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은마녀 이 작품의 장르는 판타지 입니다. [정보수정] [쪽지함보기] [로그아웃] [목록보기] [이전] [다음] [선호작 추가] [윗글] 글쓴이 두드리자 글쓴날 2005-11-04 22:43:37 고친날 2005-11-04 22:43:37 읽은수 7374 [ 11 K ] 제목 여동생은 마녀 제 0화 달콤한 순간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0화 달콤한 순간 내 마음을 보드랍게 만져주는 피아노의 선율이, 건물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 오늘은 나의 결혼식 날. 저 앞에 내가 좋아했던,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내가 좋아할 여자아이가 서 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너무나 맑은 옷을 입은 채로. "이제 신랑 연 문구 군과, 신부 송 진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고, 결혼행진곡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하객들이 우리 둘의 앞날을 축복해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옆의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기뻐. 정말로 이 날이 올 줄은." 말끝을 흐리는 진희. 언제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런 멋진 여자와 일생을 함께 하게 된 나는, 분명히 세계 제일의 행운아일 것이다. 아아. 이제야 나에게도 암흑대신 빛이 찾아온 것이다. "만세 !"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그리고 진희를 끌어안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그녀를 품은 채 빙빙 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조금 있다가 하고 싶다. 기쁨을 표시하기에는 아직 이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침착하자. 침착.' 주례 선생님. 왜 이렇게 느긋하세요. 어서 시작하세요. 어서 제게 기쁨의 나날로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런 나의 무언의 압력을 느꼈는지, 주례 선생님은 허겁지겁 주례사를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내 머리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 '난 해냈어.'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만이, 내 마음속을 소용돌이치듯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해낸 것이다. 어둠과 저주의 나날은 끝나고, 이제부터는 기쁨과 환희의 나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록 결혼생활은 이상이 아니고 현실이지만, 적어도 이제부터는 확실히, 나에게는 그 이상이 다가오게 된 것이다. 적어도 이제 나와 진희는 단둘이서만 살게 되기 때문에. '얼마나 길고 힘들었던 나날이었던가.' 그동안은 정말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서 살았었다. 남들은 한 번 맞기도 힘든 벼락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맞고, 태풍에 휩쓸려 바닷물 속에 끌려 들어가던 나날, 지진으로 갈라진 땅 속으로 떨어져 가면서, 공포에 전신이 찢기는 듯했던 순간이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마치 인생이 끝나는 순간, 중요한 장면들이 하나씩 눈앞에 보여지는 것처럼. '그래.' 이제 나의 어둠의 생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장밋빛으로 물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고통은 바로 이 순간의 희열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역시 신은 공평한 것이다. 고통스런 20여 년의 세월 끝에, 결국 나에게 안식을 주었기 때문에. '진희야.' 나는 나의 사랑스런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에게는 이미, 주례사의 내용같은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결말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결말이 다가왔다. 주례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에게 들려온 것이다. "신랑 연 문구 군은, 신부 송 진희 양을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영원토록 그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 맹세합니다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입이 열리고 대답이 터져 나온다. 마치 화산이 폭발할 것 같은 기세로. 그런 것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약간 놀란 주례 선생님의 얼굴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옆에서 얼굴이 빨개진 진희가, 내 옆구리를 찌른다. "좀 작게 해요. 문구씨." 하객들이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음. 좀 부끄럽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이 급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제 다음 순서는. "신부 송 진희 양은." 그렇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나는 기다려온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좋아했던 동급생이자, 나의 영원한 사랑이 될 그녀. 그녀를 위해 나는 그동안 인고의 세월을 참아왔고, 이제 그 결실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이렇게 느리지? 조바심나는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면서, 나는 기쁨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신랑 연 문구 군을 맞아." 갑자기 주례 선생님의 말이 느려졌다. 아니, 이것은 내 기분 탓일 것이다. 너무나 기쁜 순간을 맞아, 내 마음이 평소보다 빨리 주변상황을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으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내 감정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주례 선생님을 보며 서둘러 줄 것을 말없이 요구했지만, 주례 선생님은 느긋할 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제발 서둘러 달라고, 어서 진희와 키스하고 싶다고. 아니,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아니, 이건 좀 노골적인 건가? 하지만 건강한 성인 남녀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결혼한 사이라면, 당연히 남편으로서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아직은 결혼하기 전이고, 이곳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있다. 그런 소리를 입 밖에 꺼낼 경우 진희가 얼마나 부끄러워하겠는가.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재촉해도, 주례 선생님의 말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제길. 이러다가는 내 속이 새까맣게 타버린 후에나 끝나는 거 아냐? 불안해하는 내 기미를 느꼈는지, 내 옆의 천사가 손을 잡아준다. "서두르지 마요. 이제 금방이니까." 그녀의 그 말에는 나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이제 곧 이런 지루한 의식은 끝나고, 그 뒤는 영원히 행복한 나날이 펼쳐지는 거야. 그 희망이 나를 지탱시켜 주었고, 주례 선생님의 말씀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희의 손을 잡고, 그 끝을 기다렸다. 차분하게. "영원토록 그를 사랑하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비록 우리의 행복한 결혼생활도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이 여인을 아끼고 사랑하리라. 그런 결심을 축복하듯이,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해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약간은 부끄러운 듯, 작은 소리로 말하는 진희. "예. 맹세합니다." 그 말이 기다림의 끝이 되었다. 주례 선생님은 이 모든 인내를 끝맺는 말씀을 함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내렸다. 내가, 진희가, 그리고 이곳의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그 한 마디를 함으로서. "그럼,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 말과 함께, 모든 이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나는 불행의 동굴에서 빠져나와, 찬란한 행복의 벌판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나를 축복하고, 그런 내 옆에는 진희가 안겨 있었다. 이제야, 이제야 간신히 행복을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쿵쿵. 쿵쿵. 쿵쿵. 내 심장이 갑자기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뒤의 하객들 중에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를 어둠의 세계에 빠뜨린 채, 온갖 고문과 테러를 가했던 그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가 없을까. 갑자기 내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잔혹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불안감은 무엇이지?' 그리고 그 불안감은, 불행하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갑자기 소리가 들린 것이다. 따르르르릉.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다. 이 축복된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불길한 소리.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저주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 공포스런 것이었다. "하객 여러분. 예식장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지금 즉시, 지시에 따라 신속히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식장에....." 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었다. 검은 연기가 예식장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평화는 깨어지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모든 이의 악몽이. "꺄악 !" 누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식장 안이 혼란으로 뒤덮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기가 들어오자, 쿨럭거리며 급히 문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이라는 것은 그리 넓을 리가 없었고, 금새 예식장 전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예식장의 직원들은 필사적으로 외친다. "하, 하객 여러분.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 그리 큰 화재는 아니..." 하지만 눈앞의 연기 앞에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런 외침은 무의미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금새 수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서 뒤엉켰다. 쓰러지는 사람, 다른 사람 밑에 깔리는 사람, 그리고 밟혀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예식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돌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혼란 속으로 빠져들 수가 없었다. 내 옆에는 지켜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진희야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아니 이제는 내 아내가 된 사람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이고, 그러려면 그녀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스런 인파 속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놓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서 얻은 행복인데. "여기서 달아나야 해 !" 나는 진희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갈 탈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식장은 이미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바깥으로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몇 개 안 되는 비상구조차, 모조리 사람들의 물결로 파도칠 뿐이었다. 내 손을 잡은 진희의 손이,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크게 열렸고, 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진희야....." "......." 대답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내 가슴을 바라보기만 하는 진희. 그녀의 손이 떨리면서, 서서히 내 가슴을 향해 다가왔다. 그 입술이 조금씩 열린다. 억지로 뱉어내는 듯한 음성과 함께. "문...구....씨....."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는 것.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가고, 대신에 그녀의 옷이 붉게 물들었다. 혹시... "진희야 !" 어째서지? 어째서 진희의 옷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는거지? 설마, 다친건가? 이 혼란속에서? 그럴 리가......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녀의 비명이 내 귀에 메아리쳤다. "문구씨 !" 비명? 하지만 그 비명이 내 귀에 닿기도 전에, 그 음성은 눈앞에 뿌려진 핏줄기에 의해 지워졌다. 가만. 피? 피라고? "피?" 그 말이 내 입에서 새어나왔다. 설마.... 진희가 피를 흘려? 그것도 이렇게 새빨간?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내 가슴이 아픈 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기 때문에? "안 돼 !" 그녀를 죽게 할 순 없어 ! 아직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진희를 보낼 순 없어 ! 그런 생각을 하던 내 몸이, 서서히 뒤로 무너졌다. 뒷머리가 뭔가에 세게 부딪친 듯 하지만, 그것은 별로 느낌에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피 !" 그 피는 진희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피였다. 내 가슴의 아픔은, 바로 나 자신의 것에서 뚫린 구멍에서 느껴지는, 그런 상처의 아픔이었다. 진희가 황급히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찢어내서 내 상처를 막았지만, 피가 새어나오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서서히 흐려지는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검은 옷의 여자.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그 얼굴이 잔인하게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비웃는다. "훗.... 순순히 행복하게 놔둘 줄 알았어?" 저 얼굴이다. 평생동안 끈덕지게 나를 쫓아오면서, 마치 악마처럼 날 괴롭히던 그 여자의 얼굴이다. 지옥에서 온 망령같은 목소리로, 나를 향해 내뱉는 저주받은 음성. "자. 죽어 !" 그 말과 함께, 커다란 칼날이 날아왔다. 진희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다. "안 돼 !" 하지만, 진희의 힘으론 살인과 파괴의 악마를 막을 수 없었다. 마녀가 가볍게 손을 내치자, 진희는 저 멀리 불덩어리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비명과 함께, 진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 이제 네 차례지?" 나를 한 손으로 잡아 들어올리는 죽음의 사자. 그리고 그 여자가 든 칼이 내 배를 파고들었다. 비명조차 지르기 전에, 그 여자는 나를 잡고 불기둥 속으로 내던졌다. 진희가 던져진 곳의 정반대 편으로. "으아아악 !" 나는 불바다에 그대로 떨어졌다.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지만, 거대한 돌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온다. 나는 별 수 없이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나 그 돌은 내 다리에 떨어졌다. 나는 다시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간다. 마지막으로 내 눈에 비친 것은. "진희야 !" 온몸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화 어느 평범한 하루 (1) 따르르르릉. 온 몸이 불타버리는 그 느낌을 난 잊을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나는 뼈만 남은 채 허물어지고 있었으니까. 죽는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따르르르릉. 이건 무슨 소리일까. 저승사자가 울리는 방울소리일까. 그렇다면 난 이제 정말 죽었나보다. 저승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이라도 해볼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얌전히 포기하고 끌려갈까. 하지만 지금은 다 귀찮았다. 팔다리가 모조리 타버리고 해골만 남았는데, 뭘 하고 싶겠는가. 따르르르릉 ! 그런데 무슨 저승사자가 이렇게 방울만 울리고 있는 거야? 게다가 이건 약간 화난 느낌인데? 그런데 화가 나는 건 죽은 나지, 왜 자기가 화내고 있는 거야? 하아. 뭐 하긴 힘없는 건 나니까. 내가 참아야 하나? 따르르르르르릉 !!! 네. 알겠습니다. 난 죽었으니 어서 데려가세요. 뭐 죽고 힘도 없는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그저 높으신 분이 시키는 대로 알아서 따를 뿐이지요.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한테 다가오는 이 느낌은, 살기? 콰르릉. 우지끈. 와그작. 우당탕. "으으으으으." 아, 아프다. 이거 날 식칼로 찌른 그 악마의 일격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까. 가만. 난 그때 죽지 않았던가? 분명히 식칼로 가슴을 찔렸고, 진희가 불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서 일어나 ! 바보 오빠 !" 그 목소리에, 나는 순식간에 기억을 되살렸다. 그렇다. 이 소리는 바로 그 악마다. 설마, 그럼 난 지옥에 온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는?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말고 빨랑 일어나 ! 새학기 첫날부터 지각하고 싶어?" 퍽.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걷어차여, 나는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제서야 나는 눈을 떴다. 그렇다. 여기는..... "어떻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내가 깨워줘야 해? 게으름뱅이 오빠 같으니." 투덜거리는 것은 국자를 든 내 여동생이었다. 그럼 여기는 지옥이 아니구나. 아니, 생지옥인가? 그녀가 국자를 흔들면서 팔짱을 끼었다. "어휴. 저래가지고 어떻게 고교생활을 할지, 정말 걱정이라니까." 너만 없어도 제대로 해. 깨워주려면 좀 다정하게 해줄 수도 있잖아? 어째서 허구헌 날 발길질에 주먹질이냐. 하지만 그 말을 입밖에 꺼낼 수는 없다. 무서우니까. "빨리 이부자리 정리하고, 가서 세수해. 아침 거르고 나가면 안 좋으니까." "네." 그녀의 왼손에 들린 식칼을 보고,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앞치마를 팔랑거리며 부엌으로 사라지는 내 여동생을 바라보며, 나는 착한 아이처럼 이부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 아직도 그 식칼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와구와구.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야지. 덕분에 나까지 늦잖아." 와구와구와구. "게다가 그렇게 품위 없이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늘은 엄마가 일찍 나가시니까, 서둘러야 한다고 그렇게 어젯밤에 얘기했건만." 와구와구와구와구. "꼭 걸신들린 것 같아." 와구와구와구와구와구. "하지만 너무 느려." 그래. 너 잘났다. 그녀는 어느새 식사를 끝마치고, 자기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녀는 언제나 느긋하게 앉아서 천천히 숟가락을 뜨는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빨리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숙녀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걸 보니, 역시 마녀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모양이다. 아. 여기서 품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겉보기만의 품위를 뜻한다. "말도 안 되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먹기나 해." 나는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쟤는 벌써 밥을 다 먹고, 자기 몫의 식기까지 다 치웠다. 분명히 말도 안 하고 열심히 먹기만 했는데, 왜 식사하면서 잔소리를 퍼붓는 저 녀석보다 내가 더 늦는 거지? '저건 인간이 아냐.' 언제나 느끼는 일이니 새로울 건 없지만 말이다. 가만. 그런데 여기 있던 내 김치는 어디 갔지? 식탁 주위를 찾아보지만, 아무데도 없다. 아니, 이런 만행이 다 있나? 한국인에게서 김치를 빼앗다니, 너무하다. 항의하려는 순간, 날아오는 바가지. "평소엔 잘 먹지도 않으면서. 자 ! 빨리 치우고 학교 갈 준비나 해 !" 어느새 반찬그릇은 모조리 식탁에서 없어진 후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밥 덩어리를 입안에 던져 넣고, 물 한 잔을 마시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잽싸게 컵을 치우고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행주로 닦는 것밖에 안 하는 것이니 정리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오빠도 느긋하게 앉아있지만 말고, 문단속이나 하고 있어." 아. 그렇게 서둘러서 먹었으니 좀 봐줘라. 원래 사람이란, 건강을 위해선 천천히 먹어야 한다고 하던데, 그렇게 사람을 닦달하고서도 만족할 줄 모르냐. "빨리 해 !" 뒤돌려차기 한 방에, 나는 식탁에서 쫓겨나 버렸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악마의 외침이 들려온다. "빨리 일어나 ! 지금 뭐하는 거야?" "하아. 하아." "헉. 헉." "하아. 하아." "헉. 헉."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자. 그녀와 나는 시계를 쳐다보고 한 번 놀라고, 죽을힘을 다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오느라 그렇게 된 거니까. 일단 숨을 고른 후, 여동생과 나의 아침 대결이 시작되었다. 차가 오기 전에는 이렇게 떠드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아.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옆에서 바가지만 안 날아오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게 다 오빠 탓이야. 어떻게 새학기 첫날부터 늦잠을 자? 자명종 시계는 어디 쓰려고 그래?" 첫 번째 바가지다. 여기서 밀리면, 버스 탈 때까지 계속 밀리게 된다. 나는 재빠르게 반격했다. "네가 때리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움직였을 거야. 세상에 오빠를 밟아서 깨우는 여동생이 어디 있냐?" 하지만 이 정도로 굽힐 여동생이 아니다. 역시 그녀는 순식간에 반격한다. "여기 있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좀 부끄러워하기라도 해라. 어디서 네가 내 여동생이라고 소개하기 부끄럽다. 그러나. "어차피 상냥한 말투로 깨우면 안 통하잖아. 꼭 때려야 일어나면서." "내가 언제 !" "오늘 아침에." 태연자약한 저 모습이여. 남들은 저 모습이 멋지다고 하지만, 예쁜 얼굴로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말하는 것이 보기 좋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전혀 안 그렇다. 어떻게 여자애가 저렇게 기가 세단 말인가. 째려보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녀의 대답은. "그게 다 잠꾸러기 오빠를 깨우느라 진화한 탓이야." 진화하지 마. '안 그래도 인류를 넘어선 외계 생물이면서.' 차마 그 소리를 입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아직 죽기는 싫으니까. 게다가 이젠 그런 대꾸를 할 여유가 없다. 드디어 지옥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교통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가 비장한 얼굴로 나에게 말한다. "각오는 됐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이 역을 통과하는 열차입니다." 기다리는 차는 안 오고, 관계없는 차만 오간다. 한시가 급한 지금이, 바로 그런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때였다. 고생고생해서 만원버스에서 살아남았더니, 이번엔 지하철이다. 오라는 차는 안 오고 이게 무슨 짓이냐. "노선은 왜 없어져 가지고."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집과 고등학교를 이어주는 버스가 있었다. 분명히 3대나 있었다. 적어도 세 개의 노선이, 우리 집과 학교를 이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고등학생일 때 이런 일이." 문제는 그것이었다. 교통지옥을 해소하기 위한 버스노선의 개편이후, 어째서인지 그 노선 전부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학교에 가려고 했던 건데, 순전히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이 학교에 가야 했다. 투덜투덜. "그 덕분에." 그래서 이제는 이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와서, 한 번 땅 속을 지나간 후 다시 버스를 잡아타야 한다. 이게 어디가 교통환경개선이냐. 다른 사람은 개선된 건지 몰라도, 난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지만 불평은 사치에 불과하다. 이제 드디어 지옥철에 타야 할 시간이 되었으므로. "오빠. 가자 !" 다정하게 오누이가 손을 잡고 그 지옥에 도전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있겠나. 그녀는 냉혹하게 나를 잡더니, 날 방패로 삼아서 그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벽에 부딪쳤고, 그녀는 안전하게 내 뒤에 숨어서 인간의 파도를 피했다. 물론 여자애가 이런 인간꾸러미 안에 들어가는 건 여러 가지로 곤란하고, 치한대책을 위해서라도 이럴 수밖에 없는 건 안다. 하지만. "너무해 !" 내가 착한 녀석이라는 이유로 인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동생을 보호하는 좋은 오빠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 억지로 말이다. 사람들의 벽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걸 보면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 "하아. 하아." "헉. 헉." "하아. 하아." "헉. 헉." 이번엔 뛰어오느라 지친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옥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살아남은 나는, 그 뒤로 닥쳐온 만원버스에 다시 올라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목적지에 도달했다. 완전히 누더기가 된 내 뒤로, 내 여동생이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다. 그럼 저 숨을 몰아쉬는 동작은 대체 뭐냐? 가끔씩 저 애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수고했어. 오빠. 고마워." 그래도 인사치레는 할 줄 안다. 아무리 형식적이라도. 그래서 나도 형식적이나마 대꾸를 했다. 나는 숨을 고른 다음, 오빠의 위엄을 최대한 살리면서 대답을 했다. "그래."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엔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그녀는 정말 예뻤다. 저 미소를 지켜준 것이, 오늘 아침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한다. 에? 그럼 된 게 아니냐고? 이렇게 해서라도 나 자신을 납득시켜야, 인간의 파도에서 죽도록 고생한 오늘 아침의 쓰라린 기억에 조금이나마 보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사악한 여동생에게 휘둘려 다닌다는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해지지 않겠는가. 뭐?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내가 미쳤냐?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앞에, 오늘의 목적지가 보였다. "학교다 !" 오늘은 새학기 첫날이다. 나는 이제 고등학생인 것이다. 이제 보람찬 고교 3년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구나. 잠시동안 감회에 젖는다. 이제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 그리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스런 그녀까지 합해지면, 이 외로운 학교생활이 더 행복해질텐데. 퍽. "날 빼먹지 마." 빼먹고 싶다. "자. 그럼 이제 교실로 들어가자." 나는 자상한 오빠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원수 1호인 여동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이 녀석에게 대항해서 발차기와 주먹질로 답하고 싶지만, 남들이 다 보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아. 입학식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뭐 그런 형식적인 건 이미 다 했다는 말씀. 그러니 이제는 새 교실로 들어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함께 즐거운 학창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입시위주의 따분하고 재미없는 학교생활을 할 것 같다. 그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응. 오빠." 어째서 이 녀석이 같은 반이냐는 거다. 보통 여동생이라면 당연히 한 학년이나 두 학년 정도 아래에 있어야 하지만, 이 녀석은 어찌된 영문인지 나하고 같은 학년, 같은 반이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불행히도 이 녀석은 나와 쌍둥이다. 이란성 쌍둥이라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런 경우가 나와 이 녀석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녀석과 무려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서 같이 있었다는 소리인데. '난 이렇게 극악무도하지 않아.' 하늘에 맹세코, 난 이렇게 사악하지 않다. 그런 걸 보면, 일란성 쌍둥이와 이란성 쌍둥이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하나는 이렇게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진, 자상함과 건강함을 겸비한 오빠로, 또 하나는 악으로 뭉쳐진 괴물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또 딴 생각하는 거지? 빨리 들어가자고. 지각하기 전에." 그렇군. "여기가 우리 반이냐." 그 이름도 찬란한 대업고등학교 1학년 3반이다. 대체 이 학교가 왜 '대업'이라는 괴상망칙한 이름을 굳이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대입을 위해 준비하는 입시위주의 학교라는 건가? 물론 그런 뜻으로 이름을 지은 거야 아니겠지만, 누구나 '대입고등학교'라고 부를 것 같다. 뭐 그런 이름은 지금 별 상관은 없지만. '나중에 진학할 때나, 취직할 때가 문제지.' 아마 학교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한 번씩 웃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업이 뭔가. 대업이. 무슨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이름이 아닌가. 일단 명문대학 진학률은 엄청나게 높으니 불평이 안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 자. 오빠는 어느 자리에 앉을 거야?" 사실 이런 질문은 필요가 없다. 자리가 중간 정도라는 건 좋지만, 왜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저 녀석인 거지? 그 녀석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아. 오늘은 안 늦었네? 문구." 그렇다. 내 이름은 연문구. 연씨 집안의 장남이다. 물론 연흥부나 연놀부의 직계자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름이 문구라서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다. 왜 내 이름은 이 모양이란 말인가. 문구? 무슨 학용품 이름이냐? 아무리 자기 이름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스타일인 경우가 많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꿉친구에게 매정하게 대하기도 그렇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난 좀 부지런한 사람이라서 말야." 어쨌든 지각한 건 아니니까. 첫날부터 지각하는 철면피 학생이 되는 것은 면했으니, 이 정도면 모범생이라고 봐줘도 될 것이다. 내 자랑 같지만, 어쨌든 나는 여태까지 초등학교 6년, 그리고 중학교 3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은 착한 학생이니까. "순전히 여동생을 잘 둔 탓이겠지." "뭐?" 아니,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녀석의 어디가? 아침마다 날 발길질로 깨우는 녀석이? 오빠를 '뒤돌려차기'로 식탁 밖으로 날려버리는 녀석이? 하지만 내 소꿉친구는 그런 내 사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는다. "그동안 잘 지냈어? 아. 옆집이니까 그런 거 물을 필요는 없겠다. 그보다 사랑스런 여동생은 어때? 아. 잘 지낸다고? 뭐 네 표정을 보니 별 일은 없는 것 같네. 그보다 모처럼 같은 반이 된 건데, 반갑지 않아? 뭐? 이렇게 아름다운 소꿉친구를 두고 왜 그렇게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너답지 않잖아. 얼굴 펴. 좀 펴보라고. 그리고 말야. 우리 담임은 어떤 사람일까나. 이왕이면 젊고 미남이면 좋겠는데. 아니지. 그보다 남자애들은 역시 예쁜 여선생님을 원하겠지? 아이. 응큼해. 뭐 너도 나이가 나이니까 이해하지만. 그보다는 말야. 진희가 이 반이라는 건 솔직히 의외인데, 이번엔 과연 고백할거니? 아. 3년 동안 실패만 거듭했으니 좀 힘들긴 하겠다." 내가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다 해버린다. 뭐 원래 이 녀석은 이런 녀석이었으니까. 그렇다. 이 녀석이 바로 내 소꿉친구이자 옆집에 사는 여자아이인 전문희이다. 보통 소꿉친구라고 하면, 아침마다 날 깨우러 오고 얼굴도 예쁘며, 상냥하고 착한 여자아이를 연상해야겠지만 그건 모조리 다 헛소리다. 세상은 넓으니 그런 소꿉친구를 가진 행운의 남자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건 그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다. 전혀 멀다. 오직 예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와 일치되는 건 하나도 없다. 물론 어딘가의 누구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려는 순간, 내 기대를 무너뜨리는 한 마디. "음. 고백 실패의 원인은 역시 오빠 사랑에 여념이 없으신 여동생 탓인가?" 내 머리통을 완전히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잠시 죽을 뻔했지만, 나는 즉시 깨져나간 머리를 추스르고 반격에 나섰다. "아냐 !"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오빠 사랑'이라니? 그 녀석의 어디가 오빠에 푹 빠진 여동생이란 말인가. 보통 그런 이야기의 여동생이란, 오빠를 보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상냥한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는 그런 여자아이다. 절대로 오빠를 향해 '뒤돌려차기'를 날리거나, 아침마다 오빠를 짓밟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 녀석에게 있어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이라고는 외모뿐이다. 절대로 외모뿐이다 ! "이봐. 너 말야." 나는 내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남자였다면 지금쯤 주먹부터 시작해서 무릎치기, 발차기, 심지어 박치기까지 동원해서 응징을 했겠지만, 여자를 때릴 수는 없으니 도리가 없다. 난 내 여동생같은 야만적인 인간이 아니니까. "문희 너, 그런 끔찍한 발언은 자제해주지 않겠어?" 최대한 순화시킨 표현으로, 나는 내 소꿉친구인 문희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그럭저럭 예쁘지만, 말이 너무 빨라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리는 내 소꿉친구를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빛조차 바뀌지 않은 채로 대꾸한다. "하지만 맞잖아. 그러니까 그 애가 아직도 남자친구가 없는 거고. 생각해보면 참 불쌍하지. 어쩌다 저런 덜렁이 오빠를 만나서, 그렇게 예쁜데도 불구하고 옆에 남자도 하나 없는 쓸쓸한 청춘이라니." "그건 그 녀석이 어벙하니까 그런 거야 !" 그렇다. 내 여동생은 생각보다 예쁘다. 일단 얼굴과 몸매만 놓고 보면, 그러니까 그 성격만 감춰놓는다면 어지간한 텔런트보다 더 낫다. 가슴도 꽤 큰 편이고, 몸매도 정말 좋은 편이기는 하다. 물론 그 내부에 감춰진 실체를 아는 나로서는, 그런 여자는 한 트럭으로 갖다줘도 사양하겠지만. 하지만 아무도 그녀와 사귀지 못했다. 아. 내가 질투해서 그런 거냐고? 그럴 리가 있냐. 오히려 그 녀석을 데려간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무릎꿇고 절이라도 하겠다. 아마 '이런 애를 구제해주셔서 고맙습니다.'고 말할 것이고. 하지만 여태까지는, 그녀에게 접근한 녀석은 아무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있었다. 아주 많이 있었다. 열 트럭에 꾸려 넣어도 부족할 정도로 많이 있었다. 문제는 이 녀석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모조리 거절만 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여자의 인생은 남자가 전부인 게 아니잖아." 열을 올리는 나와 문희 옆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목소리는? "지, 진희?" 나는 펄쩍 뛰었다. 거기 있는 것은 바로 진희.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문희 녀석의 말로는, 진희도 이 반에 들어왔다고 했었지. 그러니 여기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내가 비록 진희에게 고백은 못했지만, 최소한 알고 지내는 사이인 건 분명했으니 나를 보고 말을 걸어오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설마, 들었나?' 문제는 문희가 나불거린 바로 그 말들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설마 지금 들은 건 아니겠지. 물론 들었다고 큰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녀가 날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내 바램일 뿐, 만약 그녀가 그걸 들었다면 어쩌지? 긴장감으로 온몸이 굳어진 나를 향해 말하는 그녀. "안녕? 문구. 이번에도 같은 반이 되었네." 아. 저 여자다운 모습. 모름지기 여자는 저래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면 뭐하나. 이 세상은 힘이 제일이라는 듯이, 약육강식의 법칙을 신봉하는 여자 따위는 !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생각이 안 난다. 진희 앞에만 나가면, 언제나 그렇듯이 머리가 텅 비어버린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대답을 못하고 진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진희가 먼저 입을 연다. "여전히 문구는 과묵하네. 자. 이제 선생님께서 오실 시간이니 그럼." 결국 이번에도 말을 못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옆에서는 예상 그대로, 문희의 비평이 시작된다. "어휴. 저래서야 언제쯤 고백을 할 수 있을지. 이런 부끄럼타는 소꿉친구를 둔 내가 죄지. 뭐 어쩌겠어. 어차피 이 녀석은 아직 어리니까, 당분간은 여동생의 따스한 손길에 의지해야 하겠지만." 사기 치지 마. 반론을 꺼내려는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아. 안녕? 오늘도 건강해 보이네? 문구." "그래." 이번에 나타난 남자는, 바로 내 친구중 하나인 강 지우라는 자다. 어릴 때부터 얼굴을 알고 지낸 사이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얼굴도 미남이다. 뭐 나보다는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는 녀석이다. 그 점만은 정말 부럽다. 그에 비해 나는. "보니까 이번에도 실패한 것 같은데, 뭐 실망하지 마.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거야." 너는 입학하자마자 여자한테 고백하는 스타일이었냐. "언젠가는 할거야. 게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고백하는 녀석이 어디 있냐. 너라면 몰라도." 그러나 그런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찢어놓는, 녀석의 한 마디. "그런 거냐? 난 조금 전에도 여자한테 고백 받았는데." "뭐야?" 그렇다. 이 녀석의 문제는, 나보다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이다. 어찌된 건지는 모르지만, 여자들에게 있어 이 녀석은 우상이다. 덕분에 엄청난 수의 팬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학교에도 이 녀석의 팬들이 대거 입학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고백을 받다니 너무하다. "망할 녀석. 나도 아직 못 받아본 건데." 할 수 없지. 입학식 때에도 이 녀석은 인기인이었다. 입학식 때 이 녀석이 학교 체육관에 입장하는 순간, 여학생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선생님 한 분이 놀라서 뒤로 넘어지시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갔던 전례도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신입생 대표가 이 녀석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소동은 없었지만.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냐? 이번에도 거절이냐?" "응. 나한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 있기는 하다. 정말 한 사람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말리고 싶은 상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녀석이 좋아한다는 상대는 바로. "오빠. 곧 수업 시작이야." 문제는 이것이다. 어째서 지우 녀석은 이런 애에게 푹 빠진 것일까. 여동생을 생각한다면 지우 정도면 괜찮다고 보지만, 친구를 생각한다면 말리고 싶다. 만약 지우가 내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아침마다 두들겨 맞을 게 아닌가. 난 내 친구가 매맞는 남편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같은 교실에 내 여동생이 있냐고? 그야 같은 반이니까. 그런데 왜 여태까지 안 보였냐고? 그 이유는 묻지 마라. 악몽을 매일,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되새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여동생이란 애가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이, 가급적이면 무시하려고 애써온 것이다. 그러나 지우 녀석 덕분에 그런 내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나를 하늘도 버리지 않았는지, 수업시작 종이 울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고교 생활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드디어 진정한 고교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 첫 관문, 바로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소개되는 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의 중요성을 반영하듯이, 모두의 눈이 교단을 향해 집중했다. 모두가 지금을 주목하는 까닭은, 이제부터 1년 동안의 학창생활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이 좋은 분일 경우, 우리는 비록 고달픈 수험생일지라도 행복의 조각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만약 담임이 악질적인 폭력배라면 말 그대로 지옥으로 직행이다. 생각해 보라. 등교 때마다 교칙을 들먹이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가위로 막 잘라버리는 깐깐한 선생이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데모대조차 쓰지 않을 거대한 쇠파이프를 휘둘러대는 선생이나, 학생 알기를 돈 나오는 창구로 착각하는 부패한 선생이 담임이 된다면 어쩌겠는가. "걱정 마. 오빠. 적어도 우린 그런 담임을 만난 적이 없잖아." 그렇다. 불행은 하나로 족한 것이다. 사악한 여동생과 같은 반이라는 것만으로도 머리는 충분히 아프다. 더 아프다가는 약국으로 직행해야 할 것이고,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두통약을 얻어와야 할 것이다. 어마마마가 약사라서 구입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구입 후에는 언제나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물론 그 내용은 언제나 똑같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약의 오남용은 몸에 해로우니 각별히 주의할 것."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계신 병원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약국을 운영하시고 계셔서, 언제나 정신없이 바쁘시다. 그 덕에 나는 언제나 사악한 여동생에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자신도 모르게 두통약을 남용할 위험이 컸다. 어머니께서 그 점에 대해 잔소리를 하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고, 몸에 해롭다는 이유로 어지간해서는 약도 안 주신다. 아. 다른 약국에 가면 되지 않냐고? 불행히도 우리 동네에는 어머니가 모르는 약국이란 없다. 어머니의 인간관계가 좋기 때문에, 어지간한 약국은 나만 보면 이러는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약의 오남용은 몸에 해로우니 각별히 주의할 것." 그 소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질려버렸다. 이젠 그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머리가 아플 정도다. 부디 그런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약국에 들를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일단 임시로 정한 자리가 편해서 조금은 다행이지만. "결국 그게 그거잖아." 물론 천하의 잔소리꾼이자 수다쟁이인 문희와 앉은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내 옆에 앉는 것보다는 낫다. 내 뒷자리에 지우가 앉은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다만 본격적으로 진짜 자리를 정하는 것은, 담임선생님이 오신 후에나 가능하다는 게 문제이다. 그 말은. '잘하면 천국, 잘못하면 지옥.' 잘하면 나는 진희의 옆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하면, 나는 마녀와 짝이 되어 공포의 1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부디 내가 그런 비극을 맞이하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담임부터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해서 악명이 자자한 인간이 걸린다면. 덜컥. 문이 열리며,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모두의 눈길이 교실의 문을 향해 집중되다가. "아악 !" 저 자는, 저 자는, 저 자는 ! 모두에게서 왕건전이라고 불리는 윤리선생이 아닌가 ! 왜 저 자가 우리 담임이냐. 모두의 입에서 절망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아. 물론 누군가는 빼고. 그래. 악당은 악당끼리 모인다는 거냐. 어째서 나한테 이런 불행이 연속으로 닥쳐오는 거냐. 만인의 증오의 눈초리를 받으며, 왕건전은 교단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 반의 담임 선생님을 소개하지. 자. 선생님, 이리로." 그리고 교실의 문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뭐야. 그럼 우리 담임은 저 폭력배가 아닌 건가? 모두의 눈에서 거대한 쇠파이프가 떠돌다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는 걸까.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사람은. "와아 !" 모두의 입에서 환성이 터졌다. 당연한 게 아닌가. 왕건전이 담임이라면, 우리의 청춘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진 채, 1년 동안을 '충격과 공포'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난 담임은, 왕건전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텐데, 우리들의 담임선생님께서는. "이번에 1학년 3반을 맡은, 수학담당 강미연입니다. 잘 부탁해요." 자고로 모든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다. 나 외에 다른 남학생들도 생각이 같은지, 모두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여학생들 역시, 왕건전이 담임이 되는 사태를 맞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있다. 하긴 누가 2m는 될법한 쇠파이프에 매일매일 맞고 살고 싶겠는가. 그로 인해, 우리의 새 담임선생님은 모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박수갈채가 터지고, 환호성이 교실을 울렸다. 왕건전은 교실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 모두를 쏘아보며 말한다. "그럼 미연 선생. 이 녀석들을 잘 부탁하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오직 새 담임에게만 시선이 집중될 뿐이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왜 내 여동생이란 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 설마 이 녀석, 이미 담임이 누군지 알고 있었나?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심정은. "대한민국 만세 !" 이렇게 외치고 싶을 정도니까. 일단 여동생이 우리 담임이 누가 되는지를 알았는지는 그냥 넘어가고, 나는 새 담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상당히 예쁘다. 특히 어른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 분위기가 최고다. 말 그대로 누님의 견본이라고 할까. 저기에 성격만 좋으면 완벽하다. 그럼 성격은?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반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어요." 일단 목소리만으로 판단하자면, 성격은 좋은 것 같다. 기본적으로 상냥한 음성이 아닌가. 목소리가 좋은 사람 중에 악인은 없........지는 않구나. 나는 '그 누군가'를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안 돼. 지금은 악당을 떠올리면 안 돼. 우리에게 온 저 천사님에게만 신경을 쓰자고. 담임선생님은 가장 앞줄에 있는 학생들부터, 소개를 시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리에 앉은 학생이 일어선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진희가 자기 소개를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들려왔다. 지금까지도 몇 번 환호가 들려왔지만, 특히 지금이 가장 컸다. 역시 남자에게 있어서 미인 동급생은 영원한 꿈인가. 물론 실제의 여자는 이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얼굴이 예쁜 여학생은 여러 가지로 동급생들에게 환영받는 법이다. 물론 여자들에게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데 잠깐.' 갑자기 학생들이 조용해지는 이유가 뭐냐? 진희가 자기 소개를 한 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입을 다문다. 그 원인은 곧 밝혀졌다. 그 원인은. "안녕하세요. 연미인이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오빠와는 쌍둥이예요." 문제는 저 이름이었다. 저 이름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았다. 의외의 이름으로 인한 혼란. 그로 인한 침묵.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상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내 소개를 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말았다.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하긴 저 이름이 좀 이상하긴 하지.' 그렇다. 내 여동생의 이름은 미인(美人). 이름 자체가 '미인'인 것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여자가 어디 있겠냐. 모두의 입이 다물어진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 미인이가 추녀였다면,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상한 이름이기 때문에. '아. 할아버지. 어째서 그런 이름을 지으셨나요.' 예시당초 저런 이름이 미인이에게 붙여진 이유는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서 동사무소에 손녀의 출생을 신고하러 가셨을 때, 이름을 기재하시다가 실수로 그런 이름을 써버리셨단다. 미인이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니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이름을 쓰셨다나. 결국 며칠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 결국 그런 연유로 해서 미인이는 미인이가 된 거다. 다행스럽게도 미인이가 워낙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문제로 미인이가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지만.' 물론 이름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기는 하다. 다만 애들이 철이 빨리 든 탓인지, 그런 일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문제는 미인이를 따돌리던 애들이, 얼마 후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전학을 가버린 사실이지만. 설마 이 녀석, 그 불량아들을 물어뜯어 버린 것은 아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미인이는 자기 소개를 열심히 해나가고 있었다. "현재 대업고등학교 1학년 3반으로, 키는 165cm, 몸무게는 비밀, 혈액형은 AB형, 생일은 5월 4일로, 여기 있는 오빠와는 쌍둥이예요." 내 머리가 농구공이냐. 만지지 마. "좋아하는 것은 음악감상, 그리고 여기 있는 오빠예요. 남자친구는 아직 없어요." "와아 !"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반에 있는 모든 음흉한 남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래. 너희들 속을 다 알겠다. 일단 겉보기에는 청순하고 매력적인 소녀로 보이니, 재빠르게 선수를 쳐서 자기 여자친구로 삼겠다는 말이지? 하지만 말이다. 저 녀석은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좋아하는 게 어디가 나냐? 그러는 녀석이 헤비급 권투선수조차 능가하는 핵펀치로 사람을 치냐?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말할 수는 없다. 이미 나는 나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미인이 혼자서 내 소개까지 다하고 있기에. 내 입을 막아놓은 내 여동생은, 자기 멋대로 소개를 이어나간다. "싫어하는 것은 정치인들이지만, 그건 모두 다 마찬가지이니 넘어갈께요. 그리고 특기라고 할 것은 별로 없어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모르게 내 입이 열린다. "뭐가 없어? 운동은 잘하잖아." 도저히 그냥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나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서 끼어 들었다. 원래는 '구타는 잘하잖아'라고 말해야겠지만, 차마 자상한 오빠의 이미지를 부수고 싶지 않아서 그만 외교적인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사실 나로서도 매일매일 여동생한테 맞고 산다고 공표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확실히 이 녀석도 그건 알고 있는지, 그냥 멋쩍게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다른 이들에게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와아 !" 아니, 이 녀석들은 '와아'라는 대사밖에 할 줄 모르나. 왜 그 말만 되풀이하는 거야? 나는 우리 반 학생들의 빈곤한 어휘력을 탓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미인이는 모두에게 얌전하게 인사하고 자기 자리에 앉았고, '와아'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다음은 누가 자기 소개를 하는 거였더라? 아니지. 그보다 내 뒤에 앉은 녀석이 왜 나보다 먼저 자기소개를 해버린 거야? 나는 말없이 한탄했지만, 이미 행차 뒤의 나팔이었다. "자. 그럼 다음은."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말도 안 돼. 불공정 행위야. 믿을 수 없어."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쌍둥이라는 이유로 내 옆자리에 미인이를 앉혀놓다니. 주위에서는 의좋은 남매라고 칭찬이 자자하겠지만, 난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는 집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옥을 만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왜. "그래도 나보다는 낫잖아. 난 이 녀석하고 한 자리라고." 1년동안 수다의 지옥에서 살게 될 지우에게,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지우에게 있어서는 일이 꼬인 것이, 하필이면 미인이가 아니라 문희와 짝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진희는 어디에 앉았냐고?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미인이는 창가이고, 진희는 저 멀리 벽 쪽으로 밀려나갔다. 어째서 이런 배치가 된 거냐? 혹시 이 녀석이 술수를 부린 건가? 나는 음모의 근원으로 짐작되는 내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녀석이 흑마술이라도 썼나? 하지만 암흑의 근원께서는 태연하게도. "오빠가 진희 언니와 같이 앉으면, 공부는 안 하고 언니 얼굴만 볼 거 아냐." 점점 이 녀석이 자리배정에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심증이 굳어지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어쩔 도리도 없는 것이, 물증이 없었다. 심증만 가지고 범인을 잡아넣고 기소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이 녀석이 설마 제비뽑기를 조작했다고 해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제비뽑기를 주관한 건 선생님이지, 이 녀석이 아니므로. "뭐 잘 된 일이잖아? 미인이 말도 맞기는 하고. 뭐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보자." 지우 녀석, 그래도 미인이 근처에 앉아서 좋다는 거냐. 하긴 나처럼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멀리 떨어진 상황이 아니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난 말이야 ! '문희 녀석이면 차라리 낫지. 이게 뭐야.' 문제는 바로 이 녀석이, 내 짝이라는 거다. 내 옆에서 여동생이 그 사악한 웃음을 흘린다는 게 참을 수 없다는 거다. 아. 친오빠면서 왜 그렇게 여동생을 싫어하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 이 녀석은 내가 조금이라도 수업시간에 고개를 숙이면, 당장에 샤프로 내 옆구리를 찌르니까 그렇지 ! 샤프는 필기도구지, 구타도구가 아니라고 ! '이제부터 내 옆구리는 성할 날이 없을 거야.' 수업시간에 자는 것은 고등학생의 필수적인 기술이다. 아. 왜 그런 게 필수냐고? 선생에게 안 들키고 자야 하는 절대절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입시지옥에 살고 있으므로, 이런 기술이라도 없으면 몸이 버티질 못하고, 이렇게라도 모자라는 잠을 보충해줘야 건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이 녀석은, 자기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남까지 그런 줄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봐. 난 너처럼 무쇠팔 무쇠다리를 가진 게 아니라고 ! 그러나 이런 하소연은 일체 소용이 없다. 하긴 말이 통하면 걱정을 안 하지. 나는 나에게 닥친 이 불행을 한탄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멀리에 외로운 섬처럼 혼자 떨어져 앉은 진희가 보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고 불쌍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한 군데에 몰려 앉았는데, 오로지 혼자서만 저런 구석지에 처박히다니. 물론 저곳이 나쁜 자리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있는 곳과 너무나 멀다는 점이다. '이런 엉터리가.'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바들바들 떨린다. 저 모습을 보니 나의 보호본능이 저절로 발동할 것 같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그녀의 어깨라도 살포시 안아주고 싶었지만, 매정한 수업종은 그런 내 심정을 무시한 채 다시 울리고 있었다. 아. 어째서 나에게는 이런 불행만이 있는가.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아주고 싶은데도, 이렇게 크나큰 장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니. "오빠. 수업 시간에 졸지 마." 하지만 내 감상은 거기서 끝났다. 내 옆구리를 노리는, 피에 굶주린 샤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 이런 비운이여. 지금이라도 책상 위에 엎드려서 한바탕 울고 싶지만, 당장이라도 내 옆구리를 찌를 듯이 노려보는 저 샤프가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다 필기도구까지도 무기로 만드는 여동생의 가공할 능력 때문이다. 어쩌다가 무술고수를 여동생으로 둬서, 내가 이 고생을 한단 말이냐. 그런 나의 한탄과는 관계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그에 따라 두 번째 수업을 맡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아니, 선생이 나타났다. 그 자는. '왕건전 !' 모두의 얼굴이 공포로 인해 굳어버렸다. 물론 한 사람만 제외하고. 새로 정해진 자리에 앉은 거의 모든 학생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가운데, 새로운 반장이 일어서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렷. 경례." 여기가 군대냐. 왠 경례냐. 그 이후의 수업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렇기는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왕건전의 거대한 쇠파이프가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감히 누가 그에게 대들겠는가. 어쨌든 2교시는 무사히 지나갔고, 선생이 나가자 누군가를 제외한 모두가 안도한 듯이 어깨에서 힘을 뺐다. "사, 살았다." 문희와 지우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정도였다. 저 멀리에 있는 진희의 경우, 안색이 상당히 나쁘다. 하긴 부잣집 아가씨이니 저런 흉악한 괴물을 자주 접하지는 못하는 탓도 있지만 말이다. 아. 미인이는 어떻냐고? 다시금 강조하지만 그 녀석은 태연했다. 모두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는데 비해, 이건 말 그대로 팔팔함 그 자체다. 대체 저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떠도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분명히 저 녀석은 분명히 뱃속이 간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왕건전의 쇠파이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의 악명은, 다른 학교까지 퍼져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그가 나타나는 순간, 공포에 떨 이유는 없는 것이다. '들리는 바로는.' 말 안 듣는 학생의 다리를 분질렀다는 건 차라리 약과다. 불량배 20명을 혼자서 제압했다는 둥, 조직폭력배들이 이곳에 못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그의 쇠파이프 때문이라는 둥, 전과 10범의 살인범을 혼자서 잡았다는 둥, 별별 믿어지지 않는 일화가 다 있었다. 그런 황당한 선생은 먼 나라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어쨌든 그런 소문이 나도는 판국에 학생들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저 거대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안 믿을 수가 없었다. 공기를 가른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들렸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대체. '역시 괴물이야. 괴물 위에는 또 괴물이 있다는 건가.' 미인이라면 혹시 저 괴물과 1대 1로 대결해서 승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물론 저 가느다란 팔로 그게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 왠지 내 여동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설마 여학생이 선생님과 주먹다짐을 할 일이 있겠냐마는. 어쨌든 악몽은 지나갔고, 잠시동안 모두 숨고르기를 끝내자 3교시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물리수업이다. 과연 누가 들어올 것인가. 모두들 생각한 선생님의 상상도는 다음과 같다. '안경을 끼고, 약간 나이가 든 양복차림의 남자.' 정말 이런 선생이 들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물리라는 것은 원래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이 아닌 이상, 그 수업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 윤리수업에 버금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수학의 경우, 담당이신 우리의 담임 선생님이 미인이라는 이유로 조금 낫기야 하지만. 물론 내 여동생이 수학선생님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녀석은 이상한 이름을 가진 탓에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픈 존재다. 잡생각을 물리친 내 눈앞에서, 드디어 교실의 문이 열리고. "에?" 왜 어린애가 들어오는 거냐? 우리들은 모두 당황해서 그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정장을 제대로 입고 있는 거지? 저건 어린애의 복장이 아닌데? 모두의 머릿속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상상했던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영화에 나오는 천재소녀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고 대한민국이고, 우리나라에서 저런 어린애가 고등학교 교사를 할 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 애는 왜 정장을 입고 있는 거지? 모두의 입은 꽉 다물어져 있었다. 차마 그 사실을 입밖에 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는 태연하게 교탁에 다가왔다. 그런데 교탁 위에 모습을 나타내셔야 할 선생님의 얼굴이, 안 보인다. 그리고. 당황하며 나오는 말은. "아. 안 보여. 이거 교탁이 너무 높아." 모두 잠시 굳어졌고,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린 우리의 반장이 치마를 휘날리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녀도 이제야 그 '어린애'가 진짜 교사임을 알아챈 모양이다. 달려가는 그녀의 얼굴은 의구심과 경악,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난 도대체 어떤 고등학교에 온 거냐. 어리벙벙해진 모두의 얼굴을 바라보려는 어린애 선생님. 하지만 받칠만한 게 없다. 새로 반장이 된 장마진이라는 여자애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받칠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름이 좀 이상한 여자애지만, 남의 이름가지고 참견할 수는 없다. 특히 나와 내 여동생의 경우라면 말이다. '그냥 수업하지 말자.' 물론 그런 내심을 입 밖으로 끄집어낼 생각은 없다. 누가 자청해서 돌 맞을 말을 꺼내겠냐.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물리수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업을 안 하면 되겠지만, 여태까지 수업이 안 되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옆 반에서는 들은 적이 없으니, 우리 반 역시 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만약 못하면, 우리 반은 다른 반에 비해 열등한 반으로 소문이 날 것이다. 선생님께 받침대 하나 못 구해드린, 멍청한 반으로 말이다. 그건 곤란하다. 상당히 곤란하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황당한 경우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대처방안도 없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니. "선생님. 이걸로 쓰면 어때요?" 나의 공포스런 여동생은, 어느새 나무상자를 구해 가지고 와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저걸 가져왔을까. 창고에서 가져왔나? 아니면 저 선생님이 다른 반에서 쓰던 받침대라도 구해온 걸까? 그것도 신기하지만, 그보다는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혼자서만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더 대단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해결책을 찾아낸 거지? '알고 있었던 거 아냐? 물리 선생님이 어린애처럼 키가 작다는 걸.' 그 외에는 납득할만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저 녀석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러고 보니 아까 왕건전이 나타날 때에도 저 녀석만 태연했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이 녀석은 사람이 아냐.' 잠시 내 머릿속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거대한 가마솥을 끓이면서, 두 손을 솥 위에 올리고는 주문을 외우는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녀석이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든다. 마녀의 요사스런 웃음. 그 녀석에게 딱 어울리지 않는가. 어쨌든 내가 그런 상상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물리 선생님께서는 그 나무상자에 의지하여 교탁 위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렇게 보니 꽤 미인이다. 물론 내 여동생이라고 불려지는 정체불명의 생물체와는 다른 사람이다. 겨우 침착함을 되찾으신 선생님이 자기 소개를 하신다. "물리수업을 맡은, 안영미에요. 여러분들이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거니까 당황하지 마세요." 이미 충분히 당황했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저 어린애 같은 외모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라는 거다. 나는 억지로 납득하기로 했다.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으니까. 이미 나는 저 선생님보다 더 이상한 사람을 여동생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믿을 수밖에 없다. 모두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선생님을 바라보고 환호했다. 그런데 말야. "와아아아아 !" 우리 반에는 생각보다 어린애 취향인 녀석들이 많은 건가. 아니면 그저 귀여운 게 최고라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여태까지의 환호가 '와아'였다면, 이제는 '와아아아아'로 발전했으니 어휘력이 증진된 거라고 해석해야 하나. 하지만 앞날이 걱정인 건 사실이다. 왠 어린애 선생님이냔 말이다. 물론 외모만 저럴 수도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렇지 않고 정말 어린애라면 신문이나 방송에 나왔을 테고,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을 테니까. 가만. 이미 저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소문이 퍼졌어야 하지 않나? "사람들이 가진 선입견과는 달리, 물리라는 학문은 알고 보면 따분하기만 한 학문이 아니니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수업에 임해주시기 바래요." "네 !" 모두들 일제히 대답했다. 이걸 보면 요즘 학생들이 악독하다던가, 범죄율이 높다던가 하는 건 모조리 거짓말로 들린다. 이렇게 착해 보이는 학생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방심은 못한다. 세상에는 첫인상과는 정반대의 인물이 많다는 것을, 나는 여동생을 통해 배우지 않았던가. 그리고 눈앞에 그 실례가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기로 했다. 일단 우리 반 애들은 착해보이니, 착할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발 그 첫인상이 뒤집혀지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게 선생님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좋다. "아아아." 3교시가 끝나자마자, 나는 책상 위에 엎어졌다.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선생님들만 나타나는 거냐. 처음에 담임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는 좋았다. 그건 정말 좋았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엽기적인 상황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2교시에 나타난 것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조직폭력배들의 두목같이 생긴 윤리선생이고, 3교시에 나타난 것은 초등학생이라니. "우리 학교, 원래 이런 데냐?" 이런 혼잣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대체 4교시에 나타날 선생님은 누구냐. 그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대체 어떤 괴물이 올 것이냐. 아. 스릴이 있으니 좋지 않느냐고? 따분한 고교생활에 있어 활력소가 되지 않겠냐고? 직접 당해 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선생님들이라니. 직접 수업을 받아야 하는 내 입장에선, 전혀 반갑지 않다. 특히 3교시의 그 선생님 ! 저런 어린애의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대로라면 수업시간에 잠도 못 자고, 도시락도 못 까먹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어린애같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면서 "문구군, 성실하게 수업 받아야지."라고 해봐라. 도저히 그 말을 거부할 재간이 없다. 아. 거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미인이냐? 그딴 짓 하게. 그러다가는 어린애를 괴롭히는 나쁜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 도저히 그런 짓은 못하겠다. "기운 다 빠지네. 배고파." 3교시의 황당한 사건을 경험한 덕에,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그래. 이럴 때에는 먹는 게 필요하다. 나는 먹을 것이 담긴 내 가방을 쳐다보았다. 저기에 점심때 먹을 도시락이 있다. 게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문구군. 그러면 안 돼."라고 할, 그 선생님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재빠르게 도시락을 담은 가방으로 손을 뻗치려고 했지만. "점심은 점심시간 때 먹는 거야." 내 손을 정확히 겨누고 있는 샤프. 그 샤프는 마치 검기라도 내뿜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물론 그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한 거겠지만. 나는 겁을 먹고 움찔거리며 손을 치웠다. '난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 거냐.' 나는 배고파 미치겠다는 신호를 계속 여동생에게 보냈지만, 그런 행동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내 여동생은 근본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오빠의 애처로운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말없이 샤프를 겨누고 있었다. 살벌하게. "........." 결국 나는 말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치사한 녀석. 밥도 못 먹게 하다니.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렇다. 그 뿐이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도시락을 꺼내서 도망쳐보라고?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중학교 시절에 그런 건 이미 지겨울 정도로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도망가다가 잡히거나, 도망쳤더니 도시락 속에 있던 내용물이 모조리 없어졌거나, 그게 아니면 도망치지도 못하고 발을 밟혀서 비명만 지르거나. 언제나 그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진희와 문희가 입을 모아 그랬겠는가. "얘. 때로는 져주는 게 어때?" 그러나 이 여동생이라는 애는, 표정도 안 바꾸고 말할 뿐이다. "오빠가 장래에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면, 규칙적인 식사를 해야 해. 아무 때나 막 먹으면, 몸에 안 좋아. 게다가, 축구선수라면 여동생의 추적 정도는 좀 피해봐야지." 그 말인즉슨, 여동생보다 느리면서 무슨 국가대표가 되겠냐는 거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할 때의 내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으므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어쨌냐고? '비참 그 자체였어.' 미인이한테 밟혀서, 땅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치사하게도 이 여동생께서는, 리본을 풀어서 내 다리를 휘감아 넘어뜨려 버렸고, 그리고 나서 날 밟은 것이다. 친오빠를 ! 게다가 발의 힘이 얼마나 센지, 나는 그 밑에서 꼼짝못하고 벌레라도 된 듯이 빌빌거렸던 거다. 좌우지간 오빠 망신은 여동생이 다 시킨다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다음 시간이 체육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실에서 나갔기 때문에 대망신은 면했지만, 그래도 그 사건은 진희와 문희의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가지고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배고파. 배고파. 너무 배고파.' 덕분에 내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달래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 세상에는 도시락말고도 먹을 게 많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그래. 나에겐 매점, 매점이 있다.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나는 배 채우기 계획을 짜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해답은 바로, 교내 매점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 아무리 쉬는 시간이 짧다고 해도, 100m를 11초에 달리는 내 다리라면 남은 시간동안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오빠." 히익 ! 설마, 이 녀석 지금 내 계획을 눈치챈 건가? 하지만 내가 향하는 방향은 도시락 쪽이 아니라, 교실의 문인데? 왜 이 녀석이 난데없이 날 부르는 거지? 나는 재빠르게 경계태세를 취했지만, 그녀가 꺼낸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녀는 샤프를 허공에 들어서, 어느 방향을 가리킨 것이다. "저쪽이 더 급하지 않아?" 무슨 소리냐? 내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냐? 나는 그렇게 반문하려고 했지만, 이럴 때 여동생의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다. 적어도 저 샤프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서, 매점으로 줄달음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한다. 게다가 고개 한 번 돌리는 것 정도는 그리 손해보는 일도 아니니까. 내가 머리를 돌리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 아니, 진희한테 왠 바퀴벌레가 붙어있는 거냐. 그것도 저렇게 큰 바퀴벌레가. 나는 그제서야, 진희앞에 서 있는 거대한 해충을 인식했다. 아니, 내가 잠시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이에 이런 일이 ! 진희가 저 바퀴벌레를 싫어한다는 점을 상기한 나는, 재빠르게 진희에게로 달려갔다. 진희의 장래의 남자친구로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 '젠장. 바퀴약이 없어.' 하나 있으면 저 해충을 쉽게 구제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내가 지금 스파이크가 달린 운동화를 신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바퀴벌레를 향해 달려갔다. '기다려라. 진희야.' 내가 진희의 책상 앞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악질적인 진드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해충 같으니. 나는 그 송충이를 향해 발차기를 날리려다가 참았다. 벌레가 죽어서 터지기라도 하면, 진희는 비명을 지를 테니까. 결국 나는 이성적인 인간답게, 그 구더기에게 말을 걸었다. 소리를 질러야 하지만, 진희가 놀랄까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쉽다. "야. 김 풍남 !" 풍남이라는 이름의 바퀴벌레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녀석의 표정은, 한마디로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 표정이었다. 타인을 자기 하인으로 착각하는 건방짐이 바로 저 녀석의 특징이었으니 당연한 지도 모르지만, 그런 태도는 인간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왜 그러나. 가난뱅이." 사람을 노골적으로 재산으로만 평가하는 저 발언. 저러니 녀석이 다른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는 거다. 뭐 저 녀석이 부자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진희가 싫다고 하잖아. 그녀에게서 떨어져." 그러나 바퀴벌레에게는 인간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녀석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말한다. "하지만 진희의 아버지께선, 진희와 친하게 지내라고 하시던걸? 우리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당부하셨고. 그러니 효자로서, 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거지. 오히려 내가 진희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그게 더 문제가 있는 거야.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언제나 도움이 되는 법이니, 착한 자식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법." 말은 바른 말이지만, 저 녀석이 하니까 기분 나쁘다. 게다가 말이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지만 진희는 싫다고 했어.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대한민국 제일의 악질기업인 전풍그룹의 계승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렇다. 저 녀석은 전풍그룹의 후계자인 것이다. 전풍(錢風). 한마디로 돈바람 그룹이라는 별명이 붙은 전풍그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기업이며 동시에 가장 많은 사업을 벌이는 기업이기도 하다. 기술력과 규모 등 여러 면에서 타 기업의 추종을 불허하며,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제일의 기업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돈바람 그룹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가 문제였다. '세금포탈, 부당이득 챙기기, 정경유착, 뇌물, 기타 등등.'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돈바람 그룹의 악명은 워낙 높았고, 그 덕에 도덕적인 기업들까지도 전풍그룹의 행각으로 인해 이미지가 나빠지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사법당국의 세무사찰이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풍그룹은 한 번도 부정행위가 적발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깨끗한 기업'으로 상도 여러 번 받았다. 아. 그러면 전풍그룹은 좋은 곳이 아니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3천억원을 벌고도 세금 한 푼 안 내다니.' 예를 들자면, 바로 얼마 전에 풍남이 녀석은 주식거래를 통해 3천억원의 이득을 챙겼다. 그게 다 사업수완 아니냐고? 문제는 이득을 챙긴 것이 아니라, 소득세를 한 푼도 안 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적법하게 말이다. 그 일로 인해 여론이 들끓었지만, 불법행위가 없었다는 점으로 인해 아무도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건, 대체 어째서 그게 불법이 아닌 거지? 3천억원이라고. 3천억원 ! 3천원이 아니란 말이야 ! 그 생각을 하니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친다. 게다가. "이봐. 우리 전풍그룹이 얼마나 많은 근로자를 고용하는지 알아? 대한민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그룹이라는 평가는 왜 나왔는데? 전풍그룹이라면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대기업이라고. 세계화의 시대에 이런 대기업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도 몰라? 앞으로는 경제의 시대야. 장래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 전풍그룹을 좋아하고, 우리의 주식은 비싼 값으로 거래되고 있잖아. 그리고 우리 그룹의 사원들은 얼마나 훌륭한데? 국내 최고의 두뇌들은 모두 전풍그룹으로 몰린다는 것도 몰라? 하여간 무식하긴."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다른 말은 넘어가도, '존경'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오지? 그 말만큼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대체 전풍그룹이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그룹인가? "그 말을 믿고 전풍전자의 MP3 플레이어를 샀더니, 10초도 못 가서 고장나더라." 문제는 그것이다. 전풍그룹의 제품들은 디자인은 멋진데, 물건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사항인 신뢰성이 부족하다. 아니, 좀 과도하게 부족하다. 전풍그룹의 애프터서비스가 좋은 이유도, 물건들이 너무 고장이 잘 나서 서비스를 하러 너무 자주 나가는 바람에, 경험이 쌓여서 그렇다나? 그게 얼마나 악명이 높냐 하면. "나도 전풍전자의 휴대전화를 사봤는데, 두 달도 못 가서 고장났어." 저 얌전한 진희조차 불만을 품을 정도면, 말 다 했다. 바로 옆에서 날아온 반격에 잠시 말문이 막히는 풍남이.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 아니,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수야 없지. "그보다 풍남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좀 가르쳐 주라." "뭔데?" 폭발 직전의 표정으로, 거칠게 말하는 풍남이. 그리고. "3천억원을 벌면서 세금 한 푼도 안 내는 노하우 좀 가르쳐줘라. 나 같은 가난뱅이한테는, 그런 노하우가 꼭 필요하거든." 이 질문만큼은 ! 절대 저 녀석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질문은 아니다. 정말 그게 궁금해서 한 질문일 뿐이다. 그러나 물론, 녀석은 그걸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녀석은 화를 벌컥 내며 말한다. "야. 우리 그룹은 불법적으로 세금을 포탈한 적이 한 번도 없다 !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그룹이라는 건, 우리 전풍그룹의 자부심이란 말이다 !" 가장 깨끗한 그룹이라. 나뿐만 아니라, 반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제대로 대응을 할텐데, 기본적으로 상식을 벗어난 발언을 하니 대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 멍하니 굳어져버렸고, 그것은 나와 진희도 마찬가지였다. 굳어진 모두를 바라보면서, "맹목적으로 기업을 싫어해 가지고, 어떻게 장래에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우리 전풍그룹처럼 훌륭한 기업이 많아야, 대한민국의 장래가 밝은 거다." 이 대목에서 모두 쓰러졌다. 적어도 교실내의 인간은 모두 말이다. 나 역시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난 인간이지,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니까 별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넘어지면서 다친 데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진희는 자기 자리에 앉아있던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지만, 기가 막혔는지 멍하니 풍남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고만장한 풍남이만이 그 자리에 서서, 모두를 오만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오빠. 오빠." 아. 역시 내 여동생은 굉장하다. 저런 발언을 듣고도 멀쩡하다니. 아. 저 녀석은 인간이 아니니 당연한 건가. 그녀는 나를 붙잡아 일으키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준다. 이렇게 보니까 이 녀석도 꽤 예쁘게 보인다. 문제는 남들이 볼 때만 이렇다는 점이지만. '평소에도 좀 이렇게 상냥할 수 없냐.' 물론 사람들이 안 볼 때에는, 말 그대로 괴수가 따로 없다. 과거 내가 도시락을 가지고 도망치다가 녀석에게 잡혔을 때에도 그랬다. 사람들이 교실에 없다는 걸 안 순간, 재빠르게 리본을 던져서 내 다리를 묶어놓고, 잡아당겨서 쓰러뜨린 다음 무자비하게 발로 짓밟았다. 물론 도시락은 통째로 빼앗겼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도시락이 엎어지지 않았는지 참으로 신기하기는 하지만, 그 상황에선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는 건, 진희와 문희 정도였지만. '지우 녀석, 그걸 알면 뭐라고 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지우 녀석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내 여동생이 그래도 여자의 탈을 쓰고 있어서 남자한테 그런 모습을 안 보여주려고 하는 탓인지, 그게 아니면 내숭의 제왕이기 때문에 모두들 속아넘어가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동생에게 분노할 틈이 없다. 지금 내 상대는 미인이가 아니라 풍남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풍남이에게 전풍그룹보다 깨끗하며, 국가에 도움이 되는 기업들의 이름을 나열하려고 했지만. "오빠. 수업 시작할 시간이야." 미인이는 나를 강제로 돌려세우고는, 내 자리로 밀어 넣었다. 물론 남들이 볼 때는 상냥하게 어깨를 밀어주는 듯 했지만, 내가 느끼는 건 전혀 그게 아니다. 역시 이 녀석은 괴력의 소유자다.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서, 어디에 쓰려는 건지. 그리고. "풍남이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 수업 시작할 시간이니까. 장래에 훌륭한 회장님이 되려면, 모범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풍남이도 일단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그 녀석은 나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나도 그 눈초리를 피하지 않았다. 결단코 너한테는 진희를 빼앗기지 않는다 ! 4교시가 시작되었다. 자. 이제 한 시간만 버티면 맛있는 밥이 기다린다. 힘을 내자. 하지만 힘을 낼 수가 없다. 힘이 나야 선생님 말씀에 집중할텐데, 그게 안 된다. 도저히 안 된다. 이유가 뭐냐고? 당신도 한 번 그런 소리를 들어봐라. 집중이 되나. "야. 우리 그룹은 불법적으로 세금을 포탈한 적이 한 번도 없다 !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그룹이라는 건, 우리 전풍그룹의 자부심이란 말이다 !" 문제는 이거다.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서,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뭐가 어째?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기업이라고?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인간이 납득할만한 말을 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것만큼은 이해가 안 된다. 중상모략이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풍남이가 상속세를 낸 것만 따져봐도 그 답은 금방 나온다.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인 전풍그룹을 상속받는 만큼, 당연히 세금을 엄청나게 냈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10억?" 아무리 모든 기업을 물려받는 게 아니었다지만, 10억? 내 머리로는 그게 이해가 안 된다. 전풍그룹이 무슨 동네가게라도 되는 줄 아나. '전풍그룹보다 훨씬 작은 기업들의 상속세가 얼마였더라?' 일단 1000억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풍그룹의 상속자가, 세금으로 낸 게 고작 10억? 이 인간이 장난하나. 그룹의 규모를 비교해보면 전풍그룹의 크기는 그런 '작달막한 그룹'의 100배나 1000배는 넘을텐데, 고작 10억? 사기 치지 마라. 뭐 나만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수다의 여왕인 문희가 고작 이 말만을 되풀이하는 것만 봐도, 그 충격의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그룹이라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그룹이라니." 모두들 충격을 과도하게 받은 덕분인지, 4교시는 상당히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일단 4교시를 맡은 선생님도, 앞서 들어왔던 선생님들에 비하면 비교적 정상적인 생김새와 성격을 가졌던 탓에,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가만. 가만. 4교시의 선생님이 누구였지? 풍남이 덕분인가. 그게 아니면 앞의 수업에서 들어오신 선생님들이 워낙 인상이 강했던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역시 정상적인 선생님은 기억할 값어치도 없다는 말인가. 제자로서는 심히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기억이 안 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결국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시면 그 선생님이 섭섭해하시겠지만, 도리가 없다. 나중에 누가 4교시 선생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릅니다."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소리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유감이다. 뭐 기억할 녀석이 이 반에서 한 명 정도는 확실히 있겠지만, 지금은 그걸 물어볼 이유도 없고, 의무도 없다.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고 ! "밥이다 !" 그렇다. 밥이다. 드디어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 아. 해방의 시간인가. 어쨌든 드디어 내 배고픔을 채워줄 합법적인 기회가 왔고, 나는 만세를 외칠 뻔했다. 물론 실제로 외치지는 않았다. 내 옆에 날아들 샤프가 무서웠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밟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을 때에는, 미인이는 절대로 나를 짓밟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 동작 속에, 치명적인 살수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이 녀석의 특징이기도 하다. 샤프를 들고 있지 않더라도, 여동생의 움직임에는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 난데없이 손에서 바늘이 튀어나오지 않나. 지우개를 마구 던지지 않나. 아. 지우개라면 기껏해야 고무니까 문제가 없지 않겠냐고? 직접 맞아보면 안다. 지우개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건, 여동생을 보고서야 알았다. '네가 무슨 중국무술고수냐.' 아무리 천하무적의 여동생이라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다. 오빠가 무슨 사격장 표적지냐. 뭐 생각해보면 밑도 끝도 없으니 그건 이쯤 하기로 하고. 지금 중요한 것은 ! 먹는 것이다 ! 풍남이 녀석이 보면 먹는데 걸신들렸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동생의 탄압에 맞서려면 체력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잘 먹어야 한다. 나는 재빠르게 도시락을 꺼내들었지만. "오빠. 잠깐." 엥? 왜 지금 시비를 거는 거냐? 지금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이란 말이다. 점심시간에 점심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당장 화를 내며 항의를 하려고 했지만, 미인이는 얌전하게 고개를 돌려, 교실 구석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아차." 아. 나의 실수. 그러고 보니 너무나 배가 고파서, 사랑스런 그녀를 잊어버렸었다. 이건 다 제 시간에 밥도 못 먹게 하는 여동생 탓이다. 이걸 풍남이 녀석이 보면 뭐라고 할까. "역시 먹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이군. 그런 주제에 감히 진희를 넘봐?" 일단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된데 대해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진희를 부르려고 손을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하지만. "진희야. 점심 같이 먹자." 한 발 늦었다. 역시 입으로는 문희를 당할 수가 없구나. 진희가 자기 도시락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아니, 달려온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요조숙녀답지 않은 모습인데? 그녀의 뒤를 바라보고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희의 뒤에 거대한 바퀴벌레가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희가 필사적으로 외친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물론 그런다고 안 올 녀석이 아니다. 녀석은 재빠르게 달려왔고, 결국 진희는 그 녀석의 추적을 뿌리치는데 실패했다. 하긴 저 바퀴벌레를 떼어놓으려면, 진희의 발걸음으로는 무리다. 원래 바퀴벌레라는 게, 크기에 비해 엄청 빠르고 끈질기지 않은가. 바퀴벌레의 3억년의 전통을 계승하여, 녀석은 진희가 싫어하든 말든 어디까지나 쫓아올 기세다. 그리고 이럴 때 등장하는 게 바로 나, 공주님이 마왕의 습격을 받아 위험하실 때에는, 당연히 악을 무찌르는 용사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멋지게 일어서서, 진희를 내 등뒤에 숨겼다. 그러나 바퀴벌레는 끈질긴 생물이다. 그러니까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지 3억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번창하고 있지 않은가. 녀석은 잽싸게 내 뒤로 돌아가면서, 진희를 낚아채려고 했지만. "와아악 !" 콰앙. 멋지게 나동그라졌다. 턱을 교실 바닥에 박았으니, 꽤 아프겠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일까. 녀석은 즉시 일어나더니,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야 ! 연미인 ! 사람 발 아래에 뭘 던지는 거야 !" 아하. 역시 미인이의 소행이었구나. 자세히 보니, 교실 바닥에 유리구슬 하나가 굴러가고 있었다. 저걸 풍남이의 발 아래로 던진 건가. 하지만 풍남이가 발을 내려놓는 순간, 구슬이 정확히 그 발 아래로 굴러 들어가게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건가. 아. '여동생의 실력에 의문을 품지 말자.' 직접 몸으로 당해본 내가, 그녀의 실력을 가장 잘 알지 않는가. 이런 경우가 한번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겠는가. 다만 풍남이 녀석이 보기 좋게 나동그라지는 것은 좋다. 매우 보기 좋다. 내 말썽쟁이 여동생도 때로는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그런데 풍남이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이제 어떻게 할 셈이자? 여동생 각하. "풍남아. 구슬을 떨어뜨렸거든. 좀 주워줄래?" 그게 어디가 떨어뜨린 거냐. 고의로 던진 거지. 풍남이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주워주기는 했다. 물론 그 뒤에 녀석은 항의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슬 주워줘서 고마워. 그럼 우리, 점심 같이 먹자." 푸훗 ! 너 미쳤니? 하필 저런 위험물을 식탁 옆에 둘 셈이냐? 화를 내려던 풍남이가, 갑자기 만면에 웃음을 머금는다. 저 승리의 웃음을 묵묵히 지켜봐야 하다니. 하지만 나로서는 여기서 여동생에게 거역할 수가 없었다. 수업시작 첫날부터 여동생한테 맞는 오빠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줄 수는 없으므로.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동안, 풍남이는 어느새 자기 의자를 가져온다. 아니, 어느새 진희의 의자까지 챙겨온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진희의 의자와 자기 의자를 나란히 세워놓는다. "안 돼 !" 내가 한 말이냐고? 아니다. 미인이가 한 말이다. 그녀는 말없이 진희의 의자를 들더니, 문희의 의자 옆에 가져다놓는다. 그리고 자기 의자는 진희의 옆으로, 그리고 내 의자는 문희의 의자 옆으로 가져간다. 아니, 이게 뭐냐? 이건 여동생의 횡포다 ! 내가 항의하려고 했지만, 여동생 각하께서는 냉정하게 무시하신다. 그리고. "자. 풍남이는 여기 앉아." 자기 의자가 놓인 곳을 본 순간, 풍남이의 안색이 심히 일그러진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의자는 하필이면 미인이와 지우의 의자 사이에 놓였기 때문이다. 즉, 바로 옆자리에 진희를 앉히자는 그의 야망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풍남이는 재빠르게 입을 열려고 했지만, 상대는 너무나 강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바로 무적의 여동생이 아닌가. "바로 옆에 앉으면, 진희 얼굴 보기가 힘들 테니까." 그러니까 여동생 각하의 말씀인 즉,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면 밥을 먹을 때의 시선은 앞으로 가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진희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얼굴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힘든다는 뜻이다. 물론 진희 옆에 풍남이를 앉히지 않으려는 수작임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막무가내로 진희의 옆에 앉는다면, 분명히 진희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것이라는 거다. 그걸 계산에 넣었는지, 풍남이는 잠시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미인이가 정해준 자리에 앉는다. 저 바퀴벌레를 순식간에 얌전하게 만들다니, 역시 여동생은 강하다. 다만 이 경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하나 있다. "어? 내 자리가 왜 여기야?" 그러고 보니 지우 혼자만 남자들 틈바구니에 앉았군. 불쌍한 녀석. 일단 점심식사는, 우호적인 분위기 하에 진행되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표현이다. 물밑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진희에게 음흉한 시선을 보내는 풍남이, 미인이와 문희 사이에서 보호받고 있는 진희, 미인이 옆에 앉지 못한 것을 분해하는 지우, 밥을 먹는 건지 수다떠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문희, 그리고 진희 옆에 앉지 못한 것을 슬퍼하지만, 배고픔이 슬픔을 압도하는 나. '걸신들린 거 맞다니까.' 누군가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지만, 나는 열심히 먹으면서, 동시에 풍남이의 행각을 살폈다. 엉뚱한 짓 하면 당장 정의의 일격을 가할 태세로 말이다. 아. 여동생이 걱정되어서 그러냐고? 그럴 리가 있냐. 그 녀석에 대한 걱정은, 이미 오래 전에 한강 물에 떠내려보냈다. 내가 걱정 안 해도, 그 녀석은 절대로 풍남이에게 당할 리가 없다. 게다가. "식사 중에는 다툼 금지 ! 만약 어기면, 가중처벌 하겠음." 이런 의사를 사방으로 내뿜는 듯한 여동생에게, 감히 풍남이가 더러운 손을 뻗칠 수는 없었다. 물론 미인이가 풍남이와 대결할만한 일도 별로 없었지만. 둘이 싸움을 벌이지 않은 이유는 내 여동생이 착해서가 아니라, 풍남이가 미인이와의 싸움을 피했기 때문이다. '악은 악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건가.' 미인이라는 거대한 악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풍남이라는 악은 빛을 못 보는 것인가. 뭐 풍남이가 미인이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은 탓에, 녀석은 내 여동생의 살인적인 무술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 녀석을 위해서는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여동생의 무시무시한 주먹과 발길질에 나동그라지는 풍남이의 모습을 보고싶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아. 재벌가의 아들을 구타하면 뒷일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 여동생이 그 정도로 거꾸러질 인물이면, 내가 이렇게 여동생한테 눌려서 살겠냐. 어쨌든 점심식사는 그런 요인 탓에 그럭저럭 평화로웠지만, 문희로서는 이런 평화가 상당히 따분했던 모양이다. 하긴 입이 근질거리기도 하겠지. 저 녀석에게는 밥 먹는 입과 수다떠는 입이 따로 있으니까. 그래서. "진희는 어느 부에 들어갈 거야? 모처럼의 고등학교 생활인데, 서민적인 취미활동을 하나쯤 해보는 게 어때?" 그렇다. 진희는 아무래도 부잣집 아가씨라서, 평범한 서민의 생활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야 하나. 중학교 시절에도 특별활동을 할만한 부를 찾아봤지만, 결국 집에서 시키는 게 워낙 많아서 아무것도 못했다. 하긴 진희가 다니는 학원이 몇 군데였더라? 그나마 친구라고 있는 건 정계나 재벌가의 아가씨들 정도이고, 평범한 친구는 문희뿐이다. 아. 내 여동생은 뭐냐고? 인간이 아닌 사람은 제외한다. 그래서 이번에 진희는 단단히 결심한 듯 하다. 자기도 좀 평범한 학교에서,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물론 집에서 이 학교에 입학하도록 허락한 것은, 순전히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매우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명문대 진학률이 가장 높은 학교 중 하나.' 이미 이것만으로도 평범함과는 100만 광년쯤 거리가 있으니, 결국 진희로서는 평범한 학교에 입학한다는 꿈은 좌절된 셈이다. 오늘 들어온 선생님들을 보라. 담임선생님은 일단 평범하게 보이지만, 2교시의 윤리선생이나 3교시의 물리선생님은 완전히 기인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선생님들이 있는 이 학교의 명문대 진학률이 그렇게 높은지는 수수께끼지만, 그 덕에 나도 진희를 고등학교에서도 만나게 되었으니 나쁠 건 없다. '뭐 나도 평범한 서민은 아니지만.' 공포의 여동생을 일단 제쳐놓고 보더라도,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약사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할 만 하다. 물론 요즘은 경제가 안 좋아서 의사라고 해도 벌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집에 비하면 충분히 부유하고 윤택한 환경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검소하신 덕분에, 아직도 가정부 하나 두지 못했다. 두 분이 바쁘시다는 걸 감안하면, 언제까지나 미인이에게 모든 것을 맡겨둘 수도 없으니 조만간 적당한 사람을 하나 구해야 하겠지. 물론 그 사람이 젊고 아름다운 누나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나? '당연하지.' 어머니께서 아름다우시고, 담임 선생님이 예쁘신 것으로 충분하다. 가정부로 들어올 사람까지 미인일 턱이 없지. 아마 평범한 아줌마일 확률이 높다. 내년쯤이면 우리도 입시준비로 슬슬 바빠질 테니, 내년이나 내후년이면 확실히 미인이도 가사에서 해방될 듯 하다. 물론 그것은, 여유시간이 생긴 여동생에게 내가 더 많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하지만, 아무리 천하무적의 여동생이라도 입시생이 되면 정신 없이 바쁠 테니, 예상외로 집에서 자행되는 구타나 폭행건수가 크게 줄어들지도 모른다. '이런 걸 기대해야 하다니.' 그런 건 일단 장래의 일이니 넘어가고. 나는 열심히 점심을 먹었다. 일단 말을 할 틈이 없으니 먹기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물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끼어들 태세를 갖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화제랄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진희가 특별히 학교에서 무슨 활동을 한 게 있어야지. 어느 부를 택할지 정한 게 없는 진희로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아. 그럼 진희는 교양도 없고 취미도 없는 멍청한 여자냐고? 그게 아니다. 그녀의 취미나 특기라는 게 하나같이 상류층 아가씨의 전형이니 '평범한' 취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일에 대해서는, 영 아는 게 없는 것뿐이다. 결국 스스로 정할 도리가 없게 된 진희의 해결책은, 친구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문희야. 적당한 곳을 추천해줄 수 없겠니?" 이런 방면에 있어 문희를 자문역으로 택한 것은 적절했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등교 첫 날이니, 문희라고 해도 이 학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없어. 난 신문부나 방송부를 찾아볼 셈이지만, 이 학교는 입시위주라서 형식적으로 간판만 걸려있지 않을까? 일단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거기서 일이 잘 되면,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하나 찾아볼게. 그런데 미인이는 어디로 갈 셈이지?" 음. 잊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내 여동생은 과연 어디로 갈 셈인지 모르겠다. 이 학교에 흑마술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고. 하긴 중학교에도 그런 건 없었지만. "나도 모르겠어. 비행기 관련으로 부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의외는 아니다. 내 여동생께서는 마녀라는 이유 탓인지, 유달리 비행기나 우주선을 좋아했다. 원래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게 특기라서 그런 걸까. 그런 건 철없는 어린아이가 가질만한 꿈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미인이는 내심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내 의견을 묻는다면, 미인이는 차라리 태릉선수촌에 가서 운동선수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의 운동신경이라면, 분명히 올림픽 역사에 남을 대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금메달 3개 정도는 문제없이 휩쓸지 않을까. 그런데 잠깐. 여기서 빠진 사람이 하나 있는데? "잠깐. 문구하고 지우는 축구부로 갈 게 확실한데, 풍남이 너는 어디로 갈래? 역시 부정부패부? 복지부동부? 세금포탈부? 그게 아니라면 재벌모임부?" 역시.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어. 문희의 가시 돋친 말을 들은 풍남이가 화를 벌컥 낸다. 하지만 풍남이 역시, 장래 재벌회장으로서 여기저기 할 일이 많은 탓에, 갈만한 부가 없었다. 덕분에 풍남이도, 원칙적인 대답만을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일단 찾아봐야지. 진희와 같은 부라면 더 좋고." 너하고 진희를 같은 부에 들어가게 놔두느니, 차라리 내가 축구부를 포기하는 게 낫지. 대화가 어수선해지기 전에, 문희가 이야기를 정리한다. "그럼 내일 내가 신문부나 방송부로 가서, 너희들이 갈만한 부를 찾아볼게. 일단 고등학생인 이상, 괜찮은 부를 하나 골라서 3년 동안 애써보는 것도 좋으니까. 그리고 나도 너희들이 어느 부에 들어갔는지 알아야, 기사거리를 많이 긁어모을 수 있고." "불법취재는 사절." 미리 풍남이가 선을 그었지만, 문희는 물러서지 않는다. "학교친구의 취재를 매정하게 거절할 셈이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다. 대 전풍그룹의 차기회장께서 그렇게 매정하고 째째해도 되는 거니? 안 그래도 전풍그룹의 대외이미지가 나쁜데, 차기회장으로서 홍보를 소홀히 하면 안 되지." 명분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 기사거리 확보가 목적이잖아. 하지만 이 학교에 진학하는 녀석들은 상류층이 꽤 많으니, 친해져서 나쁠 일은 없다. 아. 그렇다고 내가 상류층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난 어디까지나 중산층이고, 보통 중산층보다 조금 잘 사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뿐이다. 적어도 나는 일류 호텔에 묵어본 적이 없고, 100평이 넘는 호화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니며, 그저 악랄한 여동생에 시달리는 평범한 고 1 남학생일 뿐이다. 그런데 내일, 진희는 어느 부를 권유받게 될까? 문희의 정보수집능력은 상당하니, 일단 기대를 해봐도 좋으리라. 그리고 그 후의 수업은,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었다. 밥 먹고 나면 원래 졸리기 마련이고, 여동생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든 채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옆구리를 찔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일단 수업은 들었지만, 솔직히 너무 지루했다. 역시 선생님이 특이해야 졸리지 않은 건가. "아. 끝났다." 그리고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이제 집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자. 이제 종례와 교실청소가 기다리는 건가. 그런데 왜 저렇게 웃으시는 거냐. "자. 이제부터 모두들 기대하는 자율학습 시간이에요." "아아악 !" 아.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 자율학습이 남아있었구나. 물론 실제로는 자율이 아니라 타율학습이지만, 명분은 자율이다. 그렇다.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으니. "여러분들의 학력증진을 위해서는 이러면 안 되지만, 오늘은 첫날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자율학습이 없어요. 물론 그래도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도서실로 가도록 해요." "아, 아뇨." 오늘은 첫날이라고. 대체 첫날부터 입시위주의 학교라는 걸 과시할 필요가 있냐? 고 3도 아니고 우린 고 1이라고. 좀 봐줘요. 어차피 앞으로 고학년이 될수록, 점점 공부시간이 늘어날텐데 말이다. 사실 점심때 고민하던 특별활동도, 3학년은 전국대회에서도 유명세를 떨치는 축구부를 제외하면 일체 없다. 그런 시간은 2학년까지만 허용된다. 3학년은 공부밖에 없다. 아.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니까, 어느 정도는 특별활동 같은 것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는 그런 사소한 것쯤은 희생해도 된다는 것이 대한민국 고등학교 학생의 자세다. 비참하지만 그렇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대체 입시가 뭐기에. '뭐 어쨌든 지금은 집에 갈 수 있으니까.' 물론 내일부터가 문제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건 내일 문제고, 적어도 오늘은 특별활동도 없다. 자율학습도 없다. 물론 학원도 없다. 가서 놀자 ! 아.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할 일이라면. "축구부로 가자 !" 지우 녀석도 그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되었기에, 나는 지금 당장 축구부 부실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고등학교 생활에서 할 특별활동이라면, 당연히 축구부가 아니겠는가. 내가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일본 축구선수들은 매우 기뻐할 것이며 중국 축구선수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매우 슬퍼할 것이 틀림없으며, 우리나라는 월드컵 우승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건 국가적인 손실이므로, 당연히 나는 축구부로 가야 했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다른 운동부는 몰라도. "축구부만큼은 대한민국 제일이니까." 다른 운동부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다. 그리 잘 하는 부분이 없다. 다만 예외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축구부다. 적어도 축구만큼은 대단한 실력자들이 모여있는 명문 고교이고, 전국대회 우승경력도 몇 차례 있는, 우리학교 운동부 유일무이의 자랑거리다. 그래서 내가 이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기뻐한 것이기도 하고, 사악한 여동생이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를 택한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무조건 공부만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 학교에서, 유일한 예외가 축구부일 정도니까. "그럼 내일 봐." 진희와 문희는 그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진희에게는 거대한 자가용이 있으므로, 귀가할 때는 교통지옥을 헤메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 문희도 리무진이 있는 거냐고? 물론 그건 아니고, 진희 '아가씨'를 모시러 오는 리무진에 편승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풍남이 역시, 전풍자동차에서 만든 집채만한 대형 리무진을 타고 돌아갔다. 재벌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안전상 저런 괴물을 타고 다닌다나? 하지만 저러면 오히려 더 눈에 띄잖아? 뭐 어차피 가만 놔둬도 눈에 띄는 인물이지만. "지우야. 가자." 그쪽은 이쯤 하고, 나는 지우와 함께 축구부 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내 앞길을 막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으니. "잠깐 !" 그 그림자는 하필이면 여동생이었다. "오빠. 오늘은 보낼 수 없어." 힉 ! 왜 ! 어째서 ! 왜 내가 축구부에 가는 걸 가로막는 거냐. 하지만 미인이는 말없이, 자기 배낭에서 몇 개의 가방을 꺼내어 흔든다. "장보는 게 먼저야." 그 가방의 크기를 보고, 왜 그녀가 날 데려가려는지 깨달았다. 이유가 뭐냐고? 뻔한 게 아니냐. 어마마마께서 바쁘시다는 이유로 미인이에게 장보기를 부탁하셨고, 그래서 미인이는 시장에 대신 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내 여동생과 함께 장보기를 하게 되면, 내가 맡는 역할은 언제나 뻔하다는 것이다. '화물 운송용 트럭.' 즉, 이 녀석은 날 짐꾼으로 써먹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끌려갈 순 없다. 오빠를 트럭으로 착각하는 여동생의 마수에 맞서야 한다. "하지만 난 오늘 축구부에 가입해야 해 !" 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이대로 밀릴 여동생이 아니다. "지우한테 부탁하면 돼." 대답 한 번 빠르다. 하지만 나의 반격이 이어진다. 레프트 스트레이트. "당사자가 직접 가야지. 선배들한테 얼굴은 비춰야 할 게 아냐." 그러나 상대는 그걸 재빠르게 피하면서, 잽을 한 발 날린다. "그럼 내일 가입하면 돼." 잽이 왜 이리 타격이 크지?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오른팔을 크게 휘두른다. "야 ! 10분만 기다리면 된단 말야 ! 그것도 안 되냐?" 하지만 아무리 내가 애절한 심정으로 펀치를 휘둘러도, 상대가 안 맞으면 도리가 없다. "안 돼. 빨리 안 가면 싱싱한 생선과 과일을 구하기가 더 힘들어." 이 녀석,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하다 못해 KO패라도 면하려면. 매달리기 ! "오빠의 장래가 중요하냐? 그게 아니면 과일이 중요하냐?" 상대를 끌어안고 상대의 펀치를 피한다. 그러나 이런 낡은 수법이 통할까? "오빠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오늘 시장에 가야 해." 날아오는 어퍼컷. 나는 패배를 직감했지만, 마지막으로 피하려고 몸을 뺀다. "왜?" 그러나, 상대의 어퍼컷은. "그야 오빠의 자명종 시계를 하나 사야 하니까. 안 그러면 오늘 아침처럼 내가 깨워주면 되고." 어퍼컷이 내 턱을 날려버리고,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오늘도 여동생한테 패하고 마는구나. 본전도 못 찾고 나가떨어지는 나. 그러니까 여동생 폐하의 말인즉슨, 여기서 내가 시장에 안 따라간다면 내일 아침에도 발차기로 날 깨울 거라는 뜻이다. 그건 안 된다. 프라이펜이나 발차기는 그럭저럭 감당한다고 해도, 식칼이라도 휘두른다면 큰일이다.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여동생한테 지는 건 일상사이지만, 오늘도 결국 또 지고 말았다. 왠지 분하다. 무지무지하게 분하다. 어떻게 된 게 이기는 날이 없냐. 게다가 이럴 때 날 응원해줄 진희도 문희도 이 자리에는 없다. 비참하다. 아. 내 옆에 지금 친구가 한 명 남아있지 않느냐고? 그게 친구냐? 이럴 때 지우 녀석이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지우 녀석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누군데. 감히 '그녀'를 지우가 막아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그럼 나도 내일 가입하면 되겠네. 첫날부터 정신 없이 뛰고 싶진 않거든." 그것 봐라. 이런 친구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 친구는 좀 가려서 사귀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탓에 이 꼴이다. 남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맞장구를 치다니. 눈물을 좔좔 쏟는 나에게 가해지는, 여동생의 주먹. 권투에서도 쓰러진 상대에게 주먹질은 안 하는데, 이미 KO된 사람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이번엔 오빠 자명종 시계는 내가 고를 거야." "뭣이?" 그 주먹 한 방은 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니. 내 시계를 왜 네가 고르냐? 당장 항의하려고 하지만. "첫째. 오빠의 잠버릇을 감안해서. 오빠의 수면습관으로 보아, 자명종 시계는 무조건 튼튼한 걸로 골라야 해. 안 그러면 또 박살날거야. 나도 오빠 깨우느라 고생하는 건 힘들거든. 그리고 둘째. 오빠한테 맡기면 정신건강에 안 좋은 이상한 시계만 고르니까." "정신건강에 안 좋다고?" 간신히 반격을 가했지만, 태풍 앞에 선풍기 바람이 힘을 쓸 리가 없다. "응. 오빠는 홀랑 벗은 여자 그림이 있는 시계만 고르잖아." "야 !" 아니, 이 녀석이 날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야? 누가 들으면, 나를 엄청난 저질로 착각할 게 분명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새 지우 녀석도, 미인이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져가고 있으니까. 의리 없는 녀석 같으니. 그래. 너 같은 친구에게 의지하려고 한 내가 잘못이다. 나 스스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마. "뭐가 홀랑 벗었다는 거냐. 다들 입을 건 입고 있다고 !" 내가 언제 여성의 나체사진이라도 그려진 시계를 샀냐. 난 어디까지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소녀라 불리는 전형적인 여자아이들의 그림을 선호한 것뿐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멋들어진 옷을 입고 있으므로, 미인이의 말은 틀린 셈이다. 그러나. "그 그림들, 하나같이 노출광들만 그려놓았던데? 가슴은 거의 다 보이고, 치마는 너무 짧아서 속옷이 다 보이고, 배꼽도 내놓은 데다가 팔에는 소매조차 없고, 다리는 허벅지까지 모조리 노출시켰잖아. 게다가 눈은 대뇌의 절반은 될 것 같이 크고. 오빠 취향은 혹시 외계인 아냐? 아무리 봐도 그 눈알 크기를 보면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외계인 아냐 !" 이 녀석은 만화에서 중요시하는 데포르메(DEFORMER DEFORMATION)도 모르냐. 그러니까 데포르메라는 것은, 현실의 사물을 있는 상태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일부를 과장하거나 형태를 바꿔서 표현한다는 뜻이다. 나는 내 여동생에게 그 점을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만히 놔두다가는, 내 취향이 외계인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져나갈지도 모른다. "그게 다 데포르메라는 거야. 사람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과장을 덧붙이는 거지. 만화는 삽화가 아니니까, 당연히 어느 정도의 과장을 덧붙일 수 있는 거야."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리고 말야. 사실 너한테는 비현실적이니 뭐니 해도, 이왕이면 잘 빠진 여자가 보기도 좋다고. 만약 실제의 여성을 그대로 묘사할 경우, 대부분은 못생긴 추녀로 나타나게 되는...." 갑자기 숨이 막히고 몸이 굳어진다.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오려고 하지만, 그것은 금새 사그라든다. 머리가 멍해지고 앞이 캄캄해진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벽에 기댄다. 억지로 숨을 쉰다. 이대로 쓰러진다면, 그것은 여동생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니까.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남의 취향을 걸고 넘어가지 마."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소녀가 좀 현실과는 다른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야 하다. 하지만 그것가지고 따질 자격이 과연 내 여동생에게 있는가? 없다. 절대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인간이 바로 내 여동생이 아닌가. 아니라고? 과연 그럴까. "너도 그렇게 생겼잖아." 그렇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내 여동생의 생김새는, 기본적으로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여자아이라면 피부에 적당히 흉터도 있기 마련이고, 약간 살도 찌기 마련이며, 가슴이 작다고 고민하기도 하고, 화장을 안 하면 얼굴이 보기 싫을 때도 있는 법이다. 진희의 경우는 원래 엄청난 부유층이라서 몸에 상처가 생길 일은 거의 없고, 문희의 경우는 아예 대상에서 제외다. 문희의 얼굴은 표준형보다 약간 나은 수준일 뿐, 절대로 특별한 미녀가 아니니까. 그런데 내 여동생은, 전혀 그게 아니다. '이러니까 내가 널 마녀라고 생각하지.' 물론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여자처럼, 그렇게 환상적으로 생긴 건 아니다. 그러나 내 여동생은, 기본적으로 눈이 약간 크다. 물론 보통 사람보다 약간 큰 정도이지만, 어쨌든 큰 건 큰 거다. 몸매는 어떻냐고? 내 여동생이라는 인간은 식사를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몸매는 언제나 그대로다. 특히 상당히 크면서도 균형이 딱 맞는 가슴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수영장에서 한 번 여동생의 가슴을 봤더니, 말 그대로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렸다. 대체 그게 뭐냐. 게다가 몸매는 또 왜 그렇게 좋은지. 뭘 먹고 그렇게 큰 거냐. 여동생아. '그것뿐이면 말도 안 한다.' 대체 피부에는 왜 상처 하나 없냐. 피부색은 완전히 상아빛인 데다가, 머리카락은 말 그대로 바람이 불면 마구 나부끼는 깃발 같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군대에라도 복무하셨는지, 질서정연하게 흔들린다. 마구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대체 머리손질을 어떻게 한 것일까. 물론 머리카락의 색깔이 갈색이나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인 것은 아니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게다가 머리카락의 검은색은 염색이라도 했는지 확실하게 검다. 거짓말 안 보태고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들이 보면 부러워서 기절할 수준이다. 이게 인간의 외모냐. 오죽하면. "저렇게 완벽한 여동생을 두다니, 너도 참 복이 많구나. 문구야." 지우 녀석이 자주 하는 말이다. 아마 그 녀석이 미인이에게 반한 이유도, 99%는 바로 저 초현실적인 외모 때문일 것이다. 그 덕에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손녀의 이름을 제대로 지었다며 기뻐하셨고, 일가친척들도 모조리 칭찬 일색이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예뻐진다. 성형수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물론 하늘은 공평하사.' 내 여동생의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만약 성격이 외모를 결정짓는다면, 내 여동생은 아마 세계 최악의 추녀일 것이다. 오죽하면 내가 미인이의 장래 결혼문제를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겠냐. 오빠를 발로 밟아서 깨우는 것부터가, 이미 착한 여동생과는 거리가 멀다. 아주 멀다. 지구 반대편에 있다. "난 그렇게 눈이 크지 않아 !" 자기가 눈 큰 외계인과 동류라는 사실을 부정하듯이, 미인이가 반격을 한다. 그러나 그 반격은 왠지 미약하다. 하긴 자기가 뭔가 비정상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는 건가. 자. 여동생이 화를 내느라 침착함을 잃은 지금이 찬스다. 나는 쐐기를 박듯 외쳤다. "어쨌든 자명종 시계는 내가 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 "자. 그럼 이제부터 시계를 사러 가자." "응." 서로를 노려보는 나와 여동생. 결국 둘이 한참 싸운 결과는, 둘이 같이 고르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이 정도면 오늘은 꽤 선전한 셈이라고 할까. 물론 시장에서 산 물건들은 모조리 내가 들고 간다는 점에서, 나의 패배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지만. "으. 무거워." 뭘 이렇게 많이 사냐. 이건 과소비다. 나는 짐을 질질 끌면서 여동생의 뒤를 따라갔지만, 자기는 하나도 안 들면서 나한테만 다 들게 하다니 이건 남녀평등에 위배된다. 너도 하나쯤 들어라. 그런 나의 원망이 닿았는지, 미인이는 뒤를 돌아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알았어. 나도 하나 들게." 그리고, 내 여동생은 가장 큰 짐을 골라갔다. 이봐. 아무리 네가 힘이 좋다고 해도, 그건 꽤 무거운 거 아냐? 그 쌀가마니는 20kg은 된다고. 그러니까. ".........." 내가 걱정을 왜 했지? 여동생께선 그 무거운 쌀가마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든다. 아. 정확히 말하면 드는 건 아니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바퀴 달린 가방을 꺼내서 거기에 실었다. 이봐. 그런데 아까는 왜 안 꺼냈냐. "야. 그런 게 있으면 나한테도 줘야지." 하지만 항의는 묵살됐다. 정도 없는 여동생의 대꾸는. "운동선수는 무거운 걸 들어야 체력단련이 되잖아." 그래서 날 골탕먹이려고 안 꺼낸 거였냐. 자기가 눈 큰 외계인 취급을 받은 게 그렇게 한이 맺힌 거냐.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짐을 든 채 여동생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원래 외교라는 건, 서로 주고받는 게 기본이다. 이번의 시계 구입 건도 결국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미인이는 튼튼한 시계를 샀으니 그걸로 되었고,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모형을 구했으니 그걸로 참아야 할 듯 하다. 나는 끝까지 내 취향의 시계를 구입하려고 했지만. "그래서, 지난번처럼 1년도 못 가서 시계를 부숴 먹으려고? 그렇게 아끼는 외계인 그림도 같이 찢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여기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고, 결국 나는 여동생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거래의 대가로, 여동생은 나에게 원하는 물건 하나를 구입할 권리를 주었고, 그래서 1/6짜리 여자모형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런 걸 피규어라고 하는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 인기 높은 여성(남성도 있지만 그건 논외다)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보통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재료가 좋아져서 꽤 튼튼한 게 많다. 내가 집어던져도 파손되지 않을 정도인 건 아니지만. "모처럼이니까, 잘 보존하도록 해." 그나마 내 여동생의 좋은 점은, 이런저런 불평을 하면서도 오빠 물건을 잘 지켜준다는 것이다. 전에 어마마마께서 내가 모은 피규어를 몽땅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을 때, 그래도 오빠 물건이라고 말을 해줘서, 어떻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명절 때 친척 애들이 놀러와서 내 수집품을 모조리 파괴하려고 날뛸 때도, 여동생이 나서서 그런 비극을 막아주었다. 이봐. 새 피규어를 샀다고 갑자기 여동생 칭찬을 하니까 이상해? 됐네. 됐어. 이럴 때라도 칭찬해줘야지. 내가 뭐 여동생 못 잡아먹어서 안달한 불량오빠인줄 아나? "자. 그럼 오늘 저녁은 뭘로 할까?" "알아서 해." 싱글벙글 웃는 내 얼굴을 보더니, 미인이가 한 마디 한다. 왠지 한심하다는 투다. "외계인 인형 하나 산 게 그렇게 좋을까." 하지만 뭐, 지금은 좋다. 기분이 매우 좋다. 무지무지하게 좋다. 날아갈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저녁 문제라면, 뭐 미인이가 알아서 해도 된다. 내 여동생의 요리솜씨는 상당히 좋은 편이니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이야. 힘내." 그렇다. 내일은 축구부에 가입도 해야 하고, 미인이도 특별활동부를 골라야 하고, 그 외에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뭐? 입시준비는 어떻냐고? 안 그래도 머리 아프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축구선수답게, 나도 열심히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야 한다. 공부와 운동의 병행이 쉽지는 않겠지만, 해내고 말테다. 그래야 나도 나중에 세계적인 명선수가 되고, 축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 나와 미인이가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는 그 때, 난데없이 사고가 터진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빠 ! 위험해 !" 오늘 산 물건을 들고, 힘겹게 길을 걷던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승용차였다. 뭐? 승용차가 왜 거대하냐고?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럼 안 크게 보이냐. 내가 뭐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미인이는 옆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몸을 피한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면 나는? 미인이가 서 있는 곳이 찻길 쪽이었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길의 안쪽. 그러니까 건물들과 미인이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런데 미인이가 몸을 피하고, 그 자리에 승용차가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그 승용차가 지금 건물 쪽으로 돌진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승용차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미 피할 수 없다. "오빠 !" 여동생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콰앙. 미처 몸을 피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차와 충돌했고. 부웅. 사람이 죽을 때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말은 사실이었을까. 나는 허공으로 날아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도 펼치지 못하고. 진희에게 고백도 못해보고. 그리고. "?" 어, 어째서 그 녀석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보통 죽어갈 때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아니었어? 진희를 떠올린 것도 아니고, 100보 양보해서 문희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여동생 얼굴이 떠오를게 뭐냐. 안 돼 ! 이건 말도 안 돼 ! 난 여동생에 목매는 변태가 아냐 !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면, 두고두고 놀려댈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오빠 !" 그래. 너도 가끔은 간절하게 외치기는 하는구나. 하지만 그 모습은 곧 멀어졌다.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의 길은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파란 하늘만 보인다. 비록 도시의 하늘이라 그리 맑게 보이지는 않지만. 비록 그 빛은 어느새 핏빛으로 바뀌었지만. 배에서 이상한 느낌이 왔다. 마치 배에 커다란 덩어리가 파고 든 듯한 기분이다. 이것이 죽음의 느낌일까. 목구멍을 기어올라오는 기운. 지금이라도 입을 벌리면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아니, 이미 튀어나오고 있다.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피.' 이게 내 인생의 끝인가. 아직 진희에게 고백도 못해봤는데. 문희와도 싸우기만 했지, 소꿉친구에게 더 정답게 대해줄 수도 있었는데. 심지어 풍남이 녀석까지도 지금은 그리울 뿐이다. 내 여동생도, 이제는 만날 수 없다. 내 입에서 뿌려진 피가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나는 뭔가에 부딪친다. 내 몸이 무너진다. 이렇게 죽는구나. "오빠 !" 주위가 회색 빛으로 바뀌었다. 여기는 어디냐. 주위가 어두컴컴한 걸로 보아, 일단 평범한 세상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모든 일은 확인이 중요하다. 눈을 떠보자. 깜박. 깜박. 눈을 깜박여본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온통 주위가 검은색인데, 뭘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거. 뭐야. 설마 정말 죽은 거야?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가만. 가만. 심장이 어떻다고? '일단 심장은 뛰고 있는데?' 그럼 안 죽은 건가. 그렇지 않으면 죽은 사람도 심장이 뛰는 건가. 난 죽어본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일단 몸부터 일으키고 보자. 어디 보자. 내 팔다리가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안 된다.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는 있는데, 그게 팔다리에 전달이 안 된다. 가만. 가만. 이건 혹시. "엑?" 설마, 난 전신마비상태에 빠진 건가? 안 돼 ! 누가 이런 악질적인 운명을 예비해뒀단 말인가 ! 눈은 뜰 수 있고, 귀는 열려 있다. 심지어 입조차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팔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거 큰일이다. 이대로 계속 누워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이제 축구선수도 될 수 없고, 진희와 결혼할 수도 없는 거야? 정말 최악이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사랑도 꿈도 다 빼앗기고, 남은 것은 오직 절망뿐이란 말인가.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평소에 미인이에게 맞을 때 흘렸던 것과는 다른, 진짜 파멸의 늪에 빠진 사람의 눈물이. "이런 건 흘리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다. 지금으로선 오로지 그것만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건져줄 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 늪은 나를 빨아들인다. 바닥이 없는 구멍 속으로, 나는 서서히 사라져간다. "안 돼 !" 이런 건 싫어. "안 돼 !" 나는 비명을 질렀다. 전신마비라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 누가 아니라고 해줘. 이런 현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안 돼. 절대로 안 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해. 그런 나의 이마를 짚는, 소녀의 손. "진정해. 오빠." 그래. 너냐. 이럴 때 그래도 옆에 있어주는구나. 하지만 이 오빠는 이미 불구가 된 몸, 너에게 짐만 되어서 미안하구나.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소리지만, 이럴 땐 문제가 다르다. 미안하다. 미인아. 너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주다니. 나는 오른손을 뻗어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가만. 오른손? "?" 뭐야. 이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째서 지금은 움직이는 거야?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나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동자. "오빠. 지금은 가만히 있어 줘. 곧 119 구조대가 올 거야." 바닥에 쓰러진 내 옆에서, 미인이는 그렇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어, 내 얼굴을 닦아준다. 그리고 내 오른손을, 다시금 바닥에 내려놓게 한다. "일단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자세한 건 병원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오빠는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야. 너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오빠는 전신마비 증세를 일으켜서 지금 지옥에 한 발을 걸쳐놓고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너는 그렇게 태연할 수 있냐. 불평이라도 하고 싶지만, 지금은 농담할 기력이 없다. 차에 정통으로 부딪친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는 탓이다. 그런데 내 오른손은, 어떻게 움직인 걸까. 설마, 정말로 전신마비까지 간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희망을 품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네? 정말로 문제가 없는 건가요?" 미인이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니, 어머니의 말소리까지 겹쳐 있다. 그럼 여긴. "물론. 지금 막 검사가 끝났는데, 아무 이상도 없다고 나왔어. 차에 치인 것치곤 대단한 행운이야." 이건 아버지의 목소리인데. 그 말을 들은 미인이가 나에게 뛰어든다.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내 품에 안겨버리는 여동생. "우아앙. 오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여동생의 등을 두드려서,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봐. 차에 치인 건 나라고. 어째서 네가 그렇게 울고 있니.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다. 여동생이 잠시 울다가, 겨우 진정되었는지 자기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녀는 내 뺨에 자기 뺨을 비비면서 중얼거린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오빠." 아직도 울먹이는 미인이. 얘 생각보다 울보 아냐? 옆을 보니, 약사 가운을 그대로 입고 계신 어머니와, 청진기를 목에 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놀라셨길래. 왠지 면목이 없다. 물론 이번 사고는 내가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생긴 게 아니긴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다." 아바마마의 진단결과로는, 다친 곳은 전혀 없다고 한다. 물론 차에 직통으로 부딪쳤다면 영안실로 직행했겠지만. 다행히도 차에 치이긴 했어도 가벼운 상처만 났단다. 차가 나와의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나. "5mm 차이로 살아나다니, 운 좋은 놈이야." 아버지의 직장동료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동차와 5mm만 더 가까이에 있었다면, 그대로 내 목숨은 날아갔을 거라는 거다. 일단 치료는 받아야 하겠지만, 이 정도 상처라면 금방 회복될 거란다. 피부가 살짝 긁힌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라 그렇단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난 분명히 차에 부딪쳤는데?' 그런데 왜 저런 허위정보를 전해주시는 거지? 혹시 치료할 수 없어서, 마지막 가는 길에 안심이라도 시켜주려고 그러시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 밝다. 내 여동생? 울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가 없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감각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분명히 나는 차와 부딪쳤고, 그대로 배가 찢겨지면서 내장이 튀어나왔다. 나는 피를 토했고,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이 정도라면 전신마비가 아니라, 그대로 사망이다. 그런데 내가 왜 중환자실도 아니고, 일반병실에 그냥 누워있는 거지? 아버지가 이 병원의 의사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없어서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세상에 어느 병원이, 자기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의 가족이 입원한다는데 병실이 없다며 물리치겠나. '설마, 정말로 경상인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금전의 그 찢겨지는 듯한 고통은, 분명히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중상을 입은 환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몸을 일으켜보았다. 만약 내가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없으리라. 하지만. '?' 내 몸은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덕에 모처럼 외식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병원에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셨지만. "병원밥이 맛이 없다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딸도 알아요." 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의해, 결국 근처 갈비집으로 가게 되었다. 일단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1주일 정도는 무리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엄명이 내렸다. 그런데 그 운전사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하시는 말씀은.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 죽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하던데."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시는지, 어머니께서 고개를 저으셨다.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사랑스런 아들이 허마터면 그 꼴이 날 뻔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으시진 않겠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미인이가 내게 갈비 하나를 내민다. "오빠는 이거 먹고 기운이나 차려. 얼마나 놀랐는데." 가족 전체의 무언의 압력에 못 이겨, 나는 갈비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떨어진 후였다. 어머니께선 오늘 일 때문에 약국을 쉬시는 모양이다. 물론 어머니의 약국은 작은 규모가 아니니까 약사라면 어머니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으니 문 닫을 일은 없지만. 나는 컴퓨터에 가서 전원을 켜려고 했지만. "오늘은 일찍 자라." 첫 날이라고 숙제도 없어서, 오늘은 밤새도록 컴퓨터를 돌려볼까 했더니, 완전히 망했다. 게다가 오늘 빨리 자라는 이유가, 그 교통사고에 있으니 만큼 반론도 꺼낼 수 없다. 부모님과 미인이의 압력에 못 이긴 나는, 도리없이 침대로 밀려들어가고 말았다. 아. 씻지도 않고 그냥 들어갔냐고? 그럴 리가 있냐. "그럼 잘 자라. 문구야." 어마마마의 엄명. 그리고 내 방의 불이 꺼졌다. 하지만 말입니다. 본인은 팔팔한 고교생으로서, 컴퓨터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있는 당당한 신세대란 말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축구부에 들어가면, 컴퓨터에 손댈 시간이 크게 줄어들 테니 오늘은 좀 봐줘요.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 교통사고로 인해 받은 충격이 꽤 크시나보다. 하긴 약사일만 하시고 고등학생 남매를 돌보지 못한다고 자책하시던 분인데, 오늘 일로 얼마나 놀라셨겠는가. 나는 일단 착한 아들이 되어 잠을 자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는 도리없이, 등불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문과 창문을 가려버렸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 두었던 게임용 DVD를 꺼냈다. 물론 그 전에 컴퓨터를 켜야 할 것이다. 컴퓨터를 켜자, 운용체제로 깔아둔 소프트웨어가 작동한다. [Doors 9000] 미국의 휴이 소프트에서 만들어낸 컴퓨터 운영체제가,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물론 본인은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스피커를 꺼놓았으므로 그 소리는 침묵속으로 사라졌다. Doors 9000이 움직이면서 아름다운 소녀가 컴퓨터의 시작을 알렸다. 미국 소프트웨어치고는 의외로, Doors 시리즈는 여자아이가 나와서 사용자를 안내하는 프로그램이다. 여자아이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게임을 하려는 내 뒤에 들리는 소리. "오빠 !" 뭐야. 지금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눈 딱 감고 무시하려는 내 귀를 건드리는 그 목소리. "오빠." 내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빠. 오빠." 아니야. 이건 환청일거야. 나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조용히 움직였다. 어차피 스피커를 쓰는 것도 아니고, 발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며, 바깥으로 빛이 나가지 않게끔 문에 만반의 조치를 취해둔 상태다. 게다가 문도 잠가놨고, 밖에서 눈치 채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몰래 마우스를 움직인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게임을 하랴.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사라지면 당장이라도 게임을 할 수 있게, 게임용 DVD를 컴퓨터에 집어넣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DVD롬을 닫지 않고 대기한다. 기다리는 지루함을 잊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도 배회한다. 하지만 1분도 되기 전에. 덜컥. 에? 어떻게 열었지? 분명히 문을 잠가두었는데? 그리고 문밖에는 여동생의 분노한 얼굴이 있었다. 그녀가 부글부글 끓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이거 큰일났다. "오빠. 당장 컴퓨터 끄고 자." 내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무시하면서, 여동생은 잠자코 컴퓨터를 끄려고 다가왔다. 하지만 이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어마마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애걸했다. 비참하다고? 하지만 정면으로 붙어서 이길 상대가 아닌 걸 어떻게 하냐. "제발 오늘은 좀 봐 주라. 나도 게임 좀 하자." 그러나 물론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는 법. 여동생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차 사고 난 사람이 무리하면, 내일은 어쩌려고 그래? 냉큼 불 끄고 자 !" 팔짱을 낀 여동생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녀석을 설득할 수 있는지 고민했지만 컴퓨터는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금, 컴퓨터가 갑자기 멈춰버린 것이다. 그리고 뜨는 문장 하나. [컴퓨터 실행 도중,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었으므로 작업이 종료됩니다. 계속 이상이 발견되면 컴퓨터를 다시 시작해 주십시오] 컴퓨터까지 날 놀리는 거냐. 결국 나는 게임을 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또 게임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게임 DVD는 통째로 압수 당하고 말았다. 내가 다 나았다고 생각되면 돌려 준다나.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가장 재미있는 걸 가져가다니. 이건 횡포다. 간신히 살아난 오빠한테 이럴 수 있느냐. 하지만 항의는 해보지도 못했다. 뭐라고 입을 벙긋거리기도 전에. "오빠는 환자니까, 잔말말고 자. 어서 자. 훠이훠이." 결국 강제로 컴퓨터는 꺼지고, 나는 침대로 밀려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려고 해도, 여동생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안 된다. 게다가 큰소리를 내면 어마마마께서 오실 테고, 그러면 한바탕 깨질 거다. 오늘 차에 부딪친 녀석이 무리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더 부라리고 나갔다. 아이구. 치사한 녀석 같으니. 나는 게임도 못 하냐.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자. 잠시 기다리는 거다. 여동생이 조용해질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밖이 잠잠해지자 나는 살며시 일어났다. 자. 이번에야말로 컴퓨터를 다시 켜고, 제대로 게임을 해보자. 그러나. "아. 오빠. 이거 잊을 뻔했네." 일어나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에 나타나는 여동생. 나는 일어나려다가 깜짝 놀라 침대에서 그냥 떨어져버렸고,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방바닥을 뒹굴었다. 내 꼴을 본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쳐다본다. "아프면 아픈 사람답게 행동해 줘. 오빠." 물론 오늘 다친 건 아니지만, 죽을 뻔한 건 사실이다. 그녀가 날 걱정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말야. 하고 싶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 게임하고 싶어. 이건 신세대 고교생의 당연한 의무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틈에,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내민다. "어서 자. 여기 새 자명종 시계도 가져왔으니까 머리맡에 놓고. 내일도 학교 가야 하잖아?" 어떻게 이걸 가져온 것이냐. 분명히 이건 오늘 시장에서 구입한 그 시계인데. 사고가 나서 난리법석을 떠는 와중에도, 시계만은 챙겼단 말이냐. 장하다. 여동생아. 하지만 이게 있다면. "내 피규어는?" 다시 한 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는 여동생. 하지만 그게 얼마짜리인데. 요즘같이 물가가 마구 뛰는 세상에서, 그거 하나가 얼마나 비싸고 귀중한 건지 아냐.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대단한 행운이라고. 결국 여동생이 혀를 차며, 자신이 가져온 그 피규어를 내밀었다. "이래가지고 언제 제대로 된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 내 입이 함지박만 해지는 걸 본, 여동생의 한탄이었다. 그러는 틈에 나는 내 침대로 돌아가서, 새로 산 피규어를 쳐다보며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이제 여동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다시금 게임을 하는 거다. 이번엔 들키지 않게. 하하하. 하하하. 하지만 내 웃음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긴장을 늦춘 사이, 난데없이 내 입을 솜으로 틀어막는 그녀. 나는 순간적으로 당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그러나 내 말은 더 이상 나오지 못했다. 천하에 치사한 녀석. 오빠한테 마취제를 쓰는 여동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 나는 항의하려고 했지만, 이미 내 의식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여동생한테 당해왔으면서도, 또 당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어머니의 약국에서 가져온 걸까. 아버지의 병원에서 가져온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전에 게임하지 말고 30분 정도만 기다릴 걸. 그런 때늦은 후회를 하며, 나는 잠들고 말았다. 분하다. "잘 자. 오빠." 여동생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오빠 뒤치다꺼리는 정말 힘드네. 이래서야 나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럴까." 나는 팔짱을 끼고, 오빠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취제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게임을 멈추지 못한다니.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게 축구이고, 그 다음이 게임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바보. 바보. 바보. 오빠 바보. 대체 오늘 자기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는 거야?" 잠든 오빠의 잠자리를 정리해주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죽을 뻔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태평할까. 역시 남들이 멀쩡하다고 하니까, 순진하게 그냥 믿어버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직도 의혹은 남았지만, 분위기에 눌려서 말을 하지 못한 걸까. 물론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아마 후자이리라. 하긴 이번에는 내가 좀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은 자기 몸도 생각해줘야 할 게 아냐." 덜렁이 오빠를 돌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내가 마법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런 잔소리 많은 여동생 역은 어렵다. 한시라도 눈을 떼면 사고를 만나니, 어디 안심할 수가 있는가. 그 문제는 조금 있다가 처리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복도에서는 마음대로 혼잣말도 할 수 없다. 그게 내 운명이다. "바보. 바보. 바보. 오빠 바보."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서, 조용히 정신을 집중한다. 방안에 남겨두었던 마법진이 다시금 발동한다. 소리도 없이. 아무 빛도 없이.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정교한 마력의 그물을. 방안의 일을 누구도 모르는 상태가 되자, 나는 옷을 벗었다. 평상복은 이럴 때 어울리지 않는다. "매일 밤마다 이래야 하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내가 처음에 마법을 익힐 때부터 따라다닌 숙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밤마다 이어지는 마법의 수행. 그리고 도시 전체를 관찰하는 것. 적과의 싸움. 이런 것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낭만적이고 흥분되는 일이겠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매 초마다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큰 부상을 입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거기에 나에게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내 정체를 감추는 일까지 더해지고 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환상 마법으로 내 얼굴을 가리는 것도, 그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힘들다. 특히 오늘처럼 불의의 사고가 터져서, 오빠가 중상을 입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해도 오빠는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늘 일로 인해 오빠도 나에 대한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오빠는 현실 안에 사는 사람이다. 아무리 나를 보고 마녀라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마법을 쓰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잔소리 심한 여동생에게 시달리니까,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녀'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마법소녀임을 오빠가 알게 된다면? "내가 장난한다고 하던지, 그게 아니면 그 말을 믿었다가 위험에 빠지게 되든지." 단적인 예로, 오늘 오빠가 정말로 척추가 부러져서 전신마비 상태에 빠졌고, 오빠가 의식을 잃었을 때 내가 마법으로 오빠를 치료해줬다는 걸 말해주면 오빠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오빠가 받을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 게다가 나에 대해 자세히 안다면, 오빠는 기절할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내 일에 휘말려들어, 크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오빠한테 말하는 것은 일이 잘못되어 반드시 고백해야 할 때. 그 때 하자. 적어도 오빠에게 괴물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평소에 물론 나를 '눈 큰 외계인'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 의미가 달라지는 날을 맞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도 꽤 약한 여자아이인가 봐." 오빠에게 미움받을 게 겁나서 이러고 있다니, 내 마음가짐이 내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뭐 지금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서울시 상공을 날아다녀야 하고, 오늘 일도 조사해봐야 할 것이고. 그 외에도 나는 할 일이 많다. 제 시간에 침대로 돌아가려면, 할 일이 매우 많은 것이다. "자. 그럼 마법소녀로서의 밤을 시작해볼까." 나는 내 목걸이를 잡았다. 평소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오직 나만 볼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둔 목걸이다. 여기에 들어간 마법의 지팡이를 끄집어내서 길게 늘린다. 나의 지팡이가 빛을 발하며 원래의 형태를 갖춘다. 오빠가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마법소녀들이라면 주문을 외우느라 정신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고, 나도 그런 길다란 주문을 외울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주문은 외워야 한다. 내 고유의 마법을 사용한다면 마법지팡이도 필요 없고 주문도 필요 없지만, 지팡이로 마법을 부리면 꼭 이런 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 지팡이가 없으면 똑같은 단순작업을 매일 밤마다 해야 한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는 것은, 그에 비하면 훨씬 쉽다. [[actuation - wizard suit (발동 - 마법사복)]] 마법지팡이에 들어있던 전용 전투복이 지팡이로부터 빛을 발하며 흩어졌고, 그것이 내 주위에 모여 옷의 형태로 변했다. 고깔모자와 망토를 걸친, 전형적인 마녀의 모습이다. 아마 오빠가 보면 분명히 마녀 그 자체라고 중얼거릴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주복처럼 만드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마법사에겐 왠지 안 어울리는 걸. 물론 기계를 쓰는 마법사가 이런 소리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아. 푸념은 그만하고." 기계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여자아이라. 이런 경우도 세상에 있을까. 이런 건 순수한 마법사가 아니라고, 대체 기술자인지 마법사인지 소속을 명확히 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마법사가 체면도 없이 첨단기술에 의존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체면은 둘째 문제고, 누가 봐주지도 않는 마법사이니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실속이 더 중요하지. 어차피 이 시대에 마법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라는 건가." 오빠가 보면 '눈 큰 외계인'이라고 놀릴만한 초과학장비들을 장착한 전투복을 쳐다보면서, 나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이게 마법사의 복장인지, 아니면 외계인의 복장인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런 사치스런 휴식시간도 금방 끝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 오늘도 나가볼까." 나는 집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이 차지만, 이 정도로 이번 외출을 중지할 생각은 없다. 우선은 오늘 사고가 정말로 우연이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미 병원에서 운전사에게는 이상징후가 없다는 걸 보았지만, 사고현장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물론 지구를 돌면서 내 적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마법수행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잠들기 전에 돌아와서 내일 등교할 준비도 끝마쳐야 한다. "마법사라는 거, 힘든 일이네."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나는 오늘도 힘차게 날아올랐다. 지팡이 위에 내 몸을 싣고, 저 멀리 달을 향해서.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2화 형식이라도 갖춰야지 (1) "워어어어어." 밖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눈이 떠졌다. 원래 잠에서 깨어나는 건 이런 식이니까, 그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주위가 분명히 밝기는 하지만, 해가 뜬 것은 아니다. 지레짐작이냐고? "아우. 아직 새벽인데." 머리맡에 놓인 자명종 시계에 표시된 시간은 새벽 4시였다. 적어도 내가 시계를 거꾸로 놓거나, 시간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니 이건 틀림없다. 그럼 시계가 고장난 걸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날아와서 내 배를 발로 밟았을 테니까, 그런 건 원인이 아니다. "잘못 본 건가." 자명종 시계에 이어, 손목시계까지 동원해서 확인해 보지만, 새벽 4시가 맞다. 정확히 말하면 새벽 4시 1분이다. 이래서는 학교에 간다고 소동을 벌일 필요가 없다. 아직 더 자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지만. "....." 잠이 안 온다. 역시 어제 너무 일찍 잔 탓이 크다. 게다가 누군가의 수면제 공격으로 인해 머리도 아프다. 치사하게 약물을 쓰다니. 축구선수는 약물금지라고. 괜히 도핑테스트라도 걸려서 선수자격이 박탈당하는 걸 그리도 보고 싶은 거냐. 물론 새벽 4시라면, 지금쯤 내 여동생도 자고 있을 테니 불평해봐야 들어줄 사람이 없다. 불평하려고 감히 여동생의 방에 침입한다? 사람 잡을 일 있냐. 게다가 난 여동생한테 집착하는 변태가 아니니, 거기 가 볼 생각도 없다. 어차피 검은 가마솥과 해골무더기만 가득한 방일걸. 게다가 말야. "흐흐흐. 그렇다면." 지금 이렇고, 그렇고, 요런 게임을 해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누군가는 지금 자고 있으니, 절대로 날 방해하지 못한다. 어제 비록 게임 DVD를 압수 당했지만, 나한테 게임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소리를 내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서, 종종걸음으로 컴퓨터에 접근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밖이 밝지? 가로등치고는 너무 센데. 보름달이 이렇게 밝은 거였나? 나는 커튼사이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밖에 뭐가 있기에 그런. "뭐야. 한밤중에."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이상한 여자가 서 있었다. 저 여자, 달밤에 체조하나. 거기에 옷은 왜 저런 걸 입었냐. 마녀들이나 쓸 고깔모자에다가, 커다란 망토. 그리고 길다란 지팡이까지 하나 가지고 있다. 지팡이가 아니라 빗자루라면 딱 마녀다. 대체 누구지. 그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달빛이 그녀의 등뒤에서 비춰지기 때문에 안 보인다. 온통 새까맣게 보인다. 누군가의 마음처럼. "가만." 저 여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는데? 뭐냐. 이건. 그럼 정말로 저 여자는 마녀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현실에 두 다리를 딛고 선 사람이다. 절대로 마녀가 이 세상에 실재할 리 없다. 아. 예외가 하나 있기야 하지만, 그 녀석은 지금 자고 있다. 게다가 내 여동생에게 불가능이 없다지만, 그 녀석이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저건 진짜 마녀가 아니다. 이건 곧,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다. "뭐야. 꿈이었잖아." 그렇다면, 이건 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가 꿈속의 세상이라면, 꿈을 꾸는 나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계가 움직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호. 이거 좋은 기회다. 어디 한 번 저 여자의 정체를 알아볼까. 나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조심스럽게 기어나갔다. 밤바람이 차지만, 꿈속이니까 얼어죽을 위험은 없다. 지팡이를 쥐고 하늘에 떠 있는 이상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 뭐, 뭐냐. 갑자기 내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꿈속이라면 당연히 내 몸도 허공에 떠올라야 하는 거 아니었어? 제기랄.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꿈을 조종할 수 있다고 사기 친 게 누구야 ! 그러나 그런 후회는 이미 늦었다. "아아아아악 !" 나는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아아아악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땅바닥을 뒹굴었다. 꿈속에선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더니, 그건 완전히 사기였다. 떨어져 본 결과, 무지무지하게 아팠다. 마치 어제 차에 치였던 경험을 연상시키듯, 나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방바닥을 뒹굴었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구급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오빠 !" 뭐, 뭐냐. 넌 이 오빠가 이틀 연속으로 구급차 신세를 지게 된 데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냐. 자, 잠깐. 내가 방바닥을 뒹굴고 있다는 것은. "그건 꿈이었나?" 심히 바보 같은 한 마디가 내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구급차 소리가 아니라 자명종 시계가 울리는 소리다. 그리고 차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것이고. 가만. 가만. 가만 ! 그럼 나는 지금까지. "대체 뭐 하는 거야? 오빠." 한 손에는 프라이 펜을, 또 한 손에는 식칼을 든 여동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히 한심해서 못 봐 주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잠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여동생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모처럼 자명종 시계를 사줬는데. 사줬는데. 사줬는데." 이런. 곧 폭발하겠다. 나는 급히 방바닥에서 일어나서, 화장실로 도망쳤다. 멍청하게 방에 더 있다가는 뭐가 날아올지 모른다. 내 등뒤에서 여동생의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치우고 밥 먹으러 와 ! 오빠 !" 나는 재빨리 화장실 문을 닫았다. 살기 위해서. 과잉반응 아니냐고? 무슨 섭섭한 말씀을. 콰앙. 화장실 문을 쪼개버릴 듯이 날아든 저 식칼을 보라 ! "자. 여기 오빠 도시락." "오냐." "자. 여기 오빠 옷." "오냐." "자. 여기 오빠 가방." "오냐." "'오냐', '오냐'만 반복하지 말고, 자기 물건은 자기가 좀 챙겨봐." "오냐." "도대체 오빠라는 사람은." 오늘 아침은 식칼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다를 게 없는, 좀 달라졌으면 좋을 듯한 하루다. 다만 이제 내가 가는 곳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바뀌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이 되면 여러 가지 해볼 일이 많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전혀 바뀐 게 없잖아? '발전이 없구나.'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의 문제인가. 아. 하나 달라진 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시장님의 명령에 따라, 아침운동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시장님의 명이냐고? 그야 간단하다. "버스가 없으니까." 우리의 시장님께서는 서울시의 교통지옥을 해소하실 목적으로 대중교통체계의 개편을 단행하셨고, 그 덕분에 학교에 직접 가는 버스가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한 번 타고, 지하철역에 가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역에서 나와서 버스를 타야 했다. 작년까지는 안 그랬지만, 서울시민의 편의를 위해서 바꾸셨단다. 차가 너무 막히니까, 이렇게 노선을 바꿔서 도로의 정체를 해소하신다나? 그런데 말야. "난 시민이 아닌가 봐." 아마 고등학생은 시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선거권도 없고, 피선거권도 없으니 당연한가? 그 덕분에 앞으로 나는, 아침마다 이렇게 지하철역까지 달려가야 한다. 좋든 싫든 달려야 한다. 안 그럴 경우. 빵빵. 빵빵. 버스에 갇혀서 한참 서 있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제 버스에 타 본 결과 대부분의 자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리고 남은 자리는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결론은, 우리처럼 건강하고 튼튼한 학생들은 서서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30분이 될지 한 시간이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축구선수답게, 체력단련도 겸해서 열심히 뛰는 것이 낫다는 게 나와 여동생의 결론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역이야. 힘내. 오빠." 뭐 여동생이 같이 뛴다는 것은 약간 안 좋은 일이지만. 이유가 뭐냐고? 언덕길을 뛰어가는 건 여동생의 연약한 다리로는 힘들 테니까 그렇다고? 그랬으면 말을 안 한다. 내가 투덜거리는 이유는 바로, 저 녀석이 나보다 더 빨리 뛰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축지법이라도 쓰는 건가. 왜 현역 축구선수인 나보다, 현역 여고생인 저 녀석이 더 빨리 뛰는 거야?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내 체면을 고려하여 같이 발맞추어 뛰고 있지만, 누가 봐도 내가 체력적으로 더 약하다는 게 눈에 보인다. 어떻게 된 게 땀도 한 방울 안 흘리는 거냐. 저 녀석 다리는 4개냐. 8개냐. "역이다 !" 저 멀리에 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옆에 세워진 자전거들을 보자,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나도 자전거 타고 올 걸. 하지만 옆에 있는 사악한 여자는, 그런 내 건의를 차갑게 거절했다. 그 이유인즉슨. "축구선수는 체력이 중요해. 90분 동안 뛰지 못하면, 축구를 할 수가 없다고. 그런데 90분도 아니고, 한 시간도 아니고 20분이나 30분 동안 달리지도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 말은 맞지만, 축구장에는 언덕이 없다. 적어도 언덕을 20분 동안 뛰어서 넘을 필요는 없지 않냐. 하지만 내가 언제 여동생한테 말로 이긴 적이 있냐. "그러다가 오빠가 대표선수가 되고 나서, 일본 팀한테 참패하면 뭐라고 하려고?" 치사하게 일본을 끌어 들이냐. 하지만 나도 일본한테 지기는 싫다. 그러니 반기를 들 수가 없는 거다. 명분이 확실하니 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다고. 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하지만 달콤한 휴식은 아직 멀었다. 역 안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오빠. 뭐해?" 그도 그럴 것이, 여동생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다음에 올 열차가 표시된 전광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왜 문제냐고? 그야 내가 탈 열차가 지금 역에 들어온다고 써 있으니까 문제지 ! 나는 허겁지겁 지하철 표를 꺼내어 개찰구로 달려갔다. 아. 여동생은 잊어버렸냐고? 걱정 마라. 벌써 앞에 가서 줄을 섰다. 그녀를 찾으려면, 뒤에서 찾는 게 아니라 앞에서 찾는 게 빠르다니까. "드, 들어왔다." 어쨌든 열차에 타는 데에는 성공했다. 평소에는 기다려도 안 오더니, 이럴 때에는 귀신처럼 빨리 온다. 마치 내 다리를 쉬지 못하게 하려고 꾀라도 부리는 듯 하다. 이런 여동생 같은 지하철이 있다니. "달달 떨지 말고, 다리 좀 얌전히 둘 수 없어?" 그렇게 달리고도 말짱한 네가 이상한 거야.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자전거를 쓰는 걸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게 잘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힘들어?" 그걸 보고도 모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말하지 않아도 척 하면 알아들어야지.그러나 여동생의 제안은 황당했으니. "그럼 진희하고 같이 등교할래? 진희라면 자기 승용차에 같이 타고 가도 뭐라고 안 할 것 같은데." "불가능해. 난 진희 아버지한테 찍혔잖아." 내가 잘못해서 찍힌 게 아니라는 게 더 문제지만. 진희 아버지라는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문제가 많다. 아니, 처음 본 딸 친구에게 난데없이 '가난뱅이'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되냐. 게다가 날 보자마자 마구 화를 내면서는, 진희에게. "저런 쓰레기 같은 녀석은 다시 이 집에 들여놓지 마 !"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진희의 집에 다시는 놀러가지 못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러자 미인이가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은. "그럼 풍남이를 부를까? 거대한 리무진이니 우리가 탈 자리도 있을 테고." "절대 안 돼 !" 불구대천지원수. 이 말은 즉,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 수 없다는 뜻이다. 한자로 표현하면 어떻게 쓰냐고? 넘어가자. 머리 아프다. 지금 중요한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뭐? 그래도 알고 싶다고? 귀찮으니까 묻지 마라. 뭣이? 모르니까 그런다고?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쓰면 되잖아. 그러니까 불구대천지원수라는 것은, 한자로 쓰면 불구대천(不俱戴天). 아닐 불, 함께 구, 머리일 대, 하늘 천이다. 원래 불구대천이라고 써야 하지만,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이 말이 왜 나오느냐고? 나와 풍남이의 사이도 바로 이렇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와 그는 진희를 사이에 놓고 경쟁하는 사이이고, 둘이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기느냐. 그가 이기느냐. 외나무다리에서 누가 살아남느냐. 나와 풍남이의 사이에는 오직 이것밖에 없다. 그런데 왜 내가 그 녀석의 차를 같이 타야 하는 거냐. "바보. 아직 고백도 못했으면서."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훌륭하신 여동생. 너 가끔은 비위 좀 맞춰줘라. 게다가 너도 그 녀석의 차에 한 번 타본 적이 있어서 잘 알텐데? "그게 여기서 나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풍남이 녀석의 차에 내가 타면, 무슨 취급을 당하겠냐." 이 말은 전에 내가 풍남이의 차에 타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뭐? 차기 재벌총수의 차에 탈 수 있었으니 매우 친한 사이라고? 아까 한자까지 써가면서 보여줬는데도 모르는 거냐? 진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인데, 내가 왜 풍남이와 친하겠냐. 그리고 내가 그 차에 타기 싫어하는 원인은. "그 녀석 차야 좋지. 일단 매우 크고, 좌석도 푹신하고." 더 자세한 말은 그 녀석이 한 말을 빌려서 표현해야겠다. 전풍그룹 차기회장님인 풍남이의 자랑에 따르면. "하하하. 이 차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전풍그룹의 최첨단기술을 모조리 투입한 걸작품으로서, 세계 방탄차 시장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신형이지. 주문생산만 하는 물건인데, 그 방탄성능은 12.7mm M2HB 중기관총을 타이어에 맞더라도 30분 이상 100km에 가까운 속도로 달릴 수 있고, RPG-7 로켓포를 맞더라도 안에 탄 사람을 보호할 수 있으며, 위성을 이용한 GPS 위치추적시스템을 탑재하고 있고, 세계 어느 지역과도 통신이 가능하며, 내부에는 우리 전풍그룹이 자랑하는 신형 디지털 TV가 붙어 있고, 내부의 컴퓨터는." 그만 하자. 내가 솔직히 로켓포 이름을 들어봤자,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기억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거다. 일단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말야. 그런 기능이 고등학생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게다가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보장이 있는 건가?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전풍그룹이라지만, 우리나라 기술이 그렇게 좋았나? 멋모르고 회사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써놓은 대외선전용 문구를 그대로 옮긴 거 아냐? "뭐, 선전문구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된다는 건지도 모르지." 그 선전문구대로만 물건을 만든다면, 전풍그룹도 평판이 좋을 텐데. 뭐 차기회장님이 쓰실 물건을 엉망으로 만들 순 없을 것이니, 그룹에서도 신경 좀 쓸 것이다. 다만 그 정성으로 국내에 시판되는 물건을 만들어주면 안 되나? 나도 좀 그런 좋은 품질의 물건을 써보자고. "그럼 뭐, 지금처럼 뛰어다닐 수밖에." 자기 딴에는 그럴듯한 의견이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하지만 말야. 그건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거라고. 예를 들어 투표소에서 새 대통령을 뽑는데, 기호 1번이 히틀러(20세기 최강 악당), 2번이 스탈린(역시나 대악당), 3번이 히로히토(2차대전시의 일왕. 물어보나마나 대악당)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냐. 나라면 그 투표, 뒤엎어버린다. 좀 괜찮은 인물을 4번에 넣어줘라. 네가 안 넣어준다면, 내가 넣는다. "그것보다 자전거를 가지고 온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 의견은 단 한 방에 각하 당했다. 이유? 이유 따윈 없다. 여동생 맘대로다. 아. 이 경우는 아니구나. 여동생이 제시한 반대이유는. "시장님은 자전거로 통학하는 걸 싫어하시잖아." 아차차. 우리 학교까지 자전거 전용 도로가 연결된 게 아니지. 결국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시장님. 어째서 당신은 자동차를 그리도 좋아하시나요. 버스도 힘들고, 지하철도 힘들다면 결국 시민들이 선택할 길은 자동차밖에 없지 않습니까. 조금만 봐주세요. 이 불쌍한 서민을 위해서라도. "고등학생은 서민이 아니잖아." 그런 걸 확인시키지 마라.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건. "그런데 너, 풍남이 편을 자꾸 드는 것 같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혹시 너." '풍남이에게 반했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잘못 말을 꺼내면 식칼이 날아온다. 오늘 아침처럼 말이다. 뭐? 학교에 가니까 식칼은 없을 거라고? 식칼은 없겠지만, 내 여동생이라는 위인은 원래 불가능이 없으니, 혹시 가방 속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동생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면 큰 코 다친다. 나는 몸을 긴장시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사태는. "굳이 편을 들면 안 된다고 할 건 없잖아. 풍남이도 알고 보면 좋은 애인데." 식칼이나 쇠몽둥이보다 무서운, 말 한마디였다. "Are you crazy?" 나도 모르게 영어를 쓰고 말았다. 저 말은 '너 미쳤니?'라는 뜻이니 굳이 영어를 쓸 필요는 없지만, 말문이 막힌 나로서는 영어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글로 말하려고 해도, 말문이 막혔거든. 그래서 (한글) 말문 대신, (영어) 말문을 사용해야 했던 거다. '대체 풍남이의 어디가 좋은 애라는 거냐.' 이해가 안 된다. 이 녀석, 정말 풍남이한테 반한 거냐. 일단 외모만 가지고 평가하면, 미녀와 야수 그 자체다. 물론 속까지 평가한 내용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일단 (한글) 말문부터 다시 뚫고. 좀 심하게 막혀서 고생했지만, 나는 불굴의 사나이다. 말문을 다시 뚫었으니 이제 묻자. "풍남이가 좋은 애라는 근거가 뭔데?" 왜 이 녀석이 풍남이에게 천사처럼 구는 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좋은 애'라는 말의 근거는 알고 싶다. 이 녀석이 남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 이걸 가지고 '미인이와 풍남이는 연인사이'라는 망발을 떨 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로서 여동생이 왜 그런 극악무도한 인간을 좋게 평하는지는 알고 싶다. 그리고 그 답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이니까. 적어도 지금은 훌륭한 회장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잖아." 너, 갈수록 수상해진다. 물론 이 마녀가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다. 다시금 숨을 몰아쉬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물어본다. 어찌 보면 이 녀석이 풍남이에게 반했다면, 나로서는 누워서 떡 먹기가 된다. 내 여동생에게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녀석이 풍남이에게 반했다면, 풍남이는 절대로 진희에게 손을 내밀 수 없다. 왜냐고? 만약 풍남이의 부모님이 둘의 교제나 결혼을 반대해봐라. 어떻게 되겠냐. 이 녀석은 분명.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이렇게 나폴레옹처럼 한 손을 치켜들고 외친 후, 전풍그룹 전체를 통째로 빼앗아버릴 게 분명하니까. 풍남이의 부모님이 아무리 재벌가라도, 재벌들 인척들이 아무리 드세게 나와도 소용없다. 간단히 평해서, 내 여동생은. "누구나 여동생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여동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렇다. 물론 이 경우의 여동생은 어디에나 있는 그런 여동생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러니까 ! 그런 문제는 있을 수 없다 ! 뭐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미인이 정도면, 남자 하나쯤은 그 외모만으로도 녹여버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인이의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미안. 오빠에겐 안타깝게도, 그건 아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물론 풍남이와 인척이 되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 녀석이 풍남이를 낚아채어 가면, 나로서도 진희와의 사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어지니 그만큼 편할 텐데. 좀 아깝다. 그 순간 내 표정을 바라보는 여동생의 얼굴은. "남자라면 스스로 장애를 이기고, 미인을 쟁취하는 거야."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는 그 애의 모습이 왠지 얄밉다. 이유가 뭐냐고? 저 녀석 이름을 생각해 보라. 마치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것 같잖아. 덜컹. 덜컹. 지하철이 흔들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학교에 도착한다.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 건 아니지만, 이제 또 고교생활이 시작되는구나. 학생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힘들다. 어떻게 된 게 지하철에 들어오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나가는 사람은 아주 적다. 아니, 나가는 사람보다 들어오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할까. "조금만 참아. 오빠." 참고 있단다. 여동생아. 열차는 석양을 향해 달리고, 사나이는 미인을 품에 안고 멀어져간다. 아. 이건 아니구나. 어쨌든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니까 힘을 내자.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그 사건은 일어났다. 사람들이 오고 가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왠 아저씨 하나가 미인이의 뒤쪽으로 들어왔다. 앞이야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문제가 없지만, 뒤쪽은 그게 아니다. 벽에 기대고 있으면 되겠지만, 애석하게도 지하철에서 자기 자리를 마음대로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 여동생이 그런 데에 신경 쓸 위인도 아니고. 그런데 아저씨가 오는 게 왜 문제냐고? 그야. 사사삭. 이렇게 되니까 문제라는 거다. 저 아저씨, 이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겠군. 나는 마음 속으로, 마음속으로만 그 아저씨를 동정했다. 제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 세상은 건전한 게 최고라니까요. 그러나 그런 내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아저씨의 손은 감히, 미인이의 치마로 향했고, 그 다음은. 푸욱. 물론 이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엉큼하신 아저씨는, 얌전히 물러나셨다. 다만 표정이 굉장히 일그러진 것만은 알 수 있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나는 그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 내 여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보나마나. 100% 확실하지만. "너, 또 바늘 썼냐?" 아마. 그랬을 걸. 분명히 그랬을 거야. 내 여동생이니까. "그럼 도끼나 식칼을 썼겠어? 그리고 내 바늘주머니에 손을 댄 사람이 잘못이야. 손을 대지 않았으면, 찔릴 일도 없을 텐데." 그게 정말 바늘주머니인지, 아니면 시퍼렇게 날이 선 암살용 바늘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말야. 좀 너무하잖아. 아무리 치한 쪽이 나쁘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여자애가 무슨 짓이냐. "그런 곳에 바늘을 두는 네가 문제인 거야." 바늘을 어떻게 두는 거냐. 바늘 단속 좀 해라. 물론 이 경우에는 치한을 물리친 여동생을 칭찬해줘야 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어차피 치한이 내 여동생에게 손을 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써둬야 마땅한 내용이고, 그럼 좀 순한 방법을 써도 될텐데 말야. 남들이 네 행각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냐. 잠깐.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 다음에는 분명히 터무니없는 대처방안이 나오던데? "그럼 다음부터는 식칼로 손을 자를까?" 역시. 이런 방안이 나오고 만다. 그리고 이럴 때, 이럴 때 도덕적이고 타의 모범이 되는 이 오빠는 어떻게든 여동생의 만행을 막아야 한다. "자르지 마." 아침부터 경찰 부를 일 있냐. 물론 이 말 뒤에 '아. 그건 좀 과격했나?'라는 대답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조금 덜 과격한 방법을 찾아볼 수 없겠냐는 게, 내 의견이다. 저러다가 언젠가는 사람 하나 잡을 거다. 그리고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그리고 차가 밀리는데, 실수로 손이 거기로 갈 수도 있잖아."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이, 이런. 내 손이 미인이 가슴으로 가잖아. 아. 이제 나는 죽었구나. 보나마나 바늘에 수 십 차례 찔릴 테고, 내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결국 절단수술까지 해야 하는구나. 그러나. "손잡이는 잘 잡아야지. 오빠." 역시 내 여동생에게 불가능은 없다. 자기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내 손을 슬쩍 잡더니, 정확하게 지하철의 난간 손잡이로 날려버린다. 내 손은 그 손잡이를 잡았고, 그 덕에 나는 나뒹굴거나, 여동생의 가슴에 손을 대는 음란한 오라버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일단 내 손은 건졌으니까. 다만 내가 진희와 같이 등교했다면, 이럴 때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나에게 '변태 ! 문구가 이런 짓을 하다니.'라고 할까. 그게 아니면 '아이. 여기선 안 되잖아. 다른 데서.'라고 할까. 하지만. "오빠. 엉뚱한 생각은 그만 해.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드디어 학교 입구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말야. 역시 이건 주의시켜야 한다. 바늘말고, 다른 걸 써서 치한을 막으라고 말이다. 물론 바늘 가지고 자꾸 그런다고 하겠지만, 잘못해서 누군가에게 찔리기라도 해봐라. 난리가 날 거다. 잘못하면 '불법흉기소유'로 찍혀서 경찰서에 불려갈 수도 있고, 멀쩡한 사람을 다치게 해서 전과자가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미인아. 다음에는 바늘말고, 다른 걸 휴대하는 게 어때?" 역에서 뛰어나오면서, 나는 미인이에게 그렇게 충고했다. 진짜 이건 오빠로서의 의무다. 그냥 놔두면 큰일날거야. 그러니 내가 경찰서에서 눈물로 여동생의 석방을 호소하는 사태가 나기 전에, 미리 예방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여동생의 대답은. "그럼 다음부터는 어떤 걸 쓸까. 전기톱? 도끼? 전동드릴? 그것도 아니면 역시 2m 정도 되는 커다란 식칼로 하면 괜찮을까." 이 아가씨가 대체. 원래 내 여동생이라는 인간은 터무니없는 의견을 자주 낸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정말 너무했다. 전기톱? 도끼? 전동드릴? 초대형 식칼? 이대로 가다간 뭐가 더 나올지 모른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건 막아야 한다. "모두 안 돼 !" 그냥 바늘 쓰는 게 낫겠다. 전기톱이라니? 네가 무슨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냐. 전기톱을 들고 치한에게 휘두른다면, 말 그대로 지하철 안은 피바다가 될 거다. 도끼? 지하철이 무슨 판문점이냐. 네가 무슨 북한 인민군이냐. 사람을 도끼로 찍다니.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의 재현은 사절이다. 전동드릴?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냐. 거기에 초대형 식칼? "지하철이 무슨 투기장이나, 도살장인 줄 아냐." 식칼의 용도는 원래 생선이나 고기를 자르는 거라고. 사람을 치는 게 아냐. 제발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써라. 내가 사색이 되어 말리는 것을 보고서야, 여동생께서는 아쉽다는 듯이 단념한다. 제발 진짜로 단념한 것이기를 바란다. 어느새 우리 학교 교문이 보이고 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교문으로 달려가면서, 나는 그렇게 한탄했다. 어째서 이런 엽기적인 여동생을 두었단 말인가. 여자아이답게, 좀 귀여운 맛이 있으면 안 되냐. "아이고. 머리야." 황당한 여동생 덕분에, 아침 내내 머리가 아프다. 오늘은 꿈에서부터 공중에서 추락하더니, 식칼 맞고 죽을 뻔하지 않나. 전기톱이나 전동드릴, 식칼에 취향이 있는 여동생 덕에 지하철에서 가슴을 졸이지 않나. 참 가지가지 다 한다. 그래도 힘은 내야 한다. 어찌되었든 간에. "오늘은 기필코, 축구부에 가입하고 말 테다." 언제까지나 여동생에게 잡혀 살아갈 수는 없다. 나도 어서 대한민국 제일의 축구천재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야 한다. 2002 월드컵의 영광을 뛰어넘어,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우승국으로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동시에 나 자신도 군대에 안 가는. 아. 이런 개인적인 소망을 끼워 넣으면 안 되나? 어쨌든 역사적인 축구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서 축구부에 가입해야 한다. 뭐? 실력도 없으면서 꿈만 크다고? 조금 있다가 두고보자. 내 실력을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해라. 그리고. "풍남이가 진희와 같은 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 이건 축구부 가입에 버금가는 중요한 일이다. 잘못해서 진희가 풍남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하면 안 되니까. 이것만 봐도, 나도 참 불타는 청춘이다. 하지만 이쯤해서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을 때가 되었는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지만, 찬물은 없었다. 어쩐 일이냐. 네가 드디어 오빠를 배려하는 착한 여동생이 된 거냐. "문희야. 나하고 진희가 가입할 부에 대한 괜찮은 정보는 입수한 거야?"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이 녀석이 조용한 이유가 그런 건설적인 것이 될 턱이 없잖아. 저 녀석은 지금, 자신이 가입해야 할 특별활동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정보는 나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아. 여동생이 어디에 가입할지 오빠로서 궁금해서 그러냐고? 천만의 말씀. 내가 걱정하는 건 진희다. 그녀가 과연 어디에 가입할 것인가는 나에게 있어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자. 문희양. 당신의 정보통으로서의 실력을 보여주세요. 그러나. "미안. 정보가 너무 많아서 지금은 안 돼. 수업 끝나면 얘기하자." 도대체 얼마나 많이 수집해온 거냐.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담임 선생님이 나간 후, 모든 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행동을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지만, 대부분은 앞으로 가입할 특별활동부에 대한 화제로 떠들썩하다. 이유가 뭐냐고? 자율학습과 비슷한 논리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고등학생으로서의 생활을 즐기고 싶어하기 때문에, 모두들 '자발적으로' 특별활동부에 가입하여 문화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일단 대외적인 발표문은 그렇다. 그렇다. 그래야 한다. "빌어먹을." 이런 건 좀 학생들이 알아서 하게 놔둬라. 이런 것까지 '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올 건 없잖아. 그나마 나는 축구부에 들어가기로 처음부터 결정해두고 있었으니까 다행이지만, 특별활동부라는 건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놀고 먹는 것'으로 알고 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황했다. 진희의 경우 처음부터 적당한 곳을 알아보고 있으니까 괜찮은 편이고, 문희의 경우는 신문부와 방송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생각이니 문제가 없으며, 풍남이 녀석이야 진희가 가는 곳에 따라갈 게 분명하니까 고민을 안 하는 모양인데, 다른 학생들은 상당히 애를 먹는 모양이다. 당장 반장만 해도,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여자애가 저렇게 얼굴을 찡그리면 주름살만 늘텐데. "문구야.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텐데?" 문희의 말도 맞다. 당장 진희가 어느 부에 가느냐는 문제가 눈앞에 가로막고 있는데, 반장이나 다른 학생들 걱정해줄 때가 아니다. 여기서 정신차리지 않으면, 풍남이 녀석이 진희와 같은 부에 들어가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니까. 게다가 우리 학교에 과연 진희가 원하는 '평범한 부'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일단 특별활동부의 숫자야 많지만."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양이 아니고 질이다. 축구부처럼 전국대회에도 자주 나가고 우승트로피도 수두룩한, 그야말로 엘리트 체육의 견본 같은 부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희가 마음고생 안 하고 원하는 대로 평범한 여고생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부만 있으면 된다. 일단 숫자만큼은 문희가 '정보가 너무 많아'라고 할 정도니 기대해도 되지만, 문제는 그 중에 어느 것이 옥이고 어느 것이 돌인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진희가 축구부의 매니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축구부 선배들이 진희를 노릴 위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에 닿는 곳에 있으니 어떻게든 보호해줄 수 있다. 하지만 진희가 그런 쪽을 원하지는 않는 것 같고. 그럼 대체 뭘 원하는 걸까. 내가 진희에게 고백을 했더라면, 이런 걸로 고민하지 않을텐데. 물어보면 되니까. 하지만 고백의 시간은 지금이 아니다. 지금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자. 그럼 우선은." 쿠웅. 이게 무슨 소리냐. 살벌하게 많은 양의 종이뭉치가 문희의 책상 앞에 나타났다. 저러니 학생들이 머리를 싸맬 수밖에. 하지만 말로만 듣는 것과 눈앞에서 실물로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 간단히 표현하면. "너무 많아 !" 소리가 워낙 요란해서인지, 몇몇 학생들이 이쪽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하긴 이 정도 종이뭉치라면 그럴 만도 하다. 우리 학교에 학생들이 이렇게 많았나? 왜 이렇게 특별활동부가 많아. 문희가 곧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어제 신문방송부에 가입한 후, 우리학교의 특별활동부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어. 크게 나누면 운동부와 비운동부로 나뉘는데, 운동부 쪽은 축구부를 제외하면 유명한 곳이 없고, 다들 취미활동 정도야. 비운동부 쪽은 문과 쪽과 이과 쪽으로 나뉘는데, 아. 물론 대학입시가 아니니까 나중에 지망하는 과에 영향을 주는 건 아냐. 여기서 문과 쪽은 주로 진희의 평소 취미에 맞는 게 많아. 우아한 아가씨한테 어울리는 부라면 꽤 되기는 하지만, 진희가 원하는 건 평범한 부니까 이런 쪽은 일단 제외. 그리고 이과 쪽은 글쎄. 진희한테 어울리는 곳이 있을지 모르겠어. 일단 자료만 보자면." 서류를 하나 뽑아내는 문희. 이렇게 보니 얘도 무슨 아나운서 같다. "여기 클래식 음악부를 보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걸 주로 쓰고 있고, 가끔 연주회도 여는 모양이야. 물론 프로 수준은 아니지만, 교양이라는 점에서 보면 괜찮아. 진희도 피아노를 좀 치니까, 이런 쪽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문제는." "난 평범한 부를 원하니까." 진희의 말은 맞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귀족적인 아가씨의 취향에 맞는 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고생에게 적합한 부다. 그런 걸 감안하면 클래식 음악부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진희같은 아가씨에겐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어울리기야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계속하는 문희. "평범하다고 하면, 역시 가장 평범한 여자애는 요리부를 택하는 경우가 많지. 전형적인 현모양처가 될 여학생들이 고를만한 곳이야. 담당 선생님이 일류 요리연구가이니까 배울 것도 많고. 하지만 진희에게는 요리가 좀." 그렇다.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심지어 진희 자신조차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진희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한 번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날 진희가 모처럼 한 번 도마를 꺼내어 식칼을 휘둘러봤던 적이 있다. 물론 그때에는 진희와 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문희나 미인이, 심지어 지우와 풍남이까지 있었으니 오붓한 데이트는 기대도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진희가 해준 요리를 먹어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지옥이었어.' 미안하다. 진희야. 나는 그때 이를 악물고 음식을 모두 먹었지만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고, 문희는 한 입을 먹자마자 기절해버렸다. 풍남이도 간신히 다 먹기는 했지만 그 다음날 상당히 초췌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지우 녀석은 다음날 벌어진 축구시합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병원에 간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진희의 표정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아직도 기억날 정도다. 아. 내 여동생은 어쨌냐고? 문제가 없었던 건 그 녀석뿐이었다. 그 요리를 먹고도 이상이 없다니, 역시 사람이 아냐. 진희를 위해 변명을 하자면. '아무래도 부잣집 아가씨니까.' 진희가 스스로 요리를 해볼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 그 문제를 일으킨 이유였다. 아무래도 집안 일을 직접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정부가 해주는 판이니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거다. 식칼을 직접 든 것은 굉장한 용기였지만, 아쉽게도 실력이 그 의욕을 뒷받침해줄 수 없었고, 그 결과가 지우의 입원과 문희의 결석, 그리고 나와 풍남이의 탈진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진희가 식칼을 들 때마다 벌벌 떨었고, 오직 내 여동생만 그런 공포에서 벗어나 초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진희가 요리실력을 향상시킬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아가씨라는 한계로 인해, 요리를 배워봐야 쓸데가 없기 때문이다. '불쌍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래서 진희가 요리부에 들어가는 것은, 일단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리부를 제외하면, 대체 평범한 부라는 게 뭐지? 문희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요리부가 안 된다면, 역시 진희 자신이 확인해야 해. 적어도 3년 간은 부에 가입해서 활동해야 하고, 선배들의 질이 나쁘면 그것도 힘들어. 그러니까 개략적인 것만 뽑아줄게. 여기서 적당한 부를 고르도록 해." 쿠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진희 앞으로 서류뭉치가 떨어졌다. 진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긴 했지만, 서류뭉치의 높이와 무게를 감안하면 이상할 건 없다. 저건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많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많아? 우리 학교에 학생들이 그렇게 많았어?" 모두의 시선이 문희에게 집중된다. 물론 문희가 진희처럼 엄청나게 예뻐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둔다. 문희도 서류뭉치의 무게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대외홍보용." "대외홍보용?" 어느새 주위에 몰려온 우리 반 학생들 전원의 외침이 교실을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특별활동부에 그런 용도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문희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응. 대외홍보용.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는 이런 부도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한다. 뭐 그런 뜻이래. 다만 실제로 활동하는 부는 생각보다 적고, 대부분은 이름만 올려둔 부가 많아. 아무래도 요즘은 입시로 인해 학원이다 자율학습이다 해서 바쁘잖아. 그래서 학생들이 부 이름만 학교에 등록한 후, 부활동시간에 잠을 자거나 놀거나 그게 아니면 공부하거나. 그런 식으로 부를 운영하는 경우가 꽤 되기 때문이래." "그런 법이 어디 있냐 !" 정말 무책임한 행정의 표본이다. 단지 교육부나 학부모들에게 내세우기 위한 간판으로 만들어진 부가 많은 것뿐이란 말이냐. 진희의 낙담한 표정이 정말 불쌍해 보인다. 다른 학생들 역시, 비참하다는 표정으로 서류뭉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우리들의 고교생활의 낭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거냐. 그러나 모두가 낙담해서 기운없이 주저앉은 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자. 자. 실망은 이쯤 해두고. 지금까지의 고교생활이 낭만적이지 못했다면, 우리가 한 번 그렇게 만들어보자고. 일단 서류검토부터 해볼게." 용감하게 서류더미 앞에 앉는 우리의 여동생. 그러나 미인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저 많은 서류더미를 다 보려면 힘 좀 들텐데?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여동생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여동생과는 다른, 바로 나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여동생의 힘을 의심하지 마라." 이것을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1, 1분 30초 ! 300장이 넘는 서류를 어떻게 그 동안에." 충격과 공포의 순간이 지나갔다. 이유인즉슨, 이 여동생께옵서는 딱 1분 30초만에 그 산더미같은 서류를 다 읽고, 종류별로 분류해버렸기 때문이다. 문희가 기가 차서 말을 더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 인간 스피커가. "켁. 케엑." 물론 그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 상당수의 학생들이 빠져나간 아래턱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런 만행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다니. 역시 내 여동생은 잔인무도하다. 모두들 '네 정체가 뭐냐'는 식으로 미인이를 쳐다봤지만, 역시 내 여동생은 얼굴에 초합금으로 된 특수장갑판을 깔았는지, 끄덕도 하지 않는다. 이봐. 최소한 당황이라든가, 변명이라든가. 그런 거라도 해봐. "너, 인간 아니지?" 누군가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들린다. 하긴 나도 묻고 싶어. 내 여동생이 어째서 이런 황당무계한 인간이 되었는지. 그러나 저 녀석이 그런 걸 가르쳐줄 리가 없지. 그런 짓을 해놓고 내 여동생이 한다는 말은. "부 이름하고 활동상황만 본 건데 뭐." 이봐. 당신들. 왜 납득하는 거야? 뭔가 의심이라도 할 수 없어? 이 생각 없는 학생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아, 그렇구나.'는 표정을 하고 있다. 이건 입시교육의 폐해가 분명하다. 스스로 뭔가를 생각할 능력이 상실되고, 오로지 교과서와 참고서를 외우기만 하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 먹히는 거다. 하지만 수상하다는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나 하나 빼고. '납득하지 마.' 하지만 모두들 그 정도로 납득하고 넘어가는 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긴 지금 급한 건 특별활동부에 대한 정보이지, 내 여동생이 인간인지 괴물인지 외계인인지 확인하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혼란이 수습되고, 내 여동생은 서류더미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왼쪽에 놓인 서류는 현재 활동하지 않는 곳. 적어도 3년 이상 신입부원이 없어서, 부원이 하나도 없는 곳이야. 말 그대로 용도 폐기된 부." 즉, 그쪽은 쓰레기통으로 가야 하는 부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부원이 5명 이하인 경우. 말 그대로 유명무실하지만 아직 이름은 올려져 있는 부야. 부활동시간에 잠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추천할만한 곳이지." 그런 짓 하라고 우리가 고등학생이 된 줄 아냐. 그래. 다음은? "이쪽은 남자 전용. 그 중에서도 운동부 쪽이야. 물론 운동부 자체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있으니 이것만 굳이 남자 전용이라고 표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학교의 자랑거리인 축구부를 비롯해, 온갖 운동부는 다 여기에 있어. 여자 매니저를 모집하기도 하지만, 대개 여학생들은 이쪽에 안 가니까 3년 동안 여왕노릇을 하고 싶은 여학생은 이쪽을 선택해도 좋다고 생각해." 저렇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해도 되는 거냐. 일부 학생들이 관심을 표했지만, 역시 대부분은 나머지 서류더미의 내용을 듣고 싶은 눈치다. 이미 축구부에 가기로 결심한 나조차도 그러니, 다른 학생들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그리고 이쪽은 여학생 전용 운동부야. 체조부나 수영부 같은, 남학생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보고싶어할 만한 부가 많이 있지만, 남자 매니저는 안 받으니 남학생들은 엉뚱한 쪽을 기대하지 말 것. 활동모습을 보고 싶으면 전국체육대회를 노려야 할거야." 뭐, 뭐냐. 이 실망하는 듯한 배경음은. "그 다음은 비운동부야. 여기는 남녀구분 없이 모두 다 받으니까 따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놓았어. 다만 이쪽에 놓은 서류는 어디까지나 문학부나 미술부, 독서부 같은 평범한 부야. 괴이한 부서들은 이쪽으로." 마지막으로 놓인 그 서류뭉치 말이냐? 그런데 거기에는 뭐가 있기에. "여기에 있는 부들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쪽이야. 취향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외부에서는 뭐라 할지도 모르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전해봐도 좋다고 생각해. 흑마술부라든가 심령현상연구부라든가 애니메이션 연구부라든가. 개성 넘치는 부를 원한다면, 이쪽을 찾아봐. 그리고 하나 더." 뭐야.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던 건가? 미인이가 내민 것은 이상한 서류 한 장이었다. 일단 서류뭉치는 아니지만, 뭔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건 무엇이냐? 미인이의 설명은. "여기는 1주일동안 특별활동부를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부. 일단 외부에는 학습부라고 공표하고 있지만, 사실은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만 하는 곳이야. 여기에 가입한 사람은 의무적으로 학원에 다녀야 하고, 의무적으로 자율학습에 참가해야 하고, 의무적으로 시험을 추가로 봐야 해." "으악 !" 모든 학생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 말을 들으니 왜 특별활동부에 대해 담임이 설명하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된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강제로 여기에 가입시키려고? 와. 치사하다. 벌써부터 이런 치졸한 수단으로, 학생들을 강제로 공부벌레로 만들려고 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냐. 모두들 불만을 토하는 가운데, 미인이가 말한다. "원래는 이런 강제수단을 안 썼지만, 학부모들의 요구로 인해 금년부터 이런 부가 신설되었대. 그러니 이 부의 폐지를 위해서라도, 우리 좋은 부를 찾아보자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나라도 그럴 거다. 고등학교 1학년에, 벌써 공부기계가 되어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만 하라고? 내가 돌았냐.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 반은 다시 조용해졌다. 약간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하긴 학습부에 강제로 가입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다른 부에 가입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어느 시대이든 학생들이 가장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은 공부인데, 안 그래도 자율적으로 수업시간 후에 공부해야 하고, 그게 끝나면 학원으로 가는 일이 일상다반사인데 말야. 거기서 공부를 또 하라고? 적어도 1학년인 지금부터 새벽 별을 보며 등교하고, 한밤중의 별을 보며 하교하고 싶지는 않다고. 우리 좀 살려 주라. 뭐? 학생의 정서함양을 위해 특별활동부는 자율적으로 선택하라고? 1주일 내로 정하지 않으면 지옥행이잖아 ! "어쩌면 이건 학생들의 특별활동을 장려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라." 하긴 문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라면 그 어떤 학생도 감히 특별활동부를 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좀 치사한 게 아니냐. 모두들 그렇게 불평하면서 집으로 떠나갔다. 왜 집으로 가냐고? 10분만에 3년 동안 활동할 부를 정할 수야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부를 정하는 건 내일 해도 되지만, 일단 어느 부가 마음에 들지 돌아보자."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고, 그래서 나와 진희, 문희와 지우는 학교탐험도 할 겸, 특별활동부를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진희 입장에서도, 직접 돌아보는 게 결정에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아이가 혼자 학교를 돌아다니는 건 좀 그렇고, 질 나쁜 인간들을 만날 경우도 대비해서 경호원이 필요했다. 그럼 경호원으로 적합한 사람? 그야 당연히 나지. 나를 제외하면 누가 진희를 지키겠냐. 문희? 그녀는 이미 신문방송부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그쪽으로 가야 한다. 지우? 그 녀석이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진희를 보호하는데 있어 적극성이 부족하다. 아. 한 사람 더 있지 않느냐고? 여동생보고 그런 걸 하라고?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만약 미인이가 불량학생을 만날 경우,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라. 불량배들은 언제나 떼로 몰려다닌다는 점을 상기시켜보면, 그들은 진희와 미인이를 포위하고는 음흉한 손길을 뻗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인이가 무슨 짓을 해도 정당방위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미인이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넌 이미 죽어있다." 그 뒤의 일은 안 봐도 뻔하지 않겠는가. 이러니 미인이에게 진희의 경호를 맡기는 건 절대 안 된다. 그러므로, 진희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 목숨을 걸고라도 말이다. "나는 왜 빼냐 !" 옆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떠들지만, 저건 논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에 학교 전체를 한 바퀴 돌게 되었다. 뭐 이런 기회라도 없으면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교문과 교실, 그리고 체육관의 일부만 왕복하면서 3년을 보낼 것이고, 그 외에 가는 곳이라고는 학원 정도일 것이다. 모처럼 고등학교에 왔는데, 그건 너무 불행하지 않겠는가. 일단 학교가 원하는 대로, 적당한 특별활동부에 가입해서 활동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삭막한 고등학교의 생활에, 그런 거라도 있어야 탄력이라는 게 붙지 않겠냐. 그러나 문제는. "부가 너무 많아 !" 원하는 부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우리학교에서 부가 몰려있는 곳이라면 체육관하고 구교사인데, 여기에 부가 하나둘이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고등학교라면 기껏해야 5층 정도의 건물 하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유감스럽게도 우리 학교는 그게 아니다. 문희가 이미 설명한 바에 따르면. "우리 학교는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어. 우선 학교 가운데의 운동장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구 교사가 하나. 중앙에는 새로 지은 학교건물이 하나. 그리고 우측에는 체육관이야. 구 교사는 옛날 건물이라서 지금은 비워두는 곳이 많지만,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냥 놔두는 모양이야. 이쪽은 공간이 남기 때문에, 운동부가 아닌 특별활동부는 대부분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새로 지은 본 건물은 상당히 고층건물인데, 땅값이 비싸서 층수가 올라갔다고 하더라고. 신문방송부처럼 이 본 건물에 위치한 부도 간혹 있어. 그리고 우측의 체육관은, 학생들의 체력단련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수영장부터 시작해서 뭐든 다 있나 봐. 축구부를 제외하고 모든 운동부는, 보통 여기서 부활동을 하고 있어." 즉, 원하는 특별활동부를 찾아서 가입하고 싶다면, 우리는 학교 전체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뜻이 된다. 5층은 될 법한 옛날 건물 하나, 10층은 될 듯한 새 건물 하나. 그리고 체육관 하나라고? 일단 겉보기에도 엄청나게 거대해 보이는 건물들인데, 과연 내 다리가 버텨줄지, 아니 진희의 다리가 버텨줄지 걱정이 앞선다. 지우야 축구선수니까 넘어가고, 여동생은 인간이 아니니 다리가 부러질 이유는 없다. 전혀 없다. 하지만 진희만큼은 불안하다. 그녀는 운동선수도 괴물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니까. "나는 왜 빼냐 !" 바퀴벌레는 논외라니까. 어쨌든 우리는 가장 먼저, 체육관으로 향했다. 과연 저 거대한 건물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방송상태가 고르지 못한 것을 시청자 여러분께 사과 드립니다] 나는 진희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체육관 안에서 빠져나왔다. 저 난장판 안에 내 여동생이 있겠지만, 도저히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미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부디 죽지 마라. 여동생아. 지우 녀석이 당황하면서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미인이를 끄집어내려고 하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냐. 오히려 인간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지우야 ! 포기하고 나와 !" 비록 도움이 안 되는 친구지만, 이렇게 외치면서 구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미쳤냐. 그랬다가는 진희가 위험하다. 저 녀석들은 자신들이 남녀공학에 다닌다는 걸 까먹은 건지. 자기 반에 예쁜 여학생이 그리도 없었나. 왜 저러는 거야. "넌 언제나 네 여동생을 보고 있으니까 면역이 생겨서 그런 거야." 바퀴벌레의 헛소리는 일단 무시하고. 어쨌든 저런 상황에서 진희가 가입할 운동부를 찾아보는 것은 절대로 무리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게다가 여학생들의 표정이 매우 안 좋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뭐야. 얼굴 예쁘면 다야?" "건방진 계집애." "얼굴이 여자의 전부가 아닌데." 그러나 남학생들은 즉시 반박에 나섰다. 심히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언들로. "그래. 얼굴 예쁘면 다다." "얼굴이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얼굴만이 아니지. 몸매도." "억울하면 너희들도 저렇게 예뻐져 봐." 어째서 이런 애들 장난 같은 말싸움을 들어줘야 하지. 저기서 뭔가가 난장판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미인이인가? 아닌데? 저건. "아이고. 나 죽네." 지우였다.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 죽기 직전의 상태로 기어오고 있었다. 남자를 저렇게 만들다니, 내 여동생도 어찌보면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 저 무더기 속에 갇혀버린 미인이를 구해와야지 ! 하지만 방법이 없다. 전혀 없다. 저 많은 사람들에게서 여동생을 끄집어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는 나와 진희. 풍남이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자기의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사설 경호원이라도 부를 셈인가. 하지만 저 상황에선 잘 안 될 것 같은데. 그가 스위치를 누르려는 순간. 팍. 갑자기 체육관의 불이 꺼져버렸다. 누구야? 누구 장난이야? 와글거리던 체육관 안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모두들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모두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테러인가?" 우리나라에 원한을 가진 녀석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당연히 생각할법한 내용이긴 하다. 뭐? 없다고? 북쪽에도 있고, 서쪽에도 있고, 동쪽에도 있다. 말하면 외교적인 문제가 되므로 입을 열지 못하지만, 어쨌든 많다. 매우 많다. 게다가 테러가 아니라고 해도, 솔직히 이런 경우가 우리나라에 없었던 게 아니지 않은가.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같은, 부실공사로 인해 피해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 이 체육관이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지진이나 화재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세기말에나 어울리는 화제인 '지구멸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뭐? 그냥 정전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확실히 그럴 수도 있구나. 하지만 이 정전이 난장판인 상황을 일단 멈추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지는데, 아무리 여자에 눈먼 녀석들이라고 해도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곧 모든 이들은 공포와 혼란에 빠져들 것이고, 그러면 내 여동생의 안전은 더욱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팍. 다시 전깃불이 켜졌다. 뭐야. 사고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이런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지?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확성기를 들고 걸어오고 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인데, 저건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애인걸.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신입생 겁주는 거야?" 아무리 확성기를 입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르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위엄이 없다. 아. 목소리 자체는 억지로 위엄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외모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못생겼냐고? 아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린애네?" 바로 이게 문제다. 고등학생들 앞에서, 어린애가 위엄을 보여주는 게 그리 쉽겠는가. 게다가 저 목소리부터가 너무 귀여운 걸. 이 난장판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지만, 글쎄. 잘 될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딱. "아, 아이고."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어린애라고 하니까, 그 어린애가 화가 났는지 나를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로 때린 거다. 가만. 가만. 어린애가 감히 나를 쳤어? 요즘 초등학생들이 버릇없고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 꼬맹이가, 고등학생 오빠를 때려?'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이 애는 꼭, 내 여동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는 짓이 비슷하니까. 그리고 이럴 때는 곧바로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게 늦어지면, 이 꼬맹이도 내 여동생처럼 될 거다. 버릇없는 초등학생을 응징하기 위해 주먹을 쳐드는 순간. "아. 안녕하세요." 난데없이 진희가, 그 꼬마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왜 그러는 거야? 만약 진희가 아닌 문희가 그렇게 했다면 장난이라고 하겠지만, 진희가 그럴 리는 없다. 그녀는 날 놀려먹는 악질적인 버릇을 가진 애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중에, 이번에는 풍남이까지 그 꼬마한테 고개를 숙인다. 이봐. 넌 남이 자기에게 고개를 숙이게 할지언정, 자기가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 뻔뻔하고 건방지기로 이름난 녀석 아니었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자, 나는 그저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진희가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한다. 잠깐. 그녀의 말을 정리해보면. "저 분은 우리 물리선생님이시잖아." 그 순간, 나는 어제의 그 충격을 기억해냈다. 키가 너무 작아서 슬픈 아가씨의 이야기를. "에엑?" 악. 그렇구나. 그제서야 나는 눈앞의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건 역시 적응이 안 된다. 적응이 안 된다. 적응이 안 된다고 ! 누가 이런 어린아이를 선생님이라고 하는. 딱. 또 날 때린 거냐. 나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그건 날 노린 게 아니었다. 그 선생님께서 때린 것은, 바로 미인이를 둘러싼 무리들 중 하나였다. 선생님답게,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을 열심히 꾸짖으신다. 하지만. "지금 뭐 하는 거야. 선배답게 후배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지. 대체 요즘 애들은." 저. 선생님. 선생님이 더 어려 보이는데요. 물론 대놓고 그 소리를 할 수는 없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기색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폼을 잡는다고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다. 얼굴부터가 어린애다. 몸매도 어린애다. 아니, 근본적으로 키가 어린애 수준이라서, 위엄을 갖춘다고 해도 전혀 안 되는 것이다. "우유 드시고 키 좀 크세요." 이렇게 말했냐고? 미쳤냐. 아직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그렇게까지 반항적이지는 않다고. 어쨌든 모두들 상대가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얌전히 혼나고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이야 뻔하다. 다들 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은. '귀여워. 귀여워. 너무 귀여워.' 보통 여성의 외모를 칭찬하려면 '아름답다'라든가, '예쁘다'고 해야 하겠지만, 이 경우는 그게 불가능하다. 이 경우에는 무조건, 귀엽다고 해야 한다. 절대로 그렇게 말해야 한다. 문제는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 밖으로 나왔는지. 딱. "선생님한테 귀엽다고 하지 마." 결국 한 대 더 맞았다. 잔뜩 화가 난 선생님의 모습은 역시 귀엽기는 하지만, 제자를 자꾸 때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차마 선생님을 더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아악. 귀여워. 너무 귀여워." 이렇게 외치고는, 선생님을 끌어안았다가 한 대 더 맞고 대(大)자로 뻗어버릴 테니까. 게다가 일단 내 여동생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 있으니, 그쪽부터 해결해야 한다. 물론 하나마나 한 일이지만. 이유가 뭐냐고? 여동생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봐. 그 녀석이 다칠 턱이 있냐.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미인아. 괜찮아?" 물을 필요가 있는 걸까. 하지만 다정한 오빠로서의 이미지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뜻도 있고, 선생님을 더 쳐다보면 사고를 칠 것 같으니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뜻도 있다. 말 그대로. '형식이라도 갖춰야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식적으로, 여동생한테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말야. 이런 생각을 내 여동생이 알게 된다면 그 녀석은 어떻게 행동할까. 가만. 가만. 가만. 저 표정은. "오빠 바보 !" 주먹 한 방에 나는 날아갔다. 벌렁 넘어진 나를 보며 방방 뛰는 여동생. "오빠라면서, 여동생을 지키지 않고 도망가면 어떻게 해." 역시 들켰나보다. 눈치 빠른 녀석. 하지만 도망가라고 한 건 너 아니었냐? "보통 여동생이 도망가라고 말해도, 오빠라면 당연히 듬직하게 여동생을 지켜줘야지." 이봐. 네가 한 말하고 전혀 다르잖아. 평소 같으면 이런 짓을 안 할텐데. 역시 아까 생각한 게 들킨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저 녀석의 태도로 보아, 들켰다는 게 100% 확실하다. 여태까지 죽 그래왔으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숨겨도, 그런 건 다 헛수고였다. 그녀는 귀신처럼 내 속을 알아채고는,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마치 지금처럼. 그녀는 내 품속으로 파고들어, 내 가슴을 마구 두들겨 팬다. 남들이 볼 때는 애교로 보이겠지만, 직접 맞는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게 아니다. 아이고. 아프다. "바보. 바보. 바보. 오빠 바보." 보통 이럴 때에는 "너, 내숭이 너무 심하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랬다가는 뒷감당을 못한다. 내 속이 들켰다는 게 확실하다면, 그렇게 말할 경우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고, 마무리로 한 대 더 맞을게 분명하니까. '그런데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조금전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와 진희, 지우와 바퀴벌레 한 마리, 그리고 모든 악의 원흉인 내 여동생이 체육관에 들어갔을 때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것은 좋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온 것도 좋다. 이건 이해할 수 있는 게, 새로 1학년생들이 들어왔으니 호기심으로라도 얼굴을 보려고 올 수 있는 게 아닌가. 새로운 후배부원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도 겸해서. 하긴 우리 학교는 괴상한 정책 덕분에 강제로라도 특별활동부에 가입해야 하니, 그리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내가 잘못한 거냐고? 아니다. 진희가 잘못한 거냐고? 그럴 턱이 있냐. 그럼 지우나 바퀴벌레가? 이번에는 그게 아니다. 모든 문제는, 미인이가 그들을 쳐다보면서 발생했다. 그럼 내 여동생이 무슨 망발을 떨었기에 이런 난동이 발생한 거냐고? 아니. 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저 선배들을 쳐다봤을 뿐이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어."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마녀들은, 남자들을 마법으로 홀려서 실컷 이용해먹고,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걸 생각해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러니까 결국 내 탓이 아니냐고? 뒤집어씌우지 마라. 누가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냐. 어쨌든 내 여동생을 본 운동부 선배들은 갑자기 눈이 이상하게 변한 거다. 즉, 겉모습에 홀려버린 거다. 하긴 내가 봐도 이 녀석이 뭔가 비정상적으로 예쁘기는 하다. 그 결과로. "신입생인가? 예쁘네." "이봐. 우리 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매니저가 하나 필요한데." "그건 안 되지. 이런 아가씨라면 역시 우리 배구부에." "배구부라니. 음흉한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그런 험악한 곳에 무슨." "아니지. 우리 축구부에." "안 되지. 우리 유도부에." "그건 안 되지. 우리 부에." "우리 부에." "우리 부에." 이봐요. 이 녀석의 속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할 겨를은 없었다. 있었으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겠지. 그렇게 되어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당사자인 내 여동생의 의견은 제쳐놓은 채 자기들끼리 언성을 높이게 된 거다. 그 후에는. "여자가 무슨 쟁탈전의 경품인줄 아는 모양이야." 이건 진희의 평이다. 사실 그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게, 아무리 내 여동생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이런 식으로 물건처럼 취급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내 여동생이 빠져나가려는 순간. "어딜 가시나요. 아가씨." 하필이면 축구부 선배가, 미인이를 막아섰다. 어떻게 아느냐고? 옷을 봐라. 축구부라고 아예 광고를 하고 있지 않느냐. 어째서 축구부가 체육관 안에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훈련을 빼먹은 건 아니겠지.' 물론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 인간들이 우리 일행을 포위하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한 게 문제라는 거다. 이 인간들, 여자에 굶주려서 이성을 잃은 건가. 하긴 내 여동생이 예쁘기는 하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큰일나겠는데. 외모가 우릴 지켜줄 상황이 아니니까. '어떻게 도망가야 제대로 도망갔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하긴 했다. 결코 미인이만 놔두고, 나 혼자 잽싸게 도망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여동생을 데리고 도주하려고 하자. "이봐. 후배. 선배님들 하시는 일에 방해는 하지 마." 이 말과 함께, 그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체육관 바닥이 딱딱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아프다. 나는 필사적으로 일어나서 여동생을 구하려고 했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선배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이 인간들은 나를 붙잡고, 더 멀리 던져버렸다. 진희가 깜짝 놀라 나에게 달려왔지만, 내 여동생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니, 꼼짝할 수가 없다. 선배들이 포위해 버리는 바람에, 나에게 올 수가 없는 거다. 이젠 그 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저 들리는 소리라고는. "얘. 나랑 사귀자." "어림없지. 너 같은 인간은 이런 아가씨한테 어울리지 않아." "후후후. 나만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웃기지 마라. 이 아가씨한테 어울릴 사람은 나다 !" "허허허. 웃기지 마슈." 말다툼이 이상한 쪽으로 번져가고 있다.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이 여자는 내 거다 !" "아니다. 내 거다 !" "내 거다 !" 대사가 점점 요상해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이 여자는 나와 잤다.'라든가, '이 여자는 내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까 겁난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황당한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는 거냐. 처음에는 분명히. '자기들 부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거 아니었어?' 뭐 하는 짓을 봐서는 처음부터 권유가 아니지만. 저 꼴을 보니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싹 달아난다. 불행한 것은, 저 말다툼을 하는 인간들 중에 분명히 축구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끼어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축구부에 가입하면 저런 한심한 선배들을 모셔야 한다는 뜻인데. "아이구. 머리야." 우리 학교는 분명히 남녀공학인데, 왜 저렇게 여자에 목을 매고 있는 건지. 여기가 남자만 있는 학교라면 저렇게 여자에 광분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저 추태를 1학년 후배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이거 여파가 커지겠는데. '금년에는 운동부에 가입할 신입생들이 많이 줄어들 거야.' 저런 꼴을 보면 누구라도 운동부에 가입하지 않을 거다. 척 봐도 한심하지 않은가. 주위에 있던 여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농구부원으로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그들을 제지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녀는 미인이와 남자들 사이에 끼어 들며. "이봐. 얘가 당황하잖아." 와. 용기 있는 선배다. 순간적으로 농구부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려는 순간, 그 선배는 단 일격으로 제거 당했다. 남자들이 주먹을 휘둘렀냐고? 아니다. 그럼 발길질이라도 했냐고?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폭언을 퍼부었을 뿐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호박은 빠져. 못생긴 주제에." 요즘 호박은 저렇게 예뻤나? 대체 저 얼굴의 어디가 호박이라는 거야? 그 말은 주위 사람들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주었을 뿐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나 보다. 하긴 저 얼굴로 호박이란 평가를 들은 적이 없을 테니. 물론 상대평가로 하면 저런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내 여동생이란 인간이 원래 좀 비정상적으로 예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호박이란 말은 좀 너무했다. 그 말을 들은 농구부 여학생은. "......."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호박이란 말을 들은 게 어지간히 분했나 보다. 하긴 내가 그 여학생이라도 그럴 것이다. 대체 그 얼굴의 어디가 쭈그러진 호박이란 말인가. 다른 여학생들이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내 여동생을 보았고, 그 순간 사태가 커졌다. 순간적으로, 내 여동생이 호박이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망상까지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시 내 여동생은 악운 덩어리다. 유일한 장점조차, 이럴 때는 해가 되고 있으니. "마, 말도 안 돼." 이건 여자농구부 부원의 말이고. "저렇게 예쁘다니, 사기야. 성형수술 한 게 틀림없어." 이건 여자배구부 부원의 말이다. 하지만 저 녀석이 그런 걸 한 적은 없는데? "저 여자, 텔런트 아냐?" 이건 여자탁구부 부원의 말. "저 계집애. 당장 꺼져. 남자들이 추켜 세워주니까 콧대만 높아 가지고." 저. 정말로 못생긴 육상부 아가씨. 그 말은 별로 동감하지 못하겠는데요. 하지만 여자들의 분위기가 안 좋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자농구부원들이, 파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버렸다. 기절한 농구부원을 데리고 양호실로 달려가는 여학생들. 몇 명은 그렇게 체육관을 빠져나갔지만, 남은 부원들이 가만있을 리 없으니까. 그들은 문제발언을 한 인간을 향해. "야 ! 너 당장 사과해." 나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우선 그 기절한 농구부 여학생이 호박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못나지도 않았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자에게 대놓고 '넌 호박이오.'라고 말하는 게 무례한 행동이니까.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정도의 인간이, 그런 막말을 할 리가 없다. 그 뇌가 없는, 벌레 같은 선배들 중 하나가 한 대꾸는. "호박을 호박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메주를 메주라고 말하지 못하면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저건 불에 기름을 붓는 게 아니라, 아예 화약을 붓고 수류탄까지 던져주는 거다. 여자농구부원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남학생을 향해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당장 덤벼들었고, 아무리 여자들이라고 해도 남자 혼자서는 그들을 모두 당할 수가 없다. 순식간에 그는 잡혀서 적절한 응징 - 집단구타 -를 당했지만, 그걸 본 그 남학생의 선배들이 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순식간에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주먹질을 했고, 그러자 다른 부의 여학생들까지 난리가 났다. 그들은 일제히 농구공과 배구공, 탁구공 등, 온갖 공을 마구 던졌으며, 그 공에 맞은 남학생들이 약간 물러섰지만, 이번에는 그 뒤에 있는 남학생들에게 공이 날아가는 바람에 날벼락을 맞은 다른 남학생들이 분노했고, "악순환." 그 평가가 딱 맞는 상황이 되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저 정도면 내 여동생도 경국지색(傾國之色 : 임금이 가까이 하여 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미인)이라고 불러줘도 될 것 같다. 아니, 이 경우에는 경국지색이 아니라 경교지색(傾校之色)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런 난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미인이를 데리고 튀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난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건 미인이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오빠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으나. "오빠. 도망가 !" 여동생의 어명이 떨어졌다. 그 말에 거역할만한 베짱이 없었던 나는, 즉시 진희를 데리고 체육관 밖으로 달아났다. 지우는 그 판에도 어떻게든 미인이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인간이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로 뒤엉킨 난장판을 뚫고 미인이에게 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누더기가 되어 버렸고, 옆에서 보기에 참 안쓰러운 꼴로 기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불쌍한 녀석. 어째서 저런 애를 좋아해 가지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만약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 뒤의 일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여학생들의 공적이 되어버린 내 여동생의 운명은? 하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 녀석이 고작 수 백 명이 덤빈다고 죽을 인간이냐.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여동생이라면 어떻게든 살아서 나올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적어도 나에게 도망가라고 할 때의 미인이의 얼굴은, 두려움에 떠는 소녀의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일은 아마 이렇게 전개되었을 거다. 그렇다. 처음부터 내가 여동생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거다. 왜 그러냐고? 저걸 봐라. 휴대폰으로 자기 경호원들을 부르려는 풍남이조차, 입이 떡 벌어져 있다. 아. 저런 방법이 있었구나. "남자들이란 좌우지간." 뭐, 뭐냐. 저 사람은 분명히 축구부 복장을 한 인간인데? 그러고 보니 아까 막말을 한 일당들 중 한 명이다. 정말 저런 인간을 선배로 모셔야 하는 내 처지가 불쌍하다. 아예 축구부 가입을 포기해 버릴까. 어쨌든 미인이는 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 있었다. 이 녀석은 사람을 뭘로 아는 거냐. 상당히 거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미인이. 이봐. 너 치마 입고 있잖아? 그러면 속옷 보여. 하지만 역시 내 여동생다웠다. 아무리 봐도 속옷이 안 보인다. 나만 그런 거냐고? 거리가 멀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니냐고? 아니다. 주위의 음흉한 운동부원들도 보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치마가 어떻게 된 건지 절묘하게 그 부분을 가리고 있다. 아마 운동부원들은 이런 생각을 하겠지. 아니. 실제로 말하고 있다. "서비스 좀 해라. 하나도 안 보인다." 이봐. 당신들.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시간인데. 부디 명복을 빈다. 아. 왜 여동생을 돕기 위해 달려가는 오빠가 되지 않느냐고? 원래 무술의 하수는 고수가 실력을 보여줄 때, 그냥 얌전히 구경만 하는 게 순리다. 저걸 봐라. "예쁜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혀 가지고." 그리고 그 잠시동안의 긴장의 순간은, 누군가가 미인이의 속옷을 보려고 너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깨어졌다. 뭔가 날아간 것 같은데, 안 보인다. 다만 그 파렴치한이 흐물흐물해지면서 쓰러진 것만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선배답게 체통을 지키시는 게 어때요? 전 어느 부가 좋은지 알고 싶어서 온 것뿐인데." 여기서 이 인간들이 얌전히 물러났으면, 문제는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군중심리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 인간들은 그대로 폭도가 되어 미인이에게 덤벼들었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눈이 멀어서, 여자들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그들은 마치 좀비들처럼, 마치 시체들이 일제히 손을 하늘로 쳐들고, 단 한 사람을 향해 피와 살을 갈구하듯 한 사람을 덮쳤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할 수 없네요. 몸이나 좀 풀어볼 수밖에." 미인이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먹이감을 앞에 둔 맹수의 그것처럼.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그걸 직감한 나는, 재빨리 진희를 데리고 도망갔다. 이러고 저러고 할 게 아니다. 체면 차리며 버티고 서 있다간 죽는다. "모두 피해 !" 몇 명은 그 말을 들었는지, 뒤로 물러섰다. 좀 이성적이고,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훌륭한 선배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골빈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불행히도 우리 학교에는 그런 선배가 너무 많았다. 그들은 내 경고를 무시하고, 미인이에게 덤벼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의 장면은 어땠냐고? "여동생은 힘이 세다." 그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상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우선 발 아래의 선배를 걷어차서 나뒹굴게 만들고, 무더기로 몰려오는 선배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신기한 건, 그 상황에서도 아무도 미인이의 치마 속을 못 봤다는 거다. 여동생의 신비인가. 그녀는 체육관 구석까지 날아가서, 대걸레 하나를 집더니 걸레자루만 뽑아들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인가. 그게 아니면 물 묻은 걸레를 휘두르면 물이 튀기니까 자기 옷을 더럽힐 걸 걱정해서인가. 뭐 어쨌든 그건 넘어가자. 이 녀석은 걸레자루를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을 까닥거린 거다. 이봐. 손바닥을 하늘로, 손등을 땅으로 향한 다음에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하는 동작은. 설마. "와봐." 그 말에 따라, 야수로 변한 (남자) 선배들과 질투로 눈먼 (여자) 선배들은 일제히 미인이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너무나 강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동네축구만 하던 녀석들이 세계 최강 브라질 국가대표팀과 맞붙은 꼴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와 마찬가지였다. 우선 그녀는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선배를 그대로 한 방 치고. "죽였냐." 그 선배는 그대로 자빠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나 보다. 잠시 멈칫거리던 선배들은 다시 돌격해왔지만, 그들의 무리 한 가운데로 뛰어든 여동생은 마치 중국무술이라도 선보이듯 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한 번 봉을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명의 선배가 쓰러진다. 어떤 선배는 체육관 벽으로 날아가 버리고, 어떤 선배는 하늘로 치솟았다가 그대로 떨어진다. 저 녀석, 인간을 야구공으로 아는구나. 다만 보통 야구공과 다른 점은, 야구공의 수가 자꾸 늘어난다는 거다. 몇 명의 선배가 이렇게 외치면서 밖으로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저 녀석, 괴물이다. 다 불러와." 계속 맞아 쓰러지는 운동부 학생들. 그들이 정말로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맞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동아리 의식만큼은 알아줘야겠다. 미인이에게 맞아서 누더기가 되는 학생들의 수에 비례하여, 운동부의 다른 부원들이 몰려오는 수도 점점 불어났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은 걸. 감히 내 여동생의 허리를 붙잡으려던 선배 한 사람이, 봉에 맞고 저 멀리로 나가떨어진다. 어떤 선배는 발차기로, 어떤 선배는 주먹질로, 어떤 선배는 봉에 찔려서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체육관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날려간다. 아. 저게 과연 내 여동생이란 말이냐. 아니. 게다가 저건 또 뭐 하는 짓이냐. "사람이 아냐." 중국무술영화를 생중계로 보니까 멋지냐고? 멋지기는 어디가 ! 영화에서는 저렇게 유혈이 낭자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 머리가 깨지는 선배, 팔다리가 부러지는 선배, 아. 허리가 부러지는 선배도 있구나. 저 선배는 이제 장가는 다 갔다. 어어어. 가랑이 사이를 때리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여동생아. 선배들은 필사적으로 여동생에게 덤볐지만, 처음부터 싸움이 되지 않는다. 때리는 건 여동생이고, 맞는 건 선배들이다. 그 법칙에 예외는 없다. 수학이라면 '예외가 없는 법칙은 없다.'고 하겠지만, 내 여동생은 특이체질인지 그 법칙을 마구 무시한다. 이러다가는 다 죽이겠다. 어떻게든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늦었어." 말리려면 사상자가 나오기 전에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너무 늦었다. 이미 이 상황은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고, 끝을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미인이가 끝을 보는 게 아니라, 선배들이 끝을 볼 것 같지만. "와악. 야압. 죽어." 기세 좋게 덤비시는 건 좋지만, 기세 좋게 맞아죽기만 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선배들은 여동생에게 덤비다가 잇달아 봉에 맞아 시신으로 변해갔고, 점차 시체더미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런 살인마 같으니. 하지만 미인이가 봉을 휘두르는 기세는 멈추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좀 봐줘라. 이러다가는 우리 학교의 선배란 선배는 모조리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여동생은 이 유혈사태를 중지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하다.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다. "어머나. 이제 포기하신 건가요?" 도대체 얼마나 더 죽이려고 그러는 거냐. 그러면 사람들이 더 덤비지 않겠냐.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녀가 죽거나 다친 사람들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피 한 방울도 옷에 묻히지 않았으니, 누가 그녀에게 손을 대겠는가. 게다가 그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치마 속은 여전히 안 보인다. 역시 여동생의 신비인가. 슬슬 상대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질렸는지, 선배들이 물러난다. 결과는 최악에 가깝지만, 일단 이것으로 싸움은 끝인가. "!" 아니잖아. 어지간하면 그만두지. 이제는 쇠파이프에 화염병, 심지어 전기톱까지 들고 나온다. 미인이가 즐겨 사용하는 식칼도, 저런 것에 비하면 얌전한 숙녀의 무기로 보였다. 뭐야. 우리 학교 선배들은 모두 조직폭력배였나. "미인아. 도망가 !" 내가 이렇게 외치며 선배들과 미인이 사이를 가로막았냐고?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 솔직히 걱정도 되지 않지만. 선배들은 미인이를 둘러싸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어느새 그녀와 선배들 사이의 간격은 세 걸음 이내로 좁혀졌다. 하지만.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미인이의 발차기가 가장 앞에 선 선배에게 날아갔다. 그게 발차기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그럴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침마다 맞아본 경험으로 보아, 내 여동생은 발차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결론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럼, 18세 이하는 모두 퇴장해주세요. 잔인한 장면은 청소년 건강에 해로워요." 그러는 너는 청소년 아니냐. 어쨌든 미인이는 자신이 들고 있던 대걸레 자루를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에는 아까 선배로부터 빼앗은 쇠파이프를 들었다. 양손에 꽃을 든 게 아니라, 양손에 무기를 든 셈이다. 지금까지 봉 하나만으로도 일방적이었는데, 무기가 하나 더 생겼다면 그 결과는? 게다가 오른손의 것은 쇠파이프다. 쉽게 부러질 무기도 아닌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돌격했고, 그것은 거대한 톱이나 다름없었다. 두 개의 무기를 휘두르는 손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전기톱처럼, 사람의 사지를 찢어발길 뿐이다. 이건 너무하다. 순진한 고등학생이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상황이다. 연이어 들려오는 비명과 절규. 그리고 살 찢어지는 소리가 체육관을 채운다. 선배들의 흉기도 이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절규뿐. 이대로 간다면. "그만해 !" 이젠 더 놔둘 수가 없다. 더 이상 내 여동생이, 대량살인자로서의 악업을 쌓게 놔둬서는 안 된다. 그런 의무감이 저 피를 뿜어내는 살인기계에게, 그렇게 외치게 할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여동생이 회전을 멈추자, 주위의 선배들이 덤벼들었다. 살의를 품은 그들은 내 여동생을 깔아뭉갰고. 그 다음은. "이제 포기하고, 나하고 이렇고 저렇고 그런 짓을 해보는 게 어때." 처음에 망언을 늘어놓았다가, 이런 엄청난 참극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선배였다. 이봐요. 당신. 당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반성은 안 하고 도리어. 그러나 우리 학교 선배들은 내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으니. "나도." "나도." 차라리 말리지 말 걸. 괜히 여동생을 말렸다가, 그녀를 수치스런 희생물로 만들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놔둘 걸. 그러나 내 여동생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괴물이었다. 선배들로 이루어진 인간 산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봐. 보통 인간은 자기 몸무게의 3배에 달하는 중량을 들어올리는 게 한계라고. 그 상식을 무시하는 거냐. 아니. 잠깐. 내 여동생에게 그런 상식이 통하기나 하나? 그리고. 콰앙.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선배들은 밖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어떤 선배는 체육관 벽에 박혀버리고, 어떤 선배는 지붕을 뚫고 날아간다. 하늘로 날아가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서, 버둥거리다가 축 늘어져버리는 학생도 보인다. 죽었나 보다. 아직 살아있는 학생들을 향해, 내 여동생은 선배 하나의 다리를 붙잡고 빙빙 돌린다. 자세히 보니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선배다. 내 여동생은 그를 무기처럼 사용해서 사람들을 터뜨리다가, 그를 마지막 생존자들의 무리에게 겨눈다. 그에게 내 여동생이 던진 마지막 말은. "넌 이미 죽어있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물론 그런 내 애원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아까 일도 있으니. 이번엔 내 여동생도 절대로 이들을 용서해주지 않을 태세다. 그녀는 그를 인간무더기에게 내던졌고, 그는 마치 폭탄처럼 폭발해버렸다. 그리고 체육관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이 난동에 가담하지 않은 선배들도, 나도 아무 말도 못하고, 오직 그녀만을 바라볼 뿐이다. 시체들 위에 서 있는 괴물을. '도, 도대체 날 뭘로 알고 있는 거야? 오빠라는 사람은.' 나는 오빠의 망상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없지만, 마법사라는 입장에서는 이런 건 간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오빠에게 저런 인간으로 비춰지고 있었던 말야? 왜 멍하니 서 있나 궁금해서 마음을 들여다보았더니, 역시 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그냥 패버릴까. '하지만 망상까지 규제할 수도 없고.' 게다가 저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 적어도 오빠가 모르는 세계에서는, 난 저런 식으로 싸우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나 자신이 힘에 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할 여지는 있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오빠는 내가 마법사라는 걸 모르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식으로 상상의 날개를 펴나가는 것일까. '그렇게 조심했건만.' 역시 마법을 쓰지 않고 정체를 숨기는 것에는 한도가 있는 법이다. 되도록 오빠의 정신세계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데.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남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 상대의 정신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상대를 사람으로 취급하기보다는, 인형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오빠는 내 인형이 아니고, 나는 오빠를 그렇게 다루고 싶지 않다.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당장에 뜯어고치고 싶은 취향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소란이 수습되고 나서, 선생님께서 물어보신 것은 당연히 이 일이 왜 일어났느냐는 것이었다. 진희가 차분하게 설명을 끝마치자, 선생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호오. 그러니까 적당한 부에 가입하려고 여기 온 거였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 마세요. 선생님. 애 머리 떨어지는 걸 겁내는 부모 심정을 이제 알겠습니다. 불안해요. 안 그래도 키가 작아서, 머리가 더 크게 보이는데. "네.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런 일이 있어서, 운동부는 좀." 어째서 일이 이렇게 꼬인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이 일로 인해 미인이는 운동부에 가입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당연히 다른 부에서 들고일어날 테니까. 예쁜 여자에 미친 선배들 덕분에 나만 죽어나는구나. 아. 뭘 걱정하느냐고? 미인이가 운동부에 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진희도 운동부에 오기는 틀렸으니까. 부잣집 아가씨답게 온실에서만 커 온 진희에게, 혼자서 저런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버티는 곳으로 가라고 하면 갈 것 같으냐. 나라도 안 가겠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뒤엎을 만큼, 운동부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여자들이 이 사건으로 미인이에게 가진 감정은,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특히 호박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쓴 농구부의 그 아가씨라면. '너도 안 됐다. 미인아.' 내 여동생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다. 그렇다면 미인이가 택할 부서는 역시 학습부인가? 하지만 저 녀석에게 그런 부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고. 입시철이 되면 언제나 나오는 말이 있다. 최고점수 획득자의 말로는. "네. 잘 거 다 자고, 학교 수업에만 충실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내 여동생이라도 되냐.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하게. 물론 그렇게 말하라고 위에서 시켰겠지. 위가 누군지 말할 수야 없지만. 실제로는 세 시간만 자고 24시간을 공부만 했으면서, 말로만 그렇게 언급한다. 하지만 그 말을 실현시키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내 여동생도 인간의 부류에 넣는다면 말이지. '그런 녀석이 굳이 학습부에 갈 일은 없을 테고.' 그렇다면 녀석이 갈 곳은 어디일까. 운동부만 특별활동부인 것은 아니니, 아마 다른 곳에 가면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흑마술부.' 나도 모르게 그 부의 이름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 행각으로 보아, 여동생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곳이라고 생각된다. 이유는 없지만, 무의식중에 떠오른 낱말이 그거인데 어떻게 하냐. 하지만 진희가 흑마술부에 들어가면? '진주목걸이를 핏물에 빠뜨리는 격이지.' 문제다. 정말 문제다. 진희가 만약 내 여동생과 단짝이 아니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는 좀 가려서 사귀어라. 진희야. 물론 지우를 보면 내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흑마술부는 안 되고. 다른 좋은 부가 없을까. 조건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바퀴벌레 접근금지.' 그래서 내가 진희와 미인이가 운동부에 가입하길 바랬는데. 여자운동부라면, 풍남이 녀석이 같이 가입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런 꿈은 이제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일단은 저 운동부 짐승들의 마수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급한 과제다. 그렇다면 아무 부라도 가입을 해야 할텐데, 어디가 좋을까. 그 고민을 풀어준 것은, 엉뚱하게도 초등학생이었다. 아. 진짜 초등학생은 아니고. 우리 어린애 선생님 말이다. 뭐? 나이로 봐서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런 건 무시한다. 여자의 모든 것은 외모다 ! 이런 남녀차별적인 생각을 해버려서 진희에게는 미안하지만, 저 외모를 보면 그렇게 생각되는 걸. 어쨌든. "그럼 어느 부로 갈 생각이니? 운동부에 가입하는 건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고." 왜 웃으시는 겁니까. 선생님. "지금으로선 비운동부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귀가부에 가입하고 싶지만." 이런 게으른 녀석. 그러니까 저 말은, 집에서 잠이나 자고 싶다는 거다. 확실히 내 여동생답다. 선생님조차 웃는다. 집안망신. "후훗. 하긴 강제로 가입하는 건 별로 좋지 않지." 언니와 동생. 사이좋은 자매를 연상시키는 두 사람이었다. 물론 미인이가 언니고, 선생님이 동생인 사이로 말이다. 비록 말투는 정반대지만, 일단 외모만 평가하면 그렇다. 잠깐의 기분전환으로 미소가 지나간 후. "그럼 항공우주부에 가입하면 어때?" "네?" 잠시 고민하는 미인이와 진희. 그러나 선생님은 웃으면서 설명을 계속한다. 확실히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찡그리고 설명하는 왕건전과 비교하면, 저게 학습효과가 100배 이상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좀 웃고 삽시다. 그런데 항공우주부라면? "항공우주부. 내가 맡은 부지만, 꽤 괜찮은 부라고 생각해. 공군사관학교에 견학 갈 수도 있고, 에어쇼에 가 볼 수도 있고, 비행에 관심이 있으면 무인비행기를 만들어볼 수도 있으니까. 학습부에 들어가서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창공을 날면서 꿈을 키우는 게 어때? 적어도 우리 부에는." 왜 절 쳐다보시는 겁니까. "저런 무례한 인간은 없으니까." 아직도 어린애라고 말한 걸 마음에 두고 계신 겁니까.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조금 전의 행동이 실례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어제 그 난리를 치면서 소개된 선생님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다시 기억나는 어제의 선생님의 모습. "아. 안 보여. 이거 교탁이 너무 높아." 안 돼. 웃으면 안 돼. 나는 필사적으로 그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어제의 그 소동을 생각하면, 내가 '꼬마 선생님'을 까먹은 것도 조금 심하기는 하다. 약간은 반성해야겠군. 그러나 그건 일단 넘어간다. 웃음을 참는 데 전력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안 보여. 이거 교탁이 너무 높아." 그 말이 자꾸만 내 귀를 울린다. 잊어버리려고 하지만, 안 된다. 차라리 어제 일을 잊어버린 채로 있었다면 좀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아예 새겨져버렸다. 이래가지고는 잊어버리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려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그 절대적인 힘에 저항했다. 눈을 감는다. 안 된다. 어제 선생님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른다. 차라리 잊어버리고 있을 걸. "참자. 참자. 참아야 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복을 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내가 깨닫고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 항공우주부라는 곳에 진희가 들어갈 것인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견이냐고? 당연히 반대다. 그 부에 대해 원한이라도 있냐고? 아니다. 그럼 '어린애 선생님'의 성격이 문제인 거냐고? 그것도 아니다. 문제는 항공우주부가 운동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냐고? 생각해 보라. '만약 진희가 여자 전용부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럼 당연히 그녀는 남자부원과 여자부원들이 사이좋게 모인 부에 들어가겠지. 예를 들어 항공우주부 같은 곳 말이다. 그런데 그러면, 누군가가 거기에 같이 들어가게 될 거다. 그게 누구냐고? 단순하게 정리하면. '사상 최악. 바퀴벌레와 요조숙녀의 동거.' 이렇게 된다. 이건 곤란하다. 아주 곤란하다. 게다가 진희와 같은 부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되는 내 여동생이, 그 벌레를 막을 뜻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물론 내 여동생이 마음만 먹으면 바퀴벌레를 쫓아내는 거야 간단하겠지만, 문제는 의지다. 날 골탕먹이는데 여념이 없는 녀석이, 나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것 같은가? 그러니 가급적이면 진희가 저 '귀여운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하기를 바라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는다. '시간 없어.' 이러다가 해 지겠다. 시계를 몇 번이나 쳐다보면서 진희의 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럼 내 여동생은 뭐하냐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진희를 쳐다보고 있다. 저 녀석이 진희의 좋은 친구라서 그녀를 배려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날 놀리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날 도와주려면 네가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말하란 말야. 하지만 그런 개꿈이 이뤄질 리는 없고. 결국 국방부 시계의 가장 긴 시계바늘이 한 바퀴는 돌아갔다고 생각되는 시점이 돼서야. "생각해볼게요." 참 빨리도 대답한다. 그것도, 진희가 아니라 내 여동생의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려면 진작 해야지. 도대체 왜 이렇게 대답이 늦게 나오는 거냐. 나는 여동생을 욕하고 싶었지만, 아직 진희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으니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에야, 진희가 말을 꺼냈다. "생각해볼게요." 음. 신중하고 사려 깊은 대답이다. 매사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아가씨의 기품이 드러나는 대답이었다. 약간 실망한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약간 침울해졌다. 왜 그러냐고? 착한 어린애를 슬프게 한 것 같아서, 죄책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진희도 미인이도, 그리고 저 양심에 털 난 풍남이까지도 미안해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어쨌든 그렇게 해서 항공우주부 입부 문제는 잠시 해결을 미루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금 다른 부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체육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잠깐 !" 왠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누구냐고? 고개 돌려볼 것도 없다. 아까 그 난동을 부리던 인간들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을 잊고 있었어. 제발 가라. 가.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는데 왜 나타난 거냐. 그 중에서도 정말 수치스러운 것은, 저들 중에 축구부가 끼어있다는 것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지간하면 운동복 입고 여기 오지 말아라. 가슴에 '난 축구부요'라고 커다랗게 쓴 채로 그런 주책 맞은 행동을 하다니. 하지만 체육관에서 운동복을 입지 말라는 게 무리고. 그런데 이번에는 뭘 요구할 셈이지? 나도 모르게 우리의 '초등학생 선생님'에게 시선이 간다. 선생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좀 해봐요. 그녀의 확성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 전에 우리 운동부를 견학하는 게 어떻습니까?" 모두의 얼굴에 난처하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하긴 조금전의 사태를 생각하면 달가운 말이 아니지. 그 난리를 쳤는데, 운동부에 견학하러 갈 생각이 들 리 없다. 무쇠팔 무쇠다리에 무쇠심장을 지닌 내 여동생은 논외로 치더라도, 진희같은 연약한 아가씨에게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저 음흉한 눈빛을 보라. '진희가 갈 만한 곳이 없어.' 그럼 여자만 있는 운동부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그런 곳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저 인간들이 만약 진희가 여성전용 운동부에 가입한다면, 어떻게 나오겠는가. 아마 이럴 게 분명하다. 절대로. "그 아가씨를 내놔라." 아마 이렇게 몰려가서, 행패를 부릴 것이다. 아까 하던 짓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물론 그 아가씨는 진희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아가씨가 진희와 단짝 친구이니 둘이 같은 부에 가입할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참 여러 모로 사람을 고생시키는구나. 여동생아. 그런 입장을 이해해서 그런지, 이번에도 우리의 '너무나 어린 선생님'이 대타로 나서주신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아. 귀여워. "이봐. 너희들. 아까 그런 소동을 일으켰는데 어떻게 이 애들이 운동부를 마음 편히 견학할 수 있겠니."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선생님이 상대라는 점이 그들을 일단 멈추게 하고 있지만, 만약 우리만 있었다면 당장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내 여동생을 빼앗아가기 위해서. 물론 그랬다면, 정말로 미인이는 내 망상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도 안 됩니다. 우리 부로 올 선택의 기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부를 못 보고 그냥 지나가면 3년 내내 후회할 겁니다." "항공우주부 반대 ! 저런 아름다운 아가씨들은 당연히 전국대회에서 우릴 응원해줘야 합니다 ! 반대 ! 반대 !"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한 법." "당사자의 의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 부를 견학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봐요. 당사자의 의사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어요. 아까도 그러더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여자의 인권은 전부 다 시궁창에 처박아야 한다는 선배들인가. 그게 아니면 누군가의 마성을 띈 아름다움에 홀려버린 탓인가. 사태는 더욱 더 나빠지고 있다. 선생님이 확성기를 켜서 애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건전지가 다 됐어." 이런. 이런. 잔뜩 기대했는데, 그러시면 어떻게 하라고요. 진희의 실망한 표정이 너무나 안타깝다. 이거, 오늘은 하루종일 악당들을 만나는 게 운명인가. 아침에는 치한을 만나더니, 지금은 선배들을 만나는구나. 예쁜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니, 좀 그만 와줬으면 좋으련만. 게다가 사태는 점점 요상해지고 있다. "정당한 가입 권유를 막다니, 선생님의 횡포다 !" "권력남용 반대 !" "독재자는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투쟁. 투쟁. 투쟁." 언제부터 이 선배들이 이렇게까지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아지신 걸까. 게다가 아까부터 이 선배들 때문에, 정작 중요한 부 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 지루한 연극은 이제 그만두라고 ! 누가 이 녀석들을 좀 어떻게 해줘.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쿵. 그 말을 들어주기 위해, 여동생께서 강림하셨다. 뭐? 그녀가 내 상상처럼 주먹질과 발길질, 심지어는 걸레질까지 해서 선배들을 모두 날려버렸냐고? 아니다. 그럼 도망갔냐고? 그것도 아니다. 그런 걸 도망이라고 표현하면 의미가 안 맞는다. 그럼 마녀답게, 마법을 써서 하늘로 날아가 버리거나 선배들을 돼지로 만들어버렸냐고?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 녀석이 정말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좀 쓸 것이지. 여태까지 가만히 있는 건 또 뭐냐? 어쨌든 그녀는. "오빠. 가자." 당당히 내 손을 잡는 여동생. 아. 이 손이 진희의 손이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끌고, 그 녀석은 태연하게. 정말 태연자약하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이. 그대로 가면 선배들한테 부딪친다고. 게다가 이건 자기가 스스로 남자들 품에 뛰어드는 형국이잖아? 아무리 내 여동생이 천하무적 지상최강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한 게 아닐까? 그러나. "에?" 내가 바보처럼 말했다고 해도, 그건 절대로 이상한 게 아니다. 왜 선배들이 다들 비키냐?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어쨌든 선배들 사이를 빠져나갈 기회라는 건 틀림없었다. 곧바로 진희와 선생님이 그 뒤를 따랐고, 풍남이 녀석도 졸졸 따라왔다. 아. 지우 녀석은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부스스 일어서더니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따라온다. 너, 몽유병 환자였냐? 딱 그렇게 보인다. 선배들이 마치 우리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 같다. 뭐냐. 이건. 아까 보여준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잖아. 설마. '이 녀석, 정말 마법사였나?' 정말 내 여동생이 마법이라도 쓴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선배들의 무리를 뚫고 지나올 때까지, 나는 그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이 괴현상은 계속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이 선배들이 왜 스스로 물러서는 거야? 그리고 물러서기 전에, 왜 눈동자가 좌우로 씽씽 움직이는 거지? 주위의 눈치를 보고 있나? 가만. 눈치? '아 !' 유레카(알았다) ! 나는 2000여 년 전의 고대의 유명한 학자인, 아르키메데스처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선배들이 물러나는 것은, 즉 주위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속은 하나같이 이럴 것이다. '저 여자는 내 거다. 저 미인을 우리 부에 데려가서,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하고 싶어. 히히히.'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미인이를 자기 부에 안내해야 한다. 그러나 아까 벌어진 소동도 있으니 미인이가 자기들 부를 견학할 리가 없고. 그렇다면 강제로 데려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 선배가 그런 짓을 한다면? 그럼 주위의 다른 운동부원들은 과연 가만히 않아서, 내 여동생을 빼앗기는 걸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아닐 걸.' 나라도 그렇게 멍하니 있지는 않겠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다른 운동부 선배들도 일제히 나설 것이고, 최초로 내 여동생을 납치한 인간은 파렴치한으로 몰려 죽도록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작 내 여동생을 데려가는 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며, 처음 나선 인간은 희생양으로서 무자비한 구타와 집단폭행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누가 과연 미인을 쟁탈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과정이 시작되려면, 바로 '파렴치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멍청이가 그런 손해보는 역할을 맡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판단은 그들이 미인이와 접촉하는 걸 피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왕님을 모시는 시종들처럼, 미인이에게서 물러서서 길을 터주는 결과를 만들고 만 거다. '모세의 기적인가.' 마치 모세의 기적 같다. 모세의 한 마디에 바닷물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내 여동생은 선배들로 이뤄진 바다를 가르고 우리 모두를 데리고 체육관을 떠나고 있었다. 그럼 그녀가 그렇게 선배들까지 복종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존재냐고? 아니다. 저건 선배들의 시커먼 속셈과, 그것을 꿰뚫어본 내 여동생의 눈썰미 때문이다. 그냥 폭력으로 길을 뚫는 것보다 더 무섭다. 선배들의 속을 모조리 알아챘다는 소리가 아닌가. '괴물같은 녀석.' 손도 안 대고 백 명이 넘는 선배들을 물리치다니.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체육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가만. 가만. 이쪽은 체육관 밖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왜 안으로 들어가는 거냐? 이쪽은 운동부실 쪽이잖아. 나는 머리를 빙빙 돌리면서, 이 녀석의 목적지를 추측하려고 했지만 그게 안 된다. 도대체 누가 이 괴물 여동생의 시커먼 속을 알 수 있겠냐. 결국 진희가 입을 연다. "미인아. 어디로 가는거니?" "축구부." 뭣이? 축구부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하려고 했지만, 저 녀석은 허튼 소리를 내뱉을 인간이 아니다. 저 녀석하고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런 것도 모르겠냐. 그럼 내 여동생은 정말로 축구부로 가고 있다는 뜻인데, 왜 가는 거지? '견학하려고 가는 건 아닐 테고.' 당연히 그럴 턱이 없다. 조금 전의 그 난리를 생각하면, 축구부는커녕 운동부 근처에도 오고 싶지 않을 거다. 그런데 가입을 할 리가? 그렇다면 저 녀석의 속셈은. 설마. "잠깐 !" 나는 내 여동생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이렇게 멋지게 외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 여동생은 상대의 속셈을 읽어내는 천부적인 능력이라도 가진 모양이다. 내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을 노려, 한 마디를 던지는 여동생. "일단 오빠가 축구부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려고. 당분간은 이 체육관에 올 생각이 없거든." 너, 내가 무슨 불량청소년인줄 아냐. 이 녀석은 마치 자기가 내 누나라도 되는 걸로 착각을 하고 있다. 그래. 이 오빠가 못미더우니까, 오빠의 축구부 가입을 확인하겠다는 소리냐.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허락할 것 같으냐. 진희가 풍남이와 다른 부에 가입하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절대로 못 간다. 내가 진희와 같은 부에 가입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풍남이가 진희와 같은 부에 가입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신성한 의무다. "아. 그러고 보니 문구는 축구 국가대표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 진희 너하고 사귀게 되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내 미래의 아내를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면 곤란하니까. 그러나. "응. 오빠의 오랜 꿈이니까. 그래서 지금 축구부로 가야 하거든. 힘들면 풍남이하고 같이 체육관 밖에 나가 있어. 곧 뒤따라 갈 테니까." "뭐라고 !" 나는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 미쳤니. 그러나 내가 소리를 지를 권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목소리가 목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내 여동생은 갑자기 내 윗옷 단추를 채운 것이다. 너무 전광석화 같아서 피할 여유도 없었다. 그녀의 손이 내 목에 살짝 닿았다고 느끼기도 전에, 내 비명은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내 웃옷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풀어진 단추가 없는지 확인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이 인간들이. 눈은 두고 뭘 보는 거야. "와. 사이좋네?" 이건 꼬마 선생님의 상황파악도 못하는 말. "원래 미인이하고 문구는 쌍둥이니까요.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은 남매로 유명했어요." 지우야. 그런 헛소문은 퍼뜨리지 마라. 아무리 네가 내 여동생에게 푹 빠졌다지만, 아직 고백도 못한 주제에 나와 내 여동생의 사이에 대해 헛소리를 하면 안 된다. "문구 녀석에게 있어, 오직 하나의 장점은 저 여동생이니까요. 선생님." 이, 이. 풍남이 이 녀석이. 눈이 그렇게 썩어빠져 가지고 어떻게 대기업 회장이 될 생각이냐. 넌 이 녀석이 내 목을 누르는 것도 못 봤단 말이냐. "나도 오빠가 있었으면, 저렇게 했을지도." 행복하겠다고 단정하지 말아 줘. 진희야. 차라리 네가 내 여동생이 되었으면 이렇게 고생스럽지 않을텐데. 나는 반론조차 펴지 못하고, 미인이의 손에 목을 졸린 채 꼼짝못하고 있었다. "야. 너 이래도 되는 거냐. 오빠의 목을 조르다니." 가장 앞에 서서 걸어가는 미인이 옆으로 간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항의한다. 대낮에 이런 치사한 암수를 쓸 줄이야. 정말 악당이다. 그러나 이대로 축구부에 끌려갈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 녀석을 막아야 한다. 뭐? 그러면 여동생을 힘으로라도 제압하라고? 내가 아까처럼 되는 걸 그리도 보고 싶은 거냐. 게다가 뒤에 선생님도 계신데, 어떻게 그렇게 하라는 거냐. 그렇다고 선생님이 가버리면 좋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운동부의 선배들이 다시 침을 좔좔 흘리며 미인이를 노리고 덤벼들 거다. 물론 아까 내가 당한 걸로 보아, 그런 멍청한 선배가 있다면 그 즉시 응징을 당하겠지만. 그래서 내 목소리도 당연히 커질 수가 없었고, 미인이도 그런 내 꼴을 보더니. 웃는다. 이런 망할 녀석. "오빠는 축구부에 가입해야 하잖아. 언제나 그러지 않았어? 대한민국의 축구의 장래는 오직 오빠한테 달려있다며? 그럼 빨리 축구부에 가서 연습해야지. 그러려면 빨리 가입하는 게 최고고." "내일 하면 안 되니?" "오빠도 일단은 사나이잖아. 사나이라면 그런 애정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놓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앞으로 가는 거야. 남녀차별주의자인 오빠라면, 여자한테 신경 쓰다가 낙오할 생각은 없을 텐데?" "내가 왜 남녀차별주의자냐." "여자는 외모가 전부라며?" 이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여동생의 공격은 계속된다. "게다가 지금 가입하지 않으면 늦어. 이제 신학기고, 오빠로서는 장래에 진짜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면 매일매일 연습해도 모자라. 뭐 기본은 일단 충실하니까 다행이지만." "하고 있어." "늦잠 자려고 자명종 시계를 부순 게 몇 차례이더라?" "그게 내가 부순 거냐. 잠결에 자명종을 끄려다가 떨어뜨린 거지." "한 두 번이어야 믿어주지.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튼튼한 걸 골랐으니까, 아마 떨어뜨려도 꽤 오래 버틸 거야." "외형은 엉망이더라." "외형보다는 실속이 중요해." "이 세상은 외형이야." "축구선수는 그렇지 않아. 아무리 겉모양이 멋지더라도, 속이 엉망이면 축구선수로 대성하지 못해. 축구 좋아하는 오빠라면 그런 건 잘 알텐데?" "그래도 외모는 중요한 거야. 호나우두와 베컴을 봐라. 축구실력은 호나우두가 더 나을지 몰라도, 인기는 베컴이잖아." "월드컵 우승은 인기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이걸 어떻게 해야 제대로 받아쳤다고 해야 하나. 반격을 모색하던 중에 들려오는 지우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축구부에 가입하려고 왔습니다. 선배님들 계신가요?" 악 ! 당했다 ! 이 녀석과 말싸움하느라 정작 중요한 걸 까먹었다 ! 내 여동생을 본 축구부 선배가 침을 좔좔 흘리며 덤벼들려고 하지만, 뒤에 계신 선생님의 화난 얼굴을 보더니 손을 슬그머니 내린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선배. 완전히 체면을 다 구기시는구나. 평소라면 그걸 보고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이거 큰일났다. '빼도 박도 못하고.' 이대로 나는 축구부에 가입하고 마는 것인가. 콰콰콰쾅. '이걸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내가 당황해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사이에, 지우 녀석은 번개처럼 축구부 가입의사를 말해버렸고, 축구부 선배들은 친절하게도 가입서 두 장을 가져왔다. 물론 그들은 내 여동생을 참으로 관심 있게 바라보았지만, 선생님의 존재로 인해 참고 있는 듯 했다. 지우 이 녀석, 이럴 때만 동작이 빠르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가입하려면 너만 가입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란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꼼짝못하는 내 앞에 날아오는 가입서. "잠깐. 왜 두 장만 오는 거야?" 여기 온 사람은 분명히 여섯 명이다. 물론 이 중에 선생님은 제외해야 하지만, 그래도 다섯 장의 가입서가 필요하다. 나하고 지우, 진희와 풍남이. 그리고 악마 뺨치는 여동생. 그런데 어째서 2장이냐. 이건 뭔가 잘못된 거다. 이봐요. 선배들. 당신들은 내 여동생에게 눈이 멀어서 아까 그 소동을 벌였지 않습니까. 어찌된 겁니까. 하지만 지우 녀석의 말은. "아. 아까 체육관 일도 있고 해서, 미인이와 진희는 가입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풍남이는 축구관람은 좋아해도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제외했고." 너, 정말 내 친구 맞냐. 대체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 결국 있으나마나한 친구는 무시해버리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 녀석, 분명히 나만 축구부에 가입시키려는 거야.' 일단 아까 일을 생각해보면 진희가 축구부에 가입할 가능성은 없다. 뭐?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고? 그 부잣집 아가씨가,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란 아가씨가 이런 거칠기 짝이 없는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올 것 같으냐. 아까 그 난리가 나는 걸 봤으면서도? 그러니 내가 진희와 같이 방과후를 보내려면, 내가 축구부를 포기하고 진희를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어서 가입해. 문구야." 이, 이 망할 풍남이 녀석은 일단 무시한다. 저런 쓰레기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내 여동생이니까. 일단 여동생한테 갈고리를 던진다. 자. 걸려라. "그럼 넌 어쩌고?" 자. 이 녀석은 뭐라고 할 것인가. 만약 이 녀석이 축구부에 가입한다면, 진희의 안전문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감히 어떤 정신나간 인간이, 내 여동생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물론 걸 수야 있다.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그 말에 방안에 있던 모든 축구부원들이 주목했다. 눈에 확 띄는 미인이 축구부에 가입한다면, 그들 역시 장밋빛 인생을 걷게 될 테니까 말이다. 자. 선배들. 압력을 팍팍 주라고요. 이 녀석이 축구부에 가입하도록. 그러나. "아. 난 축구부에 가입하지 않을 거야." 마른하늘에 날벼락. 어지간하면 이 녀석이 호의를 가지고 축구부에 먼저 들렀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어지간하면 이 녀석이 오빠의 장래를 생각해서 여기에 먼저 왔다고 생각해주려고 했다. 적어도 이 녀석이 축구부 매니저로 들어왔다면, 진희도 따라 들어올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축구부원들은 미인이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좋고, 나는 진희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게다가 풍남이가 축구부에 가입할 턱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바퀴벌레의 차단효과도 기대할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내 기대를 무참하게 배신했다. 방안에 있던 모든 축구부원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선배는 체면도 상관하지 않고 운다. 어떤 선배는 뒤로 돌아서서 고개를 숙인다. 어떤 선배는 몸을 부들부들 떤다. 치솟는 감정을 억제하기 힘든 모양이다. 어떤 선배는 아예 거품을 물고 기절하셨다. 그럼 나는 어떠냐고? 기절하려다가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 '이 나쁜 여동생 같으니.' 이 녀석이 축구부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안전 문제를 염려해서라도 진희는 축구부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진희는 다른 부로 갈 것이고, 그 부는 운동부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망측하게도 같이 가입하는 부가 틀림없을 것이다. 당장 저 꼬마 선생님이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짓는 걸 봐라. 그래. 그게 뭐가 문제냐고? 풍남이 저 녀석을 봐라. 저거하고 같은 부에 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잖아 !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선배들도 내가 쓰러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여자를 위하여.' 상당히 밝힌다고 하겠지만, 나로서는 진희와 함께 하고 싶은 정당한 욕망이 있다. 나도 고등학교 3년 동안, 여자친구를 가져보고 싶다 ! 목소리만 큰 문희나, 공포의 여동생말고, 좀 건전한 이성교제를 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단 말이다 ! 그런데 이 여동생이라는 애는 왜 나를 방해하는 거냐 ! 여기서 내 꿈을 포기할 순 없다. 나는 진희를 돌아보았지만. "아. 나도 축구부에 가입하려고 온 건 아냐." 아까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만, 실망하는 선배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물론 나 역시 그 중 한 명에 속하지만. 꿈이 좌절되는 순간의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랴. 하지만. 하지만. "여기 가입하지 않는 이유는?" 선배들이 그 질문에 공감을 표시한다. 대체 이 녀석은 왜 축구부 가입을 거절한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이유가 말이 안 되는 거라면, 어떻게든 뜯어 고쳐주마. 그러나 상대는 여동생이다. 내가 감히 넘볼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내 인생은 오빠를 중심으로 돌지 않거든." 감탄하는 어린애 선생님. 허탈해하는 선배들. 기뻐하는 풍남이. 잔잔한 미소만을 짓는 진희. 천하태평인 지우. 그리고 그대로 축구부실 바닥에 쓰러지는 나. 내 귀에 들려오는 풍남이의 승리감에 도취된 목소리. 물론 그 녀석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분명 그랬을 거다. 분명하다. "하하하. 정의는 언제나 이기는 법." 이런 부조리한 일이. 나는 머리를 땅에 숙이고, 팔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말았다. 완벽한 좌절이다. 저 풍남이가 기고만장해 하는 꼴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 하다니. 오. 신이시여. 당신은 뭐하고 계십니까. 저런 녀석에게 벼락 한 방 날리시지 않으시고. "오늘 날씨가 맑네? 축구하기 좋은 날씨야." 지우 이 녀석, 나는 저 녀석을 잡아서 전기톱으로 썰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저런 게 내 친구라니. 친구는 정말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아. 비참한 내 신세여. "그럼 잘 있어. 오빠." 병 주고 약 주냐. 저런 여동생 따윈. "부디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길 바라네. 친구여." 네가 언제부터 내 친구였냐. 죽어라. "그럼 문구야, 열심히 해." 진희야. 내게 필요한 건 그 말이 아냐. "자. 힘내야지. 파이팅 !" 주먹 쥐고 외치셔도 힘 안 나요. 선생님. "그럼 안녕."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부여잡으려고 팔을 내밀지만, 내게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다니. 안 돼. 그러나 나에게는 그 쪽으로 달려갈 배짱이 없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아. 이게 아니구나. 부산항이 아니라, 여기 돌아와 줘.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는다. 듣는 것은. "자. 이제부터 청춘을 불태우자고. 문구야." 너 같은 건 나가 죽어. 나는 지우 녀석을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진희가 나를 바라보는 동안에는 폭력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기에. 게다가 나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건, 지우가 아니라 풍남이였다. 그 녀석은. "!" 아니, 저 녀석이 ! 축구부원 전원이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증오에 가득 찬 시선을 던졌다. 풍남이 녀석은 진희를 왼팔로, 그리고 내 여동생을 오른팔로 껴안은 것이다. 아. 껴안은 건 아니고 팔짱을 낀 정도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저런 행동은 완전히. "하하하. 내가 이겼다. 정의는 언제나 이기는 법. 악당 문구에게 드디어 천벌이 내렸다." 나에게는 이런 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른 축구부원들은 뭐하냐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축구부원들이 나중에 풍남이를 만나면 난리가 날 듯 하다. 저 녀석이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은 아니지만. "부럽다." 누가 말했을까. "그 아가씨가 바로 피고의 여동생이라는데, 사실인가?" 나는 어두운 심문실 한가운데에서, 오직 전등 하나만을 벗삼은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축구부 선배들의 준엄한 질문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죄목이 뭐냐고? [여동생 가입권유 실패] 대략 이렇다. 요점은, 모두가 탐을 내는 그 여자가 내 여동생이라면 마땅히 여기에 가입을 시켰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기 때문에 죄가 크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게 약간 다른 의미로 다가왔지만. '진희를 가입시켰어야 하는데.' 물론 지금 하는 걸 보면, 차라리 내 여동생이 여기에 가입하지 않아서 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인간들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아무리 내 여동생이라도 힘들지 않을까. 아니, 이런 인간들이라면 사이좋게 지낼 노력을 아예 안 할 지도 모른다. 그냥 무조건 식칼로 베어버릴지도. 물론 그런 생각을 들키면 안 된다. "피고는 축구부에 여동생을 가입시키려는 가시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고소장의 내용을, 인정하는가?" 했잖아요. 좀 전에.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쓴다. 게다가. "피고는 축구부에 미인 매니저 2명을 가입시킬 절호의 기회를 그대로 잃어버리고, 이것으로 우리 학교의 전국대회 우승을 도와줄 유능한 후배들을 축구부에 끌어들이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는가? 그로 인해 우리 학교 축구부 선수들의 경기능력 향상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음을 인정하는가?" 뭘 인정합니까. 이 사람들도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축구부에 가입하지 말 걸. 장래희망을 미리 바꿨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가 검사 측에 선 것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피고의 여동생은 오늘 체육관에서 일어난 참사로 인해, 운동부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받아 판단착오를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착한 선배는 있나 보다. 변호도 해주고. "물론 오빠의 권위로 여동생에게 가입을 강력히 권유하지 못한 피고의 죄는 용서받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만." 착한 선배라는 발언 취소. 그리고 나한테 권위가 어디 있습니까. 매일 맞고 사는데.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는 걸 어쩌라고. "본 검사는 피고의 죄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그는 체육관에 들어오자마자 축구부로 직행하지 않고, 쓸데없이 다른 부원들에게 여동생을 자랑하고 다니는 바람에 우리 축구부의 장래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둘째. 그는 이번 사태로 축구부의 명예를 훼손했다. 셋째. 그는 선배들을 즐겁게 할 애교 있는 후배 여학생을 우리 부에 영입하지 못함으로서, 축구부원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자랑한 적 없는데요. 게다가 애교라. 그 녀석에게 애교라는 게 있었나? "이상의 사실로 보아, 본 검사는 피고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엄벌이라. 도대체 뭘 하려는 거냐. 이 인간들. 게다가 변호사 역할을 맡은 선배는. "할 말 없습니다." 처음부터 말도 안 했으면서. 원망해봐야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내 편은 여기에 없다. 하나도 없다. 난 가재가 아니니까. "판결을 내리겠다." 3학년 주장께서 몸소 재판장에서 망치를 쳐들고, 탁자를 내리친다. "본 재판장은, 피고의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운동장을 20바퀴 돌 것을 선고한다." 쾅. 쾅. 쾅. 나에게로 다가오는 선배들에게, 재판장이신 주장께서 말씀하신다. "그럼 두 사람은 형을 집행하기 바란다." 나는 선배들에게 양팔을 잡혀서, 밖으로 끌려나갔다. "정신. 통일. 정신. 통일." 나는 선배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뭐? 생각보다는 좋은 선배들이라고? 같이 달리니까, 그저 괴롭히는 데에만 열성적인 인간들은 아닌 것 같다고? 웃기지 마라. "정신. 애고. 통일. 애고. 정신. 애고. 통일. 애고."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아놓은 건 나밖에 없는데, 무슨 소릴 ! 게다가 내 허리에는 줄이 매어져 있고, 타이어 하나까지 끌고 달리는 중이란 말야 ! 이게 어디가 좋은 선배들이 시킬 짓이냐. 그 와중에 내 속을 더욱 긁어놓는 것은, 친구랍시고 옆에서 달려주는 지우였다. "힘내. 문구야. 모두들 힘드니까." 이 녀석. 넌 타이어를 끌지도 않고,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매달지도 않았잖아 ! 그러면서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거냐. 나는 지우 녀석을 패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지만, 억지로 참았다. 내가 참지. 저 녀석은 원래 인간성이 저랬어. 남에게 도움은 안 되고, 언제나 순진한 얼굴로 나를 약올리며 웃고 있었어. 축구부에 가입하면서 얻은 운동복에 땀이 배이고 있다. 아직 다 돌려면 많이 남았는데, 큰일이다. 이렇게 내가 체력이 형편없었나? "뭔가. 1학년. 속도가 늦다. 더 빨리 !" 여기서 어떻게 더 빨리 돌라고요. 옆에서 선배들이 열심히 응원을 해준다. 그런 게 응원인지는 모르지만. "전국. 최강. 대업. 고교." "세계. 최강. 대업. 고교." 적어도 사람 괴롭히는 데에는 세계 최강인 것 같다. 선배들이 다시 한 번 외친다. "자. 전국대회를 향해 가자 !" "와 !" "와 !" 와아아아앙. 달리고, 구르고, 걷어차고, 걷어차이고, 다시 달리고. 그게 그 후의 내 일이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축구에 대해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건 인정한다. 우리 학교의 환경이 축구하기에 좋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희가 없었다. 그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진희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풍남이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이미 풍남이와 같이 호텔에. 아아악 ! 벌써 그렇게까지 일이 진전될 리가 없잖아 ! 하지만 내 망상은 멈추지 않는다. 운동을 할 때도,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뛰어올 때도, 그리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도 그 망상은 멈추지 않았다. 아. 이 저주스런 머리여. 그 망상을 끝낸 것은, 역시 내 여동생이었다. 매우 불쾌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군. 빌어먹을. "아. 오빠. 다녀왔어?" 이 악의 축 같으니. 나는 하루종일 죽을 고생만 했는데, 이 녀석은 팔팔하다. 하긴 저 녀석은 운동부에 간 게 아니니 훈련을 할 일이 없지. 앞치마를 두르고 노래를 부르며 나를 환영해준다. 뭐? 웃으면서 맞이해 주는 여동생이 있으니까 좋겠다고? 카아악 ! 오늘의 불행은 순전히 저 녀석 때문이란 말야 ! 저 녀석만 없었어도, 나는 진희와 같이 축구부에 가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모르는데, 저 녀석 때문에 몽땅 다 망쳤다. 구겨진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여동생은 태연하기만 하다. "자. 운동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저녁 밥." 눈물 젖은 밥이지만, 먹는다. 일단 이 녀석의 요리솜씨만큼은 최고수준이고, 먹는 게 남는 것이니까. 하지만 말야. 요리말고 성격도 이러면 좀 좋아. 눈물과 밥이 뒤섞인 덩어리를 마구 먹는 나를 보며, 그녀도 저녁밥을 먹는다. 언제나처럼, 도대체 흐트러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정말 겉만 보면 숙녀다. 겉만 보면 말이다. '저러니 사람들이 저 녀석을 보기만 하면 홀려버리지.' 속도 그러면 참 좋으련만. 내가 지금 먹는 게 밥인지 반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먹는다. 어쨌든 먹는다. 일단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와구와구. "오빠. 밥이 코에 묻었어." 놀리지 마라. 일단 옆에 있는 휴지로 코에 붙은 밥을 떼어내고, 다시금 밥을 먹는다. 와구와구. 다 먹고 나서 두고 보자. 오늘 축구부 선배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까지 몽땅 다 갚아주마. 물론 방법은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야 내 분이 풀릴 것 같다. 그런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연히 물어보는 내 여동생. "오늘 부활동은 어땠어?" 나는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누구 약올리는 거냐. 그때부터 지금까지 심문 당하고, 운동장을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로 뛰고, 구르고, 공을 차고, 차이고.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옆에 진희만 있었어도 좋은 추억이 되었을 텐데. 어느새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고 있던 내 여동생이 웃는다. 웃지 마. "그렇게 진희하고 같이 가입하지 못한 게 아쉬워?" "응 !" 너무 강하게 말하는 바람에 입에서 밥알이 튀었지만, 그런 게 내 여동생에게 맞을 턱이 없다. 가기 전에 모조리 막혔으니까. 하지만 행주로 막다니, 밥 먹는데 기분 나쁘잖아. "아. 나하고 진희는 항공우주부에 가입했어. 선배들도 참 좋더라. 다들 친절하고." "네 얼굴 탓이겠지." 운동부만 그렇겠냐. 아마 그 항공우주부의 선배들도 그랬겠지. 예쁜 여학생들이 들어온다는데, 마다할 선배가 어디 있겠냐. 아마 입이 찢어지게 기뻐했을 걸. "어머.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다들 착한 사람들이던데." 놀리지 마라. 이 나쁜 인간아. 그래. 넌 좋은 선배 만나서 좋겠다. 좋겠어. 나한테는 모조리 악당선배만 생겼는데.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차피 풍남이 녀석도 거기 들어갔을 것이고, 그 뒤에는 아마도. 아마도. "와아아악 !"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장면이 내 머릿속에 마구 생각났다. 아아악. 이건 18세 미만이 생각할만한 장면이 아니잖아. 하지만 떠오르는데 어떡하라고. 필사적으로 건전하고 도덕적인 고등학생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며,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여동생. 그녀는 손수건으로 내 입을 닦아주면서, 귀에 대고 속삭인다. "걱정 마. 풍남이는 경제연구부에 가입했으니까." 뭐라고? 갑자기 비명을 멈추는 나를 보며 웃음을 참는 그녀. 갑자기 내 여동생이 무지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때로는 이런 날도 있구나. 갑자기 싱글벙글 웃는 내 모습을 보며, 여동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빨리 밥이나 먹어. 참 어린애 같다니까." 가만. 가만. 이 녀석이 설마 농담하는 거 아니겠지? 내 얼굴을 보면서, 미인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아하하하하. 오빠도 참. 그렇게 못 믿겠으면 내일 진희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냐." 나는 웃음을 터뜨리는 내 여동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3화 폭력은 안 돼요 (1) 폭력. 한자로는 暴力, 영어로 violence라고 한다. 불법, 부당한 방법으로 물리적인 강제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바로 폭력의 의미이다. 단어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고, 만약 그럴 경우 법의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되어야 마땅하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되어지고 있다. 다만,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인정되는 것이며, 실제로는 폭력이 문제해결의 유용한 수단으로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전쟁이다. 전쟁은 국가 간의 거대한 폭력이며, 한 번 벌어지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게 된다. 전쟁은 나쁜 것인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정당한 전쟁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했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은 정당한 전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 덜컹. 덜컹. 지하철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하철이 레일토막 하나를 건너갈 때마다, 그 이음새를 지나가는 바퀴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나에게는 그 진동이 느껴진다. 마찰로 인한 열, 소음, 그리고 전기에너지의 흐름 등. '학교까지 앞으로 2km. 그 정도 남았을까.'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는, 이런 평화로운 상황에서는 힘의 흐름을 읽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공기. 빛. 전기. 열. 그리고 에너지의 거대한 덩어리. 그들이 내 주위에 서 있다. 인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물질로 이루어졌지, 에너지의 덩어리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20세기에 살았던 대마도사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며,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가끔씩 물질을 에너지 덩어리로 인식하곤 한다. '방법만 알면 간단하게 바꿀 수 있는데.' 물론 인간은 그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지만, 그 잠재적인 가치를 수면위로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 인간의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의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며 이것은 핵분열반응과 핵융합반응의 제어로 이미 어느 정도는 성취되었다. 물론 모든 물질을 원하는 만큼 에너지로 바꾸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 먼 꿈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인류라.' 다른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쉽게 해낸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를 인류와 분리시켜서 생각하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적어도 지금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마지막 연결고리를, 나는 바라보았다. 언제나 태평인 사람을. "으. 대체 언제쯤 학교에 도착하는 거야. 이 열차는." 이 사람이 연결고리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조금만 참아. 오빠." 오빠를 달랜다. 물론 그래도 나의 오빠는 몸을 비틀면서, 괴롭다는 신음을 내면서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 원. 저리도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까. 운동선수이면서. 물론 오빠에게 완벽함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오빠는 평범한 인간이고, 인간에게 완벽한 일처리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쓰는 마법과는 달라서, 인간은 불완전한 것이 매력이고, 불완전해야 인간적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나는 오빠의 불평에 혀를 차면서, 잠시 오빠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마법은 원래 쉬운 것이 아니지만, 이 정도의 일은 굳이 마법을 쓸 필요조차 없다. 오빠의 정신 에너지의 흐름을 읽어보고, 그 흐름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으면 되니까. 이런 것도 마법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아아. 이렇게 하루가 또 시작되는구나. 진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항공우주부에 가입했을까. 아니지. 풍남이 녀석이 같이 가입했으면 큰일인데. 미인이 녀석이 혹시 날 놀리려고 헛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그러면 어쩌지. 주먹으로라도 몰아낼까. 아냐. 아냐. 역시 학교에 가서 확인해보는 게 좋아. 적어도 그런 쪽으로 내 여동생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진희한테 어떻게 말을 걸지? 아아. 모르겠다.' 아무래도 들여다보지 말 걸 그랬다.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뒤에서 그런 오빠를 챙겨줘야 할 때는 귀찮기도 하지만, 마법을 쓰는 것에 비하면 그런 건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돌보는 재미도 있고, 실수해도 내게 보복이 돌아오지는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마법보다는 상대하기가 편하다. 덤으로, 정말 귀엽기도 하다. 하긴 나이로 보면 내가 오빠의 누나뻘이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하면, 내 아이도 이렇게 될까.' 이런 부질없는 희망을 가져본다. 물론 나에게 있어 결혼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힘을 가진 여자를 이해해줄 남자를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라는 동물은 여자가 자신보다 뛰어나면 불만이 많아지기 때문에. 하지만 미래는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니, 거기에 희망을 걸어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럼?' 나는 오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한 번 찾아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내 마음을 파고든다. '아아. 오늘은 아침도 못 먹고 나왔는데.' '오늘 저녁에는 데이트인데, 옷에 신경을 못 썼네. 어쩌지.' '오늘도 여전히 배가 아프군. 약을 안 먹고 나왔더니.' '.......' '와아. 저 여자, 섹시한데?' '차가 너무 늦어. 이러다가 지각하겠어.' '졸려 미치겠네. 누가 자리 양보 안 하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힘을 다루게 된 이후로, 나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적이 있고, 그들을 다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에게는 위험이 닥쳐올 것이다. 물론 지팡이의 마법이 있으니 내 몸을 지킬 수는 있지만, 오빠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힘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주의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예로. '흐흐흐.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성공하고 만다. 저 계집애를.' 언제나 오던 사람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내가 지하철에 타면, 꼭 따라오는 사람이었다. 어제도 나에게 당해서 도망가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그는 자기 손이 아프지도 않은지, 이번에도 역시 나를 노리고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둔한 오빠도 그걸 알아챈 모양이다. 하지만 오빠의 생각은. '불쌍한 치한. 이제 미인이에게 또 찔리겠구나.' 날 믿어서 이런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게 아니면 여동생을 지켜주는데 무관심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내가 뭐든지 잘하니까, 어느새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마법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게 가능했을까. 물론 진실을 말해주면 오빠는 놀라고, 나에 대해 좀 더 이해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의 세계에 오빠도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빠가 마법사가 된다? 그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빠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냥 축구선수로서 활동해주기를 바란다. 나의 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끼어 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다.' 나는 마법지팡이를 꺼내지 않았다. 여기서 그런 걸 꺼내 휘두르기도 난처하기 때문이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다 큰 계집애가 어린아이들처럼 마법지팡이를 가지고 논다고 착각할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건 차라리 약과다. 만약 마법지팡이가 정말로 빛을 발하며 사람 하나를 날려버린다면, 이 지하철은 대혼란에 휩싸일 것이며 나의 적들은 그걸 발견하자마자 이 지하철 전체를 날려버릴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 근처에 없다는 건 확실하지만, 최소한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으며 힘도 없는 치한 하나를 잡는데 지팡이까지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휘두를 필요는 없으며, 나에게는 지팡이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있지 않은가. 치한이 나의 몸에 접근하는 순간, 나는 그의 손끝에 내 손바닥을 대었다. 내 몸에 들어있던 힘. 에너지의 극히 일부가 내 손바닥을 통해서 그의 손끝에 주입되었다. 