‘천사의 집’으로 돌아가셨고, 특실에 입원한 지혜의 옆에 다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희는 평생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다. “지혜를 살려주세요. 제 목숨이라도 내 놓겠습니다. 저는 받기만 했습니다. 제 것을 드릴테니 지혜를 살려주세요. 하나님, 하나님이 계시다면, 제발. 누구라도 좋아요. 지혜만 살려주세요.” 잠잠하게 시작된 다희의 기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광기를 띄어갔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지혜의 한 손을 부여잡은 다희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젖어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동안을 절규했을까? “네 삶을 주겠느냐?” 환청처럼 울려퍼지는 소리. 다희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근원을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 간절한 바램으로 인해 헛들은 것일까 의심할 무렵, 그 소리는 다시 한 번 다희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너의 삶을 포기하겠느냐? 그 보다 더한 일도 하겠느냐?” 환청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다희에게 요구를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뜻대로 하세요. 대신 제 친구만 온전히 살려주세요” “네 친구는 건강하게 살아날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신 너는 나와 함께 가야 한다. 바로 지금.” 다희는 순간 깨어나서 자신을 찾을 지혜와 원장 아버지, 그리고 강사범님과 천사의 집의 식구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없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환한 빛이 지혜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상하게도 다희는 그 빛이 지혜를 치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혜의 숨결이 편안해지자 다희는 조용히 지혜를 감싸고 있던 생명유지장치들을 벗겨내었다. 그래도 지혜의 모습은 편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하는 다희를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빛무리가 감싸고 돌았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희가 있었다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김간호사는 새로 특실에 입원한 환자의 방으로 향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리고 이쁘게 생긴 여학생이었는데...... 저 상태로라면 경험상 죽거나 식물인간 잘 되어봐야 반신불수가 최상이랄까? 뇌출혈이 있었고, 척추도 부러졌다. 즉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행지도 모른다. 살아난다고 해도 지옥같은 생이리라. 수술실 안에서 환자만큼이나 창백한 안색으로 오열하던 다른 여학생이 기억났다. 친구인지 자매인지 몰라도 그 사람이 병실을 지키고 있을 것이리라. 달래서 밥이라도 먹여야지 생각하면서 병실 문을 열었다. 당연히 옆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 그 소녀가 없다. 준비하던 위로와 격려의 말을 뒤로 하고 환자의 상태를 보려고 접근하던 김간호사는 저도 모르게 “앗” 소리를 내었다. 환자에게 필수적인 여러 장치들이 모두 떼어내어져 있었다. 이 상태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설마 그 소녀가? 하는 마음에 허겁지겁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안그래도 놀라 커졌던 눈이 더 동그래졌다. 호흡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던 환자는 너무나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담당의사와 간호사들 사이에 이 일은 ‘은밀한 기적’으로 퍼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빠른 응급조치와 훌륭한 수술로 인한 ‘회복’이라는 이름을 내세웠고, 기적적으로 수술 후 이상이 없는 환자 덕에 가해자도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지혜의 가족들은 전화로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지혜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전화를 걸었던 다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 날, 다희가 병실에서 밤을 새웠을 것으로 짐작한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제서야 그들은 다희의 실종을 인지했다. 전날과는 전혀 다른 지혜의 상세를 보고 놀란 원장에 의해 그들은 다희와의 통화내용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것은 병원의 주장과 같은 치료의 효과로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술을 아무리 잘 했기로서니, 어찌 수술 자국 하나 안남을 수 있다는 것인가? 황당하게도 멍 하나 안든 몸이라니. 지혜의 아버지는 웬만하면 쓰지 않던 윗선의 줄까지 대어가면서 병원 관계자들의 거짓말을 캐어 갔으나, 결국 전해진 진실이란 건 김간호사가 발견한 상황에 대한 설명 뿐이었다.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지혜의 완쾌와 다희의 실종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하나의 사실 뿐이었던 것이다. '약속의 날'을 준비하는 이들 약속의 날이 왔다. 무려 1700년간의 이세계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환상계로 돌아올 다희를 위하여 그녀의 삼촌과 이모라고 할 수 있는 최고신들은 그들의 높은 지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포이브론의 거처에 모인 7명의 최고신들은 사랑스런 조카의 귀환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스는 안오나?” “어제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는 천사들의 뒷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혹시, 모녀간에 먼저 만나라는 배려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좀 늦는군요. 신계 문턱에만 왔어도 전언이 왔을터인데......” “그러게 말이다” 그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 껏 멋을 낸 성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아프로테이아는 타고난 미모에 그녀의 타이틀이기도 한 미와 사랑의 허리띠를 차고 나왔기에, 저항력이 약한 천사들은 그녀 앞에서는 홀린 표정으로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 되기 일쑤였다. 페르세포네는 어차피 미모로는 아프로테이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는 평소 죽이고 지내던 마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신계의 특징상 그녀의 마기는 마치 연출된 분위기처럼 사방 1미터 정도를 감싸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녀는 신력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몸 주위로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페르세포네” “왜요? 오라버니” “너 오버한 거 아니냐?” “......” “웬 마기에 신력까지 동원하고 난리야?” 눈치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포세이스는 성정 그대로 지나친 용기를 내어 ‘솔직한 심정(?)’을 표현했고, 순간 약간 올라간 페르세포네의 눈꼬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떠졌다. 솔직히 그녀는 오늘을 위해서 수십 년 간 고민한 끝에 ‘분위기’로 승부한다는 결론을 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적절한 보조효과를 연구한 결과가 오늘의 어둠속의 빛 이라는 컨셉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도 그녀의 의도를 알만 했지만, 쓸 데 없이 예민한 ‘여심’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음을 몰랐던 이는 불행하게도 포세이스 하나였던 것일까? “그러는 오라버니는 무식하게 힘만 세다!라고 아예 광고를 하시지 그래요?” “당연하지. 나 만큼 힘 센 신이 또 어디 있냐?” 비꼬는 소리를 당연한 칭찬으로 소화해내는 포세이스를 보면 혹시나 그가 진짜 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맞아요. 그리고 그 힘만큼 무식하죠. 오죽하면 비꼬는 소리도 칭찬으로 잘못 알아듣고 히죽거릴까? 그리고, 그 무장들좀 해제하라구요. 오늘 무슨 전쟁난 줄 알아요? 우리 조카는 여자애라구요.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걔가 좋아할 꺼라고 착각한 건 아니죠?” “헉”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페르세포네의 연타 공격에 결국 뒷수습을 못하고 깨갱 뒤로 물러나는 포세이스였다. 실상 포세이스와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을 하려다 한 발 늦어버린 헤파이토스는 처참하게 깨지는 포세이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동작이 굼뜬 것에 속으로 감사와 안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기쁜날이잖아요. 다들 그만하세요” 아테나이가 나서서 이상향 방향으로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를 수습했다. 포이브론은 고민이 있는 듯, 구석에서 상념에 빠져있었다. “아 참, 오늘에야 밝히지만, 다희에게 이곳 이름을 내가 지어줬어” 느닷없이 나선 헤르메스의 말에 상황을 전혀 모르던 몇 몇 신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명예를 담당하는만큼 헤르메스의 작명은 신들조차 한 수 접어주는 것이었지만, 아이의 부모가 있는데 작명이라니? “하하하! 그런 얼굴들 말라고,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레스에게 부탁을 받았단 말씀이야! 오늘까지 말 안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실은 아버지두 이름을 아신다구.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받았구. 크크크” 호탕한 웃음을 표방하던 헤르메스의 말은 웬지 점점 경박해지는 어투와 함께 상당히 경박한 웃음으로 끝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든 신들은 조카가 받은 이름을 궁금해했다. “다이아나” “다이아나?” “흠... 새벽, 달... 좋군” “어둠 속의 빛이라...” 저마다 조카의 이름이 가진 의미들을 나열해본 신들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한껏 의기양양해진 헤르메스는 더 신이 나서 자랑을 해댔다. “거기다가 여태 쓰던 이름이랑 어감도 비슷하잖아. 다희, 다이아나. 안그래도 낯설텐데, 이 삼촌의 마음씀씀이가 돋보이지 않아?” 단순한 두 신(누구인지는 알아서들 생각하시길)만은 이 이야기에 한 층 감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다운 지혜를 소유한 다른 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 아, 그렇다면 저 두 신은 최고신의 평균 지적 능력에 미달한다는 소리??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페르세포네는 그 점을 나서서 다시 지적했다. “흠, 그건 우연이지? 그 아이 이름은 태어나기 전에 부탁받아서 지었다면서? 저쪽 세상에서의 이름이야 그 뭐야. 원장이라는 인간이 지어준 거잖아” “그.. 그야, 나의 선견지명이......” “흠~! 거참 이상하군. 예언의 신인 포이브론 오빠도 그런 세세한 부분을 예견하기는 힘든데, 언제부터 속성이 바뀌었지?” “......” “허긴 그걸 진짜인 줄 알고 감탄하는 약간 모자란 신들도 있으니 누구만 나무랄 것도 아니군. 하지만, 다른 이들까지 같은 수준으로 판단하면 곤란하잖아” “......” “......” 아, 과연 페르세포네는 무서웠다. 아마도 처음의 원한을 잊지 않은 듯. 헤르메스에 대한 공격의 말미에는 그녀의 컨셉에 대하여 반발심을 가졌던 두 명의 신에 대한 보복까지 곁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본다면, 혹은 혹자가 옮긴다면 ‘신성모독’이 될 것이 분명하다. 최고신이라는 이들이 저런 유치한 말싸움에 허풍까지 늘어놓고 있다니. 물론 이들도 평상시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지만, 늘상 위엄을 지켜야 하는 평상과는 다르게 이 곳은 그들 형제자매만이 있는 공간인 것이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늘상 점잖고 품위있게 사는 것이 어디 재미있겠는가? 하여, 신들이 모이면 오히려 웬만한 인간들보다 더 시끄럽고 경박해 지기도 한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특.별.한. 날에는 말이다. 이런 저런 실랑이를 벌이는 순간에도 시간은 자꾸 흘렀고, 신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조카의 귀환을 기다렸다. 하지만, 조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이제는 이세계를 비추는 거울로도 그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7명의 신들은 그날 꼬박 밤을 새울 수 밖에 없었다. “뭐가 잘못된거지?” 참을 성 없는 포세이스가 가장 먼저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신들은 저마다의 특성에 맞추어 혹자는 조용하게 생각에 잠기고 혹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혹자는 큰소리로 궁시렁거렸다. 약속의 날이 이미 지났다. 그런데, 그들의 조카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던 표정들이 점점 굳어졌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차원이동 중에 소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차원이동이 어렵기는 하지만, 최고신이나 주신 정도의 능력에 실수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괜히 고룡 정도가 어설프게 나섰다가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이지, 아무리 우습게 보려고 해도 이들은 최고신인 것이다. 더더군다나, 자신들이 아닌 주신이 직접 개입한 일이었다. 터무니없는 불안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은 초조와 망상을 낳는다고,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상상이 교차하고 있었다. “포이브론 오빠” “그래.. 불행히도...” 아테나이의 뜬금없는 소리에 포이브론이 화답하자, 다른 신들은 내막을 알 수 없어 이들의 주위로 몰려들어 답을 요구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10개의 눈동자가 죽일 듯이 노려보는 통에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이 두 신의 얼굴에도 곤란한 빛이 감돌았다. “내가 말하마” 역시 총대는 첫째가 매는 법인지. 포이브론이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판결에서, 1700년 후의 귀환이 약속되었다. 허나, 그 귀환의 장소가 신계라고 명시된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신계에서 그 아이를 받아준다는 어떤 약속도 없었다” 아테나이는 드물게 힘들어하는 포이브론의 말을 받아 이어갔다. “물론 우리들도 신계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하지만, 돌아오는 날인만큼 이곳으로 데려오리라 생각하였던 것인데, 아마도 아버지의 뜻은 다르셨나봅니다. 혹시,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들 실망할까봐...... 확실한 것도 아니구요.” “이젠 확실해진 셈이지. 그 아이는 환상계 어딘가로 와 있을 것이다. 이미 ‘약속의 날’은 지나갔으니까” 포이브론이 결론을 내렸다. “세레스는 그 아이를 만나봤겠지요? 설마 세레스도 못 본 것은 아니겠지요?” 아프로테이아가 상상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담고 말했다. 자신들은 어머니도 아니고, 1700년 간 조카를 못 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레스까지 그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아닐겁니다. 죄를 지은 이는 세레스. 물론 타고난 능력에 합당한 짐을 지는 이는 다이아나 그 아이지만, 아버지는 너그러운 분, 죄 없는 그 아이에게 그렇게 가혹하실 분은 아닙니다. 결코 공평한 일이 아니구요” 아테나이의 확신에 찬 말에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던 다른 신들은 그나마 약간의 위안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조카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7명의 신들은 환상계로 건너온 다이아나의 행적을 찾을 방법과 도울 방법을 나열하면서 다시 작전모드에 돌입했다. “이상하군...” “......” “어제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니? 포이브론 님이나 아테나이 님이라도 전언을 보내실 만 한데...” “연락이 오겠지” “냉정한 척 하지 말게나. 누구보다 애가 탈텐데?” “나는 세레스를, 그리고 내 딸을 믿네” 동면에서 깨어난 유스테우스의 레어에 찾아간 하비어스는 ‘약속의 날’에 친구가 깨어나는 것을 보았으나, 신계에서 어떤 연락도 없자 초조해했다. “그나저나, 그 아이는 어떻게 자랐나?” “응? 이쁘고 착해” “사내애가 이쁘고 착하다고?” “사내애라니?” “자네 아들 말일세.” 어쩐지 핀트가 안맞는 대화였다. 평소같으면 당연하게 서로의 의중을 알아차리련만, 겉으로는 초연해 보이는 유스테우스나 겉으로도 안절부절 못하는 하비어스나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으니. “아, 내 아들. 잘 컸지. 암, 누구 아들인데” “자네 여전히 팔불출이구만... 알일 때부터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더니만... 쯧쯧” “내 아들이 잘난 건 사실이지 뭘그래? 겨우 100살 난 헤츨링을 사위로 탐낸 게 누군데 모른 척 하는거야???” 자식 얘기만 나오면 머리에서 김을 올리면서 열변을 토하는 하비어스였다. 1700년은 드래곤에게 긴 시간이 아니었을까? 전혀 변한 것 없는 듯한 친우의 모습에 유스테우스는 포근함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대륙은 많이 변했겠군” “응, 완전히 뒤집혔지 뭐. 인간들이란 원래 그렇잖아” “그런가? 후~!” “앗, 이게 아니잖아! 그래서, 내 잘난 아들은 말이지 색시 맞을 준비를 하려고 하산했다네” “하산... 이라구?” “아무래도 인간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 아냐? 그래서, 여러 가지로 준비좀 해놓으라고 했지” “훔. 그렇군. 근데 말이지 누구 색시라고?” “무슨 말이야? 네가 나한테 부탁해서 용언으로 맹세까지 했잖아” “부탁을 했지. 자네가 용언으로 맹세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내 딸을 자네 아들 색시로 준다는 소리는 안했네.” 오거 먹고 오크발을 내미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태도로 미소를 짓는 유스테우스의 말에 돌연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하비어스였다. ‘그 때, 용언으로 맹세한 것이... 이런... 이럴 수가...’ “돌아가” “싫어~!” “도대체 어쩌자는거냐?” “얼굴이라도 봐야지” “네가 왜?” “라이벌이잖어”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흥~!” 묻지 않아도 이 둘의 대화를 본다면 짐작할 만 하다. 서재처럼 보이는 큰 방에서 에디우스와 레디아나의 끝나지 않는 실갱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들이 기다리는 이에 대한 소식은 야속하게도 전해질 기미가 없었으니...... 어머니 “... 하니 ... 하도록....” “알겠습니다. 아버님” “저 아이가 깨어나는 것 같구나.” ‘누굴까? 저 목소리는. 아, 들렸다는 건? 죽지 않았다는 건가? 하긴 죽었는데 이렇게 몸이 무거울 리가 없지. 눈을 떠야 하는데...... 지혜는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원장 아버지가 당황하셨을꺼야. 대리 사범도 구해야 했을텐데......’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온갖 상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듯했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안간 힘을 쓴 끝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갑자기 예민해져 오는 감각에, 누군가가 손을 부여잡는 느낌이 들었고, 흐릿한 시야를 확보하느라, 한 번 더 정신을 집중했다. “!...” 불가능한 일이다. 눈도 뜨기 전에 버려진 아이가 ‘엄마’라는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느낌’은 인간같지 않게 아름다운 - 물론 인간이 아니었지만 - 앞의 여인이 엄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웨이브 진 황금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녀는 기껏해야 20대 중반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엄마’라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엄마가 실제로 있다고 해도 내 나이로 보아 서른 중반은 되었을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다희의 눈은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찬찬히 훑고 있었다. ‘예전에 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같네? 근데 더 아름답군’ 그녀가 떠올린 대상은 월트디즈니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아마, 그 캐릭이 당시 미국인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의 표현이라고 했지?’ 초기 애니메이션들의 여주인공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 ‘오로라’의 캐릭은 금발머리에 푸른 눈, 천사같은 얼굴 윤곽과 발레리나의 우아한 동작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10대의 그 모습에 비하면 눈 앞의 여인은 좀 더 성숙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했던 그림속의 공주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함과 성스러움이 배어 있어 마치 후광 속에 감싸인 듯 보였다. ‘응? 근데 진짜 후광이 보이는 것 같네. 아직 시야 회복이 안되었나? 눈물?’ 그랬다.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다희는 산 속의 오염되지 않은 물처럼 맑고 깊은 여인의 눈에 가득 고여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해낸 것이다. 입 안이 바짝 말라 몇 번을 뻐끔대다가 겨우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울지 마세요” 느닷없는 말에 그 여인은 흠짓 놀란 듯 했고, 말을 꺼낸 다희조차도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정말 예쁜게 자랐구나”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대상을 본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다희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빼내서 조심스레 다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치, 다희가 금방 꺼져버리는 약한 불꽃이라도 되는 듯이. 미소를 짓는 얼굴인데도 눈물이 가득 고인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찰랑 하고 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다희는 이상하게 가슴 한 쪽이 아렸다. 여인의 눈물이 보기 싫었다. 그러한 마음이 다시 한 번 다희의 입을 열게 했다. “울지 마세요” 조금 더 분명한 말이 튀어나왔다. “사랑한다 내 딸아” 아무 것도 모르는 딸은 1700년 만에 어미를 만나 원망의 말 한 마디 없이, 불안한 이 상황에서도 낯선 여인의 눈물을 걱정한다. 세레스는 감격에 겨워 준비없이 말부터 내뱉었다. 사실, 질문이 먼저 나올 것이라 여겨, 이런 저런 설명 과정을 준비하고, 어찌하면 딸의 마음을 풀어줄까부터 언제 자신이 어머니임을 밝힐까 하는 등의 온갖 상상을 1700년이나 해왔는데, 걱정 섞인 혈육의 말 한 마디로 모든 자제력이 무너져버렸다. “어머니... 세요?” 혹시 둔하거나 감정 자체가 모자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희의 반응은 마치 당연한 것을 확인하는 듯한 어투였다. 집 밖에 볼일을 보러 갔던 어머니의 문 여는 소리를 듣고 방 안의 자식이 확인하는 것 같은 평온함. 하지만, 다희의 눈에서는 무심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연처럼 깊은 눈매에는 많은 그리움과 약간의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세레스는 주저하지 않고 다희를 끌어당겨 품 안에 안았다. 이제는 성인의 몸을 가진 딸아이가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슴 안에 꽉 차는 느낌에 안도하면서. “그래, 내가 너의 어미란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여인은 이제 눈물을 담고 있지 않았다. 여인의 눈을 넘쳐난 물들은 이미 두 줄기 강이 되어 여인의 볼을 적시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는 여신의 볼을 적시고 있었다. “어머니. 그리웠어요. 보고 싶었구요” 다른 말은 필요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모녀는 그렇게 한 참을 끌어안고 보듬어가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 참의 시간이 흐른 후, 둘은 누구랄 것 없이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었다. 세레스는 딸에게 힘든 설명을 해야 했고, 다희 또한 어머니에게 물을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다희는 한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어머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한 일은 많았지만, 어머니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다희는 무의식중에 어머니를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렇게 해서 이 어미의 죄 때문에 네가 그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지” 다희는 사랑과 연민이 담긴 눈으로 여신을 쳐다보았다. 어찌보면, 아무 죄 없이 고통받았다고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다희는 자신이 고통스럽게 산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물론 아주 힘들었던 순간에는 다른 이들에게 증오를 갖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까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자애의 여신’ 그녀의 자애의 일부가 자신에게도 전달된 탓이리라. 다희는 오히려 어머니의 그 간의 고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자신이야 아무 것도 몰랐고, 17년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무려 1700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지내온 어머니의 삶이라니. 여신이 고귀한 존재라고 해도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없었다면, 이러한 일도 없었을 테니까. 모정을 누르고 오랜 세월을 인내해 온 자신의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세레스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다희의 눈을 보면서 더욱 미안함이 사무쳤다. 그 간의 고생만해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희가 순조로운 삶을 살았다면, 아마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위로를 하기 위해서라도 언질이 있었을 만도 하다. 물론 최근 100여년은 어느 정도 편하게 산 것 같다. 편하다기보다는 바쁘게 살았다고 해야 할까? 다희가 벌인 일들을 사건 사건 신나게 전하던 신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전에는 어땠을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차분한 다희의 물음에 세레스의 안색이 한 층 어두워졌다. 차마 말을 못하고 다시 눈물이 고이려는 세레스의 손을 굳게 부여잡고 다희는 미소를 지었다. “전 괜찮아요. 말씀해 주세요” 과거야 어찌되었던, 지혜는 살았고 나는 어머니를 만났다. 내 생명과 영혼까지 포기하려 했는데 그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고 다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선행의 빛과 카르마의 저울에 대해서 말했었지?” 세레스는 어렵사리 다시 말을 시작한다. 다희는 그런 어머니를 격려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계에 있을 수 없단다. 환상계, 즉 우리 신들이 담당하는 세계에서 생활해야 할꺼야. 네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지” 역시 다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계에서 산다니,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인만큼 서운할 것을 없었다. 다만... 다희가 궁금함을 눈치채고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신계에서 살아야만 하지. 나와 네 아버지의 일 이후로 신들의 강림은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단다. 지상의 영들과 또 다른 인연을 맺어 또다시 균형을 어지럽히면 안되니 말이다.” “그럼... 만날 수 없나요?” “자주는... 꿈에 보거나 내 신전에서 볼 수 있을 거야. 네가 이 생을 제대로 마친다면, 카르마의 저울을 이겨낸다면, 함께 살 수 있겠지” “......” “미안하다. 내가 여신의 직위를 버려서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리 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같이 있을 수는 없구나. 아버님인 주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함부로 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본 걸요. 전 어머니를 보지도 못하고 죽은 줄 알았는데요. 전 괜찮아요” 다시 헤어져야 한다. 머리 한 구석에 밀어놓고 생각하지 않고 싶었던 일이 사실로 확인이 되었지만, 다희는 밝은 면을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더 가슴아파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어날 수 있겠니?”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어머니는 다희의 손을 붙잡고 방의 반대편으로 데리고 갔다. 그 앞에는 아주 커다란 거울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다희와 거울 사이에 막아 선 후 입을 열었다. “너를 보낼 때, 그 세계의 기준에 맞추어 약간 외모를 변형시켰었단다.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낯설지 몰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희에게 주의를 주는 세레스였다. 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자 어머니는 거울 앞에서 비켜서서 다희가 거울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거울 안에는 자신과 닮았지만 미묘하게 다른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저쪽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은발 - 흰색이 아니었다. 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에는 찬란한 금색이 군데 군데 빛가루처럼 뿌려진 모양이었다 - 의 단발머리에 어머니와 똑같은 푸른 눈이 보였다. 약간 서구적으로 생겼던 얼굴 모양은 동양계적인 특징이 모두 사라지고 좀 더 뚜렷해진 듯 했다. 피부색에서는 황색이 완전히 사라져서 투명할 정도로 시린 흰 빛을 띄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운동으로 인하여 탄탄했던 몸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몸 여기 저기를 점검하는 다희를 보면서 세레스는 짐작이나 한 듯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이유 없이 빼앗지는 않는 분이시지” “아, 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주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 그리고... 네 이름은 이 세계에서는 쓰기가 힘들단다” “네?” “언어가 다르니까” “아, 네.” “널 위해 이름을 부탁했는데... 괜찮겠니?” “물론이에요. 말씀해 주세요” “다이아나.. 란다” “다이아나!” “다이아나는 신계의 언어로 달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대어로는 새벽을 의미한단다. 새벽의 형상을 빗대어 ‘어둠속의 빛’이라고도 하지. 명예를 담당하는 헤르메스님이 지어주시고, 주신께서도 네게 어울린다고 하셨다” “헤르메스님?” “아, 이리 앉아보렴~!” 세레스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주신을 비롯한 8대신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다이아나가 된 다희는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지어 준 그 삼촌(?)을 만나면 감사인사를 하리라 다짐하고, 그 전에 미리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 우린 언제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죠?” 마치 농담이라도 하듯이 가벼운 어조로 물었지만, 그 내용은 세레스의 얼굴을 어둡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딸을 생각하여 역시 미소를 만들어 보이는 세레스였다. “17일. 짧은 시간이지만, 그 기간 동안 이쪽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라고 주신께서 명하셨단다. 일단 언어부터 통하지 않을 테니까.” “17일 동안 언어를요?” 황당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세레스는 처음으로 딸이 어리광을 피운다고 느꼈다. 괜히 가슴이 뿌듯해져서는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해보는 것이었다. “어머, 내가 이래뵈도 ‘신’이란다!” “아, 맞다. 엄마는 신이라고 하셨죠? 참 편리하네요 히힛~!” 불쑥 튀어나온 엄마라는 말에 세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세레스를 보면서 다이아나는 어색하게 얼굴을 붉혔다. “이상해요? 움, 이 나이에 ‘엄마’는 좀 징그러운가? 한 번 그렇게 불러보고 싶어서요” “아니, 아니야... 너무 좋구나... 계속 그렇게 불러주겠니?” “그거야 어려울 것 없죠. 엄마, 엄마.” “그래, 그래.. 내 딸 다이아나” 두 모녀는 17일이라는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주신의 권능으로 만든 결계 안이었고, 주신의 권능으로만 해제될 수 있었기에 아무도 찾지 않았다. 그 사이 세레스는 지상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고, 때로는 지식을 바로 머리에 심어주기도 했다. 다이아나는 인간 외에도 여러 종족의 문화가 있음을 알고는 신기해했는데, 각 종족에 대한 그녀의 소감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키가 작고 채굴을 한다구? 아, 그러니까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쟁이랑 같은거네~! 동화책에는 공예에 재능이 있다고는 안했지만, 수염 있는 것도 똑같다. 후훗” “엥? 진짜 이쁘다. 순정만화 캐릭 다 모아놓은 것 같네. 여기 사람들 무지 눈 높아 지겠다 우후후~!” 위의 내용은 환타지 매니아라면 다 짐작하다시피 각각 드워프와 엘프에 대한 다이아나의 반응이었다. 물론 실물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생활을 아예 영상으로 보여주었으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이아나는 이 두 종족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면서 엘프어도 가르쳐달라고 졸랐고, 별 문제 없이 그 일도 해결되었다. - 드워프는 따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 마지막으로 세레스가 보여준 종족은 지상계의 가장 강력한 존재이며, 다이아나의 아버지의 종족이기도 한 드래곤들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나?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실버드래곤이었다. 영상에 나타난 모습은 처음에는 은발의 미남이었는데 - 엘프에 뒤지지 않는 미모를 자랑하는 남정네였다. 엘프의 차분함과 다른 위엄과 차가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 곧바로 빛이 터지면서 본체로 폴리모프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그렇게 드러난 실버드래곤의 모습을 본 다이아나의 감상은. “어? 저거 은이에요? 디게 이쁜 비늘이다!!! 근데 저렇게 크면 어디서 자지?....종알종알~” 워낙 혈통이 대단한 만큼 드래곤에 의한 위압감을 하나도 느끼지 않는 듯한 다이아나였다. ‘닫혀진 세계’에서의 다희는 무뚝뚝할 정도로 차갑고 말이 없었는데, 세레스와 함께하는 다이아나는 어찌 보면 약간 수다스러워질 정도로 잘 웃고 잘 떠들어댔다. 사실, 지혜와 둘이 있을 때의 다희는 지금과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중간 중간 다희로서의 삶에서의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주절거리는 - 주로 지혜가 일으킨 사건들이 많았다 - 다이아나와 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고 필요한 교육을 병행하는 세레스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물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이 17일간, 환영회를 준비했던 7명의 신들과 며느리감을 데려온다고 당당히 레어를 나섰다가 빈손으로 돌아가 다시 아인시아의 브레스를 몸으로 받아야 했던 하비어스, 그리고 강제동면에서 깨어났음에도 아내와 자식이 코끝도 볼 수 없었던 유스테우스 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고, 그 중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 아니 존재는 레디아나엑 엄청난 시달림을 당하면서 열부처럼 반려감을 기다린 에디우스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허나, 어차피 결계의 안팎은 주신의 신력으로 나누어진 공간이니, 굳이 사정을 알고 있는 세레스라 해도 고의적으로 이들을 고생시켰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라진 다이아나 신계 입구에 세레스의 모습이 나타나자, 조용히 그러나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모시는 신들에게 세레스가 나타났음을 알렸고, 17일이나 조카와 세레스를 기다리던 이들은, 이제야 모녀상봉이 끝났나보다 하고 단숨에 모여들었다. “세레스~~ ” “언니~~” “누님~~” 아테나이의 침착하지만 끝이 약간 늘어지게 하여 친근감이 들게 하는 호칭과 아프로테이아의 애교스러운 ‘언니’라는 호칭까지는 들어줄 만 하겠지만, 포세이스 - 포세이스는 용기와 의리의 상징이다. 물론 신이니만큼 외모가 뛰어나지만, 샤프다하기 보나는 좀 투박한 전사같은 느낌을 주며, 신들 중에 가장 큰 키와 체격을 가졌다. - 가 제 어깨 높이에도 안 닿는 가냘픈 세레스에게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콧소리를 섞는 모습은 아름다운 한 편의 동영상을 조금 망쳐놓는 효과가 있다. 아무튼 제각각 특색을 보이면서 세레스에게 달려들던 7명의 신들은 세레스 주위에 그토록 기다리던 조카의 모습이 아무리 찾아도 없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인간에 해당하는 기운은 신계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조카가 가까이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만났니?” 미리 상황을 짐작했던 포이브론이 침착하게 물었다. 의외로 슬퍼 보이는 것만큼 분위기가 어둡지만은 않은 세레스의 모습 덕에 포이브론은 그간 모녀가 함께했음을 짐작했던 것이다. “네.” “좋은 아이지?” “네. 제게는 너무 과할 정도로......” 애써 미소 지으며 딸의 이야기를 꺼냈건만, 금방 눈에 눈물이 그득해지는 세레스였다. 아테나이는 살짝 세레스의 옆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위로에 세레스는 눈물을 삼키며 자신의 속성다운 자애스런 미소를 환하게 지어보였다. 안타깝게도 역시 두 명의 신만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으니, 누구인지 이제는 이름을 대지 않아도 알 만 하리라.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무려 17일간 안절부절했다구우~!” “그러게. 전언 한 번이면 될 것 가지구. 흥~!” 포세이스와 헤파이토스는 서로 맞장구를 쳐 대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조카와 세레스를 손꼽아 기다렸는지 강조해댔고, 그 강조의 이면에 연락 한 번 없는 세레스의 무심함과 의리없음을 반복하여 떠들어댔다. 이와 동시에 이들의 주위는 조금씩 텅 비어 갔지만, 불행히도 눈치 없기로 첫째와 둘째인 이들은 다른 신들이 다들 일정 거리를 두고 째려보다가 그것도 모자라 살벌하게 신력을 일으켜 휘감을 때까지 자신들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유독 당사자인 세레스만은 그 앞에서 비켜서지 않고,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번갈아 성토하는 둘의 말을 들어주었고, 속사포처럼 이어지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을 해주었다. “아버지가 치신 결계 안에 있었어” 주신이 친 결계는 주신의 뜻이 있기 전에 결코 내왕할 수 없다. 그 사실이야 말단 천사도 아느니만큼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눈치 없는 둘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했고, 더더군다나 그 오랜 시간 떨어졌던 딸과 다시 헤어져서 돌아온 세레스의 심정을 생각하여 위로의 시선을 건네고 있었던 것인데...... 그제서야 자신들의 실수를 자각한 두 신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마기를 잔뜩 일으킨 페르세포네는 작달막한 체구의 헤파이토스를 마력으로 묶어 질질 끌고, 사랑의 허리띠의 능력을 일으킨 아프로테이아는 헤롱거리는 거구의 포세이스를 졸졸 따르게 하고 뒷길로 사라졌다. 이어, 상당히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으나 곧 무언가로 막혀진 듯 잠잠해졌고, 사라졌던 두 쌍의 신들 중 유독 남신들의 얼굴이 서 너 살의 아이들이 색칠해 놓은 도화지 같았다는 점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혹자는 궁금할지도 모른다. 신들 간에 힘의 차이가 있는 것이냐고. 실제로 이들의 힘은 누가 강하다고 할 수 없이 속성적인 특성에 의하여 가위,바위,보 식의 사슬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여성에게 약한 포세이스와 마력에 약한 헤파이토스의 속성을 차지하고서라도 그 주위에 소리를 없애는 순간적인 결계를 만들 정도의 힘이 이 두 여신에게 있었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분위기 상 스스로도 잘못했음을 알고 얼떨결에 당해버렸다는 것과 뒤따라 가지 않은 신들 중 포이브론과 아테나이아가 각각 누군가에게 신력을 보조해 주었으며, 헤르메스가 혼잣말처럼 시끄럽군 하고 중얼거린 후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는 점이 추측만 가능하게 할 뿐이다. 누구누구의 탓으로 인한 약간의 헤프닝 끝에, 신들이 가장 궁금해 하던 일에 대한 질문이 조심스레 튀어나왔다. “다이아나는? 유치하게도 자신이 지어 준 이름을 꼭 드러내어 호명해보고 싶었던 누군가가 기회를 노리고 노려서 한 질문이었지만,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투와 표정을 고수했고, 다른 신들 또한 궁금하나 물어보기 힘든 일을 거론했기에 다들 대답을 기대하며 세레스를 주시했다. “아버지가 데려가셨어요. 우리의 세계에 있다는 것, 신계나 마계가 아니라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어디로 갔는지는... 저도... 몰라요.”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한숨 섞인 대답이 세레스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신들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전언입니다. 다이아나에 대한 신들의 직접적인 개입은 주신의 권한으로 금지한다는......” “그... 그럴수가......” “아직 난 선물도 못주었는데? 이번엔 내 차례였다구” 이미 적당한 선물들을 전달한 신들보다, 엉뚱하게 힘을 선물로 주려다 실패한 두 명의 신과 아직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선물을 전달하지 못한 페르세포네는 더욱 속상해했다. 다른 신들도 조카에게 주려고 준비해두었던 것들이 꽤 되던 터라, 다들 실망하는 눈치였다. “모두의 마음은 알지만, 그건 저의 뜻이기도 해요. 더 이상의 능력은 안됩니다. 그 아이가 지금 가진 능력만 해도... 카르마의 저울이...” 미리 가늠질하여 선물을 했던 몇 명의 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카와 형제애로 가득하여 그저 주려고만 하던 신들 몇 명은 기겁을 했다. 자시들의 선물이 잘못하면 안그래도 힘든 저울의 심판에 반대쪽의 역할을 할 수도 있기에. “너무들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마세요. 저는 제 딸을 믿어요. 저보다 많이 그 애를 보아오셨죠? 해낼거에요” 그 누구도 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이브론과 아테나이를 제외한 다른 신들은 한낱 일개 인간의 지위로 카르마의 저울을 기울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끼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세레스의 면전에서 그러한 말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확실한 ‘규율’에 따른 판단이라고 하지만, 이들 모녀에게는 너무나 가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세레스와 두 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유스테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신계에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이 연인들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규칙’에 따라 유스테우스가 하급신이 될 정도의 영혼의 빛을 가지게 되는 것도 다른 방법이겠지만, 현 생의 유스테우스와 세레스가 다시 만날 수 있는지의 여부 또한 다이아나에게 있었다. 딸아이에게 또다른 부담을 지우기 싫었던 세레스와,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주신다운 배려를 해 준 쥬피스의 침묵으로 인해 이 일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유스테우스와의 연락을 도와주는 아테나이와 속성으로 인해 어차피 사실을 알게 된 포이브론만이 세레스의 또다른 슬픔을 공유했다. “아테나이 언니. 부탁드려요” “응. 걱정하지 마” 저울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세레스에게 더욱 안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아테나이는 별 다른 언질이 없이도 세레스의 부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세레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는지 보란 듯이 눈 앞에서 아테나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녹아내릴 듯한 황금의 머리칼과 벌꿀같은 금빛 눈동자를 소유한 남자가 신비한 은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와 함께 있었다. 환한 노란색의 따뜻함과 대조적을 금발의 남자는 수시로 표정을 바꾸며 흥분한 듯 했고, 조금 차가워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은발의 남자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조용한 미소를 띄우고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이봐, 그만 왔다갔다 해. 나까지 어지럽잖아” “넌 걱정도 안되냐? 하긴 이 사기꾼 같은 녀석, 용언을 그렇게 이용해 먹었으니 고소해서 웃음이 나올 만도 하군. 하지만, 벌써 며칠 째인지 알아? 17일이 지났어. 궁금하지도 않냐구!!!” 말하다가 자신이 한 말에 더욱 열받는 상황을 당해 본 이는 저 하비우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애 엄마한테는 날마다 바가지 긁히지, 아들놈에게 헛소리 했다고 차마 말은 못하겠는데 매일 연락해서 반려를 찾아대지. 나보고 어쩌란 거야?” “흠. 아인시아가 무서워서 매일 이쪽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거였군?” 그 와중에서 약점을 놓치지 않는 유스테우스의 냉철함이라니. 역시 골드를 넘는 재목이라고 이름을 떨쳤을만 하다. 상당히 아픈 부분을 찍힌 하비어스의 얼굴에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 떠오름과 거의 동시에 변명이 튀어나왔다. “무슨말이야? 나야 우리 며느리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거지!!!” “누가 뭐랬나? 며느리 걱정도 하고 마누라 바가지도 피하고. 일석이조네 그려~!” “......” 사실 누구보다 초조해져 있을 유스테우스였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만 동면에서 깨어난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선 하비어스의 약간은 푼수같은 이런 행동들이 유스테우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하여 상당히 과장되어 있음을 둘 다 모르지 않았다. 친구의 애틋한 우정에 장단을 맞추어 구박하듯이 농담조로 대꾸하는 유스테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가 정말 웃고 있지 않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마도 모녀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을 걸세. 만나자마자 떼어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 “연락이 닿지 않는 사정이 있을거야. 주신께서 관여하신 일이니까” “......” 침착하게 상황을 예상하는 유스테우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레어 안 한 부분에 환한 빛이 생성되었다. “다희, 아니 다이아나가 오늘 이쪽 세계로 보내어졌다고 합니다.” “어딘지는 물론 모르시겠군요” 어쩐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어조로 어렵게 말을 꺼낸 아테나이에게 묻는 유스테우스였다. “아직 모릅니다. 그 동안에는 주신님의 결계 안에서 세레스와 이쪽 세상에 대한 공부를 한 모양입니다.” “그녀가... 기뻐했겠군요. 그리고, 또 울었겠군요...” “네” “그리고, 세레스의 전언입니다. ‘우리 딸을 믿어요!’라는......” “전해주십시오. 저도 믿는다고.” “하아,,, 언제 보아도 당신들은 대단한 분들이에요” “미천한 드래곤 따위가 어찌 고귀하신 신께......” “누가 뭐래도 세레스의 반려는 당신이니까요”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갈께요” “......”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유스테우스를 뒤로 하고 아테나이는 다시 사라졌다. 여신의 강림 후 줄곧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하비우스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의 도움도 불가능하게 하신 것인가?” “아니지. 능력껏 찾아 도우라는 것이겠지. 만일 도움이 제한된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었을 것이야. 내 딸을 찾아야겠네” 동면에서 깨어나 게으름부리듯이 찬찬함을 유지하던 유스테우스의 동작이 돌연 빨라졌다. 갑자기 짐을 꾸리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던 하비우스는 겉으로 초연해 보여도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였군 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의 팔을 잡아다녔다. “직접 찾아 나서려구?” “......” “이 넓은 대륙에서 어떻게?”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내 딸을 어수선한 세상에 방치할 수는 없네” “이봐, 그렇게 찾아서 언제 만나겠다는거야?” “그럼 날 보고 어쩌라는 거야? 손 놓고 기다리라고? 1700년이나 잠을 잤어. 그 아이가 크는 모습도 못보았다구. 물론 자네가 보여준 영상으로 모습은 확인했지만, 내 딸이야. 내 딸이라고!!!” 침착을 가장한 냉정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유스테우스는 감정을 드러내며 절규했다.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하비어스는 팔을 잡았던 손을 풀고 친우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찾지 말라는 것이 아니네” “???” “휴우... 자네도 이성을 잃었구만. 좀 더 현명하게 빨리 찾을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걸세” “아!” “좀 아니꼽기는 해도 그린 애들에게 부탁하면 쉽게 엘프들을 동원할 수 있네. 영상이 있으니 충분히 확인이 가능할걸세. 드워프들이야 어차피 우리 말에 꼼짝을 못할꺼고, 그리고 저능하기는 해도 대륙 천지에 깔린 생명체가 오크와 고블린이네. 몬스터들도 동원해 보세. 아참, 유희를 나간 드래곤들도 있군. 규칙에 어긋나기는 해도 부탁을 하면 들어줄 걸세. 자네나 나나 그리 미움받고 살진 않았으니까” “그, 그렇군...” “지금 해야할 일은 바뀐 대륙 지도를 구하고, 각각의 지역을 나누어 탐색계획을 짜야 하네. 그리고...” “영상용 수정구를 만들어야 하겠군” “이제야 좀 자네답군” “고맙네” “흠, 흠... 뭐 장래 며느리를 위한 것이니만큼......” “고마운 건 고마운거고, 약속은 약속이네만?” “머야? 이 사기꾼 녀석!” “하하하!” 하비어스의 도움을 받아 조금의 여유를 되찾고 웃음까지 보이는 유스테우스였다. 계획대로라면 딸을 만날 날이 머지 않았으리라. 세상은 넓었지만, 모든 능력을 동원한다면...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들의 계획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첫 걸음 17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저 서로에 대한 애정만 확인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세상에 대한 지식까지 교육하고 받아야 했으니, 더더욱 짧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주려고 애를 쓰던 세레스였지만, 시간은 공평했다. 아니, 이 두 모녀에게만큼은 잔인했다. “오셨습니까?” “주신을 뵙습니다.” 약속된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결계에 나타난 주신은 둘의 인사를 받고 세레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 했다. “그만 가보도록”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레스는 딸을 한 번 안아주고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 내 딸아” “사랑해요 엄마” 짧은 이별의 의식이 끝나고 세레스는 결계 밖으로 내쳐지듯이 나가야만 했다. 남겨진 다이아나는 묵묵히 주신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원망스러우냐?” 처음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게 따스함이 깃들어 있는 음성에 다희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신을 바라보았다. 외모는 젊은 남자였지만, 현명함과 따스함, 힘.... 세상을 이루는 속성이 모두 그의 눈 앞에 있는 듯했다. “제 몫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이아나가 된 다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솔직하게 대꾸했다. 규칙은 규칙일 뿐, 주신의 시선 어디에서도 자신에 대한 미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어머니의 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이다. 이 세상 모든 창조물의 어버이인 그가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나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쩐지 저쪽 세계의 기독교적인 하나님에 대한 연상을 해버린 듯 하지만, 오랜 습관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느낌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이 확신을 가지는 다이아나였다. “그것도 틀리지 않다” 돌연 주신의 음성이 들렸다. 주신은 다이아나의 마음을 보고 있었던 듯 무표정하던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처음이며 끝, 온전한 사랑인 존재 그것이 나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지.” “아아...” 성경의 어구를 인용한 주신의 말에 다이아나는 무의식중에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엄정한 심판장기도 하단다” ‘구약의 야훼!’ 다이아나는 또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은 나를 이루는 속성이다. 나 자신이며,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무 혼란스러워 할 필요는 없단다. 나의 아이여!” “......” “그나저나 너에게는 꽤 가혹한 생애가 되었구나! 균형을 지키는 존재로써, 나의 행위를 원망하게 되지 않기를...... 너의 그 마음을 잃지 말기를... 나 주신 쥬피스의 이름을 걸고 축복하노라!” “감사합니다. 쥬피스님!” 다이아나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주신으로부터의 축복을 겸허하게 받았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가자.”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결계 밖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밖은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고, 숲 속의 마을처럼 생긴 공간이 시야 안에 있었다. 둘이 서 있는 곳은 얼기 설기 엮어놓은 장벽이라 일컫기 차마 힘든 마을의 외곽지역이었다. “이 곳에서부터 너의 생을 이어가거라.”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주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목소리만 한 번 들렸을 뿐, 혹여 다른 소리가 들릴까 한 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다이아나는 선뜻한 새벽 공기를 느끼고,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로브의 옷깃을 여미면서 별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앞에 있는 마을을 향하여 걸어갔다. 전날 밤 친구들과 놀다가 지쳐 저녁도 못 먹고 잠들었던 다키는 이른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고픈 배를 채울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매정한 식구들은 다키의 몫을 남겨놓지 않았는지, 집 안에 먹을 것이라곤 도통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여기 저기 뒤적이던 다키는 이내 포기한 얼굴로 집 밖으로 나갔다. 마을 근방에 혹시 먹을 만한 열매라도 있는지 찾아볼 심산이었다. 그다지 어귀가 맞지 않는 나무문을 열고 집을 나서니 모처럼만의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숨을 깊게 들어마신 다키는 바쁠 것 없는 걸음걸이로 넓지 않은 마을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엷게 깔린 아침 안개를 보면서 마을 어른들처럼 제법 의연한 말투로. “오늘은 맑겠구나” 하고 혼잣말도 중얼거려 보았다. 마을 어귀에 가까워졌을때, 다키는 자신 말고도 마을의 누군가가 일찍 일어났나보다 생각했다. 사실 다 걷혀가는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훨씬 더 전에 볼 수 있었지만, 어제 또래와의 격투에서 진 사실이 떠오르자, 머리 속으로 그때는 이렇게 막고 저렇게 할 것을 해가면서 혼자 주먹을 휘두르는 등 한참 열중해 있었던 탓이다. 일단 누군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누구인지 유심히 바라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흐릿했던 모습에서 눈에 먼저 들어온 체형만으로도 다키는 자신의 마을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한 달 전, 대규모의 전투가 있고 나서, 안그래도 좋지 않던 다키네 마을의 사정은 더더욱 심각해졌다. 아마 어제 일찍 집에 갔더라도, 저녁을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루 한 끼의 식사조차도 불가능한 날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지난 번의 전투에서 마을 어른들이 많이 죽고 다쳐서 열 중의 두셋만이 돌아오기 전까지, 다키는 자신의 마을 전사들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린 다키와 그 친구들 두 셋을 팔에 거뜬히 매달고 휘휘 돌릴 정도로 힘이 좋았고, 산 꼭대기까지 구보로 오갈 수 있을만큼 튼튼했다. 늘상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수련을 했고, 마을 이곳 저곳에서는 힘겨루기를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대부분의 어른이 죽거나 상처를 입은 지금의 마을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몇몇이 모여서 풍요롭게 고기를 뜯던 시절이 벌써 까마득한 옛일로 여겨졌다. 근래 한 달 동안 마을의 사정은 점점 나빠졌고, 모자란 식량에 배고픈 이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야생 열매나 풀뿌리까지 거침없이 채취해 연명하고 있었다. 다키네 집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다키의 아버지는 약간 부상만을 입었으므로 숲에서 산토끼 같이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 오시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냥한 식량은 다키네 뿐만이 아니라 몇 집이 나누어 먹어야 했으므로, 늘상 굶주리긴 매한가지였다. 어찌되었던 전사들이 제구실을 못하는 이 시점에 저 낯선 방문객이 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난 다키는 확실하게 보지도 못하고 바로 뒤돌아 마을 중앙으로 달려갔다. 마을 쪽으로 걸어가던 다이아나는 의외로 마을이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에서 보기에는 몇 집 안 보였는데, 근접한 거리에서는 그 뒤로 늘어선 집들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100여 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마을이었는데 - 세레스로부터 전달받은 지식에 의하면 이 정도 마을은 중간 정도의 크기에 속했다 - 지나치게 낙후되어 보였다. 아무리 낡았더라도 식당이나 여관 정도야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둘러보던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다이아나는 짝달막한 인형의 안개 너머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개로 가려진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른이 아닌 아이의 형상임을 알 수 있었다. 대충 13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뚱뚱하지는 않더라도 꽤 살집이 있는지 약간 옆으로 퍼진 몸매의 아이가 분명한 인형은 다이아나가 어느 정도 윤곽을 볼 수 있을 즈음에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달려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꽤나 낯을 가리는 성격인가보다 하며, 이 새벽에 누군가를 깨우기도 미안하니, 어른이라도 불러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잠시 후, 철판을 무언가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 - 종소리에 가깝지만, 그렇게 소음에 가까운 종소리는 처음 들었으므로 - 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상황상 아무래도 저 종소리는 아까의 꼬마가 경계의 뜻으로 치는 것이리라. 자신의 인상이 그리 험상 굳었던 것인지 문득 외모에 자신이 없어지는 다이아나였다. 아니면, 유독 이 마을이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이거나....... ‘어쨌든 어른이 나온다면 그걸로 된 거지. 설마 마을에 들어왔다고 함부로 해를 끼치거나 하겠어?’ 어찌되었던 느긋한 마음으로 가던 방향으로의 행보를 계속하는 다이아나였다. 정신없이 마을 중앙으로 달려간 다키는 비상시에 울리는 종을 마구 쳐댔다. 평소에는 다키같이 어린 아이들이 접근도 못하게 하는 종이었지만, 침입자를 처음 발견했다는 점이 그러한 제약에도 거침없이 종을 울릴 용기를 주었다. 집집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들이 열리면서 여기 저기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뛰어나온 것은 의무감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집이 가까워서인지 지난 번 전투에서 하크가 죽는 바람에 새로 마을의 대표가 된 포치였다. 헐레벌떡 뛰쳐나온 포치는 종 옆에 서있는 다키를 보자,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쥐어박을 태세를 취했다. 보나마나 금지된 장난을 친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탓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포치는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침입자가 쳐들어왔다고 고함을 질렀다. 팔을 치켜 든 채로 놀라 굳어졌던 포치는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오히려 두려움이 깃든 다키의 표정을 보고는 한 둘 씩 모여드는 전사들을 모아 마을 입구로 나갔다. 물론 침입자가 몇인지 물어보기를 잊지 않았고, 다키는 자신이 본 것은 하나였다고 전했다. 제발 정말 그 이상이 아니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면서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앞장을 서는 포치였다. 모았다는 전사라고 해야 열 남짓, 그 중에는 아직도 부상이 낫지 않았음에도 용감하게 무기를 들고 나선 이들도 끼어 있었으니, 적이 많다면 이 마을은 폐허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상 비장한 각오로 무기를 들고 앞장 선 전사들의 뒤로는 불안감을 쫓으면서 사태 파악을 위해 쫓아오는 전사가 아닌 이들이 있었고, 그 뒤에는 어린 아이들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초리를 하고 일련의 대열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키 또래의 아이들 중 꽤 용감한 몇몇은 조급함을 내세워 앞열로 나서다가 어른들에 의해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했다. 만일 상황이 불리하다면 최악의 경우, 뒤쪽부터 가능한 빨리 도망을 쳐야 하리라.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던 포치는 아이의 말대로 마을 중앙으로 걸어들어오는 존재와 마주쳤으나 오히려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나중에 다키 녀석의 투실한 엉덩이를 몇 번이고 걷어 차 주고야 말겠다고 이를 갈면서 다짐하는 포치였다. 침입자는 달랑 하나, 그것도 뼈대 있는 전사같이 근육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무기를 든 것도 아니었다. 키는 작지 않았지만, 팔 다리의 뼈대가 가늘고 허리도 얇아 무척 약해보이는 인간의 여자였다. 뒤돌아 노려보는 포치의 살벌한 눈길을 느낀 다키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저토록 약해보이는 인간을 두려워하다니. 나름대로 이제 다 커서 내일이라도 당장 전사가 될 수 있을꺼라고 생각했던 다키 - 어린 아이들이란 항상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하는 법이니까 - 로서도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키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인간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훈련이 잘 되어 있었는지 종소리가 울리고 얼마 안되어 꽤 많은 인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이아나는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손과 손에 무기를 들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윤곽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설마 무조건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최대한 적으로 여겨지지 않을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기다렸다. 이 쪽을 저토록 경계하는데 다가간다면, 확실한 침입의 의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옮기던 발걸음을 멈춘 채로.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다이아나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좀 특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이르게 되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오크?!!” 아, 그랬다. 다이아나가 들어선 마을은 숲 속의 오크마을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이족보행을 하고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지만, 돼지를 닮은 머리 모양과 빽빽하게 난 털, 그리고 옆으로 딱 벌어진 체격을 가진 그들은 ‘오크’였다. 약해 보이는 인간의 암컷 - 오크의 관점에서 본 다이아나 - 과 오크마을의 주민들 - 강적의 침입에 비장한 마음으로 최후까지 각오하고 몰려나온 - 은 서로 황당한 현실에 잠시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양 측의 생각을 보면 더 황당했지만 말이다. 마을의 신임 수장의 자리를 갑작스레 차지한 포치는 이전이라면 무척 자랑스러웠을 그 자리가 큰 부담이 되었다. 전사들 사이의 힘겨루기로 가장 강한 오크가 수장이 된다는 전래의 규범대로 수장이 되었다면 참으로 자랑스러웠겠지만 일백 여에 달하던 마을의 전사들은 열 명을 조금 넘었고, 그나마 정상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사들은 지난 번 전투에서 선두에 서지 못한 일천한 경험의 오크들이 주를 이루었다. 현재 오크 마을 내에는 온전한 전사라고 일컬을 이는 포치 하나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부담이 어린 오크 새끼 한 마리의 성급한 판단을 확인도 않고 침입으로 확신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수장다운 행동을 한 것이 고장 인간 암컷 - 물론 인간의 암컷들도 간혹 강한 경우가 있긴 했지만, 오크의 기준으로 눈 앞의 암컷은 전투능력이 전무해 보였다 - 한 마리에 온 주민들을 동원한 격이 되었으니, 포치의 지금 심정이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털로 빽빽하게 덮여 있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토치의 얼굴은 잘 달아오른 화로에서 구워지는 고구마를 연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상대적으로 털이 거의 없어 피부가 보이는 귀 안쪽의 불타는 듯한 빨간 색은 그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주는 상태였다. 어찌되었던 온 주민을 다 불러모은 셈이 되었으니,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다. 어차피 한 마리라도 침입자는 침입자인 셈. 오랜만에 인간을 사냥해 주린 배에 약간의 기름기라도 더해 주면 동료 오크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내린 자신의 발상에 조금 위안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수장의 위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포치는 앞으로 나섰다. “취익, 인간의 암컷, 사냥감이다. 죽인다” 포치의 말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오크마을 주민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먹음직스런 사냥감에 대하여 깨닫자마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한 편, 이 넓은 대륙의 하고 많은 인간의 동네를 제외하고 하필 오크마을 앞에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간 주신의 심사가 무엇인지 황당해 하던 다이아나는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가 취익거리는 콧소리를 내며 하는 말에 순식간에 굳어졌다. ‘사냥감... 먹이...’ 자신이 무엇인가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17년이라는 전 생을 살아온 다이아나로서는 도저히 인지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자신의 삶에서 인간의 죽음이란 교통사고나 천재지변과 같은 경우, 병에 걸린 경우 등이었지, 육식동물에게 걸려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더군다나 그 대상이 사자나 호랑이 같은 알고 있던 육식동물도 아니고, 생긴 모양은 좀 이상해도 말을 하고 마을을 이루고 사는 종족에 의해 ‘먹이’로 지명 당했다고 자각하기는 그야말로 이해는 가는데, 실감은 안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딸의 안위를 걱정한 세레스가 대륙에 분포하는 몬스터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세레스는 ‘여신’이었고, 그녀에게는 인간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생명체도 다같이 그녀의 ‘자애’를 주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여 물론 이론적인 위험성이야 설명해 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지, 다이아나보다 더하면 더한 세레스가 적대적인 묘사로 설명을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다이아나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포치는 도끼처럼 보이는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주민들에 대한 미안함과 땅 밑으로 떨어지는 체면을 어느 정도 올려 보려는 욕구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끝에 포치는 ‘저 인간의 암컷을 혼자 잡아서 민심을 다시 잡으리’라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다른 오크들은 어차피 위험한 대상을 사냥하는 것도 아니니 구경이나 하고 나중에 먹이나 먹자는 심산과 새벽부터 그들을 똥개훈련 하듯이 모은 일이 별거 아니었다는 짜증스러운 마음에 당연히 구경이나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다이아나는 일단 죽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다행히 다른 오크들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상대할 대상은 앞으로 나선 하나였다. 다이아나는 자신을 죽이려는 오크를 보았다. 오크의 눈에서는 적의나 증오가 보이지 않았다. 오크는 자신을 단순한 ‘먹이’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취익~!”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둔해 보이는 외견과는 다르게 상당히 빠르게 도끼가 휘둘러졌다. 만일 제 때 피하지 않았다면 다이아나는 거의 고통없이 깨끗하게 목에 베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무술로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던 다이아나는 몸에 벤 감각만으로도 슬쩍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첫 공격이 실패한 오크는 무언가 더 흥분한 듯이 격하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자애를 속성으로 물려받았다고 해도 생을 포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다이아나였기에 정신을 집중하여 오크와 생사를 건 결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위잉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선 무기를 대항하는 것은 실제로 처음이라, 주먹이나 발길질을 피하던 것처럼 움직였지만, 철의 스산한 기운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희는 몇 번인가를 피하기만 하면서, 상대의 공격패턴을 읽어갔다. 눈 앞의 오크는 다희보다 훨씬 강한 힘과 치명적인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느린 편도 아니었다. 잠시의 방심은 잘못하면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포치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오크들에게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온대로 먹이는 최대한 고통없이 한 순간에 죽여 주는 자비를 베풀려고 작심하고 내휘두른 자신의 무기를 슬쩍 무릎을 굽혀 피해냈을 때에는 그저 운이 좋았으려니 짐작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약하다고 너무 얕잡아 보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의식했다. 저처럼 약해보이는 인간의 암컷에게 두 번을 휘둘러야 하다니...... 무안을 떨치려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무안함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포치는 두 번 뿐만 아니라 세 번, 또 네 번, 수없이 도끼를 휘둘러야 했다. 다이아나는 포치의 몸동작을 주시하면서 계속되는 공격을 피해냈다. 꾸준히 관찰한 결과 상대 오크의 동작이 힘이 있고 빠르기는 하지만 매우 단순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동작들의 템포가 비슷했고, 도끼가 휘둘러지는 방향에 따라 내딛는 스텝이나 노리는 방향이 동일했다. 오크는 심장이나 목, 머리를 대상으로 하여 도끼를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도끼가 올라갔다가 가장 크게 휘둘러지는 한 동작을 기점으로 그 도끼의 날을 피하면서 발을 앞으로 내딛어 오크의 손목을 가격했다. 허리를 힘의 중심으로 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도끼를 휘두르던 회전의 마지막 점에서 가해진 공격은 오크의 손에서 도끼를 떨어뜨리게 했다. 다이아나는 재빨리 오크의 도끼를 주워들었다. 긴장한 눈으로 무기를 쳐다보는 오크의 앞에서 순식간에 주웠던 도끼를 자신의 뒤편 멀리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기억속에서 되살린 결코 오크들이 거부할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으며 격투 자세를 취했다. “당당하게 겨루자” 포치는 어느 틈엔가 자신의 품으로 파고 들어 무기를 날려버린 인간 때문에 숨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놀랐다. 떨어진 무기를 주워 든 인간의 암컷을 보면서, 다른 오크에게 무기를 던져달라고 소리치려고 할 그 때, 그 인간의 암컷은 도끼를 멀리 던져버리고는 오크들이 신성한 결투에서 사용하는 말을 건네왔다. ‘당당하게 겨루자’ 오크들은 강함을 숭상하는 종족이다. 어찌보면 순수할 정도로 가진 지능에 비하여 단순하다. 인간들이 오크들을 경시하면서 머리가 아주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에는 오크들이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잔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오크들은 지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 인간들보다야 떨어질지라도 -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크의 기준에서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지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종족을 제외한 - 극히 일부의 오크들은 이러한 제외도 없었다 - 다른 생물에 대해서는 먹을 수 있고, 자신보다 약하다면 사냥감으로 인식했다. 이는 오크들 자신도 다르지 않아서, 자신의 종족보다 훨씬 힘이 센 오우거에게 사냥을 당하거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드래곤의 먹이가 되는 것에 대하여 별로 적대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오크들 또한 오우거를 이긴다면 그 오우거는 그날 오크들의 식사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오크들에게 ‘강함’이란 곧 존재의 증명이며 ‘선’이었다. 오크 사회의 서열 또한 당연히 이러한 기준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러한 서열을 결정하기 위한 절차가 바로 ‘신성한 결투’ 였다. 우열을 가릴 수 없거나 자신보다 높은 서열의 오크에게 도전하여 신성한 결투를 청할 때, 도전자는 상대방에게 이 말을 한다. 바로 다이아나가 포치에게 한 '당당하게 겨루자'는 말이었다. 이는 일종의 의식어였고 결국 ‘신성한 결투를 하자'는 뜻이었다. 이 신청을 받은 오크는 절대 거절할 수 없었고, 결투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맨 손으로 이루어졌다. 어떻게 위대한 오크의 신성한 결투에 대하여 알았는지는 몰라도 마을 주민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이곳에서 결투는 받아들여져야 했다. 이 또한 인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크들은 신성한 결투를 신청한 상대의 종족이 오크가 아니라고 해서 무시하는 등의 ‘예외조항’ 따위는 몰랐다. 어떻게 보면 다이아나의 계획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취익~! 나 포치는 취익~!, 인간의 암컷과 취익~! 신성한 결투를 한다” 콧바람 소리를 크게 내면서 선언하듯이 내뱉는 포치를 보면서 다이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 없이 하는 결투라면 누구보다 익숙하고 자신이 있었다. 다이아나는 오크들에 대한 편견 없는 정보를 전해 준 어머니께 속으로 감사했다. “고맙다” 격투자세를 취하고 있던 다이아나의 말이 끝나자 포치는 이번에는 맨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무기로 인해 피하는 것으로 일관하던 다이아나도 가드를 사용하면서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오크는 인간의 신체 비율에 비해 다리가 짧았다. 따라서, 맨몸으로 벌이는 격투는 주먹질과 잡고 쓰러뜨리는 등의 상체를 이용한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여러 가지 스탭을 섞은 복잡한 무술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다이아나의 실력이 충분히 드러났다. 한 쪽은 공격을 다른 쪽은 방어만을 하는 희귀한 대결이 오크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헠헠,, 취익, 취익, 인간 암컷 강하다. 내가 졌다” 코와 입으로 격한 숨을 내뱉으며, 포치가 항복을 선언했다. ‘신성한 결투’를 관전하던 오크들은 시작은 잊어버리고 늘 그렇듯이 승자에게 환호를 보냈다.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로 수장이 된 포치였지만, 오크 전사중에 결코 약하지 않은 그였기에 도무지 알 수 없는 힘으로 한 시간 여를 공격 한 번 안하고 버틴 다이아나의 강함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승부는 지나치게 공격을 하느라 온 힘을 다 써서 지구력이 떨어진 포치가 스스로 패배를 자인함으로써, 다이아나의 승리로 끝났다. “취익, 인간 암컷. 네가 수장이다” “나는 수장의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너도 강하다. 우리는 무승부였다” “취익, 나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나도 너를 한 번도 때리지 못했으니 무승부가 맞다” “취익~! 나랑 새끼 낳을래? 취익~! 우리 오크는 외모보다 힘을 본다. 인간여자 너 좋다” 말을 들어 본 즉슨, 다이아나의 외모는 마음에 안들지만, 잘 싸우는 것이 멋있으니 청혼을 한다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다희 시절 한동안 CF의 대사로 유명했던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어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나도 너 좋다. 하지만, 나는 인간 수컷이랑 새끼 낳을 것이다” 그야 말로 오크 수준의 눈높이 대화를 몸으로 실행하는 다이아나였다. 결국 다이아나는 이 오크마을의 친구로써 받아들여졌다. 그것도 일반 암컷의 지위가 아닌 전사들과 동일한 존재로써. 이들은 서로 이름을 말하고 인사를 나누었으며, 다이아나에게 빈 집을 제공해 주고, 넉넉지 않은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저녁에나 결정이 된 일로, 그 전에 다이아나는 포치네 집에서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마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들을 수 있었다. 포치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일 뻔한 다키는 훌륭한 전사를 발견했다고 우쭐해서 돌아다녔고, 맨 처음 겨우 윤곽만 본 것에도 불구하고 다이아나와 처음 만난 오크임을 또래들에게 영웅담처럼 들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다이아나의 첫 발걸음은 어딘지도 모를 깊은 산 속의 한 오크마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취익. 있나?” “응 들어와” 낡은 문은 우악스러운 포치의 손 아래 신음성을 내뱉었다. 오크들이 지은 집은 단순했다. 다이아나가 살게 된 곳은 독립하여 혼자 살게 되는 오크들이 짓는 집으로,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원룸 시스템이랄까? 침대 하나와 바로 옆에 작은 탁자 하나 좀 불안하게 삐걱거리는 의자 하나가 들어 있고, 다른 쪽으로는 ‘부엌’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었다. 그렇다고 ‘개수대’나 ‘싱크대’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조리를 할 수 있도록 벽에 딱 붙여 설치한 탁자 위에 ‘그릇’으로 추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고 옆으로는 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오크가 손가락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힘이 센 데 비하여 그다지 손놀림이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도 있었고, 어차피 주거를 꾸민다는 개념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집을 대충 완성하고 식구가 늘 때마다 필요한 공간을 늘려나간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다이아나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이들 오크가 고마웠고, 더더군다나 어찌 보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인 자신을 그 ‘단순한 사건’으로 전혀 의심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에 감탄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이들 종족의 성품은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예의’와 ‘가식’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갈등이나, 이중성을 가지고 누군가의 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하는 등의 일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했다. 어찌 보면 인간세상에서 쓸 데 없이 사용되는 자잘한 신경씀이 이들과의 생활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다녀 온거야? 갔던 일은?” 다이아나는 처음이 딱딱한 말투에서 점차 이전 세계에서의 자신의 말투를 이곳의 언어에 적용하고 있었다. 사실 주입된 언어란 것이 ‘정확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응용하여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좀 어색했던 것이다. “취익, 잘 되었다. 다음 달이 뜨기 전에 우리는 키투의 마을로 이사한다” “그래. 다행이다” “취익. 다이아나. 취익, 너도 같이 가나?” “아니, 같이 있고 싶지만, 나도 내 종족에게 돌아가야지” “취익, 인간 나쁘다. 취익, 우리랑 살자. 나랑 새끼 낳자” “나도 인간이야 푸치. 인간은 인간들과 살아야 해” “취익, 인간 나쁘다. 다이아나 착하다. 취익, 이상하게 생겼지만 힘도 세다. 취익, 나는 다이아나 떠나는 것 싫다” “푸치, 그래도 나는 가야해. 나한테 새끼 낳자고 해 줘서 고맙다” “취익, 다이아나의 말은 취익, 가끔 이해 못하겠다. 취익, 새끼 안낳는다고 하면서 취익, 뭐가 고맙지?” 그저 미소로 얼버무리는 다이아나였다. 푸치 뿐만이 아니라 마을 오크들과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간의 특징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크들은 가끔 다이아나의 말의 뜻을 오해하거나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일예로 지금만 해도 푸치는 다이아나의 앞에서 대놓고 생긴 것은 마음에 안들지만, 힘이 세서 좋으니 오크식의 함께 살자는 표현을 한다.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못생긴 여자에게라도 이는 따귀 한 대는 맞고도 남을 표현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이 왜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느끼는대로 생각하는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내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의 고급화된 표현이 언어가 되었을 것이고. 하지만, 마음을 그대로 옮기기 위한 언어는 이미 어떤 면에서는 마음을 왜곡하여 포장하는 도구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오크들은 언어를 처음의 목적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새끼를 낳자는 말에 고맙다고 대답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찌어찌 포치와 다이아나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인간 마을 안다” “키투가 알려줬어?” “그렇다. 네가 우리랑 같이 안가면 우리가 이사할 때 내가 길 알려준다.” “그래, 그렇게 하자. 참, 내가 알려준 것들은 잘 기억하고 있지?” “나도 알고, 투바도 알고, 아지후도 안다.” “응 알았어. 네가 기억 안나는 것은 투바랑 아지후에게 물어보면 되겠구나” “고맙다.” “응” 다이아나는 이 마을에서 살기 시작한 첫 날, 큰 전투로 마을 전사들을 잃어 마을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푸치에게 들었다. 사실 이 또한 인간들이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눈치를 봐 가며 말을 하거나 감추고 싶어할 일이지만, 오크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사실’에 대하여 쉽게 말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오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천사의 집의 희연이, 미수언니 들이 연상되곤 했다. 이들을 알아갈수록 오크란 종족이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크를 간식으로 생각하는 유스티우스나 하비어스 등이 들었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여기 저기서 ‘새끼 낳자’고 조르는 오크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여기서 살면 참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이아나가 이들과 생활 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놀러와서 아이다운 수다를 떨던 다키가 갑자기 배를 욺켜쥐고 뒹굴거린 사건이 있었다. 함께 있던 포치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기만 했고, 다이아나는 일단 다키를 자신의 침대에 뉘어달라고 부탁했다. 다이아나는 엄마를 떠올리면서 다키가 낫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순간 다이아나의 몸에서 빛이 나면서 그 빛이 손을 통해 다키에게 옮겨갔고, 다키는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일어났다. 이것이 다이아나가 처음 써 본 자신의 신성력, ‘치료의 능력’이었다. ‘자애와 치료의 여신’ 세레스의 딸인 다이아나는 선천적으로 어머니의 성력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닫혀진 차원’에서 이쪽 세계의 신인 세레스의 신성력은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세레스와 지낸 기간에 다이아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었고, 영상을 통하여 신관들이 성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봐야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다이아나는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졌다는 세레스의 대신관보다도 높은 신성력의 소유자였고 -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 그 대신관이라는 인물의 성력이 숨만 붙어 있으면 누구라도 살릴 수 있다는 정도의 경지였으니, 다이아나의 신성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포치는 다이아나가 마법도 하는 줄 몰랐다며 신기해했고, 다이아나가 신성력이라고 하자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간들과 오크와의 전투에서 종종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이들 - 마법사나 신관 -을 목격했던 오크들은 그러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다이아나도 처음 사용한 신성력의 위력에 스스로 놀랐고, 어머니의 힘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기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이아나는 다키가 배고픔을 못이겨 이것 저것 열매를 주워먹다가 식용열매와 흡사한 독이 든 열매 류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마을의 식량사정에 대하여 전해 듣기는 했지만, 전사로서 대우받는 다이아나는 어느 정도 소박한 식사가 가능했기에 늘상 밝게 뛰어다니는 마을 아이들이 그토록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오크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전투력이 우선시되었고, 높은 출생률과 짧은 성장기간 때문에 아이보다는 한 명의 완성된 전사가 더 아쉬운 실정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들 사회의 힘을 숭배하는 풍조상, 강한 자가 더 많이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다이아나는 그 날부터 세레스로부터 주입받은 지식들을 차근차근 적용하여 마을 주위를 돌면서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으면 안되는 식물들을 구분해 가르쳤다. 무조건 무기를 사용하여 사냥을 하는 오크들에게 간단하게 올가미와 함정을 이용한 덫을 사용하여 동물들을 잡을 수 있도록 했고, 생선은 아예 잡을 생각도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여 조잡한 그물을 만들도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조리법을 가르쳤다. 오크들은 이제 다이아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르고 있었고, 덕분에 배를 곯지 않게 된 마을의 노약자 층은 완전히 다이아나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무엇보다 다이아나가 가르친 여러 일들이 오크 사회에서는 별로 쓰일 곳 없었던 노약자들의 일손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다이아나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지식들을 전해주어도 문자문화가 없는 오크들이 잊을 것을 염려하여 푸치를 중심으로 하여 투바와 아지후라는 비교적 똑똑한 오크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무엇보다 다이아나는 오크들이 인간이 나쁘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를 알게되었다. 인간에 대한 오크의 생각은 스스로 인간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고리 안에 얽매일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포치가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오크와 싸우는데, 오크가 죽어도 잡아먹지 않는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자꾸 무기를 들고 사냥을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들은 그걸 ‘토벌’이라고 부른다. 오크들도 인간들을 공격하지만, 그건 먹이를 구하기 위한 ‘사냥이다.] 대충 골자만 들자면 이랬다. 즉, 오크들은 먹지도 않을 것을 죽이는 인간들의 행동이 나쁘다는 거였다. 이를 인간 입장에서 듣고 보자면 이처럼 끔찍한 말이 없다. 즉, 인간이 오크를 먹는다면, 나쁜 일이 아닌데 안먹으니까 나쁘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현재시점. 포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련이 남은 듯 다이아나의 의사를 몇 번 더 확인하고는 - 결국 다이아나는 오크식으로 말했다. 나 네 새끼 낳기 싫어!라고... -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포치는 어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이른 바 원조요청을 하러 갔다가 오늘 왔다. 원래 오크들이 주로 사는 곳은 키투의 마을부터 반 나절 혹은 그 보다 짧은 거리로 주욱 이어져 있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키투의 마을이 하루나 걸려 가야 할 거리에 있는 것은 그 동안 이 마을과 키투의 마을 사이에 있던 마을 두 개가 인간들이 ‘토벌’이라고 부르는 사냥을 할 때, 전투에 져서 다른 마을에 합해지거나 했기 때문이다. 포치는 다이아나가 가르쳐 준 여러 가지를 이용하여 다른 마을과 함께 살더라도 자신의 마을 오크들이 홀대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포치야 다른 마을에서도 환영받을 존재인 ‘전사’였지만, 이 마을의 대부분의 오크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이아나는 이들에게 식량과 더불어 새로운 마을에서의 ‘입지’도 준 셈이었다. 푸치가 키투의 마을에 갔을 때, 마을은 상당히 분주했다. 키투도 푸치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처음 보는 이상한 구슬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 적이 있는지부터 물어보는 것이었다. ‘수정구’라고 부르는 그것을 위대한 존재인 산맥의 주인께서 내리시면서 그 인간을 찾아보라고 하셨단다. 포치는 영상을 보았지만, 영상 속의 인간 암컷은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이 오크의 얼굴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크들도 인간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나마 인간의 경우는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 몸의 크기 등으로 구분이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푸치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검은 눈, 검은 머리의 인간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고 보니 키투의 마을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오크 마을에서 위대한 존재께서 내린 명령을 이행하기 위하여 모든 오크들이 동원되었다고 했다. 이 때 대륙에서는 어두운 머리색과 눈을 가진 인간들이 숲이나 산에서 종종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 원인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했으며, 이를 토대로 논문을 쓰는 학자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해후의 징후 다이아나가 난생 처음 신성력을 발휘한 그 날, 안그래도 조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최고신들은 세레스 계열의 신성력이 발현된 곳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실제로, 오크 다키가 먹었던 열매는 가벼운 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방치했다면 복통과 설사 등으로 인해 탈수증에 걸린다든지 해서 - 인간 마을도 아닌 오크 마을에서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이아나가 치료한 시점에서는 그저 독기를 해독할 정도의 신성력만이 발현되었을 뿐이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일이건만, 안그래도 지상계의 지도를 펴 놓고 신들로서 가장 찾기 쉬운 목표인 신성력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신들이기에 미약하게 발현된 신성력까지 놓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었다. 아테나이는 대륙의 서쪽 산맥 부분에서 발생한 미약한 신성력을 간과하지 않았다. 아테나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신성력이 느껴진 지역이 일반인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오크의 거주지역이라는 것. 둘째, 한 번 미약하게 느껴졌던 신성력이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이 두가지가 왜 단서가 될 수 있는지, 포세이스와 헤파이토스에게 특히 눈을 맞추고 설명하는 아테나이였다. “일단, 세레스의 신관들이 워낙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발현된 신성력을 모두 체크하기는 힘듭니다. 다이아나가 인간들과 함께 있다면 자신의 어머니인 세레스의 신전을 무시하고 지나쳤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 세레스의 신관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은 검색 영역에서 제외시킵니다. 만일 그쪽으로 다이아나가 간다면, 세레스가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보자면, 우리 신전들이 있는 부분들도 모두 제외시켜야 하지요. 결국 다이아나는 신전이 없는 부분, 인간들이 모여 살지 않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이 오크 거주지역에서 일어난 신성력을 살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건 첫 날 벌써 해 보았잖아요?” 페르세포네가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 정말 지쳤을 리는 없지만, 휘하의 아이들을 동원해 이와 유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직접적인 조사를 벌인 신이 페르세포네였던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가 단서가 됩니다.” “???” “인간 종족 이외의 종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신성력이 발휘된 경우는 거의 모두가 인간들이 결성한 소위 ‘몬스터 토벌대’에 포함되어 있던 신관들이 전투 중에 발휘한 신성력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모두 알고 계시죠?” 모를 리가 없다. 첫 번째 단서를 기준으로 몇 번이나 허탕을 치면서도 기대를 가지고 조카 찾기에 열중한 신들이었으니. “그 외에도 모험가 파티에 수련하는 신관이 동행한 경우가 한 건 있었구요” “아우 머리 아플려고 합니다. 그냥 쉽게 설명해 주세요” 역시 이런 말을 나서서 할 신은 하나 밖에 없다. 평소 같으면 성미 급한 포세이스의 말에 누군가가 구박이라도 할 만 했지만, 실상 다른 신들도 마음이 초조해지기는 여반장이었기에 이번만큼은 체면불구하고 나서는 포세이스가 고마웠다. “아, 네. 요점만 말하죠. 전투시 신관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세레스 언니의 신관들의 경우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구요. 따라서 전투시에 발생하는 신력의 특징은” 여기까지 말하자, 둔한 포세이스도 알아 채고는 말을 받았다. “상처의 즉각적인 치료를 위한 강한 신력, 반복적으로 발휘되는 형태?” “맞습니다. 더더군다나 오크들의 주 거주지에 들어갔다면 그 전투 상황이 얼마나 치열할지는 불을 보듯 훤하죠” 마치 어려운 수학문제를 깨끗하게 풀어낸 머리 좋은 학생처럼 아테나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휘이이잉~!’ 하지만 이쯤에서는 포이브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사실 확인에 나선 후였고, 그들이 있던 자리는 훵하니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역시 그렇죠?” “뭔가가 있어” “그러게요” 다른 이들이야 몰라도 이 둘은 이미 모든 몬스터의 영역에 유스테우스와 하비어스의 부탁에 의한 드래곤들의 명령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역시 오크나 오우거의 지력으로는 무리였을까요?” “모르지, 그 외의 요인이 있었는지도” “연락을 해야할까요?” “어차피 다들 확인하러 갔으니 확실해진 후에... ” “그게 낫겠지요,” 안그래도 자식을 찾는다고 거의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유스테우스이다. 다이아나가 추측대로 그곳에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오히려 더 큰 실망만 안겨줄 것이라 생각하는 둘이었다. “찾았어요! 찾았어~~~~!!!” 분위기니 품위니 하는 것들은 다 어디로 내던졌는지 페르세포네가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타났다. 뒤따라 나타난 신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페르세포네의 힘에 의지하여 다시 영상이 나타나는 거울처럼 생긴 것을 들여다 보았다. “이런... 이러니... 오크들이 알 수가 있었겠나... ” “아마 세레스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을거에요” “아, 역시 내 조카야. 너무 아름답다” “원래도 이뻤지만 저 정도면 정말 살인적이군” “오호홋~! 그러게 제 선물이 빛을 발할 날이 있을꺼라고 제가 누누이 강조했죠?” “흠.. 그게 아닌데요?” 마침 영상에서는 늘 하는 포치의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겼지만, 힘도 세니 내 새끼 낳아주라’ 그제서야 오크의 미적인 기준을 떠올리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 신들이었다. 결국 다이아나의 본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난 지금도 아프로테이아의 선물은 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참 저러기도 힘들거야” “본인은 전혀 자각을 못하는거 같죠?” “아마 스스로 못생겼다고 생각할지도......” 약간 본론을 떠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테나이님!” “찾았습니다” 유스테우스의 레어에 돌연 현신한 아테나이는 거의 광룡이 되기 직전의 드래곤 두 마리를 볼 수 있었다. 지상계 최강의 존재라는 드래곤 중에서도 몇 되지 않는 고룡이 단지 사흘이라는 기간 동안 저렇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왔다. 하여 아테나이는 다른 모든 설명을 빼고 요점만 먼저 말했던 것이다. 아테나이가 손을 휘두르자 오크 마을의 영상이 떠올랐고, 우르르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오크들 틈에서 금색 가루가 뿌려진 듯한 은발을 휘날리며 그들을 몰고 다니는 - 실제로는 오크들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가르치는 - 다이아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스테우스는 더욱 아름다워진, 그리고 자신의 색을 흩날리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상이 흐려져서 잘 안보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다이아나를 지켜 본 하비어스도 인간으로서는 거의 극상의 미를 갖추었다고 생각한 다이아나의 한 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에 놀라면서도 기뻐하고 있었다. 일단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이들을 지켜보던 아테나이는 다이아나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고 사라졌다. 두 고룡은 얼싸안고 빙빙 돌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곧바로 다이아나가 있는 곳으로 워프해 가려던 이들 둘이 다이아나가 오크마을을 떠날 무렵에서 겨우 뒤를 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 둘이 다이아나를 찾기 위하여 해놨던 수 많은 조치들 때문이었다. 고룡 둘의 부탁은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들어주기로 했기에, 떠나려던 둘은 비슷한 사람을 찾았노라면서 흑발, 흑안의 인간들을 전송시키기 시작한 드래곤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둘은 그 인간들이 기억을 지우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등의 모종을 조치를 취하고, 부탁을 취소하는 등등의 일을 처리하느라 훨씬 늦게서야 레어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이야 일 처리를 말끔하게 했다지만, 세상에는 게으른 드래곤들이 꽤나 많이 있어서, 자신이 명령해 놓고 취소하는 것을 잊은 덕분에 오크들에게 잡혀온 ‘인간’들을 뒤늦게 처리하느라 - 이미 부탁을 한 두 드래곤은 이미 찾았다고 부탁을 확실히 취소하였으므로 - 골머리를 앓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 성질 급한 레드나 블랙족의 경우 귀찮다는 이유로 불행한 인간 몇을 꿀꺽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레어로 쉴 새 없이 워프되는 인간들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면서도 유스테우스와 하비우스는 그 이후 다이아나의 행적을 계속 영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오크에게 전혀 스스럼없이 말하고 그들을 가르치고 소중히 여기는 다이아나의 모습은 두 드래곤에게는 상당히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나마 ‘자애의 여신’의 반려인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세레스와 장기간 연애를 한 유스테우스야, 제 엄마를 닮았구나 하고 쉽게 생각했지만, 간식꺼리도 안되는 것들과 어울려 이것 저것 가르치고, 거기에 수없는 오크식의 ‘청혼’까지 받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하비우스는 드래곤 생애 처음으로 기절할 뻔 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자, 유스테우스가 먼저 떠났고 - 친우의 마음을 짐작한 하비어스가 어느 정도 처리할 일이 줄자 자신이 뒤처리를 맡겠다고 한 덕이다 - 하비어스는 일이 끝나는 대로 연락을 해서 함께하기로 했다. 물론, 하비어스가 곧바로 유스테우스와 함께 떠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우정도 있지만, 자신의 아들인 에디우스에게 전언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당당하게 유스테우스 앞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용언의 약속’의 내용 덕에 무언가 뒷공작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 시점에서 하비우스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우스와 레디아나 "헉헉~!" "좀 쉬다 해~!" "헉헉헉헉~!" "좀 쉬다 하라니까~~~" 칼라임 제국 외곽에 위치한 한 저택의 뒷마당, 금발의 청년이 땀을 줄줄 흘리면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연인처럼 보이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조잘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본 풍경은 마치 연인의 검술연습을 구경하며,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한 쌍의 사이 좋은 커플로 비추었을 테지만, 가까이서 보고 들어보면 '영 아니올시다'라고나 할까?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비유 치고는 좀 지저분하지만, 변의를 느꼈는데 화장실이 없어 수십분을 참다가 바로 앞에서 찔끔 실례를 한다던지 하는...... 만일 그 화장실이 10분 거리에 있었더라도 그 사람은 똑같이 화장실 앞에서 참담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좀 더 점잖은 비유를 들어보자. 친구가 볼 일이 있다고 나를 기다리게 해 놓고 '두 시간 이내에 오겠다'고 했을 때, 작심했다면 두 시간은 누구나 짜증없이 기다린다. 하지만, 그 두 시간에서 10분, 15분 늦게 친구가 도착한다면? 두 시간을 기다렸던 참을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수시로 시계를 보면서 늦는 친구를 원망하거나 짜증을 내기 마련인 것이다. 1700년을 기다려온 반려. 에디우스는 아테나이의 배려로 다이아나의 성장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볼 수 있었다. 맨몸으로 버려진 무방비한 얼굴의 갓난 아기 모습의 다희. 고아라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베풀기를 좋아하던 어린 다희의 모습. 명랑하고 밝던 모습이 천사의 집 밖으로 나갈 때면 무표정하게 바뀌던 과정들. 다희를 못살게 굴던 많은 인간들. 그에 굴하지 않고 무술을 배우던 다희의 모습. 원래 드래곤이란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난 능력 자체가 크기 때문에 아무리 모자란(?) 드래곤이라도 타의에 의하여 '수모'를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항상 다른 종족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드래곤 종족은 지상계에서는 최강자로 군림하는 자기들의 위치를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었다. 하여, 대부분의 드래곤은 헤츨링 무렵에는 세상에 대하여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지만 성룡이 되고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러 경험이라든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유희'를 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 유희를 하는 드래곤들이 '별종'이라고 회자될 정도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갓 성룡이 된 드래곤들이 호기심에 기대를 잔뜩 걸고 세상으로 유희를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러한 유희도 몇 번 하고 나면 별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다른 종족보다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영웅'이 되는 것도 역사에 길이 남을 '악한'이 되는 것도 드래곤들에게는 너무 쉬웠다. 하여, 노력이 필요한 검술 따위를 익힌다고 해도 폴리모프로 완벽하게 만든 몸에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그들의 생, 거기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검술서적과 스승은 단기간에 이들을 절대강자로 만들어 버렸고, 결국 '검술'이라는 새로운 능력도 그들에게 최종적인 관심사가 되기에는 너무나 작은 유혹이었던 것이다. 하비어스에 의해 아주 어려서부터 다희를 반려로 정하고 지켜 본 에디우스는 그 아버지의 의도대로 '인간'의 삶에 대하여 여타 드래곤보다 진지했다. 다희가 처한 상황이 자꾸만 나빠지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그저 무심히 타인의 일처럼 의무감으로 지켜보던 마음이 점점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만한 드래곤으로서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에디우스는 다희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점차 그녀의 '강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강함은 바로 누구보다 깊은 사랑과 이해심에서 비롯되었고, 에디우스는 발끈거리면서 영상을 쳐다보다가도 그녀의 태도나 혼잣말, 그리고 그 이후의 행동들을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더더군다나 에디우스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드래곤 중에 가장 지혜롭고, 그로 인하여 마법에도 가장 능통하다는 에디우스의 일족의 특징도 뛰어난 지혜를 소유한 다희의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한 몫을 차지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아버지인 하비어스의 간섭 없이도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안달하면서 다희를 지켜보았고, 더 간절히 '약속의 날'을 기대해 온 에디우스였다. 그런데, 막상 그 날에 다희가 나타나지 않자, 1700년을 기다리던 마음 속의 모든 인내심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듯 했다. 막연한 불안감으로 하루, 이틀 지나가는 시간 속에 매일같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하비우스는 물론 다희의 아버지인 유스테우스 마저도 전혀 그녀의 소식을 알 길 없다는 답을 들었을 뿐이다. 추측으로는 어머니인 여신 세레스와 상봉하고 있을 것이라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은 추측일 뿐, 매일 일과처럼 지켜보던 다희의 모습이 하필 그녀의 귀환을 위해 준비한 저택으로 이동하자 마자 끊기자, 초조감이 밀려들었다. 사흘 전에서야 다희가 이 세계로 무사히 왔으며, 추측했던 대로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한 순간 안도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다이아나'라는 준비된 이름을 받고 주신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동되었다는 뼈아픈 현실이 바로 뒤따랐던 것이다. 그 이후 폭주할 뻔한 유스테우스를 진정시킨 아버지는 연락이 안 될 정도로 다이아나의 행방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고, 급한 마음에 유스테우스의 레어까지 이동해 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결국 아무 소리 없이 되돌아온 에디우스였다. 갑자기 워프로 사라지더니 더 굳어진 안색으로 돌아온 에디우스는 그런대로 대꾸해 주던 레디아나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뒤뜰로 나가 칼을 휘둘러대기 시작앴다. 처음에는 그저 검술 연습이라도 하나보다고 생각했지만, 그 연습이 한 두 시간을 지나 꼬박 하루로 이어지자 레디아나는 불안해졌다. 결국 옆에 서서 갖은 방법으로 말을 걸어보고 짜증도 내 보고 말려도 보았으나, 에디우스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마치 미친사람처럼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째, 아무리 좋은 육체 상태로 폴리모프를 했고, 그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드래곤이며, 오랜 기간 수련을 했다고 해도 인간의 육체로 있는 이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 아마도 드래곤이 존재한 이후 처음으로 한 마리의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거의 죽을듯이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말리고 또 말리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 레디아나가 몇 번을 시도한 회복주문마저도 매정하게 튕겨져 나왔고, 제 집처럼 행동하면서 안주인 역할을 한 덕에 새로 들인 하인들을 시켜 식사를 준비해 와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레디아나는 드래곤이 지쳐 죽을 수 있을까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그 동안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친근감 - 말 안듣는 누이동생에게 대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 을 표현해 주던 에디우스가 돌변해버리자 온통 원망스러운 마음에 증오심이 피어났다. 물론 그 대상은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에디우스의 반려였다. 자신에 대한 무심함과 달리 저렇게 망가질 정도로 그녀를 생각하는 에디우스의 모습은 생전 처음 레디아나에게 열등감과 무력감을 가져다 줬고, 그러한 감정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어린 레드 드래곤 한 마리는 불어나는 감정들을 모두 하나의 대상에 대한 미움으로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던 레디아나는 스스로 짐을 싸서 - 사실 짐도 없었지만 - 자신의 레어로 돌아와버렸다. 레디아나의 마음 속에는 에디우스에 대한 걱정과 사랑보다 더 큰 증오가 점차 뿌리를 내려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게 레디아나가 떠난 지 얼마 후, 하비어스로부터 다이아나의 위치를 찾았다는 전언이 왔고, 긴장이 풀린 에디우스는 그대로 쓰러지고야 말았다고 전해진다. 드래곤이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해서 쓰러진 것도 아마 최초였을 테니, 이모 저모로 드래곤사의 획을 새로 많이도 그어놓는 에디우스였다. 정신을 차린 에디우스는 당장 길을 떠나기 위해 서둘렀지만, 하비어스가 정색을 하고 말리는 바람에 저택에 눌러 앉았다. 그나마 이제는 다이아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므로, 영상을 보면서 다이아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작전'이나 짜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한 편 레어로 돌아온 레디아나는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착하고 다정한 자신의 연인 - 실제로 에디우스는 레디아나에게 시종일관 무덤덤했건만 레디아나는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 이 인간에 불과한 한 여자애에게 미쳐서 - 뭐든지 제멋대로 생각하는 레디아나는 이런 저런 내용을 훔쳐듣다가 다이아나에 대하여 알아냈던 것이다. -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여신의 자식이니 드래곤의 핏줄이니 해도, 결국 신계에서 쫓겨나 이세계로 귀양보낸 것이나 다름없는데다가 폴리모프하여 낳은 드래곤의 자식은 어차피 드래곤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실제로 유희에서 낳은 아이는 유희 기간이 끝나면 냉정하게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드래곤이 대부분이었으니, 레디아나의 이러한 생각은 드래곤의 상식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드래곤의 기운을 인간인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드문 경우였고, 어차피 폴리모프 상태에서는 육체적인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해당 종족이 되는 것이니, 드래곤의 자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대륙에 누구누구가 드래곤의 자손이어서 영웅이 되었더라 하는 식의 전설들이 퍼져 있는 이유는 그렇게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도 폴리모프한 육체가 워낙 완벽했다 보니 그 육체의 유전자를 받은 후손이 잘났을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레디아나는 그깟 인간 계집애 하나쯤 꿀꺽 삼키던지 확 태워버려 흔적도 안남긴 후에 시치미를 뗀다면 에디우스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위험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드래곤은 드래곤, 인간의 계집아이 하나 때문에 그녀에게 어떤 처벌이나 불이익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 편 그래도 혹시 다른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을 수 있으니까 적당하게 골탕이나 먹여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일단, 화풀이를 할 대상을 정하자 우울한 기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이런 저런 계획(?)이라기보다는 음모를 꾸미며 흐뭇해하는 레디아나였다. 실상,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누군가에게 의논이라도 했다면, 전혀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유스테우스는 유일한 자식으로 다이아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신과 드래곤의 결합을 위하여 두 연인이 의논 끝에 인간으로 자식을 낳기로 하였을 뿐이다. 앞 뒤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 결단으로 인해 주신에게 1700년의 강제동면이라는 벌을 받을 정도의 위험을 감수한 - 실제로는 소멸의 위험이 될 지도 몰랐는데도 - 유스테우스의 결정을 보면 충분히 그 의도를 알 수 있을법도 했다. 하지만, 레디아나는 이제야 1100살을 넘어선 어린 드래곤에 불과했고, 드래곤 중에서 가장 급한 성정을 가졌다는 레드의 일족이었으며, 더하여 사랑에 빠진 여심이라는 미약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동행 1 "취익~! 포치 슬프다. 잘 가라" "잘 있어" "취익~! 흑흑, 취익~! 엉엉, 취익~! 앙앙앙~!" "에구, 울지마 다키야. 내가 가르쳐준 것들 잊지 말고..... 주신의 은총으로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기를......" 꽤 깊은 숲속의 오솔길, 갈림길이 나타난 지점에서, 듬직한 체구의 오크 한 마리와 어린 오크 한 마리, 그리고 은빛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 한 명이 어찌 보면 희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별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린 다키는 눈치 볼 것 없이 거친 콧소리 사이사이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한 전사 오크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다이아나도 얼핏 눈물이 차올랐으나, 애써 참고 웃음을 지으면서 두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취익~! 이쪽으로 세번의 해가 취익~! 뜰 때까지 가면 취익~! 인간의 마을이 있다" "고마워. 포치. 쪽! 잘있어 다키. 쪽!" 다이아나는 천사의 집의 사람들에게 늘 하던대로 충동적으로 둘의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리고, 당황스러워하는 포치와 눈물을 멈춘 다키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휭하니 발길을 돌려 포치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오크 친구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사람이 거의 지나지 않는 숲 길은 길이라기 보다는 그저 약간의 자국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또렷하게 보이던 길이 나아갈수록 길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처음 두 세 시간 정도는 여유있게 길을 보면서 걷던 다이아나는 오후로 들어서면서, 길의 흔적을 찾기를 포기했다. 다이아나의 능력으로는 이제는 거의 흔적이 없는 길을 따라간답시고 약간 풀이 누운 흔적이나 드문한 나무 사이의 길을 찾아내다가 방향만 꾸불꾸불해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냥 한 방향으로 주욱 가보자' 라고 생각한 다이아나는 속이 출출해 오는 것을 느끼며, 어깨에 매고 있던 짐보따리를 손에 들고 앉을만한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차피 짐이라고 해야 오크들이 챙겨 준 - 실제로 인간에게는 별로 필요할 일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 약간의 잡다한 물건과 식량과 물 정도였고, 품 안에는 어머니가 챙겨넣어 준 보석 몇 개가 있었다. "아얏~!" 큰 나무 아래 제법 풀이 두껍게 자란 위치를 발견하고 털썩 앉던 다이아나는 무심결에 주의를 하지 않은 덕에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더 자라진 않으니 다행이지 뭐야!" 그것은 자고 일어나면 엄청난 길이로 자라 있는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세레스와 함께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에는 분명히 단발머리 였는데, 어느틈엔지 길게 허리를 넘고 있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이아나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만 해도 무심코 앉았다가 머리카락을 깔고 앉는 바람에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터뜨린 것이다. 생전 머리를 길러 본 일이 없었던 다이아나는 - 긴 머리를 관리할 시간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욕구도 별로 든 적이 없었다 - 몇 번이나 남들처럼 머리를 땋아보려고 했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잘 되질 않았다. 무언가로 묶어 보려고 시도를 했으나, 이전 세계에서와 달리 고무줄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탄력이 없는 끈으로 잡아 묶어보았자, 매끄러운 머리는 얄밉게도 그 끈을 어느틈에 흘려버리고 제멋대로 자유를 찾아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자리에 앉아 식량을 꺼내 든 다이아나는 먼저 상하기 쉬운 열매 몇 개를 꺼내어 와삭거리면서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심히 음식을 먹던 다이아나는 어느 틈엔지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며,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 지혜, 언니들.... 하아~!' 그랬다. 어머니를 만났던 시간 이후로 자꾸만 떠오르는 저쪽 세계의 사람들. 오크마을에서도 바쁜 시간들이 지나고 혼자 있을 때면 유독 다이아나를 그리움에 젖게 만들던 그들이 또 생각났던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나온 그들. 다희를 찾아 헤맬 것이 분명한 지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지혜와 있었던 사소한 추억들은 꼬리를 물고 다이아나를 상념에 잠기게 했다.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마음을 추슬러 보았지만, 이번에는 오크 마을의 정다운 이들이 생각나 다시 우울해졌다. "팍 눌러 살아버릴껄 그랬나?" 일부러 소리내어 말하고는 피식 웃어버리는 다이아나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울다가 웃다가 하던 다이아나는 문득 하늘을 보고는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숲 속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어느 정도 쉴만한 곳을 찾아야 할텐데 하는 약간의 걱정스러움을 가지면서, 갑자기 감상에 빠져 헛되이 시간을 보낸 자신을 속으로 나무라면서, 다이아나는 힘차게 일어나 처음 가던 방향이라고 생각되던 곳으로 씩씩하게 발길을 옮겼다. "하아~!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길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태양은 가물가물하게 마지막 빛을 보내주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난감함에 여러 번 한 숨을 쉬었다. 어머니에게 배운 여러 지식들도 이런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찾는 데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일단 지칠 때까지, 어두워질 때까지 가보리라 작심한 다희는 눈을 부릎뜨고 여기 저기를 살피면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 세계에 와서 유난히 좋아진 시력이 태양이 지고, 어슴푸레한 달빛이 드문 드문 나무 사이로 비추는 어두운 길에서도 걷는 정도는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고 있었다. "어?" 다희는 갈수록 어두워지는 숲 사이로 언뜻 불빛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유심히 쳐다 보았는데,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것은 분명히 불빛이었다. 불을 피웠다면, 사람이나 지능이 있는 생명체일 것이라고 판단한 다희는 주저없이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 속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약간의 공터가 생겨 있었다. 그 공터에는 물 빛의 푸른 머리카락을 내려뜨린 이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불 앞에 앉아 있었다. 다이아나가 그 곳으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 그녀를 응시했다. 다이아나는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의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실물로는 생전 처음보는 푸른 머리카락, 그리고 짙은 남색은 눈동자. 다이아나는 그 아름다운 외모와 약가 뾰족한 귀 끝으로 상대방이 엘프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길을 잃었는데, 신세를 좀 져도 될까요?" "......" 자신이 건넨 말에 아무 대꾸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살피는 엘프의 모습에 다이아나는 혹시 이 엘프가 공용어를 못알아 듣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여, 그녀는 엘프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다이아나가 엘프어로 인사를 하자 그 엘프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공용어로 말했다. "이 쪽으로 앉으시죠" 엘프가 가리키는 대로 모닥불 주위로 다가간 다이아나는 다시 한 번 털썩 앉았다가 똑같이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엘프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인간이신 것 같은데......" "네.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시루스입니다. 엘프어를 할 줄 아시다니, 특이한 분이군요. 혹시 엘프의 피를 받으셨는지?" 그랬다. 다이아나의 모습은 인간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왔다. 달빛 아래서 무언가 신비한 분위기마저 풍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그녀의 얼굴에 다른 마을의 엘프로 착각했던 시루스는 귀를 살폈고, 엘프가 아님에 놀랐다. 그 다음에 그녀가 엘프어를 하는 것을 보고 혹시 하프엘프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숲의 여신의 은총을 받은 일족의 피를 물려받지는 않았답니다." "그렇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시루스는 말을 이어갔다. "길을 잃으셨나보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오신 방향에는 인간의 마을이 없을 텐데...... 혹시 동행을 잃어버리셨나요?" "아뇨. 오크 마을에 있다가 인간의 마을로 가는 길이었답니다." "네???" 약간 당황하는 표정으로 다이아나의 대답에 갸우뚱하는 시루스였다. 그의 상식으로 인간은 오크를 몬스터로 구분하고 적대한다. 오크 또한 인간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물론 오크들이 엘프들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드문 경우이고 엘프들은 그저 자신의 마을을 지켜내는데 온 힘을 쏟아 물리치면 그만이었다. 자연의 순리와 균형을 사랑하는 엘프들은 오크들의 생존방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보다 강한 힘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냈다. 오크들도 엘프들의 강함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좀처럼 엘프 마을에 침입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엘프 마을의 대부분이 결계나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점도 크게 한 몫을 했지만. 시루스는 인간 세상을 여행해 본 경험이 있었고, 지금도 또한 인간 세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시루스가 본 모든 인간종족은 '몬스터'라는 존재를 '악'으로 구분짓고 능력이 되는 한 말살시켜야 할 대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개체수가 많고 만만한 대상이 오크였기에, 인간과 오크의 전투는 끊임없이 여기 저기서 일어났고, 인간들과 여행을 할 때에는 자신도 할 수 없이 그들과 함께 싸워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 눈 앞의 인간의 소녀는 오크 마을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엘프를 보면서 다이아나는 그 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인간에게 이러한 말을 했더라면, 바로 거짓말로 치부되었겠지만 시루스는 계속 침묵 속에서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다이아나의 말의 뜻을 생각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다이아나는 우연히 오크 마을인 줄 모르고 들어갔던 이야기와 '신성한 결투',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줄여서 말했다. "... 그래서 열흘만에 그 곳에서 나왔답니다. 그런데, 길을 찾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제가 인간의 마을로 가는 길이니 모셔다 드리죠" 시루스는 다이아나의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진실을 보는 엘프의 눈은 다이아나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 앞의 인간 소녀는 엘프보다도 더 편견 없이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듯 했다. 오크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일일히 그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미소짓고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 특히 친하게 지냈던 몇몇의 이름을 말하면서, 약간 습기를 띄어가는 그녀의 눈동자.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360년을 수많은 구애 속에 특별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시루스는 어느 틈에 약간 볼이 상기된 자신의 모습을 의식했다. 다이아나는 시루스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는 엘프에 대하여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시루스는 그녀의 오크 마을에서의 특이한 경험을 물어보았고, 둘은 질문과 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둘은 아무 이유없이 말을 주고받던 모습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잠든 둘의 앞으로 금빛 머리의 한 인영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셋의 모습은 빛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새로운 뗄 것을 먹지 못해 시름시름 꺼져가는 모닥불만이 둘의 흔적으로 남아 한 밤이 공터를 스산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유스테우스는 엘프와 딸을 마법으로 잠재우고는 자신의 레어로 이동했다. 하비우스가 그 자신의 레어로 떠난 뒤 유스테우스는 자신의 레어 주위에 드래곤도 풀기 힘들만큼 강한 결계를 형성해놓고 떠났고, 아마 하비어스라고 해도 단시간에 해제할 수 없을 것이다. 시루스를 한 곳에 대충 놓아둔 유스테우스는 딸의 몸을 안아 들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침대 위에 딸을 뉘고는 한참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떨구던 유스테우스는 울컥한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조심스레 마법의 기운을 해지하고 그녀를 깨우기 시작했다. "다이아나, 얘야~!..." "......" "다이아나, 일어나거라." 귓가에 들려오는 저음의 미성. 시루스라는 그 엘프였나? 엘프의 목소리보다 좀 더 낮은 것 같은데, 그리고 참 부드럽군. 짧은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뜨는 다이아나였다. 눈을 뜬 그녀는 이곳이 자신이 있던 숲도, 공터의 딱딱한 땅도 아닌 푹신푹신한 침대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빛나는 은빛 머리칼의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보는 남자의 눈도 또한 은빛이었다. "아, 아버지???" 세레스가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모습. 인간의 아버지들처럼 늙거나 하지 않은 세레스와 연애하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앞에 보이는 그 모습은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다이아나" 팔을 벌리면서 다가드는 유스테우스의 품으로 다이아나는 주저하지 않고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나는 어색함이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스테우스는 그런 다이아나의 반응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한참을 딸을 안고 서 있었다. 부녀의 눈물겨운 상봉이 끝나고 둘은 사이 좋게 침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유스테우스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레스와의 이야기를 했고, 유스테우스는 그 동안 다이아나를 찾기 위하여 벌인 여러 일들과 그에 따른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말했다. 둘은 웃고 울면서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알기 위해 앉아있었다. "골드 드래곤이라구요?" "그렇단다. 하지만,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굳이 강제할 생각은 없다" "저, 용언으로 약속하셨다면서요?" "그게 말이지... 좀 미안하긴 하지만 하비어스가 용언으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나랑은 관계가 없단다. 그리고 용언이란 그 구체성이 중요한데, 하비어스에게 약속을 시킨 내용이......" "풋! 아버지도 참 너무하셨어요" 그제서야 용언의 단어들을 조합해 본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하비우스에게 맹세하게 한 용언의 맹점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흠흠.. 그것야, 골드 드래곤 씩이나 되어서 그걸 눈치 못챈 하비어스의 탓도 크지. 그리고, 덕분에 그 아들래미는 엄청나게 공부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서로 좋은 일 아니겠니?" "하긴, 만나지도 못한 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을리는 없으니까... 그것도 좋겠네요" '그건 아닌데......' 이미 에디우스가 자신의 아름다운 - 외모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저리 지엄마를 빼닮아 착한지 - 딸에게 이미 함빡 빠져 있음을 알고 있는 유스테우스는 약간 찔리는 양심을 재빨리 수습하면서 화재를 전환했다.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니?" "글쎄요. 생각은 해보았는데, 여행을 하면서 일단 이 세상의 여러 종족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먼저 이쪽 세상의 사람들부터 보아야겠죠. 엘프나 드워프도, 아참! 시루스는요?" "저쪽 방에 잘 재워놨단다." 방 한 구석에 내동댕이 치듯이 처박아 놓은 것도 잘 재워놓은 것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잘 자고 있는 것 - 슬립 마법에 걸렸으니 아무리 자리가 불편해도 잘 잘 수 밖에 없었고, 숲에서 자는 것보다야 낫겠지 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는 유스테우스였다. 엘프로서는 웬만큼 포근한 자리가 아니면 오히려 숲 속의 기운이 더 편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무시하고. - 이리라. "일단 시루스와 동행하려고 해요. 마을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으니까" "내가 있는데, 엘프랑 동행할 이유가 없잖니?" "저도 함께 있는 건 좋지만, 아버지랑 함께하면 아무래도 너무 의지하게 될 것 같아요.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렇게 살아서는......" "...... 그렇구나!" 카르마의 저울의 심판, 그를 위하여 다이아나는 스스로 선행을 쌓아야만 했다. 오크마을을 떠난 것도 그런 편한 생활로는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헌데, 드래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그녀가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대부분 해결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다이아나의 생에서는 아버지의 도움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단 좀 쉬고 이야기하자꾸나" "네" 딸을 재워놓고 나오는 길에 슬쩍 시루스가 있는 방에 들러 얼른 침대로 고이 옮겨놓고는 - 아무래도 딸이 알면 실망할까봐 - 만났지만 함께할 수 없는 딸을 도울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유스테우스였다. "악! 이러면 안되는데......" 나름대로 어떤 첫인상을 줄까 고심하면서 다이아나의 뒤를 쫓던 에디우스는 좀 유치하기는 해도 아버지가 조언한대로 하기로 했다. 그 조언이란 위기에 빠진 레이디를 구하는 기사같은 이미지를 만들라는 것이어서, 에디우슨 이제나 저제나 다이아나가 '위기'에 처하면 멋지게 나타나리라 마음 먹고는 온통 마법을 휘감고 - 투명마법에 기척을 숨기는 마법 등등 - 다이아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마침 다이아나가 길을 잃고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자, 에디우스는 속으로 '지금 나갈까?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야지. 아직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불안해 보이지도 않잖아. 좀 더 지치고 힘들 때 나가는 것이 좋을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간신히 참아내었다.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이제는 모습을 보이려고 작심한 시점에 다이아나는 탄성을 지르더니 한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상상 - 길 잃고 불안하고 무서워하는 다이아나에게 우연히 접근, 사이를 진전시켜서... - 에 빠져 있던 에디우스는 그제서야 다이아나가 가는 쪽으로 보이는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에디우스는 하찮은 엘프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다이아나를 또다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고, 분명히 자신이 할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는 엘프를 보면서 피어나는 살기를 죽이느라 한 참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오크까지는 별 위협이 안되었지만, 혹여 엘프와 사랑에라도 빠지면 큰일이다' 라는 결론을 내린 에디우스는 자신도 길을 잃은 모험가인척 하면서 둘에게 접근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엘프는 기척을 느끼는 능력이 꽤 크므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다시 옮겨가 마법을 풀고 일부러 기척을 내면서 접근하고 있었는데, 마법의 파장이 느껴지는 바람에 허둥지둥 달려가보니, 이미 엘프와 그의 사랑하는 반려는 사라지고 모닥불만 다 죽어가는 형세로 공터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으로 보아 유스테우스가 딸을 데리고 간 것이 분명했다. 에디우스는 비록 고룡이며 아버지의 절친한 친우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다이아나의 아버지라고 해도 유스테우스의 교활함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며칠 전 다이아나를 찾아 오크의 마을로 떠나려는 에디우스를 불러들인 하비어스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들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하비어스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용언의 맹약의 '맹점'이었으니. "크아아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구요!!! 아버지 골드 드래곤 맞아요? 아니, 어떻게 저 멍청한 레드나 블랙족만도 못한....XXXXXXXXXXXXXXXXXXX" "그, 그게 당시 상황이 말이다. 그리고 그 녀석이 하두 애타게 부탁하기에, 전혀 생각을 할 틈이......" "책임 지세요!" 변명을 하는 하비어스에게 발악을 하다 말고 갑자기 냉랭하게 선언하는 유스테우스였다. "그,, 그래서 내가 잘 생각해 보았는데, 그 애가 너를 사랑하게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렇죠" "세상에 그애가 너 말고 또 누구를 사랑하겠니? 너만큼 그 애를 잘 아는 존재가 또 있을 리 없잖아. 게다가 너는 그 애가 살아온 곳의 모든 지식을 다 섭렵했다. 외모 잘났겠다, 성격 좋겠다. 마법 실력 최고에다 검술에 지식에, 너같은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여자도 있겠냐?" "그... 그럴까요?" "그럼~! 당연하지.. 그러니 말이다......." 어느 정도 안색이 풀어진 아들이 언제 다시 소리를 지를 지 몰라 - 사실 하비어스는 상당히 권위있는 아버지였건만, 워낙 저질러 놓은 일이 크다 보니 별 수 없었다 - 얼른 이런 저런 계획을 말해주는 하비어스였다. 결국 그들 부자의 '다이아나 꼬시기 작전'은 며칠동안 심혈을 기울여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당시 하비어스의 레어를 지키던 가디언의 뒷담을 들어보면, 두 부자는 온갖 책을 쌓아놓고 실전 선생을 부르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카사노브라는 당대의 바람둥이 인간 하나가 잡혀왔었고, 연애에 관한 책들이 갑자기 여러 서점에서 증발해버렸다. 두 부자는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벌벌 떠는 카사노브를 다그쳐 '여자 꼬시기'의 비법을 전수 받았다. 당시 이 두 부자는 아주 감명깊에 하나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는데, 그 책은 이 방면으로 심도 깊은 연구를 한 골드 드래곤과 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조아라스라는 나라에서 발간된 이 책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후편이 속속 나오고 있었는데, 책 제목은 '비코즈'라나? 아무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회를 노리던 에디우스는 돌연 닭 쫓던 개같이 허탈한 심정에 휩싸여 빈 공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모습을 붉은 머리카락의 한 소녀가 음울한 표정을 띄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이게 다 뭐에요?" "뭐긴? 여행필수품이지!" 질린 표정으로 묻는 다이아나와 상관없이 희색이 만면해서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유스테우스였다. 그렇게 말하는 둘의 앞에는 조금 과장하자면 한 방은 채울듯한 물건들 - 주로 번쩍거리는 것들 - 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걸 어떻게 다 가져가라는...?" "아, 염려 말거라. 이 배낭 보이지? 마법배낭이란다. 이것들 다 넣고도 10배쯤은 끄덕없지. 거기에 무게도 별로 안나가게 해놨단다. 아, 또... 도난방지 마법도 걸려 있고, 추적마법도... " "......" "이 칼은 2000년 전 내가 유희할 때 쓰던거야. 이 로브는 마법사로 유희할 때 쓰던거구. 이건 신용장이고, 흠, 이게 아직 통할까? 뭐 확인해 보면 되겠지. 이 반지와 저 반지 그리고......" "......" 동면에 들어갈 때 유스테우스는 4700살이었으므로, 그가 소유한 보물이 적을 리 없었다. 거기에 지상계에 관심이 많은 세레스를 위해 일부러 이런 저런 모습으로 유독 많은 유희를 즐긴 그였다. 타고난 재질이 뛰어났던 데다가 경험이나 노력이 적지 않았으니, 그가 모아놓은 보물은 비록 1700년 간의 동면기간이 빠지더라도, 웬만한 고룡들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 딸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딸에게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유스테우스는 뭐대신 뭐라고, 밤새도록 온갖 종류의 마법물품과 보석들을 모아놓고 의기양양하게 자랑하고 있었다. "저... 이렇게 많이는... 저는 마법 물품이란 것도 거의 써보지 못했잖아요. 너무 많으면 오히려 잘 활용이 안될 것 같아요." 저토록 기뻐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 마침 적당한 변명을 찾아낸 다이아나였다. "응? 아! 이런... 그럼 어떻게하지? 사용법을 따로 작성해 줄까?" 저 많은 물품들의 사용법을 작성하려면 적어도 책 한권은 되야할 터인데, 당장이라도 쓸 것을 찾으러 달려갈 태세의 유스테우스였다. 다이아나는 '가을밤의 달빛처럼 시린 은빛을 가진, 냉철한 지혜와 잘 드러나지 않는 따뜻함의 실버 드래곤'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시적인 묘사와 눈 앞의 아버지 - 푼수끼가 철철 넘치며 허둥대는 - 의 궤리를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 따스함이 밀려올라와,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감격은 감격이고... "아빠!" "너... 지금 뭐라고???" "아빠, 아빠~!" 돌연 자신의 품에 안기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그 때까지 준비하던 것들을 까맣게 잊고는 여려보이기만 하는 딸을 안은채고 그저 머리와 등을 쓸어주는 유스테우스였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엄마'라고 불렀을 때 기뻐하던 모습을 생각해내고는 유스테우스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아빠'라고 불러준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인지, 별 거 아닌 호칭에 기뻐하는 아빠의 모습에, 다이아나는 남들이 유치하게 보건 어쩌건 간에 자신은 평생 엄마, 아빠로 불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참 시루스는요?"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일단 어느 정도의 화재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꺼낸 말이었다. "응,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다시 슬립마법으로 재워놨단다. 내가 깨우기 전엔 안일어날꺼야" 속으로야 눈꼽만치도 미안하지 않았지만, - 누가 뭐래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 딸의 눈높이에 맞추어 부드럽게 대답하는 유스테우스였다. "그럼 잘되었어요. 어차피 시루스에게 아빠의 정체를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우리 이렇게 해요" 다이아나는 아직 시루스의 실력을 알 수는 없었지만, 갑자기 희귀한 마법물품이 쏟아져 나오면 도저히 변명을 할 수 없다면서 아빠의 안목으로 몸을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만 선별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벌써 어느 정도 요령을 깨달은 다이아나의 재치있는 여러 설득에 휘말려 - 아무리 뛰어나도 팔불출 아빠들은 딸에게 꼼짝 못하기 마련인 법 - 결국 다이아나의 의견대로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물품만 고르느라 유스테우스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사실, 앞에 쌓여있는 물품들만 해도 밤새도록 보물더미 속에서 고르고 또 골라낸 것이니만큼 그 중에서 무엇인가를 또 선별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낙점된 것은 다이아나의 성격상 공격마법이 걸린 물품은 모두 제외되고, 실드 마법이 걸린 반지와 유스테우스가 예전에 유희할 때 세운 가문의 인장을 겸하는 반지가 양 손에 하나씩 채워졌고, 유스에우스와 연락을 취하거나 최후의 경우 유스테우스의 레어로 이동할 수 있는 귀걸이 한 쌍과 피어 능력이 담긴 작은 단도 하나만이 최후에 채택되었다. 유스테우스는 꼼꼼하게 각각의 물품의 사용법을 설명하고는 각 물품마다 주인을 인지하는 마법과 추적마법을 걸어 물건들이 다이아나의 몸을 떠나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도난 방지 마법도 걸려고 했으나, 도난방지 마법이라는 것의 공격성 - 대부분 전격마법등이 걸린다 - 때문에 걸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이아나는 아버지로부터 문스톤이 달린 엷은 금목걸이 하나를 받았는데, 유스테우스는 다이아나가 새로 받은 이름이 '달'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따로 준비한 것이라고 해서 다이아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 유스테우스는 목걸이가 마법물품이 아니라고 했지만, 오히려 다른 마법 아이템들보다도 더욱 기뻐하는 딸을 보면서 가슴이 뿌듯해 졌다. 시루스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다급하게 경계태세로 몸을 일으켰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통나무로 만든 작은 집의 침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약간 안도할 수 있었다. 방문을 나서자, 다이아나와 처음 보는 노인이 사이좋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 깨어나셨군요!" 다이아나는 시루스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그 옆의 노인은 약간 거만한 표정으로 시루스를 힐끗 보더니,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아, 인사하세요. 이 분이 어젯밤에 저희를 구해주셨다는군요" "유스라고 하네" "시루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블린의 마법에 걸렸더군. 마침 내가 발견했기에망정이지 큰 일 날 뻔 했네" "아, 그렇군요" 느닷없이 잠들어 버린 것을 기억해내고는 시루스는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이 숲 속에 웬 노인이며, 고블린들을 물리칠 정도의 실력자라니? 의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지만, 노인이 자신을 은거한 마법사라고 소개하자 공감할 수 있었다. 인간의 마법사들 중 어떤 이들은 숲 속에 결계를 형성하고 수 십년을 은거하면서 마법을 연구하고는 했으니까. 이런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살아갈 정도면 상당히 강력한 마법사이리라. "자네는 검사인가? 마법사?" 엘프는 기본적으로 정령과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고, 마법에 대한 재능도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인간에 비하여 뛰어나다. 무기로는 주로 활을 쓰지만, 검을 쓰는 엘프도 간혹 존재했다. 엘프들 또한 인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긴 수명을 가진 종족이라,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발달해 있었던 것이다. "마법은 5클래스이고, 검도 약간 씁니다. 정령술도 조금 하구요. 좀 잡다하게 배웠죠" "여행을 오래했나 보군" "그런 편입니다" 정착한 엘프는 검이나 마법에 별로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 저것 능력을 키운 엘프들은 마을을 지키는 위치 - 엘프의 전사라고나 할까? - 이거나, 모험과 여행을 즐기는 쪽이었다. 눈 앞의 엘프가 전자였다면 엘프마을을 비울 이유가 없으니 후자로 판단한 것이다. "흠, 이 아름다운 아가씨도 마법에 꽤 재능이 있더만......" "제가요?" "다이아나 양이요?" 똑같이 놀라며, 반문을 하는 둘이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고심하여 짜낸 상황을 너무나 열심히 연기하는 아버지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면서 간신히 참고 있다가, 계획되지 않은 '대사'가 튀어나오자 놀란 것이었다. 한편 엘프인 시루스는 흔하지 않은 고레벨로 추정되는 마법사가 다이아나에게 마법의 재능이 있다고 하니, 놀란 것이었다. "흠.. 자네도 몰랐나보군" "우린 어젯밤에 우연히 만난 것이라서....." "참.. 그렇다고 했지? 그럼 몰랐을 수도 있겠군. 저 아이는 마나를 쌓기에 상당히 좋은 체질을 지녔네. 내가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한 번 제자로 키워보고 싶은데... 거 참......" 일부러 말끝을 흐리는 마법사의 말에 시루스는 의도하던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없으시다뇨? 혹시???" "그렇네. 나 정도 되면 생의 끝을 느낄 수 있지. 아마도 이 생에서는 자네들이 마지막 인연이 될 듯 하구만. 이보게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겠는가?" "가능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떤 사정이던 간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거기에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노년의 마법사의 의연한 모습은 마치 엘프들의 생의 끝을 보는 것 같아서 시루스는 저도 모르게 승낙을 하고 말았다. "나는 웬지 이 아이가 남같지가 않네. 자네와 동행하는 동안 만이라도 이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게나" "저도 그리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닌데......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닐세, 자네 정도면 상당한 실력이지. 인간세계에서야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실력 아닌가?" "정 그러시다면 제 능력이 닿는 한은 그리 해보겠습니다" 다이아나는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드래곤의 능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드래곤 나이대로 하면 다이아는 아직 걸음이나 걸을 듯 말 듯한 헤츨링에서도 한참 어린 나이인 것이다. 드래곤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수백 년은 걸릴테니, 인간식의 마법이라도 배워서 몸을 지키게 하려는 의도이리라.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여 꾸벅 절하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시리우스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답례를 했다. "이렇게까지 하실 건 없습니다" "아니에요. 일단 배우기로 했으니 스승님이신걸요" "네. 그럼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엘프족 여인들의 미모에 익숙해져 있는 시루스였지만, 다이아나의 아름다움은 무언가 달랐다. 엘프들이 그려놓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다이아나는 거기에 좀 더 동적인 생기와 신비스러움을 더하여 가지고 있었으니까. 햇살을 받고 있는 다이아나는 금이 뿌려진 듯한 은빛 머리카락으로 인해 후광이 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이 다이아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엘프는 당혹감에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유스테우스는 엘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어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의 성정상 싫다는 애를 덮칠 이유도 없었고, 자신의 딸에게 쑥쑥 끌려드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이니 흐뭇하기도 했다. 종전까지도 '하찮은 엘프'라고 간주했던 시루스가 꽤 '괜찮은 엘프'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이아나야 여전히 이런 면에는 무뎠고, 자신의 외모에 대하여 워낙 호된 평가를 받았던 터라 - 오크 마을을 돌이켜 보면 알만하다 - 처음에 바뀐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가졌던 생각도 이미 저 멀리 사라져서 그저 남들이 못생겼다고만 안하면 좋겠다 정도가 되어 있었다. 셋은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 소박한 음식으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유스테우스는 어차피 이젠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이라면서, 보란듯이 보석 몇 개가 든 주머니를 이 둘에게 나누어 주고, 아까 딸에게 주려다 실패한 마법물풀 몇 개를 엘프에게 안기듯이 주었다. 물론 다이아나에게도 몇 개 미리 주었다는 말로 상당히 미안해하고 당황스러워 하는 엘프가 사양의 말문조차 열지 못하게 하고는 내쫓듯이 그들을 내보냈다. 둘의 행선지를 물어본 마법사 '유스'는 친절하게도 그 근방까지의 이동을 제안했고, 덕분에 둘은 마을 근처의 숲으로 순식간에 갈 수 있었다. "참 특이한 분이셨어요" 이제는 시야에 들어오는 마을을 향해 걸으면서 시루스가 말했다. "그러게요. 하지만, 참 친절한 분이었죠?" "네. 그렇게 남에게 잘 주고,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인간은 처음 본 것 같아요" "아, 네" 문득 아버지의 거짓말이 조금은 미안해진 다이아나는 슬쩍 말꼬리를 얼버무리고 씩씩하게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레아 다이아나와 시루스가 들어선 마을은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조아라스왕국과 그 옆의 칼라임 제국의 국경지대로, 칼라스 제국의 가장 동쪽 끝에 해당되는 마을이었다. 동서가 남북에 비하여 두 배 정도의 길이인 대륙에는 크게 네 개의 산맥이 ㅌ자를 90도 오른쪽으로 돌아간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아나와 시루스가 내려온 서쪽산맥(오하르트 산맥)은 조아라스왕국과 칼라임제국을 둘러싼 형상으로 이어진 형태였다. 조아라스 왕국은 칼라임 제국과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국경지대라고 해도, 산맥과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몬스터들로부터 외곽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을 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조아라스 왕국이 제국 정도 규모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엄중하게 국경이 지켜졌겠으나, 조아라스는 무력보다는 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칼라임 제국 초기에 큰 공을 세웠던 유덴하임 조아라스 대공이 영지로 받았다가, 후에 왕국으로 독립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여, 다이아나와 시루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국경지대임에도 검문 등은 심하지 않았다. 다만, 외곽 마을의 특성상, 상당히 큰 방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의 정문을 지날 때, 경비병이 로브를 뒤집어 쓴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마을의 규모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수의 기사, 병사들과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국경이라서가 아니라 산맥과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의 특성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조아라스에서는 해로를 제외하고는 칼라임을 거쳐야만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 혹은 모험자로 보이는 일행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한마디로 마을의 크기나 규모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자애와 치료의 여신이 홀대 받을 일은 없다. 특히 마법사들의 치료마법과 비교하는 것이 모욕스러울 정도로, 현 시대의 세레스 여신을 모시는 신관들의 신성력은 뛰어났기 때문이다. 마을 규모에 비하여 상당히 크게 지어진 여신의 신전은 마을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머니의 신성력의 느낌을 알 수 있었고, 시루스에 앞장서서 느낌의 발원지로 걸어갔다. 시루스는 다이아나가 앞장을 서자, 별 다른 질문 없이 다이아나의 뒤를 조용히 쫓아 걸었다. "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아악~!" "클클~! 누가 죽인다고 했나? 살려준다니까" "자아~자아, 얌전히 말을 들어야지. 반항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구!"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이쁜 것이 튀어나왔지?" 대사만 들어봐도 무슨일인지 알만한 소리가 한 골목으로부터 들려왔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골목 안에서 나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발길을 재촉했고, 골목 안쪽에서는 높은 톤의 어린 소녀의 비명소리와 음탕한 단어들을 섞어서 소녀를 희롱하는 사내들의 소리가 불협화음을 내면서 불길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가던 - 어차피 외곽의 문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대로였기에 - 다이아나와 시루스의 귀에도 들려왔다.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다이아나는 어느 날 밤 겪었던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졌다. 시루스는 다이아나의 그러한 반응을 보고, 조심스레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안가시는 것이......" "......" 엘프라고는 하지만, 한 인간의 일생보다 더 오래 인간세상을 여행한 시루스였다. 처음부터 용병과 병사들이 많은 이 마을의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짐작했다. 더더군다나, 경비대의 수가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하는 이 마을 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히 저들을 물리쳐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그릇된 욕망이 빚어내는 악행의 결과는 다른 종족에게도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그 어떤 종족보다 인간 종족 그 자신이 가장 흔히 피해자가 되곤 했다.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엘프인 자신이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전혀 무력을 쓰지 못하는 - 시루스야 다이아나의 외모를 보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지만 - 동행이 미모의 여성이라면, 더더욱 상관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잠시 멈칫하는가 싶었던 다이아나는 홀린듯이 잡힌 옷자락에 상관하지 않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로브 옷자락은 순식간에 시루스의 손을 빠져나갔고, 어쩔 수 없이 시루스는 다이아나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도 시루스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당도하기 전에 다이아나를 잡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다이아나의 뛰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쉽게 생각하여 방심한 시루스는 다이아나가 일이 벌어지고 있던 현자에서 우뚝 선 다음에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골목 안 ㄱ자로 꼬부라진 막다른 곳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한 소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사내의 덩치에 가려 얼핏 보이는 소녀는 이제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등을 돌린 사내는 마악 엉덩이를 보이면서 '거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만두시죠." 아름답지만 차가운 느낌을 주는 미성의 음성이 골목 안에 울려퍼졌다. 용병들 사이에서 미친개와 맷돼지라고 불리는 콤비인 하크와 티론은 그다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을 내에서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순하게 행동을 해서, 초보 용병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단 무기를 잡으면 별명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그들의 별명이 왜 유명해졌는지를 충분히 느끼게 했다. 미친개 하크는 용병 치고는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졌다. 주로 변칙적인 스타일의 전투를 하는 그는 단검 던지기가 특기였고, 상당히 빠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와의 전투가 시작되면 보통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단검으로 급소를 맞춰 죽이는 형태로 싸웠다. 그런데도 하크가 '미친개'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고블린과 오크들을 대상으로 한 전투에서 동료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고, 단검까지 떨어지자, 평소엔 거의 쓰지 않던 검을 들고 덤벼든 모습에서 비록되었다. 뒤늦게 후발대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 하크는 자신에게 덤벼든 고블린 하나는 칼로 꿰뚫고 그 사이 공격한 한 놈을 말 그대로 물고(?)있었다고 한다. 고블린의 목줄기를 입으로 문채 기절한 하크 옆에는 미친듯이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대는 제정신이 아닌 듯한 티론이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몬스터의 피로 뒤범벅이 된 채, 무서운 힘으로 도끼를 휘둘러대던 티론은 후발대의 지원도 의식하지 못하고 마지막 오크의 숨통을 끊은 뒤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이후, 이들에게는 미친개와 맷돼지라는 별명이 붙었고, 사선을 함께 지킨 동료로서 이들은 둘도 없는 콤비가 되었다. 이들 둘은 얼마 전 길을 것다가 한 소녀를 발견했다. 적갈색 머리카락의 십 오륙 세 정도로 되어보이는 소녀는 상당히 순진하고 청초한 인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들은 눈 호강을 한 것에 만족하며 기껏해야 몇 번 휘파람을 불어 준다던지, 씨익 웃으면서 그녀를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소녀를 뒤쫓았고, 소녀가 쫓겨들어간 골목에서 지금과 같은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그들은 상의가 찢겨져서 완전히 드러난데다가 치마는 젖혀져서 치부가 드러나 보일 정도인 소녀를 앞에 두고 최후의 일탈을 막 시도하려던 중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는 폭행인데도, 약속이나 한 듯이 완력이 센 티론이 소녀를 잡고 있었고, 하크가 마악 바지를 내리려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들려온 소리에 그들 둘은 새로 나타난 인물을 주시했다. 달려오느라 로브가 벗겨진 다이아나는 환상적인 미모를 내뿜으며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곧이어 시루스가 달려와 그녀의 뒤에 섰다. 두 명의 불운한 용병들은 다이아나의 모습을 보자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일언반구 없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두 용병들을 보면서 재빨리 피한 다이아나는 번들거리는 광채를 뿜는 충혈된 네 개의 눈동자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는 이미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듯, 표적이 된 다이아나에게 마구 달려들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용병으로서 오랜 세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쌓아온 실력은 상당한 압박을 다이아나에게 가했다. 그래봐야 일 순간, 마치 존재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을 무시하고 다이아나에게 달려드는 두 용병의 모습에 아차하는 순간, 다이아나가 그들을 피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던 시루스가 은빛 광채가 나는 검을 들고 다이아나 앞을 막아섰다. 시루스의 검은 마법사 '유스'가 선물로 준 것으로 '마법검'이었다. 아직 검의 마법을 사용하기엔 익숙치 않았던 시루스는 엘프 특유의 빠른 검술로 이 둘을 상대했다. 하지만, 짜여진 듯한 합격을 하는 두 사람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편 시루스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자 다이아나는 쓰러져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반쯤 혼절해 있는 소녀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소녀는 옷이 찢기고 거친 손길에 멍이 좀 들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저 정신적으로 워낙 크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여벌의 로브를 꺼내 걸쳐줄 때에도 쇼크상태 특유의 멍한 눈빛을 하고,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다이아나는 상당히 성숙한 몸을 가진 소녀의 얼굴을 보고 생각한 것보다 어려보이는 얼굴에 인상을 굳혔다. 그 소녀의 나이는 다희로써 험한 일을 당했던 그 시절이 그녀와 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한편, 두 명의 용병의 합격에 상당히 고전하던 시루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검의 기능을 떠올렸고, 검에서 뿜어낸 불꽃 화살로 둘의 움직임을 묶고 다시 한 번 전격마법을 발동하여 기절시켰다. 실상 용병들의 합격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시루스의 검술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보통 사람들은 상처를 입으면 움찔하는 정도의 반응이나 동작의 지체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 저기 베이면서도 막무가네로 덤벼드는 이들의 비정상적인 공격 덕에 애를 먹었던 것이다. 싸움이 끝나자, 시루스는 쓰러진 둘을 뒤로 하고 다이아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소녀를 달래느라 부드러운 소리로 위로의 말을 반복하던 다이아나는 시루스가 다가오자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용병들을 보았다. "저 사람들, 좀 이상해요"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버서커 - 광전사를 일컫는 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평소 능력의 몇 배를 발휘하여 죽을 때까지 싸운다 - 가 된 것 같았습니다." "정상이 아니라......" 다이아나는 품 안의 소녀를 보더니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 치료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 신성력을 발휘하여 치유했다. 따뜻한 느낌의 신성력은 소녀의 불안감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는지, 소녀는 기절하듯이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그런 다이아나의 모습에 시루스는 상당히 놀라와했다. 마법사의 자질을 가졌다면서 신성력을 사용하다니. 더더군다나 그리 오래 기도를 하는 모양도 볼 수 없었건만.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하게 빠르게 뛰던 모습과 몸에 익숙한 동작으로 공격을 피하는 모습에, 신성력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녀였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루스에게 다이아나는 로브로 감싼 소녀를 건냈다. 그녀가 소녀의 몸을 별 힘도 안들이고 들어서 넘겨주는 것을 보면서 시루스는 자신이 보고 있는 소녀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상당한 힘을 가졌음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결국 얼떨떨한 상태로 소녀를 받아들고 멍하니 서 있는 시루스에게 다이아나는 부탁한다는 한 마디 말을 던지고 쓰러져 있는 용병들에가 갔다. 혹시 죽이려는 걸까? 시루스는 저런 종류의 범죄에 대하여 여성들이 상당히 잔혹해 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살인자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면 베풀었지, 강간범에 대하여 여성들은 지극한 증오심과 혐오감을 가진다. 능력이 없는 여성들이야 감정으로 끝나겠지만, 여성 용병이나, 모험자들의 경우 강간으로 현상수배된 범인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 살려 데리고 가면 더 많은 상금을 주는 경우에도 -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병들에게 간 다이아나는 먼저 상처가 심한 티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의 몸에 손을 얹었다. 소녀를 치료할 때보다도 환한 빛이 스며들면서 데인 상처와 베인 상처들이 아물어갔다. 다이아나는 지체하지 않고 하크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를 해 주었다. 시루스는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용병 둘을 치료하는 다이아나를 보며, 다시 한 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뚝처럼 서 있었다. "이쪽으로 물러 서십시오" 어차피 치료하는 것을 말리지 못했지만, 한 박자라도 늦게 정신이 들었으니 다행이었다. 용병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격할 것을 대비하여 시루스는 짧게 외치면서 소녀를 든 상태로 다이아나 쪽으로 움직이면서 소리쳤다. 그제서야 시루스의 생각을 눈치챈 다이아나는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한 걸음 물러섰다. 피하자는 시루스의 설득에 자신의 반지에 있는 실드 속성을 이용하면 된다고 설득한 다이아나는 신음 소리와 함께 깨어나는 두 용병을 유심히 관찰했다. 뿌연 머리속이 맑아지면서 깨어난 티론과 하크는 자신들의 행동을 떠올리고 경악했다. 맹세코 그들은 그러한 일을 한 적도 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기억에 없다고 변명이라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세한 부분까지 선명하게 재생해주는 현실에 둘은 처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눈치가 빠른 하크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과 티론에게 아무런 상처가 없음을 발견하고 더더욱 당황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한편 이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시루스와 다이아나는 이들이 온순한 눈빛으로 깨어나 비참한 표정을 짓자, 굳었던 표정을 상당히 풀었다. 특히 다시 한 번 그들과 싸워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시루스는 이미 공격 마법 하나를 캐스팅해 놓았다가 슬그머니 해제시켰다. "죽이시오!" 침중한 어조로 먼저 말을 내뱉은 이는 티론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후회의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인간같지 않게 아름다운 눈 앞의 소녀와 로브를 쓴 남자는 아무래도 신의 사자인 것이 틀림 없었다. 죄악에 빠진 자신들을 처벌하기 위해 왔으리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생각으로 말하는 티론과 조금 생각은 달랐지만, 하크도 동일한 말을 했다. 티론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크는 자신도 죽여달라고 했다. 로브의 남자에게 안겨있는 소녀를 보자, 그 어린 소녀에게 했던 일들이 떠올랐고, 제정신이었다면 눈부셔서 쳐다보기도 힘들었을 미모의 소녀의 얼굴을 보니, 자괴심이 밀려왔다. "제 정신이 들었나보네요" 다이아나는 시루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시루스는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를 표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저들을 치료하신겁니까?" "음, 저들의 정신이 병들었다면 그것도 함께 치료가 되겠거니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듯한 시루스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다이아나는 경쾌하게 말했다. "그럼 실드로 막고 시루스님이 다시 수고해 주셔야 했겠죠 뭐" 싱긋 웃으면서, 무슨 걱정이냐는 표정으로 시루스를 멍하게 만든 대사를 토해낸 다이아나는 시루스에게 안겨 있는 소녀를 보며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디 여관같은 곳에서 깨어나길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힘든 일을 겪은 소녀에게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이보시오!" "우리를 왜 치료하신 거요?" 그야말로 결의를 다지면서 죽이라고 했건만 완전히 무시당한 두 용병은 각자 입을 열어 앞에 서 있는 다이아나를 향해 말했다. 둘의 말로 인해, 자신들을 치료한 사람이 다이아나이며, 그녀 혼자만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까닭이다. "왜냐구요?" "그렇소. 우리가 그,그런 짓을..." 티론은 투박한 성품답게 얼굴을 붉히고 우물쭈물했지만, 하크는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비록 말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다이아나의 아름다운 모습에 기가 질린데다가 워낙 부끄러운 행적이라 말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다이아나는 이상한 것을 질문받은 사람처럼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단순하게 대답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잖아요" "그,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살인범을 용서해 줄 수는 없다. 거기다가 그 행위를 낱낱히 기억하고 있다면, 어떤 처벌을 받아도 억울해할 자격이 없는 것이라도 하크와 티론은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이 되었으니 다행이네요." "우리를 벌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약간 냉정을 찾은 목소리로 하크가 처음으로 또박또박 질문을 했다. "흠,, 무언가 속죄를 하고 싶은 건가요?"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티론까지 합세하여 부르짖듯이 외친다. 다이아나는 약간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금방 결론을 내렸다. "일단, 저와 시루스에게 사과하시구요. 이 분 - 기절한 소녀를 가리키며 - 이 일어난 다음에 이분에게도 사과를 하세요. 아차, 돈 있으세요?" "지금은 많이 없지만, 여관에 있습니다" "전 재산이라도 드리겠습니다" 둘은 앞다투어 말했다. 다이아나가 처음으로 보상다운 보상을 거론한다 싶었던 것이다. "흠,, 그럼 그 여관으로 가요. 빈 방은 있겠지요?" "네?? 네..." "여관에 가서 이 분을 좀 쉬게 하고, 그 여관비는 댁들이 내셔야 해요" 두 용병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분이 깨어나면 직접 어떤 보답을 바라는지 물어보세요" 그제서야 다이아나의 의도 - 피해 당사자에게 보상하라 - 를 눈치챈 두 명의 용병은 화급하게 일어나 자신들이 묶고 있는 여관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시루스는 비록 로브로 가려져 잘 못이지 않았지만, 차분한 엘프로서는 상당히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면서 약간 멍해있었다. 그런 시루스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방긋 웃은 다이아나는 "어서 가요~!" 하는 재촉의 말을 남기고 용병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시루스는 황급히 다이아나의 옆으로 다가가 로브의 모자를 씌워줬다. 골목 안에서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엘프인 시루스만 해도 상당히 시선을 클 판에 다이아나의 미모는 귀찮은 일들을 '초대'하는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다급하게 다가와서 로브 모자를 씌워주는 시루스의 행동에 문득 '앞머리 꼭 내리고 다녀라' 하고 지혜가 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혜에 대한 그리움과 그 당시 떠올랐던 웬지 모를 - 사실은 잘 알지만 - 서운함을 시루스에게도 느낀 다이아나는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았지만, 시루스야 그 이유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여관에 도착한 용병들은 숙소를 잡고 허둥거렸다. 2인실과 1인실을 잡은 다이아나는 용병들에게 밖으로 나가 기다릴 것을 '부탁'했다. "깨어나서 댁들을 보면 놀랄꺼에요" 두 용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다이아나는 마침 답답하던 로브를 벗고, 시루스에게 보석을 주며, 용병들의 안내를 받아 옷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자신 또한 여벌의 옷이 없던 터이고, 아버지가 준 보석과 어머니가 처음에 챙겨준 보석들 이외에는 현금이 없었으므로, 몇 개를 팔아달라고도 부탁했다. 시루스는 자신도 충분히 있다면서 거절했지만, 다이아나는 자신도 현금이 필요하다면서 억지로 몇 개의 보석을 시루스에게 건냈다. 시루스가 방을 나선 후, 여관 종업원이 부탁한 물과 천을 가져오자, 다이아나는 소녀를 감쌌던 로브를 벗기고 찢어진 옷가지들을 제거한 후, 천을 물에 적셔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리고, 일단 급한대로 종업원에게 부탁하여 몸을 가릴 옷가지를 입혀놓고 소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으음~!" 신음소리와 함께 소녀가 깨어나자 다이아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도록 하면서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이아나의 모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소녀는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소녀가 울기 시작하자 다이아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 안전해요.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요~!" 다이아나는 소녀의 상체를 부축하여 끌어앉고는 낮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달래 주었다. 처음에는 훌쩍이던 소녀는 다이아나의 품 안에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가 한 참을 울고 난 후에야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다이아나는 그제서야 소녀를 안았던 팔을 풀고, 그녀의 옆에 앉아 눈을 마주 보면서 이름을 물었다. "레아라고 해요" 주춤거리면서 고개를 든 소녀의 눈은 루비같은 붉은 색이었다. 소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으로 미루어, 갈색 눈을 상상하던 다이아나는 특이한 소녀의 눈에 잠시 마음을 빼았겼다가 곧 제정신을 차렸다. "전 다이아나라고 해요" "절 구해주신 분인가요?" "저보다는 제 동행분이죠" 약간의 침묵 후에 소녀는 머뭇거리면서도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저,,, 그 사람들은......" "밖에서 사과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을껄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안그래도 순진하고 청순한 인상의 소녀가 더욱 귀여운 모습이 되었다. 다이아나는 천사의 집에서 동생들에게 하던 것처럼 소녀를 끌어안아 볼을 부비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 소녀의 상태를 고려해서 -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답니다." "......"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레아씨가 죽으라고 한다면, 죽을 꺼에요. 그러길 바라나요?" "네?" 레아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는 소녀가 속을 갈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용기를 주듯이 소녀의 손을 꼭 잡고, 그들의 처분이 레아에게 달렸음을 상기시키면서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물론 전혀 강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조용히 설득했을 뿐이다. 다이아나와 레아는 한 명은 대답을 기다리느라, 또 한 명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결국 레아는 다이아나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야무진 표정을 짓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만나보겠어요" 다이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격려하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자신들의 방으로 가지 못하고, 방문앞에서 안절부절하면서 기다리던 두 용병은 느닷없이 열린 방문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만 깜박였다. "들어오세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난 용병이오!'라고 써붙인 듯한 인상의 사내 둘이 얼굴 한 가득히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서 주저,주저 방으로 들어왔다. 다이아나는 레아가 두려워할 것을 염려하여 얼른 레아의 곁으로 가 그녀의 손을 잡고 꼭 붙어 앉았다. 거의 사색이 된 두 용병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침대에 근접한 곳에서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레아는 두 용병을 보면서 처음에는 두려운 표정을 짓다가, 그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릎을 꿇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여도 좋고 종으로 삼으셔도 좋습니다. 아니, 죽이기 싫으시면 그냥 죽으라고 하면 조용히 가서 죽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쪽은 단순한 티론, 뒤쪽은 하크이 말이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두 용병의 얼굴에서 바닥으로 원인을 알만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너,, 너무 달라요" "그렇지? 아마 마법에 걸렸거나 무얼 잘못 먹었을지도 몰라." "......" "어떻게 할래?" 레아는 묻는 다이아나와 두 용병 사이로 시선을 몇 번 옮기더니 결심을 한 듯 한숨소리와 함께 선고를 내렸다. "하아,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레아의 대답에 두 용병은 물론 다이아나마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린 소녀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자신에게 지옥같은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두 남자를 이토록 쉽게 용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레아가 너무 귀여워보여, 다이아나는 레아의 어깨로 팔을 둘러 토닥거렸다. 은빛 머리의 미모의 다이아나가 적갈색 머리의 청순한 이미지의 소녀와 다정히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화가가 작품을 위해 연출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고, 뜻밖에 용서를 받아 놀라서 레아를 올려다 본 두 용병을 그 모습을 보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때마침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루스는 열린 방문으로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로브 모자 아래로. 시루스는 처음엔 다이아나의 말대로 두 용병에게 적당한 가게를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방문앞에서 서성이는 그 둘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차피 가게 위치야 여관 종업원에게 묻거나 길 가는 이에게 물어보아도 별 문제 없을 것이었다. 마침 카운터에 나와 있던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에게 가게들의 위치를 물어본 시루스는 가르쳐 준 길을 걸어가면서 떠오르는 의문으로 복잡한 머리 속을 한참이나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으로 남을 뿐, 어차피 질문의 대상에게 묻기 전엔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먼저 머리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당연히 다이아나에 대한 것이었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능력과 운 - 대마법사와의 만남을 시루스는 당연히 기연으로 생각했다. - 을 소유한데다가 엘프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특이한 사고의 소유자라니. 하나 하나 그녀의 능력을 되짚어가던 시루스는 문득 한 가지 잊었던 사실을 떠올리고 황망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그녀를 만난 곳은 산맥의 숲속, 그리고 그녀는 오크마을에서 '신성한 결투'를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이아나가 보여준 몸놀림은 이미 그녀가 말해 준 사실이었다. 단지, 그녀의 외모에 마음이 쏠려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 그렇다면 신성력은? 전투에 익숙한 몸놀림과 신성력, 그렇다면 그녀는 파티에서 '신관'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리라. 전투시에 신관이 보호받는 존재이긴 하지만, 스스로 방어능력을 기른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터이니 그러지 말하는 법은 없다.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적절한 답을 찾아낸 시루스는 그녀가 '자애와 치료의 여신'의 신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섬기는 여신이 신관의 '독신'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부분을 떠올리면서, 왜 안도감이 드는 것인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외모도 이해가 갔다. 신관들은 그 신앙이 깊어지고 신성력이 높아질수록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게 된다. 그녀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지금의 외모가 당연하다 - 그래서 고위 신관일수록 보통 아름답게 마련이었다. 물론 모시는 신들의 속성에 따라 약간의 예외인 경우도 있다. - 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여신의 사랑을 지극하게 받는 존재일 것이다. 그녀의 성정으로 보아 치료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자애라는 면에 있어서도 엘프인 자신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어서오십시오" 드나드는 사람들의 수는 상점들의 크기와 비례한다. 아니 그 반대인가? 아무튼 겉으로 허름해 보이던 보석상은 꽤 깔끔하고 넓은 내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시루스는 약간 퉁퉁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가게 주인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얼 보여 드릴까요?" "살 것이 아니라 팔려고 왔습니다" 시루스가 미리 골라놓은 작은 보석 세 개를 내밀자, 보석상 주인은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보석을 감정했다. "호오, 작지만 상당히 질이 좋은 물건들이군요. 좋은 물건들을 내놓으셨으니 세 개 모두 해서 100골드 드리죠" 아마 시루스가 여행 경험이 없는 엘프였다면, 호감가는 미소를 지으면서 선심쓰듯이 가격을 정한 주인의 말에 따라 100골드를 받고 물건을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시루스는 '만만한 엘프'가 아니었다. 시루스는 흥정을 할 때, 가장 강력한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꺼냈던 보석을 다시 쥐고 묵묵히 휙 돌아선 것이다. 마치 말 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그의 발걸음에 주인은 문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로 보아 물정을 모르는 젊은이인줄 알았는데, 잘못하면 좋은 물건을 놓치고 말 것이다. "소, 손님~! 이거 왜이러십니까아~! 원래 거래란 게 다 흥정하는 재미에 하는 것인데~! 이렇게 냉큼 돌아서시면 어쩌시려구요~~~" 황급하게 튀어나가 로브자락을 붙들고 말꼬리를 늘리면서 헐레벌떡 시루스를 설득했다. 시루스는 그제야 마지못해 뒤를 돌아 보았다. 상인은 아직도 기대를 걸면서 시루스가 가격을 부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로브를 뒤집어쓴 이 남자는 보이지 않는 시선을 자신 쪽으로 향한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인내의 싸움에서 노련하기 짝이 없는 주인이 지고 마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나에 100골드, 모두 300골드 드리죠. 이 이상은 절대 받을 수 없으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루스는 다시 보석을 꺼내 들었고, 한숨을 내쉰 주인은 돈을 꺼내 들었다. 시루스가 다시 입을 열자 주신은 긴장했으나, 시루스가 한 말은 10골드는 잔돈으로 달라는 것뿐이었다. 하여 290골드의 금화와 10골드 어치의 실버동전(1골드는 100실버)을 받아 든 시루스는 로브 안에 그것들을 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다음 볼일을 위해 상점 문을 나섰다. 오랜만에 보석에 제값을 다 쳐주고야 만 주인은 이미 놓쳐버린 폭리를 아쉬워하면서 만만찮은 손님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시루스는 여성용 옷을 판매하는 가게로 들어갔다. 다이아나의 짐 상태나 오늘 만난 소녀의 상태로 보아, 결국 여성용 옷의 일체 - 물론 속옷도 포함 - 을 구입해야 할 것이었다. 시루스는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종업원에게 두 여성을 위한 옷들의 일습을 준비해오도록 했고, 오히려 사이즈를 몰라 손으로 적당하게 그려내는 그의 초연한 모습에 옷집 종업원들이 얼굴을 붉히는 약간의 헤프닝이 있고서 역시 목표한 바를 달성했다. 돌아오는 길에 시루스는 무언가 마음 한 구석에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다이아나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지금,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늘 있었던 사건이었다. 시루스는 여관으로 돌아가 주인에게 은화를 쥐어 준 후, 마을에 대하여 이것 저것 - 마치 초행길의 여행자가 정보를 얻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상당히 쓸 데 없는 것까지 - 물어보았고, 그 와중에 이 마을의 치안상태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하여, 문제의 두 용병이 상당히 유명한 인물들이며, 그들의 성격이 상당히 온순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호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가정을 해보다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복잡한 수수께끼같은 사건을 생각하면서, 시루스는 다이아나와 소녀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용병의 모습이 안보이고 방문이 열려 있던 터라 무심결에 들어서던 시루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두 소녀의 아름답고 귀여운 모습과 그 앞에 엎드려 눈물콧물 범벅이 된 데다가 귀까지 빨갛게 상기된 두 명의 용병을 발견했다. '쉼터'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여관 2층의 한 방에서는 한참동안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제발 받아주십시오" "우리에게 무슨 면목으로 살라시는 겁니까? 제발 받아주십시오" "저,, 저는 괜찮다니까요!" 근 한 시간 여를 계속된 실랑이는 두 명의 용병이 평생 모은 재산을 받거나 자신들을 종으로 삼아달라는 부탁을 한 데서 시작되었다. 처음 레아는 조심스럽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으나, 두 용병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실랑이가 시작될 때는 아직도 두 사람이 무서운지 조심조심 거절하던 레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고집을 부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점차 두려움을 잊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다이아나와 시루스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이 기이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아는 양 볼을 붉게 물들여 더욱 귀여운 얼굴에 흥분한 어조로 이제는 거의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이에 질세라 잡아잡수~! 하는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고집을 꺽지 않는 두 용병의 모습은 볼 수록 가관이었다. 결국 "짝짝짝!" 다이아나가 손뼉을 쳐서 세 명의 입을 잠시 다물게 한 뒤 "밥이나 먹고 마저 해결하자구요~!" 라고 제안하자, 그제서야 점심때가 지났다는 것을 알아챈 이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다이아나는 의도한 대로 식사를 하면서, 레아의 사정을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두 용병은 그러한 다이아나의 의도를 깨닫고 눈을 빛내면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레아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던 시루스 또한 실상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레아는 원래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 이 점은 용병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치고 거의 모르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 원래는 수도 쪽에서 하녀의 일을 하다가, 이 마을의 저택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는 사람을 따라 이 마을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몇 주도 안되어 갑자기 저택의 주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인들은 급여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고, 레아도 그 중의 하나였다. 거처를 구하지 못해 저택에 머물고는 있었지만, 월급을 줄 사람이 없는 이상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익숙하지 못한 거리에 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두 용병은 주인이 사라진 저택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달 정도 전에 어떤 사람이 비어 있던 귀족가의 저택을 사들였는데, 말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수도부터 모집해왔던 하인들이 새로 직업을 구하느라 돌아다닌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주인이 저택 안의 고가의 물품들조차 챙기지 않고 사라졌기에, 요령 좋은 몇몇 하인들은 그 물건을 팔아 급여로 대신하고는 - 실제로는 훨씬 고액을 챙겼지만 - 마을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끼지 못한 하인도 당연히 있어서, 이런 저런 수소문을 하면서 돌아다닌 결과 이미 마을에서는 저택의 주인이 집을 나갔다가 몬스터에게 변을 당한 것이라는 둥의 소문이 떠돌았다. "그럼 이제 어쩔 작정이지?" 레아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다이아나는 가장 핵심이 되는 질문을 했다. 원래 사람들에게 존대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었지만, 척 보기에도 레아가 자신보다 어려보였고 무심결에 나온 반말에 오히려 친근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레아를 동생처럼 대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어차피 마을에서 일자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수도로 돌아간다면 그간의 경험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귀족의 저택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도까지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았고, 안전하게 가려면 비용도 상당히 들 터였다. 레아에겐 그런 돈이 없었다. 하지만, 레아는 두 용병이 주는 돈을 받을수는 없었다. 용병이란 목숨을 걸고 하는 직업이다. 남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번 돈을 자신이 빼앗을 수는 없다는 레아의 설명에 다이아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루스님, 저는 수도로 가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저야 경험을 위한 여행이니 어느 쪽으로 가던 별 문제가 없습니다만은" "잘 되었군요." 시루스에게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 다이아나는 마침내 상황을 정리했다. "두 분 용병분들은, 아 하크님과 티론님이라고 하셨나요?" "님은 무슨...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십쇼! 말도 낮추시구요" "전 이게 편해서요. 아무튼 두 분이 레아에게 보상을 하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입을 모아 대답하는 두 명을 바라보며,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레아, 네가 지금 바라는 것은 수도로 무사히 가는 것이지?" "네" 얌전하게 대답하는 레아를 보며 다이아나는 방긋 웃음을 보냈다. 물론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입꼬리만 올라가는 모양이었지만. "그럼 이렇게 해요. 저와 시루스님, 그리고 하크님과 티론님, 레아까지 모두 수도로 가는거에요. 두 분은 보상대신 레아를 지켜주시고, 여행경비를 대 주세요" "!" "만약 레아가 수도에서 정착할 돈이 필요하다면 그 선에서 도와주시구요"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명의 용병은 구원자라도 만난 듯이 안색을 밝히면서 대답했다. 레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 하자 다이아나는 먼저 설득하기 시작했다. "레아야, 오늘 만났지만 나는 네가 동생같은데...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겠니?" ".... 어, 언니.." "고맙다. 이 언니가 시루스님이랑 둘이만 수도까지 갈 생각을 하니, 좀 위험할지도 모른단다. 동생 잘 만난 덕에 무료로 호위좀 얻으면 안될까? 나는 너와 수도까지 함께 가고 싶은데, 넌 싫으니?" "아, 아니에요" "그럼 내 말대로 하렴. 더이상 거절하면 저 분들은 평생 마음이 불편할꺼야" "그렇게 할게요" 실상, 다이아나가 수도까지 꼭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같은 조건으로 용병들과 레아를 동행해 보내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레아가 오늘 당한 일이 있는데, 용병들과 달랑 동행시킬 정도로 다이아나는 무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이아나의 배려는 약간의 시간차를 통해 모두에게 인식이 되었다. 신관이 되다 "그럼, 언제 출발합니까?" 성격이 급한 티론이 물었다. 레아에게인지 다이아나에겐지 뚜렷한 대상없이 질문을 던지자, 시루스는 다이아나를 다이아나는 레아를 레아는 다이아나는 쳐다보았다. 서로 눈치를 보듯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다이아나는 일행 각자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시루스야 별 문제가 없었고, 하크와 티론은 용병단에서 처리할 것이 있을 터였다. 여태까지 기거하던 곳을 떠나는 것이니만큼 떠나기 전,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이들 둘이었음이 분명한데도 이 둘은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자신들은 '언제든지 상관없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흠.. 레아는 어떠니?" 결국 이 둘은 차지하고 레아의 사정을 묻는 다이아나였다. "전.. 어차피 저택에 가봐도 별 짐도 없구요. 저야말로 별로 상관이 없거든요. 그런데, 여기 묵으려면 아무래도 비용이......" "그건 괜찮아. 어차피 내 방을 이인실로 잡았으니 나랑 함께 있으면 되지. 괜찮지?" "그.. 그럼요" "그럼 레아는 되었고, 하크씨" "네!" "휴우~! 그렇게 소리쳐서 대답하지 않아도..." "죄송합니다!!!" 잔뜩 힘을 주어 다시 대답해오는 하크를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다이아나는 그냥 용건을 말하기로 했다. "두 분, 용병단에 속해 있지요?" "네? 네...." "이곳을 떠나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하죠?" "현재는 특별하게 토벌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의 침략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 탈퇴한 후 길드에 알려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통보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네" "흠.. 그럼 하루 정도면 되겠군요." "저... 그렇게 신경써주시지 않으셔도......" "아니, 굳이 바쁠 것도 없으니까요. 저도 좀 시간이 필요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시간도 있어야 하니까요." "아,..! 네...." "그럼 이틀 후에 출발하는 걸로 하죠. 다들 괜찮겠어요?" 다이아나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자 다른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동의했다. 한편, 이 곳에서 볼일이 있다는 다이아나의 말에 시루스는 약간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가 알기로 다이아나는 이 마을은 분명 처음인 듯했기 때문이다. "저어, 실례가 안된다면, 볼일이라는 것이?" "아... 안그래도 그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 전에 아무래도 하크씨와 티론씨가 가장 경험이 많을 듯하니, 여행에 필요한 준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비용은 드리겠습니다" "아,, 네 물론입니다!" 하크의 대답과 함께 티론에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는 좀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아를 힐끗 보고는 올라가서 쉴 것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사양하던 레아도 다이아나가 계속 권하자 - 아무래도 그녀가 겪었던 일이 일인만큼 상당히 지쳐있던 터라 - 위층으로 향했다. 두 용병은 시루스가 건네준 돈을 들고 - 이 때에도 이 두 용병은 자신들도 돈이 있다고 우겨댔기 때문에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 무엇이 그리 급한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시루스는 엘프답게 이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다이아나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 이야긴 아니지만, 답답하니 올라가서 이야기 하면 안될까요?" "네? 아 네~!" 별안간 답답하다는 소리에 무심코 의문사를 내뱉던 시루스는 다이아나가 말하는 것이 로브의 모자임을 깨닫고 얼른 대답을 고쳤다. "제 방은 레아가 쉬고 있으니 시루스님 방으로 가지요" 긍정의 뜻을 표시한 시루스와 함께 둘은 방으로 향했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로브를 벗어든 다이아나는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밝게 웃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던 것과 긴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다이아나는 다희일 때부터 모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모자를 쓰면 상당히 갑갑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거기에 밥 먹을 때까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니 답답할만도 했다. 물론, 아침 저녁으로는 약간 쌀쌀하다지만, 실내에서 추울 정도는 아니어서 약간 덥게 느껴지기 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로브를 벗어 의자 위에 얌전히 걸쳐놓고 시루스를 향한 다이아나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시루스도 덩달아 로브의 모자만은 벗었으나, 다이아나처럼 로브 자체를 벗은 것은 아니었다. "아, 좀 살 것 같다! 시루스님도 더우셨나봐요?" 웬지 상기된 시루스의 얼굴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자신처럼 시루스도 더웠나보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얼굴이 붉어진 것이 아닌 시루스는 대충 침묵으로 무마했다. "아 참, 제 볼일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별 건 아닌데요. 혹시 이 마을에 세레스님의 신전이 있는지 알아보려구요." "아,,!" "있다면 좀 들렀다가 오려고 하는데... 늦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으음.. 못들어올지도......"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간단히 당연하다는 어투의 대답이 나오자 오히려 다이아나가 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신전에 왜 가는지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조금쯤 고심을 하던 차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시루스와는 꽤 오래 동행을 할 지도 몰랐고 - 마법도 배우기로 했으니 - 특별한 이유 없이 시루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안그래도 유스테우스와 벌인 한 편의 연극이 생각날 때마다 자꾸 시루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신관으로 인정을 받으면 소속이 확실해 지니 훨씬 수월하겠지' 다이아나가 세레스의 신전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가장 좋았고, 그 외에도 신전의 신관으로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 세레스의 신전은 일단 신성력을 인정받으면 까다로운 절차 없이도 바로 신관이 될 수 있었다. 신전 안에서만큼은 신앙과 신성력이 가장 큰 지표가 되고 있었기에 그 외의 신분 등에 대하여 전혀 제한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세레스가 무려 1700년간 공을 들여놓은 결과이기도 했다. 다이아나가 방을 나서자 - 로브를 입고 모자를 쓰면서 상당히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 시루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예측대로 다이아나는 신관임이 틀림없었다. 특별히 밝히지 않았어도, 저 정도 되면 이미 말을 한 것과 진배없었다. 신성력을 보여준데다가 신전에 가겠다고 당당히 말을 했으니...... 짐작만 하던 다이아나의 신분이 '신관'으로 밝혀지자, 수수께끼 하나를 해결한 듯이 뿌듯해지는 시루스였다. '그런데, 왜 그녀가 웃기만 하면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인간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엘프들은 평생 단 한명의 반려를 갖는다. 특히 마음에 맞는 반려를 발견하지 못한 엘프는 상당히 오랜 기간, 혹은 평생을 반려 없이 지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엘프들의 감정은 인간들처럼 변덕스럽지 않았으며 - 이는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종족의 특성이라 볼 수 있다 - 그렇다고 딱히 일부일처제라고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엘프들은 배우자를 구함에 있어서 특별한 압력을 받지 않았고, 그야말로 이 엘프가 아니면 안되겠다고 할 정도의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반려를 얻기 위하여 애를 쓰지도 않았다. 엘프에게 반려란 평생을 옆에서 함께 걸을 동료를 의미했다. 엘프의 혼인에는 특별한 절차가 없었고, 인간들처럼 한 집에서 가정을 꾸리는 형태도 있었지만, 반려를 정한 다음에도 성향상 각자의 생활을 독립적으로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엘프들이 인간들과 하프엘프의 혼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강제적인 경우 - 주로 동쪽 대륙의 국가들에서 - 엘프를 노예로 만들어 2세를 가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자신의 자율적인 의지로 하프엘프가 생기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인간과 교류를 하던 엘프들이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인간들의 강렬한 감정에 '동화'되어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엘프와 달랐다. 그들은 변덕스러운 종족이었다. 아무리 엘프가 아름답고 신비하다고는 하지만, 다른 종족이나 혼혈의 2세들이 인간 세상에서 적응하기에는 인간들은 너무나 폐쇄적이었다. 어찌보면 가장 개방적인 듯하면서도 '다름'에 대하여 일정 부분은 지극히 폐쇄적인 인간이라는 종족의 모순성 때문에 상당히 많은 엘프들이 상처를 받고 아파해야만 했다. 하여, 어린 엘프들은 인간들과의 교류 자체가 금지되었고, 엘프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엄격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시루스의 경우, 인간세상에서 활동한 연륜도 상당했거니와 이런 면에 대하여 상당한 사전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사랑을 호소하는 인간 여성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여성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에 색다른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구애를 받기도 했다. 결국 가능하면 외모를 숨기고 다니는 것이 최상이라는 하나의 '지침'을 확고히 했다. 시루스가 다이아나의 외모를 감추기 위해 유독 신경을 썼던 것도 인간들의 그러한 속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남성'인 자신에게도 뛰어난 외모는 상당한 부작용을 동반하는데, 엘프인 시루스가 흔들릴 정도로 환상적인 미모를 갖춘 다이아나라면, 오늘 당장 여관에서 칼부림이 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나에 대한 자신의 '반응'부터 시작하여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시루스는 다이아나에게 급격히 호감을 느끼는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깨닫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일단 생긴 감정을 굳이 억누른다는 것도 엘프인 시루스의 성정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조금 더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다이아나를 지켜 본 후, 확실한 상태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었다. 어쩌면 단순히 보기 힘든 외모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으니까. 방을 나선 다이아나는 지나가던 여관 종업원을 붙들고 신전의 위치를 물었다. 워낙 세레스의 신도들이 많았고, 여행자들의 경우 '포션'들의 구입을 위해서도 신전에 가려는 이가 많았으므로, 십대로 보이는 소년은 주저없이 쉽게 길을 설명해 주었다. 종업원의 말대로 길을 찾아가던 다이아나는 자신의 예상대로 마을의 중앙 부분에 위치한 어머니의 신전을 볼 수 있었다. "자애의 손길이 그대와 함께 하시기를!" "자애의 손길과 치유의 은총이 머무는 곳의 자녀로서 인증을 받고자 합니다" "이 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하던 사람은 신성력을 인증받으려는 신자들이 하는 인사말을 듣자 다이아나를 다른 방문객들이 가는 곳과 다른 쪽으로 이끌었다. 다이아나가 들어선 곳은 신관들이 여신에게 기도를 하는 일종의 예배소 겸 기도실이었는데, 신관으로 보이는 안내자는 그녀를 데리고 가 여신의 신상 앞에 일단 경의를 표시한 후 - 다이아나도 따라했다 - 기도를 하는 자리로 안내했다. "일단 이 곳에서 기도를 하신 후에 오른쪽에 난 문으로 들어가셔서 검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는 시간의 제한이 없지만, 신성력을 검사하는 곳에서는 시간 제한이 있습니다. 모쪼록 여신의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역시 비슷한 인사말을 주고 받은 후 신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다이아나는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사실 어떤 자세를 해도 어머니는 응답을 주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희로서 교회에 다닐 때, 기도하던 자세가 습관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레스의 신전에는 다이아나가 들어간 곳과 같은 기도실이 상당히 여러 개 있었다. 세레스의 신관들은 신앙심에 따라 신성력을 아낌없이 늘릴 수 있었으므로,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관으로 인증을 받은 사람의 경우 일단 여신께 이를 아뢰고 마음을 가다듬는 기도를 통해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하고 신성력을 검사했다. 예르미아 신관은 로브를 쓴 한 여인이 신관의 인증을 원하는 인사를 하자 우선 그녀를 기도실로 안내하고 고위신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예르미아 신관이 이 신전의 책임자인 고위신관 노이아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여신의 신성력이 온 신전을 뒤덮었다. 일반 신도들이야 약간 청량한 기운을 느꼈을 뿐이지만, 신전에 있던 수십 명의 신관들은 극도로 충만된 여신의 신성력을 느끼고 각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거나 신성력의 근원을 찾기 위해 웅성거렸다. 물론, 가장 신성력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노이아는 화급하게 방문을 열어 젖혔다가 그 앞에 목석처럼 굳어 있는 예르미아를 발견했다. 신성력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던 신관들은 한 기도실 앞에 모여들었고, 그 기도실이 자신이 안내한 신도가 들어간 곳이라는 것을 아는 예레미아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새로 신관으로 인증을 받으려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까?" "네, 노이아님." "어떤 분인지.. 혹시 얼굴을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로브로 가리고 계셔서...... 젊은 여성이셨는데,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여신과의 성스러운 대화를 방해해서는 안되었다. 더군다나, 고위신관도 처음 보는 엄청난 신성력의 발현을 할 정도라면 더욱 그랬다. 어쩌면 '성녀'의 탄생일지도 몰랐다. 노이아 신관은 일단 의문의 여성이 나올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는 대신관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총총히 움직였다. 워낙 엄청난 신성력을 경험한 신관들은 일단 신전의 방문객들을 내보내고, 여신의 뜻을 알기 위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각 신전들은 신들과 인간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신들의 인간세상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엄연하게 말해서 신전은 모시고 있는 신의 영역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적으로 다이아나와 세레스의 만남이 제한되어 있다고 해도, 신전에서의 만남까지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세레스는 이 사실을 다이아나에게 미리 알려주었고, 다이아나는 아버지와 만났다는 사실도 말할 겸 - 물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는 것도 이유지만, 가능하면 어머니께 덜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스스로 제한을 두었으므로 - 신분도 확정할 겸 해서 신전부터 찾은 것이다. 다이아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를 부르기 시작한 몇 분 후 흐릿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엄마~!" "다이아나~!" 세레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다이아나는 달려가 안기려고 했지만, 달려가던 다이아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이.. 이건???" "미안하구나.. 여기서 현신한다면, 네가 곤란해 지겠기에. 내 신성력의 일부로 영상만 만든 것이란다" "아!" 만일 여신이 직접 강림했을 경우 신전의 신관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현재 신전에 나타난 신성력만 가지도고 밖에서는 벌써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신성력으로 위계를 정하는 세레스 신전의 규율상, 대신관보다 높은 신력을 가진 새로운 인물의 출현도 문제가 되겠거니와,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다이아나가 앞으로 행동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세레스와 아쉬운 해후을 한 다이아나가 신관이 일러준 문을 열자, 거기에는 신전의 모든 신관들이 열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세레스가 일러준 사실도 있거니와 원래 영민한 머리를 가진 다이아나는 대충 짐작하고 있던 일이기에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없는 자애와 치료의 손길을 지니신 세레스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이를 뵙습니다" 제일 앞에 서 있던 노이아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신관들도 같은 인사를 하면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감당하지 못할 인사이십니다. 그저 저를 불쌍히 여기신 여신님께서 약간의 가호를 내리셨을 뿐입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리로 오시지요" 노이아가 직접 나서서 세레스를 안내했다. 다른 신관들은 감히 이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궁금함만 가득담긴 얼굴로 둘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노이아의 집무실과 같은 곳에 이르러 다이아나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은 노이아는 일단 자신의 소개를 했다. "자애와 치료의 여신 세레스님의 종 노이아라고 합니다." "저는 다이아나라고 불러주십시오" 노이아는 다이아나에게 자리를 권하고 마주 앉았다. 세레스 신전의 고위신관급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데, 다이아나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조차 없었으므로, 눈앞의 이 여성은 분명히 새로 신관이 되려는 이가 분명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신앙을 키워오다가 신전의 신관이 되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만, 단 번에 고위신관급 이상의 신성력이 내려진 일은 없었다. 허나, 눈 앞의 여인은 신성력의 측정이 민망할 정도로 이미 증표를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죄송하지만, 로브를......" "아!" 그제서야 자신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다이아나는 얼른 모자를 벗었다. "헠!" 어찌된 일인지 노이아는 다이아나가 얼굴을 드러내자, 고위신관다운 품위는 다 제껴놓고 그야말로 입을 따악 벌리고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렸던 얼굴을 드러낸 여인은 여인과 소녀의 중간 정도의 모습이랄까. 일단 눈에 들어온 것은 특이한 색을 지닌 머리칼이었다. 금빛이 드문드문 뿌려진 은빛의 머리카락은 마치 스스로가 내뿜는 듯한 은은함을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든 소녀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고도 맑았다. 그리고 그 눈이 자리잡고 있는 얼굴의 모습은...... "이럴수가~!" 약간 표정이 굳어지는 - 다이아나는 사람들이 심지어 엘프마저도 자신의 얼굴만 보면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 다이아나를 앞에 놓고 신관은 자꾸 감탄성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 감탄성이 결국 놀람의 표현인데 왜 놀랐는지 본인만 이해를 못하니 문제가 좀 있지만...... 그리고, 노이아는 다이아나의 미모에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고위신관인 그가 약간의 동요를 일으킬 정도로 여인의 미모는 뛰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저,,,, 제 얼굴이 이상한지요?" 결국 참다 참다 못해 다이아나가 질문을 던지자, 제정신을 차린 노이아가 엉뚱하게도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려앉으면서 무릎을 꿇었다. "여신의 분신이십니까?" "네?" 그랬다. 신들의 형상은 신전의 조각 등으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특히 대신관이 바뀔 때마다 강림하는 세레스 여신의 경우 상당히 구체적인 성화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고위신관급인 노이아는 여신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눈앞의 소녀의 이목구비가 여신과 너무나 닮아 있어 기절할 듯이 놀랐다. 다만, 여신의 머리카락이 순수한 황금빛인데 비해, 눈 앞의 소녀는 은발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만이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하지만, 얼굴 모습이 여신님의 형상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된 다이아나였다. 아름다운 자신의 어머니를 - 설령 아름답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어머니이므로 - 닮았다는 말에 갑자기 기분이 상승했지만, 어머니에 비해 상당히 평범(?)하다고 착각해 온 다이아나는 나중에 거울이라도 구해서 심각하게 얼굴을 들여다 보기로 작정했다. 실제로, 변한 모습을 어머니가 보여줄 때에는 바뀐 머리색과 눈 색만 대충 봤을 뿐이고, 그 전에 다희로 있을 때조차 앞머리 안올리 제 모습이 자신도 잘 기억이 안날 정도였으니까. 그거야 나중에 할 일이고, 지금 당장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눈 앞에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단호하게 자리를 권하는 다이아나의 모습과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노이아는 황송하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노이아님, 저는 고귀하신 세레스님의 분신이 아닙니다. 다만, 제 어머니께서 신관은 아니셨으나 상당한 신성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그 영향으로 미천한 제게도 자애의 손길이 미친 듯합니다." "어머님이라구요? 그럼 그 분은" "어머님은 이 세상에 안계십니다." "아,,, 그렇군요" 가능하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다이아나는 교묘하게 진실을 말했다. 다이아나는 세레스의 분신 - 여기서 분신이란 화신의 의미를 가진다 - 이 아닌 유스테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고, 세레스는 신관이 아니지만 신성력이 있다. 다이아나의 신성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세레스는 지상계가 아닌 천계에 거하고 있으니, 결국 거짓말은 하나도 하지 않은 셈이다. 노이아는 자신보다 아니 어쩌면 대신관보다도 높은 신성력을 소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눈 앞의 소녀의 설명에, 좀더 캐묻고 싶었으나, 일단 자제했다. 무엇보다도 다이아나는 더이상 말하기 싫다는 단호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고, 신관들은 자신보다 신성력이 강한 존재에 대하여는 상당히 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듯이 표정이 바뀌는 노이아를 보고 있던 다이아나는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일단 신전을 찾은 용건을 꺼내기로 했다. "저, 신관 인증이 되겠습니까?" "...네? 아, 네. 당연히 됩니다. 일단 제가 느끼는 것만으로 고위신관으로 증명 발급이 가능하십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고위신관이기 때문이 이 곳에서는 그 이상의 판별을 하기 어렵습니다. 대신관님이 기거하시는 곳에 가시면 최고위신관의 자격을 심사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 잘되었네요. 그럼 고위신관으로 등록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저... 대신관님을 만나뵙지 않으시렵니까?" "저, 일단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당연히 찾아뵈야지요" 이후에도 노이아라는 대신관은 몇 번에 거쳐 다이아나에게 이런 저런 권유를 했지만, 다이아나가 그냐말로 귀신같은 화술로 미끄러지듯이 피해버렸기에 별 소득이 없었다. 신관이 되는 절차 자체가 신성력의 증명, 그 이상은 아무것도 강제할 수 없었기에 노이아로서도 별 수가 있을리 없었고, 속으로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다이아나는 새로 발급된 신관으로서의 신분증에 해당하는 목걸이를 지급받고 신관 명부에 이름이 기재되는 절차를 거친 후 유유하게 신전을 떠나 버렸다. 덕분에 이후에 쏟아진 다른 신관들의 질문과 미리 연락을 보내놓아 목을 길게 늘이며 기다렸던 대신관측에도 그다지 많은 정보를 전하지 못했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모습이 여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얼핏 내비치면서 은연중에 그 부분에 대한 침묵을 요구했고, 노이아는 소녀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에 그 부분을 거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세레스의 신관들 사이에서는 여신의 은총을 크게 입은 '성녀'가 대륙을 여행한다는 소문만이 무성하게 퍼져갔다. 생각보다 빨리 볼일을 마친 다이아나는 시루스가 건네 준 보석을 처분한 돈을 가지고 잡화상처럼 보이는 가게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별 흥정도 없이 주인이 원하는 값을 치르고 거울을 사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여관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시루스는 서너 시간만에 돌아온 다이아나가 급하게 노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이닥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급한 와중에도 쉬고 있을 레아에게 방해가 될까봐 시루스의 방으로 들어간 다이아나는 방문을 닫기가 무섭게 로브를 벗어던지고는 의자엔 털쩍 앉아 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런 느닷없는 행동에 놀란 것은 당연히 시루스였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평소의 사려깊은 행동은 어디로 갔는지, 거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온갖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후 갑자기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다이아나 때문에 시루스는 얼굴이 벌개 졌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저 제 얼굴 어때요? 예뻐요? 시루스는 엘프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요" 생각해 보라. 안그래도 바라보기 힘들정도로 예쁜 여자가 닿을듯 말듯 얼굴을 들이대고 눈을 굴려가면서 저러한 질문을 한다고 하면...... 시루스는 갑자기 피가 몰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쩔쩔맸다. 그러자, 다시 자기 자리에 털푸덕 앉은 다이아나는 다시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내 눈이 잘못되었나? 내가 보기엔 이 정도면 예쁜거 같은데...... " 혹시 자신이 그 옛날 들었던 '공주병'에라도 걸려서 자아도취에 빠진것일까 하고 갸우뚱거리는 다이아나였다. 거울로 들여다 본 자신의 얼굴은 확실히 어머니를 닮았다. 고로 충분히 예뻤던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얼굴만 보면 깜짝 놀라는 이 엘프는 어찌된 것이냔 말이다. 한편 인간보다 청각이 예민한 시루스는 이 중얼거림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은 가식적인 겸손을 표방하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예의'라고도 하지만, 검술을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이 자신은 아직도 초보라도 한다거나 현자라 일컫는 이들이 스스로를 바보로 칭하거나. 그 중에서 가장 속보이는 경우가 지가 예쁜 줄 잘 알면서도 입끝으로는 자신이 평범하다 혹은 못생겼다고 말을 해서 다른 이들이 이를 부정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여심이라 하겠다. 하지만, 눈 앞의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정말 '자각'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후, 도대체 여태 어떻게 살아온 것이지......' 엘프들만 모여 사는 곳에 간다면, 적어도 외모로 인해 크게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저 나이가 될 정도로 자신의 외모를 자각하지 못했다는건은? 혹시 신전에서 내내 키워졌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보아도 여행에 익숙한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에 소녀는 세상사에 대하여 달관한 듯한 연륜을 풍겨내고 있엇다. 절대 물정 모르고 꼭꼭 갇혀져 키워진 백치같은 순수함을 풍겨내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러운 것들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현자'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시루스의 머리속은 온갖 가설로 인해 복잡해졌다. 한편 시루스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안하고 계속 생각만 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이아나는 약간 심술이 났다. "시루스님. 그러니깐 저 안예쁘냐구요~! 한번 잘 보시라니까요!" 다시 한 번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 태세를 취하는 다이아나의 말에 퍼뜩 놀란 시루스는 다급하게 소리를 냈다. "아... 아름다우십니다." "흐음~!" 웬지 모르게 미심쩍은 표정을 떠올린 다이아나는 다시 질문공세를 했다. "그런데 왜 맨날 로브로 가리라고 그래요? 내가 그리 흉하게 생겨서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는 거잖아요. 이쁘다면서요? 그리고 보면 지혜도 그러더니....." 말하다가 중간에 혼자 흥분하고 지혜를 떠올리자 다시 우울해진 다이아나였다. 시루스는 마치 자신이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생각을 정리한 후 다이아나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는 왜 로브를 쓰고 다닐까요? 다이아나님이 보시기에, 제 외모가 흉한가요?" "네? 시루스야 물론 너무너무 잘생겼죠!!!" 이부분에서 눈을 반짝거리면서 시루스의 외모를 요리 조리 훑어보는 다이아나의 모습이라니. 만일 시루스가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의 수컷이었다면 아마 벌써 수 차례는 덮쳤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루스는 그 옛날 조선 여인네들이 허벅다리를 찌르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말을 이어갔다. "다이아나님은 지나치게 아름다우십니다." "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인간이란 종족들은 욕망에 상당히 약하죠. 물론, 모두 다는 아니지만, 레아님의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금방 적절한 실례를 찾아낸 시루스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정확하게 요점을 말했다. 외모에 둔했다고 하지만, 말귀를 못알아들을 다이아나는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수 년 전 직접 겪은 일까지 떠오르자, 시루스의 '배려'가 충분히 납득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죄 없는 엘프의 혈관에 피가 참 많이도 흐르게 만든 작은 헤프닝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다이아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에 대하여 자각을 한 사건이기도 했다. 시루스는 약간 어색해진 방 안의 분위기도 바꿀 겸, 다이아나가 자리를 비운 동안 생각했던 화제를 꺼냈다. "저,, 다이아나님. 마법공부를 시작했으면 하는데......" 워낙 하루종일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다보니, 그 점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다이아나였다. 시루스는 다이아나가 마법을 익히면 여러 모로 편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만일 마법사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신성력과 마력이 충돌한다는 이론의 허구가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500여년 전에 '치료의 손'이라고 불리던 한 사람에 의해서 신력과 마력의 공존이 가능함이 밝혀진 것이다. 사실 이 또한 세레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꽤 높은 수준의 마법사였던 히포크리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이 인물은 20대에 3써클 마법사가 되었으며, 30대 후반에 이르러 5써클까지 마스터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가 뒤늦게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이 불치로 일컬어지는 병에 걸렸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거주하던 곳이 하투아 제국의 동쪽 끝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세레스 여신의 신전을 찾은 이들은 고위급 신관의 힘이 필요하다는 무력한 대답을 들었다. 현대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지만 당시 하투아 제국과 그 아래 위치한 시우스 제국은 국경 분쟁중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 하투아제국에도 고위급 신관은 물론 최고위급 신관도 있었다. 헌제, 이 두 나라의 국경 분쟁에서 양 국의 신관들이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의 한 역할을 하는 것 - 세레스 여신의 신관들의 신력으로 인해 부상병들이 다음날 다시 투입되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 을 보다 못한 여신이 대신관에게 내린 신탁으로 인해 대륙 동쪽의 고위급 이상 신관들은 모두 중앙5국 내의 대신관 휘하로 귀환했던 것이다. 물론 양 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아우성을 쳤으나, 결국 똑같은 조건에 여신의 신탁이라는 대꾸가 있는데 감히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히포크리스는 사랑하는 여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하다 가망이 없어지자, 여신의 신전에 들어앉아 무려 100일 낮밤을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감동한 여신이 그에게 축복을 내렸고, 그는 그러한 여신의 뜻을 받아 연인을 살려낸 이후에 평생을 세상을 돌면서 사람들을 살려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결국 그 때까지 상식으로 알던 마법력과 신성력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공부 방향때문이었다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평생을 신앙에 정진하거나, 마법에 정진해도 쉽지 않은 일인지라, 그 누구도 마법과 신성력을 함께 소유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힘 - 마법 - 이 강해지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신성력을 소유한 채로 마법을 배웠던 이들은 오히려 신성력이 감소하거나 없어지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마법을 먼저 배운 이들은 마법만 공부해도 웬만한 재능과 노력으로는 진전을 얻기 힘들었기에, 신앙심을 쌓을 여유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야기를 주욱 늘어놓은 시루스는 다이아나에게 마법을 배움으로써, 신성력의 약화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사항으로 나열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다이아나라면 금지되다시피한 이 두 가지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시루스였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시루스는 본격적으로 마법 공부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는데, 들려온 다이아나의 대답은 참으로 엉뚱했다. "음 먼저 시루스님이 저한테 말을 놓으셔야죠" "네?" "제자에게 존대말을 하는 스승이 어디 있어요?" "......" "그러니까~~ 다이아나~ 하고 그냥 부르세요. " 평소답지 않게 애교까지 섞어가면서 시루스를 궁지로 몰아넣는 다이아나는 사실 시루스를 통해 강사범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닫혀진 차원'의 기억에서 가장 아쉬워 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좀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천사의 집의 몇몇 언니와 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심지어는 원장아버지께도 어리광을 부리거나 한 기억이 없었다. 강사범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받기만 하고 준 것은 없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시루스와는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자신의 '스승'이 될 존재였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좀 더 친근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한 터였던 것이다. 물론, 불행히 그 실행의 첫번째 대상이 된 - 실제로는 첫번째라 할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오크마을에서, 그리고 부모님을 만나면서, 심지어 레아에게도 예전같으면 취하기 힘든 태도를 이미 보여주었으니까. 시루스의 경우는 분명히 좀 친근하게 접근한 것 같은데도 워낙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지라, 다이아나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관계였는데, 마침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럼 제가 호칭을 바꾸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스승님이 좋겠죠?" "앗, 제발 그렇게는...... 제가 정식 스승도 아니고, 제 생각에는 진정한 스승님은 유스님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 분도 좋아하실 겁니다" 다이아나와 만난 이후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왜이렇게 힘든지, 시루스는 진땀을 흘리면서 거부했다. 스승님이라는 호칭 자체도 부담스러웠지만, 그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는 웬지 나이 든 사람을 가리키는 듯해서 더더욱 거부감이 생겼던 것이다. 이미 시루스의 마음은 어디 어디로 기울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성이 자신을 '아저씨'라든가, '스승님' 하는 식으로 높여 부르면 어쩐지 싫지 않은가? 아무튼 다이아나의 깜찍(?)한 강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시루스님은 너무 딱딱한데...... 흠... 가만있자, 레아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니까, 그럼 시루스 오빠는 어때요?" "네?" 갑자기 급진전해버린 호칭에 이제는 정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연륜과 경험을 자랑하던 한 엘프는 갑자기 돌진해서 자신의 팔 한쪽을 붙잡고 "시루스 오빠~! 오빠~! " 하고 되풀이하는 알 수 없는 미모의 소녀에 의해서 그대로 굳어져 버렸던 것이다. 결국 어떻게든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승낙을 했으나, 자신을 반말로 부르기 전엔 팔짱을 풀 수 없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다이아나에게 밀려 울며 겨자먹기로 말을 낮추고야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시루스가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인간종족만큼 다양성을 소유한 종족은 드물었다. 엘프들이 개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선악에 있어서 인간만큼 예측하기 힘든 종족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동료를 삼는다면 가능하다면 엘프를 추천할만한 일이다. 물론 그들의 사곡방식을 먼저 이해해야겠지만. 더군다나, 다이아나 자신도 시루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이아나를 바라볼 때, 그의 눈은 참 따스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루스는 다이아나를 보호하려고 노력했고, 그녀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남성을 싫어하는 여성이 있다면 약간 특이한 것이 아닐까? 본론과는 상관없는 긴 실랑이가 이어진 덕분에 결국 둘은 저녁을 먼저 먹은 후에 첫 공부를 하기로 했다. 옆 방 문을 열어보니 레아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이아나는 레아에게는 먹을것 보다는 휴식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저녁식사를 시루스 방으로 주문했다. 다이아나로서는 다시 로브를 뒤집어 쓰고 식사를 할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로브를 입고 있으라는 시루스의 주의에 이번에는 순순히 로브를 뒤집어쓰는 다이아나였다. 실상 시루스는 정상이 아닌 듯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다가 자신이 다이아나에게 생각보다 크게 끌리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나마 다이아나에게 주문과 배달을 핑계로 - 종업원이 들어올 것이므로 - 로브를 입혀놓자 두근두근을 넘어서 쿵쾅거리던 심장이 약간 진정되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식사를 차려놓고 종업원이 나가자 마자 신나게 로브를 벗어놓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어떻게든 그 영향력에 대하여 면역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했다. 다이아나가 시루스의 지도에 따라 마법의 근원이 되는 마나를 느끼기 위해 한창 집중할 무렵 - 무술을 할 때에도 정신수련을 위한 참선은 늘 했기 때문에 집중력은 상당했다 - 마을 내에서는 두 명의 용병이 다급하게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장을 보고 있었다. 하크와 티론은 용병단에 들러 탈퇴를 신청했다. 이들의 계약기간은 이미 몇 번 연장된 상태였고, 이런 외곽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으므로 이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이는 몬스터와의 전방전투에 지나치게 장기간 묶여있던 용병들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하자 용병길드 자체에서 내놓은 규약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외곽지역의 계약은 초기2-3년의 의무기간을 채우고 난 후 재계약으로 연장할 때에는 특별한 이유 - 토벌 중이거나 전투중일때 - 를 제외하고는 용병 당사자의 의지로 인한 해약이 가능했다. 이 마을에서 하크와 티론은 상당히 유명한데다가 가장 오래된 용병들에 속했다. 이들의 실력을 아쉬워하던 용병단장이 몇번을 완곡하게 붙잡았지만, 워낙 단호한 이들의 태도에 할 수 없이 탈퇴를 허락했고, 둘은 바로 용병길드에 들어 자신들의 해약사실을 고지하고 자유용병으로 새로이 등록했다. 그리고는 곧곧의 가게를 다니면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바쁘게 사 댄 결과 의외로 일을 일찍 마쳤던 것이다. 사실 다이아나가 준 시간은 하루가 온전히 남아있어 서두를 필요가 없이 다음날 하면 되었을 일을 굳이 미리 하느라 헉헉대면서 돌아다닌 둘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주 가던 주점에 앉아 맥주를 시켜놓고 티론이 말문을 열었다. "이봐 하크" "왜?"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 "그건 나도 그래" 둘 다 하고싶지 않은 말이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들 둘 만의 자리에서는 달랐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던 이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들의 행동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그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뭔가" 이번에는 하크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엘프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분의 외모는......!" "말도 말게나. 으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다 돋는것 같네!" "마치 여신 같았지?" "응" 둘은 다이아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정이야 어쨌건 자신들이 한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치료한 다이아나. 레아에게 잘못을 한 빚이 있다면, 사실 다이아나에게는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몸과 정신을 한꺼번에 치료해 준 데다가, 죄책감을 어느 정도라도 잊을 수 있게 여러 배려를 해준 이가 아닌가! 내용만 봐도 이러한데, 그녀의 미모까지 합해지자 둘의 마음 속에서는 다이아나가 정말 여신이라도 된 것처럼 신비하고 신성하게 느껴졌다. **************************************************************************** - 그의 근황 눈 앞의 반려를 놓치자 에디우스는 급기야 이성을 상실했다. 만일 그가 냉철하게 판단했다면, 일단 유스테우스의 레어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손에 잡힐뻔한 반려를 놓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비우스는 아들녀석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자신에게 죽일듯이 덤벼들자, 황당한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 드래곤으로서는 드물에 이 두 부자지간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자녀들이 헤츨링 시기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독립을 시키고, 그 이후로는 전혀 별개의 개체를 대하듯이 했다. 하지만, '반려를 위한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성룡이 된 이후로도 이 둘은 내내 동거하면서 함께 지냈고, 덕분에 특이한 부자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아무리 에디우스가 화가 나서 막무가내로 덤볐더라도 드래곤의 힘이란 같은 종족 사이에서는 특히 나이에 비례하게 마련이다. 1800살 정도 먹은 에디우스가 이미 6000살이 된 고룡급의 하비어스를 어찌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다만, 아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하비어스가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죽어라 막느라고 흘린 땀방울만큼은 적지 않았다. 결국 발악하는 아들을 겨우 잠재운 하비어스는 그 원인이 다이아나에게 있으리라 짐작했다. 실제로 아들을 동요시킬 원인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이... 이런!" 아들이 잠들어 있는 사이 문제를 해결하리라 작심한 하비어스는 유스테우스의 레어 안으로 이동이 안되자 당황했다. 결국 레어의 근처로 이동을 했지만, 근방에 강하게 쳐진 결계마법을 푸느라 결계 속에서 한 참이나 헤매어야 했다. 그가 결계마법을 거의 해지할 순간 주위를 옭아매고 있던 약한 기운이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스테우스가 자신이 건 마법을 직접 해지했던 것이다. 씩씩거리면서 유스테우스의 레어로 쳐들어간 하비어스는 다이아나가 이미 떠났다면서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를 보고 차마 결심한 대로 다그치지 못했다. 방안 한 가득 '보물'을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그 앞에 주저앉아 눈을 벌겋게 하고 애써 눈물이 떨어질때마다 심호흡을 하면서 슬쩍 닦아내는 모습이라니! 결국 따지러 간 하비어스는 위로만 실컷 하고는 그래도 소득이 없지 않아, 다이아나가 간 마을을 알아내고 신이나서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위치를 알자 황당해했다. 그녀가 있는 마을은 자신이 사놓았다가 내팽개치고 그녀를 따라 나섰던 바로 그 저택이 있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저택을 떠나올 때, 아무 조치도 취한 것이 없다. 급한 마음에 그냥 사라졌는데, 다시 들어가자니 뒷처리를 할 시간이 아까왔다. 다이아나가 며칠이나 그 마을에 머물지도 모르는데, 사소한 일에 발목을 잡힐지도 모르게 생겼으니. 결국 다시 한 번 사이좋게 머리를 맞댄 이 부자는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느긋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 바가 있었는지 다이아나의 귀걸이에 걸려 있는 추적마법의 코드를 유스테우스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행적을 놓칠 염려는 없으니,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접근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납치 중앙산맥(센트리아 산맥)의 남쪽에는 5개의 왕국이 하나의 연합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은 원래 하나의 국가였으나, 왕권이 약화된 시기에 분열이 되어 5개의 왕국으로 갈라졌다가, 제국들의 침략으로 인해 다시 연합국가로 재탄생한 곳으로, 대륙의 모든 문화의 중심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른 제국들에 비하여 병력 면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이 연합국 - 군사적인 면에서 - 이 아직도 건재한 까닭은 뭐니뭐니 해도 주신을 비롯한 최고위신들의 본단이 되는 신전이 모두 이 안에 밀집해 있다는 것과 대륙의 대부분의 길드들의 중앙본부들 또한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는 점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 중앙5국연합은 근래에는 연합국이라고는 하지만, 수백 년 간에 걸친 왕족들의 혼인으로 인하여, 하나의 왕족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지엽적인 특성을 가지면서도 연합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도록 하나의 제국이나 다름없는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 칼라이덴의 영토였던 곳에 위치한 중앙5국연합의 수도 내 왕성에서는 현 연합제국의 황제인 레파르토 라 카오시아 쥬이도스라는 거창한 이름의 중년인과 황태자 그리고 이트리아, 멘피스, 칼라이덴, 데이론, 가우스로 구성된 5개 왕국의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들의 회의는 궁전마법사 중 유사이래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8클래스 마스터 피하르 레 인슈타인이 설치한 결계로 둘러싸인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투아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거야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습니까?" "문제는 오히려 시우스제국입니다." "흠 그 요녀가 기어코 사단을 내는군" "이대로라면 하투아가 우리쪽을 넘볼 확률이 높습니다" "시우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지만, 시우스는......" 하투아제국은 대륙 동북쪽의 광활한 대륙을 소유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국토가 넓다고 해도 산맥으로 둘러 싸여 있는 형태이다 보니, 남쪽으로 위치한 시우스의 영토를 넘보는 일이 허다했다. 지리적으로 시우스는 중앙5국과 하투아제국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맡고 있는 형태였고, 시우스가 버티고 있는 한 하투아가 감히 중앙5국까지 넘볼 수는 없었다. 반면에, 국토의 삼면이 산맥으로 싸여있는 환경의 영향으로 강력한 기사단과 병력을 소유한 하투아가 있는 한 시우스 제국 또한 중앙 5국을 넘볼 수 없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균형이 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하투아는 20대에 등극한 젊은 황제 자신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최근 10년간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국토를 평정하여 유사이래 가장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반면 시우스 제국의 경우 어린 후손을 남기고 요절한 전대 황제의 황비를 중심으로한 외척 세력이 9살의 어린 황제를 앞으로 내세워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고, 외척들의 전횡에 맞서 전대 황제의 동생인 공작이 하나의 세력을 일으킴으로써, 내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우스제국의 현재 실권자는 28살의 젊은 미망인인 로스테아 드 카시우스, 희대의 미모를 지녔다는 그녀는 어린 아들을 황제로 내세우고 온갖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대륙 전체에 파다했다. 일부에서는 30대의 젊은 황제가 요절한 까닭이 그녀의 음모에 의한 타살이라는 소문도 사실처럼 퍼져있는 실정이다. 그런 그녀와 황제의 외가쪽의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전대 황제의 동생인 아들레앙 데 카시우스였던 것이다. 시우스 제국의 문제는 제국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시우스와 하투아의 국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급격하게 한 쪽으로 기울 경우에는 중앙5국마저 하투아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회의는 바로 그러한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허나, 그들의 국력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어찌 감히 그들이 신전들을 농단하겠소?" "하지만, 그것만을 믿고 있기엔 카이덴의 야심이 너무 큽니다." 카이젠 드 하티아스, 현 하투아의 황제이며 소드마스터이기도 하다. 속설에 의하면, 그는 대륙이 언젠가 자신의 손아래 통일될 것이라고 이미 10살 때 부황의 앞에서 단언했다고 한다. 물론 어린 마음에 한 치기어린 행동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들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회의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별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다들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지쳐 있을 무렵 현재 5국 연합이 재상직을 맡고 있는 에하르트가 발언을 요청했다. 에하르트 레 다이온은 공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는 데이론의 왕족이기도 했다. 그의 지혜는 다른 참석자들도 인정하고 있던 차라, 어떤 결론이던 간에 답변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다들 귀를 귀울였다. 한편, 에하르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실컷 결론없는 말들을 떠들어 지치게 해놓아야 자신의 의견일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제를 깔고. "하투아를 그래도 둘 수도 없고 시우스를 돕는 것도 해결방법이 안된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바로......" 에하르트의 폭탄같은 발언은 여러 참석자의 언성이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에 의해 제안의 타당성을 제시하는 에하르트의 의견을 결국 회의의 결론이 되어버렸다. 이미 결정난 사항에 대하여 각자 배당된 일거리들을 들고 각국 대표는 자신들의 왕성으로 귀환했다. 이미 재상과 의견일치를 보고 회의를 주도한 레파르토 라 카오시아 쥬이도스는 늘상 얼굴에 감돌던 여유있는 미소조차 사라진 채, 에하르트와 둘만의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 칼라임 제국의 수도 "흠, 그렇단 말이지?" "어떤 결론이 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이롭다 할 수 있습니다" "하투아가 서쪽을 욕심내지는 않겠는가?" "아무리 하투아의 국력이 강하다고 해도 시우스와 5국연합을 모두 상대한다는 것은 힘듭니다. 만일 전쟁에서 이긴다는 최악의 가정을 한다고 쳐도, 일단 본국과 우리의 거리를 생각해볼 때 수십 년의 준비가 더 필요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서쪽을 노린다 함은 우리와 하이센이라는 양대제국을 한꺼번에 적으로 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카이젠이라 해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흠.. 그것도 그렇군. 하긴, 아무리 카이젠 자신이 마스터라고 해도 우리도 뒤질 건 없지 않은가? 후훗.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들이 사실을 알면 뒤로 넘어갈 것이야! 하하하!" "그렇습니다. 실로 제국의 홍복입니다" 무엇이 그리 흐뭇한지 얼굴 한가득 웃음짓는 황제를 바라보며, 칼라임 최고의 두뇌라는 마르띠앙 공작은 덩달아 소리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게 이 둘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했던 장본인이 대전안으로 들어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20세는 넘긴 듯한 젊은 청년은 상당히 드문 보라색의 머리카락에 현 황제와 똑같은 진록색 눈동자를 지녔다. 큰 키와 잘 다듬어진 체격의 곱상하다기보다는 남자다운 선을 가진 얼굴로 인해 나이보다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너무 격식을 차리진 말거라. 어차피 식구들간에....." "뵐 때마다 늠름해 지시는 것 같습니다" 황태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공작과 똑같은 눈매의 황제. 대전에 들어선 청년은 제국의 황태자 리카르도였다. "백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공작은 황태자의 외삼촌이었던 것이다. "여행은 잘 다녀왔는가?" "예, 역시 문화면에서는 대륙 최고라 할 수 있더군요." "흐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데, 아버님도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마침 그 이야기를 하던 중입니다. 황태자저하" 신분을 감추고 하는 여행을 즐기는 황태자는 연합국에 갔다가, 어수선한 소문을 듣고 황급히 귀국했던 차였다. 공식적인 방문이라면 모를까, 상황이 급박해진다면 귀찮을 일이 생긴 것을 우려한 수행원들의 걱정과 우려 때문이다. 황제는 아들이 못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전해들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었다면서?" "아직 미흡합니다. 그저 약간의 진전을 보았을 뿐입니다" "겸손의 말씀이십이다. 저하. 대륙에 소문난 카이젠 황제도 20대 후반에야 도달했다는 소드마스터입니다. 이는 제국의 복이며, 주신님과 헤파이토스님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암, 그렇구말구! 하하하하!" 자못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황제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얼굴에는 웬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 감돌았다. 그리고 다음날...... "송구하오나, 황태자 저하의 여행벽이 다시 도진 듯 하옵니다" 황제는 수행을 떠난다는, 그러나 동쪽으로 가지 않을테니 염려 말라는 설명이 곁들인 쪽지 한 장을 달랑 들고와 납죽 업드려 전해지는 보고에 전날 황태자의 표정을 상기했다고 한다. **************************************************************************************** "저..." "언니!" 단호하게 말하는 다이아나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선이 마주치자 레아가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낸 것이다. "언니.. 저, 저택에 좀 다녀올게요" "응. 아무래도 가져올 것이 있겠지?" "네. 그리고 알고 지내던 분들에게도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고.... 신세진 분들이 있어서요" "아침은 먹고 갈꺼지?" "네 그럴께요" "알았어. 어차피 내일 떠날 거니까 천천히 볼일 보고 오려무나" "네" 간단하게 얼굴과 손을 씻은 두 사람은 시루스를 불러내어 - 이 시점에서 다이아나는 문을 두드리면서 시루스오빠라고 소리쳤기 때문에 불려나온 로브 밑으로 보이는 시루스의 피부는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이아나는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면서, 아직도 수줍어하는 레아를 놀리기도 하고, 시루스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면서 즐거운 아침식사를 했다. 어디까지나 다이아나의 관점에서 그랬다는 것이지 시루스나 레아가 편하게 식사를 했냐고 묻는다면, 레아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서 긍정, 시루스는 부정이었다. 밥을 먹고 바로 떠나려는 레아에게 다이아나는 억지로 약간의 돈을 쥐어주면서,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주고픈 만큼 나누어주고,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말했다. 물론 레아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방안이라는 장점 - 로브를 벗고 있는 다이아나의 모습은 그 자체가 남녀를 불문하고 무기라고 할 수 있다 - 을 살려 애교작전에 울먹거리면서 "난 네가 친동생 같은데... 넌 안그런가부지? 엉엉, 레아가 나를 싫어하나봐!" 하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수법 - 그야말로 지혜가 다희에게 많이 써먹던 수법이건만, 눈물도 안나오는 거짓 울음에 레아는 그야말로 당황해서 오히려 더 울상이 되었다 - 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방으로 온 덕분에 그 모든 일들을 목격한 시루스는 레아가 억지로 돈을 받아쥐고 나가면서 방문이 닫히자마자 의기 양양한 표정으로 돌면한 다이아나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한편 다이아나는 '이거 해보니깐 무지 재밌다. 흠흠 종종 활용해야겠군'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어서, 눈치 빠른 엘프는 갑자기 온몸에 끼치는 미묘한 느낌에 더더욱 불안에 떨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둘 다 방을 빠져나온 레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한 것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수줍고 선량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아는 방 문을 닫자마자 돌변한 듯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여관을 나섰다. 시루스는 아침식사 이후에 다이아나가 이미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두,세 주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하여, 마나를 모으는 요령을 가르치고 연습을 시킨 뒤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무작정 여관을 나섰다. 사실 산책이 하고싶었다기 보다는 긴 속눈썹을 내리 깔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다이아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괜히 심장만 쿵쾅거렸기 때문에 더이상 한 방에 있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산란해진 머리를 달래기 위해 별 목적지 없이 걷던 엘프가 다시 다이아나의 방을 찾았을 때, 방은 비어 있었다. 마법에 열중한 모습으로 보였던 터라 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답답해서 밖으로 나갔거나 신전에 갔을꺼라고 단정짓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을 시루스는 이후로 오랫동안 후회했다. 다이아나에게로 자꾸만 신경이 쏠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녀답지 않은 - 아무 연락 없이 나가는 것은 다이아나의 세심한 성격상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지만 - 행동을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말도 안돼!!!" 추적신호를 이용하여 다이아나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다이아나가 마을을 떠나는 시기를 기다리던 두 부자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신호가 끊겼던 것이다. 허겁지겁 유스테우스의 레어로 달려갔지만, 자신들보다 더 질린 안색의 유스테우스 또한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다만, 마법을 해제한 이가 적어도 7클래스 이상의 마법사이거나 엘프나 드래곤일 것이라는 것 밖에는. 유스테우스로서는 지상계에 직접적인 간섭을 할 수 없는 세레스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힘들었고, 그저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다이아나의 행적을 찾기 위해 하비어스의 협력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유스테우스조차 다이아나의 행적을 모른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하비어스와 에디우스는 여러 상황을 가정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끙끙 앓기 시작했다. 밤이 늦도록 다이아나가 돌아오지 않자 시루스는 문득 불안해졌다. 다음날 출발 시간을 묻기 위해 하크와 티론도 함께 기다렸지만, 다이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저택에 들르러 간 레아도 소식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시루스는 여관 종업원들에게 이리 저리 물어본 결과 레아로 추정되는 소녀가 자신이 나간 후에 다시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레아와 다이아나가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루스는 마을 지리를 잘 아는 두 용병을 내세워서 레아가 일했다는 저택으로 찾아가 보았다. 저택에는 새로 거처를 찾지 못한 하인 몇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약간의 돈을 주고 이들에게 레아에 대하여 물어 봤지만, 이름이나 인상착의를 설명해도 레아를 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시루스는 레아와 용병들간의 일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지면서도 이내 잊어버렸던 자신을 책망했다. 두 용병도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다이아나를 노리고 일어난 것임을 깨닫고는 억울한 마음과 걱정이 뒤섞여 어쩔 줄 몰라했다. 시루스도 레아에게 가장 큰 혐의를 두었으나, 혹시 둘이 같이 있다가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용병을 진정시켰다. 그러는 시루스 자신이 오히려 레아에 대한 의심이 굳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시루스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레아와 다이아나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레디아나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손에 들어온 다이아나를 보면서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마나를 모으는 수련을 하던 다이아나를 슬립마법으로 잠재운 후,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장신구들을 우선적으로 빼내어 따로 보관했다. 걸려있는 마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추적마법과 이동마법의 기운이 느껴진 귀걸이는 아예 브래스로 태워버렸다. 어차피 보석이나 장신구가 아쉬운 것은 아니어서, 마법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무늬의 반지 하나와 별로 비싸보이지 않는 목걸이는 그대로 남겨두고 몇 번에 거쳐서 자신의 레어로 이동했다. 특정 대상을 향한 복수심은 오히려 평소보다 레디아나를 현명하게 만들었다. 레디아나는 다이아나가 사라지자 유스테우스의 결계 밖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이 이동할 마을이 에디우스가 사들이 저택이 있던 곳임을 아는 순간 저택 내로 이동했던 것이다. 오며 가며 어느정도 마을의 지리를 알고 있었던 레디아나는 다이아나가 지나칠 수 밖에 없는 길을 골라 지나가던 남자 두 명을 현혹마법으로 끌어들인뒤, 은밀하게 조종했다.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도 모른척한 것은 레아가 미리 수작을 벌여놨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대단한 계획이 성공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이후에 모든 일은 일사천리였다. 어리석은 인간 여자는 의도적으로 변형시킨 머리카락과 순진한 인상에 - 원래 레디아나의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은 약간 어리기는 해도 성적인 매력이 풀풀 풍기는 모습이었다 - 깜박 넘어갔다. 인간의 여자에게 언니라고 부르면서 수줍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뒤에 있을 달콤한 복수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기에 가능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노력한 결과는 그야말로 달콤했다. 이제 다이아나의 생사는 레디아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이아나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오자 레디아나는 여러 가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다이아나를 자신이 직접 처리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신이 직접 다이아나를 없앤다면, 처벌은 아니더라도 세 마리의 드래곤과 불편한 관계가 될 터였다. 다른 두 마리야 어떻든 간에 에디우스에게 만큼은 절대로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무언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어차피 하잘 것 없는 인간이니, 인간들에게 맡기는 것도 좋겠지. 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에디우스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만들어주면 될꺼야! 그게 어딨더라?" 레아는 한참을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듯 급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은빛이 도는 팔찌 하나를 다이아나의 손목에 채웠다. "호오, 꽤 잘 어울리는군. 혹시 모르니까, 나라는 걸 모르는게 좋겠지" 레아는 다이아나가 깨어나서 자신을 보는 일이 없도록 다시 한 번 마법을 걸어 깊게 잠재우고는 잠든 다이아나를 가뿐하게 들쳐매고 레어에서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다이아나는 상당히 불편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나 수련을 하다가 잠든 것이 분명한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심결에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자신의 손과 발이 사슬로 묶여있음을 깨달았다. 불안감을 달래며 살펴보니 자신 말고도 몇 명의 소녀가 여기 저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엘프로 보이는 뾰족한 귀를 가진 여성도 있었다. '뭐지 이건? 마치 인신매매범 소굴같군' 일단 주위에 있는 소녀 중 의식이 있는 듯한 이를 찾기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흑흑거리며 울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불편한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그녀의 주의를 끈 다이아나는 가까이 보이는 모습에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 상대방에게 실례라고 생각했으므로 - 애를 써야 했다. 12-3세로 보이는 소녀는 분명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처럼 옆으로가 아닌 머리 위쪽으로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수인족?' 다이아나의 예측이 맞았다는 증거를 보여 주듯이 소녀의 뒤로는 긴 꼬리가 보였고, 다이아나와 같이 손과 발에 채운 사슬 외에도 소녀는 개목걸이처럼 생긴 목걸이 하나를 더 차고 있었다. 어찌되었던, 일단 말을 걸어보려고 시도한 순간 '말이.. 말이 안나와' 입은 분명히 열리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여러 차계 시도했으나, 하다못해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한거지? 입과 혀는 분명히 움직이는데, 성대의 기능을 중지시킨건가?' 눈 앞에는 애써서 제 쪽으로 움직이더니 입만 빠끔거리다가 갑자기 움직임이 없어진 다이아나를 울다 말고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수인속의 소녀가 있었다. 레어로 돌아온 레디아나는 속이 시원했다. 아마 에디우스나 하비우스 등이 다이아나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 인간의 여자애는 철저하게 망가진 후일 것이다. 마법물품도 모두 제거되었고, 말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으니 자신이 하프엘프가 아니라고 주장할 방법도 없었다. 레디아나는 다이아나의 몸값으로 받아온 금화를 구석에 던져버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건 노예로 팔린 것 같은데......' 다이아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깨어난 후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두컴컴한 곳이라 확실하게 날짜를 세진 못했지만 대충 들여오는 식사를 보아서는 맞을 것이다. 주위의 소녀들이 모두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갇힌 지 얼마 안되어 알 수 있었다. 수인족의 경우, 전투형태로의 변신을 막고 주인에게 복종하게 하기 위한 목걸이가 엘프로 보이는 이들 중 일부에게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마법이나 정령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의도로 보여졌다. 아마, 자신의 팔에 채워진 팔찌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듯했다. 자신은 분명히 인간인데 이러한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미심쩍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할 방법이 없으니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기만을 바라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들여주는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움직이기 힘든 손발을 억지로 움직여 몸의 근육들을 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찌보면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형상이 되기도 했는데, 가끔 그런 모습을 스스로 깨닫고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남자가 한 수인족 소녀를 끌고 나갔다. 일정한 간격으로 주위의 소녀들이 하나씩 문밖으로 사라졌고, 다이아나도 비슷한 방법으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처음 다이아나가 옮겨진 방에는 덩치큰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슬이 풀린 다이아나가 미처 반항할 사이도 없이 여인들이 달려들어 버둥거리는 그녀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다이아나의 완력이 생각보다 세다고 생각했는지, 양팔의 사슬을 다시 뒤로 결박지어 놓고는 이런 저런 치장을 했다. '이거야 원 영화에 나오는 하렘에 팔려간 노예같군!' 다이아나는 어차피 반항해봐야 이 상황으로 뾰족한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자, 갑자기 얌전한 태도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굳이 눈에 띄어서 경계심을 자극해봐야, 나중에 정말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만 희박해질 뿐이다. 냉정을 되찾은 다이아나는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듯이 스스로의 마음을 깊숙히 파묻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돌아왔다. 왕따를 당하던 시절 자신에게 행해지는 모든 폭력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고 반응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미 각오를 해서인지 나풀거리는 원피스 같은 옷을 입고 끌려나간 곳이 관객을 모아놓은 듯한 큰 방에 마련된 단상같은 장소임에도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약간 간사한 표정을 하고는 '상품소개'에 열을 올리는 말도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다. "자, 다시 볼 수 없을만큼 환상적인 미모의 하프엘프입니다. 귀도 뾰족하지 않고 인간과 다를 게 없는데도 어떤 순종 엘프보다 아름답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하프엘프는 순종보다 오히려 더 드뭅니다. 더더군다나 이 정도의 외모라면, 아무리 비싼 값을 주셔도 후회하시진 않을 겁니다." 경매의 사회를 보는 듯한 남자는 이어서 아는 사람은 모두 알만한 하프엘프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희귀성을 제외하고라도 순종의 엘프보다 하프엘프는 인간의 노예를 소유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억제를 해놓지 않으면 곧잘 자결하고 마는 엘프는 소유한다고 해도 대부분 인형을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하프엘프라면 길들이기에 따라서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다. 거기에 남자의 손을 타지 않았다는 장점 또한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가격을 올리려고 신나게 떠들어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꽤 가격이 나가는 상품인 듯하다. 경매에 참가한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최상급의 노예에 다들 경매의 시작을 기다리는 듯 짜증스런 표정으로 끝날 줄 모르는 사내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사회를 보는 사내가 노리는 점이기도 했다. 초조해진 사람들은 경매가 시작되면 더욱 더 열을 낼 것임을 경험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30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사내의 말은 최초 경매가를 공지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된 것이다. '어라? 생각보다 작잖아!' 시루스의 말로는 보석 세 개를 300골드에 팔았다고 했다. 이 세계의 화폐단위에 대하여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물가를 느끼기엔 다이아나의 경험은 일천했다. 한국에서의 화폐단위로 환산하기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평민과 귀족들 사이의 금전감각의 괴리였다. 또한, 유스테우스가 챙겨준 보석은 아무리 작은 것이었더라도 상당한 가치가 있었음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보석 세 개와 자신이 같은 값이라는 생각에 웬지 속이 쓰렸다. 다이아나가 묶고 있는 여관의 하루 숙박비는 10실버이다. 1골드는 100실버에 해당하므로 10일간 여관에 투숙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1실버는 한국의 물가로 치자면 2,3천원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까?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숙박비로 보면 그렇지만, 한끼 식사의 가격은 실버의 아래 단위로 1실버 아래로도 있었으므로, 실버의 가치는 더 올라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1골드는 10만원 정도의 가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보석류나 사치품의 경우는 오히려 한국의 물가가 싸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경제 자체가 완전히 상하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즉, 귀족이란 계층은 골드를 생활의 단위로 한다면, 일반 서민들의 경우에는 한 달에 1골드 정도의 수입이 있으면 평균을 윗도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경제상태야 어찌되었던 싸게 나온(?)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았는지 어쨌는지, 다이아나의 경매가는 천정부지로 솟고 있었다. 처음에는 10골드 단위로 상승하던 것이 20골드, 50골드 단위로 흐름을 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1000골드를 넘어버렸다. 1000골드라면 능력있는 서민이 80년을 넘게 뼈빠지게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까 말까한 금액이다. 경매장에서의 기본적인 매너의 하나가 일단 불어난 금액보다 적은 액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800골드에서 900골드를 불렀다면, 그 다음 경매가를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1000 이상을 부른다. 그래서 경매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시점에 급격하게 가격을 높이는 것을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로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똑같이 1000골드가 현재가격이라고 해도 500골드에서 바로 1000을 부른다면 다음 사람은 1500을 제시해야 했으니까. 이런 경매가격의 법칙은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매라는 것이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자존심의 승부의 일환이 되기도 하여서 어느 날인가부터 이러한 규칙이 불문률이 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을 '명예'와 동일시하는 귀족들이 워낙 일반적인지라, 어떤 규칙보다 잘 지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규칙을 잘 이용하는 이가 항상 경매의 승자가 되기 마련이었다.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상황은 아니다. "2000골드" 1000골드에서 주춤하고 있어 낙찰이 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였는데 돌연 2000골드가 튀어나왔다. 1000골드 까지야 차근차근 올라간 것이다보니 신나게 너도나도 가격을 불러대었지만, 막상 천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무게는 상당했다. 웬만큼 부유한 귀족이라고 해도 절대 함부로 볼 수 없는 금액인데, 거기서 또 천이 늘어났으니 이미 경매는 끝을 본 듯 했다. 다이아나는 자신을 산 사람을 볼 수 있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목소리로 보아 남자라는 것과 그나마 목소리는 상당히 좋다는 것 밖에는. 그 남자는 그 동안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로브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벙어리 노예 다이아나를 사들인 남자는 그녀를 자신의 말 앞에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남자는 얇은 원피스 위에 다이아나가 그토록 지겨워했던 로브같은 것을 하나 뒤집어 씌운 상태였다. 이놈의 지겨운 로브는 끝까지 따라다닌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마차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때, 아마도 기사일 가능성도 있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팔에서 탈출을 시도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깨끗하게 단념했다. 일단, 자신이 있는 곳도 몰랐고, 지리도 알 수 없었다. 일단 말 위에서 뛰어내린다고 한들 말보다 빨리 달릴 수도 없을 뿐더러, 괜히 다리나 팔 한 군데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팔안에 안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남자는 잘 다듬어진 대로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다이아나는 로브의 모자가 너무 커서 시야를 상당히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앞의 것들만 대충 볼 수 있었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상당히 높은 담에 어울리지 않게 작게 나 있는 문이었다. 문으로 들어선 남자는 계속 말을 달려 꽤 큰 건물 앞에서야 멈춰섰다. '내가 멀미를 했었나?' 말도 생전 처음 타보는 것인데, 불편한 자세로 억지로 시각을 돋우어 신경을 쓰면서 끌려온 터라 속이 메슥거렸다. 누군가 달려나와 말고삐를 잡았고, 말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가볍게 다이아나를 끌어안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한 장면이 이랬을까나? 이건 완전히 영화 여주인공이잖아. 오늘영화출연 많이 하는군' 말을 달리면서 바람결에 그런건지 아니면 도착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출된 남자의 머리카락이 완전한 검은색임을 알게된 다이아나가 그야말로 속도 편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말이 되어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보니 이 쪽에서 완전히 검은 머리를 본 건 처음이네!' 갈수록 현실과 멀어지는 듯한 상념의 나래를 펴며, 그런 자신을 또 한편에서는 자각하고 기가 막혀하는 둥 혼자 머리 속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별로 쉬운 일은 아니었던가 보다. 며칠간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건만 의도적인 것이 분명한 부실한 식사와 - 자각 없는 노예가 배불리 먹고 체력 좋아지면 당연히 탈출을 꿈꾸지 않겠는가 - 긴장감 그 뒤로 이어진 익숙치 않은 말타기에 몸은 완전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결론까지 영화로군' 별로 우습지 않은 생각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영화속 여주인공처럼 혼미해져오는 느낌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어라? 