아주 적은 양의 에너지지만, 그 힘은 치한의 신경에 일정한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는 신경을 따라 올라가 그의 대뇌에 전달되었고, 그 다음은 간단했다. "크엑." 그는 약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치한퇴치수단이다. 오빠는 내가 바늘을 쓴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건 아니다. 굳이 바늘까지 던지지 않아도, 이렇게 하면 상대는 통증으로 인해 나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되며, 치한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나에게 시비를 걸지도 못한다. 우리나라는 치한과 여학생이 시비가 붙으면, 일방적으로 여고생의 몸가짐이 정숙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조용히 끝내는 편이 편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학교에 가야 하니, 경찰서까지 들렀다 갈 생각이 없다. 이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또 똑같은 결과를 맞는 거냐. 저 아저씨, 학습능력이 없나보다. 분명히 어제 따끔한 맛을 보았을 텐데, 지치지도 않고 또 오셨다. 그리고 또 찔리셨고, 또 가셨다. 내일은 오지 마세요. 아저씨. 손이 구멍투성이가 되겠습니다.' 내 옆의 오빠라는 사람의 문제는, 이 판국에도 사랑스런 여동생의 몸을 걱정해주는 게 아니라 치한을 걱정해준다는 것이다. 마법까지 쓸 거 없이, 그냥 바늘로 오빠를 팍 찔러버릴까. 게다가 묻는다는 말은. '학습능력이 없는 건, 오빠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오빠가 이제 곧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챘고, 좀 섭섭했다. 정말 매정한 사람인지, 그게 아니면 나를 그 정도로 믿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정신파의 분석작업이란 건 길고 지루한 작업이다. 결코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 또 바늘 썼냐?" 예상대로의 물음이고, 어제와 비교해서 전혀 발전된 것이 없는 물음이다. 하긴 사안이 같으니 말을 다르게 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더 이상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기에. 내가 마법을 쓴다는 걸 오빠한테 알려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언젠가는 그 사실이 오빠에게 알려지게 되겠지만, 그 후에는 오빠가 평범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적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오빠가 자신의 꿈을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나 자신이 여기서 살 수 있기 위해서도. "자. 다음 역에서 내려야지." 열차가 점차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 미니스커트 입은 게 맞는 거냐.' 처음에는 저 녀석이 이 학교에 오는 것을 반대했었다. 이 학교의 교복이란 게, 속옷이 다 보일까 걱정되는 미니스커트였기 때문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말만한 처녀가 그게 무슨 망측스런 옷차림이냐. 그러나 저 녀석의 치마 길이는 수많은 늑대들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치마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저 짧은 치마가 그녀의 속옷을 교묘하게 가리는 거다. 바로 뒤에서 뛰는 나에게도, 그녀의 속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역시 마녀야.' 물리학의 상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인간이다. 물론 그 원인이야 아마 여동생의 손이 교묘하게 치마를 조작해서, 팔랑거리지 않도록 잘 누르고 있는 탓이 크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 뒤에 들리는 이 실망하는 듯한 소리는 뭐냐. '아아. 역시.' 축구부 선배들, 그리고 농구부, 배구부, 야구부, 레슬링부, 유도부등, 우리 학교의 고명하신 선배님들이었다. 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저 인간들이 정말 내 선배가 맞는 거냐. '무시한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전력으로 여동생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지각할 생각도 없고, 저런 선배들에게 여동생을 넘겨줄 생각도 없다. 게다가 여동생의 뒤를 따라가려면, 죽어라 달려도 부족하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발이 빠른 건지. '약 먹었냐.' 죽어도 여동생보다 느리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그래도 역시 내 다리는 너무 느리다. 어느새 내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Stop ! Stop !" 멈추라는 말을 영어로 하는 것은 바람직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는 문제가 있는 행동이긴 하다. 한글 사랑이 나라 사랑 아닌가. 물론 우리나라의 높으신 분들은 한글을 싫어하시는 듯 하지만. 그러니까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지. '노는 날이 하루라도 늘면 안 된다는 건가.' 국민들은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나라가 잘 산다는 신념인지, 어쨌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주상전하께서 글을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을 기념하지 않는다. 뭐? 기념식은 하고 있으니 그 말은 틀렸다고? 노는 날이 아니라면 기념일이 아니다 !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는 뜻은, 결국 한글창제를 기념하여 하루동안 일을 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국가에서 한글날을 기념하지 않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영어를 애용하게 되는 것이다. 변명이 좀 억지스럽다고?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면 나도 한글을 애용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 물론 그런 노력을 할 날은 당분간 오지 않겠지만. "오빠. 너무 느려." 악. 여동생한테 이런 말을 듣다니. 하긴 나보다 10m는 앞서서 달리고 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느린 게 아니다. 내 달리기 기록은 100m에 11초 0이란 말이다 ! 적어도 천재축구선수로서의 기본적인 신체조건은 가지고 있다고 ! 그러나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옆에서 평범하게 걷고 있는 인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왠지 모르게 분통이 터진다. "어머. 남자가 여자보다 느려." "오빠인가 봐. 무슨 오빠가 여동생보다 느리니?" "여자보다 체력이 떨어지다니. 저래놓고 남자라고 할 수 있나." "한심하다." 이봐. 당신들. 옆에서 떠들지만 말고 직접 달려보는 게 어때? 그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보자고. 하지만 그 말에 응하는 것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엉큼한 선배들밖에 없다. 이런 늑대들 같으니. "아가씨. 잠깐 기다려요." "이봐. 후배. 거기 멈춰." "선배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지." 물론 저 말은 나한테 하는 게 아니고, 내 앞을 달리는 여동생에게 던지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걸어봐야, 여동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달리기만 할 뿐이다. 점차 숨이 차기 시작한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다. 목에 쇠를 넣어둔 듯 하다. 내 숨에 쇳가루가 섞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야. 이 거만한 계집애야. 멈추지 못해." "널 ****." "나하고 **하고 **하고 **해 보자." 차마 무슨 말인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저런 저질 선배들이 어디 있냐. 정말 학교를 잘못 고른 것 같다니까. 나는 다리가 부러지도록 뛰지만, 그들은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달리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모든 것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인, 교문이 다가왔으니까. "다, 다 왔다." 이젠 살았다는 심정으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리 무식한 선배들이라고 해도, 설마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광란의 질주를 하지야 않겠지. 그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니었던지, 공포의 여동생은 어느새 달리는 것을 멈추고는 얌전한 숙녀의 걸음걸이로 교문을 향하고 있다. 저런 내숭여왕 같으니. 선생님이 보자마자 얌전한 숙녀의 탈을 쓰다니. 그러나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내 뒤에 있으니. 우르르. 선배들은 내 여동생처럼 행동전환이 빠르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우르르 교문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내 여동생을 덮치듯이 말이다. 그들은 내 여동생이 선생님들 앞이라서 내숭떠는 걸 모르고, 도주를 포기했기 때문에 달리는 것을 멈춘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들이 외치는 말은. "자. 하자 !" 뭘 하자는 거야. 뭘. 선배의 명예를 위해, 무슨 뜻인지는 해석하지 않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문 앞에는 미인이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저 사람이 누구시더라? 정장을 입은 선생님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아, 안 돼 !" 아이고. 큰일났다. 하필이면 선배들의 진로에 서 있던 것은, 이제 나도 잘 기억하고 있는 꼬마 선생님이었다. 어린애를 덮치다니, 이런 범죄자 선배들이 다 있냐. 선배들도 그걸 깨닫고 발을 멈추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이 세상에 교통사고는 한 건도 없을 것이다. 선생님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순간. "자. 선생님."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모시고 옆으로 비켜서는 그녀. 아. 역시 여동생은 천하무적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 상황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다니. 잠깐. 그 상황에서 옆으로 비켜선 건 좋은데, 그러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거냐. 남은 선생님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선배들은 선생님들을 덮치고 말았다. 그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안 보여서 모르지만, 정말 볼만했을 것이다. 물론 선배들이 멈추려고 애는 썼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전속력으로 달리던 차가 급정거를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앞으로 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뒤에서 달려오던 선배들은 앞의 상황을 모르므로, 자신들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앞에서 멈추려고 발버둥치던 선배들을 뒤에 오던 선배들이 덮쳤고, 곧 사람의 무더기가 된 그들은 앞으로 쓰러졌다. 요란한 소리가 교문을 뒤흔든다. 무슨 소리냐고? 파지직. 파직. 이 소리가 아닙니다. 타타타탕. 이 소리도 아닙니다. 와당탕. 쿵탕. 바로 이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넘어져서 난리법석을 떨 때는, 바로 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이 녀석들이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등장하는 사람이, 우리의 윤리선생 왕건전이다. 선생님들을 깔아뭉갠, 발칙한 학생들을 본 그의 눈이 빨갛게 변한다. 핏발이 선 그의 눈이 살기를 발하고, 거대한 쇠파이프가 돌풍을 일으킨다. 장작더미처럼 교문 앞에 쌓인 선배들이, 그의 등장에 벌벌 떨었다. 무리도 아닌 게. "도대체 아침부터 뭐 하는 거냐. 너희들은." 쇠파이프가 운동장을 내리치자, 땅이 갈라진다. 농담이 아니다. 비록 지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마른 땅이 갈라지는 게 보였다. 물론 운동장 전체가 갈라진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저게 왕건전의 위력이냐. 쇠파이프를 그가 들어올리자, 파이프의 자국이 땅에 선명하게 남았다. "학교 앞에서는 뛰지 말라는 건 고등학생으로서 기본적인 규칙이다.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겠다. 모두 일어서 !" 누더기가 되어버린 선배들이 번개처럼 일어선다. 왕건전의 무서움을 최소한 1년 이상 경험한 선배들이라서 그런가. 하긴 저 인간은 지역적인 스타가 아니라 전국적인 스타니까, 저런 일도 가능하기는 하다. 보는 사람 살 떨려서 그렇지.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학생들에게 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신사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왕건전 선생. 하지만 봉변을 당해 정신이 없는 선생님들, 특히 내 여동생 옆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꼬마 선생님에게 그 모습은 완전히 깡패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간신히 미소를 지으면서. "괘, 괜찮아요." 아마 왕건전 선생의 무지스런 모습에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 그러나 왕건전은 그런 선생님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그는 사고를 친 선배들을 돌아보더니.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 네 놈들 덕에 선생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으면 저러시겠나. 지금부터 그 썩어빠진 정신을 뜯어 고쳐주겠다. 전부 일어서 !" 쇠파이프가 공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크엑." "아악." "쿠억." "으윽." 참 가지각색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아. 놀랐어. 갑자기 애들이 그렇게 몰려올 줄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시는 우리의 꼬마 선생님. 하지만 저 분에게는 가슴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여동생이 나를 노려본다. 눈치 빠른 녀석. 일단 교무실에 온 선생님을 자기 자리에 앉히고, 물 한 잔을 대령한다. 물컵을 두 손으로 받치고, 꼴깍꼴깍 마시는 선생님. 어린애 돌보기도 힘들다. "문구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차마 솔직히 말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물컵이 빈 것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그 컵을 가지고 도망간다. 여동생한테 맞기 전에 말이다. 물론 그런 노력은 헛된 것이었지만. 뭔가가 날아오더니 내 머리에 명중했다. "아구구." 여동생한테는 안 맞았지만, 선생님한테 맞았다. 하지만 분필던지기라니, 분필이 아깝지도 않으십니까. 자원을 아낍시다. 물론 아무도 그 말은 안 듣지만.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야? 선배들한테 쫓기고." 전에도 그랬지만, 미인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물어본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미인이는 꼬마 선생님 옆에 앉아서, 이럴 때면 의례 나오는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모두 말하자면 너무 기니까 요점만 말하면, 자신이 예쁘다는 죄로 얼마나 남자들에게 쫓겨다니는지를 선생님한테 자랑했다고 하면 되겠다. 그런데 말야. 저런 말은 다른 여자들이 들으면 안 좋은 반응을 보인다고. 예를 들어. "그거 부럽네. 난 남자들한테 그렇게 쫓겨다닌 적이 없어서." 내 예상과는 약간 다른 반응이다. 그래도 겉모양대로 착한 선생님이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나쁜 여선생이었다면, 그 뒤의 반응은 이랬을 테니까. "이 XXX이 ! 지가 이쁘다고 XX하고 있어. 건방진 X." 이런 인간이었으면, 미인이로서도 좀 힘이 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 여동생은 저 선생님이 담당으로 있는, 항공우주부의 부원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진희에게도 악영향이 있다고.' 물론 진희는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가씨고, 그 덕분인지 선생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여러 가지로 안 좋은 면이 있으며, 원한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아주 많다. 너무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집에서 진희 정도로 마음 착한 아가씨가 나온 게 불가사의할 정도다. 물론 그것은 진희의 잘못이 아니지만. 어쨌든 선생님이 좀 진정된 것을 보고, 나와 미인이는 교무실에서 나왔다. 이런 곳은 학생이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니까.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마음이. 그런데 교무실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가던 중에. "오빠 ! 위험해 !" 내 반응이 약간 늦었다. 여동생이 저렇게 외치면,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걸 까먹은 게 죄라면 죄였다. 오늘 아침의 추격전이 내 정신을 빼놓은 탓일까. 교무실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여동생의 어명을 받들어 모시지 못했다는 거다. 나는 인간이라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날릴 수가 없다고. 축구경기장이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뭉클. 약간 야릇한 느낌과 함께, 나는 뒤로 넘어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꽤 큰 모양이다. 나는 차가운 교무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고, 그 위로 정체를 모를 사람이 쓰러졌다. 남자였다면 아마 발차기 한 방으로 날려버렸을 것이지만, 남자치고는 가슴이 너무 크다. 뭐? 발차기부터 생각하는 걸 보니, 내가 여동생을 닮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살 떨리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어쨌든 그 여자는 황급히 사과하면서 일어섰다. 더 있으셔도 뭐라고 안 하는데. "괘, 괜찮니?"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 분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셨다. "헤에. 그렇게 된 거였어? 미인이도 꽤 인기 있네." "자랑할 건 아니지만요." 조금 전까지 그리도 자랑했던 주제에. 나는 담임선생님과 미인이의 뒤에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꼬마 선생님 앞에서 그리도 자랑스럽게 '너무 예뻐도 탈이에요. 아아. 난 왜 이렇게 예쁜 걸까.'라는 식으로 떠들던 녀석은 어디로 갔냐. 사람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거냐. 치사하다. 비겁하다. 기타 등등. 그렇게 온갖 불평을 늘어놓지만, 물론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무서우니까. '이러니 남자 망신 다 시킨다는 소리를 듣지.' 비참하지만, 지금 끼어 들어 봐야 나만 맞으니 참을 수밖에. 그런데 잠깐. 뭔가 잊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았는데. 이 녀석이 예쁘다고 자랑을 늘어놓게 된 이유는 교문 앞에서의 소동이 기원이고, 그 소동은 미인이의 외모에 혹한 선배들이 체면도 차리지 않고 마구 쫓아왔기 때문이며,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어제였고, 그 원인은 나하고 여동생이 체육관에서 특별활동부를 찾아보려고 들어온 탓이며, 그리고. "앗 !" 곰곰 생각해보니, 특별활동부에 가입하려고 한 이유는, 결국 그 학습부인지 뭔지 하는 천인공노할 사기부 때문이잖아? 그리고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숨긴 것은, 다름 아닌 내 앞에서 웃고 떠드는 바로 이 선생님이고. 그런데 왜 이 녀석이 그걸 말하지 않는 거지? 이 녀석 성격이라면 당연히 따지고 들 것 같은데. '애들 앞에서 따질 셈인가?' 왜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있는 거냐? 넌 천하무적의 막가파 여동생 아니었냐? 선생님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추궁이나 심문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이유를 몰라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교실에 도착했다. 상당히 요란하게 떠들던 학생들이, 선생님의 등장에 조용해진다. 일단 반장이 일어나고, 선생님께 모두 인사하고, 그리고 모두들 자리에 앉는다. 언제나처럼 오늘의 주의사항이나 공고가 나오고, 그게 끝나면 담임은 밖으로 나가실 것이다. 잠깐. 잠깐. '그럴 리가 없잖아.' 어제 일로 인해, 모두들 담임 선생님에게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의 일. 그러니까 '학습부 강제 가입을 위한 진실 은폐계획'이 과연 우리 담임의 작품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눈치다. 그러나 아무도 가장 먼저 그 말을 꺼내놓지 못한다. 이럴 때라면 당연히 내 여동생이 한 마디 해야 하겠지만, 이 계집애는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는다. 왜 웃는 거냐. 다른 애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선생님을 노려보는데. 역시 이 녀석은 뭔가 알고 있는 걸까. "빨리 누가 물어보란 말야." 그럼 네가 물어봐. 다들 그렇게 외치고 있다. 선생님에게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신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에게 미운 털이 박힐게 뻔한 질문을 할 수가 없는 거다. 가장 얼굴이 두꺼운 풍남이가 입을 다문 걸 보면, 확실히 그런 분위기다. 뭐 조금만 기다리면 문희가 말을 하겠지만. 보아하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겠다는 눈치다. 그런데 왜 참는 거지? "기자는 사건에 개입하면 안 되는 법." 이봐. 신문방송부에 들어갔으니 이것도 기사거리가 된다는 거냐. 그런 거 기사로 실으면 우리학교 신문은 '사실 여하에 관계없이' 명예훼손죄로 당장 발간정지가 될 걸. 그래도 기사로 쓰겠다는 거냐.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으면." 쓸데없다는 소리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자칫 잘못해서 큰 소리라도 내면, 내가 '선생님 음모론'을 파헤쳐야 한다고. 난 앞장서서 총대를 메고 싶지 않아. 그러는 동안에 선생님은 말없이 자기 짐을 챙기고, 나가신다. 옆구리에 출석부와 책을 끼고, 교실 문을 여는 선생님. 그러나. "선생님 !" 오호. 누구냐. 이런 용기 있는 사람이. 역시 반장. 단순히 성적순으로 그 자리를 꿰어찬 게 아니었구나. 모두의 소리 없는 감탄사. 그래. 우리 모두는 네 희생을 잊지 않으마. 비장한 분위기가 반 전체를 감싸고 있다. 물론 한 사람 빼고. "왜 저렇게 웃고 있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내 여동생만 제외하고, 모든 이의 시선이 선생님에게 집중되었다. 자. 가라. 반장. 네 시체를 넘고 넘어, 우리는 앞으로 가마. "응? 무슨 일인데?"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신 선생님의 물음. "특별활동부에 가입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학습부에 가입시킨다면서요?" 드디어 나왔다. 자. 이제 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런데 답변이 이게 뭐야. "응." 이렇게 쉽게 대답이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 기세를 타고, 더욱 돌격하는 반장. "그런데 왜 어제 알려주시지 않으신 거죠?" 드디어 나오고 말았다. 문제의 핵심이자, 모두 불만을 품는 이유가. 그리고 답변의 여하에 따라, 폭동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분위기. 하지만. 담임 선생님이라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은. "아. 까먹었다." 모두 쓰러졌다. 그렇게 충격의 하루는 지나갔다. 음모론까지 나왔던 사건의 결말치고는 약하지만, '까먹었다'는 데에는 뭐라고 추궁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 말이 던진 충격파가 너무 강해서 모두들 할 말을 잊은 거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담임 선생님에게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고, 학교에는 폭동도 난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다 잘 끝났으니까 행복한 결말이 아니냐고? 이게 무슨 ! 문희의 절규를 봐라. "기사거리가 날아갔어." 하긴 '까먹었다'는 걸 기사로 쓰기는 좀 그렇지. 게다가 음모라고 주장하기에도 좀 무리인 게, 옆 반 애들에게 물어보기만 해도 탄로가 날 일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거다. 이거, 우리만 바보가 된 건가. 졸지에 바보반 학생들이 되어 버린 우리들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축구부로, 미인이는 항공우주부로, 그리고 진희와 풍남이는. 어라? 둘이 따로 가네? 어떻게 된 거냐? 그걸 보고서야 나는 진희에게 물어봐야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좀 무섭지만. "저. 진희야."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건 그저 평범한 일인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거지. "응?" 뒤돌아보는 진희.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나를 황홀하게 한다. 저녁 노을 때문인지, 그녀의 볼이 빨갛다. 아. 그녀가 날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좋으련만. "어제..... 어느 부에..... 가입...했니?" 숨이 막힐 것 같은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가 대답했다. 빨리 좀 해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모르지. "항공우주부. 미인이하고 같아." "아. 그렇구나." 그러나 더 중요한 게 남았다. 어쩌면 내 고등학교 생활 전체를 좌우할지도 모르는 사항이. "그럼.......... 풍남이는? 같이 가지 않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답하는 그녀. "풍남이는 경제연구부에 가입했는데?" "뭐?" 생각 없음. 그냥 방방 뛰기만 함. 그렇게 해서 오늘은 잘 마무리되었다. 이유 같은 건 알 필요도 없다. 진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고, 그런 그녀가 풍남이와 다른 부에 가입했다는 것을 말해준 것만으로 족하다. 그걸로 된 거다. 축구부의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버렸지만, 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잘 됐어." 비록 진희와 같은 부에서 3년 동안 지낼 수는 없게 되었지만, 풍남이에게 그녀를 빼앗기지 않을 자신은 섰다. 이제 나와 그는 같은 출발선에 선 것이다. 힘내자. 문구야. 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달리는 거다. 자. 집으로. "?" 체육관 뒤로, 어떤 그림자가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무엇이 나를 이끌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안 좋은 예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체육관 뒤로 가는 사람이 왠지 불량해 보여서 그랬다고 하면 과장일까. 생각나는 것은. '못생긴 여학생이었어.' 언제나 예쁜 여학생들만 봐서 그런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저절로 눈길이 간다. 장미꽃들이 만발한 꽃밭에 살다가, 호박덩어리를 보면 깊은 인상을 받는 식이랄까. 물론 내 주위에 미인들만 모인 것이 내 눈을 너무 높인 탓이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그 여자의 뒤를 졸졸 따라간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야. 너. 예쁘다고 재는 거야. 뭐야." "요 계집애가. 칼로 확 그어줄까." "아냐. 아냐. 점잖게 인두로 팍 지져줘야지." "그것보다, 요런 계집애 취향인 녀석들한테 던져줄까?" 뭐야. 불량 여학생들이 누구를 협박하는 모양이다. 도와줄까.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두고 도망칠까. 나는 내 품에 무기가 될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없지." 난 깡패가 아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러니 무기라고 할만한 건 없다. 돌멩이라도 집어야 하나. 어쨌든 대한민국의 착한 고교생으로서, 이런 광경을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협박당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도와줄 건 없겠군." 연약한 여자가 위협 당하는데,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고? 내가 미쳤니. 도와줄 필요가 있는 사람이어야 도와주든지 말든지 하지. 이럴 때는 그저, 일이 끝나기만 기다리면 된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뛰어들어가야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모조리 착한 사람으로 개심하기 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야. 이 지지배가. 웃고 있어?" 당연하잖아. 원래 호랑이는 하룻강아지가 까분다고 당황하지 않는 법이니. 건방지게 생긴 여학생이, 칼을 혀로 핥으면서 종알거린다. "이 건방진 XXX을 묶어버려. 이걸로 좀 쓰다듬어주면 정신이 들겠지." 그 옆의 여학생이 뭔가를 꺼냈다. 밧줄치고는 좀 두껍다고 해야 하나. 잠깐. 저건 밧줄이 아니라 자전거 체인이잖아 ! 저런 걸 여자한테 휘두를 셈이냐. 이런 불량선배들 같으니. 도대체 내 주위에는 왜 이런 선배들만 꼬이는 걸까. 나는 아무래도 여동생을 도와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 녀석의 장점은 얼굴밖에 없는데, 그게 상처라도 입어봐라. 큰일이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퍼억. 그럼 그렇지. 체인을 들고 설치던 여학생 하나가, 미인이가 든 가방에 맞고 날아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그리고 그 뒤는 어떻게 되었냐고? "오빠. 도망쳐 !" 이쪽으로 달려오는 미인이. 엥? 보통 이럴 때에는 무지막지하게 하늘로 날아올라 불량선배들을 격파하는 게 저 녀석의 행동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그냥 도망치는 거냐. 너무 당황해서 미처 행동을 못하는 사이, 나에게 달려오는 불량배들. "이 계집애. 거기 서라. 선배의 명령이다." 여동생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역시 움직이지를 못하겠다. 여동생의 의외의 행동에 당황해서 그런 것일까. 그러자 여동생은. "도대체 오빠란 사람은." 그대로 내 옆에 있는 나무를 걷어차 버렸다. 나무가 흔들리더니, 마치 가을낙엽처럼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불량배들의 머리 위로 말이다. 난데없는 나뭇잎의 폭우에 불량배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여동생은 내 손을 잡고 달렸다. "어서 뛰어 !" 그제서야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야 ! 왜 도망가는 거야?" 네 실력이면 저런 것들쯤은 순식간에 몰살시킬 수 있는 게 아니냐. 아. 살인은 안 되지. 그래도 그렇지, 평소에 나를 구타하던 실력이라면 전혀 당황할 게 없을 텐데, 왜? 내 의문을 남겨둔 채, 여동생은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저 계집애, 잡아 !" 우리가 도망가는 것은 당연히 불량아들에게 보였다. 낙엽은 그들을 잠시 당황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가을이 아니라 봄이니 잎이 그렇게 많이 떨어질 턱이 없으니까. 물론. "크아악 ! 꺄악 !" 벌레는 많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벌레들을 떼어내느라 여념이 없는 불량 여학생들을 뒤에 남기고, 우리는 지하철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벌레 몇 마리에 맞은 것 정도로 포기할 리는 없다.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은 날라리들은, 자전거 체인과 칼을 꺼내들고 우리 뒤를 따라왔다. 이거, 안 좋은데. 하지만 내 손을 잡고 달리는 '저 계집애'의 달리는 속도는, 평소보다 더 빨랐다. 이건 너무 빠르다.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 내가 당황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빨리 좀 달려. 오빠." 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 평소에 100m를 10초대로 달리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했었는데, 여동생이 그 기분을 나에게 적나라하게 맛보여주고 있었다. 그 느낌이란 간단히 말해서. '다리 아파.' 내가 육상선수가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나를 잡아끌고 그 정도의 속력을 내는 여동생은 정말 대단하지만, 뒤를 악착같이 따라오는 불량배들도 대단했다. 물론 그들이 내 여동생의 뒤를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여기는 육상경기장이 아니다. 앞으로 똑바로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도 해야 하고, 신호등에 앞길이 막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학교 밖으로 나와 주택가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알았지?" 그녀는 내 팔을 잡고 골목길을 달려갔다. 그러나 학교 부근의 지리는 불량배들이 더 잘 아는 법. 그들 중 하나로 보이는 날라리 여자가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며 앞을 막아섰다. "자. 선배로서 자상하게 교육시켜주지." 뭐가 자상하냐. 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불량배와 말싸움할 상황도 아니고, 지금은 미인이의 다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누군지 모르니 일단 식별기호 '날라리 1호'로 부르겠다. "받아라 !" 날라리 1호는 체인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내 여동생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했다. 야. 잠깐. 네 실력이면 저 정도는 발차기 한 방으로 날려버릴 수 있지 않아? 왜 도망치는 거야? 상대 역시 여동생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다. 그 여자는. "어서 덤벼 ! 그러고도 네가 암흑 세계의 여왕이냐 !" 역시. 이 녀석, 뒷골목에서 날렸나 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불량소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녀가 조직을 만들었다던가 사람을 마구 팼다는 등의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 돈을 뜯겼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아.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 문제시된 적은 없었다. 왜냐고? '알려진 피해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어쨌든 날라리 1호는 체인을 다시 휘둘렀지만, 저 여동생이 맞을 리가 없다. 물론 얼굴에라도 맞으면 큰일이니까 안 맞는 게 좋지만, 뭔가 상식에 어긋나지 않냐. 상식으로 판단해보면 내 여동생은 벌써 이런 조무래기 정도는 처치했어야 정상인데. 혹시 내가 옆에 있어서 그러나? 저 녀석이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럴 리는 없으니, 설마, 내가 걸림돌이라도 되는 건가? 상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날라리 1호는 기고만장한 웃음을 띄며 덤벼들었다. "이걸로 끝이다 !" 저거, 왠지 나를 노리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여동생은 나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아구구. 이 녀석, 오빠를 마구 던지냐. 그리고 그녀는 멋지게 발을 들어. 퍽. 옆으로 도망갔다. 이런 실망스러운 대응을 하다니. 그런데 왜 그런 소리가 났지? 눈앞의 날라리 1호가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 설마 그 사이에 한 방 후려친 건가? 아닌데? 여동생의 손에는 피가 묻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으...... 무서운....... 계집.......애." 날라리 1호는 이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그가 몸을 기대고 쓰러진 전봇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내 시선이 미인이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자폭?"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뿐이다. 날라리 1호는 미인이를 잡으려고 돌격하다가, 그녀가 잽싸게 비키는 바람에 몸을 멈추지 못하고 전봇대에 부딪친 것이다. 아직도 전깃줄이 흔들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세게 부딪친 모양이다. 나는 다시금 내 여동생을 노려보았지만. "난 안 때렸어." 확실히 안 때리긴 안 때렸다. 이런 교활한 녀석 같으니. 계속 이런 식이었다. 여동생은 주먹질, 발길질 한 번 하지 않았지만, 놀라운 몸놀림으로 날라리들의 공격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가방을 한 번 휘두르긴 했지만, 체인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그 정도면 정당방위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거, 물리치는 방법이 좀 웃기지 않나? "어쨌든 주먹은 안 쓰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건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거라고." 그렇기는 하지만, 그냥 수긍하기에는 날라리들의 피해가 너무 엄청났다. 간판에 부딪치는 날라리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날라리는 담벼락에 부딪쳤다. 또 어떤 날라리는 몸을 날렸다가 경찰서에 처박히는 바람에 유치장에 갇히고, 어떤 날라리는 심지어 공사장 구덩이에 추락하기도 했다. 참 가지가지다. 하지만 그러고도 쫓아오다니, 너희들 학습능력이 정말 없구나? '무서운 녀석.' 보통 대여섯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면 폭력도 이만저만한 폭력이 아니지만, 내 여동생은 도망만 다녔으니 폭행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한 사람을 잡으려고 무더기로 쫓아온 깡패들을 피해 도망간 게 죄라면, 저 깡패들은 대체 무슨 죄라고 해야 하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 같아. 그러는 사이에. "아구구." 이번 날라리는 미인이를 쫓아오다가 표지판에 부딪쳐서 뒤로 넘어졌다.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저 날라리가 딱 그 꼴이었다. 표지판에 코가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뒷머리까지 부딪쳤으니 완전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불쌍한 날라리 같으니.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는구나. "불쌍하다." 얼마나 많은 날라리가 그렇게 산화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날라리의 수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미인이를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우린 의지의 한국인이니까." 확실히 그들의 의지는 대단했다. 문제는 머리가 아니라 의지만 대단하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언제 내 여동생을 잡겠나. 불쌍하다는 나와 여동생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두목으로 생각되는 날라리 여고생께서 큰 소리로 외치신다. 아직 기는 살아있다는 건가. "저 계집애를 잡아. 특히 저 남자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거다." 에? 나? 미인이를 잡을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나냐.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누군가가 터무니없이 강해서 그렇지, 나도 실은 그리 약한 편은 아니거든. 그리고 말야. 너희들 당장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겠냐. 미인이한테 맞지도 않았으면서 그 꼴이 뭐냐. 물론 그들이 여기서 물러날 리는 없다. 곧이어. "전원 돌격 !" 아직 움직이는 날라리들이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온다. 마치 2차대전시의 일본군의 만세돌격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지만, 따라할 게 따로 있지. 하필이면 일본군을 따라하냐. 혹시 저 여자들도 일진회라는, 과거에 나라를 일본에 팔아 넘겼던 반국가단체의 이름을 딴 폭력조직의 회원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내 여동생은 겁을 먹은 기색이 없다. 조무래기들이라고 비웃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는 거지? 궁금해하는 내 앞에서, 그녀는 갑자기 달리던 방향을 180도 바꿔서. "야 ! 그쪽이 아니잖아 !" 이건 무모했다. 왜 날라리들에게 달려가는 거냐? 무기도 없으면서. 상대는 불법무기를 다수 휴대하고 있단 말이야 ! 내가 말리든 말든 상관없이, 여동생은 앞으로 돌격해갔다. 이런 미련한 녀석. 그 모습을 보고 희색이 만면한 날라리들은, 자기 발로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오는 미인이를 환영하며 마주 달려왔다. 둘이 부딪치려는 순간. "익 !" 아. 불쌍한 나여. 여동생에게 발맞추기도 힘들다. 난데없이 여동생은 좌회전을 감행했고, 나는 누군가의 억센 손아귀에 잡혀 급작스런 방향전환을 어거지로 따라가야 했다. 뼈가 울린다. 미인아. 물론 내 비명이야 여동생이 알 바가 아닌 듯, 당연히 그런 불만은 무시당한다. 그러나 나까지도 당황하게 만든 급선회 덕분에, 날라리들은 순간적으로 여동생을 놓쳤다. 그런데 여동생이 왜 갑자기 뒤로 돌아 달려간 거지? 그 까닭은 날라리들이 말해주었으니. "으악 !" "차다 !" "차다아아아 !" 거대한 승용차가 골목길에서 달려나온 거다. 여동생을 잡으려고 눈을 부라리던 그들은 미처 승용차를 보지 못했고,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날라리들의 비명과 함께, 차는 그들의 눈앞으로 달려왔고. 끼이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는 멈추었다. 날라리들은 골목 담에 달라붙어 있고, 차는 그들의 바로 앞에 정지해 있다. 조금만 브레이크를 밟는 게 늦었다면, 저 날라리들은 영락없이 저승행이 되었을 거다. 거품을 물고 기절한 날라리들을 놔두고, 여동생은 다시 내 팔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야 ! 이 비겁한 계집애야 !" "정정당당히 싸우자 !" "거기 못 서 !" 하지만 울면서 그렇게 외쳐봐야 무섭지가 않다고. 게다가 날라리들이 다시 일어서더라도, 내 여동생을 상대하기엔 너무 늦었다. 너무 놀라서 오줌까지 싼 주제에, 전투를 재개하는 것은 무리라고요. 아가씨들. 우리는 그들을 뒤에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저게 인간이냐." 언제나 느끼지만, 역시 내 여동생은 위대하다. 주먹 한 방 안 날리고 저 깡패들을 물리치다니. 다만 그 방법이 너무 웃겨서, 여동생이 무섭다고 해야 할지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런데 이상한 건. "대체 왜 도망을 친 거니?" 나한테 하는 것처럼 하지 않다니, 확실히 지상최강의 여동생이 한 일 치고는 의외였다. 저런 녀석들 정도는 그냥 주먹 한 방으로 날려버리면 끝이 아니던가. 평소에 나를 때리던 실력은 다 어디에 숨겨두고, 얌전히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을까. 뭐 별로 얌전한 도주는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여동생의 답은. "폭력은 좋아하지 않아." 나는 지하철역 바닥에 쓰러졌다. 이 녀석이 폭력을 싫어한다고? 말도 안 돼. 그 말을 믿느니, 국회의원들이 싸움을 안 한다는 말을 믿어주겠다. 평소에는 그리도 나를 마구 패고 다니면서. "너 말야." 간신히 정신을 챙겨온 나에게, 여동생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입학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주먹을 휘두르겠어. 숙녀답게 얌전히 굴어야지." "얌전?" 너, 어휘력이 형편없구나. 지금 달려서 도망친 것도 이미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게다가 어떻게 그리 함정을 잘 파놓는 거냐. 평범한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날라리들을 괴멸시키는 솜씨를 보니, 나중에 우리나라의 국방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주먹만 안 썼지, 실제로 이 녀석에게 '얻어맞은' 인간이 몇 명이냐. 어림잡아 10명은 넘는다. "얌전한 숙녀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면서 달려가냐. 게다가 어째서 그렇게 학교 주변의 길을 잘 알고 있는 거냐."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그 질문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역시 이 녀석은 만만하지 않아. 주먹을 쓰지 않더라도. 나는 다시 한 번 여동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요물이야.' 저 불량한 날라리 선배들은, 정말 상대를 잘못 만난 거다. "그럼 오빠, 잘 자." "그래." 나한테 넌더리를 내면서, 오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주먹을 쓰든 안 쓰든 나를 두려워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일까. 오빠도 참. '되도록 살살 해준 건데.' 평소에 하는 것에 비하면, 이건 정말 살살 때린 거다. 직접적으로 주먹이나 발을 쓴 것도 아니고, 마법으로 그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것도 아니다. 물론 그들을 개구리로 만들거나 바퀴벌레로 만들어서 모든 이들의 미움을 받게 하지도 않았고, 검을 꺼내서 팔다리를 토막내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적이 아니라 철없는 어린애들이기 때문에, 그런 확실한 종결수단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제대로 싸우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걱정해주어서라기보다는. '우연한 사고라고 변명하기 위해서이지만.' 물론 그 불량배들은 절대로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당장 오빠조차도 안 믿고 있으니까. 확실히 우연치고는 너무 길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내가 고의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상대의 힘을 가늠한 후, 스스로 물러설 만한 지혜가 없다. 그런 머리가 있다면, 오늘 일을 다시 생각해보고 스스로 물러나겠지만, 오늘 본 바로는 그들의 두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 그러니 그들은 내일도 계속해서 나에게 덤벼들 것이고, 우연을 가장하여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언젠가는 정말로 무력을 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검인지 주먹인지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말이 통하는 상대였으면 좋으련만.' 가장 좋은 방법은 일격필살. 마법으로 싹 쓸어버리는 것이지만, 이런 방법은 전투가 아닌 이상 바람직하지 못하다. 평범한 여고생답게 주먹으로 때려주는 것도 좋지만, 그럴 경우의 문제는 따로 있다. 그들이 나를 '암흑세계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많이 맞아봤기 때문이다. 자기 힘을 보여주기 싫어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일격으로 모든 불량배를 처리하는 막강한 여자애. 적어도 불량배들이 알고 있는 나는 그렇다. '덕분에 쓸데없는 벌레들만 잔뜩 붙었어.' 물론 나와 정식으로 붙어본 불량배들은 감히 나에게 덤비지 않는다. 그러나 불량배 하나를 교화시키려면, 정말 귀찮지만 최소한 5분이나 10분쯤, 그들의 느리기 짝이 없는 공격을 피해줘야 한다. 그들에게 '네 실력으로는 무리이니 돌아가'라는 가르침을 주려면, 꼭 그렇게 인내력을 시험해야 한다. 한 방으로 날려버리면 실력차도 모르고 또 도전하고, 또 맞는다. 그러니 상대를 물러서게 하고 싶으면, 따분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끌어줘야 하고, 상대가 지치고 나서 때려줘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절대로 상대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 물론 내가 그들을 팰 때, 마법을 써서 때리는 게 아니니 맞아죽을 사람은 없지만. '귀찮아 미치겠어. 정말.' 되도록 피해주는데도, 그 불량배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매일 덤빈다. 오죽하면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를 노리는 불량배들을 모조리 마법으로 일망타진했을까. 물론 그들은 내가 마법을 쓴다는 것도 모르고 있지만, 나도 인간인 이상 인내력에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때 어지간한 불량배들은 모조리 박살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죽이지야 않았지만.' 물론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약간의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다음에 또 나에게 덤빈다면, 그때는 약간 잔인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말로 할 때 알아듣고 물러날 것이지, 내가 동네 불량배들과 패권을 다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나를 귀찮게 구는 거야 ! 불량배한테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한 마법사가 아니라고 ! 나는 ! 지지직. "아. 실수." 너무 화를 내서 그런지, 내 손에서 마력이 튀어나와 번개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가 내 방 안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밖이었다면 적이 그 마력을 감지하고 벌떼처럼 몰려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방에까지 마법진을 쳐서 적을 경계해야 하다니, 정말 마법사는 고달픈 직업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있으면 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럴 때는 정말 움직이기도 싫은데. "내가 없으면 지구를 누가 지키랴. 인가?" 어쩌다가 내가 지구를 지키는 마법사가 된 건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원흉은 그 녀석 탓이다. 그 녀석이 나와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나는 마법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로서, 평범한 여고생으로서 잘 살고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게 뭐냐. 밤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을 찾아야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마법지팡이의 존재가 나를 많이 도와주고는 있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럴 땐, 오빠가 부럽다니까." 천하태평으로, 걱정도 없이 잘 사는 오빠가 부러운 것은, 바로 이런 때다. 뭐 오빠가 나를 보면, 반대로 나를 부러워할 게 뻔하지만. 예를 들어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하는 숙제만 해도. "이런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 어지럽고 졸리는 마법이론이나 실전연습에 비하면, 그리고 전투에 비하면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쯤은 장난에 불과하다. 이런 식이니 평범한 여고생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지만. "자. 숙제부터 하자." 잠옷으로 갈아입기도 해야 할 테고. 나는 얌전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모두 잠들었네." 밖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의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들 자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부터 마법사로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숙제도 다 했고, 내일의 준비도 모두 끝났다. 물론 자고 있다고 해도, 오빠가 지금 잔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그 게임광이 벌써 잠이 들다니. 오늘 축구부 연습이 그렇게 힘들었나?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려면, 내가 깨워야 하겠지만." 프라이 펜을 써야 할지, 식칼을 써야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을 했다. 하루 일과를 이런 식으로 시작하다니. "자. 그럼 오늘도 나가볼까." 다른 사람이라면 잠을 못 자서 피로하겠지만, 마법사가 좋은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마법을 지팡이에 걸어서 내 수면을 잘 관리한 덕분에, 나는 고작 한 시간으로 8시간 이상의 수면효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내 몸은 실제로 8시간동안 숙면을 취했고, 그동안 내 주위의 시공간은 조금 비틀어졌었다. 적어도 잠은 제대로 자고 싶어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만. "나도 잠순이일까." 잠을 자고 싶어서 시공간을 비틀어버리다니, 나도 마법을 쓸데없는 데에 낭비하는 것일까. 사실 피로를 푸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나도 인간인 이상 잠은 제대로 자고 싶은 것이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내 방에 마법진을 만들어놓고 작은 요새를 지은 것이지만. "방의 방어마법진은 완벽. 마법지팡이도 문제없음. 그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 목에 걸린 투명한 목걸이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이 안에 마법사용을 좀 간단하게 만들어주는 보조도구이자 나의 무기인, 마법지팡이가 들어있는 것이다. 내가 마법사가 되면서 만들어낸, 나의 지팡이. 보통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스스로 만들 수 없지만, 나는 다르다. 마법지팡이가 부서져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남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나는 이것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을 것이지만. 나는 목걸이를 잡고. "자. 지팡이야. 나와라." 목걸이 안에서 지팡이의 손잡이부분이 튀어나왔고, 그것이 내 손에 잡혔다. 은은한 마력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서서히 목걸이에서 뽑아냈고, 지팡이는 마치 장난감같은 외형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작은 모습은, 내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환골탈태했다. 지팡이 자체가 길게 늘어나면서, 요정들의 것처럼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actuation. wizard suit(발동. 마법사복)]] 나는 주문을 외웠다. 지팡이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면서, 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가 입었던 잠옷과 속옷이 반딧불로 변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보석 부스러기가 허공에 떠 있다고 할 광경이다. 그렇게 몸에서 옷이 사라지자, 나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변신은 남자들에게 눈요기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일반 복장은 전투에 견디지를 못하니 옷을 바꾸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내가 싸우는 환경은 정상적인 지구의 옷이라면, 옷 찢어지기 딱 좋은 상황이다. 나 혼자 있을 때 알몸이 되는 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남자들 앞에서 그런 상황이 된다면? '그건 곤란해.' 안 그래도 엉큼한 인간은 내 주위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판국에, 옷이 찢어지면 큰일난다. 따라서 이런 절차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또한 내 정체를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런 식의 마법복장의 착용은 필요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의 몸에서 흩어져간 나의 옷은 지팡이에 갈무리되었다. 이 부스러기들은 나중에 전투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을 때, 다시금 나의 잠옷과 속옷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마법지팡이에서, 다시 반딧불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잠옷이 아니다. 그 발광체들은 나의 몸을 감싸고, 빛의 덩어리가 되었고, 그 덩어리는 점차 나의 옷으로 변해간다. 작디작은 미립자가 결합되어, 나의 옷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으웃." 강한 힘이 나를 감싸고 있다. 옷으로 변한 빛의 무리는 점차 물질화 되어갔고, 나의 몸은 전투복으로 덮여갔다. 팔을 위로 쳐들자, 팔에 빛이 몰려들면서 장갑을 만들어간다. 다리를 아래로 뻗자, 다리에 신발이 만들어진다. 빛은 점차 나의 몸으로 접근해 들어왔고, 치마와 웃옷의 형태로 바뀌어갔다. 남은 빛은 망토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 위로 고깔모자가 씌워졌다. 물론 옷을 다 입었다고 해도, 노출이 조금 심하기야 하지만. '오빠가 보면 얌전하지 못하다고 방방 뛰겠지만.' 애석하게도, 이건 남자들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마법지팡이를 이용한 마법 외에도 나 자신의 힘을 이용한 마법이 있으며, 만일의 경우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주위의 힘을 느끼고, 그 힘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맨살을 노출시켜서 힘을 느끼기 쉽도록 해야 하며, 이것은 마법도구의 마력으로 인한 감각차단효과를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사실 마법도구의 장착을 배제한다면, 가장 좋은 것은 알몸이고 그 다음은 수영복이겠지만, 그건 죽어도 못 하겠다. 차라리 내가 마법수행을 더 해서, 옷을 입든 벗든 상관없이 주위의 힘을 완벽히 느끼도록 하는 게 낫지, 어째서 그런 낯뜨거운 복장을 택하겠는가. "절대로, 죽어도 안 돼. 수영복 차림으로는 못 싸워." 결국 그로 인해 내가 택한 것은, 평범한 여름옷이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의 노출이 힘을 느끼고 다루는 데 필요하다지만, 수영복만은 안 된다. 일단 여자로서 옷은 입어야 하고, 그러려면 미니스커트까지는 용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되기 때문이다. 창피하니까. 그리고 수련만 제대로 하면 이 정도 노출로도 힘을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남자들이야 아쉬워서 침을 흘릴지 모르지만, 남자들 좋으라고 옷을 갈아입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다. 드디어 빛이 사라지고, 나는 평범한 여고생에서 마법소녀로 변신했다. 시간상으로는 정말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변신할 때마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완성." 나는 멋지게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보았다. 물론 마법을 쓰기 위해 이런 동작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폼이 나니까 해보는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런 쓸모 없는 동작은 즉시 죽음을 부르게 되지만, 여기서는 비교적 안전하므로 이런 사치가 가능한 것이다. 지팡이가 내 주위를 돌면서 빛을 뿌리고, 나는 그 빛 속에 서 있었다. 반딧불같은 빛의 덩어리들이, 차분하게 내 주위로 내려앉는다. 그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멋진 것이었지만, 냉정하게 평가하면. "바보짓이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이런 식의 멋 부리기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도 여자아이이고, 이왕이면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다. 어차피 영원히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역시 내가 소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사치스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일단 밖에 나가면, 이곳에 돌아올 때까지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으니까. 나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언제나 느껴지는 마법의 따스함. 그리고 짜릿함이 내 몸을 떨리게 한다. "그럼 가볼까." 오늘도 여전히 하늘은 어둡다. 도시의 공기는 매연으로 인해 더럽혀졌고, 별들은 그 공기에 가려져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저 밖에는 분명히 별이 있다. 두꺼운 스모그를 지나가면, 별들이 나에게 미소를 지어줄 것이다. [[Actuation. telepotation(텔레포테이션. 순간이동)]] 내 몸은 방에서 사라졌다. [[Actuation. Magic missile]] 매직 미사일. 마력을 뭉쳐서 만든 간단한 유도미사일이라고 할까. 그 미사일이 지팡이에서 뻗쳐 나와 사방으로 날아간다. 마치 사람의 눈알을 거대하게 만든 것 같은, 나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상한 마법생물들을 향해서. 그 중 몇 마리가 미사일에 맞자,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아래로 떨어져간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지만, 싸우는 이상 안 볼 수도 없다. 그로테스크한 눈알들이 사방에서 레이저를 쏘며 덤벼드는 광경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들이 나에게 타격을 입힐까봐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automatic shield]] 마법주문이 자동적으로 발동하더니, 내 주위에 방어막이 쳐지면서 눈알들의 레이저를 모조리 무력화시켰다. 다시금 마법미사일을 발사하고, 눈알들이 사방으로 터지면서 흩어져간다. 지금 사용한 주문은 원래대로라면 내가 외워야 하는 것이지만, 뻔한 상황에서 똑같은 주문을 반복하는 것은 이제 질려버렸다. 그래서 지팡이에 입력한 것이 바로 이 automatic 계열의 주문으로, 이것은 적절한 상황에서는 지팡이 스스로 그에 맞는 마법을 자동으로 발동하도록 한 것이다. 어차피 내가 만든 지팡이이니, 무슨 전통이니 격식이니 하는 것에 맞춰줄 이유는 없다. 그저 내가 쓰기 편하면 그뿐이다. "요란한 의식이나 기괴한 주문은 질색이야." 그리고 지금은 싸우는 중이다. 난해한 주문을 외워가면서, 기묘한 동작을 취하면서 마법을 발동시키는 사치는, 나에게 있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주위의 적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런데 왜 잔챙이들만 있는 거야?" 그게 문제였다. 우리나라의 영공을 벗어나서, 지구를 한 바퀴 돌기 위해 성층권으로 올라가 마력을 방출시키자마자 눈알들이 몰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들이 단체로 공격해온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한테 덤벼봐야, 졸개 주제에 날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렇지만 왜 그들은 손해만 보는 공격을 하고 있을까. 만약 그들이 나를 찾아내려고 온 것이라면, 당연히 지금쯤이면 이 눈알들에게 정찰 명령을 내린 자가 나타나야 마땅한데 말이다. "공격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물론 나는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마법소녀이고, 이기는 건 당연하다. 아니 당연해야 한다. 내가 지면 지구는 누가 지키겠는가. 정치인들이? 기대하지 말자. 차라리 그들이 지구를 파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이 녀석들, 좀 잡혀라. 좀." 내가 날아다니는 눈알에 이상한 취미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이 녀석들을 잡아야 나의 궁극적인 적이 어디 숨었는지 알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몇 바퀴 돌아봐도 녀석이 숨어있을 만한 곳은 없고, 그렇다면 녀석의 부하를 잡아서 마법으로 정보를 불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녀석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부하를 밖에 내보내야 할 테니, 그를 잡아서 심문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여태까지 부하조차 내 눈에 띄게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내가 만난 것들은 녀석의 부하도 아니고, 기껏해야 약에 쓰려고 해도 안 받을 저런 피라미들뿐. 게다가. "디자인이라도 공부하지, 이게 뭐야." 정말 못 생긴 생물들이었다. 내가 정상적인 미성년자라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불량청소년으로 낙인찍힐 수준이었으니까.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지만, 정보 문제가 걸린 이상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쫓아가서 구워버리든지 삶아버리든지 할 게 아닌가. 그러려면 녀석을 무조건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솔직히 내키지 않는 일이다. 당장이라도 사람의 눈에서 뽑아낸 듯한, 저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시뻘건 눈알들이라니. "정말 구역질난다니까." 게다가 이 눈알들은 비겁하게도, 내가 잡으려고 다가가면 도망간다. 정면으로 싸우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냐. 어차피 감정도 없는 인조생물 주제에. 내가 뒤로 물러나면, 스르르 다가와서 레이저를 난사한다. 간혹 빈틈을 포착해서 기습적으로 날아 들어가면, 녀석들은 내 손에 잡히기 직전에 어김없이. 콰앙. 이런 식이다. 그들은 나에게 잡힐 것 같으면, 언제나 이렇게 나온다. 잡힌다면 정보를 누설시킬 테니, 그걸 막기 위한 예방책인 것 같다. 물론 이런 잔챙이들이 자폭한다고 해서 소녀의 피부를 상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짜증을 유발하는 효과는 있다. 그렇다고 도발에 넘어가서 다 날려버리면, 녀석에게 한 수는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이 분통을 풀 수 있으니까. 물론 저런 더러운 생물을 손으로 잡는 건 찜찜한 일이다. 잡히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걸 보면, 때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말야. "이것들이 정말 !" 나도 인내심이 무한히 많은 게 아니다. 또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니고, 낮이 오면 나 역시 평범한 소녀의 탈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소녀의 새벽잠을 이런 식으로 날려버리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다 잡아주겠어." 마법을 쓸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미사일을 날리거나 실드 마법으로 나 자신을 지키는 수준의 소극적인 것이 아닌, 단 한 방으로 이 보기 싫은 눈알들을 일망타진할만한 것으로. 낮이라면 주위에 사람들도 많으니까 마법사용에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여기는 지상에서 30km나 떨어진 곳이다. 차디찬 바람만이 부는 곳, 숨쉴 공기조차 없어서 마법을 동원해야 하는 곳. 이런 곳에 마법의 여파로 피해를 볼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런 곳에 나타날만한 건 군용 정찰기나 기상관측용 기구 정도겠지만, 그런 것은 이 주위에 없다. 그렇다면. [[Actuation. Black hole]] 위력은 가급적이면 낮게 했다. 정상적인 위력을 내다가는 지구 전체가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마법을 쓸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 범위의 적당한 조절이다. 너무 작으면 녀석들이 도망가버리지만, 너무 크면 지상에까지 그 여파가 미쳐서 난리가 나게 된다. 여기가 공해상이라 다행이지, 만약 주권국가의 상공이었다면 당장 요격전투기가 출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투명해서 그들에게 안 보인다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도. 마법이 발동되면서, 지팡이의 끝에 검은 구슬 모양의 공간이 생겨났다. 그러자.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불더니, 곧 그 공간은 탐욕스럽게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떠가는 구름, 지구를 덮은 공기, 심지어 주위에 떠돌던 벌레들까지 모조리 말이다. 이런 곳까지 벌레가 올라온 것은 약간 의외였지만. 아마 과거에 강대국에서 핵실험을 했을 때, 딸려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태풍이라도 불었던 걸까.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방사능을 띈 먼지가 주변에 떠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나에겐 별 위험이 없지만. "자. 빨리 이리 와. 이 상한 눈알들아." 마법생물인 눈알들은 필사적으로 나의 마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물론 그 녀석들은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마 그들이 노리는 건 아마 자폭일 것이다. 싸워도 이길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다면, 그들이 선택할 길은 자명하니까. 물론 눈알 수 백 개가 자폭한다고 해서 내 몸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런 길을 선택한다면 분명 누군가 - 이 눈알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 - 가 신호를 보내야 할 것이다. 눈알들의 행동방식으로 보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은 뒤떨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하긴 정찰을 위해 무더기로 배양한 저런 생물에 사고능력을 넣어주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 그런 신호가 나에게 느껴진다면, 재빨리 그를 쫓아가야 한다. 그가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기 전에. 그러나 만약 눈알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서 자의로 자폭을 결심한다면, 나는 그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일단은 마법을 조절해서, 눈알들이 내게 날아오는 속도를 조절한다. 위력이 너무 크면 여러모로 위험하니까. "신중하게. 신중하게." 블랙홀이라는 마법은 원래 거대한 중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마법이기 때문에, 설령 빛이라고 해도 도망칠 수 없다. 물리법칙에는 빛보다 빠른 것은 없기 때문에, 적어도 시공간에 매여 있는 물체라면 모조리 나에게 빨려 들어오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법을 쓸 경우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너무 많은 물체가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오면, 서로 충돌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소나기처럼 날아오는 물건들에 얻어맞는 수가 있다. 물론 날아오는 소행성을 맞아봐야 내가 죽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돌에 맞으면 기분이 나쁘다. 내 머리가 돌보다 단단하다는 걸 입증하고 싶지는 않다고. 게다가 나는 충돌에 대비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으니까. "자. 어서." 눈알들이 서서히 내가 만들어낸 블랙홀 안으로 끌려들어온다. 녀석들이 블랙홀 안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 그러니까 녀석들이 가지고 있을 정보가 소실되기 전에, 나는 그들을 살펴봐야 했다.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발동하는 것은 다른 마법사라면 어렵겠지만, 나에게는 별 일도 아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쓰기 위해 만든 마법지팡이니까. [[Actuation. scan(정밀검사)]] 지팡이의 마법이 눈알들을 일일이 검사하기 시작했다. 눈알들은 자폭하려고 하지만, 격심한 폭풍과도 같은 중력파에 휩쓸리자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몇몇은 내 마법에 의해 비밀을 폭로 당하기 전에 자폭하려고 했지만, 내 지팡이는 그런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엿보고 있었다. 어쨌든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내가 블랙홀 마법을 발동하고 나서, 새로운 마법을 발동한 것은 고작 1초 정도 지난 후의 일이니까. 여기서 내가 눈알들을 직접 검사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기분나빠." 저 토할 것 같은 눈알을 내가 직접 손대기는 조금 기분이 나쁘다. 핏덩이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당장이라도 팔딱거릴 것 같은 저런 눈알은 꿈에 보기도 싫으니까. 게다가 한 번 터질 때에는 또 얼마나 더러운지. 저래가지고는 도저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안해. 지팡이야. 궂은 일을 시켜서. 지팡이가 전해준 눈알들의 기억 속에 든 정보가, 내 마음에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내 수고는 처음부터 헛된 것이었다. "이게 뭐야." 아무래도 이 눈알들은 정보를 저장했다가 귀환 시에 보고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얻을 때마다 즉시 그 정보를 전송하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정보도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는 '전송할만한 정보가 없어서' 통신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긴 지금 상황은 언제나 그들이 당하는 그대로이니 전송할 게 없을 만도 하다. 하지만. "없으면 만들면 되지." 나는 치마를 손으로 잡아서, 위로 들춰 올렸다. 이 녀석들이 만약 내 짐작대로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만 외부와 연락하는' 생물이라면, 아마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조종하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자의 이미지와 대략적인 위치가 느껴졌다. "됐어." 이제 눈알들에게 용무는 없다. 나는 마법지팡이를 흔들었고, 갑자기 중력파가 흐트러지자 나에게 다가오던, 정확히는 내 지팡이에 다가오던 눈알들은 사방으로 흐트러지면서 자기들끼리 충돌했다. 상당히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외부로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내가 중력파를 더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블랙홀 마법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Actuation. Light speed, create air, invincible state]] 첫 번째는 빛의 속도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마법을 발동시키는 이유는 아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공기를 보충해 주기 위한 것이고, 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지구는 나 자신의 손에 의해 황폐화될 것이다. 공기가 없어서 헐떡거리다가, 숨이 막혀 죽어버리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마법은, 무적상태라는 허울좋은 말을 붙인 것으로, 주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나 자신도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마법이었다. 단순히 말하면 내 몸이 일종의 유령 비슷한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이런 마법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나 자신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동안 주위의 공기분자와 내 몸이 서로 부딪치면서 생기는 엄청난 저항과 충격을 이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 반대로 나와 대기의 충돌로 인해 생길 엄청난 불상사를 예방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날아가는 물체가 만약 저공으로 날아간다면? 그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잘못하면 지켜야할 사람들을, 내가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귀찮기는 해도, 이런 예방조치는 반드시 필요했다.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어지간하면 이런 건 나 스스로의 마법을 쓰겠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여유도 없다. 조금이라도 꾸물거린다면, 녀석은 도망치고 말 것이다. 치마까지 들추면서 간신히 잡은 찬스가 아닌가. 물론 실상은 조금 다르지만. "가자 !" 나는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허공을 날아갔다. "여기서 정지." 마법주문을 외우자마자 취소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지구에서 사용할 경우에는 대기의 저항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잘못하면 충돌사고가 날 수도 있으므로 미리 비행코스를 점검해둬야 한다. 여기에 잡다한 게 더 추가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이 역을 통과하는 열차이오니."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만약 취소하는 타이밍을 조금이라도 늦게 잡아버리면, 목적지를 지나쳐서 엉뚱한 곳에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번거로운 마법을 쓰지 않고 순간이동같은,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마법을 사용한다면?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만약 적이 감지할 수 있다면, 그 뒤는 너무나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 적은 혼비백산,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칠 것이고, 이러면 나는 하루를 그냥 날려버리는 것이다. 모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이 잠도 줄이면서 수고를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좋든 싫든, 번거롭든 말든 이렇게 해야 한다. 물론 광속으로 이동하면 정상적인 경우에는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체가 공기를 찢고 광속으로 날아온다? 그러면 그 물체가 일으키는 충격파는 엄청날 것이며, 지구는 내 비행만으로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마법이 있어서 안심이기야 하다. 물론 이 주문까지 합할 경우,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이런 식으로 마법을 적용할 때, 몇 가지 주문을 더 외워야 하겠지만. 'Simple is best.' 이런 건 간단한 게 최고다. 마법지팡이에 이런 경우에 쓸 마법을 미리 가르쳐둔 덕분에, 이 영특한 지팡이는 알아서 적절한 마법을 한 번에 모두 가동시켜준다. 정말 귀여운 내 아이다. 가만. 가만.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무슨 아이냐. 하지만 내가 만든 지팡이이니, 그만큼 애착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팡이가 애써준 걸 생각해서라도. "오늘은 반드시 단서를 잡아내고 말겠어." 물론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옆에 사람들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나로서도 투명 마법부터 시작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탐지수단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둔 상태였고, 그래서 아무도 나를 주시하지 않았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쯤 아래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끼아악 ! 마녀다 !" "빗자루를 타지 않았잖아? 어떻게 된 거야?" "와아. 너무 야해. 저 옷차림 좀 봐." "몸매가 끝내주는데? 좀 더 보여봐라."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은, 남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내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학교 선배들이 이 사실을 알면, 꽤나 억울해할 것이다. 자. 잡생각은 이쯤해서 집어치우고. "신중하게." 나는 밤거리를 서서히 날아갔다.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물론 지금의 내 몸은 공기도 빛도 모두 통과해버리는, 완전한 투명상태이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적들 역시 숨는 데에는 이골이 난 종족들이니까. 하지만 내가 찾아온 곳은, 어디선가 많이 본 곳이다. 우리 학교가 보이고, 불량배들의 근거지도 보이고, 저 멀리 지하철역도 보이니, 이건 영락없이. "왜 하필 여기야?" 하필이면 내가 온 곳은, 서울시 한가운데였다. 그들이 어째서 이 부근에 있었을까. 설마 내가 사는 동네를 알아낸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큰일이지만, 지금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서서히 날아서, 녀석들이 모여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느껴지는 적은 하나.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료? 아니면 부하? 그것도 아니면 관계없는 사람들?" 어느 쪽이냐에 따라, 대처방안도 달라질 것이다. 만약 적의 동료라면, 가차없이 죽이든지 잡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적들의 근거지를 알아내야 하므로, 죽이는 것보다는 생포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 사람들이 민간인이라면? 이 일과 관계없는 무고한 시민이라면? 그렇다면 문제가 커진다. 그들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그들은 목격자가 될 것이고, 이 일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한 두 번이라면 헛소문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게 누적되면? 결국 정부에서 나를 추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이 꼬이게 된다. 이 일은 일개 정부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든 상황을 판단할 무렵에는,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가 될 것이니까. "거기에 하나 더하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민간인들이 내 전투장면을 목격한 후의 상황은 언제나 똑같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좀 침착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허둥대다가 마법을 맞는다. 그것도 언제나, 내가 적을 추적해서 결정타를 먹이려는 순간에 내 앞을 막아선다. 한 두 번 그런 게 아니다. 만약 적의 손에 의해 내 앞으로 끌려나왔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다. 마치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앞을 막아선다. 언제나. 적이라면 그냥 날려버리지만, 이건 적이 아니니 그럴 수도 없다. "죽이지 말라. 다치게 하지도 말라. 인도주의란 건 정말 어려운 거야."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마법소녀라는 이유로, 덕분에 나는 언제나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내 힘이 압도적이어서 그런 사람들까지 고려하면서 싸울 수 있었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적은 언제까지나 피라미만 나오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진짜로 무서운 상대를 만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럴 경우에도 과연 모든 이를 지킬 수 있을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내 적을 잡고, 마법수행에 힘쓰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천천히, 언제나처럼 마법을 준비했다. 이 경우에 가장 먼저 사용해야 할 마법이라면 역시 그것이지만, 주위의 소음이 내 귀를 잡아끈다. "그러니까 너희들, 그 계집애를 잡지도 못하고, 그저 놀림감만 되었다는 거냐?" 뭐야. 이 사람들. 나는 마법을 준비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귀를 막고 싶어도, 아주 잘 들리는 걸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바로 나였으니까. "........네." 낮에 나에게 골탕먹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아마 여자깡패들일 것이다. 자세히 보니, 선배라는 이 여자들을 추궁하는 이 사람도 어디서 많이 봤는데? "바보 새끼들." 선배들을 걷어차는 불량배 두목 아가씨.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불량 선배들. 자주 보는 광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배들을 바라보는 불량배들 사이의 인간이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인데, 어째서 마력을 품고 있을까. "콩알만한 계집애 하나를, 열 명이 못 이겨?" 이봐요. 아가씨. 당신도 나한테 맞은 적이 있을 텐데? 하긴 이 근처의 불량배들 중에 나에게 흑심을 품고 다가오지 않은 인간은 없으므로, 당연히 그 역시 나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다. 물론 저 불량배는 여자이지만, 자기들의 애인을 내가 빼앗을까봐 걱정해서 내 기를 죽이려다가, 반대로 그 자신의 기를 팍 죽이고 만 것이다. 사실 저 아가씨의 애인도 나를 노리다가, 한 방으로 나가떨어지기는 했지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말이다. "내일 우리가 그 계집애를 손봐주지. 너희들은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못난 새끼들." 내가 정식으로 그들을 때린 적은 없다.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폭력을 휘두르기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 대해 원한이 많지만, 적어도 여태까지는 어떻게 잘 억눌러왔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이른 모양이다. 역시 폭력을 폭력으로 상대한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무슨 방법을 쓸지는 앞으로 고민할 문제이지만. "시작하자." 나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런 경우에 내가 할 일은 뻔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저 불량배들의 헛소리를 일일이 들어주는 것도 질려버렸다. 나를 손봐주겠다는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불량배 아가씨. [[Actuation. Isolated world(고립된 세계). 2 !]] 고립된 세계.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외부와의 모든 연관관계를 끊어내는 마법이다. 밖에서는 안의 일을 알 수 없고, 안에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런 고립된 공간을 만드는 마법. 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밖에서는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이 마법의 목적이기도 하다. 결계라고 하면 어울릴까. 물론 이것은 결계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Reduction(축소). 1 !]] 다른 결계와는 달리,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결계를 이룬 마법막이 재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주위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지자 바람이 멈췄고, 그 바람에 이상함을 느낀 불량배들이 당황해 했지만, 그들에게 이 상황을 파악할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능력이 있는 건. "역시." 그들 중 하나. 불량배들 사이에 섞여있던, 내가 의심하던 바로 그 녀석이 잽싸게 움직였다. 역시 저 녀석인가. 아마 주위에 평범한 사람들을 두어 내 눈을 피해가려고 한 모양인데, 그 정도로는 속지 않아. 나는 마법막을 급속도로 좁혔다. 곧 저 자는 내 마법막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마법막이 다른 이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수축작업을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 드는 법이다. 녀석은 갑자기 불량배 하나를 잡더니. "뭐야?" 녀석은 불량배를 잡고, 마법막을 향해 던져버린 것이다. 힘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 마법막에 부딪치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저 마법막 밖으로 내 허락 없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당연히 막에 부딪쳐서 뒤로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저 녀석이 쓴 힘은. "안 돼 !" 나는 마법막을 약간 열어서, 그를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이 속도로 그가 마법막과 부딪치면, 그는 분명히 목뼈가 부러져서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법을 전개하는 순간, 나의 적은 마법막이 열리는 순간을 노려 번개처럼 뛰쳐나갔다.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지? 어쩌지? 하지만. 콰앙. 녀석은 마법막에 부딪쳐서,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내 앞에 나가떨어진 아까의 불량배를 내려다보자, 그 여자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지경에 빠졌는지 모르겠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마법으로 감싸준 덕분에 다친 곳은 없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느낌이 참기 어려운 듯 하다. 확실히 인간이 경험할만한 일은 아니다. 저쪽 마법막에는, 도망가려다 창피스럽게 나동그라진 나의 적이 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 뭐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마법을 이중으로 걸어둔 것뿐이다. 도망 잘 가는 녀석들이라면 분명히 주위의 사람을 방패막이로 이용할 것이니, 그런 경우에 대비한 것뿐. 나는 내 앞에 쓰러진 불량배를 그대로 걷어찼다. 불량한 선배 아가씨는 허우적거리다가 안쪽의 결계로 빨려 들어갔다. 어디 보자. 이 안에 다른 사람이 없나. "됐어." 적어도 내가 결계를 만들어 가둔, 이 영역 이내의 사람들에게는 모조리 마법막을 씌워버렸다. 심지어 건물이나 길바닥까지도, 철저하게 마법막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이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저 녀석을 잡아서,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보호막으로 덮인 불량배들을 잠들게 했다. 그들에게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의 세상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정의의 마법소녀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되는 법. [[Actuation. Sleep]] 불량배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모조리 잠들어버렸다. 그래가지고 나를 손봐주는 건 무리예요. 아가씨들. 다음에는 적의 힘을 감안해서 도전해주시기 바래요. 나는 내 앞에 있는 나의 적을 잡기 위해, 다음 마법을 준비했지만. "제, 제기랄." 녀석은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는 짓을 보니 마법막이 없는 곳을 찾아서 돌파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게 과연 그의 소원대로 잘 될지는 의문이지만. 내가 할 일은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녀석을 잡아서 모든 정보를 토해내게 하는 것이다. 대체 왜 평범한 인간이 마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저들의 두목은 과연 어디에 숨어있는지. 물어볼 것은 많은 것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이 안에서는 뭘 쓰든 상관이 없다. '고립된 세계' 안에서의 시간은 매우 빨리 흐르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1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기서는 하루가 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일을 끝내면, 바깥 세계는 서울시의 한 동네가 갑자기 이차원현상을 일으킨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자. 서둘러볼까.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타닥타닥. 그는 쫓기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을 달려가는 그의 뒤로, 악의 첩보원들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총을 쏘아대는 와중에도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품에서 권총을 뽑아 쏜다. 검은 양복 한 명이 고꾸라진다. 하지만 검은 양복의 수는 많다. 그는 총알이 떨어진 권총을 품에 집어넣고, 다시 어둠 속으로 달렸다. 만약 시간에 맞게 왔다면, 그를 기다리는 동료의 차가 있을 것이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전혀 아냐." 적이라고 해서 엄청난 녀석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약간 김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처음에 바짝 긴장하고 마법을 걸었을 때까지는 좋았다. 그 뒤에 무고한 민간인을 잡아서, 탈출도구로 쓰는 장면까지는 꽤 재치 있는 대응이었다. 비인도적인 대응이기는 하지만, 악당이니 그러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정의의 마법소녀'인 내가 그를 응징하기 위해 나선 것이고.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내 마법에 의해 특정한 공간에 갇혔다는 걸 알자마자, 그의 침착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계속 저 꼴이다. "그냥 달린다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마법에 의해 갇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그 역시 마법으로 받아쳐야 할 것이다. 결계를 깨서 밖으로 달아나려고 시도하던가, 나에게 마법을 쏘아 공격하던가, 이도 저도 안 되면 두손들고 항복하던가. 그런데 저게 뭐 하는 짓이냐. 저 녀석은 그저 무조건 달릴 뿐이다. 그것도 굉장히 느린 속도로. 명색이 악당이면 최소한 100미터에 1초 정도로 달려야 하는 거 아냐? 저렇게 느려서야 어떻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이용해먹겠다는 거야. 위에서 쳐다보는 내가 무안할 지경이다. "역시 졸개가 분명해." 그리 마력이 대단하지도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건 너무 한심한 대응방법이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제대로 해야 싸울 맛이 나는데, 이건 너무 무지한 녀석이다. 이런 녀석 때문에 내가 잠도 못 자고 밤에 돌아다녀야 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인지 해부라도 해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러려면 일단은 녀석을 잡아야 할 것이다. 저런 허약한 상대에게 살상마법을 쓰기도 솔직히 좀 아깝고. "부디 지금의 모습이 위장이 아니길." 지금의 모습이 진짜라면, 지금 쓰는 마법이 먹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만약 위장이라면, 이런 가벼운 마법 정도는 금방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내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가혹해질 것이다. 이건 전쟁이니까, 상대를 봐주면서 싸우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건 일단 녀석을 잡고 나서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주문을 외웠다. [[Actuation rope(줄)]] 싱거운 싸움이었다. 단 한 방의 주문으로, 그는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갑자기 그의 발 밑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빛이 그를 감싸고, 그 빛이 자신을 결박하는 사슬이 되자 그는 발악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화려한 마법으로 나에게 도전하지도, 수수하지만 묵직한 마법으로 나에게 반격하지도, 하다 못해 마법도구를 꺼내들고 발악하지도 못한다. 처음에 마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다. "마력이 너무 약한 거야? 그게 아니면 싸움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풋내기인 거야?" 둘 중 어느 쪽이든, 예상과는 어긋났다. 더불어 오늘의 밤 산책도, 아무 성과가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중요한 정보를 얻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심문은 해봐야 아는 법이니, 나는 일단 마법을 준비했다. 저 꼴은 봐주기가 괴롭다. "이봐. 풋내기." 녀석은 주위를 돌아보지만, 주변에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밤중에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신사복차림의 남자와 헤픈 언니들도, 그 뒤로 다가가는 강도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그리고 이름 모를 밤의 방랑자들도, 지금은 단지 석상일 뿐이다. 그들의 외양은 정상적인 인간이지만, 아무도 움직임을 허락 받지 않는 침묵의 세계. 그게 바로 내가 펼친 마법 '고립된 세계'의 위력이었다. 그는 주위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 줄로 알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다시금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게 풀릴 턱이 없다. 녀석이 도망 다니는 동안 나는 상대의 마력을 측정해봤고, 그 결과에 따라 '절대로 그가 풀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부여하여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한계를 멀찌감치 초월한 수준의 마법이어서, 그는 절대로 이 마법을 깰 수가 없다는 뜻이다. 만약의 경우 그가 이 마법을 깬다면, 그 뒤는 더욱 무서운 마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준비는 괜히 한 것 같다. "아구구. 이거 놔줘." 말투는 거칠지만, 그 말투에 어울리는 실력은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애송이를 상대로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숨긴 마법의 장막을 조금 거두었고, 얼굴을 제외한 나의 몸이 흐릿하게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억 ! 뭐야 !" 그는 단지 놀랄 뿐이었다. 물론 보통사람이라면, 난데없이 눈앞에 투명한 뭔가가 모습을 보이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겠지. 그 물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얼굴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하지만 내 앞에 잡힌 인간이 그런 평범한 사람인가? 적어도 마력을 가진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이게 만일 위장이라면, 이 녀석은 정말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내 앞에서 이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계속 연극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게 연극이라면. "다, 당신은 누구야?" 정말 연기력이 대단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연기를 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는 나에게는 학교 선배도 아니고 불량배들의 일원도 아니고, 오직 내가 심문해야 할 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얼빠진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마법주문부터 외웠다. 이런 일은 간단히 끝내는 게 최고니까, 곧바로 본론으로 돌입한 것이다. [[Actuation truth]]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의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장소에서도 뭔가가 움찔거렸다는 점이다. 뭐 대충 짐작이 가지만 말이다. Truth. 영어로 '진실'이라는 뜻이다. 나는 고문이나 폭행 같은 원시적인 심문방법을 즐기지 않으므로, 그냥 마법 한 방으로 적에게 진실을 털어놓게 하기 위해 이 마법을 생각해냈다. 사실 흑마법사들이라면 무슨 이상한 재료들을 솥에 집어넣고, 알아듣기도 힘든 긴 주문을 외우면서 악마를 불러내어 힘을 빌려야 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런 짓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게으르다. 한 번 마법을 발동시킬 때마다 그런 짓을 하다가는, 나는 분명히 지쳐서 말라죽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 내 마법은 그런 식의 체계와는 원리부터가 동떨어져 있어서 그런 식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지팡이에게 내가 마법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주문만 외우면 발동이 되게끔 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도 게으름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지만, 한 번만 하면 그 뒤에는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결되기 때문에 그나마 견딜 수 있다. 다만 지팡이가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겠지만. 어쨌든 내 주문에 걸린 졸개는, 스스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황한 녀석이 자기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런다고 입이 안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어제, 건방진 후배 계집애가 자기 외모를 가지고 너무 잘났다고 자랑하고 다니길래, 선배로서 버릇을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그 계집애가 도망쳐서. 쳐서. 그래서 잠시 땅을 바라봤다가 보니 이 나이프가 있어서. 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나이프가 너무 멋지. 멋지니까 그냥 주웠다가. 네. 훔친 거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그리고 내일 그 쓰레기 같은 계집애한테. 한테. 이걸 보여주려고 했는데. 는데." 이 사람이 만약 내가 그 '건방진 후배 계집애'라는 걸 알면 어떻게 행동할지 참으로 궁금했지만, 지금은 일단 심문이 먼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는 것이 더 없다는 표시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취할 행동은. "그 칼, 지금 가지고 있지? 보여줘 봐." 아무래도 칼을 봐야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물론 불량한 선배는 내 마법에 손발이 완전히 묶였기 때문에 칼을 꺼내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원래 rope라는 마법은 몸을 줄로 묶는다는 것으로, 줄을 쥔 내 의지에 따라 상대를 꼭두각시처럼 다룰 수 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는 내 명령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갑자기 자신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가자, 불량선배는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의 손은 내 의지에 따를 뿐이다. 이윽고 그는 정중히 칼을 꺼내어 나에게 바쳤고, 나는 그 칼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미약하지만 확실한 마력이 느껴졌다. 확실히 이 칼이 마력의 출처다. 그렇다면. "넌 누가 보냈어? 말해봐." 물론 이 정도로 대답할 리는 없겠지만, 이 녀석은 근본적으로 불량선배의 품속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아까 걸어둔 마법인 rope와 truth가 걸려있는 상태이다. 입을 다문다고 해서 다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마법나이프라고, 내 마법을 풀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 정도의 마력으로 풀릴 마법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 힘에 부치는 일을 억지로 시도한다면 그 결과는. "크엑."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무리하게 되면 몸에 안 좋다. 마법나이프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눈치지만, 솔직히 털어놓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 모양이다. 과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어차피 내 마법은 내가 풀어주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결국 이 나이프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크엑. 크으으윽. 꾸엑." 마법나이프보다, 오히려 불량선배가 더 비명을 크게 지른다는 것이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따로 없다. 눈물까지 흘리며 데굴데굴 땅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완전히 나한테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저 선배에게 걸린 마법 중에 저런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없다는 점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모조리 털어놓은 사람에게 고문을 자행하는 것도 내 취향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 선배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으.........너.........평범...........인간...........이렇게 괴롭히다니.......... 생각보다..........독하군." 역시 이 물건이 문제였다. 나는 마법나이프가 불량선배의 통각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막아버렸고, 곧 불량선배의 비명도 멈추었다. 물론 나에게 저런 정신나간 선배를 지켜줄 의리는 없지만, 나는 이 마법나이프에게 불량선배를 고문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게다가. "끄에엑 !" 진실을 말하라는 마법. Truth는 이런 고약한 불량품 마법나이프에게는 특히 가혹하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버틴 이상, 넌 이제 마법나이프로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마법나이프의 손잡이가 부르르 떨리면서, 조금씩 표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넌 죽어." 농담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이 나이프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고, 그 최후는 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나이프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기를 만들어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소용없는 짓이다. 어차피 그래봐야. "3일전에 만들어진 마법나이프로 이름은 아직 미정. 이번 임무는 첫 번째로, 적당한 인간을 유혹하여 협력자로 만든 후, 목표물을 찾아 자료를 수집하는 것. 자료수집이 끝나면 북극지방의 빙산에서 기다리겠음. 식별신호는." 마법나이프가 내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지만, 원래 Truth라는 마법은 이런 것이었다. 마법에 일단 걸리면, 그 마법을 깰 정도의 능력이 없는 자는 그저 무조건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 입을 막으면 손으로 진실을 써주고, 손을 자르면 발가락으로 펜을 잡아서라도 진실을 토해내게 된다. 만약 손발이 잘리고 입에 재갈을 물리더라도, 눈길로라도, 생각으로라도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마법나이프가 숨기던 지식을 모두 말했을 때, 마법나이프는 한탄했을 뿐이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의 진실을 알아봤을 뿐. 그리고 이 나이프는 살려둘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생명의 연장은 불가능했다. 고작 태어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다니.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것은 이 나이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나이프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낸 '적'의 잘못이지만. [[Actuation Death]]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마법의 나이프는 그대로 부서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동시에 이 나이프를 한때 몸에 지녔던 불량선배는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져서 움직일 줄 모른다. 아마 정신연결이 갑자기 배제되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일 듯하다. 불쌍한 사람. 나이프 하나 잘못 줍는 바람에 저렇게 되다니. "마법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법나이프의 최후를 지켜본 나는, 잠시 한숨을 쉰 후,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문이 종료된 이상,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안에서 보낸 시간은 극히 짧고, 따라서 밖의 시간은 더욱 짧게 흘렀을 것이 확실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그들은 모조리 도망쳐 버리고 말 것이다. 여태까지 계속 그래왔으니까. "이미 들켰다고 봐야 해." 녀석들은 마법나이프와의 연락이 끊어진 시점에서, 이미 내 존재를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미 그들은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요즘 들어 왜 나와의 정면대결을 피하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저지해야 한다. 나는 재빠르게 마법주문을 외웠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주문은 역시. [[Actuation. Light Speed !]] 그 주문이 나옴과 동시에, 내 몸은 결계 밖으로 치솟았다. 주문을 좀 크게 외우는 바람에 지팡이도 약간 당황했지만, 어쨌든 마법을 제대로 발동시켜주었다. 내 몸은 재빨리 북극으로 날아갔다. 섬광처럼. 눈 한 번 깜박이기도 전에 북극에 도착한 나는, 즉시 빙산 아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늦었어 !" 역시 이번에도 늦고 말았다. 녀석들은 마법나이프와의 연락이 끊어지자마자, 미련 없이 순간이동으로 멀리 도망친 모양이었다.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해도, 이미 어떤 곳에서도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내가 한 방식과 마찬가지로, 결계 안으로 도피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력이 밖의 세계로 흘러나가지 않으므로, 내가 그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지금 와서 지구 전역을 찾는 수색마법을 발동시키더라도. "늦고 말았어. 젠장." 이미 그들은 은신처로 숨어버린 후다. 그들로서는 오늘의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했을지라도, 최소한 정보의 누출은 막았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그에 비해 나는.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다. 결국 오늘도 헛된 밤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애꿎은 빙산을 주먹으로 내리쳤지만, 지금의 내 몸은 빛의 속도를 내기 위해 마법이 걸린 상태다. 모든 물질을 그대로 통과해버리는 상태에서, 내가 휘두른 주먹은 허무하게 빙산을 뚫고 지나갈 뿐이다. 빙산 그 자체에는 아무 타격을 입히지 않은 채. 나는 잠시 멍하니 북극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 덩어리만이 떠다니는 침묵의 바다를. "결국 오늘도 잠만 못 잤잖아." 북극해에서 잠시 허무하게 떠 있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시계바늘이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마법을 발동시켰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꽤 긴 시간이 흘렀다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시간은 1초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결계를 아래에 두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늘도 실패한 것이다. 이건 내가 느려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내 몸이 하나라서 생긴 문제다. 내 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결계 안에 갇힌 졸개를 심문하려고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밖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되고, 그 틈을 이용해 녀석들은 달아나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내 몸에 피로만 쌓이지, 성과를 얻을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내 몸을 둘로 나눌 수는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을 완전히 익히면 이런 것쯤은 문제도 아닌데." 하지만 내가 마법수업을 완료한다면,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그거야말로 인간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만다. 아무리 내가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은 싫다. 사람이 아닌 존재라니. 아직 앞길이 창창한 처녀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나 역시 마법을 이용해 새로운 생물을 만들어내는 것. 즉 부하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마법생물을 만든다는 것은, 왠지 생체실험을 연상시켜서 꺼림직 하지만. "내가 무슨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면서 생물을 창조한다? 이것만큼 벼락맞을 짓도 또 있을까. 하지만 다른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진짜 생물이 아닌, 유사생물을 창조하는 것뿐이다. 생물이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하지만,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하를 만드는 것. 마치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마법의 지팡이와 같은 존재를 말이다. 물론 지팡이와는 좀 다른 존재가 되겠지만. "해결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하지만." 물론 해결방법이 마법생물을 만드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아예 결계를 치지 않으면, 적들이 내 감각에서 벗어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니 그만큼 문제가 간단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문제는. "난리가 나지." 단순한 난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대도시에서 만약 적들과 싸울 때 결계를 치지 않는다면, 당장 건물은 무너지고 도로는 꺼지며 자동차들은 불타오르고,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갈 것이다. 그런 꼴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마왕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히틀러나 스탈린을 능가하는 악의 화신으로 기록된다면. "그 방안은 포기." 게다가 일단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당연히 정치인들이 내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음모를 꾸밀 것이다. 그들이 국가를 위해 일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당연히 국익에 해가 되는 일부터 할 것이다. 편견이지만, 이건 오빠를 보면 확실해진다. 오빠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치인들의 품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정치인들은 그렇게 우리 오빠를 괴롭힌단 말인가. 물론 그 경우는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명이지만. "마법으로 좀 도와줄까." 물론 그러면 안 된다. 남의 애정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더군다나 마법이라니. 사람의 마음을 마법으로 손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은. "손을 대야 하나." 결계 안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들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 일단 대부분은 굳어져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학교에서 나를 쫓아다녔던 골수 불량배들이라는 점이다. 마침 좋은 기회이니, 이번에 그들에게 적절한 징벌을 주는 게 어떨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결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그들을 처리하고 나서도, 내가 할 일은 얼마든지 쌓여 있었다. 어떤 마법생물을 만들지, 그들의 수는 얼마로 해야 할지. 그리고 그들의 능력도 정해둬야 했다. 신경 쓸 부분이 아주 많은 것이다. "당분간 외출은 못할 것 같아." 이걸로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내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나에게 싸움을 걸기 힘들어지니까. 모처럼 휴가를 얻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휴가를 즐기기 전에. "불량선배들부터 재교육시켜야지." 나는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꺄아악 !" "히이익 !" "사람 살려 !" 온갖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고 발버둥치던 불량선배지만, 내가 결계 밖으로 나갈 때 Rope 마법을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허공에 매달린 채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안쪽 결계에 갇혀서 버둥거리는 불량배가 몇 명 더 있었지만, 그들은 단지 어둠 속에 갇혀서 절망하고 있을 뿐이므로 문제는 없었다. 다만 여기서 골치가 아픈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선배였다. "어떻게 할까." 나는 꼼짝 못하고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불량선배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바퀴벌레로 만들어서 1주일 정도 죽도록 고생하게 만들어줄까. 생쥐로 만들어서 고양이에게 쫓겨다니게 할까. 그게 아니면 팔다리를 잘라버릴까. 하지만 이럴 경우 대처방안은 정해져 있었다. 일단 죽일 수야 없고, 그렇다고 송충이로 만들 수도 없다. 되도록 내 종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팡이 마법은 안 되겠어." 이건 상당히 정교한 작업이 될 것이다. 단순한 마법이라면 미리 지팡이에게 가르쳐주겠지만, 이건 사람에 따라 어느 선까지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지팡이에게 마법을 미리 가르쳐주고, 그대로 실행하게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힘의 크기나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모두 개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에 맞춰서 마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지팡이야. 지금은 잠깐 쉬렴." 나는 지팡이를 땅바닥에 꽂아두었다. 이미 발버둥치다가 지쳐버린 불량선배를 앞에 두고, 나는 서서히 떠올랐다. 지금부터가 문제다. 까딱 잘못하면 이 사람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건드리는 마법이다.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팡이를 쓰지 않는 마법. 내 진정한 마법이 발동되었다. 빛과 함께. ((나의 의지여. 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나에 대한 기억을 보여다오. 마법의 유혹자에게 지배되었던 모든 시간들이여. 그대의 존재를 무로 돌리니 그대와 얽힌 시간의 낱알들은 모두 흩어져 나오라. 마법의 존재에 대한 기억이여. 모두 사라져라. 그대의 두뇌에 새겨진 무수한 추억이여. 제 자리에 머물러라. 단지 유혹자에게 이끌렸던 기억만을 요구한다. 기억들이여. 마법의 존재와 얽힌 기억은, 단순한 착각임을 명령하노라)) 말로 나오는 주문은 쉽게 들리지만, 이 마법을 익히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지팡이로 쓰는 마법은 이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쉬운 것이다. 적어도 지팡이 마법은, 나처럼 지팡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의식을 거치면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적용하는 마법은, 평범한 인간은 백년을 수행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똑같은 주문을 외울 수가 없기 때문에. 세상은 기계처럼 정해진 상황만을 내놓는 것이 아니며, 내가 만나는 사건은 모두 다 나름대로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마법을 사용할 경우, 그에 맞춰서 무한대의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마법을 발동시켜야 하므로, 지팡이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웠다. 이미 인간이 쓸 마법이라고 부르기도 곤란할 지경이었으니까. 나는 마법을 완성시켰다. ((기억이여. 너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평안한 날들을 기록하기를. 찬란한 아침해가 뜰 무렵에 주인의 의식은 돌아올 것이다)) 비명을 지르던 불량선배의 입이 멈추고, 그를 얽어맨 Rope의 마법이 풀리면서, 그의 몸이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와 땅에 누웠다. 이걸로 한 명은 처리한 셈이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고, 다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마법나이프에 관련된 사항만 잊어버릴 것이다. 겉보기에는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마법이었다. 두뇌 전체에 깃든 기억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하나하나를 검사하고 일일이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마치 지구 전체에 있는 모든 모래사장에 일일이 방문해서, 모래 속에 섞인 사금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할까. 게다가 그 모래들을 모두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는 조건에까지 이르면, 그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 비하면, 말썽꾸러기 오빠를 돌보는 것이나 지팡이 마법을 쓰는 것은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휴우. 다음." 마법나이프와 관련이 없는 나머지 불량배들의 경우는 비교적 간단했다. 그들은 결계 안에 갇혀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메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나는 불량배들이 갇힌 결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 다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절로 한탄이 나온다. 어째서 나는 이런 어려운 마법을 배워야 했던 걸까. 최고의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내 스승이란 작자가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차라리 지팡이 마법으로 만족할 걸.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지팡이가 없으면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최고의 마법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마법을 배우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불량배들을 보며, 내가 느낀 감상이란 이런 것이었다. "뭐, 끝났으니 된 건가." 앞으로는 행동방침을 약간 바꿔야 할 것이므로, 얼마 동안은 밤하늘을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멋지게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볼까. 어차피 내 종적을 감추기 위해서도, 그런 조치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지구 어딘가에서 마력을 숨기고, 몸을 숨긴 채 집으로 잠입하는 사기행각을 벌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멀리까지 날아가야 했다. 여기서 마력을 숨긴다면, 당연히 서울시에 내가 있다는 의심을 받을 테니까. 물론 어쩌다 한 번은 서울시에서 종적을 감춰서, 이 도시가 적의 의심을 받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Cancellation(취소). isolated world]] 결계가 사라지면서,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따르르르릉. 오빠의 방에서 자명종이 울리고 있었다. 앞치마 차림으로 요리를 하고 있던 나와 어머니는, 언제나 보는 그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이라면 참겠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명종 소리는 꺼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안 되겠네. 오빠 좀 깨워오렴." "네." 매일 아침마다 경험하는 일이니 새로울 건 없지만, 오늘도 여전하다. 자명종을 새로 사 준 게 아무 소용이 없다. 어쩌면 저렇게 태평하게 잘 잘 수 있는 걸까. 자는 동안에도 주위를 경계해야 하는 나로서는 부럽기 한량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전쟁을 치르는 전사이자 마법사이고, 오빠는 평화로운 세계의 사람이니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이렇게 소리가 큰데, 왜 못 일어나는 거야?" 부엌을 나가는 내 귀에, 날벌레가 하늘을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벌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내 귀를 따갑게 울리고 있었다. 물론 더욱 따가운 것은 오빠 방의 자명종 시계의 굉음이지만, 벌레가 너무 가까이에서 나는 상황에서 그걸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뿐이랴. 먼지가 마루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문이 움직이면서 삐걱대는 소리, 하수구에서 달려가는 쥐들의 발자국소리까지 모두 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물론 오빠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이럴 때는 오빠가 사람이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잠깐. 그 많은 소리 중에 내 발자국 소리만 안 들린다. 방바닥과 내 발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틈새는 아주 미세해서, 보통 사람은 그걸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지만. '큰일이야.' 나도 모르게 마법을 쓴 모양이다. 주문마법이 아니라, 내 고유의 마법을. 주문도 안 외웠는데, 멋대로 발동해버렸다. 이런 걸 보면, 내가 마법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진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으로 신기한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마법사가 맞지만. '난 악마한테 혼을 판 적은 없다고.' 원래 마법사라는 것은, 중세유럽을 기준으로 하여 정의를 내리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넘기고, 그 대가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자'이다. 즉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악마에게 대가를 치르고 그런 힘을 얻은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마법사가 불순한 방법으로 힘을 얻었다는 뜻으로 연결되며, 마법사나 마녀가 사회에서 배척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물론 중세에는 진짜 마녀는 잡히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만 누명을 썼지만. '그런데 말야.' 나는 지금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런 게 과연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악마에게 혼을 팔아 넘기지도 않았다. 무슨 양의 피를 받아서 대접에 담아놓고, 가마솥에 동물의 내장이니 이상한 약초니 하는 걸 넣고 끓이면서 주문을 외우지도 않는다. 그럼 나는 초능력자라고 불려야 하나? 하지만 큰 마법을 발동시킬 때에 주문을 외우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다. 오빠는 나를 무술의 고수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쓰는 것은 중국무술도 아니고 일본무술도 아니고 우리 고유의 무술도 아니다. 그럼 나는 외계인이나, 외계인의 문명을 이어받은 자라고 해야 하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우주선에 타 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 스승님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리고. '어차피 뭐.' 내가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나를 마법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얌전히 오빠의 방에 걸어가서,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역시 잠겨있다. 열쇠라도 가져와야 하나. 그러나. 덜컥. "아." 무의식중에, 거의 자동적으로 마법을 사용해버렸다. 분명히 어제 오빠가 방문을 잠그는 것을 봤는데, 문이 잠겼다는 것을 안 순간, 주문도 쓰지 않고 자물쇠를 해제해버린 것이다. 오빠는 분명히 문을 잠그고 그 앞에 뭔가를 잔뜩 쌓아둔 모양이지만, 이런 건 적들과의 전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보다 훨씬 견고한 마법장막도, 나는 손쉽게 부수지 않았던가. 결국 너무 잘 부수는 바람에, 적들이 이제는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지만. '이건 적의 방어막이 아니잖아.' 이건 습관이다. 고칠 수 없는 습관이다. 전투가 거듭되면서, 마법수행을 거듭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 배어버린 습관인 것이다. 이런 여동생에 맞서서 매일 밤 문을 잠그는 오빠도 불쌍하지만, 지금은 그런 오빠의 사정 따위 생각해줄 여유가 없다. 대체 왜 문을 잠그고 난리야. '나한테 맞기 싫어서겠지만.' 아무리 문을 잠그고 문단속을 철저히 해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방에 침입하니까, 오빠가 나를 마녀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말야. 오빠가 그렇게 투덜거린다고 해도, 나도 역시 투덜거릴 이유가 있다고. 그 이유는. 따르르르릉. "이런 잠꾸러기."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자명종 소리가 크게 나는데도, 오빠는 꼼짝도 안 하고 잘도 잔다. 정말 잘도 잔다. 창 밖에는 봄바람이 부는 소리도 들리고, 오빠가 자면서 몸을 뒤척이느라 이불과 몸이 비벼지는 소리도 들리며, 벌레가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도 잘도 잔다. 물론 나처럼 마법으로 철통같이 방을 보호하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만,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무신경하게 자는 오빠도 정말 대단하다. 둔감함의 제왕이라고 할까. "음냐." 잠꼬대까지 한다. 이번엔 또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이번에도 진희와 결혼하는 꿈을 꾸는 걸까. 그게 아니면 나한테 쫓겨서 죽어 가는 꿈을 꾸는 걸까. 왜 오빠의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악역으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역시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 실생활에서 말이다. 물론 어머니께서 나에게 이런 악역을 자꾸 맡기시는 것은. "도저히 난 못 깨우겠더라.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지만, 정말 못 당하겠다니까." 결국, 그 덕에 내가 언제나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둔감한 오빠를 둔 것을 하늘에 대고 탓해야 하나. 일단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오빠를 깨울 수 없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프라이팬 내려치기." 이것이 정답이지만, 일단 여동생으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방법은 잠시 보류해야 한다. 일단 상냥한 여동생으로서, 오빠를 깨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뭐 보여줘 봐야 결국 결말은 똑같지만. "오빠. 일어나." 안 일어난다. 다시 흔든다. "오빠. 일어나." 안 일어난다. 다시 흔든다. "오빠 ! 일어나 !" 소리가 커진다. 안 일어난다. 더 세게 흔든다. "오빠 ! 일어나라니까 !" 그래도 안 일어난다. 이제 도리가 없다. 도대체 어째서 오빠라는 사람은 이렇게 둔감한 거야.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콰앙. 비명과 함께, 오빠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오빠 ! 빨리 일어나 ! 지각이야 !" 안 다치게 살살 때리기는 했지만, 소리가 약간 크기는 했다. 그러나 저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비하면, 이건 큰 소리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러나 오빠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리나보다. 온갖 비명을 다 지르며, 무슨 고문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난리를 치고 있지만, 일단 그런 건 무시한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분명히 지각할 테니까. "세상에. 자명종까지 사줬는데, 빨랑 안 일어나고 뭐해 !" 슬그머니 자명종을 들여다본 오빠는, 자명종을 껐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간다. "아직 해도 안 떴잖아." 대체 이 사람, 자기 자신이 운동선수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잠이 덜 깬 모양이다. 아무래도 오늘 할 일을 일깨워줘야겠다. 매일 이래야 하다니. "아침운동 해야지 !" 그러나, 오빠는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한다는 소리가. "학교 갈 때 하면 돼." 안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고, 프라이팬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오빠는 그 일격으로 침대에서 다시 굴러 떨어졌고, 나는 눈을 부라렸다. '안 일어나면 더 때릴 거야.' 그 시선은 마법지팡이만 안 들었지, 영락없이 '적'을 노려볼 때의 바로 그 눈이었다. 오빠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 사용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오빠의 표현대로라면 '공포의 여동생'의 눈동자 그 자체였다. 내 눈과, 오른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바라본 오빠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죽어라 방밖으로 뛰쳐나간다. 이런 식으로 오빠를 노려보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 마법으로 방 전체를 박살내버리는 방법보다는 낫지 않은가. "오빠를 돌보는 건 정말 힘들어." 마법 다음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아빠.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반쯤 졸고 있는 오빠의 손을 붙잡고,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나왔다. 물론 버릇없는 오빠가 부모님께 인사하도록 시키는 것도 내 몫이다. 완전히 이건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다. 오빠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게 보통의 여동생의 역할 아니었던가? '할 수 없지.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걸.' 물론 오빠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부모님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나만 아는 비밀이다. 하긴 누가 쌍둥이로 태어난 남매 중에서, 여동생 쪽이 더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겠는가. 물론 문희나 진희, 풍남이가 보기엔 내가 누나고 오빠가 남동생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기세 좋게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했지만. '아. 오빠는 너무 느리지.'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의 발걸음은 너무나 느리다. 100m 달리는데 11초씩이나 걸리는 걸 보면, 과연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왜 100m에 11초씩이나 쏟아 부어야 하는 걸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잠깐. '아차.' 근본적으로, 보통 인간을 나하고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까먹고 있었다. 달팽이와 제트기의 속도를 비교하는 꼴이니까. 마법사가 된 후에 가장 큰 문제가, 이런 식으로 '인간의 기준'과는 멀찌감치 벗어나는 생각을 하기 일쑤라는 점이다. 언젠가는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려다가, 황급히 동작을 멈춘 적도 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아내려고 몸을 날리려다가, 그게 비상식적이라는 걸 깨닫고 다른 방법을 강구한 적도 있었다. 물론 가끔씩 신문이나 방송에는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어린아이를 아래에서 받아냈다는 뉴스가 나오지만, 200m 떨어진 곳에서 달려온 여고생이 그런 일을 했다고 나오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물론 그때는 여고생이 아니라 여중생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느려.'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데에 적응한 탓에, 100m에 11초라는 기록은 너무나 느리기 짝이 없게 보였다. 특히 인간은 장거리를 달릴 때에는 그 속도가 더욱 줄어든다. 느릿느릿. 꾸물꾸물. 이래서야 내가 마음먹고 달리다가는 큰일이 날 게 분명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와중에도 속도차이가 큰 마당에, 달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오빠는 내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걸로 착각하고 있지만. "너, 너무 빨라." 오빠는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오빠의 모습은 너무나 느렸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마법을 쓰지 않고 걷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걸어가는 여동생을 달려가는 오빠가 따라오지 못하다니. 결국 나는 중간에 걷는 것을 멈추고, 오빠가 따라오는 것을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비명소리가 들린다. "애고. 나 죽어." 차마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 그 꼴을 본 나는 오빠를 업고 달리는 것을 검토해보았지만, 그러면 오빠는 내 속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절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빠를 위해서라면, 그런 동정을 해서는 안 된다. 오빠가 장래에 위대한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마다 지하철역까지 달려야 한다. 오빠의 체력단련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자. 오빠. 조금만 더 가면 지하철역이야. 힘내." 처참한 표정을 짓는 오빠를 뒤로하고, 나는 역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맞이할 평범한 하루를 향해서.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4화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여동생은 강하다 (1) 여자는 약하다. 일단 말로는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내 여동생은 강하다. 나한테만 강한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내 생활이 크게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새로운 학교에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새로운 여동생.... 아. 이건 아니구나. 어쨌든 많은 점이 뒤바뀔 것이니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며 각오를 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게 없어." 물론 몇 가지는 달라졌다. 우선 중학교 시절과 비교해서 등교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되었고, 버스에 타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편한 자세로 잠을 자던 버릇이 없어졌다. 지하철에서도 되도록 다리를 단련하기 위해 서서 가게 되었다. 우리의 인자하신 시장님의 배려 덕분이다. 빌어먹을. 그 외에 달라진 것이 뭐가 있더라? "생각나는 게 없어."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역시 나는 언제나처럼 여동생의 폭력에 시달리며 침대에서 쫓겨났고, 여동생의 구박에 시달리며 아침을 먹었으며, 여동생의 폭언에 시달리며 지하철역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지금도, 지하철에서 몰려오는 치한들에 대항하기 위해 여동생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원래 이런 건 여동생이 스스로 해도 괜찮은 일이지만, 내가 자원했다. 치한들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이 녀석 하는 대로 놔두면 큰일나겠어." 여기는 전장이 아니다. 바늘로 사람을 찌르는 걸 더 두고보다가는, 여동생이 신문에 실리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다. 정말로 곤란하다. 특히 '칠칠치 못한 오빠가 지켜주지 않아서 그랬어요.'라고 말할 게 분명한 내 여동생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동생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뭐? 정확히 말하면 감시하는 거라고? 그런 진실을 드러냈다가는 당장에. 푸욱. 이렇게 될 것이다. 내가 방심하는 틈에, 치한 한 분이 미인이의 엉덩이에 손을 대려다가, 그만 가셨다. 물론 저승에 가신 건 아니고. 걸음걸이로 보아 걷어차인 게 분명하다. 아프겠다. 많이 차여본 나는 그 심정을 잘 알지만, 동정하기도 좀 그렇다. 동정했다가는. "이런 불량오빠가 !" 이 말과 함께, 내가 걷어차일 거다. 이 녀석의 발길질은 굉장히 아프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여동생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다. 눈치보는 게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상한 오빠로서, 여동생을 지켜주기 위해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 아니라고? 그렇다. 그렇다고 생각해라. 이건 명령이다. "오빠. 제대로 지켜주고 있는 거야?" 푸욱. 또 한 분의 치한께서 돌아가셨다. 부디 집에 잘 돌아가세요.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말이다. 문제가 이상하게 비비꼬이기 시작한 것은, 학교 앞 지하철역에 내린 후였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계속될 줄 알고, 따분하게 밖으로 나온 나와 여동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콰르릉. 콰르릉. 물론 우리가 등장하자마자 번개가 내리친 것은 아니지만, 벼락소리를 방불케 하는 오토바이의 소리가 들린 것은 사실이다. 척 보기에도 흉악하게 생긴, 거구의 사나이들이, 우리에게 돌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아악 !" 겁에 질려 허둥거리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여동생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야. 빨리 피하지 않으면 우린 차에 치인단 말야. 아무리 네가 지상최강이라지만, 오토바이에 치이고도 무사할 수는 없어. 나는 여동생을 데리고 사지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끼이익. 오토바이는 정확히, 여동생의 발 앞에 멈추었다. 이거 뭐야. 이 녀석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괜히 나만 바보가 되었잖아.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녀석들, 누구지? "이봐. 대업고등학교 1학년 3반, 연 미인이 너냐?" "그런데요." 여동생이야 언제나 그렇듯이 태연자약했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검은 잠바에 검은 바지를 입은, 얼굴에 칼자국이 난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는데,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만약 여자아이들이라면 조금은 낫겠지만. 그리고 내 예상은 틀렸어야 했다. 틀렸어야 하는데. 젠장. "하하하. 기다리고 있었다. 건방진 계집애." 오늘도 역시나, 사방에서 나타나는 불량배들. 요 며칠 사이에 부쩍 자주 보는 광경이다. 내 여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것이 알려진 후부터다. 정확히 말하면, 여동생에게 불량배들이 얻어맞은 후부터다. 물론 그걸 구타라고 하는 것은 좀 의미가 틀리지만. "오늘이야말로 네 마지막 날이다. 연 미인. 우리가 네 악에 대한 정의의 심판을 내려주마." 하지만 겉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너희들이 악당이잖아. 우선 그 검은 코트도 그렇고. 선글라스도 그렇고. 그 '교통법 위반 과시용' 오토바이도 그렇고. 그렇게 오토바이에 이것저것 붙여도 법에 안 걸리니? 게다가 말야. "왠 일본도야." 여자아이 하나 잡으려고 칼까지 가져 오냐. 그것도 하필이면 왜 일본도냐. 마치 야쿠자 같잖아. 마치 '나는 친일파, 매국노요.'라고 외치는 듯해서 별로 보기 안 좋아. 그리고 이 경우에 그런 걸 들고 있으면. "경찰 아저씨. 큰일났어요." 누가 신고라도 하면, 너희들은 당장 경찰서행이라고. 그러나 아무도 신고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기세에 눌린 건가. 그게 아니면 불의를 택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진리를 깨달은 건가. 아. 선생님한테 내가 이런 생각했다는 거 절대 이르지 마라. 내신성적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뭐? 알린다고? 입 다물어 ! 입 다물라고 했지 ! 내가 그런 망상을 하는 동안, 주위에는 어둠의 인물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오고 있었다. 한 스무 명 되나? 별로 걱정은 안 되지만, 요즘 들어 이런 일이 너무 자주 발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이들은 우리학교의 선배들도 아니고, 이 동네의 불량배도 아니다. 혹시 다른 구에서 원정이라도 온 건가? 그렇다면 내 여동생은 이미, 서울시 전역의 불량배들에게 목표가 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 큰일났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 드디어 불량배들의 두목이 외쳤다. "네 신화도 이것으로 끝이다 !" 내 여동생이라는 애가 어둠의 세계에서 전설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건 나도 안다. 내가 아는 것만도 여동생한테 얻어터진 불량배가 100명을 넘었으니 당연하기야 하다. 하지만 신화의 경지까지? 그렇게까지 이 녀석이 악명이 높았나. '하지만 이 녀석이 주먹을 휘두른 적은 없는데?' 내 여동생이라는 애는, 그 잘난 주먹을 꼭 나를 패는 데만 썼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다른 불량배들을 주먹으로 때리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불량배들 사이에 신화적 명성이 퍼진 거냐고? 전에도 봤지만, 그거야 뭐. "저 계집애를 잡아 !" 우르르 몰려오는 불량배들. 경찰도 안 부르고 구경만 하던 주위의 인간들이 일제히 기대에 찬 눈길을 보냈다. 아니, 이 인간들. 지금 무슨 영화 찍는 줄 아나. 아무리 저 녀석이 성질이 못되기는 했어도, 저 녀석 역시 연약한 여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식칼의 광채가 번뜩일 때마다 그런 의견을 수정하고 싶어지지만. 오로지 한바탕의 활극만을 기대하는 이 사람들 앞에서, 과연 미인이는 무술솜씨를 선보일 것인가.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꺄아악 !" "누가 도와줘요 !" "무서워요 !" 당황하는 주위 사람들. 하긴 '신화적인 존재'라고 하니까 무슨 무술의 고수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본데, 내 여동생은 그런 식으로 불량배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전형적인 여자아이의 반응. 즉 도와달라고 외치며 전속력으로 뛰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나 역시 여동생의 뒤를 따라 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반응은. "에이. 잔뜩 기대했었는데." "주먹 좀 쓰면 안 되나? 전설의 불량배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만." "겉만 번드르르한 계집애였어." "경찰에 신고할까? 저 계집애 잡아가라고." 당신들, 대체 인간 맞냐. 저런 부도덕한 인간들이 어른이라고 설치니까, 우리 사회가 그만큼 혼탁해지는 거야. 그러나 내 여동생은 그런 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았으니. "꺄아악 ! 끼아악 ! 살려줘요 !" 열심히 외치면서 도망가고 있다. 그 뒤를 쫓는 나. 그리고 그 뒤에 바짝 따라오는 불량배들. 그런데 이건 한 두 번 경험한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웃고 있어?' 전혀 겁먹고 달아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물론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일순간이고, 곧 머릿속에 겁밖에 없는 사람의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이 녀석의 이런 얼굴을 내가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 거냐.' 큰길로 달려가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 여동생. 그 방향전환이 너무 신속한 나머지, 불량배들은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퍽. 불량배 두 명이, 어디선가 나타난 전봇대에 부딪쳐서 나동그라졌다. 매일 보던 패턴이라 이젠 신기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어떻게, 똑같은 수법에 매일 당하면서도 질리지도 않고 또 당하냐. 이제는 미인이가 상당한 고수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도 되었는데, 그들은 머리가 나쁜 건지 학습능력이 없는 건지, 그게 아니면 학습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는 건지 계속 걸린다. 또 걸린다. 지겹게 걸린다. 누가 이 바보들을 좀 가르쳐줘요.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으악 !" 오늘도 역시 경찰차에 치여 나동그라질 뿐이다. 저건 경찰차가 그들에게 와서 들이받은 게 아니라, 멀쩡히 서 있는 경찰차에 그들이 달려와서 부딪친 것이니 공권력 남용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하다. 더 신기한 것은, 그 경찰들이 여동생을 못 봤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경찰이 여동생을 데려간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원래 기적이라는 건, 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하지 않은가. 잠시 후. "끄으으. 분하다." 마지막 불량배가 쓰러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마지막이라서 특별대우를 해줬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비참하게도 쓰레기차에 처박혔다. 불쌍하지만, 그래도 손을 내밀어줄 수는 없다. 하필이면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다니. 더러워서 손을 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지난번에 분뇨차에 처박힌 불량배보다는 낫지만.' 사방에는 격전 끝에 쓰러진 불량배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들을 뒤에 놔두고 유유히 나와 함께 학교로 걸어가는 여동생을 보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망하던 인간들이 지금은 입을 떡 벌리고 있다. 그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은, 턱이 빠졌기 때문이다. 입을 다물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조금은 그들의 부도덕한 태도에도 응징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러나. "저 불량배들, 죽었냐?" 너무 처참한 광경이라,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대답이긴 하지만. "시신은 아냐. 다들 살아 있어." 글쎄.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불량배를 보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다. 뭐 다른 불량배들도 별로 다를 게 없지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렇게 수가 많으면서, 그렇게 몽둥이를 열심히 휘두르면서, 어떻게 한 방도 못 맞히는 거냐?' 물론 그들이 성공했다면 여동생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니 좀 곤란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일방적인 패배가 아닌가. 게다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야. 차라리 그냥 때리는 게 나았겠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게, 차라리 여동생이 그들을 마구 팼으면 이렇게까지 비참한 결말은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팔이 부러진 녀석이나 다리가 부러진 녀석, 심지어는 이마가 깨진 녀석도 있지만 이건 차라리 약과다. 어떤 불량배는 옷이 홀랑 벗겨진 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줄곧 여동생을 쫓아다닌 나도, 어째서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대체 저건 어떻게 한 거냐?" 도대체 어떻게 하면, 멀쩡한 사람, 아니 이 경우는 멀쩡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람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벌거벗길 수 있는 거냐. 그것도 자기 손을 하나도 쓰지 않고 말이다. 분명히 내가 옆에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여동생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렇다고 저기서 침을 좍좍 흘리는, 저 음란한 아주머니들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안 보는 척 하면서 보고 있어.' 이 아주머니들은, 안 보는 척 점잔을 빼면서, 곁눈질로 열심히 그 불량배를 훔쳐보고 있었다. 물론 남자 역시, 여자가 벌거벗고 있으면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그 불량배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뚝. 부러졌다. 아래로 추락하는 불량배. 일단 나뭇가지가 그리 높은 곳에 위치하지 않았으니, 일단 죽지는 않을 것이다. 부디 살아남거라. 그리고 내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는 좀 엉거주춤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땅에 무사히 착지했고 주위에 흩어진 자기 옷을 주워서 도망친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안 보는 척하면서, 여전히 본다. 계속해서 본다. 좀 참으세요. 나는 마음 속으로 한탄을 하고, 여동생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고개를 빙 돌리고, 아예 몸까지 돌려서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봐. 네가 한 짓이잖아. 그걸 외면하면 어떻게 하라고." 물론 이 녀석이 아무리 말괄량이라고 해도, 어쨌든 이 녀석도 처녀는 처녀다. 처녀가 저런 자극이 심한 풍경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 그러나 문제는, 저 불량배를 저 지경에 빠뜨린 것이 바로 미인이라는 점이다. 태연하게 남자 옷을 벗길 때는 언제고. "그래. 안 보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남자 옷을 손도 안 대고 벗긴 거냐?" 그 점이 매우 궁금하다. 뭐? 진희한테 써먹으려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냐고? 절대 아니다 ! 물론 문희에게 써먹을 가능성은 있지만. 뭐? 내가 문희를 좋아해서 그런 거냐고? 미쳤냐 ! 어차피 문희의 알몸은 어릴 때부터 자주 봐서, 그런 거 봐도 이젠 느낌도 안 온다. 문희도 내 알몸은 많이 봐서, 이젠 서로 그런 쪽에는 무감각해진 상태다. 뭐? 그럼 내가 이미 문희하고 선을 넘은 게 아니냐고? 절대 아니다 ! 우린 아직 키스도 안 했단 말야 ! "오빠. 자신의 음흉함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미인이.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데 너, 저 녀석을 어떻게 벗긴 거니?" 포기를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미인이. 나는 계속적으로 추궁했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저 사람이 알아서 벗은 건데." 그러나 그걸 유도한 것은 명백히 너 아니냐. 나는 계속해서 여동생을 추궁했다. 물론 진희를 벗기려는 술책도 아니고, 문희의 몸이 탐나는 것도 아니다 ! 난 건전한 고등학생으로서, 그런 범죄에는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다 ! 다만 여동생의 그 수법이 궁금해서 그러는 것뿐이다 ! 결국 여동생도 포기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빠한테 보여줄게. 아마 오빠가 직접 당하면 이해가 될 거야." 땅. 심장이 얼어붙었다. "어? 왜 그래? 오빠. 아까는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살금살금 다가오는 미인이. 뒤로 물러서는 나. 이거 잘못 건드렸다. 까딱하다가는, 등교하는 여학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대망신을 당할 위기에 몰린 것이다. 조금 전에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그 불량배의 모습이 나와 겹쳐지고 있었다. 공포다. 이건 정말 공포다. 공포의 여동생을 함부로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인가. 벌벌 떠는 나를 바라보며, 여동생이 피식 웃는다. "그만둘게. 역시 오빠를 여기서 벗기는 건 좀 불쌍하니까." 휴우. 살았다. 여동생한테 감사해야 하다니. 이런 비참한 일이. 여동생은 다시금 휘파람을 불면서 학교로 걸어갔다. 주위에 쓰러진 불량배들이, 그런 그녀를 슬금슬금 피한다. 이제야 여동생의 무서움을 알았다는 건가. 상당히 깨달음이 늦었다. 그 덕에 부상자가 되고 만 불량배들이, 처량하게 골목길 구석으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데 왜 주먹을 안 쓰니? 그쪽이 더 빠를 텐데." 사실 조금 전처럼, 피해 다니는 방법은 손이 많이 가는 수법이다. 여동생의 실력이라면 주먹 한 방으로 상황이 정리될 텐데, 왜 그녀는 굳이 귀찮게 그런 방법을 동원했을까. 물론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은. "왜 나만 때리고, 저 불량배들은 안 때리냐?" 이런 질문이지만, 그런 거 묻다가는 여동생한테 맞는다. 아니, 잘못하면 벌거벗겨져서 시청광장 앞에 매달릴지도 모른다. 이 녀석의 조금 전의 행각을 보면, 그것도 결코 불가능은 아니다. 그러나 주먹을 안 쓰는 이유를 묻는 정도라면, 여동생도 꼬투리를 잡기 힘들다. 그리고. "난 법적으로 꼬투리 잡히고 싶지 않은 걸." 꼬투리라. 확실히 그럴듯한 이유이기는 하다. 요즘 불량배들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고, 이걸로 사진을 찍는 건 간단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 녀석이 언제 법을 무서워했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게다가 그 대답에는 한 가지 맹점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그럼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폭력을 휘두르겠네?" 법이 무서워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법에 저촉되지 않을 경우 마구 폭력을 휘두를 게 아닌가. 이 녀석은 능히 그러고도 남는다. 아니, 사실은 법에 '살인자는 사형'이라고 적혀 있어도,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무죄판결을 받을 녀석이다. 아니, 아예 고소당하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그에 대한 여동생의 대답은. 대답은. 대답이란 것은. "폭력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기다. 협잡이다. 엉터리다. 억지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새 학교 앞이다. 그러니까 한참동안, 나는 의식을 잃은 채로 그냥 걷기만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 무시하고, 문제는 그게 아냐 !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정도가 있지, 대체 네가 폭력을 싫어한다는 게. "말이 되냐 !"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매일 얻어맞는 내 입장에서는, 그런 대답을 절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귀찮아서 그랬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하지만 저 말은 여동생의 평소의 행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폭력을 싫어한다는 애의 식칼을 피해 화장실로 도망쳐야 하는 입장에서, 저 말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녀석이니까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렇지. "네가 폭력을 싫어한다는 건......." 분명히 말을 꺼내려고 했다. 적당한 비유를 생각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여동생. 내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폭력보다는 이런 게 더 좋아."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여동생은 강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는 여동생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 이게 뭐냐. 어떻게 된 거냐.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불량배들에게 사용한 수법을 나에게도 쓴 게 분명했다.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주위 여학생들은 폭발적으로 괴성을 질렀다. 뭐냐. 이 녀석들. 남매끼리 끌어안는 거 처음 보냐. 나는 여동생을 끌어안은 팔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꺅. 대낮에 대담해." "아냐. 아냐. 친오빠하고 여동생 사이래." "어머나. 그럼 시스터 콤플렉스(Sister complex : 여동생에게.... 이하 생략)?" "저런 경우가 정말로 있긴 있네." "하지만 우리 오빠보다는 백 배 나은 걸. 우리 오빠는 언제나 나만 구박하는데." "하긴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낫지." "여동생도 예쁘고." "그런데 학교 앞에서 저럴 정도였니?" 물론 그 순간은 3초도 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지기에 충분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세상에. 이런 기습을 당할 줄이야. 그것도 대낮에 ! 학교 앞에서 ! 학생들이 등교하는 바로 그 길에서 ! 얼어붙어 버린 나의 품에서 슬쩍 벗어난 여동생은, 미소지으며 나에게 말한다. "언젠가는 진희하고 이렇게 할 수 있기를 빌게. 오빠." 아. 당했다.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마치 정조를 빼앗긴 느낌이다. 이런 건 진희하고 가장 먼저 하고 싶었는데. 게다가 주위에 나타난 운동부의 선배들의 표정은. "그랬냐. 그랬단 말이지." "좀 있다가 두고 보자." "이런 범죄행위를 자행하는 오라버니였다니." 이, 이 인간들이. 저 인간들은 어차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니, 내가 뭐라고 변명해봐야 소용이 없다. 저런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 여자가 남자를 껴안는다는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을 테니까. 선배들이 이를 갈면서 교문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여동생의 행동에 기습을 당한 타격이 너무 컸던 탓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여동생은 내가 했던 질문. '어떻게 그 남자를 벗겼냐.'에 대한 답을 해준 셈이기는 하지만. '날 실험용으로 쓰지 말아 달라고.' 이건 폭력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폭력이 아니지만, 명백히 폭력이다. 그것도 법의 맹점을 이용한 폭력이다. 왜 폭력이냐고? 이런 광경을 선배들이 봤으니, 방과후에 축구부에 가면 무슨 꼴을 당하겠냐. 안 그래도 머리 속이 텅 비었다고 의심되는 그 인간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니. 정신이 아득하다. 거기에 추가되는 사항은. "정말 사이가 좋네. 나도 오빠가 있었으면." 어느새 나타난 진희의 평가였다. 진희야. 이게 사이좋은 걸로 보이는 거냐. 역시 내 여동생은 순진한 부잣집 아가씨 하나쯤은 쉽게 속일 수 있는 녀석임이 증명된 셈이다. 이게 어디가 남매간의 우애냐. 여기에 나를 더욱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음. 다음에는 사이좋은 오누이편으로 문구와 미인이를 등장시켜 볼까? 안 그래도 미인이는 화제의 인물이니, 그렇게 하면 신문도 더욱 잘 나갈 테고." 문희 너, 그런 허위기사는 쓰지 마. 절대 쓰지 마. 하지만 저 녀석은 아무래도 꼭 그런 기사를 만들고야 말 것 같다. 네가 그러고도 내 소꿉친구냐. 그러고도 신문기자냐. 양심을 속이지 마라. 나는 당장 문희에게 항의하려고 했지만. "정말 아까워. 오빠 사랑이 과도하지만 않았어도 완벽한 여자인데." 오빠 사랑이라니. 풍남이 너 지금 나를 놀리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러나 역시 백미는 지우였다. 만사에 도움이 안 되는 이 녀석이,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도울 리가 없다. 그는. "이거, 필살 오니짱 어택이네." 뭐, 뭣이라고 ! 지우 이 녀석, 신성한 학교 앞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마구 뒤섞은, 국적 불명의 말을 꺼내다니. 그런 말을 고등학생이 막 써도 되는 거냐 ! 게다가 그 말을 해석해보면, '오니짱'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여동생 캐릭터가 오빠 캐릭터에게 쓰는 말이다. 즉 '오빠'라는 뜻이다. 상당히 귀여움을 담아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물론 '어택'은 영어로 표기하면 attack으로, '공격'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필살 오니짱 어택'이란 것은, 너무나 귀여운 여동생의 공격으로 인해 오빠가 그 귀여움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론 다른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만, 일단 지우 녀석이 나에게 한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런데 ! "뭐가 필살의 오니짱 어택이야 !" 그건 귀여움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아니라, 엉뚱함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라고 ! 게다가 저 녀석의 어디가 귀엽다는 거냐 ! 뭐 예쁘기는 하지만, 나이 어린 소녀를 연상시키는 구석은 별로 없다. 물론 찾아보면 있기는 하지만, 조금 전의 모습은 어린아이에 어울리는 순수함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 녀석에게 있는 것은 단지, 교활함과 사악함뿐이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 나는 지우 녀석에게 정의의 응징을 가했다. 아니, 가하려고 했다. 교문 앞에 누가 있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뭔가 내 마음 속에서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 !" 그러나 나에게는 마음대로 사람을 때릴 권리도 없었다. 그런 권리는 여동생 같은 거물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나에겐 그런 게 없었다. 그게 바로 나 같은 평범한 서민과, 여동생같은 귀족, 왕족, 여왕의 차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구야. 폭력은 안 돼." 꼭 이럴 때 나타나십니까. 꼬마 선생님. "부럽다." 카악 ! 뭐가 부럽다는 거냐 ! 지우 녀석은 아침부터. 그러니까 미인이가 날 껴안은 모습을 본 후부터 계속 이 꼴이다. 완전히 맛이 갔다고 해야 하나. 정신차리라고 아무리 흔들어봐야 소용없다. 뺨을 때리면서 소리쳐봐도 반응이 없다. 녀석이 하는 말은 오로지. "아. 정말 부럽다." 그 말뿐이었다. 하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안겼던 남자를 보고 부러워하는 건 인지상정이겠지만, 이 녀석은 앞뒤상황을 과연 제대로 인식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미인이 녀석이 왜 나를 껴안았는지, 그로 인해 내가 이제부터 무슨 악몽을 겪을지는 생각하고 있는 건가? 물론 이 녀석은 그런 내면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단지 내가 미인이에게 포옹 당했다는 점만을 중점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덕분에 난 이제 선배들한테 맞아 죽게 생겼는데, 그래도 부러운 거냐." "미인이를 안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불쌍한 녀석. 완전히 홀렸구나. 하긴 이 녀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미인이에게 홀려 있었다. 잘못하면 죽을 때까지 이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명복이라도 빌어 줘야 하나. 아니지. 아니지. 남 걱정 해줄 때가 아니지. 지금 급한 건 내 문제니까. '껴안으면 어떻게 해. 껴안으면.' 어쨌든 여동생은 우리 학교 제일의 미인으로 공인된 녀석이고, 그에 따라 나는 평소에도 수많은 선배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평소에도 축구부에 가기만 하면. "야. 여동생은 잘 있냐." "왜 여동생은 안 데리고 왔냐." "당장 데려오지 못하겠나." 이런 소리를 듣는 판국이다. 그런 판에 축구부 선배들이 나와 여동생의 포옹장면을 봐 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교실에서도. "이상형이 혹시 여동생?" "그렇게 예쁜 여동생을 독점하다니, 나쁜 오빠네." "어서 오빠의 마수에서 여동생을 구해내자." "사악한 오빠는 금단의 사랑을 그만두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옳소." "아가씨. 그런 오빠는 내버려두고, 내 품에." 이렇게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심각한 판이다. 내가 원해서 포옹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냐. 여동생을 몰아붙인 대가가 이렇게 크다니. 게다가 더 억울한 것은, 여동생에게는 사람들이 이렇다할 비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실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내가' 여동생을 껴안은 꼴이 되었으니까. 덕분에 비난받는 건 나밖에 없다. 나쁜 녀석. '국회의원 같은 녀석 같으니.' 여동생이 나중에 정치가가 되면, 정말 볼만할 것이다. 그 사악함, 교활함, 비열함. 게다가 두꺼운 얼굴. 희대의 정치꾼으로서 모자랄 게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주위의 웅성거림은 그치지 않는다. 게다가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방과후에 축구부 부실에 가면. "범죄의 길로 들어서다니, 나쁜 녀석." "어둠의 길로 빠져든 후배를 갱생시켜주마." "못된 강아지는 맞아야 말을 듣는 법." "어떻게 교육을 시켜줄까." 축구부 선배들의 하는 짓거리로 봐서, 이런 반응을 보일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여동생을 노리는 선배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시달릴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우아악 ! '으. 이건 폭력이야.' 그러나 그런 식의 폭력은 여동생만 구사하는 게 아니었으니. "아. 내일 시험이야." 난데없는 담임선생님의 기습적인 발언으로, 우리 반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절규하는 학생들, 통곡하는 학생들, 울부짖는 학생들의 모습이 내 눈에 가득 찬다. 어떤 학생은 쓰러지고, 어떤 학생은 분노했다. 시험이라니. 악의 근원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시험이라니 ! 그것도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시험이라니 !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서 선생님에게 항의했다. 아. 반장이구나. "선생님. 내일이 시험이라면 너무 늦게 알려주신 게 아닌가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는 있지만, 분노로 인해 반장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사실 하룻밤만에 시험준비를 하는 것은 보통 학생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니,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잊어버렸어." 이럴 줄 알았다. 모두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를 간다. 아. 물론 내 여동생은 제외한다. 그런데 말야. "선생님.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험이라니 좀 빠른 게 아닌가요?" 역시 우리의 반장. 지당하신 말씀이다. 모든 학생들이 동의의 눈길을 보내기야 했지만. "교장선생님이 어제 말씀하시길, 입학기념으로 학생들에게 뭔가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일 시험을 보기로 결정되었어. 자신의 학력을 평가하고, 앞으로 어느 부분을 보완해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서래." "그런 기념은 필요 없어요 !" 기념하려면 다른 걸로 합시다. 그런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다른 학생들의 외침이 교실을 뒤흔들었으니까. 이렇게 말이다. "기념하려면 차라리 자율학습 빼줘요." "아니, 하루 휴일을 줘요." "하룻밤에 어떻게 시험공부를 다 해요." "너무해요." "오늘밤에 여자친구와 영화 보려고 했는데." 마지막 말은 일단 잊어버리고. 어쨌든 학생들은 어떻게든 시험을 피해보려고 아우성을 쳤지만, 오직 내 여동생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선생님을 바라볼 뿐이다. 하긴 당황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머리통에 뭐가 들어있는 거야. 저 녀석.' 이번에도 자기 실력을 과시할 수 있어서 웃는 거냐. 그래. 너 공부 잘 해서 좋겠다. 머리 좋아서 좋겠어. 전교 1등이라 좋겠다고. 난 밤을 새면서 공부해도 전교 1등은커녕 10등 안에도 들 수가 없는데, 저 녀석은 전교 1등이 간식거리라도 되는지, 손쉽게 그 자리를 차지한다. 저 녀석은 언제나 그랬다. 오죽하면. "이 학생은 장래가 매우 기대되는 모범생으로서." 이런 식으로 표창 받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모범생? 내 여동생이 모범생? '모범생 좋아하네.' 공부만 잘하면 다 모범생이냐. 이 동네 전역의 불량배들의 타도대상이자, 공포의 존재인 내 여동생의 어디가 모범생인지 모르겠다. 모범생이라는 것은, 타인이 본받을만한 인품과 성적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여동생의 변명은 언제나 이렇다. 아침에도 그랬지만. "난 상대를 직접 주먹으로 때리지 않아." 그럼 난 뭐냐? 난 상대도 아니라는 거냐?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를 때리는 주제에, 뭐가 안 때린다는 거냐. 나는 안으로, 반 학생들은 밖으로 불평을 토해내는 가운데, 선생님은 자기 맘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자자. 이제 잡담은 그만." 잠시 웅성거리던 반의 급우들도, 지쳤는지 입을 다물었다. 모두들 체념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긴 학생이 반대한다고 시험 안 치르는 학교가 어디 있나. 선생님은 모두를 돌아보며 평이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내일 시험범위는 오늘까지 배운 범위 내에서 나오니까, 모두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래요. 그리고 연 미인양." "네?" 뭐냐? 대체 무슨 일로 내 여동생을 부르는 거냐? 혹시 오늘 아침에 벌어진 난투극의 책임을 묻는 건가? 그게 아니면 얼마 전에 체육관에서 벌어진 선배들의 광란에 대해? 그것도 아니면 뭐지? 온갖 나쁜 상상만을 일삼는 것도 별로 좋은 게 아니지만, 여동생의 행각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특히 오늘 아침의 사건은, 선생님이 아시면 크게 놀라실 일이니까. '그러니까, 벗기는 건 너무 심했다고.' 선생님이 혹시 그 모습을 보신 걸까. 물론 어른이니까 남자 알몸 정도야 많이 보셨겠지만. 아, 아직 결혼하지 않으셨으니 아니구나. 어쨌든 그 일에 대해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것이라면, 일이 상당히 꼬이게 될 것이다. 여동생이 직접적으로 주먹을 휘두른 건 아니지만, 다친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중학교 때 언제나 전교 1등이었다지? 첫 시험에서 좋은 성적, 기대할게." 그, 그거였습니까.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 그리고 여동생의 발랄한 대답. "네. 노력할게요." 수업은 끝났고, 나는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도저히 오늘만큼은 축구부에 갈 엄두가 나지 않고, 내일이 시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벼락치기 밤샘은 아니다. 일단 나도 평소에 공부는 어느 정도 했으니까. 사실은. "여동생은 공부 잘하는데, 넌 그게 뭐니?"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지만. 물론 아무리 공부해도 그것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누구처럼 전교 1등을 하는 영예는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여동생이 전교 1등을 하는데 오빠의 성적이 나빠 봐라. 안 그래도 시험 때만 되면 구박받는데, 그게 더 심해질 거다. 특히 축구부에 계속 남아있고 싶으면, 무조건 전교 50등 이내에는 들어가야 한다. 말도 안 되지만, 그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여동생이 공부를 너무 잘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태다. 물론 이 문제는 여동생만의 잘못은 아니고, 우리 사회의 학력중시 풍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생이 축구선수든 야구선수든 미술가든 상관없다. 우리 사회는 무조건 공부'만' 잘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회의 압력에 거부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러니 도리 있나. 공부해야지.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한 명씩. 한 명씩. 첫 번째 인사는. "그럼 문구야, 열심히 해." 고마워. 진희야. 하지만 내가 그녀의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걱정 마십시오. 진희양. 열심히 하겠습니다." 풍남이 이 녀석, 너한테 한 말이 아니잖아. 내가 진희 앞에서 말을 잘 못한다는 걸 알고, 고의로 남의 인사를 자기가 받아간다. 풍남이에게 항의하려고 해도, 이 녀석은 어느새 도망갔다. 나는 화풀이할 장소를 찾다가 포기하고, 내 여동생의 근황을 살폈다. 이 녀석은 과연? "자. 이번에 전교 1등이 되면, 인터뷰를 요청할 테니까 각오하고 있으라고." 문희야. 그렇게 장담할 거 없어. 저 녀석이 아무리 대단하지만, 입학하자마자 그럴 리가 있겠냐. 게다가 저 녀석도 요즘 공부는 많이 못했다고. 그런 내 의견을 뒷받침하려는 듯이, 여동생이 말한다. "음. 글쎄. 갑자기 나온 거라서 좀." 가만. 저 말은 오히려 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발언인데?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해놓고, 그 뒤에 시험을 망친 역사가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번에도? 물론 저 녀석도 가끔씩은 전교 1등을 놓치긴 하지만, 전교순위 10등 밖으로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완벽한 여자라는 칭송을 듣는 것이기도 하고. 같은 쌍둥이인데, 왜 저 녀석만 저렇게 재능이 있는 거냐. 나는 하늘을 원망했지만, 사실 그럴 여유는 없었다. 빨리 집으로 가서 공부해야지. 나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서 어깨에 둘러매고, 교실 문밖을 바라보았다. 재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다. 그러나 내가 교실에서 나가기도 전에. "이봐." "네?" 내가 도망가기도 전에, 축구부 선배 한 사람이 먼저 나타났다. 정말 빨리도 온다. 누구 얼굴을 보려고 온 건지는 너무 뻔하지만. 내 예상대로 그는 내 여동생을 보며 씩 웃는다. 자기 나름대로는 착하고 순수한 소년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그의 실체를 다 아는 입장에서는 징그러운 아저씨로 보인다. 뭐야. 내 속을 읽은 건가. 갑자기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선배. 이거 왠지 불안한데. "빨리 축구부에 가서, 연습해야지?" 하지만 오늘은 안 되는데요. "저, 내일 시험인데요." 그렇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일이 시험인 내가, 어떻게 축구부에 가겠는가. 당장 집에 가서 공부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이니 말이다. 그러나 선배에게는 그런 내 사정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 "허어. 꾸준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전에서 기량이 늘지 않는 법." 이거 큰일났다. 분명히 내일 시험이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은 척도 안 한다. 선배의 그 느끼한 말투를 들을 때부터 알았어야 하는데, 아니다. 이 사람들은 원래 이 모양이니, 좀 전에 무슨 짓을 해서든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어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지만. "자. 그러니까 어서 축구부실로 가야지?" 자기 딴에는 웃느라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표정이다. 어쨌든 선배는 큼지막한 손으로 내 팔을 잡고, 꽉 움켜쥐었다. 으악 ! 이건 완전히 납치잖아 !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지만, 말이 안 통한다. "시험공부는 언제 하고요?" "그런 건 내일 해도 돼." "그러니까, 내일이 시험이라니까요." "근성으로 메워." "그건 근성으로는 좀." "말이 많다. 선배의 명령이다." 그러는 동안, 지우 녀석은 어느새 가방을 들고 슬금슬금 혼자서 빠져나갔다. 의리 없는 녀석. 친구의 위기를 못 본 척하고 달아나다니. 이제 내가 내일 시험을 망치지 않을 단 하나의 방법은. 비록 후유증은 크지만. "이거 놔요."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선배를 밀어붙였다. 아니, 내일이 시험인데 지금 장난하나. 난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한단 말이야 ! 선배가 내 팔을 놓치고 뒤로 나가떨어진다. 그 틈에 필사적으로 교실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지만. "하하하. 어딜 가려고. 연습해야지." 어느새 교실 문 앞에는 더 많은 선배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내가 달아날 길을 완전히 막아놓은 상태였다. 어디로든 도망가려고 하지만, 그들의 포위망은 완벽했다. 미인이라면 몰라도, 나로서는 이 사람들을 모두 물리칠 힘이 없다. 그래서 결과는. "하하하. 잡았다." 거구의 선배 두 사람이 내 양어깨를 붙잡았고, 나는 꼼짝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그들은 내 사정 따위는 개가 짖는 소리로 여길 뿐이다. 버둥거리는 나를 보며 기고만장해하는 선배들의 외침. "자. 전국대회를 향해서 발진 !" 내가 무슨 전투기냐. 그렇게 나는 강제로 선배들에게 끌려갔다. 미인아. 도와줘. 하지만 내 여동생은 야속하게도 손수건을 꺼내더니 흔든다. 야. 야. 야 ! "잘 다녀와. 오빠. 집에서 기다릴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내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나에게 드러내놓고 여동생과의 포옹 사건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집에 보내달라고 해도,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인간들아. 난 내일 시험이란 말이다 ! 나는 필사적으로 오늘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지만. "안 돼 ! 꾸준히 연습하지 못하면, 3년 내내 후보선수가 되는 수도 있어 !" 말은 잘 한다. 하지만 축구부실에 있는 1학년생은 나 밖에 없다. 그렇게 연습이 중요하다면, 왜 다른 학생들은 안 보이는 거냐. 나는 강제로 운동장에 끌려나왔고,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귀가하는 1학년생들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일이 시험인데 뭐 하는 짓이냐는 거겠지. 하지만. "너무 느리잖아. 그래가지고 어떻게 축구선수로 활약하겠나." 누가 도와줘. 나는 도망갈 틈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가방도 없이 도망가서 뭘 어쩌겠나. 가방이 없으면 지갑이 없고, 지갑이 없으면 돈이 없고, 돈이 없으면 지하철을 탈 수가 없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운동장을 돌면서 학생들을 보니, 귀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새로 입부한 축구부 1학년생들의 모습도 있었다. 왜 저 녀석들은 그냥 두는 거지? "이봐요. 선배." "왜?" 내 옆에서 열심히 뛰는 선배 중 하나가, 나를 쳐다본다. 나를 당장 죽여버리고 싶다는 얼굴이다. 이 인간들이 정말. 하지만 일단은 선배다. 난 미인이처럼 이런 선배들의 턱을 부숴 버릴 배짱이라고는 전혀 없으니, 일단 공손하게 묻는다. "다른 1학년생들은 왜 안 보이지요?" 여유있게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걸어가는 1학년 축구부원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나는 물었다. 어디 뭐라고 하나 보자. 그러나 선배라는 작자의 말은. "아. 내일 시험 본다고 해서 집에 보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격분했다. 다른 녀석들은 다 집에 보내주면서, 왜 나는 안 되는 거냐.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왜 나만. 하지만 선배들은 무정했다. 그들은 쓰러진 나를 어거지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는. "근성도 없나. 끝까지 돌지 않으면 언제 슈팅 연습을 하나." "으악." 그리고 나는 다시 달려야 했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달리기가 끝났다.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나 내가 미처 몸을 편히 눕히기도 전에, 선배들은 나를 붙잡고 끌고 간다. 축구골대 앞에 내동댕이쳐지는 나. 그리고. "슈팅 연습 시작 !" 내 앞에 공이 날아온다. 공이 나를 맞춘다. 나가떨어진다. 축구부 선배들이 발로 나를 찬다. 간신히 일어난다. 아니, 이건 발이 아니라 공이구나. 억지로 공을 찬다. 헛발질이다. 선배들이 비웃는다. 다시 찬다. 골대 안으로 공이 들어간다. 하지만 선배들이 공을 쳐낸다. "자. 그것도 골인 못 시키나. 페널티킥은 보통 골키퍼가 막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 똑바로 하지 못할까." 골대 앞에 선배들이 다섯 명이나 포진하고서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공이 다시 날아온다. 또 맞는다. 쓰러진다. 강제로 일어난다. 또 찬다. 골대 밖으로 벗어난다. 다시 공을 찬다. 빗나간다. 또 다시 공을 찬다. 목이 타는 것 같다. 벌써 몇 번째로 공을 찼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쓰러진다. 일어난다. 찬다. 쓰러진다. 이것만 반복하는 느낌이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자. 이것으로 슈팅연습은 종료." 털썩. 슈팅연습이 끝났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거의 탈진해서 운동장에 쓰러졌다. 죽을 것 같아.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하지만. "자. 이번에는 드리블 연습." 지쳐 쓰러진 내 꼴도 안 보는 거냐.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 왜 나만 굴리는 거냐. 다른 녀석들은 다 집에 보내놓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도 집에 보내줘요." "안 돼. 연습해야지." "내일 시험이란 말이에요. 시험 !" "연습은 꾸준히 해야 해. 시험은 평소에 공부한 걸로 보면 그만이고." "그럼 왜 다른 1학년생들은 다 집에 보낸 겁니까 !" 설마, 내 여동생과 나의 포옹으로 인한 악감정인 겁니까.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야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하지만 선배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이. "그들은 후보선수이고, 너는 주전선수로 키워야 하니까 그렇지."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아니 그럼, 이번 1학년생은 모두 후보선수란 말입니까. 게다가 내가 주전인 것도 아니다. 나도 아직 후보에 불과하다. 한 가지 추가한다면, 축구부에 들어온 녀석들 중에는 중학교에서 최우수선수로 뽑힌 인간들도 있다. 그런 녀석들까지 모두 후보라는 거냐. 내가 언제부터 중학 최우수선수가 된 거지. 전국대회에서. "자. 공을 몰고 여기를 지나간다. 실시 !" 선배들이 무더기로 서서 버티는 곳을 지나가란다. 지칠 대로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인간에게 말이다. 어쨌든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내가 공을 몰고 가는 게 아니라 공이 나를 몰고 간다. 몽롱한 상태에서 뛴다. 선배들의 태클이 날아든다. 나는 몇 번이고 넘어졌지만, 필사적으로 달린 끝에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자. 다시 한 번 드리블한다. 실시 !" 반대편으로 다시 뛰란다. 거의 무의식중에 달린다. 이번엔 공이 나를 몰고 가는 것도 아니고, 공에게 끌려간다. 그저 공이 앞에 있으니까, 달리는 것뿐이다. 다시금 선배들의 태클이 날아든다. 그걸로 내 다리가 부러진다면 법원에 고소라도 하겠지만, 얄밉게도 그들은 급소만 피해서 나를 걷어찬다. 내가 안 다쳐야 계속해서 골탕먹일 수 있다는 속셈일까. 그렇게 다시 운동장 끝에 도착했을 무렵. "다시 한 번 드리블한다. 실시 !" 날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나는 또다시 운동장 반대편으로 달려갔지만, 이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비틀거린다. 헐떡거린다. 몇 번이고 나뒹굴며,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부를 잘못 들었어.' 그리고 결국, 얼마 후에 나는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냉정한 선배의 말이 식어 가는 내 몸에 던져진다. "칫. 체력이 너무 약해. 이래가지고는 주전으로 못 써먹겠어." 당신이 이 짓 해봐. 결국 몇 차례나 쓰러지고, 억지로 일어나고, 그리고 다시 쓰러지는 것을 반복한 후에야, 선배들은 나를 놓아주었다. 이미 해는 지고,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내일이 시험인데. 내일이 시험인데. 내일이 시험인데 ! 이제야 집에 보내주면 어쩌라는 거야 ! 항의하려고 해도 연습을 더 시킬까봐 입을 열 수가 없다. 게다가 선배라는 작자들이 하는 말은. "너, 체력이 너무 약해. 연습을 더 해야 할거야." 말이나 안 하면 밉지나 않지. 나는 억지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사실은 축구공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힘이 없다. 비틀비틀. 이래서는 아무래도 내일 시험은 망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축구부를 자동으로 그만둬야 할 것이다. 저 선배들을 안 보는 건 좋지만, 장래의 희망이 이렇게 꺾이다니. 너무 허무하다. "아냐.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 아무리 사악한 선배들의 괴롭힘이 있다 해도, 여동생의 어둠의 힘에 시달리더라도, 그건 절대 포기할 수 없어 ! 진희와 사귀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내 꿈이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건데, 그걸 벌써 포기하다니. 나는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맹세했다. "난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될 거야 !" 한 번 외치고 나니 - 그리 큰 소리도 아니고, 모기소리 정도였지만 - 정신이 없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교문으로 기어간다. 겉보기에는 걸어가는 것이지만, 사실상 기어가는 거다. 이러다가는 집에 가기 전에 탈진해서 쓰러지겠다. 흐느적흐느적. 그렇게 교문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문구야. 너 이제 집에 가니?"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은데, 누구더라? 모르겠다. 교문이 눈앞이다. 조금만 더 가서 버스에라도 타면, 일단 지하철역까지는 어떻게든. 다시 흐느적흐느적. "문구야 !" 누구세요. 어기적어기적 고개를 돌려본다. 대체 이 시간에 학교에 남아있는 여자가 누구야. 목소리는 곱지만, 누구인지 알아볼 기력은 없다. 비틀거리면서도 어쨌든 고개는 든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에?" 내 반응이 이랬던 것은, 목소리에서 느껴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두 사람 모두 내가 익히 아는 분들이다. 한 분은 미인이가 있는 항공우주부를 맡은, 동시에 1학년 물리선생님도 맡고 계신 꼬마선생님이시고, 또 한 분은 오늘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아, 안녕하세요?" 담임이 왜 이제 퇴근하는 거지? 피로에 젖어 둔해진 머리로는, 왜 선생님들이 이제야 퇴근하는지 생각해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 이거 큰일이다. 이래가지고 내일 시험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인사하자마자 다시 비틀거린다. 또다시 흐느적흐느적. 그 꼴을 본 선생님들은 갑자기. "문구야. 괜찮아?" 나에게 달려오는 꼬마선생님. 비틀거리는 나를 억지로 부축하지만, 어린애가 고등학생을 떠받치는 것은 예시당초 무리다. 선생님의 다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면서. "어? 어? 어?" 죄송합니다. 움직일 수가 없어요. 나는 그대로 무너지듯이, 꼬마선생님을 덮치고 말았다. 아. 물론 학생으로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건 아니고, 지쳐서 선생님 쪽을 향해 넘어진 거다. 내 이마가 향하는 땅바닥을 보니, 뾰족한 돌이 하나 보인다. 내 인생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나. 탁. "괜찮니? 문구야." 모처럼의 담임선생님다운 모습이었다. 밤에 부는 바람은 차다. 아직 봄이라고는 해도 겨울의 잔재가 남아있는 이상, 포근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게 이른봄의 기후다. 벤치에 닿은 엉덩이가 시리다. 덜덜덜덜. '아이고. 추워.' 하지만 여기서 벗어나려면 버스가 와야 한다. 평소라면 지하철역까지 뛰어가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극악무도한 선배들에게 끌려 다니는 바람에, 발걸음을 옮길 기운이 남지 않은 것이다. 일어서려고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판국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달려가겠는가. "자. 따뜻한 커피." 담임 선생님이 근처 자판기에서 가져온,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스턴트 커피였다. 나는 종이컵을 받으려고 했지만, 손이 후들거린다. 이러다가 컵을 떨어뜨릴 것 같아서, 나는 두 손으로 종이컵을 쥐었다. "착한 학생이네." 담임 선생님은 그러셨지만, 사실 이 경우에는 내가 착해서 그렇다기보다 팔에 힘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선생님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건 잘 알지만, 그걸 생각해낼 만큼 내 머리가 맑은 게 아니다. 지금은 피로로 인해 완전히 흐리멍텅해져서, 축구부의 선배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두뇌활동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겨우 종이컵을 입에 들이대는 데. "미연아. 학생에게 커피를 먹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옆에서 참견하는 꼬마 선생님. 그녀는 재빠르게 내 커피를 빼앗아서, 자기가 마신다 ! 너무하십니다. 선생님.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려고 해도, 내 입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내 몸의 상태를 반영하듯,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석상처럼. 게다가 커피를 마시든 안 마시든 상관없이 내 몸은. 푹. 내 머리가 그대로 푹신푹신한 뭔가에 부딪쳤다. 비켜보려고 해도, 움직이는 것은 이미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선생님의 가슴은 아니니 안심하고. 눈이 점점 감겨지면서. "문구야. 잠은 집에 가서 자. 밤 공기가 차서, 여기는 안 돼." 꼬마 선생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냥 잘게요. 버스 오면 깨워주세요. 마음속으로만 그 말을 되풀이하며 꿈나라로 떠나려고 할 때. "소문대로 엄청나게 밝히는 애네." 네? 그게 무슨 소리? 갑자기 정신이 확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내 머리가 놓인 곳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으아아아악 !" 내 비명소리가 버스정류장을 뒤흔들었다. "어휴. 귀청 떨어질 뻔했잖아. 그게 뭐야. 그게." 너무 그러지 마요. 하지만 정말 놀랐는데 어떡하라고. 그런 건 순진한 청소년에게는 너무 심한 자극이잖아요. "아무리 선배들에게 시달려서 그랬다지만, 좀 너무하지 않아?" 이거 앞으로 선생님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치한'이라든가, '밝힘증 환자'라든가, '변태'라든가. 그런 쪽으로 못 박힐 위험이 매우 높아졌다. 아무리 피로에 찌들어서 그랬다지만, 무릎베개를 베다니. 그것도 담임 선생님의. 반 학생들이 들으면 무지 부러워할 게 틀림없는 상황이다. 머리는 어떨지 몰라도, 몸매만큼은 학교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우리 담임의 무릎베개를 베다니.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는 변명거리가 있어서, 교칙으로 처벌되지도 않는다. 지우 녀석이 들으면 행운의 사나이라며 또 부러워할 거다. 나는 지친 몸을 겨우 움직여서 바른 자세로 벤치에 앉았지만. "문구야. 내일부터 좀 힘들어질 거야." "네?"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시면 어쩌라고요. 담임 선생님. 그러고 보니 난 아직도 담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이름이. 이름이. 그러니까. "미연아. 애들을 그렇게 겁주면 안 돼." 잠깐. 잘 생각해보니 꼬마 선생님 이름도 모르잖아? 이건 다 선배들 때문이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내 몸통에 머리가 제대로 붙어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두 분 이름이. 이름이. 이름이. '으악 ! 모르겠다 !' 결국 나는 두 분의 이름을 생각해내는 것을 포기했다. 일단 두뇌를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면 좀 쉬어야 하니까. 그런데 왜 내일부터 더 힘들어진다는 거지? 여기서 더 힘들 일이 있나? 아무리 내가 지쳐서 나자빠졌지만, 남의 말을 듣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되도록 불쌍한 눈으로, 선생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뜻입니까. 좀 가르쳐주시옵소서. 내 눈은 그렇게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 그게 그러니까 말야." 그러니까요? "오늘 들으니까 너, 엄청난 변태로 소문이 좍 퍼졌더라?" "네?" 무슨 그런 유언비어를. 그러나 선생님들의 대답은 한술 더 뜬다. "들려오는 소문이 너무 황당해서 안 믿으려고 했었어. 그러니까 여동생을 짝사랑해서 아침부터 공개적으로 포옹한다던가, 여동생은 그래서 난처해하고 있다던가. 학생들은 빨리 미인이에게 애인이 생겨야 한다며 너도나도 연애편지 쓰기에 몰두하지 않나. 거기에 또." "또?" "안 믿으려고 해도, 지금 상황을 학생들이 알면 또 시끄러울 거야. 아마 여동생에 이어 담임선생님까지 손에 넣으려는 색마로 찍히지 않을까. 우리학교 상급생들은 애인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질투도 심할 테고, 그러니 아마 내일은 더욱."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즉, 나는 완전히 선배들에게 찍혔으며, 지금 상황이 알려지면 더욱. 더더욱 미움받게 될 거란 거다. 사람 살려. 도대체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가만. 가만가만. 대체 왜 내가 선생님들에게까지 손을 뻗친다고 소문이 난다는 거지? 어지러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안 난다. 결국 선생님에게 답을 물을 수밖에. 그러나 내가 묻기도 전에. "게다가 학생들이 그걸 물어보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해. 아무리 사랑스런 제자를 감싸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더라고." "네?" 이유가 뭡니까? 담임 선생님은 갑자기 장난스런 미소를 띄더니. "학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미인의 무릎베개를 베고 누웠으니까." 푹. 그렇게 그게 얄미웠던 겁니까. 하지만 지칠 대로 지쳐서 움직이지도 못할 상황이었으니, 좀 봐주세요. 담임선생님은 웃으면서. "뭐 보아하니 오늘도 힘들었던 것 같지만." "네." 사실 오늘의 연습은, 누가 봐도 나를 겨냥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1학년생들은 모조리 시험이라는 이유로 집에 돌아가는데, 나만 별이 보일 때까지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고생할 리가 없잖아? 이래가지고는 앞으로 어떻게 견딜지, 앞이 캄캄하다. "예쁜 여동생을 둬서 힘들겠네. 문구야." 놀리지 마시옵소서. 여동생이 예쁘기야 하지만. "얼굴만 말이지요." 망할 녀석. 오빠는 지옥으로 끌려가는데, 태연하게 손수건을 흔들며 배웅하다니. 물론 보통은 여동생이 남자들을 상대로 이길 거라고 여기지는 못하지만, 그 녀석이 어디 '보통'이냐. 그 실력이면 충분히 날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왠지 그 녀석의 표정으로 보아 이럴 줄 알면서도 일부러 날 내버려두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아침에 자기를 몰아붙인 게 그렇게도 한이 맺혔냐. 이 나쁜 녀석아 ! "어머. 그렇게 억지로 여동생을 싫어하는 척 하지 않아도 돼. 문구야." "네?" 오해하지 마세요. 그 말을 하려는 순간, 헤드라이트가 이쪽을 비췄다. 버스가 오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그러나 난 빨리 집에 가야 한다. 가서 공부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빌어먹을 선배들 같으니. 오늘 과연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상황인데. 그러나. "다른 차잖아."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안 오는 게 법칙이긴 하지만, 당할 때마다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다. 왜 내가 피곤할 때는 버스가 안 오는 거냐. 물론 화를 낼 기운 같은 건 예시당초 없다. 남들은 예쁜 선생님들 사이에 앉아있으니 화낼 필요가 없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피곤해 죽을 지경이라 그런 거 모르겠다. 물론 지금 내가 피로하지 않다면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길 바랄지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어른이 하는 일을 두 분과 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는. "오빠 저질 !" 만약 여동생이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 소리와 함께 업어치기나 팔꿈치 치기, 또는 일격필살의 정권 찌르기가 날아오겠지만, 옆에 여동생은 없다. 설령 그녀가 옆에 있더라도, 난 지금 언제 잠들지 모르는 상황이니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할 여유도 없다. 나중에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할지도 모르지만, 그냥 건전한 학생으로 남자. 골치 아프다. 다시 편한 자세로 차를 기다리려는 데. "차가 또 오네?" 꼬마 선생님이 찻길을 바라본다. 나도 바라본다. 담임선생님도 바라본다. 하지만 저건 버스라기보다는 차라리. "오토바이?" 그것은 오토바이였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오토바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상당히 요란하게 장식이 된, 폭주족들의 오토바이들이다. 오토바이를 샀으면 그냥 몰고 다니면 되지, 뭘 저렇게 덕지덕지 많이 붙인 거냐. 본인들이야 멋지게 되었다고 할지 몰라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흉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저 오토바이들과 우리와는 일체 관련이 없지만. 우리가 뭐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단지 찻길에 그려진 배경일 뿐이다. 그러니 배경은 배경답게,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저 오토바이, 왠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니? 문구야." 꼬마 선생님의 말은, 곧바로 실현되었다. 하필이면 저 오토바이들은, 우리가 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선두에 섰던 오토바이가 그대로 허공을 날면서. "으악 !" 그 오토바이는 앞바퀴를 들고, 그대로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를 덮쳤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지금의 내 몸 상태로는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조금 전에 선생님의 무릎베개를 베었을 때 무사히 넘어가지도 못했을 테지만. 오토바이의 큰 바퀴가 나를 깔아뭉개려는 순간. "위험해 !" 담임 선생님이 나를 감싸고 엎드렸다. 여동생이라면 이럴 때 오토바이를 걷어차 버리거나, 나를 붙잡고 피했겠지만 선생님은 보통 여자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나를 그대로 감싸안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내가 생각한 것은. '내 몸이 멀쩡했으면 좋았을 걸.'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의 가슴 감촉에만 신경 쓰다니, 나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오토바이는 우리를 깔아뭉개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앞바퀴를 내리면서 인도로 올라오더니, 나와 선생님의 바로 앞에 정확하게 멈춰선 것이다. 브레이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문구야. 미연아. 괜찮아?" 허겁지겁 달려오는 꼬마 선생님.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는, 오토바이에 탄 남자. "용감한 선생님에, 바보 제자인가." 바보 제자라. 그건 날 말하는 건가. 너도 한 번 운동장 50바퀴 돌아봐. 아니, 오늘은 그보다 더 많이 뛰었었나?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볼썽사납게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선생님에게 안긴 채로. 지우 녀석이 보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하겠군. 그 남자의 뒤로 최소한 열 대는 넘는 오토바이가 달려오더니, 그의 뒤에 멈춰 섰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왜 여기에 온 거지? 폭주족이라면 당연히 넓은 길에서 씽씽 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학교 앞길이 그렇게 넓은 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처음에 나를 놀라게 했던 그 남자가, 자신의 오토바이에서 내려왔다. 그는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야. 네가 연 미인이라는 그 계집애의 오빠냐?" 이건 또 뭐냐. 왠지 아침에 본 그 불량배들을 떠올리는 대사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녀석도 그 녀석한테 맞았구나.' 앞의 '이 녀석'은 물론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뒤의 '그 녀석'은 세계 최강일지도 모르는 내 여동생을 가리킨다. 왠지 이 남자를 보고 있으니 좀 불쌍해진다. 보아하니 외모나 체격은 괜찮지만, 유감스럽게도 속이 썩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단정을 짓느냐 하면, 처음에 등장했을 때의 태도 때문이다. '사람을 오토바이로 깔아뭉개려고 하다니.' 물론 내 앞에서 오토바이를 멈추기는 했지만, 죽을 뻔했다는 생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뭐? 장난일수도 있지 않느냐고? 안 그래도 피곤해 죽을 지경인 사람한테, 그런 악질적인 장난을 쳐도 되니? 생각 같아서는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다시 묻겠다. 네가 연 미인이라는 그 계집애의 오빠냐?" 아이구. 귀찮아.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기운이 없어서, 입을 열기도 힘들다. 게다가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은 - 죽고 싶은 게 아니다 ! - 심정인데, 뭘 자꾸 묻고 난리야. 눈이 소르르 감긴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정말 인간적으로 더는 못 버틸 것 같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문구야. 지금 자면 어떻게 해 !" 피곤에 지쳐 늘어진 나를 강제로 잡아 일으키는 선생님. 그러나 졸음에는 장사가 없는데요. 나는 눈을 감고, 꿈나라로 이사갈 준비를 했다. 졸린다. 졸린다. 졸린다. 졸린다. 졸린다. "배짱 좋군. 내 앞에서 잠을 자다니."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나에게 구둣발을 날렸다 ! 아니, 이 경우에는 운동화 발인가? 아무리 내가 졸려서 잠드는 상황이라고 해도, 눈앞에 발이 날아오는데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밤낮으로 여동생의 구타에 단련된 내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탈진상태에서 움직인다는 것도 솔직히 놀랄 일이지만. 쉬익. 내가 그걸 피했다는 게 더 놀랄 일이었다. 이것이 여동생의 위력인가. 얼마나 내가 그 녀석한테 시달렸으면, 이 정도는 느리게 보일까. 내가 자신의 앞차기를 피한 것이 의외였는지, 그 남자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하지만 나는 남자이고, 여자의 미소는 좋아해도 남자의 미소, 특히 저렇게 살기를 머금은 웃음은 보고 싶지 않다. "제법 하는군. 애송이. 역시 그 계집애의 오빠야." 네가 느린 거야. 네가. 내가 빠른 건 절대 아냐. 졸려서 쓰러지기 직전인 사람을 맞추지 못한 걸 보면, 네 실력이 형편없는 거야. 물론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과연 다음 번에도 피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몸이 너무 피로했기 때문이다.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나타나다니. 옆에서 두 선생님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나를 난처하게 했다. '도망가기도 어렵겠는데.' 나 혼자라면 어떻게 죽을힘을 다 내서 도망쳐보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무리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녀석의 움직임을 살펴야 했다. 불의의 급습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나는 끝장이다. 지금은 힘도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물론 몸이 정상이라고 해도, 열 명이 넘는 불량배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럼 이 녀석이 다음에 할 일은 아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연 미인이라는 계집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물론 이렇게 물을 경우, 답은 정해져 있다. 이 녀석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여동생이 지금 집에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분노한 여동생의 철권에 맞게 되면, 저 녀석들은 지옥행이 틀림없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다고 말할까. 비록 내 머리가 지금 제대로 회전하지는 않고 있지만, 나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연 미인이라는 계집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이 인간아. 토씨 하나 정도는 바꿔서 말해라. 나는 이 불량배의 몰개성에 치를 떨었지만, 불량배에게 그런 걸 따져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그의 요구에 따라,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미인이 녀석이 지금 집에서 공부하고 있을지, 진희네 집에 가 있을지, 문희네 집에 가 있을지, 그게 아니면 풍남이네 집에 가 있을지 내가 알 도리가 있겠냐. 물론 정답은 당연히 '집에서 공부하고 있어요'가 되겠지만, 그런 건 모른다. 일단 그 녀석이 아무리 평소에 폭력과 유혈에 젖어서 사는 녀석이라도 해도, 어쨌든 내 여동생인 건 사실이다. 진심을 말하면, 여동생이 이 녀석들과 만난다고 해도, 나에게 손해가 되는 건 없지만. '집에서는 안 돼.' 집 밖에서야 미인이가 깡패들을 마구 패든, 죽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안 된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도 문제지만, 저 녀석이 내 방에서 날뛰기라도 해봐라. 내 수집품이 다 깨진단 말이다 ! 그러니 절대로, 미인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할 생각은 없다 ! 설령 저 녀석들이 날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내 수집품 만큼은 지켜야 한다 ! 내 대답에 실망했는지,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역시 듣던 대로군. 그 계집애의 오빠는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낀다더니." 그런 유언비어가 언제 퍼진 거냐. 나로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 소문을 지금 바로잡아주고 싶어도, 졸려 미칠 지경이다. 그럴 기운은 나에게 없다. 게다가 더욱 난처하게도. "맞아야 말을 들을 것 같은데." 그 폭주족들은 주먹을 어루만지며 나에게 다가왔다. 주먹에서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척 보기에도 겁나게 체격이 크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힘도 없는 지금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 좋은 방법은. '그냥 엎드려서 빌어?' 당연히 기각. 꼬마 선생님과 덜렁이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체면이 있지, 어떻게 그런 비굴한 자세를 취하겠는가. 게다가 요즘 불량배들이 여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잘 안다. 보나마나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두 분은 아마 저들에게 잡혀서 사람이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강요받을 것이다. 저 더러운 욕망에 굶주린 불량배들의 눈을 보라.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버스 한 대가 올 때까지라도 버텨야 한다. 그걸 타고 선생님들이 달아날 수 있으려면. 그런 내 바램이 이루어졌는지. 부우우웅. 버스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운전사 아저씨는 야속하게도,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속도를 높여서. "그냥 지나가네." 이봐요. 아저씨. 손님이 안 보이시는 겁니까 ! "후후후. 그 계집애의 오라버니라니, 싸움도 잘하겠는걸. 기대하겠어." 기대하지 마. 안 그래도 쓰러지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니까. 기운만 다 빠지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불량배가 하나 둘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여동생에게 원한을 품은 팔팔한 불량배들이 열 명도 넘게 모여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근성이 있지,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 '어떻게든 해 볼 수밖에.' 나는 일단 싸울 자세를 취했다.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싸우더라도 목적이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옆에 있는 두 선생님에게 눈짓을 했다. 물론 입을 쓸 수는 없지만, 그들이 어떻게든 도망쳐주기를 바랬다. 나야 어차피 여기서 쓰러질 것 같지만, 선생님들까지 휘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무사히 달아나면 그들은 경찰에라도 신고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물론 그들이 사건현장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내가 변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안 알리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을 테니까. "와 봐 !" 미인이라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외치겠지만, 나는 지금 외칠 기운이 없다. 주먹 한 번 휘두를 기운이라도 있는지 심히 걱정된다. 가장 앞에 나선 불량배는. 누구더라? 피로에 흐려진 내 눈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내 꼴을 본 불량배는 비웃음을 날렸다. "흥. 저런 새끼가 정말 그 계집애의 오빠야? 비실비실 하는데? 이봐. 그래가지고 어떻게 여자를 둘씩이나 상대할 셈이지? Come on. baby." 네가 와 봐. 나는 녀석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쓰러지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라고. 게다가 폭주족들이 겹겹이 포위한 이 상황에서, 무슨 여유가 있겠어. 지금 내 머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어떻게 선생님들을 달아나게 할 것인가 밖에 없는데.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도망치게 하려면 역시. "위험하니까 내 뒤에 바짝 붙어요. 선생님." 두 분 중 하나라도 미인이처럼 강력하다면 어떻게 되겠지만, 우리 담임은 천하의 덜렁이고 꼬마 선생님은 척 보기에도 체력이 약하다. 과연 두 분이 도망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시도는 해봐야겠지. 가능성 낮은 도박이지만. "우아아아아 !" 그리고 나는 돌격했다. "후후후. 근성은 있군. 하지만 우리한텐 안 돼." 결국 나는 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안 것은, 두 선생님들이 눈치도 어지간히 없다는 것이다. 내가 폭주족들을 밀어젖히는 사이에 어떻게든 달아날 것이지, 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거야. 나는 몇 번이고 달아나라고 외쳤지만, 두 분은 어떻게 된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속 터져. 길을 열어주느라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 공연히 나만 떡이 되도록 맞았잖아. "왜 안 달아났어요? 가서 경찰서에 신고라도 해야지." 나는 두 선생님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지만, 사이좋게 묶인 두 분의 대답이란 것은. "하지만 제자를 두고 어떻게 선생님이 달아나니." 카아악 ! 지금이 체면 따질 때입니까 ! 그냥 눈 딱 감고 도망갔어야지요 ! 대체 어쩌려고 그러신 겁니까 ! 물론 내가 불평한다고 해서 상황이 호전될 리는 없다. 우리는 폭주족들에 의해 오토바이의 뒤에 강제로 태워졌고. "자. 이제 밤길 드라이브를 즐겨 보실까." 즐기기 싫어. 그들은 우리를 한 명씩 오토바이의 뒤에 태우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두 선생님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난 두려워할 기력조차 없었다. 집단구타에 피멍이 든 상황에서 그럴 기운이 어디 있겠냐. 빌어먹을. 축구부 선배들이 새삼스레 원망스러웠다. 그 녀석들이 내 힘을 빼놓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선생님들은 달아나게 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커다란 공터였다. 아마 재개발로 인해 건물들을 철거한 곳인 듯, 여기 저기에 다 치우지 못한 콘크리트 더미가 널려 있는 곳이었다. 폭주족들은 우리를 콘크리트 기둥에 묶어놓고,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 - 처음에 인도로 올라와서 날 치려고 한 바로 그 작자 - 가 내 턱을 잡고 올리더니, 묻는다. "자. 집 전화번호를 대 주실까." "몰라." 내가 미쳤니. 대답해주게. 그러자 이 인간들이 하는 짓은. 퍽. "꺄악 !" 비겁하게, 나를 치지 않고, 선생님을 치는 거다 ! 담임선생님이 뒤로 쓰러진다. 그들은 선생님을 마구 걷어차면서, 다시 묻는다. "자. 전화번호가 이제 기억나겠지?" "몰라."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걸.' 지칠 대로 지친 데다가, 얻어맞아서 머리가 흔들리는 판에 무슨 기억이 남아 있겠냐. 그러자 그들은 이번에는 꼬마 선생님을 걷어찼다. "악 !" 발로 두 사람을 짓밟는 폭주족들. 이것들이 그냥. 하지만. "호오? 정말 여동생 사랑이 지극하신 오빠인걸? 선생님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도, 오직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닫다니." 뭐가 여동생 사랑이 지극하냐 ! 이건 어디까지나 집을 전장으로 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일 뿐이라고 ! 절대로 여동생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게 아냐 ! 나는 그 점을 어떻게든 역설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불량배들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입을 다물면, 나쁜 학생이지." 퍼억. 앞이 캄캄해진다. 숨이 막힌다. 그러나 상대는 멈추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저렇게 고생하시는데 말야." 퍼억. 이번에는 컸다. 나는 앞으로 쓰러졌고, 땅바닥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문구야 !" 선생님들의 외침이 멀어져간다. "문구야. 괜찮아?" 흔들지 마세요. 선생님. 하지만 꼬마 선생님은 내 머리가 무슨 방울이라도 되는지, 계속 흔드신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머리까지 흔들리니까 더욱 어지럽다. 주위가 온통 까맣게 보인다. 아무리 밤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런데 이 감촉은 뭐냐. "일어나. 일어나. 문구야. 제발 일어나."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앞이 보여야 일어날 게 아닌가. 온통 까맣게 보이는데 어떻게 움직이라는 거냐. 그런데 앞이 왜 안 보이는 거냐. 이건 설마. '눈, 눈이 안 보이는 거야?' 안 돼. 그러면 나중에 진희와 결혼해도 그녀의 알몸을 볼 수 없어 ! 아니지. 아예 결혼하지도 못할 거야. 그러면 안 돼 ! 그런 인류평화에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어 !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지만, 앞이 안 보이니 그건 다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이거 어쩌지? 이대로 시력을 상실한다면 난. 난. "영미야. 애 잡겠어. 그만 놔." 네? 그렇다면 눈이 안 보인 것은, 이 말랑말랑한 감촉은. 설마. 갑자기 주위가 확 밝아지면서, 내 앞에 있는 꼬마 선생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겉보기와는 달리, 꽤 크다. 그제서야 자신이 뭘 했는지 눈치채셨는가. 가슴을 가리고 얼굴을 붉히신다. 귀엽다. '예쁘다기보다는.' 저건 너무 귀여운 아이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진희와 결혼하면, 꼭 저런 딸을 낳고 말 테다. 그래서 꼬마 선생님처럼 귀여운 딸로 키우고 말겠다 ! 누구처럼 사악함이 넘치는 괴물로 만들지 않고 ! 그런데 '누구'의 생각을 하자, 지금의 상황이 삽시간에 기억났다. 나는 그 폭주족들에게 얻어맞아 쓰러졌지. 그리고. "앗 !" 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나를 보던 담임 선생님이 풀죽은 목소리로. "미안. 출석부를 빼앗겼어." "Oh, shit." 미국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인지, '이런 빌어먹을.'이라고 외쳐야 하는 상황에서 영어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물론 뜻이야 똑같지만, 한글사랑이 나라사랑인데, 실천을 못한다. 욕하는 걸 한글로 하는 게 나라사랑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데 잠깐. 출석부를 빼앗겼다는 것은. "큰일났다." 녀석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 나는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일어나려다가 다시 엎어졌다. 아프다. 무지 아프다. 불량배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크게 웃는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안 된다. 일어나려고 해봤자, 쇠사슬이 내 몸을 더욱 더 조일 뿐이다. 내가 무슨 노예냐. 이런 식으로 사람을 결박해 놓다니.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태의 악화를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기어이 전화를 걸고 말았고, 기고만장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들이 죽어도 난 이제 모른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옥의 도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불어올 피 바람을. "뭣이? 이 계집애가 지금 뭐라고 했어? 뭐? 공갈치지 말라고? 지금 내가 장난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뭐야 ! 이 계집애가 !" 내 예상대로, 그들은 매우 열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말야. 상대는 내 여동생이라고. 어지간한 말로는 꿈쩍도 안 해. 무게도 무겁지 않은 주제에. 콧구멍에서 수증기를 뿜어내던 불량배가 나를 노려보고. "그래. 증거를 보여주지. 조금 있으면 겁먹고 질질 짜게 될 거다. 이 개 같은 년." 고운 우리말을 씁시다. 그게 안 되니까 불량배겠지만. 그들은 전화기를 나에게 들이댔다. "자. 여기 대고 그 계집애한테 말해봐. 살려달라고. 말 안 하면 네 모가지는 없다." "하아." 뭐 아무 말이나 해야겠군. 어차피 내가 살려달라고 해서, 날 살려주러 올 애가 아니라고. 그 녀석이 여기 온다면 그건 분명, 너희들을 죽도록 때리려고 오는 게 분명해. 하지만 지금 굳이 이 녀석들을 배려해줄 필요는 없으니, 나는 얌전히 전화기를 받았다. "아아. 여보세요. 마이크 시험 중. 아아." "오빠?" 역시 미인이. '당황'이라는 낱말하고는 인연이 없구나. 그런데 이건 너무 태연한 거 아냐? 난 지금 불량배들한테 잡혀서 끌려왔고, 여기에는 두 분 선생님들까지 있다고. 어떻게 그걸 설명해줘야 할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게 여동생의 특기. "오빠 목소리로 보아,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네?" 그걸로 어떻게 그런 걸 다 파악하는 거냐. 게다가 그 말 자체가 틀렸다고. 여기저기 맞아서 피멍이 들었는데. 하지만 매정한 여동생은 그런 내 사정 따위는 무시하고. "거기 있는 불량배는 몇 명이야? 들리는 소리로 보아 선생님들도 있는 거 같은데, 설마 같이 잡힌 거야? 그 불량배들, 혹시 총이라든가 수류탄이라든가, 그런 불법무기는 안 가지고 있어? 혹시 간첩이라면 알려줘. 신고해서 상금 타게." "야 !" 여기서 신고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 납치범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뭔데 ! "경찰에 알리면 이 녀석을 죽인다." 이거잖아.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경찰에 알린다는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불량배들이 다 듣게 하는 녀석이 어디 있냐 ! 다른 휴대전화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던 불량배들까지도, 여동생의 황당한 반응에 얼이 빠진 모양이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봐.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남의 대화를 엿듣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뭐 어차피 납치 당한 사람이 엿듣지 말라고 해봤자 저 녀석들이 들어줄 리가 없지만. 그리고. "음. 간첩은 아닌 것 같네. 유감인 걸. 그럼 잘 자." "야 !" 뭐가 잘 자라는 거냐 ! 이 계집애가 대체. 그러나 그 뒤의 발언은 더욱 기가 막혔다. "오빠. 그런 애송이들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없어? 고작 백 명 가지고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난리야? 아침에 본 불량배들 수준이면 다들 허약할 텐데?" "야 !" 이 녀석,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없던 기운도 생기는 모양이다.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 자기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지 마라. 대체 이 여동생이라는 애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물론 주위의 불량배들 역시, 모두 분노했다. 하긴 자기들이 완전히 무시당했으니, 화낼 만도 했다. 처음에 나를 치려고 했던 남자가, 나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그리고 외쳤다. "당장 나와라 ! 안 나오면 네 오빠와 두 선생 년을 파렴치범으로 만들어버리겠다 !" 하는 협박이라곤. 역시 불량배다운 저질 협박이다. 그런데 뭐? 파렴치범? 나를? 온갖 엉뚱한 상상을 시작하는 내 귀에 들린, 여동생의 말은. "이봐. 우리 오빠라면, 최소한 여자가 열 명 정도는 되어야 파렴치범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고작 두 명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우리 오빠가 두 명으로 만족할 사람으로 보여?" 이젠 말도 안 나온다. 날 아주 바람둥이로 모는구나. 내가 무슨 아랍 왕자냐. 하렘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아냐. 나는 여동생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 저런 소리만 하니까 헛소문이 학교를 메우지. 하지만 그렇다고 불평을 하다가는, 불량배가 아니라 저 녀석이 날 파렴치범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정말 저런 여동생 데리고 살기 힘들다. 순간적으로 불량배들이 나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낸다. 아. 이게 무슨 망신이냐. "그래? 그렇다면 네 오빠의 얼굴가죽을 벗겨서 너한테 보내주마. 가급적이면 신사적으로 대하려고 했지만, 네 년의 발언을 들으니 안 되겠다. 하긴 네 오라버니에게 파렴치범 같은 일을 시키는 건 너무 호의적이지. 내일 아침을 기대하고 있어라." 일단 나름대로의 반격을 시도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저러다가 핏줄 터지겠다. 하지만 말야. 당신 실력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상대는. "얼굴가죽이라. 그거 자르려면 구멍이 안 나게, 조심해서 잘라 줘. 핸드백 만들려면 구멍이 없어야 하거든. 아. 공짜니까 가공상태가 안 좋은 게 당연한 건가? 어쩌지?" 카악 ! 도대체 이 여동생이라는 애가 하는 소리는 ! 오빠의 얼굴보다 핸드백이 우선이냐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이젠 힘도 다 빠졌다. 원래 내 여동생은 저런 애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했다. 그 남자가 이를 악물고 외친다. 상대가 하나도 당황하지 않으니까 약이 올랐나 보다. "이, 이. 네 년을 죽여버리겠다 !"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위협은 약자에게나 통하는 것. 상대가 겁을 안 먹으니 위협이 먹힐 리가 없다. 오히려. "그럼 전화비 비싸니까 이만 끊을게. 요즘 불황이라 너도 돈이 없을 테니. 잘 자." 딸깍. "야 ! 야 ! 이 년이 ! 야 ! 야 !" 그가 아무리 외치더라도, 이미 끊어진 전화는 응답할 리가 없었다. "이런 개 같은 ! 우악 ! 죽여버리겠다 ! 카악 !" 이봐. 이미 전화는 끊어졌다고. 그런다고 내 여동생이 대답해 주겠냐. 나와 두 선생님, 심지어 폭주족까지 기가 찬 듯이 할 말을 잃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나를 치어 죽이려고 했던 남자가, 성질을 못 이기고 휴대전화를 내던진다. 그리고 마구 밟는다. 달이 수평선에서 하늘 위로 떠오를 때까지 밟는다. 요즘 물건은 워낙 튼튼하니까 그 정도로 고장날 것 같지는 않지만, 휴대전화의 상표를 보니. [전풍전자] 음. 고장나겠군. 저 녀석은 곧, 막대한 수리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 같다. 전풍전자의 애프터서비스는 친절하고 깔끔하지만, 좀 비싸지. 아마. 물론 그런 거야 남의 사정이지만. '잠깐.'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터무니없는 여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얼이 빠진 불량배들로서는, 어딘가에 화풀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딘가'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슬슬 목숨 걱정을 해야 할 것 같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죽든지, 난도질당하든지, 그게 아니면.' 파렴치범 같은 행복한 처벌은 안 한다니 약간 아쉽지만. 아. 아냐. 절대 아냐. 난 절대로 두 분 선생님의 알몸을 상상하지 않았어. 절대로 두 분하고 같이 침대에서 잔다든가, 선을 넘어간다든가 하는 상상은 안 했다고. 정말이라니까. 믿어 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니까. 진짜라고. 내가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는 동안. "그래. 좋다. 네 년이 그렇게 나온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우선 뭘 할까." 그 남자의 눈이 선생님들에게 쏠린다. 설마, 설마. 설마 ! 그의 눈짓이 있자, 곧 불량배 몇 명이 선생님들에게 다가간다. 왠지 눈치가 심상치 않다. 설마 ! "모처럼 재미 좀 볼까."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두 분은 여자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챈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불량배들이 사방에 둘러싸고 있으니 그것도 무리다. 그들의 더러운 손이 선생님의 옷을 잡는다. 안 돼 ! "이러면 안 돼."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두 분 선생님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여자는 힘으로 남자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이건 몸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다. 아무리 여자가 발버둥치더라도, 남자를 뿌리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모든 여자가 내 여동생처럼 강할 수는 없으니까. 기고만장하여 웃어 제치는 불량배들.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며, 더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를 처음에 치어 죽이려고 했던, 그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외친다. 아마 두목인 모양이다. 이제 와서 깨달은 나도 너무 늦은 거지만. "하하하. 어차피 우린 미성년자니까, 선생 몇 명쯤 덮친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거든.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나? 가해자의 인권은 왕이고, 피해자의 인권은 걸레라는 거. 우리가 선생 상대로 재미를 좀 본다고 해도, 경찰에선 그냥 훈방으로 끝난다고. 훈방. 알아?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만 좀 늘어놓고 끝나는 거야. 선생들이 이 일을 신고해봤자, 경찰은 어차피 당신네들을 보호해주지 않아. 그것도 몰랐어?" 저걸 그냥. 나는 어떻게든 쇠사슬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안 한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내가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을 수는 없다. 무력하게 내가 선생님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들이 선생님들의 옷을 잡고 찢으려는 순간. 땅. 갑자기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선생님을 잡은 불량배 중 하나가 서서히 쓰러졌다. 듣고 싶지도 않은 비명을 지르면서. "게엑." 기절하는 것도 참 품위가 없다. 그러니 불량배겠지만. 어쨌든 그는 쓰러졌고, 선생님들의 옷을 벗기려던 불량배들도 동작을 멈추었다. 하긴 아무리 불량배들이 여자에 환장했다지만, 눈앞에 놓인 친구 불량배의 시체 - 시체 아냐 ! -를 무시할 수야 없겠지. 그런데 왜 저 녀석이 쓰러진 거지? "어떤 새...." 나만 그걸 궁금해한 건 아닌가 보다. 가장 반응이 빠른 불량배가 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따땅. 목탁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불량배 둘이 그대로 쓰러졌다. 역시 불량아들답게, 조금 전에 쓰러진 녀석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흉측한 표정으로 쓰러졌다. 내가 나중에 쓰러질 일이 있다면,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물론 그 전에 쓰러질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런데 누가 이런 장한 일을 하는 거지? "어떤 새끼냐 ! 당장 앞으로 나와 !" 그건 나도 궁금하다. 다만 이 경우는 '새끼'가 아니라 '님'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난 새끼줄 아닌데?" 잠깐. 잠깐. 잠깐. 이렇게 오만하고도 방자한 대답을 할 사람이 누구였지?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설마. 설마. 설마? 악마의 등장을 환영하는 차가운 돌풍이 광장을 휘감고 지나간다. 그렇다면. "왔다 !" 죽음의 여신, 여동생께서 강림하신 것이다. 보통 죽음의 신, 저승사자의 경우 서양풍이라면, 커다란 낫을 든 해골바가지를 연상할 것이다. 동양풍이라면, 역시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갓을 써야 할까. 물론 창백한 얼굴도 포함해야 할 것이고, 결정적으로 성별은 남자여야 할 것이다. 왜 그런 무시무시한 역할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했는지는 영 모르겠지만, 여자가 그런 역을 하면 공포감을 주지 못한다는 게 이유일까? 그게 아니면 옛날에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여자는 아이를 낳는, 다시 말해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러나 지금 나타난 죽음의 여신, 아니 죽음의 악귀는. "낫이 없어." 물론 내 여동생이 정말로 낫을 들고 나타나는 걸 바란 건 아니지만, 최소한 백 명은 될 법한 불량배들을 상대하려면 무기 하나쯤은 들고 와야 할 게 아니냐. 우리나라는 총기휴대가 불법이니 기관총이니 로켓포니 하는 걸 들고 올 수는 없지만, 최소한 몽둥이 하나라도 들어야 할텐데, 안 보인다. 전혀 없다. 평화주의자라면 이해가 되지만, 나한테 하는 행동을 봐서는 평화니 협상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인데? 어쨌든 여동생은 광장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따라, 걸어왔다. 다리가 없는 유령이라도 되는 건지, 발소리가 안 들린다. 불량배들의 숨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가. 그게 아니면 저 녀석의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그런 건가. 그런데 이 인간이 갑자기 멈추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 머리를 움켜쥔다. 왜? "음. 이럴 때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협박? 매수? 공갈? 아무래도 상대가 저질들이니까 대화라든가 타협 같은 방법은 안 통할 테고, 그럼 역시 몽땅 다 죽여야 하나? 아니. 죽이면 안 되지. 아아악. 모르겠다 !" 이봐. 깡패들 앞에서 그렇게 종알거리는 여자도 있냐. 역시 저 녀석은 뭔가 머리통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게다가 여기 있는 건 깡패들이라고. 보통 여자 혼자서는 상대할 엄두도 못 내는, 그런 무시무시한 녀석들인데, 왜 저래?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거 아냐? 의외의 반응에 깡패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깡패답게 반격을 가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몽둥이를 들고 내 여동생에게 돌격한 건 아니고. "손들고 무릎꿇어. 그렇지 않으면 네 오빠의 목을 잘게 썰어주마." 힉. 나? 왜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거냐. 이 인간들이 정말. 당연히 나는 보통 사람이므로 이럴 때의 전형적인 반응 -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면서 벌벌 떠는 것 -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뭐? 배짱 좋게 팔짱끼고 버티라고? 네가 한 번 해 봐 ! 달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 내 목에 닿았는데, 어쩌란 말이야 ! 그러나 내 여동생은. "싫어." 이봐. 배짱은 다른 데 가서 부리라고. 지금 내 목이 걸려있단 말야 ! 칼이 다가온다고 ! "농담으로 아는 모양인데, 지금 이 칼을 그어줄까?" 히이익. 어린 나이에 이렇게 죽다니. 땀이 주르륵 흐른다. 하지만 저 계집애는 멀쩡하다. 표정 변화 하나도 없다. 그래. 네 목이 아니니까 그러는 거냐. 대체 이유가 뭐냐. 이유가. "옷 더러워진단 말야. 세탁하려면 큰일이라고." 이, 이유라는 게 고작 그런 거냐. 갑자기 맥이 좍 풀린다. 선생님들조차 혀를 찬다. 불량배들은 어떤 상황이냐고? 모두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너, 내 모가지보다 옷이 더 중요하냐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평소와는 달리 바지차림이다. 검은 잠바에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거기에 검은 색 운동화까지. 드디어 속마음과 똑같은 색으로 옷을 차려 입은 거냐. 야 ! 어차피 검은색이니까, 더러워져도 눈에 안 띄잖아 ! "배짱 하나는 좋군. 하지만 네 년이 오빠에 푹 빠졌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과연 이래도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으악 ! 칼이 내 목에 닿았다 ! 차가운 칼날이 내 목의 피부를 조금씩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야 ! 네 옷 때문에 내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잖아 ! 눈물의 호소라도 해야 하나? 내가 애절한 눈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래. 이제야 정상적인 여자아이의 반응을 보여주는 거냐.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저 녀석은 예시당초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고. 특히 내 일에 관해서는. 그녀는. "어머.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어쩌지. 난 몰라." 상당히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다. 뭐? 정상적인 반응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여동생이라는 애의 진면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다 ! 그 뒤를 보라고. 뒤를. "후후후. 그럼 손들고 항복하시지."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불량배가 그렇게 협박하자마자 나타난 여동생의 표정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내가 미쳤니?" 울고불고 사정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은 다시 멀쩡한 표정으로 돌아가더니, 한다는 소리가. "내가 미쳤니?" 라니? 야 ! 이대로라면 내 목이 잘린단 말야 ! 당황한 불량배 두목 - 나를 처음에 치려고 한 녀석이지만, 하는 짓을 보아 두목 같다. 그러니 앞으로는 두목이라고 호칭한다 - 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여동생의 터무니없는 대응에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맥이 빠진 불량배 두목의 칼이 내 목에서 떨어져 나간다. 하긴 내가 그였더라도 그랬겠지. 기괴한 상대에 질렸는지, 그가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오. 오빠가 죽어도 좋다는 거냐." 상당히 당황했는지, 목소리에 약간 기운이 빠졌다. 그럼 그 뒤는. "그럼 다시. 꺄악. 꺄악." 하지만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뻔한 연기를 하고 있다. 저건 분명히 고의다. 억지로 비명을 지르는 척 한다는 걸, 모든 불량배가 다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비명이었다. 대체 이 아가씨는 말야. 불량배들이 여기저기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야 ! 대사하고 행동이 다르잖아 !" 그러자 비명을 지르는 것을 멈추는, 우리의 여동생. 정말 쟤가 내 여동생 맞는 거냐? 여동생에게 놀라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건 너무했다. 이 많은 불량배들이, 전부 미인이에게 휘둘리는 것이다. 직접 보고 있는데도 못 믿겠다. 저걸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만용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대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황당한 답변을 하려는 것이옵니까. 여동생 각하. 그녀는. "보통 여동생은, 이럴 때 비명을 지르면서 도와달라고 외치잖아? 그래서 한 번 따라해 봤어." 따라하지 마. 모든 불량배들이 말을 잊었다. 하긴 이 정도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지. 보통 이럴 때는 여자 애는 벌벌 떨고, 남자들은 기고만장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기 마련인데, 이게 뭐야. 대체. "미인이 저 애, 원래 저랬니?" "네." 담임께서 기가 막힌 지, 나에게 작은 소리로 묻는다. 하긴 담임선생님이 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저런 황당한 여자 애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실 만도 하지. 하필이면 자기가 맡은 반에 말야. 옆에 있는 꼬마 선생님 역시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와. 대단해. 정말 대단해. 이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다니." 뭐하시는 겁니까. 저게 감탄할 상황입니까. 나는 그만. "저게 뭐가 대단해요 !"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야. 저게 정상적인 여자아이의 반응이냐? 보통은 이런 상황에선 벌벌 떨다가 습격 당하는 게 정상이고, 그럴 때 오빠가 구하러 가야 마땅한데, 이건 그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우리나라 같은 '여자한테 험한' 환경에서도, 저 정도면 자기 몸 지키는데 문제가 없을 거다. 절대로. "저건 대단한 게 아니라, 황당하거나 어디가 망가진........" 땅. 아구구. 머리야. 이건 불량배의 일격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 여동생의 공격이었다. 한 두 번 맞아본 게 아니니까,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서 있는 곳과 여기와는, 최소한 몇 십 미터는 떨어져 있다고. 게다가 불량배들이 저렇게 웅성거리는데, 어떻게 내 말을 들은 거야. 불량배들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말한 건데. 아픈 머리를 문지르고 싶지만, 손이 묶여서 안 된다. 여동생이 나를 째려본다. "오빠. 지금 나한테 욕했지?"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큰일난다. 이 황당한 계집애는 주위에 불량배가 있든 없든, 내가 잡혀있든 말든 상관없이 나를 팬다. 말 그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까지 나를 때리다니, 너무 심한 게 아닌가. 나는 당연히 항의했다. "야 ! 난 지금 인질로 잡혀있는데, 이 상황에서까지 날 때리는 거냐?" "응." "이럴 때는 먼저, 날 구출하고 나서 때리든지 말든지 하는 게 순서 아니냐?" "하긴 그렇네. 하지만 오빠를 보니까 왠지 자꾸만 때리고 싶어져서." "때리지 마."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걸. 오빠를 볼 때마다 아앙. 때리고 싶어. 때리고 싶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그럼 다른 상황에서는 때려도 되지?" "절대 안 돼 !" "그럼 때리지는 않고, 찌를까?" "찌르지도 마." "그럼 가스렌지에 올려놓고 구워볼까?" "굽지 마." 네가 식인종이냐. 내가 언성을 높이려는 때, 불량배 두목이 먼저 외쳤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 말싸움하는 척 하면서 오빠에게 접근하는데, 어림없다 !"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나와 여동생의 거리가 많이 줄어들었다. 뭐야. 너 그런 거였니? 옆을 돌아보니, 두 분 선생님께서 약간은 감탄하는 듯, 약간은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계신다. 여동생에 대한 악의가 한 순간 호의로 바뀌려는 순간. "아. 아까워 죽겠네. 할 수 있었는데." 땅. 아이고. 왜 또 때리는 거냐. 갑작스런 일격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이번엔 이유가 뭐냐.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타격이었다. 불량배들 역시 이상한 전개에, 여동생을 덮치려던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모두들 여동생의 입을 주목하는 가운데. "야. 이번엔 왜 때리는 거냐 !" 내 항의에 대한 그녀의 답은 과연? "작전 실패에 따른 화풀이야." "야 !" 그래. 몰래 다가오려던 계획이 실패했으니까, 화풀이를 하자 이거지. 그런데 왜 그 대상이 나냐? 내가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선생님. 얘들 때려도 돼요?" "뭐?" 난데없이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왜 그걸 담임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하지?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불량배들을 때려주려고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저 녀석이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저런 소리를 할 리는 없고. '명분 쌓기? 외교적 술책? 함정?' 여동생한테 너무 그런다고 하지 마라.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 상황은 선생님에게 묻고 자시고 할 개재가 아니다. '보면 뻔하잖아.' 사랑하는 오빠와 선생님들이 깡패들에게 납치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빠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고 있다. 이 경우에 뭘 어째야 하겠냐. 당연히 경찰서에 신고하거나, 오빠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오던가, 그게 아니면 무기를 들고 싸우던가. 그렇게 하는 게 순리 아니겠냐. 그런데 왜. "왜, 왜 그걸 나한테 묻니?" 우리 담임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담임이 맹해서가 아니다. 상식을 벗어난 여동생의 기행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다. 여기서 싸움 이외에 무슨 해결책이 있다는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시는 우리의 불쌍한 담임 선생님. 저런 애의 담임을 맡으시다니, 나 다음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내가 더 불행하냐고? 담임이야 솔직히 1년만 고생하면 되지만, 난 평생 이 모양이니까 그렇지. 이해할 수 없다는 담임 선생님과, 광장의 모든 이들에게 내던진 여동생의 대답은. "전 착한 학생이니까요." "전 착한 학생이니까요." "전 착한 학생이니까요." "전 착한 학생이니까요." 그 말이 던진 충격파는 대단했다. 나야 당연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불량배들은 어땠을까. 그들도 이미 여동생이 좀 이상한 애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들의 반응이 나온 것은, 여동생이 따분한 표정으로 하품을 한 후의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들은 일제히. "네가 어디가 착한 학생이냐 !" 불량배들에게 저런 소리를 듣다니, 아무리 내 여동생이 희대의 악인이라지만 좀 심하군.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 저 폭주족들이 대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 사람을 납치하고 폭행한 인간들인데. 그러나 그 점이 여동생이 '착한 학생'이라는 주장의 부당성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착한 학생이 사람을 그렇게 패냐 !" 역시. 그런 소리가 하나둘이 아닌 걸 보면, 여동생에게 맞은 녀석이 꽤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봐.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내가 언제 너희들을 주먹이나 발로 때린 적이 있니?" 내가 본 바로도, 그건 맞다. 적어도 저 녀석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폭행이 아니라도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은 가능하다.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싸움만 할 때, 그들은 국민에게 직접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지만, 국민들은 그로 인해 크게 상처를 입듯이 말이다. 불량배들의 항의가 홍수처럼 터져 나온다. "너 때문에 난 차에 부딪쳤어 !" "네 년 때문에 내 머리통이 깨진 게 안 보이냐 !" "손만 안 댔지, 실제론 그 이상의 폭행을 가했잖아 !" "새로 훔친 차가 불타버린 게 누구 탓인데 !" "난 저 계집애 때문에 한강 다리에서 떨어졌어 !" "나도 !" "내 소매치기 영업을 방해한 게 누군데 !" "저 계집애가 경찰차에 날 처박는 바람에, 난 큰집에 갔다고 !" 그런데 말야. 왠지 들리는 불만이 좀 정당하지 못한 것 같지 않냐. 훔친 차가 불탄 게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보나마나 여동생에게 화염병이라도 던졌다가, 그걸 여동생이 피하는 바람에 차에 불이 붙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때 안 피했으면 내가 차에 부딪쳤을 걸." "내가 네 머리를 때렸니? 자기 스스로 전봇대에 부딪쳤잖아." "약한 사람을 주먹으로 때리기는 싫으니까." "그 차에 화염병을 던진 게 누구시더라?" "그럼 내가 그냥 차에 치여야 하니? 내가 피했으면 재빨리 급정거를 하지, 한강에 그대로 뛰어들면 어떻게 하라고." "너도 그래. 같은 차에 타고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예시당초 소매치기라는 영업을 하는 것부터가 나쁜 거야. 그럴 때 신고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니." "처음부터 지명수배 된 네 잘못이지." 마, 많다. 일일이 답해주는 여동생도 대단하지만, 어떻게 사안이 전부 그 모양이냐. 그러나 불량배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바로. "약한 사람을 주먹으로 때리기는 싫으니까." 이것이었다. 그 말이 나온 순간, 모든 불량배들의 표정이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무기를 들었고, 여동생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했다. 하나도 당황하지 않는다. 하긴 그러니까 여동생이지만, 너 정말 여자 애 맞는 거냐? '이제부터 어쩌려고.' 그녀는 다시 담임 선생님을 쳐다본다. 설마. "선생님. 어떻게 해요? 싸워요? 달아나요?" 너, 끈질기다. "야 ! 아까부터 왜 자꾸 그 질문만 하는 거야 !" 더 이상 못 참겠다. 이유나 알자. 나는 여동생에게, 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량배들조차 걸음을 멈추는 걸 보니, 그들 역시 그 점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냥 패면 되지, 왜 굳이 선생님의 허락이 필요한 건지. 그럼 담임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까.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은, 선생님에게도 꽤 힘든 모양이다. 평소에 수업할 때의 학생들의 눈동자와는 전혀 다르게, 악의와 비열함에 가득 찬 눈초리들이라니. "그, 그건." 선생님. 혹시 딜레마에 빠지신 겁니까. 교육자로서 '때려라'라고 한다면, 폭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평소의 가르침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때리지 말고 달아나라'고 한다면 우리 처지가 난처해지고. 확실히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이상보다는 현실이 우선이니, 선생님도 아마. "가, 가급적이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결국 타협이십니까. 아니면 이상이 현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물론 교육자로서 '불량배들을 쥐어 패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실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상을 내세우다가 현실이 망가지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에 대한 답은 여동생이 내주었다. "선생님. 지금 상황으로는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은데요." 하긴 지금 그들이 외치는 말들은 하나같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악을 타도하자 !" "악의 괴수를 무찌르자 !" "도시의 평화를 위해 악녀를 쓸어내자 !" "싸우자 !" "싸우자 !" 자. 그럼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까. 은근히 선생님에게 도덕적 결단을 강요하는 미인이. 생각보다 집요하다. 이건 자기합리화를 위해서일까. 나중에 선생님에게 과도한 폭력을 휘둘렀다는 추궁을 받지 않기 위함일까. 담임 선생님은 결국. "그럼........... 도망가 !" 네?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우리 담임은 여동생이 날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따라서 그녀가 평범한 소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거, 터무니없는 착각이라는 걸 모르시는군요. 선생님. 게다가 그러면. "선생님. 너무 위험해요. 저 저질들이 선생님한테 손이라도 대면 어떻게 하시려고." "난 괜찮아. 이래 보여도 명색이 선생인데, 제자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어." "이미 충분히 말려들었는데요.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는 여동생. "이 녀석들은 어차피 미성년자니까, 법에 호소해봐야 처벌이란 고작 훈방이라고요. 우리나라 국해(害)의원들의 성향으로 보아, 가해자를 피해자보다 보호해주는 그들의 전통으로 봐서는 도무지 견적이 안 나오는데요." 그런 진실을 폭로해도 되냐? 게다가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더더욱 막 나간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그냥 가면, 아마 두 분 선생님들은 지금부터 내일 밤까지 성폭행 당하지 않을까요? 여자로서 그런 꼴을 보기는 곤란한데요. 경찰이 이런 일에 신속하게 출동할 것 같지도 않고." 우리나라 경찰을 무시하는 거냐.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오빠. 하지만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도 경찰은 안 오잖아." 삑. 내 입이 닫혔다. 도저히 할 말이 없다. 사실 이런 소동이 벌어지는데도 경찰이 고개조차 내밀지 않는 걸 보면, 불량배들 중에 국회의원 자녀라도 있는 것 같다. 이런. 나도 모르게 국해의원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르고 말았군. 여동생의 그 말이 맞았는지. "그래. 경찰은 어차피 여기 안 와. 우리가 네 년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릴 때까지 말이지." "하아." 한숨을 쉬는 미인이. 저 녀석도 나름대로 고생이 많구나. 하지만 잠깐. 경찰이 오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어쩌지? 난처해하는 담임 선생님의 옆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인아. 이 녀석들을 날려버려 !" 꼬마 선생님, 겉보기보다 상당히 과격하십니다. 깜짝 놀란 담임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지만, 꼬마 선생님은 단호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어. 나도 폭력은 싫지만, 세상에는 때려야 말을 듣는 녀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미연이 너도, 선생님 노릇을 하려면 각오해야 해. 미연이네 반엔 아직 저런 녀석이 없지만, 언젠가 불량학생을 선도하게 되면 그렇게 무르게 마음먹으면 안 돼. 미인아. 멋지게 한 판 해봐 !" 역시 겉모습과 실제는 많이 다르다. 저렇게 어리게, 연약하게 보이는 꼬마 선생님에게 저런 기백이 있다니. 여동생이 그 말에, 만족스럽게 대답한다. "네." 그 대답을 기다리기까지 자제한 것은, 그녀가 너무 몸을 사리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선생님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였을까. 그녀는 서서히 양손을 좌우로 벌렸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야. 맞기 싫으면 당장 달아나는 게 좋아." 드디어 여동생이 나 이외의 인간에게 주먹질을 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도 달아나지 않는다. "드디어 네 년과 정면으로 승부할 수 있게 되었는데, 누가 달아 나냐." "도망치는 재주가 없으면, 나 혼자서도 이길 수 있어." "드디어 네 년을 무릎꿇게 할 수 있는 찬스인데, 왜 도망 가냐." "하하하. 너도 오늘로 끝장이다." 벼르고 벼른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사람을 납치하고 인질극을 벌이지. 여동생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다. "알았어." 불량배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진다. 하지만 그 환성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하필이면 여동생이 그 다음에 한 말이. "하지만 덤비려면 무더기로 덤벼 줘. 힘도 없는 애들이 하나씩 덤비면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귀찮아." 그 말이 뭔가를 폭발시켰다. 불량배들의 고함이 광장을 메우면서, 그들은 일제히 미인이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나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담임은 비명을 지르고, 꼬마 선생님은 주먹을 쥐고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걸릴까.' 여동생의 실력으로 보아, 그들을 못 물리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만 어떻게 물리치느냐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바탕 활극을 기대했던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활극이라면 좀 시간이 걸려야 할텐데. 딱딱딱딱딱딱딱. 일곱 번의 소리가 들렸다.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과거 미국에서는 서부영화라는 장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미국이 세워진 북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마구 몰아내던 시절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원주민들은 실제와는 정반대의 성격과 행동을 보여주도록 그리는 것이 법칙 중 하나였고, 백인중의 악당은 반드시 정의의 보안관이나 무법자에게 처단 당하도록 만든,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류로 가득 찬 작품들이었다. 물론 이것도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예외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런 영화에 나오는 백인 주인공은 반드시 멋들어지게 총을 휘둘러 악당들을 처치했고, 석양을 배경으로 하여 말을 타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말야. '그런 영화의 주인공은 남자라고.' 물론 서부영화 자체가 오류로 가득 찬 물건들이니 - 편견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량했던 원주민들이 살인귀로 매도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 그걸 꼭 지킬 필요야 없기는 하지만. 그런데 왜 서부영화 이야기를 하냐고? 여동생이 불량배 일곱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수법이, 서부영화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아, 아냐 ! 왜 미인이가 '정의의 사도' 역할을 맡는 거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 내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일은 어차피 벌어졌고, 여동생은 느긋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불량배 일곱 명이 사지를 떨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진 모습을 감상하며. 그런데 저건. "총이다 !" 불량배들의 동작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량배들이 예상한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칼이나 쇠파이프 같은, 접근전에 적합한 무기로 무장했고, 우리나라는 총기소유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 적어도 10대 소녀가 총을 쉽게 입수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 이런 식의 대응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야. "저 녀석이 평범한 10대 소녀일 리가 없잖아." 그게 문제였다. 어쨌든 미인이는 '총'을 꺼냈고, 불량배들은 갑자기 우세에서 열세로 돌변했다. 누가 총을 맞고 죽고 싶겠냐. 게다가 저 총의 외양으로 보아, 저건 아마. "왜 저 녀석이 MP5를 들고 있는 거야?" MP5. 독일의 유명한 총기회사인 H&K에서 만든 제품으로, 테러리스트들을 무찌르는 대테러부대에서 주로 애용하는 총이다. 기관단총의 일종인데, 정확도가 매우 높아서 인질과 테러범이 같이 있을 경우 테러범만 사살하는데 유용하다고 한다. 잠깐. 총기 설명을 떠올릴 때가 아니지. 세상에나. "야 ! 총을 들고 오면 어떻게 해 !" 세상에. 총이라니. 아무리 불량배들 상대로 쓴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저 녀석이 식칼이나 프라이팬을 무기로 썼다면, 나도 이해할 것이다. 물론 식칼은 좀 그렇지만. 하지만 총이라니 ! 하필이면 총이라니 ! 그것도 대테러부대가 쓰는, 기관단총을 가지고 오다니 ! 어디서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번에는 수습할 수 없는, 큰일을 저지른 셈이다. 이미 불량배 목숨이나 납치극이 문제가 아니다. 이 사태로 보아, 내일쯤이면 경찰에서 '그 총을 어디서 입수했냐'라는 질문을 퍼부을 것이고, 잘못하면 경찰특공대도 출동할 것이다. 아냐. 어쩌면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에서 나설지도 몰라. 그러나 내 생각이 거기까지 날아가기 전에. "오빠. 이건 단순히 6mm BB탄을 쏘는 장난감 총이라고. 진짜가 아냐." 그,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이제 경찰특공대나 특전사에서 여동생을 잡으러 나오는 일은 없겠구나. 하긴 아무리 내 여동생이 대단하다고 해도, 진짜 총을 휘두르진 않겠지. 암. 그럼. 그렇고 말고. 그러나 안심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불량배들 역시, 총의 등장으로 얼어붙었다가 '장난감'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시 사기를 드높인 것이다. 불량배 두목의 선창. "그럼 겁먹을 거 없다. 전원 돌격 !" 두목이 나서니 졸개들도 나선다. 어쨌든 기세 하나는 좋다. 아까는 혼비백산했던 주제에. "저 건방진 년을 죽이자 !" "악녀를 박살내자 !" "저 년을 부수고 정의사회를 구현하자 !" "구현하자 !" 역시 불량배답게, 도저히 바람직하지 못한 구호만 골라서 외친다. '정의사회구현'이 뭐냐. 그건 과거 전설의 독재자였던, 대머리 아저씨가 자주 썼던 구호가 아니냐. 하긴 불량배들의 역사의식이 높을 리가 없지만. 어쨌든 불량배들은 다시 돌진해 들어왔고, 여동생은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너희들, 눈이 나쁘구나?"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발아래 나동그라진 일곱 구의 시체 - 시체 아니라니까 ! -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매서워지며, 왼손에 또 하나의 MP5가 들렸다. 이걸로 여동생은 쌍권총의 사나이, 아니 쌍권총의 여고생이 된 것인가. 아. MP5는 권총이 아니니, 쌍기관단총의 여고생? 이런 쓸데없는 호칭에나 신경 쓰는 나를 노려보는 여동생. "정말 오빠 여동생 하기도 힘들다니까." 그리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드디어 일이 터지자, 담임의 표정은 새하얗게 얼어붙었고, 꼬마 선생님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은 느긋한 마음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어차피 여동생이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전투장면을 구경이나 하면 족하니까. 어차피 묶여 있어서 도와줄 수도 없고. 게다가 내가 도와준다고 설쳐봐야, 오히려 방해만 될 게 분명했다. 뭐? 여동생을 너무 믿는다고? 당신이 한 번 저 여자한테 당해 봐라. 매일매일 맞고 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리고 그런 내 기대는 훌륭하게 보답 받았다. 받았지만. 받았지만. "와아." 이건 꼬마 선생님의 대사. 그리고.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담임 선생님의 대사. 그리고. "끄아. 말도 안 돼." 이건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불량배의 대사였다. 그런 대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게 말야. "이게 어디가 전투냐." 아무리 우리편이 이기는 게 좋다지만, 이건 뭔가 이상할 지경이다. 원래 싸움이라는 건 양쪽의 전력이 비슷비슷해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데, 이건 한쪽이 지나치게 우세하다. 누가 우세하냐고? 당연히 여동생밖에 더 있냐 ! 물론 불량배들은 칼이나 도끼, 쇠파이프나 각목, 야구방망이로 무장했고, 여동생은 총으로 무장했으니 당연히 여동생 쪽이 화력에서 우세하기야 하지만, 저건 장난감 총이라고 ! 세상에 BB탄을 쏘는 총이 저렇게 무서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BB탄이라는 건 고작해야 6mm의 직경을 가진 플라스틱 공에 불과한데, 그런 공 한 알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파괴력을 보여주다니. '국회의원들이 보면 장난감 총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법안을 낼 거야.' 물론 보통의 BB탄 사용총은 절대 저런 위력이 안 나온다. 단지 미인이가 가진 총이 이상하게 센 거다. 뭐? 그래봐야 장난감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당신이 한 번 맞아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여동생이 총을 쏠 때마다. "윽." "큭." "켁." BB탄 한 방으로 불량배 하나가 쓰러진다. 아직 봄이라서 불량배들도 옷은 든든히 입었고, 육박전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의 방비는 해두었을 텐데, 그런 건 말짱 헛일이다. 한 방으로 상황이 끝난다. 저거 혹시 BB탄이 아니라, 진짜 총탄이 아닐까. 일단 피가 안 튀는 걸로 봐서 진짜는 아닌 것 같지만, 아냐. 아냐. 혹시 저 녀석이 총에 소음기를 달았고, 지금이 밤이라서 피가 안 보이는 건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여동생의 '장난감 총'은 위력이 있었다. 세상에나. "우아악 !" 각목을 휘두르려던 불량배를 향해 사격하는 여동생. 그리고 BB탄이 각목에 맞자, 세상에나. 각목이 뒤로 밀렸다. 말도 안 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안 믿었을 거다. 불량배 역시 뜻밖의 사태에 당황해서 움직임을 멈추었고, 그 즉시 또 한 발의 BB탄이 그의 가슴에 명중했다. 발랑 뒤로 자빠져서, 그대로 기절하는 불량배. 한심한 녀석 같으니. 그런 거에 맞고 기절하는 거냐고 하고 싶지만, 휘두르는 각목을 멈추게 할 수준의 위력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말야. 저런 건 불법무기의 범주에 속하는 거 아닌가? "이, 사나이의 전투에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하다니." 불량배 두목이 이를 갈며, 단검을 들고 돌격했다. 그러나 여동생에게는 그 역시 피라미일 뿐이었고, 그녀는 미소까지 지어주며 대꾸한다. "난 사나이가 아닌 걸?" 그리고 불량배 두목 역시, 여동생의 총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아. 안 죽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영락없이 시체인 걸. 두목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셈이다. 고작 장난감 총에 맞아 쓰러지다니. 이미 절반 이상의 불량배들이 여동생의 총에 맞아 죽었고 - 안 죽었어 ! - 남은 자들은 이제 슬슬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건 절대로 장난감 총이 아니다. 진짜 총알만 안 쓰지, 완전히 살상무기다. 게다가 6mm의 직경을 가진 BB탄은 탄창 하나에 수 백 개씩 넣는 것이 가능했고, 따라서 여동생의 총은 밑도 끝도 없이 총알을 뿜어냈다. 그 결과. "사람 살려 !" "저건 마녀다 !" "장난감 총이 아니었어 !" "도망가자 !" 나를 감시하던 불량배까지도,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 명의 불량배가 끝까지 저항을 시도했지만, 순식간에 여동생의 총에 진압되었다. 저 녀석들, 나와 싸울 때는 날아다니더니, 여동생과 싸우니까 기어다니는구나. 한심하다. 모든 상황이 끝났을 때, 광장에 서 있는 사람은 나와 꼬마 선생님, 담임 선생님, 그리고 여동생뿐이었다. 주위는 피만 안 보였지, 완전히 전장을 방불케 했다. 시체들이 끝없이 널려 있고,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체 아냐 !" 여동생의 항변이 광장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어쨌든, 상황 끝 !" 여동생은 자신이 들고 있던 총 두 자루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자신의 잠바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런 무식한 녀석 같으니. 이 상황에서도 폼을 재는 거냐. 게다가 저 모습은 완전히 영화의 주인공이다. 정말 못 봐 주겠다. '그래. 너 잘났다. 네가 최고다.' 카아악. 이런 폭력배 여동생 같으니. 어떻게 백 명은 족히 되는 불량배들을, 이렇게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는 거냐. 여동생이 나에게 다가오는 걸 보면서, 나는 질린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못 말리는 여동생이라니까. 그런데. "선생님. 괜찮으세요?" 담임 선생님은 직접 싸운 것도 아니면서, 완전히 얼이 빠졌다. 자신이 맡은 반의 학생이 이런 괴물이라는 걸 아셨을 리가 없으니까. 반면에 꼬마 선생님은. "굉장해. 미인아. 최고였어." 그렇다고 엄지손가락까지 세우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주위의 상황은 영 아니었다. 사방에 널려있는 불량배들의 시체. 시체. 시체. 지옥에 나올법한 악몽이다. "시체 아니라고 !" 다들 멀쩡히 살아있지 않느냐는 여동생의 항변을 무시하고, 나는 불량배들의 시체를 살폈다. 상처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입에 거품을 흘리는 시체들이라니, 꿈에 볼까 겁난다. "이거 119 구조대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다친 사람 없으니까 안 불러도 돼." 팔짱을 끼고, 쓰러진 깡패들을 바라보는 여동생.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 여동생이라는 인간의 진면목이다. 그리고 이런 점이 난 싫다. 보통 여자아이는 이런 상황에서는. "꺄악. 누가 도와줘요."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건 그런 맛이 전혀 없잖아. 아무리 안 다친 게 다행이라지만. 물론 이게 배부른 소리라는 건 안다. 그래도 이건 좀. 그 생각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만. "불쌍하네. 어쩌다가 여동생의 마수에 걸려서." 그 말만큼은, 절대 그 말만큼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 말을 입밖에 내고 말았고, 그 결과는 자명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여동생. 그리고. "뭐가 여동생의 마수야 !" 퍼억. 나는 여동생의 발길질에 맞아, 그대로 나뒹굴었다. 이 녀석, 하필이면 중요한 부분을 차냐. 나는 고통 속에서 불량배들의 공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5화 세상은 여동생을 중심으로 돈다 (1)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그 날 밤의 악몽이 끝난 후 나는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비교적'이다. 선생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다음주부터 시험이에요. 범위는 오늘 배운 데까지, 과목은 체육을 제외하고 전 과목." 처음에 모든 학생들이 느낀 것은 감탄이었다. 물론 시험을 본다는 것에 그런 느낌을 가진 게 아니고, 선생님이 그런 전달사항을 기억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다 ! '잊어버리실 줄 알았는데.' 분명히 시험보기 전날은 되어서야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모두의 표정이 잠시 경탄의 빛을 띄었다가, 곧바로 우거지상으로 바뀌었다. 당연하지만, 시험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 있겠냔 말이다. 모처럼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뭐? 여동생이 존재하니 평온할 수가 없다고? 그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동생의 난동을 제외하면, 상당히 조용한 나날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불량배들도 조용하고.'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녀석들 덕분에 나는 시험을 망쳤으니까. 물론 그들의 탓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축구부 선배들의 훈련을 빙자한 기합, 그리고 폭력배 여동생의 탓이 더 컸다. 사람을 샌드백으로 착각한 여동생의 행각 덕분에, 나는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오죽했으면 선생님들이 말렸을까. "미인아. 오빠 좀 때리지 마라. 이러다 죽겠다." 그러나 그 다음의 여동생의 말에, 두 분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녀가 한 말은. "애정표현인데요." 사기 치지 마 ! 그게 어디가 애정표현이라는 거냐 ! 나는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이 여동생은 언제나 내 예측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갑자기 나를 잡고는. 쪽. 내 뺨에 입술을 들이댄 것이다. 게다가 날 또 끌어안고 ! 이 녀석, 날 끌어안는 데 재미 붙인 모양이다. 뭐? 그렇게 예쁜 여동생의 품에 안겨놓고,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네가 한 번 끌어 안겨 봐. 치사하게 끌어안으면서, 허리 조이기를 하냐 ! 버둥거리는 나를 보면서, 여동생은 싱글벙글 웃는 거다. 악마의 미소였다. 그건. "앞으로는 이렇게 애정표현을 할까? 오빠." "절대 하지 마 !"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기절했었다. 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결국 그 덕분에 나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고, 그 다음날의 시험은 완전히 죽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하하하. 어지간히도 공부를 못하는군." 풍남이가 내 성적을 보고 기고만장, 잘난 척하는 꼴을 봐야 했을까. 그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시험을 본 후 나는 집에서 부모님께 불려갔고, 죄인처럼 온갖 꾸중을 다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음 시험도 이렇게 망치면, 축구부에서 탈퇴해라." 부모님의 주장은, 축구 따위는 대학에 들어가서 해도 되며, 지금은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축구선수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축구도 안 하면, 대체 어떻게 국가대표가 되라는 거지? 물론 두 분은 내가 본격적으로 축구의 길로 가는 것에 철저하게 반대하신다. 학생은 공부가 우선이라는 거다. 반론은 통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축구선수를 해서 쌀이 나오니. 돈이 나오니. 그저 지금 세상에서는 의사가 되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게 최고야." 이건 아바마마의 주장. 그리고 어마마마는. "좋아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하려면, 운동선수보다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는 게 좋아.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을 보다 순탄하게 꾸려갈 수 있는 바탕은 되니까." 기본적으로 두 분은, '축구선수 연 문구'라는 미래는 극히 부정적인, 있어서는 안 되는 미래로 여기시는 거다. 아들이 그렇게 되는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강제로라도 축구부에서 쫓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두 분에게서 느껴졌다. 뭐? 그래서 내가 축구부에서 억지로 탈퇴해야 했냐고? 그랬으면 평온한 나날이라고 할 수 없겠지. 그 위기를 넘어간 것은 하필이면. "저. 오빠는 시험 전날에 납치 당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는데요." 여동생의 지원사격에 힘입은 탓이었다. 이런 사나이의 수치가. 저런 날강도 폭력배, 깡패 100명을 때려눕히는 계집애한테 도움을 받다니. 물론 여동생은 자기 주먹으로 때린 게 아니라고 항변하겠지만. "총이 뭐야. 총이." 어쨌든 여동생이 나를 도와준 덕에, 부모님은 조건부로 내 축구부원 생활을 허가하셨다. 그것은 즉, 다음 시험까지 전교 100등, 아니 50등 이내에 들어가라는 거다. 말이 안 된다고 항의해봐야 소용없다. 이건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이기도 하니까.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만큼 공부 잘하는 운동선수가 어디 있어 !" 일단 이번 시험이야 망쳤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중학교 때는 언제나 전교 100등 안에 들었고, 반에서도 5등 이내의 성적을 거두는 모범생이 바로 나다.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는, 선생님에게는 꿈의 학생이라고 할까. 평소에 그런 성적을 거두기 때문에, 부모님도 내 장래에 대해 기대하고 계시는 것이고, 당장 축구부에서 탈퇴시키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내가 잘났어도,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그런 내 능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 "사악한 여동생 같으니." 미인이의 실력이 문제였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서 전교 100등 내에 든다고 해도, 언제나 전교 10등 내에 드는, 더불어 반에서 1등을 놓치는 게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여동생이 바로 코 옆에 있는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건 사기다. 어째서 저 녀석은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 거야. 게다가. "그 난리를 치르고 나서도 전교 1등이라니." 물론 여동생은 축구부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달리 공부할 시간이 남아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집안 일도 있고, 깡패들을 때려잡느라 몇 시간은 소비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잘한 거지? 이것도 여동생의 신비인가. "그래도 오빠도 지난 시험에선 101등이었잖아." 그게 위로냐. "오빠. 오늘도 축구부에 가는 거야?" "응." 아마 앞으로는 공부를 더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일단 내 꿈이 축구선수이니, 축구부에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치사한 인간들만 모여 있다고 해도, 나는 계속 거기에 간다. 사실 그런 꿈이 없다면, 내가 미쳤다고 그런 정신나간 인간들한테 가겠냐.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무래도 꿈을 이루기 힘들 것 같았다.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건. "오빠. 왠지 피곤해하는 것 같은데?" 눈치 빠른 녀석.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괜찮아." 죽어도 이 얄미운 여동생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뭐? 어차피 매일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그야 여동생한테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 ! 명색이 친오빠인데, 그런 짓을 어떻게 하냐 ! 어쨌든 나는 활기차게 교실 문을 나섰고, 축구부실로 향했다. "오빠." 여동생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지우. "아. 정말 착한 여동생이야." "어디가?" 평생 도움이 안 되는 친구로 보이는, 지우 녀석의 말은 신용할 수가 없었다. 이 녀석도 역시 축구부원이라서, 속이 시커먼 것일까. 그게 아니면 원래 멍청해서 그런 것일까. 녀석의 발은 축구부실로 향하는데, 녀석의 눈동자는 미인이를 쫓고 있다. "걸으려면 앞을 봐라. 앞을. 그러다가 넘어진다." "하하하. 뭐 그럴 일이 있겠냐." 지우 녀석에게 아무리 주의시켜도, 이 녀석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마 언젠가 큰일을 당할 거야. "그럼 문구야. 연습 열심히 해라." "너도 열심히 해라."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나는 보통 1학년들과 달리 따로 연습을 하고 있다. 내 체력의 어디가 약하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도 선배들에게 잡혀서, 운동장을 돌게 되었다. 정말 축구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독한 녀석 같으니." 이런 선배들의 저주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나는 열심히 달린다. 어쨌든 나는 축구를 좋아하니까. 비록 아무도 내 꿈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린다. 이건 어릴 때부터 내가 원했던 것이니까. 그래서 이것이 비록 악질적인 후배 괴롭히기의 일환이라도, 축구 연습인 이상 즐겁다. 이상한 녀석이냐고?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니까 즐길 수가 있는 거다. "이제 세 바퀴." 이걸로 운동장을 세 바퀴 째 돌고 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즐겁다. 운동이 끝나면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언젠가는 국가대표가 될 것이다. 저 멀리에 월드컵이 보인다. 아자 ! "오빠. '아자'가 아니잖아?" 달리던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저 소리는, 설마. 순간적으로 내 다리가 굳어버렸다. 이곳에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인간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설마, 그 요사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설마. 나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했지만, 귀마개가 없으니 그 목소리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저 녀석이 여기에 왜 온 거야? 나는 어떻게든 현실도피를 하려고 했으나. "오빠. 사랑스런 여동생이 왔는데, 돌아보지도 않아?" 그렇게 꼭 찍어서 말해야 하니?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어쨌든 축구부의 선배들은 여동생을 잡아먹고 싶어서 언제나 흉계를 꾸미고 있고, 그래서 나는 축구부에 절대 나타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었다. 물론 내가 말한다고 이 녀석이 들을 가능성은 없지만. "너, 왜 왔니?" 어느새 내 주위로 몰려든 축구부 선배들이, 입에서 침을 좔좔 흘리며 내 여동생을 쳐다보고 있다. 이 인간들이 좌우지간,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있어. 일단 그런 선배들은 무시하고, 나는 여동생에게 집중했다. 내가 그토록 말렸는데, 내가 말리는 이유를 그토록 잘 아는데 왜 여기에 나타났을까?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왜, 왜 그런 눈길을 하는 거냐.'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저 얼굴. 내 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뭐라고 하지 마라.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그리고 이 녀석이 선배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 머리가 국회의원 세비 인상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돌아가는 중에, 여동생이 하는 말. "오빠. 테스트는 안 해?" 에? 엉뚱한 말에 내 머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테스트라니?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선배들의 얼굴빛이 달라지는 게 보인다. 이거, 무슨 음모가 자리하고 있는 거지? "몰랐어? 오늘 축구부 1학년 중에......." 아니. 이 인간들이. 이 선배들이, 난데없이 여동생에게 더러운 손을 뻗치는 것이다 ! 그것도 굉장히 절박한 듯이. 그러나 그들의 재주로 여동생을 잡는다는 것은, 예시당초 무리였다. 나보고 느리다고 하더니, 선배들은 더 느리다. 그들이 허공에 헛손질을 반복하는 동안, 여동생은 모든 것을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 주전선수를 선발하기 위해 체육관에서 테스트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오늘 연습은 중지라고 하던데?" 뭐야? 그 말은 내가 얼음덩어리가 되어, 내 몸을 파묻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 선배들이 오늘 나를 연습시킨 것은. 설마. 선배들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분함과 낙담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믿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실망했다. 괴롭히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선량한 후배를 이런 식으로 농락하다니. 나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즉시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끝까지. "어림없다 !" 그들은 내 앞을 막아섰다. 절대로 나를 체육관에 보낼 수 없다는 태도다. "네가 주전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 그게 당신들의 진심이었습니까. 마지막까지 선배들에게 품고 있던, 존경심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게 성실하게 연습하는 후배를 대하는 태도였나요. 눈물이 나온다. 이런 모습, 여동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얌전히 포기해라. 넌 절대로 주전이 될 수 없으니까." "네가 주전이 되게 놔둘 줄 아느냐." "넌 그저 후보로만 있는 게 나아." "그게 싫으면 저 계집애를 우리에게 바쳐라." 장래의 꿈이 축구선수만 아니었다면, 당장 부를 탈퇴하고 저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짓눌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권력자는 저들이고, 나는 그 밑에 짓밟힌 약자이다. 맞서 싸우려고 해도, 혼자서 저들을 모두 뿌리치고 체육관으로 달리는 것은 너무 어렵다. 지금 갔다고 해도, 이미 테스트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다. 그랬다간. '저 녀석들만 좋아할 거야.' 나는 저 선배들, 아니 쓰레기들의 방해를 물리치려고 했지만, 내가 좌측으로 달리자 이 인간들은 일제히 좌측을 막아선다. 우측으로 달리니까 일제히 우측으로 몰려온다. 내가 체육관에 가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 하겠다는 의도이다. 내가 왜 이런 쓰레기들에게 원한을 산 거지? 난 적어도 선배들에게 마구 대들지 않았는데.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려는 나에게. "오빠 ! 이리로 와 !" 내 손을 잡아끄는 여동생.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선배들의 눈동자가 험악해진다. "어딜 도망가려고 !" "이번에야말로 네 년을 자빠뜨릴 테다 !" "지난번엔 용케도 빠져나갔지만, 오늘은 어림없다 !" 뭐야. 역시 여동생과 관련된 원한인가.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생각을 정돈하지 못하는 나를 낚아챈 그녀는, 재빨리 체육관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배라는 이름의 쓰레기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쫓아온다. "거기 서라 !" "연습은 안 하고 어디로 튀는 거냐 !" "네가 주전이 되면 우리 학교 축구부의 자질이 의심받을 거다 !" "그 년의 오빠라는 작자가 주전이 되게 놔둘 수는 없다 !" "고 계집애가 기뻐하는 꼴은 못 봐준다 !" "죽어라 !" 뭐야. 이거. 역시 여동생 쪽의 원한이었어. 그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일사불란하게 내 앞길을 막아섰다. 축구를 하면서 많이 단련된 솜씨다. 아마 수비수 출신들인가 보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내가 아니라, 나를 끌고 다니는 여동생이었다. 과연 그들이 여동생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안 될걸.' 그게 됐으면, 여태까지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을 리가 없겠지. 여동생은 여유 있게 미소를 짓더니. "후회하지 말고, 그냥 물러나는 게 어때요?" 물론 그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여동생을 잡기 위해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여동생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자가 어떤 최후를 맞는지는 경험으로 잘 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들에게 달려오는 것은. "으악." "차다 !" "차다아아아 !" 이봐. 너. 그 패턴 좀 바꿀 수 없냐?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불량배들을 물리치는 패턴이 하나도 다를 게 없냐. 그러니 고의로 그런 게 분명하다는 의심이나 사지. 어쨌든 그들에게 달려오는 것은, 거대한 리무진이었다. 어째서 모든 리무진은 검은 칠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수입품으로 보이는 리무진은 쓰레기들을 덮쳤다. 물론 그 차의 운전사께서 우리를 발견하고 다급히 핸들을 좌측으로 꺾기는 했지만. 쾅. 우당탕. 아. 쓰레기들이 다치거나 죽었냐고?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랬으면 기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단지, 눈앞에 들이닥친 리무진이 급정거하면서 운동장 바닥을 긁는 바람에, 약간의 먼지와 흙을 뒤집어쓰기만 했다. 땅바닥에 넘어져 나뒹굴면서 말이다. 꼴 좋다. 남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기만 하더니. 박장대소를 하고 싶지만, 그럴 틈은 없다. 멍하니 구경만 하는 나에게. "뭐 해. 오빠. 빨리 가야지." 나는 여동생에게 이끌려, 체육관으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체육관에 들어갔을 때, 안에서는 한참 체력테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대기중인 축구부원들 사이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야 ! 넌 자격 없어. 나가 !" 헐레벌떡 뛰어온 쓰레기 하나가, 나를 가로막았다. 리무진에 그냥 팍 치일 것이지, 왜 여기까지 살아와서 날 괴롭히는 거냐.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굳은 결의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생일대의 꿈을, 이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것 같으냐. "비켜." "어림없다." "난 테스트를 받을 거야. 비켜." "선배한테 어딜." "고의로 테스트도 못 받게 하는, 그런 비열한 선배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 체육관 한가운데에서 나와 쓰레기가 서로 버티는 모습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쓰레기의 저지를 뿌리치고 축구부원들에게 걸어갔고, 쓰레기는 내 어깨를 짚었다. "다리가 부러지면 테스트 소리도 못하겠지." 이 자식이. 내가 그를 험악한 눈으로 돌아보는 순간. "거기 뭐야?" 3학년생으로 보이는 축구부 선배가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떡 버티고 서더니. "무슨 일로 여기 왔나?" "네. 축구부 주전선발 테스트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차려 자세로 대답하니까, 완전히 군대 훈련병 같지만, 뭔가 느낌이란 게 있다. 지금까지의 쓰레기들과는 전혀 다른, 그런 인간으로 보였던 거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는 보답을 받았다. 적어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으니까. "1학년생인가? 시간이 좀 늦었는데?" "오늘 테스트한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어제 분명히 1학년생들에게 알려주라고 지시했었는데?" "못 들었습니다." "어제 부실에 안 왔나? 2학년들이 알려줬을 텐데?"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테스트를 못 받게 하려고.......읍 !" 기습당했다. 쓰레기가 내 입을 막으니까 구역질이 나잖아. 문제의 쓰레기는 그 3학년생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은 연습도 안 나오고, 선배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녀석입니다. 곧 교육시키겠습니다. 주장." 이 작자가. 내가 폭력으로라도 그를 물리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쓰레기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움켜잡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자세히 보니. "잘해봐. 오빠." 어느새 나타난 여동생이, 그의 발을 힘껏 밟아준 것이다. 잘했다. 미인아. 모처럼 칭찬해주마. 내가 다시금 내 할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안 됩니다. 주장. 이 녀석은 자격이 없습니다. 실력이 형편없어요." 발은 밟힌 주제에, 그는 포기를 모르는 모양이다. 어떻게든 나를 물고늘어지는 쓰레기의 행각에 나는 분노했지만, '주장'이라 불린 3학년생은 그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내가 판정하는 거다." 와. 멋진 말씀 ! 드디어 선배 같은 선배를 만난 것인가. 나는 의욕을 한껏 내 몸에 불어넣었다. 이제부터 평소에 연습한 결과를 보여주는 거다. 그러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주장. 이 녀석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건가. 그러나 주장이 한 번 째려보자, 그 쓰레기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주장이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더니. "실력이 형편없는지, 아닌지 보여 봐." "와. 붙었다. 붙었어." 좋아서 방방 뛴다고 너무 타박하지 마라. 이제부터 나도 축구부 주전선수가 되었단 말이다. 기뻐서 환호하는 나를 보며, 주장은 미소를 머금었고 주전이 된 1학년생들은 박수를 쳐주었으며 대부분의 주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번에 테스트에서 떨어진 1학년생들도 축하를 해주었다. 모든 것은 내가 그들에게 인정받을만한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크기는 컸다. 그 누군가가 없었으면, 나는 오늘 테스트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테니까. 그 누군가가 나를 포옹해온다. "오빠. 축하해." 이번에는 허리 조르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 점에 안심하며, 나는 방방 뛰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안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 넘어간다. 다만 마음에 안 드는 건. "하하하. 나도 붙었는데, 미인아. 축하해주지 않을래?" 이 못된 지우 녀석.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오늘 테스트가 있는데도 나에게 알려주지도 않았지 ! 박살내버릴까 하다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주전이란 말이다 ! 꿈에 그리던 주전선수가 되었던 말이다 ! 물론 중학교 시절에도 주전선수이기는 했지만, 축구명문인 대업고등학교의 주전선수가 되는 것은 의미가 또 달랐다. 이제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나도 국가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내 가슴을 부풀어오르게 했다. 아. 절대 여동생처럼 가슴만 큰 괴물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도 따라오는 법. 모든 이가 내가 주전이 된 것을 축하해주지는 않았으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저런 녀석이 주전이 되면, 팀웍이 흐트러집니다." "주장. 이 결정만은 제발." 아까 여동생에게 감히 대들었다가, 흙먼지 속에 나뒹군 쓰레기들이 다시 나타났다. 참 악착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인내심이 있다면, 그 힘으로 축구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주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테스트는 끝났어." 오호. 멋진 주장. 정말 존경할만한 선배가 축구부에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죽여버려 !"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면 되지." "저 계집애의 오라버니가 주전이 되다니, 수치다." 참 불만도 많다. 주장조차, 나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대체 왜 저래? 그러나 그 해답은 여동생이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저, 얼마 전에 총 맞은 사람들은 회복되었어요?" 히이익. 체육관의 모든 이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총이라니? 대체 이 아가씨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다만 그 말의 속뜻을 아는 나만이, 깜짝 놀랐을 뿐이다. 저 녀석이 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이 쓰레기들이 비록 질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 납치극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모두 입을 다문 가운데. "회복은 무슨 !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 "네 년의 그 총질 덕분에, 우린 개망신을 당했다고 !" "비겁하게 총이라니 !" 그런데 당신들 말야. 그 말이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거, 알아? 그들의 뒤에서 들려오는 맹한 아가씨의 소리. "뭐야. 나하고 영미를 납치한 녀석들의 배후가 너희들이었어?" 우리 담임의 말이, 그들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사실 우리 담임과 꼬마 선생님, 그리고 나를 납치한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면, 여동생이 (장난감)총을 휘둘렀던 그 일을 알 리가 없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자백해버린 셈이 되었고, 그들의 당황한 표정은 모든 이에게 그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 입을 다물려면 철저하게 해야지. 그렇게 쉽게 사실을 말해 버리냐. "너희들......." 주장이 기가 차서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쓰레기들은 이 상황을 만들어낸 원흉. 즉 여동생에게 원한에 찬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이렇게 되면 자신들은 무기정학을 당하는 게 확실하니까. 그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불행하게도 여동생이었다. "너희들 이제 죽었다. 감히 여동생에게 덤비다니."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체육관에 왔다가 납치범들을 만나 놀라고 있는 우리 담임도 수긍하겠지만, 저 녀석이 누구냐. '누구나 여동생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여동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 녀석은 보통 여동생이 아니라, 특별한 여동생이다. 말 그대로 지상최강의 여동생인 것이다. 저들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얼마 못 가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역사의 순리이다. 그걸 알면서 덤비는 건지. 모르면서 덤비는 건지. 나는 그들의 최후를 예상하고, 기다렸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는지. "바보." 역시. 여동생은 자신과는 상대도 안 되는 쓰레기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아니지. 어차피 여동생의 기관총...... 아니구나. 어쨌든 뭐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금새 쓰러져 갈 상대에게 동정해줄 인간은 아니지. 그녀가 상대를 동정했다면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을 것이고, 동정하지 않는다면 비정하게 박살내버릴 테니까. 그녀는 역시 여동생답게, 축구부 주장을 향해 몸을 빙그르르 돌리면서. "저, 이 축구공 좀 써도 되나요?" 난데없이 기습을 받은 주장은 당황했지만, 어쨌든 대답은 했다. 역시 3학년이야. ".........상관없지만, 왜?" 당황하는 건 이해가 간다. 그는 아직 내 여동생이 얼마나 황당하고 엉뚱한 인간인지 모르고 있으니까. 그녀가 이런 상황에 무엇을 원하고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앞뒤를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로선 별로 달갑지 않은데. '신성한 축구공을 구타에 쓸 셈이냐.'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것도 아니니, 나는 잠자코 있었다. 뭐? 여동생이 위험하니 오빠가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이봐. 저 녀석이 위험해지려면, 그 정도로는 안 돼. 불량배 100여명이 여동생에게 '감히' 덤볐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냥 구경만 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순식간에 정리해버리겠지. 쓰레기가 수 십, 수 백 명인 것도 아닌데. 여동생은 공을 자신의 발 아래에 놓고, 멋들어지게 기합을 넣더니. "야압 !" 내 여동생이지만, 정말 공을 차는 모습은 우아하다. 내가 가르쳐 준 것이니 당연한 건가? 일단 뭐, 여동생이니까 정확히 맞추겠지. 다만 죽이지나 않으면 된다. 아무리 징그러운 쓰레기들이라고 해도, 일단 사람이고 선배이니까 살살 대해주었으면.............이 아니잖아 ! 어디로 차는 거야? "방향이 다르잖아 !" 이봐. 이봐. 각도가 90도나 틀렸어 ! 내가 이렇게 외치든 말든 상관없이, 이미 차인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슛이 아무리 위력적이라고 한들, 처음부터 방향이 틀린데 쓰레기들에게 날아갈 턱이 있나. 산업폐기물들은 여동생의 엉뚱한 슛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동생이 공을 차면서 난 소리를 생각하면 몸을 움츠릴 만도 하건만, 명중오차가 너무 클 게 뻔하니까 안심해버린 거다. "후후. 축구공 차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았냐. 계집애." "오늘은 널 기어코 자빠뜨려 주마." 그런 말 안 하면 누가 잡아가냐. 쓰레기들은 기고만장하여 여동생에게 더러운 손을 내밀었다. 아니, 내밀려고 했다. 그러나 여동생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으니.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불량선배들에게 충고한 것이다.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아플 텐데?" 물론 그 말은 쓰레기들에게 '어서 날 덮쳐보세요'로 들렸고, 그들은 여동생에게 덤벼들었다. 나도 모르게 여동생을 구하려고 한 발을 디디는 나였지만. 펑. 그 소리가 나를 한낮의 착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 소리는, 다름이 아니라 여동생이 찬 축구공에 맞고 쓰레기 하나가 나가떨어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잠깐. 말이 안 되잖아 ! 여동생이 찬 축구공이 날아간 방향은 저쪽............. 그러나 축구부원의 소리가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UFO슛이다 !" 여동생이 날린 슛은 U자 모양을 그리며 방향을 틀어서, 그대로 쓰레기 선배의 머리통을 옆에서 후려갈긴 것이다. 저, 저럴 수가. 저게 얼마나 어려운 슛인데. 브라질 축구선수 카를로스가 1997년 프레월드컵에서 프랑스와 브라질이 맞붙었을 때 선보인 것이 바로 UFO슛이고, 그 슛으로 인해 그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알려졌었다. 그런 것을, 고작해야 고등학교 1학년생인 여자아이가 선보이다니. 아무리 저 녀석이 '여동생'이라지만. "괴물......" 저런 킥을 날리려면 공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차야 한다느니,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난 저런 거 못 찬다고 ! 아니, 전 세계의 어느 명문축구팀을 뒤져봐도, 저런 슛을 날릴 인간은 거의 없어. 워낙 충격적인 일격이어서 그런 건지, 그 슛은 불량선배들의 돌격을 그대로 멈춰 세우고 말았다. 그것이 던진 충격은 그만큼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축구부원들은 모조리 얼어붙어 버렸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전까지의 여동생의 행각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믿을 수 없어.' 내 여동생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탄하고 있었다. 공부를 나보다 잘하는 것도, 운동을 나보다 잘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운동 중에 '축구'는 제외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꿈, 내 인생이 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동생이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축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발휘되는 것이기에 나는 여동생에게 이런 저런 불만을 품으면서도, 한 구석에서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축구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나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여동생이 관심 없어하는 분야. 그리고 내가 여동생보다 잘한다고 생각되는 유일한 분야. 하지만. '분해.' 너무 분했다. 난 축구선수인데,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니, 그 사람이 세계적인 축구선수였거나, 하다 못해 축구부 선배만 되었더라도 내가 이렇게 동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하필이면 여동생이었고, 그녀는 축구선수가 될 꿈을 품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감정을 가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쓰레기 선배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여동생에게 돌격해 들어갔지만. '헛수고야.' 이미 결과는 결정되어 있었다. 축구부 테스트를 하는 곳에, 축구공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리가 없으니까. 여동생은 우아하게 다시금 오른발을 뒤로 젖혔고. 뻥. 축구공이 선배들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쓰레기들은 비참하게, 여동생에게 얻어터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의 가장 큰 특기인, 축구를 통해서 말이다. 여동생에게 덤비는 녀석들은 모조리 축구공에 맞아 나뒹굴었고, 그것은 앞으로만 다가간 녀석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옆으로 파고들려는 쓰레기를 향해. "회오리 슛 !" 저, 저것은. 난데없이 여동생의 몸이 빙그르르 돌면서, 그대로 축구공을 걷어찼다. 공이 대포알처럼 날아가더니, 그대로 한 방 맞고 나가떨어지는 쓰레기. 비참하다. 처참하다.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 명색이 축구선수라면서, 축구선수도 아닌 여자아이의 슛을 피하지도 못하냐. 물론 그 여자아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쓰레기들도 그 점은 인식했는지, 필사적으로 덤벼든다. 그러나 체육관은 넓고, 바닥에 널린 축구공은 많았다. 공 하나를 몰고 옆으로 비키는 여동생. 쓰레기들은 벽에 집단으로 부딪쳤고, 다시 일어서려는 자에게는. "바나나 킥 !" 공이 90도 가까이 회전하더니, 쓰레기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또다시 나가떨어지는 불량선배. 물론 이것은 아까의 UFO슛에 비해 충격은 적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아까는 오른발로 찼는데, 이번에는 왼발로 찼기 때문이다. 양발을 모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축구선수는 드문 편이고, 과거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를 4강에 올려놓은 히딩크 감독조차, 우리나라 선수들이 양발을 모두 자유롭게 쓰는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할 정도니까. 하지만 양발 모두 세계적인 수준이라니. 어차피 모두 충격을 받을 대로 받은 상태여서, 아무도 놀라지 않았지만. 하긴 이미 턱이 다 빠진 듯 하니, 놀라고 싶어도 놀랄 수 없을 거다. 그 다음 희생자는. "발리슛 !" 바나나킥을 날리자마자, 그녀는 오른발을 땅에 내려놓으면서 왼발로 공을 걷어찼다. 아냐. 아냐. 저건 오른발이 땅에 닿기 전에 때린 것 같아. 물론 날아오는 공을 그대로 때리는 게 발리슛이니, 저게 발리슛이라고 불리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저게 고등학생의 실력이냐. 그것도 상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몸을 피하면서, 그녀는 사정없이 슛을 연발로 날렸다. 이건 총 쏘는 거하고 별로 다를 게 없잖아. 아니, 어찌 보면 더 나쁘다. 저 쓰레기들이 아무리 산업폐기물 수준이라지만, 그래도 축구선수이고 자기 나름대로는 축구를 좀 해봤다고 자부했던 인간들이었다. 어쨌든 우리 학교는 축구 명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 '여자아이 한 명의 슛에 농락 당하고 있으니.' 만약 그들이 축구를 사랑한다면(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지만), 지금 죽고 싶을 거다. 나 자신은 지금 그런 생각만 드니까. 도대체 어떻게,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한 나보다, 내가 축구공을 가지고 연습할 때 옆에서 따라하기만 했던 여동생이 더 축구를 잘 하냔 말이다. 뭐? 슛만 가지고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저걸 봐라. 저걸. UFO슛이 나올 때부터, 이미 그런 소리는 물 건너간 거다. 모든 축구부원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꼼짝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아무도 여동생을 돕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모두의 생각이야 뻔하겠지. "UFO슛이야. UFO슛이야. UFO슛이야." 오로지 그 말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꼼짝못하고 있는 사이에. "대포알 슛 !" 썩은 선배 한 마리가 또 나가떨어졌다. 내 앞에서는 기세가 등등하더니, 여동생 앞에서는 지렁이처럼 기어다닐 뿐이다. 전에 불량배들과의 결전(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타)에서도 느꼈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크다. 아. 한심하도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저런 식이면 절대로 저 슛을 못 피한다. 지금 당장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더라도, 저 정도라면 충분히 세계무대에서 통용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다. 물론 여자는 규정상 남자 선수들과 같이 뛰면 안 되지만. '저걸 보면, 규정 바꾸라는 여론이 일어날지도.' 저 정도라면, 여자 선수들 사이에 끼워 넣기는 아까울 정도다. 만약 저 녀석이 남자로 태어났다면, 아마 세계 축구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될 테니까. 하지만 내가 지금 아쉬워하는 것은, 전혀 다른 점이었다. 저런 경지의 축구실력은 바로.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거라고 !' 저렇게 움직이고 싶어서 몇 년이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너무 분했다. 왜 별반 노력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여동생만 저렇게 뛰어난 거야. 그래.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공부나, 운동이나, 뭐든지 그랬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마지막으로 남은 내 영역까지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축구에 쏟아 부은 시간과 정열이, 모두 헛되게 여겨졌다. 그런 내 비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동생은 열심히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다. "한 번 더. UFO슛 !" 참 가지가지 다 한다. 이젠 무슨 슛인지 알아보는 것도 포기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금 얻어맞는 선배들이 정말 축구선수가 맞느냐고 비웃겠지만, 저건 쓰레기 선배들의 탓이 아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공이 옆으로 날아가다가 유도미사일처럼 갑자기 빙 돌아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데, 대체 어떻게 피하라는 거냐. 물론 피하려고 하는 녀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툭. 툭. 툭. 쾅. 사람을 속이는 기술에서도, 그들은 여동생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공이 이리로 갈지 저리로 갈지, 그녀는 툭툭 공을 차다가, 난데없이 공을 상대에게 날렸다. 저 녀석이 스트라이커가 된다면, 아마 운동장은 완전히 초토화될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저 녀석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헛된 저항을 반복하던 쓰레기 선배들도 모두 쓰러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쓰레기가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독수리 슛 !" 여동생이 걷어찬 공이 위로 올라갔다가, 난데없이 아래로 푹 꺼지면서 최후의 쓰레기를 후려갈겼다. 그는 맥없이 쓰러졌고, 모든 폐기물들은 그것으로 부글거림을 멈추었다. 모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사방에 널린 폐기물의 잔해들만이, 상황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었다. They are dead. 그들은 모두 죽었다. 아니, 실제로는 죽은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선생님을 납치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그들이 그나마 내세울만한 유일한 재주였던 축구조차, 축구선수도 아닌 일개 여고생에게 밀리는 실력이라는 게 폭로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곳의 모든 축구선수가 똑같은 꼴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있었다. 앞으로 연습하면 실력이 좀 더 나아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기 늘어져 있는 쓰레기들에게 있어 그런 것이 남았을까.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정학이나 퇴학처분인데. "대, 대단해." 한참이나 조용하던 체육관 분위기는, 주장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나서야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있던 학생들도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곧 그들 역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긴 월드컵에서나 나올 슛을 연속으로 구경했으니 그럴 만도 해. 나도 역시 어색하게 박수를 치려고 했지만, 되지 않는다. 뭔가가 내 손목을 조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환성이 섞인 박수소리가 체육관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대단해. 축구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너 정도라면 당장 국가대표가 되고도 남을 거야." "굉장해. 미인아. 평소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래." "혹시 브라질에 유학이라도 갔다 온 게 아니니?" "그 재주라면 남자선수들과 대결해도 되겠어." 그 모든 칭찬 속에 파묻힌 여동생과 달리, 나는 홀로 서 있었다. 모든 축구부원들의 관심은, 아니 축구부원이 아닌 사람들까지, 모조리 여동생에게만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야 평소부터 많이 경험해왔으니 이상하지도 않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녀가 이번에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분야는, 바로 축구이기 때문이다. '축구라니. 하필이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치졸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여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럴 때는 칭찬하고 격려해줘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몰라도, 내가 품은 꿈,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자리, 내가 몇 년간 노력해도 올라가지 못한, 바로 그 봉우리에 올라가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어째서. 세상은 어째서 이렇게 불공평하단 말인가. 나에게도 저런 능력이, 아니 저 능력의 반만이라도 있었다면. 그렇다고 판을 다 뒤엎을 만큼 못난 오빠만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체육관에서 사라졌다. "으아아아 !" 나는 애꿎은 축구공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벽을 향해 슛을 쏜다. 벽에 맞고 축구공이 퉁겨 나온다. 다시 잡고 쏜다. 또 퉁겨 나온다. 또 쏜다. 또 퉁겨 나온다. 또 쏜다. 또 퉁겨 나온다. 