이건 완전히 공주님 방이네~!' 누군가 자꾸만 귀찮게 건드리는 바람에 뜨인 눈으로 들어오는 방안 풍경은 그야말로 레이스 천지였다. 나름대로의 감상을 끝내기도 전에 처음 그녀를 깨운 손이 하나가 아니었음을 타의에 의해서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 여러 개의 손들이 그녀를 어디론가로 들고가더니 따뜻한 물 속에 텀벙 빠뜨렸기 때문이다. '나참 내가 그렇게 더러워 보이나? 왜 다들 못씻겨서 난리야?' 진한 향이 흐르는 욕조에 앉아 달려들어 몸을 씻기는 여자들은 손길을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다이아나는 바로 얼마 전에도 이렇게 달려들어 강제로 목욕을 한 기억이 떠올라 기가 막혔다. '뭐, 일단 얌전하게 있어보지. 그 많은 돈을 주고 샀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려고' 일단 몸을 구속하던 사슬은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거기에 이전과 다르게 - 그러니깐 경매장에 나서기 전의 상황 - 주위를 둘러싼 여인들은 주로 젊은 여자들이었고, 무식하게 힘이 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다 말을 못하나? 정말 그렇다면 주인 취향 한 번 특이하네'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한 여인이 탄성에 가까운 한숨소리를 냄으로써 이 생각이 틀렸음은 금방 밝혀졌다. 그런대로 얌전히 앉아 여인들의 목욕시중(?)을 받던 다이아나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곳으로 거침없이 손길이 옮겨가자 진저리를 치면서 그 손을 쳐내고 보란듯이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이봐이봐, 여자들끼리도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다구'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무사히 '순결'을 지켜낸(?) 다이아나는 연이어 또 들려져 욕조 밖으로 옮겨졌다. '에구, 나도 발 있는데...' 이후로도 한참동안 거의 풀코스인 듯한 마사지를 받고 의상을 입고 화장을 하는 동안 다이아나는 누군가 들으면 기가막혀 할 팔자 좋은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지루함과 사실은 조금씩 자라나는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명석한 머리의 소유자인 그녀가 지금 행해지는 일련의 행위들이 무엇을 위한 준비단계인지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다만, 그 생각을 떠올려봐야 불안감만 가중되었기로, 일부러 이런 저런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속으로 내뱉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공주 맞군!' 한 껏 단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 앞에 앉아서 지켜보던 다이아아는 결론을 냈다. 여인들은 다이아나의 손을 잡아 어딘가로 이끌었고, 끝도 없을 듯한 복도를 한참을 따라 걸은 끝에 당도한 엄청난 크기의 방문 안으로 그녀를 밀어넣고는 사라졌다. 들어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둘러본 방 안은 매우 넓었지만, 상당히 단순하게 꾸며져 있었다. 문 앞에는 탁자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 비슷한 의자들이 정면으로 난 넓은 창 아래로는 다이아나가 있던 방과는 다르게 단순한 모양의 커다란 침대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뒹굴어도 떨어지진 않겠군' 침대를 보자,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으로 자꾸만 상상력이 발동되었다. 애써서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현실을 도피하기엔 보여지는 것들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결국, 누군가의 그렇고 그런 상대로 찍힌 모양인데......' 입고있는 옷자락을 휙 올리고는 탁자 앞의 의자에 발을 올리고 동그마니 앉아, 이제는 뒤로 미룰 수 없는 결단을 해야만 했다. 이곳에서도 '얌전히' 행동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과연 그렇게 해야 할까? 고민을 마무리지을 새도 없이 그녀가 들어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문 쪽을 보니, 검은 머리의 남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남자의 눈도 검은 색이었다. 거침없이 다이아나의 앞으로 다가선 남자는 한동안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왔다. 3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미남이라고 보기엔 약간 거친 인상의 남자는 상당히 큰 키에 검은 색 일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한 손길을 피하려고 무의식적으로 앉아 있던 소파를 거꾸로 굴러 착지했다. 남자는 잠시 놀란 표정이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 얌전히 있어서 길이 잘 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다이아나가 나름대로 방어 태세를 하고 노려보자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했다. 뒷일이야 어찌 될 지 모르지만, 무기도 없는 남자와 단 둘이 일대 일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다가올 생각이 없는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그 복장으론 힘들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놀리듯이 남자가 하는 말에, 다이아나는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옷이 떠올랐다. 남자의 표정이 바뀌기도 전에 천 찢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퍼졌다. 다이아나가 옷 밑단을 힘을 주어 찢어버린 것이다. 옷감을 만드는 기술은 현대만 못했는지, 천은 의외로 쉽게 찢어졌다. 치렁치렁하던 치마단을 중간에서 없애버린 다이아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띄우며 남자를 쳐다봤다. 갑자기 치마를 끊어내는 소리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달려든 남자의 몸짓에 다이아나는 최선을 다해서 대항했다. 어느 정도 경계를 하고 있었으므로, 첫번째로 달려 든 남자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이어 몇 번 잡으려는 시도가 여러 방식으로 실패하자 남자는 조금 표정이 굳어졌다.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몸에서 마나의 기운이 갑작스레 내뿜어지는 듯하더니 다이아나는 어느 새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놀라운 힘으로 버둥거리는 그녀를 제압한 남자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처음 앉아있던 의자 위에 그녀를 내려놓고는 자신은 다시 맞은 편에 앉았다. "이름이.. 아, 말을 못하게 해놨나? 좀 답답하겠군. 일단 부를만한 이름이 필요하니.. 뭐라고 할까?" 남자는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는 것이 그야말로 이름을 생각하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제압을 당해 이제 끝이라는 절망감에 잠시 넋을 잃었던 다이아나는 의외로 남자가 자신을 얌전히 내려놓고 느닷없이 작명에 골똘한 눈치를 보이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좋았어. 네 이름은 이제부터 리아야" 졸지에 신이 작명한 이름을 무시하고 새로 이름을 받은 꼴이 된 다이아나는 기가 막히고 말문도 막혔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도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보아하니, 체술을 배운것 같은데, 특이하군. 하는 짓으로 보아 처녀인 것 같고... 그 장사치 말처럼 길들이는게 쉽지는 않겠는걸? 푸하하하!"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남의 얼굴 붉어질 말들만 뱉어 놓고 신나게 웃는 남자를 다이아나는 실컷 째려보았다. "시간이야 많으니 천천히 하지 뭐. 아 참, 여태까지 행동으로 보아 꽤 똑똑한 듯 싶은 듯해서 미리 말해두겠다. 말은 알아들을 수 있지?" 다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노예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 이 대목에서 다이아나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얼굴빛이 변했으나 - 그런 건 상관 없다. 네가 이종족이 아니라고 해도 전혀 상관 없다는 말이지. 네가 영리하다면 상황판단을 잘 하는 게 좋아. 아마 탈출을 생각하겠지?" 다이아나가 당황스러운 심경을 가리고 무표정으로 일관하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까보니 몸놀림이 상당하더군. 그런데도 아까까지는 얌전했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기회를 노리고 있을테지. 하지만, 네가 여기서 빠져나갈 가능성은 그야말로 전혀 없어" 남자가 다이아나의 지능과 무술실력을 파악한 것처럼 다이아나도 남자의 빠른 머리회전과 그 전에 보여준 무위에 놀라고 있었다. 다만, 그대로 굴복할 생각이 없었기에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속으로는 희망을 가지고 있나보군. 이곳은 대 하투아 제국의 왕성이다. 나 제국의 황제 카이젠 드 하티아스가 너를 소유물로 삼은 이상 네가 자유로와질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네가 영리하다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차라리 내 비위를 잘 맞춰서 '비'라도 되보려고 노력하는 편이 이득이 있을거야. 아직 제국의 황비 자리는 비어있으니까. 밑져도 혹시 아나? 후궁이 될지. 허긴 어떤 쪽이던 벙어리 여자는 재미 없으니 네 말문부터 열 방법을 찾아야겠군 하하하" 다이아나에게는 가장 절망스러울 말들을 얄밉게도 줄줄이 쏟아놓은 사내는 역대 최강의 무위를 자랑한다는 하투아 제국의 번성을 직접 이루어낸 주역, 카이젠이었다. 카이젠이 이종족 경매장에 들르게 된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조카딸이 며칠 전부터 수인족이 가지고 싶다고 졸라댔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직 성혼을 하지 않은 카이젠은 이제 7살이 된 조카딸에게는 상당히 관대했다. 사실, 굳이 원인을 캐고 들면 조카의 부탁보다는 답답한 왕성과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서류처리에서 벗어날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지만. 늘상 하던 대로 말을 타고 정문이 아닌 하인들 전용의 출입문에 이르자, 낯이 익은 문지기가 공손히 문을 열어주었다. 황제의 검은 눈과 머리카락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귀찮지만 로브를 뒤집어써야 했다. 경매장에 신분을 숨기고 참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겉으로는 앓는 소리를 하는 귀족들의 숨겨진 재산상태를 파악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니까. 경매장에 들어서 구석에 앉아 있자니 여기 저기서 음탕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오늘 나올 노예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최상품이라는 하프엘프에 대한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찌 정보를 얻었는지,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다시 없을 기회라며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 탐탁치 않게 여기던 노아르 백작의 모습이 보이자 애시당초 목적이었던 수인족에 대한 생각은 씻은 듯이 달아났다. 그동안의 정보로 볼 때, 최상품이라는 하프엘프는 백작의 소유가 될 확률이 컸다. "후와~!" 경매장 여기 저기서 한숨 섞인 탄성이 울려퍼졌다. 입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사회자의 목소리보다 오히려 앞에 나와 말없이 서있는 노예의 모습이 훨씬 더 관심을 끌었다. 스무살이 안되어 보이는 노예는 특이한 머리색에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외모로 좌중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하프엘프라고 하지만, 순종의 엘프를 상당수 본 카이젠으로서도 저정도의 외모는 본 경험이 없었다. 마법에 의해 말을 못한다는 노예는 무표정하게 단상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저항없는 모습이 마치 처음부터 노예로 키워진 듯 했다. 경매장은 가격을 높여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특유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가격이 높아질수록 경매가를 부르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져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천골드라는 거액을 부른 당사자는 노아르 백작이었다. 엄청난 금액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노아르 백작의 승리를 예상했고, 노아르 백작은 이미 노예를 손에 넣은 듯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있던 카이젠은 이천 골드를 제시했고, 노예는 그의 소유로 낙점되었다. 일그러지는 노아르백작의 얼굴을 확인한 카이젠은 후련한 심정으로 제국 안에 몇 개 없는 금으로 된 신용장을 제시하고 경매대금을 치룬 후 노예와 함께 왕성으로 향했다. 긴장이 풀린 듯 기절한 노예를 맡겨놓고 잔소리를 읊어대는 시종을 뒤로 하고는 밀린 서류들을 보았지만, 기분만큼은 상당히 좋았다. 세상에 다시 없을 미모의 노예를 가지게 된 것도 즐거웠고, 꼴보기 싫은 노아르가 분해할 것을 상상하면 피식거리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의 지위로 볼 때, 노예 따위를 안을 일은 없었다. 황비의 자리를 노린 귀족의 영양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으니까. 물론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고 해도 아무 보장도 없음은 이미 오래 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투아에서 여성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은 그리 흠이 되지 않았고, 덕분에 그의 침실에 들지 못한 여자들도 넘쳐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시종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카이젠은 사치와 욕망에 물든 몇몇 인간들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흥, 그러다가 운 좋게 임신이라도 할까 철없는 꿈들을 꾸고 있겠지" 하지만, 카이젠은 그렇게 녹녹한 인물이 아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만큼 후손을 남기지 않기 위한 조치는 비밀리에 완벽하게 수행되고 있었다. 방문을 열자 소파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 있는 노예의 모습이 보인다. 그 앞으로 다가선 순간 단상위와 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아름다움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도무지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손으로 확인하고픈 생각이 행동으로 먼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노예여자는 순식간에 소파 뒤로 뱅그르 넘어가 섰다. 여자의 눈은 단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코 단상 위에서나 데려올 때 느꼈던 '노예'의 모습은 아니었다. "계속 얌전히 있어서 길이 잘 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이것봐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형같은 노예지만 워낙 대단한 미모여서 실증날 때까지 데리고 놀 셈이었는데, 반응이 남달랐다. 카이젠의 얼굴에 재밌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그 복장으론 힘들껄?" 말이 끝나기 전에 여자는 제 옷을 찢어 움직이기 편한 상태를 만들었다. 우습게 생각하고 당동하게도 눈 앞에서 의기 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잡으려고 달려들었으나, 몇 번에 걸친 시도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노예 여자의 몸놀림은 제대로 배웠음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었다. 결국 마나를 끌어 올리고서야 여자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오랜만에 시선을 끄는 여자를 강제로 어찌해볼 생각은 사라졌다. 어차피 외모만 보고 안을 생각을 했던 것은 인형같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정면으로 대항하는 여자를 보니, 왠지 모르게 그녀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하고 싶었다. 카이젠은 우선적인 조치로 그녀에게 처해진 상황을 말해주었다. 평소로서는 있을 수 없는 친절을 베푼 셈이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벌을 받는 상상은 하기도 싫었다. 노예가 그의 생각대로 영리하다면 나름대로 적응할 것이다. 그의 궁 안에서.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은 그의 여자가 되어 그의 사랑을 얻어내는 것 뿐이었다.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사랑'이란 단어로 결론을 내면서도 카이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리아님~!" 보나마나 시종장이다. 힘을 주어 걸레로 바닥을 벅벅 닦던 다이아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울상이 되어 달려온 시종장은 리아의 손에 든 걸레를 빼앗기 위해 한동안 실랑이를 했다. 보기와는 달리 힘이 센 리아에게서 - 리아가 힘이 센 것도 있었지만, 온 힘을 다하다가 리아가 다칠까봐 시종장이 전력을 다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 걸레를 빼았는데 실패하자, 바닥에 앉아서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시종장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생긴 작고 호리호리한 남자를 떠올렸다면 큰 착각이다. 카이젠은 그 자신이 소드마스터였고, 능력 없는 이들을 경멸했다. 수시로 몬스터의 침략이 일어나는 하투아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없는 남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 하는 황제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주위를 지키는 시종장을 비리비리한 사람으로 뽑았을 리 없다. 산만한 덩치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데다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징징거리는 모습이라니! '결국 오늘도 안되겠군' 다이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걸레를 시종장에게 내밀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시종장은 재빨리 걸레를 받아들고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리아를 재촉했다. 오늘도 똑같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벙어리 노예'로 왕성에 들어온 지 일 주일, 의외로 황제가 별 다른 힘을 행사하지 않자, 다이아나는 자신의 방을 빠져나가 이곳 저곳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다이아나로서는 '노예'로 들어왔으니, 잠자리 시중을 들지 않을 바엔, 얼른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일단 왕성의 구조를 파악한 리아는 궁전의 하녀들의 방에서 유니폼을 찾아내 입고는 태연자약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중급의 하녀장이 새로 들어온 노예로 착각하고 이것 저것 일을 시킬 정도였으니까. 새로 들어온 '황제 전용의 벙어리 노예'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왕성은 발칵 뒤집혔다. 카이젠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처벌에 있어서 가차 없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궁성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시녀는 즉시 시종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황제가 모르게 은밀하게 인상착의대로 수색을 하던 시종들은 천운으로 하녀옷을 입고 머리수건까지 써서 얼굴을 대충 가린 채로 빨래통을 운반하는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시종장은 황제가 유능한 마법사를 구한다는 소문이 '그녀' 때문임을 아는 유일한 측근이었다. 물론, 왕궁마법사도 있었고 제국에 소속된 마법사들도 꽤 되었지만, 황제는 소속이 없는 마법사를 원했다. 때문에, 시종장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법사 길드까지 여러 번 심부름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리아라고 불려지는 노예를 황제가 전혀 찾지 않음에도 시종장이 알아서 늘상 방으로 모셔다 놓은 일이 최근 일 주일 간 반복되고 있었다. 시종장은 처음에는 리아의 아름다움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사라졌다하면 어딘가에서 일거리를 찾아내어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에 놀랐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이 아름다운 소녀가 상당히 마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평생을 윗 분들의 눈치를 살펴 입 안의 혀처럼 생활해온 노련한 시종장으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늘과 같이 단시간내에 그녀에게서 걸레를 빼앗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리아를 앞세우고 가려던 시종장은 리아가 갑자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이번엔 새로운 행동패턴을 개발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한 번 울먹임을 준비하고 리아의 옆으로 다가선 순간 시종장은 숨을 들이켰다. 황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색이 된 시종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단 예를 갖추어 인사부터 했다. 숙인 고개 너머로 슬쩍 상황을 살펴보니 리아는 장승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고, 황제 역시 꼼짝도 안하고 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을 종료한 것은 황제쪽이었다. 휙소리가 나게 몸을 돌려 사라진 것이다. 초조해진 시종장은 리아에게 제발 얌전히 방에서 대기하라고 일러 두고는 황제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황제는 아무 소리 없이 시종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루 이틀 섬긴 윗전이 아니므로, 할 수 없이 그 간의 사정을 털어놓는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 간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리아를 데려오너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종장은 리아에게 전갈을 보냈다. 잠시 후 시녀들이 억지로 갈아입힌 것이 분명한 드레스 차림으로 리아가 들어섰다. 시종장은 그나마 눈치빠르게 옷을 갈아입힌 담당시녀에게 상이라도 챙겨 주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시종장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고, 시종장은 리아를 동정의 눈길로 한 번 슬쩍 본 후 집무실을 나섰다. "다행히 탈출 시도를 한 것은 아니군" "..." "몸 값을 하겠다는 것인가?" 단 번에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황제의 명석함을 다시 한 번 절감하면서 다이아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한 번 까딱거렸다. "흠.. 어리석군. 네 몸값을 갚으려면 평생 해도 모자를 일이다" 그것을 다이아나가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했을 뿐이다. 빈둥대며 시중을 받고 있는 것은 마음이 편한 상태라고 해도 달갑지 않을 터인데, 노예로 있는 주제에 그러기는 싫었다. 마음대로 비꼬라지. 내가 끄덕이나 할까.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는데 의외로 황제의 빈정거림은 이어지지 않았다. "혹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가?" 물론 가능했다. 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황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예는 고사하고 평민 중에서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던 것이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긍정을 표시하는 여자를 보면서 황제는 '제안'을 했다. "정히 일을 하고 싶다면, 네 몸값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라. 내 일들을 돕는다면 하루에 1골드씩 쳐서 2000일 후에 네게 자유를 주마" 사실 황제의 제안은 상당히 충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충동적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계산은 충분히 한 후였다. 2000일이면 5년 반 정도의 세월이다. 그 이전에 이 노예는 황제의 곁을 떠날 생각도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즈음에는 자신이 이미 실증이 나 있을 수도 있다. 리아는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 자신에게 모자란 것은 '정보'였다. 그리고 황제가 제안한 이천일이라는 시간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리아도 아니었다. 그 이후, 리아는 일어나자마자 황제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단순한 서류정리부터 시작했지만, 리아의 업무능력이 기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눈치챈 황제는 조금씩 더 많은 일들을 리아에게 맡겼다. 물론 시종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리아가 시녀로서 그저 차나 타다 나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분좋게 낮잠을 즐기던 카이젠은 누군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자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완전히 잠이 깬 순간 놀란 눈의 리아의 팔을 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얗게 질린 리아의 얼굴을 보고, 얼른 팔을 풀어준 황제는 리아를 나무랐다. "자고 있는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시종장이 주의를 주지 않던가?" 물론 주의를 들었지만, 그저 황제에 대한 예의 쯤으로 치부해 버린 리아였다. 어려서부터 암살의 위험 속에서 살아온 황제의 삶을 리아가 알 수는 없었으니까. 아픈 팔을 문지르면서 리아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은 주의를 주었다는 뜻이다. 그 모습이 웬지 모르게 애틋하게 느껴진 황제는 갑자기 리아를 끌어안았다. 방심하다가 안겨버린 리아는 약간 입을 벌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순간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카이젠은 리아의 붉은 입술에 자심의 입술을 포갰다. 입 안으로 이물질이 들어오자 리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으나, 카이젤의 억센 팔은 리아의 뒷 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불가능했다. 수많은 여인들과 질척한 밤을 보낸 카이젤의 능숙한 프렌치 키스와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길은 갑자기 부딪혀오는 뜨거운 입술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다이아나의 정신을 오히려 되돌려 놓았다. 카이젤은 리아가 저항을 포기하자, 마음껏 리아의 입술을 유린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품안의 리아가 그야말로 인형처럼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끓어오르는 욕망을 잠재우며 리아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카이젠과 함께 집무실에서 일을 한 지도 열흘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 리아는 무표정을 고수하던 처음의 태도를 많이 누그러뜨리고 가끔 슬쩍 미소를 보이거나 찡그리기도 했다. 어제는 자신에게 서류더미를 안겨주고 느긋하게 놀고 있는 카이젠에게 나무라는 표정까지 지어보였었다. 카이젠은 이제 다시 무표정한 얼굴의 리아를 볼 수 있었다. 충격을 받은 표정이라면 그저 처녀의 쑥스러움이거니 하고 무시할 수나 있었다. 하지만, 리아는 카이젠의 품에서 풀려나자마자 인형같은 얼굴로 움직여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카이젠은 명치 끝이 아련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무표정한 리아의 얼굴을 보았을 땐, 그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미 살아있는 리아의 표정을 본 후였다. 다시 인형처럼 무표정해진 리아의 얼굴은, 그에게 버림받고 원망섞인 눈물을 쏟던 그 어떤 여인의 얼굴보다 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카이젠은 리아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다이아나는 황제가 자신이 노예가 아님을 짐작하고 있음을 며칠 전에야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관계가 형성이 되었을 때, 다이아나는 빈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사정을 써서 황제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그 내용을 보지도 않고 찢어서 버리고는 "네게 시킨 일이나 해라. 난 너의 개인적인 사정 따위에 관심 없다. 너는 리아고 내 노예일 뿐임을 명심하도록!" 이라는 말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내뱉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이후로, 다이아나는 황제가 자신의 신분 - 하프엘프의 노예가 아닌 인간이며 신관이라는 사실 -을 안다고 해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이아나는 황제의 기습적인 키스와 그가 보여준 욕망을 생각하면서 시기가 되었다는 결심을 했다. 이미 틈틈이 서재를 뒤져 왕성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일 주일이나 하녀 노릇을 한 덕에 왕성 내부의 사정도 꿰뚫고 있었다. 어머니의 신전의 위치가 왕성과 멀지 않았으므로, 그곳까지만 간다면 탈출은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날 밤 리아의 최초의 탈출 시도가 있었다. 잡혀온 리아는 왕성의 규율에 따라 기둥에 묶여 채찍을 맞는 벌을 받았다. 하지만,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지 않았다면 소리만 요란한 것이 아닐까 하고 보는 사람들이 의심할 만큼, 리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단지, 그녀의 몸이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알 수 있었고, 규정에 의한 채찍질이 끝났을 때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리아는 채벌의 규정상 하루 동안은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고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다. 탈출은 순조롭게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 했다. 황제는 종일 자신을 다시 찾지 않았고, 풀이 죽은 표정으로 방에 처박혀 있자, 시녀들도 안심한 듯이 모두 제 할일을 하느라 다이아나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다이아나는 최후까지 세심한 주의를 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힐 경우 체벌이 가해진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이야 어찌어찌 참아낸다고 하더라도 그 체벌로 인해 목숨을 잃은 노예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고 한다. 위험을 최대한 줄일수록 좋았다. 이곳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일은 마지막 순간에 틀어졌다. 건물을 무사히 빠져나와 경비가 허술한 곳을 찾아 담을 넘을 때까지도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정작 담을 넘어가서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강한 타격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기둥을 끌어앉는 자세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채찍을 얻어맞으면서 다이아나는 과거의 경험에 감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맞는 것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 참아낼 자신이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벌을 받는 자신을 쳐다보는 황제와 무심코 눈이 마주쳤을 때, 다이아나는 황제가 상당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의 눈에서는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습관적인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몸에 가해져오는 고통으로부터 신경을 분리시켰다. 늘 그랬듯이 속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던 다이아나는 맞는 것은 자신인데, 아픈 척은 왜 카이젠이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더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인내와 육체적인 한계는 다른 것인지 겨우 지탱하고 있던 몸이 어느 순간 의지를 떠나버렸다. 카이젠은 하루 종일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하찮은 노예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자신이 이토록 안정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하지만, 채찍을 맞던 모습이나 넝마처럼 처참한 등을 보이며 병사들에게 끌려 나가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노예가 탈출할 경우 여자는 10대 남자는 20대의 채찍을 맞는다. 만일 다시 탈출하면 매는 두 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한 번 탈주한 노예가 두번째 탈주를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는 체벌의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보다는 채찍의 후유증으로 인해 죽거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방치되어 있는 하루 동안 건강이 여의치 못한 노예들은 쉽게 죽어버리곤 했다. 그런 경우들이 선례가 되어 노예들은 탈출할 엄두조차 못내는 곳이 이곳 하투아였던 것이다. 생각을 안하려고 해도 카이젠은 흰 피부에 채찍이 떨어지는 소리와 핏방울이 튀는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시켜 놓고 있었다. 리아가 감옥에서 죽어가는 모습도 상상했다. 사실, 리아의 탈출은 큰 소동을 이어지기 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낮의 일이 있은 후에 어떤 예감에 따라 리아의 뒤에 사람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그에게 리아의 탈주 시도를 일찌감치 저지하라고 했다면, 리아가 저리 되지는 않았으리라. 카이젠은 자신의 마음 한 켠에 자신의 구애를 더없이 매몰찬 방법으로 거절한 것이나 다름 없는 리아에 대하여 애증의 마음이 뒤섞여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음날 새벽 날이 밝자마자, 리아는 방으로 옮겨 온갓 치료를 받았다. 카이젠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리아는 멀쩡했다. 물론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은 아니었으나, 감염으로 인한 발열등의 증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최고급 포션으로 리아의 등에는 채찍을 맞았다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리아는 며칠의 정양기간을 보낸 후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아 집무실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리아를 감옥에 두고 괴로워하던 카이젠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리아가 감옥에서 무사하게 나오자 그는 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의 비로 삼을 것을 결심하고, 은밀하게 리아의 신분을 꾸며낼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지금 카이젠은 감옥에서 돌아온 리아를 처음으로 대면하고 있었다. 리아는 전혀 겁을 먹거나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무표정에는 약간의 싸늘함이 더해진 것 같았지만, 꺾이지 않은 그녀의 기세를 느낀 카이젠은 오히려 그것이 더 사랑스러웠다. 제국의 황비가 될 여인은 강한 심성의 소유자여야 했다. 대륙을 통일할 황제의 아내는 황제와 나란히 설 만한 그릇이어야 했다. 카이젠은 이제야 비로소 동반자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 날부터 카이젠의 적극적인 구애가 이어졌다. 그는 슬쩍 사랑의 의미가 담긴 말을 건네기도 하고,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자상함을 보이기도 했다. 강압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리아 앞에서 만큼은 벗어 던지고, 진지하게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가 리아에 대한 진심을 털어놓던 저녁, 인형같은 리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약간의 표정이 돌아왔다. 우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카이젠에게는 상당한 희망을 보여준 셈이었다. 다이아나는 돌연 변한 황제의 태도에 한동안 적응을 못해 애를 먹었다. 어차피 지성이 있는 존재를 노예로 삼는 나라임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러한 대우를 경험한다는 것은 약간의 충격이었다. 감옥 안에서 사경을 헤맨 덕에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 다이아나는 조금씩 괜찮게 생각하던 카이젠에 대하여 '상대 못할 인물'이라는 극단의 판단을 내렸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탈출을 기다렸다는 듯이 잡혀온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던 것이다. 다이아나 스스로는 황제에 대하여 어떤 기대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으나, 황제의 돌변한 행동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했다. 다이아나는 그가 자신이 죽었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상당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챌 수 있었다. 대륙에서 차갑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황제인 카이젠이 고작 노예 여자의 목숨 따위에 연연한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외면한다고 해도 돌연 시작된 황제의 노골적인 구애는 진실함을 담고 있었다. 황제는 달래듯이 다이아나가 자신의 비가 되면, 목소리를 찾아 주겠노라 약속했다. 때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겠노라고만 하면 지금 당장 목소리를 찾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거짓약속을 할 생각은 없었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성격이 카이젠의 일방적인 사랑을 비웃거나 경멸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끔 다이아나는 카이젠이 자란 환경과 그의 신분이 그를 너무나 외로운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마치 평생 표출하지 못한 사랑을 한꺼번에 다이아나에게 쏟아내는 듯이 보였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가능하다고 해도 스스로는 그럴 감정도 아니었던 다이아나는 기회가 생기는 대로 빨리 황제의 손 안에서 벗어나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카이젠이 다이아나를 달랠 생각으로 사냥에 같이 나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무엇보다 바깥바람을 쐴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던 다이아나가 무의식중이 웃음을 흘리자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서둘러 준비를 시켰다. 그래봐야 사냥에 어울리는 의상들이 산더미같이 배달될 것이 뻔했지만. 카이젠 왕족과 귀족들을 모아 하는 사냥행사에 리아를 대동하기로 했다. 이미 리아의 신분에 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태였다. 리아는 어릴 때 잃어버렸던 귀족의 딸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황후가 되리라. 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하는 외출에 리아도 상당한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던 시녀들은 리아의 얼굴에 나타난 깊은 슬픔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떻게해서든지 오늘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그 순간 전 날 자신이 살짝 웃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얻은 듯이 기뻐하던 카이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이아나는 카이젠에 대한 연민으로 우울해졌지만, 그것이 그녀의 결심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황제는 최근 사랑을 받는다는 여성과 함께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그 사냥터에는 이미 대기하던 암살자가 기회를 노리고 눈을 번득이고 있었음을 몇몇 귀족은 알고 있었다. 사냥 전에 먼저 황제에 대한 예를 표해야 했으므로, 다이아나를 뒤에 남겨둔 황제는 혼자 앞으로 향했다. 다이아나는 보석자랑을 하러 나온 것인지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번쩍임의 물결 속에서 이리 저리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행사의 진행을 돕기 위한 인원들 중에 세레스 여신의 표식을 한 신관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사냥이란 언제나 부상의 위협을 동반한다. 왕족과 귀족이 주가 되는 행사에 신관이 초청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치료를 위한 신관이라면 세레스의 신관의 능력을 따를 수는 없었다. 물론, 워낙 신관들의 숫자나 질 자체의 차이도 커서, 다른 신의 신관을 이런 일로 찾기조차 힘들었지만. 화려한 의상을 입고 말을 탄 귀족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귀족들은 반으로 나눈듯이 갈라져 황제에 대한 예를 표했다. 이에 대하여 황제가 손을 들어 화답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몇 개의 화살이 황제에게 날아들었다. 황제를 지켜야할 기사들은 말을 타고 입장하던 황제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어서 미처 대응하지 못했고, 황제의 실력으로 화살만이라면 어찌어찌 피하거나 쳐냈을지 모르지만, 말 아래에서 단도를 잡고 덤벼드는 두 명의 암살자까지 완벽히 피해내진 못했다. 하투아 제국의 황제 카이젠은 한쪽 팔에 화살을 맞고 자객이 휘두른 칼에 배를 찔린 채로 말 아래로 구르듯이 떨어졌다. 뒤따르던 기사들에 의해 암살자들은 사살되거나 붙잡히기 전에 자살했다. 치료를 위해 동행한 고위신관이 황제의 옆으로 달려가더니 고개를 저었다. 자객들의 칼과 화살에는 독이 묻어 있었고, 그 독은 이미 황제의 전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사건을 주도한 몇 명을 제외한 - 물론 그들도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 모든 사람들이 망연자실했다. 그 때, 뒤쪽에서 한 여인이 뛰어나오더니 황제의 옆에 주저앉아 손을 댔다. 뒤늦게 깨닫고 그녀를 떼어 내려던 사람들은 여인의 몸에서 나타나는 신성력의 증거를 볼 수 있었다. 여신이 강림한 듯한 외모에 엄청난 신성력을 보인 그녀의 몸에서 뿜어내던 빛이 사그라지자, 조심스레 황제의 상태를 검사한 고위신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제의 무사함을 선포했다. 황제는 회복을 위해 엄중한 호위 속에 궁 안으로 옮겨졌고, 자신의 이름을 '다이아나'라고 밝힌 이 여인은 고위신관의 인도를 받아 당당하게 궁을 빠져 나갔다. 성녀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 이 일은 하투아 제국 내에서는 황제가 죽을뻔하다가 세레스의 축복을 받은 성녀로 인해 살아났다고 전설처럼 널리 퍼졌다 - 황제는 리아가 없어졌음을 알고 분노를 터뜨렸다. 사정을 알고 있던 시종장은 그녀가 황제를 살려내고 말을 했으며, 신성력이 증명된 이상 그녀가 신전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그랬다가는 신전 전체가 국가에 등을 돌렸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나마 리아가 자신을 살려낸 장본인임을 알게 된 황제는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고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다이아나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감옥에서였다. 수많은 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이아나도 상처를 제때 소독하지 않고 안 좋은 환경에 방치된 때문에,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고열에 시달렸다. 그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생명의 징후가 약해지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준 이후로 단 한번도 몸에서 떠나지 않았던 목걸이의 보석 - 문스톤 - 이 이름 그대로 달빛과 같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목걸이에서는 작은 빛의 형태가 튀어나왔다. "음... 아, 아파!" 무의식중에 돌아눕던 다이아나는 스스로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다 말고,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이봐! 좀 괜찮아?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마치 머리속을 울리는 듯한... - 나 좀 보라구우~! 나좀 봐주라~! 어린아이의 맑고 선명한 목소리가 다시 머리 속으로 파고 들었다. 곧바로 다이아나는 보란듯이 움직이는 빛이 나는 작은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그쪽으로 초점을 맞추자, 그 빛은 다이아나의 눈 앞으로 움직였다. "페어리?" - 응?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너 살렸다. 너 죽을 뻔 했어. 그리고 마법 한 번 지독하게 걸렸더라. 어쩌다가 목소리까지 잃은거야? 흥! 나같이 위대한 능력이 없으니 여태 그러고 살았지.......... 투명한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쉴새없이 지껄이는 존재는 요정족, 페어리였다. "저를 구해주셨군요. 고마와요" - 흠흠.. 그럼 당연히 고마와해야지. 암튼 그 드래곤도 꽤나 쪼잔하지 머야? 아무리 내가 장난 좀 쳤기로서니, 저 답답한 데다가 나를 가두어 두다니. 다음에 만나면 실컷 골탕을 먹여줘야지. 아무튼 너 살려줬으니 내 할 일은 다 한 셈이야. 치잇. 달빛을 닮은 비늘 하나 좀 빼주면 어때서... 나아쁜 드래곤 같으니. 나한테 뭐 부탁할 생각 하지 마. 네 목소리 돌려준 것만 해도 안해도 되는 걸 내가 착하니까 해준거야 알았지? 상대방이 무엇을 궁금해하건 어떤 표정을 짓건 간에 완벽하게 마이페이스로 한참을 중얼거리던 페어리는 다이아나의 대꾸를 기다리지도 않고 한 마디만 남기고 목걸이 안으로 휙 사라졌다. - 야! 너 혹시 이 목걸이 준 드래곤 만나면, 내가 잘 해 줬다고 나 좀 꺼내달라고 해주라 그래 줄꺼지? 아니면 넌 진짜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는거야. 잘 해 줄꺼라고 믿고 나는 좀 쉰다. 불러봐야 소용 없을꺼야. 어차피 나는 네 목숨만 지키면 되거든. 아, 그렇다고 위험한 짓만 골라하지 마아. 아무리 위대한 나라고 해도 자주 그러면 피곤하단 말야. 아참, 내 부탁 잊지마아!!! 하,, 한마디가 아니었다. 다이아나는 목소리를 되찾은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사냥터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슬금슬금 신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던 다이아나의 귀에 비명소리와 함께 금속들이 부딛히는 소리가 방금 카이젠이 인사를 받으러 간 방향에서 들려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간 다이아나는 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이젠과 그 옆에서 가망이 없다고 말하는 신관을 볼 수 있었다. "왕성 안에 다이아나님 같은 최고위급 신관이 계셨다는 걸 왜 몰랐는지 모르겠군요"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신분증도 잃어버렸구요. 혹시 여기 신전에서 다시 받을 수 있을까요? 저도 고위급 신관으로 등록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지나치게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어요 " "하지만, 그 신성력은... 정말 수련을 열심히 하셨나보네요. 신분증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재인증을 받으셔도 되고 등록되어 있으시다면 재발급은 당연히 되니까요" "하아, 다행이네요" 세레스 여신의 신전으로 걸어가면서 다이아나는 '리온'이라는 이름의 신관의 이야기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는 분들 이신지요?" "네. 죄송하지만 저는 나중에 신전으로 가겠습니다" "아, 네. 그럼 나중에." 저 편에서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빛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물론 그 주위로는 금발의 두 남자가 있었으나, 다이아나의 시선은 은발의 남자에게서 떠나질 못했다. 신관을 먼저 보낸 다이아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도 다가왔다. "아빠~!" "다이아나!" 외모로 짐작할 수 있는 나이로 보아 전혀 부녀의 나이로 안보이는 이들은 당연히 유스테우스와 다이아나였다. 그들이 거기 있던 이유 "혹시 다이아나라는 소녀를 아십니까?" 시루스는 다이아나를 찾아 돌아다니던 중 자신처럼 로브를 뒤집어 쓴 낯선 남자가 다가와 다급하게 다급하게 묻자, 당황했다. 남자는 흥분한 어투로 시루스의 로브자락을 잡아 당기면서 간절하게 말했다. "방금 다이아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만......" "혹시 그 애가 은발머리에 17세 가량 되어 보이지는 안던가요? 상당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데." 시루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다이아나와 아는 사이임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길거리에서 로브를 뒤집어 쓴 현재로서는 대화하기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양해 하에 시루스가 묶고 있고, 다이아나가 머물던 여관으로 향했다. 방안에 들어선 두 남자는 로브를 벗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엘프셨군요" "아,, 네 그런데?" 다이아나에 대하여 물어 본 남자는 녹아내릴 듯한 금발에 푸른 눈의 소유자였다. 시루스는 다이아나만큼이나 엘프보다도 아름다운 인간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다이아나의 오빠입니다" "네?" "에드라고 합니다. 다이아나는 제 여동생이죠" "아!" 그제서야 남자의 눈이 다이아나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은 엘프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보면 다이아나의 머리카락에도 금 색이 섞여 있었다. 시루스는 한 숨을 내쉬고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 결국 가장 수상한 사람은 그 레아양이군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어쩌면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도 다이아나양과 함께 잡혀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레아라는 분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시루스로부터 설명을 전해 들은 에드는 다이아나를 찾아보겠다면서 허겁지겁 밖으로 나섰다. 시루스는 그런 에드를 말리며 함께 찾자고 했지만, 에드는 거절했다. 물론 에드라는 다이아나의 오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엘프와 동행했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마을에서 엘프의 기운을 가진 존재를 찾아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에디우스가 레디아나의 레어로 들이닥쳤을 때, 이미 레디아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에디우스는 할 수 없이 하비어스와 유스테우스의 도움을 요청했다. 레디아나의 위치를 혼자서 찾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기운을 숨기고 잠적한 레디아나를 찾는 일은 나이에 비해 유능하다고는 하나 에디우스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골드 드래곤 두 마리와 실버드래곤 한 마리가 레드 드래곤의 수장의 레어에 쳐들어가 난장판을 만든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말년에 딸자식 하나 버릇없이 키운 죄로 레드의 수장이자 레디아나의 아버지인 칼리우스는 세 드래곤의 엄청난 항의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더하여, 아무리 혈통이라 조금 낫다고는 하지만 대륙 곳곳을 스캔하여 딸의 행방을 찾는 일을 밤낮없이 계속해야만 했다. 그 앞에는 눈에 불을 켜고 씩씩거리는 드래곤 세 마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두 주라는 시간을 밤잠 안자고 - 사실 드래곤이야 저 필요할 때 동면을 하는 만큼 잠을 안 잔다고 별 탈은 없었지만 - 온 대륙을 스캔한 결과 딸의 흔적을 발견한 칼리우스는 그래도 핏줄이 무언지 딸의 안위가 걱정된 나머지 몰래 로드의 도움을 청했다. 한편, 다이아나를 노예상인들에게 팔고 후련한 표정을 지었던 레디아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후환이 두려웠다. 그녀는 용언의 기운을 감추고 원래 기거하던 곳과는 정 반대인 동쪽 시우스 산맥으로 이동한 후 적당한 동굴 하나를 발견하자, 최선을 다해 결계를 꼭꼭 치고는 들어앉아 동면에 들어갔다. 어차피 인간의 일이라면 백 년만 자고 일어나면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하지만, 백 년을 결심하고 동면에 들어간 레디아나는 겨우 두 주 반만에 강제로 깨어났다. 칼리우스의 간청에 드래곤 로드가 동행했기에 레디아나는 분노한 세 마리의 드래곤의 발아래 죽지 않을만큼만 두드려 맞았다. 징징거리면서 - 1100살의 드래곤이란 아직은 어린 존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다이아나를 팔아 넘기기까지의 사실을 경찰서에서 조서 꾸미듯이 상세히 털어놓은 후에 한 번 더 두들겨 맞았음은 명약관화이다. 칼리우스는 세 드래곤에게 머리를 숙여 사죄를 하고, 로드까지 나서서 아량을 베풀라고 중재를 하는 바람에 레디아나에 대한 처벌은 대충 그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내 눈에 띄면 바로 죽일테니 평생 피해 다니도록!" 이라는 말이 다이아나의 아버지도 아닌 에디우스의 입에서 나오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칼리우스를 붙들고 펑펑 울어댔다. 레디아나를 데리고 돌아온 칼리우스는 그 때 까지도 엉엉 울어 제끼는 딸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레디아나는 산맥이 떠나가도록 더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그가 한 충고란 것이 "백 년 동면할 생각이 있었으면 그냥 하지. 그럼 그 애는 죽었을 것 아니냐?" 였고, 이 말에 레디아나는 비로소 성급한 자신의 행동이 에디우스와 가늘게 이어져 있던 연마저 끊어 버리고 악연의 고리를 생성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마법물품만 빼았았다고 했고, 그 아이가 목걸이를 건 채로 있었다면 아주 큰 일은 안 당했을 게야" 라고 단언하는 유스테우스의 말에 하비우스와 에디우스는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았다. 두 부자는 결국 다이아나가 당한 봉변이 자신들이 레디아나와 맺고 있던 관계에 의한 것이라,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물론 그 정도가 더 큰 것은 당연히 에디우스였다. 세 드래곤은 다이아나를 샀던 노예상을 찾아 대륙의 동쪽으로 이동했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노예상을 찾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예상한 것 보다 많은 시일을 동쪽 대륙을 헤매고 돌아다녀야 했다. 일주일 여를 헤맨 끝에 겨우 노예상을 만날 수 있었던 이들은 아주 의미 있는 대화(?) 끝에 다이아나가 하투아 제국의 경매장으로 넘겨졌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들의 조사는 다시 경매장에서 난항을 겪었다. 다이아나를 사 간 사람이 실명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이아나의 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그들 하나 하나를 조사해 보는 동안 시간을 급류를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직도 다이아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시루스를 찾아가 - 물론 마법사 유스의 모습으로 - 다이아나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는 친절하게 하투아 제국 안으로 이동까지 시켜놓은 유스테우스의 이중행각을 딱한 두 부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의 엘프와 세 마리의 드래곤은 그렇게 다이아나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하투아 안을 쥐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재회, 그리고 만남 "아!"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려 있었다. 무심결에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쳐다 본 에디우스는 신관복장의 남자와 나란히 걷고 있는 꿈에도 그리던 반려의 모습을 보았다. 화려한 복장은 그녀의 형용할 수 없는 미모와 더불어 길을 가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고 홀린 듯한 시선을 빨아들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신관과 대화를 하며 무심하게 걷고 있었다. "다이아나!!!" 에디우스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그의 시선을 쫓던 하비우스와 유스테우스도 다이아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다이아나도 유스테우스를 보았다.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찾지 못했던 다이아나와 길을 가다가 마주친 상황은 오히려 현실감을 앗아가고 있었다. 다이아나도 충격을 받은듯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동행하던 신관과 무슨 말인가를 주고 받더니 유스테우스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 "다이아나!" 무려 한 달 가까이 실종되었던 다이아나는 그렇게 무사히(?) 돌아왔다. "저......" 너무 달아올라 바알간 뺨을 하고 말까지 더듬거리지만, 천상의 미모를 소유한 이 남자가 드래곤임을 누가 믿겠는가? 부녀상봉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멍하니 있다가, 한참을 지나도 자신들 - 하비어스와 에디우스 - 을 소개할 생각조차 안하는 유스테우스를 마음 속으로 원망하며, 에디우스는 쭈뼛거리면서 다가가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아들이 앞으로 나서자, 잠시 뒤로 빠져 있으리라 생각했던 하비어스는 그 모습에 기가 막히다 못해 기암을 했다. '세상에, 내 잘난 아들이 저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원래 골드 일족의 특성도 특성이려니와 타고난 재능과 하비우스의 엄청난 교육열이 맞물려 일족 최고의 영재로 이름을 날린 에디우스이다. 현재도 또래를 통틀어 가장 폭넓은 지식과 높은 마법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법의 깊이와 다양성에 있어서 어디 내놔도 빠질 데가 없었다. 그뿐인가?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마스터급의 검술실력을 자랑하는 그의 아들은 유스테우스가 '용언'과 '우정'이라는 콩깍지만 씌어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어느 수장 레어에 사위로 들어앉고도 남았다. 알에서 깨어난 이후 현재까지 늘상 하비우스의 자랑거리였던 아들의 현실은 슬프게도 쑥맥도 저런 쑥맥이 없을 정도로 숫기 없이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아, 물론 아름답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미소년이나 미청년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대부분 그런 선호의 사람들은 동성이거나 30대 이상의 여인네들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하비우스는 상념이 위험수위(삑~!)에 이르자, 얼른 혼란한 머리속을 정리하고 도대체 말도 안되는 꼴을 하고 있는 아들의 뒷수습에 나섰다. "이보게 유스테우스. 우린 소개도 안 시킬 셈인가?" 부녀상봉을 연출하느라 한참 바빴던 두 사람은 에디우스의 다 죽어가는 소리를 다행히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넉살 좋게 말을 거는 하비어스를 못 보았을 리 는 없었다. - 정신차려! 그 꼴을 보일 작정이냐? 에디우스에게 머리 속이 쩌렁쩌렁 울릴 듯이 강력한 전언을 보내면서, 하비어스는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아, 이분은 전에 말했던 아빠의 친구 하비우스란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반갑다 다이아나. 사실 나는 네 아버지보다 너를 더 오래 지켜보았지. 알고 있니?" "말씀 들었어요. 감사드려요!" "아참, 그리고 이쪽은 내 아들이자 네 반.려.인 에디우스란다" 아들이 대충 정신을 차리자 얼른 소개시키면서 하비우스는 일부러 '반려'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흠,흠... 글쎄~~, 확정된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라" "뭐야? 이 사기꾼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소개는 시켜놓고 서로 인사할 사이도 없이 투닥거리는 철없는 어른들 때문에, 두 젊은 남녀는 이들을 사이에 두고 가벼운 목례와 눈을 맞춤으로서 인사를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어른과 젊은 남녀라고 해봐야 17살의 다이아나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에디우스의 겉모습과 겉모습만으로 보자면 역시 30 안팎으로밖에 안 보이는 두 남자였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둘의 모습에 둘은 어쩐지 동질감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빠, 죄송하지만, 저 사실 아주 피곤해요.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될까요?" 애교가 뚝뚝 떨어지게 말하며 유스테우스의 팔짱을 살짝 끼고 몸을 기대는 다이아나 - 이런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자신에게 놀라와 하면서, 역시 사람을 보고 배운다는 진리를 깨닫는 다이아나였다. 이런 다이아나의 행동은 지혜의 행동과 쏙 빼닮아 있었으니까 - 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하비우스와 티각거리다 말고 "아, 미안하다. 힘들었지? 얼른 가자꾸나" 하고 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터질까 조심스럽게 다이아나를 에스코트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이아나가 제 아버지를 처리하는 순간에 조금 다른 방식 - 용언으로 아들 혼사 다 망칠꺼냐는 싸늘한 음성이 하비어스의 머리속을 쿠궁 울렸다 - 으로 아버지를 진정시킨 에디우스가 겉으로는 아버지- 충격 받아서 거의 굳어진 - 를 모시고 그 뒤를 따랐다. 살벌한 분위기의 부자와 정반대로 살갑기 그지 없는 분위기의 부녀는 상당히 고급으로 보이는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한 층의 반은 되는 듯한 방으로 들어섰다. 거실을 비롯하여 방이 5개나 딸린 특별실이었다. 넷은 약속이나 한 듯이 둘로 나누어 탁자를 중심으로 양쪽에 둘씩 앉았다. 이제는 완전히 제 페이스를 되찾은 에디우스가 - 사실 에디우스는 잘난 드래곤이다. 단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좀 얼이 빠졌던 것 뿐이다. -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다시 소개를 드리죠. 골드 일족의 에디우스라고 합니다." 정중하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는 에디우스의 어느 곳에서도 아까의 약간 아방한 듯한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조각상같은 외모의 미남자는 금빛 눈 가득히 따스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않다면 상당히 차가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아, 네.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다이아나는 아버지의 약간의 조작 때문에 자신을 반려라고 굳게 믿고 살아온 상대를 보고 있었다. 물론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이성으로서 특별한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세상 어느 여자가 자신만 바라보고 무려 1700년을 기다렸다는 남자에게 덤덤할 수 있겠는가? 에디우스의 존재에 대하여 안 이후 나름대로 의지를 굳힌 다이아나는 따뜻하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는 시선을 에디우스에게 보냈다. 자신의 감정이 확실하기 전에 자칫 호의를 내보인다면, 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자신을 향하여 그야말로 아버지 친구의 아들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를 예의바르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따스함을 가지고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자신에게나 하비우스에게나 똑같이 보여 주고 있었다. 하비우스와 유스테우스 또한 다이아나의 태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유스테우스는 속으로 딸을 응원했고, 하비우스야 당연히 아들을 응원했다. 무언가 사태가 불리하다고 느꼈는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문제를 제기한 쪽을 하비우스였다.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이렇게 둘이 만났으니, 시간 끌 것 없이 결론을 짓세나!" "결론이라니? 무슨 결론 말인가?" "몰라서 묻나? 내가 용언으로 맹세까지 했지 않은가?" "그 맹세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 말했고,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이쯤해서 하비우스가 용언으로 한 맹세를 알 필요가 있다. 하비우스가 당시 100살 가량의 아들래미를 두고 한 맹세는 "내 아들 에디우스를 세레스여신과 실버드래곤의 딸 다희의 반려로 부끄럽지 않게 키울 것을 나 골드 드래곤 하비어스의 이름을 걸고 용언으로 맹세한다" 위와 같았다. 그런 고로. "그러니까, 네 딸은 내 며느리라 이거지" "내가 언제 내 딸 준다고 했어? 내 딸에 부끄럽지 않게 네 아들 키우라고 했지" "뭐야?" "알면서 왜 그러실까~~~" 그랬다. 에디우스를 다이아나의 반려로 삼을 것을 맹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키우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즉, 에디우스를 어떠어떠한 드래곤으로 키우겠다는 교육지침이랄까? 분명히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건만 한 단어 한 단어가 중요한 용언의 맹세가 저렇게 된 데에는 다 유스테우스의 농간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1700년 전 "... 하여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말해 보게나" "내 딸이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그 아이가 돌아온다고 해도 주신께서 나에게 어떤 제한을 하실 지 알 수 없는 일이네" "염려 말게. 내가 자네 대신 돌봐 주겠네" "그것보다는..." "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자네 아들 말일세. 아직 어린데도 소문이 자자하더구만.. 솔직히 나는 그 애라면 내 딸의 반려로 부끄럽지 않게 성장할 것이라고 믿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아무래도 그 애는 인간인데..." "어허, 자네까지 그런 말을? 그 아이가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날지언정 나와 세레스의 딸일세. 여신과 드래곤의 딸이라면 자네 아들에게도 그 이상 가는 반려가 있을 것 같은가?" "그야..." 생각해보니 세레스 여신과 유스테우스의 딸이라면 아쉬울 것이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하지만, 그 아이가 가진 육신의 시간으로는 내 아들과 겨우 몇 십 년 살다가 사별해야 할 걸세" "그 아이가 인간의 수명을 가진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게 무슨?" "그 아이의 신체의 시간은 닫혀진 세계의 흐름에 맞춰져 있네. 거기 1년이 여기의 백년이니 건강만 조심한다면... 후훗" "아.. 그 세계에서 자라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군" "그렇다네. 그건 그렇고, 문제도 없어졌으니 자네의 승낙만 남았네" "까짓거 그렇게 하세나" "내가 자네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딸 가지 아비의 마음이 그렇네. 미안하지만 자네의 아들을 내 딸의 반려로 부끄럽지 않게 키워 주겠다고 용언으로 맹세를 해 줄 수 있겠나?" "용언으로?" "왜 싫은가?" "아, 아니네. 어차피 번복할 것도 아니고 하니......" 상황을 잘 살펴보면 마치 딸을 반려로 주겠다는 듯한 뉘앙스를 물씬 풍겨대면서도 용언으로 하는 약속은 교묘하게 그렇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다. 1700년이나 강제동면에 들어가게 된 친구를 위로하던 순진한(?) 골드 드래곤은 그 함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내 아들 에디우스를 세레스여신과 실버드래곤의 딸 다희의 반려로 부끄럽지 않게 키울 것을 나 골드 드래곤 하비어스의 이름을 걸고 용언으로 맹세한다" 위와 같이 맹세를 해놓고는 자기 아들과 다희가 반려로 맺어지기로 맹세한 것으로 오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유스테우스가 자신의 딸을 안 줄 경우 용언으로 약속한 하비우스를 광룡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하비어스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용언의 내용은 이미 지켜진 것이고, 다이아나라면 드래곤하트라도 빼어 내 줄 것이 뻔한, 드래곤계에서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아들은 '소박'맞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미 용언의 문제를 알고 있던 - 에디우스는 이미 한 번 이로 인해 발작을 일으킨 일이 있다 - 두 남녀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2차전에 돌입한 후 둘 만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쪽 방이 작은 거실입니다. 유리로 되어 있어서 햇살이 잘 들지요.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네. 그게 좋겠군요" 에디우스의 제안에 다이아나가 응하자 끝날 줄 모르는 금,은의 대결을 뒤로 하고 청춘남녀는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온실처럼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곳은 마치 베란다를 막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작은 거실 - 작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웬만한 방보다 큰 - 의 한 가운데에는 2인용의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다이아나와 함께 방 안에 들어선 에디우스는 우아한 동작으로 의자를 당겨 다이아나를 자리에 앉히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인간의 예의에 익숙하신가봐요?" "꽤 오래 노력했으니까요" 약간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띄운 채로 대답하는 에디우스의 모습은 유리로 투과되는 햇살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다이아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드래곤들의 미적 감각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엘프들도 아름다운데 이보다는 약간 더 순한 분위기랄까? 확실히 카리스마에 있어서 드래곤 일족을 따라가기는 힘들지도...... 그리고 보면 이 남자는 마치 카이젠의 분위기와 시루스의 외모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다이아나는 카이젠을 떠올리며 가슴 한 구석이 싸아해졌다. 깨어났을까? 아마도 화를 내고 있겠지. 이들과 함께 있는 이상 카이젠은 자신을 구속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야' 마지막에 다이아나가 카이젠에게 느꼈던 감정은 연민이었다. 탈출사건 이후 말이 많아진 카이젠으로부터 그가 자라온 척박한 환경을 알 수 있었고,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보았다. 카이젠의 감정은 자라지 않은 아이와 같았고, 뛰어난 능력과 컨트롤에 묻혔던 그러한 감정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을 때는 마치 아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처럼 손에 닿지 않는 것에 억지를 부리면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외면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시루스가 나를 찾고 있을까?' 그럴 것이다. 말도 없이 사라진 다이아나에 대하여 걱정하며 적어도 확실한 결론을 얻기 전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지켜주겠노라고 '유스'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는 엘프, 자기 편한대로 약속을 잊어버리는 종족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잠잠한 다이아나의 얼굴 위로 생각에 따라 여러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에디우스는 그저 조용히 그런 다이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아나야 에디우스가 한 폭의 그림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감상의 즐거움을 더욱 만끽할 수 있는 쪽은 오히려 에디우스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 제가 실례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제서야 상대를 무시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너무 오래 잠겨 있었음을 깨달은 다이아나가 화급하게 사과의 말을 건냈다. 물론 에디우스는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미리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은 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구요. 일단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듣겠습니다" 에디우스는 차마 꺼내기 힘들었던 화제를 다이아나가 먼저 말하자, 치밀어 오르는 긴장감을 억누르면서 대답했다. 다이아나의 말은 이어졌다. "저는 제 감정에 솔직하고 싶습니다. 아직 제 감정이 어찌될 지 모르겠어요. 저희 부모님의 예로도 알 수 있지만, 가장 존귀한 존재들 조차도 감정을 의도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에디우스님에게는 너무나 불공평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일찍 말씀드리는 것이 죄를 덜 짓는 것이겠지요. 제가 에디우스님의 반려가 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물론, 이건 현재의 상황이에요. 그러니, 에디우스님도 이제는 조금 더 넓게 보셨으면 합니다." "후훗. 절대 아니라는 말씀은 안하시는군요" "그건 희망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럼 저도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감정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저도 제 마음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바로 저 자신의 의지입니다." "상당히 무모한 말씀이세요. 그러다가 제가 저만의 반려를 찾으면요?" "글쎄요. 지금은 어떻게 말할 수 없군요. 화가 나서 그 상대를 죽일 지도 모르고, 다이아나님의 행복을 빌면서 조용히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이아나가 다른 남자를 반려로 선택한다는 상상만 해도 치솟는 살기를 겨우 억눌러야 했다. 에디우스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어찌되었든 다이아나님의 의도는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1700년 동안 당신만 바라 본 저를 위해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 말씀하세요" "편견없이 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겠어요" "그리고, 저를 알릴 기회를 주십시오" "네?"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건...." 다이아나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에디우스는 침묵을 지켰다. 다이아나는 금빛 눈 가득히 확신을 담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에디우스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동행을 원하신다면 몇 가지를 지켜주셔야만 합니다" 반승락을 받았는데 에디우스가 거절할 리가 없다. 속으로야 펄쩍펄쩍 뛰고 있던 어찌되었던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보라는 태도를 취했다. "인간으로서 함께 해 주십시오. 적어도 저와 관계되는 모든 일에서 만큼은 드래곤이라는 표시를 내거나 능력을 사용하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제가 스스로 하겠다고 하는 일에는 나서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에디우스님이 저와 동행하신다면 저는 어디까지나 에디우스님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인간으로 대우할 것입니다. 그 이상을 바라셔서는 안됩니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부탁이었다. 에디우스가 그렇게 하겠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다이아나는 거의 잔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조건을 덧붙였다. "저는 반려로서 에디우스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에디우스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모르지만, 다른 이를 사랑하거나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해서 그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하셔서는 안됩니다." 드래곤인 에디우스보다 강한 남자가 또 있을까? 에디우스가 동행을 하다가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그녀가 호감을 가진 이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자신들 이외의 종족에 대하여는 상당히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레디아나의 사건이 있기 전이라면 에디우스는 이 말에 수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당한 전례에서 그런 행동이 다이아나의 미움을 살 뿐이라는 것을 에디우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만일 다이아나에게 큰 해가 있었다면, 에디우스는 목숨을 걸고라도 레디아나를 죽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요" 의외로 순순히 나오는 에디우스의 대답에 다이아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에디우스의 대답에는 가식이 없어 보였고, 그저 따뜻한 미소만 보내오고 있었다. 에디우스는 레디아나 - 다이아나가 레아로 알고 있는 - 의 이야기를 할까 망설이다가 다이아나의 심성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다이아나가 겪은 일에 대하여 자신의 책임이 상당하다고 느꼈기에 이해할 수 없는 사과를 건냈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말씀이신지요?" "다이아나님이 이번에 겪으신 일에 저 또한 책임이 있습니다" "???" "더 이상은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묻어주시겠습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을 굳이 들추어 낼 필요는 없었다. 다이아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개념치 않는다는 의도를 확실히 했다. 젊은 남녀가 상당히 지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고 방에서 나올 때까지도 연륜있는 어르신들의 다툼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아빠. 그만하세요" "아.버.지" 누구 딸은 저렇게 이쁘게 말리는데 왜 내 아들은 이렇게 살벌한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아들에게는 이미 지는 죄가 있는지라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하비어스는 그 원흉을 한 번 더 노려보았다. 거실 안이 조용해지자, 이 일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에디우스가 나섰다. "다이아나님과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용언의 약속은 이제 그만 거론해 주십시오. 제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단호한 에디우스의 말에 유스테우스는 흐뭇한 표정을 하비어스는 죄책감 어린 표정을 각각 지었다. 그날 밤, 아버지의 방으로 찾아간 다이아나는 목걸이 요정에 대하여 여쭈어 보았다. "페어리가 나왔었다면, 위험한 일이 있었나보구나" "아, 그게... 원래 탈출하다 잡힌 노예는 벌을 받거든요" 당장 왕성에 브레스라도 날리겠다는 아버지를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 사실, 이런 이유로 다른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야 어떻게든 말릴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둘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다시 목걸이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게 말이지......" 원래 페어리는 요정족이며 마법 사용에 능숙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성격이 지루한 것을 싫어하는 반면 게으르기는 짝이 없고, 재미를 위해서는 물불을 안가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페어리는 유스테우스의 본체 모습을 보고는 은빛 비늘이 이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레어에 침입해서 몰레 비늘을 떼어내려다가 유스테우스에게 잡힌 것이다. 감히 에인션트급 드래곤의 비늘을 예뻐서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떼어낼 생각을 하다니, 페어리란 족속의 성격을 알 만도 하다. 그야말로 생각 없는 스타일이랄까? "그래서 이 돌 안에 가두신건가요?" "응 그거 정령석인데, 약간 기운을 변형시켜서 가뒀지 뭐. 정령 가두는 거랑 비슷해. 그렇게 하면 마법의 기운이 안 느껴지고 싸게 보이니까 만약의 순간까지 네게 남겨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는 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한참 감사의 인사를 한 후, "그런데, 안 풀어 주시나요?" "걔가 풀어달래?" "부탁하시던데요?" "웬 존대냐? 하찮은 페어리한테." "그래도 제 목숨을 구해준 걸요" "흠.. 일단 이리 줘 보렴" 다이아나의 목걸이를 손에 쥔 유스테우스가 뭘 어떻게 했는지, 목걸이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예의 그 페어리가 나왔다. 그런데 둘은 한참 무엇인가 얘기하는 듯하더니 페어리는 다시 목걸이 안으로 사라졌고, 유스테우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다이아나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왜 다시,..?" "귀찮다는데? 그건 빈 말인거 같고 네가 맘에 들었나보다. 쟤네들 이쁜 거 되게 밝히는 족속이거든" 유스테우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다이아나는 허탈하게 마주 웃었다. 허긴, 드래곤 비늘이 이쁘다는 이유로 목숨을 걸었다는 페어리가 아닌가? 다이아나의 외모를 생각하면 대충 이해 할 수 있을지도. "그건 그렇구요. 아빠께 부탁이 있어요" "얼마든지 말하렴!" 안그래도 뭐든지 혼자서 하려는 딸의 성품과 그것을 말릴 수 없는 딸의 운명 때문에 몸이 달아 있는 유스테우스에게 '부탁'이라는 말은 가뭄속의 한줄기 시원한 빗줄기였다. "시루스라는 엘프 기억나세요? 아마 저를 찾고 있을 것 같아요." 다이아나가 시루스라는 이름을 언급하자 안그래도 입이 찢어졌던 유스테우스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이 곳에 있단다" "네? 어떻게??? 거기서 여기는 몇 달 거리인데......" "내가 옮겨놨지 뭐" 유스테우스는 자신이 '유스'로서 시루스와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이아나의 오빠라는 남자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시루스는 다른 곳으로 이동도 못하고 - 혹시나 다이아나가 다시 찾아왔을 때 자신이 없을까봐 - 전전긍긍하며 여관에 장기투숙을 하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오기 전까지. "날 기억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알았는지, 유스라는 마법사가 찾아왔다. 유스를 본 시루스는 반갑기도 하고 면목도 없었다. 다이아나를 마음에 들어하면서 자신에게 부탁했던 이가 바로 유스가 아닌가! "그 애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네" 뜬금없는 말의 의미는 바로 파악되었다. "어떻게???" "나도 모르겠네. 그 아이의 영상이 떠오르더군.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어디쯤인지는 아네" "거기가 어딥니까?" "대륙의 동쪽, 하투아 제국일세. 수도쪽인것 같네만 그건 확실치 않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짐부터 싸려는 시루스였다. -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 그런 시루스를 기특하게 생각하면서 그가 짐을 다 꾸려들고 "떠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유스는 그를 붙잡았다. "자네의 마법으로는 이동도 자유롭지 않고, 거리가 너무 머네. 내가 데려다줌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루스를 붙들고 하투아의 수도로 이동한 유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사실, 이런 거리의 이동이 가능했던 건 내가 이 생이 끝났기 때문일세. 그럼 잘 부탁하네" 말과 함께 흐릿해져가는 유스의 모습. 시루스는 한 위대한 마법사의 마지막을 보면서 그의 부탁대로 다이아나를 찾아 이번에는 반드시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 이렇게 된거지. 아, 물론 저쪽 골드들은 몰라. 굳이 가르쳐 줄 이유도 없고. 싫어할거야" "후훗. 아빠 너무 고마와요" 다이아나로부터 감사의 뽀뽀를 볼에 받고 헤롱대는 유스테우스는 정말 팔불출 아버지의 전형이었다. 엘프의 위치를 세심하게 살펴본 유스테우스는 - 한 마을 내에 있기 때문에 엘프의 기운을 찾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 그가 가까운 거리의 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다이아나는 다음 날 신전에 가는 길에 그를 만나리라고 결심했다. 냉혈황제 카이젠 드 하티아스 병자의 약해진 시력을 위해 커튼이 쳐져 있는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침상 위에는 아직 젊어 보이는 여인이 독에 중독된 사람 특유의 검푸른 안색으로 짧은 숨소리를 끊어질 듯 낸다. "대신관님이 계시다면 모를까, 저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미 독이 온 몸에 퍼져 있습니다" 죽음의 선고와도 같은 신관의 말이다. 침상 바로 옆에 있는 신관의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흑발, 흑안의 중년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병자를 돌보던 아랫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마법사를 불러오게" "하, 하오나 전하! 이미..." "영상을 담을 수 있는 수정구를 가져오라 이르게" "예." 황제의 옆을 끝까지 지키고 있던 시종장은 문밖으로 나가 대기 중이던 마법사에게 무엇인가 조용히 전했다. 잠시 후 수정구 하나를 손에 쥔 마법사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영상을 기록하라" "예" 마법사가 중얼중얼 마법을 캐스팅하는 짧은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지금부터 기록이 됩니다" 황제는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인은 괴롭게 숨을 몰아 쉬면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여인의 손을 쥐고 귓 가에 속삭였다. "그 애는 무사하오! 그리고 가장 강력한 황제가 될 것이오. 그러니 편히 잠드시오. 걱정 말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은 숨을 거두었다. "선명하게 잘 되었겠지?" "네. 폐하" 마법사는 영상이 담긴 수정구를 황제에게 바치고 조용히 물러났다. "어서 가져오지 않고 뭘 하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이 날아왔다. 갑옷을 입은 기사의 손에 얻어맞고 구석으로 반쯤 날아 처박힌 것은 5-6살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언제 맞았냐는 듯이 재빨리 일어나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소년의 볼에는 커다란 손자국 모양이 일부 남아 소년이 당한 폭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어이, 카이! 또 맞은 거냐?" "암튼 칼튼 그 녀석은 질이 안 좋아!" 소년의 얼굴을 본 몇 몇 기사들이 쯧쯧거리면서 말을 건네왔다. 소년은 고개를 까닥이면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반짝거리는 윤기를 머금은 흑발에 까맣고 큰 눈을 가진 소년의 이름은 카이였다. 어른들도 벼텨내기 힘들다는 변방의 영지에 저런 소년이 그것도 기사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보통은 시종으로 쓰거나 수습기사라고 해도 적어도 10살 이상 흔히는 12살에서 16살 정도의 소년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나마, 그런 종자를 쓸 정도의 기사는 이런 변방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이 곳은 하루 걸러 한 번은 몬스터들의 침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날마다 상당한 인원이 시체가 되어 묻히는 지옥같은 전장이었던 것이다. 하루 해가 저물어 어슴푸레할 무렵. "또 맞았나 보구나" "......" "강해지거라. 네가 강해지면 아무도 너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신분이 비천하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를 홀대하는 곳은 대륙 어디에도 없다!" 소년은 '홀대'라는 단어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전체적인 의미에서 맞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어떤 말도 없이 소년을 앉혀 놓은 지이드라는 이름의 기사는 큰 손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소년의 얼굴에 약을 발라 주었다. 그는 소년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사람들의 말로는 지이드는 원래 수도에서 근무하던 근위기사였는데, 그의 가문이 모반죄를 저질러 이 곳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 때 그가 데려온 것이 바로 눈 앞의 소년 카이였다. 사람들은 카이가 지이드의 자식일 꺼라고 수근거렸다. 소년은 밖으로 나가 지이드가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목검을 휘둘렀다. 벌써 어느 정도 수련을 해 왔는지, 소년의 자그마한 체구에 비해 상당히 큰 목검이 상당히 깨끗한 움직임을 보이며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날, 실력은 상당했지만 상당히 악질적인 범죄를 저질러 변방으로 와서 그 실력 덕에 꽤 오랜 기간을 기사들 사이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칼튼이 자신이 늘상 두들겨 패던 소년에 의해 살해당했다. 16살의 소년이 된 카이는 칼튼에게 정식으로 결투 신청을 했고, 걱정하면서 말리는 주위 사람들의 예견과는 다르게 그 결투에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게 된 것은 칼튼이었다. 전혀 주저없이 칼튼의 목을 베어버린 소년은 무표정하게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 이후 소년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이 18살이 되자 지이드는 소년을 데리고 가 어떤 사람에게 넘겼다. 그 곳은 암살자 길드였다. 소년이 상급의 어쌔신이 되었을 때, 다시 지이드가 찾아왔다. 카이가 꼭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지이드는 이제는 청년이 된 카이와 길드내에서 몇 안되는 카이 이상의 실력을 인정받던 비슷한 또래의 한 청년을 데리고 수도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저택들이 즐비한 수도의 외곽에는 그 저택에서 필요한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이 살고 있었고, 더 구석으로 가면 어떤 도시에나 있다는 슬럼가가 있었다. 지이드는 카이를 사창가에 취직시켰다. 함께 나온 청년은 어디로 보냈는지 보이지 않았다. 카이는 그곳에서 화대를 안 낸다거나 행패를 부리는 손님들의 뒤처리를 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창녀들에게 '밤의 쾌락'을 배웠다. 젊고 잘생긴 청년에게 창녀들은 앞다투어 틈만 나면 몸을 던졌고, 카이는 그러한 그녀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곳에서 꼬박 1년을 채운 카이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는 여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지이드를 따라 나섰다. 스물 한 살의 청년 카이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하투아 제국의 황제가 사는 곳, 바로 황성이었다. 카이는 황궁 기사단에 입단했다. 기사로서 가장 낮은 귀족의 지위를 받은 카이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기사의 작위를 받기에는 어린 나이의 그가 추천장을 들고 테스트를 받겠다고 하자, 다들 비웃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기사단 내에서 중상위에 속하는 기사가 카이의 칼에 힘없이 무너지자 분위기는 급격히 변했다. 몇 년 전의 무표정함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카이의 얼굴에는 늘상 미소가 가득했다. 호탕하고 밝은 젊은 기사의 옆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우정으로 시작된 관계는 카이의 월등한 실력으로 인해 존경심으로 발전해갔다. 젊은 귀족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누가 카이를 잡느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정형적인 미남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여인들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꿀단지에 벌이 몰려드는 형상처럼. 하투아의 남자들은 모두 전사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언제나 몬스터와 맞서 싸워야 했다. 언제 사별할지 모르는 젊은 연인들은 혼전에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던 연인이 죽었다고 해서 여인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연인을 찾았고 그렇게 생을 꾸려 나갔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정착된 하투아의 관습이었다.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이러한 풍조는 상당히 자유로운 성문화를 형성했다. 귀족들 사이에도 이러한 풍토는 이미 정착되어, 카이에게 유혹의 눈길을 던지는 여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마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이에게 빠져들었다. 카이가 왕성에 들어간 지 꼭 세 해만에 황제는 큰 연회를 열었다. 이미 황제의 건강이 극도로 나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어떤 왕자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지에 대하여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파벌을 형성하며, 조심스러운 세력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제가 연회를 연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후계를 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황제는 후궁들이 낳은 세 명의 왕자가 아닌 이미 죽은 황비의 아들인 카이젠 드 하티아스의 생존사실을 알리고 - 황비의 유일한 아들은 3살 때, 괴한들에 의해서 납치된 후 소식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 일이 각각 2살과 1살의 후궁출신 왕자들의 앞날을 위한 누군가의 음모라고 수근거렸다 - 후계의 지위가 아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동요한 귀족들 중 눈 앞에서 부귀영화를 놓친 각 왕자들의 외척들이 먼저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마치 황제가 눈 앞에 없기라도 한 듯이 큰 소리로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노골적인 강박을 해댔다. 제국의 권력의 상당수를 손에 쥐고 이제는 황제의 권위에도 서슴없이 도전하던 그들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 짐은 이 나라의 황제다. 지금 그대들이 하는 일은 바로 반역행위이다" 황제는 전에 없이 큰 소리로 그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안하무인인 그들은 힘 없이 죽어가는 황제를 오히려 비웃었다. "그럼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저희들을 모두 반역죄로 체포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어디 한 번 해보시지요" 제1왕자의 외조부인 함부르크 후작이 대놓고 빈정대자, 같은 입장의 귀족들이 동조했다. 정녕 그들의 눈에는 황제조차도 보이지 않는 듯이 그야말로 무인지경의 행태의 절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갑옷으로 인해 울리는 발소리조차도 정연하게 황궁 근위대가 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나 카이젠 드 하티아스는 황제폐하의 명을 받아 너희에게 역적의 죄를 들어 체포한다!" 기사단을 이끌고 연회장에 들어선 사람은 카이였다. 사람들은 황제가 황위를 이양하면서도 보여 주지 않던 황비의 아들이 최근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기사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황제의 밀명을 받고 황태자의 충복이 되기로 맹세한 황궁 근위대는 왕자들을 비롯하여 후궁들과 외척들,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하던 인물들을 모두 추려내어 연행했다. 기사단 안의 불순한 세력들은 이미 소리소문없이 제거된 후였다. 황제가 후계를 발표할 것이라는 기대 하에 자신들의 주장을 펼 준비를 하고 측근들을 모두 불러내어 세력 다툼을 하려던 그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잡혀서 다음날 바로 참수되었다. 일 주일 후, 대관식을 거쳐서 황제에 등극한 카이젠 드 하티아스는 참수된 귀족들의 영지와 사병을 모두 압수하고 하투아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카이젠이 즉위한 지 세 달 후 전대 황제는 마치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숨을 거뒀다. 냉혈의 황제 카이젠이 침착함을 되찾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시종장 라덴 - 길드에서 함께 나온 라덴은 지이드의 아들이었고, 지이드가 카이젠을 위해 따로 예비해 놓은 그의 경호원이기도 했다 - 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의 이름을 들었나?" "예. 다이아나라고 했습니다" "신전에 가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오도록 하게. 그 외에 다른 사항이 있다면 뭐든지 다 알아보도록!" "황공하오나 이미 지시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렇군" 언제나 자신의 의도를 한 발 먼저 읽는 라덴이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황제의 자리에서 카이젠이 쓰러지지 않도록 가장 많은 힘을 주는 이가 바로 그이다. 라덴은 겉보기에는 시종장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공작이 된 지이드가 공개하지 않았던 아들이었고, 제국 내의 최대의 정보조직과 암살길드의 수장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전대 황제 때부터 준비되어 카이젠에 이르러 열매를 맺고 있었다. 황비를 암살하고, 자신들의 외손자로 하여금 제국을 갖게 하려는 귀족들의 의도에 맞서 어린 황자의 실종을 조작하고 - 각 후궁의 외척들은 서로 상대방이 행한 일로 알았다 - 믿을만한 측근들에 대한 모함을 믿는 양, 모두 음지로 보내어 20년을 쌓아 올렸던 전대 황제의 업적인 것이다. 카이젠에게는 꽤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라덴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가 들고 온 정보로 인해 카이젠은 다이아나가 신관과 동행하다가 가족인 듯한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숙소에 묵고 있다는 사실과 숙소의 위치와 그들이 묵는 방이 특실이라는 것과 그들의 인상착의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신전에 들르겠다고 했으나 아직 방문하지 않았으며, 아마도 다음날 갈 듯하다는 거의 확실한 추측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만 돌아가마!" 상당히 화려한 메뉴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무슨 이름인지는 모를 - 유스테우스가 상당히 어려운 이름을 말해 주었지만 별로 새겨 들은 이가 없었다. -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느닷없이 유스테우스가 말했다. 다이아나는 어젯밤에 이미 들은 이야기여서 평온한 표정이었고, 이미 동행하기로 한 에디우스야 속으로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지만 하비우스는 달랐다. "왜 우리야? 가고 싶으면 너나 가라고!!! 난 얘네들 따라 다니면서 오랜만에 유희나 할꺼야!" 어차피 보일 꼴 못 보일 꼴 다 탄로났다고 생각했는지, 평상시 타인 앞에서는 늘상 '근엄모드'를 자랑하는 하비우스는 떼 쓰는 어린아이처럼 발악을 했다. 다이아나는 하비우스의 뜻밖의 반응에 약간 당황했지만, 굳이 스스로 나설 필요가 없음을 짐작하고 잠잠히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동시에 단독면담을 신청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하비우스는 유스테우스에게 끌려가서는 딸의 행보에 방해될까 자신도 못 가는데 니가 나서서 망칠 참이냐고 짜증을 부리는 - 다이아나의 앞에서와는 전혀 다른 태도- 에 한동안 진땀을 흘렸고, 나오자마자 소매를 잡고 다시 끌려가서는 도무지 일생이 도움이 안된다 - 엉터리 맹약을 맺어서 아들 인생 망쳐 놓고 이제 좀 어찌 해 볼 기회가 생겼는데, 주책없이 따라 나서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 는 아버지 가슴에 못박는 아들의 한탄을 한참 들어야 했다. 암울한 표정으로 다시 거실로 들어선 하비어스는 잔뜩 기가 죽어서는 머뭇거렸지만, 양쪽에서 가해오는 살기 어린 기운에 애써 웃음지으며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는 유스테우스에게 끌려 가듯이 사라졌다. 산만한 분위기를 형성하던 두 아버지가 떠난 거실은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다이아나가 볼 일이 있다면서 나가려고 하자, 에디우스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함께 가시려구요?" "동행하기로 했잖습니까?" "흠.." 나가려다 말고 다시 들어온 다이아나는 역시 뒤따라 돌아온 에디우스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자신도 맞은 편에 앉았다. "아마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 신관으로서의 신분을 되찾고 그 신분으로 계속 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예" "저와 동행하시려면 어떤 사이인지에 대하여 미리 준비가 있어야 할꺼에요" "그거야..." "그리고, 에디우스님의 직업에 대하여도 미리 말을 맞추어야 하겠죠" "그.. 그렇군요" "마법은 당연히 잘 쓰시겠고, 검술도 잘 하신다면서요?" 에디우스는 이 대목에 이르자, 속으로 그 간 열심히 노력한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원래 드래곤만큼 자존심 센 존재도 드문 것이다. "인간의 마법은 거의 모두 쓸 수 있습니다. 굳이 용언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9클래스까지 가능하지요. 검술은 인간들의 말로는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마 그랜드마스터라고 부르나보더군요" "아, 대단하시네요 정말" "......"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싱긋 미소를 지었으나 - 이 시점에서 에디우스는 하비우스와 연구한 여러 가지 것들을 드디어 실습에 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공부라면 지겹게 하다 보니 연애학에 있어서도 상당히 빠를 수 있었던 걸까? - 속으로는 뿌듯하기 그지 없었다. "에디우스님의 나이에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는 좀 그렇고... 검사가 낫겠네요. 실력이야 가능하면 좀 감추는 게 좋겠지요" 다이아나의 말은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20대 초반의 마법사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4-5클래스를 넘기기 힘들다. 검사라면 이미 20대에 소드마스터가 된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고 하니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주목을 받지 않으려면 소드마스터임은 숨기는 편이 더 나았다. 다이아나의 대답이 현실적이라고 해도 열심히 닦은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에디우스는 속이 탔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웃으면서 다이아나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냥 편하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요? 동행하면서 내내 서로 존대를 하기도 어색할꺼에요" "네?... 아 네!" 이 부분만큼은 상당히 기뻐하는 에디우스다. 거기에 다이아나가 친근하게 "응, 이라고 해야죠!" 라고 다그치자,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응" "아, 그럼... 친구가 나을까요 아니면 오빠,동생 할까요?" "친구로 하죠" 에디우스는 별 생각없이 말했는데, 오빠,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레디아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결정을 하루도 못 가서 후회할 줄은 전혀 짐작도 못하고 말이다. "친구라... 후훗... 그럼... 에디우스!" "응?" "그냥 에디라고 불러도 될까?" "응!" 어쩐지 주도권은 완전히 기운 것 같다. 어차피 에디우스가 다이아나에게 푹 빠진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다이아나답지 않은 것이었으나, 다이아나에게는 일부러 에디우스를 친구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혹시 이곳에 묵는 사람들 중에......." "다이아나?" 밖으로 나가 근방의 여관 하나로 들어간 다이아나는 프론트에서 시루스를 불러 달라고 하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무작정 따라 나선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여관으로 들어가자 묵묵히 따라 들어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아예 얼굴을 드러내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니면 잊어 먹은 것인지 몰라도 얼굴을 드러낸 다이아나와 걷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 에디우스는 - 물론 함께 있는 에디우스와 한 폭의 그림을 생성하는 바람에 더더욱 그랬었지만, 일단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으로만 받아들였다 - 신경이 상당히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이아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는 순간 날카로워진 신경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몰라도 에디우스의 얼굴은 급격히 냉각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다이아나가 그 목소리의 임자에게 뛰어가면서 "시루스 오빠!" 라고 소리치질 않나 눈물을 글썽이며 연인처럼 끌어안는 두 사람을 보니 약속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당장 저 빌어먹을 엘프놈을 사랑스런 다이아나에게서 떼어 내어 가능하면 잔인한 방법으로 없애 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속으로 상상했다. 속 마음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다이아나가 에디우스를 소개하기 위해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에디우스는 특유의 밝고 따뜻한 미소를 띄우고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는 다이아나의 말에 더더욱 암울해져야만 했다. "이쪽은 우리 아버지와 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제 친구인 에디우스에요. 에디 인사드려, 여기 이 분은 내가 여러 가지 신세를 지고 마법을 배우고 있는 시루스오빠야. 원래 스승님이라 해야 하지만, 너무 불편해 하셔서 그냥 편하게 지내기로 했어" "처음 뵙겠습니다. 시루스입니다" "에디우스라고 합니다" 그나마 엘프인 시루스가 정중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다이아나의 소개대로 하면,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와 동급이고 시루스는 그 윗사람이 되는 격이다. 결국 인간들 사이의 서열대로 하면 - 인간만큼 서열을 정하기 좋아하는 종족도 드물다. 아, 오크도 그렇지만 걔들은 어디까지나 누가 힘센지 가리느라 그런거고 - 그야말로 에디우스는 시루스에게 '형님~!'하는 관계여야 한다. 사실 에디우스야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 했지만, 다이아나는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었다. 엘프인 시루스에게 에디우스가 함부로 대할까 봐 - 해치지는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무시하고 오만하게 굴 수도 있다. - 자신의 스승이란 위치를 들이댐으로써, 미리 예방을 한 셈이다. 시루스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다이아나를 너무 급작스럽게 만난 터라 다른 아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빨리 하투아 제국을 떠나고 싶다면서, 그간의 사정을 궁금해 하는 것이 분명한 시루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신전에 들렀다가 가능하면 빨리 제국을 떠나자고 재촉했다. 두 남자는 당연히 다이아나를 혼자 보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다이아나는 그들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에디우스는 앞에서 팔짱을 끼고 걸어 가는 둘을 어두운 표정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함께 가겠다는 시루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팔짱을 끼자, 시루스는 내내 신경을 쓰고 있었던 듯 얼른 다이아나에게 로브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유독 시루스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다이아나의 태도 - 에디우스에 비하여 - 는 여성의 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시루스와의 경우 만남부터 우연했고, 오히려 시루스 자신이 어느 정도의 거리 -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지만 - 를 두면서도 다이아나를 잘 챙겨주는 성격이었다. 별로 숫기가 없는 엘프는 다이아나의 입장으로서는 전혀 '위험'이 느껴지지 않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농담을 하거나 짓궂게 행동하면, 얼굴을 붉히거나 당황하는 시루스였다. 에디우스의 경우를 보자면, 상대는 이미 자신이 알기 전부터 자신을 '이성'이자 '연인'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즉,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에게 '이성'으로서의 압박을 주고 있는 셈이었고, 그다지 남자들과의 연애감정을 가져 보지 못한 다이아나에게는 약간 '부담'이 가는 상대였다. 더하여,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에디우스의 어쩔 수 없는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는 다이아나에게 '카이젠'의 집착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에디우스야 상당히 억울한 일이겠지만, 다이아나는 본인이 의식하는 면과 무의식적인 면이 어우러져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이아나와 시루스의 뒤쪽에서 걸어가는 - 혼자만 로브를 쓰지 않은 탓에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 에디우스의 얼굴은 우울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신화 속에서 빠져 나온 남신이 분위기를 잡고 걸어가는 것과 같은 영상을 연출해낸지라, 길을 가던 여인들은 거의 혼절할 지경이 되어 그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그런 장면에 출연한 주인공은 초대하지 않은 '관객'에 신경을 분산시킬 여유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던 신전에 도착한 후, 신관이 아닌 둘은 잠시 일반 신도들의 영역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상당히 정중한 태도의 신관에게 안내를 받으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세레스 신전에서는 전날 왕성에 갔던 신관 '리온'에 의하여 '다이아나'라는 이름의 '최고위급의 신력을 가진 신관'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본단과 연락을 취한 하투아 제국의 총책임자인 최고위급 신관 엘다이르는 그녀가 한 달 정도 전에 새로 신관이 되었으며, 대신관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신성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리온에게서 당시 국왕의 상태를 전해들은 엘다이르로서도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자신이라고 해도 국왕을 살려낼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기도실에서 어머니와 만나고 싶었지만, 이 곳에서 다시 한 번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단념했다. 그녀가 인도된 곳은 응접실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녀를 안내하던 신관이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후에 다이아나는 상당히 친근한 느낌의 노인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엘다이르에게 느낀 친근감은 그가 최고위급 신관으로서 가지고 있는 신성력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기운을 풀풀 풍겨내고 있으니, 다이아나로서는 친근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의상 어쩔 수 없이 다이아나는 엘다이르에게 얼굴을 보이게 되었고, 이전에 만났던 신관과 똑같은 이유로 놀란 엘다이르에게 그 당시 했던 것과 동일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위급신관이 다이아나의 신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점에서 최고위급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했던 데 비해, 엘다이르는 눈 앞의 여신을 닮은 소녀의 신성력이 자신은 고사하고 어쩌면 대신관보다 높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다이아나는 결국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최고위급 신관의 증명인 신분증을 가지게 되었고, 상당히 고급으로 만들어진 신관복도 몇 벌 선물받았다. 그런대로 쉽게 넘어간 처음의 신관과 달리 엘다이르는 예의상 다이아나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으나, 마치 대신관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고 가끔은 일부러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그녀를 '성녀'라고 호칭하다가 고치는 둥의 행동을 해서 다이아나의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다이아나가 신전을 찾은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사실 카이젠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카이젠과 신전이 반목하는 결과를 막기 위해 일부러 신전을 찾은 것이다. 여신의 은총을 받은 신관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세레스 신전이 하투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지 알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으며 황궁에 있었지만, 말을 할 수 없게 제약을 걸어 놓은 터라, 왕성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황궁 내에서 어떠한 해도 입지 않고 상당히 잘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하는데다가 워낙 완강한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대신관은 미심쩍은 점이 한 둘이 아니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사실 제국의 황궁과 아니 직접적으로는 카이젠 황제와 반목한다는 것은 신전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난감해질 사안이었으니까. 숙소를 준비했다고 말리는 엘다이르에게 여신의 뜻에 따라 여행 중이므로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변명을 대고 - 이 또한 거짓말로 볼 수는 없었다. 다이아나의 뜻에 엄마가 동감했으니 여신의 뜻이고,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었으므로 - 다이아나는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던 에디우스와 시루스를 동행하고 서둘러 신전 밖으로 나오던 다이아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흠칫 멈춰 섰다. "그녀가 나타났단 말이지?" "예. 로브를 쓴 남자와 어제 만났던 일행 중의 한 남자와 함께라고 합니다." "말을 준비해라"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 카이젠이 고집스럽게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하자 라덴은 한 숨을 내쉬면서 황제를 따라 나섰다. 카이젠이 중요한 일에 대한 결정을 할 때 타인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지이드 공작과 라덴의 경우가 유일했다. 하지만, 지금같은 태도를 보일 때는 자신이 말려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을 내려오던 다이아나는 카이젠을 보자 약간 동요를 보이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의아해하는 동행들을 뒤로 하고 평지로 내려간 다이아나는 고개를 숙여 낮은 소리로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카이젠 전하를 뵙습니다."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군"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그냥 보내 주시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 "자리가 좋지 않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카이젠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리아를 낚아채서 말에 싣고 황궁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제국의 황제로서 살아온 사람이다. 세레스신전과 불화가 생긴다면 지금 당장 준비하고 있는 전쟁에서 하투아는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어느 틈엔가 리아의 옆으로 다가선 시루스와 에디우스는 각각 리아의 좌우의 약간 앞에 보호하듯이 위치를 잡고 있었다. 에디우스의 화려한 외모와 심상치 않은 기도를 본 카이젠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는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벙어리도 아닌데 습관이 남았나? 아무튼 일단 자리를 옮겨서 해결하도록 하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휙 돌아서서 앞장을 서 가는 카이젠의 뒤로 라덴이 두 필의 말고삐를 잡고 뒤따랐다. 다이아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카이젠의 뒤를 따라갔고, 무슨 일인지 궁금하고 애가탔지만 드물에 보인 다이아나의 어두운 분위기에 튀어나오는 질문을 삼친 시루스는 처음으로 다이아나의 손을 잡아 자신에게 팔짱을 끼웠다. 마치, 위로하는 듯한 친절한 엘프의 행동에 다이아나는 살짝 그에게 몸을 기댄 채로 카이젠의 뒤를 따랐다. 시루스와 달리 어느 정도의 사정을 알고 있던 에디우스는 카이젠을 보자 치솟는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동행으로 인정받은 그가 지금 나서는 것은 잘못하면 스스로의 기회를 없애는 것이 될 수도 있었기에 당장 검을 빼 들고 싶은 욕망과 힘겹게 싸웠다. 어차피 상대가 강압적인 방법을 시도한다면 기회는 올 것이다. 엘프에게 의지한 채로 카이젠의 뒤를 따르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에디우스는 치밀어 오르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수습하고 빠르게 다가가 다이아나의 빈 쪽의 옆자리를 지키면서 걸어갔다. 카이젠이 앞서서 도착한 곳은 다이아나의 일행의 숙소였다. 그는 성큼성큼 들어가 거실의 의자에 앉았고 그 뒤로 라덴이 섰다. 황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 덕분에 다이아나는 시루스에게 살짝 무엇인가를 부탁할 수 있었다. 에디우스야 타고난 능력 덕에 그 소리를 들었지만, 시루스가 잠시라도 없어진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일부러 모른 척 했다. 시루스가 걱정스러워했지만, 다이아나는 에디우스를 살짝 돌아보면서 무언가 중얼거렸고, 시루스는 어디론가로 향했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방 안에 들어가자, 카이젠은 마치 제 방에 있는 듯이 편히 앉아 의자를 권했다. 다이아나가 맞은 편에 앉고 에디우스가 그 옆의 의자에 자리잡자, 카이젠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집은 눈썹을 한 번 치켜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젠은 에디우스를 무시하기로 결심한 듯, 다이아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고위급 신관이 불가능한 일을 했다고 들었다. 일단 내 목숨을 살려 준 것은 고맙군" "......" "왜 그랬지?"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긴, 별로 상관 없다. 세레스 여신의 은총을 받은 성녀가 제국의 황비가 된다면 군의 사기가 더 높아질테니, 더더욱 좋은 일이지" "전하의 비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너는 아직 내게 빚이 남아 있다. 아니,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그건 없어진 셈인가? 하긴 이 카이젠의 목숨이 2000골드가 안된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 때 잠시 다른 곳으로 갔던 시루스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둘의 대화는 중지되었다. 시루스는 주머니 하나를 다이아나에게 건냈고, 다이아나는 그런 시루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그 주머니를 카이젠의 앞쪽으로 밀어 주었다. "이건 뭐냐?" "2000골드입니다. 제 몸 값이지요" "훗. 철저하게 준비했군. 하지만, 산 물건을 물리는 것은 산 사람의 마음이 아니던가?"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다만, 전하께서 저로 인해 큰 돈을 내셨기에 돌려 드리는 것 뿐입니다." "상당히 자신만만하군. 신전을 믿는 것인가?" 이렇게 말을 해서는 끝이 없을 것이다. 다이아나는 옆에 앉은 에디우스를 의식했다. 만일 황제가 정말 무력을 사용한다면, 신전이 문제가 아니라 드래곤을 적으로 두게 되는 셈이다. 아무리 에디우스가 약속을 했다고 해도, 다이아나의 신변에 위협이 생긴다면 그 약속이 지켜질 리 만무했다. "전하, 저는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전하에게 저는 단지 리아라는 이름의 노예였을 뿐이지요. 전하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저의 신분이나 이름을 알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전하가 바라시는 것은 그저 전하를 사랑하고 전하의 뜻대로 행동할 여인입니다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제가 전하를 사랑한다고 해도 지금 이 곳에 머무를 수 없듯이 말입니다. 저도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전하께서 제게 보여 주신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소유욕이었습니다. 방금도 전하는 저를 물건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진정한 사랑이란, 절대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고 나의 뜻대로 하려는 강압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사랑의 방식은 다를 수 있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데, 누가 그걸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이냐?" "후우~! 그런가요. 전하는 전하의 방식으로 저를 사랑하시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제게 독이 될 것입니다. 만일 저를 가두어 황비로 만드신다면 저는 날마다 죽어갈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아니요. 전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사랑의 방식은 각자 다르다고 말입니다. 저는 저를 가두어 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제 자신의 일이니까 당연히 전하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억지로라도 나는 너를 데려 가겠다. 신전? 모르게 처리하면 그만이다. 나는 그 정도의 능력은 충분히 있다. 더 이상 너와 말싸움을 하며, 시간낭비를 하지는 않겠다. 네가 싫다고 해도 나는 너를 가지고야 말 것이다." 도무지 고집을 꺾을 생각을 안 하는 카이젠의 태도에 다이아나는 피곤함을 느꼈다. 마치 귀를 막고 자신의 말만을 하려는 어린아이처럼 단호한 태도로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그의 눈빛은 어찌 보면 애처로울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무지 말이 안통하는 인간이군" 참다 못한 에디우스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끼어 들었다. 다이아나는 말릴까 생각하다가 의외로 에디우스의 태도가 침착한 것을 보고는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라덴이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손짓으로 말린 카이젠이 그제서야 에디우스를 쳐다보았다. "당신 말고 누가 또 있나?" "재미있군. 무슨 자격으로?" "자격이야 충분하지. 나는 어려서부터 다이아나를 반려로 생각하고 컸으니까. 뭐 말하자면 다이아나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친구이기도 하고.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사랑 운운하면서 상대를 배려할 줄 조차 모르는 당신같은 사람과는 다르지" 에디우스의 말에 다이아나의 뒤쪽에 서있던 시루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로브로 가려진 상태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물론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카이젠이다. 외모로 치자면 카이젠은 에디우스보다 한참 뒤쳐졌다. 그래도 여자 다루는 데 이골이 난 터라 나름대로의 자신감으로 애써 에디우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던 터였다. "네가 다이아나의 남편이라고 해도 너를 죽이고 가지면 된다" 카이젠의 입에서 에디우스가 바라마지 않던 말이 튀어나왔다. 에디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과연 나를 죽일 실력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피할 생각을 없다. 일단, 여기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으니 밖으로 나가지" 에디우스는 숙소로 돌아올 때 카이젠이 그랬던 것을 갚아주기로 작정한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비록 지금은 황제이지만, 누구보다도 진한 전사의 피를 가진 카이젠이었다. 연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살기가 끓었지만, 자신에게 결투를 청하는 사람을 살려 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이라고 그 심정이 더했으면 더했지 바뀔 리는 없었다. 에디우스의 말에 차갑고 잔인한 미소를 띈 카이젠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하비어스가 절대 허름한 숙소에 묶을 수 없다는 고집을 피워서 잡은 이 곳은 제국내에서 손꼽히는 고급여관이었다. 그런 이유로 에디우스와 카이젠은 주로 대련을 위해 사용되는 꽤 고급의 방어막 - 고급 검사나 마법사의 경우 여관 건물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 을 갖춘 대련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주군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라덴은 별 걱정없는 얼굴로 카이젠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한 쪽에서는 그가 대륙 전체에 명성이 자자한 소드마스터임을 알고 상당히 걱정스러워하는 시루스와 에디우스를 붙잡고 귀엣말을 건네는 다이아나가 있었다. 다이아나는 물론 카이젠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에디우스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이젠을 바라보았다. "잠깐, 생각해보니 이 결투로 내게 얻어지는 것이 없군. 안 그런가? 내가 이기면, 리아를 데려가겠다. 여기에는 리아도 동의해야 한다" 여전히 고집스럽게 다이아나라는 이름 대신 리아라고 부르는 카이어스의 내심을 짐작하고 이길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자신감에 불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던 다이아나는 웬지 자신이 그를 속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지신다면 저와 일행이 이 나라를 떠날 수 있게 해 주시겠지요?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도 전하께서 소드마스터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디우스는 전하보다 강합니다. 이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그렇지 않아도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에게 바짝 붙어 속닥거리는 모습에 생전 처음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던 카이젠은 전혀 불안한 표정 없이 자신보다 그가 더 강하다고 말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더욱 살의를 품고 말했다. "좋다. 저 자가 이기면 나 카이젠의 이름을 걸고 너를 자유롭게 놓아주도록 하지. 네 일행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결투 상대로 여태 숨을 쉬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에디우스를 죽이겠다는 선포나 다름 없는 소리에도 다이아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할 뿐이었다. 결투를 할 두 사람을 남겨 놓고 나머지 셋은 결투장 바깥으로 물러났다. 라덴이 익숙하게 간단한 시동어로 작동시키게 되어 있는 실드를 작동시키자 두 남자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세를 취했다. 카이젠은 눈 앞의 남자가 생각보다 강한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곱상한 외모와 다르게 일단 대치한 상태에서 남자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자신도 경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이젠은 자신이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식 기사들이 소드마스터가 된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제대로 된 검술에 더하여 수많은 실전경험과 변칙적인 기술까지 마스터한 터였다. 결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애송이가 자신과 같은 경험을 가질 수는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더하여, 다이아나의 능력을 전해들어 잘 알고 있던 카이젠은 다이아나가 신성력을 사용할 겨를도 없이 확실하게 상대방을 죽이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카이젠과는 다르게 에디우스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물론 비교도 할 수 없는 드래곤과 인간의 능력이지만, 지금 현재는 앞의 인간과 동일한 조건으로 싸우는 것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검술을 완성할 수는 없다. 다이아나가 자신에게 걸어놓은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걸고 믿는다는 생각에 에디우스는 속으로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더더군다나 가소롭게도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 카이젠의 협박에도 당당하게 맞서지 않는가? "정말 괜찮겠습니까?" 시루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오빠, 자꾸 존대말 할꺼에요?" "지,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 아" 시루스는 말하다 말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다이아나의 필살의 눈빛공격에 어색한 반말로 이야기했다. 그런 시루스를 보며 약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이아나는 말했다. "에디는 절대 지지 않아요. 오히려 카이젠이 걱정인걸요. 후~!" 아마 카이젠이 자신을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는 다이아나를 보았다면 기뻐했을 테지만, 지금 그 카이젠은 근래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결투'에 임하고 있었다. 카이젠이 걱정이라는 다이아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떠올리는 시루스를 보면서 결투에 진 카이젠이 받을 정신적인 타격을 걱정하던 다이아나는 라덴의 비명소리를 듣고 잠시 눈을 돌렸던 결투장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실력의 검사가 아니면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이 빠르게 검을 맞댈 때마다 번번이 손해를 입은 것은 카이젠이다. 몇 번 맞붙지 않았는데도 그 때마다 카이젠의 몸에서는 스쳐서 생긴 검상들이 늘고 있었다. 카이젠은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는 자신에 못지 않은 검기로 검을 감싸고도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었고, 그가 휘두르는 검에 의해 자신의 검로는 매번 막혔다. 그의 검은 자신의 검을 막으면서도 착실하게 카이젠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라덴이 놀라 소리를 지른 것은 정식 검술이 먹히지 않자, 어쌔신 특유의 빠른 스탭으로 변칙공격을 시도했던 카이젠이 오히려 부러진 자신의 검에 맞아 쓰러졌기 때문이다. 라덴은 믿어지지 않는 실력을 가진 젊은 남자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힘없이 말리는 카이젠에 의해 저지당했다. 카이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비슷하지만 약간 뒤쳐지는 실력의 라덴이 이길 수는 없었다. 카이젠은 부러진 칼날이 박힌 어깨를 움켜쥐고 힘겹게 말했다. "내가 졌다. 약속은... 지키겠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 다이아나의 눈에는 상처의 고통보다 무너진 자존심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의 카이젠이 보이고 있었다. "슬립~!" "무슨 짓이냐?" 별안간 시루스가 황제를 잠재우자, 라덴이 발끈 화를 내며 그 앞을 막아섰다. "저 분이 제정신으로 있는 이상 저에게 치료를 받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시종장님!"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슬픈 미소를 피어 올린 다이아나가 앞으로 나서면서 라덴을 달랬다. "이걸 뽑아주실 수 있나요?" 다이아나의 의도를 알아챈 라덴은 고마움 반 원망 반의 표정으로 말없이 카이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박혔던 검 조각을 쉽게 잡아 뽑았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다이아나는 주저없이 카이젠의 몸에 손을 얹고 신성력을 발현했다. "고맙.. 습니다" 전혀 고마워 보이지 않는 굳어진 얼굴로 라덴은 마지 못해 중얼거렸다. 다이아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황성 내에서 그와 황제의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므로, 그의 침중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다 저 때문인걸요. 알고 있어요. 그의 마음도. 그리고 보니 시종장님께 인사도 못 드렸네요. 그 동안 폐를 많이 끼쳤어요. 감사합니다" "다 아시면서, 그래도 떠나시는 겁니까?" "제가 잡혀 간 것마저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저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답니다.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지요." "카이젠이, 카이가 망가질지도 모릅니다. 제가 무릎 꿇고 빌어도 안 되겠습니까?" 라덴이 어찌 보면 불경죄에 해당할 호칭으로 황제의 이름을 부르며, 다이아나에게 애원했다. 평생을 카이젠을 위해 키워진 그였다. 자신의 주군의 무너지는 모습을 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황제를 염려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강한 사람이랍니다. 그를 믿으세요!" "......" 다이아나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여 카이젠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한 후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라덴은 그런 그녀를 더는 잡지 못하고 상처의 흔적도 없이 편안하게 잠이 든 황제의 몸을 소중히 끌어안고 자리를 떠났다. 또 다른 시작 "시루스오빠, 혹시 마법으로 얼굴을 다르게 만들 수 있어요?" "간단한 환영마법을 걸 수는 있지. 하지만 나보다 높은 써클의 마법사라면 알아볼 수 있으니까 별로 도움은 안될 것 같은데?" "에휴.. 방법이 없을까? 로브는 너무 답답해서 싫고... " 로브를 뒤집어 쓰는 것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아빠에게 마법을 걸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자신의 외모가 이런 식의 문제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고, 지금와서 외모를 바꾼다는 것은 여러 모로 문제가 있었다. "신관복을 입으면 굳이 모자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괜찮을꺼야. 세레스 여신님의 신관에게 시비를 걸 만한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신관복을 착용한다면 다이아나의 화려한 외모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갈 터였다. 하지만, 시루스가 알기로 다이아나는 신관복이 없었다. 그녀야 맨몸으로 달랑 왕성에서 나왔고, 옷가지라고 해 봐야 시루스가 부탁을 받아 사 놨던 옷들이 전부였던 것이다. "아, 그런 거야? 잘됐다! 마침 신전에서 주더라고. 얼른 갈아입고 올께~!" 카이젠의 약속도 있고 해서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하투아를 빨리 떠나고 싶었던 다이아나는 필요한 것들을 구해서 출발하기로 했다. 에디우스는 말을 탈 줄 모르는 다이아나를 위해 마차와 여러 가지를 구하기 위해 나갔고, 시작만 했던 마법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던 중이었던 것이다. 시루스는 짧은 기간에 상당한 양의 마나를 축적한 다이아나 때문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황성에 갖혀 있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데다가 아버지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만, 마력에 관한 한 거의 무한대의 능력을 선물로 받았던 터라 엄청난 속도로 마나를 쌓고 있었다. 시루스는 이미 2써클 정도를 상회하는 마나량을 가지고 있는 다이아나에 대하여 혹시 인간이 아닌지를 의심해 보았으나, 다이아나가 드래곤이나 마족일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 그렇다면 납치될 이유가 없다 - 어떤 해답도 찾아낼 수 없었다. "흠. 신관복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다이아나의 모습을 보고, 시루스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안어울려요?" 이상하지도 않고 안 어울리기는커녕 너무나 잘 어울려서 문제였다. 다이아나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히 신관의 복장이었으나, 일반적인 모양과는 약간 차이가 났다. 대부분이 상당히 중성적인 형태인 경우가 일반적인데, 다이아나의 옷은 허리가 살짝 들어가 있었고, 상당히 좋은 천으로 만들었는지 흐르는 듯한 선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세레스 여신의 표식은 은빛 실로 왼쪽 가슴 위에 수놓여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하얀 옷 곳곳에 은사로 문양이 새겨져 있어 상당히 화려했다. "아니, 잘 어울려!"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사실 다이아나가 입고 있는 신관복은 성녀의 출현 - 당시 사건의 목격자인 고위신관 리온의 표현에 의하면 - 이라는 말에 특별히 새로 준비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두 사람은 원형에서 약간 변형된 신관복이 무언가 다르다라는 생각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당연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놓인 수나 무늬 자체가 이미 최고위급 신관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 또한 몰랐다. "마차 빌려 왔어!" 방으로 들어오던 에디우스는 여신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어질 모습에 잠시 멈칫 하다가, 싱긋 웃으면서 다정하게 레아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쪽으로 향하게 하더니 요리 조리 훑어보았다. "잘 어울리네!" 나갔다 오더니 무언가 갑작스럽게 변한 면모를 보여 주는 에디우스였지만, 워낙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원래 둘 사이를 잘 모르던 시루스는 당연하게 생각했고,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일종의 '컨셉'인가 보다고 생각해 버렸다. 사실 그런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 에디우스 자신은 혹시나 다이아나가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을까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방긋 웃으면서, "그래? 고마워 에디!" 라고 했을 뿐, 별다른 이상하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에디우스는 남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즐거워했다. "그럼 출발합시다아~!"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다이아나의 말에 따라 세 사람은 새로운 여행의 첫 발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내가 나가서 알아보고 올께" "응. 고마워 에디" 국경 검문소 앞에서 마차가 한참을 지체하자, 지루해 하던 다이아나를 위해 에디우스가 나섰다. 다이아나는 갑자기 밝고 싹싹하게 바뀐 에디우스의 변화가 과연 무엇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대하기는 상당히 편해 졌으므로 개의치 않기로 했다. "참, 혹시 오빠가 걱정할 텐데, 연락은 하셨나요?" 기습적인 시루스의 질문에 다이아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바로 대꾸했다. "요는 빼고 물으시면 가르쳐 드리죠" "아! 미안... 오빠에게 연락은 했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존대가 더 편한지 가끔씩 시루스는 다이아나의 지적을 받곤 했다. 다이아나야 시루스에게 반말과 존대를 섞어 친근한 나름대로의 어투를 완성한 듯 했지만. "아빠가 알아서 하셨을 거에요. 실은 아빠랑 먼저 만났거든요" "아, 그렇구나! 네 오빠가 나를 찾아왔었어. 이름이 에드라고 하던데, 네 이야기를 물어 보고는 바로 사라졌지." "아, 그랬구나!" 에드라면, 아마도 에디를 말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에디우스를 만나 그 이야길 물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찾아오셨다고?" "네. 우리 아빠는 알려지진 않았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법이 가능하시거든요. 사실 아빠랑도 최근에 만났어요. 제가 아기였을 때부터 떨어져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말이죠." "...그랬구나!" 여전히 거짓말도 안 섞고 교묘하게 '오해'를 유도해내는 다이아나였다. 이래서 핏줄은 못 속인다는 것인지, 그녀의 교묘한 언변은 하비우스를 농락한 유스테우스에 절대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루스는 나름대로 다이아나를 구한 사람이 마법을 한다는 아버지일 것으로 생각했고, 다이아나의 마법적인 재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 셈이다. 그 때 마침 에디우스가 마차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이아나의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시기가 좋지 않아. 서둘러 나오기를 잘한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전쟁이 날 것 같다는군요. 양 국 경비대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검문도 상당히 엄격해졌고. 시우스 쪽에서 넘어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더군요. 하투아가 시우스로 쳐들어 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쪽에서 가는 사람들은 일단 설득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쟁이 나면, 하투아가 이길 가능성이 크니까." 전쟁이 일어난다. 그것도 하투아에서 시우스를 침략한다면 카이젠의 의도가 확실했다. 그제서야 카이젠의 방에서 정리하던 서류들의 내용이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다이아나는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이젠이 노리는 것은 시우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 한 쪽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 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전쟁을 시작한 카이젠의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을 물들일 피도. "저, 그럼 우리도 국경을 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 아니 괜찮아. 우리에겐 네가 있으니까. 최고위급 신관과 그의 일행이라면, 어떤 나라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거든" "맞아! 세레스 여신님의 신관을 홀대할 곳은 원래도 없지만, 전시에는 더욱 그렇지. 물론 네가 최종목적지가 시우스라고 하지만 않으면 말야. 만약 그렇게 말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막으려고 할 껄?" "...그렇겠죠. 최고위급 신관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으니까요" 에디우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시루스의 마음은 착잡했다. 서로 죽이는 전쟁에서 신관이 병사를 살려내고 기사들을 살려낸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날 죽거나 죽이기 위해 다시 전투를 치룬다. 생명의 존귀함을 가장 사랑한다는 세레스 여신님의 마음은 어떨까? 자신의 힘으로 살아난 이들이 적을 죽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단지 땅을 넓히기 위한 인간들의 전쟁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왔다. 그저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나누어 쓰는 엘프로서는 동족의 피를 흘리면서도 채워야 하는 인간들의 욕망에 도무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물론 이런 마음은 시루스보다 다이아나가 더 크게 가지고 있었다. 에디우스야 드래곤이니만큼 인간들끼리의 전쟁에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진 않았지만, 다이아나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고는 살짝 어깨를 안아 주면서 위로했다. - 너무 걱정하지 마. 전쟁은 이전에도 많이 일어났어. 세레스 여신님은 괜찮으실꺼야 머리 속으로 전해지는 에디우스의 전언에 다이아나는 감사의 뜻으로 에디우스에게 미소를 보냈다. 상당히 다정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루스는 약간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이들의 검문이 이루어졌는데, 이상하게도 예상했던 목적지에 대한 질문도 신분증 제시도 요구하지 않은 채 이들은 바로 하투아의 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마도 '성녀'에 대한 어떤 지시를 하달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시우스 쪽의 검문은 다이아나의 신분증을 본 기사가 우선적으로 통과시켜 줌으로써, 간단하게 끝났으므로, 이들은 별 탈 없이 시우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검문소를 통과한 마차는 좀처럼 앞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 본 이들은 깜짝 놀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모여 있었고,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우스를 떠나 하투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어찌해서 시내로 들어간 일행은 고급여관에 투숙했다. 다이아나나 시루스는 조금 더 싼 곳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이런 시기에 싼 여관에 투숙하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다이아나의 아버지에게 면목이 없다는 에디우스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거기에 에디우스가 주문한 방으로 들어가 보니 영락없이 하투아 내에서 묶었던 곳과 같은 특실이었다. 이 또한 에디우스의 말을 빌자면, 엘프인 시루스도 있고 하니, 여러 명과 공동공간을 쓰지 않아도 되고 식사를 배달시켜도 거실이 있어서 편리하다는 - 특실의 경우 욕실도 완전히 따로 있었고, 음식은 거실까지 배달이 되니까 -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하투아에서 출발하여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대부분 시루스가 여관을 잡았는데, 다이아나를 고려해서인지 중간 정도 수준을 골랐지만 에디우스의 눈에는 한참 모자랐던 것이다. 어차피 하루씩 묵는 여관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어느 정도 머물지 모르는 시우스에서까지 초라한 곳에 다이아나를 묵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국경 지대의 마을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최대한 많이 내려왔기 때문에 일행이 숙소에 도착한 것은 거의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 에디우스의 비밀 ** 유난히 엘프에게만 친근하게 대하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에디우스는 마차를 구하기 전에 일전에 잡아온 적이 있었던 카사노브 - 후일을 위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놓았던 - 를 강제이동해서 데려왔다. 카사노브는 앞 뒤 정황을 자세히 듣더니, 이런 충고를 했다. "가능하면 상대가 편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이쪽에서 먼저 친한척 하는 게 좋지요. 예의를 지키고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서 친근하게 대하세요" 카사노브는 여러 상황에 대하여 실제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방법들을 알려 주었다. '흠. 효과가 있잖아! 이런 식으로만 하면......' 급한 마음에 필요한 곳까지만 카사노브의 강의를 듣다가 얼른 정신마법을 걸어 기억을 지운 후 돌려보낸 에디우스는 원래대로라면 주의사항으로 덧붙여졌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못 듣고 말았다. "주의해야 할 것은 어느 정도 선에서 이성적인 스킨십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친구처럼 편한 상태가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면,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혈족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마치 아빠나 오빠처럼 말이죠!" 그러게 원래 강의의 백미는 뒤쪽에 치우치는 것 아닌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친구처럼 지내던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여성들도 있으니까. "그럼 남서쪽으로 가야 하겠군요" 중앙 5국에 가고 싶다는 다이아나의 의견에 따라 지도를 놓고 상의하는 중이다. 가장 빠른 길은, 수도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가는 방법이었지만, 현 상황으로 수도쪽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오히려 붐빌 것이 당연했으므로,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혹시 텔레포트가 가능하십니까?" "가능은 하지만, 제가 아직 5클래스 밖에 안되다 보니, 먼 거리는 불가능합니다. 말과 마차를 포기한다고 해도 세 명을 이동시키려면 하루에 두 번, 무리하면 세 번 정도 밖에는......" 5클래스 마법사라면 낮은 실력이 아니다. 하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잘 되었네요. 이걸 좀 봐주시겠습니까?" "이.. 이건......" "저로서는 사용이 불가능해서요" 에디우스가 꺼낸 것은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스크롤 몇 장이었다. 일반인을 위한 물품이라기보다는 마법사를 위한 것으로, 약간의 마법을 사용하여 목적지를 지정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시루스에게 에디우스가 싱긋 웃음을 지으며 별 거 아니라는 어조로 답을 제공했다. "아버님이 아, 다이아나의 아버님이 저한테 주시고 갔습니다. 원래는 저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시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있으셨거든요" 전날 저녁 다이아나의 '오빠'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해주고, 시루스에게 어떤 대답을 해 놓았는지 미리 알아둔 터였다. 스크롤은 신중하게 인간마법사들의 방법대로 만들어졌으니, 의심을 받을 이유도 없었고 다이아나와 약속한 '제한'에도 위배되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가 스크롤을 꺼내 놓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아주 잠깐 떠올렸으나, 능란한 설명으로 시루스를 이해시키는 에디우스의 모습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의 스크롤이라면 저의 마법으로 충분히 중앙5국으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예측했던대로 다이아나의 아버지는 고위급 마법사가 틀림 없었다. 스스럼없이 아버님이라 칭하는 것을 보니, 아마 둘의 아버지는 절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에디우스의 아버지는 그럼 검사일 가능성이 높다. 시루스는 고위급 마법사와 소드마스터를 능가하는 검사로서 오랜 세월 함께 해 왔을 이 두 남녀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고는 약간의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하면 빨리 떠나는 것이 나을듯하니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지요. 시간이 좀 걸릴텐데..." 어차피 이동은 마법사인 시루스의 몫이다. 그 사이,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함께 이동할 수 없는 말과 마차를 팔고 마부에게 품삯도 주어야 했다. 며칠을 마차 안에 갇혀 있었던 데다가 어제는 늦게 도착해 바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상당히 갑갑했던 다이아나는 에디우스를 졸라 잠시의 산책길에 나섰다. 에디우스야 모처럼 시루스를 떼어놓고 나온 길이라 거절할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밖으로 나온 다이아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는듯이 보였다. "뭐, 필요한 것이라도 있어?" "응. 이 머리 때문에... 너무 불편해서. 잘라봤는데, 어찌된 일인지 금방 길더라구. 묶기도 쉽지 않구. 여기 끈들은 너무 탄력이 없어. 내가 살던 곳에선......" "아, 그 고무줄 같은거?" "어? 알고 있어? 어떻게???" "네가 아는 만큼은 다 알지. 이래뵈도 열심히 공부했다구!" 가볍게 대답하는 에디우스였지만,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반려를 위한 공부'에 그런 것까지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내가 살던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거야?" "영상으로 봤어. 그리고 네가 학교라고 불리는 곳에서 가르쳐주는 내용들은 대부분 다 알아. 일상에서 사용하던 것들도. 웬만한 건 거의 다 만들어서 사용해 봤거든. 그런데, 전기를 이용하는 것까지는 되도, 전파는 발생지가 있어야 하니까 좀 힘들어서 사용은 못해보았지" "와아! 대단하다!" 1700년이나 공부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이아나가 사용하는 물품들이 그 세계에서야 돈만 주면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쪽 세계에서 사용하려면 하나 하나 만들어보아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문물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오히려 에디우스가 앞서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안그래도 반짝거리는 듯한 눈을 빛내며 감탄하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에디우스는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가자" "응? 어디?" "머리 묶을 거 사러" "여기도 그런게 있어?" "고무는 사용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탄력을 가지는 끈들은 있어. 그리고, 흘러내리지 않게 고안된 핀들도 있으니까 도움이 될꺼야" "아, 그렇구나" 여관을 나서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원래 국경 도시는 무역 때문에 좀 번화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붐비고 있었다. 시우스의 국민들은 하투아 제국에 맞서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거의 배제한 듯이 보였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국의 국민으로 남는 것보다는 그나마 강국으로 피신하는 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차피 가진 것이 별로 없는 평민들로서는 목숨을 내놓고 자신들에게 해 준 것 하나 없는 이 나라에 남기보다, 승전국이 될 가능성이 큰 국가에서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 나았던 탓이다.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에디우스는 언제부터인지, 다이아나의 어깨를 슬쩍 감싸고는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잡화상처럼 보이는 큰 상점에는 그야말로 만물상같이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에디우스는 '탄력이 있는 끈' 몇 개와 핀들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다. 주인은 함께 들어온 남녀의 외모나 옷차림으로 보아 충분한 대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 여자친구 데려온 남자처럼 확실한 봉이 없다는 것은 가게 주인이면 대부분 뻔히 안다 - 짐작하고는 상당히 고급에 해당되는 물건들을 상당수 가지고 나와 이들 앞에 주욱 늘어놓았다. "어머, 이건 진짜 고무줄같네!" 상당한 탄력을 가진 끈을 잡아당겨 보며, 다이아나가 신기한 듯이 말했다. 여러 색깔의 끈들은 하나같이 상당히 튼튼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두 남자 중 누구도 그 재료를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디우스는 알아서 재료를 말하지 않는 상점 주인의 센스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오우거 힘줄로 만든 줄을 머리에 묶고 싶을 것인가? 그런 에디우스의 눈치를 훤히 꿰고 있던 주인은 얼른 다이아나의 주의를 끌었다. "여신관님, 이 쪽 핀도 좀 보시지요" "이건.. 예쁘기는 한데, 너무......" 정교한 세공의 보석이 박힌 핀은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데다가 무엇보다 화려했다. 다이아나가 그 화려함에 좀 망설이자, 에디우스는 슬쩍 웃더니 탁자위의 핀을 집어들고는 다이아나의 뒤로 돌아가 머리를 살짝 틀어서 핀을 꽂아 고정시켰다. 연습이라도 많이 해본 듯이 익숙한 솜씨였다. "이렇게 하면 훨씬 시원하지 않아?" 다이아나는 갑자기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깜짝 놀랐지만, 워낙 에디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어고, 오랜 만에 목 뒤와 등이 시원한 느낌이 들자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점 주인은 재빨리 거울을 가져와 보여주었는데, 후광처럼 빛나던 머리를 틀어 올리자 약간 성숙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머리색이 조금 덜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거울을 보고 있는 틈에 재빨리 상점 주인과 속닥거리면서 상점 주인이 건네주는 몇 개의 물건을 받아들고 엄청난 액수의 대금을 치르고는 다이아나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얼른 가게를 나왔다. 다이아나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드래곤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보물을 떠올리고는 에디우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문을 열고 여관으로 돌아가던 두 사람은 거리에 몰려 무언가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잘못 했어요" "사과만 하면 다야? 벌써 몇 번째냐? 나도 이젠 못 참아~!"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맞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다이아나가 그 쪽으로 다가가자 에디우스는 다이아나를 감싸고 사람들 틈을 파고 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투박한 중년남자의 손에 붙잡혀 주먹질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 발치에 빵 두 개가 나뒹굴고 있어 이유를 짐작할 만 했다. 황권을 두고 귀족들의 암투가 계속된 데다가 이제는 전쟁의 기운마저 맴도는 시우스 제국에서 굶다 못한 아이들이 음식을 훔치다가 얻어맞는 일은 워낙 흔하다 못해 일상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보통 몇 대 때리고 훔쳐간 음식을 빼앗는 데서 끝나는 일이 오늘은 상당히 장시간의 폭행을 이어지는 바람에 꽤 많은 구경꾼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손에 이어 발길질까지 소년의 몸으로 날아들자, 입술을 깨물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이아나가 말릴 새도 없이 앞으로 달려나가 소년을 안고 재빠르게 한 발 물러섰다. 무엇이 그리 분한지 씩씩거리면서 소년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던 중년 남자는 누군가 상당히 빠른 몸놀림으로 자신에게 얻어맞던 소년을 채어 가자 목표를 바꾼 듯 그 쪽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나갈 듯하던 중년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은 소년을 데려가서 보호하듯이 서 있는 사람이 신관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을 때리던 사람에게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다이아나는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팔이 약간 각도가 비틀려 있는 것으로 보아 부러진 듯했다. 다이아나는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올려 소년을 치료했다. 그런 다이아나의 옆으로 어느새 에디우스가 조용히 다가와 서 있엇다. 중년 사내는 신관복을 입은 여자의 몸에서 마치 신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빛이 뿜어져 나오자, 애써 화를 억눌렀다. 만일 세상물정 모르는 저 신관이 자신을 추궁이라도 한다면, 확실하게 대꾸하리라 결심한 사내는 할 테면 해 보라는 듯이 어깨를 펴고 서서 기다렸다. 소년의 치료가 끝나자, 다이아나는 일어서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때 까지도 다이아나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던 사람들과 사내는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여기 저기서 탄성과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냈다. "이 소년이 도둑질을 했나 보군요" 의외로 따지고 들리라 생각했던 입에서는 부드럽게 사실을 단정짓는 듯한 말이 나왔다. 사내는 처음의 결심도 잊고 마치 변명하듯이 더듬거리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그것도 한 번이 아닙니다. 거의 매일 벌써 몇 번이나...." "그렇군요" "저희 애들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데......" 분명히 중년 사내는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봐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자신이 흙으로 빵을 만들어서 파는 것도 아닌데 매일 도둑질하다 들켜서는 다신 안 그러겠다는 변명으로 몇 번을 넘기고도 또 같은 짓을 한 저 녀석을 그냥 두었다가는 동네 꼬맹이들이 금새 따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또한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빵을 만들어 판다고 해서 자식들이 날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찌 보면 생계를 위한 정당한 폭력이었던 것이다. "일단 이 아이는 벌을 받아야겠네요"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멍하니 서 있는 사내에게 여신과 같이 성스러움을 풍기는 여신관의 옆에 서 있던 미모의 남자가 다가와서 동전 몇 개를 건냈다. "그 벌은 제가 주어도 되겠는지요?" 에디우스가 자신의 부탁대로 사내에게 빵 값을 건네자 다이아나는 다시 물었다. 중년 사내는 자신이 며칠 간 손해 본 것을 배상하고도 충분할 만한 금액을 손에 받아 들고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관은 소년을 안아 들려고 했지만, 옆의 남자가 재빨리 가볍게 안아 드는 것을 보고는 그와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 길을 열어 주었다.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하여 가게 주인이던 미트랑이 늘상 하던 말이 있다. "그래서 말이지. 난 웬 철없는 신관 하나가 선행이랍시고 끼어 든 줄 알았지. 왜 니들도 알잖아?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몰라서는 여기 저기 끼어 들기나 하고 말야! 거기다 턱 보니 여자더라고, 그런 경우는 빽빽거리면서 애를 어떻게 이렇게 때리느냐는 둥 한참 설교를 해대는 것이 보통 아니겠어? 그래서 난 그럼 우리 애들은 누가 먹여 살리느냐고 할 참이었지. 그렇게 잘 났으면 이 골목에 돌아다니면서 굶은 애들은 다 먹여 살려 보라구 말야. 진짜 그렇게 말해주려고 했거든... 근데, 그분의 얼굴을 보니까 이상하게 부끄러워지더라구. 나한테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야. 어쩐지 무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더라니까!. 진짜야 맞구 뻗은 그 녀석이 아니구 나한테 그런 표정을 지었다구. 니네 그런 적 있어? 난 있지. 울 엄마한테 뭘 좀 잘못했는데, 엄마가 날 슬픈 눈으로 쳐다보시더라구. 그게 큰 소리로 야단 치는 것보다 더 미안하더라니까. 그 땐 딱 그랬다구. 나보다도 어려 보이셨는데 말야 그 분은......" 시루스는 스크롤을 완성해 놓고 밖으로 나간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돌연 약간 우울한 표정의 다이아나와 어린애 하나를 안은 에디우스가 들어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빠. 우리 며칠 더 머물러요" 대충 짐작이 갈 만한 상황이다. 넝마를 걸친 아이 하나를 데려와서 남는 방의 침대에 눕히는 것을 보고 나온 다이아나의 첫 마디를 듣기도 전에, 시루스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오크들만큼은 아니지만, 인간들의 출산율을 꽤 높았고 그 중에 제대로 양육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어른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모든 일족에게 우선적으로 보호되는 드래곤이나 엘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신분'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같은 종족임에도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생각하는 인간들의 '가치'에 대한 부분만큼은 꽤 오랜 시간을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한 시루스조차 이해하기 힘든 부분의 하나였다. 하지만, 저런 아이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스러운 표정만 지을 뿐 먼저 질문을 하지 않는 시루스의 태도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다이아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고아로 자라기는 했지만, 굶주려 본 일도 무언가를 훔쳐야 할 정도의 절박함도 느껴 본 일이 없다. 일단 아이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 아이 하나를 어찌한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에디우스 또한 다이아나가 어떤 행동을 할 지 궁금했다. 그가 보아 온 다이아나의 성품으로는 아이를 구해내고 다시 세상에 던지는 행동은 못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다이아나가 살 던 세상의 격언 중에는 '가난은 황제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과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라고 해도 끝도 없이 돈이 들어가는 일을 어찌할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에디우스나 유스테우스 정도의 재력이라면 이 나라에 돌아다니는 고아들 쯤은 충분하게 먹고 입히고 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나 갈까? 어차피 고아란 가난한 부모에 의해 버려지거나,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거나 해서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산같이 쌓인 재물이라고 해도 끝이 있는 법. 돈을 쓰기만 한다면, 결국 언젠가 바닥이 나고 상황은 원래대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다이아나가 모를 리 없었다. "에디, 근처에 신전이 있는지 좀 알아봐 줄래? 어떤 신전이던 상관 없어. 있는 곳은 전부 알아봐 줘" "그럴께" 에디우스가 방을 나가자, 시루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신전의 고아원은 아마 자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나마 고아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신전들이었다. 하지만, 신전 또한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터라, 고아들을 받아들이고 키우는 데 한정없이 쓸 자금이 있을 리 없다. 시루스는 그 사실을 말한 것이었고, 다이아나가 알고 있다고 하자 더 이상 할 말도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에게 '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소년은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이 드디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혹시 천사세요?" 딱 죽었구나 생각될 만큼 두들겨 맞았는데, 아픈 곳도 없었고 눈 앞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같이 않게 아름다웠으니 소년이 오해한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죽는 것도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난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란다" "에..엣? 나 안 죽었어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만......" 소년은 그제서야 발딱 일어나 앉아 여기 저기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눈 앞의 예쁜 누나는 신관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가끔 고아들이 모여 사는 거리에 신관들이 와서 음식을 나눠 주고 갔기 때문에 소년은 신관 복장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문득 소년은 짜증이 치밀었다. 천사인 줄 알았는데 신관이라니.. "흥. 뭐야. 신관이잖아!" 아마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보고 구해냈겠지. 아마도 지금쯤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신께 잘했다고 상 받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그래봐야 내일이면 자신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도둑질을 해야 할 터였다. "가족이 있니?" "알아서 뭐하게요? 가서 날 구해줬다고 뽐내려구요? 미안하지만, 난 가족따윈 없어요!" 소년은 이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렴풋이 그런 소년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지만, 절대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엄격한 표정을 짓고는 소년의 눈이 동그래질 만한 말을 했다. "그래? 그럼 벌을 주겠다는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겠구나" "네?" 이게 무슨 소린가? 보통 이렇게 하면 마음 약한 신관들은 자신들이 죄라도 진 양 어쩔 줄 몰라하면서 이것 저것 쥐어 주고는 되돌려 보내어야 정상인데. 세상사에 관한 한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은 자신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당황했다. "마음대로 하시죠! 어차피 부모도 없는 고아따윈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구요" "그래?"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도 저 여신관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 소년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높은 신관 나으리야 저같이 천한 고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흠.. 그건 좀 틀리구나. 나도 얼마 전에야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그 전엔 네가 말하는 천한 고아로 자랐지. 뭐 나야 내가 고아라고 해서 천하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다만." 생각외로 강적이다. '고아'라는 말은 동정심 많은 신관들에게 들이댈 수 있는 최대의 무기였는데, 스스로 고아로 컸다고 하니, 조금 약발이 안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조는 단념하지 않았다. "흥~! 고아라고 다 같은 고아인줄 아세요? 신전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인형처럼 시키는대로만 하는 애들이랑 나는 다르다구요. 바보같이 맨날 고개 처박고 기도나 하면서 아부나 하는 놈들~!" "그렇게 생각하니?" "그.. 그럼요. 나는 신전에서 모시러 와도 안 따라 갈 꺼에요. 쳇, 신이 뭐람. 어차피 신들도 우리 같은 아이에겐 관심도 없는걸요!" 어쩐지 이 여신관 앞에서는 자꾸 투정 비슷한 말만 튀어나왔다. 조금 더 험한 말을 하면 울지 않을까? 실제로 몇 번 거친 말로 신을 비난했더니 어떤 여신관은 울면서 뛰어간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잘만 나오던 반말과 욕설이 왜 이렇게 내뱉기가 힘든지 조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런 건 나도 상관이 없구나. 네가 물건을 훔친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었으니, 너는 내 돈을 훔친 셈이란다. 그 돈만큼만 벌 대신 일을 좀 하면 되겠지" "뭐.. 뭐에요? 내가 왜요? 싫어요." "싫으면 할 수 없고.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다아아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소년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벌을 준다고 했다가 안받겠다니까 그럼 할 수 없다니. 다이아나는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말의 펀치를 날리고는 방을 나갔다. "그럼 너는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구나. 몸도 다 나았으니 내 방에서 나가주겠니?" "...네?" 이건 말이 안되었다. 이렇게 데리고 왔으면 동전을 좀 쥐어 주거나 먹을 것이라도 싸주게 마련인데, 벌을 안 받을 거면 나가라니? 도무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만 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어찌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알았나? 어쩐지 억울하고 속상한 기분이 들어 울컥 울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소년은 입술을 앙다물고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퉁탕거리는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에?" 그것이 시루스가 특이한 모양의 귀를 내놓고 앉아 있는 거실로 들어선 셈이 되었기는 했지만...... "아, 이제 가니?" 소년은 생전 먹어 보지도 못할 과자와 과일들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책같은 것을 들여다보던 시루스가 태연하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소년은 음식도 탐이 나고 엘프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으나 누구도 자신에게 먹어보란 말도 붙잡아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침을 꿀꺽 삼키고 다른 문으로 향했다. "어, 거기가 아닌데, 나가는 문은 저쪽이란다" 얄밉게도 과자를 한 입 베어문 엘프가 출입문을 가르쳐 주자, 소년은 힐끗 그 문을 보고는 테이블 위의 과자를 곁눈질 한 뒤, 잽싸게 엘프의 앞에 있는 과자와 과일 몇 개를 이미 더러워진 웃옷자락에 주섬주섬 챙겨 넣고는 그야말로 바람같이 사라졌다. 소년의 움직임이 어찌나 빨랐는지, 이미 방을 나와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이아나는 그런 소년이 빵을 훔쳐낸 것을 알아챈 가게 주인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네가 말한대로구나" 군것질을 별로 안 하는 일행이라 차 이외의 다른 것들은 별로 시킨 적이 없었건만, 아이나 좋아할 듯한 과자 등을 시켜서 거실의 테이블에 잔뜩 차려 놓은 다이아나는 아이가 나오면 아무 말 말고 나갈 문만 알려 줄 것과 소년이 혹시 음식을 가져가더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에 그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근데, 주려면 곱게 주지 저렇게 훔쳐 가게 할 필요는 없지 않니?" "곱게 줘도 고마워 할 녀석이 아니더군요." 어차피 친절하게 대해 주어도 소년에게는 가식으로 밖에는 안 보였으리라. 예전에 천사의 집에 찾아와 온갖 선물을 주고 다시 오겠다고 어린 동생들에게 철썩같은 약속을 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리던 사람들. 그 약속을 믿고 오겠다던 토요일마다 매일같이 마당에서 무책임한 그들을 기다리다가 지켜 잠들던 자신의 착한 동생들...... 다희가 아무리 위로해도 동생들의 마음 속에는 원망과 상처가 커갔고, 나이가 든 아이들일수록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오히려 경계하게 마련이었다. 다이아나는 소년의 마음을 그래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소년에게 지금 당장 돈을 준다거나 해 봐야 자기만족일 뿐이리라.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될 지 알 수 없는 바에야 책임 못 질 약속 따위는 필요 없는 일이다. "시루스 오빠, 내일 하루 더 머물고 떠나요. 그래도 될까요?" "나는 괜찮아." 어찌되었건 지금 다이아나와 따로 길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시도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시루스로서는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처를 입을까 약간의 염려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 다이아나는 신전의 위치를 알아 온 에디우스와 다시 나갔다가 밤 늦게서야 돌아왔다. 밤 늦게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잠자리에 들었던 - 인간으로 있는 이상은 남들처럼 자는 척이라도 하는 형편이라 -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기척을 느끼고는 허둥지둥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혹시 여기서도 초를 써?" "초? 아 그 불 키는 거 말이지?" "응,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없을꺼야. 나도 본 적이 없으니까. 보통 그냥 기름을 쓰던지 아니면 마법등을 쓰고 있으니까" "그럼 초 만들 줄 알아?" "응. 생각보다 쉽더라. 재료도 의외로 쉽게 구할 수 있고" "그래? 재료가 쉽게 구해져?" "그게 이쪽에선 아직 석유라는 걸 모르거든. 그거 꽤 많이 묻혀 있을꺼야. 우물파다가 그거 나오면 완전히 망치는 셈이라서, 대부분 다시 막은 우물들엔 석유가 있더라구" "석유가 그렇게 많아?" "응. 드워프들 말로는 상당히 흔하다더군. 그래서 우물을 팔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지. 대부분 정령사들이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잘못하면 유전을 건드려서 땅을 망가뜨리니까." "그럼 이쪽에선 석유를 전혀 쓸 줄 모른다는거네?" "응. 뭐 인간들은 '악마의 물'이라고 부르더라. 냄새 고약하지 색깔 검지." "그럼 이 근처에서도 유전을 찾을 수 있을까?" "있기만 하다면 가능해. 왜 알아봐줄까?" "응" "기다려봐" 에디우스가 무엇인가 중얼거리자 바닥에서 희미한 형체가 나오더니 작은 사람과 같은 형태로 변했다. "노움, 이 근처에 사람들이 '죽음의 물'이라고 부르는 검은 액체가 있는지 알아봐. 있으면 어디 있는지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이아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땅의 정령의 모습을 형태로 나타나게 하는 에디우스였다. 대충 어머니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정령을 처음 본 다이아나가 상당히 신기해하자, 에디우스는 잔뜩 신이나서 다이아나가 좋아할 만한 하급 정령들을 종류별로 불러내서 구경을 시켜 주었다. 다이아나는 정령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눈을 반짝였고, 에디우스야 정령 소환에 그다지 별 힘이 들지 않았으므로, 다이아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노움이 돌아올 때까지 다이아나만을 위한 정령들의 쇼는 계속되었다. "으흠... 그래서 말이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이자, 다들 숨을 죽여서 뒷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고 이쁜 것이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내게 그러는 거야....." 한 문장 던져 놓고는 한참씩 일부러 뜸을 들이는 태도에 다들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으므로, 조용히 기다리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속으로야 다들 이야기 끝날 때를 기다리면 퍼런 칼날을 갈고 있을지라도. "도와주세요. 삼촌~!!!" 애써 갸냘픈 여자의 목소리를 냈지만, 듣는 입장으로서는 역겹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사랑하는 조카야~! 흠흠 이 대목에서 걔가 감동하는 눈치더라구. 얼마나 이쁘게 웃던지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진짜 속상했다니까~~! 그리고 마음 쓰는 것도 딱 지 엄마잖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우리 조카의 '부탁'을 전하게 된거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자신을 향하는 살벌한 시선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걔가 할 말이 있다고 며칠 내로 들를 꺼래. 도와줄 생각이 있으면, 가서 만나면 돼" 제 할 말 다 끝났다는 듯이 돌아서는 헤파이토스의 위로 참다 참다 못한 신들의 응징이 쏟아졌다. 조카가 헤파이토스의 신전에 들러 둘이 만났고, 무슨 부탁을 했다는 것까지는 나머지 신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건만, 눈꼴이 시는 것을 억지로 참고 내내 자기 자랑만 하는 것을 들어주었더니 결국 제대로 된 내용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결국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건지, 팅팅 부은 얼굴로 결국 제대로 된 전언을 하는 헤파이토스는 평소에는 늘 자신보다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싸잡아서 한 편으로 구박을 당하던 표세이스가 가장 많은 주먹질을 한 것에 대하여 서운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니까, 본단 신전에 각각 들릴 꺼라는데도. 신탁 내려서 오면 만나보라는 데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자꾸 때리는거야!!!!!!!!!!!!!!" "네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결국 매를 버는 헤파이토스였다. 그 날, 중앙5국 수도에 위치한 각 최고신들의 본단에서는 난리가 났다. 모든 신들이 똑같은 신탁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신탁의 내용은 '세레스 신전의 여신관이 방문하면 대신관이 맞이하여 바로 대성전으로 인도하라'는 것이었다. 대신관들은 유사이래 최초로 8대 최고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성녀'의 출현이라고 들떠 있었고,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각 신전은 성녀의 방문을 앞두고 성녀가 어떤 신전부터 찾을 것인지에 대하여 경쟁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에디우스와 시루스의 예상을 뒤엎고 다이아나는 신전 두 곳을 방문한 후, 바로 시우스 제국을 떠났다. 사라진 그녀와 일행들은 중앙 5국의 수도의 외진 골목에 다시 나타났다. 일행이 적당한 숙소를 잡은 후, 다이아나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한 엘프와 드래곤에게 각각 어떤 일들을 부탁한 후 신전 순례에 나섰다. 시루스는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와 동행하는 줄 알고 - 소드 마스터를 이긴 에디우스였기에 - 선뜻 부탁받은 일들을 처리하러 떠났지만, 에디우스의 경우는 틀렸다. 그는 뿌득뿌득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다이아나가 들어 줄 기미를 안보이자, 그녀의 팔목에 드래곤이 아니면 지울 수 없는 추적마법이 걸린 마법진을 그려 놓고서야 보내주었다. 사실 다이아나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그녀의 처음 결심에는 상당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르마의 저울의 평가보다는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은 해 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물론, 세레스의 신전에 들러 헤파이토스의 신전에 들른 결과가 - 세레스의 신전에서 헤파이토스의 신전에 들를테니, 삼촌을 만나게 해달라고 이미 부탁한 후였다 - 겉보기엔 상당히 과묵해 보이는 그의 푼수끼가 한참을 작용하고 거기에 다른 신들의 그에 못지 않은 열성까지 더해져서 엄청난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이아나는 어머니인 세레스 여신의 충고에 따라, 8대신의 가장 맏이인 포이브론의 신전부터 시작하여 형제,자매의 순서대로 신전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여신이라도 강림한 듯이 온갖 요란을 떨어가면서 자신을 맞아들이는 신관들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워낙 신전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므로 나중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다. 이 날 신들은 나름대로 최대한도로 치장을 하고 조카를 만날 수 있었고, 페르세포네는 드디어 그토록 보여 주고 싶어하던 '어둠속의 빛' 컨셉에 조카가 진심어린 감탄을 하자, 뿌듯해서 어쩔 줄 몰랐다. 다이아나는 최고신들에게 자신이 생각한 일을 털어놓았고, 원래 의도 자체가 신전들이 하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 사실 그랬어도 아무도 거절할 태세가 아니었지만 - 혼쾌한 승낙과 함께 협력을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8대신의 대신관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며, 그들은 각자가 모시는 신들의 신탁을 받아 다이아나를 '성녀'로 인정하고 그녀에게 각 신전의 협력을 약속했다. 다이아나는 상당히 위엄있어 보이는 대신관들 중, 유독 신관답지 않은 외모 - 상당히 우락부락하게 생긴데다가 덩치도 산만한 - 의 두 신관이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이 두 신의 신관들이 워낙 게을러서 대신관이라고는 해도 몇 대에 한 번 신탁을 받을까 말까 한 터에 신탁을 받고 감격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전에서는 전혀 필요없어 보이는 몇 곳의 영지를 사들였고 - 물론 자금은 유스테우스의 레어에서 나왔다 - 그 영지에는 평소 드워프들을 유난히 아끼던 '창조와 무력의 신'인 헤파이토스의 명을 받들어 파견된 다수의 드워프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으나, 사들인 영지는 이미 '페르세포네'의 명을 받든 마족들에 의해서 세심하게 결계가 쳐져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완전히 차단되었으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대륙 곳곳의 신전 옆에는 상당히 잘 꾸며진 상점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분명히 신전에 속하는 땅에 세워진 이 상점에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서민을 위한 새로운 물품들이 진열되었다. 물론 상점에는 귀족들이 좋아할만한 물건들도 몇 가지 진열되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물품들은 엘프의 마을에서나 볼 수 있다는 고급 과일주와 획기적으로 오래 가는 향수 등의 고급품이었다. 주로 서민들이 사가는 물건은 비누와 양초 등이었고 - 비누는 이미 있었지만 워낙 비싸서 서민들에게까지 돌아가지 않던 것을 재생비누를 만드는 식으로 싼 기름이나 폐유를 사들여서 공급한 덕에 - 어느날인가부터 이 상점에 부탁하면 이런 물건을 생산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돈을 벌어들인 상점은 주변의 땅을 사서 고아원을 하나씩 설립했고, 이 고아원의 이름은 한결같이 '엔젤하우스'였다. 조가 사는 마을에 고아원이 들어선 것은 조와 다이아나의 만남이 있은 후 꼭 2년만의 일이었다. "한스씨지요?" "네? 네." "이 곳에서 일한 지 세 달이 되셨군요. 급료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 그럼요! 마음에 듭니다! 들구 말구요!" "오늘부터 한스씨는 엔젤상회의 정식 직원이 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일을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식직원이 되고 싶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남자는 한스를 데리고 상당히 복잡한 건물 복도를 이리 저리 가로질러서 한 참을 걸어 가더니, 한 곳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고는 한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에... 엘프?!" "반갑습니다. 저는 시루스라고 합니다." "하..한스입니다" "자, 이리 앉으시죠" 한스가 한참을 놀란 표정을 서 있자, 한스를 데리고 온 엔젤상회의 직원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계약서를 드릴텐데, 한스씨는 글을 못읽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죠" "알 수 없는 내용에 동의하신다는 점이 상당히 불안하실 것 같아서 저희 엔젤상회에서는 글을 읽지 못하는 분들의 계약은 시루스님께서 직접 맡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엘프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아...!" 한스는 이런 세심한 배려에 놀라고 말았다. 동네에 들어선 엔젤상회의 상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계속 머무르는 경우도 있지만, 본사에서 정하는 일자리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스도 삼개월을 상회에서 일을 한 후 처음으로 본사에 온 것이다. 사람들은 신전과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새로운 곳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을 상당히 불안해 했는데, 앞서 간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가뿐히 기쁜 얼굴로 짐을 싸들고 떠났는지 이제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시루스는 친절하게 서류에 써 있는 내용을 한스에게 읽어주었고, 한스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은 더 쉬운 말로 바꾸어 설명해 주었다. 그 중 가장 한스가 놀란 내용은 자신이 받고 있는 적지 않은 월급이 실제로는 일정 부분의 기부금을 제외한 것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부분과, 회사의 실적이 좋은만큼 월급 이외에 일 년에 두 번씩 배당금이라는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또한 자식이 있을 경우 한스가 원하기만 하면 본사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에서 무료로 교육을 해 준다고 했다. 한스는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 홀린 듯에 계약서에 시키는 대로 지장을 여러 군데 찍고는 일정 부분에 대한 비밀유지에 대한 부탁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 시루스는 발이 땅에 안 닿을 듯한 걸음걸이로 사무실을 나가는 한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빠~! 오늘 또 한 명 왔었다면서요!" "응 방금 나갔어!" "오빠도 이젠 거의 상회직원 폼이 확실히 나네요" "그런가?" "어쨌든 고마와요. 오빠가 이런 일까지 해주시다니" "아니.. 나도 재밌단다. 그런데 무슨 일이니?" "에디우스가 그러는데, 시우스 제국쪽이 좀 힘든가봐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거긴 전쟁 중이니까" "그렇죠. 돈도 가장 안 들어오고 나가는 돈은 가장 많은 지역이에요. 그래도 할 수 없죠. 결국 그곳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이미 '성녀'로 그 명성이 대륙에 자자한 다이아나가 신관복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책상 위에 엉덩이를 척 걸치고 앉아 조잘거리는 모습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는 이 일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무슨 말이지? 상회를 그만 둘 셈이야?" "아뇨. 이제 제가 더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이 정도면 그냥 두어도 알아서 잘 돌아갈 것 같구요. 이런 일은 원래 신전이 해야 할 일인데, 제가 뜬금 없이 나선 것 뿐이잖아요. 이제 못 한 대륙 구경이나 마저 갈래요" "설마 이 스승님을 빼놓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리가요! 오빠랑 같이 가려구요. 오빠 자리를 대신한 분을 구해 놓으시라고 미리 말하는 거에요" "둘이만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 돌연 문이 열리면서 약간 뾰루퉁한 표정의 에디우스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표정은 다이아나가 달려가 얼른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하는 말에 모아졌던 입이 옆으로 좌악 찢어지는 것으로 얼마 가지 못했다. "에디~! 고생했지~!" "응.. 뭐 조금..." "우리 여행가자아!" "응? 그, 그래." "그럼 결정 난 거네. 정리하려면 좀 걸리니까, 에디도 하던 것들 잘 정리해서 드워프들에게 좀 전해주고 다음 주 쯤 떠나면 되겠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에디우스의 힘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이아나가 닫혀진 세계의 지식 속에서 이 곳에서 사용할 만한 물건들을 떠올리면 실제로 그 물건들의 제작과정이나 필요한 재료등을 알고 있는 에디우스와 상의를 하고, 그렇게 선별된 물건들은 다시 에디우스가 드워프들에게 제작 과정을 가르쳐 주거나 설계도를 작성해 주는 식으로 여러 물품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1700년을 한결같이 공부해 온 에디우스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어서, 다이아나의 감탄과 감사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그 동안 에디우스는 드래곤으로서는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 사소한 일들까지 즐겁게 해 낼 수 있었다. 맨 처음 다이아나는 재단에 의하여 운영되는 고아원을 구상했다. 그런데, 이 곳에는 아예 재단이라는 제도가 없었으므로 그러한 재단을 구성하기 위해 상회를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상회에서 팔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내고, 그 제작과정과 판매, 운송에 빈민 계층의 사람들을 대량으로 고용함으로써, 빈민 구제 사업을 대신했다. 엔젤 재단에는 드워프와 엘프 등의 이종족들에 실제로는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일부 오크족들까지 가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게 되어 있었다. 먼저 3개월의 수습기간을 두고 직원의 인성과 생활환경 등을 체크하고, 인원을 선별한 후 본사의 심사를 거쳐서 정직원으로 발령을 낸다. 이 때, 재단에 엘프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이들도 알게 된다. 일반 직원에서 상급 직원이 됨에 따라 기밀에 해당되는 사항들이 몇 가지씩 어쩔 수 없이 공개되는 형태였고, 각 지부에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드워프들의 개입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 종족의 일부가 재료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엘프 마을에서 지원을 나온 몇 명의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다이아나를 제외하고는 아예 없었다. 포치와의 일로 오크 종족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던 다이아나가 에디우스를 동행하고 몰래 오크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관계를 형성했고, 종족에 대한 편견이 인간보다 훨씬 적은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이들과의 연락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은 유전에서 발굴한 물을 '석유'라고 부르며, 그것의 쓰임새가 엄청나게 많은데다가 고열을 내는 연료로서도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이 새로운 재료를 이용한 여러 가지 물질들의 개발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 '석유'에 관한 내용은 엔젤 재단의 특급비밀에 속했으며, 이종족들과 재단의 운영 전반을 책임지기 위해 파견된 아테나이의 신관 몇 몇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혜와 판단의 여신’ 아테나이의 신관들은 그 속성에 따라 최대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다이아나가 없이도 상단의 운영에는 별 지장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엘프들의 경우, 동대륙에 널리 퍼져있는 이종족을 암거래하는 풍토를 신전에서 반대하고 나온 덕분에 상당히 움직이기 쉬워진 데다가, 노예로 있는 엘프들을 상단에서 남몰래 사들여 풀어주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 주었기 때문에 엔젤상회에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엘프들이 직,간접적으로 돈을 모아 노예가 된 엘프들을 사들일 수 있는 자금도 대부분 상회와의 거래를 통하여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대륙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거대상회와 그들이 운영하는 구제시설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아 어느 정도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엔젤하우스 "자아, 그럼 점심 맛있게들 먹고 내일 보자" "네에~!" 떠나갈 듯한 소리가 교실 안을 뒤덮었다. 아이들을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끼리 끼리 모여 점심 준비로 후각을 즐겁게 하는 냄새가 풍기는 근원지, 식당으로 향했다. 조는 이러한 일상이 꿈만 같았다. 가끔 자신들에게 음식을 주러 오는 신관들은 신전의 고아원에는 자리가 없다는 말을 묻지도 않았는데, 늘어놓곤 했다. 조는 신전에서 잘 먹고 편히 지내는 아이들이 부러웠지만, 겉으로는 그런 나약한 녀석들 쯤이야 다들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고 다녔고, 조의 구역으로 드나드는 신관들은 어느 정도 아이들을 파악한 후로는 조라면 슬슬 피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의 마을에 큰 건물 하나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건물이 '엔젤 하우스'라고 했다. 상당한 규모로 지어지는 건물은 빈민가 뒷골목에 모여 사는 고아들에게는 마치 '궁전'같이 보였다. 조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가끔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몰래 구경하러 다니곤 했다. 저런 건물에 사는 사람은 분명히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신분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건물이 완공되자, 신관들은 뒷골목의 아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엔젤 하우스'라는 이상한 명칭의 그 집에서 함께 살자며 데리고 갔다. 조는 다른 아이들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따라 갔고, 그 이후로 조에게는 꿈같은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전에는 수업을 받았고, 오후에는 약간의 정해진 일을 했다. '엔젤 하우스' 뒤에는 상당히 넓은 텃밭이 있었고, '엔젤 하우스'의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일을 했다. 조는 처음에는 누굴 부려먹자는 수작이냐며 일하는 시간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누구도 조를 나무라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즐겁게 일을 하는 것을 날마다 바라보는 것이 더 지겨웠던 탓에 언제랄 것 없이 조도 오후에는 텃밭에서 작은 일손을 보태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당히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던 조는 '엔젤 하우스'의 누구도 자신에게 강요하거나 자신을 고아라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어렵게 가지게 된 후에는 상당히 촉망받는 학생들 중에 속하게 되었다. 물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좀 뒤떨어지거나 무엇을 못한다고 해서 별다르게 대우하는 경우가 없었다. 엔젤하우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대부분이 신관들이었으나, 지금은 본사라는 곳에서 왔다는 신관이 아닌 선생님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조는 가끔 자신이 천사로 착각했던 세레스 여신의 신관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 아름다운 누나를 보면, 예전의 무례했던 행동을 사과할 수도 있을텐데 하고 약간의 후회하는 감정도 들었다. 시우스 제국은 전쟁이 터지기 전의 예측과는 다르게 꽤 오래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이는 시우스 제국의 국력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앙연합국의 황제 레파르토 라 카오시아 쥬이도스는 재상인 에카르도의 의견을 받아들여 비밀리에 시우스 제국의 내란을 종결시켰다. 어린 황제를 앞으로 내세워 온갖 비리를 행하던 황비와 외척들이 조용히 제거되고, 황제의 숙부가 권력을 잡았다. 새로 정권을 잡은 전대 황제의 동생인 아들레앙 데 카시우스는 중앙연합국과 뒤로 은밀한 동맹을 맺고 전쟁 준비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전쟁이 일어난 곳은 시우스와 하투아였지만, 실제로 하투아는 두 나라를 적으로 삼아야 했다. 따라서, 전쟁은 지진부진한 형태를 보이며 몇 년을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상황이야 어찌되었던, 아직은 불가침지대인 신전 소속의 엔젤하우스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별다른 것 없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 너희들에게 소개할 새 선생님이 오셨다"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자 저마다 눈을 빛냈다. 일반적인 공부를 마치면 아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곳의 엔젤하우스는 건립된 지 1년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과목은 선생님들의 말로는 '기초과목'이라고 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마법이나 검술 등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직 없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새로 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 "엘프다~!" "천사같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 있지?" 새로 부임한 선생님들은 세 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무나 아름다워서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소란해졌다. 푸른 머리에 남빛의 눈을 가진 엘프와 금발에 금빛 눈을 가진 엄청난 미남, 그리고 가장 아이들의 시선을 많이 끈 사람은 마치 금빛 햇살이 군데 군데 빛나는 듯한 은발을 가진 여신관이었다. 특히 조는 엘프와 여신관을 보자 갈색의 큰 눈이 금방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새로 온 선생님들은 각각 정령술과 검술 그리고 마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특히 다이아나라는 이름의 여신관이 마법 외에도 몸을 지키기 위한 격투술을 가르친다는 말에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믿거나 말거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각자 어떤 과목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하여 결정하기 위해 조를 짜서 하루에 한 조씩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선생님이라구?" "왜? 싫어? 시루스오빠는 어때요? 아이들 싫어해요?"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굳이 시우스제국까지 가려는 이유가....?" "내 생각도 같아. 나야 네가 하자는 일이면 전혀 상관 없지만, 시우스는 위험하다구! 어떤 상황인지 잘 알잖아?" "응! 그래서 가려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대답에 시루스와 에디우스는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거긴 세워진지도 얼마 안되었어. 아무리 신전에서 운영한다고 해도 조금 위험하겠지. 전쟁의 끝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좀 잔인해지는 경향이 있잖아? 그런데 지킬 사람은 없어. 물론 근방에 헤파이토스님의 신전이 있으니까 그 곳의 전사들이 도와주시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가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나보다야 네가 더 도움이 되겠지.. 후훗!" "......" "그리고 이젠 나도 짐이 될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죠 오빠?" "그야, 네 마법실력이 나를 넘어선 것도 사실이고, 검술도 수준급이라는 건 알지만....." 시루스가 차마 뒷 말을 못 잇고 흐릿하게 끝맺자 에디우스가 마무리를 했다. "넌 공격을 못하, 아니 안하잖아!!!!" 역시 다이아나는 다이아나였다. 상단을 꾸려 나가는 와중에도 다이아나는 마법공부를 게을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에디우스에게 검술까지 배우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시루스는 속으로 마법사들이 다이아나의 일을 알면 다들 자살하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고 우울하게 생각했다. 자신도 그 사이 6써클의 벽을 넘었지만, 다이아나는 그런 시루스를 넘어설 정도였다. 무엇보다, 마나를 쌓는 속도는 경이적이었다. 거기에 마법에 필요한 수식을 가르쳐 주면, 어디서 배우기라도 한 듯이 훨씬 쉬운 방법으로 풀어내어 시루스에게 다시 가르쳐 주기까지 하는 통에 시루스도 처음엔 상당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시루스는 이미 마법사 '유스'에게 선물받았던 마법서를 다이아나에게 주어 버린 상태였다. 물론 같은 6써클이라고 해도 다이아나의 진도가 오히려 빨랐던 탓이다. 다이아나는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결국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검사를 말하는 것임을 에디우스로부터 배우고는 이미 알고 있던 기본기에 마나의 유동을 곁들여 상당한 수준의 검술을 완성했다. 따라서, 다이아나의 현재 능력은 원래 있었던 신성력과 6써클의 마법, 그리고 웬만한 기사와 겨루어도 지지 않을 검술과 정령술까지 익히고 있는 터라 다이아나에 대한 걱정은 상당한 노파심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의외의 변수가 있는 법, 도무지 다이아나는 '공격'을 안했다. 마법이던 검술이던 늘 막기만 했고, 그도 안되면 피하는 데 주력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알면서도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은 공격에 적극적이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고, 공격마법을 배우고서도 대련 때 생전 사용을 안 하니, 대련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신성'을 가진 존재에게 호감을 느낀 정령들과 상당한 친화력을 보여주면서 중급 정령까지 소환이 가능했으나, 주인의 감정에 예민한 정령들조차 완전히 주인의 닮은 폼으로 공격이라곤 하질 않았다. 결국 시루스와 에디우스는 늘 그랬듯이 다이아나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시우스 제국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가 얼마나 큰 여파를 미칠지에 대하여는 아무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대륙의 성녀가 엔젤상회의 본단을 떠난다] 이 소식은 신전의 최상급의 인사들과 각 제국의 수뇌들, 길드의 수뇌들에게 특급 비밀로서 조심스럽게 전해졌다. 다이아나 일행들이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륙 전체에 퍼진 은밀한 소문 [성녀를 얻는 자가 대륙을 얻는다] 이었던 것이다.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외부의 예상을 뒤엎고 늘상 침묵하는 주신전을 제외한 8대 신전의 협력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하위 신들을 섬기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륙 전체가 이들의 신도인 셈이었기 때문에 엔젤상회를 적으로 삼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엔젤상회를 탄생시킨 '성녀'의 존재는 대륙의 최고위층에 가장 탐나는 '보물'이 되어있었다. 그 '보물'은 절대로 타국에 빼앗겨서는 안될 강력한 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오랜 시간 신전의 보호를 받으면서 드러나지 않던 성녀가 움직인다는 정보는 결국 은밀하지만 아주 빠르게 새로운 움직임들을 낳고 있었다. 에디우스는 마지막으로 할 일을 마친 후, 자신의 방에 들어와 생각에 잠겼다. 지난 3년 간, 다이아나와의 사이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에디우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은 그녀가 시루스에게 대하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면이라면 이제는 오히려 에디우스에게 더욱 친근하게 대했다. 서슴없이 팔짱을 끼고 - 에디우스가 상당히 부러워하던 시루스의 역할이었지만 - 가끔 장난스럽게 스킨십을 걸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당한(?) 에디우스는 속으로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건만, 다이아나는 마치 친오빠라도 생긴 양 태연자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분명히 카사노브의 충고를 따랐고 그대로 잘 진척되나 싶더니 최근 1,2년간은 어쩌면 차라리 다이아나가 자신을 좀 지나치게 의식하던 때가 낫지 않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에디우스였다. ** 외전 1 : 지혜가 다희를 만났을 때 ** 지혜가 다희를 처음 만난 것은 꽤 유명하다는 사범이 운영하는 도장과의 친선시합에서였다. 도장을 자주 찾는 것은 아니지만, '대련'을 좋아하는데다가 그걸 구경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대련의 장소는 지혜가 다니는 도장이었다. 상당히 시설이 잘 된 데다가, 근처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열 명이 조금 넘는 학생들과 사범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입구로 들어서자, 관장이 나가 반갑게 맞았다. "오랫만이네. 이런 일이 아니면 아예 얼굴 보기도 힘드니 원..." "아.. 그야 저희 도장 환경이 저 말고는 보조사범 하나 밖에 없어서 워낙 바쁘잖아요" "흥, 핑계는 좋군. 이 아이인가?" "네" "김다희라고 합니다" 열심히 연습을 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입구 쪽에서 딴 짓을 하던 지혜는 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보조 사범이라구? 내 또래인 것 같은데... 응? 저 아이는?' 다희라는 아이는 학교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앞머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모습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웬만한 반 친구들 얼굴은 거의 다 알고 있었는데, 그 중에도 다희라는 애는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어서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보조사점을 할 정도로 실력이 있다는 것은...? "지혜야, 너 아니?" "뭘?" "저 다희라는 애 말야. 쟤 왕따였다!!!" "응?" "나 쟤랑 같은 초등학교 나왔잖아. 맨날 두들겨 맞으면서 학교 다녔어. 애가 좀 음침하잖어" "그래서?" "응? 그래서라기 보다는....." "난 왕따같은 거 당하는 애들도 그렇지만 하는 애들은 더 웃기더라. 지들이 먼데 사람들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놀아? 그건 하는 애들이 당해 보는 게 제일 좋다는 생각 안 드니?" 마치 네가 한 번 당해볼래? 하는 어감까지 보이면서 날카롭게 말하는 지혜의 태도에 말을 걸었던 아이 - 별로 친한 친구도 아니었다 - 는 움찔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물거리더니 자기 자리로 향했었다. 그 때 그 아이가 분명히 저 앤데...... 보조사범을 할 정도의 실력이면 상당히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따를 당하면서 가만히 있었나? 아니면 그 후에 이를 악물고 배우기 시작한건가? 일단 지혜의 관심은 다희를 향해 집중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거절했겠지만, 오늘은 다희가 맡고 있는 저학년 반 아이들 중에도 대련을 위해 참여한 아이가 있었다. 할 수 없이 의무적으로 사범님을 따라 나선 다희는 관장에게 소개되어졌고, 둘 만의 대화를 하는 어른들 뒤에서 학생들을 인솔하여 자리잡게 했다. 대련은 각 도장에서 열 명씩 나와서 비슷한 실력끼리 - 물론 관장과 강사범의 사전 합의에 따라 - 상당히 널럴한 규칙으로 진행 되었다. 학생들은 소속감에서였는지 각자 자기 도장의 선수들을 응원했고, 다희도 자신이 가르친 아이가 나서자, 손에 땀을 쥐고 관전을 했다. 대련 결과는 6:4로 다희쪽의 패배였다. 승부야 어찌되었던 간에 오랜만에 긴장을 하고 시합을 한 탓인지 약간 섭섭하기는 해도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 때, "저 저 친구랑 겨뤄 보고 싶은데요!" 갑자기 튀어나온 한 여학생이 있었다. 도복조차도 참 맵시있게 입은 그 학생을 본 다희는 상당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전교에 유명한 학생인 지혜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대충 무심하게 생활하는 다희도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희는 지혜가 자신을 알고 있는지가 더욱 걱정이 되었다. 대련은... "그건 좀 곤란한걸?" 어차피 강사범이 막아줄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다희와는 제대로 대련이 될 리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탓이었다. 지혜는 꼭 다희와 겨루어 보고 싶다면서 떼를 썼지만, 관장으로부터 약간의 핀잔을 듣고는 포기하는 눈치였다. 다음 날, 도장 문을 닫을 무렵에 지혜가 찾아왔다. 관장을 졸라 다희의 도장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강사범은 몇 번 말리다가 어차피 도저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은데다가 한 술 더 떠서 두 번 본 자신에게 애교작전까지 서슴지 않는 지혜에게 질린 표정이었다. 다희가 계속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지혜는 '학교에선 도장 다니는 거 말 안할께'라는 미묘한 말로 다희를 자극했다. 결국 둘은 대련을 했고, 공격을 하지 않는 다희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공격을 명중시키지 못한 지혜는 처음에는 상당히 모욕감을 느낀 듯 화를 내다가 강사범에게 이런 저런 말을 듣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다희야아~!" 다음 날 학교에서 지혜가 큰 소리를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자, 다희는 움찔했다. 혹시 대련에 진 보복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웬만한 일을 다 겪어 본 다희로서는 불안감이 앞섰다. 달려온 지혜는 팔짱을 터억 끼더니 "우리 라면 먹으러 가자~!" 라고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아직도 굳어 있는 다희를 억지로 잡아 끌었다. 큰 키의 다희에게 매달려서 낑낑대는 포즈로 팔을 잡아 당겨 끌고 가려는 지혜의 폼은 다희가 봐도 상당히 귀여웠다.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면서 온 힘을 다해 잡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희의 표정은 입모양에 드러났는지 "어? 웃었네!!! 너도 내가 좋은 거지? 그럴 줄 알았어!!!" 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지혜는 그 날로 다희를 친구라고 선언이나 하듯이 다희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지혜 주변의 아이들은 갑자기 다희만 유독 챙기는 지혜의 모습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잘 몰라 한 동안 다희만 보면 어색한 웃음을 짓곤 했다. "여기야" 부끄러운 듯한 어조도 과장하는 투도 없는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친구 사이에 집은 알고 지내야한다는 지혜의 고집 때문에 둘은 천사의 집까지 오게 된 것이다. 며칠 안 되는 시간이지만, 지혜는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라도 있는 것 처럼 자신의 신변이나 취미에 대하여 틈만 나면 수다를 떨었다. 덕분에 싫던 좋던 다희는 지혜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가장 많이 아는 '친구'가 된 셈이었고, 오늘은 이렇게 같이 하교를 한 것이다. 다희가 지혜를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날부터였다. 지혜는 다희의 우려와는 달리 '천사의집'의 식구들과 금방 친해졌다. 조금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봐 주기도 하고, 일하러 간다는 다희를 기어코 따라 나서더니 장애인 언니들과 동생들이 있는 건물에서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처음 하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지혜가 매주 천사의 집을 방문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혜는 바쁜 - 스스로 바쁘다고 스케쥴을 줄줄 외워대는 지혜였으니까 - 일상 중에서도 주말이면 빼놓지 않고 천사의 집을 찾았다. 결국 다희는 지혜의 마음을 연 첫 번째의 '친구'가 되었다. 천사의 집과 도장 강사범님을 제외한 유일한 '외부인'으로. 어려서부터 지혜의 주위엔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혜는 그런 친구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즐겁게 이야기하고 같이 놀기도 했지만, 웬지 모르게 자신만 소외되어 있는 듯한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철이 들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혜는 이른 바 '천재'에 속하는 아이였다. 집안 내에서야 워낙 부모님부터 유별났기 때문에 그다지 못 느끼고 있 었던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나 '쉬운' 것들을 어렵게 공부하는 또래들을 보면서 지혜는 적응을 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오빠에게 하던대로 학교에서 선생님께 질문을 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부모님은 둘 다 박사과정을 마스터하고 미 국의 연구소에 있다가, 둘째인 지혜만큼은 한국에서 키우고 싶다면서 귀국을 했었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과정으로는 지혜 를 가르칠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지혜가 하는 질문들에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선생님은 결국 지혜를 가 르칠 수 없다고 선언을 했고, 부모님은 지혜와 함께 미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혜는 굳이 필요 없는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즐겨보고 싶다는 이유를 전면에 내세워 귀국에 성공한 것이었다. 어차피 미국의 영재학교에서도 거의 '괴물' 수준인 지혜의 능력이 드러나자 상 당한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지혜로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지혜의 목표는 '제대론 된 대인관계' 를 형성하여 '인기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것을 전혀 티내지 않고 지혜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시기에 맞추어 똑같이 입학을 했다. 이미 자신의 능력과 더불어 상당한 준비를 한 지혜에게 어쩌면 학교라는 것은 자신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증명해 보일 하나의 시험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크지 않은 일로 지나갔고, 지혜는 그야 말로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지혜의 주변에는 지혜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친구들은 무엇 하나라도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고, 매일 선물을 받고 말이라도 건네면 다들 기뻐했다. 그렇지만, 지혜는 외로웠다. 다희라는 친구를 처음 인식했을 때 느낀 것은 동질감이었다. 전혀 달라보이는 다희에게 지혜 는 자신의 근원인 '외로움'을 함께 느꼈다. 다른 친구들에게 하듯이 접근을 해서 약간씩 속을 보게 된 지혜는 날이 갈 수록 다희를 좋아하게 되었다. 다희가 속으로 감탄했던 천사의 집에서의 일도 지혜로서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가 족을 제외하고,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들은 지혜로서도 처음이었으니까. 지혜와 다희가 친구로 지내기 시작 한 지 6주 정도 지났을 때, 다희의 도장에 찾아가 함께 하교하려고 기다리던 지혜는 다른 곳에서는 절대 꺼내놓지 않는 물리책을 놓고 수식을 풀고 있었다. 지혜가 풀고 있는 것은 통신으로 수학하는 미국에 위치한 대학과정의 책이었다. 한참 문제 풀기에 열중하던 지혜는 어느 틈엔가 다희가 자신의 뒤에 서 있음을 알았다 . 슬쩍 돌아보니, 다희는 지혜의 시선도 못느끼고, 중얼중얼 수식의 해답을 풀어보는 듯 했다. 지혜는 그날 다희가 오히려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다희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지혜는 점점 큰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희의 앞에서는 마음껏 궁금한 것들이나 안풀리는 문제들, 관심이 가는 것들을 이야기 해도 괜찮았다 . 지혜의 능력은 다희 앞에서만큼은 이상한 것이 아닌, 그저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접근했던 둘의 사이는 그렇게 탄탄한 우정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조는 면담을 위해 줄을 서서도 다이아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의 마음은 두 가지가 뒤섞여 있었는데, 한쪽으로는 다이아나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른쪽으로는 자신의 무례함을 잊어버렸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엑?... 네." 확실히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다이아나의 첫마디에 소리를 질렀다가는 얼른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저......" 소년이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다이아나는 도와주지 않았다. 다이아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 자, 뒷골목에서 수 년을 버텨 온 소년의 오기가 용기를 주었다. "그 때는 죄송했습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여 꾸벅 절하는 소년은 참으로 귀여웠다. 특히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다이아나로서는 가 서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속마음과 달리 다이아나는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가 죄송했다는 건 지 모르겠구나" 약간은 차갑게 들리는 다이아나의 말에 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관님은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기껏 구해서 치료해 주었더니, 험한 말이나 하고 과자를 훔쳐 도망간 자신은 선생님들께 배운 단어에 의하면 '배은망덕'한 아이였으니 까. 조는 이제 신관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그 때도 다이아나가 너무 아름답고 다가갈 수 없는 존재처 럼 보인데다가 자신은 너무 초라해서 일부러 반항을 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네가 천한 고아라서 신들께서도 너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데, 돌연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는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들어 다이아나를 쳐 다보았다. 그녀는 종전과는 달리 녹아들 듯이 자상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그 땐, 너무 화가 나서.... 그래서......" "그래.. 그랬겠지. 네 잘못이 아니란다. 나도 그 때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으니, 네가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 그럼 나도 이젠 싫어하지 않는 거니?" "그.. 그래요" 사실은 그 때도 싫어한 건 아니었다. 괜히 화를 내기 했지만, 아름다운 여신관의 모습은 가끔 꿈에 나왔다. 꿈에서 여신관은 자신을 찾아와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어 주곤 했다. 이렇게 한 어린 소년과 성녀로 불리는 여인의 재회는 이루어졌다. "생각 외로 재능 있는 아이들이 많은 편이더군요" 며칠에 거쳐 아이들을 다 만나 본 후, 시루스가 검술 쪽은 어떤지를 물어보는 듯한 태도로 에디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흠.. 나쁘지 않더군요. 다만, 대부분 체력이 약해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밖에는, 근성들은 있어 보이더군요" "그럴 수 밖에 없을꺼야" 다이아나가 씁쓸한 어조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 곳의 아이들은 이 혼란의 시대에 어떻게든 여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나 다름 없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나빠질 것도 없는 삶, 거기에 좋아진다는 어 떠한 보장도 없는 삶을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나약한 어른들보다 더 순수하고 강한 삶에 대한 애착이 있을 것이다. 어떤 면 에서 자신도 그랬으니까. 시루스는 내심 신기해하고 있었다. 3년 전 만났던 꼬마아이는 이제 11살이 되어 있었다. 나이보다 좀 어려보였던 그 소년은 시루스가 보기에는 상당히 비뚤어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던 시루스는 다시 만난 소년이 너무나 밝고 순수해 보여서 상당히 놀랐던 것이다. 인간의 아이들은 잘 오염되기도 하지만, 아이로 있는 동안에는 다시 정화되기도 쉬운 법인가. 상념에 빠져 있던 시루스는 다이아나가 장난스럽게 볼을 슬쩍 만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서 제정신을 차렸다. "오빠. 생각도 좋지만, 이제 시간표를 짜야 한다구요" "에디, 너도 이리와서 앉아 볼래?" 셋은 머리를 맞대고 교육에 관한 계획을 세웠다. 인간의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것이 처음인 두 남자는 어차피 그녀의 주도에 따라 가끔 묻는대로 질문에 대답을 하는 정도였지만. 이런 면에서는 가장 경험이 많은 다이아나는 자신의 다희로 있었을 때 의 교육과정과 이쪽 세계에서의 특징을 조합하여 차근 차근 계획표를 만들어 갔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난 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좀 그래..." 에디 옆에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던 다이아나가 에디 쪽으로 몸을 기대면서 말을 걸어왔다. 다이아나가 마음이 산란할 때 이런 식으로 가끔 접촉해 온다는 것을 에디나 시루스나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옆에 앉았던 에디도 건너편에 앉아서 바라보던 시루스도 약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저 애들이 고아인 이상, 가장 좋은 출세의 방법이 신관이나 마법사, 검사가 되는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서 저 아이들이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면 난 어떻게 하면 좋은거지?"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다이아나가 그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예전에 무술을 배웠던 것이나, 그녀가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신관의 자질이 엿보이는 아이들이야 이미 각 신전에서 데려가서 따로 공부를 시키고 있었기에 남은 아이들은 그 외의 살 길을 열어 주어야 했다. 엔젤상회에 모두 취업을 시켰으면 좋겠지만, 상회라고 해서 모두 사무직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현재 대륙 전체의 엔젤하우스에 있는 아이들의 숫자를 고려할 때, 그들을 모두 엔젤상회에서 고용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도 했지만. 전쟁 중인 나라에서 마법사나 검사, 정령사와 같은 인재들은 평화시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다. 물론 이러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실력만 양성하면 웬만한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다. 다이아나는 오히려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쪽으로의 재능이 없는 아이들은 가능하면 상회 쪽에 남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시련을 겪은 아이들은 무엇보다 대우받는 직업을 선망하고 있었다. 아마도 상당한 열정과 노력으로 교육에 임할 것 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일단 너는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셈이지. 저 애들에게 기회를 준 거잖아? 그 다음은 각자의 의지에 맡겨야지. 결국 그 애들의 인생이니까" "내 생각도 에디우스님과 같아요. 다이아나, 그래도 이 곳에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확실히 강조하고 있으니까, 아이들도 네 생각처럼 잘못되거나 하는 일은 드물 꺼야" "그래... 어차피 걱정이나 하고 앉아 있는 것은 나답지 않지? 얼른 내일 수업 준비나 해야겠다. 이거 오랜만이라 잘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네? 어? 수업 준비 안해? 안해요?" 스프링 튀기듯이 발딱 일어나 언제 고민했냐는 듯이 재촉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는 얼핏 보기에는 전혀 방금 전까지의 우울 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3년 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아서인지 두 남자는 약간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다이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왜들 그래? 자아, 상으로 뽀뽀해 줄 테니깐 열심히 준비들 하라구요~!" 말끝을 늘리기가 무섭게 에디의 볼에 쪽 소리가 나는 뽀뽀를 한 다이아나는 슬금슬금 피하는 시루스를 기어코 잡고 시루스의 볼에도 뽀뽀를 했다. 얼굴이 붉어져 말을 못하고 당황스레 서 있는 시루스와 무엇을 생각하는 지 전혀 알 수 없는 에디우스를 뒤로 하고, 다이아나는 주저없이 뒤를 돌아가면서 어깨 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새로운 선생님들이 소개된 지 사흘 후부터 엔젤 하우스에서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다이아나가 가르치는 격투반에서 기초체력을 양성하고, 각자 배당된 전문과목을 듣게 되었다. 마법과 검술, 정령술의 경우 일단 아이들의 희망사항을 우선으로 하였지만, 타고난 능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마법과 정령술의 경우는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아이들이 기초적인 호신술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다이아나의 방침 아래 결국 다이아나의 경우 전교생을 가르치게 된 셈인데, 아이들은 오히려 상당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럼 줄을 맞춰서 출발해서 헤파이토스님의 신전까지 갔다 오도록 해요. 절대 뒤쳐지는 사람이 있어도 안되지만, 게으름은 피지 말고! 알았죠?" "네에~!" 매일 아침마다 일정하게 열을 맞추어 엔젤 하우스에서 대로를 따라 아테나이 신전을 지나 헤파이토스의 신전까지를 뛰어가 는 것이 아이들의 첫 일과였다. 다이아나의 수업은 수업이라기 보다는 아침 식사 전의 운동처럼 매일 일과 전에 구보와 간 단한 체조같은 동작을 하는 것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단 기본적인 체력이 가장 중요한 데다가 이러한 운동은 아이 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엔젤 하우스에서는 잠이 덜 깬 아이들이 많은 탓에 가장 적게 준비했던 아침 식사가 모자라는 소동이 일어났고, 처음 하루, 이틀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는 오히려 아침식사를 가장 많이 준비하게 되었다. 엔젤하우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모두 90여명, 백 명이 약간 안 되는 숫자였다. 이미 각 신전에서 신관이 될 아이들을 뽑아 갔음에도 이 곳의 아이들의 숫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편이었다. 아이들은 세 개의 반을 구성하여 교육을 받았고, 새 로 개설된 과목 이외에도 기본적인 공부는 모두 병행되었다. 새로 개설된 과목들의 공부는 오후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이들 의 자유시간이 줄어 든 셈이 되었지만, 어차피 희망에 따라 신청한 것이었으므로 불평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너희들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어느 날 수업중에 다이아나가 아이들에게 한 말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가장 위대한 마법사, 소드마스터 등등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다이아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의 꿈을 주욱 들어 주다가 대충 돌아가면서 이야기가 끝나자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되고 싶은지 말해 볼래?" 아이들은 약간 당황한 듯이 술렁거리면서도 선뜻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아이들이야 그런 사람이 되면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다는 것과 마을의 이야기꾼이 말하던 '영웅'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꿈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았는데, 그걸 이야기하자니 이 아름다운 선생님이 혹시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여신의 위대함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던가 하는 가식적인 말을 하기엔 아이들은 아직 순수했다. "저기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어떤 사람이 그랬어요. 천한 고아라고. 우리같은 애들은 신들의 버림을 받은 거래요" 한 명이 말을 꺼내자, 다른 아이가 받았다. "맞아요. 귀족들이나 왕족들은 다 신들께서 축복해서 그렇게 된 거랬어요" 물꼬가 터진 듯이 아이들의 입에서 비슷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이아나가 느낀 그 말들의 종합적인 내용은 바로 '지배계층의 논리'였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갖지 못한 이들을 쉽게 억누르고 지배하기 위해 이미 가진 자들이 내세우는 논리. "너희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너희가 귀족이나 왕족보다 못하다고? 신들께서도 너희를 덜 사랑하신다고?" "......" 사실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 앞의 선생님이 세레스님의 여신관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대답해서는 알 될 것 같아 입을 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침묵으로써 긍정을 표시했다. "그럼, 왕족이나 귀족 중에 일찍 죽거나 병에 걸려서 고생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이번에는 조금 쉬운 질문이 나왔다. "그런 사람들은 신께서 사랑하셔서 일찍 데려간 거랬어요" 역시 아이들은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의 답을 말했다. "그러면, 평민들이 훨씬 더 많이 일찍 죽는데, 그런 경우엔?" 다시 침묵. "얘들아 다른 것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어. 신들께서는 노력하는 이를 사랑하신단다."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공평하게 똑같이 태어나게 했어야 했다. 누구는 귀족의 아들 딸로 태어나서 걱정없이 잘 먹고 사는데, 누구는 하루 한 끼도 못 먹어서 굶주리는 집안에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차마 입을 못 열고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이아나는 알 것 같았다. 그 때 조가 나서서 말했다. "하지만, 신분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아이의 뒷 말이 무엇인지 다이아나는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용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는 혹시 실망을 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표정을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조에게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자, 그럼 그 이야길 해 보자.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서 신들께 사랑을 받을 수 있는데, 왜 누구는 처음부터 많이 갖고 태어 나고 누구는 적게 갖고 태어나는 것일까? 너희는 모두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을꺼야. 그럼 말이지, 귀족이 기사가 되기가 쉽니, 아니면 평민이 기사가 되기가 쉽니?" "그야 당연히 귀족이죠" 평민이 기사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인연이 없고는 힘든 일이다.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평생 검 한 번 못 잡아 보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냥 평생을 보내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으니까. "자, 그럼 기사가 되기 위해 평민이 더 노력했을까? 아니면 귀족이 노력했을까?"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그건 바로 평민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는 이를 신께서 사랑한다고 해도 죽을 고생을 하는 것보 다는 좀 편안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누가 그런 고생을 하고 싶을까? 이미 세상이 살기 힘들다 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던 아이들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여러 영혼들 중에 누구는 귀족으로, 누구는 평민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쩌면 영혼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우리가 신과 함께 있는 영혼이었을 때는 우리 모두 그 분의 일부분처럼 존재했을 거야. 주신께서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시기도 하지. 하기 힘든 일과 조금 쉬운 일이 있을 때, 너희라면 어떻게 하겠니? 조금이라도 나은 능력을 가진 이에게 하기 힘든 일을 시켜야 공평하지 않겠니? 아마도 너희의 영혼은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귀족의 아이들이 너희들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해할 듯 말 듯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말이 가지는 위험한 의미보다는 아이다운 점에 집착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요. 귀족 때문에 죽었어요. 울 엄마가 그 때 그러셨는데요 세상은 힘 있는 자들 마음대로 되는 거랬어요." "테아, 아버지 일은 참 안타깝구나. 그럼 테아는 힘을 가지고 싶은거니?" 어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힘을 가지고 테아도 남의 것을 빼앗고 그럴까?" 소녀는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이 많이 생긴단다. 그건 대부분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 빼앗아 갈까봐 생기는 두려움이지. 너희들 집에 도둑이 들까 봐 걱정한 적은 없을 꺼야. 가져갈 것이 없는 집에 도둑이 들 리는 없으니까. 귀족들도 그렇단다. 많이 가진만큼 많은 두려움을 가진 그들은 늘상 불안감에 시달리지. 그래서 빼앗기기 전에 빼앗으려고 하는 거야. " "하지만 우린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는데요?" "응.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그러면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속단하는 나쁜 습관이 있거든. 빼앗을 생각을 하면, 더더욱 빼앗길까봐 두려워지는 거지" "결국 귀족들은 나쁜 사람들이라는 거네요?" "맞아, 맞아!"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나쁘다기보다는 잘 모르는 거야. 그리고, 그들이 모두 그렇게 사는 건 아니란다. 동화책에도 나쁜 영주님도 나오지만 착하고 멋진 영주님도 나오지? 마찬가지란다. 만일 너희가 좀 더 커서 너희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을 보면 내 생각을 한 번만 해 주겠니?" 아이들은 여신관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던 그들은 다이아나를 사랑했으므로 선생님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말을 거절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네에!" "고맙구나. 자 이제 그럼 수업을 계속하자" "저어,, 에디우스님,, 이거......" 동료 교사로 있는 아프로테이아의 여신관이 주춤거리며 에디우스에게 꾸러미 하나를 내밀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오호~! 이번엔 뭘까?" 다이아나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흥미롭다는 듯이 꾸러미를 주시하자, 에디우스는 그 꾸러미를 잡아 다이아나에게 건네주었다. "궁금하면, 직접 풀어봐" "흠. 그럼 안 돼지. 티아라님이 애써 준비한 것 같은데~~! 자아 얼른 풀어봐. 궁금하단 말야" 티아라 여신관은 미의 여신 '아프로테이아'를 모시는 신관답게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부드럽게 풀어내린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녹색의 눈을 소유한 그녀가 에디우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공인된 사실이나 다름 없었다. 대부분의 신관들이 일반인들보다 뛰어난 외모를 지닌 탓에 엔젤하우스에 속한 교사들의 외모도 상당히 수려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본사에서 나왔다는 이들 일행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감히 접근하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엘프인 시루스의 경우 워낙 온화한 성격이라 쉽게 동화되었고, 다이아나의 경우에는 그녀 쪽에서 붙임성 있게 굴었기 때문에 엔젤하우스에서는 마치 여신처럼 대우받고 있었다. 그리고 에디우스의 경우엔 워낙 쿨한 태도를 취하긴 했으나, 그것이 매력으로 보인 것인지 나름대로의 팬 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감히 접근하는 이들이 많이 않았던 주 이유는 이 셋이 함께 왔을 뿐만 아니라, 에디우스가 대부분의 시간을 다이아나 옆에 딱 붙어 있었기 때문임을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의 사이가 어쩐지 의좋은 남매 이상은 아닌 분위기를 풀풀 풍겨내자 - 물론 대부분이 다이아나의 행동 때문이지만 - 차츰 용감하게 이 둘에게 대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시루스의 경우는 이미 여러 곳에서 애정 공세를 받았지만, 나름대로의 경험이 있어서 오히려 부드럽게 떼어놓고 거리를 유지하는 능숙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잘한 부탁들을 해오면서 그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여직원 - 하다못해 식당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까지 - 은 날로 늘고 있었지만. 다이아나의 성화에 못이겨 에디우스가 잘 포장된 꾸러미를 풀자 그 안에서는 곱게 수가 놓여있는 장갑 한 켤레와 손수건 한 장이 나왔다. 에디우스는 말없이 다시 그걸 싸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빈 손으로 돌아왔다. "엥? 돌려 준거야?" "내가 받을 물건이 아니야." 예전이 없이 차갑게 대답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는 에디우스의 태도에 다이아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이아나는 후다닥 에디우스의 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화난거야?" "......" "흠.. 뽀뽀해 줄까? 왜 화내고 그래. 그냥 장난친 건데... 무안하게 시리~!" 다이아나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에디우스의 옆으로 다가가 팔을 잡았다. "용서해 주라. 에디야~!" 돌연 에디우스는 다이아나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다이아나를 휩 잡아 끌어안고는 입술을 겹쳤다. 순간적인 일이라 굳어있던 다이아나가 정신을 차리고 밀어내려는데, 에디우스가 먼저 살짝 다이아나를 밀어 내어 떼어내더니 싱긋 웃는 것이었다. "뽀뽀해 준다며???" 멍해 있는 다이아나에게 한 마디를 던지고는 에디우스는 딴청을 피웠다. 다이아나는 어쩐지 무안한 기분이 들어 가벼운 인사를 던지고 에디우스의 방을 빠져나왔다. "들어오시지 그러십니까?" 에디우스가 방 밖을 향해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조금 무안한 표정의 엘프가 열려진 방문사이로 모습을 나타냈다. "앉으시죠" 시루스는 열려진 방문 사이로 우연히(?) 다이아나에게 키스하는 에디우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급히 나가느라 시루스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에디우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두 남녀의 모습을 엿보다 들킨 셈이 되어 버린 시루스는 약간 주저하는 태도로 에디우스가 권하는 대로 마주 앉았다. "여태 다이아나의 곁에 머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입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시루스에게 에디우스는 집요했다.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저 애를 지켜준다는 이유라도 있었다지만, 이제 저도 있고, 다이아나의 능력이 시루스님을 넘어섰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아실텐데요?" "......" "이제 가르칠 것도 없는 터에, 굳이 이곳까지 따라 오신 이유는요? 아니 제가 있는데도 상회에 남아 도와준 것도 좀 의문스럽군요.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시루스가 좀처럼 의중을 밝히지 않자, 에디우스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의심과 적의의 이빨을 드러냈다. "다이아나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그 애를 사랑하기라도 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시루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쉽게 자인하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에디우스였다. 속으로는 이 하찮은 엘프가 감히! 라는 생각이 살기를 자극했으나, 그래서는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었다. 다이아나와 처음 약속한 내용은 아직 유효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 애는 인간, 당신은 엘프입니다. 아뇨, 당신이 엘프가 아니더라도 저는 다이아나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비록, 제가 지금 한 발 물러나고 있다고는 해도 저는 그녀를 '반려'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에디우스는 시루스가 다이아나의 확실한 신분을 모른다는 점을 내세워 그녀와의 친분을 강조하면서, 엘프에게 포기할 것을 완곡한 말투로 돌려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도 우연히 제 감정을 알게 되었지요. 아마도 다이아나가 없어졌을 때부터였나 봅니다. 말씀하셨듯이 저는 엘프, 그녀의 온전한 반려가 되기엔 무리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저를 필요로 하고 내치지 않는 이상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에디우스야 흥분을 하건 말건 시루스는 시종 차분한 어조를 고수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물어주어 홀가분하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어서 에디우스의 속을 박박 긁어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에디우스가 속을 끓이던 말던 간에 대충 대화가 끝났다고 지레짐작 한 시루스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가 버렸다. 남겨진 에디우스는 모처럼 다이아나에게 키스도 했고 해서 의기양양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불쾌함을 느끼면서 닫힌 방문을 드러내면서 살기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다이아나는 습관대로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 고민에 빠졌다. 에디우스의 느닷없는 키스는 무의식중에 꽁꽁 숨겨놓고 있던 카이젠과의 일을 떠올렸다. 어차피 시우스 제국에 올 때부터 카이젠의 생각이 자꾸만 나는 것을 억지로 기억 한 구석에 밀어넣고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 행동에 문제가 있었나봐!' 다이아나의 변화된 행동들은 '지혜'를 상당히 닮아 있었다. 17년 간 별 주목을 안 받고 조용히 살아온 '다희'의 성품으로는 이쪽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었다. 특히, 바뀐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후부터는 의식적으로 더욱 지혜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다이아나의 생각에 상당한 미모와 실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편하게 대해주었던 지혜의 성격은 현재 다이아나라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다희'였을 때의 다이아나는 주위의 한정된 인원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보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형성함으로써, 그녀의 울타리 내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만을 돈독히 하는 데 노력했다. 학교를 자퇴한 후에 상당히 밝게 생활하긴 했었지만, 워낙 짧은 기간이었고, 그 때 만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이쪽 세상에서 어머니를 만난 후,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밝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지혜한테 입술에 키스한 사람은 없었는데......' 자신도 지혜의 육탄공세를 많이도 받았다. 심심하면 매달리고 안기고 입술을 불쑥 들이미는 바람에 곤란했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지혜가 자신에게 대하듯이 하면 '좋은친구'가 될 줄 알았다. 아무래도 '성적인 정체성'이 상당히 모자란 듯이 보이는 다이아나다. 혹자는 다이아나가 지나치게 무신경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바로 그런 점들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다희로서의 삶 자체가 평범하질 않았다. 대부분의 남는 시간은 어려서부터 '천사의 집'의 장애인들과 함께 하길 즐겼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다.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한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을 만나서도 다희의 입장은 늘상 고정되어 있었다. 도장에서는 처음엔 배움을 따라가기에 바빴었고, 이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사범으로써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학교에서야 가능하면 안 튀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으니 더 말 할 나위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다이아나의 대인관계에 대한 경험은 극히 적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대인관계도 그런데 하물며, 남녀관계라는 데는 더더욱 미숙했다. 무엇보다 다이아나의 삶 저변에 깔려 있는 의미가 그런 내용 자체를 '사치스러운 감정' 쯤으로 여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저변에는 자신의 삶과 생활에 대하여 걱정으로 지켜볼 부모님의 심정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생의 마지막에 준비된 저울이 기울지 않게 하기 위한 '선의의 빛'의 무게는 다이아나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단지, 그러한 면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런 이유로 에디와의 일을 그냥 자신이 처신을 잘못하여 생긴 '실수' 내지는 '사고' 쯤으로 치부한 다이아나는 생각하기 싫은 일들을 묻어버리고 그냥 잠이나 자기로 했다. 축축한 무언가가 얼굴을 적셨다. 눈을 뜬 다이아나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손을 느꼈다. 고개를 든 다이아나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여기 저기 피를 묻힌 채 다이아나를 만지고 있는 검은 눈의 남자였다. '카이..제...ㄴ?' 두 눈에 원망과 애증을 가득 담고 카이젠은 서서히 몸을 내려 다이아나의 두 팔목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려 꼼짝 못하게 한 후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마치 리아로 돌아간 것처럼 다이아나의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고 그저 입만 괴롭게 벌릴 뿐이었다. "나를 버리고 참 행복하게 웃더군"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를 버린 게 아니라고. 단지 자신은 처음부터 카이젠의 소유도 아니었고, 그의 이기심으로 사랑을 강제했던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너를 잊을 수도 없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면 내게 돌아와 줄 지도 모르지. 너를 갖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다" 목에서 으르렁 거리는 소리처럼 카이젠은 다희의 코 앞에서 절규했다. 몸 여기 저기를 더듬는 손과 낯선 몸의 무게를 느끼고 바르작거렸지만, 몸 마저도 마음 먹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가 귓 가를 울렸고,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전혀 부드럽지 않은 벌을 주는 듯한 거친 키스! "너를 진작에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하고 몇 날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이었다. 낯선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 것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지.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아아악!!!!!!" "정신 차려! 다이아나!!" 눈을 뜬 다이아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침대 옆에 있는 두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침대 가장자리에서 그녀를 깨우려고 했던 듯이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시루스는 조금 늦게 온 것인지 뒤쪽에 서 있었다. "선생님!" "응? 왜?" 악몽을 꾼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아이들에게 마나를 쌓는 수련을 시키고, 약간 멍하게 앉아 있던 다이아나는 뜰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 중에 조가 옆에 와서 부르자 살짝 놀랐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말해 보렴" "제가 이담에 커서요. 대마법사가 되면... 선생님께 청혼해도 되요?" "응,, 응??? 뭐???" "그.. 그러니까 이 다음에 크면요. 제가 선생님보다 커지면......" 소년은 얼굴을 잔뜩 붉히고 나름대로 진지한 고백을 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조를 보면서 천사의 집에서 유독 자신을 잘 따르던 진호라는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다희보다 8살이나 어린 진호는 맨날 다희를 독점하지 못해서 안달을 했고 심지어는 장애인 건물의 친구들까지 질투를 하곤 했다. 진호는 자신이 크면 다희에게 장가 갈꺼라고 늘 큰소리로 말하곤 했었는데, 조의 지금 모습을 보니 그 때의 진호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런데... 조가 나보다 커지면, 나는 완전히 아줌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이아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조는 용기를 얻었는지, 다이아나도 흠칫할 만한 말을 했다. "선생님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예쁠꺼에요. 틀림 없다구요" 순간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다이아나의 얼굴에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흠.. 약속은 할 수 없지만, 네가 그 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내가 정해놓은 사람이 없다면 그 때는 한 번 생각해 볼께" "네. 고맙습니다" 신이 나서 다시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로 달려가는 조를 보면서 다이아나는 아이의 눈이 상당히 날카롭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곳에 온 지 3년, 만일 자신이 21살이라는 육체의 나이를 가지게 되었다면, 이제는 소녀스러운 면이 없어져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의 시간은 닫혀진 세계의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신성력과 마법 등 자신의 수련을 생각하면 정상적이라고 해도 노화 자체가 늦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10년 후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넌 나를 인간으로 볼 수 없을 지도......" 그제서야 특이한 존재로서 인간들의 세상을 살아 간다는 것이 장차 큰 부작용을 불러 있음을 깨닫고 마는 다이아나였다.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간혹 이렇게 현실적인 무게를 느끼면 더더욱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마도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무리하게 에디우스라는 존재를 예비한 것인지도 몰랐다. 반려가 되던 친구가 되던, 긴 세월을 살아가야 할 다희에게 함께 할 동행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내가 에디우스에게 잘 하고 있는 걸까?' 별로 꾸지 않던 악몽은 다이아나의 숨겨진 불안감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고 있었다. 겉으로야 자신있게 행동하지만, 누구보다도 불안한 사람은 다이아나 자신이었다. 자신의 긴 생이 주신의 배려 - 기간이 길 수록 선행을 쌓을 기회는 많아진다 - 일 수 있다고는 하나, 인간으로서 그 세월을 제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도 의문스러웠다. 또 그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에디우스에 대하여도 죄책감이 들었다. 한 번 우울해지기 시작하자 상념을 끝없이 밀려 들었다. 문득 손등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자신이 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슬쩍 돌아보니 아이들은 나름대로 마나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이아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잔디 뒤쪽의 공터로 들어갔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이아나는 그냥 쏟아지는 대로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아버지고 보고 싶었다. 사실, 여행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자신이 바라는 건, 이제 부모님을 만났으니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그녀가 부러워하던 삶, 그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어리광도 부리면서 평범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었다. "저 봐. 저 아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구. 저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된단 말야" "특별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말 모르는거야? 세레스 언니의 성품을 인간이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저애를 봐.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잖아" "......" "너무 부자연스럽다구 저건......"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내게도 생각이 있어. 결코 저 아이를 저렇게 놔 두진 않을꺼야. 무슨 권리냐고 묻지 마. 저 아인 나의 유일한 조카라구. 내 조카가 저렇게 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영상에는 한껏 소리를 죽여서 흐느끼는 다이아나의 모습이 있었다. 화를 내면서 나가 버린 페르세포네와 그 날 모여 있던 몇 명의 신들은 다이아나도 페르세포네도 걱정이 되었지만, 다이아나가 손을 내밀지 않는 이상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루스와 에디우스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이아나를 발견했다. 본사에서 전해온 연락을 전달하기 위해 다이아나의 반이 야외수업을 하는 장소로 간 시루스는 다이아나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을 알고 근방을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엘프의 예민한 청각은 낯선 소리를 찾아 한 곳으로 이끌었고, 그가 도착한 공터 한 구석에 낮은 관목 아래 잔뜩 몸을 말고 앉아 다이아나는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전신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낮음 울음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시루스는 말없이 다이아나에게 다가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무엇이 다이아나를 이토록 서럽게 만드는 것인지 마음 여린 엘프는 알 수 없었지만, 주위 공기를 온통 눈물로 채운 양 무겁고 습한 분위기에서 가라앉아 허우 적대는 듯한 모습을 보니 저절로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엇이 이토록 당신을 울게 하나요?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길래......' 시루스는 입으로 말하지 못할 의문들을 목 안으로 삼키며, 그저 다이아나를 따뜻하게 안고 그렇게 울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다이아나는 시루스의 온기를 느끼고는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맡기고 나오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루스는 참 따뜻하고 다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 광경을 목격한 이는 에디우스였다. 그 또한 다이아나를 찾고 있었는데, 시루스보다 한 발 뒤쳐졌을 뿐이다. 웅크리고 있는 다이아나를 엘프가 감싸안고 있는 것을 본 에디우스는 앞 뒤 생각할 것 없이 성큼 다가가 당황해 하는 엘프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치고는 다이아나를 일으켜 휙 끌어안았다. 당황해서 품안을 벗어나려는 다이아나를 양 팔로 가슴 안에 가두고 에디우스는 엘프를 노려보았다. 시루스는 느닷없는 일에 처음엔 약간 당황한 듯이 보이더니, 에디우스가 행한 일임을 알고는 곧바로 침착한 태도를 되찾았다. 시루스가 알기에 '인간'은 소유 욕과 집착이 심한 종족이었으므로, 이는 어쩌면 어제 대화의 후유증 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에디!" 나무라는 듯한 소리가 다이아나의 입에서 나왔지만, 에디우스는 아랑곳 없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는 그대로 어깨를 감싸 안고 숙소 쪽으로 향했다. 다이아나는 거의 강제로 끌려 가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담아 시루스에게 아이 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한숨을 쉰 엘프는 수업 종료를 알리기 위해 아이들이 마나 수련을 하는 곳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으로 다이아나를 데려 간 에디우스는 다이아나를 밀듯이 놓고 방문을 닫았다. 그런 에디우스를 다이아나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던 마법으로 주위에 결계부터 친 에디우스가 다이아나 앞에 앉았다. 꽤 오랜 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시루스를 어떻게 생각하지?" "......?" 느닷없는 질문에 약간 당황한 다이아나는 그제서야 에디우스가 '질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루스오빠를 이성으로 생각하진 않아" 다이아나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단호하게 말했다. 다이아나의 생각에 어디까지나 이 일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오해였던 것이다. "그럼 날 어떻게 생각하지?" 나름대로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에디우스의 잇따른 질문에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내가 에디우스를 어떻게 생 각할까?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 대하여 상당한 '책임감'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었다. 에디우스가 오히려 분위기를 바꾸어 친근하게 행동했을 때부터 상당히 그러한 부분에 대하여 덜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 느냐는 에디우스의 질문은 아까부터 여러 가지에 대하여 고민하던 다이아나의 심연의 깊은 부분을 건드렸다. 그래서였 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대답이 유독 더 냉랭해 진 것은. "친구로 생각해. 에디는 어떤 지 모르지만...." "친구라... 후후... 편리하군..." 에디우스의 말 속에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그 뼈아픈 차가움에 다이아나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항상 자신에게만큼은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만큼 돌변한 에디우스의 태도는 다이아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진 않겠어. 지금 내가 네게 느끼는 것은 친구나 동료에 대한 감정이야. 처음부터 말했지만, 감정이란 뜻대 로 된다는 법이 없어.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야" "흠... 그런 건가? 그럼 카이젠은?.. 어젯밤엔 아주 목놓아 부르던데?" "에디! 어제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글쎄..." 몸을 누르던 무게, 거친 숨소리... 그건 꿈이 아니었던가? 다이아나는 애써 덮어 놓았던 여러 가지 부분이 오늘 따라 여러 번 건드려지자,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런 다이아나에게 에디우스는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내리 꽂았다. "혹시 즐기고 있는 건가? 그 카이젠이라는 인간이나, 저 엘프놈의 애타는 사랑을 말이지. 그래봐야 너는 일, 이천년이 보장된 엘프나, 백년이 될까말까한 인간들과 반려의 사이가 될 수는 없어. 그래서 너에게는 나 에디우스가 있는 거야. 너의 상대로 나 말고 다른 존재가 가능할 것 같아?" "그.. 그런..." "웃기지 마. 너는 결국 인간의 껍질만을 뒤집어 쓰고 있을 뿐이야. 네가 인간일 수 있을까? 지난 3년 간 하나도 변하지 않는 네 모습을 봐. 결국 폴리모프를 하고 있는 나나 너의 모습이나 변할 건 없다구!" 충격으로 새하얗게 질린 다이아나를 앞에 두고 에디우스는 결계를 해지했다. "실컷 혼자서 인간인 척 해 보시지!" 조롱하듯이 내던지는 한 마디, 그리고 에디우스는 사라졌다. 다이아나는 멍한 느낌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아닌가? 하긴 그녀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와 같은 신도 아버지와 같은 드래곤도 아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이런 엄청난 기운이...? 다이아나.. 다이아나?" 에디우스가 마나의 유동을 제어하지 않은 덕에 달려왔던 시루스는 결계 때문에 한 동안 묶여 있다가 에디우스의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방 안에는 주인 없이 혼자 의자에 앉아 공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다이아나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에디우스가 떠났어요" 다이아나는 시루스가 가져다 준 차를 들고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거의 패닉상태에 빠진 듯했던 다이아나 때문에 시루스는 한동안 허둥거렸지만, 아무래도 에디우스와 연관된 일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조용히 차를 끓여 다이아나에게 주고는 그녀의 닫힌 입이 열리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군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루스는 전날 에디우스와의 만남을 떠올리고는 그 이유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에디를 힘들게 했나봐요" 다이아나는 상대야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루스는 사랑을 한다는 인간들이 그 대상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는 것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 자신은 다이아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말이다. "다 괜찮아질 거에요.. 괜찮아요..." 그 날, 새로 온 선생님들의 수업은 모두 갑작스럽게 '휴강'의 공지가 되었다. 시루스는 에디우스가 본사의 호출에 의해 급한 일을 수행하러 떠났다는 변명을 했고, 본사로부터 어떤 연락이 있었음은 알고 있었던 다른 직원들은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다이아나의 경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말을 했으나, 사람들은 '연인'과 헤어지게 되어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나름대로 입조심들을 하고 있었다. *********************************************************************************** 주말입니다.. 지난 번 동파의 여파로 부속품이 고장나는 바람에 처음 와주셨던 동네 기사분이 거의 출퇴근 하셨었죠. 드디어, A/S 와 연결이되었는데, 수리비의 아픔이 장난 아닙니다. -.-;; 부속을 세 개나 갈았거든요. 낯선 닉네임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상당히 당황한 알테입니다만, 어차피 소박하게(?) 쓰기 시작한 글이니만큼 '마이페이스'는 끝까지 유지됩니다. -_-;;; 아마도 이런 허접한 글까지 읽으실 정도면, 다들 판타지 매니아 급들이실 듯한데요.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동네 도서대여점에선 거의 '귀빈'급이구요 책 못빌리는 시골에 내려갔을때 찾아낸 몇몇 사이트 중의 하나가 조아라입니다. 어제는 모처럼 SKT 4권을 읽었지요. 글을 쓰기 전에는 하루 몇 권씩 빌려다 읽었는데, 요즘은 고작 만화책 몇 권씩으로 참아야 했습니다. 일단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 정신이 팔렸었으니까요. 일요일 저녁에 울산으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월요일 새벽에 가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첫 비행기 시간이 6시 반인데, 여기서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교통편이 난감하네요. 벌어들이는 돈보다 택시비가 더 드는 것 아닌지 몰라요 -_-;;; 암튼 그런 이유로 내일 밤까지는 여기 있겠군요. 일일히 이름을 불러드리지 못할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엔젤 하우스 에디우스가 떠난 다음 날, 시루스는 멀쩡하게 일어나 평상시대로 아이들의 아침 운동을 지도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평상시보다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시루스는 웬지 안쓰 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시루스는 자신의 감정이야 어찌 되었던 다이아나가 슬퍼 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원래 엘프의 사랑이란 그랬다. 수십 년, 수백 년의 세월을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한 번 정한 상대만 바라보며 기다리는 엘프에겐 그저 그 대상이 눈 앞에, 자신의 손 닿을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의 축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몇 년의 인내심을 한꺼번에 내던지고 다이아나에게 폭언을 퍼부은 에디우스는 자신의 레어로 돌아와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후회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자신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지면서 공허해지던 다이아나의 푸른 눈 동자가 자꾸만 눈에 선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끝까지 잡지 않은 다이아나가 원망스럽기도 했고, 엘프 하나에 흥 분해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자신의 반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이 더욱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다이아나는 아이들에게 마나 수련을 시키고 있었다. 에디우스가 떠났다고 해서 다이아나 의 일상에 별 다른 변화는 없었다. 본사에서는 근처에 접전이 있다면서 다이아나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했지만, 에디 우스가 없다고 해서 아이들을 버려두고 갈 생각이 그녀에겐 추호도 없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이 마나 수련을 하는 아이들의 최대의 적이었다. 간혹 밀려드는 졸음에, 꾸벅거리는 아이들도 보였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을 하려 는 아이들의 모습은 반짝거리는 햇살과 더불어 천사의 뜰이 있다면 이와 같을까 싶을 정도로 평온했다. "여깁니다!!!" 정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가보려던 순간 다이아나는 무장한 병력들과 그들을 이끌고 있는 상당 수의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갑자기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에게 겁을 먹은 아이들이 다이아나의 주위로 몰려 들었다. 검은 말을 타고 검은 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얼굴을 가리던 투구를 벗어 들었다. "카.. 카이젠....?" "무례하다!!!" 주위의 기사들이 검을 들고 나서려 하자, 카이젠은 그런 기사들을 슬쩍 손을 들어 제지시키고는 말에서 뛰어 내렸다. "오랜만이군.. 벌써 3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신전과 척을 지시겠다는 겁니까?" 불안감을 억누르며 다이아나가 가능하면 침착한 태도로 물었다. 아무리 강력한 국력을 소유한 하투아라고 해도 8대 신전을 모두 적으로 돌려서는 승산이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다이아나였기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리가 있나? 신전이라... 내 편이 되어야겠지. 혹시 대륙에 퍼진 말을 알고 있나?" ".....??" "성녀를 얻는 자 대륙을 얻는다더군. 난 내 손에 들어 온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멍청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돌연 아이들 사이에서 조가 뛰쳐나갔다. 11살의 소년은 눈 앞의 남자가 황제라는 것은 몰랐지만 자신들의 선생님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마음 속에는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우리 선생님이에요!!!" "호.. 귀여운 꼬마로군..." 말의 내용과는 달리 카이젠의 얼굴에는 잔혹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불안한 느낌에 다이아나는 앞으로 나서서 조를 감싸려고 했으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둘러진 검은 이미 소년의 머리를 몸과 분리시킨 후였다. "조!!! 안돼!!!" 이성을 놓은 듯한 다이아나는 조의 몸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력도 이미 죽어버린 조에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일을 하려고 나를 떠난 것인가? 보여주지. 네가 한 일이 얼마나 쓸 모 없었는지" 카이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은 곳곳으로 다니면서 보이는 사람들을 살해했다. 다이아나는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어느 순간, 주위의 마나가 정지한 듯 반응하지 않자, 당황했다. "마법교사를 하고 있다더군. 6써클이라고 했나? 설마 제국에 마법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무엇이 재밌는지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카이젠의 뒤에서 로브를 쓴 마법사 하나가 걸어나왔다. 미리 지시를 받은 듯이 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고, 마나를 움직일 수 없었던 다이아나는 결국 그들의 손에 붙잡혔다. 사슬에 묶 이고 마나를 제어하는 팔찌를 강제로 찬 다이아나는 눈 앞에서 카이젠은 보란 듯이 아이들 하나 하나를 죽였다. 아 이들은 배운 것들을 총동원해서 대항했으나, 기껏해야 1년도 수련을 못한 그들이 숙련된 기사들에게 하는 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아이들이 하나 하나 죽어갈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잡혀 온 것은 시루스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지. 내 품에서 달아나 저 엘프에게 안겨서 행복했나?" "시루스오빠" 절망이 가득한 다이아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시루스는 살짝 웃었다. "다이아나. 슬퍼하지 말아요. 각자의 운명은 타고난 것. 당신이 생명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늘상 다이아나의 구박으로 억지로 반말을 하던 시루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분노한 황제에 의해 잔인하게 여러 조각으로 베어짐으로 엘프로써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카이젠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이 광폭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자, 이제 또 무엇이 너를 잡는가? 네가 애정을 가지는 것들은 내가 다 없애 주지. 네가 사랑하는 것들도 내가 다 없애 주겠다!!! " 다이아나는 이 모든 일이 꿈이기를 절실히 바랬다. 피에 젖은 카이젠이 나타났던 그 때 처럼.. 악몽이라고 해도 충분히 달갑게 받아들이리라. 이것이 꿈이라면...... 카이젠을 살리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공격마법을 썼다면, 조 금만 조심했더라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해 준 것 뿐인데, 되살아난 그가 수백을 죽인다. 그녀를 도와주면서 늘 마음의 지주가 되었던 시루스도, 그녀에게 미래의 청혼을 약속받던 어린 소년도, 저마다 꿈을 이야기 하던 아이 들도 모두 죽었다. 그녀가 살려 놓은 카이젠에 의해...... "폐하. 성녀의 상태가!!!" 고개를 숙인 '성녀'의 아래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화급히 다가간 카이젠은 '성녀'라 불리는 그녀의 눈에서 붉게 고여 떨어지는 피눈물을 보았다. 푸른 눈과 대조되는 붉은 물이 그녀의 눈에서 쉴 새없이 흘러나와 흰 신관복을 물들이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운이 장내를 휩쓸었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고개를 든 하투아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웅장한 은빛 몸체를 볼 수 있었다. "드.. 드래곤???" 잔인하게 엔젤하우스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던 그들이 주위를 덮는 맹렬한 공포의 기운에 온 몸의 기운이 빠 져나가면서 힘없이 주저 앉았다. 상당 수의 병사들은 아예 고개를 바닥으로 파묻었고, 카이젠을 비롯한 몇 명만 이 어느 정도 기운에 대항하여 간신히 서 있었다.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너희가 못 입히고 못 먹이던 이들을 돌보았을 뿐인 것을. 어리석은 너희들의 욕 심이 저 아이를 상처 입혔구나!] 드래곤의 용언의 영향인지 다이아나는 주위를 억누르던 속박에서 풀려났으나, 그녀의 눈에서는 계속 피눈물이 흐 르고 있었다. 드래곤은 대륙에 성녀라고 알려진 그녀를 마나의 기운으로 휘감아 공중에 솟아오르게 했다. 그녀의 몸에서 그녀를 속박하던 사슬과 팔찌가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비산했다. 카이젠이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어느 틈엔지 그녀는 드래곤의 날개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만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을 뿐. [너 카이젠 드 하티아스 인간의 황제여! 네가 이 아이에게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너를 죽이고 살리는 것 또 한 이 아이의 뜻이니 물러가라. 너의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만약 내 경고를 무시한다면, 내가 네가 쌓아 온 모든 것들을 하루 아침에 모두 없애 주겠다! ] 드래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카이젠은 속절없이 그를 향하여 검을 휘두르다가 거의 제정신이 아닌 궁정마법사를 다그치고 있었다. 라덴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리아가 사라진 그 순간부터 카이젠의 이성은 파괴의 본능에 필요한 면만을 남기고 모두 사라진 것처 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아라는 이름을 피가 터져라 외치면서 도달하지 못할 높이의 드래곤을 향하여 강 한 살기를 내뿜으며, 헛된 몸부림을 계속했다. [어리석은 인간!] 드래곤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떨어지면서 카이젠이 쓰러졌다. [오늘 본 것들에 대하여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라. 너희 땅으로 가서 심판을 기다려라] 최후통첩과도 같은 말이 울려퍼지고, 드래곤의 모습이 사라졌다. 패잔병같이 풀이 죽은 병사들과 이들을 이끄는 기사 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엔젤하우스에서 물러났다. 연일 접전을 벌여 시우스의 제국의 3분의 1 정도를 손에 넣은 하투 아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들의 제국으로 철수했다. 라덴의 상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륙을 떨게 하던 하투아 제 국의 황제가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대륙 전체에 공공연하게 퍼졌다. 유스테우스는 급작스럽게 아테나이와 아프로테이아의 전언을 받았다. 둘 모두 다이아나가 있는 곳에 신관을 파견하고 있던 터라, 자신들의 신관의 죽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황급하게 그곳으로 이동한 유스테우스는 마력을 동결당하고 사 슬에 묶인 채 피눈물을 쏟아내는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디우스는 뒤늦게 자신이 없는 동안 다이아나에게 닥친 일들을 알게 되었다. 이미 유스테우스가 나섰기에 얼굴을 보일 면목이 없었던 그는 유스테우스가 데려온 피투성이의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있는 핏자국의 대부분이 그녀가 흘린 눈물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침통해 했다. 다이아나가 당한 참극에 기겁을 한 이는 또 있었다. 신들은 아테나이와 아프로테이아의 호출에 모여들어 문제의 순간을 보았고, 분노했다. 만일 세레스여신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 날 하투아제국은 사라졌을 것이다. 이 날, 페르세포네의 의견이 통과되었다. ********************************************************************************* 네, 시루스가 그동안 속을 썩인 것은 얘의 역할이 중도하차였기 때문입니다. 초반에 시루스의 인기가 없어서 오히려 좀 시루스에게 미안했고, 죽여도 별 탈 없겠다 싶었는데.. 왜 죽을 때 되어서 인기 상승인지.... 죽여놓고는 원망이 무섭다는...... 원래 남녀가 만나면 연애감정이 싹트기 마련이고, 이쁜 여자 옆에는 남자들이 꼬이죠 그 여자가 맘씨도 착하다면? 금상 첨화죠. 이렇게 말하는 저는 아무래도 '설상가상'인가 봅니다. -.-;;; 아무튼 시루스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심심한 애도를.... 콜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꿈 "아버님" "유스테우스님이라고 불러라. 내게 왜 네게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유스테우스님" 드래곤의 서열체계는 힘의 서열이며, 곧 나이의 서열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유스테우스가 이 젊은 드래곤을 대하는 모습은 아주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유스테우스의 레어 앞에 찾아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서 있는 이 금발의 청년이 에디우스라는 것 정도일까? "자네 좀 너무하는 것 아닌가?" 보다 못한 하비어스가 나섰다. 다이아나나 유스테우스를 볼 면목이 없다면서 실의에 빠져 있는 에디우스에게 유스테우스의 레어에 가보자고 설득한 것은 다름아닌 하비어스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유스테우스가 자신을 봐서라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건가?" "다이아나가 죽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에디우스는 할 만큼 했단 말일세!" "그렇겠지. 내가 에디우스보고 잘못했다고 했나?" "지.. 지금 자네의 태도는...." "내 태도가 뭐가 어떻다는 거지? 에디우스는 자네 말 대로 할 만큼 했어. 이제 되었네. 아, 에디우스 그 동안 우리 다이아나 옆에 있어 주어서 고맙구나. 난 이제 들어가야겠네" "유스테우스!!!" "그만 하십시오. 아버지"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에디우스에게 유스테우스가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스테우스는 시종일관 칼날같은 차가움으로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고 마치 처음 보는 이를 대하듯 했다. 하비우스는 이를 보다 못해 나선 것이었으나, 수 천 년을 아웅다웅했던 친우는 그에게조차 냉정했다. 성질대로라면 당장 힘으로라도 유스테우스를 잡을 기세의 하비우스를 말린 것은 에디우스였다. "에디우스 미안하구나. 공연히 내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에디우스는 유스테우스의 태도로 미루어 다이아나에게 심각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저런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른 드래곤들 사이에서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용언의 맹세'를 거의 사기에 가깝게 하도록 속고 속임을 당하면서도 그저 투닥거리기만 했지, 심각한 다툼이 없었던 그들이다. 한데, 작금의 유스테우스의 태도는 하비우스마저도 냉정하게 밀어내고 있음에 다름 아니었다. 두 부자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되씹으면서 발길을 돌렸다. 유스테우스라고 그들에게 그렇게 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워낙 속이 상했기에, 그나마 믿고 맡겼던 에디우스에 대하여 심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다이아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기에 가까운 일까지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에디우스를 믿고 있었던 유스테우스이다. 하필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매정하게 딸을 버리고 떠나 있었던 그를 용서하기에는 다이아나의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이아나를 배려하여 카이젠이라는 인간을 죽이지도 않았고 그 제국을 멸하지도 않았다. 