그러기를 반복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그 UFO슛은 나오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스핀킥은 나도 가능하지만, 그건 차원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걸 쓰려면 공을 아주 빨리 날아가게 하면서도 회전을 시켜야 하지만, 내 다리의 힘으로는 아직 무리였다. 여자아이보다 힘이 약하다니. 그것도 축구선수가 될 꿈을 가지지 않은 여자아이인데. 여동생의 벽은, 그렇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난 재능이 없는 건가? 없는 거였어?" 아무래도 난 축구에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누구는 순식간에 독수리슛이니, 회오리슛이니, 심지어는 UFO슛까지 잘 날리는데, 나는 그게 안 된다. 도저히 안 된다. 아예 축구를 포기해 버릴까. 어차피 여동생이 국가대표가 되는 게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이런 식이라면. "젠장 !" 한 번 더 공을 찬다. 하지만 UFO는커녕, 전투기 수준도 안 나온다. 축구를 전담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나를 미워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왜 누구는 모든 재능을 다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것밖에 재능이 없는 겁니까. 하늘에 대고 원망해봤지만, 돌아오는 보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흐린 하늘은, 찌푸린 얼굴만을 나에게 보여줄 뿐이다. "젠장 !" 나는 그렇게, 아무도 듣지 않는 외침을 담고, 운동장에 서 있었다. 내 앞으로 축구공이 굴러온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공을 찰 기운도 없다. 공은 내 발을 툭 치고는 멈추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오직 그 말만 반복하고 있었고, 어느새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봄이라 그런지, 그것은 너무나 차가웠다. 마치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하려는 것처럼. 곧 비는 폭우로 변했고, 나는 그렇게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오빠." 그래. 너냐. 세상에서 제일 잘나신, 우리의 천하무적 여동생이시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저리 가 ! 뭐든지 나보다 잘하니까, 자랑이라도 하려고 온 거지? 너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얼른 가 버려 ! 꺼져 !" 하지만 내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빗줄기와, 나무와, 그리고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되어버린 운동장뿐이었다. 다른 사람도 없다. 그 넓은 운동장에 남은 것은, 오로지 나 하나 뿐이었다. "환청이었나." 생각해보니 나도 한심했다. 도대체 그녀에게 뭘 가지고 화를 낸단 말인가. 여동생이 잘 나서? 여동생이 잘 난 것이 대체 무슨 문제라는 거지? 하지만 여동생이 이번에 나를 압도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축구였다. 하필이면 축구라니. 다른 분야였다면 내가 이렇게 좌절감에 빠지지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환청을 듣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화풀이를 하다니. 갈수록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심해." 결국 나는, 실력도 없는 엉터리 축구선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자학하며, 빗속에 서 있었다. "문구야." 순간적으로 여동생인 줄 알고 화를 내려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녀석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언제나 '오빠'였지, 내 이름을 반말로 부른 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 녀석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럼 누구일까. 나를 '문구야'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그 사람은 나보다 어리거나 나와 동갑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옆으로 굴렸다. 머리를 돌릴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굴러간 내 머리가 향한 곳에는, 우산을 쓴 여자가 있었다. 누구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런데 왠지 모를 저 불안한 발걸음은. 그녀가 발을 헛디뎌서, 운동장에서 비틀거린다. 저러다 넘어지겠다. 나는 없는 기운을 짜내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주르륵. 옷을 입은 건지 물 덩어리를 입은 건지 구분이 안 되는 내 꼴이 영 보기 딱했는지, 그녀는 나를 끌고 양호실로 데려왔다. 덕분에 양호선생님은 내 꼴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내가 무슨 물귀신입니까. 그런 표정을 지으시게. "미연 선생. 그 학생, 어떻게 된 겁니까?" 양호선생님의 질문을 일단 미루고, 우산 쓴 아가씨, 아니 담임 선생님은 내 옷부터 갈아 입혔다. 아니, 입히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지. "괘, 괜찮아요." 우리 담임이 맹하다는 건 잘 알지만, 남학생의 옷을 벗기려고 하다니. 물론 물벼락을 맞은 내 꼴을 봐서는, 빨리 마른 옷을 입혀야 감기가 들지 않으니 그러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담임은 여자고, 나는 남자다. 여자 앞에서 옷을 훌렁 벗는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양호선생님도 여자군. 이렇게 되면. "그, 그냥 옷만 줘요." 체육복 한 벌이 나에게 날아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자용 체육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디서 난 체육복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는 두 분을 양호실 밖으로 내보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젖어서 물이 흐르는 겉옷부터 속옷까지 전부 벗고, 기계적으로 체육복을 걸쳤다. 아니, 걸치려고 했다. 그런데. "문구야." 난데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 나는 재빨리 침대 뒤로 몸을 날렸지만, 담임은 이미 얼굴을 붉히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 아무리 선생님이라지만, 남자의 맨몸을 굳이 그렇게 보려고 하실 필요는 없......... "타올은 저기 걸려있어." 손가락으로 타올의 위치를 가리키고, 문을 닫는 담임. 이걸 배려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과보호라고 해야 하나. 일단 남자의 몸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고, 억지로 호의적인 해석을 내렸다. 타올로 젖은 몸을 닦고, 체육복을 몸에 걸친다. 물론 걸치면서, 양호실의 문을 계속 훔쳐본 것은 물론이다. 언제 또 들어올지 모르는, 담임의 경거망동을 경계하면서 말이다. '왠지 나도 한심하다.' 어차피 여동생에게 축구로 졌을 때부터, 한심한 남자였지만. "자. 한 잔 마셔." 양호실 침대에 앉은 나에게, 담임은 따스한 커피를 가져오더니 불쑥 내밀었다. 하지만 그렇게 급작스럽게 내밀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고요. 선생님. "........" 내가 아무 말도 못하니까, 엉뚱한 쪽으로 상상하는 담임. 아이고. "술 아니니까 괜찮아." 사실 뭘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는 커피를 억지로 마셔야 했다. 일단 차가워진 내 마음을 녹이는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만, 싱글벙글. 뭐가 그리 좋으신 겁니까. 선생님. "드디어 커피를 먹였으니까." 그, 그런 겁니까. 설마 지난번 납치극때 커피 사줬다가 꼬마 선생님한테 빼앗긴 걸 아직도 마음에 두신 겁니까. 어쨌든 강제로라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찾은 덕에, 조금은 몸이 풀리는 것 같다. 오돌오돌 떨리는 몸이 가라앉으니까, 조금은 낫다. 그런데 말야. "이제 좀 속이 풀리니?" 담임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본다. 자상한 눈동자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조금 전까지의 일이 생각났다. 여동생의 화려한 축구기술, 모든 이의 감탄, 장래의 꿈을 빼앗긴 기분, 그리고 빗속의 방황. 그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 다시금 파문을 일으켰고, 눈앞이 흐려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말없이 나를 감싸 안아주는 선생님. 얼마나 울었을까. 내가 진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동생의 재능이 부러운 거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 마음을 정확히 짚은 선생님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나도 저런 재능이 있었다면, 지금쯤 세계무대를 질주하고 있을 텐데. 억울해서 땅을 치고 싶을 지경이지만, 하늘은 불공평했다. '축구 할 생각도 없는 녀석인데.' 왜 하늘은 축구에 관심 없는 녀석에게, 세계 제일의 천재로서의 재능을 내렸단 말인가. 그것도 축구쪽 재능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녀석은 공부도, 운동도, 요리도, 그 외에 어떤 일도 척척 잘 한다. 뭔가 불공평하지 않은가. 한 사람에게만 모든 재능이 내려지다니. 눈물이 다시 쏟아질 것 같다. 선생님은. "여동생이 밉니?" 이런 오빠가 되면 안 되지만, 미웠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축구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천하태평으로 지내고 있다니.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하지만 가장 미운 것은. "답답하겠지. 여동생보다 축구를 못하니까. 평생동안 이루고 싶었던 꿈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이루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게, 견딜 수 없는 거겠지?" 아마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뼈빠지게 노력했는데도, 여동생의 손짓 한 번이면 그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은, 정말 싫었다. 하지만 어떻게 되는 일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식인가. 소리 없이 한탄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니야." 어설픈 위로라면 하지 마세요. 그냥 지금처럼 품어주시면, 그걸로 족해요. 때로는 말보다는 이런 행동이 더 중요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서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는 날아다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갑자기 툭 끊어버리는 선생님. "나도 그랬는걸." "네?"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그 덕에 나도 얼떨결에 그 흐름에 휩쓸린다. 아니, 그것은 지금의 울적한 상태를,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라도 해소하고 싶은 내면의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도 학생 시절에는, 상당히 공부를 못했으니까." 에이. 설마. 공부를 못했다면 어떻게 선생님이 되셨습니까. 납득할 수가 없었다. 비록 우리 담임이 맹하기는 해도, 수학만큼은 꽤 잘하셨던데? 그런 내 말에 떨어지는 일침. "영미처럼 언제나 상위권이었던 건 아니었어. F도 맞았으니까 말야." "네?" F. 전설의 권총. 학업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자가 받는다는, 대학의 합법적인 무장수여. 그것을 받은 대학생은 어떻게든 그것을 학교에 반납하려고 필사적이 된다는, 그 전설의 무기이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그런 무서운 무기를 쓰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 무기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하지만 간혹 그것을 수여 받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그 무기를 손에 쥐는 순간 공포에 떨며 그것을 버리려고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기는 손에 진득하게 달라붙기 때문에, 떼어내려면 매우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 전설의 무기를, 우리 담임도 손에 쥐어봤단 말인가. 그런데 영미라면. "그래. 통칭은 꼬마 선생님이라는, 그 영미." 아. 그러고 보니 꼬마 선생님의 이름이 '유영미'였던가? 그제서야 이름이 떠올랐다. 보통은 꼬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아서, 이름은 멀리 떠내려보냈는데. "그 애는 나하고 달리, 매번 과에서 수석이었어. 나도 그걸 무지 부러워했거든. 나는 어떻게 저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세상은 불공평하다. 하늘은 너무했다. 그렇게 불평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냐."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단지 귀여운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이는 우리의 꼬마선생님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의 나처럼 상대를 시기했다면 어째서 두 분이 지금도 단짝친구로 있는 거지? 선생님은. "나도 그래서 영미를 미워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옷을 사려고 백화점에 갔을 때, 재미있는 걸 보는 바람에, 부러움이 싹 사라지더라고." "뭘 보셨는데요?" 그게 매우 궁금하다. 아무리 내가 울적하더라도, 과거의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짐작이 안 가서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는 나에게 던져진 말은. "속옷 가게에서, D컵 브레지어를 들고 한숨만 쉬고 있더라고. 그 애." "풋 !" 그 말을 듣는 순간, 꼬마 선생님의 체형이 기억났다. 하긴 가슴이 좀 없는 편이었지. 아마. 풀죽은 꼬마 선생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상상이 갔다. 웃음을 참느라 이를 악무는 가운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래서 미연이 너, 그때 자랑이 대단했지?" 수증기를 마구 뿜어내는, 꼬마 선생님이 서 있었다. 현재 선생님의 온도는 120도? "문구네 집에 연락하고 왔더니, 남의 험담만 늘어놔? 이런 불량 선생 같으니." "하지만 어울리지도 않는 D컵을 들고 있으면 어떻게 해? 가슴에 맞는 A컵을 선택해야 체형이 안 망가지는 법이라고. 아. 실례. 아예 필요가 없었지? 너는." "머리는 없고 가슴만 큰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 가슴이 부럽긴 할 걸? D컵으로 차면 좀 답답하더라고. 다음엔 F컵으로 바꿔볼까 생각중이야." "그렇게 F를 좋아하니까 대학에서 F만 받지 ! 그러면서 선생이 된 게 용하다." 서로 치고 받는 두 선생님.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약간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전혀 다르게 보이는 두 선생님이 어째서 그럭저럭 사이가 좋은지,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두 분은 서로에게서 부러운 부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고, 인간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신 거겠지. 그래서 자신의 단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런 걸 보면 세상은 확실히 공평하다. 하지만. '그 녀석한테 약점이라는 게 있나?'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여동생의 약점을 찾아서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가 아니고. 어쨌든 긍정적으로 살기로 했다. 오늘부터는 나를 악질적으로 괴롭히던 불량한 선배들도 없어졌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 여동생이 축구를 잘한다고 해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여동생은 남자축구선수가 아니라 여자축구선수밖에 될 수가 없으며, 주전경쟁에서는 절대로 내 방해물이 될 수 없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실 그런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다음 주가 시험이란 말야.' 이런 외부의 압력이 원인이었지만. 물론 저녁에 집에 돌아갔을 때, 여동생은 왜 내가 늦었는지에 대해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그 눈동자. 하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네가 무슨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냐. 네가 그렇게 잘났냐. 대놓고 그렇게 퍼부어 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오빠. 아침 밥 먹어." "응." "오빠. 빨리 일어나." "응." "오빠. 빨리 좀 뛰어." "응." "오빠 !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어휴. 정말." 이런 식이었다. 속 좁은 오빠라고 뭐라고 하지 마라. 직접적으로 여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막말을 퍼붓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렀으니까.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라서, 나보다 잘난 여동생을 더 이상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저런 완벽한 인간이 만약 내 연인이었다면? 끔찍한 말은 하지 마라. 진희가 저런 인간이었다면, 말 그대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었다면, 난 그녀를 좋아하지 못했을 거다. 물론 축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재능을 보여줬다면, 불평은 전혀 없겠지만. 하지만 내가 여동생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은. "오빠는 그것밖에 안 돼?" 이 말 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그 녀석은 내 속을 다 아는 것 같고, 그렇다면 이 말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중의 두려움. 그것이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물론 어제의 일을 저 녀석이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마 꼬마 선생님이 집에 전화를 했기 때문이겠지만. '무서워.' 자기 여동생을 무서워하는, 겁 많은 오라버니인 것이 한심했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기가 죽는 게 당연했다. 여동생보다 잘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지금은 공부해야 해.' 한 번이라도 여동생을 이겨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축구를 더욱 열심히 해야 하고, 공부도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성적이 상위권이 아니라면 축구부에서 활동하기가 힘들어질 것이고, 그러면 영영 축구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저 녀석은 축구를 제대로 할 생각이 없으니 실력이 그 자리에 머물겠지만, 나는 다르다. 나에게 있어 축구는 꿈이고,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저 녀석의 실력을 뛰어넘을 것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열심히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공부하는 거야. 일단 다른 잡다한 일에 주의를 끊고 말이야. 하지만. "여동생을 축구부에 가입시킬 수 없겠냐?" 이것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 UFO슛은 축구부의 모든 부원에게 알려져 버렸고, 심지어는 다른 운동부, 아니 학교 전체에 알려져 버렸다. 그로 인해 축구에 관심이 있는 녀석들은 모조리 여동생에게 축구부 가입을 종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하긴 체육선생님조차. "미인아. 축구부에 가입하지 그래?" 이런 식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러다가는 저녁이나 내일 아침쯤이면, 신문기자가 달려와서 취재를 요청할지도 몰랐다. 아. 이미 한 명 날아왔군. 그 수다쟁이는 미인이 옆에 바짝 붙어서. "미인아. 그 UFO슛, 한 번 더 보여줄 수 없니?" 역시 문희다웠다. 여동생의 강렬함에 휘말려 종종 존재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나는 이 녀석의 무서움을 잘 안다. 물론 여동생처럼 엄청난 압박감을 동반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 입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 무엇보다도 귀를 피로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동생도 피곤했는지. "난 축구선수가 될 생각은 없는데?" 그러나 이 인간 진드기가, 그 정도로 특종거리를 포기할 리가 없다. 전혀 없다. 문희의 입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그 말은 모조리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아. 손이 막아봤자 소용이 없는가. 그 녀석은. "그러면 안 돼. 안 그래도 우리나라 축구계에는 스타가 필요하다고. 비록 2002 월드컵에서 4강까지 진출한 남자축구대표팀이 있다지만, 여자축구계에는 그런 성과가 별로 없었어. 너 같은 천재가 축구계에 진출한다면, 여자축구계는 단숨에 스타를 맞아들일 테고, 그러면 국제대회에서 중국이나 북한, 미국 등의 강팀들과 대결해도 밀리지 않을 수 있어. 생각해 봐. 심심하면 역사왜곡이나 하는 중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건 국가에 대한 공헌이고 민족중흥의 기틀이란 말야. 그것뿐이 아냐. 모든 여성들에게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자, 남자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을 싹 없애줄 수 있는 쾌거란 말야. 미국 생각해 봐. 우리 우방이기야 하지만, 지난번에 오노 그 인간의 금메달 약탈이라든가, 아테네 올림픽에서 체조금메달 약탈이라든가. 그런 게 분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국제무대에서 그들을 팍 꺾어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그것만이 아냐. 우리학교에서 대스타가 한 명 나오면, 그것은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반에서도 스타가 나왔다며 자랑하고 다닐 수도 있고, 나도 특종감을 찾았다고 신문사나 방송사에 특채될 수도 있으며,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쨌든 너로서도 엄청난 돈과 명예가 따라오게 되며, 남자선수들과도 겨룰 수 있다는 실력을 보여줌으로서 FIFA에서도 혹시 규정을 바꿀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너도 월드컵에 나가서 사상 최초로 유럽이나 남미가 아닌, 제 3세계 축구팀이 우승을 노릴 수 있게 되는 거야. 조국수호. 겨레의 영광. 이런 구호가 옛날 구호라고 생각된다면, 엄청난 돈도 기다리고 있어. 명예만이 아니라고. 너 정도 얼굴이면 충분히 모델로도 나갈 수 있다고. 잘하면 베컴만큼의 상업적 성공도 거둘 수 있으며, 평생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돈도 벌 수 있다고. 그것보다 피가 끓지 않아? 지난 2002년의 거리 응원을 생각해 봐. 그 모든 응원이 너에게로 쏟아지는 거야. 그리고 네가 골을 넣으면 전 국민이 환호한다고.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런 청량제가 어디 있겠니. 우리도 지난번처럼 축구축제를 즐겨보는 거야. 어때? 괜찮지? 여기에다가 세계 축구팬들에게 우리나라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축구를 잘 한다고 자랑할 수도 있게 되며, 지난 월드컵에서 주먹질과 발길질, 팔꿈치 치기로 축구장을 무술대회장으로 만든 이탈리아에게도 축구의 진수를 선보일 수 있고, 월드컵에서 독일에 패한 빚도 갚아줄 수 있으며, 브라질 선수들에게 자신들이 세계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고. 거기에다가 한국여자의 우수성을 보여줌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여자의 지위를 더 향상시키는 것도 가능하며, 너 자신을 홍보하는 효과도 있어. 물론 그 얼굴을 내세움으로서 우리나라 체육계의 얼굴마담 노릇도 할 수 있으며, 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명성도 얻게 된다고. 생각해 봐. 네 실력이면 월드컵 3회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해서, 세계 축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한번 축구선수가 되어 봐. 그 꼬마선생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 테니까. 여차하면 축구부 사람들도 도와줄 테고. 왜. 그 선생님한테 미안하다고? 네 실력을 알면 교장선생님이나 이사장님도 당연히 널 축구부에 가입시킬 걸. 그러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선생님도 우리학교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찬스니까 굳이 고집 부리지는 않을 거야. 그것뿐이니? 우리 학교에는 축구계에 인맥도 많아서, 실력이 있는데도 대표선수가 되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그러니까 한 번 도전해보는 거야. 위대한 축구선수로 역사에 남을 찬스라니까. 너라면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니까. 도전해. 우리 반 애들 모두가 응원해줄 거라고. 이봐. 오라버니. 어서 설득해주지 못해? 이런 재능을 그대로 썩히는 건 아깝잖아. 이봐. 그렇게 멍한 표정만 짓지 말고 도와주라니까? 미인이 너도 그래. 그런 재능을 시궁창에 처박을 셈이야? 제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어서 보라고. 그 실력이 아깝잖아? 일어서. 일어서서 적극적으로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거야. 어서 일어서라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세계 제일의 축구스타의 등장을." 뭐야. 이거. 악몽인가. 해일인가. 지진인가. 태풍인가. 어쨌든 뭔가 엄청난 것이 지나간 듯한 느낌인데. 모두 충격으로 인해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움직이려고 하다가는, 말의 해일에 밀려 떠내려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졌다." 모두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저 정도의 말을 쉬지도 않고 쏟아내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컵라면 하나 정도는 끓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혼자 수다떠는데 사용해버릴 수 있는 엄청난 입이라니. ".............." 모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뿐이었다. 하긴 나라도 저런 상황에서는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이게 뭐냔 말이다. 이게. 주절주절종알종알재잘재잘. 듣는 사람의 혼을 빼놓는 수준의 연설, 아니 연설이라기보다는 장광설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식의 고문을 어떻게 인간이 견딘단 말인가. 아니, 견딘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할 말이 없어.' 사실은 그게 더 큰 문제였다. 뭐라고 여동생을 설득하지? 이미 써먹을 만한 말은 문희가 다 써버렸고, 다른 말을 생각해내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뱁새는 뱁새답게, 황새 따라갈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지. 그래서 우리 모두는 찌그려졌다. 교실내의 다른 학생들도, 설득하려고 온 축구부 선배들도, 그리고 나까지도. 그러나 한 사람. 예외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난 축구할 생각이 없는 걸." 역시. 여동생은 그 엄청난 수다에도 전혀 압도당하지 않았다. 대단한 녀석 같으니. 그런 엄청난 조잘거림의 직격탄을 맞고도 꿈쩍하지 않을 수 있다니. 역시 지상최강의 여동생답다. 그러나 상대는 문희만 있는 게 아닌 법. 물론 문희처럼 엄청난 문장의 집중포화로 도전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게릴라전으로 도전해왔다.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게릴라들을 맞아, 여동생은 응전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경우는 '응전'이라기보다. "이봐요. 연 미인양. 그 재능이 아깝지 않습니까." "축구부에 가입만 하면, 넌 평생 유명인사가 될 수 있어."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그런 거창한 일보다, 너 자신을 위해 가입해 봐." "우리학교 여자축구부의 미래를 열어 줘." "UFO슛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만 게릴라전으로는 적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전세를 뒤집는 것이 어렵다. 여기는 베트남이 아니니까, 뒤에서 군대의 발목을 잡아채는 여론이나 방송이 없단 말이야. 거기에 우위에 선 자가 민간인 학살 등의 과오를 범하지도 않고. 따라서. "죄송합니다. 전 축구부에 가입할 생각이 없어요."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바로 어제 여동생의 공포의 슛을 직접 본 축구부원들로서는, 감히 그녀에게 덤빌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전의 그 쓰레기 선배들이라면 감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여동생에게 도전했다가 신나게 깨지겠지만, 이번에 온 선배들은 그런 작자들과는 달리 예의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런 식으로 나올 수가 없다. 결국 그들은 여동생의 예의바른 대답에 예의바르게 나왔다. 어떻게 나왔냐고? "그래? 아쉽구나. 하지만 마음이 바뀌면 찾아와. 언제라도 환영할 테니까." 도리 있냐. 그래서. 모든 일이 잘 마무리가 되었냐고? 그랬으면 나도 속이나 편하지. 만약 여동생이 정말로 축구부에 들어왔다면, 아마 3년 내내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 되겠지만. 뭐? 시기심이 너무 심하다고? 당신이 당해 봐 ! 나도 이왕이면 모차르트가 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살리에르는 될지언정, 모차르트는 되지 못한단 말야 ! "에헴. 미인아. 축구부에 가입하지 그래?" "미인아. 축구부에 가는 게 어떻겠냐." "연 미인양. 축구부 가입 요청이 들어왔던데?" ".........." 수업시간 내내 이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게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모조리 여동생에게 축구부 이야기를 한 번씩 꺼내는 거다. 마지막 교시의 물리 선생님만 제외하면 전원 다. 하긴 우리 학교 운동부에서 내세울 게 축구부밖에 없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만. 그것도. 'UFO슛이란 말야.' 모두들 얼굴색이 달라져서 권유할 만 했다. 하긴 나조차도, 시기심과 질투심만 없었다면 당연히 여동생에게 축구부 가입을 권유했을 테니까. UFO슛이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브라질 축구선수 카를로스가 그거 한 번 차는 바람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건, 절대로 괜히 된 게 아니란 말야. 아무나 그렇게 찰 수 있으면, 그가 스타가 될 턱이 없지. '그것만 한 것도 아니니.' 축구선수, 정확히 말하면 스트라이커가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을 사실상 다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마 여동생은 졸업할 때까지 축구부의 추적을 받을 것이다. 나쁜 쪽으로 쫓겨다니는 게 아니라는 건 다행스럽지만, 나로선 미칠 지경이었다.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고 여동생에게 입부를 권유하느냐, 아니면 이기적인 질투심에 따라 가입을 방해하느냐. 하지만 나는 극악무도한 오라버니는 될 수 없었고, 그래서.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자.' 여동생의 의사를 존중해서, 난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사실 이건 시기심에 패배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만, 난 한심한 속물이다. 도저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번만은. 아. 처참하다. 그러나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물리 선생님, 다시 말해서 미인이의 특별활동부 담당이신 꼬마 선생님이 수업을 끝내고 교실에서 나가자마자, 나에게 날아온 것은. "문구야 !" 나, 나왔다 ! 나는 재빠르게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문희 녀석은 불행히도 내 소꿉친구였고, 서로의 행동패턴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젠장. 운동신경도 별로 좋지 않은 문희의 손에 뒷덜미를 잡히다니. 이것이 소꿉친구의 강점인가. 나는 별 힘도 못 써보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꼼짝없이 의자에 앉혀지고 말았다. 뭐? 이럴 때 남자라면 여자한테 휘둘리지 말고 휘둘러야 한다고? 나는 살고 싶다. 적어도 내 귀에 이상이 없는 채로 말이다. '저항하면 아마도.' 그 무서운 수다를 하루종일 들어야 할거다. 도망가면 집에 쫓아와서, 내 방에 들어와서, 심지어는 내 방 침대에 같이 누워서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할거다. 어차피 소꿉친구라서 속을 너무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부모님도 뭐라고 안 한다. 뭐? 덮쳐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문희 녀석이 왜 태연하게 나를 대하는데? '내가 문희를 덮쳤다가는.' 당장 진희에게 모든 사실이 보고될 것이고, 나는 고백도 못하고 실연 당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너무 무섭기 때문에, 결국 나는 문희를 덮친다는 늑대의 수법을 쓸 수 없다. 게다가 내가 그런 짓을 할 경우. '난 사망한다.' 공포의 여동생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러다간 그 녀석은 오라버니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2m짜리 식칼을 가져와서 나를 잘라버릴지도 모른다. 난 토막살해 당하고 암매장되고 싶지는 않으니, 결국 저항할 수가 없었다. 마치 피고인을 심문하는 검사처럼 책상을 내리치는 문희. "어딜 도망가." 나는 그저, 고양이 앞의 쥐였다. 흑. 여동생한테 짓밟히고 소꿉친구에게 휘둘리고. 내 처지도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다. 뭐? 그렇게 예쁜 여동생과 소꿉친구를 두고 있으면서, 자꾸 배부른 소리만 한다고? 약올리지마. 직접 당하면 알 것이다. 그 수다를 직접 듣는다는 게, 얼마나 충격이 큰지를.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아무에게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의리 없는 녀석들.' 다들 알아서 꽁무니를 뺀 상태다. 진희는 재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있었고, 풍남이 녀석은 거대한 귀마개를 꺼내어 착용하고 있었다. 음. 전풍그룹 제품이군. 저거 성능이 좋을 것 같지가 않은데. 너무 문희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지우 녀석은. '이런 생쥐 같은.' 재빠르게 낮은 자세로 도망가고 있었다. 정말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언제나 되새기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학생들에게 도와달라고 하기도 곤란한 것이. '이 망할 자식들아 !' 이 인간들이 하는 짓을 좀 보소. 남학생들이라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미인아. 옆으로 비켜. 위험해." "여기 귀마개." "아니지. 교실에서 나가는 게 좋겠어." "전원 대피. 문구의 숭고한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 뭐가 숭고한 희생이야 ! 이 녀석들, 하나같이 여동생의 얼굴에 눈이 멀어 가지고선, 미인이 주위에만 바글바글 몰려 있다. 아무리 세상이 여동생을 중심으로 돈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여동생이 아닌 인간은 죽어도 된다는 거냐 ! 뭐 그런 건 내 사정이고. 그럼 여학생들은 어떠냐고? "꺄악 ! 귀 막아 !" 그것밖에 없냐. 정말 못 살겠다. 여동생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제는 반 아이들 전체가 이렇게 무관심의 벽을 쌓고 있는 거냐. 이렇게 우리 학교가 삭막한 곳이었다니. 나는 신세한탄을 늘어놓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쩌면 이런 생각도, 현실도피의 일종인지도 모르겠다. 문희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옥문이 열리는구나. "이봐. 문구야. 여동생한테 좀 강력하게 권유해 봐. 이대로는 저 재능이 아깝잖아. 난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그런 재능이 있다면,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축구부에 들어가서 전국대회를 휩쓸고 세계로 진출해서 유럽 킬러, 남미 킬러, 월드컵의 지배자가 되어버릴텐데. 어떻게 좀 해봐라. 명색이 쌍둥이잖아." 드디어 시작되었다. 이거, 이러다가는 말의 파도에 휘말려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저 소음이 대책 없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러면 안 돼 ! 굉음에 휘말리면 그대로 끝장이야 ! 그저 문희에게 말려들어 문희의 뜻대로 끌려 다닐 뿐이야. 나는 다급한 마음에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생각나는 것은. '입을 틀어막자.' 물론 좀 현명한 방법도 있었겠지만,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 문희와 입씨름을 해봐야 내가 질 게 뻔하고, 그렇다고 저 수다를 멈추게 할 묘안도 생각나지 않았다. 옆에서 소음이 계속 들리는데, 차분히 생각하는 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뭐? 내 입으로 문희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면 이기지 않느냐고? 야 ! 진희가 저기서 빤히 보고 있는데 어째서 내가 문희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 싫어 ! 그런 건의는 진희가 없을 때 하란 말이야 ! 아. 이건 아닌가. '어쨌든 !' 일단 저 녀석의 입은 틀어막아야 한다. 물론 내 입술로 틀어막는 방법은 제외하고, 다른 묘안을 생각해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묘안이 무엇이지? 방법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일어섰으니, 당연히 그 다음 동작이 나올 리가 없다. 나온다고 해도, 그저 대책도 없이 문희에게 다가설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걸어갈 때 생기는 결과는. 툭. 그럼 그렇지. 생각 없는 행동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대책도 없이 문희에게 걸어간 결과, 어디가 어떻게 꼬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뭔가에 걸렸다. 당연히 나는 비틀거렸고, 눈앞에는 문희가 있었다. 문희의 놀란 얼굴이 내 눈동자에 잠시 스치고, 그 이후에는. "어? 어? 어?" 몸을 피하려는 문희와, 입을 막으려는 내 움직임이 절묘하게 꼬였다. 서로의 동선이 겹쳤다고 할까. 이렇게 되면 파국을 피할 수가 없다. 보통은 사고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와 문희는 꽈배기처럼 비비 꼬여 버렸고, 그 결과 우리는. "꺄악 !" 그렇다. 나와 문희는, 사이좋게 교실 바닥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의자 부딪치는 소리. 책상에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문희의 비명. 이 모든 것이 뒤섞여서 혼란을 불렀다. 그렇다. 그것은 엄청난 혼란,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꺄악 ! 이게 무슨 짓이야 !" 내 머리는 어디에 있는가. 간발의 차이로 일단 문희의 입술을 내 입술로 막는, 그런 파렴치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손에 집힌 이것은? 뭔가 딱딱한 반구모양의 물건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냈을 때,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하필이면 왜. '이런 건 안 만져도 돼.' 말랑말랑하지 않잖아. 어쨌거나 그런 나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망상'은, 이미 벌어진 사건 앞에 모조리 묻혀버렸다.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에. "........." 침묵의 종류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기가 막혀서 조용했던 것이라면, 지금은 그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뭔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 여동생이 화를 폭발시키기 직전의 그 분위기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언제나 짧다. 누군가의 말문이 터짐과 동시에, 그 분위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하긴 아까부터 그렇기는 했지만. "저 녀석, 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 "가슴이야. 여자 가슴에 손을 올려놨어." "어떻게 넘어지면 저렇게 되는 거냐?" "우연?" "그럴 리 없잖아." "저런 게 우연이라면, 나도 우연히 넘어지고 싶어." "게다가 말야, 손으로 주무르고 있잖아." "불쌍한 문희. 저런 소꿉친구를 두다니." "아. 아직도 주무른다." "아니? 저 녀석의 다리와 다리 사이의 물건의 위치가 어디냐." "와아. 차마 말할 수 없는 곳에 올라가 있어." "저 녀석, 고등학생 맞아?" "세상에. 우리나라에도 대낮에 저런 짓 하는 녀석이 있구나." 가만. 가만. 가만. 가만가만가만 ! 말을 듣다보니 내가 지상최악의 파렴치한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상황을 관찰해본 나는, 갑자기 지금의 내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문희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다리와 다리 사이를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부위'에 올려놓고, 문희의 불룩한 부분 위에 손을 올려놓은 데다가, 조금 전에는 그걸 주물러본 것이다 ! 반구형의 딱딱한 것은, 아마 문희의 브래지어였나 보다. 그렇다면. '난, 치한?' 문희의 치마가 말려 올라간 걸 생각하면, 그게 틀림없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움직이기도 전에, 그 행동의 결과는 나에게 통렬한 타격을 가했다. 그것은. "꺄아아아악 ! 이게 무슨 짓이야 !" 문희의 말치고는 상당히 짧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이 내 뇌리에서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뒷머리에 충격이 전해진다. 책상다리에라도 부딪친 것 같다. 아프다. 물론 여자에게 걷어차이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프다. 분하다. 비참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나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저런 대악당이 !" "저건 여자의 적이야 !" "여동생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여동생에 이어, 이번에는 소꿉친구인가." "그럼 다음은 누구지?" "혹시 우리 담임이 아닐까? 어제 양호실에 둘이 같이 있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고." "비록 양호선생님도 같이 있었다지만." "혹시 두 분 모두 저 녀석의 마수에 걸려서?" "그럼 이미 상황이 끝났다는 건가." 야 ! 이 녀석들아 ! 맞아서 나가떨어진 건 나인데, 왜 내가 대악당이 되어야 하는 거냐? 물론 이렇게 외치지 못한 까닭은, 내가 문희 위에서 취한 자세 때문이다. 아. 고의냐고? 그럴 리가 있냐 ! 고의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녀석이 어디 있냐 ! 뭐? 치한들은 고의로 그런다고? 내가 무슨 치한이냐 ! 하지만 아무도 믿을 것 같지 않다. 하필이면 넘어져도 꼭 그렇게. '하지만 담임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이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잘 생각해보니,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무릎베개가 있었고........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변명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정말 아무 일도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만약에. "아. 저 녀석? 어제 보니까 담임의 무릎베개를 하고 누웠던데?" 이런 소리가 나오면 그 즉시 내 인생은 종치는 거다. 물론 학교에서 걱정하는 불미스러운 일은 절대 없으므로 정학이나 퇴학은 면하겠지만, 이 녀석들에게는 그런 사정이 안 통한다. 무릎베개를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전후사정은 아무 상관없이 '죽어 마땅한 자'가 되는 거다. 내가 그 생각으로 인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망상은 점차 심각해져 갔다. 저 엄청난 상상력이라니. 마치 서울시장님의 정책만큼이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입학한지 한 달이나 됐냐?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여자를 빨리 만드는 거야?" "하늘이 내린 재능인가 봐." "나도 그런 재능 받고 싶어." "이거 왠지 열 받는 걸. 누구는 행운의 별을 머리에 이고 있는지, 여자. 여자. 여자. 그런데 우린 뭐야." "저런 녀석들 때문에, 여자친구를 만들 수가 없잖아." "부익부 빈익빈은 반대한다 !" "독점금지법 위반이다 !" "남자의 적, 여자의 적, 공공의 적을 무찌르자 !" "무찌르자 !" 그들의 망상은 점차 과격행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거 누가 도와줄 사람이 없나? 당연히 지상최강의 여동생의 얼굴도 힐끔 훔쳐봤지만, 매정하기가 스탈린 뺨치는 여동생은 나를 째려보더니. "알아서 하세요. 모두들." 이봐. 뭘 알아서 하라는 거야? 어쨌든 여동생은 그 말만을 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마치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이 녀석, 요즘 말도 안 걸어주니까 토라졌구나. 아니. 아니. 지금 그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여동생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하자마자, 갑자기 반 아이들, 특히 남자들의 얼굴이 확 펴졌기 때문이다. 이 인간들, 여동생이 허락하지 않으면 주먹도 못 쓰는 물건들이었나. "만세." "만세." "미인이 만세." "만만세." "악을 토벌할 때가 왔다. 국민이여, 일어나라." 뭐가 만세냐. 뭐가. 게다가 뭐가 악을 토벌한다는 거냐. 졸지에 악으로 몰린 나는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고 했지만, 천하무적의 여동생은 진희를 바라보며. "자. 우린 가자." 그녀는 진희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유유히 걸어가 버렸다. 그 뒤를 문희와 풍남이가, 그리고 지우가 따른다. 의리 없는 녀석. 문희야 내가 가슴을 본의 아니게 만졌으니 그렇다 치고, 풍남이야 원래 나하고 앙숙이니 그렇다 쳐도, 지우 녀석은 대체 저게 뭐냐. 생쥐처럼 기어나가는 걸 보니, 저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우같은 물건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 진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저 시선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난 치한이 아니라고 ! 그건 실수였어 ! 절대로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어 ! 물론 내가 그렇게 외쳐봐야,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도 안 믿는다. 이런 바보 같은 손. 어쩌다 그런 크지도 않은 가슴을 만져서. 물론 문희의 경우도 과도한 조잘거림으로 인해 내 과잉반응을 불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지금 그렇게 말하면 난 맞아죽을 걸. 아니,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찬바람을 견뎌야 하는 외로운 남자들을 대표하여, 지금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 누가 말한 거야. 어쨌든 남학생들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여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힘도 못쓰는 주제에, 참 기세는 좋다. 순간적으로 여자들이 이렇게 달려들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망상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일단 살아남고 보자.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대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네'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반 아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고, 결국 교실 밖으로, 본 건물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 판에도 가방을 챙겨온 것은 비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내일도 왠지 괴로운 나날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번 사태가 가라앉으려면, 며칠이 걸릴까. '빨리 조용해져야 하는데.' 나는 일단 축구부실로 향했다. 아무리 우리 반 애들이 날뛴다고 해도 그쪽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테니까.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느니, 악으로 악을 구축한다느니 하지 마라. 일단 불량한 선배들은 거의 모두 쫓겨났고, 따라서 우리 축구부도 드디어 이미지 쇄신을 할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여동생의 업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 일단 그건 넘어가고. '앞으로 문희를 어떻게 대하나.' 그 녀석에게 치한이라고 불릴 생각을 하니, 앞날이 캄캄하다. 아. 어쩌면 안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녀석 가슴을 만져본 게 한 두 번인가. 물론 어릴 적에 아무 것도 모를 때의 일이고, 그때는 문희도 가슴이 평평했으니 만졌다고 하기도 곤란하지만. 아니, 그건 만진 것도 아니다. 씨름이나 주먹다툼을 하면서 가슴을 툭 쳤다고 해서, 그게 만졌다는 행위로 해석되는 건 무리 아니겠냐. 어쨌든 문희와는 소꿉친구 사이였으니까, 어릴 때는 같이 목욕한 적도 있고, 같이 잔 적도 있고, 끌어 안아본 적도 많이 있고......... 뭐 그런 사이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하면 넘어갈 수 있을지도. '가만. 이건 완전히 애인 사이잖아.' 어릴 때야 멋모르고 그랬다지만,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겠다. 까딱하면 문희하고 맺어지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나깨나 문희 조심. 없는 문희 다시 보자.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진희에게 고백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이고.' 오늘 일로 봐서, 당분간 고백은 무리이다. 치한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무슨 사랑고백이냐. 오해를 푸는 쪽이 먼저지.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하는 나에게, 축구부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문구야. 오후 연습 준비해야지." 지우 녀석보다는 좀 나아 보이는 이 녀석은 강기운이라고 한다. 나와 같은 1학년생으로, 적어도 지우나 불량선배들과 비교하면 인격적인 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다. 확실히 악질선배의 고문에서 벗어나자, 이런 착한 학생도 내 눈에 보이는구나.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새 친구를 만들었다고 기뻐할 상태냐. 내 표정을 본 기운이가 웃으며. "소문이 좍 퍼졌던데,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며칠 지나면 사그라질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이런 상황이 며칠 더 계속된다면, 나는 노이로제로 앓아 눕게 될 거다. 이런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어. 어서 평안한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하는 수 없이,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빨리 오늘 치 연습을 끝내고 집에 가서 공부해야 하니까. 그러나 운동장에는 축구부원만 있는 게 아니다. 하교하기 위해 운동장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축구부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 중에서도 그들이 주목해서 보는 사람은, 하필이면 나였다. '왜 나야.' 내가 불평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여동생처럼 얼굴이 유달리 튀는 것도 아니고, 축구계의 슈퍼스타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도마에 올려진 먹이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여동생만으로는 모자라서, 소꿉친구까지 덮치는 저질중의 저질." "변태의 제왕." "학교 제일의 공공연한 치한." "양손에 꽃. 아니, 양손에 꽃다발." "하렘의 주인." "다음 희생자는 누구인가." 이런 식이었다. 그래. 내가 너희들 입맛대로 요리되는 생선이냐. 이런 상황을 며칠이나 더 견뎌야 하다니 끔찍하다. 하지만 다른 건 다 넘어간다고 해도 한 가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왜 하렘의 주인이야?" 내가 그렇게 여자를 많이 거느린 것으로 보였나? 아무리 소문이란 게 과장이 심하다지만, 이건 정말 너무했다. 게다가 비난만 나오면 놀라지도 않겠다. 이제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마구 나오고 있다. "저 녀석, 여자가 10명은 된대." "더 많은 여자를 노리고 있대." "이미 -삐-한 상대도 있대." "-삐-한 상대가 하나 둘이 아니래." "여자 몇 명을 모아놓고 -삐-한 적도 있대." "선생님하고도 -삐-했대." "-삐-도 모자라서 -삐-도 했대." 야. 이 녀석들아 ! 내가 언제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삐-를 했다는 거냐 ! 원래 헛소문이라는 게 그런 것이기야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난 아직 -삐-는커녕, 키스도 해본 적이 없다고 !" 이렇게 외칠 수도 없다. 운동장에서 발광할 일 있냐. 오로지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면서, 녀석들을 노려볼 뿐이다. 아니, 노려볼 자유도 없다. "뭐하고 있나. 연습 안 해?" 사악한 과거의 선배들과는 달리, 주장이나 3학년 선배들은 그래도 신사적이긴 했다. 하지만 축구연습에 있어서는 절대로 대강 넘어가는 법이 없다. 생트집을 잡는 것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변명할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너희 1학년들이 우리 팀 주전이 되려면, 예전보다 2배는 뛰어야 해." 모든 것은 그 불량한 2학년의 엉터리들이 무더기로 정학처분을 받은 탓이다. 그 인간들은 선생님을 납치한 죄과가 있으니 다시는 축구부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주전 자리가 많이 비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3학년 선배들에게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비록 불량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어쨌든 우리학교 축구팀의 중요한 멤버들이었으니까. 이건 엄청난 전력누수가 아닌가. 전국대회 우승을 노리는 우리학교 축구부의 입장에서,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었고, 따라서 이 문제는 하루속히 해결되어야 했다. 그럼 2학년의 그 불량배들을 용서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이미 그들은 몇 차례 문제를 일으킨 데다가, 이번 사건은 선생님들을 납치했다는 사건의 성격상, 절대로 대충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축구부에는 빈 공간이 생겼고, 여동생에게 선배들이 축구부 가입을 권유한 것도 그런 걸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했다. 우수한 선수를 많이 확보하는 게 시급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권유는 실패해 버렸지만. 그래서 그런지, 다음 주에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은 신입부원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반발하려고 해도. "대회에 나가서 망신당하고 싶나?" 그 말에는 대꾸할 수가 없다. 1학년생이나 기존의 후보선수들에게 있어, 불량배들의 대거탈락은 주전자리의 확보라는 면에서는 유리하지만, 팀 전체의 전력을 생각하면 엄청난 손해였다. 아무래도 후보나 1학년생은 서툴기 마련이고, 그들 중 어설픈 인간이 주전선수가 되어 대회에 출전했다가 헛발질이라도 한다면, 그건 선수 개인의 망신이기 이전에 학교의 망신이다. 이래 보여도 명색이 축구명문인데 말이다. "그런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 봐." 그것이 축구부를 맡는 코치 선생님들이나 3학년 선배들의 공통된 의견이었고, 따라서 주전이 되고 싶은 1학년생이나 후보선수들은, 주전이 되는 대신 지옥훈련을 감내해야 했다. 내가 그 많은 숙덕거림에도 불구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뛰기만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헉헉거리며 달리고 있는데, 무슨 말을 꺼낼 여유가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배들의 괴롭힘으로 인한 훈련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옆에서 궁시렁대는 인간들만 없다면. 그러니까. "호오. 하렘의 주인장이시다." "저기 봐. 저 녀석의 어디가 그런 매력이 있다는 거냐? 진짜로 -삐-를 수없이 경험해본 녀석이 맞는 거냐?" "그런데 요즘 축구부엔, 낯익은 얼굴들이 없는데?" "정학 당했대. 저 녀석을 납치했다가." "납치? 납치는 왜 했는데?" "저 녀석이 워낙 여자들과 -삐-를 많이 해서, 질투심에 못 이겨서 그랬다나?" "아니. 불량배들의 여자를 데려가서 -삐-해서 그렇대." "아니라는데? 불량배들이 저 녀석의 여자들을 노리고 납치한 거래." "어?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른데?" 듣는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야. 이 인간들아 ! 몇 차례고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그냥 연습에만 몰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지옥훈련을 하고 있단 말이야 !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다니. 물론 내가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요상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어쨌든 저 녀석이 여자들하고 -삐-를 많이 한 게 원인인 건 분명하구나." 이상한 결론 내리지 마 ! 내가 언제 그 많은 여자들하고 -삐-를 했다는 거냐. 내가 무슨 카사노바냐. 게다가 내가 화제의 중심인물이 된 탓에, 여동생이 불량배들을 총(!)으로 마구 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는다. 물론 진짜 총은 아니라지만, 여자아이 혼자서 불량배 백여 명을 해치웠다는 것은 충분히 화제 거리가 될만하지 않나? 왠지 점점 분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문희 위에 한 번 엎어진 것치고는, 너무 결과가 가혹하지 않은가. 더 이상은 연습이고 뭐고 못하겠다. 저 물건들을 쫓아내든지, 아니면 억울함을 풀든지 해야지. 내가 잡다한 구경꾼들에게 돌격해 들어가려는데, 누가 나를 잡는다. "참아라. 참아. 화내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덤벼들 수는 없잖아."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 뜬소문이란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내가 애 아빠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구경꾼들의 잡담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수 십, 수 백 명의 여자들과 -삐-를 했다는 것이고, 우리학교의 미녀라는 미녀는 모두 내 손아귀에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현실은, 한 명의 미녀도 내 옆에 두고 있지 못하다. 뭐? 여동생이 있지 않느냐고? 외계인은 제외해야지. 방방 뛰는 나에게 날아오는 주장의 한 마디. "이봐. 문구. 연습 안 하나." 그 뒤를 이어, 일제히 날아오는 3학년 선배들의 몇 마디. "이봐. 1학년.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나." "연습 안 할 거냐." "주전 자리가 많이 남았다고 해이해진 모양인데, 후보로 밀어내줄까?" 물론 그런 틈을 노려 더욱 더 열심히 본인을 비방하는 구경꾼들. "와. 천하의 바람둥이다." "애 아빠다." "부러운 녀석. 여자가 몇 명이냐." 방방 뛰는 내 꼴은 상당히 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런 소리를 듣고 그대로 넘어가는 건 무리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냐. 그러는 나를 보던 주장이, 한 마디를 던졌다. "그것도 못 참으면 대회에 내보낼 수 없어." 힉 ! 그 말은 내 동작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내가 굳어버리는 꼴을 보며 말을 잇는 주장. "시합에 나가면 얼마나 야유가 심한지 아나. 국가대표선수가 되면 외국에도 나가야 하는데, 그 동네에는 쓰레기통에 불을 붙여서 던지는 인간들도 있다고. 그때도 관중들한테 손가락 세우며 항의하다 징계 먹을 셈이냐. 저 정도는 그에 비하면 약과야." 그러고 보니 주장은 청소년 대표였지. 청소년 대표라도 대표는 대표이고, 그 말의 권위에 눌린 나는 그대로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장이 말하는 외국은 모든 외국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된다면 필연적으로 관중난동의 대명사, 홀리건의 표적이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내가 국가대표가 되어 이탈리아 같은 나라한테 골을 먹여줄 경우, 엄청난 야유가 쏟아질 것이다. 주장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축구선수가 되려면 상대의 야유에 넘어가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 일은 그를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도록."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분통이 터지는 걸 참기로 했다. 주장의 그 말에는 뭐라고 대들 수가 없었으니까. 축구시합을 위한 훈련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상 최대의 색마." "애 아빠." "공공연한 치한." 등등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연습에 열중했다. 야유를 퍼붓던 구경꾼들도, 내가 응답을 하지 않자 점점 그 소리가 줄어들더니, 연습이 끝날 무렵에는 아예 없어졌다. 저런 물건들에게는 응답하지 않는 쪽이 더 효과적인가. 나는 그럭저럭 만족한 기분으로 축구부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쾌한 기분은 어디까지나 축구부실로 돌아갔을 때의 일이고. "와. 잘 잤니? 애 아빠." 등교하자마다 들은 소리다. 어째서 내가 이런 소리를 교실 안에서까지 들어야 하는 거냐.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 어제부터, 여동생과의 대화는 이 모양이었다. 여동생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UFO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그 장면을 지워보려고 해도, 안 된다. 잊어버리고 싶어도, 안 된다. 나 자신도 과거에 카를로스가 UFO슛을 쏘는 장면을 본 적이 있고, 그 모습에 반해서 그 슛만 집중적으로 연습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스핀킥은 가능했지만, UFO는 도무지 되지가 않아서 포기했었는데, 그런 걸 태연하게 떡 차버렸으니. '안 돼. 여동생에게 질투해선.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돼. 오빠답게. 오빠답게.' 하지만 인간이 그런 걸 쉽게 할 수 있다면, 질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그 덕에 여동생과의 관계는 매우 서먹해졌다. 이 문제야 그렇다 치고. "문희야." "........" 그 수다쟁이가, 나만 보면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유야 뻔하긴 하지만. 게다가 나만 보면 몸을 슬슬 피한다. 망할 녀석. 내가 네 가슴을 만져본 게 하루 이틀 일이냐. 물론 다 어릴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덕에 내 '치한'이라는 평가만 굳어지고 있다. 진희는 아예. "........"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 아이고. 내가 못 살아. 덕분에 풍남이만 신이 났다. 그 녀석은 이제 공공연히 나와 진희 사이를 막아선다. 내가 항의하려고 하면. "치한에게서 진희를 보호하기 위해." 명분 한 번 좋다. 하지만 이 녀석, 사실은 그 소문을 믿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내가 문희하고 -삐-를 했다는 소문 말이다. 물론 학교측에서야. "원래 그 나이의 애들은 그런 소문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넘겨버렸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학교에 떠도는 헛소문을, 어떻게든 잠재우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사실. "내가 어딜 봐서 천하의 바람둥이냐." 진짜로 내가 -삐-한 여자가 그렇게 많아서 비난을 듣는 거라면, 말도 안 하겠다. 도대체 내 주변에 있는 '사귈만한' 여자라고는, 아직 제대로 고백도 못해 본 진희나, 소음공해의 주범인 소꿉친구, 예쁘지만 맹한 담임, 유명하신 꼬마 선생님, 그리고 공포의 여동생밖에 없는데, 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냐. 그 중에 키스해본 사람이 있다면 말도 안 하지. 그 덕에 학교에서는. "악의 화신 물러가라." "양손에 꽃다발이라니, 너무하다." "누구만 인기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하자." 특히 애인이 아직 없는 녀석들이, 이렇게 외치고 있다. 불량배들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선량한 학생들이라는 점이 더 문제다. 그럼 여자들은 어떻냐고? "꺅 ! 치한이다 !" "야. 너. 다가오지 마." "잘못하면 우리까지 깔아뭉갤 거야." "훠이. 훠이. 잡귀야 물러가라." "이 여자의 적." 아마 당분간은 이런 꼴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비참한 지경에 빠졌지. 지금은 오직 '극기훈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이런 여론을 고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만약 이번 시험을 망친다면, 난 축구를 할 수 없게 되니까. "공부하자." 나는 죽어라 책을 들여다봐야 했다. 온갖 압박과 설움을 당한 끝에, 어느새 그 날이 다가왔다. 내가 치한이니, 변태니 하던 인간들도 그 날이 다가오면서 잠잠해졌고, 그래서 나는 안락한 학업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날이냐고? 당연히 시험 보는 날이지. 평소라면 몰라도 그 날이 다가오는 이상, 다들 날 놀리는 것보다는 자기 성적 올리는 쪽이 더 급했고, 그래서 주위에 맴돌던 골칫덩이들도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 있었다. 일단 주위가 시끄럽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 행복해.' 뭐? 시험 보는 게 재미있어서 이러는 거냐고? 그럴 리가 있냐.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즐기는 것뿐이지. 이건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아니 아니지. 높으신 분의 자제가 아닌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다. 어차피 시험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만큼, 그냥 재미있게 보자고 생각해버리는 거다.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 이번 시험에 실패하면, 난 축구부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우리 부모님은. "학생은 공부. 오로지 공부. 무조건 공부. 축구 같은 건 둘째, 셋째." 그러시면서 지난번 월드컵 때는 어떠셨더라? 과거사를 자꾸 꺼내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두 분 역시 축구는 매우 좋아하신다. 다만, 자기 자식이 축구선수가 되는 것만큼은 결사반대 하시는 거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문제가 없지만. 축구부를 그만두라는 부모님의 압력이 들어올 때마다. "공부요? 잘 하고 있잖아요?" 여태까지는 이 전술로, 부모님의 축구부 퇴진압력에 맞서서 잘 버텨왔다. 다만 지난번에 깡패들에게 납치 당하는 바람에, 전교에서 100등 이내가 아닌 101등을 차지하는 불상사가 생겨서 이 꼴이지만. 뭐? 그 정도면 양호한 성적 아니냐고? 부모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더라. 100등에서 1등 밀려났다고 당장에. "축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당장 축구부 그만 둬." 이런 식이었다. 원래는 그 즉시 축구부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지만, 납치로 인해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변명이 그런 대로 먹혀 들어가서 유예기간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말할 때는 무시하시다가, 여동생이 말하니까 납득하시는 이유는 모르겠다. 사실. '공부하고 운동을 모두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라는 게, 말이 되냐.' 그러나 우리 부모님에게는 그런 뻔한 사실은 무시된다. 뭐? 상식에 어긋난다고? 원래 사람의 판단이란 자기 주위의 환경에 크게 영향 받는 법이어서, 양쪽 모두 잘하는 사람을 언제나 보는 우리 부모님은 나 역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시고, 그걸 당연시하시는 거다. 그게 누구냐고? 누구이겠냐. '인간 같지 않은 녀석.' 어떻게 시험 볼 때마다 전교 10등 밖으로 나가지를 않는 거지? 물론 지금은 여동생이 어째서 그런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지에 신경 쓸 경황이 없다. 몇 년 동안이나 그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애써왔지만, 성과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시간도 없는 지금, 그걸 알아내기 위해 여동생을 연구할 여유 같은 건 없다. 그러니 그런 첩보활동은 일단, 100등 이내에 들어가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아니, 50등 이내인가? '흑. 너무하십니다. 아버님. 어머님.'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 겁니까. 물론 앞에서 불평하면 당장. "하여튼 축구부가 문제야." 이러실 거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모님과 나와의 대화를 간추려 보면. "어머니. 저 세탁기 좀 쓸게요." 이렇게 내가 말하면, 어머니는 금새 이러신다. "어휴. 문구야. 효도하는 셈치고 축구부 좀 그만둘 수 없니? 빨래감이 너무 많잖아." 운동하니까 빨래감이 많기야 하지. 그런데 문제는, 바지 한 벌하고 윗도리 한 장밖에 늘어난 게 없다고. 그래서 내가 빨래를 하려고 하면. "빨래도 제대로 못하면서, 걸리적거리지 마." 그것만 나오면 말도 안 한다. 해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문구가 축구를 너무 해서 바다가 노한 건가?" 홍수가 나면. "문구의 축구 열기가 너무 과열되어서, 대지를 식히려니 폭우가 쏟아지지." 그런 게 축구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물론 부모님은 내가 축구부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내가 축구부와 관계가 없다면 당장에. "축구 만세 !" 이러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다만 두 분은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선수로서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고 계시므로 내가 축구하는 걸 반대하시는 거다. 뭐 이해는 간다. 아무리 축구를 잘하더라도, 국민들은 그가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매몰차게 추궁하고 질책한다. 그 때문에 어떤 대표선수는, 골을 못 넣는다는 국민들의 질책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밤에 가위에 눌렸다고도 한다. 이건 같은 방을 쓰던 동료선수의 증언이니까 틀림없다. 그것도 이름만 대면 다들 아는, 그런 유명한 선수인데도 그런 식이었으니, 부모님이 축구선수의 길을 반대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게다가 축구선수보다는, 의사가 되는 편이 장래의 삶에 있어서 더욱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확률적으로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못 살겠는데요." 허영심만 많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축구가 좋은 걸 어쩌라고. 누구 아들인데.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니까요. 물론 분명히 같은 피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인간이 내 옆에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런데, 그러면서 축구는 겁나게 잘한다. 얄밉게 잘한다. UFO슛이 뭐야. UFO가. 공부와 축구로 점철된 나날이 지나고,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모든 이들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야속하게도 어김없이 오는 그 날이. 담임 선생님의 마지막 말은. "모두 열심히 공부했겠지? 그럼 좋은 성적이 나오길 기대할게." 물론 담임이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 말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과연 밝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두들 장엄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교실은 고요했다. 단지 간혹 들리는. "시험 잘 봐." 그 말만이, 들려오는 대화내용의 전부였다. 대세에 영합해서 약간이라도 얼어붙은 사이를 녹여볼 마음으로, 나는 일단 문희에게 그 말을 던졌지만. "..........." 역시. 아무래도 이 상황을 풀어내려면 시험이 끝난 후에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그 조치가 무엇일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그럼 진희는?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몹시 당황한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혹시 문희를 깔아뭉갠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완전히 치한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것? 미치고 환장하겠지만 지금은 오해를 풀 시간이 없다. 게다가 이제 힘내라는 인사를 할 여자도 없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담임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첫 과목을 맡은 선생이 들어왔고, 그의 옆에 들린 두툼한 시험지 뭉치가, 지금부터 진짜 시험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 시작하자." 그 선언과 더불어, 오늘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젠장. 대학에 가려면 이런 시험을 몇 번이나 봐야 하는 거야. 이런 불만은 일단 꾹 눌러둔다. 지금은 시험을 제대로 보는 게 우선이니까. 시험지가 나눠진다.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가다듬는데. "오빠. 시험 잘 봐." 엥? 의외의 기습을 당한 나는 허겁지겁 여동생에게 고개를 끄떡여주고, 고개를 아래로 파묻었다. 만약 다른 때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냉정하게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난데없이 옆구리를 찔린 꼴이니 그냥 되는 대로 대답해줄 수밖에 없다. 무서운 녀석. 그걸 다 계산한 건가. 나에게 시험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건 글씨고 흰 건 종이라고? 적어도 그것보다는 잘 구분하고 있는 중이다. 첫 과목이 끝났다. 정신이 없다. 곧 두 번째 과목이다. 책을 펴고 마지막으로 확인할 사항을 다시금 읽어가면서 머리에 집어넣는다. 아니, 머리에 들어가 있는지, 들어있으면 혹시 먼지가 쌓여서 들춰볼 수 없게 되었는지 확인한다. 먼지를 털고, 모든 기억을 다시 점검한다. 선생님이 들어온다. 두 번째 과목이 시작된다. 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시험의 압박에 굴복하여 그대로 쓰러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써서 이 난국을 극복할 것인가. 두 번째 과목이 끝났다. 어지럽다. 일단 모든 답안을 다 메우기는 했지만, 잘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빨리. 빨리. 다음 과목을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지식을 익혔는지 확인한다. 옆에서 여동생이나 진희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할 시간이 없다. 세 번째 담당 선생님이 올 때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교과서를 흩어보았다. 객관식 문제에서 답을 표시할 때, 정확히 자신의 시험지에만 집중하지 않고 남의 시험지를 훔쳐본다면, 그대의 점수는 교칙에 따라 모조리 몰수해 버릴 것이다. 네 번째 과목은.......... 어쨌든 준비했다. 교실 여기저기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남이야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잔혹하다고 하지 마라.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니까. 게다가 날 놀릴 시간이 있었으면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게 아냐. 자업자득이니까 다들 알아서 하라고. 아아. 답이여. 그대는 어째서 답인가요. 그리고 점심. 도시락의 뚜껑을 연다. 먹는다. 뚜껑을 닫는다. 이상 상황 끝. 지금 먹는 데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니까 맛이나 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군대에서 주는 밥보다는 맛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걸로 참아야지. 뭐? 내가 군대에 벌써 갔다 왔냐고? 아니. 초등학생일 때 군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어서 아는 거다. 그때 반 아이들의 상당수가 밥투정을 한 줄로 아는데. 물론 여동생은 제외하지만. 후후후. 악마와 계약해서 영혼을 판다면, 네가 쓸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마. 다섯 번째 과목에서는 너무 졸려서, 문제를 푸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과목 자체가 너무 지루해서 그런가. 역시 물리라는 과목은 달갑지 않은 과목이다. 이런 과목을 누가 만든 거야 ! 정말 재미없다니까. 딱. "너, 내가 맡은 과목에 불만을 품고 있니?" 꼬마 선생님이 어디선가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어쨌든 이제 6교시가 기다린다. 나와 계약하지 않았으니, 그 대가로 시간을 빼앗아주마. 갑자기 시간이 줄어드는 바람에, 나는 허겁지겁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 여파인지, 아니면 시험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시험이 종료되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단 답을 메우기는 했는데,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내가 그걸 알면 여동생이지, '오빠'이겠냐. 너무 여동생을 신격화한다고 구박하지 마라. 여동생이 괴물이라서 그런 거니까. 어쨌든 마지막 과목을 마무리하고 시험지를 내는 순간, 그제서야 여유가 생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과정에서 본 사람들의 표정은. 문희는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뻗었고. 진희는 역시 우아한 모습으로 뒷정리를 하고 있고. 풍남이 녀석은 뭔가 고장났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다. 부디 시험을 망쳤기를 빈다. 지우 녀석은 언제나 웃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뭘 모르기에 언제나 저렇게 웃는 거다. 이 녀석은 그저 시험이 끝났으니 기뻐하는 것이겠지. 어쨌든 머리는 빈 녀석이니까. 그럼 여동생은? '표정 변화가 없어.' 뭐야. 지금 마치 산보라도 하고 온 것 같다. 도대체 이 인간은. 어쨌든 내가 불평을 하거나 말거나, 여동생은 시험보기 전과 시험 본 후의 표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의 일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역시 괴물이라니까. 전교 1등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나도 한때는 전교 1등을 노려본 적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포기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외계인을 이길 수 없었어.' 저 녀석은 정말로 외계인일지도 모른다. 진짜로 저 먼 별에서 온, 내 여동생의 탈을 쓴 정체불명의 괴물일지도 모른다. 주책 맞은 생각이지만, 언제나 나보다 최소한 1등은 앞에 서 있으니 그런 망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여동생이 그렇게 똑똑한 덕분에. "오라버니가 여동생보다 공부를 못하면 어떻게 하니?" 남자는 여자보다 무조건 뛰어나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할아버지, 할머니 등의 집안 어른들은 나만 보면 이렇게 말했고, 그런 소리는 그 분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도, 학우들도, 친구들도, 모두들 툭 하면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중학교 시절 내내,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다. 이번에는 제발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실 나에게는 그런 문제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일단 전교 50등 이내에 들어가야. '축구부에 계속 남을 수 있으니.' 겨우 주전자리까지 확보했는데, 여기서 밀려나 봐라. 얼마나 억울하겠냐. 그런 일이 생겼다가는 아마 죽을 때까지 한숨과 낙담으로 가득 찬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시험은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이미 여동생보다 뛰어나고 어쩌고가 문제가 아니다. 내 모가지가 떨어지느냐, 마느냐는 갈림길이다. '제발. 제발.' 이제는 기다릴 뿐이다. 최악의 결과가 아니기만을 빌면서. 쾅쾅쾅 쾅. 쾅쾅쾅 쾅.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제 1악장을 학교에서 배경음으로 깐 것도 아니건만,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악몽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인가. 물론 시험이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살아남으면 다음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지금 난국을 극복하지 못하면, 뒤의 시험은 아무 소용이 없다. 죽고 나서 구조대가 와 봐야, 시체 수습밖에 더 하겠나. '제발. 제발.' 다른 사람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다. 그저 하늘에 빌 뿐이다. '살려주세요.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다만 내가 그 결과를 모를 뿐이다. 성적표를 들고 교실 문을 여는 담임의 모습.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반 전체가 숨을 죽였다. 다른 때는 맹해서 대하기 쉬운 담임이지만, 오늘만큼은 무섭다. 담임이 아니라, 담임이 든 저 종이뭉치 때문에. 그리고. "자. 지난 시험의 성적이 나왔어요. 모두들 자신이 어느 과목에서 부족한지를 보고, 보완하는 계기로 삼도록 해요." "네." 사실 이번에 실패하면, 보완할 것도 없이 그냥 끝이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학생들이 대답하자, 드디어 악마의 문서가 배포되기 시작했다. 한 명씩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선생님에게 성적표를 받는 것이다. 이런 살 떨리는 짓을 매달 해야 하다니. 입시교육 반대 ! 학생의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을 해라 ! 물론 이런 소리는 지금의 교육체계에서는 그저 멍멍이 짖는 소리일 뿐이겠지만. 학우들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으악." "히익." "휴우." 참 반응도 다양하다. 성적에 따라 엇갈리는 희비. 어떤 녀석은 절망하여 쓰러지고, 어떤 녀석은 안도하여 기뻐한다. 하지만 대부분 구겨진 표정으로 걸어가서, 구겨진 표정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알만하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담임의 웃는 얼굴을 볼 것인가. 담임의 웃는 얼굴을 볼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뭐? 그래가지고는 모두 똑같은 표정이 아니냐고? 전혀 다르다. 전자가 시험을 잘 본 학생에 대한 격려의 웃음이라면, 후자는 시험을 망친 학생에 대한 동정과 격려의 웃음이다. 웃음의 질이 전혀 틀리다. 어느 쪽 얼굴이 나를 맞을지는 모르지만, 부디 전자이길 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어.' 담임의 얼굴이 마치 여동생의 그것처럼 무서웠다. 결국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벌벌 떨면서 담임에게 걸어갔다. 상어의 입 속으로 걸어가는 기분이다. 덜덜덜덜. 파멸이냐. 구원이냐. '제발. 제발.' 담임이 나눠준 성적표, 여기에 쓰여져 있는 내용으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무서워서 열어보기가 겁나지만, 사나이로서 시간을 너무 끌 수는 없다. 나는 눈 딱 감고, 성적표를 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거기에는. "전교 19등 !" 해냈다 !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대고 흔들어댔다. 해냈다. 드디어 해냈다. 이 정도라면 목표치를 크게 뛰어넘는 성적이다. 이 정도라면 부모님도 축구부에서 탈퇴하라는 소리는 하시지 않겠지.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문구야. 너무 방방 뛰지 마. 다른 애들이 섭섭해하잖니." 음. 좀 심하게 뛰었나? 학우들을 보니 다들 질투와 시샘의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떻게 하라고. 나는 성적표를 꼭 끌어안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다행이야. 기뻐서 싱글벙글 웃는다. 이제 남들의 결과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내 성적이 아니니, 긴장하면서 지켜볼 필요는 없다. 어디 보자.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나왔나. "악. 망쳤다." 풍남이였다. 이 녀석, 분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좋다. 이런. 내가 지우인가. 이런 식으로 남의 불행을 기뻐하다니. 그러나 그 '남'이 풍남이인 이상,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저 녀석, 대체 몇 등이기에 망쳤다고 하는 거지? "젠장. 전교 20등이야." 뭐라고? 모두의 얼굴에 적의가 스쳐갔다. 하긴 그 성적으로 시험을 망쳤다고 하는 건 여동생 심보다. 다른 애들이 그 정도의 성적을 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알기나 하냐. 뭐 원래 저 녀석은 '높으신 분'에 속하고, 앞으로 '높으신 분'이 될 예정이니 저런 심성을 가진 것이 당연한 지도 모르지만. 문제아는 그 정도로 넘어가기로 하고, 그럼 다른 사람은 어떨까? "아. 망쳤네." 문희야. 정말이니? 나도 모르게 문희의 성적표 쪽으로 눈이 간다. 망쳤다면, 얼마나 망친 걸까. 성적의 추락이 풍남이처럼 '천인공노할 수준의' 망가짐일까, 그게 아니면 진짜로 망가진 걸까. 내 눈동자가 문희의 성적순위를 향해 나아가자. 사사사사삭. 성적표가 사라졌다. 내 눈이 문희의 손을 쫓았지만, 이미 성적표는 문희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제 거기까지 성적표가 이동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하다. 역시 소매치기의 달인답다. 장래가 기대된다. 앞으로 마피아 두목, 아니 여두목이 될 것으로 기대.... 딱. "또 망상하고 있지?" 모처럼 문희한테 맞았다. 물론 아무리 문희가 기를 써봐도, 여동생의 험악한 폭행으로 단련된 나에게 별 타격을 입힐 수 없다. 주먹의 강도가 다르므로. 그래서 나는 태연하게, 문희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만약 여동생의 주먹이었다면 큰일이겠지만. "문희야. 전교 몇 등이냐?" "비밀." 훌륭한 대답이로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나가라. 연필 굴리기 ! "혹시, 전교 25등?"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새파랗게 질리는 문희. "어, 어떻게 그걸........" 역시 내 연필 굴리기는 효험이 좋다. 물론 이번 성적이 연필 굴리기로 이룩한 모래성은 절대 아니지만.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어쨌든 당황하는 문희는 일단 내버려두고, 진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뭐야. 진짜로 망친 건가. 적어도 풍남이처럼 사기를 칠 사람은 아니니, 저건 진짜겠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나에게 들린 말은. "전교 13등이라니. 13은 서양문화권에선 안 좋은 숫자라는데." 의외로 싱거운 문제였다. 그러니까 진희가 기분을 상한 이유는, 성적이 나빠서가 아니라 순위가 이상한 숫자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4등을 했다고 하면, 숫자인 4(四)가 아니라, 죽을 사(死)를 연상하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것이다. 뭐 그래서 우리나라는 4층을 F(Four : 4)라고 표기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여기는 서양문화권이 아니라 동양문화권이니까, 괜찮아." 이렇게 말해서 이미지를 좀 개선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수업시간이 끝나면, 곧장 가서 그녀에게 그 말을 해주기로 결심했다. 언제까지나 치한 이미지로 남을 순 없다고. 이렇게 해서 이번 시험도 막을 내렸다. 나 자신은 축구부 잔류가 확정되었고, 일단 아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 그것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 빠진 사람이 있다고? 지우 녀석 같은 의리도 없는 인간은 제외한다. 그 녀석은 대체 내가 위급할 때 도와주지도 않고, 혼자서 도망가기에 바빴다. 못된 녀석 같으니. 그런 녀석이 과연 경기에서 팀웍을 맞춰줄 수 있을까? 우리 축구팀에 암적 존재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경기 때도 저러다가는, 어휴. 뭐? 남자가 아니고 여자 하나가 빠졌다고? 설마, 그 녀석? 인간 같지도 않은 괴수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 녀석의 성적이야 어차피. "잘 했어. 미인아. 전교 1등이네? 굉장한데?" 이렇다니까. 전교 19등은 자랑할만한 성적이지만, 저런 인간이 내 옆에 있으니 자랑도 못 한다. 언제나 이 모양이니 이제는 익숙하긴 하지만. '세상은 불공평해.' 왜 뛰어난 재능은 여동생에게만 몰려있냐. 저 정도로 공부를 잘하면, 굳이 축구까지 최고일 필요는 없잖아. 투덜투덜. 뭐 이미 이번 일도 끝났으니, 그럭저럭 넘어가도 되려나.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우선 진희 문제부터 시작해서. 나는 진희에게 달려갔다. 13이라는 숫자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와. 일단 진희와도 화해했다. 진심 어린 위로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나라는 서양문화권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쨌든 다시 예전 사이를 회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음은 고백을 해야 할 차례지만, 오늘은 좀 무리일 것 같다. 화해하자마자 고백하는 건 너무 빠르니까. 그럼 문희는 어떻게 되었냐고? 25등을 알아 맞춘 덕에. "두고 보자고. 다음엔 절대 못 맞출 거야." 이걸로 그럭저럭 된 건가? 어쨌든 그렇게 해서 치한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호오. 애 아빠. 성적 잘 나왔다고 되게 재던데?" 이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희와의 그 사건은 학교 전체에 퍼졌고, 나를 애 아빠라고 부르는 인간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 우리 반 애들이야 그럭저럭 순진하고 착한 편에 속하니 괜찮지만, 다른 반 애들까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시비를 거는 인간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너희들, 복도를 가로막으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없잖아. "그래. 전교 19등이라. 잴 만도 하지." "축구 바보 주제에, 제법인데." "매일 밤마다 -삐-하느라 바쁜 주제에, 공부할 시간도 있었나 보군." "나도 -삐-하면 성적이 올라가는 거냐? 어디 -삐-할 여자라도 소개해 주지 그래?" "우리 학교도 무르다니까. 이 나이에 애 아빠라니. 퇴학 안 시켜주나." 비록 그 숫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지만, 별로 달가운 존재들은 아니었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려는 때에, 그들이 웃으면서 나를 포위했다. 아니 포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모두 그만하세요." 그 말 한 마디에, 갑자기 불량스러운 녀석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 어떤 선생도 가지지 못할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으면서, 그 말의 주인공은 나에게로 다가왔다. 오지 마. "자. 이 녀석들을 물리쳐 줄 테니, 심통을 부리는 건 그만 하는 거야. 오빠." 이걸 여동생의 화해 제안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협박이라고 해야 하나. '화해해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졸지에 거래대상이 되어 버린 불량한 학생들의 반응이야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여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 난처해하는 나를 보고 즐기고 있어. 하지만 결론은. 나와 여동생은 화해했다. 화해하지 않으면......... "으아아아악 !"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6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 다사다난했던 3월도 끝났다.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핍박당한 한 달이 있는가 싶을 지경의 나날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지나고 나니까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아직 내 고난의 나날은 끝나려면 멀었다. 4월이 되자마자 들은 말은. "얼레꼴레리. 얼레꼴레리. 누구하고 누구는 애인이래요." 내가 왜 이런 말을, 4월 초부터 들어야 하는 거냐. 물론 그 이유는 알고 있다. 지난달에 문희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넘어뜨리고, 가슴을 손으로 만진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는 거다. 물론 그 문제로 나에게 시비를 건 불량배들은 여동생의 손에 의해 그만 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옥에 끌려가지 않았을까. "내가 무슨 저승사자라도 되는 줄 알아?" 여동생의 항의는 무시한다. 깡패 백여 명을 혼자서 해치우는 주제에, 자신이 아무리 평화주의자라고 외쳐봐야 메아리가 없다. 뭐 어차피 학교에서는 그 가면이 잘 먹히는 모양이지만,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그 실체를 하루 이틀 본 줄 아냐.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중요한 것은, 여동생의 실체가 아니다. 내 실체다. 현재 나에 대한 반 급우들의 입장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가장 주류를 이루는 여론은 다음과 같다. "여동생과 소꿉친구를 동시에 노리는 변태." "학교 제일의 밝힘증." "공공장소에서도 기어코 하고 마는 집념의 사나이." 무슨 평가가 이따위냐. 물론 그 평가가 나에게 물리적 피해로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일단 내가 더 많은 여자 - 특히 남의 애인들 -를 건드리지 않는 한, 주먹으로 나를 응징하지는 않기로 묵시적인 합의가 되어 있었으니까. 만약 그 합의를 어긴다면,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여동생의 응징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러나 원래 사람에게는 이미지라는 게 있다. 그 이미지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박혀버리면 앞으로의 활동에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난 축구부 소속이라서, 전국대회에 나갈 가능성도 있는데 만약 우리 학교 학생들이 응원이라도 오면? 그들이 나에게. "변태 파이팅 !" "이겨라. 이겨라. 변태 이겨라." 이런 식으로 응원해준다면, 전혀 반갑지 않다. 게다가 좋은 성적을 거둘 경우,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 학생들에게 '평소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식으로 묻는다면? 애들이 이렇게 대답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변태요." 그게 무슨 망신 ! 따라서 이 이미지를 어떻게든 고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리고 나도 소문이 난 상대가 문희라는 건 전혀 반갑지 않다고. 기왕 소문이 날 바엔, 진희하고 소문이 나는 편이 백만 배는 낫지. 무엇보다 문희에게는 너무 큰 결점이..... 퍽. "막았다 !" 여동생의 공격은 아니었다. 여동생의 주먹이라면 절대로 상대에게 눈치 채이게 날아오지도 않을 테고, 내가 팔로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리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주먹에 담긴 무게가 전혀 다르다. 여동생이 만약 내 팔을 쳤다면, 아마 내 팔은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와 더불어 사라졌을 것이다. 아. 물론 여동생이 그럴 마음이 있을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그럼 지금의 일격을 날린 사람은 아마도. "문희냐." 다른 사람이 없었다. 진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는 없고, 풍남이나 지우는 뭔가 이미지부터가 다르다. 풍남이라면 직접 나서지 않고 검은 양복을 동원했을 것이며, 지우라면 음흉한 계략을 꾸미겠지. 뭐? 편견이라고? 하지만 그 녀석들이 뒤에서 나에게 주먹을 휘두를 위인들이냐. 지우라면 가능하겠지만, 풍남이는 아니다. 그 녀석은 정정당당하게 바가지 요금이나 불공정 계약 강요, 부실공사 등의 수법을 쓰지, 폭력은 안 쓴다. 가만. 이거 전혀 '정정당당'이 아닌가? 그리고 지우가 주먹을 휘둘렀다면, 보나마나 주먹 뒤에 독침이라도 준비했을걸. 그럼 남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역시." 내 예상대로, 내 팔 너머에는 잔뜩 골이 난 표정의 문희가 있었다. 그녀는 내 앞의 책상을. 쿵. 큰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불쌍한 책상. 어쩌다가 저런 애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 나는 마음속 깊이, 책상을 동정했다. 잠깐 애도의 시간이 흐르고. "당장 여자를 하나 만들어 !" 문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엄숙해지는 분위기. 문제가 있다면. "이미 있잖아?" 옆에서 초를 치는 반 학우들이었지만, 그들은 문희의 눈동자를 마주치자마자 허겁지겁 도망갔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느꼈냐. 이 원수들아. 문희는 주위의 학생들을 마치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나서, 다시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서 하나 꿰어차서, 이상한 소문을 잠재우란 말야 !" 여자가 무슨 꼬치구이냐. 꿰어차게. 하지만 부글거리는 문희에게 그런 걸 말하다가는 맞는다. 물론 여동생과의 사이처럼 무서워서 얌전히 맞는 게 아니라, 소꿉친구를 마구 구타하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얌전히 맞아주는 것이다. 뭐 어쨌든 일방적으로 맞아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주먹의 위력이 차원을 달리하니 그게 가능한 것이다. 문희는 여동생이 아니므로, 입은 무섭지만 주먹은 그다지 무섭지 않다. 급소만 안 맞으면 되니까. 하지만 귀가 아픈 것은 사실이다. 어디 보자. 오라버니가 이렇게 청각에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여동생은 뭐하고 있을까. 힐끔 바라보니. '치사한 녀석.' 저 녀석, 오라버니의 위기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거냐. 아니,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웃고 있다. 못된 녀석. 내가 문희한테 깨지는 게 그렇게도 재미있냐. 하지만 내가 항변해봐야 소용이 없다. 여동생은 아마 이렇게 대꾸할 테니. "깡패가 왔다면 도와주겠지만, 남녀간의 애정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아. 알아서 해." 내가 언제 문희하고 '애정문제'로 대화한다는 거냐. 애정이 생길 만해야 생기지, 문희에게 내가 연애감정을 품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너무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에, 이제 연애에 따라오기 마련인 신비감 같은 건 전혀 없다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애인으로 삼겠냐. 안 그래도 알몸도 매혹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퍽. "엉뚱한 생각하지 마." 문희의 알몸을 상상하려다가, 한 방 맞았다. 하긴 나도 좀 심하긴 했지. 별로 몸매도 좋지 않은 애의 약점을 잡으려고 한 꼴이니 말이다. 일단 진희와는 달리, 이 녀석은 절구통에 가까운 몸이다. 가슴도 작고. 퍽. "중상모략하지 마." 하지만 네 몸매는 진희에 비하면.... 퍽퍽퍽. "지금이 헛소리 할 때냐 !" 문희가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이를 부득부득 가는 게, 꼭 투견을 연상시킨다. 이제 곧 굉음이 들려오겠군.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으니. "어서 여자를 만들어. 물론 '나' 말고 다른 여자로 정해서. 운동부든 아니든 상관없어. 선배든 후배든 동급생이든 관계없으니까. 빨리 하나 만들어서 애들에게 이 여자가 내 애인이라는 식으로 공표해. 그러지 않으면 이 뜬소문을 잠재울 수가 없어. 왜 내가 네 애인이 되어야 하는 거야. 단지 네 소꿉친구라는 멍에 때문에, 그런 끔찍한 소문의 희생자가 되는 건 견딜 수가 없어. 네가 빨리 소문을 잠재우지 않으면, 우린 손자손녀까지 보는 사이가 될지도 몰라. 어서 나가서, 하나 만들엇 !" 이봐. 우린 아직 1학년생이야. 후배가 있을 리가 없잖아. 물론 그 말을 내가 입 밖으로 꺼낸 건 아니지만, 문희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진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나 보다. 너무 얼굴을 자주 보다 보니, 이런 것까지 알게 된단 말이야.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희가 나를 걷어찼으니까. 하지만 말야. 엉덩이를 걷어찬다는 발상은 괜찮았지만,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가겠냐. 몇 번이고 강조하는데, 여동생의 마수에 단련된 나에게는 그런 것쯤은 아주 느리게 보인다고. 나는 당연히 번개같은 동작으로 그 일격을 피하고, 뒤로 돌아가서 팔을 잡으려다가. '아. 안 되지.' 주위에서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는, 수많은 학우들 ! 그들은 내가 언제 문희를 넘어뜨릴지, 이번에는 무슨 -삐-한 짓을 할지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 도대체 이 인간들은 좌우지간. 그렇게 -삐-한 짓을 구경하고 싶으면, 애인을 만들어서 직접 하시지 그래? 그렇게 한 마디 던져주고 싶었지만.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뭐, 뭐냐. 이렇게 -삐-를 보고 싶어하는 인간이 많았단 말인가. 너무 인간이 많으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적당히 많아야지. 이 많은 인간들을 상대로 떠드는 건 문희나 가능한 짓이다. 뭐? 왠일로 여동생을 언급하지 않느냐고? 여동생이라면 이런 소리가 나오기 전에. [심의 규정에 의거하여 삭제되었습니다] 이렇게 할 것이다. 아니, 아니지.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그런 -삐-한 짓을 설마 정말로 하려고. 그럼. 그럼. 그럴 리가 없지. 그건 범죄라고. 범죄. 나는 약간의 현실도피를 하면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실망하는 듯한 탄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내가 못 살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지금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 - 여자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에 착수했다. 지금처럼 천하의 바람둥이에 변태로 낙인찍히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역시 고정된 애인 한 사람이 필요했다. 여자를 방패로 삼는다는 발상은 그리 좋은 게 아니지만, 문희 말대로 뜬소문을 어떻게든 잠재우려면, 애인 하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공인된 애인이 있다면, 문희와 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식의 헛소문도 잠잠해질지 모르니까. '물론 교실에서 자빠뜨릴 필요는 없지만.'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잡는 정도의 사이라도 좋다. 어쨌든 한 명은 있어야 한다. 그녀는 내 고교생활에 행복을 더해주는 빛이 될 것이며, 문희나 여동생의 구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내가 유명해지고 나서 여자를 사귀려고 해도 이미 늦기 때문이다. 스타가 된 후에 여자를 사귄다면, 내 재산이나 명성만을 보고 나에게 접근하는 속이 시커먼 여자가 많을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애인으로 삼고 싶은 여자는 우리 학교 안에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백하지?" 이거, 여자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고백을 해봤어야 알지. 내가 풍남이처럼 기름칠한 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외모가 엄청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며,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니 더욱 어렵다. 아. 지금은 결혼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연애하는 게 목적이니 이런 건 일단 넘어가도 되나? 그리고 고백의 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궁리해야 하는 것도 있다. 일단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상황을 분석해보자. 일단 내가 정해야 하는 것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이다. 그럼. "누가?" 당연히 내가 진희에게. "언제?" 내일 아침부터 계속. "어디서?" 내가 고민할 문제 하나. 이걸 지금부터 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진희의 일정을 검토해보면 답이 나올 듯 하다. "무엇을?" 당연히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문희와의 사이를 진희가 오해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 역시 명확하게 정해진 일이다. 그리고. "어떻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어떻게?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안 된다. 그게 된다면, 내가 여태까지 진희에게 고백 한 번도 못하고 여태까지 세월만 보낼 리가 없으니까. 이 질문은 바로 '어디서?'와 '언제?'와도 연관되는 것이며, 내 고민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과연 어떻게 해야 진희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문희라면 아마 이럴 것이다. "아무데서나 붙잡고 고백해 ! 빨리 !" 하지만 그 의견은 각하. 고백이라는 것도 뭔가 격식이 있고 품위가 있고 예의가 있는 법. 아니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무데서나 붙잡고 고백한다고 해서, 품위도 없게. "진희야. 널 좋아해." 화장실에서 이렇게 고백하라고? 난 문희처럼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건 못하겠다. 그럼 어디서 고백해야 할까. 고백장소를 물색하던 나에게, 떨어져오는 한 가지 진실. 그것은. "학교 밖에선 어렵겠군." 진희는 부잣집 아가씨다. 그것도 보통 부자가 아니라, 저 전풍그룹의 후계자인 풍남이가 보기에도 상당히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아가씨다. 예시당초 나 같은 평범한 서민과는, 사는 세계부터가 다른 것이다. 우리 학교에 그 두 사람이 온 것은, 사실 명문대 진학률이 극히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나와 미인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서로 만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뭐? 아직 고등학생이 된 지 한 달 정도인 인간들이 어떻게 소꿉친구처럼 친밀할 수 있느냐고? '중학교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입시경쟁을 없앤다느니 하는 교육부의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된 게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입시를 걱정해야 하는 거야? 어쨌든 나와 여동생이 공부를 매우 잘했기 때문에 - 집안 어르신들은 여동생만 공부를 잘하고 나는 못하는 줄로 알고 계시지만 - 우리는 괜찮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나와 진희는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뭐? 그 전에도 만나지 않았느냐고? 몰라. 내 머리는 초등학교 시절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정도로 좋지가 않아. 그 정도 머리라면 내가 여동생이지, 오빠겠냐. '하지만 만난 후에는.' 도무지 진전이 없다. 문희나 여동생과는 쉽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어떻게 된 게 진희하고만 만나면, 정확히 말해서 단 둘이 마주치면 당장 입이 막힌다. 이상하게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다. 좌우지간 입이 풀칠이라도 한 듯이 봉인되는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렇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영화나 드라마라면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못하는 주인공에게 마구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내가 그 입장이 되니까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별다를 게 없다. 아니, 더 나쁘다. 한심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문희와의 사이를 요상하게 만든 헛소문은 차라리 약과다. 만약 내가 진희에게 고백하지 않고 이대로 머뭇거린다면, 그 풍남이가 진희를 낚아챌지도 모른다. 그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진희를 노리는 인간이 하나둘이겠는가. 솔직히 진희 정도라면 그 얼굴, 그 몸매, 그 성격, 그 재능. 어느 한 분야에서도 밀리는 쪽이 없다. 물론 외계에서 온 여동생에 비하면 약과이지만, 그 녀석은 성격에 문제가 있으니 제외해야 하며, 그렇게 따지면 진희는 매우 보기 드문 재원이다. 아니, 그녀의 재능이니 재산이니 하는 것보다는, 단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행복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을 맺어야 할 때이다. 문희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야 한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좋아." 내일부터 고백작전을 시작하자. 어떻게 하느냐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지말고, 그냥 진희와 둘이 있는 기회가 생기면 즉시 고백하는 거다. 물론 화장실이니 탈의실이니 하는 곳은 절대로 제외하고. 문희의 방법을 연상시키는 무식한 돌격이지만, 정교한 고백수법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내 솔직한 감정을 진희에게 털어놓자.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내일의 태양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백의 날, 시작 !" 이렇게 하늘에 대고 외친 것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은 내내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세면대에서도, 식사시간에도, 그리고 아침에 학교를 향해 달려갈 때에도. 오죽했으면 여동생이 그러겠는가. "오빠. 오늘은 왜 그렇게 붕 떠 있어?" 그래. 난 오늘은 붕 떠 있다. 진희가 나의 고백을 받아들이면 더욱 더 떠오를 것이고, 고백이 거절당하면 땅속으로 하강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떠 있는 쪽이다. 우선 고백의 첫 번째 시도는, 역시 등교시간이다. 진희가 비록 부잣집 아가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학교 안에까지 리무진을 들이밀지는 않으니까. 나는 지하철역으로 달려가면서, 오늘의 작전을 생각했다. '등교시간이 안 되면.' 그럼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을 모조리 사용하는 거다. 아마 등교 이후에 쓸 수 있는 시간이라면, 역시 점심시간과 방과후일 것이다. 진희를 따로 불러낼 수 있는 시간이라면, 역시 그 시간이 가장 좋겠지. 쉬는 시간도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은 시도해보는 거다. 자. 봄이 올 것인가 겨울이 올 것인가. 만약 오늘이 안 되면 휴일에 진희를 불러내거나, 진희네 집에 직접 쳐들어가는 선택이 남게 된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오늘 고백하고 싶다. 결심이 굳었을 때 하지 않으면, 또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까. 지하철에 타고나서도, 이런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고백작전, 개시 !" 안 외쳤다. 안 외쳤다. 맹세코 안 외쳤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진희에게 고백할 첫 번째 기회라면, 역시 등교시간이다. 물론 진희는 부잣집 아가씨답게 대중교통이 아닌 리무진을 이용하므로 지하철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하지 말라는 학교측의 부탁도 있으니 중간에 리무진에서 내려서 걸어올 것이다. 진희가 평소에 걸어오는 방향은, 지하철역과는 정반대 방향. 따라서. "먼저 가서 기다린다." 잠깐. 그 전에 위험인물부터 제거해야지. 여동생이 이런 자리에 따라오는 거, 별로 바라지 않으니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이 녀석은 평소보다 내가 더 빨리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처럼 옆에 따라붙었다. 좀 떨어져라. 이 진드기 같은 인간아. 그러나 내가 버럭 화를 내기도 전에. "그럼 오빠, 오늘 고백 잘 해." 으악. 어,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무리 여동생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완전히 얼어 붙어버린 나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웃는 미인이. "어제 문희가 오빠한테 권유하는 걸 들었거든." 설명이 부족하다. 어제의 협박에는 오늘 내가 고백할 거라는 걸 암시하는 내용이 없었단 말야. 게다가 '진희가 등교하는 걸 기다렸다가 고백할게요.'라고 결심한 건 그 이후라고. 앞뒤가 전혀 안 맞아.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일란성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알아냈지. 이 녀석은 정말 외계에서 온 여동생인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여동생과 일일이 시시비비를 가릴 틈은 없다. 늦게 가면 진희는 리무진에서 나와서 학교 정문으로 들어올 테고, 그렇게 되면 수많은 학우들이 보는 앞에서 고백을 해야 한다. 뭐 고백 자체는 큰 문제는 없지만, 그 상황에서 진희가 긍정적인 답을 해줄 수 있을까? 단호하게 말하는데, 부정적이다. 여자아이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 받고 나면, 과연 대답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진희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안 된다. "에라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고백하는 게 낫겠다. 나는 악마 같은 여동생은 일단 내팽개쳐두고, 진희가 온다고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석양을 향해, 아니 진희를 향해 달려라. 문구야. 다행스럽게도, 여동생은 내 뒤를 쫓아오지 않는다.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주는 걸 보니, 일단 방해꾼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안심이다. 다만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는 표정을 짓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길 빈다. 평소에 열심히 운동한 것이 효과가 있는지, 곧 진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잘 맞춘 모양이다. 하긴 진희가 등교하는 시간을 매일 확인한, 내 노력의 성과라고 해야겠지만. "진희야." 나는 진희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알아본 진희가 깜짝 놀랐지만, 일단 손을 흔들어주기는 한다. 약간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주위에는 학생이 전혀 없었다. 잘 됐다. 일단 고백은 못하더라도, 점심시간에 옥상에 나와달라고 부탁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거리에서 고백을 한다면 진희도 부끄러워하겠지만, 단지 옥상에 나오라고 하는 정도라면 무리가 없겠지.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너무나 안이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진희에게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쿵. 내 앞을, 검은 양복이 막아섰다. 물론 양복 자체가 하늘을 떠다니며 내 앞길을 막은 건 아니고,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나를 막아섰다는 것이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른다. 의외의 기습을 당한 나는 그 주먹을 막으려고 했지만. 쾅. 창피하게도,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같은 나이의 상대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은 전문가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내 명치에 정확히 주먹을 날리는 것부터가 보통 불량배와는 수준이 틀렸다. 그런데 내가 왜 얻어맞아야 하는 거지? 진희한테 위협이 되는 요소라고 판단된 건가? 하지만 난. "쓰레기 주제에 감히 우리 아가씨한테 접근하려고 하다니. 죽고 싶나." 뭐, 뭐야.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받는 거지? 순간적으로 문희와의 헛소문이 이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사이의 뜬소문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이 사람들이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 위인들이 이러는 이유는. '진희 아버지?' 그 자를 제외하고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진희의 아버지를 빼면 이런 짓을 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나. 이러고도 나중엔 정당방위라고 우기겠지. 두 번째 일격을 대비하여 몸을 한 바퀴 굴리려는데,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또 다른 검은 양복이 내 어깨를 밟았다.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나. 유괴범? 불량배? 그런 생각을 했다면 당장 꺼져." 이 작자들이 대체. 진희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그들을 막으려고 하지만, 이 인간들은 진희를 반강제로 리무진에 다시 태운다. 그녀는 말도 못해보고 차 속으로 사라졌고, 검은 양복의 무리들은 나에게. "아.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 이건 법적으로 정당방위니까." 이게 어디가 정당방위냐. 다짜고짜 사람에게 주먹부터 휘두르는 게 정당방위냐. 내가 무기라도 들고 덤벼들었다면 이해나 하겠는데, 이건 억지가 너무 심한 게 아니냐. 그러나 그것은 내가 진희 아버지를 너무 만만히 본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내 옆에서 이상한 물건을 들더니. "이거, 러시아제 토카레프 자동권총인데요. 고등학생이 어떻게 이런 걸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에 신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야 ! 내가 언제 그런 걸 가지고 다녔다는 거야. 내가 여동생인 줄 알아? 그들은 손수건으로 권총을 감싸고는, 비닐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거 뭐야. 본격적으로 뒤집어씌우기를 할 셈인가. 극히 불길한 예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범죄자가 되겠다. 게다가 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진희는, 리무진에 갇혀버렸고. 그 작자. 나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내가 진희랑 만나는 게 그렇게 아니꼬운 거냐. 검은 양복들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양팔을 잡았다. "자. 얌전히 경찰서로 가자. 혹시 북에서 보낸 간첩 아냐? 이 녀석. 꼬마 주제에 권총이라니." 야 ! 멀쩡한 사람 간첩 만들지 마 ! 위기감을 느낀 내가 버둥거리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힘은 일개 고등학생인 나와는 수준이 달랐다. 아무리 내가 고등학생치고는 강하다고 해도, 무술의 고수들인 본격적인 경호원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들은 나를 자기들의 차에 밀어 넣고, 강제로 경찰서로 이송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만 두세요." 그들의 앞에, 진짜로 고등학생 수준이 아닌 학생이 나타났다. 아.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내가 여동생이 오는 걸 기뻐하다니. 세상 살다보니 별 일도 다 경험한다. 그녀는 차분하게 검은 양복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런데 오른손에 들린 게 뭐냐. "무고한 시민에게 누명 씌우지 마세요. 학교 친구를 만나려고 온 학생에게, 그게 무슨 짓인가요?" 검은 양복들이 그녀. 여동생의 말을 무시하려다가,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작은 물건을 보고는 안색이 돌변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은. 설마. 저 녀석. 설마. "당신들의 행동은 모두 녹화하고 있어요. 이상한 행동은 삼가 주세요." 이봐. 휴대전화 들고 협박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동생이 들고 있는 것은, 그런 시시한 휴대전화가 아니었으니. 여동생이 스위치를 탁 누르자, 그 작은 휴대전화의 콩알만한 화면에 뭔가가 나타났다. 야. 멀어서 안 보여. 하지만 검은 양복들은 그게 보이나 보다. 선글라스를 쓰고서도 그걸 보다니, 시력 한 번 좋다. 그런데 다들 얼굴색이 왜 저래? 설마. "어, 어떻게 그런." 너, 정말로 녹화한 거냐? 아무리 요즘의 휴대전화가 TV시청에, 사진촬영에, 게임에, 인터넷에, 안 되는 게 없는 물건이라지만, 설마 비디오 카메라 노릇까지 가능했던 거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미인아. 너 우리 집 돈을 얼마나 횡령한 거냐?' 일개 여고생의 용돈으로, 저런 비싼 물건을 구입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많은 용돈을 받고 있지 않다고. 여동생만 용돈이 왕창 지급되는 게 아닌 이상, 도대체 어떻게 저런 사치품을 태연히 구입할 수 있는지,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히. 딱. 악. 이 상황에서까지 때리는 거냐. 저 녀석,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때린다. 이거 재미 붙인 게 분명해. 오라버니가 구속될 위기에 놓인, 이 상황에서조차 나를 구타하는 걸 잊지 않다니. 망할 녀석. 하지만 여동생이 그런 나를 동정해줄 리가.... 없다. 그녀는 오히려. "오빠. 그 눈초리, 날 의심하는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생활비라도 횡령한 줄 알았어?" 무서운 녀석.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게 아니라, 여동생 앞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는 식이다. 순식간에 사람의 속을 딱 짚어내다니.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날 속담을 완벽하게 깔아뭉개 버린다. 악마. 괴수. 그러나. 딱. "오빠가 돈을 너무 펑펑 쓰니까 그렇지. 좀 절약하면서 살라고." 또 때린다. 게다가 사과할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꾸중까지 한다. 오빠한테 그런 식의 말버릇이라니, 네가 내 누나인줄 아냐. 쌍둥이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내가 먼저 태어났다고. 하지만 여동생에게 있어, 그런 내 사정은 개천에 내다버린 지 오래다. 아니, 내 사정만 그런 식으로 취급된 게 아니다. 검은 양복들 역시, 그녀에게는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주위에 경호원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진희가 타고 있는 리무진에 다가왔으니까. 아니, 갇혀있는 리무진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진희야. 학교 가자." 저 천진난만한 목소리. 모르는 사람은 깜박 속을, 유리구슬이 유리창을 구르는 듯한 목소리다. 저 목소리로 여태까지 몇 명의 남자를 홀렸을까. 하지만 엉뚱한 생각의 대가는 컸다. 따딱. "아이쿠 !" 나는 비참하게 엎어졌다. 또 BB탄을 던진 거냐. 전에 불량배들이 나를 납치했을 때도 그랬지만, 저 녀석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죽하면 진희가. "미인아. 문구를 너무 때리는 거 아냐?" 그래. 맞다. 무슨 저런 폭력배 여동생이 다 있냐. 하지만 미인이는 오히려.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뭐가 괜찮아 ! 하지만 여기서 내가 화라도 냈다간 또 맞는다. 하지만 주위의 환경을 생각하면, 맞는 것을 각오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진희의 경호원이라고 자칭하는 납치범, 불량배들이 보는 앞에서,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그런 말을 할 기회는 없었다. 여동생이 리무진의 손잡이 문을 열려는 순간, 경호원 하나가 선수를 친 것이다. "너 같은 불량배는 지금 처리해야, 아가씨가 안심하고 등교하시지." 저 바보 ! 감히 여동생의 어깨를 잡아당기다니. 어떻게 될지 앞날이 뻔했다. 이 멍청아 ! 그러다가는 당한단 말이야 ! 물론 내가 그걸 알려주기도 전에 이미 상황은 끝났다. 그는 불행히도 상대가 지상최강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그가 여동생을 잡아당기는 순간, 여동생은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그에게 끌려나온 것이다. 그런데 말야. 머리 위치가 안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빡. 역시. 모든 일이 예상대로 되는 것은 재미없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하긴 여동생을 상대로 감히 행패를 부렸으니 어쩔 수 없지. 여동생을 잡아당긴 것은 검은 양복이고, 그로 인해 여동생의 머리가 뒤로 획 젖혀진 것도 당연하다. 다만 그 머리가, 여동생의 그 돌머리가 검은 양복 자신의 앞이마와 부딪친 것은, 예상 밖의 사고였다. 이 멍청이. 그것도 못 피하냐. 물론 옆에서 구경하는 입장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그는 서서히. 쿵. 쓰러졌다. 그는 잠시 몸을 버둥거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나 보다. 물론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사고로 보였다. 사실 여동생이 머리를 먼저 휘두른 게 아니라, 검은 양복이 여동생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머리가 뒤로 날아간 거니까. 하지만 저건 실수 같아 보여도. '고의야. 고의.' 백이면 백, 저건 고의가 분명했다. 명색이 경호원이라면 싸움에도 전문가일텐데, 일개 여고생의 실수에 저렇게 간단히 나자빠질 리가 없다고. 게다가 저 녀석이 이런 상황에서 실수라는 걸 할 것 같으냐. 당연히 평소의 그 패턴이 분명했다. 불량배들에게 고의로 사고를 일으켜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을 쓰러뜨리는 그것 말이다. 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이봐. 저 녀석은 일개 여고생이 아니라, '여동생'이란 말야. 여동생. 어쨌든 여동생은 자기 멋대로 리무진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진희가 재빠르게 뛰어나온다. 경호원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아가씨'를 때릴 수는 없었나 보다. 물론 그 이유는, 그들이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거, 보통 녀석이 아닌데.'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비록 여동생 같은 고수는 아니지만, 저 검은 양복들이 긴장했다는 것은 확실히 느꼈다. 조금 전의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긴 조금만 이 동네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불량배 100여명을 물리친 여자가 단지 실수만으로 그런 업적을 쌓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람 대 사람간의 싸움으로 밥을 먹고사는 경호원들로서는, 절대로 여동생에 대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의 망설임이 그들을 붙잡았고, 그 덕분에. "문구야. 괜찮아?" 나는 황송하게도, 진희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었다. 아. 행복해. 거기다가. "이젠 그만해 주세요. 문구는 내 친구예요. 친구에게 이런 식으로 행패를 부리지 마세요." 아가씨다운 품위 있는 말투로 호소하는 진희. 아. 역시 어떤 폭력신봉자와는 하늘과 땅 차이야. 저래서 내가 진희를 좋아한다니까. 뒤에서 황홀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진희의 경호원들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선다. 그러나 그것은 진희가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방향이 말야.' 여동생한테 가 있었으니까. 어쨌든 경호원들 중에서 선임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진희에게 걸어오더니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휴우. 포기하고 물러가는 건가. 그러나.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가급적이면, 저 학생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시길." 나를 손가락질하는 경호원 선임. 내가 무슨 불량학생이냐. 하지만 그들이 나를 보는 눈빛은, 증오심과 살기로 넘쳐흘렀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다. 어째서 나는 저런 눈을 자주 만나야 하는 걸까. 축구부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그랬었는데. 그때의 불량선배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건만, 왜 또 저런 녀석들을 만나야 하지? 그들은 리무진과 함께 사라져갔고, 나는 남몰래 한탄해야 했다. '어째서 나한테만.' 산 넘어 산이었다. "미안해. 문구야." 그 경호원들이라는 작자들이 사라진 후, 진희가 가장 먼저 한 말은 그것이었다. 먼지를 털어 주고, 안타까워하고, 손수건으로 먼지를 닦아주는 그녀의 손길이 부드럽다. 그리고 이럴 때 내가 할 말은 당연히. "괜찮아. 이 정도야 뭐." 다른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럼 아파서 미치겠다고 엉엉 울며 진희한테 매달릴까. 옆에 지나가는 학생들을 봐서라도, 그건 못하겠다. 그랬다가는 오늘부터 내 별명은 '울보'가 된단 말이야. 어쩌면 그 경호원들이 순순히 물러간 것도, 학생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여동생과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었다면, 적어도 주위 통행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의 시간은 걸린다는 판단에서일까. 물론 지금은 지나간 일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다만 한 가지, 그 경호원들을 다시 만날 경우에는 조심해야 하겠지만. "미안해. 저 사람들이 저러는 것은, 그러니까. 저......" 진희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저들이 저러는 것은 분명히 자기 아버지가 지시해서인데, 그렇다고 딸이 아버지를 비난하기도 힘들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마. 진희야. 껴안고 싶어진다고. 그런데 잠깐. 생각보다 그 인간들이 너무 순순히 물러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급히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미인아. 혹시 지금도?"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듯한 여동생의 대답. "다들 물러갔어. 다만 그 사람들이라면 진희의 옷에 위치추적용 발신기 하나쯤은 붙이지 않을까?" 겁나는 소리는 하지 마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그렇게 된단 말야. 하지만 진희는. "아마 그럴 거야. 부잣집 아가씨라고 해서 편하기만 한 건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할 때의 진희는, 정말 불쌍해 보였다. 가련한 한 떨기 꽃, 그 자체였으니까. 이럴 때는 보통 나도 같이 슬퍼해야 마땅한데, 그게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온통, 진희가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뿐이었다. 어느 야만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기만 해도 감싸주고 싶어지는 저 얼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진희에게 한 발짝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뒷머리가 서늘해진다. 이 느낌은. "잠깐. 너, 찍지 마." 예상대로, 어느새 여동생은 문제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망할 녀석 같으니.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설마 도촬이라도 할 생각이냐. 대답이야 뭐. "기념이잖아? 당연히 오라버니가 지금부터 할 일을 촬영해둬야지." 기념은 무슨 ! 사실은 그걸로 날 놀려먹을 셈이지? 그렇지?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손을 내젓는 나에게, 따스한 햇빛이 내려 쬔다. 그런데 이건. "오늘 할 일? 뭘 하려고 했는데? 문구야." 악. 나왔다. 저렇게 천사 같은 얼굴로 물어본다면, 부정하지 못해. 나는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진희에게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호박이 줄긋는다고 수박 되는 게 아니고, 집에서 깨진 바가지가 밖에 나가서 안 새는 것도 아니다. 평소에 진희 앞에서는 말을 더듬던 버릇이, 지금에 와서 바뀔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연습이라도 해둘 걸.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특정 주제를 언급하려고 하면 나는. "그래서, 난, 난, 네가......... 네가........" 이렇다니까.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말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하지만 입이 그렇게 쉽게 열린다면, 벌써 난 진희한테 고백했을 거다. 자꾸만 입이 다물어진다. 그러나. '그래. 나도 남자다.' 여기서 입을 다물고 도망친다면, 남자도 아니다 ! 여동생이 날 놀리는 건 문제조차 아니다. 지금 고백을 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진희야." 진희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래. 이제 가는 거다.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지옥행이든 천당행이든 지금 결말을 내고 만다 ! 하지만 나에게 봄날은 오지 않았다. 뭐? 거절당했냐고? 아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엥? 저 녀석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오호. 뭐 하는 거지? 새로운 공략대상이냐?" "여동생과 소꿉친구에 이어, 세 번째라니. 너무한 거 아냐?" "못된 녀석. 독점금지법 위반이라고 전에 경고했을 텐데?" "욕심쟁이." 입을 열 겨를도 없었다. 어느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학우들, 아니 원수들이 둘러싸 버렸으니까. 이곳이 학교 바로 앞임을 깨닫지 못한, 나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주위의 와글거림을 깨달은 진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나, 나중에 들을게."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학교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안 돼." 내가 말릴 겨를도 없었다. 진희는 거의 여동생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교실로 달려가 버렸다. 와. 빠르다. 내가 황급히 쫓아가려고 했지만, 그러기 전에 내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그의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보니, 대충 사정을 알만했다.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이런 인간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다. 나는 그를 뿌리쳤지만, 또 다른 인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밀쳐버린다. 또 있다. 밀쳐버린다. 또 있다. 밀쳐버린다. 또 있다. 밀쳐버린다...... 가만. 이거 도돌이표가 찍힌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아? 등교하던 학생들이 전부 나 하나만 막아선 것 같잖아? 할 일 없는 녀석들. 그들은 일제히. "세 명은 안 돼." "우리 학교의 예쁜 여학생은 모조리 혼자 독점할 생각이냐?" "너무 한다." "우리도 예쁜 여학생 좀 사귀어 보자." "학내 제일의 미녀를 여동생으로 둔 주제에." "나도 그렇게 예쁜 소꿉친구를 애인으로 두고 싶어." 빨리 한 명으로 고정해야 할 것 같군. 그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잡상인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교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너희들 사정을 내가 알 게 뭐냐. 어차피 내가 고백에 성공하면 '독점'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어질텐데. 그런데 뒤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뭐냐. 우르르르르. 발소리 한 번 요란하다. 한가한 인간들 같으니. 여자도 아니고, 남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다니. 한바탕 꾸짖어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내 말을 들을 리가 없겠지?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냥 내 갈 길을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해서. 우다다다다.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더 커졌다. 한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살짝 돌아봤더니, 그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차피 듣지도 않겠지만, 형식적으로 말려본다. "따라오지 마." 그들 역시 형식적으로 대답해온다. "우린 등교하는 것 뿐이야." "지각하면 네가 책임질래?" "모두가 사용해야 할 길을, 왜 너 혼자 쓰겠다는 거야." 웃는 얼굴로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손에 들린 게 무엇이더라? 내 머리보다 더 큰 무언가를, 그들은 움켜쥐고 달리고 있었다. 이봐. 그것보다는 자기 머리를 떼어서 드는 게 더 단단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한심한 인간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여자 하나를 꿰어찰 것이지, 남이 고백하는데 방해를 놓는 걸로 소일하다니. 좀 건설적으로 놀아라. 저런 사람들과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죽어라 교실로 달렸다. 뒤에서 뭔가가 날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게다가 말야. 사실 너희들이 나한테 화낼 처지냐. 그게 아니면 내가 너희들한테 화낼 처지냐. '고백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방해나 놓고 말이지. 투덜투덜. 불평과 함께, 나의 첫 번째 고백시도는 그렇게 참담한 종말을 맞았다.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억울하다. 말도 제대로 못해보고 한 번의 기회가 무효로 돌아가다니. 그러나 아직 해는 중천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힘내자.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진희야." 교실에서 고백한다는 게 아니다. 점심시간에라도 따로 만나자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희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홍당무가 되더니, 책상 아래로 가라앉았다. 진희야. 가라앉지 마. 네가 무슨 잠수함이냐. 그 대신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달갑지 않은 학우들이었다. 뭐? 반 아이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학생의 의무라고? 이 인간들이 하는 짓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들은 잽싸게 나와 진희 사이로 끼어 들더니. "변태 접근 금지." 야 ! 이 작자들이. 도대체 이걸 친구라고 해야 하냐. 그렇지 않으면 원수라고 해야 하냐. 그들은 진희를 완전히 둘러쌌다. 철의 장막이 아니라, 인(人)의 장막이다. 그들은 일제히 진희의 주위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진희는 귀를 막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떠드는지 귀로 듣기도 전에, 그 모습은 곧 장막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런. 큰일이다. 이 녀석들이 진희한테 엉뚱한 짓이라도 하면 어쩌지?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구하려고 접근했지만. "변태는 접근 금지라고 했지?" 나는 장막 안으로 접근하려다가, 밀려나갔다.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하지만, 안 된다. 힘으로 길을 열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혼자서 수 십 명을 힘으로 당해낸다는 것이 무모하기야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해야 한다. 하지만 여동생이 아닌 내가 그런 위업을 이룬다는 것은 무리였다. 안타까운 외침. "진희야 !" 남자들의 산더미에 파묻힌 그녀. 그런 그녀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안 된다. 인간으로 이뤄진 장막을 헤치고 접근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게 상대팀 수비수라면 어떻게 하겠지만, 공간이 너무 좁았다. 게다가 축구와는 달리, 그들은 팔을 쓰고 있었다. 뭐? 축구에서도 팔은 많이 쓰지 않느냐고? 이봐. 보통 그런 건 반칙이라고. "진희야. 저런 녀석한테 넘어가면 안 돼." "정신 바짝 차려. 너 정도면 좋은 남자를 많이 거느릴 수 있어. 예를 들어 나 같은." "네가 무슨. 남자라면 나 정도는 되어야지." "게다가 저 녀석은 얼굴도 못생겼어." 이 인간들이 남의 얼굴을 가지고 중상모략을 하나. 게다가. "학교 제일의 변태와 굳이 사귈 필요는 없다니까." 내가 밖에서 인의 장막을 부수려고 애를 쓰는 동안, 그들은 별별 헛소리를 다하며 진희를 현혹하고 있었다.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 덕분에 나는 아직 고백도 안 했는데, 내 의사는 모조리 진희에게 전달되어 버렸다. 낭만적인 고백과 응답을 원했지만, 그런 건 하수구에 처박혀버린 셈이다. 무슨 이런 청춘이 다 있냐. 안에서 난처해하는 진희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고민은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끝났다. 아무것도 못해보고, 정말 아무것도 못해보고 아침의 기회는 날아간 것이다. "진희야. 저 녀석한테 접근하지 마." 장막이 풀리면서, 이 망할 학우들, 아니 원수들은 그렇게 진희한테 다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허무하게 주저앉은 나와, 혼란 상태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진희만을 남기고. Now loading. Please wait. 무슨 연애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내 꼴이 바로 이런 지경이었다. 수업이 이미 시작된 이상, 점심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수업도중에 진희에게. "진희야. 좋아해. 우리 사귀자." 이렇게 외칠 깡은 없다. 여동생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난 그 녀석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지 못했으니까. 물론 쉬는 시간에. "진희야. 좋아해. 우리 사귀자." 이렇게 외치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가능한 일이냐.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를 학우들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감시하는 판인데. 아니, 이 경우는 날 감시하는 게 아니라, 진희를 감시한다고 해야겠군. 이 인간들은 진희에게 내가 접근하려고 하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오지 마. 죽어." 이런 식이다. 그런 인간들을 밀어젖히고 진희에게 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이 녀석들이. "진희야. 위험해. 피해." 아예 진희를 끌고 도망가 버리는 거다. 덕분에 진희는 졸지에 '사악한 악마에게 납치된 공주님'이 되어 버렸고, 나는 '악을 물리치는 왕자님'이 되어 버렸다. 그래. 왕자님이 되었으니 좋겠다고? 공주님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아야 구출해올 것 아니냐. 결국 첫 수업이 끝나고 나서, 나는 쉬는 시간 내내 줄기차게 뛰어다녀야 했다. 2교시가 시작할 때까지. "내가 못살아." 그냥 오늘을 포기하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결단코 안 된다. 오늘 고백한다고 결심을 세우지 않았는가.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어떻게 무를 자른단 말인가. 내가 직접 가면 진희가 끌려가는 판에. 골머리를 앓던 나에게 스쳐 지나가는 묘안이 있었으니. '꼭 내가 알리라는 법은 없잖아?' 마침 입을 나불거리기 좋아하는 여자가 내 옆에 하나 있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빨리 애인을 만들라고 닦달하고 있으니, 내 고백작전에 협조해 줄 것이다. 뭐? 여동생이냐고? 그 녀석이 그런 선심을 쓸 것 같으냐. 내가 말하는 건, 여동생에게 가려 존재조차 희미해진 내 소꿉친구, 문희를 말하는 거다. 그 녀석은 내 귀를 따갑게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최소한 여동생보다는 인간성이 나은 애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쥐는 이유는 뭘까. '조건반사?' 그럴 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여동생은 이번엔 습격을 해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불의의 일격을 가한다. 이런 비참한 생활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꼭 고백하고 말 테다. 그러려면 우선은. "문희야." 나는 문희를 불러서, 진희에게 전할 쪽지를 전달해 주었다.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누구한테 전할지는 잘 알 테니,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전해 줘." 보통은 이렇게만 말하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를 한 번 보고, 진희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꿉친구답게, 이런 건 잘 알아듣는단 말이야. 그러나. "내가 네 심부름꾼이냐?" 이 아가씨가. 애인을 만들라고 한 건, 너잖아. 그런 말을 했으면 협조를 해야지. 일단 눈을 흘기고. "나하고 손자손녀 보는 것보다는 낫잖아." "진희가 불쌍해." 이게 정말. 그럼 할 수 없지.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네가 대신 할래?" "아니." 단호하게 부정하는 문희. 귀찮네 심하네 하더니, 막상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잽싸게 도망간다. 그렇게 불평할 바엔 빨리 전하기나 할 것이지. 표나지 않게. 문희는 잠시 쪽지를 내려다보면서 망설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좌우지간 소꿉친구를 잘못 둬서 피곤하다니까." 이렇게 해서 일단 문제 하나는 해결되었다. 문희라면 알아서, 저 인의 장막을 뚫고 진희에게 내 의사를 전달해 줄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내가 직접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하는 수밖에 더 있나. 그런데 이런 혼란과 대소동의 중심지는 원래 여동생 몫이 아니었나? 왜 내가. "됐어." 문희가 그 말을 나에게 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와아. 밥이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도시락을 열자마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마치 사흘 굶은 후 게걸스럽게 밥을 집어삼키는 듯이. 물론 그래도 나름대로의 품위는 갖추고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여동생에게는 불만인 모양이다. "오라버니의 위엄을 갖추고 식사해 줘." 네가 언제 그런 걸 따졌다고 그런 말을 하냐. 여동생의 말은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나는 식사를 끝냈다. 급히 식후 책상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평소라면 진희도 같이 식사를 했겠지만, 오늘은 그게 불가능했다. 눈치가 너무 보여서, 내 자리로 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과연 그녀가 옥상에 제 시간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다. '힘내. 진희야.' 나는 진희가 와주기를 기원하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 왜 이래?" 옥상에 사람들이 바글거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지금이 4월이라고 해도, 아직까지는 찬바람이 남아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진희에게 고백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많으면 좋을 게 없지만. 이야기에서야 주인공이 고백할 때 의례 옥상에는 사람이 없지만, 실제로 그렇게 타이밍이 좋을 리가 있는가? 학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적막한 학교라고? 약간 이상하기는 했지만,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나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으니. "우~~~" 뭐냐. 이건. 내가 미처 정신차리기도 전에, 눈이 뒤집힌 인간들이 팔을 90도 각도로 쳐들고, 출입구에서 하나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발을 질질 끄는 녀석, 어기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는 녀석, 침을 좔좔 흘리는 녀석,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녀석 등.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녀석들이 맛이 갔다는 것이다. 우선은. "난 평범한 학생이란 말이야 !" 절대로 내 사전에는 좀비와 만난다는 식의 학교생활은 계획된 바 없어. 게다가 우리 학교에 좀비를 만들 인간이 있겠냐. 우리 학교에 특별활동부가 많기야 하지만, 이런 짓을 할만한 데가 있나? 학교에 부두교 신봉자가 있을 리가 없고. 의심 가는 곳은 흑마술부이기는 한데. '그럼 미인이한테 갔어야지.' 흑마술이니 마법이니 하는 쪽은, 음흉하고 잔머리 잘 굴리는 여동생하고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축구선수인 나에게는 아무 연관이 없다. 2002년의 월드컵에서야 세네갈이 8강까지 올라가니까 주술사의 힘을 빌었다는 실없는 소리도 나돌기는 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그런 거 없어. 하지만 이럴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좀비를 다룬 공포영화는 과도하게 많이 나왔고, 수많은 온라인 게임에서도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지는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럼 우선은. "아. 칼이 없구나." 마법을 건 칼이 없는 이상, 전면전은 불가. 그럼 총은? 쓸데없이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아. 총도 없구나." 여동생이라면 권총, 소총, 기관총, 심지어 대포까지 주머니에서 나온다 해도 놀랄 게 없지만, 난 그런 불법무기 소유자가 아니다. 난 건전한 대한민국 사람이므로, 그런 흉물이 있을 턱이 없다. 그렇다면, 이럴 때 내가 선택할 답안은. "튀자." 도망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냐. 물론 저 인간들이 진짜 좀비일 리는 없겠지만, 왠지 다가가고 싶지 않은 족속들이란 건 틀림없다. 그렇다면 도망가는 게 최선이기는 한데, 어디로 달아나지? 옥상에 입구라는 물건은 오직 딱 하나. 저 녀석들이 걸어나오는 저기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이쪽으로." 일단 이런 인간들과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다. 나는 재빠르게 방송탑으로 걸어갔다. 가급적이면 그들의 신경을 끌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서. 하지만 이 녀석들은 어기적거리면서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문으로 나가고 싶어도, 맛이 간 학생들이 끝없이 나오고 있으니 그쪽은 무리다. 뭐랄까.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괴이한 느낌이 그들에게서 번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우~~~~~~~" 나는 조심스럽게, 방송탑에 있는 사다리에 매달렸다. 잠깐 위에 있다가 내려가자. 이 인간들이 뭐 하러 여기 왔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걸고 싶지가 않아.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 뒤집힌 눈을 보면 도저히 그러고 싶지가. "우~~~~~~~~~~~~~~~~~~" 그런데 내가 사다리에 매달린 순간부터, 일이 이상해졌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 깜짝 놀라 사다리 위로 후다닥 올라갔다고 해서, 날 겁쟁이로 몰지 마라. 정말 무섭게 달려왔단 말이야 ! 내가 방송탑 위로 올라간 것과, 그 시체(?)들이 사다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들의 손이 일제히 위로 내밀어진다. 조금만 늦게 사다리를 치웠으면, 그들은 위로 기어올라왔을지도 모른다. 이건 뭐야. "우~~~~~~~~~~~~~~~~~~~~~~~~~~" 말도 안 돼. 설마, 진짜로 살아있는 시체들이란 말인가. 내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고 해서 놀리지 마라. 난 여동생이 아니란 말야. 그런데 잠깐. 여기가 이런 식이라면, 저 아래는 과연 무사한 걸까. 물론 절대무적의 여동생이 있는 이상, 그 녀석이 좀비에게 물려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아냐. 아무리 그 녀석이 위대하다고 하더라도(위가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 혼자 몸 빼내기도 버거울 거야. 아냐. 아냐. 진희의 운명은? 수다쟁이 문희의 운명은? 기타 잡다한 인간들은 일단 젖혀놓더라도, 이 두 사람은 문제가 달랐다. 한 명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그래도 소꿉친구니까 내가 챙겨줘야 한다. 여동생? 그 녀석이 좀비한테 물려죽는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내려가야 하는데.' 진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역시 이대로 여기 있기만 하는 건 곤란하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도, 나에게는 무기도 없고 출입문으로 달려갈 빈틈도 없다. 이미 옥상은 눈이 뒤집힌 학생들로 가득 찼고, 말 그대로 발 디딜 틈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게다가 내려가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다. "우~~~~~~~~~~~~~~~~~~~~~~~~~~~~~" 이 녀석들아. 올라오지 마. 그런 내 불안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옥상에 올라오던 학생들이 지금의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이다. 어쩌다 이럴 때 올라오는 거냐.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내가 방송탑 위에 올라가 있는 걸 보더니. "야. 거기서 내려와. 거긴 학생이 맘대로 올라가는 데가 아냐." 이봐. 당신도 학생이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내가 그에게 충고하기도 전에, 좀비들은 그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입을 잘못 놀린 학생과 그 친구들은 순식간에 좀비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리고 그들은. "아아아아악 !" 죽었냐. 그들은 곧 좀비들 사이로 사라졌다. 비명. 소란. 알아들을 수 없는 불분명한 말의 이음. 그것이 끝났을 때, 좀비들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들은 곧,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다만. "우~~~~~~~~" 다들 물렸냐. 굳이 그걸 나한테 알려주려고 피로 옷을 물들이지 마라. 비록 손은 위로 쳐들지 않았지만, 벌어진 입에서 침 흘리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곧 그들 역시 좀비 무더기에 합류했다. 이 일을 어쩐다. 생각 같아서는 전기톱으로 저 녀석들을 해체하고 싶지만, 여기에는 전기톱은커녕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없다. 공구상자 하나는 있지만. 좀비들이 탑 위의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여기저기서, 하늘로 쳐 들린 좀비들의 손. 잔디 깎기 기계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필사적으로 공구상자를 살피던 내 귀에. "우어~~~ 문구 녀석만 좋은 일 시킬 수는 없어. 우어~~~" "우~~~~~ 우리도 여자 사귀고 싶어. 우~~~~~~" "우어~~~ 독점체제는 반대해. 우어~~~" "우어~~~~~" "우~~~~~~~" 뭐야.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에 망치 하나를 든 채로. 그들이 실제 좀비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안심이었을까. 일단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니, 전혀 다행이 아니다 ! 내가 옥상에 올라온 이유가 무엇인데 ! "우~~~~~~~" "우~~~~~~~" 나는 그렇게, 점심시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방송탑 위에 앉은 채로, 질투에 눈 먼 학우들, 아니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진짜 좀비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이건 너무했다. 난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것도 못하는 거냐. "아깝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사진 몇 방 찍었을 텐데. 이번 신문의 특집은, '질투에 눈 먼 학우들'로 타이틀을 잡아서 한 방 멋지게. 옥상 전체에 그렇게 학생들이 몰려있는 건 장관이라고.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문희 이 여자가. 남이 안달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작 나오는 감상이 그거냐. 넌 모든 게 '특종기사 감'으로만 보이는 거냐. 하지만 눈동자에 '특종'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듯한 내 소꿉친구에게 있어서, 그런 내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잇는 문희. "그래서. 설마 진짜 좀비들인 줄로 알았어?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잖아. 영화도 아닌데." "네가 그 광경을 봤어도 그런 소리를 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수 십 명의 좀비(?)들이 무더기로 덤벼드는 광경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아무리 여자가 없어서 한이 맺혔다지만, 그렇게까지 되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냐. "하지만 너 진짜 웃긴다. 어떻게 피하고 페인트도 구분 못하냐?" "직접 당해봐. 비명까지 들리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냐?" 누가 그 위치에 방치된 페인트 통이 있을 줄 알았냐. 알고 보니 피라고 생각된 것은 페인트였고, 비명이 나온 것은 페인트가 엎질러지면서 페인트통과 학생이 부딪쳤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누가 그렇게 쉽게 내겠냐. 하지만 이 일로 아마, 나는 한참동안 문희의 놀림감이 될 것 같다. 내가 못살아. 게다가 이 소꿉친구는 나에게 다짐하기를. "그러니까 휴대전화 하나 사라고. 그런 일이 있으면 잽싸게 달려가서 사진 한 방 찍게." 진짜를 만나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나로서는. "물리지나 마라." 지금은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밖에. 어쨌든 결국 점심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나는 방송탑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아. 진희는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옥상에 못 왔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상황에서 옥상에 올라온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소리냐? 물론 여동생이라면 설령 진짜 좀비들이 옥상을 가득 메운 상황일지라도. "Fire(사격) !" 이 말과 함께, 한바탕 날아다녔을 것이다. 영화 주인공처럼 양손에서 기관총을 쏴대고, 자신의 옷에 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으면서. 뭐? 우리나라에는 총기가 없다고?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어디에선가 구해올 거다. 안 되면 경찰서를 털어서라도 구할 거다. 게다가 그러면서 좀비에게 포위된 경찰들까지 구해서, 모범시민으로 표창장을 수여 받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진희는 그런 인간이 아니니, 예시당초 무리다. 그녀는 부잣집 아가씨이지, 그런 상식 밖의 괴물이 아니라고. 뭐 어쨌든 그런 시시한 건 일단 젖혀두고. "큰일났다." 결국 나는 아침에도, 점심에도 진희에게 고백하는데 실패한 셈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저녁시간 뿐인데, 이번에도 실패하면 오늘의 고백작전은 대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다. 게다가 오늘이 이렇다면 내일 역시. "우~~~~~~~~~" 이렇게 외치는 학우를 가장한 원수들에 의해, 고백 자체가 차단 당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여동생한테 불량학우들을 소탕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할까. 아니, 안 돼. 그러면 두고두고 이걸 가지고 날 놀려먹을 게 분명해. 게다가 아직 기회가 없어진 것도 아니야. 수업이 끝나고 진희가 귀가를 위해 리무진에 올라타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든 살려야 해. '이게 마지막 기회란 말야.' 만약 이번에도 고백을 못하면, 진희의 집에 찾아가야 한다. 뭐? 그것도 좋은 게 아니냐고? 웃기지 마. 진희 아버지라는 자가 얼마나 사악무도한지 몰라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다. 아마 그 사악함을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여동생밖에 없을 거다. 아니, 여동생보다도 더 사악할지도 몰라. 그런 인간과 만나서 담판을 하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다. 언젠가는 그 자와 대결해야 하겠지만, 그 전에 진희와 사귀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보다 진희 쪽이 더 먼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일단 사귀어야 승산이 생기지.' 진희가 감히 그 아버지와 맞서는 길을 택할까? 지금으로선 힘들다. 그 연약한 여자아이에게 그런 짐을 맡기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 그래도 난 명색이 남자인데 말이다. 진희는 여동생이 아니니, 그런 짐은 내가 지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백부터 해야지.' 그런데 이렇게 고백이 힘들다면, 나는 어떻게 진희와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장래가 갑자기 걱정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보자. 일단은 고백에 성공하는 것이 시급하다. "가자." 나는 재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수업시간은 막을 내렸고, 나는 이제 진희에게 갈 것이다. 죽든 살든, 차이든 안 차이든 이제 결말이 나는 것이다. 자. 죽든 살든 시도해보는 거다. 하지만 그런 나의 야망은. "야. 연 문구. 어디로 가는 거야. 너 오늘 청소당번이잖아." 이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런. 그러고 보니 오늘 난 청소당번이었잖아. 하지만 왜 하필이면 오늘이지? 어제나 내일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어차피 10초 이내로 끝낼 수 있는 게 고백이니까. 나는 재빠르게 진희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청소당번이 도망가다니, 어림없다 !" 일제히 내 앞을 막아서는 '사랑스러운' 급우들. 그래. 너희들 참 의리 있고 당당하구나. 진희에게 어떻게든 접근하려고 해도, 이런 식이면 접근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꼴이다. 그렇게 내가 진희에게 접근하는 게 사악무도한 짓거리냐. 게다가. "청소당번은 청소당번답게, 청소를 끝내고 나서 자유시간을 가지는 게 정석." "옳소. 학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해라." "축구부 주전선수면 다냐. 청소는 하고 가라." "혼자서 내뺄 셈이냐." 말로는 참 당연한 소리다. 일단 겉으로만 보면 청소당번이면서도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 달아나는 나를, 착하고 모범적인 급우들이 막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 말로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게 뭔가. "그럼 진희야, 안녕. 내일 보자." 참으로 훌륭하신 우리 반 남학생들은, 진희의 가방을 들어주고, 그녀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교실 밖으로 안내해준다. 내가 그쪽으로 가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내가 인의 장막을 뚫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나 혼자서 어떻게 그런 걸 해낼 수 있겠냐. 결국. 쿵. 교실 문은 닫히고, 진희는 우리 반에서 나갔다.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이, 그 날 마지막으로 내가 목격한 진희의 모습이었다. 완전히 좌절하여 교실 바닥에 쓰러지는 나. 그제서야 이 망할 급우들은. "자. 문구야. 청소 시작해야지." 친절하게, 상냥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웃는다. 이 악마, 아니 여동생 같은 녀석들.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어떻게든 진희가 학교 밖으로 나가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다면, 고백할 기회는 남게 되니까. 하지만. "청소당번이 도망가면, 나쁜 학생이 되는 거예요." 야 ! 남자가 그런 말투로 말해봤자 징그러워 ! 겉으로는 웃으면서, 그들의 손은 의자에 가 있었다. 여차하면 때려서라도 나를 막겠다는 놀부 심보다. 게다가. 찰칵. 찰칵. 야 ! 이 나쁜 인간아 ! 문희 녀석은 좋은 풍경이라는 듯이,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어디서 카메라를 가지고 왔는지 묻지 마라. 요즘 휴대전화는 성능이 좋아서, 카메라 역할도 쉽게 감당한다. 비참한 내 표정을 열심히 찍으면서, 휘파람까지 부는 문희. 그 표정이 거의 뇌물의 액수를 셈하는 국회의원 수준의 진지함으로 물들어 있다. '남의 불행이 너의 행복이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갈 기력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아. 비참한 내 청춘이여. 그렇게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모두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다.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악. 악. 아아아아악 !" 결국 나는 고백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오늘 했어야 하는데. 했어야 하는데. 했어야 하는데 ! 애꿎은 방송탑을 걷어차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바뀔 리는 없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분한 일이 아닌가. "우아아악 !" 여기서 이렇게 소리질러봐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녀석 취급받을 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덕에 나는 결국 축구부에도 안 갔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간 것도 아니다. 진희를 놓쳐버린 나를 보며 학우들이 한 말이라고는. "문구야. 청소해야지?" 이것뿐이었다. 이 망할 인간들 같으니. 아무리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게 인간이라지만, 이럴 수가 있느냐. 아예 우리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대놓고, 내가 진희에게 고백하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뭐냐. 진희 아버지의 공작이냐. 그 작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망상이 내 머리를 스쳐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분하다. 나는 그렇게, 계속 옥상에서 신세한탄을 하며 발광하고 있었다. 그래. 발광이다. 이런 식이라면 내일도, 모래도, 심지어 졸업할 때까지도 고백할 수 없을 게 아닌가. "바보." 그래. 맘껏 비웃어라. 어차피 난 고백에도 실패한, 인생의 낙오자다. 그렇게 주저앉아서 나는 스스로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는데, 남이 날 어떻게 평가하든 알게 뭐냐. 이대로 팍 죽어버릴까. 어차피 여기서 뛰어내리면 확실히 죽겠지? 옥상 난간에 매달려서, 나는 그렇게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다. "바보." 그래. 내가 바보란 건 인정한다. 하지만 욕을 하려면, 좀 더 어휘력을 기르는 게 어떠냐. 이왕이면 더 좋은 욕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내가 말해볼까? "오빠 바보." 그래. 조금은 어휘력이 늘었구나. 하지만 오빠라고 부르는 건 개선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으냐. 좀 더 좋은 말을 꺼내라니까. 그런데 잠깐. 오빠? 오빠? 오빠?!?!!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나를 부를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것은 바로. "힉 !" 역시. 공포의 여동생이 내 뒤에 서 있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옥상의 난간 뒤로 넘어져 버렸다. 다시 말해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난간 아래에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아아아아악 !" 그래서. 내가 떨어져 죽었냐고? 그랬으면 내가 여동생에게 시달릴 일이 없지. 그 광경을 본 여동생은 번개처럼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우산을 꺼내서 나를 낚아챘다. 내가 무슨 물고기냐. 나는 마치 낚시터의 잉어처럼, 여동생에게 낚여서 옥상으로 끌어올려졌다. 그동안 여동생의 얼굴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 보통 여자아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이 인간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무서운 녀석. "내가 못살아. 칠칠맞은 오라버니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나를 옥상 콘크리트 바닥에,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내가 무슨 북어냐. 그나마 어디가 부러지거나, 멍이 들게 하지 않았다는 점은 놀랍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없다. 무엇보다도, 난 고백도 못한 머저리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내가 살 값어치가 있을까. 나는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 퍽. "빨리 일어나. 고백해서 차인 것도 아니면서, 이게 뭐야." 잔인한 녀석 같으니. 남의 사정 같은 건 눈에도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네가 한 번 당해봐라. 이 나쁜 녀석아. 나는 차가운 콘크리트의 촉감을 느끼며, 그대로 엎어져 있었....... 퍽. "빨리 일어나라니까. 오빠 가방은 무겁단 말야. 빨리 일어나서 들어." 이 상황에서도 구타냐. 게다가 내 가방이 뭐가 무겁냐. 솔직히 네 힘이라면 그 정도는.... 퍽. 퍽. 퍽. "안 일어나면 더 때린다." 그제서야 나는 일어났다. 다섯 대나 맞고, 더 맞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추락할 걸. 살아봐야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내가 왜. 물론 여동생에게 그런 내 사정은 통하지 않는다. 언제 이 녀석이 내 사정 봐주면서 팼냐. "정말. 한시라도 눈을 떼면 꼭 이렇다니까." 겨우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자, 가방부터 나에게 던진다. 꼼꼼한 녀석. 그리고 그녀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귀를 막으려고 해도, 안 된다. 그랬다간 꽁꽁 묶여서 방송탑에 매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한밤중이 될 때까지, 월척으로 낚인 생선처럼 전시될지도 모른다. 흑. 진희라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짓밟지 않을텐데. "도대체 사나이가 무슨 사랑고백 하나 제대로 못해? 하루종일 계속 헛다리만 짚고." 윽. "옆에서 보니까 정말 가관이더라. 진희한테 한 마디만 하면 그만인 걸 가지고." 윽.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 좋아한다 ! 그 말만 꺼내면 그만인데 왜 그걸 못해?" 잠깐. "솔직히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어? 진심과 열정으로 외치면 되잖아? 안 그래도 우리학교 남학생들의 시기와 질투를 가득 받는 처지면서." 무슨 소리냐? 이해를 못하는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여동생. "오빠. 그것도 몰라? 오빠는 지금 남학생들에게 있어, 하렘의 주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엑?" 내가 무슨 ! 아직 사귀는 여자도 없는데. 그러나. "나하고 문희, 물리 선생님, 담임 선생님. 이렇게 네 명이나 오빠와 얽혀 있으니까. 오빠 생각에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세상에는 여자와 이야기도 못하는 남자가 많아.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오빠는, 말 그대로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라고." "공공의 적?"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 내가 무슨 국회의원이냐. 어째서? 왜? "응. 그래서 남학생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라고. 학내에서도 소문난 미녀 네 명을 거느리는 남자가,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 더 추가할 셈이냐. 그런 거야. 이건 애인 없는 남자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라고. 이래서는 예시당초 오빠가 남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 자체가 무리야." 그, 그런 거였냐. 물론 미녀 '네' 명이라는 말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그러니까 고백하려면 신속하게 해야 해. 마치 상대팀 골문에 재빠르게 기습적으로 들어갈 때처럼. 일본선수들처럼 느릿느릿하게 백패스만 하다가는 아무 것도 안 된다고.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이거저거 가리면서 시간을 끄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왕 고백하려면 격식이니 멋이니 하는 게....... 그러나 그 말에 일침을 놓는 미인이. "그런 거 다 집어치워. 내일 아침에 진희가 학교에 오면, 그냥 교실에서 사귀자고 외치는 게 더 빠를 거야. 안 그러면 오빠는 절대로 진희와 사귀지 못해. 지금 오빠에 대한 질투로 불타는 남학생이 하나둘인 줄 알아?" "그럴 리가?" 그렇다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여동생은 말을 계속했다. "오빠. 쓸만한 사람은 다 임자가 있는 법이라고. 진희 정도의 외모와 성격, 그리고 집안이라면 아직도 사귀는 남자가 없는 것 자체가 극히 예외적인 거야. 꾸물대면 딴 남자에게 빼앗길 걸?" "하지만." 내가 너냐. 다들 보는데 '사랑한다 !'고 외치라고? 진희한테? 그렇게 했다가는 그녀가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할거다. 부잣집 아가씨에게 있어 그런 공공연한 애정표현은 오히려 감점요인이 될 지도 모르는데, 그런 행동을 하라고? 절대 못 해 ! 굳은 내 표정을 보고, 여동생은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지. 불쌍한 오라버니를 위해, 내가 기회를 만들어 줄게." 뭣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진희에게 고백할 기회라도 만들어준다는 거냐? 하지만 우리학교 남학생 전체가 질투로 불타고 있다면, 그건 거의 불가능할 텐데? 물론 여동생의 능력에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어쨌든 지상최강, 천하무적의 여동생 아닌가. 하지만 이번 일은 규모가 너무 크다. 전에는 불량배 100명이 상대였으니 그렇다 쳐도, 이번 상대는 전교생이다. 1학년만 쳐도 수 백 명은 되는데, 뭘 어쩐다고? "어떻게?" 어떻게? 도대체 무슨 계략으로? 그러나 그녀가 내놓은 방안은 묘안도 무엇도 아니었으니. "진희네 집에 가서 고백하면 되잖아." 기발한 답안을 기대했던 나를, 보기 좋게 실망시키는 방안이었다. 야. 이왕 아이디어를 짜내려면 그럴듯한 걸로 할 수 없냐. 내 머리로도 생각해내는 방법을 말하지 말란 말이야. 괴물 여동생답게, 좀 기똥찬 대책을 꺼낼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뭐라고 불평을 하기도 전에, 여동생은 내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세워서. 이건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럴 때 내가 반항하면, 여지없이 응징이 있을 뿐이다. 여섯 번째로 맞고 싶지는 않고, 무슨 기발한 대책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일단 말을 하지 않았다. 제발 날 실망시키지 마라. 미인아. 그리고 그녀는. "오빠. 어차피 가야 할 곳이야. 오빠가 진희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안 만날 수는 없잖아? 뭐 나도 그 사람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기도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을 나는 만나야 한다는 거냐.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항의한다고 통할 사람이 아니었지. 이 녀석은.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이미 손가락이 내 입술 앞에 와 있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거냐. 그 다음은. "여자를 공략하려면 먼저 여자 아버지를 공략해야 하는 거라고. 물론 친해지고 싶은 부류의 인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친밀해지는 편이 좋아. 진희와 사귀게 되면 자주 만나야 할 테니까 말이야." "절대로 싫어 !" 나중에 장인어른이 될 지도 모르니까 친하게 지내라는 권유를 하는 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인간은 절대로 싫다. 이성으로는 어떻게든 친해지자고 하고 있지만, 감정으로는 안 된다. 전혀 안 된다. 이건 국민의 뜻이다.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내 꼴을 보던 미인이. "혹시, 진희 아버지가 무서워서?" 이 인간이 남의 아픈 곳을 찌르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하다. 그래서. "그래." 사실, 진희 아버지 정도의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뒤에서는 무수히 욕을 퍼붓지만, 막상 그 사람 앞에 가서도 욕을 계속할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다. 물론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진희 아버지와 만난 인간들은 거의 모두 웃는 낯으로 아부를 떨어댄다. 그건 진희 아버지가 가진 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공포는 어디까지나 그 공포에 짓눌리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나 느껴지는 법. "겁쟁이." 이렇다니까. 자기는 진희 아버지 정도는 두렵지 않다. 그 이야기냐.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진희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서기 힘들다. 최소한 진희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래서 서로 사귀는 사이라면 어떻게든 도전할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만약 진희가 나를 싫어한다면? 어쩌면 나를 움츠리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세세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해주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매일매일 맞고 살면 그렇게 돼." 사실 여동생이 나를 패는 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니, 이 대답도 어느 정도는 진실이긴 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인간이 나를 샌드백 취급하는 게 대체 몇 년 째냐. 넌 양심도 없냐. 오라버니가 무슨 스트레스 해소용 도구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러나 그런 내 조리 있는 항의는. "한 대 더 맞을래?" 이런 식으로 보답 받는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 녀석에게 맞고 죽은 적은 없으니, 차라리 그냥 맞고 말겠다. 뭐? 대항해서 싸우라고? 안 해 본 줄 아냐. 하지만 그게 되지가 않는다. 축구로 설명하면, 이탈리아 선수를 능가하는 반칙기술과, 독일 선수를 능가하는 몸싸움, 브라질 선수를 능가하는 개인기를 가진 축구선수들을 나 혼자 막으라는 꼴이다. 혼자서 11명을 다 막으라고? 게다가 그 팀 전원이 심판을 속여넘기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했다고 생각해 봐라. 이길 수 있겠냐? 그리고. "어차피 매일 때리잖아." 아예 달관한 듯한 대답이 나온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다고 망설이거나 물러설 여동생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시달리면서 살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뭐, 뭐냐. 그 미소는. 그것은 마치 어떻게 하면 아시아의 평화를 무너뜨릴지 궁리하는, 일본 극우정치인들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소름이 좍 끼친다. "알았어. 오빠가 끝내 진희네 집에 안 간다고 하면........" 하면? [전파수신상태가 고르지 못해서, 잠시 방송을 중단합니다][][][][][][][][][][][][][][][][][][][][][][가, 강제로?][][]][어, 어떻게 된 거야?][[][][이상합니다 ! 외부에서 강력한 전파가 강제로][][][][][][][중지시켜 !][][][][][막을 수 없습니다 !][][][][][][전원을 내려 ! 전원을 내리란 말야 !][][][][][소용없습니다 ! 예비전원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내려 !][][][][][무리입니다 ! 아아악 !][][][]][이봐. 기술반. 기술반. 기술반 !][][][][응답이 없습니다 ! 방송용 컴퓨터가 강제로 재프로그램되고 있습니다][][][][시설 전체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난입했습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 아아아아악 !][][][][][][][안 돼 ! 그걸 내보내면 안 돼 ! 아악 !][][][][][악 !][][][][악 !][][][][][아아아아악 !][][][][...........] "오빠. 현실도피하지 마. 무슨 방송 중단이야?" 아. 강하다. 도대체 이 여동생에게는 아무 것도 통하는 게 없단 말인가. 어떻게든 안 들으려고 해도 안 된다. 내가 귀를 막든 말든 상관이 없다. 끝내 들리고 만다. 도망가는 것도 소용이 없다. 심지어 자폭하는 것도 안 된다. 사실 내가 폭약이라도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니 폭발은 못하겠지만, 일단 여기는 옥상이니 어떻게든 최후수단을 쓸 수는 있...........없구나. 어차피 조금 전처럼 내가 추락하더라도, 이 녀석은 나를 낚아서 패대기칠 거다. 아. 현실이라는 감옥에 갇힌 나의 처지여. 그녀는 내가 눈물짓는 건 아예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일 학교에서, 진희하고 벌거벗고 나뒹굴게 만들어줄까?" "헉 !" 이, 이게 여자가 할 소리냐 ! 이래서 내가 현실에서 달아나려고 한 거다. 물론 여동생에게는 그런 건 내 사정, 자기 사정이 아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남자가 좋아할 만한 것인데, 이 여자는 대체. 게다가 이 '건전한 청소년답지 않은' 소리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비록 자기 짝이 없어서 질투심이 좀 심하기는 하지만,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면 도리가 없겠지. 둘이 벌거벗고 키스부터 성관계까지 다 해버리면......." "안 돼 !"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냐. 아무리 남매 간의 대화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엿듣는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을 막 해도 되는 거냐. 이건 너무했다. 적어도 진희가 나와 함께 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막 나가는 건 곤란하다. 여자의 선택권 역시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데, 이 녀석은 어째서 여자의 적이 될 발언만 반복하는 거냐. 나는 그런 그녀의 황당한 계획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크게 외치기야 했지만,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이 녀석 상대로는. "그럼 고백하면 그만이잖아? 진희한테 한 번만 말하면 끝날 일을, 왜 그렇게 질질 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오라버니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손을 써보겠다는 거잖아. 그러니 역시 체육관 창고에 둘만 집어넣고 하룻밤만 가둬두는 게....." "절대 안 돼 !" 이렇게 강하게 저지하지 않으면, 이 녀석은 정말로 실행할게 분명하다. 물론 내가 막아서도, 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자기 맘대로 해버릴 게 뻔하지만, 최소한 내 인생에 대한 문제는 내가 결정하고 싶다. 물론 여동생이 언제 내 맘대로 해줬냐. "하지만 이대로라면 평생가도 고백 못할걸? 그러니까 내가 오라버니의 청춘을 위해 약간만 공작을......." "갈게 !"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미인이. 아. 정말 싫다. 저 사악한 눈동자는. "어디를 간다고?" 이 녀석, 뻔히 다 알면서. 나는 미인이의 귀에 대고, 크게 외쳤다. "그래. 간다. 진희네 집에 가면 되잖아 !" 씩씩거리며 서 있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짓는 미인이. 악마의 미소다. 이건. "응. 그럼 내일 내가 진희한테 말해서, 약속시간을 정할게. 기대하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옥상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럼 어쨌냐고? 말 그대로 완전히 좌절해서, 옥상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 '또 졌어.' 결국 여동생의 의사대로 된 셈이다. 내가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진희네 집 방문'을 어떻게든 성사시켜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걸 내가 거부했다면, 분명히 저 녀석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결국 호랑이굴을 피하려고 늑대굴에 들어간 셈이다. 뭐? 그냥 여동생의 '파렴치한' 계획에 따라 진희를 덮치면 되지 않느냐고? 정말 소중한 여자를 어느 누가 그런 식으로 대하겠냐. 그리고 지금으로선. 'Oh, shit ! 누가 저 여동생을 말려 줘 !' 나는 내가 감히 낮에 반 아이들에게 감히 '여동생 같은'이라는 생각을 해버린 실수를 반성하며, 옥상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반 아이들을 무엄하게도 여동생과 비교하다니. 이건 상대가 안 되잖아. "그럼, 마음의 준비는 되었겠지?" 등교하자마자 나에게 날아오는 여동생의 비수. 무력한 내 가슴에 팍팍 꽂히는 저 날카로운 말투. 나는 되는 대로 대꾸했다. 어차피 앞일을 알게 뭐냐. "그래. 됐다." 안 됐다고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는 또 맞는다. 말 그대로 공포에 의한 통치다. 네가 무슨 악의 제국 황제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다루다니. 내가 어쩌다가 이런 불쌍한 겁쟁이가 된 거지. 흑. 그냥 깃발이라도 들고 민주화 시위라도 벌여볼까. 퍽. "엉뚱한 생각 좀 하지 마." 또 때린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가방으로 가리면서. 교실로 향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잔소리라고 해야 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 지금부터 교실에 들어가면 내가 진희한테 가서 이야기를 할 테니까, 그동안 오빠는 제발 좀 의젓하게 행동해야 해. 어깨 늘어뜨리지 말고, 표정도 좀 밝게. 최소한 보통으로 만들어 봐. 자신감 없는 남자는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를 쳐다보던 여동생이 갑자기 내 웃옷단추를 보더니. "이게 뭐야. 옷 좀 제대로 입어." 단추부터 다시 매어주고, 옷의 칼라를 잡아서 편다. 구겨진 부분을 정성껏 손질해주는 것만 보면 영락없이 의좋은 오누이지간이겠지만, 실상은 뭐, 일단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거냐. 가볍게 항의해본다. "내가 무슨 애냐. 옷까지 네가 챙기게." "애 맞잖아." 윽.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을 하다니. 내 코를 완전히 짓밟아놓은 여동생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깐. 지금 우리 반의 인간들의 심리상태는. '질투의 화신이었지. 아마.'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잘못하면 반 아이들이 위험해 ! 이런. 나도 모르게 엉뚱한 쪽을 걱정하고 말았다. 원래는 여동생 쪽을 걱정해야 하겠지만, 도대체 그 녀석이 날 걱정시킬 만큼 허약체질이 아니어서 그게 익숙하지가 않다. 나는 급히 여동생의 뒤를 따라 교실로 허겁지겁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역시." 예상대로, 여동생이 진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 남학생들은 일제히 진희에게 달려와서 그녀를 둘러싸고, 여동생을 막아섰다. 아마 그들은 그녀가 내 여동생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 말을 진희에게 전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아선 대상은, 하필이면 여동생이었으니. 그녀는. "진희한테 할 말이 있는데요." 그녀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남학생들에게 다가섰다. 길을 비켜달라는 무언의 요구에, 그들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그들이 건드린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동생이었다. 불량배 100명을 혼자서 물리친, 바로 그 여동생 말이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오빠에 대한 질투로 이러는 거, 꼴사나워. 여자를 사귀고 싶으면, 여자한테 말이라도 걸어 봐. 입도 벙긋 못하면서 다른 남자를 방해하는 데만 신경 쓰지 말고." 여동생의 미소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마치 얼음으로 만든 창이 내 심장을 꿰뚫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물론 여동생이 나에게 그 미소를 보낸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여동생을 본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여동생을 찍던 문희조차,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졌으니까. 멋지게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은 평소라면 마구 놀려댈 만한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걸 보고 비웃지 않았다. 덩치가 꽤 되는 남자들조차, 뒤로 한 걸음 물러섰으니까. 그러니 여학생들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구경하다가 새파랗게 질려서 고개를 팍 숙이고 책으로 머리를 가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일대장관이었다. "........" 잠시간의 침묵이 있은 후, 모두들 여동생의 앞에서 슬슬 물러섰다. 기가 팍 죽었는지, 그들은 모조리 자기 자리로 꼬리를 말고 달아나 버렸고, 여동생은 여유 있게 자기 길을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기 때문에 진희만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고, 곧 여동생은 자기 할 말을 할 수 있었다. 고요 속에서. 그리고 나의 휴일 일정이 확정되었다. 콰르릉. 콰릉.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마왕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성의 창문마다 오크와 트롤이 들끓고 있었고, 성의 한가운데에 있는 베란다에는 살이 썩어 뼈가 드러난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성의 바깥에는 이미 죽어버린, 그리고 죽고 나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는 불쌍한 병사들이 깔려 있었다. 성 위의 마왕이 손짓을 하자, 그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환성을 질렀다. 썩어 가는 살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입이, 혀가 저주받은 목소리를 뱉어내고 있다. "카악. 카악. 카아악." 그 소리에 맞춰서, 성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오크와 트롤, 오거들이 붉게 물든 무기들을 맞부딪치며 걸어나왔다. 그들이 병기를 하늘로 쳐들며 외친다. 하얗게 빛나는 구름을 배경으로 둔 그들의 기세는, 어떤 용사라도 무너뜨릴 듯 주위를 압도했다. "카악. 카악. 카아악." 검은 망토를 걸친 해골들이, 진창덩어리로 만들어진 말을 타고 성문에서 의젓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칼은 피와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그들의 누런 이빨은 그 칼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들의 말이 진창이 뚝뚝 떨어지는 날개를 펴고 울부짖자, 어둠의 병사들이 일제히 기세를 올린다. "카악. 카악. 카아악." 하늘에서는 고약한 가스를 뿜어내는 용의 시체들이, 부패한 몸체를 흔들며 죽음의 냄새를 흩뿌렸다. 아니, 이곳의 모든 병사들은 시체였다. 그들은 한때 마왕에 대항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 죽고 나서는 마왕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마왕의 충성스러운 병사로서 말이다. 심지어 그들의 혼까지도. 하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자." 나는 나의 칼을 뽑았다. 과거 전설의 대마왕이 소유했다는 바로 그 칼. 시스터 소드(sister sword)를 ! 그 칼을 보는 순간 모든 악의 병사들의 환호가 그친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빛에 공포가 스친다. 악을 잡기 위해 더 큰 악을 풀어낸 나의 행위에 대해 신은 어떤 벌을 내릴까. 하지만 내 혼은 이미 지옥에 떨어진 지 오래다. 모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였던 마왕을 배신한 진희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서 !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퍽. "오빠. 망상 좀 하지 마. 무슨 시스터 소드야. 시스터 소드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던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은, 다름 아닌 전설의 대마왕이었다. 아이고. 이 녀석. 과거의 인물로 소개해서 화가 난 건가? 하지만. '마왕의 성에 와 있는데, 그 정도는 맞춰줘라.' 그렇다. 나는 지금 악의 제국의 성, 진희의 집에 와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희의 집이 아니라, 진희 집안의 소유물인 교외의 별장이긴 하지만. 뭐 어디서 고백하든 관계는 없다. 요점은 진희가 있는 곳에서 고백하면 되는 거다. 다만 이곳은 왠지 사람의 기를 죽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 집은 너무 커.'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기에 이런 집을 지을 수 있는 걸까. 물론 진희 아버지가 원래 부유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도대체 집이 왜 이리 크단 말인가 ! 좌측으로 봐도, 우측으로 봐도 담벼락의 끝이 안 보인단 말이야 ! 안에 뭐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집을 무식하게 크게 지었는지. 집을 구경하느라 바쁜 나에게 여동생은. "오빠. 우린 지금 여기 놀러온 게 아니라고." 이봐. 여동생. 그 팔랑거리는 옷의 어디가 놀러온 게 아니라는 거냐. 치마 길이야 일단 그럭저럭 되기는 하지만, 하얀 색의, 더군다나 얇은 천으로 된 옷이라 그런지 좀 가벼워 보인다. 안 그래도 훅 불면 날아갈 녀석이. 사실 내가 보기에는 하얀 색은 천이요, 하얗게 보이는 색은 살색이요, 그리고 검은 색은 머리카락이지만. 그래. 그래. 옷에 파란 색으로 무늬가 새겨지긴 했어. 핸드백 하나도 들고 있고. 하지만 마녀가 몸단장을 해봤자 그 악의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 퍽. "뭐가 악의 에너지야 !" 아이고. 이런 중요한 시기에도 때리는 거냐. "조금 있으면 진희 아빠가 외출하실 거야. 안에서 연락이 오면, 그때 들어가자고." 뒷문으로 말이지. 난 이미 진희 아버지에게 찍힌 몸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몰래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진희의 다른 가족들은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물론 집안의 최고권력자를 적으로 돌린 나로서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지만. "그동안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 오늘도 미적거리다가 고백 실패하지 말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미인이. "도대체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지." 이게. 저거야말로 남의 사정을 모르는, 철없는 말투다. 정말 모처럼 일반적인 여동생의 이미지에 맞는 말을 했다고 할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반격개시. "네가 한 번 사랑에 빠져봐라. 이해할 거다." 하하하. 모처럼 여동생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였다. 상당히 고민하는 표정이 되는 미인이를 두고, 나는 오래간만에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렇다. 사실 여동생은 저렇게 아름다운데도, 아직도 애인이 없다 ! 너무 예뻐서 다들 접근을 안 하는 건지, 그게 아니면 불량배들 사이에 퍼진 공포의 소문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긴 불량배 100명을 단신으로 격파하는 괴물에게 누가 접근해 오겠나. 사귀기 전에 맞아 죽는다고 도망치고 말지. '어쨌든 남자로서는 여자보다 약한 건 자존심이 상하니까.' 나야 여동생이니까 그럭저럭 곁에 두고도 참고 있지만, 혈연관계가 아니라면 이건 공포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여자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여자가 너무 잘나면 그만큼 남자를 잡기 어려운 법이다. 여동생의 보이지 않는 단점이라고 할까. 그러나 역시 여동생은 여동생.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으니. "음. 그럼 풍남이라도 꿰어차 볼까?" 으악 ! 그럼 그렇지. 여동생이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어. 감히 여동생에게 일격을 먹인 대가는 컸다. 왜 그러냐고? 이 녀석이 정말로 풍남이를 꿀꺽 삼켜버리면, 난 풍남이에게 '형님'이란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건 지옥이다. 내 얼굴이 새파래진 걸 보며 재미있어하는 여동생. 역시 이 녀석은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단 말야. 내 체온을 10도 정도는 떨어뜨려 놓고, 그녀는 진희의 집을 바라보았다. "이제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의 휴대전화가 이상한 음을 냈다. 이거 대체 뭐야. 모르겠다는 표정의 나에게 친절히 설명해주는 여동생. 하지만 그 친절함을 평소에도 보여주면 안 되냐.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이야." 이 녀석, 클래식을 좋아하는 건가.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이 녀석의 음악 취향이 진희하고 똑같다니. 그럼 이 녀석도 부잣집 아가씨인가? 아악. 아냐 ! 이 녀석이 드레스 차림으로 귀족들과 춤을 추는 광경을 상상하다가, 나는 그만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악몽이야. 분명히 파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 거야.' 이 말괄량이 여동생에겐 양손에 총을 들고 설치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 굳이 [매트릭스]의 여주인공 트리니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는 짓을 보라. 그 외에 뭐가 맞는단 말인가. 지난번에 불량배들과 대결했을 때도, 선글라스만 하나 썼으면 딱 그 여자였다. 차마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 '네오'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녀석이 세상의 구원자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악당의 어디가 ! 여동생은 휴대전화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곧 진희 아빠가 나갈 거야. 확실히 나가고 나면 연미 언니가 연락해준다니까. 5분만 기다리고 있으면 될 거야." "5분이라니." 지금까지도 죽 기다렸는데, 또 기다리는 거냐.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싶지만, 여동생의 눈초리가 무서워서 그게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10시까지만 오면 될 것을, 굳이 9시까지 여기 오니까 그렇지. 평소에도 그렇게 부지런했으면, 내 고생도 덜할 것을."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게 고생이냐." 그걸 핑계로 자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거 아니냐. 사실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나타나서, 프라이팬과 식칼을 오라버니에게 마구 휘두르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사실 안 휘둘러도 문제는 있지만. 전에 제발 좀 무기로 사람을 패지 말라고 했더니. "알았어." 그러고 나서 그 다음날 아침에, 이 녀석은 사람을 발로 밟으면서 깨웠다. 겨울에 논밭에 나가서 보리밟기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무슨 보리냐. 게다가 계절이 겨울인 것도 아니고. 그 덕에 나는 죽도록 밟혔고, 말 그대로 납작한 보리 싹이 되었다. 이런 살인마 같으니. "안 때리면 안 일어나면서." 일어날 기회도 안 주지 않았냐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내 입을 막듯 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 좋은 징조다. "숨어." 여동생은 나를 끌고 골목으로 피했다. 차가 우리를 볼 수 없도록,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진희 아버지가 만약 나를 발견하면 이 인간은 분명히 차를 멈추게 하고는, 이렇게 지시할 것이다. "이 무례한 폭력배를 쫓아내." 내가 진희 아버지에게 주먹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건만, 그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은 여동생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다. 나만 있다면 온갖 치사한 수법으로 나에게 범죄자의 누명을 씌우는 인간이지만, 여동생이 옆에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니까. 최소한 억울하게 전과자가 되는 사태는 피할 수 있다. 역시 여동생은 위대한 건가. 차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어느 순간 멀어져갔다. "됐어. 이제 연미 언니의 연락만 기다리면 돼."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여동생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전화기 화면에 떠오르는, 성숙한 미녀. "어머. 미인아. 안녕?" "안녕하세요. 연미 언니." 여동생이 연미 언니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진희의 친언니이자 나의 든든한 지원세력이신 송연미. 진희와 마찬가지로 천사 같은 마음씨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겉만 번드르르한 여동생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사람이다. 다만. "어머. 문구도 왔네? 과연 오늘은 성공할까?" 내가 진희를 좋아한다는 걸, 연미 누나도 알고 있다. 따라서 매우 나를 흥미 깊게 지켜보고 계신다. 그래. 그건 좋지만, 그걸로 날 열심히 놀리는 재미에 살고 계신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것만 없으면 반했을지도 모르는데. "뒷문을 열어줄 테니까 들어와. 아마 아빠는 오늘 저녁에야 오실 테니까, 시간은 충분할 거야. 그럼 성공하길 빌게." 이럴 때 반론이라도 펴다가는 계속 놀림감이 되고 만다. 나는 그냥 짧게. 아주 짧게 대답했다. '네'라고. 그 이상의 말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괜히 덧붙였다가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속 장난감이 되는데. 나와 여동생은 진희네 집 뒷문을 바라보았고. 위이이잉.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도련님. 큰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뒷문으로 나온 하녀의 말에 따라, 나와 여동생은 거대한 마당을 건너 저택으로 향했다. 만약 서울에 있는 집이라면 이렇게 거대할 수가 없겠지만,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교외에 있는 별장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면적을 자랑할 수 있었다. 전철 타고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원. '체력 단련하러 온 것도 아니고.' 덕택에 나는 죽어라 달려야 했다. 전철역에서부터 이 집 뒷문까지 말이다. 뭐? 여동생은 어떻게 왔냐고? 그 녀석은 내가 죽어라 달리는 동안, 천하태평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도 나와 비슷한 속도를 유지했다. 물론 폼으로 보아 달린 것 같기는 한데, 왜 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거야? 이 괴물단지 같으니. 어림잡아 30분은 뛰었는데. '게다가 말야.' 그렇게 뛰고도 모자라서, 여기서도 또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이건 기본적으로 마당이 너무 넓은 탓이다. 우리나라는 안 그래도 국토가 좁아서 난리인데, 어째서 좁나 했더니 진희네 집을 보니까 납득이 간다. 부의 80%는 사회 상층의 20%에 집중된다는데, 여기에 와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이건 너무 커." 그렇다.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컸다. 이 별장의 위치를 문제삼는 게 아니다. 비록 전철역에서 30분 이상을 뛰어와야 하는 곳이라는 점은 문제이지만, 일단 별장답게 주변경관은 상당히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곳이니까. 숲도 울창하고, 나무도 수 백년은 묵은 듯하고, 공기도 맑고, 무엇보다도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다만. '다리가 아파.' 차 없는 외부인들이 방문하기에는 영 조건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마당이라고 붙은 게 마당이 아니다. 이건 중산층이 사는 단독주택의 마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월드컵을 치러도 될 정도로 넓어서야, 어디가 아담한 별장이겠는가. 그러나 나로서는 감히 힘들다고 중얼거릴 수도 없다. 옆에 여자가 둘씩이나 있는데, 그리고 그들이 힘든 기색도 내비치지 않는데 어떻게? 뭐? 여동생은 괜찮은 거냐고? 그 녀석은 멀쩡하다. 분명히 나하고 같이 30분 넘게 달려왔는데, 멀쩡하다. 이거야 이미 익숙해진 일이니 마음껏 불평하고 싶지만, 문제는 여동생의 진면목을 이 집 하녀가 알고 있느냐는 점이다. '아마 모를 거야.' 진희 아버지라면 혹시 모르지만, 단순한 고용인인 이 여자가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그러니 나는 감히 불평할 수 없다. 어차피 불평한다고 차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자전거가 나오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인라인 스케이트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불평을 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 남자와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멀쩡한데 남자만 지쳐서 헐떡거리고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전에 한바탕 달리기를 했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이봐. 여자보다도 체력이 약해서야, 어떻게 사내 구실을 하겠어?"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에는 체력이 강한 여자와 체력이 약한 남자도 있기 마련이지만, 여자한테 남자가 막상 지면 무조건 이런 반응이 나온다. "남자가 여자한테 지냐? 체력으로?" 무조건 이렇다. 반론은 용서되지 않는다. 예외란 없다. 비록 그 여자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고, 남자가 체력문제로 군 면제를 받더라도 그 의견은 달라지지 않는다. 남자는 적어도 체력적으로는, 여자를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것이다. 특히 내 여동생처럼 겉만 약하게 보이는 녀석이 상대라면 더더욱. '이봐요. 사람들. 겉과 속이 다른 게 사람이란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거다. 진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직도 잘먹고 잘사는 데에는, 사람들의 그런 우둔함도 한몫하고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희네 별장에 있는 국립공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건 국립공원이지, 절대로 마당이라고 할 수 없어. 하지만 아무리 큰 땅이라고 해도 사람의 사유지인 이상, 언젠가는 끝이 보이는 법이다. 그 언젠가는,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가씨. 도련님." 우리 옆에서 걸어가던 하녀가, 재빠른 걸음으로 저택의 후문에 다가간 것이다. 이제야 저택의 문에 도착한 것인가. 그녀는 문 옆으로 걸어가더니, 손잡이 옆에 위치한 휴대전화 모양의 자물쇠에 손을 댔다. 저택의 외형만 보면 중세 유럽의 성을 연상할 정도로 거대한데, 이런 분야는 구식이 아닌 현대적인 단장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되어 있는 것이, 역시 대저택이라고 할까. '주인의 속과는 완전히 다르네.' 하긴 살고 있는 집의 외형이 거주자의 속을 반영한다면, 과연 아름다운 집은 몇 채나 될까. 하녀가 자물쇠에 손을 얹자, 작은 모니터에 사람의 얼굴이 비춰졌다. "큰아가씨. '그' 손님이 오셨습니다." 모니터 안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 문이 열리고, 거대한 저택이 자신의 속살을 드러냈다. 그 규모와는 달리, 이 대저택은 정말 소박한 곳이었다. 그래. 일단은 손님으로서, 소박하다고 해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우기기로 했다. 하지만 예의는 진실 앞에서 빛을 잃는 법. 일단은. '평범한 그림. 평범한 복도. 평범한 바닥. 평범한 조명.' 일단 소박하다고 하자. 평범하다고 하자. 비록 벽에 걸린 그림이 루벤스의 작품이고, 조명등마다 작지만 정교한 크리스탈 장식이 붙어 있으며, 대리석으로 덮인 복도 바닥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평범하다고 하니까 평범한 거다. 하녀가 내 표정을 보더니 변명처럼. "보석으로 장식되지는 않았어요. 집 주인께서 소박함을 중시해서." 일단 보석이 없다는 점에서, 소박하다는 것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진희 아버지의 행각으로 볼 때, 이 정도면 확실히 검소한 저택이 아니던가. 백만장자도 아니고 억만장자도 아니고 조(兆)만장자라는 설이 떠도는 진희 아버지의 재산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놀라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다. 어차피 진희네 집에는 100년 묵은 포도주, 1000년 묵은 항아리, 심지어 1억 년은 묵은 호박(보석의 일종)도 무더기로 쌓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고작 이 정도로 놀라면. "오빠. 의젓하게 해. 의젓하게."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으. 망할 여동생 같으니. 내가 너처럼 이런 데 익숙한 줄 아냐. 그러나 '의젓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지금으로선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안 된다. 눈동자가 제멋대로 돌아간다. 고정이 되지 않는다. 눈을 감으려고 해도, 내 눈은 어느새 벽에 걸린 그림으로 날아가고, 금새 대리석의 무늬로 튀어 나갔다. 아. 노파심에서 말해두는데, 절대로 저 그림이 누드라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아. 그리고 내가 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그림에 먼지가 묻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절대로 그렇다 ! 그렇다면 그런 거다 ! "이러다가 거실에라도 가면 기절하겠어. 심장 좀 진정시켜. 오.라.버.니." 하지만 내 눈동자는 어느새 벽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를 향해 옮아갔다. 걱정하지 마라. 여동생아. 어차피 구경하느라 바빠서, 기절은 생각도 할 수 없으니까. 저런 거대한 크리스탈이 전등을 감싸고 빛을 발하는데, 구경도 못하고 나자빠지겠냐. 와. 정말 굉장한 부잣집이야. "오빠 !" 나도 이런 집에 살고 싶어. 물론 돈이 많다고 다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이건. "오빠 !" 매일 여동생한테 맞고 사는 내 생활에 비하면, 이건 정말로. "오빠 !!!" 퍽. 아이쿠. 넌 이 상황에서마저도 때리는 거냐. 머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나를 내버려두고, 여동생은 잽싸게 허리를 굽혔다. 아. 물론 나에게 굽히는 건 절대 아니다. 이 녀석은. "안녕하세요. 연미 언니." "안녕. 미인아. 여전히 건강한 것 같네." "네." 아이쿠 ! 어느새 거실에 도착한 건가. 나는 그제야 황급히 연미 누나에게 인사를 했다. 웃음을 억지로 참는 저 장난스런 얼굴이, 내 눈동자를 가득 채운다. 아. 그렇다고 연미 누나가 찐빵처럼 부풀어올랐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여동생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도대체 오빠라는 사람은.' 평소라면 이렇게 외치면서 한 방 더 때렸을 텐데, 많이 자제하는 듯하다. 다만 폭력을 사랑하는 여동생의 성향으로 보아, 잘못하면 또 한 방 맞을지도 모른다. 이미 연미 누나가 보는 앞에서 주먹을 휘두른 위인이 아닌가. 뭐 어차피. '연미 누나야 미인이의 실체를 잘 아니까.' 아니, 아니지. 연미 누나라면, 오히려 내가 여동생에게 맞는 걸 즐길지도 몰라. 하긴 누나의 낙이라는 게 그런 것 밖에는 없으니 이해는 해주지만, 그래도 그렇지 ! 그렇다고 진희의 친언니에게 불평을 토할 수도 없는 내 입장으로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진희 아버지의 생트집에도 불구하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디인데. "문구 안녕?"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렇게 해서 미인 두 자매를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뭐? 두 자매가 누구냐고? 그야 당연히 한 명은 연미 누나이고, 나머지 한 명은 진희지. 비록 휴일이라서 그리 격식을 차린 복장을 입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다. '어흑흑. 정말 예쁘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려야 정상이겠지만, 지금은 감격이 아니라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리는 뛰어오느라 지쳐서, 머리는 누군가의 횡포 때문에 비명을 토하고 있는 거다. 물론 나는 여기에 울기 위해 온 것이 아닌 만큼,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백에 성공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실패하면 슬퍼서, 펑펑 울겠지만. "오느라 고생 많았어. 차라도 하나 보내줄 걸 그랬나?" 일단 지나간 일이기는 하지만, 연미 누나의 친절함이 나온다. 그래서. "네."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여동생이 선수를 치고 말았다. 그 녀석은. "괜찮아요." 이봐. 좀 너무한 거 아냐. 왜 거절하고 난리냐. 여동생아. 사실 이곳까지 오는데 있어서 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차를 보내줬다면 당연히 기쁘게 얻어 탔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의 반응이 이 모양이라면, 아무래도 돌아갈 때도 차에 타기는 글렀다. 아이고. 다리야. 그러나 여동생은 실속보다는 체면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적어도 오늘만은. 그래도 그렇지. "오빠는 체력이 너무 약해서, 좀 단련해둬야 하거든요." 야 ! 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어떻게 해 ! 사실 여동생의 기준은 말이 안 되게 높다. 100m를 11초로 달리는 내 다리도 여동생의 기준에 따르면 '축구선수치고는 너무 발이 느린' 열등생의 다리인 셈이고, 학교 성적이 전교 50등 이내가 되더라도 여동생의 기준으로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멍청한 학생'이 된다. 하지만 말야. 솔직히 네가 만족할만한 체력을 지닌 남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냐. 내가 무슨 UDT, 네이비 실, 특전사라도 되는 줄 아냐. 그러나 이 자리에서 여동생의 부당한 기준에 대해 항의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난 지금 이 자리에서는 손님이니까. 진희 앞에서 탁자를 뒤엎고 난리를 쳐? 그건 당연히 안 되지 않는가. '아이고.' 내가 못살아. 물론 여동생으로서는 그런 내 약점을 이용, 날 하루종일 놀려먹을 기회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게다가 지금 여기에는, 내가 골탕먹는 것을 행복한 얼굴로 지켜보는 사람도 하나 있지 않은가. 그녀는. "하긴 그래. 문구 정도면 훅 불어도 날아갈 걸." "아니에요 !" 내가 그렇게 약한 줄 아십니까?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왜 그러냐고? 내가 그 말을 하려는 순간, 여동생이 사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기 때문이다. 이, 이 녀석. 나한테 무슨 망신을 주려고. 여기서 아니라고 반박했다가는, 분명히 여동생이 나를 훅 불어버릴 거다. 물론 그거 가지고 내가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이 녀석이니까 또 모른다. 그렇게 상황을 연출할 능력쯤은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 나는 착하고 겸손한 오라버니가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입 닥치고 찌그러졌다는 이야기다. '비참해.' 오늘은 고백하러 온 날이란 말이야 ! 여동생이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라고 ! 그런데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여동생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장난스런 표정이 아니라,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녀는 연미 누나에게 눈짓을 했고, 그러자. "그럼, 둘이서 잘 해봐. 방해꾼들은 이만 사라져줄게." "앗. 잠깐 !"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알 건 다 안다는 식의 미소를 띄면서, 슬그머니 거실에서 나가 버렸다. 나와 진희만 남겨두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연미 누나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럼 고백 성공하길 빌게." 이, 이봐요 ! 내가 항의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나가버린 뒤였다. 아이고.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일을 처리하시려고, 화제의 머리를 자르고, 꼬리를 자르고, 몸통만 덩그러니 남겨두시는 겁니까. 낭만적이고 환상적이 되어야 할 내 고백이, 졸지에 무슨 사무실 서류 처리하는 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유명한 뭉크의 그림 '절규'의 모델이 된 나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희는. "........." 그녀는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와 친구를 잘못 고른 죄로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판은 이미 벌어진 것, 이대로 나 역시 침묵만 지킬 수도 없었다. 어차피 망가졌다면, 끝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사실 학교에서 고백하려다 실패했을 때부터, 정상적인 여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진희에게 고백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차라리. "진희야." ".........." 대답이 없다. 훈병 송진희. 감기 걸리셨습니까. "..............." 군기가 빠졌군요. 훈병 송진희. ".........................." 체력 단련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훈병 송진희. 목소리 크게. 다시 한 번 ! "진희야." "아, 네." 얼굴이 잘 굽힌 고기처럼 폭삭 익어버린 진희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상당히 당황한 건 맞나 보다. 나한테 존댓말을 다 쓰다니. 그 대답이 나오자마자, 진희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녀가 급히 찻잔을 집으면서. "하, 한 잔 드세요." 말이 중구난방, 횡설수설 그 자체다. 이봐. 주려면 찻잔을 줘야지, 찻잔 받침을 주면 어떻게 마시라는 거야. 하지만 내가 남 말 할 처지냐. 나 역시. "머, 먼저 마셔." 눈앞에 놓인 차가 결명차인지, 보리차인지, 홍차인지, 녹차인지 분간이 안 된다. 일단 프림부터 타 넣고. 아. 이건 커피였나? 코로 마시는 건지 입으로 마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찻잔을 집어들고 꿀꺽 삼켜버렸다. 아. 찻잔까지 삼킬 뻔했다. 아니지. 이건 인스턴트 커피였나? 아. 여긴 부잣집이니까 원두커피로 나오는 게 정상이던가? 에.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니지. 이건 코코아였나? '안 돼.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야 해.' 커피는 입으로 마시는 거야. 코로 마시는 게 아냐. 내 꼴이 보기 사나웠던지, 진희가 찻잔을 딸그락거리고 있다. 아니, 아니잖아. 저건 불만을 표하는 거라고 하기보다는. '아이고.' 자리가 이곳이 아니었다면,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아마 어딘가에 숨어있을 연미 누나와 미인이가 눈을 밝히고 구경하고 있겠군. 아니지. 사진을 찍히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희가 찻잔을 집으려다가 계속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 찻잔, 상당히 튼튼한 모양이다. 아직도 안 깨진 걸 보면. 어쨌든 한 잔 술을 마시고, 아니지. 한 잔의 커피인지 코코아인지 녹차인지 모를 물건을 마시고 나서, 나는 진정하고 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난 여기에 뭘 마시러 온 게 아냐. 난 진희한테 고백하러 온 거야. 어차피 내가 그걸 할 것이라는 것쯤은 이미 모두에게 공개되어 버렸으니, 망신스러울 것도 없다. 이미 망신은 당할 대로 당했으니까. 그렇다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 '..........' 철판을 깔아야 하겠는데, 리벳이 없다. 용접기도 없다. 철판을 얼굴에 붙이려면 그런 게 필요할 텐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없다. 그럼 그냥 오늘은 대충 분위기만 잡고 헤어지는 것으로 넘어가면. '안 돼 !' 이렇게 애매하게 넘어갈 순 없어 ! 그랬다가는 평생 여동생의 놀림감이 될 거야 ! 야냐. 아냐. 여동생만이 아냐. 연미 누나도 평생동안 계속 놀려댈 거야 ! 그런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 그냥 여기서 고백해버려야 해 ! 어차피 학교에서는 고백할 수 없어 ! 경험했잖아?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억지로 설득하면서, 진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까 머리카락만 보이잖아.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겠나. 어차피 진희는 어떤 마물과는 달라서, 이 상황에서 자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나는. "진희야." 진희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진희야." 진희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진희야." 진희의 어깨가 더 크게 움찔거린다.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진희의 이름만 부를 셈일까.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고백하고, 키스든 포옹이든 해버리자. 물론 최후의 선을 넘을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겠다. 나는. "진희야. 나는...." 한 단계 진보한 셈인가. 진희 역시 필사적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어깨도 흔들리지 않았고,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입술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은 단지 고개를 들었을 뿐이지만. 나는. "진희야 !" 진희의 얼굴이, 팔이, 다리가, 그리고 옷까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렇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진희야 !"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뭐든 해야 하는데. 뭐든. 뭐든. 뭐든. 뭐드으으은 ! 필사적으로 입을 연다. 이가 맞물린다. 안 돼. 말을 해야 해. 억지로 이와 이 사이를 벌려놓는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 나와. 나와. 나오라니까 ! 욕설과 협박으로, 오그라든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어어 ! "진희야 ! 나는 네가....." 더. 더. 더 말해야 해 ! 하지만 입이 그 순간 갑자기 꽉 다물어진다. 열려. 열려. 열려. 열려. 열리라니까 ! 열려라 참깨 ! 내 필사적인 애원과 간청에 힘입어, 내 입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문구야. 고지가 저기 있다. 힘내라. "나는 네가 좋........." 겨우 한 글자를 내뱉었다. 좋아. 좋아.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 "나는 네가 좋ㅇ....." 한 글자만 더 ! 한 단어만 더 ! 한 단계만 더 ! 아니, 'ㅏ'만 더 ! 내 숨이 가빠지면서 말이 기어 들어간다. 진희의 거친 숨소리도 조금씩 들려온다. 이것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 최대의 고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어떻게드은 ! 내 입술이 열린다. 서서히. 그리고 나는....... "이 자식 ! 감히 내 딸을 또 노리다니 !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뭐야? 분위기를 잡던 나와 진희를 향해 날아오는 벼락같은 외침에, 나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아니, 그것은 내가 진희에게 몸을 좀 더 기울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둘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고. '아. 행복해.' 이것으로 나와 진희는 함께 누운 사이가 되는 건가. 그러나 내가 지금 황홀한 기분에 잠길 때가 아니지. 이 소리는 분명히 그 작자가 틀림없으니까. 그런데 왜 벌써 나타난 거야? "잊은 게 있어서 돌아와 봤더니, 내 딸을 희롱하려는 불량배가 와 있었군 그래." 내가 언제 그랬냐 !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는 이 말투는, 오직 세상에서 한 명밖에 없다. 그가 어느새 방 밖에 와 있었고, 연미 누나가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하긴 저 인간이 나타나면 되는 일이 없으니까. 그는. "오늘에야말로 네 놈을 감옥에 집어넣어 버릴 테다. 이렇게 청소년범죄가 극심해서야 어디 살겠나. 여기가 어디라고. 이봐. 경호원. 뭐하고 있나? 이 자식을 경찰서로 끌고 가지 않고." 이봐요. 내가 언제 청소년범죄를 저질렀습니까. 그런 짓이라면 나보다는 오히려....... 잠깐. 이 녀석은 어디로 간 거지? '범죄'라면 나보다 훨씬 연관이 많을 누군가가 안 보인다. 이봐. 여동생. 저런 인간은 너하고 잘 맞는 게 아니더냐? 왜 조용한 것이더냐? 진희 아버지가 나를 보며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구둣발을 든다. 그 발이 나에게 날아온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나 이 상황에도 헛소리를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이봐. 오빠. 좀 더 가련한 표정을 지을 수 없어?" 뭐, 뭐냐. 이 황당한 발언은. 이런 소리를 하는 인간은 지구상에서 오직 한 명뿐이다. 진희 아버지가 그런 망언을 하는 인간을 돌아본다. 그것은 연미 누나는 물론, 방안의 모든 경호원들도 마찬가지이고. 진희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이빨을 간다. "네 년은 !" 이봐요. 진희 아버지. 그럼 누구겠습니까. 여동생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진희 아버지를 노려본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쥔 무언가를 딸깍거리고 있었다. 저것은 ! 전풍전자에서 만든 초호화판 휴대전화 ! 도대체 어디서 돈이 나서 저런 걸 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저 전화기에는 분명히 사진기의 기능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빠진 나와 진희, 그리고 그 위에 구둣발을 들고 서 있는 진희 아버지를 향해 휴대폰을 들이댄 채 미소짓고 있었다. 진희 아버지에게 저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을 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악마로 보였을 거야. 여동생은 방긋 웃더니. "생각보다 사진은 잘 안 받으시네요. 진희 아버지." 이봐. 여동생. 지금 그게 문제냐. 내 옆에 죽 늘어선 경호원들도 생각을 해줘야지. 역시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진희 아버지는 즉시. "저 년을 잡아 ! 휴대전화를 압수해 버려 !" 즉시 여동생 옆에 있던 몇 명의 경호원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 검은 양복들 중 그 누구도 여동생을 잡을 수는 없었다. 여동생은 어느새. "연미 언니. 이 사람들 누구예요?" 야. 언제 거기로 도망간 거냐? 경호원들 사이에서 잽싸게 달아나면서, 여동생은 연미 누나의 옆을 빙빙 돌고 있었다. 진희 아버지가 고용한 경호원들의 실력이 상당히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아무리 여동생이 강하다지만 기껏해야 아마추어인데, 어째서 프로들이 그렇게 쩔쩔매는 거냐. 물론 이 경우는 격투가 아니라 도망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연미 누나가 허겁지겁 대답한다. "아, 우리 집 경호원들." 상당히 당황하신 것 같은데. 하긴 누나는 여동생의 악명을 듣기는 했어도, 직접 보는 건 이게 처음이지? 그렇다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저 녀석은 원래 저 모양 저 꼴이었어요. 누나. 여동생은 입만 살았는지, 피하면서도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네가 문희냐. "아. 오빠. 아직도 고백 못했지?" 야. 진희가 있는데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냐. 진희의 얼굴이 당장에 새빨개지더니, 그대로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숨어버린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진희 아버지는 당연히 크게 분노하셨고, 그는 노기에 띈 표정으로 여동생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입을 닫을 인간이라면 여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아요. 여동생은 혀를 차면서 나를 쳐다보고. "오빠. 어지간하면 고백 좀 하지 그래? 어떻게 하루종일 기다려도 고백 못하는 거야?" 그리고 그녀는 진희 아버지를 돌아보더니. "이래서는 아저씨의 야욕을 막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진희를 힘있는 집에 팔아 넘길 계획,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나요?" 그리고 한숨 한 번. 하아. 그런데 말야. 너 그렇게 진실을 대놓고 막 말해도 되는 거냐? 그도 그럴 것이 진희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사람에게 보복할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는 모든 이들에게 온갖 저주를 다 받는. "이 년 ! 감히 국회의원을 능멸하다니 !" 그렇다. 진희 아버지는, 그 이름도 찬란하신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내 여동생이 그런 권력에 굴할 인간은 아니다. 제발 더 날뛰지 말고 싹싹 잘못했다고 빌라는 내 무언의 압력을 무시하고,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이걸 겉과 속이 같으니 솔직하다고 평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버릇없다고 평해야 하나. 아니, 우리들은 사실 국회의원들 욕하느라 날 새는 줄 모르니까, 국민의 여론을 솔직히 전한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당신의 야욕은 반드시 꺾겠어요. 절친한 친구가 팔려 가는 꼴은 볼 수 없으니까." "이 년, 내 딸의 장래를 위한 일을 조롱거리로 삼다니." "연미 언니도 그렇게 팔려갔지요? 딸 하나만 부귀영화의 제물로 바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둘째 딸까지 팔아 넘기는 건가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고백도 못한다는 자식이 감히 내 딸을 넘볼 수 있을 것 같으냐." 왠지 저 둘은 아주 마음이 맞는 것 같다. 저렇게 손발이 탁탁 맞다니. 역시 악당은 악당끼리 논다는 말이 맞나 보다.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아귀다툼이 진행되는 것을 한가로이 감상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건데, 난 지금 진희를 껴안고 있단 말이다 ! 잔뜩 부끄러워서 내 품에 움츠린 진희에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네가 좋....."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그게 말이지. 옆에 악당이 두 명이나 있는데, 내 행복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 두 괴인의 소란스런 외침 때문에, 우리는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귀 아파. "이 녀석아. 나도 고백 좀 하자."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7화 오빠에게 부는 바람 (1) 쏴아아아. 비가 쏟아지는 들판을, 나는 홀로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는 거대한 오거가, 트롤이, 그리고 오크들이 붉게 물든 무기들을 휘두르며 쫓아온다. 거대한 철퇴가 내 발꿈치를 스치고 땅에 박힌다. 진흙탕에 발이 미끄러지는 것을 참고, 나는 필사적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괴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바보." 어째서 그렇게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쫓기는 입장에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진희 공주를 악마의 성에서 구출하는데 실패하고, 이렇게 혼자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왔던 동료들은 모두 죽었다. 동료검사인 지우는 이미 목이 잘려 죽었고, 동료 성직자였던 풍남이는 심장이 도려내어져서 죽었다. 동료 음유시인이었던 문희 역시, 벌거벗겨진 채 오크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외침이 나에게 들린다. "문구야. 살려줘."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가슴에 검은 테두리의 오각형 문장을 새긴 동료 마법사들이, 잇달아 산성액체를 뒤집어쓴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짓뭉개진 그들의 얼굴이, 상황의 비참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조리 녹아버리지 않은 것은 폭우로 인해 산의 농도가 약해진 탓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저주였다. 혀가 잘려서 주문을 외울 수 없게 된 마법사들이, 이제 와서 살아남은들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게다가 그들이 살아있다고 해도, 이미 그들을 치료해줄 성직자에게 달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들의 다리는 모조리 잘려진 채, 오크들의 저녁거리로 분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보. 바보." 오크들의 조롱 섞인 외침 속에, 그 다리들은 모조리 더러운 침을 흘려대는 오크들의 입안으로 사라져갔다. 오크들의 고기 씹는 소리가, 나를 구역질나게 한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살아서 저들의 복수를 해줘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쉬이이익. 내 앞에 날아든 것은, 마왕의 부하들이었다. 검은 색 눈꺼풀을 가진 악마의 부하들이, 박쥐날개를 퍼덕이며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내가 좀 더 나의 마법검을 지혜롭게 사용했더라면. 나는 잃어버린 나의 검을 아쉬워했지만, 이제는 늦은 후회였다. 나는 급한 대로 오크들에게서 빼앗은, 더러운 검을 쥐고 그들을 겨누었다. 붉은 용암을 흘려대는, 찢겨진 입을 벌린 괴물들이 나를 비웃는다. "바보. 바보. 바보." 그리고 그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마신다. 이제 곧 나에게 죽음의 액체가 쏟아지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비록 저주받은 세계의 것이기는 해도. "진희야 !" 내 눈앞을, 시꺼먼 액체가 뒤덮었다. "오빠. 일어나 !"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자세히 보니 내 배 위에, 정확히 말해서 그 위에 덮인 이불 위에 프라이팬 하나가 놓여 있다. 배가 황산에 맞아 타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내장을 쥐어짜듯이 밀려온다. "으악 !" 나는 침대에서 떨어져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 그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여동생의 시선은 예전과 달랐다. 더 차갑고, 더 무정했다. 여동생이 나를 쳐다본다. 한심하다 못해, 이제는 아예 무시하고 싶다는 속마음이 보인다. "바보." 여동생이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백하라고 할 때는 말도 못하더니, 잠잘 때는 신나게 불러대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바로 어제 진희네 집에 가서, 사랑고백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고백하고 차였으면 위로라도 해주겠는데." 문제는 그것이었다. 나는 아예 고백도 제대로 못했다. 아니, 고백하다가 말았다. 물론 그것은 진희 아버지가 난입해서 나를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는 싶었지만. "하루종일 같이 있었으면서, 입은 뒀다 뭐에 쓰려고 하는 거야. 이......" 내 볼을 양손으로 잡아서, 좌우로 당기는 미인이. 당연히 내 볼은 팍팍 늘어나 버렸고, 나는 울지도 못하고 팔만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내 볼을 더 세게 잡아당길 뿐이다. 그녀는 잠시동안 그렇게 하다가. "어휴. 내가 참아야지. 어쩌다 이런 오빠를 둬서. 교육을 잘못 시켰나 봐." 그리고 그녀는 맥이 빠진 듯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방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문의 손잡이가 새해 시작을 알리는 종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것이 내 눈에 보이고 있었다. "바보." 아냐. "바보." 아니라니까. "바보. 바보. 바보." 아니란 말야. 정말. 하지만 나를 사납게 노려보는 여동생의 눈동자와 마주치니까, 그런 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쪼그라들어 버리는 나. "어떻게 하루종일 기회를 줬는데도, 그래?" 아침부터 여동생은 계속 그 소리만 하고 있다. 일어났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아침운동 할 때도, 지하철에 탔을 때도, 심지어 학교 앞에 올 때까지 그 모양이었다. 비참하지만, 반론할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어제 내가 너무나 진희의 처지를 배려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고백도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도대체 언제나 올케언니를 볼 수 있을지. 뭐, 상관 없을라나?" 왜 상관이 없다는 거냐. 이 녀석은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거냐. 그러나 그 뒤에 나온 발언은 역시 여동생다웠다. 그녀는. "어차피 내가 먼저 시집가버릴 것 같으니까." 푹. 아직 남자친구는 물론, 좋아하는 남자 하나 없는 녀석에게 이런 말이나 듣다니. 흑. 진희야. 난 이렇게 살고 있어. 어째서 내 여동생은 이렇게 오라버니를 괴롭히는 취미만 있는 걸까. 그런 말을 속으로만 하며 학교로 가던 내 눈에, 거대한 리무진 하나가 오는 것이 보였다. 리무진이 길가에 멈추고, 검은 양복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낯익은 여학생 한 명이 차에서 내렸다. "진희야." 그런데 진희의 옆에 같이 내리던 경호원들의 눈길이 이상했다. 아무리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적의 정도는 알 수 있다고. 그들은 명백히 나에 대한 증오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눈길은 좀 다르다. 뭐랄까. 증오에 경멸이 섞인 듯한 저 눈은. 설마. 나는 달갑지 않은 일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바보 자식." 현실로 나타나 버렸다. 검은 양복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바보'라는 말을 날린 것이다. 원인이야 뻔하다. 보나마나 그 이야기겠지. 불행히도,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여자랑 같이 있었는데." "고백도 못하냐." "나 같으면 만리장성을 쌓았겠다." "아냐. 애 하나 정도는 만들었을 거야." "그런데 저 녀석은." "아무 것도 못하셨다며?" "참 대~단한 녀석이야." 검은 양복들의 조롱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진희에게 대놓고 말한다. "저런 남자답지 못한 인간과는 절대로 사귀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진희는 그저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하긴 옹호해주고 싶어도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결과였으니까. 하긴 어제 집으로 돌아올 때 본 연미 누나의 얼굴은. "어휴. 하루종일 같이 있었으면서도 고백을 못해? 으이그. 속 터져." 이런 식이었다.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다는 듯한 표정을 보니, 대충 속마음이 짐작이 간다. 하긴 그녀 자신의 미래와는 다른 미래를 진희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나에게 더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라도 연미 누나와 비슷한 미래가 기다린다면,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좀 너무하잖아." 모두들, 나만 미워해. "문구야아아아아 !" 학교에 왔을 때, 문희는 잔뜩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을. 그녀는 버둥거리는 나를 무시하고, 자기가 묻고 싶은 것만 물었다. 애고. 애고. "도대체 휴일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당장 이실직고해. 물론 네가 진희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잘 알지만, 최소한 바보 소리를 듣는 관계는 아니었어. 일단 그 인간은 널 위험인물로 분류했지, 조롱거리로 삼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그 경호원들은 대체 왜 그랬대? 게다가 미인이의 태도도 그래. 평소의 미인이 태도라면 '오빠 사랑해'가 넘치는 게 한 눈에도 보였는데, 오늘은 왜 저렇게 뿌루퉁해 있지? 당장 모두 털어놔 봐." 하긴 오늘 여동생의 눈은,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무섭다. 마치 시베리아 호랑이의 눈동자를 보는 듯하다. 저런 인간을 밤에 만난다면, 당장 비명부터 지르며 도망가다가 앞 발톱에 찍혀서 그대로 먹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할 정도다. 그런데 이 인간아. 이야기를 들으려면 내 멱살부터 놓아야 할 게 아니냐. 나는 마치 시체처럼, 대롱대롱 문희의 손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도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아. 그럼 이야기해 봐." 콰당. 나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애고고. 말이라도 해줘야 다리로 내 몸을 지탱할 게 아니냐. 꼴사나운 내 모습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힌 문희가 발을 날린다. "이, 이 녀석이 어딜 보는 거야 !" 보여줄 것도 없는 흰색 팬티면서 왜 그래. 나는 문희의 발차기를 맞고 뒤로 나자빠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여동생의 저 눈초리를 앞으로 매일 보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서워 죽겠다.' 나동그라진 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안 된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어떻게든 하고 말겠어." 이것은 이미 청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여동생의 저 무시무시한 눈을 더 보다가는, 공포로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악마 같은 녀석.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눈이 만들어지는 거야. 물론 여동생에게. "째려보지 마." 이렇게 말할 용기 같은 건, 나에게 없다. 그런 게 있었으면 벌써 진희에게 고백해서 행복한 연인사이가 되었던지, 그게 아니면 차여서 비참하게 땅바닥에 나동그라졌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어떻게든 진희와 사귀어서 여동생의 눈동자를 순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저 눈을 계속 보다가는, 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문제는 이것이지만 말이다. 일단 교실에서는 남에게 관심이 지나치신 학우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고, 점심 시간에 고백하려고 해봤자 언제나처럼. "우~~~~~~~~"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인간들, 남이 고백하는 걸 놔두면 벼락이라도 맞는 거냐. 내가 진희를 옥상으로 불러낸다면, 분명히 지난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방과후에 진희에게 가는 수밖에 없는데, 과연 언제? '역시 특별활동부 부실로 가는 수밖에 없나.' 그때가 되면 다들 자기가 가입한 부로 가거나 귀가할 테고, 그게 아니면 학습부로 끌려가서 강제로 자습을 해야 하니 방해꾼의 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다만 나 역시 축구부로 가야 하므로, 고백할 시간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달리면 되겠지.' 상당히 엉성한 계획이지만, 고백하는 것 자체는 1분도 안 걸린다. 아니, 사실 고백시의 대사를 생각해보면, 10초도 안 걸릴 수밖에 없다. 물론 분위기고 뭐고 다 깨지기야 하겠지만, 나 자신이 생각해도 그런 거 다 따지다가는 평생 고백을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냥 외치기라도 하자. 그럼 남은 문제는. '고백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할까. 내일 할까. 그렇지 않으면 1주일쯤 기다렸다가 고백할까. 고백할 때 분위기는 어떻게 잡아야 할까. 이런 한가한 고민을 하려던 내 눈에 보이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크르르르르." 소리 없이 으르렁거리는 여동생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그냥 오늘 고백하자.' 원래 고백할 때에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은 법이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아니 사치스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오늘 내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갑자기 여동생의 상냥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렇게. "오빠. 오늘도 고백 못했어?" 호호호. 아마 여동생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짝 웃다가, 갑자기 그 긴 손톱을 세우고는 내 목덜미를 잡아서 끌고 갈 것이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처럼 말이다. 하지만 끌려가는 장소를 생각하면, 도살장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그곳은 아마. [지옥문] 여기가 분명할 테니까. 여동생의 오늘 태도로 봐서, 만약 내가 진희에게 고백을 하지 못할 경우, 살인이라도 저지를 기세다. 아니라고? 그랬으면 저 녀석이 여동생일 리가 없잖아? 그러니 가급적 빨리 해치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퍽. 푹. 팍. "끄아아아악 !" 이런 최후를 맞을 게 분명했다. 뭐? 아니라고?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려다가, 여동생의 가방 안에 든 - 그것도 친절하게도 내가 보기 좋은 위치에 놓인 - 물건을 보고 그런 의심을 버렸다. 저 바늘뭉치는 대체 어디에 쓰려고 가져온 거지? 치한을 물리치기 위해 쓴다고 생각하기에는, 바늘의 양이 너무 많았다. 물론 누가 보면 바늘과 실뭉치니까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생각은 여동생에게 바늘꽂이로 쓰여 본 사람이라면 하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저 많은 바늘을 일일이 내 몸에 찔러 넣을 거란 말이냐. 그러니까 나는. '살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했다. 조국의 축구발전을 위해서라도, 진희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여동생이 살인자로 사형대에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아. 이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녀석이 법정에 설 리가 없잖아.' 우리나라 법정은 힘없는 사람에게만 중벌을 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TV 뉴스를 보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진희 아버지나 풍남이 아버지를 보면, 그들이 중죄를 저지른다고 해도 감옥에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여동생이 감옥에 갈 가능성이 과연 0.1%라도 존재하겠는가. 국회의원만큼이나 악독한..... "오빠." 히익 !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심장을 진정시키고 제자리를 지켰다. 휴전선 전방에서 경비를 서다가 멧돼지를 목격한 군인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아니, 이 경우는 멧돼지가 아니라, 무장공비나 북한군 전차부대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아니, 중국에서 온 대부대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러다가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그녀는 내 얼굴색이야 하얗게 되든 말든,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 녀석아. 웃지 마. 무서워. "오빠." 벌벌 떠는 나에게, 여동생은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한다. "오늘 기대할게." 뭘 기대하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질문이고 반론이고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다. 비록 다른 녀석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이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이 녀석이 요구하는 것은 알 수 있다. 적어도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어쨌든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 간 벌거벗고 침식을 같이 했던 사이 아니던가. '오늘 무조건 하라는 거냐.' 뭘 하라는 건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조건 진희에게 고백해야 한다. 무조건 말이다. 절대로 말이다. 이유가 없다. 여유도 없다. 오늘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는 오늘로 인생의 마지막을 고할지도 모른다. 여동생의 가방에 든 바늘이, 바느질이 아닌 의미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여동생한테 맞아죽을 바엔, 어디 한 번 고백해보는 거다 ! "오늘은 이걸로 수업 끝 ! 청소당번들은 청소가 끝나면 교무실로 오고." 그 말을 남긴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책과 출석부를 가지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교실 안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청소당번인 녀석들은 허겁지겁 청소함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곧 빗자루와 걸레, 그리고 대걸레의 쟁탈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쉬운 일을 맡으려는 게 눈에 뻔히 보이지만, 나라도 그랬을 테니 할 말은 없다. 물론 그 중 몇 명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어딜 가 ! 야 ! 거기 서지 못해?" 반장이 그런 녀석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화장실에 밀어 넣는다. 하긴 도망자가 자꾸 나오면 청소시간이 그만큼 길어지고, 그만큼 모범생들이 피해를 입게 되니까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좀 고달프지 않을까? 도망가다 걸리는 인간들은 강제로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며 코를 막아야 했다. 그나마 모범생들은 비교적 편한 일을 맡았지만, 의문이 하나 있기는 하다. 화장실 청소 당번들이. '창문으로 달아나면 어쩌려고?' 물론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화장실 유리창은 모조리 안전망을 둘러치기는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청소를 할 바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소리치는 궁극의 게으름뱅이들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안전망을 자르고, 아래로 줄을 타고 달아나는 인간들이 혹시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화장실 문만 열면 손쉽게 달아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장은 생각보다 치밀했다. 그녀는 아예. "청소 다 끝나면 불러." 화장실의 바깥문을 아예 잠가버린 거다. 일단 대걸레와 양동이는 주고 나서 문을 걸어 잠근 것이지만, 좀 야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물론 나는 오늘의 청소당번이 아니므로,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전혀 없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진희는 어디에?' 진희와 문희, 그리고 여동생은 자신들의 가방을 챙겨서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그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뻔하다. 보나마나 항공우주부 부실이겠지. 그럼 그들은 구 건물로 가야 할 테니까, 서쪽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힘들겠군.' 내 뒤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진희를 지금 따라가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인간들이. 얌전히 자기들의 특별활동부로 갈 것이지, 왜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거야 ! 그들이 괴성을 지르며 내 뒤를 쫓아오기 전에, 나는 동쪽 계단으로 걸어갔다. 비록 이게 좀 빠른 속도이기는 하지만, 몸이 위아래로 출렁거리지 않고 직선을 유지하니까 뛰는 것은 아니다. 이건 걷는 속도를 다투는 경보경기에서 달리는 것과 걷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고, 따라서 국제공인이다. 그 규칙에 따르면, 나는 지금 걷는 것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달리고 싶지만, 선생님들에게 걸려서 소란 피운 죄로 벌을 서고 싶지는 않으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지, 내 뒤에 따라오던 정겨운 학우들도 그렇게 걸어왔지만. '난 축구선수라고.' 일반인과 축구선수의 체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매일 단련을 거듭한 내 체력이, 운동도 안 하고 놀기만 했던 인간들과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그들보다 더 빨리 걸을 수 있었고, 그들은 조금씩 내게서 멀어져갔다. 게다가 진희는 동쪽 계단이 아니라, 서쪽 계단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여자에 환장한 인간들이, 멀쩡한 목표물을 두고 내 뒤를 계속 쫓아올 리는 없었다.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내 뒤에서 사라졌고, 나는 유유히 체육관으로 향했다. 물론 지금 당장 체육관에 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방향을 틀어서.' 나는 체육관이 아니라, 본 건물의 뒤쪽으로 향했다. 이쪽은 나무가 많고 사람들의 왕래도 적으며, 무엇보다도 운동장처럼 탁 트이지 않아서 다른 이들에게 들킬 염려가 적었다. 그러니 빨리 움직이면 '정겨운 학우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구 건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항공우주부가 몇 층에 있더라. 그러고 보니. "거기 가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누가 들으면 무심한 오라버니라고 하겠지. 좋아하는 여자가 가입한 부에 한 번도 안 들러 봤냐고. 하지만 지금 들르게 된다면, 그런 무심함과도 이별을 고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구 건물로 들어온 나였지만. "뭐야. 이 인간들의 무리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수가 꽤 많아 보였다. 하긴 우리 학교는 모든 학생들이 부활동을 하고 있고, 지금은 부활동이 시작될 시간이니까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왜 저기에만 사람들이 몰려 있어?" 인간들이 들어가는 부는 몇몇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부는 상당히 한적한 편이었고, 사람들이 몰리는 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하긴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교육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즐기는 분야가 다양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부인지 이름이 궁금해서, 나는 그들이 들어가려고 하는 부의 이름을 훔쳐보았다. 거기 써 있는 것은. [현대 오락 문화 연구부] 뭐냐. 이 부는. 왠지 심오한 내용을 담은 것 같아서, 나는 약간 기대를 해보았다. 문화 연구라. 좀 딱딱할 것 같은데. 물론 오락문화를 연구한다니 조금은 연하다고 여겨져서 그런 걸까. 그러나 그 부의 내부를 슬쩍 엿봤더니. [Round 1. Fight !] [You lose] [Nuclear launch detected] 이거 뭐야. 영어공부냐고 착각하기에는 내가 게임을 너무 많이 알았다. 그리고 그 영어 대사가 어디서 쓰이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나는 기가 차서 벽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오락문화가 뭔가 했더니, 이런 거였냐? 하긴 이런 부라면 사람들이 몰려올 만 했다. 하긴 누가 특별활동시간에까지 딱딱한 문화연구를 하겠나. 이런 식의 부드럽고 촉촉한 문화를 연구하겠지. 그래도 그렇지. 여긴 학교라고. 잠시 충격으로 멍하니 있던 나에게, 그 부실 안에서 들려온 소리가 나를 깨웠다. 보나마나 게임에 들어간 음성이겠지만. [아나타노 고토, 스키데스] 뭐야. 일본어인가? 이게 무슨 뜻이었더라? 일본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는 나로서는, 머리를 싸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 말들 중에 알아들은 것은 기껏해야 '스키'였지만. 일본어로 이게 좋아한다는 뜻이던가? 그 말에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해낸 것은. "진희야 !" 그래. 난 여기 고백하러 왔지, 게임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고. 나는 허겁지겁 다른 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부의 현판을 읽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만 골라서 말이다. 하지만 부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예를 들어. [전쟁사 연구부] 뭐야. 이런 것도 여기에 있는 건가. 전쟁의 역사를 연구한다니, 아마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원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전쟁의 역사라. 이런 걸 하려면 상당히 자료를 많이 찾아봐야 할 테고, 그러면 한자나 라틴어까지 알아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학교에서 왜 승인해줬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물론 나는 이런 쪽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난 지금 항공우주부를 찾고 있다고. 그러나 그 다음에 내 눈에 보인 것들도, 하나같이 내가 찾는 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해외문화 탐구부] 이봐. 말만 번지르르하지, 결국 일본 만화 애호가들이잖아. 물론 일본만화가 재미있는 건 사실이지만, 역시 부를 만든 사람들도 대놓고 일본만화를 제목에 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부실 안에서는 만화를 보느라 바쁘지만, 그래도 해외문화라는 점을 강조하는지 부실 안의 벽에는 만화와는 관계없는 사진들도 많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난 항공우주부를 찾아야 한다고."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도대체 항공우주부는 어디에 있는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사방을 뛰어다녔다. 아니, 열심히 걸어다니며, 내가 원하는 부실을 찾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되지만, 이미 축구부에 늦는 걸 걱정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아무래도 선배들에게 걸리면 죽도록 구르겠군. 사실 매일 매일의 꾸준한 연습은, 축구선수로서는 필수적인 것이니까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은 없다. 적어도 지금 선배들은 내가 처음에 입부할 때 만났던 그 흉악하고 비인도적이며,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만 하는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이 경우에는 혼이 난다고 해도 부당하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단 이탈.' 그 외에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일이 이렇게 비비꼬인 이유는, 따지고 보면 여동생 때문이다. 그 녀석이 만약 진희를 데리고 튀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이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지.' 내가 항공우주부의 부실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나만 떼어놓고 줄행랑을 쳐버린 건 명백히 고의다. 날 놀려먹기 위해, 그리고 오늘밤에 날 토막내서 솥에 집어넣고 끓이기 위해 꾸민 계략이 분명하다 !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건물이 좀 크냐. 아무리 오래된 학교 건물이라고 해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건물의 크기가 줄어드는 건 아니지 않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콩알만한 부실 하나를, 처음 와보는 사람이 찾으라는 것이 말처럼 쉽겠는가. 그런데 여동생이란 애는. "오빠. 같이 가자." 이 말을 꺼내기가 그리도 귀찮았던지, 진희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녀석이 항공우주부 부실에 잘 갔을까. 혹시 벌써 집에 간 건 아닐까. 그럼 난 진희도 못 찾고, 선배들에게 욕만 먹게 되는 건 아닐까. 마음이 급해지니까 부실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상하게 특별활동부 부실들은 하나같이 구석진 곳에 있거나, 어두운 곳에 있거나, 그게 아니면 부실 입구에 부 이름도 안 써놓고 있는 것 같다. 이 인간들아. 이름 좀 크게 쓰면 안 되냐. 나는 그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 잰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지나가다 보니. [경제 연구부]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부다. 물론 우리나라가 발전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살려야 하니까, 이런 부도 있으면 좋기는 하다. 문제는 이 부에 들어간 인간이, 내 맘에 하나도 안 드는 녀석이라는 점이지만. 그 녀석이 들어간 부니까, 아마 이 부에는 배 나온 사장님이나, 그 후계자들만 가득할 거야. 뭐? 그렇게 말하면 배가 안 나온 사장님들은 뭐가 되냐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장님'이라고 하면 그 이미지잖아? 풍남이도 앞으로 그런 모습이 될 거고. 게다가. '이런 부, 관심 없어.' 이 부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금 거기에 쏟을 관심 같은 건 없다. 지금 급한 것은 항공우주부의 소재이지, 풍남이의 방과 후 활동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산업스파이라면 후자가 더 신경 쓰이겠지만, 난 우리나라의 산업기밀을 외국에 팔아 넘길 생각이 없으니 이런 곳은 넘어간다. 그럼 다음 부는. 여전히 잰걸음을 유지하던 나에게 보이는 게 있었으니. [영화 연구부] 상당히 전형적인 특별활동부다. 하긴 영화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어느 학교에나 있으니, 이런 부가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음. 여기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혹시 장래에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지닌 남학생과, 그 남학생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부실 안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게 아닐까. 그 남학생은 품에 안긴 여자아이를 어떻게 대할까. 역시 실수로 여자아이를 쓰러뜨리고, 우연히 둘의 눈이 마주치고, 둘은 선을 넘어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이게 아냐 !" 여기서 지금 이런 상상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나는 이상한 생각을 억지로 머리에서 몰아냈다. 어차피 진희에게 고백해서 성공하면 얼마든지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단지 애인 사이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이 해서는 조금 곤란한 짓'을 하면 안 되지만. 아냐. 아니지. 지금은 상상할 때가 아니다. 행동할 때이다. 상상은 나중에 하자. 일단은 진희를 찾는 게 먼저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부실을 찾는 것은 아직도 먼 장래의 일이었으니. [UFO 연구부] 이건 뭐냐. 내 머리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비행접시였다. 아이들이 날리고 노는 그런 접시가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으로 허공으로 떠오르는, 그런 비행접시 말이다. 물론 그건 눈의 착각이라는 주장이 많지만, 사람들 중에는 그게 외계인이 보낸 비행물체라는 주장도 퍼져 있다. 아. 절대로 여동생이 탄 비행물체라는 게 아니다. 여동생이 속한 부에서 다루는 비행물체는, 최소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힘으로 허공으로 떠오르니까 말이다. 나는 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고, 다른 부실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심령현상 연구부] 또 실패다. 이런 부라면 여동생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진희가 있을만한 장소는 아니다. 연속된 실패에 약간 허탈해진 탓인지, 다리의 기운이 빠진다. 잠깐 여기 들어가서 쉬고 갈까. 이런 예의 없고 방정맞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여태까지 계속 실패만 거듭한 고백작전의 전황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발이 서서히 그 간판, [심령현상 연구부]라는 간판이 걸린 부실을 향해 움직인다. 그래. 좀 쉬고 가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럼. "!"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왜 난데없이 이 부실 안에 예쁜 여학생들이 무더기로 가입해 있고, 그들과 내가 -삐-를 하는 장면이 상상되는 거냐. 흑마술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렇게 -삐-한 장면만 튀어나오는 건 아니라고. 내가 피곤해서 그런가. 나는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 이상하다. 발이 안 떨어진다. 어째서인가. 혹시 내가 너무 지쳐서 그런 건가. 그러나 심령현상 연구부로 발을 한 발짝 떼어놓자, 이상하게 발이 잘 떨어진다. 이거 뭐야. 왠지 모르게 무시무시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거 혹시, 마법에라도 걸린 거 아냐? 나는 다시금 발을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아앙." 아니다. 이건 아니다. 절대로 저 부실의 문이 약간 열려있고, 그 안에 사람의 살색이 보일 듯 말듯하다는 것으로 인해 내 발이 저쪽으로 끌려가는 게 아니다. 뭐 약간은 흥미가 있기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하지만 저 올록볼록한 게 과연 무엇일까. 나는 필사적으로 호기심을 억누르고 달아났다. 아니,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끼이익. '히익.' [심령현상 연구부]라더니, 확실히 문 열리는 소리부터가 다른 부와는 질적으로 틀리다. 마치 괴물이라도 안에 도사리고 있는 듯한, 마왕성의 문이 열리는 듯한 이 소리는. 도대체 이곳은 얼마나 오래된 건물이기에, 이런 '흉가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가 생기는 거냐. 나는 더 이상 이 부실의 내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설령 저 안에 여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 여자들이 모두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고 해도, 왠지 이곳의 관계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나에겐 축구가 있고, 진희가 있어. 저런 괴상한 곳과는 얽힐 필요가 없다고. 나는 그 말을 되풀이하면서, 부실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원래 도망가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 증거는. '그게 익숙했으면 내가 여태까지.' 여동생에게 맞고 살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내가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어느새 문 뒤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직 복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복도는 왜 이렇게 길어. 그리고 예정된 순서대로. "손님이신가요?" 아이고. 망했다. 나는 나 자신의 느린 발걸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경우는 복도에서 달리면 안 된다는 규칙을 지킨, 나의 고리타분함과 어벙함에 이유가 있겠지만, 그걸 굳이 딱 집어서 말하기는 좀 창피하다. 고로 이건 내 발이 느려서 생긴 일이다. 나는 손님이냐는 심령현상 연구부원의 물음에 필사적으로.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사실 그 말이 맞지 않은가. 절대로 안에서 여자가 옷 갈아입는 것을 보고 싶었다느니, 안의 부원들이 모두 아름다운 여학생이어서 그들과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다고 상상했다느니 하는 이유로 내가 저 부실의 문 앞에서 얼쩡거린 게 아니다. 난 그저, 항공우주부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걸 찾다가 피로해져서 잠시 멈춰선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변명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혹시, 1학년생?"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오해를 불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부실 안에 있던 또 다른 연구부원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그녀는. "손님이시군요. 들어오세요."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했지만, 이게 이상하게 비비 꼬여 버렸다. 처음 나온 부원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내가 손님이라는 걸 인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이 엉뚱하게 진행되는 걸 깨달은 내가 달아나려고 했지만. "들어오세요." 두 여학생은, 웃으면서 나를 부실 안으로 끌고 가 버렸다. '아이고.' 결국 나는 도망도 못 가고, 흑마술부 부실로 끌려 들어왔다. 진희를 찾아가려면 한시가 급한데, 난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부원들이 가져오는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나는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항공우주부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토마토 쥬스나 마시고 있는 거지? 물론 심령현상을 연구한다는 간판과는 달리, 부실 안은 상당히 밝고 깨끗한 편이었다. 만약 이곳이 어두컴컴하고 해골바가지라도 하나 걸려있었다면. '그랬으면 난 아마.'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것이다. 물론 [심령현상 연구부]라고 해서, 진짜로 여기서 유령이나 사후세계를 탐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학교에는 학습부라는 괴상한 부서가 있기 때문에, 여기 가입하지 않으려면 학생들은 머리를 짜내서 별별 희한한 부를 만들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부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기에 모인 여학생들이 과연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가 솥에 삶아서 악마에게 바치겠는가. 이상한 주문을 외우면서 저주를 걸겠는가. 그들이 마술을 부린다고 해도. '기껏해야 사랑점 정도겠지.' 그래. 그럴 거야.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그러고 싶어도, 내 앞에 놓인 빨간 물질을 보니 속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정말로 토마토 쥬스 맞는 거야? 혹시 간판에 어울리게 피라든가, 혈액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액체는 아니겠지. 내가 자꾸만 쥬스잔을 쳐다보는 걸 본 부원 하나가 웃으며 말한다. "그거 토마토 쥬스 맞아요." 속을 들킨 것 같아서, 약간 씁쓸하다. 뭐? 여동생에게 매일 들키며 살지 않느냐고? 이봐. 여동생이야 기본적으로 대마왕 아니냐. 게다가 그 녀석은 일단 가족이고, 쌍둥이이니 어느 정도는 억지로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왠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 기우였으니. 그 부원이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그 쥬스를 보면, 하나같이 피가 아닌가 의심하더라고요. 우리 부의 이름 때문인가?" 뭐야.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던가. 나는 순간적으로 안심했다. 다행이다. 일단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답이 나왔던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으니. "그런데 우리 부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견학? 가입? 그렇지 않으면 운명?" 뭐가 운명이야 ! 그러나 이곳에 온 목적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기는 있군. 나는 이 부실, 아니 이 건물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그래. 이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항공우주부의 부실 위치를. "저, 지금 항공우주부를 찾고 있거든요.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잠시 만나러 가려고요. 그런데 부실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이유는 생겼다. 그 부원이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더니. "항공우주부요? 아. 그 애가 가입했다는." "그 애라니요?" 그 애? 그게 누군지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본다. 어쩌면 여동생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런 희망은 당연히 좌절되기 마련이었다. 그 부원이 말한 이름은. "그 애 이름이 아마 미인이라고 했던가요? 이름이 이상해서 모두들 듣고 웃었는데." 역시. 그 녀석을 제외하고 누가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겠나. 무슨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보나마나 나쁜 소문일 게 분명하다. 아니라고? 이것 봐라. 이름부터가 괴이하지 않느냐. 미인(美人)이 뭐냐. 미인이. 사람 이름을 그렇게 붙인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나 자신의 이름도 문구 세트니 학용품 세트니 하는 판에 여동생에게까지 신경 써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나한테 급한 건, 여동생이 아니라 진희라고. "그런데, 어째서 그 녀석을?" 아시나요. 사실 하나마나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학교에서, 그 녀석을 모르는 인간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겠냐. 입학 때부터 이상한 쪽으로만 화제를 뿌린 녀석인데.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냐. 내 앞에 있는 여학생이 하는 말부터가. "그 애는 유명하잖아요. 이름부터 이미 상당히 튀니까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게 수상하다. 이봐요. 아가씨. 왜 웃는 겁니까? 차라리 여동생이 불량배 100명을 짓밟았다던가, 오빠를 샌드백 취급한다던가, UFO슛으로 모든 축구부원들의 넋을 빼갔다던가, 심지어 '악의 화신' 국회의원과도 대등하게 맞선다던가. 그런 소리가 나왔으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는데. 이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면 앉아있는 내가 더 힘들다. 난 지금 바쁘단 말야 ! 안절부절하는 나를 보며 그 여학생은. "역시 소문대로 오늘 진희라는 여학생한테 고백하려는 건가요?" 덜컥. 나는 의자에서 미끄러져, 탁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어, 어째서 그런 소문이? 사실 그럴 예정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부의 이름이 [심령현상 연구부]가 아닌가. 투시마법이나 세뇌같은,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며 벌벌 떠는 나를 보던 그 여학생은. "어차피 다들 아는 건데요. 이미 오래 전부터 소문이 퍼졌으니. 두 사람은 지상최강의 바........" "그만 !" 더 이상은 못 듣겠다. 보나마나 지상최강의 바보커플이라고 하겠지. 그런 말은 이미 지겹게 들은 이상, 더 듣고 싶지도 않다. 아직 고백도 안 했는데 커플이라. 듣기는 좋을지 몰라도 그 말이 결코 좋은 뜻이 아닌 이상, 달갑게 들리는 건 아니다. 왜 전교성적이 50등 이내인 나와 진희가, 바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하냐. 하지만 그 이유는. "사람들은 이미 내기했다고요. 과연 우리의 바보커플이 이번에는 공식커플이 될 것이냐. 그게 아니면 이번에도 고백에 실패할 것이냐. 돈까지 걸린 모양이던데요." 걸지 마. 내가 무슨 경마장 말이라도 되냐. 하지만 내가 진희를 좋아하게 된 건 꽤 오래 전부터의 일이고, 고백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치 누군가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고백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차라리 다른 여자를 사귀는 게 낫겠다." "고백도 못하는 멍청이." "입은 뒀다 뭐하냐?" 그러다가 나온 말이 바로 '지상최강의 바보커플'이다. 처참한 나 자신의 과거에 절망하고 싶지만, 그런 창피한 별명을 떼어내는 게 나의 오늘의 의무다. 그런 소리를 하루만 들었다면 여동생이. "기대할게." 라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오늘도 그 별칭을 떼어내지 못한다면....... 여동생의 마수가 나에게 뻗치는 걸 상상하자, 당장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기분이, 나를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당장 뛰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청춘을 위해. 그리고 바보커플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아이고. 항공우주부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도리 없이, 눈앞의 여학생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라고 물어야 하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질문부터 던진다면, 이 여학생이 날 무엇으로 보겠냐. 그러나 그 여학생은 생각보다 친절했으니. "항공우주부 부실은 5층 19호실이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부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달려라. 문구야. 비록 여동생의 바람 같은 발걸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는 전속력으로 복도를 뛰어갔다. 약간 발소리가 크기는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런데 잠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맙습니다." 그 여학생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길도 가르쳐 주고, 토마토 쥬스까지 대접해준 사람이니,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나중에 다시 만난다면, 아는 체라도 해야겠다.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시더라? 급하니 나중에 묻자. 일단은 진희가 아직 부실에 있을 때, 도착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고백 잘 되길 바래요." 쿵. 복도에 미끄러질 뻔했다.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른다 ! 엘리베이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학교에 그런 게 있을 리는 없다. 더군다나 이 건물은 새로 지은 본관이 아니라, 옛날 건물이라서 계단은 있어도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같은 사치품은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일 체력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택에, 이 정도는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다리 아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물론 본관 건물에도 엘리베이터는 없다. 아니, 있기는 하지만 높으신 분들의 전용이라 우리 같은 힘없는 학생들은 타지도 못한다. 아. 여동생 제외. 그 녀석이라면 엘리베이터쯤 몰래 타는 건 일도 아닐 거다. 아니, 당당하게 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래. 이래도 나에겐 희망이 있어.' 진희를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고백하는 거다. 이번만큼은 말을 더듬지 않고, 당당하게 말이다. 이것은 아직 여동생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다. 이번에야말로 여동생보다 앞서나가는, 선진국 오빠가 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죽어라 계단을 뛰어오르다 보니, 어느덧 목표가 보였다. 그래. 이제 여기만 올라가면 5층이야. 희망에 부풀어오른 내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오빠 ! 너무 늦어 !" 5층에 올라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동생이었다 ! 그런데 말이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여동생아. 진작에 그런 걸 교육시켰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기도 전에, 나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탁. 역시 여동생은 강했다. 그녀는 어느새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문제는 손으로 붙잡은 게 아니라, 우산으로 잡았다는 점이지만. 우산 손잡이의 구부러진 부분이 내 목에 걸렸고, 나는 켁켁거리며 몸부림쳤지만 여동생에게 항의는 무의미했다. 그녀는 얌전히. 자기 딴에는 얌전한 동작으로 나를 끌어올렸지만. 쾅. 내가 무슨 개구리냐. 가오리냐. 가자미냐. 나는 5층 복도에 납작하게 퍼졌다. 단순히 말해서, 자빠졌다는 말이다. 코가 안 깨진 건 다행스런 일이지만, 이런 건 좀 너무하지 않느냐. 아니, 이건 고의야. 고의. 날 한 번이라도 더 때리고 싶어서, 일부러 날 놀라게 한 거야. 일단은. "크아악 !" 비명부터 한 번 지른다. 오징어포처럼 될 뻔했는데, 비명이 안 나왔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 다음에 행할 일은 당연히, 여동생에게 항의하는 것이다. 일단 내 목에 걸린 우산부터 떼어내고. 나는 노인들의 지팡이처럼, 손잡이가 구부러진 우산을 보며 몸서리쳤다. 이런 걸 사람의 목에 걸어서 잡아당겼단 말이지. 항의가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도대체 수업이 언제 끝났는데,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혹시 다른 여자 만나서 토마토 쥬스 마시고 온 건 아니겠지?" 그 말은 내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여동생의 심문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놀라 떨어뜨린 턱을 다시 주워서 머리에 붙이기도 전에, 그녀는. "게다가, 심령현상 연구부의 부장님하고 밀실에서 대화를 나눴지? 어떻게 고백도 하기 전부터 바람을 피우는 거야? 정말 오빠는." 너, 나도 그 사람이 부장님인지 1학년생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다 아는 거냐. 이 녀석은 천리안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건가.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나와 여동생의 주위에 여자아이들이 몰려들었고, 그 여학생들은 일제히 비난을 던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벌써 바람이라니." "진희가 불쌍해. 고백도 못 받았는데."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바람둥이." 도대체 이 여자아이들은 뭐냐. 설마 이렇게 많은 미인이 모두 항공우주부에 소속된 여학생이라는 건 아니겠지. 여자들의 집중공격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보지만, 솔직히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지금 이 여자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나에겐 없다. 목표가 코앞이다. "진희야 !" 이렇게 외쳤냐고? 불행히도 아니다. 외치기는 했지만, 내가 외친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여동생이 먼저 진희를 부른 것이다. 약간 어색하게 웃던 진희가, 갑자기 뒤돌아 서더니. 피융. "진희 저 애, 또 도망간다 !" 뭐? 또? 여자아이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고,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어서 진희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쫓아가고 싶었지만, 여자아이들이 장벽이 되는 바람에 그게 불가능했다. 물론 그녀들이 나를 방해하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전부 멍하니 진희의 등만 바라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장애물이 된 거다. 이대로 진희를 놓치는가. 그러나 이곳에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진희야. 거기 서." 이봐. 그렇게 외친다고 설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 파앙. 여동생은 마치 로켓처럼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난데없는 여동생의 질주에, 나는 꼼짝도 못하고 상황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가고 싶어도 내 다리로는 여동생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아침마다 확인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걸 볼 때마다 여동생이 달리는 속도가 얼마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내 손목시계가 스톱워치 기능을 가졌다는 것에 기뻐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시계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와. 빠르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빨라서 내가 어리버리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사이에, 여동생은 이미 진희를 따라잡고 있었다. 괴물 같은 녀석. 진희가 여동생의 장벽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틀어봤지만, 여동생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나만 여동생을 이길 수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 증명되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여동생이 진희를 가지고 노는 걸 보니 슬프기도 하다. 저 녀석, 설마 저러면서 진희를 때려눕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런 내 걱정은 헛된 것이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진희의 어깨를 잡고, 마치 보석이라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나한테는 우산을 마구 휘두르더니, 진희한테는 전혀 다르네.' 남녀차별이냐. 약간의 불만이 섞인 시선을 보내보지만, 그런 건 여동생에게 있어 '무시해도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진희를 한 번 쳐다보고. "자. 그럼 방해꾼들은 물러갈 테니, 고백 잘 해." 그리고 진희를 반강제로 부실에 넣어버렸다 ! 음. 19호 부실이군. 그렇다는 건, 저기가 바로 그 ! 여학생들이 일제히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럼 잘해보세요. 오라버니." "문구야. 힘내." "자. 지상최강의 바보커플은 과연 오늘도?" 이, 이 인간들이. 도대체 그 눈은 무슨 의미냐 ! 그들은 나에게 눈길을 주면서. "빨리 들어가셔야지요. 오라버니." 복도 반대편 끝에, 웃음을 참느라 배를 움켜잡은 꼬마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저 선생님이 항공우주부 담당이셨지. 그들은 나를 부실 안으로 밀어 넣더니. "그럼 기대할게요." 쾅. 야. 뭘 기대한다는 거냐? 문은 매정하게 닫히고, 나는 부실 안에서 허탈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여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죄와 벌. 살인죄를 저지른 주인공은 어떻게든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하지만, 결국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그는 거기서 밑바닥에 굴러 떨어진 한 여인을 만나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 "이게 아냐 !"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지금의 내 꼴이 꼭 그 지경이다. 여동생이 눈을 부라리는 가운데, 나와 진희는 강제로 항공우주부 부실에 감금당했다. 아니, 여동생만이 아니라 항공우주부의 모든 부원들이, 부실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나와 진희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뭘 기대하는 건지. 난 성인영화 찍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물론 그런 내 생각을 여동생이 못 읽어낼 리 없다. 그녀는. "미성년자에게 안 어울리는 일을 하라는 게 아냐. 단지 한 마디만 하면 돼. 다른 거 필요 없으니까, '지상 최강의 바보커플'에서 벗어나면 돼. 이렇게 질질 끌기만 하지말고. 알겠습니까 !" "네 !" 야. 왜 너희들이 대답하는 거야 ! 역시 여동생이 속한 부답게, 부원들도 하나같이 사악하고 음흉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왜 1학년생이 부 전체를 주도하고 있지? 2학년이나 3학년은 이 부에 없는 거야? 하지만 좀 나이 들어 보이는 학생들은. "........" 저 인간들이. 그들은 모조리, 심지어 꼬마 선생님까지 포함해서, 1학년생들의 곁에서 약간 떨어져서, 의젓하게 서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쳐다보자 일제히 고개를 돌렸지만, 표정들이 정말. '카아악.' 여동생 앞이라서 소리는 못 질렀지만, 저 표정의 속뜻은 분명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재미있다.' 이런 식이었다. 대체 선배씩이나 되어 가지고, 남이 난처해하는 꼴이 그렇게도 재미있냐. 나는 마지막 희망으로 항공우주부를 담당하시는, 전혀 선생님으로는 안 보이지만 어쨌든 선생님인, 꼬마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막고는 고개부터 숙이는 거다. 무슨 의미인지 알만하다. 나쁜 선생님 같으니. 믿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와 진희는 어쩔 수 없이, 밀실에 둘만 있게 된 것이다. "아이고." 절로 한탄의 목소리가 나온다. 뭐? 좋겠다고? 이제 합법적으로 이런 일, 저런 일,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웃기지 마라. 여동생이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놓아둘 것 같으냐. 게다가 지금 문 밖에는, 눈을 반짝거리며 부실 안의 상황을 훔쳐보는, 심히 고약한 여학생들이 그득한데 말이다. 아마 부실 어딘가에 감시카메라라도 설치해두었을 거야. 이 장면을 녹화해서 두고두고 놀려먹기 위해서 말이지. 이 상황에서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할 기분이 들 것 같으냐. "망할 인간들." 나는 도대체 어디에 감시카메라가 있는지,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비록 항공우주부 부실답게 비행기 모형도 있고 우주선 모형도 있고 공군사관학교에서 부원들이 찍은 사진도 있고 부원들이 직접 제작한 로켓도 하나 있었지만, 내가 지금 찾는 건 오로지 감시카메라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감시카메라라는 물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진희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주위에 시선을 놓으려고 해도 안 된다. 잘못하면 지금의 일이 모조리 촬영될지도 모를 판국인데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희하고만 있어본 적이 별로 없으니.' 그렇다. 난 지금, 진희와 단 둘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밀실에 가까운 곳에서. 그런데 잠깐. 이렇게 되면 내가 보통 어떻게 행동하더라? 갑자기 벽에 걸린 시계가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분명히 초침이 도는 속도가 무지무지하게 빨라지고 있다. 큰일이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큰일났다. 이러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또 고백도 못할 게 분명하다. 안 돼. 입을 열어야 해. 그러나 내 입은 움직이지 않는다. 도리 없이 손으로 입을 잡아서, 억지로 열어보았지만. ".............." 말이 나와야 할 게 아닌가. 입만 열려서 뭘 하겠는가. 이제는 시계 초침뿐 아니라, 분침까지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다가는 시침까지 빨리 돌아갈 거야. 그럴 순 없어 ! 하지만 입이 열려도, 목소리가 안 나온다. 제발. "............................" 제발. Please. 오네가이. 나는 한글과 영어와, 제대로 되지도 않는 일본어까지 모두 동원해서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 짜내려고 했다. 그런 내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조금씩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침이 돌아가는 속도를 늦추려고 애쓰면서, 나는. "나, 나는.........." 이젠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나는 아예 눈을 감고, 오로지 입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네................가............." 그래. 조금만 더. "가..........조......." 이게 아냐. 좀 더 명확하게. "조...........좋........." 한 글자만 더 ! "좋................." 한 글자만 더 ! 더 ! 더어어어어 ! "좋......." 그러나 내가 마지막 글자를 토해내기 전에, 난데없이 진희가 벌떡 일어섰다.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새빨개진 진희의 얼굴이 있었다. 뭐? 키스하려고 다가온 것이냐고? 그럴 리가 있겠냐 ! 그녀는. "나, 나중에 들을게. 그럼." 자기 가방을 들고, 죽어라 부실 문을 향해 달려가는 진희. 뭐, 뭐냐. 아예 내 고백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거냐.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녀는 부실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문이 열릴 리가 있겠냐. 여동생이 오늘은 단단히 벼르고 온 것 같은데, 과연 문이 꿈쩍하기나 할까. 그러자 그녀는. "문 열어 줘 ! 문 열어 줘 !" 그녀의 얼굴 표정은, 마치 공포영화의 여주인공 같았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무시무시한 살인마의 칼을 피해 달아나는 여인. 그 여인의 눈앞을 가로막은 문. 그 문을 열지 못하면 그녀는 칼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될, 그런 상황에서의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럼 내가 무슨 살인마냐. 여동생도 아닌 내가 그런 식의 위압감을 진희에게 가했단 말이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건. "와. 드디어 덮치는 건가?" "뭐, 진희처럼 둔한 여자에겐 그것도 좋을지도." "하긴 그래. 이렇게라도 해야 '지상 최강의 바보커플'이란 딱지가 떨어질 거야." "그러니 우린 친구로서, 진희를 믿고 기다려 주자고." 지금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덮치는 거라면, 왜 내 소리는 하나도 없냐.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이라면 여동생이 모를 리가 없잖아. 그 녀석이라면 내가 파렴치한이 되기도 전에. "여동생 날아 차기 !" 이런 게 날아올 걸. 뭐 여태까지 내가 여동생에게 많이 얻어맞기는 했어도, 그런 문제로 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쪽이 문제가 아니다. 일단 내가 진희를 덮친 것도 아닌데 이런 반응이 나온다면, 앞으로도 고백은 불가능할 게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진희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바램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가방을 어깨에 걸치더니, 엉뚱하게도. "문구야.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하지만 여기서 나가려고 해도, 부실 문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데? 고백도 아직 못했는데, 저 인간들이 우릴 내보내줄 것 같으냐. 그러나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진희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부실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녀는 ! "뭐, 뭐 하는 거야 !" 그녀는 창문 밖으로 도망간 것이다 ! 내가 깜짝 놀라 창문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녀는 창문 밖의 삐쭉 나온 턱을 통해 빗물을 버리는 배수관으로 달려가서, 그대로 그 배수관을 손으로 잡은 것이다. 설마. 설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 배수관을 잡은 채로. 주르르르륵. 그녀는 배수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자기가 유명한 탈주범이었던, 신창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에 그녀가 가졌던 청순가련한 아가씨의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충격이긴 했지만, 그보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렇게 내가 싫은 거냐.' 도대체 내가 그녀에게 고백하는 게 얼마나 싫었으면, 여동생이나 가능할 방법으로 달아난단 말인가. 진희가 저렇게 굉장한 행동력을 지녔다는 건 전혀 몰랐던 터라, 나는 아무 짓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실의 문이 열렸을 때도, 여동생과 부원들이 뛰어들어왔을 때도, 진희가 1층까지 내려갔을 때도,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차였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 행동에 대한 다른 해석은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허탈하게 부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내 가방을 들고, 비틀거리며 항공우주부 부실에서 나와서, 여기저기 헤메고 다닌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아마도. "몰라." 아마 학교 뒤편의 숲이겠지만, 솔직히 그런 건 알게 뭐냐. 비참한 패배자인 주제에. 결국 나는 축구 연습도 못했고, 고백도 실패했다. 참으로 멋지게. 진희가 벽을 타고 달아날 정도로 나를 싫어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차일 걸. 이래가지고 과연 내일 연습에 참가할 수 있을까. 여동생 얼굴은 어떻게 보나. 기뻐 날뛸 진희 아버지의 꼴은?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인다. 익어서 고개를 숙인 벼이삭이 아니다. 선배에게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다. 그저 초라한 패배자였기에, 그런 꼴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숙인 것뿐이다. 그것뿐. 그것뿐. 그것뿐. '으흑.' 울음을 참는다. 아무리 슬퍼도 울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지금의 일이 현실로 굳어질 것 같기에. 하지만 참기가 힘들다. 이런 식으로 첫사랑이 끝장나다니. 울고 싶다. 엉엉. 엉엉. 엉엉엉.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하지만 삼켜지지 않는다. 통곡은 계속 눈에서 흘러나오고, 나는 슬픔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내 청춘은. "문구야. 미안." 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미안하다니. 차라리 직접적으로 나에게. "네가 싫어 !" 그렇게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속이 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싫다는 말조차 들을 가치가 없는 상대였단 말인가. 그래. 너도 결국 부잣집 아가씨니까, 자기에게 어울리는 재벌 2세나 고위 정치인의 아들을 찾아가겠다는 거냐.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고백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가지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하늘이 무엇인가에 의해 가려졌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저. 미인이 오빠 되시나요?" 누구지? 이 여자는. 그녀는 단발머리에, 약간 납작한 가슴에, 그럭저럭 괜찮은 몸매를 소유한 여자아이였다. 콧날이 오똑한 것도 아니고, 입술이 특별히 붉은 것도 아니고, 화장이 진한 것도 아니었지만 모가 나지 않은 점은 괜찮았다. 평범하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 그녀에게서 받은 첫 인상이었다. 여동생이나 진희같은, 외모가 튀는 여자들만 상대한 내 입장에선, 충분히 신선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외모다. 그런데 이 아가씨, 누구지? "누구세요?" 처음 본 사람이니 반말로 묻기도 그렇고, 이 사람이 선배인지 동급생인지도 모르니 일단 낮춰 부를 수가 없다. 난 1학년이니 이 사람이 후배일리도 없고. 그녀는. "아. 저는 항공우주부 부원인 김시내라고 해요." 헉 ! 항공우주부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죽어라 달아났다. 이 아가씨가 왜 여기에 왔는지, 찔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내가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당했는데. '보나마나 날 놀리려고 온 거야.' 그 외에 나를 만나러 올 이유는 없다. 물론 여자가 이런 으슥한 곳에 혼자 온다는 것은, 아무리 여기가 학교라고 해도 그리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어느 학교에나 불량배는 있는 법이고, 다른 사람이 자주 오지 않는 이런 곳은 범죄의 온상이 되기 쉬우니 말이다. 뭐? 여동생은 이런 곳에 혼자 와도 안전하다고? 이봐. 이 세상의 여자들은 여동생처럼 천하무적의 괴물이 아니라고. 보통 여자는, 남자에게 힘으로는 당하지 못하는 법이며, 비신사적인 작자들과 단독으로 맞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아무리 내가 초현실적인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다고는 해도, 그런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너무 순진하거나, 깡패들을 만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즉, 저 아가씨는 여동생과 같은 부류의 인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여자를 내가 상대해서 뭘 하겠는가. 게다가 저 여자가 항공우주부라면, 조금 전에 내가 겪은 일을 다 봤을 것이고, 당연히 내 꼴을 보고 마구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니 난 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가 지금 남과 이야기할 만큼, 마음이 평화롭고 너그러울 리가 없잖아? '미치고 환장하겠는데.' 그러니 나는 죽어라 달린다. 어딘가, 혼자서 실컷 울 수 있는 곳을 찾아서. 하지만 달릴 때는 앞을 봐야 하는 법. 그런 상식을 무시한 대가는 컸다. 어떻게 된 거냐고? 당연하잖아? 이럴 경우 내가 겪을 일이란 건. 쾅. "아고고." 당연히 이렇게 되었다. 머리가 아프다. 혹 났나 보다. 그러나 이마에 뜨끈한 게 흐르지 않는 걸 보니, 머리가죽이 찢어졌거나 두개골이 빠개졌거나 뇌수가 흘러나온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달리려고 했지만. "아야. 아파요." "?" 어째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앞에 와 있는 거지? 그제야 나는 내가 무엇과 부딪쳤는지를 깨달았다. 얼굴을 찡그린, 그 시내라는 여학생이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냐? 왜 내 뒤에 있던 여자가 내 앞에 와 있는 거냐? 만약 내가 부딪친 상대가 여동생이었다면, 그 녀석은 원래 상식과는 인연이 없으니 그냥 납득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 여동생이 아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저. 미인이 오빠. 왜 달아나세요?" 시내는 나에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저 주먹에 들어간 힘을 보라고 ! 저건 분명히 기분이 나쁘다는 거야 ! 나는 저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미 채득하고 있었다. 저건 여동생이 자주 보여주던 태도니까 말이다. 하긴 여동생과 같은 부에 속한 사람이니, 여동생이 호신술을 좀 가르쳐줬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일은 단 하나. '36계다.' 만약 여동생이라면, 날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여동생이 식칼이나 프라이팬을 휘둘러대더라도 일정선에서 멈추어 왔었다. 그래도 오라버니라고 봐준 것인가. 사실 그녀에게 덤빈 불량배들이 다들 어딘가가 부러져서 돌아갔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도 그 녀석은 여동생으로서의 선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 여동생이 아니고, 나와는 아무 의리도 친분도 없다. 그렇다면 이럴 때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녀에게서 풍기는 나쁜 기운. 아니, 기운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어쨌든 예감이랄까. 그래서 나는 죽어라 도망쳤다.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자마자. 하지만. 쉬익. 나는 뭔가에 발목을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뒤에서 덮쳐오는 시내. 그녀의 억센 손이 내 목덜미를 잡는다. 그리고 그대로 비수가 내 목에 내리꽂힌다. 나는 얌전히 죽음을 기다렸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무거나 잡고 던진 것이다. 마침 이곳은 풀 많고 나무 많고 흙 많고 돌 많은 곳이니, 던질 것이라면 꽤 많았다. 뭔가 아주 단단한 게 손에 잡힌다. 나는 그것을 들고 시내를 향해 던지려고..... "저. 미인이 오빠. 괜찮아요?" 그녀가 든 비수에 걸린 것은, 전갈이었다. "역시 미인이한테 듣던 대로 상상력 과대, 행동력 과대네요." 나는 다시 원래 앉아있던 벤치로 돌아와서, 시내에게 잡혀 있었다. 전갈에게 물려서 경련을 일으키는 사태에서 날 구해줬으니, 도망갈 핑계도 없다. 물론 묻고 싶은 건 많다. 여자아이가 어째서 칼을 가지고 다니는지, 그리고 나는 왜 만나려고 했는지 등등. 하지만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할 말이 있어야지. '이런 망신이.' 오늘 왜 이러냐. 벌써 2번째다. 항공우주부 부원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눈에 선하다. 아마 여동생은 오늘밤에 날 죽이려고 하겠지. 오라버니라고 하나 있는 게 이런 추태만 연속으로 선보이고 있으니. 채찍이 날아올지 식칼이 날아올지 프라이팬이 날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었다. 묘자리부터 알아봐야 하나. "힘내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격려를 듣다니. 그렇게 내가 불쌍하게 보였나. 불쌍한 게 사실이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내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이게 뭐냐. "이 세상에 여자는 많으니까요." 잠깐. 그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인데? 그리고 곧장, 그녀의 입에서는 내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마치 한밤중에 공장에서 폐수를 강에 무단으로 방류하듯이. "진희 한 사람만 여자인 건 아니에요."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이 세상에 여자는 많을지 모른다. 내가 아는 여자만 해도 한 명은 아니니까. 하지만 진희는 나에게 있어 오직 한 명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세차게 부정했는지도 모른다. 시내가 말하는 말을. 하지만. "오늘 보니, 진희는 오빠를 싫어하는 것 같던데요?" 쿵. 내 가슴에 꽂히는 한 방. 그 일격이 나에게 던진 충격은 컸다. 안 그래도 진희가 '부잣집 아가씨답지 않게' 배수관을 타고 도망간 일로 상처받은 나에게, 그 말은 확인사살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내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남에게서 그 추측을 확인시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나는 앉은 채로 비틀거렸다. 비틀비틀. 비틀비틀. 내 몸이 서서히 옆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오빠. 조심하세요." 그녀가 날 잡는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나를. 하지만 내 마음까지 잡지는 못했다. 시내의 출현으로 여태까지 억누르고 있던 현실이, 새삼스럽게 나에게 다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시내의 품에 뛰어들어, 울어버린 것이다. "으윽." 입술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붉은 빛의. 한없이 울기만 하는 나를 감싸안는 시내. "울어요. 오빠. 울어서 오늘 일은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 말이 자극이었을까. 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나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시내의 품속에서, 그냥 무작정 울기만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본 여자아이의 품안에서 말이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지만, 진희의 마지막 모습이 나를 그렇게 이끌고 있었다. "문구야. 미안." 그 말과 함께, 두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었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창문을 열고 달아나야 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던가. 사귄다는 말을 듣는다는 게, 그녀에게 그렇게도 무서운 일이었던가. 잘못하면 5층에서 추락해서 죽거나,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진희가 그런 일을 해버렸다는 것이, 나를 더욱 더 허물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내는, 그런 나를 보면서 그저 웃어주기만 할 뿐이다.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아니, 잘 모르면서도 나를 동정해서, 자신의 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천사처럼. 나는 그제야 눈물을 닦을 수 있었다. "고, 고마워." 그 말이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인정을 베풀어주다니. 나에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런 착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니. 물론 진희에게 버림받은 것은 큰 충격이기는 했지만, 시내가 내민 손길이 나를 재앙으로부터 건져주었다. 물론 그녀는 내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지만, 나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만약 내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으면 손목을 칼로 그었을지도 모르겠다. 창백한 얼굴로 나무 뒤에 쓰러진 채, 식어 가는 몸으로 버둥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나는 몸서리를 쳤다. 내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이,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걸 생각하면. "고마워."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게, 지금의 내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을 뿐이다. 비록 얼굴은 진희나 여동생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저녁놀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충분히 예뻤다. 황홀할 정도로. 만약 그녀가 내 연인이었다면, 지금쯤 끌어안고 키스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곰곰 생각하기도 전에, 지금 내가 얼마나 무례한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시내의 어깨를 잡고, 아니 허리를 잡고. 잡고. 잡고. 잡으니까. 이걸 우리말로 뭐라고 하던가. 포옹? "으악 !" 시내가 당장 성폭행이라고 선생님들에게 일러바치더라도 할 말이 없을 짓을 저지르고 있던 것이다 ! 내가 ! 내가 ! 풍남이도 아니고 내가 ! 나는 그 순간, 내가 지금 얼마나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지를 깨달았다. 저 착한 아가씨에게, 난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무리 진희와의 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처음 본 아가씨의 품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고, 게다가 포옹까지? 여동생에게 파렴치한이라고 두들겨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완벽한 치한행위였다. 내가 지금 미쳤나 봐. 나는 당장에 시내를 끌어안은 팔을 풀고, 시내에게 엎드려 빌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미안 !" 난 힘으로 여자를 밀어 넘어뜨리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인간이 아니다. 풍남이나 지우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다. 여동생조차 그 점은 확실하다고 믿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랑스런 신사의 자부심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그 점이 나를 더욱 수치스럽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지만, 이게 뭔가. 그러나 시내는. "괜찮아요. 힘들었을 테니까요." 흑. 이런 착한 여자가 세상에 있다니.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뭐랄까. 키스라는 말을 떠올리니까, 정말 무례하고 추잡한 생각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어떻게든 그 생각을 지우려고 했지만, 안 된다. 나도 남자라는 건가. '안되겠어.' 이럴 때는 내가 여기서 떠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우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벤치에서 떼어냈다. 얼굴을 시내에게 돌리고, 입술을 연다. 이렇게 하면 키스하기 좋겠지? 시내가 말없이 웃는다. 그녀의 입술이 나에게, 내 입술이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아냐 !" 내가 정말 미친 게 분명하다. 왜 자꾸 이런 무례한 짓을 하려고 하는 걸까. 내 생각이 행동으로 실행되기 전에, 이 자리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자꾸만 작아졌다. 그래. 어차피 진희도 날 배신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그녀에게 집착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차라리 이 여자와 한 번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겠느냐. 그녀의 입술이 붉게 보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내 입술을 대어보고 싶은 앵두같은 입술. 갑자기 저속한 생각이 든다. 이대로 저 입술을 따먹으면. '맛있을 거야.' 내 손이 저절로 그녀의 어깨를 잡는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성은 외치지만, 진희에게 거부당한 쓰라린 기억은 나를 몰아붙였다. 그래. 이 아가씨하고 새로운 청춘을 만들어 가는 거야. 내가 그녀에게 충실하고, 그녀가 나에게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마지막 선을 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입술과 입술의 만남일 뿐인데. 그런 몹쓸 생각이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아갔다. 내 손이 시내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올린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만나려고 할 때. "오빠아아아 !" 그 외침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아. 신발이구나. 아니, 신발이 아니잖아 ! 하지만 내 눈에는 여동생의 신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위치라면 당연히 여동생의 치마 안쪽이 보여야 마땅하겠지만, 이 세계의 물리법칙에는 이런 항목이 있다. [여동생 치마 속은 관람 금지] 그 법칙에 따라, 여동생이 오늘 무슨 속옷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벗겨본 적이 없었던 내가, 여자 속옷을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뭐가 보여야 판단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어쨌든 여동생의 발은 내 머리통을 정통으로 강타했고, 그 후의 당연한 순서는. "으아아악 !" 비명과 함께, 나는 석양을 향해 날아갔다. 아. 벌써 하루가 갔는가. 정말 세월은 화살같이 빠르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긴 하루동안, 시내와 키스 한 번 할 수 없었던 말인가. 아. 당신은 어째서 이제야 나에게 왔나요. 시내에게 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기력이 없었다. 이유가 뭐냐고? 난 바빴거든. 하필이면 공중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느라 말이다. 요란한 충격이 내 등을 거칠게 덮쳤다. 마치 트럭이 나를 들이받은 것처럼. 쾅. 우당탕. 나는 그대로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시내 앞에서 말이다. 이게 무슨 꼴사나운 모습이냐. 시내 앞에서 이런 주책이라니.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땅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동생이 착지한 것이다. 쿵. 그 충격은 거의 진도 8에 육박했다. 이 정도의 충격을 지구에 주다니, 이 녀석은 분명 엄청난 체중의 거인이 분명했다. 그동안 여동생이 가벼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음. 여동생의 새로운 면인가. 대체 얼마나 무겁기에, 지축이 다 울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다른 사람과 상대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더라도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상대는 여동생이었다. 그녀에게 과연 숨긴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오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 여동생에게서, 벼락이 하나 날아와서 나를 강타했다. 이봐. 여동생. 귀청 떨어지겠다. 물론 여동생에게 있어 오라버니의 고막은 고려대상이 아니니까 내 항의는 무의미했다. 그녀는 보기 흉하게 나동그라진 내 꼴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지금 시내한테 뭐 하려고 했어?" "에?" 무슨 말이냐?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당연히 너도 보았듯이, 사랑스런 시내의 입술을 따먹으려고 했지. 생각해 봐라. 이 정도 여자아이라면, 상당히 맛있지 않겠냐. 게다가 네가 화내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어차피 나는 진희에게 차였고, 따라서 다른 여자와 사귈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시내의 옷을 벗기고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 문제는 없다. 따라서 내가 여동생에게 맞을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뭐? 키스라는 건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는 너무 빠른 거라고? 이봐.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고작 키스라고.' 사랑하는 상대와 키스하는 게 뭐가 나쁜 일이냐. 나로서는 여동생이 화를 버럭버럭 내는 것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차이는 꼴을 다 봤으면서, 왜 저렇게 화를 내고 난리야.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으니. "오빠 바보 !" 퍽. 내가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여동생은 발로 내 턱을 걷어찬 것이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아니 나뒹굴려고 했지만, 여동생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걸 보자마자 그녀는. 퍽. 다시금 나를 걷어찬 것이다. 물론 그녀의 무식한 다리 힘을 감안하면 그리 센 타격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뭐? 하루 이틀 맞아본 것도 아니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고? 이봐. 내가 만약 두 대 맞았을 뿐이라면 이런 소리를 안 하지. 그녀는 내 몸뚱이가 땅에 부딪치기도 전에. 퍽. 다시 때린 것이다 ! 그것도 때린 데를 또 ! 당연히 나는 다시 떠올랐고, 물리법칙에 따라 다시금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게 전에. 퍽. "으아악 !" 이 인간아. 이건 너무 빠르잖아 !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유가 뭐냐고? 저 녀석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인간인 이상, 여동생의 발차기에 맞은 내 몸은 하늘로 뜨기는 해도 금방 가라앉게 되어 있다. 일단 나는 여동생의 치마가 아니므로, 물리법칙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사실 그 '금방'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아마 1초나 2초쯤 될까? 그런데 문제는, 내 몸이 땅바닥에 닿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동안, 여동생의 발이 잇달아 날아온 것이다. 그래서.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내가 공중에 떠 있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무수히 맞았다. 마치 폭우처럼 쏟아지는 발차기에,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떡이 된 것이다. 사실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에 내가 저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나는 맞을 수밖에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하지 않느냐. 최소한. '때리려면 땅에서 때려라.' 하지만 그런 소박한 바램은, 여동생을 상대로는 사치에 불과했다. 아니, 그녀가 들어주기는 했다. 나는 신나게 맞고는 땅에 떨어졌고, 그러자마자 여동생의 발이 내 엉덩이를 걷어찬 것이다 ! 우아악 !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지만, 여동생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독사에게는 그런 건 내 엄살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 눈길은, 더욱 더 매서워질 뿐이다. 모처럼 좋은 여자를 만났는데, 이대로라면 그 여자는 겁을 먹고 달아날 게 뻔했다. 누가 저런 폭력배 시누이를 두고 싶겠냔 말이다. 하지만 여동생은. "멍청한 오라버니 같으니." 그리고 여동생은 시내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나에게 손을 뻗었다 ! 그녀의 손이 나에게 다가오자, 나는 절망적인 공포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절대로 시내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같은 학교의 여학생인데 한 번 만나지도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 예감은 너무나 강렬했고, 여동생의 손은 너무 소름끼쳤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ㅍ----------ㅓ----------ㄱ! 괴, 굉장히 세게 때렸다 !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랫배를 잡고 굴렀다. 고통을 이길 수 없어, 손톱으로 땅을 긁어댄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여동생은, 사납게 내 뒷덜미를 잡더니 쏘아붙인다. "오빠, 가자 !" 그리고 나는, 사냥꾼에게 잡힌 토끼처럼 저항도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시내가 뭐라고 하려는 듯하지만, 여동생은 그런 시내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마치 그런 여자는 본 적도 없다는 태도다. 너무하잖아. 시내도 같은 항공우주부인데. 저렇게 착한 애하고 사이가 안 좋다니, 아니지. 이건 당연한가? 어차피 여동생 같은 대악당은 천사 같은 시내와 사이가 좋을 리가..... "!" 그 생각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내 멱살을 잡은 채 갑작스럽게 손목을 돌려버린 것이다 ! 옷소매가 조여지면서 목이 막힌다. 발버둥을 치지만, 그녀의 손은 전혀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섣부른 저항은 엄청난 대가로 돌아왔으니. 하필이면. "으악 ! 으아악 !" 그녀는 하필, 자갈이 깔린 길로 나를 끌고 갔던 것이다 ! 등에 느껴지는 모래. 자갈. 그런 것들의 느낌이 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등가죽이 벗겨질지도 모른다. 말이 아니라, 진짜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 "미인아. 그만 둬." 놀란 얼굴로 여동생을 제지하는 시내. 흑. 저렇게 착할 수가. 그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까지 벌벌 떠는 악의 화신을 막아서다니. 그러나 여동생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그녀는 아예 시내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나를 끌고 갔다. 더 빨리 ! 마치 시내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이 ! 게다가 그녀가 시내에게 던진 말은. "이건 남매간의 일이야. 끼어 들지 마." 시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여동생은 인정사정 없이 나를 끌고 달려갔다. 애고. 애고. 애고. 등에 자갈이나 모래가 긁히는 느낌이 든다. 내 피부가 벗겨지나 보다. 그러나 여동생은 강제견인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멈출 생각도 없다. 씩씩거리는 여동생의 숨소리가 나에게 들릴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데 왜 이 인간은 오라버니가 모처럼 키스하겠다는데,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거야. 안 돼. 시내의 입술이 바로 저기인데. 나는 안타깝게 시내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으나. "엉뚱한 짓 하지말고 따라와." 시내의 모습이 점차 멀어져 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내가 우리를 바라보는 차디찬 시선이었다. 하긴 선의를 악으로 돌려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만간 또 한 차례의 폭풍이 불 것 같다. 이번에는 여동생에게 불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악의 축' 여동생이 이번에도 과연 무사할 것인가. 솔직히 별로 응원해주고 싶지 않은......... "!" 모, 목 조르지 마. "야 ! 너 너무한 거 아냐?" 학교 밖으로 끌려나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에. 무너지는 나를 격려하고 보살펴준 사람에게 그게 뭔가. 시내가 화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미안해서 말이다. 하지만 여동생에게는 그런 게 안 보이나 보다. "뭐가?" 태연하게 시치미를 뚝 떼는 여동생. 나는 시내의 이름을 어떻게든 말하려고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다. 여동생의 눈빛은, 말 그대로 날 잡아먹으려는 야수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거지? 혹시 오늘이 그 날인가? 퍽. "이상한 생각하지 마." 괴물 같은 녀석.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주먹이 날아오다니. 하지만 내 걱정은 곧바로 시내에게로 옮겨졌다. 그 애, 상당히 실망한 것 같았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앞으로 시내를 어떻게 보나. 하지만 내가 생각을 더 이어나가기도 전에. 퍽. "바람둥이." 도저히 시내에 대해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여동생의 무자비한 구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내에 대한 생각을 포기할쏘냐 ! 다시금 시내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려는 나에게, 여동생이 갑자기 주먹을 들이댄다. 아니 ! 손으로 주먹에 김을 불어넣는 이유는 뭐냐 ! 여동생은 나를 향해. "꿀밤 한 방 !" 쾅. 내 주위에 별들이 떠오르면서, 나는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고고." 지금 내가 누운 곳이 어디냐. 땅바닥이냐 벤치냐. 그게 아니면 시체안치소냐. 몸이 온통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니, 일단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꼴이 이게 뭐냐. 갑자기 진희에게 차였다는 과거와, 땅바닥에 쓰러진 현재가 맞물려서, 미래의 눈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금새 내 현재가 되었고. "흑." 분했다. 진희에게 차인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렇게 여동생에게 맞고 살아야 하다니. 아직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송곳으로 찔린 것처럼 괴롭다. 뇌진탕일까. 뇌출혈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예 뇌수가 땅바닥을 적시고 있는 걸까. 하지만 심장이 얼음, 아니 드라이아이스, 아니 액체질소, 아니 액체 헬륨으로 되어 있는 내 여동생은, 그런 것에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마 저 녀석의 체온은 영하 273도쯤 될 거야. '그렇지 않고는.' 오라버니를 이렇게 땅바닥에 팽개쳐두는 짓거리를 할 리가 없어. 하지만 여동생이 한 말은 의외였다. 생각보다는 상당히 따스한 말투로 - 여동생이 ! - 나에게 안부를 물은 것이다. "이제 정신이 들어? 오빠?" 엥?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지금 땅바닥에 뻗은 게 누구 때문인데. 나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머리에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아무리 지금이 4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밤공기는 찬 편이라고. 땅바닥에 뻗었으면 당연히 냉기가 내 등을 타고 올라와야 하는데, 이게 뭐야? 너무 말랑말랑한.... "지상 최강의 여동생의 무릎베개야. 좀 얌전히 있어 줘." 뭐, 뭐, 뭐?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일에 맞닥트린 내 머리는, 엄청난 혼돈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 돼 ! 세상에 ! 여동생이 ! 지상 최악의 폭력배인 내 여동생이 ! 오빠에게 ! 무릎베개를 해 줬다고? 이건 사기다 !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 부딪친 내 머리는 처리기능을 상실했고, 나는 여동생이 하는 대로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이 녀석이 무릎베개를 해주는 거야?' 설마, 그동안 오빠를 너무 많이 때렸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지구가 반쪽이 나는 게 더 빠를 거야. 어째서 이 녀석이 나한테 이런 특별대우를 해주는 거지? 이 녀석,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그 외에는 이런 일이 발생할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여동생이 날 보는 시선은, 전혀 표독스럽지 않았다. 아냐. 아냐. 이건 정상이 아니야. 내가 진희한테 차이고 나서, 정신적인 충격으로 헛것을 보는 게 분명해. 무엇보다도 내 여동생이 저렇게 순한 얼굴을 할 수가 없어. 저 녀석은 상황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나를 때려야 직성이 풀린다고. 내가 납치 당하든 불량배에 포위 당하든 부패한 국회의원에게 폭행 당하든 관계가 없어. 그건 여태까지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일이었다고. 그런데 오늘은 왜 저래? "그럼 치울까?" "아니." 일단 일어날 기운부터 되찾고 나서, 치우든지 말든지 해라. 안 그래도 너한테 맞아서 골이 흔들리는 판인데. 그런데 내가 왜 맞아야 했던 거지? 원래대로라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포즈를 취해야 했겠지만, 머리가 흔들려서 그것은 무리였다. 나는 그대로 여동생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는 따뜻해서 이상했지만. '내가 왜 맞은 거지?' 곰곰 생각해보지만, 답이 안 나온다. 분명히 이 녀석이 날 때린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예를 들어, 오늘이 여동생의 '그 날'이라든가, 시험문제를 하나 잘못 봐서 틀렸다던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든가. 하지만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부분은 진희가 날 걷어찬 후, 절망해서 뛰어나간 부분까지인데. 그 뒤가 마치 안개 속에 가려진 듯 희미하기만 하다. 그때 만난 여자가 누구였지? "아악 ! 모르겠다 !" 결국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어지간하면 생각해내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 뒤가 공백이다. 이래서는 여동생이 나를 왜 때렸는지 따지는 것도 곤란하다. 그냥 얌전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법이. 혹시 여동생이 너무 나를 많이 때리는 바람에,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건가? 나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아주는 여동생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지 마." 때리는 게 은혜냐.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자초지종을 모르니 반박할 수가 없다. 내가 못살아. 실컷 맞고도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평소라면 여동생의 횡포에 분개하기라도 하겠는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도대체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물론 물어보려고 해도 여동생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 내 이마는 이제 다 닦았다는 거냐.' 나는 여동생의 무릎 위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쉬었다가, 여동생한테 자초지종을 듣는 수밖에. 하지만 여동생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 아무리 침묵이 금이요 웅변이 은이라지만, 이건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물론 문희처럼 지구가 깨질 정도의 수다를 자랑할 필요는 없지만, 이건 조용함이 지나치다. 여기가 무슨 우주공간이냐. 소리 하나 없게. 말없는 여동생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리자, 밤을 밝히는 가로등의 불빛이 내 눈에 들어왔다. '..........' 괴로웠다. 아무도 없는 이 밤에, 나 혼자만이 저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다니. 물론 여동생이 같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시집가면 그쪽 귀신인 걸. 저 멀리에 떠 있는 달이, 마치 내 현실을 반영해주는 것 같았다. 홀로 외로이 떠서, 별들조차 외면하는 밤하늘을 천천히 걸어가는 달. 온통 새까맣게 물든 하늘을 천천히 흘러가는 달이, 마치 나 같아서 더욱 가슴이 욱죄었다. "어?" 갑자기 여동생이 입술을 움직인다. 아주 작지만, 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말은. "달은 혼자가 아냐. 언제나 지구를 바라보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하아."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비록 여동생이 여동생답지 않게 다정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내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그녀는 진희가 아니었고, 따라서 진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아니, 여동생이기 때문에 진희대신 나를 지탱해줄 수 없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아무리 여동생이 대단하다고 해도, 나와 결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게다가. '평소하고 똑같으면 차라리 속이나 편하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평소의 삭막하고 유혈이 낭자한 여동생이 아니라, 다정하고 착한 여동생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천지가 뒤집혀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고.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혹시 이 녀석, 내가 진희에게 차인 걸 동정해서 이러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더 비참하다. 여동생이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여동생이 ! 바로 그 여동생이 나를 동정할 정도로 내가 불쌍하게 보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세상이 뒤집힌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거나. 일반적인 세상의 상식으로는, 여동생은 오라버니를 마구 구박하고, 괴롭히고, 지갑을 털어 가고, 부려먹는 게 정상이 아닌가. 그리고 진희는 그런 여동생을 말리느라 죽어라 애쓰는 게 여태까지의 정석이었고. 그런데 이렇게 역할이 뒤바뀌어도 되는 거냐. 진희가 내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여동생이 그 상처를 감싸고 있다니. 아무리 이 세상이 상식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지만. '내가 혹시 미친 거 아냐?' 그렇다면 이 모든 사태가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생각이 갈팡질팡하니까 걸음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왔다 갔다 하는 내 꼴을 경찰이 보면, 당장 날 체포해서 경찰서로 데리고 갈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난데없이 여동생이 내 팔을 잡는다. 그리고 옆에서 부축해준다. 역시 뭔가 이상해. 이 녀석이 이렇게 다정하다니.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곧 사라져 버렸으니. "오빠. 내일은 확실히 고백하는 거야." 쿵.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조금 전까지 내가 그 꼴이 되어 누워있어야 했던 것이 무엇 때문인데? 어째서 내가 (하필이면) 여동생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 넣고, 끙끙거리며 앓아야 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가 진희에게 걷어차이는 현장에 있었던, 바로 그 여동생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에, 나는 혼절하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없던 힘이 절로 솟구칠 정도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여동생이 말한 고백의 대상은, 딱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여동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긴 여동생이 그렇게 했다면, 나는 아마 땅바닥에 쓰러져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단단한 보도블록에 머리를 부딪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 이게 아니고. "이미 차였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 !" 그랬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차인 사람이, 꼴사납게 다시 도전을 하라고? 그것도 그렇게 멋지게 차였는데? 하지만 여동생에게 패배는 없었다. 작전상 후퇴는 있을지 몰라도, 여동생이 일단 말한 이상, 그것은 반드시 실현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것은 문희와는 달리, 이런 문제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적다는 여동생의 특성을 감안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오빠. 진희가 확실히 오빠한테 싫다고 말했어?" 이봐. 그걸 굳이 말로 해야 할 필요가 있냐? 행동으로 이미 다 보여준 걸 가지고. 그리고 네 말이 얼마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면. 휘이이잉. 봐. 찬바람까지 불잖아. 물론 이런 상황에서 종종 벌어지는, '여자아이의 치마가 바람에 흩날리면서 속옷이 노출되는' 낭만적인 장면은 절대로 지금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여동생의 그 특수합금 치마가 젖혀질 리가 있냐. 뭐 그런 거 봐도 좋을 건 없지만. 진희 치마도 아닌데 뭘 하러. 게다가 지금 그런 시시한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있냐. "말로 할 필요도 없었잖아. 그 행동이면 당연히....." 거절이지. 뭘 더 붙여야 하겠냐. 걷어차인 오라버니의 상처를, 굳이 칼로 헤집을 필요가 있냐. 하지만 여동생이 그런 걸 따질 인간이면,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그녀는 오히려. "오빠. 진희가 왜 달아났는지도 안 물어보고, 이렇게 끝낼 거야?" 으. 제발 말하지 말아 줘. 그 장면이 다시금 내 머리에서 상영되고 있단 말이야 ! 제발 오빠 살려주는 셈치고, 입 좀 다물어 주라. 하지만 여동생이 그럴 가능성은, 없지. 그녀라면. "한 번만 더 용기를 내 봐. 진희가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납득할만한 해명을 듣고 난 후에 헤어져도 늦지는 않아." 고집 센 녀석. 결국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승낙하지 않으면,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명분도 있다. 일단 명목상이지만. '사랑스런 여동생이 조르니까.' 말도 안 되는 명분이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라도 납득해야지. 주위 사람들에게는 나와 여동생이 매우 친한 사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면 모두들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하지만 진희가 이번에도 달아나면?" 문제는 그것이다. 도대체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할 셈이지요? 우리 천하무적 여동생? 그러자 여동생의 눈빛이 갑자기 사악해졌다. 저, 저것은. 평소의 여동생의 눈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밀 셈인가. 그녀는 나를 보며 웃는다. 악마의 미소라니까. 저건. "걱정 마. 이번엔 절대로 달아나지 못하게 할 테니까." "어떻게?" 그러나 여동생은 더 이상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붙잡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나는 여동생에게 반강제로 끌려가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 어쩔 셈이지?' 밀실에 가둬도 안 된다면, 이번에는 설마. 정말로 체육관 창고에라도 우릴 가둘 셈인가. 그게 아니면 대체 뭘 하려고? 갑자기 살벌한 기운이 내 등뼈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인생 최악의 날은 오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과연 내일은 제대로 된 하루가 될 수 있을까? 달만이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걱정 마. 이번엔 절대로 달아나지 못하게 할 테니까." 나는 그 말만을 곱씹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일단 여동생의 그 말만 믿고 잠에 빠졌고, 이렇게 아침 일찍 등교하고 있기야 했지만, 나도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솔직히 말도 안 돼.' 아무리 여동생이라지만, 이번에는 너무 어려운 장담을 한 게 아닐까. 솔직히 여동생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진희를 막는다? 검은 양복들의 저지를 뿌리치고 그녀를 막는다? 이해가 안 된다.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 결국 나는 인내심을 일단 내버리고, 옆에서 휘파람을 불며 걸어가는 여동생에게 묻는다. 그러나. "좀 천천히 걸어라." 잊을 뻔했다. 여동생이 걷는다고 나도 걸었다가는, 절대로 여동생과 같이 걷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열심히 뛰기 시작했지만, 여동생의 걸음은 너무 빨랐다. 이 녀석, 축지법이라도 쓰는 거 아냐. 헥헥거리는 내 숨소리를 들었는지, 여동생이 발걸음을 멈추었고, 그래서 나는 그녀를 따라갈 수 있었다. 헥헥헥. "어떻게 할 생각인데?"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방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대한 게 사실이다. 어쨌든 내 여동생은 지상 최강,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여동생이 아닌가. 그러나 그 여동생의 발언이란 것은. "그냥." 그, 그냥? 그런 걸 답변이라고 준비한 거냐? 주저앉고 싶다. 이런 녀석을 믿고 마지막으로 용기를 끌어 모았었다니. 당장이라도 한강 물에 뛰어 들고 싶었지만, 우리 학교는 한강변에 있는 게 아니라서, 무리였다. 그럼 지나가는 차에라도 뛰어들까. 진지하게 도로를 바라보는 나를 보며, 여동생은 미소를 지었다. 이 악마 같은, 아니 악마 ! '오빠가 괴로워하는 게 재미있냐.'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왜. 여동생에게 감히 항의하는 건 엄두가 안 나서 그러냐고? 그것보다는 이 녀석이 대답할 말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게 뭐냐고? 이 녀석이라면 분명히. "응. 재미있어." 이렇게 말할 테니까. 마음의 상처만 더해질 답변을 지금 들어봐야 나만 슬퍼진다. 게다가 나는 여동생처럼,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남을 몰래 때리는 기술이 없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가슴이 아프더라도 - 그 가슴이 아니다 ! - 결국 한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흑.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화병으로 죽지. 이렇게 내가 속이 끓든 말든, 여동생은 자기 할 말만 한다. 웃으면서. "오빠. 준비해." 이 망할 녀석. 남이야 괴로워하든 말든, 오직 자기 할 말만 하는 악당 같으니. 그런데 너, 지금 뭘 준비하라는 거냐? 원래 여동생이란 인간이 설명이 좀 부족한 족속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경우에는 너무 없다. 멍하니 있다가는 여동생이 만든 함정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므로,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뭘?" 하지만 내가 질문을 던진 시점이 너무 늦었다. 여동생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왼쪽을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그 방향을 쳐다본 것은, 역시 여동생의 마력에 이끌려서일까. 하지만 왜 내가 여동생의 행동을 따라해야 하는 거냐. 물론 질문을 던졌으니 답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상 그런 것이지만, 차라리 안 봤어야 했다. 그곳에는 하필. "!"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물체가 서 있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것은. 하필이면. "너무 빨라 !" 그것은 진희가 탄 리무진이었다. '큰일났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거냐.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여동생은 그딴 걸 상관하지 않았다. 역시 자기가 고백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거야. 어떻게든 시간을 끌 방법을 모색하려고 했지만. "자. 오빠. 가서 고백하는 거야."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동생이,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할 리가 없다. 그녀는 거칠게 나를 밀쳐버렸고, 나는 여동생의 괴력에 밀려 리무진 쪽으로 달려나갔다. 아니, 그건 넘어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에서 파생된 본능적인 행동일 뿐이다. 어흐흑. 등뼈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에, 나는 항의하려고 했지만. '그게 통할 리가 없잖아.' 그러기에도 너무 늦었고, 이 거리에서 다시금 여동생에게 돌아가서 항의한다? 그게 참 잘 되기도 하겠다. 게다가 이미 리무진의 문은 열리고 있었다. 문 아래에 보이는 발을 보니, 분명히 진희가 맞았다. 흑. 지금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혹시나 해서 여동생 쪽을 바라봤지만, 이 녀석은 못 본 척 하고 있다. 야. 도와준다고 했잖아 ! 하지만 그 말은 순전히 사기였던 모양이다. 이런 나쁜 녀석. 그리고. "!" 리무진에서 내리던 진희가 내 얼굴을 보았다. 상당히 당황한, 그리고 상기된 내 얼굴과 그녀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재빠르게. 후다닥. 리무진 안으로 다시금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솔직히 섭섭하기는 했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나를 보자마자 달아나기에 바쁜 진희의 모습, 이것이 네 진심인 것이냐. 1년 이상을 고백하려고 애쓴 상대의 태도가 이 모양이니, 아무리 나라도 기운이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렇게 실망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오지 마.' 당신들은 안 와도 돼. 하지만 검은 양복들 - 진희의 경호원들 - 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잘 만났다는 듯이, 주먹까지 불끈 쥐고는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래. 기어이 날 패겠다는 거냐. 그래. 그럼 패라. 어차피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이고, 여동생에게까지 우롱 당한 남자인데, 몇 대 맞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냐. 여태까지의 인생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이게 아냐.' 왜, 왜 여동생의 얼굴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거냐 ! 이런 건 안 나와도 돼 ! 기억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얼굴은 물러서지 않는다. 끔찍하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여동생의 얼굴을 봐야 한다니. 하지만 그것은. "길 좀 비켜주시겠어요?" 진짜 얼굴이었다. 이런 큰 바위 얼굴 같으니. 너무 얼굴이 커 ! 물론 이건 여동생과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거리 문제로 인해 여동생의 머리통이 크게 보이는 것이란 건 안다. 그러나. '저런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여동생의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아 ! 하지만 그런 건 내 사정이지, 여동생의 사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 같은 건 완전히 무시한 채, 살기 등등하게 다가서는 경호원들을 향해. "진희한테 할 말이 있어요. 잠깐만 시간을 내주세요." '이봐.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잖아.' 기본적으로 그 경호원들이, 내가 진희와 만나게 할 리가 없잖아. 그런 내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으니, 그들은 일제히. "안 돼. 의원님께서 절대 저 녀석을 아가씨에게 접근시키지 말라고 했다." 뭐, 그 인간이라면 그런 소리를 할 만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라면 그런 명령이 먹히겠지만, 여동생에게만은 그게 안 된다. 언젠가부터 느끼는 거지만, 저 녀석은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보통 여자아이가 불량배 100여명을 혼자 해치운다? 아무리 불법개조총기를 보유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 사격솜씨와 담력은 보통이라는 낱말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게다가 그 도망 다니는 솜씨하며, 프라이팬 휘두르는 솜씨까지 ! 그게 평범한 인간이냐. 물론 오라버니를 악착같이 괴롭히는 걸 보면, 일반적인 여동생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아니지만. '오빠에게 푹 빠진 여동생이란 건, 만화에나 나올 이야기라니까.' 그런 면에서 저 녀석은 정상적인 여동생인 셈이다. 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어쨌든 저 녀석이 국회의원의 말을 순순히 따를 리는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 경우에 문제는, 고백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여동생이 아니라 나라는 점이다. 여동생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 담을 기어오르든 벽을 부수고 들어가든,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접근해서 고백을 받아낼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라고. 내가 무슨 여동생이냐. 게다가 여기는 완전히 공개된 장소나 다름없다. 도대체 저들을 어떻게 쓸어낼 셈인가. '구타라도 할거냐.' 그게 아니면, 역시 총이라도 꺼낼 거냐. 하지만 여기서 그런 폭력적인 수단에 호소한다는 것은 예시당초 불가능하다. 게다가 등교시간을 감안하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도 무척 짧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등뒤에서의 기습이 특기인 여동생이라도 주어진 조건은 너무 불리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그럼 여기서 말하면 되겠네요. 진희하고 거리도 어느 정도는 되니, 의원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요?" 엥? 주먹질 할 생각이 없던 거였냐? 하긴 시간의 한계를 감안하면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 경우 일단 진희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명령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진희에게 접근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일단 진희는 리무진 안에 있고, 나는 리무진 밖에 있으니까. 하지만 말야. 그렇게 되면 나는 네거리에서 고백을 해야 한다. 뭐 어차피 할 고백이기는 하지만, 여기선 너무 부끄럽잖아. 하지만 그런 고민은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안 돼. 의원님은 저 녀석이 아가씨에게 말도 걸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약간 내 머리를 스치기는 했지만, 곧 그 말의 의미가 내 살을 베어냈다. 진희 아버지의 말인즉슨, 나는 진희와 대화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망할 자식. 갑자기 진희에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인간을 장인어른이라고 부르라고 하면, 차라리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말겠다. 순간적으로 진희를 포기하자는 선택지도 떠올랐지만, 그런 내 마음은 누군가의 만행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역시 여동생의 호언장담을 믿은 내가 바보였어 !!! 그 녀석은. "그럼 제가 말할게요. 진희야 ! 난 네가 좋아 ! 사랑해 !" 쾅. 너, 너, 너, 너, 너 ! 네거리에서, 그것도 대낮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 너무나 놀란 나머지,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 검은 양복들도 모조리 굳어버렸다. 심지어 리무진 안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있던 진희마저도. 쿠당탕. 미끄러졌군. 완벽하게 기습을 당한 우리 모두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나다니던 사람들까지 전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입을 딱 벌린 채로. 하지만 여동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라고 오라버니가 말했어요." 야 !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 어떻게든 입을 열려고 해도, 굳어버려서 안 된다. 그나마 호흡기까지 굳어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내가 받은 충격은 지대했다. 물론 나만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유가 뭐냐고? 내가 혼란의 도가니탕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동안. "하긴, 저러면 말이 되지." "오빠의 입을 막았지만, 여동생의 입은 못 막은 건가." "역시 국회의원답다. 말도 못하게 하는 거냐." "원래 국회의원은 세금 도둑이잖아. 저런 횡포는 기본 아냐?" "하지만 저 오라버니도 좀 너무한 걸. 그냥 자기가 말하면 그만이지, 여동생한테 시키냐?" "어지간히 간이 작나 봐." "멍청한 인간 같으니." 이럴 줄 알았어. 내가 걱정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안 그래도 진희와 나의 상황은 학교 전체에 좋은 이야기 거리로 자리잡았는데, 이렇게까지 일이 악화되면 나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학교에 다니겠는가. 아니, 나만 걸리는 게 아니지. 진희를 보라고. 그녀는 이제 완전히 리무진 안에 숨어서,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안 봐도 내부상황이 훤히 보인다. 그녀는 아마 창피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 잠시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누군 누구이겠냐. 여동생이지. 그녀는 차분하게 "그럼, 오늘이 지나기 전에 대답해 줘. 진희야." 그리고 그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학교로 몸을 돌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끌고서, 그녀는 휘파람까지 불며 학교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뭔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고백은 이것이 처음인데, 이게 뭔가. 고백이란 모름지기. "진희야. 난 네가 좋아." 이렇게 내가 말해야 하는 건데, 왜 그걸 네가 해버리는 거냐 ! 내 고백이, 일생일대의 내 고백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다니. 진희가 나를 보고 도망갈 때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오빠. 빨리 안 가면 지각이야." 이, 이, 이.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모두 빼앗겼기에. "............." 이 상황에서 뭐라도 상관없으니, 그럴듯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는가. 하지만 그런 것은 단지 의지일 뿐, 막상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나의 실태였다. 한심하게도, 버둥거리는 것 이외에는 한 게 없는 것이다. 결국 여동생이라는 존재에게 거역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남들 앞에서 진희에게 애정을 표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나는..... 바보야.' 이런 비참한 꼴을 진희에게 보이다니. 다른 모든 이에게 이런 벌레같은 모습을 보인 것보다도, 진희에게 이런 꼴을 보인 것이 더욱 비참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이런 내 모습조차도 진희에게 보여줄 수가 없게 되어 가고 있었다. 진희는 더 이상 리무진에서 고개를 내밀지 않았고, 리무진의 육중한 문은 소리 없이 닫혀버렸기 때문이다. 진희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고용인들은 리무진에, 그리고 자신들이 타고 온 차량에 몸을 실었고, 거대한 리무진은 서서히 자신의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 앞으로 벌어질 일은 뻔한 것이다. 이대로 진희가 경호원들과 함께 떠나버린다면, 나는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진희 아버지는 오늘의 일을 전해듣는 즉시 진희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적어도 내가 그녀와 다시는 물리적인 접촉을 할 수 없게끔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진희와는 사회계층이 다른 내가 그녀를 만날 장소는 학교밖에 없는데, 아직 사귀는 상태도 아닌 내가 이렇게 그녀와 헤어진다면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 진희를 잡아야 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 내가 그녀를 놓치면, 영원히 그녀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절박함이 나를 밀어낸 것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달려나갔다. 여동생이 내 팔을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여동생이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걸 막기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뜻밖에도 그녀의 손은 쉽게 풀려나갔다. 어째서일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건 상관없다. 그녀가 왜 나를 풀어주었는지, 그런 건 몰라도 된다. 지금만큼은. 지금만큼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진희야 !" 움직이기 시작하는 리무진에,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다가갔다. 리무진이 나에게 다가오지만,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도 없었다. 다리가 리무진을 향해 움직였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는 내 손이, 검은 리무진의 피부를 향한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손을 뻗을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잡힌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리무진의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만이 느껴졌을 뿐. '아. 내 청춘이여.' 이렇게 내 젊음은 사라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구나 여동생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여동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그 문장이 기억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앞으로 달려나간 무언가가, 그 그림자가 내 눈동자에 비춰진 순간, 나는 그 문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번개처럼 내 앞을 스쳐지나가면서, 리무진을 놓치고 멍하니 최후의 청춘을 길에 흩뿌리던 나를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 여동생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다. 여동생이 진희가 탄 리무진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막 출발했기 때문에, 나를 피하느라 방향을 틀었기 때문에 속도가 제대로 붙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리무진의 지붕위로 날아오르듯 몸을 던지는 여동생의 모습은 나를, 모두를 전율케 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 "차 세워요." 냉정하고 침착하게, 리무진의 지붕 위에 올라탄 그녀의 그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지붕 위에서 운전수석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운전수에게 들이대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는, 그 누구도 거부의 의지를 내보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 여동생은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그 누구도 말릴 겨를이 없었고, 리무진은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그녀를 떼어내고 달아나는 수도 있었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비인간적인 짓을 했다가는 결코 무사히 넘어갈 수 없는 대형 사건으로 발전할 것이므로. '도대체 너는 누구냐.' 저런 인간이 과연 내 여동생이란 말인가. 능숙하게 몸을 옆으로 굴리면서 리무진 앞으로 뛰어내리는 여동생을 보며, 나는 꼼짝도 못하고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착. 너, 아예 서커스를 해라. 서커스를. 심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해놓고 태연하게 웃고 있다. 내가 못살아. 나는 억지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나 자신을 억눌렀다. 그랬다가는 심장이 견디지 못할 거야. 이미 지금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판이다. 이건 절대로 진희와 다시 만나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 진짜야. 진짜라니까. 나는 그렇게 억지로 나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리무진을 향해 다가가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주위에서 구경만 하던 인간들이, 여동생의 묘기 대행진에 우레 같은 박수를 치는 걸 지켜보면서. 그녀는 리무진의 문에 손을 대고. "문 열어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열어 젖혔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진희는 다시 밖으로 걸어나오게 되었다. 그 뒤의 경호원들의 표정은, 한 마디로 깨진 밥그릇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내심으로는 그냥 여동생을 밀어젖히고 도망치고 싶었겠지. 그러나 그러기에는 주위 사람들의 눈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거의 모두, 국회의원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사람들이었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그런 그들이 진희 아버지의 편을 들 가능성은 없고, 여기서 여동생을 리무진으로 밀어버리기라도 하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폭행을 과연 방관할 것인가. 그냥 넘어가기에는 학교가 너무 가까웠고, 학생들도 너무 많았다. 아니,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이쪽을 모두 주목하는 판이다. 여기서 그들이 과연 폭력을 휘두를 것인가. 만약 사람들의 눈이 없었다면 온갖 악행을 다 했겠지만, 이곳이 인적드문 황야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에겐 불행이었다. '안 됐다.' 나에게는 잘 된 일이지만. 마왕의 전차에서 풀려 나온 공주님을 바라보는 용사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원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용사의 시선은 경멸이나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 녀석들이 안 됐다는 생각은 취소.' 차라리 깔아뭉개는 시선이면 좋겠지만, 그것은 하필이면, [오빠 좋아 너무 좋아]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악. 참아 줘. 아무리 주위를 의식한 선전용 미소라지만, 그건 너무하잖아. 마지막까지 나를 철저하게 짓밟고, 여동생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자. 오빠." 찰나의 순간이 흐른다. "진희야. 난 네가 좋아." "나, 지금은 대답할 수 없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이걸로 내 고백의 시간은 끝났다. "드디어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는 뜻인가. 하지만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런 극한상황에까지 몰린 후에야 고백을 할 수 있었다니. 널 돌보느라 미인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안 봐도 훤하다. 뭐, '지상최강의 바보커플'로서는 나름대로 분투한 셈인가. 어쨌든 학교 신문의 취재는 이쯤 하기로 하고." 뭐가 바보커플이냐 ! 하지만 문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반박할 근거가 있어야 뭐라고 하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반 아이들의 질투심 어린 시선이 상당부분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제 미인이와 문희는 무주공산이다 !" 이봐. 보통 그렇게 오빠 앞에서 여동생을 노린다고 선언하지는 않는다고. 게다가 말야. 그런 말은 진희가 내 고백을 받아들인 후에나 외치라고. 앞으로 진희 아버지가 진희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킬지, 그게 아니면 무슨 음모를 꾸며서 나를 날려버리려고 할지, 그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픈 판에, 여동생까지 챙기기는 무리란 말야. 나 좀 봐줘라. 게다가. "너도 앞으로 힘내도록 해. 솔직히 진희가 아깝지만, 뭐 사랑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할 수 없나? 친구 입장에서는 말리고 싶지만, 자기가 좋다는데 할 수 없지. 그저 친구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밖에." "내가 무슨 폭력남편이냐." 문희 녀석, 소꿉친구를 옹호해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독설만 퍼붓고 있냐. 하지만 불만을 내뱉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건 그렇지. 사실 진희 정도의 아가씨가 너 같은 녀석한테 어울릴 법이나 하냐.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원한다면, 나는 물러나 줄 수 있지." 야. 풍남이. 네가 언제 그렇게 대범한 인간이 된 거냐? 저 녀석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맞고 착해졌다는 가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그럼 뭐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이냐? 혹시 이걸로 나에게, 두고두고 유세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실 이것도 대기업 회장이 될 자로서는 필요한 능력인지도 모른다. 도의적인 부채를 지워놓음으로서,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열쇠를 확보하는 것. 그렇지만 이 녀석이 진희를 포기한다면, 집안의 압력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혹시? "그럼 넌 누구하고 사귈 생각이냐?" "음. 미인이라도 선택해 볼까나?" "선택하지 마." 농담도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냐. 물론 대기업의 회장이 될 풍남이라면, 여동생 정도의 거물을 고르는 것도 충분히 전략적으로 유리한 선택이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여동생 정도의 인간이 전풍그룹을 손에 넣는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짜로 전풍그룹이 세계 제일의 기업이 될 지도 모른다. 불가능이 없다는 여동생이니까. 그것은 전풍그룹 전체는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부디 그런 일이 실현되지 않기를 빈다. 네거리에서 리무진 위로 뛰어오르는 녀석이 상류사회의 꽉 막힌 틀에서 견딜 수 있겠냐. 그런 내 상념을 깨부수는 목소리. 달갑지 않아. "문구야. 축구부 가자." 꽉 막힌 틀이라는 것은, 여동생만 직면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선택에 따라 그런 틀에 갇히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이미 갇히지 않았는가. 친구를 가장한 악인인 지우라는 괴물의 틀에. 걷어차고 싶지만, 친구를 걷어차는 나쁜 인간으로 찍힐까 봐 그러지도 못한다. 아. 내 인생에는 혹이 왜 이리 많이 붙었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진희야. 그럼 내일 봐." "응." 이것이었다. 적어도 오늘의 고백은, 한 가지 면에서는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이다. 이제는 진희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록 대망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물론 아직 진희가 나에게 대답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희망은 생겼다. 부디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발걸음도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지나친 것 같은데? 누구지? 우리 교실에 온다면 1학년생인 것 같은데, 본 기억은 있으면서도 어디서 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나 몸매는 평범한 편인데, 대체 누구더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온다. 저 여자는....... "미인아. 항공우주부 선생님이 너 찾아." "아. 시내야. 무슨 일로?" "미인이 오빠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보고하래." 윽. 그 꼬마 선생님이 한다는 짓이란. 도대체 그런 걸 왜 '보고'까지 시키는 겁니까. 나는 꼬마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분을 원망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희한테 직접 묻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이렇게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면, 진희가 나를 먼저 포기해버리지 않을까. 솔직히 두렵기는 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오락거리냐.' 학교 신문도, 선생님들도, 모조리 내 일을 화젯거리로 삼다니. 미칠 지경이었지만 항의할 수도 없다. 워낙 큰 소동을 몇 차례나 일으킨 몸이니 말이다. 항의해봐야 재미거리만 늘어날 뿐이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축구부로 향했지만. "시내?" 역시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8화 월하미인(月下美人) (1) 크워어어. 꿈에 보기도 겁날 정도의 크기를 지닌, 거대한 용이 내 앞에 떠 있었다. 어림잡아 백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이제 나올 것은 용이 뿜어내는 죽음의 숨결. 나는 정신을 집중하였고, 용은 수 십 가닥의 불을 토해냈다. 일일이 구분하기에도 피곤할 정도로 많은 종류의 빛줄기가, 나를 향해 날아온다. 나는 마법을 발동시켜서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내가 서 있던 땅바닥은 순식간에 충격음과 함께 부서져 내렸다. 콰콰쾅. 허공으로 몸을 던지면서, 나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평소의 지팡이 마법이 아닌, 내 고유의 마법이다. 의지의 힘으로 이치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고등마법을 말이다. 이런 마법은 평상시라면 사용을 꺼릴 것이다. 아무래도 지팡이를 이용한 주문마법에 비해,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지팡이 마법은 도저히 이것에 미치지 못했고, 강력한 적을 상대한다면 당연히 이쪽을 선택해야 했다. 일단 처음으로 할 것은 방어. ((시공간의 흐름이여. 나의 의지에 의해 멈춰 서라. 내 앞으로 날아올 힘을 통과시키는 것을 금지할 것을 명령하니, 내가 명하는 방향으로 마법을 움직여라)) 내 예상대로, 용은 내가 허공으로 뜨자마자 다시금 입을 열어 죽음의 숨결을 토해냈다. 빗발치듯 날아드는 빛줄기가 나를 포위하려고 했지만, 내 마법이 조금 더 빨리 발동했다. 용의 마력은 모조리 굳어진 시공간에 막혀서 차단 당했고, 일부는 시공간 안으로 들어 왔지만 마법이 발동하자 마치 유리 안에 갇힌 모래조각처럼 멈춰서고 말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반적인 용의 숨결이 시공간을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로 위를 열차가 달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열차는 철로에서 벗어날 경우 움직일 수가 없으니 당연히 철로가 깔려있는 곳만을 달려야 하며, 따라서 이 철로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경우 열차(이 경우는 용이 뿜어낸 숨결) 역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마법을 멈추게 한 것은, 철로를 뜯어내서 열차가 강제로 멈추도록 유도한 탓이고. "아직 약했나?" 그 말과 함께, 나는 시공간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철로가 용에게로 뻗어가자, 그 철로 위에 있던 열차(용의 숨결)도 자연스럽게 용에게 날아갔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용은 미처 대항할 수가 없었다. 용이 뿜은 숨결 중 일부가, 그대로 용에게 명중했다. 쾅. 핏물이 뿜어지면서, 용은 허공에서 추락했다. 용이 사용하던 마법이 깨지면서,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거구를 지닌 용의 몸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마법을 제 때 사용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거구의 용이 지상에 충돌하자,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렸다. 사방으로 튀어 날아가는 지면의 바위와 모래들. 그리고 갈라지는 땅. 쿠앙. 요란한 진동이 지나가자, 나는 피투성이가 된 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방으로 날리는 흙먼지가 용의 몸을 가리기는 했지만, 그 모습은 중상을 입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멀었어." 원래의 예상대로라면, 여기서 용은 땅에 추락할 때 상처를 입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의 마법으로 자신의 부서진 몸을 치료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 기대는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배양의 종결은 아직도 멀었다는 뜻이다. 이런 잔인한 실험은 그래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강해지려면 어쩔 수 없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일단 부서진 용의 몸을 보며, 울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어쨌든 내가 만들어낸 생물이니, 아무리 괴물이라도 나는 저 아이의 엄마가 아닌가. 엄마로서 아이를 저렇게 마구 패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 녀석은 단순한 마법생물이 아니라, 전투를 위해 만들어지는 존재이므로. 그러니 어느 정도는 거칠게 대하는 것도 필요했다. 하지만 이건 좀.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 할텐데." 나는 마법으로 용을 들어올려, 배양액이 담긴 수조에 집어넣었다. 용의 덩치가 워낙 큰 탓인지, 수조가 그렇게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가 들어가자 수조가 꽉 차 버리는 느낌이었다. 하긴 저건 용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니,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저게 무슨 용이야." 머리가 100개나 달리고, 몸통은 거대한 근육덩어리인 저 괴물이 과연 용일까. 이건 용이라기보다는, 영웅담에 나오는 악당이나 다름없었다. 공주님을 납치하여 왕자님에 맞서 싸우다가 죽는, 그런 용 말이다. 아니, 저렇게 흉측한 용도 보기 드물 거야. 물론 내가 만드는 용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좀비 드래곤은 아니지만, 그리 볼만한 타입도 아닌 것은 확실했다. 전투에 효과적인 형태를 찾다 보니,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괴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뭐, 아직 최종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니까." 저 용의 외부형태와 내부구조 등은, 아직도 개량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사실 지금 나와 싸움을 해 본 타입도 완성형은 아니고, 아직은 만드는 중이기 때문에 기본성질부터 전투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손을 볼 곳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완성되면 나노머신을 기반으로 한, 분해결합이 가능한 용이 될 것 같지만. "일이 제대로 풀릴 경우의 이야기이고." 저 괴물 외에도 여러 가지를 실험하고 있지만, 잘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마법생물이라고 해도 진짜 생명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깝기 때문에, 실제 인간을 마법사로 만드는 것보다는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투력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의 잔머리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을 마법사로 만드는 것은........ "안 돼. 안 돼."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장난으로 참여해도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참여시킬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마법사를 하나 키우려면 얼마나 어려운지는 나 자신이 이미 수행으로 경험해서 안다. 그걸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는 없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결국 나 혼자서 지고 가야 하는 짐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나는 황야를 둘러보았다. 이제 여기서 할 일은 없다. 남은 일은 이 세계가 아닌,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오빠가 진희에게 고백하는 날이었지? 제발 오늘만은 제대로 고백을 끝내기를 바라면서, 나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일단 내 방으로 돌아가야 밥을 해주든지, 떡을 해주든지 할 수 있으므로. "자. 그럼." 내 몸이 빛나면서, 시공간 바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법생물들이 있는 세계에서, 내가 머무르고 있는 세계로. 잠시 수많은 우주들이 보였다. 다양한 차원 속에 파묻힌 세계들이. "아름다워."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자. 학교 갈 준비를 해볼까." 나는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어쩌면 이쪽이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마법생물이 있는 곳에서는 옷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내 방으로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난처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실 옷을 입기는 입어야 하는데, 시공간을 벗어나는 상황에서는 옷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일반적인 물질이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몸이 정상적인 인간의 몸과 다를 게 없다면 이런 이동도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이게 사람인가. '이러니 내가 미치지.' 뭐,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던가. 한탄은 이쯤 해두고, 나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침대에 곱게 개어서 접어둔 옷이, 내 몸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난 지금 한탄할 때가 아냐. 할 일이 있다고. 그것은. "오빠. 제발 오늘은 제대로 하라고." 그렇다. 오늘이 바로 오라버니의 고백의 순간이다. 1년 이상이나 고백을 시도한다면서도 말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던, 오라버니의 결전의 순간이다. 나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기는 하지만. 대체 왜 말을 못하는 거야. 서로 좋아하면서. 몇 차례고 마법을 날려서 둘 다 박살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 오늘만큼은 오빠가 제대로 고백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옆에서 협박과 기합과 구타를 병행해서라도, 내가 힘을 내야 한다. 도무지 성과가 없는 오빠의 청춘을 위해서라도. 옷을 입은 나는 내 방을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빠 방에서 새어나오는 사념은, 대체 뭐야? '도대체 무슨 꿈을 이렇게 꾸는 거야.' 원래 오빠가 꾸는 꿈이란 게 이렇다는 건 알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오빠는 꿈속에서, 마왕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까지는 좋다. 오빠라고 해서 언제나 둔하기 짝이 없는 소년의 역할만 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원래 꿈은 현실과 반대라지 않는가. 그렇지만 이건 좀 곤란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왜 저런 배역을 맡은 거야? '시스터 소드(sister sword)?' 칼 이름도 참. 어째서 내가 전설의 마검(魔劍)이 되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오빠가 나를 보는 관점이 그렇다는 건 알고 있다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다. 당장 오빠의 꿈속으로 들어가서, 진짜 악마가 뭔지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게다가 말야. 그런 칼을 가지고 있으면. '왜 쫓기고 난리야?' 내가 미쳐. 돼지 목에 진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아무리 칼이 좋으면 뭐하나. 쓰는 사람이 바보인 걸. 하긴 저러니까 '지상 최강의 바보커플'이라는 별명을 안고 살지. 안 그래도 마법생물의 제조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오빠까지 날 속 터지게 만들고 있다. 당장에 그냥 ! 나는 가스레인지를 켜서 프라이팬을 달구는 것을 검토했지만, 인간은 그런 프라이팬에 맞으면 죽는다. 따라서 나는 그냥 안 달군 프라이팬을 들고, 오빠의 방으로 걸어갔다. 프라이팬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오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퍽. "오빠. 일어나 !" 그래서 나는 오빠를 데리고 학교에 왔다. 오늘만큼은 기어코 제대로 된 고백을 시키기 위해서. 물론 오빠의 성격으로 보아, 고백을 성공시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말은 할 수 있겠지.' 이미 오빠에게 압력을 팍팍 준 이후다. 오빠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오늘만큼은 고백을 하는 게 좋다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만약 오늘도 고백을 못하면, 가만 안 둘 거다. 물론 죽이지는 않겠지만, 가방에 든 바늘을 왕창 써서 고문을 자행해서라도 ! 이렇게 하는 건 좀 심하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1년씩이나 고백을 안 하고 미적거리는 꼴을 옆에서 본 나로서는 이런 강경책을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년이 뭐야. 1년이. '도대체 왜 내가 오빠의 청춘을 위해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 거야?' 어차피 오빠가 날 보는 관점은, 괴물이나 악마나 마녀인데. 하지만 착한 여동생의 입장에서는 도리가 없다. 아무리 오빠가 바보 같고 멍청하고 미련하고 둔하기 짝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니까. "오빠." 일단 미소는 짓는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미소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마법부터 스트레이트로 갈겨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싶지만, 보통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 난리가 날 테니 참는다. 하지만 치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고, 나도 지금은 굳이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오빠는 그저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다. 심장박동수가 좀 올라간 걸 보니, 확실히 그렇다. 심약한 오라버니 같으니. "오빠." 뭐, 너무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되겠지. 나는 간단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오늘 기대할게."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니까. 굳이 고백 안 하면 마법으로 엉덩이를 한 방 때린다느니, 걷어찬다느니, 바늘로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주겠다느니 할 필요가 없다. 이걸로 족하다. 이제 남은 것은, 오빠가 과연 제대로 고백을 할지 지켜보는 것. 그리고. '고백을 위한 무대장치 마련. 배경조성.' 정말 이 사람의 여동생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여동생의 연애에 대한 고민을 오빠가 들어주어야 하는 건데, 이게 뭔가. 왜 내가 오라버니의 연애를 일일이 챙기고 다녀야 하느냔 말이다. 오늘도 제대로 못하면 날려버릴 테다 ! '아이고. 속 터져.' 부글부글. 부글부글. 부글부글 ! "으. 속 터져. 왜 안 오는 거야."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공우주부 부실에서 말이다. 원래는 이렇게 기다릴 필요도 없어야 했지만, 오빠라는 인간은 아침에 등교하고부터 수업이 다 끝나는 지금 이 시간까지 고백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오늘 진희와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안 남게 된 것이다. 물론 오빠가 여기에 안 올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오빠는 아마 나한테 맞아죽을 테니. "그런데 왜 안 와." 이 인간이, 정말 나한테 죽고 싶은 건가. 사실 힘도 없는 오빠에게 힘 자랑을 하는 것은 연상의 여동생 입장에서 할 일이 아니지만, 마법 수련생도 아닌 주제에 1년씩이나 시간을 들이고도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곤란했다. 오빠가 만약 마법을 배우고 있다면, 1년이 아니라 1만년이 걸리더라도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거, 안다. 하지만 이건 마법수업이 아니라 연예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인간은 천년을 넘길 수 없는 법이고, 나처럼 특수한 예외가 아닌 이상 그 법칙은 지켜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인간은 대체. "모처럼 선배들에게 부탁까지 했는데." 오늘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실로 와서, 선배들에게 부탁을 했다. 오빠가 진희에게 고백하게 되면, 모두들 자리를 비워달라고. 선배들은 '지상 최강의 바보커플'이 드디어 정식 커플이 되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며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솔직히 영미 선생님까지 그렇게 관심어린 눈으로 바라볼 줄은 몰랐다. 물론 선생님도 아직 결혼을 안 하셨으니, 연애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 당연하겠지만. 뭐 나도 관심 있는 분야가 연애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선배들이 열심히 협력을 해주더라도, 거기에는 조건이 따른다. "주연이 와야지." 연극의 무대를 아무리 정성 들여 꾸며놓고, 감독이 발이 아프도록 뛰어다니더라도 연극이 성공하려면 조건이 있다. 일단 주연배우가 힘을 내야, 연극이 제대로 될 게 아닌가. 그러나 이 경우에 문제는, 주연 배우가 여기로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두들 오빠가 왜 안 오는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지만, 나는 그 이유를 잘 안다. 나는 아래층의 상황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러니까 오빠는. '이 인간........ 한눈을 파는 게 아니고 두 눈 다 팔고 있어.' 게다가 하는 소리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항공우주부가 대체 어디 있냐고? 참 대단한 독백이야. 사랑스런 여동생과, 연인 후보가 있는 부실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른다니. 게다가 지금 하는 꼴은 대체 무엇인가. 경제 연구부니 영화 연구부니 하는 곳을 둘러보는 건 이해라도 된다. 어쨌든 간판만 보고 지나치고 있으니까. 간판 보는 속도가 늦은 것도, 오빠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억지로 이해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도대체 심령현상 연구부에는 왜 가는 건지. '저러니까 어설픈 마법에 걸려서 잡히지.' 오빠는 심령현상 연구부에 매우 관심이 큰 모양이었다. 한 층을 다 둘러봤으면 그 윗층으로 올라올 생각을 할 것이지, 그저 멍하니 심령현상 연구부 앞에 서서, 얼쩡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마법이란 건 나한테나 별 게 아닌 것이고, 보통 인간에게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할 마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마법을 쓰는 건 위험한데.' 자신도 잘 모르는 존재에게서 힘을 빌리면 위험부담이 큰데? 물론 그들이 힘을 빌리는 대상은, 지금으로선 내 적이 아니니 묵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별로 좋게 비춰지지는 않는다. 어쨌든 오라버니가 그 마법에 걸려서,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거 차라리 내가 내려가서 오빠를 잡아올까.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내가 만약 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럼 진희 녀석이 도망갈 거야.' 원래 저런 여자라는 건 안다. 하루 이틀 친구로 사귄 것도 아니고, 상대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입장이니 진희가 이 경우에 어떻게 행동할지는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내 예상대로, 내 눈이 보는 대로, 그리고 내 마음이 보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리고 비행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녀의 엉덩이는 자꾸만 문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앉은 채로 도망가는 건지.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그녀는 반드시 행동을 취할 것이다. 덜컥. 예상대로, 그녀는 어느 순간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가려고 했다. 하긴 선배들이 자꾸 진희를 재미있다는 눈으로 봤으니까, 눈치를 채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진희 개인의 부끄러움을 고려해줄 단계는 아니다.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파다닥. 진희가 아무리 빨리 달아난다고 해도, 결국 내 앞에서는 뛰어봤자 벼룩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내 손에 뒷덜미가 잡혀서, 다시금 제자리에 앉게 되었다. 강제로 말이다. 어지간하면 힘으로 사람을 짓누르지 않아야 하지만, 진희의 경우는 내버려두면 도저히 고백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달아나는 데 쓸 행동력을 고백 받을 때 썼으면 벌써 상황은 정리되었을 텐데. 나는 그녀를 자리에 앉힌 후,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도망가지 마.' 물론 별로 쓸모가 없는 경고라고 생각되지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빠를 잡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내가 내려간 사이에, 이 계집애가 도망가버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분신술을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공공연히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어쨌든 이곳에는 작지만 마력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아마 심령현상 연구부. 통칭 흑마술부가 출처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지만, 마력을 가진 자가 존재하는 이상 함부로 마법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아군인지 적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지금 오빠의 위치와 행동을 추적할 수 있는 것도, 내가 마법을 썼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한 것은. '저렇게 사념을 사방으로 퍼뜨리니, 모를 수가 있나.'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두뇌에서 발생한 정신파를 숨기는 방법을 모른다. 따라서 그 정신파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되고, 조금만 민감한 사람이라면 그걸 정확히 감지하여 상대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보통 사람은 그런 방법을 모르고, 안다고 해도 그걸 실현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마법을 부리는 데 익숙한 나에게는,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경밖에 못하잖아.' 보통 인간은 꿈도 꾸지 못할 마법의 경지에 이르렀으면 뭐하나. 오빠 하나 잡아오지도 못하는 신세인데. 하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릴 수도 없는 게, 사람에게 허락된 인내심의 양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참고 기다리기에는. '오빠. 너무 느려.' 도대체 여기엔 언제 올라오는 거야. 어지간하면 참아주겠지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기나긴 마법수행의 기간을 생각하면, 이런 짧은 시간에 흥분하는 것은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오빠의 일이고, 오빠는 나처럼 장구한 세월을 보내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빠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재고의 여지가 있겠지만. "저 바람 쐬고 올게요." 나는 부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두고보자. 오빠. "바보 멍청이 늘보 오빠 같으니." 나는 5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빠가 우리 부실에 오려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빠가 다른 계단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건물 가운데에 있는 이 계단이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사용하는 유일한 계단이니 다른 곳에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비상계단이 있기는 하지만, 오빠가 어디로 올라오는지 뻔히 다 아는 나로서는 그쪽을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쯤 서 있으면, 진희가 도망치는 것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점이, 내가 기다리는 지점을 선택하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제야 기억하셨어?' 한참동안 흑마술부에서 노닥거리던 오빠가, 이제야 내 말을 기억해낸 모양이다. 잠시 내 모습을 상상하며 벌벌 떠는 오빠의 마음이 느껴지자, 혀를 찰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내가 무서운 건가. 내가 얼마나 강한 지도 전혀 모르면서. 어쨌든 오빠는 드디어 5층으로 뛰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서히 오빠가 계단으로 올라온다고 느껴지자. "오빠 ! 너무 늦어 !" 기다리다 말라죽을 뻔한 내 입장에서, 화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오빠는 그런 걸 예상하지 못한 듯, 내가 큰 소리를 지르자 즉시 비틀거리더니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정말 내가 못살아. 언제나 이런 식이니 내가 오빠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소리 한 번 지르면 이런 일이 생기는지. 어쨌든 오빠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므로. 탁. 나는 급한 대로 오빠를 우산으로 낚시하듯 잡았다. 월척이다 ! 물론 크기로 월척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마법 수행을 하면서, 오빠보다 큰 물고기 정도는 엄청나게 많이 구경했었고, 낚아 올리기도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빠 정도의 무게를 움직이는 건 큰일이 아니었다. 나는 힘을 잘 조절해서 오빠를 5층 복도로 날렸고, 오빠는 납작하게 엎어졌다. 분명히 공중회전을 할 정도의 시간적 여유는 주었지만, 오빠에게 그건 너무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축구 국가대표가 되려고. 오빠기 비명을 좀 지르고 있었지만, 그리고 사람을 낚았다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솔직히 그런 말을 듣고 화내줄 생각이 없다. 내 할 말 하기도 바쁜데 말야. "도대체 수업이 언제 끝났는데,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혹시 다른 여자 만나서 토마토 쥬스 마시고 온 건 아니겠지?" "......." 오빠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서 기절하듯이 놀랐지만, 나로서는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사안이었다. 오빠의 옷깃에 묻어있는 것이 바로, 핏빛 토마토 쥬스였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특별활동부에서 그런 쥬스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고, 따라서 오빠가 어디 갔는지를 알기에는 최적의 단서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로 오빠는 자기 옷깃에 뭐가 묻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지, 당황하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 틈에 할 말은 다 해야겠지. 그럼. "게다가, 심령현상 연구부의 부장님하고 밀실에서 대화를 나눴지? 어떻게 고백도 하기 전부터 바람을 피우는 거야? 정말 오빠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 부의 친구들이 오빠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진희에게 그 사실이 알려져서 난리가 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매도 먼저 맞아야 한다고, 지금 욕먹고 상황을 정리하는 게 오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비난이 대충 잦아들 무렵, 나는 오늘의 여주인공을 불렀다. "진희야." 일단 진희를 부르기야 했지만, 나는 이미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처럼, 선명하게 나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 그대로, 진희는 잠시 어색하게 웃다가 몸을 돌리더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피의 늪을 향해. "진희 저 애, 또 도망간다 !" 물론 대부분의 부원들은 진희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도 방관했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의 기대대로, 그녀를 잡아다가 오빠에게 배달해줘야 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결판을 내라고요. 부끄럼쟁이 아가씨. 그래서 나는 일단 부드러운 설득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진희야. 거기 서."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진희가 그 자리에 멈출 리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꺼내야, 그 다음의 조치에 대한 명분이 생기는 법이다. 예를 들어 벼락을 날린다든가, 장풍을 쏜다던가, 기관총을 갈긴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학교 내에서 그런 강력한 응징을 한다면 진희는 내 올케언니가 되기 전에 죽어버릴 것이니, 그건 일단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천천히 걸어가서. ".........." 나는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진희를 막아섰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빠른 속도였다. 이것이 기준의 차이라는 걸까. 오빠나 다른 부원들이 내 지금의 움직임을 보고 '질주'라고 생각하는 걸 느끼며, 나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이게 질주라. 정말로 내가 질주하는 걸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진희는 나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틀며 빈틈을 찾으려고 했으나, 진희 정도의 실력으로 나를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되도록 부드럽게 진희를 잡아서, 모두가 모여있는 복도를 향해 돌아왔다. 사실은 진희의 턱을 한 방에 날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인간이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기로 했다. 다만. '나한테는 우산을 마구 휘두르더니, 진희한테는 전혀 다르네.' 참으로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 오라버니였다. 이봐요. 오빠. 내가 지금 진희를 마구 집어던진다면, 진희가 차분히 앉아서 오빠의 고백을 들어줄 것 같아? 물론 남녀차별이라는 시선도 있을 수 있지만, 오빠와는 달리 진희는 그런 쪽에 약하다고. 이게 다 오빠의 불쌍한 청춘을 구제해주기 위해서인데, 그런 것도 몰라? 물론 오빠에게 그런 것을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급한 것은 오직 하나. "자. 그럼 방해꾼들은 물러갈 테니, 고백 잘 해." 그걸로 족했다. 요점은 오빠가 진희에게 고백하는 것이고, 그것만 제대로 된다면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 지금 주인공은 오빠와 진희이지, 내가 아니니까. 주연이 아닌 조역배우인 나로서는, 이쯤에서 슬슬 퇴장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연배우를 무대에서 올리기 위해, 나는 진희를 되도록 부드럽게 부실로 밀어 넣어 주었다. 물론 오빠 역시 친구들에게 밀려 부실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마지막으로 격려사를 읽었다. "미성년자에게 안 어울리는 일을 하라는 게 아냐. 단지 한 마디만 하면 돼. 다른 거 필요 없으니까, '지상 최강의 바보커플'에서 벗어나면 돼. 이렇게 질질 끌기만 하지말고. 알겠습니까 !" 하지만 과연 격려해준 보람이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죽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오늘도 과연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오빠의 청춘은 이걸로 끝이다. 부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래. 오빠. 그러나. "문 열어 줘 ! 문 열어 줘 !" 안의 상황, 그리고 진희의 반응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격려해준 보람이 없어질 모양이다. 나는 진희에게 화를 냈고, 오빠에게 화를 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저 재미있어하겠지만, 내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어쨌든 이 고백의 당사자인 오라버니의 여동생이고, 또 하나의 당사자인 진희의 친구가 아닌가. 그 덕분에 나는 안의 일에 조금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마법으로 안을 살피는 것은 아니지만, 목소리들이 너무 커서 마법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다 들리기 때문이다. 아니, 목소리만이 아니다. 그들의 기(氣)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황이란 것은 너무나 엉망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 계집애가 정말 ! 우리 오빠가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과연 진희가 오빠의 고백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녀가 이번 일을 장난으로 넘기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상황을 다 알기에 나는 더욱 더 화가 났다. 차라리 마법으로 한 방 먹여줄까. 나도 모르게 목걸이에 손이 가고, 입에서는 마법의 주문이 나오려고 했다. 만약 내가 인내심이 조금만 약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끔찍해.' 진희의 행동도, 오빠의 행동도, 그리고 나 자신이 조금 전에 일으킬 뻔한 일에 대해서도. 하지만 정말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째서 이 두 사람은 매일 이 모양이란 말인가. 그 일만 있었다면 말을 안 하겠는데,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바깥에 있는 우리 부원들이 문을 틀어막을 뿐임을 안 진희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필이면. '이건 또 뭐야?' 문이 열리지 않자, 그녀는 창문으로 달려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미 나는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가릴 수 없는 법이다. 진희는 창문 밖으로 나가더니, 작은 턱을 옆으로 걸어가서 배수관에 매달렸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나는 오빠가 어떻게든 행동을 하기를 기다렸다. 지금 진희를 잡는다면, 고백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니, 배수관에 매달려서 도망가다가 진희가 실수할 경우, 큰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남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자기연민에 빠져있어.' 나조차 기운이 빠질 지경이었다. 오빠는 진희를 붙잡는 적극적인 사고방식 대신, 진희에게 차였다고 착각하고 절망에 빠지는 소극적인 사고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오늘 오빠는 뭘 하려고 여기에 왔던 거야? 오빠의 감정이 급격히 절망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쾅. 나는 문을 열고, 부실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물론 상황은 내가 밖에서 본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다른 부원들이야 벽을 뚫고 안을 들여다 볼 능력이 없었으니 이제야 놀라고 있었지만, 나는 단지 오빠와 진희의 감정의 흐름만 읽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죽 그랬으니까. 1년 동안. 1년 동안 언제나 오빠는. "차였어." 이런 식이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는데도, 심지어 밥을 차려주고 숟가락으로 먹여주는데도 그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축 늘어져버린 오라버니의 모습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걷어차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일단은 도망가기에 바쁜, 저 부끄럼쟁이 아가씨를 붙잡는 것이 순서였기 때문이다. 일단 잡아놔야 일을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불만을 일단 감춰놓고, 부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가는 곳은. '계단으로.' 어차피 보지 않아도 진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다 안다.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사념을 사방으로 흩뿌리기 때문에, 굳이 마법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흑마술부가 근처에 있는 이상, 굳이 여기서 마법을 남발하고 싶지도 않고. 물론 그들이 나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 나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고, 그 전쟁에 평범한 사람들이 끼어 들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더 급한 사안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진희를 멈출 수 있을까. 진희가 달라붙어 있는 배수관을 향해 달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나 매달리면 배수관이 망가질 거야.' 물론 내 몸무게로 보아 그럴 일은 없다. 그러나 평범하게 배수관을 붙잡고 내려갈 자신 같은 건 없다. 무엇보다도, 5층 정도면 그냥 뛰어내려도 된다고 ! 다른 사람이라면 안 되겠지만, 나로서는 그 정도의 높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냥 뛰어내릴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동기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난리가 날 게 분명해.' 그래서 나는 그 방향으로 뛰어가지 않았다. 만약 그쪽으로 갔으면, 분명히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을 것이기에. 그 대신 나는 계단 쪽으로 달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로서는 거의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속도여서 지루함을 참느라 애를 먹어야 했지만, 남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계단으로 몸을 날렸고, 내 몸은 난간을 타고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난간이 180도로 꺾이는 지점에 이르기 전에, 나는 다시금 몸을 날려. '한 바퀴 돌고.' 내 몸은 바로 아래의 난간으로 떨어지듯 미끄러졌다. 다시 난간을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 난간이 꺾이기 전에 또 한 번 뛰어내린다. 이런 과정을 단순히 반복하자, 나는 금새 1층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지만, 그쪽으로 갈 생각은 없다. 나는 몸을 날려 난간에서 떨어졌고, 내 몸은 느린 속도로 1층 복도에 내려앉았다. 남들이 보면 절대로 느리다고 하지 않겠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이걸 봤다면, 내 몸은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면서 계단과 계단의 틈새로 빠져나가는 걸로 보였을 것이다. 뭐 그건 할 수 없고. '어차피 본 사람도 없는 걸.' 나는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고 싶지만, 남들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다들 지금은 아직 부활동 중이라서 부실 안에 얌전히 있지만, 만약 내가 큰소리를 내서 그들의 주의를 끈다면?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지금의 나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거나, 의심을 품고 당국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된다. 해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설명해주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진희를 붙잡는다는 것은, 공염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정리해야겠어.'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우리 부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진희는 배수관에서 막 땅에 발을 내딛는 중이었다. 시간에 맞춘 것이다. 발소리를 약간 내면서 그녀에게 걸어가자, 진희도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예시당초 진희의 실력으로 나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무리다. "도망은 못 가. 진희야." 어차피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희의 걸음으로 나를 피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상대에게, 소리의 속도도 낼 수 없는 사람이 몸을 피한다는 것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 만용이나 다름없었다. 진희의 경호원들이 나를 가로막는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나를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법이 이미 생활화되어버린 나를 막으려면, 단순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내 실력이면, 특별히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감각만으로 그들을 느끼고, 적절한 대처방안을 짜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과시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진희야." 이쪽이 먼저였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어쨌든 친구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대화가 보람없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답을 구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자꾸 도망가는 거니?" 사실 오빠와 진희를 오늘 같이 있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진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눈치가 둔한 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 뭘 하겠는가. 행동이 따라주지를 않는데. 주위에서 오빠와 진희를 괜히 '지상 최강의 바보커플'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이 모양이 아닌가. 그리고 진희의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부....... 부......... 부끄럽잖아." 그랬다. 진희의 마음은 이 모양이었다. 고작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1년을 이렇게 피해온 것이다. 만약 그녀가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턱뼈를 날려버렸을 것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너 바보냐." 그리고 약간의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친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쓸모 없는 말이기야 했지만, 그래도 친구인 이상 말을 해야 할 것이었다. 진희는 평범한 인간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의사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미룬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아. 우리 오빠가 고백하는 걸 들어보고 나서, 그 후에 행동을 정해도 늦지는 않아. 그렇게 부끄럽다고 계속 피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이야. 이미 1년이 지났어. 더 이상은 안 돼. 이건 우리 오빠를 조롱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할거야?" 하지만 진희의 대답이란 것은, 너무나 한심했다. 아무리 그 내용을 이미 알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역시 직접 그런 말을 들으니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하지만.......... 무서운 걸. 문구가 날 싫어한다고 하면......." 이랬다. 처음부터 이랬다. 오빠는 진희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고, 진희는 오빠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계속 이 모양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고백을 쉽게 하지 못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1년을 보낸 것이다. 1년을. 천 년의 세월을 사는 것도 아니면서, 1년을 이렇게 날려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바보." 나는 그 말만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진희에게 물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진희를 강제로 오빠에게 데려간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진희는 또 부끄럽다며 도망칠 것이고, 오빠는 좌절해서 쓰러질 것이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지금 당장은 진희보다는 오빠 쪽이 더 급했고, 나는 오빠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진희를 내버려 둔 채로. 어차피 여기 더 있어 봐야. '진희를 날려버릴 게 분명하니까.'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수밖에. "그래서 오빠는?" "조금 전에 나갔어. 아마 집에 돌아갔을 거야." 어떻게 된 건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기에, 나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고, 친구들도 침묵했다. 어차피 오빠의 생명력이 어디 붙어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기에. 나는 난장판이 된 부실을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맺어지게 할 수 있을까. '그냥 마법을 써버릴까.' 둘을 잡아다가, 이런 짓에 저런 짓에 그런 짓까지 시켜서 기정사실을 만들어 버릴까. 아니면 아예 둘을 마법으로 한데 붙여버릴까.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사악한 마법사의 방법이 여러 가지 떠올랐지만,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 힘을 남용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면, 그 부작용으로 나 자신이 고통받게 된다는 것은 누누이 스승님에게 듣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런 건 두 사람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사람이 고백해서 순조로이 연인 관계가 되는 것이지만, 이대로는 백만 년을 지나도 가망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난 오빠의 연애사업에만 정신을 쏟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다고. 세상에 나처럼 바쁜 여동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한 가지만 해도 힘든 판에.' 엄마가 약국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졸지에 나는 10대 소녀 주제에 주부 노릇을 하고 있는 판이었다. 물론 엄마가 아예 안 도와주는 건 아니지만, 내년은 되어야 가정부가 들어오든지 어쩌든지 할 것이니 아직은 주부다. 게다가 그것만 해야하는 게 아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의 역할도 맡아야 하며, 오빠를 챙겨주는 여동생의 역할도 해야 한다. 그것뿐인가. 독수리 5형제도 아니면서, 지구를 지키느라 날아다녀야 한다. 내 몸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게 뭔가. '못 말리는 오라버니 같으니.' 학교 뒤에 붙은 숲. 통칭 대업자연농원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오라버니를 느끼면서, 나는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바빠서 미칠 것 같은 여동생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 오히려 일거리를 늘려? 벼락마법이 좋을지 지진마법이 좋을지, 그게 아니면 아예 운석을 불러서 정밀폭격을 실시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오빠가 얄밉다고 해도, 그런 마법을 맞으면 인간은 그냥 죽는 게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내가 참아야 하나.' 솔직히 오빠를 때리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사실은 오빠를 때리기보다는 '오빠 좋아 너무 좋아'가 더 마음에 들지만, 이 인간은 그렇게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잘 대해주고 싶어도, 그러면 일이 안 풀리는 걸 어쩌겠는가. 아침에 오빠를 깨울 때부터, 살살 달래서는 통하지 않는다. 무조건 때려야 일어난다. 이래서는 상냥한 여동생이 되어주기는 글렀다. 그리고 지금은 오빠를 위해서라도, 독하게 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빠는 평생 여자를 못 사귈 거야.'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오빠 돌보기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고, 오빠도 언젠가는 연애라는 걸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오빠를 때리든지 찌르든지 해서라도, 고백을 제대로 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오빠를 돌볼 여자를 구해놔야, 나도 안심하고 내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 내 입장을 감안하면, 이것은 절대로 필요한 조치였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한 번만 더 패자. 어차피 내가 오빠를 때린다고 해서 죽거나 다칠 염려는 절대로 없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그게 안 되지만, 나는 가능하다. 때릴 때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해결되는 문제니까. 흑. 오라버니를 돌보는 것도 너무 힘들어.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고 내가 참아야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부실의 정리가 끝났다. 나는 선생님과 학우들에게 인사하고,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모두의 격려가 이어진다. "오늘 고생했어. 미인아." 사실 고생은 고생이었다. 몸이 힘들었다는 게 아니라, 마음이 말이다. "오빠 때문에 힘들겠지만, 힘내." 이건 대부분의 부원들이 던진 격려였다. 그리고 현재 내 상황을 압축해서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오빠 잘 달래서, 내일 결석하지 않게 해. 미인아." 저, 선생님. 오빠의 결석을 허용할 리가 없잖아요. 제가. 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부실에서 나왔다. 자. 이제 오빠를 찾으러 가 볼까.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업자연농원으로 직행하던 나에게. "!" '뭐야? 이 느낌은.' 이런 느낌은 나에게 있어 매우 익숙했고, 많이 느끼던 것이었다. 나는 이 느낌을 쫓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었고, 그 추적의 끝은 언제나 피바다로 끝나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언제나 내가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타국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흑마술부 쪽이 아냐?' 그리 크지 않은 마력이라면, 당연히 흑마술부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쪽 이외에 마법에 대해 아는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으므로. 사실 마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관심을 쏟는 사람들의 수는 적었다. 대부분은 단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마술쇼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마법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탐구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학교에서 마력이 느껴지더라도 흑마술부의 부원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언제나 적중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큰 마력을 발산하지 못하므로. 게다가 마력의 질도 달랐다. 이것은. '적이다.' 이것은 분명히 적의 마력이었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출현한 위치가 나빴다. 이쪽은 분명히 오빠가 넋을 놓고 울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 아닌가. 물론 그 마력은 극히 짧은 시간에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마력의 종류는 아마. '왜 하필 정신마법이야.' 게다가 오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말은 즉, 정신마법에 맞은 사람이 오빠라는 뜻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빠의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살펴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빠를 제외하면. '오빠한테는 안 돼 !' 더 이상 볼 것이 없었다. 나는 마법소녀로 변신하려고 목걸이에 손을 댔지만, 그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이 학교라는 것을. 그 말은 즉. '여기서 마법을 드러내면 안 돼.' 만약 마법을 사용한다면, 나는 그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마력의 크기로 미루어보건대 대단한 강적은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물리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 뒤는 어떻게 되겠는가. 오빠에게 내 정체를 들키고 나서, 그리고도 평범한 삶을 보낼, 아니 보내는 척 연기를 할 수 있겠는가. 오빠가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오빠 역시 전쟁에 말려들게 된다. 아니, 내 친구들까지, 우리나라 전체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전쟁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그래도 된다면, 나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우리나라 정부에 알렸을 것이고, 혼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마법을 쓰지 않고 상대를 처치한단 말인가. 아니, 오빠가 만약 이미 마법에 걸렸다면. '최악이야.' 잘못하면 오빠를 때려야 할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처럼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순간적으로 가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나와 오빠가 사이가 좋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비록 오빠 자신만은 부정하지만 모든 이가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어서 오빠에게 가야 했다. 제때 가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게 돼.' 내가 만약 오빠에게 지금 가지 않는다면, 평소의 행동과 반대되는 내 행위에 대해 모든 이들이 의문을 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 과대망상일 수도 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의문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빠에게 가야 했다. 아직 오빠가 무사할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마법을 쓰면 안 돼.' 이것이었다. 과연 상대의 마법에 마법으로 대항하지 않고서, 오빠를 위험지대에서 끌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내 정체를 상대가 눈치채게 하지 않으면서?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적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마법을 쓴다면. '그러면 끝장이야.' 물론 적이 투시마법으로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쯤은 막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이었다. 만약 내가 마법을 쓰는 것을 상대방이 알게 된다면? 설령 마법의 사용을 적이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일껏 투시해봤더니 내 마음이 백지상태였다. 그러면 적이 과연 나를 의심하지 않고 넘어갈까. 그렇다고 내 속을 적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인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그렇다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마력을 지닌 상대가 지금 나를 감시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오빠아아아 !" 나는 오빠를 보자마자, 그대로 몸을 날렸다. 언제나처럼, 오빠를 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진희가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다니. 아직 제대로 고백도 못해놓고, 사나이 주제에 양다리를 걸쳐? 오라버니의 머리통이 내 발끝에 걸렸고, 오빠는 석양을 향해 날아갔다. 내가 지면에 착지할 때쯤, 오빠 역시 지면에 몸을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쾅. 우당탕. 꼴사납게 나동그라진 오빠를 향해, 나는 기를 모았다. 도대체 이 인간은 진희를 내버려두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못된 오빠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해. 그러기 위해선. "오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 평소보다 약간 크게 외쳤지만, 뭐 오빠니까 잘 견디겠지. 어차피 상냥한 말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좀 거칠고 자극적인 외침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우리 부의 시내를 유혹하다니. 어쩔 생각이야? 내가 평소에 시내와 아주 친한 사이였던 건 아니지만, 유혹하는 사람이 오빠인 만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지금 시내한테 뭐 하려고 했어?" 이렇게 쐐기를 박는 것이, 여동생으로서의 역할이겠지. 하지만 오빠는. "에?" 저 멍한 대답은 뭐야? 게다가 키스? 이 인간이 대체 무슨, 능글맞은 생각을 하는 거야 ! 진희한테 차였다고 제멋대로 상상해서 찌그러지더니, 이제 와서는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정의의 여동생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은. "오빠 바보 !" 나는 오빠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물론 손으로 하면 내 손가락이 아플지도 모르니, 발로 말이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서, 오빠가 가루가 될 때까지 때릴 생각이었다. 물론 실제로 가루로 만들면 시체 처리가 힘들어지니, 죽지는 않을 정도로만 패야 했다. 좀 힘들지만, 현실의 벽은 그만큼 높고 두터웠다. 칫. 어느 정도 때리고 나서. "오빠. 가자 !" 나는 쓰러진 오빠의 뒷덜미를 잡고,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 과정에서 오빠가 약간 반항을 했지만, 그것은 곧 가혹한 응징으로 진압되었다. 옆에서 시내가 굳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지만, 지금 시내의 심정을 따질 여유는 없다. 시내도 주책이지, 오빠가 누굴 좋아하는지, 오늘 누구에게 고백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도 않을 텐데, 왜 오빠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 부디 내 착각이기를 바래. 시내야.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널 보고 싶지 않아. 오빠의 행각이 너무 창피해서. 그리고.... "미인아. 그만 둬." 이봐.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니? 오빠한테 꼬리 친 주제에. 오늘 오빠가 진희와 뭘 하려고 했는지를 모를 리가 없으면서, 어떻게 오빠와 키스를 하려고 했니.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냥 줄여서 말했다. "이건 남매간의 일이야. 끼어 들지 마." 나는 오빠를 질질 끌고,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가 버둥거리든, 시내가 나를 차디찬 시선으로 바라보든 관계없다. 그런데 이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뭐? 시내하고 키스하고 싶다고? 이런 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와 오빠는 일란성 쌍둥이는 아니지만, 최소한 이란성 쌍둥이라는 건 확실하며 20년 가까이 함께 지낸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니 오빠의 생각 정도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인간이 감히, 아직도 시내의 입술을 어쩌겠다는 생각이나 해? 이런 음흉한 인간 같으니. 나는 일단. "엉뚱한 짓 하지말고 따라와." 나는 오빠의 목을 약간 조르면서, 교문 밖으로 퇴장했다. 오빠. 제발 좀 정신차려. 우리 오누이 망신을 혼자 다 시키지 말고. '이런 바보 멍청이, *** 오빠.' 학교 교문까지 앞으로 10m. '나쁜 오빠 같으니. 집에 가면 죽도록 팰 거야. 고백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같으니.' 학교 교문까지 앞으로 5m. '그 **을 떨고도 ***만도 못한 **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해.' 학교 교문까지 앞으로 1m. '이 ****같은 오빠가. 어떻게 패 줄까. 아니지. 아예 구워버릴까. 아냐. 아냐. 프라이팬으로 마구 패서, 납작하게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서....' 학교 교문 통과. '휴우. 무사해서 다행이야. 오빠.' 그제야 나는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학교 앞길에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다니므로, 시내가 설령 나를 추적해 오더라도 자기 정체를 드러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한, 섣불리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도 마법으로 맞서야 하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공개적으로 나와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님의 말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럼 조용히 지낼 것이지, 너무 튀잖아.' 사실 개인적인 원한이 없었다면, 나는 그들이 날뛰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악의 집단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꼭 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정의를 기준으로 내세운다면 이 지구에서 처벌받지 않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시내에게 홀려버린 오빠를 치료하는 게 더 급했다. 그걸 잊는다면, 일부러 사악한 여동생으로 위장하고 오빠를 구타하는 연극까지 한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뭐 그걸 원한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그들 덕분에 죽을 뻔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나는 스승님을 만났고, 지금처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마법사가 되었다고 해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단적인 예는 바로. '아이고. 무거워.' 마법사가 되었다고 해도, 오빠 돌보기가 어렵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시시한 마법에 걸려 가지고 날 이렇게 애먹이는 건지. 하지만 오빠는 마법사도 아니니, 그걸 막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무의미했다. '오빠는 이 세상에 마법이 있다는 것도 모를 테니.' 결국 마법에 대해 아는 내가 오빠를 챙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빠를 한쪽 어깨로 부축하고,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시내가 내 뒤를 추적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만큼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절대로 마법을 쓰는 티를 내지 말고, 평범한 소녀로 행동해야 하며 외부에 내 생각을 누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내 속셈이 적에게 감지되면, 당장 난리가 날 테니까. 자기들에 대해 알고 있는 지구인을 그냥 놓아둘 작자들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달갑지는 않지만, 오빠를 미워해서 마구 패는, 증오를 가슴에 품은 여동생이 되어야 했다. 상당히 마법에 조예가 깊지 않으면, 이 경우 겉에 드러난 나의 증오심만을 보기 때문에 속에 숨겨진 마음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이 수법이 통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가 고려하지 않은 변수가 있었으니. "야 ! 너 너무한 거 아냐?" 아. 그렇지. 이 사람은 아직 제정신이 아니지. 그 점을 깜박할 뻔했다. 아까 시내에게서 빠져나올 때 적당히 두들겨 주었지만, 그 정도로는 역시 마법을 푸는 데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미쳐 날뛰지 않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풀린 것 같지만, 안심할 단계는 절대로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오빠의 머릿속은 지금. '시내로 가득해.' 평소라면 진희와 축구, 그리고 나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하던 머리가, 지금은 오로지 시내뿐이다. 만약 지금 오빠의 두개골을 잘라서 뇌수를 꺼낸다면, 아마 시내라는 단어가 우수수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다른 것은 없고, 오직 그것만 말이다. 이래서는 곤란했다. 오빠에게 걸린 마법을 빨리 풀지 않는다면, 언제 시내의 명령에 따라 나에게 칼을 들이댈지도 모를 형국인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나를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적었지만, 시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뭐가?" 이런 퉁명스러운 대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덤으로, 어떻게 오빠의 마법을 풀지 고민해야 할 의무가 생긴 셈이다. 전혀 달갑지 않은 덤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의 해답은 어차피 하나였다. 마법을 쓰다가 시내에게 탐지되면 난리가 날 테니, 이 세뇌를 푸는 법은 무자비한 구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 이유도 없이 오빠를 때리면 시내가 의심할 수도 있었다. 이유도 없이 구타를 한다면, 그 이유에 대해 시내가 생각해볼 수도 있고, 그러면 일이 더욱 꼬이게 된다. 따라서. '좋은 핑계거리가 없나.' 하지만 그것은 오빠 자신이 스스로 제공해주었다. 오빠의 망상 덕분에 말이다. 다만 좀 불쾌한 게, 뭐가 오늘이 그 날이야. 보통 이런 소리를 들은 여자아이는 화를 내기 마련이고, 나도 그 예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퍽. "이상한 생각하지 마." 이걸로 오빠에게 걸린 마법이 풀렸으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약간 마법이 흔들리는 듯 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충격이 부족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빠는 여전히 시내 생각만 할 뿐,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마법을 함부로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빠에 대한 구타뿐이었고, 그런 고로. 퍽. "바람둥이."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오빠가 바람둥이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대체 오빠한테 여자가 몇이나 되더라? 물론 오빠는 일편단심 진희만을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게 아니었다. 나야 여동생이니까 넘어갈 수도 있다지만, 진희에다가 문희에다가 이제는 시내까지? 물론 그게 오빠의 본의는 절대로 아니란 걸 알고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왠지 얄밉게 보인다. 그래서 내 주먹에는 조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안 풀렸잖아.' 아직도 오빠는 시내만을 찾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좀 더 세게 때리는 것. 때리는 장소는 당연히 머리이며, 오빠에게 해롭지 않을 정도로 힘을 잘 조절해야 했다. 마법을 확실하게 풀기 위해선 힘을 많이 쓰고, 오빠를 다치지 않게 하려면 힘을 적게 써야 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가장 조화를 이루는 곳은 어디쯤일까. 나는 즉시 결론을 내렸고. 주먹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오빠. 부디 죽지 마. "꿀밤 한 방 !" 쾅. 약간 강하게, 나는 오빠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그게 좀 심했던지, 오빠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오빠의 생명은 일단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도. '마법이 풀렸어.' 시내가 오빠에게 걸어둔 마법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있었다. '자. 오빠. 조금만 참아.' 오빠를 어깨에 부축한 채, 나는 조심스럽게 위험지역에서 멀어져 갔다. 천천히. 하지만 재빠르게. 평소라면 한달음에 달려갔을 거리였지만, 보통 인간이 걷는 속도를 유지하려니 상당히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시내에게 의심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추적자가 없는지를 살펴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시내는 눈에 띄는 미행자를 나에게 붙이지는 않았다. 물론 마법으로 어딘가에서 날 감시할 가능성도 있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날 위험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버스 정류장에 올 때까지 안심하지 못했다. 사실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지금 바라는 것은 그 정도였다. 일단 오빠를 벤치에 눕힌 후,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오빠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쉬고 있어. 오빠. 나는 오빠의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마법은 풀어냈지만, 오빠의 머리에 너무 과도한 충격을 가했던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보통 인간의 방식으로 오빠를 때렸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평소라면.' 평상시라면 내가 주먹이나 발로 오빠를 때리더라도 절대 다치지 않게끔, 통각신경만을 자극했을 것이다. 즉, 내가 오빠를 아무리 때려도 오빠는 통증만을 느낄 뿐, 실제로 몸이 다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하긴 그래서 내가 오빠를 마음놓고 때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때렸다면, 반드시 시내에게 내 마법이 들켰을 테니까. 나 자신의 마음을 투시하는 것은 극히 어렵지만, 오빠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오빠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이고, 그런 오빠의 몸을 상대의 마법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보호 자체는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마법을 써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쓰면, 당연히 상대는 그걸 알 수밖에 없었다. 시내가 투시하기 힘든 것은 내 몸이지, 오빠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빠가 아무리 나에게 맞아도 세포 하나 망가지지 않는 것을 마법으로 확인한다면, 시내는 과연 나를 의심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 줄까? 그럴 리는 없으니, 결국 나는 오빠를 진짜로 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심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사람이란 약한 힘으로 때리더라도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존재인 만큼, 그것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천만다행으로, 오빠의 머리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무리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힘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마법을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한 것은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일단 오빠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기절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금방 괜찮아질 정도의 피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아직은 위험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시내는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기에. '감시망이라도 설치하든지 해야지, 이거.' 감정을 속이는 위장술은, 역시 너무 피곤했다. 아무리 내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24시간 내내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면 어디 견뎌내겠는가. 내가 방에 마법진을 설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상대가 내 방안을 엿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설령 엿보더라도, 평범한 여자아이의 모습만을 비춰주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인간인 이상, 그런 식으로 안전한 장소를 마련해둬야 긴장을 풀고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잘못 처리하면, 그 작은 쉼터조차 빼앗길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이야. '내 앞에까지 적들이 나타나다니.' 그들이 나를 모르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내 정체를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해온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어쩌면 오늘로 평범한 여자아이의 삶이 완전히 날아갈지도 모르는, 중대사태였기 때문이다. 서울시 한가운데에서 마법으로 싸움을 했다가는, 그리고 내 정체가 다 드러났다가는 평범함은 영영 나에게서 사라진다. 지금도 평범한 여자아이는 아니지만, 일단 겉으로라도 그런 꼴은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게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나는 엄청난 부담을 떠 안아야 했다. 이 전쟁에서 내가 이기든, 지든 간에. '그건 싫어.' 마법이 공식화될 경우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생각하다가,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런 걸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감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내 힘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이 내 힘을 적절히 사용할 기량이 없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내 힘은 평범한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것이고, 나 자신도 이 힘을 얻는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했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그런 수행을 할까? 머리가 어지러워서 나는 그쪽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 게다가 지금은 일단 오빠에게 마법을 건 시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지, 그런 장래의 일까지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사실 궁금하기도 한 게. '지금 시내는 뭘 하고 있을까.'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까. 나는 마법을 발동시키는 게 아니라, 사방에 흩어져 가는 시내의 정신파를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적어도 지난주까지는 시내에게 마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만큼, 내 예상이 맞으면, 그녀가 마법을 익힌 것은 요 며칠 사이의 일일 것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포함하면, 잘해봐야 2일이나 3일정도? 그렇다면 완벽하게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는 못할 수도 있다. 정신을 집중하자,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시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나?' 내 불찰이었다. 시내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고,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는 다섯. 이 정도라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수치다. 물론 그들이 나를 이길 수는 없지만, 문제는 수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였다. 그들의 존재는, 즉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이 다섯 명이라는 뜻이 아닌가. '빌어먹을.' 사람을 다섯 명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안 죽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내가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지금은 한탄이나 절망이 내 마음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일단 급한 것은 상황분석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어야 하는 것이다. 시내는. "놓쳤습니다. 그 계집애가 목표물을 끌고 가 버렸습니다." 시내가 말하는 그 계집애란 분명히 나를 의미하는 것이고, 목표물이라는 건 오라버니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시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와 오빠니까. 하지만 목표물이라. 저들이 왜 오빠를 노리는 거지? 혹시 내 정체를 알아챈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도 곤란한 것이, 저들이 나에 대해 안다면 '계집애'로 나를 지칭할 수가 없다. 그랬으면 그들은. '대악당, 악마, 대마왕 등으로 불렀겠지.' 그게 아니면 가장 간단한 단어인, '적'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럼 그들은 나에 대해 모르면서도 오빠를 노렸다는 뜻인데, 대체 뭘 원했던 걸까. 오빠에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지켜볼 인내심이. 내가 오빠를 무릎에 눕히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들은 대화를 계속했다. 정체를 알기 힘든 누군가가 시내에게. "뭐야. 놓쳤다고?" 반드시 잡을 거라고 자신했다는 건가. 하긴 그들도 '여동생의 난입'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니, 그 반응 자체는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주의해야 할 대목은 지금부터였다. 과연 그들이 내 정체를 모르는 것이 확실한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엿듣는 것을 눈치채고, 거짓정보를 흘리고 있는가. 어느 쪽인지를 가늠할 단서가, 시내에게서 흘러나왔다. "네.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아서, 추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그 점은 내가 처음에 계산한 것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햇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고, 그 점을 감안하면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네거리에서 마법을 난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오빠를 데리고 네거리로 피한 것이며, 결국 시내도 그 문제로 인해 나를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시내와 대화하던 자도 그걸 생각했는지,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음. 할 수 없지. 상대가 의심하지는 않았던가?" 드디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나왔다. 나는 주의를 집중하여 그들의 말을 들었지만, 내심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이 세상에 100%라는 건 없으며, 아무리 나라도 실수로 인해 위장에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 '상대'가 이미 자신들의 말을 엿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내의 입이 열렸다. "아뇨. 오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서, 절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일단 시내의 그 말은, 내가 연기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만약 오늘 일의 진실을 안다면, 역시 여동생다운 사기수법이라며 감탄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칭찬했을까. 아마 내 정체를 알지 않는 이상, 무조건 전자로 의견을 냈겠지. 그리고 시내에게 보고를 들은 누군가도, 같은 시간에 의견을 냈다. "그럼 다행이군." 다행이긴 다행이었다. 일단 나로서는 여기서 변신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오빠를 돌볼 시간여유를 얻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점차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나로서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오빠의 의식이 점차. '깨어나네.' 그들이 있었을 때 의식을 되찾았다면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시내가 만약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나에게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때까지 오빠에게 걸린 마법이 풀리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나는 오빠를 이번에야말로 구타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말이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나는 오빠가 서서히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혹시 아까 내가 때린 일로 머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조마조마했지만. '없어.' 뇌출혈이나, 뇌종양이나, 뇌진탕이나, 척수신경의 절단 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행이었지만, 역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 깨지는 걸 직접 봤다고 해도, 역시 오빠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걱정되는 건 똑같았다. 상대가 내가 모르는 새로운 마법을 썼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속이 타 들어가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 오빠?" 그에 대한 오빠의 첫 반응은 멍함이었다. 멍하게 누워있기만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하려다가, 말았다. 오빠의 눈은, 분명히 마법으로 홀린 사람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는 오빠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그런데 오빠가 지금 하는 생각은. '오빠. 땅바닥에 뻗은 게 아니라고.' 아무리 나하고 오빠의 사이가 구타로 점철된 관계라지만, 그건 전적으로 오빠가 자초한 거 아니었어? 제발 내가 착하고 다정한 여동생으로 행동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 좀 신경이란 걸 써 달라고. 물론 오빠에게 신경이라는 단어는 없는 듯 하지만, 이런 생각을 계속 이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상 최강의 여동생의 무릎베개야. 좀 얌전히 있어 줘." 그 말은 분명히 진실이었다. 물론 오빠는 단지 장난으로 그런 표현을 쓰고 있지만, 내 실체를 알면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다. 사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으므로, 내가 멋대로 지상 최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지구라는 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라는 한정을 지어서 말한다면, 나는 분명히 지상 최강의 마법사였다. 물론 지구라는 좁은 무대에서 최강이라고 해봤자,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이 인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혼란에 빠졌네. 오빠.' 문제는 혼란에 빠진 이유가 '내가 너무 착해서'라는 거지만. 뭐가 어째? 평소의 폭력배의 모습과는 다르니까 이상하다고? 너무 착하니까 여동생 답지 않다고? 나는 얄미운 오빠에게 농담조로 경고를 던졌다. "그럼 치울까?" 일껏 무릎베개까지 해주니까, 하는 소리가 '말도 안 돼'라니. 게다가 내가 아파서 이렇게 잘 대해준다는 착각은 뭐야. 뭐? 오빠를 때렸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렇다고? 게다가 내 얼굴이 너무 순하게 보인다고? 그냥 무릎베개를 치우고 땅바닥에 오빠를 내동댕이칠까. 하지만 그건 싫었는지, 오빠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대답한다. "아니." 참 빠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이렇게 빠르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하는 나에게 오빠의 생각이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이건. '내가 왜 맞은 거지?'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지만, 절대로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왜 오빠가 맞았냐고? 마법을 쓰지 않고 마법을 풀어주려고 해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는가. 내 정체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런 일도 있었으니. '아악 ! 모르겠다 !' 결국 오빠는 그렇게 외치기만 할 뿐,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정신마법에 홀려있는 동안의 일이 제대로 기억날 리 없지. 물론 아직도 마법에 지배되는 상태였다면 기억날 수 있겠지만, 그랬으면 나는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오빠를 때려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아프게. 그게 아니라면 마법을 써야 하는데, 그 경우 오빠의 정신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다.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이 문제가 나를 붙들어맬 테니까. 물론 오빠가 나를 돕도록 하는 길도 있지만, 그런 것은. '어설픈 각오로 따라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그러니 나는 오빠에게 자신의 힘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오빠마저도 평온한 일상과는 작별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일단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마법도 풀렸고, 몸도 이상이 없으니까. 이것으로 일단은 한 건 해결인가. 이제 남은 것은 오빠를 데리고 집에 돌아간 후, 마법소녀로 변신하여 시내를 잡는 것이었다. 다행이야. 오빠.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아서.' 만약 마법이 풀리지 않아서 오빠가 적이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 만약 마법으로 오빠를 원래대로 되돌리더라도, 과연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제한다. 이를 악문다. 그걸 감추기 위해 오빠의 이마를 닦아준다. 영문을 모르는 오빠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지 마." 물론 오빠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나만이 이해하는 말,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말을 던져놓고, 나는 오빠를 무릎에 얹은 채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로 오르고 있는, 커다란 달도. 가능하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시간은 흐르는 법이고, 사람은 그에 따라 변해 가는 법이다. 이렇게 오빠와 같이 있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빠가 진희와 함께 하게 되면, 다시는 이렇게 함께 하기 어렵겠지. 내 어린 시절이 저물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 하지만 오빠에겐 지금의 시간이 매우 지루한 모양이다. 아니, 이건 슬픔의 감정인데. 뭐가 시집가면 그쪽 귀신이라는 거야. 과연 내가 시집이란 걸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걸. 하지만 조금이라도 오빠가 오빠다운 생각을 해주니 기쁘다. 내가 마법을 배울 때의 일이 기억났다. 그때 나는. "달은 혼자가 아냐. 언제나 지구를 바라보고 있어." 나는 달이고, 내 고향은 지구였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달처럼 언제나 얼굴을 지구로 향하고 있었다. 비록 그때는 내가 지구를 볼 수가 없었지만. 그때의 내 바램이 이루어진 것처럼, 언젠가는 오빠도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오빠. "그럼 잘 자. 오빠." 언제나처럼, 오빠가 자기 방에 들어가는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것으로 외부에서 내 방을 엿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누군가가 마법으로 내 방을 들여다보더라도, 그는 내가 침대에 누워 자는 것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라면. 스르릉. 이 소리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다. 내 마법의 목걸이를, 마법생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전을 위해서 꺼내드는 것 말이다. 사실 실전에서는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언령마법에 의존하는 편이 훨씬 더 강력하지만,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중간과정을 처리하는 게 귀찮다는, 게으름뱅이로서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실수할 경우의 부작용이 더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의 위력이 크다는 말은, 바꿔 말해서 마법의 완성에 실패할 경우에 얻어지는 부수적 피해도 그만큼 크다는 뜻이며, 그 부수적 피해가 우리 집에 날아오는 건 정말이지 달갑지 않았다. 비명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오빠의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지팡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정 급하면 언령마법으로 돌아가겠지만. '나도 인간으로 있고 싶다고.'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마법을 쓸 때마다 보고 싶지는 않아. 사실 이건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미 나는 보통 마법사의 수준을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하긴 그러니까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런 생각도 사실은 사치였다. 되도록 빨리 적들을 물리치고, 평범한 여고생인 척 해야 한다. 그럼. [[Actuation. wizard suit]] 변신주문이 외워지자, 내 옷은 여름옷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아직 봄인데 무슨 여름옷이란 말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은 내 마법수행이 부족한 탓이다. 원래는 옷을 아무리 두툼하게 입어도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정신 문제인 건가.' 스승님이야 나 정도면 옷차림을 어떻게 하든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아직은 그게 안 된다. 물론 그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내가 그걸 해내게 되면, 나는 아마. '생각하지 말자.' 내가 그걸 해내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내 욕심인 걸까. 나는 더 이상 잡념으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되도록 빨리, 시내의 일을 해결해야 할 상황이다. 그럼. [[Actuation. telepotation(순간이동)]] 내 몸이 방에서 사라지면서, 나는 우주 바깥으로 와 있었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그 족쇄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내가 원하는 시공간에 몸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순간이동. 그런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시공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에게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워." 물론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빛 자체가 시공간에 얽매여 있으므로, 빛을 이용해 사물을 인식하는 '눈'이라는 기관은 이럴 때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인간으로서의 고정관념은, 내가 사는 우주를 '시각'으로 인식하게 했다. 허무의 공간에 떠 있는, 거대한 암흑구슬의 위용. 그리고 그 안에서 번쩍이는 수없이 많은 은하들. 나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뻔했지만, 자기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어차피 난 오늘 감상을 위해 여기에 나온 게 아니니까. 내가 원하는 위치를 향해, 나를 밀어 가는 지팡이. 시공간의 욱죄는 감각이 나를 다시금 팽팽하게 긴장시키면서, 우주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촤아악. 나는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투명해진 몸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내가 전쟁만 치르지 않았다면 여기서 아침까지 떠 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겠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관광할 틈이 없다고.' 나는 바다를 뒤로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근처를 지나는 민간 여객기들을 피하기 위해 신경을 쓰면서. 사실 바다 위에 붙어서 움직였다가는 화물선에 충돌할 우려가 크다는 점도, 내 행동에 이유를 제공했다. 여기는 말래카 해협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가 통행하는 곳 중 하나가 아닌가. 물론 해적도 많이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뭐, 내가 해적을 소탕할 수도 없으니.' 물론 내 코앞에 해적이 나타났다면 당장에 조치를 취하겠지만, 지금은 굳이 해협 전체를 뒤져가며 해적들을 잡을 시간이 없다. 일단은 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시내를 그대로 놔두면, 내일 또 오빠에게 나타나서 유혹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오빠는 진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진희도 오빠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좋아하는 건 진희 아버지. 즉 국회의원밖에 없는 셈이고, 이건 극히 곤란하다. 여러 모로 곤란하다. 내 앞에서 국회의원이 기뻐 날뛰는 꼴을 본다? 오빠가 울먹이는 꼴을 본다? '그건 안 돼.' 따라서 나는 시내를 잡아서, 그녀의 마법을 없애버려야 했다. 지금 느껴지는 마력이 더 강해진다면, 그녀에게도 큰 불행이 될 것이다. 어설프게 마법을 익히면 무슨 꼴이 나는지,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력이 이렇게 많이 느껴진다면.... "잠깐." 마력을 쫓아가던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이 한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만 다섯 마리가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마력과 마력 사이의 거리가 문제였다. 만약 이게 모두 우리나라의 바보들이 가진 마력이라면, 우리나라는 만주는 물론, 황하 이북까지 모조리 영토로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 방향은. "여긴 중국 쪽이잖아?" 어째서 중국 쪽에 이런 마력이 있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면, 나는 중국 상공에 진입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군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도록 마법으로 나 자신을 보호하고는 있었지만, 마력이 느껴졌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왜 이런 힘이 중국에? 게다가 이런 느낌은 그쪽에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쪽은. "뭐야. 일본도?" 그쪽만이 아니었다. 나는 일단 지구 밖으로 날아가서, 마력의 분포도를 살폈다. 저쪽에 보이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충돌하지 않도록, 고도를 잘 맞춰가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백 스물 하나?" 중국, 일본, 유럽, 남미,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인도...... 전세계적으로 골고루 마력이 분포되어 있었다. 물론 그게 흑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웃고 넘어가겠지만, 이 마력은 그게 아니었다. 이건 내 적들이 사용하는 마력이었다. 물론 흑마술을 배웠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기꾼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지만. "이 정도 숫자라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모두 처리하려면." 줄잡아 백 명도 넘다니. 역시 잠시동안 외출을 삼가니까, 당장 이렇게 된다. 정말 이 바보들이.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나 있는 건가. 결국 나는, 사랑의 매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며칠만 더 방치하면, 그들을 죽이는 수밖에 없게 되기에. 마법의 단물에 빠져,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자." 나는 지구로 몸을 날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상당히 바쁠 것 같아. 콰앙. 와그작. "이걸로 66명 째 처치." 대낮에. 당당히. 뻔뻔하게. 나는 독일의 한 가정집을 급습했다. 원래는 이런 난폭한 짓을 하면 안 되지만, 상대가 마법사이니 도리가 없다. 물론 순수하게 흑마술을 전공하는 사람은 내 목표가 아니니,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가 잡으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적들이다. 난데없이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차원 사이로 날려버린 자들. 그래서 꿈에 볼까 무서운 스승님을 만나게 한 자들. 게다가 지금도 이렇게 밤마다 고생을 하게 만든 자들. 그들을 제외하면 무슨 마법사가 있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 마력은 말야. "사람이 가지면 안 되는 거라고." 남이야 흑마술사라며 사기를 쳐서 돈을 벌든 말든, 그건 나와 관계없다. 하지만 나의 적들과 한패거리라면, 용서할 생각이 없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유령에게 맞아 쓰러진, 머리가 깨져서 피를 흘리며 버둥거리는 멍청한 마법사의 육신을 쳐다보았다. 그가 손에 쥐려고 한, 지팡이도 함께 말이다. 지팡이는 내가 손을 뻗자 기괴한 울부짖음과 함께 몸부림쳤지만. [[Actuation. truth(진실을 토로하게 하는 마법)]] 말을 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내 예상대로 지팡이는 다른 마법사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듯 했지만, 이미 그 지팡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조리 내 손에 쥐어진 후였다. 나는 지팡이를 손으로 눌렀고, 지팡이는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그와 함께, 내 발 밑에 깔린 마법사도 꿈틀거리다가 의식을 잃었다. 마치 실 떨어진 연처럼. 물론 내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고통스러워서 기절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속하게. 과감하게. 적의 목은 단번에 자른다." 적이 주문을 외울 틈을 준다면, 당연히 일이 귀찮아질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대낮이라서, 옆방에 있는 이 사람의 부인이 나를 보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프다. 어차피 지금은 그 부인도 낮잠을 자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수면 마법을 걸어둔 탓이긴 해도.' 나는 쓰러진 마법사의 등뼈를 도로 붙여놓고, 방에서 나갔다. 부디 오늘의 경험을 잊지 말고, 다시는 마법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래요. 아저씨. 설마 등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또 겪고 싶지는 않겠지요? 나는 그렇게 해서 사람 하나를 살렸다. 만약 그가 계속 마법사로 있었다면. '그랬으면 더 끔찍했을 거예요.' 부인의 목숨까지 위태로웠을 테니까. 나는 밝디 밝은 독일의 태양을 바라보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물론 이곳이 낮인 것은 우리나라와는 지구반대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고, 날씨 나쁜 독일의 기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를 볼 수 있는 것은 내 발이 구름을 밟고 있기 때문이지만. 뭐, 지구 전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낮과 밤이 뒤바뀌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그럼. 67번째의 문제아는 어디 있나. "다음은 중국에 갈까?" 아. 중간에 인도하고 중동지방하고 중앙아시아가 있구나. 이제 전체 인원의 반 정도를 해결했으니, 나머지 반만 더 패면 끝인가? 빨리 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패서, 머리통을 깨부수고 마법사의 힘을 없애버리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안 하면, 마법사가 늘어나는 건 둘째치고 꿈자리가 사나울 것이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말이다. 게다가 마법사를 제압하고 적과의 계약을 끊으려면, 역시 머리통을 깨부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두개골을 부수고 피를 흩뿌림으로서, 마법사의 의식은 당연히 나락으로 빠지고 마법의 사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물론 계약의 증거인 지팡이는 남지만, 사람이 없는 지팡이는 마력은 있으되, 그 마력을 마법으로 만들 수단을 빼앗기므로 힘을 거의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 뒤는 간단하다. 일격필살. 완전분쇄. 여기에 마법사의 뇌에 마법을 걸어 계약으로 인해 생긴 적과의 정신적 연결고리를 해제하면, 완벽하다. "좀 난폭하기야 하지만." 사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방법으로, 잘못 때리면 마법사를 아예 죽여버릴 수도 있는, 극히 아슬아슬한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법을 걸어 계약을 해지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인 데다가, 상대가 마법을 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이런 난폭하기 짝이 없는 수법을 써서 상대를 무력화시켜야, 일이 제대로 풀리게 된다. 그러게 왜 적과 계약을 하고 그러세요.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나는 마음속으로 한탄을 하며, 다음 상대를 찾아냈다. 이건 이란에 있는 사람인가? 나는 테헤란의 교외에 있는, 67번째의 마법사의 집으로 날아갔다. 언제나처럼 마법 주문을 외우고. [[Actuation. Permeation(투과, 삼투. 침투. 몸 자체를 유령처럼 만들어서,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도록 한다)]] 마법에 의해 내 몸이 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변화하자, 조심스럽게 장애물을 투과하여 상대의 집으로 스며든다. 마력이 느껴지는 방으로 들어가서, 투명한 채로 '마법사'의 뒤에 선다. 주의해야 할 점은, 여기서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첫 번째 마법사의 머리통을 부순지 1분도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 계속 마법사들과의 연락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상대는 이미 지팡이를 빼든 채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 마력장벽이라면, 금방 뚫고 나갈 수 있다. 나는 최대한 신속하게 그의 등뒤로 날아가서. [[Cancellation. Permeation(Permeation 마법 취소. 해지)]] 아지랑이처럼,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존재에서 다시금 정상적인 인간의 몸으로 변화한 - 내가 과연 정상적인 인간이냐는 점은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부정적이지만 - 나는, 그의 머리통을 지팡이로 내리쳤다. 그가 그제야 공기를 가르는 내 지팡이를 느끼고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사람의 신경이 신호를 전달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날아오는 지팡이를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마법장벽이 종잇장처럼 찢겨지면서, 그의 머리는 깨졌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그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고, 그는 저항도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지체하지 않고 그의 지팡이를 낚아채자마자, 나는 진실을 토로하도록 마법을 걸었다. 그 역시 다른 마법사의 위치를 모두 말했고, 그 마법사도 족쇄에서 일단은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일단'이라서 문제였지만. 내가 지금 계약의 사슬을 풀어서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계속 마법사의 길을 원한다면 그때는 더 지독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부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빈다. "자. 다음은." 이걸로 67명의 머리통을 깬 셈이었다. "아이고. 피곤해."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은, 일을 시작한 지 40초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한 명 처리에만 40초는 걸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한 덕에 아직 그 정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인간 이상의 힘을 지녔으니, 인간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지만, 적에게는 상당히 안 좋은 일일 것이다. 대처방법을 찾아낼 시간이 부족하니. "하지만 지금부터는 힘들 거야." 이미 첫 번째 마법사의 머리통을 깬지 40여 초가 지났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적들도 이미 한데 모여 나를 막기 위한 대책을 준비할 테고, 그것은 내 피로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피로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면이겠지만. "100여명의 머리통을 깨부쉈으니." 어린이들은 따라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물론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어린아이겠지만. 이 경우 내가 실제로 살아왔던 시간은 문제도 안 된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내 겉모습이 이러니까 18세 미만의 청소년인 것이다. 무조건 그런 것이다. 뭐 그 사람들에 대한 건 일단 잊어버리고. "빨리 일 끝내고 쉬자." 하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상대는 내가 잠을 자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지, 자기 집에서 나와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가지 말아주었으면 했던 장소를 향해서. 이 방향이면. "왜 하필 거기야." 이왕 가려면 여의도에 있는 둥근 지붕이 달린 집에나 갈 것이지. 내가 그곳을 부수면 국민들은 환호할 것이고, 그들의 시름이 한순간에 씻겨나갈 것이다. 하긴 국회 부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물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거기 있는 녀석들이....." 워낙 악명이 자자하니 사람들이 이를 갈지 않을 수가 있나. 나도 그런 인간을 하나 알고 있으니, 국민으로서 솔직히 한 방 날리고 싶은 곳이기는 하다. 하지만 시내가 도망간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학교잖아." 달갑지 않은 사태가 발생한 셈이다. 학교라. 혹시 숙직선생님이나 수위아저씨를 방패로 삼을 생각인가? 하지만 그러려면 근처 주택가라도 골라잡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혹시 학교를 요새로 삼아 농성할 생각인가? 다섯 마리의 바보들의 마력이 모두 그쪽에서 느껴지니, 그것도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말야. 우리 학교가 과연 요새로서 적합한 곳이야? "전혀 아닌데." 기껏해야 마법진 몇 개 그릴 공간밖에 없는 곳인데. 부실공사라도 했다면 순식간에 무너질 테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군사요새가 아닌 이상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살고 싶다면 차라리 멀찌감치 도망치는 게 더 유리할 텐데? 뭐 상관없겠지. 그들이 뭘 준비했던 상관없다. 그게 마법진이든 뭐든 간에, 나오는 대로 때려부수면 그만이다. 나는 발 아래에 놓인 서울시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조금 있으면 불어올 피 바람이, 부디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지 않기를. 그럼. "내려가자." 나는 초고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빛의 속도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서, 나는 마법주문을 준비했다. 물론 날아가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말이다. 그런데 마력의 개수가? "늘어나는데?" 이 문제아들이 마법진을 그리기는 그리는 모양이다. 무슨 마법진인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어지간한 마법은 안 통할지도 모른다. 자세하게 상황을 살펴볼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대의 마력을 느끼려고 했다. 마법진에 배치된 마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해. 아무리 내가 강력하다고 해도, 섯불리 적의 함정에 걸어 들어가면 귀찮아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잠을 못 자." 나는 수면시간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든 내가 잘 시간만큼은 빼앗길 수 없기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놓고 싸울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법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서, 주문을 외웠다. 사실 이런 걸 주문이라고 하는 것도 곤란하기는 하지만. [[Actuation. Isolated world(고립된 세계), 2 !]] 학교 주변 지역에 이중의 결계 마법이 쳐지면서, 학교는 바깥 세계와 완전하게 고립되었다. 이렇게 해두고 나면 안에서 핵폭탄이 터지더라도 밖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마법을 쓸 수 있어서 유리했다. 물론 이 마법이 적의 저지를 받은 적은 없다. 적들 역시, 자신들의 정체를 외부에 퍼뜨리기 싫어하는 건 나와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안에 사람이 몇 명 있지? 하나. 둘. 셋." 숙직 선생님 두 분, 그리고 수위아저씨 한 분이 학교 안에 있었다. 물론 그 분들은 본 건물에만 있고, 특별활동부가 몰려있는 옛날 건물이나 체육관에는 거의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순찰하는 분이 또 계시네? 이렇게 되면 이 분들의 안전을 지켜드려야 할 의무가 생긴다. 원래는 안쪽의 결계로 다섯 바보를 잡아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잡을 사람이 늘어난 것 같다. 뭐, 그럼 하면 되지. 하루 이틀 하는 짓도 아닌데. [[Actuation Reduction(축소). 1 ! Sleep(수면 마법) !]] 우선은 2개의 결계 중 내부 결계만을 수축시켰다. 이 결계의 마법막을 잘 조작해서, 모든 사람을 막으로 뒤집어 씌워야 한다. 물론 그들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잠을 자게 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적들과 싸울 경우, 중간에 끼어들 위험이 있는 민간인들에게는 이렇게 마법을 걸어왔고, 아직까지는 잘 먹히고 있었다. 잠시 졸린 눈으로 억지로 버티던 숙직 선생님들이 완전히 잠들어버리고, 수위아저씨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정작 목표물인 다섯 바보에게는. 쾅. "막아냈어?"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거친 소리와 함께, 내 마법은 퉁겨 나가버렸다. 이건 뭐야. 주문마법에 대해 저들이 그렇게 잘 알고 있었나? 하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쓴 마법은 주문마법으로 치면, 최소한 레벨 8에 해당하는 복잡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시공마법 레벨 8이 애들 장난인 줄 아나. "말도 안 돼." 물론 내 경우는 주문마법을 배운 게 아니라,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정식으로 내가 배운 마법은 주문마법이 아니라 언령마법으로, 힘있는 말을 이용해서 힘을 다루는 것이었다. 물론 이쪽이 주문마법보다 월등히 어렵기도 하고, 그 위력도 주문마법에 비해 월등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주문마법이 아니어서,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그 위력은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옛날의 대마법사들이 개발해 낸 것이 주문마법이고, 그 사용은 상대적으로 언령마법, 아니 '마법을 뛰어넘는 마법'에 비해 월등히 편리한 편이었다. 물론 이건 지구의 마법사들이 개발한 게 아니니, 지금의 흑마술사들과는 별반 관계가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떻게 저 녀석들이. "레벨 8을 막아?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게다가 레벨 8을 익혔다고 해도, 마법의 응용법을 익히려면 그 시간이....." 이런 건 단순히 시간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지구인 조무래기 주제에, 제대로 마법수행도 하지 않았으면서, 레벨 8이라니? 게다가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마법을 택해서 마법진을 만들다니? 이건 뭔가 말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법을 익힌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1년도 안 익혔을 텐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간단히 예를 들면, 권총을 쏘는 법은 조금만 들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막상 권총을 제대로 다루는 사람은 그 중 일부에 불과하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그 총의 탄환을 목표에 정확히 맞추는 것은 천지차이인 것이다. 주문마법도 이와 같아서, 마법주문을 단순히 외우기만 하는 것과, 그 주문을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완전히 수준이 달랐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졌을 시간은, 기껏해야 2, 3일에 불과할 텐데? 1년이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지만. 혹시 저 녀석들, 천재 아냐? "쉽지 않겠어." 물론 저 방어능력이 단지 '한 가지 주문만 외워서 달성한' 것이라면 말은 된다. 아무리 레벨이 높은 마법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익혔다면 지금의 상황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처음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별 도움이 안 될텐데? 주문마법이 내 고유의 마법인 '마법을 넘는 마법'에는 미치지 못해도, 익히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레벨 11까지 알고 있는 나는 알 수 있다. 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지팡이까지 스스로 만들 줄 아는 나에게는. 그럼. "혹시, 나를 상대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렇다면 저런 현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다른 마법에 취약점을 드러낼 것이다. 무조건 높은 레벨의 주문을 외울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강한 것은 아니니까.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지 않으면, 결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부터 그걸 좀 가르쳐줘야 할 것 같다. 만약 상대가 정말 몇 개의 주문만 골라서 외운 게 사실이라고 하면. [[Actuation. Spell cancelation(주문 취소. 상대의 주문을 취소해버린다)]]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실험 좀 해보자. 나는 역주문마법을 꺼내서 발동시켜 버렸고, 그 마법은 당장에 그 진가를 드러냈다. 원래 이것은 상대의 주문마법을 억지로 취소시켜버리는 것으로, 주문마법에 자꾸 의존하는 인간들에게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남은 것은 마법을 발동시키는 근원체간의 힘싸움이지만, 적어도 나는 내 지팡이를 그리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노련한 마법사라면 다시 역주문마법을 걸어서 대항하든가, 아니면 견제마법을 걸거나 마법진을 다시 만들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그게 가능할까? 내가 다른 주문을 날리기도 전에. 와그작. 그들의 마법진이 잠시 번쩍거리다가, 모래성처럼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다섯 명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제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을 마법은 더 이상 없고,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콰직. 우선 하나. 나는 한 명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마법사를 뒤로하며 다음 상대에게 덤벼들었다. 그가 미처 마법을 완성하기도 전에. "두 사람 !" 그의 머리통 역시 터져 버렸다. 물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렸으니 목숨은 건질 테지만, 마법을 다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때리는 거니까. 사실 두개골이 부서지는 건 단순한 구타라기에는 좀 심각하지만, 이대로 어설픈 마법사로서 활동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럼 다음 상대는. "세 사람 !" 바로 옆에 있던 마법사 역시, 맥도 못 추고 쓰러졌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재빠르게 밖으로 달아났다. 하긴 그 쪽이 더 낫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마법진의 도움도 없이, 과연 레벨 8짜리 시공마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이 다른 마법을 발동시키기 전에, 나는 번개처럼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내가 본 것은. "이사장님, 죄송해요." 이 녀석들이 마법진을 편 곳은, 하필이면 이사장실이었다. 이거 나중에 꼭 복구해야겠네. 창문을 깨놓고 그냥 넘어갔다가는 뒷일이 귀찮아지니. 나는 일단 사과한 후, 밖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사과해봐야 소용없는 게. 와장창. 단순히 지나간 것만으로, 나머지 유리창들도 모두 부서져버린 것이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 충격파가 생긴 탓인가? 뭐 나중에 마법으로 복구해버리면 되겠지. 지금은 내 앞에 있는 적들을 처리하는 게 더 급하다. 특히 시내. 감히 오빠에게 마법을 걸려고 하다니. 상대는 주문을 외우면서 달아나고 있었지만, 내 쪽이 훨씬 더 빨랐다. 마법의 이름만 외워도 마법이 완성되어 발동될 정도의 주문마법을 가진 나와, 길게 주문을 외워야 간신히 마법 하나가 나오는 저들과는 수준이 틀린 것이다. 사실 이름만 외워도 마법이 튀어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마법 레벨 10을 익힌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Actuation. Fireball(파이어 볼). 2 !]] 우선은 간단한 마법부터 한 방씩. 2개의 파이어 볼이 두 마법사에게로 날아갔고, 그대로 폭발했다. 단순한 파이어 볼치고는 너무 거대한 폭발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상대가 추락해줄 것이다. 그런데 가만. "뭐야. 또?" 그들은 다시금, 내 마법을 막아낸 것이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에서 뭔가가 빛나고 있다. 마법반지에 의한 방어막인가. 그제야 나는 그들이 어떻게 아까 내 마법을 막아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며칠 동안에 레벨 8의 마법을 익힐 정도로 실력자였던 게 아니고, 한 가지 마법만 죽어라 익힌 경우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마법이 걸린 도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아마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에게서 얻은 것이겠지. 그러나 그런 걸로는 처음부터 나를 상대하는 게 무리다. 간단하게 끝내주지. [[Actuation. mind break(정신붕괴. 상대의 정신력을 모조리 붕괴시킨다)]] 시내는 그 마법에 정통으로 걸렸다. 정신마법 레벨 8짜리의 공격에는 그녀도 별 수 없었던지, 그대로 눈이 뒤집힌 채 아래로 추락해버리는 시내. 사실 시내가 오늘 오빠를 유혹할 때의 마법을 보면, 이 마법에 당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시내가 만약 정신마법을 좀 더 익혔다면 오빠의 의지를 조금씩 침식해가지 않고, 단번에 오빠를 세뇌시켜 버렸을 것이기에.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고, 그래서 '그런 힘을 지닌' 레벨 8의 정신마법에 맥을 못추고 굴복한 것이다. 정신이 사라져서 백치상태가 된 시내를 내버려두고, 나는 마지막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안 돼 !" 그는 시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급히 아래로 날아가려고 했다. 아마 동료를 구하려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그녀의 목숨을 재촉할 거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사실 당신들이 마법사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당신들의 목숨은 끊어질 위기에 몰렸다고. 이 바보들아. 그러니 나는 그의 움직임을 막아야 했다. 아무리 시내가 오빠를 유혹한 나쁜 계집애라도, 일단은 같은 부의 부원이니 친구이다. 친구가 죽음의 길로 걸어간다면, 그것을 막는 것도 친구로서의 도리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방해자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이걸로. [[Actuation. Fire storm(불폭풍)]] 나는 극히 평범한, 레벨 5짜리 원소마법을 그에게 날렸다. 물론 평범하다고 해도, 거대한 불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그에게 불어 가는 모습은 결코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물론 이걸로 그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벨 3짜리 원소마법인 파이어 볼과는 달리, 이것은 레벨 5짜리 마법이다. 과연 이것을 그가 쉽게 막을 수 있을까. 설령 막는다고 해도, 과연 이걸 막으면서 시내에게 접근하는 게 가능할까. 방어마법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다른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정신마법이 레벨 10에 달해야 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평범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지금 공중에 떠 있기 때문에, 비행마법과 방어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시내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도 자기 목숨이 귀한 줄은 알 테니 여기서 무리를 하지는 않을 테고, 그럼 그 동안에 시내의 마력을 없애버리면 되는 것이다. 일단 마법사가 아니게 되면 그녀를 결계로 가두는 것도 간단해지고, 그럼 적은 저 녀석 하나만 남을 것이다. 그게 내 계산이었고, 그가 불의 폭풍을 보고 당황하는 것까지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파앙. "아니잖아?" 내 계산은 약간 빗나갔다. 상대가 마법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굳이 2가지의 마법을 동시에 쓸 필요가 없었던 상대는 각오를 굳히고 내 마법을 뚫은 것이다. 사실 레벨 5의 마법은 강력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위력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고,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쏜 게 아니었기에 그 위력은 더욱 약해졌다. 그리고 그런 값싼 동정의 결과는. 탕. 상대는 하늘에서 떨어지던 시내를 받아내었다. 생각보다는 비행마법의 사용이 능숙한데. 조금은 감탄을 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 시내를 구했다는 것은, 앞으로 시내의 운명이 그만큼 험난해진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이대로 간다면, 나는 결국 두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장래가 아니라, 눈앞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이 녀석, 싸움에 익숙한데?' 여태까지와는 달리, 이번 마법사는 가볍게 놀아줄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마법의 수준은 나와 비교할 수가 없지만, 그는 그 자신이 가진 마법과 장비들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머리를 현명한 판단에 썼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각오를 다졌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해야겠어.' 지금까지처럼 장난스런 대응을 하다가는, 상대가 빠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그럼 어떤 마법으로 해치워야 할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상대는 레벨 5의 마법을 막아낼 능력은 있어도 레벨 8의 마법을 막아낼 능력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마법을 써야 할까. 레벨 6? 레벨 7? 레벨 8?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결계의 레벨은 8이고, 그걸 감안하면 레벨 8 이하의 마법을 동원하는 게 안전했다. 같은 레벨의 마법이 서로 부딪칠 경우, 잘못해서 결계가 깨지게 된다면 큰일이 아닌가. 그럼 어디 한 번. [[Actuation. gravity cannon(중력 포)]] 나는 레벨 7의 시공마법을 선택했다. 마법을 발동시키자마자 지팡이의 끝에서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파가 두 애송이 마법사를 향해 뻗어나갔다. 레벨 8은 너무 강력하고, 레벨 6은 불안하므로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결과 레벨 7의 마법이 선택된 것이고, 이 정도라면 아마 두 사람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이 정도의 위력만 해도 인간을 상대로는 터무니없이 강력한 마법이니까.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중력파가 휩쓸고 지나가는 곳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나는 결계 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했지, 안에 있는 건물까지 보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쿠릉. 쿠릉. 쿠르릉. 중력파가 결계 내부의 공간을 휩쓸자, 학교 건물들은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고, 두 마법사를 지키는 마법의 방어막이 부서질 듯이 울어댔다. 중력파가 끊임없이 두 사람을 몰아치고, 방어마법에 부딪친 중력파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여력은 학교 전체를 뒤흔들었고, 결국 건물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건물들은 내진설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지축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콰르릉. 새로 지은 건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학교 건물은 폭음과 함께 무너졌다. 이거 혹시 부실공사 아냐?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중력파를 맞는다면, 어떤 건물이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두 마법사의 그림자도, 무너지는 건물이 일으킨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겉으로만 본다면. "해치웠나?" 하지만 안 보인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마력은 아직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이 대체. 분명히 중력의 포탄을 맞아놓고도 아직도 살아있다니. 물론 죽일 생각으로 사용한 마법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이렇게 강력한 마법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니. 그러나 내 느낌이 맞는다면. '반지가 깨진 건가?' 반지의 마력은 분명 사라졌다. 물론 이게 속임수일 수도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가지고 있다. 이럴 때 쓸 마법이라면 역시. [[Reduction 1]] 내가 주변에 만들어둔 결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고, 안쪽의 결계는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가두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실제로 학교에 있던 수위 아저씨나 선생님들이 무사한 것은, 바로 내부의 결계가 만든 방어막에 갇혀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지금까지 결계의 감옥이 먹히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기도 한 마법반지가 없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우웅. "부서졌구나." 시내와 그 마법사가 사이좋게, 결계 내부에 갇힌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가둔 마법구슬은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고, 쓰러진 시내를 끌어안은 그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반지가 깨지면서, 충격을 받은 건가. 나로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저들은 저항할 수 없을 것이므로. "곧 살려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만약 그들이 나에게서 탈출한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주문마법이라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니까. 사실 주문만 말로 하면 마법이 실행된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 실상을 아는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주문마법을 마구 남발하면서도 멀쩡한 이유는, 주문마법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 부작용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나처럼 지긋지긋할 정도의 마법수행을 했을까. 그건 부정적이었다. 그 정도로 마법을 갈고 닦았다면 벌써 레벨 10짜리 마법이 마구 튀어나왔을 것이고, 마법반지에 의존해서 내 공격을 막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러니 그들은 여기서 마법사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들의 마법을 없애기 위해 '그 마법'을 준비했다. 스승님이 나에게 가르쳐 준, 진정한 마법을. 하지만 그 순간에. 쾅. "뭐야?" 난데없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그들을 가둔 결계마법이 갑자기 파괴당한 것이다. 시내와 그 마법사를 가두었던 결계가 파괴되면서, 그 에너지가 사방으로 분출되었다. 그것은 마치 빛의 꽃을 연상시키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어둠의 열매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마법이 파괴당한 거지? 저건 시공마법 레벨 8에 해당하는, 엄청난 고급 마법이었는데. "믿을 수 없어." 이런 바보 같은 대사를 내가 할 줄이야. 이건 여태까지 상대했던 풋내기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대였다. 레벨 8의 마법을 풀다니.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거지? 만약 상대가 마법도구를 사용해서 내 마법을 깼다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단지 무기가 좋아서 그랬을 거라고 납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마법으로 내 마법을 부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것은 분명. "레벨 8짜리 역주문마법?" 그가 사용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역주문마법. 즉 마법사의 주문을 깨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을 역으로 돌려서 분해시켜버리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원소마법과 달리 무력화시켜야 하는 마법을 이해하고 있어서 사용이 가능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력만 강하다고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농담이나 우연으로 저런 마법이 튀어나올 수는 없다. 저건 주문마법에 대해 이해하고, 오랫동안 수련을 쌓아야 쓸 수 있는 마법이다. 그렇다면 상대는 여태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정도라면 최소한 레벨 8의 마스터, 즉 주문마법의 고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마법반지를 또 숨기고 있어서 저런 기술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역주문마법이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만약 그게 마법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이제 상대를 레벨 8의 마스터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상황은 매우 곤란해진다. 지금 내가 주위에 쳐둔 마법은 레벨 8이고, 상대가 레벨 8의 마스터라면 그를 능가하기 위해서는. '결계를 깰 정도의 마법을 써야 해.' 큰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잘못하면 서울시 전체가 전투에 휘말릴 가능성도 생긴 것이다. 결계가 있는 동안이야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주변에 피해가 없지만, 그게 깨진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고, 상대는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그런 대학살극을 조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중간에 도망쳐 버린다면, 꼼짝없이 내가 그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별 수 없지. '레벨 9의 마법을 쓸 수밖에.' 물론 결계가 파괴될 위험이 있지만, 위력을 좁은 범위 내에 한정하면 어떻게든 녀석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물론 스승님이 가르쳐 준 그 마법을 쓸 수도 있지만, 그건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다. 물론 그 마법이 내 비장의 무기인 탓도 크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인 문제가 더 컸다. 그런 힘을 발휘할 때마다, 나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자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난 사람으로 남고 싶어.' 적어도 오빠를 프라이팬으로 때리며 깨우는 여동생으로,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도 해보는 여자아이로, 그리고 이 지구 위에서 평범한 삶을 보낼 수 있는 여인으로 살고 싶다. 언젠가는 내가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싶다. 그래서 내가 지구에 돌아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난 질 수 없어.'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국 사치이자, 망상에 불과했다. 어차피 지금 내가 보여주는 힘만으로도, 인간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으니까. 친구들이 내 힘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그들 역시 그 점에 동의할 게 틀림없었다. 그것이 나에게 드리워진, 음울한 진실의 그늘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빌 수밖에.' 이런 게 바로 억지요, 절대 불가능한 소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인간 여자아이의 삶을 체험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삶을 지키기 위해, 상대에게 마법지팡이를 겨누었다. 그러나 내가 마법을 발출하기 전에. "에잇 !" 그가 갑자기 시내를 붙들더니, 아직 의식도 없는 시내를 나에게 던져버린 것이다. 나는 시내를 받으려고 했지만, 이런 경우에 적이 쓸 마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시내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쓴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의심이 가시지 않은 나를 상대로, 적이 주문을 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내에게. [[*&#zombie bomb(좀비 폭탄)]] [[Actuation. spell cancelation(주문 강제 취소)]] 주문의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마법취소주문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어째서 저 녀석이 이런 주문을? 내가 놀란 것도 당연한 것이, 그가 걸어온 마법은 동료에게 걸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Zombie bomb이라니? 하필이면 '좀비폭탄'이라니? "미쳤어." 지금 녀석이 시내에게 걸어온 주문은, 죽음마법 레벨 8짜리의 강력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마법의 레벨이 아니라, 그 마법이 지닌 효과였다. 그 마법에 걸린 사람은 우선 시체로 변하고, 그 직후에 죽음의 힘을 내포한 폭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죽은 몸이 되면, 그녀는 폭발하는 길밖에 택할 수 없었다. 주문이 시내의 몸을 휘감고, 곧 그녀의 몸이 검붉게 변했다. 피부가 갈라지면서 검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파직. 빛과 함께 시내를 죽음으로 몰아넣던, 저주스런 마법이 사라졌다. 주문취소마법이 제때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몹시 위독한 상태였고,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문취소마법은 상대가 건 '좀비 폭탄'의 마법을 멈추게 했을 뿐, 이미 진행된 결과를 무로 돌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검은 피가 운동장 아래로 낙하해 가는 걸 보며,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저 자식이.' 이게 무슨 짓인가. 자기 동료에게 이런 마법을 걸다니. 만약 시내가 지금 정신이 깨어 있었다면,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못 이겨 발작을 했으리라. 그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고,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뼈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부패의 독기는 뇌수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그나마 마법이 취소되는 바람에 추가적인 피해는 면했지만, 썩어 문드러진 살에서 풍기는 냄새는 내 살을 도려내는 듯 했다. 그녀를 안은 나의 왼손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내 감정에 불을 질렀다. 아무리 이 계집애가 오빠를 유혹하는 나쁜 여자라지만, 그게 이런 식의 처참한 죽음을 맞을 이유는 아니었기에. 게다가 그녀는 내 친구였다. 비록 아주 친한 친구는 아니라도, 같은 부에 속한 친구인 것은 틀림없었다. 무의식중에 경련을 일으키는 시내의 몸을 보며,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온 것은. [[Actuation. Dragon breath(드래곤 브레스) !]] 다음 주문을 외우고 있던 상대방이, 내 목소리를 듣고 기겁했다. 내가 외운 마법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소마법 10레벨의, 최강의 생물 드래곤이 뿜어내는 죽음의 숨결. 드래곤 브레스라는 마법이었다. 그 절대적인 에너지량으로 인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무서운 마법. 그것이 그를 겨눈 것이다. 그가 사색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를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동료이기도 했던 시내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검은 피가 흐르는 만큼, 내 동정심도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어." 내가 오른손에 든 마법지팡이가 빛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빛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외치기만 하면, 그는 죽으리라. 그리고 나는 죽음을 선고하는데 있어서,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짓을 한 자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힘을 탐내었고, 자신과 함께 하던 동료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한 자. 그의 목숨을 과연 살려둘 가치가 있는가. 고결한 마음을 가진 성인이라면 가치가 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를 살려둠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지해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으므로. [[Red ! Fire !]] 물론 이렇게 외치지 않아도 마법은 발동될 것이지만, 너무나 분노한 내 마음은 그대로 내 입 밖으로 나왔고, 마법진은 즉시 붉은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것은, 절대의 힘을 지닌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이 세상이 처음 태어났을 때의, 우주공간이 생겨났을 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열기가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조금 전에 시내를 죽이려 한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며 반지를 손으로 짚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붉은 용의 숨결이, 상대에게 뻗어가고. 콰앙. 그 불은 상대를 순식간에 불태웠다. 그의 고깔모자가 불의 폭풍에 휘말리면서 타버리고, 그의 옷도 모조리 타 들어갔다. 아니, 타기도 전에 모조리 그 옷들은 증발해버렸고, 그의 마법도구들도 자신의 힘을 잃고는 부서져버렸다. 그는 황급히 오른손에 마법을 발동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마법도구가 모두 증발하는 판에 오른손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손가락의 피부가 먼지처럼 사라지면서, 근육과 뼈가 드러났고. "으악 !" 그의 근육이 불에 타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것은 그의 뼈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몸 전체가 마치 여름 햇빛에 녹아 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뭉개지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에 그의 오른쪽 반신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왼쪽 반신도 마치 아침안개가 지워지듯 녹아들기 시작했다. 비록 그의 반지는 왼손에 있었기에 아직도 살아서 빛을 뿜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반지의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미주 선배?" 그랬다. 그는 내가 전에 본 적이 있었던 불량한 학교 선배인, 강 미주의 얼굴이었다. 물론 선배라고 불러줄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순간적으로 손길이 늦추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동정이 나를 잡아당긴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저 바보가." 그가 무엇을 택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일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린 그의 마음에서 나는 진실을 들여다보았고, 그가 왜 이런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그렇게 부러웠어요?' 물론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는 내 말을 들을 수 없기에. 귀가 녹아버리는 판국에, 어떻게 내 말을 들을 것인가. 하지만 내가 약간 손을 늦춘 것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가,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차 !" 그는 마법사로서는 3류에 불과했지만, 그가 지닌 마법의 반지는 그렇지 않았다. 반지가 빛을 내면서 그의 몸은 사라졌고, 드래곤 브레스는 허무하게 하늘로 날아가 말았다. 물론 그 상태에서 그가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긴 했다. 머리 일부와 목, 그리고 몸통 일부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심장은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로. 하지만 마법이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현실로 만들기 때문에 마법인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미 그를 추적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발사한 마법의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둔다면 학교 주위에 친 결계는 박살날 것이고, 모든 이들에게 거대한 빛의 기둥이 보이게 될 것이기에. 결국 '그 마법'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나에게 익숙한 마법은 역시 그것이니까. ((파괴의 힘이여. 나에게 들어 오라. 너를 물질이라는 틀에 구속할 것이니 파도치는 네 모습을 틀에 맞추어라. 너는 질서를 찾을 것이고, 법칙은 무너져 내릴 것이니)) 이번에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므로, 마법을 쓰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내 마법이 눈 앞의 거대한 빛줄기를 잡아 묶었고, 곧 드래곤 브레스의 강대한 힘이 순식간에 모래 알갱이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지만, 그러니까 이 마법이 위대한 것이다. 물리를 맡은 영미 선생님이 이걸 보시면, 끝없이 물어보시리라. 어떻게 한 거냐고.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끝없이 증가한다는 대원칙에 위배....라." 바로 이것이었다. 물리법칙조차 지배하는 무서운 마법. 주문마법은 이 마법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주문마법의 이상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말만 꺼내면 이루어지는 마법이라니. 모든 이들의 꿈이자, 정말로 마법다운 마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게 '단순한 말'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황을 수습했으니. "다음으로 할 일은." 학교 수리와 시내의 치료, 그리고 결계의 정리인가. 그 외에도 일본과 호주의 얼치기 마법사들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 뿐인가. 메주 선배. 아니, 미주 선배의 행방을 쫓는 일도 남아 있다. 물론 미주 선배는 이미 내 추적권에서 벗어났지만, '그 마법'을 꺼낸다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미주는 마법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나는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과 똑같이, 얼치기 마법사들을 상대하다가 말이다. 그때도 그녀는 마법의 나이프를 가지고 있었고, 힘을 원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힘을 원한 동기부터가 상당히 불순하지만. 못된 짓을 해서 나에게 맞았다고, 더 강한 힘을 원하다니. 이런 심보를 봤나. 잘못했으면 반성을 할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마음보다는 힘을 택했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는 것보다, 깡패처럼 날뛸 힘을 원한 것이다. 가장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다니. 그녀의 최후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래 가지고 찾아낼 이유가 있을까?" 억지로 말려봐야 소용이 없다. 이미 나는 그녀의 나이프를 분지르고, 기억을 지워버린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다시 마법사로 돌아왔고, 또 나에게 맞아서 도망쳤다. 아마 그녀는, 내 손에 죽을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어쩌면 다음에 미주를 만났을 때는, 목숨을 거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더 이상의 악행을 하지 않도록 하려면. "칫." 기억을 완벽히 지웠는데도 또 힘을 찾아 나락에 빠지다니. 이건 근본적인 문제였다. 물론 작정하고 유혹하는 상대를 뿌리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도 모르는 힘을 내미는데, 그걸 덥석 물다니. 상대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힘을 나눠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바보같이." 나는 달을 쳐다보았다. 결계 너머에 있는 푸른 달을. "드디어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는 뜻인가. 하지만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런 극한상황에까지 몰린 후에야 고백을 할 수 있었다니. 널 돌보느라 미인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안 봐도 훤하다. 뭐, '지상최강의 바보커플'로서는 나름대로 분투한 셈인가. 어쨌든 학교 신문의 취재는 이쯤 하기로 하고." 나는 문희와 오빠의 대화를 들으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시내를 구한 후, 모든 일을 마친 나는 오늘도 평범한 여동생으로 행세하고 있었고, 그것은 어제의 난투극에 비하면 꽤 편한 것이었다. 다만 고백도 제대로 못해서 빌빌거리는 오빠를 돌보는 게 좀 힘들었지만. '오죽하면 나까지 동정을 다 받겠어. 정신 차리라고. 오빠.' 뭐, 일단 오빠가 고백했으니 문제는 해결된 셈인가. 아직 진희가 오빠에게 답을 주지 않기는 했지만, 최소한 전보다는 진전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억지로라도. 물론 문제가 하나 더 남아있기야 하지만. '시내는 과연?' 어제 시내를 치료하고, 그녀의 기억을 없앤 후에 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하루만에 다시 마법사로 돌아오지야 않겠지만, 앞으로 그녀를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다. 분명히 적들은 그녀에게 다시 접근할 것이고, 다시금 마법사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할 것이다. 만약 시내가 자신의 어두운 욕망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그녀에게 불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이번엔 쉽지 않을 걸.' 나는 어젯밤에 머리통을 깨부순 사람들에게, 마법의 깃털을 심어두었다. 만약 엉뚱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깃털이 나에게 소식을 알려주겠지. 다른 사람을 감시한다는 것은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그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마법사의 유혹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번엔 그들을 살려줄 수 없다.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 것이니, 그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여태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고. "내가 무슨 폭력남편이냐." 이렇게 문희와 떠들며 실없는 소리나 하는 오라버니였다. 오라버니의 경우 내가 기억을 지워준 게 아니라, 매혹의 마법을 걸던 시내의 마법이 풀리는 바람에 그녀를 잊어버린 것이니, 아직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오빠가 시내를 기억해낸다면, 그 뒤로 일이 꼬이게 될 것이기에. 한 사람의 입을 막지 못하면 나중에는 수 백 명을 죽이더라도 소문이 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으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오빠는. "시내?" 오빠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다행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강 미주. 만약 그녀가 계속 그런 마음을 먹고 나에게 덤빈다면, 이번에는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부디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래.' 수평선 아래의 달을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달 아래에서 편안하게 날아가는 나날은 과연 언제나 올까.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9화 부장님 우리 부장님 (1) "당신은 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길을 가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사실 어디를 가든 사람은 길 위를 걷기 마련이고, 그것은 자전거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비행기조차, 아무 곳이나 날아다니지 않으며 대개는 일정한 코스를 따라 날아가게 된다. 따라서 사람은 길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길거리의 사람들이 말하는 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와는 다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대개는 눈썹이 휘날리게 몸을 피하기 마련이다. 특히 나처럼 바쁜 사람이라면 더더욱. "난 안 그래도 할 일이 많다고." 다시금 강조하지만, 나는 바쁜 사람이다. 모범생으로서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며, 운동도 잘해야 한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학생의 기본이기 때문이고,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은 옆의 어느 나라의 지도층처럼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함이며, 운동을 잘해야 하는 것은, 내가 축구선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령 예를 들어. "너, 흑마술에 관심 있니?" 아. 이건 아냐.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은, 어느 화창한 4월의 봄날의 일이었다. 그 날도 나는 여전히 성실한 학생으로서, 성실한 축구선수로서, 그리고 진희의 성실한 애인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진희의 애인이 된 건 아니다. 그 날 내가 진희에게 고백한 후, 그녀는 아직도 답을 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모든 이가 나와 진희를 애인 사이라고 인정해주었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 특히 연미 누나의 경우. "와. 드디어 문구가 고백했어? 오래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있네. 어쨌든 잘 했어 !" 고백 후에 연미 누나가 보인 첫 반응은 이것이었다. 하긴 그동안 내가 남자답지 못하게 고백도 못한다며 마구 구박하던 연미 누나로서는, 이번 일이 매우 기뻤던 모양이다. 다만 진희 아버지에게는 이 소식이 상당히 타격이 되었던 듯, 고백 다음날에 진희의 전학문제가 논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 대부분이 그녀의 전학에는 반대했으므로, 결국 진희의 아버지도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만 나를 동정해서 전학을 취소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럼 다음 선거에선 어쩌려고 그래요? 위장전입 시키다가 표 깎이고 싶어요?" 바로 이것이었다. 진희 아버지는 정치가이고, 국회의원으로서 선거를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을 받든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은 안 한다. 되지도 않을 일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진희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후보자들이 아빠한테 진희의 거주지와 학교의 불일치 문제를 물고늘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세요?" 연미 누나의 이 지적이 아니더라도, 딸의 거주지와 학교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면 누구라도 '특혜'라는 생각을 할 것이고, 그것은 정적들에게 이용되어 선거전에 막대한 타격을 줄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진희를 함부로 전학시켜서 다른 명문 고등학교에 집어넣는 것은 무리이고, 진희 아버지에게는 미칠 일이지만 우리 동네에는 대업고등학교 정도의 명문고가 또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진희의 전학은 당연히 곤란했고, 그의 야망은 실패하고 말았다. 파이팅. 연미 누나. 하지만 그는 결코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상황이 불리함을 안 그가 경호원들에게 한 말은. "모두 정신차리고, 그 녀석이 진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 알겠나." 하지만 그건 사실 불가능한 임무였다. 학교 밖에서 나와 진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는? 아무리 검은 양복들이라고 해도,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학생들을 쫓아버리는 건 곤란하고, 결국 학교 안에서 나와 진희가 만나든 말든 그들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선생님들에게 뇌물과 협박과 압력을 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상당히 청렴결백한 편이다. 정상적인 학교가 아니라고 경악하지 마라. 이런 학교도 있는 법이다. 이 사회에는 부패한 선생이 있는가 하면, 모두의 모범이 될만한 선생님들도 계시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좋은 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진희를 만나지 못하는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여기가 부정부패가 만연한 학교였다면? '그럼 난 진희와 같은 반이 되지도 못할 걸.' 아니, 아예 퇴학당했을지도 모른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퇴학이냐고? 국회의원이 그런 거 따지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거 봤냐. 게다가 진희 아버지의 경우는 초선의원도 아니고 재선의원도 아닌, 꽤 고참 수준의 의원'님'이어서 최고상류층과 이런 저런 연줄로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의원 중에서도 권력이 강대한 편이다. 왜 저런 인간이 몇 번이나 당선되었는지는 정말 불가사의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 인간을 찍은 적이 없다니 일단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나는 아직 투표권이 없고, 정말 불행히도 여동생도 투표권이 없다. 그러니 그 인간이 낙선하는 걸 보려면, 아직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 지금은 진희와 마음껏 만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한 일이지만. "3년이라면." 그렇게 긴 시간이라면, 그 동안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까지 다 해치우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물론 나와 진희는 도덕적이고 건전한 고등학생이니, 이런 짓이나 저런 짓까지는 해도 절대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임약을 사고 싶어도 우리 동네에서 그걸 샀다가는 당장 어마마마의 불벼락이 떨어질......... 아. 이게 아니구나. 어쨌든 거기까지는 안 간다 ! 졸업하자마자 거기까지 갈 수도 있기야 하지만....... 아. 어쨌든 지금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 아직 난 진희한테 대답도 못 들었으니까 ! "빨리 좀 해줘." 그래야 나도 진희와 이런 짓, 저런 짓을 할 수 있고, 데이트도 할 수 있으며, 둘이 힘을 모아 닭살커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짓'은 나중에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면 하기로 하고. 일단 이렇게 건전한 학생으로 있어야 선생님들에게 불량한 인간으로 찍히지 않는다. 장래에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도, 당분간은 아이를 가지면 안 되고.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참 밝히는 인간 같다. 여동생이 이걸 보면. "오빠 저질 !" 이렇게 외치며 주먹을 날리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여동생은 항공우주부로 갔다. 따라서 나를 때릴 인간은 여기에 없다. 다만 진희도 같이 갔다는 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진희가 알면 교제승낙이 아니라 교제거부라는 대답을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그건 넘어가자. 축구부로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던 나에게. "문구야." 누구지?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에는 반장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 얼굴색이 왜 저래? 흡혈귀한테 피라도 빨렸나? 완전히 새하얗게 된 게, 뭔가 유령이라도 본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왜?" 간단명료하게 묻는다. 사실 내가 반장에게 불릴 이유 같은 것은 없으니까. 내가 오늘 청소당번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희와 '그런 짓'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걸린 것도 아니며, 술이나 담배를 한 것도 아니다. 물론 난 일진회같은, 폭력단체에 가입한 적도 없다. 그러니 내가 반장에게 불릴 이유는 없다. 반장이 저런 표정으로 다른 학생을 불렀다면, 그건 그 학생이 엄청난 사고를 쳐서 교무실로 잡혀간다는 걸 알려줄 경우밖에 없는데, 솔직히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난 이래 보여도 모범생인데. 그래서. "무슨 일인데? 마진아?" 그렇다. 우리 반 반장의 이름은 장 마진. 절대로 동네 슈퍼마켓에서 거론되는 물건의 마진, 즉 경제관계에서의 차익(差益)을 가리키는 마진(margin)은 아니겠지만, 모든 이들이 그 마진이라고 알아듣고 있다. 어차피 내가 반장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니, 반장의 이름에 어떤 한자를 쓰는지는 관심이 없고, 따라서 그 오해를 고쳐줄 생각은 없다. 난 이미. '지금 있는 여자만으로도 정신 없다고.' 소음공해의 주범인 문희나, 지상 최강의 악당인 여동생, 그리고 고백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진희. 이렇게 셋이나 여자가 있다면, 더 많은 여자를 탐낼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들에겐 여자가 많으면 좋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게 아니다. 세 여자에게 시달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여기에 연미 누나까지 끼어 들면, 정말 밥상 하나 깨지는 건 순식간이다. 따라서 반장과는 그냥 평범한 학우로서의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물론 반장도 그럭저럭 얼굴은 괜찮지만, 어차피 여동생이나 진희에 비하면 떨어지는 편이고. 그렇게 태평스런 생각을 하던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쾅. 나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굳었다. 비누나 두부처럼, 틀에 집어넣어진 채 굳어져 버린 거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뭐? 여동생이냐고? 아냐 ! 이번엔 아냐 ! 그 사람은 하필, 내가 전에 진희를 찾으러 갈 때 보았던. "안녕? 문구야." 그 사람은, 심령현상 연구부. 통칭 흑마술부의 부장님이었던 것이다. "........" 나는 흑마술부의 부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원해서 가는 건 전혀 아니다. 순전히 강제로 끌려가는 거다. 뭐 겉보기에는 자기 발로 가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살려줘요.'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흑마술부에 끌려가는데 좋은 기분으로 갈 사람이 어디 있겠냐. 특히 지난번에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들어가야 했던' 기억도 있어서, 그곳에는 접근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부장님을 밀쳐내고 달아날 정도의 용기는,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목을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다리를 빼면 다른 곳의 근육이 완전히 굳었다. 이건 상대가 독침을 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마법을 걸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심리적인 이유로, 이런 꼴이 된 것이다. 원래는 심령현상 연구부였지만, 지금 흑마술부라고 불리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로 이 부장님의 존재가, 부의 호칭까지 다 바꿔버린 이유인 것이다. 고작해야 나보다 한 살 위인 사람인데,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거야. 그러던 중,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내 쪽으로 축구부의 선배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구해 줘요.'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님처럼, 나는 선배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대로라면 나는 오늘 연습도 빼먹고, 강제로 흑마술부에 잡혀간다고요. 후배한테 좋은 일 하는 셈치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세요. 그러나 내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히 부장이 보는 데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내가 이렇게 용기가 없는 녀석이었던가. 하지만 용기가 없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축구부 선배들은 나를 보더니. "야. 연습하러 안 오고 어디 가는 거야."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들은 내 등뒤에 서 있는 흑마술부 부장을 보는 순간, 갑자기 말을 바꿔 버렸다. 이봐요. 게으른 후배를 질책하고, 장래의 위대한 축구선수로의 발전을 위해 채찍질을 하는 엄격한 선배의 모습은 어디다 팔아먹었단 말입니까 ! 물론 그렇게 외쳐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이 인간들이 한다는 소리는 고작해야. "아. 안녕하세요. 부장님. 우리 부의 문구 녀석이 뭘 잘못했나 보지요? 부디 교육 좀 잘 시켜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헤헤." 그리고는 죽어라 걸어가는 거다. 아니, 저건 사실상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의리 없게도, 선배들 사이에 끼어있던 지우 녀석도 얼굴이 새파래져서 달아나고 있다. 아니, 그 녀석은 가장 먼저 도망치고 있었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같은 친구 자식아. 나가 죽어라. "문구야. 그런 생각만 하면 못써." 쿵. 여동생도 아니면서, 어떻게 내 속을 들여다보신 겁니까. 부장님. 당신은 정녕 소문대로 흑마술의 대가이십니까. 나는 더 이상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 돼. 안 돼. 이래가지고는 안 돼. 달아날 수가 없어. 믿었던 축구부 선배들까지 저 지경이 되었다면, 이젠 희망이 없다. '안 돼.' 하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다들 흑마술부의 부장과 감히 맞서느니, 사람 하나를 희생시키고 자기들만 살자는, 아프리카의 얼룩말이나 쓸 생존기술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얼룩말들은 사자가 나타나면 죽어라 달아나고, 그 중 가장 느리고 도망가는 재주가 없는 한 마리의 얼룩말이 잡혀 먹히면, 다시금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바로 그런 얼룩말이 되어 있었다. 느리고 재주 없는 얼룩말. 빌어먹을. '이 녀석은 왜 없어져 가지고.' 이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비장의 무기가 바로 여동생이지만, 그 녀석은 불행히도 이미 항공우주부로 튀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막상 필요한 때가 되니까 어디론가 사라진다. 못된 녀석. 혹시 그 녀석은, 부장님이 오는 걸 알고 도망간 게 아닐까. 물론 여동생이 누구에게 겁을 먹고 도망간다는 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어쨌든 내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학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물 학생이니까. '우리 학교의 7대 불가사의를 뽑으라면.' 저 사람은 당연히 그 안에 들 것이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다 붙어 다니고 있었으니까. 동물들을 잡아서 흑마술의 연습용 교제로 쓴다던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던가, 한밤중에 고대 마녀들처럼 벌거벗고 의식을 행한다던가, 심지어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붙잡아서 가마솥에 넣고 마법의 약을 만드는 재료로 쓴다던가. 물론 그런 소문은 절대로 진짜는 아닐 것이고, 아마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헛소문일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은 그렇게 믿고 싶다. 어쨌든 그녀는. '저래 보여도, 학교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부의 일원이라고.' 그러니 절대로 그런 헛소문에 나온 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면, 학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니까. 우리 학교는 일단 명문 고등학교로 알려진 곳이고, 그러니 그 소문이 진짜라면,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당장 저 여자를 퇴학시켰을 게 아닌가. 그러나 소문이라는 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법이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길. "저 여자가 분명히 마술로 선생들을 홀렸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은 거지." 그런 식이었다. 그 이미지는 워낙 굳건해서, 흑마술부가 아무리 부실을 밝게 꾸미고 꽃을 꽂아도, 호기심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도, 학교 축제에서 사랑점을 쳐주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원래의 이름이 '심령현상 연구부'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흑마술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이미지가 너무나 큰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무시무시한 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나는 달아나고 싶었지만, 달아나려고 했지만, 부장의 뒷모습에서는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도망을 절대로 불허한다는, 그녀의 강력한 의지가 말이다. 이런 느낌을 받은 상대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여동생밖에 없었는데, 역시 세상에는 고수가 많구나. 설마. '여동생과 동급의 괴물은 아니겠지.' 부디 그러길 바란다. 이미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기서 악당이 더 늘어나다가는, 내 몸이 견디지를 못해. 여동생에 진희 아버지에 지우에, 그것도 모자라서 이 사람까지 추가된다면 어떻게 하라고.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을 썼다가 잡히면. '가마솥에 직행이다.' 나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심정이 되어....... 아냐 ! 난 이 사람에게 밉보일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어 ! 그런데 왜 내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거야 ! 하지만 학생이란 인간들은 모두들 우리를 보는 순간, 알아서 꽁무니를 뺀다. 그러나 선생님이라면. 나는 어떤 선생이든지 - 심지어는 왕건전이라도 - 이곳을 지나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우리는 이미 옛날 학교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낡았다지만 여기도 어쨌든 학교인데, 어째서 선생님들이 없는 거야? 나는 좌절하여 쓰러지려고 했지만, 그 앞에 희망이 나타났다. "선생님 !" 아. 살았다. 담임 선생님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옆에 노트 하나를 들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일은, 그녀가 등을 돌리고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 만세 ! 만세 ! 대한민국 만세 ! 나는 잔뜩 기대를 하고 선생님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어쨌든 우리는 같이 불량배에게 납치 당했던 사이가 아닌가. 설마 날 모른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명색이 담임인데.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를 외면하지 않고. "어머. 문구하고 월영이네? 월영? 월영(月詠)? 츠쿠요미? 네코미미 모드? 부장님의 이름이 그런 거였단 말인가? 나는 고양이 귀를 달고 있는 부장님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상상했지만, 뭔가 안 맞는다. 월영이라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목으로, 고양이 귀를 달고 있는 귀여운(!) 여주인공이 최대의 특징인데, 이 사람이 '냐옹'을 외치며 애교부리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이미지하고 너무 다르잖아.' 나는 그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인 네코미미 모드(일명 고양이귀 모드)를 떠올리며 폭소를 터뜨릴 뻔했지만, 지옥으로 끌려가는 내 처지를 생각하고 간신히 웃음을 억눌렀다. 지금 내가 웃을 때가 아니지 않는가. 당장이라도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마녀의 가마솥 안으로 끌려 들어갈 판국인데.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이 처지에서 벗어나야........... '잠깐.' 우리 담임이 어떻게 월영 선배를 알고 있지? 물론 이 사람은 유명인이니까, 이름을 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우리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미인이를 아는 것처럼. 하지만 선생님의 말속에는 뭔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울림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걸 미처 짐작해내기도 전에, 그 예측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월영 선배는. "소개할게. 우리 심령현상 연구부를 맡은, 강 미연 선생님이셔." 쿵. 그 말은 나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다. 최악의 예감이 현실로 되었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왜 하필 우리 담임이, 이런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부를 맡고 계신 겁니까. 당신은 정녕 수학 선생님 맞습니까. 물리 선생님을 친구로 둔 분이, 물리하고는 가장 인연이 멀어 보이는 부를 맡으시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에 가실 건 없지만, 그래도 비슷한 부를 맡으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나는 절망에 빠진 채로, 뺨에 손바닥을 대고, 절규하고 말았다. 그 유명한 뭉크의 걸작, '절규'의 주인공이 되어서 말이다. "아아아악 !" "자. 토마토 쥬스 한 잔." 미소녀 부원이 나와 월영 선배가 있는 테이블에 쥬스 한 잔씩을 놓아주지만, 플라스틱 잔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 지금이 쥬스 마시고 있을 때냐.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미 담임이 맡은 해괴한, 아니 기괴하고 미신적인 부의 부실로 들어오고 말았으니까. '선생님. 너무합니다.' 불쌍한 제자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지는 못할망정 , 오히려 밀어 넣다니. 이것이 과연 선생님으로서, 제자에게 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담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오히려. "이왕 여기 왔으니, 구경하고 가."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난 전혀 흑마술부 같은 부에 갈 생각이 없다고요. 나는 가기 싫다고 외치려고 했지만, 그런 말은 월영 선배의 손놀림 하나에 봉쇄 당했다. 막아보고 싶었지만, 그게 안 된다. 하긴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도망갔겠지. 결국 나는 포로 신세가 되어, 토마토 쥬스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핏빛 쥬스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섬뜩하다. 내가 드라큐라가 된 느낌이야. '아이고.' 물론 이곳은 쥬스의 색깔만 빼면 상당히 밝은 분위기의 부실이었다. 어찌 보면 남자들이 대부분이라 음침하고 더러운 느낌까지 드는 축구부의 부실에 비해 몇 배 낫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부원들부터가,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많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얄밉게도. '예쁜 애가 왜 이렇게 많아.' 이건 불공평하다. 우리 축구부에도 이렇게 예쁜 여자 매니저가 있으면 안 되냐. 여름만 되면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전국적인 강호인 우리 부에는 왜 이런 여자들이 안 들어오는가. 이건 말도 안 된다. 여학생들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그래서 그런지 더욱. '여긴 싫어.' 색깔을 밝게 한다고 해서 이곳의 어둠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아무리 창을 활짝 열어 젖힌다고 해도, 어두운 건 어두운 거다.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곳 부원들에게서 발산되는 어둠의 기라고 할까. 그런 게 있다. 우리 담임이 이런 황당한 부를 맡고 있다니. 속았다는 생각이 마구 든다. 나는 호소하는 눈빛으로 담임을 바라보았지만 월영 선배는. "아. 축구부 쪽의 허락은 얻어뒀으니까 안심해도 돼. 문구야." 얻지 마요. 아무리 선배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나는 어떻게든 일어나서, 부실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리가 얼어붙은 건가. 이 분위기 싫어. 공포의 대상은 여동생만으로 충분하단 말야. 그런 인간을 하나 더 만나는 건 질색이라고. 그런데. '날 왜 부른 거야?' 혹시 흑마술에 쓸 제물이 없어서, 인신공양을 한다는 건가. 이봐요. 담순이 아가씨. 이거 어쩌실 겁니까. 하지만 우리 담임은 그저 재미있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다. 아아악.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내 꼴을 보던 흑마술부 부원들이 웃는다. "이봐요. 문구씨. 우린 문구씨 안 잡아먹어요." 그런 말을 믿어주기에는, 이 부의 이미지가 너무 어두웠다. 특히 부장의 이미지가 더더욱. 벌벌 떠는 이유의 근원이신 부장께서, 고깔모자를 가져온다. 그리고 쓴다. 아아악. 꿈에 볼까 겁나요. 쓰지 마요. 또다시 머리를 감싸쥐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만.' 저런 모습,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 꾼 꿈에서였던가, 달 아래에서 저런 모자를 쓴 여자아이가 나를 바라보았던 것 같은데........ 다만 모자가 약간 다른 듯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현실도피를 하지 않으면, 부장의 무게에 짓눌려 죽을 것 같다. "문구야. 난 그렇게 살찌지 않았어." 부장님......... 조금만 봐주세요. 어흐흑. 환상 속으로 달아나려는 나를 강제로 현실로 붙잡아오는 부장님의 냉혹한 한 마디에, 나는 저주를 퍼부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나를 제물로 하는 겁니까. 이왕 하려면 세상에 있어봐야 도움이 안 되는 지우 녀석이라든가, 여동생이라든가, 진희 아버지라든가.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고르라고요. 물론 여동생을 제물로 삼는 것은 극히 어렵겠지만, 구하는데 힘이 드는 만큼 재료로서도 꽤 쓸만할 것이라고.... "문구야." 윽. 나는 눈앞에 앉은 부장의 얼굴을 보았지만, 고깔모자가 워낙 커서 얼굴을 가린다. 안 그래도 무서운데, 모자가 눈을 가리니까 더 무섭잖아. 거기다가 망토까지 ! 점점 더 꿈에서 본 그 마녀 아가씨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다. 이 사람, 이래놓고 무슨 짓을 하려고. 삶아질지 구워질지 생으로 먹힐지 몰라 벌벌 떠는 나에게, 드디어 식칼이 ! "식칼 아냐." 그냥 손이었다. 아이고. 죽는 줄 알았다. 마녀라니까 여동생이 생각나잖아요. 부장. 놀라게 하지 마세요. 뭐 어쨌든 그게 아니니 일단 살았다. 감사히 잊어먹자. 그런데.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게. 오늘 내가 널 부른 것은....." "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내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진도 3, 진도 4, 진도 5, 진도 6........ 시야가 점점 흔들린다. 우리나라도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할텐데. 그러나 부장님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너, 흑마술에 관심 있니?" 난데없는 말에, 나는 턱과 책상의 만남을 성사시킬 뻔했다. 아니. 날 공포에 떨게 해놓고는, 고작 그게 이유였습니까. 눈동자가 빠져나와서 바닥에 구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아니, 여기선 이미 그런 일쯤은 일상다반사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이 사람이 만약 내가 그쪽에 관심이 있다는 착각이라도 하는 날에는, 나는 축구부의 촉망받는 인재에서 어둠의 세계에 물든 괴인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내 꼴은, 자칫 잘못하면 '고개를 끄덕였소'로 해석될 수 있는, 극히 위험한 동작이었다. 그런 일이 터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없어요." 단호하게. 빨리. 필사적으로 외친다. 괜히 흑마술부 부원이라도 되는 사태가 터지기 전에. 그런 일이 생기면 내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은 파멸이다. 진희 아버지는 미신에 빠진 사윗감은 필요 없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날려버릴 것이다. 그리고 진희도, 흑마술에 빠진 남자친구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런데 부장님. 왜 웃으시는지요? "농담이야. 후후." 그런 썰렁한 농담은 하지 마요.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악의 축'인 부장을 째려보려고 했으나, 내 목숨을 위해 그만두었다. 이런 건 원래 사악한 여동생과 상대하면서 얻은 자세이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빌어먹을. '이런 비굴한.' 상대의 미소를 보며, 나는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아. 비참하도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매일 골탕만 먹는 신세가 되었단 말이냐. 그러나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게. 오늘 문구를 부른 건, 요즘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대해 증언을 들어보고 싶어서야." "네?"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 '어떤 사건?' 대체 어떤 사건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전에 내가 진희에게 고백하려고 했다가 질투에 눈먼 수많은 학생들에게 포위되어 좀비영화를 찍을 뻔한 사건? 그게 아니면 나를 납치한 불량배들이 여동생에게 일망타진 당한 사건? 그게 아니면 여동생에게 감히 덤비다가 UFO슛을 맞은 불량배들의 사건? 그게 아니라면........ '잠깐. 이건 다 여동생 관련 사건이잖아.' 물론 내가 질투에 눈먼 인간들에게 포위된 사건은 여동생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은 아니지만, 내 고백에는 여동생이 이런저런 핑계로 개입한 만큼 간접적인 관계는 충분히 있다. 아, 아냐. 지금 내가 왜 그 녀석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거야. 나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흑마술부의 부장, 월영 선배의 입을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저 눈. 눈빛이 그런 생각을 모두 지워버린다. 먹이를 앞에 둔 독사의 눈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간식거리를 앞에 둔 사자의 눈이라고 해야 할까. 아냐. 아냐. 저건 사람을 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는 드래곤의 눈빛이야. 이제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던 나에게. "너, 강미주라는 애를 알고 있니?" 드디어 심문 시작인가. 그런데 강미주가 누구지?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다. 이유가 공포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용기가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누군지 갑자기 잊어버렸다. 이유? 무서워 죽겠단 말야. 묻지 마. 그래서 나는. "모르겠는데요." 강미주라는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알 게 뭐냐. 아는 척 했다가 여기 있는 시간만 더 길어질텐데. 이럴 때는 그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최고다. 공무원들의 금언인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말은, 바로 이 경우에 적용되라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말은 그저.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거면 족하다. 내가 청문회에 나온 정치인이 된 느낌이 들지만, 괴물을 앞에 둔 상황에서는 생존이 우선이다. 굳이 흑마술사와 연관되어 좋을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담순이,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런 부를 맡고 있었다니. '다음부터는 거리를 둬야겠어.' 같이 납치되었다고 해서 어느 정도는 친근감을 느낀 선생님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부의 두목을 맡으신 겁니까. 나는 부두목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며, 달아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문구야. 성실히 대답해. 전에 우릴 납치한 불량배들과 한패거리였잖아. 미주라면." 이 사람이 대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만 하고 계십니까 ! 기껏 여기서 달아나려던 계획이, 모조리 엉망이 되잖아요 !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감히 내심을 밖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에 숨겨진 가마솥이 끓어오를 것 같았기에. 그래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네." 어흐흑. 이렇게 되면 빨리 달아날 수가 없게 되잖아. 나는 담순이를 원망했지만, 원망해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매정하게도 없다. 분하다. 속으로 눈물을 펑펑 쏟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월영 선배는 다음 말을 이어나간다. "그럼 미주가 얼마 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네." 흑흑. 알고 있다는 게 사실이니, 변명할 수가 없었다. 변명하려면 처음부터 모른다고 버텨야 하는데, 담순이의 방해공작에 걸려서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만 게 치명적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달아날 수 있지? 상대가 무슨 이유로 묻는지는 이미 관심 밖이다. 나는 오로지, 빨리 여기서 도망쳐서 다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미주에게는 흑마술 취미가 있었어. 우리 부의 부원은 아니었지만, 불량배들과 있을 때 간단한 마술을 연습했다는 소문도 들리더라고. 그래서 만나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거야. 그래서 미주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고 있는 거야. 너도 미주와는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니 묻겠는데, 혹시 미주의 행방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어?" "몰라요."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대답했다. 정말로 미주 선배의 행방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상대가 독심술을 쓰든, 고문을 하든 상관없이, 모른다고 외칠 수 있었다. 아는 게 있어야 대답을 할 게 아닌가. 하지만. '정말로 고문하면 어쩌지?' 미주 선배가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니, 고문당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건 고문이 길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며, 당연히 그만큼 나의 고통은 길어지기 마련이다. 갑자기 살 떨리네.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서 이 순간을 넘어갔어야 했나. 하지만 어차피 이곳에 온 사실 자체가 고문이다. 나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몸을 사렸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그래, 그럼 할 수 없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 ".........." 고문이나 협박을 연상했던 나에게는 다소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못 된다. 다음으로 넘어간다지 않는가. 그것은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다음 질문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 고문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 그녀는. "아까 미주가 흑마술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지? 그녀는 자신의 흑마술을 다른 불량배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 부원의 말로는, 그녀의 흑마술은 꽤 효험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몇 명이 그 애에게 흑마술에 대해 물어본 모양이야. 그 중 하나는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인데, 이름이......." 힉. 나는 순간적으로 '연 미인'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것을 예상했다. 흑마술이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름이 그것 아닌가. 일단 내가 아는 여자들이라면 진희, 문희, 여동생, 그리고 반장 정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진희가 흑마술을 배운다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고, 문희라면 흑마술을 배우라고 하면 취재부터 할 녀석이니 안 된다. 그리고 반장은 그런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모범생 스타일이니 이쪽도 안 된다. 그럼 남는 것은 여동생뿐인데, 그 녀석이 아니라면 내가 아는 여자 중에서 금방 생각나는 애가 없다. 설마 진희의 언니인 연미 누나가 그런 쪽에 관심이 있을 리는 없고. 하지만 월영 선배가 꺼낸 이름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김 시내. 너도 잘 아는 이름이야." ????? 대체 김 시내가 누구지?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시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모르는 사람을 생각해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누구지? 요즘 연속극에서 인기 있는 텔런트 이름인가? 그게 아니면 댄서들 이름? 어차피 요즘 TV에는 가수가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가수 이름은 아닐 테고,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입만 벙긋거리는 가수를 어떻게 가수라고 인정하겠는가. 가수라면 당연히 노래를 불러야지. 가수라는 단어의 의미를 매우 좁게 해석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노래도 못 부르면서 가수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지칭하다니, 그건 사기행위라고 생각한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누구더라?' 하지만 답이 안 나오니 별 수 없이, 나는 시내가 누군지 생각해내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전혀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걸. 하지만 상대는 내가 시내를 잘 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게 아닌데. "시내는 아마 미주에게 흑마술을 조금 배운 모양이야. 다만 그 힘을 남용하는 것 같아서 주의를 주려고 했는데, 만나 봤더니 애가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잠깐. 너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니?" 안 듣는데요. 나는 시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이야기를 쫓아갈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앉아서 졸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시내가 누구지? 누구지? 누구였더라?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는 여기쯤에서 슬슬 퇴장해야 할 것........ "이봐 !" 쾅. 테이블을 내리치는 부장님. 갑자기 방의 온도가 급전직하한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라는 거야.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데. 하지만 부장님은 그런 내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녀는. "야. 너하고 시내하고는 보통 사이가 아니던데, 왜 그렇게 관심이 없는 거야? 아무리 여기가 흑마술부라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사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계속 달아날 궁리만 할 거야? 이건 네 애인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고 !" "진희하고요?" 아니. 아니지. 아직 진희와는 사귀지 않았으니 뭐라 하기도 그런가? 그러나 부장님은 상당히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를 노려본다. 도대체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느냐는 투다. 하지만 그런 눈빛을 나에게 돌리다니. 솔직히 내가 왜 '이상한 인간의 대표'인 사람에게,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하지만 부장님은 점점 열을 받으시는 모양이다. 이거. 위험한데. 내 마음속에서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요 ! 나는 공포보다는, 당혹감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거야? "너, 그러니까 시내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거야?" "네." 그러니까 날 그만 밖에 내보내줘요.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상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거, 벌집을 건드린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시내에 대해 모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왜 그걸 가지고 그렇게 화내는 거야? "모른다고?" 쾅. 테이블을 한 번 더 내리치는 부장님. 테이블이 마구 흔들리지만, 모르는 걸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얼굴을 보던 부장님이 이를 갈며 손을 들다가, 손을 다시 내린다. 그리고.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부장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상당히 화가 나셨나 보다. 하지만 모르는 걸 알게 하려면, 누군가가 가르쳐줘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지식을 가르쳐 줄 사람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자기 책상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볼 뿐이다. 나쁜 담순이. 저렇게 게으른 사람이 어떻게 선생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지금 급한 건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다. 저쪽이 아니다. 이유도 없이 화를 내는 부장님을 일단 진정시켜야 하겠지만, 그녀는 진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자. 이 사진에 대해 설명 좀 해 봐. 이래도 모른다고 할거야?" 마치 범죄자에게 결정적인 물증을 내보이는 형사의 표정처럼,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보였다. 하지만 난 연쇄살인범이나 탈주범이 아니라서, 그 표정이 장소를 잘못 찾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장님도 꽤나 덜렁대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사진을 바라본 순간. "악 !" 얌전히 사진을 들던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사진에는 너무나 이상한 모습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있는 남녀는, 격정적으로 키스를 하려고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만약 그 사람들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면, 나는 부장님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여자의 얼굴은 내가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지만, 문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그 안에 찍혀 있는 사람은. '나?' 사진 안의 나는, 의문의 여자에게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 여자도 싫지 않은 듯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고, 둘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부딪칠 듯이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난 이런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무엇보다도, 이런 좋은 짓을 하려고 했다면 그 상황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것은. 내 입에서, 극히 상식적인 의문이 튀어나왔다. "이거, 합성사진 아닌가요?"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건 진짜 사진일 리가 없었다. 왠지 내 몸이 실제보다 더 큰 것 같고, 얼굴도 약간 어색했다. 게다가 저 넋 나간 눈동자는, 결코 나의 것이 아니라고. 내가 저렇게 멍한 눈을 할 리가 없어. 그것도 하필이면, 사랑에 빠진 눈동자라니. 내가 저런 눈을 할 상대는 오로지 진희 뿐인데, 진희와는 아직 키스한 적이 없으니 결국 저건 정교하게 만들어진 컴퓨터 그래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부장은 자신만만한 듯. "그 아가씨가 시내야. 그래도 모른다고 할래?" 네? 하지만 얼굴은 그냥 평범한 수준인데요? 물론 그것은 내가 진희나 여동생 같은, 상식을 벗어난 미녀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나 구름 위의 여자들만 보고 있으니, 지상에 발을 디디고 선 여자들이 마음에 차지 않을 수밖에. '내가 왜 저런 여자하고 키스를 하겠어.' 그녀는 진희가 아니었고, 문희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여동생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문희나 여동생과 키스한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사진 속의 여자에게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모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여자에게 끌린다는 걸까. 게다가 나에게는 진희가 있는데. 보통 남자라는 동물은 수많은 여자와 -삐-하고 싶다는 게 정설이지만, 때로는 안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도, 자랑스럽게도 그 범주에 든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내가 왜, 저런 여자에게 굳이 입술을 주겠는가. '물론 저 여자가 호박이란 건 아니지만.' 사실 기준을 조금만 낮춘다면, 저 여자도 미인이긴 했다. 아. 물론 내 여동생이라는 말은 아니고. 일단 진희처럼 모든 이가 인정하는 미녀는 아닐지 몰라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숨겨진 여자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실연 당했다고 믿고서 정신이 없을 때라도, 다른 여자에게 키스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웃기시네." 팔짱을 끼고 비웃는 부장님.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그 다음의 말을 이었다. "그럼, 하나 묻겠어. 네가 진희한테 고백하려다 그 애가 수도관을 타고 달아난 후, 넌 어디로 갔었어?" "!" 가슴이 아려온다.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다. 비록 그 일은 원만하게 수습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끝을 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당장이라도, 진희가 '미안해'라고 말을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꺼내다니. 부장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뭔가가 내 마음 속의 벽을 부수는 것을 느꼈다. 이건 지나쳤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도대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아무리 선배라지만, 건드려도 될 게 있고 안 될 게 있는 법이다. 나는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상대의 악명을 무시하고 그냥 부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날아오는 상대의 화살. "바람 피운 게 들키니까 도망치겠다? 대단한 녀석이네." 그 말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아니.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억지로 합성사진을 만들어서 나를 협박하더니, 이제는 중상모략까지 해? 아무리 상대가 악명 높은 흑마술부 부장이라지만, 이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나는 홱 돌아서서, 그녀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무리 상대가 여자라지만, 그냥 패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비록 선생님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왜. 억울해?" "........" 도저히 치가 떨려서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쥐어 패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상대는 비웃음까지 흘리고 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다니. 과거 나를 괴롭혔던 축구부의 불량한 선배들보다 훨씬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덤으로 우리 담순이도. 두 사람 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히 이미지를 버렸다. 오늘의 일로. 하지만 상대는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다. "그럼 증명을 해보지 그래"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그녀가 한 말은. "네가 바람둥이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하라는 거야. 시내를 만나서, 네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는지 알아보자고. 만약 네가 결백하다면, 그 애가 알아서 그 사실을 입증해주겠지. 어때? 내일 시내에게 찾아가서 확인해볼까?" "좋아요." "만약 네 말이 맞으면, 내가 직접 무릎꿇고 너에게 사과하겠어. 하지만 내 말이 정확하다면, 우리 부에 들어와. 이번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임시로 말야. 물론 축구부에서 탈퇴할 필요는 없어. 단지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게 목적이니까. 어때? 공평한 조건이지?"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담순이지만, 그래도 담순이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설마 월영 선배가 선생님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지는 않겠지. 나는 담순이를 한 번만 믿어보기로 하고, 선배에게 인사했다. 물론 선생님에게도. 하지만. 획. 더 이상의 예의는 차려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발걸음도 힘차게, 축구부를 향해 걸어갔다. "둘 다 식사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하지만 옥상에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와." 그 다음날, 나는 시내와 같이 선배의 호출을 받아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 즐거운 점심시간을 헌납해야 한다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두고 보자. 내가 일편단심의 사나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선배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 테다. 여태까지 내가 진희에게 고백은 제때 못했어도 한눈을 판 적은 없었는데, 그 자부심을 무참하게 뭉개버리다니. 나는 조금 후에 월영 선배에게 사과 받을 생각을 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생각해 보라. '전설적인 악명을 자랑하는 저 선배의 뻣뻣한 무릎을 구부릴 수 있다 !' 이것만으로도, 식사시간을 방해받는 보상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저 선배에 대한 악명이 얼마나 심한데. 하지만 시내는 별로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 듯하다.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생각보다는 꽤 예쁘다. 물론 너무 예뻐서 인간 같지 않아 보이는 여동생이나, 내가 사랑하는 진희보다는 호박이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내 애인도 아닌데, 굳이 외모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문구야. 안녕? 미인이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야. 잘 부탁해." 시내의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녀가 옥상에 올라왔을 때, 나에게 곧장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바짝 긴장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부장이 준 사진을 보고, 나를 찾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저주스런 합성사진을 보고 옥상 난간을 부술 뻔했지만, 조금만 참으면 그런 일은 다 없어진다. 힘내자. 문구야. '물론 저 사진은 없애버리고.' 저런 합성사진이 나돌게 할 수는 없다. 진희가 오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처음에는 내가 진희 외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에 호기심을 품은 학생들이 주변에 몰려왔지만, 시내가 한 마디를 하니까 상황이 싹 달라졌다. 그 한 마디란. "아. 우린 월영 선배하고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2학년이고 3학년이고 1학년이고 관계없이, 모조리 없어졌다. 월영 선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모든 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더니 죽어라 옥상에서 도망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옥상에 왜 난간이 있어야 하는지를 절감했다. 그게 없었으면 몇 명은 분명히 추락했을 거야. 그들은 그 정도로 월영 선배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더욱 더 몸 속에서 희열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이제 곧, 그런 선배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얏호 ! "이봐. 아직 좋아하는 건 이르지 않아?" 그런 내 환호를 들었는지, 월영 선배가 달갑지 않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덤으로 담순이까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옥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저런저런. 하품까지 하시네. 식사시간이 무슨 잠자는 시간입니까. 그렇게 졸린 눈을 하시게. 하지만 뭐, 이미 승패는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나는 여유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흑마술부의 부장인 월영 선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학교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제 곧, 그 드문 인간들의 반열에 올라가는 것이다. 하하하. 나는 자신만만하게,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멋지게 이겼다는 걸 표현하기에 좋을까. 이미 반쯤 붕 떠있는 나에게. "둘이 이미 구면이니 굳이 상대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이 참에 아예 둘이 포옹하지 그래?" 이, 이, 이 아가씨가 ! 물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그렇게 단정을 하면 어떻게 해 ! 나는 항의하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아니에요 !" 시내가 먼저 말을 해 버렸다. 하긴 내가 말하는 것보다는, 저쪽이 말하는 게 더 효과가 높을 것 같지만. 그 말 안에는 나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선배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그럼 우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시내부터 말해봐." 우리 모두의 눈이 시내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난처하다는 듯이 부장을 쳐다보았지만, 결국 대답했다. 내가 가장 원하는 내용으로. "문구에 대해선, 우리 부의 미인이의 쌍둥이 오빠이자, 진희라는 애한테 얼마 전에 고백한 애잖아요. 그냥 친구의 오빠. 그 정도예요." 하하하. 여자한테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기쁜 일이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문제가 달랐다. 진희한테 이상한 오해를 받을 소문이라도 퍼지면 큰일이니까. 어쨌든 시내가 부장에게 흑마술이라도 걸려서 홀리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으면, 나는 억울하게도 시내의 애인이 되는 사태를 만났을 지도 모르니까. 이건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나? 하지만 부장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그럼 문구가 시내에 대해 말해봐." 나는 졸려 미치겠다는 담순이의 얼굴을 보며, 이상한 부장에게 잡혀와서 피곤하다는 표정의 시내를 보며 말을 꺼냈다. 자. 이제 무릎꿇을 준비나 하시라고요. 부장님. "시내에 대해선, 여동생의 친구라는 것밖에 모르는데요. 그것도 시내가 지금 말해서 안 거고,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리고 나와 똑같이 1학년생이라는 것 정도." 후후후. 이제 부장님은 어떻게 나오실까. 자기 계산에 어긋났다고 마구 발광할까. 그게 아니라면 음모와 계략으로 이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할까. 나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부장의 대응은. "휴우. 내가 잘못 짚은 건가? 미안." 상당히 낙담한 표정이라, 오히려 나와 시내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못을 쉽게 인정하네. 난 한바탕 싸움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싱겁게 끝난 경기 결과를 보며, 허탈함을 느끼는 팬들의 심정이 이해될 정도의 종말이었다. 그녀는 분한 듯. "하지만 약오르는 걸. 분명히 맞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그녀는, 우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어? 어? 어? "선배. 그렇게 할 것까지는." 시내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말렸다. 아. 진짜로 무릎을 굽히려고 하는 건가? 역시 국회의원과는 다르다. 비록 악명은 높지만, 긍지는 지킨다는 건가. 순간적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진희 아버지 같은, 흉악무도한 인간들만 봐서 잊고 있었는데. '악당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진희 아버지 같은 3류 악당과는 격이 달랐다. 이것이 진정한 악당의 마음가짐인가. 하지만 감탄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부장을 말리려고 시내가 무릎을 굽히는 순간. 콱. 그녀는 시내의 머리를 잡아서, 그대로 비틀어버린 것이다 ! 나도, 시내도, 심지어 졸고 있던 선생님조차도 놀랄 만큼의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시내의 머리카락을 뽑아내듯 잡아당겼고, 시내가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을 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월영아. 무슨 짓이야?" 돌변한 상황에 놀란 선생님조차 이리로 뛰어오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자, 나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 어째서 이런 짓을?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화풀이라도 하려는 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얍 !" 그녀는 기합을 넣으며, 시내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뽑아냈다. 비록 뽑힌 머리카락은 몇 가닥 되지 않았지만, 시내는 너무나 놀라고, 아픈 나머지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비명은, 엄청난 소음에 가려져서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소음은. 빠직. 마치 과자가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시내의 머리에서 들린 것이다. 무슨 소리야? 마치 뼈라도 분질러지는 듯한 그 소리에, 굳은 내 다리가 풀렸다. 아무리 상대가 악명이 높다고 해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내 마음의 외침이 공포를 눌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선배를 막아야 했다. 그리고 시내를 구해야 했다. 물론 머리카락을 뽑았다고 뼈가 분질러지지는 않겠지만, 그 소리는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목뼈가 부러진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 겁먹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만 둬 !" 물론 지금 내가 한 말은 존대고 존칭이고 완전히 무시한, 무례한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조차 예의를 갖춘 말이라고 해도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심각했다. 월영 선배가 지금 하는 짓은, 내가 가장 믿고 싶지 않았던 소문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잡아다가 가마솥에 산 채로 끓여서, 흑마술의 재료로 쓴 적도 있대.' 그런 소문을 나는 믿지 않았었는데, 그 판단은 완전히 착오였다. 선배는 시내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목을 뽑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뼈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시내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피부가 찢겨지면서, 함몰된 두개골을 드러내듯 푹 파인다. 그리고 그녀의 목은. "꺄아악 !" 선생님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사실은 나도 그러고 싶었다. 시내의 목의 피부와 근육이 찢겨지면서, 목뼈가 부러질 듯 부러질 듯 몸에서 뽑혀 나오고 있었으니까. 아니, 척수까지 모조리 뽑히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 산 사람의 머리를 뽑다니. 저 여자는 완전히 미쳤다. 자기가 내기에서 지니까, 이런 식으로 분풀이를 하다니. 그녀에게 달려가던 나에게 핏물이 튀었다. 한 방울이나 두 방울이 아니라, 폭포수처럼. "우왝 !" 그 피는 내 얼굴에 폭우처럼 쏟아졌다. 내 옷이 피에 물들고, 일부가 입에 들어갔다. 쇳가루라도 삼킨 듯한 그 맛에, 나는 구역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 냄새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 중 일부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살덩어리였다. 나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시내의 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피의 웅덩이에 시내의 시체가 버려지는 게 보인다. 시내의 피묻은 머리를 들고, 마치 자랑스런 전리품이라도 되듯 이리저리 살피는 선배의 모습은, 마녀 그 자체였다. 이럴 순 없다. 내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도 저런 잔혹한 방법을 써서. 나는 분노했다. 이럴 순 없다.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순 없다. 저건 악마가 분명하다. 나는 주먹을 들어 그녀를 내리치....... "어?" 내 주먹은 깨끗했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에 그렇게 많은 피를 뒤집어썼는데, 왜 이렇게 깨끗한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내 옷을 손으로 마구 쓸어 내렸지만, 피라고는 한 방울도 묻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봤지만, 역시 피는 만져지지 않는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부장의 손에 들린 시내의 머리를 본다.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가.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부장의 손은. "시내가..... 아냐?"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시내의 머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빛나는 흰 깃털 하나뿐이었다. 대관절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어리둥절한 나의 주위에 흩뿌려진 피가, 그 피의 개울이 빛을 발하면서, 증발하고 있었다. 마치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그럼 이건 처음부터. "환상?"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황급히, 시내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목이 뽑혀나간 시체였던 그녀가, 머리를 왼손으로 문지르며 나처럼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혼란에 빠진 듯. 부장을 쳐다볼 뿐이었다. 선생님은?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줄 오직 한 사람의 인물인, 월영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흰 깃털.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그녀가 가장 처음에 한 말은, 명쾌한 해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라는 듯이 나를 향해 흰 깃털을 내밀며. "자. 할 말 있으면 해 봐." "이, 이게 뭐예요?" 나는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우리 학교 학생 중에서 흑마술부 부원을 제외하면,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논리로는, 이런 일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마법이란 속임수이고, 마술사라는 건 사람들이 모르는 속임수를 써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인데, 그것이 모두 뒤집혀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건 무엇인가? 월영 선배의 말이 이어졌다. "이건 마법의 깃털이야." 이봐요. 선배.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중세가 아니라 21세기라고요 ! 이런 항의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나 자신이 목격한 광경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리 요즘 시대에 홀로그래픽(입체영상)이 발달했다지만, 이렇게 사실적인 입체영상이 있을 수 있나? 특히 그 우드득하는 소리가 들릴 때, 나는 정말로 시내가 죽는 줄 알았었다. 게다가 그런 입체영상을 만들기 위해선, 엄청난 고가의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일개 고등학생이 가질만한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일단 미심쩍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선배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마법사가 분명해.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정신마법을 걸어서 인식을 하지 못하게 하지 않나,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 머리 안에 박아두지 않나, 그러면서도 인간의 두뇌활동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게 하지 않나. 이렇게 하려면 보통 솜씨로는 불가능해. 거기에 강제로 뽑아내려고 하면 머리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서 해제를 막다니. 게다가 그럴듯한 환상까지 추가로 보여줘서. 질렸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하다니." 그 철저한 걸 찾아냈으니, 자기가 대단하다는 건가. 왠지 자기자랑이 지나친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자부심을 뭉개버릴 만한 일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파직. 깃털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부스러져 버린 것이다. 마치 과자가 부서지듯. 나는 재빨리 부장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는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뭐야. 이미 예상했다는 건가.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대단한 상대야." 뭐가 대단하다는 건가요? 상대의 힘을 알았다면 미리 대비하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 아닌가요? 생각보다 형편없는 마법사네요. 월영 선배도.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나의 눈초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전에 시내를 조사했을 때도 그랬어. 그때는 이런 게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가 버렸는데, 생각해보니 시내의 기억이 너무 깨끗하더라고. 분명히 둘은 아는 사이였는데, 그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니. 뇌에 아무 흔적도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해서, 다시 검사해보니 알겠더라고. 정말 대단해. 마력을 이렇게까지 숨길 수 있다니.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단정하고 샅샅이 뒤지지 않았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었을 거야." 저. 그런데 '둘'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설마 실종되었다는 미주 선배하고 시내 자신? 나는 혼자서 감탄만 하는 선배를 내버려두고, 옥상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왠지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미신과 무지가 난무하는 세계로 빠져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어딜 도망가?"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옥상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난 축구를 해야 한단 말이야. 흑마술 같은 건 부장이나 하라고 해.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어. 없다고. 없단 말야. 게다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있어? 이건 환상이야. 분명히 흑마술로 나를 속이고 있는 거야. 그래. 굳이 입체영상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어? 마약성분이 들어간 식물이라도 태워서, 나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거야.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어? 하지만 옥상의 출입구 앞에는, 이미 월영 선배가 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너도 참 고집이 세다. 눈앞에서 보고도 못 믿다니." "못 믿어요 !" 그래. 이건 분명히 월영 선배가 날 놀리려고, 고의로 기획한 장난이 분명해. 아마 시내도 한패거리일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역시 대마초 같은 걸 태워서 그 연기를 나에게 억지로 흡입시킨 게 분명해. 이런 건 경찰이 맡을 일이라고. 난 마약류 사범과 관계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러니까. "현실도피 하지 마." 그 말은 화살처럼 내 가슴을 관통했고,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정말로 말이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진짜로 물리적인 효과를 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그녀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나뿐만 아니라, 시내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아니, 그녀는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옆에서 목격했을 뿐이지만, 그녀는 직접 이 일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자기 머리가 뽑혀나갈 때, 그녀는 얼마나 고통과 공포에 떨었을 것인가. 하지만 그게 모두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오직. "선배님." 그것뿐이었다. 선생님이 그녀를 부축해 주었지만, 아직도 그녀는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진짜 죽음이 아니었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가해진 충격은 진짜 죽음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녀의 목이 부러지면서 척추가 뽑힐 때, 나 자신이 받은 충격도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당사자인 그녀라면. 그래서 나는 월영 선배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무게가 너무 컸기 때문에.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도대체 이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와 시내의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를 보며 월영 선배는 손짓했다. "자. 자세한 건 우리 부실에 가서 이야기하자."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눈동자, 왠지 기쁨이 넘쳐흐르는 듯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부장이 결론을 내 버렸다. 그것은. "아. 그리고 명예부원. 너도 시내 좀 부축해. 선생님에게만 다 시키지 말고." "네?" 명예부원이라니? 여기에 흑마술부 부원이 또 있었나? 나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옥상에 나와 부장, 시내, 그리고 선생님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설마, 그 명예부원이라는 건 나를 말하는 거야? 선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말아요. 하지만 그녀의 입을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한 말은.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자, 잠깐. 내기의 내용은 이게 아니잖아? 내가 부장과 내기한 건, 분명히 '내가 바람둥이가 아니란 걸 증명한다'이지, 시내의 머리에 이상한 게 박혀있는지를 놓고 겨룬 게 아니라고. 그런데 왜 내가 명예부원이야? 그것도 흑마술부의? 뭔가 부정하려는 말을 꺼내려는 나에게, 부장은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너도 이미 마음 속으로는, 내기에서 자신이 졌다는 걸 알고 있잖아." "투덜투덜." 나는 반강제로 흑마술부 부실로 다시 들어왔다. 비록 겉으로는 필사적으로. "내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게 아니니까, 난 이곳 부원이 아니라고요."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극히 불안했다. 아까처럼 황당한 사건이 또 생겨서, 내가 정말로 시내와 키스하려고 했다는 사실(진실과는 관계없다고 믿지만)이 밝혀진다면? 갑자기 내 앞날이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비록 이곳에 예쁜 부원들이 아주 많기는 하지만, 문제는 대외적인 내 이미지였다. "호오. 흑마술부 명예부원이 되었다고?" "축구부에, 흑마술부에, 문구도 바쁘겠네. 나중에 취재해도 되지?" "하하하. 21세기에 그런 미신적인 부에 들다니, 하하하." "문구야. 잘해봐. 축구부는 나에게 맡기고." "오빠. 흑마술은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으. 생각만 해도 골치가 다 아프다. 특히 여동생의 놀림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진희 아버지의 기고만장한 웃음도 문제지만, 여동생의 눈은 더 무서웠다. 일단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까 말이다. 카아악. "자. 여기 앉아. 문구야. 부장하고 이야기가 끝나면, 자기 소개 하는 거 잊지 마." 소개하기 싫어요 ! 이미 흑마술부의 아가씨들은 내가 이곳 부원이 되는 게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 난 공부하고 축구하는 데만도 바쁘단 말야 ! 안 그래도 진희하고 데이트 할 시간도 없는 판국에, 어떻게 부를 2개씩이나 든단 말야 ! 불만에 가득 찬 나를 앞에 앉혀두고, 부장은 자기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슬쩍 훔쳐보니, 시내의 표정이 상당히 어둡다. 아니, 그녀의 경우는 머리통에 박힌 무언가 때문에 더 어두워졌다고 해야 할까. "너희들도 조금 전에 봤겠지만, 요즘 우리 학교 주변에는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 부가 심령현상을 연구하고는 있지만, 그런 현상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건 솔직히 의외야. 그래서 우리 부는 요즘 그 이유를 조사하고 있어. 너희들을 부른 것은, 그 현상에 너희들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야." "아니에요 !" 그러나 나와 시내가 그렇게 외쳐봐야, 설득력이란 건 개미눈꼽만큼도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시내의 머리에서 뽑혀나간 그 깃털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장이 굳이. "조금 전의 현상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준다면, 그 말 믿어줄게." 이렇게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나와 시내는 이번 일의 관계자가 틀림없으니까. 그런데 잠깐. 시내의 경우는 그 커다란 깃털이 박혀 있었으니까 관계자가 맞지만, 나는 그런 게 없는데? 있었으면 분명히 나에게도 그 솥뚜껑같은 손을 뻗어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깃털을 뽑아냈을 것이고, 그랬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에 끼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희망이란 걸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까.' 하지만 왠지 상황은 절망적인 것 같다. 저 월영 선배의 미소만 봐도 그렇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웃고 있었다. 쓸데없는 반항은 그만두라는 무언의 암시가 아닐까. 아니기를 바라는 나를 앞에 두고, 계속해서 할 말을 꺼내는 그녀. "원래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 마법사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유령이나 악마에 의한 것일 수도 있어. 물론 초능력자에 의한 것일 수도 있는 데다가, 심지어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을 우리가 착각해서, 마술이니 기적이니 하는 걸로 부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야. 실제로 UFO의 목격담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생각되어 부정당하고 있고, 우리가 보는 괴이한 현상 중 거의 모두가 이런 거야." 그러니까 이번 것도 그렇게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자고요. 그것이 나에게도 편하고, 부장님에게도 편하고, 시내에게도 편하고. 그냥 덮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하지만 부장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그럼 이번 일은 어느 쪽에 해당할까? 우리 부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걸 알아내는 것이고, 그래야 '심령현상 연구부'라는 간판을 달 자격이 있는 거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와 부원들은 이번 일을 조사하기 시작했어. 한 두 번이라면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세 번 이상 일어나면 이건 우연이 아냐. 그래서 우리는 신비한 현상의 사례를 모았고, 거기서 내린 결론은 이번 일이 '착각'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였어." 제발 착각이라고 단정해주기를 바랬던, 나의 소박한 소원을 뭉개버리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이어졌다. 제발 이어지지 마세요. 어흐흑. 하지만 그런 소원은 이루어질 리가 없다. 여동생이 이미 그것을 몇 차례나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원래 내 소원은 이뤄지지 않고,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만이 현실이 되기 마련이란 걸. "착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목격자를 모았고, 그들의 공통적인 말은 이 말이었어. '모른다.'는 거지. 하지만 그런 사람이 하나라면 모를까.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어. 물론 그들 중에는 정말로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일이 바빠서 심령현상 따위는 모른 척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뭔가 찔리는 게 있어서 말을 안 하는 사람도 있었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괴이한 일에 무관심하지는 않을 텐데, 왜 모두들 모른다고 할까? 그게 미심쩍더라고. 그래서 나는 우리가 쉽게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로 했어. 그게 바로 흑마술사라고 소문이 파다한 미주였지. 하지만 그녀는." 이미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지요. 그럼 조사를 할 수가 없으니,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어때요? 선배님. 어차피 아무도 조사에 협조를 해주지 않는데, 뭘 하러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해요? 어차피 부활동이란 거, 입시공부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거라고 다들 생각하는데. "하지만 넌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축구연습을 하던데?" 윽. 그걸 어떻게 알았지? 갑자기 내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다. 이 사람이 내가 연습하는 걸 몰래 훔쳐봤단 말야? 하지만 아직 국가대표도 되지 못한 나를 왜?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입시공부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게 부활동이라고? 그런 부활동을 필사적으로, 목숨걸고 하는 너는 대체 뭐야? 네 장래의 꿈이 그렇게 하찮은 거였어? 그런 애가 어째서 공을 그렇게 열심히 찬 걸까? 자기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생각은 하지 마. 문구야." 참패였다. 도저히 변명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식의 생각이 나 자신도 설득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내 입을 다물게 한 그녀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주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조사는 미주에게 흑마술을 배웠다는 학생들을 만나보는 것이었어. 물론 그녀만이 흑마술사는 아니고, 우리 부원들도 어느 정도는 백마술을 할 수 있기는 해. 하지만 우리 부원들은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니." "왜요?" "그랬으면 벌써 자랑하느라 바빴을 걸." 할 말이 없는 이유였다.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 여지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답변이어서 나와 시내는 꼼짝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럼 남은 사람들은 미주에게 흑마술을 배웠다는 애들 뿐이야. 그래서 나는 그 애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봤더니, 세상에.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미주의 실종사실로 그 애를 걱정하고 있기는 했지만, 미주한테 흑마술을 배우지 않았냐고 하니까 그런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전혀 기억에 없다나? 더 캐물으니까 그 애들이 대답하는 말은, 흑마술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는 거야. 그 부분만 백지상태로 돌아가 버렸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그녀는 시내를 바라보았다. 시내는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바로 얘처럼." 잠깐. 기억을 못한다면, 그걸로 단서는 끊어진 거 아냐? 거기서 뭘 더 캐물을 수 있다는 거지? 이것으로 조사는 땡.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고, 이번 일은 미제사건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잖아? 어차피 아무도 기억을 못하는데. 하지만 그녀의 집념은 내가 생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래서 나는 그 애들의 친구들을 찾아서 다시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 애들이 흑마술을 확실히 익혔으며, 자기들도 그 녀석들이 흑마술을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아마 신기한 힘을 처음 손에 넣어서, 자제력을 잃었던 모양이야. 원래 그런 걸 배웠다면, 함부로 사람들에게 드러내면 안 되는데. 마법사로서는 실격이지만, 그 덕에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뭘 얻으신 겁니까. 공포의 부장님.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동료를 더 늘리려고 한 모양이야. 흑마술 동호회라도 만들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에 그들의 모임은 없어졌고, 미주는 행방불명이 되었어. 그 구성원들도 흑마술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렸고. 이건 어떻게 된 노릇일까?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어. 만약 미주가 행방불명되지 않았다면 그냥 대충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사람이 실종된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경찰에서는 미제사건으로 대충 처리해버렸다고 하지만, 뭔가가 걸려. 최소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싶은 거야. 그래서, 그 모임이 없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흑마술사들의 일원이었던 시내와 만난, 너의 증언을 듣고 싶었던 거야." 월영 선배가 시내를 가리키며,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말을 맺었다. 하지만 난 그 날 시내를 만난 적이 없는데?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뭘 증언할 수 있다는 거야? 이해를 못하겠다는 나를 향해, 본론을 꺼내는 그녀. "그래서, 우리 부원이 찍은 사진에도 나왔듯이, 너는 시내하고 키스까지 하려던 사이였으니 아마 애인관계일 것이고, 그럼 시내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해서 널 부른 거야. 대답해 줘. 시내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낌새라도 느꼈다면, 솔직히 털어놓아 줘.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애인 아니라니까요." 난 정말로 시내와는, 그때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뭘 도와준다는 것도, 사실 무리란 말이라고요. 처음에 비해 월영 선배의 인상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기억에 없는 일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내가 시내와 애인관계란 걸 시인하면 꼼짝없이 흑마술부의 부원이 되고 만다는 현실도 나를 막은 요인이기는 하지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그 말을 했던 것은 정말로 그런 일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배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을 전에도 몇 차례나 겪었다는 듯이. "그렇게 안 만났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건, 알리바이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그거라도 말해 줘. 네가 진희에게 고백하려고 항공우주부에 찾아갔다가 실패했던 그 날, 너는 어디서 뭘 했었지? 우리 부원이 찍은 사진을 거짓이라고 몰아붙이고 싶다면, 자신이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는 말해주길 바래. 아. 말하겠는데, 비밀은 엄수하는 주의야. 걱정은 안 해도 좋아." 확실히 그랬다. 만약 내가 여기서 그 사진의 터무니없는 장면을 부정할 수 있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나는 억울하게 시내의 애인으로 몰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 한다. 부장이 재촉한다. "빨리 말해 봐.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까. 어쩌면 네 말이 이번 사건의 해결에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고." 그때 나는.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게 아니라고 ! 지금 이런 말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 내 지능지수가 이렇게 낮았던가. 머리를 감싸쥐는 나를 보며 선배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기미가 너무 없는데. 혹시 이미 이럴 거라고 예상한 거 아냐?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무서운 예감을 들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 사람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아니야. 안 돼.' 나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발악을 했다. 어떻게든 그 때의 일을 기억해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굳은 결의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고 말았다. 부장이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설마. "마법 주문?" 설마, 나에게 마법을 걸려는 것인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조금 전에 이 사람이 진짜로 마법사라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이마를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강철로 만들었는지, 떼어내기에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발버둥치지 마. 네 기억이 남아있는지 살펴보는 거니까." 그리고 그녀는 다시 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이게 라틴어야?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의 언어)야? 그것도 아니면 고대 이집트 언어야? 어쨌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걸로 미루어볼 때, 영어나 일본어는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독일어도 아니고, 하물며 한글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 잠깐. 지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남의 기억을 멋대로 뒤져요 !" 이런 항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사실 그 당시의 일을 기억도 못하는 내가 어쩌고저쩌고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 당연히 나는 흑마술부에 강제로 가입해야 할 것이며, 그러면 나는 파멸이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마법을 나에게 걸게 할 수도 없다. 어찌하오리까. 머뭇거리는 동안, 그녀의 주문이 끝났다. 그리고. "찾았다. 희미하지만 기억이 남아 있어." 순간적으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 것은, 그 뒤의 일을 내가 예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서서히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고, 그 기억은 점점 부풀어올라 내 앞에 놓인 수정구슬에 나타나.... '안 돼 !' 그러나 나는 이미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선배는 내 손을 잡고서. "걱정 마. 비밀은 지킨다고 했지?" 부실의 문은 닫혀 있었고, 창문은 모조리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부실 바닥에는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법진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결계 마법진이야. 이 정도면 비밀엄수는 될 거야." 그리고 나는 과거의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 나중에 들을게. 그럼." 자기 가방을 들고, 죽어라 부실 문을 향해 달려가는 진희. 뭐, 뭐냐. 아예 내 고백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거냐.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녀는 부실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문이 열릴 리가 있겠냐. 여동생이 오늘은 단단히 벼르고 온 것 같은데, 과연 문이 꿈쩍하기나 할까. 그러자 그녀는. "문 열어 줘 ! 문 열어 줘 !"]] "뭐야? 이거. 너무 앞으로 간 건가?" 으. 이 띨띨한 마법사 같으니. 그쪽 기억을 재생할 건 없잖아. 게다가 그쪽은 지워진 기억도 아니라고.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악몽의 순간인데. 그걸 왜 재생하고 난리야. 내 무언의 항의를 들었는지, 월영 선배가 약간 미안하다는 듯이 말한다. "아. 여기가 아닌가 봐." "네에?" 나와 시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풀어진 것도 당연하긴 했다. 그 도도하시고 위엄 있으시고 엄청나신 흑마술부의 부장님이신 월영 선배가, 일명 '네코미미 선배'가 이런 실수를 다 하다니. 만약 지금의 일이 나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래. 남의 일이었다면 말이다. '남의 일이고 싶어.' 이런 사람에게 내 머리를 맡기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 의문이다. 잘못하면 내 머리는 폭탄 맞은 것처럼 마구 헝클어져서 대머리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빡빡 머리가 되거나, 그러는 거 아냐? 물론 지금 나는 이발소에 간 게 아니고, 미장원에 간 것도 아니니 그런 쪽으로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이거 이 사람, 자기 멋대로 아무 결론이나 말해버리고는 억지를 쓰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으니까.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그러나 월영 선배의 얼굴은 분명히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밑천이 드러나셨나요. 역시 이 사람은 단순한 사기술만으로 흑마술부의 부장이 된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을 지도 몰라. 그래. 지금 달아나는 게 수야.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설령 사기술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람이 마법을 내 머리에 걸었다가 잘못되면, 나는 진희 아버지(주 : 국회의원) 수준의 지능을 가진 사람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튀자 !' 나는 재빨리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고, 죽어라 부실 밖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부장의 그 말만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일어서려고 몸을 앞으로 굽히는 그 순간에, 그녀는 김을 팍 새게 하는 말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도망가면 잡아서 키스해줄 거야." 쾅. 그 말은 내 다리 근육을 순간적으로 동결시켰다. 그, 그렇게 썰렁한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선배. 나는 일어서려다가 주저앉고 말았고, 그 뒤를 이어 날아든 것은, 선배의 유혹적인 협박이었다. 다른 남자에게라면 이런 건 협박이 될 수가 없겠지만, 나한테는 달랐으니, 그걸 진희가 알기라도 하면.....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도망가면 널 붙잡아와서 우리 애들하고 하룻밤동안 방에 가둬 놓을 거야. 남자들은 그런 거 좋아한다면서? 겉으로는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여러 명의 여자들과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하고 싶어 미친다면서? 특히 너처럼 순수해 보이는 애들일수록 더욱. 어디 한 번 시험해볼까?" 하지만 그건 협박이 아니라 회유가 아닐까요? 그것도 별로 질이 좋지 않은 타입의 당근 같은데. 이 경우에 외교관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을 내미는 게 올바른 대처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이 사람이 이런 므흐흐한 대처방안을 내놓는 거지? 그러나 그 뒤에 날아온 한 마디는, 나를 액체질소에 담가서 얼음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으스스했다. 그것은. "걱정 마. 네가 우리부원들에게 '이런 짓'까지 하기 전에, 미인이를 불러올 테니까." 쾅. 뭐, 뭐, 뭐라고요? 대체 이 사람이 뭘 노리고 있는 거야? 그게 무엇인지는 순식간에 알아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원하는 바는. "남자들의 소원은 하렘을 만들고, 그 주인이 되는 거라면서? 그러니까 소원대로 하렘 하나 만들어 주고, 그 기념으로 미인이에게 축하의 장미꽃다발을 안겨서, 너에게 전해주게 하는 거야.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재미는 무슨 재미. 땀이 이마에서 발끝까지 줄줄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다. "기념식을 하고 나선, 하렘의 주인으로서 뭘 하든 나도 몰라. 뭐 미인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 듣자하니 그 유명한 미인이가 네 여동생이라던데." 이, 이 인간이. 날 아예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 아무리 남자의 로망이 하렘의 주인이라지만, 여동생이 그런 장면을 목격한다면 난 그대로 끝장이다. 그 녀석이라면 그런 꼴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나를 과연 살려둘 것인가. 단순히 몇 대 맞고 넘어갈 사안이 아닌 이상, 그 녀석은 분명히. "여자를 노리개로 삼다니, 그것도 몇 명씩이나. 죽어 !"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버린 내 시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것뿐이랴. 그 앞에서 나에게 경멸하는 시선을 던지는 진희의 얼굴도 떠오른다. 진희 아버지가 자신의 혜안을 자랑하며 다니는 모습도 떠오른다. 그것뿐이랴. 흑마술부의 못된 아가씨들이 내 시체를 가져다가 가마솥에 끓이거나 악마에게 바치는 모습도 떠오른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아무도 여동생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보나마나 사람들, 특히 진희 아버지의 힘으로 그 녀석은 무죄로 방면될 것이고, 모든 이들은 '음탕함이 하늘을 찌르는' 오라버니를 처단한 정의의 여동생으로 그녀를 받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문의 수치로서 연씨 집안 족보에서도 이름이 지워질 것이고, 저 지존파나 유영철에 버금가는 악인으로 범죄사에 남게 될 것이다. 아무도 내 무고함을 믿어주지도 않은 채 말이다. "아, 악마."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부장을 가리켰다. 그렇다. 이건 악마다. 자기 말을 안 들었다고 아예 차도살인(借刀殺人 :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다)의 계책을 쓰다니. 실제로 날 날려버리는 건 여동생이지만,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부장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별명은 마녀나 마법사, 그게 아니면 네코미미 선배가 아니었어?" 아아악. 나는 꼼짝도 못하고, 의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내 운명을 저주했다.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흑마술부에 들어온 게 잘못이라며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도주시도를 포기한 내 앞에서, 다시 수정구슬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파앗. 나와 시내, 그리고 부장님의 눈앞에 그 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내 생각이 행동으로 실행되기 전에, 이 자리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자꾸만 작아졌다. 그래. 어차피 진희도 날 배신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그녀에게 집착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차라리 이 여자와 한 번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겠느냐. 그녀의 입술이 붉게 보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내 입술을 대어보고 싶은 앵두같은 입술. 갑자기 저속한 생각이 든다. 이대로 저 입술을 따먹으면. '맛있을 거야.' 내 손이 저절로 그녀의 어깨를 잡는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성은 외치지만, 진희에게 거부당한 쓰라린 기억은 나를 몰아붙였다. 그래. 이 아가씨하고 새로운 청춘을 만들어 가는 거야. 내가 그녀에게 충실하고, 그녀가 나에게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마지막 선을 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입술과 입술의 만남일 뿐인데. 그런 몹쓸 생각이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아갔다. 내 손이 시내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올린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만나려고 할 때. "오빠아아아 !" 그 외침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아. 신발이구나. 아니, 신발이 아니잖아 ! 하지만 내 눈에는 여동생의 신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위치라면 당연히 여동생의 치마 안쪽이 보여야 마땅하겠지만, 이 세계의 물리법칙에는 이런 항목이 있다. [여동생 치마 속은 관람 금지] 그 법칙에 따라, 여동생이 오늘 무슨 속옷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벗겨본 적이 없었던 내가, 여자 속옷을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뭐가 보여야 판단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어쨌든 여동생의 발은 내 머리통을 정통으로 강타했고, 그 후의 당연한 순서는. "으아아악 !"]] 그리고 수정구슬에는, 여동생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시작했다. 정말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 그러나 지금은 그에 대해 불평할 여유가 없었다. 전혀. 득의만면한 월영 선배의 모습을 봐야 했으니까. 그녀는. "드디어 찾았다. 역시 시내쪽이 아니라 이쪽엔 기억이 남아 있었어. 간신히 찾아냈네." 하지만 나는 좌절하여 엎어져 있었다. 아냐. 이건 선배의 기억조작이야. 어째서 이런 일이. 나는 지금 기억난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큰일이 난 건 사실이었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아냐. 혹시 선배가 사기를 치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그 뒤에 나온 장면은 나를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다. 여동생의 무자비한 인권유린현장이 지나가고, 잠시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나온 장면은. [["........아고고." 지금 내가 누운 곳이 어디냐. 땅바닥이냐 벤치냐. 그게 아니면 시체안치소냐. 몸이 온통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니, 일단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꼴이 이게 뭐냐. 갑자기 진희에게 차였다는 과거와, 땅바닥에 쓰러진 현재가 맞물려서, 미래의 눈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금새 내 현재가 되었고. "흑." 분했다. 진희에게 차인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렇게 여동생에게 맞고 살아야 하다니. 아직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송곳으로 찔린 것처럼 괴롭다. 뇌진탕일까. 뇌출혈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예 뇌수가 땅바닥을 적시고 있는 걸까. 하지만 심장이 얼음, 아니 드라이아이스, 아니 액체질소, 아니 액체 헬륨으로 되어 있는 내 여동생은, 그런 것에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마 저 녀석의 체온은 영하 273도쯤 될 거야. '그렇지 않고는.' 오라버니를 이렇게 땅바닥에 팽개쳐두는 짓거리를 할 리가 없어. 하지만 여동생이 한 말은 의외였다. 생각보다는 상당히 따스한 말투로 - 여동생이 ! - 나에게 안부를 물은 것이다. "이제 정신이 들어? 오빠?" 엥?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지금 땅바닥에 뻗은 게 누구 때문인데. 나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머리에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아무리 지금이 4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밤공기는 찬 편이라고. 땅바닥에 뻗었으면 당연히 냉기가 내 등을 타고 올라와야 하는데, 이게 뭐야? 너무 말랑말랑한.... "지상 최강의 여동생의 무릎베개야. 좀 얌전히 있어 줘."]] 저건 나도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변명할 여지는 전혀 없는 셈이다. 내가 모르는 장면만 엮어져서 나온다면 반박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저 장면은 나와 여동생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 순간, 그대로 의자에 몸을 묻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패였기에. 내 몸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아냐 ! 아냐 ! 아니란 말야 !" 