성질대로라면 벌써 브레스를 날려도 몇 번은 날렸을 것이다. 다이아나는 유스테우스에게 있어서는 다른 드래곤의 해츨링과 마찬가지였고, 또 그렇게 드래곤들 사이에 공표했던 터이니 뒷 감당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딸은 더 아파할 것이다. '다이아나......' 인간으로 폴리모프 했을 때, 사용하는 화려한 침상 위에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다이아나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몸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처음 딸을 데려왔을 때, 정신을 놓은 듯이 보이는데도 계속해서 피눈물을 흘리는 통에 무엇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댔었다. 딸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은 생기와 마나 등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들의 기운을 한꺼번에 담고 있어 심각한 위험을 예감케했다. 결국, 강제로 잠을 재워 한 숨을 돌리는 듯 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악몽을 꾸는지 자는 상태에서도 피눈물을 흘려대는 것이다. 결국 꿈의 정령을 불러서 그녀의 정신세계를 강제로 조절한 후에야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유스테우스로서는 어떻게 해야 딸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암흑과 파괴의 여신' 페르세포네님의 명을 받들어 꿈의 유희를 주관하는 마족 나이트메어가 고룡 유스테우스님을 뵙습니다" 안 그래도 신계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하던 차였으나, 아테나이나 포이브론이 아닌 페르세포네의 사절로 마족이 올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유스테우스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고, 다른 신들의 동의를 얻었다는 전언에 따라 이들에게 딸의 운명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다희야~~~!" 으으 또 시작이다. 오늘은 도대체 뭘까? 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생존을 위해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 입꼬리가 올라간 상태였다. 에구구 지혜야, 아무리 네가 가볍고 내가 튼튼하지만 그렇게 매달려서는... "쿵" 이렇게 된단 말이다. 라는 결론은 지혜 밑에 깔려서 내려졌다. 다다다다 달려와서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폴짝 뛰어 다희의 등에 덮썩 매달린 지혜는 아직도 다희를 딸고 앉아서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 몸이 약해졌나봐. 나 정도는 척 엎었어야지" '네가 일부러 무게를 늘이지 않았다면 그렇겠지. 매달리면서 무술을 쓰냐?'라고 생각하는 다희였지만, 역시 이 말도 겉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다희를 깔고 앉아서도 지혜는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쿠션이 안좋은 걸 보면 좀 더 먹여야 하겠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별 필요없는 말들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저... 지혜야" "응? 왜?" "나.. 좀... 힘든데....." "어머, 그랬니? 난 별 말 없기에 네가 편하게 누워 있는 줄 알았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오해를 한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지혜는 얼른 일어나서는 다희를 일으켜 세우고 옷까지 탁탁 털어주는 자상함을 보인다. "물론 거절할 리는 없겠지만...." 역시, 지혜의 느닷없는 공격에는 항상 무언가가 숨어있게 마련이다. 오늘의 공격은 부탁을 거절할 경우에 대한 경고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같이 가자~!" "에? . 저.. 오늘 아르바이트도 가야 하고......" "아, 걱정 말어. 오늘 도장에 네 수업은 없으니까" "무슨???" "우리 도장하고 니네 도장하고 친선경기를 열거든. '보조사범'은 안 와도 된다고 강사범님이 전해 달랬어. 그럼 약속한 거다!" 역시나, 하고싶은 말만 해 놓고는 냉큼 사라져버리는 지혜는 위대했다. 무의식중에 입을 헤 벌리고 지혜의 뒷모습을 보던 다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지난 번 지혜네 집에 갔던 때를 생각하고는 "설마.. 이번에는....." - 그만 두시죠 갑자기 공기를 진동하는 듯한 음성이 들리더니, 영상이 일그러진다. 교실도 아이들도 흐릿해지면서 사라지고 잘라낸 사이로 꾸물거리며 나오던 어둠이 사방을 에워쌌다. - 과거 속에서 행복하다고 자위해봐야 과거는 과거, 꿈은 꿈일 뿐입니다. "꿈!" 그래. 맞아! 이건 꿈이었지. 나는 고아도 아니고 이제 지혜와 같은 세계에서는 살지 않는다. 내 이름은 다이아나, 여신과 드래곤의 아이. 아련하게 붉은 영상이 스며든다. 사방에 튀기던 피,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나올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누구신지요?" 꿈이라서 그럴까? 되풀이되는 학살의 현장이 마치 자신과는 상관 없는 듯이 여겨졌다. 의외로 침착하게 어둠 속을 주시하면서 다이아나는 물었다. - 페르세포네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마족 나이트메어 인사드립니다. 마족이라... 문득 마족에 대한 자랑을 하던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신전에서 본 영상. 강하고 힘을 숭배한다는 마족은 의외로 고위급일수록 아름다운 형상을 소유한다고 했다. 그들을 자신의 아이들이라면서 사랑스럽게 이야기하던 이모. 그러한 다이아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목소리만 울리던 어두운 공간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피부의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인간과 별 다르지 않은 형태의 마족. 다른 것이라면 천사처럼 등 뒤에 날개가 있다는 것 정도일까? 보라색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색감의 모든 것을 표현하듯이 짙은 보라색의 눈과 머리카락 날개, 그리고 옅은 보라색의 의상이 묘하게 색정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 다이아나님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성품을 물려받으셨습니다. 세레스여신님의 심성만 크게 작용하고 있어서, 스스로의 존재와 불균형을 초래했다고 페르세포네님은 판단하고 계십니다. 다이아나가 어떤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도 없이 침묵을 지키자 마족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 하여, 페르세포네님은 다이아나님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한 가지를 가르쳐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게 뭐지? 내게 무엇이 있어야 인간으로서 부족하지 않을 걸까?' 다이아나는 자신에 대하여 가졌던 의문점들을 떠올리면서 눈 앞의 마족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 그건 바로 '이기심'입니다. 인간은 다른 것보다 자신을 그리고 타인보다는 가족을 모르는 이 보다는 아는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다이아나임께는 그런 특유의 이기심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기심이 없다? 아닌데.. 나도 충분히 이기적이야. 전의 세계에서도 내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만 챙겼지. 다른 부분에는 관심도 없었는걸?' - 아주 없다라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요. 분명히 다이아나님의 마음에도 이기심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세레스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자애'의 속성에 억눌려 발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 미처 인간의 이기심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기 전에 속성이 먼저 드러나 정신적인 타격을 받으신 겁니다. '그런 건가....?' - 그래서 다이아나님께는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기심'의 정당성을 증명해 줄 경험이...... 조금씩 주위를 덮었던 어둠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 곳은 다이아나의 꿈속, 거부하려는 마음이 어느 정도 사라진 것이다. - 함께 가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안도감에 휩싸인 마족은 서둘러 다음의 의무를 수행했다. ************************************************************************** 제 설정은 이러합니다. 신의 신성을 갖기 위한 기본적인 것은 둘 중의 하나죠 인간부터 차근차근 진화한 영의 경우는 인간성에서 벗어난 '도'를 획득하여 신급에 이르는 경우이고, 최고신들의 경우는 이미 '완전'을 추구한 형태의 자아를 초기부터 획득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경우는 인간의 속성과 그걸 초월하는 신의 속성이 혼합되어 있는데 신적인 속성이 주를 이루다 보니 인간적인 면이 덜 부각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유조아는 마공을 쌓았군요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이거 올라는 갈까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꿈 '여기는?'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한 여인의 태중, 다이아나는 태아로서의 체험을 하고 있었다. 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다이아나는 가난하지만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8살의 미루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 수 없었다. 부모님은 미루의 손을 붙잡고 피난길에 올랐다. 어린 미루는 처음으로 배고픔의 고통을 알았다. 가끔 신전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주고 돌아가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서 주먹질을 했다. 미루 또한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을 보면 눈에 불을 켜도 덤벼들었다. 힘 없는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힘에 대하여 갈구하던 미루는 결국 용병이 되었다. 18살의 미루가 처음 참여한 임무는 한 마을을 몬스터로부터 지키는 일이었다. 쳐들어 온 오크들의 숫자는 많았고, 동료들이 주변에서 쓰러져 갔다.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그나마 안전하게 배치되어 있던 미루는 주위 사람들이 차례차례 힘 없이 쓰러져 가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미루가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을때, 오크 하나가 도끼로 미루를 내려쳤다. 그 곳에서 한 짧은 생애는 끝났다. 다시 태어난 곳은 어느 나라의 왕성이었다. 국왕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난 한 아기는 테이미아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무 부족할 것 없이 자란 그녀에게는 세 명의 친한 친구가 있었다. 공작의 딸과 백작의 아들, 그리고 그녀를 어려서부터 따라 다닌 시종이었다. 그녀가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주위 사람들은 그녀와 결혼할 사람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가 백작의 아들과 약혼을 하자, 수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었고, 성대한 파티장에서 많은 선물을 받아들고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선 그녀는 행복했다. 그날 밤, 적국과 손을 잡은 후작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의 후면에는 그녀의 친한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그녀의 시종이 있었다. 반란을 위해 정보를 캐내오는 대신 이후에 상으로 그녀를 받기로 한 시종은 결국 배신을 당해 뒷골목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다이아나는 바로 그 시종으로 한 생애를 함께 했다. 다이아나는 이외에도 평생을 주인에게 구박받다가 결국 그 주인을 살해하고 자신도 잡혀서 죽임을 당하는 노예가 되기도 하고, 권력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여 결국 권력자로서 성공한 귀족이 되기도 했다. 하나 하나의 꿈 속의 삶이 지나갔다. "저게 정말 효과가 있는거야? 혹시 말이지 잘못해서 저 사랑스런 애가 페르세포네처럼 폭력적이고 무서운 여자가 되는 건 아니겠지?" 역시 기대를 깨지 않고 매를 버는 이는 포세이스다. "혹시 알아? 멋진 여전사가 되어서 대륙의 영웅이 될지" 괜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누구인지 그냥 짐작만 하는 것이 낫다. "일단,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여지네요. 일단 타고난 성품은 남겠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자애'의 영향력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테나이의 판단이었다. "두고 보라구.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 "고마워! 페르세포네" "뭘요 언니" 다이아나의 꿈 속의 체험들은 빠른 속도로 영상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 조금씩의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신들은 다이아나가 어느 정도 회복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 어떠셨는지요? '알 것 같기도 해요' - 이제 깨어나시지요 '얼마나......' - 꿈의 시간은 순간이자 영원, 실제로는 단지 삼 일의 시간이 흘러갔을 뿐입니다 '잠깐만.. 나이트메어라고 했나요?' - 네. 다이아나님 '고마워요. 그리고, 이모님께도 고맙다고 전해주시겠어요?' -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이아나, 정신이 드니?" "아, 아빠...." "다행이로구나" 조용히 아빠의 품에 안긴 다이아나는 이번에야말로 마음껏 울었다. 깨어난 다이아나가 울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당황하던 유스테우스도 다이아나가 흘리는 눈물이 정상적임을 깨닫고 말없이 딸을 안고 달래 주었다. "그래서, 전쟁은 끝난 건가요?" "그래.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카이젠이라는 인간은 능력만 막아 놓았다. 아마 다시는 마나의 힘을 쓰지 못할게야" "그렇군요" 의외로 냉정한 반응이었다. 유스테우스가 약간 의아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속을 짐작한 듯이 다이아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그에게 두 번째의 생을 주었고,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데 사용했어요. 그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가 선택한 생의 업보라고 봐야겠죠." "......" "아이들은 다시 태어났을까요? 시루스는 아마 이번에는 더 좋은 생을 살 수 있겠죠?" "아마도..... 그 아이들이야 이번 생에선 크게 죄 지은 일도 없을 뿐더러 시루스라는 엘프는 오히려 엘프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을 한 셈이니까......" "그렇군요. 아빠, 제가 변하더라도 아빠는 절 사랑하실꺼죠?" "그럼.. 세상의 존재가 다 널 미워하더라도 나와 네 엄마만큼은 너를 사랑할 꺼란다" "저 때문에 이 생에서 엄마랑 다시 못 만나신다고 해도요?" 다이아나가 묻어 두었던 가장 불안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너는 모르는 줄 알았는데?" "주신께서... 알려 주셨어요" "그랬겠구나.. 다이아나, 나와 네 엄마의 선택으로 네가 태어났단다. 너는 그저 다른 인간과 같은 영혼의 하나로서 네 삶에 충실하면 그 뿐이야. 선택한 우리가 결과도 책임지는 거지. 알고 있었더라면, 괜한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네가 알지 못하는 줄 알고 너에게 부담을 주었구나! 미안하다. " "아뇨. 제가 죄송해요 아빠" 어찌보면 유스테우스의 소원 한 가지는 이 때 이루어졌다. 깨어난 딸은 이전과는 달리 아빠와 함께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말했고, 고대하던 일이었는지라 이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복한 며칠 간을 보냈다. 다이아나는 지나치게 감정을 억누르려 들지 않았고, 가끔 닫혀진 세계의 사람들이나 카이젠의 명에 의해 살해된 이들을 떠올리면 슬프게 울었다. 하지만 오히려 딸이 강해졌음을 유스테우스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에디우스가 여러 번 찾아왔었단다" "......" "네 걱정을 많이 하더라" "네"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니?" "...... 일 주일만 우리끼리 있어요. 그 다음에 만나볼께요. 그렇게 전해주실래요?" "그러마" 에디우스는 유스테우스의 냉정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매일 한 번씩 그의 레어에 찾아갔다. 어느 날인가부터, 유스테우스의 얼굴이 상당히 밝아진 것을 보고 다이아나의 상태가 좋아졌음을 짐작하며 함께 안도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찾아가던 어느 날 일 주일 뒤에 찾아오라는 무뚝뚝한 말 한마디에 에디우스는 기뻐하면서 다이아나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궁리를 거듭했다. "잘 지냈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에디우스였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돌아오는 대답은 상당히 냉정했다. "미안해...." "미안해 할 것 없어. 에디 너는 자신에게 충실했던 거야. 오히려 내가.. 스스로를 잘 몰랐고, 잘못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용서해 주는 거야?" "내가 너를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어차피 나는 너에게 어떤 보답도 할 수 없다고 했고, 네가 나의 옆에 있었던 것도 떠났던 것도 모두 너의 의지였어. 네가 없을 때 내게 나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해서, 너를 원망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야. 다 자기변명이지." "다이아나...!" "그렇게 보지 말어. 네가 전에 말했지? 내가 인간이냐구. 이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때는 아마도 좀 어중간했겠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 난 인간이야. 단지 남들보다 좀 특이한 환경 탓에 여러 가지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지만." "......" "드래곤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아. 너는 나를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의 아이로 보고 싶겠지. 아니면 여신의 아이이거나. 하지만, 부모님이 어떤 존재던 간에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실해." "미안해. 맞아 너는 인간이야. 그 때는 그냥 화가 나서......" "아니, 네 말도 맞아. 인간 세상에서 살기엔 나는 수명도 길고 능력도 지나치게 많을지도 몰라. 만일 내 본모습을 보인다면,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테니까" 에디우스가 다이아나에게 던졌던 말들이 다이아나의 입에서 다시 하나 하나 풀어져 나오고 있었다. 겉모습이 바뀐 것이 아닌데도 웬지 성숙한 느낌을 주는 다이아나의 모습에서는 이전의 따뜻함보다는 서늘함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네 길을 가도록 해 에디. 나는 인간으로서 살꺼야. 너는 네 삶을 살도록 해" "네 삶이 곧 내 삶이야. 네가 없는 삶을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한 줄 아니?" "아니, 드래곤의 삶은 길어. 네가 비록 1700년을 나를 바라보았다지만, 결국 허상을 본 것 뿐이야. 아직도 너의 삶은 많이 남아있어. 반려를 찾아 에디, 너와 같은 드래곤들 중에서" "다이아나" "내 말은 여기까지야. 내 친구가 되길 거절한 것은 너 자신이란 것을 잊지 마" 예전의 다이아나라면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차가운 말이었다. 제 할 말만 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에디우스의 마음은 상실감과 배신감, 허탈함이 뒤섞여 회색으로 감싸였다. 한참을 넋을 놓은 듯이 서 있던 에디우스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다이아나 괜찮겠니?" 다이아나의 부탁에 의해 입구에서 사라지는 모습까지를 영상으로 보고 있던 유스테우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빠가 그러셨지요. 드래곤은 이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 강한 힘과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고" "그렇기야 하다만......" "에디도 이겨낼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내 옆에 계속 있게 한다는 건 에디에게 잔인한 일이에요. 제가 약간이라도 희망의 여지를 남겨 놓는 이상 떠나려고 하지 않겠지요. 이미 많이 늦긴 했어도, 이제 에디도 스스로의 삶을 찾아야 해요" "......" 사라지는 에디의 모습을 함께 들여다보는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아까 에디에게 지어보였던 차가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따뜻함만이 가득했다. 유스테우스는 자신의 독단으로 인해 에디우스에게 못 할 일을 한데다가 결국 자신의 딸이 나서 '악역'을 자처해서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을 보고 죄책감이 들었다. "아빠.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에디가 옆에 있어 주어서 참 든든하고 좋았어요" 역시 유스테우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다이아나의 말이었다. ***************************************************************************** 미리 써 두고 리플을 보면서, 우왕자왕한 마음이 드느니 아예 걍 올려버리기로 작정한 알테입니다. 어차피, 다들 아시다시피 삼일간의 휴지기가 있을 예정이므로 다 올려버릴 작정입니다. 얼마나 될까요? -.-;;; 얼마 안됩니다. -_-;;; 그리고, 이 글도 올라갈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에러가 남발중이라서리... 에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워프 마을 "드워프를 본 적 있다고 했지?" "예. 그렇게 오래는 아니지만, 헤파이토스님의 신관분들과 함께 만난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럼 사적인 대화를 해 본 것은 아니구나!" "예"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지만, 엔젤하우스를 위해 일했던 생각이 나서 다이아나는 약간 우울해졌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게 된 다이아나를 유스테우스는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유스테우스는 다이아나를 위한 페르세포네의 계획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게 된 이후부터 다이아나에게 도움을 줄 만한 '경험'을 떠올리다가 이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내가 아는 드워프들의 마을이 있단다. 가서 만나볼래?" "아, 그래도 될까요?" 다이아나가 배운 바로는 드워프라는 종족은 어디까지나 드래곤에게 약간의 착취를 당하는 관계였다. 어차피 광물을 채굴하고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그들은 드래곤들이 주로 거주하는 산맥에 거취를 정해야 했으며,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드워프 마을은 모두 어느 정도 드래곤들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었다. 이러한 부분이 드워프와 드래곤의 인연을 결정했다면, 음식과 술을 좋아하는 그들의 종족적인 특성은 인간들과 상당한 세월동안 지속적인 거래를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무력을 사용하는 기사나 용병 등의 '전사'들은 헤파이토스나 포세이스의 신봉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창조와 무력의 신' 헤파이토스의 총애를 받는 이 키 작은 일족은 인간 종족들의 전횡의 대상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영향을 받아 전사의 직업을 가지는 이들이 드워프 종족에 대하여 상당한 존중을 보임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재미있을꺼야. 지금부터 갈 마을의 드워프들은 좀 특이하거든. 후훗~!" 자신있게 웃음짓는 유스테우스의 제안에 다이아나는 별다른 반대할 까닭이 없었고, 둘은 드워프 마을 근처로 이동했다. 다이아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드워프의 마을에 갈 때는 일반적으로 본체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마을 중간으로 이동해서 일부러 스스로 드래곤임을 드러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유스테우스는 드워프들을 배려하는 듯이 외곽으로 이동해서 안으로 걸어들어 간 것인데, 이 부분까지는 다이아나가 알지 못했다. 마을 입구인 듯 보이는 곳에서 유스테우스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마치 누가 왔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마을의 안쪽으로부터 한 명의 드워프가 걸어나왔다. "무슨 일이오?" 상대방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틱틱거리는 말투였는데도 유스테우스는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자신이 방문한 상대방의 이름을 댔다. "제프님에게 서쪽 산맥의 친구가 왔다고 전해주게" "제프님을 찾아 오셨습니까?" 방문객이 제프의 친구임을 밝히자, 갑자기 드워프의 말투가 정중해졌다. "그렇네. 오래된 친구지" "실례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테니 따라 오십시오" 라고 말하는 상당히 드워프답지 않은 정중함을 발휘하는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물론 다이아나는 시종일관 아버지가 하는 대로 얌전히 기다리다가 뒤를 따랐다. 다이아나는 처음 보는 드워프 마을의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별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마을 안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하투아의 수도나 왕성 못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색색의 돌을 하나 하나 맞춘 듯한 - 상당히 고급의 보도블록을 생각하면 되지만, 그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지닌 돌이다 - 모양으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길 가로 보이는 건물들은 상당히 제각각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똑같은 모양의 집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건물은 낮은 지붕에 약간 넓게 퍼져 있었고, 어떤 건물은 고층으로 쌓아올린 탑처럼 보였다. 가장 특이한 것은 문하나가 달랑 세워져 있는 공공장소의 화장실 만한 크기의 건물이었는데 - 물론 상당히 예쁘게 지어 놓았지만 -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건물의 주인은 지하가 좋다면서 땅을 파서 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이아나가 사방을 둘러보면서 감탄하는 표정을 짓자 안내하던 드워프는 상당히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하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을 지었다. 유스테우스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준비했다는 듯한 빠른 말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원래 저희들은 독립을 기념하여 집을 짓는데, 집 자체가 독립을 기념하는 작품이 됩니다. 따라서, 이 집들 중에는 100년이 넘게 공사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서 설계 내용은 장로님들에게 검사를 받기 때문에 조화로운 모양이 된 것이죠. 이 길들은 마을이 세워질 때, 저희 드워프가 모두 모여서 만든 것이구요. 새로운 집에는 자신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도 설계에 포함이 됩니다" 형형색색의 집들이 전혀 이질감을 느껴지지 않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드워프에게 집이란 작업장이고, 생활의 공간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같은 드워프에게 내보이는 자신의 작품이자 명함일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드워프들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상당한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 왔습니다. 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착한 집은 특이하게도 인간들의 저택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러한 집을 장식하고 있는 돌이었는데, 다른 집들도 상당히 다양한 색상의 돌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보석이지. 이 집 주인의 취미가 그거 모으는 거거든" 그 때, 별안간 집 안쪽에서 엄청난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하지 말랬지!!!!!!!!!!!!!!!!!!!! 안 그래도 작업이 안 되어서 속이 끓는단 말이다!!!! 시끄러!!! 듣기 싫다니까!!!!!!!!!!!!! "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다시 한 번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작 말하지!!!!!!! 왜 꾸물거린거야!!!!!!!!!!!!!!!!!" 쿠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짧은 다리로 저렇게 뛸 수 있을까 싶게 튀어나온 드워프가 있었다. 사실 다이아나는 아직 드워프들의 얼굴을 잘 구분하기 힘들었다. 거의 비슷한 몸매에 수염까을 길러놓아서 안그래도 구분하기 힘든 얼굴이 가려져서 더욱 어려웠던 탓이다. 어찌 되었던 원래 드워프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나온 드워프만 그런 것인지 여전히 큰 목청으로 그 드워프는 유스테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게 얼마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제피어스님" "이야기는 전해 듣고 있었네!!!!!! 여기까지 찾아와 줄 줄은 몰랐지만!!!!!! 정말 반갑네!!!!!!!!" "이 쪽은 제 딸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다이아나입니다" "엥? 니가 그 유명한 딸이구나!!!!!!!!!!! 반갑다!!!!!!!!!!! 와, 이 색은!!!!!!!! 이거야!!!!!!!! 영감이 떠오를 것 같군!!!!!!!!!!!!" "저.. 제피어스님.. 죄송하지만, 조금만 소리를 낮추심이......" 그랬다. 이 드워프는 처음부터 여태까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유스테우스와 다이아나는 상당히 청각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제피어스는 그제서야 여기가 작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 작업의 특성상 소음이 많아서 소리지를 수 밖에 없다 -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엣? 드래곤이시라구요?" 제피어스는 제프라는 이름으로 유희중인 골드 드래곤이었다. 사실 제프의 유희는 유희이면서도 아니기도 했는데, 오래 살아도 2천 년을 넘지 못하는 드워프로 폴리모프해서 살아온 지 현재 3천 년이 넘었다고 - 정확히는 본인도 잘 모른단다 - 했다. 보통 드래곤들의 수명을 1만 년 정도로 보는데, 제프는 5천 살 정도에 드워프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드워프들이 드래곤들도 자신들같은 예술품은 못 만들꺼라고 늘 자신하는 바람에 오기가 생겨서 작정을 하고 드워프로 유희를 한 것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창작의욕에 불타서 여태까지 이 마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고룡이 지키고 있는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다른 드래곤들의 간섭이 없을 뿐이지, 제피어스는 드워프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경우 자신들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드래곤들의 약탈(?)을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피어스야 하는 일이 없었지만, 다른 드래곤들은 제피어스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상당히 오랜 기간 어떤 드래곤도 이 마을을 방문하지 않았고, 지금 마을의 드워프들은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야 몰랐지만, 이 곳에서 살기 시작한 지 천 년 정도가 지나자 드워프들도 대충 제피어스의 정체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저 정중한 원로 대접을 할 뿐,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드래곤의 존재로써 대우하지도 않았다. 이는 제피어스 자신이 계속 드워프일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워프들이 괜히 헤파이토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산맥에 자리잡은 그들 또한 많은 몬스터들과 늘상 대항하며 마을을 지켜야 했지만, 인간 종족의 웬만한 전사들보다 도끼를 능숙하게 다루는 그들은 자력으로 마을을 지켜내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작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용기있고 의리를 중시하는 종족이다 보니 포세이스도 이들 종족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호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이아나 한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생활해 보는 것은 어떻겠니?" 느닷없는 유스테우스의 제안이었다. 제피어스도 드래곤들 사이의 이야기로 딸이라면 죽고 못산다는 유스테우스가 다짜고짜 딸을 이 마을에 맡기려 하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마을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다이아나는 이미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감정에 일단 충실하게 사는 것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심한 바 있었다. "저는 좋은데, 제피우스님이......" "응? 나도 좋아. 이 애 정도면 괜찮은 모델이 될 듯도 하고."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르지만,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응. 어서 가봐" "아빠!" "한 석 달 쯤 여기 머무르면서 생활해 보려무나. 아마 좋은 경험이 될꺼야"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유스테우스는 역시 걸어서 마을을 나갔다. 물론 마을 밖에서야 워프로 이동했을 테지만...... 유스테우스가 사라지자 마자 제피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이아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도 없이 그녀를 휙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그녀를 앉혀 놓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제피어스의 손에는 날이 잘 세워진 단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눈에서 광채를 번쩍이면서 단도를 들고 가까이 다가서는 제피어스를 보고 다이아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했지만, 설마 자신을 해하진 않겠지 하는 생각에 그냥 보고 있었다. 이는 제피어스로부터 전혀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이아나에게 가까이 다가선 제피어스는 갑자기 뺨을 붉히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그 머리카락, 조금만 잘라 주면 안될까?" 사실 제피어스는 처음부터 다이아나의 머리카락의 색상을 보고 크게 탐이 나서, 잘라 달라고 하고 싶었다. 다이아나의 머리카락이 워낙 빨리 자란다는 것을 몰랐던 제피어스는 유스테우스가 보면 못하게 할까봐 억지로 참고 또 참다가 그가 떠나자마자 말을 꺼낸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주인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강아지를 본 적이 있다면 그 모습이 아마 지금의 제피어스와 겹쳐 보였을 것이 틀림 없다. "많이 잘라도 상관 없어요. 이리 줘 보세요" 그제서야 제피어스의 마음을 안 다이아나는 별로 아까울 것 없는 머리카락을 제피어스에게 받은 단도로 어깨 아래에서 끊어 긴 머리채를 넘겨주었다. 탐을 내던 머리카락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받자 다이아나의 손에 잡혀 있던 머리단을 소중하게 받아 쥔 제피어스는 눈깜짝할 사이 짧은 다리를 움직여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나온 제피어스는 그제서야 '정상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머리채를 건네 받고 무척 기분이 좋았던 제피어스는 자신을 제프아저씨라고 불러 달라고 했고, 묵을 방을 준비해 주었다. 그렇게 다이아나의 드워프 마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 에고 힘드네요. 다음 편부터 조금은 달라진 다이아나의 모습이 공개됩니다. 사실 예리한 분들의 지적이 있었지만, 다희로서의 다이아나나 이쪽으로 옮겨와서의 다이아나는 지나치게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다분히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많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이 편한대로 한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거나 '오버'하는 생활을 했던 것이죠. 다희로서의 다이아나가 장로님의 걱정을 염려해서 '평범'을 목표로 했다면 이쪽에서의 다이아나는 부모님의 걱정을 염려한 나머지 '지혜'를 닮으려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지금의 다이아나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속성적인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는 중이랍니다. 물론, 본질이 확 변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밤은 여기까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 그럼. 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워프 마을 제프는 마을의 드워프들에게 다이아나를 소개시켰다. 드워프들은 처음엔 다이아나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인 줄 알았는지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더니 확실하게 '인간'이라고 강조해서 소개를 하자, 그들 특유의 태도로 다이아나를 맞았다. 그날 저녁 제프를 제외한 마을의 드워프들이 모두 모여서 이른 바, 환영잔치라는 것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저 술 먹을 핑계가 필요했던 것인지 주인공에게 신경을 쓰는 드워프는 별로 없었다. 단지, 몇 명의 드워프들이 다이아나의 머리카락과 눈 색 등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드워프들이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저 색상이 상당히 특이하다는 이유였는데, 이미 달랑 소개만 시키고 부리나케 사라진 제프가 그 색상을 내기 위한 금속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금 시큰둥해졌다. 물론 다이아나의 눈 색상을 만들어보고 싶어 한 드워프는 별개였지만. 다이아나는 머리카락은 잘라 줄 수 있는데 눈만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당장이라도 남의 눈에 손을 넣을 듯한 그 드워프의 시선에 상당히 당황해했다. 이 날 다이아나는 자신이 상당히 술에 세다는 것을 알았는데, 처음으로 대량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자신의 주량을 가늠할 수 없어서 결국 혼수상태에 가깝게 되었다. 물론 드워프들이야 그런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므로 여기 저기서 술잔이 오가고 그들 식의 말싸움과 투닥거리는 힘겨루기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아무튼 방치된 채 구석에서 취해 잠들었던 다이아나는 다음 날 아침 상당히 힘겹게 일어나야 했고, 종일 두통과 구토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무리한 보람은 있어서 꽤 괜찮은 '인간의 여자아이'로 평판을 얻게 된 - 일단 드워프들은 술을 잘 마셔야 괜찮다는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있다 - 다이아나는 나름대로 무리 없이 드워프 마을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정작 다이아나를 책임져야 할 제프는 콧배기도 안 보이고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날 여기에 있게 하신걸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광산 일이나 세공을 배우라는 뜻은 아닐 것 같았다. 모두 자신의 작업에 들어가면 상당히 열중해 있는 탓에 나름대로의 '재충전' 기간이라고 놀고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술 자리가 아니라면 거의 얼굴들을 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던 다이아나는 눈동자의 색을 욕심내던 드워프에게 몇 시간 잡혀 있었던 외에는 상당히 심심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릴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던 다이아나는 한쪽으로 우루루 몰려가는 드워프들을 보았다. "뭐 해? 같이 가자구!" 이름도 잘 모르는 드워프가 다이아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걸었다. "예?" "식사하러 가는거야" 급작스럽게 끌려간 다이아나는 어제 잔치를 벌렸던 건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거의 모든 드워프들이 모여들어서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는 몇 명의 드워프가 아슬아슬하게 음식 접시를 들고 나르고 있었는데,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 드워프들과 달리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어, 결코 자발적인 행동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습관적으로 - 천사원에서 늘상 도왔던 기억대로 -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가, 마치 구원의 여신이라도 만난 듯한 드워프의 손에 이끌려 주방으로 인계되었다. "야, 나 대신 얘가 한다구 했으니까, 난 갈래" "에,, 네?" "도와준다면서?" "아.. 네!" 알고 보니,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식사를 제 때 챙겨 먹기가 힘들었던 드워프들은 돌아가면서 식사당번을 해야 했는데, 작업이 중도에 끊기면 안된다는 그들의 '장인정신'에 따라 무려 1년을 기간으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어린 순으로 한다는 이들의 제멋대로식의 당번제는 툭하면 나이가 많은 드워프에 이르면 끊어져서 '처음부터 다시'를 외쳤으므로, 결국 식사당번은 일이 가능하고 가장 젊은 나이의 드워프들 10여명만이 하게 되어, 이들은 거의 2년 주기로 이러한 일에 붙잡혀 있었다고 한다. 혹시 여기서 그럼 여자드워프들은 뭘 하느냐고 묻는 이는 없길 바란다. 드워프들은 신체의 특성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남,녀의 차별없이 '장인'이었고, 오히려 여자 드워프들의 경우 식당일을 하기엔 체력이 딸리는 데다가 '육아'의 부분을 상당히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로 주방 일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던 터라, 다이아나는 자신이 머무는 기간 동안 식당에서의 일을 돕기로 했고, 덕분에 이번 년도의 당번인 툴레임, 래리, 콜, 미하스, 피트, 론 등을 소개받았다. 이 중에 다이아나를 내세우고 자신은 당번에서 빠져나가려던 론은 의리없는 드워프라는 말과 주먹세례 끝에 결국 제 일거리로 복귀했다. 이들은 안그래도 일손이 딸리던 차에 다이아나가 생각보다 상당히 능숙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 천사의 집의 인원이 백 명에 달했으니 이전의 다희도 시간이 날 때마다 주방일을 보조했다 - 상당히 흐뭇해 했다. 창백한 안색의 다이아나의 앞에는 툴레임이 날카롭게 갈린 도끼 날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툴레임을 둘러싸고 래리, 콜, 미하스, 피트 등이 응원을 했다. "한 번에 해버려" "고통없이 가야 맛이 좋다구" "이봐,이봐, 어리숙하게 살기를 풍기면 쟤가 겁먹잖아! 그럼 고기가 질겨진단 말야" "그럼.. 당연히 세상 모르게 보내야지" 이들은 저녁식사 거리로 끌려 온 돼지 한 마리를 앞에 놓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성인이 되어 자신의 집을 완공하여 식사 당번으로 합류한 - 사실 드워프들이 집 짓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식사당번 일을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다 - 툴레임이 처음으로 돼지 잡기에 도전한 것이다. "꿱(?)" 툴레임의 도끼는 부드럽게 선을 그리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졌고, 이는 아주 성공적이어서 당하는(?) 돼지는 그 영문을 모르고 편안하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드워프들은 육식을 즐겼기 때문에 하루에 한 두번 이상씩은 이렇게 도살한 고기를 미리 챙겨 두었다가 사후강직이 풀린 후 요리 재료로 사용했다. 다이아나는 육식에 대하여 별 부담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눈 앞에서 돼지가 죽는 것을 보면서 편안하게 있을 정도로 무딘 감성을 가지진 않아서, 금방이라도 구토가 날 것만 같았다. "이봐,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 이래뵈도 우리는 상당히 신경써서 얘네들을 보낸단 말이야" "그럼, 당연하지! 어차피 맛있게 먹을 양식을 제공해주는 애들한테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드워프의 미덕 아니겠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실제로는 영 아니올시다 였다. 하지만, 생명의 끝을 고통없이 마감하기 위하여 상당히 수련을 쌓은 이들만이 도살을 행한다는 드워프들의 말에 다이아나는 또 다른 생명의 존중이라는 가치관은 경험할 수 있었다. 결국 며칠 후, "어? 제법이다!" 라는 감탄을 들으면서 최초의 공격용 검술로 닭의 목을 뎅겅 베어내기 까지 했으니까. 이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유스테우스는 기가 막혔다. 공격과 살생에 대하여 지나치게 소심한 다이아나가 드워프 마을에서 무언가 배우기를 기대했지만, 처음 한 살생이 식용닭의 도살이라니...... 감히 드래곤의 아이에게 닭을 도살하게 한 드워프들을 혼내줘야 하는건지, 그럼에도 약간 빗나갔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의도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이라도 줘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이아나가 드워프 마을에서 생활한 지도 세 주가 넘어서고 있었다. 어느 틈엔지 딱 처음 길이의 머리카락을 회복하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여러 개의 핀을 선물받았다. 선물로 핀을 준 드워프들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거의 매일 핀을 바꿔가면서 착용해야 한 건 둘째치고 처음에는 순서가 문제가 되었다. 자신의 핀이 더 잘 어울린다면서 다투기 시작하는 드워프들을 말리고는 할 수 없이 선물한 나이순 - 이럴 때는 역시 많은 사람의 것이 우선 순위가 된다 - 으로 매일 바꿔 하겠다는 말로 무마시킨 다이아나는 '나이가 깡패다'라는 드워프마을의 불문률을 이미 어느 정도 터득한 후였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식사를 준비하던 다이아나는 마을 전체에 퍼지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종 또한 상당히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는 있었지만, 소리의 아름다움이야 어찌 되었던 그 종의 의미는 침입자가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식사를 준비하던 드워프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고 뛰쳐 나갔다. 물론, 이미 도끼를 쥐고 있던 툴레임이나 검을 차고 - 아버지가 챙겨 준 검으로 닭 머리를 처음 벨 줄은 몰랐지만 - 있었던 다이아나는 가장 빨리 나갈 수 있었다. 그 날 다이아나는 항상 정신없고 질서라고는 모르는 듯하던 드워프들이 짜임새있게 조를 짜서 침입한 오우거와 상대하는 희귀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오크의 침범을 충분히 막아주는 방책은 오우거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으므로, 드워프들은 각자 무기를 가지고 대형을 갖추어 오우거와 맞서고 있었다. 이미 연습한 듯한 진영에 끼지 못하고 약간 뒤로 쳐져 있던 다이아나는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제프의 모습에 당황했다. 제프는 빙긋 웃더니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공격마법 할 줄 알지? 좀 도와주지 그래?" 실제로는 피어 한 방이면 오우거를 물러나게 할 능력의 소유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혹스러웠으나, 제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나이 먹어 힘 없는 드.워.프 라구" 라고 선언하더니, 보란 듯이 한 쪽을 가리키면서 안타깝게 소리를 내지르는 거였다. "어, 거기 론 위험해! 에구 저걸 어쩐다~! 다 죽게 되었군!" 식당의 드워프들은 전투에서도 한 조인 듯 한 곳에 몰려 있었다. 문제는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드워프들은 어떻게든 오우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키가 작은 드워프가 큰 키의 오우거에게 치명상을 주는 것은 어려웠던 것이다. 다이아나가 제프의 손가락질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는 가까스로 오우거의 몽둥이를 피한 론이 보였다. "이봐, 너도 쟤네들 조란 말야~!" 이제는 아주 속마음을 들어 내놓고, 답답하면 나서라고 재촉하는 제프와 식당 식구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다이아나는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물더니 중얼거리면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툴레임, 비켜나요!" 다이아나가 소리치면서 앞으로 나서자, 론을 대신해 오우거의 몽둥이를 간신히 막고 있던 툴레임이 튕기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라이트닝" 전격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오우거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앞으로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 옆에서 달려든 미하스과 피트가 동시에 오우거의 목을 가격했다. "아직 안죽었어!" 두꺼운 오우거의 가죽은 꽤 무거운 도끼날에도 상당한 상처만 용납했을 뿐이다. 이미 다른 마법을 준비하던 다이아나는 쓰러진 오우거 위로 마지막 공격을 날렸다. "매직 에로우" 원래 3써클 마법인 매직 에로우는 마나로 화살을 만들어 쏘아내는 것이었으나, 주입된 마나의 양이 상당한데다가, 목 부위의 상처 로 정확하게 파고 들어 오우거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헉헉...!" 다이아나는 생전 처음 '이지'를 가진 생명을 죽였다는 데에 타격을 입은 상태였지만, 부상을 입은 론을 제외한 드워프들이 서둘러 다른 드워프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자, 힘겹게 따라 나섰다. 이 날 마을에 침입한 오우거 다섯 마리 중 세 마리는 다이아나의 공 격 마법으로 처치되었다. "이건 그래도 좀 낫군" 영상을 들여다 보던 포세이스가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엽기적인 첫 살생을 본 신들은 유스테우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게 황당해 했다. 그리고 지금, 처음 유스테우스의 의도에 따라 오우거에게 공격을 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신들은 만족감과 불안 감을 함께 표시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유스테우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자신의 음모와 제프의 강압적인 태도로 첫 공격을 성공했지만, 그 이후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이기적인 선택이야" 다이아나의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을 안다는 듯이 여기 저기 앉아 쉬고 있는 드워프들과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그녀에게 제프가 건넨 첫 마디였다. "선택....!" "그래. 생명체들은 각자 자신의 목숨이, 그리고 동료의 목숨이 중요하지. 너는 그 상황에서 네가 아는 드워프들과 오우거의 목 숨을 놓고 선택을 해야 했어" "......" "만일 네가 끼어 들지 않았다면 저들 중 몇은 죽었겠지" "하지만......" 약간 책망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제프는 알 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나서면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그건 자연스럽지 않아. 저들이 드워프로서 살려면 지금처럼 살아야 해. 드래곤의 보호를 받는 드워프 마을이 어떻게 될 것 같아? 나약해지고 게을러질꺼야. 따라서, 나는 ' 드워프'로서만 여기 존재할 따름이지." "그렇다면 저도......" "넌 달라, 네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한다고 이 마을이 변할 것 같나? 전혀 아니란 말씀. 거기다가 넌 여 기서 장기간 있을 것도 아니잖아? 아, 더 중요한 게 있지. 유희중인 나와는 달리 너는 저들과 현실의 '관계'를 이미 형성한 다 음이란 말이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무책임하게 돌아서 가버리는 모습의 제프였지만 사실 뒷 일이 궁금한 듯이 슬쩍 건물 뒤에서 다이아나의 모 습을 살펴 보았다. 한참을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 있던 다이아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다친 드워프들 사이를 다니면서 신성력을 이용하여 치료를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프는 물론 유스테우스와 신들도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했다고 해서, 혹은 결심을 했다고 해서 원래의 심성이 일순간에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이아나는 그 날 밤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 일단 떠나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올려 볼랍니다. ^^;;; 오늘 밤에도 한 두개는 올릴 수 있을 것 같군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워프 마을 "누구얏!!!!!!!!!!!!!" 새로운 색상의 금속의 제작에 열중하던 제프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화풀이를 시작하려다가, 질린 표정으로 문을 연 상태로 굳어진 다이아나를 보고는 민망한 웃음을 머금없다. 다이아나는 조용히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어 문을 열다가 사정없이 울려퍼지는 고함 소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저.. 아빠에게 연락하실 수 있으시죠? "응. 왜? 연락해 주랴?" "네. 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알았다!" 이미 다이아나 모르게 여러 번 연락을 주고 받던 둘이었다. 이번에야 다이아나의 부탁도 있었으니 거리낄 것 없이 유스 테우스에게 전언을 보낼 수 있었고, 그야말로 물 한 그릇 주욱 들이킬 사이라고나 해야할까 어느 틈에 유스테우스는 다이 아나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아빠!" "응.. 그래그래~!" 어차피 웬만한 일은 영상으로 다 보고 들은 주제에 괜히 여기 저기 살펴보면서 제프를 째려보는 유스테우스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지내기 불편하니? 돌아갈까? 혹시 제피어스님이 너한테 못할 일이라도 시킨거 아니냐?" 물음표로 점철되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제프를 겨냥한 듯했기 때문에 제프는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이야 그야말로 부 탁받은 대로 훌륭히 이행한 죄 밖에는 없지 않은가? 악역은 다 미뤄놓고 좋은 아빠 노릇에 열중해 있는 유스테우스가 상당히 얄미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이리라. 어찌되었던 다이아나는 그게 아니라는 말로 일단 유스테우스의 입을 막아 놓고는 눈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제프에게 살짝 눈길을 보냈다. "아, 부녀간에 얘기하는데 좀 알아서 비켜주시죠!" 처음의 예의는 어디로 갔는지,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는 유스테우스의 태도에 제피어스는 기가 찼지만, 일단 도와주기로 약속한 이상 이 정도는 참아주자고 생각하면서 슬쩍 자리를 피했다. "훌쩍... 엉엉~!" "다, 다이아나? 얘가 왜 이래.. 무슨 일이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유스테우스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고, 여태껏 기껏해야 흐느끼던 수준에서 갑자기 애라도 된 듯이 엉엉거리면서 우는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던 것이다. "훌쩍, 끅! 그냥, 끅! 아빠 얼굴 보니까 끅! 울고 싶어서요. 끅!" 끅끅 거리면서 숨을 겨우 참고 우는 도중에 그나마 말을 한 다이아나 덕에 걱정이 약간 진정되었으나, 그래도 완전히 없어질 리는 없었다. 사실 다이아나가 유스테우스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단순했다. 일단 나름대로 어느 정도 변화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으로 살생을 해 본 이후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스트레스가 적절한 대상을 찾자 폭발한 것이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겉으로 이러한 감정들은 내놓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감정의 표현면에 서 다이아나는 아직 초보였던 셈이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다이아나는 자신이 아버지를 부른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유스테우스의 '의도'와 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으나,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내용이기도 했다. "네 뜻은 알겠는데...... 좀 서두르는 것 아니니?" 결국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유스테우스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걱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말을 요약하자면, 분명히 꿈의 체험 등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이기심에 자각한 듯은 한데, 실제로 접해보니 - 오우거와의 전투 - 아직도 몸이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더라는 것이다. 하여, 어떻게서든 필연적인 상황에서의 재현 - 쓸 데 없는 살생이 싫었으므로 - 이 필요한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다이아나는 밤새도록 제프의 말을 떠올렸다. 만일 자신이 늦었더라면 몇 주간 그녀와 우정을 쌓았던 드워프들 중의 누군가가 죽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랬다면 어느 정도의 변명은 되었겠지만, 능력탓은 아니었다. '만일'이라는 한 단어가 대변하는 모든 상황을 떠올려 본 다이아나는 누군가를 잃고 더 후회하는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엔젤하우스에서 죽어간 이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러면서도 오우거가 죽어가던 모습이 겹쳐서 상당히 혼란해졌던 것이다. 두 가지의 상반된 마음이 오히려 단단하게 결심했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한 흔들림으로 작용하자, 다이아나는 극단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결심이 흐려지기 전에 '선택'을 위해 싸운다는 개념을 확실하게 알고 몸에 배게 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 다이아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막상 유스테우스의 말을 들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초조해 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아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에 털어놓고 아버지의 조언을 구했다. "음... 내 생각에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판단된단다. 그보다 오히려 좀 더 실력을 쌓는 일이 필요하겠지. 어차피 필요한 살생이라면 가능하면 빨리, 고통없이 끝내는 것이 너한테는 나을 꺼야" "그렇겠군요" "그럼. 당연하지! 일단, 정체되어 있던 마법과 검술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 인간들의 수준으로는 상당하다고 해도, 내가 보기엔 아직 애매하니까 말이다" 물론 애매하다는 것은 공격을 위한 부분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전투 중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감각과 순발력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실제로 공격에 관한 대련이나 연습이 부족한 다이아나로써는 전체적인 써클의 수준이나 검술 뿐만 아니라, 현재 수 준에서의 공격에 대한 실전적인 공부가 선행되어야 했다. 결국 다이아나는 드워프들과의 생활을 예정대로 몇 달 더 하기로 했다. 유스테우스는 자신과 연락할 때 사용하라고 작은 통신용 수정구 하나를 다이아나에게 주고 돌아갔다. 대륙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지던 하투아 제국은 '엔젤하우스의 참극'이라고 불리우는 사건 이후 잠잠했다. 8대신전이 주도하여 건립된 엔젤하우스의 '비전투인원'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 제국과 왕국들은 하나같이 하투아 제국의 만행을 규탄하고 나섰다. 시우스제국은 하투아제국에 대하여 상당한 '유감의 뜻'을 표명하면서 침략전쟁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선언하고 전면으로 나선 8대 신전의 지원과 엔젤상회의 금전적인 지원, 그리고 각 제국들의 지원 을 받아 하투아 제국과의 국경에 물리적인 방어벽과 마법으로 형성된 방어막을 조성했다. '드래곤의 경고'로도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는지, 대륙에는 신의 명령을 받은 드래곤이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 나타나 함께 사라졌으며, 신을 대리한 드래곤의 분노를 받은 냉혈황제 카이젠이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상, 이 소문은 자신들도 '성녀'를 탐하여 기회를 노리던 각 제국들의 첩자들이 당시에 은밀하게 듣고 본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고 각 제 국이 이를 정책적으로 이용한 덕분이었으나, 순수하게 '성녀'를 칭송하던 대륙의 평민들은 그러한 '성녀'를 앗아간 하투아제국의 만행에 분노하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엔젤상회와 8대신전은 '성녀'의 뜻을 받들어 그녀가 원하던 사업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이 결정은 각 제국과 왕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표면상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각 제국의 최고 수뇌들은 은밀하게 성녀의 행방을 찾는 작업을 극비리에 실행하고 있었다. "떠나겠습니다" "......" 몇 주를 그 어떤 설득에도 꼼짝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에디우스가 하비어스에게 한 첫마디였다. 하비어스는 결국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듯하여 상당히 자책을 하고 있었으나, 결국 에디우스에게 다이아나를 맡겼던 것 에는 그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별다르게 유스테우스나 다이아나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다. 고룡이라는 존재는 그 능력만큼 오 랜기간의 성찰과 생각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는 다이아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번 일로 큰 교훈을 얻었기에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경 험이 필요합니다" "유희를 하려는 거냐?" "누구보다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유희를 해 보겠습니다" "....... 단단히 결심한 듯 하구나" "드래곤으로서의 제가 그녀를 잡을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려는 것입니다" "굳이 그런 말을 내게 와서 하는 이유가 있겠지? 도와줄 것이 있느냐?" 물론 하비어스는 에디우스가 원하는 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자마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았다. "네가 다이아나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이번 일은 네게 상당한 경험이 될 것 같구나. 나는 고룡이 되고 나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열 배가 넘는 수명과 지능을 가진 조화의 엘프, 신의 손재주를 타고난 드워프들도 감히 도전하지 않는 우리 드래곤에게 인간들은 무모한 칼을 휘두르곤 한다. 내가 젊어서는 그것을 그들의 어리석음으로만 간주했지만, 인간이란 그 유 한성에서 나오는 불꽃같이 맹렬한 삶의 의지와 타 종족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욕망과 신으로부터 선물받은 신성이 어우러진 존재다. 지상 위의 가장 위대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드래곤이라는 존재보다 태초부터 신들께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존재가 그들이란다. 다이아나의 경우를 보거라, 신과 드래곤의 아이지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에 근접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한참 하 위의 존재이면서도 그 속에는 신과 같은 잠재력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 또한 깨달았다고는 하나 수 천 년의 선입견까 지 어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다이아나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너는 인간들의 추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받아들 이고 그들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나 골드 일족의 고룡 하비어스가 네게 줄 수 있는 충고이다" 에디우스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아버지의 말을 마음 속 깊이 담아놓고, 하비우스가 마련해 준 것들을 챙긴 후에 자신의 길을 떠났다. 그의 반려가 속한 종족, 인간을 알기 위해서. "야, 뭐하는 거야? 아예 바닥을 기어라" "쯧쯧 네 놈은 드워프의 수치라니까!" "으읍, 닥치지 못해!" 바닥을 뒹굴어 다이아나의 공격을 간신히 피한 래리가 화를 폭발시켰다. 다이아는 자신의 공격에 래리가 땅으로 뒹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포기의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으므로 그대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드워프들과 대련을 시작한 것은 오우거의 일이 있은 지 이틀째 되는 날부터이다. 드워프들 중 특히 젊은 드워프들이 늘상 이런 식의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끼워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이아나의 검술실력이 의외로 상당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식당의 멤버들을 포함한 젊은 드워프들은 너도 나도 다이아나와 대련하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드워프들의 무기 는 주로 긴 자루를 가진 도끼였고 다이아나는 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은 늘상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무기를 가진 상대 와 대련하다가 실제의 적에 좀 더 근접한 실력자와의 대련이 가능해지자 너도 나도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공격에 익숙치 않아 실수를 하곤 하던 다이아나였으나, 익숙해질수록 제대로 된 검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 과 대련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드워프들의 태도에 상당히 의아했고, 누구도 진실을 알려주지 않아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드워프들로서는 다이아나의 감정을 고려하여 숨긴 것이었지만, 제프만은 아랑곳 없이 다이아나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왜 그러냐고? 드워프들에게 자기 키만한 적이 있을 꺼라고 생각하냐? 어차피 고블린들은 약삭빨라서 드워프나 엘프 마을에 침입 하는 법은 없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싸우는 상대는 오크나 오우거거든. 네 키가 오우거만큼은 아니지만 오크보다는 약간 작 은 정도니까 드워프끼리 연습하는 것보다 도움이 되지. 거기다가 드워프들도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경우가 꽤 된다구. 우리 마 을도 인간들이랑 교류를 하는데, 인간들이란 믿을 게 못되거든. 결국 우리 드워프의 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게 인간들이고. 그런 데, 너는 인간에다가 검까지 쓰잖아. 너같은 대련 상대 만나기가 여기선 쉽지 않다 이 말씀이지!" 너무나 솔직하게 요점을 꼭꼭 집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허전함을 느끼며, 그런가보 다고 생각하게 만드 는 제프의 화술은 실로 한 자루의 검에 못지 않았다. 뭐 이런 이유로 다이아나의 대련 상대는 부족하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대부분 다이아나를 상대하기가 워낙 어려워진 터라, 대련을 구경하면서 상대 드워프를 놀리는 것이 드워프들 사이에서 하나의 오락꺼리가 되어 버렸다. 우스운 것은 좀 전에 다이아나에 의해 제압되거나 수 번을 땅을 굴렀던 드워프가 자신이 했던 대련은 잊어버리고 항 상 현재 대련상대를 더 많이 놀려댄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장신구나 보석세공을 좋아하는 드워프들도 다이아나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장신구를 걸친 모습이 이들의 섬세한 미적 감각을 상당히 만족시켜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머리핀으로 시작한 장신구가 하나 둘 늘어서, 다이아나는 선물받은 장신구만으로 가게를 차려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값비싼 보석들을 받고 상당히 난처해하 면서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드워프란 원래 소유욕보다는 미적감각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물건에 어울리는 상대가 사용하는 것을 더 즐긴다는 제프의 따끔한 한 마디에 주는 족족 감사하게 받아 챙길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일단 검술의 숙련도를 위하여 마나의 사용을 자제하고 육체적인 능력만으로 검술을 몸에 익히느라 노력하던 다이아나는 상당한 진척을 볼 수 있어서, 혼자 있을 때에는 이러한 검술을 펼칠 때의 마나의 유동을 따로 연습하고 있었다. ************************************************************************************** 조아라의 상태가 그런대로 괜찮을 때 냉큼 올립니다만... 스트레스가 쌓이네요. -.-;; 리플에 지적받은 부분들을 고치려고 해도, 워낙 시간이 걸려서 상당히 힘이 듭니다. 자, 힘내서 밤에 하나 정도는 더 올려보도록 노력하시죠 에디군은 나름대로 팬 층을 형성하고 있네요 훔.. 역시 잘난 드래곤이라 그럴까요? 아니면 보기 힘든 순정남이라서? ^^;; 암튼 언젠가 만날 날이 있겠죠. 에디군의 결심으로 봐선 말이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워프의 거래 "무슨 일 있어요?" 다이아나가 드워프마을에서 생활한 지도 세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제프에게 방을 새로 받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어서, 다이아나도 이러한 생활에 상당히 익숙해진 터였다. 지난 번 오우거의 침입 이후에는 몬스터 들도 잠잠했는데, 하나도 아닌 여러 마리의 오우거가 침입한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다이아나도 뒤늦게 들어 알았다. 다이아나가 방을 옮긴 이유는 처음에 제프가 준 방이 최근에는 '선물'들로 너무 비좁아졌다는 이유였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준비를 하기 위해 제프의 집을 나선 다이아나는 아직 아침식사 시간이 아닌데도 여기 저기 돌아다니 는 드워프들을 목격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의 작업실과 식당 사이를 오가는 일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다이아나로서는 상당히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다이아나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드워프 콜에 게 질문을 했다. "아, 너는 처음이겠구나. 응? 이상하다? 너도 간다고 들었는데...?" "네?" "클클.. 제프님이 말 안하셨나보군." 겁도없이 제프의 뒷담을 궁시렁거리면서 정작 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콜의 이어지는 말들을 가만히 듣던 다이아나는 결국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인데요?" "응?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어? 오늘 떠나는 날이야" "떠난다구요?" "응. 맥주랑 과일주랑.. 그리고 밀도 그렇고... 재료도......" 한참 모자라는 것을 읊어대지 않아도 주방의 일을 돕고 있는 다이아나는 식량창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상당한 참을성 을 발휘한 끝에 결국 각종 재료와 식량 등의 구입을 위해 '거래'를 하러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낙에 두서없이 하고 싶 은 말만 이리 저리 하는 콜의 대화법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 했지만 말이다. "... 그래서, 다들 실패작들하고, 괜찮은 것들하고 가지고 나오는거야" 결국 요점을 정리하면, 몇 달에 한 번씩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자신의 '작품'은 마음에 드는 이에게만 준다는 드워프식의 고집을 감안해서 '실패작'들의 정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차피 드워프가 실패했다고 해도 그건 그야말로 만든 드워프의 마음에 안들었다는 것 뿐이고, 그렇게 필요없는 것들을 인간마을에 가져다 팔고 식량을 구입한다고 했다. 일단 하는 김에 다 하자는 식이라, 겸사겸사 엘프들과의 거래도 있고, 채굴을 주로 하는 드워프 마을에 식량의 일부를 건네 주고 재료도 가 져와야 한다나? "제프아저씨" "응? 떠날 준비는 된거냐?" 정작 말을 전해주었어야 할 제프는 작업실로 다이아나가 들어오자,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한테 말씀도 안해주셨잖아요. 콜한테 들었어요" "응? 그랬던가?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 원, 치매끼가 있는건지"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드래곤에게 치매가 있을 리 없다. 다이아나도 뻔히 아는 진실을 뒤로하고 정말 기억력이 떨어져가는 노인 드워프 흉내를 내는 제프의 모습은 그야말로 뻔뻔함의 진수라고 하겠다. 어차피 제프에게 따져봐야 본전도 못 건질 일임을 다이아나는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단념하고 이유나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는 왜 같이 가라는 거에요?" "아, 그거야 인간이랑 거래할 때 인간이 있으면 편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우린 마법을 못하잖아. 없다면 모 를까 있는 마법사를 놀린다는 것은 상당한 낭비지. 암, 그렇구 말구!" "그... 그런가요?" "아참, 그리고 이번 일은 유스테우스도 알고 있으니까 특별히 따로 알려줄 필요는 없다 흠흠.." 당사자에게는 실행일까지 한 마디도 안 했던 주제에 보호자에게는 이미 허락을 받는 치밀함을 보여주는 제프는 과연...... "응? 싫으면 관 둬라~! 뭐 애들이 좀 섭섭해 하긴 하겠지. 걔들이야 네가 지네 동료인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가 본데. 당사 자가 싫다면.... 뭐 상.당.히. 서운해 하긴 하겠지만, 억지로 시키진 않을꺼야"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유희를 나온 주제에 드워프 수명을 다 채우고도 떠나지 않아서 '나 드래곤 이요~!'하고 이미 다 알려진 후에도 끝까지 자신은 드워프라고 박박 우기면서 동료 드래곤들에게도 '유희중'임을 늘상 강조 하던 제프의 억지는 이미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다이아나가 똑똑하다고 한들, 8천년을 살아온 이 특 이한 드래곤의 숙련된 말발에는 당해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엔 좀 넉넉하게 가져와. 알았지?" "야 래리! 너 저번처럼 술 먹고 혼자 뒤로 쳐지면 죽어~!" 시끌벅적한 드워프식의 인사들을 뒤로 하고 툴레임과 래리, 훈트, 다이아나로 구성된 '거래'을 위한 이들은 마을에서 출발했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라는 나이 든 드워프들과 아직은 세상구경이 재밌는 젊은 드워프들의 특성 때문에 거래를 위한 여행에 나선 것은, 일행을 이끌 어른으로서 할 수 없이 참여한 훈트와 잠시라도 식당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 동안 상당한 '로비'를 했다는 툴레과 래리였다. 그나마 평소에는 보통 이 두 배의 인원이 필요했었으나, 다이아나의 마법을 사용하여 도와준 덕에 반 수로 줄인 것이다. 실제로 일행이 가져가는 짐은 공간확장 마법과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 달랑 두 개였다. 물론 그 두 개는 래리와 툴레임이 짊 어지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식량이 든 배낭을, 훈트는 그야말로 달랑 자신의 무기 하나만 들고 유유자적 길을 나섰다. 경량화 마법이 걸렸다고는 해도 워낙 물건들이 많았던 터라 낑낑거리는 두 드워프에게 시종일관 '내가 젊은 드워프였을 때는...'으로 시 작하는 훈트의 구박이 사정없이 쏟아지고 결국 입을 다물고야 마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발길을 재촉했다. "저.. 훈트님" "응? 뭐야?" "이 인원으로 가다가 몬스터를 만나면 위험하지 않은가요?" 솔직히 다이아나 혼자라면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거나 해서 피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이야 그렇지도 않을 터인데, 달랑 넷만 길을 나섰으니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아, 그건 말이지.. 내가 워낙 대단한 드워프거든. 이래뵈도 내가 젊었을 적엔 오우거를 때려 잡았었다고. 내가 가는데 뭘 걱정 하냐?" 정말 오우거라도 앞에 있는 양, 자신의 키보다도 클듯한 도끼를 휙휙 휘둘러대며, 전혀 믿어지지 않는 말을 태연자약하게 하는 훈 트를 보면서 다이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힝..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마세요. 오우거를 혼자 때려잡은 드워프는 마을에서 제프님이 유일하다는 거 모르는 드워프도 없는데....." "맞어. 맞어.. 다이아나가 뭘 모른다구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훈트에게 당한 구박과 설움이 '나이가 깡패'라는 드워프의 불문율도 무섭지 않게 만든 것인지 래리와 툴레임이 기다렸다는 듯 이 반박하고 나섰다. 결국 길 잘 가다 말고 훈트가 오우거를 물리친 무위를 보여주마고 두 젊은 드워프를 두들겨 패는 것을 다 이아나가 간신히 말린 다음에야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엘프의 길'이라구" "완전하진 않지만 몬스터들한텐 잘 눈에 안 띄는 길이래" "아.. 그렇군요" 토막 토막 끊어서 세 드워프가 지껄여 대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랬다. 몇 대 전에 - 드워프 세대로 몇 대 전이면 수 천 년 전이다 - 엘프들과 거래를 시작하면서, 오가는 중간에 워낙 피해를 많이 입게 되자, 아무리 용맹한 드워프들이라고 해도 거래를 지속하기가 힘들었단다. 드워프들은 은근슬쩍 이런 불만을 토로했고, 이에 엘프들이 나서서 숲의 길 하나를 내 주었는데, 그것이 지금 이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길을 걸으면서 다이아나는 상당히 짙게 풍기는 정령들의 기운은 느낄 수 있어서 의아했는데, 그것이 길을 낸 엘프들의 부탁으로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정령식의 결계라는 것을 이런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시도해 본 일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정령의 결계란 물리적인 강제성이 없는 결계였다. 물론 정령을 부른 이가 강력 한 결계를 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따라서, 엘프들은 하급 정령들에게 부탁하여 이 길을 가는 이들의 소 리나 냄새 등이 자연에 묻히게 하는 특이한 결계를 형성해낸 것이다. 길을 벗어나면 마치 상당히 많은 나무들이 뒤덮여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해 놓아서, 별다른 일이 없으면 몬스터가 이 길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 우린 엘프 마을에 먼저 들르는 건가요?" "일단 갈 때 들러서 물건을 주고 올 때 다시 들러야 해. 거기서 받은 물건들을 다 가지고 오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오는 길에 들러도 되는 거 아닌가요?" "인간들과의 거래가 없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혹시라도 엘프들한테 줄 물건들이 인간들의 눈에 띄면 상당히 귀찮아진다구" 드워프들은 인간들에게는 무기류를 팔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엘프들과 거래하는 물건은 '실패작'이 아니라 '주문품'과 장로들로부 터 나온 '작품'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드워프제의 무기가 유난히 희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견물생심'이라 는 말이 드워프 사이에는 없을지 몰라도 물건에 눈이 어두워진 인간들은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사실을 오랜 거래를 통해 이 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엘프들에게 줄 물건이 상당히 작은 양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할 수 있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에 대하여는 다이아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도 힘과 권력 그리고 부에 관한 인간들의 욕심이 만들어낸 역사가 이어져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간 이상의 지적인 존재가 없었던 그 곳에서는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들도 이 곳에서 다른 존재들의 입을 통해 듣는 인간에 대한 냉엄한 통찰의 결과를 대하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게 만들 었다. 스스로 다른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런 자신들 사이에서도 '계급'을 형성하고 차별을 만드는 모순적인 존 재가 바로 인간이었으니까. "이상하군? 이쯤에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이틀 밤을 숲 속에서 야영을 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강행군을 계속해왔다. 흐릿했던 햇살이 태양이 높게 솟아오름에 따라 나무 사이로 상당히 빛을 발하다가 약간씩 스러지기 시작할 무렵, 훈트가 모두가 다 알아들을 정도의 크기지만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마치 훈트의 말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끝이 안보일듯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녹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는 당연히 엘프였다. "헤파이토스님의 사랑을 받는 종족......" 길게 이어지려는 인사는 훈트에 의해 바로 잘려 버렸다. "됐네 됐어. 난 훈트라고 하네." 예의바른 엘프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드워프들의 특성을 상기하고 얼른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뵙겠습니다. 저는 루이스덴입니다." "저번에 그 미리인가 하는 엘프는 안 나온건가?" "미리안느님 말씀이시군요. 마을 안에 계십니다. 조금 일이 있어서..... 그런데 저 분은?" 사실 처음부터 이들을 따라온 인간에 대하여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엘프라는 종족은 너무나 예의 바른 종족이었던 것이다. "응. 걱정할 것 없네. 제프님의 손님이니까" "제프님의?" 순간적으로 깜짝 놀락 엘프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이아나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이아나가 화를 내지는 않는지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훈트는 그런 엘프의 속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훈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엘프는 더욱 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침묵만 지켰다가는 큰 오해를 불러올 것이라는 생각 에 다이아나는 직접 자신의 소개를 했다.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정중한 인사를 받고 오히려 더 놀라는 표정의 엘프였다.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심한 듯 물어왔다. "유희중이십니까?" "아뇨. 전 확실히 인간입니다. 유희중인 드래곤이 아닙니다" 엘프의 지레짐작을 얼른 바로잡아 주자, 엘프는 안도감과 함께 이상하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무언가 더 물 을 기세였다. 하지만...... "이봐. 우린 여기까지 오느라 무지 힘들다구~!" "그러게 말야. 손님을 앞에 놓고 편하게 쉬게 해 주기는커녕 이게 뭐람~!"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젊은 두 드워프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는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나타났던 나무들 사이 로 일행을 안내했다. 엘프가 앞장서서 나가지 않았다면 절대 갈 생각도 못할만큼 빽빽하게 보이던 나무들이 엘프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가지들을 벌려 길을 내 주는 광경은 상당히 인상깊었다. 다이아나는 이미 엘프 마을을 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으나, 막상 엘프를 만나고 보니 시루스의 생각이 나서 갑자기 우울해져 버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워프의 거래 "오랜만입니다" "잘 있었지?" 영상에서 본 엘프들은 실제로 보아도 온통 미남미녀들 천지였다. 나무들로 이루어진 특이한 집들보다 다이아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 자체가 자연의 하나처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여기저기서 일행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엘프종족 자체였다. 엘프의 대표처럼 보이는 이도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는 20대로밖에 안보였는데, 엘프는 한 번 성장하면 죽을 때까지 같은 모습을 유지한다고 했다. 꽤 젊은 드워프도 수염으로 인해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대조이다. 지금도 드워프와 엘프의 우스울 수 있는 여러 방면의 대조가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레리와 툴레임보다 젊어보이는 이가 엘프의 장로라는 것, 그리고 엘프의 장로는 상당히 격이 갖추어진 존대를 훈트는 드워프식의 툭툭 내뱉는 어법을 고수한다는 것이 었다. 인간들에게 잘못 알려진 상식중의 하나가 드워프와 엘프 사이의 불화설이다. 하지만, 불화가 있다기보다는 워낙 종족의 특성 차이 가 크다고 해야 옳았다. 드워프들은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늘상 자신들을 위대한 드워프 하는 식으로 높이고 있어서 엘프들에 대하 여 딱히 좋게 말할 리가 없었다. 워낙에 함부로 말하는 것 자체가 종족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엘프들의 경우 다른 종족에 대하여 함부로 평가하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 했고, 드워프들의 특성을 잘 아는 이들로서는 언급을 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하여, 사람들 은 자신들의 잣대에 맞춰 드워프들은 엘프들을 싫어하고 엘프들은 드워프들을 꺼린다고 생각해게 되었다. 일행을 맞이한 엘프는 '미리안느'라는 이름의 여장로로 처음 그녀의 일행을 맞이한 루이스덴에게 훈트가 물어본았던 엘프이다. 푸른 머리카락과 호수같은 색상의 눈은 다이아나에게 더더욱 시루스의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그녀는 뒤쪽에서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두 종족의 장로급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와의 거래는 의외로 단순하게 끝났다. 엘프의 종족이 드워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리도 없었고, 드워프가 엘프들을 속일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 두 종족의 거래는 말이 거래였지, 어찌 보면 득실을 따지지 않는 '선물의 교환'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상당한 무력을 가진 엘프전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무기'가 드워프들의 높은 자긍심을 자극했고, 자신들이 담근 과일 주를 너무나 좋아하는 드워프들을 본 엘프들은 과일주를 선물했다. 안그래도 자극을 받은 터에 과일주를 받아든 드워프들은 받기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작품 몇 개를 선물했고, 보낸 과일 주에 대하여 지나치게 좋은 선물을 받은 엘프는 다시 과일주와 약초로 만든 치료제 등의 선물을 했다. 이러다 보니 엘프 마을에 성인식을 치른 엘프가 생기면 드워프 마을에서 맞는 무기를 선물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고, 엘프의 과일주에 맛을 들인 드워프들 은 그 핑계가 없으면, 안면 있는 엘프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과일주를 받아갔던 것이다. 하여, 엘프와 드워프의 거래는 준비해 온 물건들을 건네주는 것으로 그냥 끝났다. 그것은 어차피 물건을 가져온 툰레임과 래리만 있으면 될 일이어서, 다이아나는 자신에게 눈짓을 하는 하툰에게 이끌려 장로라는 엘프를 따라 살아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엘프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엘프들은 늘 그러하듯이 손님을 위해 차와 과일을 내놓았는데, 유독 하툰의 앞에는 과일주를 내놓았다. 하툰은 만족한 듯이 과일 주를 홀짝거리면서, 미리안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시루스가 늘 끓여주던 차가 생각나 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미리안느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미리안느라고 합니다." "다이아나입니다." "하툰님께서 다이아나님이 마법사라고 하셨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몇 써클이신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부족하지만 6써클을 마스터했습니다" "에...엣? 지금 6써클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 혹시 드래곤께서 가르치셨는지요" "그건 좀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아... 예" 말하기 싫다는 이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 또한 엘프답지 않은 일이다. 분명히 20세도 안되어 보이는 다이아나가 6써클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엘프들이 타고난 소질에 비해 그다지 열심히 마법을 안익힌다지만, 엘프 중에서도 8써클에 도달하는 이는 드 물었다. 인간의 경우, 대륙 전체에서 각 제국의 궁정의 마법사들이 대체로 8써클이었고, 마법길드의 마스터가 8써클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외에도 은거한 고써클의 마법사들이 몇 있을 수는 있겠지만, 7써클의 마법사조차도 수 십명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인간으로서는 평생 마법을 배워봐야 대부분 5써클이나 6써클에 이르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9써클을 이루었다는 몇 안되는 인간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인간으로 유희한 드래곤이었을 것이라고 엘프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제프의 소개로 왔다는 이 인간의 소녀가 나름대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어본 미리안느는 예상보다 대단한 능력과 엘프를 뛰어넘는 외모의 이 소녀에게 안그래도 가지고 있던 관심이 솟구쳤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어. 제프님의 명령이야.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얘는 확실하게 인간이라는 것 뿐이라구." 의외로 하툰이 나서서 뚝 잘라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이아나는 무뚝뚝한 하툰의 태도가 지금처럼 고마운 적은 없었다고 속으 로 생각하고 있었다. 좀 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미리안느는 예의를 갖추어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그 때까지 묵을 방을 안내할 엘프를 불러냈다. 육류가 전혀 없는 저녁 식탁에서 하툰은 들으란 듯이 투덜거렸으며, 래리와 툴레임도 불만의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나, 어 차피 정말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어찌되었던 육류가 없어서 속상하는 것임을 이미 아는 엘프들은 나름대로 일행을 열심히 접대했 다. 결국 식사보다는 술에 더 신경을 쏟던 드워프들은 차마 엘프들 앞에서 폭음을 하기는 멋쩍었는지, 하툰의 주도 하에 술 한 동이를 짊어지고 자신들에게 배당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다이아나도 혼자 남아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갔다. 다이아나는 잠을 자려고 해보았으나, 노력할수록 정신이 말똥거렸다. 엘프 마을은 끊임없이 시루스를 떠올리게 했고, 그렇게 떠 올린 시루스와의 추억은 항상 엔젤하우스의 마지막 모습으로 끝이났다. 다이아나의 소리죽인 울음소리와 함께 그 밤은 지나갔다. '휭하니 왔다가 갔다'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술을 제외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드워프들에게 엘프마을은 상당히 불편한 곳이 었다.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과 편하다는 것은 분명 차이가 나는 일이다. 하툰과 일행은 아침을 먹자마자 한 젊은 엘프 - 그래봐 야 누가 젊은지 늙은지 구분이 안갔다. 이 점이야 드워프도 매일 반이었지만 - 의 안내를 받아 인간의 마을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마을이다!!!" 나흘간의 힘겨운 여정 끝에 마을을 발견한 래리가 목청을 높였다. 툴레임도 덩달안 신이 나서 목청을 높였고, 체면상 아무 말 없는 하툰의 눈에서도 생기가 돌았다. 하툰은 일행들을 데리고 주점을 겸한 여관으로 들어섰다. "드워프들이다" "거봐. 이 마을이 그래서 유명한거라니까! 운이 좋았군." "에??? 여자도 끼어 있네???" 마을을 발견하자마자, 미리 양해를 구했던대로 다이아나는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었다. 3클래스에 해당하는 약한 환상마법으로 머 리카락과 눈 색깔을 갈색으로 보이도록 했다. 사실 얼굴도 바꾸고 싶었는데, 구체적인 영상을 떠올리기가 힘들어서 눈에 띄는 부분만 바뀌도록 한 것이다. 일행이 들어선 마을은 칼라임제국의 서쪽산맥과 맞닿은 곳이었다. 드워프들과의 거래로 인해 마을에는 드워프의 물건을 사기 위한 사 람들과 오가는 길에 이 보기 힘든 종족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들렀으므로,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드워프들이 해결해 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워낙 멋대로 몇 달에 한 번씩 예고없이 불쑥 방문했기 때문에, 운이 좋은 소수의 여행객들만이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하툰님 어서 오십시오" "잘 있었나?" "예. 덕분에요. 일단 맥주부터 드셔야죠? 드시는 동안에 연락을 해놓겠습니다" "고맙군" 갈색 머리카락에 드문드문 흰 서리가 내려 노년을 맞이하고 있는 주인은 퉁퉁한 몸매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우고 반갑게 이들을 맞았다. 그러면서도 연신 다이아나 쪽을 힐끔힐끔 쳐다 보았지만, 하툰이 도무지 소개시켜 줄 생각이 없는 듯 했고, 다 이아나 또한 뒤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나중을 기약하면서 얼른 점원에게 눈짓을 했다. 주점 중앙의 원탁의 테이블로 이들을 안내 한 점원은 앉기가 무섭게 엄청난 크기의 맥주통과 잔을 가져다가 일행의 탁자에 차려 놓았다. 세 명의 드워프는 눈을 빛내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특별히 시키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푸짐한 육류 요리가 나오자, 신이나서 먹어대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도 이들만큼은 아니였지만, 이젠 익숙해진 맥주와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캬, 이 맛이지! 인간들이 딴 건 몰라도 맥주 하나는 잘 만든다니까!" "그러게 과일주도 좋지만, 역시 술 하면 맥주 아니겠어?" "이놈들아 좀 천천히 먹어라. 니들만 먹냐?" "아, 하툰님도 빨리 드시면 될 것 가지고 뭘 그러세요?" 고기를 뜯는 한 편 맥주를 마시면서도 드워프들의 입은 떠들 여유가 있다. 이 특이한 식사광경을 주점의 사람들은 넋놓고 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조금씩 아주 조용히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이 주점 중앙에 마련된 식탁에 안내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주인은 이들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잘 보이라는 뜻으로 이 중앙의 식탁을 내어 준 것이다. 아마도 저 바깥에서는 '보기 드문 드워프'를 이용한 호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다이아나는 이러한 상술을 깨닫고 약간 기분이 상했다. 하툰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 때 주변을 힐끗거리면서 불편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이아나를 눈치챈 하툰이 여전히 먹고 마시면서도 다이아나의 의문에 대답을 했다. "쟤들이 우릴 보고 있지? 그거야 당연할꺼야. 어차피 인간들이란 드문 것에 호기심이 많거든. 덕분에 우린 여기 공짜로 머물고 공짜로 마시고 먹는다구. 얄팍한 상술이지만, 서로 해 될 것이 없으니 신경쓰지 말어. 저래뵈도 이 집 주인은 꽤 괜찮은 인간이거든" "거 참 이상하지? 우리 마을에서 인간 보기 힘든 것도 사실인데 난 쟤네들 봐두 별루 재미두 없더만......!" "그러게 말야. 아무튼 인간이란 특이한 종족이야!" 하툰의 말에 이어 래리와 툴레임까지 전혀 불쾌해 하지 않는 눈치여서, 자신이 속한 종족들의 약삭빠른 상술에 미안하고 불편한 느낌이 상당히 누그러졌다. "저기.. 그런데 술과 식량은 어떻게 가져가나요?" 아무리 마법배낭이 있다고 해도 가져가야 할 물품의 양이 너무 엄청났다. "아, 그건 말이지 여기서 알아서 해줘" 뭔 걱정이냐는 듯이 단순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네?" "마법 있잖아 마법! 그걸로 알아서 해준다고." 무슨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지만, 다이아나는 이들의 거래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경량화 마법 등은 한계가 있었고, 이런 경우에는 아공간을 사용하거나 물건을 이동시켜야 했는데, 마법진을 사용한다고 해도 최소한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할 터였다. 이런 외곽지역에 그런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드워프들과의 거래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반증이 되었다. 다이아나의 이와 같은 예측은 틀리지 않아서 저녁내내 맥주를 마시고도 자신들의 방으로 배달시키는 드워프들과 헤어져 자신의 방에서 밤을 지내고 나온 다음 날 아침 일행을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 만약 써 놓은 것을 두고 갔다가 울산에서 피씨방이라도 잡고 들어섰는데, 써 놓은 분량이 아까울 수도 있겠다 싶어서 결국 비축분을 모두 정리해 올립니다. 4시 반에는 나가야 할 것 같네요 ^^; 노력은 해 보겠지만, 외부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고 해서 일단 잠시 중단될 가능성이 큽니다. 수요일에 돌아오니까, 운이 좋으면 그 날 밤에 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다들 즐거운 한 주 되시고, 그 때 뵙지요. 참고로 코맨에 대해 답변을 해드리려고 해도 워낙 상태가 상태인지라 쉽지 않았어요 일단 올라오는 코맨은 빼놓지 않고 앞의 것까지 모두 보고는 있습니다. 글도 올리기 쉽지 않은 터여서, 답변을 못드리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오류 중에 쉽지 않은 코맨과 추천을 해주시는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싫어" "도대체 왜 싫으시다는 겁니까?" "내가 싫다면 싫은 거지 왜가 도대체 왜 필요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지라도 말씀해 보십시오" 툴레인과 래리는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로 자꾸만 자신 쪽으로 눈길을 보내는 하툰의 말상대 때문에 상당히 불편해 하고 있었다. 의외로 아침 일찍 이들을 찾아온 사람은 원래 만나야 할 상단의 인물이 아니라 영주가 초대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사람이었다. 하툰은 처음부터 마지 못해 간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툴툴거리면서 일행을 이끌고 영주의 성에 들어왔다. 다이아나는 상당한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했던 이 성의 집사가 바로 지금 눈 앞에서 하툰과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저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로 딱딱한 예의를 지키던 영주의 집사라는 사람은 일단 자신의 목적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하툰과 대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하툰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지난번에 하툰님께서 그러셨지요. 얼굴도 못 본 사람을 위해 무기를 만들어 줄 수는 없다구요" "그랬지!" "그래서, 우리 도련님께서 지금 하툰님 앞에 서 계시구요!" "그런건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여태까지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이번에 영주님께서 백작의 작위를 받은 기념으로 가보가 될 만한 검을 하툰님께 부탁 드린다구요. 검을 사용할 분은 재작년에 수도의 국립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신 우리 도 련님이시니까, 하툰님께 검을 부탁드리기 위해 지금 자리를 마련한 것 아닙니까?" "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우리 영주님과 이렇게 직접 나오신 도련님 성의를 봐서라도 하툰님께서 검을 하나 만들어 주십사고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건 싫다고 했잖아" "도대체 왜요?" 영주의 아들이라는 젊은 남자는 친구로 보이는 또래의 남자 하나와 이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하툰이 싫다는 의사를 밝힐 때마다 영주의 아들 테이보스의 얼굴은 조금씩 구겨져 가고 있었다. 테이보스의 친구는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람쥐 챗바퀴 돌 듯 하는 한 인간과 한 드워프의 치열한 설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쯧쯧. 직접 나와 있어서 내가 솔직히 말 안 한 것인데, 네가 그렇게 다그치니깐 별 수 없군. 저 인간에게 내 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 한 마디로 마음에 안 든다 이 말이야!" 테이보스를 손가락질하면서 한 점의 배려도 없이 하툰이 내뱉은 말이었다. 급작스러운 이 말로 인해 집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고, 테이보스는 당장이라도 차고 있는 칼을 들어 하툰에게 내려 치고 싶은 표정이었다. 두 인간들의 반응이야 어떻든 일단 열린 하툰의 입은 칼날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뭐가 마음에 안드냐고 물어보면 대답 못할 줄 알아? 일단 실력이 마음에 안 들어. 우리 드워프에게 검을 부탁할 정도라면 최소한 소드마스터나 그에 버금가는 실력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저 녀석은 아직 한참 멀었단 말야. 그리고, 인간성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거지. 검을 부탁하는 장본인 주제에 집사를 앞에 내세우고 뒤에 물러서 있는 꼴이라니… 실력이 되도 안 줄 판인데, 실력도 안되니 만들기 싫다는데 왜?" "어…. 어떻게 그런 말을…. " "흠.. 저기 그 옆에 있는 인간이면 실력만 보면 좀 가망성이 있겠군. 엥? 거기 자네! 그 칼 좀 가져와보게!" 훈트는 테이보스의 옆에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구경을 하던 한 젊은이를 지목하자, 테이보스의 얼굴에 질투와 시기의 감 정이 문득 스쳐갔다. 훈트는 그런 테이보스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젊은이가 차고 있던 검을 살펴 보고 있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좋은 검이야. 거기에 실력도 상당해 보이는군" "그리 대단치는 않습니다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이 상황에서 저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넙죽 한다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바로 눈 앞에서 친구이자 집 주인의 아들이 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당했는데, 자신에 대하여 좋게 말한다고 싱글거릴 수 있다는 것은 눈치가 없거나, 뻔뻔스럽거나,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서일 것이다. 이 사람은 마지막의 경우였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테이보스가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역시나'하는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영주의 집사라는 사람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말했다. "그간 우리 영주님과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훈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꾸했다. "그간의 정리를 생각한다면 나한테 뭐 부탁할 생각 말고 니들이 선물을 줘도 모자라는 것 아니야? 쯧쯧, 이번 영주는 어려서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들더라니만, 결국 백작이 된 것을 보니 꽤나 많이 갖다 바쳤겠군. 어차피 다 그게 우리 드워프들이 이 마을과 거래를 하기 때문인 줄 내가 모를 것 같나? 흥! 전대 영주까지는 인간 치고는 꽤 괜찮았는데, 영 글렀군. 할 말 다 했으면 우린 이만 가겠네" 결국 가까스로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한 테이보스가 앞으로 나섰다. "이 무례한….. 감히 아버님까지 모욕하다니……!" "우습군, 네 조부와 증조부, 심지어 그 윗대의 인간들도 나는 이름으로 불렀어. 그들도 내게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구." 훈트는 콧방귀를 끼면서 시덥잖다는 듯이 말했고, 테이보스는 당장이라도 허리의 칼을 빼어 훈트를 내려칠 듯 했다. "테이, 그만하게. 드워프종족은 인간보다 열 배 이상의 수명을 지닌 종족이야. 그들에게 우리 인간의 예의를 강요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네" 친구로 보이는 젊은이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테이보스를 말리고 나섰다. 애칭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둘은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안 그래도 모처럼 놀러 온 귀한 신분의 친구에게 망신당하는 꼴을 보인 셈이라, 더욱 마음이 상했던 테이보스는 이 자리에 리카르도와 함께 참석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는 하나 테이보스로서는 리카르도의 말을 정면으로 거역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나라의 장래의 군주가 될 인물이었으므로. 리카르도의 검은 대대로 황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검이었다. 실력으로도 리카르도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검이 항상 부러웠던 테이보스는 그의 눈 앞에서 드워프의 검을 약속받음으로써,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얄밉기 그지 없는 드워프는 오히려 실컷 망신만 주었고, 자신은 친구의 만류로 인해 분풀이도 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한편 인간들의 속성에 대하여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훈트는 자신이 칭찬했던 젊은이가 허영심 가득해 보 이는 이 영주의 아들보다 높은 지위의 인물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다이아나는 훈트의 편을 들고 나선 특이한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유자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한창 열심히 검을 수련하는 중인 자신이 보기에도 리카르도라는 청년의 기도는 상당했던 것이다. 실상, 에디우스와 카이젠을 제외하고 그만한 실력을 가진 이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문득 리카르도의 시선이 다이아나에게 머물렀다가 살짝 이채를 발했다. 다이아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으나, 이미 둘의 시선이 부딪힌 후의 일이었다. "저 분은....?" 세 명의 드워프와 일행인 여자는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을 슬쩍 내려 얼굴의 형태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결정권이 훈트에게 있었던 만큼 그의 일행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던 - 실상은 거의 무시했던 - 집사와 테이보스의 시 선도 한 곳으로 모아졌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다이아나는 어색한 기분이 들어 도움을 요청하듯이 훈트를 바라보았다. "훔.. 인간 여자이지만, 우리의 친구지." 훈트가 다이아나를 가리키며 한 마디를 툭 던지는 바람에 다이아나도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가능한한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표적을 잃은 화살은 가끔 눈을 잃기도 한다. 분풀이 할 상대를 찾고 있었던 테이보스는 성을 소개하지 않는 여자 즉, 평민여자를 보자, 얼른 말 끝을 그녀에게 돌렸다. "흥! 그렇게 대단하신 드워프들의 친구라면 실력이 대단하겠군. 그리고 보니 저 여자의 검도 상당히 좋군. 드워 프의 선물인가? "아닙니다. 이건 제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흥 그래? 실력에 비해 과한 검을 가지고 있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으면서 시비를 거는 테이보스의 태도에 발끈하고 나선 것은 오히려 래리와 툴레임이었다. 사실 그들의 실력이 다이아나에게 못미쳤으므로, 다이아나의 실력을 비웃은 것은 자신들 보고 형편없다고 하는 것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다이아나가 마음 먹으면 너 정도는 충분히 거꾸러뜨릴 수 있다구!" "암, 그렇고 말고! 아무나 드워프의 친구가 되는 줄 아나?" 실상, 애시당초 다이아나의 실력과 그들의 관계는 아무 상관 없이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가장 당황한 것은 다이아나 본임이었음이 당연했고,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것이나 다름없어져 버린 리카르도도 졸지에 피해를 준 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테이보스만큼은 달랐다. 젊은 드워프들의 간섭은 화풀이할 명분을 확실하게 제공해 준 셈이었으니까. "호, 그래? 드워프 종족이 거짓말이나 하진 않겠지? 나를 충분히 거꾸러뜨릴 수 있는 실력이라~! 궁금하군! 그리고,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면, 나의 검도 섭섭해 하겠지. 이봐, 네 친구들에 말에 책임을 지라고! 나를 이기면 여태까지의 무례는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지. 어떠냐?" 테이보스의 말은 그와 겨루어야 하며, 이기지 못한다면 응분의 보복이 있을 것을 예고하는 협박과 다름이 없었다. 다이아나가 결정을 못 내리고 약간 지체하고 있을 때, 다시 나선 것은 리카르도였다. "이보게, 그렇다고 이런 일로 결투를 한다는 건......" "자네도 들었지 않나? 검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세. 하지만, 저 드워프들의 말은 나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 없어! 지금 자네가 내게 명예를 버리라고 할 셈인가?" 의외로 강력하게 나오는 테이보스의 태도에 리카르도는 속으로는 그 좁은 마음에 상당한 혐오감이 일었으나, 일단 확실한 명분을 건 셈이라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왜? 겁이나나?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드워프들이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잘못을 빌고, 내게 네 검을 바친다면 한 번 쯤 용서해 줄 수도 있지. 알겠지만, 검엔 눈이 달려있지 않으니까" 이미 탐욕이 얼굴에 드러나 있는 테이보스였다. 처음엔 주시하지 않았던 여자의 검이 상당한 보검이라는 것을 눈치챈 데다가, 드워프들에게 화풀이를 하면 뒷탈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평민 여자 한 명을 결투에서 해친다고 자신에게 뭐라 할 수 없을 것 이라는 계산까지 이미 끝난 터였다. 다이아나는 이러한 테이보스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는 테이보스의 태도가 불쾌했고,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 대로 솔직히 행동하기로 날마다 다짐을 거듭 하던 터였다. 실제로 인간을 상대로 공격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 내키지 않는 대상에게 확인할 기회도 될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훈트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결단을 내렸다. "부족하지만 그럼 결투에 응하겠습니다." 테이보스는 다이아나가 결투에 응하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드워프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분한 판에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자신의 확실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투를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살기로 이어져, 그는 적어도 이 여자의 팔 한 쪽 정도는 잘라 놓아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잔인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미 선입관에 빠져 여자의 실력을 가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고, 오직 스스로의 분노에 도취되어 있었다. 결국 이들은 성의 뒤쪽에 있는 기사들의 수련장으로 향했다. 테이보스의 눈빛에서 살기를 감지한 리카르도는 이동하면서 이번에는 다이아나를 설득해 보려고 했다. 앞장을 서서 걸어나가는 테이보스와 그 뒤를 여유있게 따르는 세 드워프의 뒤로 조용히 다이아나가 맨 뒤에서 따라갈 때, 슬쩍 옆으로 가서 미안한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결투의 포기를 슬쩍 권유한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지금이라도 결투는 그만두심이 어떻겠습니까?" 다이아나는 이 일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젊은 남자의 짙은 녹색의 눈에서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걱정을 볼 수 있었다. "걱정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저 분을 말릴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난 듯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드워프의 친구로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군요. 그럼......" 조용히 대답하고 일행의 뒤를 좇는 다이아나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리카르도는 허겁지겁 뒤를 쫓아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이들이 결투를 하려고 한 장소는 영주에게 속한 기사들이 수련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결투를 하기 위해 기사들에게 자리를 마련할 것을 명하자, 수련을 하던 기사들 또한 호기심에 자리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남았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문득 시선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머리를 틀어 올려 핀을 꽂아 얼굴을 드러냈다. 가려졌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여기 저기서 탄성이 울려퍼졌다. '뭐야? 상당한 미인이잖아? 흠.. 그럼, 팔을 자르는 건 고려해 봐야겠군. 팔 없는 계집을 안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까.. 크크크~!' 테이보스는 평범한 색의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이 상당한 미모의 여인임을 알아채자, 탐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머리속은 이미 음탕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두 눈은 다이아나의 온 몸을 핥듯이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에 대한 한 점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다. "얼굴로 드워프들의 친구가 된 것인가? 드워프들도 미인을 좋아하나보군. 이봐, 내가 이기면 드워프들에게 하던 '봉사'를 내게도 해 주는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어!" 결코 명예를 위한 결투에서 기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한 자신의 '친구'라고 여기던 남자를 다시 판단하고 있었다. 늘상 그의 앞에서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던 테이보스의 행실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의 얼굴에는 그런 그에 대한 실망감과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었다.이는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 있던 기사들도 다를 바 아니어서, 자신 들이 모시는 영주의 후계자이며, 차기에 자신들의 주군이 될 테이보스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그들의 표정에 비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마치 이미 제 것이라도 된 양, 음흉한 눈길을 보내면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오는 남자를 보자, 약간 남아 있던 망설임 마저도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자,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이 나라의 황태자이신 리카르도님께서 이 자리의 참관인 자격으로 공정 성을 확인해 주실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집사의 말로 인해 리카르도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바로 쪽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여행을 떠났던 칼라임의 황태자였던 것이다. 여행 중에 모처럼 친구 집에 들렀던 그와 다이아나의 우연한 만남은 이렇게 막을 올렸다. 다이아나와 테이브론은 검을 빼 들고 마주 섰다. 의외로 다이아나의 자세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 챈 테이브론은 속으로 약간 움찔했으나, 평민의 여자가 검을 배워봐야,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상위의 수준에 속하던 자신의 실력을 넘어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이아나를 얕잡아 본 그는 빨리 승패를 내기 위해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챙~!" 무서운 기세로 날아든 검에 구경꾼들은 다이아나의 패배를 예감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떠올렸고, 검을 휘두른 본인도 단숨에 끝낼 수 있다는 미소가 떠올랐으나, 강한 기세로 날아든 검은 다이아나가 살짝 내지른 검에 맑은 소리와 함께 기세를 잃고 검로가 뒤틀렸다. '일단 여자인 너는 마나를 싣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검을 흘리는 것이 좋아!' 늘상 에디우스가 대련하면서 주의를 주었던 대로 다이아나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압박해 오는 테이보스의 검을 충실하게 흘려내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 수록 테이보스의 얼굴에는 경악감과 함께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실제로 테이보스의 실력은 다이아나보다 약간 쳐지는 정도였으나, 처음부터 진지하게 결투에 임한 다이아나와 상대를 얕보고 덤볐다가 낭패스러운 마음에 조급함만 더해진 테이보스의 결투는 이미 결과를 정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제길! 도대체 뭐야 이 여자는?' 테이보스는 초조했다. 당연히 자신이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해서 수련장의 기사들에게도 특별히 나가라고 명하지 않았다. 지금 이 결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장차 자신이 섬겨야 할 황태자와 자신의 충복이 되어야 할 기사들이었고 이들의 앞에서 패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마음과 달리 오히려 다이아나의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 로움을 더하고 있었다. 그의 검을 낱낱이 받아 흘려내거나 아주 간단한 스탭으로 피해내었고, 공격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해 오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상대방의 초조감이 전해져 옮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수 차례 검의 부딪힘을 통하여 테이보스의 검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아나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람의 몸에 검을 찌르 려 하니, 망설임이 다시 생겨났다. 하여, 다이아나는 상대의 몸에 검상을 입힐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의 결투는 상당 시간 동안 대등하게 계속되었다. 테이보스는 냉정함을 잃었기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 다이아나는 아직도 공격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렇다 할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처음에는 다이아나의 드러난 얼굴이 상당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놀랐고, 그 얼굴에 음탕한 욕망을 드러내는 테이 보스에 대하여 실망했다. 둘의 결투가 시작되자 이번에는 침착성을 잃고 덤비는 테이보스의 검을 보고 실망했고, 의외로 상당 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다이아나에 대하여 호감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다이아나는 확실히 기회를 잡고도 테이보스를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는 다이아나가 테이보스를 봐 주고 있는 것으 로 판단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더 경과되자, 다이아나는 어느 정도 망설임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테이보스 또한 스스로 냉정을 잃은 결과가 현상태임을 깨닫고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다하 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다이아나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테이보스가 휘두른 칼끝을 살짝 피한 다이아나는 칼의 면 부분으로 강하게 손목을 노리고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손목에 통증을 느낀 테이보스는 검을 놓쳤고, 다음 순간 다이아나 의 검 끝은 그의 목 바로 아래에 닿아 있었다. "크으~!" 테이보스가 분한 신음소리를 내며 동작을 멈추자, 다이아나는 결투를 끝내고자 자신의 검을 거두어 들였다. 다이아나가 검집에 검을 꽂고 돌아서려 할 때, 테이보스가 맨 손으로 다이아나에게 덤벼 들었다. 그는 분한 마음에 어차피 힘으로야 상대가 안 될 것으로 보이는 다이아나에게 육탄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리카르도와 다른 이들은 테이보스의 속셈을 알아채고 그 비겁함에 경악했으나, 이미 테이보스는 다이아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검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다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테이보스를 보았다. 검을 마주하면서 다이아나는 힘을 사용하 기보다는 주로 흘리는 기술과 빠름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테이보스 뿐만이 아니라, 둘의 결투를 지켜 보던 모든 이들도 다 이아나가 테이보스에게 당할 일을 예감하면서 그가 온몸을 던지면서 다이아나에게 주먹을 뻗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다이아는 살짝 몸을 비켜내어 그의 주먹을 피하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그의 어깨 아래로 파고 들었다. 상당한 안력을 가진 리카르도만이 다이아나의 발이 슬쩍 테이보스의 정강이를 치는 것을 보았다. 다이아나는 그의 균형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어깨와 손을 사용하여 그들 슬쩍 뒤로 넘겼다. 유도의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달려오는 기세가 컸던 만 큼 테이보스는 자신보다 훨씬 갸냘픈 체구의 다이아나에 의해 멀찌감치 패대기 쳐진 꼴이 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에는 이미 리카르도가 튀어 나와 둘 사이를 막아서 있었다. "자네가 졌네!" 서릿발같은 어조의 선언이 뒤를 이었다. 테이보스의 뜻밖의 패배와 뒤이은 비겁한 행동에 정적이 감돌던 수련장에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다이아나가 승리의 미소를 띄우면서 누구에랄 것도 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 자 환호성은 한층 높아졌다. 테이보스는 모멸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신의 부하가 될 기사들도, 여태까지 공들여 좋은 이미지를 쌓아왔던 황태자도 자신의 얼굴을 외면 하고 있었다.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테이보스를 뒤로 하고 다이아나는 하툰과 일행을 재촉해서 영주의 저택을 빠져나왔 다. 호감을 나타내는 많은 시선도, 증오로 일그러진 테이보스의 시선도 상당히 거북했던 탓이다. 래리와 툴레임은 재 촉에 못이겨 짧은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신나게 영주의 아들에 대한 험담을 들으란 듯이 늘어놓았고, 하툰 또한 동감한 다는 표정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으나, 다이아나의 내심을 눈치챈 듯, 별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어......" 결투 이후의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도망치듯이 저택을 빠져나와 여관 근처에 거의 다달았을 때, 어느 틈엔지 이들을 뒤쫓아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모를 때는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미 신분이 밝혀진 후여서 인간인 다이아나로서는 당연히 예를 갖춘 것이다. 리카 르도는 자신이 부른 상대가 갑자기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자,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금방 여유를 되찾고 용건을 말했다. "굳이 예를 갖추실 것은 없습니다. 신분을 감추고 돌아다니는 처지이기도 하고, 드워프 분들의 친구시라면 인간의 신분에 따 른 예절 따위엔 익숙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리카르도야 어떤 말을 하건 다이아나의 태도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리카르도는 한숨을 내쉬면서 뒤따라온 목적을 밝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체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을 겪으시진 않았을 텐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태자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소탈하면서 겸손한 말이었다. 전혀 사심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다이아나도 어느 정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는 미소를 띄우며 개념치 않는다는 뜻을 전달했다. 다이아나에게 사과를 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훈트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속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훈트는 인간들이 말하는 '황태자'라는 지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상하의 신분을 정해놓고 사는 인간 들 사이에서 황태자라는 지위를 가진 이가 자신 앞에 가식없는 겸손함으로 사과를 하자, 훈트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드러났다. "어차피 우리 드워프에게야 인간의 신분은 상관 없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리카르도가 래리와 툴레임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 둘 또한 흔쾌한 웃음을 떠올리면서 동감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용건 을 끝내고도 머뭇거리는 리카르도의 시선이 다시 다이아나에게 향해 있음을 포착한 훈트는 짐작이 간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는 그가 고대해 마지 않던 초대의 말을 던졌다. "자네, 혹시 맥주 좋아하나?" 기회를 잡으려던 리카르도가 부정의 대답을 했을 리는 없다. 제국의 황태자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훈트는 그를 잡아 끌고 여관으로 가서 신나게 술을 권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리카르도는 상당히 술을 잘 마셨고, 세 드워프로부터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여행 중에 친구집이라 하여 저택에 있었으나, 이미 테이보스의 진실한 모습을 목격한 리카르도는 더 이상 영주의 저택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결국 리카르도도 드워프들이 묵는 여관으로 옮겨왔고, 대낮부터 술을 시작한 드워 프들은 상단과의 약속을 다음 날로 미루고는 오밤중까지 신나게 술을 퍼마셨다. 드워프들에게 붙잡혀 맥주를 마시면서, 리카르도는 다이아나라는 여인에게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어느틈엔지 올 렸던 머리를 내려 얼굴을 가린 것이 아쉬웠으나,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드워프들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따로 말을 걸 시간이 없었다. 그런 리카르도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다이아나는 가끔씩 드워프들의 농담에 맞장구를 치면서 일행 중 가장 조용하게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드워프들과 지낸 몇 달 동안 약하지 않던 다이아나의 주량은 더욱 늘어 있었던 것이다. 훈트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다음 날의 거래는 훈트와 다이아나가 할 것 아니냐면서 거침없이 술을 퍼붓던 두 명의 드워프는 당연한 결과로 초저녁부터 고꾸라졌다. 다이아나는 이제 어느 정도 주량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약간의 취기가 있을 정도였고, 훈트는 젊은 드워프들이 부러웠지만, 다음 날 일정을 생각하여 아쉬운대로 적당히 술을 마셨다. 드워프들 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기회를 노리고 있던 리카르도는 두 젊은 드워프들이 쓰러지자, 종업원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방으로 날라다 놓고 다시 내려왔다. "훈트님은?" "먼저 올라가셨어요" 술을 앞에 놓고 마음껏 마시지 못한 때문인지, 투덜거리던 훈트는 그 사이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다이아나는 차마 아무 말 없이 갈 수 없어서 리카르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리카르도는 금방이라도 일어서 방으로 갈 눈치인 다이아나를 붙잡기 위해 그녀가 흥미 있을 만한 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저, 검법이 상당히 특이하시던데... " "검을 상당히 잘 다루는 친구가 가르쳐 주었답니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검술을 은근히 칭찬하는 말을 듣자 문득 에디우스가 떠올라, 씁쓸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체술도 그 분이....?" "그건 스승님이 따로 계셨습니다" 묻는 질문마다 그리움을 자아내는 것 뿐이다. 리카르도야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에디우스에 이어 강사범을 그리고 이내 만나지 못하게 된 친인들을 떠올린 다이아나의 표정은 상당히 우울해져 있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러한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 리카르도는 자신의 질문에 짤막한 답변으로 일관하는 다이아나와의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실력이 참 뛰어나십니다. 아마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몇 없을 듯 하더군요" 리카르도는 황태자이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검술을 하는 여성들은 외모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보다는 그들의 실력을 칭찬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미 과거의 영상 속에서 그리움으로 가득했기에 그런 칭찬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낯선 이에게 그러한 감정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터라 마지못해 대꾸하는 다이아나의 말은 좀 싸늘했다. "리카르도님이야 말로, 미약한 제 능력으로 일견하기에도 상당한 성취가 있어 보이십니다만......" "그저 남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운이 좋았지요" "글쎄요. 환경을 갖추고 운이 좋다고 누구나가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답지 않게 약간 심사가 꼬인 듯한 말이 되어 버렸다. 황태자가 내뿜는 기운과 마나의 기운을 살펴볼 때, 그녀는 그가 소드마스터임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과한 칭찬을 하는 듯 하자, 우울한 심점의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쌀쌀하게 내뱉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살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럼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위층으로 사라지는 다이아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쏠리는 자신의 호기심과 다른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태도가 기폭제가 되어 심란해졌다. 그러나, 결국 일행이 모두 떠난 테이블을 혼자 지킬 생각은 없어서, 새로 잡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 안그래도 엉망인 바이오리듬이 더 이상해져 버렸습니다. 현재시점 알테는 무지무지 졸리거든요. 자는 데 성공하면 안들어올 것이고, 실패하면 다시 올릴 수도 있고......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_-;;; 오늘의 퀴즈 알테는 프리랜서입니다. 도대체 뭘 하는 인간일까요? -.-;; 아무도. 안궁금하면.. 할 수 없죠 머 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알트 상단 소속 마법사인 에펜하임은 상당히 심기가 좋지 않았다. 드워프들과의 거래는 상단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일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5써클 마스터인 그가 단순한 아티팩트의 사용을 위하여 이 구석의 영지까지 오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상단으로 연락이 왔을 때, 적당한 마법사가 없다는 이유로 마법진을 이용하여 오긴 했지만, 상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정작 거래 대상인 드워프들은 영주가 불러내어 가버렸고, 돌아올 시간이 지나서도 연락이 없어 사람을 보내어 보니 마음대로 다음 날로 약속날짜를 옮겨 버렸다고 한다. 에펜하임의 마음을 불쾌하게 한 것은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드 워프들에게 대륙 4대 상단의 하나인 알트 상단의 오늘을 만들었다는 기본 규칙, 즉 '고객은 왕이다'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불쾌 함조차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상당한 대우를 보장받고 있기에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도 안하는 그였으나, 감히 5써클 마스터를 이토록 무시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상처입은 자존심을 혼자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뻔뻔스러운 드워프는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미안한 기색 없이 상단의 지점을 찾아왔다. 세 명의 드워프들 중 짐을 매고 온 두 명은 술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어서 전 날의 약속이 미루어진 이유를 짐작케 했으며, 이는 에펜하임의 불쾌감을 증대시켰다. 나이든 드워프는 에펜하임은 본채 만채 하고 그 두 명의 드워프에게 잔소리를 퍼부어댔고, 역시 그 두 드워프들도 에펜하임은 무시하고 중얼거리면서 불평을 하더니 인사도 없이 짐만 달랑 놓고는 사라졌다. 그제서야 에펜하임은 뒤 쪽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여성과 흔치 않은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훈트님 어서오십시오" 지점의 책임자인 알베르트가 얼굴 만면에 전형적인 상인의 미소를 머금고 먼저 인사를 건내왔다. 그 옆에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알!" "여전하시군요! 그런데, 저 분들도 일행이십니까?" 알베르트는 근 5년간의 경험으로 훈트와 어느 정도 안면을 쌓고 있었다. 드워프의 대화법에 익숙한 그는 망설임 없이 뒤쪽에 서 있는 두 명의 남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응. 이 아이는 요즘 우리 마을에 신세지고 있는 마법사고, 저쪽은 어제 만나서 잠시 동행하게 되었네" 훈트의 '마법사'라는 말에 시큰둥한 표정의 에펜하임이 노려보듯이 다이아나를 살피기 시작했고, 알베르트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떠올랐다. 물론 누구보다 놀란 것은 떼를 쓰듯이 하여 일행이 된 리카르도였고, 다이아나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떠올렸을 뿐이다. "다이아나, 이리 와서 인사해라" 훈트의 불림에 앞으로 나선 다이아나는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래봐야 이름만 말했을 뿐이지만. "일단 물건은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이고, 대금은 예전처럼 물건으로 지급하고 남는 것은 예치해 두겠네. 그리고 그 아티펙트인지 하는 것의 사용법은 이 애에게 가르쳐 주게나. 그럴려구 데려온 것이니" 사실 6써클 마스터인 다이아나는 시도해 보지 않았을 뿐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다. 훈트의 말에 따라 알베르트는 다이아나를 에펜하임에게 소개시켰고, 마나를 다루는 에펜하임은 다이아나의 얼굴 주위를 감도는 마법의 기운을 감지했다. "환상마법인가?" 예리한 눈초리로 다이아나를 살피던 에펜하임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다이아나는 그가 눈치를 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급적이면 거론하지 않았으면 했던 자신의 희망사항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잠시 망설였다. "...... 네. 조금 사정이 있어서" "흠... 그런데 이상하군. 처음엔 얼굴을 바꾼 줄 알았는데, 눈과 머리색만 바꾼건가?" 5써클 마스터다운 판단력이었다. 처음에 얼굴의 환상마법을 감지한 에펜하임은 다이아나가 상당한 나이를 먹은 마법사일 것으로 생각했다. 여마법사의 경우 나이 든 얼굴을 슬쩍 손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서는 눈만, 그리고 머리카락 부분에서만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또한 그렇게 바꿔놓은 눈과 머리카락의 색이 모두 흔하디 흔한 갈색이라는 점이 흥미를 돋궜다. 환상마법을 얼굴에 거는경우 대부분 아름다운 색이나 모양을 선호하는데, 지극히 평범한 색으로 마법을 걸다니...... "... 네. 역시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제가 할 일은....?" 다이아나는 어차피 드러난 것에 대하여 변명을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화재가 계속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므로, 자신이 맡은 일만 얼른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네. 시동어는 "나의 공간을 열어라" 이고, 닫을 때는 "나의 공간을 닫아라"라고 말하면 되네. 이건 3회까지 쓸 수 있네. 그러니 중간에 쓸데 없이 자꾸 열거나 닫지는 말게" 투박한 모양의 반지 하나를 건네주면서 에펜하임은 아공간을 처음 보았을 것이 분명한 애송이 여마법사에게 주의를 주었다. 환상마법 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는 3써클 정도를 마스터하였을 것이다. 하긴, 그녀의 나이에 3써클이면 나쁘지 않은 성취였다. 에펜하임의 예측과 다르게 다이아나는 별 표정의 변화없이 반지를 건네 받았다. 보통 낮은 써클의 마법사들이 고써클의 마법을 보면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묻는다. 에펜하임은 이를 예측하고 있다가 오히려 너무 상대방의 반응이 덤덤하자, 오히려 맥이 풀려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이 의외로 깐깐한 훈트와 노련한 상인인 알베르트는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서로에게 유리한 거래를 위해 설전을 펼치고 있었다. 어차피 한 두 번의 관계가 아니어서인지, 둘의 흥정은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고, 다이아나는 적당한 곳에 아공간을 열어주기 위해 알베르트를 따라 나가 마법을 발현시켰다. 단순하다 못해 무성의한 시동어인 '나의 공간을 열어라'라고 말이 끝나자, 반지에서 마나의 유동이 생겼고,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아공간의 입구가 나타났다. 거래하는 물품의 양이 워낙 많았으므로, 물건들을 아공간에 쌓는 동안 훈트와 알베르트는 흥정할 때의 삭막한 태도를 벗어 던지고 그 간의 안 부와 사건들을 서로 떠들어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법사?' 훈트가 다이아나를 마법사로 소개하자, 리카르도는 상당히 놀랐다. 마법과 검술을 겸한다는 것은 누구나 욕심을 내면서도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른 바, '마검사'가 되기 위하여 공부한 이들이 마법과 검술 양쪽 중 어느 쪽도 대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분이다. 하여, '마검사'라면 웬만한 나라에서는 소드마스터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였다. 만일 정말 다이아나가 마법사이고 어느 정도의 마법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충분히 '마검사'로 불릴 수 있었다. 그 녀의 검술실력은 소드마스터에 거의 근접해 있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았는가? 이어지는 상단의 마법사의 말은 다이아나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증대시켰다. 눈과 머리카락의 색이 원래의 색이 아니라니! 상당히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윤곽을 칙칙한 갈색 - 갈색도 상당히 아름다울 수 있지만, 다이아나의 현재 모습은 정말 칙칙한 갈색이었다 - 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의 색이 환상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최소한 지금보다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동행을 요청했고, 드워프들과 친분을 쌓을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건만, 지금 다음 대의 통치자로서의 그의 예감은 눈 앞의 여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에펜하임의 쓸 데 없는 말로 인해 황태자의 시선이 자꾸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낀 다이아나는 아침의 일을 되새기면서,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고 있었다. "훈트님.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래리와 툴레임은 전날의 음주로 인해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인 이들은 모두 셋이었다. 간단한 아 침 - 물론 훈트의 것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 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에 뜬금없이 리카르도가 동행을 자청하고 나섰다. "왜?" 훈트다운 짤막한 질문이 답변을 대신했다. "드워프 분들과 사귀어 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여행을 하는 중이니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되구요" "정말 의도가 그 뿐인가?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 드워프들에게 무얼 바랄 꺼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네. 자네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하기 싫은 일을 하게끔 하지는 못할 테니까" 황제의 아들, 황태자를 앞에 놓고 감히 황제의 권위를 팍팍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훈트였으나, 리카르도는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럴 생각이 있다고 해도 허락 안하실 것을 뻔히 압니다.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써, 다 른 종족 분들을 조금 알고 싶어 드리는 부탁입니다" 일말의 불편함도 내비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을 내놓는 리카르도를 보는 훈트의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뭐, 한 명 더 는다구 별 일 날 것도 없지. 맘대로 하게나!" 흔쾌한 허락에 리카르도는 상당히 기뻐했고, 다이아나는 마을을 벗어나면 해제할 생각이던 환상마법을 어찌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아침에 이어, 결국 대충의 사실이 드러나 버리자, 다이아나는 어차피 알아챈 만큼 마을을 벗어나면 처음의 생각대로 마법을 해제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호기심이라는 것이 얼마 못 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자신은 지금 평민이고 황태자가 자기의 외모에 빠진다고 해도 스스로의 위치를 생각하면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터였다. 다이아나의 생각이 정리되는 동안 거래는 무사히 끝났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려는 눈치가 역력한 에펜하임을 간신히 피해서 다시 여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이 오후가 되어서이기도 하고, 전날 '거래'라는 이유로 마음껏 술을 마시지 못했다는 핑계도 있었기에 훈트는 당연하게 하루 더 머물고 다음 날 아침 떠난다고 선언하고는 아쉬웠던 술판을 재개했다. 어느 틈엔지 래리와 툴레임도 한자리씩 차지를 하고 앉았고,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드워프들이 하루 더 묵게 되자, 구경꾼들로 인해 상당한 매상을 올리게 된 여관 주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함박 피어나고 있었다. "되는 일이 없군!" 꽤 오래 단련한 듯 탄탄한 몸을 가진 젊은 남자가 웃으면 꽤 괜찮을 듯한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리고 찌푸리면서 잇새로 내뱉은 말이다. 테이보스는 드워프의 검을 가질 수 있다는 모처럼의 희망도 완전히 무산된 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 로 황태자 앞에서 추태를 보였기에 아버지에게 상당한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일련의 사실을 일러바친 놈이 누군지는 모 르지만, 꼭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황태자를 달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일언반구 없이 떠나버린 후였다. 어차피 신분을 숨기고 여행 중이었으니, 다른 영지로 갔을 것이라 예상한 그는 오히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치 명적인 상처를 입은 '우정'을 회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계산을 끝마쳤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망신을 준 망할 드워프들과 아직도 눈에 삼삼한 계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가 더 화급했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하나의 계획을 완성한 후 평민들의 옷을 구해 입은 후 저택에서 나와 어디론가로 향했다. 아주 단순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은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 에펜하임은 하루도 더 이 산골 영지에 틀어박힐 생각이 없었다. 여마법사에게 조금 관심이 있었지만, 뭘 좀 물어보려고 하면 얼른 말을 가로채서 방해는 놓는 능구렁이같은 드워프 때문에 이후엔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다. 결국 상당히 불쾌한 며칠을 보낸 이 프라이드 높은 마법사는 바로 본사로 귀환했다. "아무튼 그들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가진 종족이라고 해도 난 영 마음에 안들더라구!" 본사에 도착하자 마자 드워프라는 종족을 본 적이 없는 하급의 마법사와 상단 소속의 용병들이 몰려들었다. 에펜하임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하급 마법사들이 오늘 따라 참 이뻐보였다. 상처받은 자존심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상당한 과장을 섞어가면서 드워프라는 종족의 무식함과 무경우를 침을 튀겨가면서 한참을 떠 들어댔다. 감히 5써클의 마법사가 무언지도 모르는 '무식한 종족'이 되어버린 드워프들에 대한 자신의 험담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니 며칠간 나쁘던 기분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지, 웃기는 건 웬 애송이 여자 마법사를 하나 동행하구 있더라구" 화풀이에 가까운 험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그는 가장 하고 싶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길드에도 속하지 않고 드워프와 동행하던 상당히 재능있어 보이는 - 최소한 그 나이에 3써클이니까 - 여자 마법사가 이상하게도 눈과 머리색을 바꾸고 있어서 물어보려 했는데, 드워프의 방해공작으로 자세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내용의 새로운 이야기는 어느 새 다시 드워프에 대한 험담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은 어땠습니까?" 갑자기 상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금발의 용병이 질문을 던졌다. 에펜하임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열을 내어 묘사를 했다. "앞머리로 얼굴을 가려서 처음엔 잘 안보였는데, 아티펙트를 주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상당한 미인이더라구. 그런데 아무리 봐도 스무 살도 안 되 보였다니까. 도대체 누구한테 마법을 배웠는지 아주 궁금해지더군" 에펜하임이 신이 나서 더 떠들려는 순간 질문을 한 용병이 재차 물었다. "키는요? 큰 편이었나요?" "응, 여자 치고는 좀 컸지. 호리호리하고... 그리고 보니 꽤 좋은 검을 차고 있었어. 마법사가 검이라니, 호신용이라고 해도 좀 어울리지 않더군. 그래서 처음엔 나도 마법사로 안 보았었지" 만일 자신의 말을 연거푸 끊은 사람이 허접스러운 용병이었다면,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한 사람은 상당히 젊은 나이에도 엄청난 검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단의 상당히 고위급 인사와 선이 닿아 있다는 소문까지 도는 터였다. 상단 수뇌부에서 키운 후계자일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도는 터라 에펜하임은 그 용병의 질문에 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실력자랑 친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는 법이니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훈트의 경고가 먹혀들었는지, 다음 날 아침 일행은 꽤 이른 시간에 식사를 하고 출발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빈 배 낭 두 개와 식량 배낭 하나만을 가지고 가면 되었으므로, 래리와 툴레임이 티각거리면서 순서를 정하는 헤프닝이 있었지만 말이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다이아는 잠시 뒤로 쳐졌다. 리카르도는 그런 다이아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이아나가 무언가 중얼거리자 마법이 해제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헠~!' 드러난 다이아나의 모습에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그것은 드러난 다이아나의 머리카락의 색상이 너무나 특이하게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특이한 색상에서 연상되는 사람을 떠올린 탓이었다. 리카르도가 방랑벽이 있다고 한들 제국의 황태자이다. '성녀'의 인상착의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회자되는 머리색을 모른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밖으로 떠돈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중요한 정보는 남김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성녀?' 모든 것이 들어맞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성녀는 신성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마법이 가능하다고 했다. 성녀가 실종된 사건이 일어난 엔젤하우스에서 마법과 호신술을 가르쳤다는 것은 상당한 고급정보에 속했다. 리카르도는 후계수업으로 장기간 수련한 덕에 그런 의문점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이아나나 드워프들의 눈에는 그저 바뀐 외모에 놀라는 것으로 비추었을 뿐이다. 마음 깊은 곳에 생긴 의문점과 그에 대한 추측을 미리 드러낼 정도로 제국의 황태자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마법을 해제하자 자신에게 쏟아지는 리카르도의 시선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에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조금 처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고, 의외로 리카르도는 별 질문 없이 그런 다이아나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사흘 이상을 부지런히 걸어야 할 여정이었다. 가능하면 빨리 되돌아가려고 최선을 다한 일행이지만, 드문 드문 나무 사이를 비추던 햇살이 사그라지고 어두움이 뒤덮기 시작하자 숲에서의 야영을 준비했다. 어차피 엘프의 길을 아는 이는 없었기 때문에, 다이아나가 알람 마법으로 주위에 약한 경계를 형성하자 불침번 없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길이 있었다니......' 새로 받은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동료들을 이끌고 마을을 떠나는 드워프 일행의 뒤를 밟던 남자는 전혀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따라 가다가 '엘프의 길'을 발견하고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도중에 의뢰인에게 특별히 부탁받은 '표적'의 외모가 바뀌었을 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발각되었을까봐 상당히 놀랐으나, 다행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드워프들이라니...... 찜찜하긴 하지만, 증거를 모두 없애면 상관 없겠지.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굴까? 어차피 잘못 동행한 셈이나 운도 없이 죽어야 하게 생겼군' 모처럼만의 거액의 의뢰였기 때문에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의뢰인이 부탁한 것은 드워프들을 뒤탈없이 죽일 것과 여 자를 사로잡아다 줄 것, 두 가지 였다. 드워프들이 상당한 무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실력자만 뽑아서 임무길에 나선 것이다. 거기에 덤으로 신기한 숲 길을 하나 알아냈으니, 보너스 치고는 상당히 성과가 좋은 편이었다. 샤프라는 별칭으로 주로 불리는 사내는 적들의 전력보다 자신들의 전력이 훨씬 우세하다고 생각했으나, 일부러 밤이 늦을 때까지 기다렸다. 굳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적을 어렵게 맞아 싸울 필요는 없었다. 금상첨화로 '표적'들은 불침번도 없이 전 원이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움직여라!' 약속된 공격 신호를 보내자, 각자 맡은 구역으로 소리없이 흩어졌다. 그 순간, 고요하던 숲 속에 갑자기 새의 지저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가득찼다. '마법인가?'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보에 없었던 보라색 머리칼의 사내가 마법사일 것이다. 재빨리 판단을 내린 샤프는 마법사로 보이는 사내가 캐스팅을 하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고 판단하고는 잠을 깨어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 는 목표물을 향하여 몇 개의 단도를 날려보냈다. "챙! 챙! 챙!" 세 개의 단도가 순식간에 사내가 휘두른 칼에 맞아 땅으로 떨어졌다. 샤프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지금의 공격은 웬만한 검사도 막기 힘들 정도였는데, 마법사가 막아내다니? 다음 순간 샤프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이제 검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 사전 정보가 없었던 새로운 일행의 정체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은 임무의 실패를 의미했다. 단도를 막아낸 사내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검을 들고 샤프의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급히 동료들의 구원을 요청하려던 사내는 '엉터리 정보' 상으로는 불가능한 또 하나의 사건을 목격했다. "홀드" 드워프들에게 어느 정도 우위를 보이던 다섯 명의 동료들이 뒤쪽에서 나타난 여인의 마법에 의하여 자유를 박탈당했다. 샤프의 눈에 절망이 지나간 순간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선 보라색 머리의 사내의 검은 이미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사실 리카르도는 뒤를 따르는 기척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미 슬쩍 그 사실을 일행에게 알려 주 었고, 다이아나는 이에 맞추어 알람마법의 범위를 평소보다 훨씬 넓게 설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다이아나의 마법과 리카르도의 뛰어난 무력 덕에 복면을 한 6명의 암살자들을 별 무리 없이 생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죠?" 문제는 바로 암살자들의 처리방법이었다. 아무리 암살자라고는 해도 저항할 힘이 없는 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 다 이아나의 생각이었다. 거기다가 일행을 습격한 것은 분명히 전문적인 암살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죽일 경우 뒤따를 문제가 걱 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일에 그런대로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 황태자랑 암살이랑은 원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 리카르도가 처리를 하기로 했다. "퍽퍽퍽퍽딱퍽~!" 난 데 없이 숲 속의 공터에서는 무언가를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퍽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맞는 대상이 아주 딱딱한 것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짐승이나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낼만한 신음소리조차 나질 않았다. "저러다가 죽지는 않을까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이아나가 훈트에게 말을 걸었다. "알아서 할꺼야. 아직 부르지도 않는데 뭐~!" 훈트는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듯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으...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리카르도라고 불리는 눈 앞의 사내는 아예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암살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그 위에 재갈까지 물리고는 말 없이 검집으로 두들겨 패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암살자들이야 의뢰인을 알아내기 위한 고문에 대비한 훈련까지 받는 터여서 ,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아예 아무 질문도 없이 무조건 맞기를 무려 한 시간 여, 더 끔찍한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샤프마저도 제발 재갈만이라도 풀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치솟았다. 리카르도는 이러한 이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원래 인간이란 확실한 목적과 의무감이 있을 때 강해지는 법이다. 만일 이들에게 심문을 겸해서 고문을 했다면, 오히려 이들은 악에 받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처음부터 때리는 것만이 목표라면? 무작정 맞는 매는 알고 맞는 매보다 더 아프다. 처음에는 얼마간 때리다가 의뢰자에 대한 질문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암살자들도 점점 눈빛이 바뀌어 갔다. 이쯤해서 그만 두고 물어도 될 듯 했지만,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이 좋은 법이라고 생각한 리카르도는 다시 한 시간 여를 더 매 타작을 했다. 그는 다이아나와 드워프들을 의식해서 겉으로 피가 터지거나 하지 않을 정도, 뼈가 부러지지는 않을 정도의 타격을 고수했다. 결국 암살자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리카르도는 눈물 콧물을 쏟는 암살자 한 명으로부터 의뢰인에 대한 그다지 많지 않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럴 수가!"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아카데미에서는 상당히 너그럽고 괜찮은 친구로 보였는데......" 많지 않은 정보지만, 드워프들을 죽이고 다이아나를 끌고오라고 했으며, 그만한 돈을 지불할 사람이라면 영지에서 딱 한 명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테이보스가 옷만 평민의 옷을 입었을 뿐 외모를 딱히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정보로도 의뢰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의뢰인이 밝혀지자 가장 당황한 것은 리카르도였다. 처음에 암살자 중의 한 명이 자신에게 단검을 던졌을 때, 리카르도는 이들의 목표가 자신인 줄 알았다. 아무리 비밀리에 움직 인다고 해도 제국의 후계자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일부러 악역을 자청한 것인데, 그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하지요?" "아마 살려 두어도 다른 생각은 못할 것입니다. 제 신분을 밝힌다면."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의 내심을 눈치채고 그들을 살려낼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다. 아무리 드워프가 드나 들어서 번창했고 영주가 백작이 되었다지만, 수도와는 달리 큰 암살자 길드가 활약할 곳이 못되었다. 어차피 가장 큰 길드는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이런 하급의 길드가 황태자의 목숨을 노렸을 경우 결과는 너무나 확연한 것이었다. 만일 자신이 신분을 밝힐 경우에는 하나의 이득이 더 있었다. "너희가 몰랐을 것으로 생각한다만, 일단 너희 길드를 감시하도록 연락을 넣겠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의뢰자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물론입니다" 자신들이 노리던 이가 스스로 황태자임을 밝히자, 샤프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왜 몰라보았을까? 칼라임에서도 보기 힘든 보라색 머리에 짙은 녹색의 눈동자의 젊은 소드 마스터. 다른 증거가 또 필요할 리가 없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자신들을 놓아주기로 한 듯 했으나, 샤프의 일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감히 황태자의 암살을 정보도 없이 의뢰하여 길드를 몰살 위기에 몰아넣은 누군가에게 확실한 보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친절하게도 그 의뢰인이 아마도 영주의 아들일 것이라는 정보까지 주었다. 결국, 황태자의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에, 길드의 복수 차원을 넘어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영주의 아들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했다. 비록 작은 영지지만, 자신들이 몸 담고 있는 마을의 영주임은 분명했으므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황태자를 암살하려다 걸렸으니 그보다 더 한 일이라 해도 못한다고 발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워프들과 함께 있었다?!!' 에펜하임에게 여자 마법사의 인상착의를 확인한 금발의 용병은 상단 본부에 무언가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본부에서 용병에게 마법진 사용을 허가한다는 전언이 내려왔고, 금발의 용병은 마법진을 통하여 칼라임 외곽의 마을로 이동했다. 알트상단의 숨겨진 후계자로 알려진 금발의 용병은 동료들 사이에서 에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올 때 걸린 시간으로 미루어 보아, 엘프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길의 야영은 오늘 밤이 끝일 것이다. 그 사이 젊은 드워프들과 어느 정도 친분을 가지게 된 리카르도는 불을 피울 재료를 찾아 래리와 함께 야영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저기요 훈트님" "응? 왜?" "리카르도라는 분이 엘프 마을에 가도 별 문제가 없을까요?" "흠... 오늘 말해줘야지" 드워프의 느긋함은 엘프의 느긋함과는 조금 다르다. 엘프들이 무언가를 위해 오랜 시간을 느긋하게 준비한다면, 드워프들은 느긋하게 느릿장을 부리다가 무엇이든 간에 한 번에 해치우는 성격인 것이다. 같은 여유라도 그 색이 완전히 다르다고나 할까? '제프의 손님'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가진 다이아나는 엘프들이 홀대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인간이었지만, 리카르도는 다르다. 더군다나 잘 알려지지 않은 엘프의 마을의 위치가 드러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인간 치고는 꽤 괜찮지 않느냐?" 그런 다이아나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훈트는 리카르도에 대한 다이아나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글쎄요. 여태까지는 그렇지만......" 인간이란 앞과 뒤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존재. 현재의 리카르도가 '황태자'임을 내세우지도, 종족적인 편견이나 오만함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황제의 자리에 내정된 인물이다. 정치와 권력은 사람을 변질 시킨다. 아니, 미래는 차지하고 그의 지금의 태도가 꼭 진실이라는 보장조차 없는 것이다. 다이아나가 최악의 상상을 하게 된 데에는 이들 드워프와 엘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책임감도 있었다. "불안한가 보군" "아마도...... 우습지요? 제 자신이 인간이면서도 엘프 분들과 드워프 분들에게 하는 것처럼 겉모습만 가지고 인간을 믿을 수 없어요." "네 걱정이 무엇인지는 알겠다만, 그래서는 발전이 없지. 세상 일에는 부딪혀 본 후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이 있는 법이야." 다이아나는 단호하게 대답하는 훈트를 보면서 일견 부러움을 느꼈다. 오히려 드워프인 훈트가 자신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관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만 존재하던 곳에서와 달리 이 곳에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다른 지적인 생명체 들에게는 최대의 위협일 수 있었다.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하고 인간답게 살려고 한다는 것은 종족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부정적인 면'들에 대하여 일단 인정한 후에 받아들여야 했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다. 인간이란 닫혀진 세계에서나 지금이 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만큼 교활해 보이지 않는 종족들이 인간에 의하여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때 론이 죽는 줄 알았어. 부상도 엄청 심했다구. 그 오우거가 얼마나 컸는지 알아? 근데 말이지 다이아나가 그 때 소리 치는 거야........."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에 대한 '정보'를 래리의 수다를 통하여 여과없이 얻을 수 있었다. 의외로 드워프들은 자신에게 금방 마음을 터 놓았다. 종족적인 특성이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날 밤에 리카르도의 실력을 확인한 래리와 툴레임은 새 로 등장한 '대련상대'를 상당히 환영하면서 틈만 나면 대련을 하자고 졸라대었다. 리카르도로서는 이들의 호의가 절실했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인간인 다이아나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실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래리와 툴레임의 친구 가 되는 것은 그다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했던 것이다. '확실하군' 래리의 말 속에서 다이아나의 신성력에 대한 증거를 획득한 리카르도는 겉으로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래리의 말에 집중하면 서도, 빠르게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라진 '성녀'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일을 본국에 알려야 할 것인가? 리카 르도는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 하투아의 카이젠이 당한 일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눈 먼 자들은 많았 다. 일단 정보가 빠져나가면 자신 혼자서 뒷감당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엉 돌아왔는가? 자네에게 할 말이 있으니, 그건 쟤들한테 맡기고 이리로 앉게나" 기다렸다는 듯한 하툰의 부름에 리카르도는 쾌히 응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툰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다이아나를 힐끔 쳐다보 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성녀'라 불리우는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실 내일 도착할 곳은 우리 마을이 아니네. 엘프의 마을이지. 하여, 내가 자네에게 미리 약속을 받아야겠네." "에? 엘프의 마을이라구요?" 물론 세상을 여행하는 엘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대륙 서쪽의 경우에는 동쪽과 달리 엘프들을 노예로 거래하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엘프들의 여행지는 주로 서대륙이 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프 종족은 가능하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노예이기는 해도 엘프를 종종 볼 수 있는 동쪽이나, 신전이 몰려 있는 중앙연합국에 서 보다 대륙 서쪽에서 엘프를 실물로 보기는 상당히 힘들었던 것이다. "엘프와 만난 적이 없나?" "아뇨. 있습니다. 할아버님의 친구분들 중에 엘프분이 있으셨거든요" "흠.. 그래? 그렇겠군. 그 인간은 좀 특이했다고들 했어" 리카르도의 조부는 젊은 시절 모험을 즐겼다고 한다. 틈만 나면 궁을 빠져나가는 리카르도를 보고 현 황제가 한탄하듯이 조부를 닮았다고 했었다. 조부는 여행을 통해 많은 이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 중에는 엘프인 친구도 있었는데, 어린 리카르도 도 그 친구를 만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소문을 듣지 못하고 친구를 찾아왔던 엘프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인간 종족 의 짧은 시간을 잊고 있었던 스스로를 탓하면서 조의를 표하고 사라졌다. "맞습니다. 할아버님은 개성이 강한 분이었다고들 합니다. 칼라임에서 대대적으로 이종족 노예들의 밀거래를 하던 범죄자들을 소탕한 것도 그분의 뜻이었다고 하지요." "음.. 들은 적이 있네. 아마 엘프들은 더 잘 알겠지. 마침 잘 되었군 그래. 그 인간의 손자라면 엘프들도 싫어하지 않을 게야" 고인이 된 조부에 대하여 '황제'라는 의미의 어떤 예의도 갖추지 않았으나, 툴레임의 말 속에는 리카르도의 조부에 대한 상당한 호감이 드러나 있었으므로, 리카르도는 내심 자신과 닮았다는 조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더군다나 침묵을 지키던 다이아나가 드물게 자신에게 질문을 해 왔기에 더더욱 그랬다. "조부님께서는 그 엘프 분과 오래 사귀셨나요?" "실은... 그 엘프 분은 여성이셨다는군요. 할아버님이 그 분을 짝사랑했다는 말도 있고, 그 반대의 소문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실제로 두 분의 관계는 성과 종족을 떠나 친밀한 친구의 관계였다고 하시더군요. 그 분과는 10대 후반에 만나셨는데 , 35세에 황위를 물려 받기 전까지는 거의 함께 다니셨다고 하더구요. 즉위하신 후에 이전처럼 마음대로 나다니기 힘들어지신 조부님께서는 그 엘프 분에게 몇 번이나 황성에 머물러 주실 것을 부탁하셨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힘들었겠지요!" "네.. 그래도 몇 년에 한 번씩 궁을 찾아오시곤 했었죠" 당시 황제의 엄명으로 황궁에서는 엘프가 찾아오면 무조건 들여보내고 어떤 제지도 하지 말라는 규칙이 생겼다고 한다. 이는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현재도 칼라임 제국의 황성에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 규칙이 확대되다시피 하여, 칼라임의 전 국토 에 걸쳐 엘프 종족에 대한 호의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이후에 리카르도는 엘프 마을의 위치에 대하여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훈트의 말에 혼쾌히 자신의 이름과 조부의 이름까지 걸고 맹세를 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본 다이아나는 어느 정도의 걱정을 덜어내고 평상시처럼 주위에 알람 마법을 걸어 두었다 . 리카르도는 유사 이래 인간들 중 선택받은 소수만이 방문했다는 엘프의 마을에 갈 수 있다고 상당히 들떠 있는 모습을 보여주 었고, 훈트는 그런 리카르도에게 '과일만 먹는 마을'이 뭐가 좋다구 야단이냐며 친근한 구박을 건네곤 했다. "어서 오십시오" 다음 날 이전과 같이 불쑥 수풀에서 나타난 엘프는 이전의 경험으로 간단한 인사말을 훈트에게 건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일행을 안내할 생각을 안하고 리카르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일행이 된 인간이네" "그렇지만......" "자네 일족과도 인연이 없진 않네. 칼라임의 이전 황제와 친분을 가졌다는 엘프가 자네 마을 출신이지?" "네? 아, 네! 미리안느님의 따님 말씀이시군요" "그 인간의 손자라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미리안느에게 직접 말할테니 일단은 안내해 주게나" "....... 예. 알겠습니다" 인간으로는 두 세대 위의 일이라고 해도 엘프들에게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엘프 루이스덴은 인간마을을 여행하는 엘프들에게 아직도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는 전대의 황제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일단 그들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가 결 정할 사안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려와는 달리 미리안느 장로는 초대받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별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단지, 장로들에게 알려야 한다 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엘프의 마을에 들어선 리카르도는 엘프식의 집들을 바라보면서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살아 있는 나무들이군요" "네. 저희들은 나무들에게 부탁해서 쉴 자리를 얻는답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던져진 감탄사같은 질문이었지만, 예의바른 루이스덴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했다. "부탁한다구요?" "음.. 직접은 아니지만요. 나무의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저희가 원하는 모양의 집을 베풀어 준답니다" "... 그렇군요!" 말로는 수긍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다이아나는 지난 번에는 시루스의 일로 인해 관 심을 가질 여유가 별로 없었던 탓에 그냥 지나친 엘프들의 집을 새삼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들은 말이지, 생명을 사랑하는 종족이지. 불필요한 살생은 절대 하지 않는단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동물들 뿐만이 아니라 식물들에게도 인색하지 않지.' '그럼 그들은 절대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란다. 생존에 필요하다면 그들은 충분히 강한 전사로서 적을 죽이는 일도 망설이지 않거든' 다이아나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필요하다', '불필요하다'는 경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드워프들 또한 불 필요한 살생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경우 '필요'의 범위가 엘프보다 넓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 인간들은? 어쩌면 인 간들도 인지하는 범위 안에서는 다들 '필요한 살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자신들을 암살하고자 한 이들도 나름대로 그것이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래리와 툴레임이 투덜거리기 시작하자, 루이스덴은 얼른 일행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던 리카르도와 다이아나도 루이스덴의 뒤를 따라, 살아있는 나무로 이루어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과일과 차를 든 한 여성엘프와 미리안느가 들어왔다. 미리안느를 따라 온 여성 엘프는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미리안느와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리카르도님" "아!" "마침 이 아이가 마을에 있어서 데려 왔습니다." "시프넨이라고 합니다" 일행은 새로 들어온 여성 엘프를 소개받았다. 푸른 머리에 더 짚은 푸른 색의 눈동자, 엘프다운 미모의 그녀는 전대 황제인 마르크스의 친구라고 알려졌던 당사자였던 것이다. 리카르도는 소년 시절 목격한 아름다움에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듯한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자, 의외의 만남에 상당히 반갑고 놀란 표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기 때문에... 다음편은 오밤중에나... ^^;;;; 글을 올리는 시간을 물어보신 분이 계신데, 보통 오후에 가능하면 한 두편 실제로 주로 올리는 시간은 11시 이후가 가장 많습니다. 11시 이후부터 새벽까지가 제 시간이랄까요? 가장 잘 써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1,2시가 넘어가면 유조아의 마공이 수그러지는 때이기도 하니 그렇게 되더군요. 얼른 다이아나를 인간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생각보다 얽힌 인연들이 많다보니 시간이 좀 걸리네요 ^^;; 자 그럼 오밤중 혹은 새벽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나는 이전에 종종 신을 원망하곤 했어" "......" "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지능을 타고 난 사람의 비애랄까? 누군가는 말하겠지. 배 부른 소리라고." "......" "너 보다는 나았을 꺼야. 천재 소리를 듣고 산 부모님에 오빠까지 있었으니까... 그래도 난 참 외로웠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 "지혜야~!!" "신이 계시다면 너로 인해 감사할 수 있을꺼야. 난 가끔 신을 원망했거든. 타고난 능력? 웃기지 말라고 해. 너는 더 잘 알겠 지. 다른 존재에 대하여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해 지는지......" "......" "두려웠어. 철이 든 이후 줄곧! 너는 어떠니? 나보다 뛰어난 너는.....?" 지혜의 얼굴은 곧바로 장로님의 얼굴로 바뀌었다. "다희야 네가 지닌 능력은 하나님의 축복이야! 아마도 어린 네게는 큰 짐이 될 테지만......: "......!" "어리석은 내가 너를 딸로 삼게 된 것이 두렵고 힘들 때가 있구나. 너는 더 하겠지. 하지만, 잊지 말아라. 신은 사랑의 존재. 너나 나나 그분의 자녀란 사실을......!" 원장님의 얼굴은 이제 시루스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슬퍼하지 말아요. 다이아나. 각자의 생은 스스로의 선택과 운명의 결합! 나는 당신 옆에 있기를 고집했던 나의 생을 후회하지 않는답니다." "시루스....!" "그래요. 나는 조화의 종족 시루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한 하나의 개체. 잊지 말아요, 나의 사랑을, 미처 못다한 나의 말들을......" "미안...해요~!" "인간을 배우세요. 다이아나~!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세요~!" "선생님. 저는 이담에 커서 선생님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다히~! 좋아~!!!!!!!!!!!!!" "조......! 수진아!!!!!!!!!"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다이아나의 잠을 깨운 꿈에서 그녀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눈물로 얼룩진 배개를 보면서, 다이아나는 그녀의 꿈의 인물들을 하나 하나 떠올렸다. "그를 닮았군요" 아름다운 엘프는 리카르도를 보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꿈을 꾸듯이 멍한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눈빛속의 그리움......! 불같은 열정은 분명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 않은 세월만큼 빛바래지 않은 그녀의 감정을 다이아나는 볼 수 있었다. "휴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인간이되, 인간들을 뛰어넘은 능력의 소유자. 하지만, 보통의 인간에게도 허락되는 부모의 사랑도 십수 년 간 모르고 지낸 존재!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오랜 생명을 약속받고, 노력의 여하에 따라 무궁무진한 능력을 보장받은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내밀면 금방 닿을 듯한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찮기 그지 없는, 신의 저울 끝에 달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존재.......! 다이아나는 꿈 속의 지인들과 낮의 영상이 맞물려 끊임없이 솟아나는 눈물을 가까스로 추스리고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찾던 원장 아버지, 지혜, 그리고 죽어가는 시루스. 꿈의 여파일까? 계속되는 영상들이 실물처럼 자꾸만 눈 앞에 떠 올랐다. 결국 다이아나는 달 빛을 받으면서 문 밖으로 향했다. "달의 신이 없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죠?" 엘프의 집을 나서, 서늘한 공기 속에 멍해 있던 다이아나는 부드럽게 울려퍼지는 음성에 순간 움찔했다. 그제서야 자신에게 말을 건네온 엘프의 존재를 눈치챘고, 그 엘프가 다름 아닌 시프넨이라는 것을 꺠달았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 다이아나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이 여성 엘프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멈출 뜻이 없어 보였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뿜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처음 그 이야길 들었을 때, 인간의 연금술사들의 무지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지요. 태양의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해 이 세상을 비추는 것이 달이란 사실을요!" "......" 계속되는 침묵에도 엘프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인간을 달과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도 그랬지요. 몽상가이면서도 그는 참 현실적인 인간, 그 자체라고나 할까? 그는 스스로 인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인간들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항상 경각심을 잃지 않았어요." "그를.... 사랑하셨나요?" 다이아나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상당한 무례일 수 있는 질문에도 온화한 이 여성은 자신의 말을 계속 했다. 그것은 다이아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그는 자주 경멸을 감추지 않고 '인간이란.....!'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주 '인간이니까.......!'라고도 했어요. 그는 나를 사랑한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의 사랑을 의미했죠, 저는 저를 향한 그의 사랑도,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도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어요. 그는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었지요. 나는 엘프, 엘프의 사랑은 나누거나 공유할 수 없었기에, 그 또한 나를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더군요. 아마도 나는 그의 다른 사랑의 삶이 끝나면 내 차례가 올 것을 기다렸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신의 오묘한 뜻이었는지, 그는 그녀보다 먼저 가 버렸고 ,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요." "......" "가끔 후회를 했어요. 아마 그는 저도, 그 인간의 여인도 사랑했을 지도 모른다고......!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 의 짧은 생의 일부분에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몰랐었을 일이라구요..." "그건..... 같은 인간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내가 인간이었다면,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내게 말하곤 했었지요. 네가 엘프만 아니라면... 이라고......." "......" "오빠는 인간들의 마음을 믿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죽음과 손을 잡는 그 날에도 나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요. 그의 마 음은 지금도 이 땅에 남아 있기에......" "...... 당신은 엘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보다 더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시는 듯 하군요" "어쩔 수 없지요. 유일한 나의 반려는 인간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조심해야 했는지도 몰라요. 어려서부터 많은 이야길 들었었 거든요. 특히 인간을 아는 오빠는 제게 늘상 조심하라고 하곤 했었어요. 하지만, 나는 결국 마크를 이기지 못했지요. 마치 불 꽃을 사랑하는 나방이라고 할까요? 그의 격렬한 감정은 저을 매혹시켰고, 그는 스스로 알지 못했지만 결국 저를 가진 셈이에요." 한 동안 침묵만이 둘 사이를 잇고 있었다. "당신의 오빠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나 보군요. 저는 인간이면서도 그의 생각에 동의해요" "시루스 오빠는 오랜 시간을 인간들의 세상에서 보냈었으니까요. 처음 인간 세상에서 마크와 마주친 저와는 달랐었죠" 시루스! 푸른 머리카락의 호수의 깊음을 담은 눈의 엘프. 다이아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시루스 오빠는 아직도 인간들 사이에 있지만, 저는 이 곳으로 돌아왔지요. 그가 없는 인간들의세상은 제게는 아무 의 미도 주지 못했으니까요." "시루스라는 분이 시프넨님의 오빠이신가요?" "그래요. 오랜 시간 오빠를 못만났네요." 다이아나의 눈은 시프넨의 얼굴에서 시루스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루스는..... 그가 제가 알던 시루스가 맞다면....... 그는 저 때문에 죽었어요......!" 다이아나는 이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을 붙들고 오열하는 미리안느와 시프넨의 영상을 떠올렸다. 시루스의 죽음 이후, 아 이들의 죽음의 무게까지 그녀를 짓눌렀건만,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힘들었다. "오빠가요? 어떻게???" 다이아나는 차분히 남의 일을 말하듯이 시루스와의 첫 만남부터 엔젤하우스에서 벌어진 참극에 이르기까지를 이야기했다. "그게 오빠였군요" 엔젤하우스, 엘프들을 인간들의 일에 끌어들여 엔젤상회의 일원으로 만들었던 그 일은 웬만한 엘프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터였다. 다만, 시루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마을의 엘프들보다는 센트리아 산맥에 거하던 엘프들과 유대를 맺었기 때문에, 시프넨이나 미리안느가 몰랐었던 것이다. "시루스는 저 때문에 죽은 거에요" 다이아나는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는 시프넨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눈 앞의 아름다운 여성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얼굴 위에 조금 짙어진 슬픔만을 더한 채로 어떤 적의감도 떠올리지 않고 그런 다이아나를 바라 볼 뿐이었다. "제가 밉지 않으세요?" 결국 다시 말을 꺼낸 쪽은 다이아나였다. "...... 왜 제가 당신을 미워해야 하지요?" "시루스를 죽게 한 것은 결국 저이니까요" "그가 노예가 되어서 당신의 곁에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가 저의 곁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꺼에요" "당신은 그와 비슷한 말을 하시는군요" 시프넨은 어떤 책망의 말도 없이 다이아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르크스도 그랬었다. 정혼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시프넨에 대한 사랑을 숨길 수 없었던 그는 죽을 때까지 시프넨을 걱정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 하곤 했다. '나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내 곁에 없었다면,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시프넨은 그의 자책감을 나름대로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사랑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의 해 자신은 평생 반려를 가질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였으므로, 그녀는 그 점에 관한 한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눈 앞의 인간의 소녀는 마치 마르크스처럼 시루스의 선택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 지고자 하는 자책감을 숨기지 않았다. "다이아나~! 우리 엘프들 뿐만이 아니라 어떤 이라도 자신의 선택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에요. 인간들은 가끔씩 스스 로의 영향력을 과대 평가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믿어요. 주신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삶과 운명은 결코 다른 이의 운명에 말 려들 정도로 가볍지 않다는 것을요. 누구나 선택의 길에서 자신이 선택한 대로의 운명을 짊어질 뿐이에요. 그것은 당신의 탓도 오빠의 탓도 아닐꺼에요. 그의 운명이 거기 까지였을 뿐이죠!" 냉정하게 들리는 엘프의 말은 다이아나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건드렸다. "시루스 오빠는 아마도 당신을 사랑했나 보군요. 이 생에서 그의 역할이 끝났었나 보네요. 엘프의 사랑을 받은 이여~! 그대는 어떤 곳에 가든지 우리 엘프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다이아나는 마치 자신의 죄를 용서하듯이 온화하게 퍼지는 시프넨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다이아나를 가볍게 다 독이다가 결국 자신의 품에 안은 푸른 머리의 엘프는 속삭였다. "고귀한 이도, 천한 이도 없지요. 우리는 다만 우리의 생을 살아갈 뿐이랍니다. 신의 뜻이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의 생이 어떤 목적을 향해 가든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다이아나는 인간으로 인해 바뀐 운명을 살았고, 자신으로 인해 오빠를 잃었다고 생각한 시프넨의 품에서 한껏 울 수 있었다. 엘프인 그녀가 오히려 인간인 자신보다 더욱 더 많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보여 주고 있었고, 스스로 염치없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다이아나는 친절한 시프넨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걱정하던 시루스를 떠올리면서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미리에게 시루스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겠군요. 그녀도 슬퍼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탓하진 않을 거 에요. 다이아나, 당신 스스로를 더욱 더 아끼고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시루스를 마음껏 애도해 주세요. 하지만, 결코 그의 선택을 당신의 탓으로 돌리진 마세요. 그건 그의 뜻도 신의 뜻도 우리의 뜻도 아니랍니다." 달빛의 따스함을 찬양하던 엘프는 마치 달빛처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말을 남기고 다이아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으으~! 드디어 과일에서 해방이닷~!" "그러게, 쟤들은 어떻게 그런 것만 먹고 사는지 몰라~!" 엘프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래리와 툴레임이 떠들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전날 밤의 시프넨을 떠올렸고, 리카르도 또한 조부의 사랑을 받았다는 엘프를 생각했는지 별 말이 없었다. 엘프 마을에서 받은 여러 물품들은 다이아나가 받은 받지를 통해 아공간에 저장되었고, 덕분에 별 다른 짐을 추가로 지지 않게 된 드워프들은 특유의 수다를 멈추지 않고 엘프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훈트님은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불현듯 다이아나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글쎄?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구나. 가장 가능성이 많은 존재라고나 할까?" "가능성이 많은 존재라구요?" "응. 위대해질 가능성도, 선해질 가능성도, 하찮게 될 가능성도 그 반대의 가능성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 같구나" "...... 그럼...... 신께서 인간을 사랑하실까요?" "글쎄......? 신이 사랑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듯 하구나." "전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인간 보다는 드워프들이나 엘프 분들 심지어는 오크들이 제게는 이해하기 쉽게 느껴져요. 어떤 종 족도 인간만큼 이기적이지는 않았거든요" "예? 드워프나 엘프는 모르겠지만, 오크같은 몬스터를 인간에게 비교한다니 좀......"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리카르도가 참지 못하고 끼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오크는 하등한 종족이라고?" "그야 몬스터니까요"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그들도 같은 종족끼리 속이거나 해치지는 않는답니다. 그들은 능력대로 먹고 살고, 힘을 가진 이를 존 중하지요. 어떤 오크도 자신보다 힘이 센 오크를 없애기 위해 음모 따윈 세우지도, 행하지도 않는걸요" "... 그래도......." "오직 인간들만이 자신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지요. 오직 인간들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해요. 오직 인간들만이 다른 종족들의 우위에 자신들을 놓지요." 리카르도는 더이상 반박의 말을 찾지 못했으나, 그건 논리적인 이유에서일 뿐, 결코 다이아나의 말에 동감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오히려 그 순간 훈트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 오직 인간들 만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지. 오직 인간들 중에서만 자신의 종족에 대한 회의를 품은 자들이 나타나곤 하지. 다이아나, 무슨 말을 하고픈 게냐? 네가 인간임에도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가끔 이 세상에 인간이란 종족이 없다면 더 평화롭고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이 되요" "인간이 없다.....? 그렇게 말하자면 모든 숲 속의 종족들은 오우거와 오크, 고블린이나 트롤들이 없었기를 바라겠지." "그건......"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하지만, 나는 만나서 즐거웠던 인간 몇을 알고 있단다" "......" "그보다 더 많이 만나서 안 좋았던 인간들도 알고 있지" "......"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 주랴? 우리 드워프와 엘프가 동료로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은 인간 세상이란다. 우습지 않니? 하지만 그건 사실이야. 엘프 마을의 드워프는 불편하기 짝이 없을 지경이지. 엘프가 드워프 마을에 온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하지만, 인간의 마을에서 드워프나 엘프는 동료가 되기 쉽단다. 그것이 인간의 힘이 아닐까?" "......" 훈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로 래리와 툴레임의 끊이지 않는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 대화는 더 이상 다이아나의 머리 속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이 든 드워프와 밝은 달빛 아래의 아름 다운 엘프의 말들이 다이아나의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인간에게 실망한 것일까?' 리카르도는 엔젤상회를 비롯하여 성녀가 대륙에 한 일들을 알고 있었다. 칼라임이나 중앙연합국들 처럼 어느 정도 살기 좋다는 나라에서도 하지 못했던 빈민층의 구제와 고아들에 대한 엔젤하우스의 선행들. 하지만, 그녀의 선행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력'이었다. 적어도 지배계층에게 있어서 그녀는 하나의 '열쇠'였고, 권력을 쥘 수 있는 '명분'이었다. 오직 조건없이 베풀기만 하던 그녀가 비극적인 사건을 인해 사라졌을 때, 대륙의 고위층은 '유감'을 표시하면 서도 '성녀'를 자신들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카르도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무심결에 다이아나와 훈트의 대화에 잠시 끼어들긴 했지만, 다이아나가 보이는 인간에 대한 상당한 불신감의 무게를 절감할 수 있었다. 선의를 가지고 행한 일에 그녀가 보답으로 받은 것이라고는 처참한 살극으로 이어 진 비극이었으므로. ******************************************************************************* "웃기는군. 저 놈은 또 뭐야?" 일행의 흔적을 뒤쫓은 결과 엘프 마을에 당도하기 전 다이아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옆에는 드워프들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이 분명한 인간의 남자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면서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고 다이아나의 일행을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나서봐야 다이아나를 설득하기는 어려울 터, 에디우스는 엘프마을을 벗어난 첫날 밤, 다이아나가 걸어둔 알람 마법을 무마시킨 뒤 곤히 잠들어 있는 다이아나의 곁에 다가갔다. "슬립~!" 혹시나 해서 일행들에게 마법을 걸고 다이아나의 옆에 다가갔다. 에디우스는 고의적으로 다이아나 옆에서 살기를 발했다. "누구얏~!" 다이아나의 목걸이에서 흰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목걸이에서 뛰쳐나온 페어리의 첫마디였다. "조용히 해~! 나는 위대한 종족 중 골드의 자손 에디우스다~!" 일부러 기운을 숨기지 않는 에디우스의 태도에 수 천 년을 살아온 장난꾸러기 요정족은 숨을 죽였다. 그가 아무리 다이아나의 생명을 지키는 사명을 맡았다고 한 들 눈 앞의 드래곤을 당해낼 리 만무했다. "네게 명령할 것이 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위압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야영을 위한 공간에 드래곤의 기운이 넘칠도록 충만해졌으나, 나름대로 약속에 충실한 페어리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려고 애를 썼다. "다이아나는 내가 지킨다구~!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녀는 나의 반려이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떨어져 있지만, 나 또한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로 너를 부른 것이다" 아름다움에는 사족을 못쓴다는 페어리는 다이아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눈 앞의 드래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존재가 굳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결국 페어리는 에디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에디우스는 훗날을 기약하면서 공터에서 사라졌다. "뭐야??????????" 다음 날, 이유없이 늦잠을 잔 탓에 일정이 늦어진 드워프 일행들은 누구의 책임으로도 전가시키지 못한 채 투덜거리면서 짧은 다리를 좀 더 빨리 놀려야 했다. "제법이군" "당연하지! 누구 아들이라구~!" "......" "왜왜왜? 내 아들 잘난 게 배 아프냐?" "쯧쯧! 드래곤 역사상 처음으로 망령 든 고룡이 탄생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 "뫼얏~!" "흥~!" 어느 덧, 오랜 우정의 깊이를 보여 주듯이 나란히 앉아 영상을 보고 있던 하비우스와 유스테우스는 화면에 에디우스이 모습이 잠시 나타나자 새로운 꺼리를 찾아낸 듯 한 동안 신나게 투닥거렸다. "참, 알트상단은 언제 만든거냐?" "그야...... 너도 없고 심심해서 내가 수십 년 전에 유희할 때......" "너 드래곤 아니지?" "뭐?" "고룡이 되어서도 유치한 종류의 유희를 못해 안달이니...... 근데 그땐 에디우스랑 공부할 때 아니었냐?" "그야... 공부 시켜놓고 틈틈이......" "... 히유... 근데 왜 하필 상단이야?" "딴 건 다 해봤잖아. 이 나이에 검사를 하랴? 마법사를 하랴?" "잘.났.다!" "그럼... 그거야.................." 실상 하비우스의 유희는 다이아나와 연관이 없다 할 수 없었다. 그가 알트 상단을 설립한 것은 다이아나가 다희로서 학교를 중퇴하고 경제에 대한 공부와 '증권'에 대한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을 때였으므로. 하비우스는 무엇이던지 '실습'이 중요하다는 점을 내세워 에디우스를 놓아 두고 유희를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객이 왕이다'라는 알트 상단의 신조는 바로 다희가 살던 대한민국의 기업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것을 그대로 차용하여 대륙에서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이봐~! 잘 피해야지~!!!" "오러 블레이드도 없는데 도대체 왜 저리 쩔쩔 매는거야?" "그러게~! 콜 저놈 엉덩이 씰룩거리는 게 꼭 오크같지 않아?" "푸하하하! 맞다 맞아!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했더니만~!" '거래'를 위한 길을 떠나기 전에도 많이 보던 풍경이었다. 단지, 지금 드워프들의 놀림 상대가 되고 있는 콜과 대련하는 이가 다이아나가 아닌 리카르도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국의 황태자인 그가 드워프들과 허물없이 대련을 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그 이전에 이미 식당일에 뛰어들었으니까. 다이아나는 이 넉살 좋은 남자를 경계해야 할 지, 동료로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예전 세상에선 이런 걸 공주병이라고 했지?' 세상 남자들이 다 자신을 좋아하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도가 격의 없이 던지는 농담이나 행동들은 여실히 다이아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다이아나로서는 그것이 친구로서의 호의인지 이성에게 보이는 감정인지에 대하여 판단할만한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실패했던 에디우스와의 관계, 무조건 베풀어 주기만 하다가 간 시루스와의 관계 는 다이아나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더더군다나, 그는 황제가 될 사람, 카이젠의 집착과 독선이 꼭 황제의 특성이라고 는 볼 수 없으나 연상이 되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이 한 판 하지 그래?" "그래그래~! 그게 그래도 볼 만 하겠다" "어이~! 다이아나 뭐하는 거야?" 리카르도와 드워프 간의 대련이 너무 일방적이라 재미가 없었는지, 드워프들은 얼른 새로운 구경꺼리를 찾아낸 듯 했다. 다 이아나가 망설이는 듯 하자, 리카르도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한 번 겨루어 주시겠습니까?" 마치 하수가 고수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듯한 태도였다. 실상, 다이아나로서도 에디우스와의 연습 이후에 이렇다할 맞상대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그다지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가 오히려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자신에게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태도를 유지한다. 리카르도는 내심 한숨을 쉬면서 참으로 접근하기 힘든 상대라는 생각을 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웃음짓고 있었다. "그럼......" "어어어? 잠깐만~!" 둘이 정말 대련을 시작할 듯하자, 피트가 잠시 기달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사라졌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멍 하니 서 있던 두 사람은 여기 저기서 모여드는 드워프들을 볼 수 있었다. 피트가 사방에 볼거리가 생겼다고 고함을 질러댄 덕분에 심각하게 작품에 몰두 중이었던 드워프들을 제외한 이들이 구경을 나온 것이다. 다이아나와 리카르도는 여기 저기 자리를 잡는 드워프들을 보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웃어 버렸다. "자자~! 이젠 되었으니 시작하라구~!" "그래그래~! 얼른 시작해라~!" "다이아나 이겨라~!" "리카르도 힘 내라~!" 드워프들은 나름대로 두 사람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진지한 대련이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검을 쥐고 마주 선 두 사람의 눈에는 어느새 진지함이 감돌고 있었다. "챙~!" 의외로 선공을 취한 쪽은 다이아나였다. 리카르도에게서 좀처럼 헛점을 찾지 못해 망설이던 다이아나는 빠른 발을 이용하여 도발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란 거저 얻는 이름이 아니었는지, 다이아나의 기습적인 공격은 바로 리카르도의 검에 막혔다. 일단 검을 부딪히기 시작한 두 사람을 엄청난 속도로 공방을 주고 받았다. 다이아나는 리카르도가 제 실력을 다 발 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약간 약이 오르는 기분이 다이아나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세찬 공격과 함께 다이아나가 뒤로 간격을 벌리며 물러섰다. "있는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리카르도님도 최선을 다해 주시길!" 경고과 같은 말을 끝낸 다이아나는 혼자 수련할 때만 사용했던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아나의 검을 타고 은빛 기운 이 조금씩 나타났다. 약간 흐릿한 은빛 광채는 검 전체를 감싼 후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리카르도는 의외의 일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에 마나를 흘려넣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저야 말로." 대련의 결과는 리카르도의 승리였다. 혼자 연습을 했다고는 하지만,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살짝 엿보고 있을 뿐인 다이아나가 이미 마스터급에 이른 지 이 년이 넘어가는 리카르도를 이긴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오랜만에 어느 정도 대등한 상대를 만난 셈이었고, 다이아나도 고수와의 대련을 통해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할 수 있었으니 상당한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이번엔 다이아나가 먼저 질문을 했다. 리카르도는 드물게 먼저 말을 걸어 주었으나, 그 내용은 그다지 호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느끼고, 속으로 씁쓸해 했다. "글쎄요. 드워프 마을이 늘상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요. 이렇게 생활하는 것도 생각보다는 재밌군요" "황태자로서 할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닌가요? 여행이 상당히 길어지신 듯 한데....." "그러시는 다이아나양이야 말로 언제까지 여기 계실지 궁금하군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것일까? 리카르도는 내심 궁금한 점을 묻고 있었다. 사실 드워프 마을에 더 머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드워프 마을을 떠나면 '성녀'의 행적을 놓칠 수도 있다. "저는 황태자도 아니고,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기다리는 사람...... 이쪽 세계에서 다이아나가 친분을 맺었던 이들 중, 남아 있는 이들은 엔젤상단의 수뇌급들밖에 없었다. 그 수뇌급이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관'이어서 다이아나를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의 사자 정도로 극진하게 대우했던 것이다. 그 외에 그녀가 인간으로서 평범한 관계를 맺었던 이들은 모두... 엔젤하우스에서 죽었다. 기다릴 사람이 없다라는 현실을 말하는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그래서인지 짙은 음영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라...... 이렇게 머물러 계시면 영원히 생기지 않을 사람이군요. 기다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의 표정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꼈지만, 냉정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생각에 성녀는 세상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녀 자신이 원하던 아니던 간에. "만들어야 한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런 관계를 만들었었지요. 저의 뜻과는 관계 없이 다시 만날 수 없게 되긴 했지만......" 다이아나는 중얼거리듯이 대답을 하고는 리카르도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던지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말에 흔들리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약간의 죄책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이아나는 리카르도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일부러 생각지 않고 묻어두었던 고민을 시작했다. 닫혀진 세계에서 자신을 기다릴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쪽 세계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했던 이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다. 아, 살아있는 이가 있긴 했다. 하투아제국의 사람들..... '무엇부터? 어떻게?' 언제까지나 드워프들과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그런 생각으로 이 곳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을테니까. 다이아나는 인간에 대한 훈트의 말, 제프의 말들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시프넨이 떠올리던 슬픈 미소도 그녀의 충고도 생각이 났다. 그녀는 인간이면서도 오히려 타종족들보다 인간에 대하여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불신을 가지는 그녀 자신도 '인간'이었다. 결국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포치에겐 당당하게 인간 남자랑 새끼를 낳겠노라 선언했었는데......' 포치와 오크들을 떠올리자 미소가 번졌다. 툭 하면 새끼낳자고 조르던 오크들의 모습이 당장 머리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준 통신용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인간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무얼 할 지 잘 모르겠다는거지?" "네. 평범까지는 무리겠지만요 후훗~!" "허긴 이미 네가 쌓은 능력으로 볼 때 평범할 수는 없겠지. 신관으로 행세하는 것은 싫으니?" "이미 너무 많이 알려졌어요" ".... 그렇구나" "어머니의 능력을 쓰기 싫은 건 아니지만, 신전이 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음... 일단 새로운 신분이 필요하겠구나" "네. 그리고 고위급 마법사도 알아볼 수 없게 얼굴을 바꿀 방법은 없을까요?" "그... 그건......" 가능하긴 했다. 유스테우스의 능력이라면 그녀의 모습 전체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딸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게 어려우면 전에 마을에 갔을 때 했던 것처럼 머리카락과 눈 색만이라도 눈에 안띄게 하고 싶어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일단, 내가 좀 준비할 것이 있으니,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네" 다이아나는 먼저 제프에게 며칠 내로 떠날 것이라고 말해 두었다. 제프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알았다는 의사표시만 하고는 몇 달째 매달리던 작업에 열중했고, 다이아나는 그녀가 할 일을 생각하기 위해 오랜 시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여행을 하시려는 겁니까?" 드워프들에게 곧 떠날 것이라는 말을 하자,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이야기가 퍼졌다. 누구보다 섭섭해 한 것은 식당일을 함께 하던 이번 년도의 당번인 툴레임, 래리, 콜, 미하스, 피트, 론 등이었다. 하지만, 이별을 앞둔 슬픔도 맥주의 유혹을 이기진 못 했는지, 이별잔치를 열어야 한다고 맥주통부터 나르기 시작하는 그들이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모처럼 소리내어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었는지, 리카르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럴 것 같네요" "기왕 떠나실 것 같으면 저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렵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여행은 동료가 있는 편이 더 즐거우니까요" "글쎄요. 황태자를 동료로 삼기엔 제가 너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제가 황태자로 행세하지 않는 이상 별로 부담될 것은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다이아나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바라 보았다. 애써 쌀쌀맞게 굴어도 전혀 굴하지 않고 넉살 좋게 구는 그는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생각해 보지요" 결국 다이아나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황태자라는 저 남자가 알 수 없게 몰래 혼자 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굳이 그래야만 할까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고 있었기에 그녀 자신도 아직 행로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그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은 갈색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가 된단다" "보이는게 아니구 된다구요?" "응. 그건 환상마법이 아니라 우리 드래곤들의 폴리모프를 응용한 마법이야. 드래곤이 아니라면 알아볼 사람은 없을게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그 옆의 주머니에는 돈하고 보석, 신분증이 있단다. 적당한 신분이 없어서 일단 마법사 길드의 신분증을 만들었는데, 괜찮겠니?" "아, 이것이.....!" "그래. 일단 4써클 마법사로 등록해 두었다. 알아보니 마법사로 유희하는 드래곤이 있더구나 후훗!" "잘 되었네요" "그래. 마음에 든다면 되었다. 정말 내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니?" "일단은요.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주실꺼죠?" "당연하지~!" "그럼 됐어요. 일단 혼자 시작해 볼래요" "그래. 제프에게 안부 전해주렴~!" "네~!"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전송시킨 물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았다. 세심하게 준비된 잔돈이 든 주머니와 금화와 보석이 든 주머니,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 여행에 적합해 보이는 신발 등 사소한 것 하나까지 차곡차곡 챙겨져 있어 아버지 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아빠, 고마워요. 다시 한 번 잘 해볼께요. 이번엔......' ****************************************************************************** 그간 빼먹었던 리플들에 대하여 감사를 ^^;; 에휴님, 사시미좀 치우시구요 ^^;;; 어제 에휴님땀시 한 편 더 올린거 아세요? 69편 쓰다가 저장하고 자려고 했어요 원래는... -_-;; 괜히 들어왔다가 에휴님의 사시미땜시 무서워서리.. 클클 맛있는 까까님, ☆Lusi™☆님... 그래뵈도 순정남이긴 하니 잘 봐주세요 슬픈사랑(哀愛)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피그파이터님 ^^; 늘 리플 잘 보고 있습니다. 블랑카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리플 달아주셔셔 감사해요 윌루님, 死神withMe님 반갑습니다. 마린블루o0 님 아주 명확한 지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有恩宥互님 꺄아~! 반가와요 ^^ 큐트걸님.. 안그래두 나와요. -.-;; 카이룬님, 꺄아~! 원래 알테는 주로 연참이 특기랍니다. 샤인♬ 님 리플 달아주신 님도 너무 좋아해요 ^^;; ☆드래곤™님,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은 연참은 계속됩니다. 빨간이슬님, 반갑습니다. 縉엘리셔스님 서버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애써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무뢰한님, 리플을 먼저 다신 예의바름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요. 반갑습니다. 치베님, 근데 독재자님 까페가 어디에요? 궁금해졌어요 ^^ 천에유화님, 반갑습니다. 무지개마을님, 늘 잘 읽어주시기를... 셀레모르님, 반갑습니다. 뒤쪽 리플들에 올라오신 분들만 주욱 불러봤습니다만, 빠진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제가 리플 답을 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편이 올라오는 것이 더 좋으시죠 다들? ^^;;; 그간 리플 달아주신 여러분께 감사하구요. 에디의 집착에 대하여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앞편의리플의 마린블루님의 지적이 저의 의도입니다. 1700년을 기다린 반려를 곧바로 포기할 수 있을지는...... 에디라는 캐릭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어려울듯 하네요. 새로 등장한 리카르도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오늘 밤 내로 한 두 편 더 올라갑니다. 이따 밤에(바로 저의 시간대에...) 뵙지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다이아나는 드워프들의 환송 잔치가 벌어진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밤새 술판을 벌인 드워프들이 일어나기 전에 떠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간 정이 든 이들과 헤어지면 아무래도 슬플 것이고, 리카르도랑 같이 떠나기 싫다는 점도 한 가지 이유였다. "잠시 기다려 보거라" 어느 틈엔지 제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마치 다이아나가 이렇게 일찍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다이아나를 세워 둔 제프는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건...?" "열어 보렴~!" "아~! 너무 아름다워요~!" "그렇지? 흐흐~! 내가 그 색을 내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아니? 내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이걸 왜 제게?" "너의 색이니까!" "고맙습니다. 제프아저씨. 선물도, 그리고 그 동안에두요" "나야 뭐 한 일도 없는데.... 흠흠....." 쑥스러운 듯이 헛기침을 하고는 가려면 빨리 가라고 툴툴거리면서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서는 제프였다. 다이아나는 제프가 건네준 팔찌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팔찌는 전체적으로 은빛을 띄고 있었는데,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다이아나는 반지로 인해 바뀌어 버린 자신의 머리색을 보면서, 없어진 색을 다시 팔찌가 대신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던 것이다. 유스테우스는 같은 갈색이라고 해도 다이아나의 머리색에 꽤나 신경을 쓴 듯 전에 다이아나가 스스로 걸 었던 것과는 다르게 윤기 흐르는 금갈색의 머리카락을 만들어 놓았다. 다이아나는 팔찌와 반지를 착용하고, 아버지가 주신 물 품들과 그 동안 드워프들에게 받은 선물들을 모두 챙긴 후 일어났다. "언제까지 따라오실 건가요?" "글쎄요." "... 휴~......" 다이아나가 짐을 꾸려 마을 어귀로 나가자 그 곳에는 어느 틈엔지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리카르도가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다이아나를 부지런히 쫓아 오고 있는 중이다. "제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신다면 동행으로 인정하도록 하지요" "말씀하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리카르도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제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요? 우스운 일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네요." "감정이라...... 일단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호감이죠. 더불어 괜찮은 인재에 대한 욕심도 있구요" ".....?" "마검사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요. 저도 이제 저만의 사람들을 포섭해야 하거든요. 저의 자유로움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정치에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솔직히 당신을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여성으로써는 아직 잘 모르겠군요. 분명히 당신은 보기 드물게 아름답습니다만 아직 특별한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일단, 그저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탐난다고 해야 할까요? 말이 나온 김에 궁중마 법사나 기사가 되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갈수록 태산이라고 할까? 리카르도는 망설임도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이아나를 포섭하려고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런 자신의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궁중마법사는 최소한 5써클 이상의 마법사들일텐데... 제 실력도 잘 모르시지 않나요?" "아, 그리고 보니... 몇 써클이십니까?" "일단 4써클이라고 해 두죠" "일단이라... 그것도 비밀인가부죠? 좋습니다. 아무튼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저랑 같이 가시는 거죠?" "......." "이럴 때 침묵은 긍정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써클을 묻지 않은 의도를 집어내고자 함이었는데, 오히려 아차 실수라는 표정을 드러내면서 웃어 버리는 저 남자. 마 치 애들이 졸라 대듯이 억지를 쓰는 남자를 떼어 놓기 어렵다면, 그냥 그대로 두자고 포기해버렸다. 다이아나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리카르도는 어느 정도 뒤에서 따라 오던 태도를 돌변시켜 얼른 다이아나 옆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시종일관 묻지도 않은 가족관계부터 어려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잘도 떠들어대고 있었다. 덕분에 다이아나는 리카르도의 아버지가 황제로서는 드물게 후궁이 없으며,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었다는 사실, 그에게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다는 것과 무릎 에 흉터가 있다는 등등의 일들을 알기 싫어도 알아야만 했다. "저,, 목 안 아프세요?" 끊임없이 혼자서 떠들어대는 리카르도가 안쓰럽기도 하고 도대체 포기를 모르는 듯한 그의 태도가 신기하기도 할 즈음에 결국 다이아나는 입을 열었다. "목이요? 아, 제가 이래뵈도 말입니다. 여행 하면서 별별 직업을 다 가져 보았지요. 음유시인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그것도 했었고, 이야기꾼 노릇도 했었죠. 덕분에 서너 시간은 너끈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재주가 생겼다니까요. 아 참, 처음으로 제 걱정을 해 주셨군요. 어쨌든 제 목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주아주 좋지요"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웠던가?' 분명 처음엔 차분한 성격으로 보였었다. 엘프마을에서도 그랬고..... 드워프 마을에선 어땠더라? 워낙 주위에서 떠들어대었으니, 그 안에 섞여서 잘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음유시인이라구요? 그건 노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맞습니다! 바로 그거에요. 돈이 떨어지는 바람에 흉내를 내 봤지요" "노래를 잘 부르시나 봐요?" 대답 대신 목을 가다듬더니 리카르도는 빈 말로도 절대 잘 부른다고 할 수 없는 노래를 불러댔다. 저 하늘 아래 수많은 꿈 별 보다 많은 꿈이 온 세상에 가득하네 내 꿈과 네 꿈이 한 하늘 아래 내 꿈과 네 꿈이 함께 하네 간단한 가사, 간단한 음정의 노래였다. 부르는 사람의 음성도 바리톤과 테너의 중간쯤 되는 듣기 좋은 소리였는데, 어쩐지 어색했다. 다이아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치 군가같이 부르는군' 노래를 마친 리카르도는 어떠냐는 듯한 표정으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그가 바라는 평 대신 질문을 했다. "그 노래로 돈을 버셨나요?" 리카르도는 아픈 곳을 찔렸다는 듯한 표정을 과장되게 짓더니, 아주 슬픈 표정을 억지로 지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주점에서 쫓겨났어요" 다이아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리카르도 또한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얼른 과장된 표정으로 다시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공짜로 저의 귀한 노래를 들으셨으니 다이아나님도 한 곡 불러 주세요!" "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거든요" 다이아나는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생각해보니 이쪽 세계에 와서 노래라는 것을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다. 닫혀진 세계에서는 늘상 노래를 부르곤 했다. 천사의 집 안에서 아이들과 놀 때, 장애인들과 함께 할 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다이아나는 문득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리카르도가 아니라, 어머니께 불러드리고 싶었던 노래를...... "별로 잘 부르진 못하니까 웃지는 마세요" "아 네.. 물론이죠" 리카르도는 다이아나가 정말 노래를 하려고 하자 의외였지만, 나쁠 것은 없었다. 그는 어찌 되었던 눈 앞의 여인과 친해지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낳으시고 기르시며 손등 야위신 내 어머니 그 모든 슬픔 삼키시어 눈 가엔 주름 이네 마구 놀던 어린 시절 종아리 걷어 꾸짖으사 그 사랑 속에 나의 가슴 정의로 가득 찼네. 말로다 할 수 없어라 어머니 그 사랑 주님의 축복 내리시라 사랑 깊은 어머니 어리던 날 푸른 꿈도 그 사랑 속에 익어오고 가녀린 팔뚝엔 자랑스런 새 힘이 자라났네 그 깊은 사랑 속에 다희로 있을 때 이 곡은 늘상 다희를 우울하게 했다. 어머니라 부를 사람이 없었던 고아원의 아이들이 오히려 가장 즐겨 부르던 성가중의 하나. 메조소프라노 톤의 다희의 맑은 음성이 숲의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다이아나는 아마도 어머니가 어딘가에서 자신을 보고 계시리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해 노래를 했다. 곡이 끝나고 다희는 말없이 길을 계속 갔고, 리카르도는 멍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면서 발걸음을 맞추었다. 한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리카르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처음 듣는 곡인데, 정말 아름답군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시나 봅니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세상 모든 이들이 내 적이 된다고 해도 그 분만은 나의 편이 되어 주실껄요. 물론 부모님은 항상 그런 존재시죠" "그런가요...!"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가 잠시동안 계속되었다. 리카르도는 다시 우스개 소리를 시작했다. "다이아나님은 굶지는 않으셨겠어요" "...네?" "주점에서 쫓겨나긴 커녕, 쫓아다니면서 불러 달라고 하겠는데요?" "그.. 그런가요?" "50대 50으로 하죠" "네?" "여행 자금 딸리면 제가 사람들을 모을테니 받은 돈은 반반으로 나누자구요" "후후훗" "하하하!" 밀쳐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 그런데 별로 밉지 않은 사람이다! 리카르도에 대한 다이아나의 생각이었다. 한편 어느 정도 친근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리카르도는 나름대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성녀'와 가까워 지는데 성공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다이아나라는 여인에게 인정을 받아서 기쁜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고 있었다. 아무튼 둘의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이고, 그녀가 바뀐 외모처럼 '성녀'로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 또한 자신에게 해로울 것은 없었다. 그녀가 '성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분간만이라도 혼자인 편이 훨씬 유리했으니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우연과 인연 며칠 간 숲 속에서 야영을 한 끝에 다이아나와 리카르도는 마을에 도착했다. 리카르도는 다이아나가 냉정을 찾 고 쌀쌀하게 대하면 농담을 하거나 우스울 정도로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과장되게 행동함으로써, 다이아나를 웃게 하곤 했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 깨달은 일이지만, 다이아나는 조금씩 리카르도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사실, 친근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잘난 남자'를 거절하기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리카르도는 '이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이아나에게 친근하게 굴었고, 그의 거침없는 입담과 웃음을 담은 얼굴은 좀처럼 매정하게 대하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마을 분위기가 좀......" "......" 드워프들과 함께 왔던 마을은 '관광객'이 상당수 있다는 점에서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무장한 병력들이 곳곳을 지키고 있다는 점은 이전과 달랐다. 리카르도는 어렴풋이 이 일에 대하여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침묵을 지켰다. "그럼 새로 영주님이 오시는 건가?" "그렇다고 하더군. 그런데, 도대체 누가 영주님 일가를 암살한 거지?" "쉿~! 이건 비밀리에 떠도는 말인데, 그 영주 아들이 상당히 높은 분을 암살하려다가 오히려 당한 거라고 하더군!" "뭐야? 쯧쯧... 어째 좀 이상하다 했어." "새로 오시는 분은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군" "그러게 말일세" 다이아나는 일부러 드워프들과 묵었던 여관이 아닌 다른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여관 주인은 1인실 둘을 달라는 주문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웃는 얼굴로 "요즘 젊은이들 답지 않게 혼전순결을 중요시 하시는군요. 참 잘 어울리십니다!" 라고 말하는 바람에 둘의 얼굴에 동시에 홍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상당히 두꺼운 안면을 가진 리카르도조차 이렇다 하게 대꾸를 못했던 것이다. 일단 식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기로 한 두 사람의 귀에 나름대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마을을 둘러싼 무거운 공기에 궁금했던 터라 다이아는 그 음성들을 유심히 들었고, 상당히 향상된 청각은 무리없이 의도하는 내용을 실어다 주었다. 리카르도는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통신수단이 있었던 그는 실제로 이번 일의 결과를 예상하고 황궁에 연락을 넣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나 앞에서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 다이아나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음을 안 이상에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할 일을 했나 보군요" "꼭 죽일 필요까지야......" "저는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용서할 정도로 속이 넓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을 한 둘 살려 놓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제 목숨이 위태로워 지지요" "......" "만일 우리에게 실력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 짐작해 보셨습니까?" "... 그렇군요" 마지 못해 동의하긴 했지만, 다이아나의 말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리카르도는 어느 정도 형성된 친분이 깨어질 것이 걱정이 되어 다이아나의 점수를 딸 말을 서둘러 덧붙였다. "이번에 오는 영주는 상당히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입니다. 이 곳은 더욱 살기 좋아 지겠지요. 드워프들에 대하여도 상당한 예우를 갖출 것입니다." ".... 그건 고마운 일이네요"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간 다이아나는 창 밖으로 여기 저기 경계를 서 있거나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들을 인솔하는 듯한 기사들의 모습도 간혹 볼 수 있었다. 원인을 따져 보면 영주와 그 아들의 죽음에는 자신도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애초에 그녀가 없었다면, 결투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드워프들만으로 영주의 저택을 방문했다면 훈트의 태도가 아무리 무례했다고 한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는 못했으리라. 자신의 주군이 될 사람과 장차 자신의 손발이 될 가신들 앞에서 온갖 추태를 보인 것은 그의 잘못이었지만, 결국 그런 일이 일 어나게 한 것은 다이아나 자신이라고 판단되었다. 딱히 그녀가 잘못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그 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므로 해서 하나의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암살자들을 고용해서 드워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영주의 아들은 경솔한 판단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의 목숨과 가족의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리카르도가 개입한 것이 분명해 보이니, 암살자 길드에는 아마 크게 불이익이 생기지 않도록 손을 써 놨을 것이다. 그들은 묵시적이지만 황태자의 의뢰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내가 능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드워프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봐야 했을 것이고, 자신은 영주 아들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 뻔했다. 그녀 또한 여자는 사로잡아 오라고 했다는 암살자들의 의뢰내용을 똑똑히 들었으니까. 온화해 보이던 리카르도도 결국 내면에는 황태자로 서의 강인한 결단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자신의 암살을 의뢰한 이를 놓아 줄 정도로 그는 녹녹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의 말도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영주민들의 생활이 좋아질 것이라 했다. 어차피 영주가 누구든지 영지민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영주의 아들을 만나본 경험으로 보아 그 아들이 후계가 되어 영지민들을 다스렸을 상황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일단의 죽음 을 놓고 '잘되었다'라고 결론을 맺는다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주무십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서 리카르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이아나는 방문을 열고 리카르도를 들어오게 했다. "앉으세요" 다이아나는 방 안에 있는 좁은 이인용의 탁자의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리카르도는 항상 얼굴을 떠나지 않던 속 좋아 보이는 웃음기도 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용건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 여인을 참으로 상대하기 힘들다고 리카르도는 내심 혀를 차고 있었다. 신분상 꽤 많은 여인들이 접근해왔고, 이성에게 자신이 호감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자신의 허물 없는 태도에 신분이라는 표찰을 뗀 상태에서도 늘 많은 접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녀'가 틀림없는 눈 앞의 여인은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갔다고 싶으면 어느 새 다시 딱딱한 태도로 되돌아가 있곤 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진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지난 번에 제가 드린 제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는지요?" 사실 별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사나 궁중마법사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가 아니라고 치부했던 것이다. "별로......" "능력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 하나를 놓고 볼 때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남자에 불과하지만, 제국에서의 제 위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 옆에 있으면, 더 많은 힘과 권력으로 당신의 이상을 이룰 수 있을텐데요" "저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직도 다이아나의 대답은 차가왔다. 리카르도는 초조함을 감추고 속내를 조금 내보였다. "일단 당신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생명에 대하여 상당한 애정을 보이시더군요. 당신에게 못할 짓을 하려고 한 이들의 죽음에도 상당히 마음 아파 하셨지요? 당신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약간의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구요. 그런 면에서 당신은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타입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 "더군다나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당신의 능력은 평범하지 않지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아, 능력을 사장시킬 뜻은 없어 보입니다. 기왕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시면, 좀 더 넓고 높은 곳에서 저를 도와주십사 부탁드리고 싶군요" "저에 대한 판단은 대충 알겠네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나요?" 다이아나는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리카르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냉정하게 물었다. 순간 리카르도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다이아나는 노골적으로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고 리카르도는 생각했다. 그녀의 질문은 오히려 그에 대한 망설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면의 거절이 아닌 이상 아직 희망을 있는 것이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제가 어떤 인물인지 저 자신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제국과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에게는 유능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오히려 그 말을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저로서는 다이아나양이 직접 판단할 기회를 가지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황제가 될 인물인지를......" "당신은 정확히 제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단 검사로서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압니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수 년 후에는 가히 모든 제국들이 탐낼만한 사람이 되어 있겠지요. 그 전에 제가 먼저 당신을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저를 당신의 수하로 두고 싶다는 말씀인지요?" "수하라... 동료나 친구라는 말이 좋지 않을까요?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저를 인정하고 주군으로 삼아 주신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과한 욕심이겠지요" 리카르도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직설적인 그의 언변은 사람을 사로잡는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눈에서 '그녀'라는 존재에 대한 '그'의 갈구를 볼 수 있었다. '인재를 미리 스카웃하겠다는 걸까? 정말 단지 그것 뿐일까?' 다이아나의 의문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한 남자로서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일단 동료로서, 친구로서 말이죠. 만일 당신이 저에 대해 안좋은 판단을 하신다면 그 때 떠나셔도 되지 않겠 습니까?"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부디 좋은 답변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리카르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지한 표정 위로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밤 인사를 건네고는 방 문을 열었다. "아 참, 여관 주인이 우리보고 잘 어울린다고 했는데, 그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디 가서 저만큼 다이아나양의 미모에 어울리는 잘난 남자를 찾겠습니까? 하하하~!" 여전히 농담 비슷한 말로 마무리를 짓는 리카르도였다. 다이아나는 그런 리카르도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하여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황태자로서 배운 교육에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함께 있는 대상을 상당히 편하고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넓고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본다...라.......' 아무래도 개인의 힘보다는 국가의 힘을 빌린다면, 좀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겠지만,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 리카르도의 캐릭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이 많으신데요 ^^; 그의 프로필을 보자면 185cm에 75kg 보기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은 근육들 때문이죠. 근육이 지방보다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것은 다 아시죠? ^^; 후궁을 들이지 않은 황제의 장남으로서, 어려서부터 후계자 수업을 충실히 받고 자란 전형적인 황족~! 결국 이 부분에서 리카르도의 행동들이 어느 정도 규정됩니다. 단지 소드마스터라는 능력 뿐만이 아니라 현 황제가 상당히 만족해하고, 귀족들 또한 이견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황태자이죠. 기본 성품은 밝습니다만, 본질적으로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이 우선하는 인물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이 캐릭은 그러한 특성을 많이 반영했다고 할 수 있네요. 그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실 기사단 '이게 옳은 선택일까?' 결국 리카르도와의 동행을 결정한 다이아나는 신이나서 바로 수도로 가자고 앞장을 선 리카르도를 따르면서 생각했다. 그녀의 복잡한 심중과 달리 리카르도는 연신 헤헤거리는 풀어진 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전날의 진지하던 '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남자도 이중인격성이 다분하군' 심술 궂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어차피 사람이란 상황과 위치에 따라 다른 태도를 가지게 마련이다. 다이아나 자신도 의도적으로 그러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주위 사람에 대한 배려로서 저런 과정된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아, 그거야 물론 마법 길드죠. 거기 가면 마법진을 사용해서 수도로 한 번에 텔레포트를 할 수 있어요. 비용은 좀 들겠지만, 시간이 아깝거든요" "그 동안은 그리 바빠 보이지 않으셨습니다만......"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이아나는 드워프 마을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인거죠. 얼른 가요~!" 느닷없이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리카르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그녀를 이끌고 있어서 무어라고 말하기도 좀 우습게 생각이 되었다. 부지런히 걷던 리카르도가 갑자기 우뚝 멈추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그의 등에 코를 박을 뻔 했으나, 겨우 거리를 유지하고 멈출 수 있었다. "...왜...?" "저기, 궁으로 들어가면 당신을 제 호위기사로 임명해도 될까요?" "에엣?" "일단 입단 테스트는 해야 하겠지만, 호위기사는 싫은가요? 황실 전속 기사단은 좀 딱딱할 텐데......" "당신을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은 제가 호위기사가 된다는 건 좀 문제가 있겠네요" "......그런가?" 분명히 당연한 일을 마치 몰랐다는 듯이 능청거리는 말투. 결국 다이아나는 황태자의 추천을 받고 기사단의 입단 테스트를 치르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에이... 좀 아쉽다" "......" "호위기사가 되어야 내내 붙어 있을 수 있는 건데......" 희희낙락하면서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리카르도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의 마법사 길드로 텔레포트한 두 사람은 곧바로 마차를 빌려 황궁으로 향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물론 황궁의 정문에는 출입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몇 명의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빠끔 내민 리카르도는 병사들의 책임자인 듯한 기사를 발견하고는 웃는 얼굴로 그를 불러댔다. "이봐~! 체르만~!" "헉!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자신을 이름을 크게 부르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마차로 다가선 기사는 경악의 신음소리와 함께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체르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비를 보던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의 갖췄다. 리카르도는 빙긋 웃더니, 여태까지와는 달리 상당한 위엄을 갖춘 어투로 그들의 예를 받아 들였다. "고생들이 많군. 이제 돌아왔다네. 그럼 수고들 하게~!" 마차는 황궁 안으로 들어갔고, 일 년에 몇 달을 제외하고는 늘상 '여행'을 떠나는 황태자의 귀환은 상당한 속도로 상급자에게 보고 되었다. 마차는 갈 가꾼 정원을 지나 몇 개의 화려한 건물도 지나쳤고, 리카르도의 신분을 알고 한껏 주눅이 든 마부는 손수 갈 길을 일러주는 황태자저하의 명령에 따라 황궁의 가장 중앙에 있는 화려한 건물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도착했습니다. 황태자저하!" "수고했네." 리카르도가 마차 삯으로는 지나치게 많은 금화 한 닢을 건네주자 마부는 더욱 황송한 표정으로 한껏 고개를 수그렸다. 리카르도는 그런 마부를 뒤로 하고 다이아나를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정문에서 통신구를 통해 연락을 받았는지 기사들이 열을 지어 황태자를 마중했다. "알렉, 오랜만이야~!" "황태자 저하~!" "기다리고 계시겠지?" "예. 물론이지요. 무려 네 달 만에 오셨으니까요" "흠.. 잔소리 꽤나 들을 것 같군. 이쪽은 이번에 내가 발굴한 인재지. 다이아나양이라네" "처음 뵙겠습니다. 알렉시안 드 하프로스입니다." "예. 처음 뵙습니다. 저는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성을 소개하지 않는 이 여자는 평민인 것 같았다. 하지만, 황태자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알렉시안은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약간의 느낌을 얼른 지우고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들어가죠 다이아나. 일단 아버님을 뵈어야 하니까." "... 저도 함께 가시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야 변명거리가 생기니까요 하하하~!" 알 수 없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 리카르도는 대기 중이었던 알렉시안의 호위를 받으면서 다이아나를 이끌고 갔다. "폐하, 황태자 저하께서 들었사옵니다~!" 시종의 말이 울려 퍼지자 문 안쪽에서 허락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라 하라~!" "하하하, 아바마마 소자 이제 돌아왔습니다~!" ".. 흠... 이번엔 꽤나 오래 걸렸구나!"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재를 한 명 발굴해서 설득하느라 늦었답니다" "호오, 인재라 저 아가씨를 말하는 것이냐?" "네. 다이아나 이리 오셔서 인사하세요" 부자간의 상봉인데다가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이다. 다이아나는 뒤쪽에서 조용히 서 있다가 자신을 소개하는 황태자의 말에 할 수 없이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다이아나라 하옵니다!" "반갑소! 내 아들이 발굴한 인재라니 내 기대해 보겠소~!" "황공하옵니다!" "그런데, 어떤 방면의 인재이신지?" 황제는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순서를 기다린 듯 했다. 황제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리카르도가 의기 양양하게 나서서 다이아나 대신 답을 했다. "다이아나는 마검사입니다. 검술은 곧 마스터의 경지를 이룰 정도이고, 마법은 4클래스까지 가능하지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호오! 대단하군!" 단순한 반응이었지만, 리카르도의 말이 몰고온 여파는 작지 않았다. 특히 황제의 그림자이자 오른 팔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마르띠앙 공작은 조카가 데려온 이에 대하여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여, 일단 마르띠앙 공작각하의 허락을 받아 황실 기사단으로 입단시켰으면 합니다." "아무리 황태자의 추천이라고는 하지만, 절차는 그대로 따라야 할 걸세" 마르띠앙 공작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는 황실 기사단의 총괄하는 책임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실의 안위를 책임지는 기사단이 그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은 처남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이지요!" 리카르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다이아는 정작 장본인인 자신과 상관없이 미리 의논된 일이라고는 해도 모든 것이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타인의 일처럼 현실감 없이 보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입단 테스트는 여행의 피곤을 고려하여 다음 날 정오로 예정되었고, 다이아나는 숙소로 안내되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황제의 서재에 해당하는 방 안에는 황제와 리카르도 그리고 마르띠앙 공작이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데려왔을 뿐입니다." "흠.. 단지 그것 뿐이냐?" "지금은요!" "혹시 저하께서 지난 번 보내신 드워프 영지로 알려진 곳의 일과 관계 있는 분입니까?" "숙부님..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편하게 하셔도......" "그러게, 자네 조카가 아닌가?" "흠흠.. 그러니까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것이냐?" "테이보스가 패해서 앙심을 품게 된 사람이 다이아나지요" "테이보스를 이겼다고?" 마르띠앙 공작 또한 테이보스를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연락을 받아 영주가족의 암살에 대한 뒷처리를 지시하고 후임을 보낸 것이 자신이었고, 테이보스라는 인물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촉망받는 인재임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테이보스라면 황실 아카데미에서도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던 인물인데, 그를 이겼다는 것은 그녀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증거가 된다. "예! 검으로 한 번 이겼고, 비겁하게 달려든 그를 체술로 날려 버리더군요" "호오~! 그 정도란 말이지?" 황제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나름대로 탄탄한 근육을 가진 다이아나였지만, 로브로 가려진 상태에서 그녀는 늘씬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여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녀는 오러 블레이드를 형상화 시킬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럴 수가~!" "마법사라 하였으니, 혹시 나이보다 젋게 보이도록 손을 쓴 것은 아니냐?" "그건 아닙니다. 뭐, 나이가 어려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요. 제게 스무 살은 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지만, 그건 당분간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가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실력에 감추어진 무언가가 또 있다는 것이냐?" "예. 하여, 숙부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말해 보거라" 셋의 논의는 밤이 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실상 황태자가 방랑벽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역대의 황제들이 대부분 황태자 시절에는 비슷한 일들을 해 왔다. 물론 현 황태자가 제국 사상 가장 많이 돌아다녔다는 전대 황제인 조부의 기록을 능가했기에 조금 더 과장되기는 했지만...... 황태자의 외유는 다음 대의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하나의 교육과정이라 볼 수 있었고, 그를 보좌할 인물들을 선별해 내는 데에 크게 한 몫을 했다. 실제로 죽은 황비나 마르띠앙 공작의 경우 현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사귄 친우이면서 그 친우의 동생을 반려로 삼은 것이었다. 일찍 짝을 만난 이유로 현 황제의 여행은 상당히 짧은 시간만 이루어졌었다. "황궁이라...... 거처를 정한 건가?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알트상단에서는 베일에 싸인 후계자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 떠돌았다. 대륙 4대 상단 중 유일하게 칼라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알트 상단의 후계자의 자리란 웬만한 중앙 귀족보다 결코 못하다고 할 수 없었다. 만일 당장에라도 알트상단이 마음을 먹는다면 칼라임제국의 상권이 마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그간 최고위급의 간부들만이 얼굴을 드러냈던 알트 상단의 실제적인 후계자에 대한 정보는 칼라임 제국의 수뇌급이 운영하는 정보조직에도 작지 않은 여파를 가져오고 있었다. ********************************************************************* 음, 일단 글의 주 내용에 관한 한 알테는 마이페이스입니다. 물론 모순성이나 오타에 대한 지적은 감사히 받고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설정된 내용을 의견에 따라 일일히 수정해서는 제 글이 아니게 될 게 분명하거든요, 이 점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찬찬히 설정을 살펴보시면, 다이아나가 후일에 대하여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는데 대하여 충분히 이해가 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무 빨리 '반려'의 결정을 하기엔 다이아나의 생이 너무나 많이 남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같이 할 이성을 결정한다는 것은 일단 감정이 따라야 하고 다이아나의 경우엔 여타의 여러 가지 제약도 고려해야 한답니다. ^^;;;; 다이아나를 걱정해주신 많은 분들께 걔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내일은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는 관계로, 밤 늦게나 글이 올라갈 듯합니다. 별 일이 없는 한 가능하면 많이 쓰게 되는데, 이유를 알아보면 아주아주 단순합니다. 라인만 정하고 그 다음에는 캐릭들의 특성에 따른 장면 장면이 나타나는 터라서 저도 써가면서 뒷 장면이 궁금해진다는 웃 기는 사정이 있거든요 ^^; 일단, 속성을 정한 캐릭은 냅둬도 알아서 움직이더라구요. 가능하면 하루 두 편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초와 같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에는 지켜질 것 같네요 2월 셋째주부터는 새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터라 지금처럼 많 이는 못 올릴 듯합니다. 그 때를 생각해서 기준으로 정한 것이 하루 두 편이구요. 그럼 즐독들 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실 기사단 마르띠앙 공작은 상당히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다이아나의 입단 테스트도 봐야 하고, 아침 일찍 전해진 상단의 후계자에 대하여도 미리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다. 만일 리카르도가 상단의 후계자마저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까진 아니더라도 둘 사이에 어떤 끈을 이어 놓아야만 했다. 무력의 힘, 권력의 힘도 중요하지만, 금전적인 힘을 무시해서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입단 테스트를 위해 방을 나서기 전 리카르도의 방문을 받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 "오늘 테스트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 지신 듯 한데,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해 주십시오" "꼭 그래야할 이유가 있는 건가요?" "황궁은 암투장이기도 하지요. 얕잡아 보여서는 생활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건 미리 양해를 드리는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무래도 하대를 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어차피 시종의 안내를 받으셔야 할테니, 저와 같이 가시죠" 앞서 가는 리카르도는 보면서 다이아나는 자신이 너무 그의 의도에 따라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닌가 회의에 잠겼다. 하지만, 일단 한 번 결정한 일이니만큼 닥친 일들을 하나씩 풀어 나가다 보면 자신의 길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는 판단이 설 것이었으므로 성급히 걱정한다고 해결될 것은 없었다. 리카르도는 대련을 위해 늘상 앞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핀으로 묶어 얼굴이 드러난 다이아나를 보고, 속으로 그 여파를 생각하면서 빙긋 웃었다. 원래의 색만큼은 아니었지만, 갈색 눈동자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둘은 황실 기사단이 평소에 수련을 하는 곳으로 향했다. 간혹 검술대회가 벌어지기도 하는 그 곳에는 이미 황제와 마르띠앙 공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과 황실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다. 테스트는 기사단장이 지명한 한 명의 기사와 대련을 하는 것이었다. 다이아나의 대련 상대를 본 리카르도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맙소사, 알랙이잖아? 숙부님이 단단히 마음을 먹으셨나 보군' 알랙시안은 개인적으로는 리카르도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약속된 첫 번째 수하이기도 했다. 마르띠앙 공작은 작위가 낮은 남작의 아들인 그의 재질을 알아보고 - 실제로는 상당히 여러 명의 낮은 작위의 귀족 아들들이 그의 테스트를 거쳐 갔다고 한다 - 조카의 심복으로 그를 키웠다. 26세의 리카르도가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지만, 리카르도보다 5살 위인 알렉시안은 그의 나이 18세부터 28세까지 한결같이 리카르도의 옆을 지켜왔던 것이다. 소드마스터가 되면서 리카르도는 알렉시안에게 하나의 임무를 맡겼고, 그에 따라 알렉시안은 황실 기사단의 일원으로 배속되었다. 문제는 오늘 다이아나와 대련할 상대가 그라는 것이었고, 알렉시안의 실력을 잘 아는 리카르도로서는 조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언제나 제 실력을 숨기는 알렉시안이 전력을 다 할 리가 없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편 오늘 입단 테스트를 치를 사람이 황태자가 데려온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기사단을 비롯한 귀족들은 간편한 복장으로 황태자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다이아나의 외모를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전날 다이아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황제와 마르띠앙 공작도 기대 이상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나자 상당히 놀란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리카르도가 아무래도 다른 마음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글쎄 말입니다" 황제와 공작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죽여 의구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저 여성을 '수하'로서 마음에 들어한다고 판단하였으나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그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한편 황실 기사단원들은 불행히도 입단 테스트에서 알렉시안을 상대하게 될 여성이 상당한 미모임을 깨닫자 염려와 함께 나름대로 응원의 눈빛은 보내었다. 원래 사람들이란 미인에게 약한 법이니까. 다이아나는 자신의 대련 상대를 소개 받았고, 둘은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알렉시안은 다이아나의 드러난 모습에도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오히려 그러한 그의 태도가 더 편하게 느껴졌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대련의 시작을 기다렸다. "와아~!" 누구랄 것 없이 구경하던 이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다이아나의 검에 깃든 은색의 빛은 바로.. "오러 블레이드닷~!" "저럴 수가! 말도 안돼~!" 기사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이아나의 검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황태자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검에 마나를 끌어내어 덧씌운 그녀는 빠른 발을 이용하여 속공을 펼쳤다. 알렉시안도 지지 않고 다이아의 검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씌워진 검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자신의 검이 남아 나지 않을 것이기에, 대련은 상당히 불리하게 된 셈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다는 제약까지 걸려 있었으므로, 꽤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던 이 대련은 짧은 시간에 결판이 나 버렸다. 그런대로 잘 막아내던 알렉시안의 검이 다이아나의 검과 충돌하여 부러져 버린 것이다. 리카르도를 비롯한 몇 명은 그것이 다이아나의 실력을 인정한 알렉시안의 나름의 결정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수위를 다투는 기사가 다이아나에게 단기간에 무너지자 상당한 동요가 기사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부러진 검을 든 알렉시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고, 다이아나 또한 대련이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처음 자리로 돌아가 섰다. "제가 패했습니다.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좋은 대련, 감사드립니다" 당사자인 두 남녀의 예의상의 대화가 이어졌고, 마르띠앙 공작은 다이아나가 테스트에 통과했음을 알렸다. 이후, 황제가 기사의 직을 수여하는 간단한 절차가 이어졌고, 이례적으로 다이아나의 실력을 높이 산 황제에 의해 다이아나는 남작의 지위와 라파엘르라는 성을 수여받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무엇이 말입니까?" "그녀 말일세. 황태자께서 단순히 측근으로 그녀를 끌어들이셨다면 별 문제가 없네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 "마르띠앙 공작 측에서 손을 쓴 것은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 괜히 일을 크게 만들 수 있으니, 일을 서두르는 편이 좋겠네" "정히 걱정이 되신다면 그녀를 없애는 것이......" "그건 좋지 않아. 황태자께서 데려온 사람이네. 오히려 뒤에 우환이 될 수 있는 일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보네." "아,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일단 시기만 좀 앞당기세나" 깊은 밤, 수도 내의 한 저택에서는 제국의 귀족 두 명이 은밀하게 그들만의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 그게 무슨?" "이건 나의 뜻이며 황태자 저하의 뜻이기도 하네. 아무래도 적응할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바, 당분간 경에게는 특별한 임무나 책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네. 일단은 황태자 저하를 모시고 다니면서 궁성 안의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도록 하게나" "... 알겠습니다" '호위기사'로 정식 발령난 것은 아니니 약속을 어겼다고 리카르도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참.. 다음 주에 큰 행사가 있네. 자네는 이번에 작위를 받은 만큼 소개의 대상이 되니, 잊지 말고 참석해야 하네. 필요한 것들은 자네 방의 시종이 준비해 줄 것이고, 질문은 황태자 저하께 하도록~!" 마르띠앙 공작은 작위를 받고 온 다이아나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어찌 되었던 자신이 속한 곳의 가장 높은 상사이자, 고위귀족이었으므로 다이아나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면서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물러갔다. "말해 보게" "후계자는 에디우스 드 하비어스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입니다. 알트 상단을 창건자와 유사한 외모에 상당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얼마 전까지는 상단 소속의 용병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흠......" "그 외에는 개인적인 신상에 대하여 거의 정보가 전무한 상태입니다. 최근 상단을 대리 운영하던 수뇌부에서 그를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것과, 그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성향은 전혀 모른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황실의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게. 전대의 상단의 주인이 당시 받은 작위가 백작이었나? 어찌되었던 명분은 있는 셈이니, 그가 우리 황실에 도움을 줄 의도가 있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 우선이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나간 여자에 대해서는 알아 보았나?" "황태자께서 그녀를 만나셨을 때 드워프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모두 산맥으로 들어갔다는 것 외에는 별달리 밝혀진 것 이 없습니다. 추정되는 사실은 그녀가 드워프들과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흠... 황태자께서는 어느 정도나 아시는 것 같은가?" "원체 일단 정하신 부분에 대하여는 내색을 안하셔서......" "그야 그렇지. 알겠네. 나가 보게나. 방금 이야기한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계속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수집하도록~!" "네!" 휘하의 정보조직을 총 동원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나타난 두 남녀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르띠앙 공작은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수하의 말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누구의 교육을 받았는데, 아래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드러나게 하겠어!' 현 황제는 쉽게 표현하면 무난한 황제였다. 황제로서 무능하지도 않았지만, 그다지 크게 두각을 나타낸 점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마르띠앙이라는 오른팔이 있었고, 후궁들이 없었으므로 이렇다할 권력 투쟁이나 후계에 대한 다툼을 미리 예방한 셈이었다. 하지만, 마르띠앙이나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거대한 제국의 영토 구석까지 황제의 힘이 미치기에는 아직 많은 점이 부족함을. 아무리 중앙에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귀족들은 나름대로 쌓아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사익의 추구에 열중했고, 그러한 면면은 제국의 발전에 큰 저해가 되는 요인이라 할 수 있었다. "당분간 일이 없으시다면서요?" "이미 알고 계셨지 않은가요?" "어? 눈치 채셨군요!" 리카르도는 여전했다. 다이아나의 약간 뾰죽한 어투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웃음을 머금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죠. 어차피 황성에 처음 오신 것이고, 작위도 처음이고 하니까, 일단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그래서요?" "여기서 다이아나랑 안면 있는 사람이 저 밖에 더 있나요? 그러니 저랑 다니셔야 하는거죠" "편한 논리군요"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고 저랑 같이 가요!"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의 차가운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젠 아주 습관이 된 듯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있었다. 간신히 알았다는 말과 함께 잡은 손을 떼어놓은 다이아나는 한숨을 쉬면 리카르도를 따라 나섰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가 자신의 상전이었으니까. ********************************************************************** "저건 좀 위험하지 않아?" "아무튼 황족들이란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이기적일 수 있는 존재지" 포이보스와 헤파이토스가 중얼거렸다. 모처럼 다이아나의 생활에 변동이 있다고 해서 모인 신들이었는데, 리카르도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흥!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 어째서 인간의 황태자 따위에게 저 애가 존대를 하고 저렇게 끌려다녀야 하는 거냐구!" 페르세포네가 이번만큼은 늘상 구박만 하던 두 남신의 편을 들고 나섰다. "세레스 언니는 속상하지 않아요? 저 인간 속이 다 들여다 보여! 어떻게든 자신의 목적에 맞게 다이아나를 이용할 꺼라구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영상을 보던 세레스가 한 말에 흥분했던 세 명의 신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저 애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내 조카잖아요. 언니의 딸이고, 유스테우스의 딸이기도 하구요!" 페르세포네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건 사적인 관계일 뿐이죠. 저 애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에요" "그.. 그건!"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신지는 알아요. 하지만 저 애는 신도 드래곤도 아니에요. 단지, 인간이지요. 저는 제 딸이 스스로의 존재를 잊지 않고 인간으로 살기를 원해요. 아버지의 뜻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세레스의 차분한 설명에 성미 급한 세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다이아나의 존재가 인간임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 니었다. 하지만, 주신의 권능으로 태어난 이들이 처음으로 가져보는 혈육의 정이었기에 다이아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굳이 거론하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인간이라는 종족을 싫어하시는 것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 따뜻한 미소를 아낌없이 던지면서 세레스는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최고신들이 지상의 생명에 대하여 경시하거나 하찮게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속성에 따라 '관심'을 주는 부분이 조금씩 달랐던 것이다. 신이라고 반드시 인간보다 존귀하 다고 해야 할까? 굳이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주신에게는 모두가 같은 의미의 피조물이며 자녀들임을 이들은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니! 저 아이가 상처를 받을 지도 몰라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아프로테이아가 말했다. "......" "상처 받지 않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능력이 높을수록 많은 이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그만큼 그 능력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많아 지겠지요.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의 삶이에요. 다이아나는 어리석지 않답니 다. 결국 경험이 그녀를 더욱 지혜롭게 만들어 줄꺼에요" 침묵을 지키는 세레스를 대신해서 아테나이가 대답했다. "그러니 그만들 하라구. 지켜 보면서 사랑을 쏟는거야 이해가 가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저 아이를 생각하는 것은 세레스이니까. 그걸 부정하진 않겠지? 안타까워도 저 아이가 손 벌리기 전까지는 간섭하지 말아야 해." 단호한 어투로 단정짓는 포이브론의 말을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풍의카제님 ^^;; 앞에서부터 열심히 달아주신 리플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근데 다른 사이트의 연재는 아직까지는 고려하기 힘드네요 원래 제가 멀티가 안되는 스타일이라서요.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곳까지 신경쓰기 힘들더라구요 현재 조아라에 올라오는 리플들도 겨우겨우 보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그냥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이름처럼... 이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죄송해요~! 에휴님아~!!! 사시미좀 치워주세요. 왕 무섭다니까요~!!!!!!!!! 빨간이슬님의 마지막의 비명성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 루시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법사의 노래님, 노력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시죠? ^^;;;;;;;;; 아참, 치베님이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네요. Tia님이 리플을 주셔서 까페에 가 봤습니다. 제가 써도 못쓸 것 같이 황송한 소개글에 감사 드립니다. 이래서 내일 저녁 음악회는 어떻게 갈까요? 항상 다음 날을 걱정하면서도 글을 붙잡고 한숨짓는 알테랍니다. 자 그럼, 다들 즐독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궁에서.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림같은 소년과 소녀의 입에서 나란히 예를 갖추는 말이 튀어나왔다. 황태자의 궁에 머물게 된 다이아나를 데리고 리카르도가 간 곳은 인접해 있는 약간 작은 궁이었다. 그의 방문을 알고 있었는지, 10살 전후가 되어 보이는 두 명의 소년과 소녀가 앞 뜰부터 미리 나와 있다가 그에게 예를 표했다. "이런, 이런... 정말 그렇게 딱딱하게 굴 테냐?" 리카르도는 혀까지 차가면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 금발머리의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는 서로 얼굴을 보고 빙긋 웃더니 방금까지의 어른스럽던 예절은 모두 던져 버리고 소리를 지르면 달려드는 것이었다. "오빠아~!" "형~!" 모계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아닌 부계의 금발을 가진 이들은 황태자의 누이동생과 남동생이었던 것이다. 타계한 황후는 상당히 몸이 약했다고 한다. 황태자와 그 바로 아래의 누이동생은 상당한 나이 차이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몇 번에 걸쳐 사산된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황후의 건강을 생각하여 더 이상의 회임을 말렸지만, 황후는 고집스럽게 신의 은총이라면서 아이들에 집착했다. 결국 손 쓸 사이도 없이 막내인 왕자를 낳고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8살의 왕자와 11살의 공주는 든든한 리카르도의 양 팔에 매달려서 오랜 기간동안 얼굴도 못 보았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두 동생들을 끌어안고 부비고 뽀뽀를 해 댔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단다!" "아, 시종들이 하는 말 들었어요. 오러블레이드를 보였다는 그 분인가요?" 영리해 보이는 녹색눈을 빛내면서 뒤쪽에 말 없이 서 있는 다이아나를 바라 본 것은 방년 11세가 된 칼라임 제국의 유일한 공주 아이리스였다. 대담하게 다이아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아이리스와 달리 이제 8살이 된 알베르트 왕자는 약간 수줍은 빛과 호기심을 담아 그녀를 힐끔 힐끔 쳐다 보았다. "왕자전하와 공주전하를 뵙습니다. 다이아나... 라파엘르라고 합니다" 다이아나는 드레스를 입은 것이 아니어서 여성의 예의를 갖추지 않고 기사들이 하는 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그 사 이 나름대로 왕자와 공주로서의 예의를 차린 이 예쁜 소년 소녀들은 애써 위엄을 갖추어 다이아나의 인사를 받았다. "흠.. 너무 그럴 것 없다. 다이아나양은 이 오빠의 친구이기도 하니까, 편하게 지내도 된단다" "정말 그래도 되요?" "그럼 당연하지!" "와아~!" 안 그래도 예쁘게 생긴 아이들이 손을 마주 잡고 폴짝폴짝 뛰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웬만큼 아이를 싫어한다는 사람도 결코 미소짓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물론, 다이아나는 웬만큼이 아니라 상당히 아이들을 좋아했으므로 저절로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언니라고 불러도..."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둘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응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렴.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알지?" 리카르도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말하자 두 아이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언니, 정말 오러블레이드를 만들어 낼 줄 알아요?" 다이아나는 예고없이 자신의 손에 매달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호기심 어린 질문을 퍼붓는 이 어린 소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상체를 구부린 후 미소를 지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대단해요~! 저도 검술을 배우고 싶은데 안 된다지 뭐에요? 알은 싫어하는데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억지로 연습해야 하구요. 정말 불공평하죠?" 특별한 대답을 원한다기보다는 아이다운 투정에 가까운 말이었기에 다이아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알베르트 왕자는 상당히 수줍음을 타는지 누나의 옆에 꼭 붙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 밖에서 이러지들 말고, 들어가자꾸나. 사람들 앞에서의 예의는 잊지 말도록~!" 리카르도가 말을 던지자 마자, 아이들은 얼른 의젓한 태도로 돌아가 제법 궁의 주인의 예의를 갖추어 둘을 안내했다. "너희들은 나가 보거라~!" 햇살이 한껏 들어오는 테라스에 시종이 다과를 늘어놓고 나자, 아이리스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제법 그럴듯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시중을 들고자 대기하던 시종들은 순식간에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리카르도는 아이들이 다이아나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잠시 볼일이 있다면서 슬며시 자리를 비웠다. 다이아나는 약간의 조심성도 던져 버리고 늘 하던 대로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고 아이리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도 했다. "왕자님은 뭐 궁금한 것 없으세요?" "......" "알은 검술 같은건 별로래요. 그래도 책을 참 많이 읽으니까 나중에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꺼랬어요" 아이리스가 대신 대답했다. 다이아나는 알베르트 왕자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친해질 계기가 필요하다. "저, 비밀이 있는데요. 두 분이 지켜 주신다면 알려 드릴께요" 다이아나는 두 아이들에게서 리카르도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그 동안 거의 불러내지 않던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운디네, 실프! 좀 나와줄래요?" "와아아~!!!" 다이아나가 일부러 사람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사람과 비슷하지만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작은 형상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특히 알베르트는 보자마자 바로 그 정체를 알아차린 듯 했다. "정령사이신가요?" "쉬잇~! 비밀이라니까요~!" 어린 왕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정령들에게 호감을 보이자, 다이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만져봐도 되요?" 아이리스가 묻자 알베르트도 발그레해진 얼굴로 다이아나를 쳐다보았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의도가 적중한 것에 대하여 상당히 흐뭇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는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던 다이아나의 표정이 아이들을 본 순간 허물어졌다. '성품으로 보아 아이들을 좋아할 것 같았지! 후훗!' 오랜만에 동생들을 만난 것도 기뻤지만, 다이아나를 확실하게 잡을 빌미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아이들이 다이아나를 따르는 한 그녀는 결코 아이들을 버릴 사람이 아니다. 엔젤상회가 전 대륙에 건립한 엔젤하우스가 주로 빈민층의 고아들을 대상으로 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성녀가 그 곳에서 교사로 일했다는 것들을 조합하면 그녀가 아이들을 좋아할 것이라는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 자신의 계획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리카르도는 차근차근 자신의 제국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 설마 저에게 이것을 입으라는......?" "네? 마음에 안 드시나요? 다른 것들도 있었을 텐데...?"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시녀의 말에 다이아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기사의 신분을 가진 터라, 그런 계통의 복장을 예상했건만 시녀들이 늘어놓은 것은 온통 레이스로 뒤덮인 드레스들 뿐이었다. 다이아나가 더듬더듬 자신의 예상을 말하자, 메리라고 불리우는 고참 시녀가 나서서 설명을 했다. "여성 기사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경비를 맡거나 호위를 맡지 않은 이상, 파티에는 당연히 드레스를 입으시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 세계의 드레스라면 하투아에 있을 때 입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하투아제국의 드레스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드레스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양반이었다. 거기에.. 저건...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허리를 조이는 류의 속옷 - 콜셑이라고 했었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가 된 기분이군! - 을 착용해야 했고, 드레스의 윤곽을 유지하는 이상한 속옷을 안입기 위해 일부러 슬릿이 드러간 타이트한 드레스를 선택하기까지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차, 생일이라고 했는데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뒤늦게 든 생각에 시녀들에게 물어보자, 역시 선물은 알아서 준비하는 것이란다. 일단 단장을 끝낸 뒤 할 수 없이 통신구슬을 꺼내 든 다이아나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선물을 마련했다. 사실 선물에 관한 말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다이아나가 유일하게 자주 접하는 사람이 생일을 치르는 당사자인 리카르도, 그리고 그 동생들인 왕자와 공주였다는 점도 있었다. 간혹 알렉시안을 동행한 리카르도를 만나는 일도 있었지만, 워낙 정중하게 황태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그의 태도에 제대로 말을 나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이아나가 선물을 백에 넣고 나갈 준비를 마쳤을 즈음 밖에서 방문객을 알리는 시녀의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안 드 하프로스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다이아나는 도대체 무슨 일로 그 무뚝뚝한 기사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했으나, 일단 들어오라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라파엘르경" "안녕하세요? 