나는 절규하며 부실의 테이블 아래에 나뒹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월영 선배의 행복한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지금은 그걸 보며 같이 기뻐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선배가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데 !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올 줄은, 예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런 건 진희 아버지 같은 인간이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잠깐. "아. 내가, 문구하고, 아. 아아." 시내의 저 모습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혹시 저 아가씨, 자신이 나와 연인 사이였는데, 기억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랑도 잃어버렸다는 착각을 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게다가 기억이 일단 없어진 이상, 과거에 연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는 남자와 굳이 사귄다고 할 여자가 요즘 세상에 어디.....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트가 마구 피어나는 저 시내의 모습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거대한 혹이 나에게 달라붙은 것 같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큰일이다. 도대체 이 난국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는 거냐. 나는 이 모든 사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을 노려보았다. 그래. 소원대로 되었으니 이제 무슨 말을 하실 생각입니까. 네코미미 선배님. 문제를 만들었으니, 해결할 책임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실망스럽게도, 뭔가 계속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틈에. "문구야." 아, 안 돼. 저 시내의 눈동자를 보니, 극히 위험했다. 이거 안 돼. 잘못하다가는 완전히 코가 꿰여버릴 위기에 놓였어. 도대체 어째서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 상황을 몽땅 잊어버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에 나는 시내를 뿌리칠 명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앞으로 잘 부탁해." 이렇게 외치면서 나에게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전보다 훨씬 친밀감을 느끼는 눈동자가 내 앞에 와 있었다. 진희가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최고였지만, 문제는 그 눈의 주인이 진희가 아니라 시내라는 점이었다. 나는 시내가 나에게 얼굴을 들이대는 걸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정녕 이대로 나는 시내에게 붙잡히는 것인가?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잡더니. "힉 !" 그녀가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뺨을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얼굴을 접근시킨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나는 그 의미를 깨닫자마자 공포에 질렸다. 정녕 이대로 나는 시내에게 먹히고 마는 것인가. 그러나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부딪치기 직전에, 그녀는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역시 아직은 안 되겠네." 안 되면 하지 마. 사람 간 떨어지게 하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이 아가씨야. 적어도 내 뺨은 놔주고 말을 해야 할 게 아냐.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만 늘어놓을 뿐이다. 반론을 하고 싶어도, 볼이 잡힌 신세이니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키스는 나중에 해줄게. 지금은 아직 부끄러우니까." 안 해도 돼. 물론 그 말은 내 입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뺨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제대로 된 발음이 안 나오는 거다. 하지만 시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정말 미안하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문제는 그 미안하다는 의미가, 내가 원하는 쪽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지만. "너무 재촉하지 마. 역시 키스라는 건, 좀 더 분위기 있는 곳에서...." 아니라니까 ! 나는 내 바램과는 완전히 반대로 행동하는 이 당돌한 아가씨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일단은 내 뺨부터 풀어놓는 게 순서다. 그러나 그녀에게 힘을 쓰기도 전에, 그녀는 뺨을 놓아주었다. 내가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그녀는 내가 앉은 의자에 자신의 몸을 의지했다. 간단히 말해서, 나하고 같은 의자에 앉았다는 뜻이다. 만약 그녀가 진희였다면 나는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겠지만, 그녀는 진희가 아니라 시내였으므로 내 기분은 지옥에 떨어질 듯한 기분으로 바뀌었다. 물론 여자아이가 내 몸에 기대고 있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나도 남자인 건 사실이고, 굳이 월영 선배가 남자의 본성에 대해 강의를 하지 않더라도 이왕이면 예쁜 여자를 많이 거느리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 아냐 ! 진희 한 명만 있어도 돼 ! 솔직히 진희 정도면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재산도 많고..... 아. 재산은 빼고. 어쨌든 나는 진희 하나로 만족할 수 있어 ! 그러나 시내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안하게 나에게 기댈 뿐이었다. "아이고." 누가 나를 좀 구해줘요 !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 정말 사람인지 의심스럽지만 - 인 부장에게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포기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곤경에 밀어놓고는 뭘 하고 있었냐 하면. "문구의 기억에는 미주에 대한 게 없었어. 문구가 마법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니니 그에 대한 증언을 얻는 것도 불가능해. 이래서는 미주에 대한 단서를 끄집어내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렇게 되면 어디서부터 추적을 다시 해야 할지 모르게 되는데. 뭔가 단서가 잡히길 바랬는데, 하나도 얻은 게 없어.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 마법의 흔적이 남았는지를 찾아보려고 해도, 아무 마력도 느껴지지 않고. 젠장. 상대가 너무 치밀해. 찾아볼 만한 건 모두 다 지워버렸으니. 어떻게 하지?" 하긴. 흑마술부의 부장이 남을 돕는 일을 할 리가 없지. 나는 그쪽은 포기하고, 다른 부원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 역시 내 꼴을 보며 웃느라 바쁘다. 못된 아가씨들 같으니라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곳의 부원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그 사람은 한술 더 뜬다. 아예 교과서를 펴놓고 읽고 있지 않는가. 이 못된 담순이 ! 내가 버럭 화를 내려는 순간. 따르르르릉. 점심 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왜 나한테 달라붙어 있는 거야." 미치겠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나서, 나는 시내에게 따져 물었다. 물론 죽어라고 교실로 향하면서 물어본 것이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저런 시시껄렁한 마술로 만들어낸 가짜 기억을 보고, 내가 자기 애인일 거라고 단정짓는 건 너무 경솔한 게 아니냐는 책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 하지만 우리가 애인 사이였다는 그 기억은, 아마 맞을 거야." "뭐라고?" 그리고 그녀는 자기 반으로 사라져 갔다. 아마 5반이었던가? 갑자기 내 앞날이 캄캄해지는 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두워졌으니까. 아니, 앞으로도 계속 어두울 것 같다. 시내라는 저 여자아이, 정말로 내가 자신의 애인이라고 믿고 있는 눈치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확신을 하게 되었는지는 정말 모르지만, 내 머리에 붙은 혹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큰. "못된 선배 같으니." 그것도 다 사악무도한 흑마술부의 부두목, 월영 선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이상한 술법으로 가짜 기억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내가 이 꼴이 된 게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그게 가짜라고 설득해봐야 나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그 기억은. '진짜일지도 몰라.' 적어도 시내에게 키스하려고 할 때의 그 설레이는 감정만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이 거짓이라면 정말 개운하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그런 감정을, 시내에게 품었지? 그리고 왜 나는, 그것을 여태까지 기억해내지 못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답을 가지고 있을 부장은, 이런 말만 했을 뿐이다. "오늘 방과후에 너희 교실로 갈게. 미인이한테 그 당시의 정황을 듣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그 상황을 목격한 건 그녀뿐이니, 그녀의 증언을 듣고 판단하자고." 부디 시내가 나를 마술로 홀렸다는 결론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흑마술부의 부실에서 그 말을 꺼내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그 말을 꺼냈을 때의 시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처음으로 나에게 살갑게 대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정말로 기억을 잃었던 때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것은, 진희에 대한 나의 사랑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였기에. '제발.' 그런 끔찍한 결론만은 아니길 바라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수업이 다 끝나고, 선배가 우리 교실에 올 때까지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는 것뿐. 그나마 시내가 우리 반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나는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그 상태에서 진희의 얼굴이라도 본다면? 두 사람을 동시에 본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그리고 여동생은? 그녀는 과연 이런 바람둥이 오빠를 용서해줄 것인가. 이 일이 사실로 단정지어질 경우, 흑마술부의 명예부원으로서 강제 가입을 해야 한다는 건 이미 둘째 문제였다. 수학 수업시간에 담임이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흘리는 것은, 이미 세 번째 문제였고. '시간아. 빨리 가라.'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었다. 물론 속으로만. 왜 그러냐는 여동생의 질문이라도 떨어지면, 나는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지금 하는 고민은 여동생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걸 알면 그 녀석에게 죽도록 맞을......... 아니, 잠깐. '그게 아니잖아?' 만약 여동생이 증언을 잘해주면, 나는 이런 갑갑한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그 일을 본 사람이 여동생뿐이라면, 그녀는 내가 시내에게 홀려 입술을 빼앗길 뻔했다고 증언해줄 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 양심의 가책도 사라질 것이다. 사실 내가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사악한 마법사가 건 요술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런데 잠깐. '이 녀석이 마법하고 관계가 있던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이 녀석의 방에는 마법에 대한 서적이 없다. 단 한 권도 없다. 여자아이답게 연애소설이나 옷 관련 책은 수두룩하지만, 흑마술에 대한 책은 없었다. 물론 내 여동생의 관심분야는 매우 다양해서, 각종 과학서적이나 역사책, 심지어 총기류 전문서적까지 있었지만 마법에 대한 책은 없었다. 마법에 관련된 책은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었던가? 아. 그건 마법을 긍정하는 책은 아니었지. 사실 그 나이의 여자아이라면 사랑점 정도는 관심을 가질 법도 한데, 점술이나 마술에 대한 책만큼은 하나도 없는 것이 여동생의 책장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무슨 전쟁 이야기야.' 자기가 무슨 대테러부대의 비밀요원도 아니면서 무슨 총을 ! 아무리 요즘이 남녀평등이니 어쩌니 해도, 저래서는 시집가기가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여자아이라면 최소한 지켜야 하는 예의나 규범이란 게 있다고. 하긴 그러니까 불량배 백 명에게 혼자 쳐들어와서, 총을 마구 난사하지. 그때는 정말 큰일나는 줄 알았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인정사정 없냐. 아무리 상대가 불량배라지만. 그리고 그래서는 이번에 내 무고함을 증명해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녀라면 마녀답게, 마법에 심취한 면도 보여주란 말야. 이럴 때는 좀 도움이 되어야 할 게 아니냐. 이 망할 여동생아. '도움이 안 되는 지식만 잔뜩 쌓아두지 말고.' 하지만 이번 경우는 여동생의 탓은 아니었다. 정말 모처럼의 일이라는 점에서 축하를 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시내와 나 사이가 수상한 관계라는 기억만을 끄집어낸 후, 뒤처리를 하지 않고 문제를 뒤로 미룬 월영 선배에게서 기인한 것이었다. 세상에. 내가 왜 시내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를 밝혀내지 않고 일을 마무리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물론 점심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랬다는 핑계거리는 있지만, 그것으로는 나를 납득시키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다. 나는 그 덕분에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문 앞에 나타날지도 모를 무언가를 두려워하면서 가슴을 졸여야 했다. 뭘 두려워하냐고? 그야 당연히. "문구야." 힉 ! 나, 나타났다 !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시내가 아니라 문희였다. 그녀는 내가 놀라는 꼴을 보더니 어이없어했지만, 하긴 내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를 테니 그럴 만도 하겠지. 아무리 신문방송부의 희망이라고 하더라도, 내 속까지 그렇게 간단하게 알아낼 수는. "너, 점심 시간에 심령현상 연구부의 부장에게 호출 당했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네코미미 선배'의 눈에 띄였어? 혹시 부 가입이라도 권유받은 거 아냐?" 덜컥. 내 간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이 녀석. 역시 보통이 아냐. 이런 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거지?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벌벌 떠는 내 꼴을 보며, 문희는 세무서 직원처럼 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어서 정보를 토해내라는 듯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이렇게 추궁 당해야 하는 거야? "안녕? 소문은 들었지만, 만나는 건 처음인걸." 나를 완전히 바싹 말려서 부스러뜨린 후에야 수업시간은 끝났고, 담임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나에게 보내는 걸 보고 나는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담순이 같으니. 어째서 내 주변에는 이렇게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만 우글거리는 거냐.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공포의 마녀가 우리 반에 나타났다. 아. 이번에는 여동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네코미미 선배 !" 물론 농담으로라도 이렇게 외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흑마술부 부실에 끌려가서, 강제로 머리에 고양이 귀를 달고 꼬리까지 추가해서 야옹야옹을 반복해서 외쳐야 할 테니까. 그래서 아무도 그런 별명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고, 월영 선배는 자기 의도대로 미인이 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하긴 누가 감히 흑마술부의 부장을, 막아서겠는가. 그녀가 2학년생이라는 것은, 이 경우에는 전혀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선배이기 때문에 모두들 물러선 게 아니라, 그녀가 바로 그 '월영 선배'이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여동생은 그런 상대의 명성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빠한테 오신다는 말은 들었어요." 역시. 두 마녀의 만남에 모든 이가 주시하는 가운데, 세기의 회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뭐? 원래 마녀라는 말은 여동생에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냐고? 아니다. 모처럼 말할 수 있어서 기쁘게 단정짓겠는데, 적어도 이 경우는 아니다. 어째서냐고? 그야 월영 선배 역시 그동안 쌓은 명성이 자자하니까. 다만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녀의 아성에 도전할 수 없었는데, 요즘은 미인이의 등장으로 최강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 침묵 속에서,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이의 눈이 이리로 집중하는 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학내 제일의 마녀이고, 또 한 사람은 최근 떠오르는 마녀이자 불량배 100명을 혼자 해치우고 전문 경호원들조차 가지고 놀았던, 전설 속의 고수니까. 아마 우리 학교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이 누구냐고 투표를 한다면, 저 두 사람이 1위 자리를 놓고 다툴 게 분명했다. 뭐, 하여튼. '과연 교실이 안 무너지고 버틸까.' 여자 셋이 모이면 바가지가 깨진다지만, 저건 여자의 한계를 초월한 특대형 괴수들이다. 만약 저들이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교실은 둘째치고 학교 건물 전체가 폐허로 변할지도 모른다. 흑마술과 현대병기의 대결은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부장은 분명히 마술을 쓸 것이고, 여동생은 총, 포, 심지어 미사일까지 끌고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장의 그 힘을 봤기 때문에, 여동생이 이기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안 할 생각인데.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여동생이 강하더라도, 그것은 주먹질이나 총싸움 같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서의 일이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건 그런 수준을 넘어선 것이고,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그런 불가사의한 마력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여동생도 역시 사람인 이상 -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만 -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볼 것이 바로, 여동생 최초의 패배? 그러면 곤란한데. 저 녀석이 월영 선배의 강압에 못 이겨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날에는. 퍽. "뭐가 불리한 증언이야." 나는 언제나처럼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문희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해서.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나를 때리는 거냐. 역시 이 녀석은 변한 게 없구나. 상대가 불량배든 국회의원이든, 심지어 마법사라도 상관없이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것이냐.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지만, 때리는 건 좀 빼라.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내 귀를 때린다. 교실 바닥에 처박힌 나를 붙잡아 일으키는 문희. 그런데 왜 한 손만 내미는 거지? 그녀의 오른손을 보니. "빠르다." 벌써 카메라를 꺼낸 거냐. 이 동작 빠른 녀석. 그녀는 한 순간이라도 이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오른손에 쥔 카메라를 얼굴에 대고 있었다. 왼손은 그저 덤일 뿐이다. 일 없이 노는 손이니까 내민다는 그 태도에 질렸지만, 그녀가 기자를 꿈꾸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자고로 기자는, 몸이 으스러져도 카메라만은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쨌든 드디어 월영 선배의 일격이 ! "문구에게 들었겠지만, 미주가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는 거 있니?" "없는데요." 야. 임마. 대답이 왜 이렇게 빨라. 아무리 여동생이 선배의 방문을 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상대의 질문을 듣자마자 대답하다니.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시시한 대답에 선배가 만족할 리는 없다. 곧바로 나오는 두 번째 질문 ! "알았어." 엥? 그리고 선배는 휙 돌아서 버린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싱거워? 모두들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어리둥절한 가운데, 선배는 여동생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너, 우리 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사양할게요." 그걸로 끝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도대체 그건 뭐였지?" 축구부에서 연습을 하면서도, 나는 월영 선배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질문 하나 던지려고 우리 반에 강림하신 거야? 선배도 선배지만, 그런 뻔뻔한 대답 하나만 날리는 여동생은 또 뭔가? 설마 여동생이 정말로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럼 왜 대답을 그렇게 한 거지? 그리고 왜 그 질문 하나로 선배는 만족했던 거지? 물론 두 사람은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마녀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안 하고 싶은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했냐 하면. "자. 오늘 연습은 이걸로 종료다. 해산." 연습이 끝나자마자, 흑마술부 부실로 뛰어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신선들의 선문답을 해버린 당사자를 만나 캐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여동생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그 녀석이 성실하게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으니, 그나마 친절하신 선배에게 묻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못된 계집애. 오빠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다니. "선배 !" 내가 자칭 '심령현상 연구부' 부실의 문을 열고 달려들어갔을 때는, 이미 부활동이 끝나고 부실안을 정리하는 부원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월영 선배가 아직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난데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무슨 일이야? 명예부원." 이봐요. 난 명예부원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려고 온 게 아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선배에게 질문하려고 했지만. "문구?" 이, 이 목소리는. 왜 하필 여기에 시내가 와 있는 거야? "그러니까, 왜 나와 미인이가 그런 대화를 했냐는 거지?" "네." 그 대화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니,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주는 셈치고 설명 좀 해줘요.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기도 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도대체 그런 황당한 대화를 하려고 우리 교실까지 왔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짧은 대화로는, 내가 여기 명예부원이 되는 불상사를 막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걸로 충분했거든."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이십니까? 나와 시내를 앉혀두고, 부장은 마치 바보제자를 가르치느라 애먹는 스승의 눈빛을 했다. 그런 눈빛 하지 마요. 물론 불평은 속으로만 했지만.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차피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미주의 행방이었는데, 그 애는 정말로 그걸 모르더라. 여기서 잠깐. 오라버니로서 여동생에게 몰래 마법을 걸었다면, 화내겠지?" 네? 그새 그런 짓을 했습니까? 확실히 아무리 나를 인간 샌드백 취급하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동생에게 마법을 걸었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부장의 '정말로 그걸 모르더라'였다. 어째서 부장은 그런 말을 했을까? 이미 망각 속으로 사라진 사람의 기억도 되살리는 사람이, 왜 여동생에게는 그렇게 단정적인 말을 할까. "하지만 마법을 걸어보니, 그 애의 그 말은 진심이더라고. 최소한 거짓을 말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어. 물론 내 마법을 그 애가 막아낼 정도의 능력을 지닐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내 마법을 깨부쉈다는 뜻이야.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리가 없어. 만약 그 애가 마법으로 내 투시마법을 파괴했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조금 화려한 불꽃놀이를 했겠지. 두 개의 마법이 서로 부딪쳤을 테니까." 뭐가 조금 화려하다는 겁니까. 왠지 그 안에는 엄청난 유혈과 고통이 따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탓할 수도 없다. 게다가 내가 위험하다고 따져봐야, 어차피 이 사람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고. 하지만 내가 그 일을 가지고 화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부장의 말을 더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애의 그 말이 진실이라면, 나로서는 미주의 행방을 찾기 위한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겠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확신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던 거야." "잠깐 !" 그런데 부장님, 하나 까먹고 계신 게 있지 않나요?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그럼 제 결백은? 그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미주 선배의 행방이 아니었다. 사실 나에게는 나와 시내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과연 부장이 마법으로 되살린 기억이 정확한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걸 몽땅 빼먹고 지나가다니. 이런 맹한 부장이 다 있나. 하지만 부장은 웃을 뿐이다. "왜 웃어요?" 그러나 그녀의 다음 대답은, 나를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한 말은. 하필이면. "네가 고백했다는 그 애 앞에서, 너와 시내의 일을 미인이에게 물어봐도 괜찮겠어?" 아차. 그걸 깜박했다. 만약 그녀의 앞에서 나와 시내가 키스했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이 나오면, 그 뒤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부장이 거기서 그 말을 꺼냈다면, 나는 그대로 저승행이 아니겠는가. 뻔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내 둔함에 가슴을 치며, 나는 좌절했다. 그럼 나는 이 오해를 영영 풀 수 없단 말인가. 그런 내 속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시내. "하지만 그 기억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없는데요." "아냐 !" 있을 거야. 분명히 어디에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걸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냐. 두통, 치통, 심지어 생리통까지 겹쳐서 내 머리를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아. 난 남자니까, 생리통은 아니구나. 뭐 어쨌든 !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 거지? 고민하던 나에게, 부장이 딱하다는 듯이 묘안을 내놓았다. "목격자를 찾으면 되잖아." 하지만 목격자를 어디 가서 찾으란 말입니까 ! 반문하려던 나에게, 부장이 정말 딱해서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힌트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힌트가 아니라 정답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미인이가 있잖아?" 그러고 보니 시내와 내가 키스하려는 장면에 난입한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이었었다. "아이고."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악의 근원인 여동생에게 가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되었다. 시내의 말로는, 아직 항공우주부의 활동이 끝나지 않았으니 별 걱정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더 문제다. 거기에는 요주의인물이 하나 있지 않은가. 물론 이 경우는 여동생이 아니라. '진희가 보는 앞에서 말을 꺼낼 수는 없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진희 앞에서 시내와 키스했는지 어땠는지를 여동생에게 물어볼 만큼, 나는 정신 없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진희가 아직 부실에 있다면, 나는 재빨리 몸을 피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진희가 없다고 해도, 여동생에게 그 일을 물어볼 자신 같은 건 없다. 대체 뭐라고 물어야 하겠는가. "미인아. 내가 시내와 키스하려던 장면, 기억 나냐?"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그 기억이 진실이라면 그녀는 내 옆에 있는 시내를 보자마자, 다시금 기억 속의 그 장면을 재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거짓이라면, 대체 이 오빠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볼 것이고, 나와 시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기억 속의 그 장면이 진실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결국 어떻게 묻든 몽둥이 찜질인가. 가급적이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없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시내가 내 옆에서 떨어질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이 기회에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히겠다는 건지. 결국은 진희가 이미 집에 돌아갔고, 여동생만 부실에 남아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요행이나 바라는 신세가 되다니. 하지만. "와. 미인이 오빠가 오네." 어느새 내 움직임은 항공우주부의 정찰기에 의해 파악되고... 아니, 아니. 정찰병에 의해 파악되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즉시 상황실, 아니 부실에 전해졌으며, 곧바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이젠 아예 내가 오는 게 연례행사라도 된 거냐. 다들 손발이 탁탁 들어맞는다. 그나마 내 옆에 있는 시내가 팔짱이라도 끼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차피 늦었다. 여기서 만약 시내가 나에게 달라붙기라도 한다면, 산통 다 깨진다. 차라리 달아나 버릴까. 어차피 그런 건 집에서 물어봐도 되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앞에 진희가 나타났다. 아니, 부원들에게 떠밀려왔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아. 문구야. 대답은 나중에 할게." 모든 부원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그녀는 허겁지겁 달아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그것도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이기는 한 게, 내가 전에 고백을 했으니 이제는 진희가 그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진희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만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며, 그러니 그녀로서는 죽어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도관 접근 금지." 부원들이 일제히 창문 쪽으로 늘어서는 바람에, 그녀가 또다시 담벼락을 타고 내려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단 아가씨 체면은 구기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아가씨의 위상을 생각하면, 어차피 지금 어떻게 행동하든 다들 웃을 수밖에 없다. 나도 이게 내 일이 아니었다면 웃었을 테니까. 다만. '지금 내가 여기 온 건.' 여동생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온 것이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이 일의 최종적인 판결을 여동생이 내려야 하는 거냐 !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고생은 몽땅 다 헛것이 되었으니, 여동생을 찾는 나에게 부원들이 해준 말은. "아. 여동생? 오늘은 좀 빨리 집에 가더라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결국 뭐야." 오늘은 하루종일 마음 고생만 잔뜩 하고, 얻은 게 없잖아. 나는 여전히 그 '조작된 기억'으로 답답해하고, 시내는 내 옆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고. 누가 보면 배부른 소리한다고 하겠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그나마 그녀가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지 않아서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게 그거다. 주위의 사람들이 우릴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상황에 대해 단호한 대처를 하기로 결정했다. 안 그러면. "문구한테 여자가 생겼다 !" 이런 소문이 진희한테로 흘러 들어가서, 내 애정전선에 파국이 닥칠 수도 있으므로. 그래서 나는 지하철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축구선수이고,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게다가 요즘 진희에게 고백하려고 바삐 뛰어다니는 바람에, 운동에 좀 소홀한 면이 있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언제 UFO슛을 완성시키고, 여동생의 옆에서 나란히 달릴 수 있겠는가. 여동생을 앞지르는 건 무리라고 해도, 최소한 나란히 달릴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된 축구선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100m에 12초라는, 무지 느린 스피드를 자랑하는 내 다리는 좀 더 단련해둬야 했다. 안 그러면 세계 무대에 서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여동생을 쫓아갈 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달렸을까. 이쯤이면 시내도 날 포기했겠지. 내 다리를 여자가 따라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여기서 '거의'가 들어가는 이유는, 여동생이라는 존재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동생 같은 괴물은 흔한 게 아니니, 이제는 안심해도 될....... "아니군." 시내는 내 뒤를 필사적으로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동생처럼 바람을 방불케 하는 속도를 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따라오고 있었다 ! 그녀의 그런 모습은 나를 한바탕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여동생이라면 몰라도, 그 흑마술부 부장이라면 몰라도, 저런 보통 여자애조차 따돌릴 수 없는 속도라니. 내 다리가 그렇게 느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숨은 상당히 거칠었다. 꽤나 무리를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달리면 시내를 따돌리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 "아니잖아." 우리는 어느새, 이미 지하철역에 도착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래서는 따돌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집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하니까. 결국 나는 울며겨자먹기로 역에 들어갔고, 시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뒤를 따라왔다. 찰거머리 같으니. 오지 마. 그러나 그녀는 접착제로 나와 달라붙기라도 한 듯, 계속 내 뒤를 따라왔다. 제발 오지 마. 그러나 그녀는 그 많은 열차 중에서도, 그 많은 열차 칸 중에서도, 그 많은 의자 중에서도, 7군데는 되는 의자의 공간 중에서도 하필이면 내가 앉으려는 자리의 바로 옆에 앉아 버렸다. 이건 고의다. 나는 다른 자리를 찾아봤지만, 다른 곳은 모조리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 시내는 나를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며. "자. 여기 앉아. 문구야." 이럴 때 매정하게 그녀의 권유를 뿌리친다면, 나는 당장 돌을 맞게 될 것이었다. 주위의 승객들이 노려보는 시선이, 상당히 차갑다. 설마, 내가 시내와 애인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들의 수군거림은, 여지없이 내 속을 부숴 놓았다. "요즘 애들은 너무 빠르다니까." "벌써 저런 거냐. 조금 있으면 키스도 하겠군." "10대 부부나 아니면 다행이지." "옛날엔 저렇지 않았는데." 그냥 서서 가자는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시내는 그런 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에 내 바지춤을 잡고. 어어어? 나는 중심을 잡기도 전에,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거 누구한테 양보해야 할텐데. 하지만 기묘하게도, 내 주위에는 노약자나 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그 흔한 임산부도 없었다. 이거 뭐야. 우리나라가 아무리 애 키우기가 힘든 환경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없으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라고. 이거 오늘, 우리 집까지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이 아가씨가. 그러나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진 순간, 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마나한 질문이 아닌가. 그녀는 왜 그걸 묻냐는 표정으로. "오늘 그걸 물어봐야 하잖아?" '그것'이라는 것은, 즉 나와 시내가 키스를 했다는 내 기억에 대한 물음이었다. 즉 그게 정말이냐는 확인작업을 말하는 건데, 문제는 이 세상의 60억이 넘는 인간들 중에서 그걸 본 사람이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여동생이라는 점이었다. 이 멍청이들. 왜 그것도 못 보는 거냐. 다들 잠만 자고 있었나. 나와 시내가 키스하는 동안. 아, 아니지. 난 시내와 키스한 적 없어 ! 그 기억은 조작이야 ! 사기야 ! 부장이 날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만든 게 분명해 ! 그러나 이 자리에 부장은 없으니, 원망해봐야 듣지도 않는다. 거기에다가. '만약 그 기억이 사실이면.' 그것은, 즉 여동생에 나에게 가한 공중 10연발 걷어차기도 사실이라는 뜻이 된다. 그 녀석, 상당히 화난 표정이었던데. 평소라면 한 방으로 끝내지, 그렇게 무자비하게 수십 대를 구타하는 녀석은 아니었던 걸 감안하면, 나와 시내의 키스가 진실일 경우 여동생에 어떤 조치를 취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 여동생에게 그 기억이 진실인지를 묻는다? 게다가 흑마술로 기억을 되살렸는데, 그게 맞느냐고 물어? 마술서적이 하나도 없는 여동생의 책장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빠. 사기술에 관심 두지 마." 이렇게 말로만 끝내면 차라리 낫다. 다시금 그 공중 10연발 걷어차기를 쓰기라도 하면, 난 사망이다. 사실 그게 사람 잡는 용도의 기술이지, 여동생이 흔히 쓰는 표현인 '오빠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냐. 그래서 나는 그 질문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지만, 시내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는. "어서 그게 진실이라는 걸 인정하고, 미련을 버리라고." 안 버릴 거야 ! 이렇게 진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어 ! 나는 어떻게든 시내를 따돌릴 방법을 모색하려고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이건 뭐냐. 가만있자. 이건 혹시. "우리 집 대문이잖아 !" 이런 빌어먹을. 웃고 즐기다 보니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방송사의 말을 인용하는 건 좀 부적절하겠지만, 어쨌든 상황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일생이 왔다갔다하는 중대한 순간에 망상에 빠지다니. 어쩌면 나는 진희를 영영 잃을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시내가 여동생 앞에서 나에게 키스라도 퍼붓는 날에는. 그런 장래가 나에게 다가오는 걸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내 인생을 위해. "늦은 시간이니까 집에 돌아가. 그건 내가 직접, 여동생에게 물어볼 거야." 그러나 그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는. "안 돼. 아무리 문구의 말이라도, 그건 들어줄 수 없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난 집에 돌아가도 잠을 잘 수 없을 거야. 그 기억이 진실이 아니라면 여기서 매듭을 지어야 하고, 맞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뭐, 뭘 원하는 거냐. 오만가지 악몽이 떠오르면서 나는 공포에 질렸고,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녀를 손으로 밀쳐낸 것이다. 원래는 말로 타이르든지 살짝 밀었어야 하는데, 극한상황에 몰리자 그런 침착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때가 많은 법.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니. "!" 이, 이 감촉은? 눈동자를 그 감촉에 따라 굴려보자, 내 손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났다. 내 손은 그녀의 가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시내가 브레지어를 입지 않았다면 더 난리가 났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브레지어가 날 살렸다. 일단 '물컹'까지는 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건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나는 급히 손을 떼려고 했지만. "오빠. 길거리에서 뭐 하는 거야?" 나는 남극대륙의 앞 바다에 떨어져 얼어죽어 가는 탐험대원이 된 심정으로,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왔다." 양손에 장바구니를 든, 여동생이 서 있었다. "너, 오늘 시장에 갔었니?" 그래서 이 녀석이 오늘은 부활동을 빨리 끝낸 거였나? 일단 여동생이 진희 앞에서 시내와의 키스장면을 증언하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상황은 약간 개선되었을 뿐, 전반적으로는 사실 그대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하는 거지? 그러나 그 문제는 여동생이 해결해주었다. 만능열쇠도 아니면서. "오빠. 애인 사이도 아니면서 여자 가슴을 만지는 건, 치한행위라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양손에 짐을 들었으므로,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진화되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었고, 시내도 아무래도 그 유형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녀는 약간의 책망만으로 끝날 수 있었던 상황을. "그럼 치한은 아니겠네. 어쨌든 나하고 문구는 키스까지 하려고 했던 사이니까." 쿵. 매를 벌기로 작정한 거냐 ! 그런 소리를 하면 여동생이 나를 살려둘 것 같으냐. 물론 그 부분에 대한 진실을 물어보는 게 오늘의 최종적인 목적이지만,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다가는, 부작용이 클 게 분명하다. 너무 직선적으로 나갔어. 시내야. 하지만 여동생은 그런 그녀의 자신감을 사정없이 뭉개버렸으니. "진희에게 고백도 못해서 자괴감에 빠진 오빠를 유혹한 인간이 무슨." 유, 유혹? 그, 그랬던가. 갑자기 모든 게 납득이 간다. 그랬구나. 어쩐지. 진희만 좋아하던 내가 갑자기 그런 짓을, 제정신으로 했을 리가 없지. 갑자기 여동생에 대한 존경심이 마구 치솟는다. 역시 멋진 여자야. 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게 느껴지지만, 시내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글세? 심령현상 연구부 부장님의 자료에 따르면, 문구 자신도 상당히 키스하고 싶어했던 것 같던데?" 그러나. 그 정도로 흔들리면 여동생이 아니다. 언제나 강조하는 말이지만, '누구나 여동생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여동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이 그녀를 상징하는 문장인 이유는,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이라는 낱말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러니까 유혹이라는 거지. 머릿속에 진희와 축구밖에 없는 오빠가, 어떻게 시내 네가 오빠를 짝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지? 그리고 그걸 알았다고 해도, 오빠는 그 날 아침만 해도 진지하게 진희에게 고백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진희가 도망가서 고백은 무산되었지만, 오빠가 얼마나 절망했는지는 옆에서 봐서 알아. 그런데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오빠가 갑자기 너에게 정열적으로 키스하려고 했을까. 혹시 너, 흑마술에 관심이 있다더니 이상한 저주라도 걸어서 오빠를 끌어당긴 건 아니겠지?" 아주 팍팍 밟는구나. 역시 여동생은 강하다. 그리고 마무리 공격을 하는 여동생. "아니라고 하고 싶다면, 너 자신의 매력과 사랑으로 오빠를 손에 넣도록 해. 그러면 인정해줄 테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로 더러운 흑마술을 써서 오빠를 손에 넣는다면." 마지막 선고가 떨어졌다. "난 널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무 과격한 발언에 충격을 받았을까. 움직이지 못하는 시내를 뒤로 두고, 여동생은 집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 뒤에서, 시내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너, 어떻게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네가 뭔데?" 그러자 그녀는. "난 오빠의 여동생이니까, 오빠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있어. 그래서 오빠가 얼마나 진희를 좋아하는지, 진희에게 고백을 못해서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도 알아. 그래서 갑자기 너와 오빠가 키스하려고 한 걸 보면, 납득할 수가 없어. 그 전날까지도 네가 오빠를 짝사랑한다는 걸 오빠는 몰랐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된 걸까? 만약 네가 결백하다면, 너 자신의 매력으로 오빠를 손에 넣어 봐. 정말 오빠를 좋아한다면, 삼각관계의 승자로 일어서도록 해. 정당한 애정싸움이라면, 나는 가로막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여동생. 그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조금 전의 발언은 나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짝사랑이라니? 시내가 나를 짝사랑했다는 거야? 그건 정말 새로운 사실이었지만, 나에게는 진희가 있으니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쨌든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 것은 좋지만, 발언 자체가 너무 과격하다. 시내도 명색이 여동생의 친구인데. 이 녀석, 어쩌면 흑마술부 부장 이상으로 지독한 인물이 아닐까. 여동생의 마지막 말은. "오빠. 그럼 공정한 애정전선의 성립을 기대할게." 그리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들을 남겨둔 채. 시내의 절규가 이어진다. "누가 계략 같은 거 쓸 줄 알아 !" 여동생은 마녀 주문마법 설정편 마법이란, 원래 남의 힘을 빌려서 신비로운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이란, 신을 뜻할 수도 있고 악마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 경우는 '마법 근원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작중에서 마법 근원체라고 하면, 마법사가 마법을 행할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는 존재를 뜻하며 이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마법사의 능력과 주문마법의 종류가 달라지게 됩니다. 작품 내에서 마법의 체계, 정확히 말해서 주문마법의 체계는 도합 12가지로 분류되며, 원소마법/독 마법/정신마법/상태변화마법/생명마법/죽음마법/언령 마법/원자마법/시공마법/힘 마법/역주문 마법/영혼마법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마력 자체를 다루는 것은 이 12가지에 포함되지 않고, 기초과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법 근원체의 경우 이 12가지 마법을 모두 다룰 수 있는 고급의 근원체가 있는가 하면, 한 가지밖에 다루지 못하는 것도 있고 2 ~ 3가지를 다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마법사가 고위마법을 익히고 싶으면, 더 강력한 근원체를 찾아야 하며 가급적이면 최고의 근원체를 찾아서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근원체가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것은 아니므로(그랬으면 우리들도 벌써 마법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이를 찾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보통 사람은 마법 근원체를 찾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우며, 어쩌다가 그런 보물을 우연히 찾아내지 않는 이상 마법사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마법 근원체 쪽에서 적극적으로 자기의 힘을 빌릴 마법사후보를 찾아다닌다면 문제가 다릅니다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스승도 없이 마법사가 되는 것은 어렵지요. 따라서 마법사가 되고 싶으면, 우선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마법 근원체와 이미 연결된 사람에게 배우는 편이, 역시 그런 방법을 익히기 쉬우니까요. 일단 제자가 되고 나면, 마법사로서 마법 근원체와 만나 계약을 주고받게 됩니다. 계약을 하고 나면 정식 마법사가 되는데, 그의 수준은 마법 근원체의 수준과, 그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주문을 익히고 그것을 적절한 타이밍에 풀어놓는가, 그리고 그 자신이 얼마나 마력을 많이 쌓아두었는가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마력은 강한데 근원체가 형편없으면 그 마법사도 당연히 약해지고, 마력은 약한데 근원체가 강력하면 그 마법사는 강해집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마력이 적다면, 당연히 마법을 만들어낼 힘이 딸리기 때문에 또 곤란합니다. 쉽게 말해서 마법사가 자동차라면, 마법 근원체는 엔진이고 마력은 기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엔진이 형편없지만 기름을 많이 담았다면 느리게, 그리고 오래 달릴 수 있지만 최고는 될 수 없고, 엔진이 뛰어나지만 기름이 너무 적으면 그 성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는 거지요. 작중에서 마력은 질서도가 높은 에너지로(엔트로피가 낮다고 해야 하나요), 쉽게 다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타입의 힘입니다. 마력을 마법 근원체가 받아서, 이 힘을 마법사가 요구하는 힘으로 바꿔서 내놓게 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개입되는 것이 주문이며, 마법사가 마법 근원체에게 주문으로 '마력을 동그랗게 뭉쳐진 불덩어리로 바꿔서 내놔라'고 요구하면, 그게 바로 파이어 볼(Fireball)이 되는 것입니다. 마법의 12가지 분류는 마력을 어떠한 힘으로 바꿔서 내놓느냐는 것에 따른 분류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인간은 원래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마법사의 스승은 마력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떻게 몸 속에 쌓아두는지를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러나 마력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처음에 마법사의 스승은 마력을 스스로의 몸에서 꺼내서 제자에게 주입, 마력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을 시켜주는 게 상례입니다. 물론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종족이라면, 이런 수고는 필요가 없습니다만 인간은 그런 종족이라고 보기가 힘들지요. 그리고 인간처럼 마력에 익숙하지 못한 종족은, 시간을 들여서 마력이 몸 안에 들어간 상태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마법 근원체가 마법을 공짜로 만들어주지는 않는 법입니다. 이건 처음에 마법사가 근원체와 계약을 주고받을 때 언급되며, 근원체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제물입니다. 이 제물이 없는 근원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근원체중 높은 수준의 것들은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하며, 그를 위해 상당히 지능이 높습니다. 그 중에는 성질이 까다로운 것들도 있어서 상당히 구하기 힘든 제물을 요구하기도 하며, 이는 근원체가 마법사를 시험하는 성격일 수도 있고 일종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간혹 성질 나쁜 근원체는 인간의 영혼을 요구하거나, 산 사람을 불태우라거나, 기타 등등. 온갖 악행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계약 과정은 아래에. <계약의 의식> 계약의 의식이란, 마법사가 마법의 근원체와 계약해서, 그 힘을 얻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아무리 주문을 잘 외워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 의식을 치러 주는 것이 고위 마법사들이기 때문에, 마법을 쉽게 배울 수 없는 겁니다. 고위 마법사가 할 일이 없어서 아무한테나 이런 의식을 해줍니까? 과정도 길고 복잡한데. 우선, 의식을 시작하면 옷을 정갈히 입고, 목욕으로 청결을 유지하고. 그 후에 제단에 서서 마법의 근원체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이 제물을 마법의 근원체, 그러니까 신이나 악마가 와서 먹는다는 건 아니고, 단지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징으로 요구되는 것이 별의 별 것이 다 있기 때문에, 고위 마법사가 필요한 겁니다. 아. 12가지의 마법마다 최소한 하나 이상의 근원체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 중 가장 강력한 근원체와 계약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상위의 근원체가 힘든 제물을 요구할 수도 있거든요. 하위의 근원체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으니 그런 경향이 덜합니다만, 상위의 경우는 계약하자는 인간이 많으므로 이런 횡포를 부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을 제물로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쨌든 제물을 구해오면, 정해진 격식에 따라 제물을 바치면서 고위 마법사가 정신마법 9레벨의 talk with demon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악마와 대화가 가능하지요. 이 대화를 통해 제물이 마음에 들면, 마법 근원체는 의식을 하는 마법사에게 피의 계약을 맺습니다. 피를 흘리기 때문에 피의 계약이라고 하는 거지, 피로 문서를 쓰는 게 아닙니다. 계약을 맺고 나면, 마법 근원체는 마법사에게 고유의 언어로 마법 주문을 말해줍니다. 이걸 외우면 마법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첫 번째 레벨에서는 계약을 맺어봐야 마법이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두 번째 레벨도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을 최소 두 번을 치러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시작만 그렇지, 그 다음은 레벨을 한 번 올릴 때마다 의식을 한 번 치르면 됩니다. 단, 의식을 무조건 치를 수는 없습니다. 한 예를 들면, 9레벨의 마법사가 12가지의 마법 계통 중 하나를 빼먹은 채 10레벨의 마법을 얻으려고 하면, 되지가 않습니다. 마법 근원체들과 계약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들 사이의 무언의 약속은, 한 레벨의 마법을 모두 익힌 후에야 다음 레벨로 승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마법사의 레벨을 다룬 규칙에서 언급하지요. 대개는 마법사는 이 의식을 스스로 치르게 되지만, 가끔씩 마법의 근원체가 마법사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무작정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요구조건이 나올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경우가 있으니, 그것은 여동생의 마법 근원체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녀는 이런 계약의 의식을 전혀 치르지 않고도 마법사가 되었으니, 그 이유는 그녀가 이 마법 근원체를 아예 자기 힘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12가지의 마법을 모두 지닌, 특대형을 말이지요. 이 정도의 강력한 마법사라면 마법사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되며, 일반적인 주문마법사가 이를 수 없는 경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정도의 능력자라면 스스로 마법 근원체로서 활동할 수도 있으며, 사실상 주문마법을 외울 필요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또 하나의 특이한 경우는 그 자신이 여동생처럼 강대한 힘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문마법을 쓰기 위한 마법 근원체를 만드는 것으로, 이건 과학의 힘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가 컴퓨터를 켤 때, 우리는 컴퓨터가 보여주는 능력을 스스로의 몸에 지니기 때문에 컴퓨터를 쓰는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간편한 주문(스위치 켜기)에 의해 컴퓨터의 힘을 불러내고, 자판과 마우스를 써서 그 힘을 빌려서 사용하기 때문에 컴퓨터를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분명히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요. 과학의 힘에 의해 마법 근원체를 만든다는 건, 그런 뜻입니다. <주문의 구조> 제가 마법사들의 주문을 쓸 때는 언제나 이렇게 씁니다. "#####$$$$$&&&&& 마법의 이름." (물론 사람에 따라 앞의 문자가 달라집니다) 마법의 이름에는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파이어 볼이라든지 하는 것이 들어가지만, 앞의 기호들에는 뭐가 들어가냐 하면, 그것은 순서대로 아래에 써 있습니다. 1. 계약한 신들과 악마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부른다. (#) 2. 마법의 사용대상을 지정한다. ($) 3. 해당하는 마법의 이름을 부른다. (&) 아까 계약의 의식에서 말한 대로, 마법 근원체들이 말하는 언어가 다 제각각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겁니다. 그 마법 근원체들의 이름은 마법사들이나 챙길 사항이고. 위의 순서대로 마법 주문을 외우면 마법이 튀어나갑니다. 물론, 그 결과로 몸 안의 마력이 약간 줄어드는 것도 감안해야 하므로, 평소에 마력을 모아두어야 하는 겁니다. 일단 마법사가 마법 근원체와 계약하면, 근원체는 마력을 만드는 마법을 마법사에게 걸어서, 마력을 평소에 모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건 근원체에 따라 다 다른데, 어떤 타입은 마력을 모으는 수행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하지요. <마법사의 레벨> 주문마법사의 레벨은 1에서 10까지이며, 여기서 레벨은 사용 마법의 수준에 따라 분류됩니다. 당연히 레벨 1보다는 레벨 2가 더 강하고, 2보다는 3이 더 강합니다. 이렇게 10까지 이어지게 되지요.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게 아니며, 실제의 레벨은 파워가 아니고 마법완성의 난이도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더 많습니다. 또한 레벨 10을 넘어선 레벨 11짜리 마법도 있기야 합니다만, 이건 아래에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레벨 1은 마법사중 초보로, 말 그대로 마법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계약의 의식을 한 번만 치루면 이 레벨이 됩니다. 그 전에는 마법사 견습이므로, 레벨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벨이 높아진다는 것은, 사용하는 마법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과 더불어, 마법 주문을 외우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마법의 근원체와 정신적으로 더욱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지요. 1레벨은 마법 주문을 외우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9레벨은 그게 상당히 짧습니다. 그럼 10레벨은 뭐냐 하면..... 레벨 10은 마법 근원체와 정신적으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으로, 마법 근원체를 간단한 말로 표현하면 악마가 되는데, 악마와 정신을 공유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제 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요. 설령 상대가 악마가 아니라고 해도, 여러 가지 마법을 주문을 듣고 마력을 이용해 만들어낸다면 그건 상당히 고도의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특히 레벨 10급의 주문을 실천할 수 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런 고도의 지적 생명체(라고 불러야 하는 존재)와 정신이 일치된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붕괴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레벨 10짜리 마법을 익히고 싶은데도, 대부분의 마법사는 그걸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넘어선 11레벨이 또 있으니, 그건 뭐냐 하면....... 이것은 마법 근원체와 힘을 합해서, 10레벨 이상의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걸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느냐는 점이고, 10레벨짜리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11레벨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마법사 자신이 마법 근원체와 대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거나 그보다 우월해야 하는데,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굳이 주문마법을 쓸 필요가 없지요. 따라서 이 수준에 도달한 마법사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극중에서 이런 사람이 하나 나왔지요. 바로 우리의 여동생. 그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여동생 자신이 마법 근원체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주문마법을 굳이 쓰냐고요? 그건 극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12가지 마법에 대해> 1. 원소 마법 : 주로 8가지(화염 fire, 얼음 ice, 바람 wind, 대지 land, 전격 lightning, 물 water, 빛 light, 어둠 darkness)의 원소를 사용하여 이루는 마법입니다. 마법 근원체와의 계약이 가장 쉽고, 가장 사용하기 편한 마법이긴 하지만, 그 대가로 위력도 약합니다. 솔직히 불덩어리를 던진다고 해도, 현대의 전차에게는 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지요.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초보 마법사들은 상당히 애용하지만, 실전에서 고위 마법사들은 이런 마법을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쓰기 쉬운 이상, 막기도 쉽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가장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마법 입문자는 반드시 사용하게 되는 마법입니다. 역마법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으며, 이는 8가지의 원소마법이 서로의 정반대의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레벨 1 : 기초를 닦고 8가지의 마법 근원체와 계약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기껏해야 마력을 변환시키지 않고 그대로 발사하는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뿐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계약을 해야 하는 단계이며, 상당히 지루하기도 한 과정입니다. 레벨 2 : 단순한 에너지의 조종입니다. - beam, - thrower, - blast(폭발)같은 형태의 기술들이 주를 이룹니다. 말그대로 그냥 힘을 뿜어내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위력이 약하다는 건 아닙니다. 빛을 집중시켜 흐르게 한 것이 바로 레이저 빔이니까요. 전기를 흐르게 하면 라이트닝 볼트, 즉 벼락이 됩니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라면,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문이 간단하고 빠르니까요. 레벨 3 : 단순 에너지 구조체를 만들어내어 상대를 공격하는 단계입니다. - ball, - arrow, - screen(장막으로 시야를 가리는 기술. 위력이 약하다), - mist등을 만들어 공격하게 됩니다. 공격 마법이 아니라도, 단순한 구조체라는 요건에 맞는다면 어떤 기술이든 가능합니다. 바람을 이용해 하늘을 떠다니는 것도, 이 수준의 마법입니다. 또한, 이 단계에선 힘을 흐르게 하니까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감지 주문도 당연히 이곳에 위치하게 되지요. 레벨 4 : 강한 공격을 하는 기술이고, 상당히 복잡한 구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입니다. - ring, - wall, - strike, - cannon, shell, shield, prison(감옥 ! 원소 마법으로 만든 구조물)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처음에 정의한 조건에 맞는다면, 어떤 마법이든 가능합니다. 레벨 5 : 복잡한 구조체를 만들어냅니다. 말그대로 힘을 상당히 자유롭게 사용하는 겁니다. 공격 범위도 상당히 넓게 할 수 있지요. - timebomb, - storm, - cluster bomb, - ocean(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파괴한다), earthquake(대지마법의 경우. 지진), - tornado등이 포함되며, 빛을 투과시켜 모습을 가리는 투명마법(invisibility)도 이에 속합니다. 그 역시 빛의 흐름을 정교하게 다루어야 하니까요. 레벨 6 : 2종의 원소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지만, 복합주문(2개 이상의 주문을 합쳐서, 새로운 효과를 내는 타입)과는 달리 마법주문 자체가 2개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건 별로 애용되는 마법이 아닌 것이, 원소마법 2가지를 동시에 외우면 그걸로 간단히 실현되므로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 typhoon, blast cloud(일종의 기화폭탄)등이 여기에 속하며, 레벨 5 이상의 강력한 원소마법도 여기에 속합니다. 레벨 7 : 3가지 이상의 원소 마법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역시 상충되는 요소가 있으므로 그리 사용되지는 않지만,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정도의 위력이 나오는 정도의 원소마법도 여기에 들어가는군요. 레벨 8 : 4가지 이상의 원소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4가지라고 해도, 그 효과가 4가지라는 거지, 주문 4개를 동시에 외우는 것은 아닙니다. 단일 원소 마법으로 사용하면, 수소폭탄급의 위력을 낼 수 있는 단계입니다. - drake breath(드레이크 브레스)가 이에 포함되지요. 레벨 9 : 8가지의 원소 마법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단일 원소마법으로 따지면 100메가톤을 넘기는 경우가 여기에 들어가며, absolute zero(절대 0도의 빙마법), sink(넓은 범위의 적을 땅속으로 빨아들여 버린다)등이 있습니다. weather control(날씨 조종) - 이 주문을 외우고 나면 마법사 자신이 원하는 날씨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게 여기에 들어가는 이유는 기존의 일반 earthquake등의 마법보다 훨씬 효과가 강력한 데다가, 8가지의 원소마법중 어느 것이 들어갈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화산폭발이라고 하면, 날씨라기에는 좀 그렇지만 불과 대지와 바람과 물, 그리고 어둠이 모두 들어가게 된다) 특히 거대한 규모의 날씨변동을 많이 쓰지만, 작은 것(폭우 heavy rain)도 들어가게 됩니다. 레벨 10 : 원소 마법의 최고 기술을 구사합니다. 확인된 주문은 여동생이 사용한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가 있으며, 그 위력이 매우 커서 잘못 쓰면 별 하나가 날아갑니다. 또한 그 이상의 에너지량을 지닌 원소 마법도 여기에 포함됩니다만, 이런 걸 지구 위에서 쓰면 큰일이므로 거의 나오지 않을 듯 하군요.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environment control(환경조절)이라는 마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 전체의 환경을 바꿔버리는 마법으로, 8가지 원소마법을 모두 사용하는 데다가 적용범위가 지구 전체이므로 레벨 10입니다. 날씨를 조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한 번 시전하면 그 효과가 장기간에 걸쳐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걸 이용하면, 빙하기를 만들어낸다던가 지구 전체에 수 백도의 고열을 지닌 폭우를 수 백년동안 내리게 한다던가, 전세계를 바다로 바꿔버린다던가, 지구 전체를 동결시키거나 메탄의 바다로 지구를 덮는다던가, 이런 식입니다. 다만 이런 흉악한 마법은 마법을 시전한 후 마법사가 원하는 환경으로 지구를 통째로 뒤바꾸는 것이므로, 오용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2. 독 마법 : 적에게 여러 가지 효과를 지니는 독을 쓰는 마법으로, 역마법은 해독마법이지만 이쪽은 이미 독 마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엄청난 수준의 마법은 아니지만, 초보자에게는 잘 먹히는 타입이지요. 그러나 효과가 좀 늦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이 마법사라면 해독마법으로 금방 풀어버립니다. 레벨 2 : 독공격에 대한 기초. 레벨 3 : 해독 마법에 대한 기초. 레벨 4 : 감각 기관의 이상이나 정지를 일으키는 정도의 독을 사용합니다. 그 증상은 마비, 침묵, 실명, 혼란, 수면 등입니다. clowd sleep 레벨 5 : 상대의 의지를 잃게 하거나 상대를 죽여 버리는 강력한 독을 구사합니다. clowd kill 레벨 6 : 2가지 이상의 복잡한 작용을 하는 독을 사용합니다. 레벨 7 : 상당한 맹독을 사용합니다. 레벨 6 이하의 마법으로는 해독이 안 됩니다. 레벨 8 : 레벨 7급의 독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에게 씁니다. 절대중독마법도 있군요. drake breath poison 레벨 9 : 절대해독마법이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레벨 10 : 만독불침(모든 독에 대한 면역)의 마법이나, 도시 몇 개를 한 방에 날리는 강력한 독을 마법으로 만들어냅니다. 역시 독마법도 10레벨 정도 되면 상당히 끔찍해지니 주의. 3. 정신 마법 : 정신파를 사용하는 마법입니다. 그 위력은 크지만, 물리적인 위력은 낮은 편이어서 자연재해에는 무력하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상당히 효과적인 마법이므로 오용하면 큰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모든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이 마법을 익히는 것은,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역주문은 정신마법의 해제효과가 있습니다. 레벨 4 : 기초. 레벨 5 : 상대의 의지를 교란시키며, 정신이 굳건한 사람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마법이 여기 포함됩니다. 원소 마법으로 치면 레벨 1부터 3까지의 공격주문을 적용해서 적에게 날릴 수도 있으며, illusion(환상)마법도 여기 포함됩니다. 작중에서는 시내가 오라버니를 유혹할 때, 마법반지류로 이걸 걸어보았습니다. 오라버니의 정신력이 낮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레벨 6 : 상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으며, 원소 마법 레벨 4에서 6까지의 주문이 포함됩니다. read mind. 레벨 7 :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정신마법입니다.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서 그를 스스로 죽게 하거나, 간단한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sorrow to death(죽음에 이르는 슬픔) 레벨 8 : 상대의 정신을 파괴하거나, 복잡한 명령을 내려서 실행시킬 수 있습니다. curse-로 시작되는 주문이 대표적이군요. 여동생이 사용한 Truth라는 마법도 여기에 속하지만, 사실은 그건 mind window라는 마법입니다. 그러나 여동생은 주문을 길게 만들기 귀찮다는 이유로, Truth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군요. 이건 마법 근원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mind break(정신 붕괴 : 상대의 정신파를 모두 붕괴시켜 마법사가 원하는 종류의 힘으로 바꾸어 버린다), mind window(마음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심문시에 사용하는 마법으로, 적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레벨 9 : 상대의 정신을 완벽히 지배합니다. mind control, talk with demon(악마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것. 계약이 되지 않은 악마와 대화하는 것이다) 레벨 10 : 마법사 자신에게 거는 마법으로, 마법 주문의 간략화와 단축에 관계됩니다. 이 마법을 익힌 마법사는 마법주문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켜서, 단지 마법의 이름만 외워도 마법이 발동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2가지 이상의 마법을 쓸 수도 있게 되므로, 전투 시에 매우 유리해지게 됩니다. Multi spell(2가지 이상의 주문 사용), spirit connection with devil(마법을 구사하는 악마와 정신을 연결시켜 마법 주문을 생략하게 할 수 있다), mind control destruction, covenant(순간적으로 계약의 의식을 치르는 수단. 특히 모르는 마법을 외울 때 사용....)등이 있습니다. 4. 상태 변화 마법 :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 자신이나, 적의 신체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마법입니다. 독 마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무엇보다도 방어주문이 포함되어 있고, 신체상태를 좋게 하는 마법도 포함되니까요. 그러나 무작위로 타격을 주는 식의 사용은 무리이며, 그 점에서 독마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역시 역주문은 상대의 상태 변화 마법을 파괴하는 타입이군요. 레벨 4 : 기초 레벨 5 : 몸 상태를 좋게 만듭니다. sight up(시야 확대), detection(디텍션 : 탐지. 각종 힘을 탐지한다) 레벨 6 : 몸 상태를 나쁘게 만들거나 막아냅니다(신체 약화, 면역 등). sickness, vaccine, virus. sleep. 레벨 7 : 방어 마법(shield)이나 cure disease같은 병 치료술이 여기 포함됩니다. 또한 상대의 마법을 감지해내는 것도 이쪽에 들어가는군요. 그것도 상대의 상태가 바뀌는 경우니까요. detect magic(마법 감지 : 레벨이 높을 수록 그 탐지 효과가 뛰어나다. 보통은 같은 레벨의 마법이나 그 이하를 탐지 가능), scan(상대의 상태를 조사)등이 여기 들어가네요. 레벨 8 : 상대를 무력화하는 마법이 여기 들어갑니다. 이건 진짜로 적을 무력화하는 것이므로 정신력이나 해독마법은 안 통하며, 알기 쉽게 설명하면 갑자기 HP와 MP가 마구 내려가서 1 이하로 떨어지는 겁니다. 잘못 적용하면 상대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태를 마구 바꾸는 마법들은 여기로 들어가지만, 아군 여러 명의 상태를 좋게 바꾸는 마법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힘 마법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powerless, energy drain(상대의 힘과 마력을 흡수한다) 레벨 9 : 아주 강력한 방어마법이나, 무적에 가까운 몸 상태를 만드는 마법이 여기로 들어갑니다. Light speed(빛의 상태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을 만들어낸다), Dragon shield(강력한 방어 마법이지만 여동생은 길게 부르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shield라고 부르는군요), no obstacle(모든 것을 투과하는 몸으로 만드는 마법이며, 여동생은 permeation. 투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recover disease(병 완치)같은 것들이 여기 들어갑니다. 레벨 10 : 절대 방어 마법이나 절대 파괴주문이 들어갑니다. Invincible force(절대 무적상태), 불치병을 주는 마법이나 치료하는 마법, 분신술(self reproduction. 자기 복제)등이 있군요. Absolute destruction(절대 파괴 - 레벨 10의 마법으로 막을 수 없는, 적의 상태를 '파괴'로 바꾸는 마법. 적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를 완벽하게 흐트러뜨린다)도 여기에 속합니다. 다만 폴리모프(polymorph : 변화)의 경우는 상황에 따라 난이도가 다르므로, 정의하기가 애매하네요.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폴리모프하는 건 비교적 쉽지만, 투명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한다면? 5. 생명 마법 : 생명력을 다루며, 치유 마법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마법은 생명에너지를 다루는 것이므로, 상태 변화 마법쪽이 치료 시에 더 널리 사용됩니다. 이건 생명에너지를 움직이므로 바이러스나 세균, 외상등에는 보조적인 효과만 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대개 치유마법이라면 이쪽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생명에너지는 그런 쪽에서 필수이므로 치유마법이 포함되어 다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의 역마법은 죽음마법이지만, 그것은 보통 따로 분류됩니다. 또한 이 마법의 특징은, 기를 사용한 각종 무술에도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레벨 7의 라이프 블레이드의 경우, 검의 고수들이 다루는 검기나 검강을 연상시키며, 실제로도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장풍'도 레벨 7에 들어가겠네요. 레벨 5 : 기초 레벨 6 : 생명력의 흐름을 다루며, 생명력을 공급하고 상처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레벨 7 : 상처를 치료하고, 원소 마법의 레벨 1에서 3까지의 공격 마법을 사용합니다. (detect life force : 생명마법 레벨 7. 생명력을 탐지한다)가 그 예입니다. Life blade(라이프 블레이드)가 그 예일 듯. 레벨 8 : 큰 상처를 치료하고, 원소 마법의 레벨 4에서 6까지 사용합니다. 역마법으로 사용할 경우, drain계열 마법이 되지만 좀 약한 편이군요. Life force cannon. cure serious wounds(상처 치료) 레벨 9 : 치명상치료가 가능합니다만, 단순한 생명력의 컨트롤로는 이게 완전하지가 못해서 치료는 복합마법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격시에는 상대의 생명력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으며, 마력에서 생명력을 만들어내는 식으로도 쓰입니다만, 역시 복합마법이라는 의견도 많군요. 특히 사람의 팔다리를 재생할 경우, 원자마법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cure critical wounds(치명적 상처 치료) 레벨 10 : prediction of revive(미리 마법을 걸어두면 죽었다가도 되살아난다), 불사마법 등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다만 이것도 생명력만을 유지하는 것이니 몸 자체의 노화를 방지하려면 원자마법 등을 동원해야 합니다. 6. 죽음 마법 : 죽음의 힘을 다룹니다. 생명과 죽음의 힘을 만나게 하면 서로 파괴되는데,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절대 0도 이하의 에너지인 음에너지와는 좀 다릅니다. 이건 생명의 힘에게만 음의 힘으로 작용하는 거지요. 역마법은 생명마법입니다. 생물체에게 효과가 매우 크며, 시체를 다루는 마법이기도 하므로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레벨 6 : 기초 레벨 7 : 죽음 에너지에 의한 공격. 원소 마법의 레벨 1에서 레벨 3까지의 공격마법 사용. Death blade(데스 블레이드 : 죽음의 칼날을 만들어서 휘두른다). 레벨 8 : 죽음 에너지에 의한 공격. 원소 마법의 레벨 4에서 레벨 6까지의 공격마법 사용. 언데드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나, 조종은 힘듭니다. animate dead(좀비 만들기), zombie bomb(좀비를 죽음의 힘으로 폭파시켜 적에게 피해). 레벨 9 : 매우 강력한 죽음마법을 사용하며, Death가 대표적입니다. 스스로 언데드가 되어 불사를 획득하는 Lich도 이쪽에 속하는 마법이며, 레벨 10을 이루지 못한 마법사가 이 마법으로 불사능력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레벨 10 : 절대 즉사마법을 비롯한 극한의 죽음마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change target to undead(적을 언데드로 바꾸어 조종한다) 등. 7. 언령 마법 : 언어로 하는 마법입니다. 주문은 그리 다를 것이 없지만, 원하는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편리한 마법입니다. 단, 매우 어려우므로 기초단계가 레벨 8입니다. 사용하려면 레벨 9에 이르러야 하는, 상당히 힘든 마법이지요. 레벨 8 : 기초 레벨 9 : 상대가 방어를 하지 않는다면 즉효이지만, 귀에 들리지 않으면 효과가 없으며, 방어마법에 의해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power word - 가 대표적이며, 그 뒤에 sink, kill, sleep, suicide등의 말을 붙일 수 있습니다. wish도 이 계열입니다. 레벨 10 : 상대가 귀가 없다고 해도 통하는 언령 마법이며, 레벨 9의 언령마법과 달리 10레벨의 방어마법으로 막아야 합니다. power order -, absolute wish등이 있습니다. 레벨 11 : 언령마법에는 레벨 11짜리가 있지만, 아무도 이 마법을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절대적으로 마법사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인과관계의 모순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잘못 쓰면 자기모순으로 인해 이 마법을 사용한 자가 있는 우주가 붕괴될 위험이 있는 paradox(패러독스 : 역설)라는 마법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위력은 극히 강력하며, 같은 수준의 마법으로 받아치지 못하면 무조건 먹히게 됩니다. 여동생의 경우 Paradox - covenant break(역설 마법을 외우고, 그 뒤에 원하는 것을 말한 것인데, 이 경우는 계약 파기. 즉 마법사와 마법 근원체간의 계약을 강제로 파기하여, 마법사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레벨 10짜리 마법사를 단숨에 레벨 0으로 떨어뜨리는, 끔찍한 마법이지요. 8. 원자 마법 : 원자를 다루는 마법입니다. 위력이 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용하기도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인류의 적'으로 지탄받을 마법입니다. 한 도시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어린애들의 팔다리가 기형이 되게 만드는..... 그런 모습을 지상에 출현시킨 마법사는 무슨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래서 대다수가 기피하는 마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법이라는 건 사용하기 나름이며, 레벨 8에 포함된 '핵융합'은 실제로 태양 안에서 지금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쪽은 마법이 아니고 자연현상이지만. 레벨 6 : 기초 레벨 7 : 원자의 기초적인 이동을 다루며,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cursed slayer(핵폭발을 일으켜 방사능오염을 일으키고 불에 태워버리는 마법) 레벨 8 : 원자를 원하는 대로 이동시키는 마법이며, 고도의 압력이 필요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레벨 9 : 원자를 분해, 조립할 수 있으며, 쿼크와 핵력, 반물질을 다룹니다. anti-matter destruction, atom destruction(원자 붕괴), 반입자포(anti-particle cannon) 등. 레벨 10 : 물질과 에너지의 체내에서의 전환입니다. 레벨 11 : 물질과 에너지의 체외에서의 전환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레벨 10은 몰라도 레벨 11의 원자마법은 여동생이 사용하는 '마법이 아닌 마법'과 연결되며, 마법사가 다룰 영역은 아닙니다. 9. 시공 마법 : 시간과 공간을 통합한, 시공을 다루는 마법입니다. 차원을 다루는 마법이며, 난이도가 매우 높은 마법입니다만 그 위력도 매우 높습니다. 레벨 5 : 기초 레벨 6 : 간단한 시공의 변화를 주도합니다. haste, slow. blink(시공이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공을 약간 구부려서 위치 이동. 따라서 단거리이다), light weight(무게를 줄이는 마법) 레벨 7 : 복잡하고 거대한 시공변화를 주도합니다. gravity cannon(중력포), reverse gravity(중력 역전). 레벨 8 : 시공을 정지시킵니다. time stop, space stop(공간을 묶어서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Isolated world(고립된 세계. 결게 발생 마법이며 Reduction(축소)라는 주문으로 결계를 줄어들게 해서 적을 좁은 공간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둬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개의 결계를 칠 경우 숫자를 붙여서 안쪽의 결계만 줄어들게 하기도 합니다) 레벨 9 : 시공을 극단적으로 변화시키는 마법이며, 소환술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gate, meteor, summon(소환 마법 : drake, creeper덩굴 등, 필요한 걸 소환합니다. 미리 준비해둔 게 무엇이냐에 따라, black hole이나 supernova등도 소환이 되며, 그럴 경우 소환되는 대상의 이름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대한 것을 소환하는 것은 레벨 10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마법사가 소환대상인 블랙홀이 있는 곳에서 이 마법을 외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warp, remove(다른 자를 강제로 이동시키는 기술), teleportation(텔레포트 : 순간이동)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Time-space blade는 시공간을 잘라내는 검을 만드는 마법이며, 이것으로 여동생이 15화의 적 마법사의 전투에서 마법근원체와의 연결점인 웜홀을 잘라냅니다. 물론 레벨 9이므로 상대도 이걸 시전할 수 있지만, 두 검이 부딪치면 시공간의 균열(블랙홀)이 발생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이 여기로 빨려들어간다는 위험성을 가집니다. 레벨 10 : 우리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차원의 시공을 컨트롤합니다. ultima(다른 차원의 시공을 우리 세계에 소환하여, 진공에너지의 상전이에 의해 폭발을 일으키는 것), . 레벨 11 : 시공을 만들어내고 파괴하는 time-space destruction이 여기에 속하며, 특이점을 이용해 뭔가를 만들어내는 창조마법(Create)도 여기 속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10. 힘 마법 : 상태변화 마법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별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지 않는 마법입니다. 마법사 자신의 몸이나 타인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다른 마법과 유사성이 많으니까요. 레벨 역시, 10레벨의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연구되지도 않는 마법입니다. 하지만 전사들에게 역주문으로 건다면..... 즉효입니다. 칼 들고 달려드는데 '힘을 빼버리는' 마법에 걸린다면? 자기 칼에 자기가 깔리는 엽기적인 경우가 발생하겠군요. 레벨 2 : 기초 레벨 3 : 자신의 힘을 조절. 레벨 4 : 타인의 힘을 조절. 레벨 5 : 힘의 흐름을 조절. 레벨 6 : 힘 자체를 다른 곳에서 끌어옵니다. (생성) 레벨 7 : 거대한 힘을 창출합니다. (dragon force) 한 마디로 축약하면, 힘 마법을 대표하는 말은 이것이군요. "곰같은 힘이여 솟아라 ! 우워어." 11. 역주문 마법 : 상대의 주문을 파괴하는 마법입니다. 상대가 마법주문을 걸어 나를 공격하려는데, 이걸로 막아버린다면 상대는 얼마나 열 받을까요. 잘만 사용하면 상대의 주문을 그대로 돌려보낸다는 것도 가능합니다. 당신이 파이어볼을 던졌는데, 상대 마법사가 그 파이어 볼을 역주문마법으로 당신에게 돌려보내 터뜨린다면..... 상당히 황당한 결과를 불러오겠지요? 위력이 크기는 하지만, 상대가 주문을 걸어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비교적 상급 주문이므로 보통은 상대의 마법이 무엇인지 모를 때, 또는 상대의 마법을 피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마법을 역주문으로 걸면, 마법이 강화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레벨 5 : 기초 레벨 6 : 주문을 막습니다. 주로 방어 마법이 이에 속합니다. iron shield, stone shield. 레벨 7 : 주문을 반사합니다. reflect, spell turning(주문을 되돌린다) 레벨 8 : 주문을 정지시키거나 소멸시킵니다. spell stop(적의 주문을 정지시킨다), anti magic shell(이 안에서는 절대로 주문을 외울 수 없다), spell cancellation(주문을 멋대로 취소시켜 버린다), magic absorption(적의 마법을 흡수한다) 레벨 9 : 타인의 주문을 조종합니다. 정신 마법과는 달리, 상대의 의지에 상관없이 주문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또는, 역주문의 응용으로 마법을 강화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spell control. magic amplification(마법을 증폭시켜 강화) 레벨 10 : 강대한 마법의 주문을 무조건 정지시킵니다. spell inhibition 주문 금지 12. 영혼 마법 : 레벨 10에서 기초를 닦는 마법..... 이런 상황이니 아무도 안 쓰는 것이 당연하고, 속칭 '잃어버린 마법'입니다. 하지만 마법 12개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라서, 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숨겨진 마법이며, 확인된 마법이라고는 레벨 11의 soul movement(영혼 이동), 그리고 상대의 영혼을 괴롭히는 soul pain 정도입니다. 다만 이 마법을 억지로 레벨 10에서 기초를 이용해 끌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마법을 받은 사람이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게 되며, 살아있는 시체로 뒤바뀌게 됩니다. 또한 레벨 10의 기초를 이용해 사람의 혼을 끌어모아 그 힘으로 자신을 강화시키는 기법도 있으나, 그 경우에는 soul movement에 걸리면 그대로 해제되므로(레벨 10의 기초만으로 만들어낸 어중간한 영혼마법은 정식의 레벨 11짜리에는 무력하니까요) 함부로 사용할 것은 못됩니다. 영혼 자체를 파괴하는 마법은 레벨 11에도 없으며,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닌 자가 있어야 사용이 가능하다고 전해집니다. <복합마법> 12가지의 마법 중에서 2종 이상을 합쳐서, 새로운 효과를 내는 마법입니다. 이건 조합에 따라 아주 다양한 마법이 생겨나므로 요약할 수는 없군요. 다만 하나만 예를 들자면, 무지개 마법이라고도 불리는 Prismatic sphere같은 것이 해당됩니다. 빨강(물리적 공격), 주황(마력), 노랑(상태이상마법), 초록(독마법과 죽음 마법), 파랑(정신, 생명계열 마법), 남색(역주문), 보라(시공마법)의 9종의 효과를 동시에 내는 마법이지요.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상태 변화마법 레벨 5 + 원소마법 레벨 3로 마법을 조합하여 검이나 지팡이에 불이나 바람등의 속성을 부여하는 식이지요. 마법구조물이 간단한 편이라서 레벨 3의 원소마법이 들어가지만, 상태 변화마법과 다른 마법을 혼용함으로서 아주 다른 타입의 마법검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Fire/ice sword가 있군요. <역마법> 12가지의 마법을 외울 때, reverse(거꾸로의, 상반되는)라는 말을 앞에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러면 마법이 완전히 다른 효과를 내게 되며, reverse gravity(역중력마법)가 바로 이런 식이지요. 원래는 중력을 만들어내는 마법이어야 하는데, reverse를 붙이니까 반대의 효과가 나서 반중력이 발생해버리는 식입니다. <마력을 다루는 마법> 이건 주문마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마법을 익힐 경우에 공부하는 마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동생이 익힌 '마법을 뛰어넘는 마법'의 기초수업편이기도 하지요. 아. 이건 어디까지나 기초이므로, 익히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며 그 효과도 처음에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일단 제대로 익힐 경우, 주문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마법 근원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마법사 스스로가 근원체의 역할을 해서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남의 힘을 빌리는' 것이 마법이라면, 이건 마법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동생이 다른 인간을 감시할 때 사용한 천사의 깃털(angel feather)도, 여기서 익힌 레벨 6의 마법을 이용해서 마법을 깃털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타인을 묶는데 사용한 rope 마법은 레벨 4의 마법을 이용, 적을 묶는 줄을 마력으로 만든 것이지요. 레벨 1 : 몸 안에 마력을 만들어 쌓아두는 단계. (당연히 마력을 자신의 의지로 위치조종가능) 레벨 2 : 마력을 열로 바꿀 수 있는 단계. 보통 1레벨을 익히면 쉽게 익힐 수 있다. 레벨 3 : 마력을 일반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단계. 레벨 4 : 마력을 에너지 구조체로 만들어 단시간동안 유지한다. 레벨 5 : 일반적인 힘을 마력으로 전환시킨다. 레벨 1과 비슷한 면이 있으나, 레벨 1은 세포 자체가 그런 능력을 가지게 단련하는 것이므로 좀 다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다. (적의 공격 마법 흡수 가능) 레벨 6 : 마력을 에너지 구조체로 만들어 장시간 유지. 레벨 7 : 마력을 정신파, 생명력, 죽음의 힘(생명력과 만나면 붕괴되지만, 이것도 결국 생명의 힘과 같다)으로 바꾸거나, 그 반대의 작용을 한다. 레벨 8 : 일반적인 힘을 다른 형태의 일반적인 힘으로 바꾼다. 마력이라는 중간 매개체가 필요없게 된다. 레벨 9 : 체내의 물질과 에너지를 전환시킨다. 레벨 10 : 체외의 물질과 에너지를 전환시킨다. 레벨 11 : 음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에너지를 다루는 능력이 극대화되어야 가능하다. 레벨 12 : 시공간을 다룬다. 따라서, 중력을 마음대로 다루게 된다. 레벨 13 : 시공간과 물질, 에너지를 통합해서 다룬다. 레벨 14 이상 : 여기서부터는 설정하지도 않았고, 이 단계부터는 분류를 처음부터 다시 해줘야 하는 상태입니다. 여동생이 이걸 보여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대개 마법 근원체는 이걸 안 가르쳐주지만, 마력을 다루도록 하려면 이걸 가르쳐줘야 합니다. 만약 이걸 배운 마법사라면 근원체에 의지하지 않고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도 가능해지며,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는 기초를 닦게 되는 것이지요. 이걸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마법사의 장래가 달라질 정도로 중요합니다. 또한 몇 개월만에 속성으로 마법을 배우는 자는, 절대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동생의 지팡이 마법의 고유주문> Actuation : 이 말을 앞에 붙이고 나서, 뒤에 마법의 이름을 부르면 마법이 발동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여동생이 귀찮게 앞에 붙이는 것은, 사실 능력이 낮아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마법의 이름만 불렀다가 그게 발동, 난장판을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군요. 물론 급하면 이런 주문을 빼고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Automatic : 이 주문이 앞에 붙게 되면, 이건 지팡이 스스로가 마법을 선택하여 자동으로 발동시키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특히 방어마법을 이렇게 쓰는 경우가 많지요. Cancellation : 이 말을 앞에 붙이고 나서 마법이름을 외우면, 그 마법은 취소됩니다. Wizard suit : 여동생이 만든 의상이며, 마법으로 치면 옷 갈아입기 정도가 됩니다. 오빠가 보면 기절초풍할 초미니스커트에 반 팔의 윗도리라니. 수영복이 아닌 건 다행입니다만. 여동생은 여기에 초과학문명에나 나올 장비들을 추가로 붙이기도 합니다. 물론 옷감도 매우 튼튼한 것이지요. 다만 이런 고유주문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붙인 것이며, 여동생은 필요에 따라 이런 주문을 생략하고, 그대로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 마법근원체를 만들었고, 그녀와 마법근원체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0화 붉은 빗방울 (1)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선택된 소녀는 홀로 일어서서 싸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그녀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힘을 지닌 자로서 일어선다. 세계의 운명은 오직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얹혀져 있기에. 자. 오늘도 일어서라. 지구를 지켜라. "이게 전혀 아니잖아." 보통 이런 영웅담은 신화의 영역에 속하며, 나는 그런 영웅이나 여걸이 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세계를 구하는 게 나쁜 일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보통 그런 영웅의 행적을 흩어보면, 최후에는 배신당해서 죽거나 제물이 되는 게 대부분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이에게 버림받아 고난 속에서 고독한 최후를 맞기 때문이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J.C 쿠퍼라는 상징체계를 연구한 학자의 의견이지만, 오랫동안 그 방면의 연구에 종사했다니 아마 맞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영웅이나 여걸이 되면 안 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점점 그런 길로 빠져들고 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 같은 거 안 배울 걸. 오늘 저녁만 해도 그렇다. 죽을 사람을 살려놨더니 듣는 소리가 욕설이다. 사실 시내가 자신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그녀의 기억을 지운 것은 바로 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한다면 회복불능의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고, 다시금 마법사라는 어둠의 길을 갈 위험이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차라리 그 기억을 놔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내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악마에게 혼을 판 주제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까?" 이렇게 모든 것을 보여준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렇게 되면 시내는 감히 나에게 욕을 퍼부을 수 없을 것이고, 나로서도 일껏 목숨을 살려주고도 욕을 먹는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뒷일은 어떻게 되겠는가? 마법사에 대한 기억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되면, 그런 힘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갑자기 일본 극우파를 비롯한, 다양한 악인들의 얼굴이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단지 우연일까. "안 돼. 절대로 안 돼." 시내가 아무리 착한 아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비밀이라는 것은 두 사람 이상이 알면, 이미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비밀을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법이고, 그들이 할 말은 간단하다. "나한테만 알려 줘.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퍼뜨릴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게 거듭되면 전 세계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마법사가 되려고 아우성칠 것이다.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지구의 원시적인 환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모든 인간은 가장 나쁜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것이고, 그 뒤의 상황은 파국이다. 붉은 비가 지구 전체에 뿌려지는 상황이 상상되자, 나는 몸서리를 쳤다. 바로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는 관계자들의 기억을 모조리 지운 게 아니던가. 하지만 없어진 기억에 대해 호기심을 품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안 좋은 것은, 그 기억을 되살릴 능력을 지닌 사람이 내 주위에 하나가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 시내의 머리에 박힌 깃털이 없어진 것을 보니,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연락이 끊어졌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찾아낼 능력을 지닌 사람이 인간 중에 있었다니. "그걸 어떻게 찾아낸 거야." 이중삼중으로 마법을 걸어두고,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도록 철저하게 숨겼는데도 들키다니. 아무래도 내가 깃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모양이다. 시내의 기억에 따르면 그걸 찾아낸 사람은 분명히 [심령현상 연구부]의 월영 선배, 통칭 흑마술부 부장이 분명한데, 그녀가 그런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가? 비록 그녀가 흑마술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껏해야 고등학생의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뿌리째 뽑아놓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지녔을까. 스승님이 나 이외의 인간 제자를 또 키웠었나? "아냐." 그랬으면 아무리 심술쟁이 스승님이라고 해도, 나한테 알려주기는 했겠지. 그러니 그런 가능성은 일단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 소속일까. 설마, 적?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만약 그녀가 적이라고 한다면. "그랬으면 시내를 다시 마법사로 되돌렸을 거야." 하지만 월영 선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 그녀는 적이 아닌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 시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면, 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럼 그녀가 적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녀는 과연 무슨 음모를 준비하는 걸까. 당장 생각나는 것은 내 목숨이지만, 사실 마법사를 몇 명 더 모아봐야 나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문마법사와 나와는 실력의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숫자로 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주문마법사만 상대한다면, 60억의 인류 전체가 주문마법사라고 해도 나는 가뿐하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그 이상의 인물이라면? 남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힘을 지닌 인물이라고 하면 승부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녀가 만약 나보다 강한 적이라고 한다면? "그럼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어." 나보다 강한 상대라면, 내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택할 길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는 것밖에 없게 된다. 가급적이면 그런 결말이 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최강의 존재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런 추측이 정확하다면, 이미 나를 공격하러 나타났을 게 아닌가. 설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 공격에 나서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나보다 강하다면 내 위장술 정도는 간파했을 터인데? 설마 나의 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유로? 하지만 지금 한 가지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보통 상대라면 자신의 생각이 무의식중에 밖으로 흘러나가므로 생각을 읽어내기도 쉽지만, 이번 상대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마법을 써서 억지로 상대의 마음을 열지 않는 이상 그녀의 내심을 간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런 강제적인 방법은 그녀가 내 적인지 아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이상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나의 우군이 될 수 있는 상대인데, 적대적인 행동으로 적을 하나 더 늘린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시내에게 날아가서. "다시 박아 놔야지." 원래 사람 머리에 깃털을 꽂아두고 감시하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만, 시내가 다시 마법사가 되어 버리는 것보다는 나으니 도리가 없다. 만약 시내가 또다시 그런 길을 선택한다면, 이번에는 살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주 선배 같은, 자기 동료를 죽이는 인간으로 시내가 변화한다면, 내가 그녀를 살려두고 싶어도 살려줄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런 인물을 오빠나 친구들 옆에 놔두는 것은 너무 위험한 짓이니까. 물론 반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로 설득하면 되잖아." 하지만 그건 안 된다. 그게 가능하다면 일본총리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가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중국인들에게 동북공정을 계속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그들을 멈추는 방법은, 극히 위험한 소리라는 건 알지만 결국 힘 밖에 없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들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경우에는 시내가 악의가 없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시내가 오빠를 유혹한 것은, 그녀가 사악해서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시내의 마법사로서의 힘을 없애버리고, 그녀의 기억을 지워버렸던 것인데. "그걸 왜 빼 가지고." 마법의 깃털이 시내에게서 빠졌다는 것은 내가 그녀를 감시할 수단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며, 그만큼 시내가 마법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시내가 내 손에 죽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올바른 판단을 내렸으면 좋겠지만, 마법사가 되면 힘을 얻게 되는데 과연 그녀가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힘이 필요했고, 그 이유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 이유라는 게. "바람둥이 오빠 같으니." 시내가 만약 오빠를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마법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빠에게는 진희가 있고, 시내에게는 유감스럽지만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지금이 옛날처럼 일부다처제를 채택한 사회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지금은 엄연히 일부일처제다. 오랫동안 인류가 고민하면서 정한 결혼의 제도가 바로 그것이어서, 그게 바뀔 가능성은 당분간 없다. 그러니 시내에게 승산이 있는 결혼제도가 채택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늙어죽을 게 확실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이기에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오빠가 과연 진희를 포기할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둘 다 우유부단하고 부끄럼쟁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둘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러니. "할 수 없지." 시내가 다시금 악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나는 그녀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마법사가 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취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그녀에게 마법의 깃털을 꽂아서 비상시에 나에게 상황이 알려지도록 해야 했다. 물론 깃털이 없어도 그녀를 감시하는 건 가능하지만, 이미 내가 감시하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수 백 명이 넘으니 너무 번거로웠다. 게다가 나도 그녀의 사생활까지 일일이 감시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만약 깃털이 없다면, 내 눈으로 그녀를 24시간 내내 살펴야 한다. 그건 너무 귀찮은 일이다. 나도 잠은 자야 할 게 아닌가. "내가 잠을 잘 필요가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이럴 때마다 나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만 드니, 이쪽은 일단 넘어가고. 어쨌든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깃털을 다시 박아둬야 한다. 그래서 내가 오늘밤에 야간비행에 나선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빨리 끝내야 하니까. 게다가 나는 시내만 바라볼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시내의 깃털이 발각되었다는 것은, 나의 적들도 그걸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그들이 깃털을 제거한다면, 나는 밤새도록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일단 다른 쪽은 문제가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나는 시내의 깃털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다른 쪽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봐 바짝 긴장했었지만, 아직까지는 연락이 두절된 깃털은 없었다. 시내에게 붙었던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언제 적들이 깃털을 발견하고 제거할지 모르니, 앞으로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시내의 깃털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고. 하지만 지금 내가 나온 이유는 다른 쪽에 있었다. 만약 월영 선배가 내 행동을 예상했다면, 분명히 시내의 집 부근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니. 상식적으로 봐서도 그게 정석이니까. 깃털이 없어져서 곤란하다면, 당연히 채우려고 오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나와 월영 선배는 한 판 붙게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드러날 거야." 자. 생각은 이만하고. 나는 시내의 집 앞마당에 착륙했다. 비교적 소박하지만, 그래도 중산층에게는 매우 큰, 2층 짜리 저택에 말이다. 요즘처럼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시대에, 이 정도 집이라면 충분히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집도 이 정도 크기는 되지만, 진희나 풍남이의 집에 비하면 월등히 작다. 하지만 그쪽은 재벌 회장 댁이니 국회의원 집이니 하는 '비정상적으로 돈이 많은' 집이니까 비교대상은 될 수 없다. 비교를 하려면 상식적인 곳과 해야 하니까. 하지만 나에게 이 집은, 그저 장식물일 뿐이다. 도둑을 막는다고 높은 담을 쌓아두기는 했지만, 이런 게 나에게 어디 장애물이 되던가? "발맞추어 하나 둘." 나는 벽을 그대로 통과해서, 시내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너무 단순한 과정이라 굳이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고, 의식적으로 마법을 발동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런 정도는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이 당연하니까. 벽을 이룬 콘크리트 덩어리나 철근, 벽돌, 심지어는 담벼락을 기어가는 벌레들까지 보이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 역시 살아가기 위해 담을 기어오르는 것이니, 죽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시내였다. 발걸음도 가볍게. 하나 둘. 하나 둘. 그런데 지금쯤이면 나타날 때가 되었을 텐데? 물론 내가 기다리는 것은 시내가 아니고. "부장님. 그냥 넘어가실 생각인가요?" 물론 내가 너무 상상력이 지나쳐서 부장을 너무 의식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암습을 당한 게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물론 여태까지는 그런 일이 있을 경우 즉시 적절한 응징을 가했지만, 이번 상대는 다를 수도 있다. 이미 내가 놓아둔 깃털을 찾아내고, 제거했을 때부터 그녀는 경계대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오늘 학교에서 부장을 만났을 때에도, 내가 마력을 없애버리고 평범한 여자아이로 위장한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었다. 갑자기 깃털에서 보내지던 신호가 끊어지고, 그 깃털이 있던 장소에는 부장과 오빠, 그리고 시내밖에 없었으니 세 사람 모두 요주의인물로 올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시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고, 오라버니도 매일 보는 인물이니 그 둘은 일단 제외한다면, 남는 사람은 부장밖에 없다. 그리고 마력이야 어차피 나에게는 크게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그런 건 필요할 때 만들면 그만이고." 사실 나로서는 마력을 일일이 만들어서 몸 속에 쌓아둘 필요는 없었다. 20세기를 석권했던 전설적인 대마도사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는 동일하므로,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보관하는 방법은 역시 물질을 몸 안에 저장해두었다가 필요시에 에너지로 바꾸던가, 우리 주위에 있는 에너지를 그대로 끌어와서 쓰는 것이다. 굳이 돼지처럼 몸에 힘을 쌓아두는 것은, 솔직히 몸에도 부담이 되는 데다가 귀찮기까지 하다. 사람의 몸에 핵폭발시의 힘을 쌓아두다가는, 내 몸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그런다고 내 몸이 폭발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필요 없는 상황에서는 그럴 생각이 없다. 굳이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물질과 에너지는 동격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몸 안에 많이 쌓아둔다는 것은 즉 몸이 무거워진다는 뜻이다. 물론 에너지에 질량은 없지만, 나로서는 물질과 에너지가 똑같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무거운 건 질색이야." 그러므로 나는 굳이 마력을 몸에 쌓아둘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에너지원이니, 필요하면 당장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너지를 쌓아두는 곳이라면 이미 확보하고 있고. 정말 필요한 것은 에너지로서의 마력이 아니라, 힘을 다루는 능력으로서의 마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절대로 줄이거나 없애면 안 되는 것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이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력이 필요하지." 나는 마법의 깃털에 마력을 주입시켰다. 깃털이 마력을 지니게 되자, 깃털은 하얀빛을 뿜어내며 공중에 떠올랐다. 물론 상대가 어지간한 힘을 지니지 않은 이상, 내 방어막을 뚫고 이것을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시내의 머리를 겨냥하여, 깃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를 밝히는 마력의 울음. "왔다 !" 내 몸이 시내의 집 바깥으로 튀어나간 것과, 시내의 집 주위에 마법진이 펼쳐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마력이 집 주위로 몰려드는 것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은 이미 시내의 방에서 사라졌고, 마법진은 곧 내부의 사람들을 모조리 묶어서 잠재워 버렸다. 물론 시내의 집 식구들은 이미 잠든 지 오래이니 지금의 상황을 모를 것이고, 설령 깨어있는 인간이 있더라도 졸려서 잠들만한 시간이었다. 어쨌든 지금 시간은 밤 12시가 넘어갔으니까.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튀어나갔다면 저 마법진에 걸렸을 것이고, 그랬으면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겠지만,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조심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조금 전까지는 이 부근에 마력이 전혀 없었는데?" 설마, 상대도 나처럼 평소에는 마력을 만들지 않고, 숨겨두는 타입인 건가? 그렇다면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만약 강한 마력을 지닌 상대라면 사실 상대하는 것은 극히 쉽다. 힘만 센 미련퉁이한테 질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하지만 마력을 스스로 증감한다면? 당연히 상대의 수준은 생각보다 높다는 뜻이고, 오늘의 내 일은 그만큼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지팡이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오늘은. "그걸 써야 할지도." 어지간하면 '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는 듯한, 그 기술은 쓰기 싫었는데. 잘못하면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단히 준비하는 게 나의 도리겠지? 나는 왼손에 쥐었던 깃털에서 마력을 빼내고, 허리춤에 그것을 꽂아 넣었다. 이대로라면 이 깃털을 감시용이 아니라, 공격용으로 써야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할 일이 있다. 지금 마법진을 친 상대가 나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내를 나에게서 보호한다는 착각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사실 사람의 머리에 뭔가를 박아 넣는다는 것은, 어둠의 인물들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나야 시내의 두뇌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신중하게 했다지만. 그래서 나는. "나와 주세요." 마력을 완벽히 감춘 상황에서는 내가 상대를 찾기 어려울지 몰라도, 마력을 이용해 마법진을 만들었다면 그 마력을 만들어낸 상대에게도 마력이 희미하게 남는 법이다. 그 마력을 순식간에 없앤다고 해도 찰나의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기는 어렵다. 아니, 사실은 마법을 쓴 그 순간만은 마력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력으로 한참 마법진을 만드는 상황에서, 마력을 내놓는 당사자가 흔적을 지운다? 그렇게 되면 마법진을 만들 마력이 없으니 곤란해진다. 그래서 나는 상대가 어디에 숨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 공격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말로 하고 싶었다. 이번 상대가 만약 확실히 내 적이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마법진을 치느니 차라리 나를 향해 마법공격을 가했을 것이고, 이런 식의 공격이라면 아직은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날 죽이려고 했다면 만드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마법진보다는, 차라리 마법 한 방을 날리는 편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니까. 물론 내가 지금 외친 말은, 평범한 음성은 아니었다. 밤 12시에 굉음을 내서 사람들의 잠을 설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예요." 굳이 이렇게 공익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잠자는 걸 방해받으면 누구나 짜증을 내기 마련이다. 나는 수 십만 명의 짜증을 일일이 다 받아줄 생각이 없었고, 그러니 그들이 듣지 못하게 초음파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동물들에게는 단잠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뭐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소리를 한 쪽으로만 보내서 부수적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이게 전쟁이라지만.' 부수적 피해가 왠 말이냐. 내가 무슨 미군이냐. 사실 이 말은 전쟁 중 민간인이 입는 피해를 가리키는 말인데, 일단 이거 맞는다고 죽는 사람은 없으니, 물론 죽는 동물도 없도록 신경을 썼으니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일단은 상대가 내 초음파를 알아듣는 게 좋은데. 그런데 초음파라니까 전설의 7옥타브 가수를 떠올리게 하잖아. 투덜투덜. 불평하는 내 앞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나뭇가지를 헤치고 서서히 떠올랐다. 역시 나무 위에 앉아 있었던 건가. 일단 머무르기야 편하겠지만, 솔직히 체중이 가볍지 않으면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굉장해." 투명 마법을 쓰면서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감추다니. 마력에 대한 통제능력이 상당히 높은 마법사가 분명했다. 어쩌면 나처럼 주문마법을 뛰어넘은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나보다 더 강한 상대가 아니면 좋겠지만, 그리고 덤으로 내 적이 아니면 더 좋겠지만, 그건 지금부터 물어봐야 할 일이다. 일단은. "안녕하세요." 인사부터 하다니 지금이 무슨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 만난 거냐고 할 수도 있지만, 어느 별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다짜고짜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것도 좀 그렇다. 물론 적이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조건 두드려 패고 보겠지만, 이 사람이 적인지는 사실 확인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적의 졸개치고는 품격이 너무 높다. 그러자 상대는. "안녕하세요." 일단 형식적인 단계는 통과했으니, 이제 질문을 시작해도 될 것 같다. 나와 상대는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끝냈다. 물론 악수니 포옹이니 키스니 하는 인사는 없었지만, 일단 상대가 지구의 문화에 대해 기초 지식을 가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인사를 "Good evening."이라고 했구나. 내 머리에서 영어가 자동적으로 한글로 바뀌는 탓에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일단 지구에서 가장 보편적인 언어는 영어이니 이걸 쓰는 게 편하다. 인구 비례로 보면 중국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동북공정 건도 있어서 솔직히 그건 싫다. 각국의 국력도 감안해야 하고. "이 집에 마법진을 편 것이 당신인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물론 그 이유야 뻔하다. 나를 막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그 동기에 따라, 상대가 내 적인지 아니면 내 친구가 될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자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상황을 보고 대처하면 그만이고. 상대는. "네. 사람의 머리에 이상한 물체를 박아두는 마법사가 있기에, 여기 사는 아이의 머리를 보호하려고요." 졸지에 마법의 깃털이 이상한 물체로 전락해버렸지만, 상대가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으니 그건 넘어가자. 게다가 저 사람이 그걸 제거했다면, 그 용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 아직은 떠보는 상황인가. "저 안에 있는 여자아이의 머리에 깃털을 박아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건 그녀가 사악한 집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주문마법사가 되는 걸 막기 위한 건데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제가 알아야 하고, 알아야 그걸 막을 수 있으니까요." 원래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상대가 내 행동의 동기를 모른다면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적이라면 초전박살, 완전분쇄를 시켜야 하지만, 그가 적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사실 마법을 익힌 자가 꼭 지구인이라는 보장은 없고, 우주의 문명은 가지각색이니 지금 내 앞에 있는 자가 인간의 외형을 한 외계인인지, 아니면 문어나 오징어처럼 생겼는데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기계나 정신력으로 이루어진 생물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심지어 내 앞의 마법사는, 다른 우주에서 왔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적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예의를 지키는 게 좋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예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니 뭐니 하는 수학증명까지 끌어올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이야 수학증명은 우주 어디서나 공통일 테니 그걸로 의사소통을 해보라고 편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실무자인 내 입장에선 어디 그게 쉬운가. 그걸로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알파벳 A에까지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면 얼마나 힘들고 지루하겠는가. 일단은 그런 지경이 아니라서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긴 했지만. "머리에 뭘 꽂아두는 건 보통 세뇌를 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일텐데요?" 역시. 설명해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까지 나올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상대를 설득하려면 힘이 좀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왜 마법강의를 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당신의 말에 따르면 그건 저 집에 있는 아가씨를 추적해서, 나쁜 무리들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붙인 추적장치의 일종이라는 건가요?" "네." 일단 설명을 알아들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건 좀 불안하다. 이렇게 내가 상황을 설명해준다는 것은, 당연히 정보를 누설한다는 것이며 나의 적들도 이 말을 듣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그런 녀석이 있다면 단 한 방으로 때려눕히고, 녀석들의 본거지를 불게 만들어 버리겠지만. '어떻게 엿듣는 녀석이 없는 거야.' 있어야 때려잡을 텐데, 평소에는 잘도 나타나던 적의 졸개들이 오늘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다. 한밤중에 이렇게 평온하게 이야기하니까,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하다. 심지어 풀벌레까지도 조용하다. 폭풍이 오기 직전의 정적인 것일까. 나는 주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눈앞의 마법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막지 말아 주세요. 지금 잠든 아가씨의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요." 나는 서서히 깃털을 허리춤에서 꺼내서, 마력을 집중시켰다. 마법의 깃털이 다시금 빛을 되찾으면서, 하얗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앞의 마법사에게는 보이는 모양이다. 그는. "하지만 당신의 실력이라면, 굳이 그런 도구는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조금 전에 내 마법진을 피하는 걸로 보아도, 그리고 지금 그 깃털에 마력을 주입하는 솜씨로 보아도, 당신은 보통 내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그런데 그 정도의 실력으로 왜 굳이 그런 걸 쓰나요?" 이 인간이 남의 약점을 찌르다니. 사실 이게 없어도 내가 시내를 감시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나는 잠도 마음대로 못 자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잠을 굳이 자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가끔은 인간으로서 휴식이란 걸 취할 필요는 있다. 정확히 말하면 몸이나 마음이 그걸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끼려면, 잠은 자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잠을 자니까 나는 인간이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런 것까지 굳이 말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전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실수하고 싶지 않거든요. 아무리 이 깃털이 없이도 감시를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다가 저 아가씨가 위험에 빠지는 걸 바라지는 않아요." 그리고 깃털이라는 보이는 물건이 있어야, 적들이 시내를 마법사로 되돌리려고 할 때 눈에 띄는 경고문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도 함부로 시내를 손대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굳이 시내의 앞에 나타나서 잡히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평상시에는 이 깃털의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시내가 다시 마법사가 되려고 하면 깃털의 존재는 분명히 걸림돌이 될 것이며, 그러면 그들도 행동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앞의 마법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묻는다. "아무리 당신이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 아가씨의 머리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두개골 안에 깃털을 박아 넣는다면, 그 깃털이 두뇌를 파괴할 수도 있어요. 그런 방식을 택하는 건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해요." 이봐요. 내가 그렇게 솜씨가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뇌세포를 일일이 쳐다보면서 그 사이로 깃털을 넣고, 깃털이 뇌의 혈액의 운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집어넣는 게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기술인줄 알기나 하나요. 시내에게 깃털이 박힌 상황을 이 사람이 봤어도 그런 말을 할까. "오늘 낮에 저 아가씨의 두뇌에서, 깃털이 갑자기 빠져나갔더라고요. 뇌를 다치지 않고 저걸 빼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갑자기 깃털이 없어지는 바람에 상당히 놀랐었어요. 누가 그걸 빼냈는지는 모르지만, 무식하게 그냥 잡아 뽑는 바람에 뇌세포를 다친 건 아닌지, 악당들이 저 아가씨를 다시 어둠의 길로 유혹한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했었어요. 다행히 내 눈에 그런 장면은 비춰지지 않았지만. 어떤 악인이 저 아가씨가 다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런 짓을 했는지." "전 악당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가요." 그 말은 자신이 내 깃털을 빼냈음을 시인하는 것이었지만, 미리 짐작했던 사안이기에 나는 그에 대해 심리적으로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점심 무렵에 월영 선배가 마법을 사용할 때부터, 나는 그녀가 여기에 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동요해봐야, 상대에게 심리를 읽힐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이미 아는 사실에 대해 굳이 감정을 움직여서 빈틈을 보여줄 정도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게다가 적들이 언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시내의 집을 둘러싼 마법진을 돌아보았다. 마력의 배열이 상당히 정교하게 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마법 근원체를 대단한 것으로 선택했던지, 그게 아니면 그 자신의 능력이 단순한 주문마법사를 초월했던지,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다른 쪽을 바라보는 사이에, 월영 선배는 먼저 말을 꺼냈다. "알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감시하는 상대는, 저 아가씨 한 명만은 아니지요?" "네." 세상에 멍청이가 하나만 있으면 좋겠는데, 대가도 없이 힘을 탐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그 덕에 나로서는 여러 가지로 손이 많이 가는 뒤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깃털도 그 중 하나에 속했다. 이런 건 근본을 뽑아내어야 해결이 되는 것이지만, 이 넓은 우주의 어디에 적들의 근거지가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생물체가 사는 곳을 모조리 폭격할 수도 없고. 전혀 관계없는 외계의 지성생명체까지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인류는 악의 축으로 그 명성이 드높은데, 굳이 나까지 나서서 그 명성에 '우주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독재자나 하는 짓이에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니, 이러다가 당신은 모든 인간을 감시해야 할지도 몰라요. 차라리 각국의 정부에 알려서, 해결방법을 찾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니까요."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정치인들에게 알려서 해결될 문제라면, 나는 벌써 말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믿지 않겠지만, 마법을 한 번만 보여주면 다들 알아서 기어다닐 테니 설득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그 녀석들은 국가를 위한 일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면서 안 하려고 해도,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면 알아서 허리를 굽히는 위인들이니까. "그렇게 지구의 정치가들을 믿을 수 없나요?" 여기서 내가 동요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상대가 내 마음의 빈틈을 파고 들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난 인간이 아니라니까요'라고 외치는 것 같아서 서글프지만, 어차피 이 질문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나는, 아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니 인류라면 당연한 상식을 늘어놓아야 했다. 월영 선배. 생각보다 고지식하네요.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믿겠어요?" 그러자 그녀도 입을 다문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진희 아버지 한 명만 봐도 이 땅의 정치인들이라는 물건들이 얼마나 불량품들인지는 훤히 드러난다. 만약 내가 이번 사태가 끝난 후에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운명을 개척할 생각을 하게 된다면, 당장 그것들부터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하지만 그건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니 제쳐두기로 하자. 난 지금 전장에 와 있으니까. "음....... 하긴 그렇네요." 휴우. 상대가 납득을 해준 것 같아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려고 했으나. "하지만 당사자의 기억을 지우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이런. 또 걸고 넘어가네요. 월영 선배. 아무리 궁금한 게 많다지만, 설명을 해야 하는 내 생각도 좀 해줘요. 물론 사건의 중심축에 서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의 대화를 듣는다면, 중간쯤에 지쳐서 도청을 포기하고 잠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긴 이러니까 정치인들의 자서전이 수면제로 쓰이지. 하긴 그런 쪽으로라도 사용되지 못하면, 책이 너무 불쌍하지만. "기억을 살려두면 결국 이 사실이 정치인들에게 알려지니까요. 그들이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국회의원의 사전적 정의가 괜히 '매일 싸우는 사람들'이겠는가. 아. '세금도둑'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건가. 아니지. 그 외에도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정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국민에 의해 선임된 국민의 대표자.....'라는, 말도 안 되는 정의만이 공식적인 국어사전에 실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그런 국회의원이 있기나 하나? 그런 사람들에게 일 처리를 부탁하라는 월영 선배의 말은, 솔직히 정론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들의 일 처리는 자기들 호주머니를 채울 때는 빨라도 국가의 호주머니를 채울 때는 한없이 느리니까. 그 인간들이 이 일을 맡았다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모두 말라죽을 때까지 일을 시작하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녀는 모순점 한 가지를 지적했다. 내가 언제나 고민하던 것을. "하지만 당사자가 이 사실을 모르면, 또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랬다.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은, 과거를 다시 되풀이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으니까.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옆에 있는 여우처럼 생긴 섬나라가 그렇지 않는가. 이봐요. 수 백년 전의 일을 기억하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100년 전의 일이에요. 그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나요. 솔직히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슬슬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언제까지나 시내를 저렇게 방치해둘 수는 없으니까. 이미 되살아난 기억까지 없앤다면 손볼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일단 그 부분은 방치하겠지만, 감시 정도는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다. 물론 필요하면 그것도 없애버리겠지만. "저 아가씨가 과거를 기억해낸다면, 인류 자체가 멸망의 길로 가게 될지도 몰라요. 당신이 어느 별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에 대해 관찰했다면 알고 있지 않나요? 인간은 한없이 고결한 존재도 될 수 있지만, 한없이 추악한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권력자들은 과연 어느 쪽에 서 있나요? 아니, 그들이 비록 훌륭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계는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결국 그들은 마법에 손을 대게 될 것이고, 인류는 멸망하겠지요. 그러니 이 일이 완전히 정리된 후가 아니면, 인간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놔둘 수는 없어요. 필요악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 뭔가가 걸렸다는 느낌이 든 것은, 내 신경이 과민해서였을까. 월영 선배가 표정을 찌푸리는 게 보인 것 같은데. 곧이어 터져 나온 말이, 그걸 증명해버렸다. 이런. "그건 안 돼요. 아무리 당신의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위업을 이루다니, 그건 곤란하다고 봐요. 당신이 없앤 기억은 비록 마법사와 관계된 것들뿐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의 기억이 저 아가씨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이봐요. 나도 그건 알아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내가 전능한 존재인 것도 아닌데. 스승님이라면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안 된다. 내가 비록 우주를 파괴할 힘이 있을지 몰라도, 나는 무한한 힘을 지닌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만약 다른 이의 희생을 전혀 용납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난 전능하지 않아요. 평범한 인간이 한 번 움직이기만 해도 미세한 생명체들은 무수히 밟혀서 죽게 되는데, 그럼 그 사람은 움직이지 말고 죽음을 기다려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 미세 생명체들을 살리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나도 그 미세한 생명체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그러니 나로서는 시내를 죽게 하지 않기 위해, 그녀의 일부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시내의 팔에 암세포가 생겨서 자라나고 있다면, 당연히 그걸 잘라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대는 그 암세포를 다시 정상세포로 돌려놓아서, 팔을 자르지 않고도 치료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나는 시내의 머리에 다시금 깃털을 달기 위해, 마법진을 향해 움직였다. "마법진을 풀어줘요. 내 할 일을 해야 하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내 앞을 막아서며 지팡이를 꺼냈다. 지팡이의 머리에 박힌 붉은 빛의 보석이 빛을 발하는 것이, 마치 흡혈귀의 눈알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빛나는 마법진이 그녀를 가리고 있어서 그녀 자체가 검게 보이기는 했지만, 지팡이의 장식만큼은 확실히 보였다. 저 붉은 빛이 그녀의 마력일까. 하지만 어느 정도의 마력이 있든 간에, 나를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단순한 주문마법사라면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얼마나 강하단 상관없다.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스르릉. 나는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나 자신이 만들어낸, 나의 지팡이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절대로 만만치 않을 것이니, 나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싸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설득을 해야 한다. 어쩌면 이게 월영 선배의 최후의 싸움일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으니까. 미련을 남기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비켜서세요.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시내의 기억을 놓아두세요. 저 아이에 대한 감시라면, 내가 할 수 있어요." "기억이 있으면, 그 자체가 파멸의 씨앗이 되게 되요. 당신이 만약 실수를 하면, 그걸로 인류가 파멸할 수도 있어요. 너무 위험해요." "그렇다고 저 애를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어요.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이상적이네요. 당신은." "너무 냉정하시네요. 당신은." 그녀가 망토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빛과 함께 망토가 사라지고, 그녀의 원래의 복장이 드러났다. 그런데 저 노출도 심한 드레스는 대체 뭐냐. 내 치마하고 비슷할 정도로 짧잖아? 만약 내가 늑대 같은 남자라면 침을 줄줄 흘리며 덤벼들었겠지만, 나는 그 복장에서 엄청난 위협을 느꼈다. 만약 상대가 나처럼, 주문마법에만 의존하지 않는 마법사라면? 그렇다면 저 '옷보다 살이 더 많이 보이는' 옷이 충분한 이유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단단히 각오를 했다. "그럼, 시작하지요." 나도 내 망토를 빛으로 만들어서, 본래의 옷차림을 드러냈다. 남자들에게만 최고의 전투복으로 보일, 과다 노출의 옷이 월영 선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창피하지만, 그나마 마법이 어느 정도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얼굴을 들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습으로 싸우는 건 정말 오래간만인데. 처음에 지구로 돌아온 후로,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강력한 적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던가. 하지만 부끄러운 차림이라는 것만은 사실이고, 선배 역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혀를 차는 걸 보니. 물론 나의 얼굴도 월영 선배의 얼굴도 마법에 의해 가려지기야 하지만, 몸짓의 윤곽은 대충 보여지니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당연히 나오는 상대의 야유. "옷을 입은 거예요? 벗은 거예요?" "당신도 만만치 않은데요."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나 선배나 수영복에 천 조각 몇 개 두른 것에 불과하니 둘 다 할 말은 없지만. 물론 우리가 몸을 노출시키는데 환장해서 이런 옷차림을 한 것은 아니다. 주문마법이 아닌, 진짜로 힘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마법을 끌어내려면 필연적으로 주위 환경과 접촉을 원활하게 해야 하니까 이렇게 한 것뿐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스승님이 원망스럽다. 가르쳐주려면 좀 품위 있는 마법을 가르칠 것이지, 이런 창피한 걸 가르친 건 무슨 심술인가. 당장이라도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 인간, 아니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존재라면 분명. "수행이 부족해서 그래." 사실 스승님은 옷의 소매길이만도 2m가 넘고 치마도 옷감을 낭비하려고 작정한 듯 무지 길지만, 그러고도 잘만 힘을 쓰니까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난 인간이므로, 그 정도의 경지에는 절대 오를 수 없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가서 불만을 늘어놓고 싶지만, 지금은 전투중이니 그럴 수 없다. 단지 마음속으로만, 불평을 씹어 삼킬 뿐이다. '두고 보자.' 나는 월영 선배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고, 우리 둘은 상대를 향해서 튀어나갔다. 공기가 갈라지면서. 팡. 전투가 시작되었다. 캉. 캉. 카카캉. 두 개의 지팡이가 교차하며 서로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마법이 아니라 몽둥이질을 전초전의 방법으로 선택했고, 그로 인해 나와 월영 선배는 마법사치고는 너무나 무지막지한 대결 방법 - 말 그대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서로를 지팡이로 구타하는 것 -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물론 지팡이만 휘두르면 섭섭하니. "얏 !" 내 주먹을 월영 선배가 피하고. "야압 !" 월영 선배의 발을 내가 피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에, 나와 월영 선배는 그렇게 달밤의 체조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조복만 입으면 딱 맞겠지만, 지금 내가 입은 건 체조복이 아니라. "수영복 차림으로 싸우면서, 제법인데." "당신도요." 사실 우리가 입은 옷을 수영복이라고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일단은 미니 스커트도 있고 셔츠도 있으니까. 하지만 배꼽이 훤히 드러나고 허벅지가 몽땅 보이는 데다가, 어깨와 가슴 일부까지 밤바람에 흔들리는 이 옷차림은 누가 봐도 과다노출의 혐의가 짙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들이 투명마법을 자기 자신에게 걸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이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와 월영 선배야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것도 상당히 흐릿한 정도에 불과했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천방지축, 처녀답지 않은 마구잡이식 무술 대결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지만. 카앙. 마력을 담은 두 지팡이가 서로 부딪치면서, 엄청난 굉음과 불꽃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싸우는 장소는 시내의 집 지붕 위여서 그 불꽃이 재난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월영 선배가 만든 마법진은 시내의 집만 감쌌을 뿐,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게 아니니까. 파앙. 이번에는 내 발과 월영 선배의 발이 서로를 걷어찼다. 다리가 서로 교차하면서 요란한 마력의 충돌이 일어났고, 나와 선배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지만 곧 다시 서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당장에 상대의 일격이 날아들 것이고, 대등한 상대와의 대결에서 선수를 빼앗기는 건 치명적이니까. 다시금 지팡이가 부딪치면서, 서로의 마력이 충돌했다. 만약 서로가 부딪치고 떨어지는 시간이 충분히 짧지 않았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이 아주 짧은 순간의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론 끝이 없어.' 아무래도 상황을 바꿔야 할 것 같으니, 이제 슬슬 마법도 같이 사용해 볼까. 사실 무술대결은 이만하면 충분할 것이니, 이제부터는 선배의 마법실력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나는 내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월영 선배의 지팡이를 손으로 쳐내고, 곧바로 지팡이를 아래로 휘둘렀다. 선배의 발목을 분질러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려는 시도였지만 선배는 재빨리 하늘로 뛰어올랐다. 내 지팡이가 빈 공간을 자르는 순간, 그녀는. 부웅. 그녀의 허리가 돌아가면서, 공중에서 옆차기를 걸어왔다. 물론 그녀의 발이 내 머리에 닿기 전에 나는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그것을 피했지만, 그녀의 다리는 관성의 법칙을 무시한 채 내 몸을 아래로 찍어누르듯 덮쳐왔다. 만약 남자였다면 선배의 속옷이 드러나는 걸 보고 황홀해하다가 한 방 맞았겠지만, 나는 오빠가 아니니 그런 쪽에는 흥미가 없었다. 여자가 여자 속옷을 봐서 뭘 하겠는가. 게다가 내가 설령 남자였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그런 걸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곧바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실제로 지금 선배의 저 내려 차기를 맞는다면, 갈비뼈 정도는 우습게 부러질 것이다. 물론 그건 내가 평범한 사람일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지금 저걸 맞으면 그 다음 공격은 더 강력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슈웅. 선배의 다리가 내 가슴을 밟으려는 순간, 나는 몸을 더욱 뒤로 젖혔다. 내 몸 전체가 허리를 축으로 하며 회전하면서, 머리가 땅을 긁듯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높이가 낮았다면 머리가 땅과 부딪쳤겠지만, 그 정도의 거리는 알아서 분별할 수 있다. 선배의 발이 가격지점을 놓치고 빗나가는 순간, 내 다리는 회전력을 이용해서 월영 선배를 향해 밑에서부터 쳐 올라오고 있었다. 만약 이걸 맞는다면 다리 사이가 찢겨지면서 몸이 그대로 갈라져 버리겠지만. 휘잉. 내 일격은 빗나가 버렸다. 월영 선배는 내 발차기가 날아옴과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날렸고, 높이 계산을 잘못한 나는 헛발질을 해버린 것이다. 역시 상대도 중력의 손길을 풀어내는 법을 충실히 익힌 모양이다. 주문마법도 쓰지 않고 몸을 허공에 띄우는 걸 보면. 하지만 발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왼발이 안 되면 오른발로 하면 된다. 내 오른발이 다시금 그녀의 다리 사이를 노리고 날아갔지만. 부웅. 역시 이번에도 헛발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 높이 띄우면서, 내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회피로 인해 그녀와 나의 거리는 약간 떨어졌다. 마법주문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즉시 그걸 사용하기로 했고, 결심은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Magic missile 매직 미사일]] 시동어조차 붙이지 않고, 나는 마법을 만들어내었다. 물론 평상시라면 마법의 이름 앞에 시동어인 Actuation을 붙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다. 그걸 붙여줄 만한 여유가 없고, 이유도 없었다. 내가 평소에 그 단어를 붙여주는 것은 시동어를 붙여야 마법이 발동되기 때문이 아니라, 시동어를 붙이지 않을 경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니까. 굳이 마법의 이름을 영어로 쓰는 것도,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가령 예를 들어. "오빠 바보. 죽어버려 !" 이렇게 외칠 경우, 내가 마법을 한글로 발동시킬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마법지팡이가 내 말을 들으면, 그 말을 곧이 듣고 오빠를 정말로 '죽여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국어사랑이 나라사랑임에도 불구하고,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우리 글을 푸대접하는 정부의 조치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를 마법발동에 쓴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으니. "You're dead." 만약 내가 영어 교과서에 이런 문장이 있어서 그걸 읽었다면, 그리고 시동어를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마법 지팡이가 그 말을 듣자마자 즉시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굳이 마법의 시동어로 Actuation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 실수로 인한 마법발동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니 그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지팡이 앞에 마력이 집결된 구슬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은 내 의지에 따라 월영 선배를 향해 날아갔다. 사실 이런 걸로는. '절대 먹히지 않아.' 상대의 수준으로 보아, 만약 내가 월영 선배를 해치우고 싶다면 훨씬 높은 레벨의 마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레벨 1 짜리 하급 마법이 아닌. 그러나 지금은 탐색전이고, 지금의 이 마법을 어떻게 상대가 막아내느냐는 것을 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여기서 상대가 어떻게 대응방책을 짜내느냐에 따라, 상대의 실력이 가늠될 것이니까. 과연 그녀는 어떻게 나올까. 매직 미사일이 자신의 앞으로 치고 올라오는 걸 본 선배는 지팡이를 미사일 쪽으로 뻗더니.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Fireball 파이어 볼]] 월영 선배가 택한 대응책은, 주문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법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주문마법이 완성되는 걸로 보아, 그녀의 마법은 최소한 레벨 10 이상의 수준이 틀림없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아무리 주문을 빨리 외우더라도 그것을 아예 생략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비록 그녀가 쓴 파이어 볼은 그리 높은 레벨의 마법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은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었다. 그녀의 지팡이 앞에 붉은 빛의 불덩어리가 생기더니,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나에게 강하해왔다. 그런데 저 불구슬의 크기는........ "!" 그 불덩어리의 크기는 너무 컸다. 최소한 3m? 아니면 5m? 비록 상대가 마법으로 받아칠 것이라는 점은 예상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컸다. 저렇게 큰 파이어 볼을 만들어낼 줄이야. 그 파이어 볼은 내가 던진 매직 미사일을 순식간에 짓눌러 버렸고, 내 미사일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파이어 볼이 지금, 나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뭐야. 초장부터 너무 박력이 심하잖아? 물론 저 정도의 마법으로 나를 다치게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주위의 집들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저런 게 땅에 떨어진다면, 인명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게 아닌가. 지금은 시간이 시간이라서 다들 집에서 자고 있으므로, 저 파이어 볼이 만약 지표면에서 폭발한다면 큰일인 것이다. 게다가 저 파이어 볼이 투명마법에 의해 일반인의 눈에 안 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큰일이었다. 아무도 위험이 눈앞에 다가온다는 걸 모르니까. 파앙. 나는 시내의 집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내 뒤를 쫓듯이 불구슬이 공중을 가르고 있었다. 내가 허공으로 달아난다면 저것도 당연히 나를 따라올 것이라는 내 생각이 맞은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으니.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Fireball 파이어 볼]] 이런 민폐 제조기 같으니. 또다시 거대한 파이어 볼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누가 파이어 볼을 레벨 3짜리, 평범한 마법이라고 했던가. 저런 거 맞으면 건물 하나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게다가 아까 내가 피한 파이어 볼이, 방향을 틀더니 나에게 다시 도전해왔다. 파이어 볼 주제에.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Fireball 파이어 볼]] 이봐요. 월영 선배,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런 말이 입밖에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고, 나는 대응책을 모색해야 했다. 물론 저런 것에 내가 다칠 이유는 없지만, 일반 시민들은 문제가 다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걷어차서 폭발시키고 싶은데도,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저걸 지금 여기서 터뜨려 버린다면, 일이 복잡해지기만 할 것이니까. "일단 피하고." 나는 세 개의 불덩어리를 피해 날아가면서, 좋은 방법이 없는지를 생각해봤지만, 솔직히 일단 걷어차 버리면 뒷수습을 하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결론은 변함이 없었다. 파이어 볼이 일단 폭발해버리면 그걸 투명마법으로 안 보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불덩어리가 사방으로 불씨를 뿌려서 여기저기에 불을 붙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불이 붙은 일반 주택이나 자동차, 도로 등을 모조리 투명하게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랬다가는 모든 이의 의심을 살 것이다. 갑자기 수 십 채의 집이 투명해진다면,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환상마법으로 가린다고 해도, 집이 불탄다는 사실 자체는 그대로 남으므로 해결책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불이 일단 붙어버린다면 내일 아침의 신문 머릿기사는. '충격. 서울시에 대화재.' '정부, 이것은 북한의 공격이 절대로 아님을 강조.' '주가 폭락. 외국 투자가들, 한국에 투자한 자금을 전면 회수.' '북한, 남조선의 민중봉기가 일어난다면 언제라도 지원할 것임을 천명.' '미국, 제 7함대에 비상령.' 이런 건 상당히 곤란했다. 안 그래도 김정일이라는 말썽꾼으로 인해 세계가 시끌시끌한데, 굳이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역시 나로서는 다른 방법. 즉 달아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원만했다. 내가 도망치면 파이어 볼도 내 뒤를 따라올 것이니, 한적한 곳으로 달아나면 지금보다는 편하게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일단 한 번 마법을 쓸 때마다 기물파손, 인명피해 등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물론 내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탐색전이지 본격적인 싸움을 벌이는 게 아니다. 진정한 힘을 보이는 것은 신중히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슈웅. 일단 하늘 높이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뒤에서 파이어 볼이 유도미사일처럼 나를 쫓아왔지만, 어차피 그 정도의 속도로는 나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간신히 나를 쫓아올 정도로 속도를 맞추고, 주위 상황을 살폈다. 보통 이 시간대라면 한적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지상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슈웅. 주위를 지나는 비행기였다. 우리나라는 워낙 험악한 이웃들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군대에 신경을 써야 하고, 그래서인지 서울 상공에는 가끔씩 비행기들이 지나다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조심하지 않으면, 비행기 한 대를 추락시킬 위험은 충분했다. 특히 지금 나는 투명해져 있어서, 비행기 조종사가 아무리 주의해도 나를 볼 수가 없으니, 당연히 피할 수도 없으니까. 저 멀리서 F-16 두 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아직 여기로 오려면 멀었다. 그럼 안심하고. [[water screen 워터 스크린]] 지팡이의 앞에 마법진이 나타나면서, 거대한 물의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거의 20m가 넘는 거대한 물방울이 내 앞에 나타나더니, 그것은 곧 커튼처럼 변하면서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 물의 막은 3개의 불구슬을 덮치더니, 그것을 통째로 먹어버렸다. 만약 지상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투명마법도 걸지 않은 물의 구슬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아메바처럼 꿈틀거렸다면 사람들은 물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달아났을지도 모르지만, 여기는 지상이 아니라 하늘이었으므로 볼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설령 하늘을 쳐다보는 인간이 있다 하더라도. "대기 오염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럴 때는 환경오염에 감사해야 하나. 하지만 마법으로 내 몸을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면 내 상아빛 피부는 순식간에 새까맣게 되었을 테니, 감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특히 이런 새까만 먼지구름들을 보면 말이다. 내가 만들어낸 물의 막은 분명히 순수한 물이었는데, 금방 먼지가 녹아들었는지 새까맣게 변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하늘에 뜬 거대한 물방울은 얼마 못 가서. 치지지직. 물과 불이 만나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거대한 물방울은 금새 거대한 수증기 덩어리로 변했고, 그것은 곧 하늘의 바람을 맞아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바람이 주위의 오염물질들까지 쓸어 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차분하게 경관을 감상하는 건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다. 전투 중에는 말이다. 나는 지팡이를 아래로 겨누며 다음 공격에 대비했지만. "올라오지 않아?" 월영 선배는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시내의 집 지붕 위에 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움직일 낌새가 전혀 없는데. 설마 그 위치에서 계속 싸우겠다는 건가. "서울시를 다 부술 셈이야?" 이봐. 이봐. 선배. 안 올라오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설마 시가지 한복판에서 마법을 날리자는 건 아니겠지? 우리나라를 완전히 말아먹을 셈이야? 그게 아니면 아직은 탐색전이니 몸소 그 고귀하신 엉덩이를 들어올릴 필요가 없다는 거야? 물론 '날아오를 실력이 없어서'라는 대답은 아예 고려사항도 아니다. 실력이 없는 인간이 그렇게 큰 파이어 볼을 3개씩이나 던져? 그것도 탐색전에서? 그렇다면 올라오게 해야겠지. 하지만 도시 전체를 파괴할 정도의 큰 마법을 구사하면 안 된다. 그럼 좁은 범위에 적용될 마법을 선택해야 하니, 역시 이것?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Reverse gravity 리버스 그래비티]] 이거라면 선배가 아무리 체중과다라고 해도, 그 무거우신 궁둥이를 들어올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내 마법이 터지는 순간, 시내의 집 전체가 빛으로 덮이면서, 중력이 뒤집혀 버렸기 때문에. 갑자기 중력이 역전되자 시내의 집 위에 있던 공기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주위의 공기가 모조리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시내의 집 지붕 위에 태평스럽게 앉아있던 월영 선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왼손으로 황급히 치마를 잡고, 아래로 끌어내리는 게 보인다. 하지만 투명해진 상태에서, 굳이 치마를 가리는데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 만약 남자 마법사가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 안다면. '당장 선배의 투명마법을 해제하려고 할 지도.' 뭐 그건 내 사정이 아니다. 나는 내 치마만 지키면 되는 것이지, 남의 치마까지 걱정해줄 여유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애를 쓸 바에는, 차라리 이쪽으로 올라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배.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시내의 집을 덮은 마법진이, 반중력의 힘에 반응하는 듯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내 마법을 깨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반중력 마법을 깨려고 하다가, 실수하면 자기 마법진까지 깨질 수....... [[Spell turning 스펠 터닝]] 호오. 나는 약간 감탄했다. 내 주문을 반사할 생각을 다 하다니. 내 마법주문이 되돌아오면서, 이번에는 반중력의 힘이 나를 덮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건 어차피 내 마법이니, 내가 취소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다. [[Cancellation. reverse gravity]] 역중력의 힘은 간단히 사라졌다. 뭐 자기 주문이니까 이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약간 놀랐다. 상대가 단순한 주문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또 실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월영 선배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쓸 줄 안다는 점을 확인한 탓이 더 컸다. 전투경험이 부족하다면, 적합한 시기에 적합한 주문을 골라서 쓸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긴 시간을 들여 상대에게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취향은.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magic absorption(마법 흡수)]] 빨리 다음 마법을 퍼붓는 쪽이다. 역주문 마법으로 레벨 8에 달하는, 마법 자체를 흡수해버리는 마법이 발동되자, 갑자기 시내의 집을 묶고 있던 마법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끝내버리겠어요. 선배.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쓰러져주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주문을 외운 것이다. 그런데 이건? [[Invisibility 인비지블리티, Cursed slayer 커즈스 슬레이어]] 이런 ! 그녀는 내 마법 흡수를 막기 위해 대응마법을 외우는 것보다, 차라리 공격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그녀가 대응마법을 외웠다면, 주문을 깨부수지 못하게 다음 마법이 잇달아 터졌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녀의 마법은 내가 던진 '마법 흡수'의 마법을 깨는 게 아니라, 아예 나를 날려버리는 파괴마법이었다. 게다가 이 마법은 하필. "맙소사."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 선배가 외운 마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하필이면, 핵폭발 마법이었다 ! 그것도 엄청난 방사능과 열선을 뿜어내는. 이런 무식한 마법을 서울시 한가운데에서 외우다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거대한 핵에너지가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일단 피하거나, 받아치는 방법을 쓸까 했지만. '안 돼. 그러다가는.' 피한다면, 아까 봤던 F-16 전투기 편대에 이 마법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하필 이쪽으로 오고 있고, 투명마법이 걸린 이 핵폭탄을 피하는 건 저들에겐 불가능할 것이니, 여기서 내가 피하면 안 된다. 저 사람들이 이런 마법에 맞으면, 저들은 그대로 핵폭발에 휘말려 소멸해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 위치에서 핵이 터질 경우, 과연 어떻게 될까. '북한의 핵공격. 서울시 대참사.' '한국 대통령 사망. 부산에 있던 국무총리, 긴급 직무대행.' '미 대통령, 보복조치로 북한에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아냐. 아냐. 꼭 이렇게 되라는 보장은 없어. 하지만 여기서 핵이 터질 경우,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죽게 된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오빠도 포함해서. 그러니 피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선택할 수 없는 답안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저걸 받아쳐 버리면? 그러면 저 마법은 서울시 한가운데에 내려앉을 것이고. '김정일, 서울에 핵공격.' '중국, 북한의 야만적 조치를 징벌하기 위해 북한 침공. 친중정권 수립.' '북한, 중국의 자치주로 편입.' '일본, 한국의 피해 복구를 위해 자위대 파견 결정.' '한국에 친일정권 수립.' '한국, 일본에 주권이양.' 아냐. 아냐. 이딴 미래는 안 돼. 이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 그렇다면 결국 나는 저걸 소멸시켜야 한다는 답안을 선택해야 했다. 다행히 이 경우에 저 마법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런데 잠깐. '굳이 없앨 필요가 없잖아?' 이 지루한 싸움을 끝내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약간 무식한 방법인데, 괜찮을까? 하지만 이 방법이 실패하면, 더 악독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빨리 집에 가서 잠 좀 자야겠고. 그렇다면. '도시 한가운데에 핵을 쏘다니. 이런 오빠 같은 심보를 봤나. 어디 맛 좀 봐요.' 나는 시내의 집을 향해 날아갔다. 핵에너지의 덩어리가 내 옆으로 날아왔지만, 나는 그 마법을 옆에서 걷어차 버렸다. 거대한 죽음의 마법은 마침 날아오던 F-16 전투기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두 비행기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갑작스런 난기류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핵에너지의 덩어리도 투명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있는 것을 보며, 나는 수직으로 강하해서 선배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독수리처럼. 난데없는 상황에 선배는 즉시 왼손으로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내가 한 발 빨랐다. 일단은. [[Death blade 데스 블레이드]] 이건 고작해야 죽음마법으로 레벨 7 정도의 마법이지만, 죽음의 힘이 응축된 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정통으로 맞으면, 어지간한 생명체는 한 방으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실로 생명체에게 있어서는 재앙과도 같은 마법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월영 선배라고 해도, 이걸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슈왁. 죽음의 검이 내 오른손에서 뻗쳐 나오면서, 선배의 머리를 베었다. 만약 맞췄다면 결정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월영 선배는 역시 쉽게 죽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검을 피하고, 동시에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한 것이다. 나는 왼손의 지팡이를 그녀에게 겨누었지만, 그녀는 내가 다음 마법을 만들어 내기 전에. [[Life blade 라이프 블레이드]] 그녀의 오른손에서 초록색 빛이 뻗어 나오더니, 곧바로 거대한 칼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분명히 생명의 검, 죽음의 검과는 반대되는 속성을 지닌 마력의 검이었다. 하지만 저건 말이 생명의 검이지, 사실상 검기와 다를 게 뭐가 있나. 물론 검기와 달리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엄연히 둘은 구분되어야 마땅하지만. 콰앙. 생명과 죽음의 힘이 서로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힘을 뻗치려는 순간에,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목표를 잃은 생명의 검이 시내의 집 지붕을 내리쳤지만, 결계로 인해 집 자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다만 지붕에서 불꽃이 튀기는 걸 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저걸 정통으로 맞는다면, 어지간한 마법사는 머리가 쪼개지는 걸 피하지 못할 테니까. 선배의 옆으로 굴러온 나는,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검을 쳐들고 월영 선배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공격이 아니었다. 내가 노린 것은, 다른 쪽에 있었다. 선배가 허리를 회전시키면서 자신의 검을 수평으로 베었을 때. [[Blink 블링크]] 월영 선배의 생명의 검은 이번에도 목표물을 놓쳤다. 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멀리 달아난 것이 아니었다. 이 마법은 원래 단거리 순간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내가 공간을 넘어 달려간 곳은 도피처가 아니라, 월영 선배의 등뒤였다. 황급히 검을 뒤로 휘두르려는 선배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향해 발을 날리면서,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것은. [[Dragon force 드래곤 포스]] 마법사에게 용의 힘을 주입하는 마법. 이 마법은 원래 상태변화마법의 한 지류로, 힘 마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마법사에게 용의 힘을 부여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실제의 용이 가진 힘과는 비교가 안 되고, 다만 용의 근력. 그러니까 근육의 힘만을 부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인간과의 육박전에서는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사람과 용이 힘겨루기를 해서, 사람이 이길 수 있겠는가. 내 몸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빛났다. 만약 투명마법을 걸지 않았다면, 모든 이가 보았을 정도의 광채가 터졌을 것이다. 그리고. "야아아아압 !" 기합과 함께, 나는 월영 선배의 등을 걷어찼다. 보통 사람이 맞는다면, 즉사하다 못해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일격을 날린 것이다. 비록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갑작스런 순간이동으로 인해 보인 미세한 허점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일격이 선배의 척추에 명중하면서.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월영 선배는 등을 이상할 정도로 뒤로 굽힌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두 조각이 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겠지만, 마력이 그녀를 보호했는지 그 타격은 결정타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했다. 내 목적은 그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잠깐의 틈을 얻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외워야 할 주문은 그 틈을 더욱 크게 해서,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해야 할 것은. [[Isolated world(고립된 세계)]] 나와 시내의 집, 그리고 나를 향해 떨어져 오는 핵에너지의 덩어리까지 결계 안으로 숨겨졌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 월영 선배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고, 이곳에서 더 싸우는 것은 시민들의 생명에 너무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Teleportation 텔레포테이션]] 순간이동의 마법이 나를 우리 우주의 시공간 밖으로 잠시 밀어냈다. 하지만 밀려나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시내의 집과, 집이 디디고 선 땅까지, 전부. 그들이 모두 빛을 발하면서, 다른 세계로 떠났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허리를 기묘하게 뒤로 꺾은 월영 선배의 몸이, 한강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원래대로라면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야 하겠지만. 풍덩. 그 물기둥은 너무나 작았다. 용이 걷어찬 기세로 날려간 걸 감안하면,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상황의 의미는 분명했다. 그녀는 아직 죽지도 않았고, 의식을 잃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비록 몸이 꺾여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단해."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안하게도, 이미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물 위로 뛰어나올 무렵에는, 이미 모든 일은 끝나있을 것이다. 비록 그녀가 아직 무력화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곧바로 나를 공격한다는 가정은 세우기 힘들었다. 어쨌든 내가 그녀를 때렸을 때,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일격이 치명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 상대의 발을 묶을 정도는 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라면 죽었겠지만." 겉보기로 판단할 때, 그녀는 분명히 척추가 부러졌다. 그것도 몸이 반으로 접힐 정도로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일격으로 숨통이 끊어졌을 정도의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그 상처를 치료하려면 어느 정도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비록 그 시간이 5초가 안 될 지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으로 족했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내 일을 끝낼 수 있으니까. 파앗. 나는 빛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파앙. 내가 시내의 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인도양의 한가운데였다.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니 이곳도 밤이기는 했지만,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도움인지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별을 보려고 해서가 아니다. "약간의 시간은 벌었을 거야." 내가 순간이동을 해버렸으니, 월영 선배로서는 내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등이 부러졌으니 자신의 몸을 추슬러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나를 추적하는 것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정도라면 보통 인간은. "심장과 허파에 등뼈가 박히면서 사망했을 테니." 그녀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런 식의 공격을 퍼붓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오빠한테 그런 발길질을 날렸다간, 오빠는 당장 사망이다. 시체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힘을 담은 일격이니까. 내가 전에 불량배들에게 쫓겨다닐 때, 진짜로 싸우지 않은 것도 그런 점을 생각해서였다. 사실 그런 피라미들을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기도 우습지만, 그랬다가는 대량학살극이 벌어질 것이다. 발차기 한 방으로 마법사의 마력을 짓누르면서 척추를 부러뜨리는 사람이, 다른 이와 함부로 싸울 수 있겠는가. "뭐 그 녀석들은 아직 정신이 덜 들긴 했지만." 조만간 또 싸워야 할 것 같아서, 약간 우울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미 0.1초의 시간이 지나버리지 않았는가. 서둘러야 했다. 월영 선배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원래의 자리에 시내의 집을 돌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하긴 내가 봐도 이건 좀 무식한 방법이었으니. "빨리 안 하면 난리가 날 거야." 그렇다. 나는 시내의 집을 옮기면서, 부장이 친 결계에 의해 방해받을 것을 우려하여, 아예 시내의 집이 얹힌 땅덩어리까지 통째로 순간이동을 시켜버린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붉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을 옮기기 위해, 그 프라이팬이 올려져 있는 가스렌지까지 모두 들어서 옮긴 것이다. 프라이팬의 손잡이가 날아갔다면, 그리고 그 프라이팬이 뜨겁다면 보통 사람은 맨손으로 그걸 잡을 수가 없다. 화상을 입을 테니까. 그럼 이걸 어떻게 옮기겠는가. 한 가지 방법은 프라이팬을 식히는 것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은 그 프라이팬이 올려진 물건까지 통째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스렌지를 들어올린 것이고, 렌지 위에 있던 프라이팬도 같이 들린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컸나?" 내가 시내의 집을 덮은 결계를 확실히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그 주위의 땅을 다 들어올려야 했다. 이것은 부장이 친 결계가 아래쪽으로 트여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사실 그것만 보고 내가 이곳으로 시내의 집을 옮긴 건 아니다. 사실 시내에게 깃털만 박을 예정이었다면, 당연히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 편이 결계도 만나지 않고, 훨씬 간단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이긴 했지만, 그럴 경우 월영 선배의 반격을 받을 위험이 너무 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을 감을 정도로, 월영 선배가 중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물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방심하면 날벼락을 맞는다. 당연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마법을 쓸 수밖에 없다. 이미 서울시 한가운데에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더 이상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뭐 한탄은 나중에 하고. [[Spell cancellation, magic feather, isolated world]] 첫 번째 마법이 월영 선배가 시내의 집 주위에 쳤던 결계를 부쉈고, 두 번째 마법은 마법의 깃털을 만들어냈으며, 나는 그것을 시내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시내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쪼개졌고, 피가 흘러나오기 전에 나의 깃털은 그녀의 뇌에 들어가서 박혔다. 물론 여기서 실수라도 하면 시내는 백치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마법으로서, 다시금 시내의 집은 결계로 감싸였다. 내가 만든 결계로 말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세 마법을 동시에 발현시키고, 그 사이에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은 다른 마법사에게는 무리였다. 무엇보다, 내가 여기 온지 아직 0.2초도 안 지났으니까. 오죽했으면, 내가 이곳에 나타날 때 본 파도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말이다. 이건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리고 그러지 않으면 언제 월영 선배에게 들킬지 알 수가 없었던 탓도 크고. "아이고. 더워." 농담이 아니다. 내가 서두른 이유는 월영 선배 탓도 있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서두르지 않겠지만, 이곳은 바로. "바다라서 좀 시원할까 했는데, 이거 위치를 잘못 잡았네." 다음에는 절대로 여기로 안 온다 ! 최소한 적도 부근으로 위치를 잡는 짓은 절대로 안 한다 ! 물론 내가 더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문제는 시내의 집에서 아직도 자고 있는,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만약 내가 빨리 결계를 다시 치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저 사람들은 잠들어있으니 다행이네." 조금만 내 행동이 늦었다면 결계가 깨질 때 주위의 뜨거운 공기가 바람으로서 안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랬으면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더워서 죽으려고 할거야." 그건 곤란하다. 난데없이 날씨가 더워진다면, 시내의 집 식구들은 일제히 깨어날 것이고, 밖의 광경을 보고 아우성칠 것이다. 난데없이 집이 서울시 한가운데에서, 망망대해 위로 이사를 해버렸으니까. 그렇게 되면 일이 귀찮아진다. 기억을 지울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뜻이니까. 부웅. 다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 마법은 발동되었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집을 원위치에 돌려놓는 것과, 월영 선배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조치를 해놨다고 해도, 상대가 또 시내의 머리에서 깃털을 뺀다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게다가 빨리 이 집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지 않으면, 뒷수습이 곤란해진다. 나는 지금 시내의 집이 서 있던 공터에, 아무 마법도 걸어두지 않고 왔으니까. 솔직히 어디서부터 설득해야 할지 짐작도 안 가지만, 일단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휴식이 허락되지 않는, 고독한 영웅의 운명일까. "영웅이 아냐 !" 난 영웅도 여걸도 아니다. 단지 운이 좋게도 굉장한 스승을 만나, 신기한 힘을 얻은 여고생일 뿐이다. 다시금 순간이동으로 집을 움직이면서, 나는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 파앗. 내가 순간이동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은 단지 1초도 되지 않았지만, 그 동안에 이미 상황은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순간이동으로 시내의 집을 다시 원위치에 내려놓았을 때,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의 눈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하긴 난데없이 폭풍이 불지 않나, 집이 없어지지 않나, 심지어 저 하늘에서는 F-16 전투기까지 갈팡질팡, 허공에서 헤메고 있으니, 의심을 품은 사람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환상마법을 걸어서, 집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월영 선배를 상대로 그런 것까지 배려해서 순간이동을 하는 건 어려웠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뭐야. 오늘 술이 너무 과했나." 대부분의 행인들의 반응이 이렇다는 점이다. 사실 시내의 집이 사라진 순간은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0.2초였으니까. 이 정도라면 보통 사람은 초자연 현상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자기 눈이 착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확인작업을 거쳐야 한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넘어갔다가 대형 사고가 터지는 것은, 모든 붕괴사고의 특징이니까. 게다가 이 부근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사실 지금 시각을 보면, 대체 이 사람들이 왜 집에도 안 들어가고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불만이라도 쏟아놓고 싶지만, 그게 허락될 정도로 내가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게 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어쨌든 투시를 해 보니. [[Read mind. 15]] 어째서 열 다섯 명이나 되는 거야? 내 불만과는 상관없이, 일단 이 집 주위에서 100m 이내에 있는 인간들은 모조리 검색대상이다. 여기는 주택가이니 그 이상의 거리에 있는 사람은 이 집이 움직이는 걸 보고 싶어도 다른 집이 가리기 때문에 볼 수가 없을 테니까. 물론 여기에는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 즉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포함이 되지 않지만, 그 사람들은 지금 자고 있다. 안 자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중에서 바깥의 광경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컴퓨터나 영화에 빠져 있는 데다가, 간혹 안 그런 인간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집의 창문은 시내의 집과는 반대편이었으니까. "15명인 게 다행이야." 만약 지금이 낮이었다면, 내가 작업해야 하는 사람의 수는 150명이나 1500명, 심지어 15000명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는. "아아. 고달파." 이렇게 불평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조차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게, 지금의 내 운명이었다. 우선은 내 할 일이나 하고, 나는 행인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 후, 그들이 혹시 지금의 일을 보고 동요했는지,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여부를 알았는지, 그 외에 의심이 가는 것을 꼼꼼히 조사했다. 하지만 이런 내 고생은 처음부터 헛고생에 불과했다. 그들중에 지금의 상황을 보고 의심한 인간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긴.' 하긴 어떤 인간이, 지금 눈앞의 상황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모두 자기들의 착각이라고 하지.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그런 현상을 안 믿기 때문이다. 0.2초라는 시간은 그들의 그런 생각을 고치는데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하아." 뭐 나로서는 당연히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월영 선배가 추락한 장소를 쳐다보던 나에게, 유쾌하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한강에서 뭔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드디어 나오신 모양이다. 그런데 저 모습은 뭐냐. 머리를 요란하게 풀어헤친 꼴이 꼭. "백년 묵은 처녀 귀신?" 이렇게 외치지 않은 것은,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월영 선배는 자신의 갈비뼈 부근을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비록 투명마법은 아직 깨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즉시 반격을 해오지도 않을뿐더러, 그녀의 등이 움푹 들어가 있었으니까. 저 정도라면 최소한 등뼈가 완전히 박살났다는 뜻이고, 부서진 척추 조각은 어쩌면 허파와 심장을 손상시켰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보통 사람은 이미 죽음에 이르렀을 테지만, 역시 그녀는 강했다. 아직도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니. 그것도 비행마법과 투명마법, 2가지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대단하네요." 나는 일단 칭찬을 해주었다. 보통 저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을 잃을 텐데, 그녀는 아직도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찬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지팡이로 겨누었다. "이미 상황은 끝났어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적어도 부장은 내 적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저런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더 싸우다가는 전신마비까지도 갈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마법사니까 돌아가서 마법으로 치료하면 나을 것이지만, 계속 싸운다면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살려두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시내의 집이었다. 아직도 결계 안에 갇혀 있는, 시내의 집은 인간의 눈에는 비치지 않는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뭐야? 왠 돌풍이야?" 나와 부장이 싸우면서, 나는 반중력으로 집 전체를 끌어올리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그 마법이 미치는 영역이 시내의 집을 중심으로 하여 수직방향으로 무한정이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시내의 집 위에 있던 공기는 모조리 위로 빨려 올라갔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곳은 진공상태가 되고, 텅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기 위해 주변에서 공기가 몰려들었었다. 그 결과. "아이고. 누가 민 거야?" 취객 두 명이 나동그라졌다. 어지간하면 다른 이들을 싸움에 말려들지 않게 하는 내 관점에서는, 상당히 참담한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마법의 여파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월영 선배가 나에게 맞아서 한강에 첨벙 빠졌을 때 생긴 물기둥은. "이봐. 거기 안 보여?" "조금만 기다려. 119에 연락했으니까, 곧 올 거야." 월영 선배가 자신을 제어해서 하강속도를 줄이는 바람에 거대한 물기둥은 생기지 않았지만, 물에 빠지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고 그것은 물기둥 하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은 당연히. "사람이 물에 빠졌단 말야. 빵빵거리지 말라고." 세상 인심은 각박하다지만, 꼭 그런 인간만 우리나라를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친절하신 분이 하필이면 부장이 물에 빠지는 걸 봤다는 것이고, 그녀가 빠져나오는 것도 보았다는 점이다. 비록 월영 선배가 투명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투명 마법은 물과 상극이라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뭔가가 물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되는 광경을 본 그 선인께서는, 사람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을 보고 엉뚱한 해석을 해버리신 것이다. "이젠 안 보여. 아무래도 힘이 빠졌나 봐." "내가 들어갈까? 난 헤엄 잘 치는데." "안 돼. 무턱대고 들어가면 큰일난다고. 자네까지 죽어." 저, 전혀 그게 아닌데요. 생각 같아서는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119 구조대원들까지 헛걸음을 하게 생겼는데. 상당히 미안한 짓을 해버린 것 같아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내가 내려갈 수도 없다. 우선은 눈앞의 부장님부터 어떻게 해야 하니까. 더군다나 이 사람은. 우드득. 그녀의 상처는 저절로 아물고 있었다. 특별히 마법을 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여기로 오기 전에 미리 마법을 걸어두었겠지.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회복될 수 있도록. 대충 후보로 짐작되는 마법들의 이름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건 지금 상관할 일이 아니다. 당장 하늘만 봐도. "참새. 괜찮은가. 참새." "이 정도 난기류쯤, 괜찮습니다. 편대장님." 두 전투기들이 내가 일으킨 돌풍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시내에서의 싸움은 이렇게 부수적 피해가 크기 때문에, 가급적 삼가고 있는데.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는 없지만, 잘못하면 이런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도 모른다. 부장의 태도로 보면. "당신, 저 아가씨에게 또 감시마법을 걸었지요?" 하아. 역시. 그럼 내가 그녀에게 뭘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어차피 당연한 게 아닌가. 그녀를 죽이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데. 그래서 나도, 약간은 맥빠지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지구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뿐이에요." 내가 무슨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여왕이라도 되는지. 왜 나 혼자서만 지구를 지켜야 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사실 그럴 수도 없는 게 내 입장이었다. 내가 왜 지구를 지켜야 하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지구에서,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이 일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 일을 맡지 않는다면 지구는 꼼짝없이 악의 소굴이 될 것이고, 나의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오빠 역시, 악의 제국의 졸개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에. 그 후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뻔히 알고 있기에, 나로서는 이 일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암에 걸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칼을 그에게 들이대어야 하는 법이다. 암세포를 제거하려면 칼로 배를 째서, 암세포 덩어리를 들어내야 하니까. "꼭 그렇게 했어야 하나요? 그런 잔혹한 방법을 써서?" "네. 그게 저 아가씨의 생명을 지킬 방법으로는 가장 확실해요." "그래서, 저 아가씨를 꼭 24시간 감시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인권유린이에요." "인권을 고려해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럴 순 없어요. 당신이 정의의 사도라면, 그 방법 역시 공명정대해야 해요. 아무튼, 당장 그 깃털을 빼내세요." "안 돼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이다. 그걸 허락했다가는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결국 나는 이 지구의 수 백 명의 마법사 후보들, 아니 사형수 후보들에게서 깃털을 모두 빼내는 지경으로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악의 마법사로 돌아갈 것이며, 그들의 최후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분해시켜야 하는 지경으로 몰리고 말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을 지킨다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피해자들의 인권과, 아직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범죄자에게 앞으로 피해를 입을 사람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나에게는 있기에, 나는 부장의 이상론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장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럼 내가 직접 빼내겠어요." "내가 다시 끼우지요." "내가 또 빼면?" "또 끼우지요." "또 빼면?" "마찬가지예요." 이러다가는 끝이 없었다. 말싸움으로 가다가는 결국 서로의 감정만 상하고 말 것이다. 이미 충분히 상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상대를 설득할 필요성이 있었다. 뭘로 예를 들어야 하나. 역시 상황을 솔직히 설명해주는 게 나을 것이다. 상대에게 말이 통한다면 말이다. 뭐, 내 입장부터 말해야 하나. 그럼. "당신은 그 아가씨를 동정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실무자인 내 입장에서는 동의해줄 수가 없어요. 나는 혼자서라도 지구 인류 60억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고, 이상론만으로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잔혹하다는 건가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현실을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녀가 이해를 할 수 있다면, 그녀의 목을 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적은 하나로 족하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를 쪼개고, 그 안에 감시를 위한 마법의 깃털을 박아 넣고, 기억을 모두 소거하는 것은 당신에게 잔혹하게 비춰질 거예요. 어쨌든 그 사람의 과거를 빼앗고, 그 안에 담긴 추억도 사랑도 모조리 박탈해버리는 일이니까요." 특히 시내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원래 오빠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오빠를 어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기억해낸다면 당장 죽을 정도로 괴로워하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오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미주의 명령대로 오빠를 납치하거나, 팔다리를 잘랐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기억을 지우면서,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마 미주가 그런 지시를 내린 건, 나에 대한 증오심이었겠지. 물론 그걸 너무 빨리 드러낸 탓에, 나에게 걸려서 심장이 타 버렸지만.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당신의 마법 실력이라면 분명...." "하지만 지금 기억을 없애고, 마법사와 마법 근원체의 교감을 없앴다고 해서 조치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일단 마법사가 된 자는, 죽을 때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마법 근원체의 마법사에 대한 영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당신 자신도 잘 알텐데요? 무엇보다도." 문제의 핵심은, 마법 근원체의 영향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그 아가씨 자신이, 그런 힘을 동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억지로 마법사의 능력을 없애봤자, 그녀 자신이 그 능력을 다시금 갈망하게 돼요. 그럼 어떻게 하지요? 깃털이라도 박아두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 마법사가 될 것이고, 다시 주위 사람들에게 악을 퍼뜨릴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기억을 없애면 안 되잖아요. 그들이 그런 갈망을 하지 않도록 설득해서...." "그런 설득이 먹힐 사람이라면 예시당초 마법사가 되지도 않았겠죠." 바로 그게 문제였다. 가령 시내만 하더라도, 솔직히 그녀의 사랑은 가망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만약 그녀의 사랑이 이뤄지려면 오빠가 진희와 헤어져야 하는데, 그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빠와 진희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정도의 사이라면, 예시당초 진희 아버지가 입에 거품을 물고 오빠를 쫓아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연미 언니가 오빠를 응원할 리도 없으니까. 그러니 그녀는 당연히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예 : 마법)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오빠의 욕망과 시내의 욕망이 둘 다 이뤄지게 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월영 선배가 말을 꺼내는 도중, 갑자기 그녀의 입술이 멈추었다. 내 눈이 선배를 쳐다보는 가운데, 갑자기 내 시야가 옆으로 빛처럼 이동하더니 시내의 집을 눈앞에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누더기를 걸친 괴인 하나가 있었다. 거대한 낫을 꺼내든 그는. [[atom destruction]] '원자 붕괴 !' 그 주문은 원자붕괴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 마법에 걸린 물체나 생물은 자신을 이루는 원자가 분해되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고, 몸 자체가 양성자나 중성자, 전자 등으로 붕괴되어 버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마법을 맞아서 좋을 일은 전혀 없다. 나는 마법이 나에게 뻗쳐오기 전에 내 위치를 변경했지만, 상대는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나에게 화를 내느라 바빴던 월영 선배는 즉시 그 마법에 휩싸이고. "이런 !"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월영 선배의 몸에서 둥근 방어막이 생성되더니, 마법을 튕겨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하늘에 이상한 빛이 번쩍였으니, 안 그래도 사람이 물에 빠졌다며 몰려든 저 많은 사람들, 특히 119 구조대원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겠는가. 그들은 하늘의 상황을 보았고, 곧 이상한 차림의 여자를 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뭐야? 저거." "하늘에 뭐가 떠 있어." "이상한 여자인데." 내 모습이 아니다. 월영 선배의 모습도 아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보는 것은, 제 3의 인물이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이. 하지만 그 인물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놀라는 이유는.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우리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메주였다. 아. 메주가 아니고 미주였나.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투명마법조차 쓰지 않고, 그대로 상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 저 녀석들은 자기 존재를 숨기면서 다니는 게 여태까지의 행동방식이었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공공연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내일 아침 뉴스 시간에 나오겠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야 지금의 정치인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 일을 비밀로 숨기고 있는 것이지만, 저들은 다른 문제가 있어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범죄자들이 저래도 되나?"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에서는 범죄자였고, 그래서 지구로 도망쳐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가 여태까지 알아본 바로는, 그들은 분명히 쫓기는 신세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존재를 너무 크게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생각해 보라. 죄를 지은 자들이 경찰들의 주목을 받고 싶겠는가. 그들이 만약 필요 이상의 소동을 지구에서 일으킨다면. "그럼 만사 끝이지." 그러니 쉽게 생각하면, 나는 그들이 필요 이상의 대소동을 일으키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경찰들이 알아서 달려올 것이고, 내 고달픈 나들이도 끝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소동이 얼마나 커야, 경찰들이 달려올 것이냐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지구 전체가 파괴될 정도의 난리가 나야 그들이 온다면? "그건 안 돼." 범죄자가 경찰의 주의를 끈다는 것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인데, 그 범죄의 대상이 될 대상은 하필이면 지구였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경찰을 부르기 위해 지구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도록 방관한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래서 나도 적들을 생포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경찰들은 과연 어느 세계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그러나. '알려주지를 않으니.' 문제는 그것이었다. 적들은 자신들의 언어조차 나에게 노출시키지 않고, 되도록 인간을 부하로 하여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마법사들을 아무리 잡아봐야, 그들의 고향에 대해 알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 마법사들은 그런 것에 대해 원래 모르고 있으니까. 이래서는 곤란하다. 악당들을 잡아갈 경찰을 부르려고 해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찾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사는 우주만 대상으로 한다면 모를까, 다른 우주에서 이곳으로 올 정도의 문명을 지닌 상대인 이상 우리 우주만 조사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우리와 같은 물리법칙을 지닌, 같은 차원의 세계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아니, 실질적으로는 무한정이다. 끝이 없는 것이다. 무한한 숫자의 우주를 모두 찾아다닌다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러니 무작정 차원을 헤메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스승님한테 물어보면 간단하겠지만.' 그렇다. 그녀는 나보다 월등히 강하니, 당연히 나의 적들이 어느 세계에서 왔는지도 알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이 세계에 처음 나타날 때, 나를 구했던 사람은 바로 스승님이니까. 그러나 이 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스승님이 과연 나를 도와주느냐는 점이다. 그녀라면 분명히 이럴 것이니. "이제 가르쳐줄 건 다 가르쳤으니까,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 이 말은 내 지레짐작이 아니다.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나에게 힘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후에, 내 곁을 떠나면서 말이다. 그러니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만난다고 해도, 그녀는 저 말을 되풀이할 것이니까. 사실 그녀가 나에게 가르쳐준 지식과 힘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제자를 내팽개치고 가지 말라고요. 무책임한 스승님." 내가 그녀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 대체 얼마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툭 자르고 떠나냔 말이다. 하루나 이틀을 같이 있었으면 말도 안 한다. 몇 백년, 몇 천년, 몇 만년, 아니 그 이상을 함께 지냈으면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밖에 없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백년 이상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는. "저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물론 미주가 범죄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범죄자와 한패거리였고, 자신을 너무 드러내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눈에 띄는 모습으로, 하늘에 떠 있는 거지? 마치 볼 사람은 다 보라는 태도로. "뭐 볼만한 모습은 아니지만." 사실 미주의 모습은 끔찍했다. 얼굴과 목만 사람의 것일 뿐, 그녀의 오른팔과 하반신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겉보기에는 팔다리가 다 온전하게 붙어 있지만, 그녀의 왼손을 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미주가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에서 뻗어 나온 균사(菌絲)가 그녀의 왼팔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몸 전체로 뻗어가고 있었으니까. 저건 분명히. "마법 반지로 몸을 재생시킨 건가?" 사실 미주의 실력은 마법 반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형편없었고, 그런 그녀가 자력으로 심장을 잃어버릴 정도의 치명상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나는 살아있는 시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균사가 얽혀서 재생된 그녀의 오른쪽 몸은, 말라비틀어진 노인의 그것을 연상시켰으니까. 아니, 저건 노인의 몸도 아니다. 죽은 몸이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른팔, 당장이라도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하반신, 그리고 구더기가 들끓는 듯한 몸통에 이르기까지, 성한 부분은 머리 하나뿐이었다. 그거라도 남아있지 않았다면, 지금 눈앞에 떠 있는 곰팡이 덩어리가 미주라는 걸 알 도리가 없었으리라. 슬쩍 옆을 보니. "읍." 부장이 입을 막고, 토하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다. 하긴 보통 사람이 볼만한 모습은 전혀 아니니까. 아무리 그녀가 강한 마법사라고 해도, 역시 역겨운 광경을 많이 접한 건 아닐 테니까. 아니, 아니다. 미주를 보고 월영 선배가 충격을 받은 건,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그건 그녀가 미주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친구의 행방을 쫓고 있었고, 친구의 몰락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나는 미주의 친구가 아니니 충격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저, 저게..... 미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의 발 아래에 있는 사람들조차 구역질을 할 정도의 곰팡이 덩어리. 그게 바로 현재의 미주의 모습이니까. 거기에 균사 사이로 흐르는 썩은 물과 구더기들이, 미주의 모습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고 있었다. 고작 이렇게 되려고 마법사가 되었던 건가요. 미주 선배. 그러나 그녀는 그런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하. 쓰레기가 하나 늘었군. 괴물." 내가 괴물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요. 곰팡이 아가씨. 아니, 시체 아가씨라고 해야 하나. 유일하게 제대로 남아있는 부분인 미주의 얼굴이, 기괴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온다. "우욱 !" 더 이상은 볼 수가 없는지, 월영 선배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긴 나라도 문희나 진희가 저 꼴이 된다면, 구역질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니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가하게 비명을 지를 권리가 없었다. 이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저 아래의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니까.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 일을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특히 지금 여의도에서 날아오르는 방송사 헬리콥터를 생각하면, 조치는 빠를수록 좋았다. 그럼 일단은. "야 ! 곰팡이 덩어리 ! 사람들 수면방해하지 말고, 다른 데서 싸우는 게 어때?" 그 대답은 이미 예상하고 있지만, 일단 지팡이는 제대로 잡고. 부디 기자들의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에, 대답을 해주길 바란다. 타락한 인간아. 그리고 일단 내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반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젠장. 미주가 한 말이라는 것은. "카악. 당연히 여기서 싸워야지. 네 년의 몸뚱이를 찢어서, 저 사람들에게 먹여줘야 하니까. 멋지지 않아? 저 아래의 인간들이, 네 년의 생피를 마시면서 기뻐 날뛰는 모습을 보는 게 말이야. 크흐흐." 이봐. 그런 취미는 당신이나 가지라고. 아무래도 미주를 구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긴 이미 그녀를 구할 생각도 사라진 상태였다. 저 지경이 된 인간을 구한다는 게 가능하겠나. 설령 내가 그녀를 살려준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은 이미 악(惡)으로 가득 찬 상태니까. 할 수 없지. 아직도 망연자실해서 뒤로 물러선 부장은 일단 제쳐두고. 나는 지팡이를 들어서. [[Invisibility, Remove]] 우선 저 문제아를 어디 다른 곳으로 이송하고 나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내 마법이 발동되면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 미주 주위를 감싸버렸다. 이건 적어도 레벨 9의 시공마법이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는 반응을....... [[magic amplification(마법 강화), spell cancellation(상대 주문 취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미주는 이미,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내 주문이 기괴한 비명과 함께 무너지고, 미주는 곧바로 반쯤 썩은 몸을 움직였다. 검붉은 액체로 적셔진 지팡이가, 나를 겨누고. "크흐흐. 어디 네 살점을 씹어먹어 볼까." 참 꿈도 크다. 하지만 나로서는 시간을 끌 이유는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1초안에 죽여드리겠어요." 기껏해야 마법 반지에 의존하는 마법사 주제에,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 나는 상대를 완전히 끝장내버리기로 결정하고,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아직 그러기에는 방해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잠깐." 역시. 이 사람이 남아 있었어. 월영 선배는 내 앞으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간절한 호소의 눈빛으로. "기다려줘요. 미주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해봤자 소용없을 걸요. 이미 저 지경이라면." 내가 손가락질을 할 필요도 없다. 미주의 상태로 보건대, 특히 조금 전에 내 Remove 마법을 막아낸 솜씨로 볼 때, 그녀는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버린 게 분명했다. 마법수련도 부족한 사람이 레벨 9짜리 마법을 쓴 것이다. 그것도 2개를 동시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문마법을 초월한 나는 알고 있었다. 절대로 아는 사람이 맞닥트리지 않기를 바랬던, 바로 그 상황이니까. "하지만...." 월영 선배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진희나 문희가 저 지경에 빠졌다면, 헛된 일을 되풀이할 게 분명했다. 물론 하나마나 헛수고라는 것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마음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래에서 우리를 보고 있지 않는가. 그 중에 몇 명은 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이걸 모두 처리하려면, 재빨리 일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시간이 없으니, 한 마디만 해 주세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양보였다. 그리고 이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도 않겠지. 월영 선배는 무거운 표정으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도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과연 내가 미주를 죽일 때 그녀가 침착함을 유지할 것인가. '무리일 거야.' 그리고, 그런 내 짐작은 금새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월영 선배가 선택한 한 마디는. "미주야. 집에 돌아가자." 아직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전혀 침착한 대응이 아닌, 감성적인 대응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월영 선배의 그 손을 미주가 잡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게 아니면 편안한 죽음을 주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미주가 택한 길은. "저 년을 죽이고 나서." 그리고 그녀는 월영 선배의 따스한 손을, 뿌리치고 말았던 것이다. 월영 선배가 마지막으로 친구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상대가 내뱉은 말은. "방해하지 마. 네가 어떻게 마법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방해하면 너도 죽여버릴 거야." 이 계집애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준 친구에게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미주는 월영 선배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지팡이를 나에게 겨누며 외쳤다. 다른 인간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널 죽이고, 자유를 찾겠어." 기가 차서. 비꼬는 말을 해주지 않을 수 없다. "생사람 잡을 자유?" 휘이이잉. 나와 미주는 서로를 노려보며, 하늘에 떠 있었다. 그러나 침묵은 이 경우에 금이 아니라 독이다. 방송사 헬리콥터가 우리를 볼 수 있는 거리로 접근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논쟁은 신속히, 행동은 재빨리. "생사람? 너 같은 악당을 물리치는 게 어째서 생사람을 잡는다는 거지?" 악당이라. 하긴 그들에게 있어 나는 악당이었다. 그것도 전대미문의 살인마. 그들의 동료들 중에서, 나에게 죽은 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지 세어볼 수도 없을 지경이므로.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주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난 적어도 자기 동료를 폭탄으로 만들어서 적에게 던지지는 않거든." 결계로 덮인 시내의 집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날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던가. 자신의 동료였던 시내에게 그런 대우를 할 줄이야. 월영 선배는 내 고개를 보고서야, 그게 시내에 대한 이야기임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이 마법에 의해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동요는 나에게 느껴져 왔다. 자신의 친구가 그런 지경의 인간일 줄은, 전혀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일단 그녀가 마법사가 된 이상.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거였어.' 뭐 미주의 경우는 마법사가 되지 않더라도, 원래 그런 인간이기는 했지만. 지금이 사사로운 자리였다면 월영 선배에게 할 말은. '친구 좀 가려서 사귀세요.' 이거였을 것이다. 저런 사람을 과연 말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계속해서 미주에게 험한 말을 계속해 나갔다. 아니, 그것은 사실 월영 선배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저런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게,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자유라. 무슨 자유를 뜻하는 걸까. 아. 알았다. 멀쩡한 사람을 홀려서, 사랑하는 사람을 어둠의 세계로 끌어들이도록 조종하는 자유? 아. 그게 아니라면, 역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고기를 씹어먹게 하고, 그걸 보고 즐기는 자유? 그것도 아니라면, 뭘 뜻하는 걸까? 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곰팡이 덩어리로 만들어서, 보고 즐기는 자유?" 남들이 들으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게 모두 미주가 저지른 일이었다. 첫 번째는 시내의 일을 말하는 것이고, 세 번째 일은 현재 미주의 상태로 보아 조만간 실현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래의 일이니 실현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만약 그들을 막지 못하면 조만간 그렇게 될 일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일은, 그녀가 아직 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도 나올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앞으로 미주가 저지를 일이었다. 이유는. "카악. 당연히 여기서 싸워야지. 네 년의 몸뚱이를 찢어서, 저 사람들에게 먹여줘야 하니까. 멋지지 않아? 저 아래의 인간들이, 네 년의 생피를 마시면서 기뻐 날뛰는 모습을 보는 게 말이야. 크흐흐." 조금 전에 이렇게 말한 사람이 바로 미주였으니까. 자기가 뿌린 씨앗이니 자기가 마무리하는 것이 원칙이겠지. 게다가 이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조금 전에 월영 선배도 옆에서 들은 내용이기도 하다. 미주가 부장님의 친구라는 점을 감안할 때, 과연 그녀가 나를 편들어줄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그녀가 긍정한다면, 정당한 비판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자. 이제 마무리. "자기 동료를 자폭으로 몰고 가는 게 얄미워서 날려버렸는데, 아직도 용케 살아있네요? 마법이 약해서 그런 걸까. 그게 아니면 그 반지에 혼을 팔아버렸기 때문일까. 어머나. 그러고 보니 큰일났네. 당신 묘 자리를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시시한 도발이지만, 저런 단세포생물에게는 충분히 통하는 도발이었고, 예상대로 미주는 부글부글거리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더럽기는 하지만, 겁은 안 나.' 그게 내 솔직한 심경이었다. 미주의 몸에 기어다니는 구더기들은 공포보다는 구역질을 동반하는 것이었고, 상대가 나보다 강한 것도 아니며, 하다 못해 나를 다치게 할 능력조차 없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겁을 먹는다는 건 무리였다. 난 아직 진짜 힘은 하나도 안 쓰고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여기서 상대가 흥분해서, 무작정 나에게 덤벼들면 딱 좋은데. 일이 빨리 끝나니까. "이 ***이 !" 사실 미주가 무슨 욕설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성을 잃었다는 게 중요하지, 욕의 내용까지 해석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미주가 나에게 지팡이를 겨누는 것을 보며, 나도 그녀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잘 가요. 메주.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한 가지 관문이 남았으니. "부탁 하나 하겠어요." 아이고.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지금 상황이 한가하게 부탁이나 하고 있을 때입니까. 한탄이 절로 나오지만, 지금 나에게 목이 잘리게 생긴 사람은 그녀의 친구이니 일단 봐준다. 그러나 지금은 말을 길게 끌 때가 아니다. 이유는. "방송사 사람들이 와요." 전국에 우리의 일이 방송되는 사태가 나기 전에, 어떻게든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내 말에 여의도 쪽을 바라본 선배가, 인상을 찌푸렸다. 헬리콥터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카메라의 사정권에 미주가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이 엉망이 될 것이다. 게다가 지상에서는, 이미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시간대를 감안하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무슨 일이야?" "저 괴물은 대체 뭐야?" "사진기 줘 봐." "당장 나와 봐. 지금 하늘에 이상한 여자가...." 도대체 잠은 언제나 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점에서 잠도 안 자고 깨어있다니. 그것도 밖에 나와서 한가로이 별 구경이나 하고 있다니. 당장 집에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지만, 내가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속옷인지 수영복인지 천 쪼가리인지 모를 의상 문제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럴 경우 이 일의 수습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하늘을 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출현하고, 서울시 한가운데에서 격전을 벌인다면,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리 그들의 신조가 월급도둑이고 국가재정파탄이 목표라지만,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일에 개입하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오해라면 차라리 좋겠는데. '진희 아버지를 보면, 그게 전혀 아냐.' 진희 아버지는 사실 국회의원 중에서는 나은 축이지만, 나은 게 그 모양이다. 그럼 낫지 못한 인간들의 수준은 과연? 갑자기 무수한 배설물이 쏟아지는 게 보이는 바람에,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니까. 그 전에 월영 선배의 어리광도 받아줘야 하겠지만. "무슨 부탁을?" 제발 터무니없는 게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선배의 부탁은 역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미주의 목숨만은 어떻게든....." 그게 가능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미주의 꼴로 보아 그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게 보이지 않나요. 나는 혀를 찼지만, 친구의 목숨을 걱정하는 선배의 마음도 이해는 되니 실속도 없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력해 보겠어요." 이건 정말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했다. 노력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월영 선배도 아는 내용이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주는 이미. '죽었으니까.' 저건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시체를 억지로 살려놓은 것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미 죽었을 사람의 혼을 억지로 잡아서 묶고, 부서진 몸을 마법의 반지에서 나온 균사로 보충해서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저 반지를 파괴한다면, 미주는 그대로 몸이 붕괴되어 죽게 될 것이다. 마법으로 억지로 살려놓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억지로 살려놓으려고 해도, 상대가 가만히 서 있을 리가 없잖아.' 혼이 육체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고, 몸을 고치고 생기를 다시 주입하는 건 주문마법으로 될 일이 아니다. 죽기 직전의 인간을 억지로 살려놓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이도의 능력인 것이다. 혼 자체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죽기 직전에 몸을 순간적으로 고치는 수밖에 없는데, 상대가 그런 틈을 줄지도 의문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의 발 밑에 있는 도시였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미주 하나를 살리기보다는, 저 아래에 있는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오라버니를 살리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월영 선배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뿐.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주는 게, 최대한의 자비일 거예요.' 나는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서. 우선 시작할 것은. [[Weather control(날씨조종)]] "뭐야?" 당연히 내가 자신을 공격할 줄 알고 방어마법을 외우던 미주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외친 마법은, 공격용이라기보다는 농촌 가뭄 해소나 홍수예방, 억지로 공격용이라고 치면 적군을 향해 댐을 터뜨려서 물바다를 만들어버리는 식의, 유혈사태로 연결짓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미주가 피에 굶주린 북한군 전차부대의 대장이었다면 지금의 마법은 치명타가 될 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하늘에 떠 있었다. 날씨가 안 좋다고 해서 추락할 위인도 아닌데, 왜 그걸 쓰냐는 의문이 그녀의 표정에 감돌았다. 그건 그녀만 그런 게 아니어서. "뭐 하는 짓이에요?" 월영 선배조차,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마법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발동시킨 것이었다. 우선 저 아래에서 꼼지락거리는 불면증 환자들부터. 지금이 대체 몇 시인데, 이 시간에 외출이야. 외출은. 지금이 한여름이라서, 열대야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쏴아아아. 더워서 나왔으면, 좀 식혀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겠지. 난데없이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걸 보고 시민들은 당황했다. 우산을 준비해온 인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게 정상이지. 하늘에 신기한 게 떠 있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나온 인간들이, 그런 걸 준비할 리가 있겠나. 그러나 준비부족의 결과는. "와악." "이게 뭐야." "아이고."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덤으로 그들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도, 물에 젖어 못쓰게 되었다. 물론 그 휴대전화에는 방수기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폭우는 상식을 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밀폐구조라도, 물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특히. 지직. 지직. 팍. 그럼 그렇지. 전풍전자의 제품이 뭐 그렇지. 다른 회사의 제품들도 모두 고장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그쪽 제품이 특히 빨리 고장나는 것 같았다. 풍남이가 보면 뭐라고 할지. 게다가 고장난 건 전화만이 아니었다. "악 ! 내 mp3 플레이어 !" "내 시계 !" "내 카메라 !" "내 회중전등 !" 자정을 넘은 시간에, 참 가져오는 것도 많다. 도대체 이 시간에 무슨 전자제품을 그렇게 많이 휴대하고 외출하실까나. 물론 폭우에 희생된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방송사의 헬리콥터조차도, 난데없는 물벼락에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라도 다시 이곳에 접근해서, 지금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려서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물론 본의는 절대 아니지만. 콰르릉. 비명은 땅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폭우에 따르는 필연적인 대가. 벼락이 하늘을 진동시키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벼락은 자신의 힘을 보여줄 대상을 찾았고, 당연히 공중에 가장 높이 뜬 물체인, 방송사 헬리콥터가 그 대상이 되었다. 사방을 달리는 번개를 본 헬리콥터는, 어떤 상황인지를 눈치채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는 입장인 미주로서는. 콰앙. "크윽."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나나 월영선배와는 달리, 투명마법조차 걸지 않고 노출되어 있었던 미주는 벼락을 자력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팡이로 막았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곰팡이 구이가 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물론 구워졌으면 내 일이 간단히 끝나는 셈이지만, 너무 낙관적인 전망을 하면 안 되겠지? 우선 첫 번째 주문으로는. [[Power order kill]] 파워 오더 킬. 이건 언령마법 레벨 9인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을 능가하는, 절대명령 주문이었다. 이것이라면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상대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레벨 10의 방어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면, 미주는 이것으로 죽는 것이다. 예외란 없다. 대응할 수 없다면 죽는 것이다. 난데없는 살인 마법에 깜짝 놀란 부장이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그러려면 레벨 10이라는, 마법사로서는 거의 금기로 여겨지는 마법을 써야 했다.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아가씨. [[spell inhibiti....]] 미주가 황급히 마법을 외워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spell inhibition(주문금지)마법이 발동되기 전에 내 마법이 먼저 발생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절대명령죽음'에 대항하는 마법을 외우지 않았다. 곧바로 나를 향해 반격주문을 날렸던 것이다. 주문이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파앙. 미주의 몸은 잠시 빛나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긴 그건 당연했다. 그녀는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아니 생명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니. "어떻게 이런?" 월영 선배. 아직도 미주에게 희망을 품고 있나요? 이걸 보고 현실을 직시해요. 더 이상 저 괴물은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마법도 아니고, Power order kill(절대명령죽음)을 주문마법도 쓰지 않고 막아내는 주문마법사가 어디 있겠어요? '죽인다는 것은.' 상대가 죽을 수 있는 생명체여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Power order kill(절대명령죽음)이 강력한 마법이라고 해도, 미주를 상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마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어가 강하다고 해도,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독수리를 잡아먹으려면, 독수리가 바다에 내려와야 한다. 상어는 하늘을 날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와 똑같은 것이었다. 즉. '쇳덩이를 죽일 수 있나.' 쇳덩어리는 죽지 않는다. 쇠는 생물체가 아니므로, 예시당초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쇳덩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죽이는 게 아닌, 녹이거나 부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리고 미주의 경우도 바로 그런 식이었다. 비록 쇳덩어리와 성질이 비슷한 것은 미주의 머리통밖에 없지만. 따라서 나는 마법의 성공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방어주문을 외웠고, 그 덕에 미주의 공격마법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Invincible force(무적 상태)]] [[....on]] 파앙. 미주의 주문금지 마법, 즉 내가 주문마법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마법이 발동되었지만, 그것은 쓸모가 없었다. 방어마법이 워낙 위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무적 상태.....라고?" 엄청난 허풍과 과장 광고일지도 모르지만, 레벨 10까지의 어떤 주문이라도 막아내는, 이름 그대로 '무적'에 가까운 상태변화마법이 발동되자, 미주의 공세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레벨 10까지의 마법 중에서, 이 마법을 격파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언령마법을 사용하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걸 쓰기 전에 내가 먼저 대응마법을 외울 것은 거의 확실했다. 내 빈틈을 노릴 정도로 빨리 외울 수 있는 마법 중에, '무적 상태'를 파괴할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슈웃. 그녀가 당황하는 바로 이 틈이, 나에게는 기회였다. 내 몸이 아침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면서, 그대로 미주에게 날아간다. 그녀가 무슨 마법을 쓸지 망설이는 지금이, 바로 미주를 죽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비록 헛수고가 될 것 같지만, 어쨌든 대응주문을 외우긴 외웠으니까. 그런데 이건....... [[Cursed slayer]] 뭐야. 고작 레벨 7짜리 원자마법으로 나를 공격하겠다는 거야? 그런 한탄을 할 정도로, 그 마법은 약한 것이었다. 물론 핵폭발 마법은 도시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날릴 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나를 죽이는 데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주가 던진 핵폭발마법, Cursed slayer는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예상은 들어맞았으니. 휘잉. 핵폭발 마법은 나를 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고, 그 빛은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독수리가 토끼를 덮치는 기세이긴 했지만. "헛수고하지 마." 핵폭발의 빛은 다시금 나를 꿰뚫었으나, 그 빛은 무적상태의 마법을 걸고 있는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가 없었다. 목표를 놓친 핵폭발 마법은 날아오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돌진해갔다. 적인 나는 공중에 떠 있는데도 말이다. '레벨 7로 나에게 통하겠냐?' 다음 마법을 쓰려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핵폭발 마법이 향하는 곳은, 바로 서울시청이었기 때문이다 ! 물론 저 시청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시대의 잔재이니 언젠가는 헐어버려야 할 것이기야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안 되었다. 지금 날아가는 것은, 핵폭발 마법이었으므로. 나는 즉시 대응주문을 외웠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Spell control(주문조종)]] 만약 저 주문이 여기서 위력을 발휘한다면, 서울시 한가운데에서 핵이 폭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런 시시한 주문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핵이 터지는 순간, 보통 사람들은 모조리 방사선과 열, 그리고 폭풍에 휘말려 죽을 것이며, 방사능 낙진이 도시 전체를 뒤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생기게 놔둘 수는 없으니. 파앙. 핵폭발 마법이 아래로 떨어지다가, 내 주문조종 마법에 걸리자 다시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걸 우주 바깥으로 날려버리면 간단하겠지. 물론 마법 자체를 없애버리면 편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걸 내가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상대가 내 빈틈을 노려서 지금 공격해온다면. [[magic amplification(마법 증폭)]] 콰앙. "뭐야? 다르잖아?" 나는 분명히 상대가 핵폭발마법에 정신이 쏠린 내 등을 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핵폭발 마법을 강화시켜서 승부를 걸다니. 역시 메주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주문조종의 마법과, 상대의 마법증폭이 충돌했다. 하늘로 올라가던 핵폭발 마법은 내려가는 힘을 대폭 증원받아 공중에서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내 힘을 누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핵폭발 마법이 상승하는 속도를 좀 늦춘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두 마법사의 마법에 붙잡힌 빛의 구슬은, 하늘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핵의 힘을 담은 구슬이 점차 불안정해지는 게 보였지만, 그렇다고 마법을 중지할 수도 없었다. 마법을 멈추면, 저것은 땅에 부딪쳐 폭발할 것이니까. 하지만 이대로 마법의 힘을 겨루다가는, 저것은 두 마법사의 힘에 앞뒤가 눌려 찌그러질 것이며, 결국 폭발해버릴 것이다. 진퇴양난인가. "칫." 혀를 차는 내게, 이제 어떻게 할거냐는, 미주의 비웃음이 보였다. 아무리 내가 강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핵폭발 마법을 저지할 수 있겠냐는 뜻의 웃음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의 파멸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이라면. "아가씨. 이래도 그녀를 구하겠나요?" 미주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목격한 월영 선배였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를 물러서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마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희망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자신의 '친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이라도 해 봐요. 이대로라면...."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만약 내가 여기서 미주의 마법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에는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것이라는 것을.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폭우로 인해 이쪽을 볼 수가 없는 이상, 당장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월영 선배뿐이었으므로. "미주야. 멈춰 !" 하지만 그 말이 미주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이미 귀 자체가 뭉그러진 탓도 있겠지만, 미주는 단지 환희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핵폭발 마법으로 내 빈틈을 만들고, 그 틈에 일격을 가하겠다는 속셈일까.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왼손에는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아가씨." 월영 선배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그걸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내가 한 말은 바로. "저 여자의 목숨을 거두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벼락이 미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내가 주문을 외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공격마법이 날아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미주에게, 그것은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예상했어야 했다. 내가 왜 날씨조종마법으로 대결을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이럴 때를 위해서였다. 물론 날씨를 험하게 한다고 미주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주문을 외우지 않고도 벼락을 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벼락은. 쾅. 쾅. 쾅. 미주는 비틀거렸다. 난데없는 벼락이 미주의 방어막과 부딪쳤고, 그녀를 일시적으로 뒤흔든 것이다. 그러자 핵폭발 마법을 향해 힘을 보내던 그녀의 마법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고, 힘이 약해진 핵폭발 마법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저 멀리, 우주로 내팽개쳐진 것이다. 내 주문조종마법이 이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상황을 마무리지을 생각은 없었다. 끝마무리는. [[Paradox - covenant break]] 마법사와 마법근원체가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해야 나올 수 있다는, 레벨 11의 최강 마법이 미주를 덮쳤다. 비록 마법근원체와 합심하여 레벨 10의 경지를 성취한 미주였지만, 지금의 마법은 그 정도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단지 하나의 숫자를 덧붙이는데 불과하지만, 10과 11의 차이는 숫자 하나가 바뀐 정도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시간의 무게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잠시 미주의 몸이 흔들리더니. "?" 나를 향해 들어올려지던 미주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겉으로는 마법진도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마법.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생명줄을 끊어놓았고, 그것은 미주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야?" 미주는 급히 대응주문을 외우려고 했지만, 모든 것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이미 그녀의 힘은 없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마법을 잃은 자가 허공에 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물리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미주의 눈이 공포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카아아아아아아아악 !" 비명과 함께, 그녀는 마법의 날개를 잃고 추락했다. 그 비명소리는 너무나 커서, 폭우를 피하던 사람들조차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그녀의 몸이 한강 다리위로 떨어지면서 철골 구조물에 부딪쳤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골이 부러졌다. 부서진 그녀의 지팡이가 은가루처럼 흩어졌고, 미주의 몸뚱이는 다리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물에 빠졌던 사람을 찾던 119 구조대원들의 바로 앞에. 쾅. 그녀의 몸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친 순간, 그 몸은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라갔다. 아스팔트가 패이면서 다리가 흔들렸고, 구조대원들이 그 진동에 비틀거렸다. 만약 통행이 뜸한 시간이 아니었다면,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한 차례 땅과 부딪칠 때마다 그녀는 피를 토했고, 몸의 이곳저곳에서 우두둑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몇 번을 그렇게 했을까. 마침내 그녀는 땅에 몸을 뉘였지만, 그것은 안식이 아니라 고통스런 종말의 시작이었다. 비명과 함께 버둥거리는 미주. [[카악 ! 네 년, 무슨 짓을.....]] 분노로 가득 찼던 반지의 목소리가, 점차 불분명한 단어의 조합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은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악마의 마지막 비명.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귀를 막았지만, 그 비명은 끊어지지 않고 그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마법사에게 이 마법을 외웠다면, 이런 결과는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외운 마법은. '고작해야.' 비록 그것이 레벨 11이라는 엄청난 난이도의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미주와 마법 근원체의 연결을 강제로 끊은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마법을 못쓰게 되기는 해도 마법 근원체와의 계약을 처음부터 다시 하면 치료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미주는 이미 마법 근원체와 융합한 상태였고, 부서진 몸을 마법 근원체의 본체를 이용해 수복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둘을 강제로 떼어놓았으니, 일이 어떻게 전개되겠는가. 물론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그들을 나눌 수가 없겠지만, 그런 힘을 지닌 마법은. "아예 없지는 않았던 거야." 원래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는 마법. 주문마법사에게 있어 악몽. 역설과 모순을 뜻하는 마법. 그러기에 이 마법은 Paradox(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레벨 11이라는, 주문마법사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위치해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마법이라는 의미를 담은 주문. 그것이 미주를 덮쳤고, 아무리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주문마법사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머물 수밖에 없었던 미주에게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아악 !" 살아날 길을 찾아 몸부림치던 미주의 손에서, 살이 서서히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심장, 아니 이미 심장이 아니라 마법 근원체라고 불러야 할 생명유지기관에서 솟구쳐 올라오던 피가, 혈관과 근육이 사라지고 피부가 벗겨진 손가락에 도달하자 허공으로 치솟았다. 마치 분수처럼. 그리고 그 비는 허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중력의 손아귀에 붙잡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빗방울로서. 피의 비가 다리를 적시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적셨다. 비록 불빛조차 가릴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 피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아아아악 !" 그 피가 사람들의 옷을 적시고, 그 마음을 두려움으로 채색하자, 비명이 파도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오직 움직인 것은 119 구조대원들 뿐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마주보며 사람들을 구해왔기에, 그런 극한적인 심리상태에서도 반응했는지도 모른다. "이봐." 구경꾼들이 비명만을 지르는 와중에도, 그들은 미주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구조대원의 손이 미주의 팔을 잡는 순간, 그 팔이. 두둑. 부러진 것이다. 이미 그녀의 뼈는 부서져가고 있었고, 그것은 구원의 손길을 붙잡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어느새 비도 그쳐 있었지만, 핏빛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미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죽음의 피가 말이다. 구조대원의 안타까움도 덧없이, 미주의 온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근육이 서로를 붙잡지 못하고, 죽처럼 내려앉은 것이다. 푸욱. 근육이 마치 젤리 덩어리처럼, 아스팔트 위에 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근육들은 물에 닿자,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근육이 물에 녹으면서, 미주의 얼굴이 두개골을 드러냈다. 그녀의 아래턱이 움직이면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절망의 배설물이었다. "사, 살려줘. 다시는 그런 짓........" 그것이 미주의 유언이 되었다. 미주의 혀가, 미주의 입술이 자신의 몸에서 솟아난 피의 분수에 묻히고, 그 조각들이 흩어졌다. 찢겨진 미주의 얼굴 피부와 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피로 이루어진 거품으로. 부글거리는 미주의 시체가, 급속도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엑." 시체가 썩는 냄새, 거기에 아직도 살아남은 마법 근원체의 마지막 펄떡임, 그와 함께 사방으로 뿌려지는 피, 조직이 붕괴되면서 생긴 역겨운 살덩이, 그리고 들끓는 구더기들, 그 모든 것이 피의 웅덩이에 가라앉고 있었다. 미주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작은 연못에 말이다. 그 광경을 보며 구조대원 하나가 절망에 찬 어조로 외쳤다. "안 됩니다. 본부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주를 구할 수 없다는, 자신들의 처지를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조해야 할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 하다 못해,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조차도 할 수 없다니. 그러나 그런 그들의 생각도 곧 끊어졌다. 팟. 다리 전체는 빛으로 덮였다. 그리고 모두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단 한 사람의 의식만이, 아직도 깨어서 외치고 있었다. 죽음과 형벌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카아아. 아아아." 이미 반쯤 녹아버린 미주의 성대는, 아직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외침을 토하고 있었다. 혀가 녹고 부서져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외침도 곧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목이 썩으면서, 조직 전체가 죽어가기 시작했으므로. 성대가 죽처럼 흐물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피의 개울에 삼켜졌다. 뺨이, 귀가 그 뒤를 따라 붉은 죽음에 삼켜졌고, 공포와 고통에 젖은 미주의 눈동자가 나와 월영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올려다보려고 했다. 그때. 왈칵. 눈동자가 두개골 안으로 가라앉았고, 그 자리에는 핏물만이 남았다. 핏속에 잠긴 안구가 턱뼈 사이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고, 피의 기둥이 치솟았다. 그것이 미주의 눈알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공백의 지점에는, 두 개의 구멍만이 남았다. 그 구멍이 점차 확장되면서, 붉은 빛 두개골이 드러났다. 피가 아래로 흘러내리자, 머리뼈가 나타난 것이다. 뭔가를 호소하려는 듯한 두개골이, 하늘로 치솟는가 했더니. 풍덩. 목뼈가 부러지면서, 두개골은 물구덩이로, 피의 바다로 빠져 버렸다. 그리고 미주의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등뼈가, 갈비뼈가, 쇠골이, 팔뼈가, 모든 것이 죽음의 바다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다는 부글거리면서, 미주의 잔해를 삼키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미주의 마지막 비명, 이미 성대가 아니라 영혼이 지르는 비명, 그것이 사방을 감싸다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비명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다리 전체는 내가 친 결계로 덮여 있었기에. 그리고 그녀가 그 결계의 제약에서 벗어났을 때는, 더 강력한, 생명체라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또 다른 결계가 그녀를 감쌌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결계가. 이로서 모든 것은 끝났다. 강 미주, 사망. "흑. 으흐흑." 모든 이의 기억이 사라지고, 다시 서울시는 평상시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본 목격자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그녀는. "미, 미주야....." 친구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그녀가, 통곡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미주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을 탓할 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녀에게도 마법의 깃털을 박아 두었을 텐데.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지만 월영 선배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텐데. 널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주야........" 그녀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미 마법 근원체와 융합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나라도 무리이다. 물론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미 그 지경까지 간 사람을 강제로 마법 근원체와 분리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혼에 새겨진 욕구까지 지울 수는 없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놔두고, 기억만을 지운다고 해도 언젠가 그는 다시 힘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일단 힘의 단맛을 본 사람은, 그 유혹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기억을 없앤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의 몸과 마음이 이미, 마법 근원체와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의 소거는 일시적인 지연일 뿐, 다른 마법 근원체와 만나는 순간 둘은 다시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 '굳이 억지로 하자면.' 그런 운명을 막으려면 그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몸과 마음을 처음부터 다시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을 인간이 아닌, 인형이나 로봇으로 취급하는 짓이었다. 내 맘대로 상대의 모든 것을 지운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대로 고쳐버린다? '그건 안 돼.' 그러니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 이상, 언젠가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법의 깃털은 단지 임시적인 대처방안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러나.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나는 시내의 집을 향해 날아갔다. 우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지는 않고, 그러니 내 일을 끝낸 후에 말을 걸든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결계를 쳐두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그런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안 돼요." 역시 월영 선배였다. 아직 눈물자국도 마르지 않았는데 말이다. "비켜주세요."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슬프더라도, 나를 막겠다는 의사표시인가요. "안 돼요. 저 애에게 그런 짓을 하게 둘 수는 없어요." 물론 나는 시내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란 걸 월영 선배도 아는 이상, 그런 짓이라는 건 '머리에 깃털을 박는 것'을 의미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당신의 소원대로 하다가는, 저 시내라는 아가씨도 미주처럼 죽게 되고 말아요. 내가 만약 마법의 깃털을 미주에게 박아두었다면, 그리고 밤낮으로 감시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건........" "비키세요. 시내도 당신의 친구처럼 죽게 만들 셈인가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나에게 도전하지는 못했다. 내 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의 죽음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그녀를 완전히 설득해둬야 한다.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나에게는 적이 있어요. 당신은 그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에 맞서서 싸워야 하고, 나 혼자 그 모든 것을 하려면 이런 수단도 써야 해요. 당신 친구처럼 구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지기 전에." 조금 전의 상황이 무엇이었는지는, 그녀가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태도만 봐도 확실했다. 그녀가 나에게 덤비지 않는 것은, 그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친구를 죽인 나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원한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고귀한 목적을 지녔기에, 수단은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그랬다. 그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이 잘못되었으니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 고결한 마음은 평시라면 존경받아 마땅했지만.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요?" 있으면 말 좀 해 봐요. 대안도 없이 불평만 하지말고. 그러자 그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내에게 꽂아둔 깃털만은 빼주길 바래요. 그녀는 내가 살펴볼 테니까." "하루 24시간 내내 말인가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의외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니까.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감시용 깃털도 없이 특정인을 24시간 내내 감시하겠다고?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24시간이라는 것은, 잠을 안 자고 있어야 채울 수 있는 시간이니 말이다. 하지만 쇠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어떻게? 그러나 그녀가 내놓은 것은,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설마, 저건? "견습 마법사용 지팡이 !" 나는 화급히 그녀를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왠지 자신이 있다는 눈치였다. 게다가. "굳이 감시할 필요도 없어요. 나로서는 유능한 마법사 조수가 필요하고, 당신은 저 애가 다시 사악한 쪽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라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잠깐. 잠깐. "그 마법 근원체의 심성은?" 그것은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만약 사악한 근원체라면, 시내는 내가 막으려고 했던 바로 그 길, 미주와 같은 최후를 맞을 길로 가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걱정 마세요. 미주를 그렇게 만든 자들과는, 완전히 반대니까." 그녀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 "이것으로, 내가 그들을 잡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네요." 그 행동으로, 나는 그녀가 어디서 힘을 받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당신은 경찰인가요?" 그녀는 웃을 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단 지금은 말이다. 나는 물러섰고. "알겠어요. 일단 믿어보지요." 나는 시내의 집의 결계를 풀었고, 그녀는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럼 시내는 이제 견습 마법사가 되는 건가. 확실히 적의 마법 근원체와 융합하지 않게 하려면, 다른 마법 근원체와 함께 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그 근원체가 사악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상대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점도 있었고. 그리고 이 경우에는 한 가지가 더. "오빠한테 이상한 마법 걸기만 해봐라." 만약 시내가 견습 마법사가 되고 나서, 그 힘을 오빠를 유혹하는 것과 같은, 불건전한 쪽으로 사용한다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하늘로 날아갔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세계를 바라보며.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1화 여동생도 약에 쓰려면 없다 (1) "자. 매직마스터로 변신하는 거야. 세라." 갈색 머리의 소녀의 어깨에 있는 곰 인형이, 소녀의 귀에 속삭였다. 시내 한가운데에 나타난 괴물을 보며, 소녀는 결심한다. "알았어. 포로롱. 자 !" 소녀가 자신의 목걸이를 잡고, 보석 아래를 건드린다. 보석이 빛을 발하면서, 아래쪽으로 작은 막대기가 튀어나왔다. 소녀는 그것을 잡고, 힘차게 뽑아낸다. 포로로로롱. 막대기는 무지개를 끌며 목걸이 밖으로 빠져나왔고, 그것은 마법 소녀, 세라의 오른손 밖으로 뻗어나가 마법 지팡이로 변했다. 세라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빛의 가루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소녀의 온몸을 감싸면서, 옷을 빛의 덩어리로 바꾸었다. 그 덩어리들은 곧 빛의 천으로 변하면서, 소녀의 온몸을 휘감듯 떠돌았다. 알몸의 소녀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포롱 포롱 포로롱. 포롱 포로롱." 소녀의 가슴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빛이 상반신을 감싸며 새하얀 옷으로 변했다. 소녀의 엉덩이가 한 번 흔들리면서, 빛이 하반신을 감싸더니 치마를 만들어냈다. 소녀의 맨발은 허공을 딛더니 날개 달린 마술구두가 신겨지고, 소녀의 양손을 감싼 빛은 하얀 장갑을 만들어내었다. 무지개 빛이 소녀의 옷 전체에 일곱 빛깔의 무늬를 새겨 넣는다. 그녀의 머리에 분홍빛 모자가 씌워지면서, 소녀는 손가락을 한 번 퉁겼다. 그리고 외친다. "정의의 이름으로 !" 눈을 감은 소녀의 몸이 서서히 땅에 내리며, 그녀는 왼쪽 가슴을 지팡이로 가렸다. 그녀의 큰 눈이 떠지면서, 소녀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외친다. "사랑과 우정의 천사, 매지컬 세라 !" "브라보 !"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러 가는 악마를 제지하기 위해, 세라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허리를 쭉 펴자, 등에서 하얀 날개가 돋아 나왔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날개다. 빛을 발하는 깃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그녀는 날개를 펄럭였다. 가슴이 그에 맞춰 출렁인다. '자. 악을 무찌르러 가자 !" "오우." 곰 인형과 함께, 그녀는 도시 위로 날아올랐다. 물론 서비스로, 속옷을 가볍게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 언제 봐도 저건. "멋져. 세라. 멋지다고." 저 귀여운 얼굴, 나이에 맞게 적당한 크기의 가슴, 그리고 변신 때마다 보여주는 폼 나는 의상, 그리고 속옷과 엉덩이의 적절한 노출까지. 아. 이렇게 멋질 수가. 그러면서도 너무 지나칠 정도의 노출은 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매력이었다. 세라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크게 환호하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한밤중이고, 마구 떠들다가는 여러 가지로 일이 곤란해지니까. 그러니 이렇게 꼭꼭 숨어서 봐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친척집에 가신 이상, 생각 같아서는 마음껏 떠들고 싶지만. '나는야 이웃들을 사랑하는, 선량한 사람.' 그래서 나는 조용히 애니메이션을 감상한다. 이어폰은 물론이고, 방을 철저하게 폐쇄해서,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말이다. 이 정도면 나도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주위에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내가 방에서 뭘 하든 간에 알게 뭐냐.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은 법이니. 퍽. "무슨 음란물 시청이야." 나는 나동그라졌다. "왜 때려 ! 그리고 왜 내 방에 막 들어오는 거야 !" 나는 엄중하게 항의했다. 지금이 대체 몇 시인지 알기나 하는 거냐. 밤 11시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 못된 지지배야. 게다가. "발소리도 안 내고 나타나다니, 온다는 기척이라도 드러내라. 이 유령 같은......." 퍽. "컴퓨터 영상이나 좀 끄라고. 보기 민망하니까." 뭐가 민망하다는 거냐 ! 비록 저 애니메이션의 세라가 좀 노출이 심하기는 하지만, 가슴도 모두 보여지는 건 아니고, 속옷도 지극히 정상적이며 엉덩이가 다 드러나지도 않는다. 배꼽도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어깨도 보여주지 않는다. 소매와 치마가 짧기는 하지만. "저건 엄연히 일본에선 18세 이하도 시청 가능한 애니메이션이라고 !" 퍽. "여긴 대한민국이야." 아구구. 그녀는 재빨리 컴퓨터 자판을 조작하더니, 동영상을 꺼 버렸다. 그런데 왜 안 지우는 거냐? 컴퓨터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의문을 풀어주는 여동생. "이걸 안 지우는 건, 오빠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아니. 이 녀석이 오라버니를 높이 평가해주는 때가 다 있다니? 그런데 그 뒷말은. "뭐 실제의 마법사가 엉덩이를 저렇게 흔들며 변신할 리도 없지만." "가능할 것 같은데." 이상한 녀석 다 봤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는 여동생. "오빠. 마법소녀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굳이 저렇게 요란하게 흔들어가면서 변신할 리는 없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심령현상 연구부 부장님이 그런다는 건 상상이 안 가니까." "........." 하긴.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서 변신한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부장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거, 이 녀석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러나 여동생의 눈치는 기막히게 빨랐으니, 내가 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오빠. 그건 대업고등학교 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아는 상식이잖아. 상식. 축구에 열중하는 건 좋지만, 야한 애니메이션만 보고 있지 마. 상식도 좀 익히라고." "익히고 있어." 역시 그런 거냐. 이 녀석은 역시 부장이 진짜 마법사라는 건 모르고, 단지 소문을 듣고 그렇다고 단정한 모양이다. 갑자기 여동생이 모르는 비밀을 나만 아는 것 같아서, 묘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행복해. 살다보니 내가 여동생을 이기는 때도 있구나. 그런데 여동생의 그 말을 듣고 보니, 부장의 옷이 벗겨지는 모습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마법 지팡이로 변신하는 부장이라. 아마 그것은...... "오빠. 왜 그런 표정? 왠지 굉장히 음흉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네. 사회전복의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 나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음. 그럼 그 흑마술부 부장하고 사귀기라도 해?" "아냐 !" 내가 미쳤니. 그런 정신나간 짓을 하게. 그런데 왜 내가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자 여동생의 대답이라는 것은. "그야 오빠가 최근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양다리 아냐 !" 그러니까 이 녀석의 말은, 현재 흑마술부와 항공우주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시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녀가 2개의 부에 겹치기 가입을 한 후, 그녀는 나에게 접근했다. 적어도 진희가 있을 때는, 그전보다 훨씬 내 옆에 가까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달아나고 있지만, 이상하게 그럴 경우. 푹. 시내의 품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꼴이 되고 만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그때마다 진희는 화를 내며 가버리고, 나는 파렴치한이 되어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남들은 행복하겠다고 하지만, 이게 뭐가 행복한 거냐 ! 게다가 이럴 때 날 도와줘야 할 인간들은, 모두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다. 특히 이 녀석 ! 도대체 왜 잠자코 있는 거야? 따지자. "너, 전에 시내에게 그렇게 말했잖아? 나한테 접근하면 가만 안 둔다고." 그러나 여동생은 언제나 나보다 강했으니. "흑마술을 써서 수작을 부리면, 가만 놔두지 않는다고 한 거지. 그리고 지금은 시내 자신의 매력으로 오빠에게 접근하고 있으니, 당연히 말릴 수 없고. 기본적으로 연애에는 불간섭주의거든." 와그작. 결국 나는 이번에도, 본전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잠깐. "그런데 여긴 왜 왔냐? 일 없으면 그냥 가라." 그리고 나도 다시 세라의 활약상을 좀 봐야겠다고. 특히 마법 쓸 때의 세라의 모습은, 정말 남자의 로망 그 자체..... 퍽. "벌거벗으면서 마법 쓰는 마법사를 보는 게, 무슨 로망이야?" "그래도 가릴 건 다 가린다고 !" 세라가 마법을 쓸 때 비록 옷이 없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팡이와 배경을 이용해서 가릴 곳은 다 가린다고. 게다가 그건 세라가 노출증이 심각해서가 아니라, 마력을 전신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옷이 있으면 방해가 되어서 그런다고. 물론 그 과정에서 가슴이 좀 흔들리기야 하지만, 세라의 몸에서 마력이 엄청나게 발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솔직히 저 정도의 노출이야 요즘 작품들에서는 필수요소인..... 퍽. "오빠가 그런 것만 골라서 보니까 그렇지. 게다가 저렇게 남자들 취향에 딱 맞는, 이상적인 여자가 실제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성격만 빼놓고 남자들 취향에 딱 맞는 여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하고 바라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여동생은 가슴도 크고, 허리도 가늘고, 엉덩이도 큰..... 퍽. "매를 벌어요. 벌어." 야 ! 네 몸매가 좋은 것도 내 탓이냐? 그리고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네가 너무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 ! 솔직히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처참할 정도의 옷차림이어서, 오빠의 권한으로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여동생이 다른 옷을 입기 전에 내가 다른 옷을 입을, 아니 옷을 빼앗기고 얻어맞을 확률이 99%가 넘기는 하지만, 올바른 일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네 옷차림이 더 민망해." 그건 사실이었다. 브래지어도 안 하고 나타나다니. 그 덕에 가슴의 계곡이 다 보이잖아. 아무리 지금이 늦은 시간이기야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노출이 심한 거냐? 게다가 옷은 안이 다 비치는 얇은 천을 써서 만든....... "오빠는 이런 옷을 좋아하잖아?"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지만, 그녀의 그 말은 사실이니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녀석이 나에게 보여주려고 이런 옷을 굳이 골랐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건 외출복이라고. 절대 잠옷이 아냐. 그렇다면? "그런 걸 어디에 입고 나가려고?" 나의 당연한 질문은 그녀에게 응답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그것은. "풍남이한테 초대를 받았거든. 그래서." 뭐라고?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 나는 즉시. "입지 마 !" 다른 사람도 아니고, 풍남이를 만나러 가면서 그런 옷을 어떻게 ! 너 그러다가 잘못하면, 재벌 2세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하는 수가 있다? 물론 여동생이니까 그런 경우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상대는 재벌이다. 동네 불량배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굳이 싸움 걸어서 이득 될 거 없다. 어떻게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럼 옷 좀 봐줘. 내일 뭘 입고 갈지 결정해야 하니까." "귀찮아." 미쳤냐. 세라의 활약도 봐야 하고, 저기 놓여진 영화 DVD들도 봐야 하고, 내일은 모처럼의 휴일이니, 볼 거 다 보고 자야겠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을 단 한 번에 꺾어버리는 여동생. "그럼 내일 이거 입고 간다." "안 돼 !"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그런 수영복 수준의 옷은 절대 안 돼 !" "그럼 봐주는 거다?" 결국 나는, 여동생의 단정한 옷매무새를 위해서라도, 그녀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왠지 속아넘어간 느낌인데. "자. 이건 어때?" "안 돼." "그럼 이건?" "안 돼." "설마, 이것도?" "절대 안 돼 !" 나는 여동생 옷 갈아 입히기를 하면서,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직접 갈아 입힌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다가는 저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질 것이니까. 그저 여동생은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는 그녀가 방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가 평가를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노출이 심한 옷만 고르고 있는 거야? "야. 천을 좀 많이 쓴 옷을 입으면 안 되는 거냐?" "더우니까 안 돼." 갑자기 내 말문이 막힌다. 하긴 이미 6월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말야. 아직은 여름이 아니라고.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나에게,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는 여동생. "남자들 취향이 이 모양이니까 그렇지." "안 돼 !" 굶주린 늑대 앞에 그런 옷차림으로 나갈 셈이냐.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려야 한다는, 오빠로서의 사명감이 솟아오르려는 순간, 그 기분을 팍 식히는 여동생. "그러니까 똑같은 대답만 하지말고, 창의적인 대답을 좀 하란 말야. 우리 반 애들도 그보다는 독창성이 높다고." '네'와 '아니오'밖에 말하지 못하는, 그 녀석들과 비교하다니. 나는 소리를 팍 질렀다. "똑같은 대답을 할 상황만 만드니까 그렇지 !" 사실 여동생이 고르는 모든 옷이 다 정숙함과는 거리가 먼 옷들이니,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여동생은 난처한 기색을 띄더니. "오빠. 그럼 어떤 옷을 원하는 거야? 의견을 말해봐. 안 된다는 소리나 하지말고." "그것은 !" 나는 열심히 외치기 시작했다. 여동생의 정조와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 이게 무슨 구식 개념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는 인간이 자기 아내나 며느리에게는 꼭 그걸 요구하더라고. 자기 자신이 아무리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니더라도, 부인은 무조건 자기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뭐 나도 진희가 가급적이면 정숙해지기를 바라지만, 내 경우는 일반적인 파렴치한 남자들과는 다르다. 최소한 나 자신도 진희 하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아니,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은. '아함. 졸려. 다 끝나면 깨워 줘." 그리고 눈을 감고, 벽에 기댄다. 곧바로 알파벳의 마지막 문자를 하늘로 뿜어내는 여동생. 이게 무슨 짓이냐. "야 !" 이 망할 여동생 같으니. 조언을 해달라고 해서 해주니까, 이게 무슨 불성실한 모습이냐. 못된 녀석 같으니. 하지만 여동생은 집게손가락을 들더니. "요약하면 하나잖아. 전부 다 가리라는 거." "아네." "그런데 왜 그렇게 길게 말해?" "네가 안 가리니까 그렇지.' 그러자 여동생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자기 자신부터 그 말을 실천하는 게 어때?" "........" 그러고 보니, 난 지금 속옷 차림이었잖아? 물론 바지야 입고 있지만, 상반신은 완전히 속옷뿐이다. 여동생이 지적한 건 그것이겠지만. "여긴 집이잖아 !" "나한테는 아까 그러지 않았어? 민망하다. 어쩌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다른 거야." 도장 쾅. 남자와 달리, 여자는 가릴 게 많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거다. 나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면, 나중에 시집가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상호모순이니 뭐니 해도 소용없다. 사회의 전반적인 추세가 그러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여동생이 안색을 바꾼다. "확실히 염색체 면에서 다르긴 하지. 하지만 유전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건, 인종차별주의를 연상시켜서 좋아하지 않아." 순간적으로 철벽을 보았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여동생의 또 다른 얼굴을 본 느낌이었다. 비록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 한 사이지만, 그녀에게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얼굴이 표면에 드러날 때, 불량배 100여명이 박살나고 축구부의 불량한 선배들이 나가떨어졌었다. 하지만 집에서까지 그 얼굴을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 무섭단 말야 ! '공포는 학교에서 경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평소에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모습이, 저것보다는 백 배 나았다. 저런 표정, 아니 분위기보다는 말이다. 지금의 여동생은 마치, 지옥에서 기어올라오던 악마도 겁을 먹고, 다시 지옥으로 도망치게 만들 정도의 기운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몸이 얼어붙는다. "오빠. 왜 그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눈이 침침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방바닥이 내 얼굴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다만 내 앞의 여동생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로 보였기 때문일까. 피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덥석. "자자. 그러니까 좀 진지하게 심사해 달라고." 조금씩 시력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나를 압박하던 거대한 존재가 사라지고, 내 앞에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잠깐. '이 꼴이 뭐냐.' 오빠가 여동생을 안아주는 게 아니라, 여동생이 오빠를 안아주다니. "하아. 겨우 골랐다." 열 벌? 스무 벌? 옷을 몇 차례나 갈아입었는지는 모르지만, 여동생의 옷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다. 평소야 여동생이 뭘 입는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지만 - 과다 노출만 안 하면 돼 ! - 막상 이렇게 흩어보게 되니 여동생도 정말. "돈 많은 녀석." 도대체 용돈이 얼마나 많길래, 저렇게 옷이 많은 건지. 원.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를 괴롭히는 것을 잊지 않는 여동생. "오빠가 낭비벽이 심하니까 그렇지." 뭐라고? 내가 어떻다고? 이런 누명을 씌우다니, 항의하자 ! "별로 안 심해." 그 말에 내 방 쪽을 바라보는 여동생. 뭐냐? 그 표정은. 그녀는 나를 쳐다보면서. "그럼 방에 있는, 산더미 같은 여자 누드 조각은 뭔데?" "누드 아냐 !" 이 녀석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하다니. 하지만 여동생은. "지난번에 방 청소하려고 들어가 봤더니, 옷이 저절로 떨어지던데?" "뭐?" 그럼 내가 전에 산 '매직 마스터 세라' 피규어를 부순 게 너였냐? 어쩐지 개조작업에만 며칠 밤을 새웠던 물건이 없어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네가 부쉈던 거냐 !" 그걸 개조하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물건 자체는 그리 비싸지 않지만, 옷을 탈착식으로 개조하고 색칠을 다시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도색잡지까지 보면서 감춰진 부위를 복원하느라 고생한 내 수고가....... 퍽. "요상한 쪽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지 마." 내 소중한 작품을 날려버린 데 이어, 내 머리까지 마구 치다니. 못된 녀석 같으니. 그녀는 내 방문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모함을 거듭했다. 으. 나쁜 계집애. "다른 물건도 거의 모두 거대한 눈을 가진 외계인들만 잔뜩 있던데? 가슴은 왜 그리도 큰지. 허리는 왜 그리도 가는지. 옷들은 왜 그리도 노출이 심한 건지. 지금 내가 입은 건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만큼도 되지 않잖아. 게다가 크기도 아주 다양하던데.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에서부터, 30cm는 되는 거대한 것까지. 이대로라면 사람 만한 크기의 피규어도 사오는 거 아냐?" 여성 캐릭터의 눈이 큰 게 뭐 어때서 ! 게다가 사람 만한 물건은 구입이 어렵다고. 이유는. "그런 건 비싸서 못 사." 그래서 나는 언제나 작은 것으로 참고 있다. 슬프지만. 그러나 여동생이 그런 내 처지를 동정해줄 사람은 아니다. 하긴 동정심이라는 항목이 이 녀석에게 있을 리가 없지. "엄청나게 아쉽다는 표정이네. 하긴 안 사는 게 아니라 못 사는 거라니." 누구 놀리는 거냐.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없는 가난뱅이의 비애를.... 퍽.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들으면 화낼 거야." 아구구.... 집에서 하는 말도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는 거냐.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꾸는 여동생. "어쨌든, 일단 골랐으니 다행이야." 이것은 타협의 산물이었다. 여동생은 덥다는 이유로 가볍게 입고 싶다는 의견을 냈고, 나는 '여자는 정숙하게, 긴 옷이 제일'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두 의견이 충돌한 끝에, 그럭저럭 양측의 의견을 절반씩 수렴한, 어정쩡한 의상이 여동생의 내일의 외출복으로 선택되었다. 여동생 자신은 아직 고민이 남은 듯하지만. 그런데 듣자듣자 하니. "날씨만 안 더우면 이렇게 입고 갈까나. 하지만 이러면 좀 더울지도 모르겠는걸. 아. 어차피 리무진이 와서 데려간다고 하니까 상관없나?" 무슨 리무진. 왠지 갈수록 이 녀석이 수렁속에 빠진다는 느낌이 드는데.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네가 재벌 집 며느리냐." 우리 집에 리무진이 있을 리 없으니, 보나마나 풍남이가 보내는 건데. 그런데 이상한 거 하나는. "그런데 풍남이가 널 왜 불렀대?" "장래의 인재 모으기 포석이래." 그렇냐. 안심하려는 나에게 날아오는 운석. "그리고 사귀기 위한 포석이래." "뭣 !" 전에 풍남이가 그랬었지. 미인이라도 노려볼까. 분명히 그랬던 것 같은데. 내 얼굴이 새파래지는 걸 보며 웃는 미인이. "걱정 마. 내 짐작일 뿐이니까." "........." 그 말이 더 무섭다. 이 녀석의 짐작은 사실로 연결되는 경우가 거의 전부니까. 내가 이 녀석의 눈치에 당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그건 아주 잘 안다. 헤아릴 수 없는 마력을 숨긴, 어둠의 군주 같으니라고. "어둠의 군주라...." 갑자기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는 여동생. 이 녀석아. 진지하게 고민하지 마. 그런데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너, 날씨가 덥지 않다면.......이라고 했었지?" "응." "그럼 날씨가 더우면, 뭘 입고 갈 셈이냐?" "이거." 여동생이 내민 '옷'을 본 순간, 갑자기 내 턱이 떨어져서 방바닥에 처박혔다. 도대체 이 녀석이. "야 ! 그건 너무 노출이 심하잖아 !"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모르겠잖아 ! 갑자기 아쉬운 표정을 하는 여동생. "그럴까? 오빠의 수집품들을 보면 남자들은 이런 옷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마침 날씨도 더우니까 한 번 시험삼아 입어볼까 하는데." "안 돼." 나는 여동생의 장래를 위해, 한참동안 열변을 토해야 했다. 비록 여동생이 듣지 않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명색이 오빠인데, 여동생의 방종을 막지 못한다면 그녀의 장래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젊은 나이에는 옷감을 적게 쓴 옷을 원한다고 해도, 결혼하면 그게 아니게 된다. 우리나라는 무조건 남자 우선 ! 여자는 보조 ! 이 녀석이 워낙 특이한 경우라서 자꾸 까먹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이 녀석도 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회라는 벽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걸 가르쳐줘야 한다. 하지만. "오빠. 친구들하고 같이 놀러 가는데, 뭘 그렇게 많이 따져야 하는 거야?" "상대가 풍남이니까 !" 단호하게. 오빠의 권위로 명령하는 나. 물론 나에게 권위라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억지로라도 권위라는 걸 재건해야 한다. 풍남이한테 여동생의 정조가 유린되는 사태라도 벌어지면 곤란하니까. 가급적이면 못 가게 말리고 싶지만, 내가 여동생을 막아서 봐야 덤프트럭에 치인 강아지 꼴이 된다. 그렇다면 옷차림이라도 어떻게 해야...... "오빠. 그렇게 걱정되면 내일 같이 가면 되잖아?" 자, 잠깐. "싫어." 단호하다. 아까보다 더 단호하게, 내 대답이 나온다. 너무 빨라서 내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원래라면 '그러자'고 해야 하겠지만, 내 입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솔직히 나 자신도 약간 당황할 정도의, 빠른 반응에. "싫어?" 여동생조차 다시 물어볼 정도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이 가자'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의식중에 나온 말은 역시. "싫어." 어째서냐. 원인 모를 신비의 힘에 의해 이렇게 된 거냐. 그게 아니면 나 자신이 여동생과의 동행을 그렇게도 싫어했기 때문이냐. 뭐 이유를 따지자면 아마 후자일 것이다. 매일 매일 여동생에게 맞고 사는 내 신세를 보면. '하루 정도는 여동생 없는 세계에서 살고 싶어.' 그런 무의식이, 실제의 대답에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동생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오빠. 같이 가자아." "..........." "같이 가자아." 이, 이 녀석이 뭐 하는 짓이야. 은근슬쩍 내 팔을 잡더니, 살짝 나에게 기댄다. 만약 이게 진희였다면 나는 이미 홀려버렸겠지만, 별 느낌은 오지 않았다. 당연하잖아. 아무리 상대가 가슴 크고 얼굴 반반하고 늘씬하다고 해도, 결국 이 녀석은 여동생이니까. "오빠. 같이 가자아. 이렇게 예쁜 여동생하고 같이 가는 건데, 그렇게 싫어?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가면 되잖아."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 떨지 마. 네가 애교를 떠는 건, 흑마술부 부장님이 애교 떠는 것보다 더 기이한 사건이니까. 그런 냉소적인 내 시각이 내 입에 반영된 건지.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냐." 물론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이 녀석의 얼굴은 굉장한 미인이다. 이름 값을 한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입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냐고? 나는 우리 학교 제일의 미녀는 진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데다가, 이 녀석이 가장 예쁘다고 했다가는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걸 인정하는 척이라도 했다가는, 여동생이 얼마나 콧대를 높이겠는가. 게다가 이 녀석이 기뻐하게 만든다는 것도, 왠지 이상하게 내키지 않는 일이고....... 퍽. "여동생이 기쁘면 안 된다니, 못됐어." 윽. 쌍둥이라는 게 이럴 때는 미칠 듯이 후회가 된다. 차라리 1년이라도 차이가 났다면 조금은 오빠의 권위가 설 텐데, 같은 나이에 생일도 같으니까, 게다가 10개월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같이 지내는 바람에 오빠로서의 체통을 세울 수가 없다. 뭐 몇 년 차이가 난다고 해도 별로 다를 건 없을 것 같지만. 여동생은 가슴을 펴더니. "이렇게 가슴 크고, 몸매 잘 빠진 호박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여동생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위아래로 흔들렸다. 힉. 역시 크기는 크구나.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인지 솔직히 의심스러운 여동생의 가슴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확실히 해두는데, 이건 음란한 이유로 인한 게 아니다. 잡아서 확 비틀어버리고 싶어서 그런 거다. 한 번 가슴을 뜯어내서, 속이라도 살펴보고 싶은 거다. 도대체 말야. "가슴만 크면 뭐하니. 속이 좁쌀만큼 작은데." 바로 그 점이었다. 가슴이야 누구 못지 않게 거대한 녀석이지만, 마음은 전혀 그게 아니니까. 도대체 어떤 구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양심이라는 게 과연 이 녀석에게 존재하는지, 아니면 양심에 털이 잔뜩 났는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새까매서 속을 볼 수가 없을지..... "어디 보자...." 잠깐.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닌데? 내 생각만 하느라 여동생을 자세히 못 본 동안, 이 녀석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 물론 상의만 벗지, 하의는 벗지 않으니 다행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저 녀석은 지금. '브래지어를 안 했잖아?' 미, 미친 녀석 ! 아무리 오빠 앞이라지만, 어린 나이도 아니면서 옷을 그렇게 훌훌 벗는 거냐. 나는 황급히, 이때 가장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은. "벗지 마 !"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뻔한 상황에서, 나는 간신히 여동생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이, 이 녀석은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나? 남자 앞에서 옷을 막 벗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냐. 내 여동생은. "오빠. 우린 이미 10개월이나 벌거벗고 같은 방에서 지냈잖아? 뭘 그리 부끄러워 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꺼내지 마 !" 게다가, 지금 넌 여고생이라고 ! 태아가 아냐 ! 태아일 때의 행동과, 여고생일 때의 행동방식은 완전히 다르다고 ! 그러니까 옷 벗지 마 ! 그러나 여동생은. "속이 좁쌀만큼 작다는 말을 부정하려면, 속을 보여줘야 하잖아. 그러려면 옷을 벗어야 하고, 속을 좀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 건데?" "안 보여줘도 돼 !" "그러면 나중에 속이 좁으니 가슴이 작으니 그럴 거면서." 윽. 눈치챘냐. 그러나 내가 이 녀석의 제안을 어영부영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녀석의 행동방식으로 보아 분명. "넌 나중에 진희하고 연미 누나에게 몽땅 고자질할 거잖아 !"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하지 마 ! 그런 소리를 두 사람이 들으면,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냐? 넌 내가 첫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걸, 꼭 보고 싶은 거지? "그러려면 그냥 시내하고 오빠를 같은 방에 하룻밤 가둬두면 간단하잖아? 뭐 오빠도 건강한 남자이니 하룻밤동안 시내와 같이 있으면 별 수 없이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은근슬쩍 할 것이고, 그러면 오빠의 첫사랑은 자동적으로....." "절대 안 돼 !" 어딜 ! 내 사랑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 같으냐 ! 그러나. "그럼 내 속이 좁다는 말 취소해." "싫어." "그럼 속을 들여다보던가." 힉 ! 이 녀석, 정말 부끄러움이라는 단어하고는 인연이 없는 건가. 게다가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면, 깨지는 건 나다. 여동생이 아니라. 연미 누나가 이걸 안다면, 나를 가만 두겠는가. 게다가 '장래의 처형'이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내가 연미 누나에게 반항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험악한 집에서 나를 편들어주는 '우리 편'에게 대들어서, 적을 더 늘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직도 진희 아버지는 나를 해충으로 보고 있는 판인데.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흐흐흑. "그래. 그래. 너 예쁘다. 어흐흑." "어흐흑은 빼." "그래. 빼마. 으흐흑." "으흐흑도 빼." "알겠다. 알겠어. 멍멍." 퍽. "개 짖는 소리 내지 마." 망할 녀석, 유머도 없어. "........." 나는 차갑디 차가운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니, 마루 바닥인가. 거실 바닥인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쓰러져 있었다. 그걸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여동생에게 '개 짖는 소리 내지 마'라는 폭언과 함께, 그대로 얻어맞은 후로 계속 이렇다. 여동생이라는 애는 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도. "그럼 옷은 이걸로 결정. 오빠. 고마워." 악의 여왕답게, 여동생은 내가 자빠지든 엎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더니 방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악마 같은 녀석. 이러니 내 장래의 꿈이 축구선수, 그리고 엑소시스트(귀신을 추방하는 성직자)지. 물론 저 강력한 악령을 몰아낸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망할 녀석." 나는 일어날 기운도 없이, 고통에 떨며 증오심만 키우고 있었다. 일어나고는 싶은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나쁜 인간아. 여동생을 위해 내일 날씨가 선선하기를 바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쓸데없는 짓이었다. 점점 차가워져 가는 내 손과 발이 느껴졌기 때문에. 창문이라도 열린 건가. 나는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지만, 여동생의 횡포에 당한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오빠. 방에 들어가서 자." 에? 이 녀석이 언제 나타났지? 여동생이 나를 걱정한다는 의외의 사태에 놀라서,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 들 수가 있나. 이런 기이한 일이 생겼는데.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다시 숙이고 말았다. 이, 이 녀석이. "야. 잠옷차림으로 나오면 어떻게 해." 이 녀석, 옷 갈아입으려고 방에 들어갔던 건가. 생각보다는 무정하지 않다는 건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녀의 잠옷이었다. 잠옷 자체가, 너무나 속이 보인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 아무리 밤이라지만, 현대문명의 이기인 전깃불은 여동생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결과. "히익 !" 야 ! 속이 다 보이잖아 ! 원래 사람은 잠을 잘 때 되도록 편한 상태를 취하고 싶어하는 법이고, 따라서 여동생이 거추장스러운 브레지어를 잠잘 때 벗는 것도 무리는 아니기는 했다. 뭐 그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파자마를 입을 것이지, 네글리제가 뭐야. 네글리제가.' 고작해야 여고생인 주제에, 얌전히 파자마나 입을 것이지, 왠 부인용 잠옷이야 ! 뭐 그건 억지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해의 범주에는,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옷감'은 들어가지 않는다고 ! 그 덕에 가슴이 다 보이잖아 !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 물론 이것은 내 시력 탓은 절대로 아니다. 비록 내 시력이 양쪽 눈 모두 2.0인지 1.5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동생의 가슴 가운데에 있는....... 퍽. "도대체 오빠는, 하루 24시간 내내 응큼한 생각만 해." 아구구구구. 하지만 도대체 네가 그걸 입을 나이가 된 거냐. 아직 어린애인 주제에. 이것도 응큼하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뭔가 이상하다. 안 어울린다. 아무리 이름 그대로 '미인'이라고는 하지만. "여동생은 성장하는 거야." 쓸데없는 반론 달지 마 ! 하지만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여동생이 날 잡아서 일으키는 상황에서는 그게 안 된다. 이 녀석, 내가 무슨 짐짝이냐. 욕이라고 하려고 하는데. "울지 마. 오빠. 착하지." 야 ! 우는 게 아냐 ! 욕하려는 거야 ! 하지만 선수를 빼앗긴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결국 나는 여동생에게 안겨서, 얌전하게 나의 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뿌리치려고 해도, 힘으로 내가 이 녀석을 이길 수가 있나. "으흐흑." 눈물이 좔좔 나온다. 물론 그것은 이 녀석의 가슴에 안겨서 간다는 기쁨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만약 다른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녀석의 오빠이니 그럴 수는 없다. 피가 안 통하는 사이도 아니고 말야. '어째서 이런 황당한 여동생이 있는 거야.' 물론 여동생에게 있어서 오빠는 영원한 봉이니, 내가 여동생의 샌드백이 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게다가 나보다 힘센 여동생이니, 저항해봐야 나만 더 맞는다. 아니, 내가 여동생보다 더 세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여동생을 마구 때리는 오빠가 되어 봐야, 나만 손해가 아닌가. "그런 놈에게 진희를 줄 순 없지." 이렇게 외칠 진희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연미 누나와 문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겁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문구, 나빠." 진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나는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이, 울면서 여동생에게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아흐흑.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가운데, 눈앞에 커다란 돌 하나가 나타나서. "울지 마. 남들이 오빠 보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할 정도인데." 물론 여자의 팔에 목을 휘감긴 채로, 가슴에 머리를 눌린 채 끌려가는 이 포즈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 돌머리가 잊은 것은. "내가 네 애인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겠냐." 그게 문제였다. 진희한테 이런 식으로 안겼다면, 행복해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잠깐. 내 눈앞에 있는 이 돌대가리는 사람의 속을 열 길 물 속보다도 더 잘 들여다보는.... 내가 그 이상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떨어지는 여동생의 말. "그럼 나중에 진희한테 전해줄게. 오빠를 유혹할 때는 이런 포즈를 취하라고." 진희가 내 머리를 자기 가슴에 누르는 포즈라. 생각해보면 정말 훌륭한, 진희가 여동생을 본받아야 할 유일한 동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 녀석이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내 눈동자를 본 그녀가,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거냐. 그것은 머지 않아 드러났으니, 그녀는. "음. 하지만 오빠의 불평이 심하니 시내한테 알려줄까?" "알리지 마." 역시. 그럼 그렇지. 이 녀석이 나를 위해 신경 쓸 리가 없지.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입을 벌려봐야 여동생의 노리개가 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녀는 나를 안고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침대로 던졌다. 애들에게 잡혀서 날려 가는 개구리 그 자체다. 쿵. 약간 큰 충격이 내 등을 강타했지만, 순전히 침대의 스프링이 나를 살렸다. 일단 부러진 곳은 없었던 것이다. 절대 여동생의 배려니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오빠. 너무 무거워. 살쪘어?" 이, 이 녀석이. 내가 무거운 거냐. 네가 괴물인 거지. 이 세상의 어느 여고생이, 오빠를 들어올릴 수 있다는 거냐. 예시당초 여자아이가 같은 나이의 남자를 척척 드는 것부터가, 뭔가 비정상이라고. 나는 이를 마구 갈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뭐 원래 그러기야 하지만. 그녀는 태연히 방문 밖으로 나가다가. 휙. 여동생은 난데없이 몸을 돌려,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거대한 돌이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이 녀석아. 오지 마. 돌 맞을까 겁난다고. 하지만 부딪쳐온 것은 돌이 아니라 한 마디. "그런데 오빠. 그렇게 내 옷차림이 노출이 심한 거야?" "당연하지." 엥? 그런데 왜 이 녀석이 이런 뻔한 질문을? 이건 아까 다 물어본 거잖아?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버렸다. 어차피 이 녀석 상대로 거짓말을 해봤자. 순식간에 들통나서 얻어맞기만 하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내일 같이 가면 되잖아?" 뭣이?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거냐? 그러나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무의식중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빨리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싫어."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 녀석 혼자 전풍그룹 전 직원에게 포위된다고 해도, 감히 그들이 여동생을 건드릴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보나마나 어디에선가 나타난 총 두 자루가 불을 뿜을 것이고, 직원들은 모두 KO패를 당할 게 분명하니까. 게다가 내 조언으로 인해 이 녀석의 옷차림도 그럭저럭 노출이 심하지 않은 걸로 바뀌었으니, 엄청난 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풍남이는 믿을 수 없지만, 여동생의 힘은 믿을 수 있으니까. 적어도 사람 패는 데에는 천재적이 아닌가. '게다가.' 네 데이트에 내가 왜 끼냐. 난 들러리는 질색이라고. 하지만 여동생은 끈덕지게. "따라오는 게 재미있잖아? 이렇게 예쁜 여동생을 자랑할 기회도 되고." 무슨 기회 ! 게다가. "지상 최악의 사고뭉치를 자랑해서 뭐하게?" "하아." 결국 여동생도 단념한 건가. 그녀는 기운이 빠졌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뭐 1mg만큼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내일은 모처럼의 휴일이고, 나도 잠 좀 자야겠단 말이다. 그러나. "그럼 할 수 없네. 하지만 오빠. 다시 생각해 봐. 같이 가자." "싫어."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거냐. 역시 끈질기기는 하다. 그러나 나도 때로는 여동생과 떨어져서 행동해야겠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둘이 같이 있다보니 별별 소리를 다 듣는단 말야. 도대체 내가 왜 '여동생밖에 모르는' 오라버니로 평가되어야 하느냔 말이야. 나에겐 진희도 있고, 소꿉친구인 문희도 있다고. 여동생은 실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된다. 이 녀석도 혼자서 다니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 그래야 오빠가 귀한 줄 알지. 물론 그 길은 난관으로 가득 차 있을 테지만. "알았어." 에? 예상보다는 좀 빠른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예상이 5초도 못 가서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알았어. 하지만 이러면 내일 후회할 텐데?" 잠깐. 후회한다고? 내 몸이 움츠러든다. 이것은 혹시 ! "또 때리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는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왠 일이냐? 매일 이 핑계 저 핑계로 때리기만 하던 네가. 하지만 이건 더 불안했다. 차라리 주먹이 날아왔으면 한 대 맞고 끝날 텐데. '왜 웃는 거냐.' 그녀. 여동생은 집게손가락을 세우더니, 나를 가리켰다. 이, 이건 무슨 뜻이냐. 혹시 무협지에 나오는 마교의 무공이라도 쓰려는 거냐. 그러나 그녀가 한 것은, 그런 시시한 것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나랑 같이 안 가면, 오빠는 내일 끔찍한 일을 겪을 거야." 저주. Curse. 주술을 사용해서 특정인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먹을 예상한 나에게는, 굉장히 뜻밖의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잠깐. 왜 이런 억지를 쓰는 거지? 이 녀석이 설마, 정말로 흑마술을 익혔을 리는 없고. '주먹이야 크지만.' 의외의 사태에 당황하여 굳어버린 나를 두고, 여동생은 평온하게 웃었다. 이, 이 녀석아. 그렇게 웃지 마. 기분 나쁘단 말야 !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방을 나가고 있다. 가만. 가만. 이대로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여동생의 방에까지 쫓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 이상, 여기서 어떻게든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난 해골이 나뒹굴 게 분명한 고문실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너,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이야?" 설마, 저주냐. 하지만 여동생은 나를 돌아보면서. "예언이야." 그리고 그녀는 성큼성큼 내 방에서 나가 버렸다. 달칵. 여동생치고는 너무나 얌전하게 방문을 닫는 바람에, 나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저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언? 자기가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나? 예언이라니? 단순한 협박 아냐? 차라리 저주라고 했으면 믿었겠지만. "지가 무슨 예언이야." 아무리 여동생이라지만. "오빠. 그럼 다녀올게." 아침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나에게 날아온 것은, 여동생의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통고였다. 뭐 이 녀석이 외출한다는 건 어제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벌써 나가냐?" 지금이 아침 6시 반인데, 휴일치고는 너무나 빨리 움직이는 거 아니냐. 그런데 잠깐. 이 녀석이 지금 나간다는 것은, 내 밥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리고 설거지는? 갑자기 차가운 물이 내 손가락을 스치듯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거 큰일이다. "오빠. 밥은 여기 차려 놨으니까, 천천히 먹어. 그리고 설거지는 직접 하고." 그런데 뭐가 큰일이냐 하면. "너, 나한테 설거지를 시키는 거냐?" "응." 이봐. 여동생. 어지간하면 직접 하고 나가시지 그래? 이건 내가 게을러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굳이 이런 남성우월주의로 가득한 발언을 하는 이유는. "내가 하면 그릇이 다 깨지니까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다. 내가 설거지를 안 하는 이유는, 줄기차게 깨먹었기 때문이다. 결코 내가 설거지를 하기 싫어서,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랬으면 여동생에게 죽도록 맞고, 두 대 더 맞았겠지.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아는지, 여동생도 이번만큼은 나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으니. "오빠. 그러니까 오늘은 좀 천천히 해보라고. 언제까지나 사랑스런 여동생이 설거지를 해주지도 않을뿐더러, 진희한테 사랑 받는 남편이 되려면 그 정도는 익혀두는 게 좋아.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세상에 오빠 밥까지 챙겨 먹이고, 설거지까지 대신해주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 그 말에 나는 내 방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중에, 그런 여동생이 얼마나 되더라? 하지만 여동생은 발을 한 번 구르더니. 