하프로스 백작님" "황태자 저하의 명을 받아 오늘 제가 에스코트를 맡게 되었습니다" "네?. 네..." "가시죠" 정중하게 팔을 내미는 알렉시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이아나는 별 수 없이 그의 팔짱을 끼고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알렉시안 드 하프로스 백작님과 다이아나 라파엘르 남작님이 입장하십니다~!" 다이아나와 알렉시안이 무도회장으로 들어서자 일제히 시선이 쏟아졌다. 황태자가 데려와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고 전례없이 바로 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았다는 그녀는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술렁거리던 소리가 멈추고 침묵이 흘렀다. 다이아나는 머리의 반을 틀어올려 얼굴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그나마 움직이기 편할 듯이 보였던 은빛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높은 목선에 부드러운 천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이었으나, 어느 정도의 탄성을 가지고 있는 천을 고려하여 상당히 타이트한 디자인의 옷이다. 악세사리라고는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은빛의 팔찌만 빛나고 있었으나,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못했다. 다이아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상당히 스스로의 외모에 만족했지만, 워낙 많은 눈들이 한꺼번에 자신을 향하자 민망해졌다. "어서오시오~! 이렇게 참석해주어 고맙소!" 이 때 만큼은 눈치 빠르게 나서주는 리카르도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알렉시스로부터 다이아나의 팔을 자연스럽게 건네 받은 리카르도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귀족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었다. 다이아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남작과 남작부인, 그보다는 소수인 백작과 백작부인 등등과 그들의 자제와 영양이라는 젊은 남자와 젊은 여인들에게 소개되었다. "알트 상단의 대표자이신 에디우스 드 하비어스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족들을 비롯한 귀족들은 알트 상단의 대표라는 말에 다이아나는 에디우스 드 하비어스라는 이름에 놀라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저도 몇 시간이지만, 절단마공을...... ㅎㅎㅎ 리카르도는 포기했습니다. -.-;; 카이젠이 '악역'이라면 리카르도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드네요. 어차피 인간이란 다들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서 최선을 다하는 법이니까요 걍 맘껏 미워들 하세요 ㅠ.ㅠ 움 에디가 요즘 상승주가인데...... 리카르도에 대한 반감이 에디쪽의 표를 몰고 온 듯합니다만... 어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 참고로, 각자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네요. 일단 여성분들은 호감은 있지만 자신이 거절한 남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지 남성분들은 포기할 수 없는 상대가 자신을 거부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물론, 성격에 따라 아주 많이 다릅니다만...... 캐릭들의 기본 성격을 맞추어 보면 대충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 이제 준비하고 음악회 다녀올랍니다. 오밤중(?)에 뵙지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궁에서. '에디?!!!' 사람들의 감탄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자는 분명히 에디우스였다. 그는 다이아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황태자에게 초대에 대한 감사의 말과 함께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리카르도가 그를 맞기 위해 앞으로 나선 동안 다이아나는 슬그머니 사람들 틈을 빠져 나와 안그래도 눈여겨 보고 있던 구석진 그늘 속을 찾아 들었다. "황제폐하 드십니다~!"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소리에 귀족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황제의 뒤에는 역시 마르띠앙 공작이 뒤따르고 있었다. "내 아들이자 이 제국의 황태자인 리카르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모쪼록 즐거운 자리를 한껏 즐기고 축하해 주셨으면 하오~!" 황제의 말에 이어 리카르도의 감사의 말이 뒤따랐고, 이어진 것은 귀족들의 하례인사 절차였다. 저마다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들고 알게 모르게 매겨진 순위에 의해 황태자 앞으로 나서서 선물을 전하고는 인사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알트상단의 저력을 잘 알고 있는 황제와 공작의 동의 하에 에디우스는 상당히 앞 순서에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오! 그대가 바로 알트상단의 숨겨진 보물이었구려~!" "보물이라는 말씀은 너무 과하십니다. 그저 폐하의 미천한 백성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백작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아버님이 되십니다. 상당한 나이에 저를 뒤늦게 보셨지요" 황제는 상당히 기뻐하면서 에디우스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보더니, 그의 아버지에게 내렸던 백작의 작위를 그에게도 인정한다는 선언을 했다. 황제의 알현 후에 에디우스는 황태자에게 인사를 하고 수행하던 이가 들고 있던 긴 상자를 건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소드마스터이신 전하에게 소용이 될 듯하여 주제넘은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대 알트상단에서 준비한 선물이 하찮은 것일리는 없었다. 실제로 금전적인 면으로는 황실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체였으니까. "이것은...?" 상자에서 나온 검은 은빛의 검이었다. 일견 보기에도 상당한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검은 현재 황태자가 가지고 있는 후계자의 검이라 불리는 황실의 가보에도 전혀 뒤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말은 그 후에 이어졌다. "마법검입니다. 7종류의 공격마법과 7클래스급의 실드마법이 영구적으로 걸려 있습니다. 사용법은 상자 안에 동봉해 두었습니다" 7종류의 마법과 7클래스의 실드라는 말에 궁중마법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자신이 7클래스였으나, 아티팩트로서 여러 마법을 한꺼번에 담고 그 위에 7클래스 마법까지 더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족에게 선물을 하면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 황제조차도 이 대단한 선물에 대하여 감탄하는 동시에 상당한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알트상단의 대표가 사라진 이후 황실은 대표자가 없다는 이유로 알트상단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을 했던 것이다. 헌데, 후계자가 초대를 받아들여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선물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후 에디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가능하면 그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는 예상치 못하게도 자신과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를 떠올렸다. '유희' 중이라면 아는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뻔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사람들을 경악시킨 '선물'을 내놓은 후에도 그는 다이아나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결국 다이아나의 차례가 되었다. 마르띠앙 공작은 흥미어린 눈으로 다이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과연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다이아나가 '선물'에 대하여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마르띠앙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새로 남작의 지위를 받은 다이아나의 인사를 받고 그녀를 귀족들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손바닥반한 백 안에서 꽤 큰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시하던 이들은 그녀의 작은 백이 마법물품임을 깨닫고 기대의 눈초리를 빛냈다. "황태자 저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리카르도 자신도 선물을 받는 시간이 되어서야 이 부분에 대하여 미리 신경쓰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시선을 받는 위치에서 적당한 선물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트집거리가 될 요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연하게 자신 앞에 선물을 내미는 다이아나의 시선에서는 어떤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열어 보시지요" 상자를 열자 고급스러운 망토 하나가 나왔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황태자의 생일 선물로는 그다지 좋다고는 빈 말로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리카르도는 선물을 끌러본 것이 오히려 다이아나에게 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상자를 닫으려고 했다. "망토의 사용법은 안에 써 놓았습니다" "이 망토가 아티팩트란 말이오?" "기본적으로는 세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일순 사람들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높은 귀족들의 경우 여행을 위한 옷에는 대부분 세탁을 하지 않아도 청결을 유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스테우스로부터 보내진 '선물'이 그것으로 끝일리는 없었다.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어, 날씨에 상관 없이 착용할 수 있으실 겁니다. 물리적인 방어를 막을 수 있고,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투명화 마법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투명화 마법이라고 했소?" "네. 그리고 시전자의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어 헤이스트와 스트렝스 마법의 경우도 따로 발동시키는 동안만 유지됩니다" "오오오~!" 귀족들 사이에서 감탄성이 퍼져나왔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가져온 망토가 유스테우스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하고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표정을 잠시나마 본 사람들은 모처럼 좋은 선물을 가져온 그가 다이아나의 선물에 대하여 약간 시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4써클 마법사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황실 마법사가 끼어 들었다 "제 아버님이 고위마법이 가능하십니다. 제 능력으로는 물론 만들 수 없는 물건이지요" 순간 마르띠앙공작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저런 딸을 둔 고위급 마법사라니! "정말 고맙소!" 아직도 차례를 기다리는 귀족들이 많았으므로, 황태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감사의 말을 했다. 선물 증정이 끝나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의 주위로는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당일의 주인공인 황태자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가장 많았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관심의 초점이 된 세 남녀 모두 미혼인데다가 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귀족들로서도 그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기에 이는 예상했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모여든 사람들이 조심하는 눈치를 보이기에 무슨 일일까 했더니, 어느 틈엔지 알렉시안이 다이아나의 옆에 딱 붙어 서서 찬 기운을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사를 건네는 귀족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흠.. 오는군'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물결이 순식간에 갈라져 길을 내고 있었다. 접근해 오는 귀족들에게 화사한 미소로 우아하게 대꾸를 해 주던 에디우스는 황태자와 마르띠앙공작이 사람들로 이루어진 길 사이를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알트상단의 본거지가 칼라임 제국인데다가 누구보다 시류에 빨리 적응하고 정보를 모아야 하는 직업이 상인들이었기에, 칼라임의 국내 사정에 대하여 에디우스는 훤하게 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자신의 위치는 황제로서도 무시할 수 없을 터, 분명히 접근이 있을 것이라 생각였고, 그 예상은 지금 그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밝은 얼굴로 예의바른 인사를 되돌려 주면서도 황태자는 느긋하지만 확실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고, 마르띠앙 공작 또한 다르지 않았다. 다양한 색상 속에서도 확실히 두드러져 보이는 거의 비슷한 색상의 화려한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점차 에디우스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에디우스 주위의 사람들은 황태자와 공작에게 자리를 내어 주듯이 슬쩍 비켜났고, 붙임성 있게 선물에 대한 인사부터 시작하 여 에디우스와 황태자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니만큼 잘 통하나 보군. 참,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네. 같이 가지 않겠는가?" 마르띠앙 공작은 황태자와 에디우스의 대화에 간간히 끼어 들어 존재감만 나타내고 있다가 어느 정도 둘의 친분이 형성된 듯하자 ,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공작 각하께서 소개시켜 주신다는데, 제가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다이아나의 주위에 몰려든 젊은 남자들이 알렉시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노골적인 접근을 못하고 있자, 이번에는 젊은 또래의 여성들이 몰려 들었다. "황태자 저하와는 상당한 친분이 있으신가 봐요" 이런 저런 의례적인 말들 사이에 귀족 아가씨들이 가장 궁금해 하던 질문이 드디어 던져졌다. 다이아나와는 대조적으로 160cm정도 되는 키에 연약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아마도 남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본능을 일 으키게 할 외견이랄까? 마주 선 다이아나는 그녀를 보면서 자신이 멀대처럼 키가 크고 억세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였으니까. 스스로를 오브리스 공작의 영애라고 소개한 그녀의 이름은 유리아나 드 오브리스였다. 화려한 진한 금발과 하얀 피부, 옅은 푸른 눈의 그녀는 세레스의 모습을 연상시켰기에 다이아나는 첫 눈에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큰 눈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띈 그녀는 다이아나에게 상당히 부럽다는 듯한 어투로 질문을 한 것이다. "글쎄요. 그냥 여행 중에 만나 동료가 된 것 뿐이에요. 그다지 큰 친분이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되겠죠" 다이아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솔직하시네요. 그 분과 한 번 만나 사적을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다들 친분이 있다고 우길껄요" "그런가요?" "다이아나경은 좋으시겠어요.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갖추고 계시니...!"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국의 꽃으로 이름 높으신 분이!"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로 둘의 대화에 끼어든 이는 유리아나와 친한 듯 그녀의 옆에 딱 붙어서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요염한 미인이었다. "세잔느양, 그건 제게 과분한 말이에요" 유리아나의 흰 얼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다이아나는 붉은 머리의 미인의 계보를 떠올리느라 잠시 침묵했다. 아, 맞다! 무슨 백작의 딸이라고 했었는데...... "하하하! 내가 자리를 잘 찾은 것 같군. 우리 제국의 아름다운 영애들이 다 이곳에 모여 계시지 않는가?" 어느 틈엔지 이들의 곁으로 다가선 마르띠앙 공작의 뒤로 에디우스와 리카르도가 나타났다. 귀족 영애들은 한껏 아름다운 자세를 만들어 가며 저마다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다이아나도 나름대로 그들을 따라했음은 물론이었다. '에디우스가 나를 아는 체 할까? 아니면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까?' 어떤 경우던 간에 그냥 그의 의사에 맡겨버리자고 결심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억지스러운 상황이지만, 자신에게는 이미 그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지 않은가?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냉정해 질 수 있었다. 마르띠앙 공작은 에디우스를 그 곳에 있던 영애들에게 소개시켰다. 에디우스가 금빛 눈에 미소를 띄고 일일히 인사를 건네자 귀족 영애들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이 분은 이번에 남작의 지위를 받으신 다이아나 라파엘르 경일세. 이렇게 아름답지만, 상당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네" "오랜만이야 다이아나!" 에디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눈만은 약간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응. 잘 지냈어 에디?" 이미 알고 있는, 그것도 이름이나 애칭을 부를 정도의 사이임을 사람들 앞에 드러낸 두 사람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머리속이 복잡해진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궁에서. "허허! 이것 참 놀라운 일이로군! 둘이 아는 사인가?" 순간적으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역시 마르띠앙 공작이었다. 무도회장 안에서는 빠르게 사람들의 입을 타고 새로운 알트 상단의 후계자와 여남작이 아는 사이라는 말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상황을 만든 사람인 에디우스만 주시하고 있었고, 에디우스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공작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그녀의 아버님과 저희 아버님이 친구셔서, 저희가 알게 된 것입니다." "오, 그런가?" "하지만 저도 여기서 다이아나를 볼 줄은 미처 몰랐군요. 여행을 간다고 했었는데......." "아, 그건 내가 말하지. 여행중에 다이아나와 마주쳤는데, 어쩌다 실력을 알게 된 바람에 내가 억지로 모셔온 셈이네" 리카르도가 나서서 말했다. "그랬군요." "결례가 안 된다면, 둘 사이에 특별한 약속이 있는지 알고 싶네" 인간같지 않은 빼어난 외모의 젊은 남녀는 말 그대로 그림같은 한 쌍으로 보였기에 좌중의 사람들은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하나같이 궁금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한 사람이 제국의 황태자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황태자의 의도를 보이고 있기도 했기에, 역시 여러 명의 머리 속으로는 계산기가 한참 두드려지고 있었다. 에디우스 또한 이런 리카르도의 의도를 그 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원하는 대답을 해 주는 것도 좋겠지만. 후훗' "저와 다이아나의 사이가 남녀로서 특별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시라면.. 슬프게도 제가 그녀에게 거절당한 과거를 말씀드릴 수 밖에 없겠군요." "에엣~!" 여성들 사이에서 놀람의 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저 외모에 저 배경을 거절할 정도라니,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그럼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가? 하하하하! 개인적으로는 안된 일이지만, 여기 젊은 귀족들에겐 다행한 일이겠군. 에디우스경이나 다이아나경 두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 이가 한 둘이 아닌 것으로 보이네만...!" 에디우스는 약간 심술궂은 마음으로 확연히 안도의 빛을 보이는 젊은 남자들 중의 하나인 리카르도의 표정을 주시했다. 그리고, 많은 영애들이 한숨을 내쉴만한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녀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한 번 거절당했다고 물러서서야 어디 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다시 약간 찌그러지는 얼굴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저로서는 처분만 바랄 수 밖에 없죠." 약간 제 색을 되찾는 얼굴들. 좌중은 그야말로 에디우스의 말에 따라 오락 가락 하는 분위기였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데다가 마치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듯한 그의 태도에 묻어나는 약간의 조소를 읽고 답답해졌다. 그 때, 지시가 있었는지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좌중의 시선은 황태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예의상 무도회의 첫 댄스는 주역인 황태자와 그의 파트너의 춤이 될 것이기에, 황태자가 어떤 여성을 파트너로 할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춤을 못 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며칠 전에 무도회에서 자신과 춤을 추겠느냐는 의사를 리카르도가 은근히 떠 왔을 때, 이미 알려 주었으므로 망신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춤 신청을 할 리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마음에 걸리는 듯이 에디우스와 다이아나에게 각각 시선을 한 번씩 주고 유리아나에게 춤을 신청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시기심에 불타는 조잘거림들이 다이아나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저 봐. 역시 황태자님은 유리아나님을 선택하셨어!" "흥 결국 평민 출신의 남작일 뿐이야. 여자가 검을 쓴다는 게 무슨 매력이겠어?" "아아, 에디우스님은 누구에게 춤을 신청하실까?" 다이아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가능한 한 안들으려고 노력했다. 그 때 에디우스가 다가오더니 다이아나에게 춤 신청을 했다. 다이아나는 뻔히 자신이 춤을 못 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난처하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었다. "춤 못추는 줄 알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 저기서 자신을 흉 보는 소리들에 레파토리가 추가되었다. "나랑은 출 수 있지. 가만히 있으면 돼!" "그게 무슨?" "믿으라고!" 다이아나는 잡아 끄는 손에 이끌려 사람들 틈을 빠져 나갔다. 플로어에는 황태자 커플과 마르띠앙 공작을 비롯한 중년의 고위 귀족들, 그리고 몇몇 귀족 젊은이들이 쌍을 지어 빙글빙글 우아한 동작을 뽐내고 있었다. "어쩌려는 거야?" "마법이 이럴 때도 쓸모가 있더군" 다른 커플들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자 다이아나는 자신의 발이 살짝 뜨는 것을 느꼈다. 에디우스는 그런 다이아나를 끌어 안은 채로 우아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제 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여기서 날 만난 건 우연이야? 아니면 의도적인 거야?" "글쎄. 편한대로 생각해. 나보고 나의 길을 가라고 했었지? 너도 알다시피 1700년이나 틀어박혀 있던 나는 유희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잖아." "그럼 유희중인거야?" "그래. 나름대로 진지한 유희지. 너도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 각자 알아서 하자구" "그래......" 어차피 이제와서 그녀가 에디우스에게 이렇다 저렇다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도망 치듯이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생이 드래곤의 유희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일단은 처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다이아나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아, 참!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 가지만 충고해 주지" "...?"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면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알고 싶지 않은 거야? 네가 그 정도 생각도 없진 않을텐데......" "......" 리카르도는 처음부터 자신의 태도를 명확하게 밝혔다. 좋게 말하면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느 쪽에 가까운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다이아나 자신도 리카르도에 대하여 확실한 신뢰도, 특별한 도움도 주지 않은 상태이니만큼 현재까지의 상황은 인간 사회에서의 새로운 위치의 시작을 위해 다이아나 자신이 리카르도를 이용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다이아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러블레이드는 발현할 수 있다면서? 그 동안 열심히 했나 보군" "네게 배웠잖아" "흠.. 마검사로 들었는데, 마법은 몇 클래스라고 한 거야?" "4클래스. 길드에 그렇게 등록해 주셨어" "알았어. 일단 나도 마검사야. 마법은 너의 아버지로부터 배웠고, 검술은 우리 아버지한테 배운걸로 대답할테니까 실수 없도록. 검술이야 소드마스터인 정도는 알려질 꺼고, 마법 써클은 알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실수하지 말어" "응" 어차피 둘이 이미 알고 있는 관계라면, 서로에 대한 질문이 들어올 것을 예상해야 했다. "부모님에 대해선 함구하자구. 쓸 데 없이 끌어들이려고 덤빌 놈들이 꽤 될 테니까. 입조심하구" "응" "마나가 안 느껴지는데, 머리랑 눈은 어떻게 한 거지?" "아버지께서 반지를 주셨어. 폴리모프랑 동일한 개념이라고 하시던데?" "흠... 그거라면 알아챌 사람은 하나도 없겠군" 첫 곡이 끝났다. 약간 상기된 볼을 한 여성들을 남자들이 에스코트하여 음료가 마련된 쪽으로 이끄는 것이 보였고, 다음 곡을 기다리는 듯 플로어에 머물러 있는 커플도 상당 수 있었다. 에디우스는 슬쩍 다이아나에게 걸었던 마법을 풀었고, 둘은 플로어를 벗어 났다. "춤을 못춘다고 하지 않았었나?" 리카르도와 유리아나도 비슷한 시점에 플로어를 나섰기 때문에 네 명이 나란히 걷게 되자, 리카르도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어머 춤을 못 추세요?" 재잘거리던 악의 어린 소리들과는 달리 천진한 얼굴로 유리아나가 다이아나에게 물어왔다. "네!" "하지만.. 너무 아름답게 추시던데....?" 고개를 갸우뚱 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림에서 빠져나온 천사같았기에,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저랑만 출 수 있죠~!" 에디우스가 밝게 웃으면서 대신 대답하자 춤으로 인해 약간 발그레하던 유리아나의 볼이 조금 더 붉어졌다. "그러게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배웠으면 좋았잖아?" '도대체 그런 일이 언제 있었다는 건지......' 기가 막혀하는 다이아나가 아무 말도 못하는데 비해 에디우스는 경쾌한 울림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다이아나는 검술이랑 마법 수련한다고 춤 같은 건 배우기 싫어했지요. 제가 몇 번이나 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출 일이 없다면서 거절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실례가 안된다면 직접 보여드리고 싶은데요" 유리아나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와 춤을 출 때처럼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살짝 끌어보였다. 갑자기 몸이 뜨고 그 상태로 우아하게 움직여지자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에디우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얼른 그녀에게 건 마법을 해제했다. "마법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다, 친구 아버님 덕이죠" 태연하게 다이아나를 향해 웃어 보이면서 그 친구가 누군지 확실하게 하는 에디우스의 수준급 연기에 다이아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네 명이 음료 테이블 쪽에 모여 대화를 하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다이아나는 춤 신청을 하는 남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춤을 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말을 솔직한 대답으로 들은 사람은 세 명 밖에는 없었고, 그냥 거절의 말로 받아들인 젊은이들은 실망의 빛을 숨기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흥! 다이아나양은 참 재밌는 분이군요. 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분명한 악의를 담은 목소리가 한 남자의 춤 신청을 거절한 다이아나를 목표로 쏟아져 나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다이아나는 이 설명하기 힘든 상황에 짜증이 났다. 에디우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태도를 취하면서 때로는 차갑기 그지 없다가 때로는 함께 지내던 시절 만큼이나 자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자신과 에디우스를 연신 흘깃거리는 리카르도의 시선도 싫었다. 더군다나 당사자에게 들리는 지는 상관하지 않고 뒤쪽에서 자신의 험담을 해대는 말들에도 진력이 나던 차였다. "그냥 에디우스님 이외의 분과 춤을 추기 싫다고 하시라는 거에요. 멀쩡하게 잘 추고 돌아와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다니, 좀 우습지 않아요?" "세잔느~!"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유리아나가 끼어 들었다. 상당히 당황했던 모양인지 평소의 친근감을 담고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을 보아 아까도 그랬지만, 둘은 친구임이 분명하리라. "세잔느양이라고 하셨나요?" 에디우스는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최대한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연인을 보는 듯한 그의 태도에 세잔느라는 여성은 방금 전의 표독스러움을 집어 던지고 수줍은 여인으로 변신하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 에디우스님" "다이아나는 춤을 못 춘답니다. 제가 억지로 마법을 걸어서 춘 것지요.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 때문에 다이아나가 거 짓말장이라는 이야길 들어서야 제가 면목이 없지요" "그.. 그런......" 언제 그런 친근함을 보였냐는 듯이 에디우스의 표정이 차갑게 돌변했다. "더더군다나 예의 있는 귀족가의 영애가 설명도 듣지 않고 함부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 한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명예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아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돌연 확실하게 과실을 책망하는 말에 세잔느는 언제 그렇게 당당했냐는 듯이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저.. 저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세잔느양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테니... 이제......." 난처한 빛을 가득 담고 유리아나가 에디우스를 말렸다. "아, 제가 좀 심하게 말했나요? 죄송합니다. 세잔느양!"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에디우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궁에서. '이거야 마치 예전 학교생활이잖아. 은따라고 해야 하나?' 에디우스는 훌륭하게 무도회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접근해오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의 식견과 자상한 태도에 매료되어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언제 다이아나의 편을 들어 주었는냐는 듯이 유리아나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응 하는 그의 옆 자리가 상당히 불편했던 탓으로 다이아아는 슬쩍 발걸음을 옮겨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무도회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에디우스와는 대조적으로 다이아나의 주위는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젊은 남자들은 황태자와 에디우스라는 거대한 걸림돌을 의 식하고 그녀를 멀리서 힐긋거리고 있었고, 귀족 영애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그룹을 형성하여 그녀를 본 체 만 체 했다. 어찌보 면 다이아나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익숙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생의 대부분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그런 다이아나에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알렉시안을 선두로 한 그들은 대부분 장신이었고, 몇 몇은 기사들의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다이아나도 그들이 황실 기사단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다크호스께서 이렇게 혼자 계시다니.......!" 평범한 외모였으나, 쾌활한 웃음으로 인해 상당히 편해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갑자기 다가와 자신들을 소개하는 그들로 인해 주위가 왁자지껄해 졌다. 다이아나는 그 중 처음에 말을 걸어온 남자와 유일하게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여기사와 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 한 번 대련을 신청해도 될까요?" 티리아라는 이름의 여기사는 다이아나보다 약간 키가 컸고, 제복을 입고 있어 꽤 단련한 흔적을 보이는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개를 하자 마자 호감을 감추지 않고 이것 저것 물어보다가 약간 주저하는 기색으로 다이아나에게 묻고 있었다. "언제든지요. 저도 근래에 대련을 못해 근질거리던 참이었어요" "동료가 생겨서 기뻐요. 도무지 영애들 사이에서는 적응을 못하겠거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 저기서 농담이 튀어나왔다. "그건 티아 네가 저 연약한 영애들이 보기엔 너무 무섭기 때문이라니까~!" "맞아맞아~! 저 쪽의 대련은 입으로 하는 건데, 너는 칼로 싸우려고 들 게 뻔하잖아~!" "뭐야~!" "으악~! 살려주라~!!!" 다이아나는 이들의 가식없는 태도에서 드워프들을 떠올렸다. 검을 통해 우정을 나누는 덕인지 몰라도, 이들에게서는 득실을 따지는 계산적인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보면 알렉의 시대도 간 거지" "암~! 그렇구 말구~! 이제 우리의 호프는 바로 다이아나란 말이지~!" 어느 틈에 대충 말을 놓아버린 이들은 그 와중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알렉시안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흥!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수련이나 더 하지 그래?" 다이아나는 알렉시안이 이들에게 대꾸를 하자 상당히 의외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다이아나의 반 응을 본 기사들은 강도를 높여 알렉시안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너 또 무게 잡았냐?" "쯧쯧, 병이다 병~! 네가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있으면 우리도 무섭다구~!" "다이아나, 알랙의 태도에 너무 신경쓸 거 없어요. 알렉은 원래 미인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쑥맥이라구요~!" 어느 틈엔지 티리아가 옆에 서서 다이아나에게 조언을 했다. "아~ 드디어 티리아도 인정을 하는군. 스스로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중요한 거야" "그럼 그럼~!" "그건 무슨 뜻이야?" "그야, 알렉은 너한테는 말 잘하잖아. 네가 직접 말했듯이 미인 앞에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알렉이 너한테는 말을 잘 한다~! 결론은 직접 내야지. 푸하하하~!" "이... 이.... 피터 너 오늘 죽었어~!" 처음 다이아나에게 말을 걸었던 피터슨이라는 남자는 시종일관 마지막까지 티리아를 놀리다가 분노한 그녀와 술래잡기 하듯이 주위를 뱅뱅 도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마음껏 웃고 있었다. 환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자, 티리아를 피해 도망치던 피터가 갑자 기 얼굴을 디밀더니,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와아~! 웃으니까 진짜 아름다우십니다~!" "빠악!" 기다렸다는 듯이 멈춰 선 피터의 머리 위로 티리아의 주먹이 부딪혔다. "3대 0" 누군가 스코어를 외쳤다. 오늘 피터는 티리아에게 세 번 얻어맞은 것이다. "으으~! 천사의 얼굴 옆으로 별까지 떴다~!" 연극하듯이 비틀거리면서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피터를 보고 다이아나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또 뭐야?' 에디우스는 예의를 지킨답시고 한껏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퍼지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옮기다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 에디우스의 눈에 티리아는 보이지도 않았다 - 다이아나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위를 둘러싼 여성들은 그의 시선을 쫓다가 원인을 발견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또 저들이군요. 같은 기사인데도 저 천박한 모습이라니~!" "신경쓰지 마세요. 대부분 평민출신에 겨우 작위나 하나 얻은 이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에디우스님과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랍니다." 그랬다. 평화시에 전투인력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벌써 수 대를 이어온 제국의 평화는 무관보다는 문관을 우시하는 풍조를 만든지 오래였다. 실력을 중시하는 황실 기사단의 관습은 전쟁이 있었던 수 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어서 어쩔 수 없었으나, 덕분에 지체가 낮은 귀족이나 평민들의 출세의 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천시받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아무리 기사들에게 좋은 대우를 한다고 해도, 이미 수 백 년을 편하게 살아 온 귀족들은 땀 냄새를 풍기면서 수련을 하는 그들에게 고마워 하기는커녕 자신들과는 다른 또 다른 계층으로 홀대했던 것이다. 물론 초대 황제의 명으로 황족을 비롯한 귀족들은 검을 배우는 것을 기본적인 교양으로 알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일 뿐이었고 특별하게 작위를 가지지 않는 이상 일반 기사들에 대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평민의 위 귀족의 아래라는 무의식이 늘상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요? 저희 아버님도 평민 출신입니다만......" 작정하고 이들의 수다를 받아 주던 에디우스는 다이아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터에 철없는 말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영애 들의 말이 고깝게 들렸다. 그런 그의 대꾸에 너도 나도 평민들의 천박함을 다투어 이야기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것도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군......' "물론 영애분들처럼 연약한 여성의 입장에서는 검을 좋아하는 거친 남성의 세계가 이해가 안되시겠지요" 마무리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에디우스였다. 곤란한 입장에서 건져 준 에디우스의 호의에 힘을 입은 영애들은 다시 이런 저런 화재 를 떠들어대며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마르띠앙 공작은 리카르도와 함께 어느 틈엔가 무도회장을 빠져 나와 작은 밀실에서 대면하고 있었다. "그럼 너도 그 마법사에 대한 것은 모른다구?" "예. 하지만, 그 마법사라는 사람이 아무래도 드워프들의 신임을 받고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군... 그 아버지라는 사람을 끌어들일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물어보마. 그 아이에 대한 너의 감정은 어떤 것이냐? 단순히 인재로서 데려왔다고 말하고 싶은게냐?" "가능하다면 황후의 자리를 예약하고 싶은 여인이지요" "호오! 벌써 그 정도로....?" "저만의 생각입니다. 의외로 쉬운 타입이 아니지요" "거기에 강적이 나타난 셈이군" "저도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오히려 잘 되었구나!" "예?" "일단 그녀가 그를 거절했다는 것은 오히려 네게 더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된다. 더군다나 아까 보니 유리아나양이 그에게 상당 한 호감을 가지고 있더구나" "덕분에 편했습니다만......" "쯧쯧... 아직도 모르겠니? 선대의 친분으로 마법까지 가르쳐 줄 정도라면, 에디우스가 다이아나를 배신할 까닭이 없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있지" ".. 흠.. 그렇군요" "애정이 없는 혼사를 추진할 생각은 없다. 그래봐야 네 후사에 문제가 생길 뿐이니까. 그 점은 너도 알고 있겠지?" "당연합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한다고 해도 제 반려를 정략적인 이유만으로 정할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일단 그 아이에게 배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 급하겠구나" "부탁드립니다" 제국의 황권을 가장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외척의 세력이었다. 스스로가 외척이라 할 수 있는 공작이었지만, 자신이 사심을 버리 고 황실을 위한다고 해서 후대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러한 외척들을 배제할 수 있는 적당한 황후 후보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사에 별 뜻이 없는 고위급 마법사이기 까지 하다면...... "영애분께 주의를 주셔야 합니다" "흠.. 면목 없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엔 영리하던 아이가 오늘 따라 왜 그리 경솔했는지......" "출신도 모르는 계집에게 온갖 관심이 쏟아졌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소. 다만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셋을 모두 손에 넣어야 합니다. 적당한 후보가 모자라는군요" "그녀의 상대라면... 꼭 우리편에서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예? 그게 무슨......?" "연적이란 때로는 원수보다 무섭다오~!" "과연......" 유일하게 황제파에 맞설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는 미켄하임 드 오브리스 공작과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켄네프 드 로슬레임 백작의 논의도 은밀한 장소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 밤 늦게 알렉시안은 마르띠앙 공작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그와 상당 시간 대화를 했다. 공작의 서재를 나서는 알렉시안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 빠른 연참을 바라시는 모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 캐릭터 이름 받습니다. 리플로 아무 이름이나 좀 만들어 주세요 출연진은 줄을 서는데, 도무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진행을 못하고 있습니다. 마구마구 좀 올려주세요 제에발~!!!!!!!!!!!!!! 리플에 올린 분들 닉이라도 써야 할까봐요. 엉엉~!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황궁에서. "부르셨습니까?" 무도회 다음 날 마르띠앙 공작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다이아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렇네. 어제 보니 기사단의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있더군. 황궁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테니 정식으로 근무하는 것이 어떤가?" "좋습니다" "대답 한 번 빨라서 좋군. 참, 영지는 없지만, 자네에게 저택이 하사되었네. 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오가기엔 별 무리가 없을 걸세" "저택... 이라구요?" "원래 작위를 줄 때 결정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없어 준비가 안되었었네. 이제라도 준비가 되었으니 내가 면목이 서게 되었네" "......" "참, 그리고 원래 귀족이 거하던 곳이라 하인들은 모두 그대로 두었네만, 얼마든지 경의 마음대로 바꾸어도 상관 없을 것이네. 늦었지만, 이걸 가지고 가게" "이건......" "기사단의 월급으론 저택을 유지하기 힘드네. 원래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적당한 영지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그 대신 비슷한 금액이 지불되는 걸세" 다이아나가 받은 돈은 일종의 '품위유지비'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작위를 받기 전에는 기사들은 월급만으로 생활해야 한다. 작위와 함께 영지가 내려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런 귀족들은 영지의 수입으로 수도 안에 저택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나 에디우스의 경우 급작스럽게 작위가 수여되었기에 영지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에디우스의 경우에야 그 아버지의 명으로 된 영지가 있었고, 알트 상단에서 내내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황실 측에서 신경을 써 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금화가 잔뜩 든 주머니를 받아 든 다이아나는 약간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황궁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고, 공작의 설명이 상당히 논리적이었기 때분에 별 문제 없이 이 일을 받아들였다. '왜 또 이 사람이지?' 공작이 새로운 저택을 보고 다음 주 초부터 출근할 것을 결론으로 하면서 다이아나를 맡긴 사람은 알렉시안이었다. "말을 탈 줄 모르십니까?" "네......" "배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사가 말을 탈 줄 모른다면 문제가 될 터이니..." "그런가요? 조언 감사합니다" "......" 결국 알렉시안은 마차를 준비시키겠다는 말과 함께 약속장소를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뒤돌아 가려고 했다. "저.. 잠시만요" "예?" "한 시간만 늦춰 주세요. 인사를 드릴 분들이......" "아, 예" "그럼 이젠 매일 못 보는 거에요?" "매일은... 좀 힘들 것 같네요" 울상을 짓는 두 얼굴을 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다이아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섭섭한 표정을 만면에 드러낸 왕자와 공주는 그나마 황궁의 사정에 어둡지 않았기에, 다이아나의 사정을 이해는 하고 있는 듯 했으나, 그렇다고 섭섭함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 왕자와 공주에게 지금처럼 애착을 가지고 있다가는 후일 리카르도에 대하여 냉정한 판단을 하는데 상당한 지장을 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다이아나는 리카르도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어린 왕자와 공주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들에게 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이 어떤 일들을 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황궁 내로 출퇴근을 하게 될 것 같았으므로, 당분간 완전히 헤어지 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아나는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자신이 가능한 만남을 약속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볼 일은 끝나신 겁니까?" "네" 황태자궁 앞에 대기해 있는 마차에 오르는 다이아나의 짐이라곤 달랑 배낭 하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궁금해 할 만도 한데, 알렉시안은 다이아나의 짐이나 그녀의 '볼일'에 대하여 단 한 마디의 질문조차 없었다. 한동안 마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 돌았다. "승마를 누구에게 배우실 생각입니까?" "네?" 의외의 질문에 다이아나는 움찔했다. 저택에 말이 있는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었고,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아래 사람들에게 배울 생각이시라면, 차라리 저에게 배우시지요" "에..예?" 오늘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다이아나는 평소의 알렉시안에게서 절대 나올 수 없는 제안에 대하여 연달아 놀라고 있었다. 그런 다이아나의 태도에도 아랑곳 없이 알렉시안은 말을 이어갔다. "장소는 저택으로 하는 것이 좋겠군요. 시간은... 일어나시는 데 문제가 없다면 새벽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르쳐 준다는 데야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다이아나는 결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흐려진 뒷말은 당연히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친절을 베푸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알렉시스는 약간 찡그린 표정을 잠시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대답을 했다. "그다지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승마를 가르쳐 드리겠다고 한 것은 동료로서의 호의라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동료의 호의를 나타내는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쌀쌀한 태도였다. 어찌 되었던 동료로서의 호의라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이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여인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알렉시안은 별 무리 없이 자신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생각했다. 황태자의 눈에 띄는 호의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어제 기사단들과의 자리에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운 태도로 접근하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스스로의 외모나 실력에 대하여 당연히 있을법한 자긍심이나 오만함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들도 움찔하게 하는 나의 태도에도 비슷한 태도로 대할 뿐 서먹해하는 기색도 친해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 분께서 걱정하실 만도 하군' 마르띠앙 공작의 비밀스러운 지시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관심은 이해가 되었다. 알렉시안으로 서도 만일 황태자가 이 여인을 자신의 짝으로 이미 내정했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다이아나에 대하여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 끼고 있었다. 황궁에서 멀지 않은 거리라는 말은 정확한 진실이었다. 황궁 밖으로 첫 번째 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거리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 중에 다이아나가 하사받은 저택이 있었다. 실제로 황태자 궁에서 황궁의 정문까지의 거리보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이 곳입니다" 수도의 저택은 귀족들의 지위와 금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기에 저택들은 하나같이 호사스럽기 그지 없었다. 다이아나가 도착한 저택 또한 별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저택은 지어진 지 얼마 안되는 것으로 보여졌다. "남작님을 뵙습니다" 어느 틈에 먼저 연락이 되어 있었던 것일까? 저택의 하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 새로운 저택의 주인을 맞아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혼자 살 집에 이 많은 사람들이라니......' 마차에서 내려선 다이아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남자 하인들이 왼쪽에는 여자 하인들이 열을 지어 있었는데, 남자 하인은 6명 여자 하인은 대충 열명이 조금 넘어 보였다. "후, 과분하군요. 모두들 일어나세요" 다이아나의 첫 소감과 함께 하인들은 숙였던 허리를 폈으나, 고개만큼은 아래쪽을 바라본 채였다. "이 쪽은 현재 저택을 책임지고 있는 집사 말론입니다" "말론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이아나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아래 사람들에게 공대를 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습니다. 다이아나경" 차갑기 그지 없는 목소리였으나, 하인들 앞임으로 고려해서인지, 상당히 낮게 들리는 알렉시안의 말이었다. 다이아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꿀 생각을 없었으므로, 그저 들었다는 표시만 했을 뿐이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다이아나가 뜻을 밝히자, 집사가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이 쪽은 제 안사람이자, 이 저택의 하녀장인 안느입니다" 서재나 집무실일 것으로 짐작되는 방 안에는 알렉시안과 다이아나 그리고, 말론과 안나가 마주보고 있었다. 귀족 앞에서 감히 앉을 수 없는 말론과 안나는 공손한 자세로 앞에 서 있었다. "일단 이것이 이 집에 대한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입니다. 이것은 저희들을 비롯한 고용인들의 명단입니다. 일단 원래의 고용인 들이 모두 있지만, 얼마든지 새로 사람을 들이시거나 현재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시는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다이아나는 꽤 두터운 서류뭉치가 하인들의 신상명세 비슷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알렉시안경 함께 와주셔서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까 제의하셨던 것은 언제부터...?" "내일부터 시작하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이아나의 말은 자세히 살펴 보면 '축객령'이었다. 알렉시안도 그 점을 금방 눈치챘는지, 자신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해 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저와 함께 출근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 뵙지요" 알렉시안은 집사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면서 방에서 나갔다. 다이아나는 그를 배웅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잠시 헷갈렸으나, 안에서 이미 서로 인사를 마친 바에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해서 그저 그가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끝냈다. '자아 그럼......' "말론이라고 하셨나요?" "예. 남작님. 그리고 말씀을 낮추시는 것이......" 알렉시안 앞에서는 감히 새로운 주인의 말에 트집을 잡는 듯하여 어쩔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다이아나가 존대를 하자 불편해진 말론은 머뭇거리면서 하대를 요청했다.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께 반말을 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다이아나의 말에 집사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의아해 하고 있는 다이아나에게 말론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머리를 한 번 숙이고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가 불편하시다면, 다른 젊은 집사를 곧 알아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후.. 그런 거였나?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군!" "그런 건 아닙니다. 그만두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까지와 같이 저택을 책임져 주셨으면 하는데요. 어렵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저야 물론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부부의 안색이 다시 환해지는 것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저는 평민 출신입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남의 위에서 누군가에게 명령을 하는 위치에 있어 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비록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집사는 의외로 솔직하게 나오는 새로운 주인의 말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인의 앞에서 버젓이 평민 출신임을 강조하는 주인이라니...... 이전 주인의 경우 새로 백작이 된 것도 말하기를 꺼려했으며,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거만 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말론이 당황했건 아니던 간에 다이아나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일하는 분들도 남아있고 싶은 분들은 다 그렇게 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이아나는 하인들에게 지급되는 급여의 합계와 그들의 거처, 그리고 저택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게 되었다. 저택은 본채와 외곽 부분의 별채로 구성되어 있었고, 별채는 주로 하인들의 숙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주인의 불편함을 고려하여 본채 내에 묵는 하인들이 있었고, 집사 내외도 그런 경우였다. "그럼 아이들은 별채에 있다는 말씀이세요?" "예. 아직 어려서......" "그럼 누가 그 애들을 봐 주나요?" 다이아나의 질문에 안느도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누가 봐주냐니? 하루 세 끼 먹을 것만 있으면 아이들은 알아서 자란다. "그럼 내내 떨어져 지내시는 건가요?" "쉬는 날을 정해서 가끔 보기는 합니다만......" "휴......" 다이아나는 꼬치꼬치 물어본 끝에 오히려 본채의 하인들은 대부분 독신자로 구성이 되어 있었고, 별채에는 가족단위로 머무는 하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비슷한 처지였으므로, 아이들은 별채에서 준비되는 식사를 함께 하고 특별한 일이 있으며, 비번인 하인이 돌보다 주는 형식이었다. 문제는.... "별채에 자리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결혼한 하인들 모두가 가족을 데려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의 주거지라 할 수 있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역과 저택은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 출퇴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완전히 주말부부들 천지겠군' 엔젤하우스의 일을 하면서 평민들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다이아나였다. 이들은 일자리가 있고 월급이 나온다는 것만으 로도 충분히 '선택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매일 얼굴을 마주할 사람들의 처지가 이렇다는 것은 다이아아 나에게는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저택의 규모부터 알아야 했다. 마차가 바로 본채 앞에 섰기 때문에 뒤쪽으로 어느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알아야 어떤 방안이던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두 분의 아이들은 본채로 옮겨 오도록 하세요" "그.. 그건... " 어린 아이들이 본채에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큰 일이다. 부부의 난처한 표정을 읽은 다이아나가 선수를 쳤다. "괜찮습니다. 제가 원래 아이들을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시끄럽게 떠들고 뛰어다녀도 아무 책임도 묻지 않을테니 그렇게 하세요. 별채의 다른 아이들도 제가 없는 시간에는 이곳에서 놀아도 괜찮다고 전해주시구요. 어차피 내일부터 출근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루 종일 본채는 비어있을 것 아니에요?" "가.. 감사합니다!" 일단 대답은 했으나, 새로운 젊은 여주인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두 부부는 머리속이 어지러웠다. "참, 저택에 말이 있나요?" "예 물론 있습니다." "내일 새벽에 알렉시안 경과 승마를 하기로 했으니, 미리 좀 알려주세요" "예" "그런 제 방은 어디죠?" "......" "아.. 그렇군요. 침실로 안내 좀 해주세요" 침실이라는 사적인 이유 때문인지 집사 대신에 안느가 나섰다. 다이아나가 가져온 배낭을 얼른 들고 앞장을 서 는 그녀의 뒤를 다이아나는 말없이 뒤따랐다. ************************************************************************ 등록 단추 누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_-;; 이름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하다 못해 말 이름도 필요하고, 하인들 하녀들 이름도 하나도 못지었습니다. 그집 애들 이름도 필요하구요. 기사단원 중에도 이름 있는 애들이 둘 밖에 없습니다. 이 와중에 등록 좀 하려구 하면 에러가 납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글이 여러번 올라오면 삭제한다고 공지 나왔는데, 그거 작가들 탓이 아 니라 사이트 에러랍니다. 28회정도에서 같은 에러를 당했는데, 등록을 누르고 에러가 나서 뒤로 갔다가 다시 등록을 반복했더니 어느 틈엔가 몇 개 가 똑같이 올라와 있더군요 이젠 에러가 나면 뒤로 못가고 다시 나의 창작실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길따라 갑니다. ㅠ.ㅠ 아, 그리고 앞쪽부터 새로 올리시는 리플은 모두 읽고 있습니다. 저도 글을 안 쓸 때는 몰랐는데, 새로운 리플은 모두 검색이 되더군요 문제는 오타를 지적당하거나 문제를 지적당해 고치려 고 해도 워낙에 수정이 어려워서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견을 무시한 것이 아니니 이 점 양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새벽에 날 잡아서 하루에 모두 고쳐보겠습니다만.. 진도 나가느라 당분간 전체적으로 수정은 힘들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참을 원하신다면 이름을 올려주세요~! 이름~! 남성과 여성 캐릭터의 이름이 모두 필요합니다. 성까지 있는 이름이면 더욱더 감개무량입니다. 참고로, 눈치 채셨을 지 모르지만, 칼라임의 이름은 백작 이상의 가문에만 중간에 '드'를 붙입니다. 그럼... 가열찬 참여를 부탁드리며... 이름 없으면 무쟈게 늦어질 다음 편으로 협박도 드리면서... 오밤중에 다시 뵙지요.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연적과 친구 새벽 공기가 쌀쌀하다면서 걱정하는 안느를 뒤로 하고, 다이아나는 알렉시안과 함께 말론의 안내를 받아 마굿간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어려서부터의 습관이었으므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알렉시안은 오자마자 건넨 의례적인 인사를 빼고는 별 말이 없었고, 다이아나 또한 굳이 말을 걸 필요를 못 느끼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남작님, 멜이라고 합니다." 수더분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뛰어나와 이들을 맞았다. 그 뒤에는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조심스레 서 있었다. "이 녀석은 제 아들인 윌리입니다. 마굿간 일을 돕고 있지요." "윌리라고 합니다." 머뭇거리면서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는 소년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다이아나는 소년의 인사를 반갑게 받고 말을 보기 위해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말은 모두 7필이 있습니다만... 어떤 종류의 말을 원하시는지 몰라 고르질 못했습니다." 다이아나는 일단 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낯선 이의 방문에 약간 흥분했는지, 발을 구르거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휘저어 대는 말들도 두 세 마리 있었으나, 그 외에는 상당히 얌전해 보였다. 다이아나가 얌전해 보이는 암말을 보고 있을 때 - 암말임도 멜이 가르쳐 준 것이었지만 - 옆 칸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해~! 워워~! 진정하라구~!" 변성기인 듯 약간 걸걸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죠?" 다이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띄우며 묻자 멜은 약간 난처함과 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했다. "아마 힉스가 항의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힉스라뇨?" "여기 대장격인 놈이지요. 제 권리를 주장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푸훗.. 그러니까 저를 먼저 봐 달라는 거군요?" "예. 그런 셈이죠. 자존심이 센 녀석입니다. 실력도 있구요" 멜의 말에선 힉스라는 말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순한 눈빛의 암말을 뒤로 하고 그 힉스라는 말을 보기 위해 얼마가 더 들어갔다. 소란을 부리던 말은 멜과 일행이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 올리고는 콧김을 토해냈다. 그 때까지 말 없이 이들을 따르던 알렉시안이 먼저 소리를 냈다. "아, 정말 좋은 말이로군요" 진한 갈색의 윤기나는 털을 가진 힉스는 이마에 별 모양의 흰 점이 있었고, 발굽 부분과 가슴에도 흰털이 나 있어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알렉시안이 앞으로 나서자, 다이아나는 조금 비켜 그에게 자리를 내 주었고, 힉스는 마치 그런 두 사람을 평가하는 듯이 오만한 눈초리로 둘을 살피고 있었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이 아이가 우릴 평가하고 있는 듯 하군요" 다이아나가 힉스를 '아이'라고 칭하자 알렉시안의 눈썹이 슬쩍 꿈틀댔다. 다이아나는 그런 알렉시안의 반응을 채 보지도 않고 힉스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긴 속눈썹 밑의 눈이 마치 '네가 내 주인이냐?'라고 묻는 듯했기에 다이아나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말의 코 앞에 손을 가져가 냄새를 맡게 해 주었다. '말에게 냄새를 맡게 하는거야. 말들은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겁이 많거든. 똑똑한 말들은 주인의 기분도 알고, 말도 많이 알아 듣는다구. 얕잡아 봐서는 안돼!' 지혜의 음성이 머리 속에서 다정하고 세심하게 다시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런 다이아나의 행동을 본 알렉시스는 상당히 놀랐다. 분명히 승마는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다이아나는 처음 말을 대하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힉스는 킁킁거리면서 다이아나의 냄새를 맡았으나, 기세는 여전했다. 다이아나는 한 숨을 내쉬고 힉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그래. 초보자는 주인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니?" 힉스가 마치 그렇다는 듯이 크게 콧바람은 내 뱉어 다이아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지만, 다이아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친구는 어떨까? 응? 나 말 못 타거든? 네 주인 행세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나 좀 태워주라~!" 다이아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녀에게선 웬지 모르게 편하고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졌고, 누구보다 예민한 말이 그 기운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편,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어머니 같기도 하고 일견으로는 어리광을 부리는 듯도 한 다이아나의 음성에 알렉시안과 멜은 자신들마저 멍 해지는 느낌이었다. "부탁해도 될까? 응?" 다이아나가 다시 부드럽게 손을 내밀면서 말하자, 힉스는 눈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녀의 손을 핥았다.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다이아나는 웃으면서 말의 갈기와 콧등을 쓸어 주었다. "대단하십니다. 힉스는 전 백작님도 애를 먹었던 말입니다. 아드님만 겨우 몇 번 탔을 뿐이지만, 잘 안 맞았는지 늘상 화를 내시곤 했지요" 멜이 감탄을 숨기지 않고 힉스에 대한 정보를 털어 놓았다. "그럼 이 말로 하시겠습니까?" "네. 힉스를 데리고 나와 주세요. 참, 알렉시안도 말을 골라야죠?" "저는 타고 온 말이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이 곳에 맡겨 놓았는데요" "예. 이미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힉스를 데리고 마굿간을 나서자 알렉시안의 검은 말은 이미 준비를 갖춘 채로 윌리의 손에 고삐가 잡혀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둘은 승마를 배울만한 곳을 찾아 조금 더 나간 끝에 풀이 적절하게 자란 장소를 찾아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요. 일단 타는 방법부터....." 다이아나를 배려한 힉스가 상당히 참을성 있게 행동해 주었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별 무리 없이 승마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다. 멜이 건네 준 당근 몇 개를 직접 힉스에게 건네 주고는 맛있게 깨물어 먹는 힉스에게 다시 보자는 인사와 함께 고맙다는 말을 하 고 다이아나의 첫 수업은 끝이 났다. "마치 사람에게 대하듯.. 아니 그보다 더 정중하게 대하시더군요" 알렉시안이 무심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그랬나요?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이에요. 그 아이들도 생명이니까요. 더군다나 제 친구에게 듣기로는 말들은 상당히 지능이 높다고 하더군요" "..... 마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말은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인에게 부탁해도 되겠지요?" "예. 저 때문에 수고가 많으시군요" 다이아나는 기다리는 알렉시안을 생각해서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쳤다. 하인들이 간단한 아침을 차려 놓았고 둘은 말 없이 아 침을 먹은 후 황궁으로 향했다. "오, 왔나?" "예. 저택이 참 좋더군요. 감사합니다" "아, 뭐 시기가 좋았지. 후훗~!" 공작은 약간 미묘한 웃음을 띄고 말했지만, 다이아나는 그 이유를 물어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 게도 그에 대하여는 그리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나, 어쩐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만큼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의 기본적인 임무는 황궁의 경비라고 할 수 있네. 황실의 분들을 지키는 호위기사들도 포함해서지. 원래 신참은 궁 경비를 맡아야 하는데, 작위를 받은 이는 그 부분에서 제외된다네. 따라서, 일단 수련장으로 출퇴근을 하도록 하게. 의무적으로 하루에 네 시간 이상씩은 기사단 내에서 생활하게 되어 있지만, 사정이 있으면 미리 말하고 제외될 수 있네. 다른 질문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수련장으로 가 보게나. 아마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걸세" "네" 여전히 말 없이 옆에 있던 알렉시안은 다이아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작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다이아나를 데리고 수련장 쪽으로 향했다. "와아~! 드디어 왔구나~!" "그러게. 이제 우리도 눈을 호강시킬 수 있겠군" 여전히 시끌벅적하게 다이아나를 맞는 이들이 있었으니, 무도회 밤에 만난 멤버들이었다. 다이아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받느라 한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에디우스는 무도회 다음 날 황태자 궁에서 전해 온 초청장을 받았다. 별 다른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친분을 맺고 싶다는 의도를 명확하게 한 초청장이었다. 허락의 의사를 보내고 다시 시간 약속을 한 에디우스는 그 다음날 황태자궁을 방문했다. 황태자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에디우스를 맞아 들였다. 에디우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빛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한 참의 의례적인 탐색절차와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이 끝나고 먼저 용건을 꺼낸 것은 에디우스였다. "다이아나양의 부친은 살아계신지요?" "그렇긴 하지만, 만나기 쉬운 분은 아닙니다. 은거하고 계시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요" "그분은 고위 마법사입니까?" "이미 황실마법사를 통해 알고 계실텐데요. 선물받으신 망토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의 실력이 필요한지를......" 에디우스가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면서 교묘하게 반격을 했다.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의 아버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듣기 위해 조금 더 직선적으로 말을 해야만 했다. "물론 고위급 마법사이심은 알고 있습니다. 제 질문이 좀 그랬나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그녀의 아버지는 몇 써클이십니까?" "죄송하지만 그 질문은 제가 아니라 다이아나에게 하셔야 할 것 같군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다면 저 또한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다이아나가 답변을 하지 않는다면 아버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저 또한 그분의 노여움을 얻는다면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에디우스는 웃는 모습 그대로 준비해 온 답을 내 놓았다. 황태자의 얼굴은 일순간 약간 냉막해졌고, 금방 수습이 되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으나, 그것을 놓칠 에디우스가 아니었다. "알트 상단의 후계인 분께서 꺼릴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라는 겁니까?" "충분히! 그렇습니다" "흐음......" "이번엔 제가 질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리카르도가 머리 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느라 정신없음을 뻔히 아는 에디우스는 여유를 주지 않고 세련되게 그를 밀어 붙이고 있었다. "말씀 하십시오" "다이아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충분히 일국의 후계자께서 탐낼만도 하지요. 하지만, 그게 다라고 봐도 되는 것인지요?" "그.. 그건...."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저는 다이아나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습니다. 물론 그녀의 선택이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그러기에 황태자 저하의 '감정'을 먼저 여쭙는 결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솔직한 대답을 들려주시길 원합니다." 틈이 없는 질문이었다. 에디우스와의 좋은 관계를 바란다면 다이아아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없다고 잡아 떼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식언을 하기에는 상대방의 힘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어찌 될 지 모르는 다이아나를 좋아한다고 선언하기엔 에디우스라는 존재가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솔직함'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저 또한 무도회 때 비슷한 질문을 했으니, 이번엔 제가 답을 드릴 차례인 것 같군요. 그럼 꾸미지 않고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엔 그저 드워프와 동행한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고, 그 이후로 그녀의 실력을 알게 되자 제 사람으로 만들고픈 욕심이 생겼지요. 그 점에 있어서는 에디우스 경에게도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적으로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적'인 일이 될 수 없기에 현재 신중하게 제 마음을 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로서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이 감정이 '사랑'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감정이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니까요. 다만, 저 또한 그녀를 미래의 황비로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더불어 저 또한 그녀의 선택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녀의 마음이 경에게로 돌아선다면 제 명예를 걸고 제국의 뛰어난 커플들에게 축하를 아낌없이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와 경 둘에게 아니 그 외의 다른 남자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태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대답이라고 에디우스는 생각했다. 사실 어설프게 미사여구를 섞어 얼버무리려 했다면 단단히 골탕을 먹여 주리라 작심했었는데,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점은 연적으로서의 리카르도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기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하나의 결론이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럼 황태자 저하와 제가 당분간 연적이 된다는 것이군요" 에디우스는 마지막 비수를 던졌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른 제안을 했다. "한 여인의 사랑을 놓고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나름의 인연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귀공을 연적이자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어떠신지요?" 대담하게 손을 뻗어오는 리카르도에게선 대제국의 황태자로서의 위엄이 아낌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전하는 상대를 거절 할 이유가 없는 에디우스였다. 오히려 반가워해야 할 일일 것이다. 현재 다이아나는 황실 기사이고 그녀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리카르도는 모르겠지만, 에디우스보다는 리카르도 쪽이었던 것이다. "황태자이시면서도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또한 황태자님 같은 분과 친구가 된다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각자 다른 속내의 두 남자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친구'가 될 것을 다짐했다. ********************************************************************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쿨쩍~! 써주신 이름은 다 주섬주섬 챙겨서 파일 하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캐릭의 속성에 따라 가장 눈이 가는 이름을 사용하겠습니다만, 혹여 직접 주신 이름이 악역이나 엑스트라 혹은 말의 이름이 될찌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쓰고 있으니 오늘 밤 이내로 한 편 이상은 가능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늦은 밤에 뵙지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물 소동 다이아나의 일상은 별 문제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의외의 사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일단, 첫 출근한 날 에디우스와 리카르도가 함께 친분을 과시하듯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련장에 놀러오는 바람에 당황한 사건이 있었다. 다이아나야 당황하던 말던 리카르도는 원래 그 자신이 검술 수련을 즐겨 했기에 이미 기사단원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받으며 친분이 있던 것으로 보였다. 에디우스는 슬쩍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어 보임으로써 역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알렉시안과의 승마교육도 순조로웠다. 힉스는 영리하기 짝이 없었고, 다이아나의 신체적인 능력도 상당했으므로, 처음 얼마간 근육통으로 고생한 외에는 어느 정도 무리 없이 말을 탈 수 있었다. 두 주일 정도의 교습으로 다이아나가 말에 익숙해 진 것을 확인한 알렉시안은 그 이후로는 방문하지 않고 있었다. 다이아나에게는 친한 친구가 두 명 생겼는데 하나는 기사단의 티리아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유리아나였다. 기사단에 출근한 지 사나흘 후 경에 유리아나로부터 방문을 요청하는 초대장이 왔고, 다이아나는 그에 응했었다. 그 이후 퇴근 후 몇 번 둘의 왕래가 있었고, 근래에는 유리아나도 심심찮게 수련장으로 방문하기도 해서 기사들의 눈을 기쁘게 해 주었다. 왕자와 공주의 궁도 세 번 정도 방문했으니, 두 주에 한 번 꼴로 만난 셈이다. 어느덧 첫 출근 날로부터 무려 한 달 반이 지나가 있었다. 저택의 하인들은 새로운 주인의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다이아나의 세심한 보살핌에 의해 전보다 상당히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어서, 이제는 완전히 다이아나의 팬으로 자리잡은 듯 했다. 특히 안느의 경우는 완전히 다이아나의 어머니처럼 행동하고 있었는데, 여성의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다이아나로서는 참 푸근하고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녀는 별 일이 없으면 칼퇴근을 서두르곤 했다. "심상치가 않습니다. 일단 파병을 해야 할 것은 확실하지만, 어떤 대응도 현재로서는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황궁에서는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마르띠앙 공작이 반갑지 않은 비보를 보고받고 있었다. "생존자는?" "의외로 희생자가 크게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이틀 전부터는 완전히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흠......" 마르띠앙 공작은 잠시 고심에 빠진 듯 했고, 지켜보고 있던 황제와 황태자도 어두운 빛으로 아무 마리 없었다. "일단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게!" "예!" 정보원이 사라지자 마르띠앙 공작이 황제에게 의견을 말했다. "일단은 소문이 나기 전에 정보를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선별적으로 해야겠지만, 더 이상 숨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회의를 소집해야겠군" "일단 중앙에서 보낼 사람은 우리 쪽 사람으로 정해야 합니다." "알렉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처음으로 황태자가 끼어 들었다. "알렉으로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현재로서 가장 접합한 사람은 그녀입니다만......" "그건......" "잘 되기만 한다면 우리 쪽에 명분이 생깁니다.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지요" "후우......" 황태자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자, 마르띠앙 공작은 묵묵히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하는 황제의 의도를 읽고 황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 일이 도대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이미 나누어 드린 자료에 적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어떤 정보도 추가로 받을 수 없는만큼 이 정보에 적힌 바에 의지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일이... " "하여, 황급히 황실 기사단과 황궁 마법사를 포함한 조사단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누가 거길 간다는 말이오?" "알렉시안 경과 다이아나 경, 그리고 황궁 마법사 중 7써클의 마스터이신 아크레디온님을 주축으로 하고 황실 기사단에서 몇 명의 지원자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인원으로는 어렵지 않겠소?" "어차피 병력의 숫자와는 크게 무관한 일로 판단됩니다. 괜히 다수가 움직이는 것보다 소수의 실력자들이 훨씬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 이같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마르띠앙 공작이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과 더불어 대략적인 설명을 끝내자, 황제가 회의를 마무리했다. "각 영지에서는 영지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번 일이 일어난 주변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분들은 마르띠앙 공작에게 별도의 전달사항을 받도록 하오." 마르띠앙 공작의 호출을 받고 급히 집무실에 갔던 다이아나와 알렉시안은 심각한 얼굴의 공작으로부터 임무에 대한 지시사항을 듣고 있었다. "마.. 마물이라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네. 아다시피 산맥에 접한 영지들은 모두 상당한 방어병력을 의무적으로 가지고 있네. 해당 사 건이 일어난 영지만 해도 5써클 마법사와 상당한 수준의 기사와 병사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현재 내부의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네" "일단 연락이 단절되기 전까지의 세부적인 정보들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미리 보고 가도록 하고, 마물이라는 말은 절대 극비이 니 외부에 퍼지게 해서는 안되네. 알겠는가?" "예" "출발은 내일 아침 일찍 수도의 마법진을 통해서 할 걸세. 기사단에서 자원자들을 차출할 것이니 내일은 갈 준비를 하고 이곳으로 오게나" "알겠습니다" 다이아나는 준비를 위해 저택으로 돌아갔고, 마르띠앙 공작은 그 후로도 한참을 알렉시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느, 저 내일부터 출장가요~!" "예? 아가씨, 출장이라뇨?" "음.. 기사단에서 일이 있거든요. 얼마나 걸릴 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그 동안에 안느랑 말론이 수고해 줘요.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 좀 챙겨 주시구요. 참, 힉스를 타고 가야 하니까 멜한테도 연락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위험한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안느는 조금이라도 여행을 편하게 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안느 가 허둥대며 방문 밖으로 나가자, 다이아나는 처음 부여받은 임무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인간들에게 '악마'라고 불려지는 것은 인간의 입장으로는 당연한 것일 테지. 원래 마계의 생물들은 지상계로 함부로 나올 수 없어. 마족이 인간계에 나타날 수 있는 경우는 '계약'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야. 물론 인간들의 역사상 '마왕'이라고 했던 이들 중 대부분은 약간 맛이 간 고위마족들이 인간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고 본신으로 나타나려는 시도의 일부분이었지만......' 페르세포네의 신전에서 들은 말이다. '마족은 순수하고 어두운 감정들에서 기운을 얻지. 강한 것을 숭배하고 약한 것을 경멸하지만, 의외로 상당히 순수한 종족이야. 인간들의 순수함과는 전혀 다른 면이겠지만.. 예를 들어 공포 계열의 마족은 그 감정에 집착하고 다른 것들에 무지하지. 증오를 좋아하는 마족도 마찬가지야. 대부분 그런 하나의 감정에 집착하는 마족들은 중급 이하의 마족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대부분의 마족들은 정당한 계약관계에 의해 지상계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 대부분이야. 문제는 그 힘을 빌려 쓰려는 인간 들이지. 마족은 계약에 관한 한 최선을 다하는데 대부분 마족에게 계약을 청할 정도의 인간들은 심성이 올바르지 않은 경우가 많 거든. 웃기는 사실은 그래서 그들의 시도가 좌절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야. 더러워진 심성으로는 고위마족과의 계약은 불가능하거든 . 가장 순수한 갈망만이 고위마족들을 끌어낼 수 있지' '마물이라... 그건 또 다르단다. 모든 생물이 마물이 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어. 어두운 기운에 잠식당하거나 그런 감정 이 영혼의 의지를 넘어설 때 자연발생적인 마물이 될 수 있지. 그건 지적인 생명체 뿐만 아니라 일반 동물들도 마찬가지야. 물론 불러낸 마족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잠식되는 경우에도 '마물'로 불리는 경우가 있지' 다이아나는 마계의 생물에 대한 페르세포네의 설명을 떠올리면서 공작으로부터 받아든 자료와 자신의 지식을 합해 새로운 정보를 조합해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알려진 사실이 적었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하기는 힘들었다. '일단은 가서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없다는 건가?' 다음 날 공작의 사무실에 들어간 다이아나는 출발을 위해 모인 인원들과 인사를 했다. 기사단원들 중 참여한 사람은 티리아와 피터슨 - 웬지 둘은 매일 싸우면서도 꼭 붙어다녔다 - 스티아노, 보거스, 사이온으로 늘상 어울려 다니던 시끄러운 패거리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위험한 임무에는 작위를 받은 귀족가 출신들은 당연히 지원을 하지 않았고, 가족이 있는 이들도 빠지다 보니 젊고 평민출신인 기사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 자신을 7써클의 마스터라고 밝힌 아크레디온이라는 상당히 정정해 보이는 노년의 마법사와 그의 직전 제자라는 세스티에 라는 4써클 마법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사실 세스티에의 실력으로는 이번 일행에 짐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죽어도 같이 가겠다고 우기는 아크레디온의 고집에 마르띠앙 공작이 할 수 없이 허락을 한 터였다. 이미 예정된 인원 외에 방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제로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암흑과 파괴의 여신 페르세포네님의 종 이시니엘이라 합니다." 페르세포네의 신관은 상당히 드물었다. 공작은 특별히 신전 본단에 도움을 요청한 결과 사제 한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족이나 마물에 대한 정보는 페르세포네여신의 신관만큼 잘 아는 이가 드문 데다가 이름 그대로 파괴의 여신인 페르 세포네의 신관들은 성력으로 공격력을 대신할 수 있는만큼 일행의 발목을 잡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일행은 수도에 위치한 마법진을 이용하여 사건의 발생지에서 가까운 영지로 이동을 했다. 7써클 마스터를 동행한 덕에 마법사들은 이들에게 상당히 정중하게 대했고,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마중나온 이들에 의해 일단 영주의 저택에 짐을 풀고 다음 날부터 조사를 하기로 했다. 다이아나는 지도에서 본 사건이 일어난 영지 쪽으로 밤 늦게 실프를 날려 보내었다. 한참 후 별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온 실프와 의사소통을 한 다이아나는 그 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블랑카님이 제 의도에 맞추어서 리플을 주셨네요 영지 주인은 여러분도 아는 사람이랍니다. ^^;;;; 그럼 다음 회에 뵙지요... 오늘 하나 더 올릴 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물 소동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영주가 보내 준 안내인을 따라 문제의 마을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이건.....?" 무언가 축축하고 음습한 느낌이 몸을 덮었다. 항상 상쾌한 느낌을 전해주던 마나마저도 무겁고 어둡게 느껴졌다. "마물이나 마족의 기운이 확실합니다." 이시니엘 신관이 얼굴을 굳히면서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을 입구부터는 마치 경계선처럼 땅에 붉은 테두리가 쳐져 있었는데, 선명한 붉은색이라기 보다는 검붉게 보이는 모양이 마치 피를 연상케 하여 더더욱 기분 나쁜 느낌을 주었다. 안내인은 도망치듯이 얼른 되돌아갔다. "일단 어느 정도 대열을 갖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이시니엘님이 맨 앞에 서주시고 그 옆으로 기사님 두 분이 그다음엔 저와 제 제자와 기사 두 분, 맨 뒷쪽에는 역시 기사분들이 자리해 주십시오" 경험이 많은 아크레디온이 제안하자,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빠르게 진형이 생겨났다. 다이아나가 자발적으로 맨 앞쪽 신관의 옆에 자리하자, 알렉시안이 맨 뒤쪽에 자리잡았다. 가장 실력이 좋은 둘이 앞 뒤로 포진하자, 사이온이 앞쪽의 다이아나를 조보했고, 피터슨과 티아라는 두 마법사의 양 쪽을 나머지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알렉시안과 후위를 맡게 되었다. "그럼 들어갑니다~!" 맨 앞에 서 있던 이시니엘이 용기를 주려는 듯 일부러 밝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일단 일행 모두가 붉은 선 안으로 들어서자, 알렉시안은 잠시 멈추라고 외치더니 다시 바깥쪽으로 움직여 보았다. "이런..."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알렉시안이 낭패에 찬 소리를 내자, 주변의 기사들도 덩달아 뒤쪽으로 돌아 나가 보려다가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멀쩡하게 보이는 모습과는 반대로 마치 어떤 막에 부딪힌 듯 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앞 쪽에 자리했던 이시니엘과 아크레디 온이 와서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둘은 그 막을 이루는 것의 정체를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깰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흑마법으로 이루어진 결계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고위마족급의 마력이 느껴지고 있어요" 다이아나와 알렉시안을 제외한 일행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7써클 마스터와 고위신관이 풀지 못할 결계라니......! 절망스러운 표정의 일행들을 수습한 것은 알렉시안이었다. "어차피 들어가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 일을 당하는 것보단 낫지~!" "그래요. 원인을 알아야 어떤 대응이던 해 보지요" 다이아나도 웃는 얼굴로 일행을 격려했다. 평민의 신분에서 기사단이 된 이들의 정신력 또한 무시할 것이 못되었기에, 기사들은 어느 덧 정신을 차리고 굳은 결심의 표정으로 서로를 다독이면서 원래의 진형을 다시 만들었다. 의외로 마을은 비정상적일 정도의 기운을 제외하고는 평온했다. 얼핏 보기에 100여 가구가 있었는데, 그 사이로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일행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별 긴장감 없이 다가왔다. "기사님들이시군요. 이런 촌구석에 어쩐 일로들 오셨는지..." 농부로 보이는 평범한 중년 남자는 신기한 듯이 일행을 쳐다보며 말을 붙여왔다. 앞에 자리했던 시니온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다이아나는 그런 시니온을 저지하듯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활짝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여행중에 묵을 곳이 필요해서요.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이아나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얼빠진 표정이 되었지만,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럴수도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제이슨이라고 불러 달라면서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시니엘 신관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다이아나의 말 없는 만류에 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일단 여관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을이 작다 보니 여관이 딱 한 개 거든요. 보아하니 귀족분들 같은데, 너무 누추하다고 하시지는 않을지......" "괜찮습니다." 다이아나는 머뭇거리면서 이야기하는 제이슨의 말에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런 다이아나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제이슨은 신이 나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 이 마을엔 몇 분 정도가 사시나요?" "글쎄요. 300명이 좀 넘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좀 더 많았는데, 아무래도 요즘엔 젊은 애들이 좀 더 큰 도시로 가곤 해서 말이죠." "영주님은 어떠세요?" "뭐, 영주님이라고 하셔도 워낙 소탈하신 분이라서요. 대대로 이 마을의 영주로 계신 분이다 보니 귀족 티를 거의 내지 않으신답니다." "그렇군요" "아 다 왔습니다. 바로 저기입니다" 제이슨이 가리키는 곳에는 특별한 이름도 없이 '여관'이라는 간판만 달랑 하나 달아놓은 것이 보였다. "이봐! 손님이야~!" 제이슨이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가던 일행은 카운터에서 졸고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일부가 보게 되었다. "소.. 손님?" "귀한 손님들이라구. 얼른 모시지 않고 무얼하나?" "아! 어서오십시오~! 묵고 가실 겁니까? 식사는요?" 어쩐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응대였다. "식사도 할 꺼구요. 방도 좀 주세요. 2인실 5개면 되겠네요" "저어... 2인실은 3개만 있고, 1인실이 2개 3-4인용 방이 1개 있습니다만......" "그럼 2인실 3개와 그 3-4인용 방 하나면 되겠네요" "아, 네~! 그럼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직 점심때가 안 되었으니, 식사는 이따 하구요. 일단 방으로 안내를 좀..." "아, 예 그러지요" 다른 일행들은 미리 안 것이 아닌가 싶을만큼 멀쩡하게 나서서 주인과 이야기를 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인이 방을 안내한 후, 다이아나는 모두를 가장 큰 방에 모이게 했다. 안그래도 궁금해 하던 일행들은 모두 모이기엔 약간 비좁은 방에 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죠?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요?" 티리아가 먼저 말하자 너도 나도 입을 모아 이 황당한 사태를 묻는 말을 한 마디씩 던졌다.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데, 그런 눈치는 없더군" 알렉시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피터슨이 바로 말을 받았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이 영지로 투입된 기사들이 벌써 두 번이나 실종되었다는데, 아까 제이슨이라는 사람은 근래에 처음이라는 식으로 말을 했잖아" "그.. 그렇군" "더군다나, 이 곳은 생각보다 병사와 기사가 많은 영지야. 산맥이 코 앞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여기는 무장인력들이 드나드는 흔적이 없어. 마을 전체를 통틀어 여관이 한 곳 뿐이라는게 말이 되나? 그리고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영지의 규모는 훨씬 크다고. 이 열 배는 되어야 정상이란 말야" "아~!" 병사들이나 기사들의 경우 영지민일 수도 있지만, 인구수가 적은 외곽 지역에는 도시지역의 병사가 차출되어 가거나 용병을 고 용하기도 한다. 이 마을처럼 산맥과 접하여 몬스터들의 침입 위험이 있는 곳은 그래서 숙박업이나 식당들이 훨씬 많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지" "뭐야? 너만 안다는 것이?" "이 마을의 영주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벌써 3년 전까지의 상황이라구. 현재 이 영지는 옆의 영지 와 합쳐져서 하나의 영지가 되었어" "에엣?" "그리고 너희들도 봤지만 제이슨이라는 사람은 전혀 거짓말을 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알겠어?" "그럼 이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마물에게 홀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그럴지도......" 알렉시안의 마지막 말은 엄청난 무게로 일행들을 압박했다. "다이아나경, 혹시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저희들과는 다르게 전혀 당황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만......" 처음에 가장 궁금해 하던 일을 잊지 않고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마법사인 아크레디온이었다. "저도 더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마을 주민들의 태도에 맞추어 주는 것이 당분간 활동하기 편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다이아나는 그 말만 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시니엘 신관에게 질문을 했다. "아까 고위마족급의 마력이라고 하셨었죠?" "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 신성력으로 전혀 접근하지 못할 정도의 결계라면 고위마족으로 봐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 고위마족의 경우 타락한 영혼은 불러내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순수한 영혼의 엄청난 집념으로 가능하다더군요" "어. 어떻게.... 예. 맞습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인데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인간이 고위마족과 계약을 한 경우가 최근 있었나요?" "최근 수 백년 내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전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고위마족의 강림이 이루어진 것은 350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혹시 그 때 어떻게 고위마족을 불러냈는지 아십니까?" "상당히 의외의 경우였습니다만, 우습게도 한 남자에게 농락당한 젊은 여성들 수십 명이 자신들의 영혼을 담보로 불러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그래서 어찌 되었는지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의 죄를 징죄했고, 그로 인해 마력이 약해진 원인들을 제거했습니다" 이야기를 한 이시니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이야기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바람둥이에게 원한을 품고 고위마족을 불러냈다는 이야기인데, 마족이라고 하면 의례히 세계정복을 꿈꾸는 인간을 상상하던 이들로써는 의외의 사실이 아닐 수 없 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정복 등의 꿈을 꾸는 이들은 영혼의 순수성 면에서 대부분 질이 떨어졌기에 고위마족을 불 러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이들이 마족에 대하여 아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들과의 계약에 얽힌 이러한 상관관계는 페르세포네 여신의 신관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고급 비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고위마족과의 계약에 필요한 조건들이 널리 알려진다는 것은 그만큼 무모한 소환과 계약을 충동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가 이시니엘에게 말했을 때 신관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원인을 알아보아야 겠군요. 누가 마족과 계약했는지 알아내서 원인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계약조건을 완성해 주는 것만이 해결방법인 듯 하네요" 다이아나가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계약의 조건이 달성되면 마족은 이 세계에 있을 힘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대가로 약속받은 것만 쥐어주면 마계로 돌아가게 된다. 만일 고위마족의 힘을 이겨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단 일행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아 보기로 했다. 다이아나와 이시니엘은 사소한 것들도 모두 놓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다이아나는 이시니엘과 동행하여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을에는 주로 중년층과 노년층이 많았으나 젊은 사람들도 가끔 볼 수 있었고, 영지민 수에 비해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여기 저기 모여 즐겁게 놀고 있었다. "유난히 아이들이 많은 것 같죠?" "그렇군요" 이시니엘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다이아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저 아무 생각없이 대꾸했다. 다이아나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 놀고 있는 공터에 가더니 갑자기 자리를 잡고 털썩 앉고는 이시니엘에게도 자리를 권하는 것이었다. 이니시엘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고위신관급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다이아나에게 웬지 모를 신뢰감을 느꼈으므로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노래 할 줄 아세요?" "노래요?" "흠... 됐어요. 제가 하죠" 갑자기 노래라니? 뜬금 없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래진 이시니엘에게는 아무 설명도 없이 다이아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라카둘라 멘치카불라 비비디바비디부 점장이 하는말 어느때나 비비디바비디부 살라카둘라 멘치카불라 비비디바비디부 그말을 조금도 믿잖아도 비비디바비디부 살라카둘라는 멘치카불레루 사랑한다는 말은 귀에 젖어 비비디바비디부 살라카둘라 멘치카불라 비비디바비디부 우습고 재밌는 말이라네 비비디바비디부" 다이아나가 부른 노래는 뮤지컬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술할머니의 주제가였다. 가볍고 경쾌한 곡조가 공터에 울려 퍼지자, 의도한 대로 호기심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같은 곡을 한 번 더 부르자,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한 곡 더 불러 달라고 졸라대었다. 다이아나는 웃음을 짓고는 이번엔 좀더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노래를 불렀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파샤파 하이샤파 얼마나 울었을까요~!" 여기까지 하고 노래를 딱 끊자, 아이들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조르기 시작했고, 다이아나는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왕궁과 마차 마법이 있는 시대이니만큼 리얼리티가 뛰어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 그래서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데요!" "와아~!!!!!!!!!" 아이들은 행복한 이야기의 끝에 이르자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어느 덧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던 이시니엘도 그런 자신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다이아나는 다른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이야기도 해 주면서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이니시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이아나는 그러면서 아이들과 하나 하나 접촉하고 있었다. 어느 덧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은 모두 다이아나의 근처에 모여 있었고, 다이아나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새벽입니다. 조아라가 한참 조아라~ 할 시간이죠 ^^; 기분 좋아서 하나 올리고 자러 갑니다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물 소동 "디안이라고 했니?" "응 언니~!" "참 이쁘구나. 부모님은 여기 같이 사시니?"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의 얼굴이 잠시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바로 원기를 회복한 8살의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이곳에 유난히 어린 아이들이 많았군요" 아이들의 대부분은 조부모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마을 안에서 적절한 일거리를 찾지 못해 외부로 일하러 나가면서 자식들을 맡기고 간 것이다. 마을 인구에 비하여 상당히 많게 느껴졌던 아이들의 숫자는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디안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엄마랑 아빠. 그리고 우리 할머니요~!" "할머니랑 사는구나?" "네에~!" 다이아나는 몇몇 아이의 신상을 물어보더니 아이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개의 동화를 이야기 해 주고는 아이들이 모두 함께 놀만한 놀이 몇 개를 가르쳤다. 어느 정도 아이들끼리 잘 놀기 시작했을 때, 다이아나는 다음 날 나오면 또 이야기를 해주겠노라 약속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영문을 모르고 계속 다이아나의 행동을 지켜만 보던 이시니엘은 허겁지겁 뒤를 다이아나의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무심히 걷고 있는 다이아나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을 굳혔다.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것이 다이아나를 울게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시니엘로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다이아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렇게 말 없이 걷던 다이아나는 이시니엘을 이끌고 여관 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늘 모이던 큰 방이 아니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간 것이다. 젊은 여성의 방으로 난데없이 끌려온 순진한 신관은 얼굴을 붉혔으나 진지한 다이아나의 태도에 자신이 불경한 듯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시니엘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페르세포네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주시겠습니까?" "다이아나양께서 원하신다면요" 신관들은 어차피 신자들의 비밀을 들어주어야 할 경우가 많았다. 어둠의 신관의 경우 특히 잘못하여 마족들에게 사로잡힌 바 된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임무에 포함되었기에 이런 일에는 익숙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느닷없이 반지를 빼어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자, 이시니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가 바로 엔젤상회의 창립자입니다" "성녀님....!" 곧바로 예의를 표하려는 이시니엘을 다이아나가 말렸다. 얼른 반지를 끼고 다시 모습을 바꾼 다이아나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이시니엘에게 말하고 그녀의 힘으로 알아낸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성력이 없는 사람을 알아낼 수 없었던 사실이었으므로 일행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일행들은 다시 한 방에 모였다. 하지만 조를 짜서 움직였던 그들이 알아낸 것은 거의 하나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어디에도 징조가 보이는 곳은 없었다. 영지에서 사라졌다는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도 별로 없었고,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에게는 극진하게 공대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영주의 성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더군요. 분명히 상부에는 죽은 것으로 보고된 그가 멀쩡히 살아서 저를 반겼습니다." 알렉시스가 이야기를 마치자 다이아나와 이시니엘만 남았다. "저희가 대충 진실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이시니엘이 부탁받은 대로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관의 말에 반색을 하면서 모든 이가 궁금해하자 이시니엘은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 마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됩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좀비나 구울이라고 하실 참입니까?" "다들 조용히 하라구! 소리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잖나? 계속하시죠 신관님" 알렉시안이 흥분한 기사들을 진정시키자, 이시니엘이 말을 이어갔다. "이 곳은 고위마족의 힘으로 형성된 환상입니다. 아마도 살아 있는 사람은 그 고위마족과 계약을 한 당사자겠지요" "그.. 그런 일이... 환상마법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현실성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러니까 고위마족이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환상을 만들어 내려면 고위마족이나 그 위의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실례지만 신관님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환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던 아크레디온이 물었다. 7써클 마법사인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고위신관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다이아나경의 도움을 받아 낮에 공터에 모인 아이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라구요?" "신체접촉을 하면서 신성력을 흘려 넣어 봤는데, 전혀 반응이 없더군요. 저도 처음엔 속을 뻔 했습니다. 맥도 뛰고 온기도 느껴졌기 때문에......" "그 정도를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라니......" "마을 사람들 모두를 이지를 가진 존재로 행동하게 할 정도의 마법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당연히 가능해야 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일단 확인한 것이 하나 있는데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이시니엘이 말끝을 흐리자, 다들 궁금한 표정이 되었다. "기사분들 중에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이시니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약간 눈치를 보던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원을 했다. 이시니엘은 이번 계획의 다이아나의 생각이었다고 이미 물러선 후였으므로, 다이아나는 그런 그들의 눈에 맺힌 결단과 용기를 보면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 망설였다. 그런 다이아나의 심정을 안 것일까? "다들 잠시 조용히 해 줘! 일단 이번 일에서 기사단의 책임자는 나와 다이아나경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이아나양은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 내가 하는 것이 나을꺼야. 아, 더이상 반대하지 말아. 나보다 실력 더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해도 좋아.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하는 게 살 가망성이 높다는 것은 모두 다 알지?" 알렉시안의 단호한 외침에 말리려던 이들까지 잠잠해졌다. 다이아나는 그런 알렉시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알렉시안에게 가졌던 생각들 중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생각대로만 풀린다면, 알렉시안은 안전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건 상당히 미지수였다. 이시니엘은 몇 명을 지명하여 다음 날 할 일을 알려 주었고, 일행은 여러 차례 연습까지 하는 열의를 보였다. 다음 날 다이아나와 이시니엘은 전 날과 같이 공터로 나갔다. 이번에는 두 명의 마법사도 대동한 상태였다. 다이아나를 보고 모여든 아이들은 몇 개의 이야기에 이어서 마법사들이 만들어 내는 신기한 불꽃이나 화살을 보고 즐거워했다. "또 그 잘난 마법으로 자랑을 하고 있군~!" 알렉시안이 그럴 듯하게 시비를 걸어왔다. 늙은 마법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알렉시안은 보란 듯이 검집채로 검을 흔들면서 그를 위협했다. 보다 못한 다이아나가 그를 막으려 하자 알렉시안은 화를 내면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다이아나는 일부러 몸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있었으므로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 제 정신인가?" 아크레디온이 마른 몸을 떨면서 성을 내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가 마법을 캐스팅하기 위해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곧바로 검집의 끝이 그의 복부를 때렸다. "이 영감탱이가~! 마법사랍시고 까불지 말란 말이야~!" 늙은 마법사를 검집으로 쳐 쓰러지게 한 후 알렉시안은 잔인한 웃음을 지으면서 쓰러진 다이아나에게 접근했다. "흐흐흐~! 내가 오늘을 별러 왔지. 여긴 어차피 작은 영지니 소문날 일도 없단 말야" 알렉시안이 쓰러져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다이아나를 덮쳐 갈 때, 이시니엘의 옆에 몰려들어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아이중의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막아섰다. "안돼~!!!!!!!!!!!!!!!!!!!" 순간 알렉시안의 몸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눈물을 가득 담고 다이아나에게 매달린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고 한 8살난 소녀 디안이었다. 다이아나는 소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디안은 그런 다이아나의 품에 안겨 엉엉 울어대었고, 다이아나는 그런 소녀를 안고 말없이 다독이다가 자리를 찾아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안게 하고는 조용한 노래를 부르면서 달래주었다. 이시니엘은 뒤에 있던 아이들을 살짝 뿌리치고 그런 다이아나의 옆으로 다가 앉더니 아이의 몸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는 자세를 취했다. 순간 아이의 몸에서 검은 기운과 흰 빛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들을 보고 있던 기사들과 조금 가까운 곳에 있던 두 명의 마법사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흐려지면서 마치 흔들리는 듯한 영상을 보는 듯이 바뀌었다. 실제로 아이의 몸에 성력을 발한 것은 다이아나였다. 아이의 몸 속에 숨어있던 고위마족은 자애와 치유의 기운에 의해 아이의 몸에서 밖으로 밀어내어지자, 자신이 지탱하던 마법의 힘을 늦추어 그 힘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마족은 자신의 계약을 방해하려는 이를 노려보았다. 다이아나의 품에 안겨 있던 디엔이 눈을 떴을 때, 그 눈은 원래의 푸른 빛이 아닌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족은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기 시작했다. "감히 나의 계약의 성취를 방해하는 너는 누구냐?" "그대는 고위마족이신가요?" 엄청난 마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태도로 여전히 아이를 감싸안고 다이아나가 물었다. "너는......?" "예. 아시는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네가 아무리 그 분의 딸이라고 해도 인간인 너로서 내 마력을 없애긴 힘들텐데?" "계약의 조건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능하면 계약을 돕고 싶습니다만......" "불가능할걸? 이 아이가 바란 것은 평화롭던 자신의 마을을 되돌리는 것이니까" "역시... 그랬군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뭐야?" "스스로도 알고 계실텐데요. 아이의 조건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죠. 그렇기에 당신은 디엔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마을을 꾸며내신 것 아닌가요?" "......"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라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이런...." 다이아나의 뒤를 이어 이시니엘이 나섰다. "페르세포네 여신님의 종이 고위마족을 뵙습니다. 지키지 못할 계약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계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 고위신관이군" "부족하지만 그분의 은총을 얻었으니까요" "휴... 어쩔 수 없구나. 이 아이의 바램이 너무 크고 영혼이 아름다워서 내가 무리를 한 것은 인정하겠다." "그럼 이 결계를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내가 여기 있기에 다른 마족의 강림이 막아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원한에 찬 혼령들의 외침이 아랫것들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을 내가 이 아이와의 계약을 핑계로 막고 있었다" "그.. 그럴수가...." 당황하는 이시니엘과 달리 다이아나는 짐작했다는 듯이 슬픔을 가득 담은 눈을 들어 마족을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그 원한의 원인을 찾아 혼령들을 달래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가 힘껏 보살펴 주겠습니다. 예전의 평화는 아니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으니 이번만큼은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하지만, 이것이 정식 계약이었다면 아무리 너라 해도 나를 막을 수 없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검은 기운이 디안의 몸에서 사라지면서 붉게 열려 있던 눈도 덩달아 감겼다. 다이아나는 축 늘어진 아이의 몸을 안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이아나를 따라 주위를 둘러 보던 이니시엔의 몸이 굳어졌다. "원인을 아시겠지요?" "그렇군요" 슬픈 어조의 간단한 문답을 뒤로 하고 둘은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조금씩 변해가던 주위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자, 일행들은 주위를 돌아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일행을 두고 다이아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알렉시안을 찾아 다녔다. 알렉시안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큰 건물의 폐허에 쓰러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수 십명의 기사들이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우욱~! 이 냄새는......" 일행들은 완전히 폐허가 된 마을에서 나는 악취에 코를 감싸쥐고 몇몇은 구토까지 했다. 마을은 불이 났었던 듯 곳곳에 타다 남은 건물과 재들이 쌓여 있었다. 주위의 몇 집을 살펴 본 기사들은 이미 불에 탄 시체 몇 구에서 칼로 당한 검상을 발견해냈다. 다이아나와 이니시엔은 알렉시안을 불러 대략적인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고, 이들은 실종되었던 기사들을 깨웠다. 며칠을 잠들어 있던 기사들의 경우 앞에 들어왔던 이들이 상당히 쇠약해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는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크레디온과 다이아나, 알렉시안, 이시니엘만 남기고, 다른 기사들은 움직이기 힘든 이들을 부축하거나 하여 처음 도착한 영지로 가 있기로 했다. 이들에게는 상부에 보고하기까지 함구하라면 당부가 내려졌다. 4써클 마법사인 세스티에가 보고와 지원을 위해 동행했다. 다이아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디안을 티리아에게 따로 부탁하고, 헤어졌다. 처음에 좁게 보이던 마을의 진짜 모습이 들어나자 이들은 폐허가 된 마을의 뒤로 상당히 큰 도시 규모의 마을을 쉽게 볼 수 있 었다. 일단 의견을 교환한 4명은 불에 탄 마을을 뒤로 하고 결계에 가리워졌던 영지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물 소동 폐허인 마을을 벗어나자, 상당히 정상적인 모습의 거대한 영지가 드러났다. 경계를 서고 있었던 병사는 일행을 보자 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렉시안이 나서서 신분을 밝히자, 병사는 반색을 하면서 보고를 하기 위해 달려갔고, 일행은 다른 병사의 안내를 받아 영주의 성으로 안내되었다. 오이스딘 드 세크넌트 백작은 그야말로 허둥지둥 이들을 맞기 위해 뛰쳐 나왔다. 어느 날 느닷없이 생긴 결계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외부인을 그것도 황궁에서 보낸 일행을 맞게 되었으니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었다. "역시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마족을 그렇게 금방 물리치시다니요~!" 사치스럽기 그지 없는 저택 안에서 일행들을 맞이하는 백작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크레디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영주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원인은 그 곳 사람들의 죽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시니엘 신관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구요. 화재가 난 듯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세월을 공으로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아크레디온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초연하기만 했다. 이시니엘은 신관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 껄끄러운 위치에 있었고, 무엇보다도 7써클의 마스터라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부분이 아크레디온을 정면으로 나서게 만든 이유였다. 백작은 40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외곽 영지의 영주들이 대부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일반론을 뒤엎기라도 하듯이 터질듯한 몸매를 둔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얼굴에는 땀인지 기름기인지 모를 무언가가 번질거리고 있었다. 아크레디온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작은 땀을 닦던 수건으로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은 얼굴의 눈 주위를 찍어내면서 구슬프게 말했다. "비극적인 일이죠.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더군요. 하여 출입을 막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 화재는....?" "다 제 잘못이지요. 겁을 먹은 바깥 사람들이 몰려가서 불을 내버렸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천한 인간들이란 제 목숨이 가장 소중했던 게지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 짓이라 특별히 처벌도 못했습니다" "호오.. 그렇군요. 참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아크레디온이 짐짓 딱하다는 어조로 부추기자,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이후 마족이 결계까지 치는 바람에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으며, 그럼에도 얼마나 훌륭히 영지민들을 진정시켰는지를 침을 튀겨가면서 떠들어댔다. "..... 라고 했지요. 여러분 덕에 제가 한 말이 그대로 맞았지 뭡니까? 이거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젊은 세 명의 남녀는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아크레디온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가능한 떨어져 앉아 보지 않으려고 해도 역겨울 정도로 잘난 체와 아부를 함께 하는 백작인데 그를 맞은 아크레디온은 한치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염병이라고 하셨나요?" 계속 백작의 비위를 맞추던 아크레디온은 안도하는 백작의 꼬리를 살짝 물었다. "아.. 네.. 네! 정말 지독한 전염병이었지요" "흠.. 그럼 이 영지도 좀 조사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토록 지독한 전염병이었다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라도 꼭 조사를 해야만 하겠군요. 좀 귀찮긴 하지만, 일단 임무에 속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저희가 한 번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예?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기름을 바른 듯한 언변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말까지 더듬어 대는 백작이었다. 확연히 안색이 변한 백작에게 전혀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아크레디온은 희망을 말을 슬쩍 던진다. "뭐, 전염병이 이쪽에 돌지 않는지 경계선 쪽의 주민들의 건강만 체크하면 될 듯 하군요" "예?.. 네,, 그렇지요. 그렇구 말구요!" "그럼 그 부근의 인가를 주욱 돌아보면서 병자가 있는지와 병증을 한 번 조사해 보면 우리 일은 끝나겠군요"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노회한 마법사의 언변에 울고 웃었던 백작은 말을 마친 마법사가 '나이가 드니 몸이 지치는군'하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자, 호들갑을 떨어가면서 숙소를 배정해 주었다. 백작이 몸매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듯이 기름기 일색인 식사를 간신히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던 일행들은 밤 늦게 다이아나와 이시니엘이 묵는 방으로 모였다. 상당한 주의를 했는지, 아크레디온은 알렉시안과 함께 방 사이의 벽을 뚫고 들어와 이시니엘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근방에는 모두 결계가 쳐 있으니 안심하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크레디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알렉시안이 무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내뱉듯이 말을 했다. "쓰레기같은 작자랑 상대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알렉시안의 말에 다이아나와 이시니엘도 공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크레디온에게 사의를 표했다. "보고를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현재로서는 백작의 거짓말을 가지고 문제를 삼을 수도 있겠지만, 이리 저리 변명을 한다면 대충 끝날 공산이 큽니다" 알렉시안이 차분하게 사태를 설명했다. "그 말씀은 저 백작이 상당한 줄이 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만?" 역시 노련하게 초점을 맞추는 아크레디온이었다. "그렇습니다. 저 자는 미켄하임 드 오브리스 공작쪽에 붙어 있습니다. 오히려 황실쪽의 세력이라면 쉽겠지만, 저 자를 문책하려면 저쪽 세력들의 입을 막을만한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 "일단, 디안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 같지는 않아요. 젊은 사람들이 외지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쪽의 번화한 마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지요. 입을 열게 하기는 힘들겠지만, 내일 한 번 알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이쪽 영지의 마법사 길드를 찾아가 보겠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마을의 신전을 찾아가 보죠" 일행은 각기 다음 날의 일정을 정하고는 헤어졌다.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다음 날, 일반 주민들에 대한 조사에 나선 알렉시안이 동행한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아이들 앞에서의 연극은 왜 한 것입니까?" "앞서 사라진 기사분들이 어떻게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아마 그들은 소란을 피우고 마을 사람들을 협박했을 겁니다. 결국 평화로운 마을의 환상을 위해서는 사라져야 했겠지요" "그... 그런...." "그래서 위험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마족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면 알렉시안님도 그 곳에서 그 분들과 함께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겠지요" "그렇군요." "마법사님을 피해자로 한 것은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은 한 편으로 인식해 주길 바란 것입니다. 사실 그 아이가 확실한 지 한 번 더 확인할 필요도 있었구요. 만일 생명력이 있는 누군가가 숨어서 벌인 일이라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었으니까요" "......" "영주를 보셨으니 대충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요?" "흔히는 아니지만, 황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이런 외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한 마을을 저 정도로 만들 정도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야겠지요." "알렉시안경. 그걸 찾아내면 이 일이 확실히 해결될까요?" "......" 비극은 비극이지만, 일의 마지막 처리는 권력다툼이나 진배 없었다. 최고층의 권력 다툼에서 뒷거래는 당연한 일이었고, 이번 일만 해도 현재로서는 당연히 증거를 들이 대면 처벌이 뒤따라야 하지만, 미켄하임 드 오브리스 공작 측에서 황태자쪽에 무엇을 들이밀 지는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알렉시안은 그런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다이아나의 말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자신에게 다이아나가 더 이상의 추궁을 하지 않자, 알렉시안은 오히려 등이 싸늘한 느낌이었다. 권력 구조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던 이 영민한 여성은 그의 침묵이 뜻하는 바를 이미 깨닫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다행히 영지 내에는 아테나이의 신전과 세레스의 신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섬기는 신이 다르다고는 할지라도 고위신관을 홀대할 신전을 없었기에, 이시니엘은 양쪽 신전에서 상당한 정보를 전해받을 수 있었다. 일단, 폐허가 된 마을의 영혼들에 대한 정화가 시급한 일이었으므로, 이시니엘은 신관들을 이끌고 폐허로 향했다. 신관들은 마을의 참상에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졌다. 이시니엘은 이들을 이끌고 각 집을 돌아다니면서 신성력과 기도를 통한 영혼의 정화를 해 나갔다. 마족이 없어진 뒤에도 음습한 기운을 풍기던 마을의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을 무렵, 다른 곳에서 일을 하던 신관의 긴급한 호출에 이시니엘은 달려가야만 했다. 중급 신관 두 명이 신성력을 발하고 있었지만, 원혼 몇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 신성력에 저항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이시니엘은 암흑의 여신의 힘을 빌어 원혼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잠시 후, 검은 빛을 띤 영혼의 빛이 점차 색이 바래는 듯 싶더니, 금빛의 광채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다른 신관들은 경탄하는 눈으로 이시니엘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다. 마법사 길드를 찾은 아크레디온은 황급히 고위급의 정령마법사를 수배했고, 7써클 마스터라는 그의 위명에 놀란 지부의 마법사들로부터 가능한 정보를 모두 모을 수 있었다. 마법길드도 갑자기 두절된 통신이 가능해지자 자신들의 궁금함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최선의 지원을 약속했다. 그렇게해서 오후 늦게서야 마법진을 통해 소환된 정령사를 거느리고 아크레디온은 폐허를 찾았다.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신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크레디온에게 대답하는 이시니엘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그것은 육체의 피곤함보다는 상처받은 마음과 정신적인 원인이 컸으나, 아직 아크레디온은 그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희가 가장 늦었군요" 다이아나와 알렉시안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다이아나는 이시니엘이 한 일을 보고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젊지만 상당한 능력을 가진 신관은 아픔이 그득한 표정으로 그런 다이아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그의 마음을 짐작한 다이아나가 주저없이 다가가 손을 꼭 쥐고 슬쩍 신성력을 불어넣어주자, 이시니엘은 비로소 약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봅시다" 아크레디온이 일행을 모았다. '증인'의 역할을 할 신관들도 모두 모여든 후였다. 필로우라는 이름의 정령술사는 아크레디온이 신호를 하자, 땅의 정령과 공기의 정령을 불러들여 과거의 일을 재현하도록 했다. 공기의 정령은 땅의 정령이 보여주는 내용을 공기 중에 흩뿌려서 영상을 만들었고, 보여지는 영상의 참혹함에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정령술을 시전한 필로우조차도 몇 번이나 흐트러지는 마나를 모으기 위해 안간 힘을 써야 했다. 말을 잃은 듯한 신관들은 우울한 얼굴로 신전으로 돌아갔고, 그 와중에 재현된 영상을 담을 수정구를 만들어낸 아크레디온은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정령술사에게 주의를 준 뒤 그를 돌려보냈다. 일행 중 아무도 오이스딘 드 세크넌트 백작의 얼굴을 보고 침착할 자신이 없었기에, 이들은 경비에게 자신들이 긴급한 호출을 받아 수도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이 그 곳을 벗어났다. 처음 도착했던 영지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동료들은 하나같이 참담한 안색의 일행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다이아나는 말 없이 티리아를 쳐다 보았고, 티리아와 함께 디안을 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기사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알렉시안은 사안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는지, 통 말을 안합니다." 티리아가 다이아나와 함께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다이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디안이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아이는 침대를 두고도 방 구석 맨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고 들어온 둘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잠시....." 다이아나가 양해를 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티리아는 말없이 둘을 남겨둔 채 방 밖으로 나갔다. 다이아나는 상처입은 어린 동물의 새끼처럼 자신을 경계하는 디안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디안...." 다이아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움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아이가 겁을 먹지 않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온 몸의 신성력을 끌어들인 다이아나에게서 자애의 빛을 느꼈는지, 아이는 조금씩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한참만에 아이곁에 다가선 다이아나는 조심스럽게 디안을 끌어안았다. 바들거리는 아이의 떨림과 심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다이아의 몸에도 같은 떨림과 울림으로 전해졌다. "일단 전염병이 퍼져서 옆 마을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는 것은 확실하게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람들도 그 곳에 전염병이 돌았다고 알고 있었지만, 불은 영주의 병사들이 질렀다는군요" 알렉시안이 경계선 주위의 사람들로부터의 수집한 정보를 말하고 있었다. "신전에서는 한 번도 지원요청을 받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신전 쪽에 이야기 하는 것을 막은 듯하더군요. 신관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대충 중간단계의 일들은 모두 알겠는데, 영주가 그런 일을 한 이유를 알 수 없군" "그렇습니다. 아무리 외곽의 영지라고 해도 언젠가는 말이 퍼질 위험이 있는데, 한 마을을 몰살시킬 정도의 원인이라니... 그 부분만큼은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혹시 이시니엘 신관님께서는 아시겠는지요?"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셋이 한참 의논을 하고 있을 때, 다이아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행은 그런 다이아나에게 기대를 걸고 그들의 의문점을 털어 놓았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엇입니까?" "흠..." 세 명의 반응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 대장금 시작 전에 한 편을 올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라라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물 소동 "그건... " 다이아나가 한 말은 일행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다량의 오리하르콘이라..... 욕심낼 법도 하군" 아크레디온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마법사인 그도 오리하르콘을 얻을 수 있다면 꽤 무모한 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다이아나가 디안을 달래서 알아낸 사실은 이것이었다. 사람 좋던 영주가 죽은 후 옆 마을의 영주의 지배를 받게 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조금씩 피폐해져 갔다. 원체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의무적으로 중앙에 내야 하는 세금 이외에는 거의 과세를 하지 않던 전 영주에 비해 새로운 영주는 편입된 영지에서 조금이라도 세금을 걷기 위해 무리하게 징수를 해 갔던 것이다. 그 동안 죽은 영주의 저택은 아이들의 탐험지가 되었고, 그 곳에서 놀던 아이들은 날마다 영주의 저택 구석구석을 탐험해 나갔다. 그러다가 그들은 반짝이는 금속들을 발견했고, 그것을 각자 집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마을 촌장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금속을 세금 대신 내려고 했다. 촌구석의 사람들이 오리하르콘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귀해 보이는 것이라 세금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영주는 마을 어딘가에 오리하르콘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고 판단했는지, 병사들을 보내어 마을 사람들을 다그쳤지만, 예전 영주의 저택에서 발견했다는 말 이외에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저택에 남았던 오리하르콘을 모두 모아 현 영주에게 바쳤기 때문에 죽은 영주의 저택에서는 더이상 오리하르콘이 발견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한 영주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로 갔다. 원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영주는 먼저 어른들을 협박하기 위해 아이들을 하나 하나 죽였다. 아이들을 감싸려는 어른들도 그 와중에 상당수가 죽어 나갔고, 영주를 맞기 위해 나왔던 마을 사람들 중의 상당 수가 죽어도 어떤 자백도 받아내지 못하자, 더럭 후환이 겁이 난 영주는 남은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지르도록 한 뒤 전염병이 퍼졌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디안은 촌장님과 어른들이 오리하르콘이라 불리는 반짝이는 금속 때문에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혼자 몰래 영주의 저택으로 갔다. 혹시라도 남은 조각이 있으면 가져오기 위해서였지만, 그 일이 디안의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마을로 돌아갔던 디안은 영주의 군사들이 갑자기 움직이자 불안한 마음에 마을로 찾아왔던 자신의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벌벌 떨면서 숨어서 보았다. 신의 은총이었는지, 디안은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덕에 혼자 폐허에 남게 되었다. 디안은 간절하게 이 모든 일이 꿈이기를 바랬다.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디안은 빌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행복했던 생활을 돌려 달라고...... 디안은 '예전 영주님이 계셨던 때가 좋았다'는 어른들을 말을 떠올리면서 온 힘을 다해 간절한 소원을 발했고, 그것이 고위마족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결국 있지도 않은 오리하르콘이 이런 비극을 만들었다는 말이군" 참담한 표정으로 아크레디온이 말하자, 이시니엘이 그 말을 되받았다. "거기에 인간의 욕심이 곁들여졌기 때문이죠" "빨리 서두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백작이 다른 말을 꾸며내기 전에 처벌을 내리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다시 아크레디온이 말하자, 알렉시안이 굳었던 표정에 약간의 조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을 겁니다. 이미 백작은 버려진 말이니까요" "그게 무슨???" "모르시겠습니까? 백작이 믿고 있었던 것은 오리하르콘을 찾아내어 중앙 귀족의 힘을 얻는 것이었겠지요. 모르긴 해도 그런 난행을 처음 결정한 데에는 중앙 귀족의 힘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급하게 보고를 했겠지요. 오리하르콘을 대량으로 발견했다고......" "그... 그렇다면......" "조사에서 밝혀진 대로 오리하르콘이 없다는 사실이 먼저 증명된다면, 백작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서서 처단하려고 할 테죠"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처음 깬 것은 다이아나였다. "디안에게 가봐야겠습니다. 아직 상당히 불안해 하고 있으니까요" "그 아이는 어떻게...?" "남작의 양녀라면 어느 정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에엣?" "약속을 했습니다. 지켜야지요." 다이아나는 멍청한 얼굴을 한 세 사람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이시니엘은 '성녀'의 뒷모습을 존경과 감탄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 일에는 이시니엘 신관님의 공이 정말 컸습니다" "예? 무슨...?" "처음 그 마을의 환상마법을 알아낸 것도 이시니엘님이니까요" "맞습니다. 저희들만 왔더라면 큰 낭패를 당할 뻔 했습니다." 젊은 신관은 망설이다가 적당한 설명을 찾아내고는 대답했다. "실은 다이아나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이아나님께서 성력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살펴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그 이후의 일들도 다이아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제가 나중에 여쭈어 보니, 알렉시안님이 받은 자료를 다이아나님도 보셨다더군요. 다만, 추측일 뿐인데다가 아크레디온님도 느끼지 못하는 환상마법이라는 가정이 틀릴 지도 모른다면서 제게 시험해 볼 때까지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그런일이......" "이 나이에 고위신관이 된다는 것은 제 자랑은 아니지만, 그만큼 세속의 일을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할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는 아마 다들 생각하실 수 없으실 텐데요" 그렇게 말하자면, 다이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나이에 검술과 마법 양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이 어찌 세상사에 이토록 밝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시니엘은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성녀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다이아나의 공을 가로채 자신이 한 일인양 하는 것은 이시니엘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렉시안님의 목숨을 건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고위마족을 물리친 것은 이시니엘님의 성력이 아닙니까?" 아크레디온이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고위마족과의 대화를 이들은 들을 수 없었고, 상황을 보고 있던 아크레디온의 눈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다이아나를 이시니엘이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으므로, 당연하게 생각한 일이었다. "고위마족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한 것만 제 능력이었습니다. 다엔과의 계약이 무효임을 고위마족에게 지적한 이는 역시 다이아나님이었지요." 말문이 막힌 듯한 두 사람을 이시니엘은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적어도 자신은 성녀님의 업적을 가로채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은밀히 이 일을 다이아나에게 말하자, 그녀는 기쁘다기보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이시니엘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 - 어느 페어리의 독백 - 내 이름은 에리나. 위대한 페어리의 일족이시지. 어이 거기 너! 위대한 이라는 부분에서 얼굴 찡그렸는데, 두고 보자구 흥~! 사실 나도 한 때는 잘 나가던 페어리였어. 저 쫀쫀한 은색 드래곤 만나기 전까지 일이지만......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라구. 우리 페어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달빛이란 말야. 물론 예쁜 것들은 다 좋아하지만, 달빛 아래서 우아하게 춤추는 기분 알아? 알 리가 없지. 니들은 날개도 없잖아. 흥! 근데 말이지 그 드래곤의 비늘이 꼭 달빛 같더라구. 정확하게는 달빛을 받아서 반짝거리는 이슬 빛깔이라고나 할까? 그거 한 장만 있으면, 맨날 환한 달빛 옆에서 사는 것 같지 않겠어? 수 많은 비늘 중에 하나 주는게 뭐 대단하다구 그렇게 버럭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그거 한 장이면 내 집 하나 짓고도 남는데 말이지...... 암튼 덕분에 달빛을 닮은 것 외에는 하나도 마음에 안 드는 돌에 갖혀 얼마나 지루했는지 몰라. 아무래도 내가 그 사이에 드래곤들의 동면기술을 터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니까. 니들은 내가 드래곤의 협박에 넘어가서 다이아나라는 애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천만의 말씀이야~! 그건 순전히 그 애가 내 맘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암, 그렇구말구! 못생겼으면 절대 안했어 그냥 죽이라고 해 콱~! 암튼 그애 목에 걸려있으면 제일 기분 좋은 게 먼지 알아? 히히. 사람들의 감탄하는 시선말야~! 그거 엄청 기분 좋다구~! 날 향한게 아니면 어때? 인간 남자들이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 느낌이란, 짜릿짜릿하다고나 할까? 암튼 인간이란 종족은 참 잘도 반하고 감정의 변화도 극렬해서 느끼기 쉽거든~! 요즘은 낙이 없어. 내가 젤루 좋아하는 게 이 아이 머리색이었거든. 도대체 왜 갈색 따위로 만들고 다니냐구. 금가루 빤짝빤짝 뿌려진 은색이 얼마나 이뿐데~!!!!! 한동안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날 속상하게 하더니 요즘은 좀 덜한 건 마음에 드는데 말이지. 한 고비 넘어 또 한고비라고 이번엔 누런 드래곤이 날 들들 볶지 뭐야? 겁나냐구? 야! 솔직히 니들은 그 앞에서 움직일 수나 있을 줄 아냐? 드래곤이 괜히 드래곤이 아니라구. 도대체 내가 무슨 죄로 맨날 그 놈한테 얘 일상에 대해서 낱낱이 보고를 해야 하느냔 말야. 그 드래곤도 그래, 수컷이면 수컷답게 딱 나서서 콱 덮치던지 할 일이지, 쪼잔하게 뒤로 정보를 받는 짓은 왜 하냐 이거야~! 거기다가 나 어젠 죽는 줄 알았다구. 페어리 평생에 그렇게 놀라 보긴 처음이었다니깐. 무슨 애가 겁도 없는지, 고위마족한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데... 히유~! 아무리 이몸이 위대한 페어리라고 해도 고위마족한테는 쬐끔 밀린다 이거지. 농담 아냐. 진짜 쬐끔 밀린다니까~!!! 그래도 내가 누구야? 다이아나의 생명을 '부탁받은' 위대한 페어리 에리나가 아니겠어? 그래서 여차하면 달려나갈 준비를 다아 하고 있었다구. 진짜야~! 엥? 누구야? 거기 눈치 빠른 놈이.... 그런 건 좀 모른척 해도 되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지 거기서 누런 드래곤 이야기가 왜 나와? 그래~! 나 드래곤 빽 믿구 뛰어나갈려구 했다. 왜 티꺼? 흠흠... 자꾸 흥분시키니깐 나의 고상함이 다 날아가 버리잖아... 기달려봐아~! 폼 좀 다시 잡구~! 암튼 이 우아하고 아름답고 위대하신 에리나님이 있으니깐 다이아나는 걱절 말라 이말이지~! 물론 내가 고위마족이나 드래곤보다 낫다고 우기는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라구! 그런 이상하게 강한 놈들이 지상계에서 설치는 게 비정상인거야! 그나 저나, 얘는 언제까지 이렇게 칙칙한 머리카락을 하구 있을라나 몰라.. 헉, 호출이다~! 나중에 보자구~! 가요~! 간다니까요~! 거참 성격도 급한 누런 드래곤 같으니라구.. 에효 내 팔자야~!!!!!!!!!!! ********************************************************************************* 여러분 덕에 이름 고민을 하지 않아 확실히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싸랑해요~! 그럼 목표한 하나를 올렸으므로, 저는 대장금 보러 갑니다. 장금아이~ 기다려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물 소동 마법진을 통해 수도에 도착한 이들 중 알렉시안과 아크레디온은 일행의 대표로서 보고를 하기 위해 입궁했고, 다른 일행들은 다음 날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디엔은 다이아나에게 안겨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에, 다이아나는 내내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어리다고는 하지만 족히 20kg 가까이 되는 아이를 종일 안고 다니는 다이아나의 체력에는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어차피 도와주려고 해도 아이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안느~!" "네 아가씨" 남작님이나 주인님이라는 호칭에서 겨우 나은 호칭을 찾아낸 것이 아가씨였다. 다이아나는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를 안고 들어온 자신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말론을 뒤로 하고 안느를 찾았다. 부르기가 무섭게 달려 온 안느 역시 다이아나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가 입을만한 옷이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 옷 중에 맞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 고급 옷은 아닙니다만......" "그럼 일단 그걸 한 번 주시고, 적당한 옷들을 좀 사다 주세요. 화려한 것은 필요 없고 아이가 입기 편한 옷이면 됩니다!" "그러지요" "아참, 사는 김에 우리 애들 옷도 함께 사오세요. 옷들이 너무 낡았던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한 명당 세 벌씩이에요. 아셨죠? 그리고 목욕물 좀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마음 좋은 주인이 한 번 정한 일에 대하여는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을 안느는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하인들의 아이들은 늘상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과 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하인들은 처음엔 몸둘 바를 몰라하면서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했으나, 아이들도 다이아나도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이들을 떼어놓는 자신들이 악한이라도 된 느낌을 몇 번 받아야 했고, 이후 고집스런 주인의 명 - 아이들과 놀 때는 건드리지 말 것 - 이 떨어진 후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아이들에게 진력을 내거나 아이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하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조용히 불러내어 다정하지만 엄격하게 그들의 행동이 자신을 얼마나 속상하게 했는지 타이르곤 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하인들은 아이들과 주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마음을 놓게 된 것이다. "와아~! 언제 오셨어요?" "내 이좀 봐줘요 이~~~" "얘는 누구에요?" 제시카, 소니아, 레온이 다이아나를 보자 총알같이 달려왔다. 5살, 7살 9살의 이들은 집사부부의 자녀들로 다이아나와 함께 한 시간이 가장 많았던 만큼 그녀를 기다렸던 듯 했다. "제시카 잘 있었니? 소니아 어머~! 앞 이가 빠졌네? 레온 인사부터 해야지~!" 다이아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디안을 소개키셨다. "그러니까 제시카랑 소니아는 디안 언니라고 하고 레온은 동생이 하나 더 생긴 셈이야. 디안도 레온을 오빠라고 부르렴~!" "디안 안녕~!" 어머니의 붉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빼닮은 세 아이들이 입을 모아 인사를 했다. 디안은 또래 아이들을 보자 약간 생기가 돌았지만, 아직도 손은 다이아나를 꼭 붙들고 놓을 줄 모른 채 떨어지지 않았다. "얘들아, 디안은 상당히 아팠단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너희랑 놀기 힘들꺼야. 난 디안을 씻겨야 하니까 나중에 보자. 알았지?" 아이들을 달랜 다이아나는 디안을 안고 욕실로 향했다. "아가씨, 저희가......" "아니에요. 당분간 디안은 제가 돌보겠어요." 다이아나는 황송하다는 듯이 아이를 받아들려는 하녀들을 조용히 저지시키고는 아이와 둘이 욕실로 들어갔다. 물 온도를 점검한 후에 아이의 옷을 벗기고 자신도 옷을 벗은 후 함께 욕탕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처음엔 좀 뜨거운 온도에 놀란 듯했지만, 다이아나가 다정하게 달래자 천천히 물 온도에 익숙해졌는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는 거품을 일으켜 장난을 치기도 하고 흥얼흥얼 노래도 불러가면서 아이와 함게 목욕을 했다. 좀처럼 따뜻한 물을 구경하기 힘들어 아이의 몸에서 까만 땟국물이 흘러 나왔으나 다이아나는 전혀 개념치 않고 아이를 씻기는 데 열중했다. "음.. 물을 갈자니 하녀들을 또 귀찮게 해야 할 것 같군... 운디네~!" 디안은 푸른 물방울이 갑자기 예쁜 소녀의 형상을 이루자 신기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이아나는 그런 아이의 표정을 보고는 아이들이 정령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깜박 한 자신을 나무랐다. 진작에 정령을 보여 주었다면 디안이 기뻐했을 것이다. 운디네가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킨 후에도 다이아나는 정령을 돌려보내지 않고 한참 디안과 놀게 했다. 아이가 밝은 미소를 띄우기 시작하자, 다이아나의 표정도 밝아졌다. "디안. 난 네가 좋은데, 넌 어떠니?" 디안은 유일하게 믿음이 가는 예쁜 언니가 말을 걸자 잠시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도. 언니가 좋아요" "그럼 내가 디안의 엄마가 되면 어떨까?" "엄마... 요?" "응." "언니가 엄마가 되요?" "응" "그럼 디안도 이제 다시 엄마가 생기는 거에요?" "그래. 디안만 좋다면......" "엄마......" 디안은 다이아나의 품에 달려들어 엉엉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 도무지 울지 않는 디안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던 다이아나는 돌연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디안은 마음 속 깊이 쌓아 둔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한참을 그런 디안을 다정하게 안고 이름을 부르면서 위로했다. 만일 디안이 지금보다 약간만 더 악한 심성을 가지고 복수라는 것을 원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뻔한 일이었다. 고위마족이 계약의 조건으로 복수를 했다면, 이번 일에 얽힌 모든 이들은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아이의 순수한 영혼을 담보로 한 마족의 힘을 인간계에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디안은 복수보다 평화로운 과거의 복귀를 원했고, 시간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마족은 그 계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결국 어린 소녀의 착하고 순수한 마음씨는 수많은 생명과 소녀 자신의 영혼을 구해냈다고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디안을 지켜주고 싶었다. 다이아나는 울다 지친 디안의 몸을 수건으로 감싸 안은 채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물기를 제거하고,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안느는 다이아나로부터 구체적인 사실을 제외한 몇 가지 이야기만을 듣고도 어린 디안이 불쌍하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이아나는 하루 종일 아이와 붙어 있을 수 없었으므로 안느가 디안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아이가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부모님과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느가 디안에 대하여 작심하고 맡겠다고 나서자, 다이아나로서는 상당히 마음이 놓였다. 알렉시안과 아크레디온은 공작 앞에서 보고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황제와 황태자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알렉시안의 전말에 대한 보고에 이어 아크레디온이 저장한 수정구의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참혹한 일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뚱뚱한 영주가 무어라 명령할 때마다 병사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칼을 들이대고 무어라고 외쳤고, 달려드는 어른들에게도 거침 없이 칼과 창이 날아들었다. 같은 장면이 한동안 계속된 후 흥분하여 얼굴을 붉히고 있던 영주는 주위의 참상에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는지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것도 잠시 잔혹한 미소를 지은 그의 명령에 의해 병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곳곳에 불을 놓았다. "내일 다시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영주에 대한 처벌을 하도록 하겠소" "준비하겠습니다" 늘 어느 정도의 여유를 품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다음 날 천인공노할 만행을 행한 영주에 대한 재판을 겸한 사건의 보고를 위해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생각보다 짧은 시일에 일이 해결되자 모여든 귀족들의 얼굴을 상당히 밝았다. 다이아나도 불안해 하는 디안을 달래 안느에게 맡기고 조사단의 일원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알렉시안이 준비한 자료를 나누어 주고, 보고를 시작하자 좌중의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오리 하르콘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이미 받은 미켄하임 드 오브리스 공작과 켄네프 드 로슬레임 백작은 자신들의 속내를 숨기기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알렉시안은 그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사건의 경위를 주욱 이야기하고는 마지막으로 ".....입니다. 하지만, 조사에 의하면 이 영지에 매장된 오리하르콘은 전혀 없었으며, 이번에 나타난 오리하르콘은 이전 영주인 남작가에서 보관해 오던 것으로 그들이 초대에 작위를 받을 때 황궁에서 하사한 것과 내용이 일치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실망감을 억지로 참는 두 명의 얼굴을 조소하듯이 바라보았다. 이어서 아크레디온이 황실 수석마법사와 동행하여 영상을 보여주었고, 영상의 진실성을 8클래스의 수석마법사인 에베르게이츠가 입증하자 장내는 한동안의 침묵에 이어 곧바로 소란스러워졌다. "감히 영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황제폐하의 은덕에 크게 누를 끼친 오이스딘 드 세크넌트 백작을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저 또한 로슬레임 백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귀족파의 두 거물이 앞장서서 극형을 요구하자 눈치를 살피던 이들도 저마다 이들에게 처벌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마르띠앙 대공은 늘상 눈에 가시같던 오브리스 공작에게 벼르던 한 마디를 함으로써 속으로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또한 앞으로는 이런 인성이 결여된 자를 추천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뇌물을 세크넌트 백작을 추천한 것은 다른 아닌 오브리스공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처벌을 주장하고 나서서 무관함을 증명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오브리스 공작으로서는 그러한 말에 내심 치미는 화를 누르고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이아나는 시종일관 그러한 귀족들의 속 보이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벌이 정해지자, 이번에는 사건 해결의 공로에 대한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금번의 일은 새로 남작의 지위를 받았던 다이아나경의 공이 가장 컸다는 사실을 조사단 전원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고위 마족과 맞선 여러 사람에게 공평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공작이 포상을 말하자, 다들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다. "이번에 지원했던 기사들 중 스티아노, 보거스, 사이온, 피터슨, 티리아 기사는 자작에 봉합니다. 알렉시안 경에게는 포상금과 약간의 영지가 지급될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황제폐하께서는 이번에 저희를 도와 마족을 물리치시는 데 공헌한 이시니엘 신관님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전에 상당한 기부금을 약속하셨습니다. 두 마법사 분에게는 적절한 상금과 상품이 지금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일에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다이아나 경에게 여백작의 칭호를 내리며, 이미 지급되었어야 할 영지를 하사하실 것입니다." 남작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백작의 지위를 받는다는 것은 지나친 파격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황제의 결정에 반대할 만한 귀족파의 인물들은 한껏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황제와 공작은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린 것이다. 하여 특별한 반대 없이 황제의 뜻은 통과되었고, 사람들은 축하의 말을 건네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참극을 보고도 저리 웃을 수 있다는 것일까?' 다이아나는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자신에게 축하인사를 하는 귀족들의 모습이 더없이 혐오스러워졌다. 씁쓸한 마음으로 퇴근한 다이아나였으나, 아이들의 한바탕 소란이 그녀의 마음을 밝게 만들었다. 문제는 디안의 호칭이었다. 퇴근한 다이아나에게 언니, 누나를 외치면 달려든 아이들 사이에 유독 디안이 "엄마~!" 하면서 달려들자, 다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래진 것이다. 디안은 그새 아이다운 적응력을 보이고 있어서 다이아나를 기쁘게 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다이아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자신에게 부러운 눈치를 보이자, 디안은 그것이 기뻤는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마치 그러한 태도가 딱 말하지 않아도 '울 엄마야~! 약오르지?'하는 듯 했기에 다이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응 우리딸 잘 지냈니?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냈구?" 다이아나가 디안을 끌어 안으면서 말하자, 디안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왜 디안만 엄마라고 해요?" 9살의 레온이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아이들은 '공유'하던 다이아나를 디안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던 것이다. "응. 레온도 엄마가 있잖아?" "에.. 하지만......" "이렇게 하자. 디안은 안느 아주머니를 이모라고 부르고, 너희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계시니까 나를 이모라고 하는거야. 좋지?" "네엣~!" 뭔지 모르지만 엄마랑 이모라면 그리 불공평하지는 않은 듯 했다. "그럼 얘들아 우리 딸 디안이랑 사이좋게 놀아주렴 알았지?" "네엣~!" 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씻겨 놓은 디안은 상당히 귀여운 아이였다. 더군다나 디안은 갈색의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이아나랑 닮아 보였던 것이다. "자,, 그럼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까?" 밝게 아이들을 향해 웃는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황궁에서의 씁쓸한 표정은 어느새 찾아 볼 수 없었다. ******************************************************************************** 달빛우유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아~!!!!!!!!!! 이 글은 달빛우유님의 졸업 축하 선물로 드리죠.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여어~! 축하해~! 백작님" "저기 자작님도 오시는군~!" "이거이거 황송해서 어디 마주 대련이나 할랑가 모르겠네?" 여전히 소란함이 주를 이루는 곳은 당연히 기사단의 수련장이었다. 일단의 무리들은 조사를 다녀 온 다이아나을 비롯한 일행을 둘러싸고 그들만의 축하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이봐, 그럼 이제 결혼식인가?" "그러게, 작위 받을 때까지 미룬다며? "언제야? 얼른 정하는 게 좋지. 백작님이 올려다 보기 힘드니 다른 놈들이 눈독 들일 가능성도 만만찮다구~!" "에이~! 설마! 피터 말고 어떤 간 큰 놈이 티리아를 건드리겠어? 평생 맞고 살 작정을 한 놈이 또 있을려구~!" 알고보니 피터와 티리아는 공인커플이었던 모양이다. 이번만큼은 티리아도 쑥스러웠는지, 손과 발을 날리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고, 그런 호기를 놓칠세라 동료들의 농담은 자꾸 진해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둘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함께 웃고 떠들었다. 황궁 안, 다이아나가 편하게 지내는 곳은 이곳과 왕자궁 딱 두 곳 뿐이었으니까. 둘이 결혼을 한다면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 지 고민하는 중에 다시 새로운 대상이 등장했다. "오오오~! 알렉시안경~!" "알렉~! 나 외상값 밀렸는데... 어떻게 좀 안될까?" "불세출의 영웅의 행차시다~!" 알렉시안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약간 당황한 듯 귀끝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역시 당하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는지, 몇 번의 농담이 오가고 나자, "흠.. 그래? 그럼 영광스럽게도 이 영웅께서 대련을 신청하지. 한 동안 심심했지?" 라는 말로 야유를 자아냈다. 물론 실력자와의 대련이야 언제든지 환영이었지만, 이렇게 나올 경우의 알렉시안의 검 끝은 매섭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 즐거워들 보이네요. 축하를 받으실 분들도 많구요!" "황태자 저하!" 일제히 꿇어 예를 표하는 기사들을 일어나게 한 후 리카르도는 그 다운 언변을 과시해서 다시 기사들 사이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엥? 아직 안갔나요? 전 자작 작위 받자마자 두 분이 신혼여행 가신 걸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동작이 느리군요. 피터슨경!" 커플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지고만 있을 피터슨이 아니었다. "아 물론 그러고야 싶었지만, 결혼식이란 여성들의 로망. 그거 함부로 대충 했다가는 평생 맞을 꺼 한꺼번에 맞고 그 이후 하루도 몸 성할 날이 없을 듯하여 준비중에 있습니다. 헌데, 그러시는 황태자저하께선 아직도 외기러기 신세를 못 면하셨습니까?" 평소 리카르도가 얼마나 기사들과 격의 없이 지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피터슨에게 한 방 멋지게 얻어맞은 리카르도는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터슨 승~!" "와아~!!!" 누군가 피터슨의 판정승을 외치자 다시 한 번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흥! 그래도 오늘의 승자는 날세. 왜냐하면......" 기사들이 숨을 죽이고 자신의 뒷말을 기다리자, 리카르도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다이나의 손을 잡고 뛰어가면서 소리질렀다. "유일한 짝 없는 꽃은 내가 데려갈 꺼니까!!!!!!!" "우우우우~!!"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사람들의 야유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이아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황명이오'라고 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기회를 잃고 딸려갔다. 수련장이 멀어지자, 황태자의 손을 뿌리친 다이아나는 예의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손 잡고 끌어오라는 것이 황명이시지는 않겠지요?" "그거야 명을 받아들인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 아니겠소?" 여전히 뻔뻔스럽기는 둘째 간다면 서러운 태도이다. 사실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의 냉랭함에 속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출장'을 다녀온 후 따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돌아온 다이아나는 유난히 더 자신에게만 냉랭해 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충 이유를 눈치챈 황태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영지의 일은 정말 할 말이 없소. 이 나라의 황태자로서 부끄럽게 생각하오" "......" "허나, 황태자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런 일들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내 심정은 어떠할 것 같소?" "......" "내게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오. 황실이 눈을 피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귀족들을 확실하게 제어할 만한 힘이 말이오." "그 힘을 올바르게 쓴다고 누가 보증하지요?" 침묵을 지키던 다이아나가 대꾸했다. "내 생명을 걸고 귀족들뿐만이 아닌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이오" "황태자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그 이후에도 그러라는 보장이 있나요?" "......" "집중된 힘을 가진 사람이 올바르지 못하다면요? 그 힘을 가지고 폭군이 되는 황제가 앞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요?" "그... 그건......" "세상은 다 그렇지요. 귀족파 중에서도 자신들의 영지를 잘 꾸려 나가는 사람이 있을거에요. 반면, 현재 황태자님과 황제 폐하 쪽으로 편을 들고 있는 귀족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자신의 영지민에게 함부로 하는 이가 없음을 확언하실 수 있나요?" 리카르도는 조목조목 따져오는 다이아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제가 살던 곳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자신부터 다스리고, 그 다음 가족을 그리고 나라를 후에 천하를 보라는 것이죠. 황태자저하께서는 귀족파들과 실랑이 하시기에 앞서 황태자 저하를 따르는 이들의 행실부터 살펴야 함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은 법이오" "제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겠죠. 황태자 저하를 따르는 세력들에게 엄정하게 대한다면 지지세력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래서 못하시는 것이죠. 허나, 이런 저런 이유로 옳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결과는 같아 집니다." "그건...." "제가 주제넘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요?" 더 이상 말을 걸 여지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깊은 상념에 잠겨 다이아나의 옆을 걷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자신이 이 황태자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을 것이고,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있었을 터인데, 자신의 말은 그 모두를 부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으니까. 의외로 황태자가 다이아나를 안내한 곳은 공식적인 장소라기 보다는 사적인 만남을 위한 것으로 생각되는 편안한 분위기의 넓은 방이었다. 소파처럼 생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황제와 대공은 들어서는 둘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들 오게. 안 그래도 다이아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일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깍듯이 예를 올리는 다이아나에게 그리 딱딱할 필요는 없다면서 자리를 권한 것은 황제였다. 보통 황제와 공작이 함께 있는 자리에선 늘상 공작이 대변인처럼 황제의 의사전달을 했으므로, 약간 의외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되었는데, 내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네" 명령 한 마디면 될 것은 굳이 사석을 만들어 부탁이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이아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실은 이번에 하이센 제국에서 초청장이 왔네. 공주의 성년식을 맞아서 황태자를 초대한 것이지. 거기 다이아나 경이 동행해줬으면 하네" "그런 것이라면... " "맞네. 원래 호위기사가 따라가야 하고, 리카르도의 호위는 여태 알렉시안이 도맡다시피 했었기 때문에 자네가 가는 것은 임무에 맞지 않지" "......" 그 이후로 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다. 하이센 제국에서는 리카르도의 황비로 자신들의 공주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 두 국가는 어느 정도 상부상조의 관계가 있었기에 매정하게 내칠 형편도 안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여 '약혼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친밀한 관계의 귀족여성을 동행시킴으로써 애시당초 '문제'의 발생을 막자는 것이다. "저..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는 유리아나 영애께서 더 잘 어울리실 듯합니다만... 저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춤도 출 줄 모르고 그런 연회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다이아나가 변명 비슷한 말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르띠앙 공작이 나섰다. "그게 말일세. 물론 유리아나 영애가 적합하긴 하다네. 하지만, 그 영애의 경우 집안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번 일이 생각보다 위험해 질 가능성이 있기에 경에게 부탁하는 걸세" "그게.. 무슨...?" "솔직히 말하지. 사실 우리는 유리아나 영애를 황비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미켄하임 드 오브리스 공작은 귀족파의 수장이 아닌가? 만일 이런 일에 그녀를 끌어들였다가는 발목을 잡힌 꼴이 되네" "......" "거기에 묵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네. 하이센 제국 측에서 황태자의 파트너를 노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지. 유리아나 영애는 자신의 몸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네"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그렇게 동행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제 처신이 상당히 곤란해진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황태자의 파트너로 공식적인 외국의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황비 후보로 나선 꼴이 된다. 다이아나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것도 문제가 없네. 이미 에디우스 드 하비어스 경이 동행을 허락했다네. 둘이라면 모를까, 셋이 함께 참석한다면 문제가 되진 않을게야. 알렉시안 경도 호위로서 함께 할 걸세. 에디우스경과의 동행이라면 이쪽에선 자네와 에디우스경을 더 많이 결부시킬 테지" 얄미울 정도로 대답을 준비해 놓은 마르띠앙 공작은 과연 칼라임의 두뇌라는 말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다이아나가 망설이고 있자, 공작은 준비해 놓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 참... 이번에 영지에서 여아 하나를 데려왔다지?" "네" "양녀로 삼으려고 한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만......" "아는지 모르지만, 백작 작위 이상을 가진 집안에서 귀족이 아닌 사람을 양자로 들일 경우에는 황실의 재가가 있어야 하네." 이건 반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즉, 다이아나가 이번 일을 받아들이면 디안을 양녀로 허락하겠다는, 그렇지 않을 경우엔 무슨 트집이라도 잡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동행한 이들이 있는 결함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디안은 고위마족과 계약을 시도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이번일을 하면, 디안의 과거에 관한 것과 저의 양녀로 입적시키는 일을 윤허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허허. 누가 보면 경을 협박이라도 한 줄 알겠군. 자네의 양녀의 과거와 양녀가 되는 절차는 내가 오늘 바로 처리해 주겠네" "고맙습니다. 출발은 언제부터인지요?" "열흘 후 일세. 그 동안 춤도 배우고 귀족들의 예절도 따로 배워야 할텐데.... " 마르띠앙 공작이 말꼬리를 흐리자, 안 그래도 진절머리가 났던 다이아나가 재빨리 말했다. "에디, 아니 에디우스 경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단단히 미움을 산 것 같네요" 리카르도가 우울하게 말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의외로구나 리카르도. 네가 이토록 고전하는 상대라니......" 마르띠앙 공작의 말에는 약간의 책망이 섞여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리카르도 황태자를 지금처럼 키워낸 데는 마르띠앙의 관여가 가장 컸던 것이다. 검술과 처세술 제왕으로써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겸비했다고 여기던 자신의 조카가 고작 여성의 마음을 못 붙잡고 있다는 것은....... 리카르도는 힘없이 살짝 미소를 띄었지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평범한 여성이 아니니까 문제지요. 그녀는 '성녀'란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누구보다 높던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이 곳으로 오면서 리카르도에게 한 질문은 스스로 물어 보아도 대답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문제였던 것이다. *********************************************************************************** 아, 정말 생활이 폐인에 가깝습니다. 일단 100회까지는 이대로 올려 보려고 합니다만, 글 쓰는 시간의 절제를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고 있는 알테입니다. 새로 맡을 일을 위해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책 안사고 프로그램도 안깔았다는 이유 만으로 이렇게 컴을 붙잡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엉엉~! 글을 올린 첫 날이 1월 21이더군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한 달도 안되는 사이 저 많은 글을 써 댄 것인지 스스로도 놀랄 노 자랍니다 ^^;;;; 흠.. 그리고, 사이를 두고 글을 올린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추천과 코맨트 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멀까요??????????? -_-;;;;;;; 그냥 푸념입니다. 써지는 대로 팍팍 올리고 있으니 오늘도 비축분은 없습니다.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후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에디우스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기는 좀 껄끄러웠다. '아, 그럼 되겠다' 초조한 표정이 금방 환하게 바뀌었다. 다이아나가 생각한 예절과 춤에 대한 선생은 유리아나였다. 부탁한다면 쾌히 들어줄 것이라고 다이아나는 생각하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모, 뭐해요?" "엄마~!" 언제인지 자신들끼리도 잘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불러대는 것을 보니, 하던 놀이에 지쳤나보다. 다이아나는 아이들을 앉히고는 늘 그랬듯이 적당한 이야기 하나를 골라 들려주었다. "뭐하는 거유?" "쉿~! 아가씨가 이야기를 시작한다구요~!" 다이아나의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는 데다가 알려진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집사부부를 비롯한 하인들마저도 일손을 놓고 멍하니 듣기가 일수였던 것이다. 어차피 하인과 하녀를 총괄하는 집사부부조차 늘상 다이아나의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으므로, 다이아나의 이야기 시간은 공식적인 휴식시간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언제든지 예외는 있는 법, 미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징징거리는 아이들은 손빠른 하인과 하녀들에 의해 어느 틈엔지 양떼처럼 빠져나갔고, 디안도 안느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자녀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놀이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거야 원 무슨 대피 훈련도 아니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텅 빈 홀을 쳐다보면서 다이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집사내외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이아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괜히 자신들의 자식들이 귀한 아가씨의 체면에 흠집을 내는 것을 절대 볼 수 없다나? 하여 손님 방문과 아이들의 대피는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에디우스 드 하비어스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에.. 엣? 알았어요. 응접실로 모시고 와 주세요" 에디우스는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다이아나의 집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이기에 안하던 발걸음을 했는지는 다이아나로서도 도저히 짐작할... 아니다. 혹시??? "잘 지냈어 에디?" 불길한 예감을 뒤로 하고 설마하는 마음에 다이아나는 가능한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에디우스를 맞았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권하는 자리에 앉더니 인사만 하고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약간 당황한 다이아나는 결국 용건을 물어야만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야?" "무슨 일이라니? 네가 더 잘 알텐데?" 설마가 맞아 들어가는 상황 중에 가끔씩 당황스런 상황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듯 하자, 애써 진정했으나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예절교습...." "정확하게는 춤이 우선이고 사소한 예절들이지. 나한테 부탁한다고 했다면서? 황태자님이 부럽다는 듯이 말하시던데?" "사실, 너 외에는 생각 나는 사람이 없었어. 그 당시엔 말이지. 잘못하면 황태자님이나 알렉시안 경을 붙여줄 기세길래 그냥......" "그 당시에는 이라고?" 에디우스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물었다. "응. 생각해 보니까 굳이 에디를 귀찮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럼 누구한테 부탁하려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심은 도대체 어떤 놈인데 에리나가 보고를 안한 것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음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유리아나가 도와줄 것 같아서... 예절이랑 춤은 워낙 따라갈 사람이 없잖아?" 이라는 다이아나의 대답에 허탈해 지고 말았다. "공작이랑 기타등등이 별로 안 좋아할 꺼야. 그들 사이를 모르진 않지? 그럴 거 없이 내가 가르쳐 주지. 일단 황제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지키는 게 좋아" "응.. 그런데 좀 미안해서..." "별로... 열흘 밖에 안 남았다면 시간도 없군. 당장 시작하자구" "지.. 지금?" "뭐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 아이들이 목을 빼어 자신을 기다릴텐데, 차마 이야기를 꺼내기가 뭐했다. 에디우스의 작전이 다이아나를 엄청나게 헷갈리게 만드는 거라면 이미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이아나는 어떤 때는 본척만척 하다가 어떤 때는 예전처럼 친근하게 구는 에디우스의 태도에 확실히 난감했으니까. 더군다나, 일단 거절을 한 상대에 대하여 미안함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어서 에디우스를 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이아나의 걱정과 달리 에디우스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으로 다이아나를 지도했다. 그는 홀을 비워달라고 하더니 곧바로 마법을 써서 춤에 필요한 스탭을 발자국 모양으로 주욱 나타나게 했다. "자 일단 저 대로 움직여 봐" "혼자?" "지금 널 상대했다가 내 발등이 남아 나겠어?" "그건 그렇구나~!" 일단 에디우스와 어색한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다이아나는 다행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혼자 그 자세를 취하고 발자국을 밟은 스스로의 모습이 속으로 상당히 웃기다고 생각했기는 하지만...... "이모가 이상해~!" "저 예쁜 사람은 누구야?" "쉿! 조용히 해." "엄마가 왜 저렇게 혼자 돌고 있는거지?" 나름대로 소리를 죽여서 낸다고 한 말들이었으나, 아이들의 속삭임이라는 게 자신들 기준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다이아나는 갑자기 몸이 굳어 멈춰 섰고, 에디우스는 재밌다는 듯이 소리의 진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숙여~!!!!!!!!" '레온이군' 다이아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생각했다. 다이아나의 생각대로 에디우스가 자신들 쪽을 쳐다 보자 이층의 난간으로 내려다 보고 있던 아이들 중에 그래도 나이가 가장 많은 레온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머리만 숨기고 몸은 버젓이 나와 있는데다가 홀이 떠나가게 소리를 질렀으니 못 들었으면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느 틈엔가 안느가 뛰어나왔지만, 에디우스와 다이아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리 내려와. 에디우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렴~!" 기다렸다는 듯이 콩콩콩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뛰어내려온 아이들에게 다이아나가 상냥하게 주의를 주었다. "계단에서 뛰면 왜 안된다고 했지?" "넘어져서 다칠까봐요~!" "그래. 그러니깐 계단에선 천천히 다니도록 해. 앞으로 그렇게 할 꺼지?" "네에~!" "자 그럼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아직도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디안은 다이아나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졌고 - 바지를 입은 여성에게 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에디의 고집으로 다이아나는 드레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 좀 활달한 성격의 세 아이는 다이아의 옆으로 서서 에디우스를 관찰하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안녕? 난 에디우스라고 한단다. 다이아나랑은 친구 사이지." 의외로 에디우스는 따뜻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새로 온 손님이 자신들을 싫어하지 않는 듯 하자, 아이들은 특유의 붙임성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아저씨 꼭 꿀 같아요~!" "아냐 황금색이잖아" 제시카와 소니아가 에디우스의 금빛 눈과 머리카락을 보고 한 말이었다. 레온은 관심사가 달랐는지 한참 에디우스를 뜯어 보고는 한 마디 했다. "저 아저씨 당근이랑 피망 좋아하세요?" "응? 그건 왜?" "울 엄마가 그러시는데, 그걸 먹어야 키가 큰데요. 다이아나 이모도 그래서 키가 큰 거랬어요" "아아~! 나도 좋아해. 음식은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단다" 레온은 키 큰 아저씨가 정말 그런 음식들을 먹었다고 말하자 약간 울상이 되었다. 사실 키는 크고 싶은데, 당근이랑 피망은 정말 싫었기 때문이다. 속이 훤히 보이는 그 표정에 에디우스는 한참 웃어댔다. "네 이름은 뭐니?" 아직도 힐끌거리면서 다이아나에게서 떠나려 하지 않는 디안에게 에디우스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디안은 그런 에디우스를 빤히 보다가 엄마를 쳐다봤다. 다이아나가 디안의 귀에 "좋은 사람이야"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슬쩍 앞을 나서서 짧게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도 한참을 에디우스를 쳐다보더니 다시 다이아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서서는 딱 한마디를 던졌다. "울 엄마보다는 못하지만 이뻐요!" 다이아나는 약간 멍청한 표정이 된 에디우스를 보고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아이들은 디안의 말을 선두로 해서 둘을 한참 비교하는 듯하더니 역시 자신들의 이모가 더 예쁘다는 결론을 함께 냈다. "얘들아 너희도 엄마처럼 춤 배울래?" "예?" "방금 엄마가 하는 거 봤지? 너희들도 똑같이 따라하는 거야" 에디우스의 의외의 제안에 다이아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들은 상당히 흥미가 있었는지 이미 눈을 빛내고 서 있었다. 어느 틈엔지 에디우스는 다이아나를 위해 마련한 발자국 옆으로 아이들의 보폭에 맞게 새로운 발자국을 나타나게 해 놓고 아이들에게도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 명의 여성과 네 명의 아이는 에디우스가 손뼉으로 내는 박자에 맞추어 발자국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술을 배운 다이아나는 몇 번 만에 별로 어렵지 않게 기본적인 스탭을 배우고 다른 것을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자꾸만 발이 꼬이고 넘어지는 데다가 그럴 때마다 깔깔거리느라 그다지 진도는 나가지 못했다. 한참을 따라 하던 아이들은 그야 말로 어린 순으로 하나씩 지쳐서 포기를 하고 다이아나가 연습하는 것을 구경했다. "근데 왜 둘이 안춰요?" 레온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원래 춤은 남자랑 여자랑 같이 추는 거 아니에요?" 제법 아는 티를 내면서 레온이 둘이 추는 춤을 보고 싶다고 조르자, 새로운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던 다른 아이들까지 졸라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군. 기본 스탭쪽은 다 배운거지?" "응" "그럼.. 아차 음악이 있어야겠군" 다이아나는 배우지 못한 마법이었는데, 에디우스가 마나를 움직이는 느낌이 오자 곧바로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활에 필요한 마법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다 배웠던 에디우스였기에 이런 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이아나와 춤을 출 지도 모르는 상황에 음악을 빠뜨릴 에디우스는 아니었지만. 큰 키의 늘씬한 두 사람이 서로 맞잡은 채로 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눈을 빛내면서 바라보았다. 에디우스의 방문은 날마다 있었고, 본채에 있던 아이들 외의 다른 아이들도 춤이나 인사 등의 행동예절을 배우는 시간 만큼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이아나의 머리나 센스로 예절교육과 춤 교육은 사실 사흘 정도에 마무리된 셈이지만, 에디우스는 일주일을 다이아나 집을 오가면서 '복습'을 외쳤고, 워낙 아이들이 에디우스를 따르는 터라 다이아나도 굳이 중단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문제는 오후의 에디우스의 방문이 아니라 오전의 일이었다. 에디우스가 첫 날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음 날 오후에 오겠다고 해서, 다이아나는 모처럼 아침부터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는데, 다시 대피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들은 다이아나에게 적합한 의상을 만들기 위해 찾아온 일종의 '디자이너'들이었다. 다이아나는 방문기간에 입을 드레스 수십벌과 거기에 맞는 구두와 백, 장갑 등을 모두 맞춰야 했다. 거기에 그렇게 한 세트가 된 의상에 맞는 보석까지 모두 골라야 했는데, 실제로 다이아나가 고르는 것도 아니고 맞는 것을 찾는답시고 드레스를 입혀 놓고 이것 저것을 걸쳐 보는 이들의 살아 있는 '모델'이 되어야만 했다. 더하여 '제국의 품위'를 위해 이번 여행에 그들 중 두 명과 머리정돈을 위한 두 명이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당장 안하겠다고 공작에게 달려가고 싶은 것을 디안을 보면서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하여, 오후에 오는 에디우스는 항상 상당히 지쳐 있는 모습의 다이아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다이아나에게 그 원인을 들은 에디우스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어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그런 말을 한 자신을 스스로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디자이너들이 알트 상단에서 보내 주었다면서 화려한 옷감과 보석을 잔뜩 들고 왔기 때문이다. ************************************************************** 참고로 귀족 작위는 낮은 순으로 자작 - 남작 - 백작 - 후작 - 공작 순입니다. 자작과 남작의 순서에 대해서는 제가 읽은 글들에서도 말들이 많더라구요. 하여 그냥 작가 맘대로 했으니 양해해 주세요 ^^; '드'라는 명칭은 세습귀족에게 내리는 호칭입니다. 기본적으로 남작 이하 작위의 세습은 황실의 허가가 필요한 반면 '백작'작위 이상은 세습의 권리를 가집니다. 이렇게 세습이 가능한 귀족들은 '드'를 붙여 영구적인 귀족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투아와 마찬가지로 귀족에 대한 호칭은 황제까지 똑같이 드를 붙입니다. 작위에 대한 호칭이 가장 세분화된 국가는 시우스제국과 중앙5국 연합입니다. 시우스의 경우 황제와 황태자는 드, 황족은 데, 일반 귀족은 덴이라는 중간 글자가 들어갑니다. 중앙연합국의 경우는 황제에게 라를 붙이는데, 원래 연합국 각 국의 귀족 호칭이 달라 하이센 제국 황실명에 붙이는 '라'를 가져다 썼다고 합니다. 고위귀족은 '레' 하위귀족은 '르'를 사용합니다. 대칭적으로 하투아의 황제 카이젠은 황제로서의 호칭을 '드'로 사용합니다. 하투아의 경우 평민이 아닌 귀족 이상급은 모두 '드'를 사용하는데, 이는 황제에 이르기까지 동일하여 모든 제국 중 가장 간단한 호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을 써 놔도 저도 보고 쓰는 실정이니, 너무 열심히 외실 필요는 없습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후훗, 정말 대단하군요!" 옷더미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다이아나는 예고없이 들이닥쳐 웃음을 짓고 있는 리카르도에게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이제, 출발은 사흘을 남겨놓고 있었다. 일단, 황태자의 방문을 핑계로 옷고문에서 벗어난 다이아나는 지친 표정을 역력하게 보이면서 응접실에서 리카르도와 마주 보고 앉았다. "일단, 에디우스 경과의 교습은 어제로 끝난 것으로 압니다만......" "예." "잘 되었네요. 그럼....." 황태자가 손뼉을 탁 치자, 언제 따라왔는지 방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한 아름씩의 서류와 책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 이건?" "하이센 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과 주요인물들에 대한 서류입니다. 도움이 될 듯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하아~! 이걸 저한테 다 읽으란 말씀이신가요?" "굳이 그렇게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남은 시간도 별로 없구요. 일단 서류 중심으로 보시고, 시간이 남으시면 책들도 참고하시라고 가져온 것입니다." "네" "흠..." "무슨 뜻이죠?" "아뇨. 상당한 불평을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으니 어쩐지 이상해서요"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으니 가져오신 것이겠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리카르도의 예상은 이번에도 완전히 뒤틀렸다. 다이아나가 불평을 늘어 놓으면, 자신이 나서서 요점정리를 해 주겠다고 할 참이었건만, 다이아는 지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 틈에 빈틈없는 태도로 자신에 대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리카르도가 몇 마디 말을 더 했지만,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하는 다이아나의 쌀쌀한 응대에 대화를 오래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 했다. '후..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리카르도를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엔 상당히 호감이 간다고 여겼으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카르도나 황제, 공작에게서 받는 거부감은 마치 '닫혀진 세계'에서 늘상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던 '정치인'들의 행각에 대한 그것과 같았다. 리카르도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다이아나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건 리카르도의 사적인 감정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다이아나는 리카르도를 단순한 '개인'으로 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다이아나는 황태자께서 내려주신 '임무를 위한 공부'에 몰두한다는 핑계로 출발 전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그건 주로 오전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으므로, 오후 나절의 아이들과의 시간만큼은 '휴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절대 빼먹지 않았다. 디안은 엄마가 어딘가에 간다는 사실에 상당히 불안해 했지만, 안느와 다른 친구들의 위로로 상당히 안정된 것으로 보였다. 다이아나는 디안이 아직도 밤에 가끔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 디안은 다이아나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었으니까 - 안느에게 특별히 디안을 부탁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자게 하면 괜찮을 거에요 아가씨. 저도 어차피 아이들과 같이 자니까요" 안느는 디안을 걱정하는 다이아나의 부탁에 자신있게 대꾸했고, 덕분에 다이아나의 가장 큰 걱정은 좀 줄어든 셈이었다. 출발 당일, 세 개의 마차에 짐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다이아나와 일행이 타고 갈 마차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던 약간 멍청하고 사치스러운 여자가 여행할 때 온갖 드레스들로 인해 한 짐을 쌓아올리던 장면을 연상케 하는 광경에 다이아나는 그 짐의 임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다이아나는 아공간 마법을 통해 드레스들을 가져가려고 에디에게 부탁해 보았으나, 에디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일단, 귀족 여성이 움직인다면 당연히 그 정도는 예상되는 일이라구. 마차에 쌓아올린 짐들을 어떻게 보면 시위라고 할 수 있는거야." 그나마 6필의 말이 끄는 황실 전용의 마차 안에 시중을 들기 위해 특별히 궁에서 보내 준 베티라는 이름의 베테랑급 시녀 외에 다른 다이아나를 전담하는 이들이 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마차 안에는 다이아나와 시녀, 그리고 리카르도와 에디우스가 타고 있었다. 황실의 마차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는지, 마차 특유의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마차를 호위한다는 이유로 말을 타고 동행하는 알렉시안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우호국인 옆 국가를 방문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는 것은 '실례'이기 때문에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는 알렉시안을 비롯하여 10명 정도였다. 마차 안이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움직이기조차 힘든 드레스를 입고 마차 안에 앉아서 웬만한 일은 모두 시녀의 시중을 받아야 가능한 처지가 된 다이아나는 이 지루한 여행이 빨리 끝나기만을 손꼽아 빌고 있었다. 리카르도와 에디우스는 사이 좋게 하이센 제국의 주요인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중간에 마치 테스트 하듯이 슬쩍 다이아나에게 질문 비슷한 물음을 던져서 말을 유도해내곤 했는데, 다이아나가 막힘 없이 술술 대답하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아나에게 '공부'란 상당히 익숙한 일이었고, 일단 작심하고 시작한 일이라, 황태자가 보내온 서류와 책을 거의 달달 외운 후에 나름대로의 '추론'까지 내린 후였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그런 다이아나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리카르도가 경악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 대화는 어느 틈에 둘에서 셋의 대화가 되었고, 그나마 지루하지 않은 진지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무력을 중시하는 하이센 제국의 황제가 마법사라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에요" "켈러비안 라 트리안은 그냥 마법사라고는 할 수 없지요. 무려 8써클의 마스터이니까요. 은밀히 도는 소문으로는 그가 9써클을 마스터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만큼 무시할 수 없는 존재랍니다" "저, 그런데 제가 본 황제의 초상화는 그가 젊었을 때의 것인가요? 39세의 나이 치고는 굉장히 젊어 보이던데......" 다이아나가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실제로 황제의 초상화는 마치 엘프같은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모습의 남성이었고, 실상 그 모습에서 시루스를 떠올린 다이아나는 한동안 그리움에 싸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이 냉정해 보였다. "현재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모친이 엘프라는 소문이 돌았지요. 전대의 황제는 마법에 대하여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료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전형적인 무사였지요" "그렇다면 황제도 혹시 검술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에디우스가 끼어 들었다. "현재까지는 그런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의 마법 능력으로 인해 그가 검을 써야 할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군요" 다이아나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40이 안되는 나이에 8클래스의 마스터라면 전무후무한 능력일 것이다. 다이아나 스스로는 그 기록을 깰 수 있을지 몰라도 그녀의 경우는 마나의 친화력을 물려받았다는 유리한 조건이었고, 더군다나 그녀의 마법 스승은 드래곤이 아닌가? "황녀에 대하여는 전혀 정보가 없던데......" 다이아나가 실제로 이번 방문의 주 목적인 황녀를 거론하자, 리카르도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면서 언짢은 기색을 살짝 내비쳤다. "뮤리엘 라 트리안이라는 이름 외에 하이센 제국의 제1황녀에 대한 정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이센에서 이번에 황녀의 성년을 맞아 그녀의 얼굴을 처음 공개한다고 했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지요. 실제로 그녀의 탄생 이후로 그녀를 직접 보았다는 이들은 극소수에 속합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건가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만... 에디우스경 상단의 정보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렇더군요. 저도 나름대로 손을 써 보았지만,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베일에 싸인 황녀라... 웬지 호감이 가는걸요?" 미소 짓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덩달아 미소를 보내는 두 남자의 속은 각각 달랐다. 사실 에디우스는 하이센 황족 일가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이아나와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결코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알트 상단의 본거지가 칼라임이라고는 하지만 다이아나가 우연히 칼라임에 들어온 것 뿐, 다른 나라로 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각 국가에 대한 웬만한 정보는 거의 다 가지고 있었다. "아, 참! 잊은 것이 있습니다." 리카르도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하이센 제국의 황제는 상당히 여성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 황비만 해도 둘이고, 후궁은 열이 넘어갈 지경이라더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외모 또한 워낙 젊고 출중하다 보니, 정식 후궁이 아닌 다른 귀족가의 여식들과도 상당히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 그건... 다른 의미로 대단하네요" "나도 들은 적이 있어 다이아나. 아마 조심해야 할껄? 그 황제가 너를 노릴지도 모르거든"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에디우스가 농담을 던지듯이 말했다. 그 뒤를 리카르도가 재빠르게 받았다. "하여 미리 말씀드리는 것인데, 자의에 의하지 않은 어떤 강요도 받아들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여태까지 황제의 행적을 보면 그가 여성을 강제적으로 어찌 했다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합니다만, 혹여나 두 나라의 관계를 들먹여 다이아나경에게 불순한 의도를 보인다면, 우리 제국에 대한 모독으로 대응할 수 있으니 그 점을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네가 그 황제의 바람기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야. 만일 네가 자의적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면 우리로서도 항의할 말도 없거든" "에디!!!" "뭐 워낙 유능하다니까 하는 말이지" 질투심이 많은 에디우스에게서는 나올 수 없을 만큼 자신과 상관 없다는 투였다. 실상 마차로 가는 길은 상당히 짧았다. 거대한 두 제국 사이를 마차로 가려면 수 일이 걸릴 것이 분명했지만, 양 국의 황실 마법사들이 나서서 거대한 마법진을 설치했기 때문에, 마차는 이쪽 황국에서 마법진까지, 그리고 저쪽 마법진에서 황궁까지만 타고 가면 되었으니까. 몇 번에 거쳐 마법진이 가동되었고, 일행은 어렵지 않게 서너 시간 만에 하이센의 황궁에 도착했다. 일단 '여행'을 한 것은 사실이므로 도착한 사절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황제와의 정식 알현은 다음 날로 미루어졌다. 일행을 맞아들인 것은 외교쪽 일을 도맡고 있는 백작급의 귀족이었는데, 상당히 날카로운 눈매로 재빨리 일행들의 구성과 관계를 탐색하는 것을 눈치 빠른 몇 명은 알아챘다. "이건......" "마법이 이렇게도 활용이 되는군!" "......" 황제가 마법사여서인지, 하이센의 황성은 웬만한 모든 생활용품들이 마법의 힘을 빌려 만들어 진 듯 했다. 다이아나는 이쪽 세계에서 최초로 '자동문'과 에스컬레이터의 대용품을 볼 수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지고 모양이 이쪽 세계의 화려함으로 인해 약간 다르긴 했지만, 완전히 비슷한 형태의 시설들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욕실까지......" 일행과 헤어져 방을 배정받은 다이아나는 하이센측에서 보낸 시녀가 정중하게 곳곳을 안내하면서 마법물품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을 흥미롭게 보다가 온수와 냉수가 마치 닫혀진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욕실의 시설을 보고 더욱 놀랐다. "거품 목욕을 하고 싶으시면 '버블'이라고 말하시면 됩니다." 시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욕실에는 소용돌이가 형성되면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멈추실 때에는 '스톱'이라고 하시구요" "다른 것들은 모두 손으로 하는데 거품만 시동어를 쓰는 이유를 혹시 알고 있나요?" 다이아나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시녀는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잠시 당황한 눈치였으나, 손님 앞에서 그런 티를 내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그건.. 보통 물을 받거나 하는 것은 시종들이 하지만, 거품목욕은 일단 탕에 들어간 후에 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말인즉슨, 귀족들이 손을 움직여 이것 저것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시동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편, 에디우스는 혼자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 올해는 아무래도 많이 돌아다니는 운수인가 봅니다. 오늘 연락이 왔는데, 대덕단지에 3일간 가게 되었어요 ^^;; 다음주 월,화,수랍니다. 서울집보다는 시골집(괴산)에서 가까운 지라 차로 출퇴근을 하게 될 텐데 일단 정상출근(9시)인 관계로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연중이 될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말씀 드립니다. ^^;;;; 천애유화님... 아이디 잘못 써서 죄송합니다. ^^;;;; 설정파일이 벌써 세 페이지 분량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죽겠어요 자꾸 찾으려니...... 인물 하나 나올때마다 기록을 했어야 했는데, 빠진 애들 이름 다시 찾는것도 장난이 아니군요 100회가 되면 알테의 직업을 밝히려고 합니다만... 프리랜서란 일이 들어오면 들어온 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기쁘거나 고민이 있지요 좋게 생각하려고해요 일이 없으면 놀아서 좋구 일이 많으면 돈 벌어서 좋구 문제는 일이 너무 없으면 어찌 살까 고민해야 하는건데 -_-;;;;;;;; 90회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각 국 사절단이 모두 튀어나와야 하는데 야들 이름이 안헷갈리게 쓰는게 장난이 아닐 듯하네요 거기에 등장하는 애들이 모두 꽤 비중이 있는 애들이라 지들 꺼 다뤄달라고 아우성인 통에 머리가 복잡합니다. 줄을 서시오~!!!!!!!!! 라고 외치는 심정이랍니다. ^^;;; 일단 초기 캐릭 설정이 잘못되어서는 곤란하니 90회는 좀 시간이 걸릴 듯하네요 장금이 끝나고는 되려나??? -.-;;;;;; 암튼 오늘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알테입니다. 힘을 주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 하투아 제국 *** "폐하!" "치워랏~! 지금 나에게 그런 자리에 가서 구경거리가 되라는 것이냣?" "그것이 아니오라......" "우습군..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한다면 하투아는 그 날로 끝장이다. 그걸 모르나?" "......" "귀족들이 바라는 데로 그 애송이에게 적당한 선물을 들려 보내도록!" "하지만.. 그랬다가 자칫 잘못되는 날에는......" "입닥쳐. 라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더 이상 입을 놀렸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 몸에 예전과 같이 않다고 내 머리까지 깡통이 된 것은 아니란 것을 명심해라. 애송이는 기대만 잔뜩 하고 갔다가 허탕을 칠 터이니......" 라덴은 한숨을 내쉬고 황제의 결정을 전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의 사건 이후 카이젠은 좀 더 난폭해지고 잔인해졌지만, 아직 그의 냉철한 판단은 건재했으므로 카이젠이 저렇게 말을 하는 데에는 분명히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나를 다루지 못하게 된 이후로 좀처럼 사람들과의 대면을 하려 하지 않는 황제에 대하여 제국 바깥까지 난 소문은 어쩔 수 없었다. 은밀하게 신관과 마법사를 동원했지만, 황제의 몸의 상태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내는 이조차 없었다 이미 30대를 넘어선 황제이다. 아직 후사가 없었고, 그 전에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황제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잠자리 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후사가 없는 군왕의 자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황제의 강한 힘에 눌려 찍 소리도 못하던 귀족들이 점차 파벌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 하이센의 무도회에 '미혼'의 황제가 가서 황녀라도 데려온다면 후계의 문제부터 귀족들의 문제까지 한 번에 해결될 수 있고, 바깥으로 난 소문도 잠잠해질 것이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해 오러블레이드를 만들 수는 없었으나, 황제는 여전히 강한 육체와 검술의 소유자였으므로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오히려 황제의 건재함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덴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카이젠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귀족들에게 지금 하나의 카드를 내민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카이젠 자신도 이 날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면 절대 라덴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라덴의 전언을 받은 지이드 공작은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아들조차 황제의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한 숨을 쉬었다. 어려서부터 쭉 보아온 카이젠이 황제가 되고 대륙에 위명을 떨쳤을 때 가장 기뻐했던 그였지만, 이제 노회한 그의 얼굴 위로는 자식같은 황제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 분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내가 귀족들에게 통고를 하도록 하겠다. 너는 선물을 준비하도록 해라" "네" 결국 황제의 결정에 따라 귀족들의 제안이 통과되었다. 하이센 제국에 사절로 참석하게 된 케르크 드 베그드안 백작은 23세로서 하투아 제국의 양대 공작 중 드베르미시 드 배그드안 공작의 아들이었다. *** 중앙 5국 연합 *** "현재로서는 칼라임 제국의 황태자가 가장 유력하다 할 수 있었습니다만, 파트너나 다름없는 귀족을 동행한다니, 저희 쪽에 가장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시우스에 대한 하투아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봉쇄한 이후 에하르트 레 다이온 공작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지금 황제와 밀담을 나누는 중이다. "하지만 칼라임의 경우는 황태자이고 에쉬는 2황자이니 불리하지 않겠나?" 에쉬크리머 라 카오시아 쥬이도스는 올해 24세의 제2황자였다. 아직 황태자로 책봉되지는 않았으나, 제1황자가 황위를 물려 받기에 아무 무리가 없었으므로 그의 계승권은 그저 이름만이라고 보아야 했다. 제1황자인 슈메이드는 이미 성혼을 하였으므로 아직 미혼인 제2황자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아닙니다.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센 제국의 경우 현재 황자는 15세입니다. 하지만, 전면으로 드러나 있는 케트리온 라 트리안보다 오히려 황제는 제1황녀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태까지 그녀를 그토록 꽁꽁 감추어 놓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만일 황녀가 후계자로 지목받는다면 오히려 '후계자'라는 면이 '혼인의 대상'에서는 부담이 되지요" "호오.. 데릴사위를 원한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괜찮군.. 괜찮아...." "하지만, 칼라임의 마르띠앙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라 할찌라도 황태자에게 파트너를 붙여서 보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녀에 대하여도 조금 더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점은 모두 자네에게 맡기겠네. 선물은 준비되었겠지? 제국의 위상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하도록 하게나" "물론입니다. 폐하!" 이리하여, 중앙연합국에서는 제2황자인 에쉬크리머가 보좌관 격으로 에하르트 공작의 아들인 니콜리에 레 다이온 백작을 동행하고 축하 사절로 나서게 되었다. ************************************************************************** 칼라임의 사절단은 도착한 다음날 오전에 황제를 알현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부터 시작해서 한 차례의 고문을 통과한 다이아나는 지난 번에는 피할 수 있었던 엄청난 속옷을 착용하고야 말았다. 상당히 가볍기는 했지만, 치마자락을 부풀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그 속옷을 입고 처음 생각난 것은 '문이 작으면 통과할 수 없겠군' 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것이었다. 물론 황궁의 문이야 상당히 큰 문이 모두 양쪽으로 열리는데다가 이 황궁은 거의 자동문 시스템이었으므로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 귀를 뚫어야 한다고 야단이던 시녀들은 오늘 아침에도 역시 귀걸이를 달 수 없음을 아쉬워했지만, 안그래도 주렁 주렁 단 물건들에 질린 다이아나는 귀를 뚫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것에 스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베티가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고 다이아나의 뒤를 따라 나섬으로서 세 시간이 넘게 걸린 준비가 끝났다. 이런 절차 때문에 황제의 알현이 이른 아침이 아닌 늦은 아침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는데, 이는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흠... 그렇게 하고 걸을 수나 있는거야?" 에디우스가 습관처럼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평가하듯이 다이아나의 차림새를 살피더니 내뱉은 첫마디였다. 안 그래도 불편한 옷에 불편한 기분이었던 다이아나는 놀리듯이 말하는 에디우스의 질문에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와아! 아름다우신데요!" 리카르도는 놀랐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이면서 다이아나의 기분을 북돋으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돌아온 것은 그저 끄덕임...... - 쯧쯧~! 요령도 없군. 이봐 도대체 마법은 어디다 쓰려는 거야? 에디우스가 가라앉아 있는 다이아나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차피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다이아나여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라봐야 에디우스와 리카르도 정도였지만... 어쩌면 알렉시안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법이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다이아나에게 에디우스는 슬쩍 힌트를 주었다. - 그거 없애고, 마법으로 부풀리라고. 간단한 것을 고생하는 군...... 나중에 시녀들 기절하지 않게 적당한 시기에 알아서 하도록 하고!" "!!!" 다이아나는 당황한 베티를 뒤로 하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침실로 뛰어들어 갔다가 얼마 안돼 훨씬 가벼워진 표정으로 나타났다. 돌아온 다이아나는 에디에게 감사의 뜻으로 슬쩍 한 번 웃어 주었지만, 에디우스는 초연한 표정으로 딴 전을 피울 뿐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여자들 속옷에 대해 어떻게 저리 잘 아는 거지?'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지만, 워낙 다방면에 박식한 데다가 1800살짜리 드래곤이 모르는 게 무어랴 싶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일행을 위한 숙소는 그 자체가 하나의 단층짜리 저택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복도에서 방문을 열면 큰 응접실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각 방에는 욕실 뿐만 아니라 시중드는 하인이 묵을 수 있는 작은 방까지 달려 있는 구조였다. 그 중 다이아나에게 배정된 방이 가장 컸는데, 원래 여성을 위한 방은 다른 방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마차 세 개를 가득 채웠던 의상들은 방에 달린 전용 방에 다시 정리가 되어 들어가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느 정도 움직임이 편해지자 그제서야 일행을 둘러보게 되었다. 리카르도는 검은 색과 황금색으로 복장을 통일했는데, 다이아나가 생일 선물로 준 망토와 에디우스가 준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황제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 물건들의 '위력'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디우스는 주로 흰색으로 된 의상위에 모든 장식들을 황금색으로 함으로써, 그의 금발과 금안이 한층 돋보였다. 알렉시안은 평범한 기사의 제복으로 입고 있었는데, 보좌라는 형식의 에디우스와 차이를 두기 위해서인 듯했다. 아마 모든 의상에 대한 사전 논의가 있었는지, 다이아나는 황금색을 기조로 한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에디우스나 리카르도 양쪽에 모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일단 여성이 한 명이었으므로 일행이 황제를 알현할 때에는 다이아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리카르도 왼쪽에는 에디우스가 함께 에스코트 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 쪽으로......" 정중한 태도로 일행을 안내하는 시종을 따라가니.... '이번엔 움직이는 길인가?" 바닥이 움직이는 복도로 안내했다. 꽤 되는 거리를 복도에 서 있다가 다른 복도 앞에서 내린 후에 조금 걸어들어갔는데 아마도 그 곳이 주로 외국의 사절단들을 대접하기 위한 방인 듯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황녀는 그 자리에서도 볼 수 없었고, 황제와 몇 명의 고위귀족들이 일행과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39살이라는 황제는 아무리 뜯어 보아도 30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외모에 초상화를 보고 감탄한 것이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마치 엘프의 음성을 연상시키는 울림이 좋은 음성과 온화한 미소를 겸비하고 있어, 다이아나는 마음을 다잡지 않았더라면 울 뻔 했다. 여행의 노고 - 사실 절대 노고랄 것 까지는 없었지만 - 를 위로하고 방문한 것에 대하여 예의를 표하는 의례적인 말이 이어지고, 서로 간에 그야말로 예의바른 인사가 오가는 것으로 알현은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다. "휴우~!"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잠깐 시녀들을 물린 후 속옷을 원상위치 시킨 다이아나는 다시 베티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복장 - 그래도 바지는 절대 안된다고 해서 비교적 간단한 드레스 - 으로 갈아입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은 일행들에게 시종이 와서 의외의 제안을 했다. "황궁 관광 이라구요?" "예. 보시다시피 황궁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마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외국 분들이 오실 경우 궁금해 하시기 때문에, 의향이 있으시다면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리카르도가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의 의향을 물었다. 에디우스야 별로 호기심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 황궁에 걸려있는 마법이라고 해도 모두 에디우스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으므로 - 일단 다이아나의 의사대로 하기 위해 그 쪽을 바라보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에디와 황태자 사이에 끼어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다이아나로서는 오후의 시간을 보내기에 적절하다 생각되었으므로 이들은 하이센측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외로 에디우스는 그 시간을 매우 재미있게 보냈는데, 그것은 다이아나가 이런 저런 마법물품들을 볼 때마다 어떤 마법의 조합인지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가 가지고 있는 마법책이나 그간 배운 마법들은 대부분 공격과 방어를 위한 마법이 기조를 이루는 기존의 마법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실생활에 적용되는 이러한 마법들은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가끔 그런 다이아나에게 전음으로 마나의 배열이나 조합 등을 가르쳐 주곤 했는데, 사실을 알고 기뻐하는 다이아나의 아주 미묘한 표정변화가 에디우스를 기쁘게 했다. 마지막으로 시종이 안내한 곳은 '후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온도를 조절하는지, 각각의 꽃이 핀 부분마다 조금씩 기온의 차이가 났다. 상당히 넒은 후원은 중간 중간 앉아서 쉴 수 잇는 벤치와 같은 시설이 보였는데, 재밌는 것은 의자에 사람이 앉으면 그 앞으로 음료테이블이 나타나 간단한 다과를 언제든지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점이었다. 군데 군데에는 꽃의 이름으로 지어진 정자들이 있었는데, 그 정자를 중심으로 해서 비슷한 종류의 꽃들이 보기 좋게 심어져 있는 형태였다. "이곳 후원은 공개된 곳이니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찾아오시기 힘드시면 각 응접실 중앙에 설치된 이동진에서 '후원'이라고 말씀만 하시면 저쪽의 중앙 정자 위쪽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미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앞의 분이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이동진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 점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시종은 이 설명을 끝으로 해서 시범이라도 보여 주듯이 정자로 갔다. 시종이 '칼라임' 이라고 외치자, 일행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처소의 응접실로 이동되었다. 막 나가려는 시종을 불러세운 알렉시안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질문했다. "만일 후원의 이동진을 악용해서 다른 사람이 이 방으로 무단침입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은 있소?" 시종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여러분들이 처음 이 곳으로 들어오실 때, 네 귀족분들에 대한 인증절차가 끝났습니다. 따라서 이동진으로는 네 분만 통행이 가능합니다. 저는 안내역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이번 한 번에 한해서 허가를 얻은 것입니다. 저조차도 여러분의 방에 이동진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흠.. 알겠소." 시종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상당히 놀랍군요. 마법을 이 정도로 사용할 수 있다니......" 리카르도가 침착했던 태도를 풀어버리고 흥분한 듯이 말했다. 그런 리카르도의 반응에 찬물을 끼얹은 동시에 알렉시안을 긴장시키는 에디우스의 대꾸가 뒤를 이었다. "문제는...... 이 곳에서 하이센의 황제는 전지전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 그랬다. 황궁 전체에 여기 저기 마법이 걸려 있는 편리함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황제의 소관 하에 돌아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는 말도 상당히 조심해야 겠군요. 8써클 마법사의 눈과 귀를 속일 방도가 없다면요" 알렉시안이 조심스럽게 경고를 했다. 물론 에디우스야 얼마든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결계를 칠 수 있었지만, 그다지 내키지도 않았고 자신의 실력 모두를 드러낼 이유도 없었으므로 그저 동감하는 표정만 짓고 있었을 뿐이다. ******************************************************************** 작위에 대한 많은 조언 감사합니다. ^^;; 근데, 대대적인 수정이 있기 전에는 일일히 찾아서 고치기가 힘들어요 -.-;;; 당분간 양해를... ^^;;;; 조금 어려운 부분이라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습니다. 유난히 쥐어짜게 되는군요 ^^;;; 자 그럼..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황제와 각국 사절단의 만남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사절단 끼리 마주치지 않도록 교묘하게 미리 안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지루하다고 할 수 있는 접견이 모두 끝났을 때는 벌써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황제는 손님들을 접대하던 방의 모든 시종을 물리고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했다. "흠, 역시 두드러지는군. 그렇게 생각지 않니?" 마법인지 몰라도 막힌 벽으로 보이던 공간에서 미모의 소녀가 걸어나오면서 대꾸했다. "누구 말씀이신지요? 후훗" "아차, 너와 나의 관심은 좀 달랐겠구나" "아바마마의 관심은 그 다이아나경이라는 여성이겠지요?" "물론" "제 관심을 가장 끈 것도 칼라임의 사절단이긴 하지만, 조금 각도가 틀리군요" "어느 쪽이냐?" "둘 다요. 욕심이 나더군요!" "가장 어려운 상대를 골랐구나, 뮤리엘! 내가 보기에 그 둘의 마음은 이미 한 곳으로 쏠려 있는 듯 하다만... 안 그렇더냐?" "그야, 모를 일이죠. 이 뮤리엘이 나선 이상에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하는 황녀의 눈에는 자신감이 반짝였다. 그런 딸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황제는 경고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내 도움을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네 것은 네 힘으로 차지해야 한다!" "물론이죠 아빠!" "아비로서 충고하자면, 세상 일이 다 네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군데요~!" "후훗 글쎄다~!" 상당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녀간이었지만, 황제는 황제답게 선을 분명히 긋고 있었고, 황녀도 그것을 전혀 섭섭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황제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소녀는 뮤리엘 라 트리안, 이번에 17세를 맞는 베일에 싸인 제국의 황녀였던 것이다. 제1황비인 아시리스의 검은 머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위에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를 물려 받은 소녀는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제국의 숨겨놓은 보물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이미 4써클을 마스터한 천재 마법사이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은 황가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녀의 친모와 남동생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녀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아이템을 활용하여 투명화 마법을 쉽게 사용할 수 있었고, 곳곳에 설치된 마법거울이나 도청장치로부터의 정보를 황제와 공유하여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황제는 미소를 떠올리면서 딸에게 하지 않았던 말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너나 나나 이번엔 좀 힘들 것 같구나. 가끔은 실패를 하는 것도 네게 도움이 되겠지" 다이아나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빈둥거리면서 논다는 것은 다이아나의 일생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감시하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검술이나 마나 수련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태자가 준 서류들이라도 조금 남겨 놓았다가 보았으면 좋았다고 생각했다. 곧이 곧대로 시험 전 날 공부하듯이 미리 다 보고 외운 탓에 모든 가져온 자료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어디 가려고?" "응. 후원에!" "다녀와!" 간단하게 말하는 에디우스와 달리 알렉시안은 아무 말 없이 다이아나를 뒤따르려 했다. "알렉시안경! 굳이 산책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혼자 나가고 싶은데요" "하지만, 위험할지도......" "사절을 모셔다 놓고 언제든지 나오라고 한 후원에서 장난을 칠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검도 이렇게 차고 있잖아요. 설마 제 실력이 못미더우시다고 하실 셈은 아니겠죠? 완곡한 다이아나의 거절의 말에 알렉시안은 슬쩍 책 한 권은 손에 들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리카르도를 쳐다보았다. 그에게서 어떤 반응도 없자, 알렉시안은 포기한 듯 앉았던 문 앞의 의자 위에 다시 주저앉았다. 다이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응접실 중앙에서 시종이 가르쳐 준 시동어를 외웠다. "후원" 시종을 따라 움직일 때는 미쳐 못봤는데, 후원 중앙의 정자로 이동하자 마자 처음 눈에 띈 것은 대륙공용어로 적힌 안내말이었다. - 뒤에 오실 분을 위하여 이 자리는 빨리 떠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이아는 힐끗 푯말을 보고는 지체없이 정자를 내려왔다. "후~! 아름답긴 하지만, 뭔지 모르게 자연스럽진 않군." 다이아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꽃 사이로 난 길을 거닐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이아나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달빛을 즐기려는 분이 또 계셨나 보네요" 상대방도 다이아나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다이아나는 돌아선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는 그의 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숲의 종족이시군요. 방해가 안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방해라니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간인데요.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솔베노라고 합니다." "다이아나입니다" 둘은 인사만 하고는 한참 말이 없이 밤 공기와 달빛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자꾸만 시루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번 방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눈 앞의 엘프는 시루스와는 달리 녹색눈에 녹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생김새도 달랐다. 하지만, 엘프 특유의 분위기는 어쩔 수 없이 시루스를 생각하게 했다. "엘프를 만나신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둘 사이에 이어지던 침묵과 다이아나의 상념은 솔베노의 질문에 의해 깨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 중에 제가 엘프임을 알고도 이런 저런 질문을 하지 않으시는 인간 분들은 거의가 이전에 엘프를 만난 일이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아, 아는 체 하는 타입의 경우겠군요?" "잘 아시네요...." "몇 분을 알고 있습니다. 친하던 분도 있지요." 엘프 마을을 방문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별로 좋지 않을 듯하여 입을 다물었다. 역시 누군가가 보고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당히 여러 면에서 제약을 주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황성에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초대를 받았습니다. 노래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아, 음유시인이세요?" 엘프들의 음성과 그들의 노래는 환상적이고 아름답다고 한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엘프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큰 행운으로 여겨질 만큼. 물론 엘프라고 모든 엘프들이 노래를 잘 한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엘프의 음유시인은 상당한 대접을 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사실 상당히 드문 존재이기도 했다. "네. 인간들의 말로는요. 사실 저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엘프일 뿐이죠." "아, 예"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한 곡 불러드릴까요?" 솔베노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살짝 놀라고 있었다. 앞에 있는 인간의 소녀는 다른 인간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자신이 엘프라는 사실에 지나친 질문도 색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무언가 우울한 표정일 뿐이다. 거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음유시인이라고 하면, 늘상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노래를 청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기색을 보이게 마련인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 소녀의 우울함을 노래로라도 달래주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게 들을께요" 다이아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 벤치를 찾아 앉았다. "하프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반주는 못하겠네요. 그럼....." 엘프가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 다이아나는 정령의 향기를 순간적으로 맡을 수 있었다. 과연 엘프가 노래를 시작하자, 마치 환상처럼 실프들이 나타나 그의 주위를 맴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은 꽃밭에서 투명한 실프들의 춤에 감싸인 아름다운 엘프는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대를 그리워함은 태양같은 빛남은 아니랍니다. 그대를 사랑함은 불꽃같은 정열도 아니랍니다. 그대를 기다림은 하룻밤의 애태움이 아니랍니다.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달빛같이 은은하여 가끔은 태양 빛에 가리워질지라도 불꽃속에 잠길 지라도 하루가 아닌 이틀 이틀이 아닌 사흘 무한한 영원 속에 아스라히 계속된답니다. 일종의 '연가'라고 할 수 있었다. 연인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연가. 다이아나는 노래의 여운에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답례의 말을 했다. "아름다운 노래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신가봐요" "아, 예!" 연인을 떠올렸는지 솔베노의 볼이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솔베노는 연인을 생각하여 침묵에 잠겼고, 다이아나는 그리움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침묵은 오래지 않아 또 다른 한 명의 방문자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죄송해요. 제가 방해를 했나 보네요. 노래소리가 들려와서......" 활달한 인상을 풍기는 검은 머리의 미녀가 반대쪽에서 걸어오면서 말을 걸어왔다. "아, 다이아나경과 솔베노님이군요" "저를 아시나요?" 생전 처음 보는 여성이 이름을 말하자, 약간 의외의 표정으로 다이아나가 되물었다. 솔베노는 안면이 있는 듯이 그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엘! 당신이셨군요" 솔베노의 목소리에서는 엘이라는 여성을 만난 기쁨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네. 저에요. 참 다이아나 경은 잘 모르셨겠군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뮤리엘 라 트리안이라고 합니다." 다이아나는 베일에 싸여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마저 전혀 알 수 없었다는 제국의 황녀를 이토록 쉽게 만나게 되자 약간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지만, 역시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솔베노님의 노래가 들리기에 혼자 계신 줄 알고 찾아왔답니다. 두 분이 함께 계실 줄은 몰랐어요" 황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지만, 솔베노는 약간 당황한 듯 했기에 다이아나가 나서서 해명을 했다. "방금 우연히 만났습니다. 음유시인이라고 하시기에......" "아, 그런 것이군요." 뒷 말을 흐렸지만, 말만 들어보면 마치 다이아나가 솔베노에게 노래를 청한 듯한 상황이 되었다. 솔베노는 자신의 난처한 감정을 다이아나가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적절히 감싸주자 금방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우리끼리는 예의를 생략하면 안될까요? 잠시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럴까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뮤리엘의 말에 다이아나가 별 생각없이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뮤리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이아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 그러니 황당하지 않겠어요? 제가 무슨 상품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불러놓고 하나 골라봐라 하는 것 같잖아요. 도무지 어른들이란 이상하다니까요" "그... 그런가요?" "그럼요! 아바마마만 해도 그래요. 당신은 마음에 드는 상대란 상대는 모조리 꼬셔서 연애를 하시면서 저보고는 벌써부터 정략적으로 상대를 고르라는 것이나 다름 없잖아요. 너무 불공평하다구욧!" 다이아나는 '꼬신다'라는 표현에서 오전에 보았던 켈러비안이 아름다운 여성에게 구애를 하는 장면이 문득 상상이 되어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솔베노는 정략결혼이 화재가 되자 상당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작은 그랬지만, 워낙 뮤리엘이 소녀스러운 수다를 자연스럽게 하는 통에 다이아나도 사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친근감이 형성되었고 둘은 한참을 재잘거리며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솔베노도 아름다운 두 소녀의 친근한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그녀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악. 늦었다!" 돌연 뮤리엘이 소리치자, 다이아나도 자신이 정원에 나온 지 벌써 한 두 시간은 넉넉히 흘렀음을 깨달았다. "내일 무도회를 위해서 일찍 자야 한다고 안그래도 야단들인데... 큰일 났네요. 언니도 똑같겠죠? 아무튼 시녀들이란 다들 마찬가지니까요. 아마 언니두 새벽부터 열 시간은 각오하셔야 할껄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볼께요. 내일 뵈요~!" 허겁지겁 인사를 하고 달려가는 뮤리엘은 영락없는 17세 소녀의 모습이었다. 황녀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쪽에서 접한 모든 그 나이의 소녀들 중 가장 '닫혀진 세계'의 또래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까? 다이아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지만, 10시간의 준비라는 대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솔베노가 걱정스럽게 추우니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 실상 전혀 춥진 않았지만 - 다이아나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여어~! 산책은 재밌었나요?"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는 그 때까지 응접실에 있었는데, 둘 앞에는 술잔과 술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하던 중으로 보였다. "네." 다이아나가 간단히 대답하다 말고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저, 황태자 저하. 혹시 내일 황녀께 저도 선물을 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드릴 때 함께 드리면 됩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아, 그럼 부탁드려요." 리카르도의 의문에 답할 생각이 없던 다이아나는 자신의 용건만 말하고는 둘에게 밤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물론 밤공기에 피부가 상할 지도 모르는데... 로 시작한 베티의 상당한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 일단 오늘 밤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합니다. 무도회 장면을 떠올리니 머리가 막 아프거든요. 전에 말이죠. 어떤 분의 글을 보면 의상이나 장면에 대한 묘사가 너무 뛰어나서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선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저는 스토리 따라 가느라 절대 그런 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기회로든 수정을 할 기회가 있다면 그런 부분이 중점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 마디로 급히 뛰다 보니 우아함은 저리 던진 상태랄까요? -.-;;;; 오늘 대장금을 보면서 느꼈는데, '시청률 높이기'란 참으로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 화에 거쳐서 꼭 위기 상황 하나씩을 놓고는 다음 주 월요일날 해결하고 화요일날 또 사고치더군요. -.-;;; 워낙 같은 패턴이 계속되니 약간 우롱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인가요? -.-; 일단 머리를 좀 비운 뒤에 다음 편을 써야 겠습니다. 아마도 내일 오후, 아니군요 오늘 오후네요 그쯤이 될 것 같네요 자 그럼 늦은 밤 즐독하시구요 너무 늦게 주무시는 몇몇분들~!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건강 조심하셔요~! 새벽 4시에 글을 올려도 읽으시는 분들께는 너무 감사하면서도 가끔 건강이 염려된답니다. 그럼.. 오늘도 이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아빠!" "헉..." 갑자기 들려오는 딸의 음성에 제2황비인 에이루파와 다정한 한 때(?)를 보내던 켈러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내뱉었다. "둘째 어머니랑 같이 계시죠?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제 방으로 좀 와 주시겠어요?" "그... 그러마. 잠시만 기다리렴" 켈러비안은 아쉬워하는 둘째 황비를 달래고는 옷차림을 수습하고 딸의 방으로 이동했다. 뮤리엘의 얼굴은 상당히 심각하면서도 살짝 상기되어 있어서, 늘상 침착한 딸의 태도를 보아온 켈러비안으로서는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나 하여 걱정스러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제가 오늘 후원에서 그녀를 보았어요" "그녀?" "칼라임 제국에서 온 다이아나경 말이어요" "아, 그런데?" "맘에 들어요" "뭐?" 갑자기 '여성'이 마음에 든다는 딸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보고 뮤리엘은 금방 입술을 삐죽이더니 불건전한 아버지의 정신상태에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제가 아빠랑 같은 줄 알아요? 허긴 아빠야 후궁에다가 요즘은 미소년들도 손대고 계시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누,, 누가 그런 소릴 하더냐? 내가 원래 미각적으로 좀 까다로울 뿐이지 난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취향이란 말이닷!" "흠.. 그러신 분이 왜 방금은 그렇게 놀라신 거죠?" "......" 하이센 제국 내에서 켈러비안을 이토록 곤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뮤리엘이었다. "다이아나와 저는 친구가 되기로 했어요" "친구라... 그거 좋지. 그런데 그게 나를 이 밤중에 부를 만한 이유가 되느냐?" "물론 아빠가 평.범.한 중년 남자라면 걱정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지요. 아빠 설마 딸의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그런 몰상식한 일은 하지 않으실 꺼죠?" ".... 그.. 그렇지..." "고마워요!" "그런데, 그럼 그 두 남자는 포기하는 거냐?" "후훗. 포기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오늘 다이아나 언니한테 그 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눈치를 봤는데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엔 둘 다한테 별 마음이 없는 것 같던데요?" "그렇게 말하던?" "아뇨. 직접 말로 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여성으로는 볼 수 없더군요." "그렇군... 그런데 왜 그녀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냐?" "귀족가의 영애들처럼 내숭을 떠는 것도 아닌데, 침착하고 차분했어요. 그리고 다른 이에 대한 배려가 아주 몸에 베어 있더군요. 오만하지도 않고 현명했어요" "그걸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판단했지?" 뮤리엘은 자신이 처음 솔베노의 노래소리를 듣고 정원에서 그들을 찾아낸 것과 다이아를 위한 노래를 불러 주었다는 것에 당황해 하던 솔베노, 그리고 그 이후 다이아나가 나서서 사정 설명을 한 것 등을 이야기했다. 솔베노는 뮤리엘을 사모하고 있었지만, 뮤리엘의 경우 솔베노에게는 호감을 가질 뿐, 1000년을 산다는 엘프와 반려를 맺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대단한 뮤리엘로서는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젊은 모습을 유지하는 남편과의 생활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엘프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단념되는 것이 아니어서, 솔베노의 감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친한 친구로서 대하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랑'이라도 엘프들에게는 대상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엘프인 솔베노가 노래까지 불러 줄 정도로 호감을 가진 인간이라면 충분히 믿을만 했다. 짧은 시간의 대화였지만, 다이아나의 말 속에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것들만을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뮤리엘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뮤리엘이 동경하면서도 이룰 수 없는 청순함과 성스러울 정도의 따뜻함이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이 억지로 얌전함을 꾸며대느라 애를 쓰는 것에 반해 다이아나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우아하기 그지 없었다. 하여 외견상으로는 오히려 뮤리엘이 나이가 들어 보일 수도 있는데도 뮤리엘은 그저 무작정 그녀가 좋아진 것이다. "만일, 다이아나 언니가 그 둘 중 하나에게 마음이 있다면 전 그 사람은 포기하겠어요!" 선언하듯이 뮤리엘이 말을 마무리하자, 켈러비안은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딸아이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목표한 것을 포기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다만, 그녀가 끔찍하게 아끼는 남동생과 어머니 정도만이 그녀의 애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어찌되었던, 칼라임의 아름다운 여사절에게 손을 내밀기는 애시당초 틀린 것 같았다. 상당히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딸의 원망을 받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다고 만만하게 자신의 품에 안길 상대도 아닌 듯했으니까. 이 시간 다이아나도 뮤리엘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눈동자 색은 달랐지만,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지혜를 연상하게 했다. 다이아나는 무의식 중에 지혜와 닮은 사람에게는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는데, 그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던 일이었다. 밝고 명랑한 성격에 거침없는 입담을 소유한 약간 모순적인 소녀.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표시하는 그녀가 제국의 황녀라는 것은 더더욱 지혜와 일치되는 점이다. 거침없이 자신에게 언니라 부르면서 매달리던 뮤리엘을 생각하면서 다이아나는 미소를 띄우고는 드워프들이 자신에게 선물한 장신구를 담은 배낭을 가지고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혹시 말이죠. 제가 어떤 사람에게 이 것 중의 하나를 선물로 준다면 결례일까요?" "네가 보기에 그 물건과 어울릴만하다면 상관 없지. 그리고 어차피 우리 드워프는 일단 준 선물의 처분에 대하여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나 쓸 데 없이 그러지. 무기는 좀 문제가 있다만......" 제프와의 대화를 생각해 내고 다이아나는 배낭에서 쏟아져 나온 엄청난 양의 물품 중에서 달빛 아래서 만난 뮤리엘과 어울릴 만한 것들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워낙 장신구가 많아 늦게 잠이 든 다이아나는 드물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베티가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 시간이 상당히 걸리기는 했지만, 선물을 받고 기뻐할 뮤리엘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다이아나는 일어나면서 미소를 지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봐요. 하지만 늦었어요! 서둘러야 합니다!" "저.. 무도회는 저녁에 하는 것이 아닌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도 저녁까지는 시간이 모자라답니다. 자아 얼른 일어나서 욕실로 가세요." 그제서야 다이아나는 10시간이라고 한 뮤리엘의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깨달았다. 베티가 동원한 시녀들에 전문 피부관리사와 머리카락을 책임진 이들까지 모두 덤벼들어 아침부터 목욕을 시킨다. 마사지를 한다. 다시 향을 푼 물에 몸을 담그고, 손톱 손질을 하는 등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시녀들의 손에 결국 포기하고 몸을 맡겨야 했다. 오전이 끝나고 겨우 점심 식사를 핑계로 좀 쉴 수 있으려나 했더니, 저녁에 무도회가 있는 날에는 당연히 점심을 굶어야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한 끼 굶는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드레스를 잘 소화해내기 위해 그같은 관례를 만들어낸 귀족 여성들의 열성에 그저 혀를 내둘러야 했고, 점심시간의 휴식을 희망으로 겨우겨우 버텨왔던 터라, 다이아나는 난생 처음 기절할 뻔 했다. "다이아나, 점심은 안 먹을꺼야?" 역시 구세주는 에디였다. 다이아나는 이 때 만큼 에디우스가 반가웠던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에디우스는 시녀들의 만류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다이아나를 식탁에 앉혔다. "고생이.. 심하셨나보네요" 리카르도가 안쓰럽다는 듯이 한마디 하자, 알렉시안마저도 동의의 뜻으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우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이아나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네가 아랫사람들을 위하는 것은 알지만, 자꾸 얕잡아 보이니까 이런 일이 있는거야. 하루 종일 꼼짝 안하고 몸치장이나 하는 귀족 영애들이 하는 짓을 왜 네가 따라해야 하는 거냐구? 그건 운동량 없는 호초같은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우리같은 검사들은 끼니를 거르면 안 좋다는 거 몰라?" 적당한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백질 섭취를 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 물론 오래 무술을 해 온 다이아나도 그러한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에디우스 경의 말이 맞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녀들이 시킨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맞추어야 하는 것이지, 당신이 그들에게 맞출 필요는 없으니까요" 리카르도도 한 마디 거들었다. 다이아나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본 결과 자신이 좀 어리석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덕분에 오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다이아나는 저녁에 입을 드레스를 직접 고르고, 무도회 전 간단한 화장과 머리손질만 하겠다고 단호하게 명령함으로써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오후 나절을 에디우스에게 빌린 책을 들고 후원에 가서 읽음으로써 상당히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시녀들이야 울상을 지을 테지만, 실제로 그들이 야단을 떨어봐야 어차피 더 좋아질 피부도, 머리카락도 아니었다. 다이아나는 예고한 대로 딱 한 시간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시녀들은 원대한 포부를 뒤로 하고, 다이아나의 뜻대로 머리손질과 약간의 화장만을 해야 했다. 그래서 드물게도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는 여성들의 원망하는 눈초리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었다. 칼라임에서 있었던 무도회는 주빈인 황태자가 나서서 손님들을 맞고 최후에 황제가 나타나 연회의 시작을 선포한 것과 달리, 이번 무도회는 손님들이 모두 들어선 후 황제가 황실의 식구들을 대동하고 나타남으로써 시작되었다. 모여든 손님들의 애타는 시선과는 상관없이 오늘의 주인공인 황녀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성년임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녀의 베일이 벗겨질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황제는 상당히 극적인 효과를 즐기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루한 예식의 종반에 황제의 선포와 함께 황녀가 드디어 그 베일을 벗었다. 미리 준비한 마법으로 후광의 효과까지 가미한 황녀의 등장은 인물이 따르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우스웠을 것이 분명했으나, 물론 그런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과연......" 여기 저기 한숨 소리와 함께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파트너가 없는 젊은 사절들을 고려하여 오늘의 무도회에는 고위귀족의 영애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번 낙망해야 했으니, 가장 좋은 신랑감으로 손꼽히는 칼라임 제국의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은 그들로써는 따라갈 수 없는 미모의 여성의 등장이 그 첫번째였고, 베일에 가려진 황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 두 번째였다. 옅은 푸른 색의 드레스 차림은 뮤리엘의 푸른 눈에 적당한 키의 날씬한 몸과 어울려 마치 그녀의 피부처럼 보였고, 푸른빛이 돌 정도로 진한 검은 머리는 매혹적이다 못해 치명적인 유혹으로 보였다. 하얀 피부에 붉디 붉은 입술과 하객들에게 응답하기 위해 지어 보인 미소로 인해 살짝 드러난 흰 눈 같은 치아라니. 17세의 그녀는 도저히 나이를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요염했으며, 우아했다. 이어서 선물 증정의 순서가 있었는데, 각국의 사절이 가져온 것은 성년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고려한 탓인지 대부분 장신구가 많았다. 중앙연합국과 하이센의 경우 상당한 마법을 포함한 아티펙트를 겸한 장신구를 선물했는데, 의외로 하이센 쪽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는 공모자같은 미소를 띄고 있다가 선물을 전하기 위해 다이아와 함께 나란히 뮤리엘의 앞에 섰다. "황녀님의 아름다움에 누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리카르도가 에디우스의 도움을 받아 알트 상단에서 구입한 물건은 보석목걸이였다. 문제는 그 보석이 보통 보석이 아니라... "블루드래곤의 눈물....!" "설마...." 사람들이 이렇게 떠들어 댈 정도로 유명한 보석이었다는 것이다. 그 옆에서 다이아나가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고, 뮤리엘은 그런 다이아를 보고 방긋 웃으면서 상자를 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이건... 혹시 드워프들의 작품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드워프의 솜씨'가 아닌 '드워프의 작품'이란 표현에 좌중은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다이아나가 뮤리엘에게 선물한 것은 써클렛과 귀걸이로 이루어진 장신구였다. 하지만, 백금과 황금 그리고 오리하르콘이 적절히 조화된 위에 정교한 세공이 어우러져, 무어라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드워프의 작품'을 보기란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고, 이미 알려진 드워프의 작품들의 소유주는 모두 공개된 상태였다. 결국 다른 제국의 사절단들은 암암리에 진행된 첫번째 승부에서 패배의 쓴 잔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누가 보아도 에디우스의 충고 - 8써클 마법사인 황제에게 아티팩트를 선물하는 것은 무모한 일 - 를 받아들여 장신구 자체의 가치만으로 승부한 리카르도와 의외의 변수인 다이아나의 선물을 황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하투아에서도 상당히 귀한 장신구를 선물했으나, 이미 드워프의 작품과 블루드래곤의 눈물을 본 후라, 그저 예의상의 치사만 들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황녀의 첫 춤의 상대에 주목했으나, 결과는 역시 실망스러웠다. 리카르도의 옆에 다이아나가 딱 붙어 서 있는 것을 보고 희망을 걸었던 다른 제국의 사절단은 황녀가 그 옆에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에디우스에게 시선을 보내고, 에디우스가 그에 응답하듯 앞으로 나서자 다시 절망을 곱씹어야 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다이아나 경과 만나셨나 보군요" "그걸 어떻게 아셨지요?" "다이아나가 어제 밤에 뛰어 들어와서는 정신없이 선물을 골랐기 때문이죠" "아..." "아마 황녀를 상당히 좋아하나 봅니다" "저도 다이아나 언니가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다이아나 언니와 특별한 사이세요?" 당돌하게 묻는 뮤리엘의 태도는 한 점의 그늘도 없었다. 에디우스는 어떤 여성이라도 넘어갈 듯한 미소를 띄우고는 이전 황태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아, 그럼 제가 에디우스경을 좋아해도 다이아나 언니를 배신하는 것은 아니군요" 분명히 실망할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뮤리엘은 한 점의 흔들림 없이 에디우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재밌는 황녀잖아! 다이아나가 좋아할 만도 하고, 별로 문제도 없을 듯 하군' 에디우스는 당돌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그녀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뮤리엘은 춤을 추는 내내 우아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첫 곡이 끝나자, 황녀의 주변에는 첫번째 상대는 놓쳤지만, 기회를 노린 이들이 몰려들었고 뮤리엘은 누가 보아도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 모두와 한 차례씩 춤을 췄다. 리카르도는 황녀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른 다이아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춤을 추지도 않으면서 황녀에게 신청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꼬투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우스 덕에 상당한 춤실력을 습득하는데 성공한 다이아나와 평생을 황궁에서 자란만큼 역시 누구에게 못지 않을 리카르도는 황녀의 커플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름다운 여백작님께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두 곡을 연달아 춘 후, 자리로 돌아온 다이아나에게 팔을 내민 것은 하이센의 황제 켈러비안이었다. 황제의 춤신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터라, 다이아나는 다시 푸른 머리의 황제에게 이끌려 플로어에 나섰다. "혹시 제 딸이 저에 대하여 경고를 하지 않던가요?" "그.. 그건....." "역시 그랬나보군요. 아름다운 그대에게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었지만, 저 또한 아버지인지라 딸의 경고로 그저 춤만 추고 물러나야만 한답니다." 황제는 소문난 바람둥이 답게 그야말로 닭살이 잔뜩 돋을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중성적인 외모와 어울려 그다지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이아나는 뮤리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해 보았을거라고 단언하면서도 딸이 무서워서... 를 연발하는 황제로 인해 웃음을 터뜨렸다. 의례적인 곡이 하나 끝났을 때 켈러비안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잠깐 보이더니 슬쩍 손을 들어 신호를 하는 듯 했다. "와아~! 드디어 나왔다!!" 상당히 단순한 기본스텝을 돕는 듯하던 느린 템포의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듯한 세 박자 템포로 바뀌었다. 그 순간 황제는 다이아나를 잡고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워낙 리더를 잘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 주일이나 에디우스에게 교습을 받은 다이아나는 쉽지 않은 황제의 춤을 충분히 따라갔을 뿐만 아니라 그에 뒤지지 않게 우아한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황제가 무도회장에서 파트너와 함께 자신의 춤실력을 선보이는 일은 하이센에서만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을 감상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보통은 황제가 뀌어난 실력으로 여성의 춤을 커버하면서 추는 것이 대부분이었지, 다이아나처럼 완벽하게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춤을 추는 여성은 없었다. 어느 덧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까지 자신의 춤을 멈추고 황제와 다이아나에게 플로어를 비워 주었고, 둘은 꽤 넓은 플로어 구석 구석을 누비면서 유감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흥, 죽 쒀서 뭐 줬군!' 누군가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지만...... 물론 이를 간 당사자는 다이아나에게 춤 교습을 시켰던 에디우스였고, 꽤 길었던 춤이 끝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면서 박수를 쳤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딸한테 약속을 해주지 말 걸 잘못했나 봅니다!" 켈러비안은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고,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다이아나는 당황한 나머지 오히려 무표정해졌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춤까지 배우신 겁니까? 쉽지 않았을 듯 합니다만...." 켈러비안의 말에 다이아는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다이아나로서도 이 춤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에디우스는 마치 이 정도는 기초라는 태도를 고수했었기 때문이다. 속내야 어떻든 간에 다이아나는 거짓말을 안하는 선에서 켈러비안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춤을 가르치신 분이 워낙 꼼꼼하셨어요!" "누군지 궁금하군요" 다이아나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켈러비안이 다이아나를 이끌고 그녀의 일행 사이로 가서 정중히 오늘의 파트너인 리카르도 황태자에게 인계했다. "대단한 보물이군요. 부럽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카르도 또한 황제의 말에 빠질 데 없이 대꾸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약간 불안한 기운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이 바람둥이 황제는 확실하게 다이아나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야기가 오갔던 다이아나야 느긋했지만, 그런 전후사정을 알 수 없었던 두 남자는 속을 태울 수 밖에 없었다. "에디우스 경의 교습이 대단했었나 보군요" 리카르도가 못당하겠다는 듯이 명랑하게 말을 걸어왔다. "엄격한 선생님이었죠" 다이아나가 어느새 옆에 서 있는 에디우스를 힐끗 보고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사적인 이야기에요. 아, 어제밤에 뵌 분이 나오시려나 보군요" 다이아나로서는 에디우스나 리카르도에게 켈러비안 황제와의 대화를 친절하게 말해 주어 안도하게 하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을 위해 저희가 특별히 초청한 음유시인인 솔베노님의 축가가 있겠습니다." 마법을 이용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플로어 중앙에서 갑자기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하프를 든 나무와 같은 초록의 엘프의 모습이 조명 아래 환하게 드러나자,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기대감에 찬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름다운 뮤리엘 황녀님의 17세 생일을 맞아, 저 엘프 솔베노가 조그만 선물로 이 노래를 바칩니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 차례의 박수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터져 나왔고, 박수소리가 잠잠해져 고요한 상태가 되자 엘프는 하프를 튕기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전날 밤 다이아나가 본 것과 같이 하프의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운디네까지 나타나 실프와 운디네들은 자신들의 소환자 주위를 돌면서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나는 밤보다 까만 어둠을 보았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빛보다 빛나던 그대의 머리카락 걸음 걸음 마다 흔들리는 밤의 어둠같은 색의 아름다운 빛 나는 또 보았네 그 어떤 호수도 가질 수 없는 푸르름을 호수도 갖지 못할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두 개의 눈동자 이 땅위에 나를 서게 한 후 처음으로 내 영혼이 노래했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모든 존재들 속에 나는 한 존재를 보았네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전부 어둠이되 빛인 그대 주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날마다 기도했네 엘프는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그 후로도 몇 속을 더 불러야만 했다. 그 틈에 뮤리엘이 다이아나 일행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고, 다이아나는 노래에 열중해 있다가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이 뮤리엘임을 알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언니, 선물 정말 고마워요" 뮤리엘이 노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해 줘서 나도 기뻐요" 다이아나도 뮤리엘에게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솔베노님은 뮤리엘을......" "아! 저도 알긴 하는데,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그랬군요" 솔베노의 노래가 끝나자 다이아나와 뮤리엘을 따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황태자에 대한 예의는 첫 곡을 양보함으로써 어느 정도 지켜진 것이나 다름 없었으므로, 무도회의 양대 꽃에게는 한 없는 춤 신청이 잇달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린 들러리가 된 것 같군요" "후훗.. 대 칼라임 제국의 황태자께서 들러리라니, 지나가던 오크가 웃을 일입니다." 무도회는 1주일간 계속될 예정이었다. 매일 밤, 솔베노의 노래를 비롯하여 보기 힘든 볼거리들이 즐비했으나, 두 남자는 그다지 즐겁다고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그래서 그 백작이라는 남자가요............." "어머, 나한테도 그러더라......." 한 쪽에서 아직도 낭랑하게 들려오는 두 여성의 관계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뮤리엘은 첫 무도회 이후에 어차피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칼라임의 사절이 묵고 있는 방을 제 방 드나들 듯이 하고 있었다. 리카르도의 초기의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뮤리엘의 관심은 다이아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다이아나도 그런 뮤리엘을 자연스럽게 대했기에, 그야말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두 남자는 찬밥 신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제국의 황녀가 칼라임 제국의 사절단 방을 매일 드나드는 것도 모자라 매일 밤의 무도회에서 다이아나의 일행들과 유독 친분을 과시하는 바람에 아무 것도 건진 것이 없건만 무도회장에 들어서면 따가운 시선들을 의식해야 하는 리카르도와 에디우스 였다. 아름다운 두 여성의 대화를 듣는데다가 뮤리엘의 활달한 성품으로 인해 오히려 대화 속에 끼어들 여지가 많았기에, 그것 만이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두 남자가 뮤리엘에게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럼... ...... 라는 건가요?" "푸후훗! 솔베노님도 참~!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라니까요" "하지만......." 매일같이 방문하는 뮤리엘의 옆에는 그림자처럼 솔베노가 있었고, 두 여성은 이 엘프에 관한 한 어떤 경계심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이 삼 일을 넘게 지속되자,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는 어느 정도 동지의식이 확실히 생길 정도였다. 다이아나는 뮤리엘로부터 전 대륙에서 극비로 취급되는 그녀의 성장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알게 된 현실은 사실 소문만으로 알려 진 황녀에 대한 선입관과는 전혀 정 반대의 것이었기에, 다이아는 오히려 뮤리엘에 관하여는 더욱 호감을 가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 17년전, 하이센 황궁 안 **************************** "응애~! 응애~!" 기나 긴 산고의 고통 끝에 축복받아 마땅할 아기가 태어났지만, 출산을 돕던 산파들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아시리스는? 아기는 무사한가?" 초조하게 방 문 앞에 대기하던 황제가 물어오자, 이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제국의 첫 자손이자 황녀의 탄생을 축하하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황제의 뒤에서 속삭이는 이들의 말은 전혀 웃는 얼굴과는 달랐으니...... "세상에! 내 생전 저렇게 못 생긴 아기는 처음 봐!" "그러게요~! 주신도 무심하시지, 아무래도 우리 아기씨는 아프로테이아님의 은총은 하나도 받지 못한 것이 틀림 없어요" 태어난 아기는 그야말로 못난이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칙칙한 젖은 검은 머리카락에 붉고 쭈글쭈글한 피부야 어쩔 수 없는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이라고는 해도 바둥거리는 아기의 얼굴에는 거의 코를 찾아 볼 수 없었고, 입만 보이는 듯 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황비와 전무 후무한 외모를 자랑하는 황제의 사이에서 낳은 첫 아이가 이렇게 흉한 모습일 꺼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이는 삼 개월이 지나자, 젖살만 피둥피둥하여 턱은 두 개에 코는 겨우 구멍으로나 윤곽을 확인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황제나 황비가 아이를 예뻐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뮤리엘은 살아 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황비 쪽 가문의 문제이기도 했다. 원래 황비인 아시리스의 가문에서 낳은 아이들은 어려서 납작한 코와 까다로운 성격을 자랑하다가, 5-6세가 되면서 차츰 콧날이 서고 이목구비가 또렷해지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어느 날인가 시녀들의 쑥덕거림을 들은 황제는 그 노여움이 극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황녀와 황비를 시중 드는 이들은 모두 황비의 집안에서 일하던 가솔들로 교체되었으며, 황제는 어리지만 일찍부터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황녀를 걱정하여 그녀를 다른 사람들 앞에 보이기를 꺼려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6-7년 간 계속되자, 제국에는 황녀에 대한 신비스러운 풍문이 떠돌았고, 황제는 이러한 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이후로 황녀를 계속 숨겨서 키웠다고 했다. 덕분에 뮤리엘은 황녀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아주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철이 들면서, 오히려 뮤리엘이 자신의 얼굴을 보이기를 꺼려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뮤리엘은 자신의 외적인 특징이 모두 드러났을 경우, 자신의 활동 범위가 극히 제한될 수 밖에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일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니, 뮤리엘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대륙에서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여인' 중 두 번째 인물이 되었다. "두 번째라고?" 뮤리엘이 이야기를 마치자, 다이아나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네. 두 번째지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첫 번째였다고들 해요. 그건 성녀님이 나타나기 전의 일이죠. 대륙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의 첫 번째는 바로 성녀님이라고들 하더군요" 뮤리엘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다이아나는 '성녀'라는 과거 자신의 그림자와 같은 하나의 인물이 얼마나 과장되고 확대되었는지 대충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분은 제가 듣기에도 대단한 분이더군요. 인간의 가치관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 우리 엘프들조차 성녀님에 대하여는 상당히 평이 좋답니다. 얼핏 듣기로 그 분은 우리 엘프와 드워프 종족 뿐만이 아니라 오크들같은 몬스터들에게도 관대하셨다더군요" 솔베노가 끼어들어 엘프들의 의견을 대변하자, 이번에는 뮤리엘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에에엣? 그럴리가..... 오크는 몬스터잖아요" "그러니까 성녀님이죠. 들리는 말로는 오크종족의 일부가 성녀님의 지도 하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종족을 중심으로 약탈하지 않는 오크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설마요......" 뮤리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느다는 엘프의 말이라도 해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어쩌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다이아나는 당황함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니라더군요. 그 분을 본 한 엘프가 지은 노래가 있어요 들어 보실래요?" 솔베노의 노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다이아는 특히 이 화재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반가워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빛은 겨울 날의 햇살을 받은 얼음 빛 그보다 더 아름다운 빛은 모든 종족을 사랑한 성녀님의 머리카락 은빛을 모두 모아 그 위에 햇살로 금빛을 만들어 곳곳에 뿌리면 그 분의 머리칼이 될까? 사랑 넘쳐 빈민가의 아이들이 배를 두드렸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서지 않던 엘프와 드워프가 손 잡았네 우악스러운 오크들도 그 분의 손길 아래 얌전하게 사랑을 받아들였네 아름다운 이 주신의 축복을 받으라 모든 신들의 사절 우리의 성녀님 아픈 자와 가난한 자 천한 자와 약한 자 성녀님 앞에 서면 행복해지리. 성녀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한 노래는 엘프들의 노래 답게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에 대한 과한 칭찬으로 가득한 노랫말에 살짝 얼굴이 상기되었고, 뮤리엘은 그런 성녀를 동경하는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노래를 들었다. "언니, 저는요 성녀님같이 되고 싶어요" "성녀님 같이?" "네. 오크를 사랑할 자신을 솔직히 없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만이라도 외모와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고통받지 않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요" 다른 일을 하는 척 했지만, 이들의 대화를 귀를 귀울이던 리카르도는 뮤리엘의 뜻밖의 발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너는 귀족과 아니, 너와 평민들이, 그리고 천민들이 똑같이 귀하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은 그러지 않지만, 제가 보기엔 똑같다고 생각되요. 오히려 귀족들이 못 따라갈 면이 더 많을 꺼에요. 사실 제가 황성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녔거든요. 귀족들은 말이죠, 작위와 외모가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에 대해선 어떤 것도 알려고 들지 않아요. 하지만, 평민들은 다르죠. 그들은 서로 주고 받을 줄 알더라구요" "너무 좋은 것만 본 것이 아닐까? 나도 평민 출신이란다. 평민들도 천민들을 멸시하지. 그리고, 평민들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단다!" "그거야 물론이에요. 하지만, 귀족들에 비하면 훨씬 그들이 솔직해요." 뮤리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리카르도는 이러한 뮤리엘의 발언에 다이아나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씁쓸해졌다. 자신은 저 어린 황녀보다 오히려 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아무리 '시찰'과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어려서부터 뼈 속 깊은 곳에 새겨진 황족으로서의 자긍심은 뮤리엘과 같은 자유로운 사고를 이미 초기에서부터 배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거나하게 마시고 들어와 쓰다 말고 나간 몇 페이지를 작성해서 올렸는데, 말이 되기는 하는 건지는 내일 다시 봐야 할 듯합니다. 제가 처음 소설을 쓰면서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선작 수가 천을 넘으면 광고를 해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오늘 만난 언니인데요 http://www.kikisilver.com 에서 악세사리 샾을 한답니다. 은제품 중심이라 귀걸이 류는 저렴하고 상당히 독특해요 혹, 필요하신 분은 한 번 가보셔요. 저도 세 쌍 있는데, 후회하지 않을 구매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거기 가시게 되면 제 글을 보고 왔노라고 꼭 한 마디 해주세요 이렇게 빠른 시일에 천 분이 넘으실 줄을 제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머나 먼 훗날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졸지에 이렇게 당하고 보니 현실감이 없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구요 더 쓰고파도 안 쓴는 게 나을거에요 취한 글이 나오면 뒷수습만 힘들어 질테니까요 다들 즐거운 밤 되시고 평안한 밤 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솔베노님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오히려 저희 엘프나, 드워프들이라면 특징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요" "왜 그렇죠?" "그만큼 다양하다고 할까요? 어떨 때는 인간만큼 아름다운 생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한데, 어떤 면에서는 몬스터보다 못하다고 생각 될 때도 있거든요" 엘프인 솔베노의 대답은 솔직했다. 다이아나는 솔베노가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하면서 흘깃 뮤리엘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틈에 대화의 일각을 차지한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도 다이아나의 질문과 솔베노의 대답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신들의 답을 찾고 있는지, 골몰한 표정이었다. "언니, 아마 그게 가장 인간다운 건지도 몰라요" "뭐가요?"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변하기 쉽다는 것, 다양하다는 것......"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뮤리엘님은 인간이 오크보다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동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까?" 리카르도가 뮤리엘에게 물었다. 드워프 마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리카르도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엘프인 솔베노야 이미 비슷한 의견을 말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다이아나의 사고는 알고 있었으므로, 뮤리엘이 생각이 궁금했던 것이다. "흠... 경우에 따라서는요" "그래도 오크는 몬스터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한낱 몬스터보다 못하다는......" "그건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분류한 것이지요. 오크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생각해 보셨나요?" "그... 그런......" "저 또한 인간이기에 말은 이렇게 해도 오크들을 인간과 똑같이 대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무조건 오크보다 더 월등한 존재라는 단언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리카르도는 에디우스를 힐끗 보았으나, 에디우스는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만일 이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십중팔구 틀림없이 리카르도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헌데, 지금은 오히려 리카르도만이 특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이들 두 여성과 세 남성들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했는데, 다이아나는 뮤리엘과만 상당히 친근한 대화를 하고 있었고, 에디우스에게는 에디우스 자신의 반응에 따라 조금씩 다른 태도를, 리카르도에게는 여전히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솔베노에게 만큼은 그의 종족적인 특성과 그가 확실히 뮤리엘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안 때문인지 시종일관 따뜻한 태도로 대해주었다. 하여, 우습게도 리카르도의 경우는 특히 뮤리엘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다이아나와 어느 정도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출발 전과는 달리 오히려 리카르도가 뮤리엘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뮤리엘은 솔직하고 밝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리카르도나 에디우스에 대한 호감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뮤리엘의 관심은 주로 다이아나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 작은 모임의 중심은 당연히 뮤리엘과 다이아나, 이 두 여성에게 몰릴 수 밖에 없었다. "후원에 산책가지 않을래요?" "좋아요" 두 여성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나서자, 당연하다는 듯이 솔베노가 그 뒤를 따랐고, 초대도 받지 못했지만, 솔베노에게 말을 걸어가면서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도 은근슬쩍 둘의 뒤를 따라 나섰다. "저, 궁금한 것이 있는데, 혹시 곤란한 일이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기밀에 속하는 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소문에 의하면 황궁의 일을 무엇이든지 황제께서 알고 있다는 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다이아나의 질문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의 질문은 황궁 곳곳에 탐지장치나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뮤리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빠르게 답을 해 주었다. "아하! 그거 말이죠?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아바마마가 마음만 먹으신다면 황궁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실 수 있지요. 하지만, '친구'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물어보지 않으셔서 미처 대답하지 못했는데, 언니 일행들의 방은 절대 엿볼 수 없으니 안심하세요. 제가 이미 다 조치를 취해 놓았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지 않는 한 제가 있는 곳은 몰래 볼 수 없다구요" 즉, 다이아나의 일행의 방에선 이미 도청장치가 제거되었다는 것이고, 황제가 그만큼 뮤리엘을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리카르도는 외국에서의 의심 - 황녀가 실질적인 후계자라는 - 이 거의 사실이 아닌가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군요. 사실 좀 불편했어요. 누군가가 나를 몰래 본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선의로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해도, 다희로서의 생의 부분 부분들이 전부 영상에 의해 이 세계에서 관찰되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불쾌했었다. 그 대상이 어머니나 아버지일 때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하비우스나 에디우스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다이아나의 말에 에디우스의 안색이 약간 변한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에리나와의 일을 절대 드러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에디우스는 속으로 자신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이거, 다이아나경 덕에 우리도 상당한 대우를 받는 셈이 되었군요. 하하하하!" 리카르도가 거침없이 둘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다섯 명의 아름다운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후원의 꽃들과 어울려 그야말로 그림같은 풍경의 일부가 된 채로 여기 저기 걸어다니기도 하고, 가끔씩 앉아서 쉬기도 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솔베노님은 어떻게 뮤리엘과 아는 사이가 되신 거에요?" "그건 말이죠..." 뮤리엘의 설명에 의하면 솔베노는 뮤리엘의 음악선생님 같은 위치로 초청되었다고 했다. 귀족가의 여식이라면 한 두 개의 악기를 다룬다든지, 아니면 노래를 한다든지 하는 것이 '교양'처럼 여겨졌고, 도무지 그런 면에 관심이 없는 딸을 위해 황제가 특별히 초청한 엘프가 솔베노였던 것이다. 다행히 황제의 그런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초청된 선생들이라면 질색을 하던 뮤리엘은 처음 본 이종족인 솔베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약간의 '효과'는 거둘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럼 노래? 하프?" "흠... 그게.... 둘 다 배우긴 했는데요......" "......?" "하프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구요. 조금 세게 당기면 줄이 끊어지질 않나, 거기에 아무리 해도 솔베노님 같은 소리가 나기는커녕 소음만 심해지지 뭐에요? 그래서 집어치웠죠 뭐~!" "푸훗..!" 입술을 내밀면서 모든 것이 하프 탓이라는 듯이 솔베노가 들고 있는 하프를 노려보면서 말을 하는 뮤리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다이아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솔베노는 그런 뮤리엘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우지 않더니, 뮤리엘 대신 변명에 나섰다. "그건... 엘님이 너무 예민하셔서 그렇답니다. 처음엔 누구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힘든데, 엘님은 그걸 못참아 하시더라구요. 절대 재능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정말 재능이 없는 이들은 소음을 내면서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구요" "아.. 그것도 그렇겠네요. 그럼 우리 뮤리엘은 약간 참을성이 부족했던 거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뮤리엘양의 목소리가 워낙 뛰어나서, 굳이 하프까지 배우지 않아도 상관 없을 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솔베노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뮤리엘이 드물에 약간 무안한 표정을 지었고, 다이아나는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리카르도는 무언가 꺼리를 발견한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럼 뮤리엘양의 노래를 청해서 들어보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뭐, 다이아나양도 아시다시피, 저도 음유시인으로 명성을......" 다이아나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었고, 솔베노나 뮤리엘, 에디우스는 의외라는 시선으로 리카르도를 쳐다보았다. 리카르도는 일부러 뒷 말을 잇지 않고 질질 끌다가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엉뚱한 결론을 말함으로써 다시 여러 명의 웃음을 자아냈다. "날리기는커녕... 주점에서 쫓겨나야 했거든요......" 다이아나는 군가처럼 멋없이 울려퍼지던 리카르도의 노래를 기억해내고 지나치게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다른 일행에 섞여서 한참을 웃었다 결국 다이아나와 솔베노의 격려와 리카르도의 장난 어린 독촉, 에디우스의 기대하는 듯한 눈빛에 뮤리엘은 솔베노의 하프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했다. 뮤리엘의 목소리는 마치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깨끗한 고음의 소리였다. 맑음 울림이 있는 소리가 명랑한 곡조를 타고 울려 퍼지자, 다이아나의 기분조차 상쾌해지는 듯 했다. 다이아나로서는 이쪽 세상의 노래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뮤리엘의 노래가 결코 솔베노의 노래에 뒤지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베노의 노래가 마치 악기의 하나처럼 티 한 점 없는 완벽함이라면 뮤리엘의 노래는 조금씩 거친 면은 있지만, 열정과 감정이 드러났고, 그만큼 힘이 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재촉에 못이겨 뮤리엘은 한 곡을 더 부르고, 솔베노와 함께 아름다운 이중창으로 다른 곡을 더 불러서 마무리를 했다. 기회를 놓칠 리카르도가 아니었다. "흠흠... 두 분의 노래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다이아나양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 저로서는 최고라고는 못하겠군요" "무.. 무슨....?" 다이아나는 리카르도가 의외의 말을 하자, 당황했다. 하지만, 리카르도의 의도대로 뮤리엘이 졸라대기 시작했고, 솔베노까지 간절하게 부탁하는 말을 하자 더 이상 사양하기 힘들었다. 다이아나는 뮤리엘을 보면서 그리고 늘상 그리워하던 친구 지혜를 떠올리면서 '친구'라는 노래를 불렀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마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 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마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달리는 마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노래를 마친 다이아나의 눈에는 남겨놓은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었다. "와아~! 너무 아름다워요. 처음 듣는 노래인데......" "저도 처음 듣습니다. 정말 아름답군요. 실례가 안된다면 좀 배워도 될까요?" 뮤리엘의 감탄에 이어 솔베노가 감격한 듯이 나서서 노래를 배우기를 청했다. 에디우스도 이번만큼은 흥미가 동했는지, 다이아나가 한 소절씩 부르자, 다른 이들의 틈에 끼어서 바리톤의 음성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솔베노와 다이아나는 몇 몇 곡들을 서로 가르쳐 주었고, 노래를 잘 모르는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도 그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솔베노는 거의 모든 곡들을 한 두 번만 듣고도 잘 따라부르는 재능이 있어서, 다이아나는 자신이 아는 곡의 테너파트를 가르쳐 주고, 뮤리엘이 멜로디를 부르게 하고는 자신은 알토파트를 내어 화음을 맞추었다. 그런 세 사람의 음성 안으로 어느 틈엔지, 에디우스가 베이스 파트를 치고 나오자, 네 남녀의 아름다운 음색이 후원을 가득히 맴돌았다. 리카르도만이 그 안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청중의 입장에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는 둥, 온갖 제스츄어를 취해 가면서 그들을 격려하는 중에 오후의 해는 아쉬운 빛을 남기고 점점 아래로 기울어 갔다. "언니,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응? 뭔데요?" "이제 무도회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잖아요. 우리 옷 맞춰 입어요" "네?" 저녁 연회의 시작을 두,세 시간 앞두고 다이아나의 방으로 쳐들어온 뮤리엘은 다이아나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오오오~!" "정말 대단하군요~!" "마치 신들께서 강림한 듯한 아름다움이지 않습니까?" 5명의 남녀가 나란히 입장하자, 연회장에서는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켈러비안 황제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라움을 숨기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뮤리엘의 주도 하에 다섯명의 남녀가 조화로우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살려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뮤리엘은 흑발을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가 옆으로 퍼지는 일반적인 스타일이 아니라, 부드러운 옷감이 아래로 흐르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천 자체에 금박으로 수가 놓여 있었고, 하이웨이스트에 소매 없이 팔과 목이 드러나 있어 하얗고 긴 목과 팔의 살결을 더욱 돋보기에 했다. 옆의 다이아나는 뮤리엘과 거의 같은 디자인이지만, 팔이 있는 드레스로 소매 역시 조임없이 흐르듯이 퍼지면서 내려와 팔을 올리면 아래로 흘러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뮤리엘과는 대조적으로 다이아나의 드레스는 흰 색이었는데, 천의 재질과 금박으로 놓인 수는 뮤리엘의 것과 동일해서 둘은 대조적이면서도 상당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솔베노는 늘상 입는 옷의 스타일이었지만, 녹색의 천의 재질은 역시 두 여성의 것과 같은 듯했으며, 금박의 수도 동일했다. 대조적으로 리카르도와 에디우스는 역시 검정과 흰색의 전형적인 파티복을 입었는데, 이 둘의 옷은 솔베노와는 달리 남성적인 디자인을 기조로 하여 다른 세 명의 옷과는 다르게 힘이 있는 천으로 되어 있엇지만, 색에 있어서 금색으로 장식을 해 한 일행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검을 다루는 남자 답게 꼭 조인 상의와 하의는 잘 다듬어진 체격을 강조하는 모양이어서 보는 여성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간의 무도회에서 주인공이나 다름없던 이들이 마치 친근함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솔베노의 푸른 색을 중심으로 양쪽에 흑과 백을 강조하여 나타나자, 연회장은 처음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가 다시 감탄의 소리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이런...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군" 켈러비안은 재미있다는 듯이 이 눈길을 끄는 이들을 바라 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띄고 젊은 남녀들의 옆에 다가가서는 농담을 던졌다. "이제 늙었다고 이 에비는 끼워주지도 않다니, 정말 서운하구나 뮤리엘" 짐짓 서글픈 중년을 표현하려고 애를 쓰는 황제였으나, 외모는 전혀 아니어서 전혀 동정심이 일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어머.. 아바마마도 참. 이제서야 나이를 깨달으시다뇨. 이 모든 것이 주신의 은총입니다아!" 뒷꼬리를 길게 끌면서 장난스럽게 뮤리엘이 대꾸하자, 황제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데, 너는 어쩌려는 것이냐? 성년식의 처음 의도를 잊은 것은 아니지?" 뮤리엘을 데리고 슬쩍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켈러비안이 엄하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저한테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잖아요"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다만...... 너무 저들에게 매달려서 다른 후보들은 무시한 것 아니냐?" "훗.. 아니에요. 이미 볼 만큼 보았어요. 하지만, 에쉬크리머 황자는 너무 유약해요. 하투아의 저 백작인지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만요" "케르크 드 베그드안 백작 말이냐? 그는 어떻더냐?" "이미 아실텐데요? 야심만 그득하고 능력은 턱도 없이 딸리는 인물이죠. 아버지 권력 아래에서 오냐 오냐 키워진데다가 스스로는 상당히 잘났다고 착각하고 있더라구요" "흠......" "개중에는 리카르도 황태자가 낫긴 해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도 역시 그냥 황족일 뿐이에요. 다른 이들처럼 개선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말이죠" "결국 하나도 없다는 게냐?" "에디우스 경이 가장 낫긴 한데, 그의 마음은 다이아나 언니 이외에는 안중에 두지도 않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도 리카르도 황태자보다는 에디우스경 쪽이 언니의 상대로는 나아 보이더군요. 그를 언니 옆에서 뺏어 오는 것은 내키지 않네요" "휴유~! 그럼 결국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이냐?" "그럴리가요. 가장 유능한 사람을 얻은 셈이죠" "뭐?" "부탁이 있어요" ******************************************************************************* 저도 뮤리엘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요 ^^;;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당당하죠. 멋지잖아요? 참, 앞 글의 광고(?) 땀시 불쾌한 분들이 있으신 듯 한데, 어차피 워낙 작은 사이트라서 도와주는 뜻에서 올린 거에요 저에게 어떤 이득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무슨 추천인 있는 사이트도 아니구요 ^^;;)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초기 소설을 시작할 때 장난처럼 약속한 것이긴 해도 약속은 약속이니만큼 지키고 싶었어요. ^^;;; 아, 술은 마실땐 즐거운데 역시 나이가 나이인지 숙취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네요 아이구 속이야~! 자 그럼 오늘도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케르크 드 베그드안 백작은 하투아의 양대 공작 중 하나인 드베르미시 드 배그드안 공작의 장남이었다. 처음 하이센 제국의 사절로 확정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케르크는 자신이 가기만 하면 황녀를 품에 안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땅땅 쳐 대었었건만, 지금 그에게 남겨진 것은 모멸감 뿐이었다. 황녀는 그의 춤 신청을 거절하지도 않았고, 그가 하는 말에 즐겁게 대꾸를 하는 듯 했지만, 그 뿐이었다. 연일 열리는 무도회에서 황녀는 접근해오는 이들과 한 번씩의 춤만을 허락하고는 늘상 칼라임의 사절들과 어울리곤 했다. 아랫것들의 소문에 의하며, 무도회를 여는 시간을 제외하고 황녀는 칼라임 사절단의 방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파트너에 해당되는 여자를 데리고 온 리카르도 황태자에게 황녀가 호의를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칼라임에서는 처음부터 완곡한 거절의 표시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거늘, 그런 그들에게만 호의를 보이는 황녀를 케르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초조하기는 중앙연합국의 제2황자 에쉬크리머 라 카오시아 쥬이도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황위가 형님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 황녀는 단 한 가닥 남은 희망일 수 있었다. 물론 형과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크게 나이차가 나지 않는 정통 황자라는 존재는 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자신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평생을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 살아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뮤리엘 황녀는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어떤 특별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의 감탄사 속에 연합국과 하투아의 사절들은 이제는 보라는 듯이 한 세트임을 노골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다섯 남녀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이제 연회는 하루를 남겨 놓고 있었고, 더 이상 기회를 바라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니콜리에 레 다이온 백작의 충고에 따라 먼저 움직인 것은 에쉬크리머였다. "언제 보아도 두 분은 다정해 보이십니다" 황제와 밀담을 마치고 돌아온 뮤리엘 황녀는 다이아나와 소근거리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 불쑥 나타난 것은 중앙연합국의 제2황자, 에쉬크리머였다. "그런가요?" 뮤리엘이 다정해 보인다는 말이 상당히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꼭 자매같아 보이는군요" "정말요?" 뮤리엘이 상당히 즐거워하자, 에쉬크리머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느 틈엔지 케르크도 이들 주변으로 다가서 있었다. "글쎄요. 일개 평민 출신이 아무리 백작이라고 하나 감히 대 제국의 황녀와 자매같아 보인다는 것은 뮤리엘 황녀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볼 수 밖에 없군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비비꼬였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어투로 케르크가 비웃듯이 말하자, 어느 정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단 번에 싸아해졌다. 리카르도는 드물게 얼굴을 굳혔고, 에디우스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의도와 달리 꼬투리를 잡힌 말을 제공한 셈이 되어버린 에쉬크리머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케르크경, 그런 말씀은 너무 실례가 아닙니까?" 어찌 되었던 말을 꺼냈던 에쉬크리머가 약하게 반박을 했다. "실례라... 누구에 대한 실례라는 것입니까? 저 평민출신의 여자에 대하여 그렇다는 것입니까? 흠. 수 백년을 내려온 전통있는 집안의 자제인 나로서는 대 제국의 황태자께서 저런 여자에게 쩔쩔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사자인 다이아나만이 평온했고, 뮤리엘의 눈빛이 잠시 번뜩였지만, 케르크는 오히려 한 술 더떠서 모욕적인 말을 서슴없이 지껄여 댔다. "귀하게 자라신 분이라 뮤리엘 황녀님이 저 여자에게 홀린 것이 분명합니다. 하긴, 별 실력도 없어 보이는데, 백작의 자리를 꿰 찰 정도면 그 능력이 대단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같은 귀족들이 천한 평민들과 동격이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더군다나 뮤리엘 황녀님처럼 고귀한 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말씀입니다." 원래부터 주위의 시선은 다이아나와 황녀 일행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며칠 간의 연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이들의 대화에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온갖 주의를 귀울여 이들을 탐색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케르크의 태도에 다들 흥미진진한 다음을 기대하는 듯했다. "아, 물론 저와 다이아나 경을 자매라고 한다면 실례가 되겠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그건 에쉬크리머 황자님의 실수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냉랭한 표정으로 돌변한 뮤리엘이 예상 밖의 말을 하자, 케르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니까요. 어찌 감히......" 케르크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할 때, 재빨리 뮤리엘이 앞서 한 말의 뒤를 이으면서 백작의 말을 가로챘다. "실력으로 직위를 받으신 다이아나 경과 저처럼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그저 운이 좋아 황녀가 된 사람을 비교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야 다이아나 경에게 상당한 실례가 되는 말 아닐까요?" 뮤리엘의 말은 태생적으로 정해지는 귀족과 평민의 신분의 차이를 부정하는 말에 다름 아니었기에 이 말을 들은 모든 참석자들은 놀라움에 침을 삼켰다. 케르크가 흥분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가? 그럼 황녀께서는 우리같이 뼈대 있는 귀족이나 여기 계신 황족 분들이 저런 천한 평민의 혈통과 똑같다는 것입니까?" "훗. 재미있군요. 뼈대와 전통이라... 그럼 묻겠습니다. 케르크 백작의 가문은 수 백년에 걸친 명문이라죠?" "그렇습니다. 우리 가문은 자그마치 500년을 내려 온 전통있는 귀족 가문입니다." "그렇군요. 하투아 제국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정확히 초대 황제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 2181년이 되었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케르크 백작의 가문은 500년 전에 귀족이 되기 전에는 어떤 신분이었나요?" "그... 그건..." 그제서야 황녀의 질문에 포함된 함정을 눈치 챈 케르크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500년 전 평민이었던 그의 가문은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당시 하급 귀족이 되었다가, 이후 승차를 거듭하여 짧은 시일 안에 고위귀족이 되었고, 그 전통이 500년을 내려온 것이었다. "우습군요. 결국 그 전에는 귀공의 그 대단한 가문의 선조께서도 평민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귀공은 다이아나 경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평민으로써 실력으로 귀족이 되어 지금 댁의 가문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한 조상님을 모독한 것이군요." "그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케르크는 흥분한 나머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뮤리엘 황녀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아하, 원래 귀공의 가문에서는 과거의 조상분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 전통인가 보군요. 아니면, 아예 평민이었던 조상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전통입니까? 그것이 귀공의 가문의 전통인가요? 아니면 하투아 제국의 전통인가요?" 황녀의 질책은 가차 없이 이어졌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데다가, 잘못하면 국가 망신을 시켰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상황에 다르자 케르크는 당황했다. 실제로는 모든 제국들 중 실력에 따른 귀족 작위의 습득이 가장 잘 되는 곳이 하투아 제국과 하이센 제국이었다. 두 제국은 산맥과 맞닿은 곳이 넓은만큼 이러한 전통이 가장 잘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현 하투아의 황제인 카이젠의 경우 아무리 오랜 귀족이라 하더라도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상당히 냉혹했다. 그런 카이젠의 태도는 이른 바 전통적인 중앙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그 중앙귀족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번에 참석한 케르크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나마, 카이젠이 타격을 입기 전까지 중앙귀족의 세력이란 것이 몰래 모여서 불평이나 하는 수준이었지만, 카이젠 황제의 몸이 예전과 다르다는 소문과 실제적으로 시우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실익이 없었던 것을 빌미로 조금씩 세력을 키우고 있는 터였다. 결국 케르크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좋습니다. 평민 출신이란 것 만으로 제가 지나친 언행을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력으로 귀족이 된 경우겠지요. 저는 다이아나 경이 진정으로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따라서, 제 사과는 그 실력을 본 후에 정식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이아나 경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사실 다이아나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케르크의 행동은 억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이아나의 실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황태자의 후광으로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케르크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원래 무력으로 치자면, 하투아나 하이센에 비하여 칼라임이나 시우스가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기사의 실력을 비교해 보면 더욱 그랬다. 케르크가 귀족의 아들로 편하게 자랐다고는 해도, 카이젠이 실력도 없는 그에게 백작의 작위를 주었을 리는 없었다. 결국 누가 보아도 이 결투는 케르크가 유리했던 것이다. 실제로 다이아나가 정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케르크가 더 강할 것이 대충 예상되는 바였으니까. 뮤리엘황녀는 궁지에 몰린 케르크가 저토록 비겁하게 나오자, 자신이 다이아나를 궁지로 몬 셈이 되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이아나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런 뮤리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빙긋 웃어 보였다. 굳이 검을 사람의 몸에 겨누고픈 마음은 없었으나, 이 자리에서 다이아나가 물러선다면, 뮤리엘과 칼라임 제국 양 쪽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이다. - 네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상대다. 마나는 전혀 움직일 줄 모르고, 어느 정도의 실력은 있겠지만, 별로 강하지는 않다. 아마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놈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이야. 다이아나는 슬쩍 힌트를 주면서도 전혀 상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에디우스에게 한 번 웃어 주고는 앞으로 나섰다.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은 숨을 삼키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굳이 케르크 경께서 그렇게 제 실력을 확인하셔야 겠다면, 저 또한 명예를 걸고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단호한 말에 여기 저기서 탄성이 들렸다. 다이아나는 냉정한 어투로 한 가지를 명확하게 했다. "다만, 이 모든 일에서 저는 모욕을 받은 대상이니만큼 저에게 지신다면, 정식 사과를 해 주실 것과 더불어 신 앞에서 귀한 존재인 평민들에 대한 귀 공의 폭언 또한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실 것을 원합니다." 케르크는 그런 다이아나의 모습을 보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고 가볍게 대꾸했다. "아아, 물론 제가 진다면 말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앞에서 당신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추도록 하지요. 더불어 물론 내 말을 취소하고 거기에 대한 사과도 할 것이오. 하지만, 다이아나 경께서 지신다면 어떻게 하실 참이요?" 사실 결투 자체가 일방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니만큼 다이아나에게 조건을 거는 것은 절대 공평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케르크는 결코 손해 볼 생각이 없는지, 또 한 번 억지를 쓰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으로 하지요. 되었습니까?" "좋소." "쯧쯧... 그럼 내가 공증을 서도록 하겠네. 하지만, 기억해 두겠네. 내 딸의 성인식이 되는 이런 좋은 자리에서 하투아의 사절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내 따로 그것이 카이젠 황제의 뜻인지 반드시 확인할 것이야!" 어느 틈엔지, 켈러비안 황제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황제의 말은 하투아 사절들의 무례를 엄히 꾸짖는 동시에 그들에 대하여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덕분에 하투아의 사절단들의 안색은 핏기가 가셔 허얘졌으나, 어차피 엎어진 물이었다. 결투는 무도회가 있었던 홀 중앙에서 하기로 했다. 아예 작정을 했는지, 다이아나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에는 어느 틈엔지 중앙 부분에 주위의 피해를 없애기 위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케르크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그런 케르크의 모습을 살핀 에디우스가 입가에 조소를 띄더니 다이아나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모종의 조취를 취했다. "자 그럼 결투를 시작하도록 하게. 결투는 한 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 원칙이네. 실드를 치면 시작하도록!" 황제의 선언이 있은 후 둘의 대련장에는 투명한 실드가 씌워졌다. "괜찮을까요?" 뮤리엘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켈러비안에게 물어왔다. 물론 다이아나도 괜찮다고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웬지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만 조금이라도 불안감이 가실 듯 했다. 하지만 켈러비안은 상당히 기분이 안 좋은 듯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막 꺼내 든 케르크의 검에 고정되어 있었다. "훗. 건방진 년, 끝장을 내주지" 실드가 작동되자 마자, 검을 빼 든 케르크는 태도를 돌변시켰다. 어차피 이번 방문은 손해만 있을 뿐 어떤 이득도 없었다. 재수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케르크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저런... 비겁한!!!!!!!!" 케르크가 시동어를 외치자, 검에서 빛이 나오면서 마법이 작동되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케르크의 비겁함을 탓했다. 뮤리엘은 아버지가 유독 그 검에 신경을 쓴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고, 결투를 중단시켜 달라고 부탁했지만 켈러비안은 무슨 뜻에선지 갑자기 일그러진 인상을 펴더니 싱긋 웃으면서 결투장 안을 가리켰다. "홀드!" 이미 시동어를 외워놓았던 다이아나가 무표정하게 시동어를 외자 잔인한 얼굴로 득의 만만하던 케르크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기를 쓰면서 다이아나가 건 속박을 풀려고 했지만,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소드 마스터라 해도 단 시간에 풀지 못할 마법을 그가 풀기는 요원했다. 다이아는 초연하게 그의 목에 칼을 대었다. "이런.. 비겁한!!!"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케르크는 소리를 지르면서 다이아나에게 욕을 해 댔다. 다이아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마법을 먼저 사용하신 것은 귀공입니다만, 검으로 겨루시겠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군요. 다만, 그 마법검을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면, 저도 마법을 쓰지 않겠습니다" 좌중은 조용했다. 보기 힘든 마법검이 상당히 비겁한 의도로 쓰여진 데다가, 어느 정도 미심쩍던 여백작이 '마검사'라는 보기 드문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지금 유리한 위치를 버리고 다시 검으로 대련을 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케르크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그가 진 것이었지만, 쉽게 이기려는 의도는 좌절되었지만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면 그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검술로 하겠다" "좋습니다." 다이아나가 마법을 해제하자, 실드가 해제되었고 하투아의 사절단 중의 한 사람이 얼른 달려와 케르크이 검을 다른 검으로 바꾸어 주었다. 다시 실드가 쳐지고 결투가 시작되었다. 온갖 망신을 다 당한 셈인 케르크는 죽을 각오로 다이아나에게 덤벼들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케르크의 공격을 몇 번 받아 넘기더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양상은 비등했으나, 아무래도 힘에서는 다이아나가 불리했고, 빠르기 면에서는 유리했다. 다이아나는 힘에서 자꾸 뒤져서 케르크에게 자잘한 검상을 입히게 되자, 차라리 빨리 이기는 것이 낫다는 결심을 굳혔다. 아무래도 사람의 살을 스쳐 지나가는 느낌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다이아나가 다시 검을 휘둘렀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검에서 나는 은색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빛을 내는 다이아나의 검과 케르크의 검이 맞부딪히자, 케르크의 검이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케르크는 가까스로 날아오는 검의 부러진 파편을 피했으나, 이미 그의 목에는 다이아나의 검끝이 닿아 있었다. 실드가 해제되었고, 다이아나의 승리가 선포되었다. 케르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무릎을 꿇고 다이아나의 발등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일어서 되돌아 가려고 하자, 위엄있는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하나가 빠졌군. 잘못에 대하여 여기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사과하기로 하지 않았나?" 결국 케르크는 마지못해 말을 시작했는데, 어느 틈엔지 그의 말소리는 마법을 통해 확대되어 구석 구석에 전해졌다. "저 케르크 드 베그드안 백작은 다이아나 드 라파엘르 백작에게 한 말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정중하게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더불어 평민들에 대한 저의 말도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바입니다." 결국 케르크는 경멸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으면서 하투아 사절단이 모인 곳으로 향했고, 이 날 이후 케르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국가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로 황제의 분노를 사 작위가 강등되었고, 몬스터들의 침입이 가장 많은 최전방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 아오이유키님 졸업을 축하드려요. ^^;; 다들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일단의 사건이 종결되기는 했으나, 일단 연회의 분위기는 전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뮤리엘 황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보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황제에게 가서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안그래도 침울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한 차례 춤이라도 추어야 하나 하는 특이한 생각을 하던 황제는 쾌히 황녀의 제안에 응했다. "아무래도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연회도 내일 하루 밖에 남아있질 않소. 이 자리를 주최한 입장으로써, 사과를 겸하여 약간의 볼거리를 준비했으니 모두들 기분을 푸시길 바라오!" 황제의 선포와 함께 당황한 표정의 다이아나가 솔베노, 에디우스와 함께 어느 새 마련된 중앙의 무대에 섰다. 사람들은 엘프인 솔베노의 노래는 며칠 간에 거쳐 들었으므로 그가 하프를 들고 나서는 것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으나, 뮤리엘 황녀에 이어 창백한 안색의 다이아나와 미소를 머금은 에디우스마저 나타나자 기대에 찬 얼굴들이 되었다. "오늘은 저의 성년식을 맞아 이렇게 참석하신 여러분께 저의 노래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만, 저 혼자의 실력으로 엘프인 솔베노님의 노래에 익숙하신 여러분들의 귀를 어지럽힐까 염려되어 이렇게 응원군을 청했습니다." 뮤리엘 황녀가 나서서 인사말을 하고, 고개를 숙이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솔베노가 함께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넷은 몇 번 맞추어 본 노래 세 곡을 연달아 불렀다. 여전히 아름다운 솔베노의 하이테너와 뮤리엘 황녀의 맑고 낭랑한 소프라노, 그리고 묵직하지만, 결코 탁하지 않은 에디우스의 베이스와 튀지 않는 음색이지만, 결코 다른 이들의 소리에 묻히지 않는 다이아나의 알토 음성이 때로 하나씩 때로 둘, 셋, 넷이 어울려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에디, 아깐 정말 고마웠어"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넷의 노래는 성공적이었고, 의도대로 무도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을 맺었다. 연회가 끝난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뮤리엘은 다이아나 일행의 방에 이미 놀러와 있었다.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에게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뮤리엘이 의아해 한 것이다. "아.. 그건...." 다이아나는 말을 해도 좋을지 에디우스를 힐끗 보았는데, 에디우스는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사실 결투 전에 에디가 마법검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나한테 주의를 주었어요. 안 그랬더라면 상당히 낭패를 당했겠지요" "어머, 그랬어요?" 뮤리엘의 말에서는 상당한 놀라움이 베어 나왔다.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검을 보고 알아차렸다는 것은 눈 앞의 에디우스의 실력이 아버지보다 위라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에디우스가 슬쩍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제 마법 실력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마나에 유독 민감한 편이지요. 그 마법검에는 마나의 기운이 상당히 많이 서려 있더군요. 그래서 미리 말해 준 것 뿐입니다." "아.. 그래요? 참, 언니는 몇 써클이세요? 오러블레이드를 만들어 낼 정도인데, 마법까지 배우시다니 그 동안 제가 천재 소리를 들은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에요" 역시 뮤리엘의 관심은 다이아나였다. 아무리 미리 알아채고 캐스팅을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홀드 마법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쓸 정도라면...... "후훗... 마법길드에는 4써클로 등록되어 있어요. 그 이상은 저도 비밀이에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요~!" 뮤리엘이 졸라대었지만, 다이아나는 굳이 리카르도도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의 전부를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슬쩍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치 빠른 뮤리엘은 입모양으로 '나중에'라고 물어 보았고 다이아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얼른 포기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피잇~! 알았어요. 원래 여자들에겐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니까. 그럼 에디우스님도 당연히 비밀인가요?" "아하, 물론! 남자에게도 숨기고픈 비밀이 있답니다!" 에디우스가 황녀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밝은 미소로 맞장구를 쳤다. 다이아나는 그런 뮤리엘을 보면서 미소를 짓다가 문득 하투아의 백작에 생각이 미치자 씁쓸해졌다. 아무래도 하투아와는 악연으로 얽힌 모양인지, 달갑지 않은 사건들만 생기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하투아도 다 되어 가나봐요. 그런 사람이 사절단의 대표라니......" 다이아나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대충 집작한 뮤리엘이 불쾌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실력이 인성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실력만 놓고 보자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죠" "흠.. 그런가요? 사실 인재의 등용이라는 것이 말이 쉽지 그 기준이 참 애매해요" "그래요. 특히 속마음이나 성품을 알기는 더 어렵지요" "그래도 세습되는 지위보다는 실력에 의한 등용이 낫지 않습니까?" 리카르도가 끼어들었다. 그로서도 뮤리엘이 제기한 문제는 늘상 머리 속에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 실력이 필요한 자리가 어디일까요? 저는 마검사라는 이유로 백작의 작위를 받고 이번에 영지를 받게 되었죠. 하지만, 제가 마법과 검술을 잘 한다고 해서 영주로써의 일도 잘 할 꺼라는 보장을 누가 하죠?" "......" "물론 영지를 방어하는 데에는 무력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긴 할 거에요. 하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과연 영지가 지켜질까요? 오히려 그보다는 영지의 무력을 튼튼하게 할 수 있도록 기사나 병사들을 키워낼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낫지요. 또 그보다는 영지의 재정이 튼튼해져서 인명피해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구요." "그럼 언니는 어떤 기준으로 관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일이네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다만, 근본적인 가치관이 잘 형성되어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잘 알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해요" "음... 너무 추상적이에요" "그렇죠?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영주가 모든 일을 할 필요는 없어요. 영지를 꾸려나가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기용하고 그들의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요." "그렇게 아랫 사람들에게 믿고 맡겼다가 그들이 딴 마음을 먹으면요?" "그만큼 영주도 공부하고 노력해야 겠지요. 하지만, 함부로 의심하고 참견하는 것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일단 재량을 인정해 주고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통제를 해야 하겠지요" "음.. 또요?" "영지민들이 영주에게 직접적으로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더더욱 좋겠죠. 그렇게 한다면 감히 실무자들이 못된 마음을 먹기가 힘들 테니까요" "흠.. 그랬다가 앙심을 품은 사람이 모함을 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런 부분에 대하여 조사를 할 중립적인 기구를 만들면 좋겠지요. 백성들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말만 한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화아~! 정말 대단해요." 뮤리엘 황녀는 다이아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머리 속에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중앙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되겠군요. 그렇죠? 응 그러니까 실무자들이 직접적으로 황성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면 영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견제가 될 것이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역시 조사기관을 마련해 놓는다면 더 좋겠네요." "흠.. 하나가 빠졌어요" "네?" "영주와 실무자들이 모두 나쁜 마음을 먹고 서로 손을 잡고 있다면요?" "아하.. 그렇구나. 그럼 중앙과 직통으로 연결이 되는 감찰기관이나 비밀리에 시찰을 다니는 기관 같은 것을 만들면 더욱 좋겠네요" "그래요. 가능하면 그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아야 해요. 그리고 서로간에도 모르는 것이 좋구요. 만일 그들의 신분이 알려지면 또 그들을 유혹하려는 이들이 생겨날 테니까요. 고정적으로 기용하는 것 보다는 일정한 기간 동안만 활동하도록 하면 더 좋겠지요" "아.. !" 뮤리엘은 한참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서둘러 밤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가 버렸다. 리카르도는 뮤리엘과 다이아나의 대화를 통하여 다이아나의 '이상'이 어떤 형태인지 살짝 엿 볼 수 있었던 점에는 감사했으나, 일견 자신에게는 어떠한 구체적인 충고도 없던 그녀가 유독 뮤리엘에게는 실례를 들면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긴 리카르도의 입장에서는 다이아나가 저런 제안을 했다 한들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드러난 비리들도 모호한 정치적인 세력에 얽혀 있어 제대로 처분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라도 원하는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이아나가 조그많게 중얼거렸다. 사실 평민들 중에 글자를 아는 이가 드물만큼 대륙의 교육사정은 열악했다. 학교라고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런 귀족들이 그 외에도 가정교사까지 동원하여 후대의 교육에 열중하는 데 비해, 평민들의 경우 어느 정도 잘 사는 상인계층 정도에서나 하급의 교육기관에 아이를 맡기거나 교사를 고용하여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뿐이다. 하여, 검사와 마법사라는 직업에 몸을 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식은 배울 곳도 그것을 배운다고 해서 써야 할 곳도 한정되어 있었다. 검술이나 마법이라면,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국가의 지원이 어느 정도 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급 병사나 용병으로 시작하거나, 마법사의 제자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어려서부터 재능에 따라 좋은 환경에서 공부한 사람들과의 격차를 메우기란 웬만한 운과 재능이 있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반대로 교육열이 지나쳐 '무엇이 될까'에 앞서 일단 '공부를 잘 해야'라는 사고방식이 우선적으로 존재하던 과거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른 바, '민주주의'라는 사회의 생존경쟁도 만만치는 않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규정된 신분이 없는 것 뿐, 실제로 신분과 계급이 없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잘 사는 집의 아이들은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기회를 제공받았다. 그렇게 사회의 상류층을 형성한 이들은 역시 그들간의 교류에 집중한다. 결국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타고난 지능이나 재능에서부터 유리한 조건을 받게 되고 그 위에 역시 더 좋은 환경을 가진다. 아무리 평등한 사회를 형성하여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상황에서 인생을 시작한다고 해도 결국 결과는 같아진다. 어떤 이는 열 개 스무 개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이는 하나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능력없고 힘 없는 이들은 결국 또 하위계층을 형성할 것이다. 주신은 바로 그런 능력과 환경만큼 영혼에 주어진 무게가 크다고 했다. 다이아나는 자신에게 씌워진 무게가 얼만큼 큰 것인지를 가늠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하투아 제국의 황성 안에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사절단이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하이센에서 마법진으로 사신을 보내어 온 것이다. 켈러비안 라 트리안의 인장이 선연한 서찰은 황제에게 직접 전달이 되었고, 서찰을 뜯어 읽어본 카이젠은 크게 분노하여 드물게 귀족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라덴은 그러한 황제의 분노가 겉모습 뿐임을 알고 속으로 고소했다. 아무튼 드러난 상황에서는 황제가 상당히 진노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귀족들의 수장을 모조리 소집했다.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만큼 간 큰 귀족은 없었으므로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속속 귀족들이 도착했다. "이것이 무슨 망신인가? 도대체 누가 이 책임을 지겠느냐?" 켈러비안이 보낸 서신을 펄럭이면서 카이젠은 짐짓 분노한 듯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영문을 모르던 귀족들은 지이드 공작이 서신을 읽기 시작하자, 안색이 급변했다. 드베르미시 드 배그드안 공작은 마치 상황을 직접 보듯이 상세하게 묘사된 아들의 추태에 사색이 되었고, 덩달아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던 귀족들의 얼굴 또한 일그러졌다. 황제파의 인물들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가까스로 감추고는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린 케르크 드 베그드안 백작에 대하여 너도 나도 처벌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단 책임부터 묻는 것이 옳습니다. 이번에 케르크 드 베그드안 백작을 추천한 인물은 그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더하여 케르크 본인에 대한 처벌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며, 그의 그러한 행동을 말리지 못한 사절 일행 모두에게 합당한 처벌이 내려져야 합니다." 지이드 공작이 냉정하게 결론을 냈다. 결국 드베르미시 드 배그드안 공작은 자식의 잘못에 대한 책임에 처음 강력하게 추천한 본인이라는 점까지 추가되어 작위가 백작으로 강등되었고, 영지의 일부가 몰수되었다. 케르크 본인에게는 돌아오자 마자, 작위를 삭탈하고 일반 기사로서 외곽 영지의 기사로 근무하게 한다는 냉엄한 판결이 있었다. 이로서,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배그드안 가는 몰락의 일보를 디딘 것이나 다름 없었다. "훔..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야겠군.. 후훗" "솔직히 저는 걱정했습니다만.. 어떻게 미리 아신 것인지......" "나도 이 정도까지 좋은 결과는 생각지 못했다. 다만, 켈러비안과 그 황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그 애송이의 반지르르한 겉 모습 속에 든 자만심과 비뚤어진 인성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것이라 생각한 것 뿐이다. 헌데, 직접 나서서 저런 망신을 초래했다니, 우습게 되었군" "... 그렇군요" "내가 나서지 않은 이상 캘러비안이 저따위 귀족파라는 인물들에게 딸을 줄 리는 없다. 그 또한 황제로서 그만한 것을 뚫어보지 못할 정도로 얄팍한 인물을 아니거든. 그래서 별 성과없이 돌아오면 그걸로 슬쩍 기세나 죽일 생각이었는데, 소득이 생각보다 컸군......" 라덴 또한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보고를 올릴 지 말 지에 대하여 망설이고 있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은 듯한 황제가 정보에 어떠한 반응을 할 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이.. 이제 일과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이제서야 시작하다니.. 히유... 일단 오늘 치 일 다 하고 난 후에 다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요즘은 이것만 붙들고 있으면 다른 일들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히유... 즐독하세요~! 아차, 졸업하시는 모든 분들께 축하인사를 보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하이센 제국 "폐하 실은......" "무슨 일이지?" "예전에 성녀와 함께 있던 금발의 검사가 이번에 칼라임 제국의 사절단의 대표로 참석했다는 알트상단의 후계자와 동일인물인 것 같습니다." "뭣이?" "사절단 일행을 감시하기 위해 딸려 보낸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이름과 인상착의가 일치합니다." "성녀... 성녀는?" "일단 조금 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상급의 첩자를 주변에 심어 놓았습니다만... 현재까지는 성녀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여성은 없습니다." "흠....." "... 폐하?" 의외로 카이젠이 냉정하게 생각을 하는 듯하자, 라덴은 안도하는 한편 황제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확실치 않은 보고는 어쩌면 이번의 사절단 일로 조금 고무된 듯한 황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위 첩자에게 영상석을 다량으로 보내라. 그가 접촉하는 모든 인물들을 영상에 담아 이쪽으로 보내도록 하고,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말고 하도록!" "네. 폐하....." 어쩌면 라덴의 예상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카이젠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고 있었지만, '성녀'의 위치가 밝혀졌을 때 그가 하는 행동 여하에 따라서는 국가가 위험해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덴은 자신의 주군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음을 믿고 있었다. 연회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아마도 오늘의 무도회가 끝나고 나면 내일 사절단들은 모두 자국으로 출발할 것이다. 역시 출근하듯이 뮤리엘은 늦은 아침에 찾아왔다. 솔베노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마지막 날이라 일부러 떨구고 온 듯했다. 전날 밤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이아나 언니, 저랑 단둘이 데이트해요" "데이트요?" "네에~! 마지막 날이잖아요" 서운한 표정을 여실히 드러낸 그녀는 막을테면 막아 보라는 듯이 일행을 주욱 돌아보았다. 이럴 때의 뮤리엘은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던 평소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린 소녀 그 자체였기에 리카르도와 에디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듯하자, 다이아나의 손을 잡은 뮤리엘은 복도로 끌고 나가거니 어디론가로 향했다. 꽤 복잡한 이동복도를 이리 저리 옮겨 탄 끝에 둘은 하나의 문을 열게 되었다. "아..?" 방으로 생각했던 문은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 밖에는 잔디와 포석이 깔려 있는 작은 뜰이 하나 있었고, 그 앞으로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황녀가 거하는 건물이었다. 선택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예 이 밖으로 나가는 문은 열리지도 않는다고 나중에 뮤리엘이 설명했다. 덕분에 뮤리엘은 황궁 내에서 생활하면서도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모~!" "아기씨! 에고!" 마음 좋게 생긴 중년의 부인은 십수 년 간을 키워온 뮤리엘의 물음에 답하며 뛰어 나오다가, 낯선 여성의 모습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이러실 필요 없으세요. 저는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다이아나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게 했다. 뮤리엘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뮤리엘의 유모인 넥시는 뮤리엘의 생후 황제가 황비의 친정에서 불러들인 대표적인 인물로써, 궁에 들어올 당시에는 25세의 젊은 여성이었으나, 이미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황제가 유일하게 딸의 말에 약하듯, 황궁을 통틀어 이 당돌한 소녀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엄하게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아기씨... 손님을 모시고 오실 의향이셨으면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잖아요. 모처럼만에 오신 손님인데......" 듣지 않으려 해도 좋은 청각 탓에 앞서 가는 넥시가 한껏 목소리를 죽여 뮤리엘에게 하는 잔소리가 들려왔다. 옅은 금발을 뒤로 올린 넥시는 자상해 보이는 옆은 푸른 눈매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그녀가 뮤리엘을 바라 볼 때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애정이 흘러 넘치는 것을 다이아나는 볼 수 있었다. '우리 안느 같군' 다이아는 속으로 안느를 닮은 넥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속닥거리는 잔소리는 뮤리엘과 다이아나가 응접실 같은 곳에 인도될 때까지 계속되다가 넥시가 손님을 맞기 위한 준비를 위해 허둥지둥 다시 방을 나섬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뮤리엘은 다이아나에게 보라는 듯히 한숨을 과장되게 포옥 내쉬더니 유모가 보았으면 잔소리 할만한 행동 - 혀를 쏘옥 내밀어 보이는 - 을 하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다이아나도 뮤리엘의 행동을 보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넥시를 좋아하는군요" "네. 그럼요! 어떻게 보면 어마마마 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져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 잔소리를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뮤리엘은 짐짓 잔소리라는 부분에서는 몸을 떠는 시늉을 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과장된 행동임을 이미 둘 다 알고 있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음모 하나를 꾸몄는데 말이죠......" 넥시가 시녀로 보이는 이들을 지휘하여 순식간에 두 사람앞의 테이블을 잘 장식된 케이크와 차, 쿠키 등으로 가득 채워 놓고 다시 아무도 없는 상태가 되자, 뮤리엘은 짐짓 비밀스럽게 말했다. "음모라니요?" "언니한테는 미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후훗" "그래도 되나요? 비밀 아니에요?" 다이아나 뮤리엘에게 장단을 맞추어 주자, 뮤리엘은 역시 장난끼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비밀이죠. 하지만, 언니한테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헤헷!" 다시한 번 핑크빛 혀가 밖으로 나왔다가 사라졌다. 짓궂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은 뮤리엘은 자신의 음모의 전모를 다이아나에게 털어 놓았다. 다이아나는 그 음모의 '규모'부분에서 뮤리엘이 과연 황녀임을 실감했으며, 실제로 기밀에 통할 정보를 서슴없이 말하는 뮤리엘의 믿음에 고마운 심정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언제쯤이 될까요?" "세 달 후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언니와 일정이 맞았으면 좋겠는데...... 어떠셔요?" 석 달이라...... 일단 저택에 갔다가 새로 받은 영지에 가 볼 생각이었다. 영지와 저택을 생각해내자 다이아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을 본 뮤리엘이 이유를 캐묻자 다이아나는 그 동안 표시하지 않았던 내심을 털어놓았다. "흐음.. 그러니까 이번 영지는 마물소동이 일어났던 곳이고, 알고 보니 저택은 황태자님을 암살하려다 되려 당한 귀족들의 것이라구요? 거참...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네요" 다이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도 그렇지만, 저택의 일은 아주 뒤늦게 안느에게 전 주인의 이야기를 묻다가 알아낸 것이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저택에 살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것을 빼앗은 기분이라서 상당히 착잡해졌었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네요. 디안이라고 했나요? 언니의 딸 말이에요. 그 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다이아나에게는 그것 또한 걱정이 되었다. 디안은 지금 잘 적응하고 있는데, 장기간 떨어지기도 싫었지만 아이가 옛 영지에서 나쁜 기억을 되살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솔직하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디안이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 많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뮤리엘은 그 이야기에 심각하게 귀를 귀울이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이 유모를 불러댔다. "아기씨... 조금 더 조용하고 예쁘게 부르셔도 들린단 말입니다~!" "응 알았어~! 저기 말야, 내가 어릴 때 하던 팔찌랑 목걸이 있지? 그것좀 가져다 줄래?" "예에? 그걸요?" "응. 얼른~!" "네." 대답과 함께 넥시가 사라졌다. 다이아나가 의문을 담고 뮤리엘을 바라보자, 뮤리엘은 입모양으로 비밀 이라고 말하면서 궁금증을 가중시켰다. 잠깐의 시간 후에 넥시가 작은 상자 하나를 가져다가 뮤리엘에게 건냈다. "언니... 안그래도 무언가 드리고 싶었는데, 이거면 디안에게 도움이 될 꺼에요" "이건...?" 상자안에는 뮤리엘이 말한 대로 팔찌와 한 세트인 듯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크기로 보아 어린 아이를 위한 것임이 틀림 없었는데, 새겨진 룬 문자는 그것이 아이템임을 말해주는 듯 했다.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해 드린 적이 있지요? 전 어려서 매일 엄마 아빠가 절 버리는 악몽을 꾸었어요. 못생긴 애라고, 너 같은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하는 거에요. 매일 밤 유모가 달래주어서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보다 못한 아바마마께서 직접 이걸 만들어 주셨어요. 따로 정령사까지 초빙해서 말이죠." 뮤리엘은 그것들을 소중한 듯이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목걸이에는 꿈의 정령이 들어 있어요. 일단 잠이 들면 좋은 꿈만 꾸게 해 주지요. 계약 조건이 바로 그거거든요. 울 아버지도 걱정이 심하셨는지, 30년간이나 계약을 한 정령을 넣으셨더라구요. 그러니깐 이건 앞으로 13년은 멀쩡하게 쓸 수 있을 거에요. 팔찌는 7살 때 위험한 일을 당한 후에 받은 선물이에요. 일부러 목걸이랑 한세트처럼 만든 것은 그 이유를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기 위해서였나봐요. 실드 마법과 슬립마법이 가능해요. 이걸 이렇게..." 뮤리엘이 들어서 팔찌를 다이아나의 손에 놓은 후 중얼거리자, 팔찌에서 잠시 빛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이제 이 팔찌는 당분간 언니를 주인으로 인식할 꺼에요. 언니가 디안에게 이것을 끼워주면서 그녀에게 인도한다는 마음을 간절하게 가지면 그 때부터는 디안의 것이 되겠지요" "이런.... 이건 너무 소중한 물건이 아닌가요?" 다이아나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제게 있어봐야 추억의 물건일 뿐이지만, 디안에게 간다면 디안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겠지요. 디안이 안전해지면 언니도 안심하시게 될 테니까, 저는 그 편이 더 좋아요" 뮤리엘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다이아나는 뮤리엘의 따뜻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감사히 받을께요. 디안에게도 뮤리엘 이모가 준 것이라고 꼭 말해 줄께요" "이모.. 와아 그리고 보니 제가 이모네요? 흠.. 이제 저도 조카가 생긴 셈이군요" "그래요" 뮤리엘은 다시 디안에 대하여 이런 저런 것들을 묻기 시작했고, 다이아나는 기쁘게 디안의 외모나 성격을 말하다가 결국 안느의 아이들과 저택 하인들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었다. "저도 뮤리엘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다이아나가 결심한 듯이 조용히 말하자, 뮤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토록 정색을 하면서 할 말이라니...... 뮤리엘의 눈은 다이아나가 반지를 빼내자 더더욱 커졌다. "서.. 성녀?" "어떻게 바로......?" 반지를 빼고 자신이 성녀로 알려졌던 인물임을 말하려 했는데, 반지를 빼자마자 이미 정체를 알아차린 뮤리엘의 말에 오히려 놀란 쪽은 다이아나였다. 일단 반지를 도로 낀 다이아나에게 뮤리엘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 따라서, 저는 이미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구요. 뭐 저희 뿐만이 아니라 웬만한 고위급 인사들은 거의 다 알껄요?" "... 그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럼 제 본모습을 보이면 리카르도님도 알 수 있겠네요" "당연하죠. 한동안 말이 아니었다구요. '성녀를 얻는 자가 대륙을 얻는다'는 소문과 함께 이번에 저를 보기 위해 왔던 이들도 한동안 성녀를 차지 하기 위해 힘 깨나 썼었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에요. 오죽하면, 아바마마까지 성녀를 찾아 나서서 제3황비로 맡겠다고 설치시다가 저한테 한 방 맞고는 생각을 바꾸셨다니까요" 뮤리엘은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재미있다는 어투로 떠들어대다가 다이아나의 얼굴빛이 창백해진 것을 알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후우... 제가 어리석었어요 뮤리엘.. 제가 처음 리카르도님을 만났을 때, 저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일이 있어요. 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아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조금... 기분이 안좋아요" "그.. 그런 일이......" 뮤리엘은 창백한 다이아나의 슬픈 모습에 위로의 말을 하다가 황녀다운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마 리카르도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거에요. 일단 언니는 끌어들이고 싶고, 언니가 성녀임을 안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을 예측했을 테니까요. 제가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몰라요" 다이아나가 뮤리엘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부정하려 하자, 뮤리엘은 슬픈 기색으로 단호하게 머리를 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뇨. 저 또한 뼈 속 깊은 곳까지 황녀에요. 우리 제국에서는 아바마마의 힘이 워낙 절대적이기 때문에 다르지만, 현제 칼라임의 정세를 보자면 그분의 욕심은 후계자로서 당연한 것이에요. 언니같은 분을 옆에 두고 싶지 않을 위정자는 결단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언니와 친구가 되지 않고 미리 성녀임을 알았다면 저 또한 어떻게든 언니를 이용하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황족이란... 원래 그렇게 키워지는 사람들이니까요" 뮤리엘의 뒷말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족이란 특히 후계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황족이란 그 권리에 앞서 엄청난 부담과 책임감을 가지게 키워져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된 황제가 되기 힘들다. 결국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황족의 삶이다. 뒤집어 보면 가장 큰 희생자는 그들일 수 있었다. 뮤리엘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속인 리카르도에 대하여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다이아나였다. "언니가 성녀라는 사실은 아바마마께도 알리지 않을 것을 주신의 이름으로 맹세해요. 언니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내 평생 절대 언니가 성녀라는 일을 이용한 그 어떤 일도 꾸미거나 하지 않겠다고 역시 주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뮤리엘은 서슴없이 주신의 이름을 걸고 다이아나가 말릴 사이도 없이 맹세를 했다. 뮤리엘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다이아나를 보고 얼른 표정을 밝게 바꾸더니 화재를 다시 그녀의 '음모'로 전환시켰다. **************************************************************************** 한창 진도가 잘 나가는군요 ^^ 100회를 넘기고 출장을 갈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오늘 내일 사이에 100회를 넘길 듯하네요. 다들 즐겁게 읽어주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영주라는 것 그날 밤, 귀뜸받은 대로 무도회이 마지막 즈음에 황제의 발표가 있었다. 그 발표는 상당한 파장을 가지고 각국 사절단을 놀라게 했고, 그 파장은 하이센 제국의 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무도회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날 귀국도 못 기다리고 여기 저기에서 본국으로 보내는 통신마법이 남발한 것을 켈러비안은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잠시 산책을 하자고 요청했다. "무슨 일이야?" "훗.. 에디... 네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었어" "그게 무슨...?" "리카르도는 내 전 신분을 알고 있었다는 거......" "뭐?" "나도 참 어리석지. 그렇게 사람에게 당하고도 전혀 그 부분은 의심하지 않았으니 말야" 다이아나의 말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어느 정도 믿었던 사람에 대한 모멸감이 섞여 있었다. 에디우스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에 시달렸는데 하나는 리카르도가 완전히 다이아나의 마음 속에서 밀려났다는 기쁨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이아나가 다시 상처받았다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에디우스의 걱정과 다르게 다이아나는 어느 정도 충격을 상쇄시킬 시간이 있었는지, 약간 슬퍼 보였지만, 상당히 초연해 보였다. "... 어떻게 할 거지?" "글쎄... 일단 돌아갈꺼야. 영주가 없는 영지는 아무래도 제대로 운영되기 힘들테니까. 영지에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놓고 적당한 대리를 찾아야지" 영지를 얻었다고 해서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만 있는 경우는 오히려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행정관에 가까운 사람을 선임하고는 가끔 들락거리는 형식이었는데, 이는 고위귀족일 수록 더욱 그러했다. 고위귀족의 경우 영지가 여러 개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친인척들을 기용해서 영지를 관리하며, 실제적인 생활을 수도의 저택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하이센의 제의에 응하려고 해." "흠......" "그리고 보니, 나 또 에디에게 넋두리를 한 셈이 되고 말았네? 미안해... " "훗.. 뭐가?" "필요할 때만 의지하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훗... 그럴 것 없어. 잊었니? 난 너를 위해 예비된 반려야.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늘 네가 손 뻗으면 닿을 자리에 있을꺼야. 절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진 않겠어" "에디.. 그건......" "내 길을 가라고 해서 찾아낸 길이야. 엘프만이 바라보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이미 1700년을 너를 지켜본 나야. 그것이 수백 년 수천 년이 되더라도 너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옆에서 지켜 보기라도 하는 것이 나아. 그러니 나에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나를 밀쳐내지만 말아"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에디우스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다이아나는 그런 에디우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감사한 심정이 되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다이아나가 울기 시작하자, 에디우스는 갑자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심한 듯이 다이아나를 살짝 끌어안았다. "미안... 미안해.... 에디.... 하지만... 아직은 나도 내 마음을 몰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걱정하지 말아. 나도 배운 것이 있으니까, 네 마음을 바꾸라는 것이 아냐..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 내 사랑이 소중한 만큼 네 감정도 중요해. 억지로 구걸해서 얻는 사랑 따윈 필요없어. 네가 다른 이를 사랑한다면 지켜봐 주겠어.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게 떠나란 말만 하지 마. 때가 되면 내가 네게 진정으로 방해가 된다면 그 땐 내가 알아서 떠나 줄게.. 울지 마... 괜찮아..." 이 밤을 기점으로 희비가 엇갈렸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마치 오누이같은 친근함을 풀풀 풍겨내는 데 반해 리카르도에 대하여 다이아나가 좀 더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다이아나의 마음이 에디우스에게 기울어 진 것인지 몇 번이나 살펴 보았지만, 에디우스나 다이아나 어느 쪽도 일언반구의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리카르도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칼라임의 황제나 공작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말을 꺼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황태자가 사실을 퍼뜨릴 때까지는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이러한 다이아나의 행동의 이면에는 에디우스와 뮤리엘의 냉정한 조언이 한 몫을 했다. 둘은 이구동성으로 다이아나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동안만큼은 그녀에 대한 정보가 빠져나갈 염려가 없으며, 외국에 숨기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라임 제국의 사절단은 역시 마법진을 사용하여 짧은 시간에 칼라임으로 돌아갔고, 보고를 위해 황성에 간 일행은 마르띠앙 공작과 황제로부터 상당한 치하의 말을 들었다. 특히 황녀의 선물이 성공적이었다는 사실과 하투아 제국의 사절의 교만한 행동에 대하여 오히려 칼라임의 국력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일, 등은 선물에 대한 조언을 한 에디우스와 다이아나에 대한 끝이 없을 듯한 공치사로 이어졌다. 하지만,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돌아간 후 모인 세 명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찌 된 것이냐?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만......" 이들의 예상으로는 하이센 제국에서 황태자가 다이아나를 우대하면 우대할수록 여러 사절단 앞에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황태자에 대하여 조금 더 호감을 가질 기회를 제공하여 친밀감을 증대시킨다는 것이었으나, 오히려 에디우스와 다이아나의 친밀감만 눈에 띄게 좋아졌을 뿐이었다. "후.. 혹을 붙인 격인지도 모릅니다. 전해졌겠지만, 뮤리엘 황녀가 다이아나 경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시하고 있고, 다이아나 경도 그녀를 친동생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가는......" "이런......." "진작에 말을 할 일이지. 이미 황제의 제안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막는다고 해서 막아질 일이 아닙니다. 다이아나 경이 그 일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의 강압으로 못하게 된다면, 일단 에디우스 경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뮤리엘 황녀 또한 손을 쓸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 정도로 가까워졌단 말이냐?" "보고를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하투아의 백작에게 직접 맞서서 망신을 준 것이 뮤리엘 황녀입니다. 더군다나 황제까지 다이아나 경의 편을 든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이미 다이아나 경의 의지를 거스르고 잡아 놓기에는 늦었습니다." "그럼......" "그녀의 마음을 잡는 방법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후.. 여태까지도 그래서 이렇게 일이 복잡해 진 것이 아니냐?" "그녀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더군요... 실은......" 리카르도는 뮤리엘과의 대화에서 다이아나가 제안하고 뮤리엘이 확대시킨 제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고, 마르띠앙 공작과 황제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들을수록 탐이 나는구나" 황제가 말을 하자, 마르띠앙 공작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제국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다이아나의 제안을 바로 실행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권력의 기반이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셋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 머리를 짜 냈으나,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엄마아~!!!!!" "이모오~!!!!!" 다이아나가 저택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일단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당연한 듯이 다이아나의 뒤를 따라 온 에디우스는 한동안 이들의 상봉을 지켜 보고 있다가 어느 정도 아이들이 진정한 듯 하자, 슬쩍 앞으로 나섰다. "이런... 이 아저씨는 아무도 아는체 조차 않는구나.. 아아.. 너무 슬퍼요~!" 과장되게 가슴을 움켜쥐고 에디우스가 울 듯한 표정을 짓자, 디안이 얼른 나서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아저씨도 좋아요" 디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 저기서 주로 여자애들이 그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둘은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가서 주욱 앉혀 놓은 다음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금씩 말해 주었다. 에디우스가 돌아간 후 다이아나는 오랜 만에 디안을 데리고 목욕을 했다. 아이는 그 사이에도 조금 통통해져서 이제는 제법 얼굴에도 아이들 특유의 젖살이 생겨 더욱 귀여워졌다. 디안은 모처럼 엄마를 독점하게 되자 기분이 좋았는지 내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엄마가 아름다운 황녀님 이야길 해 주었지?" "아아.. 무리엘 황녀님이요?" "뮤.리.엘 이란다" 하지만, 디안의 짧은 혀로는 뮤라는 발음은 좀 어려웠다. 다이아나는 뮤리엘과 자매처럼 지내기로 했다는 것과 그녀가 조카인 디안에게 보낸 선물을 보여주었다. "엄마엄마... 황녀님이면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이랑 똑같은 거죠?" "응.. 그래.." "와아.. 그럼 저는 공주이모가 생긴 거에요?" "그렇단다" 디안은 폴짝거리면서 기뻐서 한참을 뛰어다니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아이를 진정시키느라 한 동안 애를 써야만 했다. "에고, 그렇게 벗고 돌아다니면 못써요. 잘못하면 감기에 걸린단다" "네. 디안이 아프면 엄마가 슬퍼요. 그렇죠?" 디안이 먼저 선수치듯이 말하자, 다이아나가 웃었다. 다이아나는 조그만 상자를 꺼내 목걸이와 팔찌를 디안에게 채워주었다. 디안은 예쁜 물건을 갖게 된 데다가 그것이 공주 이모의 선물이라는 말에 아주 기뻐하면서 절대 떼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듯이 말했다. 다이아나는 따로 주의를 줄 필요가 없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이아나는 집사인 말론과 안느 부부를 불러들였다. "일단.. 그렇게 해서 영지로 가야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두 분만큼은 동행했으면 하거든요. 말론, 안느 어때요? 두 분이 떠나셔도 저택에 문제가 없을까요?" "일단 제가 비번일 때 늘상 제 일을 대행하는 하워드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안느도 마찬가지구요" 다이아는 빠른 대답과는 달리 그다지 밝지 않은 말론과 안느의 모습에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과연 다이아나의 다음 말에 두 부분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럼 아이들과 함께 옮겨갈 준비를 해주세요. 제가 없는 동안 저택에 생길만한 문제는 미리 대비해 주시구요" "아이들을 데려갑니까?" "어머, 그럼 제가 두 분을 아이들과 떨어뜨릴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디안도 또래 친구가 필요하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필요해요. 당연한 일이죠" 이 말에 두 부부는 크게 기뻐하면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영주의 저택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세심한 부분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영지로 떠날 때 협조를 받기 위해 황성에 들르기도 했다. 이제 백작인 된 이상 기사단의 단원으로서의 임무는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않으면 섭섭해 할 것이다. 어린 왕자와 공주에게도 인사를 해야 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르띠앙 공작은 영지로 간다면서 마법진 사용의 허가를 요청하는 다이아나를 붙잡을 만한 명목이 없는 터라, 삼 개월 후를 약속받고는 마지 못해 허가를 내 주었다. 물론 다이아나는 디안을 양녀로 입적하는 데 필요한 서류일체를 모두 준비해갔고, 이 또한 재가를 받을 수 있어서 디안은 정식으로 디아느 드 라파엘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영지로 간다구요?" 티리아가 섭섭함을 숨기지 않고 말하자, 여기 저기 떠들어대는 소리가 높아졌다. "아, 이젠 나의 낙도 끝이구나. 비록 여자같진 않아도 하나 있던 여 동료는 결혼해서 짝을 찾는다고 하고, 나의 보람이자 낙이던 다이아나경을 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나 다름이 없다니~~~!" 스티아노가 가슴을 움켜쥐고 마치 노래하듯이 애처롭게 말하자, 다들 그의 흉내를 내는 바람에 한 동안 폭소가 터져 나왔다. 다이아나는 언제든지 영지로 놀러 오라고 - 특히 티리아와 피터슨 커플에게는 결혼 휴가로 여행을 오라고 귀뜸하고는 - 모두에게 말하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어린 왕자와 공주와의 이별은 이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으나, 어느 정도 칼라임의 황실과의 관계를 정리한 다이아나로서는 가슴 아프지만,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약간 단호하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고, 결국 어렵게 둘을 설득할 수 있었다. "제게는 작별 인사도 안하실 셈이었나 보네요" 왕자와 공주가 거하는 작은 궁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리카르도가 나타났다. "어차피 석 달 뒤에 다시 뵙게 될 텐데요" "후우... 아무래도 저는 차인 것 같군요" 황태자가 평상시의 장난스러움을 애써 유지하며 말했지만, 그 다음 떨어진 말은 거의 청천벽력이었다. "아마도... 제겐 에디가 있으니까요" "결심하신 것입니까?"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결혼하실껀가요?" "당분간은 그러지는 못할 것 같네요. 하지만, 승부는 이미 결정지어졌다고 전하라더군요 에디가." 황태자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다이아나는 자신을 핑계로 삼으라는 에디우스의 충고를 충분히 지킴으로써 황태자와의 거리감에 대하여 완벽한 핑계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럼...." "네. 에디가 아무리 속이 좋다고 해도, 제게 마음이 있는 분과의 사적인 관계를 계속 용납하긴 힘들꺼에요. 저도 에디가 기분 나빠할만한 일을 하고 싶진 않군요" "후후.. 완벽한 패배네요" "제게 보여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 신하로서의 충성을 받을 기회는 남아 있는 거겠지요?" 실연의 쓰라림 속에서도 과연 리카르도는 자신의 본연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아직은요.. 그 부분은 결정된 것이 아니니까요"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마워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영주라는 것 "응? 에디도 함께 가는 거야? 상단은 어쩌구?" 영지로 떠나기 전날 밤 늦게 방문한 에디우스가 결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안 다이아나의 첫마디였다. "흥, 상단 일이야 어디서든 할 수 있고, 내가 없다고 큰 일 날 것도 없어. 어차피 내가 끼어들기 전에도 잘만 돌아가던 곳이라구" "후훗.. 그렇게 걱정돼?" "그야......" 에디우스가 의례적인 걱정이 아닌 무엇인가를 숨기는 듯한 기색이 보이자 다이아나가 정색을 했다. "무슨 일이야? 솔직하게 말해줘. 나한테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거지?" "괜히 네 맘만 어지럽힐 것 같아서......" "괜찮아. 나도 언제까지나 보호만 받고 있을 수는 없어.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알고 싶어" "히유.. 알았어.. 그게 말이지......" 에디우스는 하이센 제국의 황궁을 벗어난 이후로 자신에게 꼬리가 달렸음을 눈치챘다. 처음엔 의례적인 정보원으로 생각했는데, 주위에서 마나의 기운까지 느껴지기 시작한 데다가 점점 감시하는 인물의 레벨이 높아지는 바람에 한 명을 잡아 정신마법으로 사실을 캐내었던 것이다. "...... 카이젠이...?" "응.. 아무래도 내 주변에 네가 있을꺼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영상을 기록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더군. 일단 네 모습이 전해지진 않았어... 아직은 말이지......" "...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가...?" "음.. 말이 나온 김에 어떻게 할 지 결정해줬으면 해. 일단 그 자의 기억은 지워 뒀으니까 당분간은 안전할꺼야. 하지만, 언젠가는 그도 알게 되겠지. 지난 번에 너무 순순히 풀어 준 것 같아" "아빠가 마나를 못 쓰게 했다고 하셨는데......" "한 나라의 황제가 마나를 못 쓴다고 그 권력이나 힘이 줄어든 것은 아니야. 만일 이대로 방치한다면 저번같은 결과를 또 초래할 수도 있어...."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알겠지만.. 그래도 내 탓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죽일 생각은 없는데.. 또 주저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아, 정말 알 수 없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죽이기는 싫다는 거지?" "응" "후환이 생기는 것도 싫고" "물론이야.. 나 하나의 피해도 아니고.. 정말.. 참을 수 없을 거야..." "그렇게 해 줄게" "응?" "그렇게 해 준다고.. " "어떻게...?" 에디우스가 내놓은 해결책은 그야말로 차선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카이젠을 죽이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을 삼은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 "누구냣?" "훗.. 우습군 감히 누구에게 덤비는 것이냐?" 피어가 섞인 에디우스의 말에 라덴은 후들거리는 다리는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설마.. 위대한 존재셨습니까?" "라덴.. 오랜만이에요" 다이아나가 동행을 고집한 것은 황제의 측근인 라덴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녀...님.." "무슨 일이냐?" 카이젠은 휘장에 싸인 침대에서 걸어 나오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다이아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어 붙은 듯이 자리에 굳어 버렸다. "카이젠...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나요? 당신은 내가 사랑하던 이들을 모두 죽였어요. 하지만, 전 당신을 죽이지 못했죠.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죠?" "너.. 너 리아일 뿐이다" "후훗.. 아직도 그 이름을 잊지 않았군요. 결국 당신은 절대 변하지 못하겠죠. 그 집착을 사랑이라 우기겠지요. 맞나요?" "그래.. 무엇으로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그래요.. 차라리 당신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어요.. 우리 그렇게 해요" "그게... 무슨?" 기다렸다는 듯이 에디우스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카이젠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라덴이 애를 쓰면서 그의 곁으로 가려고 했으나, 다이아나에게 저지 당했다. 황제의 옆에 앉은 에디우스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기다려요 라덴..." "무, 무슨 짓입니까?" "당신이 가장 잘 알꺼에요. 카이젠의 나에 대한 집착... 보시다시피 제 친구인 에디우스는 드래곤이에요. 하투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를 당해낼 수는 없어요. 카이젠의 집착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올지도 몰라요. 드래곤의 분노를 누가 피할 수 있겠어요?" "그.. 그런......" "염려 마세요. 에디는 그저 카이젠에게서 나에 대한 사적인 기억만을 지울꺼에요. 아마 이제부터 그는 나를 대륙에 알려진 성녀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겠죠. 다른 이들처럼 조금 욕심을 낼 지는 모르겠지만, 무모한 짓을 할 정도로 집착하지는 않을꺼에요. 오히려, 조금 거부감을 표시하게 될 테니 미리 알아두시는 것이 좋겠지요.." "어째서....?" "왜 당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느냐구요? 이미 벌인 일들이 있으시잖아요. 에디에게 따라붙은 첩자들을 불러들이세요. 그들도 소중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요. 불필요한 일들은 다 잊으세요. 카이젠이 예전의 냉철함을 되찾는 것은 당신도 바라는 바가 아닌가요?" "그..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저도 내켜서 하는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카이젠은 계속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거에요. 한 번은 그냥 경고로 넘어갔지만, 두 번 요행수를 바랄 수는 없어요. 잊으세요. 그리고 당신의 주군에게 충성하세요. 그렇게 해 주시겠죠?" 다이아나의 말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누구보다 황제를 생각하는 라덴으로써도 사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는 없었다. 드래곤의 호위를 받는 성녀를 감히 건드렸다가, 황제의 목숨이나 자신은 고사하고 제국의 미래 자체가 암담해질 것이 훤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그의 걱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이러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다이아나의 마지막 정리일 것이다. "정녕.. 그를 사랑하시진.. 않는 겁니까? 라덴의 말은 쥐어짜듯이 튀어 나왔다. 다이아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를 사랑했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겠죠. 다시는 뵐 일이 없기를 바라겠어요. 카이젠을 부탁해요. 라덴......" 어느 틈엔지 하던 일을 끝낸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나 몰래 라덴의 머리 속으로 음성이 울려 퍼진 것과 그들이 사라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나 골드드레곤 에디우스는 내 이름을 걸고 용언으로 맹세한다. 카이젠이 다시 다이아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다면 대륙에서 하투아 제국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라덴은 힘없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바닥에 볼 품 없이 널부러져 있는 자신의 주군에게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가볍게 들었을 그의 몸이 오늘 따라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겨우겨우 침상에 카이젠을 눕힌 라덴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는 듯 하다가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가 일어나기 전에 어색함이 없이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던 것이다. 그는 에디우스 쪽으로 투입한 정보원들을 걷어 들이고 성녀나 에디우스에 대한 모든 정보의 수집을 중지시켰다. 그가 일을 모두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새로운 날의 빛이 붉게 창문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준비를 서두른 다이아나와 집사인 말론 내외,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은 시간을 맞추어 온 에디우스와 함께 영지로 떠났다. 에디우스가 알트 상단의 마차들을 불런 준 덕에 이동은 한결 쉬워졌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장기 여행을 하기를 꺼려한 다이아나가 이미 예비해 둔 대로 일행의 이동은 이동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디안은 이미 마법진을 동한 이동을 경험해 보았지만, 그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안느의 세 아이들도 처음 겪는 신기함에 상당히 즐거워했다. 다이아나는 아이들이 이동의 영향으로 어지러워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이동진을 나서자 마자, 이미 대기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새로 오는 영주 일행이 마법진을 사용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미 마법길드에서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전 영주의 처형 이후 오히려 영지는 살기 좋아졌다고 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분에 한정된 일이었다. 영주의 아래에서 영지민들의 착취에 열을 올리던 이들이 영주가 없어졌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나은 것은 영주 바로 아래에서 보좌하던 수장격인 인물이 교체되었고, 병력을 책임지는 인물도 중앙의 기사단에 서 파견나온 기사로 바뀌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다는 점이었다. 세금은 그대로라고 해도, 새로 부임한 기사 때문에 관리들은 눈치를 보느라 심한 일을 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병사들의 만행이 거의 근절되다시피 하였기에 영지민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새로운 영주가 온다는 소문에 그녀가 마물소동을 해결하는 데 공헌했던 인물이며, 최근에 백작이 된 '마검사'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일단, 기대를 가져볼 부분은 '마물소동' 이후 처리과정이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이라면 괜찮은 인물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주가 신임 백작이라는 것은 오히려 불안감의 원인이 되었다. 이른 바 신흥귀족이라는 이들이 최악의 영주가 될 수 있음을 노회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평민 출신들이라고 평민의 일을 잘 알아서 이해해 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최악의 영주가 되곤 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평민 출신 귀족들은 그 간 받은 설움을 되돌리기라도 하듯이 영주민들을 수탈했고, 그 돈으로 더 높은 귀족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었다. 분명히 나름대로의 일이 있을 터인데, 마법길드를 나서자 영지민들이 길가에 나와 환영의 말을 외치면서 꽃을 던져댔다. 다이아나는 결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그저 불안감만 보일 뿐이었다. 다이아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영지를 어떻게 해야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드베르는 엉겁결에 영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물론 한시적이었지만, 늘상 윗사람들의 눈치만 보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드베르의 집안은 그의 조부대에 남작의 지위를 가졌었으나, 그 후로 작위를 받은 사람이 없어서, 귀족이라고 보기도 평민이라고 보기도 힘든 어중간한 상태였다. 그래도 조부가 아버지에게 일정한 교육을 시켰고, 드베르 또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드물게 문맹을 면한 상태였기 때문에 영지의 관리직으로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영지의 관리라고는 해도 하급 귀족이나 영주의 친인척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하여, 드베르의 경우는 관리인 중에도 말단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주가 처형되면서 영주의 친인척을 비롯하여 그와 친분이 있던 이들이 모두 죄과에 따라 형량을 받음으로 인해서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영주대행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공으로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허리를 굽신거렸고, 그것이 며칠 계속되자 드베르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주를 힐끔 본 드베르는 그녀가 젊은 여성인데다가 상당히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존대를 한다는 사실에서 그녀의 마음이 약하다고 단정지었다. 옆에 붙어선 금발머리의 상당한 미남은 아마도 애인인 듯 했는데, 그거야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새 영주가 애인과 사랑에 빠져 있다면 아마도 영지에 대하여 관여할 생각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은 예전에 그의 상관들이 하던 대로 적당히 세금을 걷어서 영주의 배만 채워주면 되는 것이었다. 드베르의 이러한 속단은 영주의 저택으로 소개된 다이아나가 며칠 간 영지의 사정에 관여하지 않자, 믿음으로 굳어졌다. 그는 새 영주의 눈치를 보느라 며칠 간 예전과는 달리 '성실한 관리'의 이미지를 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새로 온 영주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좋은 일이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드베르는 출근을 했다. "여.. 영주님"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은 것이 분명했다. 사흘간 영주관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새 영주가 집무실에 미리 나와 있었던 것이다. 드베르는 당황한 표정을 얼른 감추고 환대의 말을 하느라 애썼다. 다이아나는 집무실 출입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드베르의 하수인 격인 남자를 겨우 젖히고 집무실에 들어 앉아 있었다. 드베르야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다이아나는 영주관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변복을 하고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건강을 해칠까봐 염려하는 안느의 잔소리에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영지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고, 새로운 영주에 대하여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다이아나가 온 그 날만큼은 무언가 기대를 하는 듯한 사람도 뜨문뜨문 보였지만, 하루가 지나자 이내 다들 포기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이아나는 중앙에서 파견되어 어느 정도 치안 유지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있는 기사를 몰래 불러들여 면담을 했다. 의외로 그 기사는 귀족가문의 자제였다. 프라이톤 드 콜라이트라는 이름의 기사는 3대에 걸쳐서 작위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몰락하기는 했지만, 엄연한 귀족이었다. 그는 지방영지의 근무를 자청했다고 하고, 당시 수도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상당히 강직한 사람을 보냈으리라 짐작되었다. '알렉시안의 판박이가 하나 서 있는 것 같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프라이톤은 옅은 금발에 갈색 눈을 가졌는데, 상당히 울퉁불퉁한 근육이 인상적이었고, 그야말로 인상을 쓰면 아이들이 바로 울 듯한 약간 험상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귀족같이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영주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한 것임을 다이아나는 프라이톤과의 대화 끝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보기보다 상당히 섬세하고 성실한 인물로서,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영지의 상황에 거의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라이톤이 어느 정도 다이아나를 신뢰하게 됨으로서, 다이아나는 영지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사항들을 하나씩 알아 나갔다. "앉으세요" 다이아나는 호들갑스럽게 환영의 말을 하는 드베르에게 자리를 권했다. 드베르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손 또한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 그런데 무슨 일로...?" "무슨 일이라뇨? 여기가 영주의 집무실인 걸로 아는데요" "아... 그게 아니고.. 물론 여기는 영주님의 집무실입죠.. 그.. 그게..." 드베르가 말을 더듬기 시작하자, 다이아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손을 들어올려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당장, 이 영지에 속한 영지민들의 인적사항을 적은 자료와 그간 걷은 세금의 내역, 그리고 그 세금을 사용한 장부를 가져오세요" "네?? 하지만.. 그런 것은 직접 하시지 않아도......" "지금 당장입니다." 드베르는 그야말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좋게 돌아가는 형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업무를 해 보지 않은 애송이 영주인 만큼 잘 작성된 이중장부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불안감과 싸우면서 드베르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느 틈엔지 금발 머리 남자까지 불러들이더니, 조금 있다가 그녀의 집사로 보이는 남자까지 합세해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영주가 부르지 않는 한 집무실에 들어갈 핑계가 없었던 드베르는 그 근처에서 조바심을 내면서 결과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드배르씨" "예" 드디어 다이아나가 드베르를 다시 부른 것은 저녁 식사 때도 한참 지난 후였다. 물론, 드베르는 퇴근하지 못하고 남아 있었기에 다이아나가 부르자 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 서류들 중, 드베르씨가 작성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최근 한 달 여는 거의 모든 서류를 제가 총괄했고 그 이전에는 세금 징수 부분에만 관여했습니다." "그래요. 고생이 많았겠군요" "아.. 뭘요.." 드베르는 이제서야 일이 생각대로 풀려간다고 생각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새 영주의 얼굴을 보다가 시선이 딱 마주쳤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웃음기는 찾아볼 수 있었고 그렇다고 화가 난 것도 아닌 무언가 슬픈 듯한... 그래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멍해진 상태로 다이아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드베르에게 다이아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 서류들 중 사실이 아닌 사항에 대해서 말해 보세요" "네??" 드베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다이아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침묵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찾아봐야 헛수고였을 꺼야. 내가 미쳤나? 솔직하게 말하게' 여기까지 생각하자, 드베르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고수하면서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거짓이라뇨. 제가 한 달 넘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저는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드베르씨도 이전 영주 밑에선 상당히 힘들게 산 듯 하더군요. 영주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줄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런 건 없습니다!" 드베르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다이아나는 그런 드베르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는 사실을 고백한 경우에는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다이아나의 안타까운 설득에도 드베르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영주가 자신을 넘겨짚어 보는 것이라 확신하고는 더더욱 펄쩍 뛰었다. 얼마나 억울한 표정을 지었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런 일이 없다는데도요. 저는 진실만 기록했습니다. 암요 그렇구말구요" "정말입니까?" 다이아나가 다시 다짐하듯이 묻자 드베르는 속으로 과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아나의 물음에는 어떤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드베르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이아나의 슬픈 눈빛도 자신을 노려보는 에디우스와 말론의 눈빛도 볼 수 없었다. "할 만큼 한거야, 다이아나. 법대로 하는 게 좋아" "네. 아가씨는 기회를 주셨고, 저 사람은 그걸 거부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음성이 들리자, 드베르는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초를 치는 그들에게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그 동안 커진 자신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당신을 파직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재산을 조사하여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돈은 모두 영지의 공금으로 귀속시키겠습니다. 몇 년은 감옥에 가두어야 할 죄목이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군요" 청천벽력같은 선고였다. 꿈이 한 순간에 날아간 드베르는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도 잊고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다. "증거도 없으면서 무슨 말이오? 내가 부정한 일을 했다는 증거라도 있고? 중앙에서 온 젊은 귀족이 뭘 안다고........"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는 계속 말을 하고 있었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에디 고마워. 증거라고 하셨나요? 저도 중앙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니 증거는 있어야겠죠. 제가 돌아다니면서 영지민들에게 들은 세금 내역과 당신이 걷었다고 적은 세금내역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무려 반을 빼돌리셨더군요. 거기다 그 반도 제대로 사용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사용내역이 적혀 있는 부분을 보니 성곽 공사비가 엄청난데, 프라이톤 기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리 건의해도 성곽을 고치지 않아 병사들이 배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것만이 아닙니다만..." 드베르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잘 작성된 이중장부이긴 하지만, 진실을 가리는 데는 이런 서류만으로 부족하답니다. 더군다나 부기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티를 내셨군요. 대차대조표의 항목도 모두 틀렸어요. 아마 전에 하던 분들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하신 듯 하지만, 드배르씨가 물려받은 부분부터는 더더욱 확실하게 이중기재가 눈에 띄더군요. 아마 실제 장부는 따로 있겠지요? 물론 그건 증거로 상부에 보고될 것입니다.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증거를 확보하고 당신의 재산을 몰수하는 시간 동안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가두어야 하겠군요" 기다렸다는 듯이 말론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프라이톤이 몇몇 병사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드베르는 아직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빠끔거리고 있었으나, 병사들에 의해 포박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다이아나는 지친 표정을 역력하게 드러낸 체, 프라이톤에게 드베르의 사저와 집무실 곳곳을 수색할 것을 부탁하고 영주관으로 돌아갔다. 영지민들 사이에 영주대리라고 호가호위하던 드베르가 감옥에 갖히고 그의 재산이 몰수되었다는 소문이 돈 것은 그 다음날부터였다. 그래봐야 괘씸한 아래 사람 하나 가둔 것으로 여겼던 영지민들은 국가에서 정한 세금이 적용된다는 방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실은 수익의 50%를 세금으로 정하고 있었다. 거둬들인 세금 중 영주가 20%를 중앙으로 보내는 금액이 30%였다. 하지만, 국가에서 정한 대로 세금을 내는 영지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주들은 그야말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제멋대로 세금을 부과했던 것이다. *************************************************************************** 채터를 끝내보려고 했는데, 용량은 많아지고.. 더 써도 이번 편엔 안끝날 듯해서 그냥 올립니다. 99편이군요. 100편을 올리는 김에 외전도 하나 같이 올릴까 합니다. 요청이 가장 많았던 2번으로요 ^^;; 1번은 이미 올렸었죠? 자, 그럼 힘을 주세요오 이렇게 연달아 올리면 앞 글에는 절대 리플도 안주시고 추천밥도 안주시는데 그럼... 그럼... 백편이 멀어질지도 모른다 이말입니다아~! (버럭~!) ^^; 안 어울리는군요 쩝... 아무도 안 속으신 것 같구요.. 엉엉 어찌 되었던 시골 내려가기 전에 백편은 올라갑니다. 외전도 올라갑니다. 그 이후엔 모릅니다아 -.-;; 토요일에 시골에 내려갈 것이고 수요일까지는 강의가 있으니 최장기간의 연중이 될 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자 그럼.. 다들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영주라는 것 페르아 영지는 산맥에 근접한 곳 치고는 그다지 살기 나쁜 곳이 아니었다. 물론 몬스터들의 침략이 가끔 있기는 했지만, 최근 1,2년간은 가장 문제가 되었던 오크들의 침략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형 몬스터들의 경우 떼를 지어 오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으므로, 초기의 피해만 없다면 대부분 지원나온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다. 산맥 바로 아래 자리잡은 영지였으나, 넓은 평원이 자리잡고 있고 대지가 풍요로운 편이라서, 그야말로 먹고 살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환경에 상관없이 오히려 문제는 언제나 인간들 사이에 있었다. 영주가 좀 괜찮은 사람이면 영지민들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하다가, 악독한 사람이 영주가 되면 피폐해지는 그야 말로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세금을 국가의 규정대로 한다는 방이 붙었을 때, 몇 몇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한 동안 영지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수 명이 똑같이 방을 읽자, 사람들은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또 방이 나붙었다. 카밀은 새로운 방을 읽어달라는 이웃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이른 아침 억지로 끌려 나왔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영주의 직인이 찍힌 글을 쳐다보던 카밀의 입이 헤 벌어지더니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반응에 사람들은 저마다 몸이 달아 재촉을 하기 시작했다. 방을 읽어 주면서도 카밀은 도통 새로운 영주의 '의도'를 알 수 없어 황당하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 [놀이친구 구함] 다음과 같이 새 영주님의 따님인 디아느 드 라파엘르 양의 놀이친구를 모집합니다. 희망자는 영주관 앞으로 내일 아침 10시까지 집합하여 면담 후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대상 : 3세에서 10세까지의 영지만 특혜 : 식사 제공 근무시간 : 아침 9시에서 오후 6시 급여 : 년 1실버 ------------------------------- 카밀이 방문을 읽자, 사람들도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욕심이 나는 자리였기에, 아이를 가진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날 영주의 저택 앞에는 수십 명의 어른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새벽부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집사인 말론이 8시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다이아나에게 알리자, 다이아나는 아이들이 지칠 것을 염려하여 이들을 홀 안에서 기다리게 했다. 이후 공지된 것보다 훨씬 일찍 면접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각기 아이들의 나이와 이름 성격 등을 열심히 대답하고는 간절하게 자신의 아이가 뽑히길 희망했다. 적어도 하루 한 끼는 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얼핏 보기에도 3살이 전혀 안되어 보이는 갓난 아이에 가까운 아이들과 1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간단한 점심식사를 대접받았고, 오후에 발표가 있었다. 새 영주는 면접만으로는 누가 좋은 친구가 될 지 알 수 없으므로 일단 행당 연령대의 모든 아이들을 딸의 놀이친구 후보로서 한 달간 출근 시킬 것을 공표했다. 공지된 연령대가 아닌 아이들은 예비합격자 명단에서 빠져 있어, 그들의 부모들을 한숨짓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주를 속였다는 불벼락이 내리지 않은 것이다. 하여, 몇몇 집은 실망을 안고 돌아갔고 대부분의 집에서는 적어도 한 달이라는 기간의 유예를 얻어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아이들은 다음 날부터 바로 '출근'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출근하기 시작한 지 이틀 후, 다시 방이 하나 붙었다. ------------------------------------------ [사환 구함] 영주관의 사무를 돕는 사환을 모집합니다. 희망자는 내일 영주의 집무실에 10시까지 모이기 바랍니다. 대상 : 10세에서 17세까지의 남녀 근무시간 : 아침 9시에서 오후 6시 급여 : 년 2실버 특기사항 : 사환직은 의무적으로 글을 익혀야 하며,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급여의 인상이 있을 예정입니다. ----------------------------------------- 지난 번 떨어졌던 이들을 포함하여 또 수십 명이 지원했다. 역시 지원한 나이대에 속하는 아이들이 모두 후보가 되었다. 조건 또한 똑같았는데, 1달간의 수습기간을 둔다는 것이었다. 말론이 이들의 면접을 맡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글을 빨리 익히는 순으로 정식사원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방이 붙었다. 그런에 이번에는 방을 읽던 카멜이 돌연 미친 듯이 뛰어가는 것이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다른 사람들 역시 공고문을 읽어 주기는커녕 영주관 쪽으로 뛰어갔다. 새로운 공문은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자격이 되니 당장 영주관으로 오면 채용하겠음"이라는 간단한 문장이었다. 드베르에 대한 일을 처리한 다이아나는 일단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주욱 적어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장 부족한 것은 사무를 돌볼만한 인원이었다. 이 부분에서 할 수 없이 단기간이지만, 에디우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알트 상단의 중급 간부 몇 명이 차출되었고, 그들은 능숙하게 사무를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아나는 카이젠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영지 내에 자리잡고 있던 엔젤하우스를 방문했다. "후우~!" 우울한 기색으로 앉아 있는 다이아나에게 에디우스가 위로의 말을 했다. "어쩔 수 없잖아. 다 그런 것도 아니라면서? 세상엔 여러 사람이 섞여 있고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야. 너는 최선을 다한 것이고, 그걸 악용한 사람들이 나쁜 것이지." "너무 안일했어. 신전 중심으로 운영이 된다고 해서, 비리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는데...... " 다이아나가 엔젤하우스를 방문한 것은 '교사'를 할 만한 인원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그 곳에서 본 것은 어느 틈엔가 '특정계층'이 되어 버린 엔젤 상회의 몇몇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빈민이 아니었고 오히려 일반 평민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엔젤하우스 내에서도 알게 모르게 상회에 부모가 있는 아이들에 대한 특혜가 소리없이 행해지고 있었다. 물론 신관으로 파견 나온 교사들이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상단 내에서 파견한 이들은 서로 서로 간에 나름대로의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돋보이고 특별하게 대해줌으로써 엔젤하우스 내에 특권층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기가 막혀 질린 표정을 한 다이아나를 보고 에디우스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엔젤상회의 본단으로 이동하여 자신의 얼굴을 아는 수뇌부와의 면담을 거쳐 빠른 시일 내에 이러한 비리의 척결을 성녀의 이름으로 명하고, 실상을 조사할 몇 가지 방법과 차후의 보고에 대하여 일련의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 나갔다. 어차피 에디우스는 엔젤상회의 초반부터 참여한 창립자의 일원인 데다가 알트 상단의 수뇌로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업무 처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오히려, 선의로 벌인 일을 악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시름에 잠긴 다이아나를 위로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이아나도 언제까지나 시름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그 날부터 황당한 공지문을 남발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을 보고 말론이나 에디우스는 한참을 웃었고, 가끔 무뚝뚝한 프라이톤이 벽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말론은 궁금한 듯이 다이아나에게 물어왔다. "어차피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것도 아닌데 왜 '근무'라고 굳이...?" "그래야 경각심이 생기니까요" "사환들도 그런 경우입니까?" "맞아요. 무료교육을 시킨다면 게으름을 피울지 몰라도 '직장'이 달린 일이라면 그렇지 않겠죠. 영주가 뭐든지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서는 곤란해요. 그러니 말론도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해요!" "네, 아가씨" 일단 모인 아이들은 에디우스와 말론이 가르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일단 세 번째 공지를 보고 모여든 이들이 아이들의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다이아나는 글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교본을 밤을 새워 만들었고, 에디우스가 마법으로 이를 아이들 수만큼 복제해냈다. 디안의 놀이친구라는 명목으로 모인 아이들은 디안 아가씨를 위해 초청된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도 놀이친구로서의 '업무'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말론과 안나의 세 아이들도 이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다른 공지가 붙었는데, 이제는 글을 읽어 줄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공지를 붙인 이가 큰 소리로 한 시간에 한 번씩 낭독을 했다. 이번 공지는 더더욱 황당했다. --------------------------------------------- [옛날 이야기 잘하는 노인 구함] 디아느 아가씨에게 옛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줄 노인들을 모집합니다. 희망자는 내일 아침 11시까지 영주관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대상 : 55세 이상의 남녀 근무시간 :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변동 가능) 급여 : 매일 출근시 년2실버 특기사항 :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 외에는 잡일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이야기의 질과 양에 따라 수당이 따로 지급됩니다. --------------------------------------------- 이후로도 노래 잘하는 사람, 요리 잘 하는 사람 등등 영주관이 구인광고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야기꾼 노인까지만 대량채용이 되었을 뿐 그 이후의 채용은 매우 엄격했고, 인원에 대한 사전공지가 있었으며 그대로 지켜졌다. 문제는 행정직이었다. 알트상단의 인원들을 언제까지나 이곳에 붙잡아 두어서는 안된다고 다이아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말론 집사님" "네" "집사님처럼 사무행정에 익숙한 분들이 수도에는 많이 있나요?" "그런 셈이죠. 대부분 고위귀족 분들의 저택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혹시 그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당분간 이 영지는 집사님이 맡아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제가 수도에 갈 때는 두 분과 같이 움직이고 싶거든요. 그리고 집사님이 계시다고 해도 지금 인원으로는 너무 모자라는지라......" "일단 한 번 알아보지요" 말론은 다이아나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생기있게 대답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몇 명의 명단이 빠르게 떠올랐고, 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것과 아가씨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은 환해져 있었다. 다이아나는 마법길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조취하여 말론이 수도와 영지를 오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다이아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모인 노인들과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사무의 잡일을 하는 공지문을 읽은 글을 아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눈여겨 보고 있었다. 일단 영지를 관리하는 데에는 이 영지 출신들이 많이 관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또한 엔젤하우스의 아이들 중 졸업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고아들을 중심으로 학문쪽에 재능을 가진 아이들의 신상명세를 파악하고 그들도 끌어들일 준비를 했다. 석 달은 하나의 영지를 개혁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페르아 영지는 점차 활기를 띄어 가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하이센 제국에서 기획한 모종의 일에 응하기 위해 영지를 떠날 날을 1주일 정도 남겨두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영주관 아래 모두 모여 들었다. "제가 일이 있어 당분간 영지를 떠나 있게 됩니다" 영지 사람들의 인사와 환호에 살짝 웃으며 응대를 한 다이아나의 첫 말은 이것이었다. 단번에 영지민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겨우 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새로운 영주가 떠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지민들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다이아나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 일단 이것을 좀 봐주세요" 영주가 투명한 수정구 하나를 높이 쳐들었다. "만일 억울한 일을 당하시거든 이 수정구에 대고 말을 하십시오. 제가 돌아와서 공정하게 처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정구는 각 마을마다 몇 개씩 지급될 것이고, 몇몇 가정과 마을 어귀에 설치됩니다. 하지만, 수정구에 기록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실여부를 증명할 것입니다. 이 수정구는 저희 영지를 관리하는 분들은 근접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사용방법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수정구를 설치했고, 직접 시범까지 보이는 성의를 보였기에 영지민들은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후우... 이제 대충 끝난 건가?" "음... 그런 것 같군" "에디..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도저히 해내지 못했을 거야" "글쎄... 그렇지 않을껄?" 에디우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다이아나는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엔젤상회의 때에도 그랬지만, 일단 이러한 일을 벌일 때의 다이아나는 엄청난 추진력으로 목표한 바에 전력을 다하곤 했다. "그럼 오래 걸려요?" 디안이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이번 길에 디안을 데려가기는 너무 위험했다. 어차피 수도의 저택에는 며칠 안 묵을 예정이었으므로, 다이아나는 말론과 안느의 동행요청도 거절했다. 그리고, 비상시에 연락할 수 있도록 그녀나 에디우스에게 바로 연락할 수 있는 통신용 수정구를 말론, 안느, 프라이톤에게 각각 하나씩 쥐어 주었다. 프라이톤은 의외로 아이들을 매우 좋아해서, 비번인 날에는 영주관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아이들은 처음엔 그의 얼굴을 보고 상당히 무서워했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금방 아이들의 신임을 얻어냈다. 영주관 안에서 꽤 거대한 등치의 그가 우락부락한 팔에 아이 몇을 매달고 목에는 목마를 태운 채 돌아다니는 모습은 이제는 별 구경거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이아나는 그에게도 행정직을 권해 보았으나, 프라이톤은 서류처리라면 질색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전과 같이 영지의 병력쪽을 전담시켰다. 안느나 말론도 처음에는 프라이톤을 어려워하더니, 나이 든 사람이나 아이들과 여성에게 꼼짝도 못하는 그의 순진한 심성을 알고 부터는 상당히 신뢰하는 눈치였다. 수도에서 떠날 때와는 달리 이번에 움직이는 인원은 단 둘 뿐이었으므로, 상당히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저택에 들러 그 동안 보살피지 못했던 힉스를 만나 보았다. 여행의 성격상 말이 필요했기에 힉스를 데려가기 위해 들른 것이었는데, 석 달이나 자신을 방치한 다이아나에게 삐진 말을 달래느라 한참이 걸린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결국 다이아나가 말에게 애걸복걸하자, 이 모양을 보고 있어야 했던 마굿간 지기인 멜과 그의 아들 윌리, 그리고 에디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에디우스가 짜증이 난 끝에 피어를 쓸까 고민할 즈음이 되어서야 힉스는 화를 풀었는데, 그럼에도 콧바람을 휙휙 내뿜는 모습이 '아직 화 덜 풀렸음' 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무튼 힉스는 다이아나를 태워 주었고, 다이아나는 그야말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멜의 말에 의하면 힉스는 그 동안 엄청나게 주인을 기다린 듯 하다고 했다. 약간 마른 듯한 힉스를 보면서 비록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등한시 한 것을 후회하는 다이아나였다. 다이아나는 황성에 들러 일정을 다시 확인하고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를 주축으로 한 칼라임 제국의 일행은 하이센으로 출발했다. ********************************************************************* ☆★☆ 오크의 현자 ☆★☆ 오늘도 현자가 머무는 집에는 그의 지혜를 바라는 오크들이 모여 들었다. 포치는 그들을 모아 놓고 예전에 그녀가 가르쳐 준 지식들을 하나 하나 전하고 있었다. 그가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들, 그리고 독이 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 늘어놓고 비교해 가며 가르치자, 모여든 각 마을 대표격인 오크들은 존경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투의 마을로 이주한 포치의 마을 오크들은 처음에는 전사 오크가 몇 되지 않아 상당히 천대를 받았다. 하지만, 새로 이주해 온 오크들이 자신들과는 달리 여기 저기서 쉽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을 본 키투마을의 오크들은 차츰 이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식량이 풍부해지자, 오크들이 굳이 약탈을 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물론 다른 몬스터들과의 영역 다툼은 있었지만, 굳이 인간들을 약탈할 필요는 없었다. 포치는 인간들과 다툼이 생길 경우 '토벌대'라는 대량의 인간들이 들이닥쳐 돌릴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역설했고, 이미 포치의 말은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크들은 인간에 대한 약탈을 자제하게 되었다. 대륙의 서쪽 산맥인 오하르트 산맥의 가장 끝부분에 속하던 키투의 마을이 상당히 살기 좋게 되었다는 말이 주변의 오크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요청에 의해 포치는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식을 전파했다. 어느 사이에 이제는 훌륭히 한 몫을 하는 전사가 된 다키가 늘 그의 옆을 수행하고 있었다. 포치의 여행은 그곳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포치는 지금 오하르트 산맥의 중간 정도의 마을에 있었는데, 아마도 수년 후에는 반대편 끝에 가 있을지도 몰랐다. 포치에 대한 호칭은 오크들 사이에 '현자'라는 인간의 단어를 알아낸 한 오크로부터 시작되어 유일한 현자가 되었다. 근래 포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센트리아 산맥 아래부분에 위치한 오크 종족들이 자신들과 같이 약탈을 하지 않는 종족이 생겨났다는 소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엘프와 드워프들을 통하여 인간들과 거래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포치는 '신성한 결투'를 요청한 인간의 여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이 다이아나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하여 포치의 여행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오크 마을들을 거치면서 대륙의 중앙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몇 년이 걸리던 포치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또한 자신들과는 다른 지식을 전수받은 듯한 그 마을의 오크들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크의 현자라 일컬어지는 포치의 멀고 먼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 일단, 100회를 자축하고.. 흠흠.. ^^;; 누구누구와 맺어주세요~! 라고 해도 다이아나 스스로 느끼는 나이 현재 20세. 이 세상에서 살다 간 그 애가 스무 살에 과연 결혼이란 것을 하고 싶을지 거기에 주어진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연애라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지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 흠.. 한 두 분만 궁금해하셨지만, 약속은 약속인 만큼 직업을 밝히자면 프리랜서이며 컴퓨터 강사입니다. ^^; 주로 서울에서 강의를 하는데, 가끔은 출장이 생기곤 하죠 울산은 직원가족교육이었는데, 초등학생들이 쓰는 사투리가 얼마나 이쁜지 웃음이 실실~!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을 좋아하는 듯 하지만, 일상에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원래 좀 모순적인 성격이죠. 대덕도 같은 교육인데, 그쪽은 카이스트 출신들이 워낙 많아서 저, 떨고 있습니다. -.-;;; 리플로 올라오는 질문들 중에 어차피 후에 설명된 것에 대하여는 대답을 해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나왔던 부분을 간과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한 것도 있고 미처 못 한 것도 있군요 오타나 모순점은 보는 데로 족족 고치고 있습니다만... 오류가 심한 날엔 정말 힘들더군요. 친절하게 오타를 지적하면서 몇째 줄이라고까지 해주신 분도 있어서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초반에 100명도 안들어올 때부터 함께 해주신 정말 고마운 분들께 오늘도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약한 마음을 고려하여 다소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시더라도 어휘의 사용에 조금만 자제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게시판에 드나드는 분들은 누구인지도 연령도 모르잖아요 읽는 분들이 불쾌하지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리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잔소리가 길었군요 ^^;; 100편 기념으로 101편은 외전이 올라갑니다. 요청중 두 번째였죠? 바로 유스테우스와 세레스의 인연이죠 즐겁게 읽으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외전2 유스테우스와 세레스 "그러니까 몰래 하면 돼잖아!" "어른들한테 들키면 죽을만큼 맞을지도 몰라" "흥, 너 겁쟁이구나?" "잉? 너야말로 나중에 맞고 징징 짜지나 말어. 난 분명히 경고했어~!" "누가 맞고 우나 어디 두고 볼래?" "그래 좋아!" 결국 나름대로의 협상을 마친 이들은 두 명의 꼬마였다. 신화속의 아기천사를 그려놓은 듯한 얼굴에 금발과 은발의 머리가 어린아이들 치고는 꽤 길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분명히 소년들이었음에도 예쁜 얼굴로 인해 여아들로 착각하기 쉬운 그런 얼굴이었다. 일단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흥분된 바알간 얼굴의 두 소년은 겉보기에는 10살 가량이 되어 보이는 평범한 인간의 소년으로 보였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이제 300세가 넘어가는 드래곤의 어린 자식들, 즉 헤츨링들 이었던 것이다. 헤츨링이라곤 전 드래곤 종족을 뒤져봐야 딱 이들 둘이 전부였다. 덕분에 두 마리의 헤츨링은 늘상 함께 놀곤 했는데,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나 드레곤 본체로 온 레어를 휘집고 다니면서 툭 하면 싸워대는 통에 레어의 물품들은 남아날 날이 없었고, 궁여지책으로 둘은 인간으로 폴리모프 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일단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기껏 싸워봐야 발길질이나 주먹질 정도였고, 기껏해야 멍이 들거나 코피가 터질 정도로 마무리가 되어서 이러한 결정에 두 헤츨링의 후견 드래곤들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원래 인간으로의 폴리모프 자체가 불가능했던 이 두 헤츨링은 한동안 잠잠해졌나 싶더니만, 외모를 이용하여 인간세계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하비어스가 묻자 이번일의 주모자격인 유스테우스가 자랑스럽게 웃어 보이더니, 감추었던 몇 가지 준비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눈이 둥그래진 하비어스는 유스테우스가 꺼낸 물건들 중에 상당수가 어른들이 '유희'를 할 때 사용했던 아이템임을 깨닫고 금방 흥분했다. "어, 이거 어떻게??" "이 몸이 몰래 하나씩 감추어 둔 거야. 히힛" "와아, 그럼 나갈 수 있는거야?" "응 일단 이 팔찌를 끼운 다음에, 자아 내 손 잡아 이동!" 두 명의 장난꾸러기들은 낯선 거리의 구석으로 이동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유스테우스는 꺼내놓았던 물품들을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이동을 했던 것이다. 하비어스에게 자랑하려고 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늘상 외부로 이동할 때의 시동어만을 보았던 유스테우스는 '이동'이라는 시동어밖에 몰랐는데, 아마도 레어로 돌아가는 시동어는 따로 있었던 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졸지에 낯선 거리에 버려진 미아가 된 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둘의 다툼은 주먹질로 이어졌고, 이제는 그나마 멀쩡하던 옷도 흙투성이가 된 데다가 난생 처음 겪는 일에 두려움에 지친 아이들은 싸움 끝에 사이좋게 울음을 터뜨렸다. "흑... 울지 마아.. 끄윽.. 흑.. 아빠가... 끅 ... 구해주러... 훌쩍... 오실거야...." 유스테우스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하비우스를 달래 보려 했지만, 그 자신도 너무나 겁이 나서 울음이 멈추지 않았기에 별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흙투성이가 된 채 골목 구석에서 두 소년은 서로 꼭 끌어 안은채 그렇게 장시간 울다가 서로를 위로하다가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 너희들 집을 잃은 거니?" 신관복을 입었지만, 로브를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인영이 그들을 보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말소리로 보아서는 여성임이 확실했다. 낯선 사람이 시야를 가리자 둘의 머리 속에는 어른들이 가출을 막기 위해 해 놓은 여러 가지 무서운 사실들이 떠올랐다. "너희같이 어린 헤츨링들이 잘못 인간세상에 나갔다가는 자칭 드레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녀석들에게 전신이 해부되기 십상이지." "해.. 해부요?" "암.. 성룡같지는 않지만, 너희들의 드래곤 하트를 빼내고, 드래곤 본으로는 무기를 만들꺼야." "그.. 그럼 인간이라고 우기고 본체의 모습을 안 보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법 당돌하게 유스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흐흐.. 니들의 인간의 모습을 본다면 악독한 인간들이 분명히 팔아 넘길껄... 인간들은 아름다운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지." "팔아요?" "그럼.. 노예가 될거야." "그럴 수가......" 둘의 머리 속에는 온갖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말들이 사실감있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러한 소년들의 상태를 알 수 없었던 여신관은 길을 잃은 소년들이려니 싶어 도와주려고 다가섰다. "꼼짝 말아랏! 더 이상 다가오면......."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말했지만, 소년의 높은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앞 쪽을 말하고 뒷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기억이 않나 결국 우물쭈물하면서 말 끝을 못 채우고 있었다. "이런... 너희들은......" 신관이 둘의 곁으로 다가 오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낭패한 얼굴을 했다. 로브를 휙 뒤로 젖힌 신관은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흥미롭다는 표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오... 오지 말라니까.... 내... 내가.... 누... 군줄 알고......" 하비어스는 그나마 의지할 데가 유스테우스 밖에 없는지라, 어차피 가려지지도 않는 유스테우스의 뒹 꼭 붙어 있었고, 그런 하비어스의 체온에 나름대로 위안을 받으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유스테우스는 앞쪽에 나서서는 말과는 달리 온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헤츨링들이 밖으로 나온 것이지? 가출한 건가?" 청천벽력격으로 여신관이 이러한 말을 중얼거리자, 둘의 안색은 더 하얗게 탈색되었다. 드래곤임이 드러난다면... '해부' 되어 갈갈이....... "저... 우릴 죽일껀가요? 심장도 빼고, 비늘로는 갑옷을 만들고 뼈로는 무기를 만들 거에요?" 유스테우스가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세상에 도대체 애들한테 뭘 가르쳤길래......" 모처럼 여신관의 모습으로 세상을 둘러 보기 위해 지상계에 강림한 여신 세레스는 훌쩍이면서도 연신 끔찍한 일들을 줄줄이 이야기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현재 드래곤의 헤츨링이 딱 두 마리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드래곤들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다행히 인간들이 이 두소년에게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이 보았기에 망정이지, 헤츨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경우 인간 세계에 가해졌을 지도 모르는 엄청난 화를 생각하면 정말 주신의 은총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여신관이 아무 말 없이 둘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겨 있자, 두 소년은 자신들의 꺼낸 말에 의해 점점 더 무서워졌다. 이제는 아예 엉엉 우는 하비어스를 바라보던 유스테우스가 입술을 깨물고 무슨 결심인가를 했는지, 억지로 쥐어짜내는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저... 저기... 끅 저만 잡아가세요. 끅 하비어스는 끅 제발 돌려 보내주세요. 부탁..끅 이에요" "유스~!" "괜찮아 끅, 흐끅... 우리 부모님께 죄송하다고..흐끅! 전해줘.. 다 내...끅! 잘못이야..." "안돼 유스얏! 너만 죽다니!" 두 소년은 다시 손을 맞잡고 당장 유스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세레스는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너무 귀엽기도 해서 한 동한 멍하니 서 있었다. "히유... 이런이런... 일단 너희들 레어로 가자" "네?" 동시에 두 소년이 놀란 듯이 대답했다. "어떻게 나왔지?" 세레스 여신이 두 소년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신성력을 끌어 올리자, 두 소년은 웬지 이 여성을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자애의 빛을 올려 두 소년을 안심시킨 세레스는 소년들이 가져온 유일한 아티펙트를 받아 들고 그들의 레어를 알아냈다. 잠시 후, 둘은 처음 출발했던 그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사이 잠시 레어를 비운 사이에 사라진 두 꼬맹이를 찾느라 - 미처 아티팩트를 눈치채지 못한 드래곤들은 주위의 산맥을 헤매고 있었다 - 온 산을 뒤지고 있던 4마리의 드래곤은 레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하고 서둘러 레어로 돌아왔다. "여신님이시여!" 두 말썽장이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드래곤인 자신들의 부모가 이 평범해 보이는 인간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세레스는 그런 그들을 주욱 돌아보더니, 따끔한 충고를 했다. "일단, 일어나세요. 이 아이들은 인간들의 거리에서 제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방비로 헤츨링들을 돌아다니게 해 놓고도 그대들은 만일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인간 세상에 화풀이를 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부인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잘못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던 간에 헤츨링에게 손댄 존재에 대하여 드래곤의 율법 자체가 정하고 있는 바이기도 했다. 꿀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소리 못하고 죄스런 표정만 짓고 있는 드래곤들에게 여신이 말했다. "지상위의 모든 생명체들은 저에겐 하나같이 소중하답니다. 부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주세요. 믿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하지만, 좋은 아이들이더군요. 훌륭한 드래곤으로 성장할 것 같아요. 너무 심하게 혼내지는 마시구요.. 그럼..." 여인은 환한 빛과 함께 사라지듯이 없어졌다.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멍해 있던 두 어린 헤츨링은 그 날 꼭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그럼 그 여자가... 아니 그 분이 여신님이라는 거에요?" 여자가 라는 말에 아버지의 눈꼬리가 주욱 올라가자 얼른 말을 고치는 유스테우스였다. "그래. 이 철없는 것아. 아휴 저걸 그냥~!" 이미 한 번의 매타작이 끝난 후 치료까지 시켜 놓고도 분이 안풀리는지 다시 손이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억눌러 참았다. 유스테우스는 은빛 머리에 환한 미소가 웬지 모르게 따뜻했던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것이 신계를 뒤집어 놓은 연애의 시초, 바로 유스테우스와 세레스의 첫 만남이었다. 헤츨링 시기를 벗어나자 마자, 유스테우스는 '유희'를 떠났다. 문제는 그가 처음 정한 유희의 형태가 전무후무했다는 것이다. "말도 안돼!!!" "뭐가?" 초연하게 대꾸하는 유스테우스에게 하비어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그런 유희를 한 드래곤은 하나도 없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내가 한다는 거 아니겠어? 남들이 다 한 거 지금 해 봐야 누가 알아 주겠냐구?" "그.. 그건......" "나도 이젠 성룡이야. 내 유희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유스.. 그래도 그건....." "아무튼 난 갈꺼야. 유희 끝나고나 보자!"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하비어스는 유스테우스와의 말싸움에서 패배를 기록했다. 몇 달간 틀어박혀 인간 세상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하던 유스테우스는 공부가 끝났음을 선언하더니, 오늘 지금 하비우스의 눈 앞에서 떠나버린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유희를 한다고 했을까? "이건..." 세레스여신은 자신의 신전으로부터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신전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기운이 풍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런..." 은발머리의 미청년이 수습사제의 복장을 하고 신전에 보란 듯이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인간으로 보이는 그는... 바로 유스테우스였다. 신관으로 유희를 했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세레스는 그 청년의 어린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다. 실버드래곤의 기를 살짝 풍겨내는 드래곤의 나이로 미루어 당사자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이 드래곤은 정말 진지하게 자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여신에 대한 신앙신임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이라고 한다면, 여신을 목격한 드래곤의 신앙심이란 인간의 것을 넘어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오히려 드래곤들은 신성력을 이용할 수 없었는데,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지상계에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과는 달리 드래곤들은 신들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하여 확연하게 사실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들은 신들에 대하여 상당히 존경할 지언정 주신을 제외한 최고신들의 신자가 되지는 않았다. 굳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내려온 전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젊은 드래곤은 보란듯이 신성력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세레스는 황급히 분신을 만들어 유스테우스 앞에 나타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아, 여신님....." 유스테우스의 대꾸에는 한 점의 놀라움도 없었다. 마치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한 그의 초연한 말투에 세레스는 약간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도냐고 물었습니다" "무슨 의도냐구요? 수습신관이 성력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대는 드래곤입니다. 드래곤에게 신성력이 필요하다니요?" "저는 세레스님의 신자거든요. 어릴 때 구원받은 이후로 주욱 신자였다구요" ".. 에엣?" "드래곤이 신을 믿지 말라는 법 있나요?" "그런 것은 없지만....." 결국 유스테우스는 세레스와 일종의 협약을 맺었는데, 신관으로 행세하는 것을 그만두는 대신 그녀와 연락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한 것이다. 여신과의 통신채널을 얻어낸 이 실버 드래곤은 싱글벙글하면서 레어로 돌아갔다. 그 후 무려 천 년이 넘는 기나 긴 시간을 유스테우스는 세레스만을 쫓아 다녔다.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유희를 했는데, 황제가 되어서 세레스의 신전을 사방에 짓는가 하면, 다음 번에는 이름을 날리는 검사가 되어서 세레스의 신자임을 자청하고 다니면서 신도들을 몰고 오는 식이었다. 유희와 유희 사이에는 세레스에게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처음엔 어리광과 같이 받아들이던 세레스도 결국 어느 날인가부터 유스테우스에게 남다른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세레스는 처음엔 오히려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유스테우스와의 만남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간 그의 대화요청을 거절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유스테우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그녀를 기다리겠노라 선언했다. 그 사이 몇 번의 동면이 있었으나, 동면 후의 유스테우스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세레스가 어린 유스테우스를 만난지 정확히 3000년 만에 3300살의 드래곤 유스테우스와 세레스는 서로를 연인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지낸 지 900년 후, 하비우스가 자신의 반려인 아인시아와의 사이에서 헤츨링을 얻게 되었다. 이미 웜급을 넘어 에인션트 급의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유스테우스는 세레스와의 생활에 만족하면서도 하비우스를 남몰래 부러워했다. 세레스 또한 그런 연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비우스의 레어를 들락거리면서 헤츨링을 보고 오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을 졸였다. 그런 생활이 100년 가까이 진행되었을 때, 이 둘은 전무후무한 결정을 내렸다. 인간의 몸으로 아이를 갖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다이아나, 다희였다. *************************************************************************** 100회에 벌인 이야기를 수습하고 다음 회부터는 새로운 내용 즉, 뮤리엘의 음모(?)의 진상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걸 또 잡으면... -.-;; 하여, 이런 저런 이유로 101회는 외전이 되겠습니다. 푸치를 궁금해하신 분은 별로 없더군요 전 맨날 푸치가 신경쓰이는데...... 한 번 등장한 캐릭은 죽기 전까지는 뇌리를 건드려 댑니다. 엑스트라가 아닌 이상에는 일단 등장한 캐릭이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만... 어찌 될 지 아무도 모르죠! 성급한 판단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천천히 여유있게 생각하세요 다이아나의 삶은 기본적으로 그녀의 이쪽의 수명이 백살 이라면 앞으로 수 천 년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수 천 년을 다 그려내긴 힘들겠지만, 그 사이 닫혀진 세계의 캐릭들도 간간히 나와야 할 것이고 (저는 지혜가 좋습니다 ^^;;;) 혹은 조금 더 새로운 설정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런 건 다아 비밀입니다. 오크마을이 처음부터 오크다!!! 그랬으면 재밌었겠어요? ^^;;;) 일부러 알만한 힌트를 복선이라고 깔아 놓고 보여지는 것만 보다가 뒤집어지는 사소한 반전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작가가 머리라도 쓰고 있는 줄 아시지 않을가요? 하하하하~! 그저 그런 글을 열심히 읽어주시는 여러분께는 늘상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도.. 즐독하세요오~!!!!!!!!! 또 하렵니다. 추천과 리플의 작가의 밥이며 힘~!!!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구조대 "언니 혹시 강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강자에 대한 역차별이라... 예로 들자면요?" "이런 거죠. 사자랑 사슴이 싸우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슴을 편든다는 것이죠" "아하......!" "제가 황녀라는 특별한 위치를 타고난 것은 제 뜻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름대로 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황녀라면 아주 행복하고 제 멋대로일 거라고 생각하죠" "흐음....." "물론 저는 제 의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목적을 위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 동원한다는 것인가요?" "맞아요. 하다 못해 아이들끼리 싸워도 할 수 있는 모든 동작을 다 한다구요. 하지만, 세상은 강자에겐 불공평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서 4써클의 마법사가 되었다고 해도, 다른 이들은 그러겠지요. 아버지를 잘 만난 탓이라고......" "그렇겠죠" "하지만, 고써클의 부모를 둔 사람들이 모두 제 나이에 이만한 성취를 했나요? 아니잖아요. 가끔 억울해요. 황녀라는 이유로 저를 볼 때마다 제 노력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구요" "뮤리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말이죠. 기회조차 잡아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뮤리엘이 가진 것들이 너무 부러운 거에요" "하지만, 그건 제 탓이 아니잖아요!" "화 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그들의 그러한 행동과 생각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조금 비뚤어진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하면 어떨까요?" "어찌 되었든 비뚤어진 거잖아요?" "그래요. 타인보다 더 낫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더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의 행동을 하지요. 하나는 스스로 노력해서 더 나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고 두 번째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깎아내림으로서 높아지려는 것이에요. 때로 이 두 가지는 함께 병행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전자는 후자보다 더 이득이 있어요. 결국 나아지기 위한 노력의 대가는 자신에게 돌아갈 테니까요. 후자의 경우엔 결국 스스로는 알고 있지요. 자신이 상대를 진정한 실력으로 이기지 못했다는... 어찌보면 참 딱한 거에요." "딱하다구요?" "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런 일을 했을 테니까요" "......?" "제가 보기엔 뮤리엘은 강한 사람이에요. 타인이나 자신에 대하여 똑바로 보고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하지요. 그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때로 용기가 모자란 이들은 사실을 직시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 두지요. 세상에서 이른 바 '악'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두려움이 악을 만든다구요?" "절대적으로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래요. 하투아의 백작은 어떻던가요? 뮤리엘은 그가 악하다고 생각해요?" "선하다고는 할 수 없죠. 맞아요! 저는 그가 악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정치에 대해서는 뮤리엘이 더 잘 알테니까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야, 그 남자의 아버지는 하투아의 귀족파의 수장이에요. 아마도 이번에 큰 포부를 가지고 왔겠지요. 하지만, 제가 언니들이랑만 너무 붙어 있으니까 불안하고 질투도 났을 거에요. 에디우스 경이나 리카르도 황태자님에 대하여는 후환이 두려웠을 테고, 만만한 상대로 언니를 고른 것이죠. 물론 튀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 거구요.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비겁하지 뭐에요? 조용히 있는 언니를 걸고 넘어지더니, 그 다음의 결투에서의 그 꼴 하고는... 흥!" "그렇군요. 비겁한 사람을 다시 말하면 용기가 없다고 하지요. 그는 시종일관 두려웠던 거군요. 자신이 자신했던 일을 못할까봐, 그리고 힘 있는 자를 잘 못 건드릴까봐, 그 후엔 저에게 지거나 망신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 있었던 건 아닐까요?" "어.. 정말... 말해놓고 보니 그럴 수도......" "재미 있는 사실은요. 어떤 존재도 스스로 하는 일이 절대적인 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악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에 대하여 속으로는 항상 당위성과 이유를 준비해 놓고 있게 마련이죠. 물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건 좀 다르겠지만요. 결국 모든 존재는 스스로의 궁극적인 선을 위해서 움직인다고 생각되요. 다만, 그 방법과 각자의 규정에 따른 '선'이라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잘못된 경우 '악'이라는 판정을 받는 것이죠" "그래도.. 악한 사람은 있어요!!!" "그럴지도 몰라요. 저도 미운 사람들이 있거든요. 후훗.. 그저 이건 제 짧은 생각일 뿐이에요" 다이아나는 석 달 전에 뮤리엘과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뮤리엘은 황녀로서의 선입관은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선입관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야말로 드물게 사물에 대하여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뮤리엘과 대화하는 것은 상당히 즐거웠다. 그녀는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하여 단언하지도 않았지만, 일단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이센의 황제라는 인물도 결코 겉보기처럼 바람둥이 마법사라고 쉽게 판단할 인물은 아니다. 그런 딸을 키워낼 수 있다면, 그의 사고방식 또한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에디우스가 골몰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다이아나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한 마디 했다. "음.. 뮤리엘황녀와 켈러비안 황제에 대해서......" 다이아나가 환한 미소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즐겁다는 듯이 두 사람을 언급하자, 에디우스는 전자는 상관 없었지만 후자의 이름에서 살짝 미간이 찡그려졌다. "흠... 황제까지? 황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데?" "후훗.. 너무 그렇게 인상쓰지 말어. 전엔 춤 교습 일로 내가 심술이 나서 말 안했는데, 사실은......" "뭐야? 정말 너무하잖아!" "그래서 지금 말해 주잖아!" 어차피 일의 시초는 에디우스의 심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인만큼 그저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었던 에디우스는 처음 다이아나에게 말을 걸었던 용건을 생각해 내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번 일 괜찮겠어?" "응? 뭐?" "나야 상관없지만.. 대대적인 전투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더라도 살생을 피하긴 어려울 꺼야." "아.. 그거...!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인지도 몰라. 그리고 어쩌면......" "응?" "응.. 건방진 말이지만, 내가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불필요한 살생을 그대로 보고 두진 않을 작정이야" "그래.. 그렇겠지!" "도와.. 줄거지?" "물론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명쾌한 대답을 듣고 나자 다이아나는 마음 한 구석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이아나 언니~~~~~~~!!!!!" 저 쪽에서 뛰어오는 뮤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도착하자 마자 후원으로 나와 에디우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다이아나는 오자마자 전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창 종알거리는 뮤리엘을 한동안 달래주어야 했다. "그 음모란 것이 말이죠... 이번에 아주 특별한 도움요청이 들어왔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제국은 센트리아 산맥과 오하르트 산맥으로 둘러싸인 형태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두 산맥이 만나는 곳에 사는 엘프 종족으로부터 지원 요청이 온 거에요" "엘프 종족이?" "네. 저도 구체적인 것은 모르지만, 솔베노님도 그렇고, 아바마마는 엘프들과도 친분이 있으셔요. 사실 원래 이건 저와 아바마마만 알던 일이고 황궁을 비우고 몰래 혼자 가 보시겠다는 걸 제가 특별히 부탁을 드린 거지요" "각 제국의 인원들로 구성된 일종의 '구조대'가 되는 거군요" "그래요. 사실 이 정도의 거창한 핑계가 없이 칼라임에서 언니를 보내 줄 것 같지도 않구요. 아바마마가 안 계시면 뒤처리는 모두 제가 해야 할 판이라구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 그 동안도 저를 얼마나 부려 먹으셨는지, 이마에 주름이 생길 지경이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뮤리엘의 이마는 잔주름 하나 없이 희고 곱기만 했지만, 다이아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구체적인 사항은 잘 모르는 거에요?" "음.. 그나마 제가 가장 많이 아는데, 제가 아는 것도 엘프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과 어쩌면 지원을 바라는 것이 엘프종족 뿐만이 아닐 거라는 사실이에요" "엘프 뿐만이 아니라면?" "드워프 종족에 심지어는 오크까지 관계되어 있다는 설도 나오고 있어요" "예?" "그런데, 기한으로 봐서는 또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한 것을 보면 분명히 중요한 일이긴 한데, 급하지는 않다니... 좀 이상하죠?" "그건.. 그렇네요" 이것이 석 달 전에 다이아나가 뮤리엘로부터 미리 들을 수 있었던 '음모'의 진상이었다. 뮤리엘의 음모라고 해 봐야 구조단을 만든다는 하나 뿐이었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구체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엘프에, 드워프, 오크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뮤리엘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제안에 응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일에 대한 제안은 당시 뮤리엘 황녀의 성년축하를 위해 황성을 방문한 모든 사절단에게 한 것이었다. 실력이 드러난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의 경우는 황제가 나서서 꼭 함께 해달라는 요청까지 했기에, 칼라임으로서도 급한 보고에 대하여 허락하라는 응답을 했던 것이고, 다른 제국들의 경우는 나름대로 인원을 편성해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에디우스는 먼저 가서 살펴보고 싶어 했으나, 가능하면 드래곤으로서의 에디우스의 능력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둘 다 공감하는 바였고, 워낙 영지의 일이 바빠서 다이아나가 동행하기도 힘들었기에 그냥 부딪혀 보기로 했다. 너무 많은 인원은 오히려 엘프 마을에 부담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각 나라에 요구된 것은 5명 이하의 인원으로 최소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검사이거나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로 그 자격을 국한시켰다. 물론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는 한에서 기준 이하의 인물의 동행이 허락되었는데, 이는 각국당 단 한명에 한하여 허락된 일이었다. 사실 이 예외조항은 뮤리엘 황녀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으나, 아직 뮤리엘을 포기하지 못한 중앙연합국의 제2황자에게는 상당한 행운이 된 셈이었다. 서쪽의 두 개의 제국은 이번 일에 불참을 결정했는데, 하투아의 경우 당시 방문시의 문제를 일으킨 것 때문에 사양한 것이었고, 시우스제국의 경우는 뮤리엘을 포섭할만한 직위의 귀족도 없는데다가 아직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의 이동은 켈러비안이 마련한 스크롤로 이루어질 계획이었는데, 이는 엘프 마을의 위치가 드러날 경우의 파장에 대비한 것이었다. 만일 이러한 일이 미리 공개되지 않았다면 이를 노리고 시우스나 하투아가 무리하게라도 참여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뮤리엘의 말이었다. "어, 솔베노님도 가세요?" 전에 황제가 각 사절단을 만났던 방보다 몇 배 더 큰 방에 들어서자, 솔베노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해 왔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굳이 다른 사람의 동행을 원하지 않아 둘 만이 오기를 원했기에 방에는 이미 와 있던 솔베노와 뮤리엘 황녀, 그리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네 사람만 있는 셈이었다. 아직 다른 제국의 대표들은 참석하지 않은 듯 했다 "아, 제가 안내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중앙 연합국과 하이센에서 선발된 인원들이 들어섰다. 중앙연합국의 인원은 마법사 한 명과 검사 네 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검사에 속하는 이 중 제2황자가 속해 있었다. 하이센 쪽에서는 마법사 한 명과 검사 두 명 황녀까지 포함하면 4명이라는 인원이어서 제한인원을 모두 채운 것은 중앙연합국 뿐이었다. 솔베노는 안내로 따라가는 것이므로 한정된 인원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 모두 앉으시오. 이렇게 와 주어 고맙소" 황제가 들어설 때 그의 뒤에는 신관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 분은 특별히 제가 신전쪽에 요청하여 오신 고위신관님이십니다. 자애와 치료의 여신이신 세레스님의 신관이시죠" 황제 옆의 신관은 일행의 부상을 대비하여 특별히 초청된 것이었으며, 고위신관이 참여한다는 사실에 모여있던 이들은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아케루디아라고 합니다. 아키라고 부르셔도 상관 없습니다만, 루디아라고는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꼭 여자 이름 같거든요. 아, 물론 제가 여신님의 성별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남자인 저로써는 여자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다지 탐탁한 기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물론 그 환영의 분위기가 얼마나 갈 지는 의외로 상당히 말이 많은 아키에게 달려 있었다. 다음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8클래스 마스터로 알려진 켈러비안은 황궁에 가득한 것 만큼이나 다양한 마법아이템을 일행 모두에게 제공함으로써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하이센 측의 7써클 마스터인 스탠이트와 중앙연합국에서 파견된 6써클 마스터 마법사인 다드보크가 있긴 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나누어 준 것이다. 일행이 받은 것은 엘프의 영지로 이동시키는 스크롤 한 장과 하이센의 황국으로 귀환하는 스크롤 한 장, 그리고 일행끼리 떨어질 경우를 대비한 통신용 수정구였다. 거기에 야영을 대비한 여러 아이템들이 준비되었고 사용법을 잘 아는 하이센측에서 관리하기로 했다. 일단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었으므로 서로 인사를 나눈 이들은 이름이나 애칭을 부르는 데 동의하고 연령인 높은 사람들에게는 '님'의 호칭을 통일하기로 했다. 이는 각 나라마다 작위가 틀렸기 때문에 작위를 따져 봐야 서로 불편할 것이라는 황제의 제안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비록 사소한 일이었으나 작은 분란의 소지마저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그 세심한 만큼은 누구도 경시할 수 없었다. 더하여 일행의 리더를 뽑아야만 했는데, 이는 정말 미묘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가장 직위가 높은 사람은 케트리온 황자와 뮤리엘 황녀였으나, 이들은 실력으로는 가장 뒤쳐졌다. 결국 하이센 쪽이나 중앙연합국 측에서 리더나 나온다면 그들은 자신의 황자나 황녀를 대하기가 껄끄러워지는 셈이었다. 황제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일행의 리더로서 에디우스를 지목했다. 일단 '마검사'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앞서서 야기된 문제가 크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에 대하여 뮤리엘과 케트리온이 동의함으로써 에디우스가 일행의 리더가 되었다. **************************************************************** 일단 써 놓은 데까지는 다 올리고 가려고 102회를 쓰다 말고, 앞 부분부터 리플을 주욱 다시 보았습니다. 새로운 리플은 늘상 보고 있지만, 그건 리플만 보이거든요. 모처럼 앞에서부터 대충 한 번 읽어 보았지요. 속도를 내느라 무리한 부분이 곳곳에 산재해 있더군요 스토리 진행 하느라, 재미가 많이 감소되었구요 스스로 좀 짜증스러웠다는 것이 딱 맞을 듯 하네요 강의를 할 때 잘 따라오는 반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한계를 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좀 특이한 성격이다 보니, 교육생들이 잘 따라오면 신나게 팁이란 팁은 다 해 버리거든요 -_-;;; 원래 가능하면 100%를 이끌고 간다가 제 강의 원칙임에도 초보딱지를 뗀 지 오래인 지금도 가끔씩 스스로 한 실수를 알아차리고 제 정신으로 돌아와 천천히 해야지.. 라고 다짐하고는 합니다. 지금 딱 그런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스토리를 타다 보니, 구석구석 걸리는 데가 너무 많아요. 후... 일단 지나간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새로 쓰는 것들이라도 조금 손을 봐가면서 올려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성질 급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어찌 될 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 써놓고 나니 더 무책임하네요 ㅠ.ㅠ) 100회를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몇 번 감사해도 정말 부족하겠죠 별 거 없는 글에 그토록 좋아해주신 분들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술이라도 한 잔~!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후훗. 미성년자 분들이 많아서 그건 뒤로.... ^^;; 다음 글의 시점은 저도 기약할 수 없으니 양해해 주세요 (잠 자러 침대방으로 갔다가 도루 컴 있는 방으로 돌아와 쓴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자, 그럼.. 모두 즐겁게 읽으시고, 잔소리 많이 하시고(코멘) 미우면 미운대로 떡 하나 주는 심정으로 추천! 고우면 고우니까 격려하는 심정으로 추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추천이랑 저랑은 안 친한 듯 합니다. (조회수 대비 추천수를 처음으로 비교해 보았는데, 최하 수준이어서 절망했답니다. ㅠ.ㅠ) 그럼 다음 글까지 모두들 안녕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구조대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에디우스가 스크롤을 찢자 나머지 사람들도 거의 동시에 스크롤을 찢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숲 속의 작은 공터였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솔베노가 나섰다. 솔베노는 엘프 마을까지의 안내만 맡기로 했는데, 비록 정령술을 쓸 수 있다고는 하나, 워낙 전투 자체에는 소질이 없어서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베노님, 여기서 어느 정도 걸리나요?" "엘프들만 이동한다면 두 시간 정도지만, 여러분과 함께 간다면 세 배 정도로 봐야겠지요" 에디우스의 질문은 일행들도 모두 궁금해 하던 내용이었다. 6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에 비교적 체력이 약한 편인 마법사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고, 이후로는 지루한 숲 길이 계속되었다. 다이아나와 뮤리엘은 사이 좋게 대화를 하면서 걷고 있었는데, 뮤리엘은 의외로 체력이 꽤 센 편이라 그다지 힘들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케루디아 신관은 처음 이들을 질리게 만든 수다를 처음 30분 정도 과시하다가 이내 체력이 딸려 입을 다물어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3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걸었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마법사들과 신관은 체력의 한계에 달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솔베노님, 이 근처에 쉬어 갈만한 곳이 없을까요?" 에디우스가 묻자 숲 속을 느긋하게 즐기면서 걷고 있던 솔베노는 지친 몇 명의 얼굴을 그제서야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점심을 먹을 만한 공터로 안내했다. 처음부터 시간을 계산해 놓은 것인지, 스탠이트의 짐을 들고 있던 브리즈안이 그에게 가방을 건네자 짐 안에서 간단한 도시락 형태의 먹을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스탠이트는 앉을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순서가 바뀌었다고 중얼거리더니 일견하기에도 황당한 아이템들을 마구 꺼내었는데, 덕분에 순간적으로 공터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 따위가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되어버렸다. 가장 질린 표정을 지은 것은 중앙연합국의 일행이었고, 일단 쉰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원기를 되찾은 아케루디아 신관은 하나의 물건이 나올 때마다 감탄사를 섞어 빠르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실 솔베노가 약간 앞쪽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던 이유도 아케루디아에게 있었는데, 도무지 신성함이나 차분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신관은 엘프인 솔베노를 보자 마자 뼈다귀에 달라 붙은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태도로 꼭 달라 붙어서는 대답할 사이도 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예의바른 솔베노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자, 에디우스가 슬쩍 나서서 솔베노에게 앞쪽에서 길을 인도할 것을 부탁했고, 덕분에 솔베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행렬의 제일 앞에 선 후로 가능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느린 속도로 움직였었다. 숲 속에서의 간단한 식사 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하게 해결한 일행은 조금 쉬었다가 출발하기로 했다. 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중앙연합국에서 따라 온 기사인 볼리쉬튼과 헤르츠가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면서 주위를 둘러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에디우스의 양해를 구해왔다. 에디우스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두 기사와 함께 근방을 돌아보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삼십 분 여가 지나,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 대하여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에 정찰을 나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후훗. 역시 에디우스님 답군요" "무슨 말이에요?" 뮤리엘이 돌아온 기사들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하는 말에 다이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저 기사들 말이죠. 분명히 에디우스님께 시비를 걸었을 걸요? 들어오는 기색을 보니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구요. 아마 외모만 보고 얕잡아 본 것일테죠." "그래요?" 그제서야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자신을 나무라면서 다이아나는 기사들을 자세히 살폈다. 과연 기사들은 태연한 듯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으나, 불편한 기색이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뮤리엘은 어떻게 알았어요?" "히유, 그건 언니가 너무 주위에 대하여 무심해서 그래요.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악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보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가장 소수인 칼라임에서 리더를 맡았으니, 중앙연합국으로서는 앞에서야 어떻든 자신들과의 상하관계를 바꾸어 놓고 싶었던 것이죠. 아마 모른척하고 있는 저쪽 나머지 기사들도 눈치는 채고 있을걸요?" 연합제국의 기사 중 자리를 뜨지 않았던 둘은 밝은 얼굴로 활달하게 돌아온 에디우스와 약간 굳어진 표정의 두 기사들을 연신 살피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스스로 주의력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그럴것이 에디우스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 때문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 정도의 분위기 파악은 필수적인 것일 수 있었다. 유독 악의에 대한 면에 둔하다는 뮤리엘의 말에 다이아나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 속에는 꺼려하는 부분이 남아있음을 자각하고 신경을 쓰기로 결심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한 이들은 솔벤의 말대로 세 시간 여를 더 걸어간 후에야 엘프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다이아나도 익숙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엘프 한 명이 튀어나와 솔베노와 일행을 맞았고, 일행은 엘프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엘프마을은 인간들에게 구조요청까지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리고 일행은 결코 흔하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출발 전의 소문처럼 이 마을에 드워프들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 인질이라구요?" "그렇습니다. 하여 저희가 수확한 열매들을 거의 공물처럼 바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일행과 마주한 엘프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놀라웠다. 인간들은 극소수만 알고 있는 일이지만 이들 엘프와 지금 마을에 있는 드워프들은 서로 교류를 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교류하기 위해 오가던 길에 오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모두 끌어갔다는 것이다. 그 때서야 알게 된 일인데, 근방의 오크들이 어느새 통합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계획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엘프 둘과 드워프 셋을 잡아간 이들이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양쪽 마을에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로서는 오랜 세월을 살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을 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상당히 급한 일인데, 어떻게 3개월이나 여유를 주신 거지요?" 뮤리엘이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을 하자, 엘프의 장로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드워프의 대표로 참석한 그운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게 다 저 게으른 엘프들이 한 짓이지. 엘프들에게 일을 부탁한 내가 미쳤던 거야. 느긋할 일이 따로 있고, 예의 차릴 일이 따로 있는거지. 덜컥 그렇게 말해 놓고는 미안해서 일정을 앞당겨 달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박박 우기는 건 또 무슨 경우인지!!" "그.. 그야, 저희 생각에는 인간 분들도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하고, 또......" 사라는 나름대로 엘프식의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그것이 그운의 화를 더 돋구고야 말았다. 덕분에 그운의 걸걸한 소리와 사라의 맑은 소리가 한참 계속되었다. 덕분에 별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간의 일은 모두 알게 되었다. 처음 오크들은 엘프들에게 이것 저것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주로 엘프들이 가꾼 나무들의 열매 정도여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그들은 과일주를 요구했고, 그것도 들어 주었다. 그러자 그 다음에는 드워프들에게 무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괄괄한 드워프들은 차라리 인질들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나서서 오크 마을을 쓸어버리겠다고 화를 냈고, 엘프들은 시간을 벌자면서 만류했다. 어차피 드워프의 무기란 것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엘프 쪽에서 나서서 적절하게 협상을 한 결과 아직까지는 별 탈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인질이 된 이들을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적에 대한 정탐이었다. 다행히 이미 엘프들은 이런 저런 정보의 습득을 위해 정령들을 오가게 하고 있었으므로 정보가 모자랄 염려는 없었다. 일단, 하루를 묵고 다음 날부터 활동을 개시하기로 한 사람들은 몇 개의 방에 나누어 묵기로 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에요" "그렇죠? 제 생각에도 그래요. 오크가 인질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도 없다구요. 오크들도 그 사이 머리가 좋아진 걸까요?" 다이아나의 말에 뮤리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다이아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오크들은 인질을 만들지 않아요. 그들은 쓸 데 없는 살생도 안한다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오크들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없어요" "네?" 다이아나는 뮤리엘에게 오크들의 살생에 대한 개념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살생을 하는 것은 쳐들어온 적과 싸우기 위해서 혹은 식량을 구해서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 맞서 싸운 적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 등이었다. 거기에 드워프들에게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것도 이상했다. "언니 말이 사실이라면 혹시...?" "하아... 이럴 때 의심할 수 있는 종족은 단 하나죠"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일행이 움직이기 전에 일단 오크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에디우스를 만나러 나갔다. 밤 늦게서야 뮤리엘이 있는 방으로 돌아온 다이아나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인질들을 구해내기 위한 계획을 짜기 위해 식사를 한 후 다시 모였다. 일단, 처음에는 정령을 보내어 인질들의 위치를 알아낸 후, 마법사가 나서서 단거리 이동으로 그들을 구출한다는 간단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라의 말에 의해 무산되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인질들이 있는 장소 근처의 마나의 유동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질이 된 엘프들도 정령을 이용한 탈출이 불가능했다. 결국 모든 일행이 오크 마을 근처에 대기하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나서기로 했다. 일단 직접적인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빠른 몸놀림과 마법이 모두 가능한 둘이 적격이었고, 다이아나로서도 바라던 일인만큼 별 문제는 없었다. 몇몇 기사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나섰으나, 투명화 마법을 걸어줄 수 있다고 해도 마나 자체의 파장을 알지 못하면 강제적으로 해제될 수 있다는 마법사의 설명에 의해 좌절되었다. 오크 마을은 하루 반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일단 체력이 약한 몇 명을 고려하여 천천히 움직였으므로, 이들이 근방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은 무렵이었다. 에디우스가 없는 동안 일행은 7써클 마스터인 스탠이트의 지휘를 받기로 하였으므로 일행이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자 정령과 스탠이트의 알람마법이 실행되었다.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는 그들 앞에서 투명화 마법을 시전하여 사라졌다. - 어떻게 할까? 이대로는 들킬꺼야 - 완전히 모르게 할 수 있지? - 응 당연히! - 그럼 그렇게 해 줘! 기다렸다는 듯이 에디우스의 용언의 힘이 다이아나의 몸을 휘감았다. 지난 밤 살짝 와 본 곳이었지만, 오크 마을로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암울한 공기에는 도저히 익숙해지기는 힘들었다. 일단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인질들을 잠재운 후 결박을 풀고 외곽으로 옮긴 후, 다시 용언을 풀고 투명화 마법을 건 상태에서 깨웠다. 어리둥절해 있던 엘프와 드워프들은 두 남녀가 갑자기 나타나자 상당히 놀랐으나, 가까운 곳에 동족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허겁지겁 움직였다. 너무나 간단하게 두 사람이 인질들을 빼내 오자, 동료들은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이들을 안내하기 위해 따라 나선 엘프는 무사히 빠져나온 친구들을 보고 상당히 기뻐하며, 에디우스의 제안에 따라 그들을 먼저 데리고 엘프 마을로 가기로 했다. 엘프와 드워프들이 없어지자, 비로소 에디우스는 오크 마을 내의 사정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는 다이아나를 배려한 에디우스가 이종족들 앞에서 인간들의 추한 면을 또 한 번 보여주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대강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처음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이 모두가 인간들이 꾸민 일이라는 겁니까?" 케트리온 황자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되물었다. 사실 이들은 엘프나 드워프처럼 고고한 자존심을 자랑하는 이종족이 인간들에게 '구조'를 요청해왔고, 자신들이 그러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자긍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밝혀진 진실을 보면, 결국 문제는 인간들로부터 생겼던 것이다. 오크들도 피해자라는 다이아나의 설명에 특히 연합국쪽의 인물들은 망연자실해 하고 있었다. "인간이 한 일이니 인간들이 해결하는 것이 옳겠군요" 뮤리엘 황녀가 나서서 이 일의 해결을 하자는 뜻을 밝히자, 당연히 하이센 쪽의 사람들은 별 반대가 없었다. 연합국 쪽은 이미 인질들이 풀려난 상황에서 오크들을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케트리온 황자가 뮤리엘의 의견에 찬성하고 나서자, 별 수 없이 동의의 뜻을 표했다. 에디우스는 이들에게 빠르게 계획을 설명했다. 운이 좋다면 아침이 올 때까지 인질의 탈출이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주변 수색에 나설 가능성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오크와 맞서서 살상까지는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이번 일엔 그들도 피해자니까요" "그래봤자 몬스터 아닙니까? 어차피 토벌대도 만드는 판에, 굳이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있습니까?" 연합국의 기사 슈마누츠가 불쾌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이 발언을 옹호하는 소리가 볼리쉬튼과 헤르츠, 제스니온의 입에서 작정한 듯이 차례로 터져 나왔다. "아하, 그럼 오크들과 전투를 하시겠다는 건가요?" 에디우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물론, 우리 중앙연합국의 기사들은 누구누구와는 달리 오크 따위를 겁내지 않으니까" 슈마누츠가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렇군요.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 곳의 오크들의 숫자는 전사만 해도 300이 넘습니다. 일단 대충 본 것이니 최소한의 숫자를 말씀드리는 것이죠. 거기에 인간의 검사와 흑마법사도 가세할 것이니, 용감한 여러분이 알아서 한 번 해보십시오. 목숨이 아까운 저희들은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요" 보기 드물게 다이아나가 칼같은 어조로 대꾸했다. 300마리의 오크와 흑마법사라는 말에 당당하던 기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크들을 배려하여 죽이지 말라고 한 점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러분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오크들은 동족을 죽인 이들을 용서하지 않아요. 만일 여러분 중의 누군가가 오크를 죽인다면 아마 그 사람은 이 숲을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오크들의 복수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운이 없다면 다른 일행들까지 동료로 몰려 함께 복수의 대상이 되겠지요. 그래도 그 뜻은 변함 없으십니까?" 약간 누그러진 다이아나의 말에 얼른 케트리온이 나서서 기사들의 무례를 꾸짖고 정중하게 대신 사과를 했다.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시간이 없었으므로 에디우스의 작전에 따라 사람들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오크 마을에서는 인질의 탈출을 눈치채고 수색대를 내보낸다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미리 입구에 자리를 잡은 두 마법사에 의해서 나오는 족족 슬립마법이 걸린 후, 기사들에 의해서 풀숲 사이로 옮겨졌다. 수색을 위해 떠난 오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자, 또 한 떼의 오크들이 다시 수색을 위해 나섰다. 에디우스의 예측대로 두 번째로 나타난 오크들은 좀 더 숫자가 많았으므로 두 명의 마법사와 기사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가 역시 같은 방법으로 오크들을 잠재웠다. 슬립마법이란 원래 상대의 정신력이 약할수록, 그리고 방심할수록 잘 걸리는 특징이 있어, 마법사들은 겨우 세 번째의 수색대까지는 사용할 수 있었으나, 뮤리엘 황녀까지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처리된 오크들은 실제로는 1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였다. 그나마 이들이 한 번 나올 때도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 아니라 조를 짜서 서넛씩 나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단 마법사들이 마나를 모두 소모해서는 곤란 했으므로, 약간의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안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챘는지 더 이상 수색대를 파견하는 조짐이 없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아쉬운대로 마나를 보충한 마법사들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는 신호를 주자, 이들은 마을 안으로 대형을 이루어서 들어갔다. 마을 외곽은 오히려 텅 비어있었는데, 조금 더 들어가자, 오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단상처럼 마련된 곳에 인간의 남자가 성난 기색으로 오크들에게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 옷까지 받아입고는 염치 없어서 한 편 더 올립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단서 지칸은 미물과 같은 오크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세심하게 계획한 것인데, 소중한 인질들이 탈출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힘만 세고 무식한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그래도 제법 말을 잘 듣는다고 약간 방심한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칸은 소리를 지르고 있던 단상에서 뛰어 내려 가지로 있던 검을 검집에서 뽑지 않은 채로 맨 앞줄의 오크들에게 사정없이 휘둘렀다. '꾸웨엑~!'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괘씸하게도 소리를 내지 않는 놈은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지나가면서 강하게 타격을 주었다. 미물 주제에 오크들은 가능하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이 지칸의 기분을 더 나쁘게 했다. "그만 두지!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가래가 끓는 듯한 낮고 거친 목소리가 없었다면 아마도 지칸의 화풀이는 한참 더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를 낸 이는 지칸으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아니, 지금 지칸으로서는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일지도 몰랐다. 일행이 오크들의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누구도 일행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다가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칸은 흥분해서 오크들을 다그치다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그들을 보지 못했고, 오크들은 모두 지칸 쪽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에디우스와 다이아나가 눈짓을 하고 다섯명의 마법이 가능한 이들이 소리없이 케스팅을 시작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오크들은 뒤쪽부터 소리없이 쓰러졌는데, 대부분은 에디우스와 다이아나의 마법에 의해서였다. 뮤리엘은 포함한 세 마법사는 상당히 큰 마나의 유동에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고, 마나로 써클을 짐작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날 수 밖에 없었던 스탠이트의 경우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되었다. 언뜻 그가 보기에, 다이아나는 자신과 동격 혹은 약간 아래였고, 에디우스의 마나 량은 거의 짐작도 할 수 없을만큼 컸기 때문이다. 마법에 대하여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이것이 7써클 마법사인 스탠이트의 위력이 더해져서 나타난 결과로 짐작하고 있었다.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검사들은 조용히 그러나 신속하게 오크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일단 범위를 넓히기 위해 슬립마법 자체의 위력은 약하게 걸린 터라, 오크들은 잠시 후에는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몇 명이 인간의 남자가 간 집 쪽으로 움직였다. "좋지 않아. 방금도 엄청난 마나가 움직였어!" "뭐? 그럼 이대로 있으면 어떻게 해?" "뭘 어쩌라는 건가?" "이익..! 어떻게 해 보란 말이다. 이 늙은이야!" "후후후. 겁이 나나 보군" 데이드라는 이름의 흑마법사이 얼굴 표정은 로브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지칸은 막상 그가 이렇게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자 안색이 급변했다. "네 놈이 부탁한 것은 다 해 주었는데, 이렇게 된 것은 네 놈의 운일 뿐이다" "뭐... 뭐야?" "덕분에 좋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따로 대가를 받지는 않아도 될 것 같군" "무... 무슨 소리야.. 당신 지금...." "그럼... 잘 해 보게나!" 지칸이 소리를 질렀으나, 흑마법사는 미리 준비를 해 놓았던 듯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런! 늦어버렸군요!" "어디로 갔는지 추적할 수 없나요?"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그리고 스탠이트가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바닥에 허탈하게 주저앉아 있는 한 인간남자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문 바로 앞에서 마나의 유동을 감지했는데, 이미 사라진 것을 보면 사라진 인물 또한 만만치 않은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일단, 저 사람부터 잡아야 겠군요" 다이아나가 조용히 말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지칸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마법사냐? 이 빌어먹을 족속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란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광기서린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는 한 명이라도 죽일 결심을 하고 느닷없이 검을 날렸다. 하지만, 끝까지 운이 없었던 점은 짧은 시간에 셋을 본 그가 가장 만만히 여긴 상대가 다이아나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스탠이트였다면 마법없는 접근전에 불리할 수 있었겠지만, 대상이 다이아나라면....... "이런..." 다이아나는 순간적으로 검이 눈 앞에 들이치자, 반사적으로 슬쩍 비켜서서 지칸의 팔목을 잡아 꺾었다. 동시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것인지 노련한 스탠이트가 시동어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홀드" 지칸의 신병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으나, 앞으로의 처리가 문제였다. 인간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다이아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오크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일행 전부를 믿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이아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도망친 마법사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니, 여러분께서는 비슷한 일이 각 국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오크들이 지금처럼 인간들에게 조정이 된다면, 어떤 국가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으니까요" 에디우스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사라진 마법사를 추적하는 일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같은 계열의 하위 마법사의 이동 경로도 쉽게 추적하기 힘든데, 사라진 마법사의 경우 흑마법을 사용했고, 실력 또한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이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두면 새로운 족장을 뽑아 살게 될 것이니, 몇 명만 슬립마법을 걸어두고 포박을 풀어주면 될 것입니다." "저 남자는 어떻게 합니까?" "인간의 법에 따라야겠지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한 것이 하이센 제국이니까 켈러비안 황제폐하께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모든 일을 도맡아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는 측에서 이렇게 말하니, 다른 일행들도 이견을 낼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엘프와 드워프들에게 인간의 치부를 폭로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일단, 엘프의 마을에 머물고 있는 솔베노님에게 일의 처리가 끝났다고 하고 황궁으로 다 같이 가는 것으로 하지요" "마법사분들이 모두 지쳐 계시니, 다이아나와 제가 뒷처리를 맡겠습니다" 뮤리엘이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던 수정구를 꺼내 들고 솔베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다지 명확한 상황의 설명은 없었지만, 문제가 된 존재를 잡았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것만 단순하게 알렸을 뿐이다. "자,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지칸을 데리고 사라지자, 다이아나는 걱정스럽게 에디우스에게 물었다. "지칸이라는 저 사람의 말을 황제가 악용하지는 않을까?" "흠..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에디우스가 호언장담을 한다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어차피 전후 사정이야 오크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다이아나는 오크들의 포박을 풀어주고 그녀 나름대로의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 약간 몸풀기 과정이 있었다. 이른 바 '당당하게 겨루자'로 외치는 그녀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오크들과 '지칸'이라는 수장이 없어진 덕에 여기 저기서 다이아나에게 덤비는 오크들과 다이아나의 '신성한 결투'를 에디우스는 한참 재미있게 구경했다. 이번만큼은 수장 자리가 꼭 필요했던 다이아나는 그녀의 의도대로 오크들의 수장으로 인정을 받았고 아주 짧은 시간동안 수장 노릇을 했다. 그 간의 사정을 물어 본 새로 나타난 인간의 여자 수장은 오크들에게 원래의 마을로 흩어져 '이전처럼' 살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예전 수장들이 각자 자신의 마을 오크들을 이끌고 돌아감으로서, 다이아나의 짧은 수장 노릇은 끝난 셈이었다.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와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연합공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뒤였다. 어차피 별로 도움도 안 되었을 뿐더러, 황제가 칼라임의 사람들에게 치하하는 말을 들으면서 기분좋게 보고 있을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장 껄끄러운 이들이 사라진 것이라서, 다이아나는 물론 뮤리엘도 상당히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황제 폐하께만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연 에디우스가 황제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나섰다. 어차피 황궁 내에서 황제를 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하이센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앙과 같이 작용하였기에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다른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에디우스는 주위에 마나를 퍼뜨려 남은 인원이 하나도 없음을 점검하고는 켈러비안 황제가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용언으로 결계를 형성했다. 그런 에디우스의 행동에 켈러비안은 그냥 초연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이군 케시오니스" "오랜만입니다. 에디우스님" 켈러비안이라고 대륙에 알려진 황제는 1500살이 되는 불루 드래곤이었다. 1800살의 에디우스와는 헤츨링 시절을 같이 지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기도 했고, 그 후로도 꽤 자주 에디우스의 레어에 들락거렸다. 다이아나를 놀라게 했던 황궁의 마법물품들은 에디우스가 공부하던 시기에 케시오니스가 어깨 너머로 흥미있게 배워 두었던 것을 유희를 시작하면서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내내 아는 척을 안하시기에 끝까지 그러실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이번 오크들 껀 때문이지. 실은 말이지....." "후.. 제가 진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든 악용할 여지가 있었겠군요" "디아아나가 걱정하는 것도 그 점이야" "후훗! 형님의 반려만 아니라면, 저도 탐을 낼 만 하던데요" "그랬다가 퍼런 드래곤 한 마리가 유달리 짧은 생을 살고 주신의 품에 안겨야 했겠지" "에고에고! 사랑하는 딸 다음에는 존경하는 형님의 경고가 있는데 제가 감히... 어찌요.. 하하하" 원래 드래곤이 유희를 할 때에는 먼저 유희하는 드래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였고, 더더군다나 케시오니스의 이번 유희는 알게 모르게 에디우스의 도움을 많이 받은 터였다. 에디우스가 직접 황궁에 찾아와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케시오니스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마법 물품을 만들기 위해 유희 초기에도 꽤나 에디우스를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이 일만큼은 다이아나에게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단 케시오니스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모를까, 드래곤이 유희중이라는 것은 스스로 알아내지 않는 한 다른 드래곤에 의해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능력이 뛰어난 나이 많은 드래곤이 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유희중인 성룡들을 골탕먹인 일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는 유희중의 존재로서 행동하고 드래곤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재하면서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존재의 능력과 그 능력으로 인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드래곤들은 무리한 일을 벌이는 법은 드물었다. "그럼, 그 지칸이란 인간에게서 나오는 말은 저 혼자만 알고 밖으로 발설하면 안되겠군요"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죽이지 말라는 것인가요?" "무조건 그러라는 게 아니고, 구제의 여지가 보이면 그러라는 것이지" "후훗. 반려라는 존재가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 "흠.흠..." "그럴 것 없이 그 지칸이라는 인간을 함께 조사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럴까?" "다이아나님도 부르도록 하지요" 다이아나는 황제와 에디우스의 단독면담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부른다는 전언을 받고 안내를 받아 방안에 들어왔다. 방 안에는 마법으로 제압당한 듯 반항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칸과 황제와 에디우스가 함께 있었다. "에디우스경으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 또한 인간이 함부로 다른 생명체들의 삶을 파괴하거나 이용하는 것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이아나경이 걱정하는 일은 절대 없을 터이니 일단 한 번 이 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외로 에디우스가 모든 사실을 켈러비안에게 털어 놓은 듯 했다. 다이아나로서는 일단 켈러비안의 말을 믿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뮤리엘을 길러낸 사람이니만큼 그의 이종족에 대한 말은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켈러비안이 지칸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 보였다. 지칸은 약간 풀어진 눈으로 여러 가지 사식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상당 시간 계속되었는데, 그가 문제의 마법사를 만난 부분부터 듣고 본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듣고 있던 세 명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 이건... 생각보다 문제가 크군요" 켈러비안이 늘상 여유롭던 얼굴을 굳히며 말하자,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도 동의했다. 문제의 마법사는 흑마법사임은 분명했으나, 그 이상의 존재라고 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일단, 이 지칸이라는 사람은 죄질이 나쁘기는 하지만, 천성이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제가 마법으로 기억을 약간 조작해서 궁의 시종으로 일하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이 자에 대하여 접근이 있을지도 모르니만큼 궁 안에 두는 것이 감시하기도 쉽겠지요" "문제는 누가 그 곳에 가서 이 일을 알리느냐는 것인데......" "제가 아는 분이 있습니다" "호, 그래요?" "아마 도와주실 것 같네요" 다이아나가 나서자, 에디우스와 켈러비안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찌되었던 둘 다 다이아나의 '성녀'라는 신분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스스로 그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는 사람이 있고, 도와줄 만큼 친분이 있다면 이 시점에서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켈러비안은 이 일을 다이아나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뮤리엘에게 이 일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다이아나경도 그 동안 지켜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제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 애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이번 일의 해결에 뮤리엘도 참여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뮤리엘과 다이아나경 사이에 생기는 어떤 비밀도 제가 따로 추궁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아이도 이제 이 나라 밖으로 나가 경험을 쌓을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일 정도라면 충분히 훌륭한 경험이 되겠지요"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두 분에게 방해가 안 될 정도의 준비를 갖추어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황녀로 자랐다고 해서 일반 황족들처럼 궁 안에 가두어 키워진 것도 아니니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은.....?" "떠나시기 전에 수정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것은 칼라임 까지의 거리에는 좀 무리가 있으니까요." 결국 일단, 자국으로 귀국한 후 보고를 마치고 행동에 들어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켈러비안의 마법이라면, 대륙의 어떤 곳이라도 이동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일련의 계획이 틀만 잡은 후에 일단 지속적인 연락을 하기로 하고 논의는 끝이 났다. 다이아나는 뮤리엘을 만나 사정을 설명했고, 뮤리엘은 다시 아버지에게 상세한 설명을 듣기로 했다. 일단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는 판단 하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급하게 귀국을 서둘렀다. *********************************************************************************** 아직 안갔습니다. -_-;; 실은 밤 꼬박 새우고 종일 자는 바람에 못갔습니다. 아예 자는데까지 가고 내일 새벽에 갈랍니다. 가서 자지요 -.-;;;; 덕분에 보너스처럼 한 편이 나왔습니다. 즐독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단서 지칸의 아버지 포드란은 용병 출신의 평민이었다. 아주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농민들보다는 수입이 좋던 그가 나이 서른이 넘어서 만난 여자가 지칸의 어머니이다. 포드란이 주로 일을 의뢰받았던 용병 길드 부근의 주점에서 일하던 하이디는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였다고 했다. 처음 포드란이 보았을 때는 오렌지빛과 붉은 빛의 중간 정도의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가득하던 10대의 소녀가 장기간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입이 걸걸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뻔한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외지의 용병들이 들어와 하이디에게 추근거리는 것을 포드란이 구해주었고, 이후 두 사람은 결혼한 후 평범한 농민으로 정착했다. 지칸의 아버지는 마을에서도 꽤 신임을 받았는데, 영지의 웬만한 병사보다 오히려 센 무력을 가지고 있던 탓이었고, 지칸의 어린 시절은 그런데로 평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칸의 마을도 다른 마을과 같아서 영주가 바뀔 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삶은 나빠졌다 좋아졌다를 반복해곤 했다. 과거를 정리하고 농부가 된 포드란이었으나, 지칸을 완전하게 농민의 자식으로 키우지는 않았다. 포드란에게는 나름대로 포부가 있었던 것이다. 나이 들어 검을 배우는 바람에 재능이 있음에도 중급 용병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칸을 어느 정도 수준의 검사로 만드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은 듯, 어려서부터 지칸에게 목검을 잡게 하고 나름대로의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칸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던 것인지, 특별히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 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기에, 어느 정도 몸을 지킬 수준이 되자 포드란은 지칸을 자신이 활동하던 용병길드로 보냈다. 지칸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꽤 열심히 노력했지만, 오히려 아버지가 중급용병이었던 데 반해 그는 고작해야 하급용병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지칸은 몇 년에 한 번씩 휴가를 받으면 꼬박꼬박 고향마을로 향하곤 했다. 그래도 용병의 벌이는 시골 구석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나름대로 정착할 자금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고, 아버지처럼 나중에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평범한 농부가 될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런 평화로움을 어느 날 한 순간에 앗아가 버렸다. 어느 날 고향집에 간 지칸은 거의 폐가가 된 작은 오두막을 보았다. 50대 후반이 된 아버지는 전 해의 흉작으로 인해 세금을 내지 못했고, 결국 그의 부모는 세금 대신 논과 밭을 빼았겼다. 사는 낙이 없어진 포드란은 술 김에 옛 호기를 살려 검을 들고 영주 저택 앞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경비들에게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말리러 갔다가 병사들의 창에 찔리는 아버지를 보고 달려들었다가 죽었다. 지칸의 나이 29살에 그는 부모를 잃고 꿈을 잃고 웃음도 잃어버렸다. 어차피 영주에게 달려가 보아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라는 것을 지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도시로 돌아온 지칸은 약간 순진해 보이던 시골청년의 모습은 간 데 없이 험악한 인상에 말이 적은 사내가 되어갔다. 몬스터의 토벌을 나갔다가 숲 속에서 소속된 용병들과 떨어지게 된 지칸이 오크들의 신성한 결투를 본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급 용병인 지칸으로서는 수장 오크와 맞싸워서 이길만한 능력이 없었고, 오크들이 인간을 신성한 결투의 대상으로 인정할 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미 지칸에게는 복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한 가지 집념밖에는 없었으므로 그는 오크를 이기게 해 줄 누군가를 꽤 오래 찾아다녔다. "자네가 흑마법사를 찾는다는 그 지칸인가?" 스스로를 데드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흑마법사가 접근한 것은 지칸이 은밀하게 마법사를 찾아 헤맨 지 1년 여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처음에는 일반 마법사를 찾아가 의뢰를 하려고 했지만, 누구도 싼 보수를 받고 그가 바라는 일을 해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계획을 털어놓았다가는 오히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수도 있었기에 하급용병인 지칸으로서 마법사를 고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몇 번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한 후에 지칸은 찾는 대상을 바꿨다. 마족과 교류하고 어둠의 세계에 속한 흑마법사들은 오히려 '계약'을 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그다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는 터에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칸은 그 동안 모은 돈을 이용하여 최대한 그늘에 가려진 흑마법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돈은 금방 바닥을 보인데 반해 별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페르세포네의 신전을 찾아가 보았지만,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일에 흑마법사를 소개시킬 수 없다는 반복되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어떻게 알고 나타난 것인지 데드는 지칸의 그동안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었고, 지칸이 원하는 것들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어떤 대가를 받을 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데드의 태도에 의심을 가졌으나, 어차피 그 때의 지칸에게는 남은 희망이 전혀 없다시피 했으므로 데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칸의 도박은 첫번째 오크의 마을에서 성공했다. 몰래 데드에게 헤이스트와 스트랭스 마법을 시전받은 지칸은 수장에게 신성한 결투를 요구했다. 일이 잘못 될 경우 데드가 지칸을 데리고 도망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의외로 수장 오크는 의아해 하면서도 지칸의 결투 신청에 응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주변의 오크 마을들을 같은 식으로 쉽게 통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크들만으로 원수를 갚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각 마을들은 오크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수도에서 대규모의 병력에게 토벌을 당할 위험까지 있었다. 그 즈음에 데드가 이들이 자리잡은 마을 근처에 엘프 마을과 드워프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처음 엘프와 드워프를 인질로 잡을 때에도 데드가 힘이 되어 주었다. 오크들은 먹지도 않을 것을 잡아서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에 대하여 지크가 댄 핑계가 바로 그들에게 식량을 받아낸다는 것이었다. 오크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을 타 종족에게 의탁하는 지칸을 이해할 수 없으나, 오크 사이의 힘의 관계는 지칸에 있어서도 절대적이었으므로 그의 명령에 마지못해 복종했다. 데드는 처음 엘프와 드워프를 붙잡고 엘프들이 마법이나 정령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까지 도와준 이후로는 그저 데드가 해달라는 것들만 도와주었다. 데드가 생각해낸 것은 오크들은 드워프들의 무기로 무장시키는 것과 엘프들에게 그 무기들에 마법을 걸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안 그래도 비협조적인 드워프 종족이 공격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일단 무기를 요구했다. 드워프들은 처음에는 어림 없다는 태도였으나, 지칸에게는 고맙게도 엘프들이 나서서 협상을 해 주었고, 몇 개월 후에 무기를 인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실 지칸에게 드워프나 엘프가 한 말은 '무기를 만드는 데는 3개월 이상이 걸리니 일단 인질을 해치지 말고 기달려 달라'는 말이었다. 그간 워낙 엘프들이 달라는 것을 순순하게 주었기에 지칸은 그들을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오크들을 거느리고 호령하는 재미에 빠져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 된 듯한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칸의 말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무려 반 년 정도를 데드와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데드의 얼굴을 제대로 본 일이 없다는 것과, 그 데드라는 마법사가 행한 일들이었다. 지칸의 기억에 의하면 흑마법사는 특별히 제물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마법을 별 준비없이 시동어만으로 행했다. 다이아나 등의 인물들이 주목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흑마법사로서 그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려면 적어도 상당한 제물을 이용하여 중급이나 그 이상의 마족으로부터 마력을 제공받는 관계여야 한다. 하지만, 고위마법이 가능한 흑마법사는 근래 몇 십 년 동안 나타난 적이 없었다. 물론 일부의 흑마법사들의 패륜적인 행위에 의해 사람들의 선입관이 나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그다지 나쁘다고 볼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일반 사람들의 흑마법에 대한 편견은 흑마법사들이 마족과 계약을 맺는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소수의 흑마법사들이 고위마족과 계약을 맺기 위해 벌였던 끔찍한 사건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오해를 더욱 부추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페르세포네 여신의 절실한 신자로서, 오히려 재능을 믿고 설치는 일반 마법사들보다 절제심이 강한 이들이 많았다. 정상적으로 흑마법사가 되는 이들은 대부분 신전의 허락을 얻어 마족과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의 대가로서 자신에게 속한 것을 희생시켰다. 페르세포네의 신전은 이러한 흑마법사들은 일반인들의 편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분등을 비밀로 해 주는 한편, 그들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흑마법사들이 마족과 맺는 계약은 결국 마나를 지원받는 형태였으므로, 이들의 마나의 형질이 암흑의 성질을 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 또한 마법을 배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야 했다. 물론 마나를 지원받는다는 면에서 재능이 별로 없는 이들도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되고, 써클을 높이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마나만으로 써클이 높아질 수는 없었고,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다는 점 때문에 그 수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에 더하여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마족과의 계약의 대가로 내놓는 것은 그들의 수명의 일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흑마법사를 지원하는 이들은 더더욱 소수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따라서, 데드라는 흑마법사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페르세포네 여신의 신전에서의 지원이 절실했다. 다이아나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시니엘을 떠올렸다. 고위신관인 그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고, 정히 힘들다면 페르세포네 이모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것이었다. 데드의 마지막 말에서, 그가 이번 경험을 악용할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더군다나 처음부터 무언가를 노리고 지칸에게 접근한 그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다이아나는 며칠 간 낯선 곳에서 주인을 태워 보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던 힉스의 한 층 더 높은 불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칼라임 제국으로 돌아갔다.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는 함께 마르띠앙 공작에게 이번 일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으나, 그 내용은 중앙연합국 사람들에게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수도에 꼭 머물러야 할 만한 이유도 없고 해서 이들은 보고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동마법진을 이용하여 영지로 귀환했다. 다이아나는 이번만큼은 힉스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조금 더 떼어 놓았다가는 아무래도 엄청나게 원망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법진을 몇 번 이용하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힉스를 타고 다녔던 덕분인지 녀석은 상당히 마음이 풀린 듯 했다. 생각보다 빠른 영주의 귀환에 저택에서는 한 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물론 소란의 주인공은 디안과 아이들이었고, 짧은 시간이었다고는 하나, 일단 산적한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던 말론은 안도의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을 반겼다. 말론은 다이아나가 통신방법을 마련해 주었다고는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 제국에 나가 있는 주인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탓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다이아나가 밀린 성의 업무들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동안 에디우스는 이시니엘 신관의 위치를 추적했다. 다행히 그녀는 원래 있던 신전에 머물고 있어서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위치만 알아두고 만나는 것은 다이아나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에디우스는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휴, 이걸 어쩌지?" "문제가 생긴거야?" "원래 이 정도 농지의 소출이라면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전 영주가 너무 많이 긁어가는 바람에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 농지가 너무 많아" "다음 해 농사지을 씨앗도 안 남겨 놨다는 건가?" "바로 그거야. 일단 말론이 어느 정도 융통을 해 주었다고는 하는데, 일단 이번 추수까지의 식량이 없다는 게 문제지." "상단에서 좀 끌어 올까?" "그렇게 해서는 해결이 안돼. 근본적으로 당장 먹고 살 것만 해결해서야, 혹시 내가 이 영지를 떠난다면 같은 일만 반복될 것 아니겠어?" "그렇군....." "이미 석유는 엔젤에서 사용하고 있고, 그것이 인간들의 손으로 넘어갔다간 잘못하면 공해만 유발할꺼라구..." "다른 소득원이 필요한 거군" "맞아. 적당한 것을 찾아봐야겠지. 이렇게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어" "응. 고마워!" 다이아나는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고 반성했다. 물론 영지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야 어떤 방법으로든 가능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드워프들의 작품만 처분한다고 해도 영지민들 모두 몇 년간 먹고 사는 것은 충분히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스스로의 사고방식이 문제였다. 다이아나는 생계도 해결되기 전에 '교육'과 '계몽'을 먼저 떠올린 자신의 사고방식이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한국에도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사의 집만 하더라도 그다지 풍족한 식생활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굶어 죽는 사람이 희귀했던 이전의 환경과 대부분의 평민들이 그저 굶어 죽지 않고 이럭 저럭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여겨지는 이곳의 삶과는 천지차이였던 것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 살다 온 자신의 지식을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어느 정도 선까지가 허용되는지 궁금했다. 어차피 이곳 사람들도 탄광이 있고, 석탄같은 것은 캐서 활용하고 있었기에 석유를 사용하는 데는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작업의 대부분은 모두 드워프들이 맡았고 주요 공정의 방법도 아직 드워프들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곳 영지민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새로 가르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과연 허용된 일일까? 결국 이 부분에 대하여는 어머니와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다른 이들에 대하여는 '선행'이 될 수 있음은 알고 있었다. 일단 주위 사람들을 돕는 것부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이제 영지를 맡은 이상에는 그 대상의 범위가 넓어졌다.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의 경계가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오후 늦게 다이아나는 영지 내의 세레스 신전으로 향했다. 동행한 에디우스가 성력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결계를 치고 자리를 피해 준 덕에 다이아나는 초기와 같은 헤프닝을 걱정할 필요 없이 어머니를 불렀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엄마!"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단다. 일단 결론만 말하면 다 해도 되고 하나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예?" "네 지식이 이 곳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지식이 악용되었을 때를 생각해야 한단다. 모든 것은 네가 가르친 것이니만큼 그것들은 모두 네 잘못으로 더해져 저울의 반대편에 얹히게 되는 거야" 세레스의 말을 들은 다이아나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을 떠올렸다. 그는 안정적인 폭약을 개발하여 인류에 공헌하려고 했으나, 그가 개발한 다이너마이트는 불안전한 폭약으로 인해 탄광에서 죽어가던 이들보다 더 많은 이들을 전쟁에서 죽이는 살인도구가 되었다. 세레스의 경고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기계장치 같은 게 아닌 농사를 짓는데 쓰는 정도의 작은 생활물품들은 어떨까요?" "그 정도야 문제 없겠지만, 다이아나 네가 직접 가르치기 보다는 그들이 생각해 내도록 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어차피 문명이 발달하면 직접 발명하는 사람들이 나오겠지. 당장 필요한 것들이야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이곳의 문명이 네 지식에 너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려무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이곳은 마법을 제외하고는 닫혀진 세계의 중세보다 오히려 뒤떨어진 문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마법에 의지하여 다이아나가 살던 시대보다 더욱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마법을 제외하고 나면 실제로 필요에 의한 발명이 거의 정체되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소출이 많던 적던 간에, 그 만큼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농민들로서는 생활에 필요한 무언가를 발명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발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있는 것들로 적당한 생활을 영위하기도 이들은 너무 지쳐 있었던 것이다. 세레스는 다이아나가 저울의 반대편에 내려질 일이라 해도 당장 필요한 것들은 하려고 결심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슬프게 미소지었다. 딸의 결심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다이아나 스스로의 인생이고, 그런 딸의 생각의 이면에는 결국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선의'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최후의 판정만을 생각한다면 다이아나는 성녀로 행세하면서 수 천 년간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애하는 것만으로 어쩌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다이아나는 지나치게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두고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건 세레스 여신 자신 또한 그런면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유스테우스의 속성은 다이아나에게 스스로도 모르는 부분에서 자립심을 주고 있었고, 결국 그런 속성의 다이아나는 후일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인간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궁금한 것을 알게 된 다이아나는 어머니와 모녀간의 수다를 한껏 즐기고 밤늦게 신전을 나섰다. ****************************************************************************** 이 시각에 글을 올린다는 것은... 결국 못 자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낮 밤이 거꾸로 된 터라, 새벽에 떠나려고 합니다. 야간 운전은 정말 싫거든요 (알테는 눈이 나쁜데다가 야맹증도 있어요 -.-;;;) 며칠 사이에 새로 오신 분들이 많으신데, 나중에 글이 올라온 날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하루 두 편에서 많으면 5-6편까지 글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이는 일이 없는 경우이고, 제가 일 때문에 이번처럼 출장을 가게 되면 일단 그 기간 동안 글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긴 지금도 유비쿼터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데, 이러구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자료 만들고 인터넷 강의 원고 쓰는 거야 집에서 하는 일이라 어느 정도 병행이 되지만 외부 강의가 있는 경우에는 글을 쓰기가 힘듭니다. 그나마 지난 번 울산보다는 좀 나은 것이 이번엔 시골집에서 출퇴근을 할 것이므로 컴퓨터 환경은 갖추어져 있다는 점인데, 잘 해봐야 하루 한 편이 아닐까 싶네요 게시판에 보니 infel님의 추천글에 '성실연재'를 칭찬하셨는데, 혹여 그 글을 읽고 오신 분들이 바로 며칠간 연중이 되면 배신감을 느낄까봐 아예 자세한 사정을 올립니다. 내일 저녁은 오히려 한 두 편이 가능할 것이고 월, 화, 수요일중 수요일 같은 경우엔 대전에서 서울로 와야 하므로 거의 힘들다고 봅니다. 그 사이에 연중을 안해보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그리 될 확률이 크니,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즐독 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단서 다이아나는 일단 식량 문제는 잠시 동안이지만, 알트 상단으로부터 대출 형식으로 빌리기로 했다. 아무리 상단의 대표가 에디우스라고는 하지만, 알트 상단의 재산이라는 것 자체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치 친분을 이유로 그 재물을 대가 없이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판단되었다. "그냥 줘도 상관없다니까. 정히 상단의 지원이 싫으면, 레어에서 보석 몇 개 내다 팔면 되니까 내 사유재산에서 줄게" "그건 해결방법이 아니야. 일단 빌리는 것으로 하고 혹시 못 갚게 되면 그 때는 너나 아빠한테 부탁할께. 약속해!" "......" 에디우스는 이런 다이아나의 고집만큼은 꺾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인데도 도움을 거절당했다는 것이 조금 서운했다. 다이아나는 그런 에디우스에게 곧바로 부탁을 함으로서, 그의 섭섭함을 어느 정도 달래줄 수 있었다. "상단에서 빌리는 것은 아예 식량으로 주면 좋겠어. 가능하면 싸게 해 주면 더 좋고. 물론 손해 날 정도로 싸다면 아예 안 받을꺼야." 싸게 해 달라는 말에 갑자기 희색이 만면해진 에디우스의 얼굴을 보고 다이아나가 재빨리 덧붙이자, 에디우스가 약간 움찔했다. "그리고,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에디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신전이 본단이 위치한 중앙연합국에 가서 이시니엘님을 먼저 만나보고, 만일 그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페르세포네님께 여쭈어 볼 생각이거든. 미안하지만, 함께 가서 혹시 페르세포네님을 만나야 한다면, 오늘처럼 결계를 처 줄 수 있겠어?" "그야 문제없지. 아무리 성력으로 만든 분신이라고 해도, 그 정도 신성력을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건 웬만해서는 어림도 없으니까......" 대답하는 에디우스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자부감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응, 그럼 되었고, 그 후에는 헤파이토스님의 신전에 들러야 해" "응? 거긴 왜?" "음... 생각해 둔 것이 있는데, 상황을 몰라서 될지 잘 모르겠거든. 일단 내일 가서 알아보고 가르쳐 줄게" 다이아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에디우스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에디우스는 많이 바뀌고 있었다. 예전의 에디우스라면 다이아나가 자신에게 말 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좀 더 추궁하고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한 위기감을 겪은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에디우스는 예전보다 훨씬 대하기 쉽고 여유로운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이는 다이아나에게 상당한 편안함을 제공하고 있었다. 아버지대의 어처구니없는, 어찌 보면 '사기'와도 같은 약속에 의해 자신을 반려로 믿고, 도저히 실감할 수 없는 1700년이라는 시간을 한결같이 한 명만을 바라보고 자란 에디우스라는 존재는 다이아나에게는 그 자체가 부담이었다. 초기에 동행을 요청하던 에디우스에게 허락을 하고, 가능한 한 '선입관'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문득 문득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의 태도와 그에 대하여 어떤 보답도 기약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감정의 괴리는 오히려 그녀를 에디우스로부터 어느 정도 유리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에디우스라는 존재에 앞서 늘상 그녀의 곁에는 시루스가 있었다. 그의 죽음 이후로 다이아나는 시루스가 자신에게 가졌던 감정의 깊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았고, '애정'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 그가 얼마나 깊은 배려로 그녀의 옆에 머물렀었는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오직 그녀의 감정만을 가장 중요시하던 그 아름다운 엘프는 아주 사소한 부담조차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기에, 그가 없어진 빈 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다이아나는 그의 감정이 엘프의 '사랑'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 주기만 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던 푸른빛의 엘프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다이아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에 대하여 냉랭하게 행동한 것은 시루스와의 관계의 악순환이 에디우스와의 사이에서 발생할 것에 대한 본능적인 염려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의 집착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카이젠을 통하여 직접 경험한 다이아나로서는 당시에는 에디우스가 예정된 제2의 카이젠이 아닐까 하는 전자와는 모순된 염려까지 가지게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에디우스는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굳건함과 그 나름대로의 강함을 선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계신 곳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이질적인 이 세계에서 지금의 에디우스는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었고, 지상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의 자존심마저 아랑곳 없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에디우스의 태도는 그녀에게 진실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의 변화에 대하여 한참을 분석하다가, 결국 이럴 싸한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 그저 편한 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어차피 감정이란 이성의 조절에 의해 어느 정도의 자제가 가능하다고는 해도 그 이상의 조작은 불가능한 나름대로의 불가침의 영역이었으니까. 에디우스 또한 다이아나의 태도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이 전의 사건으로 인해 얻은 교훈이라면 단 하나, 다시는 다이아나가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다이아나에 대한 에디우스의 감정은 어찌 보면 일방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한 면이 있었다. 그의 생각의 기저에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어차피 다이아나는 자신의 소유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었다. 당시의 그는 다이아나의 감정 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에 몰입했고, 스스로 품고 있던 자존심과 소유에 대한 자신감이 상처를 받자,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 에디우스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다이아나의 냉정한 선언 이전에 상처받고 정신을 놓아버린 그녀의 모습을 본 충격이었다. 현재시점에서 에디우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이아나를 지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덕분에 에디우스는 자연스럽게 소유의 욕구보다 '배려'가 우선하는 행동으로 점차 변화되고 있었고, 그 자신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도 다이아나는 민감하게 훨씬 자연스럽고 따뜻해진 그의 감정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라는 선입관을 배제하면 젊디 젊은 이 두 남녀는 그날 밤, 나름대로의 서로에 대한 감정을 되새기면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다이아나님!" 자신의 찾아온 방문객의 이름이 다이아나라는 것을 전해 들은 이시니엘은 전언을 한 수습신관이 멍하게 쳐다보는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고위신관이 된 이시니엘은 차기 대신관으로 거론되는 첫 번째의 인물로, 수습 신관들에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목표라고 할 만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물이 낯선 여성의 이름만 전해 듣고 별 기복 없던 얼굴에 누구라도 알아챌 만큼 감격어린 표정으로 평소의 침착함은 내던진 채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습신관은 속으로 자신이 무언가 헛것을 보거나 오해한 것이라고 내내 중얼거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이시니엘님!" "그럼요.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이시니엘의 눈에는 다이아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존재를 증명하던 살짝 헛기침을 하는 에디우스에 의해 그는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에디우스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성녀를 만나 그녀와 함께 '사건'을 해결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혼자서 생각을 하더라도 늘 꿈같은 일이었다. 결국 그는 성녀에 대하여 알려진 정보들은 나름대로 수집하여 보았고, 그 덕에 다이아나 옆의 아름다운 남자가 엔젤상회 초기부터 성녀와 동행했다는 금발의 검사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흑마법사가 분명한 건가요?" 이시니엘은 보통 신자들과의 면담에 사용되는 방 안에서 그 간의 이야기를 듣고는 재차 확인했다. 물론 성녀의 말을 의심한다기보다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기에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행동이다. 다이아나가 말 없이 긍정을 표시하자, 다이아나와의 만남으로 인해 상당히 밝았던 이시니엘이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아, 아닙니다!"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을 금방 삼키는 듯한 이시니엘의 태도에 다이아나는 진지하게 그를 설득했다. "아무 것이라도 좋아요. 혹시 약간이라도 의심이 되는 부분은 없나요?" "하지만... 속단으로 타인에 대한 의심을 입게 담는다는 것은....." "일단 진실이 밝혀지기 전엔 모든 것이 다 단서가 될 수 있어요. 확증이 있기 전에 절대로 말하지 않을 테니까, 사소한 것이라도 말해 주세요. 이시니엘 신관님의 마음은 짐작이 가지만, 저를 믿으시고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 주세요" 이시니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페르세포네 여신의 신전에서는 치부라 할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를 털어 놓았다. 아무리 대상이 성녀라고는 하나, 엄연한 외부인에게 부끄러운 면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성녀에 대한 믿음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일의 중요성을 우선으로 판단한 것인지, 이시니엘은 결국 머뭇거리면서 그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다이아나는 막상 말을 해 놓고도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시니엘을 위로하고, 절대 그녀의 말이 외부로 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후, 신전을 나왔다. "결국 신관들끼리의 세력 싸움인가?" 이시니엘의 정서를 고려하여 가능한 다이아나를 수행하는 듯한 태도를 짐짓 고수하고 있던 에디우스가 신전을 나와 어느 정도의 거리에 이르자 한 첫 마디였다. "글쎄... 그렇다고 하기엔 좀 이상한 면도 있고......" "저렇게 다투면 페르세포네님이 화를 내시진 않는 건가?" 에디우스는 신관들끼리 신전 내에서 두 파로 갈리어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방관하는 여신의 의사를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확한 교리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힘의 다툼이라면 페르세포네님은 오히려 기뻐하실 수도 있겠지. 더군다나 오래 된 관습의 파괴라는 것은 어찌 보면 페르세포님의 속성과도 연관이 있으니까......" "흠.. 그렇군" "더군다나 마족과의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된 상황이라면 페르세포네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실 꺼야. 흑마법사에 대한 규제도 실상은 신전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 페르세포님께서 특별히 신탁을 내리거나 하신 것은 아니거든" "내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신들의 심기를 짐작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면들이 많아"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빛이라든지 어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눈 기준 자체가 인간이나 다른 존재들의 시각에 따른 일이기 때문일꺼야. 창조는 좋은것, 파괴는 나쁜 것이라고 대부분은 생각하겠지만, 파괴가 없이는 창조가 나타날 수 없는 것이잖아. 어둠도 마찬가지지. 어차피 세상을 이루는 한 속성이고, 어둠이 없다면 오히려 평안한 휴식도 없을거야. 마족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선입관을 배제하고 보면 그들도 나름대로 참 아름다운 종족이라고 할 수 있겠더라고!" "윽! 마족이 아름다워?" "시점을 바꾸면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거지. 후훗. 에디우스도 마족에 대해서 편견이 있는거야?" "글쎄, 솔직히 우리 드래곤에게는 인간이나 마족이나 비슷해. 물론 강함과 약함의 차이 정도는 있겠지만......" "맞아. 드래곤은 그런 종족이었지. 아무튼 파괴를 찬양했으니, 이번엔 창조 쪽으로 가 보자고!" "아, 헤파이토스님의 신전?" "응, 그럼 어디 간다고 생각한 거야?" "아니,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워낙 다른 이야길 하다 보니 새삼스러워서......" 다이아나는 헤파이토스의 신전에 당도하자, 신도들을 안내하고 있는 견습 신관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갔다. "저, 창조의 손을 가진 사제님들을 뵐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다이아나의 말에 헤파이토스의 신관 답에 큰 덩치에 꽤 단단한 근육이 신관복 위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 남자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어이! 클루, 그 쪽 신자님 오셨어~ 야! 얼른 나와 보라니까!!!" 도무지 신관으로 볼 수 없는 걸걸한 목소리에 조심성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그 신관의 모습은 이 곳이 헤파이토스의 신전임을 절감케 했다. "뭐야! 드워프 종족 분이라도 오신거야?" 원래의 형태를 알아 보기 힘든 낡고 꼬질꼬질한 옷은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수습신관의 복장임이었지만, 얼룩이 묻고 여기 저기 기운 자국에 미처 기우지 못한 부분은 탄 자국까지 있어 복장의 주인을 전혀 신관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복장에 걸맞게 걸걸한 목소리가 먼저 선보였던 당사자는 다듬어지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마치 막 탄광에서 나온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이아나는 그를 보자마자, 작업 중에 식사를 하러 나온 드워프를 연상하고는 피식 웃었다. "어? 드워프 종족도 아니네?" 아름다운 두 남녀가 방문자임을 생각도 못 하고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던 그는 그를 불러낸 이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시한 두 남녀를 가리키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크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 헤파이토스님의 은총이다! 이런 아름다운 분들이 우리를 방문하시는 일이 있다니...! 저 머릿결이라면... 틀림없이 내 작품을 시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암 그렇고 말고!" 신전의 안내를 책임진 신관이라면 누구나 해야할 법한 인사의 말도 없이, 그는 무작정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다른 신관이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손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그는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양, 약간 호들갑스럽게 둘을 안내했다. ******************************************************************* 작년 폭우때 이후로 최악의 드라이브였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렌즈를 빼고 안경을 끼고 나갔는데, 밤 새고 나간 시간이 7시 반 쯤이었지요 8시쯤 되자, 햇님이 방긋~! 웃기 시작하는데 동쪽으로 와야 했던 저로서는 눈 앞이 아찔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도무지 뭐가 보여야 운전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멀쩡하게 난간을 들이박고 나동그라진 자동차의 모습이 머리속에 떠오르더군요 폭우 때는 그나마 어차피 다른 이들도 다 안보이는 상태에서 다들 기어가고 있었고, 모두 비상등을 반짝거리고 있어서 외려 나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한 밤중에 상향등을 킨 자동차와 국도에서 마주친 상태와 거의 비슷하게...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얼마간 달리다가, 궁여지책으로 돋수 없는 선글라스를 안경 위에 겹쳐 쓰고야 말았습니다. 안경 자체도 약간 색이 들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엔 라이트 안 켜고 밤에 달리는 기분이더군요 거기에 계기판이 안보여서 속도도 알 수 없구요. 결국 휴게소에 들러서 렌즈를 끼우고서야 어느 정도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얼른 돋수 있는 선글라스를 장만하던지 해야지......! 아까 오후 5시 쯤 한 세 시간 자고 일어났는데, 또 잠이 안오면 내일 갈 때는 별로 상관없지만, 올 때 졸려서 워쩔지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미리 사서 걱정해 봐야 별 수 있나요? 쉬엄 쉬엄 오지요 뭐 -.-;; 여전히 대책없이 사는 알테입니다. 일단, 오늘도 한 편은 올리게 되어서 안도하고 있습니다. 모두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단서 클루라는 이름의 사제는 워낙 쬐재재한 얼굴로 인하여, 도무지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이나가 창조의 손인 사제분들을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희희낙락하면서,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를 신전 구석으로 안내했다. 초라한 문과는 달리, 그 안은 상당히 넓었는데, 엄청난 소음 때문에 소리를 질러야 겨우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망치로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가 주를 이루었고,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듯한 삐거덕거리는 기계음, 그 와중에 소리를 지르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소리까지 어우러져 절로 귀로 손을 가져가게 했다. 다이아나는 귀를 막자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이쪽 세계의 수련으로 더욱 민감해진 청각으로 이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슬쩍 다이아나의 귀 주변으로 마나의 막을 둘러쌌다. 솜뭉치로 귀를 막은 듯이 마나가 귀 주변을 채우자, 그제서야 다이아나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입모양으로 '고마워'라고 한 후, 열심히 설명은 하고 있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 클루에게 집중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그냥 여러 장치들의 생김새와 시연하는 것을 보고 용도를 짐작하기로 했다. "이 곳의 책임자가 누구시죠?"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해보았지만, 클루는 계속 못 알아듣고 되묻는 시늉을 했다. 결국 다이아나는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보냈고, 그 소리가 창고같은 작업장 전체에 퍼지는 바람에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다이아나는 갑자기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하지만, 어찌 되었던 모든 이들에게 한 번에 물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듯하여 다시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기 저기서 이번에는 사람의 음성으로 이루어진 소음이 발생하여 그녀는 열었던 입을 다물고 멍하니 울려퍼지는 소리들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먼저 맡았다!!! 탐내지 말라구!" "아냐, 이번엔 내가 먼저야. 이거 만들고 한 번도 시험을 못해봤단 말이다!" "야, 너는 나보다 낫지, 여성들이 쓰는 걸 만든 나는 근 3년간 한 번도 제대로 사용을 못해 보았잖아!!!" 주로 이런 소리들이었는데, 대부분 자신의 기계를 시험작동시킬 외부인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의미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였다. 워낙 기계들의 소음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들의 목소리는 드워프 뺨치게 컸다. "조용히 햇!!!" 멍하니 있는 다이아나의 앞에 희끗희끗하게 서리가 덮여가는, 한 때는 전체적으로 오렌지 빛이었던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나서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한 구석에서 누군가 중얼거리 듯이 말을 하려 하자, 앞으로 나선 남자는 경고의 말을 함으로써, 그야말로 쥐죽은 듯한 정적을 만들어 냈다. "한 마디라도 하는 놈은 이번 주 내내 신전 앞에서 신도들에게 우리의 교리를 전파해야 할 줄 알아라!"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결같이 때가 묻은 얼굴임에도 분명히 드러나도록 질린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창조의 손을 가진 사제들의 총 책임자인 소네트입니다.." "아.. 네! 다이아나라 드 라파엘르입니다. 저희 영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곳 신관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다이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기대에 찬 신음성이 튀어 나왔으나, 소네트가 눈을 부라리면서 누구의 입이 열렸는지 보겠다는 듯한 태도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다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다이아나의 말이 의외였는지, 미심쩍음과 기대가 반박 섞인 듯한 눈빛으로 정중하게 다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정말 저희 작품들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도 영지 개발에 직접요?" 나름대로는 상당히 품위를 지켜 자제하려고 애 쓰는 모습이었지만, 연달아 질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밖에 이루지 못한 듯했다. "일단 작품들 중에 필요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고, 필요성에 따라 주문에 맞는 창작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있는지도 알아보려고 합니다." 희색이 만발하던 얼굴이 주문에 의한 창작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살짝 굳었다. 소네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창작에는 당연히 자신의 생각이 들어갑니다. 다른 이들의 생각으로 주문받아 만드는 것을 창작이라 할 수 없지요. 만든 작품들이야 얼마든지 협조해 드리겠지만, 여기서 주문받아 창작을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헤파이토스 신전의 '창조의 손'이라고 불리는 신관들의 무시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대부분 발명에 미친 사람들처럼 미친 듯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곤 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실생활에 쓸모 없거나 터무니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헤파이토스의 신전은 그의 창조의 부분은 거의 잊혀진 채, 무력의 부분만이 부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창조의 손'으로 있는 신관들은 대부분 발명에 미쳐 있는 이들이었고, 인정을 받고 못받고를 떠나서 작업장이 제공되고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헤파이토스님께서 원하시는 창조란 무엇인가요?" 다이아나가 질문을 했다. "헤파이토스님께서 원하시는 창조라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분은 단지 창조적인 것을 좋아하실 뿐입니다." "그럼 질문의 방향을 달리 하지요. 창조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건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예?" 다이아나는 약간 당황한 듯한 소네트의 앞에서 갑자기 가까이 있던 작업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 작업대의 임자에게 살짝 양해를 구하고, 다이아나는 나무 몇 개를 망치로 두드려 이상한 모양 하나를 만들어 냈다. "자, 이것도 없던 것을 만들어 냈으니 창조를 한 것입니까?" "그.. 그런......" "제가 여러분의 작품을 둘러 보기 전에 이런 행동을 하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작품의 창작도 중요하겠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은 주문이라 하여 거절하고, 그저 새로운 것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헤파이토스님의 뜻인지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드워프분들은 헤파이토스님의 사랑을 받는 종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보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고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거나 물건 자체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인간이 어떻게 하면 헤파이토스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손이신 여러분께서 이 세상 전체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만들어 널리 이로움을 얻게 했다면 이미 헤파이토스님은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고 더 많은 사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지요?" 확실히 무력의 신으로서의 헤파이토스는 검사 계층 등의 신자들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창조의 신으로서의 헤파이토스는 드워프들에게 추앙을 받을 뿐이었다. 일반인들은 헤파이토스가 무력의 신인 것을 기억할 뿐 누구도 그가 창조의 신인 것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이들을 둘러보면서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주신님과 최고신님들께서 각 속성을 가지고 계신 것은 그것이 생명들에게 필요한 면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여러분은 창조의 속성으로 어떤 생명에게 이로운 일을 하고 계신지 여쭈어 봐도 될지요?" 사실 '창조의 손'인 신관들이 초기부터 지금 같았던 것은 아니다.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일반인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발명하여 상당한 존경과 찬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교단 내에서는 차츰 그런 물품들보다는 기발한 착상에 의한 특이한 작품에 대하여 '작품성'을 운운하면서 높게 평가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한 시류를 타다 보니, 지금처럼 희한한, 그러나 별 쓸모 없는 발명들이 이들의 원래의 존재 의미인 것처럼 왜곡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세에 필요한 물품들을 발명하는 것은 점점 천시되었고, 신관들은 저마다 획기적인 작품만을 생각할 뿐, 더 이상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점점 유리되는 형상이 짙어지자, 이제는 사람들도 그들에 대한 기대를 아예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자존심 있는 이들은 '세상과의 타협은 무의미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것이었다. 이들의 교류는 대부분 드워프들과만 이루어졌고, 드워프들의 손재주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기발함'과 '창작성'으로 위안하면서 그렇게 이미 수 십 년을 정체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가끔씩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발명에 대한 회의가 일기도 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 꽁꽁 묻얻었었는데, 오늘 바로 그 부분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그들에게 이번에는 새로운 방향의 제시와 호소를 시작했다. "저는 제 영지민들을 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필요한 것은 너무 많은데, 저로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라, 신관이신 여러분만큼은 영지민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려 하지만, 능력이 없는 제게 기꺼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빌려 주실 것이라 믿고 말이죠. 여러분이 기부금을 받아 이런 물건들을 만들고 있을 때, 그 재료값도 못 되는 돈이 없어 제 영지민들은 굶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창조의 정신을 모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분들이 그 능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수 년간 고심해도 안될 것들을 너무나 간단히 할 수 있는 분들이 여기에 계십니다. 헌데, 정작 그 분들은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여 정말 필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다이아나의 말은 절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한 영지의 책임자로서, 영지민들을 걱정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도박일 수 있었다. 한 영지의 영주라는 귀족 여인이 찾아와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한탄하고 그들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다갈색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같이 물기에 젖어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둘을 이곳으로 안내해 온 크루가 격앙된 목소리로 악을 쓰듯이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 저기서 지원하는 목소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네트 신관이 그들을 진정시킨 후에 스스로도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진정한 헤파이토스님의 신자십니다. 그 분의 깊은 뜻을 왜곡하고 우리만의 고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진즉부터 걸렸지만, 차마 잘못된 길을 돌아 나올 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오늘, 부족한 저희들을 일깨워 주셨으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해드리겠습니다." 여기 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사실 그들도 사용하는 이도 없는 발명품을 만드는데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저 남들이 열심히 작업하니까 자신도 한다는, 어쨌든 발명을 해야만 하는 재능과 성품을 타고난 터라, 닥치는 대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수 백 년 동안 쓸만한 물건을 만들었던 이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괜찮은 발명품들이 알려지지도 못한 채 사장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상, 마법으로 편한 생활을 하는 귀족들이 서민을 위한 물질적인 발명품에 돈과 시간을 투자할 리 만무했으며, 가끔 뜻있는 귀족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확률이 지극히 낮았다. 상인들의 경우 심한 경우에는 발명품만 빼내어 큰 돈을 벌고 정작 그 물건을 만든 사람에게는 낮은 수고비를 지급한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전 대륙에서 사용된 물건을 만든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었다. 다이아나의 도박은 성공으로 끝이 났고, 그제서야 다이아나의 의도를 알아챈 에디우스는 그녀의 성공을 속으로 축하하면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이후에야 다이아나는 이들의 발명품을 둘러보았고, 방치되었던 몇 작품이 의외로 실용성이 있는 물건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오히려 에디우스가 나서서, 알트 상단의 명의로 그 물건을 발명자의 이름을 붙여 대륙 전체에 퍼뜨리겠노라 약속하자, 신관들은 너도 나도 몰래 만들었던 발명품들은 하나씩 가져와 선을 보였다. 의외의 수확을 걷은 다이아나는 그래도 꼭 필요한 물품 몇 가지에 대하여 여러 사람과 의논을 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은 동력은 말이나 소를 이용하더라도 쉽게 논이나 밭을 가는 도구와, 수확을 도와줄 수 있는 도구 등이었다. 여러 가지 제안이 즉석에서 나왔고 타당성이 있는 것들은 바로 설계도가 그려진 후에 다른 이들에 의해서 수정되고 보안되었다. 몇 몇 신관이 대표로 다이아나의 영지로 가서 더 필요한 물건들을 살펴보겠다고 나서자, 다이아나는 이들이 쉽게 영지로 올 수 있도록 마법 길드를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을 지급했다. "대단했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글쎄.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을거라고 생각이 되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이 세계에는 발명가라는 사람들이 눈에 띄질 않더라구. 하지만, 하다 못해 등잔이라든가 마차라도 발명한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니겠어? 그런 생활용품들에 대하여 조사해 보니 대부분이 저 분들의 선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더라구." "헤파이토스님께서도 좋아하시겠군!" 에디우스의 예측 - 물론 에디우스야 실상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지만 - 은 딱 들어맞아서, '창조의 손'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조카의 방문 때문임을 뒤늦게 안 헤파이토스는 8대 신들을 모아 놓고 다이아나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면, 자신의 신전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겠느냐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했다. ******************************************************************* 평소보다 아주 약간 짧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섯장 분량은 되니 이해해 주세요 걸르는 것보다는 나을 듯해서 일단 가능한 시간에 올립니다. 내일도 비슷하게 써 보도록 노력하지요 다들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단서 "그녀는 왔다 갔는가?" "예" "자네를 의심하는 기색은 없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녀가 우리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네가 알 것은 없다! 아니면 그녀에게 호감이라도 가지게 된 것이냐?" 웃전인 듯한 남자의 음성에는 약간의 조소가 곁들여 있었다. 정중하게 그의 물음에 답하던 젊은 남자는 그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당황해 하고 있었다. "호감을 가지는 것을 말리지 않겠다. 뭐라고 해도 우리가 모시는 그 분께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만큼,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겠지. 하지만, 그녀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들만 보더라도 그녀는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명심해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어!" 드물게 유화적인 표현으로 시작한 남자의 말은 강경한 어조로 끝났다. 젊은 남자는 입을 꼭 다물고 스스로 다짐하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보다, 그녀 옆에 선 존재가 심상치 않습니다." "나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 사건 때 그를 보았다는 이가 없는 걸까요?" "글쎄... 일단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녀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나름대로 조사를 할 모양이니 미리 주의를 주도록 해라"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당분간은 다들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잘했다. 준비가 끝나기 전에 지나치게 강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예" 오후의 햇살은 어스름히 두꺼운 커튼 사이를 뚫어 보려고 했지만 실패한 듯,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보이지는 않지만, 방안만큼이나 어두운 옷을 걸친 듯 가끔씩 눈동자의 흰 부분이 두드러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 건물의 상당히 깊숙한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 카이젠의 기억 속에 성녀는 대륙을 재패하기 위하여 납치를 하려다가 오히려 전쟁을 패하게 만든 원흉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성녀를 얻은 자가 대륙을 얻는다'는 말에 자신이야말로 대륙을 재패해야 할 사람인만큼 성녀를 데려와야 한다고 섣불리 나섰다가, 드래곤의 개입으로 전쟁에서 패퇴한데다가,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성녀의 얼굴은 유난히 희미했는데, 카이젠은 그 또한 당시 드래곤이 손을 쓴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카이젠에게 있어서 '성녀'는 그가 쌓은 업적을 일순간에 무너뜨린 화근이었고, 그의 아버지 대로부터 숙원으로 여겼던 시우스 제국의 정복과 그 이후 대륙의 통일로 이어지는 그의 원대한 계획에 훼방을 놓은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카이젠이 다이아나에 대한 기억을 조정당하자, 라덴은 때를 놓칠세라, '후계'의 문제의 중요성을 거론하고 나섰다. 하지만, 카이젠은 라덴이 거론하는 황후 후보들에 대하여 갖가지 이유를 대어 거절하고 있었는데, 워낙 그 이유가 논리적이고 타당하다 보니, 라덴은 몸이 달아 올라 어쩔 줄 모르는 지경이 되고....... "흠.. 중앙연합국 놈들이 몸이 달아 올랐겠군" "아무래도 그렇지요. 제2황자라는 신분 자체가 워낙 앞일을 알 수 없는데다가 벌써 빤한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친 셈이니......" "뮤리엘 황녀에 대하여 더 이상 알려진 사실은 없는가?" 처음으로 반려가 될 만한 신분의 '여성'에 대한 거론에 라덴은 기쁘기 한량 없었다. 그는 엉겁결에 드물게도 계산에 없이 대답을 했다.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는 여걸입니다!" 카이젠은 라덴의 그러한 태도에 짐짓 흥미가 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훗! 그 정도란 말이냐? 네가 여자들에 대하여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전에는 본 적이 없구나!" "에엣?" 몇 번이나 좋은 얼굴로 황후감을 거론했는데, 황제가 지금에서야 표정을 말하고 있었다. "네가 너와 함께한 세월이 있거늘...... 이전의 얼토당토 않은 황후 후보들이 네 놈의 머리에서 나온 없으니보다는 나은,.. 이라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헌데, 지금 뮤리엘 황녀에 대한 네 모습은 여자들에 대하여 항상 비관적이던 너의 태도와는 상반되는구나" 라덴은 대륙의 둘째가는 - 첫째는 물론 성녀였다 - 신부 후보에 대하여 모처럼 카이젠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뮤리엘 황녀에게 첩자를 붙일까요?" 흥분에 못 이겨 미처 다이아나라는 변수와 에디우스를 생각하지 못한 라덴은 자충수를 둔 격이었으나, 황제와 라덴 모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일단! 그 아비가 8써클을 넘어서거나, 아니면 그 주변에 있으니, 친분을 가진다면 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최대한 모든 정보를 모으거라!" "예, 폐하!" 응답을 하는 라덴의 얼굴은 마치 50을 눈 앞에 둔 농촌 총각이 참한 신부를 만난 냥,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카이젠은 지이드 공작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유일하게 믿을 만한 친구이자, 자신보다 더 믿을 만한 충복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 "그래서, 달랑 그것도 정보랍시고 가지고 온 것이냐?" "하지만, 고위써클의 흑마법사라는 존재는......" "닥쳐랏~! 어차피 오크라고 해 봐야 몬스터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우리처럼 산맥과 접하지 않은 나라에서야 다른 나라들이 몬스터들과 싸우는 일이야말로 반겨할 일이 아니냐?" "그.. 그런 말씀을......!" 인간이 몬스터에 의해 피해를 입는데도 동족이라는 의식보다는 적들의 '병력 약화'와 연계하여 오히려 '호재'라고 말하는 제1황제의 태도에 제2황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어차피 뮤리엘 황녀의 성년식을 핑계로 한 행사에서도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을 뿐더러, 그 이후의 천재일우의 기회에도 아무 것도 못했다고 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하여 이러한 모욕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형이 황제의 위에 걸맞은 인재임을 믿고, 어려서부터 형의 오른팔이 되리라는 순수한 결심을 다져 온 제2황자에게 어려운 순간 나타나는 형의 비인간적인 모습은 실망으로 다가왔다. "리카르도 또한 그 계집아이가 다른 놈과 친하다면 뮤리엘 황녀를 노릴 것이다. 운이 없다면 카이젠이 재기의 기회로 그 황녀를 탐낼 수도 있다. 네가 과연 그들과 맞설 수 있겠느냐?" 그의 말 속에는 그럴 자신도 없으면, 황자로서의 대우를 받을 생각도 말라는 일종의 협박과 같은 색깔이 짙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 "그럼 이제 그녀를 단념하신 것입니까?" 알렉시안이 모처럼 리카르도와 둘이 있게 되자, 그의 심중의 의문점을 털어 놓았다. "글쎄...... 알렉, 네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지?" 리카르도가 늘상 짓던 밝은 미소가 완전히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냉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감히 어찌, 황태자 저하를 평가하겠습니까만, 어려서부터의 친구로서 물어 보시는 것이라면 부족한 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길~! 너도 귀족들의 허식을 닮아가는 게냐? 좋다! 허락하마, 지금부터 너는 나의 친구로서 이야기 해라!" 술 취한 이의 탄식같은 말이 맨정신의 황태자로부터 떨어졌으나, 정작 그 대상인 알렉시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꾸했다. "그럼 친구로서 말하지. 리크!" 오랜만에 들어보는 애칭이었다. 자신의 '충복'이라는 이름으로 키워진 알렉시안과의 사이가 주군과 신하라는 하나의 굴레로 얽매인 후 처음 들어보는 애정이 담긴 애칭에도 리카르도는 굳힌 얼굴을 차마 풀지 못했다 "얼른 말하라니까!"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진중한 태도의 알렉시안을 앞에 두고, 리카르도는 지위도 신분도 잊은 한 명의 남자로서 캐묻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냐? 네가 보기에는 내가 남자로서 매력이 에디우스 경보다 덜한 걸로 보이니? 도저히 그녀는 내 손 안에 잡을 수 없다는 것이냐?" 낙천적이고 긍적적인 평소의 태도를 접은 채 리카르도는 비관적인 물음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알렉시안은 겉 껍질을 모두 벗겨버리고 연약한 속살을 내밀고 있는 갑각류 같은 황태자의 반응에 쓰게 미소 지으면 말했다. "연애라면, 네가 나보다 경험이 많겠지.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반응을 내가 어찌 알겠나?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리카르도가 스스로도 웃긴 질문이었다는 듯이 자조를 머금자, 알렉시안은 자신의 의사를 솔직히 밝혔다. "허나, 그녀는 내 주군의 반려로 탐낼만한 인물이다. 아마도 그녀를 얻는다면, 너는 한 쪽 날개를 단 것과 같겠지. 하지만, 한 명의 남자로서 그녀를 애모하는 이는 너 하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나이나 능력을 미루어 볼 때, 앞으로 더더욱 증가할 것이다." 알렉시안은 자신 또한 다이아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단지 매력적인 여성이기만 했더라면, 나는 기꺼이 너와 연적이 되었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이 대륙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인물이기에 나는 너의 반려로 그녀를 추천한다. 