쿵. "그림과 현실을 혼동하지 마." 나쁜 녀석. 오빠의 즐거움을 여지없이 뭉개려고 하다니. 그리고 널 보고 있으면, 실제의 여동생과 애니메이션의 여동생의 모습을 착각할 일도 없다고. 가상의 여동생이 착하고 예쁘고 오빠 사랑에 가득 찼다면, 실제의 여동생은 악독하고 흉측하며 오빠 쳐부수기에 열중하는.... 퍽. "쳐부수자. 사기꾼. 무찌르자. 거짓말." 아구구구구. 여동생은 괴로워하는 오빠는 본 척도 않고, 유유히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잠깐. 내가 운동하러 나올 때는 이런 옷차림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내가 한 시간을 뛰고 왔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밥도 제대로 되지 않은 때였다. 어떻게 된 거야? '역시 이 녀석은 여자답지 않아.' 보통 여자들은, 옷 한 번 갈아입는 데만 수 십 분이 소비되지 않나? 아무리 미리 골라놨다고 하지만, 밥을 차려서 먹고, 옷 갈아입고, 자기 그릇을 설거지하고, 내 밥까지 차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뭔가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역시 여자가 아니고..... 딱.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야 ! 현관에서 식탁까지는 최소한 5m가 넘는 거리인데, 어떻게 내 머리를 때리는 거냐. 설마 그 옷 어딘가에 총이라도 숨기고 있는 거냐. 일단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기에, 나는 여동생의 손을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 이 녀석이 옷 어딘가에 총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은? 하지만 보이는 것은 여동생의 큼지막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큰 엉덩이밖에 없는..... 딱. "이상한 쪽만 쳐다보지 마." 또 아구구구구. 언제나처럼 나는 이마를 감싸며 나뒹굴었다. 이래서 옛 사람들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던가. 확실히 이런 식이라면,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딱. "오빠. 제발 부탁인데, 이젠 잠에서 깨라고. 헛소리만 골라서 하지말고." 딱하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걸치는 여동생. 자기 딴에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여동생의 모습을 연출한다고 하는 거겠지만, 나에게는 오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뻔뻔함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저 녀석은..... 또 딱........ 어? 안 날아오네. 어째서? "빨리 밥이나 먹어. 조금 있으면 차가 오니까." 다시금 머리를 감싸쥐던 나에게 날아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너,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냐?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싫어." 여동생이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내 의지를 확실하게 표출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황금 같은 일요일을 왜 여동생하고 같이 보내야 하는 거냐. 모처럼의 일요일이니 축구 연습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한다. 뭐? 모범생이나 할 소리를 한다고? 일단 말로는 그렇게 해야 타의 모범이 되는 오라버니라고 하지 않겠냐. 절대로 뒤에서는 새 피규어를 조립한다거나, 신작 애니메이션을 본다던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영화를 본다던가 하는 목적으로 혼자 있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다. 물론 여동생이 없는 사이에, 마음껏 이 녀석을 저주하기 위한 목적인 것도 아니다. 이건 순수하게....... 딱. 딱. 딱. "일껏 생각해줬더니, 무슨 저주를 한다는 거야? 못된 오빠." 3연속으로 맞고 나가떨어지는 나. 이젠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쓰러진다. 피할 틈도 없다. 비참하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이 녀석의 사격 실력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것 같아.' 전에 불량배 백 명을 혼자 해치울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런데 총은 어디에 숨기고 있는 거지? 여동생의 신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 그렇다고 저 녀석의 옷을 벗겨서, 총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아볼 수도 없고. 게다가 바닥에 이렇게. 'BB탄을 마구 뿌리면 어쩌라는 거야.' 이 둥근 BB탄을 오빠가 밟아서, 발이라도 미끄러져서 뒤통수가 깨지면 네가 책임지겠다는 거냐. 나는 BB탄을 집어서 치우려다가, 갑자기 뭔가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나만 맞고 사는 건 너무 억울하다 ! 그래서 나는 압제에 시달린 민중이 하는 일을 했다. BB탄을 잡아서, 그대로 되던진 것이다 ! 어디 맞아봐라. 이 녀석아. 그러나 그것은, 여동생을 너무나 얕잡아 본 것이었으니. "느려." 그녀의 오른손이 갑자기 사라졌고, 내가 놀라기도 전에, 이미 모든 BB탄은 여동생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네가 무슨 무림맹주라도 되냐. 그녀는. "오빠. 아무리 축구에선 손을 안 쓴다지만, 이건 너무 허약한 거 아냐?" 무서운 녀석. 어떻게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가 있지? 그런데 잠깐. 여동생이 보복을 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오른손을 약간 뒤로 젖힌다. 위험하다 ! 그걸 보자마자 나는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도망간 것이다. 오빠의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도리 있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게 이 세상이고, 착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잘 사는 게 세상의 도리인 걸. 빌어먹을. 그러나 여동생의 오른손은. 휘익. 그녀의 손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BB탄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에? 어찌 된 거냐? 지금쯤 내 머리는. '불이 번쩍거려야 정상인데?' 물론 저 녀석이 나를 맞출 수 없었다는 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피해도 어차피 언제든, 어디서든, 무조건 내 머리는 그 녀석의 과녁판이 아니었던가. 그 말을 의심할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최소한 이 근방의 불량배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맞아봤으니까. 그럼 이 녀석은. '안 던졌나?' 그 외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잔뜩 움츠린 자세로 식탁 위로 기어 나오는 나를 보며, 그녀는 약간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설마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서, 나를 패려는 것이냐. 하지만 여동생은. "오빠. 혹시 몸이 아파서, 나하고 같이 못 가는 거야?" "응 !" 나는 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외쳤다. 밥알이 사방으로 튀길 정도로 크게. 결국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야 포기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냥 물러날 여동생이 아니지. 그렇게 착하다면, 그건 이미 여동생이 아니지 않은가. "알았어. 그렇게 가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다만." "다만?" 이번엔 또 무슨 저주를 하려고. 그녀는 나를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몸조리 잘해. 다만, 나중에 안 데려갔다고 울며 떼쓰기 없기다?" "그럴 일은 없을 걸." 뭘 하러 악마 같은 여동생과 하루를 보내야 하는 거냐. 내 자신만만한 대답을 뒤로하고, 그녀는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바람이 불어오지만, 다행히도 중국산 황사는 아닌 듯 하다. 다행스러웠다. 이것도 오늘의 나를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인가. "오빠. 그럼 다녀올게." 상당히 쓸쓸한 어조의 말이었다. 나는 기뻐 날뛰고 싶어하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오냐. 잘 다녀와라. 몸조심하고." "응." 그래도 일단 여동생이니, 나는 배웅을 위해 숟가락을 놓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런데 저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냐. "오빠. 그럼 다녀올게." 그 말만 딱 하고 나갔으면 뭐라 하지 않을 텐데, 이 녀석, 마치 멀리 이민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나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든다. 매우 애처롭게. 매우 슬프게. 그리고 매우 가엾게. 손수건이라도 꺼내서 눈물을 닦으면, 딱 알맞은 표정이다. 그런데 이 녀석. "흑." 에? 진짜로 손수건을 꺼내고 있어? 만약 내가 저 녀석에 대해 잘 몰랐다면, 나와 헤어지는 것이 정말로 슬퍼서, 너무 슬퍼서 그러는 줄로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저건 진짜가 아닐 것이다. 소문만 들어보면 저 녀석은 오빠사랑에 여념이 없는 여동생이지만, 그런 녀석이 밤낮으로 나를 때리고 구박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내가 여기서 손을 흔들어주지 않으면. '무자비한 보복이 뒤따를 것이니.' 그게 무서워서, 일단 손을 흔들어준다. 사실 저게 연기라고 믿고는 있지만, 그걸 아는 나조차도 감동해서 눈물을 좔좔 흘릴 뻔했으니, 그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저 녀석은 차라리 여배우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분명 전설의 여배우로 이름을 남길 텐데. 오죽했으면. "오빠랑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울지 마라."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몰려 나와서, 여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줄 정도다. 이 분들, 드라마도 제대로 안 보시는 건가. 어째서 여동생의 저런 뻔한 연기에 속는 것일까. 그리고 여동생은 잠시 후, 눈물을 닦은 후 대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천천히. 내키지 않는 듯이 걸어가는 여동생. 연기의 마무리를 아주 멋들어지게 하는구나. 여동생아. 뭐 어쨌든. "그래. 잘 다녀오너라." 이럴 때 굳이 욕을 덧붙이는 것도 오빠의 체통에 관련된 문제라, 그냥 상식선의 말만 남기고 나도 방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잠깐. 끼이이익. 거대한 리무진이 우리 집 앞에 날아와서 멈춘다. 아마 저게 풍남이가 보낸 자동차인가 보다. 뭐 검은색의 멋없는 색상이, 그 녀석이 보냈다는 걸 확연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다른 색깔도 좀 칠해라. 어떻게 그렇게 네 속과 똑같이, 시커먼 색을 선호하는 거냐. "아가씨. 자. 타십시오." 아가씨라. 나는 문 앞에서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이 세상의 아가씨란 아가씨는 다 죽은 모양이다. 저 녀석이 그런 소리를 듣다니. 솔직히 아가씨라면, 진희처럼 교양 있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에?" 왜 내가 아는 얼굴들이 저 안에 있는 거냐? 나는 황급히 문을 향해 달려갔다. 신발을 안 신은 게 보이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 이건. 이건. 이건. 이거어어언 ! "진희야 !" 갑자기 밀어닥치는 후회와 원망의 물결이, 나를 집어삼켰다. 이 못된 녀석이, 그런 건 진작에 말해줬어야지 ! 하지만 내가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제시간에 나갈 수는 없었다. 내가 숟가락을 팽개치고 밖으로 뛰어나갈 때는, 이미 리무진의 문이 닫힐 무렵이었으니까. 물론 모든 것은 너무나 빨리 리무진 안으로 들어간, 천인공노할 여동생의 만행으로 인한 것이지만. "멈춰 !" 나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지만, 그 목소리는 담을 넘어가지 못했다. 설령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리무진의 엔진소리에 묻혀버렸을 것이지만. 내가 대문을 열어 젖혔을 때는, 이미 리무진이 달려나간 후였다. 풍남이와, 문희와, 여동생과, 그리고 진희를 싣고서. "안 돼 !" 나는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망할 리무진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미 속도를 내고 있는 자동차를 상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문 앞에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리무진을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이럴 수가. '모처럼의 휴일을 진희와 함께 보낼 찬스였는데.' 나는 다시금 여동생의 사악함을 깨닫고 치를 떨었다. 그런 좋은 일이 있으면, 진작에 말했어야지 !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아아아악 !" "아아. 으으." 좌절이라는 낱말은 평상시에 자주 쓰지만, 이렇게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여동생의 지금의 행동은 충격이었고, 악몽이었다. 망할 자식. 어째서 이 녀석이. "같이 가자아." 이렇게 애교를 떨어가며 나에게 동행을 권유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랬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거야. 바로 지금, 나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기 위해서. 그래서 진희와 동행한다는 걸 철저하게 숨겼던 거야. 내가 자기와 동행하는 걸 절대로 허락할 리 없다는 걸 아니까, 중요한 진실을 숨기면서 명분을 쌓은 거야. 나중에 내가 항의하고 싶어도, 항의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이 악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가지 마 !"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뿐이었다. 대문 앞에서 보이지 않는 리무진을 향해. 물론 그 말을 들려주기에는, 풍남이네 리무진은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결국 나는 허공에 대고 외친 꼴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망할 자식. "가지 마......." 내 목소리가 점차 기운이 빠져간다. 으. 이게 뭐야. 그런데 주저앉은 내 어깨를 두드리는 이 손길은 뭐냐. 설마, 날 위로해줄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도 와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으니. "이봐. 학생. 그렇게 슬퍼할 것 없어.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뭔가 초점이 안 맞는 내용이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였다. 불쌍한 젊은이가 가엾어서 그러신 모양인데, 문제는 충고의 내용이었다. 이건 아냐. 뭔가 아냐. 지나가던 사람들이 던진 말은 하나같이. "너무 여동생만 바라보지 마. 오빠로서는 모범적이지만." "역시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다워." "우리 애들도 저렇게 사이가 좋았으면." "우리 집 애들은 언제나 싸우기만 해요. 똑같은 오빠와 여동생인데, 어떻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는 건지." "말도 마요. 우리 집 애는 누나면서, 남동생을 어찌나 타박하는지. 힘들어요." 이,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설마 이것도 여동생의 여론조작의 일환인가. 함정에 걸렸다는 생각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처음에 '가지 마'라고 외친 악영향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건가. '으윽.' 나는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누구도 듣지 않는 울분을 씹어 삼키면서. "쓸쓸하겠지만 힘내렴." "슬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매일 보는 사이 아니냐." "여동생을 너무 과잉보호하는 거 아니니? 때로는 풀어주는 것도 필요해." "에헴." 이 사람들이. 대체 이웃이면서 눈은 어디에 박혀 있는 건가. 모두들 내가 여동생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조금이라도 그녀가 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는 오라버니라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이들이 모두. '귀신한테 홀린 거야.' 여동생이라는 이름의 귀신에게 말이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비비꼬인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번에도 내가 여동생의 교묘한 언론플레이에 말린 건 분명했다. 왜. 어째서. 언제나 이렇게 당하기만 하는 거냐. 나는 그들의 격려 같지도 않은 격려를 들어가며,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무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니까. 집에 들어와서 다시 식탁에 앉으면서, 나는 발을 굴렀다. "망할 자식 !" 하긴 여동생이, 풍남이와 달랑 둘이서만 외출할 리가 없었다. 그 영악한 녀석이 그런 위험한 실수를 할 턱이 없잖아? 하지만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이 녀석이 진실을 모두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명백히. "오라버니를 놀려?" 이건 이 녀석이 고의로 나를 물 먹이려고 획책한, 계략이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자기하고 같이 외출할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같이 가자며 없는 애교를 만들어가며 떨어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가장 중요한 사항인. "진희하고 같이 가." 이 말을 붙이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건 분명히, 날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이 녀석, 내가 진희하고 데이트하는 게 그렇게도 싫은 거냐. 나는 치를 떨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기 있지도 않은 녀석을 상대로 화를 내 봐야, 에너지 낭비니까. 우적우적. 투덜투덜. 와구와구.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먹는다. 열심히 먹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밥알이 마치, 여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린다. "이봐. 물." 있지도 않은 여동생에게 외친다. 평소라면 절대로 할 수 없지만, 이럴 때라도 속을 풀어야지, 안 그러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미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잠깐. 물 잔을 짚으려는 내 손에 잡힌, 이건 뭐냐? "편지?" 어둠의 기운이 피어오르는 걸 보니, 아마 여동생이 보낸 게 분명할 것이다. 열어보려다가,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든다. 기분 나쁘다. 열기 싫다. 끔찍할 것 같다. 결국 나는. "안 봐." 나는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여기서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반찬도. 물론 물도. 꿀꺽꿀꺽. 따르르르릉. 식탁을 치우고, 내 방의 침대에 누운 나를 깨운 것은, 전화벨소리였다. 뭐야. 누구야. 지금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누구지? 잠시 진희라는 달콤한 기대를 하려다가,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접었다. 사실 그녀가 왜 나한테 전화를 하겠는가. 조금 전에 놀러 가는 걸 봤는데. 그러니 아마 다른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일단. "파아." 한숨과 함께, 마음을 정리한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다. 지금의 내 기분과, 전화를 거는 사람의 기분은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예의를 다해서 받기 위해선 나 자신의 기분을 남에게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이제. "오빠. 식사 다 했어?" 에? 이 목소리는 바로 그? 나는 갑자기 내 왼팔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아니, 이건 내 의사를 99% 정도는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오빠?" 그 말이 내 귀에서 멀어지면서, 수화기가 번개처럼 전화기 위에 놓여졌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오빠로서의 생존본능이라고 할까. 내 손이 전화선을 향해 날아가다가. "아. 안 돼." 조금만 더 늦게 정신을 차렸다면, 전화선까지 끊어놨을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전화를 쓰는 게 여동생만 있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무슨 흉계를 꾸미려고." 나는 넘어가는 숨을 간신히 추스르면서,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시선에 분노를 담아서. 물론 내 마음 한구석에는 이 녀석이 왜 전화를 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존재했지만, 그보다는 자기 보전의 본능이 더 우선이었다. 그런데 가만. 이 녀석이 만약 음흉한 계략을 꾸미고 있다면.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는데?"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으니. 30초도 못 가서. 따르르르릉. 다시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나는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천천히 전화기에 접근해서.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다. 신중하게. 만약의 경우에는 재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손가락을 전화기 위에 올려놓으면서. 과연 이번에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구일까? 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만약 그 녀석이라면....... "오빠 ! 전화 끊지 마 !" '오빠'라는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으려던 내 손이, 여동생의 쇳소리에 밀려서 전화기 밖으로 떨어졌다. 너무나 큰 소리였기에, 순간적으로 두뇌의 활동에 장애가 일어나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다. 배가 갈라지면서 내장이 밖으로 쏟아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에 나는. "야 ! 이 녀석아 ! 심장 떨어지겠다 !" 나 역시 소리를 빽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빨리, 내장을 다시 뱃속에 쑤셔 넣는다. 정말 오빠 노릇은 힘들다니까. 그런데 왜 전화는 자꾸 걸고 난리냐. 혹시 너, 날 놀리려고? 그게 아니면 무슨 도발을 하려고. 여동생이 던진 올가미는. "오빠. 밥 다 먹었으면, 빨리 나와. 나하고 데이트하자." 울컥하는 감정. "싫어." 달칵. 나도 모르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동생의 '나하고 데이트'라는 말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여동생의 제안이라면 무조건 싫다는 '조건반사'가 나를 그렇게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로서는 여동생하고 데이트를 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 "내가 미쳤냐. 너하고 데이트하게." 게다가 이미 놀러 나간 녀석이 무슨 데이트냐. 친구들하고 열심히 놀기나 할 것이지. 문희 녀석이야 좀 시끄러울 것이고, 풍남이 녀석이야 돈밖에 모르니 무슨 재미로 같이 놀지는 모르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에게, 여동생과 지금 같이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진희야 !"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나는 후회했다. 이럴 수가. 진희와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찬스였는데, 여동생이 '나하고 데이트'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그대로 날려버린 것이다. 아이고. 이럴 수가. "못된 녀석 !" 좌절하여 방바닥에 쓰러지는 나. 방의 벽이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차게 느껴졌다. 이럴 수가. 또 다시 여동생의 계략에 넘어간 셈인가. 벽에 머리를 박는다. 울부짖는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황금 같은 휴일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정말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다. 아흐흑. 절망하여 부들부들 떠는 내 귀에, 다시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 따르르르릉.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금 전화기에 다가간다. 수화기를 집어든다. 이번에는 여동생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실수하지 않게끔, 주의하면서. 하지만 다른 사람의 전화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일단은. "여보세요." 제발 여동생이길 바라면서,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세상에. 내가 여동생의 전화를 기다리는 경우가 다 있다니. 물론 그건 여동생이 걱정되거나, 여동생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추호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지금 여동생과 같이 있는 사람이 진희이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이번엔 나 자신의 혐오 본능을 어떻게든 눌러서,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야.... 하지만 들려온 대답이라는 건. "거기 피자집이지요? 치즈피자 두 판 가져와요. 여기 주소는....." "피자집 아닌데요." 달칵. 어째서 여기가 피자집이냐. 우리 집이 피자처럼 생긴 것도 아닌데.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다시금 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기대었다. 상당히 어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나는 잠시동안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비록 아까처럼 찬바람이 불지 않아서 조금은 나았지만, 내 마음에는 여전히 찬바람만 불고 있다. 하긴. "뭐, 두 번이나 거절당했으니 여동생도 포기한 건가." 어젯밤부터 헤아리면 다섯 번도 넘는 건가? 열 번이 넘는 건가? 뭐 그렇다면 여동생도 포기할 만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라면, 한 번만 더 찍어볼 것이지." 허탈한 가운데, 나는 그렇게 벽에 기대고 있었다. 따르르르릉.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내 눈이 조금씩 떠지고 있었다. 또다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하지만 이제는 맥이 빠졌는지, 내 몸은 상당히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손이 수화기로 가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젠 누가 전화를 걸었든 별로 신경이 써지지 않았다. 일요일에는 원래 여자와 데이트라도 하거나, 축구 연습이라도 하는 게 정상적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신작 DVD라도 보거나 애니메이션이라도 시청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음악을 듣거나 공부를 하든지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할 게 있나. 뭐 어쨌든. "전화는 받고." 오후에 학교 운동장에 가서 연습이라도 해야지. 적어도 오늘은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숙제는 이미 다 해치운 지 오래이고, 공부도 대충 해놨고, 그럼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부디 이번엔 피자집이냐고 묻지 마라." 안 그래도 맥이 빠지는데 말이다. 전화를 받고,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이번에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보세요." 부디 엉뚱한 전화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 왕창, 여동생 전화이길 바라는 마음 약간, 그리고 뭐가 되든 상관없으니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끊으라는 생각이 중간쯤 뒤섞인 가운데,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전화기에서 나온 목소리는. "아. 문구니? 엄마인데, 오늘 오후에 고모하고 고모네 애들 데리고 집에 갈 테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꼭 붙어있어. 엄마는 고모하고 쇼핑하러 가야 하는데, 애를 맡아줄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까 네가 오늘 애들하고 같이 놀아주라고." "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이게 왠 변이냐. 그 말썽꾸러기들하고 같이 놀아주라고? 기온이 10도 정도는 내려가는 것 같다. 그 순간 나온 말은. "저, 오후에 나갈 데가 있는데요." 하긴 축구연습을 하러 나가는 것도 나가는 것은 나가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마마마에게 축구는 거의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경기'나 다름없었다. 나를 장래에 의사나 약사, 또는 변호사 등의 '사'자 돌림의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려는 어마마마에게는 말이다. 어마마마께서는 내 말을 무시하고. "그리고 장난감 가지고 애들 너무 타박하지 말고. 그럼 있다가 보자." 삑. 전화는 그대로 끊어졌다. "어머니. 어머니? 전화 끊지 마요 !" 하지만 이미 끊어진 전화통을 잡고 외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이렇게 되면 내 오후는 꼼짝없이, 불량 채권자들에게 압류 당한 셈인가. 물론 그 채권자들의 이름은 '연 미인'이 아니다. 정말 오랜만에, 악당 역할을 여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맡게 된 것이다. 그 이름은 바로. "애들은 싫어." 어린아이가 귀여워 보여야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지만, 나는 싫다. 어린애는 정말 싫다. 도대체 왜 이 세상에 어린애가 존재해야 하는 거냐고 외치고 싶다. 나도 옛날에는 어린애였으니 이런 말을 하면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르는 거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내 피규어. 내 만화책. 내 영화. 내 애니메이션. 내 모델들. 내 트로피가 !" 참 신경 쓰는 것도 많다고 하겠지만, 이 외에도 아직 거론하지 않은 게 몇 개 더 있다. 내 컴퓨터, 내 MP3 플레이어, 내 휴대전화, 심지어는 내 옷까지. 이 녀석들한테 걸리면 남아나는 게 없다. 거의 없다. 아. 물론 방 자체는 남는다. 집을 무너뜨리면 난리가 날 테니까. 하지만. "계란 껍질만 남으면 뭐해 !"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건더기도 안 남기고 빨아먹는데. 정말 큰일이다. 만약 내가 여동생과 함께 외출이라도 했다면 이런 불상사는 안 만났을 것이다. 사람도 없는 집에 애를 맡긴다고 들르는 것은 무리니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아양까지 떤 게,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갑자기 여동생이 어젯밤 남긴 한 마디가 떠오른다. "나랑 같이 안 가면, 오빠는 내일 끔찍한 일을 겪을 거야." 그 예언은 바로 이걸 가리키는 것이었냐 ! 이 망할 여동생아 ! 하지만 더 이상의 욕을 할 시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서두르자." 나는 필사적으로 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요새화 작업을 위하여. 어떻게든 제 시간내에 끝내지 않으면. 내 보물의 미래는 없다. 그런데. "어느 것부터 숨겨야 하는 거지?" 과연 나는 오늘, 내 보물들을 지킬 수 있을까? "..............." 나는 허탈하게 누워 있었다. 결국 방어작전은 실패한 것이다. 내 방은 완전히 사라졌고, 남은 것은 벽지뿐이었다. 책상도, 의자도, 심지어 책장과 컴퓨터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잔해뿐. "장군님. 죄송합니다. 중과부적으로......." 그 말만 남기고, 내 숨은 끊어져 갔다.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없어도, 임무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미 명을 다하는 나에게, 그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린것들과의 처절한 전투 끝에, 나는 그만....... "아냐 !" 이런 불길한 상상이나 하다니. 아직 전투는 시작도 안 했다고.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이렇게 외쳤다. "악이다 ! 깡이다 !" 악과 깡으로 버티는 거다. 마치 내 뒤에 있는 것이 우리 대표팀의 골문이고,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일본 축구선수인 것처럼. 대한민국 축구선수는 절대로 일본 선수에게 지면 안 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듯이, 나는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결승골을 넣을 기회를 잡는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 붉은 악마의 정신이다. 힘내라. 연 문구. 그런데 이건 좀.... 내 포지션은 수비가 아니라 공격일텐데? "뭐, 요즘은 공격수도 수비를 하니까, 괜찮아." 어쨌든 내가 할만한 방어수단은 다 준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악의 화신들을 상대로 싸우는데 있어서,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 나는 초인종을 노려보았다. 어디 보자. 그런데 지금 시간이.....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는데?" 실내에서의 운동도 끝냈고, 숙제도 오래 전에 끝냈다. 심지어는 점심밥도 챙겨먹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지? 이제 저녁밥을 준비해야 할 시간인데? 물론 준비해봐야 나 혼자밖에 먹을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설마, 취소된 건가?" 그러나 그런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땡. 땡. 땡. 땡. 그럼 그렇지. 악운을 몰고 다니는 여동생이 내린 저주스런 예언이, 나를 완전히 휘어잡은 모양이다. 그럼 결국, 힘없는 나는 그 저주에 견디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순순히 꺾이지는 않을 거다. 이 망할 여동생아. "두고 보자." 나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지만. "젠장. 왜 이렇게 많아."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이렇게 넘기기에는 어린것들이 너무 많다. 갑자기 내 방의 게임잡지에 있던, 어느 게임 애호가의 유언이 생각난다. 그는 분명히 딸들, 아니 게임기들과 함께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어린것들에게 유린당할 바에는 이렇게 한다며 자신의 방을 폭발시켜서 딸들과 함께 게임의 세계로 떠났지. 설마 내 꼴이 그렇게 되는 건가. 절대 안 돼. 하지만 이건. "너무 많잖아." 이걸 다 막아야 하는 거냐. 고모들이나 고무부, 아니 고모부들과 인사하는 건 이미 남의 일이었다. 음. 저기 이모들도 있군. 정말 달갑지 않은 사태다. 형제들끼리 의가 좋은 것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의 좋은 점이지만, 이럴 때는 전혀 좋지가 않다. 친척들이 많이 왔다는 것은, 곧 어린것들도 많이 왔다는 뜻이니까. 도대체 골칫거리들이 몇이나 되는 거야? '이미 내 방은 걸어 잠갔지만.' 아. 여동생의 방?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날 골탕먹였으니 자기 방은 알아서 지키라고 해. 게다가 내가 지금 여동생 걱정할 겨를이나 있나. 나도 바쁜 주제에. 까닭은. "자. 문구야. 이모들한테 커피 가져가야지. 준비해." 어마마마. 왜 저한테 다 시키시옵니까. 항의하려고 해도. "그럼 형이 되어 가지고, 동생들한테 시킬 거니?" 어린것들을 본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들한테 시켰다가는 우리 집 커피 잔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왜 이걸 내가 전부? "나도 집안 일에서 해방되어 보자고. 휴일에는." 저. 어마마마. 평소에도 집안 일은 여동생이 다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려면 손에 물이라도 묻히셔야. "엄마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말로는 안 되니까 부모의 권위로 빠져나가시는 어마마마. 하긴 어머니의 경우는 맞벌이 부부라는 점도 있고, 약사 일로 워낙 바빠서 휴일을 제외하고는 가사노동을 할 여유가 없다는 점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여동생보다 주부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그 덕에 여동생의 일이 늘기는 했지만, 들어온다는 가정부는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다.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것이고, 설마? "가정부? 아직 적당한 사람을 못 구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들로서 불효이지만, 솔직히 어머니보다 가사노동을 잘 할 가정부라면 얼마든지 있을 듯 한데요? 물론 어머니도 여동생보다 밥짓는 솜씨가 떨어진다는 걸 알고,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은 하셨다. 손끝이 갈라질 정도로. 하지만. "난 요리에는 소질이 없나 봐." 소질이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재능을 약사라는 직업에 쏟아 부으신 탓이 크다고 봅니다만. 물론 요즘 세상은 그렇지 않으면 출세는 커녕, 살아남기도 버거우니까 어쩔 수 없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러니 커피하고, 사과 깎아서 가져와." 도리 있냐. 요리솜씨 없는 어마마마를 원망할 수는 없으니, 별 수 없이 이럴 때 자리를 비운 여동생을 원망하는 수밖에. 이 녀석, 그래서 말도 안 하고 튀었구나. 게으른 녀석 같으니. 나중에 주부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나는 커피 잔을 식탁에 늘어놓으면서,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내 입은 곧 다물어졌으니. "이 녀석들이?" 분명히 잠가둔 방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방문 손잡이에 이상한 것이 꽂혀 있고, 그 끄트머리를 꼬맹이들이 잡아서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설마. "처, 철사?" 졸지에 금고털이범을 목격한 셈이었다. 나는 커피 잔을 식탁에 모두 놓자마자, 큰 걸음으로 내 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것들이. 오자마자 무슨 짓이야. 게다가 이런 청소년 범죄를 막아야 할 이모들, 이모부들, 고무부...... 아니 고모부들은 왠 수다가 그리도 극심한지, 내 방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래서 이 녀석들이 오는 게 싫다니까. 내가 왜 청소년 선도까지 맡아야 하는 거야. 나도 청소년인데. 어쨌든. "자. 애들은 얌전히 놀아야지." 철사를 빼내고, 어린것들을 거실 한가운데로 밀어낸다. 이대로 두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했다. 열쇠구멍에 철사를 넣고 돌려? 다행스럽게도 내 방문을 걸어 잠근 자물쇠는 무사하지만, 정말 아찔했다.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나. 일단 다시 커피를 타기 위해 식탁으로 간다. 커피는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프림 적당히 넣고 설탕 적당히 넣고 물 적당히 붓고 커피 적당히 넣고. 과정은 별로 기억 안 나지만. "대충대충 커피 완료." 커피 잔을 나르기 시작한다. 친척들이 워낙 많은 탓에, 몇 개를 동시에 나르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으로는 일이 안 끝난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지만, 빌려줄 손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놀고 즐기는 데 쓸 손은 많지만. 애고. 힘들어라. 겨우 다 날라놨더니, 나오는 소리라는 게. "문구야. 과일." 이 사람들이. 직접 깎아먹으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다가, 다시 기어 들어간다. 어머니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싶어도, 그랬다가는 커피 잔만 깨지는 게 아니다. 설탕통하고 물통까지 박살이 날지도 모른다. 여동생이 있었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결국 나는 부엌으로 원대복귀한다. 아이고. "슬근슬근 톱질하세." 내가 지금 들고 있는 건 톱이 아니라 과일칼이지만, 그렇게라도 중얼거리면서 일을 해야 그나마 힘이 덜 드니까 넘어간다. 어쨌든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서. "이거 한 개에 몇 천 원이냐." 절대로 사치스러운 과일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일인 사과인데, 왜 요즘은 이리도 비싼 거냐. 다른 집 같으면 어마마마가 사과를 깎고, 내가 손님들에게 접시를 나르겠지만. "도리 있나." 어머니가 했다가는 과일칼로 사과가 아니라, 손가락을 깎을 위험이 있으니 제외한다. 옛날 같으면 그냥 사과를 들고, 껍질 채로 와작와작 씹어버리면 되는데, 요즘은 그게 안 된다. 이것도 현대 문명 시대의 설움인지. 어쨌든 농약의 잔류 가능성을 걱정하기보다는, 그냥 칼을 대서 껍질을 깎는 게 시간이 덜 걸리니 그렇게 할 수밖에. 사과 몇 개, 다시 말해서 엄청난 돈을 물에 씻는다. 돈세탁이 절대 아니니 오해는 마라. 어디까지나 사과를 씻는 거다. 절대로 '사과상자'에 사과(라고 쓰고 돈이라고 읽는다)를 넣기 위해 준비하는 게 아니다. 쓱싹쓱싹. 사과를 깎는다. 물론 내가 먹는다면 그냥 사과를 깎기만 하면 끝이지만, 이건 손님 대접용이니 그렇게 마무리할 수가 없다. 잘라야 하는 것이다. 과일칼로 사과껍질을 깎고, 반으로 자른 후 이걸 다시 자른다. 그리고 속을 도려내서 씨앗을 제거하고, 보기 좋게 가지런히 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포크를 몇 개 늘어놓아서,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서 이모들, 이모부들, 고모들, 그리고 고모부들이 몰려 있는 탁자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이 녀석들, 엉뚱한 짓 하지는 않겠지?' 곁눈질로 어린것들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했다. 여동생이라면 안 봐도 감시 같은 건 잘 하겠지만, 나는 여동생이 아니니 눈을 부라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녀석들, 이번에는 뭘 들고 내 방에 접근하는 거냐. "망치 들지 마." 망치를 압수한다. 녀석들을 거실로 쫓아낸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온다. 사과를 나른다. 곁눈질을 한다. 슬쩍 관찰한 바로는, 녀석들은 일단 노는 척 하고 있다. 하지만 손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 물론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 쪽은 아니다. 이 녀석들은. "전동드릴 들지 마." 이상한 쪽에만 관심이 있다. 특히 사람을 잡기 좋은 물건들에만 말이다. 물론 이 녀석들이 왜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보나마나 내 방에 가려는 거겠지. 물론 이 녀석들은 그럴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진출이야." 그렇다. 말로는 진출이다. 문제는 그래놓고는 하는 행각이란 게. "그게 침략이지 진출이냐." 이런 일본 극우파 같은 녀석들 같으니. 하지만 지금처럼 눈을 부라리기만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수월하다. 지금 걱정이 되는 것은. '분명히 이모&고모 범벅들은 쇼핑 어쩌고 했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쇼핑하니까 나한테 이 암세포들을 다 떠맡긴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이다. 설마 날씨가 더우니까, 쇼핑을 포기한 건가? 물론 물어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내가 그걸 물어봤다가. "아. 쇼핑 간다고 해놓고는 잊어버렸네.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별 걸 다 까먹는단 말야. 그럼 우린 갈 테니까, 애들하고 잘 놀고 있어라. 문구야." "어, 어머니 !" 이렇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 게다가 물어볼 시간적 여유도 나에게는 없다. 그럴 시간에. "톱 들지 마." 정신 없는 하루다. "휴우. 다 했다." 마지막 과일접시를 이모&고모 범벅더미에 보낸 후, 나는 커피 잔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설거지인가. 물론 설거지거리가 많이 남아 있으니 지금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릇의 양을 생각하면 지금 조금이라도 처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여동생이 귀가하면 다 떠넘기는 것이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녀석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뭐? 어지간히 게으르다고? 그게 아니고. '속도 문제가 있으니까.' 내가 설거지하는 속도와, 그 녀석이 설거지하는 속도를 비교하면, 당연히 여동생이 압도적으로 빠르다. 따라서 여동생이 설거지를 하는 게 훨씬 낫다. 우리 집 수도요금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는. 요즘은 조금만 많이 쓰면 요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 때문에, 이런 생활의 지혜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몇 시간이나 그릇을 그대로 놔두면 어마마마의 잔소리가 심할 것이므로.... 하지만 설마 나보고 저녁식사를 만들라고 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니, 그릇을 나르는 내 손길도 그만큼 가벼워진다. 이제 집안 일도 끝이 보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아. 문구야. 그럼 우린 나갈 테니까, 애들 잘 보고 있어." 쨍그랑. 커피 잔이 싱크대에 부딪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커피 잔은 워낙 튼튼해서 파손만은 막았지만, 나로서는 느닷없는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여동생에게 옆구리를 찔린 것만큼이나 아프다. 나는 즉각.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 이렇게 외쳤지만, 어마마마는 간단히. "아까 전화로 말했잖아? 쇼핑 간다고." "지금 간다고는 안 하셨어요. 지금은 이미 저녁 때....." "요즘은 날이 더우니까, 저녁에 가야지. 여름이 벌써 왔나." "좋은 물건은 아침에 들어 온다고요. 지금 가신다고 해도." "어머. 과일 사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뭘 사시려고요." "음. 모처럼 사치를 부려볼까 해. 밍크코트는 지금 날씨로 봐서 안되겠지만, 역시 여름이 다가오니까 수영복이라도 하나 맞춰볼까...." "나이를 생각하세요." 어마마마의 나이로 보아, 수영복은 절대로 무리라고요. 게다가 어차피 약국 일이 밀려 있어서, 바다에 가시는 건 무리 아닌가요? 내가 다리를 걸자. "일요일에 가면 돼." "갔다 오는데 시간 다 잡아먹을걸요." "자꾸 그러면 올해 피서는 없다?" "엑?"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빠지는 겁니까? 게다가 내가 놀라는 사이에, 슬그머니 나갈 준비를 하는 이모&고모 범벅들. 이 사람들이 대체. 일은 나한테만 시키고는 자기들끼리는 놀고 올 셈인가. 게다가 말야. "애들도 데리고 가세요. 보아하니 밤에 오실 것 같은데, 왔다갔다하기는 좀 힘들지 않아요?" 솔직히 이 꼬마 악마들과 같이 있어봐야, 나만 고달프다. 게다가 난 지금부터 이모&고모 범벅들이 먹고 남긴 그릇들도 처리해야 하니까. 물론 내가 그릇을 먹어치운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난 애들 돌볼 시간이 없다. 바쁘다. 결국 어마마마도 그게 조금은 미안한지. "얘들아. 그럼 백화점에 같이 갈래?" 하지만 이 녀석들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어차피 이 녀석들이 선택할 길은 뻔하니까. 데리고 갈 생각이 있다면, 그냥 끌고 갔어야 하는 것이다. 이거, 어마마마의 책임회피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일은 달갑지 않게도, 내 예상대로 진행되었으니. "오빠하고 같이 있을래요." "엄마. 아빠. 데이트 잘 하고 오세요. 쪼옥." "형아하고 있는 게 재미있어요. 여기 있을게요." "그럼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요, 요 녀석들이 ! 물론 이 녀석들이 날 좋아해서 이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아까부터 다 알아봤다고. 그렇다면 이 녀석들의 목적은. 내 눈에 방안의 보물들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지금은 추억이나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 꿈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어마마마는 이미. "그럼 우린 백화점에 다녀올 테니, 애들하고 잘 놀고 있어." "엑 !"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오오. 내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나가버리는 이모, 이모부, 고모, 고무부.... 아니 고모부들. 이 사람들이 대체. 애를 낳기만 하고 돌볼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거냐. 이 치사한 어른들아 ! 게다가 다 가 버리면 나 혼자 이 많은 애들을 어떻게 돌보라고. 어림잡아 다섯은 넘는 것 같은데. 나는 마지막 수단으로 어머니를 쳐다봤지만. "두 시간만 있으면 미인이가 온다니까, 조금만 애들하고 같이 놀아주면 될 거야." 어마마마 ! 어마마마 ! 어마마마아아아아아 ! 결국 나는 꼬마 악마들과 함께, 황량한 집 한가운데에 남겨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막으려고 해도, 이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이란 건. "때로는 애들하고 놀아주기도 해야지. 그래야 사랑 받는 형아, 오빠가 된다고." 하지만 여동생하고 놀아준 결과는 언제나 미움받는 오빠인데요. 그런 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밀려나오려고 했지만, 이미 다들 달아난 뒤니 소용이 없었다. 이 사람들이. 놀러 갈 때만 동작이 빠르냐. 물론 이모나 고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상당히 예의 없다는 걸 모르는 나는 아니다. 하지만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속으로 생각하는 거니까 괜찮다 ! 게다가 이렇게 원망이라도 하지 않으면,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게다가. "와. 부수자." 이런 소리가 언제 들릴지 모르는 것도, 두통의 원인이었다. 물론 아직은 이 녀석들이 이렇게 외치지는 않았지만, 눈빛부터가 그렇게 보였다. 오해냐고? 망치나 톱을 들고 어슬렁거리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믿어주겠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일단 내 방의 문은 잠가 두었지만, 망치와 톱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말짱 헛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녀석들이 그렇게 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일단 접시들을 치우면서, 나는 그 방법을 계속 궁리했다. 이미 슬금슬금 내 방으로 다가가는 녀석들의 기척을 느끼면서. 흑. '저 녀석들의 인해전술을 무슨 수로 막나.' 가만. 인해전술이라. 그건 중국식이니 이걸 막아내려면........ 아 ! 중국 생각을 하는 순간,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이럴 때를 위해 미리 꺼내둔 게 있었지. 나는 베란다에 미리 배치한 상자를 떠올렸다. 그래. 그거라면. 하지만 내가 이 녀석들에게 상자를 그대로 넘겨주면. "재미없어." 이렇게 말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이 녀석들이 스스로 찾아내어야 효과가 있는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와. 찾았다." 미끼를 문 거냐. 부서져서 넣어둔 프라모델, 품질이 나빠서 처박아둔 프라모델, 그리고 내 취향에 맞지 않는 피규어들이 모조리 꼬맹이들의 손에 넘어갔다.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보물들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저건 이미 폐기 처분한 물건들이니까. 다만 이 녀석들에게 그걸 눈치 채이지 않게 하려면. ".........." 침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꼬마들이 난리를 치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와그작. 우드득. 뿌직. 와지끈. 들리는 소리가 왠지 가슴을 조이는 듯 하다. 아무리 내가 버린 물건들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한때는 내가 애정을 쏟아 붓던 보물들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억지로 그 소리를 외면했다. 꼬맹이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휴우. 다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손에서 고무장갑을 벗으면서 나는 거실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방문을 톱으로 켜는 소리는 안 들렸으니 큰일은 터지지 않았겠지만, 과연 미끼로 넘겨준 물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 눈에 보인 것은. ".........." 차라리 안 보고 말 걸. 거실 전체에 꿈의 잔해들이 널려 있고, 이 녀석들은 열심히 프라모델들을 부수고 있었다. 아무리 장난감의 원리를 알아내려면 한 번 부숴야 한다지만,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니냐. 무엇보다도. '이걸 다 치우려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현기증 난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소파에 몸을 기댔지만. "아앗 !"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그 노랫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애고. 아파. 도대체 소파에까지 프라모델의 잔해를 던져두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망할 녀석들. 게다가 그 비명으로 내가 있는 걸 알아챈 꼬맹이들이 일제히. "형아. 우리 놀자." "오빠아. 우리 놀자." 내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이 녀석들은 내 위에 올라탔고, 그리고 이들이 한 짓은. 와드득. "으악 !" 비명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들, 내 팔이 무슨 돼지 족발이냐. 깨물게. 나는 녀석들을 억지로 팔에서 떼어냈지만, 이 녀석들은 내 팔에 결사적으로 매달린다. 못된 녀석들. 힘으로 녀석들을 일단 풀어내기는 했지만, 이 녀석들은 굉장히 아쉬운 표정으로. "형아 팔은 물어보면 감촉이 좋아서." "오빠아. 한 번 더 물어도 돼?" 물지 마. 이것들아. 나는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TV를 켜려고........ 잠깐. 여기 소파 위에 있던 TV용 리모콘이 어디 갔지? 이리저리 손끝으로 찾아봤지만, 없다. 어디로 튄 거냐? 소파를 내려다보던 내게서 비명이 터졌다. 내가 본 것은, 리모콘의 잔해였던 것이기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 이 녀석들이 무슨 짓이냐. 리모콘을 부수다니. 마구 화를 내는 어마마마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물론 이걸 부순 건 내가 아니지만, 어머니는 아마도. "넌 어떻게 애들을 그렇게 못 다루니?" 이러실 게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부쉈다고 오해나 하지 않으시면 다행이고. 머리를 싸매는 내 주위로, 서서히 다가오는 꼬맹이들. "오빠아. 놀자." "형아. 놀자." 그리고 다시금 입을 벌려서........ 악 ! 나는 재빠르게 팔을 그 녀석들의 입에서 치웠다. 이거 정신 안 차리면 큰일나겠어. 이 녀석들의 손을 보니. '다 부쉈구나.' 미끼 프라모델이 다 박살난 상태라는 것은 위험신호였다. 여기서 재빨리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 녀석들은 다음 제물을 찾아서 발길을 옮길 것이다. 슬슬 이 꼬마들의 얼굴에는 지루함이, 권태로움이 떠오르고 있다. 어서. 서둘러야 한다. 나는 TV를 향해 몸을 날렸고, 재빨리 스위치를 눌렀다. 손으로. 리모콘이 박살났으니 이럴 수밖에. '망할 녀석들.' 곧 TV가 켜졌다. 다행스럽게도, 이 녀석들이 TV까지 부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단 안심. 그러나 문제는. "오빠아. 아롱다롱 나롱이 보자." 뭐? 아롱다롱?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프로그램 이름이 뭐가 그 따위냐? 일단 채널을 돌려보는 나에게 들리는 또 하나의 의견. "형아. 바가지 라이더 보자." 뭐? 바가지 라이더? 그건 또 뭐냐? 다시금 채널을 돌리는 나에게 날아온 의견은. "오빠아. 방가방가 햄버거 보자." 뭐? 그건 또 뭐 하는 프로그램이냐? 아니, 그보다 제대로 된 한글인지부터가 의심스럽다. 방송국 사람들은 대체 어째서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거냐? 속으로 우리나라 방송사를 욕하면서 채널을 또 돌린다. 하긴 그 모양이니까 사극의 고증이 언제나 그 모양이지. 듣자하니 조선시대의 일본군 조총이 연발로 나간다고 말이 많던데. 하지만 그에 대한 불평은 일단 뒤로 접어두자. 지금 당장 문제는. "오빠아. 아롱다롱 나롱이 보자.' "형아. 바가지 라이더 보자." "오빠아. 방가방가 햄버거 보자." "형아. 기동전사 건달 씨앗 팔자 보자." "오빠아. 수박 100% 보자." "형아. 미국 사랑 이야기 보자."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지금 방영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총출동할지도 모른다. 나는 허공으로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중지. 중지. TV는 하나라고. 한 가지로 통일해 !" 솔직히 저 녀석들이 제대로 애니메이션 제목을 알고 외치는 건지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일단 이 녀석들을 얌전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난 애들을 다루는 재능은 없다. 정말 없다. 어머니께서 굳이 나를 타박하지 않더라도, 없는 건 없는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여동생이 여기 있었다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을 텐데.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된다. 정신 차리고. "아. 오빠 또 미인이 언니 생각한다." "역시 시스터 콤플렉스(sister complex) 형다워." "언제나 그렇잖아. 우리가 어른답게 이해해 주자고." 잠깐. 앞의 두 문장이야 그렇다 치고.........가 아니지만 ! 마지막 문장의 내용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었다. 너희들이 뭐가 어른이냐. "어른이 TV 리모콘을 부수냐?" 적어도 어른이라면 친척집 물건을 마구 부수지는 말아야지. 하지만. "응."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꼬맹이들. 내가 반론을 펴려고 하는 순간, 꼬마 하나가 TV 앞으로 걸어오더니 채널을 돌린다. 뉴스가 나온다. 국회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자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물건을 마구 부수는 광경이 나오기에. 아이고. '역시 저것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저런 물건들에게 국가 예산을 쓰는 게 갑자기 아까워진다니까. 여기저기서 웃는 꼬맹이들의 소리에, 나는 더욱 더 미칠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그걸 보고 이 꼬맹이들이 한다는 말은. "어른은 이렇게, 물건을 잘 부수는 거야." 이 녀석들아, 국회의원을 판단기준으로 삼지 마 ! 나는 애들 교육에 안 좋은 장면이 마구 나오는 국회의 모습을 TV에서 지우기 위해, 다른 쪽으로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문제는. "와아. 오빠 야해." "역시 형아는 이런 것만 좋아하네." 이런. 어째서 대낮에 이런 게 나오는 거야? 화면 안에는, 여자 연예인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서 장애물 경주를 하다가, 비키니 상의가 벗겨지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들이. 어느 인간이 저런 게임을 기획한 거야? 나는 다시금 채널을 돌렸지만. "오빠아. 아롱다롱 나롱이 보자.' "형아. 바가지 라이더 보자." "오빠아. 방가방가 햄버거 보자." "형아. 기동전사 건달 씨앗 팔자 보자." "오빠아. 수박 100% 보자." "형아. 미국 사랑 이야기 보자." 똑같은 소리를 또 하지 마라. 이 꼬마들아. "오빠아아아 !" "형아아아아 !" 결국 프로그램 하나를 선택해서, 일단 꼬마들을 진정시키는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 과정이 길게 걸려서 문제였지만. 문제는 원래 애들용 프로그램이란 게 2시간을 계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꼬마들은 뭘 보느냐를 두고 싸우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고, 결국 그들이 본 프로그램이....... 뭐였더라? 어쨌든 그들의 시청시간은 5분을 넘기지 못했다. 잔뜩 울상이 된 꼬마들이었지만, 사실 이건 자초한 것이니 별로 동정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 문제는. "재미없어." "재미없어." "재미없어." 독창성 없는 녀석들. 하지만 이게 불평으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인데..... 이 녀석들 하는 짓 좀 보소. "이 녀석들아. TV 고장나겠다." 나는 열심히 채널변경버튼을 눌러대는 꼬마들을 TV에서 떼어냈지만, 이건 해결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녀석들을 진정시키나. 정말 골머리 아프게 하는 녀석들이라니까. 여동생은 예쁘기나.......아. 삭제. 나는 신문을 가져와서, 오늘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뭐가 있는지 살폈지만. "없잖아?" 왜 하나도 없는 거냐. 아까는 넘치도록 많더니. 방송사조차 날 골탕먹이기 위해, 애들용 프로그램은 전부 똑같은 시간에 방영되게 한 건가. 하지만 요즘은 공중파 방송만 방송인 게 아니다. 유선방송이 하나둘이냐. 나는 재빠르게 유선방송 중 적당한 곳이 있는지 살폈다. 아. 살피기보다는 차라리. 삑.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 좋겠지. 아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차라리 이 녀석들에게 채널 선택권을 맡기고 숨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 TV까지 박살나면 대책이 없다. 좋든 싫든, 감시를 게을리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만화가 나온다며 TV에 달라붙는 꼬맹이들. 그런데 이건. "수가 적네?" 왠지 머릿수가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방에 여자아이 몇 명이 들어가서, 어머니 화장품을 집어들더니, 뚜껑을 열고.... "먹지 마 !"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화장품을 빼앗았다. 이 녀석들. 화장품이 무슨 음식인 줄 알아. 애들이 뭐든지 입에 넣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잘못했으면 119 구조대를 부를 뻔했잖아. 그러나 아직 일은 안 끝났으니. "휘두르지 마 !" 이 꼬마들이 무슨 짓을 ! 여자아이가 그렇게 난폭하게 행동하면, 미인이처럼 된다고 ! 나는 손거울을 파리채처럼 휘두르는 꼬마에게서 그것을 낚아챘다. 이미 이 녀석이 이모 쪽 애인지, 고모 쪽 애인지, 그게 아니면 또 다른 쪽 애인지는 기억도 안 난다. 그걸 판단할 기력도, 정신도 없다. 일단은 이 녀석들을 안방에서 쫓아내야 하므로. "자. 자. 여기서 놀면 안 돼. 착한 아이는 그런 거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간신히 여자아이들을 안방에서 몰아냈지만, 내가 쉴 틈이란 건 없다. 전혀 없다. 망치와 톱을 들고 내 방으로 다가가는 사내아이들을 봤으니까. 나는 또다시 부리나케 달려가서. "애들은 그런 거 들면 안 돼 !" 후다닥. 일단 망치와 톱을 압수하지만, 왜 내가 경찰도 아닌데, 이런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조직폭력배라도 단속하는 중이냐. 하지만 한탄은 사치라는 것을, 적어도 오늘만큼은 사치라는 것을 나는 2초도 못 가서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톱과 망치를 치우던 중이 아니라, 치운 후 2초만이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올라가지 마 !" 거실의 장식장 위로 올라가는 꼬마 둘을 발견한다. 죽어라 달린다. 내려놓는다. 이 녀석들이. 거기서 떨어지면 머리 깨진단 말야 ! 그나마 너무 높이 올라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랬으면 의자까지 동원했을 듯..... 와장창. "뭐, 뭐냐?" 이런. 거실에 있는 장식장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무너진 장식장 앞에 약간 얼빵한 얼굴로 서 있는 꼬마. 이 녀석이 이모 아들이었더라. 고모 아들이었더라. 솔직히 몇째 고모인지는, 이미 기억에도 없다. 그나저나, 용케도 안 다쳤구나. 이걸 칭찬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저주해야 하나. 장식장에서 떨어진 물건의 정체는. "휴우. 다행이다." 다행스럽게도, 떨어진 물건이 도자기가 아니라 트로피여서 그런지, 일단 부서지지는 않았다. 이게 아마 아버지가 골프장에서 받은 홀인원 기념패였던가? 일단 제자리에 돌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려다가. 꿀꺽. 도로 삼킨다. 이 녀석들이 무슨 사고를 칠지 감시해야 하니까. 그리고 내 생각은 적중했다. 이번에는. 쿠당탕. "아아앙." 이번에는 또 뭐냐. 나는 욕실 쪽으로 죽어라 뛰었다. 혹시 바닥에 미끄러진 건가? 그래서 머리가 깨지기라도 한 건가? 나는 욕실 문을 활짝 열어 젖혔지만. "아, 아니구나." 일단 꼬마 머리통이 깨진 건 아니어서,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아래에 떨어진 세제 통을 보며 절망했다. 이게 얼마 어치인데, 이걸 다 엎어버리는 거냐. 그나마 바닥이 마른 상태라는 것만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비참하다. 일단 쓸어 담으면서, 나는 꼬마라는 생물체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다. 도대체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이란 말인가. 나에게는 정말 평안한 날이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하지만 청소가 끝나기도 전에. 쾅. 와장창. "이, 이번엔 또 뭐냐?" 이번엔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허겁지겁 달려간 나에게 보인 것은, 부서진 접시 무더기였다. 이 녀석이. 어떻게 찬장을 열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어떻게 그걸 다 꺼내서 부쉈는지도 수수께끼였다. 의자도 없이 싱크대에 어떻게 올라갔냐.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와아. 형아. 던지기 놀이하자." 접시 하나가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급히 몸을 피했지만, 날아간 접시는 벽에 부딪쳐서 깨졌고, 그 조각들이 바닥을 덮었다. 또 하나의 접시를 집는 꼬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결국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야 ! 이 개 같은 자식아 !" ".........악몽이었어." 나는 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나는 건 오직 하나뿐. "끝났다." 그렇다. 드디어 오늘 하루가 끝난 것이다. 오로지 울고, 울먹이고, 눈물 흘리며, 슬퍼하기만 했던 하루가. 그 외에 다른 감정이 들어갈 틈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 그런 사치스런 틈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없다.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 게 있으려고 해도. "어지러워." 어지러울 수밖에 없는 게, 하루종일 뛰어다니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 꼬맹이들이 이번에는 어떻게 사고를 칠지 두려워하며, 부서진 접시를 치우면서 나는 이런 발칙한 짓을 저지른 꼬마에게 마땅히 형님으로서 응징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보니 TV 수상기가 깨져 있다. 꾸중하고 기술자 부르고 접시 조각 치우고, 애들을 안방으로 밀어 넣고 날뛰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기술자들이 TV를 고치는 걸 보며 골머리를 앓고. 거기다가 수리비용까지. 거기에 추가해서, 기술자들이 돌아가자마자 사고가 터졌다. 이번에는 이 녀석들이 화장실에다가 비누를 던져서..... 결국 나는 정의의 이름으로 이 못된 꼬맹이들을 응징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상황을 본 이모와 고모 무더기들은 일제히. "문구야. 애들 좀 제대로 돌봐라." 이 인간들이. 부서진 접시 값하고, 막힌 변기하고, 깨진 TV 수리비나 내놓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래요? 물론 그들은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극히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럼 어마마마는, 어마마마는 어떻게 하셨냐고? 내가 죽어라고 상황을 설명하며 애원했건만, 이 말만 남기고 튀어나가셨다. 그것은. "문구야. 나 지금 약국에 가봐야 하니까, 뒤처리 좀 부탁한다." 어, 어마마마. 어마마마. 어마마마 ! 그 덕분에 나 하나만 친척들에게 깨진 것이다. 동생들을 괴롭히는 나쁜 형아, 오빠로서 말이다. 물론 내가 고통을 겪는 걸 보면서, 사악하게 웃는 꼬맹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이것이 맞벌이 부부를 부모님으로 모시는 자의 숙명인가. 어마마마만 계셨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바마마야 매일 바쁘시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아니, 이 모든 사태는 순전히. '이 녀석은 대체 어디로 놀러 간 거야 !' 그렇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여동생도 필요하니까 없어진다. 그 덕에 나 혼자서만 꼬맹이들에게 조롱당하고, 친척들에게 시달린 것이다. 나 혼자서만 말이다. 갑자기 여동생의 저주가 생각난다. 선명하게. "나랑 같이 안 가면, 오빠는 내일 끔찍한 일을 겪을 거야." 이 망할 녀석. 알고 있었으면 어떻게든 막아줬어야 하는 게, 여동생으로서의 의리가 아니냐.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여동생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폭발했다. 이모나 고모 무더기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억울하게 계속 야단만 맞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결국. 쾅. 내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버렸다. 침대에 몸을 던지면서, 소리를 빽 질러 버린다. "집을 다 부수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라고 ! 난 이제 몰라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뜨거워진다. 하긴 요즘 날씨가 좀 덥긴 하니 무리도 아니지만, 방안의 에어컨을 켜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귀찮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싫어서이다. 어차피 오늘은 너무 많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더는 움직일 기력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화가 나서, 움직이고 싶지도 않다. 화풀이할 곳도 없는데, 움직여서 뭐하냔 말이다. 나는 다시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나중에 이 인간들이 날 뭐라고 욕하든, 이젠 나도 모른다. 빌어먹을..... "오빠. 일어나. 저녁은 먹고 자." 이 인간아. 내가 지금 지쳐서 쓰러진 것도 안 보이는 거냐. 나 좀 자자. 잠이나 자게 해라. 오빠의 마지막 소원이다. 하지만 원래 여동생에게는 내 하소연 같은 건 들리지도 않으니.... "냉큼 일어나 !" 에? 이 녀석이 왜 여기 있지? 지금쯤 풍남이와 같이 방탕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지 않았나? 보나마나 호텔에 둘이 들어가서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게 아니면 문희와 같이, 나를 놀리며 웃고 있지 않았던가? 꿈일 거야. 이건 꿈일 거야. 어차피 오늘은 나쁜 일만 일어났으니, 여기에 꿈까지 개꿈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 "일어나지 못해?" 쿠당탕. 아구구. 나는 침대 아래로 떨어진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시야를 가리는 두 개의 가슴. 정말 크기는 크구나. 그리고 그 가슴 사이로 쏙 튀어나오는 여동생의 머리. 아구구. 이 못된 녀석. 벌써 돌아온 거냐. "야. 나도 잠 좀 자자." 이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원래 여동생 앞에서는 맘대로 떠들지도 못하는 게 내 운명이다. 그녀는 내 멱살을 잡더니. "자. 밥 먹으러 가자고." 으. 이게 오빠를 대하는 예의바른 태도냐. 하지만 이젠 솔직히 따질 기운도 없다. 그럴 기운은 이미 꼬맹이들에게 전부 소모했으므로. 나는 그저. "기운 없어." 이상 끝. 축 늘어진 내 꼴을 보던 여동생은 침대에 나를 도로 눕히고.........가 아니지. 이 녀석이 그런 온정을 베풀어줄 리가 없잖아. 그녀는 내 멱살을 그대로 잡은 채로. "자. 자. 그러니까 빨리 밥 먹어야지. 일단 목욕부터 하고 와." 애구구구구. 이 녀석아. 막힌 변기가 있는 곳으로 나를 밀어 넣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그러나 욕실을 바라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 "에?" 욕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무리 여동생의 신비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얌전히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정리를 해둘 수 있지? 눈앞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여동생이, 오늘따라 더 기괴하게 보였다.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모나 고모 무더기들은 다 어디 가고? 그리고 이 악마 같은 꼬맹이들은? 여동생이 웃으면서. "궁금해?" 당연하지. 아무리 내 여동생이 공포의 여동생, 악몽의 여동생, 불가사의한 여동생이라고는 해도, 이건 뭔가 이상하잖아 ! 설마 혼자서, 그 난장판을 다 정리했다는 거냐? 아무리 지상 최강의 여동생이라지만, 네가 손이 무슨 열 개쯤 되는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오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물 한 잔을 마시고. "엄마가 전화를 해주시더라고. 지금 오빠가 꼬맹이들의 습격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엄마는 약국 일로 집에 갈 수가 없으니 내가 빨리 가서 구하라나? 엄마도 참. 오빠를 걱정하는 건 좋은데, 너무 호들갑을 떠신다니까. 이젠 오빠도 다 컸는데." 네가 내 누나냐? 왜 그런 황당한 표현을 하는 거냐?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서양식으로 하면, 먼저 태어난 오빠가 내 동생이라고." "여긴 대한민국이야 !" 웃음을 참는 여동생,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나. 게다가 서양에서 정말로 그런 기준을 적용하는지도 솔직히 미심쩍은데, 이 녀석은 태연하게 '확인되지도 않은 지식'을 가지고 나를 놀리고 있다. 못된 녀석. 그리고 그녀는 봉투 하나를 꺼낸다. 식탁에 놓이는 충격이 장난이 아닌데. 이건 뭐냐? "자. 이건 TV 수리비하고 기타 부대비용. 이모들하고 고모들한테 확실히 받아냈으니까, 잘 받아 둬. 듣자하니 오빠가 TV 수리비를 다 부담했다면서? 엄마가 그것도 잘 챙기라고 하시더라." 내 하소연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일단 핵심은 꼬박꼬박 챙기셨다는 건가. 잠시 나는 어머님 은혜에 감사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구나. 바쁜 와중에도 자식을 생각하시다니. 그런데 한 가지. "그런데 너....." 어떻게 그 녀석들을 진압하고, 친척들에게서 배상금을 받아낸 거냐? 상황설명이야 어마마마가 이 녀석에게 다 해줬을 터이니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 점이었다. 막대한 액수가 걸린 일이니 당연히 꼬맹이들은 시침을 뚝 뗄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 녀석들의 입을 연 거지? 게다가 이모나 고모들의 지갑은 또 어떻게 열었고? 그러자 여동생은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쪽 뺨에 대더니 눈을 살며시 감고. "여동생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거야."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런데, 넌 재미있게 놀았냐?" 나는 체육복 차림의 여동생에게 깔려서, 근육 마사지를 받는 중이었다. 원래는 그냥 밥 먹고 자려고 했지만, 여동생이 우기기를. "운동선수가 자기 몸을 관리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국가대표를 하겠다는 거야?" 그 덕에 이렇게 깔려 있다. 일단 아마추어치고는 꽤 괜찮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동생은 원래 그런 애니까 감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가만. 가만. 이 녀석은 오늘 뭘 하고 지냈을까? "응. 재미있었어. 다음에는 풍남이하고 유럽 여행도 같이 가기로 했고." "푸훕 !" 이,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유럽 여행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설마 이 녀석, 정말 풍남이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건 아니겠지? 어리둥절한 나에게 설명해주는 그녀. "풍남 그룹이 출자한 유원지하고, 그 근처의 풍남식품 공장에 갔었어. 나중에 자기 회사에 입사하라고 하면서, 자랑스럽게 생산라인을 보여주더라고." 하긴, 풍남이가 데이트 코스로 잡는 데가 뭐 그렇지. 낭만도 없는 녀석 같으니. 그런데 그거하고 유럽여행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냐? 그러자 이 녀석은. "자세히 보니까, 그쪽 라면 생산라인에 바퀴벌레가 들어가 있더라고." "크윽 !" 이, 이 녀석. 만약 지금이 식사시간이었다면 난리가 났을 거다. 나는 황당한 소리에 놀라 머리를 앞으로 쓰러뜨렸지만, 즉 방바닥에 얼굴을 격돌시켰지만 이 녀석은 놀라지도 않는다. 하긴 강철로 만든 심장을 지닌 녀석이니 당연한가? 그녀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걸 사람들한테 말해줬더니, 생산라인이 멈추고 난리가 났더라고. 나중에 사장이 직접 와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뭔가 보답할 게 없겠냐고 해서 유럽 여행을 선택한 것 뿐이야." "돈으로 달라고 하지." 풍남이하고 같이 다닐 바에는, 그쪽이 더 이득일 것 같은데? 그러나 여동생은. "오빠. 여행의 즐거움도 좀 배워. 그리고 이왕 유럽에 가는 이상, 유럽의 축구도 보고 오는 게 견문을 넓히는 데 좋아. 나중에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면 말야. 그리고." "그리고?" "이번엔 안 간다고 앙탈 부리지 말고. 나중에 진희하고 가는 걸 말하지 않았느니 어쩌니 하면서 트집잡는 건 곤란하다 이거야. 아까 보니까 잠꼬대로 날 아주 원망하시던데?" "네가 진희랑 같이 놀러 간다는 말을 안 했으니까 그렇지 !" 못된 녀석 같으니. 그 소리를 안 하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하냐 ! 그리고 요즘 세상에 어딜 놀러간다면 당연히 여자친구와 같이 놀러가지, 여동생이랑 같이 놀러 가는 녀석이 어디 있냐 ! 일부러 말을 안 한 거지 ! 그러나 여동생은. "그럼 물어보지 그랬어? 내가 누구하고 같이 가는지." 삑.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여기에 여동생이 날리는 마지막 일격. "때로는 여동생의 교우관계에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래." "아구구구구."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자는 거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있어서 잠을 청하기가 힘들었지만, 일단은 자야 했다. 나도 내일 새벽에 운동하러 뛰어나가야 하니까. 그런데 유럽여행이라. '진희와 같이 하는 유럽여행이라.' 여러 가지로 기대가 되기는 하지만, 옆에 방해물들이 따라간다는 게 좀 꺼림직 했다. 보나마나 풍남이도 동행할 것이고, 어쩌면 문희도 같이 올지 모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포의 여동생이 동행할 게 분명하니 좀 으스스하긴 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회다." 그렇다. 이건 기회였다. 잘하면 이번 기회에 진희와 정식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물론 젊은 남녀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부모님에게는 안 좋게 보일지 몰라도, 나이든 사람 하나만 동행시키면 그것도 문제가 없다. 그리고 연미 누나라면, 그런 연장자로서 문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사악무도한 진희 아버지라면 당연히 반대하려고 하겠지만, 국내 제일의 재벌 후계자와 여행하는 이상 그가 방해하기도 좀 곤란할 것이다. 풍남이의 힘, 아니 여동생의 힘을 빌린다는 게 좀 꺼림직하기는 하지만. 게다가 풍남이 녀석, 오늘 불량품 적발건으로 진짜 여동생에게 반한 건 아닐까. 갑자기 불안해지지만. '뭐, 알아서 잘 하겠지.' 내 여동생이 폼으로 지상최강의 여동생이겠는가. 이럴 때는 여동생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오늘은 너무 힘든 날이었으니까. 내 눈이 서서히 감겨갔다. 고달픈 하루를 배웅하면서.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2화 왔노라. 보았노라. 놀았노라 (1) 나는 달린다. 발끝에 달린 공과 더불어. 내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저기. 일본. 일본 팀의 골문.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청소년대표선수로서, 저기에 공을 집어넣을 신성한 의무를 띄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오소이 !"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느리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건방진 쪽바.....아니 일본인에게는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해줘야 할 것이다. 일단 공을 약간 올리면서, 코에 한 방. 쾅. "웩 !" 누가 일본 선수 아니랄까봐, 코에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심판을 곁눈질하더니, 잽싸게 머리를 감싸며 뒤로 넘어진다. 그런데 말야. 공은 당신 코 근처에도 안 갔다고. 공이 간 곳은. "잘했어. 문구." 내 옆에 있는 홍만보 선배의 발끝이라고. 수비수이면서도 가끔씩은 이렇게 공격에 가담해서, 적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선배의 중거리 슛이, 쪽바........아니 일본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일본 골키퍼가 기겁을 해서 공을 쳐내지만, 그 공은 내 발 앞으로 날아 들어왔다. 자. 받아라. 일본. '됐어.' 공중에서 서서히 떨어지는 공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내 발에 맞은 공이, 느릿느릿 골문으로 날아간다. 일본 골키퍼가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고 해봤지만, 그가 선배의 슛을 막느라 몸을 날린 방향은 골문의 왼쪽이었고, 내가 찬 공이 날아가는 방향은 골문의 오른쪽이었다. 당연히 몸을 일으켜서 다시금 뛰어오를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일본 수비수들 역시, 우리들의 재빠른 공격에 미처 따라올 겨를도 없었고. 철렁. 들어갔다. 나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럴 때 기자들에게,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준비한 골 세러머니가 있었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난다. 그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외칠 뿐. "넣었다 !" 전광판 화면에는 내 모습이 커다랗게 비춰지며, 모든 선수들이 나에게 달려왔다. 감격의 포옹. 그리고 우리 팀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들의 함성. "대~~한민국 !" 쿵쿵. 쿵쿵쿵. 북이 울리고, 꽹과리가 마주친다. 화면에는 나의 모습과, 전국의 축구 팬들의 거리응원이 비춰진다. 그들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국민 전부가. 단지 일부 몰지각한 친일파들과, 일본 응원단만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뿐. 내가 골을 넣는 장면이 다시 보여진다. 아나운서의 외침과 함께. "슛 ! 골인 !" "해냈습니다. 대한건아 연문구 선수, 드디어 일본 골문을 갈랐습니다. 기쁨의 외침을 터뜨리는 연 문구 선수. 아. 일본 골키퍼가 땅을 치고 있네요."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슈팅이었어요. 누가 후반 47분, 인저리 타임에 이런 극적인 역전골이 터질 줄 예상했겠습니까. 후반 45분에 홍만보 선수의 극적인 동점골. 그리고 다시 후반 47분, 인저리 타임에 터진 연문구 선수의 기가 막힌 발리슛. 정말 극적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태극전사, 연문구 선수가 해냈습니다." 완전히 무너진 일본 선수들이 억지로 다시 일어서서 공을 차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만회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주심이 종료 휘슬을 분 것이다. 일본 선수들이 땅을 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여. 선배들이 달려온다. 기쁨에 겨워 마구 뛴다.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그것도 일본과의 경기에서 자랑스런 득점, 그것도 역전골을 터뜨렸기 때문에. "이것으로 우리 팀은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8강 진출을 확정지었습니다. 이제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축구를 기대하면서, 중계방송을 여기서 마칩니다. 밤잠을 설치며 응원해주신 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우리 자랑스런 태극전사들이, 일본을 격침시키고 아시아 정상임을 다시금 입증했습니다........" "만세 !" 나는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해냈다 ! 드디어 내가 해내고 말았다 ! 드디어 내가, 악의 제국 일본을 꺾고, 우리나라에 승리를 바친 것이다. 진희야. 문희야. 담임 선생님, 꼬마 선생님, 아버지, 어머니, 부장님, 시내야. 기뻐해 줘. 내가 해냈어. 해냈다고. 내가....... 퍽. "아구구구구." 나는 머리를 뭔가에 맞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푹신한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받쳐주는 바람에 큰 부상은 면했지만, 이건 무슨 난리란 말인가. 자랑스런 승리를 거둔 축구 꿈나무에게.... "뭐가 축구 꿈나무야." 이, 이 목소리는. 나는 언제나 당하는 바로 그 일을 떠올렸다. 설마, 이것도 꿈이었던 말인가. 안 돼. 이건 불합리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너무해. 오. 신이시여. 이런 식으로 저를 조롱하시는 것입니까. 이건 정말로..... "뭐가 안 돼." 내 옆자리에서, 뾰로통해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눈물을 삼켰다. 그런가. 역시 이번에도 꿈인가. 하긴 아직 전국대회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 내가 청소년대표로 선발될 리가 없었지. 그런데 잠깐. 내가 왜 앉아서 자고 있지? 게다가 이 의자의 질이 너무 좋은 걸로 봐서는, 절대로 여긴 학교가 아닌데? 그럼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뭔가 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는 여동생. "비행기 탔으니까 그렇지. 이제 슬슬 도착할 시간이니까, 그만 잠에서 깨라고." 에? 내가 왜 비행기에 타고 있는 거냐? 잠시 여동생의 폭행으로 인해 흐트러진 뇌세포를 정돈하느라 시간을 보낸 후에야,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아. 그랬지." 그랬다. 나는 지금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이다. 유럽으로 가기 위해. "안 돼. 난 못 가."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는 처음에는 여동생과의 유럽여행을 거절했었다. 물론 처음에야 진희와 유럽에 가는 것이니까 조금은 혹했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축구가 있었다. 일단 나도 축구선수이고, 전국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연습을 해야 했으며, 우리 학교의 주전선수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불량한 2학년들이 무더기로 쫓겨난 사건 이후로 우리 팀은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만큼 더 연습을 해야 했다. 그 결과는. "여행갈 시간이 없어 !" 언제나 여동생과 웃고 떠들기만 한다고 착각하는 지우 녀석의 모함이 있든 말든, 나는 실력을 키워야 했다. 어차피 별 일이 없으면 우리 학교의 인맥으로 보아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실력은 있어야 하고, 실적도 있어야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인맥과 연줄로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안 그래도. "공공의 적, 축구협회의 추천이라면 욕 많이 먹는다고." 그러니 나는 실력을 쌓아야 했다. 가을에 있을 전국대회에서 우리 학교를 우승시킨 후, 당당하게 청소년대표선수가 되어야 하므로. 하지만 이 계획의 문제점은. "청소년 국가대표? 안 돼 !" 어마마마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의 반대가 워낙 극심하다는 점이었다. 즉. "넌 나중에 의사가 되어야 해. 내 뒤를 이어야지." 이건 아바마마의 의견. "너 정도면 대기업 임원이나, 종합병원 원장이 될 수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축구냐? 반대 !" 이건 어마마마의 의견. "우리 가문을 빛내기 위해선, 역시 '사'자가 붙은 직업이 좋겠지?" 이건 할아버지의 의견. "역시 이 사회는 돈이 최고니까,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좋을 거야." 이건 친척들, 특히 이모와 고모 무더기들의 의견. "형아는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는 게 좋아. 그래야 우리 장난감이 더 많아지니까." 이건 원수 같은 사촌 꼬맹이들의 의견. 내가 너희들 장난감 내놓는 기계냐. 그리고. "음. 문구의 직업이라. 역시 아빠를 설득하려면, 정치가 쪽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연미 누나. 꿈에 들을까 겁나는 소리는 하지도 마요. 어쨌든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반대한다는 점에서, 내 청소년 국가대표라는 희망은 짓밟힐 공산이 컸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 이번 대회에서 말이다. 가만. 가만. "문구야. 같이 가자." 문희야. 왜 너까지 유럽에 가는 거냐. 보나마나 풍남이와 진희, 그리고 미인이가 간다니까 억지를 써서 끼어 든 거겠지만, 네가 가자고 해봐야 솔직히, 전혀 매력이 없다? 무엇보다도 수다쟁이의 대화상대를 해주기 위해 내 황금 같은 연휴를 날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진희가 같이 간다고는 하지만, 이 시대의 2대 악인인 문희와 미인이와의 동행을 각오하면서까지 이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 보나마나 진희와 같이 있을 시간은 없고, 여동생의 뒷바라지만 해주다가 올 게 뻔한데. 그런데. "오빠. 여기 여권. 아빠가 준비하셨대." 에? 왜? 난 안 간다고 한 것 같았는데?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친구와의 우정이 더 중요하지, 그깟 축구가 중요하냐?" 저. 아바마마의 속셈이 훤히 보이는데요. 이건 진희나 풍남이와의 교우관계를 돈독히 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제가 축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나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므로 따질 수는 없지만. 나는 축구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친구와의 우정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난 널 그렇게 기르지 않았다." 어마마마. 억지로 눈물 짠다고 해서, 제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아요. 결국 나는 그런 이유로, 유럽여행을 그냥 포기해 버렸다. 여동생이 걱정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문희가 있으니 그런 건 알아서 잘 챙길 것이고, 진희도 있으니 큰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아직도 청소년 대표가 되지 못했어.' 이대로라면 대학생이 되기 전에 청소년 대표가 된다는 내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즉, 조금만 더 머뭇거린다면, 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님들이 만들어놓은 인생계획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될 것이란 점이다. 축구를 포기하고 의사나 대기업 임원, 혹은 정치가가 된다? 나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난 아직 젊다고." 벌써부터 꿈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여동생은 식은 죽 먹듯 차는 UFO 슛을 아직도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동생도 차는데, 오빠가 못 찬다고 해봐라. 그 슛을 보고 축구부원들이 나에게 몇 번이나 물었는가. "문구야. 너도 그거 할 줄 아냐?" "뭐?" "UFO 슛." 그 질문을 얼버무리느라,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가. 그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고, 한 번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에는 못이 박혔다. 내 꿈을 이미 이룬 여동생이라니. 그래서 나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지만, 여태까지는 계속 좌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는 빗속에서 울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슛 ! 골인 !" "해냈습니다. 대한건아 연문구 선수, 드디어 일본 골문을 갈랐습니다. 기쁨의 외침을 터뜨리는 연 문구 선수. 아. 일본 골키퍼가 땅을 치고 있네요."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중계방송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이 비행기는 곧 파리 샤를르 드골 공항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를 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내가 현실에서 들은 방송은. 이 지경이었다. 이건 내가 듣고 싶은 방송이 아니었다고 ! 비록 내 옆자리에 진희가 앉아 있기야 하지만, 난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어. 어째서 일이 이렇게 비비꼬이는 거야? "배부른 소리는 하지도 마."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작 고등학생이 무슨 해외여행이냐고 따지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사랑하는 여인과 아리따운 여동생이 좌우로 포진한, 행복의 극에 달한 장면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지금 하고 싶었던 건, 축구장에서 연습하면서 청춘을 불태우는 것이라고 ! '그냥 내리자마자 비행기 타고 귀국해버려?' 그러나 축구부에 가봤자, 어차피 축구는 못할 것이다. 뭐? 축구를 너무 못해서 잘린 거냐고? 그럴 리가 있냐 ! 나도 누구처럼 UFO슛은 못해도, 최소한 바나나킥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기본 기량도 이 정도면 꽤 충실한 편이고, 이제 100m를 11초에 끊을 수 있는 주력도 갖추었으니. 그러나 내가 여동생의 유혹을 뿌리치고 축구부로 갔을 때는 이미. "아. 그래? 하긴 내가 봐도 문구 녀석은 요즘 무리했으니까, 알았어. 오빠한테 휴가를 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봐. 이봐. 분명히 넌 내가 교실을 떠날 때, 교실 안에 있지 않았어? 어째서 축구부 부실에 벌써 나타난 거야? 어느 길을 통해서 앞질러온 거야? 뭔가 상식을 벗어난 현상이지만, 저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니 그건 넘어가고........가 아니지 ! 휴가는 무슨 휴가 ! "선배님 !"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리하고 있다니, 난 아직 UFO슛도 완성시키지 못했고, 청소년 대표선수로 선발되지도 못했다. 그러니 만큼, 더욱 더 열심히 뛰어야 마땅할 터인데, 어째서 휴가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선배는. "너, 요즘 무리했으니까 1주일쯤 쉬고 와." Oh, No. 이건 여동생의 공작이 분명했다. 내가 축구대표선수가 되는 걸 시기해서, 그걸 막으려는 계략이 분명하다. 사람 좋은 홍만보 주장을 속여서, 나를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음모가 분명했다. 속지 마세요. 선배님. 난 아직. "하지만 오빠. 요즘 무리한 건 사실이잖아." "너 때문이잖아 !" 이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다가, 들어갔다. 사람들 앞에서 여동생에게 비난을 퍼붓다가는, 당장 그에 걸맞은 보복이 돌아오는 게 겁이 나서 그런 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여동생을 대외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오빠의 상냥한 마음씨로 인한 것이다. 어쨌든. "전 아직 기량이 부족하니까, 더 연습해야 한다고요. 선배님. 제발....." 다른 사람이라면 놀러 가고 싶다고 외칠텐데, 내가 이런 소리까지 하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조속한 시일 내에 청소년 대표가 되지 못하면, 나는 강제로 의대나 법대 등, 내가 전혀 가고 싶어하지 않는 쪽으로 진학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야 가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그것도 뭔가 맞는 게 있어야 갈 게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법조문이라면. '읽기가 싫어.'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법조문이란 걸 읽어보면 왠지 모르게 졸리고, 피곤하고, 따분해진다. 의학서적도 마찬가지다. 이상할 정도로 두뇌에 피로를 가중시킨다. 스포츠 과학에 관련된 원서들은 술술 읽을 수 있는데. 똑같은 영어라도, 독일어라도 머리에 들어가는 속도가 다르다. 역시 문장의 난해함보다는, 흥미와 관심에 따라 독해력이 좌우되는 것인가. 어쨌든. "이번에 청소년 대표가 되려면, 어떻게든 우리 학교를 우승시켜야 한다고요. 그것도 못해서야 어떻게 나중에 국제무대에.........' 툭. 애고고고고. 나는 주장의 느닷없는 어깨 치기에 비틀거렸다. 주장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너, 요즘 연습을 너무 하고 있어. 거기에 학교 공부도 언제나 상위권. 사람이 쇳덩이가 아닌 이상, 쉬면서 재충전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거야. 지금도 봐. 평소라면 이런 정도의 충돌은 간단히 감당할 텐데, 그렇게 비틀거리잖아." "아니에요. 전 이 정도는....." 비틀. 어느새 여동생이 나를 끌어안고 부축한다. 뭐야. 내 체력은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아냐. 이건 분명히 여동생이 내 음식에 독이라도 탄 게 분명해. 그러나 주장은 매정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푹 쉬고 오라고. 지금 네 상태로는 이번 여름의 지옥훈련을 견딜 수가 없어. 전국대회 이전의 마지막 휴가라고 생각하고, 편히 지내고 와. 알겠나. 문구." "네, 네." 결국 그렇게 나는 비행기를 탔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아무리 1등석의 의자가 푹신푹신하고, 기내 서비스가 훌륭하며, 150도쯤 의자가 뒤로 젖혀져서 잠자기 좋다고는 하지만, 이건 바늘방석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철갑상어 알이니 거위간이니 하는, 평소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금덩이 음식들이 제공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차피 먹어 버릇하지 않는 물건이라 별로 입맛에 맞지도 않고. '내가 김정일이냐.' 너무 고급 음식이라 솔직히 먹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다고. 그것도 팍팍. 여동생이야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이 녀석은 인간 같지도 않으니 제외. 진희나 풍남이, 그리고 연미 누나는 어차피 최고 상류층이니 그렇다 쳐도 말이다.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사람은. "이, 이거 너무 부담되는데." 하긴. 문희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그나마 나와 말이 통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니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하긴 한 끼니에 수 십 만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날리는, 부자들하고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다만 여동생은 어째서 저렇게 잘 적응하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딱. "안전벨트 안 매?" 이해가 안 되는 녀석에게 또 맞고 말았다. 그녀는 정말 못 봐주겠다는 듯이, 나에게 오더니 손수 안전벨트를 매주기 시작했다. 다 매고 나더니, 한 마디 덧붙인다. "아무리 피로하다지만, 이런 정도는 스스로 해."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여동생. 돌아간다고 해도 바로 옆이긴 하지만. 겁나게 째려본다. 지금 내가 휴가 여행 떠나온 게 맞나? "기내 방송은 좀 제대로 들으라고. 오빠."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동생의 한숨과 함께. "30분 있다가 독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탈 거야. 일단 그동안은 편한 자세로 휴식. 특히 문구, 무리하지 마." 여행책자를 들고 설명하는 연미 누나. 그런데 사실 이 분은 그런 거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어차피 자잘한 수속은 같이 따라온 경호원이니 고용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다 하잖아. 단지 여행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인가? 잠깐. 잠깐. 왜 나만 콕 집어서 말하는 겁니까. "그야." 연미 누나가 내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 자세로 누워 있으면 누구나 아프다고 생각한다고." 확실히 내 자세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동생의 구타로 인한 것인데요. 사실 1등석에 앉아서 오는 동안, 여동생의 쉼 없는 구타로 인해 1등석의 그 거대한 좌석이 주는 안락함과 향락을 전혀 누리지 못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난 한 방밖에 안 때렸는데? 오빠가 안전벨트를 하도 안 매서." 못된 녀석. 내 머리 위에서 그렇게 웃지 마. 나는 울컥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무리하지 말라고 연미 언니가 말했잖아." 꾸욱. 눌린다. 눌린다. 납작하게 눌린다. 나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원래 이럴 경우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여동생의 고릴라 같은 힘을 내가 당할 도리가 있나. 단지 여동생이 내 배를 슬쩍 누르는 것만으로, 나는 스스로 일어날 권리를 완벽하게 박탈당했다. 으. 이 녀석아. 손 치워. 손 치워. 손 치우란 말이야. '내가 무슨 책받침이냐.' 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저 여동생의 무릎과 손 사이에 끼어서 발버둥칠 뿐이다. 아니,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배가 더욱 찌그러질 뿐이다. 이러다가 내장이 터져 나오는 거 아냐? 거기에 내 마음을 더욱 갈가리 찢어놓는 것은. "오빠. 이상한 생각만 하지 좀 말고, 편한 자세로 있어." 여동생의 무심한 말이었다. 이 녀석은 정말. '당신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습니다.' 이 말도 모르는 거냐. 이 나쁜 지지배야. 나는 항의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이건 편한 자세가 아니잖아." 다른 사람은 편한 자세가 분명하다고 동의할 자세이기야 하다. 일단 여동생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고, 누워 있으니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국제공항에서 이게 뭔 짓이냐고 항의 받아도 할 말은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당신도 아파 봐라.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여동생에게 잘못 맞은 게 문제였는지 아니면 너무나 사치스런 음식에 위장이 적응을 못해서 배탈이 났는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나는 계속 이 상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속이 안 좋은 사람의 배를 누르냐.' 배탈이 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 물론 속이라고 해도 지금 피곤한 건 다리 쪽이지만. 역시 주장의 말대로 내가 그동안 무리한 건가? 그러나 정말 내가 쓰러질 일은 바로 다음에 생겼으니. "문구야. 그럼 난 진희하고 같이, 공항 구경이나 하고 온다. 그동안 넌, 여동생하고 우애를 돈독히 다지고 있어." 뭐가 돈독한 우애냐. 그리고 왜 하필이면, 진희와 같이 간다는 거냐 !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에, 나는 그대로 여동생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말았다. 이젠 소리칠 기운도 없다. 내가 시차적응을 못하는 건가. 그저 어지럽기만 하다. 그에 비하면 문희 녀석은. "뭐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기는 어디가 ! 만약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외쳤을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숨 쉴 기운을 남겨둬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한 문희는. "그럼 진희야. 안내해 줘. 난 해외 여행은 처음이라서, 솔직히 여긴 잘 몰라." "응." 나를 한 번 쳐다본 진희는, 잠시 독한 시선으로 날 쏘아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서 가 버렸다. 문희와 함께. 그런데 내가 뭘 진희에게 잘못했기에, 저런 시선으로 날 노려보는 거야. 곰곰 생각해보니 찔리는 게 하나 둘이 아니다. 이런. 빌어먹을. '시내하고 만났고, 시내하고 만났으며, 시내하고 만나기까지 했으니.' 자기한테 고백해놓고, 다른 여자와 태연하게 데이트를 즐긴다는 오해를 하는 걸까. 하긴 시내가 나에게 적극적으로 돌진해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진희 앞에서만 이상한 자세를 여러 번 보여준 것이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 본의가 아니라고. 절대로 시내의 가슴의 감촉이 좋아서라던가, 시내가 침대에서 보인 요염한 모습이 탐이 났다던가, 시내의 입술의 보드라운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다던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이건 순전히. "오빠. 지금은 편히 쉬어. 쓸데없는 걱정으로 마음을 해치지 말고." 네가 무슨 도인이냐. 그런 소리를 하게. 그런데 이 녀석은, 내 속을 어떻게 아는 걸까. 이것도 쌍둥이의 힘인가. 그러나 나하고 이 녀석은 일란성이 아니라 이란성인데? 일란성이라면야 그런 현상이 있어도 이해가 되지만, 이건 좀. "10년 이상을 같이 있으면, 그 정도는 척 보면 알아. 오빠처럼 단순한 사람이라면 특히." 전혀 납득이 되지 않지만, 솔직히 기운이 없어서 뭐라 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도 그렇지만, 힘없는 나라는 화낼 권리도 없지 않은가. 일단 힘을 키우기 전에는, 대꾸하기도 힘들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데 미인아." 일단 약간 기운을 차리고. 지금은 싸울 힘이 없으니 그냥 차분하게, 지나가는 말투로 묻는다. "지금 우리 모습, 솔직히 별로 안 좋게 보이지 않을까?" 그러니 나 좀 여기서 놓아달라는 사정이다. 그러나 여동생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 "어차피 우린 돈이 너무 남아서, 주체를 못하는 상류층의 방탕한 자식들로 보이니까 안 좋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고. 게다가 오빠는 시차적응 실패에다 연애사업 부진, 축구공 금단증상까지 겹친 중환자니까, 누워 있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아픈 건 축구공 금단증상이라는 거냐. 일단 말이 되기는 한데.......... 가만 가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내가 왜 상류층의 방탕한 자식이냐." 돈이 너무 많아서 대책이 없는, 낭비가 심한 철없는 재벌 2세들? 최고 고위층 자제들? 왜 내가 거기에 들어가는 거냐? 언제나 용돈이 모자라서 쩔쩔매고, 서민의 음식인 떡볶이를 좋아하는 내가 말이다.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상류층의 방탕한 자식이.' 고작해야 잡지 한정 피규어 하나 살 돈이 없어서 쩔쩔 매냐. 만약 내가 재벌 2세나 최고 상류층 자제였다면 당연히 돈이 산더미처럼 지갑에 쌓여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고작 10만원을 거액으로 생각하며 벌벌 떠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현실은 그랬다.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어디가 최고 상류층이냐." 아버지? 종합병원의 의사이며 중산층치고는 돈이 많지만,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상류층이지만 그렇다고 내 용돈이 특별히 많이 나오는 건 아니다. 다른 애들에 비해서 말이다. 어머니? 대형 약국의 약사로서 역시 돈이 많고 벌이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부를 누리시지는 못한다. 언제나 두 분 모두 살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시지, 우아하게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사치 같은 건 꿈도 꾸시지 못한다. 말 그대로 삶은 힘들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신다고 할까. "음. 그런가?" 전풍전자의 특제 시제품이자, TV부터 전자사전, 심지어 게임기에다 카메라까지 붙어있는 '돈이 썩어서 넘치는 인간이나 가지는' 부유한 휴대전화를 펴보면서 여동생이 종알거린다. 주위에 지나가는 프랑스 사람들조차 그 전화기를 보고 놀라지 않는 인간이 없는 것만 해도, 돈을 물 쓰듯 낭비하는 '철딱서니 없는 상류층 자제'로 보이는 인간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여동생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쳐다본다. "오빠. 이건 용돈을 푼푼이 모아서......." "아냐." 절대로 아냐. 그게 한 두 푼을 모아서 살 수 있는 금액의 물건이냐.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비싸다'고 광고하는 듯한 그 호화로운 기능, 엄청난 화면, 마지막으로 거의 생산되지 않은 한정판이라는 점까지. 저 녀석이 전풍그룹의 이사나 회장이 아닌 이상, 뭔가 수상했다. 도대체 이 녀석은. "무슨 비리를 저질러서, 그런 걸 입수했냐?" "비리는 무슨 비리." "아냐. 그건 분명히 무슨 구린 구석이 있어. 평범한 여고생이 입수할만한 물건이 아냐. 절대. 하긴 네가 평범한 여고생이라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겠지만. 대답해. 무슨 짓을 해서 그걸 살 돈을 모은 거지?" "오빠. 적어도 이걸 손에 넣은 건, 하늘에 맹세코 한 점 부끄럼 없는, 정당한 경로였다고." "진짜냐?" 나는 풍남이에게 물어봤다. 자기 회사 물건이나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풍남이의 대답은 나를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었으니. "그거 대답해도 되니? 미인아." 왜 여동생의 눈치를 보는 거냐. 자랑스런 전풍그룹의 후계자인 네가 ! 언제나 자기는 세계 제일의 그룹을 만들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지 않았냐. 하지만 여동생의 대답은 더욱 걸작이었으니. "대답하지 마." 그딴 말이나 하면, 의심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미인아. 역시 이건 무슨 음모가 있어. 그게 과연 무엇일까? 세금포탈? 마약밀수? 부동산투기? 나는 그녀를 거세게 추궁했다. 여동생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는, 극히 드문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으니. "이건 용돈을 푼푼이 모아서 산 거라고 했잖아." "그럼 그 옷은? 구두는? 모자는? 그리고 그 무지무지하게 비싸 보이는 핸드백은?"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은 하지 마라. 이 비리비리 여동생아. 결국 내 추궁을 이기지 못한 여동생은, 고개를 떨구었다. 상당히 비참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쳐다보면서. "........여행이라고 돈을 너무 썼나." "그것 봐. 낭비 맞잖아." 시무룩해진 여동생을 보며, 나는 오래간만의 승리감을 맛보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드디어 내가 해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주먹 쥐고 환호하려다가, 여기가 외국이란 걸 감안해서 자제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억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하하.' 드디어 해냈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드디어 제가 사악한 여동생의 콧대를 꺾고, 이 녀석의 잘못을 지적하는 오빠다운 일을 해냈습니다. 여동생의 낭비벽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이 절호의 찬스에 나는 소리를 죽이고 환성을 질렀다. 우와. 우와. 우와. 그러나 여동생을 옹호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누구야? "문구야. 미인이 너무 구박하지 마. 그건 정당한 노력의 대가인데."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여동생의 태도가 눈에 띄게 이상해졌다. 상당히 당황해서, 황급히 연미 누나에게 손짓발짓을 다하며 그녀를 막은 것이다. 무슨 일이야? 행동이 너무 표가 나서, 나조차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낄 정도이다. 이 녀석이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었나? 물음표를 머리 위에 띄우는 나를 놔둔 채, 연미 누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어차피 다 아는 거잖아. 미인이 부모님도 아시고, 나도 알고, 풍남이도 아는데. 굳이 오빠한테만 숨길 필요가 있겠니? 하긴 진희와 문희는 모르지만, 지금 그 애들은 여기 없고." 뭐야. 뭘 안다는 거야? 그러나 그 뒤에 여동생이 한 말은 상당히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그걸 알면 오빠의 낭비벽이 더욱 심해.........." "뭐가 낭비벽인데." 왠지 무지무지하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 내가 무슨 낭비를 한다는 거야. 게다가 정당한 노력이라니? 이 녀석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아무리 내가 여자 옷에 무지하다고 해도 한 두 푼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걸 정당한 노력으로 얻다니. 이 녀석, 내가 모르는 또다른 비밀이 있는 건가? 뭐 어차피 이 녀석은 비밀주의에 입이 무거워서, 자기 방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기야 하지만. 뭐 사실. '나도 이 녀석 속옷은 관심 없다고.' 물론 지금 입고 있는, 여동생의 여름 나들이옷이 그녀의 유일한 사치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연미 누나는 알고 나는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설마, 이 녀석의 용돈은 나보다 훨씬 많은 거 아냐.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내 상상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은. "언니. 큰일났어요." "왜 그래? 진희야." 뭐야? 진희가 왜 저렇게 당황해서 달려오는 거지? 설마 문희 녀석, 프랑스에 왔다고 이것저것 마구 사다가 돈이 떨어진 건 아니겠지. 그러나 진희가 말한 사건의 내용은 더욱 심각한 것이었으니. "문희가 향수가게에 진열된 향수병들을 엎었어요. 가게 주인은 당장 변상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른다고 하고 있고." 호오. 그랬군. 하긴 문희가 진희한테 안내해달라고 할 때부터 뭔가 불안했는데....... 가만. 가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뭘 엎었다고? "가자." 우리 모두는 급히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이 정도면." 우리 모두는 문희가 벌인 사건의 현장에서, 넋이 나가 있었다. 이 녀석, 도대체 얼마나 부순 거야. 아예 진열장 하나를 다 엎었구나. 엎었어. 미안한 건 아는 건지, 문희는 이미 가게 구석에 쪼그라든 채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 분량이라면 액수가 장난이 아닐 텐데. '바보.' 이 녀석이 아까 방방 뜰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갑자기 앞일이 캄캄해졌다. 상상을 초월한 가격이 우리에게 제시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긴 이 모든 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우리 잘못인가.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이 정도 규모라면. "!^$*^&U#$&^!#." 향수가게 주인이 지금 뭐라고 하는지는 프랑스어를 몰라서 모르지만, 우리가 물어내야 할 금액이 엄청날 것이란 점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연미 누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런데. '야. 이봐.' 풍남이의 표정이 굳어지는 건 이해가 되었다. 이 가게의 피해를 변상하려면, 결국 우리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은 풍남이가 나서야 할 테니까. 진희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도 나름대로 납득이 갔다. 사고뭉치와 동행했으면서도 사후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큰 피해를 풍남이에게 입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미인이 너는 왜 표정이 굳어지는 거냐. 친구가 사고 쳐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다른데. 설마, 너. '프랑스어를 다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그런지 확인할 방법이 있지. "이봐. 미인아. 우리가 물어낼 금액이 얼마나 된다고 하는 거냐?" 만약 알아듣는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겠지. 그리고 여동생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 답을 말했다. 그러나, 그 액수를 듣는 순간, 나는 질문을 괜히 했다는 후회를 해야 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걸. 여동생이 부른 금액은. "10만 유로. 우리 돈으로 치면 1억 원 이상." "10만 유로 !" 크, 큰일났다. 그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느냔 말이다. 나는 문희를 죽일 듯이 쏘아봤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런 사고뭉치 같으니. 물론 문희가 평소에 사고를 자주 내는 건 아니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문 일이고, 나도 문희 녀석이 실수하는 걸 본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왜 하필, 왜 하필 이곳에서, 이 순간에 사고를 치느냔 말이다. "10만 유로가 어디 있어." 도대체 향수병 몇 개 부쉈다고 어떻게 그런 금액이 나오느냐는 소리가 터지려다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지금 문제는 10만 유로라는 거액을 어떻게 변통하느냐는 것이므로. 어차피 문희를 닦달한다고 돈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돈 없는 서민인 내가 아무리 궁리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결국 우리 모두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돈이 많아 보이는 아가씨, 연미 누나를 쳐다보았지만. "안 돼. 1만 유로라면 어떻게 하겠는데, 10만 유로는 무리야." 하긴. 누가 10만 유로라는 거액을 지갑에 넣고 다니나. 어차피 비행기표나 호텔 예약 등은 이미 끝낸 상태에서, 그런 거액을 가지고 다니는 게 더 이상했다. 솔직히 지갑에 든 돈들은 그저 기념품 구입 정도의, 적은 돈만 가지고 다니는 게 정상이니 난데없이 10만 유로를 꺼내들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건 연미 누나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럼 문희는 어떻게 되는 거냐.' 아무리 도움이 안 되는 소꿉친구라지만, 이대로라면 이 녀석은..... 우리 모두는 연미 누나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나도 역시 1만 유로가 한계인데....." 말꼬리를 흐리는 풍남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래간만이긴 한데, 이건 더 문제였다. 평소라면 자기 용돈은 아끼긴 해도, 선행을 할 때는 아낌없이 돈을 내놓는 - 사악무도한 전풍그룹의 후계자가 맞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 녀석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건 정말로 큰일이었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안 되냐는 눈빛으로 풍남이를 바라보았지만. "안 돼. 사업상 굴리는 돈은 그보다 더 많이 쓸 수 있어도, 개인 용돈은 그게 아니라고. 검소하게 살아야 돈이 모인다는 게 우리 집안의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라서." 검소...........라. 1만 유로를 맘대로 쓸 수 있는 게 검소하다는 거냐. 하긴 세계적인 부자들과 비교하면 그게 당연하긴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아무리 커졌다고 해도, 역시 재벌회장이 아닌 회장의 아들이나 손자가 10만 유로라는 거액을 맘대로 휘두르기는 무리겠지. 그런데. "그럼 이 녀석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나는 연미 누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어차피 들려올 대답은 뻔하지만. 연미 누나가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건 차라리 말하지 마요. "아마 경찰서에서 유치장 신세를 져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즐거운 여행은 이걸로 끝이야."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 사실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잖아? - 문희의 얼굴. 난생 첫 유럽여행이라고 좋아했다가, 이런 악재를 만나서 완전히 깨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유럽여행도 이걸로 끝이라는 거다. 문희가 유치장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어떻게 속 편하게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이걸 갚으려면 문희 부모님이 고생 꽤나 하시겠군. 그런데 연미 누나. 왜 여동생을 쳐다보는 거지요? "미인아." 저, 누나. 아무리 여동생이 지상 최강에 무적이니 뭐니 해도, 이건 싸움박질이 아닌데요. 머나먼 프랑스까지 와서 주먹이라도 휘두르라는 겁니까. 뭡니까. 여동생 역시 그건 아는지, 연미 누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먼 산만 바라볼 뿐이다. 아니, 먼 에펠탑인가. "........."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여동생이 불량배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한다고 해도, 손쉽게 UFO슛을 날리는 축구천재라고 해도, 전교 1등을 밥먹듯 하는 짱구머리라고 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빠를 개 패듯 패는 성질 더러운 애라고 하더라도, 이건 그런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동생의 한계였다. 결국 이 세상은 돈 많은 사람이 가장 힘이 센 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풍그룹의 악랄한 돈벌레 회장도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연미 누나는. "다른 방법이 없어. 힘 좀 써 봐." 저. 누나.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바보 같이 보여요. 그만 해요. 그러나 바보는 연미 누나만이 아니었으니. "미인아. 제발." 에? 푸, 풍남이 너까지 바보 행렬에 합류하는 거냐. 아무리 지상 최강의 여동생이긴 해도, 그건 주먹 크기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지 주머니 크기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도대체 왜 이런 바보스러운 짓을?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들에게. "저, 이 녀석은 어디까지나 중산층 가정의 딸자식이라고요." 이렇게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풍남이가 코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후후후. 이럴 때 선량한 재벌이 옆에 있는 게 문희 너의 행운인 줄 알아."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10만 유로를 내줬다면, 차라리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포탈로 3천억을 버는 인간이, 그런 추한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거냐. 하지만 풍남이는. "그 돈은 내가 꺼내 쓸 수 있는 돈도 아니라고." 네 재산을 네가 마음대로 못 써? 참 대단한 변명이야. 역시 돈벌레 회장의 손자가 아니랄까봐. 얼굴 한 번 두껍다. 자기 돈을 쓰기 싫으니까 미인이한테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나 하고. 그래서 나는 오빠로서 할 일을 했다. 연미 누나와 풍남이, 그리고 미인이 사이에 끼어 들어 합법주차를 한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미인이한테 그런 돈은 없는데요." 10만 유로를 마음만 먹으면 내놓는, 그런 엄청난 부잣집 딸로 태어난 애가 아니라고. 내 여동생은. 이 사람들이 혹시, 여동생의 주먹이 크니까 돈주머니도 크다고 착각을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연미 누나와 풍남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들은 일제히. "미인이가 돈이 없으면, 이 세상에 돈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 너무나 단호해서, 나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오죽하면 저 구석에서 암흑에 빠진 채 쪼그라든 문희조차, 그 말에 엉덩이를 들썩였을까. 하긴 가게 주인조차, 난데없는 큰소리에 당황할 정도였으니 그 목소리를 눈앞에서 들은 내가 받은 타격은 엄청났다. 하지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단호하게 만들었던 말인가. 두 사람은 일제히. "전풍그룹 정도는 몇 개라도 살 수 있는 돈이 있는 애라고. 미인이는." "미인이가 얼마나 돈이 많은데.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 공항 전체를 현찰로 살 수 있어. 그러고도 금고에 쌓인 돈은 줄어들 기미도 안 보일 거라고." "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는데요." 두 사람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들의 말을 억지로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 정말 착각이 너무 심하다니까. 물론 여동생의 낭비벽이 좀 심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돈이 많을 수는........ "........알겠어요." 잠깐. 이 목소리는 분명 여동생의 것인데. 뭘 알겠다고 한 거냐. 설마. "너, 미쳤니?" 뭘 알겠다는 거냐? 설마 너, 자신이 부자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평생 짐이 될 지도 모를 거액의 부채를 떠 안겠다는 거냐. 안 돼. 그건 안 돼. 너 때문에 나까지 빚더미에 눌려 살 순 없어. 우리 부모님이 1억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만, 그 돈은 결코 중산층 가정이 버스 표 사듯이 낼 수 있는 액수가 아니라고.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번쩍.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수표도 아니고 현금도 아니었다. 그녀가 꺼내든 물건은 은빛의 작은 카드였던 것이다. 설마 이 녀석. '신용카드로 때울 셈이냐.' 갑자기 이 녀석의 장래가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이 녀석, 벌써부터 외상거래에 맛을 들이다니. 이봐. 지금 오가는 금액은 천 원이 아니라고. 만 원도 아니고. 자그마치 10만 유로, 우리 돈으로 1억 2천만 원이 넘는 고액이라고. 그걸 고작해야 카드로 어떻게 막겠다니, 나는 순간적으로, 이 녀석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돌아버린 게 아닌가 의심했다. 내가 지금 할 일은. "안 돼 !" 이 녀석이, 정말 큰일낼 녀석이네. 신용카드라니. 그런 걸 잘못 쓰다가는, 우리 집 다 날리는 수가 있다고. 나는 황급히 여동생을 막아섰다. 잘못하다가는 여동생이 평생 빚쟁이가 되어, 어둡고 컴컴한 뒷골목에서 썩어 가는 몸을 붙들고 청춘을 파는 신세가 될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이미 그 카드는 지배인에게 넘어갔다. 아이고. 내가 못살아. 그러나 정말 놀라운 일은 그 카드를 본 지배인에게 일어났으니. "에?" 갑자기 상점주인, 지배인께서 여동생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인사를 한 것이다. 뭐냐. 이 황당무계한 사태는. 아무리 지상 최강의 여동생이라지만, 이건 물리법칙에 어긋난다고. 고작해야 외상을 노리고 꺼낸 카드에, 저렇게까지 정중한 태도가 나올 수 있는 거야? 지배인이 총알처럼 카드를 직원에게 보여주더니, 급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카드를 받은 직원이 번개처럼 여동생에게 커다란 의자를 가져온다. 그리고 역시 그녀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인사한다. 뭐냐. 이 이해가 안 되는 사태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회장님."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회장님이라고? 그 직원이 우리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회장님? 회장님? 회장니이이임? 직원들이 급히 여동생에게 자리를 권하고, 음료수를 바치고, 바닥을 치우고, 하여간 난리도 아니었다. 뭐냐. 이 기괴한 일은. "회장님이라고?" "이봐. 지상 최강의 여동생." "왜 그래? 오빠." "이 사태를 납득이 가게 설명해 보실까." 일단 무사히 비행기를 타게 되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주 이상했다. 절대로 이상했다 ! 도대체 여동생이 뭐 하는 녀석이기에, 회장님이라는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게다가 그 카드는 또 뭔가. 그걸 보자마자 향수상점 지배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는데, 그 카드가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기에, 그런 식의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나는 당장 그 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게다가 연미 누나와 풍남이는 아는데, 감히 이 하늘같은 오라버니가 모르는 일이 있다니. 그게 다른 일이라면 모른 척 넘어가겠지만, 여동생의 비밀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회장이란 건지, A부터 Z까지 설명해 봐. 그리고 그 카드는 대체 뭐야?"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도, 진희도, 문희도 일제히 시선을 여동생에게 집중할 수밖에. 무엇보다도, 궁금해서 미치겠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여동생에게 그런 권력이 있는 거지? 이 경우에는 권력이라기보다는 '돈'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 세상은 돈 많은 사람이 권력자니까 어차피 그게 그거다. 여동생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빨리 보여줘 봐." 세 사람의 시선에 결국, 여동생은 한숨을 가볍게 쉬더니 카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Platinum(백금)?" 뭐냐. 이 화려하신 백금이라는 글자는. 이런 카드는 혹시, 부자들만 지니고 다니는 거 아냐? 아냐. 아냐. 이건 일반적인 '부자'가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냐. 이 정도 카드를 지니려면. "너, 이거 어디서 훔친 거냐?" 이건 분명히, 세계 100대 부자 정도는 되어야 가질 수 있는, 초특급 호화판 신용카드였다. 전에 해외토픽에서 한 번 보여져서, 나도 안다. 일개 여고생이 주물럭거릴 수 있는, 그런 시시한 신용카드가 아닌 것이다. 이런 걸 여동생이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건 오직 소매치기나 도박, 위조 등의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런 카드를 위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너, 이젠 범죄의 영역까지....."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끝맺지 못했으니. 퍽. "여동생을 도둑 취급하지 마 !" 아구구구구. 오늘도 여전히 나는 맞고 말았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구타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런 걸 훔쳤다가 들키면 후환이 두렵기 때문에. 이건 문희의 향수가게 파손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 "이건 내 힘으로 벌어서 가진 거라고 !"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 아무리 여동생이라지만, 고작해야 20세도 안 된 이팔청춘 여고생이 어떻게 이런 걸 합법적으로 손에 넣는다는 말이냐. 여동생이 아무리 위대해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나는 이 녀석이 이걸 (진짜로) 소유할 정도로 돈이 많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도대체 어떻게 그런 돈을 벌었다는 거냐 !"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여동생의 재주가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지만, 세계 100대 부자에 들 정도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정도의 돈을 모을 방법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가 여동생을 너무나 얕잡아봤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이야기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말하면, 첨단기술 특허료하고 주식투자라고 알아 둬." "못 믿어 !" 절대 못 믿어 ! 여고생이 무슨 특허료를 그렇게 많이 챙긴단 말이냐 ! 세계 100대 부자가 누구 집 애 이름인줄 알아 ! 그러나 그런 내 의지를 순식간에 꺾어버리는, 연미 누나의 직격탄. "그 말, 맞아." "네?" 뭐라고요?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미 누나의 말이라지만, 그게 대체 말이 되는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뤄내는 게 특기인 여동생이라지만, 그것만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우리 집 재산이 얼마인데,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고작 20도 안 된 나이에 세계 100대 부자가 되었다고? 그것도 내가 모르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거야? 그러나 그런 내 속을 더욱 더 짓밟는 풍남이의 발언.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플래닛 그룹이 미인이 소유라고." 우악 ! 갑자기 내 머리가 어찔어찔.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 그럴 수가. 그 돈으로 뭉쳐진 기업이, 여동생 거라고? 도대체 어떻게 그걸 손에 넣은 거지? 그래서 여동생을 그 사람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른 건가? 말도 안 돼. 순 사기야. 이건 억지가 분명해. 있을 수 없어. '차라리 성실하게 돈을 모아서 1억을 만들었다는 말이 더 믿을 만 해.' 그래서 이번에 그 돈이 다 거덜났다고 한다면, 차라리 친구를 구하기 위해 돈을 내던진, 의리의 여동생으로서 칭찬이라도 해주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플래닛 그룹이라고? 그건 전풍그룹보다 훨씬 큰,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이잖아. 도대체 무슨 협잡으로 그걸 손에 넣었지?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리는 연미 누나. "아마 지금 본 그 카드로 당장 쓸 수 있는 금액만 해도, 1억이 넘을 걸." "1억 원이요?" 그것은 어쩌면, 내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뻗은, 구원을 찾아 헤메는 손길 말이다. 그러나 그 희망을 처참하게 도끼로 내려찍는 연미 누나. "1억 원이 아니라, 1억 달러." "네에에에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1억 달러라니. 1억 달러라니. 그럼 우리 돈으로 자그마치 1천억 원이 넘는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그만 이곳이 비행기 안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 아무리 연미 누나의 말이라도, 그런 허무맹랑한 말은 믿을 수가 없어 ! 일개 여고생이 어째서 1000억 이상의 돈을 가지고 있는 거야 ! 모 전직 대통령이 29만(+천 원)으로 골프장에 가고, 리무진을 굴리고, 호화주택에 사는 것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건 음모야. 사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어. 나는 하늘에 대고 절규했다. "오빠. 아무리 1등석에 앉아 있다지만, 조금만 조용히 해 줘." 그러나 내 경악은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비교체험 극과 극도 정도가 있지, 그 나이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의 회장인 녀석이 그렇게 말해봐야 설득력이 있겠냐. 그걸 여태까지 몰랐다니. 나 자신의 둔감함에 공포를 느낄 지경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역시 여동생의 위장술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동안 나를 속이고 그런 거금을 횡령할 수 있었단.... 퍽. "뭐가 횡령이야." 그러나 내 자세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뺨을 손바닥에 대고..... 아니 손바닥을 뺨에 대고 비명을 지르는 자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동생에게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건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수많은 애니메이션에서, 게임에서, 그리고 영화에서 여동생이란 존재가 천재, 초능력자 등으로 나오긴 했지만, 내 코앞의 이 여동생이 그럴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주먹만 큰 게 아니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녀석이 못하는 일은 무엇인가. 집에서는 소녀주부, 학교에선 우등생, 내 옆에선 난폭자,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는 회장님? 무슨 사기술로 그 나이에 회장 자리를 강탈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녀석의 끝없는 음모와 계략에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회장 일을 하려면 상당히 바쁠 텐데, 어째서 나는 전혀 몰랐지? "오빠. 회장이라고 해도, 모든 방면의 일을 다 맡아서 하는 건 아니라고. 우리 그룹은 너무 커서, 그러다간 회장자리에 아무도 못 앉아." "다른 사람이라면." 보통 이런 말은 칭찬할 때, 아니면 상대를 과도하게 추켜세울 때 사용하겠지만, 이 경우에는 욕이다. 이미 여고생 주제에 회장이란 소리를 듣는 것부터가, 보통 사람과는 100만 광년쯤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이 녀석, 진짜로 나와 쌍둥이 맞나? 퍽. "맞으니까, 사랑스런 여동생과의 혈연관계를 자꾸 의심하지 마." "사랑스럽긴 뭐가 !" 그런 좋은 일이 있으면, 진작에 오라버니에게 보고를 해야지 !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다는 것은 돈을 (왕창) 벌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일이 분명하다. 그러면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며,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옛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당연히 오라버니에게 언급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오빠의 낭비벽을 더욱 조장할까봐." "뭐가 낭비벽이야 !" "오빠라면 그 돈으로 가장 먼저 살 게, 사람 크기의 외계인 인형이니까 그렇지." "지구인이야." "지구인 치고는 눈이 너무 커. 그게 어디가 사람이야?" "사람이라니까." 투닥투닥. 토닥토닥. 그런데 이건 본론을 벗어난 말싸움 아닌가. 지금 할 것은 이런 게 아니다. 여동생의 비리비리 재산목록을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 대체 이 녀석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수법으로 그 많은 재산을 긁어모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뭐? 나중에 전풍그룹을 훔쳐오는데 참조하려고 그러냐고? 절대 아냐 ! 일단 질문 ! "너,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거대 그룹의 회장이 된 거냐?" 그 질문에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은 듯, 진희와 문희, 그리고 풍남이와 연미 누나까지 우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심지어는 코 크고 머리가 노란 서양인들까지. 그러나 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분야는. "저, 조용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스튜어디스의 말이, 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왜 나한테만 주의가 날아오고, 여동생한테는 주의가 안 가는 거야. 설마 돈 먹였냐. 나쁜 녀석. 그러나 여동생이 하는 말은. "안 되겠어. 오빠.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야기해." 그리고 이 녀석은 자기 자리에 앉더니, 편한 자세로 의자를 펴고는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여동생을 깨우려고 했지만. "쉬. 여기서 또 떠들면 국가망신이라고." 굳이 문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 상황에서 더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신문에 '어글리 코리언'으로 나올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 이용해서 잠들어 버리다니, 악랄한 여동생 같으니. "전에도 그랬지만, 역시 여긴 멋진 곳이라니까." 이 도시의 이름이 뭐였더라? Konstanz였던가? 그게 아니면 Tuebingen이던가? 그러나 계속 여동생만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도시 이름이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다. 뭐? 그렇게 여동생이 좋아 미칠 지경인 것이냐고? 그럴 리가 있냐 !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떻게 플래닛 그룹 회장이 된 걸까.' 그게 궁금해서 그런 거다 ! 그런데 잠깐. 이 녀석이 언제 여기에 와 봤었다는 거지? 이해가 안 가는데? 나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여동생을 째려볼 수밖에 없었지만. "아. 그거? 오빠가 축구한다고 합숙훈련 할 때." 그럼 내가 죽어라 공을 차며 흙먼지 속에서 달리고 있을 때, 너는 편한 자세로 해외에서 피서를 즐겼다는 거냐. 이 망할 녀석아 ! 이런 곳에 여행하려면 나도 부를 것이지 ! 나는 약이 올라서 방방 뛰려고 했지만, 그런 나에게 매정하게 뭔가를 날리는 여동생. 이런 ! 쿵. "애고고." 이거 뭐야. 도대체 왜 이리 무거운 거야. 설마 돈 가방은 아닐 테고(그런 중요한 걸 나한테 줄 정도로 착한 여동생이 아니다 !), 그럼 이건 혹시 옷 가방인가? 그게 아니면 날 골탕먹이기 위해 준비한 고문도구? 거의 세탁기 수준의 무게를 자랑하는 가방을 놓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가방을 열어보기로 결정했다. 역시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려면, 직접 열어보는 게 최고지. 그러나. "어?" 다시. 그런데 이거. "어? 어?" 한 번 더 ! 그러나 가방은. "어? 어? 어?" 안 열린다 ! 도대체 무슨 자물쇠를 걸어둔 거야? 설마 영화에나 나오는 전자식 자물쇠라도 되는 거냐. 여동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다. "오빠. 그거 오빠 힘으로는 안 열리니까, 힘 빼지 말고 그냥 놔 둬." 끝끝내 안에 뭐가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 얄미운 여동생에게 나는 다시금 이를 갈았지만, 그보다 지금 더 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즉. "미인이 너, 피로에 지친 오빠에게 이걸 나르라고 하는 거냐?" 재벌 회장, 아니 다국적 기업도 재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돈으로 도배를 해도 되는 녀석이 짐꾼 하나 안 부르냐? 이런 거대한 가방을 가져가야 하면서도? '구두쇠 같은 녀석.' 여동생도 그런 비난을 의식했는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알았어. 비서들을 부를 테니까, 건드리지 말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 그러더니, 손목시계를 눌러 뭔가를 부르는 여동생. 그래. 휴대전화도 모자라서 이젠 손목시계 전화기냐. 무서운 녀석. 돈 많은 녀석. 사치스러운 녀석. 그런 엄청난 부자라면 차라리 전용 비행기를 부르지 그랬냐. 나는 여동생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길바닥에 서 있었다. 그런데 풍남이 녀석은 어디로? 비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녀석은 어디로 튄 거야? 쥐구멍에 숨은 거 아냐? 자기 그룹에서 알아서 다 한다고 큰소리 탕탕 치더니." 사실 이 여행의 스폰서는 전풍그룹이니, 전풍그룹 직원이나 전풍그룹에서 고용한 안내인이 지금쯤 총알같이 날아왔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30분이나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안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는 하지만, 이런 무능한 인간들 같으니. '국내용으로 판매하는 제품 수준의 서비스라니. 어떻게 하려고.' 물론 나야 힘없는 일반 서민이지만, 여동생은 문제가 다르다. 과연 전풍그룹 주제에 플래닛 그룹 회장에게 이런 식으로 대접해도 무사할 수 있을까. 그 돈벌레 회장님, 돈에 눈이 멀어 엄청난 적을 만들게 될지도. 그런데 왜 이리 무성의한 거냐. "혹시 그 할아버지도 미인이의 정체를 모르는 게 아닐까?"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문희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상대의 중요성을 모르니까, 평소에 소비자들에게 하는 식으로 해버렸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자사 직원들 사이에도 스파이를 심고, 정계에도 전풍맨이라 불리는 전풍그룹 옹호자들을 늘어놓는 그룹인데,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상대는.' 10년 이상 함께 산 오빠를 속여넘기는 바로 그 여동생이다. 이 녀석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 증거라면 경제신문들의 톱기사에. '이 녀석이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어.' 사실 플래닛 그룹이라면 세계적인 거대 기업이고, 미인이가 그 기업의 창립자가 아닌 이상 공식적으로 회장 자리에 취임했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거대 기업의 새로운 회장이 출현했는데, 그것도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가 선출되었다는데 과연 그게 뉴스거리가 안 되겠는가. 다른 나라 신문이라면 몰라도 우리나라 신문에는 충분히 톱기사로 실릴 자격이 있다. 그런 거대 기업의 회장으로 한국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사는 본 적이 없어.' 왜 그랬을까. 물론 이 녀석이 그 그룹의 회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그랬으면 당연히 드골 공항에서 직원들이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고, 10만 유로라는 거금이 그렇게 쉽게 튀어나오지도 않을 테니까. 어째서 이 녀석은 정체를 숨긴 걸까. 어째서 이 녀석은 지금까지 국내 신문의 1면 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런 생각은 여동생의 한 마디에 의해 사라졌으니. "사생활 보호를 위한 사전조치라고 생각해 둬." 뭐가 썩어 문드러질 사전조치. 나도 모르게 비아냥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자기 사생활을 보호하는 녀석이, 내 사생활은 사정없이 깔아뭉개는 거냐. 게다가 거대 기업의 회장이 왜 여기서 천하태평으로 놀고 있냐. 여동생의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 이어졌으니. "아무래도 평상시에는 전문경영인들에게 일을 맡기니까." 그랬냐. 그럼 너는 돈줄을 틀어쥔 채, 편한 자세로 놀고 먹으면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는 거냐. 역시 악당답다니까. 여동생의 설명이 추가로 따라붙기는 했지만, 그런 내 비꼬인 생각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그래도 중요한 일은 직접 결제한다고." "얼마나 자주." "1주일에 한 번 정도." 그게 회장이 할 짓이냐. 자기는 일도 안 하면서, 악마처럼 직원들의 고혈을 빨아먹다니. 그러고도 그룹이 망하지 않는 건, 순전히 그룹 규모가 커서 그런 게 분명한..... 딱. "내가 회장 되고 나서, 우리 그룹의 총재산과 순이익은 각각 500% 이상 증가했다고." 으. 말도 안 돼. 부하를 잘 둔 게 틀림없어. 여동생의 사기술은 세계 제일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지만, 경영능력이 그 정도라는 건 말이 안 된단 말이야. 그러나 그런 내 푸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는. "아. 폴리? 지금 공항에 도착했는데 예정이 어긋났어. 현지 지사에 연락해서 차량 하나만 여기로 보내. 여기 위치는 이미 알고 있지? 위성추적에 나온 그대로니까...." 뭐가 위성추적이냐 ! 여동생은 어쨌든 전화하느라 바쁘니 제외하고. 그렇다고 직원들을 찾아 죽어라 뛰고 있는 풍남이를 상대로 하소연할 수도 없다. 사실 그 녀석에게 하소연 같은 걸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럼 문희는 어떠냐고? 찰칵. 찰칵. 찰칵. 디지털 카메라이니 옛날처럼 사진을 찍을 때 소리가 요란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소음공해의 주원인이 되어 있으니 말을 걸 수가 없다. 하긴 사람들이 올 때까지는 이게 최고겠지. 그럼 진희는 과연 뭘 하고 있을까. 여동생의 발광으로 인해 오랫동안 볼 수가 없었던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 너, 너 왜 내가 쳐다보니까 고개를 홱 돌리는 거냐? 곰곰 생각하려고 했지만, 사실 찔리는 게 하나둘이 아니다. 이 여행을 안 온다고 내가 거절했던 일도 있고, 시내 일도 있고,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역시 간악한 여동생에게 너무 신경을 쓰느라 진희를 자주 쳐다보지 않아서 그런가? 그럼 질투? 그랬으면 차라리 좋겠지만, 이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왠지 올해 피서는 괴로울 것 같아.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러니 평소에 잘하지 그랬어." 역시. 이 사람한테 하소연하는 건 무리다. 하긴 나를 놀리는 게 생애의 유일한 낙인 사람에게 호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그래도 그렇지, 지금 상황에 대해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할 친구가 하나도 없다니. 내가 이렇게 인덕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누나. 가슴 다 보여요." 결국 나도 농담 따먹기나 할 수밖에. 어차피 호텔이든 여관이든, 아니지. 그런 거대 기업의 회장님이라면 당연히 1급 호텔, 그것도 초일류 호텔에 갈 게 분명할 것이니, 그 억대의 방에 앉아서 다리를 펴고 나서 여동생의 비리에 대해 듣기로 하자. 일단은 피서지에 온 사람답게 편한 자세, 편한 마음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내인이 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건 너무나 무료한 일이니. "문구야. 내 가슴이 아니라 진희 가슴을 봐야지." 연미 누나와 말장난이나 할 수밖에. 원래는 진희와 해야 마땅하겠지만, 지금 진희의 태도로 보아 말을 걸면 박살날 것 같으니까 꿩 대신 닭으로, 장래의 처형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물론 누나의 옷차림만 보면. '너무했어.' 솔직히 이건 좀 지나쳤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가슴을 굳이 그렇게까지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까?' 여긴 40도의 더위로 수 백 명의 노인들이 죽었다는 프랑스도 아니고, 저 멀리 아프리카도 아니라고요. 독일 남부, 알프스가 코앞에 있는 이런 곳에서 뭐가 덥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가슴을 다 드러내는 겁니까. 우리나라 여자들이 해외에서는 대담한 옷차림을 선호한다더니, 정말인가. 이미 약혼까지 하신 분이 정숙하지 못하게. 딱. "내 맘이야." 우. 연미 누나도 여동생에게 물든 것인가. 어째서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겁니까. 아이고. 아파라. 갑자기 이 사람을 처형으로 삼는 것을 재고해야겠다는 생각이 팍팍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진희를 좋아하게 된 건 이 사람을 보고 선택한 게 아니니 재고해봐야 소용이 없다. 아이고. 골치야. '차라리 축구 연습이나 하자.' 어차피 지금 축구공을 찰 수는 없으니 상상으로 하는 연습에 불과하지만, 계속 맞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다면 편한 자세로 앉아서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 근처에는 의자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의자마다 코 크고 엉덩이 큰 사람들이 의자를 점령했다고 해야 하겠지만. 뭐? 몰아내면 되지 않느냐고? 외국까지 와서 노인학대로 구설수에 오를 일 있냐. 그렇다면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없다. '적당한 게 없나.' 빈 의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내가 앉을 수 있는 위치에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거기로 가는 것밖에는 없다. 다만 문제는. "이걸 어쩌나." 이 무겁기 짝이 없는 가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들고 가야 하나. 밀고 가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진 청춘에게. "바퀴가 달려 있으니까, 끌고 가면 돼." 이봐. 여동생. 그런 충고를 할 시간이 있으면 불쌍한 오빠를 도와주지 그래. 그러나 여동생은 충고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는 다시 전화기를 붙들고 늘어진다. 못된 녀석 같으니. 문희는 여전히 카메라 삼매경이고, 진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풍남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니 날 도와줄 사람은 없다. 전혀 없다. 연미 누나의 경우도 무리인 게. '저 옷차림으로는 뭔가를 밀거나 끌 수가 없어.' 저렇게 치마가 짧으면, 이 가방을 밀고 갈 때 속옷이 보일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솔직히, 연미 누나는 부잣집 아가씨다. 그런 사람이 무거운 짐을 나를 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결국 이 가방을 나를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가방을 잡고, 살살 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잘 가네?" 생각보다는 무겁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역시 바퀴는 위대한 발명이야. 그런데 문제는, 가방 자체가 너무 무겁다는 것이었다. 살살 밀려가던 가방이, 어느새 속도가 붙자. "어?" 이게 어디로 굴러가는 거야? 생각보다 바퀴가 잘 도는 바람에, 나는 가방에 필요 이상의 힘을 가해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가방이 찌그러지거나 부서진 건 아니지만, 문제가 있다면. "머, 멈춰." 가방이 너무 빨리 굴러간 것이다 ! 멈추려고 해도, 오랜 비행으로 인해 몸이 피곤해졌는지,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가 않는다. 다리에 힘을 주려고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을 비행기만 타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몸이 앞으로 쓰러지면서, 나는 마치 말 위에 탄 것처럼 가방에 타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과는. "와아아악 !" 공항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해 굴러오는 거대한 가방(과 거기에 얹혀있는 연약한 소년)을 보더니,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지는 못할망정, 도망부터 가다니. 나는 어떻게든 정지하려고 했지만, 발이 땅에 닿지가 않는다.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힘이 없으니 안 된다. 확실히 그동안 무리하긴 무리했나 보다. 이런 손쉬운 동작도 안 되는 걸 보니. 물론 시차적응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대로라면 큰일이다. 이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거냐.' 내가 가는 방향을 보니, 공항 출입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비록 밖의 광경을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건 문이 뻥 뚫려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 말은 즉, 이대로 내가 가만히 있으면 대형 참사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 당장 가방에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이런." 가방 끈이 내 팔에 얽혔는지, 손이 안 빠지는 것이었다. 이거 큰일이로다. 잘못하면 유리와 함께 현실에서 유리될지도 모르겠다. 특히 유리파편이 내 얼굴에 박히기라도 하면..... 안간힘을 쓰지만, 팔이 빠지지 않는다. 이러다가 유리 깨먹겠다. 병원침대에 누운 내가 상상되는 순간에. 탁. "오빠. 힘없으면 없다고 해. 가방에 휘둘리지 말고." 역시 괴물다웠다. 누가 여동생 아니랄까봐, 그녀는 가방과 내 앞으로 달려와서는 가볍게 유리문 앞에 나를 멈춰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거, 사나이의 체면을 완전히 짓밟는 행위 아니냐?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겠냐. 힘없고 비실비실한 오라버니로 보는 시선이 두려워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동생은 그런 건 상관도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가방에 타고 다니지 말고, 그만 내려. 아무리 내가 괴력의 여동생이라지만, 오빠 같은 거구의 남자아이를 잡는 건 힘들다고." 뭐냐. 그 말은. 너, 혹시 몸집만 크고 밥값을 못한다고 날 놀리는 거냐? 하지만 나로서는 고개를 들 경황이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들의 눈은 마치 여자보다 연약한 남자를 보는 듯하다. 아. 이 망신.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오기로 된 사람이 갑자기 앓아 눕는 바람에." 전풍그룹에서 보낸 안내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원래 오기로 한 시간에서 자그마치 50분이나 지난 후였다. 한 시간을 안 채웠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문제가 있다면. "옮겨 타야 하는 건가?" 물론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우린 이미 짐까지 다 다른 차에 실어 놓았다고. 결국 전풍그룹에서 보낸 차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문제의 다른 차, 즉 플래닛 그룹에서 보낸 차는 비록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해." "이게 세계 제일의 힘인가." 다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고? 그야 전풍그룹의 차는 50분이나 걸려서 이곳에 왔는데, 플래닛 그룹의 차는 부른지 10분도 안 되어 공항에 나타났으니까. 물론 회장님께서 직접 불렀다는 걸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차이가 나잖아. '이것이 여동생의 힘인가.' 왠지 약이 오르고, 분하고, 속이 뒤틀렸다. 우리나라의 기업이 세계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풍그룹이 그 정도로 수준미달인 건 아니지만, 50분과 10분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짐을 차에 다 싣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편한 자세로 한참 기다린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다니. "아이구." 그룹 망신이라며 풍남이가 얼굴을 붉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이건 국제망신이다. 자기들이 주선한 여행에서 이런 사고나 치다니. 플래닛 그룹의 회장비서, 딱 잘라 말하면 여동생의 부하인 여자가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 속으로 그러겠지. '접대 하나 제대로 못하냐. 병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풍남아. 물론 이게 풍남이 탓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 녀석 탓인 건 분명했다. 이 여행을 주선한 게 누구인데. 그러나 그 비서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고. "그럼, 길 안내를 부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도 아닌 주제에, 차 하나를 앞에 세우고 가게 되었다. 우리가 무슨 국빈이냐. 그런데 잠깐.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나 물어볼 대상은 이미 앞의 차에 숨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하긴 차마 얼굴을 들고, 남의 그룹의 차에 편승할 수는 없었겠지.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풍남이가 아닌, 진희와 문희와 회장 비서와 회장, 즉 악의 화신 여동생의 얼굴뿐이었다. 덤으로 차의 내부도. 그런데 잠깐. "이건 뭐냐?" 원래 차라는 것은 이런 구조가 아닌데? 어째서 우주전투기를 연상시키는 운전석을 가지고 있지? 게다가 안이 너무 조용한데. 방음장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건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도, 안전벨트가 내 몸을 잡고 있어서 그게 힘들다. 그저 목만 이리저리 휘둘러볼 뿐. "오빠. 목 부러지겠어. 좀 얌전하게 타고 있어." 앞자리에 있던 여동생의 잔소리는 무시하고. 어차피 머리도 안 보일 정도로 큰 좌석이 놓인 앞자리에 있으니 나를 구타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이니까.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차의 내부를 감상하려고 했지만. 퍽. "좀 얌전히 앉아서 가 줘. 오빠." 이, 이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해 ! 어떻게 저기서 내 머리를 때린단 말이냐. 그러나 그건 모두 여동생의 신비일 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항의하려고 해도, 이미 여동생은 차를 운전하는 비서와 뭐라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 영어는 아닌 것 같고. 독일어도 아니고. 프랑스어인가? 설마 우리가 듣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못된 녀석. 자기 오빠도 안 믿고 있다니. 그런데 저 비서 아가씨, 운전하면서 저래도 되는 건가. 철없는 회장의 나불거림에 호응하고 있으면, 사고 낼지도 모르는데. 퍽. "우리 그룹의 차를 얕보지 말아 줘." 못된 녀석. 사람을 때리면서 대화하지 말란 말이야. 결국 나는 여동생 쪽에는 신경을 끄고, 뒷자리에 앉은 문희와 진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내 옆에 앉은 문희는 무시하고. 어차피 이 녀석은 차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그러나 진희는. "진희야." ".........." "진희야." ".................." "진희야." "...........................말시키지 마." 이상 끝. 그리고 그녀는 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래서야 대화가 될 리가 없다. 그럼 문희는 어떨까. 이대로 여동생의 구타와 진희의 무시를 견디며 앉아있는 것은 질색이었다. 이미 그런 건 비행기 안에서 충분히 했다고. "문희야." "............." "문희야." "......................." "문희야." ".................................ZZZ." 이건 또 뭐냐. 결국 나는 또다시 외로운 여행을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연미 누나는 자리가 좁다며 아예 풍남이네 차에 탔으니, 대화할 수도 없고. 하긴 대화할만한 상대도 아니지만. "이게 무슨 즐거운 여행이야 !" 내 한탄과는 관계없이, 두 대의 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이런 방송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일행은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석양을 바라보는 기분은 최고라고 외치고 싶지만, 자연풍경을 즐겁게 감상하고 싶어도 오늘 워낙 누군가에게 많이 얻어맞아서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여동생의 비리를 하나 알았기 때문에, 섬세한 내 신경에 가해진 타격이 만만치 않단 말이야. 그런데 잠깐. '여기가 독일이냐. 스위스냐. 오스트리아냐.' 솔직히 모르겠다. 아까 공항에서 안내방송을 제대로 듣지 않은 탓이냐고? 그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여동생의 횡포에 시달려서, 그걸 까먹은 것뿐이다 ! 나는 되지도 않는 독일어로, 아니 스위스어로, 아니 오스트리아어로 호텔의 간판을 해독하려고 시도했지만. 퍽. "어차피 모두 다 독일어를 쓰는 곳이잖아." 아구구. 뻔한 상식을 깜빡했다는 이유로, 나는 또다시 여동생에게 맞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는 대체 어디냐? 나는 구타의 욕구를 충족시킨 여동생에게, 재빠르게 눈치를 주었지만.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도시인 Konstanz라는 곳은 알지? 여기는 그곳으로부터....." "Konstanz?" 야. 해외여행은 이번이 처음인, 이 불쌍한 오라버니가 콘스탄츠가 어딘지 어떻게 알겠냐. 나는 재빨리 지도를 펴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장소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없네." 좀 큼지막한 지도를 가져올 걸. 내가 어디 있는지 여동생이 장황하게 떠들지만, 그게 어디 붙어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하다 못해 난 Konstanz라는 도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걸. 지도를 보며 방황하는 나에게. "베를린 쪽을 찾지 말고, 남쪽을 보라고. Bodensee라고 써 있는 부분을 특히 주의하면서." 여동생이 손가락으로 찍어주는 부분을 들여다보자, 겨우 문제의 도시를 찾을 수 있었다. 음. 거대한 호수를 접하고 있는 도시네. 하지만 여긴 국경도시잖아? 게다가 너무 남쪽이고. 여름에 굳이 '따뜻한 남쪽나라'로 와서 무슨 짓인지. 정말 여동생이란 애의 머리는. 퍽. "따지려면 전풍그룹 회장님한테 따져. 여행코스를 정한 건 내가 아니니까." 아구구구구. 요점은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거냐. 이 부잣집 아가씨야. 돈만 많아 가지고, 사람을 완전히 뭐 취급하고 있다. 잠깐. 이 녀석은 부잣집에 태어난 게 아니니 부잣집 아가씨라고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일단 부자인 건 분명하지만, 솔직히 그건 정당하게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 사기를 쳐서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여동생은 정당한 재산취득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솔직히 그 말을 어떻게 믿겠냐. 일단 이 녀석의 양심이라는 건.... 퍽. "뭐가 사기야." 아구구구구. 아프니까 요양해야 한다는 사람을 억지로 외국, 그것도 시골구석으로 끌고 오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또 구타냐. 이러려면 집에 그냥 있었어도 되지 않겠냐. 피곤한 사람을 마구 끌고 다니는 것도 너무한데, 이제는 구타까지..... 오죽했으면 저기 서 있는 플래닛 그룹 직원이 웃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 회장 비서라고 했지? 일단 보기에는 참 예쁘네. 여동생의 마수에 걸려 고통을 겪기에는 너무 안타까울 만큼. 잠깐. '이 녀석이 플래닛 그룹 회장이라고 했지?' 그 순간 내 눈앞에, 무수한 돈 다발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이 녀석이 회장이라면, 나는 바로 회장의 오라버니. 비록 모든 청소년이 꿈꾸는 부자 아들은 아닐지언정, 부자 여동생을 둔 오빠가 아닌가. 그것도 여동생의 하나뿐인. 그 말은 즉. '앞으로 피규어는 보이는 대로 다 살 테다.' 그렇다. 나는 그래도 된다. 세계 제일의 부자 여동생을 둔 오라버니이니, 그깟 돈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세계적인 부자들은 씀씀이도 커서, 한 번 쇼핑에 수 십억의 돈을 날려버리지 않는가. 비록 약간 의미는 다르지만, 여동생 역시 한 번 쇼핑에 10만 유로를 써 버렸다. 내 눈으로 그것을 보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오빠의 극히 작은 소비에 이 녀석의 주머니가 털릴 리도 없다. 온갖 완성형 피규어, 각종 DVD, 오디오 세트, 디지털 TV, 시속 400km 이상을 낼 수 있는 초호화 스포츠카, 각종 게임기, 여기에 진희에게 선물할 각종 보석 목걸이가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돈을 쓰자 ! 적당한 소비는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된다 !' 어차피 여동생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 회장들에게 있어, 내가 아무리 열심히 돈을 써봤자 그건 푼돈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사고 싶은 걸 다 사도, 여동생의 호주머니는 거의 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좋은 일이 있나. 모처럼 여동생 덕 좀 보자.......... 퍽. "이래서 내가 오빠한테 말을 하기가 싫었다고." 아구구구구.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내가 돈 좀 쓴다니까 화부터 내냐. 그러나 자기 비서가 웃든 말든, 전풍그룹 직원들이 기가 차든 말든 여동생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모양이다. 다시 뭐라고 우물거리려다가, 여동생의 주먹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말이 목구멍 속으로 달아난다. 무서운 녀석. 사람을 숨도 쉬지 못하게 하다니. '이 녀석은 대통령 앞에서도 날 팰 거야.' 이 프레첼 먹다가 목에 걸려서 숨통 막혀 켁켁거릴 녀석아. 사시사철 구타하지 말란 말야. 그러나 내가 뭐라고 떠들든, 여동생은 그에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나를 무시하고 자기 비서를 쳐다보더니. "이봐. 알리사." "네. 회장님." "회의 준비는 다 해놨겠지? 결제준비도." "네. 이미 본사에 연락해두었습니다." "호텔에 자리를 잡으면 곧 일을 시작할 테니까, 위성통신장비 켜 놔." 웃다가 죽으려고 하던 비서가, 여동생의 느닷없는 트집에 허겁지겁 차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저건 기계처럼.....이라고 말해야 하나? 어쨌든 저렇게 성질 더러운 회장 밑에서 근무하려면 힘들겠어요. 비서 누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재빠르게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차피 맞을 게 뻔하지만,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서.... 그러나 날아온 것은 주먹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홱 쳐다보더니. "난 일단 회사에 연락해야 하니까, 오빠는 일단 거실에서 쉬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비서 아가씨의 뒤를 따라 가버렸다. 일단 안 맞은 건 다행이었지만, 그런데 잠깐. 물어볼 게 있었잖아. 난. '어떻게 회장이 된 건지 설명도 안 하고 도망가는 거냐.' 못된 녀석.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는 여동생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 돈 많은 회장 아가씨는 휴양지에서도 회사에 신경을 쓰는 게 도리라는 거지. 이미 없는 여동생을 다시 잡아서 끌고 올 수는 없으니, 나는 얌전히 호텔로 가서, 우리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라고 하기에는 좀 큼지막한, 특실에 안내된 우리 일행은 짐을 풀었고, 나는 호텔 방에 마련된 거실의 의자에 몸을 묻었다. 푹. "아. 피곤하다." 잠시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잠들어버릴까. 오늘은 워낙 오랜 시간을 여행했기 때문에, 그런 유혹이 나를 침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시차가 뒤죽박죽이 되는 바람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지경이니까. 밖을 보면 분명히 낮인데, 내 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항변하고 있다. '그래. 자자.' 소파의 푹신한 느낌과 더불어, 나는 점차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잠의 요정이여.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해주렴. 음. 가슴이 노출된 것이, 아주 멋진 옷차림의 요정이야. 그런데 이 얼굴은 누구지? 내가 그 느낌을 잡으려고 할 때. "언니. 미인이가 정말로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었어요?" 진희의 그 말이,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여동생의 말이라면 떠들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진희의 말이니까 피곤한 몸을 채찍질해서라도 일어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그녀가 입에 올린 화제가 여동생에 대한 것이라는 게 날 약간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그 질문은 나도 하고 싶었던 것이니. 연미 누나가 대답했다. "응.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긴 하지만, 그 애는 분명히 회장 맞아." 저. 연미 누나. 지금이라면 그냥 웃고 넘어갈 테니까, 농담이라고 한 마디만 해줘요. 하지만 저 얼굴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럼 이 녀석은 진짜로 플래닛 그룹 회장이란 소리잖아. 어차피 그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우에엑. "그런데 왜 그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돈은 어떻게 모았고?" 역시. 진희가 왜 뻔한 질문을 했는가 했더니, 바로 이걸 묻기 위해서였군. 역시 내 애인다운 명석한 두뇌야. 아. 아직 애인은 아니었나?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니 상관없어. 진희의 질문에 방에 있던 모든 이의 눈과 귀가, 연미 누나에게 집중되었다. 자. 연미 누나. 기대를 저버리지 마세요. 여동생의 비리를 확 ! 다 까발려 버리라고요. 그러나 연미 누나의 대답은. "당사자가 오면 묻자고." 쿵. 이 사람이 대체. 누구 놀리는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는 거야?" 여동생이 호텔 방으로 들어온 건 저녁 식사가 끝난지도 한참 후의 일이었고,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침대에 쓰러져 있던 우리들은, 그녀의 귀환소식을 듣자마자 모조리 출동해서 그녀를 에워쌌다. 자. 비리를 밝혀라. 여동생아. 그러나 그녀는. "별 거 아냐. 싼값에 주식을 사서,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는 재주가 대단했을 뿐이야. 그래서 플래닛 그룹의 대주주가 될 정도로 돈을 모았고.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지 뭐." "너무 간단한데." 확실히 이건 너무 간단한 설명이었다. 뭔가 머리 빼고 다리 빼고 팔 빼고 꼬리 빼고 몸통 빼고. 그냥 등뼈 한 조각만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이었을까. 그걸 가지고 어떻게 재산축적과정에서 네가 저지른 그 무수한 비리들을 알 수 있겠냐. 돈이 얼마나 되는 지도 전혀 모르겠고. "단지 주식거래의 실력만으로 대기업 회장을 현혹한 거냐?" "그렇다면 그런 건가?" "얼버무리지 마 !"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뭔가 음모가 있다. 단지 주식을 가지고 노는 것만으로 그런 돈을 모았다고? 물론 주식투자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면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걸로 거액을 벌기 위해서는 처음에 종자돈이 있어야 하고, 주식에 대한 지식과 행운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그게 그렇게 쉽다면, 이 세상은 부자로 가득 차지 않겠는가. 하지만 실제로는 깡통계좌로 인해 쪽박 차는 사람이 더 많다. 아니, 거의 모두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거래를 잘해도 그렇지, 그것만으로 대기업의 회장이 된다고? 웃기지 마 !" 돈만 많다고 대기업의 회장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현대 사회가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지만, 회장이란 직책은 기업을 이끄는 지도자다. 또한 그 기업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런 자리에 아무나 앉힐 정도로 플래닛 그룹이 만만한 곳일까. 기업의 회장이 되려면, 경영에 있어 비상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회장이 결정 하나 잘못하기만 해도, 기업은 엄청난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주식거래를 잘한다고 해서, 기업경영을 잘한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고. 스물도 안 된 계집애가 어디서 경영기법을 배워서, 회장이 되었다는 거냐? 그것도 그렇게 큰 기업의." 그런데 저 녀석, 왜 저렇게 웃는 거야? 왠지 기분 나쁜 미소다. 마치 사람의 모가지를 자르기 직전의 살인마가 웃는 것 같다. 그녀는 태연하게. "경영기법 배우는 거야, 뭐 쉽던데." "그게 쉽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러자 여동생은 다시 그 살인미소를 지으며. "오빠는 자기 여동생의 IQ도 파악하지 않는 모양이지?" 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여동생의 일격이 내 머리에 떨어졌다. "만약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난 벌써 대학 졸업하고 경영학 박사 학위 정도는 움켜쥐었을 거야. 우리나라에선 영재교육 같은 게 거의 불가능하니까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지만." 에? 에? 에? 설마 그 말의 의미는..... "오빠의 사랑스런 여동생은, 10살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을 정도의 천재라는 거야." 에이. 농담도 잘 하셔. 이봐요. 여동생. 아무리 네가 대단하다고 해도 설마 그럴 리가... "그러니까 공부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전교 10등 이내에 들어가지. 평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소녀주부 역할까지 맡으면서 우등생이라니. 지금쯤이면 여동생의 두뇌수준을 의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빠가 상처받을까봐 말하기 싫었지만." 쿵. 갑자기 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No. No. That's not true. That's impossible." 아, 아니구나. 여기는 대한민국이지, 미국이 아니니 이 대사는 곤란하다. 번역해서. "아냐. 아냐. 그건 사실이 아니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 역시 뭔가 안 어울린다. 간단하게 하자. "믿을 수 없어 !" 똑같은 소리를 세 번 반복한 것이, 내가 여동생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비참하지만, 너무 황당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실이란 거 다 알고 있잖아. 포기해." "포기 못해 !" 그렇다. 아무리 여동생이 지상최강이라고 해도, 그건 주먹만으로 족하다. 잔꾀만으로 족하다. 돈까지 지상최강이라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돈이 많은 사람이 제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나는데. 이러다가 이 녀석은 혹시 권력까지 지상최강이 되는 게 아닐까. 갑자기 히틀러나 스탈린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여동생의 군대에게 짓밟혀서, 압제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원혼이 허공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일까. '안 돼.' 그런 건 막아야 해. 어떻게든 악의 화신 여동생을 막아야 해. 그런 무의식의 반영인지. "네가 기업 경영할 시간이 어디 있어 !" 현실 부정.... 아니 여동생의 논리에 대한 논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말은 한 방에 부정당했으니. "오빠를 돌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어." 이, 이 녀석이 날 뭘로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명히, 내가 어지간히 돌보기 힘든 녀석일 거라고 오해하잖아 ! 옆에 진희가 있다는 건 고려하지도 않는지, 태연하게 오빠한테 물을 먹이는 여동생이라니. 못된 녀석. 그런데 주위의 시선이 이상하다. 이건. 설마. "아니라고 !" 하지만 방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안 믿는다는 표정이다. 진희야 아까부터 나에게 골을 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풍남이는 볼 필요조차 없으니까 넘어가고. 그런데 문희 너, 어떻게 소꿉친구인 나에게 이럴 수가. 그녀의 반응은. "음. 확실히 그렇기는 해." 야. 너, 나 놀리려고 작정했지 ! 그럼 지금 남은 사람은 둘밖에 없는데..... 비서누님은 나와 만난 적도 없었던 사람이니 제쳐두고, 호텔직원은 어차피 여기 없으니까 빼고. 그럼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은....! "확실히 문구를 돌볼 정도의 재능이라면,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 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봐." 이, 이 사람이.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떨어지잖아요 ! 물론 그렇게 외쳐봐야 연미 누나가 자기 생각을 안 바꿀 거라는 건 안다. 날 놀리는데 재미 붙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가 위기에 몰린 지금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 태도를 고수하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모두의 비웃음속에, 절망적으로 반격을 시도한다. 미치겠다. "논점 흐리지 말고, 진짜로 설명해 봐. 설령 네 주식거래 실력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대기업의 주주들이 네 회장 등극을 승인할 리가 없어. 무슨 수를 썼지?" 도대체 무슨 사악한 재능을 선보였기에, 그들이 그런 '기업 말아먹을 짓'을 했냐는 거다. 그러나 여동생이 내세운 변명, 아니 핑계라는 건. "주식거래로 모은 자금으로 일단 플래닛 그룹의 주주 자리를 차지하고, 여기서 기업의 투자방향에 대해 적절한 조언을 해서, 신뢰를 얻어냄으로서 결국 회장 자리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자세한 건 기업 비밀이니까 말할 수가 없고." '적절한 조언'이라는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참아야 한다. 먼저 화를 내는 쪽이 지는 것이니까. 아니, 이미 화내고 있는 건가? 일단은 평정을 가장해서. "오빠한테도 비밀이냐." 사랑스런 오빠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 아, 아냐 ! 이건 진실을 숨긴, 괘씸한 여동생에 대한, 선량한 오빠의 정당한 분노라고 ! 어쨌든 질문 쪼가리가 날아가고, 여동생의 대답이 돌아왔다. 문제는 그게 제대로 된 게 아니라서 탈이지. 그녀는. "오빠가 그런 걸 알면, 1주일 이내로 전국에 그 이야기가 다 퍼질 거야. 그러면 내가 대기업 회장이라는 게 알려지고, 돈 달라는 인간들이 끝없이 몰려올 걸? 귀찮다고." 하긴. 공짜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둘인가. 여동생의 그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수긍하려다가......... 아니잖아 ! 이 녀석의 말대로라면, 내가 그 비밀을 알 경우 다 떠벌리고 다닌다는 소리잖아? 이 녀석이 오빠의 입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망발을 서슴없이..... 탁. "아까도 그랬잖아. 이제 마구 낭비할 거라고."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오빠를 무시하는 여동생. 그런데 그게 어때서? "당연하잖아. 돈이 많이 있다면, 어느 정도 쓰는 게 인간의 정상적인..." "그래서 안 돼." 내 입을 거의 틀어막다시피 단언하는 여동생. 하지만 여기서 막힐 순 없다. 진희의 입술이나 가슴이라면 기꺼이 막힐 용의도 있지만, 여동생한테는 싫다. 그러나. "난데없이 오빠가 과소비를 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분명히 의아하게 여길 거야. 그러면 다들 오빠한테 지금 상황을 물어볼 것이고, 그러면 오빠는 분명히 대답하게 되어 있어. 주위로부터 들어오는 압력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러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빠와 오빠 친구들로 확대되고, 그런 압력이 반복되면 진실은 새어나가. 그러면 오빠도 나도 평범한 고교생의 삶을 잃는 건 시간문제야. 한 번 발 디딜 때마다 파파라치들이 몰려오는 꼴을 보고 싶어?" "........." 네가 어디가 평범한 고교생이냐고 소리라도 질렀어야 했지만, 여동생의 말이 너무 빨리 나오는 바람에 못했다. 분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도리가 없다. 입이 나불거리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에. 침도 안 튀기면서 저렇게 말하는 게 신기하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 그러니까? 그래서 뭐냐? 어차피 나쁜 이야기겠지만. "과소비는 엄금. 비밀 누설도 엄금. 물론 내가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란 것도 외부로 발설 못함. 고등학교 시절만이라도 편하게 보내고 싶으면, 입을 다무는 게 필수.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오빠의 용돈은 지금까지와 달라지면 안 돼. 주머니가 가벼우면 비밀을 숨기는 게 그만큼 쉬워지니까." 역시. 그 핑계로 돈을 안 준다는 거냐. 못된 녀석. 혼자서만 과소비를 하겠다니. 이런 말아먹을 인간이 내 여동생이란 말이냐. 그리고 하나를 덧붙이는 여동생. "만약 플래닛 그룹이 우리나라 기업이었다면, 아마 난 회장이 되지 못했을 거야. 난 남자도 아니고, 기업 회장의 친손녀도 아니니까. 그래서 풍남그룹이 아니라, 플래닛 그룹을 택했던 거고. 풍남이한테는 아쉬운 일이지만." "............." 뭐, 풍남이로서는 여동생의 실력을 보고 그녀가 자기 기업에 오기를 바랬지만, 그건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 누가 자기 소유인 대기업을 버리고, 콩알만한 그룹의 임원으로 가겠나. 여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온갖 발악을 다 해야 하는 이 나라에서. 그런데 잠깐. "미국에는 언제 갔었냐."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건, 숨겨진 비리를 들켜서 짓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잠깐. 잠깐. 그렇게 큰 주먹을 휘두르면..... 콰아앙. "여섯 살 때 행방불명된 여동생의 일을 이렇게 쉽게 까먹으면 어떻게 해 !" 아쿠쿠. 평소보다 왠지 타격력이 증대된 것 같은 여동생의 주먹에 나는 비틀거렸지만, 그 말에는 한 가지, 내가 지금까지 간과하던 가능성이 들어있었다. 뭐? 나한테 행방불명된 여동생이 있다고? 그렇다면 나한테는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는 말이잖아? 음. 그게 누굴까. 적어도 이 녀석보다는 착한 아이였을 거야. 그럼 그 애는 지금 어디에서 헤메고 있는....... 콰아앙. "내 이야기잖아 ! 여섯 살 때 일이라고 잊어먹지 마 !" 아. 그랬던가. 이 녀석이 여섯 살 때, 유괴 당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지. 그때 이 녀석을 찾아서 데려온 사람이......... 나이가 팍 든 할아버지였던가. 여동생이 기가 차다는 어투로 자기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자, 뭔가 유령 같은 게 허공에 떠올랐다. '이 녀석이 이젠 귀신까지 부르나?' 퍽. "입체영상이야. 플래닛 그룹의 전 회장님이자, 그때 날 데려온 할아버지." 누군가하고 유심히 쳐다보자, 내 기억 속의 악당의 얼굴이 떠올랐으니. "아 !" 그제야 기억이 났다. 여동생을 찾아서 데려온, 심히 멍청하고 재수 없는 노인네가. 그럼 그 행방불명된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혹시 그 그룹에서 무슨 생체실험을 하느라 내 진짜 여동생을 빼돌리고, 가짜를 턱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게 아닐까? 콰콰쾅. "도대체 오빠라는 인간은 !" 나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간신히 저승에서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잔뜩 불어터진 여동생의 얼굴이었다. 음. 꽤 화가 났나 보다. 그러나 솔직히 그 상황에서는 그런 말밖에 나올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 게다가 여동생이 돈을 모은 과정을 들어본 결과는, 오직 한 가지 확인성 질문으로밖에 이어질 수가 없으니까. 그것은 바로. "너, 투기꾼이었냐?" 그 소리에 다시 주먹부터 치켜드는 여동생. 음. 투기꾼이 아니라 깡패라고 했어야 했나? 놀란 비서 누님이 허겁지겁 여동생을 말린다. 남들이 볼 때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말리는 거지만, 저건 분명히 '허겁지겁'이 맞다. "회장님. 지나친 감정분출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부디 고정하시길." 고생이 많으시네요. 비서 누님. 그런데 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 설마 이사들을 모아서 회의할 때도 저렇게 행동하는 건 아닐까? 왠지 모르게 비서 누님의 행동이 상당히 익숙한 것으로 보아, 종종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화를 버럭버럭 내며 이사들을 질타하는 여동생이라. 왠지 어울릴 것 같은..... 쾅. 우당탕. 나는 그대로 웃는 얼굴로, 방바닥에 엎어졌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건 좀 짓궂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아직도 씩씩거리는 여동생의 모습이 상상된다. 다만 지금 고개를 들면 한 방 더 맞을 것 같아서, 일단 호기심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결국 고개를 치켜든다. 그걸 보니 여동생의 치마 속이 보이.......는 건 아니고. 비서 누님이 필사적으로 여동생을 말리고 있는 게 보였다. "회장님. 그렇게 때리다가는 오라버님이 다칠 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하지만 그런 건설적인 충고를 받아들일 여동생이 아니지. 저 녀석은. "이런 건 제 때 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트레스로 넘어가면 큰일나니까." 내가 무슨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냐. 다행히 항의는 나보다 비서 누님이 먼저 했으니. "폭력은 안 됩니다. 더군다나 약자에 대한 폭력은 더더욱." 약자..... 뭐 내가 여동생에 비하면 약자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실을 확인 받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이제 나는 국제적으로 '연약한 오빠'로 공인되는 거란 말인가. 그러나 정작 경악할 소리는 그 다음에 나왔으니. "총으로 쏘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는 거라고. 지금." 크억. 총이라니. 게다가 이 녀석이 지금 지칭하는 총은 분명히 전에 불량배들을 물리칠 때 썼던 'BB탄 쏘는 장난감 총'이 아니라, 진짜 총일 게 분명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세계적인 대기업인 플래닛 그룹이라면 그쯤은 눈감고도 입수할 수 있을 것이니까. 그런데 너, 설마 친오빠를, 그것도 쌍둥이 오빠를 총으로 쏴 죽일 셈이냐. 농담이라고 생각하려고 하는데. "회장님. 안 됩니다." 에? 비서 누님이 왜 저러시는 거지? 하지만 그 이유는 곧 밝혀졌으니. "걱정 마. 사격은 여기서 안 할 테니까." 한 번 웃고 마는 여동생. 그런데 잠깐. 여기서 사격을 안 한다고? '그럼 어디서 한다는 거냐?' 갑자기 내 몸이 싸늘해졌다. 그럼 다른 데에서는 날 총으로 쏠 수도 있다는 소리가 아니냐. 몸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동생은 태연하게. "그건 당연히........" 여동생의 손이 가슴팍으로 들어간다. 으아악. 드디어 총질을 할 셈인가. 아냐. 아냐. 여기서는 안 한다고 했잖아? 그러나 여동생이 언제. '아, 그거? 농담이었어.' 이렇게 뒤집을지, 누가 아나. 부디 비서누님이 성공하길 빈다. 그러나 결국 여동생은. "!" 힉. 진짜잖아 ! 내가 번개처럼 의자 뒤로 도망간 것과, 여동생이 총을 뽑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난 죽기 싫어. 살려 줘. 아직 진희하고 같이 잠도 안 자봤단 말야. 옷도 안 벗겨봤고. 이봐. 이봐. 왜 여태까지 여동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거야? 이거 치워. 치워. 치우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들려온 말은. "당연히 사격장에서 쏴야지." 그리고 자기 총을 살피는 여동생. 하지만 이 녀석아 ! 위험하게 그딴 물건을 만지작거리지 말란 말이야. 달달 떠는 나를 쳐다보며 비서 누님은. "탄창이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미스터 연." 이봐요. 당신은 저 녀석이 순식간에 탄창을 어딘가에서 뽑을 수도 있다는 건 감안하지도 않으십니까. 하지만 다들 그대로 서 있는데, 나만 숨는 것도 별로 좋은 건 아니므로 결국 난 일어나야 했다. 진희가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모두를 기겁하게 할 말을 또 꺼내는 여동생. "시가지에서 쏘려면 역시 발칸포로 화끈하게 갈기는 게 좋거든." "갈기지 마 !"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 시내에서 뭘 쏘겠다는 거냐. 그것도 권총도 아니고, 소총도 아니고, 산탄총도 아닌 발칸포라니 ! 1분에 총알을 6000발이나 쏟아내는, 그런 흉물을 사람들도 많은 도시 한가운데에서 휘두를 셈이냐 ! 정말 대책 없는 여동생이다. 갑자기 차가워지는 모두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냐. 좀 자제할 줄 알아라. 이 나쁜 녀석아. 돈만 많으면 다냐. 그래도 조금은 찔리는지, 변명을 늘어놓는 여동생. "걱정 마. 악당들의 군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으니까." 핑계라는 게 고작 그 모양이냐. 현실감각도 없는 녀석. 솔직히 북한이 쳐들어오거나, 중국이 쳐들어오거나, 일본이 쳐들어오거나, 러시아가 쳐들어오지 않는 한 그럴 일이 있냐. 없지. 아.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가? 갑자기 불안해지네. 우리의 자랑스런 '대형 수송함' 독도함이 생각나니, 일본의 침략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어쨌든 일본이니까 말이다. 그 이상의 가능성을 생각하려다가, 나는 그만 망상을 접었다. 오늘은 피곤하니 이제 그만 잠도 자야 하고, 여동생에게 물어볼 게 딱 하나 더 있으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니. "그럼 너, 돈이 얼마나 있는 거냐?" 그렇다. 돈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에, 10만 유로를 덜컥 내놓느냐는 거다. 그리고 여동생의 돈이 많을수록, 내가 뜯어먹을 수 있는 떡고물도 그만큼 더 많아질 수 있을............게 아니라 ! 여동생의 재산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절대 꿀꺽하거나 집어먹으려고 묻는 게 아니다 ! 진짜다 ! 진짜라고 ! 진짜라니까 ! 그 점에 대해 궁금해한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모두의 시선이 여동생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재산 총액이 궁금한 거야?" 이봐.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여동생. 내가 묻는 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텐데? 나는 질문을 고쳐서, 내가 묻고 싶은 걸 강조했다. "그게 아니고, 지금 당장 개인용돈으로 꺼낼 수 있는 돈이 얼마냐는 거야." "음. 개인 용돈이라." 잠시 오른손의 검지를 뺨에 대고 생각하는 척 하는 여동생. 하지만 너, 아무 생각도 없지? 그녀의 대답은 나를 크게 실망시켰으니. "한 달 동안 쓰는 용돈이라면, 교통비용을 합쳐서 대략 5만원." 모두 잠시 방바닥에 엎어졌다. 이 녀석아.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듣고 싶은 건 ! "그거말고 ! 네가 회장으로서 쓰는 개인적인 돈 !" 너, 오빠가 열 받아서 죽는 거 보고 싶은 거지? 그래서 일부러 내가 뭘 묻는지 알면서, 딴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국회의원 같은 녀석이 다 있나. 뿌드득. 내 이 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동생은 다시 대답을 했다. 그러나. "회사 돈이나 개인 별장이나 보석이나 미술품이나........." 뭐야. 왜 수식어가 그렇게 많아. 누가 그런 잡다한 문학적인 치장을 듣고 싶은 줄 알아. 모두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 의식이 그와 함께 빠져나간다. 그리고 고개가 서서히 앞으로 꺾여진다. 간단히 말해서, 조는 거다. 도대체 몇 개 항목이나 더 불러야 하는 거냐. 오죽하면. "미인아. 예외항목 다 지나면 불러." 연미 누나조차, 지쳐서 그렇게 모닝콜을 예약할 정도냐. 그러나 여동생의 예외항목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나조차 졸기 시작할 무렵에야, 결론이 나오기 시작한다. 참 빨리도 나와요. 그러나 문제는. "..............등을 제외하면, 현금만 대략 1억 달러 정도. 물론 이건 회장으로서의 출장비용도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로 내가 쓰는 돈은 매우 적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그 정도야." 그런 거냐. 그럼 너도 생각보다는 가난한 모양이구나. 그럼 난 잔다.............. 잠깐. 얼마라고? 1억 달러? 그럼 우리 돈으로 얼마냐. 요즘 환율이 1달러당 1000원이 넘으니까....... 그건 즉 대한민국의 돈으로 바꾸면 1000억 원 정도 되나? 잠깐. 얼마라고? "천억 원?" What the hell !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순 사기다. 아무리 지상 최강의 여동생이라지만,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한참 잘못된 거야. 어째서 저 얼굴만 펀펀한 여동생이 그렇게 돈이 많단 말이야. 갑자기 기절하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00억 원?" 얼마라고? 모두의 눈에서 질렸다는 감정이 떠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서 누님을 제외하고. 하긴 그녀는 이미 여동생의 재산에 대해 잘 알 것이니 놀랄 이유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서민들에게는, 그건 천문학적인 수치라고 ! 사실 풍남이나 진희, 연미 누나도 상당한 부잣집 출신들이지만, 이건 액수가 달랐다. 그러면서 한 달 용돈이 5만원이라고? "이 지상 최강의 사기꾼아 !"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것도, 절대로 이상할 게 아니었다. 액수가 많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건 완전히 문제가 달랐다. 물론 전직 대통령인 어떤 분들은 그보다 더 돈이 많지만, 그 사람들은 세계적인 대기업을 소유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 녀석은 그들보다 더욱 부자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돈 없는 척, 모자란 척 했단 말이지.' 그것도 그거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녀석이 1억 달러라는 말 앞에 달아둔 수식어들이었다. 이 녀석은 분명히 '이거 빼고 저거 빼고 요거 빼고' 해서 남은 게 그 정도라고 했지. 그럼. '이거 넣고 저거 넣고 요거 넣은 재산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거냐?' 아니, 그걸 따질 것도 없었다. 1000억이라니 ! 도대체 그걸 어떻게 벌었지? 이 녀석은 혹시, 침몰한 해적선이라도 찾아낸 거 아닐까. 거기서 어마어마한 보물을 건졌다던가. 아냐. 아냐. 그것만으론 한참 부족해. 오히려 히틀러나 스탈린이 숨겨둔 보물이라도 찾았다는 쪽이 더 그럴 듯 하겠어. 그게 아니면 고대 문명이 남긴 보물이나. 물론 미국 정부의 금고를 털었다는 것도 가능성이 있을 것이고. 물론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은 역시. '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내린 거야.' 부럽다. 그런 벼락은 왜 나한테는 안 내리는 거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도 그렇게 돈이 많았다면. 아니, 나는 가난한 일개 서민이니,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 바라는 것은, 그저 소박하게. "그렇게 돈이 많이 있으면, 나한테 10억만 주라." 그렇다. 10억이다. 10억만이라도 있다면, 나로서는 만족이다. 그 정도의 돈이 있다면 평생 먹고 살 수도 있을뿐더러, 내가 원하는 걸 대부분 할 수 있다. 가난한 서민이 아무리 돈을 써봐야, 솔직히 10억이면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그런 편의를 나에게 제공할 리가 없다. 정말 없다. 그녀는 차갑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벌써부터 낭비벽이 심해지면 축구 못해. 헝그리 정신이란 걸 길러야 한다고. 오빠는." 나쁜 녀석. 갑자기 배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소화가 안 되어서 그런가.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위장장애가 있었나. 물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에 해당하는 일은 절대 아니다. 여동생은 사촌이 아니라 2촌 관계거든. 물론. '왜 이 녀석만 이렇게 일이 잘 풀리는 거야.' 이런 소리나 하면서, 여동생에게 하늘의 응징이 가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기쁨은 나누면 두 배라는 명언을 기억하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10억 원이 여동생에게 뭐가 부담이 되겠냐.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외계인이면서. 사실 이 녀석이 돈을 번 수단을 생각해보면. "졸부. 투기꾼. 복부인." 이 말이 가장 어울리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비난한다고 해도 여동생에게 타격이 가해지지는 않는다. 저렇게 돈이 많으니 솔직히 걱정이 되겠냐. 그저 각국 정치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 충분하지. 그리고 어차피 전문경영인들을 쓰고 있다면서. 그럼 이 녀석은 그저 얌전히 투기꾼답게 놀고, 고생은 고용인들에게 시키면 끝이라는 거다. 전문경영인들은 죽어라 피 토하면서 일하고, 저 녀석은 편히 누워서 배를 불리는 거란 말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얄밉게도. "뭐 이것도 능력 아니겠어?" 뭐가 능력이냐고 외치고 싶지만, 확실히 그런 대기업을 그 나이에 손에 넣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기에, 여동생의 말에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다만 요 녀석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손에 넣었는가 하는 것은 조금 수상쩍지만. 역시 선천적인 재능인가. 그럼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이야. 물론 나도 아주 형편없는 쓰레기는 아니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한다. 의사 아들이니 집안도 좋은 편이다. 다만, 옆에 저런 정체불명의 괴물이 있는 게 문제지. 그럼 이 녀석은.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건 다 하겠네?' 아마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남극에 다녀올 수도 있을 것이며, 세계 제일의 호텔만 골라서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고, 유럽의 어느 성을 통째로 사서 별장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그런 돈 많은 여동생이, 어째서 굳이 전풍그룹처럼 조그마한 기업의 돈으로 유럽 여행을 하는 거지? 굳이 신세를 질 필요가 없잖아? 그런데 왜? "오빠. 까먹지 말라고. 이 여행은 어디까지나, 전풍식품의 라면 생산라인에 나타난 결함을 지적해서, 금전적 손실과 이미지 손실을 막아준 데 대한, 전풍그룹의 감사 차원에서 이뤄진 거라고." 그랬냐. 오늘 워낙 큰 일이 많이 터져서 잊고 있었다. 그래. 난 무식한 오빠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여동생의 정체를 풍남이가 언제 알았지? 그런 으리으리한 인간을 고작해야 라면공장 견학으로 대접한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게다가. "그런데 그 전풍그룹이, 남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안다는 거냐?" 그게 이상했다. 플래닛 그룹 회장이라면 라면공장에 보내서 견학시킬 사람이라기에는, 뭔가 너무 무겁지 않은가.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남이는 여동생을 자기 기업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 혹시........ 내가 여동생에게 '은혜 어쩌구'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바로 그 점이 이상해서였다. 전풍그룹이 남의 은혜에 감사표시를 할 기업은, 분명 아니므로. '중소기업의 특허에는 특허료를 안 내고 무단 사용하는 것이 흑자경영의 첩경.' 이런 동네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전풍그룹이 여동생의 생산라인의 결함 지적에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 기업이라면 당연히 여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협박하거나, 생트집을 잡는다며 공장 밖으로 여동생을 쫓아내거나, 여동생이 바퀴벌레를 라면생산라인에 넣었다고 누명을 씌우거나, 뭐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오빠 상상하고 비슷해. 그 사람들은 내가 지적하니까, 생산라인을 정지시키고 확인하더니, 입 싹 씻고 감사장 하나로 끝내려고 하더라고. 마치 내가 그걸 못 봤어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처럼 말야. 그래서 감사장을 안 받고 그냥 가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골을 내더라. 건방진 계집애니 어쩌니 하면서. 그런데." "그런데?" "플래닛 그룹 한국지사의 사람이 그걸 본 거야. 식품관련으로 협상하려고 사무실에 들렀는데, 날 발견하는 바람에 일이 커진 거지." "역시." 그럼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전풍그룹이 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어. 아마 감사장도 대충 만든 게 분명할 거야. 무엇보다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면 여기 이 방에 전풍그룹 관계자가 하나 있으니 반론이 나올 법도 한데. "..........." 그것 봐. 조용하잖아. 확실히 전풍그룹다워. 뭐 그 그룹의 사전에 감사니 보은이니 하는 항목은 전혀 없으니 무리도 아니지만. 그런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됐어? 응?" 이봐. 문희야. 굳이 수첩까지 빼들고 대기하지 마라.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카메라까지 놓여있다. 무슨 짓을 할지가 뻔히 보이는구나. 그러나. "도촬은 금지입니다." 뭔가가 휙 지나가더니, 문희의 수첩도 카메라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증발했나? 그럴 리가 없잖아 ! 이 경우에 카메라의 행방을 물으려면, 역시.... "악 ! 언니 ! 그거 내놔요 !" 그러나. 비서 누님이 그런 말에 흔들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설명이란 단지. "회장님은 아직 공식 인터뷰를 원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뿐이었다. 그럼 이제 저 카메라는 몰수당하는 건가........ 어? 그냥 돌려주네. 잠시 웃던 문희의 얼굴이 갑자기 확 일그러졌다. 그 이유는. "내 카메라가........" 내부전원 0. 전지를 빼둔 건가. 그게 아니면 내부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킨 건가. 울상이 된 문희를 배경으로 한 채, 여동생은 다시 자기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풍남식품 관계자들은 무례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이번 여행을 주선하게 된 거야. 물론 그건 미안해서가 아니라, 돈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그런 거지만. 이번 일로 이사회에서는 전풍그룹과의 제휴를 하지 말자는 의견이 상당히 강해졌고." 물론 전풍그룹에는 양심이 없으니, '돈이 걸린 문제라서' 사과했다는 건 이해한다. 그런데 플래닛 그룹 쪽에서는 왜 그런 의견이 나온 거지? 단순히 회장에 대한 무례 때문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본 비서 누님이 보충설명을 해준다. "식품 생산라인에 바퀴벌레를 투입할 정도로 품질관리가 엉망인 회사와 제휴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뿐입니다. 회장님도, 이사진들도, 대주주들도 말이지요." 하긴. 그 말에는 모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풍남이는 완전히 창피해서 찌그러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풍남이에게 더 두려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으니. "그래서, 일단 제휴 문제는 좀 더 두고보기로 했어. 하지만 이대로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왜..........요?" 풍남아. 너 굉장히 불쌍해 보인다는 거, 아냐? 이게 돈과 권력의 힘인가. 저런 콩알만한 여자아이에게 대재벌의 후계자가 싹싹 비는 걸 보니, 정말 돈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허망함도. 평소에는 힘이 있다고 뻐기고 다녔지만, 결국은 보다 더 큰 힘이 눈앞에 나타나자 무릎을 굽히지 않는가. 그런데 제휴를 포기하는 이유는 뭐냐?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안내인이 한 시간이나 지각했어. 세계 굴지의 대기업 회장을 접대하면서도 이런 식이라면, 일반인들을 상대로는 오죽하겠어. 그러면 우리 기업의 이미지를 버리게 된다고. 고객에 대한 불성실이 너무 과해. 고객이 일반 서민이든 권력자이든, 정성을 다해 모시는 건 장사의 기본인데 말이야." 여동생이 하는 말이라는 걸 제외하면, 아주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다. 전풍그룹의 물건을 사서, 고장 안 난 적이 몇 번이며 그들의 횡포에 무너진 중소기업은 몇이냐. 중소기업의 특허를 무단으로 침해하고, 법을 위반하며 세금을 포탈한 건 또 몇 번이냐. 풍남이의 고개가 점점 숙여지는 걸 보니 한 편으로는 고소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망하지는 않겠어. 전풍그룹.' 풍남이는 그래도 수치를 알고 있으니, 회장이 되면 잘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저 녀석이 회장이 아니니, 도리가 없다. 이런 악평을 들어도 항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봐야 어쩌겠는가. 국내에서라면 돈으로 찍어누를 수도 있지만, 상대는 일개 개인이 아니라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다. 돈으로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심히 무례한 대접이었습니다. 회장님." 비서 누님이 이렇게 말해도, 반박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건 여동생만이 아니라, 나도 진희도 문희도 연미 누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그 자신도. 다만 풍남이만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으니, 자기 기업의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서 누님도 저러시는 걸 보면.' 이거 이번 여행은 평안하지 않겠는걸. 풍남이가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전풍그룹이 대단해도, 그건 국내무대에서 그런 거지, 세계무대에서도 그런 건 아니니까. 물론 전풍그룹도 웬만큼은 알려진 그룹이기는 하나, 플래닛 그룹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당장 매출액부터 비교가 안 되니까. 돈이 힘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안에서만 통용되는 진리는 아니었다. 당장 눈앞의 광경만 해도. "풍남아." 바짝 긴장해서 얼어버린 풍남이에게, 상냥하게 말하는 여동생. 하지만 풍남이한테는 상당히 끔찍하게 들릴 것이다. 이건 학교 친구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플래닛 그룹의 회장으로서 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내일은 제대로 해 줘. 내일도 이런 식이면, 우리 그룹 이사들이 당장 날 다른 도시로 끌고 갈 거라고. 오늘 일만 해도, 벌써 그룹 임원들이 발칵 뒤집어졌으니까. 안 그래도 귀한 여름 휴가를 왜 하필 남의 기업이 제공한 싸구려 호텔에서 보내려고 하냐고 난리거든. 우리 기업에도 일류 호텔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러니까 풍남아. 내일은 오늘처럼 하지 마." "네, 네 !" 여기가 싸구려 호텔이었나?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이 으리으리한 특실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나는 풍남이에게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일단 학교에서는 친구사이인데, 지금은 완전히 상하관계라니. 불쌍한 녀석. '어쩌다가 여동생의 마수에 걸려서.' 그러나 여동생의 주먹이 360도 모든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대가는 컸다. 덤으로 이 녀석은 언제든지 그걸 쓴다는 것도. 그래서. 퍽. "아구구구구."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판에도 주먹질이냐. 미인이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오빠. 이건 차라리 풍남이를 위해서야. 세계 굴지의 대기업 회장들의 기호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아? 그 사람들은 음식에 소스 하나 제대로 못 넣어도 난리라고. 그리고 난 지금 음식의 맛이 어쩌니 호텔 내부 인테리어가 어쩌니를 놓고 트집잡는 게 아냐. 안내인이 한 시간이나 지각하고, 그동안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풍남그룹의 몰상식함을 문제삼는 거야." "전풍그룹이잖아." 아무리 풍남이네 기업이라지만, 남의 기업의 이름을 그렇게 자기 맘대로 바꾸는 거냐. 그러나 여동생이 그런 거 신경 쓸 녀석은 아니다. 자기 할 말만 할 뿐이다. 그녀는. "풍남그룹, 아. 전풍그룹. 뭐 어차피 그게 그거지만. 어쨌든 전풍그룹의 일처리가 이 모양이라면, 같이 사업을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 이득도 못 얻게 돼. 안내인이 사정상 못 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면 미리 연락을 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든지 해서 일을 수습하든지 하는 성의를 보여야 해. 그런데 오늘 그게 뭐야? 한 시간이나 설명도 없이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고. 열심히 뛴 풍남이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 전풍그룹의 일 처리 능력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어. 그러면 제휴는 공염불이 돼. 플래닛 그룹은 나 혼자서만 이끌어 가는 게 아니니까. 내가 참는다고 해도, 다른 이사들이나 주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 그리고 풍남이를 노려보는 미인이. 무서운 녀석 같으니. 완전히 상전이다. 상전. 하지만 여동생은 계속해서, 풍남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아무리 대기업 회장이라고 해도, 저렇게 친구를 깔아뭉개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잔소리는 마무리단계였다. 말 한 번 빨리 한다니까. "그러니까 풍남아. 내일부터는 접대 좀 잘 해. 친구한테 이런 말하는 건 미안하지만, 제휴가 무산되는 건 둘째치고, 지금 회사 내 여론이 전풍그룹에 굉장히 안 좋아. 호화판 접대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호화판 접대라는 말에, 갑자기 내 머리에는 [김정일이 즐겨먹는 음식 Best 30]이라는 기사가 떠올랐다. 야자상어 날개탕(1인분 30만원), 참다랑어 뱃살초밥(1인분 40만원), 뱀장어 캐비어(1인분 200만원 !) 같은 요리들이 머리위로 날아다녔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정일이가 잘 먹는 게 그거라니까. 하지만 솔직히 제대로 된 접대라면, 그런 것밖에 안 떠오르는데, 뭘 요구하는 거냐. 미인아. "그저 정성어린 접대로 좋아. 비굴하게 하라는 게 아니라, 정성이란 걸 들여서 하라고. 전풍그룹에 그런 건 안 어울린다는 건 알지만, 앞으로 전풍그룹을 이끌어갈 자로서 작은 것부터 고쳐봐. 해외 소비자한테는 왕 대접, 국내 소비자에게는 봉 대접을 하는 관례부터 고치자고. 응?" "..........응." 말 자체는 맞다. 전풍그룹에 평소부터 해주고 싶던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여동생이 말하니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기가 죽은 풍남이를 격려하는 여동생이었지만, 신나게 깔아 뭉개놓고 다시 격려하는 건 좀 그렇다. 뭐 어쨌든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나도 방에 돌아갈까. 다만. '앞으로 이 녀석이 돈이 없다고 하면 안 믿을 테다.' 돈이 없기는 어디가 없다는 건지. "자. 이제 늦은 시간이니, 이야기는 이만 하고 그만 자자." 연미 누나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장시간의 여행으로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해외여행에 익숙한 진희나 연미 누나조차도 그러니, 나나 문희는 오죽하겠는가. 물론 풍남이는 찔리는 게 있으니 피곤한 기색도 못 보이고, 여동생이야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 주먹'의 소유자니 피곤할 턱이 없지만. "그럼, 모두 잘 자." 의례적인 인사가 지나가려다가, 말았다. 물론 그건 '친구 사이에 그런 거 없다'는 게 아니라, 다들 피곤해서 그런 거다. 여동생이 손을 흔들어주고, 모두들 자기 방으로 간다. 풍남이가 이번에 안내인의 지각 건으로 인해 단단히 기가 죽었는지, 완전히 축 늘어진 채 돌아가는 모습은 불쌍하기까지 했다. 물론 동정하려고 해도. '한 시간이나 하염없이 기다린 우리는 뭐냐.' 사실 이런 식으로 대접받으면 일반인들은 당장 항의할 것이다. 여동생의 성깔로 봐서, 저렇게 대응한 건 상당히 자기 성격을 억누른 거다. 다른 회사의 회장들이라면 당장에 책임자를 부르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르는데. 어? 왜 내가 여동생을 이렇게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거냐. 아니란 말야 ! 그 녀석은..... 다섯 살때까지는...... "오빠." 해맑게 웃던 여동생의 얼굴. 그건 분명히 다섯 살 때의 모습이었던가. 그랬다. 그때는 정말 좋았다. 나와 여동생은 그 무렵에는........ "엄마. 미인이는? 미인이는 어디 있어?" 그랬었다. 그 날, 여동생이 갑자기 없어진 그 날, 나는 하루종일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여동생을 찾기 위해. 하지만 미인이는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그때, 날 끌어안고 울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 때였던가. "오빠." 하지만 그건 내가 찾아 헤매던 여동생이 아니었다. 서양의 신사와 함께 돌아온 그 애는, 더 이상 나와 쌍둥이로 태어났던 그 애가 아니었다. 모습도 목소리도, 심지어 기억마저도 같았지만, 그 애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애는 당당했고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한 달이나 혼자 떨어져 살았음에도. 내가 옆에 없었음에도. "오빠."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와 여동생의 사이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모든 것을 아는 듯한, 단지 태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듯한..... 물론 그녀도 나름대로 많은 일을 겪어서 그랬겠지만, 다섯 살까지의 여동생이 나는 그리웠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런 여동생이 아닌, 단순히 나와 내 주위의 작은 세계만이 전부였던 그 여동생이. "겨우 잊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계속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기 때문에. 내 여동생을 데려가고 낯선 여동생을 데려온 사람이 바로 그 기업의 전 회장이었기 때문에. 여동생을 유괴한 그 남자도 앞으로 계속 생각할 것이다. 내 앞에서 그는 미인이를....... "제기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3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 두두두두두. 거대한 헬리콥터 하나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의 옥상에 내려앉아 있었다. 헬리콥터는 엔진을 켠 채로 대기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이 양옆으로 갈라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헬리콥터인지는 모르지만, 로터가 두 개 달린 걸 보니 헬기 주인이 얼마나 돈을 물 쓰듯 낭비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저게 뭐야. "로터 두 개 짜리 비행기라니." 건방지게도, 참으로 건방지게도 이것은 여동생 전용의 헬리콥터, 아니 비행기였다. 분명히 수직으로 내려앉기는 했지만, 어쨌든 로터가 하늘을 향해 붙어 있으니 헬리콥터이기는 했다. 문제는 저 물건이 이곳으로 날아올 때는, 분명히 다른 비행기처럼 로터, 아니 프로펠러가 앞으로 붙어 있었다는 거다. 착륙하면서 위로 휙 돌아서 그렇지. "일반 헬기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렇다. 이것은 미군이 군용으로 쓰기로 결정한 V-22 오스프리라는 틸트로터기였다. 비행기처럼 생겼지만 날개의 양옆에 프로펠러가 달린 엔진이 하나씩 붙어 있고, 이착륙 시에는 이 부분이 90도 위로 회전해서 헬기처럼 수직으로 뜨고 내리는 것이다. 당연히 일반 헬기보다 월등히 빠르지만, 월등히 비싼 물건이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동생이 이런 사치품을 마구 부리는 거야. "그야 내가 회장이니까 그렇지." 아이고. 굳이 확인해주지 않아도 다 알아요. 이 사치스런 여동생아. 하지만 이건 너무 비싼 물건 아니냐? 오스프리 한 대 값이 얼마였더라. 기억도 안 나는 머리통으로 고민을 하던 나에게 던지는 여동생의 일격. "이걸 보고 놀란다면, 내 전용 항공모함은 어떻게 보려고."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공모함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항공모함이라니 ! 아무리 네가 돈이 많은 녀석이라지만, 항공모함이 누구 집 애 이름인줄 아냐 ! 그거 하나에 대체 얼마인 줄 아냐. 내가 알기로 그런 건 최소한 10억 달러는 깨지는 물건이고, 전투기 가격까지 치면 50억 달러는 우습게 넘어가는 물건이라고 !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하려던 나에게. "걱정 마. 어느 나라 국방부에 팔아먹으려고 만든 물건이니까." 휴우. 그럼 그렇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일개 개인이 항공모함을 자기 전용으로 가지고 있을 리가 없어. 그런데 그게 어느 나라를 지칭하는 거냐. 물어보고 싶지만. "고객이 비밀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면, 우리는 그 바램에 따라야 해." 내가 묻기도 전에 입을 막아버리는구나.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이런 걸 불렀냐 하면. "우........" 여동생은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눈앞에 쌓인 종이뭉치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좀 많은 이 서류들의 정체는. "회장님. 이왕 나오신 김에 결제 부탁드립니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렇게 된 거다. 그녀는 대기업의 회장님이시고, 그로 인해 돈과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좋은 것만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뭐든지 공짜는 없는 법이 아닌가. 당연히 그녀에게도 그 말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고, 그 이치에 따라 세계 제일의 부자인 여동생은. "세계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해야 하는 법이지." 고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왜일까. 여동생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서일까. 하지만 여동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번 일은 확실히 난처해할 만도 했다. 가로 2m, 세로 2m, 그리고 높이 2m인 종이 뭉치가 그녀의 앞에 놓였으므로. 솔직히 이건. '아무리 여동생이라지만.' 너무 많은 게 아닌가? 내가 듣기로 분명히 플래닛 그룹은 전문경영인에게 일 대부분을 맡기는 체제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지? 그것도 물어볼 겸, 그리고 모처럼 여동생이 보여주는 난처한 표정을 감상할 겸해서 다가가려는 데. 철컥. "뭐, 뭐야?" 나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여동생의 주위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총을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짓이냐. 이 인간들아. 아무리 봐도 BB탄을 쏘는 총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상, 미인이에게 더 가까이 가는 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비서 누님이. "미스터 연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경호원이 총을 치웠고, 나는 여동생의 옆으로 갈 수 있었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 서류더미가 왜 여동생에게 온 거지? 나는 비서 누님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1초 정도 고민하다가. "저......" 가만. 비서 누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러고 보니 미인이 녀석, 이 사람의 이름에 대해 말도 안 했잖아? 와아악. 정말 무신경한 인간이라니까. 난처해하는 나를 보며 비서 누님은. "그냥 알리사라고 부르십시오. 미스터 연." ".......네." 그게 이름인지 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름이겠지.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나는 알리사 누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선. "이 서류더미는 다 뭐예요?" 대답은 즉시 나왔지만. "회장님께서 오늘 결제하실 서류입니다." 네? 갑자기 비정상적인 말을 들은 대가로, 내 두뇌의 작동은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어떻게 '하루동안' 결제할 서류가 된단 말인가. 양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물론 여동생이란 애가 보통이 아니니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지나치다. 분명히 플래닛 그룹에는. "전문경영인들은 뭐하고 있길래, 미인이한테 이런 터무니없는 양의 서류가 날아오지요?" 어지간한 건 그들 재량으로 처리해도 되잖아?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동생이 하루 24시간 내내 기업경영에 매달리는 게 아니니, 당연히 어지간한 건 회사의 중역들이 처리할 게 분명한데, 왜 여동생한테 이렇게 결제서류가 많이 오느냐 이거다. 아무리 밉고 미운 여동생이기는 해도, 이걸 다 하다가는 애가 쓰러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일을 너무 잘해서 그래." 갑자기 동정심이 다 사라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비서 누님이 그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고는 해도, 솔직히 그게 말이 되냐. 이 녀석이 일에 치이니까 아예 미친 건가. 하지만 그 다음에 여동생이 꺼낸 말이 더 요상했으니. "알리사." "네. 회장님." "팔 아프면 이야기해." "네." 뭐? 보통은 회장이 팔 아프면 비서한테 말하는 게 아니냐? 저 거대한 서류더미를 보면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여동생 최강전설이니 뭐니 해도, 저건 솔직히 너무나 강적인... "어마나?" 그러나, 나는 곧 내가 여동생을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여동생은 펜을 들고, 도장을 준비하고,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서류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뭐? 그런 건 누구라도 하지 않느냐고? 그랬으면 내가 놀라지도 않지. 문제는 여동생이. '저 녀석, 오른손과 왼손이 따로 놀고 있어.' 오른손으로는 서류에 만년필로 글을 쓰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도장을 찍고 있었다는 것이다 ! 보통 사람은 분명히 둘 중 하나의 동작밖에 할 수가 없는데, 이 녀석은 두 개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것도 서류를 읽으면서 ! 기가 막혔다. 아무리 여동생이 최강이라지만. '너 머리통이 세 개냐.' 덤으로, 여동생이 펜을 놓자 더 기가 찰 일이 벌어졌다. 오른손은 새 서류를 가져오고, 왼손은 이미 결제한 서류를 들어서 다른 이에게 건넨 것이다. 뭐? 그건 어떻게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난 못한다. 서류와 함께 온 사람들은 검은 양복의 경호원만이 아니고, 정장 차림의 비서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알리사." "메리." "나타샤." 도, 도대체 어떻게 비서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2장의 서류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지? 이게 도대체 인간이야? 갑자기 나는 여동생이 여섯 살 때, 플래닛 그룹의 회장과 만나서 사이보그로 개조라도 된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저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냐? 혼자서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게다가 저러면서도 별로 힘들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힘들어하는 건 비서들이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쉬자." 이마에 땀도 안 흘린 여동생의 여유 만만한 제안에.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비서들은 진땀을 흘리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저런 일 처리가 가능한 거야? 혹시 이 녀석. '대충 엉터리로 도장만 찍는 거 아냐?' 그래서 나는 서류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철컥. 이봐. 여동생. 이거 좀 어떻게 해 줘. 회사 기밀이라 그런지, 경호원들은 내가 서류를 보려고 하니까 당장 총부터 겨눈다. 미치겠다. 기밀 보호는 이해가 되지만, 좀 심한 게 아닌가. 다행히도. "오빠. 서류 구경을 하고 싶은 거야?" "당연하지." 도대체 이 녀석은 결제를 어떻게 했을까. 엉터리로 고무도장 역할만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여동생이 서류 하나를 뽑아서 나에게 보여주는 순간, 그런 생각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으니. "으악 !" 야 ! 이 몰상식의 극한에 이른 녀석아 ! 자기 서명과 의견까지 또박또박 써놓다니 어떻게 된 거냐 ! 여동생이 원래 그런 녀석이란 건 알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쳤다. 도대체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자기 주장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지? 내가 본 서류는 마침 영어로 써져 있었기에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라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건 너무했다. 어째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이건 사람도 아냐.' 결국 나는 기가 막혀서 여동생의 방에서 나와 버렸다. 내가 돕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거실에 더 있다가는, 내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질 것이기에. 그리고 물론, 그 날은 완전히 망쳤다. 놀고 어쩌고 할 기력도 사라졌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저녁 시간에 여동생이 이렇게 물었을까. "오빠. 기운이 없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도저히 창피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동생은 저렇게 훌륭한데, 난 뭐란 말인가. 아직도 국가 대표는커녕, 청소년 대표도 되지 못하고 있으니. 속으로야 펑펑 울고 싶었지만, 운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 열심히 연습해서, 어서 대표로 선발되는 쪽이 낫겠지. 하지만. "오빠는 지금 쉬어야 해." 그 말에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공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짧은 연습시간만이 나에게 허용되었을 뿐, 뼈가 부서져라 공을 차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몰래 연습하려고 해도, 플래닛 그룹의 비서들과 경호원들이 하나둘이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이런 빌어먹을 감시사회라니. 하지만 그 사회를 벗어나는 계기는, 전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그날 밤에 비서 누님이 여동생에게 말하길. "내일 처리하실 서류는 오늘의 3배 분량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여동생의 성질이 폭발한 것이다. 그녀는 약이 올라 방방 뛰다가. "알았어. 내일 베를린의 독일 내 본사로 갈 테니까, 헬기 준비해 놔." 하긴 내가 봐도 불량한 전문 경영인들을, 그녀가 그냥 놔둘 수야 없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숙소를 옮겨야 하는데? 그럼 나도 같이 따라가야겠네? 이건 원래 여행의 목적인, 편안한 휴식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도리가 있나. 바늘과 실이 언제나 함께 하듯이, 여동생과 나는 언제나 같이 있을 수밖에. 그러나 그녀는. "오빠는 여기서 쉬고 있어. 베를린은 나 혼자 갈 거니까." 에? 짐을 싸려던 내 손이 갑자기 멈춘다. 어쨌든 나와 여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바늘과 실이었으니까. 비록 내가 일방적으로 맞는 사이라고는 해도, 둘이 떨어져서 지낸 적이 거의 없는 이상, 이건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다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너, 샌드백도 안 가져가고 어떻게 지내려고?' 나 자신이 샌드백이라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저 녀석은 하루라도 날 때리지 않으면 두통, 치통, 심지어 생리통까지 겹치는 녀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서 저런 결정을 하는.... 탁. "오빠는 휴양하러 온 거잖아. 나는 일을 하러 가는 거고." 에? 왜 이 녀석이 주먹부터 날리지 않은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미인이라면 당연히 여동생답게, 오빠를 봉으로 알고 마구 패는 게 정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왜? 왜 ! "혼란 상태에 빠지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하지만 안 하던 짓을 한 네가 더 문제인 거다. 어째서 이런 '비상식적인' 짓을 하는 거냐? 차분하게 내 뺨에 손을 대는 건, 전혀 너답지 않다고. 혹시 너, 너무 화를 내서 분노로 이성을 잃기라도..... 탁. "자꾸 그러면 뽀뽀해버린다." 양손으로 내 양쪽 뺨을 감싼 여동생의 발언에, 나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뭐냐고? 저쪽에서 날 노려보는 진희의 눈길이 심상치 않아서 그런 거다. 여동생하고 뽀뽀해봐야 좋은 것도 없을뿐더러, 나중에 진희한테. "여동생한테 뽀뽀를 하냐? 변태 !" 이런 소리 듣기는 죽어도 싫다. 차라리 문희하고 한다면 그나마 실수니 착각이니 오해니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주위의 시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저 남매는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우리 애가 부러워할 정도니까요.' 왜 내가 오누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에게 그런 소리나 들어야 하는 거지? 게다가 왜 내가 뽀뽀를 당해도, 내가 '여동생을 강제로 눕혀놓고 뽀뽀를 한' 걸로 오해를 받아야 하는 거지? 물론 여동생이 상대니까, 그건 충분히 가능하다. 불량배들 상대할 때를 보라. 그 녀석은. "이야아압 !" 이렇게 주먹을 휘둘러서 그들을 제압하지 않았다. 그저 불량배들을 '다치게' 유도했을 뿐이다. 그것도 법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게 그들을 구타하면서. 그러니 여동생의 말은 그냥 듣는 게 좋다. 내가 건전한 사람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오빠가 나하고 베를린에 가 봐야, 어차피 일만 하는 여동생 옆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오늘도 보니까 완전히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킁킁거리기만 하던데. 그 꼴은 더 못 보니까 그냥 여기서 쉬고 있어. 그리고." 그리고? "오빠로서도 그런 곳에 가봐야 고생만 할 테니까. 바깥출입도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어째서?" 잠깐. 아무리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에 나섰다지만, 왜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거냐? 내가 어린애냐. 길도 못 찾아다니게. 솔직히 길이야 지도 펴면 나오는 것이고, 진희와 문희와 연미 누나까지 있는데 길을 잃어버릴 리가 없잖아? 나는 몰라도 진희와 연미 누나는 해외 여행의 경험이 많으니 어리버리하게 헤매야 할 이유는 없는데? 하지만 여동생은 단호하게. "오빠. 이런 이야기하면 구닥다리라고 하겠지만." 하겠지만? 그러나 여동생이 한 말은, 새삼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으니. "오빠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라고. 맘대로 외출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아?" "왜?" 뭐가 신분이냐. 지금이 옛날처럼 신분제 사회인 것도 아닌데. 그러나 여동생이 말한 것은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으니. "오빠가 베를린에 나하고 같이 갈 경우, 오빠의 신분은 아시아의 구석진 나라에서 온 관광객 A가 아니라, 플래닛 그룹이라는 세계 제일의 대기업을 이끄는 젊은 회장의 혈연,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친 오라버니가 된다고. 일단 여기서 신분이 폭로되어 버리면, 오빠는 절대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오빠가 소원하는 축구 국가대표도 될 수 없고, 평범한 고교생활도 할 수 없어. 안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데, 하물며 세계 제일의 대기업 회장의 친오빠라면?" 그 말에서 잠시 풍남이를 여동생이 노려본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했다. 물론 그걸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풍남이만 불쌍하니까 넘어가고. "그럼 오빠의 자유는 사라지고 말아. 지금까지처럼 편안하게 등교할 수도 없고, 편안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도 없어. 아침저녁으로 등뒤에는 파파라치가 따라다닐 거고, 돈을 노린 흉악범들이 오빠를 납치하려고 할거야. 그러니 지금은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지 않아. 최소한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그리고 실력으로 국가대표선수가 되기 전에는." 그런데 '실력으로'라는 말을 강조하는 건 무슨 이유냐? 설마, 너..... "물론 오빠는 그럴 사람이 아냐. 자기 실력으로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주위 사람들, 특히 입놀림이 가벼운 녀석들에겐 그게 아냐. 그들에겐 오빠의 노력은 보이지 않고, 오빠의 신분만 보이니까." 하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었다. 그러니까, 남들은 내가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라는 여동생의 권력을 이용해서, 국가대표의 자리를 꿰어찼다고 생각할 거란 말이지? 물론 여동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섭섭한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나를 그렇게 보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녀는. "그러니까, 가을에 열리는 전국대회에서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거둬. 거기서 두각을 나타내서 국가대표에 뽑혀야, 나중에 오빠의 신분이 드러나도 사람들의 불평이 최소화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결국 같이 못 가겠군. 이렇게 되면 그녀의 말에 대답할 거리도 없으며, 반론을 제기할 여지도 없다. 게다가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설득하는 데에는, 예나 지금이나 당할 수가 없었다. 다섯 살 때까지의 그 얼굴로 설득해오는데, 어떻게 당하겠는가. "몸을 편히 쉬게 해서, 합숙훈련에 참가할 때까지는 피로를 말끔히 풀도록 해. 알겠지?"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되도록 일을 빨리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잘 지내. 오빠." "그래." 여기까지는 여행을 떠나는 여동생과, 배웅하는 오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 여태까지는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가씨가 그 뒤에 꺼낸 이야기였다. 아니, 이 녀석은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오빠. 밥 잘 챙겨 먹어." "속옷은 매일 갈아입는 거야." "잠은 제 시간에 자야 해."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고." "편한 자세로 몸을 회복시키는 데만 신경 쓰도록 해." "그렇다고 너무 게을러지지 말고. 적당한 운동은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니까." 아아아아악. 내가 애냐. 왜 이렇게 주의사항이 많이 따라붙어 ! 이 녀석은 며칠동안 자기가 나하고 떨어지니까 불안한지, 계속 조심하라고 나불거린다. 이봐. 누가 보면 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멍청한 오빠라고 착각하겠어. 오죽했으면. "회장님. 이제 미스터 연도 어린애가 아니니 만큼,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그것 봐. 비서누님까지도 지나치다고 말릴 정도잖아. 그러나 여동생은. "어린애야." 야 ! 그렇게 단호하게 외칠 필요는 없잖아 ! 그리고 내가 어린애면, 너는 뭐냐. 콩알만한 어린애가 회장이란 감투를 썼다고 으스대는데, 나도 말야..... 그러나 내가 반론을 펼치기도 전에, 여동생은 이미 망언을 늘어놓기 시작했으니. "문희야. 오빠가 내일 아침에 안 일어나면, 망설이지 말고 떡메라도 가져와서 한 방 내리쳐. 말로는 죽어도 안 깨어나니까." 야 ! 너 날 죽일 셈이냐 ! 이역만리 타향에서 무슨 떡메야. 떡메는. 프라이팬에 식칼에, 이제는 떡메까지 가세하는 거냐. 다행스럽게도 문희는. "미인아. 난 지금 떡메가 없는데. 여행하는데 그런 건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져왔어야지 !" "하지만 문구 깨우는 건 지금까지 네 담당이었잖아." 이 녀석들이. 소꿉친구와 여동생이 똘똘 뭉쳐서 날 물 먹이는구나. 하지만 여기는 독일이지 우리나라가 아니므로, 떡메는 못 구할 걸. 물론 프라이팬이나 식칼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탁. "자. 이걸로 써." 이, 이 녀석이 언제 떡메를 준비해둔 거냐? 혹시 이 녀석은 오늘 자신이 베를린에 갈 거라는 걸 미리 짐작하고, 모두 준비해둔 건가.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문희는 얼떨결에 떡메를 받게 되었다. 무서운 녀석. 하지만 여동생이 준비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으니. "자. 이건 치한 퇴치용 스턴건(stun gun : 사람을 마비시키는 총)." "이건 만약의 경우 나하고 연락할 무전기." "이건 여행 팜플렛." "이건 여름용 모자." "이건 축구공." 참 많이도 나온다. 축구공이야 반갑긴 하지만, 여자들이 쓸 스턴건까지 준비하는 건 좀 과한 걱정이 아닐까. 어차피 우리끼리만 행동할 것도 아닌데 말야. 그러나 여동생의 배려는 엉뚱한 쪽에까지 미쳤으니. "문희야. 오빠가 너무 열심히 연습하면, 떡메로 사정없이 내리쳐. 알았지?" 이봐. 꼭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냐. 물론 무리해서 연습하면 피로가 안 풀린다는 건 나도 알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다짐할 건 없잖아. 문희 역시 상당히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곧 환하게 펴졌으니. "그리고 이건 편안한 휴식을 위한 여유자금." 역시 돈 다발은 만병통치약인가. 여자의 표정을 한순간에 바꿔놓다니. 하지만 이건 좀 적은 액수가 아니냐. 1만 유로나 될까? 액수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이건 좀 적은 금액.... 휘잉.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오는지는 너무 뻔하므로, 나는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망할 녀석. 자기 회사 직원들이 다 보고 있는데, 주먹을 휘두를 생각을 하는 거냐 ! 두두두두두. 여동생이 탄 오스프리는 서서히 하늘로 올라갔다. 여동생이 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것 같은데, 그게 점점 더 희미해진다. 마른하늘에 왠 비가 오는지.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갔다. 아. 죽었다는 소리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그렇게 해서, 진정한 휴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잠깐. 진정한 휴가라고 해도. "어디로 놀러가야 하는 거지?" 나는 독일에 온 적이 없다. 전혀 없다. 그건 문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런 때 가장 현명한 선택은, 역시 이런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진희와 풍남이와, 특히 연미 누나를 쳐다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나의 선택은 좀 평범한 것이었으니. "시내로 나가야지 !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거야 !" 저, 연미 누나. 독일까지 와서 그런 선택을 하시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백화점이라면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요. 물론 그건 서울에 국한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서울에 살면서 백화점에는 신물나게 가봤을 텐데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해요. 언니." 음. 좋은 판단입니다. 누나. 확실히 살 건 사 놓고 관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조금 전에 여동생에게서 돈도 받았으니, 자금사정도 나아졌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살게 없는데? 축구공도 있고 휴대전화도 있고 호텔에 돌아오면 맛있는 식사도 준비되어 있으니, 귀국 전날에 선물이라도 사들고 가면 모를까 굳이 오늘 쇼핑을 할 필요는..... "좋아. 그럼 다수결로, 쇼핑 결정 !" 이런. 남자가 둘밖에 없어서, 여자 셋의 쇼핑제안을 막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어리벙벙해 하는 사이에, 이미 진희와 연미 누나는 여행자용 지도를 꺼내놓고는, 어디로 가야 가장 비싸고 좋은 물건이 있겠냐며 토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풍남이는 혀를 차더니, 호텔직원에게 가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문희는 진희 옆에 가서 이거저거 물어보느라 난리다. 그런데. '그럼 난 뭐를 해야 하는 거지?' 답은 0.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꾸어다 논 보릿자루가 된 거다. 내가 풍남이처럼 호텔 직원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재잘거리는 여자들 틈에 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뭐? 그냥 끼어 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해도. "...........!" 아직도 그러는 거냐. 진희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하지만 찔리는 게 하나둘이 아니니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변명하려고 해도. 왁자지껄 우르르르 쿠당탕탕. 역시 옛말이 하나도 틀릴 게 없다. 여자 셋이 모이면 바가지가 깨진다더니, 지금이 딱 그렇지 않은가. 이런 난장판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가. 뼈도 못 추릴 거라는 예상밖에 할 수가 없다. 뭐? 사나이답게 용기를 내라고? 네가 한 번 해 봐 ! 그랬다간. '80? 90? 100 데시벨?' 귀가 울린다. 두통으로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다. 눈이 핑핑 돈다. 이래서 공항 부근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건가. 그러나, 이대로 멍하니 서 있기만 할 수는 없다. 모처럼의 해외여행 아닌가. 그러니 나도 어떻게든 즐겨 봐야 한다. 일단 발걸음 한 번 내딛고. 왁자지껄 왁자지껄 우르르르 우르르르 우당탕탕 우당탕탕. 아까의 2배에 달하는 소음이 내 귀를 잡아 찢을 듯이 흔들었다.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이, 이 입만 살은 여자들 같으니.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이렇게 계속 떠드는 여자들을 방치하다가는. '나라 망신이야.' 호텔 로비에서 소란 피우는 어글리 코리언(ugly korean : 추악한 한국인)으로 악명을 떨치기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동생이 없으니, 그 역할은 내가 해야 한다 ! 숨을 들이쉬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 "연미 누나. 차 구해왔어." 풍남이 이 녀석, 그 순간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결국 나는 김이 팍 빠진 채 한 발을 내딛다가 말았고, 모두는 수다를 멈추고 호텔 정문으로 몰려나갔다. 나? 허탈해서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기분은. "야 ! 타 !" 문희의 외침이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서 혼자 서 있을 수도 없으니, 결국 나도 따라갈 수밖에. 풍남이의 느닷없는 출현으로 인해 기운이 빠진 채 걷는다. 걷는다. 맥없이 걷는다. 비틀거리며 차에 오른다. 아마 전풍그룹 직원이라도 온 모양이지. 아니면 풍남이가 호텔 측에 요구해서 차를 하나 빌려왔다던가. 그러나 그건 관심 없다. 맥이 빠졌으니까. 그런데. "역시. 미인이가 없으니까 힘이 빠진 건가." 이, 이거 누가 한 헛소리야? 눈을 들어 차를 보니, 모든 여자들이 그 말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분위기는 뭐야? 설마. 설마. 설마아 ! "문구야. 슬픈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울지는 마. 미인이도 그건 바라지 않을 거야." 아아아아악. 연미 누나.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 아니,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끔찍한. "오해하지 마 !" 그러나 내 외침은 나오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문희가 그 우악스런 손으로 나를 움켜잡더니, 그냥 차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켁 !" 그리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투덜투덜. 궁시렁 궁시렁." 도대체 비행기 타고 독일까지 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고궁이나 박물관이나 놀이시설도 아니고, 유명 축구팀의 전용구장도 아니고, 고작 백화점이냐. 나와 풍남이는 졸지에 짐꾼이 되어 있었다. 백화점 들어오고 나서부터 계속. "애고. 애고." 이게 휴양을 위한 여행인가. 전혀 아니다. 완전히 트럭이다. 그것도 공짜로 대여된 트럭. 여자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각종 돌덩어리를 들고 꺅꺅거리고 있다. 돌덩어리가 비록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나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이게 뭐야. "차라리 박물관이면 좋았을 걸." 아니, 그런 거창한 건 바라지도 않는다. 일반 공원이라도 좋다. 어차피 이 도시 이름이 뭔지는 까먹었지만, 호수를 끼고 있는 이 도시에 왔으니 당연히 진희와 둘이서 배라도 타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아가씨들은 그런 낭만적인 쪽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지, 오로지 쇼핑이다. 유럽에 쇼핑하러 온 건지. '문희라면 이해나 하겠는데.' 유럽에 한 번 오신 게 아닌, 두 자매분들께서는 왜 그리도 쇼핑에 광분하시는 겁니까. 문희야 해외여행이 이게 처음이니 말이 되지만. 게다가 뭘 이렇게 자꾸 사는 겁니까. 결국 풍남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미 누나. 이제 그만 사요. 여행 기념품은 귀국할 때 사도 되잖아요." 그러나 허영에 눈 먼 여자들에게는 그런 충고가 먹히지 않는다. 그녀의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였으니. "기념품 아냐. 관광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이지." 저, 연미 누나. 보석 목걸이가 어째서 여행의 필수품입니까. 갑자기 진희라는 여자아이를 내가 좋아하는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가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그냥 이대로 시내한테 가 버릴까. 아니 잠깐. 요즘 시내는 흑마술부에도 다니고 있는 듯 한데, 잘못 사귀다가는. 보글보글. 가마솥에 들어가서 삶아질지도. 그러니 나는 좋든 싫든 진희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원래 사랑이라는 건 자기 마음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할 수 없지. 하지만 왠지 서글프다. 내 운명은 어째서 이렇게 비비꼬였는가. 하긴 그런 여동생을 둔 것부터가 불운의 시작이자 종점이지만. '그런데 이 녀석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서류 더미에 깔려서 오빠를 부르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대주주나 이사들을 모아놓고 발광하고 있을까. 갑자기 책상을 뒤집어엎으며 소리지르는 여동생이 생각나 버려서, 웃는다. 비서 누님이 죽어나겠군. 물론 생각 외로 침착하게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동생이니까 그런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 어울린다고 ! 그런 생각을 하던 내 귀에 들려온 말은. "와아. 이 목걸이 예쁘다." 문희 녀석, 돈도 없으면서 욕심은 많아요. 물론 그녀 자신도 그걸 아는지, 목걸이를 그냥 진열대에 놓고 만다. 조금 불쌍한데. 도와줄까? "하나 정도는 사줄게." 이 말, 내가 한 거 아니다. 어디까지나 연미 누나가 한 거다. 하긴 그녀는 돈이 많으니 목걸이 하나 정도는 선물로 사 줄 수 있지. 문희의 얼굴이 갑자기 확 밝아지면서. "네. 언니." 아이고. 역시 여자들은 보석을 좋아한다니까. 그런데 무슨 보석을 고른 거지? 문희의 생일이 7월 18일이니........ 7월의 탄생석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무드 깨는 소리가 날아들었으니. "다만 향수병은 엎지 마. 지금은 미인이가 없으니까." ".......네." 갑자기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긴 이번에도 10만 유로 짜리 사고를 치면 도와줄 사람이 없지. 연미 누나가 선물을 사준다고 한 건, 혹시 문희가 또 엉뚱한데 흥미를 보이다가 사고를 칠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웃음을 참느라 고생하는 나에게, 문희가. "문구야. 너도 와서 아무거나 사 봐." 그런데 문희의 그 말, 왠지 빨리 와서 지갑을 풀라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문희의 그 권유에는 문제가 있었다. 비록 여동생이 나에게 돈지갑을 하나 쥐어주기는 했지만. "돈을 쓸 일이 있어야지." 내가 돈 쓸 일이라면 진희한테 줄 선물 사는 거,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에게 드릴......... 아니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 사는 거, 그 외에 뭐가 있지? 지우 녀석은 선물 줄 필요도 없는 악질이니 제외하고.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바치다가는 뇌물이나 촌지로 간주되어 엉뚱한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살 게 무엇이겠는가. '없다.' 없었다. 정말 없었다. 살 게 없는 것이다. 절대로 내가 독일어 독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살 게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아예 없지는 않았으니. '역시. 진희한테 줄 선물은 사두는 게 좋을지도.' 뭘 사야 할지 고민하는 편이, 이 수다스런 여성분들의 대화에 낄 수 있는 핑계가 되니 좋을 듯 싶었다. 나는 일단 이럴 경우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인. "연미 누나." 이 사람한테 물어볼 수밖에. 진희한테 줄 선물을 고르려면, 역시 친자매이신 이 분이 가장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갑자기 불안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을 파악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니. "진희야. 풍남아. 문희 잘 감시해." "아, 네." 불쌍한 문희 녀석. 그러니 평소에 신뢰를 잘 쌓을 것이지. 나는 연미 누나에게 진희의 취향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진희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심스럽게.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여기서 볼만한 곳은...." 백화점 정문으로 나오면서,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아니, 여기서 고민한 건 여자들뿐이고, 나와 풍남이는 그저 한숨만 쉬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풍남이의 심정을 이해하는 날이 오다니. 역시 여자는 신비로운 동물이야. 언제나 여동생 덕분에 깨닫고 있던 진리이기는 하지만, 오늘 다시 새삼스럽게 확인할 줄은 몰랐는데. "박물관으로 가자." "공원에 가보자." "그냥 호텔로 돌아가서 수영장에라도 들어가 볼까." "호수는 어때?" 세 명의 의견이 다 다르다. 아니, 한 사람도 자기 의견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의견이 몇 개나 나오는지. 이럴 때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거다. 나로서는 어디로 가든 별 상관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이 짐들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금 있으면 운전기사 아저씨가 백화점 앞 주차장에 돌아오실 것이니, 그때까지는 다음 목적지를 정해두어야 했다. 아무래도 기사 아저씨가 우리 전속이 아니라 호텔 전속이라서, 여기 저기 불려 다니느라 우리만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하긴 호텔에 우리만 묵는 게 아니니, 그럴 만도 해. 그런데 이 망할 전풍그룹, 미인이가 베를린으로 가니까 당장 대우가 달라지는 거냐. 하긴 그녀는 엄청난 돈으로 뭉쳐진 귀빈이시니 특별히 모셔야 한다는 거겠지만. 하지만 내 상상도 거기까지. 드디어 주차장 입구에 호텔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자. 다음 목적지로 가볼까. "꺄아아아악 !" 뭐, 뭐냐? 난데없이 왠 비명이?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들의 눈앞에 보인 것은, 한 여자의 뒤를 쫓는 이상한 남자였다. 그런데 저 사람, 저 옷차림이 뭐냐. "미쳤나봐." 진희의 그 말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하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옷에 빨간 페인트를 묻히고 다닐 리가 없겠지. 입가에 페인트를 칠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힐 리도 없지. 그런데 잠깐. 이런 상황은 영화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우리가 놀라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그 남자는 기어이 여자를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 콰악. "아아아아악 !" 이, 이게 무슨 짓이야 ! 그 남자는 여자의 쇠골 부분을 깨물어, 그대로 살점을 뜯어낸 것이다 ! 너무나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우리 모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남자는 여자를 넘어뜨리고, 그대로 왼쪽 어깨부분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계속해서 뜯겨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얼음처럼 굳어져 있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크어어어." 그 남자가 하늘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이거....." "뭐..............야........" "..........영화촬영.........이겠지?" 우리 일행은 모조리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생각해 보라. 난데없이 대명천지에 왠 미친 녀석이 나타나서, 여자를 잡아먹은 것이다. 아. 절대로 야한 쪽으로 생각되는 뜻이 아니다. 이건 진짜로 잡아먹는 거다. 쓰러진 여자가 계속 비명을 질러대는 가운데, 그 남자는 여자의 목을 물었다. 살점을 뜯어낸다. 그리고 씹는다. 입가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있을 뿐. 그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누가 이런 일을 상상했겠는가. "어, 어떻게.........." 어떻게? 그 뒤의 말을 하라고. 진희야. 그러나 아무도 그 뒤의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을 재간이 있어야지. 지금 보이는 건 현실로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비록 내가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가지나 한 가지 전제조건을 깔고 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래서 게임을 하면서 괴물을 만나더라도, 그저 웃으면서 키보드를 누르는 것이고. 그러다가 패해서 죽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다. 모니터에 비춰지는 피가 아니라, 실제로 내 눈앞에서 흐르는 피이다. '사실이란 말야.'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살육의 피비린내가, 우리 모두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렸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여인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그녀의 심장이 몸에서 뜯겨나가, 그 남자의 입안으로 들어가면서 상황은 끝났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충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크르르." 주위를 둘러본 것이다. 하필이면 여자의 심장을 씹으면서, 그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가득 담은 입을 벌리면서. 으르렁거리는 그의 눈을 마주칠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은 우리 일행에 없었고, 창피스럽게도 우리는 그의 살인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야. 다른 쪽을 보란 말이야.' 부끄럽지만, 우리 모두의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문희야. 그 판에도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거냐. 그런데 잠깐. 설마. 저 녀석이 지금 하려는 건. 내 머릿속에 과거에 문희가 했던 헛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질투에 눈 먼 인간들이 좀비처럼 몰려올 때의 공포를 이야기했을 때, 문희가 했던 망발이. "그러니까 휴대전화 하나 사라고. 그런 일이 있으면 잽싸게 달려가서 사진 한 방 찍게." 나는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문희의 손은 마치 마법에라도 홀린 것처럼 서서히 카메라를 그 남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으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말을 했다가는, 저 남자의 주의를 끌 것 같기에. 그리고 나도 저 여인처럼 물려 죽을 것 같기에. 어찌 보면 참으로 겁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나는 그랬다. 어쩌면 초현실적인 사건을 만났기에, 현실을 부정하느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번쩍. 그리고 문희는 기어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아. 바보 녀석. "............." 모두의 체온이 1도 정도는 내려갔을 거다. 우리 모두는 문희의 바보 같은 행동에 치를 떨었지만, 이제 와서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저 우리가 문희라는 바보를 친구로 둔 불운을 한탄할 뿐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그렇게 끔찍하게 여기냐 하면. '이 상황에서 튀면 어쩌라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이런 짓을 하면 저 남자가 우리를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은 불행하게도 맞아 떨어졌으니. "크아아악."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바보 같은 소꿉친구를 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미치겠다. 도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은 그 답을 아는데, 몸이 그 답을 모른다. 야. 좀 상황을 알아듣고 민첩하게 행동하란 말이야 ! 그러나 내 몸은 공포로 굳어진 건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내 장래가 붉은 빛으로 채색되면서..... "바보. 뭐해. 빨리 뛰어 !" 진희의 외침이,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역시 그녀는 나보다 영특했고, 그래서 이미 몸을 돌려 죽어라 달아나고 있었다. 그나마 날 잊지 않고 외치기라도 해줬으니 고맙다. 그녀는 여동생이 아니니까, 이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충분히 용기를 낸 거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내 다리에 불을 붙였다. 나는. "으아아악 ! 꺄악 ! 히익 !" 남자 체면이 완전히 다 구겨지는 비명이었지만, 살인마가 나한테 다가오는데 어떻게 하라고. 나는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네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물론 우리 일행도 그에 빠지지 않고, 대한민국 사람이 얼마나 잘 달리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앞에서 달리시는 연미 누나.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 거지요?' 물론 물어볼 정도의 여유가 나한테는 없다. 그렇게 입을 나불거릴 기력이 있다면, 다리에 다 쏟아 부어야 하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그러나 문제는, 달아나는 사람들이 우리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기는 독일이고, 사람들의 덩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연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것이다. 뭐? 그렇게 사람들이 많으면, 한 번 정신이상자에 대항해서 싸워보라고? 사람을 물어뜯어서 죽이고, 그 시체를 먹어치우는 자를 상대로? 그리고 그런 생각을 누가 떠올리기도 전에. "꺄악 !" 누군가와 부딪쳐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곳의 길바닥에 돌이 튀어나와 있어서 그랬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진희가 넘어지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살인귀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넘어지면, 그 뒤의 일은 뻔한 것이다. 아마 진희의 운명은 이걸로 끝장이겠지.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지만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곤. "미안해. 진희야. 미안해." 나는 그렇게 죽어라 달려갔다.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도 미친놈에게 물려 죽기는 싫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달리는 방향이 어느 쪽인 거냐? 난 역시 바보야. 미안하다. 미인아. 이 못난 오빠를 용서해다오. 나는. 쾅. 나와 그 남자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체중을 실어 그를 걷어찬 것이다. 어쨌든 나는 축구부원이고, 축구선수는 축구선수답게 싸우는 거다. 그러니 발부터 나가는 수밖에. 아무리 내가 돌 머리라고 해도, 머리를 저런 살인마에게 들이댔다가는 머리통을 잡혀서 깨물릴 것 같아서 그건 못했지만. '제대로 들어갔어.' 남자의 약점은 두 다리 사이에 있다. 무술의 고수가 아닌 이상, 거길 차이면 당연히 고통에 못 이겨 주저앉는 게 정상이다. 내 다리도 결코 약하지는 않은 만큼,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차면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 사정이고. 그 남자가 비틀거리면서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아........ "........." 안 넘어가네. 이상하다. 내가 약하게 찬 건가? 그 남자는 뒤로 몸을 젖히는 듯 하다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보였고, 나는 잠시나마 내가 진희를 잊고 그냥 도망가지 않은 걸 후회할 뻔했다. 그 얼굴은. "크아악." 역시 대명천지에 살인을 저지른 정신이상자답게, 그의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고 그의 입은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그의 목은.......... 목은........... 목은...........! 잠깐. 뭔가 이상하잖아? 보통 저렇게 목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 죽지 않나? 무슨 짐승이 목을 물어뜯은 것처럼, 그의 목덜미는 깊게 파여 있었다. 굳어진 피가 상처를 뒤덮고 있었고. '설마.' 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가, 그걸 무시해버렸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지금은 이상한 녀석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보다, 진희를 데리고 도망가는 게 우선이니까. 그러나 그 남자, 정확히는 그 남자의 뒤에 보이는 광경이 내 눈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크으으으." 아까 물려죽은 여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 "말도 안 돼 !" 보통 목덜미부터 가슴까지 물어뜯기고, 심장까지 뽑혀나가면 죽지 않나? 만약 저 여자가 여동생이라면 안 죽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 이상하다고 하지 마라. 여동생이라면 왠지 모르게 가능할 것 같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대책 없이 든다 - 저 여자는 절대로 '여동생'이 아니다. 게다가 피를 한 사발은 넘게 쏟아냈는지, 그녀가 쓰러졌던 땅바닥은 피로 연못을 이루고 있다. 저러고도 사냐. 그렇다면 지금의 사건은. 가장 간단한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여기는 현실세계라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질 수가 없어. 나는 망상을 접어두고 진희를 붙잡아 일으키려고 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하지만 내가 미처 그러기도 전에. "크아악 !" 그 남자가 나에게 덤벼든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속에서 욕이 나왔지만, 내 몸은 입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든 내 본업은 축구선수 아닌가. 이번에는 가랑이 사이가 아니라 다리를 걷어찼다. 다리 사이가 약점이 아니라면, 아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이 작자를 넘어뜨려야 하니까. 그러나. 퍽. 이상하다. 분명히 제대로 맞았는데, 상대는 잠시 움찔거릴 뿐 전혀 동작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덩치 큰 서양사람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더 빨랐다. 그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크악 !" 그대로 입을 벌린 것이다. 아까 그가 먹은 여자의 심장 조각이, 입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피도. 야. 이 자식아. 떨어져. 옷 버린다고. 이 판에도 이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그에 대해 반성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기합이다. "이야아압 !" 내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저절로 그의 몸을 양손으로 붙잡고, 허리를 뒤로 돌렸다. 이런 걸 프로레슬링에서는 백드롭이라고 하던가? 어째서 그런 동작이 튀어나왔는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마 이건 분명히. '미인이 녀석한테 시달려서 그래.' 그걸로 만사형통. 분명히 여동생의 고문에 시달리다보니 이런 동작도 반사적으로 나오게 된 것일 거다. 어쨌든 그 남자는 난데없이 자기 몸이 반원을 그리며 뒤집히자 놀랐는지 나를 깨물지 못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힘이 센 줄은 몰랐으니, 그가 이런 일을 예상할 리가 없을 것이다. 누가 2m는 될 법한 서양인을, 그보다 훨씬 작은 동양의 꼬맹이가 집어던진다고 예상했겠는가. 어쨌든 의외의 반격에 대응하지 못한 그의 머리는. 쾅. 땅바닥에 격돌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은 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고,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다. 그러나 그걸로 안심하기는 좀 일렀으니. "크아아악 !" 이, 이 여자가. 죽었으면 그냥 죽어 있으란 말이야 ! 나는 다시 한 번 다리를 휘둘렀다. 여자의 다리를 목표로. 어지간하면 여자를 때리지는 않겠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그걸 따질 소냐 ! 그 여자의 다리는 내 발길질에 옆으로 꺾였고, 여자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다리가 부러진 건가. 그렇지만 걱정이란 걸 지금 해 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등뒤에서. "크아아악 !" 못 살겠다. 보통은 그런 기술에 당하면 얌전히 쓰러져서, 기절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냐. 사실 내가 생각해도 아까의 그 동작은 기적에 가깝긴 했지만, 이왕 기적이 일어났으면 지속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게 뭐냐. 그런데. '진희는 어디로 갔지?' 지금쯤이면 무사히 일어나서 도망갔겠지? 그랬겠지? 그렇지? 하지만 곁눈질로 훔쳐봤더니, 우리 일행 가운데에는 그녀가 없었다. 그럼 그녀는 어디에?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왜 이렇게 느려 !' 일어난 건 잘했다. 하지만 왜 달리지 않는 거냐. 내가 모처럼 죽을 각오하고 폼을 잡아 봤는데, 좀 호응이란 걸 해줘라. 진희야. 거기서 그렇게 머뭇거리지 말고.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아나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지금 녀석들의 주의를 돌리고 싶지 않아.' 내가 지금 진희에게 도망가라고 외치면, 이 녀석들이 혹시 진희한테 일직선으로 돌진할지도 모른다. 아까 문희가 주책 맞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바람에, 이 살인마들이 하필 우리한테 달려온 것처럼. 그리고 진희의 지금 상태로 보아, 자칫하다가는 그녀가 녀석들에게 잡힐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아아아악 ! 그런 일은 절대 없어 ! 나는 두 악인들이 보지 못하게, 등뒤로 손을 내밀고는 마구 흔들었다. '달아나라. 달아나라. 달아나라. 진희야.' 제발 부탁이다. 좀 도망가라. 수도관 타고 도망가는 솜씨를 뒀다 뭐하냐. 지금 그걸 써먹어야 하지 않겠냐.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래. 설마 겁을 먹고 얼어붙은 건 아닐 테고. 왜 움직이지 않는 거야 ! 내 속은 시꺼멓게 타 들어갔고, 그러는 동안 두 명의 정신 이상자는. 저벅. 저벅. 오지 마. 이 미친 것들아. 물론 심장이 없어진 저 여자를 단순히 정신 이상자로 분류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쳤냐. 저 여자를 좀비(zombie : 살아있는 시체)라고 부르게. 그리고 그런 게 실제로 있을 리가 없잖아. 좀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두교의 호웅간(사제)들이 약으로 멀쩡한 사람을 가사상태로 만들어서 죽었다고 간주되게 하고, 그들이 무덤에 묻히면 희생자를 파내서 다시 약물을 투여, 마구 부려먹는 것이다. 절대로 마법으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 내가 택해야 할 해결책은, 저 녀석들의 머리에 칼을 꽂거나, 목을 잘라내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별로 택하고 싶지 않은 해결방식이었다. 비인도적이니 끔찍하니 하는 걸 따지기 이전에, 결정적으로. '칼이 없다고.' 여동생이라면 이럴 경우에, 망설이지 않고 돌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뻔한 게 아닌가. 아마 두 녀석의 모가지가 허공으로 치솟고, 내려오면서 반 토막이 나겠지. 적어도 저 녀석들은 17조각이 되지 않을까. 아. 두 명이니 34조각이겠구나. 나도 그렇게 해볼까. 그러나. '내가 무슨 여동생이냐.' 아침에 난데없는 떡메를 꺼내놓은 여동생의 전과로 보아, 그 녀석이라면 분명 식칼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조무래기 정도는, 순식간에 비참하게 끝장내버릴 재주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여동생은 그게 될 거다. 그러나 나는 여동생이 아니다. 단칼에 사람의 팔다리, 그리고 목을 잘라놓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뭐? 남자가 그렇게 자신감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난 사람 잘라본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안 되는 거다. 이런 건 실습을 해봐야 솜씨가 느는 법인데, 난 여동생 같은 천재가 아니니 연습도 안 하고 토막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 방안은 자동적으로 각하.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야 하나.' 그냥 돌로 녀석들의 머리를 쳐서 죽일까. 아니면 모가지를 졸라서 죽일까. 하지만 심장이 떨어졌는데도 저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 그건 안 될 것 같다. 뭔가 비인간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동생이 떠올릴만한 해결책이 없을까. 그러나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삐뽀. 삐뽀. 호오. 이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아닌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뒤로 풀쩍 뛰어 물러났다. 두 살인귀는 나에게 덤비려고 했지만, 경찰차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들었는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다. '튀자.' 나는 진희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그대로 죽어라 달아났다. 진희가 뭐라고 항의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매는 나중에 맞고 보자 ! 일단 사는 게 우선 아닌가 !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경찰들이 권총을 뽑아들고, 미친 녀석들에게 다가섰다. 아마 누군가가 신고한 모양이다. 하긴 미친 인간은 두 명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수 백 명이 넘으니, 그럴 틈은 충분히 있었겠지. 미리 확실히 해두는데, 내가 독일어에 능통해서 경찰들의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니다. 이건 순전히. '연미 누나 탓이지 뭐.' 옆에서 일일이 해석해서 들려주는데, 그래도 못 알아들을 수가 있겠냐. 물론 우리 일행과 합류한 후 나는 진희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그건.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껴안으면 어떻게 해."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나보고 짝 잃은 외기러기라도 되라는 겁니까. 어지간하면 이럴 때 진희를 달래느라 애를 써야 하겠지만, 일단 살고 보자는 게 지금의 방침이다. 만약 경찰들이 저 살인귀들을 저지하는데 실패한다면, 다시 진희를 껴안고 죽어라 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진희 이 아가씨는 왜 그랬을까? 처음에 도망갈 때는 나보다도 침착했었는데, 아까는 왜 꼼짝도 하지 않았을까. 만약에. '미인이라면....' 아. 취소. 감히 아름다운 진희를 흉악한 여동생과 비교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독이다.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금 현장을 바라보았다. 악당들을 저지하고 나선 경찰들의 모습이 멋지다. 물론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여기가 독일이니까 하는 소리다. 만약에 우리나라라면? '생각하지 말자.' 비참해진다. 물론 보통 경찰은 국민을 위해 애쓰는 분들이 많다. 그건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높으신 분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높으신 판사양반께서 판결하시길. "도망가는 음주운전 용의자의 차 앞을 막아선 것은, 차에 치일 위험을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므로 경찰의 책임이 15% 인정된다." 뭐가 15% 책임이냐. 그럼 음주운전을 단속하지 말라는 거냐. 단속하다가 다치면 경찰관이 알아서 자기 돈 내서 치료하라는 거냐. 그럼 누가 단속을 하겠냐. 뭐 원래 높으신 분일수록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하는 법이긴 하지만, 그건 너무했다. 하지만 우리는 행운을 만났으니, 여기에는 그런 높으신 분이 없다는 점이다. '다행이다.' 일단 안심하고. 그럼 이제 저 정신 이상자들을, 이곳의 경찰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구경해볼까.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크아아악." 남자와 여자가 경찰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총 든 사람한테 그냥 덤비면. 탕. 타탕. 이렇게 된다. 둘은 머리통에 총알을 맞고 나자빠졌고, 피가 다시금 뿌려졌다. 이것으로 만사형통, 모두 잘 되는 건가. 경찰들도, 주위의 행인들도, 그리고 우리 일행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고, 곧 사람들은 안도하기 시작했다. 휴우. '큰일나는 줄 알았네.' 모두 안심하는 가운데, 경찰 한 사람이 권총을 겨눈 채, 서서히 시체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퍽. 와. 인정사정 없구나. 그들이 걷어차자 다시 두 남녀가 꿈틀거렸고, 경관은 망설임 없이 총알을 그들의 머리통에 박았다. 한 명에 두 발씩. 머리가 완전히 박살난 두 남녀의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그들의 꿈틀거림은 멎었다. 그 경관이 신호를 보내자, 다른 경찰들이 달려왔다. 거대한 시체주머니가 펼쳐진다. 가능하면 평생 저런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경찰들이 남자의 시신을 들어서,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하지만 정말로 저 인간들이 죽었는지가 심히 의심스럽다. "자꾸 꿈틀거리잖아." 이봐. 문희야. 네가 확인해주지 않아도 다 안다고. 그리고 이번에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이 판에도 열심히 찍는 거야 장래의 언론인이 꿈이니 이해한다. 하지만 아까 네가. "그런데 너, 아까는 왜 사진기를 꺼냈냐." 상황을 보고 카메라를 휘둘러야지. 세상에, 살인마가 눈을 부라리는데 그런 짓을 하냐. 그 덕에 우린 죽을 뻔했다고. 그러나 문희는 내 항의를 무시한 채, 열심히 사진 찍기에 바빴다. 못된 녀석. 그리고. "연미 누나. 무리하지 말고 토하려면 토하세요." 비닐주머니가 어디 있더라. 그녀는 억지로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참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간신히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아까 그 여자가 심장을 뽑히면서 피를 주르륵 흘렸지, 내장 일부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지, 게다가 경관에게 사살 당하는 장면까지 다 봤지. 보통 사람이라면 구역질이 아니라 기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곱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가 시체를 눈앞에서 볼 일이 있었겠나. '하긴 나도 처음이지만.' 으. 못된 인간들 덕에, 옷은 다 버렸다. 녀석을 백드롭으로 집어던질 때, 가슴에 피가 좀 묻은 모양이야. 이게 뭐야.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진희를 위해 한 일이니, 옷 한 벌이 뭐가 아깝겠냐만. "그런데 진희야." "왜?" 다시 토라진 어투로 돌아간 진희. 그러나 지금 할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너 새 옷을 사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자신의 옷을 쳐다본 진희가, 구역질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까 내가 급히 진희를 데리고 도망칠 때, 내 옷에서 피가 약간 묻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뭐 그 외에도 그 남자가 진희를 덮칠 때, 약간 피가 튄 것도 있긴 하고. 그녀는 급히 손수건을 꺼냈지만, 당연히 거기에도 피가 조금 묻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옷을 벗어 제칠 수도 없지 않은가. 명색이 숙녀인데. '당장 백화점 가야겠군.'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 거기 들어가다가는, 살인자로 오해받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는 나에게 들이닥친 목소리. "동행해주시길 바랍니다." 에? 우린 왜요? "모르핀. 모르핀." "그쪽 환자를 잡아 !" "카아악." 탕. 탕. 경찰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병원이었다. 아까 봤던 정신이상자와 비슷한 인간들 몇이 침대에 묶인 채 발광하고 있고, 의사들은 아예 그들을 꼼짝못하게 묶어놨고, 간호사들까지 모조리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있는, 그런 끔찍한 곳으로 말이다. 게다가 군인들이 병원 문 앞부터 진을 치고 있고, 심지어 장갑차까지 버티고 있다. 살벌하기도 해라. "무슨 일이 터진 거야?" 영화 촬영하는 거라고 믿고 싶지만, 미친 사람의 머리를 총으로 쏘는 경찰과, 쓰러진 시체가 버둥거리는 모습, 그리고 그 머리도 없는 시체를 잡아서 끌고 가는 군인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요즘이 특수효과가 발달된 시대라지만, 이건 좀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비록 조금 전에. '으. 끔찍해.'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우리는 왜 여기에 와야 하는 거야?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경찰을 향해, 우리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자. 진실을 고백하세요. 경찰 아저씨.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느 악덕기업의 생물병기 실험? 신종 바이러스? 악독한 마법사의 저주?' 왜 그 모든 가설의 배후로 미인이를 놓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억지로 그런 생각을 몰아냈다. 일단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듣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경찰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의외의 것으로 시작되었으니. "옷을 다 벗어 주십시오." "네?" 요구하는 사항이 뭔가 했는데, 그런 겁니까. 상당히 엉큼하시네요.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정말 진지했다. 장난기라고는 눈꼽만큼도 들어있지 않을 만큼. "다른 분들은 괜찮습니다만, 두 분 만큼은 꼭 벗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에? 왜 나하고 진희만 지적하는 겁니까? 솔직히 몸매라면 연미 누나가 더..... 그러나 차마 입 밖에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하겠다. 국제적으로 망신당할 일 있냐. 그런데. "왜 벗어야 하는데요?" 다행히도 연미 누나가 먼저 그걸 물어본다. 하긴 사랑스런 자매가, 인파 속에서 벌거벗어야 하는 위기에 봉착했으니 그건 당연하지만. 자. 경찰은 과연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 자신의 음흉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답이 나올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두 분의 몸에 상처가 있는지, 특히 물렸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윽.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럼 진찰실로 가야지, 왜 여기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벗으라고? 당연히 그건 안 된다. 진희의 나신을 다른 녀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다. 음흉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우리 사정을 그들이 봐주지는 않았으니. "지금 환자가 많아서, 남는 병실이 없습니다. 일단 우리가 몸으로 가려줄 테니까, 어서." 하지만 남자 앞에서 진희를 벗기고 싶지는 않은데요. 나도, 진희도, 그리고 연미 누나도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 풍남이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문희 녀석은. '사진 좀 그만 찍어라.' 저러다가 카메라 압수 당하지. 다행히 다들 바빠서 그런지, 그녀의 행각에 주의하는 녀석은 없었다. 하긴.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기에는. "크아악." 탕. 또 하나의 환자가 으르렁거리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환자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게 자신들의 앞날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런 이들이 몸을 버둥거리고, 간호사들은 그들을 달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환자들에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것은. "누가 좀 잡아." "어깨 눌러." "팔부터 묶어." 머리가 날아간 시체가 발버둥치는 것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도 저 대열에 낄 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도 죽을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지 못했다. 시체가 발버둥칠수록 더욱. "자. 끌고 가. 도망 못 치게 잘 감시하면서." 군인들이 필사적으로 그 시체를 잡아서 묶고는, 그대로 어디론가 끌고 간다. 원래는 그런 광경을 환자들에게 보여주면 안 되지만, 로비에까지 침대가 나와 있는 판국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한테 내 줄 탈의실은 없다는 건가요.' 그래서 우리보고 여기서 옷을 벗으라고 하는 건가요. 그리고 만약 상처자국이 있다면,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건가요.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난 분명히 안 물렸다고. 진희도 그렇고. 그러니 쓸데없이 의심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강제로 벗겨지거나, 환자로 오인되어 침대에 묶이는 건 싫으니까. 그러니. "알았어요. 벗을게요." 하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는 싫은데요. 그건 다들 이해하는지, 풍남이와 연미 누나와 그 경찰 아저씨가 우리들을 둘러쌌다. 그리고 여의사 하나가 내 앞에 왔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이걸로 검사 준비는 완료된 셈이다. 그럭저럭. 그런데 잠깐. 벽의 숫자가 부족하다? "놀지 말고, 너도 이리 와." 하긴. 한 사람이 빠졌으니 벽에 구멍이 뚫리지. 나는 사진 찍느라 정신을 팔아먹은, 의리없는 소꿉친구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이 녀석이. 결국 연미 누나가 그녀의 모가지를 잡아서 끌고 온다. 아이고. 참 가지가지 해요. 그렇게 환자들 사진이 찍고 싶었던 거냐. "너도 빨리 여기 서서, 좀 가리고 있으라고." 그러나 이 못된 문희의 말은. "뭐 그런 걸 가지고 바쁜 사람을 불러요. 좀 보이면 어때서."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항의하려는 순간에. "빨리 가리란 말야 !" 결국 진희가 새빨개진 얼굴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고. 여자의 앞에서 옷을 벗는 건, 난생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여기서 여자란, 내가 결혼해도 되는 범주에 들어가는 여자를 뜻한다. 그러니 어마마마나 여동생은 자동으로 제외된다. 뭐? 여동생한테 알몸을 보인 적이 있냐고? 넘어가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특히 여동생의 가슴에 손을 댔다가 죽도록 얻어맞은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가슴은 말랑말랑한데, 주먹은 쇳덩이라니. 아. 절대로 고의로 만진 거 아냐. 실수야. 실수. 그리고 지금 문제는 따로 있잖아? 그러니까. "진희야. 벗어." 연미 누나가 재촉하지만, 진희는 옷을 좀처럼 벗지 못한다. 당연하다. 나도 벗기가 부끄러운 지경인데, 처녀인 그녀에게 이건 너무 심한 짓이 아닌가. 이제 그녀는 시집 다 갔군. 그러니 내가 장래를 책임져야겠지.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는 건 우리 사정이고. "시간 없으니 빨리 하세요." 으. 이 얼굴 두꺼운 여의사 같으니. 나는 투덜거리면서 바지를 벗고, 윗도리까지 벗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설마 ! "속옷까지 벗는 겁니까." 치사하게도, 그 여의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망할 아줌마 같으니.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이것만은. 이것만은..... "팬티까지는 안 벗어도 돼요." 휴우. 나보다 누군가가 더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것까지 벗기면 좀 너무한 거겠지. 그리고 팬티로 가린 부분을 만약 물렸다면, 지금쯤 우리가 걸을 수도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발로 여기에 왔으니까, 당연히 그 부분은 무사할 수밖에. 게다가 피를 흘렸다면, 팬티를 안 벗어도 환히 드러날 것이고. '잠깐.' 그럼 진희가 생리중이라면? 부디 그렇지 않기만을 바란다. 공연히 오해라도 받아서 침대에 묶이면 곤란하다. 주위에 온통 환자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이런 곳에 어떻게 그녀를 놓아두겠는가. 부디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라면서, 나는 벗은 내 옷을 한 군데에 쌓아두었다. 여의사가 그 옷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금 나를 본다. 위부터 아래까지, 다 흩어본다. 여자 입장에서 남자의 나체는 어떤 느낌일까. 뭐 완전한 나체도 아니지만. 내가 축구선수라는 게 갑자기 다행스러워졌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몸매는 되니까. 근육도 나름대로 있고. 그런데 이 사람, 과연 날 진찰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감상하는 걸까. 골치 아프다. 그건 넘어가자. 그런데. "네가 날 껴안으니까 이렇게 된 거잖아 !" 이렇게 불평해야 할 사람은 어디 있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지만, 없다. 이상하다? 어디로 갔나?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역시. "무, 문구야. 보지 마." 그녀는 창피한 나머지, 얼굴을 숙이고 가슴을 무릎으로 가리고 있었다. 하긴. 앉아있으니 안 보이지.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가린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봐야, 결국 보이는 건 보이는 거다. 게다가. "진희야. 그렇게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못하잖아." 물론 저 의사가 남자였다면, 절대로 일어나라고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런 불쾌한 상황은 빨리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진희가 저런 모습으로 더 있다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다. 빨리 끝내고 옷 입으라고. 진희야. 비록 여동생 가슴처럼 크지는 않지만, 그렇게 큰 가슴을 눈앞에 들이대면.........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위가 새까맣게 된다. 시베리아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으. '악몽은 상상하지 말자.' 하지만 문제는, 진희가 좀처럼 안 일어나는 거다. 아무리 말로 타일러도, 그녀는 쪼그려 앉은 그 자세 그대로였다. 좀 일어나라. 도대체 언제까지 벗고 있을 셈이냐. 결국 나는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기로 했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힘을 주자. "꺄악 !" 깜짝 놀란 나머지, 연미 누나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뭐 그건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 이 모습은,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진희가 내 등뒤에 숨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직접 진희를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아. 진희가 지금 브래지어를 안 하고 있지 않느냐. 팬티만 입으라는 여의사의 협박으로 인해. 그래서 그녀의 가슴이 내 등에 닿았고, 그 느낌은. '최고다.' 너무나 멋진 경험이었다. 오. 결혼하기 전까지는 이런 일을 체험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런 좋은 일이 여행 중에 생기다니. 아. 행복해. 나는 순간적으로, 이번 여행을 잘 왔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도시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일은 원래 짧은 법이니. "그러면 안 보입니다. 좀 내놔봐요." 의사 선생, 죽어. "그럼 됐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일어서는 의사. 그런데 무슨 진단이 이렇게 간단히 끝나?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오만가지 의문이 다 떠오르는 가운데, 결국 연미 누나가 우리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물론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괜찮은 거예요? 정말 감염되지 않은 건가요?" "네. 이 병은 감염된 사람에게 물려야 전염됩니다. 몸에 상처가 없다면, 감염자의 피가 묻더라도 전염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에는 상처가 없으니, 전염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설령 입을 통해 피가 들어가더라도, 내장에 상처가 없다면 전염 가능성은 없으니 안심하시길." "휴우." 난 그 녀석들의 피를 마신 적은 없으니, 결국 걱정할 건 없다는 뜻이다. 다행이야. 그럼 난 그런 기괴한 살인귀가 되지는 않겠구나. 그러나 안심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빨리 다른 옷 가져와요 !" 아하. 그렇구나. 하지만 나로선 그녀가 내 등뒤에 더 붙어있으면 좋은데. "일단 이 병에 감염된 환자는 몸 전체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극심한 구토와 설사, 두통, 그리고 내출혈을 일으킵니다. 이 증세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와 거의 비슷하며, 살아있는 상태에서 몸이 썩어 들어가게 되는 것도 비슷합니다. 감염된 자는 최저 1분에서 최장 1주일 이내에 의학적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 말씀은....." "네. 의학적으로 보면 죽은 상태가 되는 거지요. 체온, 심장박동, 뇌의 활동상태,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이요. 문제는 이게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며, 의학적으로 사망이라고 생각되는 시점이 되면 환자가 다시 몸을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그럼 안 죽은 거잖아? 혹시 의사들이 멀쩡한 사람을 사망했다고 우기다가 들킨 거 아냐? 하지만 그 다음의 말은 내 섣부른 예측을 완전히 뒤엎었으니. "환자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나서, 우리 의료진은 환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환자는, 의사 한 명을 물어뜯었습니다. 물린 경우에만 감염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환자는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응하지 않았으며, 단지 다가간 사람을 물어뜯는 것에만 열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사람의 살을 뜯어먹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으악. 모두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람을 먹다니. 아무리 조금 전에 우리가 그 광경을 눈앞에서 봤다고 해도, 역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물리지 않으면 감염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 걸까. "우리들은 환자를 독방에 가두고, 치료과정에서 피를 뒤집어쓴 사람이나 침에 접촉한 사람, 심지어 피 한 방울을 삼킨 사람까지 모두 격리해서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오로지 물린 사람만이 그 병에 걸린 환자와 같은 증세를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잠깐. 그걸 일일이 확인할 정도였다면. "이 병이 발견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던 모양이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여태까지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지요?" 그게 문제다. 그걸 알았으면 우리가 굳이 이 도시에 올 일이 없었잖아? 그런 위험한 병이 퍼지는 도시에 뭐 하러..... 혹시 관광수입이 줄 것을 걱정해서, 당국이 일부러 숨긴 게 아냐? 하지만 그 경찰의 말은 다른 것이었으니. "이 병은 오늘 아침까지는 확실히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A마을의 경우, 이 병의 갑작스런 만연으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지만 우리 경찰의 신속한 투입으로 인해 곧 전염은 멎었고, 그 후 추가환자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환자가 탈출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환자가 탈출을 했지요?" 어느 멍청이가 그렇게 관리를 못했지? 그 녀석이 누구인지 찾아내면 그냥....... "알 카에다로 의심되는 자살폭탄 테러범이 병원에 폭탄을 터뜨렸기 때문입니다. 그 통에 경비에 빈틈이 생겼고, 환자 몇 명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환자가 없어졌음을 알고 경찰들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으. 그 인간들은 대체 도움이 안 된다니까. 왜 하필 오늘, 여기서, 우리가 와 있는 도시에 테러를 하고 난리야. 그런데 그로 인한 사망자나 부상자는? "보시는 대로입니다. 하필이면 이 병원에 폭탄테러를 가하다니. 미친놈들이 따로 없습니다. 그 덕에 도시 전체가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테러를 하려면 그들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백악관에나 가라. 힘없는 서민들에게 폭탄을 던지지 말고. 물론 그게 꼭 알 카에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경찰 아저씨도 그저 '의심되는'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누구든 간에, 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념? 신념? 신의 영광? 무슨 말라죽을 신의 영광. 그런데. "그럼 확실히 물린 경우에만 전염이 되었다는 건가요? 감염된 사람의 혈액이나 타액, 신체적 접촉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요?" 연미 누나의 질문은, 우리 모두가 묻고 싶은 것이었다. 특히 그 감염자의 피를 뒤집어쓴 나와 진희는 더더욱. 다행스럽게도 경찰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가급적이면 민간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나름대로의 친절봉사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두 분을 격리수용하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휴우. 나와 진희는 일제히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연미 누나는 매우 기뻐했다. 풍남이는 진희를 보며 웃었고, 문희는 다시 사진기를 들어서 촬영을 하려다가..... "그런데 질문이 있는데요." 연미 누나가 그 말을 통역했다. 경찰도 어지간하면 받아주겠다는 듯이 응대했지만. "왜 머리도 없는 시체가 움직이는 거지요?" 문희의 질문은 중대한 것이었다. 보통 생명체는 머리가 잘려나가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바퀴벌레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사람은 바퀴벌레가 아니다. 머리를 잘리면 그냥 죽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병에 걸렸기에, 머리를 잘리고도 계속 움직이는 것일까. 기분 나쁘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현재 의료진이 바이러스 검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평범한 시체와 다른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신체를 잘라내는 것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실제로 여러분들도 목격하셨듯이, 일단 이 병에 걸린 자는 목을 잘라도, 팔다리를 잘라내도 계속 움직입니다. 유일한 대응수단은." 그는 아까 목이 날아간 시체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소름끼치는 광경이 있었으니. "꺅 !" 진희가 비명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까 목이 잘려나간 시체가 남긴 자취가, 그가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살 조각들이 한데 모여 펄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경찰들도, 군인들도 이미 그런 건 많이 본 탓인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단지. "불질러버려." 그 조각들에 라이터 하나를 던졌을 뿐이다. 1회용 라이터가 살 조각들의 위로 떨어지자, 불길이 일어나더니 타기 시작했다. 마치 마른 장작에 기름을 뿌린 것처럼, 그 조각들은 아주 불에 잘 탔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건. "아아아아아." 마치 사람이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살 조각들에서 흘러나왔으므로. "현재 이 병이 얼마나 도시에 만연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이 보신 바와 같이 이곳의 상황은 너무 위험합니다. 곧 헬리콥터가 도착하면 여러분들을 안전지대로 피신시켜드리겠으니, 그때까지는 저희들의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위층의 대피구역에 가 계셔야 합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그 말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살 조각들이 퍼덕거리는 걸 본, 지금의 상황에서는 말이다. 솔직히 너무나 무서워서, 이렇게 외치고 싶을 정도다. "빨리 대피시켜 줘요." 물론 진희 앞에서 그런 겁쟁이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 그리고 우리들 중 아무도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지 않으니, 즉 나만 바보가 되는 건 달갑지 않으니까 참는 거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물리지 않으면 감염되지도 않는다는 걸 확인 받았다는 것이다. 일단 안심하고. 그런데 잠깐. '이 녀석, 걱정하지 않을까.' 나는 갑자기 아주 극악무도한, 감염자보다 훨씬 무서운 어떤 고약한 꼬맹이를 떠올렸다. 이 소식을 들었다면 상당히 걱정하고 있을 텐데. 혹시 내가 죽은 줄 알고 펑펑 울다가 쓰러진 거 아닐까. 갑자기 불안해져서 전화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이런 사태가 생길 경우에는.' 꼭 보도통제가 뒤따르지 않나? 이게 만약 다국적 기업의 생물병기 실험이라면 분명히 보도를 막을 것이고, 정부에서 추진한 것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자연상태에서 발생한 신종 바이러스라도 마찬가지일 게 아닌가. 보나마나 명분은 같을 것이고. 내 예상은 여지없이 들어맞았으니. 사람 죽는데 신이 나서 카메라를 휘두르던 문희에게 경찰이 말하길. "그리고 아가씨, 카메라는 이리 주십시오." 저런. 저런. 문희야. 그렇게 설쳐대더니, 결국 응징을 당하는구나. 그녀는 울상이 되어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런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것입니다. 일단 일이 수습된 후,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것이니 보도관제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문희는 날개 빠진 새가 되고 말았다. 카메라에 목을 건 녀석이 카메라를 날렸으니, 날개 빠진 새 맞지 뭐.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짠순이 여동생이 모처럼 한 턱을 내서 마련한, 신형 휴대전화는 날아가고 말았다. 젠장. "그럼 우린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야?" 피난민들 사이에서, 우리는 할 일도 없이 앉아있었다. 이게 뭐야. 물론 총을 들고 저 감염자들과 싸우는 걸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헬리콥터나 기다리는 신세라니. 하긴 우리는 평범한 서민 A, B, C, D, E에 불과하니 이게 정상이지만. 물론. '그 녀석이라면.' 그럼 문제가 달랐겠지만. 우리는 휴대전화조차 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헬리콥터가 오면 거기에 타기 위해. 가급적이면 빨리 타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다만. '아까워라.' 새 휴대전화를 써먹지도 못하고, 그냥 빼앗기고 말았다. 아마 그 전화는 지금쯤 1층의 로비에 쌓여 있겠지. 아이고 분해. 그나마 아래에서 저 이상한 감염자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그냥 옥상의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좋았지만, 지금은 그 사이에 불쾌한 불기둥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 경찰들이 싸우는 광경이겠지. 가끔씩 총성도 섞여서 들려오는 걸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참 한가한 상황이었다. 모든 구경 중에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도 할 수가 없다. 어느새 밤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방관자로서, 옥상에서 별과 도시의 풍경만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헬기는 언제 오는 거야?" 그런 심정으로 헬기 착륙장을 바라보던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라라? 저게 뭐야?" 그것은 붉은 액체가 묻은 끈이었다. 아니, 저건 소시지라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순대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둘 다 아닌 것은 확실했다. 저건 차라리. "뱀?" 그 소시지는 마치 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게 왜 여기 나타난 거지? 소시지는 서서히 몸체를 들어서, 옥상으로 기어올라왔다. 빗물홈통을 통해서. 왠지 썩은 소시지 같아서,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이런 도시에 왠 뱀?" 어지간하면 밟아서 쫓아내고 싶지만, 여기에 있는 시민들은 하나같이 나보다는 덩치가 크다. 게다가 내가 있는 위치는 그 배수관과 조금 떨어진 곳이어서, 나는 그냥 게으름뱅이의 본령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무시." 아무리 지루하다고 해도,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뭐 하러 힘을 낭비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한가하신 생각은 곧 접어둬야 했으니. 꼬물꼬물. "........." 꼬물꼬물. ".............." 꼬물꼬물꼬물꼬물. "......................!" 나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왜 저 뱀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거냐.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 배수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쾌하고 구역질나는 물건들은. "설마." 나는 그제야,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에 발을 내딛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난 지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도시에 있는 것이다. 시체들이 걸어다니고, 그 내장들이 춤추는 그로테스크한 세계에 말이다. 사람의,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뭐한 허파, 심장, 위장, 간, 심지어는 소장과 대장까지, 배수관을 통해 줄줄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큰일났다." 나는 주먹부터 쥐었다. 어떻게든 저 괴상한 내장 덩어리들을 쫓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손으로 잡고 던져버릴까? 하지만 저게 만약 내 팔을 휘감고 조이면? 저게 내 입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아무리 감염자에게 물리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역시 저런 흉물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누가 손에 피를 묻히고 싶겠는가. 그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던 듯, 옥상에 있던 시민들이 슬금슬금 뒤로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 내장들이 옥상을 가득 채울지도 모르는데. 누군가가 뒤로 물러서다가, 갑자기 출입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파국의 시작이 되었다. 아니, 이 도시에 우리가 온 것 자체가 파국이었지만. 쉬익. 식도로 추정되는 끈 하나가, 그대로 그의 뒤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장 덩어리들이 주위의 시민들을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달아난다. 하지만 내장들은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놀란 얼굴로 연미 누나와 문희, 그리고 진희를 쳐다보았지만, 그들 역시 혼란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쉬익. 올 것이 왔다. 대장 하나가 나를 향해 뛰어오른 것이다. 이런. 왜 하필 대장이야. 다른 내장도 많은데, 그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 배설물이 만들어지는 대장이라니. 나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 머리를 손으로 감싸면서, 쪼그려 앉은 것이다. 옆으로 피하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방안이 있는데 왜 내가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덕인지 대장은 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리고. "끄아아아악." 대장, 그것도 반쯤 썩은 데다가 배설물이 묻어 있어서, 정말 더럽기 짝이 없는 대장은 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도무지 들어주기 싫은 비명을 남기면서. "끄아아아아." 소름이 확 끼친다. 내장이라는 게 움직이는 것부터가 꺼림직 한데, 성대도 없는 주제에 비명이라니. 하지만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비명은, 내가 지금 비현실적인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소리 지르지 마.' 차마 말로는 꺼낼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서 있는 현실이 뒤집혔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로 못을 박을 필요도 없이, 내 눈앞에 전개되는 광경은 이미 다른 세상의 그것이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할 용의가 전혀 없는, 비참한 세상 말이다. "이건 아니야." 내가 여기 오면서 바랬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아래로 떨어져 가는 대장의 최후를 바라보았다. 내가 옥상의 가장자리에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내가 다른 곳에 있었다면, 지금쯤 저 내장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목이 졸려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의 산물로, 밖을 쳐다봤기에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우연의 저주로 추락한 대장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푸악.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온갖 더러운 물질을 사방으로 흩트리면서. 나는 그 광경을 더 이상 자세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저녁을 엉터리로 때웠다고는 해도, 그 얼마 안 되는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아서였다. 물론 병원에서 주는 밥이 좀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래도 우리나라 음식이다. 여긴 아예 물부터 다른 외국이고, 비위에 안 맞는, 그것도 양도 적은 식사여서 억지로 집어삼켰는데, 그걸 다 토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런 내 염려를 증명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을 제대로 먹기는 힘들 것 같다. "키익." 다른 내장들이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장만 올라오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체까지 기어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참 억세기도 해라. 10층도 넘는 건물의 벽을 기어올라오다니. 그런데 경찰은 뭘 하고 있기에, 이런 일이 생기도록 방치하는 거지? 여기는 분명히 경찰과 군대가 지키고 있지 않았던가? 혹시 알 카에다가 또 폭탄이라도 던졌나? 그게 아니면 저 시체가 유달리 영특해서, 수비선의 빈틈을 찾아낸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래를 다시 한 번 쳐다봤지만, 그쪽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위에서 떨어진 내장 조각에, 놀란 경찰 하나가 그것을 불로 태워버리는 모습이 보였을 뿐. 그가 위쪽을 쳐다보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라진 게 있었다. 그것은. "우워어어." "그어어어." 병원 밖에 모인, 엄청난 숫자의 인파였다. 아니, 그건 인파가 아니었다. 모두 다 조금 전에 내가 목격한 것과 같은, 살인마 집단이었다. 그럼 다른 쪽은?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을 눈에 담기 위해서.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주변을 살피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계속해서, 출입문 쪽으로 쇄도할 뿐이었다. 눈앞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하지만 그 문은 너무나 좁았다. "빨리 들어가요." "어서 ! 빨리 !" "진희야 ! 떨어지지 마 !" "연미 누나 !" 그것은 우리 일행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희도 연미 누나도 풍남이도, 그저 달아나기만 할 뿐이었다. 아까처럼 얼어붙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진희의 공포에 질린 표정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가 즐거운 여행을 하기를 바랬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나는 갑자기, 여기에 없는 여동생을 원망하고 싶어졌다. 어째서 전풍그룹에게 여름 여행을 시켜달라고 말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게 그 녀석 탓인가.' 사실 여기를 여행장소로 정한 건 미인이가 아니니, 그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녀석은 나름대로 날 챙겨준다고 여행을 원했던 거니까. 그리고 지금 누구를 원망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떡이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할 게 아닌가. 유일한 탈출구가. "큰일났어. 끼었어." "진희야. 이리 나와. 위험해." "누나 ! 물러서요 !" 이렇게 막힌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공포로 인해 순간적으로 출입구로 치달았고, 그 결과는 비참했다. 사람들이 문에 끼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아래층으로 달아날 수 있었던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옥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갇히고 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다시금 주위를 살피려고, 옥상의 가장자리로 뛰었다.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 내 눈에, 경악할 만한 장면이 들어왔으니. "이.........거........." 모든 방향으로,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시체들의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단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까지 많은 수의 감염자가 발생하다니. 이렇게까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당국의 실수는 아니었다. 만약 그 폭탄테러가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간에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아니다. 어쩌면 그 테러범들이 생물학 병기를 어디선가 구해와서 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이런 치명적인 균을 연구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키이익." 피묻은 내장들이 출입문에 몰린 사람들을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저 남자의 다리를 휘감는 것은 소장일까. 식도일까. 그게 아니면 십이지장일까. 그는 어떻게든 저주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발로 차고, 손으로 잡아뜯고, 심지어는 바닥을 구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도, 그 내장은 남자의 다리를 휘감고는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여기서 떨어지면, 영원히 파멸하기라도 할 것처럼. "쉬익." 