허나, 이것은 한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사랑을 말함이 아니다. 황제로서 그 자리에 합당한 황후 후보로 그녀를 권하는 것이다. 네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 있는 이상 너는 그녀를 절대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리카르도는 마르띠앙 공작이나 황제 그리고 알렉시안에 비하여 다이아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혼자 품고 있었다. 이는 황태자 편의 측근이자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셋이 모두 아는 사실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황태자의 침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아는대로 털어 놓으라 강압하지 않았을 뿐이다. 헌데, 오늘 친구로서의 알렉시안은 그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리크! 예로부터 사랑과 전쟁에는 페어플레이란 없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지 아나? 패자의 편에 선 역사는 없으며, 연애에서의 패자는 젊은 날의 추억일 뿐 절대 여인에게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이다. 네가 진정 그녀를 원한다면 자존심을 버리고, 밑바닥 끝까지 내려가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가 아는 모든 정보를 이용하는 것만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알렉시안의 말 속에 감추어진 뜻을 알아챈 리카르도의 표정이 굳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마지막 말이 쐐기를 박았다. "단지, 남성으로서 네가 그녀를 연모한다는 것이면, 이 자리에서 말해라. 나 또한 넋 놓고 네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건네 주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 황태자가 아닌 일개 남자에게 그녀를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알렉!" 마치 연적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듯한 알렉시안의 태도에 리카르도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억울하냐? 내가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하고픈 거냐? 웃기지 말어. 네가 황태자가 아니라면 내가 진작에 그녀를 가로챘을 거야" 알렉은 약간 과장된 어투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의 표현임은 틀림 없었다. 리카르도는 그런 그의 태도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친구의 마음 깊은 속을 읽고 있었다. "후.. 그래! 내가 어리석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나만 알아다오. 너에게만 말하지만, 그녀가 아무 가치 없는 여인이었으면 오히려 나는 마음껏 사랑하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카르도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인재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다이아나였다면, 충분히 어떤 수단을 쓰던 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고, 더군다나 대륙 최고의 무력을 소유한 하투아가 그녀를 탐낸 황제 하나로 인해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승리를 의심치 않던 전쟁에서 패한 것이나 다름 없는 결과를 얻었다. 리카르도에게 그런 다이아나라는 존재는 정석적인 남성으로서의 어필 외에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잊지 마라! 리크!!! 네 아버지에게 황제폐하께서 주군이고, 네가 그 분의 뜻을 이어 이 나라를 이끌어갈 후계인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황제폐하보다 앞선 유일한 주군이 너라는 것을. 내 일생을 건 네가 더 이상 나약함을 보이는 것은 내게 대한 모독일 수 있음을... 너를 위해 온 실력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내 스스로가 비참해지지 않게, 네가 내 결정이 맞았음을 증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리카르도는 목숨을 내놓고라도 자신을 지킬, 그보다 더한 기사의 명예 따위는 자신의 말에 의해 한 순간에 던질, 그리고 평생 처음 마음을 움직인 여자를 군주로써 차지하라고 권하는 친구의 말에 가슴 속 한 곳에 찌를 듯이 아파왔다. ************************************************************************ 졸립니다. 아버님과 한 잔 거하게 했습니다 ^^;;; 형부가 선물했던 조니워커 블루가 남아있던 삼분지 일의 운명을 달리 했군요. -.-;;; 오늘의 빅소식은 희소식(?)과 나쁜 소식입니다! 2주 정도 인터넷 강의원고에 매달려야 할 듯 합니다. 하여 더더욱 바빠지고, 글 쓰기는 쉽지 않을 예정입니다만.... 하루 10장 분량은 지켜보도록 하지요 (10Kb 씩 두 번이죠? ^^;;;) 북박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출판을 하게 될 것 같네요 ^^;;; 일정 잡아서 콜라와 맥주로 한 탕 할까요? -.-;;; 너무 미리 샴페인틀 터뜨려서도 안되겠지만 김 빠진 샴페인은 맛이 없는법! 미리 예고편을 띄웁니다. 순조롭게 계약까지 들어가면 번개를 한 번 칠까 합니다. 장소는 아무래도 서울이 되겠지요. 참석자 미리 받습니다. 계약 안되면? 무산됩니다아~!!! - 알테 - 잠시 생각을 했지요 ^^; 수정하면서 동화를 한 편 올립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를 기대하며.... - - 프롤로그 - - 아주 옛날에는 하늘이 지금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때의 일이어요. - 1 - 하늘에 자리잡은 별나라의 많은 별들 중에는 사람들이 이름을 아는 별들이 있었지요 별나라에서는 그 분들을 '신장'이라고 불렀어요. 오리온 신장, 카시오페이아 신장.. 어린 꼬마 별들은 모두 커서 그런 신장별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그런 별 중에 꼬마별 해피가 있었답니다. 해피는 아아주 작은 별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별들처럼 주어진 일이 없어 엄마 별 옆에서 세상 구경을 하거나 가끔씩 신장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하고 꿈을 키워 나갔죠. 땅위에도 친구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그 중 해피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숲속의 멋진 암사자 라이어와 들판의 얼룩말 레이서 그리고 마을 안쪽에 사는 고양이 나비였답니다. 나비와 해피는 태어난 날이 같았어요. 해피가 처음으로 내려다본 땅의 세상에 아주 귀여운 친구가 안보이는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나비가 눈을 뜬 그 날 밤, 해피는 하늘에서 나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안녕?" "어? 누구야??"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나비는 하늘에서 전해지는 갸냘픈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한껏 쳐들어보았답니다. 하늘의 많은 크고 밝은 별 중에 아주 작은 별 하나가 나비를 보고 웃고 있었지요. 꼬마별 해피와 꼬마고양이 나비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답니다. - 2 - 나비의 언니 오빠들이 모두 사라지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나비가 좋아하는 막내아씨가 중학교에 입학한 날, 해피도 드디어 하나의 일을 맡게 되었어요 이제 정식으로 별가족의 임무를 맡게 된거죠. 해피는 다음 날 맡겨질 임무를 고대하면서 한밤에 눈을 반짝이면서 나비에게 자랑을 했답니다. 나비도 한껏 축하를 해 주었구요. - 3 - 다음날은 별가족의 회의가 있었어요 해피는 여태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었지요. 가장 늦게 일을 끝마치는 아름다운 비너스 신장이 들어오고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답니다. 해피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괜히 불안해 하시는 눈치로군요. 아마도 어린 해피가 걱정되시나 봅니다. 중앙에 주욱 늘어선 신장들이 이것 저것 의논을 하더니 드디어 해피를 부르십니다. 해피는 으젓하게 그 앞으로 나섰지요. "해피, 이제 너도 일을 할때가 되었구나, 잘 할 수 있겠지?" "네엡~!" 씩씩하게 대답하는 해피의 맑은 음성이 회의장 안으로 울려퍼졌답니다. "해피야, 우리 별들은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별이 될 사람을 선발하는거야. 이번에 새로 별로 태어날 소녀가 있는데, 네가 가서 그 소녀를 만난 다음 별나라로 데리고 오너라. 기한은 일주일이야" 해피는 신이났어요. 얼른 친구들에게 새로 받은 임무를 자랑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애써 참으면서 "넵 알았습니다~! " 하고 대답을 했지요. '별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러 가다니, 난 참 좋은 일을 맡았어" 해피는 자신의 일이 마음에 들었어요. 기쁜 마음으로 먼저 숲속의 라이어 아줌마를 찾아갔지요. - 4 - "라이어아줌마~!" 미처 어둠이 내려앉기도 전에 아주 작은 빛으로 화한 해피는 숲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라이어 아줌마는 평상시처럼 우아한 자태로 예쁜 아기들과 함께 계셨어요. "응? 해피구나? 뭐 좋은 일 있나부지?" 아줌마는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해피에게 물으십니다. 해피는 신이나서 설명을 했어요. 아직 달려온 기운으로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 새로 맡은 임무에 대하여 열심히 떠들었답니다. 해피의 별빛은 그야말로 초롱초롱 빛났지요.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난 라이어 아줌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크게 한숨만 내쉬는 거에요. "아줌마 왜요?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 아니야. 해피야. 너 이제 다 컸지?" "그럼요 해피도 이젠 꼬마별이 아니에요 당당히 제몫을 할 어른별이라구요. 이번 임무를 훌륭히 해내고 다른 일도 열심히 해서 저도 꼬옥 신장이 될꺼에요." "그래 장하구나." 하고 말하는 중에도 라이어 아줌마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표정이 떠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신이 난 해피의 눈에는 아줌마의 걱정스런 얼굴이 전혀 들어오질 않나 봅니다. 해피는 얼룩말 레이서와 꼬마 나비에게도 자랑을 한 후 시간에 늦지 않게 얼른 별이 될 소녀의 집으로 향했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려고 서둘러서 말이지요. - 5 - "콜록~! 콜록~!" 오늘도 지은이의 아침은 기침으로 시작됩니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 힘든 기침으로 지은이의 온 몸은 떨리고 있었어요. 어제밤 늦게 장사를 마치고 들어오신 어머니가 깨실까봐 지은이는 수건을 입에 대고 소리를 죽여 기침을 합니다. 지은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은이네는 사람들이 달동네라고 부르는 높은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은이는 그 동네가 좋았습니다. 밤에 별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별님들은 지은이의 이야기를 다 알아듣는게 확실했습니다. 늘상 지은이를 보고 미소를 지어주곤 했거든요. 어머니가 일을 하러 나가신 후 지은이는 평소처럼 자리에 누워 책을 펼쳐듭니다.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지은이에겐 이제는 책이 유일한 벗입니다. 원래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집에 돈이 좀 있을때는 가정교사 선생님이 오시곤 했지만, 이제는 오시지 않습니다. 지은이는 늘 책을 읽으면서 상상속에서 지금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 6 - 해피는 소녀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음이 이쁜 이들이 그렇듯이 소녀는 조그만 방 창문을 열고 벌써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갑자기 그 중 작고 예쁜 광채가 나는 별이 지은이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안녕? 네가 지은이지?" 지은이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별을 쳐다보았습니다. "잉 내 말이 안들려? 지은이 맞지?" 성격 급한 해피는 안달이 나서 대답을 재촉합니다. "콜록~! 콜록~!" 창문을 열어놓은 탓일까요? 아니면 너무 놀라서일까요. 지은이는 가쁜 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애써 헉헉거리는 숨을 고릅니다. 해피는 지은이가 기침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아픈아이라는 걸 몰랐거든요. 아마 별이 되면 그런 아픔이 없어질테니까 어서 이 소식을 알려줘야 겠다고 다급하게 생각합니다. 기침을 멈춘 지은이는 "별님이 말을 하네요? 저 지은이 맞아요. 이거 꿈 아니죠? " 하고 말을 걸어봅니다. 지은이의 대답에 신이난 해피는 "별님이라니 히히~! 난 해피라고해 아직은 어린별이야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신나서 말을 합니다. '별님이 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니...' 꿈이라도 좋았습니다. 지은이는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님들이 그동안 지은이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계셨다는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답니다. 새로 사귄 두 친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날 다정하고 짧은 한때를 보냈지요. 참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 7 - 다음날도 해피는 부지런히 지은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지은이의 엄마가 오시기 전에 이제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지은아~!" "어 해피구나~!"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면서 지은이가 별이를 반깁니다. "지은아 사실은 좋은 소식이 있어" "응? 그게 뭐야?" "너 이제 나처럼 별이 될꺼야. 아프지도 않을꺼고. 우린 같이 별이 되어서 함께 있을 수 있어." "뭐? 정말?" "응 그렇고 말고~! 사실은 내가 이 기쁜 소식을 너에게 전해주는 임무를 맡은거야. 히힛 사실 나도 이번이 별로서 일을 처음하는 거거든" "와아 신난다." 지은이는 해피와 함께 기뻐하였고 해피도 또한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임무를 잘 수행하다니 신장이 되는 것도 얼마 안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거지요. 그 날 해피는 지은이에게 별이 될 날짜를 가르쳐주었고 둘은 그 날을 기대하면서 기쁨에 차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그날, 하늘의 모든 별들은 해피가 잘 했다고 칭찬하는 듯 했어요. 별이와 지은이는 참 행복했답니다. - 8 - 오늘도 해피는 지은이를 만나러 갑니다. 아, 그런데 오늘은 지은이가 힘이 없군요. "지은아 너 또 아픈거니? 염려마. 이제 얼마 안남았어 너도 나처럼 별이 되고 나면 절대 안아플꺼야 기운내." "해피야. 나 어제 우리엄마에게 말했어. 나 별이될꺼라구" "그래? 기뻐하시지?" "......" "응? 아니야? 왜? " 지은이의 야위었지만 예쁜 얼굴 위로 눈물이 굴러 떨어집니다. 해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지은이의 대답만 재촉합니다. "무슨일이야? 지은아 왜그래?" "해피야 엄마가 그러시는데 사람이 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죽는거래. 엄마는 처음으로 나한테 화를 내셨어. 엄마를 두고 나 혼자 갈꺼냐구. 나 정말 죽는거야? 그런거니?" 해피는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지은이의 말이 사실일까요? 지은이가 별이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는게... 지은이는 생각에 잠겨 어제를 회상하고 있나봅니다. 그 사이 해피는 지금 들은 것이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박학다식한 레이서 얼룩말 아저씨를 찾아가 확실히 물어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지은아, 내가 알아볼게 아닐꺼야 아닐꺼야. 나 다녀올께. 기다려 응? " - 9 - 지은이의 엄마는 오늘도 밤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지은이가 치료를 받을 수 있어 치료만 받으면... 예전처럼...' 요즘은 지은이가 전에 없이 명랑해져서 엄마도 한결 마음이 가뿐합니다. 지은이의 아버지가 없는 지금 하나뿐인 딸 지은이는 엄마의 모든 것입니다. 살아가는 의미 그 자체였지요. "엄마 나 말할게 있어요" "응? 우리 딸이 말할게 있다고? 그럼 어서 말해보렴~!" 평소 엄마가 피곤할까봐 말도 조심스레 하는 딸이 더욱 가슴아프던 어머니는 반갑게 대답을 합니다. "엄마, 나 있잖아. 별이된데요." "응? 별?" "네에. 아프지도 않고 예쁘게 빛나는 저 하늘의 별 말이어요 사실 며칠 전부터 별님나라에서 해피라는 별이 밤마다 저를 만나러 와요. 제가 별이 되는걸 미리 알려주려고 왔데요. 엄마 나 정말 별이 될 수 있데요. 너무 기뻐요. " 어머니의 안색이 갑자기 변합니다. "지은아 너 그게 무슨소리니? 그래서 별이되겠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아? 이것아? 별은 산 사람은 될 수 없는거야. 죽는거라구~!!!" 격앙된 엄마는 화를내시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립니다. "저 하나 믿고 사는데. 죽겠다니 죽겠다니--" "엄마, 아냐 아냐 그냥 별이 되는거지 내가 죽긴 왜죽어?" "이것아, 니 아버지도 없는데, 너마저 가버린다는거니?" "엄마?" - 10 - 꼬마별 해피는 온힘을 다해 레이서 아저씨가 있는 곳을 향해 열심히 날아갔습니다. 아저씨의 긴 얼굴 아래로 라이어 아줌마도 보였지요. 하지만, 지금 해피에겐 평소처럼 예의바르게 인사할 그런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헉헉~!" "응 해피구나? 무슨 일 있니? 하하하~! 신장이라두 된거야 벌써?" "어, 해피야 너 울었니?" 그제서야 해피는 자신의 볼위로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이 흐려지지 않게 얼른 눈물을 닦고 울음을 참으면서 해피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저씨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응? 무얼 말이냐?" 하지만, 레이서 아저씨는 이미 해피의 질문을 알고 있는 듯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라이어 아줌마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듯 앞발위에 머리를 푸욱 숙여버렸습니다. "아저씨, 사람이 별이 된다는게 죽는거에요? 그게 정말이에요?" "응? 저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정말이냐구요. 그러니깐 내가 맡은 일이..." 쏟아지는 눈물로 말을 잊지 못하는 해피의 모습을 보면서 레이서 아저씨는 자꾸만 뒷발질을 하면서 먼지를 일으킵니다. "해피야, 그래 맞아.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되는거야. 너도 그렇게 해서 별이 된거구..."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이어 아줌마가 조용하게 말을 했습니다. "해피야, 그게 꼬옥 나쁜 것은 아니란다. 사람들 중에 죽어서 별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않아. 별빛을 가지려면 정말 마음이 맑은 그런 사람이어야만 한단다. 그리고 별이 되고 나면 행복해지지.." "정말이군요? 정말이었군요?" 절규하듯이 외쳐대는 해피에게는 설득하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은이가 죽는거야. 나 때문이야. 지은이를 내가 데려오면 그애는 죽는거야...' 해피의 머리 속에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지은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네가 나를 속인거니? 난 죽기 싫어. 싫다구~!' "아니야. 모두 나빠. 왜 나한테만 속인거에요? 아줌마 아저씨 전부터 알고 있었던거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요? 신장따윈 안되도 좋아. 난 지은일 데리고 오지 않을꺼야. 엉엉~!" "해피야 네가 스스로 알기 전까지는 말해줄 수 없어. 그것이 규칙 이란다. 그리고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별이 그 일을 할꺼야" 황금빛 털 위로 눈물을 떨구면서 라이어 아줌마는 조용히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별나라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해마다 별나라에 더해지기 때문이야. 그건 아주 중요하단다. 만일 그렇 지 않다면, 별나라는 이곳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단다. 별이 된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 속에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들이 별나라를 이곳 지구에 붙들어놓고 있는거야." "그래도 나는 하지 않겠어요." "그래선 안된단다. 내가 토끼나 사슴을 잡아먹는 것도 사실은 살기 위해서야. 결국 세상은 그렇게 유지되는거지. 어쩔 수 없어." "그래 해피야. 그건 지은이에게도 좋은 일이야." 레이서 아저씨도 옆에서 열심히 거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해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난 절대 지은이를 죽게할 수 없어. 지은이의 엄마가 슬퍼하는 것도 다 나때문이야. 내가 지은이를 지킬꺼야. 꼭~!' 해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라이어 아줌마와 레이서 아저씨를 뒤로하고 지은이에게로 날아갔습니다. "해피야ㅡ 그 일은 꼬옥 해야해.. 해피..." 지상에는 해피를 부르는 소리만 애절하게 그리고 공허하게 울려퍼졌습니다. - 11 - '정말일까? 엄마의 말이? 아냐 아닐꺼야. 해피도 모르는 일 같던데, 우린 친구인데 해피가 날 죽게할 리가 없어.' 지은이는 습관처럼 창가에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마구 화를 내시던 엄마가 한참을 소리내어 우시더니 다신 그런소리 말라면서 일을 나가신 후, 해피를 만났던 지은이는 계속해서 창가에 앉아 해피를 기다렸습니다. "지은아~!" "어? 해피구나?" "응. 너 괜찮아?" "응 그러엄. 해피야. 저 아까 그말말이야" "아 그거어? 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다 알아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나도 그럴줄 알았어" 불안한 해피의 마음과는 달리 지은이의 얼굴은 활짝 펴졌고 하얀 얼굴 위로 아름다운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절대 지은이는 안죽어. 내가 막을꺼야.' 해피는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평소처럼 지은이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날이 밝아올때, 이별을 인사를 하고는 별나라로 향했습니다. - 12 - 별나라에서는 갑자기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꼬마 별 해피가 신전 앞에 있는 크리스탈 종을 쳤기 때문이지요. 이 종은 어떤 별이던지 칠 수 있는 종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별들은 회의장으로 모여야 했기에,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울리는 법이 없었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의 별들이 하나도 없어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심술맞은 구름이 별들의 빛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별나라의 신전에서는 속속들이 신장들이 도착하고 종을 친 해피는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신전 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신장 비너스가 꼬마 별 해피에게 물었습니다. "해피, 당신이 종을 쳤습니까?" "네, 제가 쳤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여러 어르신들께 꼬옥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또한 묻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별나라는 인간의 영혼으로 유지된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또한 사람들을 별로 만드는 것이 그들을 죽게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오리온 신장이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해피, 당신은 이미 한 몫을 하는 별이 되었으니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이 별나라의 일원으로서 이 일에 협조해야만 합니다." "만일 제가 그 일을 거부한다면요? 하지 않겠다면요?" 별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생겼습니다. 별나라의 제일규칙을 가장 어린 별이 깨뜨리려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다시 비너스 신장이 나섰습니다. 별들의 술렁거림은 다시 고요해지고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울려퍼졌습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은데요? " 해피는 눈에 눈물을 그렁담고는 그러나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죽게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별이 된다는 것은 말만 좋을 뿐이지, 결국 내 친구 지은이는 엄마도 없는 곳에 혼자 있게 될거에요. 그 애는 나를 그리고 우리 별나라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 친구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해피님 어차피 사람은 죽게 되어 있어요. 그 중 별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도 큰 영광인 것이어요. 여기 모든 별들이 이전에는 다들 인간세상에서 살고 있었지만, 이젠 이 별나라에서 행복하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애에게 별이 되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도 전해주지 않았잖아요? 그저 별이 된다고 하고 허락하면 데려온다는 것은 결국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죽는다고 해도 별이 된다고 한다면, 그 애를 데려오겠어요. 그 애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잖아요." "......"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 절대 지은이를 데려오지 않겠어요. " 별들 사이에서는 낮은 속삭임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해피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지만, 별나라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다들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카시오페이아 신장이 나섰습니다. "여러 별들과 그리고 해피 들으셔요. 이 별나라는 여태껏 같은 방법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이 지구의 친구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영혼들의 힘이에요. 그들의 지구에 대한 사랑이 지구와 이 별나라를 멀어지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지요. 지은이란 아이는 이 별나라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 아이가 별이 된다면, 적어도 백년간은 다른 사람이 별이 될 필요가 없어요. 이 일은 별 본연의 작업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의무지요. 해피의 말은 우리 신장들도 이해하지만, 규칙에는 예외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별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해피가 하지 않아도 지은이는 여기 와야만 합니다. 다른 별에게 그 일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해피는 당분간 근신하도록 합니다." 가차없는 신장들의 결정이 이어졌고, 해피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새로운 임무는 한참 누나인 즌이라는 별이 맡았습니다. 이제 지은이가 별이 될 날짜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요. 해피의 머리속에는 지은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멤돌고 있었습니다. 즌이가 지은이를 데리고 오기 전에... 그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요. 해피는 다시 레이서 아저씨를 찾아 갔습니다. - 13 - 레이서 아저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해피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하지만, 해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아저씨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어두워졌습니다. "해피야, 그런 방법은 없어. 네가 안하더라도 그 앤 결국..." "아니에요. 꼬옥 방법이 있을거에요." "글쎄다.. " "누구 알만한 이가 없을까요?" 생각에 잠겨 질겅질겅 풀만 씹어대던 레이서는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아하, 너 고양이 중에 아는 애가 있다구 했지? " "네, 제 친구 나비가 고양이에요. 왜요?" "응 그럼 그애 어머니한테 물어봐라. 고양이들은 원래 영물이라 하늘과 지상의 모든 비밀을 대대로 알고 있단다." "아, 그렇구나. 고마와요 아저씨." 나비만 찾아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해피는 오랜만에 나비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 14 - 나비네 집 뜰에는 나비는 없고 나비의 엄마만 계셨습니다. "어? 해피구나? 요즘은 왜 뜸하니? 나비가 많이 보고 싶어하던데." "아, 안녕하셔요? " "그래그래. 맡은 일은 잘 하고 있니? 나비한테 들었단다. 근데 어쩌지? 나비는 마침 막내 아가씨 방에 가 있는데..." "아녀요 아주머니, 아주머니께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응 그래? 심각한 일인가부네? 말해봐라." 해피는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고양이 아주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가끔씩 홍홍~ 소리를 내면서 진 지하게 들어주셨습니다. "그래, 넌 그 지은이라는 애를 구하고 싶은 거구나?" "네, 레이서 아저씨가 고양이 세계에는 아는 이가 있을꺼라구..." "그래.." "혹시 아셔요? 지은이를 구할 방법을..." "음 나도 들은 이야기야. 하지만, 이 이야길 네게 해 주어야 할지 잘 판단이 안서는구나." "말씀해 주셔요." "나도 이건 나비의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인 모르는게 없었지 별나라의 별들은 모두 사람을 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그게 정말이어요? 그럼 저도???" "어떤 별이든지 예외는 없어. 다만..." "네?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인간 세상에는 이런 전설이 있지.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야. 사실 그건 잘못된 이야기야. 그 순간 소원이 이루어지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지. 떨어지는 별이 들어주 려고 결심한 단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란다." "별똥별이라구요?" "별이 떨어질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우리 별은 떨어질 수가 없잖아요?" "그게 문제란다. 별은 떨어지지 않지만, 스스로 떨어지고자 하면 바다로 뛰어들 수 있어. 다만 그 순간 생명이 끊어지지. 영혼조 차 세상에 남질 않아. 가끔씩 인간을 사랑한 별들이 그렇게 가곤 했단다. 대부분은 지상에서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 그리 워하고 그리워하다가 바다에 뛰어드는거야..." "그건..." "그렇단다. 네가 그 아이를 구하는 방법은 너 스스로 바다에 뛰어 드는 방법밖에 없어. " "아, 그렇군요" "그러니, 그만두거라 해피야. 어차피 그 아인 별이 되어도 영혼이 지속되겠지만, 별은 떨어지면 그걸로 끝이야. " "아니, 아니에요. 전 지은이랑 약속한걸요." "해피야. 너무 무모한 일이다." "그래도 전 하겠어요" - 15 - 해피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보았습니다. 나비만이 어머니로부터 사정이야기를 듣고는 울면서 말렸지요 "너 그 아이만 소중한거니? 나는?" "나비야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이건 나와의 약속이야.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난 절대 밝은 빛을 낼 수 없는 흐릿한 별이 되고 말거야. " 태어나면서의 친구 나비와도 그렇게 이별을 고하고, 마지막으로 지은이 집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하늘을 올려다 보던 지은이 눈에 환하고 아름답게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가 보였습니다. - 에필로그 - 꼬마 별 해피가 영혼을 던져 지은이를 구한 후, 별나라에서는 다시 회의가 열렸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별로 만드는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혼을 얻지 못한 별나라는 점차 지구와 멀어져서 결국 아주 멀리 자리잡게 되었는데, 자꾸자꾸 멀어지던 어느 날인가부터 그 자리에 머물게 되었답니다. 아마도 바다속에 뛰어든 해피의 별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별나라를 묶어두고 있는 거라고 후배 별들은 두런거리곤 했답니다. 지은이는 병이 나은 다음에도 어머니가 좋은 새아버지와 결혼해서 어여쁜 동생과 좋은 집이 생긴 다음에도 항상 별이 될 날을 기다렸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세월은 흐르고 지은이의 별에 대한 기억도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 영혼을 유지하면서 이 몸과 저 몸을 오가면서 결코 영혼을 빼앗기는 일 없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피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우리가 별 나라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이후의 세상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지는 않으세요? 어둠의 반란 그저 막막하던 영지의 일들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영주의 저택은 아이들이 넘쳐나고, 늘상 시끌벅적 했는데, 최근에 가세한 멤버로 뮤리엘 황녀가 있었다. 다이아나가 신전의 일을 마치고 온 후 바로 이동해 온 뮤리엘은 아름다운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금방 영주 저택의 사람들과 친해졌다. 뮤리엘은 다이아나가 일차적인 조사를 끝냈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동해 왔는데, 물론 이동 자체는 켈러비안의 힘을 빌어 이루어졌다. 저녁 늦게 저택에 방문한 뮤리엘은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기 직전인 디안을 만나 보았다. "진짜 공주 이모에요?" 다이아나가 디안에게 뮤리엘을 소개하자, 공주님의 환상으로 기대가 만발하던 디안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녕, 디안? 공주를 좋아하니?" 뮤리엘은 자신을 보자 대뜸 공주냐고 묻는 디안의 태도에서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인물을 실제로 접하는 아이들 특유의 호기심을 알아채고는 한껏 아름답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무지 좋아해요. 그런데, 공주는 세상에서 젤루 예쁜 사람 아니에요?" 디안의 아이다운 화법 속에는 뮤리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나름의 궁금증이 숨어 있었다. 더군다나 그 말을 하면서 디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엄마와 이모를 자꾸만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젤루 예쁜 사람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구. 왜? 실망스럽니?" 뮤리엘이 디안을 말리려는 듯한 다이아나를 살짝 제지하면서 말하자, 디안은 그런 이모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더니 선심 쓰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음... 이모도 예쁘니까 괜찮아요 뭐! 엄마보단 못하지만......" 다이아나는 무안해서 약간 얼굴을 붉혔고, 뮤리엘은 재밌다는 듯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을 변화시켜 심각한 얼굴로 디안에게 말했다. "있잖아, 비밀이 있는데...... 디안이 말 안하겠다고 하면 가르쳐 줄게" "디안 비밀 잘 지켜요. 뭔데요?" "네 엄마는 특별한 거야. 아마 네 엄마보다 예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껄? 그러니까, 절대 너희 엄마랑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 안 되는 거지." "왜 안돼요?" "그건 말이지. 너희 엄마는 실제로도 예쁜데다가 엄마잖아. 그러니 너무너무~~ 유리하거든. 비교 당하는 사람이 불쌍해지는 거야" 뮤리엘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약간 우스꽝스럽게 불쌍한 척을 해 보였다. 디안은 그런 이모를 유심히 보더니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모가 불쌍해지는 건 싫으니까 앞으론 이모 말대로 하겠어요" "아 정말 우리 조카는 착하구나! 고맙다!!!" 뮤리엘이 발그레하고 통통한 디안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자, 디안은 간지럽다는 듯이 웃더니, 엄마에게 하던 대로 뽀뽀를 돌려주었다. 덕분에 이 꼬마가 더욱 귀여워진 뮤리엘은 디안을 끌어안고 답답해할 때까지 볼을 부벼대고는 아쉬운 듯이 놓아주었다. 다이아나와 뮤리엘이 사이좋게 디안을 재워주었고, 그 후에야 다이아나는 뮤리엘과 그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에디우스는 간간히 뮤리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거나 보충 설명을 함으로써, 대화의 일각을 차지했다. "언니, 전 이해가 가네요.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들로서도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물론, 흑마법사나 페르세포네님의 신전이 일반인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래도, 만일 이런 일이 더 생긴다면, 대륙 전체에 파문이 크게 생길거야. 사람들의 희생도 나올지 몰라" "그건 그렇죠. 이해한다는 것이지, 방관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제가 그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힘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마족이라는 존재들도 힘을 최우선으로 하잖아요? 세상의 눈을 의식해서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할 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지금으로서는 신전 자체에서 어느 정도 정화되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인 것 같아. 물론 관찰은 해야겠지. 만일......."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며, 다이아나는 얼굴을 굳혔다. 에디우스가 그런 다이아나가 안쓰러웠는지, 슬며시 독려의 말을 던졌다.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니고, 도와줄 사람도 많으니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차하면 드래곤들의 힘이라도 빌리겠다는 의사를 이미 밝힌 바가 있는 에디우스였다. 만일 인간들만의 문제라면 어렵겠지만, 마족과 계약을 하는 이들이 대거 등장했을 경우에는 드래곤들도 방관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응. 그렇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할래. 그런 의미에서 뮤리엘, 조사는 일단 알트 상단쪽의 정보원들이 하고 있으니까 되었고, 여기 있는 동안 날 좀 도와줄래?" "물론이죠!" 뮤리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하고 빙긋 웃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뮤리엘에게 내일이나 그 다음 날 정도에 '창조의 손'들이 오게 될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뮤리엘은 잊혀진 존재들을 끌어낸 다이아나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머물러 있는 동안 영지의 일을 돕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일단, 언니 영지가 실험대라고 생각하죠 뭐! 나중에 제가 황제가 되던, 동생이 되서 도와주는 입장이 되던지, 이번 일이 크게 도움이 될거에요.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아무 일이나 시켜만 주세요!" 뮤리엘은 일부러 스스로를 위한 일임을 강조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는 다이아나에게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보였다. 다음날 어느 정도의 계획을 세운 다이아나는 계획의 중심으로 움직일 인물들을 모아 놓고 할 일을 설명했다. '사환'의 명목으로 들어온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소년과 소녀들은 처음으로 '일'을 부여받았다. 처음 그들은 영지의 각 집을 돌아다니면서, 각 집의 인원구성과 나이, 그리고 가지고 있는 영지 등을 기록해 왔다. 영주의 저택 안에서는 새로운 놀이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언니 오빠들이 가져온 서류의 이름에 따라 첫 자가 같은 것들을 한 곳에 모으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새로 온 서류에 적힌 영지민의 이름 중 대표자의 이름 첫 자를 읽어내어 해당 글자를 모아놓은 더미에 가져갔고, 제대로 가져갈 때마다 실적이 기록되었다. 보통 놀이는 아이들의 집중력을 고려해서 한 시간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아이들의 수가 많고, 저마다 많이 해서 '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 상이라는 것은 칠판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칠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고, 상을 선택하는 아이는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어야 했다. ♡ 프라이톤 아저씨 목마 타기 (3명) ♡ 에디우스 아저씨와 춤추기 (3명) ♡ 다이아나 이모랑 힉스 타기 (2명) ♡ 좋아하는 사람에게 뽀뽀 받기 (제한 없음) ♡ 뮤리엘 이모랑 날기 (3명) 결국 아이들은 모두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뽀뽀를 받을 수는 있었으니까! 주로 뽀뽀를 받고 싶어 하는 대상순위는 여자애들의 경우 에디우스, 다이아나, 뮤리엘 순이었고, 남자아이들의 경우엔 다이아나, 뮤리엘 정도였다. 힉스는 아이들을 태우는 것에 대하여 약간 불만을 표시했으나, 그럼에도 등에 아이가 올라타면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배려를 보여주고 있어 인기가 좋았다. 뮤리엘의 경우 아이템을 이용하여 플라이 마법으로 저택의 홀 안을 한 바퀴 안고 도는 것이었는데, 덕분에 꺅꺅 거리는 아이들의 높은 소리가 저택 안에 울려 퍼지곤 했다. 프라이톤은 목마 뿐만 아니라 용감한 사내 애들을 잡고 빙빙 돌리는 등의 서비스도 해 주었는데, 이것은 희망자에 한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의 경우 무서워 하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으로 불려온 노인들은 면담의 대상이 되었다. 집사인 말론과 사무직으로 영입된 그의 친구들은 다이아나의 지시에 따라 영지민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노인들의 지혜를 하나 하나 탐구하여 문서로 작성했다. 인구조사가 끝나자, 그 다음에는 각 농지의 그간의 경작 현황과 토지의 질에 대한 조사가 잇달아 시행되었다. 영지로 파견을 자청한 '창조의 손' 들은 소년들과 농지를 살피면서 사람들이 필요할만한 농기구를 고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나의 기구를 착안해 내면, 일단 그것에 대하여 의논하고 시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전의 작업장으로 돌아왔고, 빈 자리는 다른 신관이 메꾸는 식이어서, 영지에는 5명 정도의 신관이 상주하는 셈이었다. 만들어질 농기구들을 생산할 만한 대장간들이 물색되었고, 원시적인 수작업을 위한 농기구를 생산하던 대장간에 신관들이 투입되어 새로운 물품들을 생산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몇 개의 대장간은 지나치게 협소한 탓에 아예 증축이나 개축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장장이가 될 희망자를 모집하는 공문이 다시 나붙었다. 어차피 만들어진 농기구는 이곳 뿐만이 아나라 알트상단을 통해 발명자의 이름을 붙여 전 대륙에 판매할 생각이었으므로, 대장장이로 키워질 인력들은 상당히 많이 필요했다. 사환 소년들 중에서도 보조역으로 자원자를 뽑았고, 노동이 힘든 소년들은 설계도를 보는 법 등을 새로 배워, 도움이 되도록 했다. 노동력은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대량의 인원이 모집되어 도로 공사에 나섰다. 농지에서 새로 제작된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농로를 먼저 넓혀야 했고, 위생을 위하여 하수도 설비도 제대로 갖출 필요가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일이 지나면, 증가된 농산물과 제작된 농기계로 수익이 생기겠지만, 한 동안은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알트 상단에서 계속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상단의 자금 상황을 걱정하는 다이아나에게 에디우스는 칼라임 제국 전체를 이처럼 개발해도 남을 돈이 있다고 하면서 안심시켰다. 중노동을 하기 힘든 인력에 대하여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채취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부분에서는 노인들의 지혜가 크게 한 몫을 했는데, 다이아나가 아는 것들과 노인들의 경험이 합쳐져서, 먹을 만한 식물들의 목록이 갖추어졌고, 역시 몇 명의 사환 소년들이 동행하면서 표본을 채취하고 설명을 적은 것을 들고 한 조에 한 명씩 붙어 다녔다. 자연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뿌리를 채취해야 하는 식물들은 반드시 그 자리에 다시 번식할 수 있는 분량을 남겨 두도록 교육했고, 먹지는 못하지만 술을 담글 수 있다는 열매들을 노인들이 알려준 결과 상당히 독특한 향의 술이 몇 가지 탄생되었다. 집안의 비법이라며 술 제조법을 가르친 노인은 그 공으로 새로 지어지는 양조장의 책임자가 되었고, 제조법이 유실되지 않도록 기록되었다. 오히려 농사를 짓지 못한 땅이 많았던 덕분에, 다이아나는 휴경지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3년에 한 번은 땅을 놀리도록 하였고, 그 노는 땅은 수거된 분뇨가 묻히는 용도로 사용했다. 다이아나와 뮤리엘, 그리고 에디우스는 남는 시간에 틈틈이 영지 외곽의 산맥으로 들어가 몬스터 마을의 위치를 찾아내고 그들의 활동반경을 체크했다. 물론 오크들의 마을을 지나칠 다이아나가 아니었고, 그녀는 거기서 뜻밖의 상황을 발견했다. 오크의 현자의 도움을 받은 마을들이 외부생명체를 방어하는데 주력하고 나름대로 식량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알려진 '오크의 현자'가 포치임을 알았으나, 이미 포치는 벌써 동쪽으로 떠난 후라,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현자의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는 젊은 오크 전사의 이름이 다키라는 것을 안 다이아아나는 한동안 그리움에 잠겼다. 영지에 가장 가까운 오크마을들은 모두 표시가 되었고, 다이아나는 이들 수장과 신성한 결투를 한 후, 한 가지 협약을 맺었다. 오크 마을의 수장들은 비상시 다이아나를 불러 낼 수 있는 수정구를 지급받았고, 대형 몬스터로 인해 마을이 위험해지거나, 영지로 향하는 몬스터를 발견하면 바로 연락을 주기로 약속했다. 어찌 보면 오크들과 인간들로 연결된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된 셈이었다. 다이아나는 이처럼 오크들에게 널리 퍼질 줄 몰라 미처 주의주지 못했던 부분들, 즉 자연에 대한 지나친 파괴를 막기 위해 물고기와 식물에 대한 교육을 다시 시켰고, 안 그래도 자꾸만 줄어가는 '식량'으로 인해 고심하던 오크들은 다이아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이아나는 사실 오크들을 인간 마을로 끌어들여 농사를 짓게 하고 싶었으나, 현재의 인간들과 오크들의 갭은 너무나 컸으므로,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트상단의 정보원들은 페르세포네 신전의 사제들에 대하여 암암리에 조사 작업을 계속했으나, 수상쩍은 기미를 발견해내지는 못하였다. 이시니엘 사제가 가르쳐준 '강경파' 명단의 사제들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일단 지속적인 관찰을 위하여 소규모의 인원만이 대비하기로 하고 투입되었던 많은 인원은 철수했다. 이 즈음에 뮤리엘은 황궁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뮤리엘의 행적을 캐묻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물론 켈러비안이 그 대상이 누구인줄 모를 리 없었건만, 짐짓 그는 사실을 숨기고 대략의 정보만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동 마법으로 단 번에 너무나 먼 거리의 지역으로 사라진 뮤리엘의 행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황제 혼자 뿐이었고, 정보가 새어나간다고 해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듯하여, 이 일에 대하여도 다들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현재 상황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일까지 신경 쓰기에는 다들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자, 영지는 어느 정도의 기반이 형성되어 조금씩 계획했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뮤리엘 계속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거에요?" "어머, 언니는 제가 있는 것이 싫으세요? "그건 당연히 아니구요. 솔베노님도 상당히 기다리실 텐데......" "엘프의 기다림이란 수 년 정도는 끄덕없는 일이죠. 무엇보다, 솔베노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제가 너무 붙어 있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구요" 다이아나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빤히 짐작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뮤리엘은 다이아나가 걱정하는 듯하자, 사정을 설명했다. "어차피 지금 황궁으로 가 봤자, 아바마마 연애하시는 동안 서류나 뒤적거려야 할 거구요. 제가 복귀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중앙연합국의 제2황자인지 하는 남자가 다시 접근할 가능성도 있다구요." "아, 말이 나왔으니... 성년식에서 신랑감을 고르려던 것 아니었나요?" "흠.. 사실 맘에 들기는 리카르도님이랑 에디우스님이 최고였죠! 근데 라이벌이 너무 강력하다 보니 어째 자신이 없네요! 거기다 이미 눈을 버린 탓인지 다른 이들은 전혀 눈에 차질 않아요. 헤헤헤!" 약간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마무리를 하고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맞은 편의 에디우스에게 농을 건다. "음.. 에디우스님! 황국을 통째로 들어 바칠지도 모르는 미모의 신부감 어떠세요? 부록으로 엘프도 울고 갈 의자매 언니까지 있는데 말이죠" 그러자 에디우스는 빙긋 웃으면서 대꾸한다. "아,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황궁의 서류까지 도맡게 될까봐 싫은데요. 거기에 제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여성도 상당히 아름다운 의자매를 부록으로 가지고 있어서 말이죠!" "이거봐요. 상대가 안되잖아요." 뮤리엘이 다이아나를 돌아보면서 한탄하듯이 말했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지? 일단 참석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에디우스가 화재를 돌렸다. 그의 손에는 금박이 화려하게 장식된 종이 하나가 나풀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황태자의 생일 연회 초대장이었다. 어느 덧, 칼라임 제국에 들어선 지도 1년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면, 황궁의 권력자들이야 껄끄러웠지만, 수도 안의 저택 사람들도 만나고 싶었고, 기사단 인물들도 궁금했다. "일단 가긴 가야 할텐데... 뮤리엘은 어떻게 할 건가요?" "언니가 간다면 저도 가야죠. 단, 지난 번 제 성년식 방문의 답례인 척 하고 황궁에서 출발한 티를 내어야 하겠지만요. 흠. 꿩 대신 닭이라고 황태자님이라도 한 번 꼬셔 볼까요?" 여전히 태평한 뮤리엘이다. 하지만, 그녀도 황궁의 연회라는 말에 조금 자극을 받은 듯, 다이아나의 옷장을 여기 저기 뒤지고 나서는, 지난 번 초대 때 만들었던 드레스 외에는 새 것이 없는 것을 한참을 타박하고 제 멋대로 몰래 드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 행복한 리플의 압박이 저를 반깁니다. ^^;; 축하의 글을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글 안에서는 각 캐릭들이 지들 등장할 차례라고 농성을 벌이고 있고, 도대체 어느 놈부터 출연시켜야 할지 순서 정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만...... ^^;;; 뭐, 여러분이 '악역'으로 점찍은 인물 혹은 드래곤이 없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제 소설에 '악인'이나 '악역'은 없다고 봅니다. 다이아나의 생각이 제 생각이거든요 누구나 알고 보면 다 나름의 사연과 이유가 있는 법이라서 그 캐릭들의 속사정을 낱낱이 꿰고 있는 저로서는 누구도 '나쁜 X'이라고 말하기 힘들답니다. 하여 새로운 악역의 등장이라기보다는 주인공과 뜻을 달리하는 단체의 등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얘들도 욕 꽤나 먹어야 할 터이니 벌써부터 불쌍해 집니다. ㅠ.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아, 그럼 저도 같이 가는거에요?" "그럼! 오랜만에 수도 저택의 친구들도 보고 오자꾸나!" "안느 이모두 가구요?" "왔던 사람들은 다 데리고 갔다 오려고 한단다. 다들 서로 만난 지 오래 되었잖니!" "와아~! 신난다!!!" 깡총거리면서 친구들에게 이 희소식을 알리려고 뛰어나가는 디안에게 다이아나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으나, 이미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휴, 저도 그럼 가야겠어요" 뮤리엘이 웃으면서 일어섰다. 꽤나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태도는 마치 놀러왔던 옆집에서 가는 듯이 태연자약했는데, 그건 당연히 마법이라는 좋은 도구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과 편하게 생활하면서도 좀처럼 진전이 없던 마법이 최근에 5써클에 이르러, 마법천재라는 위명에 걸맞은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 또한 다이아나의 덕이기도 했다. "너무 고마웠어요! 물론 바로 다시 보겠지만, 뮤리엘이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에요" "무슨 말이에요? 저야말로 언니 잘 둔 덕에 모처럼 마음을 비울 수 있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그 동안 마법의 진전이 없었던 것은 지나친 강박관념 때문이었나 봐요. 아이들의 순수함이 억눌렸던 마음의 일부분을 풀어버리고, 선입관도 상당히 없어졌거든요. 그리고 나니 술술 잘 풀렸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모두 언니 덕분이에요. 아이들과 지내기 전까지는 처음 마법을 할 수 있었을 때의 흥분과 기쁨을 다 잊어버리고, 그저 아바마마에 못지 않은 마법사라는 말을 듣기 위해 안간힘을 썼거든요." 뮤리엘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 또한 뮤리엘의 성품 덕분이라고 오히려 칭찬했다. "뮤리엘,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뮤리엘의 성품이 순수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이잖아요. 저야 이 일 저 일 부탁만 했으니, 이 모든 것은 다 뮤리엘 혼자서 이룬 것이라고 생각되요." 둘은 한 동안 티각거리면서 서로의 덕분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보다못한 에디우스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뮤리엘의 출발은 하루 늦어질 뻔 했다 "아름다운 두 자매님들! 서로 얼굴에 금칠하는 것은 나중에 하시고, 밀린 일들이나 먼저 처리하심이 어떠하신지, 이 몸이 황송하옵게도 여쭙나이다!" 극적인 표정과 함께 우아하게 절까지 하면서 에디우스가 끼어들자, 그제서야 자신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두 여성은 한참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픈 듯 한 쪽 허리를 움켜 쥐고, 뮤리엘은 국제적인 초대에 응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떠났고, 일 주일 후의 재회를 약속하며, 이번에는 정상적인 이별 장면을 연출했다. "리카르도님이 뮤리엘과 혼인을 하면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다이아나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들렸지만, 에디우스에게 묻는 듯도 하였기에 에디우스는 두 남녀가 함께 선 모습을 그려보는 듯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뮤리엘이 손해 보는 거 아닐까?" 에디우스가 삐딱허니 자세를 잡고 말하는 폼이 마치 여동생 시집보내기 아까와하는 오빠의 모습처럼 보였기에, 다이아나는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리카르도님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 소드마스터에 제국의 황태자이고, 얼굴도 그만하면 남자답게 잘 생겼잖아. 성격도 쾌활하고 남들 잘 배려하고......" 다이아나가 리카르도의 장점을 하나 하나 열거할 때마다 에디우스는 점점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는 이전처럼 격렬한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슬슬 눈치를 보며 농담 비슷해지는 다이아나에게 장단을 맞추어 준 것에 불과했다. 다이아나가 리카르도에게 약간의 부담감이나 책임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에디우스도 알고 있었다. 카이젠의 경우를 상기하면서 리카르도에게 잔인하다 할 수 있는 '선고'를 하고 돌아온 다이아나의 심기는 편하지 않았었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자신에게 호감을 가져 주고 자신을 위해 많이 노력했던 이에게 냉정한 거절의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음에도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것과 머리 속의 냉정한 판단 사이에는 항상 틈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런 다이아나가 리카르도를 대상으로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에디우스에게는 상당히 좋은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흠... 리카르도님의 장점이 그렇게 많았다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걸? 일단 나보다 나은 점만 주르륵 말해봐. 내가 똑같이 바꿔줄 테니까" 갑자기 펜을 잡더니 마치 받아 적으려는 듯한 폼을 취하는 에디우스의 너스레에 - 실제로 에디우스는 정말 마음먹으면 필기도구 따위가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 다이아나는 다시 맑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차없는 에디우스의 보복이 이어져 다이아나는 웃다 말고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참, 뮤리엘이 가면서 이야기한다고 하더니 빼먹었는데, 내가 말해줄께. 네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수도에 있는 저택의 좌표를 알아갔어. 아마, 연회에 입을 의상을 직접 골라서 보낼 모양이야. 참 친절도 하지?" "뭐... 뭐라구?" "아공간 만들 줄 아냐고 하기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더니, 그럼 이 저택 거실만한 아공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려 달라고 하더군." 다이아나는 거실 크기만한 아공간에 옷과 장신구가 가득 차 있는 광경을 상상하고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 갔다. "뭐, 뮤리엘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어서, 지난 번의 그 사람들 모두 다 불러놓았어. 아마 수도 저택에 대기하고 있을거야" "......" "이봐! 이 정도로 패닉에 빠져서야...... 하하하하하!" 결국 이 날의 승리자는 에디우스였다. 칼라임의 황성에서는 꽤 큰 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 하여 이번만큼은 황태자 저하의 성혼을 서둘러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후계를 이으실 황태자님의 결혼이 늦어지는 것은 제국의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번 생일 연회를 맞아 적당한 후보를 물색하시고, 빠른 시일내에 국혼을 추진함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속 보이는 주청이라 할 수 있었다. 주청을 하는 당사자는 미켄하인 드 오브리스 공작과 켄네프 드 로슬레임 백작을 필두로 한 귀족파들이었는데, 황제파라 할 수 있는 귀족의 영애들 중에는 눈에 띄는 여성이 없었고, 국내에서 황태자비를 거론한다면 선두에 설 여인인 유리아나 드 오브리스는 공작의 딸, 그 바로 다음가는 가문의 영애인 세잔느 또한 로슬레임 백작의 딸이었던 것이다. 황제와 마르띠앙 공작은 그런 그들의 작태에 상당히 짜증이 났지만, 실제로 칼라임 제국의 안주인 자리는 너무 오래 비워놨던 터라, 더 이상 방치하기는 힘들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세 사람(황제,황태자,공작) 중, 저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출 만만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황제가 드물게 전면에 나서서 모처럼 아버지다운 말을 했다. "귀공들의 의견은 잘 알겠소. 내 생각에도 매우 타당하며, 나 또한 내 아들이 빨리 결혼해서 손자를 낳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오. 더군다나 지금처럼 황후의 위가 비어 있다면 황태자비라도 있어 안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히 좋은 일이오" 황제가 의외로 이렇게 나오자, 귀족파들은 오히려 약간 불안했다. 그 불안한 예감이 맞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허나, 내가 황후를 일찍 보내고 좀 외로웠다고는 해도 내 평생 그토록 사랑한 여성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이 에비가 그런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는데, 내 아들이 사랑 없이 급하게 떠밀려 결혼을 하게 하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구려. 일단 모든 귀족 영애들을 후보로 놓고 고려해 보도록 하겠소만, 일단 리카르도가 싫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강제할 생각이 없소. 황제가 사랑하지 않는 여성이 어찌 장차 좋은 황후가 되겠소. 그런 의도이니만큼 이 문제에 대한 한 한 동안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그야말로 온화한 어조로 시작하여, 칼같은 끝맺음을 보여주는 경우였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오브리스 공작이 나름대로 차선책을 바로 선택한 듯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대비책을 내놓았다. "과연 폐하께서는 모든 백성의 아버지답게 너그러우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태자 저하께서 반려를 찾으실 때까지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게 가능하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저희 신하들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첫 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지만, 차차 정이 드는 사랑도 있는 법이니, 저하께 감추어진 연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당한 귀족 영애를 물색하여서 추천하고 저하와 사적으로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함이 좋을 듯합니다."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추천'하는 것이요, '기회'를 준다는 데야 황제도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후계로서 결혼 문제는 일종의 의무와도 같았다. 일국의 황태자가 20대 중반이 넘어가도록 황태자비가 없다는 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였다. 더군다나, 몇 번 지적된대로 현재 제국이 황후자리는 비어 있었다. 결국 오브리스 공작의 말까지 거절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던 탓에 황제는 마지못해 그의 청을 받아들여, 이번 무도회를 기점으로 다섯 명 정도의 후보를 선발하고, 그들을 황궁에 자주 초청함으로써, 황태자의 '선택'을 돕기로 했다. "빌어먹을 오브리스!" 평소의 온화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황제가 내뱉듯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마르띠앙공작은 동의하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브리스 공작의 괘씸함을 따지기보다는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더더욱 시급했다. "일단, 그 둘의 영애보다 나은 상대를 내세워야 합니다. 다이아나경이 힘들다면, 오히려 뮤리엘 황녀 쪽을 추천하고 싶습니다만......" "문제는 내 아들 녀석이지." "황태자저하는 어리석은 분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기회를 드린 셈이고, 다이아나경을 더 이상 기다릴 수도, 그녀를 압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휴우! 할 수 없지. 틈만 나면 여행을 한다고 황궁을 빠져 나갔으니, 그 동안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너무 없었는지도 모르네. 일단, 우리 쪽 귀족의 영애들 중,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여 명단을 만들게." 황제는 마르띠앙 공작 보다 오히려 뮤리엘 황녀에 대하여는 더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에는 하이센 제국의 황제에 대한 약간의 부러움과 시기심도 무시할 수 없게 작용하고 있었는데, 물론 산맥과의 접경 부분이 워낙 넓다보니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하이센의 환경도 환경이지만, 현재의 켈러비안은 그 이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드물게 그 자신이 스스로 8써클을 상회하는 마법사인 켈러비안은 호색가라는 소문이 무성한 것과는 정 반대로 자신의 제국을 거의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같은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 암암리에 정치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자신의 상황과는 너무나 달랐다. 원래 두 제국이 혼인으로 인한 동맹이라도 맺게 된다면, 대체로 남자쪽의 국가가 유리하게 마련이었지만, 뮤리엘 황녀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모처럼 얻은 '소드마스터'인 아들을 처가의 눈치나 보면서 살게 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황제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마르띠앙이 그런 속내를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다. 뮤리엘황녀에 대하여는 완벽하게 무시하는 황제의 태도에, 마르띠앙은 약간 아쉬운 마음을 가졌다. 황태자에 대한 모든 교육을 전담하였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황제보다 더 황태자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물론 다이아나의 일에 있어서는 실망을 했지만, 이미 지나치게 잘난 에디우스라는 인물이 있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리카르도는 제 할 일을 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8써클의 황제라고 해서 그 딸까지 그런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보증도 없었고, 어차피 17세 반 정도의 나이의 황녀가 똑똑하고 세상 물정을 잘 안다고 해도 귀족들과의 암투를 계속 지켜보면서 '온전한 황제'로서의 교육을 받아 온 리카르도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 이번에 얼굴이 공개되기 전까지 황녀는 전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이것은 황제가 그녀를 너무 소중히 한 나머지 바깥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그녀를 은폐하여 키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황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그저 곱게만 자란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터무니없는 확신이었지만, 사실 황녀에 대하여 드러난 정보들을 조합한 바로는 있을 법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고써클의 마법사를 동행하여 지난 번의 '사건'에 딸려 보내었다는 것을 봐서는 켈러비안의 딸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만 했다. 아마도 철 없는 딸의 고집에 지고 만 것이리라. 만일 리카르도가 뮤리엘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면 어쩌면 하이센과 칼라임이 하나의 제국이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느냐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마르띠앙은 자신의 주군인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고 나름대로의 공작을 하기로 했다. 오브리스 공작은 딸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유리아나의 지나칠이만치 상냥한 성품이 정치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세잔느 쪽이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로슬레임 백작과 머리를 맞댄 오브리스 공작은 이러한 사실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저 쪽에서는 유리아나 님에 대하여는 방심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영애분의 착한 성품은 소문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결코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분도 아니구요" "그건 그렇네만...... 너무 마음이 약해 자칫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어 그렇네. 유리아나가 세잔느 만큼만 제 앞가림을 해 주면 내가 무슨 걱정이겠는가?"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세잔느는 성격이 너무 강합니다. 주의는 주고 있지만, 일 년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더더욱 유념시키겠습니다." "그래. 일단 둘 중의 하나로 결정만 된다면, 그 이후에야......" 미리 그 상황을 상기한 탓일까? 말꼬리를 흐리는 오브리스 공작의 얼굴에는 약간 음흉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동의를 하는 태도의 로슬레임 백작의 표정도 비슷했다. "황제나 마르띠앙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세. 시골 구석까지 뒤져서라도 괜찮은 후보를 찾아내 오겠지. 그에 대하여 미리 대비해야 할 걸세" "어차피 사교계는 유리아나님을 모시고 세잔느가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어설픈 하위 귀족의 영애들은 발도 못 붙이게 할 터이니 염려 마십시오" "다이아나경은 어떤가?" "영지로 내려간 이후로는 황실과 연락을 하는 기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에 비해 늘상 에디우스경과 함께 움직인다고 합니다." "흠.. 그렇군. 그 쪽은 괜찮겠지? 그럼 뮤리엘 황녀 쪽은?" "황제가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입니다만, 혹 모르니 미리 주시해야겠지요" 당장이라도 영애중의 한 명이 황태자비가 될 듯한 유리한 발판을 마련한 두 귀족파의 수장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의를 거듭했다. **************************************************************************** 어제밤에 쓰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 버렸거든요 서울로 떠나기 전에 완성해서 올립니다. 자, 다들 즐독하시고, 오늘 밤에 최소 한 편은 더 올라온다는 것을 다들 아시죠? ^^;; 그럼 그 때 뵈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다이아나는 말론과 안느,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인 제시카, 소니아, 레온을 다른 마차에 태우고, 자신은 디안과 에디우스와 께 수도로 향했다. 디안의 요청으로 한참 친하게 지내는 소니아가 중간에 다이아나 일행의 마차로 옮겨 간 것과, 마차 옆에서 짜증을 부린 힉스 덕에 아이들이 다이아나와 함께 말을 탈 수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평온한 여행길이었다. 하지만, 에디우스는 시시때때로 '아공간'을 들먹이면서 다이아나를 놀리고 있었다. "아가씨!" 하워드가 일행의 도착을 보고 반갑다는 듯이 부르짖자, 여기 저기서 다이아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안과 아이들은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친구들이 부르자, 구르듯이 마차에서 내려가 아이들 특유의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왜 아이들은 꼭 반가움을 폴짝거리면서 뛰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힉스는 멜이 다가오자, 반갑다는 듯이 힝힝 거렸는데, 멜 또한 연신 힉스의 털을 쓸어 주면서 여기 저기 살피고 있었다. "자, 일단 다들 들어가세나. 아가씨와 백작님을 세워두고 이 무슨 일인가?" 말론이 나서자, 안느도 얼른 하녀들과 아이들을 수습했다. 말론은 넓은 영지의 일을 도맡아 한 까닭인지, 어딘지 모르게 전과는 다른 위엄이 생겨난 듯 했다. 하워드의 다그침에도 그저 주인들을 만나 기뻐하기 바빴던 하인들이 말론의 말에는 꼼짝을 못하는 것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영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네 명을 둘러 싸고 홀 안에 모였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말론과 함께 하워드에게 그간 있었던 일이나 보고사항을 위해 서재로 갔다. 어차피 중요한 일을 별 것 없었고, 말론의 친구들로부터의 전언이 약간 있었을 뿐이다. 영지의 관리인으로 뽑혀간 사람이 며칠만에 수도로 돌아와 온 가산을 정리해 아예 그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미처 지원하지 못했던 이들이 뒤늦게 혹은 궁금함에 연락을 한 것이다. 다이아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일단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면접을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어차피 영지에는 지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었으니까. 어른들이 홀로 나가 보니, 아이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무언가 바라는 표정으로 다이아나를 목 빠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간 하인들이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봐 주긴 했지만, 다이아나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나 놀이를 가르쳐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들끼리 다이아나가 가르쳐준 몇 가지 놀이를 하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다이아나는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간 못해주었던 이야기를 몇 가지 재미있게 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디안은 먼저 들은 이야기도 있어서 끼어 들다가 약간의 면박을 사기도 했다. 레온이 제법 점잖게, 네가 그렇게 미리 말하면 이야기가 재미 없어지는거야라고 주의를 주자, 디안도 엄마의 이야기가 재미 없어질까봐 조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 되면, 자신이 아는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을 달싹거리곤 했다. 다이아나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동안, 준비를 끝낸 안느가 홀에 들어와 다이아나의 시선을 끌고는 신호를 보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아앙, 싫어요!!! 좀 더 해주세요!!!" "우린 그 동안 하나도 못들었잖아요!" "다이아나 이모오!!!" 아이들이 다이아나에게 매달려 저마다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떠들어대자,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에디우스가 다가와 말했다. "어? 파티 안할꺼니?" "파티요?" 아이들은 '파티'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이아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벌리거나 오무리고 눈은 동그랗게 뜬 아이들의 모습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 모두 참석하는 파티를 하려고 했지. 아, 아까워라! 음식도 준비하고 모처럼 춤도 추려고 했는데......" "할래요! 할래요!" 아이들은 그 파티라는 것이 정말 준비되어 있음을 눈치채고 열을 내어 소리를 질렀다. "그 전에, 일단 가서 파티복으로 갈아 입고 오렴! 부모님이 준비해 두셨을 꺼야" 아이들이 기대감에 흥분된 얼굴로 홀을 나서자, 안느는 자신의 세 아이와 디안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도 파티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기로 약속했으므로, 디안은 안느가 맡기로 한 것이다. 큰 식당에는 연회가 있는 날 그러하듯이 음식이 아름답게 차려져 있었다. 빳빳한 제복을 차려 입은 하인들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각 자리마다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었고, 도착한 아이들의 이름이 하워드에 의해 크게 불리워졌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에서 나왔던 것과 똑같이 진행되는 파티의 형식에 빠져,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아름답게 성장을 하고 주인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 보였고, 아이들 또한 이야기 속에서 듣고 몇 번 혼자서 해 본 티를 내면서 최대한 아름답게 인사를 했다. 물론 아직 어린 소녀들 몇이 절을 하다가 자빠지는 소동도 있었지만, 그렇게 어린 손님들의 등장은 무사히 끝났다. 술 대신 과일주스가 든 잔을 들고 다이아나가 축배를 권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목이 터져라 따라 하고는 주스를 들이켰다. "악! 난 몰라~! 이게 뭐야!" 문제는 식사 도중에 일어났다. 제시카가 잘못해서 주스 잔을 엎었는데, 그것이 소니아의 드레스를 얼룩지게 만든 것이다. 평소에는 동생에게 잘 해주는 편인 소니아도, 모처럼 새로 입은 아름다운 옷에 얼룩이 지자 짜증스러운 표정이 되었고, 이미 자신의 옷은 흠뻑 젖은 제시카는 금방 울 듯한 얼굴이었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소녀들은 자신의 드레스에 얼룩이 생긴다는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니아에게 안됐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그럴수록 제시카를 나무라는 소니아의 소리는 커져갔다. "이런, 우리 아름다운 숙녀님께서 잠깐 실수를 했군요. 사실, 주스잔이란 게 참 잘 엎질러 지지요" 어느 틈에 제시카와 소니아 사이에 자리를 잡은 다이아나는 음료를 닦아내고 두 아이를 달래느라 바쁜 안느에게 눈짓을 해 뒤로 물러나게 했다. 제시카는 다이아나가 다정하게 말하자, 제 편을 만난 듯하여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소니아는 이모에게 매달려 정작 잘못을 한 주제에 온갖 서러움을 다 나타내는 동생을 째려보고 있었다. "자, 이럴 때 아름답고 착한 공주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갑자기 다이아나가 공주님을 이야기하자 아이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공주도 음료수를 흘려요?" "물론, 공주님도 어릴 때에는 음료를 엎지를 수 있어요" 울다 말고 자신에게 공주라면 어떻게 할까를 물어보는 다이아나에 의해 제시카의 울음은 뚝 끊겼다. 제시카는 한참 생각하더니, 도움을 청하듯 언니를 바라보았다. 소니아도 생각하는 듯하더니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공주라면, 저렇게 울지 않고 잘못했다고 사과할 꺼에요" "제시카는 어떻게 생각하니?" 제시카로서는 언니가 정답을 말했다고 생각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우리 제시카도 공주님처럼 정중하게 한 번 사과해 보련?" 다이아나가 용기를 주자, 제시카가 젖은 치맛자락을 들고 어설프게 절을 한 번 하고는 사과의 말을 했다. 소니아는 그걸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어린 동생보다는 자못 우아하게 자신도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드레스야 갈아 입으면 돼죠. 자, 그럼 우리는 옷을 갈아입어야겠네요. 실례하겠습니다" 다이아나는 정말 마음 착한 공주처럼 이야기하는 소니아를 보면서 잘 했다는 뜻의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작 소니아는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갈아 입을 옷이 없을 듯하여 내심 서운함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자, 그럼 안느엄마랑 위로 올라가서 새로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정말 다른 옷이 있어요?" "물론이죠. 얼른 다녀와요!" 다른 옷이 있다는 말에 입이 한껏 벌어진 소니아는 제시카의 손목을 잡아 끌듯이 하면서 안느와 함께 사라졌다. 다이아나는 다른 아이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때를 놓칠세라, 한 평생 남을 만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물론, 소니아의 옷이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소니아는 그 전에 제시카를 용서했지요? 좋은 일을 한다고 항상 좋은 결과만 있지는 않아요. 누구도 몰라 줄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착한 일을 한 여러분도 알고 있을 거에요. 그거면 충분한 거랍니다. 여러분 모두 스스로에게는 공주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공주나 왕비라고 다 착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죠? 모두 자기 자신이 착하고 아름다운 공주라고 생각하고, 그런 공주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씩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그럼 신께서 보시기에 여러분은 모두 공주가 되는 거에요" "하지만, 우리는 귀족이 아닌걸요?" 제법 나이가 있는 아이가 약간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테오, 물론 아니지. 하지만, 신께서 보시기엔 귀족이나 평민이나 다들 사랑하는 인간일 뿐이란다. 내가 너희들이 귀족이 아니라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다이아나의 말에 테오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야, 이모는 좀 다르시잖아요" "뭐가 다르지?" "다른 귀족이랑은 틀리다고 아빠가 그러셨어요. 원래 귀족들은 다들 평민들을 싫어한데요. 천하다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한댔어요" "그래? 그럼 여기 에디우스님은 어떠셨지?" "그건......" "물론 나라의 법이 신분을 정하고 있고, 저나 에디우스님과 같은 사람은 별로 없지요. 따라서, 여러분도 귀족이나 높은 사람들을 만나면 행동을 조심해야 할 거에요. 하지만, 제게는 여러분 모두가 똑같이 사랑스러운 조카들이에요. 그래봐야 저는 인간이지요. 하지만, 인간인 제가 이런데 신은 어떠실까요? 그 분은 더욱 큰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있어요. 저는 여러분이 그런 신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되어 주길 바래요. 모두들 노력해 주겠어요?" "네에!" 아이들은 멋모르고 이모의 부탁에 대답을 했으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하인들은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다. '신분'이라는 틀을 벗어나 '평등한 인간'을 역설하는 다이아나의 말은 평민출신들의 하인들에게는 매력적이었으나, 금단의 열매와도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저택 안에서 높은 귀족들에게 이모나 아저씨로 부르던 아이들이 저택 밖에서 실수를 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이들이었다. 그나마, 다이아나가 바깥에서의 행실을 유의하라고 당부한 것만이 위안이랄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이 아가씨의 대담한 행동에 하인들은 그녀의 진심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이아나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옷을 입은 소니아와 제시카가 들어왔다. 아이들은 식사를 맛있게 끝낸 후에는 귀족들의 무도회라는 주제로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 이미 에디우스의 강습 때 어느 정도 기본 스탭은 다들 통달해 있었기에 제법 멋진 폼을 자랑하면서 음악에 맞추어 홀을 빙글빙글 도는 아이들의 모습은 닫혀진 세계의 그림에 나오는 아기천사를 방불케 했다. 그날 밤 늦게 뮤리엘이 통신구를 통해 에디우스와 연락을 주고 받는 듯 싶더니, 정말 산더미같은 드레스와 장신구가 전송되어 왔고, 이는 마법으로 아공간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이미 에디우스에 의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며 저택 구석방에서 나름의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지난 번의 패배 - 다이아나가 갑자기 엄하게 말하는 바람에 뜻대로 못한 것 - 의 원인을 분석하고 머물렀던 하루 동안 저택 하인들에게 수집한 다이아나의 약점을 나열하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말론집사님 저는 아가씨의 생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하인들도 나름대로의 회합을 가졌다. 오랜만에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말론이 돌아왔기에 거의 모든 하인들이 모여서 그 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충 일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모두의 의견을 대변하여 앞장서서 질문을 한 것은 하워드였다. 말론 또한 그런 하인들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지에서 이미 다이아나의 마음을 엿본 그는 그런 일들을 하나도 모르는 하인들보다 훨씬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게. 그게 그 분의 마음이며, 신념이라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과 평민은 신분의 차이가 큰데....." "후훗. 아마 얼마 안 가서 이 저택을 정리할 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되면 자네들도 아가씨의 영지를 볼 수 있겠지. 거기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안다면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게 될 걸세" "도대체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누구보다 현실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말론이었다. 신임 백작이 되었다고 오히려 더 까다롭고 신경질적으로 하인을 부리던 전 주인의 아래에서도 말론은 하인들의 불평불만을 잠재우고, 주인의 성격에 맞추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고, 그의 비호 아래 해고를 면한 이들도 꽤 있었다. 귀족인 주인이 아무리 잘 해 준다고 해도, 결국 귀족은 귀족일 뿐이라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말론을 하워드는 집사의 표상처럼 여기고 그의 목표로 삼아왔다. 헌데, 지금 말론은 마치 현재의 주인을 자신의 딸처럼 말하고 있었다. 말론은 하인들에게 다이아나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농민의 아이들이 아가씨의 놀이친구로 고용되고, 노인들은 이야기꾼으로 고용했다는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농사를 짓기 쉽게 하기 위해 직접 헤파이토스님의 창조의 손들을 움직였다는 말에는 다같이 감탄을 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십 여 명 정도였던 영지가 이제는 웬만한 이들은 간단한 문장은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에 이르자, 다들 입이 벌어졌다. 문자와 숫자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다는 것은 말론과 같이 귀족의 저택의 관리인으로서 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아가씨의 영지에는 귀족들이 관리인으로 있지 않고, 임사로 상단에서 파견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지민에서 뽑거나 말론이 데려간 평민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관리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각 마을에는 통신구가 지급되었고, 누구나 억울한 일은 바로 고할 수 있었다. 힘든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나 벌써 새로운 직업들이 줄줄이 소개되었고, 성인식을 앞 둔 아이들은 이미 글을 배우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보조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직업'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평민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는 모두 꿈처럼 들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영지는 평민들에게는 낙원이군요" 하워드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하인들도 이 사실을 믿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말론은 그런 그들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사실, 이 저택은 유지할 사람만 몇 있으면 된다네. 아가씨는 우리 아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네. 물론 영지 사람들과 섞여서 비슷한 대우를 받겠지만, 디안 아가씨조차 특별대우를 하고 있지 않으시니 자네들도 별 불만은 없을 것이야. 따라서, 이번에 영지로 돌아갈 때, 희망자들을 뽑아 일차적으로 데려가려고 하네. 일단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가서 보고 그리고 결정하게나. 수도에 남아있고 싶은 사람들은 저택에서 계속 일하면 되네. 어차피 저택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아이들이 동화속의 공주님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면, 하인들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 코 앞에 들이닥칠 수 있는 것인지의 현실감 없는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 약간 이 부분이 늘어지고 있습니다만, 일단 인연이 닿은 이들을 뒤로 내버려 두고 무언가(현재 대기하고 있는 대립단체)를 뒤쫓는다는 것은 다이아나가 내켜하질 않는군요 ^^;; 어쩌면 다이아나는 자신의 영지에서 만이라도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의 한 부분을 보여주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엔젤상단만 해도 충분히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다이아나가 할 일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후에 떠났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주인공 성격이 이렇다보니 여기 저기 흘려놓은 사건들만 추슬려도 한참 걸리는군요 지루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자극적인 장면을 기대하고 계셨던 분들은 몇 회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추천과 리플에 넘 인색해하지 마시고, 즐독들 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황녀가 돌아왔다는 말이지?" "예, 그간 어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마법으로 이동한 듯 싶습니다." "그 쪽은 정보원들의 활동이 좀 어렵지 않나?" "사실 그렇습니다. 일단, 황궁 안에서는 어떠한 행위도 함부로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시종 몇 명을 포섭한 상태라 자세한 것은 아니더라도 대충의 일은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켈러비안은 까다로운 상대군" 8써클의 마법사이자 하이센의 황제인 켈러비안은 드물에 8써클에 이르렀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연구하는 마법사로서 유명했다. 황성 안의 엄청난 마법물품들은 어느 정도 귀족층에게는 알려진 일이었고, 써클도 써클이지만, 그의 다방면에 걸친 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연구 결과는 마법길드에서도 배우려고 안달할 정도였던 것이다. 카이젠 또한 검으로 하나의 경지에 다다른 바 있었으나,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급 검사에 불과했다. 어쩌면 드래곤이 건 마법을 해지할 수 있는 대륙의 유일한 인간 마법사는 켈러비안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드러내 놓고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피차간의 위치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뮤리엘 황녀를 잡을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칼라임에 답례차 간다고 하는데, 그 쪽은 활동이 더 쉬우니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 잘못하면 그 쪽에 선수를 빼앗길 수 있겠군. 지난 번 무도회에서도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하지 않았나? 더군다나 그 다음 일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 같던데......" "리카르도 황태자가 그녀를 잡을 마음이었다면, 파트너로 여성을 데리고 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만... 혹시 모르니 둘의 관계에 대하여도 자세히 관찰하도록 따로 일러 두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아쉬워해봐야 별 소용 없는 일이었으나, '성녀만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이 절대 켈러비안에게 뒤질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카이젠이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자신은 시우스를 정복하고, 지금쯤에는 중앙연합국을 목표로 또 다른 일들을 하고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제국 내의 엔젤하우스와 엔젤상회를 모조리 없애고 싶었으나, 그래봐야 신전들의 반발만 거세어질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이야 어떻든 엔젤하우스에서 하는 일들은 실제로 제국의 하층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공적인 일을 망칠 정도로 카이젠은 우매하지 않았고, 덕분에 다른 제국보다는 턱없이 적은 숫자이지만, 하투아에 세워진 엔젤하우스들은 사건 직후의 동요에서 벗어나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칼라임 제국의 귀족들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지난 번의 귀족회의를 통하여 이번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결국 황태자비 후보를 간택하기 위한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도에 있는 옷가게들은 성황을 누렸고, 장신구점도 호황을 맞았다. 일단 후보에 오르기만 해도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될 상황이다 보니, 적령기의 여식을 가진 귀족들은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고, 덩달아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영애들은 연회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나마 그 와중에도 태평하다 할 수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건 당연히 다이아나였다. 뮤리엘이 미리 최고급으로 마련해준 드레스들은 다이아나의 미모를 더욱 살려주는 디자인에 그녀의 성품을 고려하여 입는 것이 까다롭지 않고 활동하기 편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의외로 다이아나의 마음에 들었다. 며칠간 그녀를 잡느라고 성화인 사람들은 피해 다니는 것이 좀 성가셨으나, 항상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아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저택의 아이들이었다. 덕분에 다이아나는 무사히 음모의 손길을 잘 피해서 외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여어~! 높으신 영주님이 이곳까지 오시다니, 감개무량일세~!" "아, 여전한 미모의 다이아나경, 이 미천한 기사들을 보러 오심이 황공하옵나이다!" 어떻게 보면 비꼬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 말을 하는 당사자들이 황실 기사단의 일원일 경우, 이야기는 틀려진다. 웃음을 한껏 머금은 눈과 달리 입들은 걸걸한 농담을 내뱉고 있었지만, 언제 보아도 정겨운 이들이었다. 특히, 티리아는 다이아나가 많이 반가웠던 듯, 달려와서 손을 잡고 한참을 뜯어보아, 다시 야유를 자아냈다. "어이, 피터! 아무래도 넌 잘못 선택한 거 같어. 저 뜨거운 눈길을 보라구~!" "아, 티리아 양의 상대가 다이아나경이었다니... 불쌍한 우리의 피터~! 상대가 안되는군" 모처럼 에디우스가 상단을 둘러본다고 따로 움직였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왁자지껄한 이들 사이에서 마음 편하게 함께 웃고 떠들었다. 물론 그 간의 성과를 보인다면서 대련을 신청한 상대들에게 약간의 사랑의 매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렉시안경" "오랜만이군요 다이아나경" 여전히 무뚝뚝한 알렉시안이었다. 디안의 일 이후로 알렉시안에 대하여 상당히 호감을 갖게 된 다이아나였지만, 이 무표정에는 도저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다이아나로서는 알렉시안에게 나쁜 감정이 없었으므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어차피 그 이후 별 대화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헤어져 있던 시간에 비하여 해후는 짧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들 다이아나가 수도에 있다는 것과 어차피 생일 연회에서 볼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섭섭함을 접고 쾌활하게 그녀를 전송했다. 다이아나는 왕자와 공주에게 들를까 생각하다가 혹시 리카르도를 만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억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만나야 할 관계이지만, 가능하면 사적인 만남은 피하고 싶은 것이 다이아나의 심정이었다. "유리아나, 너도 황태자님을 좋아하지 않느냐? 지금 너처럼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면 어쩌려는 것이냐? 세잔느만 해도 좀 더 적극적인데다가, 이번에는 뮤리엘 황녀까지 참석한다. 지금과 같은 생각으로는 결코 네 사랑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오브리스 공작은 드물게 냉엄하게 딸을 다그치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상냥하고 마음이 약한 딸의 성격이 지금처럼 안타까운 적은 없었다. 유리아나는 아버지의 냉정한 말에 벌써부터 습기를 머금은 눈을 애써 내리 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네가 황태자님을 좋아한다는 것 만이라도 확실하게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말 알아 들었느냐?" 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억지로 다잡고 오브리스 공작은 재차 다짐을 받았다. 유리아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나, 하늘같이 섬기던 아버지의 명인지라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세잔느, 절대 경솔하게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네 그 강한 성격은 황태자님이 결코 좋아하시지 않을게야. 지난 번 일도 있고 하니 극히 조신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로슬레임 백작 역시 딸에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 내용은 오브리스 공작 쪽과는 정 반대였다. 이미 다이아나를 모욕함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망신을 당한 데다가 황태자에게 밉상을 보인 것이나 다름없는 세잔느에 대하여 백작의 염려는 상당히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욕심만 차릴 생각을 하지 말고 유리아나 영애께서 황태자에게 접근하기 쉽도록 네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해라. 알다시피, 그 분은 너무 심약한 데가 있어서......" "도대체 아버지는 제가 황태자비가 되길 원하시는 거에요? 아니면 유리아나에요? 얌전히 있으란 말을 알겠지만, 제가 왜 그 내숭덩이를 책임져야 하는 거냐구요?" 평상시에 유리아나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행동하던 것과 달리 세잔느는 독기를 뿜으며 아버지에게 대들고 있었다. "어차피, 제가 황태자비가 되면, 아무리 대단한 오브리스 공작의 영애라고 해도 제 발 아래에 있게 된다구요. 숫기 없는 그 계집 따위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제게나 신경써 주세요" "쯧쯧, 이 경솔한 것아! 네가 그러니 내가 안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뭘 알아야 말을 하지" 로슬레임 백작이 정말 한심하다는 얼굴로 책망을 하자, 세잔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네가 유리아나 공주의 핑계를 대고 그녀를 빌미로 황태자에게 접근하는 거야. 친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로 다리는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전의 나쁜 이미지도 사라질 것이고, 네가 황태자비가 되어도 오브리스 공작이 감히 섭섭하다는 티도 못 낼 것임을 왜 모르느냐? 더군다나 유리아나는 네 호의에 몸둘 바를 모르겠지. 이 아비가 미리 다 생각하고 한 말이거늘, 어찌 그리 경솔하게 네 감정을 내세우는 것이냐?" 참으로 인간의 욕심이란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로슬레임백작이 오브리스공작의 충복처럼 행동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자신의 야망이 먼저였다. 황태자비의 아버지란 얼마나 매력적인 위치인가? 현재 황제의 그림자라고 일컬어지며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는 마르띠앙도 누이가 황후가 되기 전에는 일개 남작에 불과했다. 황제의 총애를 업고 승승장구하면 제국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그를 볼 때 로슬레임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로슬레임은 오히려 마르띠앙 공작 측에서 적당한 후보를 물색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기를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편, 아버지의 속내를 알아차린 세잔느는 한껏 자신감에 부풀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유리아나가 황태자비가 된 자신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누가 어떤 꿈을 황당하게 꾸고 있던, 황태자의 생일을 맞아 열리는 연회의 날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일로 다가왔다. 그 사이, 다이아나는 꽤 바쁘게 움직이면서 영지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에디우스 또한 나름대로 바쁜지, 자주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뮤리엘 황녀는 연회 전날 황궁에 도착했고, 이미 다이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친분을 과시했다가 이후 영지로 함께 갈 예정인 뮤리엘의 행보가 알려질까봐 연회까지 만남을 자제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미 둘 사이가 친해진 것은 하이센에서도 알려진 사실이므로, 연회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의심받을 염려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칼라임 제국에서는 하이센 제국의 황녀의 방문을 상당히 반기는 눈치였는데, 실상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반응은 마르띠앙공작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의 반협박을 받아 리카르도도 연회 전날 도착한 황녀를 마중해야 했다. ++++++++++++++++++++++++++++++++++++++++++++++++++++++++++++ 칼라임에서 이렇게 들뜬 분위기의 소란이 이어지고 있을 때, 하투아 제국의 외곽에 위치한 페르세포네의 신전에서는 조용하지만 계획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래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하는 페르세포네의 신전은 다른 신전들보다 상당히 규모가 작고 빈약한 모습이었다. 기껏해야 흑마법사 지망생들이나 드나들 법한 신전은 그나마 마을과 상당히 떨어진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누구도 신전에 모여든 다수의 인원을 눈치채지 못하였으며, 이는 이 일을 계획한 사람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암흑과 파괴의 여신의 신전답게 예배실은 제대로 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그 방에 검은 색 로브를 입은 인파가 모여 들어 마치 닫혀진 세계의 사이비 종교의 광신자들을 연상케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교리를 억눌러 왔습니다. 우리의 페르세포네님은 어떤 신보다 강하고, 그 강함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거늘, 세상 사람들의 눈을 무서워하면서 그 분의 뜻도 아닌 여러 규칙을 내세워 우리의 권리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상위의 젊은 신관이 비분강개한 어투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에,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들은 이제껏 가려왔던 진실들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 그 힘을 나누고자 합니다. 페르세포네님은 마족을 지배하는 신, 지상계의 드래곤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마족의 힘은 우리의 계약으로 충분히 끌어 쓸 수 있습니다. 마족들은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입니다. 힘을 얻기 원하는 자, 힘을 얻을 것이요. 복수를 원하는 자, 그 원수의 몸을 갈가리 찢는 통쾌함을 얻을 것입니다. 오직 순수한 소망만이 고위마족과의 계약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그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얼굴을 나타내기 싫어하듯 로브의 모자를 내리 눌러 쓰고 있었으나, 신관의 말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신관의 말이 끝나자 마자, 여성으로 짐작되는 몸매의 역시 신관복을 입은 사람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어린 소년을 데리고 나왔다. 10세 안팎으로 보이는 소년은 초췌한 얼굴에 상당히 마르고 작은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만은 마치 타오르는 횃불처럼 집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선동을 하던 신관은 그 소년과 문답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너의 이야기를 해라. 그러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소년의 눈에는 잠시 불신의 빛이 어렸으나, 잠시 망설인 끝에 약간의 시간을 두고 체념을 한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11살로 이름은 조우라고 합니다. 제 부모님은 3개월 전 마을에 처들어온 몬스터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신관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년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몬스터들을 죽여 복수를 하길 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소년은 째지는 듯한 고성을 내질렀다. 처음 자신의 소개를 하던 것과 너무나 다른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으나, 소년은 흥분한 상태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몬스터들이 부모님을 죽였지만, 실제로는 영주의 관리 중의 하나인 포트란이라는 사람이 한 짓이에요! 아버지를 속여서 병사들도 없는 곳에 경비를 서게 하고 어머니까지 죽게 만들었어요. 영주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그랬다구요, 그 사람이 어머니를 탐내고 있었다구. 저는 포트란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길 원해요!" 분한 마음에 울음이 터져나왔으나, 소년은 애써 그것을 참는 티가 역렸했다. 신관은 그런 소년을 안된 눈으로 처다 보고는 다시 물었다. "마족에게 대가를 치룰 결심은 한게냐?" "그 놈을 죽여준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요!" "되었다.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쯤이야 마족들에겐 일도 아니지. 그럼 너는 네 수명의 10년을 걸도록 해라. 알겠지?" "네!" 소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관은 기도문같기도 하고 주문같기도 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에게는 간절하게 마족과의 계약을 원한다고 생각을 집중하라고 했다. 페르세포네의 신전이라서 그런지 마족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 모습을 보였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소년과 마족이 계약을 하는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소년은 늑대와 같은 검은 몸체에 두 개의 뿔을 달고 전갈과 같은 꼬리를 가진 마족의 붉은 눈을 쳐다보면서 두려움을 겨우 억누르고 대답했다. "네!" "나와 계약하길 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며, 계약 조건은 무엇이냐?" "제 이름은 조우입니다. 한 사람을 죽여주십시오. 그의 이름은 포트란이며 이 윗 마을에 거하는 영주의 관리입니다." "대가로 무엇을 주겠느냐?" "제 수명의 10년을 드리겠습니다" "좋다. 인간 하나쯤 죽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지. 죽이는 방법은?" "최대한 고통받으며 죽기를 원합니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주어야지. 모처럼, 괜찮은 영혼의 바램을 먹었다. 나 마족 디에블리아는 인간소년 조우와 정당한 계약을 맺어, 그의 수명 10년을 대가로 받고 포트란은 가능한 최고로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줄 것이다." 마족은 소년의 이마에 계약을 뜻하는 인을 새기기 위해 잠시 손을 대었다가 떼었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에는 선명한 마족의 인이 새겨졌지만 곧 사라졌다. "이 인은 내가 계약의 조건을 완수함과 동시에 다시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그 때 네 수명도 가져가게 될 것이니 그렇게 알도록!" "감사합니다." 조우가 말하자, 마족은 나타날 때와 같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마족과의 계약이 이토록 쉽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하고 기뻐했다. 신관은 그들을 진정시킨 후, 설명을 했다. "원래 소망이 순수하고 간절할수록 고위마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우의 경우 하급마족만으로도 충분히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약간의 조취를 취했던 것입니다. 원래 어릴수록 그 영혼이 깨끗하여 상위의 마족과 계약을 맺기 유리하지만, 여러분들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페르세포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의 일부인 것입니다!"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고,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페르세포네 여신을 찬양하거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가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소년의 이마에 있던 인이 다시 생겨 광채를 뿜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리에 모였던 이들과 조우는 소원이 성취되었음을 알고 더더욱 기뻐했다. 다음날, 하투아의 한 영지에서는 멀쩡하게 자러 들어갔던 영지 관리인 하나가 온 몸이 갈가리 찢겨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집에는 침입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은 마치 늑대와 같은 맹수의 송곳니로 물어 뜯긴 듯하다는 점과, 맹수였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그를 먹은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를 문 맹수는 떼어낸 살점을 방안 곳곳에 뿌려두고 사라진 것이다. ******************************************************************* 에효... 잔인한 장면은 쓰기 싫은데 말이죠. ㅡㅡ; 오늘 저녁에나 한 편 올릴 듯 하네요 요컨데 이건 오늘날짜의 글이라는 겁니다. 내일 일정이 좀 바빠서 하나는 미리 올려놓는 거라구요 ^^;;; 그래도 짦은 편은 아니니 즐독하세요~! 추천과 리플은 작가의 힘입니다~!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오랜만이네요. 리카르도 황태자 저하" "반갑습니다. 뮤리엘 황녀" 대륙의 손꼽히는 두 제국의 후계자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었다. 더군다나, 두 남녀가 모두 미혼의 아름다운 젊은이들인 경우에야, 누구든 한 번쯤은 낭만적인 상상을 해 볼 만도 하다. 하지만, 영민한 뮤리엘은 상냥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리카르도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지켜보는 눈들을 생각하여 알아챈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뮤리엘은 예민하게 그런 리카르도의 태도를 살피고 있었다. "이 곳입니다. 뮤리엘 황녀" 원래는 안내역을 따로 정해야 할 일이었으나, 황녀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보이기 위해, 리카르도는 뮤리엘에게 배정된 방까지 직접 안내를 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폼이 바로 돌아 나가려는 듯 했기에 뮤리엘은 대담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저랑 사담이라도 하지 않으실래요?" 여성의 청을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는 것은 황태자로서 받은 교육에 어긋나는데다가 그 대상이 국가 차원의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 경우이다. 리카르도는 등을 보인채로 잠시 얼굴을 찡그렸으나, 돌아서는 얼굴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꺼운 듯한 대답을 했다. "아, 저는 또 피곤하실 줄 알고, 자리를 비우려 했는데 오히려 제가 결례를 한 듯 하군요" "아닙니다. 모두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황태자 저하께 여쭐 말이 있거든요" 이들은 뒤따라 온 이들 중에는 귀족이나 기사들도 있었기에 뮤리엘은 존대를 했다. 그런 뮤리엘의 태도에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기꺼이 자리를 피했다. "앉으세요" 여전히 딱 부러지는 태도의 뮤리엘은 그녀의 성격답게 다른 이들이 사라지자 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상당한 도전적인 느낌을 내포하는 억양이 포함되어 있어서, 리카르도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리카르도 황태자님 정도라면, 저도 제 상대로 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중앙연합국의 사람들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 그건" 리카르도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을 뮤리엘이 자신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막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위로 볼 때나 성품으로 볼 때, 리카르도님이 괜찮은 남성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저는 저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정치적인 이유로 선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시죠?" 처음에는 호감을 말하더니 다음 순간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을 한다. 리카르도는 자신이 판단했던 것보다 이 황녀가 훨씬 노련한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하여, 그런 황녀 앞에서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지도,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못했던 자신의 태도가 한 수 뒤진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솔직하게 나오는 상대에게는 솔직한 편이 좋다. 리카르도는 스스로 예민해졌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나오는 황녀의 태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습니다. 전에 우리나라에서와 달리 경직된 분위기시더군요. 아마도 다이아나 언니가 마음을 정했나보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방패로 이용할 사람이 없어져서 더 민감한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아마도 그래도 리카르도님의 마음은 다이아나언니에게 고정되어 있는 듯 하군요. 아뇨!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어요. 일단 결론이 마음이 드는지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저에게 태도를 이미 분명하게 정하신 듯 하니, 저 또한 황태자님에 대하여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배제하도록 하지요. 다만, 어차피 안면이 있는 사이이고 꽤 친하게 지냈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실 필요는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단언컨데, 제게 편하게 대하신다고 해서, 황태자님이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뮤리엘은 리카르도가 중간에 끼어들려고 하자 이를 막고는 자신의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며 그의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어린 황녀의 이러한 태도가 나름대로의 자긍심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무례에 대한 너그러움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입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면서, 이전까지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특유의 밝고 따뜻한 미소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예민했다는 점 인정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지적받고 나니,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결단코 당신이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알고 계신 듯 하군요. 용서하십시오. 제 사과를 받아들이고 다시 친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뮤리엘 황녀는 그야말로 황녀다운 기품을 한껏 풍겨내면서 우아하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리카르도는 그 손에 살짝 키스를 하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정말 예민해지실 만도 했군요. 그럼 이번 무도회는 황태자비 후보 간택의 역할을 하는 건가요?" "그렇게 즐거워하지 마십시오. 황녀께서도 머지 않아 이런 일을 당하시지 않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머! 8써클 마법사의 위력을 무시하지 마세요. 아바마마는 이미 다른 이들보다 배는 느린 노화속도를 증명하고 계시다구요. 따라서, 제가 후계가 되기 위해 신랑감 후보를 고르라고 내몰리는 것은 지난번의 성인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랍니다. 부러우시죠?" "휴우~! 도저히 황녀께는 당하질 못하겠군요.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신 겁니까?" 농담같은 말이었지만, 가장 깊은 진심이기도 했다. 온갖 권모술수를 사용하는 귀족들에 대항하기 위한 교육을 평생 받아온 그가 이 어린 황녀 앞에서는 말싸움 하나도 이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글쎄요. 흔히 세상에서 생각하듯이 황궁 구석에 가두어서 키워진 것은 아니라고만 말씀드리죠"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믿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뮤리엘 황녀의 재치와 결단력은 이미 본 것 만으로도 도저히 온실의 화초처럼 키워진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뮤리엘이 처음에 과감하게 말 한 덕분에 리카르도는 모처럼 별 부담 없이 한 동안 느긋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황녀의 방에 오래 머물수록, 외숙부에게는 자신이 성의를 다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것이었다. "자, 그럼 출발하지" 에디우스가 손을 내밀자, 다이아나는 그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랐다. 파아란 물색의 드레스가 몸을 감싸고 풍부하게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천의 드레스 자락은 부풀려 올려야 하는 폭 넓은 드레스보다는 훨씬 움직이기 편했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의 머리카락은 솜씨있게 일부분이 틀어 올려져 고정되었고, 금빛의 드워프의 장식이 빛을 발하며 고정되어 있었다. 나머지 부분은 허리까지 길게 내려와 몸을 움직임에 따라 함께 찰랑대었다. 푸른 빛의 다이아나와는 대조적으로 에디우스는 남성으로서는 드물게 붉은색을 기조로 한 옷을 입고 있었다. 금빛을 좋아하는 에디우스의 옷에는 대부분의 의상에 모두 들어있는 금색 수와 장식이 역시 금빛 머리카락과 어울려 한층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었다. "에디우스 드 하비어스 백작님과 다이아나 드 라파엘르 백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정문을 지키던 시종이 한껏 크게 외쳤다. 다이아나가 영지를 떠나면서 에디우스가 동행했다는 사실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일 년 전의 무도회에서 에디우스의 '고백'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소문을 듣고는 드디어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여 연인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입장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 선홍빛과 물빛의 두 남녀는 타고난 아름다움 만큼이나,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대조적인 색을 과시하면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일 년 전처럼 주빈으로서 손님들을 맞이하던 리카르도 황태자는 아무리 뜯어 보아도 흠잡을 데 없이 잘 어울리는 이 둘의 모습에 멈칫하며 잠시 표정이 굳어졌으나, 그러한 그의 순간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것은 유심히 그를 살피던 알렉시안 뿐이었다. 리카르도는 오랜 세월 그래왔던대로 두 명의 유망한 젊은 남녀가 다가오자,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다이아나를 본 유리아나가 다가와 인사를 건냈고, 유리아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세잔느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황태자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내면서 유리아나도 대화에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리카르도가 예의바르게 세잔느의 사소한 이야기들에 대답을 하고 있을 때, 한 때 대륙의 호기심을 받던 뮤리엘 황녀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이아나는 사방에서 숨죽여 울려 퍼지는 감탄사를 마치 자신이 듣는 듯이 흐뭇하게 생각하면서 사랑스러운 동생이 황태자 쪽으로 우아하게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칫하면 어둡게 보일 수도 있을 완벽하게 검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천 자체가 윤택을 가지고 있어 각도에 따른 음영이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웬만한 여성이라면 오히려 초라해 보일 수도 있을 의상이었으나, 뮤리엘의 검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와 어울려 오히려 나이보다 성숙하게 보일 뿐더러, 화려하게 장식된 귀족 영애들의 드레스 사이에서는 오히려 고상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황궁안의 사소한 소문이란 빛보다 빠르게 전해지는 법이라, 황태자가 이미 직접 황녀를 마중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방에서 머물면서 상당한 시간 둘 만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도 웬만한 귀족이면 모두 알고 있었다. 저마다 황태자비 후보로 간택되기를 기대하던 귀족들은 소문으로 인한 실망감을 한 쪽으로 몰고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소문과는 다른 어색함을 찾기 위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뮤리엘 황녀를 맞는 리카르도의 표정은 반가움만이 가득했고, 그런 리카르도에 대한 뮤리엘도 친근한 태도를 보이자 꽤 많은 이들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순식간에 약간의 실망감이 홀 안을 타고 넓게 퍼졌다. "잘 지내셨어요? 다이아나 언니" "그럼요. 황녀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정말 반가워요" 리카르도와 인사를 한 뮤리엘이 한 자리에 서 있는 다이아나에게 더욱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안그래도 치켜 올라갔던 세잔느의 눈꼬리가 더욱 위로 향했다. 뮤리엘은 이어서 에디우스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둘은 반 년 만에 만난 반가움을 이런 저런 안부인사로 보여주는 등 죽이 맞는 연기를 해 내고 있어 다이아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에디우스야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뮤리엘까지 지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연기를 하자, 다이아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느라 슬쩍 고개를 숙였다. "처음뵙겠습니다. 뮤리엘 황녀님. 저는 세잔느 드 로슬레임이라고 합니다." 리카르도, 뮤리엘, 에디우스, 다이아나라는 네 명의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자, 무시당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세잔느가 나섰다. "그리고 이쪽은 유리아나 드 오브리스 영애십니다. 우리 칼라임에서는 제국의 꽃이라 불려지는 분으로 아름다움과 착한 성품을 칭송받고 계십니다." 세잔느는 나서지 않으려는 유리아나를 억지로 잡아서 자신의 앞으로 끌어 내세우면서 그녀를 황녀에게 소개시켰다. 뮤리엘 황녀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세잔느의 눈을 잠시 살피고는 그녀와 유리아나에게 답례인사를 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밝게 웃는 뮤리엘 황녀의 얼굴 위로 순간적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뮤리엘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흰 색을 기조로 한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유리아나를 뮤리엘의 바로 앞에 세워 놓은 세잔느는 마치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호들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보니, 황녀님과 유리아나님은 마치 빛과 어둠을 뜻하듯이 대조적이시군요. 드레스의 색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의 색도 대비되네요!" 유리아나를 빛에 뮤리엘을 어둠에 비유하는 이 말은 사실상 엄청난 결례였다. 비록 암흑의 여신인 페르세포네가 최고신의 하나로 존중받고는 있었지만, 사람을 어둠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모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도의 얼굴이 굳어지고 유리아나가 창백해진 데 반해 뮤리엘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띈 채로 세잔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 제가 이런 실례를... 별 뜻 아니고, 장식 없는 검은 드레스와 흑발을 보니 튀어나온 말입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과연, 세잔느는 빈틈없이 달아날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만일 뮤리엘이 이미 사과한 일을 빌미로 화를 내거나 약간의 불쾌감을 표시한다면 그녀의 속좁음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반대의 경우라면 깎아 내릴대로 내리고도 아무 후환을 안 당할 터이니 속이 시원한 방법이라고 세잔느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빛과 어둠이라... 나쁘지 않군요. 어둠만큼 사람에게 평온을 주는 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뮤리엘은 전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오히려 세잔느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뮤리엘을 잘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평생 좋은 말만 들어서 '험담' 또한 '칭찬'으로 받아들인 순진무구함으로 비치고 있었기에, 세잔느는 자신의 의도가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고 이번에는 강도를 높였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일국의 황녀님의 드레스가 아무런 치장도 없이 검은색 일색이라는 것은 좀...... 제가 황녀님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만한 의상을 만들어 올릴 이들을 소개시켜 드리죠. " 여성들의 싸움은 혀를 칼날로 사용한다는 말이 있다. 면도날같은 난도질 속에서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황녀가 사교계의 이름난 독설가에게 잡혀 모욕을 당하고 있음에도 전혀 모르는 듯이 웃는 얼굴을 하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어머, 그런가요? 제 옷이 그렇게 보였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아무래도 칼라임에는 엘프의 천이 없나 보군요. 이 드레스는 저와 친분이 있는 엘프 솔베노님이 특별히 선물하신 천으로 만들었기에 일부러 아무 장식도 하지 않았답니다. 엘프분들이 짠 이 검은 옷감은 밤의 달빛이라고 부르죠. 조명을 받아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빛이 조금씩 비치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이 옷감에는 아무 장식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답니다. 어차피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라고 해도 달빛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니까요. 아무래도 세잔느양은 엘프의 옷감을 처음 본 것일테니 못 알아 본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 없지요!" 엘프의 옷감... 정령을 통하여 식물과 교감하는 엘프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짜내는 옷감은 그들의 수명처럼 오래 가는데다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드워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엘프들의 경우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만 옷감을 만들어 내고 그 이상은 여간해선 만들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엘프들만의 특별한 염료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깊은 숲의 식물로 만들어진 이 옷감은 마법 없이도 백 년 이상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때도 타지 않을 뿐더러 각 천마다 아름다운 신비한 빛을 내뿜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연히 세잔느로서는 엘프의 옷감을 본 일이 없었다. 검은 빛에 장식이 없다고 하여 마음대로 입을 놀리던 그녀는 졸지에 대륙내에서 가장 진귀한 물품을 식견이 없어 모욕했다는 뜻의 뮤리엘 황녀의 말에 이렇다 할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허긴, 세잔느양처럼 보석을 좋아하시는 분은 이 옷감을 드려도 별 소용이 없겠군요. 그렇게 주렁주렁 보석을 달면 어디 천이 제대로 보이기나 하겠어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은 뮤리엘은 지나치게 화려한 세잔느의 드레스를 슬쩍 돌려 '천박하다'는 표현없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미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세 남녀는 일 년 전의 일보다 한층 더한 망신을 당하는 세잔느를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뮤리엘은 유리아나의 성품을 재빨리 파악하고는 그녀를 세잔느에게서 떼어내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무리 속으로 끼어들게 하고는 모욕감에 얼굴이 달아오른 세잔느에게 열이 있는 것 같다는 걱정스러운 말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국 세잔느는 그 말을 핑계삼아 몸이 좋지 않다면서 구석에 마련된 의자 쪽으로 휘청거리면서 걸어갔고, 그 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유리아나는 자신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는 황녀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다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이어진 순서는 일 년 전과 비슷했다. 황제가 입장하고 선물이 증정되었으며, 음악과 함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리카르도 황태자가 의무감으로 거의 모든 귀족 영애와 춤을 추었다는 것과 이제는 춤 실력에 있어서 뒤지지 않게 된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의 마법 없이 춤을 추었다는 것 정도이다. 뮤리엘 또한 무도회를 즐기기로 작정한 듯이 주위에 몰려든 남성들의 청을 물리치지 않고 그들과 즐겁게 춤을 추었고, 다이아나는 뒤늦게 몰려든 기사단 패거리들에 의해 티리아라는 파트너가 있는 피터슨을 제외한 기사들과 한 번씩 춤을 추었다. 뮤리엘에게 춤신청을 하기 위해 늘어섰던 남자들이 갑자기 하나의 길을 만든 것은 무도회의 종반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름다운 황녀님께 춤을 신청하고 싶습니다만......" 리카르도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뮤리엘은 환하게 응답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둘은 춤을 추면서도 소근소근 한참 대화를 나누었는데, 수많은 여성들과 춤을 추면서도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던 리카르도가 유독 그녀와 이야기하다가 웃음소리를 내자, 다시 여러 사람이 절망감을 맛보았다. 황녀와의 춤이 끝난 리카르도는 여전히 기사단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다이아나의 쪽으로 에디우스와 뮤리엘까지 데리고 다가갔다. 그리고는 에디우스에게 귓속말을 살짝 건네고는 자신은 뒤로 빠지는 것이었다. 다이아나는 갑자기 에디우스와 뮤리엘이 다가오자 반가움 표정으로 그들을 맞다가, 갑자기 울려퍼지는 소리에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뮤리엘 황녀님의 요청에 따라, 대륙 최고의 춤실력을 자랑하시는 켈러비안 황제께서도 감탄했다는 다이아나경과 그녀를 가르친 에디우스경이 여러분께 아름다운 춤을 선보이겠다고 합니다." 뮤리엘은 소년같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다이아나의 등을 떠밀었고, 에디우스가 순식간에 텅 빈 플로어의 한 가운데로 다이아나를 이끌고 나가자, 그녀를 고생시켰던 바로 그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오늘 출판사에 다녀왔습니다. 계약을 하고 왔지요 4월쯤에 책이 나올 듯 합니다. ^^;;; 더불어 일감도 잔뜩 들고 왔습니다. 보통 한 달 걸려 하는 작업을 2주간에 끝내야 하게 생겼네요. 20단원 분량을 끝내려면 아마도 밤낮없이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매일 두 편의 연재를 못 지킬지도 모르지만,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 보자고 악을 쓰고 있는 알테입니다. 최대한 노력을 해 보겠으니, 걍 이쁘게 봐 주세요 ^^;;; 자,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알테 - 추신 : 안그래도 힘들 때, 추천과 리플은 보람이자 보약이랍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이제 그만하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니?" "아뇨, 절대 포기하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 없다면 다른 세상에라도 있겠지요" "나도 다희 일은 마음이 아프다만, 해 볼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잖니?" 지혜의 아버지는 온종일 돌아다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딸을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싫었으나, 새벽이면 또 나가버릴 것임을 알기에 며칠을 고민 끝에 설득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혜는 몇 번에 걸쳐 보였던 그대로의 완강함을 더욱 굳건히 하고 고집스럽게 입을 꼭 다물 뿐이다. 남자는 남들보다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또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덕에 항상 주위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느끼면서 자랐으니까. 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자식들은 그런 부모보다 더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였다. 큰 아들만 해도 천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는 '수재'라는 소리를 귓가에 달고 자란 그 조차도 측정이 불가능할 두뇌를 지니고 태어났다. 한국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던 일은 아직도 남자의 가슴에 애틋한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딸이 스스로 학창생활을 다시 경험하겠다면서 한국에 들어오고 누구보다 활기차게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또한 얼마나 흐뭇했던가! 하지만, 지나치게 밝은 딸의 얼굴 한 쪽에는 여전히 허전함이 엿보였다.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 세상이란 얼마나 삭막한지, 남자 또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던 딸이 조금씩 달라진 것이 바로 그 다희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였다. 집에도 수 차례 데려온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를 중퇴함과 동시에 그 친구라는 소녀가 벌인 일은 남자로서도 놀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딸의 친구가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왜 지혜가 그토록 다희에게 집착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다희의 실종 직후에는 남자도 지혜만큼이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행적을 추적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완전히 증발해 버린 양, 다희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있을 수 없게 말짱해진 지혜의 부상은 그 자체가 다희의 실종의 대가인 것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지혜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멀쩡한 몸으로 퇴원한 후, 지혜는 아버지와는 별도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루 종일 다희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공권력까지 개입시켜 조사해도 나타나지 않는 다희의 행방을 지혜의 힘으로 알아낼 수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다희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꺼야. 적어도 몸은 잘 챙겨가면서 다니도록 하렴. 다희가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너도 잘 알잖니?" 결국 남자는 평소처럼 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그저 걱정어린 당부만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다. 지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 앞에 차려진 음식에 힘 없이 젓가락을 가져갔다. 다희가 실종된 지도 벌써 열흘이 넘어서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낸들 아나? 그런데, 이 춤을 추면서도 말을 할 여유가 있다니 누가 가르쳤는지 정말 대단한 교사로군" 할 수 없이 끌려나와 춤을 추면서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묻는 다이아나에게 에디우스가 자화자찬이 따로 없는 말로 대꾸하고 있었다. 두 남녀가 뭐라고 하건 간에, 세 박자의 곡은 빠른 템포로 진행되었고, 아름다운 두 남녀는 플로어를 누비면서 그야말로 춤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와아~!" 춤이 끝나자, 숨을 죽이고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를 빙글 돌려 함께 여러 번 우아하게 인사를 했고, 붉고 푸른 빛의 대조적인 색상으로 차려 입은 이 커플에 대한 환호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정말 멋진 춤이었습니다!" 리카르도가 웃으면서 말을 하자 이번 일의 주도자이면서 공모자인 뮤리엘이 나서서 활짝 웃으면서 무어라 항의하려고 하는 다이아나의 입을 막았다. "언니, 정말 멋있었어요. 사실 지난 번에 본 이후로 계속 눈 앞에 어른거려서 꼭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애교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말하는 뮤리엘에게 차마 탓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다이아나를 보면서 에디우스와 리카르도는 동시에 뮤리엘의 무서움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회의 첫날을 이들의 춤을 마지막으로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이건 좋지 않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될 줄은......" "결국 하이센과 손을 잡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절대적으로 우리의 세력에 위협을 받겠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합니다." "막아야지!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일세" "그냥 처치해 버리기엔 후환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잘만하면 일석이조를 노릴 수도 있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뮤리엘 황녀와 다이아나경입니다. 원래 아무리 친해 보여도 여자들이란 속으로 질투와 시기심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지요" "흠.. 하지만, 그 둘 사이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네" "둘 사이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렇게 몰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몬다?" "일단 의심의 단서만 그 쪽으로 쏠리게 한다면야, 별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호오, 의심의 화살을 그 쪽으로 돌리게 하면 후환이 없다는 말이군. 잘 하면 둘 다 제거할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 쪽은 분명하게 제거가 된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 일단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조금 소문을 내야 하겠지만 말이죠" "그렇군. 좋은 생각일세" 두 사람은 구체적인 일의 진행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연회는 일주일간 계속될 예정이었으므로, 넉넉하지는 못하다고 해도 일을 꾸밀 시간은 충분했다. 로슬레임 백작은 밤 늦게 집으로 돌아가 애꿎은 하인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던 세잔느를 불러들였다. 연회에서 돌아온 후 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세잔느였지만, 아버지와의 밀담을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설 때에는 더 이상 환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귀족들 사이에는 은근히 뮤리엘과 다이아나를 비교하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소하게 둘의 미모의 비교부터 시작된 소문은 리카르도 황태자의 마음이 다이아나에게 있었다는 짐작을 곁들여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마검사로서의 자질과 뮤리엘황녀의 마법에 대한 실력에 대한 비교가 은밀히 입과 입 사이로 전해졌고, 반대로 에디우스를 사이에 두고 두 여성이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소문이 당사자에게는 가장 늦게 도달한다지만, 그 대상이 일반인들보다 훨씬 좋은 청력을 소유한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라면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 시기심에서 나온 말이거니 생각하고 웃어 넘겼으나, 그 정도와 내용이 점점 극에 달함에 따라 이 둘도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건... 아무래도 의도적인 것 같아요" "하지만, 무얼 노리고 소문을 낸다는 거지요?" 연회의 나흘째가 되던 날 아침, 뮤리엘을 방문한 다이아나가 소문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의도를 지적하자, 뮤리엘도 이번만큼은 추측이 불가능한 듯 되물어 왔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하여 꽤 많은 의논을 한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뮤리엘의 안전을 위하여 작은 가능성에 대하여도 말을 하기로 이미 결심을 한 후였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에디우스가 신중한 빛을 띄고 뮤리엘의 말에 대답했다. "언니와 저, 이렇게 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충분히 그럴 여지도 있어." "하지만, 저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우리 제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텐데요. 아무리 세력다툼이 중요하다지만, 나라를 걸 만한 일을 함부로 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그래서 지금의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나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빌미를 제공한 후, 한 쪽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이럴수가, 다른 한 쪽에 혐의를 두겠다는 거군요" 에디우스의 말에 즉각적으로 답을 내놓은 뮤리엘은 상황을 생각해 보고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동안 심각하게 생각에 빠져 있는 뮤리엘을 보면서 일단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는 그녀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해 본 뮤리엘이 냉정함을 되찾은 얼굴로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만일 언니를 노린다면, 제게 혐의가 있다고 해도 크게 문책을 할 수는 없겠지요. 다른 제국의 황녀에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결례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반대로 저를 노린다면,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충분히 언니를 제거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온 거에요. 저야 에디우스와 함께 있는만큼 위험이 적다고 해도, 뮤리엘은 황궁에 혼자 있잖아요. 몸을 지킬 방책을 세워야 해요" "그렇군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쓸까요?" "글쎄요. 가장 쉬운 것은 독을 사용한다던지 아니면 자객을 보낸다던지 하는 것인데......" 아무리 위험에 대한 경고라고는 해도 뮤리엘에게 위해가 되는 일들을 입에 담는 것도 싫거니와 그런 구체적인 방안을 당사자 앞에서 말하기란 더욱 껄끄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뮤리엘은 당찬 태도로 가능한 모든 사항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일단, 시종들을 통한 독극물이 가장 문제가 되고, 납치의 위험도 있을 수 있겠죠. 자객을 보낼 수도 있고, 의상 이나 목욕물에 수작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 흠.. 나도 여자니까 혹시 남자를 보내 덮치게 할 수도 있겠네요" 초연하게 상상도 하기 싫은 일들을 계속 나열하는 뮤리엘의 얼굴에는 도전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뮤리엘이 혹시 겁을 먹을까 염려했던 다이아나는 이런 뮤리엘의 태도에 약간 안도감을 느꼈다. 뮤리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아티팩트를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염려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보다 더한 아티펙트를 가지고도 납치되었던 경험이 있는 다이아나로서는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질 않았다. 하여,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한 가지를 뮤리엘에게 건네주었고,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감추어진 비밀 하나를 더 알게 되었다. 연회는 연일 계속되고 있었고, 세잔느는 둘째 날부터는 태도를 돌변시켜 뮤리엘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유리아나는 뮤리엘이나 다이아나 양 쪽에 모두 호감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녀와 딱 붙어서 황태나자 에디우스의 그룹으로 들어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의외로 세잔느가 자신의 속좁은 행동에 대하여 명쾌하게 사과를 하자, 뮤리엘 또한 쉽게 받아들인 덕에 4명의 여성과 2명의 남성은 연회장의 눈길을 받으면서 한 무리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세잔느가 뮤리엘에게 사과의 표시로 보석이 박힌 목걸이 하나를 선물로 주었고, 이를 에디우스가 엄중히 검사했으나, 별 문제가 없었으므로 그 이후로 세잔느에 대한 경계는 사뭇 누그러졌다. 뮤리엘이 염려된 나머지 다이아나는 연회가 없는 오전이나 낮에 자주 그녀에게 안부를 물어 왔고, 뮤리엘은 나름대로 황궁을 구경하기도 하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리카르도 등과 함께 수도를 보기 위해 외출에 나서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아바마마께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멀쩡하던 귀족 영애나 귀부인들이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면서 그 앞에서 기절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한 두번이었어야죠." 뮤리엘이 즐겁게 켈러비안으 뒷담을 늘어놓자, 리카르도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분명히 일부러 기절하는 듯한데도 안색을 창백하게 만드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여성들이 남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잘 쓰는 방법은 보통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기절을 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물건이야 주워주고 가 버리면 별 소용이 없으니, 당사자와 상당히 접근한 거리에서 - 주위에 다른 남성이 없을 때를 노려서 - 기절하는 것이야말로 관심 가는 상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리카르도도 이번 연회에서 비슷한 일을 많이 겪고 있었는데, 멀쩡하던 영애가 갑자기 춤을 추다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그의 품에 쓰러지질 않나, 옆 자리에서 음료수를 마시다가 비슷하게 쓰러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바닥에 닿기 전에 잡아 줘야 했던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분명히 거짓 기절이 분명한데도 한결같이 영애들은 결백을 증명이나 하듯이 비정상적인 흰 빛이나 때로는 푸른 빛의 안색을 보여 의심한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상황에 귀족여성들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말이 뮤리엘의 입에서 나왔으니, 궁금함에 못 이긴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뮤리엘 또한 지난 며칠 간 황태자 품이나 주변에서 쓰러지는 영애들을 자주 본 터라, 웃음을 참으면서 짐짓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이건.. 여성들끼리의 비밀인데...." "그러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 리카르도가 간절하게 부탁했고, 귀족여성이라면 다 안다는 듯한 태도에 다이아나도 궁금하다는 듯이 뮤리엘을 바라보았다. 에디우스는 무슨 생각에선지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전략에 대하여 이미 '교습'을 받은 바 있었던 것이다. "어머, 아무래도 에디우스님은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 뮤리엘이 대답을 끌 좋은 핑계를 찾았다는 듯이 에디우스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 표정을 놓치지 않고 집어내자, 이번에는 모든 시선이 에디우스의 얼굴에 쏠렸다. "흠흠. 설마요! 제가 어찌 여성들만의 비밀을 알겠습니까?"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 발뺌을 하는 에디우스의 태도에 다이아나와 리카르도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표정이었으나 뮤리엘만큼은 알만 하다는 듯이 슬쩍 시선을 던지고 목을 빼고 대답을 기다리는 두 순진한 남녀에게 강의를 시작했다. "그건 말이죠. 코르셑이라는 여성의 속옷의 위력이에요" "예?" 리카르도가 못 알아 듣고 의문사를 내뱉었다. 속옷과 창백한 안색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뮤리엘은 이미 그런 효과를 바라고 단순한 대답을 내 놓은 것이기에 의혹만 더한 둘의 표정을 보면서 다시 자세하게 설명했다. "허리를 가늘어 보이기 위해 억지로 조르는 코르셑을 숨을 거의 들이쉴 수 없을 정도로 조여 놓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다 안색이 창백해 져요. 물론 적당한 시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잘 조절해 놓아야 하지만..... 거기다 호흡만 조금 조절하면 숨을 쉴 공기가 모자라 정말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요. 제일 쉬운 것은 춤같이 몸을 움직여서 호흡이 더 힘들어지도록 하는 거구요" "헛..." 한 마디로 몸을 졸라서 그런 일을 꾸민다는 것에 리카르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고, 그에 있어서는 다이아나도 다르지 않았다. "서 있을 경우에는 밖에서 보이지 않게 살짝 허리를 굽히죠. 그럼 코르셑이 더 조이게 되거든요. 아슬아슬하게 조인 코르셑이 허리를 굽히면서 더욱 심하게 압박을 가하니까 바로 안색이 창백해지는 거에요. 아마 황태자님 주위에서 쓰러진 여성들도 자세가 조금 이상했을 껄요?" "그리고 보니......" 이미 알았다고 해서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어차피 앞에서 쓰러지는 여성들에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표시를 할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 허리를 주욱 펴지 않은 여성의 근처에 절대 머무르면 안되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는 리카르도였다. 이 날 저녁, 리카르도는 세심하게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주위로 슬쩍 다가오는 영애들이 살짝 몸을 구부린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는 그런 여성들을 발견하자 마자, 눈에 뜨이지 않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곤 했다. 뮤리엘과 다이아나는 그런 황태자의 태도에 대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웃음을 참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결국 도저히 그 꼴을 더 볼 수 없었던 두 여성은 에디우스와 리카르도에게 춤 신청을 안한다고 타박을 주었고, 뮤리엘과 함께 플로어로 나간 리카르도는 그 날 연회에서 처음으로 긴장을 풀고 즐겁게 춤을 출 수 있었다. 세 곡쯤 춤을 춘 후에 다이아나는 늘상 그랬듯이 뮤리엘과 함께 가서 음료를 마셨다. 검사로서 육체의 단련을 한 세 사람과 달리 뮤리엘의 체력이 어느 정도 된다고 해도 세 곡을 연달아 추고도 멀쩡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음료를 각각 손에 쥔 두 여성이 리카르도와 에디우스가 기다리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뮤리엘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리카르도는 내내 이 상황에 대하여 농담을 했던 터라, 뮤리엘이 장난을 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제국의 황녀가 무너지듯이 쓰러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 들었다. ***********************************************************************************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되었더군요. 써 놓은 글이 없어서 허둥대면서 쓰느라 애를 좀 먹었습니다. ^^; 다음 편이 오늘 내로 나올지는 장담을 못하겠네요. -.-;; 생각보다 일 양이 많아요. 엉엉.. 출판 축하의 리플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독자분들이 없었다면 당연히 출판 같은 일은 있을 수도 없었겠지요 용기와 격려를 주신 많은 분들께 허리 숙여(음.. 안창백해지는군요. 역시 콜셑을...) 인사를 드립니다. 다들 행복하시고. 즐독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뮤리엘이 쓰러지자,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중 가장 앞서 움직인 사람은 이미 주위에 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세잔느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 뮤리엘에게 다가서더니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독이에요! 틀림 없어요!" 워낙 영애들의 기절이 빈번했던 터라, 뮤리엘 황녀의 기절도 단순한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독이라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경 도대체 뮤리엘 황녀께 무엇을 먹인 거지요?" 뮤리엘에게 다가가 옷의 조임을 풀고 편안하게 하고 있던 다이아나는 세잔느의 외침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뮤리엘을 무릎에 기대어 눕힌 채로 연극무대에서 일인극을 하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세잔느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무슨 불미스런 일인가?" 황제도 독이라는 외침에 인파를 가르고 다가왔다. 세잔느는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는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해 가면서 눈물을 섞어 다이아나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아까 얼핏 다이아나경이 황녀님의 음료에 무언가를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못 본 것이려니 했는데, 바로 저렇게 쓰러지시잖아요. 틀림없이 독을 탄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물론 나쁜 소문들이 돌고 있었지만, 워낙 친한 사이처럼 행동했기에 그런 무서운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 제 잘못이어요. 제가 말렸어야... 흑흑...." 세잔느의 연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쓰러진 뮤리엘과 그녀의 옆에 팽개쳐진 잔을 내려다 보면서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작 범인으로 지목된 당사자인 다이아나는 그다지 놀란 표정도 당황한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세잔느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세잔느는 함정에 걸려든 다이아나가 당황해서 멍한 틈에 얼른 마무리를 하기로 작정했다. "저 보셔요. 모두들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다이아나경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 않습니까? 옆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가요?" 이쯤되자, 의심스러워하는 눈길이 늘어났다. 황제와 마르띠앙공작은 일련의 사실들이 음모로 인한 것이라 바로 짐작할 수 있었으나, 너무나 잘 짜여진 각본이라 무어라 나서서 편을 들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악을 쓰는 세잔느를 주시하고 있었다. "세잔느, 네가 본 것이 사실이냐?" 때를 놓치지 않고 오브리스 공작이 짐짓 근엄한 어조로 심문하듯이 말했다. 세잔느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고 놀라고 분하다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먼저 한 말들을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사건 조사의 책임을 전가받기라도 한 듯이 엎어진 잔의 음료를 시험할 동물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수근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미리 준비했던 새장이 등장했고, 오브리스 공작은 시종에게 바닥의 음료를 새에게 먹여볼 것을 명령했다. 새의 부리를 억지로 벌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음료 몇 방울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후 새에게 일어날 반응을 기다리느라 모두 잠잠했다. 하지만, 새는 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퍼득거렸다. 공작이 다시 시종을 독촉하여 음료를 억지로 먹이게 하려고 명을 내렸을 때, 맑은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만하시죠. 죄 없는 새를 괴롭히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군요" 감히 공작의 명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말을 한 대상을 찾기 위해 다시 새에게서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그 사이 깨어나 있는 뮤리엘 황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보란듯이 다이아나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일어나면서 말을 이어갔다. "세잔느양, 멋진 연극은 잘 보았습니다만, 도대체 이런 일을 벌인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군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음모를 꾸민 당사자들의 경악에 비할 바 아니었다. 세잔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짱한 모습에 비웃음까지 띄워가면서 자신을 응시하는 뮤리엘 황녀에게 결례라는 것도 잊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독... 독을 마셨는데... 어떻게?" 뮤리엘 황녀는 우습다는 듯이 세잔느를 보면서 추궁했다. "왜 제가 독을 마셨다고 주장하시는 거죠? 보시다시피 저 새도 멀쩡하지 않은가요?" "하.. 하지만, 분명히 다이아나경이 독을 넣는 것을....." "우습군요. 이 잔은 시종에게 건네받은 이후로 다이아나경과는 반대편의 손으로 들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손을 잡고 움직였지요. 다이아나경에게 손이 하나 더 있기라도 하다는 겁니까?" "그.. 그런......" "도대체 왜 다이아나경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주장하는지 들어 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왜 이 잔에 독이 있다고 그리 확신했는지부터 물어야겠군요" 세잔느는 그제서야 오히려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뮤리엘은 모든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하는 말을 했다. "사실 이 잔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단호한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황제와 마르띠앙 공작 조차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뮤리엘이 무사히 독잔을 피한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독이 들었었다는 말에 놀란 것이다. "아시다시피, 연회가 열린 다음 날부터 괴이한 소문이 돌더군요. 저와 다이아나경과의 사이를 일부러 나쁘게 말하는 소문이죠. 모두들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족파의 사람들이 공작의 명을 따라 여기 저기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었으므로,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들은 적어도 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 소문을 먼저 들은 다이아나경이 저를 걱정하는 말을 하시더군요. 물론 저도 아바마마로부터 받은 아티팩트로 제 몸을 지킬 충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황궁 안에서 감히 독을 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다이아나경은 그 경우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제게 방비할 것을 주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 목걸이죠. 운디네!" 물의 정령을 호출하는 말이 들리자마자, 뮤리엘이 걸고 있던 목걸이의 푸른 보석에서 희미한 형체가 나타나더니 모습을 갖추었다. "제가 마시는 모든 음료는 해로운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이 정령이 정화를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때는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목걸이를 통해 정령과 교감을 나눌 수 있기에 미리 저 잔에 독이 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었기에 일부러 독을 마신 것처럼 연기를 했던 것입니다. 황제폐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그의 암묵적인 이해를 얻은 뮤리엘은 하던 말을 이어갔다. "다이아나경은 제가 독에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정령의 목걸이를 선물한 사람이 다이아나경이니까요. 다만, 제가 하는 일에 어떤 의도가 있음을 알고 가만히 계셨던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뮤리엘이 다이아나 쪽을 돌아보며 말하자, 다이아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이아나경은 제 잔에 독을 탈 이유도 없고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이번엔 도저히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독을 탄 것일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잔느에게 향했다. 세잔느는 창백한 얼굴로 불쌍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는데, 마치 스스로가 범인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이 보였다. "모두들 짐작하고 계시군요. 제 생각 또한 비슷합니다. 연회에서 여성이 기절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쓰러지자마자 독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더군다나 전혀 혐의가 없는 다이아나경에게 죄를 전가하려 했습니다. 독을 사용한 본인이거나 그것을 사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아마도 이 사건을 만들기 위해 며칠 전부터 소문까지 퍼뜨린 듯 하니, 세잔느양 혼자만 꾸민 일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냉정하게 판단하고 분석하는 뮤리엘은 어떤 황제 못지않게 위엄이 흘러 넘치고 당당했다. 그녀는 논리적인 이유들로 결론을 낸 후 황제에게 시선을 돌려 질문을 했다. "황제폐하, 어떤 이유로든 하이센제국의 황녀인 저를 음해하려 한 것은 국가간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더하여 이 사건에는 다이아나경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는 음모까지 포함이 되어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외부인인 터라, 사건의 해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이 일을 적당히 덮어둔다면, 하이센에서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쪼록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좋은 의도로 방문한 저로 인해 두 제국의 오랜 관계가 파괴된다면 저 또한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이오 황녀. 내 나라에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이번 일은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 죄를 묻도록 하겠소" 황제가 속으로 기쁨을 참고 침중한 안색으로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르띠앙 공작이 나서서 세잔느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체포를 명했다. 세잔느는 뒤늦게 정신이 든 듯, 잡혀가면서 발악을 하듯이 뮤리엘과 다이아나에 대하여 저주의 말을 퍼부었고, 로슬레임 백작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오브리스 공작을 애타게 보면서 끌려 나갔다. "결국 그녀였군요" 연회는 그대로 끝나버렸다. 이미 제국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을 앞에 두고 더 이상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인다는 것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일단, 신변의 위협을 받은 황녀는 자신이 가장 믿을만한 이의 집 - 즉, 다이아나의 저택 - 으로 피신하고 다음 날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황제는 그녀에게 사건의 처리가 끝나는대로 결과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려줄 것을 약속하고, 여러 번에 거쳐 사과와 위로의 말을 했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제 생명이 위험할 뻔 했어요. 아, 참 아닌가요? 대륙의 성녀님이 옆에 계셨으니, 즉사가 아닌 이상에야 멀쩡하게 살아났겠군요." 다이아나가 성력을 감추고 있기는 했지만, 뮤리엘이 눈앞에서 죽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실제로 독을 마셨다고 생각한 다이아나가 - 정령을 주고도 순간적으로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 성력을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 뮤리엘이 슬쩍 신호를 보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뮤리엘은 다이아나가 성력을 내보였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중하게 여긴 그녀에게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세잔느양은 어떻게 될까요?" 다이아나는 내심 세잔느가 걸려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를 해치려 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품고 있던 증오심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이아나에게 그 다음에는 뮤리엘에게 드높은 자존심이 꺾였던 그녀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타인의 생명을 노릴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는 차지하고도 어찌되었던 빌미를 제공했다는 생각에 약간의 자책감이 느껴졌다.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실 뮤리엘이 사건을 거창하게 만든 이면에는 다이아나에 대한 염려가 있었는데, 자신이야 떠나면 될 문제이지만 누군가가 다이아나를 노리고 있다면 자신이 미리 나서서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뮤리엘이 보기에 다이아나는 스스로에게 크게 피해가 있기 전에 먼저 상대에게 공격을 가할 성품이 못 되었고, 오히려 다이아나보다는 이러한 면에 냉정한 뮤리엘로서는 다이아나를 그런 위험 속에 내버려둘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에디우스는 뮤리엘의 그러한 판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다이아나에 대한 음해가 성공했다고 해도 에디우스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다이아나 또한 크게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미리 원흉을 찾아 해결해 준 것이나 다른없는 뮤리엘의 행동에 에디우스로서는 내심 감사하고 있었다. ***************************************************** 에고에고.. 간신히 스스로 정한 마감을 지켰군요 ^^;; 다들 좋은 밤 되시고, 즐독하세요 늘상 말씀드리지만, 추천과 리플은 많으수록 좋습니다. 이제 저는 일하러 갑니다아~!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갑자기 칠흑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자신의 손발도 거의 볼 수 없었다. 무서울 법도 하련만 다이아나는 이상하게 별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마치 누가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으면서 주저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끝이 없이 느껴지던 어둠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이는 듯 하더니, 이내 그 앞에 도착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 듯이 느린 걸음걸이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어둠 속에 아주 희미한 빛으로 인해 다이아나보다 좀 작은 가냘픈 인영 하나가 윤곽만으로 드러나 보였다. "누구...?" "다희야... 넌 행복하니?" "지.. 지혜니? 너 지혜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닫혀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열었던 또래 친구이며 자신의 생과 바꾸어 살려놓은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친구의 목소리에, 다이아나는 흥분하며 다가서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방금 전과는 달리 서너 걸음 정도로 보이는 거리는 전혀 가까워지지 않고, 지혜의 모습은 여전히 검은 음영으로만 보인 채 슬픈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다희야... 너무 보고 싶어. 네가 나 때문에 잘 못 된 거라면 나도 따라 갈래. 다희야... 다희야... 제발 돌아와! 아니 내가 갈께 어디 있는거니? 살아는 있는거니?" 지혜의 목소리는 점점 울음기를 짙게 머금어 가면서 끊임없는 질문으로 점철되었다. 다이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최대한 크게 외쳤다. "나 잘있어 지혜야. 걱정하지 마. 나 잘 있으니까, 너도 건강하게 살아줘! 나도 네가 보고싶어 지혜야... " 하지만, 지혜의 말이 들리는 다희와는 달리 지혜는 다희의 대답을 듣지 못하는 듯 끊임없이 울음섞인 질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 때문이지? 네가 기적을 이루어 냈니? 네가 없는 세상을 내가 기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거니? 다희야.... 제발.... 돌...아...와........." "지혜야, 지...지혜야!" 지혜의 인영은 쫓아가는 다희보다 더 빨리 움직여 점점 멀어지더니 끝내는 목소리만 들리다가 사라졌다. 다이아나는 울면서 지혜를 쫓아가다가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자, 다급하게 뿌리치려 했다. "엄마,,, 엄마!" "아! 디안." 디안은 갑자기 엄마의 울음 소리에 깨어 불안한 얼굴로 작은 손으로 꼭 붙잡은 엄마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깨어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얼른 다이아나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디안을 다독거리면서 잠시 꿈을 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는 가만히 디안의 몸을 끌어안았다. '분명히 지혜였는데... 똑똑하고 당찬 친구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너무 내 맘대로 생각한 건 아닐까? 만일 꿈 속의 지혜의 모습이 실제 모습이라면 어떻게 하지? 지혜가 나 때문에 몹쓸 생각이라도 한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다이아나는 적어도 지혜가 아무 확신 없이 최악의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었다. 다희가 죽었다는 증거는 절대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혜가 다희를 따라 죽는다는 최악의 상황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사정을 알고 있는 자신과 전혀 모르는 지혜는 입장이 전혀 달랐다. 다이아나는 지혜에 대하여 그리움과 염려의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런 꿈을 꾼 것이라고 단정짓고는 웬지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디안의 체온을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에디우스는 뮤리엘이 겪은 일도 있고 해서 어제 밤에 저택에서 머물렀다. 세 남녀가 일어나 아침을 먹기도 전에 황궁에서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들고 알렉시안이 도착했다. 알렉시안은 이른 방문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한 후 황제로부터 보내어진 문서를 뮤리엘에게 전해 주었다. "모쪼록 귀국에서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씀과 다시 한 번 사과를 전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저 또한 제국의 기사로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뮤리엘 황녀님" 황궁 기사단의 정식 제복을 차려 입은 알렉시안은 용건인 문서를 정중하게 건네 주고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갖추어 뮤리엘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뮤리엘은 밝은 웃음과 함께 알렉시안에게 잡힌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일어나라는 표시를 하고는 황녀다운 위엄을 과시하면서 대답을 했다. "황제폐하의 마음 쓰심이 이처럼 너그러우신데, 제가 어찌 두 나라의 관계에 폐가 될 일을 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저 뿐만이 아니라 다이아나경도 노린 것으로 보아 결코 우리 제국에 대한 귀국의 뜻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바마마께 이사실이 당연히 보고될 것이니 제가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폐하와 여러분의 진심 어린 사과와 공정한 처리를 꼭 말씀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뮤리엘 황녀는 이번 사건의 처결사항이 담겼다는 문서를 열어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너그러운 행동으로 보일 수 있었으나, 문서 안의 처결내용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그 일이 하이센의 황제에게 보고될 것임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시안은 그런 뮤리엘의 태도에 오히려 반가운 내색을 숨기는 듯 했고, 뮤리엘도 내심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휘유~! 아주 이번 참에 끝장을 내시려나 보군!" 에디우스는 뮤리엘이 준 문서에 나타난 처결내용을 보고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 사건이 나자 마자 당사자들을 심문하고 관계된 모든 일을 밤새도록 조사한 듯 했다. 서류에는 이번 일의 전면에 드러난 세잔느 일가의 귀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빼앗고 변방 지역에서 강제노역을 시킨다는 내용 외에도 스스로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였으나, 로슬레임 백작이 공모하였다고 지목한 오브리스 공작의 작위를 백작으로 강등시키고 황궁 출입을 제한하는 것 외에도 직·간접적으로 이 일에 연루된 증거가 있는 모든 귀족들에 대하여 크고 작은 처결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정말 그렇군요. 확실한 증거가 없기는 해도 로슬레임 백작의 증언이 있었으니 오브리스 공작의 기세를 꺾을 좋은 기회였겠어요. 이렇게 되면 제가 칼라임 제국에 상당히 큰 도움을 준 셈인가요?" 다이아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신중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치적인 감각이라는 면에서 만큼은 뮤리엘이나 에디우스의 식견에 미치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런데 처벌이 너무 약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확증이 없다고 해도 일단 로슬레임이 자백한 듯 한데, 오블리스 공작은 작위만 강등이 되었다니, 좀 이상하군요" "확증이 없고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에 강력한 처벌을 못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게 들려주기 위한 변명이겠죠. 역시 마르띠앙 공작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번만큼은 에디우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다이아나 또한 궁금해했으므로 뮤리엘은 마르띠앙 공작의 의도에 대한 그녀 나름의 추측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오브리스 공작이라는 귀족파의 수장이 눈엣가시인 것은 틀림 없지요. 그 동안 쌓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회가 있을 때 죽이거나 아예 없애고 싶었을 거에요. 제가 대단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이죠. 사적으로 공적으로 꽤나 미운 상대일텐데도 냉정하게 판단했다는 점이지요" 뮤리엘은 두 사람의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듯이 약간의 틈을 두었다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만일 오브리스 공작이 로슬레임백작과 같은 처결을 받아서 정계에서 완전히 없어지면 어떻게 될 지 생각해 보셨나요? 수장이 없어졌다고 해도 나름대로 새로운 인물이 나서서 그들을 이끌게 되겠지요. 이번 일도 있고 해서 한동안 조심할 수 밖에 없어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귀족파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만일 오브리스 공작이 지금처럼 남아 있게 된다면요?" 뮤리엘은 공부 잘 하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이쯤되면 답을 말해보아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를 돌아보았다. "아, 지금이라면 오히려 오브리스 공작, 아니 백작이라는 존재는 귀족파에게 걸림돌이 되겠군요. 수장으로 그냥 두자니 이미 날개 잃은 새와 같고, 새로 누군가를 내세우자니 아무래도 오브리스와의 친분이 두터운 이들이 문제가 될테니까요." 에디우스가 확신에 찬 대답을 하자, 뮤리엘은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도 이미 뮤리엘의 말이 끝나갈 무렵 의도를 알게는 되었으나, 어찌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라는 세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지 않아 그저 알았다는 표시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의외로 언니가 태연하시네요? 솔직히 전 언니가 이번 처벌에 대해서 또 그 세잔느라는 여자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거든요. 제가 보기에 언니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도 상당히 너그러우시던데, 이번엔 별 말이 없으시니 좀 궁금하네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뮤리엘이 솔직하게 의문을 숨기지 않고 물어보자, 에디우스도 그 점이 궁금했던 터라 다이아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이아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물론 세잔느양에 대하여 연민을 마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내 동생인 뮤리엘의 생명을 위협했어요. 예전에 누가 그러더군요. 원래 자신에게 가까운 것들이 더 소중한 법이라고, 저도 그래요. 만일 우리에게 능력이 없었다면 정작 그들의 계획에 의해 뮤리엘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고, 저 또한 억울하게 누명을 썼겠죠. 더군다나 그들이 음모를 꾸민 상황에서 지금 그 음모의 원인은 전혀 제거되지 않은 만큼 또 그런 일을 꾸미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오히려 이번에 능력을 보였으니 더 치밀하고 막기 힘든 계획을 세우겠지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번처럼 그냥 막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다이아나가 흐르는 듯이 이어가던 이야기를 끊더니 살짝 미소를 짓자 뮤리엘과 에디우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알기에 다이아나는 자신이 안전해졌다고 해서 남의 불행을 기뻐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세잔느양의 일가가 처형을 당하거나 했다면 저도 상당히 신경이 쓰였겠지요. 하지만, 직위 박탈당하고 몇 년간 강제노역을 한다면 굶음 염려도 없고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잖아요? 적어도 여태까지 누릴만큼 누리고 산 그들이 남은 기간 평민들과 비슷하게 산다고 해서 불쌍하다고 한다면 이 제국에 불쌍하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되겠어요?" 다이아나의 냉정함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다. 어차피 교육도 받았을 터이고 영지를 빼앗겼어도 어딘가에 재산을 숨기로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친척들은 멀쩡히 있으므로 강제노역 기간만 끝나면 편안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평민들의 노력의 결과물을 펑펑 쓰기만 하였으니 조금 노동을 한다고 해서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래봐야 그들은 평생 죄 한 번 짓지 않은 평민들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는 없어!" 밤새 신문에 시달린 데다가 극심한 불안감과 분노가 한꺼번에 정신을 흔들어 놓은 탓에 혼미해진 정신으로 세잔느는 악을 쓰고 있었다. 귀족가의 영양인 세잔느는 단지 심문실에 놓인 몇 가지 고문기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는 사실을 히스테릭하게 다 털어 놓았기에 잠이 모자라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외에는 전혀 신체적인 위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와 오브리스공작이 이 일을 해결해 줄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자신의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존재하는 과거 속에서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존재였고, 자신은 사랑받은 딸로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 그녀가 무언가 좀 실수를 했다고 한들 아버지가 있는 한 늘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으며, 같은 백작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에는 설설 기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아침 일찍 심문실의 문이 열려 당연히 아무 일 없이 돌려보내어 질 것으로 기대했던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기사도 아닌 일개 병사가 더러운 손으로 그녀를 거칠게 끌고는 귀족들이 드나드는 문이 아닌 평민용의 작은 문으로 가서 허름한 수레 뒤 편에 결박도 풀지 앉고 내동댕이 치듯 타게 했다. 그리고 그 수레 위에는 멀쩡한 그녀와는 달리 험한 일을 당한 듯한 그녀의 아버지가 짐짝처럼 구겨져서 기다리고 있었다. 냉정한 현실은 유리아나도 비켜 갈 수 없었다. 뮤리엘이 쓰러진 것만으로도 놀랐는데, 그 다음에는 다이아나가 범인으로 지목을 받았고 그녀를 지목한 사람은 바로 세잔느였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모든 일이 세잔느와 그녀의 아버지의 음모로 밝혀졌고, 연회가 끝나 집으로 돌아온 지 수 시간 후, 한 밤중에 기사들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연행해갔다. 새벽에 돌아온 아버지는 맹세코 그녀의 눈에는 갑자기 작아진 것으로 보였다. 항상 크게 벌어졌던 어깨는 안으로 움츠러 들었고, 눈빛은 힘이 없었으며, 허리는 구부정해져서 마치 한 순간에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걱정스러워 부축하려는 그녀를 물리치고 밤새 한 잠도 안 자고 함께 기다린 어머니마저 외면한 채 아버지는 서재로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리아나와 오브리스 공작부인도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않고 굶으면서 공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저녁 무렵에 모습을 나타낸 공작은 이제는 그가 공작이 아니며 백작이 되었음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 봄비가 분명한데, 어째 내리는 폼은 장마철을 방불케 하더군요 혹시 비 맞고 감기 드신 분은 없으시겠죠? 저도 감기라면 늘상 달고 살다시피 했었는데, 예전에 회사 생활할 때, 감기 걸려서 약국에 가서 약이라도 지으려면 녹음기 같이 나오는 약사분들의 말에 속으로 툴툴거리던 생각이 납니다. "무엇보다 약 드시고 푹 쉬셔야 낳아요" "네" 요렇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이러죠 '쉬면 낳기야 하겠지만, 쉴 시간이 있어야죠!' "과일 많이 드시고 끼니 제 때 잘 챙겨드세요" "네" 속을 보면 또 비슷하답니다. '평소에도 혼자 밥 차려 먹는 거 싫어하는데, 아파 죽겄는데 먼 밥을 해 먹겠어요?' 늘상 이런 식이었지요 ^^;;; 요즘은 아프면 쉬면 되니까 그거 하나는 무척 좋습니다만, 혼자 있을 때 아프다는 건 참 서러운 일이에요 그러니 늘 건강은 미리 조심하는 것이 최선인거죠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뮤리엘은 이번 사건에 대한 여러 일들을 그녀의 아버지와 의논해야 했으므로, 일단 하이센으로 돌아갔다. 대부분 그랬듯이 켈러비안은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별 내색없이 그녀의 설명을 들었고, 뮤리엘 또한 아버지가 어떤 경로로든 대강의 이야기는 알고 있음을 짐작하면서도 겪은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흠.. 결국 칼라임 황제의 골치거리를 대신 해결해 준 꼴이 아니냐?" "결국 그런 거지요. 그래도 일단 다이아나 언니에 대한 위험이 줄어든 것이니까, 좋은 일이에요" "그렇게 되나?" 켈러비안은 짐짓 생각에 빠져 있는 표정을 짓다가, 약간 능청스러운 어투로 딸의 아픈 곳을 꼭꼭 찌르는 말을 했다. "그런데, 결국 너는 언니 하나밖에 얻은 것이 없는 셈이구나. 에디우스경이나 리카르도 황태자 모두 너의 그 언니라는 다이아나경에게 푹 빠져 있는 게 분명하니, 그러다가 노처녀 되면 아무도 안 데려갈껄?" "흠..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후계는 케트리온에게 이으라고 하면 되니까, 저도 아버지처럼 평생 바람이나 피면서 살까요?" "그게 무... 무슨" 아무리 딸이라 하여도 다 큰 처녀의 입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의 행각을 따르겠다는 듯한 말이 나오자 켈러비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않느냐? 알다시피 케트리온은 정치엔 관심이 없다. 그 애는 완전히 학자 타입이지." "그러니까, 제가 황위를 물려 받고 그 이후엔 케트리온의 아이한테 물려주면 되잖아요. 어차피 성격상 바람 필 소지가 전혀 없으니, 아마 착실한 가장이 되서 아이도 많이 낳을 거구, 그 중에 제일 뛰어난 아이한테 물려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원래 대륙에서 스스로의 능력이 가장 뛰어난 황제를 꼽는다면 마나를 잃기 전의 카이젠과 켈러비안이었다. 카이젠이 특유의 카리스마와 냉철한 성격으로 약간 강압적인 황제로서 군림한다면 켈러비안은 강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상대방을 스스로 굴복시키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켈러비안도 결국 딸 앞에서는 아버지에 불과했다. 괜히 딸을 놀려 보려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 된 불쌍한 아버지는 드물게 얼굴색을 바꿔 가면서 뮤리엘을 설득하려고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전 아직 18살도 안되었다구요. 아버지! 거기에 아버지는 아직도 멀쩡하게 20대 외모를 유지하고 계시구요. 지금의 노화속도라면 제가 황위를 물려받지 않고 케트리온의 아이에게 바로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직 남은 생은 기니까, 제 인생의 반려는 신중하게 선택할 거에요. 아셨죠?" 그나마 결혼 안하고 연애나 하겠다는 식의 말보다는 좀 나은 말이 나오자, 비로소 황제는 약간 진정이 되었다. "참, 이건 아버지도 관심이 있으실 듯 해서 제가 자료를 좀 가져왔어요" 정색을 하고 유능한 황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뮤리엘이 꽤 두툼한 서류들을 꺼냈다. 켈러비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 서류들을 뒤적이다가, 신음과도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진지하게 서류 뭉치에 코를 박고 읽어대기 시작했다. "어때요? 대단하죠? 이래도 제가 그냥 언니 한 분을 건진 거라고 하실 셈인가요? 다이아나언니는 어쩌면 주신께서 이 대륙의 백성들을 위해 보내신 천사일지도 몰라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렇게 척척 해내고 있다구요" "이걸 개발한 사람은 누구냐?" "헤파이토스님의 창조의 손들이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물론 다이아나가 영지개발을 위해 그들을 초빙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대륙에 소문난 엉뚱한 발명가인 그들이 무언가 신통한 물건을 만들어낼 리가 없다고 생각되어 그냥 무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들이 나타나 있는 물건들은 너무나 실용적이면서도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일단 이것들은 영지의 수요를 충당하고 나면 알트상단에 의해 판매되기 시작할 거에요. 우리 제국이 뒤쳐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언니에게 부탁해서 먼저 우리 제국 쪽에 우선권을 달라고 했어요" 켈러비안, 아니 1500살의 드래곤 케시오니스는 에디우스가 그토록 목을 매고 있는 인간여성에 대하여 남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그녀가 여신과 드래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쥐고 있는 서류들은 그가 황제로 유희를 하면서 나름대로 '성군'으로서 이름을 남기리라 작정하고 행한 모든 일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절대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마법을 발전시키고 귀족들의 수탈을 막는 등, 대륙 전체를 놓고 보자면 상당히 뛰어난 왕이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로서는 다이아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개혁에 눈이 번쩍 뜨여지고 있었다. 뮤리엘은 아버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지금 그의 심경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뛰어난 군주였고 백성을 아끼며 현명한 통치를 해 왔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켈러비안조차 그저 평범한 평민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그들이 귀족들보다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실상 드래곤의 입장에서야 같은 인간들끼리 신분을 정해 높고 낮음을 정하는 것 자체가 우스워 보였지만, 그저 인간종족 자체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고정관념 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진지하게 서류를 검토하던 켈러비안이 뮤리엘을 응시하면서 물었다. "다이아나경을 이쪽으로 끌어올 수는 없겠느냐?" "그건 언니의 마음에 달렸어요. 저 또한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언니는 정이 많은 사람인지라, 주변 사람들을 버리고 하이센으로 오려고 할 지는 의문이네요" "여기엔 네가 있지 않느냐?" 켈러비안은 다소 조급해진 말투로 되물었다. "언니에게 제가 친동생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그 영지의 수많은 사람들을 버리고 올 수 있을까요? 아버지라면 이 제국의 백성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이상을 펼칠 수 있다면 그러시겠어요?" 켈러비안의 질문에 대하여 이미 수없이 질문과 대답을 반복해서 생각해 온 뮤리엘이었다. 영지에서의 일들을 함께 겪으면서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감정을 함께 공유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그녀의 사람들에 대한 애착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고, 반면 황녀로서의 뮤리엘은 그런 그녀가 자신의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절감하고 그녀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일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뮤리엘은 다이아나에게 그러한 부탁을 할 경우 그녀에게 고민거리 하나만 더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민을 해서 결론이 좋다면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는 영지민들을 버리지 못할 것이고 뮤리엘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수도에 위치한 다이아나의 저택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이미 말론이 말한대로 다이아나는 하인들을 모아놓고 현재 영지의 사정과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희망자와 그 가족은 모두 받아들이겠노라 선언했다. 어차피 수도의 저택을 관리한 소규모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여겨졌기에, 이주가 어려운 사람은 그냥 남아 있는 것도 허용되어서 하인들은 선택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냥한 여주인은 그들의 결정을 다그치지 않았다. 영지로 갔다가 마음에 안 들면 수도로 보내주겠다고 했고, 수도에 남은 이들이 영지로 이주를 원하면 그 또한 가능하다고 했다. 비록 몇 달 간의 간격이 생기더라도 다이아나는 자신이 처음으로 가족으로 인정한 이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그런 마음은 하인들에게도 선연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따라서, 가족 중에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어 수도에서 움직이기 힘든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지로 이주를 희망했고, 저택은 이러한 준비를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이들로 들뜬 분위기였다. 다이아나는 저택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기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 일 주일 정도를 더 수도에서 머무르면서 모처럼 느긋한 시간을 즐겼다. 영지의 일은 매일 수정구로 보고를 받고 있었고, 이번에 수도에서 새로 보내어진 인력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보고도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처럼 시간이 난 그녀는 디안과 함께 힉스를 타고 수도의 시장을 구경하기도 하고, 에디우스를 동행하고 세레스여신의 신전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 보기도 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거야?" 연회 이후로 조금씩 안색이 안좋아지는 다이아나를 주시하던 에디우스는 디안을 재우고 모처럼 둘이 앉아 차를 마시던 자리에서 며칠 동안 눈에 띄게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그녀에게 물어왔다. "그냥. 꿈을 좀 많이 꿔서 그래" "꿈?" "응. 내가 전에 살던 세계의 친구가 날마다 꿈에 나와. 왜 알지? 지혜라고......" "응. 지혜라면 잘 알아" "날마다 꿈에 그 애가 나타나서 나를 찾아 헤매는 거야. 나는 그 애의 말을 들을 수 있는데, 그 애는 내 말을 듣지를 못하니까 너무 안타까워.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는데 벌써 나흘째 같은 꿈을 꾸었어" "내일 신전에 가보자" "신전이라구?" "포이브론님의 신전에 가면 꿈에 대한 해몽을 받을 수 있을꺼야" "아, 그렇구나. 하지만......" 다이아나가 주저하는 기미를 보이자, 에디우스가 이유를 물어 왔다. "너무 불안해. 혹시 지혜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 쪽에 갈 수 없잖아. 아마 평생 갈 수 없겠지. 지혜가 나 때문에 불행하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에디우스도 물론 지혜를 알고 있었고, 다희였던 시절의 영상을 볼 때면 그녀에게 고마운 감정을 여러 번 느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이 쪽으로 온 후에는 닫혀진 차원에 대하여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에디우스가 그 쪽의 차원에 관심을 가진 이유 자체가 오직 하나의 존재를 위함이었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이아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유달리 사람에 대하여 집착이 많은 그녀의 성격에 그 동안 꽤나 혼자 고민했을 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하여 약간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민만 한다고 무슨 수가 생기진 않겠지? 그래 네 말대로 내일은 포이브론님을 만나뵈어야겠어. 좋은 충고 고마워!" 다이아나는 항상 그렇듯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일부러 힘을 주어 밝게 말하고는 밤 인사를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황제와 마르띠앙공작은 그야말로 행복에 겨워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숙적인 오브리스 공작이 백작으로 강등된 데다가 기한을 정하지 않은 근신형을 받았으며, 그의 수족같이 움직이던 로슬레임 백작은 아예 평민이 되어버린 셈이니, 귀족파의 세력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두 주범을 처벌한 이후로 진행된 고의적인 '소문'에 대한 조사가 이어지자, 귀족파의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졌다. 실제로 그 소문을 퍼뜨리는 데 동참하지 않은 귀족파의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덕분에, 몸을 사리는 귀족들이 하나 둘 영지관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도의 저택을 비우기 시작했고,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기운이 솟구친 마르띠앙 공작은 그 외의 귀족파 수뇌들의 비리를 조사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후 연이어 '공모'에 가담했다는 혐의와 그 외의 여러 가지 비리들을 줄줄이 엮은 수 차례의 '처리'가 있은 후, 귀족파는 이미 파벌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한 때 황제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 제국의 모든 일에 대하여 세력다툼을 벌였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제국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 하나가 허무하게 끝을 맞은 것이다. +++++++++++++++++++++++++++++++++++++++++++++++++++++++++ 라덴은 뮤리엘 황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취합하다가 몸이 굳어졌다. 그는 뮤리엘 황녀가 친하게 지낸다는 다이아나라는 인물이 성녀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흥미를 가진 뮤리엘에 대한 조사 도중에 튀어나온 이 잊혀진 여성에 대하여 보고를 안하자니 앞뒤가 맞지 않았고, 그냥 보고를 하려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하지만, 일단 드래곤에 의해서 기억이 지워진 황제가 만의 하나 그녀를 직접 대면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하면, 뮤리엘 황녀가 그 여자의 영지에 가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군"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황녀가 사라진 기간을 전후로 친분이 있었던 사람을 꼽는다면 가장 유력합니다. 그 곳은 저희가 별로 정보를 얻을 만큼 중요한 곳도 아니기에, 정보원이 나가 있지 않는 곳이구요" "일단 지금은 하이센이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현재 위치는 아는 셈이니 변동사항이 있을 때까지는 그대로 두도록 하지. 이미 17년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에는 나름대로 다른 은신처가 있을 가능성도 있어. 특히 황궁내에 있으면서도 마법에 의해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해 볼 수 있겠군" "저 또한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야 할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클 일은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말해보아라" "요즘 유난히 산맥에 접경한 외곽 영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가?" "그것이 확실치를 않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평판이 좋지 않던 자들로서 그 중에는 감찰기관 쪽의 주시대상이었던 인물도 있었습니다만, 그들조차도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집 안에서 살해된 경우에도 침입의 흔적조차 나아있지 않았구요" "단서 없는 죽음인데, 죽을 만한 놈들이 죽었다?" "그것만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덕분에 좀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재밌군. 나쁜짓 한 놈들이 꽤나 잠자리가 사납겠는데?" 카이젠은 백성들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제국 내에서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귀족들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그들의 시선을 피해 혹독한 어린 날을 보낸 그에게 귀족들이란 편의상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에 비하여 오히려 일반 백성들은 그의 소유물과 같이 여겼기에, 자신의 소유물을 괴롭히는 적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로 하투아제국도 그런 대로 살만한 곳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다. 일단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진상'을 모른다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으므로, 카이젠은 일련의 사건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지시했다. 허나 그 지시 속에는 단순히 조사만 할 뿐, 혐의자를 알아내더라도 절대 외부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단서가 붙었다. ************************************************************************** 자 오늘 분량도 올렸으니 이제부터는 또 일을 할까요? ㅡㅡ; 소설은 즐겁게 써 지는데, 왜 일은 이렇게 하기 싫은지....... 어제 한 단원 분량 끝내고 두 단원째를 시작했는데, 분량에 비해서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군요 노동량이 너무 많아요. ㅠ.ㅠ 어차피 한 달 분량을 두 주에 하는 것이니만큼 돈도 한 달 분량을 받기로 했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죠 돈 많이 벌어서, 계약금 나오고 이번 일 끝나는 시기에 맞춰서 오는 사람 하나 없어도 번개를 치고야 말겁니다. (요즘 이 상상을 하면서 버티고 있다는.......) 즐독하시고, 새로운 한 주 즐겁게 시작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예언과 음악의 신' 포이브론은 모든 음유시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더불어 국가에 큰 일이 있을 경우 황족들도 예언을 받기 위해 방문하는 일이 있어 문화의 중심지이자 황궁이 있는 수도 내에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포이브론은 신탁을 내리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이는 예언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고, 포이브론의 신성력을 받은 신관들은 상당히 조심해서 예지 능력을 사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꿈에 대한 해몽 정도는 쉽게 해 주는 편이었기에 포이브론의 신전은 그를 찬양하기 위해 찾아오는 음악가들과 간단한 해몽을 원하는 신자들로 늘 붐비고 있었다. 8대신들 중 맏이인 그의 성품이 상당히 차분하고 이지적인데 반하여 그의 신자들은 대부분 음악을 즐기는 방랑자나, 음유시인 등 예술가들이 많아서 상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신관들조차도 예지나 해몽의 일을 할 때가 아니면 참배한 이들과 함께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약간 늦은 오전에 신전을 찾은 다이아나는 지난 번 중앙연합국에서 신전 순례를 할 때에는 번잡한 응대 때문에 보지 못했던 포이브론의 신상을 볼 수 있었다. 한 손에 하프를 들고 다른 손에는 예지의 능력을 가졌다는 거울을 든 포이브론의 신상은 성인 키의 세 배 정도의 크기로 신전 앞마당의 중앙, 즉 신전의 문을 열자마자 정면이 되는 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의 발 아래 부분을 차지하는 발판과 같은 각진 돌에는 사람의 하나의 경구가 새겨져 있다. "예언은 바로 이 순간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진 미래를 보여 줄 뿐이다" 다이아나는 그 문구를 보면서 저쪽 세계의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을 떠올렸다. 그는 주역에 능하여 상당히 세세한 부분까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아 맞추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저술한 토정비결은 그의 제자가 보기에도 미비한 구석이 많았다고 한다. 하여, 그 제자가 의도를 묻자 토정비결을 저술한 의도는 나쁜 일에 대하여 대비하고 좋은 기회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라는 의미일 뿐 정확한 미래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포이브론 또한 모든 인간의 운명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얽힌 실타래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의지에 따른 극복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어차피 '신관'에게 부탁하여 해몽을 할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개인 참배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른 바 기도실이라고 불리는 이 방들은 대부분 신관들의 기도에 이용되고 있었으나, 독실한 신자들이 찾아와 오직 신과의 교통을 위하여 기도하는 곳이기도 했다. 보통 포이브론의 신관이나 신자들은 앞서 나타난 바와 같이 떠들썩하게 함께 모여 그를 찬양하기를 즐겨했기에 기도실은 비어 있는 곳이 많아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원래 기도실은 일인실인데다가 젊은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함께 들어가는 것을 신전에서 좋게 볼 리 없었으므로, 에디우스는 다이아나를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슬쩍 용언으로 결계를 쳐 놓았다. 포이브론의 강림이 있을 경우 신성력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이아나는 몇 번 다른 신전에서 경험한 대로 마음 속으로 포이브론의 이름을 부르며, 만나 달라고 기원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빛무리 속에서 이전에 이미 본 적이 있는 외삼촌의 모습이 보였다. "네가 나를 찾아오다니, 정말 기쁘구나! 얼마 전에 헤파이토스의 신전에 들렀다지? 그 놈이 얼마나 자랑을 해대는지 요즘 아예 귀를 막고 산단다" 포이브론은 다이아나의 '심판'을 담당할 아테나이와 더불어 세레스를 제외하고는 신계에서 다이아나아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신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8대신의 맏이라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 외에도 주신의 은밀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그는 이 특별한 조카를 상당히 아끼고 있었다. 실제로 닫혀진 차원에서의 다이아나에 대한 모든 지원이 아테나이와 더불어 포이브론의 판단 하에 이루어졌었던만큼 그의 다이아나에 대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예언의 속성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포이브론이 채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나타나자마자 속사포처럼 약간의 섭섭함을 보이면서 이야기를 하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존재라고 해도 이들은 다이아나가 난생 처음 가져 본 '친척'이었고, 그녀에게 절대적인 지원과 애정을 쏟고 있음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그녀는 외경심보다는 친근함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예언과 음악의 신 포이브론님을 뵙습니다!" 간신히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건만, 포이브론은 한 술 더 떠서 신계에서조차 잘 보이지 않던 푼수기를 여지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이런이런! 우리 사이에 이렇게 서먹하게 예를 차리다니. 내가 도대체 저 무식한 헤파이토스나 여깡패같은 페르세포네보다 너를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이 삼촌은 너무너무~ 섭섭하구나아~" 헤파이토스의 톤을 흉내내어 일부러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하는 포이브론의 눈빛은 따스함과 장난기로 가득했다. 다이아나는 생긋 웃고는 그가 기대해 마지 않는 말을 해 주었다. "큰외삼촌~! 보고 싶었어요!" 혹자는 신들에 드래곤까지 이러한 호칭에 감격하는 이유를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들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주신의 권능으로 탄생한 이후 이들은 자신들 이외의 어떤 존재와도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다이아나의 어머니는 최고신들 사이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세레스였다. 이는 세레스의 속성인 자애와도 연관이 있어서, 어떤 신에게든지 항상 사랑과 이해를 쏟았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주신 휘하의 신들이 각각이 가진 속성으로 인해 약간씩은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자애의 속성만큼은 모든 것을 포용했기에 그녀의 형제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장 세레스를 아낀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세레스가 드래곤이 반려로서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상당히 흥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바로 그 세레스의 아이였다. 더군다나 이들로서는 처음 가져보는 조카이고, 어디 가서 생전 '이모'나 '삼촌'으로 불릴 일이 없는 이들이 이러한 호칭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몰랐다. 일단 용건은 차지하고 포이브론의 여러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여실히 귀여운 조카의 역할에 충실한 다이아나 또한 그런 신들이 싫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네가 우리의 도움을 가능한 받지 않으려고 하는 듯 해서 그냥 보고 있었는데, 오늘 온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결국 포이브론이 먼저 질문을 하자, 다이아나는 닫혀진 세계의 친구가 나오는 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녀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해몽이라..... 일반적인 꿈이라면 모르겠지만, 닫혀진 차원에 대한 꿈이라면 파장으로 인한 실제의 상황일 가능성도 있구나" "네? 그게 정말이에요?" 포이브론은 별로 좋지 않은 사실을 전하게 되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거짓된 말로 위로를 할 수는 없었다. "아마 너와 지혜라는 아이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그녀의 의지의 힘이 너의 정신과 연결이 된 것이지. 정신적인 면이나 능력에서 네가 좀 더 강하기 때문에 너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고, 그녀는 너의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그녀의 영혼의 목소리가 너보다 컸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한 마디로 다이아나가 지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보다 지혜의 다이아나에 대한 생각이 훨씬 더 클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지혜는 온 정신을 다희를 찾는 데 쏟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워낙 여러 일들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혜처럼 생사를 모르는 간절함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방법이 없을까요? 지혜에게 제가 잘 있다는 것만이라도 전해 줄 방법은 없나요?" "닫혀진 차원이 왜 닫혀진 차원이라 부르겠느냐? 너라는 존재는 원래 이 곳에 속해 있었기에 네가 그쪽 세계에 있는 동안은 우리도 조금씩 관여할 수 있었지만, 네가 이쪽에 있는 이상 우리들로서도 닫혀진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단다." "그럼 방법이 전혀....." "닫혀진 차원의 경우도 주신께서 맡고 계신 차원이지만, 우리들은 이쪽 차원의 신이기 때문에 간섭을 할 수 없단다. 가능한 분은 오직 한 분이지" "......" 결국 주신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그 쪽 세상과의 인연을 끊겠다는 약속과 함께 지혜의 생명을 살려 준 주신에게 이제와서 그런 부탁을 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이아나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포이브론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오히려 우리 신들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닫혀진 차원에 접근하기 쉽단다. 만일 네가 9써클을 마스터하게 되면 차원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드래곤은요?" "그들은 닫혀진 세계와 연결된 끈이 없잖니? 너는 그 세계에서 1700년을 살아왔다. 만일 그런 네가 차원 이동을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다면 네 능력으로 이동하지는 못하더라도 지혜라는 친구와 연락할 방법은 생길지도 모르지. 사실 이건 내 추측일 뿐, 정확하지는 않단다. 네가 지금 꿈으로 그 친구와 이어져 있다니 하는 말이다만......" "잘 알겠어요. 일단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니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노력해야겠죠. 고마워요 삼촌" "고맙긴......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사실 그 동안 마법에 전혀 진전이 없었거든요. 일단 하는데까지 해 보겠어요!" 결심을 굳힌 듯한 다이아나의 태도에 포이브론은 대견하다는 미소를 짓고 다른 몇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는 신계로 돌아갔다. 다이아나는 꿈 속에서 지혜를 보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포이브론의 말대로라면 지혜가 꿈에 나타나는 한 그녀는 살아서 다희를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녀가 이 세계로 건너온 후 3년 이 넘었지만, 실제로 저 쪽 세상에서는 한 달도 안된 것과 다름 없었으니, 노력만 한다면 지혜가 절망하고 포기하기 전에 다이아나 쪽에서 연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다아아나의 이런 결심을 들은 에디우스는 마법을 배우는 것을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엄마, 왜 혼자 갔었어..요?" 디안이 다이아나를 붙들고 칭얼댔다. 요즘 웬만한 외출은 모두 다이아나와 동행을 했기 때문에 에디우스와 둘만 나간 것이 상당히 불만이었는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이제는 악몽도 꾸지 않고, 처음의 불안한 태도도 없어져 투정까지 부리는 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덥석 끌어 안고는 뺨을 부벼대며 달래주었다. "응, 엄마가 신전에 가서 여쭈어 볼 말이 있어서 다녀온 거야. 우리 디안 섭섭했구나? 두 밤 자면 영지로 돌아가니까 내일은 시장에 놀러 갈까?" "정말? 힉스 타고? 응?" 디안은 힉스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대조적으로 힉스는 늘 뚱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보기에 어디까지나 힉스는 체면을 차리는 것에 불과했고, 디안이 타면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그야말로 조신하게 행동해서 웃음을 겨우 참게 만들곤 했다. 디안은 시장에 힉스를 타고 가도 된다는 말에 기뻐서, 이전에 엄마 혼자 외출한 것에 대한 서운함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시장에 나가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 하나 말하고 있었다. 힉스는 다이아나를 보고 반기다가 옆에 있는 조그만 갈색머리 여자아이를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김을 흥흥 내뿜었다. 디안은 그런 힉스를 전혀 무서워 하는 기색도 없이 멜 아저씨로부터 받은 당근 하나를 얼른 앞으로 내밀었다. 힉스는 가장 좋아하는 당근과 자존심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당근과 자존심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당근의 유혹에 참을 수 없었는지 아이의 손을 피해 조심스럽게 당근 끝을 이빨로 잡아 슥 빼앗듯이 가져가서는 우적우적 씹어 먹고는 약간 아쉬운 듯한 태도를 보였다. 디안은 속으로 맛 없는 당근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말을 하진 않았다. 아마 힉스도 당근을 먹어야 키가 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거 먹고 가요" 다이아나는 디안만 말에 태우고 고삐를 잡고 시장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튀김을 가리키며 사달라고 하는 디안 때문에 멈추어서 가게의 상태를 살폈다. 사실 길거리 음식을 꺼려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천상 디안에게만큼은 엄마인 다이아나로서는 어른들이야 별 탈이 없어도 아이가 위생상태가 안 좋은 음식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튀김의 재료는 야채였고, 기름도 상당히 깨끗해 보였으므로 다이아나는 디안을 말에서 안아 내려 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야 해요. 알았지?" "네에" 튀김을 받아 최대한 식힌 후에 디안에게 건네 주면서 다이아나가 주의를 주었다. 디안은 엄마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호호 불어 가면서 조금씩 떼어 먹기 시작했으나, 이내 튀김이 식었는지 온통 손과 입 주위에 기름을 묻히면서 정신없이 먹었다. 다이아나는 힉스를 세워 놓은 것이 좀 미안해서 재료로 있는 당근을 조금 사서 힉스에게 주었고, 힉스와 디안은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느라 한동안 쩝쩝, 우걱우걱 소리만 내고 있었다. "야! 그 쪽으로 간다~!" "잡앗!" 왁자지껄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서너명의 소년들이 무언가를 쫓아 시장 골목을 뛰어왔다. 다이아나가 시끄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몇 명의 소년들이 회색의 먼지덩어리 같은 것을 쫓아오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어머!' 그 뭉치는 다이아나의 품 안으로 팔짝 뛰어올라 안기는 것이었다. 다이아나의 품에 안긴 것은 지저분한 고양이였는데, 전체적으로 회색털이 길게 나 있었다. 목표물이 한 여성의 품에 안겨버린 데다가 그 여성이 귀족같이 보이자, 소년들은 주춤하고 선 채로 그녀가 어떻게 할지 살피는 표정이었다. "아, 야옹이다!" 튀김을 먹느라 정신이 없던 디안이 고양이를 보고 눈을 반짝이면서 소리쳤다. ********************************************************************************* 대장금 보기 전에 올리려구 두 편 연달아 써 놓았지요 이번에도 앞 편엔 또 추천이랑 리플이 팍 주나요? 자꾸 그러시면... 하루 한 편만 올리는 수가..... -_-;;; 즐독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소년들은 더러운 고양이가 팽개쳐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모처럼 외출한다고 곱게 차려입은 디안과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아도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다이아나, 그리고 그 옆의 말을 보고 시장골목에서 수 년간 쌓인 감각은 그 일행이 귀족일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 잠깐 놀라서 소리를 친 것 외에는 그 더러운 고양이를 소중한 듯이 품에 안고 있었고, 한 술 더 떠서 그 옆의 작은 소녀는 고양이를 보자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년들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작정한 듯 했다. "엄마, 이 고양이 주인이 누굴까요?" "글쎄?" 다이아나는 고양이를 쫓아 달려오던 소년들 쪽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고양이에서 자신들에게 향하자, 소년들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기색으로 움찔거렸다. 다이아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살짝 미소를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 고양이 너희들이 키우는 거니?" "도둑고양이를 누가 키워요?" 그 중 가장 덩치가 큰 소년이 비죽대면서 말했다. 고양이 주인이 따로 없는 것을 알자, 디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제가 키울래요" "네가?" 다이아나는 의외로 바로 허락하지 않고 디안에게 되묻기 시작했다. "만일 네가 고양이를 키운다면, 목욕도 직접 시키고 똥이랑 오줌도 치워야 하는데? 그래도 키울래?" 디안은 목욕이라는 말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 후에 따라오는 단어를 듣고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곧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네. 그렇게 할께요. 그러니까 우리가 데려가요!" "우리 디안이 그렇게 한다니까 데려가야지." 디안이 조심스럽게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잠시 경계는 눈빛으로 털을 살짝 세웠으나 다이아나가 살짝 어루만지자 슬쩍 내밀었던 발톱을 오무렸다. 디안은 다이아나로부터 고양이를 받아 들고 말에 타려고 했지만,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결국 저택까지는 다이아나가 고양이를 안고 가기로 했다. 힉스는 시종일관 고양이에 대하여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사실 고양이가 뛰어 들 때, 놀라서 날뛰려는 것을 다이아나가 슬쩍 진정시킨 일로 고양이에 대하여 안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별 거 아닌 고양이에게 놀랐다는 사실이 힉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고양이와 함께 저택에 들어선 모녀를 본 저택 사람들의 반응은 정확하게 둘로 나뉘었다. "우와! 고양이다!" 이건 아이들의 반응이고, "에그머니나, 이 더러운걸 어째?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요!" 이건 어른들의 반응이다. 다이아나는 고양이가 진정이 된 다음에 조금씩 친해지는 것이 좋겠다고 아이들을 타이르고, 디안에게 고양이를 목욕시키라고 했다. 안느가 나서서 자신이 대신 하겠다고 했고 하녀들 여러 명이 비슷한 제안을 했지만, 디안은 의젓하게 자신의 고양이니까 스스로 하겠다고 말하고는 고양이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으앙~! 이 고양이는 날 싫어하나봐요" 다이아나는 디안이 하는 양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디안은 제법 어른들의 흉내를 내어 작은 대야에 물을 받고 온도를 가늠한 후 고양이를 물에 담그려 했다. 하지만, 물을 싫어하는 고양이는 본색을 드러내어 디안의 손을 할퀴고는 욕실 구석으로 달아났고, 디안은 놀라고 아픈데다가 당황하기까지 해서 울기 시작했다. "아냐 디안, 원래 고양이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너도 누가 싫어하는 일을 갑자기 시키면 놀라고 겁이 나지? 이 고양이도 그래서 그런거야" 다이아나는 디안을 달래어 상처 부분을 깨끗이 씻기고는 구석에서 등을 구부리고 꼬리를 빳빳이 세운 채 털을 부풀려 하악 거리는 위협의 소리를 내고 있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다이아나가 살짝 신성력을 내뿜자, 고양이는 진정이 되었는지 위협적인 태도를 돌변시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부비적거리면서 오가기 시작했고, 그런 고양이를 안아 든 다이아나는 디안의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되니까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목욕을 같이 시키자고 했다. "네가 지금처럼 더러우면 이 집에 같이 살 수 없단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줄래? 네가 기분 좋아할 온도일거야" 다이아나는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것을 고려해서 디안이 맞춰 놓은 물에 더운 물을 부어 온도를 조금 더 높게 하고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면서 살그머니 물 속에 집어 넣었다. 처음엔 바들거리면서 무서워하던 고양이는 따뜻한 물 속에 푹 잠긴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이내 조용해졌다. "디안 이리 와서 물 안에 손을 넣어보렴" 디안은 엄마의 말대로 다치지 않은 손을 살짝 물에 담가 보았다. "고양이는 사람보다 체온이 높단다. 그래서 네가 목욕할 때보다 약간 뜨거운 물을 더 좋아하는 거야" "아아~!" 디안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아나는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씻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양이가 좋아할만한 곳을 긁고 쓰다듬어 주는 방법을 직접 보여 주고 디안이 상처가 나지 않은 손으로 따라 해 보게 하면서 고양이를 씻겨냈다. "후와~!" 여러 차례 물을 갈아 가면서 씻겨 내었더니 눈이 부실 정도로 흰 털이 나타났다. 디안은 완전히 다른 색이 된 고양이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더니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는 눈치였다. 다이아나로서도 고양이의 암수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둘은 별로 상관 없을 듯한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블루라고 할래요" 마지막까지 흰털, 흰둥이, 화이트, 뭉치 등의 이름이 경합을 벌렸으나, 결국 고양이의 눈 색깔을 따라 블루라는 이름이 선택되었다. 하지만, 블루는 제 이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우유를 할짝거리고는 바구니 안에 마련한 집에서 금새 곯아 떨어져 버렸다. "웬 고양이야?" 에디우스가 저녁에 와서 고양이 바구니를 보고 물었다. 다이아나는 낮의 일을 설명하고는 블루라는 이름을 짓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다이아나 주변의 것들에는 상당히 예민한 에디우스는 고양이 바구니에 가서 한참 요리조리 살피더니, 별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자 금새 무관심해졌다. 다음 날, 예정대로 다이아나는 영지로 갔고, 이번에는 꽤 많은 수의 저택의 사람들이 따라갔다. 약 3분지 2 정도 되는 인원은 영지로 가게 되었고, 수도의 저택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남아 저택 관리를 하기로 했다. 다이아나가 영지에 도착한 이틀 후, 뮤리엘이 당연하다는 듯이 왔는데 솔베노와 함께 와서 조금 놀라게 했다. 더군다나 솔베노는 엘프의 특징인 귀를 마법으로 살짝 변형시킨 상태였는데, 뮤리엘이 황제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어쩐 일로 이번엔 솔베노님과 동행한 거에요?" "명색이 제 음악선생이었잖아요. 제가 없으니 황궁에 있기 힘들었나 보더라구요" "그것 뿐이에요?" 다이아나가 장난스럽게 묻자 뮤리엘은 짐짓 모른 척 능청을 떨었다. "사실 나 혼자 여기서 일하고, 솔베노님은 할 일이 없어서 외로워하는 게 우습잖아요? 여기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일이나 하시라고 모셔온 거죠" 다이아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자, 뮤리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워낙 주위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없으니까 허전하더라구요" 하지만, 솔베노는 불행히도 서류 등을 처리하는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결국 그는 행정부서 쪽에서 뮤리엘을 돕는 일을 포기했고, 다이아나는 그에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부탁했다. 같은 엘프이면서도 시루스가 엄청난 업무능력을 보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서류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솔베노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엘프들 또한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다행히 솔베노는 교사로서는 최고의 자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냥한 엘프는 자신의 학생들이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해 와도 미소를 잃지 않고 참을성 있게 가르쳐서 배우는 능력에서 아이들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성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솔베노님은 정말 교사로서 훌륭한 성품을 가지셨어요" 다이아나가 저녁 후에 넷이 모인 자리에서 솔베노를 칭찬하자, 엘프의 얼굴은 금방 달아올랐다. 뮤리엘도 솔베노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솔베노는 칭찬에 화답하기 위해 너무나 엘프다운 솔직한 답변을 했다. "사실 엘프들이 끈기가 있고 참을성이 많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일이랍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예전 같았으면 도저히 이렇게는 못 했을 거에요" "예에? 예전이라뇨?" "뮤리엘 황녀님을 가르치기 전의 일이죠. 뮤리엘 황녀님의 음악교사로 일한 것은 말씀드렸었죠? 그런데 황녀님 성격이 아시다시피 하기 싫으면 전혀 안 하시고, 흥미 없는 일은 금방 잊어버리시는 지라 저도 마음을 많이 수련할 수 있었지요" 뮤리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에디우스는 껄껄대고 웃었으며, 다이아나는 한참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억눌린 웃음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솔베노님!' "예?" 뮤리엘이 악을 쓰듯이 솔베노를 불렀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에 결국 포기하고는 함께 웃기 시작했다. 한참 세 사람을 살피던 솔베노는 아무래도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아, 솔베노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영지 사람들 중에 혹시 정령과 친화력이 있는 분이 있는지 가려내 주셨으면 해서요" "정령사를 키우시려는 겁니까?" "전문적이 아니더라도 정령과의 친화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니까요. 농사일에도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구요. 한 마을에 한 명의 정령사만 있어도 훨씬 편해질 거에요" "알겠습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드리면 되는 건가요?" "네. 그렇게 해 주시면 일단 그 중에서 희망자를 모아서 가르치면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있는 재능을 사장시킬 필요는 없다. 전투를 위함이 아닌 농사와 생활을 위해서라면 하위정령 하나만 있어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뮤리엘은 정령술을 생활에 접합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를 보고 사뭇 그 결과가 궁금한 듯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 한숨이 솔솔 나옵니다. 주말에 두 단원 해서 가져갔는데, 제가 일하는 데서 납품하는 최종사용자 측이 목차를 바꿔달라는군요 결국 주말내내 거의 헛손질 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별 수 있나요? 다시 해야죠 -_-;;;; 그럼..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영지의 개혁은 점차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아직 학교라고 부를만한 곳은 없었지만, 많은 곳에서 점차 배우고 가르치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하수 처리 시설이 완성되자, 인분등은 농사를 위한 퇴비로 쓰기 위해 한 곳으로 모아졌고, 미처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농토에 적절하게 뿌려졌다. 비록, 땅이 지금은 풍요롭다고 해도 지나친 개발이 땅의 힘을 약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농토 중의 4분지 일은 퇴비를 만드는 곳으로 항상 놀려 두도록 했다. 매 년마다 노는 땅을 돌아가면서 사용하도록 하고 쉬는 땅에는 새로운 퇴비를 뿌리도록 했다. 창조의 손들은 처음에는 간단한 기구들을 좀 더 실용성이 있게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더니, 점차 더욱 발전된 기계 형태의 농기구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엘프인 솔베노는 누구보다 식물들의 쓰임새를 잘 알고 있어서, 미처 손이 닿지 못했던 식물들의 쓰임새를 찾아내고, 사람들의 지나친 채취를 막는 일에도 공헌하고 있었다. 단지 엘프인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지의 식물들은 최대한의 보호를 받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실 솔베노의 이러한 일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주의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인간들과 엘프들의 식물에 대한 관심 자체가 달랐기에 어느 날인가 솔베노의 걱정스러운 한 마디로 시작된 것이었다. "저, 제가 돌아보니 여긴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종류의 나무와 풀들을 이용하더군요"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다이아나, 에디우스, 뮤리엘, 솔베노라는 고정적인 멤버와 프라이톤, 말론 등 약간의 변동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날의 일들을 의논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알고 계신 내용들을 모두 모아서 활용한 덕분이죠" 다이아나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다 말고, 솔베노의 심상치 않은 안색을 보고는 주춤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신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몇 가지 식물들이 너무 많이 채취되고 있어서요. 조금 더 신경 쓰시지 않으면 멸종이 될 수도 있겠어요" 엘프들의 경우 다년생의 나무는 그 열매를 취하고, 수명이 일 년이 안 되는 식물들은 다음 해에도 같은 자리에 자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우 각 식물에 대한 특성을 잘 몰랐기에 뿌리를 채취하는 식물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조심하고 있었지만, 식물이 생식을 하기 전에 마구잡이로 채취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다음 해에 그 식물이 자라지 못할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솔베노는 영지를 둘러보다가 그같은 점을 발견하고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아! 그건 곤란하죠. 말이 나온김에 솔베노님이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다들 잘 몰라서 그런거에요. 저도 한계가 있구요. 솔베노님 만큼 식물들을 잘 돌볼 수 있는 분은 없을테니까요.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멸종하는 식물이 없게끔 미리 주의를 주시고, 필요하다면 채취를 금지해야 할 것들도 가르쳐 주세요. 물론, 엘프님들만큼 제가 식물을 아끼고 보존할 수는 없겠지만, 개발로 인해 무의미하게 멸종되는 식물이 생기면 안되니까요" 다이아나는 반갑게 솔베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다음 날부터 솔베노는 영지의 식물에 대한 채취와 채취후의 처리에 대한 총 책임자가 되었다. 영지민들은 이 아름다운 녹색 머리카락의 중성적인 미남의 부드러운 말소리와 차근차근한 설명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고, 이미 그에게서 글을 배운 바 있는 몇 몇 사람들은 거의 추종자가 되다시피 했기에, 위기에 빠졌던 몇 몇 식물들은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자연스럽게 솔베노를 통하여 자연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확대되어 나가자, 크게 걱정하던 부분이 해결된 셈이었다. 처음 영지를 개발할 때부터 가장 걱정하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런 영지의 변화에 고무된 다이아나는 솔베노와 뮤리엘을 동원하고 비밀리에 교류를 하고 있던 오크 마을에 가서 솔베노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 솔베노는 도착한 곳이 오크들의 마을이라는 것과 그 오크들이 다이아나를 상전 모시듯이 깍듯하게 대한다는 점에 거의 기절할 듯이 놀랐지만, 이내 적응을 하고 한 주에 한 두 번씩은 오크 마을을 오가면서 그들에게도 식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파했다. 이외의 변화라면 전문적인 도축장이 건설된 것이다. 다이아나는 사람들의 육식을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무분별하게 가축들을 죽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하여, 가축을 도살하는 장소를 하나로 정하고, 가능하면 그 곳을 이용하게끔 유도하기 시작했다. 닭과 같은 조류는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돼지나 소와 같이 덩치가 있는 동물들을 도살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기술과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불필요하게 가축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고통이 많이 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러한 점을 안타깝게 느낀 다이아나가 이런 방도를 강구한 것이다. 도축장으로 선택된 곳은 각 마을의 외진 곳이었는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도축업자로 일을 하다가 이것 또한 창조의 손들의 힘을 빌어 자동으로 가장 고통없이 도살되는 기계가 보급됨으로서, 상당히 쉬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까지 생각하신 거에요?" 뮤리엘은 살생을 상당히 싫어하는 다이아나가 도축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낸 점이 의아했기에 초기에 이러한 질문을 했다. 그녀 자신도 육식을 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요리된 고기였고, 동물을 도살한다는 것을 직접 하거나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도 고기는 먹고 있잖아요. 이율배반적이긴 하지만,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가능하다면 고통없이 죽이는 편이 더 좋잖아요?" "그야 저도 동의는 해요. 하지만, 굳이 그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라도 있는 거에요?" "글쎄요. 전에 그런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요. 죽을 때 고통을 받은 모든 것들에는 한을 담은 독이 들어간다구요.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죽는 생명으로 인해 이득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배려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겠죠. 오히려 이런 면에서는 오크들이 우리보다 더 세심하답니다." "에엑?" "처음 오크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그거였거든요. 가능하면 빨리 고통없이 죽여서 먹겠다구 하더라구요" "무.. 무엇을요?" "그야 물론 저를요" "헉!" 오크마을에서 만난 푸치를 생각해낸 다이아나는 밝게 웃으며 말을 했지만, 정작 질문의 당사자인 뮤리엘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에디우스를 제외하고는 그런 말을 초연하게 하는 다이아나를 희귀한 생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이상한가요? 하지만, 오크들의 입장에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먹이에 불과하다구요. 우리가 소나 돼지를 먹는 것과 그들이 인간을 먹는 것에 차이를 둘 수는 없었죠. 물론 지금 저와 알고 지내는 오크들은 적어도 말을 하는 생명을 잡아먹진 않지만요" 사실 솔배노로서는 도축장이라는 화제 자체가 달갑지 않아 무시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엘프들은 육식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종족들의 식습관을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경우는 더욱 특별했다. 그녀는 자신이 육식을 하는 것과 오크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고 그것에 대하여 특별히 죄악이라고 하는 관념 자체를 깨어 버린 것이다. "정말 대하면 대할수록 다이아나님은 특별한 분이군요" 약간 질렸다는 듯한 말이 저도 모르게 솔베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에디우스는 당연한 이야길 왜 하냐는 표정이었고, 뮤리엘 또한 어느 정도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던 터에 늘 그 한계를 쉽게 뛰어넘어 버리는 다이아나에 대하여 신기하다는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영지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새로운 도구로 인해 남는 일손들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영지 내에 알트 상단의 지부가 들어선 이후로 상단에 취업하는 인원들도 생겨났다. 상단으로서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상당히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무엇보다 상단의 최고 책임자가 머무는 영지이다 보니, 영지 내의 상단의 지부는 거의 본단같은 분위기였다. 영지 내에 필요한 도구들이 어느 정도 지급이 되면서, 알트상단에서 생산품들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러한 도구를 제작하는 대장간의 규모가 커졌고,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을 잡은 사람들이 주거환경에 신경을 쓰면서 집을 짓는 전문가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던 초기의 관리인력들도 어느 정도 일을 배분한 끝에 말론같은 경우는 완벽하게 저택의 집사로 되돌아갔고, 다이아나나 뮤리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오히려 처음에는 가르치는 일 외에는 별 할 일이 없던 솔베노가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그는 가르치는 일과 정령술 쪽의 제자들 외에 식물들의 보호까지 도맡았던 탓이다. 하지만, 이 또한 솔베노의 가르침을 이은 사람들이 충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택의 큰 방 하나에는 비밀리에 마법진이 크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이센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나온 마법사는 다이아나도 안면이 있는 7써클 마스터인 스탠이트였는데, 황제로부터 지원받은 마나석을 설치하여 영지에서 바로 제국의 은밀한 곳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에디우스가 알트상단의 대표로 켈러비안 황제와 몇 번의 협의를 거친 결과 다이아나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물품들 중 일부가 하이센으로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를 위하여 마법진이 운영되었다. 다이아나는 영지민의 생계유지의 방편이 생기자, 마지막으로 학교를 건설했다. 거리가 먼 곳의 마을에서 오는 학생들을 고려하여 학교는 기숙사를 끼고 지어졌고, 디안 아가씨의 놀이친구들은 모두 근무지가 학교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을 위한 학교와는 달리 이 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다른 수업은 대부분 앞으로의 직업을 위한 전문훈련과정이었다. 아이들은 최소 일 년 간은 여러 가지 수업들을 들으면서 적성을 개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후에는 그 쪽을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아예 현업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로 예정되었다. "분명한가?" "네. 영지로 들어가는 길은 막혀있지 않았기에 이미 여러 첩자들이 황녀의 모습을 확인해 왔습니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카이젠은 뮤리엘황녀가 친언니처럼 따른다는 다이아나라는 여자의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덕분에 부가적으로 영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개혁들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할 수 있었고, 이전의 '구조대' 사건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점과 그녀의 활동을 보니 황녀가 관심을 가질 만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요즘도 사건이 계속되는가?" 돌연 화제가 바뀌었지만, 역시 라덴은 황제의 뜻을 짐작하여 재빨리 대답했다.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미 그 사건이 일어난 범위가 상당히 넓혀졌고, 그 수법도 다양해졌습니다." "아직도 단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인가?" "이상할 정도로 완벽합니다. 더군다나 당한 사람들이 워낙 인심을 잃어서인지 정보를 캐내려고 해도 협조를 잘 해주지 않는 분위기구요. 사실 협조를 받아 봐야 그들도 전혀 모른다는 분위기입니다. 기껏 나오는 말이 천벌을 받아 그리 되었다는 정도니... 면목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잘 된 것인지도 모르지" "예에?" "이번엔 우리가 도움을 청해보세나. 저 잘난 켈러비안과 다이아나라는 여자에게 말일세" "그건 무슨?" "하이센의 일도 처리했다지 않나? 우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불가능하니 여러 제국의 도움을 청한다고 당장 사신을 보내게. 아마 자존심을 걸고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겠지. 아 참, 그 내용에는 지난 번 하이센의 일을 처리한 분들을 특별히 모시고 싶다고 꼭 써 넣도록 하고... 서류가 다 되면 가져오게나" 제국내의 일에 대하여 외국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드높은 카이젠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만큼 그의 서신을 더 큰 힘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 높은 능력을 빌어 제국내 미지의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청하는데,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충분히 맞아 들었다. +++++++++++++++++++++++++++++++++++++++++++++++++++++++++++++++++++++++++ 아슬아슬합니다. ^^;; 바로 다음 편이 올라갑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다이아나는 뮤리엘과 자신에게 각각 전달된 서신을 펴 보고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 속 사정을 잘 아는 에디우스야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 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이아나의 결정이 중요했기에 단 둘만 남을 때를 기다렸다. "의외로군요. 그 자존심 센 카이젠 황제가 이런 편지를 다 보내고......" 뮤리엘은 말을 꺼내면서 다이아나를 보다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알아채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니, 왜 그러세요? 사람들이 죽은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어요?" 다이아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핏기가 가진 얼굴을 들어 뮤리엘을 보고는 괜찮다는 듯이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대답을 했다. "아니, 괜찮아요.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 쉬세요. 일단 저나 언니나 황궁에서 호출이 온 셈이니 내일을 움직여야 하겠지만, 이 서신대로라면 어차피 다시 만나서 의논해야 할 것이 분명하잖아요. 그 때까지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도록 하죠" "그래요" 뮤리엘은 다시 한 번 다이아나의 안색을 살피면서 솔베노와 함께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마도 다이아나에게 쉴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리라. 뮤리엘을 따라 나설 듯 하던 에디우스는 어느 틈에 기척없이 돌아와 주변에 살짝 결계를 펼치고 다이아나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가야... 하겠지?" 다이아나가 꽤 오랜 침묵을 깨고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묻지 에디우스는 약간 화가 난 표정이 되어 단호하게 말했다. "가고 싶지 않다면 갈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든 해 볼테니까" "명분이 없어. 더군다나 카이젠이 나를 기억하는 것도 아닐테구... 이런 식으로 엮였다면 라덴으로서도 말릴 방법이 없었을 거야" "그 인간들의 장단에 네가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뭔데?" "일단 나도 이 제국의 귀족이야. 나라에서 하라는 일은 해 주어야겠지. 무엇보다, 그쪽에서 일어났다는 일이 마음에 걸려. 카이젠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고 라덴의 능력도 무시 못할 정도야. 그런데 그들이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살인사건이라니... 무언가 이상해" 그 점은 에디우스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물론 나름의 꿍꿍이가 있을테지만, 별 거 아닌 일로 외국의 도움까지 청한다는 것은 카이젠의 치부를 내보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 따라서, 일 자체의 심각성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인데...... "오랜만이군요" 리카르도 황태자는 별 내색없이 반갑게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를 맞았다. 황궁의 기별을 받은 두 사람은 바로 다음 날 마법진을 이용하여 오전 중에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르띠앙 공작과 황제는 두 사람에게 하이센과 협력하여 카이젠 황제의 부탁을 들어 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사흘 후 하투아로 향하게 된 두 사람에게는 황제의 친필 서찰 한 통과 더불어 황태자와의 접견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다이아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고, 에디우스도 반가운 친구를 맞듯이 리카르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지 못합니다." 황태자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한 기색이 다이아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런 다이아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에디우스를 보면서 섭섭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에디우스경, 제가 노리던 이를 빼앗아 갔으면, 국익에 이익이 되는 장사만큼은 제게 먼저 말씀을 하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찌하여 새로운 물품들은 하이센에서만 판매하시는지요?" 알트상단이 전 대륙에 거쳐서 사업을 하고 있음은 이미 알려진 바였으나, 최근 하이센과의 거래는 조금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물품들이 대량으로 하이센으로 납품된다는 것을 칼라임에서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 것들의 효용성에 대하여 알게 된 황태자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띄며 말했다. "상인은 이득을 제공하는 곳에 물건을 납품합니다. 어찌하다 보니 켈러비안 황제께서 그 사실을 먼저 아시고 후한 값이 물건들을 사들인 것입니다. 저야, 제가 소속된 나라에 팔고 싶지만, 이 나라의 영주들 중에 평민들을 위함이나 다름 없는 그런 물품에 관심을 가진 이는 별로 없더군요" 미리 준비된 듯한 깔끔한 대답이었으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리카르도는 잠시 얼굴이 굳어졌으나, 곧바로 안색을 밝게 하고 에디우스와의 거래를 시작했다. "물론 이전까지야 그랬지만, 덕분에 우리 제국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뮤리엘 황녀와 다이아나경의 덕분이기도 하니, 이 자리를 빌어 황제폐하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에디우스경의 말에 따르자면, 하이센과 같은 조건이면 우리 제국에도 그 물품들을 팔 수 있다는 것이겟지요?" "물론입니다. 저 또한 국내 거래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물품 목록을 알고는 있지만, 가능하면 상세한 목록과 쓰임새, 그리고 가격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몇몇 영지에서 먼저 시행해 본 후 귀족들에게 의무적으로 구입하도록 하지요" "떠나기 전에 미리 그렇게 조치해 놓고 가겠습니다." "아, 예" "생각보다 단념이 빠르군" 리카르도가 떠난 후 에디우스가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를 살짝 흘겨보았지만, 에디우스의 다음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아쉬워? 딱 백 년 기다려 줄테니깐 연애 한 번 할테야?' 확실히 에디우스는 변해 있었고 계속 변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갈수록 자신을 편하게 하는 에디우스의 태도에 기뻐하면서도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변화가 대부분 다이아나의 반응을 고려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에디우스는 카이젠을 만날 일을 걱정하는 다이아나의 심경을 짐작하고,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흠... 그럼 고려해 볼까? 리카르도 황태자라면 상당히 괜찮은 상대지" "뭐.. 뭐야? 뮤리엘이랑 잘 되었으면 한다면서?" "그야.. 네가 질투하지 않는다면, 뮤리엘도 이해해 줄껄?" "......" "네가 굳이 그렇게 제안하는 데 사양하는 것도 우습잖아?" 1대 0의 승부를 속으로 외치는 다이아나에게 에디우스가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맘대로 해. 그래도 첫날 밤은 나랑 지내자" "뭐... 뭐얏?" "여자는 첫 남자를 못 잊는다잖어. 리카르도 죽은 다음에 못 잊어서 애쓰는 모습은 볼 수 없으니까 내가 나서서 첫 남자가 되어 줄께" 안색 하나 안 변하고 이렇게 말하는 에디우스에게 다이아나는 결국 속으로 외치던 1대0의 스코어를 뒤집어 기록해야 했다. "아무래두 우리 딸이 노처녀가 되진 않을 것 같구나" 한 번 크게 당하고도 여전히 농담을 포기하지 않는 켈러비안의 말이었지만, 그 말에 담겨진 의도에 뮤리엘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네 주위에 꼬리가 달렸다는 이야기지" "넷?" "동쪽의 노총각이 아무래도 네게 마음이 있나 보구나" 황궁 내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하는 켈러비안이었다. 더군다나 겉으로 알려진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가진 블루드래곤이기도 했기에 그는 귀국하는 황녀의 뒤로 붙은 첩자들을 금방 눈치채었고, 최근 약간의 움직임을 보이던 수상쩍은 시종들 몇 명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뮤리엘이야 놀라건 말건 켈러비안은 계속해서 딸을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듯 했다. "흠... 안타깝군. 그래봐야 얼마나 가겠어?" "그건 또..." 뮤리엘은 자신을 감시하는 첩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데 켈러비안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계속하고 있자, 드물게 당황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이번에 다이아나경도 같이 간다면서?" "그래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야...... 너만 가면 모를까, 그 다이아나경을 본 황제가 너한테 미련을 가지겠어? 에디우스경에게 연적이나 하나 늘겠지" "아빠!!!" "얘야, 아무리 네가 내 딸이라지만, 세상은 냉정한 거야. 이 아빠도 너만 아니면...... 그러게 왜 언니를 삼고 그러냐? 그 정도면 네 셋째 엄마로 딱이었는데...... 다이아나경과 그렇게 붙어 다니면 어디 누가 네 얼굴이나 봐 주겠니?" 사실 취향의 차이일 뿐이지 뮤리엘의 외모가 다이아나보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개성을 동경하는 법이다. 평소 다이아나의 청순하고 신비스러운 면을 동경하는 딸의 마음을 잘 아는 켈러비안은 그 점을 이용하여 10살 이후로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딸을 마음껏 놀려주고 있었다. "역시... 그럼 내일 도착하는 것인가?" "예. 폐하" "좋아. 일단 사건에 대한 모든 자료를 준비하고... 음 아무래도 여자들은 파티를 좋아하니, 가기 전에 환영파티를 한 번 크게 여는 것도 좋겠군" "알겠습니다." 하투아에서 황제가 여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간 큰 귀족은 없다. 아마도 황녀가 참석하는 파티는 성황리에 개최될 것이다. 하지만, 라덴은 칼라임 쪽에서 요청했던 이들이 온다는 것에 더욱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골드드래곤이 했던 마지막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며, 그 때 그가 풍기던 위압감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무릎이 후들거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기억이 지워졌어도 한 때 황제가 사랑하던 여성이다. 황제가 그녀를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한 편으로는 뮤리엘 황녀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기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라덴은 한동안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황제가 몇 번을 부른 후에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이거이거... 자네 아무래도 벌써부터 내가 혼인을 한다는 상상이나 하고 있었나보군. 하긴, 저 켈러비안이 장인이 된다면 이 저주스러운 마법도 풀 수 있을지 모르지. 더군다나 그 황녀는 검은머리더군.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들어. 암..." 카이젠이 상당히 밝은 표정으로 라덴의 속을 넘겨 짚었기에 약간 멍했던 라덴의 태도는 그냥 묻혀졌다. 하지만, 라덴의 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음날, 칼라임과 하이센에서 차례로 사절이 도착했다. 칼라임에서는 에디우스와 다이아나가 하이센에서는 뮤리엘 황녀가 솔베노와 스탠이트를 동행하고 도착했다. 지난 번 엘프마을의 일을 같이 해결한 주역들이 모두 모인 것이어서 이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반가움과 친근함을 표시했다. 물론, 사실적으로는 며칠 만에 만난 것이기에 뮤리엘 황녀는 솔베노가 실언을 하지 않도록 가능하면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을 가로채 가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처음 마법진을 통해 들어온 이들은 황궁까지 기사단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면서 안내되었고, 그 후에 대기실 같은 곳에서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마중을 받았다. 두 제국의 일행이 별 시간차 없이 도착했기에, 먼저 숙소를 배정받고 황제와의 접견은 다음 날 가지게 되었다. 두 일행이 안면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미 다이아나와 뮤리엘 사이의 일을 조사해 놓은 하투아에서는 이례적으로 이들에게 귀빈용으로 사용하는 독립된 건물의 숙소를 함께 쓰도록 했다. 이러한 숙소의 배치에서 뮤리엘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일들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깨닫고 냉혈황제라는 악명을 높인 카이젠의 용의주도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뮤리엘은 숙소를 배정받자마자 자신의 방을 나와 당연하다는 듯이 다이아나의 방을 찾았다. 어차피 뮤리엘이 마법을 쓴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므로, 보란듯이 방안에 결계를 치고 대화를 시작했다. "언니, 아바마마가 그러시는데, 제 주변에 벌써부터 하투아의 첩자가 있었다는군요. 아무래도 이번 초대는 그냥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원래 제국 사절들의 숙소도 보통은 이렇게 한 건물을 주는 경우가 없다구요." "카.. 하투아의 황제가 우리 사이가 친다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다이아나는 카이젠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바로 말을 바꾸어 하투아의 황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일지도..... 아마 제가 언니 영지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 지 모르겠어요" "음... 결혼상대로 생각하는 걸까요?" "성인식 때 참석을 안 했길래, 카이젠 황제는 신랑감 후보로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황태자보다 황제가 나으려나?" 뮤리엘은 농담조로 별 상관 없다는 듯이 경쾌하게 말했지만, 카이젠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다이아나로서는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황제가 청혼을 하면 받아 들일 건가요?" 다이아나답지 않은 성급한 질문이었다. 다행히 뮤리엘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재미있다고 여겼는지, 방긋 웃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언니두 참. 아직 실물도 못 봤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적어도 제 반려가 되려면 아바마마보다 멋진 남자여야 한다구요" "푸웃. 좀 힘들겠네요" 켈러비안은 바람둥이라는 사실 외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상적인 반려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섬세하고 다정한 성격에 능력까지 따라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라는 사자성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다. 뮤리엘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런 아버지의 장점에 자신만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으니, 기준이 까다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다이아나는 그 점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려워도 벌써 한 명 있으니 더 없으란 법도 없지요" "응?" "에디우스경 말이에요. 아우, 언니 애인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한테 반하게 만들었을텐데......" "에디는 황태자나 황제는 아닌데도?" 다이아나는 짐짓 뮤리엘의 속을 떠 보았다. "그야, 어차피 아바마마는 후계로 저를 생각하고 계시니 전혀 상관이 없어요. 현재 황제나 황태자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긴, 하투아랑 우리 제국 사이에는 센트리아가 딱 막고 있으니, 이곳 황제랑 결혼한다면 하이센의 황위는 동생에게 양보해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위치로 보아선 리카르도 황태자님이 딱인데...... 거긴 짝사랑에서 벗어나려면 한참 걸릴 것 같구...... 아니지. 이번에 도와준 것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 시도해 볼까?" 뮤리엘은 처음엔 분명히 다이아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얼마 못 가서 혼자만의 중얼거림처럼 이런 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에 따라 콧잔등에 살짝 주름을 잡기도 하고 희희낙락 웃기도 하는 둥, 하도 표정이 다양하게 변해서 다이아나는 즐겁게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뮤리엘이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 해서 .... 하니깐... 아휴 모르겠다. 일단 만나보고 정해야지!" 길고 긴 중얼거림 끝에 결론을 내린 듯한 뮤리엘은 그제서야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렸다는 것과 다이아나가 그런 자신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 뮤리엘의 이러한 버릇은 이미 다이아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에효, 또 혼자 중얼거렸구나. 미안해요 언니" "괜찮아요. 그럼 일단 만나 보고 결정하려구요?" "결정한다고 다 제 맘대로 되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제 맘은 정할 수 있겠죠. 사실 첫 눈에 팍 반하지 않는 이상 그리 내켜지진... 앗... 언니." "왜요?" "괜찮으세요? 저 카이젠 황제는 바로 그 사건의......" 뮤리엘은 황제에 대한 여러 소문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아무래도 여지를 두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그 소문 중에 가장 최근의 것이 바로 엔젤하우스의 일이었으며,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헌데, 그제서야 그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성녀가 바로 눈 앞의 다이아나임을 깨달았다. 다른 일들은 아버지와 의논하면서 서로 빠뜨린 점들을 보완하곤 했지만, 다이아나가 성녀인 것은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기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이아나로서는 가장 뼈아픈 기억이었을 사실을 자신이 전혀 배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뮤리엘은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는 제 얼굴도 잘 몰라요. 당시에 로브를 쓰고 있었고...... 미안해요 뮤리엘 이 이야긴 더 하기 싫으네요. " "아.. 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이 되서 온 것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황제와 오래 대면할 것도 아니잖아요? 조사를 하러 떠나야 할테니까요" "알았어요. 그 대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주세요." "혼자 버티기 힘들면 뮤리엘에게 말할께요" 약간 들뜬 분위기에서 시작된 대화가 어두운 내용이 되자, 뮤리엘은 일부러 솔베노에 대한 이런 저런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다이아나를 웃기려고 애를 썼다. 다이아나 또한 그런 뮤리엘의 마음을 눈치채고 최대한 즐겁게 말을 받아 주었고, 뮤리엘은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떠들다가 결계를 해지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뮤리엘이 나가자마나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사람은 에디우스였다. 그는 다이아나의 안색을 살짝 살피고는 괜히 다음 날 입을 옷은 골랐느냐는 둥의 그 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 놓으면서 한참 눈치를 보았다. "난 괜찮아. 그게 알고 싶었던 거지?" 결국 다이아나가 그런 에디우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자신이 먼저 말을 하자, 그제서야 에디우스는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응. 계속 안절부절 못했잖아. 너 답지 않게. 후훗." "흠......" "가능하면 황제와 오래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일단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래." "내일은 내 옆에 꼭 붙어 있도록 해. 어차피 대외적으로 우린 약혼한 사이나 다름 없잖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다이아나에게 재차 다짐을 받고서야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에디우스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오전에 두 제국에서 파견나온 이들은 황제와 접견하는 시간을 가졌다. 황제가 이들을 불러들인 곳은 다이아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집무실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인원이 몇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접견실로 사용하는 곳은 지나치게 넓을 것이라고 판단한 카이젠의 배려였지만, 다이아나로서는 노예인 리아로서 카이젠의 사무를 돕던 장면이 눈 앞에 바로 펼쳐지는 듯 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집무실로 안내된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리 기다리고 있던 카이젠에게 예를 표했다. 카이젠은 호탕한 웃음으로 이들을 반기면서 제국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국의 일행까지 불러들인 것이 민망하다는 뜻의 말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젊은 황제의 얼굴에는 오만함과 자존심이 가득 차 있어 그가 결코 그러한 일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잘 나타내고 있었다. 한편 뮤리엘은 인사를 주고 받은 후 자리에 안내되어 앉고, 황제와의 이런 저런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름대로 카이젠을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군' 카이젠이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켈러비안이 비정상적으로 젊어 보이는 것이었지만, 뮤리엘의 눈에 비친 카이젠은 30대 중반의 나이가 그대로 보이는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로 기르고 있었는데, 항상 잘 손질되어 있는 켈러비안의 머리카락과 달리 그냥 대충 빗어 내린 듯 보였다. 그럼에도 워낙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라, 반들반들 윤기를 머금고 있어서 보기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황제는 상당히 굵직한 선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미남이라기 보다는 사내답다는 말이 어울릴 듯 했다. 각이 진 턱과 높게 선 콧날은 그의 오만함을 나타내 주었고, 검고 깊은 눈은 짙은 속눈썹 아래에서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처럼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상당한 외부활동을 하는 듯, 피부는 그을려 있었고, 190㎝가 넘어 보이는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들이 옷 위로도 감추어지지 않고 그가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돋보였다. 뮤리엘은 그의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남자다운 선에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으나, 차갑고 약간 잔인해 보이는 눈빛에 이르러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냉혈황제'라는 별칭 답게 카이젠은 시우스제국과의 전쟁에서 가차없는 살행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했다. 엔젤하우스의 일이 있기 전에도 그는 항복하는 영지에 대하여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나, 자신에게 저항한 영지에 대하여는 그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학살에 가까운 만행을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사실 그러한 면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기도 했다. 항복하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저항하는 자에게 잔인하다는 소문이 크게 퍼질수록 정복은 쉬워진다. 이러한 점은 카이젠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처음부터 노렸던 효과였고, 나름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만일 중앙연합국의 지원이 그토록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2년만에 흐지부지된 전쟁은 단기간에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철저한 계획하에 냉철하게 움직이는 정복자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카이젠은 뮤리엘 황녀가 자신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황녀를 본 그의 느낌은 충분히, 아니 넘칠 정도로 영리하고 생각보다 순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야수와 같은 그의 감각은 눈 앞의 황녀가 결코 온실 속의 화초로 키워진 여성이 아님을 즉각적으로 전달했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강인한 하투아의 여인들보다 오히려 뛰어난 기상이 엿보였고, 쉽지 않은 자리임에도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적절하고 재치있는 답변을 거듭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황녀가 기대 이상의 여성임을 판단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과는 별도로 그의 감각 한 부분을 자꾸만 건드리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는 결국 그 쪽에 시선을 돌렸다. 환상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금빛의 사내는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최근 드러난 알트상단의 대표이면서 마검사라고 알려진 에디우스의 실력이 뛰어나서 자신의 신경을 끌었다고 생각했으나, 예의 바른 미소 속에 비수처럼 감추어진 살기를 언뜻 보이는 그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온 신경을 긴장시켰다. 그의 옆에는 긴 갈색머리의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카이젠은 그녀가 뮤리엘과 친하다는 이유로 시선을 끌어 보려고 몇 번 노력했지만, 상당히 숫기가 없는 듯 시종일관 그림처럼 에디우스라는 사내의 옆에 딱 붙어 있는 그녀는 짤막한 대답만을 들려줄 뿐이었다. 다이아나는 집무실 구석에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라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카이젠의 관심이 뮤리엘에게 쏠려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가능하면 결례를 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끔씩 던져지는 그의 질문에 짧게 대답을 하고 그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단 한 번 무심결에 그 눈을 보는 순간 살짝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리아로서 처음 마주쳤던 때의 흥미로움과 궁금함을 담고 뮤리엘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나의 떨림을 느낀 에디우스는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고,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존재를 느끼고서야 어느 정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신경에 거슬려." 일행과 저녁의 연회를 약속하고 혼자 남은 카이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성녀와의 만남에 대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라덴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누구.. 말씀이신지?" "칼라임의 남녀" 카이젠은 밀어내듯이 말을 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알트상단의 대표라는 그 남자, 분명히 처음 본 것인데도 나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더군. 더군다나 그 옆의 여자는 내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양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더란 말이지. 뮤리엘 황녀가 친하다는 그 여자가 그렇게 내게 거부감을 가진다면 별로 좋지 않을텐데 말이야" "어차피 뮤리엘 황녀의 마음만 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라덴은 가능하면 카이젠의 관심이 에디우스나 다이아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었으므로, 별 거 아닌 일에 신경을 쓴다는 듯이 가능하면 초연하게 말했다. 카이젠은 그런 라덴의 말이 의외였는지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들었다가 이내 이해가 간다는 듯이 다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일엔 몰라도 남녀관계만큼은, 아니지 여자에 대한 한 자네의 지식은 초보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여자들이란 좀 우스운 면이 있는데, 반드시 친한 동성에게 관심이 가는 대상에 대한 판단을 의지한다는 거야. 지금 뮤리엘 황녀가 누구에게 의견을 묻겠나? 그 다이아나라는 여자한테라고. 거기다가 처음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보니 언니라고 부르면서 그녀를 매우 좋아하는 것이 한 눈에 보이더군. 그렇다면, 그 여자가 나를 싫어하면 일이 틀어질 수 있어. 이건 아주 간단한 상식이라구" "아... 그... 그렇습니까?" "그렇구 말구. 저녁 연회에서 좀 접근해봐야 겠군.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구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원... 칼라임의 여자들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평생 손을 내밀어 가지지 못한 여자가 없을 정도로 이성에 대한 카이젠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듯이 드높았다. 이는 그가 후계자로서 선보이기 전, 기사로서 재임할 무렵부터의 일이었으므로 지위를 제하고라도 충분히 여성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헌데, 뮤리엘 황녀는 그저 호기심에 가까운 시선만 보내었고, 다이아나라는 여자는 마치 못 볼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다이아나로서는 뜻하지 않게 지나치게 피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카이젠의 호승심과 자존심을 자극한 꼴이 되고야 말았다. 이는 그들의 첫 만남에서 다이아나가 지극히 당돌한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카이젠의 관심을 끌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일이었으나, 그의 관심을 자극했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니,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하루 쉰 김에 약간 양이 늘어났습니다. ^^;; 배고프신 분들을 위하여~! 한 편 더~!!! 하지만 첫 편이라구 그냥 가시면 추천단추가 울어요 -_-;;;;;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하아, 이곳 여인들은 정말 대담하군요" 연회를 위한 자리에 참석한 일행은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엘프인 솔베노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에디우스와 황녀다운 고고한 우아함과 함께 나이를 넘어서는 요염함을 과시하는 뮤리엘, 그리고 이번만큼은 뮤리엘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약간 소박한 흰색 드레스 차림의 청순해 보이는 다이아나라는 네 젊은 남녀는 연회의 주역이라는 점 외에도 그 외모만으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스탠이트는 이런 연회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연회용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7써클의 마스터라는 위명에 압도된 하투아의 궁정 마법사들이 약간의 가르침이라도 얻을까 하여 주위에 몰려 있었다. 하투아는 전사의 나라이면서 성적으로 상당히 개방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연회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이들 주위에는 젊은 남녀들이 둘러싸듯이 모여들었고,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노골적으로 에디우스나 솔베노에게 춤을 신청했다. 대체적으로 참석한 여성들의 옷차림은 노출도가 상당한 편이었으며, 팔과 목 외에도 가슴을 반쯤 드러낸 듯한 디자인의 옷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더군다나 그런 옷차림으로 마음에 드는 남성에 대하여 춤을 추면서 육탄공세를 퍼부었기에 이내 솔베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디우스는 나름의 기술을 발휘하여 다이아나를 데리고 플로어로 향했고, 뮤리엘은 격의 없이 춤 신청을 받아주고 있었다. 한참을 플로어를 메우며 여러 꽃송이가 피어난 듯한 광경을 연출하던 귀족들은 카이젠이 옥좌에서 내려와 플로어로 향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중앙을 비우고는 그에게 예를 표했다. 그런 그들의 눈 속에서 다이아나는 이들이 황제에 대하여 절대적인 두려움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켈러비안 황제에 대한 그 나라 사람들의 반응이 존경에 가깝다면, 하투아의 사람들이 황제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외경이라고 보였다. 양의 무리로 뛰어든 한 마리의 육식동물처럼 카이젠은 그렇게 사람들이 주변으로 물러서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이면서 뮤리엘에게 다가섰다.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봄의 꽃을 연상케 하는 연분홍빛의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걸친 뮤리엘이 넓은 치맛단을 잡고 인사를 하면서 카이젠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검은 색으로 온 몸을 휘감은 카이젠과 옅은 분홍의 꽃과 같은 뮤리엘이 플로어의 중앙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자, 악사들은 황제와 황녀의 품위에 맞는 정중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카이젠은 의외로 날렵한 몸놀림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이 또한 그가 사교계에서 작위를 얻은 기사로서 이름을 떨쳤던 때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춤을 참 잘 추시는군요" 함께 춤을 추고 있다고 해도 침묵이 어색했던지라 먼저 대화를 시작한 것은 뮤리엘이었고, 카이젠 또한 황녀가 말을 걸어오는 것에 냉담할 이유가 없었기에 재치 있게 대답했다. "켈러비안 황제를 매일 뵙는 분의 칭찬을 받게 되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말과는 달리 카이젠의 눈에서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기에 뮤리엘은 살짝 웃음지었다. "듣던 바대로 상당한 자신감의 소유자이신 듯 하네요" "그렇게 보였습니까?" "스스로 잘 아실 듯 한데요?" "하하하! 대 제국의 황제가 이 정도의 자신감도 없어선 곤란하지요. 참, 함께 동행하신 다이아나경은 저를 상당히 꺼려하는 눈치시던데 혹시 제가 무섭게 생겼나요?" 카이젠은 슬쩍 다이아나를 끌어들여 그녀들 사이에 있었음직한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엿보고자 하고 있었다. 뮤리엘은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짐짓 새침하게 되받았다. "글쎄요. 다이아나경은 에디우스님의 부드러운 성품에 익숙하니까요. 저보다는 다이아나경에게 더 관심이 있으신거였군요?" "이런... 그럴리가요. 아까 접견할 때의 반응이 좀 특별해서 궁금했던 것 뿐입니다." "특별했다구요?" "마치 방심하면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 처럼 눈도 안 마주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모르셨습니까?" 다이아나와 같은 쪽에 앉은 탓에 뮤리엘로서는 다이아나의 태도를 관찰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시간 동안 뮤리엘은 카이젠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탐색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재치있게 설명을 했다. "다이아나경이 좀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그럴 거에요. 거기에 어차피 에디우스경 이외의 남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요" 카이젠은 조금 더 묻고 싶었지만, 딱 잘라 말하는 뮤리엘의 대응에 다시 다이아나의 일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고, 잘못하면 황녀의 마음을 얻는데 효과가 반감될 여지가 있었기에 쏟아지는 질문을 슬쩍 눌러 참았다. "아무래도 솔베노님을 좀 구해드려야 겠어요" 연회가 시작된 이후로 에디우스와 춤을 계속 추던 다이아나는 플로어에서 마주친 솔베노가 보내는 애처러운 시선을 차마 못 본 채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에디우스 또한 더이상 붉어질 수 없을 듯한 솔베노의 얼굴을 보고는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협조를 해 주었다.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에디우스가 먼저 자연스럽게 솔베노의 파트너에게 춤 신청을 하자, 솔베노와 에디우스를 번갈아 살피던 풍만한 몸매의 귀족영애는 곧장 에디우스의 품으로 뛰어 들듯이 안겼다. 안도의 한숨을 쉰 솔베노는 다른 여성들이 접근하기 전에 허둥지둥 다이아나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휴우.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나라의 여성분들은 도무지......" 솔베노는 뒷말을 잇지 못한 채 다시 얼굴을 붉혔다. 다이아나는 그런 솔베노를 안되었다는 듯이 처다보면서 나름대로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게 체력을 핑계로 대고 거절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사실 연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춤을 춘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지쳐서 좀 쉬어야겠다고 거절한다고 해서 크게 결례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충고를 한 다이아나도 솔베노가 정말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 아닌 이상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난철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솔베노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할 수 없이 다이아나는 한 곡이 끝난 후 솔베노의 손을 잡은채로 플로어 주변에 마련된 원형의 탁자가 있는 좌석으로 향했다. 그 전에 춤 신청을 거절할 핑계로서 음료를 한 잔씩 손에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솔베노에게 접근하려던 귀족 여성들은 다이아나와 솔베노가 잡고 있는 손을 보고는 아쉬운 듯이 길을 비켜주었다. 덕분에 솔베노는 처음으로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능숙하네?" 솔베노와는 달리 에디우스는 솔베노에게 매달렸던 여성과의 춤이 끝나자마자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이 있는 자리에 합류했다. 머뭇거리면서 거절의 말을 하지 못했던 솔베노와는 달리 에디우스는 밝고 환한 미소와 함께 정말 아쉽다는 듯한 어조로 플로어를 떠나는 그의 곁으로 접근하는 영애들에게 잠시 쉬어야 한다는 핑계를 그럴 듯하게 대고는 요리 조리 빠져 나왔는데, 이미 앉아 있던 다이아나와 솔베노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엇으므로, 다이아나가 장난기 어린 말을 던진 것이다. 뮤리엘은 아직도 카이젠과 춤을 추고 있었고, 셋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 스탠이트가 거의 뛰는 듯한 걸음걸이로 일행에 합류했다. 그의 뒤에는 마법사 두 세 명이 미련을 못 버린 듯이 따라오다가 스탠이트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듯, 솔베노의 옆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자 아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아무래도 우리나라보다 마법에 관하여는 좀 떨어지는 것 같군. 도대체 질문이 한 두 가지여야 대답을 하지. 잘 아는 후배들 같았으면 직접 연구하라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는데, 예의라는 게 뭔지 정말 피곤하단 말야" 스탠이트가 심각한 얼굴표정을 유지하고 그 표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툴툴거리는 말을 하자, 솔베노가 금방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보게, 제발 그렇게 안색 바꾸지 말고 진지한 표정을 좀 지어 달라고. 이렇게 해야 저 인간들이 못 다가온단 말야" 스탠이트가 거의 애걸하듯이 말했지만, 이 순진한 엘프에게는 좀 무리한 요구인 듯 했다. 다행히 에디우스가 속삭이는 듯한 스탠이트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잘 울리는 소리로 내일의 일정을 언급하자 화색이 도는 얼굴로 얼른 대상을 에디우스로 바꾸고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노마법사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다이아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정말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앉아있는 네 사람의 위로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웠다. 카이젠이 뮤리엘 황녀를 이끌고 이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이들 주위를 서성이던 사람들이 어느 샌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주도 물러서 있었다. "뭐 이미 전에 상당히 위험한 일을 함께 한 사이다 보니 서로 믿음이 생겨서 그렇겠지요" 에디우스가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어 다이아나를 살짝 가리면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연회 중에는 황제에게 따로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일행은 일어나지 않았고, 원형의 탁자의 남은 두 자리를 뮤리엘과 카이젠이 차지하고 앉았다. 이들이 앉은 자리는 사전에 주빈에게 내어 준 귀빈석에 해당했기에 다른 이들이 감히 자리에 앉을 생각을 못한 것이었고, 카이젠은 이 상황을 예측하고 미리 탁자에 자신을 포함한 좌석을 준비해 둔 것이다. 카이젠은 뮤리엘과 함께 일행이 모인 곳으로 향하면서 은밀히 다이아나의 태도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이아나는 카이젠이 말을 건네자 살짝 고개를 숙였는데, 순간적으로 흠칫하는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유독 자신에게 예민한 다이아나의 태도에 카이젠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왜 자신이 이 여성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목표인 뮤리엘황녀와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통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갈색머리카락의 여인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카이젠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다이아나를 화제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뮤리엘과 에디우스가 번갈아 나서서 다이아나 대신 대답을 하거나 화제를 돌리는 등의 행동을 했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나칠이만치 다이아나를 감싸는 두 사람의 태도는 어딘지 미심쩍기도 했고, 일면으로는 정말 다이아나라는 여성이 지나치게 낯을 가리는 성격일지도 모른다는 두 가지의 판단을 가능케 했다. "참, 다이아나경께는 제가 따로 사죄의 말을 했어야 하는데, 늦었습니다." 카이젠은 다이아나가 피할 수 없는 화재를 꺼내었다. 느닷없는 말에 다이아나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지 얼른 눈을 내리 깔았다. "케르크의 일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투아에 그런 비겁자가 있었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 하투아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이쯤되면 다이아나 또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잊은 일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기회를 잡은 카이젠은 물러서지 않고 대화를 계속하려고 했다. "그가 비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력은 그리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는데, 간단히 물리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분에게 검술을 배웠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다이아나의 검술은 제가 가르쳤습니다." "에디우스경이요?" "예. 저희 아버님들끼리 잘 아시는 사이여서 저 또한 다이아나의 아버님에게 마법을 배웠습니다" "그럼 에디우스경의 아버님은 상당한 수준의 검사이셨나 보군요" "스스로의 몸을 지킬 정도는 되셨지요" 에디우스가 다시 자연스럽게 카이젠의 질문에 대답함으로서, 다시 카이젠과 다이아나 사이의 대화는 끊겼고, 다이아나는 긴장한 탓인지 어깨가 뻣뻣해져 오는 것 같았다. - 괜찮지 않은 것 같군 에디우스가 느닷없이 마법으로 전언을 보내자 다이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젠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손 아래 죽어간 시루스가, 조가, 그리고 엔젤하우스의 사람들이 떠올라 그의 손이 피칠을 한 것처럼 붉게 보였다. 영상의 마지막은 항상 처참하게 분해되듯이 죽어가는 시루스의 모습이었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얼굴과 잔인했던 카이젠의 표정이 번갈아 떠오르고 있었기에 다이아나는 극도로 피곤해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다이아나경이 상당히 피곤해하고 있어서 이만 물러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에디우스의 느닷없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이아나의 창백한 얼굴에 모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드러난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가셔 있었기에 모두들 걱정하는 얼굴이 되어 들어가서 쉴 것을 권유했다. 카이젠은 에디우스와 맞잡은 다이아나의 손이 하얗게 되어 있음을 보았고, 그녀가 자신과 시선을 마주친 이후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마법진으로 이동한 것이 별로 좋지 않았나 보군요. 기쁘게 해 드린다는 것이 오히려 실례를 범한 셈이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다이아나경이 오늘 아침부터 약간 몸이 좋지 않다고 했었습니다. 저희 둘만 먼저 물러날테니 다른 분들은 연회를 더 즐기셨으면 합니다. 저희 때문에 모처럼 폐하께서 베푼 자리에 폐가 될까 두렵군요" 결국 에디우스의 완곡한 부탁으로 다른 일행들은 연회장에 남았고 에디우스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이아나의 몸을 마나로 살짝 지탱하여 손을 잡은 듯이 보이는 형태로 연회장에서 데리고 나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다시 숙소에 이르기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이아나의 몸이 살짝 공중에 떠 있음을 눈치 챈 이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주시하고 있던 카이젠과 걱정스러움으로 바라보던 뮤리엘 정도였다. 방 안으로 들어선 다이아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혀진 후 한동안 멍하게 굳어 있었다. 에디우스는 그런 다이아나의 상태를 보고 가슴 한 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마치 사건이 일어난 후의 그녀의 표정을 다시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에디.. 소리가... 나가지.. 않게......" 호흡할 공기가 모자라는 것처럼 다이아나가 끊기는 말로 부탁하자, 에디우스는 재빨리 결계를 쳤다. 다이아나는 주위를 에워싸는 마나를 느끼고 나서야 억지로 누르고 있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이아나가 울기 시작하자, 오히려 안도한 에디우스는 다이아나 옆에 붙어 앉아 어깨를 감싸고 말 없이 안고 있었다. 그런 에디우스의 가슴 속에는 카이젠에 대한 분노가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순간만큼은 다이아나의 뜻을 따라 카이젠의 기억을 지운 것을 후회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카이젠이라는 존재는 다이아나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 사실 오늘 새벽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열심히 썼거든요 오전 8시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봤는데 역시 먹통이더군요 하루밤 새 선작수가 줄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렇더군요 아마도 조아라의 마공에 못이겨 많은 분들이 아예 짐 싸서 떠나신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기다리는 분들을 굳게 믿으며 오늘도 굳굳한 알테입니다. 다들 즐독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무언가 이상하다. 카이젠은 뮤리엘 황녀에게 호감을 가지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여자. 다이아나라는 여인은 평소에 그가 경멸하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귀족의 영애로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이나 큰 눈, 하얗다 못해 속이 들여다보일 듯한 피부는 차지하고라도 카이젠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라니. 평소같은 그따위 허약한 여자는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거들떠 보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상하게도 눈길을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다이아나라는 여자가 카이젠을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랐고, 힘으로 여자를 취해 본 일이 없음에도 그러한 충동을 느꼈다. 감추어진 은밀한 욕망의 한 끄트머리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자꾸만 겉으로 빠져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왜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뮤리엘 황녀는 예상한 것보다 더 훌륭한 여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춤을 추면서 그리고 다이아나라는 여자가 나간 이후에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녀의 뛰어난 식견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카이젠은 제국의 안주인으로서 그녀보다 어울리는 여성을 없을거라고 단정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뮤리엘 황녀의 자질과 능력에 기뻐하는 그 순간에도 먼저 자리를 비운 다이아나라는 여자는 손가락 끝에 박혀 끝도 보이지 않은 작디 작은 가시처럼 그의 마음 한 곳을 찔러대고 있었다. 라덴은 평소보다 민감하게 주인을 살피고 있었고, 카이젠이 계획대로 뮤리엘에게 관심을 집중시키자 어느 정도 안도를 하고 있었으나, 주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점을 이 순간 깨닫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황제는 뮤리엘 황녀를 얻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리움과 분노 그리고 애증, 바로 그것이었다. 그 모든 감정의 원인을 잘 알고 있는 라덴은 가장 많이 들어나고 있는 감정인 혼란함이 그 원인을 모름에서 비롯했다는 것조차 알 정도로 감정의 주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뮤리엘 황녀께서는 제국의 황후로 부족함이 없으실 듯 합니다." 결국 라덴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냄으로서 카이젠의 심상의 고리를 끊어 버렸다. 손에 잡힐 듯 말듯 어른거리는 감정들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던 카이젠은 라덴의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젠이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라덴은 표정을 한껏 밝게 하고는 평소같으면 카이젠이 먼저 제안했을 법한 말을 꺼냈다. "뮤리엘 황녀와 그 일행에 대한 배려는 어떻게 할까요?" 카이젠은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자, 곧바로 평소의 냉정한 계산을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뮤리엘 황녀는 대륙에 퍼져 있는 자신의 '악명'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경계심도 작동시킨 상태였다. 자신이 여성들에게 어필할 매력이 있음은 잘 알고 있었으나, 엘프인 솔베노와 에디우스, 거기에 한 술 더 떠 켈러비안이라는 강적에 맞설만한 것인지는 다시 검토해야만 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뮤리엘에게 대륙에 널리 퍼진 소문과는 정 반대의 인상을 각인시킬만한 일들을 찾아야 했다. "일단, 가장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도록 해. 조사를 나갈 지역의 기후 풍토를 먼저 알아보고, 그녀의 일행이 필요한 물품은 모두 챙겨라. 원래 여자들은 사소한 곳에서 감명을 받게 마련이지. 내가 그 곳에 간다고 생각하고 라덴 자네가 직접 지휘해서 준비를 갖추어 놓도록 하게. 그리고, 출발 전까지 그런 내색은 절대 하지 말도록" "잘 알겠습니다. 반드시 황녀가 놀라고 기뻐할만큼 철저하게 준비토록 하지요" 라덴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쁨과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반갑게 대답을 하고는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고 늘 그렇듯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언니 괜찮아요?" 뮤리엘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다이아나의 방을 찾았으나 열이 있고 몸이 조금 아픈 듯 하여 약을 먹고 자고 있다는 에디우스의 말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여,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다시 다이아나의 방을 찾아 드물게 침대에 누워 자신을 맞는 다이아나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힘들었나봐요." 뮤리엘이 황녀로 자란 것에 비하여는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켈러비안의 안배에 의해 엄중한 보호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이들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그녀는 지난 밤 다이아나의 입장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편 결과 자신이 무심했음을 자책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은 눈 앞에서 학살한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 순간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을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자신을 그 자리에 놓고 상상한 순간 더 이상 끔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뮤리엘로서는 그런 대상을 앞에 놓고도 어떤 증오도 슬픔도 내비치지 않은 다이아나가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몰랐어요. 한 번이라도 언니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면......" 늘 밝은 표정이었던 뮤리엘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했고, 두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말을 하는 입술은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이 울 것만 같았기에 다이아나는 뮤리엘의 손을 붙잡고 오히려 위로의 말을 했다. "아뇨. 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걸요.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요. 뮤리엘이야 당사자가 아니니, 제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 모르는 것이 당연해요. 제가 오만했어요. 전 좀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뮤리엘은 최선을 다해 주었어요. 저도 눈치챘는걸요, 여러 번 그가 말을 거는 것을 막아주었잖아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뮤리엘에게 말을 하는 다이아나의 표정은 따스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고마움가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얼굴 전체에 드러내며, 뮤리엘에게 자책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뮤리엘은 그런 다이아나가 안스럽기도 하고 연약하게 느껴져서 자신이 지켜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능하면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죠? 일단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일찍 떠나요. 황궁을 떠나서 그 사람 얼굴을 안 보게 되면 언니도 훨씬 편해질 거에요. 떠나기 전까지 절대 마주치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러니까...." 뮤리엘은 울먹이면서 말을 잇지 못했고, 다이아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엎드리듯이 자신 위에 몸을 구부린 뮤리엘의 머리를 늘상 디안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최대한 힘을 주어 밝게 말했다. "그래요. 뮤리엘이 알아서 해주세요. 뮤리엘이 지켜주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후훗. 이러다가 뮤리엘이 내 기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몰라요. 아마 켈러비안 황제께서는 질색을 하실걸요?" "흥, 아바마마야 마음대로 생각하시라지요. 정말 생각 같아서는 기사의 갑옷이라도 입고 언니 앞에 막아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라구요" "알아요. 고마워요 뮤리엘" 한껏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두 여성을 방해한 것은 시종을 물리치고 손수 음식쟁반을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방안에 들어선 에디우스였다. 물론 에디우스야 어떤 일을 해도 우아한 동작을 하고는 있었으나, 그의 화려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쟁반 때문에 두 여성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웃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자신의 상태를 돌아 본 에디우스는 일부러 약간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짐짓 엄숙하게 다이아나에게 을러대었다. "이거 다 먹고, 오늘 하루 종일 침대 안에서 꼼짝하지 말고 쉬어. 일단 솔베노님의 약초가 있으니 효과를 기다려 보도록 하고, 오늘 밤까지 열이 안 내려가면 바로 신관을 불러오자"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에디우스는 옆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뮤리엘과 함께 다이아나의 뒤에 베개를 포개어 침대에 편히 기대 앉게 하고, 냅킨까지 둘러준 후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쟁반을 들고오는 일을 자연스럽게 해냈다. "그냥 내려놓으면 돼" 다이아나가 쟁반을 다리 위에 올려 놓으라고 했지만, 에디우스는 고집을 피우며 쟁반을 든 채로 이번에는 스프를 퍼먹일 태세를 갖추었다가 뮤리엘에게 장난 것인 타박을 듣고는 포기했다. 두 남녀의 재촉에 못이겨 스푼을 든 다이아나는 온갖 격려와 협박을 받아가면서 한 그릇을 모두 비워야 했고, 마치 어려운 일을 해낸 공범자처럼 에디우스와 뮤리엘이 보내오는 흐뭇한 미소를 되받아 주어야 했다. "이렇게는 안되겠어요" 다이아나의 방을 나선 뮤리엘이 단호하게 말을 시작했다. 에디우스 또한 다시 다이아나가 카이젠과 마주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고, 사실 다시 다이아나가 어제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카이젠에게 손을 쓰지 않을 자신도 없는 터였다. "일단, 카이젠 황제에게는 제가 따로 말을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황제와 만나야 하는 일은 저와 에디우스님 스탠이트님이 돌아가면서 하도록 하죠. 대표라는 개념으로 내세우면 별 문제는 없을 거에요. 어차피 한 나라의 황제란 사람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만큼 대충 알아서 해석하라고 하죠 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언니는 괜찮겠지요?" "괜찮을 겁니다. 그녀는 보기보다 상당히 강한 사람이니까요" 에디우스는 자신의 도움도 뿌리치고 혼자서 독립하기 위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던 다이아나를 떠올리면서 스스로에게도 확신시키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물론 다이아나가 슬픈 기억에 괴로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깨어난 사람이다. 일시적인 감정 조절의 실패로 인해 약간의 쇼크 증상과도 같이 몸이 나름의 방어작용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카이젠 황제를 알현한 것은 뮤리엘 황녀 혼자였다. 뮤리엘은 나름대로 황제의 관심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계산하여 자신이 단독으로 대표로 나서는 것이 피차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와, 이게 뭐야?" 처음 사건이 일어났다는 곳은 하투아에서도 상당히 외곽에 속하는 마을이었고, 하투아는 마법진이 활성화된 곳이 아니었다. 하투아의 수도와 이어지는 마법진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곳에 불과했고, 일단 가장 가까운 곳까지 마법진으로 이동한 후, 마차와 말을 타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스텐이트나 에디우스의 마법이라면 좌표만 안다면 마법진에서 다시 영지까지 이동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카이젠이 호위라고 붙여준 30명에 달하는 기사단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황제와 담판을 해서라도 기사단의 수를 줄이고 빠르게 이동했을 테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다. 가능하면 빨리 카이젠과 다이아나를 떼어 놓기 위해 뮤리엘이나 에디우스가 그냥 준비해 주는 모든 것들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여, 일행은 전혀 조사단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호화로운 장식이 달린 마차를 앞에 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이아나나 에디우스는 각자의 말을 가지고 왔지만, 일단 다이아나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으므로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힉스는 4두마차의 말들과 여분으로 준비된 말들의 기강을 잡는지, 한동안 기세 싸움을 벌이더니 하투아의 드센 말들의 항복을 받아내고는 이내 자랑스럽게 코를 치켜 세웠다. 하투아의 기사들은 원래 말을 소중히 하는 편이었는데, 힉스를 보고는 바로 감탄하는 눈치더니, 거칠기로 소문난 하투아의 말들이 힉스에게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값비싼 보물을 탐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의 배려는 마차와 기사단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행이 타고 갈 큰 마차 이외에도 시중을 들기 위한 노련한 하녀와 하인들 몇 명이 따로 다른 마차에 올라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세 대의 짐마차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거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야유회를 가는 것 같군" 에디우스의 중얼거림에 스탠이트나 뮤리엘도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솔베노는 무서운 여인들의 손길을 피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는 듯 했다. 무사히 황궁을 빠져 나오자 녹색머리의 엘프는 그제서야 어느 정도 긴장을 풀고 예전의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았다. "이 곳 사람들은 상당히 기질이 강한 것 같아요. 남자나, 여자나......" 뮤리엘이 말을 꺼내자 스텐이트가 연장자답게 설명에 가까운 답변을 했다. "전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이 있다는 곳입니다. 국토의 삼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니만큼 강한 것을 숭배하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르지요. 거기에 마법길드와의 위치가 떨어져서인지 민족적인 특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투아 제국은 마법사가 귀합니다. 결국 순수한 무력으로 몬스터들을 막아내야 하니 자연히 강한 기질을 가지게 된 것이죠" "기질이 강하다고 해도 귀족 여성들은 천상 여자던데요?" 솔베노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연회에 참석했던 여인들은 적극적이기는 해도 여전사같은 타입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투아의 여인들이 강하다는 것은 다른 이유지요. 오늘 사랑했던 연인이 내일을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함이랄까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하투아의 남녀관계가 문란하다고 하고, 실제로 귀족들의 경우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평민들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과 종족보존이 아예 힘들 정도로 척박한 환경을 가진 곳이 많습니다." 스텐이트의 설명에 뮤리엘이 바로 토를 달았다. "결국, 하투아의 강함은 남성들의 전사적인 강함과 여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역시 황녀께서는 정곡을 찌르는 예리함을 가지셨습니다." 스탠이트는 단박에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뮤리엘을 향해 자못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칭찬했다. 다이아나도 실제로 정신적인 피곤함으로 약간 열이 있었을 뿐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일단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계속 대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마차를 타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녀 또한 이제 어느 정도 생기가 도는 얼굴로 이들의 대화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풍요로운 다른 나라를 탐냈던 것이었지' 다이아나는 척박한 자신의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자 한 카이젠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탈출 사건 이후에 카이젠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가끔 했었고, 선대부터 전해진 포부를 숨기지 않고 밝히곤 했다. 그는 대륙 전체를 넘보고 있었고, 스스로의 능력에도 자신감에 가득한 남자였다. 그리고 늘 그녀에게 그 옆자리를 지켜달라는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매듭짓곤 했던 것이다. 워낙 규모가 커진 일행 때문에 마법진은 수 차례 운용되어야 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결국 마법진을 운용하던 하투아의 마법사들이 기진맥진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스탠이트까지 나서서 도움을 준 끝에 다섯 대의 마차와 삼십명의 기사단과 수십 필의 말들이 이동할 수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한 듯, 기사단 중의 일부가 먼저 이동했고, 그 후에는 마차들이 그리고 다시 기사단이 이동되는 형식이어서 호위기사들이 항시 이들을 지킬 수 있게끔 배려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뮤리엘은 황제의 속셈을 어느 정도 짐작했고 솔베노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한 영지에서는 황제라도 방문한 것처럼 수선스럽게 이들을 맞이했고, 오히려 이들보다는 함께 온 기사단과 하인들이 더욱 거드름을 피우면서 당연스럽게 이러한 접대를 받아들였다. 며칠은 머물 것이 당연하다는 영주의 태도에 스탠이트가 연륜을 과시하면서 나선 결과 일행은 호의를 생각해서 영주의 저택에서 하루밤을 묵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는 처음에 바로 조사할 영지로 떠나야겠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한 스텐이트의 작전이 성공한 결과로, 그의 단호한 태도에 쩔쩔매던 영주는 뮤리엘이 나서서 그래도 성의를 보아 하루는 묵어가자고 말하자 감지덕지할 수 밖에 없었다. +++++++++++++++++++++++++++++++++++++++++++++++++++++++++ "어떻게 할까요?" "아직은 때가 아닐세. 일단 관계된 모든 이들을 철수시키고 신도들에게는 그들을 유인할 만한 다른 단서를 조금씩 보여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일 눈치챈다면......" "싸워야겠지" "하지만, 성녀를 드래곤이 보호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후훗. 물론 드래곤이 벅찬 상대이긴 하지만, 고위마족 두 셋의 힘이라면 한 마리 쯤이야 감당 못할 것도 없지" "......" "더군다나 그 일행도 있지 않은가? 세가 불리하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그쪽일세" "그렇겠군요" "일단, 자네가 가도록 하게" "예?" "그들을 감시할 사람도 필요하고, 잘못된 정보를 넘기기엔 믿을 만한 인물이 있는 것이 제격이지" "하지만, 갑자기 제가 나타난다면 오히려 의심하지 않을까요?" "조사를 위해 일부러 찾아갔다고 하게나. 아마 오히려 자네를 더 믿고 고마워할 걸세. 그리고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알아보는 거야" "아!" "그래. 그러니까 그 영지의 우리쪽 인물들과 자네는 전혀 별개인 셈일세. 필요하면 대치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주라구" "알겠습니다." 젊은 남자 쪽은 순종적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그다지 내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를 눈치챈 나이 든 남자가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자네가 성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말했지만 알고 있네. 당분간이야 그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겠지만, 절대 우리의 목표를 잊지는 않을 거라고 믿겠네" "아.. 알겠습니다." 페르세포네 신전 깊숙한 곳의 어두침침한 방에서 두 남자의 대화가 있었던 것은 다이아나 일행이 하투스에 도착한 날 밤의 일이었다. *********************************************************************** 사무실에 모여 있다고 나오라는군요 -_-;; 아마도 나가봐야 할 듯 합니다. 해서 부랴부랴 한 편을 완성해서 올립니다. 오늘은 죄송하지만 이걸로 만족을... (쿨럭~!) 새로운 사건의 시발점이 바로 다음편이라,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군요. 어제 곰곰이 생각한 것인데, 걍 20킬로로 하루 한 편으로 올릴까 생각 중입니다 -.-;; 괜히 두 번 추천하구 리플달구 하게 하는 것보다는 습관적으로 5-7페이지씩 끊어지는 글을 그냥 두 개 만들어서 하나로 올리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어차피 양은 동일하니, 별 상관두 없을 것 같구요 오늘은 20키로에는 못 미치지만 내일부터는 그렇게 해 보려고 합니다 다들 즐독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어둠의 반란 다이아나 일행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영주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뒤따라 오던 세 대의 마차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가자는 말에 기사들은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 몇 명이 나서서 적당한 공터를 찾아냈고, 이어서 짐마차 세 대에서 엄청난 물건들이 내려지더니 순식간에 공터 위에는 마치 야유회를 나온 듯한 간이 천막과 탁자와 의자까지 배치되는 것이었다. "일단 음료를 드시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 하나가 쟁반에 음료를 날라왔고, 어떻게 보존한 것인지 차가운 냉기를 잃지 않은 음료가 멍하게 의자에 앉은 일행들에게 제공되었다. 그 와중에 하녀들은 수선을 떨어가며 다이아나와 뮤리엘에게 붙어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주고, 별로 덥지도 않은데도 부채질을 하는 둥 각자 역할을 나누어 충실하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 이것도 카이젠 황제의 뜻이겠죠?" 뮤리엘이 질렸다는 듯이 묻자 스탠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 또한 이 황당한 사태에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뮤리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투아의 황제는 뮤리엘 황녀에 대한 호감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목적지까지는 원래 하루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으나, 이처럼 쉬어 갈 때마다 온갖 수선을 피운 덕에 무려 사흘이나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목적지는 외곽의 마을답게 상당히 한적하고 소박한 곳이었는데,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간혹 이들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도 호기심만 엿보일 뿐 그다지 불안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을을 지나쳐 그 마을을 관할하는 영주의 저택에 도착하자, 밝은 표정으로 중년의 기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나와서 이들을 반겼다. 외곽 영지의 영주답게 그는 40대 중반으로 보임에도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고, 얼굴 또한 햇볕에 그을려 거의 갈색에 가까운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호쾌한 인상의 중년 사내는 별 허식 없이 일행들을 반갑게 맞았고, 그의 솔직 담백한 태도는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럼 그런 일이 한 차례 일어난 후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까?" "예. 부끄러운 일이지만, 죽은 포트란이라는 놈이 그렇게 악행을 많이 한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 조사한 결과 하급관리가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도맡아 했더군요" "그럼 특별히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포트란은 사건이 일어난 마을의 총 책임자격인 하급관리였지요. 세금을 떼어먹은 것은 물론 논과 밭을 강제로 강탈당한 집도 몇 집이 있고, 멀쩡한 아가씨들을 세금을 빌미로......" 영주는 여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더 이상 말을 잇기가 곤란했는지 슬쩍 말꼬리를 흐렸으나,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영주의 설명을 들어 보니, 영주 자신은 몬스터와의 접경 지대에 대한 경비 문제로 영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렇다 보니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몰랐으며, 포트란의 죽음 이후로 하급관리들의 전면적인 감사에 들어 갔는데, 다행히도 그와 같이 심한 경우는 없었으나 약간의 비리를 행한 자들이 있어 이미 처벌을 한 후라는 것이다. "사실, 포트란에게 가장 크게 원한을 가질 사람이 있긴 한데......" "그게 누굽니까?" "소년입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11살의 조우라는 소년이지요" "포트란이 어떤 짓을 했는데요?" 내내 에디우스와 영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뮤리엘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나섰다. 영주는 차마 말을 꺼내기 부끄럽다는 기색을 보이면서 조우의 부모님에게 행한 포트란의 악행을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11살짜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거기에 포트란의 방에는 침입한 흔적도 없었을 뿐더러 아무리 보아도 그건 야수나 몬스터에게 물어 뜯긴 모습이었지요" "그 조우라는 아이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다이아나는 역시 무엇보다 아이가 걱정이 되었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는 페르세포네님의 신전에서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페르세포네님의 신전이라구요?" 이런 외곽지역의 마을에서는 페르세포네를 숭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암흑은 일종의 안식으로 받아들여 졌으므로, 암흑과 폭력의 여신의 사제들은 장례식을 집전하거나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겸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도시에서 보다 페르세포네 여신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편이었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워낙 처참하게 죽었기에 뒷일이 걱정스러워져서 신관님을 모시고 장례를 집전했지요. 아시다시피 원한을 품은 영혼이라도 생기면 뒷감당이 힘들테니까요. 그 분이 오신 김에 조우의 부모님의 영혼도 달래 드렸습니다만, 그 때 신관께서 조우를 거두셨답니다. 아마도 여신의 신관이 될 수 있을 자질이 있다는 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엘프 마을에서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때 사라진 흑마법사에 대하여 해결하지 못한 찜찜함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의문의 사건이 일어나는 이 곳에 페르세포네의 신전이 있다는 것과 범행동기가 가장 큰 소년이 신전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무언가 연관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영주의 앞에서는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고 여러 사실들을 들은 후 일행은 따로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기적으로는 신관을 의심할 수는 없어. 일단 포트란이 죽은 후에 신관이 나타났고 조우라는 소년도 그 후에 신전으로 들어간 것이니까" 뮤리엘이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 페르세포네의 신전 쪽이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사건이 일어난 순서로 보면 개연성을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미리 접촉이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일단 내일 아침부터 그 마을 사람들에게 탐문 조사를 하고, 일부는 신전에 가서 조우라는 아이를 만나 보는 것이 좋겠네요" 결국 자리에 앉아 말을 해 보아야 실제로 서류상에 적혀 있던 것에서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결론에 다들 직접 나가서 조사를 해 보기로 했다. 헌데 문제는 일행을 둘로 나누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에디우스가 완강하게 다이아나와 떨어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쪽에 무게중심이 쏠린 것이다. 결국 하투아에서 딸려 보낸 기사들 중 에디우스가 몇 명을 선발하여 뮤리엘 황녀의 일행 쪽의 호위를 맡기기로 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와 함께 마을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는 신전에 갔다. 신도의 방문이 잦지는 않은 데다가 워낙 외진 곳이다 보니, 이미 신관은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조사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고, 그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조우라는 아이를 만나보고 싶으시겠죠?" 신관이 서로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먼저 말을 꺼내자, 다이아나는 수긍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을 데리고 다른 신관이 들어왔다. 다이아나는 방 안에 들어서는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이런 저런 사적인 질문을 했다. 소년의 심정을 고려해서 바로 부모에 대한 것을 묻지는 않았고, 신전 생활에 대한 것과 소년의 흥미꺼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그야말로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질문을 하면서 다이아나는 시종일관 소년의 태도를 살피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이아나에게 마음을 쉽게 여는 것에 비하여 약간의 경계심을 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우에게서는 그다지 큰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이아나가 정작 사건에 관련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신관들이 자리를 비켜 주겠다고 먼저 말했지만, 다이아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말렸다. 그녀가 보기에 조우는 이 신관들을 완전히 믿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신관들이 없어진다면 오히려 큰 일을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소년이 불안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신관들이 보기에는 전혀 쓸 데 없는 대화를 나눈 뒤 다이아나는 이 곳의 책임자라는 신관 한 명과의 독대를 요청했다. "조금 의외입니다. 조우에게 물으실 말이 많으실 줄 알았는데......" "어차피 조우가 할 수 있는 말들이라면 신관님께서도 대답해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아이에게 굳이 이전의 기억을 되살리게 할 생각은 없답니다." 중년의 신관은 이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씀씀이에 상당히 감격한 듯 했다. 덕분에 그는 다이아나가 묻기도 전에 영주가 말한 것보다 더 상세하게 조우가 겪은 일들을 설명하고, 포트란의 죽음이 조우에게는 오히려 정신적인 안정을 찾아 준 듯 하다는 결론으로 말을 끝냈다. "그보다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 보십시오." 신관은 약간 말라 광대뼈가 두드러지는 얼굴에 나름대로 밝은 표정을 지우지 않고 다이아나의 요청에 쾌히 응답했다. "마족과의 계약에 관한 비밀을 알고 계시지요?" "예엣?" 완전히 경계심을 푼 듯 하던 신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면서 의혹과 적의의 빛이 들어찼다. 마족과의 계약에 관한 일은 페르세포네의 신전에서도 고위신관급에서나 알 법한 극비의 사항이었고, 외부인인 여성이 나타나 그 것을 언급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제가 지난 번......" 다이아나는 일단 자신의 성녀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도 내용을 설명할 수 있도록 디안의 마을에서 있었던 마물소동의 해결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마족과의 계약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슬쩍 내비쳤다. 그제서야 신관의 얼굴에는 납득한다는 표정이 나타났고, 그럼에도 외부 인물이 이러한 사항을 알고 있음에 대하여 상당한 우려를 표시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주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데, 제가 이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이를 악용하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그의 난처한 태도를 보다 못한 다이아나가 주신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자 신관은 어느 정도 불안감을 떨쳐낸 듯 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굳이 지금 하시는 것은......" "조우는 11살입니다. 그 아이가 겪은 일로 볼 때 충분히 마족을 불러낼 만한 조건이 된다고 봐야 겠지요" 다이아나는 그 때까지 머리 속에만 담고 있던 말을 했다. 조우가 마족과 계약을 맺어서 포트란을 살해했다는 것은 최악의 가정이었으나, 가장 논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가정이기도 했다. 다이아나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녀 자신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만일 조우가 마족과의 계약을 맺었다면, 신전의 사제들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린 나이에 마족과의 계약을 할 정도의 능력이라면 신전에서 조우를 맡겠다고 한 이유도 충분히 설명이 될 터였다. 하지만, 신관은 그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조우는 마족과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러한 기운이 감지된 일도 없구요. 마을과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마족들은 페르세포님을 섬기고 그 분의 사랑을 받는 종족입니다. 저희 신관들이 마족의 동태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 이번 일은 마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도 포트란의 죽음에서 마족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제물을 사용한 흔적도 없고 계약을 맺은 증거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족 특유의 기운도 발견되지 않았구요" "다행이군요. 그럼 혹시 의심이 가는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솔직히 마을 사람들 전체가 단합하여 그를 죽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그 마을에서는 몬스터보다 악하고 무서운 존재였으니까요. 마을 사람들 치고 그에게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지경이니......" 다이아나의 의심에 대하여 신관은 오히려 인간을 의심하는 소리로 응대했다. 사실 열 사람이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담합하고 포트란의 집 열쇠 등을 누군가가 빼내었을 수도 있고, 다같이 그 일에 대하여 함구했을 가능성도 빠뜨릴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페르세포네를 만나볼까 생각하다가 이시니엘의 말이 떠올라 일단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럼, 마족의 짓은 아니라는 거야?" "단정지을 수는 없어. 이시니엘이 한 말이 있잖아. 만일 이 마을의 신관들이 그 때 이시니엘이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신관들이 모두 담합했을 수도 있다?" "응. 결국 마을 사람들이나 신관들 중 한 쪽의 거짓을 말하는 것이겠지" "일단 마을 쪽에 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아야 대충이라도 알겠군. 하지만, 지금 같아서는 어느 쪽도 믿거나 의심할만한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보이는걸?" 결국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는 이상 사건은 원점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확인된 사실의 모두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영주가 마련한 숙소로 돌아가, 뮤리엘 일행을 기다렸다. 마을로 갔던 뮤리엘은 신관 복장을 한 젊은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뮤리엘 일행에게는 영주의 배려로 하급 관리 한 명이 안내역으로 함께 있었는데, 그는 신관을 보자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곧장 그 쪽으로 향했다. "저, 죄송하지만 이 마을의 신관님은 아니신 듯 한데......" "아, 순례를 다니는 중이랍니다. 이 마을에 알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좀 궁금해서요" 선한 인상의 신관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신관복에 표시된 기호에 의한다면 고위신관임이 틀림없었다. "신전에 가시면 아실 수 있지 않나요?" 뒤따라온 뮤리엘이 말참견을 했다. 젊은 신관은 아름다운 여성과 마법사의 로브를 입은 노년의 남자들을 보더니 이내 반색을 하면서 물어왔다. "혹시 이번에 조사차 나오신 분들이 아니신지요?" 뮤리엘은 마을 사람도 아니라는 신관이 자신의 일행을 아는 척하자 조금 당황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신관은 정중하게 자신이 소개를 했다. "페르세포네님의 종 이시니엘이라고 합니다. 다이아나님과 예전에 만난 일이 있지요. 이번에 이 마을에 온 것도 지난 번 다이아나님이 신전에 들어서 하신 말씀 때문이기도 하구요. 다이아나님은 오지 않으셨습니까?" 뮤리엘은 그제서야 다이아나가 사적으로 안다고 했던 신관이 눈 앞의 젊은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조금 막막하던 차에 어둠의 신전의 사제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뮤리엘은 기뻐하면서 일행에게 이시니엘을 소개했고, 이들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 들러 남은 단서는 없는지 살펴 보았다. 뮤리엘은 현장을 둘러보던 이시니엘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는 질문을 하려다가 이시니엘이 주위를 둘러보며 살짝 고개를 가로 저어 보이는 바람에 튀어나가려던 말을 참고 태연한 표정으로 여기 저기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참혹한 살인의 현장의 흔적은 방 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분명히 닦아내었음에도 핏자국으로 인한 얼룩의 흔적이 여기 저기 있었고, 망가진 가구나 찢어진 커튼 등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하급관리가 당시 가장 먼저 방을 목격한 마을 주민을 증인으로 데려오자 그는 방 안의 여기 저기를 가리키면서 당시의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했으므로 뮤리엘은 속이 다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솔베노는 이미 방안을 맴도는 피 내음에 예민해진 나머지 얼굴빛이 푸르게 변한 것을 보고 스탠이트와 뮤리엘의 강압적인 권유로 집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정황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음은 영주가 한 말이나 일차적으로 보았던 서류의 내용과 일치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포트란에 대하여 '잘 죽었다'는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보통 죽은 사람에 대한 원한을 말하는 것은 본인의 혐의성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아서 꺼리기 마련이었는데, 워낙 악명이 높았던 탓인지 누구도 자신이 범인으로 의심받으리라는 걱정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이아나님!" 다이아나는 뮤리엘 일행과 동행하여 영주관으로 온 이시니엘이 반갑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뜻밖의 만남에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영지의 신관들의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고위급 신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시니엘이라는 존재가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시니엘이 다이아나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고, 이시니엘은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 곳은 신관들이 바로 이시니엘님이 말씀하셨던 그 쪽의 사람들인 거군요" "예. 저로서는 도움을 청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마침 조사단의 파견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서 와 본 것입니다." "그럼 다른 곳들도?" "이미 거의 한 번씩 들러보았습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이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신성력이 발현되었다는 점 외에는 알 수가 없더군요. 이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성력의 흔적만 있을 뿐 그 전의 기운은 이미 지워져 있었습니다." 이시니엘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미 몇 곳의 마을에서 똑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는 다이아나가 찾아와 의뢰한 일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눈치를 채고 사건이 일어난 마을들을 들러 보았었다. 하지만,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모든 기운이 지워져 있고 그 위에 페르세포네 여신의 신관들의 신성력의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에 페르세포네의 신관들이 들러 정화를 위한 신성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일어나는 살인 사건들의 성격이 워낙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다 보니 이러한 절차는 필요 불가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주 작은 마을에서조차 고위급 신관의 신성력이 발현되었다는 것이고, 덕분에 이시니엘로서도 그 이전에 마족의 마력이 존재했는지에 대하여 전혀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이시니엘의 설명을 들은 다이아나는 그의 능력으로도 크게 별 다른 단서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서둘러 달려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네?" 이시니엘이 상당히 주위를 의식하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꺼냈다. 다이아나는 더욱 굳어진 그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은 무슨 내용인지 들어봐야만 했으므로 말을 하라는 태도로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송구스럽게도 아마 지난 번 신전에 들리신 일을 그들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성녀님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후 갑자기 그 쪽과 손을 잡고 신전을 들락거리던 흑마법사들의 행적이 묘연해졌구요. 차라리 저 쪽에서 다이아나님이 성녀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안심이 되겠습니다만, 그것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해서 말이죠. 페르세포네님이 아끼는 분을 해칠 의도는 그들도 절대 없을 텐데, 만일 다이아나님에게 해라도 입히는 일이 생기면......" 면목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시니엘의 얼굴 가득히 미안한 감정이 흐르고 있어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이아나가 성녀란 사실을 힘을 숭배하고 마족과의 계약의 방법을 공개해야한다는 급진파들이 알고 있다면 오히려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들에게도 페르세포네의 직접적인 신탁이 내려진 이후 성녀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페르세포네 여신은 인간들보다는 마족에게 더 관심을 쏟고 있었기에 여신의 신탁은 흔히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가끔 신전내에 소환된 고위마족들이 여신의 의도를 더 잘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여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의 존재는 페르세포네의 신관들에게도 여신과 이어질 수 있는 하나의 끈으로 보일 것이었다. 신전 내부의 분열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여신에 대한 반란이 아닌 교리라든지 행동에 대한 의견의 갈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여신의 뜻을 잘 받들고 있다고 생각했고, 세상 사람들은 위한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각기 달랐을 뿐이었기에 대립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하여 경멸하거나 증오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오랜 기간을 숨 죽이며 기다려온 급진파들의 심상치 않은 발호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분명히 걸림돌로 작용한 다이아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해를 끼치지 않을까 이시니엘은 염려하고 있었다. "일단 고위마족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저는 안전합니다. 저와 함께하는 에디우스 혼자의 능력으로도 하급이나 중급의 마족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까요." "저도 그 분이 소문의 검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소드마스터라고 하더라도 중급마족을 혼자 상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시니엘이 여전히 걱정을 덜지 못한 목소리로 염려의 말을 했다. 다이아나는 이시니엘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끼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뒷말을 이어갔다. "에디는 소드 마스터급의 검술실력 외에, 마법 실력도 오히려 저 보다 나은 편입니다" "예에?" "또한 제 마법실력도 이미 7써클에 이르렀으니 크게 걱정하시지는 않으셔도 될 거에요. 저 뿐만이 아니라 하이센에서 오신 스탠이트님도 7써클의 마스터시니까요" 다이아나는 이시니엘에 대하여 완전한 신뢰를 하고 있었다. 사실 성녀인 그녀를 알고도 그녀에게 해를 끼칠 간 큰 신관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8대 최고신이 모두 인정한 성녀라는 존재는 신관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모시는 신 다음으로 성스럽고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싫어서 성녀로서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아는 이시니엘이기에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디안의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본 이시니엘의 성력은 고위신관이라는 신분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신앙심이 깊은 그가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받는 다이아나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시니엘은 드러나지 않은 에디우스의 전력을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자신에게 말해 주는 다이아나를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디우스의 능력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지만, 그가 소드마스터라는 것 외에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정도의 사실만 알려졌을 뿐, 실제적인 능력이 이토록 막강하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극비의 사실을 단지 자신을 안도시키기 위해 당연하게 말하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이시니엘은 감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이시니엘님은 네가 소드마스터에 최하 7써클은 넘는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 "흠. 뭐 그 정도야 상관없지" 에디우스로서는 실제로는 그랜드 마스터급인데다가 용언마법이 가능한 능력이 있었기에 다이아나가 알려준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사실 중급마족이 아니라 고위급의 마족 한 둘 정도는 에디우스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마계에서라면 아무리 1800살의 드래곤이라 하여도 혼자서 고위마족 하나를 당해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물질계에서라면 마족의 힘을 다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편 이시니엘은 에디우스의 금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 그리고 마법과 검술의 양 면에 걸친 능력들을 다시 곱씹어보면서 혹시 그가 성녀를 데리고 사라졌다던 그 드래곤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시니엘이 이번 조사 여행에 동행하기로 하면서 일행에게 소개되었고, 암흑의 여신의 고위신관의 동행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시니엘은 일행과 금방 친해졌다. 다만, 솔베노는 속성 자체가 빛에 가깝기 때문인지 이시니엘의 신성력에 대하여 그리 좋은 반응이 아니었고 엘프들의 속성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이시니엘도 솔베노의 주변에서는 암흑의 기운을 풍기지 않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뮤리엘은 고위신관이라는 존재보다는 그가 마족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예측 하에 이시니엘을 붙들고 마족에 대한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황당해서 이시니엘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럼 마족도 결혼을 한단 말이죠?" "예.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2세를 생산하고 키우기도 하구요" "혹시 마족과 인간이 결혼한 예는 없나요?" "예에?" "인간에게 반해서 결혼한 마족이라든지, 아니면 납치된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든지 하는 경우요" 뮤리엘은 옛날 이야기에나 나옴직한 것들을 물으면서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이시니엘을 채근하고 있었다. 이시니엘도 아직은 젊은 남자인지라 검은 머리의 미모의 여인이 착 달라붙어 이것 저것을 물어대는 데에는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고, 그런 이시니엘의 태도를 즐기듯이 일부러 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는 뮤리엘의 눈에서는 오히려 장난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저... 이 팔 좀 놓으시면......" "어머, 네가 잡고 있었나요? 아무래도 마족의 이야기를 하려니 으스스해서 말이죠" 팔을 휘감고 달라붙은 뮤리엘의 자세 때문에 푹신한 무엇인가를 팔꿈치에 느껴야 했던 이시니엘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뮤리엘은 짐짓 마족에 대한 말을 들으려니 겁이 난다는 엄살을 떨었으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이시니엘님, 마족과 계약을 맺은 사람을 보면 계약의 흔적을 알아낼 수 있나요?" "그건 가능합니다. 일단 마족과 계약을 맺었던 사람의 몸에는 마족의 기운이 약간이라도 남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계약으로 이어진 마족과 인간의 경우에는 계약이 완료된 후에도 기의 파동이 비슷해져서 다시 마족을 불러내기가 쉬워지는 것이죠" "그럼 내일 저와 함께 조우를 만나러 가 주시겠어요?" "그 점은 저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보다는 다이아나님이 조우라는 아이를 신전에서 데리고 나와서 저와 만나게 해 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신관들이 저를 본다면......" "아, 그렇겠군요. 그럼 적당한 곳에 이시니엘님이 기다리고 계시도록 하고, 제가 조우를 불러내도록 하지요" 다음 날, 다이아나는 조우와 마을을 산책하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신관들은 별 의심없이 이를 허락했다. 다이아나와 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에 서 있는 이시니엘을 본 조우는 약간 경계하는 눈치더니 그가 입고 있는 신관복을 알아 보고는 오히려 다이아나보다는 이시니엘을 믿는 눈치였다. 이시니엘은 조우의 부모님을 위해 그의 손을 붙잡고 한 차례 기도를 올렸고, 조우에게는 여행을 다니다가 그의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왔으나, 이미 여신의 품에 있으니 자신은 기도나 올려주고 싶었다는 핑계를 댔다. 조우는 그가 고위신관임을 알고 동경하는 표정이 되었다. 조우는 신관이 되고 싶다고 주저없이 말했고, 이시니엘은 열심히 기도하고 여신을 섬기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이를 격려했다. 다음 날, 조사를 위해 나왔던 일행들이 별 다른 단서를 잡지 못하고 다음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향한다는 말에 영주는 조금 섭섭한 기색이었다. 그로서는 오랜 만에 중앙에 근무하는 기사들고 만나 대련도 할 수 있었고,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황녀와 다이아나라는 여성을 매일 볼 수 있어서 상당히 즐거웠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워낙 단서가 없는 사건이다 보니 별 결과를 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살피러 간다는 말은 의외는 아니었다. "정말 그냥 이렇게 떠나도 될까요?" 이시니엘이 걱정스럽게 물어오자 다이아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조우라는 아이는 마족과의 계약을 완료했어요. 이미 페르세포네님의 신전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함부로 계약을 맺는 일은 없겠지요. 물론 그 계약을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점은 의외의 일이긴 하지만, 일단 여기서 조우에 대하여 사실을 밝혔다가는 그 애의 미래만 어둡게 할 뿐이에요." "하지만, 언니! 그 죽은 사람은......" "나 또한 그가 죽어 마땅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이 곳을 들쑤셔본다고 해도 사람들 사이의 불신감만 조장하게 되겠지요. 조우라는 아이는 마족과의 계약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어요. 아마, 사이를 중재한 신관이 마족에게 부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나중에 다시 들르는 한이 있어도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 전에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요" "일단 전체적으로 다 한 번 돌아보자는 말씀이신가요?" 뮤리엘이 대충의 의도를 이해한 듯 다시 확인했다. "맞아요. 피해자나 가해자에 대한 내용도 각기 다를 것이고, 그 계약의 대가가 무엇인지도 중요해요." "하긴, 여기서 알아낸 약간의 사실을 떠들었다가는 다른 곳에 남아 있을 단서들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워지겠군요" 조우라는 아이가 마족과 계약을 했었음을 알아낸 것은 이시니엘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마족과의 계약이 완성되었다는 말에 그 사실을 숨기고 다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떠나자고 주장했고, 그 구체적인 이유가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일행은 다른 마을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다. 용의자로 의심스러운 사람은 이시니엘이 신전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 보았고, 하나같이 마족과 계약을 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 이시니엘의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죽을만한 사람들만 죽었네요" 마을을 돌아보고 돌아온 뮤리엘이 의자에 앉아 서슴없이 맨 발을 드러내고 주무르면서 하는 말에 다들 동의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대부분 죽은 이들은 다양한 악행을 저질러 마을에서 피하는 부류였고, 법대로 처리한다고 해도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이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미리 판결을 내리기라도 한 양, 이 살인사건들은 엄중하게 객관적으로 '악인'이라 판단되는 이들만을 골라 피해자로 만들고 있었다. 이시니엘은 치맛자락이 걷어 올라가 드러나 있는 뮤리엘의 다리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반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신관들이 악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마족과의 계약은 아무래도 신관들의 엄중한 판단 하에 이루어졌을 테니까요" "경솔한 말일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 사건을 꼭 조사해야 하는 이유에 의문이 생겨요. 나라에서 해결하거나 영주가 해결했어야 할 일들을 대리로 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에요? 이런 외곽 지역에는 중앙의 손이 닿지 않는다구요. 어떻게 보면 이 나라의 황제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 될 수도 있다구요" 뮤리엘이 약간 뾰로통한 어조로 말하면서 주무르던 발을 바꿔 올리고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다들 말을 안 했지만, 사건의 진상을 알면 알수록 과연 현재 행해지고 있는 마족과의 계약을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에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행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심판의 권한이 있느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러한 은밀한 일들이 일어나는 지역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물론 현재까지는 그리 억울한 죽음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없지만, 지금처럼 계약이 계속된다면 이 계약에 대한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은 기정 사실이라 볼 수 있어요" 다이아나가 관점을 바꾸어 문제를 지적하자, 이야기를 듣던 이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마족이 순수한 영혼의 바램에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일단 계약의 대가가 적당하다면 하급마족 정도는 어떤 사람이던 간에 불러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아야 했다. 더군다나 일의 확산 속도나 마을 사람들의 태도로 보아 은연중에 사건이 일어난 마을에서는 암흑과 파괴의 여신에 대한 숭배가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와중에 불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단 불러낸 마족이 계약의 대가에 만족하지 않는다거나 소환한 이의 정신이 마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이 마물이라 부르는 비이성적인 존재가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이아나의 염려는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현실로 드러났다. 마일스는 22살의 젊은 남자로 소작농인 동시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자치대의 병사이기도 했다. 기사들과 훈련을 받은 병사들, 그리고 용병들이 주를 이루는 방어 병력이 있기는 하지만, 외곽 지대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을 이러한 군대와 비슷한 단체에서 복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마을에서도 조우의 마을과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용병들 중 악명이 높았던 사내가 은밀한 집회 이후에 잔인하게 살해된 일이었다. 마일스는 그 집회에 참여했었고, 소원을 말하고 마족이 나타나는 장면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던 그는 마음씨 착한 젊은 남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긴 했지만, 작은 키와 마른 몸매 그리고 남들보다 뒤지는 체력 덕에 자치대에서도 상당히 무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자신보다 더 힘이 없어 보이는 30세 가량의 여인이 남편과 아이를 죽이고 자신을 폭행한 그 용병에 대한 복수를 간절히 바라자, 그것은 마치 꿈처럼 바로 이루어졌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 마족들은 우리를 도와 주기 위한 페르세포님의 신의 사자가 틀림 없어. 그 강대함으로 악을 파괴하다니......" 흥분에 휩싸여 함께 집회에 참여했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 보았지만, 그 친구는 마족이라는 존재에 대하여는 아직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그다지 호응을 해 주지 않았다. 마일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죽은 놈에 대하여 다들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것이 분명한데도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마족들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용병이 살해된 후 순박했던 마일즈는 전 같으면 그냥 지나칠 일들에 대하여 속으로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카즌씨가 농담처럼 "어이, 비실이 총각 오늘도 경비 잘 서게나" 하고 건네는 인사말은 어제와 다름이 없었지만, 마일즈는 평소와 달리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실이라니, 내가 마족과 계약만 한다면......" 경비대에서 늘상 자신을 구박하는 용병들의 언행에도 전과는 달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마일즈는 마족과 계약을 한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있었고, 마족의 은혜로 마을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기사보다 더욱 강해진 자신을 떠올리면서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조금씩 신경질적이 되고 작은 일에도 발끈하는 그에 대하여 그나마 착한 것만이 장점이었는데, 그것조차 없어졌다면서 냉대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마일즈의 힘에 대한 욕구는 커져만 갔다. 그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신전에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악화된 대신 신관들과 새로운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 일행이 한 밤중에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을 곳곳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마물이 나타났다는 말에 경비대에 이어 기사단까지 출동했지만, 상당 수의 희생자만 냈을 뿐 마물의 화만 돋구었을 뿐이라고 안내를 한 하급관리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이상한 것은 마물이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공격하는 이들에 대하여 대응하는 것 외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마물이 나타나는 시간은 매일 자정부터 새벽에 이르는 일정한 시간대였고, 그 후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럼 마물이 나타난 지는 얼마나 되었죠?" "사흘째입니다. 오늘 세 번째로 출현한 셈이죠" "낮에 신관들이 조사를 하지는 않았나요?" "신관들도 상당히 당황했는지 조사를 하기는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운을 찾을 수 없다는 말만 하더라구요" 기사단의 단장은 마물과 대치상태에 있는 기사단을 지휘해야 했으므로 마을의 촌장격인 노인이 나와서 다이아나 일행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그 쪽으로 간다아!" "막아랏!" 포위망을 뚫고 마물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구경을 하던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지는 모습이 점점 앞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스탠이트는 만일을 대비하여 캐스팅을 하고 있었고, 호위로 따라온 하투아의 기사들도 긴장한 기색으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포위망을 뚫고 튀어나온 마물은 다이아나 일행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다가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은 보고 멈칫하더니 바로 방향을 틀어서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마물이 코 앞에서 방향을 틀었기 때문에 일행은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 몸은 적갈색 털이 뒤덮여 있었고, 눈동자와 흰자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눈은 온통 빨갛게 물들었으며, 손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웬만한 단검 길이만한 손톱이 비죽 나와 있었고, 송곳니기 길게 내려와 턱을 덮은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앞을 가로막는 기사에게 입을 벌려 내뱉는 것은 하급마법사가 만든 파이어볼과 같은 형태의 불덩이여서, 웬만한 실력으로는 접근하기도 힘들 듯 했다. 호위를 위해 따라온 기사들이 말렸지만,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와 함께 플라이 마법을 이용하여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머리위로 마물을 쫓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 사이로 이족보행과 병행하여 가끔씩 손까지 짚어서 거의 나는 듯이 뛰던 마물이 골목안으로 사라지는 듯 하더니 여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메린!!!" 담 위로 솟구쳐 오르는 마물의 한 쪽 손에는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처녀 하나가 축 눌어진 채 안겨 있었고, 그 뒤로 가족들의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멈추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골목에서 다이아나와 함께 마물의 바로 앞을 막아선 에디우스가 약간의 피어를 섞어 마물을 위협했다. 그 사이 다이아나는 마물에게 안겨 있는 여인의 상태와 마물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에디우의 기운지 전해진 듯 본능적으로 마물은 잠시 동안 몸이 굳어졌다. "기절시킬 수 있겠어?"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에게 부탁하자, 에디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매직 에로우 몇 발을 만들어 마물의 몸을 공격했다. 보이지 않는 마나의 화살에 타격을 입은 마물은 순간적으로 들고 있던 마을 처녀를 떨어뜨렸고, 기회를 보고 있던 다이아나가 즉시 앞으로 튀어나가 처녀를 안아들고 에디우스의 옆으로 몸을 피했다. 다이아나는 성력으로 치료를 하려다가 의외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여인의 상태를 깨닫고 에디우스의 마나에 의해 움직임을 구속당한 마물을 살펴보려고 했다. "위험합니다. 다크 파이어!" 다이아나를 밀치면서 누군가가 암흑의 화염을 날렸고, 마물은 화염에 휩싸여 괴로운 듯이 괴성을 질러대었다. "잠깐만요!" 에디우스가 밀쳐진 다이아나를 일으키기 위해 다가선 순간 다이아나가 다시 공격을 하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소리쳤으나 상대는 들은 척도 안하고 마물에게 최후의 타격을 날렸다. "윈드 블레이드" 바람의 칼날이 마물의 몸으로 날아들어 불길에 휩싸인 몸을 뚫고 육체를 난자하는 데는 눈 깜짝할 만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이것은......" 다이아나는 눈 앞에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한 때 마물의 몸을 구성하던 고깃조각들을 보면서 마법을 시행한 사람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미 저 마물은 제 마나에 의해 포박되어 있었습니다만......" 에디우스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갑자기 나타난 흑마법사에게 추궁을 하기 시작했다. 마물을 처리한 흑마법사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이어 바로 도착한 페르세포네 신전의 신관들이 그 남자가 자신들이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초빙한 신전 소속의 흑마법사라고 신분을 증명하는 바람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흑마법사에게 더 이상의 추궁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두 분께서도 마물을 처치하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오해가 있었던 듯 한데, 별 피해 없이 이렇게 빨리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모두가 페르세포네님의 은총이지요" 신관이 나서서 흑마법사를 노려보고 있는 에디우스를 달래듯이 해명을 했고, 기사들과 함께 도착한 뮤리엘과 스탠이트가 다이아나의 옆으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이시니엘은 같은 신전의 신관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뮤리엘에게 슬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다이아나는 아직도 화가 나 있음이 분명한 에디우스의 손을 살짝 잡아 그를 진정시키고 자신이 돌보았던 마을 처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쇼크로 인해 잠시 기절한 것 뿐이어서 깨어난 그녀는 약간 어리둥절해 하다가 울기 시작했고, 뒤늦게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울면서 뛰어나온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를 데리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이 마물이 누구였는지 아는 분 계신가요?" 마물의 움직임은 마을 지리에 능숙한 사람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었고, 메린이라는 처녀를 좋아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다이아나는 간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 아니더라도 이미 원형을 알아 볼 수 없는 마물의 시신에서 그것이 사람이었을 때의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한 후, 다음 날 마을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는 것이 낫다는 판단으로 다이아나는 촌장에게 뒷처리를 부탁하고는 뮤리엘의 말을 듣고 이시니엘이 먼저가서 기다린다는 여관으로 향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군요" 뮤리엘이 무겁게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먼저 말을 시작했지만 다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어 다음 말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입을 연 다이아나에 의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그 흑마법사가 좀 걸려요" "건방진 놈 같으니, 마나를 다루는 자가 포박되어 있는 상태를 몰랐다는 것이 말이 돼?" 에디우스는 흑마법사가 중요한 단서인 마물을 처치했다는 것보다 그 전에 다이아나를 밀친 것과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난 괜찮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균형을 못 잡은 것 뿐이라구. 다친데도 없잖아" 다이아나는 일단 에디우스를 달래 보았지만, 그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기에 단념한 듯 한숨을 내쉬고 이시니엘을 바라보았다. "신전에서 흑마법사를 고용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흔한가요?" "그게 미묘합니다. 일단 이삼일의 시간이라면 흑마법사와 연락을 해서 그가 지원을 와 주었다고 해도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흑마법사들의 신변에 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은 우리 신전 뿐이니까요. 저 또한 그 흑마법사의 의도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일단 마물을 퇴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변명하면 달리 잘못했다고 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여러 가지로 빈틈이 없군요. 이번에 나선 흑마법사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한다면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흑마법사의 일상 생활을 위해서라도 그들에 대하여 신전에서는 최대한 보호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신전에서 의뢰한 것이고 그로서는 의뢰의 내용을 충실히 행한 셈이니 신전으로서는 그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국가의 권력을 이용한다고 해도 잘못했다가는 신전과 대립하는 결과만 가져오겠지요" 그야말로 완벽한 시나리오 속에 진행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단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나타났던 마물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것 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일즈는 신전안에 마족을 소환할 때 사용하는 방이 있음을 알아내고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깊은 밤 그 곳으로 들어갔다. 소환의 언을 할 줄 몰랐지만, 일단 마법진의 도움이 있고 간절한 소망이 있으므로 마족이 소환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런 그의 판단이 맞았는지, 몇 시간을 간절하게 바란 결과 어둠의 기운과 함께 야수의 모습을 한 하급마족 하나가 소환되었다. "네가 나를 소환했느냐?" "예. 위대한 마족이시여" "계약의 조건은?" "저에게 강한 힘과 능력을 주십시오 사람들이 결코 깔볼 수 없게 해 주십시오" "대가는?" 마일즈는 자신이 목격한 계약에서 여인이 건 대가를 생각했다. 당시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궁을 대가로 내세웠고, 마족은 그것을 받아들였었다. 헌데, 그는 남자였고 불임이 되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이 부분에서 망설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정말 크나 큰 실수였다. "감히 네가 대가도 없이 나와 계약을 하려는 것이냐?" 소환되어온 마족은 난폭함을 드러내며 재촉을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마일즈는 무엇이라도 생각해내려고 했지만, 당황한 머리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는 최악의 선택을 해 버렸다. "무.. 무엇이든지 제가 가진 것 중에 원하는 것을....." "진심이냐?" "예. 힘만 주시겠다면......" "계약은 이루어졌다." 그 날부터 마일즈의 기이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족은 대가로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즉, 마일즈의 모습으로 있는 동안 마족이 마일즈 안에 동거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마일즈가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자정부터 새벽에 이르는 다섯 시간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자신이 몸을 움직일 때 강대한 힘을 주겠다는 마족의 약속에 마일즈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의외로 마족은 마일즈의 몸을 차지하고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신전에서 참배를 하는 둥 멀쩡하게 생활했다. 마일즈는 몰랐지만, 이 마족은 하위급의 마족일 뿐만 아니라 처음 인간 세상을 구경하는 어린 마족이었기에 이런 특이한 형태의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첫 날 약속한 시간이 되었을 때 마족은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약속의 실천을 위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끄아아악~!"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마일즈는 힘을 받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기 위해 방 안에 있던 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의 고통이 지난 후 그가 정신을 차리고 본 것은 털이 빽빽하게 나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이럴수가!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마일즈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구강구조가 바뀐 탓에 짐승이 내는 신음소리 비슷한 것만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이게 아니잖아! 어디 있는 거야?' 마일즈는 자신을 속인 마족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와중에 익숙하지 않은 몸에 달린 긴 손톱이 방안의 물건을 마구 부수게 되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자신의 집 안에서 마족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마일즈는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운이 없게도 술을 마시고 귀가를 하던 두 명의 용병이 괴물과 같은 모습의 마일즈와 정면으로 딱 마주쳤고, 그 이후 초비상이 걸린 온 마을을 헤메면서 마일즈는 도망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힘을 주기는 준 것인지 자신의 손짓 한 번에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만만치는 않아서 기사들 여럿이 덤벼들 때에는 꼭 죽는 줄 알았다. 당황하여 그가 비명을 지르자, 그의 입에서는 괴성과 함께 불이 튀어나갔고 덕분에 그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지옥같은 밤이 지나 간신히 병사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있었고, 뻔뻔스러운 마족은 다시 마일즈의 몸을 차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일즈는 몸 안에 갖힌 채로 마족에게 악을 쓰듯이 항의를 했지만, 마족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강한 힘과 능력을 달라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깔보지 않게 해달라고 했잖아? 너의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을 보았지? 그리고 그 이상 어떻게 강하게 해 달라는거야?" '하지만, 이렇게 괴물같은 모습을 원한 것은 아니란 말야!' "웃기는군! 마족이 전지전능한 줄 알어? 연약한 인간의 육체로 어떻게 강대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 네 몸은 내가 생활해 보니 마나를 쌓기 적합한 체질도 아니었다구. 재료가 부실하니 내가 힘을 써서 멋진 새 몸을 준 것인데, 왜 불평이야?" '제발.. 내 몸을 돌려줘! 이런 계약은 하고 싶지 않아' "이봐. 마족과의 계약이 네 마음대로 했다가 취소할 수 있는 줄 알았어? 이미 계약은 성립되었고 나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구." '그... 그럼......'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사는 거지 뭐" '이 나쁜놈......' "그렇게 화를 내도 소용없어. 오늘 밤엔 무얼 할 지나 생각하는 게 나을텐데?" 결국 자포자기한 마일즈는 둘째날 밤에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바뀐 그로서는 단지 비웃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일 수조차 없었다. 몇 번 손톱을 내리려다 상처만 내었을 뿐 결국 머뭇거리다 달아났고, 다시 병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온 마을을 돌아다녀야 했다. 사흘째가 되었을 때, 마일즈는 생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 이제는 병사들은 포위만 할 뿐이었고, 그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기사들 뿐이었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뛰쳐 나갔을 때 다시 일단의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을 절감하고는 평소에 짝사랑하던 메린이 사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금갈색 머리카락의 메린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을 처녀로 마일즈에게도 늘 상냥하게 대해 주었기에 그는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그녀의 집으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붉은 눈의 마물을 대한 메린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다가 기절했고, 식구들이 달려오는 바람에 쓰러진 그녀를 부축한다고 들었던 그대로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가게 되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높이의 점프가 가능했기에 가까스로 메린의 식구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아 왔다. "멈추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시골 구석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란 마일즈로서는 그토록 아름다운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신이 현신한 듯한 금빛의 남자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섰을 때 사실 마일즈는 그다지 저항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순간 몸을 크게 뒤흔드는 타격에 메린을 놓쳤지만, 아름다운 여성이 뛰어들어 그녀를 받는 것을 보고 마일즈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리고 이어 그의 몸을 무언가가 휘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하는 것을 느꼈다. 마일즈는 그 순간 오히려 마지막 희망을 다시 한 번 품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아침이 되어 마족이 자신의 몸을 차지한 것을 안다면 다시 한 번 인간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 아름다운 남녀는 분명히 신의 사자일 것이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왔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는 반항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여성쪽이 그에게 다가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온 힘을 다해 눈빛으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 여인을 밀치는 것이 보였고, 무심결에 넘어지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곧장 불덩이가 날아들어 온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으로는 낼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면서 고통에 몸을 비틀면서도 그는 애절하게 아까의 여인을 바라보려고 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수십조각으로 분리되었고,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안타깝게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마을에서는 마일즈가 사라진 것을 알아내었고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그의 집 안의 가구들도 증거로 내세워졌다. 마을 사람들은 소심하고 착했던 젊은 남자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최근에 약간 신경질적이 되었었다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의심할 점이 없었다고 저마다 증언했다. 하지만, 마을의 어느 누구도 마일즈가 최근에 페르세포네여신의 신전에 매일 들락거렸다는 것과, 그녀의 지독한 숭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전의 마족과의 계약을 함께 본 이들도 이 일에 대하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꼭 다물었다.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만일 마족과의 계약을 묵인한 사실이 알려졌다가 자신들까지 피해를 볼 것이 두려웠고, 어떤 면에서 신관들의 당부를 지키지 않은 마일즈의 처참한 죽음은 더더욱 신전에 대한 경외심을 고조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나는 마물이 된 남자의 최후의 눈빛이 어쩐지 애원하는 뜻을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에디우스는 다이아나를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어서 신경이 날카로웠고, 이시니엘의 경우 신전으로 인해 생긴 희생자에 대하여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바람에 기가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죽은 사람이 구원을 바라는 눈빛을 했다고 말을 했다가는 그 둘에게 더더욱 책임감만 가중시키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다이아나는 마일즈라는 마물이 된 남자의 일을 마음 속에 조용히 감추고 있었다. "에디, 마족에 대해서 잘 알아?" "글쎄. 마족이나 우리나 서로 강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딪힐 일이 별로 없지. 하지만, 강함을 숭상하는 종족이라는 것과 약속을 중요시한다는 점 정도는 알아" "마계에 가 본 적은 없지?" "취향이 무척 특이하지 않고서야 거기 갈 드래곤은 없을껄? 오천 년 쯤 전에 마족과 친하게 지냈다는 레드일족이 있어서 마계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어떤 곳이야?" "의외로 살기 좋다고 하던데? 물론 마물들이 들끓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 형태의 마족들이 사는 곳은 문화도 발달하고 아름답다고 하더군" "그렇구나. 아무래도 이모님께 여쭈어봐야겠어" "페르세포네님?" "응. 일단 뭘 알아야 말이지" 다이아나도 마족과 직접 대면한 일이 있었다. 그녀를 꿈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생을 사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나이트메어라는 고위마족이었고, 디안을 구해낸 영지에서도 디안의 몸을 통하여 마족과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까. 페르세포네는 마족들에 대하여 상당한 자긍심을 가지고 자랑을 했었고, 만난 마족들이 그다지 나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에 마족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다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들 중 가장 약한 자라 할지라도 인간계에서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고, 그들을 세상에 불러내려는 것이 페르세포네의 뜻인지도 알아야 했다. 특히 고위마족들이 현재 급진파에 해당되는 신관들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그들의 성향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차후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단, 지금처럼 움직여서는 아무 수확이 없다고 봐야해. 이곳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신전의 편이야. 신전의 편이라기보다는 급진파쪽의 편이라는 것이 맞겠지. 당사자들이 모두 중요한 것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조사를 한다고 해도 특별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을거야" "여기 신전에 갈꺼야?" "아니. 일단 수도로 돌아가서 새로운 정보가 있는지 알아보고 하투아에서 본단 역할을 하는 신전에 가보아야지. 최악의 경우엔 신분을 드러내더라도 이 일은 해결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거야. 네 옆엔 내가 있잖아" "응.. 알고 있어. 뮤리엘에게도 말하고 내일은 수도로 돌아가자." "괜찮겠어?" 에디우스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를 다이아나가 아니었다. "황제와의 면담은 뮤리엘에게 일임할거야. 굳이 황궁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리고 황제를 다시 만난다고 해도 지난 번처럼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어." 다이아나의 단호한 말에 에디우스는 미소를 짓고는 뮤리엘과 다른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이시니엘과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신전에서 알아보겠다는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대충 이해했고, 스탠이트의 경우는 이시니엘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신전을 찾기 위해 수도로 가는 것으로 이해했으므로 별다른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 할 일이 결정되었는데, 지체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는 생각으로 호위로 따라온 기사단의 책임자에게 간단한 상황을 설명하고 가장 빠른 경로를 통하여 수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스탠이트에 에디우스까지 힘을 빌려준 결과 이들은 처음 올 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일단 스탠이트가 몇 번의 이동을 하고 나면 에디우스가 스탠이트와 비슷한 정도의 이동을 해냈기 때문이다. 수도로 돌아온 일행은 약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황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표로 입궁했던 뮤리엘과 스탠이트가 황제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지만, 다이아나는 의외로 크게 신경쓰지 않는 얼굴이어서 뮤리엘과 에디우스는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이시니엘은 수도로 들어온 후 황궁으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가지 않고 신전으로 향했는데, 떠나기 전 다이아나와의 대화 내용에 의하면, 수도쪽의 신전은 온건파와 급진파가 비교적 균형을 잡고 있는 상태라서 도와줄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단 황궁에 도착한 후 황제에게 그 간의 경과를 보고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사실 조사단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뮤리엘이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보고는 마물 사건 정도였다. 그나마 신전에 대한 의심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으니, 이미 경로를 따라 보고되어 있을 사건에 대하여 조사단이 새로운 것을 알아낸 점은 하나도 없다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카이젠 황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뮤리엘과 스탠이트를 후대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고, 별 다른 결과를 내지 못한 뮤리엘은 그런 황제의 태도에 조금은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이시니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신전 내의 상황을 살펴보고 연락을 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의 연락이 오기까지 혹시 신변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으므로, 꼬박 이틀만에 이시니엘이 약속된 장소에 찾아오자 반갑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이시니엘의 안색은 상당히 침울했고, 그가 심각하게 하는 말에 의해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의 안색도 급변했다. "뮤리엘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다이아나가 먼저 말을 하자, 에디우스도 동의했다. 뮤리엘의 실력으로는 도움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그녀의 지위와 신분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저들의 손에 인질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보아야 했다. 이시니엘이 이리 저리 탐문한 결과 급진파의 고위급 사제들이 최근 하투아에 여러 번 모습을 보였으며,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인적인 드문 시간에 마족과의 계약을 위한 방에 드나드는 모습을 하위급의 신관들이 목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위신관급의 능력에 신전의 소환진이라면 고위마족을 불러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가 그러한 고위신관이 한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야만 했다. 결국 다이아나는 신분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페르세포네와 일단 대화를 해 본 뒤에 모든 일을 정리하려고 마음 먹었다. 에디우스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고위급의 마족이 하나가 아닌 서너 명만 된다고 가정할 때 그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다음 날, 신전 근처에서 이시니엘을 만나 급진파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경로로 신전 안으로 들어가 페르세포네의 조언을 구하기로 하였고, 이는 이시니엘에게는 페르세포네님의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는 말로 바꾸어져 전달되었다. 이시니엘은 너무나 쉽게 페르세포네의 신탁을 거론하는 다이아나의 태도에서 다시 한 번 그녀가 성녀임을 절감하면서 감격에 벅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시니엘을 만나고 돌아온 다이아나는 뮤리엘에게도 다음 날의 일정을 알렸으나, 고위급 신관들의 행보에 관한 정보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뮤리엘의 성격으로 보아, 다이아나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결코 뒤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신전과의 일은 다이아나가 혼자서 처리했던 탓에 뮤리엘은 별 의심을 품지 않았고, 최근 황제의 초대가 잦아진 탓인지 일정상으로도 다음 날을 바쁘다는 이야기를 했다. 황제는 지난 번 조사 전에 제대로 대접을 못했다면서 귀빈의 예우로 거의 매일같이 뮤리엘을 불러내어 공연을 보게 하거나 파티를 여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고, 칼라임 쪽의 일행들의 불참을 메우기 위해 뮤리엘은 그런 카이젠의 제안을 대부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햇살이 마지막 빛을 희미하게 뿜어낼 즈음 어스름한 저녁 공기 속에 황궁을 떠나, 약속한 장소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달이 태양의 자리를 차지한 후였다. 신관복 위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이시니엘이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을 하면서 맞이했다. "죄송하지만, 뒷문을 이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페르세포네의 신전에는 흑마법사들이 주로 드나드는 뒷문이 있었다. 암흑과 파괴의 여신의 신전의 특징 때문에 신전을 드나드는 이들 중에는 이 뒷문을 애용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섰다가 얼굴이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시니엘은 성녀를 뒷문으로 모신다는 점에서 상당히 민망한 눈치였으나,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쓸 다이아나가 아니었기에 신전 뒤의 골목을 따라 걷는 세 사람의 발걸음은 빠르게 옮겨가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것처럼 신전의 뒤쪽으로 난 문은 수도의 뒷골목과 인접하여 있었고, 가끔씩 보였다가 사라지는 신전을 에워싼 벽이 그들이 신전 근처에 있음을 알게 했다. 몇 개의 골목을 꺾어지자 작은 문이 보였고, 그러한 문을 세 개를 통과하자 그들은 신전의 뒤뜰에 도착했다. 앞장선 이시니엘의 뒤로 벽을 따라 한동안 걷던 중에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신관과 흑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이 신전 뜰의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로브의 모자로 얼굴을 가린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약간 거친 목소리로 말을 하자, 이시니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애써서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앞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에디우스는 물론이고 다이아나도 주변의 기척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에디우스는 주위에 숨은 인원의 실력을 대충 전음으로 다이아나에게 전했고, 덕분에 다이아나도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기다렸는데?" 에디우스가 빈정거리는 빛을 숨기지 않고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대꾸하자,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의 동요의 빛이 보였다. 그 사이 다이아나는 이시니엘의 옷자락을 잡고 자신의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만일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약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젊은 신관이었기 때문이다. "흠. 마검사라고 하더니 꽤나 자신이 있는 듯 하군. " 이미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초연했다. 그는 옷 속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내더니 보란 듯이 흔들면서 말을 계속했다. "어차피 무력으로 당신들을 이기려는 생각은 없었다구. 이걸 한 번 보는 게 어떨까?" "흠, 그 따위 수정구에 무슨 수작을 해 놓았길래?" "수작?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이건 단순히 영상을 볼 수 있는 수정구에 불과하다고. 의심이 되면 한 번 살펴보아도 좋아" 에디우스는 즉각적으로 수정구에 걸린 마법을 탐지했다. 과연 수정구는 약간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배열을 살펴본 결과 동영상을 저장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신관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수정구를 다이아나 앞으로 굴려 보냈다. "무슨 의미냐?" "별 탈 없을 걸 알았으면 한 번 보라는 의미지" 수정구에 손을 대려는 다이아나를 막고 에디우스가 바닥에 떨어진 수정구를 마법으로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가 다시 마법을 사용하기도 전에 신관이 시동어를 읊었다. "재생" 곧바로 살짝 빛을 뿜어낸 수정구에서 몇 가지 영상이 나타났고, 그것은 에디우스와 다이아나 두 사람의 눈앞에 바로 보여졌다. 영상을 본 에디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다이아나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디안!' 처음 보여진 영상은 잠들어 있는 듯한 디안의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눈 앞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로브를 걸친 사람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감시하듯이 지키고 있었다. "그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준비해 놓은 것이 아까우니 끝까지 보지 그러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에디우스는 다이아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수정구는 얄밉게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새로운 영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에디우스는 그 영상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이아나가 소리를 치자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포치, 다키!" 에디우스는 묶여 있는 오크 두 마리를 보아서 어쩌라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이아나의 말에서 그녀가 가끔 언급하던 오크들을 생각해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세심한 준비를 해 왔음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다이아나가 의외로 담담한 어조로 신관을 향해 물었다. "흠. 그렇게 나온다면 아주 간단하지. 일단 페르세포네님께 맹세코 저들은 현재까지는 아주 멀쩡히 살아있다. 네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질 것이야" "말을 해 보세요" 에디우스의 분노를 느낀 다이아나가 자신을 안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재차 물었다. "일단 저 남자는 위험 인물이니 우리의 인질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겠는가?" 다이아나는 그의 요구가 자신이 아닌 에디우스에게 향하자 움찔했고, 에디우스는 그런 다이아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내가 인질이 되어 준다고 한 들 너희가 나를 잡아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에디우스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이미 1800살의 성룡이 된 지도 한참이 지난 그를 가둘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다이아나에게도 그러한 전언을 해서 안심시킨 그였다. "일단 이 팔찌를 좀 차 주시게" 마나를 구속하는 팔찌가 던져졌고, 에디우스는 별 상관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그것을 팔목에 채웠다. 폴리모프한 육체라고는 해도 인간의 마법물품 따위가 그를 속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팔목에 팔찌를 채우자 마자, 여러 명의 신관들이 무언가를 일정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그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본체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으윽... 이것은......" 다이아나는 팔찌에서 일어난 검은 기운이 에디우스의 온 몸을 옭아매듯이 감싸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이미 에디우스는 신관들에게 에워싸여 있어서 접근할 수 없었다. "에디!" 믿고 있었던 에디우스가 꼼짝을 못하는 상태임이 분명해지자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으로 침착성을 잃고 그의 상태를 보기 위해 신관들을 밀치고 다가서려고 했다.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저건 고위마족들이 만든 팔찌이며, 더불어 열 명이 넘는 고위신관들의 암흑의 신성력이 깃든 것이니까요" 이시니엘이 뒤쪽에서 팔찌의 정체를 설명하면서 다이아나를 말렸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부림을 멈추고 자신을 끌어 당기는 이시니엘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이시니엘?" 다이아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시니엘을 바라보자 이시니엘을 슬픈 빛을 띠고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 때 뒤에서 다시 수장격인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성녀. 페르세포네님의 은총을 받은 당신을 다치게 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도 원하지 않는 일이어서 준비에 시간이 꽤 걸렸지요" "당신들은......" "이미 당신이 성녀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 남자는 드래곤이겠죠? 하지만 드래곤이라고 해도 지금 저 구속을 깰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말을 따르는 이상 그에게는 해가 없을 것을 역시 페르세포네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다이아나는 그나마 사랑하는 이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 달려 있다면, 이전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래요.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저희는 정확하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 동안 당신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계셔 주시면 됩니다." "다른 곳이라구요?" "당신이 지상계에 간섭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지요." 이제 에디우스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에디우스의 모습을 안타깝게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그 곳이 어디든 제가 간다고 하면, 저들을 풀어 주실 건가요?" "지킬 수 없는 맹세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일단 디안이라는 소녀와 오크들은 제 위치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아, 따님의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녀는 스스로 당한 일을 모를 것이고, 그 주위 사람들이야 잠시 실종되었던 아이를 찾은 것으로 알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이 드래곤은 지금 풀어 주어서는 감당할 수 없겠지요" "그럼..." "일단, 성녀님이 갈 곳에 함께 보내어져 감금될 것입니다만, 몸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드리죠" "도대체 어디로 보내실 생각이죠?" "드래곤을 가두어 둘 수 있고, 성녀님이 다른 신들과 접하는 곳을 막을 수 있는 곳. 바로 마계입니다." ********************************************************************** 이래서 마계에 대한 내용을 써야 하는데, 등장인물만 정해지고 마계 상황에 대한 설정이 영 안나오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_-;; 오늘은 즐독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계 "이 쪽으로 오십시오" 정신을 잃은 에디우스의 옆 쪽을 가리키는 신관의 말에 다이아나는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녀가 에디우스의 몸을 살피는 동안 신관들은 다시 무언가를 일제히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를 둘러싸는 마나의 파동이 이어졌고, 둘의 모습은 신전 뜰에서 사라졌다. 이시니엘은 다이아나의 눈길을 생각하면서 멍하니 선 채로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그의 정체를 알았을 때 처음 보였던 반응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던진 눈빛은 어찌 보면 연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눈빛이어서 더욱 그의 양심 한 곳을 아프게 찔러대고 있었다. "이번 일에 자네의 공이 크군" 페르세포네의 신전에서 서열로 치자면 3위의 위치에 있으며, 자신이 이런 일을 하게 만든 존경하는 선배이자 부모와 같은 그가 속한 단체의 수장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잘 했다는 미소를 보내왔다. 이시니엘은 한 점의 의혹없이 자신을 믿던 다이아나를 배신했다는 자괴감에 몸을 굳혔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신관은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비겁한 방법을 썼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네만, 성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오랜 세월을 준비해 온 것들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번 일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마족들 또한 그녀를 경시하지 못할 것이니 절대 그녀가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걸세." "예" 마지못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긴 했다. 만약 다이아나의 신변에 크게 위협이 될 일이라면 맡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급진파의 의도는 성녀를 사건의 중심부와 떨어뜨려 놓는 것이지, 결코 그녀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알기에 이시니엘도 이번 임무를 맡기로 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이 그녀의 믿음을 배반하고 그녀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동을 하는 순간 잠시 정신을 잃었던 다이아나는 상당히 화려한 방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마계로 보낸다고 했지만, 지금 다이아나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지상계와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상당히 고상하고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장식된 방이었다. 푸른색의 단색의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는 장정 넷이 누워도 될 만큼 큼직했고, 검은 색과 흰색 그리고 푸른색의 가구들이 방안을 허전하지 않을 정도의 느낌으로 채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반쯤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잡았다. 그녀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는 순간, 방문이 갑자기 바깥쪽으로 열리는 바람에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아, 당신은?" 보라색으로 온 몸을 휘감은 보라색 날개의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가 녹아들 듯한 미소를 띄우고 반가운 듯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이아나님" 다이아나는 페르세포네의 호의로 자신에게 보내졌던 나이트메어라는 이름의 마족을 보고 이 의외성에 머리속이 복잡해짐을 느꼈다. "저를 이 곳에 가두는 음모에 동참하신 건가요?" 큰 도움을 주었다고는 하지만, 인질을 붙잡고 협박을 한 신관들의 행위에 마족이 그것도 안면이 있는 마족까지 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자, 상당한 배신감이 몰려왔다. 덕분에 다이아나가 나이트메어에게 질문을 하는 표정과 어투는 상당히 냉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아름다운 마족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설명을 했다. "페르세포네님이 관심을 가지신 분의 신병을 한 달이나 인도한다는 데 저희 마족들이 사양할 이유가 없지요. 더군다나 이번 일은 정당한 절차를 밟은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니만큼 저희들로서는 규칙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다이아나가 적의를 뒤로 하고 일단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나이트메어는 기가 막힌 사실들을 늘어놓았다. 사건의 주범인 신관은 고위신관들을 모아 고위마족을 소환하여 그 계약의 대가로서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받는 성녀의 신병을 내세운 것이다. 이미 마왕을 비롯한 고위급의 마족들은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받는 성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알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족들의 페르세포네에 대한 충성심과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다이아나의 상황을 어렵게 만든 셈이다. 성녀가 한 달 동안 마계에서 생활하는 조건으로 고위마족들은 드래곤을 구속할 장비들을 만들어 주었고, 그야말로 신관들은 두 가지 이득을 한 번에 얻은 셈이 되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죠?" "사실은 이번 대의 마왕님께서 다이아나님께 상당한 관심을 표하고 계십니다. " 다이아나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페르세포네는 유독 현재의 마왕에게 상당한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었다. 애초부터 드래곤 정도를 조카사위로 삼는 것이 그다지 탐탁치 못했던 점도 있어서, 에디우스가 다이아나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곁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는 나름대로 대안으로 현 마왕을 고려하게 되었는데, 이미 신들 사이에서는 그 속을 드러낸 바 있다. 페르세포네의 말이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준비가 된 마왕이야 신과 드래곤의 아이에 대하여 평소 끔찍한 애정을 보이던 자신의 여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회가 생기자 옳다구나 하고 그녀와 함께 할 시간과 장소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이아나는 사실 마계로 보낸다는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마계에서 페르세포네의 말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계에 도착하면 여신의 도움을 얻어 당장에라도 지상계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에디우스의 신병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 마족의 마력인만큼 여신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나이트메어의 말에 의하면,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마왕이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에디우스는요?" "그 골드 드래곤은 일단 수면상태에 있습니다. 수 백 년의 장기동면도 하는 드래곤이니만큼 한 달 정도 잠들어 있다고 해도 크게 지장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체가 아닌데도 괜찮은가요?" "본능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마나를 끌어들이는 것은 막아놓지 않았으니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저희들도 드래곤들과 척을 지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그들이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할 이유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나이트메어는 강함을 숭배하는 마족답게 중성적인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투기를 발산하면서 언제든지 도전에 응하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일단 에디우스가 무사한 것에는 안도하면서도 지상계의 일이 걱정이 되었고, 마왕이라는 존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제게 원하는 것이 있는 건가요?" "주군께서는 그저 다이아나님께서 이 곳 마계에서 편하게 한 달을 보내시길 원하실 뿐입니다." "페르세포네님을 만날 수는 없나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페르세포네님이 다이아나님의 부탁을 거절하시지 못할 경우 저희는 계약의 조건을 어기는 셈이 되니까요." "그것이 페르세포네님의 뜻인가요?" "글쎄요. 보통 마계에서 페르세포네님의 현신을 뵐 수 있는 분은 현 대의 마왕과 몇 몇 장로급의 고위마족들 뿐입니다. 제가 지난 번 부름을 받은 것은 저의 능력이 꿈을 조절하는 것이라 영광스럽게 불려나간 것이지, 보통은 저로서는 그 분과 소통할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에디우스가 잘 있는지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저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로 인해 당한 일인만큼 걱정이 되는군요" "물론입니다." 나이트메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을 서서 길을 안내했다. 꽤 넓은 복도를 지나 막다른 곳에 난 방문을 열고 들어간 다이아나는 단정하게 침상위에 누워 있는 에디우스를 볼 수 있었다. "에디." 다이아나는 곧장 그의 곁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고는 손을 잡았다. "세레스님의 신성력으로 가사상태를 깨어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분의 신성력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곳은 일단 페르세포네님의 영역이니까요. 더군다나 그 드래곤은 상처를 입은 상태가 아니라 마력에 의한 구속이 되어 있는 상태인만큼 회복력이나 치유력으로 속박을 풀 수는 없습니다." 다이아나는 겉으로 보이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신성력으로 에디우스를 치료해 보려고 애를 써 보다가 나이트메어의 얄미운 설명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신성력이 미약하게 움직였으나, 에디우스의 상태는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무렵 신계에서도 페르세포네를 둘러싼 신들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었다. 돌연 다이아나가 마계로 강제로 끌려간 셈이 되자, 이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의외로 둔하기로 소문난 헤파이토스였다. 최근 헤파이토스는 창조의 손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이아나에게 보답할 기회를 찾느라 나름대로 꽤 열심히 다이아나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일이 터지자마자 급한 성격대로 형과 누나들을 찾아다니면서 페르세포네를 성토했고, 헤파이토스의 재촉에 못이겨 다이아나가 마계로 간 지 채 한 시간도 못되어 여덟신이 다시 모이에 되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느냔 말이에요. 마족들이 하는 일을 페르세포네 누님이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헤파이토스는 평소에 받던 구박을 되돌리기라도 하는 양 흥분하여 소리치고 있었고, 페르세포네는 그런 헤파이토스를 가소롭다는 듯이 본 척도 안한 채 외면하며 침묵을 지켰다. "잠시만요. 일단 페르세포네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 낫겠어요" 신들이 모인 이후 헤파이토스는 단짝인 포세이스의 지원을 받아 페르세포네를 다그쳤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고, 그 모양을 보던 아테나이가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기고 중재에 나섰다. 페르세포네도 아테나이의 말을 무시하지는 못한 탓인지 그제서야 꼭 다물었던 입을 열 기미를 보였다. "이번 일은 제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이아나를 위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무슨 뜻이니?"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세레스가 묻자 다른 신들도 페르세포네의 설명에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아시다시피, 현재 다이아나는 지상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관여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마족들과의 계약에 관한 것은 결과적으로 다이아나에게 또 큰 상처를 줄 확률이 크지요" "어차피 누님 신전이잖소? 그렇지 않아도 인간계에 마족들이 너무 자주 드나드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 죽겠구먼" "정당한 대가를 받고 마족들이 계약을 하는 것은 이미 세워진 규칙에 따른 것이야. 내가 비록 그들이 섬기는 신이라고는 해도 그걸 막을 이유는 없다는 거지" "그것과 이 사건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 "여전히 둔하구나. 다이아나가 지금처럼 나의 신관들의 뒤를 캔다면 이미 정해져 있는 분란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꼴이 된다는 것을 모르겠니?" 페르세포네가 냉소하면서 가차없이 헤파이토스의 말에 반박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다이아나를 미리 피신시킨 것과 같은 건가요?" 아프로테이아가 염려의 빛을 지우지 못하고 한 마디 거들자 페르세포네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물론 내 신전에서 분란이 있다는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되지만, 어차피 내 속성이 그런 탓이니 그건 이해해 줘야죠. 어차피 신전에서도 장기간 끌 생각은 없어요. 일단 그들이 내세운 기간이 한 달이니까요. 그 동안 다이아나가 마계에 있다면 못 볼 꼴도 안 보는 셈이니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닌가요?" 귀가 얇은 편인 포세이스와 헤파이토스는 열심히 페르세포네를 규탄하다 말고 그녀의 이런 설명에 그것도 그럴싸하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페르세포네의 배려는 고마워요. 하지만, 현실에서 도피해서 안 좋은 상황을 넘긴다는 것은 다이아나가 원하는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더군다나, 이번에 에디우스까지 마계로 잡혀 갔는데, 하비우스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군요" 과연 세레스는 다이아나의 어머니답게 딸의 의도를 중시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본인의 의지를 거스르고 강제적으로 보호된다는 것은 다이아나의 성격을 보아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다. 세레스의 말에 또 다시 귀가 얇은 두 명의 남신은 페르세포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그것 봐. 어쨌든 다이아나가 원하지도 않는데 납치한 거잖아" "그러게" 하지만, 일단 엎질러진 물이었다. 페르세포네로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저지른 일이기도 했음을 노련한 포이브론이나 아테나이 등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쓸 데 없는 불화를 조장하기 싫은 탓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단, 마족들이 계약을 맺은 이상에는 강제로 깨도록 신탁을 내리면 계약에 참여한 마족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구요" 페르세포네가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라는 듯이 말하자, 다른 신들은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기가 죽은 듯이 고개를 수그린 페르세포네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에디우스와 다이아나의 신병에 문제가 없으니 드래곤들의 개입을 막아 달라는 말을 했고, 자칫 잘못하면 마계족과 드래곤들의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라, 할 수 없이 아테나이는 유스테우스와 하비어스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현신을 해야만 했다. 페르세포네의 의도 자체가 다이아나가 분쟁에 휘말려 다시 고통을 당할 일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선의였으므로 유스테우스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고 - 아버지들은 딸들 아파하는 꼴은 못 보게 마련이다 - 하비우스는 에디우스에 대한 일에 기분이 상하기는 했으나, 어차피 드래곤의 시간관념상 한 달이란 순식간이라고 볼 수 있었고, 아테나이가 페르세포네의 사과말까지 전한 터에 굳이 마계와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결국 신들의 회의는 애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페르세포네가 벌인 일의 뒷감당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돌아서는 페르세포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을 아는 이는 상당히 드물었다. 다이아나는 최후의 희망으로 생각했던 신들의 개입이 이처럼 어이없이 무산되고 말았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마계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후우, 어찌보면 이번 일은 마계에서 푸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다이아나는 자신이 잡혀 있는 상황을 부모님이 아신다면 최소한 어떤 조치는 취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도움을 기다린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해 본 결과 그녀가 조사하던 일들이 결국은 마족과의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오히려 마계에 있는 동안 마족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다. 의외로 다이아나에 대하여 어떤 신병의 구속도 행해지지 않았고, 사정 설명을 한 나이트메어는 마계에서의 생활을 즐기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시녀로 소개된 예쁘장하게 생긴 마족 소녀 한 명을 남겨둔 채 미련없이 사라졌다. "저, 이걸......" 소녀가 자신의 팔찌에서 하나의 보석을 분리하여 조심스레 내밀었다. 다이아나가 그 보석을 잡자 보석 자체가 다시 하나의 팔찌 형태로 변환되었다. "감시하는 느낌을 받으실까봐, 저는 부를 때에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팔찌를 끼신 후에 에린이라고 말씀하시면 어디 계시든 제가 달려갈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에린인가요?" 소녀는 다이아나가 자신에게 존대를 하자,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에서는 얼마든지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바깥 정원을 산책하셔도 상관 없구요." 소녀는 설명을 마친 후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방과 에디우스가 있는 방을 비롯한 기본적인 건물의 구조를 머리 속에 담으면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건물 안을 서성이는 동안 꽤 여러 명의 마족들을 볼 수 있었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보자마자 사라졌기 때문에 미처 말을 걸어보지도 못하였다. 결국 다이아나는 밖으로 통하는 큰 문을 찾아내었고, 크기에 비하여 상당히 쉽게 열린 문 밖으로 펼쳐진 광경에 잠시지만 자신의 처지를 잊고 감탄을 했다. 마계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두컴컴함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하이센의 궁정 정원과 비교한다고 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모습의 정원은 그 규모가 훨씬 컸고, 하이센의 것보다 아기자기함은 떨어져도, 전체적인 웅장함이 대단했다. 특히 방사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원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와 그 주변을 둘러 뻗어 나가는 길 사이사이마다 세워진 조각상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이 보였다. 다이아나는 건물로부터 이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 분수대 앞까지 이른 후 조각상들을 살펴 보았다. 분수대 중앙의 조각은 나이트메어와 같이 인간형의 모습에 날개가 달린 마족의 모습이었고, 주위를 둘러 싼 조각상들은 여러 형태의 마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8갈래로 뻗은 길 사이 사이에 각각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으므로, 조각상의 총 숫자는 중앙의 것까지 합하면 모두 9개였는데, 대부분은 인간의 모습에서 약간 다르게 뿔이 나 있거나 꼬리가 달린 모습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야수의 모습을 한 부분의 비중이 커졌다. 시계방향으로 주욱 돌면서 마족들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때 바로 뒤에서 어린 아이 특유의 높고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건 전투형태의 마족들의 모습이야. 어차피 이 안에서는 다들 인간형으로 돌아다니니까 실물을 보긴 어려울껄?" 건물 안에서도 거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기에 살짝 놀란 다이아나는 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휙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그녀의 가슴에 닿을 듯 말 듯한 작은 키를 가진 소년이 치기 어린 눈빛으로 다이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이 마계가 아니고 소년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이 조금 밝은 색이었다면, 레오나르도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천사의 모습이 바로 이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드리우고, 선명한 보라색의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다이아나는 습관적으로 존대를 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품이 갑자기 변할 리는 없어서, 이곳에 있는 소년이 마족이라는 점을 감안하고라도 다이아나의 입가에는 마계에 강제로 오게 된 후 처음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년은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도 생글거리는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대답을 했다. "난 베르헤안이라고 해. 뒤로 상당히 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귀찮은데다가 본명을 모두 알려주는건 마계에서는 금지된 일이거든. 넌 예쁘게 생겼으니까 그냥 베르라구 불러두 돼" "예. 만나서 반가워요 베르님. 전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소년은 잠시 탐색하는 듯한 표정으로 다이아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결론을 내리는 어조로 말했다. "네가 그 인간이구나? 이번에 계약의 대가로 인간이 여기서 머무르기로 했다는데, 그게 너니?" 성인에 가까워 보이는 다이아나는 존대말을 소년은 반말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소년의 반말이 그다지 듣기 싫지는 않았다. 다이아나는 성 내에서 자신을 피하던 마족들을 생각하면서 이 소년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워졌다. "네. 제가 그 인간이에요. 그런데, 혹시 저와 이야기를 하지 말라든가 하는 말은 못 들으셨나요?" "그렇게 존대를 하면 불편하지 않아? 그리고, 너와 얘기하면 안 된다구?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존대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래요. 저는 저 건물 안의 마족들이 모두 저를 피하는 눈치라서 혹시 베르님은 모르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아, 상관 없어. 그것보다도 그 말투 좀 어떻게 해 봐. 나는 존대를 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너만 나한테 존대를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인간의 나이야 아무리 해도 어릴 수 밖에 없지만, 년 수로 따지는 나이란 무의미한 거라구 들었어." "음.. 그럼 제가 베르님께 그냥 반말을 해도 될까요?" "베르님이 뭐야? 그냥 베르라고 불러. 나도 이미 편하게 말하고 있잖아" 소년은 답답하다는 듯이 약간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을 했는데, 그 또한 상당히 귀여워서 다이아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 곳에는 어떤 마족들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 다이아나가 의식적으로 존대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물었다. 소년은 바뀐 어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짓다가 그녀의 질문 내용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일단 여긴 마왕성이야. 이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서열 100위 이내의 마족들과 이 성에서 일하는 마족들 뿐이지. 하지만 여기서 사는 마족은 마왕과 직속 친위대에 속하는 8수장이라구. 아까 네가 보던 조각상들 있지? 그 종족들의 대표들이 여기서 살고 있는 셈이지. 실제로 성 안에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지만." "성 안의 다른 공간이라구?" 베르의 설명에 의하면 마황성의 2층과 3층의 네 귀퉁이에 위치한 각 수장의 방은 실제로는 이공간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그들의 성이 나타난다고 했다. 즉, 마왕성에 기거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8대 수장들은 자신의 성과 마왕성을 연결해 놓고 살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장로들도 다들 그런 식으로 연결된 공간의 방을 가지고 있었는데, 워낙 잔소리들이 심한 탓에 얼마 전에 연결 통로를 없애 버렸지. 덕분에 조용해져서 좋지 뭐!" 원래 이런 식을 연결된 방이 훨씬 더 많이 있었는데, 현재의 마왕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해서 호위에 속하는 이들을 제외한 마족들과의 연결통로를 모조리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하여, 실제로 다이아나가 건물 안에서 만난 마족들은 대부분이 이 궁에서 일하는 하인 격의 마족들이라고 했다. "마계의 계급은 어떻게 되는데?" 다이아나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여러 가지 이야기로 미루어 고위마족이나 하위마족과 같은 지상계에서 이름 붙인 것들은 알고 있었으나, 베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시각에 의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베르는 심각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는 마치 어려운 것을 외듯이 마족들의 위계질서에 대하여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일단, 마왕 아래로 8대 장로와 8대 호위가 있어. 장로들의 경우엔 종신직이고 일종의 명예직이라고 할 수 있지. 대부분 전대 마왕의 호위들이 장로가 된다고 보면 맞아. 8대 호위는 아까 말한 것처럼 각 마족의 종족을 대표하는 수장들이지. 대부분 서열 10위 이내의 마족이지만, 각 종족마다 하나라는 제약이 있어서 체질적으로 좀 약한 종족의 경우에는 서열은 좀 처진다고 봐야하지. 마족의 서열은 800위까지 매겨지고 있고, 이 안에 속하는 마족들은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소위 '고위마족'이라고 봐도 문제가 없을 거야." "그 서열은 어떻게 매겨지는데?" "그건 좀 복잡해. 일단 각 종족별로 300명까지를 서열 대상에 올리고, 2400명 중에서 강한 순으로 순위가 매겨지는 거지. 일단 한 번 정해진 순위는 44년마다 한 번씩 서열을 정하는 날에 결투를 통해서 다시 매길 수 있어" "그럼 마왕도 그 순위에 따른 거야?" "아니. 마왕은 좀 특별해. 마왕은 페르세포네님의 신탁과 현신에 의해 정해지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마계 최고의 힘을 가지게 되거든. 우리의 마력의 근원이 암흑과 파괴의 힘이기 때문에 마왕을 당해낼 수 있는 존재는 마계에는 없다고 봐야해" "서열을 정하는 그 일은 모든 마족이 함께 하는 거야?" "아니지. 그 날을 기해서 서열을 높일 마족들이 자신의 상대가 될 마족을 정해서 결투를 신청하는 거야. 따로 결투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서열을 그대로 가지게 되는 거지. 예를 들어 88위가 70위한테 결투를 신청해서 이겼다면 70위부터 87위까지 서열이 하나씩 밀리게 되는 셈이야" 베르의 설명을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결투에 의한 순위제 때문에라도 마족들은 전투력에 있어서 끊임없는 수련을 계속해야만 했고, 힘에 의해 갈리는 마족들간의 순위는 다음의 순위변동이 있는 날까지는 아주 절대적이었다. 다만, 미성년인 마족들은 이러한 순위싸움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고, 드래곤들이 헤츨링에 대하여 절대적인 보호를 하는 것처럼 보호가 되었다. 하지만, 드래곤과 마족들의 절대적인 차이는 그런 어린 마족들조차 성인이 아닌 자신들끼리의 다툼에서 다치거나 죽는 것에 대하여는 어른들이 절대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하여 이런 면에서는 다른 종족들에 의해 살해되는 헤츨링에 대하여 절대적인 보복을 하는 드래곤과 크게 차이가 있었는데, 드물지만 만일 어린 마족이 지상계에 섣불리 나갔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한다고 해도 마계에서는 '인과응보'로 받아들여 방관한다는 사실이다. 마족들은 전투종족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에 대하여 상당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리다고는 하지만, 타 종족에게 패한 마족에 대하여 전혀 동정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더군다나 제 능력을 모르고 규칙을 어기고 지상계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데다가 마족의 명예를 더럽힌 일로 치부되어 방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베르와의 대화를 통하여 마계에 대한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보통 마족이 500살에서 1000살 사이에 성마족으로 급변하는 일종의 성인식을 치르게 된다는 것과 일정한 기간 동안 마치 누에고치처럼 움직이지 않다가 성마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한 절차를 치룬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성마족이 되는 기간은 50년을 주기로 99일 동안 나타났고, 마족에 따라서 성마족이 되는 나이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했다. 베르는 다이아나와 함께 정원에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다이아나 혼자서 둘러 볼 때는 열지 못했던 여러 방문들을 가려서 열어 가면서 각 장소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이제 점심 시간이야. 나도 내 거처로 가야해" 어느 새 다이아나의 방까지 이르렀을 때 베르는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말을 던지고는 총총히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아무래도 점심 시간에 늦어서 야단을 맞을까 걱정하는 아이의 모습이었기에 다이아나는 차마 그런 소년을 잡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에린을 불러 점심을 해결한 다이아나는 개인 연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큰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실력을 점검했다. 그녀는 몇 가지 동작을 해 보고는 마계에서 내내 약간 무거워진 듯한 걸음걸이의 원인을 알아냈다. 마계는 지상계보다 약간 높은 중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점프력이나 몸의 움직임이 약간씩 둔해졌고, 마왕성 안을 돌아다닐 때에도 몸이 무거운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높여진 중력에 맞추어 몸을 익숙하게 해 두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꾸준히 수련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체술과 검술 훈련을 마친 다이아나는 마법을 사용해 보려고 했지만, 마나의 배치에 실패했다. 마계에 존재하는 마나는 밀도가 높고 약간 성질이 달랐다. 그녀가 마나의 저장을 시도하자 심장 주변에 모여들어야 할 마나가 몸의 주변에서 흡수되지 못하고 빙빙 돌다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실상 마족은 마나를 일정 부분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모두 마나의 저장고와 같았다. 고위마족들은 대부분 심장을 2개 이상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마왕의 경우 3개의 심장이 있었다. 암흑의 성질을 가진 마계의 마나는 마족의 몸에서 마력으로 바뀌기도 하고 그 마족의 몸을 구성하는 일부분이기도 했다. 마족은 변태기를 맞아 이 마력을 저장하는 몸의 구조가 바뀌면서 더욱 큰 마력을 소유하게 되며, 마력 자체가 인간의 근육이나 마법사의 마나, 신관의 신성력의 역할을 모두 하고 있었다. 인간이 몸으로 마계의 마나를 저장하려면 일단 몸의 세포 부분부분에 마력이 저장되어야 했지만, 이러한 요령을 알지 못하고 심장에 마나를 저장하려고 시도했던 때문에 다이아나의 시도는 무산될 수 밖에 없었다. 다이아나가 나름대로 마계의 첫 날을 베르히안을 통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무렵, 지상계에서는 뮤리엘이 이 둘의 행방을 찾기위해 모든 능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카이젠이 마련한 연회에서 밤 늦게 돌아온 뮤리엘은 습관적으로 다이아나의 방에 들렀다가 초저녁에 나간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신전에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었던 뮤리엘은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다시 다이아나의 방을 찾았지만 그녀는 물론이고 함께 나간 에디우스의 방에서도 돌아온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당황한 뮤리엘은 스탠이트를 동행하고 어둠의 신전을 방문했지만, 이시니엘이라는 신관도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에 대하여도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약간의 미심쩍음이 순간적으로 거대한 불안감이 되어 뮤리엘을 덮쳐 왔고 그녀는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법을 취했는데, 그것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켈러비안은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딸의 모습을 수정구로 보고는 그들을 찾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에디우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과 다이아나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들 둘에게 무언가 해결 불가능한 일이 닥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입장에서는 밝힐 수 없는 사실들을 뒤로 하고 뮤리엘의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켈러비안의 생각은 상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고, 에디우스가 일을 당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신감과 일통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판단을 내린 에디우스가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 지, 이 시점에서 켈러비안이 알 리가 만무했다. 뮤리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던 그 시간에 다이아나는 지상에서와 별 다를 바 없는 점심을 먹고 에디우스가 잠들어 있는 방에 앉아 있었다.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어느 틈엔지 뒤쪽에서 나타난 나이트메어가 말을 걸어왔을 때, 다이아나는 잡고 있던 에디우스의 손을 놓고 상당히 단호한 태도로 일어섰다. "일단 강제적으로 이 곳에 있다는 것이 불편하군요. 물론 에디가 이런 상태로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 외의 물리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라면 불편하지 않아요. 되었나요?" 표정의 변화 없는 냉정한 어투가 나이트메어에 대한 그녀의 바뀐 심사를 내보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비록 자신이 곤란할 때 도와주었다고는 하지만, 이 사건의 음모자의 하나인 그를 더 이상 친근하게 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이트메어는 오전에 만났던 때와 사뭇 달라진 다이아나의 태도에 잠시 멈칫했지만, 특유의 웃음을 지으면서 부드럽게 응대했다. "마왕께서 오늘 저녁에 초대를 하셨습니다. 물론, 참석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거절하셔도 좋다는 전언입니다." 나이트메어는 다이아나의 태도로 보아 거절할 것이 분명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즉각적인 거절의 말 대신 다이아나는 다른 말로 답해왔다. "마족은 강함을 숭배한다고 들었어요." 질문과 전혀 관계 없는 듯한 대답에 나이트메어는 잠시 당황한 빛을 띠었지만, 곧 성실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론입니다. 마왕님을 제외하고는 우리 마계의 서열 자체가 바로 힘에 의해 이루어져 있지요" "당신은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알고 있을 거에요. 제 능력은 마족들에 비해서 어떠하지요?" 나이트메어는 뜻밖의 질문에 약간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마족은 의외로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가식을 위한 거짓말 따위는 경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물어 보는 것에 대하여 솔직히 대답을 한다면 안 그래도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그녀에게 불쾌감만 더 안겨 줄 것 같았다. 다이아나는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제 기분을 고려할 것은 없어요. 어차피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저의 의사를 존중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에 비하여 제 능력에 대하여 객관적인 대답을 한다고 해서 제 기분이 더 나빠지거나 할 리는 없으니 솔직히 말해 주시기 바래요" 나이트메어는 다이아나에게서 전혀 의외의 면을 보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다이아나는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약한 마음이 되었을 때가 그다지 당차거나 냉정한 면은 볼 수 없었고, 자애의 여신의 딸답게 온화함과 사물에 대한 애정만이 느껴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 앞의 여인은 그 때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논리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나이트메어는 그녀가 단지 세레스여신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냉정하기로 소문난 실버드래곤의 아이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재 다이아나님의 마법실력은 7써클, 그리고 검술은 마스터급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지상계에서 중급의 마족과 대치할 정도이고, 운이 좋으면 고위마족과 맞서 살아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이긴다는 것은 무리겠구요. 만일 이 곳 마계에서라면 다이아나님은 실력으로는 하급 마족 한 명을 겨우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되도록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나이트메어는 눈치를 살피듯 다이아나의 표정을 관찰했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무표정한 얼굴은 바뀐 것이 없었고,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곳 마계에서 저라는 인간의 가치는 하급 마족 하나 정도의 힘을 가진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지상계의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은 다이아나의 심사를 고려함이었다. 실제로 마족이 모든 힘을 낼 수 있는 마계라는 조건이 붙었을 경우의 결론이 다이아나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이트메어가 가까스로 피해간 한 마디의 결론을 다이아나는 자신의 입으로 초연하게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님은 특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살벌한 결론 탓일까? 급히 부연을 하려는 나이트메어의 말미를 끊으면서 다이아가 다른 질문을 했다. "마족은 출생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힘을 먼저 본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우습군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왕이 저 같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죠?" 이 부분은 나이트메어가 이야기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 또한 완전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고, 대충 짐작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고, 그런 짐작을 함부로 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이아나는 처음과는 달리 불안한 낯을 한 마족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유추와 추론을 반복하고 있었다. 일단 마왕을 만나 보면 어느 정도 의문이 해소될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고위급인 눈 앞의 마족도 마왕의 정확한 심산을 모르는 듯 했다. "저녁을 함께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엉뚱한 질문을 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나이트메어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게 된 것에 대하여 기뻐해야 할 지, 이 어린 인간 소녀의 말에 평상시 내심을 표현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심리를 가지고 노는 것을 장기로 하는 자신이 동요했다는 점을 부끄러워야 할 지 헷갈리는 심정이 되었다. 일단, 마왕의 제안이 받아들여졌으므로 자신의 심정에 대한 분석은 나중에 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시간 전에 준비를 하실 수 있도록 에린에게 일러두도록 하지요" 나이트메어는 무의식적으로 다이아나의 다른 말을 기다렸으나, 오전과는 달리 그녀는 용건이 다 끝났으니 볼 일 없다는 듯한 태도로 그를 무시했다. 무의식중에 다이아나가 풍겨내는 자애의 빛에 현혹되었던 나이트메어는 오전에는 약간 남아 있던 그 따스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승낙을 전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마계에서 마왕이 차지하는 지위는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전대 마왕의 혈족이 다음 대의 마왕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끔은 변덕스러운 페르세포네의 뜻에 따라 전혀 새로운 혈족에서 마왕이 탄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마왕이란 것이 탄생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300살을 전후한 어린 마족들 중 한 명을 페르세포네가 후계로 지명하는 것이다. 이 일은 마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마족의 죽음을 천 년 앞두고 한 번씩 일어났다. 따라서 보통 마왕이라 하면 1300살에 즉위하여 일만 살의 수명을 채울 때까지 무려 8700년을 마계의 절대자로 군림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페르세포네의 지명을 받는다고 해도 실제로 성장의 변태과정에 들어가기 까지는 그 자신조차 스스로 다음 대의 마왕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다만, 페르세포네와의 교감을 할 수 있는 마왕만이 다음 대를 이을 마족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이들은 변태 과정을 거치고 나면 숨길 수 없을 정도의 마력과 힘을 가지게 된다. 마왕이 마족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고 해도 마왕들끼리의 힘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왕의 힘의 근원이 페르세포네인만큼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몇 명의 마왕들은 현격하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현 대의 마왕은 바로 그런 경우로서 역대 마왕 중 최고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였다. 2000살의 그가 마왕으로 지명을 받은 시기는 특이하게도 전대 마왕의 수명이 5천년은 족히 남은 시기였다. 하여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전대의 마왕은 마족으로서는 지나치게 짧은 생애를 보내고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원인은 아직도 마족들 사이에서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그 마왕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온 나이트메어는 충성을 맹세한 자신의 군주를 경외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참석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이아나의 대답을 전하는 나이트메어의 어투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마왕의 앞에서 누군가를 높여서 말하는 것은 마족 사이에서는 거의 금기시된 일이었다. 신급이 아닌 다음에야 마족으로서는 마왕의 앞에서 존대를 붙여 줄 존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이트메어는 지금 다이아나에 대하여 존대를 깍듯하게 사용하고 있었고, 그 말을 듣는 마왕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흠, 그래? 의외로군." 간단하게 말을 끝냈지만, 그 뒤에 붙은 의문사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 빠른 마족은 그가 본 그녀의 상태와 대화의 내용을 모두 그대로 전했다. 물론 그 내용 중에는 마왕의 의도에 대한 다이아나의 질문과 나이트메어의 답변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말을 하면서 나이트메어는 마왕의 의중을 읽기 위해 그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마왕은 그의 호기심을 눈치채고는 빙긋 웃으면서 질문을 했다. "너도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이상한가?" 나이트메어는 긍정도 부정도 하기 껄끄러운 상태여서 약간 주저하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마왕은 그런 그를 보면서 드물게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마력과 무력도 힘이지. 무엇보다 대표적인 힘일 수 있어. 하지만, 그녀는 또 다른 부분에서 상당한 힘의 소유자이지" 나이트메어는 그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나 마왕은 더 이상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그에게 물러날 것을 명했다. 다이아나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가 마왕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페르세포네와 만나려고 해도 마왕의 재가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며, 무엇보다 이번 일을 암묵적으로 허락한 존재가 마왕임을 안 이상에는 그의 의중을 알아야만 했다. "저어......" "말 해 보세요" 에린은 저녁식사를 위한 옷을 준비해서 입는 것을 도와 주었고, 다이아나는 별 다른 반박 없이 드레스를 입었다. 무엇보다 지상에서부터 입고 온 옷은 입은 채로 하루를 잔 상태였고, 사소한 일에 대하여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마족들의 취향을 나타내듯이 드레스는 아름다웠지만, 의외로 행동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를 갖추고 있었다. 칼라임의 귀족들이 입는 이상한 속옷도 필요치 않았고 치맛단도 지나치게 길거나 폭이 좁은 편이 아니어서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었다. 이미 결심했던 것이 아니어도 드레스 종류라면 이런 류의 옷은 얼마든지 환영인 터라 군말 없이 옷을 갈아 입었는데, 에린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듯해서 다이아나를 답답하게 했다. 다이아나가 특유의 미소로 에린에게 말 해 보라고 하자, 소녀처럼 보이는 에린은 주춤거리면서 마왕의 전갈을 전했다. "저, 지금 모습이 원래 모습이 아니시라고... 그래서......" 다이아나는 보기 힘든 은빛과 금빛으로 만들어진 드레스가 자신의 원래의 머리색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알아챘다. 더군다나 장식품으로 딸려 온 것들은 온통 푸른 색의 보석들이어서 그녀의 눈 색상까지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에린이 어렵게 전한 말에 피식 웃고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받지를 빼어 들었다. 순간적으로 다이아나의 화려한 머리카락이 제 빛을 되찾자 에린은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모습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제 색을 찾은 머리카락과 눈은 고위마족들이 인간형으로 변신했을 때의 미모보다 월등했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린을 조용히 불러도 반응이 없자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아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이아나는 허리를 곧게 피고 마왕을 만나기 위하여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하고 아름다워서 그녀를 보면 곧바로 사라지곤 하던 건물의 하인들이 잠시동안 멍하게 여기 저기 서 있는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곳입니다." 에린이 큰 문 앞에서 멈추어서서 자신은 들어갈 수 없음을 암시하자, 다이아나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스르르 열리는 문 안으로 주저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계 "어서 오십시오" 다이아나와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는지, 나이트메어가 문 안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긴 식탁에서 차려지는 정찬을 상상하고 있었으나 문 안쪽은 의외로 상당히 아늑한 느낌의 작다면 작은 방이었다. 덕분에 다이아나는 문 안에 들어서자 마자 마왕으로 짐작되는 존재를 볼 수 있었지만, 일단 응대하는 이는 나이트메어였으므로 그가 몇 걸음 되지 않는 자리로 안내하는대로 따라 걸어갔다. 마왕은 나이트메어가 다이아나를 인도하여 맞은 편 의자까지 데려오자 짐짓 인간의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를 맞았다. 처음 문 앞에서 볼 수 있었던 마왕의 옆 모습은 검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상당히 하얀 열굴과 전체적인 윤곽이었는데, 정면으로 마왕의 모습을 본 다이아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베르히안을 떠올렸다. "페르세포네님께서 조카로 인정하신 성녀를 만나게 되어 반갑군" 마왕의 인사말에는 다이아나가 드래곤의 딸이라는 것, 혹은 세레스 여신의 딸이라는 점보다는 페르세포네와의 관계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베르와 닮았지만, 어른이 분명한 마왕을 보면서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이아나의 인사말은 성의없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극진한 예의를 갖춘 것도 아니었고, 불쾌하다는 느낌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마왕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감정을 전혀 표현하지 않고 그저 예의를 지켰다는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일단 앉지" 마왕이 자리를 권하자마자 나이트메어가 익숙한 동작으로 의자를 빼 주었고, 다이아나는 마왕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이아나는 마왕과 베르히안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므로 처음의 무심하고 냉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키면서 마왕을 쳐다보았다. 마왕 또한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다이아나가 정면에 시선을 두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에 비하여 마왕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살피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마련된 연인을 위한 자리가 있다면 딱 이러하리라 싶을 정도인 식탁인지라, 일단 마주한 이상은 다이아나에게도 마왕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족들이 힘을 숭배하는만큼 심미안도 높다고 자랑하던 페르세포네의 말대로 마왕은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유약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외견은 눈 위에 자리하여 위로 힘껏 뻗어 있는 짙고 검은 눈썹으로 인해 강인한 의지를 가진 듯이 모이게 했고, 긴 속눈썹의 여성스러움을 그 아래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풍기는 심연같은 표현하기 힘든 빛이 상쇄하여 남성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길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웨이브 없이 어깨를 덮고 내려와 있었는데, 그의 동작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면서 시리도록 검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보던 마왕은 습관적인 듯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대화를 시도했다. "아, 이런 실례를 했군. 내가 이번 대에 페르세포네님의 은총을 입은 마왕이오. 키케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굳이 대답이 필요치 않은 말이었기에 다이아나는 알았다는 표시로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키케르는 그런 다이아나의 태도가 흥미롭다는 듯이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나이트메어 말로는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하던데, 의외로 식사 초대를 허락했더군"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고 마계의 최고 권력자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으니까요" 키케르는 다이아나의 태도로 보아 자신의 말을 무시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이아나가 의외로 순순히 솔직한 대답을 하자 약간 놀랍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흠, 상당히 특이한 성품이군. 처음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듣기 힘들 줄 알았는데?" "정보를 얻으려면 저 또한 대화를 해야겠지요" 어찌보면 상당히 적극적인 답변을 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다이아나의 무심한 어투와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마왕은 계속해서 '정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그녀에게 도전하듯이 그리고 선심 쓰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궁금한 것이 무엇이지?" "저를 여기 붙잡아 두는 데에 찬성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전후사정으로 보아 이번 일에서 제가 잡혀 오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보탠 이가 키케르님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궁금한 것은 힘을 숭배하는 마족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별 거 아닌 저 같은 존재를 잡아 놓는 것을 계약의 대가로 받아들인 이유입니다." "일개 하급마족의 전투력 정도의 힘밖에 없는 네게 왜 관심을 가지는 지가 궁금한 건가?"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군" 마왕이 도발적인 언사를 내뱉었지만 상대는 다이아나였다. 그녀는 전혀 기분이 나쁘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무감한 어투로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내리신 겁니까?" "힘이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전투력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야말로 저차원적인 생각이지. 이 마계에서 비할 데 없는 전투력을 가졌다는 나라고 해도 내일 당장 페르세포네님의 뜻이 있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최고신 일곱의 조카로서 사랑을 받고 있고, 최고신 중의 하나를 어머니로 두었으며, 드래곤 일족에서도 영향력인 큰 아버지를 두었지. 더군다나 너라는 존재 하나만 있다면 아마 저 지상계에서 굴복하지 않을 인간은 없을 것이다. 어떤 신의 신관도 너만큼의 신성력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니까" 실상 마왕은 페르세포네로 인하여 다이아나에게 관심을 가졌을 뿐, 그녀의 주위관계를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해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한 일은 그 자신의 성격상 전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부러 마치 그녀를 이용하려는 의도라도 있는 듯이 그녀를 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저를 통하여 페르세포네님의 관심을 더 얻고자 한다고 주장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인정할 수 없다는, 아니 당연히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고 어투였다. 마왕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더니 되물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을 할 여지가 없겠지요. 거짓으로 꾸며낸 말 따위는 더 들을 가치가 없으니까요" "호오, 어떻게 거짓이라고 단언하지?" "현 마왕은 페르세포네 이모님이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관을 맺어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조카라고는 하지만, 그 사이를 잇는 역할 따위는 처음부터 두 분 사이에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페르세포네님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그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군요. 첫 인사말에서도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데다가 페르세포네님을 생각해서라도 다른 신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으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흠. 그렇군" 마왕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그녀의 분석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실상, 다이아나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키케르는 다이아나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다이아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키케르는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도를 알려주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수식어를 생략한 직설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마왕은 재미있어하던 표정을 순식간에 바꾸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그야말로 마족다운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에 대하여 흥미가 있었다. 첫째 나도 수컷이라 아름다운 이성에 대하여 관심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 관심을 가진 네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실상 마족 중에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넘칠만큼 많음을 다이아나도 알고 있었기에 결국 마왕의 대답은 단순히 호기심 충족을 위해 그녀를 이곳에 오게 했다는 것과 같았다. 실상 마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힘 있는 존재가 힘 없는 존재에 대한 배려를 할 필요가 없는. 다이아나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터무니없는 마왕의 대답에 대하여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은 채 묵묵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했다. 자신의 대답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반응을 예측하고 있던 키케르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또다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흠. 정말 특이하군. 조금 무리해서 데려온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걸? 무엇 하나 예상처럼 행동하는 법이 없군" "......" "일단, 계약은 계약이니만큼 너는 한 달 꼬박 여기 있어야 한다. 뭐 강제적으로 끌고 온 것이니만큼 그 대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 안에서는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이 말을 끝내면서 무엇인가 신호를 보냈는지, 몇 명의 마족들이 들어와 식탁 위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자네도 앉지" 나이트메어는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도 계속 옆 쪽에 서 있었는데, 식탁에 차려진 식사는 3인분이었으므로 마왕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나이트메어는 마왕에게 감사하다는 뜻의 인사를 하고는 권해진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런 쪽엔 영 재주가 없으니 자네가 식사 대화를 주도하도록 하게" 나이트메어는 꿈을 주관하는 마족인만큼 인간의 여성들이 좋아할 말과 행동을 하는데 능숙했다. 그는 식사 내내 음식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숙달된 언변으로 늘어놓았다. 하지만, 마왕이 오히려 그의 농담에 몇 번 웃음을 터뜨렸을 뿐, 그가 목표로 했던 대상은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 꼭 대답이 필요한 경우에만 입을 열어 실례되지 않을 정도의 짧은 대답만을 했다. 다이아나가 마왕과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마왕성의 많은 방 중 일반 마족의 출입이 금지된 방에서는 또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깔끔한 방 안에는 별다른 가구 없이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황금빛의 남자가 그림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닫혀있던 방문이 슬쩍 열리는 듯 하더니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다이아나가 없는 틈을 타서 에디우스가 있는 방에 조용히 들어온 존재는 암청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었다. "흠, 이게 그 골드 드래곤이란 말이지?" 침상 옆에 붙어서 여인은 스스럼 없이 에디우스의 몸에 손을 가져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온 몸을 더듬었다. 한참을 그런 행태를 보이던 여인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다시 혼자말을 줄얼거렸다. "폴리모프라고는 해도 이 정도의 몸이라니!" 고개를 들어올린 여인의 눈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디 붉었다. 그 눈동자에 지지 않게 꽃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가 들어났다. 청색의 머리카락과 붉은 색의 눈동자, 흰 피부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지독할 정도의 요염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녀가 에디우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욕망 그 자체를 옮긴 양 이글거렸고, 참기 어렵다는 듯이 계속햇거 입술을 핥으면서 드러나는 붉은 혀는 그 증표인 양 타액으로 젖어 반짝임을 보이고 있었다. 에린은 지나치다가 방문이 열린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다가와 방문을 닫으려다 그녀의 모습을 목격했다. 분명히 출입이 금지된 곳에서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에린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에 돌아본 여인은 전혀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발견한 에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침상 옆에 붙어선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도 이 사내가 탐나는 게냐?" 여인은 보란 듯이 에디우스의 몸을 쓸어 내리면서 에린에게 말했다. 에린은 그 여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에린뿐만 아니라 마족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에린은 여인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면서 부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여인은 요염한 미소와 함께 한술 더 떠 에린을 몰아쳤다. "그런데 왜 안 가고 서 있는 거지? 오호라! 내 아이들과 함께 놀아보고 싶은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그럼 냉큼 꺼지지 않고 왜 거기 있는 거지?" 여인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미소가 더 무서워 보였다. 에린은 움츠려드는 자신을 겨우 달래면서 가까스로 자신의 소임을 생각해내었다. "하, 하오나, 이 곳은 출입이 금하여진 곳입니다" 에린은 마왕으로부터 직접 내려진 명을 거스르는 것보다는 눈 앞의 여마족에게 할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눈 앞의 여인이 무섭다고 해도 마왕의 분노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일단 경고를 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다 한 셈이라 억지로 용기를 내어 말하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나름대로 돌려서 한 협박이 통하지 않자 여인은 마음을 바꾸어 먹은 듯했다. 아무리 사내가 탐이 나도 마왕의 의지를 거슬렀다가는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쉬운 빛이 남은 눈으로 침상위의 에디우스를 다시 한 번 핥듯이 바라보고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이름이 뭐지?" "에린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물어보는 의도를 모르지 않는 바, 에린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아주 예쁜 아이구나. 입술도 참 예쁘군" 여마족은 손을 들어올려 길게 기른 손톱으로 에린의 입술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에린은 차마 피하지 못하고 몸을 떨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예쁜만큼 가볍지는 않겠지?" 그녀는 이 일에 대한 침묵을 강요하고 있었다. 에린은 차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수긍의 감정을 표시하려고 애썼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손톱 끝이 입술을 할퀴고 지나갈 듯하여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여마족은 에린의 눈에 담긴 간절한 빛을 보고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남기고 유유하게 문 밖으로 사라졌다. 에린은 얼른 에디우스의 상태를 살펴 보고 별다르게 변한 것이 없음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각, 다이아나아 마왕 키케르의 식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이트메어의 눈물겨운 노력은 결국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으나, 그 자신을 비롯하여 셋 중 누구도 그러한 사실에 별로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식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다이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페르세포네님의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왕께서도 동의를 하신 것입니까?" 키케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동의하고 말고가 있나 마족들이야 지상계에 나가 노는 것을 즐겨하니 계약의 조건만 맞는다면,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지" "키케르님은 전혀 상관이 없으시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나야 별 상관 없지. 계약은 어차피 각자에 속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그걸로 끝인가?" "네?" "따지지 않는군?" "그래봐야 별 소용이 없을텐데요" 다이아나의 말에는 어떤 책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족이라는 종족의 특성에 대하여 디아과 엘프마을의 일 이후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 왔다. 그녀가 본 마족이라는 존재는 자신들만의 잣대에 의하여 움직이는 존재였다. 일간적인 양심이나 시시콜콜한 시비를 가리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점은 확실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나름대로 마족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너의 그런 점이 궁금했지" "네?" 느닷없는 키케르의 말에 다이아나가 의문을 표시하자 키케르는 특유의 거침없는 화술로 말을 이어갔다. "그 받아들이는 점 말야. 아무리 자애의 여신의 속성을 받았다고 해도 '이기심'을 타고난 인간이라는 존재인 네가 보여 주는 속성은 상당히 흥미롭거든" "그런가요?" "응. 어찌 보면 그런 속성적인 면은 우리 마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기도 하지. 힘이 있으면서도 굽히고 들어간다는 점도 말이야. 네 행적을 보니 저쪽 세계에서도 늘 그렇게 행동한 것 같더군. 우리 마족들과는 참으로 상반된 일인데, 그게 바보스러워 보이질 않으니 흥미가 가더군" "마족들은 어떠한가요?" "예를 들어 너의 외모. 그 정도면 비슷한 미적인 기준을 가진 어떤 종족에든 충분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야. 헌데 너는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더군. 그리고, 하찮은 존재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노력한다고 들었지. 한 마디로 너는 힘을 남을 위해 사용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대하여 지나치게 관대하단 말이지. 물론 엘프들도 그런 점이 있지만, 그들은 워낙 답답하고 고정된 종족이라 그렇다고 치고 인간들 중에 너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거든"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하하하. 그렇지 너는 왜 인간이 존재하는지 아나?" 마왕은 마치 자신은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다이아나는 인간의 종족적인 존재 의미를 말하는 마왕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중요한 하나는 알지. 신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 중 가장 무질서하고 불규칙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야" "......" "그리고, 그런 인간처럼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바로 신들이란 말이지" "네?" "의외인가?" "조금" "신들은 자신의 속성에 충실하지. 때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말야. 그리고 자유롭지. 혹시 그거 아나? 주신이 직접 창조한 종족은 인간 뿐이라는 것을" "주신께서 직접?" "그래. 결국 인간이나 최고신들만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주신의 손길을 직접 받은 존재라는 거시야" "드래곤은?" "드래곤과 마족, 엘프와 드워프 같은 종족들은 최고신들의 합작품이야" 키케르는 상당히 의외의 사실들을 거침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최고신들만이 주신의 온전한 창조물이며 나머지 종족들은 최고신 하나, 혹은 둘 이상의 합작품인 동시에 주신의 도움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인간들만이 모든 신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거야" "그것만으로 인간이 신과 가장 유사하다고 하기는 힘들지 않나요?" "그 뿐만이 아니지. 모든 영혼이 카르마의 저울의 심판을 거쳐 새로운 생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알고 있지?" "네" 결코 모를 리 없었다. 다이아나의 생의 최대의 목표라 할 수 있고, 그녀를 옭아매는 하나의 결박과도 같은 현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건 모를거야. 카르마의 저울을 거쳐 신으로 바로 승격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뿐이라는 것을. 물론 드래곤들이야 좀 다르지만" "네?" "한 마디로 다른 종족들은 최고 단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 오크의 경우 드워프, 엘프, 인간 정도가 한계라고 보면 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 보통은 이쪽으로 오지" "마족이 된다는 것입니까?" 어느틈엔지 나이트메어는 사라져 있었다. 마왕이 지금 하는 말들은 마족들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마왕만이 알 수 있는 비밀에 속했다. "오크, 오우거, 트롤 등등해서 너희가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들의 특징이 무어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지성이 있지만 힘을 중요시한다고 할까요?" "맞아. 그 정점이 바로 마족이란 말이지" "아!" "그래서 마족들은 몬스터들에 대하여 지배력을 가지고 있어. 정통으로 상위의 속성을 가지고 있거든" "인간은요?" "인간은 이런 영혼의 사슬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야. 네가 자란 세상에 복권이라는 것이 있더군. 인간으로 환생한다는 것은 복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해" "당첨될 확률이 적지만, 당첨되면 상당한 이익을 얻는다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만큼 위험의 정도도 크다는 것도 비슷하지"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하셔도 되나요?" "어차피 너는 이 일을 알아도 별 탈 없을 존재니까. 네가 분별 없이 이러한 일을 퍼뜨리지 않으리라는 것에 내 목을 걸지" 마왕은 농담처럼 말했으나 그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저에 대하여 미리 알고 계셨던 듯 합니다만" "그런 편이야" "페르세포네님을 통해 아시게 된 것입니까?" "그것도 있고, 나중에는 직접 알아보기도 했거든" 마왕 정도의 존재가 인간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마족은 근본적으로 자신과 관계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드물었다. 마족들의 관심은 힘과 자심이 가진 속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이기는 것 정도였으니까. "참, 즐거운 마계 생활을 위해 내가 하나 서비스할까?" 다이아나는 의외의 말에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나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자 마왕은 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고 그녀가 기뻐할 사실을 알려 주었다. "지상계의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걱정하는 모양인데, 어차피 그들의 의도대로 되진 않을거야" "네? 그럼 마족들이 계약을 거부하나요?" "아니. 아까 말했듯이 계약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거야. 다만, 우리쪽에도 희소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구" 다이아나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마왕이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여태까지는 순수한 인간의 바램도 드물었고, 거기에 인간의 수명을 달고 다니는 것도 드물어서 하급 마족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자랑이 되었거든. 하지만, 저 인간들이 너무 계약을 남발하면서 똑같은 조건을 내세우는 바람에 그 희소성이 없어졌다구. 어차피 인간의 수명 따위는 별 의미가 없어. 다만, 계약의 대가로 받았다는 하나의 표식만 있을 뿐이지. 그런데 지금은 그 희귀성이라는 가치조차 없어져가고 있거든" "아!" "맞아! 그리고 어린 인간들의 간절한 바램이라는 것도 그렇지. 물론 그 감정 자체를 먹고 사는 속성의 마족들이야 즐거워는 하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대가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방식으론 계속되기 어려워" 사실 그간 신전에서 전체적인 조정을 했기에 마족들과 인간들간의 계약은 상당히 드물게 이루어졌다. 흑마법사들의 계약은 대부분 지상계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싶어하는 어린 마족들이 경험을 위하여 마력을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상위마족들의 경우엔 특별한 것이 아니면 계약을 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더군다나 상위마족들은 자신의 서열을 한 단계라도 앞당기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기에 인간과의 계약이란 일종의 기분전환이었던 것이다. 결국 키케르의 말에 의하면, 현재 지상에서 계획되고 있는 일은 소규모의 성공은 바라볼 수 있으나 전 대륙에 파장을 퍼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르세포네 신전의 사제들도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채고 있으니, 그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인정받을 수 있는 소규모의 범위일 것이라 하였다. 키케르의 설명은 한 달을 시한으로 잡았던 그들의 말과도 일치하는 면이 보였다. 대륙 전체를 도모했다면 한 달이라는 시간 내에 특별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를 마계에 보낸 이들은 그 한 달 동안 무엇인가가 확정될 것임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다이아나는 그나마 걱정했던 부분의 범위가 줄어들었다는 점에 안도했다. "오늘은 이만 하지" "그럼......" 고개를 살짝 숙임으로서 작별 인사를 대신한 다이아나는 어느 틈엔지 다시 나타나 서 있는 나이트메어의 안내를 받아 방문을 나섰다. 에린이 없어서 그런지 나이트메어는 다이아나의 방까지 데려다 주려는 듯이 앞장을 섰고 그에게 물어 볼 것도 있던 터라 다이아나도 사양하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만난 에린의 굳은 표정을 다이아나는 미처 보기 못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관심을 가졌을 것이나 나이트메어에게 물어 볼 것이 있다는 말을 하고 방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기에 에린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트메어는 에린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챘고, 노련하게 그러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다이아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권한 자리에 앉은 나이트메어는 마나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친절하게 마계의 마나의 속성에 대하여 설명했고, 다이아나는 빠르게 나이트메어가 전하는 지식들 받아들였다. 결국 설명이 끝날 즈음에 다이아나는 1클래스의 마법인 라이트를 성공할 수 있었고, 마계의 마나를 배치하는 요령을 깨달았다. 나이트메어는 감사의 인사를 받고 방을 나섰고,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방에 들렀다가 수련을 할 수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에린은 상냥한 미소를 얼굴 가득히 보이고 있는 눈 앞의 마족이 보이는 것처럼 녹록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트메어의 서열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해도 그의 속성의 특징으로 인해 그는 마왕의 신뢰를 받는 몇 안되는 마족이었다. 에린은 자신의 입술에 스치던 날카롭고 차가운 손톱의 감촉이 떠오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로서는 눈 앞의 마족만큼이나 자신을 협박했던 여마족이 두려웠고, 그것은 그녀를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했다. 나이트메어는 에린의 얼굴에 공포가 뚜렷하게 나타나자 혀를 차고는 더이상 그녀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안도에 차서 돌아선 에린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나이트메어는 에린의 답을 등러야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나이트메어는 에린의 꿈에 나타난 청발의 여마족을 보았다. 그녀는 긴 손톱으로 에린에게 상처를 내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불쌍한 에린의 꿈은 계속해서 악몽으로 점철되었는데, 여마족의 명을 받은 수 많은 야수 형태의 마족들에게 유린을 당하는 에린이 보였다. 나이트메어는 원래 악몽이 주는 기운을 좋아했으므로 에린의 꿈을 즐기고 있다가 악몽이 지나치게 심해져 에린의 정신까지 침범할 지경에 처하는 것을 보고는 약간의 동정심을 발휘하여 그녀를 깰 수 있도록 도와주고는 꿈 밖으로 빠져 나왔다. 나이트메어는 에린의 꿈에서 알아낸 정보를 보고해야할지 망설였다. 보고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페이샤라니. 일렀다가 알려지면 앞으로 재미보는 것은 끝장이잖아’ 청발의 여마족의 이름은 페이샤. 마족들은 그녀를 ‘욕망과 쾌락의 마족’으로 불렀다. 힘으로는 50위권에 간신히 드는 존재인데도 나이트메어가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페이샤 휘하의 마족들은 잘 단련된 성적인 쾌락의 도구였다. 웬만한 마족들은 그녀 휘하의 마족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여 안달할 지경이었고, 그 정점은 물론 페이샤였다. 페이샤에 종속된 마족들은 쾌락을 탐하는 본능을 지닌 마족이거나 페이샤의 눈에 들어 이지를 상실하고 성적인 쾌락만을 위해 길들여진 존재들이다. 하여, 페이샤는 하급마족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반면, 강한 마족들은 그녀로부터 상당한 ‘쾌락’을 제공받곤 했던 것이다. 나이트메어의 저울질은 아침 일찍부터 불러들인 마왕의 말로 결론이 났다. “누구지?” 키케르는 마계 최대의 마력을 감추지 않고 힘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못들은 척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나이트메어는 직감했다. “페이샤입니다.” “역시 그렇군. 그 발정난 계집이 이번엔 드래곤에게 눈을 돌린건가?” 키케르의 입에서는 저속한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나이트메어는 그녀의 밤상대를 했던 몸으로 차마 동의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페이샤를 잡아들여 처벌을 내릴 줄 알았는데 키케르는 항상 그렇듯 예상을 뒤엎었다. “일단 모른척 하도록” “예” 나이트메어야 마왕이 허락되지 않은 누군가의 침입사실을 그토록 빨리 알아챈 것이 궁금했지만,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미안, 에디. 괜히 나 때문에......” 다이아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에디우스가 있는 방으로 가서 그의 옆을 지켰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에디우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력함을 보여주는 듯하여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에린” 다이아나가 이름을 부르자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에린이 나타났다. “물이랑 깨끗한 천 좀 줄래요?” “네? 하지만......” 용도가 뻔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려다 말고 에린은 얼른 말을 고쳤다. “알겠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모르지만, 에디우스의 얼굴이 더러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긴 성 안 곳곳이 청소하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데 먼지 한 점 없었다. 아마도 키케르는 상당히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 관계없이 다이아나는 직접 에디우스의 얼굴이라도 닦아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현재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 있습니다.” 에린이 물과 천을 건네주자 다이아나는 천을 물에 적셔서 에디우스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기 시작했다. “이, 이건?” 얼굴을 닦고 목에 이르렀을 때 다이아나는 어제 잠시 들렀을 때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붉은 흔적을 발견했다. 혹시나 해서 셔츠의 단추를 몇 개 끌러보니 붉은 반점같은 흔적이 흰 피부 곳곳에 벚꽃처럼 드러났다. “에린!” 부드러운 톤이 아닌 질책하는 듯한 소리에 에린은 몸을 움츠렸다. 다이아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심호흡을 한 후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후 “어제 누가 왔었나요?” “예?” 에린은 급변한 다이아나의 태도에 잠시 놀랐다가 그 이유를 짐작하고는 최대한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었다는 건가요?” “저, 제가 알기로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돌아가보세요” “아, 네” 에린은 이것저것 질책을 당할 줄 알았는데 약간 냉정하긴 했지만, 별 추궁이 없자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한 순간 다이아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이 다시 떠오르자 한숨을 쉬고 물러났다. 에린이 자리를 비운 후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열에 의한 발진이나 벌레에 물린 자국은 확실히 아니었다. ‘키스마크라니!’ 분명 누군가가 에디우스의 몸에 이러한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꼼짝 못하고 누워있게 된 것도 속상한데, 의식 없는 그의 몸을 누군가 유린했다고 생각하기 기가 막혔다. 드래곤인 에디우스가 이러한 모욕을 당한 것이 모두 자신 탓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이아나는 조용히 에디우스의 곁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가 일어난 것은 점심 시간을 한참 넘긴 때였다. 에린이 가져온 점심에는 손도 대지 않은 다이아나는 결심한 듯 에린을 불러 한가지 부탁을 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에린의 전언을 받고 달려온 나이트메어가 여느때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라도 갖추던 그녀는 에디우스의 옆에서 꼼짝하지 않고 단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지 혹시 마음 상하는 일이라도?” 찔리는 것이 있던 나이트메어는 오랜 침묵 끝에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나이트메어를 바라보는 다이아나의 눈이 한 순간 차갑게 빛났다. “이 방에 들어왔던 마족이 당신보다 상위의 마족입니까?” “네?” “못 알아 들으셔서 반문하시는 것입니까?” “그,,, 그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음에도 다이아나가 풍기는 기운은 신성력과 흡사했다. 고위마족인 나이트메어가 한 순간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당한 기세를 보인 것이다. “키케르님을 뵐 수 있습니까?” “헉!” “예?” 다이아나의 질문에 에린과 나이트메어 양쪽에서 반응을 했다. 에린은 감히 마왕의 이름을 부르는 다이아나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음을 알고 놀란 것이다. 반면, 나이트메어는 그녀가 아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잠시 당황했다. “오늘 이상하시군요. 제가 발음이 안 좋아진 건가요? 아니면 갑자기 둔해지신 겁니까?” 결례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도 다이아나는 무심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여쭙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분께 다녀올 동안 당신이 이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키케르님이 직접 오시던지요. 두 가지 다 안 된다면 저 또한 이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치의 타협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선고였다. 나이트메어는 조용히 자리를 물러나 마왕에게 그녀의 말을 전했다. “뭐야? 벌써 알아챈 건가? 흐음. 재미있을 뻔 했는데, 이렇게 되면 여지가 없군. 알았다” 키케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나이트메어는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지?” “어제 제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가 에디를 건드렸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모욕적인 면에서” “응? 여긴 내가 이미 명령을 내린 상태인데, 누군가가 내 명을 거슬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성녀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지만, 여기서 내 말은 절대적이다. 증거가 있는가?” “이게 그 증거입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셔츠 깃을 살짝 열어 붉게 피어난 자국들이 몇 개 보이도록 했다. ‘저런 바보같은. 변명할 여지가 없잖아’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나이트메어는 페이샤가 남긴 키스마크를 보고 속으로 신음을 토했다. 키케르는 상당히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이트메어를 향해 물었다. “담당은?” “에린” “미천한 에린이 아름답고 강한 우리의 페르세포네님의 영광스러운...” 에린은 습관처럼 긴 인사말을 시작했지만, 키케르가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하는 한 마디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만, 그만!” “죽을 죄를...” 벌벌 떨며 당장이라도 죽을 듯한 모습의 에린을 보면서 나이트메어는 혀를 끌끌 찼다. 어제나 오늘이나 에린에게는 일진이 안 좋은 날임이 분명했다. “어제 여기 누군가가 다녀갔다. 그게 누구냐?” “그. 그것은......” 에린은 눈 앞의 마왕도 무섭고 페이샤도 무서웠으므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고 있는 에린을 구한 것은 다이아나였다. “잠시만요” “무슨 할 말이라도?” “마족은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게 약하다고 하셨지요? 에린에게 무조건 그 존재에 대해 묻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에린이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도록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 주세요.” “아!” 에린은 다이아나가 나서서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대신 말하자 감사를 담아 눈길을 되돌렸다. ‘이 상황에서도 아랫것 걱정이라니, 괜히 성녀가 아닌가?’ 키케르는 이번에도 다이아나의 의외성을 발견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에디우스에 관한 일이어서 그런지 이번에 그녀의 반응은 상당히 격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처리할 상황에서는 아직도 주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도록 하지. 에린, 네가 말하는 그 마족이 절대 너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겠다. 만일 그 마족이 그런 짓을 한다면 내 권한으로 소멸시킬 것이다.” 키케르는 다이아나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유쾌해진 기분에 이와같이 호언을 했다. 한편, 나름의 고민을 한순간에 해결한 에린으로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어제 방문이 열려서 보니 페이샤님께서 이 방에 계셨었습니다.” “페이샤? 욕망과 쾌락의 그 페이샤 말인가?” 키케르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누구도 그가 이 사실을 미리 보고받았음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나이트메어 또한 자신의 속마음을 가리는 데 자신이 있었지만, 키케르의 이런 연기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예” “협박을 받았나?” “확실히는 아니지만 그런 뜻을 확실히 보이셨습니다” 이제 에린은 있는 대로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에린,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물러가라” 에린이 자신이 본 것을 모두 털어놓자 키케르는 일단 에린을 물러가게 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나이트메어” “예” “당장 페이샤를 불러들여.” “알겠습니다.” “일단 내가 대신 사과하지. 내 명령을 거스른 마족이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수치스런 일이군.” 나이트메어가 명을 수행하기 위해 물러간 후 키케르는 정식으로 다이아나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로서는 일단 벌어진 일보다 이후에 반복되지 않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 방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을 없습니까?” “내 명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믿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단 벌어진 일이 있는만큼 에디가 같은 일을 당할 위험은 없게 하고 싶습니다.” “그렇군. 이렇게 하지. 내 힘으로 이 방에 결계를 치겠다. 그럼 되겠나?” “저는 드나들 수 있는지요?” “이것을 가져라” 키케르는 도무지 아무것도 없을 듯한 얄팍한 옷 안에서 검붉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페이샤” 돌연 나이트메어가 나타나자 페이샤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이 순간 페이샤는 첫 번째 벌어진 상황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왕님께 말하기 전에 나이트메어만 잘 설득하면......’ 일이 오히려 쉬워질 지도 몰랐다. 페이샤는 나이트메어가 에린의 꿈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일단 그만 잘 구슬린다면 ‘그 미남은 내가 마음대로......’ 금발의 아름다운 남자를 생각하자 몸 속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페이샤는 한껏 요염한 자태로 나이트메어에게 접근했다. “무슨 일이죠? 아름다운 꿈의 제왕님” 벌써 여러 번 관계를 한 사이임을 믿고 페이샤는 짐짓 나이트메어에게 몸을 밀착시키면서 긴 손톱으로 그를 자극하려 했다. “마왕님께서 부르신다. 지금 당장!” 하지만, 나이트메어는 그녀의 손을 휙 뿌리치고 자신의 용건을 전했다. 순식간에 아름답던 페이샤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뭐야? 벌써 이른거야?” 페이샤의 속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이트메어는 한숨을 쉬면서 그 간의 정을 생각해서 정보를 주었다. “아무리 몸이 달아도 그렇지 여기 저기 키스마크까지 내고 시치미를 떼서 될 일이냐?” “그, 그건......” “이미 에린이 직접 불었고, 마왕님이 직접 들으셨다. 거기에 네가 에린에게 손을 대면 소멸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지. 외부 손님에게 명령을 어긴 마족이 있다는 것을 보인 것만으로도 지금 상당히 기분이 안좋으시니 얼른 가는 게 좋아” “이익, 그깟 인간 계집애한테......” “참고로, 절대 그분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하지 않는게 좋아.” 잠자리에서 쌓아올린 정리를 생각해서 나이트메어는 나름대로 성심껏 충고를 해주었다. 하지만, 고마워해야할 당사자는 그 말로 인해 더욱 기분이 나빠진 듯 이를 바득 갈고는 앞장서 갔다. “부르셨습니까?” 페이샤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음모를 꾸미는 데 있어서는 손꼽힐 정도로 상당한 두뇌파 마족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페이샤는 명령을 어겨 심기가 불편해진 마왕 앞에서 미사여구를 읊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페이샤는 내심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고 짐작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위마족에 대한 공식적인 처벌은 마족의 장로들과 서열내의 마족들을 모아놓고 거행한다. 하지만, 현재 페이샤가 불려간 곳은 중앙대전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키케르가 다이아나에게 빠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택했음을 페이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잘도 내 명령을 어겼더군” 인사를 하느라 꿇어앉은 위로 일어서라는 말도 없이 바로 질책이 들렸다. 페이샤는 잠시지만, 마왕의 옆에 있던 인간의 여자를 생각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호기심에 그만......” 페이샤는 한껏 불안해하는 연약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몸을 바들바들 떨어보였다. 이 모습을 본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의 몸에 과격한 자국을 남긴 대상과 전혀 일치되지 않는 모습에 내심 갈등했다. 하지만, 그런 페이샤의 연기는 다이아나에게나 먹혀들었을 뿐 정작 그녀의 본모습을 잘 아는 키케르는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라. 꾸민 모습이 역겹다.” 매몰차게 던져진 말에도 페이샤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듯 불쌍해 보이는 모습을 유지했다. “아닙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호오, 그래?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다면 잘 되었군. 너는 내 명령을 어겼고 나의 손님에게 모욕을 주었으며 또다른 손님을 화나게 했다. 이 죄목을 모두 인정하느냐?” “부디 선처를......” “웃기는군. 내 명을 거역한 것은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도전의 의미. 내 손님을 모욕한 것 또한 나 키케르를 모욕한 것. 이것들을 차지하고라도 내 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이상 너는 처벌을 면할 길 없다. 앞으로 백 년 간 마력을 폐하고 하급마족으로서 성안의 시종이 되어 일하도록!” “그, 그것은” “왜? 불만이 있나?” 상상하지 못한 엄중한 벌이 내려지자 페이샤는 그때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언제 부들거리며 떨었냐는 듯 한껏 독기와 색기를 내뿜는 모습으로. “마왕님의 명령을 거스른 죄라면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하찮은 드래곤과 인간 따위가 무엇이라고 제가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키케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페이샤는 자신을 얻은 듯 무릎으로 기어 그의 발 아래로 다가섰다. ‘이런 바보같은!’ 대충 마왕의 속내를 눈치채고 있던 나이트메어는 키케르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페이샤를 약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다이아나는 불쌍한 여마족의 모습에 동정심이 일다가 그녀의 돌변한 모습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저어,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페이샤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키케르의 발부터 시작하여 위쪽으로 더듬어 올라가면서 한껏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흠. 내 명령을 거스른 죄라면 달게 받겠다고?”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페이샤는 옳다구나 싶어 속성을 한껏 끌어올리며 다리를 더듬는 손길에 박차를 가하며 대답했다. “네에. 마왕님께 거스른 벌이라면 달게 받겠어요” 발치에 있던 페이샤가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자 키케르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눈에 띄었다. 페이샤는 나름대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이샤가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한 키케르의 눈은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아악! 도대체 왜?” 키케르는 발치에 있던 페이샤를 난폭하게 걷어찬 후 그녀에게서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역대 마왕이 페르세포네로부터 물려받는 힘. 마족의 힘의 서열에서 마왕만큼은 절대자로 제외된 이유이다. 마왕은 모든 마족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고, 해당 마족의 마력을 본인에게 돌려줄 수 있다. 페이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와 키케르의 손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다이아나 또한 목격할 수 있었다. 페이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급마족 정도로 줄어버린 마력을 점검했다. “마력 폐지 기간은 이백 년으로 한다. 너는 드래곤의 처소에 침입하여 내 명령을 어겼다. 이것이 처음의 오십 년의 이유이다. 네가 내 명령에 반하는 것은 달게 받겠다 하였으니, 네 의사를 받아들여 손님들에 대한 부분은 제한다. 더하여 감히 내 앞에서 내 말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내 손님들을 하찮게 본 죄는 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한다. 그 간의 공을 봐서 소멸시키는 대신 백 오십 년을 추가한다.” “그, 그럴 수가!” 망연자실하여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페이샤를 나이트메어가 문 밖으로 끌 듯이 내보냈다. 다이아나는 시종일관 이 모습을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페이샤를 내보낸 후 키케르는 다이아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벌이 마음에 드는가?” 키케르는 다이아나가 페이샤의 편을 든다면 대꾸할 말을 준비하고 이렇게 물었다. “그녀에 대한 처벌이 마계의 평소 규칙에 의해 공정한 것인가요?” “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면 소멸되었다고 해도 불평할 이는 아무도 없다. 대답은?” “저에게 물으실 내용이 아닙니다. 마왕께서 마족에 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은 마계의 일, 제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 저는 에디우스에게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증만 필요할 뿐입니다.” “푸훗. 푸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너에 관한 한 내 예상되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키케르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배를 감싸쥐고 한동안 크게 웃어댔다. 그가 이렇게 크게 웃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어서 보이지 않게 성내를 돌아다니던 마족들은 자신들의 청각을 의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키케르가 한참이 지나도 웃음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이아나가 먼저 말했다. 키케르는 아직도 웃음기가 걷히지 않은 모습으로 손을 휘휘 저어 허락의 뜻을 밝혔다. 키케르가 달리 명하지 않았는데도 나이트메어는 당연하게 다이아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것던 다이아나는 방문 앞에서 인사를 하는 나이트메어를 불러 세웠다. “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방으로 들어선 다이아나는 나이트메어에게 자리를 권하고 에린을 불렀다.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페이샤에 대한 처벌의 결과를 에린에게 알려주고 차를 부탁했다. 에린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차를 준비해 둘 앞에 차려놓고 물러났다. “대조적이시군요” 나이트메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하자 다이아나는 무슨 뜻이냐는 의문을 담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린같은 아이에겐 상당히 상냥하신데 아까는......” “아, 그 여마족 페이샤라고 했나요? 그녀에 대한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 예.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차이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린에 대해서는 약자라서 친절하게 대하시는 것인지?” 사실 그가 이상한 것은 에린에 대한 태도보다는 페이샤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다이아나는 결코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엄청난 절망으로 몰아넣은 그 카이젠조차 미워하지 못하는 성품을 지니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그런 차이 때문은 아닙니다. 에린은 마계에서의 위치상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함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그녀의 자의라고 볼 수 없지요. 페이샤라는 여마족에 대한 일은 키케르님께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그녀 자신이 마족이고 규칙을 잘 알면서 깨었다면 마계의 법칙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일의 껍데기만 놓고 보자면 그랬다. 하지만, 키케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판결을 했다면 한 번의 실수로 무난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누가 보더라도 키케르는 페이샤를 함정에 몰아넣고 가혹한 처벌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이아나에게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이트메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만일 이러한 의문을 풀려고 한다면 알고도 모른체 하는 것이 아니냐는 책망조의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나이트메어의 갈등을 알고 있었으나 속마음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제가 한 달 간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완전히 동의하면 페르세포네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그, 그것은......” “어려운가 보군요. 그럼 다른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지상계에서 하고 있던 일도 있고 지인들도 있습니다. 한 달이나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페르세포네님도 그러한 상황을 바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건, 마왕님께 말씀드리시는 것이......” “아니오. 아무래도 나이트메어님이 더 저를 잘 아실테니까요. 저를 아는 분들에게 쓸 데 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상계의 몇몇 분에게 연락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마왕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연락할 내용을 미리 보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고맙습니다.” 나이트메어는 다이아나의 부탁을 전하기 위해 다시 마왕을 만나러 갔다. 다음날, 뮤리엘에게 여러 개의 수정구가 배달되었다. 뮤리엘 앞으로 되어 있는 수정구에는 다이아나의 영상이 나타나 갑자기 아버지를 만나 급한 일로 함께 가게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영상에서 다이아나는 에디우스도 동행할 것이며, 함께 보내는 수정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일단, 다이아나의 무사함을 알게 된 뮤리엘은 발빠르게 움직여 다이아나의 부재를 기정사실화 했다. 어쩐 일인지 하투아에서는 더 이상 마족이나 마물에 의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뮤리엘은 내심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원인을 찾아 해결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사건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하투아 측에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따로 조사중이라고 얼버무려 놓았다. 수정구는 디안과 말론에게도 전달되었다. 칼라임 황실에서야 다이아나가 하투아에서 조사중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부탁을 받아들여 영지에서의 중요한 사안에 관한한 자신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다이아나의 잠적과 더불어 오히려 뮤리엘은 다이아나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 또 만났네?” “베르히안” “어젠 왜 안나왔어?” “아, 미안해요. 혹시 저를 기다렸나요?” “뭐, 별로......” 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약간 섭섭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마왕을 닮은 그의 얼굴 위에 어린아이 특유의 고집스러움을 보고 살짝 미소지었다. “어제는 일이 있었어요. 미안해요.” “흐음. 그거 혹시 페이샤랑 관계된 거 아니야?” 소년의 입에서 페이샤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다이아나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상관없이 베르히안은 혼자말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제 무덤을 팠지. 쌤통이다. 베에!” 다이아나가 자신을 만나지 못한 것이 페이샤의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베르히안은 다이아나가 난처할 정도로 페이샤에 대해 저속한 언어를 지껄여댔다. “저,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응? 뭔데?” “혹시 키케르님이랑......” “아, 너 만났지? 치잇!” 소년은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시작했다. “나랑 키케르랑 닮은 거 알아. 그럴 수 밖에 없지. 난 키케르의 어릴 때 모습이니까” “네?” “난 키케르의 일부야.” 다이아나는 도무지 소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르히안은 비슷한 말을 몇 가지 더하더니 이내 지쳤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해봐야 넌 몰라 흥” 다이아나는 나중에 나이트메어나 키케르에게 다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쪽에서는 상당히 어른스럽게 논리적인 설명을 하던 베르히안이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단편단편 하고싶은 말만 했기 때문에. 둘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기 저기 산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베르히안은 마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고 그에 보답하듯이 다이아나는 지상계의 일이나 간단한 동화를 들려주었다. “가려구?” “네” “혼자 뭐해?” “수련을 하려고 하는데요” “수련? 검술이나 마법같은거?” “네” “내가 같이 해줄까?” “네?” “내가 마왕의 일부라고 했잖아. 최고위마족보다도 내가 나을걸?” “저, 그래도” “가자. 수련실로 갈거지?” “네” 베르히안의 일방적인 페이스에 말려든 다이아나는 손을 잡고 압으로 끌어당기는 소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꼴 좋군” “닥쳐!” “근데, 그 드래곤 진짜 괜찮게 생겼어?” 화를 내던 페이샤는 골드 드래곤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고는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듯한 표정이 되었다. 붉은 혀끝으로 연신 입술을 핥는 그녀의 모습은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을 대지 못하는 육식동물을 연상케 했다. “그 꼴을 당하고도 미련을 못버렸다는 건가? 그 정도야?” “크리샤, 아무리 너라고 해도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야” “뭐?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냐? 지금 너는 하급마족이야. 내게 대들었다가 소멸당한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걸?” “너.” “너무 속상해 하지 마. 덕분에 많은 부하들을 물려받았으니 그 계집애한테 복수는 대신 해줄게. 그 대신 대가로 그 아름다운 골드 드래곤과 키케르님을 내가 가지도록 하지”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휘하로서 존재하던 쌍둥이 동생의 폭언에 페이샤는 이를 갈며 분개했다. 하지만, 원래의 페이샤로서도 쉽지 않았던 상대를 마력을 빼앗긴 지금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튼 여러 정보에 실험까지 해주어서 고마워, 사랑하는 언.니!” 얄미운 웃음을 떠올린 크리샤는 참지 못하고 손톱을 세우고 달려든 페이샤를 간단하게 손짓 한번으로 밀쳤다. 마력의 차이로 인해 방 안 저 쪽에 내팽겨진 페이샤에게 마지막 말을 던지고 그녀는 방안을 나왔다. “하급마족 따위가 나같은 고급마족에게 덤벼들어선 안돼지. 똑똑히 기억해 두라구” 크리샤는 그길로 곧장 마왕궁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키케르는 귀찮다는 표정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으나, 크리샤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방문목적을 밝혔다. “이번에 페이샤 언니가 위대하신 마왕님의 손님께 결례를 한 것에 대하여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페이샤 언니는 쾌락에 대하여 집착하는 성격이 있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한 듯합니다. 언니를 대신하여 다시 한 번 사죄를 드립니다.” 페이샤와 쌍둥이라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두 자매의 외모는 확연히 달랐다. 페이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고 풍만한 몸매로 노골적인 유혹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 키케르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린 크리샤는 언니보다 작은 키에 가녀린 몸매를 가지고 있다. 암청색 머리카락의 페이샤와 대조적으로 크리샤의 머리카락은 연한 하늘색이었다. 페이샤의 외모를 성숙함과 요염함으로 표현한다면 크리샤의 외모는 연약함과 청순함으로 대변할 수 있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넘어갈 듯한 사랑스러운 자태이건만 키케르는 별 감흥없이 되받았다. “용건은 그것뿐인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그 인간의 여성분을 뵙고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유는?” “언니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왕성 내에는 여마족이 안계시니 그 분께서 저같은 것이라도 상관 없으시다면 가끔 말동무라도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흠. 일단 네 뜻은 알겠으니 물러나거라.” “네.” 크리샤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얌전하게 물러섰다. ‘생각보다 그 인간여자에 대해 집착하고 계셔. 이건 좀 위험할 수도 있겠군’ 마왕의 미진한 대답의 이면에는 그 손님이라는 인간에게 의향을 물어본 후 답변을 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했다. 마계에서 마왕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페르세포네님 이외의 어떤 존재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크리샤는 민감하게 마왕의 감정을 눈치채고 어리숙한 인간 여자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거처로 돌아온 크리샤는 페이샤를 불러들였다. 페이샤로서는 거처에서 나가고 싶어도 그간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움직일 수 없었다. 고위마족들 사이에서야 쾌락을 제공해주는 그녀의 존재는 환영받았지만, 중하위 마족들은 그녀에 대한 보복을 바랄 것이다. “무슨 일이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구체의 형상을 갖춘 검을 덩어리가 페이샤의 복부를 가격했다. “큭, 무슨 짓이야?” 페이샤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배를 감싸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말했지? 고위마족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지. 언니만 아니라면 예전에 이 곳에서 내쫓았어. 하지만, 하위마족인 네가 건방지게 구는 것은 봐 줄 수 없어” “나쁜 계집애” “후훗.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언니야. 누구를 원망하는 거지?” 혈육 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행동하면서도 크리샤의 표정은 한결같이 온화했다. “쌍둥이로 태어나 나보다 마력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잊었어?”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크리샤의 말에 페이샤가 잠시 움찔했다. 사실 크리샤의 말에는 거짓이 섞여있지 않았다. 어려서의 크리샤는 타고난 외모에 걸맞게 내성적인 성품을 가졌었으니까. “멍청한 것. 네가 내 쌍둥이라니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어” “언니” 바닥에 쓰러진 크리샤의 몸 위로 발길질이 가해졌다. 크리샤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무방비하게 맞고 있었다. “넌 마족으로서 자각도 없지? 연약하고 청순한 척 하는 꼴이라니. 역겨운 것 같으니” 페이샤의 폭언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마력이 약한 크리샤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흥, 얌전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뒤로는 남자들에게 잘도 꼬리를 쳤더구나” “무, 무슨?” 평소보다 한층 더한 폭행 뒤에 알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크리샤는 당황했다. “듣기 싫어” 요염하고 도전적인 글래머의 미인인 페이샤를 품고 싶어하는 마족은 많았다. 하지만, 마족들 중에도 청순가련한 모습의 크리샤에게 눈길을 주는 족속들도 꽤 있었다. 페이샤는 이번 목표로 삼았던 마족에게서 크리샤에 대한 언질을 받은 것이다. “약해 빠진 쓸데 없는 것 같으니” 크리샤에 대한 화풀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사실 크리샤가 약하다기 보다는 페이샤에 비해 약간 뒤쳐지는 것 뿐이다. 하지만, 마족의 힘의 서열에 의해 이 작은 차이가 두 자매 사이에서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크리샤는 차츰 페이샤에게 대응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가능하면 언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애를 썼다. 페이샤의 화풀이를 대신 받아줄 하급이나 중급 마족들을 준비해 놓기도 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페이샤의 심기를 미리 짐작하고 입 안의 혀처럼 그녀를 받들었다. 그러는 동안 크리샤의 속내는 점차 페이샤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인가부터 크리샤는 페이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음탕하고 악랄한 마족이 되어 있었다. 크리샤가 무서운 것은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다. 페이샤가 요염한 자태로 불같은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녔다면 크리샤는 음모에 가득한 속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모두 언니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라고도 할 수 있다. “언니 덕분에 나도 쾌락의 맛을 알게 되었지.” 크리샤는 기분좋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페이샤는 자신이 여태까지 크리샤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서 점차 얼굴이 굳어졌다. 가해자의 입장에서야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막상 똑같은 보복들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크리샤. 제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결국 공포가 자존심을 이겼다. 페이샤는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크리샤의 보복을 막기 위해서는 자존심 따위는 생각해서는 안되었다. “어머, 왜 이러셔? 고고하고 도도한 존재가 이러시면 안돼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면서 크리샤는 살짝 페이샤를 걷어찼다. “허억” 겉보기와 달리 상당한 힘이 들어간 탓에 페이샤는 다시 한 번 바닥을 굴렀다. “일단, 지금은 더 끌리는 게 있으니까, 언니랑은 나중에 천천히 놀아줄게. 알았지?” 크리샤는 끝까지 온화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동생이라구요?” “네. 크리샤라고 하는데, 페이샤의 잘못을 사과하고 말동무라도 되어주고 싶다고” “꼭 만나야 하나요?” “그건 다이아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으음” 다이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승낙의 말을 했다. 나이트메어는 다이아나의 승낙을 전하기 위해 키케르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승낙했단 말이지?” “아무래서 성품상 어쩔 수 없으셨나봅니다.” “흠, 그렇겠군” 직접 피해를 입히지도 않은 존재가 마음이 불편해 꼭 사과를 하려고 한다는데 그것을 거절할 정도로 매정한 성품이 아니다. 이는 이 둘 모두 다이아나에 대해 미리 판단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일단 크리샤를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나이트메어는 사라진 지 얼마 안되어 크리샤를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다. “다이아나가 네 사과를 받겠다고 하니 가 보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일단 키케르의 재가가 떨어지자 나이트메어는 크리샤를 다이아나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들을 맞아들인 다이아나는 페이샤와 상당히 다른 크리샤의 모습에 약간 놀라는 듯 하다가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앉기 전에 먼저 페이샤 언니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모처럼 마왕님의 손님으로 방문하셨는데 불쾌한 일을 당하셨으니...... 정말 죄송합니다.” 크리샤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다이아나 앞 쪽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다이아나는 돌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바람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괜찮습니다. 크리샤님의 잘못도 아닌데......” 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마족이라고 해서 다들 포악하거나 한 것은 아닌가?’ 눈 앞의 크리샤는 어디로 보아도 마족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이트메어만 해도 부드러운 인상 한 부분에서는 상당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크리샤라는 여마족은 마족이라기보다는 엘프라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고위마족이라고 했으니 확실히 힘이 약한 것은 아닐텐데. 쌍둥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르다니’ 다이아나는 괜히 크리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 에린에게 다과를 부탁했다. 평소처럼 재빨리 다과를 준비한 에린이 탁자에 그것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고마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여자의 입에서 감사의 말이 튀어나왔다. 다이아나야 늘 그래왔지만, 고위마족이 하찮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자 에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크리샤는 그런 에린에게 녹아들 듯한 미소로 답례했고 다이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 거의 종일 혼자 계시는 건가요?” “아, 수련을 하고 있긴 해요. 그 땐 베르히안이 함께 하지요.” “베르히안님이요?” “아세요?” “아, 이름만 알아요. 여러 소문이 있긴 한데 워낙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라서” “실례되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란 것이?” “어차피 마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이지만. 베르히안님이 마왕님의 자손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큽니다. 혹은 조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 이런 내용은 베르히안님이나 마왕님께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 알겠어요” 둘은 금방 친숙해졌다. 크리샤는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다이아나의 불편함을 걱정해 주고 이런 저런 친절한 제안을 해 왔다. 다이아나는 말할 상대가 없어 답답했던 차라 젋은 여성이 친절하게 대해오자 상당히 반가웠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저, 크리샤” “네?” “또 놀러 와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다이아나님께서 싫어하시지 않으신다면 언제든지 오겠어요. 내일 이 시간에 들러도 될까요?” “네. 기다릴게요” 크리샤가 방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나이트메어가 모습을 나타냈다. “저, 다이아나님이 또 방문해도 좋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될까요?” “상관 없습니다. 그 분의 뜻이라면.” “고맙습니다.” 크리샤는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이트메어는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언제 보아도 당신들 자매는 참 대조적이군요” 별로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어서 크리샤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마왕성을 벗어났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미묘한 표정을 지은 나이트메어는 혼자말을 했다. ‘그런데 꿈은 아주 비슷하더군. 참 완벽한 이중성이야. 그 분께서도 아실 법한데, 왜 말리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군’ 사실 크리샤의 외모에 현혹된 나이트메어는 그녀를 유혹하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접근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꿈을 들여다 본 이후로 나이트메어는 그러한 생각을 버렸다. 겉보기엔 상당히 마음이 약해보이는 저 여마족의 꿈은 온갖 가학적인 상상으로 가득했다. ‘거기에 엄청나게 음탕했지’ 나이트메어로서는 차라리 노골적인 페이샤가 상대하기 쉽다는 판단을 내렸다. 크리샤는 잘못 가까이했다가는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을 위험한 여자였다. “뭐야, 벌써 지친거야?” 치기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니, 더 할 수 있어요. 한 번만 더” “좋아, 덤벼!” 다이아나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검을 움켜쥐었다. “차앗!” “느려, 느려” 전혀 느리지 않은 속도임에도 여유있게 피해낸 베르히안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는 다이아나가 휘두르는 검을 여유있게 피해내다가 간혹 한 번씩 자신의 검을 휘두르곤 했다. 그리고 그 검은 여지 없이 다이아나의 몸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어흑” 옆구리 밑으로 검 끝이 파고 들어 쿡 찌르자 저절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온다. 연습용이라 날이 서지 않았다고는 해도 무게가 나가는 검이라 타격이 심했다. “흠. 무리하지 말라구. 오늘은 이만 하는 게 어때?” “네. 고마워요 베르히안” “어휴 또 저 존대말” “후훗”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작은 몸집의 베르히안은 다이아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조그맣고 하얀 손과 몸만큼이나 긴 검이 대조적인 모습으로. 다이아나는 소년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금방 금방 좋아지는걸?” “정말요?” “응. 전투는 우리 마족의 근원적인 능력이야. 그런데 넌 웬만한 마족보다 더 빨리 배우는구나” “고마워요” “뭐, 사실을 말하는 거야.” 마계에 온 지도 벌써 일 주일이 넘었다. 누워있는 에디우스나 지상계를 생각하면 초조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가능한 일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앞으로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실력을 쌓아두고 싶었다. 며칠 전의 일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크리샤가 찾아왔고 베르히안도 매일 대련을 해 주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다이아나의 일과는 어느 정도 규칙적이 되어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에디우스와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혼자 수련을 한다. 점심 후에는 베르히안과 대련을 하고 오후 늦게는 크리샤가 찾아와 다과를 함께 하거나 산책을 했다. 키케르는 그 이후로 다이아나를 부르거나 찾지 않았다. 처음에 상당한 호기심을 보이던 태도로 보아 의외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페르세포네를 만날 수도 없었고 키케르를 만나야 할 이유 따위는 별로 없었으므로 다이아나는 나름대로 이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푸훗! 너어무너어무 간단하잖아? 아무튼 인간들이란 참으로 단순해!” 크리샤는 자신의 계획이 잘 먹혀들어가는 듯하자 상당히 즐거운 기색이었다. 덕분에 요 며칠간 페이샤에 대한 가혹행위는 상당히 줄어든 셈이다. “재미있지 않아? 그 계집애 말야. 여기가 마계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마족이란 것도. 내가 가면 얼마나 잘 해 주는지 아아주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니깐” 페이샤는 묵묵히 크리샤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크리샤로부터 바로 검은 구체가 날아왔다. “왜...?” “왜냐구? 이 내가 말하는 것이 말같지 않아? 지금 날 무시했잖아?” “그, 그런......” “아니라고 할 셈이야?” “죄송합니다.” “흠, 뭐야? 재미 없어!” 혼자 중얼거리듯하는 말에 대꾸를 하던 안하던 트집을 잡아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이미 페이샤가 크리샤에게 수도 없이 행한 일이었다. 만일 페이샤가 맞장구라도 쳤으면 반드시 “네가 뭘 안다고" 라는 말과 함께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페이샤가 크리샤에게 늘 했던 그 패턴이었으므로 페이샤가 모를리 없었다. “으흠, 조금 더 작업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시간이 별로 없단 말이야” 다이아나가 마계에 머물기로 한 시한은 1개월. 그녀가 지상계로 나간다면 골드 드래곤도 따라가게 되어 있다. 매일 오후 늦게 다이아나를 만나러 가는 것을 제외하고도 크리샤의 행보는 유난히 바빴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골드 드래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드래곤을 어찌어찌 빼돌린다고 해도 마왕성을 자주 드나드는 마족으로서 잘못하면 바로 잡힐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일에서는 무엇보다 협력자와 다른 혐의자가 필요했다. 크리샤는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페이샤 쪽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뭐 혐의자야 벌써 준비되었지만. 후훗’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군’ 마계의 마나를 다루는 것에 상당히 친숙해졌다. 요 며칠 베르히안과의 수련 덕분인지 마계의 무거운 중력에도 확실히 적응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인간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온 다이아나는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로 특별히 의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쪽 세계의 지상계에서 드래곤보다 강한 존재는 없음을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의식중에 에디우스에게 기대고 있었음이 이번에 여실히 들어났다. 에디우스나 아버지, 어머니와 최고신들. 스스로 서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이들의 절대성을 의심하지 않고 무력하게 당해버린 자신에 대하여 실은 크게 자책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침상위에 늘어진 에디우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점점 커져갔다. 파앗! 공기를 가르면서 휘둘러진 검끝이 매서운 기운을 품고 공간을 자르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 검끝에서는 공격을 하더라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살기’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그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다시는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겠어!’ 처음부터 빌미를 제공한 것은 자신이었다. 엔젤하우스의 일로 8대 최고신에게 스스로 손을 내밀어 버렸다. 그 참극 이후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페르세포네 이모의 도움을 받아야만했다. 결국 자신의 인생에 다른 존재의 간섭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스스로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다. “상당히 좋아졌는걸?” 떠오르는 잡념들을 억지로 내몰면서 한참을 검과 한몸이 되어 있던 탓에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베르”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년은 자못 평가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 다이아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대련을 할 때의 소년은 결코 어리다고 얕잡을 상대가 아니다. 베르히안의 검술은 에디우스에 뒤지지 않음을 다이아나는 절감하고 있었다. 에디우스의 검술이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형태의 공수를 갖춘 형태라면, 베르히안의 검술은 강한 공격을 주로 한 실전기술에 가까웠다. 성장을 다 하지 않은 마족이 저토록 강한 검술을 가진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웠으나, 다이아나로서는 그 점까지는 알지 못했다. “조금 쉬어야겠지?” “네.” 최상의 컨디션으로 덤빈다고 해도 현재의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잠시의 휴식이 있은 후, 두 사람은 여느때처럼 한바탕 어울려 대련을 펼쳤다. “에린, 전에 내왔던 케잌이랑 과자같은거. 혹시 있으면 좀 부탁해요” “아, 네” 며칠에 한 번씩 대련이 끝난 후 베르히안은 다이아나와 함께 다과시간을 가지곤 했다. 베르히안이 음식에 있어서만큼은 무척 어린아이다운 선호를 가진 것을 안 것도 그 때문이다.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과자나 단 종류의 먹을 것은 늘 빌 때까지 먹곤 한다. 그러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 자못 어린아이다워 보여서 다이아나는 흐뭇하게 보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수련을 해서 뭐 하려는거야?” “글쎄요. 단시간에는 어렵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놓으면 후회가 적을 것 같아서요” “응? 그럼 후회하고 있어?”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네가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이번 일을 막을 수는 없었을거야” 베르히안은 다이아나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들 드래곤인 에디우스조차 무력하게 묶여버린 사건의 전말이 바뀌었을 리가 없다. “애초부터 조금씩 나태해져가고 있었어요” 다희로 살 때는 이렇지 않았다. 기대려고 해도 기댈 사람도 없었거니와 늘 스스로의 일을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느틈에 몸에 배인 그 습관들이 무뎌지고 있다. 물론 부모님을 비롯하여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이 생긴 것은 좋을 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마음까지 약해져서는 안된다고 다이아나는 절감하고 있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베르히안은 별 상관없다는 듯이 앞에 놓인 달콤한 과자를 조금씩 물어뜯어서 음미했다. “저, 크리샤님이 오셨습니다” “아!” 오늘따라 베르히안과의 이야기가 길어진 듯 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만나는 이 둘이 부딪히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저......” 다이아나가 양해를 구하듯이 쳐다보자 베르히안은 뚱하게 그녀를 쳐다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별로 상관 없어.” “네. 그럼 잠시만요” 일단 베르히안의 양해가 있었으니만큼 크리샤에게도 양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이아나는 방문 밖으로 향했다. “손님이 계신가봐요” 언제 보아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아, 네. 베르히안님이 계셔요. 싫지 않으시다면 들어오시겠어요?” “저는 상관 없는데......” “그 분도 허락하셨어요” “아, 그럼”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크리샤는 베르히안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는 듯 했다. 조촐한 모임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오히려 늦게 도착한 크리샤 쪽이었다. 베르히안은 크리샤를 거의 무시하듯이 대하면서도 미적거리면서 일어날 뜻이 없어 보였다. 다이아나가 크리샤를 배웅하고 돌아오자 베르히안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크리샤님이 마음에 안드세요?” “글쎄? 그것보다 너 너무 함부로 마족을 믿지 말라구” “네?” “나만해도 그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마족을 믿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구. 네가 아무리 키케르의 손님이라고 해도 일단 당한 후엔 늦는단 말이지” 베르히안은 소년의 얼굴을 하고는 마치 세파란 세파는 다 겪어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일뿐 소년의 경고에 대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베르히안은 무엇이 불만인지 상당히 툴툴거리는 태도로 약간을 더 뭉기적거리다가 늘 그렇듯이 휭하니 일어서 나가버렸다. “저, 실례지만 다이아나님은 여기 자의로 계신 것은 아니죠?” “그런 셈이죠” “지상계로 가고 싶지 않으세요?” “물론 지금이라도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아, 페이샤 언니가 실례를 범했다는 그 분 때문이군요” “물론 그 이유도 있구요” 에디우스를 떠올린 다이아나의 안색이 약간 흐려지자 크리샤는 금방 미안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죄송해요. 안좋은 이야기를 꺼내서......” “아뇨. 상관없어요. 어차피 시간은 계속 가고 있으니까요” 다이아나가 마계에 온 지 벌써 두 주. 절반의 시간이 흘러갔다. 키케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페이샤의 처벌 이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다이아나가 걱정할 거리는 거의 없는 셈이다. “저어......” 크리샤는 평소답지 않게 몇 번인가 말을 꺼내다가 망설이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더니 결국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는 결심한 듯이 제안해 왔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네?” “지상계로 가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다구요” “하지만, 어떻게요?” “다이아나님 한 분만 보내드리는 것은 사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문제는 그 분인데, 그것도 방법이 있어요” “왜 그런 말을? 알려지면 크리샤님이 힘들어지지 않나요?” “하지만......” 크리샤는 말하기 어려운 듯 주저하더니 다이아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해왔다. “전 어차피 고위마족이라고는 해도 페이샤 언니한테 늘 구박만 당하고 살아왔어요. 마력이 폐쇄된다거나 해도 별로 어려워지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다이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에요. 크리샤님의 마음을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에디우스를 걸고 도박을 할 수도 없고 저 때문에 누군가가 처벌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이제 곧인걸요” “하지만, 다이아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어요” “네?” “그 분, 마왕님께서는 시일이 되어도 결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린다. 다이아나는 그런 크리샤의 태도에 당황해서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크리샤는 마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으로 마왕이 다이아나를 마계에 눌러 앉힐 생각임이 확실하다고 부언했다. “하지만, 불가능해요. 페르세포네님도 제가 여기서 살 수 없음을 알고 계셔요. 더군다나 에디우스를 장기간 억류했다가는 드래곤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구요” “다이아나님이 마왕님의 반려가 되신다면 가능한 일이죠” “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고들 해요. 저도 뒤늦게 알았어요. 고위마족이라고는 해도 언니랑 달라서 제게는 그런 이야기들이 늦게 들어와요. 그래서, 그래서......” 다이아나는 크리샤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 표시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소문일 뿐이잖아요.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는 것 아닌가요?” “그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음 주에 다이아나님을 소개하는 연회가 있다더군요. 그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그럴 수가?” “연회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저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한테도 이미 초대장이 왔고. 아마 며칠 내로 다이아나님께도 연회에 대해서는 말해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내용은 알려주지 않겠죠” 다이아나가 생각에 잠긴 듯 하자, 크리샤는 빠른 어조로 이런 저런 소문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요지는 처음부터 마왕의 목적은 다이아나를 자신의 반려로 삼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언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크리샤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날 나이트메어의 방문이 있었다. “연회... 라구요?” “예. 마계에 있으실 날도 머지않았고, 고위마족들에게 다이아나님의 존재를 알려 혹시 나중에 지상계에서 뵙더라도 결례를 범하지 않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고마운 일이군요” “다이아나님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분께서는 무엇보다 다이아나님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참석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그 분을 뵐 수 있을까요?” “아, 네. 물론입니다.” 페이샤의 건 이후로 전혀 왕래가 없었지만, 다이아나의 요청은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임을 나이트메어는 알고 있었다. “흠. 오랜만이군” “네. 그렇군요” “무슨 일이지?” “저희의 약속이 유효한지 한 번 더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하지만, 기한의 반이 지나가니 조금 불안해져서요” “조금 의외이군. 상당히 너답지 않은 말이란 거 자각하고 있나?” “저다운 것이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약속은 유효하다. 한 달의 기한을 채우면 너와 저 드래곤은 지상계로 돌려보내 줄 것이다.” “페르세포네님 앞에서 유효한 것인가요?” 키케르는 집요하게 물어오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인상을 풀고는 대답했다. “페르세포네님 앞에서 맹세코. 너와의 약속은 유효하다!” “고맙습니다.” “흠. 그럼 궁금한 것은 다 물어본 건가?” “네” “저녁이나 먹고 가지?” “초대, 받아들이죠” 다이아나는 키케르, 나이트메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나가자 잠시동안 침묵하던 키케르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아하하하하하!” 나이트메어는 그런 마왕의 태도에 깜짝 놀라 의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주군의 심기를 살폈다. “정말, 여러 가지로 나를 감동시키는군” “네?” “정공법이라니. 생각도 못했는걸?” 나이트메어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듯 키케르는 한 동안 유쾌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면담을 요청해온 크리샤에 대한 키케르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싸늘했다. 크리샤는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마왕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크리샤의 말에 귀기울이는 마왕의 얼굴은 점차 냉기를 더해갔다. ‘역시, 동요하시는군’ 크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하여, 혹시 다이아나님이 동요하실까 두려워 미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흠” 크리샤가 말한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마족들 사이에 마왕이 이번 연회를 기점으로 다이아나를 반려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는. 물론 그 소문의 뒤에는 크리샤가 있었지만, 한껏 조심해서 은밀하게 다른 경로들을 통해 내보냈기에 그녀는 자신하고 있었다. “근래 다이아나님의 태도가 조금 불안해 보입니다. 주제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소문을 들으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다이아나의 곁에 드나드는 마족이라고는 너 외에는 베르히안과 나이트메어 그리고 그 하녀밖에 없다. 내게 그 중의 누구를 의심하라는 것이냐?” “그, 그런...... 누구를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럴 수 있으니 존귀하신 마왕님께서 그 분을 안심시켜 드리는 것이” “듣기 싫다!” 키케르로부터 위협적인 기운이 솟아나자 크리샤는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엎드린 자세로 벌벌떨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왜 내가 근거 없는 소문에 해명을 해야 하지? 마왕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녀 편에서 깨뜨린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룰 일이다.” “하오나, 그 분은 이곳에 아는 분도 없으시고......” 누가 보아도 다이아나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크리샤는 소문에 동요하는 다이아나가 자칫 어리석을 일을 저지를까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물러가랏” 하지만, 그것이 키케르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누군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계약과 약속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마족으로서는 존재를 무시함과 같다. 사실 이 점을 모를 크리샤가 아니었기에 일부러 키케르를 선동한 것이다. 크리샤는 바들바들 떨며 눈물이 가득 고인 외견 안으로 미소를 지으며 마왕전을 빠져나왔다. 한편,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던 키케르는 크리샤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돌연 표정이 돌변했다. 그의 입가에는 상당히 재미있다는 듯한 고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크리샤를 맞아들이면서 다이아나가 인사대신 약간의 궁금함을 담아 물었다. 크리샤는 창백한 안색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왕께서 부르셔서 뵙고 오는 길입니다.” 하고 약간 겁에 질린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눈에 띄게 창백한 안색과 조금씩 떨리는 몸을 하고 눈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불안감에 시달리는 이의 표본같은 모습에 다이아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주의를 받았습니다.” “네?” “실수로라도 다이아나님께 ‘소문’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라면 지난 번의 그 연회에 관한 것 말인가요?” “네” 대답을 들은 다이아나의 표정이 일순 조금 차가워졌지만, 연기에 몰입한 크리샤는 알아채지 못했다. “크리샤님은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으시나요?” “그, 그것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크리샤는 주저하는 태도로 다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안달을 하고 있었다. ‘어서, 말하란 말이야, 도와달라고. 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잖아 응?’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크리샤의 속내와는 달리 다이아나는 한참을 멍해보일 정도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직 연회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전에 죄송하지만 정말 그 일이 사실인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크리샤에게는 꽤나 길게 느껴진 시간을 침묵하던 다이아나가 드디어 부탁을 해 왔다. “사실은......” “네? 혹시 다른 일도 있는 건가요?” “며칠 전 말씀드린 후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오늘 불려간 것도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듯 합니다. 마왕께서 연회에 혼인 준비를 은밀히 하고 계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이아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이아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를 위해서 크리샤님께 피해가 가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쓸 데 없이 착한 게 문제로군’ 크리샤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점점 애가 탔다. “제가 걱정이 되셔서 그러시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저는 마족입니다. 다이아나님이 저와 계약을 맺어 주신다면 지상계로 나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곳에서 살아야 하잖아요. 혼자 지상계에 나가게 되면......” “아뇨. 전부터 마계를 벗어나고 싶었어요. 이미 포기하고 있었지만, 다이아나님께서 나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세요” 다이아나가 결정을 하지 못하자 크리샤는 준비한 카드를 모두 꺼내놓기로 했다. “골드 드래곤이 걱정이 되신다면 염려하지 마세요. 일단 그 방에서 다이아나님이 밖으로 옮겨주시기만 하면 그 분을 제어하고 있는 마력을 일시적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 후에 그 분이 본체로 돌아가시면 셋 다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에디우스를 제어하고 있는 것은 사제들의 신성력과 최고위마족들의 마력이 들어간 것입니다. 크리샤님이 고위마족이라고 해도 그건 무리에요” “방법이 있습니다. 저희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가보가 있는데, 그걸 사용하면 됩니다. 이전에는 페이샤 언니가 가지고 있었죠. 그걸 이용하면 잠시동안의 해제는 가능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분을 묶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 때의 능력일 뿐 본체는 불가능합니다. 잠시동안만 해제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이아나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리샤는 그것이 자신의 희생에 대한 동정심에서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다음 날, 베르히안과의 대련을 마친 다이아나는 처음으로 그녀 쪽에서 다과를 하자고 청했다. 보통은 베르히안이 제멋대로 다이아나를 따라오거나 했을 뿐이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거야?” “마족들은 키케르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응?” “페르세포네님께 듣기에는 마왕은 마족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라고 하셨어요.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고 모든 마족이 성심을 섬기는 페르세포네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존재라구요. 그런데, 지난 번 페이샤 같은 경우는......” “아아, 그게 궁금한 거야? 그러니까 마족들이 페이샤처럼 제멋대로 마왕의 명을 거스르는 일이 있느냐?” “네” “그건 말이지. 최고위급 마족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아. 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고위급 마족들이 가끔 그러는 경우도 있지. 물론, 처벌을 각오해야 하지만, 마왕이란 존재는 워낙 제멋대로다 보니 그 처벌이 운이 좋으면 거의 없을 수도 있거든. 페이샤는 판단을 잘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 “그런가요?” “응. 그리고,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을거야. 그들이 아는 것은 한정되어 있거든. 거기다 키케르는 성격이 이상해서 아는 것도 모른체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데, 베르님은 그 분을 전혀 어려워하시지 않는 것 같네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나는 마왕의 일부라고” 도대체 어떻게 베르히안이 마왕의 일부일 수 있는지 다이아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 부분에서 베르히안은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 몹시 불쾌한 일을 떠올렸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 귀여워서 다이아나는 얼른 그가 좋아하는 과자를 손에 쥐어주었다. 사실 다이아나는 거의 밤새도록 크리샤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왕은 페르세포네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약속에는 ‘자유’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크리샤의 말은 모두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알 수 없었던 것은 생면부지의 크리샤가 그런 음모를 꾸며낸 ‘이유’였다. 처음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의 충고도 크리샤의 말도 일단 한 곳에 수용하기만 했다. 마계에서 그 둘은 그녀에게 가장 친근감을 주는 존재였고, 누군가 한 쪽의 말에 치우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크리샤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미 선악을 떠나 수 번의 배신을 겪은 터다. 무조건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누군가의 음모에 곧바로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처음 크리샤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 것은 베르히안의 말을 들었을 때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크리샤의 접근에 대하여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이아나는 크리샤가 언니인 페이샤를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실, 그건 다이아나로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었지만, 일단 타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의미로 그녀를 대해왔다. 정작 크리샤가 마왕에 대한 거짓소문을 말해왔을 때에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비밀로 감추어두는 대신 곧장 마왕에게 달려가 맹세를 받아냈던 것이다. 즉, 그녀는 크리샤가 은밀히 뿌린 의심에 대항 말하지 않고도 그녀의 말의 거짓됨을 알아낼 방도로 정면으로 마왕에게 약속의 진위를 물어본 것이다. 이를 깨달은 이는 정작 마왕 자신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주욱 알고 있던 키케르는 다이아나가 크리샤의 말에 속아 넘어갈 것인지 매우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다이아나는 키케르에게 달려와 크리샤에 대한 언급도 전혀 하지 않고 교묘하게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사실 이 부분까지만 해도 다이아나는 크리샤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할 수 없었다. 크리샤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다. 마왕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가는 소문만으로 마왕이 유난히 대우하는 다이아나에 대하여 그런 소문이 돌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샤는 다이아나에 대한 걱정스러움과 관심을 보여준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고마워할 일이다. 하지만, 어제 크리샤의 거짓말이 거듭되면서 다이아나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크리샤에 대한 실망감을 둘째 치고라도 그녀가 그러한 일을 꾸민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베르님, 만약 말이죠. 제가 이 곳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다가 잡힌다면 키케르님은 화를 내겠지요?” 다이아나의 말에 베르히안은 인상을 팍 쓰더니 한번 손을 휘둘렀다. 다이아나는 그의 손짓을 따라 방 안에 결계가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베르히안은 결계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자 돌연 높은 음성으로 다이아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거야? 네가 탈출하다 잡히면? 넌, 마족과의 약속을 어긴 셈이 되지. 너야 멀쩡할지 몰라. 페르세포네님의 가호를 받는 너를 마왕이 어쩌지는 못할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저기 잠들어 있는 골드 드래곤은 멀쩡하지 못할 거라는데 내가 이름을 건다.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 거야? 어차피 기한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거기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어쩔 셈이지?” 숨쉴틈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이 사레가 들리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정작 열이 받아 소리를 지르던 차에 상대편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베르히안은 문득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의 말이 끝나자 미소를 짓고 차를 권했다. “전 여기에서 탈출할 생각이 없는데요?” “뭐야?” “제가 언제 그러겠다고 했나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의 결과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 뿐이에요” 다이아나는 늘 그러하듯이 따뜻한 어조로 베르히안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혼자 열을 낸 꼴이 되어버린 베르히안은 잠시 눈을 깜박거리면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소리가 겉으로 나올 정도로 콧방귀를 끼었다. “흥, 제대로 말해야지. 놀랐잖아!” “죄송해요. 그렇게 걱정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뭐가?” “절 걱정해 주시는 거요. 정말 고마워요” “흥.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그런 것 뿐이야. 마왕이 화를 내면 여기가 얼마나 시끄러워지는데...... 그런데 왜 그런걸 물어봤지?” “그건, 비밀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다이아나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히안은 더 이상 그녀를 다그치지 못했다. 다만,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이 그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것 같아 무안한 마음에 계속 흥, 핏 소리를 연발하면서 입숙을 비죽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다이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뭐, 뭐야?” “그야, 베르님이 너무 귀여운 표정을 지으시니까” 다이아나가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웃음을 짓자 베르히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발개진 상태로 어쩔 줄 몰라하던 베르히안은 “몰라. 나 간다” 하고 나가려다 자신이 친 결계에 쾅 하고 부딪혔다. 걱정이 된 다이아나가 달려갔지만, 더욱 무안해진 소년마족은 얼른 결계를 해제하고 달려가 버렸다. 덕분에 한참을 더 웃게된 다이아나는 씁쓸한 생각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히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그녀도 에디우스가 목표였나?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각성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붉다기보다는 분홍빛에 가까운 입술을 핏기가 가실 정도로 꼭 깨문 크리샤의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입장이 바뀌어 크리샤의 손끝에 목숨이 달린 것과 같은 페이샤로서는 동생의 이런 모습이 불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크리샤는 페이샤를 괴롭히는 것도 잊을 정도로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 있었다. ‘왜지? 다 된 일이었어. 내 계획은 완벽했는데......’ 다이아나는 심성이 착했고 자신의 접근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조심스레 음모의 끝을 내밀었을 때에도 크리샤를 신뢰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이아나를 망설이게 한 것은 크리샤에 대한 걱정 뿐이었으므로, 방법이 제공된 이상 바로 반응이 나타나야만 했다. 다이아나와 마지막으로 만난 후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시간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흘은 너무 길잖아’ 지금 크리샤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더군다나, 충분한 시간을 고려하여 어제 만나러 갔는데도 다이아나와의 면회가 거절되었다. ‘혹시 그 분께서?’ 최악의 경우가 머리에 떠올랐다. 크리샤는 불길한 상상을 얼른 지우고 다른 방향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아, 그런 걸 거야!’ 결국 크리샤가 낸 결론은 ‘소문’에 대하여 자신이 말한 것들이 ‘마왕’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었다. 만약 마왕이 그 일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했다면 일부러 방문을 사절하도록 압력을 넣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약간 초조해 보이던 표정이 순간적으로 환해졌다. 크리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다이아나님은 오늘도 마찬가지인가요?” 우물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에린의 태도에 크리샤가 먼저 말했다. 에린은 얼굴 가득히 미안하다는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크리샤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에린을 도리어 위로했다. “에린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고위 마족이면서도 크리샤는 항상 에린에게 잘 대해주었다. 에린으로서는 이 상냥한 여성을 갑자기 거부하는 다이아나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다이아나의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크리샤는 에린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에린양은 다이아나님을 좋아하시죠?” 비록 인간이라고는 해도 그 어떤 마족보다 아름답고 상냥한 다이아나를 에린도 어느새 좋아하고 있었다. 에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샤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이아나님이 저를 만나시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분의 진심이 아닐거에요. 저는 알아요. 에린이 아다시피 그 분은 너무 착하고 상냥하시잖아요” 크리샤의 말에 섞여있는 슬픈 기운에 에린이 고개를 들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크리샤는 약간 망설이는 듯 하다가,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아뇨. 에린까지 위험할 수 있어요. 하아. 그래도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크리샤의 태도에 에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 며칠 다이아나는 상당히 우울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다. 에린에게는 여전히 상냥하게 대했지만, 혼자 있을 때 보이는 표정으로 보아 분명 고민이 있는 듯 했던 것이다. “저,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에린이 용기를 내어 말을 해 보았지만, 크리샤는 거절의 말을 되풀이했다. “아뇨. 다이아나님은 제가 위험한 것도 에린이 위험한 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거에요. 그분은 아마 스스로 희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시는 듯 하네요.” 알 수 없는 말이다. 희생이라니? 에린의 머리 속이 헝클어지는 듯한 느낌에 잠시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이아나가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도 돕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지요?” 머뭇거리던 전과는 달리 결심을 굳힌 에린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크리샤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거부했다. “에린. 위험한 일이에요. 물론, 계획대로만 잘 된다면 좋겠죠. 하지만, 만일 에린이 다친다면 다이아나님은 슬퍼하실거에요” “괜찮습니다. 방법이 있는 거죠? 크리샤님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다치지 않고 다이아나님도 희생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다이아나님은......” 여전히 망설이는 크리샤의 태도에 에린은 열을 올렸다. 결국 크리샤는 따로 에린과의 약속을 정하였고, 에린 스스로가 그 일을 다이아나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런일이!” 크리샤의 거처에 방문한 에린은 강제적인 혼인의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크리샤는 우울한 미소를 되돌리면서 에린의 걱정을 부채질했다. “아무래도, 다이아나님은 그대로 따르실 생각이신가봐요. 어쩔 수 없겠지요. 누워계신 골드 드래곤은 그 분의 소중한 존재. 그런 존재를 걸고 가하는 협박에 굴하지 않을 수 없는 거에요.” 크리샤는 에린이 가질 수 있는 기대의 한 부분까지 깨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마왕께서 다이아나님을 평생 사랑해 주신다면 나름대로 좋은 일이 되겠지요. 하지만, 에린은 몰라요. 그 분은 그저 다이아나님을 가지고 놀다가 또 다른 여성을 찾게 될 거에요. 