그리고 그 내장은 남자의 허리를 감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 악마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내장은 어느새 그의 목을 감기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든 내장을 풀어내려는 일념으로 다시금 내장을 손으로 잡았지만. "카악." 내장의 끝 부분이 벌어지더니, 그의 손가락을 안으로 집어삼켰다. 마치 뱀이 먹이를 집어삼키듯. 그는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빼냈지만, 그 손가락은 이미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뼈에 불과했다. 엄지손가락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장의 흡인력에 의해. "아아악. 아악." 그리고 그의 목을 내장이 휘감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구하러 갈 수가 없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기 싫어서가 아니다. 내가 본 것은, 그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 돼 !" 배수관을 잡고, 기어올라오는 시체들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달아날 곳은 막혔고, 시체들은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저들은 옥상에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저 내장과 합세해서,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좀비로 변할 것이다. 문희도, 연미 누나도, 그리고 진희도. 그런 일이 생기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기 ! 무기 될 만한 거 없어?" 문제는 무기였다. 총이든 칼이든 뭔가가 있어야 저 녀석들을 막을 게 아닌가. 하지만 내가 평소에 그런 걸 가지고 다닐 리가 없었다. 내가 여동생이라면 몰라도, 그런 흉악한 물건이 내 품안에 있을 리가....... "?!" 하나 있었다. 여동생이 혼자 베를린으로 도망가면서 줬던, 호신용이라는 흉기가. 나는 황급히 품속을 뒤졌다. 제발 나와라. 나와라. 안 나오면 평생 원망할 테다. 다행스럽게도 그 물건들은 나왔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려다가..... ".............이걸로 될까?" 별로 달가운 물건은 아니었다. 사실 전기충격기라는 물건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상대로 쓰는 것이지, 저런 괴물을 상대로 쓰라고 만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약간 찌릿하게 만드는 정도일까? 아니, 그거라도 가능하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사람도 아니고, 시체로밖에 안 보이는 저 악마들에게 과연 이런 게 통할지. 이 망할 녀석. "주려면 좀 괜찮은 걸로 줄 것이지." 이제 와서 원망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나는 결국 전기충격기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아래에서 기어오르는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통할 방법이라면......... 그 순간 뭔가가 내 머릿속에서 불꽃을 튀겼다. 녀석들이 매달려있는 무언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자. 죽어봐라." 두 손으로 옥상 난간을 잡고,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밖으로 내놓고, 다시 나머지 하나를 밖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본 우리 일행은. "문구야 !" "문구야 ! 안 돼 !" "문구야 ! 자살하면 안 돼 !" 연미 누나와 진희가 그렇게 외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지금의 내 포즈는, 전형적인 자살 지망자의 그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진희와 결혼을 못한다고 ! 여기서 죽으면 진희와 같은 침대에서 자지 못한다고 ! 그리고 여기서 죽으면, 진희하고 이렇고 저렇고 그런 일을 하지도 못한다고 ! 마지막 것에 특히 초점이 맞춰졌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야아아아 !" 모든 체중이 실린 일격을, 배수관을 향해 날렸다. 배수관이 벽에서 떨어지면 당연히 배수관에 매달린 좀비들도 추락할 것이라는, 그러니 저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가 나를 이끈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진희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나도 결혼은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이왕 결혼하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절대로 죽거나 물리면 안 된다. 내 장래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런 내 바램이 무색하게도. 팅. 뭐야. 이건. 야속하게도, 배수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독일제답게, 튼튼하게 만든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안 튼튼해도 되지 않는가. 나는 약이 올라 더 세게 배수관을 걷어찼다. 그러나 그래도 꿈쩍하지 않는다. 어지간하게 튼튼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크워어." 좀비들이 드디어 내 바로 밑에까지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곧 내 다리는 그들에게 잡힐 것이다. 잠시 절망적인 광경이 내 머리에 떠올랐지만. "이야야아아아아아 ! 여동생 키이이이익(sister kick) !" 여동생 킥, 정확히 말해서 여동생의 발차기를 뜻한다. 나는 뭐든지 쳐부수는 무적의 여동생 킥을 떠올리며,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해서 배수관을 걷어찼다. 그러나 배수관은 단지 심하게 흔들렸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인가. 천사가 나를 돕지 않아서 악마라도 날 도와달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친 건데, 결국 신의 분노가 나를 지옥으로 걷어찬 것인가. 하지만 이 세상에 신은 존재했다. 즉, 악마도 당연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게 여동생을 수호하는 악마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악마가 손을 내밀었고. 우지직. 배수관이 서서히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있던 시체들도,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괴성을 질렀지만. "우어어어." 이미 늦었다. 그들의 손은 약간의 차이로 내 발뒤꿈치를 잡지 못했고, 그 손은 곧 허공을 붙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잡히지 않는다. 단지 잡히는 것처럼 보일 뿐. 좀비들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우워어억 !" 그들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이 의지하던 배수관의 조각과 함께. 우장창. 쾅. 우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좀비들의 탑은 붕괴되었다. 사실 배수관의 한 끝이 벽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이게 모조리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좀비가 매달려 있다는 게 원인이 되어, 관은 불어난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은 것이다.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바로 그곳으로. 그 결과는. "휴우."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다. 적어도 저 녀석들은 분명히 불행해도 될 녀석들이고, 나는 저런 걸 볼수록 행복해진다. 그들이 박살나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생존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며 더불어 진희의 생명이 보호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좀비의 유입을 차단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미 올라온 좀비도 있고, 아까 잡혀 먹히던 사람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아래층이 만일 저들에게 점령되었다면? 나는 죽어라 난간을 넘어서, 다시 옥상 출입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좀비들을 잡아야 하므로.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짓이냐. '내가 무슨 여동생도 아니고.' 여기에 총만 들면, 딱 여동생이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그 가치관부터, 적이라면 인정이고 사정이고 없이 마구 패는 그 행동까지 말이다. 하지만 나도 일단 살아야 하니까, 윤리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자. 죽은 시체에 대해 마구 난도질을 하는 건 고인에 대한 모욕이니 하는 걸 따질 겨를이 없다 ! 적어도 지금 나에게는 없다 ! 그런 거 따지다가 진희가 죽겠다고 ! 좀비가 사람들에게로 다가서고 있단 말이야 ! 그리고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감히 좀비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고 있다고 ! 하긴 그게 정상일 것이다. 나도 사실 그러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진희는. 그러니. "우아아아아 !" 아마 나는 지금 미친 녀석으로 보일 것이다. 하긴 난데없이 날아 차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될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오해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 할 일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저 못된 좀비부터 때려잡는 게 순서다. 입을 벌리던 좀비의 뒤통수에, 내 분노의 일격이 명중했다. 사람을 씹어먹으려는 악독한 시체는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나는 멋지게 착지하려다가. 우당탕. "아구구구구." 힘을 너무 줬나? 꼴사납게 나뒹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한 건 하기는 했다. 일단 좀비가 다른 사람들, 특히 진희에게 다가서지는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좀비가 죽지 않은 이상, 그는 누군가에게 다가섰다. 그게 누구냐 하면. "나잖아?" 좀비가 서서히 일어섰다. 물론 시체에게 표정은 있을 리 없지만, 자기 식사를 방해하는 무례한 먹이에 대한 증오심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인간 기준이고, 저 녀석들에게는 그런 게 없겠지만. 그저 나는 그에게 있어, 먹이일 뿐이니까. 하지만. '순순히 먹혀주진 않겠어.' 좀비가 기세 좋게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빠를지 몰라도, 나에게는 느리다. 상당히 느리다. 평소에 축구선수로서 열심히 연습한 덕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소에 대마왕을 상대하다보면, 오크 정도는 밥이라고.' 나를 구박하던 상대는 다름 아닌 여동생이 아닌가. 저 좀비가 아무리 강해봐야, 여동생이 지닌 압도적인 위압감이나 엄청난 움직임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 그는 그저 맹목적으로 나에게 돌진할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먹이가 옆으로 비켜나가자 목표를 잃고 비틀거리는 좀비. 이때다. 퍽. 자. 여기서 멋지게 좀비를 넘어뜨리고 나서, 마무리를 하는 거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녀석의 다리를 찼는데,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뭐야. 이거. 이야기가 다르잖아. 덩치 큰 서양인이라서 그런가? 내가 새파랗게 질리는 사이에. "크아악." 이런. 큰일이다. 나는 잽싸게 옆으로 몸을 비틀면서, 이번에는 옆구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보통 이 정도 일격이면 정상인은 고통에 못 이겨 나뒹굴어야 하는 거 아냐? 그 순간, 내 눈이 그의 배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 피묻은 척추가 드러나 있었다. 등이 아니라 뱃가죽이 찢겨진 녀석의 척추가 보인다는 건, 다름이 아니라 속이 비었다는 뜻이다. 그럼 아까 설치던 그 내장들이, 이 녀석의 것이었나? 그제야 나는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괴물을 상대로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을. "크악." 그래서 나는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내 상대는 하나가 아니었으니. 내 등뒤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쉬익." 야. 이 인간, 아니 시체들아. 내가 무슨 중요 목표물이냐. 나 하나만 포위해서 공격하게. 하지만 이미 그들에게 원수질 일을 하나, 아니 둘이나 해치운 나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전에 저들의 일원인 대장의 공격을 '감히' 피했고, 그 다음은 좀비 몇 마리를 추락시키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들에게는 내가 자신들의 동료를 해친, 철천지원수로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저 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정도의 지성이 남아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상대가 진짜 좀비인지, 아니면 환자인지, 그것도 아니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진화된 생물인지도 모른다고 ! 그리고 그걸 더 생각하기도 전에. "크악." "쉬익." 양쪽에서 시체조각들이 덤벼들었다. 내장들은 내 등으로, 좀비는 내 앞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여동생은 어떻게 했더라? 전에 불량배들의 공격을 여동생이 어떻게 받아냈는지가 떠올랐다. 어지간하면 여동생의 행동을 따라하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되겠지만 지금은 목숨이 달린 문제다. 적어도 싸움과 유혈사태에 있어 여동생을 따라올 인간은 거의 없다고 보므로, 이럴 때는 그녀를 본받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팍. 나는 옆으로 피했다. 물론 옆이라고 해서 아주 빈 것은 아니고, 간인지 위장인지 모를 물건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지만 순순히 맞아줄 생각은 없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 내장 덩어리는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역시 공중에서 방향수정을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래야 나도 속이 편하지. 그 순간 나는 아까 대장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다.' 나는 죽어라 옥상의 가장자리로 도망쳤고, 시체와 그 조각들은 내 뒤를 쫓았다. 나는 난간을 밟고 올라서서. 휘이이잉.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여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난간 위에 버티고 섰다. 바람이 너무 심한데, 지금이라도 내려갈까? 잘못하면 앞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바닥도 없는 뒤로 내려갈 것 같아서 조금은 겁이 났다. 그 겁을 더욱 부추기려는 듯이,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좀비. 그리고 그 뒤에선. "야. 문구 이 미친 자식아." "문구야. 피해." "문구야." 모두의, 그리고 진희의 응원, 아니 이 경우에는 응원이라기보다 염려라고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래. 난 절대로 여기서 죽지 않는다. 비록 여동생에게는 언제나 밥이지만, 최소한 이런 시체에게도 밥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 나는 적어도 '그 여동생'의 오라버니라고 !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나는 난간 위에서 곡예를 부리고 있었다. '난 여동생이 아니지만.' 그녀의 그 수법, 상대에게 손을 대지 않으면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그 기민한 몸놀림을, 나는 과연 흉내낼 수 있을까? 마구 몰려드는 비관적인 생각을, 나는 억지로 떨쳐버렸다. 혼을 담은 외침으로. "나는 지상최강 미인이의 오빠다 !"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하기 딱 좋은 대사지만, 이런 거라도 해야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게 아닌가. 나는 투우사가 된 기분으로, 내장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묘한 놀이다. 실패하면 그대로 목숨이 결단나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쉬익." 첫 번째로 날아든 것은 위장이었다. 하지만 하나라면 피하는 건 쉬웠다. 나는 살짝 허리를 구부렸고, 위장은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이봐. 여기는 옥상 난간이라고. 이 뒤에는 아무 것도 없어. 여기서 나에게 덤비면. "키이이이익." 몸, 아니 간을 날려 나에게 달려들던 간도, 저 아래로 떨어져갔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안다. 아마 비참하게 죽겠지. 나는 그런 현실을 애써서 무시하고,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녀석들은 덤비지 않았다. 음. 포기했나?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으니. "쉬익." "쉬익." "쉬이익." 이런. 인해전술이잖아 !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저들을 모두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난 미인이가 아니니까, 주먹 한 개는 피하지만 열 개는 피하기 어렵다고. 그래서 나는 눈 딱 감고, 미친 짓을 했다. 옆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뒤로 텀블링이 아니라, 옆으로 텀블링(Tumbling : 공중제비) ! 다행스럽게도 여동생을 돌보는 악마가 이번에도 나에게 미소를 보낸 건지, 나는 난간을 잡고 또 한 번의 공중제비를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할 것이란 것을 그 내장들은 예상하지 못한 듯, 내가 있던 공간을 뚫고 지나갔다. 다시 말해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나는 조금 안심하려고 했지만. "카아악." 아. 한 마리가 남았지. 나는 돌격해오는 좀비 본체를 보며, 한숨부터 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내 인생은 이 모양이란 말인가. 여동생이 옆에 없어서 이제야 좀 기를 펴고 살 수 있겠다 싶더니, 당장 이런 꼴이냐. 결국 나에게는 언제나 악운만이 가득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거냐. 하지만 불평은 그걸로 족했다. 지금 당장은 이 솟구치는 분노를. 퍽. 풀어야지. 나는 돌진해오는 좀비의 머리를 걷어찼다. 녀석은 잠시 비틀거리는 듯 했지만, 당연히 다시 손을 내밀더니 난간을 내리쳤다. 쾅. 나는 옆으로 뛰었지만, 녀석은 다시 손을 휘저었다. 이런. 이런. 잡히고 싶지 않은데. 나는 그만 난간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런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내려가려고 하면 그쪽으로 달려오고, 옆으로 피하면 또 따라오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따라오지 말라고 외쳐봐야, 녀석이 그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난 이 상태로 오래 버틸 수가 없다고.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아웃이 되고 말 것이다. 축구장에서라면 공을 빼앗기는 걸로 끝나지만, 물론 그건 공격수로서 매우 뼈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그 경우에는 만회할 기회라도 주어진다. 여기서 그랬다가는. '저승으로 직행이지.' 바로 조금 전에 내가 저승으로 보낸 내장 조각들이, 열렬히 환영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다시금 여동생의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그것은. 탕. 총을 쏜 게 아니다. 그런 살상병기는 나한테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여동생이라면 택할 행동은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기분 나쁘지만." 사람 머리를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를 밟고 넘어가는 거지만. 찐득찐득한 느낌이 신발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상당히 구역질나는 행동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병원 옥상에서 추락해서, 좀비들에게 산 채로 먹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런 짓을 했다. 시신의 머리를 훼손시킨 것이다. 그래서. 쿵. 그 덕에 나는 옥상에 무사히 안착했다. 난데없이 머리를 밟힌 좀비가 급히 뒤로 돌아서서 나를 노렸지만,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조금 전에 살아있는 내장을 물리친 경험이, 나를 격려해준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을 수호하는 악마는 결코 호의만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탁. 이거 뭐냐. 내 등뒤를 누군가가 잡았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카악."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등뒤에 어느새 다가선 좀비가, 내 어깨를 움켜잡고는 그대로 입을 들이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좀비라면 분명히 내 앞에 있는데? 즉시 내 머리에 최악의 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설마, 아래층이 이미?' 경찰들은 이미 전멸 당한 건가? 그래서 아래층으로 좀비들이 난입하고, 여기까지 올라오기 시작한 건가? 순간적으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 그리고 좀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내 목덜미에 스며들면서. "!" 이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본인은 좀비에게 깨물릴 의도도 없고, 그들처럼 식인괴물이 될 의향도 전혀 없다. 하지만 원래 세상사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법. 미안해. 진희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연미 누나. 진희를 책임지지 못해서. 하지만 문희와 풍남이에게는 별로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죽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려고 눈동자를 굴려봤더니. 찰칵. 찰칵. 문희, 너....... 이 판에도 사진기냐. 이 판에도 카메라냐. 이 판에도 촬영이냐 ! 어디에 카메라를 숨겼는지는 모르지만, 참 대단한 녀석이다. 그러나 그럴 능력이 있다면, 날 좀 도와줄 것이지 ! 내가 잡아먹히게 생겼는데도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사진만 찍고 있는 거냐? 풍남이의 경우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넘어간다지만, 소꿉친구라는 게 저게 뭐냐. 하긴 여동생부터가 그 모양인걸.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죽음만을 기다렸다. "카악." 좀비가 내 머리 위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눈앞의 좀비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좀비들은 서로를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런데 이 전개는. "뭐야?" 이상하다? 분명히 나는 지금 좀비에게 붙들려서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이었는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하지만 내 허리는 분명히 굽혀져 있었다. 내 팔은 앞으로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목덜미에는 아무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 혹시 몰라서 살살 만져봐도, 파이거나 축축한 느낌은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내가 지금....." 저 녀석을 던진 거야? 좀비들이 서로를 밀치면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당황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하지만 좀비들은 혼란스런 내 심정 따위는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다시금 으르렁거리며 일어섰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직도 덜덜 떨기만 하는 저 피난민들이 날 도왔을 리는 없고. 괘씸하게도 사진만 찍는 문희가 했을 리도 없으며, 풍남이는 더더욱 아니고, 하물며 연미 누나가 그랬을 리는........ '!' 내 눈앞에 순간적으로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금 내가 한 것은 분명히 업어치기였고, 그 깔끔한 동작은 여동생의 행각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그럼 혹시. 설마. 이것은. 도무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론이 떨어졌다. "그 녀석한테 너무 당해서, 나도 모르게 익혀버린 거야?" 하긴 말은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 녀석한테 하루 이틀 맞고 살았나. 그동안 나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여동생에게 당했고, 그 중에는 몇 차례나 반복된 방법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식칼 휘두르기, 프라이팬 휘두르기, 업어치기, 여동생 자이언트 스윙, 여동생 킥, 여동생 펀치, 심지어는 여동생 파일 드라이버까지. "하긴 수 십 번은 당했으니." 아니, 수 백 번일지도 몰라. 어쨌든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타당하는 동안, 내 몸은 그 동작들을 모르는 사이에 익혀버린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군더더기가 없는 업어치기는 나올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런 수준의 격투기는 여동생이나 익히는 것이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인가." 왠지 비참해졌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결론이기도 했다. 여동생의 그 화려하신 격투기술을 조금이라도 익히고 있다면, 승산은 충분한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동생처럼 불량배 무리를 소탕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저 좀비 두 마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비 두 마리가 서서히 일어서는 걸 보며, 나는 자그마한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뭐 하는 거야?" 왜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아무도 날 돕지 않는 거지? 주위를 둘러봐도 모두들 떨기만 할 뿐, 일어서서 싸우는 인간은 없다. 하긴 그런 인간이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벌써 상황은 정리되었겠지. 나는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꾸짖고 싶었지만, 지금 그런 데 쓸 손가락이 없다. 그런데 손가락이라고 하니. "저 좀비, 손가락이 이상하네." 배에 구멍이 난 좀비와 같이 일어서는 좀비의 손가락이 이상했다. 손가락의 피부 일부가 벗겨져서, 뼈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목이 졸린 흔적도 있고, 작지만 뚜렷한 구멍도 하나 보였다. 뭐야. 그럼 저 사람은 아까. "내장한테 먹힌 사람이잖아." 갑자기 등이 서늘해졌다. 당장이라도 저 사람을 죽인 그 내장이 나에게 덤벼들 것 같았기에. 물론 그 내장은 지금도 저 좀비의 뱃속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내 목을 휘감으면 어쩌라고. 하지만 내장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이 밤이라고 해도,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것도 아닌데. "카악." 게다가 좀비 두 마리가, 다시금 기세를 올리며 나에게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알아서 피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벌벌 떠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다시금 옥상 가장자리로 뛰기 시작했다. 왜 거기냐고? 녀석들을 잡으려면 그쪽밖에 길이 없으니까. 게다가 옥상의 중앙에서 빙빙 돌다가는, 진희한테 녀석들이 몰려가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희는 어디로 간 거지? 내가 그녀의 모습을 찾기도 전에. "크아악." 일단 내 목숨부터 챙겨야겠군. 나는 옥상 가장자리에서, 어떻게 녀석들을 저승으로 보낼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생각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여동생의 주먹을 피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다. 그리고 마음은 결정되었다. 남은 것은 행동뿐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나에게 돌진해오는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 시체 주제에. "잘도 뛰네." 이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나는 이 도시의 네거리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때에 피난민을 수송할 헬리콥터가 와야 할 텐데, 이런 식이면 올지 안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그때까지 버티는 게 우선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두 시체를 옥상에서 쫓아내는 게 순서였다. 그렇다면. "각개격파 !" 축구에서도 두 명의 수비수를 동시에 제치는 것보다는, 한 명씩 제치는 게 더 쉽다. 그래서 나는 앞에 달리는 좀비부터 혼을 내주기로 했다. 오늘 내내 고생만 한 분풀이도 할 겸, 나는 그 녀석을 세게 걷어찼다. 물론 고인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며 살살 차는 짓거리는 하지도 않았다. 이럴 때 예의는. 퍽. 아주 세게 차는 것이다. 나는 UFO 슛을 연습할 때처럼, 여동생에게 혼신의 일격을 날릴 때처럼 혼을 담은 발차기를 날렸다. 발목이 걷어차인 녀석이 균형을 잃었고, 나는 잽싸게 한 방 더 걷어찼다. 이렇게 외치면서. "위장도 없는 주제에 !" 좀비가 그대로 쓰러졌다. 상당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뇌진탕이라도 일으켰을 것이지만, 시체에게 그런 건 없다. 아마 조금 있으면 다시 일어나겠지만, 나는 중요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이제 나에게 덤비는 시체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잠시뿐이지만. 좀비의 손이 나를 잡으려는 때에. "지금이다 !" 나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달려오는 상대의 힘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허리를 굽히며 그대로 녀석을 앞으로 날린다. 그런데 내가 과연 여동생처럼 무시무시한 업어치기를 할 수 있을까? 만약 여동생이 상대였다면 이런 내 의도는 바로 간파 당하고. "훗." 이런 여동생의 비웃음과 함께, 나는 허공을 날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대는 여동생이 아니라 좀비였고, 머리가 빈 좀비로서는 세밀한 격투기를 구사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부웅. 그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두 팔을 버둥거리면서. 그 팔이 난간에 부딪친다. 그 몸이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리고 손이 하필이면. "안 돼. 잡지 마 !" 탁. 애석하게도 그런 내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좀비는 으르렁거리며 남은 한 팔로 마저 난간을 잡으려고 했으나. 투투툭. 그의 손가락은 그럴 힘이 없었다. 아까 내장에게 먹힐 때, 근육과 피부를 뜯긴 손가락은 힘없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부러진 손가락과 함께, 좀비는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크아아아아." 그 순간 나를 바라보았던 그의 눈길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흐릿해진 눈동자에 담긴 오로지 하나의 감정이 그것이라니. 죽음의 순간까지 그런 꼴이라니. 나는 혀를 찼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이 도시에 일어난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 일은 끝난 게 아니었으니. 콰당. "이런 !"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은 것이다. 속이 빈 좀비는 내 발목을 붙잡고,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버티려고 했으나, 상대의 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당겨지자, 내 몸이 그에게 끌려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이건 그가 나를 끌어당긴 게 아니라. "다가오고 있잖아." 녀석은 허리가 이미 끊어져 있었고, 그래서 그 자신의 몸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힘으로 나를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아마 아까 쓰러졌을 때 허리뼈가 부러졌던 것일까? 내가 미처 대항하기도 전에, 그의 입이 벌어졌다. 이런. 이렇게 되면. 퍽. 뭔가가 좀비의 머리를 내리쳤다. 좀비는 내 발목을 바로 코앞에 두고는 그대로 허물어졌고, 그 틈에 나는 필사적으로 좀비의 손을 걷어찼다. 그의 손이 내 발목에서 떨어진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급히 일어나서, 좀비를 내리친 정의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희야." 이럴 수가. 그 누구도 좀비에게 대항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일어선 것이다. 저 사악한 괴물들에 맞서서,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나와 함께 싸워준 것이다. 그리고 나를 구해준 것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아마 국기 게양대로 생각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전설의 검으로 보였다. 흑. 정말 멋진 아가씨야. 내가 그녀를 좋아하길 잘했어. 하지만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좀비가 다시 일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매듭지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자식 !" 나는 좀비의 팔을 붙잡았다. 몸통에서 흘러내리는 찐득찐득한 액체를 잘 피하면서. 좀비가 내 손을 향해 입을 벌리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몸을 회전시키면서, 마치 원반이라도 던지는 것처럼 좀비를 빙빙 돌렸다. 자. 죽어라. "크우에에엑." 좀비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기괴한 비명을 내뱉는다. 그러나 나는 그를 동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 전에 죽을 뻔한 일이, 나를 모질게 만들었다. 나는. "지옥으로 꺼져 !" 그 외침과 함께, 좀비는 저 멀리 나락으로 던져졌다. 그의 마지막 비명이 하늘을 찌르듯 울려 퍼진다. 그 비명에 응답하듯 그의 잘려진 하반신이 서서히 일어섰지만. "죽여버리겠어." 발만 남은 녀석은 겁낼 게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사라진 십이지장인지 소장인지 모를 내장이 더 두려웠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기습을 해올지 모르므로. 그래. 너부터 정리하고 그 녀석을 찾아서 박살내주겠어. 내가 비틀거리며 걷는 인간의 하반신을 내던지려는 그때. 탕. 갑자기 내 가슴에 큰 충격이 가해지면서, 나는 서서히 쓰러졌다. 사람들의 기쁨의 환성이 들린다. 하지만 이건. '어째서?' 내게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저 멀리 떠 있는 별들이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4화 시체들의 새벽 (1) 붉은 세포들이 서서히 생명의 숨을 멈춘다. 생명의 샘이 얼어붙으면서 강이 말라붙는다. 온기가 사라지면서 힘이 흩어져 간다. 그리고 차가운 땅으로.......... "!" 나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누워있으니까 하늘을 바라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라봐서 뭐 하겠는가. 난 이미. 탕. 그 소리와 함께, 운명을 달리했거늘. 이제부터는 오라버니의 삶이 아니라 여동생의 삶만이 남은 것인가. 안 돼. 난 아직 진희와 그렇고 그런 짓도 못해봤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종칠 수는 없어.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이 날뛰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실제로 왼쪽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이, 내 죽음을 증명하고 있........ "에?" 죽은 사람이 무슨 통증이냐. 나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쾅. "아구구구구." 뭐야. 여동생의 습격인가. 나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어디선가 나타날 일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하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건 나뿐이 아니었으니. "아구구구구." 뭐야? 여동생이 아니잖아? 당장 이렇게 단정짓는 이유는, 여동생이라면 누군가에게 맞고 다닐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여동생과 불량배들의 결전을 눈앞에서 목격하지 않았다면, 조금. 아주 조금은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동생이 불량배들을 혼자 소탕하는 걸 다 본 지금에 와서는, '맞고 다니는 여동생'이라는 가정은 내 머리에서 멀리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녀는 다국적 기업의 회장님이 아닌가. 몰래 숨어서 그녀를 지키는 경호원들이 없을 리가 없는데,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겠는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여긴 베를린이 아니라고.' 그 녀석은 지금 베를린에 가 있고, 나는 독일의 최남단의 도시, 콘스탄츠라고 했던가? 아니면 그 부근의 도시라고 했던가? 긴가민가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위치와 그 녀석이 있는 위치가 너무나 차이가 나지 않는가. 물론 여동생이라면 그 개인용 비행기로 후다닥 여기로 올 수도 있지만,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나타나겠는가. 이곳의 상황은 보도도 안 되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지금 아프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일 테고, 그 사람은. "진희야." 그녀는 앞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니, 누가 그녀를 팼단 말인가. 나는 그런 짓을 할만한 사람이 누군지 주변을 흩어봤지만, 이상하다? 다들 거리가 너무 먼데? 그럼 누가 그런 짓을 했지? 고민하려는 나에게. "문구야.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떻게 해." 연미 누나?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분명히 아까 총에 가슴을 맞고 죽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그녀가 나하고 말을 하고 있지? 혹시 그녀도 죽은 건가? 결국 좀비들이 옥상에 올라와서? 그럼 내가 죽도록 싸운 건 다 헛고생? 크게 실망하는 나. 하지만 확인은 해야지. "설마 여기가, 저승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총을 맞고 나동그라졌는데, 멀쩡하다고 믿으면 그게 도둑놈 심보지. 그러나 연미 누나는. 좌아악. "아구구구구." 남의 볼은 왜 잡아당기는 겁니까. 그녀가 웃으면서, 계속 내 볼을 잡아당긴다. 늘어나겠어요. 그만 해요. 물론 그 말을 내가 할 수는 없다. 입을 쓸 수가 없으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는 전형적인 수법이야. 아프면 산 거고, 안 아프면 죽은 거지. 상당히 효험이 있는 전통적인 방법인데, 어때?" "T.T(아프잖아요)." 꼭 이 상황에서도 사람을 괴롭혀야 합니까. 어쩐지 진희고 연미 누나고 할 것 없이, 내 주위의 모든 여자들이 전부 여동생처럼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아니, 안 돼. 진희가 여동생처럼 되었다가는, 내 인생은 파멸이야 ! 그녀가 그러다가는. "진희 펀치 !" "진희 킥 !" "진희 자이언트 스윙 !" 차마 진희 파일 드라이버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본인은 18세 이하이기 때문이다. 그걸 나한테 쓸 경우, 약간의 므흣한........... 아.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아니지. 나는 분명히. "아까 총 맞았는데......" 내가 무슨 여동생도 아니고....... 아.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이 상황에선 도리가 없겠다. 총이란 말이다. 총. 총탄이 내 가슴에 날아와서 명중했는데, 어째서 내가 살아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내 얼굴에 나타나는 건 당연했다. 연미 누나가 말없이 웃으며, 옆에 서 있는 경찰을 바라본다. 그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사과하세요." 그가 고개를 숙인다. 나를 향해서. 그런데 저 사람, 어디서 본 얼굴인데? 곰곰 생각하던 내 기억에, 조금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나를 향해 총을 겨누던 사람이..... "야 ! 이 나쁜 X새끼야 !" 내 입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뭐? 과격하다고? 외국까지 가서 왠 욕이냐고? 내가 그런 소리를 안 할 수 있냐 ! 난 죽을 뻔했다고 !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한테 ! 물론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멍멍이 소리이고, 선전을 위한 간판에 불과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여기는 외국이라고 ! 좀비에 대항해 싸우는 용감한 외국인에게 날아온 보답이, 고작 총알이냐? 아. 물론 우리나라 경찰 중에도 국민을 위해 몸바쳐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건 안다. 문제는 그런 분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가 힘들다는 거지만. 방방 뛰는 나를 말리며 연미 누나가 한 말은. "그만 해. 아까 진희가 이 사람을 마구 팼으니까." "네?" 오늘 진희가 이미지를 많이 깨네. 아까는 막대기를 들고 좀비를 패더니, 이번에는 경찰을 구타했단 말인가. 하지만 저 경찰 덕분에 저승으로 이사갈 뻔한 나로서는, 그녀를 탓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희가 그랬다는 것은. "별로 안 때렸어요. 딱 한 대....." 어쨌든 때리긴 때렸구나. 진희가 부끄러워서 문희의 뒤로 숨어버리는 걸 보며, 나는 다시금 그녀를 좋아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말 의리 있고 착한 아가씨다. 어떤 못된 소꿉친구와는 천지차이고, 하물며 극악무도한 여동생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런데 가만있자. "전 어떻게 살아난 거지요?" 보통 총알을 가슴에, 그것도 왼쪽 가슴에 맞으면 죽지 않나? 연미 누나가 뭔가를 꺼낸다. 나에게 내밀어진 그 물건을 보고 내가 내뱉은 말은. "이건 미인이의 그 쓸모 없는 전기충격기 !" 아까의 싸움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그 물건이었다. 하긴 좀비한테 신경을 마비시키는 전기충격기가 먹힐 리가 없고, 여동생이 아무리 대단해도 좀비와 내가 마주칠 거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변명이야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번 상황에서는 짐만 되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일그러졌냐? 연미 누나는 말없이 전기충격기의 일부분을 가리켰고, 거기에는. "총알이네요?" 총알 하나가 전기충격기의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잠깐. 잠깐. 그렇다면. 설마, 설마, 설마아아아 ! 갑자기 무시무시한 상상이 들이닥쳤다. 차마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 그렇다면. "이 아저씨가 쏜 총알이 바로 거기에 박혀서, 네가 살아남은 거야. 만약 그게 없었다면, 넌 심장에 관통상을 입고 즉사했을 거라고 하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어. 미인이의 가호라고 해야 할까." '우아아악 !' 말도 안 돼. 만약 이게 신의 가호라면, 나는 신에게 무릎꿇고 감사했을 것이다. 악마의 가호라면,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악마에게 고맙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여동생의 가호로 살아남는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차마 비명을 지르거나 고함을 지를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런 것이. "죄송합니다. 옷에 피가 묻었기에, 좀비인 줄로 착각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패 죽일 수도 없고, 또 좀비로 오해받아 총에 맞는 건 싫다. 죽다 살아나는 건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이나 세 번째에도 그런 행운, 아니 이 경우는 불운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게 또 오리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나 낙관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어억." "크아악." "카아악." 같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눈물이 좔좔 흘러나온다. 여동생 덕분에 목숨이 붙어있다니, 서럽다. 원래는 고마워해야 하는 법이지만, 평소에 맞는 횟수를 생각해보면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 사건이 끝나고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그 녀석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좋든 싫든 그렇다. 눈물이 쏟아진다. '대기업 회장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주먹이 헤프면 쓰냐.' 하지만 그건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간 후에 걱정할 문제다. 일단 제쳐두고, 우선적인 문제는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동생에게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는 건, 살아나간 후에 해." 연미 누나가 이렇게 말해도 참아야 한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고쳐서 말해줘도, 저 사람은 듣지 않을 테니까. 부글부글.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일단 여동생 문제는 저기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고, 나는 그 문제를 경찰에게 질문했다. 총 맞아 죽을 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라도 그걸 들을 권리가 있었다. 멍하니 있다가 아까처럼 죽느니 사느니 하는 문제를 놓고 좀비와 한 판 벌이기는 싫으니까. 최소한 알고 나서 싸우든지 도망치든지 하자고. 경찰도 그 일이 미안하기는 한지, 돌아가는 상황을 털어놓았다. "안 좋습니다. 감염자들이 예상보다 너무 많아서, 현재는 2층의 계단을 폭파해서 진입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벽으로 기어올라오는 녀석들이 꽤 있는 데다가, 화염방사기나 소이탄이 특히 부족합니다. 총이야 많지만, 그걸로는 쉽게 끝장낼 수가 없으니까요. 뭐 기어올라오는 녀석들은 모두 제풀에 추락하고 있습니다만." "하긴 박살낸다고 죽는 녀석들이 아니니." 그건 바로 조금 전에 나 자신이 경험한 일이었다. 분명히 허리가 끊어진 녀석이, 다시 움직이면서 나를 먹으려고 달려들던 그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사람이 죽으면 절대로 화장을 권유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냥 매장은 못 시킬 거야.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반대하든 말든. 그런데. "헬리콥터는 언제 온대요?" 그 말에는 모든 피난민이 귀를 기울였다. 이 사태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 그거 아닌가. 하지만 그의 대답은 상당히 실망스런 것이었으니. "기체 고장으로 인해, 한 시간 후에 오기로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피난민들의 실망이 극에 달하는 게 보인다. 아무래도 큰일나겠는걸. 경찰 아저씨가 그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등뒤에서 어떤 남자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야.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여기서 시체들한테 잡혀서 산채로 그 놈들 식사거리가 되란 말이야? 이 새끼가." 그런데 저 사람, 경찰 아저씨를 잡고 흔드는 걸 보니 힘이 상당한 것 같은데, 아까 내가 좀비들하고 싸울 때는 어디에 계셨더라? 분명히 본 기억이 없다. 적어도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발차기를 하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걸 본 기억은 전혀 없었다. 연약한 진희도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말이다. 갑자기 여동생의 말투를 흉내내고 싶어진다. 그것은. "그만 그 손 놔요." 건방진 말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이 사람의 팔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힘이 있으면 내가 고생할 때 도와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애꿎은 경찰 아저씨를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거대한 주먹을 들어. "뭐야. 이 꼬마 새끼가. 너 맞을래?" 아이고, 박력도 있으셔라. 하지만 이왕 있는 박력을, 아까 발휘했으면 좀 좋았을까. 아까 고생했던 일을 생각하니, 이 사람이 은근히 얄밉다. 그런 마음이 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허약한 몸으로 날뛰지 마요." 그 말을 연미 누나가 어떻게 번역해서 전달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상대의 반응을 보니 상당히 진실에 가깝게 전하긴 한 모양이다. 그가 화를 내며 방방 뛰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그 덩치로 날뛰면 바닥이 꺼지는 게 아닐까요? 그 자신도 그걸 걱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뛰어다니는 걸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 꼬마 새끼가." 나에게 주먹을 들이댄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내 주위의 사람 중에 누구 하나도, 그를 말리지 않는다. 이런 의리 없는 인간들. 결국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전형적인 여동생의 수법을 따라하는 걸로 말이다. 그것은. 싹. 옆으로 피한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꼴이 된 그 남자가 다시 주먹을 휘두른다. 또 피한다. 약이 올랐는지 이번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구 휘두르는 그 남자. 살짝 피해준다. 참 느리기도 하셔라. 몇 번 주먹을 휘두르다가 지쳤는지, 이번에는 발길질을 한다. 옆으로 폴짝 뛰면서 다리를 걸어준다. 그 결과. 우당탕. 아주 쉬웠다. 너무 쉬웠다. 무지무지 쉬웠다. 뭐 이렇게 싱거운 사람이 다 있나. 솔직히 말해서. "근육이 아깝다." 겉보기에는 근육으로 똘똘 뭉쳤는데, 왜 이리도 약하나. 물론 이건 이 남자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평소에 상대한 그 인간이 문제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강해야지, 어떻게 매일 상대할 때마다. 퍽퍽퍽퍽퍽퍽. 언제나 이렇게 마무리를 하느냔 말이다. 그런 인간의 동작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 남자는 너무나 느리고, 둔하고, 균형감각이 없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 가지고 놀았다고 해서, 내가 강한 것도 아니다. 정말 강했다면 나는 아까 좀비 정도는. '순식간에 날려버렸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가 왜 아까 나를 돕지 못했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런 수준이라면, 안 돕는 게 차라리 돕는 거다. 이건 방해물이나 짐 덩어리 수준이지, 아군으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야 ! 너희들은 왜 안 돕는 거야?" 아까 좀비를 상대할 때는 겁이 나서 그랬다 치자. 그런데 지금은 왜 멍하니 있는 거냐? 내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냐? 하지만 문희의 대답은. "미인이한테 많이 배운 모양이네. 굳이 도울 필요조차 없겠어." 쿵. 왜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냐. 내가 그 여동생의 신묘한 동작의 그림자라도 쫓아갈 수준이 되었다는 거냐. 그러나 풍남이 녀석도 거기에 가세했으니. "넌 좀비도 물리쳤잖아. 머리 빈 근육덩어리 하나 정도야 수월하겠지." 그래. 이 인간이야 그렇다 치자. 그럼 그래도 건설적이라 할 수 있는 연미 누나는? 그러나 그녀가 날 놀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라는 사실을 잠시 까먹은 대가는. "재미있잖아?" 이 사람이. 저 거구의 서양인을 내가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그게 아니면 경찰 아저씨를 봐서 그러시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그래도 양심이 있고 착하고 [예쁜] 진희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와. 문구야. 굉장해." 그냥 넘어가자. 뭐 저렇게 연약한 소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고. 결국 나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친구들에게 화를 내는 대신, 엎어진 남자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느라 좀 지루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는 일어났다. 하긴 밤에 병원 옥상에 엎어져 있는 것도 좀 그럴 테니까. 그런데. 부드득. 부드득. 이는 그만 갈 수 없을까요? 하지만 내 말을 들어줄 사람 같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우아악 !" 소리까지 질렀다. 주위 피난민들이 움찔한다. 아마 좀비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안다. 단지 그의 머리가 좀 비어 있어서 문제일 뿐이지. 그래서 나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허약한 몸으로 설치지 마세요." 뭐? 그게 더 폭력적이라고? 난 주먹도 안 휘둘렀는데? 뭐? 언어 폭력이 더 심각한 거라고? 아까 좀비들이 휘두른 폭력에 비하면, 과연 언어 폭력이 그렇게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말에 대한 가장 심한 비판은. "문구야. 너 지금, 미인이 같아." 연미 누나. 그거 칭찬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욕입니까? 참으로 사람을 기운 빠지게 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친절하게도, 독일어로 통역까지 해서 그 남자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사람이 도대체 !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설득된 그 남자는. "우아악 !" 통역을 어떻게 했는지는, 차마 묻고 싶지가 않았다. 아이고. 골이야. 결국 나는 여동생의 기술 하나를 차용해서 쓰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퍽. 그 남자는 단 한 방에 기절했다. 거구의 사내가 쓰러지니까, 바닥이 울린다. 안 무너진 게 다행일 정도로. 여기가 우리나라였다면 아마 이 병원은 당장 허물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역시 건물이 독일제라서 튼튼한가 보다. 그런데 이거, 굉장히 강력하네. 내가 지금 쓴 것은 바로. "평소에 그 녀석이 내 머리를 치던 대로 해봤는데." 나는 갑자기 소름이 확 끼쳤다. 이 녀석, 언제나 나를 이렇게 때렸단 말인가. 하지만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이번만은 여동생이 아니었다. 나는 주책 맞은 누나를 바라보았지만. "아냐. 난 진지하게 설득했다고." 진짜냐고 묻고 싶었다. 도대체 저 덜렁이 누나는 진지함과는 거리가 너무 머니, 믿어줄 수가 있어야지. 예시당초 이 판에도 촐랑거리는 저 태도부터가, 진희의 친언니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어떻게 진희하고 자매간이면서, 그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말을 꺼낸 대가는 너무나 컸으니. "음. 그럼 너하고 미인이는 친남매, 그것도 쌍둥이니까 상당히 닮았겠네?" 한 방에 당해버렸다. 그 말에 대꾸할 말이 없으니까. 하긴 없는 게 정상이지만. 하지만 난동의 대가는 엉뚱한 곳에서 왔으니. "이봐. 헤르만. 위에 무슨 일 있어?" 헤르만이라고 불린 경찰아저씨가, 자신의 무전기를 꺼내들고 뭐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 판에도 통역을 맡아 수고하는 연미 누나에게는 감사하고 싶지만, 그 바람 불면 치마가 날려갈 정도의 가벼운 태도는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지금은 일단 통역이 하나 있어야 하니까, 넘어가겠지만. "아. 괜찮아. 피난민들 사이에 가벼운 말싸움이 있어서." 그게 말싸움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은 편히 쉬고 싶다고. 구조 헬기가 올 때까지. 어차피 더 할 일도 없는데. 그런데 그런 내 희망은 오늘도 이뤄지지 않을 예정이었으니, 무전기에서 갑자기. "아아아악." "무슨 일이야? 하인리히." 헤르만 아저씨가 자신의 유탄발사기를 집어들고, 사격자세를 취했다. 여차하면 아래층으로 달려갈 기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준비동작은 곧 보답을 받았으니. "살려줘. 헤르만. 살려줘." 설마. 나와 헤르만이 옥상 출입문으로 달려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아악. 으아악." 우리가 바로 아래층인 9층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은 목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남자였다. 그의 총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그의 눈동자는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허공을 부여잡는 그의 오른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리고 그의 목은. "취이익." 저것은 ! 아까 사람 하나를 목을 졸라 죽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 시체 내장 ! 그게 어디로 튀었나 싶었는데, 여기로 와 있었나. 나는 가장 먼저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 남자가 아직 죽지 않았고, 저 내장을 놓친 것도 나니까. 물론 옥상의 모든 사람의 안전을 내가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므로. 하지만 나보다는. "하인리히 !" 헤르만이 먼저 뛰어나갔다. 그는 사람의 목을 조르는 내장을 잡고, 그대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동료가 목을 조르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내장은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빨이 없는 내장에게 그건 버거웠고, 결국 헤르만 아저씨는 내장을 풀어냈다. 그러나 내장은 다시금. "쉬이익." 이번에는 헤르만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이미 사람의 손에 잡힌 내장이 발버둥친다고 해봐야, 힘으로는 건장한 남자의 두 손을 당할 수가 없었다. 헤르만은 내장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유탄발사기를 꺼냈다. 그대로 한 방 먹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장은 생명의 위기를 느꼈는지, 잽싸게 아래층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탁. 어딜 도망가. 그 내장은 내 발에 밟혔다. 널 그렇게 쉽게 놔줄 것 같으냐. 헤르만은 유탄발사기를 꿈틀거리는 내장에게 겨누고, 나에게 뭐라고 외쳤다. 연미 누나가 그 말을 번역해준다. 간단히 정리하면. "내가 휘파람을 불면 발을 치워. 한 방 먹일 테니까." 그런데 잠깐. 연미 누나가 여기는 왜 내려와 있는 겁니까? 아니, 풍남이하고 문희, 그리고 진희까지 ! 나는 내 친구들의 무모함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다. 하지만 연미 누나의 대답은. "통역할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뭐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불평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내 발 아래에, 좀비 내장이 하나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얌전히 경찰 아저씨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실눈으로 보니, 그 하인리히라는 사람은 무사한 모양이다. 다만 상처가 있다면, 문제는 다르지만. "준비 다 되었다고 하세요." 나는 연미 누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나는 헤르만의 휘파람을 기다렸다. 자. 그럼 타이밍 맞게 부탁해요.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피한다면, 나는 좀비 내장과 함께 사이좋게 숯 덩이가 될 지도 모른다. 그 긴박함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동시에 냉정해지게 했다. 시키는 대로 잘하면 다치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고. 퍽. 나는 갑작스런 기습에 나가떨어졌다. 뭐, 뭐야? 좀비의 기습인가? 급히 중심을 잡고 일어나려는 내 눈에 보인 것은. "이 새끼. 어딜 달아나? 어디 맛 좀 봐라." 아이고. 이 정신나간 인간이. 아까 나한테 한 대 맞고 기절했던 그 작자가, 하필 이리로 따라온 것이다. 정말 미친 인간이다. 어째서 이런 자가 나한테 들러붙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 "내장이 달아났어." 이런. 어디로 도망갔단 말인가. 우리 모두는 새파랗게 질려서 얼어붙었다. 어디선가 튀어나올 내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신나게 패 주지. 요 노란 원숭이." 아이고. 사태의 경중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보면, 연미 누나보다도 한층 심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최소한 진지해야 할 때는 진지한데, 이 남자는 아무 것도 없다. 역시 머리가 빈 게 분명하다. 나는 그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퍽. 그의 거대한 주먹이 내 배를 강타했다. 엄청난 고통이 내 배를 찢어발겼다. 허물어지는 나에게 그가 다시금 손을 뻗는다. 경찰 아저씨가 뭐라고 외치지만, 그는 까딱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쉬이익." 어디선가 습격해올, 그 좀비 내장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흥. 그런 시체 쪼가리가 뭐가 무섭다고. 너처럼 허약한 놈이나 그렇지, 난 달라."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아니, 그렇게 용기 있고 튼튼하신 분께서, 조금 전에 내가 좀비들과 싸울 때는 그렇게 깜쪽같이 자취를 감추셨나? 온갖 비아냥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냥 약소하게 한 마디만 한다. "기억력이 완전히 일본 총리 수준이네요." 그 사람들은 원래 과거의 악행에 대해 사과하고서, 잠시 후면 그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야스쿠니 신사로 가서, 다시 이웃나라를 침략하겠다고 맹세한다. 언제나 그렇다. 매일 그렇다.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아시아의 평화를 빌러 거기 갔다고 한다. 웃기지도 않아. 거기에 '모셔진' 작자들이 대체 평화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냐? 살인이나 방화나 약탈이나 강간이나 생체실험하고는 관계가 아주 많지만.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우리 일행은 일제히. "문구야. 그건 너무 심해." "야. 너무 지나친 욕은 하지 마." "너, 아무리 한 대 맞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심한 욕을 하니?" "........." 아니. 이 사람들이. 조금 전에 이 인간의 행각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하시나. 솔직히 이런 자는 그런 욕을 먹어도 싸다는.....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 지나친 욕이라고." "국회의원 같다는 말보다 더 심하다. 얘." "인권 모독으로 신문에 낼까?" ".........." 물론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기는 하지만, 억울하게 맞은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사람이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으니, 내가 얼마나 심한 욕을 했는지도 모를 테고. 그러나 여기에는 연미 누나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으니. "........번역하지 마요." 우리한테 독일어를 번역해주는 건 좋다. 하지만 우리말을 독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는가?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아무리 통역 담당이라지만, 쓸데없는 데에까지 힘을 들이고 있다. 그 말을 들은 경찰 아저씨들이 일제히. "그건 너무하군요." "우리 독일을 일본과 비교하다니, 기분 나쁩니다." 하긴 독일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일본보다는 훨씬 잘 하고 있으니까,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경찰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요. 연미 누나. 그는 예상대로 매우 화를 냈고,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아이고. 못살아. 언제 그 내장이 우리를 습격할지 모르는데, 이런 짓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잠시 멍하니 있었던 대가는 크게 돌아왔다. "아아아아악 !"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이다. "뭐야? 누구야? 누가 물린 거야?" 우리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몸에 이상한 게 붙었는지, 확인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아아아아악 !" 을 외치며 쓰러진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근육만 붙은 이 덜떨어진 독일 아저씨까지도. 그럼 이 소리는 어디서 들리는 거야? 귀를 쫑긋 세우고 사방을 흩어보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우........" "크으으으으......." "카아아아." 이런 소리밖에 없었다. 뭐 이 소리야 이제는 지겹게 듣는 소리지만, 사람의 비명은 어디로 간 거야? 혹시 좀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도 못 듣는 거 아냐? 나는 급히 옥상으로 달려가서 피난민들을 흩어보지만, 그들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다. 그럼 이쪽은 아니고. 이번에는 8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간다. 귀를 세운다. 어디. 이상한 소리가 안 들리나 보자. 하지만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9층에 경찰이 있었으니, 8층에도 몇 명은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나는 조심스럽게 8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하지만 차마 다 내려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뭔가 엄청나게 끔찍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든 계단을 내려가고 나면. '아닐 거야.' 설마. 경찰과 군인들은 2층 계단을 무너뜨리고 저지선을 쳤다고 하니까, 아마 별 일 없겠지. 내 망상일 거야. 그럼. 그럼. 그래도 군인들까지 포함된 공권력이, 우리나라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무력화될 리가 없겠지. 그럼. 그렇다고. 그렇다니까. 하지만 발을 내딛는 느낌은. '식인 괴물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야.' 그리고 8층의 입구에 머리를 쏙 내밀자마자. 쩝쩝. 으적으적. 경찰복을 입은 좀비 하나가, 쓰러진 군인의 가슴에서 뭔가 빨간 것을 꺼내고 있었다. 비록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건 아니지만, 옆에서 본 얼굴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로 9층으로 원대복귀하고 말았다. 더 이상 상황을 볼 것도 없으므로. 그런데 내가 왜 상대를 좀비라고 단정했느냐 하면. '얼굴 가죽이 없어.' 눈알과 머리뼈는 있지만, 그 뼈를 덮은 것은 근육이지, 피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붕대를 감든지 어쩌든지 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응급처치를 못하더라도 그렇게 태연하게 쪼그려 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선 분명히. "아야아아아. 아파." 이렇게 외치며 바닥을 굴러다녔을 테니까. 게다가 저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상황이 끝났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분명히.... 그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올라왔건만. "요 쥐새끼. 어딜 달아나." 누가 이 사람 좀 말려 줘. 그래서 나는 연미 누나에게 되도록 작은 소리로, 하지만 그녀에게만은 크게 들리도록 목을 쥐어짰다. 아래의 좀비들이 듣기 전에, 어떻게든 서둘러서 여기서 도망쳐야 하니까. 그러나 내 그런 노력은 처음부터 헛되기로 정해져 있었나 보다. 내 말을 들은 연미 누나는. "뭐? 아래층에 좀비가 있다고?" 소, 소리가 너무 커요 ! 모두가 그 말을 들은 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 '모두'에 좀비도 포함되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연미 누나의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우리 일행은 기겁했고 경찰들은 어리둥절했다. 특히 이 근육만 부자인 아저씨는. "이 새끼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이고. 연미 누나.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지 말고, 빨리 통역 좀 해요 !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재촉했지만, 연미 누나는 그저 굳어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못 살아. 사소한 소리는 잘도 통역하더니, 가장 중요한 지금 그렇게 돌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해요. 안 돼. 이러는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기회가 ! "크으." 늦었구나. 나는 계단 아래에서 걸어 올라오는 그림자를 목격했다. 이젠 시간이 없다. 나는 기를 모아서 크게 외쳤다. 이 경찰 아저씨들이 영화를 많이 봤다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외친 말은. "좀비다 !" "뭣이? 좀비라고?" 그 말을 들은 경찰 아저씨들의 표정은 당황 그 자체였다. 분명히 철통같은 경비를 자랑하고 있을 이 병원의 방어선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파 당한단 말인가. 그들은 '좀비'라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내 말을 믿은 건 아니었다. 그들이 한 일은 우선. "삐익." 무전기부터 빼든 것이었으니까. 그들은 아래층에 있는 자신들의 동료를 부르기 시작했다. "3층. 아무도 없어? 살아있으면 응답해 !"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헤르만은 단념하고, 다른 층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4층, 아무도 없어?" "5층?" "6층?" "7층?" 아무도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잠시 우리 모두에게 다가서는 침묵. 그가 이를 악물더니, 다시금 무전기를 켠다. 하지만 8층이라면, 이미 소용이 없는데요. 내가 본 바로는, 이미 그쪽 상황은 끝장이 나 버렸는데. 하지만 그런 내 판단을 의심할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헤르........만......." 누, 누구지? 아까 다 죽은 게 아니었던가? 헤르만은 무전기에 머리가 눌러 붙을 정도로 팔에 힘을 주었다. 겨우 살아있는 동료를 찾았으니, 그 심정이 어떨지 이해할 순 있었다. 그러나 나로선. '안 돼. 함정이야. 가면 안 돼.'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좀비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사라졌던 것이다. 그들은 이곳으로 올라오는 걸 포기하고, 멀리 사라져 가는 듯했다. 어째서? 혹시 이건 정말로? 그러나 헤르만은 이미 그런 걸 무시했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겨우 살아남은 동료를 버릴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어디 있어? 구하러 갈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 "8층........ 824호.........." "824호 병실? 곧 갈 테니까, 죽지 마." 내가 말릴 틈도 없었다. 헤르만은 급히 8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잠시 망설이던 하인리히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가기 전에 우선. "모두 옥상에 가 있어요.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하지만....." 진희야. 난 네 그 상냥한 마음씨를 좋아한단다. 하지만 지금만은 달아나 줘. 날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그렇게 외쳤다. 저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랑스런 소녀를 지옥으로, 아니 지옥이 될 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기에. "어서 가 줘. 날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는 지옥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물론 통역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외쳐봐야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헤르만과 하인리히, 두 사람은 자신들의 무기를 손에 쥐고, 주위를 노려볼 뿐이다. 일단 경찰로서 기본 자세는 되어 있으니 조금은 안심하지만, 솔직히 그런 무기로 좀비들에 대적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헤르만이야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솔직히 하인리히라는 경찰이 든 건 기껏해야 권총이 아닌가. 총에 맞는다고 죽을 녀석들이 아니니, 걱정이 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 내가 든 건 기껏해야. "맨 주먹 붉은 피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솔직히 괜히 내려왔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지만, 이제 와서 올라올 수도 없다. 나 혼자 이런 곳에서 돌아다니다가는, 금방 잡혀서 좀비들의 간식거리가 될 게 뻔하니까. 그나마 이런 위험한 곳에 진희를 데리고 오지 않아서 조금은 안심이 되지만. 그런데. "조금 전엔 여기에 시체가 있었는데?" 바닥에는 피가 흐른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이 시체는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모양이었다. 주위에는 살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거의 한 양동이 수준의 피가 쏟아져 있었다. 끔찍했다. 이젠 너무 봐서 익숙해진 풍경이지만. 그런데 이것은 좀비들이 시체를. '옮겼다는 뜻일까.' 잠시 주위를 둘러본 두 경관은, 즉시 824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자신들의 동료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에라 모르겠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여기다." 824호 병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째서 좀비들이 하나도 안 나타나는지는 상당히 이상하지만, 두 경찰관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아니, 그걸 알았다고 해도 그들은 여기 달려올 것이다. 동료가 위험하니까. 죽어가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 동료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사실. '괜히 따라왔어.' 하지만 죽으러 가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힘도 없는 주제에 이런 쓸데없는 정의감을 품다니, 나는 바보다. 만약 여동생이 이런 마음을 품었다면 인류 평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겠지만. '그 녀석은 그걸 실현할 돈과 권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난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 일반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만약 내가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뽑히면 조금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시일이 좀 지나야 할 것이다. 어쨌든 ! 쾅. 헤르만이 824호 병실의 문을 걷어차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을 지웠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비겁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 병실 안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날 것이다. 그 말은 좀비들에게 이미 그 경찰관이 먹혔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이 경찰 아저씨들이 내 뒤를 따라오느냐는, 그들의 발에 달린 문제다. 사실 그들이 아무리 동료애로 가득하더라도, 탄약도 달랑달랑한 지금 상황에 어떻게 좀비들을 모두 상대하겠는가. 문이 열리지 않자 헤르만은 한 번 더 문을 걷어찼고, 드디어. 쾅.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바짝 쫄아서 다리를 앞으로 놓았다, 뒤로 놓았다 하고 있었으나, 안에서는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지만, 이렇게 되면 그런 건 불가능하다. 하다 못해 좀비 내장이라도 나타났으면 도망갈 이유가 되겠지만, 결국 나는 그들과 함께 824호로 들어가야 했다. 아니,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경계를 서니까 둘이서 들어가는 건가. 하지만 이 분위기는 꼭. '시체 안치소 같아.' 보나마나 안에는 시체가 가득 쌓여 있겠지. 아까 병실이 없어서 나와 진희가 그 꼴을 당한 걸 생각하면, 멀쩡한 병실을 비워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고 걸어간다. 병실이니까 보나마나 수많은 침대가 있을 것이고, 피로 물든 시트가 바닥마다 가득 깔려 있을.... "어?" 다 어디 갔냐?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 있던가, 아니면 희생자의 가족들이 있었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좀비들이 묶인 채로 발버둥치고 있다면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완전히 병실 전체가 텅텅 비었던 것이다. 뭔가. 이 상황은. '물어볼 수도 없고.' 경찰 아저씨들이라면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좀 전에 좀비들을 몽땅 잡아서 태워버렸다던가, 그게 아니면 위쪽 병실은 안전을 위해 비워놨다던가. 그러나 말이 통해야 물어보든지 하지. 결국 나는 눈치로 때려맞출 수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당황하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경찰이 정리한 건가? 하긴 옥상에 있는 피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기에 좀비들을 가두어두지는 않았겠지. 사실 그 녀석들을 상대로 한다면 소각처리를 하는 게 가장 안전하니까. 그러나 너무 조용하니까 더 찜찜하다. 언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 갑갑한 공기. '정말 싫어.' 나도 모르게 의자 하나를 잡는다. 최소한 무기라도 있어야 조금은 안심할 게 아닌가. 헤르만이 의자 끌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락커를 잡고. 쾅. 그 문을 열어 젖혔다. 나는 곧 튀어나올 좀비를 예상하고 의자부터 휘두를 준비를 했으나. "휴우." 거기서 나온 건 좀비가 아니라, 피투성이이긴 했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헤르만이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 사람은 이미 기력이 없는지 그대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헤르만이 유탄발사기를 손에서 놓고, 그의 상반신을 받쳐준다. 그건 훌륭한 동료애이긴 했지만, 나로서는 소름이 팍 끼치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무기를 놓다니, 당신 제정신입니까?' 저 남자가 갑자기 좀비로 변해서 달려들면 어쩌려고. 만약 그 유탄발사기에 멜빵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어깨에 매달려 있어서 다행이지. "에르빈....." "으.... 헤르만....." 그는 뭐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말하는 대목만 알아들었을 뿐.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헤르만이 고개를 숙인다.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하다. 하지만 어차피 조금 더 일찍 왔더라도 그를 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몸은 여기 저기가 물어 뜯겼으므로. 그런데. '이상하다?' 그를 이렇게 만든 좀비는 어디에 있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그 순간에. "카아."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에르빈이라는 이름의 그 경관은, 갑자기 입을 벌려 헤르만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물려죽고 10초도 되지 않아서 좀비가 되다니? 그러나 내 행동은 내 생각보다 더 빨랐다. 내가 한 짓은. 쾅. 의자로 그 에르빈이라는 사람, 아니 좀비를 후려갈긴 것이었으니까. 느닷없는 상황에 헤르만은 반응하지 못했고, 내 의자가 친구의, 아니 좀비의 머리를 쳐서 그를 뒤로 쓰러지게 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좀비는 친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좀비의 손은 마치, 갈고리처럼 친구의 팔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헤르만은 좀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같이 쓰러진 것이다. 이런. 큰일났다. 내가 미처 그 다음 행동을 하기도 전에. "카아." 우드득. 헤르만의 왼쪽 어깨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럴 수가. 이런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것도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그들이 여기 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헤르만의 비명이 처절하게 방을 울렸다. 놀란 하인리히가 안으로 달려왔으나. "카아." 이미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좀비의 머리를 걷어찼지만, 좀비는 헤르만의 어깨를 물고는 놔주지 않았다. 엄청난 피가 바닥을 메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좀비를 떼어내려고 해도, 좀비는 헤르만을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우드득. "아악 !" 헤르만의 비명이 들리며, 그의 목이 좀비에게 물어 뜯겼다. 그가 서서히 기력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으. 끝장이다. 하인리히가 이성을 잃고. "아아아아아 !" 탕. 탕. 총성이 방안을 울렸다. 두 발의 총탄이 좀비의 머리로 빨려 들어가자, 좀비는 헤르만의 목을 물어뜯은 채 그대로 목이 뒤로 젖혀졌다. 헤르만의 살점을 입에 문 채로. 하지만 좀비는 다시금 머리를 앞으로 숙이더니. "카아." 우드득. 또다시 헤르만의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좀비의 기분 같은 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는 분명히 사람을 잡아먹는데 대해 기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일을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 좀비는 과거 자신의 동료였던 사람의 살점을 마구 뜯어내어 삼키기에 바빴다. 더 이상은 구역질나서 볼 수가 없다. 쾅. 나는 그의 머리를 의자로 내리찍었다. 동료애를 이용해서 사람을 잡아먹은 저 좀비의 썩어빠진 마음가짐을 보니, 이렇게 할 수밖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비는 다시 머리를 뒤로 젖히며 나자빠졌지만, 그뿐이었다. 녀석은 다시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망할 자식.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제기랄." 나는 쓰러진 헤르만의 어깨에 걸린, 유탄발사기를 잡아챘다. 그에게는 이미 이것이 필요없게 되었지만, 나에겐 다르니까. 나와 이 경찰 아저씨, 그리고 우리 일행 전부가 살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했다. 좀비를 죽일 수 있는 무기가. 그러니까. "아저씨. 늦었어요. 빨리 가요 !" 내 말을 알아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는 하인리히의 팔을 잡자마자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 이유가 만약 있다면, 그건 분명히 진희 때문일 것이다. 내가 패닉 상태에 빠져봤자, 결국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니까. 그것은 조금 전, 좀비들과 싸웠을 때 스스로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인간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도, 슬픔도, 공포도 모두 내던져버린 것이니까. 그러나. '살아야 해.' 그 명제가 모든 감정을 억누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진희의 목이 물어뜯기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방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7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크으으으." 좀비들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지?' 나 자신의 사격솜씨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오른손에 든 유탄발사기를 들고, 당장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스럽게도 안전장치니 뭐니 하는 게 안 걸린 덕분에, 제대로 유탄 한 발이 튀어나가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쾅. 계단으로 유탄이 날아가기는 했는데, 문제는 좀비에게 맞은 게 아니라, 좀비의 바로 옆, 벽에 명중해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물론 군대에도 아직 안 간 내가, 이런 무기를 제대로 다룬다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다. 여동생이라면 아마 저 좀비 대열에 정확한 일격을 선사하겠지만, 난 아니라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한 발만 나가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유탄발사기는 단발식이 아니라 리볼버식 탄창이 달려있는 6연발의 큼지막한 것이었고, 그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나에게 예비 탄창 따위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못 맞췄다가는 큰일이다. 나는 신중하게 다시 적을 겨누려고 했지만. "에?" 벽에 명중한 유탄이 터지면서 불길을 뿜자, 좀비들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것이다. 문제는 그게 너무 빨랐다는 것이고, 그 덕인지 좀비들은 뒤로 중심이 쏠리면서. 쿵쾅. 우당탕. 콰당. 와르르 무너졌다. 직접 맞춘 건 아니지만, 시간은 벌게 된 셈이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꼴이 되기는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미소를 지을 여유도 없이, 나는 하인리히와 같이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등뒤가 서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은 아주 잘한 짓이었으니. "카아악." 헤르만과 에르빈이라는 두 경찰의 시체가, 824호 밖으로 나와 우리를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다. 언제 좀비들이 다시 계단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판국이니까. 게다가 저 에르빈이란 사람을 죽인 좀비도 어디 있는지 모르고....... 콰당. "Oh, shit(젠장. 빌어먹을)." 한글이 아니라 영어를 애용하는 한심한 한국인이 되고 말았지만, 적어도 심정만은 그랬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8층의 병실 문이 여기저기서 열리면서, 좀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녀석들이 감히. "죽은 놈들이 무슨 매복이야 !" 우리는 울고 싶었지만, 그냥 달려갔다. 다른 수가 없으니까. 쿵쾅. 쿵쾅. 우리는 단숨에 9층으로 올라왔고, 다시 단숨에 10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달려갔다. 언제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붙인 것이다. 역시 독일제답게 듬직하게 생긴 철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래. 이 정도라면 버틸 수 있을 거야. '구조 헬기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그러면 된다. 이 문만 닫고 더 이상 좀비들이 전진하지 못하게만 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우리를 물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린 사람이, 옥상에도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쾅.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문제는, 우리는 아직 옥상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재빨리 앞날을 상상한 나와 하인리히는. 쾅. 쾅. "문 열어. 문 열어 !" "이하동문(한글 해석)." 나는 독일어를 모르니 하인리히가 뭐라고 외쳤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밖에는 외칠 말이 없으니 내 해석은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해석의 정확성 여부를 따질 때가 아니지. 누군가가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면, 이런 걸 따질 능력은 내게서 떠나가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카아악." 나도 이렇게 된다는 뜻이다. 이건 매우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가 만약. "크아악." 이런 상태라면, 나는 절대로 진희와 함께 잘 수도 없고, 뽀뽀할 수도 없고, 키스할 수도 없으며, 당연히 둘이서 한 마음이 될 수도 없지 않은가 ! 이런 불합리한 미래가 나한테 닥쳐오다니, 그것도 현실 바로 코앞까지 ! 나는 당연히 미친 듯이 문을 두들겼으나, 야속하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런 나쁜 자식들. 자기들만 살자고 우릴 헌신짝처럼 버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쾅. 쾅. 이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소리도 못 듣는다면, 저 밖의 피난민들은 모조리 귀머거리가 분명했다. 그러니 이건 분명히 고의로 이러는 거다. 전쟁 상황에서의 인간성 파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이해가 되다니. "이런 거 이해하기 싫어 !" 제발 누군가가 이타적인 행동을 해서, 우리가 살아날 가능성을 높여다오. 그런 우리의 기대는 다행스럽게도 보답 받았으니, 저 밖에는 피난민만 있는 게 아니라. "문구야. 곧 문 열어줄게." 진희도 있었기 때문이다. 흑. 역시 착한 아가씨답구나. 가장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소리없이 손을 내밀다니.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고, 하인리히도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그 미소에 전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곧이어 문 손잡이가 덜그럭거리고. 퍽. "꺄악 !" 에? 뭐야?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문이 열리고, 우리는 살아서 옥상에 나간 후 다시 문단속을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 꼴로 변하는 거야? 우리 둘이 멍하니 있는 사이에, 그 모든 상황의 설명이 밖에서 들려왔다. "블라블라블라블라." 무슨 뜻이냐? 독일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여기서 하인리히뿐인데, 그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안 좋은 일일 것이다. 더 이상 구체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진희는 과연?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한 마음. "진희야. 괜찮아?"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연미 누나로 생각되는 누군가가 거친 말투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독일어라서 못 알아듣겠다 ! 다만 하인리히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지는 걸 보면, 지금 상황이 결코 우리에게는 유리하지 않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해주는 소리가 들렸으니. 짝. "아악 !" 사람 넘어지는 소리가 또 들렸다. 이거 정말. 아무래도 연미 누나가 누군가에게 맞은 모양인데, 나로서는 도우러 갈 수도 없으니 갑갑할 뿐이다. 게다가 나로서는 더 답답한 게, 일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카아악." 내가 진짜로 이렇게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이 문을 부수고 나가려면 발로 차서는 안 되고, 더 강력한 무언가를 써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우리가 옥상에 나가는 것과 동시에. "카아악." 이렇게 외치는 녀석들이 옥상으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파멸이다. 겁으로 똘똘 뭉쳐진 피난민들에게 전투를 기대하는 건 무리이고,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피난민들이 상대해야 할 좀비의 숫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는 피난민들이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좀비군단에 합류할 게 뻔하고, 그러면 우리는 역시 죽음이 예정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문을 부수는 건 안 된다. 좀비들을 막아줄 바리케이트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면, 이 문은 멀쩡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래선." 나는 유탄발사기를 들어서 문을 부술 것인지를 고민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행에는 진희와 연미 누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녀석의 행동을 듣는 순간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 녀석은. "안 돼 ! 이러면 문구가 죽어 !" 풍남아. 네 말은 의리를 지키고 있지만, 네 행동은 전혀 아니잖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떠들 시간에 문이라도 열어줄 것이지. 이미 예상했지만,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김없이. 쿵. "아악 !" 그럼 그렇지.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결국 나는 문이 열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살 길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열리지도 않는 문짝만 쳐다보다가는, 나도 좀비 군단에 합류하고 말 것이므로. 하지만 세상에는 의외성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난데없이. 덜컥. 문이 열렸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냐? 진희가 드디어 문을 여는데 성공한 것인가? 그게 아니면 연미 누나가? 그것도 아니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풍남이가? 나는 그 위업을 달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크게 떴지만. "문희냐?" 사실 문을 열어준 것은, 거의 목숨을 건져준 은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좀비들과 대결할 때 사진만 찍던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러나 그런 원한은 나중에 풀어야 한다. 일단은 옥상으로 들어가야 할 게 아닌가. 하지만 나는 차마 먼저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딱딱딱딱딱딱딱. 딱따구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이를 맞부딪치는, 하인리히가 불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먼저 옥상에 밀어 넣었고,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잠시 짓다가 곧 튀어나갔다.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내가 옥상에 들어가려고 발을 디디는 순간. 퍽. 나는 거대한 주먹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건 또 뭐냐. 자세히 보니 아까 그 근육만 불어터지게 있던 인간의 소행이었다. 그는 문희의 멱살을 잡고, 나에게 뭐라고 외쳤다. 하지만 독일어니까 역시 모르겠다. 이 경우에는 모르는 게 약이겠지만. 그러더니 그는 문을. 쾅. "닫혀버렸네." 이, 이게 무슨 폭거야? 이 상황에서 왜 나만 밖에 놔두는 거야? 그나마 하인리히나 문희가 같이 버려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문희가 당장에 연미 누나에게 외친다. 아마 자기가 독일어를 모르니까, 번역을 부탁하는 거겠지. 그러나. "왜 문구를 내쫓는 거예요?" 이런 정당한 항의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 의해 무시당했다. 이유 붙이는 게 거의 일본 정치인들 수준이다. 뭐? 너무 지나친 발언이라고? 네가 한 번 당해 봐. 이런 어거지 논리를 듣는 내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데. "저 놈은 물렸어. 어깨에 피가 묻었잖아." 아까 내가 헤르만에게서 회수한 그 유탄발사기의 멜빵을 보고 한 소리가 분명했다. 그래. 그가 물려죽고, 멜빵에까지 피가 튀었으니 그런 착각을 하는 것도 말은 된다. 하지만 문제는, 하인리히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가 코웃음을 치는 거다. 이 자식이 혹시. "일부러?" 속 좁은 인간 같으니. 조금 전의 일이 그리도 분했냐. 어쩌다 저런 인간을 내가 만나 가지고. 정말 이번 여행 최악의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아니라고? 이제 죽음이 거의 90% 정도 확정되었는데, 그런 소리를 안 할 수 있냐? 나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문을 걷어찼다. 그러나. 쾅. "아구구구구." 내 발만 아팠다. 하긴 철문이니까 당연하기는 하지만, 이상한 데에 독일제다운 견고함을 발휘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다시 한 번 문을 걷어찼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약간 떨리기야 하지만, 그걸로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건 어림없는 소리다. 게다가 밖의 상황은. "아니에요. 문구는 안 물렸어요. 제발 문 좀 열어요." 애절한 진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아마 끌려가는 모양이다. 나는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려고 했지만, 그럴 수단이 없........ "하나 있잖아?"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문을 향해 유탄발사기를 겨냥했다. 물론 이런 짓을 하면 다 죽는다는 건 알지만, 진희가 고통스러워하는데도 아무 짓도 못한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망설임을 버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이..........." 하필이면 지금 탄환이 떨어지다니. 오늘은 완전히 망했구나. 나는 성질을 못 이겨 유탄발사기로 철문을 내리쳤다. 불꽃이 튀기는 했지만, 그걸로 문이 깨지거나 열리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아.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 이젠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나는 암담하다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문을 부술만한 물건은 나에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다른 병실에....." 혹시 경찰이 놓아둔 총이라든가, 탄창이라든가, 그런 게 9층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좀비가 없었으니, 지금 찾아보면 혹시 뭔가 나올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지만. 과연 내가 제 시간에 적당한 무기를 주워올 수 있을까? 나는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없어." "없어." "여기도 없어." 나는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이미 9층에서 좀비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10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몰려 있었다. 밖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그들은 철문을 두드리며 문을 부수려고 했지만, 거대한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게 오랫동안 버틸 수는 없을 거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실제로도 그럴 테고. "그나마 그쪽에 좀비들이 몰려서 다행이지만." 밖에 엄청난 수의 먹이가 몰려 있으니까, 대부분의 좀비는 그쪽을 보고 있는 거겠지. 문제는 그렇다고 나에게 좀비가 안 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죽어라 달리면서, 좀비들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들이 단순히 눈동자만 나에게 향했다면 좋겠지만. 아. 사실 그들은 시체니까, 눈동자를 돌릴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카아." "크아." "크으으." 야. 이 자식들아. 따라오지 마.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먹어야 산다는 듯이, 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빈 유탄발사기를 들고뛰면서, 신세한탄을 해야 했다. "어째서 무기가 없는 거야?" 물론 무기가 왜 없는지는 안다. 아마 경찰들이 다 가져갔겠지. 아래층에서 좀비들을 제지하기 위해 말이다. 문제는 일껏 가져가 놓고는. "크아악." "크르륵." "카아악." 이렇게 되어서야 아무 쓸모가 없지 않은가. 물론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찰이나 군인 차림의 좀비도 꽤 많이 보이지만, 차마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서 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저 좀비 군단 안으로 파고 들어가라고? 내가 여동생이냐? 그러니 나는 잉잉 울면서, 죽어라 살아날 길을 찾아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9층이 무한히 넓은 것은 아니니, 이래서는. '난 죽는 건가.' 아니, 안 돼. 나는 애써서 비관적인 생각을 지우고는, 다시금 살아날 길을 찾아 달렸다. 병실 문을 일일이 열어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무기는 고사하고, 몽둥이 하나도 없었다. 납득은 가지만 이해는 못할 이 상황에, 나는 하늘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누가 좀 구해줘요 !" 물론 그 말을 듣고 날아올 사람은 없다. 게다가 더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으니. "카아악."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이 상황에서 안 달리면 물려 죽는다고? 하지만 달리면 더 확실히 물려죽는 걸. 왜 그런고 하니. "크아악." 좀비들이 복도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9층 복도가 'ㅁ'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식의 사태는 언젠가 벌어질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빠르잖아 !" 내가 왜 벌써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해? 나는 마지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젠 무기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아무 방이라도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단지 1분, 1초라도 더 살고 싶다면. 하지만 어디로 들어가지? 나는 막다른 골목 두 군데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도망자의 심정이 되었다. 단지 1초 내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뒤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좀비들도, 앞에서 오는 좀비들도, 기다려주지는 않으니까. 결정. [연 문구군은 911호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911이라고 써진, 병실로 달려들어갔다. 그건 어쩌면, 미국의 긴급구조대 호출번호가 생각나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왜 하필 미국이냐. 사대주의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 방은. "문짝이 부서졌다고." 이왕 숨을 바에는, 문짝이라도 멀쩡한 방을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철컥. 911호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좀비들이 언제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불행히도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은 너무 좁았고, 그쪽으로 가지 못한 좀비들은 하필이면 911호를 향해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긴 9층에 남은 사람은 내가 유일하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다른 데로 가란 말이야 !" 이렇게 외치고 싶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다른 곳이 어디지? 진희가 있는 옥상? 와아아악 ! 결국 나는 신세 한탄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저런 끔찍한 시체들이 몰려간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결국 나는 상상을 집어치우고, 문을 보강하기로 했다. 아무리 좀비들이라도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들어오기는 힘들 것이고, 좀비 주제에 총을 쏘기도 어려울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 방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바로. "문이다 !" 일단은 문부터 어떻게 막든지 해야겠다. 아무리 독일제 문이라고 해도, 좀비들이 떼거리로 몰려드는 상황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주위에 뭐가 있는지를 살폈고, 마침 적당한 물건이 방에 있었다. 여기는 병실이니까, 당연히 침대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한 개야?" 물론 병실이 작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하나밖에 없다는 건 좀 섭섭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문도 한 개 밖에 없어서, 좀비들이 들어올 수 있는 출입구도 자연스럽게 한 군데로 좁혀졌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방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문이 하나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를 향해 달려가서는, 그 다리를 잡고 끌어당기려고 하는데. "!" 침대 위에 불룩 솟은 이것은 무엇이냐. 갑자기 내 머리에는 무시무시한 상상이 들이닥쳤다. 좀비에게 물린 후 헐떡거리며 최후를 기다리던 환자가, 드디어 수명을 다하고 좀비로 환골탈태하여 지금 이 아래에 도사리고 있다는, 그런 거 말이다. 과대망상이라고?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이 도시가 과대망상증 환자의 악몽에나 나올법한 곳인데? 물론 침대를 덮은 이불만 치워버리면 간단히 확인될 일이지만. "난 무기가 없는데." 그 말은, 여기서 좀비가 튀어나오더라도 육탄전으로 맞서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 전의 사투를 또다시 반복하여야 한다는 그 현실에 나는 잠시동안 짓눌렸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유라면. 쾅. 문짝이 언제 깨질지 모르니까. 이 녀석들이, 드디어 문 앞에까지 진출한 건가. 오지 말란 말이야. 이 썩어빠진 자식들아 ! 그래서 나는 미친 척 하고, 손을 서서히 침대에 내밀다가. "이걸로 하자." 역시 유탄발사기로 하는 게 더 안전하겠지. 나는 총구 끝 부분을 침대 이불 아래로 쑤셔 넣고, 서서히 그걸 들어올렸다. 내 머릿속에는 여기서 좀비가 튀어나와 나를 덮치는 상상이 끝없이 떠올랐지만, 당장 문을 보강하지 않으면 침대 아래에서 나오는 좀비가 아니라, 문에서 쏟아져 들어올 좀비들에게 당할 게 뻔했다. 그래서 억지로, 이를 덜덜 맞부딪치면서 이불을 들어올렸다. 뭔가 큼지막한 게 있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이불이 젖혀지면서 그게 나올 듯한 기분이 마구 내 어깨를 잡아 흔든다. 나온다. 나온다. 나온다. 나온다아아.....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즉시 침대를 끌고 가려다가........ 혹시 바닥에 뭔가 있을지 모르니까 재빠르게 침대 아래를 확 바라보고, 그 후에 침대를 끌기 시작했다. 힘내라. 문구야. 너에게는 축구를 위해 몸바쳐 단련한 체력과 끈기가 있다. 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침대는 제때에 문 앞에 놓였다. 애고 무거워라. "휴우." 하지만 하나로는 뭔가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테이블부터 시작해서, 의자와 기타 등등의 물건들을 침대에 겹치듯이 올려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할 것 같다. 좀비가 하나둘이 아닌데,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뭔가 더 좋은 물건이 없을까 하고, 방안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걸 보니. "특별실이라도 되나? 혼자서 쓰는." 그러니 이런 옷장도 있는 거겠지. 그리고 안에서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순간. 물컹. 뭐, 뭐야. 물컹. 물컹. 물커어어엉? 나는 기절할 듯이 놀라 손부터 빼냈다. 하지만 너무 세게 당긴 게 탈인지,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왜, 왜 옷장 안에 이런 게 있는 거지? 나는 불문곡직, 다짜고짜 유탄발사기부터 들었다. 물론 빈 발사기를 들어봐야 몽둥이 대용밖에는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 보드라운 감촉은 설마. "좀비냐?" 생존자가 여기에 있을 턱이 없다. 분명히 피난민은 다 옥상에 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왜 난데없이 여기서 생존자가 또 나오겠냐? 그러니 내가 만진 것은 분명히 좀비의 부패되는 살덩어리일 것이고, 썩기 시작했으므로 보드라웠겠지. 아니, 이건 방금 죽은 시체일 것이다. 아직도 따뜻하면서도 뭔가 신비스런 부드러움이.... "에?" 잠깐. 좀비가 무슨 온기냐? 따뜻함이라는 단어하고 시체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게다가 이게 만약 좀비라면, 지금쯤. "카아악." 이렇게 외치면서 나를 공격해와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진정하고 다시금 상대를 살폈다. 거기에 있던 것은. "........."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시체라고 하기에는 뭔가가 달랐다. 우선, 썩은 냄새도 안 난다. 피도 안 묻었다. 게다가, 좀비치고는 너무 겁이 많았다 ! 이건 차라리 아까 하인리히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위층에서 골칫덩어리였던 겁쟁이 피난민들을 더 닮았다. 그럼 이것은. "Are you really human(너, 정말 인간이냐)?" 독일어를 내가 못하니, 영어로라도 묻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뜬구름 잡는 짓이다. 유럽사람이 과연 영어를 익혔을까? 그들은 영어를 상당히 천대한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내가 유럽의 언어 가운데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나. 러시아말을 할 줄 아나. 물론 유럽 언어의 기원인 라틴어는, 더더욱 모른다. 그러니 아는 걸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 수밖에. 자. 뭐라고 말 좀 해봐요. "Don't shoot me. I'm not a zombie(쏘지 마세요. 전 좀비가 아니에요)." 나는 긴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사, 살았다. 내가 만난 사람은, 클라라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성이 슈만이라고 하는 걸 보니, 옛날에 음악 시간에 배웠던 어떤 음악가의 이름이 생각나지만, 넘어가자.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어차피, 저 아가씨를 성으로 부를 리도 없고. 이 경황에. '미스 슈만이니 뭐니 할 상황이 아냐.' 나와 클라라는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영어를 아는 수준이나 그녀가 영어를 아는 수준이나 도토리 키재기였기에, 필연적으로 손짓발짓까지 다 동원해서 대화를 해야 했다는 것이다. 즉. "Are you the member of rescue team(구조대원이신가요)?" "No. I'm just a student of Korea(아뇨. 한국의 학생일 뿐인데요)." "Oh, No(아, 안 돼요)." "Ah(아)?" "Will you destroy this city(이 도시를 부술 건가요)?" "What(무슨)?" "But you're Korean(하지만 당신은 한국인이잖아요)." "So what(그래서 어떻다는 건가요)?" "Korea is very dangerous country(한국은 굉장히 위험한 나라잖아요)." "NO(아니에요) !" 아니, 이 아가씨가 무슨 일본인 같은 헛소리를? 그러나 그 다음의 말을 듣자, 나는 더욱 좌절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But Korea is making nuclear weapon(하지만 한국은 핵무기를 만들고 있잖아요)?" "No. it's North Korea. I'm South Korean(아니에요. 그건 북한이고, 난 남한 사람이라고요)." 나나 클라라나 문법에 맞게 했는지는 하나도 모르겠다. 다만 대충 해보니까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런데 왜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보다 더 먼저 튀어나오는 거냐? 상당히 불만을 토하게 만드는 그녀의 교양이었지만, 세계인의 인식수준이라는 게 솔직히 그렇다. 한 예로 세계지도 상당수가, 동해를 일본해라고 기재하고 있지 않은가. 선진국 국민들의 의견이 언제나 올바르지는 않다는 단적인 예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그걸 실감할 줄이야. "어쨌든, 여기서 나가야 해요." 그녀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나중에 여기서 살아나가면 고치기로 하고, 나는 그녀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를 말했다. 그녀 역시 그 말에는 동의했지만. "저래선 못 나가잖아요?" 그녀가 굳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아도, 문은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물론 워낙 많이 물건을 쌓아두는 바람에 아직은 끄떡없어 보이지만, 조금씩 떨리는 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뜻은, 우리가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어서 나가야 하는 이유는 또 하나. "하지만 나가야 해요. 곧 구조헬기가 옥상에 올 거라고 경찰들이 말했어요." 그게 중요했다. 만약 우리가 제 시간에 옥상에 도착하지 못하면, 구조헬기는 우리만 떼어놓고 도망칠 게 아닌가. 그 악랄한 근육 덩어리 남자가 '저 아래에 생존자가 남아 있어요.'라고 구조대에 알려줄 리도 만무하고. 그러면 나와 그녀는. '좋을지도 몰라.' 이런. 상상해 버렸다. 둘만 이 방에 남게 되고, 좀비들도 물러가고, 결국 며칠동안 이 방에 갇혀 지내다가 이 아가씨와 본능대로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아, 아니야 ! 이 경황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 언제 좀비들이 저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하지만. "어떻게 하지?" 방법이 나와야 했지만, 나올 방법이 없었다. 문의 장애물을 치우고 문 밖으로 질주한다? 그렇게 많은 좀비들을 뚫고? 내가 무슨 여동생이냐? 거기다가 여자아이까지 끼고 달아난다고? 이건 무리다. 반도 가기 전에 좀비들에게 잡혀서, 우리 둘은 사이좋게. "크아악." "카아악." 한 쌍의 좀비가 되고 말 거다. 이런 건 안 된다. 그러나 문이라고는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혹시 벌써 구조헬기가 오는 건 아니겠지? 밖을 쳐다보니, 안 보인다. 일단 안심하고, 두두두두두. 이런. 빌어먹을. 나와 클라라는 사색이 되어 바깥을 다시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하늘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헬리콥터다 !" 그렇다. 구조헬기가 나타난 것이다. 하필이면 바로 지금 ! 보통이라면 지금 기뻐해야 할 상황이지만, 우리한테는 달랐다. 지금 우리는 옥상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아래층의 밀실에 갇혀있다고 !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나와 클라라만 이런 지옥에 남겨질 것이다. 이건 뭔가 불합리해 !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하느냔 말이야 ! 우리는 허겁지겁 탈출방법을 찾으려고 했지만, 문 밖에는. "크아악." 이래서는 안 되겠군. 우리는 다시 창문으로 달려갔다. 헬리콥터가 우리를 발견하길 바라면서, 우리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대로 옥상으로 날아갔다. 물론 헬기 한 대로는 그 많은 피난민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 없겠지만, 그러니 몇 대 더 올 거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한테만 해당되는 거지만. "빨리 옥상으로 올라가야 해. 안 그러면 우린 끝장이야." 그 말은 클라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절대명제였다. 우리한테는 무전기도, 무기도 없고 오직 '맨 주먹 붉은 피'만 있다. 이런 상태로는 좀비들을 막아낼 수가 없고, 물도 식량도 없는 이런 곳에서 며칠 동안을 버틸 수도 없다. 구조대가 이런 구석진 방까지 수색할 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확인된 생존자들만 구한 후 곧바로. "핵이 날아올지도 몰라." 나만 그런 걸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클라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이런 원인 불명의 질병이 만연한 도시를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렇다면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소독방법 - 핵 -을 동원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핵이 인류의 적이니 어쩌니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인류를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우리한테는 전혀 그게 아니라는 거다. 게다가 그들이 생존자가 도시에 더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여기까지 수많은 구조대원들을 희생시키면서 구출작전을 펴기보다는. "그냥 핵을 날릴 거야." 그게 문제였다. 솔직히 그들 입장에서는,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를 몇 명의 민간인을 위해 더 많은 구조대원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다가, 정체도 모르는 이 질병이 이 도시를 넘어 확산되기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정치인이라도, 그런 무모한 구조작전을 펴기보다는 이곳을 완전히 파괴함으로서, 질병을 소멸시키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우리 힘으로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창문 주위를 둘러보려고 했지만. "이런 젠장." 이곳은 9층이고, 당연히 이 병원은 안전장치를 철저하게 해 놓았다. 즉 유리창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히 방탄유리로 막아두었는지, 두드려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큰일났군. 물론 부수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그것부터가 큰일인 데다가. "뭘 써서 올라가지?" 하다 못해 로프라도 있다면, 이 유리를 부순 후에 그걸 저 위의 옥상 난간에 걸어서, 위로 기어올라가는 데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나라면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팔이 난간에 닿기만 하면, 몸을 끌어올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평소에 체력단련을 철저히 한 나도 어려운 일을, 그녀가 해낸다고? 솔직히 무리다. 당장 겉보기만 해도 연약함 그 자체인데. "로프는 없어?" 물론 이런 말 해봐야 '없다'는 대답이 나올 게 뻔하다. 하지만 무엇을 요구해도 내놓는 인간을 여동생으로 둔 게 죄인지, 그만 습관적으로 묻고 말았다. 만약 짧은 끈이라도 있다면, 내가 옥상에 기어올라간 후 클라라를 끌어올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게 병실에 있을 리가 없다. 여기는 등산용품 판매점이 아니란 말이야. 클라라 역시 로프가 없다고 대답할........ "있어요." "에에에에에?" 뭐, 뭐야? 로프가 있다는 거야?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기쁜 소식이었다. 총도 없고, 포도 없고, 수류탄도 없는 이 방에 그런 좋은 물건이 있다니, 나는 당장에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로프가 있다면, 내놓으라고요. 클라라양. 그러나 그녀는 로프를 꺼내지 않고,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커튼?" "다 묶었어요." 나와 클라라는 당장 창가의 커튼을 모조리 떼어내서, 그것으로 구명줄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서 이건 구조대의 행위라기보다는, 날림공사와 땜빵 그 자체였지만. 오죽했으면. "이런 걸로 될까?" 이런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올까. 하지만 클라라는 묵묵히, 커튼의 양끝을 묶어서 긴 줄로 만들었다. 커튼의 마지막 끝에는 이미 텅 빈 유탄발사기를 묶어서, 옥상 난간에 걸릴 갈고리 대용으로 쓸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말야. "이거, 풀리지 않을까?" 당연했다. 이게 만약 풀리면, 나와 클라라는 저 아래로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날 것이고, 남은 살점은 좀비들의 밥이 될 것이므로. 즉 좀비가 될 기회조차 없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걱정 마요. 절대 안 풀리니까." 적어도 하인리히나 그 근육 덩어리 남자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떻게 남자들이 이런 연약한 소녀보다도 겁이 많단 말인가. 같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커튼으로 구명줄을 만드는 작업을 지켜보다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냈다. 그렇지. 저 유리를 깨야지. 그래야 우리가 옥상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나는 우선. "으럇차." 문을 막느라 쌓아둔 물건 중에서 의자를 하나 골라잡아서, 그걸로 유리창을 쳤다. 하지만 그 유리는. 쾅. 금도 안 갔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더 세게 의자를 휘둘렀으나. 쾅. 이런 빌어먹을. 나는 다시 한 번 유리창을 의자로 찍었지만, 역시 유리는 금도 안 간다. 이거 뭐야. 나도 모르게 열이 확 받쳐서 발로 걷어차지만. 쾅. "아구구구구." 발만 아프다. 이거 더 센 타격수단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런 건 없었다. 하긴 있을만한 물건은 모조리 문 앞에 쌓아두었으니, 없을 만도 했다. 게다가 내가 거기서 의자 하나를 집어낸 결과가 당장 드러났으니. 쾅. 좀비가 문을 몸으로 들이받았는지, 문에 대충 쌓아놓았던 TV 한 대가 침대에서 밀려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나와 클라라를 움찔거리게 했다. 큰일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녀석들이 안으로 달려 들어올 게 아닌가.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했다. 의자는 안 통했지만. "이거라면." 나는 TV를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워서 허리가 덜덜 떨리기는 했지만, 지금 그런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다. 나는 살아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저 유리를 깨야 하고, 그러려면 이걸 들어야 했다. 나는 우리를 죽음의 세계로 몰아가려는, 악의에 가득 찬 유리창을 노려보았다. 자. 이제 맛 좀 봐라. 네 음흉한 속셈을 우리가 모를 줄 아느냐. "이야아아압 !" 기합과 함께, 내 몸은 유리창으로 돌진했다. 모든 힘을 쏟아서, TV가 창문을 향해 날아간다. 내 체중과, TV의 무게를 합친 일격이 유리를 강타했고. 와장창. 유리는 부서지면서, 탈출구가 열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TV를 그렇게 세게 내던지려면, 그만큼 죽어라 달려야 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 나는 제 때 몸을 멈춰 세우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즉. 쾅. "아구구구구." 그대로 벽에 충돌하고 만 것이다. 팔꿈치고 가슴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아프다. 하지만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저 아래로 추락하는 TV보다는 나은 운명이니까. 만약 내가 저렇게 되었다면. '추락해서, 박살나서, 먹혔을 거야.' 유리창이 약간 높게 설치된 것에 감사해야 했다. 하반신이 벽에 걸려서 살아남은 꼴이니까. 하지만 워낙 험하게 부딪쳐서 그런지 소리가 너무 컸다. 오죽하면 클라라가 깜짝 놀라. "미스터 문구 !" 서양 사람들은 성을 나중에 쓰고, 우리는 성을 앞에 쓰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클라라에게, 내 성은 '문구'가 아니라 '연'이라는 걸 설명하고 싶었으나, 그건 나중에 하기로 했다. 일단은 바깥 상황을 살피는 것이 먼저니까. 콱 막힌 속을 뚫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만 하고, 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위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옥상의 난간이 크게 보인다. 그 말은 즉, 조금만 기어올라가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즉시. "클라라 !" 원래 친한 사이가 아니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거지만, 급한데 그런 거 알 게 뭐냐. 클라라 역시 그런 시시한 문제를 물고늘어질 정도로 정신나간 여자는 아니었고, 그녀는 즉시 로프를 가져왔다. 내가 그 로프를 던지자, 유탄발사기가 난간에 걸리면서 탈출로가 확보되었다. 그리고. 슥. 슥. "사, 살았다." 한 번 로프를 당겨보니, 일단 그럭저럭 쓸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다행이야. 마음이 풀어지면서 주저앉고 싶었으나, 그건 살아남고 나서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즉시 클라라부터 위에 올려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오다가 멈추더니. "아, 안 되겠어요. 너무 높아요." 아차. 의자를 가져와야지. 나는 즉시 의자를 대령해서, 그녀가 창문으로 쉽게 나갈 수 있게 했다. 커튼으로 만든 구명줄을 잡고 올라가려던 클라라가 위를 한 번 보고, 다시 아래를 한 번 보더니 갑자기 사색이 된다. 그리고. "아, 안 되겠어요. 너무 높아요." 똑같은 소리를 또 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물론 아래를 쳐다보면 정말 아찔할 수준이기야 하다. 여기는 9층이니까. 보통 사람이 커튼에 몸을 의지하며 벽을 기어오르는 게 어렵다는 것도 이해한다. 나도 솔직히 자신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올라가지 못하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쾅. 언제 문이 깨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문에 받쳐놓은 침대가 떨리는 걸 보니, 이 방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정말 얼마 안 남은 게 분명했다. 지겨운 놈들. 그러나 욕을 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일단 클라라가 위로 올라가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서 올라가요. 도와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벌벌 떨 뿐이었다. 이걸 어쩌나. 나는 할 수 없이. "알았어요. 일단 다시 들어와요." 그녀가 다시 내려오자, 나는 그녀의 허리를 커튼으로 감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전에 커튼을 꼬아서 고리부터 만들고, 그 끝으로 그녀의 허리를 한 번 감은 후 고리에 커튼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커튼을 원래의 줄(커튼) 뒤로 빼낸 후, 그 끝을 처음 만든 고리로 다시 집어넣었다. 이런 것을 보울라인 매듭이라고 하던가? 원래 이것은 등산에 쓰는 매듭으로, 사람의 허리를 묶을 때는 이렇게 하는 게 안전했다. 만약 섣부르게 다른 방법으로 허리를 묶으면. 우두둑. 이렇게 되니까. 하지만 이 매듭은 그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내가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거 잘 풀리는데.' 만약 중간에 이게 풀려서 클라라가 커튼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커튼이 좀 더 길었다면 이 끝을 한 번 더 묶어서 안전도를 높이던가, 8자 매듭을 쓸 수도 있지만 커튼의 길이로 보아 그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끈을 한 번 꼬아보려고 해도, 길이가 안 되니. 평소라면 이런 어정쩡한 안전장치에 여자아이의 목숨을 맡기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클라라. 제발 부탁이니까."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빨리 올라가." 이게 풀려나가기 전에, 그녀가 옥상에 올라가야 했다. 부디 성공하기를 빌어요. 클라라양. 하지만 이게 정말로 느슨해지면? 그럼 나도 끝장이다. 당연히 클라라가 내 위에서 먼저 올라갈 것인데, 그녀가 추락해봐라. 그녀는 내 머리위로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쿵. "으아아아악." 이렇게 될 게 아닌가. 그러니 그녀의 생존은 내 생존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실 내가 먼저 올라가면 되지만, 사나이의 체면과 자존심이 있지, 그런 짓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내가 나중에 올라가야지. '난 그 정신나간 근육 아저씨하곤 다르다고.'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지만, 산 사람도 마구 내버리는 그런 인간과 동격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클라라도 자신의 허리를 감은 커튼을 만져보고는. "네." 용기를 내서 다시 창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체중에 커튼에 실리자, 커튼이 팽팽해지면서 그녀를 지탱한다. 하지만 저거. "빨리 !" 언제 매듭이 풀릴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나를 서두르게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뒤를 돌아본 나에게 보인 것은. 쾅. 드디어 문짝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이어서 좀비의 얼굴만 보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보자 울부짖기 시작했다. 밥이 도망가니까 화를 내는 건가? 하지만 여기는 독일이니까, 밥이 아니라 빵이나 스테이크라고 불러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왜 안 올라가는 거야? 나는 위쪽을 쳐다보고는. "아이고." 그녀가 평범한 소녀라는 걸 간과한, 내 실수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어올라가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녀의 팔이 너무 약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강철 팔뚝을 지닌 누군가에게 맞고 살아서 몰랐는데, 사실 여자는 약한 생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것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내가 당황하는 순간. 쾅. 아이고. 침대가 밀려나갔다. 그리고 문 위쪽이 드디어 완전히 부서졌고, 좀비들이 그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곧 그들은 침대를 넘어, 이리로 달려올 것이다. 나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올라가 !"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움켜잡고, 확 밀었다. 이런 치한 같은 짓은 어지간하면 안 하겠지만, 죽기 직전인데 어떡하라고 ! 갑자기 뒤에서 강한 힘을 받은 그녀의 몸이 위로 올라가면서, 그녀의 손이 옥상 난간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다리가, 옥상에 닿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하지만 나에게 이제 여유시간은 사라졌으니. "크아악." 드디어 좀비 한 마리가 문틈을 통해서, 침대로 넘어오더니 방바닥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 나는 황급히 창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아직 클라라는 완전히 옥상에 몸을 눕히지 못했다. 아직 그녀의 왼쪽 다리가, 달랑거리면서 내 진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보통 남자라면 이 상황에서 얼굴을 붉히겠지만, 지금은 그걸 보든 말든 감정에 변화를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다. 좀비가 방안에 있단 말이야 ! 그가 일어나기 전에 당장 할 일은. "우라라라라."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의 위쪽을 잡고, 왼쪽 다리만을 창에 걸쳤다. 좀비가 일어서면서, 나를 바라본다. 맛있게 보이나 보다. 그는 즉시, 좀비답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것은. "카아악." 망할 녀석. 나는 녀석의 상판을 향해, 정의의 일격을 먹였다. 즉, 걷어찬 것이다. 좀비가 난데없는 반격에 이마를 맞고, 뒤로 발랑 나자빠진다. 하지만 이런 건 극히 일시적인 효과밖에 낼 수 없었다. 좀비가 이 정도로 그들의 식사를 포기할 리가 없고, 더 큰일인 것은. 쾅. 우지끈. 드디어 침대가 문에서 밀려나가 버렸다. 그리고 문이 활짝 열리면서, 좀비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 처음에 나를 습격했던 좀비는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동료들의 파도에 휩쓸린다. 그는 그대로 '친구'들에게 짓밟혀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었다.' 원래 친구 사이는 이래야 하지만, 좀비들에게는 친구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빵, 아니 살아있는 스테이크를 포식하는 것이 더 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졸지에 스테이크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나로서는, 고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해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지? 두 손만으로 내 몸을 지탱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미스터 문구 ! 해냈어요 ! 곧 줄을 내려 드릴게요." 그건 분명히 희소식이기는 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커튼은 지금. "그녀의 허리에 있었지." 안 그래도 길이가 모자란 커튼이 내 구명줄 역할을 하려면, 그걸 우선 그녀의 허리에서 풀어낸 후 다시 나에게 던져줘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울라인 매듭이 풀리기 쉽다지만, 그걸 푸는데 드는 시간은 0초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줄이 없어 !" 일 났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늘을 날아야 하나? 순간적으로 꿈에서 보았던, 고깔 모자를 쓰고 달을 배경으로 떠 있는 소녀가 내 기억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아니다. 날아다니는 것은 내 전공과목이 아닌 것이다. 그럼 나에게 남은 길은. "이야아아아 !" 솔직히 말해서 이건 미친 짓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구명줄은 없고, 좀비들이 밀어닥치는 절대절명의 상황. 그럼 내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양손으로 창의 위쪽을 잡은 후, 손아귀에 힘을 주고 몸을 하늘로 날렸다. 갑자기 내 다리가 창 아래에서 사라지자. "크에엑?" 좀비들의 눈에서 갑자기 스테이크가 사라진 꼴이었다. 물론 좀비들이 눈으로 먹이를 찾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좀비들이 방으로 달려오는 기세는 워낙 엄청났고, 선두의 좀비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쿵. 좀비들은 좁은 방에 자신들을 밀어 넣었고, 그 선두 대열은 창 밖에 손과 머리를 내민 채 꼼짝 못하게 되었다. 좀비들이 좀비들에게 눌려서, 시체 샌드위치가 되었다고 할까. 좀비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내밀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의 머리가 닿는 곳에 있었다. 뭐? 그런데 왜 그렇게 여유만만이냐고? 그야. "망할 자식. 혼 좀 나봐라." 나는 그의 머리 위에 착지했기 때문이다. 원래 좀비가 사람을 잡아먹으려면 그 탐욕스런 입을 벌려, 사람의 살을 물어뜯어야 하는데. "카악. 크악. 크으윽."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의 입이 아니라, 이마를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좀비가 설쳐봐야, 나를 먹을 수는 없었다. 입을 써야 날 잡아먹지. 좀비가 배고픔에 못 이겨 울부짖지만. "배고픈 건 네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지롱." 원래 사람의 머리 위에서 거만을 떨며 상대를 조롱하는 것은 여동생이나 하는 짓이었지만, 지금의 내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이므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 해야 할 예의범절에 아주 걸맞는 행위라 할 것이다. 좀비에게는 이렇게 예우해주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 다른 좀비가 나를 보고 다가오려고 하지만. "크아악." 좀비들에게는 애석하게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만약 방안에 좀비들이 열 마리만 있었다면, 국면의 전환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에 있는 좀비는 백 마리는 넘는 것 같았고, 한정된 장소에 너무나 많은 좀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슬쩍 내려다보니, 아직도 방에는 좀비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동료들에게 눌린 좀비들의 비명이, 방안에 메아리쳤다. "꼴 좋다." 다만 발에 좀비들의 내장 조각이라도 기어들까 봐 겁은 조금 났지만, 그런 걱정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드디어, 드디어 클라라가 자신의 허리에서 커튼을 풀어내서, 나에게 던져주었으므로. "미스터 문구 ! 올라와요 !" 그 외침이 얼마나 따스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힘내요. 조금만 더." "아이고." 나는 좀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옥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가 들리는 걸 들으면서, 이제 이 끔찍한 모험은 막을 내리는 건가. 나와 클라라는 약간 안심하고 있었다. 위험한 고비는 이제 다 넘은 게 아닌가. 이제 헬리콥터에 타기만 하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옥상 난간을 잡은 내 팔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만 더." 나는 드디어 몸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난간을 넘어가서.......어? 어? 어? 쿵. "아구구구구." 긴장이 풀리니까 힘이 빠진 건가. 그나마 옥상에 무사히 안착해서 다행이었다. 나와 클라라는 헐떡거리는 숨을, 그제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죽는 줄 알았네." 정말 이번에는 죽는 줄 알았다. 죽을 고비를 대체 몇 차례나 넘었는지. 내 뒤를 쫓아오던 좀비들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죽어 가는 경찰의 모습도. 아마 죽을 때까지, 나는 오늘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뭐. "클라라. 괜찮아?" "네." 사람 하나는 건졌잖아? 나는 잠시동안, 아주 잠시동안 대(大)자로 엎어져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를 배경으로 해서. 하지만 하늘만 쳐다보면 따분하니, 피난민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생각보다는 질서정연하게, 헬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런데 저 기종이 뭐였더라? EH-101인가? 사실 그딴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기쁠 뿐. 그런데. "진희는?" 그녀는 과연 무사히 탔을까. 혹시 그 망할 근육 덩어리가 그녀에게 못된 짓이라도? 나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일어나야 했다. 저 헬기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에. 클라라 역시 이곳에 더 이상 머물기는 싫은지,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그래서. "미안." "괜찮아요." 나는 그녀에게 의지하여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잠도 못 자고 계속 생사의 고비를 넘기다 보니, 힘이 다 빠진 것이다. 물론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점차 헬기가 가까워진다. 피난민들의 행렬에 합류한다. 주위를 둘러보며 진희를 찾는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안 보인다. 혹시 벌써 헬기에 몸을 실은 것일까. 탕. 좀비들을 겨우 물리치고 올라온 나에게, 갑자기 눈앞의 피난민 하나가 윙윙거리더니 선글라스를 낀 요원으로 변한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빤질빤질한 얼굴을 나에게 향하는 그. "클라라." 총을 뽑아들며 나는 외친다. "도와줘." 그리고 그 요원은 거대한 권총 - 아마 데저트 이글일 것이다 -을 꺼내들고 나를 쏜다. 총알 한 발이 나에게 날아온다. 그 구릿빛 탄환의 뭉툭한 머리가 나를 향해 날아든다. 그게 만들어내는 공기의 소용돌이까지도. 나는 허리를 뒤로 굽힌다. 한 발을 피한다. 또 날아온다. 팔을 휘저으면서 몸을 뒤튼다. 두 발. 세 발. 네 발. 팍. 아구구. 실수했다. 나는 그대로 옥상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서려고 하지만,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요원이 헬기의 탐조등 빛을 등에 업고 거만하게. "역시 인간이군." 그 순간 권총을 그의 머리에 겨누는 클라라. "이것도 피해봐." 탕. 그의 머리가 터지면서.......... '이게 아니잖아.' 총알 한 발이 내 발 옆에 날아와 박혔는데, 무슨 이 판국에 망상을.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긴 망상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두뇌는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왜 나한테 총을 쏘는 거야? "블라블라블라." 피난민들이 우리를 보고 일제히 물러서고 있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군인 한 녀석은 이미 우리를 가리켜 뭐라고 떠들고 있었고, 다른 군인은 겁나게 생긴 대포를 하나 꺼내서 들고 있다. 또 한 녀석은 총구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소총을 우리에게 겨누고 있다. 상당히 아깝다는 표정인데, 뭐가? 옆에 있는 장교가 그를 구박하고 있다. 아. 왜 그를 장교라고 생각하게 되었냐고? 더 멍청하게 생겨서 그런 거다. 절대로 그 독일군 장교의 계급장을 알아봤다던가 하는 게 아니다. 난 그렇게까지 군사 방면에 대해 지식이 풍부하지 않다고. "왜, 왜 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눈물로 호소하지만 - 물론 눈물은 안 흘렸다 - 그들은 그런 말은 전혀 못 들었다는 듯이 다시 총구를 나에게 겨누었다. 아. 여기는 독일이니까, 독일어로 해야 알아듣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말을 써봐야, 그들에게는 그저. "우어억." "크아악." "으르르." 이렇게 밖에 안 들릴 게 뻔했다. 하지만 독일어로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던가? 궁지에 몰린 쥐의 신세가 된 것을 한탄할 틈도 없이, 나는 도망갈 곳을 찾았다. 이거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어떻게 하나? 다행스럽게도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니. "블라블라블라?" 클라라가 외계어, 아니 독일어로 뭐라고 외친다. 그 말을 들은 군인들이 총을 내리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그들은 우리를 계속 총으로 위협하면서, 옥상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어찌하오리까. 그보다도. "왜 이러는 거야?"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이렇게 갑갑할 줄은 알고 있었다. 이미 여동생에게 줄기차게 맞으면서 깨달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 경우에는 최소한 상대가 나와 똑같이, 우리말을 쓰고 있었다. 지금처럼 언어 자체가 안 통하는 경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블라블라블라 !" 그들은 더더욱 거칠게, 우리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군인 몇 명이 다가오더니. "What the hell(도대체 왜)?" 외치는 것도 영어로 해야 하다니. 역시 외국에 나오면 피곤하기 짝이 없다. 물론 독일어로 외치면 간단하지만, 내가 그걸 알면 이 고생을 하겠냐 ! 사실 영어로 외치나 우리말로 외치나 그들이 못 알아듣는 건 똑같지만. 생각 같아선. '날뛰고 싶지만.'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저항하고 싶어도 총부리가 내 이마를 왔다갔다하는 판국인데, 그게 가능할 리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클라라와 함께, 세트 메뉴가 되고 말았다. 엉뚱한 짓 하지 못하게, 손을 들고 하늘만 쳐다보게 된 것이다. 등뒤에는 물론, 차가운 총구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이고." 그리고 군인들은 피난민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뭐라고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설명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다시 피난민들의 행렬이 헬기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구석에 방치된 나는 클라라에게 물었다. "Tell me about this situation(지금 상황에 대해 말해 줘)." 힘들어 죽겠다. 이런 물음도 일일이 영어로 해야 하다니. 그녀 역시 영어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덕에 문장이 매우 짧아지기는 했지만. 그녀의 말을 종합하면. "뭐? 우리가 좀비인 줄로 알았다고?" 그게 말이 되냐. 하지만 그녀의 말로는 그렇단다. 처음에 나에게 총을 쏜 병사를 장교가 꾸짖은 이유는. "좀비 상대로 보통 총이 먹히겠냐 !" 이게 이유란다. 민간인 학살이나 오발사격으로 혼난 게 아니고 말이다. 혀를 차던 나에게, 한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그럼 클라라가 독일어로 외친 후에도 우리를 이렇게 취급한 이유는? 그녀가 상당히 곤혹스러운 듯이 말하길. "뭐? 우리가 감염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물린 적도 없는데, 그게 무슨 변이냐. 나는 피난민들이 헬기로 들어가는 것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말이다. 이러다가 우리만 여기에 남겨두고 가버리는 게 아닐까. 헬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는 동안, 그런 의구심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불행히도 적중했으니. "블라블라블라?" 우리를 감시하던 병사에게 클라라가 뭔가를 물어본다. 그러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좋은 결과가 나올 모양이군.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바로. "설마 우리만 여기에 버려 두고 가는 거 아냐?" "네." 으아아악. 이게 무슨 변이야.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곳이 바로 인생의 종착역이라니. 나는 무심한 하늘을 저주했지만, 그런다고 해봐야 나올 건 벼락밖에 없었다. 흑. 이런 일이. 저 멀리에서 헬기에 올라타는 사람 중 하나가, 나를 애처로운 눈길로 쳐다본다. 진희일까.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다니. 그러나.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는 건가요?" 내 말을 클라라가 통역해서 병사에게 전달한다. 병사의 표정은 지금 볼 수가 없지만, 아마 그도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아리따운 독일 소녀를 버리고 가다니 말이다. 이 경우에 나는? 어차피 난 외국인인데, 그들이 관심이나 가지겠냐. 어쨌든 그가 상황을 설명했지만,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뻔했다. "이미 세 개의 도시가 이 병으로 엉망이 되었대요." 뭐? 그럼 설마, 베를린은? 그쪽은? 설마 미인이가 지금 가 있는 거기는? 아. 이건 절대로 여동생이 걱정되어서 물어본 게 아니다 ! 정말이다 ! 갑자기 황급하게 병사를 향해 얼굴을 돌리자 그가 총을 겨누려고 했다. 그러나. "베를린은? 베를린은?" 독일어를 모르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병사의 대답은. "베를린은 아직 이 질병이 발생하지 않았대요." 휴우. 일단 안심했다. 그 녀석이 있는 곳은 그러니까 무사하다는 뜻이지? 물론 그 녀석이 좀비 따위에게 물려 죽을 위인은 절대 아니라고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나와 여동생이 동시에 죽어버리면 부모님이 얼마나 상심하시겠는가. 그러나 나는? 클라라가 병사에게 이것저것 캐묻는다. 그리고 나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식만 잔뜩 있잖아. 나오는 말이라는 게. "병의 원인을 모른대요." 그리고. "그래서 도시를 격리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러니 감염자인 우리는 도시 밖으로 나가지 못한대요." 그리고.........가 아니잖아 ! 난 물리지도 않았는데, 왜 여기에 그냥 있어야 하는 거야 ! "물리지 않았는데도 감염되는 사람이 있대요." 무엇이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나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지만. "이유는 모른대요. 물리지 않고, 다른 원인으로 죽은 사람도 그렇게 되었대요." 뭐야. 그럼 죽기만 하면 모두 다 그렇게 된다는 건가? 원인이 뭐야? 바이러스? 박테리아? 그것도 아니면 신의 저주?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럼 내가 여기서 죽어도. "크아악." 이렇게 된다는 거야? 갑자기 죽기가 더더욱 싫어지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냐.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나는 원인이라곤, 시체 내장이 몸에 들어갔을 경우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랬으면 이 병사가 그에 대해 언급을 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내가 놓친 그 내장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혹시, 물리고도 자백하지 않은 사람이 그 상처로 인해 죽고, 좀비로 되살아난 걸까. '모르겠어.' 물론 다들 살고 싶을 테니, 자기가 물렸다고 고백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피난민 중에도 그런 인간이 있을지 모르고. 일단 얼굴은 살피는 모양이지만, 사실 다른 병이 있다고 우기면 도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사람들 옷을 다 벗겨서 검사할 수도 없으니. 잠깐. 이 사람들은 혹시 우리가 물리고서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치겠다.' 나는 속을 태우면서, 저 멀리 헬기에 타는 피난민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못살아.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감염자는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나하고 클라라만 여기에 남겨지는 거야?' 무기도 없이, 그리고 희망도 없이? 그나마 옆에 같이 최후를 맞이할 사람이 있어서 다행인 건가. 인종차별이라고 항의하고 싶어도, 이런 예쁜 독일 소녀도 남겨지는 판이니 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조치도 아니니까. 그러나. '힘없는 서민에게는 이해가 안 된다고.' 왜. 왜 나만 죽어야 하는 거야? 용기도 없이 벌벌 떨던 하인리히는 살고, 비겁하게 내 앞에서 탈출구를 봉쇄한 그 근육 새끼는 살고,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얄밉게도, 저 멀리에서 나를 바라보던 피난민 하나가 웃는다. 그 새끼는 바로. "저 !"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두드려 패고 싶지만, 병사가 총을 겨눈 이 상태에서는 가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드디어 헬기에 사람들이 모두 탔고. "블라블라블라 !" 그들이 우리 앞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뭐라고 중얼거린다. 클라라가 통역하기를. "미안하다. 고 하는데요." ".........." 뭐? 미안하다고? 사람을 죽음의 땅에 버려 두고 가면서, 고작 미안하다면 다냐?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온다. 물론 우리말이라면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이건 너무나 유명한 독일어라서 내가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이다. 그것은. "나치 Nazi !" 하지만 병사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직 고개를 숙이고, 죽어라 헬기로 달려갈 뿐이다. 그래도 미안한 줄은 안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전혀 고맙지 않다. 이유가 뭐냐고? 이대로라면 우리는 옥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드디어. 쾅. 옥상 출입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건 얼마 못 가서,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파괴될지 모른다. 그런 내 예상은 불행히도, 정말 불행히도, 빌어먹을 만큼 불행히도 적중했고. 쾅. 출입문이 통째로 떨어져서 옥상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온다." 내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부서진 문, 그리고 그 뒤에 깔린 어둠 속에서, 굶주린 짐승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도 봤지만, 팔 없는 시체도 있고 다리 없는 시체도 있고 몸통이 반쯤 뜯어 먹힌 시체도 있고 기타 등등....... 심지어 팔이나 다리, 물론 내장까지 골고루 기어 나오고 있었다. 종합선물이냐. "받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 애물단지를 우리가 맡고 말 것이다. 이 옥상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나와 클라라밖에 없으니까. 헬리콥터들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까. 불행이라고 할까. 그 새끼가 탄 헬리콥터는 이륙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게, 마지막 탈출기가 된 것이다. 그 작자가 약간 당황하는 게 보인다. 하지만 별로 고소하지 않다. 어차피. "저 자식은 살 거잖아?"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죽는 것이고. 이런 불합리한 일이. 결국 불의가 승리하는 건가. 아무리 법을 어기는 쪽이 잘 사는 것이 요즘 추세라고는 하지만, 내가 그걸 몸소 경험해야 한다니, 그리고 희생자로서 죽게 되다니,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이대로 죽으면 나는 감염자로서 기록될 것이다. 억울한 희생자가 아니고 말이다. 이럴 순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 나가서, 이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역시 모든 문제는 이것으로 집약된다. 지금 여기서 도망가려면 헬기를 잡아타는 게 유일한 해답이 아닌가. 하지만 좀비에 물린 감염자로 오해받은 입장에서는. "태워주세요." 이런다고 태워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동안 좀비는 서서히 옥상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먹이감을 찾던 그들에게, 나와 클라라가 발견되었다. "크르르." 그들은 맛있게 보이는 두 먹이를 보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빈 유탄발사기를 집어들었지만, 이걸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클라라가 공포에 질려, 내 뒤로 숨는다. 하지만 그건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다. 우리는 이대로 죽는 것이다. 그러나 좀비들은 우리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헬기의 로터 소리가, 그들의 주의를 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헬리콥터 안을 보자마자. "크아악." 그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긴 고작해야 두 개의 스테이크 조각을 노리는 것보다는, 커다란 바비큐를 노리는 편이 더 맛이 나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쪽은 너무나 위험했다. 살기 등등한 군인들이. 펑. 펑. 펑. 좀비들에게 발포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불덩이로 변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유탄발사기, 화염방사기, 그리고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좀비들은 벌집이 되어 나뒹굴다가, 불이 붙어 타오르고, 그리고 폭발과 함께 박살이 났다. 만약 내가 헬리콥터에 탔다면 아주 안심하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쾅. 쾅. 쾅. 그게 왜 문제인고 하면, 나와 클라라도 옥상에 있기 때문이다. 연이은 폭발과 불길에 밀려, 우리는 옥상의 중앙에서 구석으로 후퇴했고, 헬리콥터 역시 서서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좀비들은 엄청난 화력에. "크아악." "키익." "크르륵." 마구 죽어가고 있었지만, 내장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으면 다시 움직이는 녀석들인 만큼, 안심할 수는 없었다. 헬리콥터도 그걸 알고 있는지, 계속 몰려오는 좀비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물리치면서도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좀비들이 불타며 내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 연기에 헬리콥터의 모습이 가려진다. 하지만 좀비들이 죽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연기 자체가 죽음의 저주라도 받은 듯, 비명을 지르는 듯이 보였으니까. "끔찍해요." 어째서 저것들은 불타면서도 저 모양인지. 하지만 그 연기를 보는 순간, 나는 살아날 길을 찾아냈다. 이 정도로 자욱한 연기라면 헬리콥터도 우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서서히 이동하고 있으므로 곧 구름 속에서 빠져나오겠지만, 헬리콥터가 움직이던 방향을 생각하면 그들이 어느 쪽으로 올 지는 분명했다. 나는 즉시, 클라라의 손을 잡았다. 이건 유일한 기회였다. 어쩌면 살아남을 마지막 방법이었고. "클라라. 달려 !" 그리고 나는 헬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연기 속으로 몸을 던지는 어리석은 행위는 하지도 않았다. 꼭 무슨 독이라도 들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물론 그럴지 안 그럴지는 모르지만, 좀 꺼림직 하지 않은가. 시체 타는 연기인데. 군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곧 헬리콥터는 죽은 자들의 재가 날리는 속을 빠져나왔다. 내가 예상한 바로 그곳에 말이다. 그리고 헬기가 옥상에서 벗어나려는 그 순간에. "뛰어 !" 나와 클라라는 그리로 뛰어 올랐다. 쾅. 상당히 큰 충격과 함께, 우리는 헬기 다리에 매달렸다. 나는 슬그머니 옆을 쳐다보았지만, 다행히 클라라 역시 제대로 헬기 다리를 잡고 있었다.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말이다. 하긴. "아구구구구." 만약 지금 상황이 평범했다면, 나라도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죽기 살기로 헬기를 향해 뛰어서, 전력을 다해 몸을 던졌는데, 쇳덩이와 부딪쳐서 아프지 않으면 그건 여동생일 것이다. 그건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블라블라블라 !" 군인들이 뭐라고 외친다. 갑자기 헬기가 흔들리니까, 가장 기분 나쁜 상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헬리콥터에 좀비가 매달리지는 않았다. 휴.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헬기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즉시. "블라블라블라 !" 철컥. 우리에게 총부터 겨누었다. 적의가 가득한 눈동자를 우리에게 향하면서. 그건 그 뒤에 있는 피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숫자가 줄었네? 원래 저것보다 더 많은 게 아니었어? 다들 연기 마시고 앓아 누우셨나?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가 다 우리를 발견한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게다가. "망할 자식들." 우리가 무슨 좀비냐. 그들은 이미 우릴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저 질렸다는 표정으로, 총을 겨누고 뭐라고 외칠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피난민들이 죽든 말든, 좀비들이 설치게 그냥 놔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아까는 미안하다고 하더니. '말짱 사기였어.'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감정을 품은 것은 피난민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특히 저 근육덩어리 인간 ! 갈아 마시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군인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걸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클라라의 표정을 보니. "블라블라블라." 그녀가 뭐라고 반박하지만, 군인들은 거부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도 단념했는지,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내용을 들으나 마나,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표정부터가 시체를 연상시켰으니까. 상황을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하니. "인류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 그냥 뛰어내리라는데요?" 미친 소리 하지 마 ! 왜 우리가 죽는 게 인류의 평화에 부합되는 거냔 말이야. 우리가 물리기라도 했을까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 물렸다고. 절대 안 물렸다고. 무엇보다도 내가 어깨나 다리에 물렸다면, 이 헬리콥터에 매달릴 수가 없었단 말이야. 다리가 물린 사람이 그렇게 빨리 뛰냐? 어깨가 물린 사람이 이렇게 잘 매달릴 수 있냐? 그녀가 그 말을 받아듣고, 다시금 군인들을 설득하지만. "안 내리면 쏘겠대요." 못된 새끼들.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어. 그들은 분명히, 우리가 '어깨를 물려서 아픈데도 불구하고' 헬리콥터에 매달릴 수 있으며, '다리를 물려서 아픈데도 불구하고' 100m를 11초 이내로 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아무리 논리로 설득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을 보는 순간, 난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블라블라블라?" 클라라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눈을 외면했다. 오히려 더욱 거칠게 외칠 뿐이다. 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이마를 겨냥한다. "블라블라블라." 클라라가 절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우릴 원망하지 말래요." 눈물이 그녀의 뺨에 흐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모두 끝인 건가. 군인들이 서서히 우리 둘의 이마에 총구를 향한다. 피하고 싶어도,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 아래는 모조리 허공인데, 어디로 달아난단 말인가. 그들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인다. 이제는 모두 끝난 것이다. 억울한 희생자로서,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만일 기록으로 남는다고 해도. [연 문구. 한국 관광객. 괴질에 감염되어 사망] 이렇게 기재될 것이다. 억울하게 감염자로 오해되어 죽었다는 말은, 한 줄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도, 나는 괴질에 감염되었고 독일군은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총을 쐈다고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죽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던 것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탔을 헬리콥터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 그녀가 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작별인사도 못하는 건가. 나는 실망을 곱씹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그녀는 듣지도 못하겠지만. "진희야. 안녕." 군인들이 총을 겨누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내 옆의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죽는 순간, 외롭지 않아서 조금은 다행인 것인가. 그녀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드디어. "으아악 !" 드디어 죽는구나. 나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이제 손을 놓아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생존본능으로 똘똘 뭉쳐진 내 팔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총을 맞았으니 죽음의 길로 걸어가야..... "어?" 이상하다? 이건 내가 지른 비명이 아닌데? 그럼 클라라가? 하지만 그녀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럼 우리가 아니라는 건가? 심지어 군인들조차,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럼 뭐야? 그녀의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우리가 총에 맞은 게 아니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도 아픈 데가 없다. 총에 맞았으면, 뭔가 자각증상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럼 이건. "누가 지른 거지?" 설마 이 광경을 보고 잔인하다며 피난민이 지른 건 아닐 것이고, 그럼 어째서? 어디서? 누가?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상황을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런 건 나중에 하자. 아래를 쳐다본다. 좀비들이 있고, 불타는 차가 있고, 부서진 건물과 가로등이 보이지만, 그리고 피와 유리조각으로 엉망이 된 도로도 보이지만, 그쪽은 아니었다. 이 비명은 좀 더 가까운 데서 나온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설마." 나도, 클라라도, 그리고 군인들도 공포에 질린 눈으로, 헬리콥터 안쪽, 피난민들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좀비다 !" 좀비들이 있었다. 피난민들 사이에.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것은. "꺄아악 !" 좀비들 사이에 앉아있던, 피난민들의 비명뿐이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5화 달 아래의 소녀 (1) 도시는 불타고 있었다. 경찰들이 쏜 총알이, 군인들이 쏜 포탄이, 사방에 맞고 불길을 일으켰고, 그것은 좀비들을 태웠지만, 사람도, 차도, 심지어 도시도 태우고 있었다. 그 사이를 살아남은 자들이 생존을 위해 뛰어다니고, 그 뒤를 굶주린 좀비들이 쫓아간다. 몇 명이 잡혀서 쓰러진다.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 자신이 다른 이들을 쫓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크아악." "아악." 이 도시에 와서 언제나 보아왔던 일이, 헬리콥터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찾아서 잡아먹고, 산 자는 죽은 자를 피해 달아나는 그 일이. 우리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좀비들은 피난민들을 향해 굶주린 입을 향했고, 군인들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블라블라블라 !" 아무도 총을 쏘지 못했다. 피난민들과 좀비들이 뒤섞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지금 헬리콥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방아쇠를 당기면 헬리콥터는 추락할 것이다. 모든 총알이 좀비에게만 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좀비가 총알 몇 방에 죽어주지도 않으며, 그들을 없애기 위해 수류탄이나 화염방사기를 쏘면, 헬기에까지 불이 붙을 것이니까. 만약 이게 게임이라면 좀비들의 머리만 맞춰도 정리되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총알이 저절로 좀비들에게만 맞고, 피난민들을 알아서 피해 가는 건 아닌 것이다. 결국. "크으으." "으악 !" "카아아." "아아악 !" 누구도 총을 쏘지 못하는 사이에, 피난민들은 모조리 좀비들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그렇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잠시 망설이는 동안에. 그들의 어설픈 인도주의가 모든 이를 시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차라리 방아쇠를 당겼다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 다음 목표는. "크아악." 좀비들은 이제 살기등등하여, 군인들에게 덤벼들었다.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총을 쏘면 헬기가 파괴되니까. 그러나 몇 대 맞았다고 살육의 본능을 잠재울 좀비들이 아니었고, 그들은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아니, 피난민들까지도 이제 시체의 군대에 입대했다. 그들은 입을 벌리고,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군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그리고 결국은. 우드득. "아아악." 군인 하나가 팔을 잡혔고, 수 십 개의 팔이 그를 붙들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용을 쓰지만, 이미 좀비 하나가 그의 팔을 깨물었다. 그의 비명이 헬기의 모든 이들의 귀를 찔렀고, 그의 팔은 곧 떨어져 나갔다. 피가 사방으로 튄다. 좀비들은 그 피를 보더니, 더욱 기세를 올린다. 곧이어 또 다른 군인이 다리를 잡혔고. 와드득. "아아아악." 하지만 그는 곱게 죽어주지 않았다. 다리를 물리고, 좀비들이 그를 덮치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는 수 십 마리의 좀비들을 모두 막을 수가 없었고, 곧 그도 고깃덩어리가 되어 좀비들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아아아아 !" 세 번째 목표가 된 군인이, 별안간 총을 겨누더니 좀비들을 쏘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사색이 되어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좀비들이 덮치는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총알을 맞은 좀비들이 뒤로 튕겨나가고, 머리가 터지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 총알은 모두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것은. 퍽퍽퍽. 곧 헬리콥터의 엔진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헬기는 갑자기 옆으로 크게 기울었고, 우리 모두는 비명을 질렀다. 그렇다. 우리는 추락하게 된 것이다 ! "클라라 !" 일이 이렇게 되다니. 나는 클라라를 한 손으로 꼭 끌어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헬기 다리를 잡았다. 물론 두 다리를 꼬아서 헬기에 달라붙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다가, 곧 나를 따라한다. 하지만 이래가지고는 죽기 딱 좋다. 헬기가 그대로 추락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좀비들은 우리처럼 행동이 신속하지 못했고. "크아악." 일제히 아래로 떨어졌다. 안전벨트도 메지 않고,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날뛰던 그들은 마치 둑이 무너지듯 지상으로 쓸려 내려갔다. 하긴 헬기 자체에 너무 많은 피난민을 실어서 문을 닫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옆으로 헬리콥터가 기울어졌으니 이런 결과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팔을 물려 뭔가를 잡을 수 없었던, 불운한 군인도 아래로 떨어진다. 전우들이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그는. "아아아아아." 내 옆으로 떨어지던 그의 표정. 그것은 군인의 그것도 살인자의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불쌍한 시골 청년의 그것에 불과했다. 그는 나에게 팔을 뻗으려고 했으나. "크아아." 추락하던 좀비가 그를 먼저 붙들었다. 좀비는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살육본능을 참지 못한 듯 그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비록 그의 방탄조끼로 인해 이빨이 잘 박히지 않음에도, 그 좀비는 계속 그를 물었다. 나락으로 떨어져가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도 곧 그 뒤를 따를 것 같다. 헬리콥터는. 부릉. 부릉. 거친 엔진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갈 것 같다. 조종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만 해도 알겠다. 물론 그는 백인이니 원래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하나도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가 뭐라고 외친다. 군인들이 굳어진 표정으로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런데 뭐라고 하는 거야? "클라라 !" 거센 바람과,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물리치려면 큰 소리가 필요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상황을 말해준다. 언제나처럼 나쁜 소식이었지만. "헬기가 고장났어요. 비상착륙을 시도한대요." 비상착륙? 다른 곳도 아니고, 좀비들이 버티고 있는 이 도시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거야? 주위의 헬리콥터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지만........... "나쁜 자식들 !" 그들은 우리 헬기에 좀비가 나타나자, 아예 버려 두고 튀고 있었다. 이런 못된 인간들이 다 있나. 그래. 이제 여기 탄 모든 사람들이 감염자라 이거지? 그러니 죽든 말든 알 바가 아니라 이거지? 저런 것들은 여동생한테 보내서 아침부터 밤까지 신나게 두들겨 맞아야 해. 물론 여기서 외친다고 들을 녀석들이 아니다. 벌써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 결국 우리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저 사람들, 처음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어. 한숨을 쉬는 나에게. "Hey. Are you ok? kid(이봐. 무사하나? 꼬마)." 뭐가 꼬마야? 뭐가. 일단 영어로 묻는 건 다행이지만, 왜 굳이 꼬마라고 부르는 거야? 물론 내가 독일인들보다 키가 작아서 그렇다는 건 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미성년자라고 해도 꼬마가 뭐야. 꼬마가. 하긴 클라라는. "미스터 문구." 내 성은 '연'이지, '문구'가 아니라고.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대답을 했다. 총알이나 화염방사기보다는 신사적인 질문이었으니까. 그래서. "I'm not fine because of you(당신네들 덕택에 평안하지 않아요)." 상당히 무례한 대답이지만, 조금 전에 그들에게 총 맞아 죽을 뻔한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예의를 차린 대답일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저씨.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올라와." 손을 내밀었다. 응?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 헬기는 곧 착륙해야 해. 총알이 엔진을 뚫는 바람에 당장 착륙하지 않으면 추락해버리니까. 둘 다 각오를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아." 우리를 끌어올린 군인들이 한 말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놀라는 건 이제 익숙해지긴 했지만, 나쁜 소식은 언제 들어도 끔찍한 법이니까. 그나마 그들이 우리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사실은 그게. '똑같이 버림받아서 그런 거 아냐?'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기야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생존자끼리 협력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좀 기분은 나쁘지만, 그들과 협조하기로 했다. 사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지만. "어디로 내릴 건가요?" 그게 문제였다. 만약 착륙장소를 잘못 골랐다고 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좀비들의 동료나, 그게 아니면 근사한 아침식사가 될 것이니까. 하지만 도대체 이 도시의 어디에 안전한 장소가 있지? 온통 불길 아니면 좀비뿐인데. "경찰서로 갈 거야." "네?" 그러다가 또 '감염자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식의 대우를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조금 전에 그들이 나와 클라라에게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던가. 의구심을 갖고 쏘아보는 두 소년 소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걱정할 것 없어. 거기엔 그런 사람은 없으니까." "어떻게 알아요?" "이미 좀비들한테 점령당했거든." 이 아저씨가.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그 말은 즉. "그럼 거기엔........" 클라라가 굳이 벌벌 떨 필요도 없었다. 나도 같이 벌벌 떨기 시작했으니까. 둘이 같이 있으면 용기가 솟느냐고? 용기는 무슨. 공포만 솟는다. 사이좋게 벌벌 떠는 우리를 보면서 그는. "걱정 마. 꼬마들. 거기엔 좀비가 없으니까. 여기 오면서 확인해 봤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아니. 좀비들이 경찰서에 들어갔다면, 사람들을 잡아먹느라 바쁠 텐데, 어째서 좀비가 없다는 거야? 그 말에 군인 아저씨께서 친절하게 설명하시길. "그들은 사람을 쫓아다니니까, 사람을 다 먹고 나면 그 장소에 머물지 않아. 공중에서 본 바로는, 대부분은 사람들이 대피한 백화점이나 병원, 그리고 시 외곽의 저지선에 몰려 있어. 그러니 우리가 준비를 마칠 동안은,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을 거야."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건 바로.... "거리가 너무 머니까......." "그렇지. 꼬마가 똑똑한데." 똑똑하니까 지금까지 목숨을 붙이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 더 말할 게 있는 줄로 아는데? 그가 상당히 계면쩍다는 듯이 마무리한다. "아까는 미안했다. 감염되었다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것도 잊었으니."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단 손을 내밀었다. 두두두두두. 헬기는 연기를 뿜으면서 경찰서 앞에 내려앉았다. 헬기가 내려오자마자, 우리는 모조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단순했다. 군인들의 말로는. "장갑차 하나를 확보해서 빠져나갈 거야. 여기 오면서 본 바로는 장갑차 몇 대가 경찰서 앞에 있었으니까, 그 중 하나쯤은 움직일 거라고 봐. 그걸 쓰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좀비들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되었을 게 뻔한 그 장갑차가, 과연 제대로 움직일 것 같나요? 헬기가 그 앞에 내리는 순간까지, 나는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헬기가 착륙하는 순간. "나가자 !" 나는 뛰어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멀쩡한 장갑차 하나라도 잡아야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나도 무기가 있어야 해.' 그렇다. 더 이상은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무찌르는' 건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이제부터 몰려올 좀비들은, 분명히 대규모일 것이다. 여기는 길 한가운데이고, 사람을 먹고 싶어하는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까. 나 자신부터가 좀비들의 대군에 쫓겨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바로 조금 전에. 그러니. "I need my M14(나에겐 내 M14 소총이 필요해)." 아. 이게 아니었나? 어쨌든 소총이든 기관총이든 가릴 게 아니었다. 뭐든 들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블라블라블라." 어느 게 멀쩡한 장갑차인지 알아볼 능력이 없으니, 무기나 찾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무기가 흩어져 있었다. 역시 경찰서 앞이라서 그런가. 그러나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희미한 핏자국과 옷 조각만 널려 있을 뿐. '알맹이는?' 다른 건 몰라도 뼈도 피도 안 남다니. 설마 이 자식들이 뼈까지 다 씹어서 삼키고, 바닥에 흘린 피까지 다 핥아먹은 거냐. 물론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피가 어딘가에서 흘러 다니면서 사람을 향해 '아아아. 피가 모자라.'라고 외치며 덤빌지도 모르고, 뼈가 스스로 통통 튀어 다닐 수도 있는......... 나는 억지로 그런 상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는, 당장이라도 그 광경이 현실이 될 것 같아, 두렵기 때문에.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무기를 찾아야 해.' 하지만 내가 무기를 볼 줄 알아야지.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아직 나이가 안 된 탓에 군대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느 게 어느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내 옆에 있던 클라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I need your help(네 도움이 필요해)." 어느새 군인 한 명이 와서, 무기를 골라내고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건가.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무기를 한 번 집었다가, 그대로 내버리고 있었다. 왜 아깝게 무기를 그냥 버리는 거야? 이 판에. 하지만 그는 무기에서 뭔가를 뽑아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이거 들고 가." 그는 큼지막한 군용 배낭 하나를 가져와서,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 안에는 각종 탄약통이 그득해서,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는 그제야, 그가 뭘 뽑아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클라라가 좋은 소식을 전했으니. "폭스 장갑차 하나가 움직인대요." 뭐? 하나? 좀 섭섭하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차가 있다는 게 어디인가. 일단 살아나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를 입수했다는 것에,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군인들이 즉시 장갑차에 타지 않고, 뭔가 호스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도 없는데 뭐 하는 짓이냐. 하지만 클라라의 말을 듣자, 나는 불만을 토할 수 없었다. "다른 차에서 기름을 옮겨 담아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래요." 하긴. 어차피 우리 인원이 적으니까, 차 하나에 모든 무기와 기름을 집중해서 담고, 나머지는 버리고 간다는 건가. 하긴 군인 세 명에 민간인 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력을 나누는 것은 너무 위험한 짓이겠지. 장갑차 자체가 꽤 크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기름을 옮겨 담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빨리 하라고 해." 언제 좀비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벌벌 떠는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다 ! 이럴 때는 그저 두 병사가 서둘러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남은 한 명의 병사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장갑차 안으로 무기와 탄약을 나를 수밖에 없었다. 클라라 역시 부지런히 무언가를 나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무거워 죽겠다고 ! 더군다나. "큰 게 좋다." 이게 모토인 이상, 우리의 팔은 더더욱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좀비들 상대로 권총이 통하겠는가. 지금 자살용 무기를 찾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장식품은 내다버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대가 사람이라면 쓸만하겠지만, 상대는 총알 몇 발 맞고 죽어줄 만큼 연약하지가 않으니까. 이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아예 불태워버리거나, 폭탄으로 다 날려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고 아름다운 무기를 우선적으로 찾아서 장갑차에 넣어야 했고, 그것도 최단시간 내에 일을 끝마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디까지 가야 안전할지 모르니까. '죽겠다.' 하지만 클라라 역시, 끙끙거리면서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불평할 수는 없다. 내가 살아남는데, 이 무기들이 도움이 될 것이니까. 그리고 드디어. "기름을 다 넣었대요." 장갑차에서 남은 탄약을 꺼낸 우리들은, 마지막 짐을 장갑차에 넣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뛰고 싶지만,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인지 그게 안 된다. 특히 클라라의 경우, 우리 중 가장 체력이 약하기에 그만큼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짐을 장갑차 안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짐을 나눠지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크아악." 그 소리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드, 드디어 나타나신 건가. 나는 잽싸게 클라라가 들고 있던 탄약통을 몇 개 낚아챈 후, 죽어라 장갑차 안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제 곧 녀석들이 올 것이다. 배고픈 위장을 움켜쥐고서 말이다. 클라라도, 다른 군인들도 급히 장갑차 안으로 달려왔고, 즉시 문이 닫혔다. 장갑차가 부르릉거리며, 힘을 쓰기 시작했다. "빨리 !" 영어와 독일어가 뒤섞인 간절한 바램이 장갑차에 통했는지, 장갑차는 거칠게 도로를 긁으면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좀비들이 뒤늦게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 발 늦고 말았다. 그들이 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휴우." 우리는 좀비들을 뒤에 남겨두고, 살아날 길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자. 이건 이렇게 쓰는 거야. 알겠습니까? 학생 여러분." "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우리는 군인에게서 총 쏘는 법을 배웠다. 안 배우고 싶어도 살기 위해선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인이 고작 세 명인데, 그들에게만 생존을 의지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독일어를 쓰는 클라라는 그렇다 해도. '난 독일어를 모른다고.' 그게 탈이었다. 결국 영어로 부연설명을 들어가면서, 나는 총을 다루는 법을 익혀야 했다. 이 경우는 총기를 분해해서 청소하는 게 아니라, 사격하는 법만 익히면 되었지만, 어쨌든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장갑차 안에 우리가 밀어 넣은 무기는. "MG4 기관총, MG3 기관총, Mk 19 유탄기관총, 판저파우스트 3, 화염방사기......." 이걸 다 다뤄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M2HB 중기관총은 군인 아저씨가 다룬다니까 조금 나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여기에 우리는 소이수류탄까지 다뤄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내가 람보가 되어야 하는 거야? 우리가 만약 전차를 탔다면, 나는 20kg이 넘는 포탄을 장전하는 일까지 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탱크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어쩌겠나. 배워야지. 나는 억지로 무기 조작법을 머리에 구겨 넣었고, 장전도 안 된 총으로 사격자세도 취해보았다. 하지만 곧 나는 여기에 총알을 넣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사격을 하기 위해서. 내가 제대로 적을 맞출 수 있을지도 두려웠지만, 더 두려운 것은. '실수하면 우린 다 죽는다.' 지금까지는 나 하나의 목숨만 챙겼다면, 이제는 여기 있는 다섯 명 모두의 목숨이 우리들 하나 하나의 어깨에 달리게 되는 것이다. 다섯 중 한 명만 실수해서 좀비들이 이 차에 들어와도, 우리 모두는 죽을 수 있었다. 이게 전쟁이란 건가. 나는 평소에 전쟁게임을 좋아했던 것을 미칠 듯이 후회했다. 실제로는 이렇게 두려운 일인데, 그렇게 천하태평으로 즐길 수 있었다니. 손이 떨린다. 멈추지 않는다. 과연 나는 해낼 수 있을까. 쿵. 그런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듯한, 울림이 우리를 뒤흔든다. 도로 상태가 나쁜 모양이다. 슬쩍 밖을 내다보고 싶지만, 솔직히 무서워서 못하겠다. 이제야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일까.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데 너,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나에게 말을 건 것은, 총 쏘는 법을 가르친 그 군인이었다. 더불어, 조금 전에 헬기에 매달린 나를 구해준 바로 그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네." 일단 대답은 했다. 그러나 그건 왜 묻는 거냐? 솔직히 나에게는 아직 사살 당할 뻔한 기억이 남아 있기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뢰를 줄 수 없기도 했다. 총부리를 나에게 겨눈 사람들에게, 그리 쉽게 마음을 주겠는가. 물론 여기에는 그 무능하게 보이는 장교가 없었으므로, 판을 뒤엎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그 인간은 아마. '죽었을 거야.' 좀비들과 함께 멋지게 떨어졌으니,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하긴 그를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특히 그 근육 덩어리 아저씨의 경우, 정말 비참했다. 좀비들에게 산 채로 잡혀 먹혔으니까. 그나마 나는 그에 비하면 행운이었다. 마음을 곱게 쓴 탓일까. 그게 아니면 정의가 승리한 것일까. 하지만 씁쓸한 승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걸까. "젠장."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울 수 있는 자유도 없다.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무엇을 묻고 싶은 거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이름을 듣고 싶은데? 언제까지나 꼬마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까." 그런가? 하긴 나도 이 사람들을 모조리 뭉뚱그려서 군인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에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위에서 시키니까 그런 거지. 그래서 나는 마음을 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이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Moon gu. It's my first name(문구. 그게 내 이름입니다)." 성씨가 last name이니까, 그걸 확실히 말해야 했다. 누구처럼 미스터 문구라고 부르는 걸 또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군인들도 자기 이름을 차례로 소개했다. 아니, 그들의 경우는 성씨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리하르트 그라스, 미하일 슐츠. 그리고......... 비트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머리를 싸매던 나는 그가 뭔가를 빠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What is your first name(성씨 말고, 당신 이름은 뭐지요?)." 왜 성씨만 말했을까. 그러나 그는. "그건 묻지 마요." 왜, 왜, 왜 안 알려주는 겁니까? 뭔가 이름에 큰 비밀이 있는 겁니까?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를 추궁하려고 했지만, 그는 애써서 손사래를 치며 거부한다. 내가 더욱 그에게 답을 강요하려고 했으나. "놈들이 온다." 슐츠, 그러니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바로 그 군인이 외쳤다. 밖을 감시하다가, 놈들을 발견한 모양이다. 우리 모두는 즉시 지붕을 열고, 위로 올라갔다. 아. 물론 그라스는 제외하고. 그는 운전을 맡았으니까, 당연히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탄을 아껴 써. 기관총으로는 놈들을 죽이지 못하니까. 다만 장갑차에 못 올라오게 하면 되는 거야." 모조리 지붕을 열고, 주위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했다. 사람이 모자라니 별 수 있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슐츠가. "이런 일까지 시켜서 미안하다. 하지만, 꼭 살아남자 !" "Of course(물론) !" 당연하지. 난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고. 우르르르르. 좀비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난 걸 보니, 이 근처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저들은 먹이가 있는 곳에만 몰려다닌다니까. 하지만 저들이 이리로 온다는 것은. '큰일났다.' 아무리 우리가 장갑차에 탄약을 왕창 실었다고 해도, 역시 이럴 때는 언제나 적게 보이는 법이다. 비록 열 명은 탈 장갑차에 다섯 명이 타고도 비좁아서 낑낑거릴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가져왔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앞쪽에도 있어 !" 좀비들은 우리의 뒤쪽에서만 오지 않았다. 좀비는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었고, 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런 그들이 뒤에서만 오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네 방향을 한 명씩 맡아서, 좀비들을 제지하기로 결정했다. 앞은 슐츠, 후방은 비트만, 우측은 클라라, 그리고 좌측은. '내가 왜 이런 일을.' 졸지에 독일군 기계화부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적은 2차대전시의 소련군이 아니라, 좀비 군단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엄청난 숫자로 밀어붙이는 인해전술만은 똑같다. 무서워라. '어째서 내가 이런 무지막지한 중임을 맡은 거야.' 이럴 바에는 탱크라도 내놓으라고 ! 하지만 상대는 전차가 아니니, 이쪽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전차는 대포와 기관총을 가지고 있지만, 네 방향으로 무기를 휘두를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우리가 전차를 탔다면, 탄약을 여분으로 가지고 갈 수가 없다. 거기에 하나 더 하면. '난 뭘 해야 하는 거야?' 차장? 안 되지. 전차를 타 본 적도 없는 걸. 조종수? 그건 더 안 되지. 난 운전면허도 없다고. 그럼 포수? 난 대포는 만져본 적도 없다. 그러니 무리. 그럼 남은 건 장전수? 포탄을 손으로 낑낑거리며 나르는 그 장전수?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일행은 다섯 명이라고.' 전차는 정원이 네 명이니, 전차를 모는데 도움이 안 되는 나는 당연히 전차 지붕 위에 매달려야 할 위험이 컸다. 물론 클라라가 장전수를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곳에다 던져둘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장갑차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무기도 잔뜩 있으니 말이야.' 나는 아까 조작법을 배운 MG4 기관총을 거머쥐었다. 이게 과연 제대로 작동할지는 모르지만, 독일제니까 제대로 되었겠지. 이걸 만든 회사가 불량품 전문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듣자하니 SA80인가 뭔가 하는 영국군 소총은 사시사철 고장만 난다던데, 설마 이 총을 만든 회사가 그런 고물총을 만든 회사와 동일하지는 않........ "같은 회사 맞는데?" 이 아저씨가. 누구 놀리시는 겁니까. 얼굴이 새파랗게 된 나를 뒤로 두고, 슐츠가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친다. 아이고. 독일어라서 무슨 구호인지는 모르지만. "Panzer Vor(판저 포 : 전차 전진)!" 하지만 나한테는 '블라블라블라'하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구호로 들렸다. 어쨌든 슐츠의 그 외침과 더불어, 우리의 전투는 시작되었다. 두두두두두. 나는 열심히 MG4 기관총을 갈기고 있었다. 일단 이렇게 되었으니, 죽어라 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탄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내가 가장 먼저 노린 것은 이 달밤에 빛나는 머리를 가진, 뚱뚱한 좀비였다. 가장 앞에 있고, 가장 덩치가 커서 최우선 목표가 된 것이다. 어차피 이 기관총으로는 좀비를 갈가리 찢을 수는 있어도,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넘어뜨리는 것만으로도 내 임무는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녀석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키에엑." 장갑차에 올라오지만 못하게 하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겨눈 것은 분명히 풍선 같은 좀비인데. 두두두두두. 이상하게 옆에 있는 좀비들만 맞는 거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다시 조준을 하려고 했지만, 앗 하는 사이에 그 좀비는 멀리 사라졌고, 다른 좀비들이 내 앞으로 몰려왔다. 왠지 못 맞춘 게 약오르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좀비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두두두두두. 이상하게, 또 옆에 있는 좀비가 맞았다. 이거 미치겠네. 장갑차가 너무 빨리 움직여서 그런 건가. 차를 멈추고 쏘면 더 잘 맞을 것 같지만, 지금 그런 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하면 안 된다.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판에, 멈추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잡생각을 집어치우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철컥. 철컥. 뭐야. 벌써 총알이 다 된 거야? 하긴 기관총이니까 그것도 말은 된다. 1초에 10발씩 날아간다고 치면 10초에 100발, 그리고 내가 이 총에 끼운 탄약통은 분명히 100발 짜리. 슬쩍 보니 예상대로 비어있다. '젠장.' 나는 서툰 솜씨로 새 탄약통을 꺼내서 재장전을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가 겨눈 목표에 한 번도 못 맞추는 거야? 물론 나는 초보이긴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갑자기 끊어진다. 옆에서 잡소리가 섞이니까. 그것은 비트만의. "이봐. 미스터 문구. 계속 쏴." 으이그. 이 사람도 날 미스터 문구라고 부르는 겁니까. 생각해보니 나는 그에게 '연'이라는 성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런 대실수를. 결국 나는 '연'이라는 말을 내뱉지 않은 탓에, 미스터 문구로 굳어지고 만 것이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이라고 할까.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적어도 이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는. 두두두두두. "크으윽." 미스터 문구로 남을 수밖에. 나는 눈물을 속으로만 흘리면서, 다른 좀비를 조준했다. 아니, 이 경우는 조준이고 뭐고 없다. 직면하고 싶은 현실은, 내가 조준하고 쏴도 안 맞는다는 것이니까. 물론 쏘다보면 나아지겠지만, 어차피 조준할 필요조차 없다. 쏘면 맞는 게 아닌가. 상대가 너무 많으니까. 두두두두두. 좀비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물론 내가 조준한 좀비들이 아닌, 다른 좀비가 말이다. 그래서 나와 클라라에게 측면을 맡긴 건가. 사격 솜씨가 엉망이니까. 하지만. 두두두두두. 왜 클라라는 제대로 맞추는 거야? 물론 그녀도 나와 같은 현상에 고통을 겪고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하려고 해도. "크아악." 이래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나는 다시금 열심히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옆에서 다가오는 좀비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으니. "차가 달리는 탓인가?" 하긴 차의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옆으로 뛰어오르는 건 쉽지 않겠지. 게다가 옆으로 오는 것보다는 앞이나 뒤에서 들이닥치는 게 쉬우니까. 그러나 그쪽은 군인 아저씨들이 잘 막고 있었다. 일단 앞으로 오는 녀석들은. "크아악." 슐츠의 무지막지한 화염방사기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단순한 기관총탄이 좀비들의 사지를 찢을 수는 있어도 그들을 죽일 수는 없는 반면, 그가 쏘는 건 불길인 것이다. 안 그래도 잘 타는 녀석들이, 연쇄적으로 날아오는 용의 입김에 맞고도 살아남는 것은 무리였다. 장갑차가 빠르게 전진하는데도 저 정도로 불길이 날아갈 정도라니. 대단하다. 하여튼. "카아악." 기관총에 맞아서 넝마가 되는 녀석,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녀석, 그리고 불길을 피하던 다른 좀비들에게 깔리는 녀석 등. 우리의 장갑차는 그런 식으로 녀석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뒤에서 따라오는 좀비들에게는. 쾅쾅쾅쾅쾅. 비트만이 중기관총으로 녀석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마치 마술처럼 좀비들의 행렬은 차단되었고, 우리는 그 틈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독일군인가. 과연 과거에 세계정복을 기도했던 군대다웠다. 뭐 어쨌든. 두두두두두. "크에엑."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를 날뛰는 무법자가 되어 있었다. 다만 가끔씩. "조심해." 차가 급회전을 해서 그렇지. 그럴 때마다 나는 죽어라 사격을 하면서, 몸을 차에 고정시켜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한탄하기도 전에. "크아악." 이 녀석들이. 앞의 건물에 올라가 있던 좀비들이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나와 클라라가 어줍잖은 자세로 기관총을 들어올리려고 하지만,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게 맞다. 총을 들어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여자아이가 기관총을 차에 걸쳐놓고 쏘는 것도 버거운데, 무슨 대공사격이냐. 그렇다고 내가 제대로 좀비들을 쏜 것도 아니다. 총을 쏜 건. 쾅쾅쾅쾅쾅. "카아악." 비트만이었다. 중기관총에 맞은 좀비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진다. 그런데 저 조각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먹고 싶어서 환장하는 것들이 아니었나? 나는 그것들이 장갑차 위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지만. 철퍼덕. 장갑차가 너무 빨리 달리는 탓인지, 그게 아니면 총탄의 위력에 녀석들이 뒤로 밀리면서 박살난 탓인지, 어쨌든 그 조각들은 모조리 장갑차 뒤쪽에 떨어졌다. 녀석들이 펄떡거리며 이리로 오려고 하지만, 곧 다른 좀비들의 발길에 깔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트만이 클라라에게 외친다. "아가씬 우측만 맡아." 하긴. 우리 실력으로 대공사격이 왠 말이냐. 게다가 그가 위로 총구를 돌리는 동안. "크아악." 장갑차 뒤로 좀비들이 따라붙고 있었으니까. 비트만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지만,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이런. 재장전을 해야 하나. 그가 재빠르게 다른 무기를 꺼내들려고 했으나, 좀비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안 돼." 나는 재빨리 MG4 기관총을 그쪽으로 향하게 했다. 위로 드는 건 못하지만, 옆으로 돌리는 건 총을 통째로 들 필요가 없으니 충분히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충 총구가 겨누어지자. 두두두두두. 즉시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어차피 제대로 조준해도 안 맞으니, 위협만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 물론 비트만한테 안 맞도록,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총구를 넣는 걸 잊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크에엑." 좀비들이 뒤로 밀려났다. 몇 마리가 쓰러지면서, 자기 동료들에게 깔려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는 매우 좋았지만, 나는 총을 다루는데 있어 초보자였으므로 총이 확실히 고정되지 않았다. 즉 총구가 마구 흔들렸고, 총의 몸통이 옆에 있는 누군가를 마구 때렸다는 뜻이다. 물론 총구를 앞으로 삐쭉 내밀었으므로, 그에게 총알을 먹이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아뜨뜨 !" 비트만의 옆구리를 마구 구타하고 말았다. 그는 느닷없는 기습에 켁켁거리기야 했지만, 그래도 장갑차에서 떨어지거나 엎어지지는 않았다. 과연 독일군다워. 하지만 그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쏘아본다. 당연하다. 그가. "야 ! 꼬마 ! 총 좀 제대로 다뤄 !" 하지만 그건 무리한 요구였다. 어쨌든 나는. "배운지 5분도 안 됐잖아요." 솔직히 총을 잡은 적도 없는, 멍청한 신병치고는 꽤 잘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말만 남기고, 재빠르게 내가 맡은 구역으로 총을 돌렸다. 기관총이 불을 뿜으면서, 좀비들이 나동그라진다. 그리고 한 마디 더. "안 그랬으면 좀비가 올라왔다고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녀석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전혀 없다. 한 마리라면 감당하지만, 열 마리를 어떻게 혼자서 때려잡겠는가. 게다가 내 총 솜씨도 솔직히. '엉망진창이니.' 어떻게 100발의 탄약통을 다 비우면서, 원래 노린 좀비 하나 제대로 못 맞춘단 말인가. 실제로 지금의 사격도 내가 노리는 좀비한테 맞는 게 아니라. 두두두두두. "크에엑." 그 옆의 좀비들만 박살내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겨눈 좀비는 총알을 전혀 맞지 않았고, 계속 자신의 배고픈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올 수 있었다. 그들이 차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두두두두두. "크에에엑." 도미노라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즉 내가 겨눈 좀비는 안 쓰러지지만, 그 옆의 좀비가 총에 맞기 때문에,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좀비에게 녀석이 깔려서(!)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절묘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비트만이야. "잘 하고 있어. 꼬마." 그렇게 말하지만, 이건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런 소 뒤 발꿈치로 쥐를 잡는 현상이 과연 얼마나 계속되겠느냔 말이다.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역시. '정확히 맞추면 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군인은 명사수일 것이다. 나로서는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주위 환경은 너무나 나빴다. 물론 양각대를 펴고, 총을 차에 내려놓았으니 나름대로 안정적인 자세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덜컹. 덜컹. 이게 문제다. 장갑차가 아무리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속도가 장난이 아닌 데다가 바닥에 이상한 물체, 즉 죽은 사람의 가방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심지어는 좀비들이 먹고 남은 사람 뼈라든가, 그런 잡다한 물체가 깔려 있는 바람에, 어느 정도는 쿵쾅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노리는 좀비를 제대로 맞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쏘는 사람의 실력도 문제가 있지만. '하지만 그래도.' 맞춰야 한다. 원래 사격이란 것도 다른 일과 똑같이, 계속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내가 여태까지 탄약통을 몇 통이나 썼는데, 아직도 목표물 하나 못 맞춘단 말인가. 또 하나의 탄약통을 갈면서, 나는 생각했지만. '잊어버렸다.' 그렇다. 나는 일일이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수의 탄약통을 쓴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좀 제대로 맞춰야 할 게 아닌가. 그나마 발전한 것이 있다면. "크아악." 내가 탄약통을 갈 동안에는 좀비가 안 온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단지. '눈썹이 휘날리게 끼우니까.' 이유라면 그것뿐이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닌가. 그러니 빨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다시금 총을 겨누었고, 좀비들은. 두두두두두. 또다시 나동그라졌다. 일어서려는 좀비들은 다른 좀비들에게 깔리고, 그런 좀비들을 뒤에 버려둔 채 우리들은 계속 달릴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만 가는 걸 아쉬워해서 그런 건지, 좀비들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야. 따라오지 마. 이것들아. 그래서 우리는 작별선물로 열심히 총탄을 퍼부었고, 그들은 팔다리가 잘린 채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정말 유감스러운 것은. 쉬이익. 그들의 팔다리와 내장이 통통 튀면서, 바닥을 기면서 따라오는 거다. 그러나 조각난 녀석들이 뛰어봤자 벼룩이다. 으깨진 내장이 아무리 서둘러봤자, 자신을 추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뽀드득. 이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좀비들이 그 내장을 밟는 소리다. 그들은 그런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그런 광경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행렬은 점차 우리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발로 달리는 녀석들이, 그것도 발이 두 개밖에 없는 녀석들이 장갑차를 따라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크르륵." "키에엑." 우리는 탈출할 수 있을 듯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시 외곽이니까. 아까 병사들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시 외곽에는 군대가 있고, 그들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잠깐. 그렇다면 그들은........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무언가가, 생각을 끊어놓았다. 저것은. "바리케이트?" 반쯤 부서진 자동차 하나가, 길을 막고 있었다. 군인들이 좀비의 습격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건가. 그게 아니면 도시에서 달아나다가 좀비들에게 습격 당한 시민의 것인가. 옷가지와 가방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후자 같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가로막은 장애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부딪친다 ! 모두 꽉 잡아 !" 누가 외쳤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 외침과 함께, 장갑차는 그대로 자동차와 충돌했다. 벤츠인지 BMW인지 폴크스바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상대 자동차가 옆으로 휙 돌아간다. 저게 작아서 그런 건가. 그게 아니면 이 장갑차가 독일제라 튼튼한 탓인가. 우리는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갔지만, 도로가 좁은 탓인지 가로등과 차가 부딪친다. 쿵. 우리 모두는 장갑차를 필사적으로 잡은 채, 총을 끌어안았다. 이 판에도 총을 지켜야 하다니. 정말 군인 다 됐군. 빨리 제대해야 하는데, 물론 그건 이룰 수 없는 소망이다. 어차피 내가 올림픽에서 메달이라도 못 따면, 난 또 총을 들어야 한다. 아이고. 못 살아. 남들은 한 번도 싫다는 군 생활을 두 번이나 하다니. 지금은 첫 번째 제대 날짜가 빨리 오기만을 기원할 뿐이다. 잠깐. 이 가로등이 우리 차를 막았다면. '차가 멈추는 거 아냐?' 소름이 확 돋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콰당탕. 가로등은 그대로 장갑차에 밀려 쓰러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의 장갑차는 다시금 속도를 붙여 나간다. 휴. 살았다. 나는 이 장갑차가 튼튼하다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매우 기뻤다. 여기서 이 차가 고장이라도 났으면. "크에엑." 우리도 저 꼴이 되었을 게 아닌가. 우리 장갑차에 부딪친 차는 이리저리 팽이처럼 돌고 있었고, 좀비들은 거기에 치여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좀비들이 수가 너무 많은 탓에, 그들은 그 차를 피할 수가 없었고, 당연히 그들은 차에 깔리고, 뒤에서 뛰어오는 자기 동료들에게 또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좀비들은 앞에 넘어진 동료들에게 발이 걸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려다가 뒤에서 또 달려온 다른 좀비들에게 밟히고, 하여간 아수라장이었다. 비트만이 그걸 보면서 한 마디. "자. 선물이다." 그가 중기관총을 갈겼다. 총탄은 자동차에 집중적으로 명중했고, 곧 그 차는 우리 모두가 바라던 최후를 맞았다. 그것은. 펑. 뭐 이런 거다. 영화에서는 자주 봤지만, 내가 직접 그걸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 보게 되었다. 좋은 풍경이었다. 비록 좀 시끄럽기야 하지만, 얼마나 보기 좋은 광경인가. 산더미처럼 쌓인 좀비들이 불에 타오르고, 거대한 불벽을 만들어내는데. 뭐? 사람 타는 게 보기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저게 솔직히 사람이냐? 시체지. 그것도 흉악무도한 시체, 사람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시체가 아니냐. 그런 게 타는 장면이 비인도적이라고 한다면, 우린 그냥 죽으란 소리냐. 우리의 장갑차는 그런 그들을 뒤에 남겨두고, 자유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됐어. 따돌렸어." "와아." 우리는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물론 다른 좀비가 옆이나 앞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므로 총에서 손을 놓지는 못했지만, 이 도시에 와서 모처럼 듣는 기쁜 소식이 아닌가. 환호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디로 나갈 거지요?" 물론 어디로 갈지는 뻔하디 뻔한 일이다. 도시 외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가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이 도시에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여유를 되찾으니 떠오른 생각은. 하필이면. "감염자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나는 갑자기 그게 걱정이 되었다. 만약 군인들이 우리를 보고 '감염자'로 생각해서 마구 총질을 한다면?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까지 와서 도시 한가운데로 돌아가는 건 무리이다. 안전한 대피소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도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끝장이다. 우리가 가진 무기가 무한정 솟아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슐츠가 주위를 경계하는 동안, 비트만이 아래로 내려가서 무기를 점검한다. 그라스는 운전을 하면서, 계기를 조작하고 있었고. 그가. "블라블라블라." 응? 슐츠한테 말하는 게 아닌데? 그럼 이건 설마. 구조요청인가? 밖의 군부대에게 무선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헬기를 보내달라고 하면,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라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뭐야. 일이 잘못된 건가? 나는 나쁜 소식이 들려올 것을 각오했으나, 그 말이 해석되기 전에. "뭐야?" 도시의 불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건가.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더니, 곧 주위는 암흑 천지로 변했다. 그라스가 급히 계기판을 조작해서 차의 조명등을 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장님이 될 뻔했다. 이제 보이는 불빛은 화재로 불타는 건물들에서 나오는 것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달 한 번 크다." 커다란 보름달이, 우리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시름을 감싸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저 달엔. '누가 있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지금 왜 꿈에서 본, 그 고깔모자를 쓴 마녀 복장의 여자아이가 떠오르느냔 말이다. 지금은 현실의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서 그녀의 영상을 지우고, 클라라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라스가 대체 왜 저렇게 당황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말이다. 어차피 독일어는 모르니. "블라블라블라 !" 슐츠에게 그라스가 뭐라고 말하고, 슐츠가 큰일났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주 큰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도시 전체의 조명이 꺼지는 것도 그렇고, 두 사람의 침울한 표정도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비트만조차,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이쪽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클라라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더니. "지금 도시를 봉쇄한 군부대에 연락중인데, 아무도 받지 않는대요." 덜컹. 내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그렇다면 그곳은 이미........ 나는 끔찍한 상상을 멈추려고 애썼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세계로 퍼져나가는 좀비들과, 불타는 도시들이 자꾸만 연상이 되었다. 그럼 이대로 우리가 이 도시를 빠져나가도, 우리는 영영 안전지대로 도피할 수 없게 되는 건가. 아냐. '무전기 고장일거야.' 내 머리는 합리적인 판단을 무시하고, 억지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명백해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만약 아무 문제없이 잘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우리의 무전을 받았을 것이니까. 그러나 클라라의 말은 그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영어를 잘 못해서, 그리고 나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군인들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조명 탓이라고 우기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으........"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잠도 못 자고 버텨온 내 체력도, 결국 한계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 버텨봐야 한 시간일까. 아냐. 이건 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도 이미 좀비가 되기 시작한 것일까. 두려웠다. 만약 여기서 눈을 감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클라라 역시, 자신을 가누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안 돼. 지금 눈을 감으면.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절망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도시 밖으로 나간다. 무슨 일인지는, 가보면 알 수 있으니까." 그 말이, 나의 공포심을 조금이나마 억눌렀다. 모두들 그의 의지가 담긴 말에, 조금은 힘을 얻은 듯 했다. 하지만 과연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의 눈에 담긴 두려움이, 우리들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군인들이 만든 봉쇄선에 가서,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절망? 희망? 어느 것이 우리를 기다리는 걸까. 장갑차는 달리고 있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다 왔어요." 클라라가 굳이 해석해줄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자유의 땅, 안전지대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은, 도로에 설치된 수많은 장애물들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장애물들은 하나같이. 부르릉. 우리 장갑차가 진행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았으니까. 보통 이런 경우에는 기뻐해야 하겠지만, 압제의 땅과의 경계선이 이렇게 된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장애물이 다 부서지고 쓰러졌다는 것은 곧, 압제자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공백을 메워줄 군인들도,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불타는 초소뿐. "뚫린 건가." 슐츠의 말이 우리 모두를 암울하게 했다. 이런 식이라면 그것 이외에 무슨 결론을 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좀비들이 결국, 군인들이 만든 저지선을 뚫고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던 병사들도 모조리, 좀비가 되어 사라진 것이겠지. 바닥에 남은 약간의 핏자국만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설마 모조리 당할 리는....." 그렇다. 다 죽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다 죽을 리는 없단 말이다. 다 죽을 리가.... 탕. 탕. 드르르륵. 그런 우리의 바램을 하늘이 듣기라도 한 듯이, 총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즉, 아직도 살아서 좀비들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좀비가 총을 쏠 리가 없으니까. 그것도 연발로.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총을 굳게 잡았다. 만약 한 명이라도 산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를 구해야 하므로.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 이미 우리 자신이 버려진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여기서 남을 버리는 입장이 될 수는 없었다. 군인들이 만약 살아있다면, 그들과 함께 살아갈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총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장갑차가 병기의 잔해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이 잔해들은. "전차, 자주포, 트럭, 장갑차....." 그것들은 무수히 많은 무기들이었다. 병사들이 쓰는 소총이나 기관총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유조차나 불도저 같은, 무기가 아닌 것들까지 섞여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박살이 나서,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작 좀비들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이곳에서 죽은 병사들에게 욕설을 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꼴을 보여준단 말인가. 우리는 고작 장갑차 하나로 좀비들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것은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던지. "어떻게 된 거야?" 슐츠도 비트만도 분노하고 있었다. 이건 독일군답지 않은 광경이었으므로. 적어도 시체들에게 이 지경으로 유린당할 만큼, 독일군이 허약하지는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던가? 그럼 여기 있던 군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설마, 달아난 것인가? 그게 아니면 다 죽은 것인가. 하지만 어디에도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총소리만 간혹 들리고. "아아아악." 비명소리. 그리고. "크으으." 좀비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도대체 어째서 이 모양이 된 것인가. 설마 정말로 군인 중에서도 감염자가 나와서, 자중지란을 일으켜 무너지기라도 한 것인가. 조금 전에 헬리콥터에 좀비가 가득 차던 광경을 상상해보니, 그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군인이면서, 감염의 위험성도 대비하지 못했단 말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어?" 그런 내 불평을 잠재운 것은, 거대한 레오파드 전차였다. 이건 독일군의 주력 전차인데, 왜 여기에 쓰러져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런 내 의문은 곧 놀라움으로 변했다. 앞에서 보기에는 그저 옆으로 쓰러진 정도였는데. "이건 뭐야?" 그 전차의 오른쪽 차체는 반쯤 땅에 박혀 있고, 전차의 차체는 우그러져 있었다. 마치 거인의 손이 전차를 잡아서 으스러뜨렸다가, 여기로 내던진 것처럼. 포신은 마구 구부러져 있었으며, 포탑은 옆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쓰러진 전차는 더 심했다. 그건 아예 포탑도 없었고, 차체 앞부분이 녹아 내렸던 것이다.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조금 전에 이렇게 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이런 식의 파손이라면. "레이저빔?" 그 외에 이런 식으로 전차를 녹여버릴 무기가 현대에 존재하나? 하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독일군이 이런 강력한 레이저빔을 쏘는 무기를 도입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게다가 그런 무기가 있다면, 당연히 좀비에게 쏴야지 왜 자기들 전차에 대고 쏘겠는가. 그렇다면 이건 설마 좀비가. "눈에서 빔 !" 아냐. 아냐. 좀비가 그럴 리가 없어. 만약 좀비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당연히 아까 도망가던 우리에게 쐈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런 망상을 안 하고 싶어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포신이 녹고 포탑이 내려앉은 PzH-2000 자주포가 말이다. 포탑 전체가 흐물흐물해져서,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되어 있다. 어째서? 도대체 누구 짓이지? "사악한 마녀? 마법사? 그게 아니면 외계인이나 무슨 비밀병기?" 별별 요상한 상상이 다 떠오른다. 다만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첫 항목에 자꾸 여동생의 얼굴이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냐. 아냐. 지금은 장난칠 때가 아니라고. 나는 억지로 여동생의 얼굴을 지우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달아날까. 그냥 갈까. 다른 사람들도 그게 고민인 모양이다. 지금도 들리는. "으아아악 !" 저 비명이 울리는 곳에는, 혹시 전차를 이렇게 만드는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했다. 전차나 자주포도 당하지 못하는 상대를, 고작해야 장갑차밖에 없는 우리가 쓰러뜨릴 수는 없으니까. 혹시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시체가 아닌, 말 그대로의 악마가 아닐까. 하지만 결국 결정은. "가자." 그것밖에 없었다. 어차피 정말로 악마가 이런 짓을 했다면, 우리가 그것을 피해 달아난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힐 테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지금 그들과 합류하는 쪽이, 조금이라도 살아날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었다.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둘이 싸우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린 자기 목숨만 건지려고, 살아있는 사람을 버리고 달아날 수가 없었다.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갈지도 모르지만. 결정을 끝내고, 다시 전진하려는 순간에. "으아아악 !" 비명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더니, 곧바로 이어지는 총소리. 계속되는 비명. 이것은. "누가 살아있다 !" 장갑차는 곧바로 그곳으로 돌진했다. 중간에 군대 막사가 좀 있기야 하지만, 텐트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사람이 물자보다는 우선인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명소리가 들린 곳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군인들과, 사방으로 흩어진 총기들, 그리고. 스으윽. 여자아이였다. "블라블라블라?" 슐츠가 기관총을 겨눈 채, 그 여자아이에게 뭐라고 물었다. 물론 겉보기에는 참으로 순진하게 생긴 애에 불과하지만, 여기서는 겉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저런 모습을 해놓고서는, 느닷없이. "카아악." 이렇게 될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게다가 군인들은 모조리 쓰러졌는데, 어째서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여자아이만 멀쩡하게 서 있단 말인가. 우리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는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듯, 우리를 태연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겁을 먹지 않다니. 게다가 들고 있는 무기라고 해봐야 뱀이 마구 휘감긴 듯이 보이는 지팡이뿐. 그리고 걸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저건 옷이라기보다는. '천 쪼가리만 뒤집어쓴 꼴이잖아.' 화재현장에서 탈출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여긴 군부대 한가운데인데? 어째서 옷도 안 입고 있는 거야? 물론 검은 망토로 인해 그녀가 실제로 옷을 안 입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단 윤곽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자세히 보려고 해도. '안 보여.'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조명이라고 할 만한 게 우리 장갑차의 조명등 정도밖에 없는 탓인지는 몰라도, 유감스럽게도 망토 안쪽은 안 보인다. 여자 알몸을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아. 이게 아니었지. 어쨌든 새하얀 살결이 그대로 비춰지는 듯한 옷이........... 아니구나. 어쨌든 하얀 옷인지 살색 옷인지, 그게 아니면 아예 진짜 알몸인지는 몰라도, 뭔가 굉장히 상상을 자극하는 듯한 복장이란 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옷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수상해.' 뻔한 결론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주위의 군인들은 모두 쓰러져 있고,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저 여자아이밖에 없다. 게다가 조금 전에 바로 여기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총질을 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외양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슐츠가 대답을 이끌어낼 것을 기대한 탓일까. 하지만 슐츠가 계속적으로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슥.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무엇이지? 우리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쾅. 장갑차가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우아악 !" 장갑차가 절단되었다는 것은, 차의 좌측과 우측이 따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탄 폭스 장갑차는 좌측에 바퀴를 세 개 달고, 우측에 바퀴를 세 개 달아둔 구조였다. 따라서 중간이 잘릴 경우, 반쪽만 남은 차체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로 인해 벌어진 필연적인 결론은. 우지직. 내가 탄 차의 좌측과, 클라라가 탄 차의 우측이 갈라지면서, 지면으로 추락한다는 뜻이었다 ! 이 높이에서 머리를 땅에 박을 경우,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는 건 당연한 것. 내가 화들짝 놀란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내 하반신은 차 내부에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죽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내 머리가 땅과 키스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 몸이 저절로 움직이네? 축구로 인해 단련된 탓인가. 그게 아니면 여동생의 구타에 의해 단련된 탓인가. 어쨌든 내 몸은 장갑차에서 하반신을 빼내면서, 땅바닥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다. 몸이 빙그르르 돌아가더니. 탁. 나는 체조선수도 아닌 주제에, 공중을 한 바퀴 돌며 중심을 잡고, 땅에 안착했다. 바로 옆에 쓰러지는 장갑차를 배경으로 하고서. 그런데 내가 이렇게 운동을 잘했나? 축구선수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명백히 헛소리에 가까웠지만, 설마 내가. '기관총까지 가지고 뛰어내리다니.' 나도 완전히 병사가 다 된 모양이다. 역시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모범적인 청년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쓰러진 장갑차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설마. 나는 울음을 참고 외쳤다. 안 돼. 나만 남기고 다 죽으면 안 돼. "클라라 ! 슐츠 ! 비트만 ! 그라스 !"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비명소리뿐이다. 설마. 차에 깔린 건가.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은. "흡 !"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슐츠와 비트만은 어깨와 가슴 사이가 잘려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라스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운전석의 구석에 박혀 있었으며, 클라라는. "아아아악 !" 어느새 그 여자에게 잡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 나타나자마자 공격이라니 !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망토차림의 그 여자를 향해 발포했다. 기관총은 두었다 뭐에 쓰겠는가. 두두두두두. MG4 기관총이 그녀에게 무수한 탄알을 날려보낸다. 그런데 잠깐. 난 총을 잘 못 쏘는데. 아차하는 후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이미 기관총탄이 그녀와 클라라를 갈기갈기 찢어.... 땅을 치고 후회하려던 내 눈에 보인 것은. 펑펑펑펑펑. "에? 뭐야?"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클라라....가 아니네? 일단 클라라가 죽는 걸 보지 않게 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저건 뭐냐. 보통 이런 경우 사람은 총탄에 걸레가 되기 마련이고, 좀비는 걸레가 되었다가 다시 내장들이 기어 나오면서. "크아아(우우우. 피가 모자라)." 이렇게 되는 게 정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저 여자는 그 중 어느 쪽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총탄이 무슨 폭죽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 주위에서 폭발을 일으킬 뿐. 그리고. 슥. "으아악 !" 그녀는 클라라를 나에게 던진 것이다 ! 나는 느닷없는 그녀의 행동에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고, 당연히 몸을 피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쾅. 우당탕. "아구구구구." 클라라를 안은 채, 나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그나마 그녀(망토 쓴 여자)가 그녀(클라라)를 돌려준 건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절대 방심할 수는 없다. 그녀가 호의를 품고, 클라라를 돌려줄 리가 없으니까. 호의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우리 장갑차를 날려버릴 리가 없잖아.' 그런데 클라라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아아아........" 그녀가 입을 벌린다. 그러다 닫는다. 그러다 연다. 그러다 닫는다. 어째서 그러는 거야? 내 머리에 스치는 섬뜩한 예감이, 나를.... "크아아." 콱. 내가 클라라를 내던진 것과, 클라라가 내 그림자를 깨물어 버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떻게 된 거야? 클라라는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이상하게 목을 구부리고 있었다. 설마, 그녀 역시 감염된 건가? 하지만 어째서? 아까까지는 분명히 괜찮았는데..... 혹시 저 여자가. "야 !" 하지만 그녀를 쳐다본 순간,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는 운전석에 쓰러져 있던 그라스를 잡고. 파지지지직. 그라스의 눈과 입에서, 뭔가가 빨려나오더니, 그녀의 입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라스를 내팽개쳤다. 그의 몸이 들판으로 굴러가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그는 곧 머리를 옆으로 숙이고는. "크으." 서서히 일어섰다. 사람이 아니라, 좀비로서. 그것은 슐츠와 비트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슐츠는 오른쪽 반신이 잘린 채, 비트만은 팔이 날아간 채. 아직도 피를 흘리면서, 그들은 이곳에 있는 유일한 인간인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상실한 채, 몽롱함만을 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크아아." 식욕만이, 그들에게 남은 전부였다. 그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나는 당장 저들을 죽여야한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마음만일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한때나마 생사를 같이했던 사람들에 대한 정. 그리고 미련. "카아악." 그 망설임으로 인해, 그들이 나를 붙잡았다. 이런 ! 그제야 나는 허겁지겁 대항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가장 먼저 클라라가 나를 향해. "크아악." 내 팔을 잡고, 문다. 이제 죽었구나. 그 순간에. 파앙. 클라라를 비롯해, 한때 나와 생사를 함께 하던 사람들, 아니 좀비들은 저 멀리로 날아갔다. 그들은 다시 이쪽으로 오려고 하지만, 망토를 입은 '무언가'가 그들에게 손을 드는 것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도망친다. 그리고 내 주위는 다시금 정적이 자리했다. '그것'을 제외하고. 저벅. "........" 저벅. "............."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평상시라면 망토만으로 온몸을 감싼, 그 속은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여자아이의 접근에 반가워했을지도 모른다. 음흉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도 남자니까. 하지만 상대는 '소녀'가 아니다. 물론 '여자'도 아니다. 저건 나를 잡아먹으려는 식인 괴물, 그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처럼, 무력하게 팔을 잡힐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힘도 못쓰고 당했지만, 나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당장 MG4 기관총이 그녀를 향한다. "다가오지 마." 물론 상대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그러니 나는 망설이지 않고. 두두두두두. 하지만 결과는 자명했으니. 펑펑펑펑펑.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 주위의 비누거품 같은 무언가가, 총탄 전부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서 나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물론 무엇을 들어도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마 나도 곧. '저 전차처럼 될 거야.' 형편없이 우그러진 전차처럼, 상대에게 잡혀 먹히겠지. 하지만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지 않고는 죽을 수 없었다. 최소한 먹이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여동생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견디고 있는 내가, 저런 기괴한 꼬맹이에게 굴복할 순 없다. 물론 이기진 못하겠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 이제 나에게 남은 삶의 시간은, 분 단위도 아닌 초 단위의 시간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결코 무릎을 굽히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저런 정체 불명의 괴물에게는 말이다. 나는 사악무도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미인이의 오빠라고 ! 두두두두두. 하지만 상대는 그런 건 모른다는 듯이, 여전히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게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상대와의 거리는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기관총이 침묵하는 바로 그 순간, 상대가 순간적으로 미소짓는 그 순간에. "에잇 !" 나는 수류탄을 던졌다. 물론 이런 걸로는 그녀의 비누거품을 뚫을 수가 없었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안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펑. 연막탄이었다. 비록 그녀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지만, 연막이 그녀의 거품을 파고들지는 못하지만, 눈을 가리는 것은 가능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모습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에 나는 옆으로 뛰면서, 남겨두었던 마지막 한 발의 실탄을 쏘았다. 비록 내 솜씨가 영 아니긴 했지만, 목표물이 워낙 커서 기관총탄은 내 의도대로 날아가 주었고, 그곳은. 쾅. 장갑차였다. 장갑차에 실린 로켓탄과 탄약상자에 총탄이 명중하자, 곧 그것들은 대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전차의 잔해 뒤로 몸을 날렸고, 그 여자는 그대로 폭발에 휘말렸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탄약을 대량으로 가져온 것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하지만 나는 위험지대에서 벗어난 게 아니다. 필사적으로 장탄을 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해치웠나?" 그 폭발은 워낙 거대했고, 내 주위로 화염의 강을 만들고 있었다. 만약 전차 뒤에 숨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폭발과 함께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내가 그녀를 해치웠다고 해도, 클라라를 비롯한 불쌍한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빌어먹을. 철컥. 장탄이 완료되자, 나는 다시 기관총을 움켜쥐었다. 만약 상대가 죽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그걸 해치워야 했으니까. 그리고 아직 이 근처는 좀비들의 세력권이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순간이라도 더 살아있어야 했다. 비참하게 죽어간 클라라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금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를, 진희와 문희, 그리고 연미 누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녀석은 빼고." 여동생이야 뭐, 신경 안 써도 잘 살아 있을 것이다. 대기업의 회장이니 경호원도 많을 테고, 무엇보다도 그 녀석은 좀비 소굴에 혼자 밀어 넣어도 절대 안 물릴 것이니까. 그런데 왜 그 녀석 얼굴이 이렇게 크게 떠오르는 거야? 나는 악귀 같은 여동생의 얼굴을 머리에서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그 망토만 뒤집어쓴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해야.... "으악 !" 그녀는 전차 위, 바로 나를 내려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 ! 나는 재빨리 기관총을 그녀에게 겨누었지만. 스으윽. 챙캉. 기관총은 그녀의 손짓 한 번에 토막이 나 버렸다. 나는 허리에 찬 권총식 유탄발사기인 HK69를 꺼내려고 했지만, 그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보통 유탄이란 15m 정도는 날아가야 내부의 안전장치가 풀려서 폭발하게 되는데. '이건 15m가 아니라.' 1.5m도 안 되는 거리라고. 나는 그 즉시, 축구선수로서 반드시 지녀야할 덕목인, 달리기 실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일단 거리를 벌리면서 수류탄을 던진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내가 물러서기도 전에. 콱. "으아악 !" 이미 늦었다. 그녀는 내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내던진 것이다. 충돌과 함께, 몸에 달고 있던 수류탄이 사정없이 내 몸을 파고든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로 끝장을 내지 않고. 쾅. "아악." 쾅. "으악." 쾅. "아아악." 나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으. 젠장. 여동생보다 더 세게 치네. 그녀는 매우 화가 났는지 쓰러진 나를 다시 잡더니. "먹이 주제에 감히 !" 그나마 독일어로 해주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이건 언어가 아니었다. 차라리 텔레파시에 가깝다고 할까. 입술을 전혀 움직이지 않으니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의 의사를 알아들어 봐야. 쾅.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는 판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으. 저 여자 엄청나게 힘이 세네. 아무리 소년이라지만 그래도 남자를 한 손으로 다리만 붙잡아서 던지다니. 물론 사람을 마구 잡아먹는 것으로 보아 '여자'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는 것, 아니 아주 많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고도 어디가 부러지지 않다니. 내 몸이 그렇게 튼튼했나? "착각하지 마. 먹이가 상하면 안 되니까, 이 정도만 하는 거야." 뭐? 먹이? 아까부터 되게 기분 나쁜 소리만 하네. 나는 그 말에 반론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내 몸이. 부웅. 허공에 떴다 ! 그리고 그녀에게 스르륵 날아간다. 그녀가 아주 기쁘게 외친다. "자. 지금 먹어주지." 그녀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퍽. 거센 충격이 나를 덮쳤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도, 몸이 요사스런 힘에 묶인 상황에서는 도리가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식인소녀의 이빨로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그 거친 손길이거나. '이걸로 끝장인 건가.' 죽어라 달아나서, 결국 최종적인 결론은 이런 것인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빨이라면 목에 느껴지는 서늘함이 대표적인 감촉인데, 이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목이라기보다는, 엉덩이 쪽에 느껴지는 감각인데. 설마. '엉덩이를 깨물지는 않았겠지.' 당연히 저 식인소녀가 나를 먹어치우려면, 머리나 팔, 다리부터 먼저 먹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하필이면 엉덩이라니. 그쪽은 깨물기에는 좀 그런 장소가 아닌가. 그럼 이 감각은 무엇인가. 이건 차라리 둔기로 때리는 느낌에 더 가까운데.... '설마.' 설마. 나는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연상했지만, 그 녀석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대기업 회장님이 이런 위험한 곳에 친히 오실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여기에 만약 그 녀석이 왔다면, 큰일이다. 아무리 구타밖에 모르는 여동생이라지만, 그래도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여동생이 아무리 강해도 그 녀석은 사람이지, 초인이 아니다. 저런 흉악한 식인괴물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 누가 이렇게 한 거지?' 그러나 그걸 알아내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내 몸은 지금. "아아아아악 !"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종점은 그 식인소녀가 아니었다. 그쪽으로 날아간다면 유언이라도 남기든지, 통곡이라도 하든지 하겠는데, 이건 그 방향이 아니라. "부딪친다 ! 부딪친다 ! 부딪친다아 !" 나는 그대로 전차의 잔해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나는. 푹. '어?' 보통은 이런 경우에 나올 결말은 이게 아닌데? 대개 전차에 날려갈 경우 그 희생자는 당연히. 쾅. 이런 효과음이라든가. 퍽. 이런 효과음으로 마무리를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리고 물론 전자의 경우는 충돌과 동시에 어디가 부러져서 고통스럽게 땅바닥에 쓰러지기 마련이고, 후자의 경우는 너무 세게 부딪쳐서 몸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짓뭉개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래? 게다가 이 부드러운 감촉은.... 나는 급히 그 감촉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보았지만. "없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쥔 좀비도, 조금 전까지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식인소녀도, 물론 군인도, 경찰도, 심지어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용사와 그 일당들도 없었다. 그럼 뭐야? 내가 초능력자일 리는 없는 이상, 허공에 이렇게 멈춰 설 수는 없는데......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나는 이미 그 여자에게 물려 죽었고, 이제 원한을 품고 죽은 유령으로 남게 된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나를 잡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손이 느껴져.' 그게 사람의 손인지 괴물의 손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뭔가가 나를 붙들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미치고 환장하게도, 그게 안 보인다. 따라서 감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다. 만약 눈에 모습이 보인다면. "이야아아압 !" 이렇게 하거나, 또는. "아아아아악 !"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안 보이니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게다가 상대가 입이라도 열면 어떻게 대답이라도 하겠는데, 이건 완전히 묵묵무답이다. 이래서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차라리 식인소녀라면. "Bitch(개 같은 년) !" 에? '년'이라고? 그럼 날 잡고 있는 이 유령은 여자라는 건가? 적어도 식인소녀가 남자인 나를 가리키며 '년'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일단 이게 여자이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안 보이니 그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판단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쾅. 이리로 날아오는 저 붉은 빛의 덩어리는 무엇이냐. 큰일났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이 움직이더니, 그 빛을 피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나에게 날아든다. 유도미사일이냐 !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명중하면서. 퍼엉. 나는 몸이 찢겨지는 자신을 상상했지만, 어? 그런 일은 없네? 내 주위에 잠시 반투명한 막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혹시 방어막? 그럼 나를 잡고 있는 이 여자(진짜?)는 혹시. "마법사인가?" 물론 답은 여러 가지이다. 마법사일 수도 있고, 초과학문명을 지닌 외계인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구를 지키는 초능력자나 사이보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Thank you." 우리말로 하면 못 알아들을 까봐, 일단 영어로 그녀에게 감사 의사를 전달한다. 하지만 대답이 안 돌아온다. 혹시 이 여자는 벙어리가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 모습을 안 보이니 대하기가 영 어색하다. 혹시 이 사람이 투명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 못생겼나? 얼굴을 보여주기 싫을 정도로.' 그 생각을 하는 순간. 퍽. "아구구구구." 나는 순식간에 한 방 맞고 말았다. 식인소녀가 날린 주먹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이 여자가 날린 것이다. 이것으로 이 여자가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입증되었지만. '아파.......' 엄청나게 매운 주먹이었다. 게다가 주먹이 안 보이니 피할 수도 없다. 내가 무술의 고수라면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걸 느끼고 피하기라도 하겠는데, 난 그런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고, 그보다. '바람 자체가 안 불었어.' 무색무취무미. 요즘 독가스의 특징이다. 독가스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공격대상이 눈치채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지금 내가 맞은 이 여자의 주먹이, 바로 이런 꼴이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으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이 여자에 대한 호감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폭력적이라니. 누군지 몰라도 이 여자에게 오빠가 있다면, 상당히 고달플 거라는 생각이..... 퍽. "아구구구구." 또 맞고 말았다. 나는 무슨 생각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몸이 추워지고 있다. 만약 한 마디라도 더 하면, 즉시 내 머리통이 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내 체온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파......" 너무나 아팠다. 이 여자를 만난 이래, 난 세 대나 맞은 것이다. 처음에 구해줄 때부터 엉덩이를 걷어차더니, 그 다음은 고맙다는 인사에 답하지도 않고 구타부터 하는 것이다.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맞아야 하는 거야. 아침부터 새벽까지 좀비들에게 쫓겨다녔으면, 이젠 좀 편안한 날도 올 수도 있잖아? 그런데 왜 이래? "흑." 비참했다. 낮에는 좀비를 만나고, 밤에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홀로 남아 여자한테 맞는 것이다. 이런 불행이 왜 나한테만..... 그러나 힘없는 자는 입도 벌리지 못하는 게 국제사회의 규범이다. 일본 같은 부도덕한 나라가 큰소리를 치는 것도, 힘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언제 국제사회에 정의가 있었나? 폭력과 강권은 있지만. 어쨌든 나는 두 여자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약소국의 심정이라는 건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 년." 식인괴물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저 표정을 보니, 빨리 죽여버리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 같다. 그 말은 즉, 나 역시 그녀의 제거대상에 올라갔다는 뜻이다. 투명한 무언가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무언가와 함께 있는 나도 당연히 맞아죽을 것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놓아주세요." 이런 소리를 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 여기서 이 아가씨가 정말로 나를 놓아버린다면, 나는 그대로. "으아아아아." 이렇게 되니까. 낙하산도 없이 이 높이에서 뭘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 투명한 소녀의 팔을 풀 자신도 없고. 여자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내 허리에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팔 하나뿐인데, 어떻게 남자를 꼼짝못하게 잡고 있는 것일까. "잘 만났다. 이 년. 승부를 내자." 그 말에, 안 보이는 그녀가 반응했다. 갑자기 바람이 내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그리고 그 바람은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이 돌풍으로 변하고, 그 돌풍이 다시 태풍으로 변한다. 내 몸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폭풍은 점점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다. 투명한 대기에서 반투명한 구름으로, 그리고 다시금 불투명한 물의 덩어리로. 그 물은 다시금 일곱 가지 색으로 물들더니. 파앗. 내 옆에는 소녀가 서 있었다. 커다란 고깔모자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커다란 망토를 몸에 두르고 있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뿌옇게 보이는 거야?" 무슨 안개가 낀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그녀 주위만 뿌옇다. 그로 인해 그녀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그녀의 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투명한 천으로 몸을 덮어씌우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건 완전히 베일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기쁘게도. 꼬옥. 그녀는 왼팔로, 나를 감싸안고 있었다. 헤헤헤. 뭐? 진희하고 클라라는 어떻게 하고 헤헤거리냐고? 원래 남자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다. 물론 이 경우는 '사랑'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다이아몬드를 한 번 빌려서 감상하는 것이라고 할까. 그리고. '저 끔찍한 썩은 호박보다야.'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소녀가 옆에 있는 것보다야 낫지 뭐. 달 아래에 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비록 얼굴이 안 보여서 아쉽지만 절세미인으로 생각되었다. 실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얼굴도 몸매도 거의 안 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속 편했다. 그리고 만약 호박이니 어쩌니 하다가는. '또 맞을라.' 그러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아가씨를 뭐라고 지칭해야 할까. 나는 0.1초 정도 고민했지만, 이 경우에는 그냥 간단하게. '월하소녀(月下少女 : 달 아래의 소녀)라고 하자.'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저 식인소녀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렇게 부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월하미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건 '아름다운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가 되니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우리는. '달 아래에 떠 있으니까.' 작명센스가 상당히 형편없다는 말을 듣겠지만, 어차피 그 호칭을 내가 써먹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는데 뭐. 그런데. "힘에 눈이 멀어 큰일을 저질렀군요. 당신." 에? 벙어리가 아니었어?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놀란 나머지,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그것이었다. 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월하소녀는. "긴 말은 필요 없겠지요. 당신 소원대로 승부를 내지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지팡이를 옆으로 뉘였다. 아니, 이건 지팡이의 머리부분을 오른손으로 잡고, 뾰족한 쪽을 앞으로 내밀었으니까 차라리. '마법사라기보다는 검사 같아.' 그녀의 자세는, 주문을 외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칼을 휘두르려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잠깐. 검을 쓸 경우에는 한 팔만으로 되는 게 아닌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팔만이 아니라 허리와 다리가 모두 협력해서 움직여야 하는 게 검술이다. 사람을 옆에 안고 있으면,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이러면 전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전혀 걱정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더니. "저런 무능력한 마법사를 상대한다면 문제없어요." 무능이라. 하지만 조금 전에 내가 싸워본 바로는, 전혀 무능하지 않았던데? 나는 기관총을 필사적으로 쏘아댔고, 심지어는 장갑차의 탄약상자를 터뜨리기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아무 상처도 입히지 못했었다. 그런데 무능이라. 왠지 실감이 나지 않는 평가였다. 이 아가씨, 이러다가. '좀비 되는 거 아냐?' 모든 일에 있어 방심은 금물이다. 하물며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무서운 마법사를 상대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마음의 긴장을 푼다면 그것은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된다. 우리들도 조금 전에 연약한 여자아이라는 외모에 속아서, 나만 빼놓고 모조리 전멸 당하지 않았던가. "방심하다가 당할 수도 있어요. 저 여자, 만만하지 않아요." 일단 충고는 해두자. 이 여자가 패배라도 한다면, 나는 살아날 방법이 없어지니까. 내게 남은 동료가 있나. 무기가 있나. 적어도 저 식인귀에게 유효한 무기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비록 맘에 안 드는 여자이기는 해도,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것이 내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내 배려는 완벽하게 무시되었다. 월하소녀는. "자. 시작해요." 으. 대답도 안 돌아온다.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내 딴에는 자기를 걱정해서 충고를 했는데, 고작 돌아오는 대답이 '무시'라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그러나 내가 불평을 말할 겨를은 없었다. 갑자기 세계는. "돈다." 나를 중심으로, 아니 그 여자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으니까. 슈웅. 식인소녀의 첫 발은 커다란 빛의 구슬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월하소녀는 그것을 쉽게 피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에서는 '쉽게' 피하는 것일지 몰라도. "우아아악 !" 나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녀에게 안겨 있으므로, 죽든 살든 그녀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전투기 조종사로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난데없이 월하소녀의 몸이 위로 솟구치다가. '세상에.' 90도로 방향을 틀어서 날아갔다. 마치 자신이 UFO인 것처럼. 문제는 그런 움직임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고, 나는 당연히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위로 전속력으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직각으로 방향을 트는 자동차가 있다면, 어떤 운전사가 그걸 몰 수 있겠는가. 앞으로 가다가 멈춰 서서 방향을 트는 게 아니라, 돌진하면서 그대로 차체가 90도 회전하는 동시에 튀어나가는 식이니. "아구구구구 !" 내 위장이 마구 흔들린다. 팔다리가 요동친다. 눈알이 튀어나오다가 들어간다. 사람의 한계를 완전히 무시한 움직임은 나를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갑자기 체중이 몇 배로 불어나다가, 팍 줄어드는 것이다. 혀가 입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턱이 다물어진다. 으악 ! 딱. '히익.' 조금만 늦었으면 나는 혀를 깨물고 자살했을 것이다. 아니, 이건 내 본의가 아니니 타살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애석하게도, 월하소녀의 움직임은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고, 그에 비례해서 내 몸도 더욱 요동쳐야 했다. 으. 내가 무슨. "요동(만주 지방의 일부)을 쳐라 !" 이렇게 외치는 광개토 대왕이라도 된 건가. 차라리 그랬으면 영광스럽기라도 하지. 쿵. "........&*%(#&%^#$ !" 뭐라고 외치고 싶은데, 말이 말로 되지 못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심히 기묘한, 언어라고 할 수도 없는 외침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보이는 것은, 이제 없었다. 그저 느껴지는 것은. 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 주위에서 느껴지는 이런 식의 떨림뿐이다. 아예 이제는 소리도 잘 안 들린다. 아예 음속돌파라도 한 건가. 제발 날 좀 풀어 줘. 그러나 이 상황에서 월하소녀가 나를 놓으면, 나는 그대로 사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죽자 사자 그녀에게 매달릴 수밖에.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불가능했다. 매달리고 싶어도. 쉬이잉. 팔다리가 제멋대로 춤을 추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더욱 미치는 것은. "어떻게 된 거야? 너무 느리잖아? 역시 인간 꼬마를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이, 이게 느리다고? 물론 이건 소리가 아니라, 식인소녀가 우리에게 보내는 텔레파시였다. 그러나 월하소녀는 전혀 기가 죽지 않고. "그런데 이렇게 느린 상대를 왜 못 맞춰?" 말은 맞지만, 그 말을 듣는 상대의 기분도 좀 배려해줘야 할 것 같은데요. 달 아래의 아가씨. 그리고 내 예상은 불행하게도 맞고 말았다. 상대는 즉시. "반격도 못하는 주제에 !" 그리고 큼지막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으악 ! 저것은 ! '운석이냐.' 죽었다. 저런 것을 맞으면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았다. 비록 그리 큰 건 아니지만, 적어도 10m는 될법한 큼지막한 돌멩이가 우리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월하소녀는 그 자갈을 피했지만, 그런 것은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도시 아래를 잠시 쳐다보더니. 쉬익. 지팡이를 위아래로 내밀자, 운석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혹시 도시를 보호하려고 그런 건가? 저런 게 시가지에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생각보다는 인도적인 것 같아서 조금은 그녀가 나아 보였지만, 지금 그런 건 시시한 문제에 불과했다. 우리에게 날아오는 것은 운석만이 아니었고. 찌잉. 레이저빔이나. 화아악. 거대한 불기둥이나. 콰앙. 마법으로 만든 미사일이나. 두두두두. 심지어는 발칸포를 연상시키는 작은 구슬까지 날아왔다. 월하소녀는 용케도 이걸 다 피하고는 있었지만, 지금 전투의 상황은 마법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명백했다. 이건 간단히 말해서. "밀리고 있잖아 !" 그렇다. 그녀는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준 채,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도 큰 소리를 탕탕 치더니, 그 말을 지금도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명중탄이 하나도 없기야 하지만, 기세가 등등하던 조금 전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컸다. 하지만 탓하고 싶어도. 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 이런 상황에서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을 벌리다가는 당장 혀를 깨물 것이니까. 뭐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목이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 죽어라 버텨야 하니까. 비록 내 허리는 월하소녀가 잡고 있어서 조금 나았지만, 내 목은 달랐다. 이리 흔들거리고 저리 흔들거리는 판이니, 까딱 실수하면 소녀의 옆머리와 부딪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가 기절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인생 종치는 게 아닌가. 여기서 그녀가 정신을 잃으면 우리는. "으아아아아 !" 이렇게 되니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배려해본들, 월하소녀의 전세는 이미 절망적이었다. 그 반면에 식인소녀는 수많은 마법을 토해내면서, 통쾌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 치더니 꼴 좋구나 !" "맞는 말이구먼." 그러나 이런 맞장구는 입이 찢어져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열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랬다가 월하소녀의 비위를 거슬리기라도 하면, 나는. "으아아아아 !" 이렇게 되므로. 하지만 제발 무슨 대책을 세우란 말입니다. 아가씨. 이러다가는 둘 다 죽는다고요. 하지만 저 식인괴물을 이길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없는데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동시에 몇 개의 마법이 한꺼번에 분출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상대는 마법에 능숙했으니까. 하나의 마법을 피하면 두 개가 날아들고, 두 개를 피하면 네 개가 날아든다. 그리고 네 개를 동시에 피하면 여덟 개가 날아든다 !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향을 포위하고, 마법이 몇 개씩 중첩되어 쌓이는 꼴이었다. 그 중 몇 개를 힘으로 막아내면서 피하더라도, 나오는 길목에 마법의 빛이 기다리고 있다. 이걸 피하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찔리네.' 내가 매달린 이상, 아무리 월하소녀가 강하다고 해도 무리인가. 하긴 너무 빠르게 날아가다가는 내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장 이성적인 수단인. "으아아아아 !" 이런 방식의 최후를 내가 택하기는 싫었다. 그러니 큰 소리를 친 대로 제발 타개책을 생각해 내라고요. 달 아래의 아가씨 !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고 있다. 식인소녀가 오른팔을 들며. 쿠구구구구. "이걸로 끝을 내주지 !" 그녀가 지팡이를 앞으로 겨누자, 우리 주위에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동심원이 여러 개 겹쳐 있고, 그 가운데에는 별이 그려진 빛줄기가 달린다. 그리고 그 주위를 메우는 고대의 문자들. 룬문자인가? 고대 게르만인들이 썼다는 문자로, 마법사들이 즐겨 사용한다는 그거?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대처할 여유를 주지 않고. 파지직. 온몸을 찢는 고통이 나를 덮쳤다. 마치 내부로부터 뭔가 강력한 힘이 올라와서, 몸 전체를 찢으려는 듯한 느낌이 내 목구멍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몸이 뒤틀리면서 비비꼬이는 것 같다. 거인들이 내 팔다리를 잡고,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다. 그리고 내 몸이 거대한 맷돌에 깔려, 산 채로 갈아지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아아아악 !"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 것뿐.........아니, 이 아가씨가. 같이 추락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지만 그녀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럼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게 되는 거야? 유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와 월하소녀는 땅바닥에 충돌하고. 쾅. 땅은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둥근 구덩이를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땅에서 밀려난 흙과 바위들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갔다. 그러나 어떤 참상이 도시에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땅 아래로 계속 떨어져가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 이상하다? 계속 우리가 굴착기라도 되는 듯이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지? 설마 벌써 죽은 건 아닐 것이고. 일단 죽으면 나타난다는 검은 갓과 두루마기를 걸친 저승사자도, 뿔 달린 도깨비도, 심지어는 천사나 악마도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우린 아직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죽은 게 아니라면, 왜 아프지 않은 거야? 물어보고 싶어도 옆에 있는 사람은 아직....... 즈즈즈즈. '뭐야?' 이건 적의 결정타를 맞고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이건 뭔가 결정적인 반격을 하려는 듯한....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고, 그녀는. 콰쾅. 나를 데리고, 하늘로 튀어나갔다. 지하로 꺼져가던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콘크리트로 된 도로를 부수면서, 로켓처럼 별들을 향해 쏘아진 것이다. 그것은 식인소녀의 정면. 바로 앞. 그리고. 번쩍.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 후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월하소녀의 반격은 그 정도로 빨랐고, 정확했다. 비록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반격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직. 식인소녀의 몸이 붉은 선을 경계로 하여, 잘려지고 있었으니까. 왼쪽 어깨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이어진 그 선은, 그녀의 몸을 절반으로 나눔과 동시에 지팡이까지 절단하고 있었다. 그 선은 서서히 넓어지더니, 두 개의 몸이 서로에게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치이이이익. 몸이 갈라진 자국을 중심으로, 서로를 향해 피를 뿜는 두 조각의 육체. 하지만 그 피는 뿜어진다기보다는, 천천히 공중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니다. 이건 피 자체가 느리게 움직이는 거다. 어째서? 식인귀는 피조차도 중력을 거부하는 건가. "우리가 그만큼 빨리 움직이는 거예요." 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우리라는 표현에는 월하소녀 뿐 아니라, 설마. "나?" 내가 무슨. 난 100m를 11초에 달리는, 여동생에 비하면 극히 느린 녀석이라고. 내가 아무리 빨리 움직이더라도 결코 그 이상으로 몸을 날릴 수는 없어.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자신의 몸에 마법이 걸린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어지간히 둔하군요." 에? 에? 에에에에에? 마법이라니? 몸에 이상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날 지금 놀리는 거지? 그렇지? 그런 거지? 마법이라면 당연히 뒤따를 주문이 전혀 없었으면서, 무슨 소리를. "자신의 마법주문을 다른 이가 듣게 하는 마법사도 있나요? 그것도 전투 중에?" 그 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확실히 자기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미리 적에게 보고하고 싸울 마법사는 없을 것이니까. 하지만 주문도 외우지 않고 그냥 마법을 발현시킨다고? 뭔가 상식과 상당히 벗어나는 것 같은데. 마법사라면 자연에 영향을 미칠 여러 가지 주문을 외워야 하고, 그러면 당연히 입을 웅얼웅얼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닌가? "모든 마법사가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어떤 마법을 배우느냐에 따라, 그건 차이가 나니까요." 윽. 정론이라 대꾸할 수가 없다. 사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이고, 나는 단지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마법을 쓰는 사람이, 당연히 나보다는 지식이 많을 게 아닌가. 그런데 난 지금 무슨 마법에 걸린 거야? 혹시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 쥐가 되거나, 개구리가 되거나, 심지어는 바퀴벌레가 되는 거 아냐? 마법의 부작용이라든가 해서..... "시공마법 레벨 6, Haste에요.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가만. 가만. 그럼 난 지금 얼마나 빨라진 거야? 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래를 보시면 알 거예요." 아래로 시선을 돌린 나에게, 내가 있었던 장소가 보였다. 아직도 내가 타고 왔던 장갑차는 불타고 있고, 우리 일행은 좀비가 된 채 식인귀에게서 달아나고 있다. 그런데 가만. 가만. 저 위치는 아까 그들이 달아난 장소에서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는데? 아니, '별로'라고 할 수도 없다. 저기는. "그 자리잖아 !" 그들은 달아나던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그리고 이 여자는 대체 언제, 나에게 마법을 걸었다는 건가. "당신을 하늘로 끌어올릴 때예요." 그럼, 이 여자가 날 걷어찼을 때 ! 나는 그때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사실 안개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 탓에, 그녀가 정말로 눈이 달려있기라도 한 지부터가 의심스럽지만. "왜 발차기부터 한 거죠?" 사람을 구타하면서 시작되는 만남은 난 싫다. 어떤 흉악한 여동생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싫다. 솔직히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막 대할 수는......... "일단 전투부터 하고." 에? 새로운 적이라도 나타난 거야? 그러나 묻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팔에 감겨서 마치 여행가방의 꼬리표라도 되는 것처럼 그냥 끌려갔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곳으로는. 슈아앙. 아주 무식하게 보이는 빛의 구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월하소녀가 재빨리 지팡이를 휘두른다. 쾅. 내 심장 바로 앞에, 뾰족한 칼날이 멈춰 서 있었다. 이건. 설마. 왠지 지팡이의 끝 부분을 연상시키는데. 이건. 이건. 이거어어언 ! "식인종이다 !" 그 식인소녀의 지팡이였던 것이다 ! 그녀가 계속 지팡이를 휘두른다. 그녀의 지팡이를 감싼, 공허하게 보이는 빛을 뿜는 칼날이 우리들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든다. 그녀가 분한 듯이 외친다. "이 개 같은 년 !" 챙. 챙. "감히 나를 자르다니 !" 챙. 챙. 챙. 챙. 챙. "너도 똑같이 잘라주마 !" 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 두 사람의 검은 점차 빨라졌다. 그리고 그 검이 한 번 맞부딪칠 때마다, 수직으로 무언가가 분출되었다. 마치 제트기류를 연상시키는 그것이 한 번 튀어나올 때마다, 천둥과 번개가 사방으로 쏟아져나갔다. '벼락으로 만든 검인가?' 하지만 전기로 만든 검치고는 공기가 너무 흔들리는데? 이건 차라리 무슨 진공청소기 같은 느낌의....... "시공마법 레벨 9의 Time-Space Blade. 당신 나라의 말로 '시공검'이라고 해요. 시공간을 잘라내는 힘을 지닌 마법검이지요." 에? 그럼 지금 두 여자가 하는 짓은......... 이런 검이 왔다갔다하다가는...... "걱정 말아요. 지구 전체를 빨아들이기 전에 마무리할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설마 이러다가 지구 멸망이 현실로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그런 현상이 나타날 징조는........ 있었다. 칼이 한 번 맞부딪칠 때마다, 도시에 놓인 자동차나 건물들이 들먹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칼은. 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 이딴 식이면, 얼마 못 가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칼이 워낙 짧은 순간만 서로 부딪치고 있어서 일단은 들먹거리기만 하지만, 좀 더 긴 시간을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데 잠깐. 우린 지금 Haste 마법을 쓰고 있다고 했지? 그럼 실제로 칼이 서로 맞부딪치는 시간은. 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 이걸 감안하면 아주 짧은 순간이라는 것인데, 그런데도 이런 식이야? 이 아가씨들 큰일낼 사람들이네. 그렇다고 말릴 방법도 없다.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 말렸겠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당장 나부터가 입이 어디 있는지, 눈이 어디 있는지, 위장이 어디로 가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으니까. 느릿느릿한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상황은. 쾅. 슈우웅. 쾅. 슈우웅. 쾅. 콰르릉. 이 지경이다. 두 여자는 지팡이를 칼로서 휘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각종 마법까지 마구 쏘아대는 데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공격하는 건 아까도 그랬지만, 식인귀 쪽이 전담하고 있고. 월하소녀는 그저 방어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반격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식인소녀도 함부로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 그래도 칼은 자주 부딪치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칼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내 귀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양쪽 모두 죽어라 휘두르는 지팡이의 속도를 감안하면, 너무나 적은 소리에 놀랄 정도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속도를 생각하면, 이해도 된다. '얼마나 빠른지는 모르지만.' 다만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똑같이 Haste 주문의 영향력 하에 있다면. '어째서 나한테는 그녀의 움직임이 하나도 안 보이지?' 내가 그렇게 느리단 말인가. 하지만 날아다니는 사람, 아니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두 여자들에게 자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비교하고 싶어도, 눈이 빙빙 돌고 있는 판에 그게 가능하겠는가.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속이 뒤집힐 것 같다. 눈알이 이제 멈춰지지 않는다. 구역질이 난다. 위장이 입에서 쏟아져 나올 것 같다. 게다가 이젠 졸음까지 나를 덮치고 있었다. 이젠 더 못 버텨. 내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간다. 의식의 끈이 막 끊어지려는 순간. 쾅. 두 사람의 지팡이가 다시 격돌했다. 그리고 식인소녀가 뒤로 물러서면서, 다시금 마법을 발동시키려는 순간에, 나는 그것을 보았다. 월하소녀가 자신의 지팡이를 빙그르르 돌리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속삭임이 들렸다. 마치 타이르는 듯한 어조의 목소리가. "힘은 약간 있지만, 그뿐이군요." 월하소녀의 지팡이가 원을 그리자, 그 회전에 휘말린 식인소녀의 지팡이가 옆으로 날아간다. 지팡이를 놓친 식인소녀가 재빠르게 월하소녀의 지팡이를 잡으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펑. 식인소녀의 등뒤로,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폭발하듯이 쏘아져 나간 것이다. 뭐지? 무슨 마법이지?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다. 식인소녀는 허리를 뒤로 꺾은 채, 서서히........ "끝났어요." 월하소녀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상대의 등에서 튀어나온 무엇인가가, 그녀의 지팡이 끝으로 모인다. 보석이 박힌 지팡이의 머리 주위를 회전하는 빛의 개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빛은 무언가. "아아아아아." 이건 비명이었다. 고통. 증오. 죽음. 절망. 좌절. 그리고...... 어째서 저 식인소녀는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설마....... 그러나 월하소녀는 그런 내 의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지팡이를 하늘로 세우자, 빛이 하늘로 날아갔다. 그것은 곧바로 달 모양의 별로 바뀌었고, 도시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월하소녀는 하늘에서 괴로워하는 식인소녀를 향해 읊조린다.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달이, 은가루처럼 부서져서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것은 비처럼 도시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굳어버린 좀비들의 위로, 불타는 건물 위로, 그리고 쓰러진 나무와 풀들의 위로. 파아아아아. "불이......." 건물의 불들이 생명을 잃고,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기괴한 비명을 지르던, 악마의 얼굴을 담은 연기들도 제풀에 꺼지고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던 시체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난 총알자국도, 뜯겨진 상처도,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악몽이 지워져간다. 마치 물거품처럼. "모두를 살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혼을 담을 그릇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되돌아올 거예요." 그렇다면 설마. 굳어져 있던 한 소녀가, 다시 핏기를 되찾는다. 흉하게 비틀려 있던 팔다리가, 다시 새하얀 살결을 되찾으며 원래대로 펴진다. 그리고 그녀는 서서히 땅 위에 눕는다. 평온하게. 그러나. "모든 이를 살릴 수는 없다.........고 했나요?" 그러자 그녀는 약간 슬픈 듯이 답한다. "네. 한 사람만은." 그 사람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팡이를 겨눈다.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한 사람을 향해서. "자. 책임의 무게를 느낄 준비는 되었나요?" 그녀가 지적한 대상은, 여전히 기세를 죽이지 않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증오의 대상은 너무나 잔잔한 눈길을 주었지만, 그녀는 그 반대로. "이......... 이 년이.......... 감히 내......... 내 혼을 !" 그 증오심은 내 가슴을 파헤쳐 놓을 것만 같았으나, 월하소녀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를 제외하고. 달 아래에 선 그녀는 달 위로 날아가는 상대에게. "가엾어라." 에? 어디가? 저 여자가 과연 그런 범주에 들어가도 될 사람인가? 조금 전에 저 여자에게 죽을 뻔한 나로서는, 상대를 동정할 수가 없었다.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그런 여자의 어디에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지? 그녀의 어디에, 불쌍하다는 말을 쓸 곳이 남아있다는 거지? 게다가 그녀는. "내가 여태까지 모은 내 혼을.........!" 그리고 그녀의 지팡이가 하늘로 쳐 들려진다. 검은 빛의 회오리가 뱀 모양의 지팡이 머리를 향해 모여들고, 그녀는 서서히 이쪽으로 지팡이를 내린다. 공격할 셈인가. 하지만 월하소녀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그녀의 행동을 바라볼 뿐. 그리고 식인소녀는 드디어. "죽어라 !" 검은 빛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그 빛이 우리를 뒤덮을 상황에서도, 월하소녀는 태연하게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쩔 셈인가. 그녀는 싸움을 포기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에 너무 힘을 써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도 없게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착각에 불과했다. 월하소녀는. "바보 같은 사람." 챙.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빛은 두 조각이 나더니, 마치 눈이 녹듯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 뒤에 선 식인소녀 역시. 푸억. 하늘을 향해 붉은 샘물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한 소녀가 추락했다. 죽음의 나선을 그리면서. 그녀의 지팡이에 새겨진 뱀들이 울부짖는다. 그들의 머리가 부풀어오른다. 그리고. 푸악. 지팡이도 주인과 함께, 한없는 강하를 시작했다. 죽음으로의 강하를. 우리는 그 종말을 눈으로 쫓았고, 그들의 최후는 허망했다. 빛과 함께 일어나는 폭발도, 검은 연기와 함께 쏟아지는 악령도, 아무 것도 없이. 쾅. 땅바닥에 격돌하며 피 보라를 뿜어낸 것이, 그녀의 최후였다. 휘이이잉. 월하소녀는 나를 안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의 광경은, 이것이 느린 속도라는 것을 내가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 발 아래의 세상은 아직도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비록 기괴한 연기도 시체들의 울부짖음도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 아래에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호수조차도, 이 소녀가 있는 동안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었으니까. 물이 얼음처럼 제자리에 멈춰선 광경을 실제로 보다니. "이걸로....... 끝난 건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나는 어떤 세상을 맞이할 것인가. 시체들이 뛰어다니는 참혹한 세상인가. 모든 것이 멎어버린 죽음의 세계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만이 남아 있는, 공허한 세상인가. 그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월하소녀는 전혀 걱정하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끝났어요."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끝이 과연 존재할까. 이 일이 끝나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역만리 타국에서 맨주먹만으로? 과연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진희와 친구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현실이 나를 압박했고, 무지의 커튼이 나를 조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내가 맞닥뜨릴 진실은 어떤 것일까. 탁. 불안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가운데, 월하소녀는 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비록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적어도 하늘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한 가지. "혹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무사한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걸 알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이 도시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그리고 식인소녀가 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그녀는 내 허리에서 자신의 손을 풀더니. "스스로 확인해보세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하늘로 떠올랐다. 내가 미처 그녀의 옷자락을 잡기도 전에. 휘이이잉. 새벽 바람만을 남기고서. 터벅터벅. "왜 내가 이런 꼴을." 비참했다. 아무리 걸어도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 도대체 그 여자가 날 어디에 내려주었기에 이런 외진 곳에. "잘하면 좀비한테 안 물려죽고 굶어서 죽겠군." 아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말도 안 통하는 이런 먼 나라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독일 친구를 사귄 적이 없는 이상, 나는 어떻게든. 터벅터벅. 걸어갈 수밖에 없다. 일단 도시 한가운데로 가야 하니까. 그리로 가서 경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일이 풀리겠지. 안 되면 손짓발짓을 해서라도 우리나라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연락을 해야..... "아, 안 되겠다." 차라리 플레닛 그룹에 전화하는 게 더 낫겠다. 내 이름과 여동생의 이름을 대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가지고 나에게 호소한다. 사실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건. "..........." 언급할 게 못 되니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시내로 들어가서, 경찰서를 찾는 게 빠를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있었던 그 병원으로 돌아간다면, 거기서 휴대전화를 찾아서..... "남아 있을 리가 없지만." 경찰들이 내 휴대전화를 압수한 후, 어디에 처박았는지 알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진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희 뿐만이 아니다. 문희도 연미 누나도 행방이 묘연하니까. 과연 좀비들이 헬리콥터에 나타나서 설쳤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탄 헬기에도 그런 일이 생겼을까. 그렇지 않다면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클라라는? 나와 최후까지 함께 달아나던 그들의 운명은? 과연 월하소녀가 그들을 살려주었을까. 그리고 살았다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내 생각은 도중에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아구. 다리야." 이젠 더 못 걷겠다. 인간적으로 너무 다리가 아팠던 것이다. 게다가 머리도. 밤을 꼬박 새워버렸으니, 머리가 아픈 건 당연하지만. 나도 모르게 길가에 주저앉는다. 일어나려고 해도 이젠 그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밥도 못 먹었다고." 이미 밤도 지나고, 지금은 아침이었다. 그동안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좀비들에 맞서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단지 피로뿐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어디에 기대서라도 자고 싶었다. 이젠 정말로 기력이 없었기에. 그러나 여기서 쓰러지면. "다시 못 일어날거야." 조난 당한 사람이나 할 생각이지만, 나는 지금 조난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행과는 헤어졌고,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무전기도 무엇도 없다. 남은 것은 누가 보면 살인강도로 착각할만한 유탄발사기와 그 탄약뿐. 물론 자살용 무기라는 권총도 있기야 하지만, 이런 걸 보면 어떤 독일인도 '조난 당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은행이라도 털기 위해 중무장한 강도'로 보지. "은행강도치곤." 돈이 없지만. 그나마 지금은 오해할만한 독일인도 근처에 없었다. 좀비들이 휩쓸고 간 흔적만이,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다. 부서진 자동차나 엎어진 장갑차. 그리고 추락한 헬리콥터의 잔해까지. 그나마 좀비들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은 다행인데. "사람도 없잖아."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어젯밤에는 누군가가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고통스러웠다면, 지금은 아무 것도 안 나옴으로서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목은 마르지, 배는 고프지, 눈은 자꾸 감기지. 게다가 메고 있는 무기들은 한없이 내 어깨를 짓누르지. 게다가 발은 한없이 아프지. 다리도 무겁지. 군대에서 천리행군을 하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천 리를 걷지 않았지만, 그게 위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 천 리를 걸어야 할 지도 모르니." 도대체 이 고행길은 언제나 끝난단 말인가. 물론 모든 원인은 나를 이런 한적한 곳에 내버려두고 가 버린 그 월하소녀였다. 내려주려면 사람 많은 곳에 놓아두면 안 되나. 왜 하필 이런 곳에 버려 둔단 말인가. 심보가 거의 여동생 수준의........ 휘이이잉. 주먹도 없었다. 발길질도 없었다. 정말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걷다 보니, 어제의 일이 마치 꿈 같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생각될 정도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시체들이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그러나 내 어깨에 매달린 무기들이, 그건 사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사실 그런 일이 진짜로 생기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무기들을 짊어져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건 너무 무겁다. "내버릴까."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들판에 무기를 내버려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최악의 경우 노상강도를 만나더라도, 이 정도 무기는 있어야 안전할 것이니까. 사실 강도가 나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굳이 나를 향해 총질을 할 필요도 없다. 잠시만 기다리면. 풀썩. 이렇게 될 테니까. 내 다리는 이미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듯, 비틀거리고 있다. 여기서 나무 뿌리라도 땅에 나타난다면. 탁. 비틀비틀. 안 넘어졌군.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걸 시험할 기회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결국. 털썩. 이게 당연한 건가.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고, 그냥 길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겠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길 가장자리로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피로는 나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이젠 정말로 한계에 온 것이다. 몇 차례나 좀비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나도. '탈진 상태는 못 피하는 건가.' 씁쓸했다. 이렇게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마치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가, 귀환 도중에 쓰러져 죽는 꼴이었다. 비유가 너무 과한 게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젯밤에 겪은 일은 치열한 전투, 바로 그것이었다. 생전 총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내가, 기관총을 마구 쏴댔으니까. 게다가 좀비와의 이종격투기라니. 이게 전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최후에는 외계에서 온 여자들간의 싸움에 말려들어.... "우엑." 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위장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만큼 휘둘렸던,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행기 멀미도 그 지경은 아니었어. 차멀미 정도는 상대도 안 되고. 그러나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금은 그저. "자고 싶어."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래. 난 할 만큼 한 거야. 잠깐만 눈을 붙이고 나서, 다시 움직이는 것도 좋겠지. 동그란 눈의 시야가 점차 좁아지고, 그것이 실처럼 가느다란 창이 된다. 그리고 닫힌다. 닫히기 직전에 내가 본 것은. "블라블라블라." 군인들이었을까.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6화 일상을 향하여 (1) "크아악." 시체들이 내 뒤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이미 같이 오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고, 나 혼자만이 살아남아 쫓기는 것이다. 전차도 장갑차도, 군인들도 경찰들도, 그리고 옆에 있어줄 사람도 이제는 없다. 남은 것은. "카아악." 시체들뿐이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존재인, 나를 잡아먹기 위해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늦게 달리면 다른 좀비에게 식사거리를 빼앗긴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그들의 위장 속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나는 더 빨리 달린다. 그러나 좀비들의 다리가 더 빠른 것 같다. 아무리 달려도 그들과의 거리가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다리를 건너던 내 앞에. "크아악." 앞에도 좀비들이 달려오고 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소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낸 후 앞뒤로 하나씩 던졌다. 곧바로 좀비들의 대군 속으로 사라진 수류탄은,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염을 뿜어냈다. 좀비들이 불길에 싸인다. 하지만 그 불길은 나에게도 손길을 뻗는다. "이얍 !" 그 불길을 맞이하기 전에, 나는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다. 불길이 다리 위를 흩고 지나간다. 나는 그 아래에서,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미 물이 마른 강을 따라, 다른 탈출로를 찾아 달린다. 좀비들을 다시 만나기 전에. 그러나 5m도 달리기 전에. 쿵. 나를 가로막은 것은, 검은 망토를 걸친, 뱀을 지팡이에 휘감은 여자였다. 그녀는 클라라의 머리를 입에 물고, 천천히 그 피를 빨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콱. "잘 먹겠어." 그녀가 클라라의 머리를 내려놓은 것과, 내 멱살을 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달아나려고 하지만, 식인소녀는 오히려 즐거워한다. "먹이란 건, 순순히 먹혀주는 것보다 약간 반항하는 편이 맛이 더하지." 그리고 그녀의 입이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 돼. 안 돼. 이건....... "안 돼에에에 !"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허공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꿈이었나. 하지만 너무나 사실적인 꿈이었다. 나는 얼마 전만 해도, 바로 그런 곳에 있었지 않은가. 그때의 기억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소용이 없다. 내 몸에 마치 달라붙기라도 한 듯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꿈속에서 만난 좀비들의 내장처럼. "으으." 분명히 그들은 전멸해버렸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히 내 눈앞에서, 좀비들이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악몽은 어쩌면 좀비들이 사라졌다는 걸 확신하지 못하는, 내 불안이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째서 사람들이 좀비가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사람으로 돌아왔는지를 전혀 모르므로. "미스터 문구?" 비명소리가 클라라의 잠을 깨운 걸까. 문밖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여기는 우리나라였지. 여기는 좀비라고는 한 마리도 안 나타난 대한민국 땅이고, 나는 우리 집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겁을 먹을 필요가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려움을 아직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긴 사람이 겪을만한 체험이 아니었으니, 그것도 당연하다고 자기위안을 해보지만. '문희 녀석은 멀쩡하던데.' 헬리콥터로 도망간 우리 일행들 중에, 이렇게 밤마다 악몽을 꾸는 녀석은 없었다. 문희야 원래부터 신경이 두꺼우니까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도 다들 멀쩡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만. "들어가도 돼요?" 그녀가 내 방에 들어온다. 잠옷바람이라 상당히 선정적이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파자마를 입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엄청난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외투까지 추가로 걸쳤기 때문에, 남자의 음흉한 상상이 자리하기는 힘들었다. 나 자신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고. "미안해요. 저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좀비들이 고향 도시를 습격하는 바람에 부모형제를 다 잃고, 여동생의 주선으로 우리나라에 머물게 된 것이다. 아마 여름방학이 끝나면 독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지금으로선 미지수였다. 원래부터 친척이 그리 많지 않았던 데다가, 이번 일로 그들이 다 죽었기 때문이다. "젠장." 새삼스럽게 식인소녀를 원망하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여자만 없었더라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녀가 미안하다고 하는 건, 그녀가 우리 집에 신세를 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블라블라블라." "블라블라블라?" "블라블라블라 !" "Are you OK?" "다이죠오브데스카?" 눈을 떠보니, 각국 언어가 다 튀어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 그나마 '블라블라블라'가 아니게 들리는 것은, 맨 끝의 두 마디뿐이었다. 영어와 일본어였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말은 안 하네.' 우리나라가 그렇게 작고,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던가. 하긴 처음에 클라라도 나를 보더니 '위험한 나라 코리아'가 어쩌고저쩌고 했었지. 클라라? 클라라? 클라라 ! "클라라 !"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난 그 도시에서 빠져나오다가 클라라와 군인 아저씨들이 모두 죽는 걸 목격했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잊어버렸다." 그 뒤가 잘 기억이 안 난다. 정신 없이 헤메던 기억은 나지만, 그 전에 아주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역시 잠이 부족해서 그랬던 걸까. 그런데 여기는 어디냐?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니 전형적인 시골풍경이다. 비록 여기는 독일이니까 한우는 구경할 수 없지만. 상당히 어리버리하게 고개를 돌리는 내 꼴을 보더니, 군인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It's OK. All OK. All zombie killed in Konstanz a few hours ago(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콘스탄츠에 있던 모든 좀비들은 몇 시간 전에 죽었어요)." 에? 모든 좀비가 죽었다고? 그 말 진짜냐? 다만 내가 있던 도시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나기 때문에, 콘스탄츠라는 도시가 내가 아는 바로 그 도시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기쁜 소식이긴 했다. 잠깐. 잠깐. 그런 소리는 이미 내가 직접 확인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잠깐. "How did you know that(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 후에 나는 도시로 돌아갔다. 군인들의 장갑차에 동승한 채로. 하지만 도시에 진입하기도 전에. "블라블라블라?" "블라블라블라 !"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그렇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싸우다가, 결국 괴물의 손에 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클라라?" 하지만 그녀는 내 앞에 나서지를 못했다. 특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제대로 되살아나지 못했나 하고 살펴보니, 그건 아니다. 다만. "I'm sorry. I'm sorry. I'm sorry(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 전에....... 제가......." 뭘 그렇게? 하지만. "제가 당신을........ 당신에게 그런 짓을........ 당신을 죽이려고......." 아하. 그랬었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을 시체로 만든, 식인소녀가 나쁜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미안해요....." 그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다른 세 명의 군인들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주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좀비가 되었을 때, 나를 습격한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니까. 나쁜 건 식인소녀이지, 그들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탕. 느닷없이 날아온 총알에, 우리 모두는 장갑차 안으로 엎드렸으니까. 그런데 이건 뭐냐. "What the hell ! You said all zombies killed(도대체 뭐야 ! 당신은 좀비들이 다 죽었다고 했잖아) !" 내가 이렇게 외친 것도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좀비들이 다 죽었다고 외친 게 누구인가. 그런데 그걸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는 사실이 있다니. 그런데 가만 있자. 좀비들이 총을 쏜 기억은 없었는데? 그렇다면. "헬리콥터로 확인한 사실입니다. 어제 분명히 모든 좀비는 소멸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그리고 도시 치안확보를 위해 이곳에 파견된 겁니다." 말은 잘 해요. 말은. 그럼 이 총은 누가 쏘아대는 거야? 고개를 내밀어보려고 하지만. 피융. 좀비와의 총격전 경험은 있지만, 사람과의 총격전 경험은 맹세코 없는(당연하지, 있으면 큰일이잖아) 나로서는, 머리를 내밀 용의가 전혀 없었다. 그때, 독일군 한 사람이 TV화면을 켠다. 조작한다.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다 나온다. 확실히 요즘 무기들은 좋구나. 사람들이 머리 내밀 필요도 없이, 카메라로 다 보여주다니. "시민들끼리 총격전이 붙었군요." 그들은 군대가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총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설마 이 도시에 그렇게 불량한 인간들이 많았단 말인가. 그런데 어느 쪽이 강도일까?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은행강도를 비롯한, 사악무도한 마피아 집단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군요. 사격중지명령에 불응하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 수 있었다.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다. 마치 그들은 서로를 원수 보듯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왜? 내가 독일어를 알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랬다. 모든 이가 나처럼 생각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좀비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를 죽인 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섰다. 모든 이들이 되살아났으니 그런 증오심을 품을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옆에 사랑하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단정했다. 그리고 무기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다. '군인들이 싸우다가 떨어뜨렸을 테니.' 무수히 많은 좀비들에 맞서서,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들이 좀비가 되어서까지 무기를 들고 다니지는 않았고, 그걸 생각하면 길에 무기가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나 자신부터가 도시에서 탈출할 때 군인들의 장갑차에서 무기를 구했으니까.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생각을 해 보라. '겨우 인간으로 돌아왔더니.' 눈앞에 가족이 없다. 그리고 가족을 잡아먹던 괴물이, 사람이라며 서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총기류가 흩어져 있다. 그렇다면 생각이 짧은 사람은 당연히 사고를 칠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이 깊다면 자신이 좀비에서 사람으로 돌아왔으니, 가족들도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간다면 이 세상에는 바보가 없을 것이다. 물론 높은 자리일수록 바보가 많아서 문제지만. 그리고. 탕. 아마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가 분을 참지 못해 총을 쏘았을 것이고, 그 총성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한 번의 총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폭발시켰을 것이고, 동시에 불안감을 확산시켰을 것이다. 모든 이가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었기에. 그러니 그들은 언제 자신들이 총에 맞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죽기 전에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자는, 그리고 죽음을 당하기 전에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클라라가 자기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우리 집에 머무르게 된 것이 다 그 때문이니까. 그 일만 없었다면 독일에 머무르겠지만, 내가 그녀라도 당분간 독일 부근에는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좀비를 더 보는 건 꿈으로 족하다고. 게다가.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클라라를 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번 사태로 인해 죽은 친구는 하나도 없고, 가족들도 모두 무사하며, 집도 이렇게 무사하지 않은가. 물론 그것은 우리나라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하지만, 최소한 나는. '다리 뻗을 장소는 남았으니까.' 내 몸도 무사히 건졌고 말이다. 그런 내가 클라라 앞에서 감히.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어.' 내가 그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나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을 겪은 사람도 눈앞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몸부림칠수록,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깨달을 뿐이다. 내가 미쳐버리지 않는 것은, 그나마 나는 총을 쥐고 그들에 대항해서 싸웠기 때문에. 그리고. "달이 떴네." 저 달 아래에 서서 좀비들을 물리쳤던, 그녀를 떠올린 때문이다. 그녀가 모든 재앙을 무로 되돌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다만 그녀가 사람들의 기억을 그대로 놓아둔 것만은 실패라고 생각하지만. 그 기억만 없었더라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그런 건 잊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나 자신부터가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을까. 다시 만나서 물어보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난 그녀의 이름도 주소도 모르니까. 어디에 가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내 두뇌가 아인슈타인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데 클라라가 그 말을 듣더니. "아인슈타인(Einstein)." 장식용으로 놓아둔 돌멩이 하나를 집어드는 거다. 그건 무슨 의미지? 한참 고민했지만, 독일어라면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알 리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원래 독일사람이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이라는 정도는 알지만, 그의 이름의 의미를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상대성 이론이라면 손톱만큼 알아도. 클라라가 어색해진 의미를 풀기 위해. "Ein means one, and stein means stone(ein은 one. 즉 하나를 의미하고, stein은 돌을 뜻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자기 나름대로 분위기를 띄우려는 거였나. 나는 억지로 웃었다. 우울한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녀는 누구였을까." 조언을 구하고 싶어도, 없는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럴 대상이 없다. 클라라와는 겨우 영어로 의사소통이 '억지로' 가능한 상황이고,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두뇌명석하고 눈치 빠른 누군가는 귀국하지 않았으니. 뭐? 진희나 문희나 연미 누나나 풍남이 녀석이 아직 안 돌아왔느냐고? 그럴 리가 있냐. 귀국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총알처럼 돌아왔는데. 하긴 우리 일행 중에서 그 누구도. "야. 여기 경치가 좋으니 더 있다 가자." 이런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긴 그게 정상이다. 나부터가 도망갈 생각만 했으니까. 그 하루의 체험이 독이 되었는지, 허리에 총이 없으니까 솔직히 뒷덜미가 서늘하다. 언제 녀석들이. "크아악." 덮칠지 모르니까. 어쩌다 내가 이런 겁쟁이가 된 건지. 그러나 한 사람만은, 그냥 독일에 남아버렸다. 아. 대단한 여동생이여. 그녀는. "우리 회사 직원들 병문안 가야 해." 아무리 그녀가 전문경영인들에게 회사경영을 대부분 맡기고 있다지만, 적어도 회장으로서 직원들이 다쳤는데 모른 척 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우리는 일제히 말리려고 했지만. "걱정말고 가서 쉬어." 그녀의 말이 아니라, 주위의 경호원들을 봐서,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저도 잠시만 더 머물게요." 