페이샤 언니도......” “예?” 난데없이 페이샤의 이야기가 나오자 에린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페이샤 언니도 한 때 마왕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잠깐이었어요. 버림 받은 언니는 점점 포악해지고 음란해졌지요. 자포자기했다고 생각해요. 언니가 그렇게 된 것은 결국......” “그럼 다이아나님도?” “마족은 강함을 숭배하는 종족이에요. 에린도 잘 알잖아요? 마왕께서 진심으로 고위마족의 능력도 안되는 다이아나님을 반려로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죠. 그분은 실컷 이용당한 후에 버려질 거라구요” “그럴 수가! 그건 말도 안돼요.” 에린은 짧은 기간이지만 다이아나의 인품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억압된 상태에서도 늘 자신에게 상냥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리샤는 그러한 에린의 심리를 교묘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별안간 저를 만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보아서는 마왕께서 무언가 경고를 하신 것이 틀림없어요. 일전에 제게도......” 생각만 해도 두렵다는 듯이 살짝 몸을 떨어보이며 처연하게 미소를 짓는다. 에린은 그런 페이샤의 페이스에 확실하게 말려들고 있었다. “어쩔 생각이지?” 맑고 높은 음성이 울려퍼졌다. “뭘?” 묵직한 남성의 대답이 이어진다. “알고 있을텐데? 내가 보는 것 듣는 것은 모두 네가 알고 있잖아? 빌어먹을!” “흠” “말 좀 해봐.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베르히안은 분통이 터졌다. 허긴 그를 만나면 베르히안은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어려웠다.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꿰뚫고 있으면서도 결코 이쪽에는 틈을 보이지 않는 존재. 그의 생명의 근원이면서도 속박하지 않는 묘한 존재. 마계에서 유일하게 베르히안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늘도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그녀가 마음에 드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키케르가 자못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의 분신을 내려다본다. 그 태연함이 견딜 수 없어서 베르히안은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였다. “그래. 마음에 들어. 왜? 그럼 안돼?” 키케르는 도발적인 그 언사에도 더욱 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이 더해졌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응? 원래 너는 매사에 별 관심이 없었지 않나?” 키케르의 분신으로 만들어진 베르히안. 그는 클론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므로 베르히안의 능력과 지식을 겸비한 채 태어났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베르히안의 모든 감각을 키케르가 공유한다는 것 뿐이다. 처음 별개의 생명체로 눈을 떴을때, 베르히안은 경악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마왕으로 자각하고 있었건만, 자신의 몸은 어느 틈에 어려져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성인 모습의 자신이 바로 눈 앞에 서 있을 것을 보았을 때의 경악이란.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마왕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최고위마족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가지지 못하고 감각까지 공유당한 마왕의 일부분으로써. “내가 왜 널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던 말이 나오고 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난 번엔 심심해서 그랬다면서?” 베르히안은 한껏 냉소를 담아 대꾸했지만, 미소년의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어봐야 살짝 토라진 듯한 귀여운 표정이 될 뿐이다. 키케르는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진실의 일부분을 토해냈다. “넌 내 대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만일을 위한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둘 중의 하나. 남던지 떠나던지. 어느쪽이 될 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뭐?” “그쯤만 알아둬 후훗” 키케르는 늘 그렇듯이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키케르가 이렇게 나올 때는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소용이 없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베르히안은 쿵쾅거리는 걸음걸이로 방을 빠져나가면서 화풀이하듯이 힘껏 방문을 닫았다. 쾅 부서질 듯 울려퍼지는 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은 키케르는 곧바로 다른 생각에 묻힌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기분이 안좋으신 듯 하네요” 다이아나는 대련을 할 시간도 아닌데 느닷없이 방문한 베르히안을 상냥하게 맞이했다. 평소와 달리 한참이 지나도 별 말 없이 과자만 아삭거리며 발을 퉁기고 있는 모습을 한참 바라본 후였다. “좀 재수없는 놈을 봐서 그래” “네?” “그냥 그런거야.” 제 할말만 하고 입을 꼬옥 다무는 그 모습은 방금 전의 키케르와 똑같았건만, 베르히안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다이아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에린에게 부탁하여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과자 접시를 채워놓았다. “지상에 가는게 좋아?” “네?” “저 드래곤을 사랑하는거야?” 한참을 침묵한 끝에 연이어지는 질문들. 다이아나는 질문의 의도를 생각지 않고 스스로 정리라도 하려는 것처럼 성실하게 대답했다. “일단, 제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이 지상에 있으니까요. 에디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에겐 둘도 없는 친구고 소중한 존재에요. 전 늘 에디의 신세만 졌거든요” “응? 둘이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어?” 베르히안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왔다. 다이아나는 그 표정이 귀여워서 살짝 웃어보이고는 다시 한 번 대답을 돌렸다. “아마 제가 누군가를 이성으로 사랑한다면 에디가 아닐까 생각은 해요. 하지만, 누군가를 이성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 “흐음?” “참, 베르님이 보시기엔 제 실력이 어느 정도 되지요?” 요모 조모로 살피는 시선이 약간 거북했던 탓인지 다이아나는 얼른 다른 말을 시작했다. 베르히안은 별로 생각도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일단 중위마족 정도. 간신히!” “벌써 그렇게나요?” 하위마족 하나를 상대하기도 힘들 거라고 했었다. 수련을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빠른 진전이 아닐까 생각되어 다이아나는 질문을 되돌렸다. 베르히안은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뭐야? 이 내가 가르치는데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참,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소린데, 너 드래곤의 능력은 다 어디다 둔 거냐구?” “네?” “네가 추방된 건 드래곤과 신의 능력을 모두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들었어. 여신의 능력이야 여기서 확인이 안되니까 그냥 두고. 드래곤의 능력은 어떻게 된 거지?” “그야 나이가 되지 않아서......” 다이아나는 자신이 헤츨링의 나이를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드래곤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바보 아냐? 저쪽 세계의 시간과 이쪽 세계의 시간, 둘 중 어느 쪽으로 나이 계산을 해야 하는지 몰라?” “예?” “넌 이 세계에서 태어났다고. 이미 성룡의 능력을 지녔어야 하는게 정상이야” “하지만, 제겐 드래곤 하트가 없잖아요?” “하!” 기가 막히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고는 베르히안은 입을 다물었다. 다이아나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져서 그의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인사을 쓰던 베르히안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500살이 되면 드래곤하트가 팍 떨어지기라도 한다고 믿었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베르히안은 방 밖으로 휭하니 사라졌다. 망연한 표정으로 남겨진 다이아나를 뒤로 한 채. 각성 “저, 목욕준비가 다 되었는데요” 에린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다이아나는 평소처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처음에 에린이 도와주겠다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한 이후로 에린은 욕실에 따라 들어오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욕실로 들어가자 에린은 그녀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뒤져서 무언가를 찾아내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건가요?” “예” 방 밖에는 이미 크리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에린이 건네준 것을 받아들고는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오늘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절대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그 전에 준비를 맞추어 놓고 제가 연회장에서 다이아나님을 설득하겠어요” 에린이 결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샤는 에린을 손은 한 번 굳게 잡아주고는 조심스럽게 기척을 숨기고 사라졌다. 에린은 얼른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다이아나가 준비를 하고 연회에 갈 수 있도록 옷가지와 보석들을 준비했다. 그 사이 크리샤는 에린이 준 구슬을 손에 들고 에디우스의 거처로 향했다. 그녀는 간단하게 방의 결계를 통과하여 에디우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다이아나는 에린이 준비해준 옷가지를 걸치고는 습관적으로 구슬을 찾았다. “응?” 에린은 다이아나의 표정을 보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검붉은 구슬을 건네주었다. “아, 에린이 챙겨놓았군요. 고마워요” 한 점 의심없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에린은 내심 불편했지만, 크리샤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내색하지 않았다. 키케르의 손님이자, 페르세포네의 조카인 성녀를 위한 연회에는 서열내의 마족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특히 최고위마족이나 장로들의 경우 페르세포네가 조카에게 가지는 애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다이아나에 대한 기대가 사뭇 컸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중앙홀에 가득한 마족들 사이로 다이아나의 입장이 알려지자, 마족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오오, 과연!” 강함을 숭배하는 마족들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족들 자신도 인간형의 모습으로는 엘프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생물들 중 아름다움의 순위를 논한다면 천족과 마족 폴리모프한 드래곤의 모습과 엘프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모에 익숙한 마족들조차 제모습을 드러낸 다이아나의 신비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마족들의 성격상 그들은 그러한 마음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나이트메어의 에스코트를 받은 다이아나는 그의 화려한 보라색과 더불어 은빛과 금빛을 찬란하게 뿜어내는 모습으로 장내를 밝혔다. 여기 저기 웅성거리던 마족들의 태도는 키케르가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다. “페르세포네님의 조카이신 성녀 다이아나양을 환영합니다!” 보기 드물게 공식석상에서 예우를 갖춘 키케르의 말이 울려퍼지자 마족들은 일시에 입을 열어 성녀를 환영하는 말을 복창했다. “환영합니다!” 연회장 안이 들썩일 듯이 각자의 목청을 돋군 진정한 환영의 소리에 다이아나는 일순 당황했으나 곧 침착을 되찾았다. 그녀는 우아하게 답례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 간단히 인사를 했다. “여러분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주객인 다이아나가 인간임을 고려한 탓인지 연회는 인간들의 방식과 흡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인간형 마족들만을 참여시켰으므로 다이아나도 이들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가끔씩 스스로 일깨워야 할 정도였다. 워낙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키케르가 연회를 여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으므로 마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름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다이아나는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크리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요 며칠간 그녀를 피해 왔던 것을 생각하여 슬쩍 자리를 옮기려고 하다가 크리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자리를 피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크리샤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크리샤의 눈에는 절실함이 넘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크리샤는 다이아나의 근처에서 멈추어 안면이 있는 듯한 다른 마족과 대화를 시작했다. - 다이아나님, 저 크리샤에요.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탁이에요. 동편의 베란다로 다이아나가 크리샤에게서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급하게 머리 속으로 전언이 울려 퍼졌다. 크리샤는 주변의 마족들을 의식한 것인지 급하게 말꼬리를 흐리고는 주위의 눈치를 보듯 슬쩍 멀어져 갔다. ‘무슨 일이지?’ 크리샤의 행위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키케르가 있고 마족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안전하다고 판단한 다이아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동편의 베란다로 향했다. “어디가십니까?" 나이트메어가 돌연 움직이는 그녀에게 물어왔다. “좀 답답해서요. 잠시 바람좀 쐬고 올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베란다 쪽을 가리키자 나이트메어는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가 움직이기 쉽도록 마족들 사이를 파고들어 안내했다. “저, 음료 좀......” 미안하다는 듯한 부탁에 나이트메어는 쾌히 그녀가 마실 것을 찾아 베란다 앞에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틈에 다이아나는 바로 베란다로 나갔고 숨듯이 구석에 있는 크리샤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죠? 조금 있으면 나이트메어님이 오실 거에요” 크리샤는 경계에 가득한 몸짓으로 다가오더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다 준비를 해 두었으니 우리 여기서 빠져나가요” “예? 그게 무슨 소리죠?” “다 알아요. 저를 걱정하셔서 그러셨다는 걸. 하지만, 전 다이아나님이 강제로 결혼하게 되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었어요. 연인이신 그 분도 이미 안전한 곳에 모셔놓았으니......” 침착하게 크리샤의 말을 듣고 있던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 대한 말이 나오자 무의식중에 목청을 높여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에디를 어떻게? 어디에 데려갔다는 거죠?” 크리샤는 애가 탄다는 듯이 자신의 할 말만을 되풀이했다. “쉬잇! 소리가 새어 나갑니다. 그 분은 제가 안전한 곳에 모셔놓았어요. 오기 전에 저희 가보를 발동시켜 놓았으니 한 두 시간 내로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전에 다이아나님도 가셔야 해요.” “크리샤!” “그 분이 일어나셔서 잠드시기 전의 기억을 되살리신다면 아마도 난동을 피우실 거에요. 그러기 전에 다이아나님이 가셔야만 해요” “이런” “어서요. 시간이 없어요!” 이미 성룡이 된 골드 드래곤이라면 마계에서도 상당한 소란을 일으킬 수 있다. 소란 정도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드래곤의 성정상 생명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일은 더 커질 것이다. 크리샤의 예측대로 다이아나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크리샤는 베란다 바깥쪽으로 다이아나를 안고 뛰어내리더니 이내 눈에 띄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준비된 옷가지를 내밀었다. 미리 철저히 준비했는지 연회로 인해 한 곳으로 몰린 시선이 아니더라도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듯한 어두움 속으로 둘의 윤곽이 녹아들어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크리샤는 다이아나를 데리고 움직이면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자신의 발로 연회장을 빠져나간 이상 골드 드래곤 또한 다이아나가 빼돌린 것으로 덮어씌울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이아나의 무모한 탈출계획의 일환이 될 것이다. 만약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음모의 주동자를 페이샤로 만들 준비도 모두 해 두었다. 마계에서 성 바깥으로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마계의 길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실상 마계의 길은 삼차원적인 공간의 길이라기보다는 공간 자체가 여러 방향으로 얽혀 있는 형태였으므로 이동하면서도 몇 차례나 공간 자체의 워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특징 탓에 얼마 가지 않아 다이아나는 어딘지 모를 공간 안으로 들어섰고 그 안에 누워있는 에디우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디!” 다이아나는 일단 에디우스 옆으로 달려가 그의 안위를 살폈다. 크리샤의 말과 달리 에디우스는 전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이아나가 무언가를 묻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그녀는 종전의 불안감을 모두 떨친 크리샤의 표정을 보았다. “호호호! 수고하셨어요. 의외로 막힌 데가 있어서 좀 고생하긴 했지만, 보람이 있군요!” 크리샤는 평소의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 한 곳의 벽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작은 공간 하나가 들어났다. “페이샤?” 다이아나는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앉아있는 청발의 여마족의 이름을 불렀다. “빙고!” “이게 무슨 짓이죠?” 에디우스의 무사함에 안도를 한 탓일까? 의외로 다이아나의 말소리는 침착했다. 크리샤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각본을 공개했다. “성녀는 마왕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어리석게도 페이샤의 꼬임에 넘어가 드래곤과 탈출을 시도한 것이죠. 저 크리샤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채고 말려보려고 하지만, 워낙 마음이 약해서 실패. 설득에 실패한 저는 눈물을 머금고 마왕님께 사실을 고하는 거죠. 물론 사실을 고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거에요. 당신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시간이” “왜 이런 일을 꾸민 거죠? 보아하니 페이샤의 원한을 갚고자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전혀 당황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의심해 볼 만도 하건만, 크리샤는 이미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대하여 자만하고 있었다. “저 골드 드래곤이 탐났지요.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이번 일로 저는 마왕님께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니 일석이조 아닐까요?” 크리샤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마력의 덩어리가 순식간에 다이아나의 손발의 움직임을 묶었다. 연약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고위마족의 위력을 여지없이 말휘한 마력은 다이아나의 움직임을 속박한 채로 벽면에 바짝 붙게 만들었다. “자, 거기서 잠시 구경이나 하실까요?” 이런 말을 하면서도 크리샤의 얼굴에는 한 점의 찡그림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만면에 상냥한 미소를 띄운 채로 에디우스를 바라보았다. “무, 무슨 짓을!” 크리샤가 에디우스의 입 안에 무언가를 넣는 것을 본 다이아나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 별로 해로운 것은 아니에요. 정신을 잃은 수컷과 사랑을 나누려면 아무래도 약간의 도움이 필요하죠. 페이샤 언니가 자주 쓰던 것인데 어차피 육체는 인간이니 효과는 틀림없을 거에요” 페이샤는 보란 듯이 에디우스의 몸 이곳 저곳을 살짝살짝 만지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다이아나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호! 차마 볼 수 없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이 분은 꿈속에서 천국의 기분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페이샤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그녀는 어느 덧 에디우스의 앞쪽 옷자락을 풀어헤치고 맨 살에 손을 묻고 있었다. 줄곧 청순하고 상냥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씩 열기를 띄면서 음탕한 표정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초조한 마음을 다잡고 주위의 마나와 공명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꾸만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음탕한 말들을 애써 무시했다. 마왕성을 떠나기 전 다이아나는 나이트메어와 베르, 키케르에게 메시지를 날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해 보지 않은 마법이 제대로 되었는지도 몰랐고 그것만을 믿고 있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순간 베르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강하게 가슴 깊이 와 닿았다. - 넌 이 세계에서 태어났다고. 이미 성룡의 능력을 지녔어야 하는게 정상이야 - 500살이 되면 드래곤하트가 팍 떨어지기라도 한다고 믿었냐? 그리고 연이어 나이트메어의 말. - 마족은 몸 전체에 마나를 저장합니다. “뭐, 뭐야?” 이미 에디우스의 상반신은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하체를 가로막고 있는 옷가지에 손을 대던 크리샤는 공간의 마나와 마력이 강력하게 한 곳으로 빨려드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다이아나가 묶여 있는 공간 쪽으로 순식간에 마나와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치 소용돌이치듯이 주위의 공간의 마나가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려는 듯이 외부의 마나들이 다시 방 안으로 몰려들었으나, 곧바로 새로운 마나들도 한 곳으로 움직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미 다이아나는 마계의 검은 마력과 마나로 둘러싸인 채 모습이 확인되지 않았다. 크리샤는 다이아나를 얽어매고 있는 자신의 마력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마치 장벽으로 둘러싸인 듯한 공간 안 쪽에 대하여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주위의 모든 마나가 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탓인지 당연히 크리샤에게 반응해야 할 주위의 마나조차 움직여지지 않고 있었다. 크리샤가 배치하고자 했던 마나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이 흘러나가 다이아나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흠. 제대로 된 셈이군!” “위험했잖아 능구렁이 자식!” 낮은 음성과 높은 음성이 어우러져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눈 앞의 현상에 잠시 넋을 잃었던 크리샤는 어느 틈엔지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키케르와 베르히안의 모습을 보고 창백해졌다. “저, 이건 다이아나님이!” “아하, 다이아나가 키케르의 약속을 믿지 않고 어리석게도 페이샤의 꼬임에 넘어가 드래곤과 탈출을 시도한 것이라구?” 베르히안이 비꼬는 어조로 크리샤가 할 말을 대신하자 키케르가 목을 울리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듯이. “그래서 너 크리샤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채고 말려보려고 하지만, 워낙 마음이 약해서 실패했다는 거야?” 베르히안은 크리샤가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던 핑계를 미리 말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크리샤는 도대체 이 둘이 언제부터 이 방에 있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력으로, 아니 최고위마족이라고 해도 마왕이 결심하고 존재를 숨기려고 한다면 알아챌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너 언제까지 그런 모습으로 있을 작정이야?” 반쯤 벗은 에디우스의 위에 올라탄 듯한 자세로 있던 크리샤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허겁지겁 침상에서 내려왔다. 너무 서둔 탓인지 거의 구르는 듯한 모습이 되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용서를!” 일단 살고 봐야 겠다는 생각에 크리샤는 무작정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관계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부자같은 생김의 두 마족은 이미 그녀에게서 흥미를 잃은 듯 다이아나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크리샤는 자신을 무시하는 둘의 태도에 조금의 희망을 가지고 살짝 빠져나가 보려고 시도했다. 엉금엉금 기듯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출구로 향했지만, 출구를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시야에 보라색이 한 가득 들어왔다. 각성 ** 본문 전 공지 ** 오늘 여신의 아이가 배포된다고 합니다. 1,2권이 함께 나온다는군요 저와 함께 기뻐해 주시겠어요? ************************************************************************************ 한동안 폭풍처럼 몰려들던 마나의 흐름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크리샤를 가둬놓은 나이트메어가 에디우스를 옮길지를 물었지만 키케르는 거부했다. 다이아나의 각성은 근본적으로 에디우스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돌연 강력해진 능력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에디우스의 부재는 큰 변화를 겪은 그녀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이런 뜻이었어!’ 다이아나는 온 몸에 차근차근 채워지는 마나를 느끼면서 깨달았다. 드래곤을 드래곤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드래곤 하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그녀의 신체에 드래곤 하트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실상은 그녀의 몸 그 자체가 드래곤 하트와 같은 역할을 해야만 했다. 유스테우스는 자신의 속성을 최대한 담아 다이아나를 잉태시켰지만, 태어날 아이의 신체적인 특징은 알지 못했다. 누구보다 현명한 그라고 할지라도 전무후무한 ‘규칙을 깬 존재’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반면 세레스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다이아나에게 억지로 드래곤의 각성을 시킬 의도는 없었기에 침묵했다. ‘빨리!’ 현재 다이아나에게 필요한 것은 엄청난 능력보다는 눈 앞의 위기를 타개할 능력이었다. 에디우스를 현 상황에 처하게 한 것은 자신의 존재이다. 조급한 마음이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다이아나는 스스로를 재촉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결코 늦출 수 없었다. - 다이아나! 에디우스는 무사해. 진정하고 침착하게 네 몸을 살펴야 해. 머리 속으로 울려퍼지는 소리에 다이아나는 일순 안도했다. 조급한 마음에 몰려들던 마나의 힘이 늦춰지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안도한 탓인지 이미 모였던 마나들이 제멋대로 날뛰려는 것이 느껴졌다. - 안 돼! 지금 긴장을 풀면 네 몸이 망가진단다. 조금 더 천천히 마나를 느껴봐. 너는 마나의 축복을 받은 존재의 자손이야. 마나는 네 일부분, 그리고 이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 다이아나, 네가 깨달은 것들을 네가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렴. 네 부모님을 생각해!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 ‘이모?’ 계속 자신을 다그치는 목소리가 페르세포네임을 깨닫고 다이아나는 정신을 차렸다. ‘부모님을 만나게 해 드려야 해.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폭주한 마나로 인해 온 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다이아나는 침착하게 몸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내 몸의 근원 또한 마나의 일부일 거야. 나는 인간이지만, 드래곤과 여신의 아이. 마나들이 나를 거부할 리 없어.’ 세상을 창조한 주신이 온 세상에 퍼뜨려 놓은 생명의 근원이자 창조의 기운인 마나. 절망적으로 다이아나의 몸을 헤집어대던 그 마나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손과 발바닥, 그리고 정수리와 명치를 통해 온 몸으로 퍼진 마나는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를 가득히 채우고 맴돌기 시작한다. 더 이상 모여들 필요가 없어지자 방 안을 움직이던 마나의 흐름이 다시 고요해졌다. “에디!” 눈을 뜨자마자 에디우스의 안위부터 챙겼다. 다행히 에디우스는 마지막 본 모습 그대로 상체를 드러내고 잠들어 있었다. “흥. 기껏 걱정이 되어서 왔는데 나는 보이지도 않는거야?” 초유의 일인만큼 초조한 마음으로 다이아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히안이 투덜거렸다. 다이아나는 아름다운 모습의 소년에게 미안하다는 뜻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어느 정도 제 힘을 찾은 것 같군.” 팔짱을 낀 채 구경하듯이 서 있던 키케르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또한 상당히 긴장해 있었고, 그 증거로 보이지 않는 옷 속으로 팔뚝에 자국이 생겨 있음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폐를 끼쳤습니다.” 겉보기에 다이아나의 모습은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방금 전의 일이 사실이 아닌 듯이 예전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키케르는 다이아나가 드래곤 하트의 힘을 소유했음을 알고 있었다. “흠. 이제 내 역할은 이것으로 끝인가? 약속 기간이 얼마 남기는 했지만, 이제 지상으로 올려 보내도 되겠군” “네?” “아아, 오해는 하지 말도록! 방관한 것 뿐 페이샤나 크리샤의 일은 내가 계획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나는 베르쪽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다이아나는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어질 질문은 베르히안에 의해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이러구 있을거야? 일단 자리나 옮기자구. 그리고 네 남자는 저렇게 그냥 두어도 괜찮아?” “아!” 상체를 드러낸 에디우스를 가리키며 짜증스럽게 말하는 베르히안의 말에 다이아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이트메어가 뒤에서 나타나 망토 비슷한 천을 하나 건네 주었다. “고마워요” 다이아나는 그것으로 에디우스의 드러난 상체를 감쌌다. “일단 움직이죠” 나이트메어가 에디우스를 옮기려고 하자 다이아나는 자신이 직접 마력을 움직여 에디우스의 몸을 공중에 띄웠다. 그녀가 마력을 자연스럽게 제어하는 것을 본 나이트메어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조용히 앞에서 그들을 안내했다. “그럼 이 모든 일이 페르세포네 이모님의 계획에 의한 것인가요?” 에디우스는 당장에라도 깨울 수 있었지만, 일단 다이아나가 먼저 사정을 알아야 했다. 깨어난 에디우스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만. 미리 말해두는데, 지상계의 신관들이 움직인 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야. 덕분에 기회가 되긴 했지. 그 분이 관여한 것은 네가 움직인 이후부터야. 뭐, 나도 오랜만에 재미있는 사건이 되었지만.” “만약 한 달이 되도록 제가 각성을 하지 못했다면요?” “억지로 그런 상황을 만들었겠지” 키케르가 초연하게 말하자 베르히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하지만 키케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읊어댔다. “만일 크리샤가 움직인다는 것을 몰랐으면, 에디우스의 안위를 위협하는 역할은 베르를 시킬 생각이었어. 너는 그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확실한 자극이 되었겠지” “그런!” 키케르의 말에는 베르의 의중이나 다이아나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일단, 내게는 페르세포네님의 명이 우선한다고. 어쩔 수 없잖아? 어찌되었던 둘 다 무사했을거야. 너도 알고 있지? 아까 그 분이 너를 구해주신 것을” 다이아나는 키케르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했지만, 페르세포네의 마음은 알 수 있었다. 페르세포네나 마왕이나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속성은 타고난 것이었으니. “일부는 너를 위한 것도 있어. 만일 지상계에서 어설프게 각성했다면 아까같은 마나의 이동이 알려지게 되었을 거야. 여기가 마계이고 내가 주변에 있었기에 별 일이 없었던 것이지. 지상계에서 아까같은 현상이 일어나면 잘못하면 일순간 마나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어. 최악의 경우 생명체의 마나를 빼앗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고” 키케르는 이 부분에서 그 답지 않게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일면 변명같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 일부분에서는 다이아나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결과로 뜻밖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자신만 겪은 일이라면 오히려 탈탈 털고 결과만을 보면서 고맙다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고맙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어요. 물론 제 잘못도 있지만, 에디우스를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한 것은 옳지 않았으니까요. 그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를 아무렇게나 이용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이아나의 냉정한 대답에도 키케르는 무표정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뭐. 별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은 없어. 한 달이 약속이었지만, 지상계에서 필요한 시간도 정리가 되었고, 어차피 너도 모습을 드러내려면 시간이 걸릴테니 준비가 되면 말하도록!” “준비요?” “나머진 베르가 말해줄거야.” 키케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베르히안은 자신이 거론된 이후 침울한 빛으로 아무말 없이 자리를 지키다가 키케르가 나가자 마자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다이아나. 실은......” “베르님. 괜찮아요! 이제 저도 조금은 알겠어요. 당신이 마왕의 일부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베르님이 저에게 아무나 믿는다고 질책하신 것도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다이아나는 버르장머리 없어 보일 정도로 거침없던 베르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그를 달랬다. “그보다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랑 지상계의 사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어요?” 다이아나는 말하기 서먹한 내용들을 먼저 정리해 버리고 베르히안을 재촉했다. 다이아나가 평소와 같은 태도로 자신을 대하자 용기를 얻은 베르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 드래곤이 깨어나면 그에게 용언의 사용법을 배우도록 해. 마족의 방식, 인간의 방식은 이미 알고 있지만, 효율면에서는 용언을 배우는 게 좋을거야.” “아, 그렇군요” 각성은 다이아나가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을 크게 증가시켰고, 마나의 움직임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아직 다이아나는 마나를 마력으로 전환하여 직접적으로 사용하거나, 인간의 마법식으로 캐스팅을 통해 배열하는 것 밖에는 모르고 있다. 새로 얻은 능력을 이용한다면 언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지상계에서 어둠의 신관들은 한 나라를 장악했어. 시간이 별로 없었던만큼 처음 노렸던 하투아를 포기하고 이트왕국 쪽에 자리를 잡았지. 동쪽 산맥 아래의 작은 왕국 알지? 거기 왕이 완전히 페르세포네님의 골수 신자가 되었더군. 어차피 더 이상 동일한 방법의 계약을 맺기는 힘들거야. 희소성이 다시 생기려면 수 백 년은 걸릴테니까” “저, 혹시 다친 사람들은” “상당히 재주껏 처리했는지 별로 그런 일은 없다고 들었어. 오히려 하층민에서 마족과 계약을 한 이들이 꽤 나타나는 바람에 신분차별이 많이 없어졌다더군. 걱정 안해도 좋을거야” “네” “도대체 저 꼬마는 뭐야?” “에디, 그러지 마. 베르님은 여러 번 나를 도와주셨어.” “그렇지만......” 잠에서 깨어난 에디우스는 자신이 한 달 가까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에 경악했다. 결국 큰소리를 치다가 자신을 인질로 제공한 셈이니 다이아나를 볼 면목이 없었다. 물론, 다이아나가 마계의 생활을 계기로 드래곤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작아지는 것 같아 조금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에디우스를 열받게 한 것은 다이아나가 끼고 도는 한 소년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디안처럼 어디서 고아를 하나 데려왔나 했더니 마족이라는 것이 아닌가? 에디우스는 베르히안과 동행할 수 없다고 펄펄 뛰었지만, 번번이 다이아나가 감싸고 도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베르히안도 에디우스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족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추고도 에디우스와 대등하게 겨룰 힘을 보유한 베르히안은 사사건건 에디우스에 맞서 그를 자극했다. 둘 사이에 끼어 용언에 대한 공부가 늦어질 지경인 다이아나는 한숨을 쉬면서 베르히안을 데리고 나온 상황을 떠올렸다. “부탁이 있어” “네?” “베르히안을 지상계로 데려가서 그가 원할 때까지 함께해 줄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저는 마족과 계약을 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베르님도 여기가 익숙할 텐데......” “아니, 베르는 이곳을 싫어해. 마족들도 그의 눈치만 살피지. 내 독단으로 만든 존재이지만, 사실 그는 고독하고 딱한 존재야. 그리고, 그는 특별한 존재이기에 지상계에 나갈 수 있어. 마족이지만 마족이 아니기도 하거든.” 키케르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베르히안이 불행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 다이아나가 베르히안의 의사를 물었을 때 그가 너무나 기뻐했으므로 결국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업자득인걸까?’ 유독 아이들에게 약한 자신을 돌아볼 때 현재의 상황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 다이아나는 한숨을 쉬면서 당장이라도 난투극을 벌일 듯한 둘을 떼어놓았다. “에디우스 용언 가르쳐줘야지. 베르님, 저와 함께 생활하려면 그 책 다 읽으셔야 한다고 했죠?” 각자 할 일을 지정해 주고서야 잠잠해졌지만, 둘 사이는 항상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이아나는 다시 한 번 베르히안에게 주의를 주었다. “베르. 일단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돼. 인간들은 마족에 대해서 상당한 공포를 가지고 있어. 힘도 함부로 쓰지 말고 네 나이에 어울리게 행동해야 해” 일단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베르에 대하여 반말의 사용을 확정하고 있었다. 마계에서야 아무리 베르히안이 강박해도 곧바로 존대말로 돌아가버리곤 했지만, 지상계에서는 어색한 행동이었으므로 조심해야 했다. 베르히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답례로 다이아나의 환한 미소를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에디우스에게는 뮤리엘에게 전한 내용을 말해놓은 상태였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다. 드래곤의 기억력으로 무엇을 잊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테니까. 새로운 능력을 얻은 이후 다이아나는 암기력과 기억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혜의 능력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질을 달리했다. 일단 한 번 들은 말이나 한 번 본 장소들은 언제든지 필름을 되돌리듯이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각성 셋의 기묘한 동거는 마족과의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의 며칠간 계속되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그간의 일을 말하긴 했지만, 페이샤와 크리샤의 일은 함구했다. 그저, 페르세포네의 배려로 각성한 것으로 해 둔 것이다. 중간의 구체적인 일들을 제외하면 의도적인 침묵 이외에는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었다. 에디우스가 상단과의 연락을 재개하고 하비어스를 만나러 간 사이 다이아나는 베르히안과 그 간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다. “베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 “응? 뭔데?” “그 두 자매 말야. 어째서 그런 일을 한 거지? 단순히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치고는 너무 위험한 일이잖아. 페이샤의 일이야 전에 들은 설명으로 대충 알겠지만, 크리샤는 도대체 왜 그런걸까?” “크리샤는 말이지. 자신의 언니에게 상당히 학대받고 지냈지. 처음의 심성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는 차츰 악독해져 갔어. 아마 저 드래곤한테 손을 댄 것은 오기였을지도 몰라.” “오기?” “크리샤에게 페이샤는 늘 넘어설 수 없는 벽과 같았지. 페이샤가 실패한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 간의 일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하지만......” “뭐, 나도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나이트메어의 이야기를 듣자면 그렇더군. 그녀의 꿈의 세계는 페이샤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동경으로 가득했다고. 페이샤는 속성 자체가 그런 방향이었지만, 크리샤는 쾌락과 욕망의 속성 쪽에 가깝지 않은데도 언니보다 오히려 난잡한 생활을 한 모양이야.” “그게 어떤 연관이 있는데?” “스스로 세뇌한거지. 언니보다 더 욕망과 쾌락을 쫓는 자신을 상정해 놓고 그대로 따른 거라고 보면 되나? 아무튼 그러다보니 무리한 일을 하게 되었지.” “흠......” “왜, 불쌍해? 어차피 개개의 사정을 다 들어보면 나름대로 사연이 있게 마련이잖아” “그래. 크리샤가 불쌍해. 그런 식으로밖에 사는 방법을 찾지 못한 거니까.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게 유일한 길로 보였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처벌을 말리진 않았잖아?” “내가 그녀를 동정한다고 해서 그녀가 한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자신이 괴롭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그 화풀이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해. 더군다나, 에디에게 그런......” “뭐, 어차피 마족에서 몇 백 년이면 조금 긴 시간에 불과해. 그 동안 그 두 자매도 머릴 좀 식힐 수 있겠지.” 다이아나는 그 일 이후 크리샤를 본 적이 없었다. 키케르가 처벌을 물어왔을 때에도 마계의 규칙에 따라줄 것을 부탁했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크리샤는 페이샤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압수당하고 그 벌의 기간은 거의 배에 달하게 받은 듯하다. 다이아나가 챙긴 것은 에린 하나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에린은 다이아나를 도우려는 순수한 의도였으므로 피해를 입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다이아나는 내내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지상계로 올라와버렸다. “베르. 네가 에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지만, 마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절대 말하지 말아줘. 이건 내 부탁이야 응?” 다이아나는 마지막으로 다짐하듯이 베르히안에게 부탁했다. 물론 에디우스에게 전말을 이야기하는 동안 베르히안이 함구하고 있긴 했지만, 둘 사이가 워낙 좋지 않다보니 염려가 되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생각은 없어.” 베르히안은 쉽게 대답했지만 어설픈 맹세나 거창한 수식어가 없는 그 말에 오히려 신뢰가 갔다. “언니!” 바람처럼 달려든 뮤리엘에 의해 다이아나는 한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뮤리엘은 그런 다이아나를 붙들고 나름대로 특이한 기쁨의 표현을 해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포옹 후에 이어지는 엄청난 질문 공세에 대답을 하려다 말고 다음 말에 막히는 경험을 계속한 끝에 끝내 포기하고 조용히 웃으면서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디 있었어요? 마물은 해결이 되었나요? 이시니엘은 어떻게 되었죠? 언니 아버님은 무슨 일로 찾으신 거에요? 디안이 잠시 실종되었다는 거 알고 계세요? 물론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저도 나중에 들었거든요. 어째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바로 귀국하실 건가요?” “......” 숨쉴 새 없이 퍼부어대는 말은 대답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뮤리엘은 한참을 그렇게 떠들어대다가 비로소 상황을 인식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명랑하고 활기찬 성격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황녀다운 품격을 늘 유지하던 그녀의 지금 모습에 에디우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이아나 뒤에 서 있던 베르히안 마저도 기가 질린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으니까. “저, 죄송해요. 너무 흥분해서......” 뮤리엘이 상황을 인지하고 입을 다물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약간 어색해진 모습으로 뮤리엘은 사과를 연발했다. “괜찮아요. 제가 너무 걱정시켰죠?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다이아나는 뮤리엘의 손을 잡고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야 원! 전 보이지도 않나 보네요. 나 참 섭섭해서!” 에디우스가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듯이 끼어들자 뮤리엘은 얼른 그에게 웃어보였다. “물론, 에디우스님도 반가워요.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 가볍게 에디우스의 공격을 받아낸 뮤리엘은 한 쪽에 서서 자신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에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11살이나 12살쯤 되었을까?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년은 크고 맑은 보라색의 눈을 빛내며 뮤리엘과 다이아나의 상봉을 흥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뮤리엘의 시선을 따라간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에게 손을 내밀어 앞쪽으로 내세우고는 둘을 인사시켰다. “이쪽은 베르. 아버지가 맡고 계셨는데 이번에 나와 동행하기로 했어. 원래 이름은 베르히안이야. 베르, 이쪽은 내 의동생인 뮤리엘이야. 전에 말해주었지?” 다이아나는 둘을 인사시키면서 내심 베르히안의 태도를 걱정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이아나는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베르히안이라고 해요” 베르히안이 수줍은 많은 소년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퉁퉁거리는 거만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숫기 없어 보이는 모습이라니. 뮤리엘은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이 얼굴을 붉히면서 수줍게 인사하자 멍한 표정을 짓더니 대뜸 달려들었다. ‘뭐, 뭐야?’ 베르히안은 나름대로 다이아나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미리 연습까지 해 둔 터였다. 뮤리엘이 다이아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호감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좋아?’ 베르히안 생애 최고의 난관이었다. 느닷없이 달려들어 볼을 부벼대는 이 인간여자를 밀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함부로 힘을 사용하는 것도 좀 문제가 있었고 무엇보다 베르히안은 이런 상황을 겪어본 일이 없어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알고 보면 그건 쑥스러움과 비슷한 감정이지만. 다이아나는 뮤리엘이 갑자기 달려들어 베르히안에게 부비거리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어쩔 줄 몰라하는 베르히안의 표정에 정신이 들었다. “뮤리엘, 베르가 놀랐잖니?” 뮤리엘은 자신의 가슴에 파묻혀서 홍시감처럼 빨갛게 상기된 베르히안을 보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 미안미안! 난 뮤리엘이라고 해. 베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아, 네.” 베르히안은 이미 뮤리엘의 페이스에 말려든 듯 했다. 분명 처음엔 뮤리엘에게 호감을 사려는 의도로 움직였지만, 막상 지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계에서 그에게 이런 일을 할 존재가 누가 있었겠는가? 뮤리엘은 당연한 듯이 베르히안의 손을 붙잡고 놔줄 생각이 없는 듯 다이아나를 재촉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에디우스는 베르히안의 돌변한 모습에 속으로 기가 막혀 하다가 다이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귀공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바요.” “별 말씀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아니오. 그대들이 노력해 주었기에 이번 일이 이 정도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오.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대들의 능력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겠소?”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온갖 수식어로 포장된 말들이 황제와 파견단 사이를 오갔다. 다이아나 일행이 마지막으로 뛰어들었던 사건 이후 하투아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뮤리엘 황녀가 일정하게 황궁 안으로 들어와 경과보고를 했지만, 거의 형식적인 내용일 수 밖에 없었다. 뮤리엘은 칼라임쪽 인원들이 현장일을 하느라 궁에 들르지 못한다고 변명했고, 카이젠 또한 뮤리엘과의 접견에 신경을 쓰느라 한 쪽으로 듣고 넘겨버렸다. 오히려 카이젠은 한 두 주가 지나도록 아무 사건이 없자 뮤리엘이 귀국하겠다는 말을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없어진 상황에서 뮤리엘이 귀국을 할 리는 없었다. 카이젠의 눈에 안 띄게 다이아나의 영지쪽을 마법을 이용하여 오가면서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르는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척했다. 이런 뮤리엘의 심정을 알 길 없는 카이젠은 척 보기에도 종료된 사건을 질질 끌고 있는 뮤리엘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호감 정도로 생각하고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으니. 이미 한 달이나 잠잠한 제국인지라, 사건이 종결된 것으로 보고 귀국하겠다는 이들을 말릴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뮤리엘도 카이젠의 그러한 심사를 대충 읽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없을 때야 일부러 그런 카이젠의 오해를 모른척해왔다. 그러다가 다이아나가 돌아오자마자 떠나겠다는 결심을 밝힌 것이다. 그렇고 그런 치하의 말이 끝나고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목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다이아나도 이번만큼은 빠질만한 명목이 없었기에 에디우스와 동행하여 참석했다. 물론 한 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와 에디우스에 대해서는 뮤리엘이 빈틈없이 일행들에게 설명해 놓은 후였다. 다이아나는 그간 상당히 친밀해진 듯한 분위기를 풍겨내는 뮤리엘과 카이젠을 조심스레 주시하고 있었다. 뮤리엘은 능숙하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카이젠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친밀함을 형성하고 있었다. “오셔서 고생만 하시다 가시는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카이젠이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를 향해 치하의 말을 했다. 알려지기로는 이번 일의 뒤를 캐기 위해 내내 조사를 해 온 것이므로, 적절한 인사말이었다. 에디우스와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반응을 내심 걱정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다이아나는 한 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침착하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면서 카이젠의 말을 재치있게 받아 넘겼다. ‘각성의 영향인가?’ 하나의 굴레와도 같은 카이젠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다이아나를 보는 에디우스의 심정은 복잡했다. 애시당초 엔젤하우스의 비극 당시에 자신의 부재가 뼈아프던 차였다. 엔젤하우스의 일은 다이아나 뿐만 아니라 에디우스에게도 부담이 되는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은연중에 자신의 부재로 인한 비극의 자리를 대신할만한 어떤 사건을 바라고 있었는지로 몰랐다. 하지만, 이제 다이아나는 각성을 했고, 그와 그녀 사이에 놓였던 큰 능력의 차이는 사실상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뮤리엘도 다이아나의 변화를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함께 했다는 다이아나는 마치 내면에 빛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의 은빛과 금빛을 숨기고 있는 지금도 마치 스스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듯한 착각까지 하게 했다. 카이젠은 이전과는 달리 자신에 대하여 어색함을 드러내지 않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다시 한 번 신경 한 구석이 쏠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뮤리엘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만 하건만, 정작 자신의 신경은 별 이익을 볼 수 없는 상대에게 자꾸만 집중되고 있었다. 카이젠은 애써 그런 부분을 외면하면서 뮤리엘과 춤을 추기 위해 플로어로 나섰다. 그들을 보던 에디우스가 한 쪽 팔을 내밀자 다이아나 또한 망설이지 않고 그의 팔을 잡고 나섰다. 황제와 황녀 커플, 그리고 칼라임에서 파견나온 아름다운 젊은 남녀의 모습에 시선이 쏟아졌다. ‘웬 날파리가 이렇게 많아?’ 에디우슨 불쾌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면서 플로어를 누비고 있는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는지 젊은 남자들이 두 아름다운 여성에게 끊임없이 춤을 신청해왔다. 뮤리엘과 다이아나는 작정한 듯 그러한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기에 에디우스는 졸지에 파트너를 잃고 외기러기 신세가 된 셈이었다. 물론 에디우스의 주위에도 적극적인 여성들의 돌진이 잇따르고 있었다. 에디우스는 그 중 몇 명과 춤을 추기도 했지만,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결국 솜씨있는 거절을 거듭한 끝에 이렇게 홀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에디, 춤 안춰? 나랑 출래?” 붉은 머리의 샌님같이 생긴 백작가의 자제라는 남자와 춤을 마치고 돌아온 다이아나가 에디우스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는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에디우스가 다이아나에게 막 손을 내미려는데 어느 틈엔지 접근했던 카이젠이 끼어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죄송하지만, 주인의 예우로서 제가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에디우스의 안색이 일순 차갑게 굳어졌다. - 난 괜찮아 에디. 다녀올게. 다음 곡은 예약이다? 이제는 능숙하게 들려오는 다이아나의 메시지에 에디우스는 순식간에 안색을 바꾸고 카이젠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저희야 언제든지 춤출 수 있으니까요” “영광입니다.” 판에 박힌듯한 예의상의 인사말이 오가고 카이젠은 다이아나의 팔을 끌고 플로어로 나섰다. 뒤늦게 이 상황을 보고 파트너를 설득하여 뮤리엘이 다가왔을 때는 이미 다이아나와 카이젠은 플로어에 서 있었다. “괜찮겠어요?” 이미 다이아나의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본 터라 뮤리엘은 작은 소리로 에디우스에게 속삭였다. 에디우스 또한 심사가 편하지는 않았지만,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끄덕여 보였다. ******************************************************************************** 연참은 오랜만이죠? ^^; 사실 제 전공이 연참이었는데 말이에요. 치베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리고 다른 여러분들의 리플도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한동안 잠 잘 시간도 없이 바쁜 나머지 조금 무리를 했었는지라 성실하게 연재를 못한 점에 사과드립니다. 리플에 달아주시는 수정사항은 모두 다 읽고있습니다. 그리고, 출판본에서는 그런 오류가 없도록 조심하고 있지요 일단 연재를 하면서 기존의 연재분을 수정해야 하는지라, 연재하는 게시판에서 수정하고 또 원고를 수정해야 하겠지만, 출판본 수정시에만 명심해서 다시 보고 있습니다. 이 점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여러 지적이 있을 때마다 고마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새겨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작가가 꿈쩍 않는 듯이 보이더라도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 자, 그럼 내일 혹은 모레 뵙지 각성 “춤을 잘 추시는군요” 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묵을 깬 것은 카이젠이었다. 다이아나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틈을 안 주는군.’ 대체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경우 겸손의 말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성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면 남성은 다시 과장되게 칭찬을 하고, 그러는 와중에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단호하게 감사의 말을 하고 나면 다시 화제는 끊어질 수 밖에 없다. “평민 출신이시라고 들었는데, 언제 배우셨는지요?” 카이젠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말을 걸어왔다. 언제나 여성쪽에서의 접근을 받아온 카이젠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뮤리엘 황녀의 경우도 좀 특이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럴만한 위치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뮤리엘은 카이젠의 말에 대꾸도 잘 해주고 호감을 가진 듯이 행동했으므로 그다지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카이젠으로서는 하이센의 황제의 마법실력으로 자신에게 걸린 드래곤의 제약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있었다. “춤을 배운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선생님이었나보군요. 제 조카에게도 권해주고 싶습니다만?” 계속적으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에디우스경에게 배웠지요. 그는 저의 검술 스승이기도 합니다.” 순간 카이젠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러고 보면, 이 여자와 알트 상단의 후계자라는 금발의 미남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을 들은 듯도 했다. “두 분은 장래를 약속한 사이인지요?”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지론대로 카이젠은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마음은 한층 씁쓸해졌다. “에디우스와 저의 아버님들께서는 아주 오래된 친구시랍니다. 아마도 제가 누군가와 반려의 약속을 한다면 그건 에디우스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소같으면 이쯤에서 접었을 것이다. 이미 임자가 있는 여성이고 그 쪽에서 자신을 유혹해 온 것도 아니라면 굳이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현재 자신은 하이센의 황녀인 뮤리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뮤리엘을 만날수록 그녀의 조건만큼이나 그녀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하이센의 황녀라는 부분에서 결혼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뮤리엘은 카이젠이 감탄할 정도의 지적인 능력과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더하여 아름다운 외모와 활달한 성격은 타국 여성들의 내숭에 가까운 태도를 싫어하는 카이젠에게는 이상형이라 할 수 있었다. 카이젠은 뮤리엘을 자신의 반려로 반쯤 확정짓고 있는 상태였다. 얌전 떠는 여성을 싫어하는 자신이 숫기 없어 보이는 다이아나라는 이 여자에게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카이젠은 속으로 되묻고 있었다. 몇 번 더 시도한 대화도 비슷한 상태로 끝이 났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질 수 없게 만드는 예의바른, 그러나 단호한 대답들. 카이젠은 결국 곡이 끝난 후 플로어에서 나와 기다리던 에디우스의 손에 다이아나를 넘겨 줄 수 밖에 없었다.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다고 에디우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젠에 대한 일만큼은 어쩐지 말을 꺼내기가 껄끄러워 둘은 그저 침묵 속에 익숙하게 몸을 움직였다. 에디우스가 평소와 다른 것에 신경을 쓴 건 오히려 다이아나였다. “왜? 걱정되서 그래? 난 괜찮다고 했잖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물론 아직도 마음이 아프지만, 이제는 카이젠을 본다고 해서 동요할 정도는 아니라구” 한껏 가벼운 어조로 다이아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에디우스는 이렇다 할 말이 없어 그저 그런 다이아나를 보며 웃음지었다. 그 날의 연회는 그렇게 별 탈 없이 순조롭게 끝났다. 다음 날, 칼라임과 하이센에서 파견된 일행들은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각각 자신의 제국으로 돌아갔다. “엄마!” “이모!”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최근 한 달간은 수정구로조차 보지 못한 다이아나를 걱정한 것은 저택의 모두였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그녀를 부르며 뛰어가 안길 수는 없었으므로 다이아나에게 달려드는 아이들은 부럽게 바라볼 뿐이다. “다들 잘 지냈니?” 다이아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각자 저마다 하고 싶은 말들을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안느가 잘 돌보아 주었지만, 장기간의 부재가 디안에게 불안을 준 듯 했다. 디안은 다이아나의 옷자락에 매달려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그런 디안을 웃으면서 안아 올리고는 뒤쪽에 서 있던 베르히안을 손짓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이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호기심의 대상을 바꾸었다. 베르히안은 훌륭하게 수줍음 많은 소년을 연기했고 안느와 말론을 비롯한 어른들과 아이들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다. 아이들을 달래 저택 안으로 들어간 다이아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한창 클 나이여서인지 기분 탓인지 그리 긴 기간이 아닌데도 아이들은 눈에 보일만큼 자라 있었다. 다이아나는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이 영지가 자신의 집임을 실감했다. 이쪽 세계에서 다이아나에게 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거처는 있었어도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주는 공간이 바로 ‘집’이었음을 그녀는 깨닫고 있었다. “저, 너무 무리하신 건 아니에요? 아가씨. 안색이 안 좋아요.” 안느가 약간 창백한 듯한 다이아나의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물어왔다. 다이아나는 몇 번에 거쳐 괜찮다고 했지만, 안느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결국 아이들은 다음 날을 기약하면서 각자 방으로 돌아갔고 디안과 베르히안만 남았다. 베르히안은 디안의 일을 알고 있었으므로 특히 상냥하게 대하고 있었다. 덕분에 디안은 저택이 낯선 베르히안을 안내한다고 손을 잡고 총총히 뛰어갔다. 겉 모습은 별로 닮지 않았지만, 이들의 체구나 하는 행동을 보아서는 꼭 사이좋은 남매의 모습이라 저택의 어른들은 다들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일단 목욕부터 하시고 한 잠 푸욱 주무세요. 참, 주무시기 전에 식사 준비를 해 놓을테니 남김없이 드시구요” 안느가 걱정이 가득한 어조로 강요하듯이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다이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가 막 목욕을 하러 들어가려 했을 때 다시 한 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상단에 들렀던 에디우스가 뒤따라 온 것이다. 에디우스 또한 아이들의 환영을 피할 수 없었는지 홀에서 붙들린 듯 했다. 다이아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목욕을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괜찮은거야?” “괜찮다니까” “하지만, 잠을 그렇게 못자서야 몸이 멀쩡할 리 없잖아?” “잘 만큼은 자고 있어” “그거 혹시 새로 얻은 능력 때문이야?” “글쎄......” 이미 그간 영지상황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받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였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디안을 재우고 돌아와보니 어느 틈엔가 에디우스가 서재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지금같은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능력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다이아나는 칼라임을 떠난 이후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꿈의 내용은 조금씩 변했으니까. 그녀가 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바로 닫혀진 세계의 지혜였다. 포이브론의 예견대로 다이아나의 능력이 상승하자 꿈도 점차 구체적이 되어갔다. 다이아나는 밤새도록 자신을 찾아 죽도록 헤매는 지혜의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분명 예전에는 지혜의 꿈만 보였는데......’ 일전에 꾸던 꿈은 지혜의 꿈 속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이아나는 지혜의 일상들을 꿈으로 보고 있었다. 꿈에 보이는 지혜는 날마다 다희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초췌해져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신원미상의 여성의 변사체까지 일일이 확인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다이아나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참혹한 사체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이 다희가 아님을 알고 안도하던 지혜. 하지만, 역시 지혜는 다이아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에디우스는 보고를 위해 머물렀던 수도에서 다이아나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분명 각성 이후부터 좀 더 안정되어 보던 분위기가 약간 변해 있었다. 그것이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아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디우스는 황궁에서의 절차를 모두 도맡다시피 하고 서둘러 영지로 귀환하도록 배려했다. “그만해 두지?” 에디우스의 다그침에 뭐라 설명을 하지 못하는 다이아나 사이로 높은 음성이 끼어들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 음성의 당사자는 베르히안이다. 베르히안은 셋만 있을 때는 여지없이 전의 태도로 돌아가곤 했다. 특히, 에디우스가 있을 때의 베르히안은 천상 마계에서의 건방진 마족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기분이 상한 에디우스가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오히려 네가 더 괴롭히고 있잖아? 지금 그렇게 추궁하는게 다이아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말 할 수 있는 일이면 말 했겠지. 아직도 다이아나 성격을 모르는 거야?” “네가 뭘 안다고......” “알만큼은 알어. 내 말을 반박할 수 있으면 반박해 보라구.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오히려 뭘 모르는 건 너 아냐? 다이아나가 악몽의 내용을 털어놓으면 네가 그걸 해결해 줄 수 있어? 만약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 같았으면 당연히 이야기했을 거라구. 둘 중 하나겠지. 네가 전혀 도움이 안 될 일이던가, 네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될 일. 내 말이 틀려?” 소년의 형태일 뿐이다. 베르히안은 키케르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존재였다. 그런 그의 말에 에디우스조차 더 이상 반박을 못하고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심각해진 두 사람의 분위기에 다이아나가 끼어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만들 해! 내 과거가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는 건 다 알잖아? 그냥 큰 변화가 나타나서 조금 제어가 안되는 것 뿐이야. 에디, 걱정해 줘서 고마워. 베르. 네 마음도 고마워. 둘 다 날 위해서라는 거 잘 아는데, 날 위한다면 제발 싸우지 말아줄래?” 다이아나의 마지막 말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사실 이상하게 서로를 싫어하는 이 둘 덕에 다이아나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둘 모두 그 사실을 알기에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금방이라도 무력을 쓸 듯한 기세는 거두어들였다. 이틀 후, 뮤리엘이 방문할 때까지 다이아나는 보고받은 내용을 직접 보느라 시간을 보냈다. 창조의 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농기구들은 상당한 효율을 자랑하여, 농민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있었다. 더불어 여기 저기 새로운 직업을 찾았던 이들도 그 사이 눈에 뜨이게 안정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글을 읽게 되었다. 잘 살게 된 탓인지 영지민들 사이에 몇 번의 사소한 다툼이 있었지만, 상당히 현명하게 해결이 되었기에 다이아나는 오히려 스스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영지는 자리를 잡고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베르히안은 인간의 생활에 대하여 듣고 보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접하니 상당히 새롭게 느껴지는 듯 했다. 그는 마치 보통의 평범한 소년처럼 ‘견학’이라는 형태로 또래들이 공부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베르히안과 디안의 사이가 순식간에 좋아지는 바람에 다이아나를 흐뭇하게 했다. 둘은 거의 모든 시간을 꼭 붙어다녔고 그 때문에 여자친구를 빼앗긴 셈이 된 레온이 심통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베르히안은 그 심술궂음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그런 레온에게도 친절하게 대했고 레온도 하루가 다 지나지 않아 베르히안의 팬이 된 모양이었다. 뮤리엘은 늘 그렇듯이 엘프인 솔베노와 동행하고 있었다. 말을 들어보니 솔베노는 오히려 뮤리엘보다 영지에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듯 했다. 뮤리엘은 다이아나의 급작스러운 전언 이후 하투아에서 이곳과 연락을 취하고 오갔지만, 솔베노는 거의 내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이 영지에 적응할 지에 대한 부분과 영지내의 신관이나 마법사들이 베르히안의 정체를 알아채게 될 것이 걱정이었다. 물론 베르히안이 마족이라고 밝혀진다고 해서 그를 모른 체 할 다이아나는 아니었지만, 밝혀지지 않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그런 다이아나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베르히안은 태평했다. 그리고 다이아나는 헤파이토스의 창조의 손들조차도 베르히안이 마족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이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신관만큼 마족이 기운에 예민한 존재는 드물었다. 하지만, 베르히안은 그런 신관들 앞에서 버젓이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기계들에 대하여 친근하게 묻거나 만져보곤 했다. 처음 그 광경을 보고 기겁했던 다이아나의 걱정과 달리 창조의 손들은 기계에 관심을 보이는 베르히안에게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마기를 그렇게 완벽하게 죽이는 것이 가능한 거야?”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이아나 편에서 묻자 베르히안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 불가능하지. 특히 신관들 앞에서 존재감을 없앨 수 있는 마족은 최고위 마족에서도 일부 뿐이야. 나에게야 간단한 일이지만.” 베르히안의 말을 듣다보면 마왕이란 마족이면서도 마족을 뛰어넘는 존재인 듯했다. 물론 마왕도 계약의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마족들에게 걸리는 제한들은 마왕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까. 뮤리엘과 솔베노가 도착한 후 저택과 영지 안에서는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생겼다. 그건, “기다려어어!” “싫어요오!” 도망가는 베르히안과 쫓아가는 뮤리엘의 모습이었다. 뮤리엘은 틈만 나면 베르히안에게 덤벼들어 이뻐 죽겠다는 듯이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등의 행동을 했기에 베르히안은 질색을 하고 달아났다. 그런 행동이 더욱 뮤리엘의 마음에 들었는지 뮤리엘의 베르히안에 대한 행동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술래잡기 하듯 온 저택 안을 헤집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둘을 보다가 솔베노에게 물었다. “오늘은 도대체 무슨 일이죠?” 솔베노는 약간 멋쩍다는 듯한 투로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옆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혹시 저걸 베르히안에게......” 솔베노는 심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다이아나는 다시 한 번 솔베노가 가리킨 것과 아직도 술래잡기를 하듯 뛰어다니는 둘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불쌍한 베르” 사실 베르히안이 전력을 다해 달린다면 뮤리엘이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베르히안은 ‘평범한 소년’으로 보여야 했고, 비등비등하게 계속되던 경주같은 질주는 뮤리엘이 스스로에게 헤이스트 마법을 건 지 수 분만에 끝이 났다. 디안은 도대체 오빠가 왜 도망치는 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뮤리엘에게 잡혀 다시 돌아온 오빠가 방 안으로 억지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오지 않으려고 온 몸으로 버티는 베르히안을 이번에는 스트렝스 마법을 발동시킨 힘으로 거의 반은 들 듯이 뮤리엘이 끌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디안은 며칠 전부터 오빠라고 부르던 베르히안을 한참 쳐다보더니 한 마디를 던짐으로써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오빠? 언니였어? 너무 예쁘다. 엄마랑 이모 다음으로 예쁜 것 같어” 긴 머리카락에 리본으로 띠를 하고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에 잘 어울리는 연한 핑크빛 원피스를 차려입은 베르히안은 절세의 미소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각성 “저, 저기......” 평소답지 않게 우물거리는 소리로 베르히안 말을 걸어오자 다이아나는 이제는 익숙한 반말로 의아스럽게 되물었다. “응? 왜?” 베르히안은 나름대로 간단한 짐을 싸고 있는 다이아나 옆에서 조금 머뭇거리더니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내뱉듯이 말했다. “꼭 가야 하는거야?” “뭐?” 느닷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다이아나는 그것이 바로 정례적인 회의에 참석차 수도로 가는 것을 의미함을 깨닫고 바로 제대로 된 대답을 되돌렸다. “각 영지의 영주는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고를 해야 해. 이건 황실에서 정해진 절차라더군. 수도의 저택에도 좀 들러야 할 것 같고. 왜?” “아, 아니 그냥...” 베르히안은 갈등하고 있었다. 지상계로 온 이후 인간의 소년 행세를 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단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그 한 가지란 바로 뮤리엘 황녀를 말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베르히안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황녀로서는 새로 생긴 아름다운 남동생이 그저 귀여울 뿐일 게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베르히안은 뮤리엘의 애정공세에 눈이 팽팽 돌 지경이었다. 처음 수도에 한 두 주 가량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베르히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동행을 거절했다. 어차피 베르히안이 귀족의 신분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인간 세상에 훤한 그는 귀족이라는 인간들을 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뮤리엘이 영지에 남는다는 것을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당연히 다이아나와 동행할 것으로 믿었건만, 바로 어제...... “뮤리엘, 그런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해요.” “언니, 염려 마셔요. 이미 해 본 일인데요. 걱정 마시고 느긋하게 다녀오셔요.” “정말 고마워요” 라는 대화가 자신의 눈 앞에서 이루어졌을 때의 난감함이라니......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베르는 걱정 마세요. 수도에 가 있는 동안 제가 잘 돌봐 줄테니까요.” 라는 말을 뮤리엘이 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희디 흰 그의 얼굴은 푸르딩딩하게 변해 버렸다. 다이아나는 어제부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베르히안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 동행을 거절하고 이제와서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드높은 자존심과 뮤리엘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는 베르히안은 천상 아이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다이아나는 스스로의 짓궂음에 놀랄 정도로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베르히안이 타인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다이아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뮤리엘 앞에서만큼은 그것이 연기가 아닌 ‘실제상황과 감정’이 되어 버림을 베르히안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베르히안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계속 다이아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다이아나는 모처럼 소년다운 베르히안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보면 볼수록 딱한 느낌이 들어 결국은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권해보았다. “베르, 정말 수도에 함께 안 갈래? 디안도 나랑 갈텐데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겠어?” 일부러 디안의 이야기를 꺼내자 베르히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베르히안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약간 뻐기는 어조로 대답했다. “아, 디안이 내가 안 가면 섭섭해 하겠지?” 속이 뻔히 보이는 태도였지만,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죽었다 살아난 마냥 희색을 되찾은 베르히안은 그래도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응, 다이아나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가지 뭐. 디안 혼자 심심할테니까” “푸웃!” 결국 다이아나도 참고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거실 구석구석에서 킥, 콜록하는 소리들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베르히안은 여기 저기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못 들은 척,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지정된 공간을 향해 걸어갔다. “음, 짐을 가져가야 겠지? 옷은 몇 벌이 필요할까?......”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그 중에는 엘프인 솔베노의 음성마저 섞여 있었다. 가장 높은 소리로 깔깔대던 뮤리엘은 문 뒤쪽에서 스윽 나타나면서 베르히안이 들으면 뒤로 넘어질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내뱉었다. “으음, 나의 애정이 부족했던 걸까? 베르가 수도로 가고 싶어 하다니...... 이번에 돌아오면 쓸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더 귀여워해 줘야지......”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상기된 얼굴을 진정시키던 베르히안이 돌연 오싹한 한기를 느낀 것은 바로 이때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 년에 한 번, 각 영지의 영주는 황궁에 들러 보고를 해야 한다. 이는 일종의 결산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영지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은 세 달에 한 번씩 수도로 보내어진다. 이 때는 전체적인 수확량만 간단히 보고하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영지를 가진 모든 귀족들이 일 년간의 세금 징수와 수확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서류를 준비해서 황궁에 보고를 한다. 다이아나가 수도로 가는 이유는 바로 ‘대결산’이라고 불리우는 이 행사를 위해서이다. 적어도 칼라임의 재정을 담당하는 것은 황제파이기 때문에 세금이 헛되이 쓰이는 확률은 적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어찌 되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이아나는 일단 영지에서 걷은 세금에 대한 항목을 상세히 정리하여 보고 자료를 꾸몄다. 덕분에 최근 일 주일간은 영지내의 사무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서류와 씨름해야만 했다. 물론 프라이톤만은 유일하게 이 작업에서 제외되었다. 분명 귀족 출신이며 나름대로 기본적인 교양 지식을 습득한 그가 왜 서류만 쥐어주면 금방 두통에 시달리는지는 알다가 모를 일이다. 덕분에 바빠진 어른들 사이에서 심심한 아이들은 모두 프라이톤의 차지가 되었다. 보통 두 명 정도는 거뜬히 안고 돌아다니던 플라이톤도 목마 한 명에, 양 팔에 두명 등에 한 명을 업고 거의 한 나절씩을 지내게 되자, 밤마다 신경통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야 어쨌건 겉모습과는 다르게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갑자기 무거워진 짊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으로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는 전보다 자주 환한 미소가 감돌곤 했다. 수도의 저택에는 최소한의 하인만을 남겨 두었기에 말론과 안느가 가족을 이끌고 따라 나섰다. 디안도 나름대로 작은 여행가방을 꾸려 들고 있었는데, 실상은 필요없었지만, 여행을 갈 때마다 짐을 싸는 것을 보았기에 안느는 결국 작은 가방 하나를 내주어야만 했다. 베르히안은 나름대로 인간들처럼 짐을 꾸려보았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일에는 능숙하지 않은 터라 가방이 모두 짐 밖으로 튕겨나가는 일을 여러 번 당해야만 했다. 결국 베르히안의 짐도 안느가 따로 꾸려주었다. 이렇게 출발 준비를 모두 마치자 마자 마치 보고 있었다는 듯 에디우스가 때맞추어 나타났다. ‘대결산’에서는 그 분기의 세금 외에도 영지의 특산물 등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이미 유명해진 민속주가 마차 한 가득 실려졌다. - 저 용도 가는거야? 베르히안이 드물게 전언을 사용하여 투덜거렸지만, 다이아나는 그냥 미소만 지어주고 외면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베르히안은 어떻게 해서라도 에디우스의 동행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단 다이아나와 디안, 에디우스, 베르히안이 하나의 마차에 타자 말론의 가족이 다음 마차에 그리고 다른 이들은 또 다른 마차에 짐과 함께 올랐다. 원래 안느는 자신이 다이아나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우겼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다이아나의 주장이 워낙 거셌다. 거기에 다이아나와 한 마차를 탓 세 명 모두 절대 다른 마차에 타지 않을 것이기에 안느의 주장은 무위로 돌아갔다. 수도에 도착하자, 몇 명 안 되는 남아있던 하인들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일행을 맞이했다. 대체적으로 독신인 하인들이 주로 남았기에 저택은 잘 관리되고는 있었지만,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느의 세 아이들과 디안, 베르히안까지 저택을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곧 그 쓸쓸함은 소란함으로 바뀌었다. “하워드 잘 지냈어요?” “아가씨!” 하워드는 지난 번 수도에서 하루를 묵는 둥 마는 둥 영지로 돌아가버린 일이 여직 서운한 듯 보였다. 다이아나는 웃으면서 그래서 이렇게 빨리 오지 않았냐는 말로 그를 달래주었다.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유리아나 드 오브리에님이라고 하시던데, 어떻게 할까요?” “유리아나님이요? 얼른 안내해 주세요” 베르히안에게 저택을 안내하겠다고 아이들이 나선 덕에 모처럼 에디우스와 단촐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짐이라고는 해도 이미 아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 터라, 궁전에 보낼 것들 외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안느는 나름대로 저택 안팎을 다니면서 청소가 덜 된 곳을 찾아 잔소리하느라 여전히 바빴지만. 다이아나는 유리아나와의 마지막 일을 생각하면서 이 방문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에디우스 또한 같은 이유로 유리아나가 들어올 때까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다이아나님 안녕하셨어요?” 유리아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어딘 지 모르게 조금 초췌해졌다는 느낌이었다. “유리아나님, 반가워요. 이리 앉으세요.” 다이아나는 반갑게 유리아나에게 인사를 하며 스스럼없이 손을 잡아 의자로 안내했다. “유리아나님 오랜만입니다.” “아, 에디우스님!” 다이아나가 문 앞에서부터 안내를 했기에 미처 에디우스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에디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유리아나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잠시 멍해있던 유리아나는 조금 더 얼굴이 상기된 채로 에디우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에디우스님.” “자,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구요. 말론 부탁해요.” 말론은 영지에서의 느긋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전형적인 집사의 예의바른 모습으로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곧이어 안느가 쟁반 가득히 아름답게 장식된 다과들을 들고 맵시있게 차려놓았다. 어차피 어느 귀족의 집에 가던 관례화된 절차라 그런지 유리아나는 일련의 일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안느가 물러나자 다이아나는 유리아나에게 다과를 권했다. 우아하게 찻잔을 든 유리아나는 웬지 모르게 상당히 불안한 표정으로 에디우스 쪽을 힐긋거렸다. “저, 제가 있어서 불편하다면 물러나 있겠습니다. 편히 이야기 하시죠.” “아, 아니에요.” 조금 흥분한 탓인지 평소보다 높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유리아나는 그런 자신의 음성에 스스로 흠칫 놀라 붉어졌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이아나는 유리아나가 평소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유난히 흥분되어 보이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 일단 진정을 시키기 위해 살짝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다이아나가 가진 신성력 중 자애의 능력은 그 자체가 사람의 영혼을 안정시키고 믿음을 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 위에 다이아나가 차분하고 상냥하게 달래는 듯한 말을 꺼내자 유리아나도 조금씩이나마 침착을 찾아 갔다. “유리아나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죠? 천천히 말하셔도 되요.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그게 당신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안답니다. 저는 유리아나님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요. 유리아나님도 저를 친구로 생각하시고 찾아오신 것이겠죠?” 유리아나는 처음의 불안함과 긴장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설움이 복받힌 듯 했다. 원래 마음이 약한 편인 그녀가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곳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는 그만큼 힘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저 좀 도와주세요.”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단 말을 한 당사자도 약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다이아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알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러니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시겠어요?” “아, 아버님께서......” 말이 잘 되지 않는 듯 유리아나는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둘다 침착하게 그녀를 격려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용기를 받은 유리아나는 이곳에 오는 동안 입 속으로 되뇌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아버님께서 제게 결혼을 하라고 하셔요. 그런데 상대가 로스티엔 후작이에요. 그, 그는......” 유리아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 로스티엔 후작은 오브리스가 백작으로 강등당한 후 귀족파의 수장이 된 인물이지. 물론 그 위세야 전에 비할 게 아니지만, 문제는 그 본인이라면 이미 40이 넘은 걸로 알고 있어. 40대 중반이지 아마? 에디우스가 유리아나가 거론한 후작에 대한 정보를 전음으로 제공해 주었다. 다이아나는 45살의 후작과 눈 앞의 아름다운 소녀가 결혼하는 것을 상상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거기에 부채질을 하듯 에디우스는 약간 인상을 찡그리듯이 한 가지 정보를 더 털어놓았다. - 후작은 이미 결혼을 두 번이나 했었어. 그 전 부인들은 모두 병으로 일찍 죽었지. 하지만, 소문이 좋지 않아. 성적 취향이 무척 특이한 모양이더군. 물론 다이아나에게 하는 말이라 상당히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로스티엔 후작이 후작이라는 직위가 있고 귀족파임에도 오브리스의 오른팔이 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로스티엔은 상당히 변태적인 취향의 소유자였다. 과장되기는 했지만, 로스티엔이 다스리는 영지에는 얼굴이 반반한 여자는 처녀가 하나도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거기에 단순히 바람둥이가 아니라 가학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었는데 그 부분만큼은 결코 과정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정보를 에디우스는 접한 일이 있었다. 다이아나는 비록 강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오브리스 공작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지만, 하나뿐인 딸을 그런 남자에게 주려고 하다니...... “유리아나님, 이러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지 우리 한 번 생각해 봐요. 분명히 길이 있을 거에요.” “고, 고마워요.” 어느 정도 기대를 했기에 찾아오긴 했다. 하지만, 세린느가 꾸몄던 마지막 일을 기억하고 있던 유리아나는 다이아나가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이미 친한척하며 들러붙었던 귀족의 영애들은 유리아나를 상대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리아나가 다이아나에게 기대를 건 것은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실 유리아나는 상당히 극단적인 결심을 하고 다이아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다이아나가 이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맞아주고 진심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줄기를 찾은 느낌이었다. “저도 나름대로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에디우스님.” “고마워 에디. 나, 귀족의 결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게 많거든. 일단 본인의 의도는 전혀 무시할 수 있는 거야?” “스스로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면 모르지만 아직까지 귀족들의 혼사는 부모대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야.”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음, 공식 석상에서 남자가 청혼을 하고 그것을 여성이 허락한 경우는 대체로 그대로 진행이 되지.” “그래?” “일단 정식으로 공표된 약혼을 파기하기는 어려워. 유리아나님, 로스티엔 후작과의 결혼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인가요?” “아뇨.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차를 내려고 거실에 갔다가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그럼 언제 공표될 예정인지는요?” “이번 대결산과 관련된 연회의 마지막 날인 것 같아요.” 대결산의 마지막 날이라면 앞으로 열흘 후의 일이다. 일단 가장 쉬운 방법은 유리아나에게 청혼할 적당한 작위의 젊은 남자를 구하여 공식석상에서 청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후에 오브리엔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지참금을 안 주거나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일이 된다. 문제는 바로 그 남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 흐음.. 이벤트를 해야 할까요? ^^;; 제가 이런 것에 약해서 말이죠. 누군 책 준다고 번개를 쳤더니 아무도 리플이 없었다나요? -.-;; 그럼 너무 슬프겠지요? 알테는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특히 초반부터 별로 이름도 없던 제 소설에 일일히 격려의 글을 달아주시던 분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답니다. 꼭 책을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일일히 부치자니 귀차니즘이 하늘을 찌르고 -.-;;; 개인적으로 5-10권은 우리 게시판 분들에게 드리려고 생각합니다만, 좋은 방법이 있을지..... 하긴, 누가 그러더군요 오프라인에서 얼굴 내미면 그나마 있던 팬도 다 나가떨어질 거라구 ㅠ.ㅠ 움... 요즘 살이 쪄서 굴러댕기는 터라... 거기에 제가 나이가 꽤 되걸랑요. 킬킬~~~ 좋은 방법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전에, 몇몇분은 스스로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실거라고 느끼고 있어요. 초반에 벌써 추천글을 올려주신 모모님과 조금 늦게 들어오셨지만, 풀로 리플을 달아주신 덕에 제가 출판 직전에 큰 오류를 고치게 해 주신분도 있구요 (답장을 드렸었으니 누군지 스스로 아실 듯 한데..... ^^;;;) 흠.. 저도 사행시같은 이벤트라도 해 볼까요? ^^;; 좋은 의견 있으면 리플 달아 주세요~!!! - 알테 - 각성 제국의 꽃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실에 대조되게도 유리아나 또한 변변히 기억하는 젊은 귀족남자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유리아나는 그 일이 있기 전엔 유력한 황후 후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던 오브리에 백작이 유리아나에게 다른 남자의 접근을 허용했을리 없었다. “다이아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공식적으로 결혼을 약속하면 파기하는 것은 안 돼. 상대방이 죽지 않은 이상 그건 큰 흠으로 남으니까” “응. 나도 알고 있어.” 가장 편한 방법은 큰 흠이 없는 귀족 젊은이들 중 유리아나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에디우스가 꺼낸 것과 같은 이유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유리아나는 그 남자와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결과가 된다. 유리아나는 둘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입술을 깨물더니 결심에 찬 목소리로 의지를 표명했다. “다이아나님, 에디우스님, 전 괜찮아요. 그저 절 사랑해주고 성실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 누구라고 해도 로스티엔 후작보다는 나을 거에요.” “하, 하지만......” 그래도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선택하는 일에 최악이 아니라고 해도 차악을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못할 일이다. 유리아나가 사모하는 사람이 리카르도임은 전 귀족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카르도 자신의 감정도 그렇고 황제와 마르띠앙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차선이라도 챙겨주고 싶은 것이 둘의 마음이었다. 반박을 하려는 다이아나의 말을 가로채다시피 유리아나가 미리 대답을 해왔다. “지금 제 처지에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 뿐이에요. 리카르도 황태자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제 진심이었는지 알 수 없어요. 전 어려서부터 황태자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 후에 그 분을 뵈었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게 제 진심일까요? 아뇨. 등돌린 귀족들을 보면서 제가 그리워한 것은 그 분이 아니었어요. 다이아나님께는 크게 잘못했지만, 그래도 제 옆에 있어주던 세잔느, 그리고 사귄 시간을 짧지만 오히려 다이아나님 생각이 더 나더군요.” 유리아나는 상당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다이아나는 더더욱 가슴이 아팠다. 처음 만났을 때의 유리아나는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동화 속의 공주님같은 분위기였건만, 이제는 세상을 알아버린 것이다. 다이아나의 슬픈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본 유리아나는 알고 있다는 듯 미소로 되받았다. 이전의 백치같은 미소가 아닌 세상을 조금은 알게 된 눈빛으로. 유리아나의 말은 이어졌다.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라요. 한 번도 제 존재 자체가 황태자님께 누가 된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을 정도로 전 철이 없었으니까요. 상대방의 처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제 감정이 진정 사랑일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두 남녀는 동감하고 있었다. 에디우스는 잠시지만 자신의 감정에 휘말려 다이아나를 괴롭게 했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간의 혈기였고 그로 인해 자신은 끝없는 후회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리카르도와 유리아나의 경우 이미 만들어진 상황에서 수 년을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유리아나는 리카르도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 속의 황태자를 보고 있었고, 이제 현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꿈이 깨어지고 나니 차가운 현실이더군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꿈을 꾸고 있었을 수는 없었을 거에요. 오히려 아버님의 뜻대로 제가 황태자비가 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죠. 남편과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것보다는 지금이 좋은 건지도 몰라요. 황태자비가 아니라면 저 또한 출가한 딸로서 아버지와 거리를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떤 방법이라도 좋아요.” 다이아나가 차마 다시 다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에디우스가 나섰다. “유리아나님, 현재로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젊은 귀족 남자들 중 유리아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을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유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에디우스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상관없어요. 가능하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제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일 뿐, 노력하겠어요. 저도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한 선언이었다. 다이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유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의 결심이 굳어졌다면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는 약속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오늘 여기 오신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나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현재로서는 가능한 것들에 전력해야 한다고 다이아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마차는 옷 가게 앞에서 내렸어요. 제가 볼일이 끝나면 부르겠다고 했지요. 그 가게에서 다른 마차를 불러서 타고 왔구요. 옷을 고르는 데는 아무리 시간이 들어도 의심하지 않으니까 상관없어요.” “좋아요. 저와 만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좋을 것이 없겠지요. 일단 연락할 방도가 있어야 하겠군요.” 다이아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디우스가 서두르는 기색으로 나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주로 영지민들과 친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만들었던 수정구가 하나 들려 있었다. 다이아나는 에디우스로부터 수정구를 받아들고 간단한 사용법을 알려 준 후 유리아나에게 건네주었다. 응접실에 손님이 있다는 말에 들어오지 않고 기다리던 베르히안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빠져나간 후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야? 얼굴들이 왜 그래?” 어차피 다이아나나 에디우스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베르히안도 알게 될 일이다. 다이아나는 유리아나와에 대하여 가능하면 간단하게 설명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베르히안은 콧등과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한 마디 할까 말까 하는 분위기를 풍겨냈다.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에게 사정을 설명하면서 나름대로 한 번 더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 자신보다는 에디우스가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사실은 에디우스 자신이라기보다는 그의 상단의 정보가 필요했다. “에디!” 생각을 정리한 듯한 다이아나가 부르자 에디우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했다. “알았어! 일단 결혼할 나이의 귀족 남자는 다 알아보도록 할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인성이겠지? 착한 사람, 맞아?” “응.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그 간의 행적을 보면 대충을 알 수 있을거야. 가능하면 수도와 먼 곳에 영지를 가진 사람 중 영지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사람이 좋겠어.” “영지에서의 평판이 좋아야 하겠군. 먼 곳이라는 건 오브리스 공작을?” “응.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유리아나님이 불편하실 거야. 영지 관리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도에서 멀리 있는 기간이 길다는 거잖아?” “하지만, 수도에서만 생활하시던 분인데......” 귀족 영애들의 생활이란 돌아가면서 싸롱처럼 여는 여성들의 모임에 참석하거나 비슷한 신분의 집안의 연회에 참석하는 정도이다. 완벽하게 도시의 꽃으로 자란 유리아나가 시골이나 다름없는 영지에서 편안할 수 있을 것인지 에디우스는 묻고 있었다. “아니, 그 편이 나을거야. 현재 수도에서 유리아나님의 위치는 대충 짐작이 가지? 오죽하면 오브리스 공작이 그런 계획을 다 세웠겠어? 말이 백작이지 남작이 딸 만큼도 못한 대우를 받고 계셨을 거야.” 이미 권력의 정상 가까이에 섰던 사람이지만, 그만큼 떨어져 내리는 폭도 컸다. 백작 강등과 더불어 오브리스 가문은 기피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귀족들 중 오브리스 가문이 황제와 맞선 귀족파의 수장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권력이 있다면 모를까 경계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오브리스 가문에 호의를 보여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유리아나님의 아까의 태도를 보니, 그 간 많은 일이 있었겠지.” “난 상당히 익숙한 편인데도 마음이 불편하곤 했어. 평생 곱게만 자란 유리아나님께는 힘든 시련이었을 거야.” “알았어. 일단 최대한 정보를 모아 볼게.” 베르히안은 점점 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두 남녀의 ‘모의’를 지켜보았다. 결국은 참지 못하겠는지 아까부터 이상하게 여기던 사실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도대체 왜 그 여자를 도와줘야 하는 거야?” “응?”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여자네 집안 때문에 다이아나가 위험할 뻔 했다면서? 그런데, 왜 도와주는 건데?” “그건 유리아나님은 몰랐던 일이고, 그 분은 늘 내게 잘 해 주셨어.” “흥! 인간들 나이로 그 여자는 이미 성인 아니야? 그렇게 하나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정말 하나도 몰랐다면 어디 모자란 거 아니야?” “베르!” “자신이 보기 싫은 건 안 보았겠지. 단지 그것 뿐이잖아?”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을 나무라려다 생각을 달리 했다. 일단 유아기를 지나면 자신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는 마족의 특성을 생각해낸 것이다. 거기에 베르히안은 아직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해낸 다이아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나도 인간관계에 대해선 미숙하기 짝이 없잖아?’ 다이아나가 잠시 얼굴을 굳히고 이름을 불렀다가 금방 웃어버리자 베르히안은 약간 토라진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입술을 비죽이는 베르히안의 모습이 귀여워서 다이아나의 피식거리던 웃음이 커졌다. “뭐, 뭐야?” 신랄한 말을 늘어놓을 때와는 달리 약간 당황한 베르히안은 딱 그나이의 소년으로 보였다. 다이아나는 상반된 두 이미지 사이의 격차를 생각하면서 소년으로 보이는 마족을 바라보았다. “베르. 네가 볼 때는 내가 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 물론 득실의 관계를 따지자면 유리아나님을 도와야 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난 유리아나님을 좋아해. 그것 만으로도 돕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거야. 이해할 수 없겠니?” “좋아해서 돕는다고?” “응. 난 베르도 좋아해. 베르가 나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베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연히 도울거야. 물론, 베르의 능력으로 내 도움 따위가 필요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말야.” 상냥한 어조로 ‘난 베르도 좋아해’라고 말한 부분에서 베르히안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 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부분에서는 금방 부루퉁한 표정이 되더니 ‘도울거야’에서는 다시 밝아진다. 방관하는 표정으로 이 둘을 보고 있던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는 베르히안의 표정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에디우스의 앞에서의 베르히안은 겉모습만 소년일 뿐 노련함을 풀풀 풍겨내는 교만한 마족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나, 나도 다이아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도울 거야!” 베르히안이 다이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외치듯이 말하자 다이아나는 녹아들 듯한 따스한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하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음, 본론으로 돌아가서, 유리아나님은 현재 혼자로서는 자신의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나는 돕고 싶어. 그냥 그것 뿐이야” “그것 뿐이라고?” “응!” “하지만, 나중에 배신하거나 너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잖아.” 베르히안은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다이아나의 성격상 호의를 베풀고도 오히려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경험들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나도 더 이상 겪기 싫어” “그렇지? 그러니까 믿을만한 존재랑만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아!” 베르히안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다이아나는 그런 베르히안을 보면서 빙긋 웃음을 던지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누가 나를 배신하거나 상처 입힐지 모른다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싫어. 누군가 나를 배신한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미리 의심하는 것은 더더욱 쓸쓸한 일이잖아?” “하지만......” 베르히안은 계속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다이아나는 그런 베르히안을 보면서 할 수 없이 한 가지 일을 상기시켰다. “난 베르를 믿었어. 알지? 그래서 지금은 친구가 되었잖아. 내가 키케르님의 말을 듣고 너를 멀리했다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앉아있지도 않을 거야.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어. 나도 타인의 사정에 의해 나만 피해를 입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편이 더 좋아” 베르히안은 다이아나가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사실 실행은 하지 않았지만, 베르히안 자신도 키케르의 강압에 의해 다이아나를 배신할 뻔 했던 것이다. 그것이 약속된 연극이라고 해도 다이아나가 상처를 받았을 것은 확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 역할을 다른 마족이 했었기에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베르히안 자신의 논리에 의하면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을 멀리해야만 했다. “아, 참! 이러구 있을 시간이 없잖아. 에디, 우린 시간이 없어. 알지?” “응. 나 좀 다녀올게” 에디우스는 정보수집을 위해 상단으로 떠났다. 베르히안은 약간 기가 죽어 있었는데, 다이아나가 과거의 일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자 대충 털어버려고 하는 듯 했다. 각성 - 삭제공지 - 6/9 수요일에 3편분량 삭제합니다. 책을 보고 들어오시는 분들을 생각해서 3권 초입부분 한 두편은 남겨놓을까요? ^^;;; 101편까지 삭제되니 못 보신분들은 스피드를 내어서 얼른 보셔요 그럼... 본편은 아래로 ************************************************************************** 귀족파의 움직임을 마르띠앙 공작이 모를 리 없었다. 오브리스 백작이라는 존재를 제외하고 본다면 그의 영애인 유리아나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다. 황태자비로서 결격 사유가 생길 것을 미리 의식한 덕에 유리아나는 오히려 다른 귀족 영애들보다 상당한 보호를 받고 키워졌다고 할 수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머리도 나쁘지 않고 외모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편이며, 성품 또한 온순했다. “유리아나만 불쌍하게 되었군요.” “후훗 그럴까?” “예?” “그녀도 이젠 조금 세상을 안 것 같더군. 더 이상 온실 속의 화초가 되고 싶진 않았겠지. 하긴 그렇게 살기엔 이미 온실이 다 깨어진 셈이지만......” 알렉시안은 마르띠앙 공작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시안이 황태자의 오른팔이라고는 해도 마르띠앙에게 전해지는 모든 정보를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귀족파의 새로운 세력의 중추가 된 로스티엔 후작과 그와 손을 잡기를 원하는 오브리스 백작의 은밀한 움직임은 이미 어느 정도 파악된 후였다. 백작으로 강등된 후 크게 타격을 받고 움츠리고 있었던 기간이 분명 있었으나, 한 때 황제와 맞설 정도의 권력을 가졌던 그에 대하여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녀라면 분명히 도와주려고 하겠지.” “죄송하지만, 말씀을 해 주시려면 하시고 아니면 그만하십시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들으라는 듯이 늘어놓는 태도에 발끈한 알렉시안이 굳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마르띠앙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알렉시안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고는 숨겨진 사실을 털어 놓았다. “뭐, 어차피 자네에겐 이야기 하려고 했었네. 유리아나가 그 아버지의 속셈을 눈치채고 반항을 시도한 모양이야.” “네?” 로스티엔 후작과의 오브리스가 손을 잡기 위해 그 거래 대상으로 유리아나가 올랐다는 것까지는 알렉시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유리아나와 ‘반항’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꿈에서조차 조합이 되지 않을 듯 했다. 마르띠앙은 뜸을 들이듯이 살짝 시간을 두고 알렉시안의 표정을 살피더니 상당히 유쾌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유리아나가 어제 다이아나경을 방문했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아!” 그 전에 이미 마르띠앙이 내놓은 말이 있었기에 알렉시안은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전후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정리하듯 마르띠앙이 마무리를 지었다.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다이아나경의 성품으로 볼 때 아마 사정을 들었다면 도와준다고 나설걸세. 그렇지 않나?” “그녀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겉으로는 누구보다 냉정함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다이아나가 사람에 대해 모질지 못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성품은 정치를 하는 이들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약점에 속할 수 밖에 없었고. 알렉시안은 그 정치라는 것에서 빠질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곱씹으면서 잠시 씁쓸함을 곱씹고 있었다. “그럼 방법이 무엇이겠나?” 알렉시안의 잠깐의 상념 속으로 마르띠앙 공작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방법이라...... 아무래도 적당한 상대를 골라주는 것밖엔 없겠지요.” “그래. 그리고 우리도 협조하는 것이 좋겠네.” 알렉시안은 다이아나의 반대편에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마르띠앙이 평생을 현 황제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처럼 알렉시안 또한 리카르도를 위해 그리 하겠다고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연륜의 탓인지 성격의 차이인지 누군가의 뒤에서 무언가를 공모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혐오감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애초에 마르띠앙의 명을 받고 다이아나의 승마교습을 자청했을 때에도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디안의 일만 해도 그랬다. 어차피 자신이 보고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알려졌을 일이지만, 때마침 다이아나를 이용할 만한 일의 빌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르띠앙 역시 알렉시안의 성격적인 결벽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웬만한 자잘한 음모에는 알렉시안을 끌어들이지 않고 다른 경로로 처리하곤 했다. 그런 이면에는 리카르도의 오른팔이 될 알렉시안의 명예를 지켜주고 자신의 대에서 악명을 끝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렉시안 또한 모르지 않았다. 여하튼 다이아나가 의도하는 바에 도움을 주라는 말은 알렉시안에게는 달가운 명임에 분명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마르띠앙 공작이 자신의 심기를 읽고 있음을 알면서도 알렉시안은 별로 달가워하는 기색 없이 무뚝뚝하게 자신의 할 일을 물었다. 단지 득실이 맞아떨어진 것 뿐이다. 만일 리카르도나 제국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어 명이 내려진다는 자신은 그에 따라야만 했다. 리카르도라면 당당히 반대할 수 있겠지만, 알렉시안의 위치는 또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다이아나는 에디우스가 구해온 자료들을 주욱 늘어놓고 유리아나의 신랑 후보를 물색하고 있었다. 알트 상단의 정보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물론 어느 정도 미리 조사된 자료는 있었겠지만, 단 하루 사이에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조사되어 있었다. 일단 둘은 각각 마음에 드는 후보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열 명 정도의 후보를 각기 골라내었을 때, 둘은 골라낸 후보를 맞바꾸어 살펴보았다. “다이아나 포스엔 자작은 안 돼” “응? 왜? 자료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던데?” “전에 클럽에서 만나서 우연히 게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성격이 영 아니야.” “흐음, 주관적인 건 아니구?” “아니. 돈이 걸린 게임을 해 보면 성격을 대충 알 수 있지. 상당히 치졸하달까? 판단력이나 머리가 모자란 건 둘째치고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전혀 파악을 못하더군. 거기까지는 좀 나은데, 나중엔 억지를 부리는 통에 황당했다구.” “응 그래? 그럼 제하지 뭐!”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둘은 남성과 여성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을 다시 한 번 바꾸어 봄으로서 후보를 좁히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은 12명. 가능하면 정치적으로 한 쪽에 완전히 속한 이들을 뺀 중도적인 입장의 귀족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주관이 뚜렷해서 오브리안이나 마르띠앙의 눈치를 보지 않고 유리아나에게 청혼이 가능한 인물이어야 했다. “음, 이중에 유리아나님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어떨까 에디?” “있을 거야. 뭐니뭐니해도 유리아나님은 귀족 남자들의 이상에 가깝지. 아름답고 연약해서 보호해 주고 싶어지는 유형이잖아?” “그렇겠지?” “응. 황태자와의 관계에 희망이 없어진 이 시점이면 그동안 어느 정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설 가능성이 상당히 있어.” “휴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음. 그러려면 네 역할도 중요해. 알고 있지?” “응.”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고. 적당히 하도록 해. 잘못해서 라이벌이 너무 많아지면 나 슬퍼할거다?” “에디!” 문제는 유리아나에 대한 마음의 강도를 시험해 보는 것만 남은 셈이다. 그 부분에 대하여 신중하게 의논한 결과 에디우스의 의견이 통과되었다. 자신이 내놓은 의견으로 놀리듯이 말하는 에디우스의 태도에 다이아나는 자연스럽게 반박했고 둘은 티각거리면서도 일을 진행해 나갔다. 대결산은 정해진 절차대로 별탈없이 끝났다. 탈이 없었다 뿐이지 이변은 있었다. 외곽에 자리잡은 페르아 영지에서 평소의 두 배에 가까운 세금을 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영지의 영주가 새로 부임한 신흥 귀족이니 더더욱 관심이 높아졌다. 마르띠앙 공작은 나름의 정보조직을 통해 페르아 영지의 변화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기간 내에 이 정도의 성과를 얻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듯 했다. 다이아나는 창조의 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농기구 등에 대하여 전혀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농기구들은 알트상단에 의해 이미 판매되고 있었기에 숨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주들은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 따위에 자금을 투자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확연하게 징수량에서 차이가 나자 뒤늦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영주들이 꽤 많았다. “어차피 이것들의 소유권은 개발한 당사자인 창조의 손들과 처음부터 자금을 대어 준 알트 상단에 있습니다. 저희 영지는 이 기구들을 생산하는 곳에 불과합니다.” 다이아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각자 다른 마음을 가진 영주들은 에디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노련한 에디우스는 알트상단의 실무책임자와 이야기하라는 말로 간단히 상황을 일소시켰다. 대결산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의 세력의 과시와도 같았다. 영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의 양으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대결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에디우스가 물려받은 영지는 전 대의 하비어스 때부터 풍요롭고 통치가 잘 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유희를 하면서도 인간 세상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아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하비어스는 영지가 피폐해지지 않도록 알트상단의 수뇌부와 연결해 두었다. 덕분에 에디우스의 영지는 칼라임 내에서도 상당히 풍족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난 상태였다. 물론, 원래 영지 자체의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는 공작이나 후작, 백작 가문들도 많이 있었지만, 큰 영지와 많은 영지민으로부터 거둔 세금이 작은 영지보다 많은 것은 별로 대단할 일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소규모의 영지에서 거의 중간 이상의 크기의 영지보다 많은 소출을 낸 두 남녀를 시기와 감탄의 눈으로 주시했다. 일단 사무적인 일들이 끝났으므로 일주일 간 계속되는 연회가 뒤를 이었다. 대결산의 연회는 영지를 가진 귀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즉, 가장 낮은 작위의 귀족들은 참여의 기회조차 없다고 보면 된다. 그 대신 수도의 권력다툼보다는 자신의 영지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영지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귀족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행사이기도 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번 대결산에서도 그토록 뛰어나시더니, 도대체 다이아나경이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하투아의 황제도 다이아나경이 무위에 감탄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주위에서 쏟아지는 아부에 가까운 칭찬에 다이아나는 애써 생글거리면서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젊은 귀족들은 분위기가 확 바뀐 다이아나의 태도를 한 번에 눈치채고 꽃에 모여드는 벌과 나비처럼 그녀의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오늘 밤의 다이아나는 평소의 약간 냉정하고 조용한 태도를 벗어 던지고 시종일관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어떤 물음에도 상냥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복장에서부터 눈에 띌 정도였다. 다이아나는 웬만한 사람이 입어서는 색상에 묻혀버릴 정도로 강렬한 노란 색의 드래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의 얌전한 스타일이 아니라 과감하게 등이 허리까지 파져 있었다. 사실 디자이너들은 다이아나의 양 팔도 모두 드러내고 싶어 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이 손목에서 어깨까지 거의 굵기의 차이가 없는 얄팍한 팔을 가진 데 비해 열심히 단련을 한 다이아나의 팔은 생기있는 굴곡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닫혀진 세계의 미적인 감각으로 보자면 비쩍 마른 팔보다 훨씬 건강해 보일 정도였고, 굵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준이 다른 탓인지 디자이너들은 팔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했다. 노란색의 비치는 천이 여러 겹으로 몸을 감싸서 두 장 정도만 겹치는 부분은 속이 보일 정도라 아슬아슬한 느낌을 준다. 교묘한 안배로 천박할 정도의 노출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맨살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진한 요염함을 풍겨낸다. 북적대는 다이아나의 주변과 달리 평소 항상 여성들의 중심이던 유리아나의 주변은 텅 비다시피 허전했다. 다이아나는 춤을 청하는 귀족 남자들 중 눈이 가는 대로 대충 하나의 손을 붙잡고 플로어로 향했다. 춤을 추면서도 다이아나의 신경은 자신에게 모여들지 않았던 귀족 남자들 사이를 예리하게 파고 들고 있었다. ‘저런!’ 다이아나는 유리아나의 근처로 로스티엔 후작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물론 윗 연배의 귀족들이 젊은 영애들에게 춤을 청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은 친척 아저씨같은 친분 관계에 있거나 상당히 친한 관계일 확률이 높았다. 다이아나는 겉으로는 즐겁게 춤을 추는 척하면서 유리아나의 응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아나는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충고한 그 모습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아니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춤을 청한 로스티엔 후작에게는 보이지 않게 유리아나는 처량한 표정을 곳곳에 던지고 있었다. 로스티엔의 키가 작은 편인 것도 다행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유리아나가 어깨 너머로 짓는 표정이 사방에서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저 모습을 보고 꿈쩍도 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는 거지.’ 에디우스는 플로어에 들어가지 않고 예리하게 그 모습을 보면서 평가했다. 그가 주변을 살짝 돌아보자 춤을 추지 않는 젊은 남자들이 유리아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좌중의 시선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파트너에게 집중하는 이와 다이아나와 유리아나를 바라보는 세 갈래로 갈려져 있었다. 에디우스는 유리아나를 향한 시선들 중에서 약간 분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몇 명을 찾아내고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그 중에는 다이아나와 둘이서 신중하게 뽑아내었던 후보들 몇 명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의도적으로 그들 사이로 접근했다. 사실 이 작전 때문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연회 초반에 살짝 사이가 틀어진 분위기를 연출해야만 했다. 에디우스가 다이아나의 옷차림에 대하여 농담처럼 ‘털갈이 하는 노란 병아리’라고 놀리자, 다이아나는 마음이 상한 듯 그에게 등을 돌렸다. 에디우스는 ‘여자들이란!’하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른 여성에게 춤을 신청했고, 다이아나는 에디우스 쪽은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알렉시안과 함께 이들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정보가 전해진 후였으므로 둘 사이의 불화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기에 기회를 틈타 접근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브리스 백작과 로스티엔 후작이 손을 잡는 것은 황제쪽에서도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그리고 유리아나의 계획에는 보이지 않는 반 절의 지지세력이 숨어있는 셈이다. “아무래도 오브리스 백작은 유리아나님을 로스티엔 후작에게 보낼 것 같더군요.” 에디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접근해온 젊은 여성에게 말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리하게 아까 찍어놓은 몇 명이 자신의 음성을 들었는지 살피고 있었다. 짐짓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그 몇 명에게 음성이 울리도록 세밀하게 신경을 썼으니까. 서너 명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끼면서 에디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상대인 여성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쉬잇.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저야 상인이니만큼 정보에 민감하지요. 그나저나 유리아나님이 너무 딱하게 되었군요.” 남의 일이지만 좀 안되었다는 듯한 어조로 에디우스는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좀 더 낮추어서 속삭이는 것이다. “로스티엔 후작의 두 전처가 그에게 나쁜 일을 당했다는 것은 쉬쉬하긴 해도 모르는 이가 없지 않습니까? 가엽게도, 저 연약한 유리아나님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저런, 끔찍해라......” 동정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한껏 미리 연습한 것으로 보이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예뻐보이는 자세를 견지하고 에디우스의 상대여성이 한껏 착한척을 한다. 에디우스는 의도적으로 말이 들렸을 몇 명의 눈치를 살피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 중에는 불끈 쥔 주먹을 파르르 떨고 있는 남자도 보였으니까. 각성 아르페노는 마치 귓전에서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르페노 드 라자리에 백작은 칼라임의 동남쪽 끝에 해당되는 외곽의 영지를 가진 꽤 오래된 귀족가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차남으로 태어났기에 일찌감치 영지나 작위를 물려받을 꿈을 버리고 어려서부터 검술에 매진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준남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차남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벌어먹지 않으면 작위를 가진 이에게 빌붙게 되는 꼴이 되고 만다. 그 자신이야 친형에게 괄시를 받지 않겠지만, 그 형에게도 차남이나 삼남이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자식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일찍 깨달은 그는 자리를 잡기 전엔 결코 결혼을 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이 그런 모습으로......’ 그가 유리아나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황궁 사교계에 데뷔하던 날이었다. 15세의 그녀는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청순하고 풋풋했다. 하지만, 이미 20세의 나이로 귀족의 차남이라는 스스로의 굴레를 벗으려고 발버둥치던 그는 그녀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의 나이 23세가 되어 준남작의 작위를 받고 오랜 만에 연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이미 유리아나는 황태자의 신부후보로 손꼽히고 있었다. 아르페노는 기사단에 있으면서 황태자의 성품에 감복한 바 있었던 터라, 그녀에게 더 이상의 반려는 없을 것이라 믿고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묻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준남작 작위를 받은 직후에 그의 형은 급작스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후계가 없었던 이유로 그는 졸지에 형의 작위를 이어 받아 백작이 되었다. 수도에 머무르는 것이 미련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고 오직 영지에 틀어박혀 그곳에 매진한 지 벌써 수 년 째. 해마다 점점 아름다워지는 유리아나의 모습을 그저 대결산의 시기에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연회에서 확인만 할 따름이었다. ‘마르띠앙공작이 백작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유리아나님을 저런 놈에게......’ 작년만 해도 영애들 사이에서 받들어지던 그녀가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것도 가슴아픈 일이었거늘, 하물며 저토록 나이 든 남자라니! 아르페노는 처음 들려온 에디우스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힘껏 주먹을 움켜 쥐었다. 다음 순간 로스티엔에 대한 악담이 들려오자 그는 굳게 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천사같이 보이는 고귀한 유리아나가 로스티엔에게 수난을 당하는 모습이 머리 속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좋았어!’ 그를 목표로 삼고 말을 했던 에디우스는 생각보다 확실한 반응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다음 대상이 있는 곳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음성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겉보기엔 충분히 이상해 보일테니까. - 아르페노 백작을 살펴봐. 현재로서는 거의 확실한 것 같아. 에디우스는 자리를 옮기면서 다이아나에게 전언을 보냈다. 마침 곡이 끝날 즈음이었고, 자리를 옮겨간 에디우스 대신 이번에는 다이아나가 우연을 가장하고 아르페노 백작의 근처에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아르페노의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다이아나를 보자 너도나도 서로 인사를 청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검사로서 기사단에 입단했던 것도 파란을 일으켰지만, 단시일 내에 백작으로 지위가 상승했고 황태자의 호감을 받는 그녀이다. 더군다나 항상 함께하는 에디우스 역시 알트상단의 후계자인터라 다이아나와 친분을 형성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다이아나의 외모 또한 당연히 한 몫을 했다. 하지만, 이미 이권이나 권력을 위한 사교생활에 익숙한 귀족들에게 다이아나의 외모나 성품은 그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편이었다. 연회의 처음부터 다이아나는 붙임성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위에 몰려든 귀족들의인사를 일일이 받아준 그녀는 마치 뒤늦게 알았다는 듯 아르페노를 주시했다.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서서는 애교스럽게 말을 걸어 보았다. “처음 뵙는군요. 저는 다이아나 드 라파엘르라고 합니다만.” 유리아나의 생각으로 가득하던 라파엘르는 사람들을 휘몰고 다니던 다이아나가 어느 틈에 자신의 눈앞에서 말을 걸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수습한 그는 몸에 밴 습관처럼 인사의 말을 되돌렸다. “아르페노 드 라자리에 입니다.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라파엘르 경” 아르페노도 대결산의 회의에서는 다이아나에 대하여 상당히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지를 위한 관심이었지, 여성이라는 존재로서의 관심은 아니었다. 유리아나의 일이 없었다면 인사를 한 김에 영지 문제에 대하여 담소라도 나누었을만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이아나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다이아나는 몇 번 더 말을 걸어 보았지만, 아르페노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단순한 답변만 돌릴 뿐이었다. 이 모습만 보자면 평소 리카르도와 다이아나의 대화를 입장만 바꾸어 놓은 것과 흡사했다. 그 사실을 속으로 깨달은 다이아나는 슬쩍 웃음을 참아 넘겼다. 아르페노의 시선이 계속 유리아나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다이아나는 결과에 만족하면서 에디우스가 점찍은 다음 후보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것은 마르띠앙 공작과 알렉시안, 그리고 리카르도와 유리아나 정도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은 황궁 안에 머물렀다. 수도에 저택이 있는 귀족들의 경우 본인의 의사에 따라 선택을 했다. 후보로 올린 이들은 대부분 수도 안에 저택을 소유하지 않거나 있어도 외곽 지역인 경우가 많았다. 신중하게 올려놓은 후보들의 대부분은 대체로 자신의 영지에 충실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관찰이 필요했으므로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각각 황성 안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르는지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자유였으므로 첫 날 밤은 의논을 하기 위해 다이아나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되었어?” 처음에야 반대했지만, 일단 사건의 진행이 궁금했던지 밤늦게까지 기다리던 베르히안이 옷도 채 갈아입기 전에 물어왔다.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잠시만, 조금 있다가 거실에서 함께 이야기하자” 라고 달랬고, 베르히안은 별 불만없이 이제는 자신의 지정석처럼 되어버린 조금 작은 푹신한 의자 위에 몸을 묻었다. “어이, 꼬마! 인사라도 좀 하지?” 물론 그 반대편에 달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지만...... 베르히안은 소년의 표정을 버리고 에디우스 전용의 익숙한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노란 도마뱀 안녕?” 하지만, 에디우스도 어리석은 편은 아닌지라 이미 여러 번 겪은 베르히안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흠. 입버릇이 고약하긴 하지만 너도 어느 정도 인간의 예절을 배워가는군. 좋은 일이야.” “뭐, 별로! 나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적응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까. 적어도 수 년을 한 여자 뒤를 쫓아다닌 주제에 그 마음 하나 잡지 못한 너와는 다르지” 평소보다 강도 높은 공격에 에디우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디우스는 곧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격했다. “뭔, 몇 년 정도야 너희 종족이나 우리 종족 어느 쪽에든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잖아? 허긴 너야 몇 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이 지나도 가망이 없겠지만” “뭐야?” “아닌가? 대충 듣기에 네 머리 속의 지식은 현 마왕의 것과 유사하다며? 그런데 신체는 어린아이라. 결국 넌 평생 그 모습인거 아닌가?” 베르히안이 독립된 존재로서 자각을 한 것은 500년 정도 전의 일이다. 물론 그는 그 전에는 키케르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에디우스의 지적은 날카롭다. 실제로 베르히안은 성마족이 될 시한을 이미 넘기고도 남았다. 생겨날 때부터의 그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가장 아픈 곳을 찔린 베르히안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평생을 소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최근 상당히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는 일이었다. 사실 마계에서야 어떤 모습이던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인 성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으니까. 에디우스는 다이아나가 나올 시간이 되었기에 더 이상 심한 말을 하지 않았고 베르히안은 조금 우울해졌기에 입을 꾹 다물고 다이아나를 기다렸다. 이런 이유로 다이아나가 나왔을 때 모처럼 둘은 싸우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물론 그 사이로 흐르는 기류야 엄청나게 냉랭했지만. 에디우스와 다이아나는 미리 뽑아두었던 후보들 중 당일의 반응이 가장 좋았던 이들을 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둘 사이에는 그날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나열되었기에 베르히안도 별 문제없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다. 일단, 가장 우선적으로 유력하게 거론된 것은 두말 할 나위없이 아르페노 백작이다. “자신의 힘으로 준남작이 될 정도로 노력파지. 거기에 여자 관계도 깨끗했고. 무엇보다 영지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더군. 아참, 오늘 추가로 알아본 사실인데, 상단에서 최초로 농기구 구입을 의뢰받은 귀족이야” “어? 그래?” “그만큼 영지민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지.” “흠. 그럼 에디가 접근하기 쉽겠다. 농기구쪽 이야기를 해봐. 뭐하면 우리 영지 이야기를 흘려도 좋구. 일단 친근한 편이 쉽겠지?” “응. 그래도 보험 하나쯤은 필요하니까 이 사람이랑 이 사람도 좀 더 지켜 보자구. 아르페노 백작이 우리의 의도처럼 움직여 준다면야 별 필요 없겠지만......” “응. 아차! 그 전에 먼저 유리아나님의 의사를 물어보는 건 어떨까?” “그건 반대야. 사실 유리아나님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구. 미리 알려주는 것보다 구원자로서 나타나는 편이 호감을 가지게 되기도 쉽다구.” “그럴까?” “그럼! 생각해 봐. 지금 이야기를 했다가 아르페노 백작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럼 유리아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나섰을 때 그와 비교해서 실망할 가능성도 있어. 반대로 미리 말해 주었다가 호감을 가질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지. 어차피 지금은 누구라도 아쉬운 때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쯤은 유리아나님도 알고 있잖아. 기왕이면 절망 속에서 홀연히 나타났을 때의 효과를 노리자구.” “그것도 그렇겠다. 그런데......” “응? 뭐?” “아, 아냐.” 도대체 에디우스가 언제부터 이렇게 여성 심리에 훤해진 것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말하기도 뭐해서 다이아나는 입끝까지 나오던 질문을 꿀꺽 삼켜 버렸다. 어찌되었던 자신이 신경쓰지 못한 부분까지 세밀히 챙기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니까. 그 시간, 황궁 안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아르페노가 가장 유력하겠지?” “네. 그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지요.” “응. 그렇지.” 아주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사단에 있던 아르페노를 리카르도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귀족 출신의 기사 중에 상당히 노력파로서 유명했다. 그리고 미래의 군주로서 리카르도가 보기에도 믿을만한 영주였다. 리카르도 또한 권력을 위한 암투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유리아나가 더 이상 안 좋은 상황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성격상 나보다는 자네랑 더 가깝겠군. 안 그런가?” “네?” “무뚝뚝파잖아! 오늘 보니 무게잡고 있는 폼이 딱 알렉 자네던걸?” “그, 그런......” “지원을 부탁해!” 리카르도는 가벼운 어조로 농담하듯이 알렉시안에게 지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이런 일에는 도통 소질이 없는 알렉시안을 위해 상세한 행동지침까지 내려주었다. 연회는 두 번째 날도 세 번째 날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그 사이 로스티엔 후작은 점차 노골적으로 유리아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한 행동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는 시선도 여전했다. 아르페노에게 접근하기 위해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미리 유리아나와 의사소통을 했다. “유리아나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아, 라파엘르 백작님!” “다이아나라고 부르세요.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우린 원래 친하게 지냈잖아요?” 다이아나는 연회장에서 일부러 유리아나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사실 유리아나의 안색은 내내 안좋아지고 있었다. 날마다 징그러운 로스티엔이 옆에서 추근거리는 데다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던 탓이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에도 로스티엔 후작은 그다지 호감을 가질 수 없은 인물이었지만, 이미 이틀간 옆에서 지켜본 결과는 최악이었다. 춤을 추면서도 틈만 나면 여기 저기 더듬는 손길에 유리아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손을 밀쳐내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심한 것이 있던 터라 억지로 참아내었다. 가능하면 그가 불쾌하지 않도록 손길을 피하는 것이 오늘로 사흘 째, 지쳤다며 겨우 쉴 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로스티엔 후작은 멀어질 기색없이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우연처럼 같은 곳으로 음료를 마시러 온 다이아나가 걱정스럽게 말을 걸자 유리아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창백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로스티엔 후작은 은연중에 적으로 가름지어진 다이아나를 핥듯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의 역겨움에 다이아나는 더더욱 결심을 굳건히 했다. “고맙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속으로야 어떤 생각을 하던 두 여성의 대화는 물흐르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짐짓 나무라는 표정으로 로스티엔 후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의도된 표정에는 상당한 애교가 섞여 있었기에 로스티엔 후작은 탐욕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그 시선을 되받고 있었다. ‘저러다 침이라도 흘리겠군’ 예민하게 다이아나 주위를 관찰하던 에디우스가 로스티엔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으르렁거렸다. “로스티엔 후작님. 파트너가 이렇게 안색이 안 좋은데, 너무하셨어요. 유리아나님은 몸이 약하시다구요.” “아, 이런. 제가 무심했습니다. 유리아나, 괜찮소?” 짐짓 다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어 보인다. 물론 시선을 고려한 행동이었지만, 모처럼의 기회를 흘려보낼 생각이 다이아나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그 사이를 이용해 슬쩍 유리아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로스티엔을 자연스레 밀치고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었다. “유리아나님. 괜찮으세요? 이런, 안되겠어요. 우리 저쪽 테라스에서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죠. 괜찮겠죠? 로스티엔 후작님?” “아, 저,저야 물론......” 다이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보다 키가 작은 유리아나를 부축하듯이 살짝 안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로스티엔은 두 미녀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남몰래 쫓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멍하니 유리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음성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르페노 백작님이시죠? 저는 알트 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에디우스 드 하 비어스입니다.” “네? 아, 하비어스 백작님. 저는 아르페노 드 라자리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칼라임에서 저희 물건을 들여가신 최초의 영주시니까요.” “네? 아, 네!” 아르페노는 멍한 머리를 수습하고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엘프도 울고갈 외모의 젊은 금발의 남자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은 이미 들은 바 있다. 아무리 귀족 사회의 스캔들에 관심이 없는 그라고 해도 다이아나나 에디우스에 대한 일까지 모를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에디우스에 대해서는 오히려 아르페노 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대결산 때 그와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르페노였는지도 모른다. 평소 같으면 영지민들을 위해 개발한 알트상단의 물건들에 대해 오히려 먼저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흘간 아르페노의 머리 속은 오직 유리아나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생각같아서는 로스티안 앞에서 보란 듯이 청혼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과연 유리아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속만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 으음... 리플은 늘 열심히 읽습니다. 이쁜이님의 리플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는데요. 일단 현재의 다이아나로서는 에디우스가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에디우스는 수 차례의 거부에도 자신의 의지로 다이아나 옆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 이 두 가지 부분으로 설명을 대신해야겠네요. 다이아나가 에디우스를 '사랑한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그녀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거기에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재 다이아나로서는 이성으로서 가장 가깝게 느끼고 있는 존재가 에디우스이지요. 나름대로 냉정하게 거절했었지만, 에디우스 스스로 거절한 것이잖아요 그녀로서 에디우스에게 최선은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뭐, 나머지는 다이아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구요. ^^;;;; 자, 그럼 즐독하시구요 일희일비하는 날들입니다 각성 아르페노는 자신에게 접근한 남자가 연회 첫 날 유리아나에와 로스티엔에 대한 말을 하던 바로 그 사람임에 주목했다. 안 그래도 초조하던 차에 조금이라도 정보를 알아 낼 기회를 놓칠 이유는 없다. 이런 이유로 에디우스는 순조롭게 아르페노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둘은 한 동안 유리아나의 일을 접어둔 채 새로 나온 농기구의 효율성에 대하여 토로했다. 처음부터 유리아나 이야기를 꺼내가 어려워 시작한 말이었지만, 아르페노는 곧바로 대화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뭐야 에디. 여기 있었어? 아, 안녕하세요? 또 뵙는군요!” 대화에 열중하던 사이 어느 틈엔지 다이아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아르페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유리아나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아르페노는 갑작스레 유리아나가 코 앞에 나타나자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다이아나의 말에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아르페노의 행동을 감싸주듯이 에디우스가 부랴부랴 끼어들어 이들을 소개시켰다. 처음으로 유리아나와 제대로 인사를 한 아르페노는 속으로 기쁨을 참지 못했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로스티엔 후작이 나타나 유리아나를 반강제로 끌 듯이 데려가버렸으니까. “도대체 귀족들은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저렇게......” 다이아나가 낮은 소리로 둘에게만 들릴 수 있게 내뱉듯이 말하자, 에디우스는 짐짓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이아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목소리를 낮춰 다이아나. 어차피 가족들 사이의 일이라고. 네가 유리아나님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에디!” 다이아나가 다시 뭐라고 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에디우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르페노를 돌아보았다. “알았어, 알았다구. 아르페노경 방금 하던 이야기는 오히려 저보다 다이아나가 잘 알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마저 이야길 하죠.” “저, 저야 좋습니다만.” 에디우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의 다이아나를 이끌고 사람들 사이를 솜씨있게 헤치면서 지나쳤다. 아르페노는 홀린 듯이 그 둘의 뒤를 따르면서도 이 연인들의 뒤를 쫓은 자신이 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유리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개된 방들이 주욱 모여있는 복도로 들어선 에디우스는 그 중 구석진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그리고는 세심하게 주변을 돌아보고 보란 듯이 시동어를 읊어가면서 말소리가 새어나가거나 다른 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자, 이제 말해도 돼.” 에디우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이아나가 속사포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유리아나님이 너무 딱하잖아. 도대체 왜 그 분이 로스티엔 같은 놈이랑 결혼을 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아버지란 사람이......” 다이아나의 음성은 한참 이어졌다. 화풀이를 하듯이 유리아나의 딱한 처지를 과장시켜서 테라스에서 떨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이아나에게 어느 정도의 동감을 섞어서 맞장구를 치던 에디우스는 냉정한 결론으로 다이아나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유리아나님도 결국 아버지의 명에 따르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걸?” 다이아나는 남자는 역시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표정으로 ‘흥’하고 콧바람을 내더니 아르페노의 심장이 철렁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구.” “뭐?” “네?” 되돌아오는 외마디 소리에 다이아나는 비로소 아르페노의 존재를 깨달은 양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해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농기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구요?” 갑자기 말꼬리를 돌리는 다이아나의 태도에 아르페노는 몸이 달았다. “아, 아뇨.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방금전의 그 말은 유리아나님에 대한 것입니까?” 다이아나는 분노와 슬픔이 섞인 태도로 살짝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긍정을 표시했다. “마치 다신 못 만날 것처럼 이야기하시더군요. 나름대로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어요.” “로스티엔과 결혼을 하기 때문은 아니고? 현실에 순응하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에디우스가 아르페노의 궁금함을 대신하듯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질문을 하자 다이아나는 다시 흥분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아니. 아니라구. 확실히 죽는 편이 낫다고 했어. 아버지에겐 미안하지만, 그렇게 살 생각은 없다고. 살짝 뒤쪽을 얼버무리긴 했지만, 틀림없어! 에디, 방법이 없을까? 연회 마지막날에 공표할 모양인가봐. 나, 유리아나님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하지만, 로스티엔 같은 남자와 결혼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잖아.” 다이아나가 간절하게 부탁하듯이 말하자, 에디우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유리아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긴 해. 해결 방법이 있다면 다른 귀족이 공개구혼을 하고 유리아나님이 그걸 받아들이는 거겠지. 하지만, 이미 연회는 반이 지나갔다고. 어디서 적절한 사람을 구할 수 있어?” “그, 그거야......” “물론 유리아나님의 마음이 확실하다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일일이 물어볼 처지도 못되잖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아르페노는 자신도 모르게 나서고 말았다. “저, 제가......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네?” “아르페노님이요?” 희색이 만면한 다이아나와 달리 에디우스는 약간 회의적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문제점들을 늘어놓는 것이다. “아르페노님이 유리아나님을 동정하시게 된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렇게 되면 두 분은 결국 결혼하게 될 텐데, 결혼이란 것이 동정으로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런 일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로스티엔 후작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군다나 유리아나님은 황제파의 반대편에 섰던 오브리스의 영애이니 잘못했다가는 귀족들 사이에서 아르페노님의 입지가 나빠질 수 있습니다.” 아르페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번엔 다이아나가 반박을 하고 나섰다. “그건 알 수 없는 거야. 아르페노님이 유리아나님을 사모하고 계셨던 건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귀족들의 세력다툼 문제라면 어차피 황제파 쪽에서는 유리아나님으로 인해 오브리스 백작과 로스티엔 후작이 손 잡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라구. 무엇보다, 우리가 설득하면 되잖아? 리카르도님은 이해해 주실거야.” “넌 너무 낙천적이야.” “그러는 너는 너무 비관적이라니까!”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이 일에 대한 양면성의 하나씩을 대변하는 양 대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미처 끼어들 기회를 놓친 아르페노는 거의 공인된 연인이나 다름없는 이 둘의 치열한 말싸움이 끝날 때까지 겨우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도와주십시오.” 대충 소강상태에 빠진 두 사람 앞에 그는 깊게 머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당황해했다. 아르페노는 자신이 유리아나를 오랫동안 연모해왔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둘에게 고백했다. “유리아나님이 제가 싫지만 않으시다면, 제가 나서고 싶습니다.” “정말이세요?” “네. 수고스럽지만, 유리아나님의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 “알았어요.” “좀 더 생각해 보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에디우스는 끝까지 비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재차 다짐하듯이 물었다. 아르페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결심을 확언했고 세 사람은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리카르도는 세 사람이 연회장을 떠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해진 것 같군” “우리가 도와줄 틈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알렉시안이 옆에서 중얼거리자, 리카르도는 씨익 웃으면서 그의 말을 되받았다. “아니, 있어. 이럴 때 점수라도 좀 얻어 놓자구!” “네?” 리카르도는 여전히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는 다이아나에 대해 부풀어오르는 호감을 애써 눌렀다. 이미 에디우스와의 사이를 공언한 마당에 자신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리카르도가 황태자라고는 해도 제국 전체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알트상단을 적대시해서는 그가 평생을 쌓아온 꿈이 한 순간에 무너질 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한 남자의 눈으로 볼 때도 사실 에디우스만큼 완벽하게 다이아나를 받쳐 줄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보아도 에디우스는 항상 다이아나의 뒤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결국, 포기해야겠지.’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려서부터 함께 해 온 두 사람의 막역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어려서부터 함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겉으로 보여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거기에 두 사람의 윗대의 친분을 생각해 보면 여지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르페노와의 알찬 대화를 마치고 시원한 표정으로 나선 다이아나는 느닷없는 리카르도의 호출을 받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에디우스와 함께 간 자리에는 리카르도와 마르띠앙 공작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둘은 부르지 않은 에디우스의 출현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단 자리를 권하고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잘 될 것 같지?” 돌아오는 길에 다이아나가 조금 불안한 듯이 묻자 에디우스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을 되돌렸다. “응. 잘 될거야. 뜻밖에 원조자들까지 있잖아.” “그러게. 아르페노 백작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나설 줄은 몰랐어.” “뭐, 네가 말했던 대로 황제파도 원하는 일은 아니잖아. 모르긴 몰라도 유리아나님의 그간의 행적에 대해 조금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응. 그래. 사실 그 분은 누구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을 할 분은 아니지.” 리카르도와 마르띠앙이 지원을 약속한 이상 일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르띠앙은 이미 정교하게 실행계획을 세워놓은 후였고, 그가 세운 계획과 다이아나측이 세운 계획을 합하고 나니 거의 모든 변수가 사라졌다. 연회의 나흘 째, 다이아나는 아르페노와 춤을 추면서 약간 바뀐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연회의 다섯 번째 날이 되었다. “유리아나양, 저와 한 곡 추어주시겠습니까?” 독점하듯이 유리아나의 옆에 딱 붙어있던 로스티엔 후작은 겁 없이 유리아나에게 춤을 신청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눈에 한 껏 힘을 주어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황태자 저하!” “아, 로스티엔 후작” 결코 못 볼 수 없음에도 이제야 알아보았다는 듯이 초연하게 고개를 까닥인 황태자는 유리아나의 팔을 잡아 플로어로 이끌고 나갔다.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공인된 약혼자가 되려면 아직 이틀이 남아 있었으므로 별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황태자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도 없었으므로 로스티엔은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봐야 이틀 후면 내 것이 될 여자니. 후후후’ 천사같은 외모에 연약함과 청순함이 한 눈에 드러나는 여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유리아나는 딱 자신의 취향이었다. 저항하지 못할 그녀에 대하여 음탕한 여러 가지 행위를 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로스티엔은 침을 삼켰다. ‘다이아나라고 했나? 그 년도 나름대로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다이아나에게 흥미가 있긴 했지만, 유리아나와는 달리 그녀는 스스로 작위를 가진 인물이다. 거기에 무력까지 만만치 않으니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림의 떡이다. 일단 손 안에 들어온 것에 만족하기로 한 로스티엔은 누가 들어도 천인공노할 말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이번엔 얼마나 버티려나? 저렇게 여리여리해서야 얼마 못 버티겠군. 돌아가면서 신전에서 포션이나 잔뜩 사가야겠어. 일찍 죽어서야 재미가 없으니까.’ 가학적인 성향의 로스티엔 후작의 머릿속은 크리샤도 감탄할 만한 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꿈과 달리 일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상상 속을 헤매고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유리아나의 행방을 찾았을 때 그녀는 알렉시안과 춤을 추고 있었다. 알렉시안이 누군가에게 춤을 신청하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어서 그녀는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황태자의 춤신청을 받은 것으로도 뒤로 말이 많은 상태였는데, 이번에는 알렉시안이니 귀족들은 저마다 이 상황에 대해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곡이 끝나 플로어에서 두 사람이 나서는 것을 본 로스티엔은 유리아나를 데려오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알렉시안은 이미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그녀를 데려간 후였다. 그 사람들이란 황제와 마르띠앙 공작 그리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 등이었다. 이 때의 로스티엔 눈에는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아르페노 백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폐하께 청이 있습니다.” “오, 아르페노 백작. 말해보시오” 이미 짜여진 절차에 의해 대화가 진행되었다. 연회의 자리에서 황제에게 청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이 일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귀족들은 그다지 나서지 않는 아르페노의 등장에 숨을 죽이고 다음 일을 기다렸다. 덕분에 이어지는 아르페노의 말은 거의 모든 귀족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었다. “폐하를 증인으로 하여 저 아르페노 드 라자리에 백작은 유리아나 드 오브리스 영애에게 공식적으로 청혼을 하는 바 입니다.” 홀 안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일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아랑곳 없이 아르페노는 깜짝 놀란 표정의 유리아나 앞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한 번 청혼의 말을 읊조렸다. 그 사이 유리아나는 얼른 다이아나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발 아래 꿇어 앉은 남자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황제는 사뭇 젊은이들의 로맨스가 재미있다는 듯 유리아나 쪽을 향해 정해진 절차의 질문을 행했다. “유리아나 영애. 아르페노 백작의 청혼을 받아 들이겠소?” 유리아나는 이미 어제밤 아르페노 백작에 대한 일을 들어서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전해 준 것은 그가 성실하고 자신의 영지에 충실하며 유리아나를 오래 흠모해 왔다는 것 뿐이었다. 인물에 대해서는 그저 나이가 많지는 않다는 정도였으므로 아무래도 좀 못난 사람이라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여, 나름대로 각오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 앞에 꿇어앉은 남자는 황홀할 정도의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리아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유리아나 드 오브리스는 아르페노 백작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놀라움에 찬 감탄사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황제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 두 사람에게 이의가 있는 이는 앞으로 나오시오. 정해진 절차에 의해 아르페노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할 것을 허락하오!” 로스티엔은 이 황당한 상황에 말을 하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그는 분노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르페노는 기사단 출신의 젊고 건강한 남자였고, 그에게 결투 신청을 해 보아야 합법적으로 목숨을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오브리스 백작은 마지막날의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화풀이를 할 대상조차 없었다. 결국 황제는 참석하지 않은 유리아나의 아버지를 스스로 대신한다고 선언하고는 두 사람의 공식적인 약혼을 발표했다. 더하여 이전부터 그녀를 딸처럼 생각했는데 섭섭하다면서 두 사람의 결혼이 있기 전까지 황궁에 머무르며 말상대나 해 달라고 유리아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발언을 했다. 각성 유리아나는 결국 대결산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황실의 후원을 얻어 바로 아르페노와 결혼에 골인했다. 오브리스 백작은 뒤늦게 달려와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이미 유리아나와 아르페노는 황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이미 때가 늦었음을 알게된 오브리스 백작은 이번에는 아르페노 백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손을 뻗쳤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르페노는 예비 장인에 대한 예우를 정중히 하면서도 정치에 대해 뜻이 없음을 확고히 했다. 물론 아르페노의 가문 자체가 워낙 예우받는 유서깊은 가문이므로 오브리스 백작의 가문에는 이익이 된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오브리스 자신의 야망과는 거리가 멀어진 셈이다. 아르페노는 유리아나와 대화할 기회가 생기자 그 간의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마음 기댈 곳 없었던 유리아나는 그의 숨겨졌던 마음을 고백받자 매우 감격했다. 단순히 로스티엔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건만,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순애보로 불타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주어진 결과에 만족한 유리아나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미련없이 수도를 떠났다. 물론 다이아나와 에디우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남겨놓고. “그럼 끝난 거야?” 베르히안이 물어오자 다이아나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결산에 관련된 행사가 끝난 후에도 유리아나의 결혼식 때문에 며칠 간 수도에서의 일정을 연장한 탓에 베르히안은 조금 토라져 있었다. 일단, 수도에서 구경할 것은 다 하고 돌아다녔으면서도 영지에서처럼 자유롭지는 않았던 탓이다. 디안도 영지의 사람들이 보고 싶었는지 칭얼대기 시작했으므로 다이아나는 바로 영지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응? 중요한 일이야?” 갑자기 출발 당일에 볼 일이 있어 따라가지 못한다는 에디우스의 말을 듣고 다이아나는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에디우스가 다이아나의 곁에서 떨어질 리 없었으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야. 상단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른 상단의 대표가 바뀌어서 대표 모임을 가진다더군. 상대편에서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했나봐. 어찌되었던 외부로 공표된 대표가 나인 셈이니 가야겠지.” “아아! 어느 상단?” “시우스쪽이 주 활동대상인 펜하임 상단이야.” “그렇구나. 연락 할 거지?” “물론” “잘 다녀와” “응. 너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말구.” “응, 그럴게.” 에디우스는 지난 번 베르히안과의 다툼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복잡해져 있었다. 유리아나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다이아나의 문제인 불면증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물론 에디우스는 그 이후로도 다이아나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전처럼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다이아나가 그다지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쯤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다이아나는 최근에 하지 않던 화장을 옅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빠진 안색을 감추려는 것임을 에디우스도 짐작하고 있었다. “저어, 손님이 오셨는데요?” “네. 누구신데요?” “저, 그게...... 아가씨 아버님이라고......” “네?” 영지로 돌아와서 비슷한 일과를 거듭하고 있던 다이아나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마계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연락을 보낸 이래로 유스테우스와 가끔씩 이야기를 하는 일은 있었지만...... ‘엊그제만 해도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 나 왔다. 다이아나. 얼른 안나오고 뭐 하니? 그녀의 망설임을 확 없애는 전언이 머리 속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빠!” 안느는 이상한 듯 머리를 갸우뚱거리던 다이아나가 돌연 일어나서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하자, 놀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물론 한참 뒤쳐지기는 했지만. 다이아나가 손님들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거실의 문을 열자 은발의 남자가 미소 지으면서 뒤돌아보았다. “다이아나!” “아빠!” 수정구를 통해 대화를 한다고 해도 실물을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두 팔을 벌려보이는 유스테우스의 품 안으로 망설이지 않고 뛰어 들었다. 갑작스레 출연한 영주의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안느와 말론은 부녀가 확실한 것으로 판단되자 두 사람의 닮은 점을 찾기에 여념 없었다. “아빠, 못 본 사이 많이 변하셨어요.” 다이아나는 아버지의 따스한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면서 시치미를 떼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세월엔 장사가 없는 법인가보다.” 다이아나의 겉모습에 비추어 아버지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을 중년의 모습을 한 유스테우스는 짐짓 웃으면서 전언을 건네왔다. - 이 정도면 의심한 인간이 없겠지? - 네, 여전히 멋있으세요 아빠. “아버님이 오셨다면서요. 언니?” 밖에서 이야기를 들은 듯 뮤리엘이 들어오다가 유스테우스의 모습을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뮤리엘이라고 합니다.” “아, 아빠 이쪽은 뮤리엘이라고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에요. 뮤리엘은 하이센 제국의 황녀랍니다.” “아, 황녀님 반갑습니다.” 유스테우스도 뮤리엘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긴 했지만, 뮤리엘은 속으로 과연 다이아나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 유스테우스의 모습에는 정중한 예의가 느껴질 뿐 황녀라는 존재에 대한 압박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님, 편하게 뮤리엘이라고 부르시고 하대해 주세요. 다이아나언니의 아버님께 존대를 받는 것은 너무하잖아요.” “그렇게 하세요 아빠. 뮤리엘은 친동생 같은 존재니까요.” “응. 그렇구나. 그럼 뮤리엘은 내 또 다른 딸이 되는 건가?” “그렇게 대해주시면 저야 더할나위 없이 영광이죠. 언니의 미모와 재능에는 못미치겠지만, 원래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하니 그 부분은 이해해주세요.” 뮤리엘은 거침없는 태도로 웃어른에 대한 예의와 친근감을 섞어 유스테우스를 대했다. 유스테우스는 영지의 주요 인물들과 인사를 했다. 디안은 느닷없이 나타난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한참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니 디안? 엄마의 아빠니까 할아버지라고 불러드리렴!” “하지만, 엄마. 할아버지 아닌데요? 머리가 하얀 것 같긴 하지만, 흰 색이랑은 틀리고 또......” 유스테우스는 할아버지라기보다는 관록이 있는 장년층으로 보일 뿐이다. 디안의 경우 원래의 조부모나 영지에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이들이 비교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엄마의 아빠는 할아버지가 맞는 것 같기도 해서 헷갈리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유스테우스는 아이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간단한 마법을 선보였고, 몇 시간을 투자한 후에야 겨우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베르히안은 유스테우스에게 인사를 했지만, 어쩐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족들에게 드래곤은 조금 껄끄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고위급이나 최고위급의 마족은 성룡 혹은 고룡들과 비슷한 무력을 소유한다. 그런데 그 기준을 설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마계에서와 지상계에서의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드래곤이라는 종족도 자존심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성격이라, 이 두 종족은 가능하면 서로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유스테우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의 딸이 강제적으로 마계로 끌려갔던 것이니 마족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다고 베르히안은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주춤거리는 베르히안과 달리 유스테우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제자’에게 말을 건네왔다. “베르. 내가 없다고 수련을 게을리하진 않았겠지?” “네? 네. 스승님” 베르히안은 비로소 다이아나가 자신을 아버지의 제자로 소개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얼른 대답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스승이 나타나는 바람에 베르히안이 당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워낙 다이아나의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으므로 낮 동안에는 부녀간에 특별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다이아나는 진지한 표정을 한 유스테우스와 마주 앉아 그가 돌연 찾아온 이유를 듣고 있었다. “드래곤으로 인정을 받는다구요?” “그렇단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긴 했어도 너는 내 딸. 그리고 각성을 한 지금은 당연히 드래곤으로서의 능력도 겸비하고 있지. 처음부터 나는 너를 유희에서 낳은 인간의 아이가 아닌 나의 헤츨링이라고 공표해 놓았으니까.” “하지만......” 다이아나의 망설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스테우스는 드물게 말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유를 자신 쪽에서 먼저 거론했다. “맞아. 너는 인간이지. 그건 나도 안단다. 네가 인간으로서 살려고 한다는 것도. 하지만, 너는 드래곤인 나 유스테우스의 딸이란다. 네가 인간이라고 해서 드래곤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라는 법은 없어. 그저 드래곤들 사이에서 너를 그들과 동일한 존재로 인정하길 원하는 거야.” 세레스 이외의 반려를 생각해 본 일 없는 유스테우스로서는 후손이라고는 다이아나가 유일했다. 그런 그가 다이아나가 드래곤들 사이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에서 다이아나가 돌아왔을 때, 평소 같았으면 당장 달려왔을 그가 움직이지 않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고룡들과 각 종족의 수장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딸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설득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아빠 말씀대로 할게요. 어떻게 하면 되죠?” 유스테우스가 기대했던 대답이 약간의 침묵 후에 흘러나왔다. 다이아나로서는 아버지의 희망사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말대로 어차피 드래곤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또한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종족에게 인정받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굳이 드래곤으로서가 아니라고 해도 실버 드래곤 유스테우스의 딸로서. “어머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뮤리엘이 놀란 듯이 말하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동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다이아나의 아버지는 다이아나가 평민으로 나타난 이유를 밝혔다. 유스테우스가 밝힌 집안은 내력은 이러했다. 원래 다이아나의 어머니 집안과 아버지 집안은 상당히 높은 신분이었다. 하지만, 두 집안 사이의 혼인은 특별한 이유로 인해서 허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스테우스는 다이아나의 어머니를 포기할 수 없어서 집안의 허락 없이 둘만 몰래 빠져나와 다이아나를 낳았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집안에서 들이닥쳐 어린 다이아나와 어머니를 강제로 끌고가 버렸다. 유스테우스는 이후 미친 듯이 다이아나를 찾아 헤맸지만,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오랜 노력 끝에 다이아나를 찾긴 했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어머니와 떨어져 고아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뮤리엘은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의 아버지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신성력이 어머니쪽에서 물려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다이아나의 아버지는 마법사 집안, 어머니는 신전쪽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대체적으로 마법사와 신관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투거나 하지는 않아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관여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다이아나가 가진 신성력으로 보아 그녀의 어머니는 최소한 최고위급 신관 이상의 재능을 타고 났으리라. 나름대로 짜맞추어 그림을 형성한 뮤리엘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런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영지의 사람들도 부모와 떨어져 자라나야 했던 그녀의 애닲은 사연에 점점 숙연해지고 있었다. 겉모습과 달리 마음이 약한 프라이톤은 유스테우스가 강제로 자식과 떨어지게 된 부분에서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후 다이아나를 고아원에 버리다시피 했다는 대목에서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유스테우스는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위안 비슷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나마 핏줄이라는게 뭔지 처음 반대하던 이 아이의 외숙부와 이모들이 이 아이에게만큼은 신경을 썼던 모양이네. 가주가 모르게 물심양면으로 이 아이를 도우려고 노력해 주었지. 나 또한 그 사이 우리 가문에 이 아이의 존재를 알리고 설득해 왔네. 이번에 그 결과를 볼 수 있었지.” 유스테우스의 결론은 다이아나가 자신을 따라 가문의 어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이아나가 또다시 영지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워낙 앞쪽 이야기의 파장이 컸기로 사람들은 그녀가 인정받게 된 사실에 축하의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듣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던 아이들을 제외하고 어른들은 모두 다이아나가 무사히 가문의 인정을 받기를 기워해 주었다. 물론,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를 따라 엄마가 또 자리를 비우게 된다는 것을 알게된 디안은 한참을 달래줘야 했다. 그나마 베르히안이 나서서 디안을 달래주었기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될 수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빠르면 일 주일, 길게 걸리면 열흘에서 두 주 정도야.” 모두의 앞에서 다이아나가 확인하듯이 묻자 유스테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안느는 바쁘게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드래곤들을 만나는 데 화려한 옷들이 필요할 리 만무했지만 다이아나는 딱히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유스테우스가 일이 다 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이아나를 데리러 간 이 때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큰 파란이 일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이나 한 듯 젊은 드래곤들 사이에서 거부의 외침이 잇따랐다. 이미 유스테우스에게 확언을 한 윗대의 드래곤들은 진땀을 흘리며 이들을 설득하기 바빴다. “드래곤으로서의 능력이라고 해도 그녀가 진정한 드래곤인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1100살이 되는 블루 드래곤이 말하자 여기 저기서 동조의 소리가 울려펴졌다. 현재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은 헤츨링을 제외한 2000살 미만의 드래곤 7마리. 윗대의 드래곤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들고 일어난 이들을 난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만으로 드래곤이 된다면 그 동안 9써클을 달성했던 인간 몇 명도 드래곤이라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다이아나는 유스테우스의 딸이지 않느냐?” “그녀는 인간입니다. 드래곤이 인간으로 유희하여 낳은 딸을 같은 드래곤으로 인정한 예는 없습니다.” “여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단지 드래곤의 형태로 낳을 수 없었을 뿐이지 모든 능력을 물려받았다.” “모든 능력이라구요? 우리 드래곤의 가장 강력한 능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용언의 능력, 둘째는 본체의 힘, 셋째는 브래스죠. 그녀는 그 중 오직 한 가지를 가졌을 뿐입니다.” 고룡들의 설득은 나오는 족족 반박하는 말에 막히고 있었다. 마치 짜여진 듯 돌아가면서 논박을 하는 젊은 드래곤들의 말에는 연륜이 넘치는 고룡들조차 대꾸하기 힘들었다. 각성 ‘흥! 절대 그 계집애가 드래곤으로 인정받는 꼴을 못 봐!’ 동면에 들어간 4마리의 드래곤과 에디우스를 제외한 나머지 드래곤들을 부추긴 것은 레디아나였다. 자존심이 대단한 드래곤 종족의 특성을 교묘하게 건드린 그녀의 말에 또래 드래곤들은 예외없이 설득당했다. 속사정을 보자면 설득에 나선 레디아나가 숫자가 적은 암컷이라는 장점도 작용했다. 노력의 결과는 달콤했다. 지금 레디아나는 전면에 전혀 나서지 않고도 당황하는 고룡들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하비어스는 돌연한 사태에 대하여 문득 떠오른 생각에 레디아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붉은 눈 한 가득 만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실수를 했군.’ 어린 성룡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대부분 드래곤의 회의에서 그들은 거의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드래곤의 전체 회의 자체가 워낙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 이미 전번 회의와는 세대교체가 된 상황이지만...... ‘용언을 터득했다면 폴리모프는 가능하지 않을까?’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 할 수 있는 것처럼 드래곤의 능력을 가졌다면 반대의 일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브래스다. 속성에 따라 각각 다른 성질을 가진 브래스를 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한다고 해서 사용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여하튼 간에 일단 더 이상의 문제가 거론되기 전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나았다. “그렇다면 유스테우스의 아이가 본체로의 현신이 가능하고 브래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드래곤으로서 인정하겠는가?” 하비어스는 복잡한 내심을 숨기고 반론을 했던 젊은용들에게 반문했다. 하비어스의 예측대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지 순간적으로 몇 마리의 당황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중 한 둘은 당황한 나머지 레디아나 쪽을 바라보았고, 하비어스의 예리한 시선을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레디아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비어스는 한 번 더 물었다. “마치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이 대답하더니,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각자의 생각을 말하라니까”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고룡들이 잔뜩 있는 앞에서 서로 전언을 보낼 수도 없었기에 더 이상의 말을 찾지 못한 젊은 드래곤들은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유스테우스님의 아이가 그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면 저도 그 아이를 드래곤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한 명이 말하자, 뒤따라 다른 드래곤들도 동의했다. 레디아나는 질문을 한 당사자가 하비어스라는 것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만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중간쯤에 섞여서 동일한 의사를 밝혔다. “일단, 이 내용을 유스테우스에게 정하고 다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비어스가 정리하듯이 말하자 드래곤 로드는 허락의 뜻을 밝혔다. 하비어스와 유스테우스, 그리고 그 아이들의 관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유스테우스에게 장담을 했건만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복잡해진 상황에 로드도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드래곤 로드라고 해도 드래곤 일족의 대표를 의미할 뿐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드래곤 종족은 성룡이 되면 일단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드래곤들이 지상의 최강자로서 가지는 자부심과 일맥상통했다. 이런 이유로 유스테우스가 다이아나를 데리고 자신의 레어로 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하비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드래곤들과 다이아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그가 레어에 나타난 것을 보고 유스테우스는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어차피 당사자가 다이아나였으므로 하비어스는 일족 사이에 논의된 사실을 털어놓았다. “본체로 현신에 브래스라......” 다이아나가 각성한 이후 당연히 드래곤으로서 인정을 받을 줄 알았던 유스테우스에게는 의외의 복병이었다. 다이아나의 신체 특징조차 확실히 알 수 없었던 유스테우스가 이러한 일이 가능한지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이아나도 드래곤으로 현신한다는 말에 입이 벌어졌다. 실제로 그녀는 현신한 드래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 보았는데, 폴리모프를 역으로 사용하면 현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네.” “그도 그렇군.” “문제는 브래스인데, 그건 일단 현신한 후에 시험해 봐야 할 것 같구. 일단, 폴리모프를 응용하는 방법부터 연습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네.” 두 드래곤의 대화를 들으면서 다이아나는 머릿속으로 드래곤으로 현신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물론 아빠 모습이야 멋있긴 했지만......’ 비늘이 달린 드래곤의 모습이라고는 해도 일반 파충류나 양서류를 볼 때 느껴지는 듯한 징그러운 감은 없었다. 하지만, 수 미터의 덩치에 날개, 비늘을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다이아나는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여성의 섬세한 마음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던 두 드래곤은 완전히 공부하는 자세로 이런 저런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자, 일단은 본체로 현신한 모습을 보여줄테니 그걸 보고 너도 현신한 모습을 그려보도록 해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궁리를 거듭하던 두 드래곤은 일단 다이아나가 가지고 있는 용언의 능력으로 되던 안 되던 한 번 시도해 보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있었다. 둘은 다짜고짜 다이아나를 데리고 레어 앞의 공터로 나갔다. 그리고는 다이아나가 어떤 말도 하기 전에 유스테우스가 현신해버렸다. 빛에 감싸이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엄청난 크기가 되어버린 유스테우스는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다이아나는 약간 허탈한 기분으로 눈 앞을 바라보았다. 코 앞에서 현신을 한 탓에 다이아나는 기껏해야 큰 기둥같은 유스테우스의 다리 한 쪽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폴리모프를 풀지 않고 있던 하비어스도 한심한 표정으로 유스테우스의 발톱을 바라보았다. “이제 잘 보고 너도 이런 모습으로 변해 보는 거야” 웅웅거리는 소리로 유스테우스가 말했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은빛의 비늘뿐인 다이아나에게는 요원하다 하겠다. 하비어스가 무어라 하기 전에 다이아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배운지 얼마 안되는 용언을 사용하여 유스테우스와 거리를 두고 떠올랐다. 돌연한 다이아나의 행동에 유스테우스가 무어라 하려던 순간 하비어스가 유스테우스의 코 앞으로 날아 올랐다. “저 아이 시선으로는 자네의 발 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데 뭘 잘 보란 거야?” 자신도 동의해놓고 뒤늦게 안 주제에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 붙이자 유스테우스도 다이아나의 돌연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신중하게 유스테우스의 본체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폴리모프” 다이아나의 몸이 빛으로 휘감기자 두 고룡을 각각 드래곤과 인간의 눈을 크게 뜨고 기대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휘이잉 썰렁한 바람이 한차례 레어 안을 훑고 지나친 듯 하다. “이, 이런!” “맙소사!” “으응?” 둘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다이아나는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리면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분명 비슷한 모습이 된 듯은 한데...... ‘시선의 높이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 오히려 더 낮아진 듯도 하고......’ 다이아나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는 드래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문제는 “인간과 같은 크기잖아?” 하비어스가 자신의 크기와 다이아나의 크기를 재어 보기라도 하듯 다이아나 옆에 내려서면서 말했다. “그, 그러게. 저게 가능한가?” 인간만한 드래곤은 처음 보는 일이어서 당황한 유스테우스는 실제 자신도 그것이 가능한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나도 안 해보아서 모르겠네만......” 당황하긴 하비어스도 마찬가지. 드래곤의 모습으로 현신하되 크기가 인간과 같다는 것은 처음 본 탓이다. 알에서 막 깨어난 드래곤이라고 해도 적어도 인간의 몇 배의 크기는 되어야 정상이다. “진짜 아름답긴 하지만......” “그렇군!” 마치 머리카락을 그대로 비늘로 옮겨놓은 듯, 당연히 실버드래곤으로 나타날 줄 알았던 다이아나의 몸체는 은빛과 금빛이 잘 조합된 모습이었다. 은색을 주로하는 몸체에 군데군데 금빛 가루를 뿌린 듯한 모습은 그 어떤 드래곤보다 아름다웠다. “다이아나, 혹시 크기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은 것은 아니니?” 혼자만 큰 크기로 있기 불편했는지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면서 유스테우스가 혹시나 하고 물었다 . “아뇨. 아빠와 비슷한 크기를 상상한걸요?” “허, 이것 참!” 은빛과 금빛의 두 미남자는 자신들과 엇비슷한 크기의 드래곤을 쳐다보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하는데까지 해 보자구. 다이아나 브래스를 뿜어보려무나. 일단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 후에......” 폴리모프한 모습이 완벽한 것이라면 브래스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하비어스가 다이아나에게 상세하게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으음. 공기를 끌어올린 다음에 마나랑 섞고 몸안긔 기운을 한바퀴 돌려서 심장에서부터.......’ “푸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빈 공터를 향해 브래스로 추정되는 것을 내뿜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의 브래스를 바라보던 두 드래곤은 더더욱 황당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이럴수가!” “으윽!” “어머나!” 약속이나 한 듯이 다이아나가 뿜어낸 브래스(?)의 위력을 감상하던 셋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러댔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세 존재는 이 사태에 대해 다시 차근히 의논하기로 하고 레어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건 세레스님의 성력 탓인 것 같네” “하긴, 그렇게 말하자면 다이아나는 신족의 일부분일 수도 있지. 하지만, 세레스의 기운이 이런 식으로 발현된다는 것은 나도 뜻밖이야.” “으음. 그래도 밀어붙여 볼까?” “조.건.에 위배되는 건 아니라고 말이지?” “그렇지.” 이 기막힌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또 있었다. 물론, 최고신들이다. 이번만큼은 세레스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다이아나의 현신 모습과 그 후의 브래스를 본 신들은 모두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도대체 드래곤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것도 마땅찮은데, 저건......” 포세이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한 소리를 하자 드물에 이번엔 헤파이토스와 의견이 갈렸다. 헤파이토스는 다이아나의 현신 모습을 보더니 황홀한 얼굴로 멍하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너무 아름답잖아. 아, 영감을 가져오는 저 모습이라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페르세포네가 그 다음 이어지는 브래스 실험에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를 꽥 질러댔다. “저, 혹시 세레스 언니는 짐작을 하고 계셨나요?” 아프로디테이아가 질문을 하자 신들은 모두 세레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세레스는 자신의 반려의 종족의 모습의 다이아나는 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저도 잘은 모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원래 브래스란 것이 자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다이아나의 브래스는 파괴의 속성을 가질 리 없겠지요. 아시다시피 속성 면에서는 저 애는 내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니까요” “하지만, 저거라면 그냥도 있는 능력이잖아요? 거기다가 브래스는 드래곤의 가장 강력한 공격수단이라구요. 내가 뭐 때문에 그토록 욕을 먹으면서까지 저 애를 마계에 잡아 둔 건데......” 결국 페르세포네가 못참고 나섰지만 ‘마계에 잡아두었다’는 부분에서 몇몇 신들의 엄청난 눈총을 받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각성을 시키려는 의도가 뒤늦게 드러나긴 했지만, 실제로 억지로 각성을 시키는 것은 각성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던 몇몇 신들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다이아나가 각성을 함으로서 유스테우스는 드래곤으로서의 자식을 되찾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지만, 신들의 입장으로 볼 때는 오히려 인간인 편이 더 나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저래서야 드래곤들이 인정할 리가 없지 않나요?” 아프로디테이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페르세포네가 되받았다. “드래곤따위에게 인정받던 말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원한 건 능력의 각성이었지, 저 애가 왜 드래곤이야? 그렇게 말하자면 신족이 되어야 하는 거라구!” “이 일의 발단이 된 사람이 누군데 왜 저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죠?” 이번만큼은 아프로디테이아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지난 번의 마계사건 덕분에 다이아나에 대한 부분만큼은 페르세포네가 많은 원망을 받고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만들 두세요. 다이아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입니다. 겨우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인데, 우리마저도 저 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요.” 아테나이가 으르렁거리는 두 여신을 진정시키면서 핵심을 찌르는 소리를 했다. “이렇든 저렇든 드래곤들이 저 아이를 인정하고 안하고 하는 일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포세이스가 처음부터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다. 신과 드래곤의 위치를 놓고 볼 때, 인간의 모습으로 있다고는 하지만, 내려다보는 위치의 존재들이 감히 자신의 조카를 인정하느니 마느니 하다니. 이 점에 있어서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같았기에 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드래곤들은 지상위의 최강자로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이아나는 부모의 존재에 앞서서 스스로는 인간임이 분명하구요. 제 딸이라고 해서 저 아이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가장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이는 세레스였다. 그녀는 유스테우스와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드래곤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경험했다.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그렇겠지만, 언니도 보다시피 저건 드래곤들 전체의 의사 표시가 아니라 그 레디아나라는 애의 음모잖아요.” “그것도 다이아나가 겪어야 할 일의 일부분이에요. 물론 유스야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아직 나타난 것도 아니구요. 일단 지켜보는 것이 좋겠지요.” 세레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다른 신들도 별 도리가 없었다. 물론 구석에서 딴 소리를 하는 특이한 신이 하나 있었는데...... “일단, 다이아나 스스로는 레디아나에게 해를 끼친 것이 없고. 복수의 저울은 다이아나 쪽으로 기우는데 레디아나는 또 다시 다이아나에게 해를 끼쳤다 이거지. 그럼 이게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야?” 바로 복수와 명예의 속성을 가진 헤르메스이다. 각성 두 고룡은 일단 세 가지 조건에 대하여 나름대로 만족시킨다고 자부하는 듯 했다. 하지만, 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한 다이아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 크기만한 드래곤을 누가 드래곤으로 봐 줄 것인가? 그리고, 처음으로 가져 보는 드래곤이라는 육체에 대한 이질감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고, 새로 생긴 ‘날개’라는 부분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폴리모프” 한참 나름대로의 궁리에 빠져있던 두 고룡은 다이아나가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자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빠, 하비어스 아저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리에요. 제가 드래곤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용언의 힘일 뿐이라구요.” “그게 무슨 소리냐? 용언이야말로 드래곤의 진정한 힘이야. 더군다나 너는 내 딸이 아니니?” “제가 엄마의 딸이라고 해서 신이 아니듯이 아빠의 딸이라고 해서 드래곤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이아나......”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시작했지만,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버지의 말을 막았다. “제가 드래곤이 아니라고 해서 아빠가 절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 “처음부터 드래곤으로서 저를 낳으실 수도 있었지요?” “그거야......” 여신이 드래곤으로 현신한 적은 없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최고신쯤 되면 어떤 존재로든 나타날 수 있다. 드래곤이 가능한 일을 신이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태어나는 아이를 어떤 존재로 할 것인지에 대하여 의논한 결과 인간을 정한 이유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겠죠? 그만큼 제가 많은 길을 열어 주셨잖아요. 음, 저도 아빠의 종족분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긴 해요. 하지만, 그건 드래곤으로서가 아니라, 아빠의 진정한 딸로서 인정받고 싶은 거에요.” 결국 유스테우스는 다이아나의 의견을 꺾지 못했다. 셋은 다른 방향으로 의견을 조정했고, 그 결과를 가지고 드래곤들을 만나게 되었다. 에디우스도 이때쯤 드래곤들의 회의에 대하여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였다. 다만, 상단의 일로 약속을 미리 해 놓은 터라, 상담이 끝나자마자 뒤늦게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회의는 일차적으로 종결된 상태였고, 그 결과만 전해 들었다. ‘에디’ 1차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던 유스테우스와 에디우스가 참여한 2차회의. 한 구석에서 에디우스의 모습을 본 레디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에 빠져 혼미해진 듯 하던 눈동자가 그 옆으로 옮겨간 순간 증오의 빛을 발한다. “자, 2차 회의를 시작합니다. 안건은 전과 마찬가지로 유스테우스의 아이인 다이아나를 드래곤으로서 인정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한 드래곤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아시다시피 3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가장 넓은 레어라고 해도 모든 드래곤이 본체로 참여할 크기의 레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드래곤들은 각기 인간, 엘프, 드워프 등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였다. 물론 드워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오직 제프, 즉 제피어스 하나 뿐이었지만. “잠시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래곤 로드의 정리하는 듯한 발언이 끝나자마자 유스테우스가 발언권을 신청했다. 결국 이번 모임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드래곤인 당사자였으므로 그의 발언 신청은 바로 받아들여졌다. 유스테우스는 뒤쪽에 일행을 두고 드래곤들이 모여있는 중앙으로 나섰다. “모두 아다시피 나는 실버 드래곤의 고룡 유스테우스이며, 이번에 인정을 받기 위해 참석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내 딸 다이아나는 유희중에 낳은 것이 아니며, 세레스여신과의 합의 하에 진정한 혈육으로서 낳은 하나뿐인 존재입니다. 허나, 제 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며,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처음에 드래곤으로서 딸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 요구를 철회하고 다른 요구를 하고자 합니다.” 유스테우스는 효과를 생각하여 이쯤에서 말을 끊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로드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것은 젊은 드래곤들의 요구사항을 저 아이가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드래곤 로드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던 몇몇 드래곤의 표정이 무너졌다. 유스테우스의 발언은 다이아나가 현신과 브래스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인 차선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유스테우스는 지금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저 또한 제 딸이 현신이 가능한지조차 몰랐습니다. 이번에 시켜보고서야 알았지요. 제 딸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현신이 가능하며, 브래스도 가지고 있습니다.” 드래곤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는 어린 드래곤들로부터 고룡에 이르기까지 모여있는 자리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 현상이었다. 유스테우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장내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린 후 말을 이었다. “일단 여러분께 제 딸을 소개합니다. 다이아나.” 유스테우스의 부름을 받고 에디우스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다이아나가 아버지 옆으로 나섰다. 이미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힐끔거리던 시선이 한 데 모여졌다. “처음뵙겠습니다. 다이아나입니다.” 격식을 중요시 하지 않는 드래곤들의 특징에 맞추어 다이아나는 모인 드래곤들에게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이 정도의 드래곤들 사이에서 기가 죽지 않는 것만으로 그녀는 나름의 존재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네 본체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해라.” 유스테우스가 짜여진 각본에 의해 말하자 다이아나는 지체없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화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드래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에디우스 또한 아버지에게 언질을 받았지만 실제로 나타난 모습에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호오~!” 조용해진 장내에 크게 감탄사가 울려퍼졌다. 돌아보던 몇몇은 그 감탄사의 주인공이 고룡 중에서도 꽤 나이가 있는 편인 제피어스임을 알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작긴 하지만, 완벽한 드래곤의 모습이군. 헌데, 속성이......” 드래곤의 비늘색은 속성을 표현한다. 실버도 골드도 아닌 다이아나의 모습은 드래곤들의 미적인 감각을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폴리모프를 하여 타 종족이 될 경우엔 최고의 아름다움을 구가할 수 있는 드래곤들이다. 하지만, 드래곤 자체의 모습만큼은 어쩔 수 없었기에 본체의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더더욱 예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은빛과 금빛 비늘에 파란 눈이라는 전에 없던 모습의 드래곤을 대하고 있었다. “일단, 제 딸의 이 모습이 드래곤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합니다. 이미 제가 체크를 해 보았고,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고룡 몇 마리가 나서서 용언으로 존재 확인을 하는 절차가 있었다. 다이아나의 모습이 일종의 변신이 아닌 진정한 드래곤의 모습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완벽한 드래곤의 기운을 풍겨내는 이 작은 드래곤의 존재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아이의 브래스는 어떤 속성이지?” 제피우스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눈동자의 색과 비늘의 색으로 도저히 속성을 짐작할 수 없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다른 드래곤들도 호기심에 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브래스를 여기서 시험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린 드래곤의 수장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다이아나의 브래스의 속성상 위험하다는 말은 맞지 않았지만, 레어 안에서는 그 효과를 보여줄 수 없던 차라 유스테우스는 장소를 옮기자는 제안에 동의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레디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드래곤의 모습을 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본체로의 현신이라니. ‘하지만, 본체가 가지는 육체적인 능력은 뒤떨어질 수 밖에 없어. 그걸 핑계로 해야 하는데......’ 문제는 자신이 나서기는 껄끄럽다는 것이다. 레디아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젊은 드래곤들은 이미 다이아나의 모습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고룡들의 눈을 피해, 특히 하비어스나 에디우스의 눈을 피해 의사전달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다시 숲 속의 공터에 모인 드래곤들은 브래스를 실험하기 위해 한 쪽 방향을 튀워놓았다. 반 원형태로 둘러싼 여러 종족의 모습을 한 드래곤들 가운데에는 홀로 드래곤의 모습을 한 다이아나가 서게 되었다. “그럼.” 유스테우스가 신호를 보내자 다이아나는 공터의 빈 곳을 향해 브래스를 내뿜었다. “이런!” “저럴 수가!” “말도 안돼!” “저게 브래스란 말야?” 여기 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다이아나는 자신의 할일을 다 했다는 듯 원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했다. 드래곤 로드 마저도 이 현상에 기가 막혀서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 이게...... 유스테우스여, 자네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다이아나가 브래스를 뿜어낸 곳에서는 시들어가던 풀이나 꽃들 그리고 씨앗들조차 모두 생명의 기운을 받은 듯 자라나 있었다. 오가는 생명체에게 밟혀 뭉그러졌던 식물들이 마치 새벽녘의 이슬이라도 맞은 듯 푸르름을 한껏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숲을 사랑하는 그린 드래곤들은 당장에라도 다이아나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유스테우스는 경악에 가득한 상황을 잠시 즐기듯 여유있게 웃고 있다가 로드의 질문에 답했다. “제 딸의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브래스는 속성을 의미하는 것. 제 딸은 신성력을 근원 속성으로 합니다. 그것도 자애와 치료의 속성이죠.” 자랑스러운 듯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유스테우스의 모습에 술렁거림이 늘어났다. “신성 드래곤이라......” 제피우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드래곤들 사이에 크게 퍼져나갔다. ‘신성 드래곤’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날 탄생되었다. 일단의 술렁임이 진정되고 모임의 본론이 다시 진행되었다. 유스테우스는 모여있던 드래곤들에게 자신의 딸이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특이한 존재임을 선포했다. 그는 딸이 인간임을 고집함에도 실제로 드래곤으로서 모자람이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그 후에 딸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녀를 ‘드래곤의 혈육’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임에도 드래곤과 동일한 존귀성을 요구해 온 것이다. 레디아나는 정신이 없었다. 이 일에 반대를 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대를 한다고 해도 멍청한 젊은 드래곤들이 넋을 잃은 듯한 상황이어서 직접 나서야 할 판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반대를 했다가는 유스테우스나 하비어스, 에디우스 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 자신이 없었다. 레디아나가 망설이는 사이 상황을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유스테우스와 각 종족의 수장들 그리고 드래곤 로드가 일단 모여 의견을 조율했다. 그리고 각 종족별로 모여서 다시 한 번 의견을 수렴했다. 이 과정에서 레디아나가 몇 가지 딴지를 걸려고 했지만, 논지가 서지 않아 실패했다. 사실 수장들의 의견으로는 다이아나를 처음 요구대로 드래곤으로 바로 인정해도 좋다는 쪽이었다. 각 종족별의 모임에서도 이전과 같은 반대는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상하기 힘든 아름다운 드래곤의 모습에 마음이 빼앗긴 젊은 드래곤들이 언제 반대했냐는 듯한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레디아나는 속이 탔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자, 그럼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으므로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스테우스의 아이인 다이아나를 인간이면서도 우리 드래곤과 차별 없이 대할 것을 선언합니다. 다이아나는 이후로 드래곤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다이아나는 각 종족의 수장을 소개받았고 다른 드래곤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유스테우스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딸을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연신 띄우고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녹색의 엘프 모습을 한 드래곤이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바로 그린 드래곤의 수장이었는데, 다이아나가 브래스를 선 보인 이후부터 한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말씀을 낮추어 주세요. 무슨 부탁이신데요?” “말을 낮추게나 나의 딸이니 자네에게도 조카뻘이 아닌가?” 유스테우스도 덩달아 웃으면서 부추겼다. 사실 그는 이 녹색의 엘프가 부탁할 것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흐뭇해했다. “그, 그러지. 다이아나, 그 나중에 내 레어 앞에 와서 그 브래스 몇 번만 써 주지 않으련?” “네? 네. 그러죠.” 이유는 몰랐지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다이아나는 쾌히 승낙했다. 다이아나가 긍정의 대답을 하자 그린 드래곤의 수장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의 종족들 사이로 달려갔다. “좀 귀찮게 될 지도 모르겠다. 다이아나.” “네? 왜요 아빠?” “저길 좀 보렴.” 달려간 녹색 머리 엘프 주위에는 유달리 엘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들이 많았다. 녹색 천지의 그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커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대부분이 다이아나 주위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인사를 하기가 바쁘게 너도나도 똑같은 부탁을 해 왔다. 다이아나는 거절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다 받아주기도 힘든 상황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 다들 진정하고. 다이아나도 자신의 생활이 있는데, 이렇게 우르르 모여들면 문제가 있지. 자네들 의사는 알았으니 내가 시간 날 때마다 한번씩 찾아가 보도록 조정을 하겠네” 마치 유명 스타의 매니저들마냥 한껏 뻗대며 하는 대답에도 그린 드래곤들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축하해 다이아나.” “고마워 에디.” “흠흠. 나는 보이지도 않니?” “제프 아저씨!” 다이아나는 제피어스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는 체를 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이후엔 몰려온 드래곤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고. 제피어스는 여전히 드워프식의 툴툴거리는 큰 목소리로 걸걸하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다이아나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제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제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키 작은 드워프 모습을 한 제프는 자신보다 훨씬 큰 키의 다이아나가 안겨들자 흐뭇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다독였다. 각성 사실 드래곤의 혈육이라고 해봐야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스테우스는 자신의 딸이 그러한 취급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 외에 자식 자랑에 대한 욕구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드래곤들은 성룡이 된 후에는 개체별로 독립된 생활을 한다. 헤츨링을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들 사이에는 불문율같은 것이 있었다. 같은 드래곤에게 폭력적인 훈계(?)를 내릴지언정 그 생명을 빼앗지는 않는다는 규칙이다. 이는 드래곤들의 힘의 질서 자체가 나이와 속성에 지배받는 성향이 강해서 저절로 생긴 셈이었다. 이 또한 또래 드래곤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강력한 힘을 지닌 나이 많은 드래곤들이 어린 드래곤들을 죽이는 것을 경계하여 세워진 불문율이므로. 하지만,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또래의 드래곤끼리 싸워서 목숨까지 잃은 경우는 드래곤의 오랜 역사상 딱 세 번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1000살대의 젊은 드래곤들이었고,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드래곤들에게 ‘전해졌다’는 말이 맞을만큼 오래된 일이었다. 즉, 실제로 드래곤들 사이의 다툼으로 인한 살해는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유스테우스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번 일을 계획했다. 용언의 능력을 가진 다이아나에게 위해를 끼칠 정도의 능력은 지상계에서는 드래곤이 유일하다는 판단 아래. 어지간한 일로는 꼼짝도 않는 드래곤들도 흥미진진했던 일대 사건은 이렇게 끝나는 듯 했다. 제피어스만이 다이아나 일행과 오랜만의 만남을 위해 동행했고, 각각의 드래곤들은 모두 자신이 생활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사실 제피어스가 다이아나를 따라온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결국 유스테우스의 눈총에도 다이아나와의 친분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한 그는 희희낙락하면서 부리나케 사라졌다. “에디, 갔던 일은 잘 된거야?” “응. 어차피 상단의 후계자라는 사람과 인사한 정도니까. 그 간의 거래내용에 대해 변동이 없다는 부분만 확인하는 선에서 끝났어.” 대답을 하면서도 에디우스는 새로 나타난 상단의 후계자와의 만남을 생각하고 살짝 얼굴 표정을 굳혔다. 펜하임 상단의 새로운 후계자는 여성이었다. 상단의 후계자가 여성인 것이야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미심쩍은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에디우스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가 빨리 돌아가지 못하도록 이런 저런 접대들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베일을 뒤집어 쓰고 신비한 척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얼른 돌아가고 싶은 발걸음을 자꾸만 막고 있으니 에디우스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던 것이다. 에디우스는 다이아나의 앞임을 감안하여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해 보였다. 둘의 인사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유스테우스와 하비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참견을 해왔기에 다이아나는 잠시 굳어진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이아나, 그걸 아깝게...... 아무리 연장자라지만,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어. 어떻게 감히......” 유스테우스가 못내 화가 난다는 듯 씩씩거리자 하비어스도 동감하는 표정으로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네가 그 분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그런 부탁까지 들어줄 필요가 있었겠느냐?” 다이아나는 별 거 아닌 일이라 생각했던 것에 유독 예민한 두 고룡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머리카락을 넘겨 준 일이 있었던 그녀로서는 제피어스의 부탁에 별로 당황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승낙해버렸다. “음. 내 생각에도 제피어스님 부탁은 좀......” 에디우스까지 맞장구를 치자 다이아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깟 비늘 하나가 뭐 어때서요?” 제피어스가 다이아나를 쫓아온 이유는 바로 비늘을 얻기 위함이었다. 더하여 그는 보란 듯이 다이아나의 현신한 모습을 영상구에 담아갔다. 그로서는 창작욕을 돋구는 그 모습이 무엇보다 탐났던 것이다. 세 드래곤에게 비친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제피어스는 갑자기 다이아나에게 친한 척을 하더니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다이아나에게 무언가 부탁을 했다. 다이아나가 미소를 짓기에 별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돌연 그녀가 드래곤으로 모습을 바꾸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피어스는 그런 세 드래곤이 멍해 있는 사이에 영상구에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거기까지야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현신한 그녀의 모습을 잘 살피는 듯하던 제피어스가 난데없이 마나를 돋군 손으로 다이아나의 비늘 하나를 ‘톡’ 뽑아들고 소중히 싸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후다닥 가버린 일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다. 딸의 비늘을 강탈당한 느낌을 받은 유스테우스는 뒤늦게야 열불이 뻗쳤다. 이 점은 다른 두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늘이야 얼마든지 있고, 그 작은 걸로 무기도 못 만들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일단 비늘의 쓰임새를 차치하고 다이아나의 몸에 손을 댄 것 자체가 기분 나쁨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더하여 유스테우스는 한 가지 지적을 해왔다. “너의 브래스가 다른 드래곤들의 브래스와 전혀 다르듯이 네 비늘에도 의외의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잖니?” 사실 이 부분은 그도 생각지 못했던 점이다. 단지 제피어스가 가져가 다이아나의 비늘이 아깝다보니 그 이유를 점점 더 부풀려 상상하다 떠오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일리 있는 말이어서 두 골드 드래곤 부자는 휙휙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끄덕였다. “아빠도 참. 제피어스님께 좋은 걸 드리게 되었으면 잘 된 거죠. 저한테 얼마나 잘 해 주셨는데요. 전에 머리카락을 좀 드렸다고 이 팔찌도 주셨는걸요.” 유스테우스는 다이아나가 머리카락을 끊어 주던 광경이 생각나 이를 갈았다. 몰래 보고 있는 처지여서 달려가 따지지도 못했던 과거가 기억나니 한층 화가 치밀었다. 며칠 후 멀쩡하게 다시 자란 머리카락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에디우스의 경우는 안색이 다 변할 지경이었다. 다이아나의 머리카락을 잘라가다니. 이 자리에 제피어스가 있었다면 엄청난 능력의 차이도 상관없이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데 세 드래곤만 조금 열을 내다가 시큰둥하게 지나간 작은 소란이었다. 한편 새로 등장한 펜하임 상단의 후계자에 대해 가장 예민했던 곳은 시우스 황성이었다. 에디우스라는 알트상단의 후계자게 대한 관심이 칼라임에서 지대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이다. 신전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전후의 피해 복구는 어느 정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꽤 오랜 기간 내부의 문제로 권력다툼을 해 온 시우스 제국이 정상화되는 것은 요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 반갑소. 그대가 펜하임 상단의 새로운 후계로군. 모쪼록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맺길 바라오. 헌데 그 베일은?” 일반인이라면 아니 고위귀족이라고 해도 감히 황제 앞에서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인임에 분명한 펜하임 상단의 후계자라는 인물은 황제 앞의 자리에서도 베일을 걷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펜하임 상단의 중요성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대전에 들기 전에 제지를 받았을 것이다. 코 바로 아래까지 베일로 가린 여인은 미소를 짓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황제의 말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얼굴을 가린 것은 제 부모님의 뜻입니다. 평생 이렇게 해 오다 보니 그만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해도 한층 궁금증을 유발하는 발언이다. 이미 드러난 몸매로 보아 미모를 기대케 하기에 충분한 모습에 황제도 남자인지라 초조함을 살짝 드러냈다. “짐이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면 실례가 되겠소?” 여인의 살짝 올라갔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미리 예를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옵소서” 살짝 무릎을 구부리고 예를 표한 여인은 상체를 숙인 상태로 베일을 걷어냈다. 그녀가 쓴 베일은 머리에서 시작하여 얼굴 상단을 감싼 모양이었는데, 베일을 걷어내자 풍성한 머릿결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선홍색의 불길같은 머리카락은 마치 타고 있는 불꽃같았으며, 그것만으로도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여인은 지극히 계산된 동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올리면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오오! 그대의 부모님은 아마도 그대의 미모에 의해 연모의 정에 빠질 많은 남자들을 걱정했나 보오!” 황제의 칭찬에 여인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약간의 수줍음을 과장되지 않게 전달하고 있어 본래의 요염함에 청순함을 더하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감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소. 내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성녀나 뮤리엘 황녀의 아름다움이 결코 그대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오!” 사실 냉정한 눈으로 보자면 여인의 아름다움은 뮤리엘보다 약간 못했고, 다이아나에는 미칠바 못되었다. 하지만, 황제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는 귀족은 하나도 없었다. 장내의 귀족들 또한 몽롱한 표정으로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있었다. 평상시와 다른 남편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황후였다. 황제의 동생으로서 불안한 위치에서 그들 부부는 돈독한 애정을 쌓아왔다. 하투아의 침략에 맞서 중앙연합국의 힘을 빌어 황제의 자리에 앉기까지 이들 부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실과 맞선 동료이자 연인이었다. 사치와 여탐을 모르던 남편의 반응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름다운 여인에 대하여 칭찬하고 감탄하는 선에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눈은 그 여인에게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해 보았느냐?” 겉보기엔 정숙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으로 보여도 황후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황제의 동생, 그리고 황제의 숙부로서 남편의 생사가 하루 아침에 갈릴 수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녀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황후가 되어 내조자의 위치를 충실히 하면서 전면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자제해 왔다. 하지만, 대귀족의 딸로 태어나 앞날이 불확실한 황자와 혼인을 한 그녀의 직관은 지금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페리안느양은 원래 상단의 대표였던 프레디안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전 상단의 대표인 클로니에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양녀로 입적했다면서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불과 석 달 전, 그리고 바로 상단의 대표로 취임했습니다.” “그 전에는?” “현재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녀와 클로니에가 만났다는 지역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녀의 존재를 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의 정보도 암담했다. 펜하임 상단과 같은 대규모 상단에서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그것도 여성이 후계가 되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반대나 분란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상단의 주요 인사들은 오히려 예전 대표인 클로니에보다 그녀에게 더욱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있어.’ 불길한 느낌은 이제 조금씩의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황후는 정보를 제공한 사람을 물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에디우스와 함께 영지로 돌아간 다이아나는 평소처럼 뛰쳐나온 아이들을 보고 멍한 표정이 되었다. 에디우스조차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두 어른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평소처럼 다이아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안느의 만류에 제지당했다. “일단 들어가서 씻고 와야지.” 부모가 있는 아이던 없는 아이던 영주의 저택 내에서 안느의 위치는 엄마를 대신했다. 남자 어른들의 경우 아이들의 애교에 넘어가 오히려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물론 그 대표적인 경우는 프라이톤 경이다. - 베르, 무슨 일 있었니? 다이아나는 뒤돌아 가는 베르히안에게 전음으로 물었으나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 응? 별 일 없었어. 그냥 논 것 뿐이야. 흙투성이 아이들 가운데에는 보라색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과 손에 진흙을 잔뜩 묻힌 베르히안도 끼어 있었다. 마치 진흙밭에서 구른듯한 다른 아이들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 없었지만, 천상 애가 되어버린 듯한 그 모습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푸하하하! 아하하하하하! 흐흐흐!” 겨우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거실로 들어선 에디우스는 소리만 새어나가지 않게 조치하고는 포복절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이아나도 덩달아 웃기는 했지만, 에디우스는 그야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댔다. ‘좋은 일이야!’ 다이아나는 베르히안이 아이들과 진심으로 어울리기 시작했음에 기뻐했다. 처음의 베르히안은 상당히 성숙한 모습의 수줍음 많은 소년을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본 베르히안은 장난기 넘쳐나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 다행히 웃음을 멈춘 후에 디안이 먼저 뛰어들어오자 그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랐다. 디안은 그 사이 베르히안과 많이 친해진 듯 다이아나쪽으로 뛰어오면서도 베르히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디안을 품에 안은 다이아나의 앞 쪽에 베르히안이 멀뚱거리면서 서 있는 셈이 되어버렸다. “응. 우리 딸! 잘 지냈니?” “응. 엄마.” “베르오빠랑 재미있게 놀았어?” “응. 엄마 디안은 이담에 커서 베르오빠 신부가 될 거야.” “뭐?” “윽!” 갑작스러운 디안의 말에 다이아나는 살짝 되물었고 앞에선 베르히안이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이야 어찌되었던 디안은 엄마에게 말하려고 그간 참았던 말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베르오빠랑 결혼할거야. 이담에 디안이 엄마만큼 커지면 그렇게 해도 되지?” “나중에 디안이 엄마만큼 커지면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꾸나. 엄마는 디안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우리 디안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좋아요.” “응!” 디안은 다이아나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베르히안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뒤로 아이들의 놀리는 소리가 한동안 맴돌았다. “뮤리엘 이모는 어디 가셨니?” 다이아나는 자신을 맞이한 사람들 중에 뮤리엘이 없었음을 깨닫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뮤리엘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오셨어요?” “뮤리엘, 그 모습이......” “아하! 이건......” 베르히안 뿐만이 아니라 이번에는 뮤리엘과 솔베노마저도 진흙투성이 모습으로 들어서자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입을 딱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공지] 출판 및 기타.... 안녕하세요? 알테입니다. 아, 연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거기 사시미는 치워주세요.. ㅠ.ㅠ) 일단, 좋은 일(?) 부터... 여신의 아이 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내일 사이 배포될 것이구요. 오늘은 조금 씁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 제 글이 모모 까페에 텍스트 파일로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주변 작가들도 다 그렇더군요. 뭐, 그것도 좋습니다만...... 3권을 출간하면서 출판부수가 화악 줄었습니다. ^^;;; 덕분에 알테는 조기종결을 생각중입니다. 첫 작품이니만큼 허술하게 종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6,7권에서의 완결을 생각 중인데, 현재와 같은 전개로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4,5권의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하여, 현재 연재분은 스톱 상태입니다. 연재대로 나가면 적어도 8권은 나가야 할 상태인데다가 종결 전에 끝났어야 할 복선이 현재 연재 분량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고심중입니다만... 4권부터는 연재와는 좀 다르게 나가야 할 듯합니다 결국 글을 새로 써야한다는 것인데, 당연히 기본 수정보다 배의 시간 이상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스토리는 잠시 중단됩니다. 이쯤해서...... 저도 대여점과 늘 사이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 책을 사서 본다면 하루 5-6권 독파가 예사인 저로서는 재정상태가 버텨날 리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자고 쓰는 글입니다. 어떤 경로로든 많은 사람이 읽고 즐거워한다면 그것 또한 글쓴이로서의 기쁨일 것입니다. 하지만, 불펌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출간과 상관없이 온라인 연재만을 고집하시면서 책을 보시지 않는 결과는 조기 종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답니다. 물론 이 또한 제 역량의 부족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리플을 달아주시면서, 메시지로, 메모로 격려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만은 변함 없답니다. 4권의 라인이 잡히는대로 연재와 독자적으로 갈 것인지 연계할 것인지에 대해 다음 편 부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 알테 드림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펜하임 상단의 후계자 "언니, 사실은요......" "저, 먼저 씻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무엇이 급한지 진흙은 온 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로 뮤리엘이 입을 열자 솔베노가 끼어들었다. 뮤리엘이 미적거리자, 솔베노는 한숨을 내쉬고는 정령들을 불러내어 자신과 뮤리엘을 깨끗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뮤리엘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언니, 진흙으로 만든 것이 구우면 단단해지더라구요. 이번에 새로 알았는데, 정말 대단하지 뭐에요? 높은 온도로 구워내면 불 위에 올려도 깨어지지 않아요." "아아, 그런데 그걸 어떻게?" "이번에 '창조의 손'님 중에서 한 분이 개발하셨어요. 덕분에 요 며칠간 아이들과 그걸 실험하느라 무척 재미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온 후로 제대로 된 '도자기'를 본 일이 없었다. 서민들의 그릇은 대부분 목기로 만들어졌고, 불 위에 올리는 종류만이 금속재료를 사용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거 우리 제국에서 한 번 상품화시켜 보면 안될까요? 여기 여건으로는 인력 조달도 힘들고 말이죠." 다이아나는 그 도자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 에디, 도자기는 온도와 유약이 관건이겠지? 오히려 사물의 근본적인 원리에 관해 자신보다 더 능통한 에디우스에게 물어보면서 뮤리엘의 질문에는 함께 생각해보자고 대답했다. 에디우스는 잠시 기억속을 찾아보는 듯 하더니 도자기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하여 아는대로 전해왔다. "뮤리엘이 그토록 좋다고 하니 저도 궁금하네요. 내일은 함께 가서 볼까요?" "지금이 아니구요?" "엘, 다이아나님은 지금 막 오신 듯한데...... 거기에다가 작업장도 이미 정리하고 왔잖아요?" 상당히 흥분한 듯한 뮤리엘을 솔베노가 진정시켰다.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뮤리엘은 솔베노의 말에 잠시 뾰루퉁한 표정을 하더니 금새 평소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헤헤거렸다. "그럼, 내일 아침에 꼭이요!" "그래요. 에디, 너도 가 볼 거지?" "응. 그러지 뭐." 베르히안은 진흙투성이의 모습을 보인 것이 조금 쑥스러웠는지 약간 뒤로 물러서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짐작할 리 없는 디안은 베르히안이 그릇을 잘 만든다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다이아나와 에디우스는 마왕의 분신이 그릇을 만든다고 진흙을 만지는 광경을 동시에 떠올렸다. 다이아나야 점차 지상계에 적응하는 베르히안의 모습에 흐뭇하게 미소지었지만, 에디우스는 조금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베르히안은 무표정을 고수하다가 에디우스의 그러한 시선과 마주치고는 '왜 떫어?' 하는 듯한 거만한 시선으로 맞받았다. "아, 영주님 어서 오십시오!" 도자기를 만든다는 작업장 안으로 들어서자 작업장을 책임지는 듯한 신관 한 명이 달려왔다. 헤파이토스의 '창조의 손'들의 신관복은 그 자체가 거의 작업복으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특이한 복장의 남자가 신관임은 한 눈에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인사를 한 후에 작업장 곳곳을 돌아보면서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아이들은 저쪽에서만 놀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험단계다 보니 기술자가 없구요." 신관은 진행상황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얇게 했을 때의 두께였다. 아이들이 장난치듯이 두껍게 만든 것들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그릇 모양을 내기 위해 두께를 얇게 하면 십중팔구 굽는 중에 깨진다는 것이다. '물레의 원리를 가르쳐줘야 하나?' 물레를 다루는 것도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수작업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지식의 전수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는 다이아나에게 신관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이걸 개발했습니다." "아, 이건!" 빙글빙글 돌아가는 대 위에 점토가 얹혀 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듯 자꾸만 허물어지는 모양을 바로잡기 위해 청년 몇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처음엔 둥근 모양을 쉽게 만들기 위해 생각해냈습니다. 하지만, 이걸 이용하면 고른 두께로 그릇을 만들 수 있겠더군요. 지금은 손재주가 있는 마을 청년들 몇 명이 사용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대단하군요!" 다이아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이미 창조의 손들 사이에서 이미 헤파이토스 신의 '사자'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신관은 그런 그녀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하자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베르라는 소년은 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제대로 모양을 내더군요. 얇게 빚은 그릇 중 구울 때 터지지 않은 건 거의가 그 소년 것입니다." "아, 그래요?" "이 쪽으로 와서 보십시오." 신관이 안내한 곳에는 여러 형태의 시험작들이 놓여 있었다. 한 눈에도 아이들이 만든 것이 분명한 모양에 다이아나는 살짝 미소지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베르가 만든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일견하기에도 다른 것들과 차이가 날 정도로 정교했다. 원형의 접시는 완벽한 원을 그리고 있었고, 우묵한 모양의 그릇들도 다른 것과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얇았다. 신관과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자신이 만든 것들을 내밀면서 자랑하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한참을 그 곳에 머물렀다. 도자기는 날이 갈수록 제 모양을 찾아갔다. 뮤리엘의 간절한 부탁에 의해 정식 도자기 제작소는 하이센 제국에 설치하기로 했다. 물론 판매에 대한 전권은 알트상단이 가지게 되었지만. 켈러비안 황제는 이 새로운 상품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거의 하루만에 수동으로 돌아가던 제작 과정 전체를 마법으로 자동화했다. 하이센에 방문했던 창조의 손은 필요한 기구들을 마법화하는 황제의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후훗.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이 거리를 이렇게 간단히 오간다는 건 아직도 신기해." 하이센에 마련된 전용마법진으로 이동한 후 다이아나가 중얼거렸다. 수 년이 흘렀고 스스로도 마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마법이란 참으로 신기한 힘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뮤리엘과 함께도 아니고 왜 갑자기 부르시는 거지?" 보통 하이센을 오가는 것은 주로 뮤리엘이었다. 에디우스 또한 상단의 일과 관련하여 가끔씩 왕래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경우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엔 뮤리엘도 동행하지 않았다. "글쎄? 무슨 용건이 있겠지." 에디우스는 대략 짐작하고 있었으나 얼버무렸다. 이들의 방문은 황제의 사적이 초대였다. 어차피 마법진으로 오가므로 국가 간의 번잡한 절차조차 필요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인지 황제가 이들을 맞이한 곳은 아담한 응접실같은 곳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끝난 후 황제는 주위의 모든 이들을 물러나게 했다. "블루 드래곤 케시오니스가 신성드래곤으로 인정받으신 다이아나님께 인사 드립니다." "예엣?" 다이아나는 이 어이없는 사실에 놀라 예의도 잊고 소리를 냈다. 의아한 시선으로 에디우스를 살피자 그는 짐짓 딴전을 피웠다. "에디우스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원래 드래곤의 유희는 종족 외의 분들에게 함부로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유희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케시오니스라는 이름의 드래곤, 즉 켈러비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신 변명했다. 다이아나는 드래곤들이 유희를 한다는 것은 들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생소했다. "그럼 뮤리엘은 하프드래곤이 되는 건가요?" "아뇨. 뮤리엘은 완전한 인간입니다. 다이아나님의 경우는 특별한 것이죠. 드래곤이 폴리모프하여 낳은 자손은 완벽하게 그 종족이 됩니다. 뮤리엘도 제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다른 누구보다 뮤리엘에게만큼은 꼭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뮤리엘이 알면 안 될 이유라도?" "유희라는 것은 드래곤의 본체와는 상관없는 완벽하게 분리된 것입니다. 뮤리엘이야 그렇게 키우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드래곤과 안면이 있다면 기대를 하게 됩니다. 따라서,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유희중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자손이라 하여 특별히 대우하지 않습니다. 즉, 인간 세상에서 유희중에 '죽음'까지를 연기한다면 그 존재는 사라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다이아나의 표정이 조금 우울해졌다. 그렇다면 뮤리엘은 단순히 유희의 산물인 것일까?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이 유희 기간 중 뮤리엘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딸입니다. 또한 저는 뮤리엘이 혼자 설 때까지는 이 유희를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희중 태어난 자손에 대한 규칙은 중간계의 균형을 위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켈러비안의 설명에 이어 에디우스도 거들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힘은 지나치게 강해. 만일 드래곤이 유희할 때 만들어 놓은 가문이나 가족에 집착하여 힘을 함부로 쓴다면 곧바로 균형이 깨어진다구."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규칙이지요." 다이아나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똑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자신과 다른 뮤리엘의 위치에 당황했을 뿐이다.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부탁이 있다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에디우스가 나섰다. "부탁이요? 저한테 부탁이라뇨?" 드래곤이 다른 존재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더군다나 켈러비안은 드러난 능력만 해도 상당한 존재였다. 그녀의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면서 켈러비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듣자하니 지난 번 몇몇 그린드래곤들의 부탁을 들어주셨다구요?" "아, 네." 부탁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린 드래곤들은 자신들이 머무름으로서 생겼던 레어 근처의 숲의 복원을 원했다. 덕분에 다이아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의 레어가 자리잡은 숲으로 가서 '브래스'를 남발했다. "실은, 제가 지난 번에 마법 실험을 하다가 북쪽 숲을 크게 망가뜨렸습니다. 덕분에 엘프 친구들에게 면목이 없어 지금을 환상마법으로 살짝 가려놓은 상태입니다." 결국 켈러비안의 부탁도 그린 드래곤들의 부탁과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크게 힘들지도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숲이 크게 망가져 엘프들이 속상해하는 것은 다이아나도 원치 않았다. "그정도야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시원스레 승낙한 다이아나의 태도에 켈러비안은 크게 기뻐했다. 어차피 드래곤 셋이 모인 것이라 이동은 자연스럽게 용언으로 이루어졌다. 다이아나의 신성 브래스가 검게 파괴된 숲으로 흩어지자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던 새생명들이 활기차게 치솟기 시작했다. 다이아나의 도움을 받을 것을 예견한 탓인지 검게 탄 숲에는 군데 군데 작은 묘목들도 보였다. 덕분에 순식간에 숲은 예전의, 아니 예전보다 더욱 생명 가득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펜하임 상단의 새로운 후계자는 거의 매일 황궁에 들락거렸다. 황제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만한 이는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페리안느. 어서오시오."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그녀에게 황제는 손을 휘휘 젓고 자리를 권했다. "오늘은 시우스 제국에 도움이 될만한 제안을 하려고 왔습니다." "하하하. 도움이 될 제안이라? 말해 보시오." "현재 칼라임을 본거지로 하는 알트 상단에서 새로운 물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물품들은 페리아 영지라는 곳을 기점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미 하이센에서는 알트상단과의 거래를 통해 그러한 물품들은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물품들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오?" "가장 많은 종류는 농사를 지을 때 도움이 되는 기구들입니다. 실제로 칼라임과 하이센에서는 이 기구들을 이용하여 두 세 배의 소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그것이 가능하오?" 아들레앙 데 카시우스 황제는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황좌에 앉았다. 하지만 이는 그의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그의 형수의 폭정에 기인했다. 중앙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인수한 그는 바로 하투아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폭정에 연이은 전쟁에 민생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아들레앙은 전력을 다하여 이를 만회하려고 노력중이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농업에 도움이 된다는 기구들의 소식은 이런 그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잡담입니다. ^^;; 결국 5페이지는 못채우고 그냥 올립니다. 이 부분은 출판본에는 나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5권으로 완결할 예정이므로 출판본은 이미 여러 군데에서 내용이 달라져 있거든요 아직도 결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연재를 계속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하지만, 일단 시작한 에피소드는 끝내야 할 것 같더라구요 페리안느에 대해 의견이 너무너무 분분해서 ^^;; 현재 생각으로는 여신의 아이는 일 주일에 한 편 정도씩 출판본과 상관없이 연재를 하고 새로운 글쪽에 주력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일 주일에 하나라고는 해도 새로운 스토리를 끌어가려면 좀 힘들겠지만요. ^^;;; 초심으로 돌아갑니다. 연재를 보는 분들이 백 명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저 제 글을 읽어주는 것만으로 기쁘고 감사하던... 그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 최선인 듯 하네요. 참고로 페리안느는 레이아나는 아닙니다만... ^^;;;; 누구게요? 이히. - 알테 - 덧글.. 모기 까페에 '하프'의 초반 세 편이 올라와 있습니다. 프롤부터 다시 수정을 가할 생각입니다만 딱 한 번 써드린 듯 한데 찾아와주시더군요. 알테와 잡담을 즐기실 분들은 놀러와 주세요 http://mogi.dasool.com/c/catschoi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펜하임 상단의 후계자 아들레앙은 황비의 말없는 질책에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대 황제를 일찍 숨지게한 것은 그의 복잡한 여성편력이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기가 쇠잔해질 정도로 난잡하게 놀았다는 뜻이다. 아예 황후궁을 선심쓰듯이 지어 주고는 자신은 황궁 깊숙한 곳의 침실에 처박히곤 했다. 이런 이유로 황제와 황비의 거처는 달랐다. 부부간의 사이가 좋았던 이 부부가 그러한 관습을 받아들인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조카를 폐위한 후 황제는 전쟁과 그 후 복구로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따라서 오히려 황후궁이라는 공간이 유용했다. 아들레앙은 업무가 많으면 황궁에서 지냈고 휴식이 필요하면 황후궁을 찾았다. 이는 번잡하기 이를데 없는 황궁 안에서 황후를 격리시키려는 애정 어린 배려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배려가 이제 무색해지고 있었다. 황제 못지않게 정세에 밝은 황후다. 그가 지난 이 주간 한 번도 황후궁을 찾지 않을 것이 바쁜 업무 탓이라고 우길 수도 없다. 심지어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를 찾곤 했다. 정적들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에 그가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아내밖에 없었다. 두 주일만에 황후궁을 찾은 아들레앙 황제에게 황비는 질책의 말 한마디 없었다. 단지 그녀는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의례적인 다과상을 차려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절도있는 예의 속에서 평소의 따사로운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내의 눈치를 보며 아들레앙은 속으로 곱씹었다. 3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황비는 아직도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녀를 보고 있는 이 순간, 그는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애정이 식은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페리안느라는 여성에 대한 갈증은 날로 더해갔다. 더군다나 최근에 칼라임과 하이센에서 사용하는 물품에 대한 정보는 제국 전체에 도움이 될 내용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스스로와 타협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여성에게 끌리는 건 본능이고, 더군다나 국사에 도움이 되는 존재이니!' 마음을 정리한 그는 나름대로 떳떳한 표정으로 아내를 마주 보았다. "내가 국사에 좀 바쁘다 보니 당신에게 소홀했구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황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온화한 어조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 온화함 속에 자리잡은 쌀쌀함을 황제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 20년 가까이 함께 산 부부로서 놓칠래야 놓칠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오." 변명을 겸하여 페리안느로부터 들은 정보를 털어놓았다. 제국을 부강하게 하는 일인지라 황비 또한 진지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아들레앙은 자신의 말에 몰두하고 있는 황비의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설명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그러한 정보는 누가 올린 건가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황비가 미묘한 문제를 건드린다. 황제는 내심 이때다 싶어 변명을 대신한 말이 될 수도 있는 답변을 읊었다. "펜하임 상단의 페리안느양이오. 사실 최근에 바빴던 것도 그 정보에 대해 사실 확인을 하다 보니 그랬다오. 해당 물품들은 펜하임 상단에서 우리 제국을 대신해서 알트 상단에 수출 요청을 하기로 했소." 페리안느와 장시간 붙어 있었던 변명이 절로 된 셈이다. 어차피 페리안느가 황궁을 거의 날마다 드나든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드나들면서 만나는 이가 황제임을 모르는 이도 없었다. 황비는 굳었던 표정을 풀면서 미소를 지었다. "페리안느 양이 그런 일을 하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군요. 황후궁으로 초청해서 감사의 말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아, 내 미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구려. 아무래도 같은 여성이라 말이 잘 통할 터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일단 황비의 분노를 잠재웠다는 생각에 황제는 쾌재를 불렀다. 그는 황비의 초대를 호쾌히 격려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오해의 불씨가 모두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시우스에서?" "응. 일단 펜하임 상단을 통해 연락이 왔어. 시우스 황실에서 전권을 위임했다고 하더군. 어떻게 생각해?" "난 좋아. 우리가 개발한 기구들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잖아." "후훗. 나도 좋아. 이렇게만 나가면 일 년 내로 페리아 영지에 빌려준 돈도 다 회수가 되겠는걸?" "물량은 괜찮아?" "아, 어차피 이곳 영지에서만 생산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 페리아 영지에서 시험 생산된 물품들 중 영지 내에서 대량생산하는 종목은 결정된 후였다. 영지에서 생산이 어려운 부분은 에디우스의 영지와 하이센쪽에 건설한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하이센에서는 황제의 주도 하에 페리아 영지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을 국가적으로 보급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보급도를 따진다면 처음 생산된 칼라임보다 하이센쪽이 우위를 차지한다. 사실 칼라임에서는 거의 수요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현재의 상태도 지난 번 '대결산'에서 나타난 엄청난 수확의 차이 덕분이었다. 나름대로 영지 관리에 열심인 몇몇 귀족이 관심을 보였다. 마르띠앙 공작은 자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귀족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듯했다. 황제파의 귀족들이 한 둘 나서기 시작하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소신되고 있었다. 잘못하면 다음 번 '대결산'에서 자신의 영지에서만 형편없는 결과를 보여 망신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규정된 세금보다 훨씬 많은 양을 쥐어짜는 형편에서 기존의 몇 배의 소출을 만들 방법은 '개선' 밖에는 없었다. "덕분에 알트 상단이 더욱 커지게 되었어. 내가 한 투자 중에 최고의 투자야!" "후훗.. 그렇다니 다행이네!" "이렇게 나가면 중앙연합국과 하투아에서 연락이 오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아, 미리 생산시설을 좀 늘려놔야 할까?" "그렇게 말하니까 딱 사장님 폼이다." "사장? 아, 그 네가 있던 세계에서는 상단의 대표를 그렇게 말했었지?" "응." 물론 '사장님 폼'이라는 말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하지만, 그것까지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이아나는 금발의 에디우스가 닫혀진 세계식의 정장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말쑥하게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큰 책상 앞에서 근엄한 표정을 지은 에디우스. "푸훗." 무의식중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응? 뭐 우스운 일이라도 있어?" "아, 아니. 펜하임과의 거래는 네가 직접 할거야?" "음. 펜하임만 관련된 일이라면 그냥 아무나 해도 되는데, 시우스와 거래를 트는 일이니......" "아, 그럼 장기 출장이 되는 거네?" "장기 출장을 할 생각은 없어. 물건들이 도착할 때 나도 같이 도착하면 되니까. 일단 가서 황제와 면담만 하고 실무자들에게 맡길거야." 다른 때 같으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동행할지를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야할 곳이 문제였다. 시우스는 '엔젤하우스의 참극'이 일어난 바로 그 곳이므로. "무슨 이야길 둘이만 하는 거야?" "아, 베르. 에디우스가 시우스쪽에 출장을 간다고 하는데?" "응? 시우스? 흠......" 시우스라는 말에 조금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베르였다. 평소같았으면 다이아나와 에디우스가 떨어지는 상황부터 챙겨야 했건만...... "왜? 다이아나 대신 너라도 따라 나서게?" 조금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었는지 에디우스가 농담 비슷하게 말을 건넸다. "너와 함께 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할 수 없지?" "뭐?" "응?" 동행의 의사를 확실히 한 베르의 발언으로 놀란 것은 두 사람이었다. 베르히안은 시큰둥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제 할말만 했다. "기껏 인간계에 왔잖아. 내가 이 지상계에 얼마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 그럴 바엔 조금이라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 그래?" "뭐, 저 노랭이하고 같이 가야 하는 건 싫지만 말야." 평소에도 다이아나라는 중립지대가 없으면 으르렁거리기 일쑤인 둘이다. 사실 그것도 다이아나가 있을 때의 일이랄 수 있다. 다이아나가 없을 때 둘은 서로 소 닭보듯이 무시하곤 했으니까. "나 가도 되지?" "응? 에디우스?" "뭐 나쁠 건 없겠지." 의외로 에디우스는 간단히 수락했다. 둘의 다툼을 예상하고 있던 다이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 "엄마!" 잠자리에 들기 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이아나는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평소와는 달리 베르히안와 에디우스 둘 모두 그녀를 따라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흥. 생각이 아주 없진 않은가 보군" "꼬마. 무슨 일이냐?" 베르히안이 정말 구경을 위해 따라나설 리가 없다. 그 점은 에디우스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다이아나에게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베르히안이 경계의 대상이긴 했지만, 다이아나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에디우스도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아는 것을 꺼려하는 일이라면 그녀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너 바보지?" "뭐야?" "그 상단 대표인가 하는 여자. 만나봤다면서?" "그런데?" "흠. 일단 가서 보자구. 그 여자 만나는 자리에 나도 꼭 끼워줘. 무슨 핑계를 대서건 말야" "그렇게 하지." 페리안느라는 여성에 대한 조사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펜하임과 같이 큰 상단의 대표가 과거를 알 수 없는 일개 젊은 여성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것 자체가 의문스러운 일이다. 이에 당연히 알트 상단도 그녀의 뒷조사에 착수했었다. 하지만, 마치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기라고 한 듯 그녀의 과거는 묘연했다. "지혜야." "다희, 다희니?" "응. 나야." "어디있는 거야? 모습이 보이지 않아. 너 무사한 거니?" "응 지혜야. 미안해. 내가 그 동안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어. 나는 건강히 잘 있어." "어디? 어디 있는 거야?" "아주 먼 곳. 걱정하지 마.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천국이나 저 세상은 아니니까." "거기가 어딘데?" "미안. 지금 내 능력으로는 이 이상의 이야길 하기 힘들어. 조금만 기다려줄래? 곧 만날 수 있을거야" "다희야, 다희야?" 가냘프게 들리던 음성이 조금씩 작아지면서 마지막말과 함께 흐려진다. 그 끝자락을 붙잡고 정신없이 이름을 불렀지만, 음성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저, 자매님." "아!" "괜찮으십니까?" 성당 한 구석에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어버린 모양이다. 온화한 표정의 수녀님 한 분이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괜찮아요." 지혜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내가 기도를 하다가 졸았던 건가?' 물리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 후 지혜는 종교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어떤 한 종교에 매진한 것이 아니다. 교회와 성당, 이름난 사찰을 가리지 않았다. 유명하다는 무당도 여럿 만나보았다. 하지만, 죽었다면 초혼이라도 해줄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그들은 다희의 영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희의 정확한 생일과 생시를 알 수 없다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사진만으로 충분히 초혼이 가능하다던 무당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당의 말은 다희의 사진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진만 있으면 생사를 알 수 있다고 했잖아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보통 사진에서 영의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이 분의 사진에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군요. 마치 무생물을 찍은 사진에서 받는 느낌과 같습니다." "뭐에요?" 시험삼아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그 무당은 기분나쁜 표정도 없이 그들의 생사여부를 정확하게 밝혀내었다. 지혜로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무당과의 만남을 생각하던 지혜는 조금 전 기도속에서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만일 내가 간절한 바램으로 인해 꿈을 꾼 것이 아니라면, 다희의 말대로 또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지혜는 입을 꼭 다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휴우.' 잠에서 깨어난 다이아나는 평소 꿈을 꾸었을 때와는 달리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되었어. 지혜야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처음 지혜의 꿈을 더 많이 꾸게 되었을 때는 괴로웠다. 자신을 찾고 있는 지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능력의 상승으로 인한 하나의 징조라고 단정지었다. 다이아나는 꿈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의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각성 이후 지속적으로 노력한 결과 오늘 다이아나는 지혜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할 수 있었다. 꿈 속에서 의지의 힘이 다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 화요일에 문상을 갈 일이 있어서 청주에 간 김에 괴산 시골집에 다녀왔습니다. 아빠랑 둘이 수요일엔 화양계곡에 갔었지요. ^^; 덕분에 물에 발 담그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외도 하나 깎아먹었다지요? 리플은 하나하나 다 읽고 있습니다. 글 써 보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새로운 리플이 올라오면 모두 표시가 되거든요 ^^;;; 하프의 경우 일단 본격적인 연재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초반 부분은 일단 진행하고 있는데, - 프롤로그 - 부분부터 수정할 예정이거든요. '여신의 아이'가 끝날 즈음에는 본격적인 연재를 할 수 있겠지요. 현재로서는 새 글에 대한 느낌을 알고 싶은 마음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프의 유조아 연재여부는 일단 제대로 쓰게 된 후에 결정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자, 무더운 여름.. 다들 건강하세요. - 알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펜하임 상단의 후계자 '이런, 제기랄!' 베르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제성을 가지지 않은 일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다이아나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단 한마디. 그것이 베르히안을 움직이게 했다. '교활한 녀석!' 사실 기본적인 성격의 구성은 키케르나 베르히안이나 매일반이다. 키케르를 욕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욕일 수밖에 없다. "뭐가 불만이냐?" 스스로 따라나선 주제에 갖은 인상을 쓰면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니 에디우스도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다. "너랑 말할 기분 아냐." "뭐야?" 몇 번의 마법진으로 텔레포트한 후 딱 둘이 타고 있는 마차 안이다. 베르히안에게서 눈에 보일 듯이 솟아나는 불쾌한 기운에 에디우스는 점점 기분이 상해갔다. 가시 돋친 몇 마디가 오간 후 무거운 침묵이 마차 안을 감싸안았다. "부탁이 있다." 의외로 대화를 재개한 것은 베르히안 쪽이었다. 에디우스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고 베르히안을 주시했다. "뭔데?" "여기서는 성인으로 행동할테니 협상할 때 나도 참석할 수 있게 해다오." "뭐야?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 "제길! 나도 너따위한테 부탁같은걸 하고 싶진 않아. 내가 너한테 부탁할 일이면 대충 눈치는 채야지" "다이아나와 관련 있는 거냐?" "그래." 더 이상 물어봐야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에디우스는 예측했다.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적어도 다이아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안 할 거라고 믿겠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알았다. 그럼......" 계약을 하지 않았지만 베르히안은 자신의 모든 힘을 쓸 수 있다. 이는 베르히안의 특징에 기인했다. 보통 지상계에서의 운신의 폭이 한정되는 다른 마족과는 다르다. 그는 마계에 존재하는 키케르의 힘을 끌어 쓸 수 있었으므로. 그런 베르히안이 성인의 모양을 갖추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일단 협력하기로 한 바에 에디우스는 치밀하게 일을 추진했다. 일단 베르히안을 번화가의 여관에 내려놓았다. 몇 시간 후 에디우스는 꽤 유명한 고급음식점에서 한 남자를 만나 상단으로 데려왔다. '아버지의 제자' 라는 명목으로. 키케르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에디우스는 알 수 없었지만, 성인 모습의 베르히안은 완벽하게 키케르 그 자체였다. 물론 약간의 마력을 소비하기는 했지만, 성마족의 모습을 하는 것은 베르히안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소년의 모습을 유지했던 것은 키케르와 똑같이 생긴 자신의 모습을 싫어했던 탓이다. 그렇다고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자니 키케르를 의식하는 듯했고. 펜하임 상단의 본부로 사용되는 건물은 꽤 오래된 듯한 대저택이었다. 성인의 모습을 한 베르히안과 에디우스는 총관급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헤에? 꽤 잘 꾸며져 있군. 너희 상단도 이렇게 화려하냐? 고풍스러운 외관도 멋있었지만, 건물 내부 또한 화려했다. 조화롭게 장식된 물건들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해도 감탄할만한 것들이다. 베르히안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전음으로 질문하자 에디우스의 답변이 돌아왔다. - 원래 중앙5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시우스야. 펜하임은 시우스를 주로 하고 중앙5국까지를 주 활동무대로 하고 있지. 이건 문화의 중심지라는 중앙5국의 영향이다. 알트 상단의 경우는 좀 더 간결하지. 알트상단 본부의 내부구조는 흡사 닫혀진 세계의 사무용건물과 같다. 원래는 하비어스의 취향에 따라 꽤나 화려하던 것을 에디우스가 완벽하게 바꾸어버린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큰 원탁이 준비된 회의실풍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에디우스 님" "저도 반갑군요. 모쪼록 좋은 거래가 되길 바랍니다." 에디우스의 뒤쪽에 섰던 베르히안이 슬쩍 옆으로 옮겨섰다. 페리안느는 에디우스의 동행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우뚝 멈춰섰다. 베일 안의 그녀의 얼굴은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이 쪽은 제 비서를 맡고 있는 베리안이라고 합니다. 베리안, 이 분이 펜하임 상단의 대표이신 페리안느 님이네. 인사드리게나." "처음 뵙겠습니다. 베리안이라고 합니다." 페리안느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에디우스는 베르히안을 소개시켰다. 그에 이어 베르히안이 소개된 이름으로 인사를 하자 그 사이 정신을 수습한 페리안느는 서먹하게 인사를 되돌렸다. - 무슨 일이지? 페리안느가 너를 알고 있는 것인가? 베일 따위가 에디우스의 시야를 가릴 수는 없다. 소개를 하면서 전해오는 전음에 베르히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말과 함께 또 다른 전음을 건네왔다. -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존재로 오해하는 것이겠지. 이로써 확실해졌군. - 마족인가? - 마족과 계약한 인간이다. 보일 듯 말듯하게 에디우스의 얼굴로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베르히안의 기색을 몰래 살피던 페리안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어차피 실무자 선에서 구체적인 사항은 논의가 된 상태이니 최종 계약만 남은 셈이군요. 이것이 저희가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페리안느는 당초의 계획과 달리 본론을 먼저 내놓았다. 그녀가 건넨 계약서는 에디우스에 이어 베르히안의 손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조건과 일치합니다. 그럼 사인을." 명쾌한 대답과 함께 알트상단과 시우스 제국과의 거래는 펜하임의 중재를 거쳐 성립되었다. 속으로 페리안느는 당장이라도 둘을 내보내고 싶었다. 마왕이 지상계에 나타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물론 그 이유를 알고있는 것은 페리안느와 공존하고 있는 마족이었고 인간의 일면은 어떻게든 그들을 잡고 싶어 했다. 페리안느가 어찌 생각하던 일단 잡혀진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다. "자, 일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황제폐하께서 에디우스 님을 오늘 저녁 연회에 초대하셨습니다." 켈러비안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큰 무역이라고 해도 황제가 나서지는 않는다. 따라서 황제는 그 대안으로서 황실 연회에 초대하는 것을 내놓았다. 이는 황후가 나서서 주도한 연회이므로 페리안느가 취소할 성격이 못 되었다. 에디우스 쪽에서도 한 나라의 황제의 초대를 이유없이 거절하진 못한다. 현재 상황으로서는 궁금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황제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숙소로 황실의 마차가 마중나갈 것입니다." 주 용건이 끝난 후에 바로 일어서는 것 또한 어색하다. 하여 이들은 찻잔을 앞에 두고 입끝으로만 예의바른 대화를 나누었다. 페리안느는 불안했고 에디우스는 궁금했다면 베르히안은 냉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셋 모두 얼굴에는 그러한 표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거래가 잘 성사되어 유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만이 드러날 뿐이다. "이제 얘기해 보지." 숙소로 돌아온 에디우스가 익숙하게 결계를 펼치고 물어왔다. 베르히안은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속에는 다이아나가 그의 심기를 고려해 말하지 않았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르히안의 설명을 들은 에디우스는 드물게 동요를 보였다. '뭐, 이쯤되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하겠지.' 굳이 다이아나에게 말하지 않을 약속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다짐하지 않아도 에디우스는 그 일을 말할 리가 없다. 그의 드높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베르히안은 귀찮은 일 하나를 직접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속으로 흐뭇해했다. 저녁의 연회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베르히안의 이야기를 들은 에디우스는 복수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집으로 돌아온 페리안느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몸을 강제한 존재에게 원망스럽게 물었다. 예전부터 노리고 있던 에디우스를 차지할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어쩌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계약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이기에 마족은 그녀의 의문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체념했을 때 그녀를 지금으로 이끌어온 마족의 힘. 그 힘은 바로 이성에 대한 매혹이었다. 원래의 신분을 지우고 상단에 접근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소문이 난 펜하임 상단의 전대 대표를 한 눈에 홀렸다. 그리고 그 후계자리를 차지한 후 상단을 물려받았다. 결코 한 제국의 황제보다 작다고 할 수 없는 영향력을 너무나 쉽게 손에 넣은 것이다. 예전에도 미모엔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아예 달랐다. '사내'라는 이름을 단 존재들은 자신을 보기만 하면 빠져들었다. 외모가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녀의 눈길 한 번에 사내들은 재산과 명예, 목숨까지 내놓았다. 그것은 한 나라의 황제도 다르지 않았다. 그토록 아낀다는 황후를 뒤로 하고 자신과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연장하려는 시우스의 황제. 그녀가 능력을 가진 후 동요하지 않은 것은 에디우스라는 존재밖에 없었다. 일전의 만남에서 베일을 걷어 보였건만 그는 그저 아름답다며 흔한 인사를 했을 뿐이다. 에디우스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마족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에디우스의 능력이 인간을 넘어설 정도이기에 그녀에게 끌리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 때는 계약한 마족과의 연계가 지금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마족과의 계약 이후로 페리안느의 이성에 대한 매혹 능력은 계속 증가되어 왔다. 지금이라면 저 아름다운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절망하게 만든 그 얄미운 다이아나는 에디우스에게 버림을 받고 이전의 자신처럼 절망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대해 온 날이다. "왜 대답을 해주지 않는 거에요?" 다시 재촉했지만 그녀의 몸을 함께 차지하고 있는 마족에게서는 응답이 없었다. 사실 마족은 떨고 있었다. 계약으로 인해 완벽하게 그녀 안에 자리한 것이 잘못이다. 계약이 달성되기 전에는 그녀의 몸에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태인 것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