그래서 나도 하루 더 남았다가,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클라라 혼자서 부모님과 형제 자매의 장례식을 치르는 걸 놔둘 수도 없었으니까. 좀비에게서 살아나셨다가 인간의 손에 죽다니. 그것도 이미 되살아난 가족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 하에. 살인자들에게 죄를 묻고 싶어도,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가족의 원수라며 타살당했다. 그런 식의 악순환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생존자중 상당수가 사망자 명부에 올라가고 말았다. 한 번 그 명부에 올랐다가, 겨우 빠져나왔더니 다시 강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쏴아아아. 클라라의 가족들의 장례식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흐느끼는 그녀를 붙잡아준 것은 내가 유일했으니까.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가족들을 많이 잃었지만, 클라라처럼 모조리 다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지할 데가 없어진 그녀는. "갈 곳이 정해질 때까지는 우리 집에 와요." 이런 여동생의 제안으로 인해, 나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물론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양부모님을 찾아내면 다시 독일로 떠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런데 웃기는 건. '왜 네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냐?' 독일 정부야 지금 사태 수습을 위해 바쁘니까, 좀 도와줘도 이해가 간다. 그녀는 어쨌든 대기업 총수니까. 그런데. '왜 우리 교민들을 네가 다 챙겨야 하냐고.' 어째서 나는 귀국할 때까지, 우리나라 외교관들을 하나도 볼 수 없었을까? "정말 정신 없는 휴가였어." 강제로 다시 잠자리에 누운 나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간단한 선택은 잠을 자는 것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휴양하러 갔다가 지옥훈련을 한 꼴이니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1주일간 집에서 자고 싶어." 마침 휴가기간도 상당히 남았으니 말이다. 이번 난리를 신문과 방송에서 본 부모님이 놀라서, 제대로 된 휴가를 가자고 적극적으로 장소를 찾고 계시니 곧 갈 곳이 생기겠지만, 당분간 여행은 사양하고 싶다. 특히 해외여행은. 그 중에서도 특히. "앞으로 전풍그룹 물건은 절대 안 살 테다." 손님 접대를 그런 식으로 하다니. 물론 그건 일종의 불운이자 사고이기는 했지만, 그 여파는 매우 컸다. 당장 플래닛 그룹과의 제휴가 취소되고, 여동생의 접대를 맡은 부장이 해고당했다고 한다. 해고 사유는 차기 회장의 경호대책 미흡과 플래닛 그룹 회장에 대한 접대 실패. 하긴 풍남이 역시 이번에 죽을 뻔했으니, 그룹 회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돈이 얼마나 깨졌는데." 거래가 무산된 게 크긴 컸던 모양인지, 아무도 그의 해고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긴 나라도 그럴 거야.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물론 지금까지는 여동생의 정체가 잘 숨겨지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아무래도 이번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플래닛 그룹 회장, 연 미인양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될 가능성이 99%로 높아졌다. 그녀가 가진 기업이 너무 크고, 이번에 교민들에게 한 일도 너무 컸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아휴. 이제 난 시집 다 갔네." 농담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그렇게 높은 사람이면 결혼하기가 상당히, 아니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런 푸념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긴 옛날부터, 그 녀석이 결혼하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너무 잘 나가니까.' 결국 내가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줘야 하나. 그녀의 정체가 확실히 폭로되기 전에. 오라버니라는 건 역시 괴로운 직종이었다. 게다가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은 최소한 두 명은 더 있었으니. '진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이번 일로, 그녀를 여자친구로 만드는 게 매우 어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쨌든 난 지금 클라라와 동거를 하고 있다고. 동거를. 물론 부모님과 여동생이 옆에 있으니 모든 이들이 꿈꾸는 그런 동거는 아니고,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양부모님을 찾아주겠다고 여동생이 장담했으니 그 기간은 매우 짧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동생이 그렇게 다짐했으니 분명하다. 그러나. '동거는 동거라고.' 여동생은 지금 바빠서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했고, 부모님들도 의사와 약사라는 직업을 가지신 이상 집에 빨리 들어오시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니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클라라는. "아응." "아앙." "으응." 이럴 거라는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집에 보낼 수도 없는 게. '독일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사실 클라라가 영어를 조금은 할 줄 아니, 그걸로 대화하면 되지만........ 원래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라는 게 문법과 작문은 잘해도. "Can you speak English(당신은 영어를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Yes(예)라고 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 그리고 그녀 자신도 난데없는 외국여행에 대해 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 믿을 수 있는 사람, 즉 나와 같이 있어야 했다. 일가친척이 살아있으면 좋을 텐데, 신원확인이 안 된 사람들이 많아서 찾기에는 시간이 걸린단다. 그러니 결국 나는. '적응해야지. 어쩌겠어.' 남들이 보면 행복하기 짝이 없는 고민이라고 외치겠지만. 허리에 권총을 찬다. 권총 탄창을 두 개 정도 허리에 끼워둔다. 방탄조끼를 입는다. 수류탄을 대 여섯 개 매달아둔다. 기관총 탄약을 넣은 탄약통을 허리에 매단다. 요즘 군장은 이런 걸 추가로 끼우기 편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이거저거 왕창 붙이기가 편하다. 아. 물론 우리나라 군장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글프게도. 그리고 MG4 기관총을 든다. 물론 유탄발사기와 유탄을 추가로 허리에 찬다. 이걸로 외출준비 완료. "아. 이게 아닌가?" 그런 체험을 하고 나더니, 여기가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곳으로 착각하고 있다. 아니, 그러기 이전에 처음부터 기관총 자체도 없지만. 미국의 참전군인들이 귀국해서 공항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이 공항에 테러리스트가 나타나면 나는 어느 길로 가서 어떤 방법으로 녀석들을 해치우겠다." 이런 계획을 세우는 자신에 놀랐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전혀 아니다. 나 자신이 지금. '그러고 있잖아.' 이거 안 되겠군.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운동복 차림으로 뛰어나갔다. 아무리 휴식중이라지만, 아침 운동은 해야 하니까. 물론 몸에 피로가 쌓였으므로 너무 무리하지는 않겠지만. "휴우." 아침운동은 상쾌한 것이다. 내 옆에 달리는 클라라 역시,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살살 달리고 있다지만. '어떻게?' 내가 느린 건가. 그게 아니면 클라라가 빠른 건가. 그녀는 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다. 하긴 그러니까 그 지옥 속에서 그렇게 오래 살아남았겠지만. 나는 더 빨리 달리려다가. '쟨 여동생이 아니라고.' 그렇다. 클라라는 여동생이 아니며, 따라서 정상적인 여자아이와의 산보를 위해서라면 나는 속도를 늦춰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람의 습관이라는 건 원래 쉽게 바뀌지 않는 법.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평소에 이런 상황이라면. "오빠. 너무 느려." 여동생이 이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내 앞으로 나가게 되니까. 아무리 여동생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최소한 달리기에서 뒤질 수는 없었다. 그 녀석은 기업 회장이지 운동선수가 아니고, 더군다나 '여자'다. 여자아이한테 속도에서 뒤지면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Stop. Mr. Moon gu. Stop(멈춰요. 미스터 문구. 멈춰요)." 에? 왠 영어야? 그제야 나는 내 뒤에 달리는 사람이 여동생이 아니라, 독일에서 온 고아소녀 클라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바보다. 비정상적인 여자들. 예컨대 문희나 여동생 같은 경우만 접하다 보니, 정상적인 여자아이의 달리기 속도를 까먹었던 것이다. 이런 멍청한. 그래서 나는 당장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돌아보니. "이런." 클라라가 콩알만하게 보인다. 이역만리 타국에 혼자 떨어뜨려 놓다니. 나는 당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헐떡이며 이리로 달려오는 클라라를 맞으며. 아이고. 그녀는 너무 무리한 탓인지, 어깨를 펄떡이며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손을 댄 채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헉. 헉. 미스터 문구. 너무 빨라요."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내가 하다니. 불쌍한 여자아이를 혹사시킨 꼴이다. 나는 그녀가 잠시 숨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고, 시계바늘이 돌아갔다. 자. 다시 달려볼까........ '안 되겠다.' 그냥 걷자. 걸어. 아직도 헐떡이는 클라라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자. 마셔." 일단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한 캔을 사서 들고 온다. 아. 물론 내 것은 제외하고 한 캔이다. 차가운 커피를 받은 그녀가, 캔을 딴다. 나도 딴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꿀꺽꿀꺽. "카아." 시원하다. 이걸로 조금은 나아진 듯 하다. 역시 여름날에는 맥주 한 캔이 최고......... 이게 아니군. 어쨌든 시원한 커피 덕분에, 그녀도 좀 진정된 듯 하다. 역시 한여름에 이렇게 빨리 뛰는 건 여자아이에게는 무리였어. 나는 감격에 젖었다. 지금까지 괴물 같은 여자들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됐어. 됐어.' 일단은 현재에 충실하자. 그녀가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새 부모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나도 악몽에 시달리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하나 더 하면. '오늘 아침처럼 좋은 일이 계속 되도록.' 그렇다. 나는 오늘 프라이팬과 식칼의 습격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여동생이 아직 해외에 있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잠시라도 평안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었다. 다만. '그 덕에 늦잠을 자 버렸지만.' 물론 내가 그동안 무리한 걸 감안하면, 그렇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침운동시간은 식사 후로 미뤄졌고, 어마마마께서는. "역시 문구는 미인이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어마마마....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전 좀비들에게 쫓겨다니다가 겨우 우리나라로 돌아온 거라고요. 게다가 처음에 해외여행을 했던 목적도 휴양이었고. 그걸 아시기 때문에 어마마마께서 날 크게 책망하시지 않는 것이지만. "음. 내일도 이러면 나도 미인이처럼 프라이팬을 들어볼까?" "참으세요." 프라이팬도 아무나 휘두르는 게 아니라고요. 물론 약에 관련된 문제라면, 약사이신 어마마마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집안일 쪽은 별로..... 사실 어머니께선 워낙 바쁘셔서, 그런 쪽으로는 손이 닿지 못한다. 그 덕에. "역시 가정부라도 들여야겠군 그래." 아바마마께서도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하지만, 그런 눈치가 역력하다. 그도 그럴 것이. "...........특이한 맛이네요." 클라라가 그렇게 미화해서 표현했지만, 음식의 맛은.... 불효자가 되기 싫으니 평가는 안 한다. 다만 밥이 상당히 남은 것만은 분명했고, 그 밥의 운명은.......... 몰라. 어차피 어마마마는 너무 바쁘시기 때문에, 점심도 저녁도 해주실 수 없는 걸. 그래서 우리는 점심은 각자 해결하기로 했다. 그럼. 그럼. 그래야 어마마마의 노고를 덜어드릴 수 있지. 그런데 저녁은....... '큰일이다.' 오늘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내일은? 모래는? 그 다음은? 안 그래도 중국산 김치가 음식점을 점령하는 판국에, 언제나 사먹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동생이 돈으로 침대, 아니 저택을 지을 정도의 위인이라고 해도, 그로 인해 내 용돈이 하루 1억 원이라든가 금테 두른 신용카드가 있다던가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가정부 하나를 들여야 한다. 되도록 빨리. '그런데 누구를 데려오지?' 이게 문제였다. 누가 우리 집의 가정부로 오느냐는 것. 사실 누구를 데려온다고 해도 솜씨에 문제가 있는 데다가, 여동생이라는 애가 워낙 괴팍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성격이 좋은 사람,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배겨나지 못할 게 뻔했다. 사실 대기업 회장이라는 자들이 원래 까다롭지 않은가. 마음만 먹으면 캐비어(철갑상어 알)부터 시작해서 제비집 요리에다 곰 발바닥에다 새끼돼지 통구이에 푸아그라에......... 그만 하자. 나만 비참해진다. '나쁜 녀석.' 저 혼자만 그런 걸 마구 먹는 거냐. 나는 저 멀리에서 산해진미에 푹 빠져있을 여동생에게 맹비난을 퍼부으려다가..... 말았다. 그 녀석이 지금 독일에 놀러 간 게 아니니 말이다. 그 녀석은 아마 지금쯤. '죽어라 뛰고 있겠지.' 자기가 독일대사도 아닌 주제에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그녀의 플래닛 그룹은 지금 독일에서 막대한 기부금을 냄과 동시에, 피해자들을 위해 식량과 침구류까지 보내주고 있었고, 그녀는 그걸 진두지휘하고 있단다. 독일정부는 물론, 다른 국제적 대기업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지만, 가장 빨리 움직인 게 플래닛 그룹이기 때문에. '완전히 스타 다 됐다니까.' 물론 회장의 얼굴은 화면에 안 나오지만, 플래닛 그룹은 아마 이번 일로 막대한 반사이익, 즉 선전효과를 챙기지 않았을까. 더불어 독일정부로부터 도시재건사업을 수주 받기도 그만큼 쉬워질 것이고. 노리는 게 너무 빤히 보이기야 하지만, 그래도. '사건 발생 3일이 지난 후에야 움직이는.' 어느 나라보다는 나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총알처럼 날아오는 플래닛 그룹의 도움이 당장 필요했으니, 그들에게도 나쁠 것은 없었다.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니까. 결과는 양쪽 모두 이득을 얻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네가 다 한 것처럼 나오는 건 싫어.' 물론 여동생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플래닛 그룹의 활동은 독일 신문과 방송에서 꽤 중요하게 취급해주고 있었다. 어쨌든 난민들에게는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여동생의 기업이 좋은 일로 신문에 실리는 것은 오빠로서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사실 이번 사태를 수습한 사람은, 여동생도 독일정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저 먼 달 아래에 떠 있었던. "힘은 약간 있지만, 그뿐이군요." 그 말과 함께 도시에 좀비를 부르던 식인소녀를 제압해버린,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실 이름도 모르는 월하소녀가 누군지 알아내고 싶어도. '얼굴도 못 봤으니.' 안개로 자기 얼굴 가리지 마. 예쁜 얼굴인지 호박인지도 모르게 해놓고, 자기 얼굴이 호박이니 뭐니 하면 주먹부터 휘두르다니. 누군지 알면 꼭 찾아가서 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게다가 신문 보도에서도. '좀비라는 글자는 거의 없으니.' 사실 신문기자가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좀비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뒤에야 가능했다. 군대까지도 밀리던 그 날엔 기자가 도시에 진입하도록 배려할 여유가 독일정부에 없었고, 나 역시 기자를 만나게 된 것은 도시의 폭동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인터뷰는 내가 아닌, 독일 병사들과 생존 시민들에게 집중되었다. 뭐? 매스컴 탈 절호의 기회를 왜 놓쳤냐고? 그건. '자고 있었으니까.' 잠도 못 자고 좀비들에 대항해 싸웠는데, 기자들과 만날 여유가 어디 있겠냐. 웬만큼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나는 그냥 독일군 막사에 가서 잤고, 그래서 유럽 지역에 얼굴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런데 깨고 나서 신문과 방송을 들어보니, 독일방송은 뭐라고 하는지 몰라도 다른 외신에서는. <독일 남부에 폭동. 시민들끼리 총격전. 사상자 다수> <독일군, 도시 완전 장악. 치안 확보> <피해자들, 가족의 시체 앞에서 통곡> 그런데 그 외신들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그 병을 고친 걸까.' 이게 바로 문제였다. 물론 신문 제목이. <독일 남부에 정체 불명의 질병 발생> 이랬으면 엄청난 혼란을 불렀을 것은 확실했다. 전염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신종 전염병의 출현. 한 번 전염되면 100% 사망하며, 사망한 자는 다시 그 질병을 퍼뜨리는 좀비로 부활. 이런 질병이 나타난다면 국민 전체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니, 독일정부가 이걸 초기에 발표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발표할 타이밍을 잡기도 전에. "끝났어요." 그 월하소녀의 말대로, 상황이 끝나버렸으니까. 사실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걸 믿겠는가. 좀비라는 건 영화에서 나오는 괴물이지, 실제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물론 부두교 신자들이라면 믿겠지만, 그들이 아는 원래의 좀비는 내가 본 좀비와는 뜻부터가 다르다. 누가 시체의 내장이 스스로 기어 나와 사람을 습격한다는 말을 믿어주겠는가. 아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미친 사람 취급받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건 뭔가 개운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해석하든 말이다. 최소한 나는. "힘에 눈이 멀어 큰일을 저질렀군요. 당신."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보았으니까. 그녀는 분명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질병을 치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병을 퍼뜨린 식인소녀는 분명히, 나를 구해준 그 소녀, 월하소녀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 여자가 어째서 월하소녀에게 증오심을 품었을까. 그리고. '왜 나만 그녀를 보았을까.' 신문기사를 보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민들의 광란의 원인은? 집단환각? 신종질병?> <살인 혐의로 시민 상당수가 체포. 현재 교도소는 만원> <집단 학살. 아우슈비츠의 부활인가> <인종차별로 인한 대량 학살 여부 수사 중> 기자들은 열심히 기사를 썼지만, 정작 진짜 원인에는 아예 접근도 못하고 있었다. 좀비라든가, 카니발리즘(cannibalism : 사람 고기를 먹는 풍습)을 유발하는 신종질병이라든가, 그 병을 퍼뜨린 식인소녀라든가, 그런 기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 그 월하소녀의 옷자락이라도 잡는 사람이 나오길 바랬지만. "없어. 하나도 없어." 기사를 다 흩어봐도, 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취재를 어떻게 했기에. 그 식인귀에게 당한 사람은 내가 본 것만 해도 네 명은 되는데, 어떻게 그거 하나 못 찾는단 말인가. 물론 그라스나 슐츠, 비트만은 군인이니 기자들과 만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지만. '클라라는?' 물론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피해자가 몇 만 명인데, 그걸 다 찾아낸단 말인가. 하지만 더 웃기는 건. "날아다니는 사람도 못 봐?" 나는 월하소녀의 품에 안겨서 하늘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안다. 상당히 요란한 마법이 교차했고, 그로 일어난 폭발이나 섬광은 끔찍할 정도였다. 일부러 숨기고 싶어도 불가능할 정도로. 그러나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설마 못 봤단 말인가? 그런 초등학생도 안 믿을 변명을....... "저, 미스터 문구." 에? 그 말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지금 나는 내 방에 팔자 편하게 드러누워 있는 게 아니라. '아차차차차.' 클라라와 함께 산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운동이었지만, 내가 너무 빨리 뛰면 클라라가 따라오지 못하니 산보로 변경한 거지만. 그런데 동행자를 고려하지 않은 내 혼잣말은 당연히 그녀에게 들렸을 것이고, 그녀라면 당연히. "What did you say(무슨 말을 하셨어요)?" 휴우. 그녀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우리말을 알아들었다면, 한바탕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테니까. 뭐? 클라라의 친척이 언론계에 있어서 그런 거냐고? 그게 아니고. '그 당시의 일을 말하면.' 그녀는 슬퍼할 테니까. 그녀는 그때 부모님을 잃었고, 형제도, 자매도, 그리고 집까지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었다. 게다가 그때 그녀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일을 겪었었다. 나는 그 일을 같이 겪었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두려워할지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내가 둔해도. '그걸 잊을 수는 없어.'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지 않은가. 나도 이런데, 하물며 클라라는 오죽하겠는가. 문희처럼 신경이 둔한 것도 아니고, 풍남이처럼 경호원들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으며, 진희와 연미 누나처럼 서로 의지할 자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혼자서 이역만리 타국에 내동댕이쳐진 신세인데. 그녀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그 일을 순탄하게 극복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리를 왜 해 가지고.' 지금 대답을 한다면, 그녀의 악몽은 더 심해질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클라라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니,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만약 내가. "What did you say?" 이 질문을 얼렁뚱땅 넘긴다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 그녀의 의심을 받지 않고,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고 순탄하게 넘어가는 방법은......... "Don't worry about it. I understand(걱정하지 마요. 이해해요)." 에? 뭘 이해한다는 거야? 이번에는 내가 'What did you say?'를 말해야 할 차례인가. 클라라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꼭 쥐고 말한다. "만약 그 날의 일을 생각하셨다면, 말해도 괜찮아요." 그렇다. 그 날.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날.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나는 클라라의 말에 반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을 말하면 결국 클라라로서는 부모님이 두 번째로 돌아가시던 그 일을 생각하게 될 텐데, 괜찮을까?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속이 깊은 여자였다. 침착한 어조로. "이미 눈물은 말라버렸어요." 그 말은 너무 슬픈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울 수도 없는 소녀라니. 그 말에는 그녀의 모든 회한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서,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내 손을 잡더니. "제가 자살하지 않은 건, 그 병을 퍼뜨린 게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니까요. 특히 그 빌어먹을 여자를 잡아야 하니까. 그 여자가 저를 그렇게 만들고........" 그녀의 손의 힘은 생각보다 셌다. 평소보다 훨씬.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의문에 대한 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걸 알고 나서, 어떻게 행동할지 두려웠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원인 제공자는 아마..... "그 여자는 죽었어." 그렇다. 그 식인소녀는, 내 눈앞에서 월하소녀에게. "바보 같은 사람." 그 말과 함께, 허무하게 땅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생을 마쳤으니까. 그럼 클라라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 말을 해줘야 할까. 아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내 말을 믿어줄까?' 그것이었다. 사실 월하소녀에 대한 기사는 전혀 없고, 그녀를 본 사람도 나 이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을 과연 클라라가 믿어줄까? 하지만 클라라의 눈이, 내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는 죽었어."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점을 제쳐둔 채. 그 말을 듣자 클라라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는 감정을 입에 머금은 채. "그녀가.............." 분노의 앙금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죽었다고요?" 그리고 클라라의 손이 내 멱살을 잡으며. "그녀가.............. 죽었다고요?" 그리고 그녀가 무서운 힘으로 나를 잡아 흔든다. "그녀가....................... 죽었다고요?" 공원에 울려 퍼지는 한 소녀의 저주. "그녀가................................ 죽었다고요 !"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나는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클라라의 죽음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를. 나 혼자 남아서 식인소녀에 대항해 싸웠지만, 힘이 부족해서 그대로 죽게 된 이야기를. 그리고 죽음 직전에 달 아래에 날아온 한 소녀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일. 그리고 그녀가 식인소녀를 파괴하던 일까지. "그래서, 그녀는........" "날 놔두고 허공으로 날아갔어. 그 뒤는 나도 몰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클라라는 이제 의자에 앉은 채로,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은 단지. "그녀가....... 죽었군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나는 그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향해서. "우아아아앙."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나는 그저, 그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상처를 내가 고쳐줄 수가 없으니, 그것을 덮어서 싸매어 주는 수밖에 없으니까. "고마워요." 그녀는 한참 후에야 내 품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잠시 돌리더니, 내가 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옷에 그녀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의 한이었으니까.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자에 대한 원한을 풀 수 없기에, 그녀는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 하지만 나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럼, 끝난 거군요. 모든 건." "에?" 진지한 분위기에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문제가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슬프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런? "당신이 말한 그 아가씨라면, 저도 보았어요. 그 날, 제가 그렇게 되고 난 후에." "뭐?" "제 몸이 악의 충동에 사로잡혔을 때, 그녀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녀가 제 이마에 손을 얹자, 그 충동이 사라졌어요. 당신에게서 달아나서, 더러운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했을 때." "..........그건....."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건 단지 그 식인소녀의....... 클라라는 여전히 그 일로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그 점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았고. "그 아가씨도 그렇게 말했어요. 모든 이는 자신이 살렸으니, 원한도 증오도 다 잊어버리라고. 비록 살아난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는 분명히, 내 눈앞에서 마법을 사용했는데? 전혀 클라라에게 간 적이 없었는데? 적어도 그 월하소녀가 클라라가 말하는 그 아가씨가 같은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내 눈앞에서 식인소녀에게.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언제 그녀가 클라라에게 갔었단 말인가. 나에게서 떠난 후에? 하지만 그렇다면 클라라만 다른 사람보다 늦게 치료되었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여러 장소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분신술? "어떻게 된 거야?" 게다가 클라라만 해도 그렇다. 아까까지만 해도 '원수를 갚기 위해선 악마에게 혼이라도 팔겠다'는 기세였던 사람이, 왜 이렇게 유순해진 거야? 이해할 수 없어. 누가 세뇌라도 시켰나? 하지만 클라라는. "당신이 제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아무 연고도 없는 저를 위해 목숨을 건 당신이."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지만, 나는 결코 클라라를 좋아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서 짐승으로 떨어질 것 같기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한 것뿐이다. 나는 클라라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성인군자가 아니다. 단지 어쩌다 보니 좋은 일을 한 것뿐이다. 그 월하소녀처럼 확고하게, 자기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하지만 클라라에게는 이미 내가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찍힌 모양이다. 나쁜 쪽으로 찍히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만, 좀 쑥스럽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칭찬 받는 건 아니지만. "그 여자가 죽어 버렸다면, 복수할 대상도 없으니까요. 제가 할 일은 이제 복수가 아니라." 그녀는 갑자기 땅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저를 용서해주시겠어요?" 당황해서 굳어버린 내게, 그녀는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해준 당신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저를."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의 그 행위로 인해 내가 죽었던 것도 아니고, 그 대답으로 그녀의 마음에서 부담이 덜어진다면. "응." 하지만 그녀는 토라진 듯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대답해 주세요." 그래서 나는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I forgive you(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 행위에 한해서라면, 그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만은, 성인이며 군자이며 위인으로 있기로 했다. 내가 평생에 이런 사람이 될 기회가 과연 몇 번이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이 소녀에게 조금이라도 구원이 된다면. "네." 그제야 그녀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다만 그걸로 끝났으면 괜찮았는데. 쪽. 이, 이게 뭐야? 내가 놀라 몸을 뒤로 피했지만, 이미 당한 건 당한 거다. 그나마 입술이 아니라, 뺨이었다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클라라는 활짝 웃으면서. "그건 감사의 표시예요."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리며, 활기차게 외쳤다. "자. 집으로 돌아가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파아." 참 정신 없는 아침 산책이었다. 갑자기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돌아갈지,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편함에 꽂혀 있는 이 편지는 뭐냐. 그리고 겉봉의 이름은..... "나한테 온 거네?" 여동생한테 온 거라면 얌전히 보관할 것이고, 부모님에게 온 것이라면 저녁이 되기 전에 안방에 모셔두면 된다. 화장대 위에 놓아두면 어머니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고. 그러나 그 겉봉에는 내 이름이 써져 있었고, 따라서 나에게는. "어디 보자." 기꺼이 편지를 읽어볼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 무슨 편지냐. 그냥 전화 한 통이나 e메일 한 통만 보내면 끝나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겉봉에 있는 주소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왜 전풍그룹에서?" 지난번의 악몽 같은 여행을 주선한 당사자가 아닌가. 처음에는 여동생에게 '식품공장에서 바퀴벌레가 들끓는' 걸 보여줘서 국제망신을 자초하더니, 그 다음에는 그걸 만회하겠다고 해외 여행을 주선했다가 안내원이 한 시간이나 지각하고, 그 다음에는..... 말도 하기 싫다. 어째서 그런 지경에 처했는데도, 차기 회장이 끼어있는 일행에게 경호원 하나 안 붙여줬단 말인가. 정말 그들이 일류 기업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워졌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또 나한테 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이번에는. '대체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러니 내가 전투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폭탄제거로봇을 동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기에, 나는 그저. "이걸로 될지 모르지만." 장갑만 끼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신중하게. 혹시 하얀 가루가 나오는 일이 없도록. 뭐? 과잉대응이라고? 아. 고글을 끼는 걸 잊었구나. 혹시 이상한 게 나와서 눈이라도 다치면 큰일이지. 나는 잽싸게 고글을 가져왔고, 클라라를 뒤로 물러서게 한 후, 편지 겉봉을 뜯었다. 다행히도. "없다." 무슨 하얀 가루나, 좀비 내장이나, 그런 건 튀어나오지 않았다. 휴우. 이번엔 바퀴벌레 안 넣었구나. 그러나 다른 것이 거실 아래로 떨어졌으니. "이, 이게 뭐냐 !" 나는 바짝 긴장하면서, 뒤로 펄쩍 뛰어 물러섰다. 물론 클라라는 내 뒤로 밀어붙이면서. 급히 쇠파이프를 들고 그 물건에게 겨누지만. "아니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전풍그룹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위험하거나, 고장나거나, 뭐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살살 잡아서 들어보니. "호텔 숙박권?" 이게 뭐냐. "그러니까, 내가 집에 없으니까 편지로 대신했다, 이건가?" 호텔 숙박권과 동봉된 편지에는, 분명히 그렇게 써져 있었다. 아마 풍남이가 직접 왔다가, 내가 없으니까 편지만 넣고 가버린 모양이다. 이런 전풍그룹 후계자답지 않은 일을. 탈법으로 기업을 이끄는(그렇게 믿어지는) 현재의 회장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올바른 처사가 아닌가. 이 녀석이 정말, 제대로 된 회장님이 되려고 하는 건가. 뭐 우리나라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뭐라고 써 있어요? 미스터 문구." 그것은. 나는 재빨리 영어사전을 가져와서, 옆에 펴놓고,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이다. 정말 국제화시대에 사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구나. "Please forgive our terrible fault, To repay our mistake, we made some ticket to have a beautiful vacation for you. You can stay our hotel anytime with this ticket. Have a nice leisure in Jun Pung hotel in jeju island. from Jun Pung company(저희들의 끔찍한 실수를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들의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저희들은 당신을 위한 아름다운 휴가를 마련하기 위해 티켓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이 티켓을 가지시면 언제라도 저희 호텔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전풍호텔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내시길. 전풍그룹으로부터)." 헥헥. 다 읽었다. 역시 우리말을 영어로 고치는 짓은 못해먹을 노릇이다. 편지에 이렇게 영어로 써진 게 아니라, 내가 영어를 일일이 만들어야 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절대로 짧게, 짧게 말할 테다 ! 말하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듣는 클라라 역시 힘들어하지 않는가. "어쨌든." 이 표딱지의 의미는 명확했다. 전풍그룹에서, 모처럼 인간다운 행동을 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수 십억은 가볍게 뜯어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관대한 사람이니 이 정도로 그들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물론 여동생은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쪽에 연락해보면 나올 일이고. 그렇다면. "제주도에 갈 티켓이라." 만약 이대로 된다면, 우리는 제주도에 공짜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 끝 부분에 보니, 추가로 한 문장이 덧붙어 있다. 슬쩍 훔쳐보니. "추신. 미인이에게 잘 좀 말해 줘." 아이고. 그럼 그렇지. 이 인간들이 양심에 의지하여 이런 저자세를 취할 리가 없었어. 그저 여동생이 강하니까, 그녀가 돈이 많고 거대한 기업을 소유했으니까, 그게 겁이 나서 잔뜩 움츠러든 게 분명했다. 하긴 그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는 상대는, 자신들보다 강한 사람밖에 없지. 만약 내가 중소기업 사장 정도였다면, 그들은 도리어. "감히 차기 회장님을 위험에 몰아넣다니. 대역죄는 사형이다." 이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나오면서, 내 재산을 날치기했을지도 모른다. 뭐? 편견이라고? 전풍그룹이라는 곳이 욕을 먹는 게 괜히 먹는 게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등쳐먹으면서 재산을 축적했다는 의심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이었고, 나는 그 표준에 충실히 따른 것뿐이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먼저 허리를 굽히니, 기분은 좋았다. 사실 나도 클라라도 일단 살아남았으니, 별로 불만을 토할 생각은 없고. 일단 티켓의 수를 세어보자. 차라라라락. 이 정도면. "전부 다섯 장이니까, 두 장은 부모님 드리고, 한 장은 내가 챙기면........" 남는 건 두 장이다. 그러나 한 장은 당연히 여동생을 위해 떼어놓아야 하니까, 남은 건 한 장이 되는 셈이다. 이걸 어떻게 할까. 진희에게 이걸 보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옆에 있는 클라라가 너무 불쌍하다. 모두 떠나고 텅텅 빈집에 얘 혼자서만 놔둔다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그렇다면, 부모님한테 사정해서라도 두 장만 더 타낼까? 그렇게 하면 둘 다 초대할 수 있잖아? 그러나 그랬다가는 그 유명한 삼각관계를 성립시키고 만다. 분에 넘치는 짓이지. 그럼 여동생한테 사정해서........... 아. 그만두자. 내가 여동생의 물건을 슬쩍했다가는 무사히 넘어가지 못하니까. 오죽하면 그 사촌꼬마들조차, 감히 여동생의 방에는 들어갈 생각도 안 하겠는가. 설령 그녀의 방문이 열려 있다고 해도, 그런 목숨 아까운 짓을 하는 미친 녀석은 없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없었다. 옛날에 한 놈 정도는 그랬지만. "으아아아악 !" 이게 그의 운명이었고, 그 후에는 아무도 그런 벼락맞을 짓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럼 할 수 없지. 나는 간단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갈래?" 즉, 진희와 클라라를 보내고, 나는 남기로 한 것이다. 클라라를 이역만리 타국에 혼자 내버려둘 수도 없고, 그녀 역시 편안한 휴식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솔직히 어마마마의 상차림을 이대로 그녀가 견뎌내는 것은......... '절대 무리야.' 그녀는 독일 사람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내가 본 독일요리는 고작해야 소시지와 맥주뿐이고, 그 외에 생각나는 건 없다. 절대 없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나라 요리도 제대로................삐................ 어쨌든 안 된다. 어머니께서 아시는 독일요리도 나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녀에게 한식을 먹인다면? 이미 그 결과는 확연히 드러났으니. "...........특이한 맛이네요." 그리고 그녀는 숟가락을 놓았다. 입맛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닌 이상, 그녀가 그러는 것도 당연하긴 했다. 사실 클라라가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독일식 소시지나 아인토프(Eintopf), 라이베쿠헨(Reibekuchen) 같은 요리가 나와야 하는데, 난 그런 거 본 적도 없다. 당연히 우리 집에서 그런 걸 만든다는 것은, 여동생이 아닌 이상 절대로 무리다. 뭐? 여동생이라고 꼭 그걸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그 녀석은 아마 가능할 것이다. 정 안 되면 독일 요리사를 불러와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이 자리에 없는 이상, 클라라로선. '밥과 김치는 아무래도 벅찰 거야.' 그나마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건 감자밖에 없었으니, 이대로 두면 큰일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여동생이 있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그 녀석은 지금 없다. 따라서 독일식 식단을 짜 줄 수도 없고, 요리의 질도 별로 기대할 수 없다. 특히 밥. 어마마마, 직장 여성의 약점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출하시다니. '물론 여자한테 다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주부와 어머니, 그리고 직장인이라는 삼중고를 견디는 것은 보통 여자에게는 무리였다. 여동생 같은 애는 특별한 경우고, 보통은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보통 직장여성은 어느 한 부분에 미진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온갖 수난을 다 당하기 마련이다. 뭐든지 주부 부담인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그래서 가정부 하나를 구해야 하지만, 지금은 무리다. 돈을 낼 사람이 안 왔으니까. 그렇다면 클라라를 잠시 호텔에 보내고. '일단 나 혼자 버텨보자.' 나 혼자라면, 라면이든 뭐든 다 동원해서, 어떻게 여동생이 올 때까지 연명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진희와 같이 여행을 가는 게 불가능해 보이고, 그렇다면 사나이답게, 그냥 양보하자.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말은 나 혼자 집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괜찮겠어요?" 클라라가 그렇게 묻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이 가엾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사나이의 도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런 장한 행동을 하려던 내 꿈은, 깨지고 말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바로 그때. 두두두두두. "으악 !" 이런 실수를. 휴대전화기를 품속에 넣고 다닌 게 실수였다. 무슨 진동모드가 이렇게 무식하냐. 나는 이 전화기를 준 사악무도한 누군가를 저주하면서, 일단 전화를 받았다. 선명하게 나오는 디지털 TV 화면이라니. 무슨 전화기가 이렇게 사치스럽냐. 여동생이 '위장용'으로 가졌다고 생각되는 전풍그룹 휴대전화기보다 훨씬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을 보며, 클라라가 속삭인다. "굉장하네요." 하긴 나도 디지털 TV에 음성인식기능까지 갖춘 휴대전화기는 난생 처음이고, 그래서 클라라의 말에 간단하게 동의했다. 미인이 녀석, 이런 걸 어떻게 만들어냈지? 아니, 플래닛 그룹이라는 곳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기술력을 지녔기에, 이런 것도 뚝딱 만들어낼까. 전화기를 열어보니. "오빠?" 이 녀석아. 그럼 네가 이 전화기를 누구한테 줬는데, 그걸 일일이 확인하고 있냐? 그리고 꼭 전화기로까지 날 구타할 필요는 없지 않냐. 진동모드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갈비뼈가 다 쑤신다. 못된 녀석. 그러나 여동생은. "엄살 부리지 말고. 지금 잘 있어?" "그래. 잘 있다." "잠은 잘 자고?" "그래. 잘 잔다." "음. 새벽에 한바탕 잠을 설친 얼굴인데?" 무서운 녀석. 그건 어떻게 알아내는 거냐. 역시 여동생이라니까. 그녀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다. 마치 그때 본. "스스로 확인해보세요." 왜 그녀가 떠오르는 거냐. 일단 월하소녀의 모습은 뒤로 제쳐두고. 눈앞의 여동생에게 집중해야지. 그녀는. "음. 오빠. 혹시 전풍그룹에서 연락 온 거 없어?" 도,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는 거냐니까 ! 나는 도리 없이, 문제의 편지와 티켓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혹시 감시카메라라도 집에 달아둔 거 아냐? 천리안을 지닌 것도 아닌 이상, 그게 아니라면 이건 말이....... "오빠 표정만 보면 금방 아네요." 무슨 소리를 ! 내 표정이 그렇게 다양한 줄 아냐? 하지만 내가 화내거나 말거나, 그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야, 이 녀석에게 보여줄 수 있지? "얼굴 앞에 들어봐. 전화기에 있는 카메라가 나한테 영상을 보내줄 거야." "잠깐. 그럼....." 아까 내 표정을 본다는 말도 그렇고, 지금 여동생의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면 이건 혹시..... 나는 그제야, 몰래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이 전화기였어. 못된 녀석. 이런 거나 오라버니에게 주고 말이야. "걱정 마. 전화를 할 때에만 카메라 기능이 작동하니까. 평소에도 카메라로 쓰려면 버튼 몇 개를 눌러줘야 하지만." 그런 기능 없어도 돼. 나는 첨단과학을 한 번 저주한 후, 얌전히 전풍그룹에서 보낸 숙박권을 전화기 앞에 들이댔다. 그걸 살펴보던 여동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음......" 저 녀석이 왜 저래? 갑자기 불안지수가 99로 증대된다. 여동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분명히 반대한다는 말이 그 뒤에 따라오는 경우가 많은데..... 안 돼. 나도 미녀들의 비키니 수영복을 구경할 권리 정도는 있다고 ! 그러나 이 녀석이 안 된다고 하면, 우리 집에서 그걸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그걸 할 수가 없다. 뭐? 이 녀석이 감히 부모님에게도 대드냐고? 그건 아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배고픈데 장사 있냐. 우리 집에서 '밥'을 하는 사람이 여동생인 이상, 당연히 그녀가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약사 일로 바쁘셔서 요리 문제를 대부분 여동생에게 일임하고 있고, 그 덕에 그만큼 부담이 줄어드는 이상 여동생에게 왈가왈부하시지 않는다. 아버지? 여동생이 밥 한 번 차리면 그냥 행복지수 100이 되시므로, 할 말 없다. "와아. 맛있다." 그 덕에, 여동생이 한다고 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다행스러운 것은 저 녀석이. "안돼요." 나를 제외하고, 이 소리를 자주 들은 사람은 우리 집에 없다는 거지만, 그게 오히려 더 악랄한 일이었다. 이 녀석은 왜 나만 가지고 그래. 게다가 요리솜씨에 현혹된 부모님들은 언제나. "미인이는 나중에 시집가면, 잘 살 거야." 저,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저런 애를 데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해서, 흥을 깨는 짓은 안 했지만....... 어쨌든 그 모양이니, 여동생이 하자고 하는데 반대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이 녀석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그저 밥이 원수지. 그러나 클라라로서는 내가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왜 그렇게 당황하세요?" 하긴, 독일에서도 저렇게 드센 여동생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녀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하긴 했다. 게다가 그녀는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토종 독일인이 아닌가. 하지만 그냥 그런 상황을 놓아둘 여동생이 아니었으니. "Guten Morgen?" 뭐? 구텐.... 뭐?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클라라의 표정은, 갑자기 반가워하는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녀 역시. "Guten Morgen." 뭐, 뭐야. 설마 이 녀석이 독일어까지 할 셈인가? 그러나 나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동생께서. "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 나는 Guten Morgen(구텐 모르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귀를 잠시 닫아두는 실수를 범했다. 그 말이 독일어로 '안녕하세요.'라는 의미임을, 그것도 아침인사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기차는 떠난 후였다. 이미 두 사람의 대화는 은하계를 떠나,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었고 나 같은 문맹자, 적어도 독일어에 대해서는 ich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야. 영어로 해. 영어로.' 하지만 클라라는 독일 사람이므로, 영어보다는 독일어가 익숙한 게 당연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바래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꿔다 논 보릿자루.' 가 되었다. 클라라가 대화를 끝낸 것은, 기다리다 지쳐서 파김치가 된 이후였다. 아이고. 흐물거리는 나에게 겨우 전화기가 넘어왔을 때, 클라라의 표정은. "아. 개운해." 이 말로 요약하면 되리라, 그동안 독일어를 못해서 꽤나 스트레스가 쌓였던 모양이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그렇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스트레스를 왕창 받았으니. '도대체 네가 못하는 건 뭐냐?' 저 녀석이 언제 독일어를 배웠느냔 말이다. 저 녀석 방에서 독일어 교재를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저렇게 말이 술술 나올까. 이건 기본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는 거다. 같은 쌍둥이면서, 내 머리하고는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는가. 혹시 저거,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애가 아닐까..... 두두두두두. "헛소리 금지." "켁. 켁." 오라버니의 마음을 마치 유리처럼 들여다보는, 저 이상한 애가 정말 내 여동생인지..... 두두두두두. "헛소리 금지라고 했을 텐데?" "켁. 켁. 켁." 더 이상 생각하다가는 휴대전화에 맞아죽겠다. 켁켁거리는 나를 보며 상당히 당황하는 클라라. 하지만 여동생이 그런 '다른 나라의 시선'에 신경 쓸 사람인가. 그녀는 오히려. "사람은 개인차가 있는 거야. 아무리 쌍둥이라도 오빠하고 나하고 완전히 복사판일 리는 없잖아?" 그것도 정도가 있지, 개인차가 너무 크단 말이다 ! 아무리 켁켁거리고 있다고 해도, 말은 바로 해야겠다. 이건 완전히 IQ 200이 넘는 괴물..... "어머. 몰랐어?" 이렇게 사람을 철저하게, 타이밍까지 맞춰서 밟다니. 못된 녀석. 휴대전화에 진동기능을 넣은 게, 이런 때 쓰려고 했던 거냐. 그것도 전화를 거는 중이 아니라, 전화를 하는 중에 진동을 시키다니. 이게 무슨 게임기도 아니고..... "자. 자. 장난은 이만하고, 아까 전풍그룹에서 날아온 티켓 말인데....." 내가 분노하거나 말거나, 자기 마음 대로구나. 야 ! 왜 이야기를 갑자기 돌리는 거야 !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대충 넘어가려는 거지? 그러나 여동생의 한 마디에 내 입은 또 막혔으니. "국제전화는 비싸네요." 그게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을지도 모를, 재산 천 억 달러가 넘는 부자가 할 소리냐. 그러나 돈을 내는 게 내가 아니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화를 끊을 경우, 후환이 두려우니 안 되고. 무엇보다도 '밥'이 걸려있는 문제인 이상, 나는 그냥 참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뭐? 참고 살라고? 그러기에는. 꼬르르르륵. 배가 협조하지 않는 걸. 나도 클라라도, 심지어 국제전화를 거시는 여동생께옵서도 그 소리를 들었고, 그녀는. "불쌍한 오빠....."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네. 그 원인의 95%는 네가 아니냐. 그런데 요금이 비싸다며? 용건만 이야기하자. 그래 뭐냐? "그 티켓은 쓰지 마." 에? "야 ! 왜 쓰지 말라는 거냐 ! 배고파 죽겠는데 !" 모처럼 호텔에서 근사한 대접을 받을 기회인데, 왜 그걸 무산시키겠다는 거냐. 그러나 여동생 앞에서는 내 의지는 완전히 무용지물이었으니. "TV 켜 봐. 지금 나올 거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녀석의 하는 말이니 얌전히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그걸 켜라는 거냐? 설마 너. "연속극이라도 볼 셈이냐?" "그거 말고 뉴스 !" "네. 네." 채널을 돌리니, 난데없이 양복을 입은 기자께서 마이크를 들고, 열심히 뭐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저기는. 설마. "그렇게 되었으니 그 티켓은 쓸 수 없어." 불쌍한 풍남이. 그 장면은 전풍호텔 앞 바다에 유조선 하나가 좌초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름이 흘러나와 모래사장은 완전히 새까맣게 되었고, 피서객들은 기분 잡쳤다는 표정으로 호텔을 떠나고 있었다. 사실 저건 전풍그룹의 잘못도 아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마. "쌤통이다 !" "잘 됐다 !" "고소하다 !" 이렇게 반응하겠지. 나부터 그런 생각이 반짝하고 들었을 정도니까. 이게 사촌이 논을 사서 배가 아픈 수준이면 좋은데, 그게 아닌 게 문제다. 뭐? 반 기업정서가 너무 심하다고? 우리나라의 다른 기업들은 그렇게 욕을 많이 먹지 않는다. 전풍그룹이 유달리 욕을 많이 먹는 것뿐이다. 그러니 평소에 좀 잘 하지. 그런데 잠깐. "저렇게 되면......" 고소하다는 생각에서 큰일났다는 생각으로 변질되어 가는 내 표정을 보며, 여동생이 말하기를. "아마 올 여름은 장사 다 했을 걸. 저래서야 피서지로 쓸 수가 없다고. 일단 보험에 들었으니 금전적 손실은 별로 없겠지만." 나와 클라라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비키니를 기대했다면, 그녀는 먹을 것을 기대했을 테니까. 그게 멋지게 무산되었는데, 어찌 아니 슬프랴. 이렇게 된다면. '휴가는 꽝이다.' 망했다. 이런 나쁜 소식이 아침부터 날아들다니. 나란히 눈물을 좔좔 흘릴 듯한 소년과 소녀를 보며, 악랄한 여동생은 태연히 말한다.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걱정 마. 내가 지금 가서, 다~~~~~~~ 해결해줄 테니까. 그럼 나중에 봐. 오빠 사랑해." 삑. 뭐, 뭐냐. 네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줄 아냐. 하지만 그녀는 여동생이었다. 상식이 기본적으로 통하지 않는 애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나를 더 충격에 빠뜨린 단어는, 그녀가 마지막에 붙인. "오빠 사랑해." 뭐가 ! 사랑하는 오빠를 그렇게 마구 패는 여동생이 어디 있냐 !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아자 !" 자고로 여름은 이래야지. 커다란 태양, 곱게 깔린 모래사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의 무리. 이게 진짜 여름인 것이다. 내가 지난번에 경험한 것처럼. "카아악." 이런 게 아니고.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태양과 모래사장과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 하나도 안 보이잖아 ! 온통 주위가 새까만데, 뭐가 보이겠냐는 말이다 ! 그렇다. 지금 우리 일행은 사이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온 것은 괜찮았는데.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아아아 !" 비행기 안에서 소리를 질러봐야 'ugly korean(어글리 코리언 : 추한 한국인)'으로 찍히기만 하므로, 나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열심히 외쳐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왜 하필 낮이 아니고 밤에 오는 거야. 그러나 내 옆자리에 앉은 여동생께옵서는. "원래 비행기편이 그렇잖아." 뭐? 원래 그렇다고? 이 사태는 순전히, 네가 밤 8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한 탓이 아니냐? 어째서 다른 시간도 많은데, 하필 그런 시간을 고른 거냐. 날 골탕먹이려는 수작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오빠. 우리나라 비행기는 이 시간대밖에 없다고. 사이판 가는 비행기편은." 그리고 말없이 비행기 시간표를 내미는 여동생의 손길에, 나는 압도당했다. 실제로 시간 편성이 그 모양이었으므로. 그리고 말을 덧붙이는 그녀. "그럼 일본 항공편을 쓸 걸 그랬나?" 이 나쁜 녀석. 하필 일본을 내세우다니. 그러나 여기서 항의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일본 항공을 타길 원하는 나쁜 사람이 되므로, 항의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쨌든 옛날 옛적은 아니더라도, 같은 품질이면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좋은 일이었으니까. 전풍그룹 제품은 제외하고. 그러나. '그러려면 제주도로 갈 것이지.' 왜 외화를 낭비하게, 굳이 사이판 섬으로 가는 거냐? 하지만 그 답은 이미 여동생이 낸 지 오래이므로, 나는 항의할 수가 없었다. 전풍그룹에서 마련해준 제주도행 티켓은, 이미 기름에 잠겨버린 지 오래이므로. 멍청한 풍남이 같으니. 왜. 왜. 왜 하필 자기네 호텔 앞에서 유조선을 침몰시키는 거냐? 나는 번지수가 안 맞는 항의를 퍼부었지만, 책임자도 아닌 풍남이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건 안다. 다만. '으. 소리 지르고 싶어. 소리 지르고 싶어. 소리 지르고 싶어.....' 이대로 물러나는 건 왠지 분해서 그런 것뿐이다. 그러나 공짜로 얻어 타고 가는 주제에, 불만을 터뜨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앉아있는 1등석 자리도, 순전히 여동생의 힘으로 얻어낸 것이니까. 보통 이 시즌은 휴가철이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이상 미리 예약이라도 하지 않으면 비행기표를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떻게 비행기표를 준비했지? "준비성이 뛰어나서 그래." 그 한 마디가, 여동생의 힘을 웅변하고 있었다. 준비성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독일로 떠났던 이번 휴가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니 준비시간은 극히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아냐.' 아무리 이 녀석이라지만, 그렇게까지는 무리 아닐까? 하지만 원래 내 예상은 틀리라고 하는 거다. 여동생은 내 얼굴을 곰곰이 쳐다보더니. "차라리 내 비행기를 타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너무 튀는 것도 안 좋다고 생각해서, 그건 포기하고 비행기표를 사기로 한 거야. 알리사가 유능한 덕이지만." "과찬이십니다." 역시 1등석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그 비서누님이 고개를 숙여 답례한다. 그런데 잠깐. 간과할 수 없는 말이 나온 것 같은데. 지금 이 녀석이 한 소리는.... "너, 비행기도 가지고 있었냐?" 지난번에 본 그 V-22 오스프리라는 비행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이판까지는 제트기로도 4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이걸 V-22같은 프로펠러 달린 비행기로 온다는 것은 좀 이상하니까 말이다. 물론 미국의 과학력이 V-22의 비행거리를 팍 늘릴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녀석이 하는 말은 아무래도..... "응. 몇 대 있어." 도대체 몇 대인지를 물어보려다가, 터무니없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다. 이 녀석은 왠지. "음. F/A-22 전투기 500대에, F-35 전투기 1000대? 그리고 수호이 계열도 좀 있고, 아. 마하 10의 극초음속 폭격기도 시험적으로 30대 정도....." 미국도 가지지 못할 엄청난 수효가 나올 것 같다는, 심히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내가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시도한 인물들이고, 징기스칸 같은 경우 거의 성공한 자인데, 왜 내가 그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망상은 멈추지 못한다. 오히려. 부우웅. 이 녀석의 등뒤에서, 거대한 항모가 진격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긴 이 녀석은 세계 제일의 대기업인 플래닛 그룹의 주인이고, 현금만 쳐서 천억 달러 이상을 소유한, 전대미문의 부자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의 다음 목표는 혹시 세계 정복? 터무니없는 소리이지만, 이 녀석이 죽어라 노력한다면 늙어 죽기 전에 그런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안 돼. 내 여동생이 더 이상 황당한 애로 진화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더 보다가는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므로. '시선을 돌리자.' 사실 여행까지 와 놓고서, 여동생 얼굴만 보는 것도 바보짓이 아니겠는가. 우선 봐야 할 사람이라면, 역시. ZZZ.... 진희는 자고 있었다. 그 옆의 연미 누나 역시, 자고 있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는데, 왜 하필 일이 이렇게 비비꼬이는 것이냐. 잠시 좌절하고. 그럼 다른 사람은..... ZZZ.... 문희도 역시 자고 있다. 하지만 이쪽은 왠지 안심이 된다. 그 녀석 수다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지금이 나으니까. 입 다물면 미인..... 아니 미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고 있으니까 예쁘네.' 입만 나불거리지 않으면 정말 예쁜데 말이야. 그녀가 조금만 얌전했으면 진희가 아니라, 문희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다. 넘어가자. 그럼 다른 사람은..... ZZZZ...... 그럼 그렇지. 클라라도 자고 있을 게..........가 아니잖아? 그녀는 책을 펴놓고, 정신 없이 읽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 시간이 늦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의 국적을 생각하면 당연하긴 했다. 그녀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독일 사람이고, 지금 시간이 독일 시간으로 몇 시이겠는가. 아마. '한낮이겠지.' 시차적응이라는 게,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그 덕에 독일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좀비들이 내 뒤를 따라오는데, 졸려서 비틀거리던 일이 다시금 상기된다.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오르자,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떨린다. 그건 악마들이었다. 사람으로 돌아온 후에도 서로를 죽여대던. 그들의 몸은 돌아왔어도, 그들의 마음은 그대로 검은 빛.... 휘이이잉. 그 검은 구름이, 서로를 쏴 죽이던 악의가 다시금 나에게 떠오른다. 총을 맞았어도, 사람을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던, 그 사람, 아니 악마들의 눈빛이. 그 강철같은 손톱이 나를 욱죄고, 조금씩 내 살을 파고든다. 차가운 절망이, 증오가 내 주위를 휘감고.....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오빠." ".........." "오빠." "............." "오빠." ".................!"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월하소녀의 무릎 위에 누워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그런데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뭐랄까. 왠지 안도감이 든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변함이 없었지만, 그 손만은. "역시 너무 무리했던 거야. 그동안." 그리고 그녀가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는다. 식은땀이 그렇게 많이 흘렀을까. 하지만 그녀는 왜 지금은 지팡이를 들지 않았을까. 혹시 의자 옆에 세워놨나?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아니잖아?" 그때 보았던, 어둠을 몰아내던 그 월하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 그냥 넘어가자. 왜 내가 여동생을 그 여자로 착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여동생의 말이 맞았다. 난 너무 피곤한 거다. 무리했던 거다. 그 날의 일은 아직도 이렇게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충격을 주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다시는 그런 곳에 오빠만 남겨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옆에서 나를 보던 비서 누님도 그제야 안심했는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외에 누구도, 내가 기절한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스튜디어스까지도. "시끄럽게 굴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 사실이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진희가 이 꼴을 보았다면, 다시 악몽을 되새길 우려도 있었고. 그래서 나는 모처럼, 여동생에게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활짝 웃어주었다. 평소에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이 녀석도 주먹만 마구 휘두르지 않으면 좋은 여동생인데, 어째서 그렇게 폭력을 앞세우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얌전해졌으면.... "그건 오빠 하기 나름이라고." 왠지 전혀 신뢰성이 없는 말인데. 그럼 여태까지 네가 날 줄기차게 때린 건, 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는 말이잖아? 다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뭐라고 항의해야 제대로 하는 건지 고민하려는데. "오빠. 곧 도착할 거야. 슬슬 준비하고 있어." 이봐. 아직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았잖아........ 하지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Ladies and Gentleman. We're arriving Saipan International Airport(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사이판 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뭐, 뭐야.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 거냐. 나는 영어로 나오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녀석,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야?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달 아래에 서 있던 그 소녀가 떠오른다. 게다가 여동생은 내 눈길을 피하고 있다. 설마. 갑자기 여동생이 뒤에 감춘 무언가가 보인다. 혹시 저거.... "그거 뭐야?" 내가 생각한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지팡이였다. 아니, 목걸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게 튀어나왔다면, 아니 그러기를 기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여동생이 내놓은 그것은, 내 예상과는 3만 광년 정도는 떨어진 물건이었다. 그것은. "전화기잖아?" 그렇다. 그것은 휴대전화기였다. 이런. 빌어먹을. 하지만 요리보고 조리 봐도, 그건 분명히 휴대전화기에 불과했다. 비록 이런저런 기능은 많이 붙어있었지만. 화면을 보니. "GPS(전 지구 위치파악시스템)?" 그래서 요 녀석이 여기 위치를 금방 알아낸 건가? 화면에는 우리 비행기가 현재 떠 있는 곳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이판 섬의 사진까지 첨부되어서 말이다. 사이판 국제공항의 위치까지 사진으로 보이고, 빨간 점이 깜박거리는 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뭐야. 이게. 그럼 나는 지금. '착각한 건가.'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지?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거지? 역시 피곤한 게 분명해. 그대로 머리를 감싸고 엎어진다.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런 나를 쳐다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난데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 휴대전화기를 빼앗아가더니, 이번에는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오라버니를 보며,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겠는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으니.' 난 바보다. 저 녀석이 나한테 준 휴대전화기를 보았을 때, 이 정도 기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어야 하는데. 여동생에게 또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마구 내 뇌리를 파고든다. 하지만 여동생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피곤한 오빠의 히스테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저 녀석이 그런 여자일 리가 없잖아.' 사실 상식적으로 따져볼 때, 여동생과 그 월하소녀의 공통점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고 해도, 두 사람은 얼굴도 다르고 키도 다르고 머리카락 길이도 다르고 목소리도 달랐다. 여동생이 아직 촐랑댄다는 느낌이 있다면, 그녀는 얼굴만 20대 후반이지 실제로는 천 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거기에 그녀가 나를 안았을 때, 그 느낌은 여동생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었다. 특히. '가슴 크기가.....' 여동생의 가슴은 월하소녀의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크기가 아니었......... 꽉. "아구구구구." 나는 또 머리를 맞은 줄 알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상하다? 충격의 방향이 다른데? 이건 주먹이 아니라 허리 쪽에서 느껴지는..... "안전 벨트 안 맬 거야?" 도대체 뭐하고 있냐는 듯한, 여동생의 눈초리가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그녀는 내 허리를 벨트로 졸라맸고, 나는 숨쉬기 운동에 전력을 집중해야 했다. 으. 너무 꽉 조이지 말란 말이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여동생아. 그러나. "이런 것까지 일일이 챙겨줘야 하다니, 정말 오빠는." 꽉.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벨트를 조인 후, 여동생은 말없이 자기 벨트도 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벨트를 조여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남는 공간이 너무 많아서 충격 흡수가 곤란할..... "불필요한 지방이 안 붙었다는 증거야." 네 경우는 솔직히 너무 안 붙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허리는 그렇게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에만 지방이 모여서..... 퍽. "아구구구구." 반짝반짝. 우리가 공항에 내린 시간은, 거의 2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아니, 셔틀버스를 타고 호텔로 출발한 시간을 생각해보면, 훨씬 더 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이봐. 이 시간 말고, 다른 시간은 없었던 거냐?" 졸려 미치겠다고. 이 잠도 없는 여동생아. 너만 그렇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어도 되는 거냐. 우리 일행 전원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셔틀버스에 올라탔건만, 이 녀석만은 말짱하다. 심지어 그녀를 수행하던 비서 누님들도 피로한 기색을 감추기 힘들어하는 판에. "우리나라 비행기로는 그래." 으. 항공사를 원망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자기 호텔 앞에 유조선을 침몰시키는 전풍그룹을 원망해야 하나. 사실 유조선이 전풍그룹의 소유물도 아닌 이상, 풍남이를 탓하는 것도 무리였으니, 나는 결국 하늘에 대고 원망을 퍼부어야 했다. 그러나 그 원망은. 씨이이이잉. 툭. 올라가다가 다시 내 머리로 떨어졌다. 너무 졸려서, 하늘로 제대로 원망을 던져 올릴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리 꾸벅. 저리 꾸벅. 요리 꾸벅. 조리 꾸벅. 내 머리는 쉴 새 없이, 이리저리 시계추처럼 왕복했다. 이런 것만 봐도, 나에게는 확실히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 내가 축구선수가 아니었다면, 2시든 3시든 상관없이 신나게 인터넷을 하거나 게임을 했을 시간인데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 꾸벅. 저리 꾸벅. 요리 꾸벅. 조리 꾸벅. 내 머리는 쉴 새 없이, 내 옆에 앉은 사람의 가슴으로 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게 하필이면 여동생의 것인 덕분에. 퍽. 퍽. 퍽. 퍽. 계속 이러고 있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의자에 기대려고 해도, 이상하게 머리가 그쪽으로 낙하한다.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아. 가끔은 다른 쪽으로도 낙하하지만. 툭. 유리창에 부딪치는 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기에, 다시금 내 머리는 반대쪽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미치겠다. 결국 여동생이 이를 갈다가. "안 되겠어. 자지 마." 그리고는, 무지막지하게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든다. 드르르르르. 머리가 앞뒤로 흔들린다. 잠시 눈이 떠진다. 그러나 곧 눈이 감긴다. 사람이 잠을 자는 건 자연적인 것인데, 왜 자꾸 말리는 거냐. 여동생아. 그리고. 푹. 나는 여동생의 품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푹. "!"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일어나고 말았다. 이 나쁜 녀석 같으니. 사람 이마를 바늘로 찌르다니. 잘못하면 죽는다고 ! 그러나 여동생은 태연하게. "자업자득이야." 아예 팔짱을 탁 끼고,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항의하려고 하지만. "Ladies and Gentleman. We're arriving......." 우리 차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 자. 조금만 더 힘을 내는 거야." "쿨......" 나는 그렇게, 여동생에게 끌려나왔다. 셔틀버스의 잠자리에서 말이다. 으. 조금만 더 자게 해 줘. 지금은 밤이잖아. 그러나 여동생에게 동정심 같은 항목은 예시당초 없었고, 나는 어거지로 여동생의 손아귀에 잡힌 채, 비틀거리며 바깥 세계로 쫓겨나야 했다. 으. 너무해. 그리고 그녀는 나를 어딘가로 던지며. "알리사. 일단 오빠를 맡아 줘." 으. 내가 무슨 짐짝이냐. 이렇게 마구 던지게.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버스 안으로 달려들어간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지? 나는 비서 누님의 품속에서, 그녀의 따스한 감촉을 느끼며 졸고 있었다..... "자. 자. 이제 다 왔으니까." 반쯤 졸고 있던 진희가 버스에서 나온다. 아.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지금조차,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옆의 연미 누나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모습이, 마치 공주님이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걸어오는 듯 하다. 연미 누나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설마 버스 안에서. '자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말해주는 연미 누나. "미인이는 문희 깨우러 갔어." 잠깐. 저 녀석이 사람을 깨운다는 것은. 나는 매일 아침마다 당하던 바로 그것을 생각하고 전율했지만, 이젠 말릴 겨를도 없다. 시간상으로 너무 촉박하고, 게다가 아무리 그 녀석이라고 해도 설마 문희한테 발길질을 하거나 주먹질을 하거나 프라이팬을 휘두르지는 못할 테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잠깐. 저 녀석은 여동생이었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후다닥. 나는 재빠르게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녀석이 국제적인 문제 거리, 즉 승객 구타를 저지르기 전에 막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들어갔을 때는..... 푹. "으읍 !" 나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버스에서 나오던 사람과 부딪쳐서. 그 사람은 바로. "Mr. Moon Gu. Are you O.K(미스터 문구. 괜찮아요)?" 클라라였다. 으. 오늘은 유달리 가슴과의 접촉이 많구나. 그녀가 내 위에 쓰러져서 그렇게 된 거지만. 그런데 문희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클라라의 밑에서 후다닥 빠져나오면서, 그 생각을 했다. 물론 클라라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도 까먹지 않고. 그러나. "쿨........"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설마. 나와 클라라가 동시에 버스 안을 들여다보자 보인 광경은,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여동생과 코에 커다란 방울을 달고 있는 문희였다. 설마. "아무리 깨워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여동생이 저러고 있는 건가........ 이봐. 잠깐. 그 방법은 좀 너무한 거 아냐. 아무리 안 일어난다고 해도, 역시 평화적인 방법이 좋은....... 퍽. "끄에엑 !" 저럴 줄 알았어. 여동생은 결국 '언제나 하던 대로' 해 버렸고, 문희는 바위에 내동댕이쳐진 개구리처럼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리고 문희는. 꽉. "아다다다다." 거의 형사에게 잡혀가는 범죄자처럼, 뺨을 잡힌 채 끌려나왔다. 으이그. 불쌍해라. 하지만 클라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동생도 평소답지 않게 많이 참았다는 소리이니, 뭐라 하기도 쉽지 않다. 이 버스는 문희의 침대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 일행은 모두 밖으로 나왔고, 여동생은 문희를 나에게 던졌다. "자. 잠에서 깼으니 문희 좀 맡아." 탁. 상당히 큰 충격과 함께, 문희는 내 품에 안기고 말았다. 오늘은 여자 가슴과 인연이 있는 날인가. 벌써 몇 명 째냐. 그러나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평소라면 너무 기뻐서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졸려.' 오로지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니까. 그래서 나는 문희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서, 나는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가야 했다. 마치 여동생처럼. 원래는 달걀 바구니를 든 새색시처럼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하지만. "쿨........" 이 녀석, 어떻게 여동생한테 한 대 맞고도 다시 잠들 수가 있지? "자. 알리사. 그쪽에서 들어. 하나. 둘. 셋 !" "네." 알리사를 비롯한 비서누님들이 셔틀버스 화물칸에서 끌고 나온 것은, 거대한. 척 보기에도 나 정도는 넣고도 남을 큼지막한 가방이었다. 비록 아래에 바퀴가 달려있기야 하지만, 저건 너무 큰 게 아닌가. 아무리 여자들이 여행 시에 이런 저런 잡동사니를 많이 가지고 다닌다지만, 저건 심한 게 아닌가. '욕심쟁이 같으니.' 크기만으로도 '난 무거워요'라고 외치는 듯한, 집채만한 가방에 나는 기가 질렸지만, 솔직히 더 두려웠던 것은. "오빠가 이거 끌고 가." 여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 돼. 난 문희 하나만으로도 벅차다고. 안 그래도 이 녀석이 너무 무거워서 대책이 없는 판인데. 아무리 흔들어도 꼬집어도 안 일어나는 문희의 잠자는 능력에는 경의를 표해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 녀석을 안고 갈 일이 없을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녀석아. 제발 좀 일어나.' 하지만 문희는 절대로 안 일어나고 있다. 이 정도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 이러다가 나까지 잠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진다. 몸의 피로는 나 역시 호텔 로비에 쓰러지라고 재촉한다. 아. 미칠 것 같아. 하지만 이 녀석이 어디에 묵을지 모르는 이상, 내 멋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없다. 그래서. "미인아. 이 녀석은 몇 호실이냐?" 우리 호텔 예약은 다 여동생이 한 것이니, 당연히 문희가 몇 호실에 묵을지는 이 녀석이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말도 하지 않고. "루이. 문희를 데리고 올라가 줘." "네." 그리고 루이라는 비서 누님은 문희를 나에게서 넘겨받더니,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한다. 어지간하면 깨워서 데려가라고 하고 싶지만. ZZZ..... 문희 녀석, 그만 일어나라. 졸면서 걸어가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기가 차서 멍하니 바라만 보는 우리 일행. 그 뒤를 이어 진희와 연미 누나가 걸어간다. 이쪽은 여동생의 손을 빌지 않고 직접 방을 예약한 터라, 나처럼 로비에서 기다릴 이유가 없으니까. 진희가 졸린 목소리로 나에게. "그럼 문구야..... 잘 자........" "그래. 너도 잘 자." 아무리 졸리다고 해도, 진희의 말에는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닌가. 뭐?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라고? 진희의 경우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가. 어쨌든 내가 고백한 상대이니까. 다만. "진희야. 언제 답해줄 거냐?" 좋다면 좋다. 싫다면 싫다. 딱 부러지게 대답해주면 좋으련만, 그녀는 아직도 답을 주지 않는다. 그 덕에 기다리는 나만 목이 빠질 지경이다. 어서 결정을 해줬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녀는 올라가..... 번쩍. 뭐, 뭡니까. 꼭 받아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저 눈빛은, '나는 받아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졸려 죽겠는데, 그런 걸 꼭 받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번쩍. 번쩍. 의지가 너무 강하다. 그래서 나는 아줌마........ 아니 누나에게도 답을 해주었다. 사실. "연미 누나도 잘 자요." 이 말 한 마디를 꼭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꼭 자기 것까지 챙기다니, 피곤한 처형이 될 거예요. 누나. 그리고 두 자매는 서로에게 기대어, 엘리베이터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긴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졸릴 수밖에 없지. 그리고 나도 졸리고. 아아아암. '그럼 남은 사람은 나하고.....' 클라라하고 비서 누님들뿐인가. 이제 내 방이 어디 있는지만 물어보고, 클라라가 자기 방으로 가는 걸 확인하면 오늘의 일과는 끝난다. 아니, 어제의 일과라고 해야 할까. '이미 2시가 넘었으니.' 지금 자도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야 하니, 좀 손해보는 느낌이다. 오늘 자고 오늘 일어나야 하다니. 하루를 손해봤어.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저, 제 방은 어디지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미스터 연." "잘 자. 오빠." "잘 자요. 미스터 문구." "잘 자요." 의례적인 인사가 지나가고, 드디어 나는 내 방에 누울 수 있었다. 비록 욕실 하나에 침대 하나만 있는, 삭막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선 옷부터 벗으려다가. "윽." 거대한 통유리로 된 창문을 보고, 커튼부터 잡았다. 당긴다. 가린다. 한숨을 쉰다. 큰일날 뻔했네. 그랬지. 여긴 우리 집이 아니라. "호텔이었지." 그랬다. 나는 외롭게도 혼자 쓰는 방을 차지했고, 여동생과 그 일당들은 다른 방으로 가게 된 것이다. 듣자하니 최상층으로 간다고 하지만, 그런데 클라라하고 문희는? "진희야 자기 방이 있다지만." 처음부터 휴가여행을 위해 방을 미리 예약한 진희와 연미 누나의 경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나와 클라라와 문희에게 있었다. 지금은 피서철이고, 이럴 때 방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인 것이다 ! 미리 예약을 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그런 고로 우리는. "죄송합니다. 남은 방이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클라라와 문희는 여동생의 방에 얹히기로 했고, 좁디 좁은 방구석에서 쪼그려서 자는 신세가 된 것이다. 불쌍해라. 차라리 내 침대도 남는 공간이 있으니, 둘 중 하나는 내 방에 재워줄까? - 미성년자에게 유해한 장면이라 삭제합니다 - 이런. 이런. 안 되나? 그럼 클라라한테 내 침대를 비워줄까? 어쨌든 나나 문희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솔직히 침대가 없어도 잠 자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잖아? 이부자리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그러나 그 말에는 모든 여자들이 반대했으니. - 미성년자에게 유해한 장면이라 삭제한다니까요 - 이렇게 된다는 거다. 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하지만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자다가는 그런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너무 컸고, 그래서 나는 독방을 배당 받고 말았다. 게다가 다른 남자도 우리 일행 중에는 없었으니. "진희 경호원도 여자고." 그런 사람이 있었냐고 할 사람에게. 있었다. 다만 눈에 안 띄는 것뿐이다. 여동생의 비서들과는 달라서, 그렇게 음지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물론 여동생에게도 그런 경호원들이 있겠지만. 하긴 지난번에 좀비들이 습격한 사건도 있으니, 경호에는 만전을 기하........ "!"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이런 실패를. 다시는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하지만 계속 떠오른다. 시체들의 손길이. 그들의 고함이. 그리고 그들의 썩은 입과,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그것은, 나를 먹고 싶다는 원초적인 식욕. ".............." 잊자. 잊어. 잊어야 한다. 이제 그런 일은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니까. 그때 월하소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분명. "끝났어요."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니다. 어째서 좀비가 생겼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자신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눈을 감는다. 시체들의 손이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올 것 같다. 눈을 뜬다. 밖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창 밖에서. 쨍그랑. 유리가 당장이라도 깨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시체들의 손이 기어올라오고, 그들은 나를........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이 또 생길 리도 없고, 이곳의 호텔 유리는 모두 강화유리가 아닌가. 게다가 그런 일이 만일 생긴다고 해도. '세계적인 대기업의 회장이 여기 있는 이상.' 경호대책은 충분할 거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안심시킬 수는 없었다. 중무장한 군대조차도, 그들에게 당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나는 지금 무기도 하나 없는..... '다른 생각을 하자.' 내일 내가 맞이할, 즐거운 피서를 생각하자. 그게 차라리 낫겠다. 여기까지 와서 피의 개울을 상상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게다가 난 지금 자야 한다고. 내일 여자아이들의 비키니 수영복 차림도 봐야 하고.......... - 미성년자에게 유해한 장면이라 삭제한다니까? 왜 자꾸 나와? - 아. 물론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내가 미쳤냐? 그랬다가는 여동생의. "여동생 펀치 ! 여동생 킥 ! 여동생 10단 공중차기 !" 이렇게 된다고. 하지만 망상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세력을 더욱 넓혀서, 내 머리를 새빨갛게 메워버린다. 나는 어떻게든 건전한 청소년으로 남아 있으려고 하지만. - 미성년자에게 유해한.........찌익 - 실패. 마음의 검열, 자물쇠가 부서지고, 나는 온갖 저질스런 상상을 마구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클라라의 비키니라던가, 진희의 비키니라던가, 연미 누나의 비키니라던가, 비서누님들의 비키니라던가, 그리고 그들의 수영복이 스르륵......... "아아악 !" 내가 왜 이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불을 켜고, 욕실로 가서 샤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여자들의 알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아니다. 사실은 내가 달아나고 싶은 것은. '상상하지 말자.' 나는 억지로 머리를 비우고, 물줄기 속에 몸을 맡겼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묵게 된 작은 방에도 욕실은 딸려 있었지만. "오빠. 잊지 마. 여긴 국제호텔이고, 여기서는 방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단정하게 입어야 해. 그리고 욕조를 쓸 때는 절대로 욕조 밖으로 물이 흘러나가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까먹지 마." 생각하기도 싫은, 여동생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랬다. 그 녀석은 내가 이 방에 들어올 때, 그렇게 신신당부하면서 주먹을 쥐었던 것이다. 즉 그 말은, 내가 만약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맞는다." 이거다. 이런 흉악무도한 여동생 같으니. 욕조 밖으로 물이 좀 넘치면 어때서? 그러나 여동생의 권고를 무시해서 내가 무사히 넘어간 적은 없으니,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실행하기로 했다. 물론. 설마. 여기에까지 도청기를 달아 두지야 않았겠지만 말이다. 쏴아아아. 물줄기 속에서, 나는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되도록 야한 상상을 안 하면서, 동시에 내일의 즐거움을 기대하는, 이른바 적정한 수준의 상상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원래 상상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크아악." 붉은 물감이 뿌려지거나. "아응." 붉은 몸이 나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양쪽 모두, 여자 알몸이 떠오르는 건 같다. 한 쪽은 인생의 끝, 또 한 쪽은 인생의 시작이라는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바람직한 청소년의 행각이라고 볼 수 없다. 여자들의 수영복의 끈이 풀어지면서........ "우아아아악 !" 내가 왜 이래. 이런 망상이나 하다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잠이나 자야지. 어차피 한숨 자고 나면 진정될 거라고.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잠을 자려고 하면. "크아악." 이거나. "아응." 이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골치를 앓던 내 눈에 침대 옆의 냉장고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 그거야. 한바탕 마시는 거야 ! 술꾼처럼 단언하며 냉장고 문을 연다. 어디 보자. 뭘 마실까. 먹을 게 있었으면 하지만, 그런 건 여기에 없을 거다. 그러나 최소한. "탄산음료도 있고 과일쥬스도 있고.......... 아. 술은 없네." 사실 잠이 안 올 땐 술 한 잔 걸치는 게 가장 좋지만.......... 아. 골뱅이도 오징어도 두부도 없구나. 안주도 없이 술만 무작정 마실 수도 없다. 많이 마신 적도 없지만. 게다가 여동생이라는 애가 이 방을 예약하면서, 냉장고에 술 같은 걸 놔둘 리가 없는 것이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술은 모두 치워주세요." 이렇게 말했을 거다. 그러니까 술이 한 방울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없는 술을 지금 찾아봐야 소용이 없고, 일단은 아무 거나 마시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나는 탄산음료를 고르려다가. "에라. 이걸로 참자." 모처럼 사이판에 왔으니, 열대 과일로 만든 쥬스가 좋겠지. 나는 망고 쥬스 한 병을 꺼내서, 병마개를 열고 그대로 목에 흘려 넣었다. 병의 입구를 입으로 물고, 병을 거꾸로 세워서 말이다. 꿀꺽. 꿀꺽. 꿀꺽. "카아." 역시. 배가 차니까 음울한 상상이 좀 가라앉는다. 그때는 아무리 배가 고프고 피곤해도 먹을 수도 없었고, 잘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 점이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잠을 자야 하는 나에게, 힘이 너무 들어가는 것도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잠을 자기 위해, 여동생에게서 받아 두었던 호텔안내서를 펴보았다. 우선 내 방부터 보면.... "가장 작은 방이잖아?" 못된 녀석. 오라버니한테 이런 작은 방을 주다니. 물론 여동생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예약도 안 했는데 이런 방을 구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분통터지기는 하지만, 그 말이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리고 가장 싸구려 방이기는 해도, 역시 별 다섯 개 짜리 호텔이라 그런지 전망 하나는 끝내주는 수준이었다. 통으로 된 유리가 방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고, 그쪽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보석을 뿌린 듯이 빛났으니까. 게다가 방에는 어지간한 물건은 다 있었다. TV, 전화기, 텔레비전, 냉장고, 심지어 개인용 컴퓨터까지 말이다. 이게 가장 싸구려라니 역시 별 다섯 개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래서. "그래. TV나 보자." 불평한다고 내 방이 갑자기 초호화판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서민은 이 정도면 충분히 넉넉하니까. 사실 이 침대만 해도, 자다가 추락할 걱정 없이 신나게 잘 수 있으며 누워서도 TV를 시청할 수 있는 막대한 장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편히 잘 수 있다 !" 그렇다. 설마 여기서도 프라이팬이 날아들지는 않을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불평을 그만 두기로 했다. 편히 늦잠을 잘 수 있는 게 어디냐. 가장 게으름이 묻어나는 자세를 취하고, 손가락 하나를 움직인다. 삐. 확. TV가 켜지고, 큼지막한 화면이 내 눈을 가득 메운다. 그런데 뭘로 볼까. 처음에는 뉴스를 보려고 했지만. "......................" 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던가. 무슨 말들이 저렇게 요상해? 뭐라고 할까. 말이 마치 끝 부분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희미해지다가 잠겨버린다고 할까? 아니, 그것뿐이면 이해할 수 있다. 눈치와 코치는 폼으로 쌓인 게 아니라고. 그러나 말이 왜 이리 빨라? 여러 가지로 컨디션이 나쁜 지금의 내가 그 말들의 홍수를 다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 이건 분명히 피곤한 탓일 거야. 다른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로 하고. 삑. "카아악." 나는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이런 빌어먹을. 왜 이런 망할 영화가 나오는 거야. 물론 실제보다는 실감이 덜하기는 하지만, 전혀 보고 싶지 않아 ! 나는 당장에 다른 데로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좀비 영화 사절 !" 이렇게 한 번 외치고 나니, 속은 편하다. 다만 다른 사람들한테 들릴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작은 소리로 외쳤지만. 정말 밤에 TV 시청하는 것도 무지 어렵네. 다시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자, 나타난 것은. 두두두두두. 쾅. 피융. 피융. 호오. 저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아닌가. 그러나 평소라면 열광할, 사람의 피가 튀고 전우애가 넘치며 약자를 보호하는......... 보호하는.......... "흥이....... 안 나......."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미 나는 저런 일을 겪었으니까. 영화로 볼 때, 즉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구경꾼으로 있을 때는 멋있었다. 피가 끓었다.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저 자리에 들어가자, 전혀 그게 아니게 된 것이다. 절로 주춤한다. 손이 저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허리에 손이 간다. 없다. 불안해진다. "카아악." 그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 나는 소름이 끼쳐서 더 이상 영화를 볼 수 없었다. 다른 걸 봐야한다.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눌러지지 않는다. 누른다. 누른다. 눌러야 한다. "이야아아압 !" 기합까지 넣으며 손가락에 힘을 주고서야, 겨우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나오는 것은 그저 그런 코미디 프로그램. 그러나. 챙그랑. 피자를 사람 머리에 날리는 장면도. 푸걱.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지는 장면도. 카악. 상대가 겁먹는 장면을 보며 놀리는 장면도. 꺄아악. 모두 무언가와 겹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내가 경험한 초현실의 이야기.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카아악."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다시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안 돼. 조금이라도 청량감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다행히도 하나가 있었으니.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모양이다. 그 프로그램이란 다름 아닌. 훌렁. 그렇다. 나는 미성년자 관람이 허용되지 않는, 그런 TV프로그램을 선택한 것이다. 평소라면 여동생의 마수가 두려워서 보기 어렵지만, 지금은 문제가 다르다. 여동생은 저 먼 별나라 궁전에 있고, 이 방은 지금 나 혼자만 있다 ! 따라서 내가 좀 불건전한 프로그램을 시청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 "만세 !" 나는 크게 외쳤다. 물론 이불을 뒤집어써서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고. 만세 한 번 외치기 힘드네. 그러나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이 옷을 훌러덩 벗는 것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명분도 있다. 악몽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쉬게 하기 위해서. 흐흐흐. 이제 조금만 있으면.... "에?"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나온 것은, 본격적인 프로그램의 시작이 아니라, 여러 불건전한 제목들과 사진 한 장씩. 그리고 그 옆에 써 있는 끔찍한 글자였다. 그것은 바로. "Pay?" 그렇다. Pay. 즉 내가 만약 청소년 건강에 안 좋은 프로그램을 보고 싶다면, 나중에 호텔에 숙박비용을 지불할 때. "시청료도 같이 받겠다는 건가." 뭐야. 그런 것도 공짜로 못 보여주겠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아악 !" 비명 한 번 지르고, 다시 나온다. 나는 호텔 방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는, 착한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기로에 서게 되었다. 저걸 보고 나중에 깨지느냐, 아니면 저걸 안 보고 그냥 자느냐.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계산서에는 분명히 그 사실이 기록될 것이고, 숙박비를 낼 누군가는 그걸 보자마자. "오빠, 저질 ! 여동생 10단 차기 !" 이렇게 될 거다. 그래서 나는 얌전히 포기 버튼을 선택하고 말았다. 잠시동안의 탈선의 유혹은 사라지고, 다시금 TV는 정적에 싸인다. 다른 프로그램들도 많이 있지만, 더 이상 볼 생각이 없다. 맥이 빠졌다. 그래서 나는 TV를 끄고. "자자. 자." 삐. TV가 어두워지면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 힘도 다 빠졌는데, 자자. 어차피 기운도 없고........... "크아악." 나는 쫓기고 있었다. 좀비들은 사방에서 몰려오고, 내가 탄 헬기는 그대로 강가에 추락했다. 군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고, 나는 클라라를 데리고 달린다. 그들을 구하고 싶지만, 이미 그러기에는 늦었다. "으아악." 살아서 우리 뒤를 따라오던 군인 하나가, 머리를 깨물린다. 총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의 팔다리는 좀비들의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피가 하늘로 튀는 것이, 그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클라라. 달려 !" 나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저기에 우리를 구하기 위한 헬리콥터 하나가 내려오고 있다. 저기까지만 달리면. 진희가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러나. 삭둑. "아아아악 !" 진희의 손목이 잘려나가고, 그녀는 헬기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헬기 안에서 나오는 얼굴. "하하하. 네 놈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리고 그 거구의 남자는, 문을 확 닫아버렸다. 헬리콥터가 하늘로 떠오른다. 흙먼지만을 남기며. 나는 헬기의 다리라도 잡아보려고 하지만. 부우우욱. 기관총탄이 내 다리 앞의 흙을 부숴서 흩뿌린다.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다. 그 남자는 기관총을 나에게 겨누며. "어서 꺼져. 감염자 주제에." "무슨 소리야 ! 나는..." "크르르....." 어, 어느새 내 뒤에까지. 뒤돌아본 내 눈에 보인 것은,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시체였다. 아니, 그건 클라라........ "크아악." 그녀가 사람고기에 굶주린 듯, 나에게 달려든다. 나는 그녀를 뿌리친다. 달아난다. 어떻게든 헬기를 잡아서 타기 위해. 하지만 헬리콥터는 공중에서. 펑. 폭발해버렸다. 불타는 사람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그리고 추락하는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좀비들. 나는 그런 혼란 속에서,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그냥 달려갈 뿐이다. 나 혼자만의 생존을 위해. 그러나 내 앞에는. "먹이 주제에 어딜 가?" 식인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서, 작은 호텔로 뛰어들어갔다. 어떻게든 숨어야 해. 방문을 잠근다. 하지만 바깥엔 이미. 쿵. 방문이 흔들린다. 황급히 방문으로 달려간다. 방문을 막는다. 하지만 침대도 흔들린다. 어느새 여기에. 그리고 창 바깥으로. 쨍그랑. 통으로 된 유리가 부서지면서, 식인소녀가 날아 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그녀는 총을 손가락으로 잡더니 굽혀버리고. "먹이 주제에 감히." 그녀의 입이 다가왔다. 붉은 피를 머금은 죽음의 입구가 나에게..... "괜찮아요." 갑자기 식인소녀가 목을 움켜쥔다. 그리고는 바닥에 넘어진다. 손톱이 부러져라 카펫을 긁어대는 식인소녀. 다시 일어서려는 그녀의 몸이. 사라라락. 얼음이 한여름의 햇볕에 녹듯, 존재를 감추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호텔방도, 바깥의 좀비도, 땅도, 하늘도. 그리고 나는. "어라?" 그렇다. 나는 산들바람에 휩싸인 채, 공중에 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 그 목소리는. 설마. 나는 눈앞에 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달빛 아래에 서 있었다. 내가 전에 본 그 모습 그대로. "당신은....." 그녀는 바람을 의지한 채, 지팡이를 등뒤로 돌려 가로로 눕히고, 두 손으로 그것을 잡고 있었다. 비록 안개로 자신을 가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월하소녀'라는 것을. 나를 죽음에서 구해준, 바로 그 사람.... "당신은........."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달빛도 별빛도 사라지면서, 나는 어둠 속에 떨어져갔다. 그저 이 말만을 남기면서. "당신은........." 하지만 그녀는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만이 내 귓가에 남았을 뿐...... "괜찮아요."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7화 여름이에요 (1) 안녕하세요? 여름이에요. 드디어 오라버니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청춘을 만개할 수 있는 나날을 맞이했어요. 이제 우리 오라버니의 선택지는 어느 쪽일까요? 과연 그는. 바다다 ! 여름이다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아 ! 비키니다아아아아 ! 이 호화스런 청춘을 선택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정반대의, 햇볕도 들지 않는 차가운 바닥으로 갈까요? 여러분. 지켜봐 주세요. "흑." 참으로 모처럼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월하소녀의 방문 덕일까. 아니, 그것은 단지 나만의 망상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의 속삭임을 들은 후로 나는. "악몽을 안 꿨다 !" 그렇다. 기념할만한 사태였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악몽에 시달렸던가. 좀비들에게 쫓기는 꿈, 식인소녀에게 잡히는 꿈, 클라라가 시체가 되는 꿈, 시체들이 일어서는 꿈, 좀비들이 달려오는 꿈, 여동생이 달려오는 꿈, 여동생이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꿈, 심지어 여동생에게 식칼로 맞아 사망하는 꿈에 이르기까지, 내가 독일에서 고생한 후유증이 얼마나 심하게....... 중간에 이상한 잡음이 끼어 들었나? 뭐 어쨌든 ! "제대로 잤어. 내가 제대로 잔 거야." 물론 수업시간에 그랬다가는 분노한 선생님의 분필을 맞겠지만, 여기는 교실이 아니고 호텔이었다. 즉, 나에게 분필을 날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긴 놀러 온 호텔에서 그런 걸 맞는 게 더 이상하지만.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패는 누군가도, 내 옆에 없다 ! 그렇다. 그녀는 거대한 특실에 머무르는 바람에 그녀의 알파요 오메가인 폭력, 그녀의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폭력을 휘두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순전히 환경 덕분이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프라이팬을 들고 호텔 방문을 열쇠도 없이 따서, 내게 쳐들어와 프라이팬을 내리치는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뭐? 휴가니까 봐준 게 아니냐고? 웃기지 마 ! 진실을 유포하는 자는 체포한다 ! 나는 수갑이 없다는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편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 오늘부터 나는 휴가인 것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앙." "아잉." "으응." 아. 이게 아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를 부르는 이런 망상은 자제하자. 그러니. 촤아. 철썩. 쏴아아. 이런. 파도를 생각해야 하는데, 여자들 방의 샤워기를 생각해버리고 있다. 잠시 고개 숙여 반성하고. 그렇다. 지금 내가 이런 망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당장에 일어나서, 바다로 가서, 멋지게 풍덩하는........ "............."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당했다. 뭐야. 이거. 여동생의 기습인가. 아니, 여기서도 몰래 내 방에 들어와서, 식칼과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짓을 포기하지 않다니. 그것도 눈을 때리다니. 나는 붉은 레이저빔에 맞아 허우적거리면서, 여동생의 악행에 치를 떨었다. 이제 레이저까지 가져와서 사람을 괴롭히냐? 그러나 내가 마주한 것은. "저게 뭐야." 핵폭발은 아니다. 화재도 아니다. 내가 본 것은, 거대한 태양을 배경으로 하여 떠 있는 여객선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자. 사이판의 유명호텔은 대부분 서쪽 해안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서쪽이나 북쪽을 바라봐야 할, 아무리 잘 봐줘도 남쪽은 가능할지언정 동쪽만큼은 절대 창문이 안 났을 이 방에 저런 게 보일까. 가만. 그렇다는 것은. "으악 !" 그렇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눈을 감았고, 깨었을 때는 이미..... 나는.......... "안 돼에에에 !" 여름의 뜨거운 하루가 이렇게 가다니. 나는 좌절하여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매정하게도 자기 맘대로 울리는 소리. 꼬르르르륵. 이런 비극 속에서도 인간은 먹고사는 것인가. "할 수 없나. 밥이나 먹자." 나는 나 자신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간단히 말해서, 밥을 먹기로 한 것이다 ! 그런데 어디로 가야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내가 이곳의 한인식당의 위치를 알기나 하나? 그래서 나는 검소하게, 호텔의 식사를 먹기로 의견을 모았다. 자. 내 소장과 대장과 위의 의견에 따라. "잠깐." 그런데 나는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잊은 문제란 건 바로. "어느 식당에 가서 먹지?" 이게 왠 바보 같은 질문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호텔에서 먹기로 했으면, 그냥 식당에 가서 앉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분은, 이 호텔의 사치성을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식당이 무려. "중국식당, 일본식당, 서양식당, 뷔페, 심지어 커피점과 제과점까지?" 그 외에 더 있지만, 정신이 사나워지니 넘어가자. 어쨌든 나는 이들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거기에 문제는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녀석은 어디로 갔지?" 나 혼자 아무 식당에나 용감하게 돌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팽개치고 자기 배만 채울 수는 없지. 의리가 있으니까. [돈 낼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뭐야. 이 설명은. 절대 아냐. 이건 단지 오라버니의 의리와 인정으로서..... [영어도 우리말도 아닌 메뉴가 나오면 어떻게 해?] 아. 이게 아니라니까. 어쨌든 나는 터무니없는 설명을 무시했다. 어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실을 누설하는 자는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니까. 나는 일단 방에서 나가기로 하고, 수영복에다 타월만 걸친 차림을 고르려다가. "오빠. 그러면 맞는다." 누군가의 위협이 두려웠기 때문에, 대충이라도 제대로 입기로 했다. 으. 편하게 입고 싶은데. 나는 폭력에 이기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 아니 오라버니로서, 그냥 나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양탄자에서 맨발로 달려보고 싶었던 희망이 무산된 건 아쉬웠지만. "오빠. 잊지 마. 여긴 국제호텔이고, 여기서는 방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단정하게 입어야 해. 그리고 욕조를 쓸 때는 절대로 욕조 밖으로 물이 흘러나가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까먹지 마." 이렇게 외치는 앙칼진 목소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귀가 아프다고. 그래서 나는 스르륵 침대에 쓰러졌다. 그냥 한 번 더 자면, 다시 아침을 맞을 수 있는.... 따르르르릉. 나는 귀를 감싸쥐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숨었다. 이건. 설마. 혹시. 그러나 원래 나쁜 예감은 죽어라 잘 맞는 게, 세상사 아니냐. 난데없는 전화의 주인공은 역시. "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 그럼 그렇지. "오빠아아아. 지금이 몇 시인줄 알아아아아.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어어어." 으. 소리가 너무 커. 휴대전화기가 쩌렁쩌렁 울리는 걸 보며, 나는 이 녀석에게서 이걸 받은 것을 후회했다. 이런 게 없었으면, 여동생의 고함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귀 떨어지겠다. 소리 좀 줄여." 나는 귀를 막으려다가, 불행히도 휴대전화를 한 손에 들고 있기 때문에 그건 못하고, 나지막하게 항의를 보내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으. 초동대처가 미흡하면 사건은 계속 확대되기 마련인데. "모두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아아아. 미스 슈만이 불쌍하지도 않아아아아." 미스 슈만이라면, 당연히 클라라인데. 설마 먹지도 않고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는 건가?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클라라라면. "..........특이한 맛이네요." 그렇다. 그녀는 순수 독일사람으로, 우리나라의 음식에 적응을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아냐 ! 그녀는 지금 영양실조상태에......... 이것도 아냐 ! 왜 자꾸 어마마마에게 불효를 하고 난리야?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꼭 지켜야 하는 군사기밀.... "오빠. 소리가 너무 커. 다 들려." 윽. 나를 순식간에 불효자로 만들다니. 역시 무서운 녀석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좌절한 후, 다시 고개를 들고 여동생에게 물었다. 묻는 것은 당연히 "그런데 너 어느 곳에 있는 거냐?" 만약 식당이라는 말로 대답하면 난 너를 바보취급 하겠다. 어느 식당인지 모르니까 묻는 게 아닌가. 그러나 여동생을 내가 바보로 취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호텔 정원에 있는 1층의 야자수 식당으로 와. 거기서 종업원에게 연 미인양 일행을 찾아달라고 하면 돼." 가만. 가만. 너 설마 자기 맘대로 막 선택해버린 거냐? 우리 일행은 한국인에 미국인에 독일인에 프랑스인에..... 실로 잡다한 사람들의 집합체인데, 아무데나 막 정해도 과연 그 사람들 전원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헛소리말고 빨랑 와. 배 고파 죽겠다는 사람 천지야." 윽. 와구와구와구. 나는 먹기에 바빴다. 우리 일행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야자수 식당은 뷔페 식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내 맘대로 세계 각 국의 요리를 골라 먹는 게 가능했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집어와서 왕창 먹을 수가 있었다. 뷔페라는 것이 이래서 좋은 건가. 와구와구와구. 슬쩍 보니, 특히 클라라의 접시가 수북했다. 그동안 배가 어지간히도 고팠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독일식 소시지를 왕창 먹으면 살찌지 않아? 그러나 사돈 남 말하고 있다고, 나 역시 그리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접시에 담는 음식의 양은 종류를 불문하고. 수북하게. 그러나 실속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양을 많이 담아도, 살이 뒤룩뒤룩 찌는 것을 고르려고 하면 어김없이. 후딱. 내가 아무리 고지방 고칼로리 식단을 마구잡이로 선택해봐야 소용이 없다. 어느새 나타난 누군가가, 내가 그걸 접시에 올려놓기도 전에 원위치로 돌려놓는 거다. 이 못된 녀석. 젓가락도 못 대게 하는 거냐. 하지만 오빠의 식사를 제한하는, 잔혹한 여동생의 대답이라고는. "살찌면 대표선수 못 해." 남이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옛날부터의 통설을 뒤집는 행각이었다. 아니. 난 마음대로 먹을 자유도 없다는 거냐. 그래서야 뷔페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냐. 그러나 여동생은. "많이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운동을 안 하니까 문제라는 거야." 윽. 나는 오늘 저녁에야 일어났으므로,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미치겠다. 왠지 무지막지하게 분하네. 그러나 나도 곧 여동생을 공격할 거리를 찾아내었으니. "돼지냐. 너." 도대체 얼마나 먹는 거냐. 못 먹어서 환장한 사람처럼, 그녀는 마구 먹어댔다. 누가 보면 내가 여동생 밥까지 빼앗아서 먹는 줄 알겠어. 어디서 찾아왔는지, 이 녀석은 김치까지도 먹고 있다. 자, 잠깐. 도대체 무슨 수로? 아무리 여동생이라지만..... "김치는 세계적인 대한민국 고유 음식이잖아."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누가 김치가 대한민국 음식이라는 걸 모르겠냐? 하지만 여동생은. "그건 우리 사정이고. 해외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거냐? 대체 어느 놈들이 감히 우리 고유의 음식인 김치를.... "당연히 일본 애들이지." 윽. 그렇구나. 하긴 그 동네에는 '기무치'라는, 김치의 명성을 깎아 내리는 해괴망칙한 식품도 존재한다고 한다. 김치의 국제표준을 정할 때, '감히' 김치를 따돌리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다가 박살난, 바로 그 극악한 식품이다. 사실. "말도 안 돼." 김치도 제대로 못 만드는 일본 애들이 감히 우리나라의 김치를 도적질하려고 하다니 ! 일본에서 재배하는 배추는 기후의 특성상 수분이 너무 많이 함유되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 식으로 담가도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그러니까 김치가 아니라 기무치지. 그런 주제에 감히 김치의 국제표준을 자기들 맘대로 한다고 설치다니. 깨지는 게 당연...... 아니, 아니. 잠깐.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김치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가 아니고. 가 어디에 있느냐는 거다. "그거, 어디서 구했냐?" 그것이 알고 싶다. 이유? 그야 당연히 김치를 먹어야 하니까 그런 게 아니겠는가. 한국인은 밥과 김치를 먹어야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해외에서 김치를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유?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내가 비행기 타고 오면서 김치를 구경도 못했을 리가 없잖아. 우리나라와 사이판을 운항하는 비행기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로 여행을 갔을 때, 난 실제로 기내에서 김치를 한 번도 못 봤다. 이유? 김치는 고유의 냄새가 있어서 외국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줄 수 있다나? 그러니 이 녀석이 호텔에 그걸 반입했을 리는 없고......... 어떻게 했을까? 무슨 술수를 부려서.... "저기 가서 타 와." 여동생의 손가락 끝에는, 김치를 배식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이 호텔은 일류구나. 세상에. 김치도 주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재빠르게 접시를 들고, 반찬이 놓인 탁자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절대로 달리지는 않았다. 좀 빨리 걸어간 것뿐이다. 만약 달렸다가는. 퍽. 이렇게 될 테니까. 하지만 내 다리는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고, 나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접시를 힘주어 잡고....... 아.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어쨌든 그렇게 갔다. 그리고. 수북. 많이 먹으면 화를 내는 여동생조차도, 이것만큼은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남기지 말고 다 먹어." 그 말만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열심히, 돼지 뺨치게 와구와구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품위를 손상시킬 정도로 정신 없이 우겨 넣는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저렇게 양은 착실히 줄어드는 걸까. 그러나 지금 내가 봐야 할 것은 여동생의 얼굴이 아니라 접시에 놓인 음식이고, 지금 할 일은. "먹자 !" 나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우적우적 쩝쩝. 특히 김치는, 말 그대로 열심히 먹었다. 물론 외국까지 나와서 무슨 김치냐는, 호사스러운 소리를 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그런 자들에게는 이 말로 충분하다. '당신도 외국에서 1주일만 식사해 봐.' 그렇다. 내가 좀비들에게 쫓겨다닌 그 날 이후로, 나는 우리나라에 올 때까지 한동안 독일군 막사에 기거해야 했다. 도시 전체가 다 뒤집어져서 묵을 곳이 없었기도 했고, 내가 독일군 차량 행렬을 만나 그들에게 구조된 일도 그런 결과를 낳는데 일조했다. 사실 독일군으로서는 피난민이라고 나를 수용소에 보냈어야 하지만. '클라라의 부모님도 죽는 판에.' 사방에서 원수 갚는다며 원수를 양산하는, 참 어이없는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던 거다. 결국 나는 또다시 총을 잡아야 했고, 군부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때 클라라와 그라스와 슐츠와 비트만과 재회한 건 다행이었지만. '그래서 칭찬 받은 건 좋았지만.' 물론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주책 맞은 그라스가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상관에게 보고했던 모양이다. 군인이니 사후보고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내가 총 들고 설친 게 모조리 다 폭로된 거다. 그 때문에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훌륭하군요." 사실 난 클라라의 가슴 크기도 전혀 모르기야 했지만. 그러나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 것으로 칭송 받는 것은..... 솔직히.......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빠른 귀가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폭동 진압에는 시간이 걸렸고, 총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난민들을 집에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나는. "독일군 제 37 기갑척탄병여단 소속 이병 연 문구, 신고합니다 !" 아. 이게 아니었나? 어쨌든 졸지에 독일군 한가운데에서 머물러야 했던 나는, 총이야 안 들었지만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것은. '우엑.' 그랬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안 된다. 도저히 안 된다. 음식 자체가 좀비 내장으로 보이는 탓에. 어떻게든 아니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당장이라도 넘어올 것 같다. 그래도 우겨 넣는다. 하지만 몸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자리에서 토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엑." 클라라가 먼저 토해서 그런 거다. 그 덕에 나는 필사적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넘기긴 했다. 그렇다. 독일군의 식사를 말이다. 뭐? 남들은 먹지도 못하는데, 잘 먹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내가 이렇게 음식에 대해 까다로웠을 줄이야.' 솔직히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이냐. 만약 내가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그냥 한 끼를 안 먹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인간은 하루에 최소한 세 번은 먹어야 하는 것이고, 그 법을 어긴 자는 위장의 경련으로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단 우겨 넣기는 했는데...... '...............' 그 맛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만약 구체적으로 상상한다면, 한국과 독일의 우호관계를 손상시킬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원래 사람의 입맛이라는 게, 의지만으로 변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독일군 병사들이 내가 음식투정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유? 그야 간단하다. 독일군 병사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맛없어 !" 그들의 의견으로는, 자기들도 먹기 힘든 식사인데 저 먼 동양에서 온 나는 오죽하겠냐는 거다. 하긴 클라라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 알만하지 뭐. 물론 이건 독일군 잘못이 아니라. '양만 채워줘야 하니 그런 거지만.' 처음에는 폭동으로 난리가 났다면, 그 다음에 독일군이 만난 과제는 구호문제였다. 일단 난동을 안 부린 피난민들은 먹여줘야 할 게 아닌가. 도시 전체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큰일이었고, 따라서 취사병들은 음식의 질이 아니라 양을 채우기에 바빴으며, 그 결과. '이건 꿀꿀이죽이 분명해.' 사실 병사들은 평상시에도 음식에 대해 불평했을 것이다. 모든 군인의 전통이 그거 아닌가. 어느 나라 병사가 자기네 식단이 맛있다고 하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런 것은. "다 먹었다." 그랬다. 난 그래도 다 먹긴 했다. 속으로는 욕을 했을지언정,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그냥 먹고 본 거다. 그래서 독일군 병사들이 나에게 뭐라 하지 않은 거지만. 클라라의 경우는 가족들이 몽땅 몰살당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토하고 괴로워하더라도 비난을 받지 않은 것이고. 하지만 다시 먹으라고 하면. '죽어도 안 먹어.' 차라리 굶고 말지. 생각 같아서는 그냥. "Give me kimchi(김치를 줘요)." 이러고 싶었지만, 독일군에 김치 배식이 가능할 리가 없고, 결국 나는 우리나라에 돌아올 때까지, 식사시간이 올 때마다 새파랗게 질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와삭와삭와삭. 김치를 열심히 먹는 것이다. 이렇게. 기쁘게. 와삭와삭와삭. "꺼억." 김치를 비롯해, 이것저것 왕창 먹은 후에야 나는 겨우 어느 정도의 포만감을 느꼈다. 휴우. 이래야 식사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독일에서는 음식 자체가 비위에 안 맞아서, 좀비 내장이 자꾸 떠올라서 식사를 하기 힘들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밥순이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뭐? 여동생을 밥순이라고 하면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고? 에이. 밥순이 맞지 뭐. 우리 집 밥 담당은.... 콰당. 갑자기 다리가 미끄러졌는지, 나는 식당 바닥에 다이빙을 해버렸다. 으. 아프다. 이건 분명히 누군가의 화풀이겠지만, 눈앞에 별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그걸 신경 쓸 수가 없다. 도대체 왜 내가 피서지에 와서까지 맞아야 하는 거야? 눈물이 날 것 같다. 먼지가 들어가서가 아니라. '서러워 죽겠다.' 그러나 그런 내 앞에 내밀어지는 손. "문구야." 위기 뒤에는 기회라고 했던가. 상당히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진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앗. 기회다. 여자를 꼬실 절호의.........가 아니라, 진희의 손을 잡을 절호의 기회다 ! 하지만 원래 나는 이런 면에는 운이 없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기 전에. "미스터 문구. 괜찮아요?" 왜 네가 먼저 손을 내미는 거야. 클라라. 물론 그녀로서는 호의로 한 행동이겠지만, 주책 맞은 문희의 말이 상황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오우. 안 돼.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전설의 삼각 관계?" 뭐가 '전설'의 삼각 관계야 !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진희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진다. 클라라의 경우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만....... 있었지만......... 있었지만 ! '눈치챘나.' 그녀 역시 상황을 보더니, 곧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어째서 인간은 언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걸까. 난데없이 사람의 언어문화에 대해 원망하고 싶지만, 지금 그걸 따질 게 아니다. 당장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건가?' 이거 미치겠네. 사실 사귈 여자를 고르는 거라면 답은 뻔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진희의 손을 잡으면. '클라라가 울겠지.' 천애고아가 된 여자아이에게 그건 좀 너무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클라라의 손을 잡으면. '진희가 울겠지.' 그녀에게 고백하고 나서, 아직 대답도 못 들었는데, 여기서 내가 그녀를 박대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나. 잠시 얼어붙은 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두 사람 다 잡아버릴까. 그러나 그러면 '양손의 꽃'이니, '양다리'니 하는 비난을 들을 게 뻔하다. 그럼 내 힘만으로 일어날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매정하다는 비난을 들을 거다. 할 수 없나. 마음을 정하려는 때에. 콱. "켁." 나는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강제로 일어서고 말았다. 으. 못된 녀석. 오라버니의 목을 뭘로 아는 거냐. 켁켁거리는 내 옆에, 잠시 싸늘한 공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이게 뭐야. 차라리 진희의 손을 잡았으면 이것보다는 따뜻한 느낌으로.... "빨리 일어나. 사람들 길 막지 말고." 아구구구구. 나는 여동생한테 잡힌 채,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건 안 돼. 아직 오늘은 시작도 안 했는데, 왜 끌고 가는 거야. 그러나 내 하소연은 어차피 들리지도 않는지, 여동생은. "누가 밥순이야. 밥순이는." 도살장에 소를 끌고 가듯, 나를 잡아가고 있었다. 바다다 ! 여름이다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아 ! 비키니다아아아아 ! 여동생의 횡포에 시달린 하루가 지나고, 다시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이 정말 아침 맞는 거야? 혹시 또 꿈속인 건 아니겠지? 확인을 위해 커튼을 열어보니. "맞다." 비록 서쪽 창이라서 해가 안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밖이 환해지는 걸 보니 아침이 맞는 모양이다. 확인을 한 번 더 하기 위해 TV를 켜고....... 아. 여기는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아침에 방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확인하기는 무리가 있지. 그럼 다시. 시계를 본다. 맞다. 고작해야 아침 6시. 그러나 이게 실제로는 6시가 아니라 18시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찰칵. 컴퓨터를 켠다. 인터넷을 연다. 우리나라 쪽 사이트로 들어간다. 이거저거 읽는다. 아. 절대로 18세 이하는 보면 안 되는 걸 보는 게 아니다. '뉴스'를 읽을 뿐이다. 정치면은 언제나처럼 구역질나는 것만 가득하니 제외하고. '진희 아버지의 활약상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 난 휴가를 온 거지, 2단 옆차기나 업어치기, 어퍼컷을 보려고 온 게 아냐. 그리고 현재시간을 보니..... "아침이다." 그제야 나는 지금이 진짜, 아침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제처럼 저녁까지 잠들어버리는, 황당무계한 일은 반복되지 않은 것이다. 우선 할 일은. "하하하." 한 번 웃고. 그 다음은 평범한 소년의 아침으로 돌아갔다. 세수하고, 이 닦고, 옷 갈아입고, 폼나게 거울 앞으로 가는 거 말이다. 머리를 빗으면서 오늘의 예정을 그려본다. 이번에야말로 아침식사가 끝나면 바다로 달려가서. "아앙." "으응." "흐응." 아. 이게 아니고. "하아." "아아." "흐아." 아. 이것도 아니고. 어쨌든 즐거운 여름을 보낼 것이다. 그게 피서를 온 사람의 의무가 아닌가. 자. 오늘은 뭘 먹을까. 여러 가지로 고민은 되지만, 결국 돈을 내는 건 밥순이지 내가 아니며, 밥순이의 지갑은 든든하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나는..... 따르르르릉. 음. 드디어 전화가 왔군. 옷을 갈아입던 나는, TV 소리를 줄이고 전화기를 들었다. 자. 이제 나올 말은 무엇인가. 만일을 대비해서 전화기는 귀에서 약간 떼어놓고..... "Good morning, Mr. Moon gu." 에? 아침 인사가 왜 영어야? 어리벌벌해하는 나에게. "여동생 분께서, 직접 전화를 하면 오빠가 놀란다고 저보고 해달라고 하던데요." 뭐야. 어제 나를 그렇게 복날 개 잡듯이 패더니, 조금은 반성을 한 건가. 그러나. "뭐? 해수욕장이 아니라고?" 나는 오늘의 일정을 여동생에게 듣고,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렇다. 그녀의 말은. "그럼. 오늘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있으니까." 아, 안 돼. 내가 왜 사이판에 왔는데. 도대체 이 녀석은 피서의 의미를 뭘로 알고 있는 거냐. 그러나 내가 발광하려고 해도 여기는 호텔이다. 그것도 코 크고 머리 노랗고 가슴 큰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이판에 있는 호텔인 것이다. 그래서. "안 돼. 이건 안 돼." 이렇게 외치는 것은 마음속으로만 가능할 뿐이었다. 아. 이럴 수가. 도대체 나는 언제쯤에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동생은 냉혈소녀답게. "오늘은 안 돼. 사이판에 왔으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있으니까." 그게 어디냐. 이럴 때는 물어보는 게 최고다. 우선. "그럼 마나가하섬에 가는 거냐?" 마나가하섬. 사이판 관광의 백미라고 칭해지는, 아름다운 섬이며 바다에서 노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곳이다. 만약 거기에 간다면, 눈앞의 해변에서 놀지 못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여동생이 그런 소리를 해 줄 리가 없으니. "아니." 푸시시. 그러나 나는 굽히지 않고, 다시 질문을 했다.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알아맞히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 아닌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아도, 요 녀석 마음속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이 난감한 법칙을 좀 깨봐야..... "그럼 타포차우 산에 가는 거냐?" 타포차우 산.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해발 473m. 좀 높기는 하지만 운동과 구타로 다져진........ 후자는 제외하고, 어쨌든 현대 청소년의 평균수준보다 훨씬 높은 체력을 지닌 나로서는 별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이었다. 사이판 관광을 왔다면 여기를 올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상상되는 곳이며, 더불어. '으흐흐. 우후후. 히히히.' 요 핑계 조 핑계로 진희를 업고 가든지, 부축해서 가든지 할 수도 있는..... 그런데 왜 다른 여자들의 얼굴까지 같이 떠오르는 거지? 뭐 이건 그저 망상이니까....... 그러나 그런 기분을 단 방에 깨버리는 여동생의 목소리. "아니." 뭐시라고?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고, 다른 관광지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럼 원주민 문화체험이라도?" "아니." "그럼 잠수함 관광은?" "아니." "그럼 경비행기 관광?" "아니." 나는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는 걸 느꼈다. 아니. 이 녀석은 대체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갈 셈인가. 게다가 이 녀석의 복장부터가, 왠지 놀러 가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다. 치마는 무릎 아래까지 덮고 있고, 소매는 팔꿈치 바로 위에, 그리고 옷깃은 여미고. 설마 여기서까지 공무를 보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여동생은.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는 거야." 국민의 의무? 네가 언제 그런 거에 신경을 썼냐?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 가상한 소리지만, 평소 행동이 안 받쳐주잖아.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태평양 한국인 위령평화탑." 그 말에 나는 화를 내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가 말한 장소는, 사이판에 온 한국인이 반드시 가야 할 곳이었기 때문에. "천황 폐하 만세 !" 일본군인들은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미친 듯이, 미군의 전차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걸 보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한다. 미군은 당장 기관총과 대포로 응수했고, 일본군은 무의미하게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짊어진 일본군은 전차에 육박하고, 몇 명은 통나무를 전차의 무한궤도에 끼우려고 한다. 전차의 발을 묶으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미군의 기관총이 더 빨랐다. 총을 맞은 일본군이 마치 춤을 추듯 쓰러진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돌진하는 일본군. "반자이(만세) !" 야자열매가 날아든다. 일본군이 화염병의 대용으로 만든 화염환이라는 물건이다. 원래는 사이다병의 속을 비우고, 그 안에 기름과 고무 등을 넣고 도화선을 붙여서 만드는 게 화염병인데, 그들은 병이 부족하니까 야자열매에 인화물질을 넣어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야자열매라는 게 원래 좀. 툭툭. 단단한 물건인 고로, 그들이 던진 화염환은 무의미하게 퉁겨 나올 뿐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전차에 기어오르는 일본군. 그러나. 탕. 전차 포신이 빙그르르 돌아가더니, 일본군의 허리를 옆에서 차버린다. 허리가 부러진 일본군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군다. 그의 머리 위로 전차의 무한궤도가 덮친다. 피보라가 아래에서 튀고, 전차의 그것은 인간의 살조각과 뼈로 뒤범벅이 된다. "이게 무슨 짓이야 !" 이게 무슨 무모한 짓인가. 전차를 상대로 육탄돌격을 하라니. 게다가 전차를 잡으라며 나에게 지급된 것은, 곡괭이와 권총뿐이었다. 이런 걸로 전차를 잡으라고? 그들의 말로는. "적 전차의 관측창을 곡괭이로 부순 후에, 전차 해치를 열고 안의 승무원들을 쏴 죽여라." 미쳤나 보다. 이런 작전을 명령하다니. 나는 당연히 뒤로 돌아서 권총과 곡괭이를 내던지려고 했으나, 일본 장교는 일본도를 겨누며 나에게 강요한다. "돌격해 !" 그러는 동안에도 내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일본군이 달려간다. 하지만 안 되는 건 뭘 해도 안 되는 거다. 전차에 깔려 죽는 일본군, 기관총에 맞아 죽는 일본군, 그리고 전차에 간신히 도달했으면서도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맞아 널부러지는 일본군까지. 간혹. 쾅. 전차와 함께 자폭하는 일본군도 나오지만, 사실 그건 완전히 무의미한 짓이었다. 불타는 전차 뒤에, 더 많은 전차들이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그들도 가만히 앉아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관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기관총들이 불을 뿜고...... "천황 폐하 만세 !" 일본인들이 바다로 뛰어내린다. 미군이 민간인들까지 죽인다는 말에, 민간인들도 닥치는 대로 뛰어내린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의 그런 말이 먹히지 않는다. 당연히. "아악. 싫어. 살려줘요." 일본인 소녀 하나가 나에게 달려온다. 나는 그녀를 안고 어떻게든 달아나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나와 소녀를 강제로 절벽으로 밀어붙인다. "자. 뛰어내려." 싫다고 외치는 나를, 강제로 밀어붙이는 일본군. 이게 무슨 짓인가. 어이가 없는지 저 멀리 있던 미군이 외친다. "항복해라. 항복하면 살려준다. 항복하면 우리는 당신들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전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점점 다가오는 미군들이 애타게 소리치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은. "반자이 !" 나를 밀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소녀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안 돼 !" ".........."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나는 비록 그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비록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비록 울 정도로 뼈에 사무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나는 분향하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묵념할 뿐. 더불어. '왜 내가 이곳을 잊고 있었을까.' 창피스럽게도, 나는 잊고 있었다. 사이판에 왔으면 당연히, 아니 절대로 와야 마땅한 곳을 잊고 있었다니. 하지만 여동생은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책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와서, 분향하고, 경건하게 묵념할 뿐. 우리 일행 전원이 차례로 분향하는 가운데, 우리는 오각기둥으로 이뤄진 위령탑 앞에 서 있었다. 탑 위의 비둘기 조각이, 죽은 이들이 가지 못한 조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편히 쉬세요." 여동생의 말소리가 들렸다. "문구야." 달과 별만이 떠 있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소녀가 나에게 다가온다. 달빛 아래 환하게 드러난 그녀의 몸은, 푸른색 석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꾹. 내 머리를 누른다. 보드랍다. 좀 더 세게 눌리고 싶지만, 그러면 숨이 막히니까.... 하지만 그 감촉은 얼굴에만 느껴지지 않았다. 내 등뒤에서부터 전해지는 소녀의 온기. 꾹. 약간 작지만, 두 군데에 찹쌀떡이 느껴진다. 아. 따뜻해라. 그리고 내 오른팔에도. 꾹. 그리고 내 왼팔에도. 꾹. 이게 바로 천국일 것이다. 수영복 차림의 소녀들이 나에게 연이어 안겨 있다니. 아. 나도 드디어 이런 즐거운 날을 맞이하는구나. 여동생의 폭력에 시달리던 나에게도, 드디어 봄, 아니 여름이 온 것이다 ! 환호한다. 웃는다. 소리지른다. 이것이 바로 파라다이스, 낙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 그녀들의 얼굴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시에 말한다. "우리들 중 누가 좋아?" 급작스런 질문에 막혀버리는 내 입. 어째서 그녀들은 그런 것을 물어볼까. 그러자 그녀들이 갑자기. 피식. 사라진다. 허공에 나만 남긴 채로. 하늘에 떠 있는 나의 머리 위로, 달이 서서히 내려온다. 그리고 그 달 위에 걸터앉은, 한 사람의 소녀. 그녀가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잡고, 무릎을 모은 채 묻는다. "두려운가요?" 두려워? 무엇이?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녀가 왼손을 뺨에 대며 웃는다. "욕심쟁이네요." 그리고 그녀 역시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그녀가 물은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욕심쟁이네요." 그녀의 그 말이, 내 귀를 붙들고 있었다. "..........." 나는 내 방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꿈이었을까. 처음에는 너무나 달콤했는데, 왜 소녀들은 모두 사라진 것일까. 그런데 그녀들의 얼굴은........ 생각났다 ! 화끈. "무슨 이런 꿈을." 말 그대로,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꿈이었다. 여자 네 명을 껴안고 놀아나다니. 거기서 조금만 더 갔으면, 미성년자가 해서는 안 되는 선까지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것도 네 여자를 상대로. 내가 어째서 그런 정신나간 꿈을 꾼 거지? 혹시 나는. "카사노바?" 얼굴이 더욱 달아오른다. 내가 미쳤나 봐. 누가 이 꼴을 보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내가 지금 홀로 방 하나를 쓰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여동생이 이 꼴을 보았으면, 당장 식칼이 내 침대 위에 꽂혔을지도 모른다. 휴우. 목숨 건진 데에 대해 안도하며. "다시 자자." 그러나. 내 머리는 내가 지금 자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나는 지금, 중요한 날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오늘은 바로. 바다다 ! 여름이다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아 ! 비키니다아아아아 ! 그렇다. 오늘은 드디어, 우리가 바다에 들어가는 날인 것이다. 비록 어제 방문한 장소는 그 지경이었지만. 예를 들어. "여기는 만세 절벽입니다." 만세 절벽이라. 아예 영어로 Banzai Cliff라고 되어 있었다. 반자이(일본어. 우리 말로 쓰면 '만세') 절벽이라. 그러니까 그곳은 즉 일본군들이. "반자이 !" 이렇게 외치면서 멀쩡한 사람을 밀어 죽인 장소가 아닌가. 망할 놈들. 죽으려면 자기들이나 죽지, 왜 어린애들까지 강제로 절벽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런 곳을 방문하는 바람에, 나는 어제는 하루종일, 돌 씹은 기분으로 있어야 했었다. 게다가 그런 절벽은 하나가 아니었으니. "자살 절벽은 또 뭐야." 끔찍한 장소는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둘씩이나 있으면 어쩌라는 거냐. 이 나쁜 자식들. 그곳에서 죽은 사람 중에는 어린애들도 있었고, 억울하게 끌려온 우리 민족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나마 그 분들을 잊은 자신을 탓하며, 더불어 일본군을 욕하며, 그런 날에 여름의 낭만이 감히 끼어 드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그래서. "결국 하루종일." 바다에는 근처에도 안 갔다. 그러나 착 가라앉은 우울한 기분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매우 곤란했으므로, 결국 우리는 오후에도 관광을 위해 나갔다. 그러나. "오빠. 사이판 박물관에 대한 감상은?" "오빠. 열대 식물원은 처음이지?" "오빠." "오빠." "오빠." 이 녀석아. 따라오지 마 ! 하지만 여동생이라는 애는 얄밉게도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그것은 내 청춘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양팔을 쓸 수가 없으니, 여자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잖아 ! 이 녀석은 훅 불어도 날아갈 체급이면서 왜 그렇게 내 팔을 두 개 모두 소유하는 건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밥상 뒤집기 !" 이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경우 후환이 두려운 데다가 당장 주위의 눈이 무서웠으므로,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동생을 내팽개쳤다면? "나쁜 오빠네." "어떻게 여동생에게 저럴 수가." "폭력 오빠 반대한다 !" 이런 소리나 들을 것이니까. 그것도 국제적인 관광지에서 말이다. 실상이야 어떻든,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토대로 판단하기 쉬우니까. 그 덕에 나는. 출렁. 출렁. 출렁. 이걸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유감스런 일이. 그 대신 내가 봐야 했던 것은. 푸드드득. 새들이 날아오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헬리콥터에 타고 그런 걸 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로 날아드는 새들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그저, 불길한 징조라든가....... "멋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오빠 같으니." 이런 소리를 들을까봐, 아예 입도 열지 않았지만. 그러나 여자들은 모두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므로, 내가 졸고 있다는 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인 건, 다시는 그 새 섬(Bird island)에 갈 일이 없다는 거다. 한 번 갔으니 됐지, 뭘. 그런데. "와. 멋졌어. 다시 오고 싶은데." 누구십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은. 여름이니 당연히. 출렁. 출렁. 출렁. 이쪽이어야 한다고 속으로만 외치면서, 나는 오늘 외출을 준비했다. 세수하고. 이 닦고. 옷 갈아입고. 더불어 TV도 보면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출렁. 출렁. 출렁. 이것을 기대하며 식당으로 갔지만. "악 !" 여동생은 이번에도, 어제와 마찬가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뭐? 여동생 같은 부자가 어째서 이틀 연속 똑같은 옷을 입느냐고?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다만. '분위기가 똑같잖아.' 치마는 무릎 아래까지 덮고 있고, 소매는 팔꿈치 바로 위에, 그리고 옷깃은 여미고. 이건 어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옷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색깔이 다르고 목걸이가 다르고 상표가 다르지만. "검은 색이 남색으로 바뀌어봐야 별 의미가 없잖아 !" 둘 다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런데 이 녀석은 어째서, 이런 격식을 차린 복장을 선택했을까. 비서 누님들의 센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피서지에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이건 완전히 장소에 안 맞지 않습니까. '우린 지금 놀러왔다고.' 그런데 왜 여동생의 복장은 '일해보아요'일까. 갑작스럽게 내 몸을 덮치는 불안감, 즉 오늘도 비키니 수영복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공포가, 내 입을 움직였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대체 어디로 나를 끌고 가려는 거야? 안 돼 ! 오늘만큼은 안 돼 ! 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들의 알몸........ 아니 수영복 차림을 봐야 한단 말이야 ! 그러나 나를 보던 여동생이 갑자기. "역시 안 되겠네." 뭐가? 뭐가 안 된다는 거냐? 설마 넌 집에 갈 때까지, 내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을 볼 수 없게 할 셈이냐? 그러나 여동생의 말은 내 예상을 뒤엎었으니. "오빠. 지금 피곤해?" "응 !" 어째서 그걸 묻는 거냐 ! 난 처음부터 피곤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냐 ! 느긋하게 쉬기 위해서 ! 그런데 그걸 왜 굳이 확인..... "알았어. 그럼 오빠는 오늘, 호텔에서 푹 쉬어. 괌에는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괌?" 그런데 이 녀석이 거기는 왜 가는 거냐? 휴양지라면 사이판 섬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하지만 여동생이 한다는 소리는 고작해야. "여자에게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거잖아."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기서 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오면, 나는 기절하고 말 테니까. 심장에 안 좋아. 하긴 지금까지 알아낸 여동생의 비밀만 해도. "여동생 최강 전설. 동네 불량배 100명 격파 !" "국회의원조차 얕보지 못하는, 공포의 여동생 !" "세계적인 대기업인 플래닛 그룹의 회장님 !" 여기서 더 추가될 게 설마 있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이 녀석은 아마 '기업 비밀'에 관련된 일로 갈 거라고 생각된다. 더 심한 게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 그러니까 저 녀석은 사업 관계로 가는 거야 ! 그런 거야 ! 그래서 나는 그냥. "잘 다녀와라. 몸조심하고." 그런데 여동생의 표정이 왜 저러지? 그녀는 갑자기 내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땅을 쳐다보더니 턱에 손을 대고 곰곰 생각하다가. "그런데 걱정되네. 오빠는 내가 옆에 없으면 꼭 사고를 만나던데. 그냥 데려갈까?" 무, 무슨 소리를 ! 나도 모르게. "나도 비키니 좀 보자 !" 이런 헛소리를 할 뻔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의 모습을 감상할 권리가 있단 말이야 ! 그러나 여동생은 내 꼴을 보더니. "훗." 너, 너, 왜 웃는 거냐. 두두두두두. 여동생 전용기... 아니 성조기를 그린 미군 소속의 V-22 오스프리 틸트로터기가 서서히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여동생과 비서 누님들을 모신, 그 비행기는 아침하늘을 가르고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말야. "오빠. 그럼 편히 쉬고 있어." 비행기 타면서, 굳이 나한테 달콤한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거나, 한 번 껴안아 주거나, 이런 식으로 애교떠는 '척'하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남들이 보면 사이좋은 오누이라고 오해할 거다? 물론 이게 다 여동생의 위장공작에 겉만 번드르르하게 치장하는 수작이란 건 다 안다. 하지만 여기서 판을 깰 수도 없으니, 그냥 응대해주는 수밖에.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나. 두두두두두. 비행기가 저 멀리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갑자기 마음이 밝아지는 걸 느꼈다. 저 녀석이 왜 미군 비행기를 타고 가는지는 모르지만, 비서 누님들까지 같이 가는 걸 보니 아마 직업상의 일이겠지. 그리고 보호자들이 달라붙어 있으니, 그녀의 신변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나는 이제부터. 바다다 ! 여름이다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 ! 비키니다아아 ! 비키니다아아아아 ! 바로 이것이다. 드디어 나도 소녀들의 아리따운 몸매를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여자들과 함께 수영도 하고, 일광욕도 하고, 선 오일도 발라주고 ! 게다가 심심하면 날아오는 프라이팬과 식칼의 압박수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런 내 기분을 깨놓는, 연미 누나의 목소리. "그럼 문구는 방에 가서 쉬고 있어. 요양해야 하잖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 당연히 오늘 같은 날은, 놀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여기저기서 피의 빗줄기가 쏟아지던 지옥을 헤쳐 나와서, 이제 드디어 광명의 날을 맞이한 순간인데. 당연히 아가씨들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아. 이게 아니구나. 어쨌든 그에 가까운 모습으로 돌아가........... 아. 넘어가자. 어쨌든 최대한 자신의 젊음을 과시하며 바다의 풍경을 즐기는..... "연미 언니. 우리 낮잠이나 잘까?" 문희 너. 꼭 그렇게 산통을 깨 놓는 거냐. 채칵채칵채칵. "빨리 좀 나와라." 내가 묵는 호텔이 바닷가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새하얀 모래가 깔려 있는 백사장, 그 앞에 수없이 늘어선, 일광욕을 위한 의자들, 거대한 파라솔들, 그리고 호텔 손님들을 위한 각양각색의 상점과 모터보트와........ 그러나 여기에 부족한 게 딱 하나 있으니. "너무 느리잖아." 이 아가씨들이. 수영복을 뜨개질해서 만들고 있는 건가. 왜 이리 늦느냐는 배부른 남자의 고민을 하면서, 나는 느긋하게...... 실상은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다. 빨리 보고 싶어. 진희의 그 커다란......... "야한 생각하지 마." 평소 같으면 이 외침과 함께 누군가의 습격이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 그 녀석이 오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니까. 과연 어떤 수영복을 입고 나올까? 원피스? 비키니? 어느 것이든 좋다. 내가 바라는 것은. "천이 모자라." 이런 것이니까. 뭐? 너무 음흉하고 부도덕하다고? 이봐. 여기가 무슨 올림픽 경기장인줄 아냐? 적어도 보통 사람들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전신 수영복을 착용해서 몸을 잘 가릴 필요가 없다고. 그냥. "꺄아. 부끄러워." 이러면 그만이다. 아. 다 벗고 나오는 걸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 내가 바라는 건 그저 평범하게, 가슴도 좀 나오고 엉덩이도 좀 나오고 배꼽도 좀 나오고........ 아. 절대로 다 벗은 걸 바라는 건 아니라니까?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아응." 가슴 설레는 여름날의 추억을 만들 정도면 된다. 뭐 그게 끈으로 된 수영복이라든가, 손바닥보다 좀 작은 천을 두르는 수영복이라든가, 되도록 맨살을 많이많이 보여주는 수영복이라든가, 그러면 더 좋고. 우선 진희의 경우라면. "빨간색 비키니는 어떨까?" 물론 노출 정도는 적당히. 어디까지나 적당히. 뭐? '적당히'라는 말을 해석해 달라고? 여기서의 의미는 가슴이 절반정도 드러나서 삼각형 천을 절약해주는, 그런 알뜰살뜰한 스타일을 가리키는 거다. 뭐 아래쪽이 끈으로 되어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고. 그리고 연미 누나의 경우는. "연두색 비키니가 좋겠지?" 역시 진희의 '언니'이니, 진희보다는 노출이 더 많이 되어야 성숙한 여인의 매력이 드러날 게 아닌가. 뭐? 너무 노출이 심해진다고? 에이.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사이판이라고. 과다노출만 아니면 무난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클라라의 경우는..... "노란색 비키니로 할까?" 그녀의 금발머리를 감안하면, 그게 좋을까? 아. 아니다. 모든 이가 비키니라면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생긴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나름대로의 개성을 부여하여, 남색의 원피스 수영복으로 하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옆구리와 가슴은 푹 파여서 자신의 건강한 육체를 드러내 준다면..... 그런데 문희? "그 녀석은 별로." 무엇보다도, 그 녀석은 중요한 부분이 납작하니까, 아무 거나 입으라고 해...... "사람을 앞에 놓고서 헛소리하지 마 !" 슈웅. 느닷없이, 문희의 외침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어허. 왜 그러시나. 진실을 말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거냐. 하지만 문희로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는 열심히 주먹을 휘둘러 댔지만. "느려 !" 그렇게 외치진 않았지만, 실제로 느린 걸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가볍게 옆으로 비켜섰고, 문희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몸의 균형을 잃은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퍽. 엎어졌다. 그녀가 입은 줄무늬 비키니의 '수영복의 도에 어긋나는 노출'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아래쪽은 천을 너무 많이 썼고, 위쪽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특히 '중요한 부분'에는 천이 너무 많이 사용되는 바람에, 착용자가 미적 감각이 전혀 없음을 외부에 어필하고 있었다. 하긴 보여줄 게 없으니 그 정도로 끝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부웅. 다시 일어선 문희가 주먹을 휘두르지만, 미안하게도 그녀에게 있어 무서운 것은 그녀의 '입'이지, 그녀의 '주먹'이 절대로 아니다.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키지 못한 공격방법은 그녀에게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예를 들어. 부웅. "뭐가 중요한 부분이 납작하다는 거야 !" 피하고. 부웅. "여자는 가슴이 전부가 아니라고." 또 피하고. 그런데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폭로해도 괜찮은 거냐. 부웅. "나도 그래도 웬만큼은 있다고." 계속 피하고. 하지만 진희나 연미 누나, 그리고 클라라에 비하면 그건 완전히..... 부웅. "정상보다 큰 사람을 기준으로 삼지 마 !" 또 다시 피하고. 하지만 주위의 모든 이가 너보다는 훨씬 크잖아? 그렇다면 당연히 여자의 정상적인 가슴 크기는 그 정도라고 판단해도 좋은..... 철썩. 어? 이 느낌은 뭐냐? 문희의 주먹을 피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바닷물 속으로 들어와 있었고, 그 결과. 쏴아.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덮치고 말았다. 이런. 아직 준비운동도 못했는데, 너무 들어왔군. 그 생각과 함께, 나와 문희는 파도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꼬르륵. 푸우. 나는 목을 바닷물 밖으로 내밀어서, 숨부터 들이쉬었다. 으. 잘못했으면 물먹을 뻔했네.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짠물은 사양하고 싶다. 아직 본격적으로 놀지도 못했는데, 물을 먹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진희는?" 그 말에는 진희만이 아니라, 연미 누나와 클라라도 포함되고 있었다. 과연 그녀들은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수준으로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옷감을 너무 많이 썼어." 그녀들이 선택한 옷의 색상은 내 상상과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노출도가 극심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문희도 그랬지만 그녀들은. "천을 아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그렇게 부자나라가 되었지? 저렇게 수영복에 천을 많이 써도 괜찮은 건가? 진희의 경우는 가슴을 너무 많이 가려서 잘 보이지가 않고, 연미 누나는 아예 아래쪽에 천을 둘러 버렸다. 게다가 클라라의 경우는, 그냥 노란색 비키니다. 이런 젠장. 진희는 빨간색, 연미 누나는 연두색, 그리고 클라라는 노란색 [비키니]? 이러면 모조리 그게 그거가 아닌가.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한 사람 정도는 원피스를 선택할 것이지. 게다가. "아무리 부자들이라지만." 저렇게 몸을 철저하게 가리다니. 이런 슬픈 일도 또 있을까. 짠 바닷물이 눈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런 비극이. 하지만 눈물이 바다로 떨어지기도 전에. 푹. 부글부글. 나는 누군가의 억센 손에 머리를 눌려,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윽. 이게 뭐야. 상어인가? 하지만 상어가 이런 곳에 나타날 리는 없다. 아니, 세상에 손이 달린 상어가 있을 리가, 처음부터 없다. 그렇다면 이 손의 정체는. 설마. "드디어 잡았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문제의 손의 주인께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머리를 바다 속으로 푹 누른 채로. 이런 젠장. 물귀신인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퍽. 아. 이게 아니구나. 나도 모르게 '폭동진압'을 할 뻔했네. 주먹을 내밀려다 멈추기는 했지만, 사실 그걸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난 지금. 부글부글. 문희한테 눌려서 바다 밑에 있다고. 내 위에 문희가 있고, 내 밑에 모래바닥이 있고, 주위는 온통 바닷물이니 그런 결론밖에 더 내겠나. 뭐? 그렇게 깊은 바다에 빠질 리가 없다고? 생각해 봐라. 문희가 예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게 깊은 바다가 아니면 무엇이냐. '얼굴만 예뻐서 문제지만.' 입만 닫으면 미녀인 게 아니고. 솔직히 저건 너무 납작하지 않은가. 아마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납작할 거야......... 꾹. 부글부글. 으. 더 세게 누르네. 나는 살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지만, 문희는 상당히 약이 오른 듯, 나를 놔주지 않는다. 이거 큰일이네. 그래서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하는 행동을 했다. 즉. "아푸푸. 사람 살려." 허우적거린 것이다. 물론 말은 안 하고. 그러나 열심히 손발을 버둥거리는 것은. 물컹. 에? 이럴 리가 없는데?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유? 생각해 보자. 지금 내 손아귀에 잡힌 말랑말랑한 무언가는 너무 크다. 이렇게 거대한 찐빵을 문희가 소유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 평평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이 정도의 부피를 자랑한다는 것은 지구가 부서져도 절대 불가능한....... 푹. 부글부글. 진실을 억압하는 외세의 핍박이 심해지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 아닌가. 게다가 눌리면서, 마지막으로 본 문희의 가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물론 그쪽이 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등을 삼각형의 천으로 가리는 수영복도 있냐? 그러므로 무언가, 특히 내 손이 그쪽에 보이지 않는 이상,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은 절대로 문희의 가슴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느낌은 설마.... '해파리?' 그렇다. 그 외에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한 손에만 이런 느낌이 오는 게 아니라, 양손에 모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진다. 더불어......... 아니. 아니. 잠깐. 이게 해파리라면 난 지금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야. 어이야." 이렇게 되어야 정상인데? 그런데 이건 뭐랄까. 외투막이니 젤리니 하는 느낌이 전혀 아니다. 심지어 해파리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촉수가 없다 ! 그렇다. 사나이의 낭만........ 아니, 아니야. 지금 말은 잊자고. 어쨌든 사나이의 소망..... 이 아니고 ! '촉수가 없다는 건.' 이건 해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긴 이게 그런 위험한 생물이었다면, 문희가 지금까지 나를 누르고 있을 리가 없지. 그랬으면 아마 당장에. "걸음아, 날 살려라 !" 이렇게 되었겠지. 의리 없이 나만 좀비들 세상에 놓아두고 달아난 전과도 있으니까. 물론 그게 고의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의 태도라면 충분히 고의라고 의심할 수도 있는..... 그런데........ '그럼 이건 결국 뭐냐?' 그러나, 내가 그걸 알아보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유? 숨이 막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해보지만. 부글부글. 내 몸은 산소부족을 호소하고 있었고, 공기가 자꾸만 폐에서 물 속으로 빠져나갔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어떻게든 문희를 밀쳐내려고 하지만. '거, 걸렸어.' 둥글게 부풀어오른 찐빵 위의 혹 하나. 거기에서 손을 떼려고 해도 팔이 끈에 얽히기라도 했는지, 빠져나오지 않는다. 안 돼. 이대로라면 문희를 밀어낼 수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거기서 빼내려고 하지만. "꺄악 !" "아악 !" 이상한 비명이 들리는데. 그러나 나는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부글부글. 마지막 공기가 입에서 뿜어져 나간다.... "문구야. 괜찮아?" "미스터 문구 !" 두 아가씨의 간절한 호소가 들려온다. 뭐야. 난 죽은 건가. 아니면 살아남은 건가. 조금 전에 분명히 문희의 압력에 의해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는데....... 눈이 서서히 떠지자. "문구야 !" 눈앞에는 진희의 커다란 얼굴이 있었다. 평소보다 좀 얼굴이 부어오른 건가? 왜 이렇게 크게 보이는 거야? 그 얼굴은 곧바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문구야 !" 그리고........ 하지만 나는 그녀를 반갑게 맞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가 지금 나와 1cm도 못 되는 거리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싶긴 하지만. "켁. 켁." 기침이 먼저였던 것이다. 더불어 누군가에 대한 원망도. 나쁜 녀석. 아무리 자신의 약점을 지적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을 지경으로 몰아가다니. 이게 소꿉친구가 할 짓이냐 ! 그러나 항의하고 싶어도 문희는 태연하게. "천벌이야. 천벌." 뭐가 천벌이냐 ! 그리고 아무리 그 발언에 대해 불만을 품었어도 그렇지, 아예 익사 직전까지 사람의 머리를 찍어 누르냐 !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계속 기침을 했다. 으. 죽는 줄 알았네. 짠 바닷물을 좀 먹은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더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최소한 숨이 멎어서 인공호흡이라도 했을 듯한..... "?" 이상하다? 진희와 클라라의 얼굴이 왜 저렇게 빨갛지? 하지만 내가 설령 숨이 막혔다고 해도, 그 가정은 무리가 있다. 인공호흡이라는 게, 비록 입과 입을 서로 맞대고 숨을 상대에게 불어넣는 것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그걸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 그제야, 나는 내가 조금 전에 무엇을 만졌는지를 기억해냈다. 그 감촉, 그 크기,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색. 그렇다면 내가 했던 짓은 바로..... "미, 미안." 나는 황급히, 진희와 클라라에게 머리를 숙였다. 아니, 누워 있었으니까 그 말은 좀 어폐가 있는 건가? 어쨌든 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의사표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내 꼴로는. "으윽." 그게 될 리가 없다. 어쨌든 익사할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도 굳이 그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구야. 아프지 않아?" "미스터 문구." 고마운 소녀들이었다. 자신들에게 '못된 짓'을 한 남자에게 이리도 걱정과 염려를 해주다니. 물론 조금 전의 상황은 내가 고의로 한 건 아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친 것이, 결과적으로 그녀들에게 안 좋은 상황을 만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성추행은 성추행, 만약 둘이 화를 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요즘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진 상태라고 해도, 그래도 가슴에 손을 대는 것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것도.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으니.' 사실 이건 죽을 때까지 맞고, 죽고 나서도 한 대 더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지경의 일이었다. 물론 내가 만약 진희나 클라라, 둘 중 한 명만 선택하여 가슴을 만졌다면. "책임져 !" 이걸로 끝나겠지만, 둘을 동시에 그랬으니 무슨 할 말이 있고, 변명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들은 단지. "자. 조금만 쉬어." "물을 너무 먹었으니까." 아. 그녀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분명했다. 필시 신이 지상을 가엾게 여겨서, 빛을 가져다주도록 명령을 받은 게 분명하다. 뭐? 부처님이 보낸 보살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사실 누가 보냈든 상관은 없다. 아. 아름다운 천사들이여..... "욕심쟁이네요." 뭐, 뭐야. 왜 달을 배경으로 서 있는, 월하소녀가 떠오르는 거야? 나는 정체도 모르는 여자의 생각을 지우고, 그냥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즉,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기로 한 것이다. 조금씩 몸에 힘을 주어 일으킨다. 그러나. 비틀. 이런.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데. 나는 다시금 다리에 힘을 주지만. 비틀 비틀. 이게 아닌데. 두 사람의 눈빛에 염려가 가득해진다. 하지만 저런 슬픈 눈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좋아하는....... "..........." 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나는 다시금 일어선다. 발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걷는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모래사장에 뻗어서, 죽느니 사느니 하는 판국의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무리인 동작이었는지. 기우뚱. 이, 이거 안 좋은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철퍼덕. 모래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남자의 자존심이 마구 뭉개지는, 비참한 최후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 꼴을 본 진희와 클라라는. "문구야 !" "미스터 문구 !" 진희는 내 오른팔을, 클라라는 왼팔을 잡고, 나를 부축한다. 두 사람의 팔이 내 허리를 감고, 다른 쪽 팔이 내 양쪽 팔을 각각 잡고는 자신들의 몸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내 다리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에 빠졌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인가. 그런데 잠깐. 지금의 내 자세는. '양손의 꽃?' 그렇다. 내 모습은 바로, 남들이 보면 부러워서 목매달고 죽고 싶어질 정도의 상황. 남자들의 꿈. 바로 공포의 삼각관계였던 것이다 ! 아름다운 두 아가씨가 나 하나를 놓고, 죽자살자 결투를 벌이는 망상이 내 머리에 마구 떠오르고 있다. 아냐 ! 그건 아냐 ! 두 사람은 단지 내가 물에 빠져서 골골거리니까, 동정심으로 이러는 것 뿐이야 ! 그러나. 꾸욱. 꾸욱. 양쪽에서 느껴지는 소녀들의, 아니 처녀들의 부풀어오른 무언가는, 내 팔을 사정없이 흔들어놓았다. 이, 이건 너무 자극이 심한 게 아닌가. 게다가. 꼬옥. 꼬옥. 여자한테 포옹 당하고 있다 ! 물론 그녀들은 한 팔만을 내 허리에 두르고 있었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포옹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나를 가슴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생각해 보라. 남자들이 밤낮으로 꿈꾸는 것이 바로, 두 여자가 나 하나만을 원하고 이렇게 자상하게 대해주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지금, 바로 그런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미인대회에 나가도 될 정도의 미인이고.....' 아. 갑자기 불쾌해진다. '미인'이라는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미스 코리아, 아니 미스 유니버스 선발 대회에 나가도 될 정도의 미녀들인데.....' 그렇다. 이쪽이 더 좋다. '미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뭔가 나에게 끔찍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이런 달콤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굳이 일부러 골라서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들어온 천국은 곧 나를 추방시키고 말았다. 사유는. "시간 다 됐다." 아니, 이런 것도 시간제로 하는 겁니까. 나는 하늘에 대고 호소하지만, 원래 행복은 짧고 불행은 긴 법이다. 두 아가씨는 나를 파라솔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히더니. "안 돼. 좀 더 부축해 줘." 이렇게 외치고 싶은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 슬프도다. 두 사람의 가슴이 내 팔에서 떨어질 때, 나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으. 괴롭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었더라면.... "문구야. 여기서 쉬고 있어." "힘들면 이야기하세요. 언제라도 올 테니까요." 두 사람은 나를 향해 웃어주고는, 곧 바다로 달려가 버린 것이다. 아. 덧없는 청춘이여. 쏴아아아. 나는 파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도 많이 해변에 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은 사람들만 보기에도 눈이 피곤한 판인데. 하지만 나는 소녀들을 보기만 해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같이 놀아야 하는데." 어린애들처럼 '놀아야 한다'는 것에 집착한다고? 당신이 한 번 이 자리에 와 봐. 저렇게 튀어나올 데는 다 튀어나오고, 들어갈 데는 다 들어간, 찬란히 빛나는 꽃들을 한 번이라도 보고 그렇게 말하라고. 내가 아니라 어떤 남자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당연히. "꺄하." "하하." "호호." 여기에 끼어 들고 싶을 것이다. 비록 노출이 너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녀들의 싱싱한 몸을 느낄 수......... 왜 내가 이런 아저씨 같은 발언을 하는 거지? 이건 역시. 보글보글.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바다에 들어갈 기력을 드라큐라처럼 빼앗아간 문희 때문이었다. 나쁜 녀석.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심정을 네가 아느냐." 문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평평하면 당연히 평평하다고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것이지,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사람에게 물을 먹여? 뭐 어차피 다들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특히. "빨래판, 절벽, 남자 가슴....." 이런 말들은 바로 문희 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더냐. 명색이 언론인이라면서,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게 말이 되냐. 이건 언론의 자유를 규정한 우리나라 헌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짓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하아. 하아." 지금 당장은 숨쉬기 운동밖에 할 수가 없다. 다른 걸 하려고 해도, 흡혈귀 문희에게 죽을 뻔 하는 바람에 기력이 없다. 아니, 이 경우는 물귀신이라고 해야 하나? 안 돼. 전세계의 물귀신들이, 자기는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고 항의할 거야. 그러나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원래 나는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꺄하 !" "하하하." "아잉." 이런 상황을 맞이했어야 하는 것이다. 진희를 보라. 클라라를 보라. 연미 누나를 보라. 그리고 납작한......... 이 사람은 빼고. 어쨌든 그런 아리따운 소녀들...... 아니 한 사람은 소녀가 아니라 처녀이지만, 뭐 그건 상관이 없다. 어쨌든 황홀한 여름을 보낼 절호의 기회였는데, 지금 나는 고작. "하아. 하아." 이런 것밖에 못하고 있다니. 난 숨쉬기 운동만 하려고 비행기를 타고 온 게 아니라고.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건 여동생이 나타나서 식칼을 내리쳐도 안 되는 거다. 나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 고로. "하아. 하아." 아. 비참한 내 신세여. 저 멀리에 내가 들어갈 자리를 차지한 공 하나가, 소녀들의 손길을 받으며 햇빛을 쬐고 있었다. 나도 저 공이 되고 싶어. 그러나 진희와 클라라와 문희와 연미 누나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슈우웅. 뭐, 뭐야 ! 왜 저게 나한테 날아오는 거야 ! 나는 황급히 대피하려고 하지만,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걸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기껏해야 공을 쳐다보며 앞으로 다가올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 상상하는 것뿐.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된다. 오늘은 안 되더라도, 내일이 있지 않은가. 내일이라도 소녀들의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싶으면......... 이게 아니라니까 ! 탕.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엎어졌다. 으. 비참하도다. 아무리 기운이 없다지만, 이런 것도 피하지 못하다니. 물론 내가 반쯤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이랬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크게 다르다. 뭐? 여자들 상대로 야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못 피한 거라고? 입 다물어 ! 그건 군사기밀..... "문구야. 공 줘." 문희 너..... 사람 머리를 공으로 맞춰놓고도 그런 소리나 하고 있냐 ! 물론 이게 다행스럽게도 축구공이나 농구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머리에는 아무 상처도 나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 아무리 바람 들어간 풍선 수준의 공이라고 해도, 사람 머리를 표적지로 삼아놓고는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안 하냐 ! 이 뻔뻔한 녀석아 ! 생각 같아서는. "네가 가져가." 이러고 싶지만, 문제는 내가 독설을 퍼부으려는 위치에는 문희만 있는 게 아니라, 진희와 클라라, 그리고 연미 누나도 있다는 점이다. 망할 녀석. 힘없는 민간인을 방패로 삼다니. 결국 나는 맥없이 일어나서...... 비실비실. 아, 안 되겠다.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기운이 없어서 안 된다. 평소의 체력이라면 절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역시 나는 그동안 너무 무리했던 것일까. 단순히 물에 빠진 것만으로 이렇게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그러나 나에게는 그걸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러기도 전에. 씨이이잉. 바람처럼 번개처럼, 소녀 하나가 내 앞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라라 너, 왜 이렇게 빠르냐? 아무리 독일 전차군단 출신..... 아. 이건 절대 아니다. 우린 독일에서도 장갑차만 탔었다고. 전차는 무슨. 그렇다면 그녀는 독일 기계화부대 출신..... 아니라니까 ! 어찌되었든 그녀는 내 앞에 멈춰 서서. "미스터 문구. 괜찮아요?" 또 그 대사냐 ! 이 아가씨는 내가 괜찮은지 잠시라도 확인하지 못하면 큰일나나 보다. 물론 그게 날 걱정하기 때문임은 아니까 뭐라 하면 안 되지만..... 솔직히 이건 좀 걱정이 지나친 게 아닌가. 내가 무슨 중환자.... 비틀. 이, 이게 뭐야.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절대 병약 미소년이 아니라고. 그러나 시대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나는 계속 비틀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안 돼.' 이러면 안 된다. 나는 사나이이고, 사나이는 사나이답게 멋진 사나이가 되어야 한다. 그게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녀자에게 걱정이나 끼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나는 이를 한 번 악물고. "괜찮아. 괜찮아. 조금 있으면 놀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그렇다. 클라라가 걱정하는 게 당연한 게, 사실 나는 아까 물에 빠졌다가 나온 후로 계속 이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운 없는 녀석이었나. 그렇지 않다면 뭔가 다른 원인이..... '그 녀석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고.' 농담으로라도 그건 아니다. 그럼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몸이 피곤하니까 머리도 피곤해서 안 굴러가는 모양이다. 오죽 내 꼴이 엉망으로 보였으면. "문구야. 힘들면 방에 데려다줄 테니 좀 쉬어." 그 수줍어하는 진희조차 그렇게 말할까. 그러나 그녀의 마음 씀씀이는 고맙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그 말을 따른다면. "꺄아." "와아." "하하하하하." 이런 소리도 못들을 것이고. 출렁. 출렁. 출렁. 이런 모습도 못 볼 것이며. 물컹. 푹신. 꺄하 ! 하물며 이런 느낌은 절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리하면서 그냥 버티기로..... 아냐 ! 무리하는 게 아냐 ! 그러나 두 아가씨의 눈빛은 영락없이. "무리하지 마요." 이것이다. 이 아가씨들이 내가 그렇게 약골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반면에 나를 이렇게 물 먹인 장본인은. '나쁜 녀석.'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연미 누나까지도. "문구야. 너 혈색이 나쁜데, 그냥 들어가는 게?" 이러시는 판국에 말이다. 사악한 녀석. 환자를 뭘로 아는 건지. 그러나 아가씨들의 눈이 너무나 염려와 불안과 초조함을 담고 있었으므로, 지금은 문희에게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래선 안 돼." 모두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 그리고 난잡하고 문란한 이성교제를 위해서.......... 가 아니고 ! 그냥 모두의 불안을 씻어주기 위해서 ! 나는 주먹을 쥐고는 힘을 모았다. 다시 일어나서, 어떻게든 소녀들 사이에서 놀아야 하니까. 그래야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해볼 수도..... 아, 아냐 ! 나는 그냥 순수한 마음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이 아가씨들은 절대로 나에게서 물러가지 않을 듯 하니까. 물론 이들이 모두 나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사랑으로 이렇게 관심을 쏟아주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난 아랍의 술탄이 아니라고.' 내가 무슨 하렘의 주인이라도 된다고, 그녀들 전원이 나만 바라보고 있겠는가. 그냥 아픈 사람에 대한 걱정이겠지. 사실 그 이유는......... 아냐. 아냐. 지금 그런 걸 생각할 필요는 없어. 없는 거야. 어쨌든 나로서는 그녀들의 걱정을 잠재울 의무가 있었고, 그래서. 벌떡. 일어난다. 걷는다. 아가씨들이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본다..... 비틀. 아냐. 이건 아냐. 다시 한 번 걷는 데 도전한다. 비틀. 비틀. 아니라니까 ! 이번에는 실수 없이, 제대로. 비틀. 비틀. 탁. 으라차차. 일단 엎어지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에 들어가면 나는 분명. [사이판에서, 한국인 관광객 한 명이 익사했습니다. 익사자 연 문구군은.....] 이런 기사의 주인공이 될 거다. 그리고 이건 굉장히 곤란하다. 진희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 사람이라면 사람이 죽었다고 좋아서 춤을 추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리고 그 꼴은 절대 ! 볼 일이 없다 ! 다리에 힘을 주고 한 발 ! 탁. 두 발 ! 탁. 세 발 ! 탁. 나는 그렇게, 바닷가로 걸어갔다. 아, 이미 바닷가에 있으니, 이건 물 속으로 걸어가는 건가. 그러나 원래 이런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라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피로가 덮치는 지금은..... "레밍들의 자살행진." 누구야 ! 그런 소리를 하는 게 ! 준비운동을 하는 레밍이 어디 있다고 그래 ! 어쨌든 나는 팔다리를 펴고, 돌리고, 구부리고, 편다. 심장마비니 하는 걸로 부고란에 올라가지 않기 위해. 그러나. 털썩. 아, 안 돼. 눈앞에 낙원이 있는데,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어. 나는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만. '안 돼.......' 이럴 수가. 목표의 바로 앞에서 좌절하다니. 나는 다가오는 파도를 보며, 그냥 모래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으. 이런. 소녀들의 비명이 터지면서, 나는 양 옆구리에 따뜻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도 두 개나. 남들이 본다면. "이런 문란한 인간이 !"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느낌도 곧 사라져버리는, 한순간의 꿈일 뿐이다. 꼴까닥. "문구야 !" "문구야 !" "미스터 문구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새하얀 방 안에서였다. 주위는 온통 소독약 냄새로 가득하고, 링겔 한 병이 머리 위에 어른거린다. 이런 풍경은 어릴 때부터 많이 보아오던 것이지만, 지금은 내 주위에 소녀들이 가득 모여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아. 절대로 내가 어릴 때 병약한 몸이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셔서 그랬던 것뿐이다. 솔직히 내가 병약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땐 그 녀석이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았다고.' 따라서 내가 맞고 쓰러져 입원할 일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뭐? 매일 맞지 않느냐고? 내 체력이 얼마나 튼튼한데, 몇 대 맞았다고 입원하겠냐 ! 게다가 그 녀석이 얼마나 약아빠졌는데. 내가 다치기 직전까지만 패는 솜씨는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그런데 이거.' 평소에 보던 링겔 주사병과는 좀 다르다. 무엇보다도, 눈에 익숙한 각도가 아니다. 보통은 길다란 직사각형으로 보이기 마련인데, 이건 원기둥 모양이다. '이상하네.' 물론 주사액을 넣는 병이 원기둥 모양인 건 당연하지만, 이렇게 아랫부분이 크게 보이는 원기둥에는 솔직히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내 오른팔에 약간 따끔거리는 감촉도 별로 기분 좋게 느껴지지는 않......... "!" 나는 황급히 눈을 크게 뜨고, 내 오른팔로 눈을 돌렸다. 그리 오래 찾기도 전에, 큼지막한 주사바늘이 발견되었다. 억. 아프다. 난 주사는 싫어. 하긴 주사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나에게는 특히 싫었다. 이유? "아프다아아 !" 만약 내 옆에 진희도 클라라도 없었다면, 나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들의 앞에서 그런 경거망동은 곤란했고, 그래서 나는 그냥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이것만큼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내가 병원 응급실 같은... 아니 응급실에 와서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좀비들이 습격했을 때도 어디 한 군데도 다치지 않은 내가. 혹시 이것은, 빨래판으로 무장된 누군가의 폭행으로 인한 후유증? "피로로 인한 가벼운 현기증입니다. 그동안 너무 무리한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스터 연." 뭐냐. 이 국어선생님 같은 대사는. 나는 그 말이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끼이익. 목이 향한 곳에는 검은 옷의 정장으로 중무장하신. "누구시더라?" 기억이 안 난다. 여자인데도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내가 피곤하기는 한 모양이다. 그럼 누구시더라? 진희와 연미 누나를 따라온 경호원일까. 그게 아니면....... 하지만 그 녀석의 비서라면 당연히 그 녀석을 따라갔을 텐데? "회장님의 비서를 맡은, 루이라고 합니다. 미스터 연의 건강을 걱정하신 회장님의 분부로, 여기 남게 되었습니다." 잠깐. 그런 소개문을 내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문제는. '왜 모두 납득하는 거야.' 루이라는 비서가 여동생에게 있었나? 하지만 우리 일행 중에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인간이 없다. 그런 비서가..... 비서가..... 그러나 여동생의 비서 중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내가 여기서 나설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루이'라. "짐은 국가다." 왜 이 말이 떠오르는 거지? 아. 루이 14세. 그럼 이 여자는 프랑스 사람인가? 그런데 왜 갑자기 불타는 자동차가 떠오르는 거지? 아프리카 흑인들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오는 듯 했다. "똑같이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우리는 프랑스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차별하지 마라." 그쪽도 인종차별이 심각하다고 해서 그게 떠오른 걸까. 하지만 이 아가씨하고 그건 관계가 없잖아. 하지만 프랑스라고 하니까, 계속 떠오르는 인상은. "안 돼. 내 목을 걸고라도, 이 책을 한국에 넘겨줄 수는 없어." 외규장각 도서를 끌어안은 어떤 도서관원의 생떼가 떠오른다. 다른 걸 생각하려고 해도. "꾸에에엑." 괴로워하는 거위의 입에 사료를 강제로 퍼 넣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거위의 간이 거대하게 부풀자,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낸 후에 푸아그라를 만드는 장면이 생각난다. 안 되겠다. 다른 걸 생각하자. 그러나. "개를 먹다니 한국은 야만인이다." 어느 극우 여배우의 망언도 생각난다......... 아. 안 되겠다. 그만 생각하자. 프랑스에 대해 더 생각하다가는 큰일나겠다. 어째서 나쁜 이미지만 마구 떠오르는 거냐. 그리고. '그녀하고는 관계가 없잖아.' 사실 이름이 프랑스를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그녀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국가의 잘못을 개인이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 되고, 그녀는 이미 충분히 가혹한 환경에 처해있지 않은가. 어쨌든 그녀는. '미인이의 비서니까.' 그러니 내가 그녀를 욕하고 꾸짖을 수는 없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모조리 우리한테 야만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내가 피로에 지쳐 쓰러진 거지? 내 눈이 자연스럽게 문희에게 향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내가 쓰러질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에게 물을 먹인..... "독일에서부터 쌓인 피로의 영향입니다. 미스 전의 일과는 관계없습니다." 무슨 법관의 판결문 듣는 것 같다. 마치 옛날 임금이 옥새를 내리찍듯이, 비판의 칼날이 전혀 들어갈 수 없는. 사형선고도 아니고 이게 뭐야. 어디 대변인도 아니면서. 앞에 발표내용을 적은 종이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다. 게다가 판결문에는. "오늘 하루동안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시라는 진단 결과입니다." 푹 쉬라고요? 이미 한 번 푹 쉬었습니다만? 게다가 이런 거 가지고 약한 소리를 하면 국가대표가 되는 건 무리라고요.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방밖으로 걸어나가기로 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이 비서 누님은 왠지 얼음보다 차가운 듯한..... 쿵. "꽤액 !" 나는 비서 누님의 손짓 한 방에, 그대로 침대로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으그르르르. 의미 불명의 골골거리는 소리가 내 성대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상대는 동정의 눈빛도 없이.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혹시 미스터 연이 너무 무리해서 쓰러질 경우,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그럼. 켁켁... 이런 무식한 지시를 내린 것도 그 녀석이냐.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냐. "미인이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명령을 왜 이 비서 누님에게 했지? 내가 쓰러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모를까, 내가 기절한 동안에 그 녀석하고 연락이라도 했나? "오늘 아침에 괌으로 떠나시면서, 저에게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미스터 연은 분명히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무대포로 뛰쳐나갈 것이니, 절대로 눈을 떼면 안 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 그 녀석은 내가 그렇게 무모하다고 생각한 건가? 의사가 아무리 말려도 무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정도로? 그러나 미칠 노릇인 것은. "확실히 문구라면 그럴 거야." "응. 응. 맞아. 맞아." "그렇겠네요." "Of course(물론)." 굳이 친절하게, 클라라에게까지 통역해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비서 누님. 게다가 왜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무모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말씀 좀 하세요. 네? "무모해 보입니다." 윽. 어떻게 날 만난 지 3일도 안 되는 비서누님까지 그런 말씀을..... "그러니 오늘은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미스터 연을 걱정하는 회장님을 생각해서라도." 그 녀석이 날 언제 걱정했다는 거야 ! 그러나 차마 비서 누님 앞에서, 그렇게 외칠 수는 없었다. 지금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은가. 그것은. '비키니 !' 난 비키니를 보러 온 거야 ! 그런데 한 시간도 못 채우고 이렇게 침대에 누워 있을 수는 없어.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방에서 나가서, 다시 바다로 갈 것인지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철컥. 안 나가기로 했다. 저 쇳소리의 정체를 나는 알고 있기에. "...........결국 이거냐." 결국 나는, 황금 같은 연휴를 헛되이 보내고 말았다. 오늘이야말로 원 없이 놀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연휴가 닥치니까 계획만 있고 실천을 못하는, 전형적인 운 없는 소년의 전철을 밟아버린 것이다. 결국 하루종일 요양에 휴식에......... 이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몸만 편하면 뭐해 ! "흑." 소녀들의 가슴이 눈앞에서 뛰논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내 손이 닿지 않는 신기루. 어째서 나는 이렇게 언제나, 눈앞에서 천국을 놓치는 것일까. 심지어 여동생이 없을 때조차도 ! 나는 몹시 좌절하여, 그냥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쓸쓸한 늦가을의 산책로여. 물론 지금은 여름이지만. '이게 늦가을이지 뭐야.' 게다가 나는 지금 산책로를 걷는 것조차,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유? 내 뒤를 보라. "무리하시면 재미없습니다." 무언의 압력이, 내 뒤에 가해지고 있었다. 여동생이 남겨둔 비서 누님은 자기 임무에 얼마나 충실한지, 저녁 먹고 난 후에도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못살아. 결국 내가 보고 싶었던 건 한 번도 못 보고..... "내일 몸이 나으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비서 누님의 눈빛은, '내일도 아플 것이니 각오하셔'였다. 이런 여동생 같은 사람이 다 있다니. 그런데 잠깐. 이 사람은 우리말도 잘 하고 눈치도 빠른 것 같은데, 설마. "내가 뭘 보고 싶었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네." 갑자기 몸에 소름이 확 돋는다. 설마, 이 사람은..... 그리고 그녀가 말한 것은. "그 나이라면 여성의 알몸을 보고 싶은 게 당연하지만, 너무 심하게 밝히지는 마십시오." 푸훗 !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질 뻔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얼굴도 붉히지 않고..... 그런데 잠깐. 이 상황이라면, 나는 식당에서 내 방으로 그냥 올라가야 한다. 늦가을의 산책로가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실제로는 한여름의 산책도 못하고 말이다. 이건 안 돼. 나도 때로는 평온한 산책이라는 걸 해 볼 권리가 있어. 그러나. 철컥. 왠지 저 사람은 분명히 이런 반응을 보여줄 것 같은데? 하지만 나로서는 반드시 산책을 하고 싶었다. 지금 시간에는 비록 비키니를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도 여자와 같이 바닷가를 걸어가고 싶다고. 비서 누님은 제외하고. 그래서. "저,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면 안 될까요?" 그런데 비서 누님의 저 표정은 뭐냐. 왠지 반응이 쌀쌀할 것 같은..... "좋습니다." 와. 나는 호텔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것을 잊고, 환호하려다가.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휘이이잉. 갑자기 나와 비서 누님 사이에 불어닥치는 찬바람. 여기가 특급 호텔이 맞는 거야? 왜 이렇게 바람이 세? 그것도 여름에. 내 표정이 크게 일그러지는 걸 보았는지, 비서 누님이 한 번 웃더니. "역시 같은 또래와 산책하기를 바라십니까?" "네 !" 나는 굳세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비서 누님은. "그럼 불러오겠습니다. 동행자가 있으면 무리하지 않으실 테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동행자라. 하긴 저녁밥을 나만 먹은 게 아니었으니, 우리 일행과 다시 접선하는 건 간단한 일이기도 했다. 가만. 가만. 지금이 무슨 간첩들의 행동이라도 되는 건가. 무슨 접선이야. 접선은. 그렇다고 맞선이라고 할 수도..... '그런 건 나중에.' 지금은 나와 저녁에 데이트할 사람을 찾는 게 먼저다. 그래서 나도 식당으로 향했다. 이왕 선택하려면 당사자인 내가 있어야 이치에 맞을 테니까. 그런데 내 생각? 우리 일행 중에 나와 같은 또래인 사람은 세 명이 있지만, 그 중 한 명만 고르라면 역시. '진희가 허락을 해줄까?' 전에 내가 그녀에게 고백한 후, 아직 나는 회답을 받지 못했다. 이런 어정쩡한 상황은 오늘로 종결짓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사귀려면 사귀고, 차이려면 차이는 게 나로서도 편하니까.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상황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어서. "아잉." "하아." "꺄하 !" 이런 상황으로 가고 싶다고 ! 그래서 나는 호텔의 품격을 고려하여, 되도록 빨리, 그러나 발소리를 내지 않고 서둘러서 식당으로 갔다. 그러나 원래 사람의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비서 누님이 우리 일행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자마자. 피융. 뭐, 뭐야? 누군가가 식당에서 달리지 말라는 예법도 무시하고, 그냥 죽어라 튀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물론 어깨가 들먹거리지 않으니 저건 뛰는 게 아니라 걷는 거다. 그러나 다리의 움직이는 속도로 보아, 거의 달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진희야 !"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죽어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더 빨리.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비틀. 아차차. 지금 내 몸은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지. 나는 비틀거렸고, 클라라가 나에게 달려와 급히 내 몸을 부축했다. 그녀의 뭉클한 느낌이 나에게 전해져 왔지만, 지금만은 그 황홀함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진희야 !"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저 멀리 도망쳐 버렸다. 어째서냐. 설마 나하고 같이 산책하는 게 그렇게도 끔찍해서? 문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다. "손 씻으러 갔대." 하지만 말야. 화장실은 저렇게 멀리 있지 않다고. 휘이이잉. "이게 뭐야." 나는 속으로 열심히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뭔가. 이게. 결국 산책은 이루어졌고, 내 옆에 여자가 있기를 바라던 꿈도 이루어졌다. 다만 문제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은 색이 아니라 황금색이고, 그녀의 눈은 검은 색이 아니라 초록색이라는 거다. 이게 뭐냐.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러나 황당한 결과이긴 했다. 왜 하필 바로 이 시점에 그녀가 손을 씻어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생리적인 현상에 대해 뭐라고 왈가왈부하면 안 되는 법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녀가 멀리까지 도망갔다고 해도. '할 말이 있어야지.' 여자한테 그런 쪽의 말은, 가급적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쓴웃음과 함께, 그냥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연미 누나가 머리에 손을 얹는 건 볼 수밖에 없었지만. "저 계집애도 참. 왜 하필 지금....." 그녀의 말의 진실성을 따지는 건 그만두자. 지금은 그냥 산책이나 할 수밖에. 게다가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을 것 같다. 우선은. "긴급 좌회전 ! 정면에 자동차 하나가 돌진 중 !" 물론 진짜 자동차는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이좋게 손을 마주 잡고 걸어오는, 인간 자동차다. 아마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이겠지. 일단은 사이가 좋게 보이는 걸 보니. 저런 사람들의 앞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어? 아직 어린애들 아냐?" 뭐, 뭡니까. 그 말씀은. 일껏 비켜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어째서 그런 식입니까. 우리 옆을 지나가던 신혼부부(추정)가, 그런 식으로 종알거린다. 그러나. "그럼 너는 성인이냐?" 아니니까 할 말 없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면 괜찮은데. "세상에. 저 애는 서양 사람? 대단한 꼬맹이네. 어떻게 저런 미인을...." 아니, 클라라가 미인인 것하고, 당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에 대한 응징은 내가 한 게 아니었다. 뭐? 클라라가 했냐고? 그것도 아니었다. 징벌은. 퍽. "우아아악 !" 남자를 걷어찬 건, 그 옆에 있는 여자였다. 상당히 과격한 신부이지만, 그렇게 말할 자격이 남자에게는 없었다. 입에 침이나 좀 닦으라고. 클라라만 쳐다보지 말고. 오죽했으면. "나쁜 자식. 언제는 내가 가장 예쁘다고 했으면서." 그리고 그 여자는 씩씩거리며 가 버렸다. 우리 역시, 쓰러진 채 바들바들 떠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우리 길을 갔다. 나는 지금 산책을 나온 것이지, 음흉한 남자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부 사이의 일은,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정폭력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경우는 남자가 맞을 짓을 한 게 아닌가. 갓 결혼한 신랑이라고 생각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입이 헤 벌어져서 쳐다보는 꼴이라니. 그리고 저 정도 맞는다고 어디 다칠 일도 없고. 게다가 나로선. 꼬옥. 내 팔을 끌어안는 소녀를 추스르기도 바빴다. 하지만 계속 걷는 것도 솔직히 좀 피곤한데. 클라라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저 바위에 잠깐 앉아 쉬는 게 어때요?" 우리는 바위 위로 올라갔다. 되도록 서둘러서. 만약 머뭇거리다가는. '자리 빼앗긴다고.' 역시 유명 관광지답다니까. 촤아아아. 파도를 바라보며, 나와 클라라는 달빛 아래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할 말이 생각이 안 난다. 적어도 이렇게 둘만 있었던 경우는. '거의 없구나.' 독일에서는 둘만 있기가 어려웠고, 있었다고 해도 좀비한테 쫓기거나 하는 판국이어서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었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도. 쿨쿨. 클라라는 이런 식이었고, 깨어 있다고 해도. "..........우엑." 이런 식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하지만 역시 독일 음식과 우리 음식은 너무 달라서, 적응이 잘 안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진실을 가리는 뻔뻔함을 보이지 말라는 항의는 무시한다. 이건 순전히. "음식이 완전히 달라진 탓일 뿐이다 ! 그리고 시차적응 문제하고 !" 그런 거다. 그렇다고 해 줘라. 그렇다고 생각해 주세요. 네? 게다가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 않은가. 부모형제는 다 몰살당하고, 남은 것은 혼자뿐. 의지할 곳도 없이 만리타향에 와서, 그녀가 평안한 마음을 지닐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으아악 !" 미치지 않은 게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한 자제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 나로서는, 존경스러울 정도..... "아니에요." 에? 이제는 이런 독일 소녀에게까지 속을 보여준 건가? 뭐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왠지 약간 창피하다. 진희처럼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하지 말자.' 어차피 가다가 또 어지럽다고 비실비실 거릴 텐데. 일단 듣기나 하자고.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보여드릴 게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가슴으로 손을 뻗쳤다. 그런데 이거. "!" 그리고 그녀는 손을 그 안으로 쑤셔 넣고. "!!" 옷깃을 벌리면서.... "!!!" 이, 이거 어떻게든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설마 여기서 벗기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클라라가 그렇게 아무데서나 벗어 젖히는 여자는 아니라고 믿지만, 이건 왠지 그런 것 같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이 바위가 한적하다고 해도, 통행이 전혀 없는 건 아닌.... 부스럭. 그리고 그녀의 손이 가슴속에서 나왔다. 오들오들 떨던 나에게 쥐어진 것은. "이게 뭐야?" 두 번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일단 열어보지만, 검은 건 글씨고 흰 건 종이다. 일단 Clara Schumann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걸로 보아 독일어로 된 문서인 듯 하기는 한데....... 여긴 너무 어둡다. 그 이상은 못 알아보겠다 ! 나는 결국, 이미 이 서류의 내용을 알고 있을 클라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의 말로는. "입양 관련 서류예요. 여동생 분이신 미스 연 덕분에, 의외로 쉽게 풀렸어요.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새 부모님과 살게 될 거예요." 그런데 잠깐. 그 분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을 부모라고 부르는 것, 나라면 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보다 ! '왜 그 녀석은 미스 연이야?' 나한테는 언제나 미스터 문구라고 부르면서. 여동생과 오라버니의 성씨가 같다는 건 그 동네나 우리 동네나 똑같지 않나? 그런데 왜 나만? "처음부터 미스터 문구라고 불렀으니까요." 선입견은 중요한 법이었다. 푹 꺼지는 나를 쳐다보며 웃는 클라라.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면, 짐을 정리해서 나가야 할 거예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나는 쓸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녀에게,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건가. 미인이 녀석은 그녀에게 새로운 가정을 선사해주었는데, 나는..... 자괴감에 빠지는 나를 위로하는 그녀. "당신은 그보다 큰 것을 저에게 주었어요."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스 클라라.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전 그 일이 있은 후에, 죽으려고 했었어요. 가족들은 모두 죽고, 유일하게 저를 구해주려고 한 당신까지 내 손으로....."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나쁜 것은 오직, 그 식인소녀였다. 그 여자가 이상한 마법으로 그녀를 시체로 만들지 않았다면, 클라라는.... "하지만 결국 당신을 죽이려고 한 것은 제 의지, 제 뜻이었어요.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당신을....."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흐느낌이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 일을.... 아, 안 되겠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고, 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곳에 올, 다른 관광객들에게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리고.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솔직히 좀 부끄럽긴 했다. 지나가는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우리를 쳐다본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웃으며 비켜줄 뿐이다. 물론 그들이 우리를 무슨 사이로 오해할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이 손을 풀려고 해도. "그대로 있어 줘요." 한 소녀의 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촤아아아. 파도는 몰아치고, 소녀는 흐느낀다. 그리고 나는 달 아래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그 자는 목석이 분명하리라. 그리고 난 목석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쿵쿵. 쿵쿵. 이거, 왠지 매우 위험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대로라면 나는 그녀와..... 아냐 ! 이제 그녀는 얼마 안 있어 내 곁을 영원히 떠날 사람이야 ! 그러니까 그럴 일은 없어 ! 하물며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 하지만 원래 남자라는 것은, 눈앞의 꽃을 외면하고 지나가기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피유우웅. 잽싸게 도망간 누구 덕분인지, 나 역시 자꾸만 서글퍼졌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 야속한 여자아이. 과연 그녀를 내가 계속 따라다녀야 할까. 아니, 사귀자는 말을 건넨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도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해주지 않는 그런 매정한.... '아냐.' 진희는 그저 부끄러워서 그럴 뿐이야. 그래. 그런 거야. 그렇다고. 그럴 거라고. 오늘만 해도 그녀의 가슴이 나에게.... 하지만 그건 내가 어지러워서 쓰러졌으니까 그런 것이고, 기껏해야 동정에 불과한 게 아닐까. 나는 아무리 잘해봐야 축구선수이고, 그녀에게는 '사'자가 붙은 신랑감이 줄을 설 텐데. 그리고 그녀는..... 반짝. 아, 안 돼. 소녀의 눈물을 보고 홀리면 안 돼. 그녀는 그런 의도로 운 게 아냐. 단지 과거에 그녀가 나에게 했던,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 뿐이야. 하지만 울고 있는 소녀에게 어떻게든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명제는 나의 몸을 구속했고. 그리고.... 내 입술이 서서히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는..... "당신이라면 좋아요." 아, 아니야. 이건 환청이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 줘. 클라라. 하지만........ 내 입술이 그녀에게..... 그녀의 입술이 나에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마치 우리에게 최면을 걸 듯이..... 주위에서 키스하는 남녀들이 우리를 이끌 듯이.....그래. 여기는 관광지였지. 그리고 연인들이나 신혼부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고..... 이럴 가능성에 대비했어야 하는 건데...... 아, 안 돼...... 우리가 다른 사람들 사이로 녹아 들어가려는 때에. '제발 좀.....' 누가 날 말려줘요. 하지만 하늘에 가득한 달빛은 우리들을 맺어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더더욱 나와 그녀의 팔에 힘을 집어넣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당기듯, 서서히. 서서히. 이것이 보름달의 위력인가. 그리고 그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 그 순간, 나의 동작이 멎었다. 달을 등뒤에 둔 채 떠 있는, 한 사람의 소녀의 모습. 그것은. "!!!"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클라라에게서 손을 떼었다. 마치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듯한 '그 소녀'가, 나를 꾸짖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녀의 입술은.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나요?" 그 말이 나를 멈춰 세우고 말았다. 꿈속을 걷는 듯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내 앞에는 슬픔에 흐느끼는 소녀만이 남아 있었다. 환영이었을까. 하지만 지팡이를 등뒤에 가로로 들고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은. 촤아아아. 파도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클라라는 그저 내 품속에서 울고 있을 뿐이고, 달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저 바람만이, 우리 주위를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고마워요. 이제 좀 나아졌어요." 그녀는 내 품에서 서서히 떨어졌다. 눈물자국이 좀 남아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눈부신 사람이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황금의 왕관이, 그런 이미지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런 공주님의 눈가에서 진주가 떨어진다.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추한 꼴을 보여드리고...." 하지만 그건 그녀의 탓이 아니지 않은가. 원인을 따지고 보면 그건 모조리 무조건 절대로 그 식인 소녀의 탓이라고 ! 몇 차례고 강조하지만 모든 악의 근원은 이번만은, 여동생이 아니라 그 여자의 탓이 아니었던가. 비록 내가 그녀를 원망해봐야,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꼴이 되겠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너무 그렇게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오히려 피해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녀가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했는가. 그녀는 그 끔찍한 몸의 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하지만 그건 하늘이 보낸 천사님의 덕분이었어요. 제 의지가 아니라." 그런데 그 아가씨를 천사님이라고 해도 되는 거냐. 사람 패는 게 거의 여동생과 맞먹던데. 물론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맙지만, 천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포악한..... 하지만 클라라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가 클라라를 살려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저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고마워요." 그녀의 눈은 끝없는 감사를 담고 있었지만, 이제 나는 그 눈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 그럼 돌아가 봐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비서 누님의 말로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나는 클라라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뒤로 파도소리와, 과거의 악몽을 남겨둔 채로. 좀비여. 잘 있거라. 탁. 내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운 후에도 나는 여전히 클라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천국제공항에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부모님을 향해 떠났고, 나는 그 분들을 볼 수 있었다. 여동생의 안내를 따라간 클라라 앞에 서 있었던 그 분들은 클라라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다행히도 그들은 마음이 잘 맞는 듯 보였다. 서로간에 좀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하겠지만, 저대로라면 일은 잘 풀리겠지. 하지만. "하아." 마음 속에 느껴지는 이 공허함과 쓰라림은 무엇일까. 결국 사이판에서는 잘 놀았고, 잘 쉬었으며, 잘 잤다. 피로도 말끔히 풀렸고, 이제 나는 열심히 숙제하고 운동하며 개학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뭐랄까. "하아. 진희도 없고. 클라라도 없고." 한 사람은 결국 도망. 도망. 끝없는 도망만 반복했고, 또 한 사람은 새 부모님과 함께 새 삶을 찾아 떠났다. 물론 그녀가 우리 집에서 영원히 떠난 건 아니다. 아마 1주일 정도는, 새 부모님과 마음이 맞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별을 위한 전주곡인 것이다. 설령. '이번에 입양이 되지 않더라도.' 그 정도의 미모와 성격이라면 조만간 새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곧 독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잠시간의 인연을 뒤에 남기고 영영 헤어지게 될 것이다. 솔직히 그녀와 나는 접점이 거의 없고, 기껏해야 한 순간 만나 헤어지는 이방인일 뿐. 그리고 그녀도 역시 독일 소년과 사귀는 편이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할 것이다. 과거의 악몽과 결부되는 나를 계속 보는 것보다는. "하아." 게다가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녀의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인지도 잘 모른다. 굳이 월하소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나요?" 그 말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의 외모가 타인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과연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을까. 그게 자신이 없는 거다. 이런 '외모지상주의'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안다. 두뇌로는 안다. 하지만 행동이 받쳐주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하아."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느낌을 공유할 사람도, 내 주위에는 없었다. 여동생? 그 녀석은 클라라와 생사를 같이 한 사이가 아니고, 그녀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므로, 내 이 공허감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하아." 왠지 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청춘의 한 페이지가 이렇게 저물다니. 세상에 널린 게 여자인데, 왜 나는 아직도 애인을 만들지 못했단 말인가. 진희의 경우는 자꾸만 도망가고 있으니, 이제는 미련을 접고 그녀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진희 아버지의 권력이 나를 가로막는다면 그걸 뛰어넘겠지만, 그녀 자신이 싫다면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하지만 그러려면 차라리 확실하게 말이라도 해 주지, 이게 뭔가. 그리고 문희는. '생각하지도 말자.' 소꿉친구가 낭만적이라는 말, 완전히 사기다.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이 봐와서, 서로의 결점까지 다 아는 사이. 그런 상황에 연애 감정이 끼어 들 리는 없는 것이다. 안 그럴 수도 있다고? 내 여동생을 봐라 ! 그 녀석의 외모와 재산과 주부로서의 능력은 최고일지 몰라도, 그런 여자가 내 애인이라면 절대 사양하겠다. 미쳤냐. 그런 폭력 지상주의자를 누가. "하아."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내가 여자를 사귈 수 있을까. 그 날 밤의 일만 해도 그렇다. 만약 내가 클라라에게 그때 키스라도 했었다면, 국제 연애를 하더라도 어떻게든 둘이 사귀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 "!" 그녀. 달 아래에 서 있던 그 소녀. 지팡이를 휘두르며 식인소녀를 처단하던 그 소녀. 도시 전체를 뒤덮었던 악의 기운을 한 번에 정화해버린 그 소녀. 그녀의 그림자가 나를 가로막았었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 느낌은. 부르르르. 몸이 떨렸다. 그때 느꼈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느낌. 축구공을 차며 앞으로 달려나가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던 그 느낌. 그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하늘을 눈앞에서 보고 느꼈던 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비록 승차감은 최악이었지만.' 내장이 완전히 뒤틀리다 못해 쥐어 짜이는 그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솔직히 소름이 좍 끼쳤다. 차라리 좀비한테 산 채로 내장을 뜯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끝에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별들을 내 품안에 안는 듯한.....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달과 같은 빛의 덩어리가 부서지듯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였을까. 어디서 온 사람일까. 아니, 그 전에 그녀는. '정말 사람이 맞는 걸까.' 다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게 할 만한 말이 있기는 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마법이 걸린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어지간히 둔하군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은 그녀가 마법사라는 뜻을 의미하니, 마법사에게 상의해보면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아는 마법사가 있나?" 그렇다.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늘을 날아다니며 시간을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괴물 마법사는 없었다. 비록 우리 학교에 그런 걸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흑마술부가 있기는 해도, 그곳에 월하소녀 만큼의 엄청난 마법사가 존재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아 !" 한 사람이 있었다 ! 흑마술부의 부장님이신 그녀. 월영 선배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전에 내 눈앞에서 시내의 두개골을 쪼개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마법의 깃털을 끌어냈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래. 그랬다. 그녀는 찬란히 빛나는 마법의 깃털을 손에 쥐고서. "이건 마법의 깃털이야." 그걸 찾아낼 정도의 실력자라면, 부장님은 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월하소녀의 꼬리를 붙잡을 능력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번의 일은 워낙 큰 사건이었던 만큼, 그녀로서도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에게 물어보면..... 찰칵.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흑마술부 명예부원이라는 억울한 직함을 받았을 때,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었으니까. 그 끔찍한 딱지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8화 어둠과의 하루 (1) 콰르르릉. 번쩍. 쏴아아아. 검은 하늘. 그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번개와 천둥. 그리고 눈을 뜨기도 힘들게 만드는 검은 비. 그 속에 똑바로 나 있는 화강암의 도로. 그 도로를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이 도로의 끝에, 내가 구해야 할 공주님이 있는 것이다. 내 동료들도 검고 끈적끈적한 빗방울을 맞으며 나를 따라온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가족을 짓밟고, 조국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학살한 마녀의 성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공주님을 구하자 !" "와 !" 모든 이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 아리따운 공주님의 미모를 시샘하여 검은 손길을 뻗은 사악한 마녀로부터, 공주님을 구출해주기 위해. 그리고 마녀에게 합당한 응징을 해주기 위해. 사람 고기를 씹으며 우리를 기다릴 마녀를 향해, 다시금 모두는 증오심을 불태운다. 끼기기긱. 우리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마녀의 성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철문으로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이 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악독한 마녀를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해낼 것이다. 그런데 공주님의 이름이.... "뭐였더라?" 이상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 이 성에는 침입자의 기억을 날려버리는 악독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우리 같은 불법 침입자에게는 어김없이 그 마수를 뻗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어린애 장난에는 절대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 동료들은..... "내 이름이 뭐지?" 동료 기사 하나의 눈이 점차 돌아간다. 그리고는 그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이런. 하지만 내 바로 옆을 걸어가던 마법사조차. 땡그랑. 자신의 지팡이를 떨어뜨린다. 그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면서, 그의 머리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대머리를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다. 이건. "내가 뭐지?" 그리고 그의 몸이 쪼그라들면서, 하찮은 지렁이로 변해버린다. 그 옆의 성직자는. "깨깽. 깽." 이미 강아지로 변해서 달아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심지어는 요정들까지도. "우리가 뭐지?" 그 말만 남기고는 차례차례 쓰러지면서, 도마뱀이나 쥐로 변해가고 있다. 안 돼. 나는 검을 힘껏 움켜쥐고, 목청껏 외쳤다. 나까지 마법에 걸려 저 꼴이 될 수는 없다. "나와라 ! 이 더러운 마녀 새끼야 ! 한 판 붙자 !" "이게 아니잖아." 나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멈추었다. 나는 지금 마녀의 성에 온 게 아니라, 흑마술부의 부실 입구에 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옛날부터 마녀의 소굴로 알려져 있었고, 나는 그 마녀에게 자청해서 가는 것이다. 비록 실제의 마녀를 만나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미쳤지." 그렇다. 나는 어제 감히, 산천초목도 벌벌 떠는 월영 선배, 흑마술부 부장님의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보았던 그 식인소녀가 정말 마법사라면, 마법사에게 그 여자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그렇다면 내 주위에 있는 마법사가 누구이겠는가. 뭐? 여동생? 그 녀석은 총질 전문이지, 마법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고. 됐어. 그래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고서. 삐뽀. 삐뽀. 전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신호가 가는 동안, 몇 차례나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식인소녀의 그 모습이, 내 행동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는 탄약통의 폭발에 휘말리고서도 꿈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삑. 바, 받았다 !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열심히 연습한 말을 꺼내려고 했다. 일단 상대가 '여보세요'라고 하면, 그 다음은 내 이름부터 말하고, 선배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어? 명예부원?" 뭐, 뭐야? 마음을 진정할 틈도 없이, 나는 악마를 만나고 말았다. 이거 뭐야. 너무나 빨라. 마음의 준비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절벽으로 내몰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준비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낼 겨를도 없다. 어쨌든 그녀는. 고오오오. 우리 학교에서 여동생과 더불어, 2대 마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악명 자자한 흑마술부 부장님이셨으니까. 재벌 회장 아들이나 명문가의 따님들이 많기로 소문난 우리 학교이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감히 'No'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작년에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게 아니라서 소문만 들었지만, 2학년 선배들 중에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감히 나서서 대드는 자는 없었다. 그건 선배들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량배들도. "으악 ! 월영 누님이시다 !" 이걸로 끝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감히 시비를 거는 '제 목숨 아까운 짓'을 하는 녀석은 없었고, 그녀가 나타나면 고요히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 면에서, 여동생과는 또 다른 실력자라고 해야 하겠다. 여동생이 불량배들과 마주치면. "저 망할 년을 죽여라 !" 이렇게 외치면서 덤벼드니까 말이다. 물론 그 말을 실제로 실현시킨 용자는 하나도 없었지만. 여동생이 아직 기반을 닦아야 하는 신흥 강자라면, 부장은 이미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 여왕님 정도라고 해야 하나. 그런 면에서 그녀는 여동생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무서운 선배님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쫄아들고 있는 것이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좀비들에게 습격 당할 때에, 용감하게 싸웠던 기억을 되살려야 해 ! 나는 이를 악물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에.........저..........그러니까........ 제가 지난번에........" 자기 이름 정도는 말해야 하는데, 상대가 먼저 말하는 바람에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미치겠다. 하지만 이 압박감은 전에 내가 만났던 진짜 마녀인, 식인소녀와 비교해서도 절대 뒤떨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앞선다. 이건 내 선입견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이미지로 인한 것일까. 오히려 부장님이 먼저 말을 꺼내셨으니. "후후후. 긴장할 거 없어. 문구야. 난 명예부원을 잡아먹지는 않는다고." 사실 명예부원이라고 말하는 걸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하긴 하는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가 이미 할 말을 하고 있다. 감히 월영 선배의 말을 중간에 끊을 용기가 없었기에, 나는 그냥 듣기만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귀국한 거야? 듣자하니 이번에 독일에서 고생 많이 했다는데, 다친 데는 없지? 잘 쉬었어?" "........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상냥하게 나오지? 아직도 시내의 두개골을 부수고 깃털을 뽑아내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그럼 우리 부에 좀 나와줄래? 독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좀 듣고 싶은데." 쿵. 그럼 그렇지. 이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상냥하게 나올 리가 없었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시당초 내가 전화를 걸었던 이유가, 바로 그 문제에 대해 선배와 상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을 해버리면. '심장이 내려앉았잖아.' 연애와는 전혀 상관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나를 자극했다. 문제는 이런 두근거림을 자꾸 경험하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박동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어차피 나는 그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래서 나는 용기 있게. "네." 꿋꿋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이제 인사만 하면 용건은 마무리가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다음에 선배님이 한 말은 인사가 아니라. "좀 아쉽네. 난 문구가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아니에요 !" 이 분이 누구 잡을 소리를 ! 제가 사망하는 꼴을 그리도 보고 싶습니까 ! 좀비들 사이를 헤쳐 나오고, 식인소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제 목숨이 얼마나 귀한데, 여기서 자폭을 해버리겠습니까. 한 번 죽으면 되살아날 수 없는 게 사람의 생명이니, 그만큼 더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내가 그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짓을..... '차라리 미인이 녀석하고 데이트하는 게 낫겠다.' 오죽하면 내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선배님께서는. "그럼 왜 전화 걸었는데?" 약간 쌀쌀맞은, 본령에 가까운 톤으로 돌아가는 목소리. 듣는 순간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 확 들어온다. 역시 무시무시한 인간이야.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결말을 지어야 한다. 머뭇거리면 죽을 지도 모른다. "독일에서의 일을 상의하려고요." "역시." 서, 설마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왠지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위인으로 보인다. 어쨌든 여동생과 맞먹는 인간이니까. 대재벌의 후계자조차 꼼짝못하게 만드는 그 여동생과, 감히 동등한 시선에서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우리 학교에서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심지어 선생님들조차도, 여동생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지는 않는 판이니까. '돈과 권력으로 밀어붙인 거 아냐?' 자세한 속사정은 여동생이 안 가르쳐주지만. 그리고 대화는 종결로 치달았으니. "알겠어. 그럼 내일 낮에 시간이 있어?" "네." 다행스럽게도, 축구부 훈련은 내일이 아니라 모래부터다. 그러니 하루 정도는 어떻게 변통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름의 외출은 덥고 끈끈하겠지만, 내일만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 어쩌면 추울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일 정오에 우리 부실에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그럼 몸조심하고 편히 쉬도록 해." 딸깍. 이것으로 정식 결정. 나는 그렇게 해서 공포의 흑마술부 부실에 온 것이다. 그러나 문 앞에 온 것이, 부실에 들어갔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니. 째깍째깍. 1분 경과. 째깍째깍. 5분 경과. 째깍째깍. 10분 경과. "이게 뭐야." 미치겠다. 눈앞에 있는 문만 열면 흑마술부 부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실 안인데, 그게 안 되는 거다. 다행히도 나는 11시에 왔으니, 아직 시간 여유가 30분 정도는 남아있지만. '안 돼. 도저히.' 내가 이렇게 겁쟁이였나? 하지만 좀비들이나 식인소녀와도 당당히 맞선 나라도, 이곳은 두려웠다. 좀비들이라면 차라리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맞서느라 바빴고, 식인소녀의 경우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전에 모든 사건이 종료되었으므로 차라리 나았는데, 여기는. '여유시간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어.' 어쩌면 이건 내가 정말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증거물일지도 모르겠다. 독일에서는 그냥 죽어라 돌격하느라 바빴으니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실감할 정도로, 여유를 찾았다는 건가. 그때는. '뒤에 누가 나타날까봐 항상 긴장했는데.' 그 순간에, 내 어깨를 잡는 무엇인가. 이건 ! "히익 !" 이 느낌을 나는 알고 있다. 바로 얼마 전, 독일에서 지겹도록 경험한 일이기에. 그 이상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 이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뭐? 이 손이 혹시 사람의 것이 아니냐고? 사람이라면, 입 뒀다가 뭐에 쓰냐. 말도 안 하고 느닷없이 남의 어깨를 짚는다는 건 분명히 악의가 있는 거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는 그런 악독한 선배가 무수히 많으므로,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록 그 인간들은 축구부에서 다 쫓겨난 지 오래지만. 휙. 우선, 잽싸게 몸을 숙인다. 상대의 이빨을 경계한 조치다. 그러면서, 상대의 오른팔을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팔은 내 목을 노리며, 나를 조이듯이 파고든다. 그리고 동시에 뻗어오는 왼팔. 하지만 내가 한 발 빠르다 ! 좀비한테 질까보냐 ! "우랴아 !" 어느 나라의 말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기합을 넣으면서 상대의 왼팔을 그대로 붙잡는다. 그리고 허리를 퉁기면서, 상대의 몸을 허공으로 날린다. 상대의 입이 내 목에 닿기 직전에, 녀석의 몸이 앞으로 넘어간다. 자. 어떠냐 ! 좀비 격파용 격투기술, 업어치기가 ! 그런데 잠깐. 내가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은데. 만약 우리 학교가 좀비들의 소굴이 되었다면. '뭔가가 빠졌잖아?' 그렇다. 만약 내 뒤에 선 무언가가 만약 좀비였다면, 그것이 필수적으로 동반할 요소가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음향효과로서. 탁. 탁. 아니, 아니고. 발소리가 아니라, 보다 중요한 소리가 있다. 그것은 좀비라면 반드시 해야 할 필수적인 의무에 해당되는 것으로, 바로. "카아악." 이거다. 자고로 좀비는, 사람의 살을 게걸스럽게 씹어 삼키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카아악'이라는 소리를 내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하지만 내 뒤의 좀비(?)는 그런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럼 이건 좀비가 아니라는 건가? 그러나 소리를 내지 않고 습격하는 좀비도 세상에는 있으니, 그것 가지고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그 좀비(??)의 왼팔을 잡아본 감상으로는. '너무 따뜻한데?' 그게 좀 꺼림직 했지만, 지금 죽어버린 시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므로, 나는 그 점을 무시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왜 팔에 온기가 남아 있는지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런 저런 사정을 봐주면서 업어치기를 늦추다가는, 당장에 내 목이 물어뜯기지 않는가. 내 반응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곳이 어디인가. 흑마술부 아닌가. 멀쩡한 사람을 솥에 삶는다는 소문이 나도는 흉흉한 곳인데, 좀비 정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가만. 가만.' 여기는 독일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단정하고, 그냥 공격부터 해 버려도 될까. 그러나 이미 행동을 멈추기에는 너무나 늦었고, 나는 상대의 머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꽂아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휘리릭. "에?" 상대는 잽싸게 몸을 회전시키면서, 잡힌 왼팔을 내 손에서 풀어냈다 ! 이, 이 빠른 반응은 설마. 그리고 상대는 몸을 빙그르르 돌리면서 허공에 멈추고. '이, 이건.' 설마, 이건 좀비가 아니라 '식인소녀'급인가 ! 내가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그것은 나에게 돌격해 들어왔다. 이제 기습을 당한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내가 되었고, 급히 허공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지만. 푸욱.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 상대와 뒤엉키고 말았다 ! 그리고 상대의 머리가 내 목으로 향했다. 이런. 당한다 ! 나는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 전에 그 무언가의 입술이 내 귀에..... "문구야. 안녕?" 에? 꼼짝없이 물리는 줄 알고 몸을 움츠리던 내 귀에 들려온 음성은, 시내의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인사치고는 너무 심하잖니." 나는 시내와 끌어안고 있었다. 아. 한 가지 확실히 할 것은, 포옹은 어디까지나 시내가 한 것이고, 나는 그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런데 왜 나한테 업어치기를 한 거야?" 죄 지은 사람이 강하게 나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가끔 통념을 깨는 사람들이 요즘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난 그런 양심 불량은 되기 싫으니 넘어가자. 신문에 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너, 혹시." 나는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바짝 긴장했다. 사실 이 경우는 살인미수로 고소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여자아이를 집어던지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머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박아버리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은 추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꼭. "역시 독일에서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와, 와, 와아아아앗 ! 나는 피하지도 못하고, 시내의 품속에 갇히고 말았다 ! 이, 이거 위험하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시내의 팔 힘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이, 이거 여자아이의 힘이 왜 이렇게 세냐. 네가 무슨 여동생이냐. 그리고 그녀는. "내가 옆에 있었으면, 혼자 그렇게 고생하게 두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고. 꿈도 크셔. 네가 내 옆에 있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었겠냐. 이건 시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그 식인소녀였다고. 총을 아무리 쏴도 끄떡도 하지 않고, 탄약통의 폭발조차 무시해버리는 초강력 진드기였는데, 네 힘으로 어떻게 하겠냐. 부장님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그러나. "걱정 마. 나도 요즘 열심히 마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그게 그렇게 쉬우면 걱정도 안 한다고. 상대는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라, 괴물이었다고. 괴물. 물론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맙게 받겠지만..... "이제야 내 마음을 받아주는 거야?" 가, 가만. 이 녀석, 혹시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는 거 아냐. 예를 들어..... "그럼, 문구도 이제 나와 사귀기로 결정한 거라고 받아들여도 좋을까?" "아, 아냐 !" 나는 황급히, 그녀의 망상을 저지했다. 이대로 두다가는 큰일난다. 이 녀석은 안 그래도 나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더욱 심해지면 정말 손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 하지만 원래 나는 여복이 없는 사람이었던지, 시내의 그 다음 말. "흑. 그럼 지난번에 내 입술을 빼앗으려고 한 건, 순전히 장난이었던 거야?" "으아아악 !" 이 말에 그냥 엎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이게 문제인 것이다. 지난번에 흑마술부 부장이 내 기억을 되살린다며 벌인 어리벙벙한 마법으로 인해, 시내는 나와 자신이 '서로 사귀다가 기억을 잃은, 다정한 연인'이라고 착각을 해 버렸고, 그것은 과거부터 그녀 자신이 나를 좋아했다는 현실과 맞물려서 더더욱 견고해졌던 것이다. 으. 바보 같은 부장님. 어째서 그런 맹한 마법을 쓰신 겁니까. 게다가 그 기억이 자신에게서 나온 게 아닌, 나에게서 나왔다는 점이 시너지 효과라도 불러 일으켰는지. "문구 좋아 너무 좋아." 이렇게 된 거다. 더더욱 미치는 것은, 그 기억을 내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러니까 유혹이라는 거지. 머릿속에 진희와 축구밖에 없는 오빠가, 어떻게 시내 네가 오빠를 짝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지? 그리고 그걸 알았다고 해도, 오빠는 그 날 아침만 해도 진지하게 진희에게 고백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진희가 도망가서 고백은 무산되었지만, 오빠가 얼마나 절망했는지는 옆에서 봐서 알아. 그런데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오빠가 갑자기 너에게 정열적으로 키스하려고 했을까. 혹시 너, 흑마술에 관심이 있다더니 이상한 저주라도 걸어서 오빠를 끌어당긴 건 아니겠지?" 여동생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나와 시내가 키스하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어째서 내가 그런 '정신나간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이란 건 사실이란 거다. 설령 시내가 이상한 짓을 해서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끔 유도되었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인 시내에게 뭘 추궁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기억이 없어졌으니까 부장님이 그걸 찾아낸다고 마법을 쓴 거고, 시내의 머리에서 그 큼지막한 깃털을 뽑아낸 것인데. 그래서 나는 시내를 심하게 밀어낼 수가 없었고, 그녀는 여전히 내 곁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야속한 여동생은. "정당한 애정싸움이라면, 나는 가로막지 않으니까." 이렇게 선언해 버린 거다. 따라서 시내가 부장에게서 배운 흑마술이라도 쓰지 않는 한, 나는 꼼짝없이 시내의 침공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가장 강력한 힘의 소유자가 나를 방치하고 있으므로. 뭐? 그럼 그냥 시내와 사귀면 되지 않느냐고? 안 그래도 진희와의 일이 벼랑으로 몰리고, 클라라는 독일로 돌아갈 것이니 옆구리가 시리지 않느냐고? 그러니 시내라도 옆에 두라고? 하지만. '난 그녀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그게 문제다. 클라라에 대한 내 감정이 사랑인지 동정인지도 모르는 내가, 과연 시내의 마음을 받아줄 자격이 있겠는가. 아니, 지금 당장은 진희와의 관계도 엉망진창인데, 도대체 어떻게 다른 여자를 사귈 수 있겠는가. 일단 진희에게서 "Yes."라는 답은 고사하고. "No." 이런 답이라도 들어야, 여자친구를 만들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게 아닌가. "하지만 문구는 아직 진희한테 답도 못 들었다면서? 도대체 몇 달을 더 기다릴 셈이야?" 내 고민을 파고드는 시내의 일격에, 나는 비틀거렸다. 그렇다. 그게 문제다. 그녀는 아무리 내가 답을 요구하려고 해도. 피융. 이런 식이다. 언제나 말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그녀와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다. 오히려 후퇴하기만 할 뿐이다. 하긴 처음에 고백하려고 했을 때도 그랬었지. 그녀가 수도관을 타고 도망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도 내 고백을 듣기 싫었던가. 타고난 성격 때문이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 그렇게까지 뒤로 빼는 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잠깐. 그런데 시내가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지? "문희한테 들었어." 그제야 나는 그녀가 여동생의 친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지난번에 그 일로 말다툼을 하기는 했어도, 미인이가 자신의 공언대로 '정당한 접근'에 대해 일체 방해하지 않는 걸 경험한 그녀는 다시 미인이와 그럭저럭 관계를 회복했고, 지금은 원만한 친구 사이로 돌아간 상태였다. 뭐 장래의 시누이에 대한 포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친구끼리 싸우는 것보다는 낫지. 그러나. "그렇게 뒤로 빼는 애가, 과연 문구를 진짜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를 감쌀 방어막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진희가 조금이라도 질투심을 보여준다면, 그래서 나에게 와서 시내를 가로막는다면 어떻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오히려 나와의 거리를 더 벌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나는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큰일이다.' 그리고 시내는 조금씩,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있게. "그러니까 나한테 와. 우리 같이 즐거운 고교생활을 누리자고. 난 진희하고 달라. 문구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수 있어. 집안이 안 맞아서 서로 사귀면 안 된다는 식의, 쓸데없는 군더더기도 붙지 않고." 사실 조건을 따지면 나와 그녀의 집안은, 그리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동생이 어느 그룹 회장님이라는 것만 제쳐두고 생각한다면. 하지만 내가 여동생에게 손을 벌릴 것도 아니니, 그쪽은 사실상 제외해야 한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직위를 숨기는 이상, 그쪽은 사실상 논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난 애인이 지금 없어.'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며, 갑자기 미소짓는 그녀. "그러니까, 잘 생각해 줘. 난 문구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럼 이 다음의 결말은. '그, 그건가.' 나는 순정을 빼앗기는 소녀의 심정으로, 마지막을 기다렸다. 보통 이럴 때 소녀에게 소년이 하는 말은, '날 믿어라'느니, '책임진다'느니 하는 말이 아닌가. 뭔가 뒤바뀌었지만, 힘으로는 시내를 이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몇 년간을 쉬지 않고 단련했던 내가, 고작 계집애를 당할 수 없는 거지? '호, 혹시.' 나, 아직도 좀비 사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야? 사이판에서 충분한 휴식으로 체력을 회복했다고 믿었는데, 아무래도 전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그 과오는 이제 잃어버린 순결로 보상받는....... "으라차차." 에? 그녀는 내 입술을 빼앗지 않고, 나를 잡아당겼을 뿐이었다. 얼이 빠진 사이에, 어느새 일어나고 마는 나. 그, 그럼 내 순결은 무사한 건가. 조선시대 처녀 수준의 생각이나 하는 나를 바라보는 시내. 그녀는 내 옷을 보더니. "먼지가 좀 묻었네. 조금만 기다려." 그녀는 자기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고, 먼지가 묻은 곳을 털어 준다. 마치 그녀가 내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반 녀석들이 본다면. "애인 맞네." 그 단순한 두뇌의 녀석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1+1은 2밖에 안 된다는, 굳어버린 사고방식으로 뭉쳐진 녀석들이니까. 그러나 이건 뭔가 아니다. 비록 그녀가 착하고 아름다우며 나만 바라보는 여자아이라는 건 확실하지만, 이건 아니다. 나는 혹시. '그녀의 마음을 기만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팔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테니까. "나한테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게 문제다. 과거의 잘못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왜 그 당시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역시 그 점이었다. 귀신한테 홀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사악한 마법사가 나에게 마법이라고 걸었던 것일까. 하지만 내가 그걸 알아보는 것은 무리였다. 예를 들어보자. 클라라에게 낫을 보여주고 나서. "왜 이걸 보고도 기역자를 연상하지 못했습니까." 이렇게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녀는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게, 지금의 나였다. 내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상대가 마법을 쓴다고 해서 알 수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 실제로 월하소녀가 나에게 헤이....... 어쩌고 했던 마법을 걸어서 내 시간을 조종했을 때도, 나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말을 해주고 나서야 겨우 알았으니까. 그때 불타던 주위의 풍경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타 들어가는 불꽃이 얼음처럼 멈춰 있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모르는 거냐." 이런 반론도 있겠지만,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죽기 살기로 여자의 팔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그게 눈에 들어오겠는가. 안 그래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초고속 항진을 했는데.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거야.' 그건 여동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 녀석이 대단해도 그건 '인간의 능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다. 솔직히 그 녀석이 얼마나 바쁜데, 마법까지 익힐 정도로 시간이 펑펑 남아돌겠는가. 집안 일에 기업 경영에 공부에 내 머리 구타까지. '무리라고.' 아무리 지상 최강의 여동생이라지만, 그녀에게 마법에 대해 묻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그러니 그 녀석이 나와 시내의 키스..........장면을 봤다고 해도, 내가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알아낼 수는 없는 거다. 부장님이 그걸 봤다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지지만. 그러니 그에 대한 결론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셈이다. 미치겠다. "그런데 우리 부실에는 무슨 일로 왔어? 방학중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왔다면........ 혹시 날 만나려고?" 그런 내 상상을 중단시키는 시내.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매우 미안하게도, 나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이다. 물론 그 여자를 '여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내가 만나러 온 여자는 흑마술부의 부장님이고, 내가 알아보려는 여자는 바로.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나요?" 그녀였다. 하늘을 품에 안은 구슬을 빛의 끈으로 감싼 지팡이를 들고, 안개로 옷을 만들어 입은 그 소녀에 대해, 난 알고 싶었다. 과연 그녀는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가 왜 나를 구해주었는지...... "문구 너, 지금 다른 여자 생각하고 있지?" 다시금 나를 환상에서 현실로 끌어내리는 시내. 그녀의 눈에 불길이 비춰진 것처럼 보인 것은, 내 착각일까. 이거 어떻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 여자 누구야 !" 라는 소리부터 나올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럴 때는 재빠르게. "부장님. 월영 선배를 만나 상의할 일이 있어서 여기 왔거든." 진실이긴 했다. 그녀를 만나야 그 월하소녀에 대한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이 공포로 가득 찬 장소로 인도한 것이니까. 하지만 여자에게 이런 말은 좀 안 좋지 않을까. 이럴 때 시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널 만나러 왔어." 이것이겠지만. 그러나 문희의 친구이자 그 여동생의 친구인 그녀에게, 그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가장 원만한 사람의 이름을 방패로 삼음으로서, 이 순간을 넘어갈 수밖에. 이미 월영 선배와 약속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호가호위(狐假虎威 :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려 으스대다)가 따로 없어.' 지금 내 꼴이 딱 그거가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토닥토닥 다퉈봐야 나오는 것도 없다.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눈앞에 서 있는 시내에 대해서도, 고아소녀 클라라에 대해서도, 심지어 진희에 대해서도 아니었다. 독일에서의 그 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그 월하소녀에 대해 알고 싶은 거다. 그녀를 다시 만나, 도대체 지금 지구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갈 순 없어.'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컸다. 아마 독일 정부에서도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상황 파악을 위해 뛰고 있겠지. 아니 그건 전 세계의 모든 정부들이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나 그런 것보다 나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알고 싶었다. 도대체 그 좀비들은 무엇이며, 식인소녀의 정체는 무엇이고, 그들만이 과연 악의 무리의 전부인지, 아니면 더 있는지, 그리고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시내도 그걸 느꼈는지. "혹시........ 독일에서 겪은 일과 관계가 있는 거야?" "응." 그 말에 그녀는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내 손을 놓지는 않았다. 내 오른팔은 비록 자유를 얻었지만, 내 왼팔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꼭 쥐는 그녀. "그랬구나....."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방학인 줄 알았는데." 보통 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3학년은 예외지만, 고 3은 인간에 속하지 않으니 제외한다. 그들은 수험기계이자 공부 전용 로봇이고, 인권이나 오락이라는 단어와는 인연이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불쌍하게도. '나도 곧 그렇게 되겠지만.' 새삼스럽게 여동생이 얄미워진다. 그 녀석이야 머리가 너무 좋으니까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을 테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시험에 떨어져도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무기로 미국의 유명 대학에 기부금을 퍼부어서 쉽게 입학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대학에 한 번 가려면 반드시 청소년 대표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뭐? 공부해서 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랬다간 난 의대로 가게 된다고.' 집안의 가업을 이으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분 하에, 부모님은 나를 억지로라도 의대나 약대로 보낼 게 분명하다. 아마 의대가 더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법대라든가, 아니면 경영학이나, 어쨌든 내가 원하는 부분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쪽으로 진로가 결정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나는 죽으나 사나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어야 한다. 그 정도가 아니면 나는 꼼짝없이. '끌려가고 마는 거야.' 그건 곤란했다. 그러니 나는 더욱 노력해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아니, 아니. 지금은 그게 아니지. 요점은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깨끗한 거야?" 그렇다. 흑마술부의 부실은, 지나가던 개미가 미끄러질 정도로 청결했던 것이다. 보통은 방학이라고 부실의 문을 닫아버리고, 안에는 먼지만 수북히 쌓이는 게 상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럼 이 청소는 대체 누가 한 거지? 설마 부장님이 직접 빗자루를 들 턱이 없고. 날아가려고 쓸 것도 아닌데. "우리 부에는 방학이 없거든." 에? 학생의 낭만을 무자비하게 부숴 버리는, 저 철퇴는 무엇이냐. 철퇴를 휘두르던 사람이 대답을 해주었으니. "3학년 선배들은 공부하러 나오고, 1학년과 2학년은 부 활동을 위해 나오거든. 자주." 자, 자주? 고 3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그 아래 학년은 왜 나와야 하는 거냐? 그녀는 어리석은 나에게 지혜를 내려주었으니. "그야 집에 있으면 학원에 가야 하니까." 윽. 그 말에 반론을 펼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하긴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뭐라고 하기가 힘들지.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은 실력파들이니까. 심지어 도무지 실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 꼬마 선생님이나 우리 담임조차도. '역시 외모와 실상은 다르다니까.' 그런데 부 활동이나. 대체 뭘 하는 거냐. 그 순간 지하실에 촛불을 켜 놓고 마법진을 그리는 소녀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절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곳 부실이 생각보다 너무 깔끔하고, '마녀 소굴답지 않은' 외양을 하고 있으니, 어딘가에 그에 걸맞게 어두컴컴한 곳이 또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 부에선 멀쩡한 닭을 잡아서 목을 자르는 짓은 안 한다고." 시내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그런 쪽으로 상상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축구부라면 부 활동이 너무 명확해서, 이런 망상을 할 수도 없지만. "그런데 문구는 축구부에 안 가네? 지금쯤 한참 여름훈련을 하고 있을 텐데." "아. 그거?" 닭 모가지를 잡아 비트는 상상보다는 낫겠지.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긴 문구는 독일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으니까." 시내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거기서 거의 죽다 살아난 내 입장에선, 바로 훈련에 참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물론 외부에는 시민폭동으로 전달되었지만, 사실 폭동이라고 해도 난 진압군 한가운데에 있었다. 결코 편하게 있다가 온 게 아니었다. 좀비룰 물리치고 나면 편히 있을 줄 알았더니. 탕탕탕. 이런 식이었다. 그 악몽 같은 날이 지나간 후에도 며칠 간은 계속 말이다. 그나마. 피융. 피융. 이게 아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지만. 물론 군부대 내에 총알이 날아올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던 건 아니었지만, 휴가를 원하고 여행을 왔던 사람에게 사방에서 총질이 벌어지는 사태는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좀비 사이에서도 살아남은 내가. 탕. "으윽. 대한민국 만세." 이런 일을 맞이하진 않았겠지만, 외부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귀국하자마자 축구부에 전화를 걸어서. "저, 이번엔 너무 피곤해서, 며칠 더 쉬었으면 하는데요." "알았어. 편히 쉬고, 몸이 회복된 후에 오도록 해." 이렇게 즉각 허가가 날 정도였으니까. 뭐 그것도 오늘로 끝이지만. 그런데 잠깐. "다른 부도 학교에 나오니?" 축구부의 경우는 전국대회를 위해 훈련중이니 학교에 나올 이유가 있다. 흑마술부의 경우는 부활동이 있고, 집에 있어봐야 학원에 끌려가는 게 전부니까 나와야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항공우주부는? 보통 비행기 관련 행사는 여름에 있는 게 대부분이 아닌가? 야외활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여름이니까 말이다. '적어도 학생들에게는.' 그럼 과연, 항공우주부도 지금 학교에 모여 있을까. 만약 모여 있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 있다. 그녀가 비록 나를 보기만 하면 달아날지라도, 나로서는 마지막으로라도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것이다. 최소한. "난 네가 싫어." 이 말이라도 듣기 위해선. 이렇게 어정쩡한 종결은 싫었다. 좋은가. 싫은가. 그에 대한 확실한 끝맺음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그래야 내 마음을 가라앉힐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여자를 찾아 출발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클라라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나 역시 그녀에 대한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다면 나는 진희에게 결말을 요구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야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항공우주부에 소속된 사람을 나는 하나 알고 있지만, 그녀는. "회장님." 그래서 내 여동생은, 나와 함께 등교하지 않았다. 학생에게 있어서 방학은 유일한 자유시간이고, 그래서 그녀는 사업 문제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불쌍한 녀석. 휴가가 끝나자마자 일이라니. 그러나 IQ 200이 넘는 녀석에게 그런 출장이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두뇌노동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 가족은 전원. '팔자에도 없는 호텔 투숙이냐.' 사이판에서 돌아온 후에도, 우리 가족 전원은 호텔에 살고 있었다. 이유라면 당연히. "밥 줘. 밥. 밥. 밥." 이렇게 말을 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지만. 그리고 항공우주부 소속인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이 여자아이. 그녀라면 그에 대해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대답을 해주었지만. "다른 부는 모르지만, 항공우주부라면 오후에 모이기로 했어. 곧 공군사관학교 견학과 모형 항공기 대회가 있어서, 대회 출전자들을 도와줘야 하거든."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시내는 내 눈빛을 보다가 뭔가 알아차린 듯이 웃더니. "아. 진희? 그 애라면 참가하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개인사정이라고 하던데?" 피식. 나는 완전히 좌절해버렸다. 솔직히 여동생도 없는 상황에서 나 혼자 진희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여동생이 지금 해외에 있다는 걸 진희 아버지가 안다면 나는. "하하하. 이 놈을 암매장해버리겠다." 농담이 아니다. 그 자는 진짜로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뭐? 실정법 위반이라고? 국회의원이 법 지키는 거 봤냐? 게다가 연미 누나조차도, 사이판에서 돌아오자마자. "문구야. 나 약혼자하고 같이 미국에 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잘 지내." 아이구. 두야. 별로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왜 가시는 겁니까. 그러나 진희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연미 누나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명령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를 도와줄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었고, 설령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간다고 해도. 씨잉.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래서 항공우주부에 대해 물어본 거였는데..... 그런데 얘는 대체 어디로 튄 걸까. 아무래도 방학이 끝날 때까지는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내 청춘이 상당히 암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안 돼. 아직 난 절망할 때가 아니라고. 나는..... 잠깐.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시내가 언제 흑마술부 부원이 되었다고, 여기에 와 있는 거냐. 이 녀석이 항공우주부에서 탈퇴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게다가 아까 내가 들은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설마, 마법사라도 될 셈인가?' 과학적인 부로 이름난 항공우주부에서, 중세의 어두컴컴한 먼지가 쌓인 흑마술부로의 이동이라.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시..... 우리 학교의 2대 마녀의 얼굴이 하나 스쳐간다. 이건. "지난 번 일로 인해, 이중가입을 하게 되었어. 별로 이쪽에는 오지 않지만." 아까 발언은 분명히 마법을 배운다느니 어쩌니.....가 아니었어? 그런데 뭐가 '별로'냐? 그런데 잠깐.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거지? 나는 순간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살의라기보다는 차라리 달콤함이었지만. '안 돼.' 아직 진희와의 관계도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즉시 일어나서 부실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부실의 문은. 스르르르. 쿵. 뭐야? 왜 저절로 닫히는 거야? 일반 고등학생의 부실에 자동문이 설치될 리가 없는데? 바람이 부는 거라면 이해가 가지만, 여기는 그럴만한 곳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창문에선 왜 바람이 안 부는데?' 이건 설마. 식인소녀와 만났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이건 바로..... 내 의심을 확인시켜주는 시내의 말소리. "마법이야." 그녀의 손에는 작지만 분명한, 마법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비록 내가 목격했던 두 마법사의 지팡이보다는 볼품이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한 초자연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는 그것은..... '이래서 마법을 배웠다는 건가.' 무기가 있다면 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쓸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총기 휴대가 금지되어 있으니까. 부실의 문이 막힌 상태에서, 내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서서히 나를 향해 간격을 좁혀오는 시내. 그녀는.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 뺨을 양손으로 잡는다. 어느새 지팡이는 숨겼을까. 그러나 내가 느끼는 공포감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디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이건 무의식중에 느끼는 공포..... 확. 나는 그녀를 밀어내고 말았다. 뭔가가, 뭔가가 그녀의 접근을 껄끄러워했던 것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깜짝 놀랐을까. 시내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내가 그렇게 싫어?" 이런. 소녀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가 여자를 울리다니. 시내는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면서 말한다. 아니, 그것은 외침이다. 서럽다는 듯이, 목이 쉬도록 외치는 그녀. "내가 그렇게 싫어? 넌 언제나 그랬어. 내가 고백하려고 하면 다른 여자들하고 같이 떠들기나 하고. 나하고 키스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니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움츠러들고. 나하고 사귀는 게 그렇게 싫어? 내가 그렇게 미운 거야? 난 옛날에도, 지금도 널 좋아하고 있는데. 널 바라보지도 않는 진희가 그렇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그 독일애하고 정말 사귀는 거야?" "에?" 쿵. 내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 독일애'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분명히 하나 있었기 때문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크, 클라라?" 설마, 그녀에 대한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단 말인가. 이건 너무 빠르잖아 !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분명히 대답할 수 있었다. 클라라에 대해서라면. "아니." 적어도 나는 그녀를 연인으로 삼지 않았었다. 그녀 역시 곧 독일로 돌아갈 것이니, 내가 그녀를 강제로 우리나라에 잡아둘 수도 없다. 그녀에게는 새 부모님이 필요하고, 새로운 가족과 형제와 자매가 필요할 것이니까. 설령 유럽에 돌아간 후 그녀가 나와 편지를 교환하더라도, 내가 그녀와 맺어질 가능성은 없다. 극한 상황에서 맺어진 사이니까. 죽음이 바로 옆에 있었던 그때의 일은, 평화를 되찾은 지금은 거의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말이다. "정말로 평화롭다고 생각해?" 느닷없는 목소리. 그리고 문이 서서히 열림과 동시에, 나타난 사람은. "부장님 !" 그랬다. 그녀였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와,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한다는 듯이. "일단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자." "........" "........" 밀실이라고 하면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부장님은 들어오자마자 모든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치더니 그 후에야 이곳의 자랑, 토마토 쥬스를 잔에 따랐다. 나에게 한 잔. 시내에게 한 잔. 그리고 그 자신에게 한 잔. 핏빛의 쥬스를 바라보는 시내의 눈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그녀의 어깨만 봐도 그것은 확실했다. '어떻게 하지?'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는 듯한, 팽창한 고무풍선의 내부에 들어앉은 꼴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풀어낸 사람은, 역시 부장님이었다. 그녀는 먼저 나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 독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그 순간 어깨를 움찔하는 시내. 그녀에게는 클라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게 분명한 화제니까,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내가 별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여자들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해도. '별로 환영할 생각이 없다고.' 어쨌든 그 끔찍한 체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해서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직도 좀비들의 괴성은 내 귀에 선명히 남아있었고, 식인소녀의 살기어린 눈도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나는 사람은. "그녀였니?" 에? 그런데 부장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였니'라니? 혹시 누군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부장님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위로 세우면서. "한 사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전에." "네." 무엇을 요구하려는 듯한 의지가, 그녀의 말속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설마. "아.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말해야겠지."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자기 무릎 위에 천천히 얹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 입술을 바라보았다. 애정이 아닌, 지식에 대한 갈구를 목적으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 어색한 침묵이, 부실을 메우고 있었다. 마치 스모그처럼. 부장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고, 시내는 나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대신 한없는 연민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 예시당초.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요?" 이걸 물으러 왔었으니까. 그러나 부장은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뭔가 고민하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덩달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간의 시간을 메운 후. "그래...." 결국 부장님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말을 할 생각인가. 하지만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한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더 이상은 들을 필요가 없겠어. 넌 지금 당장 이 부실을 나가서, 다시는 그에 대해 생각하지 마. 그 여자에 대해서도, 그 사건에 대해서도." "네?" 난데없이 무슨 강요? 하지만 부장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전혀 웃음이 배여 있지 않은 그 얼굴은, 그녀가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심해. 만약 살고 싶으면, 그에 대한 흥미를 모두 버리는 거야." 이게 무슨 횡포인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내쫓을 셈인가? 하지만 내가 미처 항의문을 작성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자. 착한 아이는 선배 말을 잘 듣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대로 부실 밖으로 밀려나가고 말았다. 이, 이런. 내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상황은 끝이었다. 이게 뭔가. 말도 안 돼 ! "이봐요. 문 열어요." 쾅. 쾅. 나는 문을 두드렸으나, 부장은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거 뭐야. 이러면 난 헛걸음을 해버린 셈이잖아. 문을 잡아당겨 본다. 밀어본다. 심지어 발로 차 본다 ! 다른 사람이 이 꼴을 봤다면. "저 녀석 미쳤나 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지만 원래 이 문은 안 열리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모양이다. 문은 단순히. 쿵. 이걸로 끝이었다. 흔들리기는 하되, 열리지는 않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하나. 나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떠올렸다. 그렇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럴 경우에는. 질질.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옆의 교실로 들어가서, 의자 하나를 꺼내왔다. 역시 옛날 건물이라 그런지 의자도 옛날 거다. 도끼로 패서 장작으로 써야 어울릴 듯한 물건이다. 물론 지금부터 내가 이걸 장작으로 만들어야 하겠지만. "선배님. 문 열어요." 안 열면 부순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게 아니다. "안 열면, 문을 부수고 들어갈 겁니다." 직설적으로 말해야 효과가 있는 거다. 이렇게. 아무리 두렵더라도,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죽는다는 것을, 나는 독일에서 배웠다. 극한상황의 일을 여기에 적용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이제 여기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독일에서의 폭동사건의 진실을 말해줄 곳이 없다.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쾅.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안에서 '무례한 후배'라고 평가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선배도 무례하지 않았나? 그냥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입을 무조건 다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다시 한 번. 쾅.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잠시 의자를 내려놓고, 숨을 들이쉬고 내쉰 후, 다시 들이쉬고. "그럼." 의자를 들어올리려는 순간에. "너 거기서 뭐하니?" 이런. 누구 목소리인지 잘 알기에, 나는 의자를 들어올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서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역시. 가슴 크기로 보아 저 사람은 분명. "가슴만 바라보지 마 !" 이건 문희보다는 약간 크지만, 그래도 빨래판을 면하기 힘든 사람의 목소리다. 하지만 원래 남자라는 동물은, 여자의 얼굴과 가슴을 먼저 쳐다보기 마련이라고요. 이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고, 실제로 그걸 건드린다던가 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물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우선은.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사부터 하고. 그러나 두 선생님은 내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쳐다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조금 전에 들린. 쪽. 이 소리가 아니다. 까앙. 이 소리도 아니다. 쾅. 바로 이 소리다. 이 소리가 문제인 것이다. 학교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니, 당연히 두 분이 달려올 수밖에. 한 사람은 이 부를 맡은 담당 선생님이고, 또 한 사람은 원수인지 단짝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담당과 친구이니. "그건 왜 들고 있니?"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역시 이럴 때는 진실이 가장 큰 무기가 아닌가. "심령현상 연구부의 문을 부수려고요." 여태까지 감히 흑마술부에 도전하는 녀석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두 분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어떤 불량배도 선생님도, 감히 여기에 시비를 거는 미친 짓을 하는 자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왜, 왜?" 아무리 놀라도, 그건 물어보시는구나.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진실은 가장 강한 무기가 아닌가. 물론 국회나 언론이나 각국 정부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없이 주장하고 있지만. "심령현상 연구부의 부장인 월영 선배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어제 만날 약속을 하고 오늘 왔는데, 느닷없이 안 가르쳐준다고 우기면서 저를 쫓아내기에 그랬어요." 정답이기는 하다. 실제로 나는 지금 느닷없이 쫓겨났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말장난은 여동생이 쓰던 기술 같은데? 썩은 사과 옆에 있으면 멀쩡한 사과도 썩는다더니, 내가 그 꼴이 된 건가. 이왕 썩으려면 그 녀석의 돈 모으는 기술까지 습득했으면 좋으련만. 어쨌든. "..........." 두 분은 잠시 충격을 받으신 듯, 멍하니 있었다. 어쨌든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 학교의 2대 마녀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재산은 몰라도 악명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러나 두 분을 탓할 수는 없다. 원래 이런 일이 전례가 없는 거니까. 그리고. "월영아. 문 열어. 선생님 왔다." 윽. 나와 꼬마 선생님은 그대로 엎어졌다. 도대체 우리 담임, 왜 저러나. 저렇게 천하태평으로 말을 하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리고 그런 말로 그 쇠고집 부장이 문을 열.... 끼이이익. 아. 열리는구나. "후배한테 사기를 치면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거니? 내가 평소에 그러라고 했니?" "........." 우리 담임이 부장님을 야단치는 걸 보면서, 나는 어째서 저 사람이 흑마술부를 담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긴 상대의 저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견디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겠지. 하나는 그 자신도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내뿜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동생이 전자라면, 우리 담임은 분명히 후자일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의 맹한 담임께서 여동생 수준의 괴물일리는 절대 없을 테고, 평소의 행동을 보면 어느 쪽이겠는가. 그러나. '저 사람이 그런다고 자기 고집을 꺾을 것 같지가....' 않은데. 여동생이면 몰라도, 저 사람을 보통 인간이 설득한다는 건 솔직히 불가능.....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아. 12시다. 그러나 우리 담임의 설교는 끝나지 않는다. 사실 시작한지 1분도 안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런데 지금 이 시간이면 설교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마 못 가서 밖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 우글우글 와글와글 부글부글. 역시. "선생님. 아래에 이상한 소리 안 들렸어요?" "어? 문구네? 역시 명예부원. 축구부 연습으로 바쁠 텐데, 왔네." "시내야. 밥 먹자." "선생님. 출석부 떨어뜨리셨어요." 그래. 12시니까 공부도 다 했을 것이고, 자유시간이라며 우르르 부실로 몰려오는 건 이해가 간다. 어차피 방학중이니까 학교 식당이 그리 붐비지도 않을 테고, 그러니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모든 부원들이 공부만 하려고 학교에 온 건 아닐 테고, 흑마술부 나름대로의 부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 그러나. "왜 이렇게 많아?" 이 부가 이렇게 인기가 높았나? 하긴 부 활동을 '편히 쉬는 시간'으로 간주하는 요즘 학생들에게는, 담당 선생이 천하태평인 데다가 활동 자체가 편한 흑마술부가 좋은 곳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근처 불량배들이 감히 시비도 걸지 않고, 집단 따돌림의 대상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별칭이 흑마술부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도 불평하지 않는 - 부에 소속된 애들이 공부를 잘하니까 - 그런 이상적인 부이기는 하다. 그러나. "너무 많잖아." 물론 부실에 들어온 학생들의 수는 그렇게까지 천문학적인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부장의 사이를 갈라놓기에는 충분했다. 우리가 애인 관계는 아니지만, 나는 부장에게 아직 묻지 못한 게 있지 않은가. 그러나 부장은 인파에 휩쓸린 나를 바라보고,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더니. "도망가지 마라 !" 이렇게 외치고 싶다. 그러나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 내가 외친다고 해봐야 안 들린다. 여자 셋이 모이면 그릇이 깨진다는 말이 왜 나오겠는가. 하물며 여기에는 여자가 셋이 아니라 몇 십 명이 있었으니, 들릴 턱이 없다. 나는 황급하게 그녀의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문구야." 내 손을 잡는 시내. 그녀는 간절히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록 그 목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녀의 의사는 명백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미안. 가봐야겠어."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문 밖으로 달려갔다. 지금 급한 것은 시내가 아니었으므로. "부장. 기다려요. 부장." 그녀는 복도 저 멀리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걸어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학교 규칙에 구애되고 있는 건가. 그러나 나는 그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우선. '주위에 선생님이 없는지 확인하고.' 없다. 그러므로 규칙은 안 지킨다. 상당히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행동이지만, 비상수단이니 어쩔 수 없다. 그렇다. 이대로 멍하니 있으면 저 사람은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러면 나는 절대로 그 날의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니까. 그러니. "뛰자 !" 다다다다다. 나는 발소리를 최소로 죽이면서,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 반면에, 부장은 그대로 걷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부장님을 따라잡는다. 그러나 그 순간 스치는 불길한 예감. 끼이이익. 이럴 때는 멈추는 게 수다. 여동생에게 얻어맞은 다년간의 경험에 의해, 나는 마지막 한 발을 떼지 않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예상대로. "안녕하세요." 선생님 한 분, 통과. 만약 그대로 뛰었다면 나는 선생님과, 그것도 하필이면 여선생님도 아니고 남자와 충돌해버렸을 것이다. 그런 입맛이 쓴 일을 할 수는 없지. 자고로, 이런 충돌은 '여자'와 해야 하는 법 ! 그리고 선생님이 지나가자마자. "월영 선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지........는 않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부장님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여태까지 어떤 불량배도 이런 짓을 한 후에는 무사하지 못했는데,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어차피 죽을 일은 지겹게 경험해버렸다. 여기서 한 번 더 경험한들 대수랴. 선배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너, 포기라는 걸 모르는구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걸로 포기할 정도면, 독일에서 죽었을 테니까요." 내가 미쳤나 봐. 이 사람에게 이렇게 자신 있게 웃으면서 대꾸하다니. 그러나 부장은 나를 비웃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힘의 차이도 무시하고, 그냥 무대포로 돌진하는 나를 동정해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강하다. "모든 사람을 잠시동안 속일 수는 있고, 일부의 사람은 영원히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이런 말이 왜 나왔는데. 부장이 거짓으로 진실을 덮는다고 해도, 결국 누군가는 알아차릴 것이라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다. 뭐? 아닌 경우도 있다고? 그런 경우는 기록에 남지 않으니까 무시한다. 내 견문이 좁아서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하지만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목숨을 걸 수는 없잖아. 문구야." 뭐, 뭡니까. 말로 설득이 안 되니까, 협박으로 나오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나 여긴 우리만 있는 교실 복도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니는, 학교 운동장의 바로 앞이다. 아무리 방학이라고 해도. "야. 문구. 이제 건강해진 거냐." 이렇게 외치는 축구부원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니까. 그러나 그들의 혈색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새파랗게 변한다. 당연하다. 나도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나. "저 녀석, 어쩌다가 저런 마녀한테 잡혔냐. 아무래도 내일 연습에 참가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어때요? 주장." 왜 그런 말이 먼저 나오는 겁니까 ! 그것도 3학년이시면서 ! 아무리 월영 선배가 악명이 드높다고 한들, 당신들에게는 어디까지나 후배가 아닙니까 ! 하지만 후배이면서 3학년에게조차 공포를 뿌려대는 누군가를 여동생으로 둔 내가 그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럴 여유는 고사하고. "와. 문구가 드디어 흑마술부에까지 손을 뻗친다 !"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나 안 나오면 다행이다. "와. 문구가 드디어 흑마술부에까지 손을 뻗친다 !" 누, 누구냐. 이런 독창성 없는 대사를 내뱉는 녀석은. 나는 그 범인을 금새 축구부의 대열에서 찾아냈다. 그럼 그렇지. 지우 너냐. 역시 저 녀석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야. 그러나 말다툼을 할 시간이 없다. 그 동안에. "선배. 거기 서요 !" 어디로 도망가는 겁니까 ! 하지만 선배가 그 정도로 멈출 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불량스러운 대사 하나를 써먹기로 했다. 그것은. "야 ! 이 계집애야 ! 거기 서지 못해 !" 그 순간, 운동장의 모든 학생들이 움직임을 딱 멈췄다. 지금은 분명히 최고기온이 30도를 넘는, 한여름의 나날이다. 그러나 내가. "야 ! 이 계집애야 ! 거기 서지 못해 !" 이런 막된 대사를 내뱉는 순간, 그런 자연법칙은 다 무너졌다. 이유? 뻔하잖아. 설명하자면. [당신이 만약 길거리 불량배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면, 당신은 먼치킨이 아니다. 당신이 만약 레드 드래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면, 당신은 먼치킨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투명 드래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먼치킨이다] 바로 이런 거다. 지금 내가 한 짓이 바로 세 번째의 상황이었으니까. 먼치킨이나 할 대사를 내가 해버렸으니,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기온이 갑자기 급강하하고, 학생들 전원, 심지어 선생님들까지도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서고 있다. 지우 녀석이야 내 최후를 기대하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지만. 저게. '저걸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하는 걸까.' 뭐 그런 궁리는 일단 살아남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상대의 반응을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상대라는 것은 당연히 선배님이겠지만, 반응은 나보다 주위 사람들이 먼저 했다. 예를 들어. "으악 ! 문구 녀석, 이제 죽었다 !" "저 녀석,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문구야. 뼈는 내가 추려줄게. 걱정 마." "우리 모두 저 녀석의 명복을 빌자. 비록 바람둥이였지만, 그래도 좋은 녀석이었는데." 언제는 학교의 공적, 하렘 마스터라더니. 죽을 때가 되었으니까 이제 와서 칭찬입니까. 나는 그 파격적인 대우에 몸살이 날 정도로 고마웠지만, 굳이 인사를 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앞의 적(?)만 해도 힘겨운 판에, 주위에 정신을 팔 여지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럼 도와주기나 하라고요.' 물론 그런 사람은 없다. 전혀 없다. 누구나 자기 목숨이 아까운 법이니까. 갑자기 독일에서 모든 시민들이 좀비와 싸우는 나를 외면하던 게 생생하게 떠오른다. 망할 자식들. 결국 그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많지 않았으니 죄 값을 치른 셈이지만. "아, 안 돼요. 주장. 가면 죽어요." 그래도 없는 건 아니구나. 우리 축구부 주장이 나에게 달려오려다가 다른 부원들에게 잡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이 많다는 걸 느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정말로 죽음에 직면해 있었고, 지금이야 일단 '죽이진 않겠지'라는 얄팍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외에 몇 명이 나에게 뛰어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제지당한다. 아. 물론 달려오는 사람 중에 지우는 없다. 망할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지금은 그쪽이 아니라, 내 모가지 쪽을 걱정하는 게 우선이니까. 자. 이제 부장님은 어떻게 나오실까. 모든 이들이 그녀를 주시했다. 과연? 부웅. 탁. 무언가 강한 바람이 지나가는 순간, 내 손은 좌우로 교차하며 머리를 가리고 있었고 월영 선배의 오른손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뭔가가 튀어나오기에, 본능적으로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서, 선배......" 시내가 멀리서 뛰어온다. 우리들의 험악한 모습을 보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시내의 목소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볼 틈이 없었으니까. 지금 내 오른쪽 다리는 기역자로 굽혀진 채 상대의 왼발을 막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 선배 ! "역시 강하네. 하루 이틀 단련해서 나올 솜씨가 아냐. 이래서 살아남은 건가....."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질문을 위해 찾아온 후배를 내쫓더니, 이번에는 살기까지 서린 구타입니까. 그러나 여동생의 폭력에 단련된 내 몸이 그렇게 쉽게 맞아줄 리가 없다. 비록 이번에는 맞을 뻔했지만. 그리고 그런 우리의 사이로. "도대체 뭘 하시는 거예요 ! 선배 !" 시내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끼어 들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나도 부장님도 그녀의 행동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주위의 놀란 눈조차, 우리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들이 뭐라고 감탄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단지 서로의 반응을 주시할 뿐. 한 순간에. "하지만 이건 어떨까?" 슈웅.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굽혔다. 내가 막을 수 있는 일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풍압을 일으키는 주먹이라면 내 팔로 막았다가는 골절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피하기만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나는 거의 땅에 닿을 듯이 머리를 땅바닥에 접근시키면서, 그 반동으로 왼쪽 다리를 차올렸다. 두 팔만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부웅.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그리고 생각하기도 전에, 내 오른발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그녀는 피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와 나의 거리는 어느 정도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나는. 타탁. 몸을 옆으로 굴리며 일어섰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동작을 정말 내가 한 거냐. 이건 여동생이 나를 팰 때 사용한 동작 같은데. 처음에 이걸로 맞을 때는. "야 ! 너 허리가 무슨 용수철이냐 ! 고무냐 ! 이게 뭐야 !" 이랬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걸 내가 해냈단 말야? 물론 그 녀석은 발차기를 한 후에 손으로 땅을 짚었지만, 나는 발차기를 하기 전에 땅을 짚었다. 난 여동생처럼 고무 허리가 아니니까. 그 덕에 상대가 피해버릴 정도의 시간을 준 건지도 모른다. 여동생은 보기 좋게 내 턱을 맞췄는데. 그것도 2발 연속으로. 하지만 이것은 쾌거였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감히 흑마술부 부장에게 공격을 했고, 그녀가 그걸 '피하게' 했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어? 저 녀석 강하잖아?" "여동생한테 헤롱헤롱하는 녀석일 줄 알았는데." 그것까진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 다음의 말은. "말도 안 돼. 이건 불공평해. 왜 저 녀석만 저렇게 복이 많은 거야?" "으. 여자도 재능도 모조리 자기 것이라니, 이건 말도 안 돼." 뭐야. 대체. 왜 내가 여동생이나 들을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힘으로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솔직히 나 자신도 조금 당황하기는 했다. 이런 경우가 나한테 있었나? '없었어.' 여동생이 내 옆에 있을 때는 말이다. 뭐 그건 그거고, 지금 당장은 축구부 부원들의 턱이 빠질 듯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아무 행동도 해 줄 수 없었다. 나 자신만 챙기기도 바쁘니까 말이다. 지우 녀석의 경우는..... 안 봐. 안 봐. 그리고 시내는. "괴, 굉장해. 문구." 너,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포즈 취하지 마. 누가 보면 네가 내 애인인 줄 알겠다. 하지만 월영 선배 같은 강적을 눈앞에 두고서, 방심하면 죽는다. 그래서 나는 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면서도, 나머지 한 눈으로는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반격을 가해올까.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무례한 후배에게.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오히려. "음......." 뭐, 뭐야. 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거야? 원래 흑마술부 부장이라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하다. 왜 주먹질을 시작해놓고, 마무리가 이렇게 초라한 거야? 그러나 내가 그 기회를 노려서, 먼저 돌격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선배에 대한 예우? 나이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 그런 게 아니고. '들어가면 난 죽어.' 빈틈이 있어야 때리든지 걷어차든지 할 게 아닌가. 실제로 내가 여동생에게 맞을 때, 무모하게도 반격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니, 아주 많았다. 거의 대부분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 경우에 나는. 퍽. "아구구구구." 이런 결과를 초래했었다. 그래서 상대의 허점이 언제 드러나는지, 살피는 눈이 발달해버렸다. 여동생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쓸데없이 돌격하면 안 되는 때를 살펴야, 나도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내가 직업적인 무술가도 아닌데, 왜 이런 눈을 가지게 된 거야.' 사실 여동생과 대전, 아니 일방적인 구타를 당할 때는 그런 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말 그대로 장식용, 있으나 마나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지금은 도움이 되네.' 그 녀석의 폭행에 감사해야 하나. 아니면 증오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감정이 모조리 날아가 버리는 상황이 발생해버렸으니, 월영 선배는 나를 상당히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면서, 작은 소리로. "너, 마법사야?" "!$^*!#&$%*~^!" 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른 것은, 그녀가 내 귓가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기 때문이 아니다. 옆에서 나와 월영 선배를 바라보던 시내가 비명을 지른 탓도 아니다. 하물며 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던 축구부 선배들이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쓰러진 탓도 아니다. 당연하지만 지우 녀석이. "문구 녀석이 흑마술부 부장까지 꿀꺽했다 !" 이렇게 외치며 달려간 탓도 아니다. 물론 그 녀석은 헛소리의 대가로. "무슨 소리야 ! 문구가 그럴 리가 없잖아 !" 시내한테 맞아서...... 갔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런 문제로 인한 게 아니었다. 놀란 이유는. '내가 무슨 마법사야.'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억울한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무슨 수상한 주문을 옹알옹알 외우면서 싸웠다면, 그런 착각도 말이 된다. 내가 회색의 고깔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빛이 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고작해야 몸을 눕히면서 2단 차기를 한 것뿐이다. 이게 마법사에게 적합한 행동이겠는가. 이건 차라리 격투가라는 말을 들어야 마땅하다. 만약 마법사라면. "Firewall(불의 벽)." 이렇게 외치면서 불로 사방을 에워싸야 마법사가 아닌가. 하지만 난 그런 거 없다. 쓸 줄도 모르며, 주문도 모른다. 위장이나 조작이 아니다. 실례로 내가 만약 마법사였다면, 독일에서 좀비들을 만났을 때. "받아라 ! 정의의 화염장 !" 아. 이건 무술가들이 할 소리인가? 어쨌든 이런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내 모가지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걸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좀비들과의 싸움에서 엄청나게 고전을 해야 했으며, 까딱 했으면. "먹이 주제에." 이런 여자에게 먹힐 뻔했다. 그것도 남녀가 벌거벗고........ -삐-를 하는 게 아닌, 심히 잔혹한 의미의 '먹다'로 말이다. 만약에 월하소녀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나는 꼼짝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마법사라면 마땅히 그런 사람에게 붙여줘야 마땅한 호칭이 아닌가. 그러나 부장은. '솔직히 마법사라면 자기 이야기 아냐?' 그런데 왜 내가 부장하고 똑같이, 악마에게 혼을 판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거야? 참고로 마법사라는 건 원래 악마와 계약을 하여, 자기 혼을 팔아 넘기는 대가로 여러 가지 힘을 손에 넣은 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악마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는 별로 자랑할만한 직종이 못되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런? 난 그냥 축구선수로 좋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데 가서 해야겠네. 따라와."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내 귀에서 떼었다. 그런데 가만. 굳이 지우 녀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이 광경은 모든 이에게 충격적으로 비춰졌을 게 분명하다. 만약 내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 "문구가 흑마술부 부장하고 애인 사이가 되었다 !" 이런 소문이 더욱 번져나갈 게 확실했다. 서, 설마. 이걸 노리고 이런 행동을? 귀찮은 나를 떼어버리기에, 이 이상 좋은 방법이 또 있겠는가. 나는 잠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악평을 각오하고 그녀의 뒤를 쫓느냐. 그게 아니면 진실을 포기함으로서 헛소문을 막을 것이냐. 꿀꺽. 나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쿵쿵. 쿵쿵.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을 위해 헛소문을 각오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가. 그런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 시내였다. 진희가 나타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매정했다. 뭐 원래 그런 것이지만.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문구야. 위험해. 따라가면 안 돼."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또한 그게 매우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도. 순간적으로 내가 만났던, 죽음 직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피. 잔혹. 죽음. 시체.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 그 속에서 헤메던 그 날의 악몽이, 나를 다시금 짓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된다. 만약 내가 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마무리를 짓는다면. "카아악." 언젠가 그 일이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아무 것도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일이 끝났다는 보증이 없는 이상,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이상, 나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시내의 눈빛은 완강했다. 내가 지나가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그녀에게 가득했다. 어떻게 하나. 그러나 돌파구는. "Ah? Mr. Moon gu?" 느닷없는 영어. 그 말에 순간적으로 시내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시내가 잽싸게 다리를 걸고..... 쿵. 나는 엎어졌다. 여동생이 비웃듯이 나를 쳐다본다. 못된 녀석. 등교하는데 다리는 왜 걸고 야단이야. 그러나 그녀는 전혀 죄책감도 없이. "오빠. 세계 무대에 나가면, 뒤에서 태클을 넣는 건 예사라고. 심판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도, 조금만 심판의 눈을 피할 틈이 생기면 주먹질, 발길질이 예사로 벌어지는 게 축구장이야. 옷 잡아당기기는 흔한 거고, 박치기도 흔해. 그러니까 뒤에도 눈을 달고 있으라고." "야 ! 난이도가 너무 높잖아 !" 부웅. 내 몸이 순간적으로, 시내의 다리를 피해 하늘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여동생의 악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그 녀석이 워낙 등교시에, 하교시에 너무 많이 기습을 걸어오는 판에, 내 몸은 그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미 채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탁. 두두두두. 나는 번개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를 미스터 문구라고 부른 사람을 향해서. 그리고. "어? 미, 미스터 문구 !" 클라라의 가냘픈 손목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일을 겪은 또 한 사람의 당사자이자, 나보다 훨씬 이 일의 비밀에 대해 알아야 할 사람이니까. 나는 그냥 잊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클라라는 달랐다.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모조리 죽어버린 그녀야말로, 진실을 물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클라라. 시간 낼 수 있어?" "네? 네." "그럼 날 따라와." "?" 그녀는 왜 내가 그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순전히 나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내 뒤에서는 좀비보다 무서운. "문구야 ! 거기 서 !" 시내가 쫓아오기 시작했지만. 시내의 앞에는 나와 클라라, 그리고 우리의 앞에는 부장님. 이렇게 이루어진 4명의 대열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모든 학생들의 눈앞에서. 내일쯤이면. '더 시끄러워지겠군.' 그래도 부장하고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선배. 거기 서요 !" 나는 클라라를 데리고,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리가 왜 이렇게 빠르냐. 마치 여동생 같은 이 엄청난 속도는....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쨌든 우리의 뒤에는. "거기 서 !" 저런 여자가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모든 이가 부장님이나 나나 시내처럼 체력이 튼튼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하아. 하아. 너무 빨라요." 클라라의 경우가 문제였다. 그녀가 나처럼 100m 기록이 11초일 리는 없으니, 그녀는 금새 지치고 말았다. 하긴 독일에서도 그랬지. 그런데 여태까지 200m도 달리지 않았는데, 벌써 지쳐버리면 어떻게..... "조, 조금만 쉬었다 가요. 뒤에 시체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에? 그렇게 힘든 거야? 그러나 나는 그녀의 핏기를 잃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여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 앞에 나타나서. "오빠. 너무 느려 !" 이렇게 폭력을 휘둘러대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만약 느리게 달리면 나는 부장의 꼬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시야에서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그녀가 골목길로 들어가는.... "미안."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클라라를 안아 올렸다. 그러니까 왼팔로 그녀의 다리를 잡고,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잡은 거다. 보통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뒤에서 철판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그리 건전한 자세는 아닌 것 같다. 오죽했으면 클라라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돌아왔겠는가. 뭐 일단은. "조금만 참아." 나는 클라라를 안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부장이 어디론가 사라지기 전에, 저 골목길로 들어가야 한다. 좌측으로 돌아가자, 부장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다. 어? 그녀가 설마 길을 잘못 알았나? 나는 그런 행운이 나에게 온 것을 감사하며, 그 앞에 멈춰 섰다. 벽을 돌린 채 우리를 바라보는 그녀. 일단 클라라를 내려놓고. "자. 이제 말해주는 게 어때요? 월영 선배." 영문을 모르는 클라라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미안했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다만 그녀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배가 그 일을 말해주겠다고 하면,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봐야..... [[Isolated world]] 갑자기 천지가 뒤집혔다. "이, 이건?" 나는 주위의 상황이 이상함을 느꼈다. 클라라의 움직임이 멈췄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석상처럼 굳어진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나도 부장도 보여지지 않는다. 이건 혹시. "시내는?" 그녀의 모습이 뒤에 보였지만, 골목길로 뛰어들어온 그녀 역시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연극이 아니었다. 그녀의 두 발은 완전히 허공에 떠 있었으니까. 이, 이것은. 그때 월하소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현상인데. 설마 그녀가.... "Isolated world. 고립된 세계라는 의미야. 시공마법 레벨 8의, 결계마법이지. 바깥과 안의 시공간의 왕래를 차단하는." 역시. 그녀가 마법을 건 것이었다. 설령 이것이 시내와 합심해서 꾸민 연극일지는 몰라도, 이 현상만큼은 결코 일상의 것이 아니었다. 시내가 만약 정말로 마법을 배웠다면, 공중에 떠 있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공기의 흐름이 멈췄다. 적어도 이 골목에서 바깥으로 나가거나, 그 반대로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는 그저 이곳에 고립된 채, 제자리에서 움찔거리고 있을 뿐. 그나마 작게 부는 바람은, 나와 선배가 움직이면서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잠깐. "왜 시내까지 정지시킨 거지요?" 저 애는 자기편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하지만 부장님은 역시 부장님. 피로 개울을 이루고도 모자라서, 댐을 파고 호수를 만드는 인간다웠다. "난 너하고만 이야기할 셈이니까." 자기편에게도 가차없이 마법을 걸어버리는 겁니까. 좀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런 인간을 내가 몇 년이나 상대했었나. 그래서인지. '그렇군.' 이런 걸 납득하면 안 되는데..... 그리고 내가 납득하든 말든, 그녀의 말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애는 아직 본격적으로 마법사가 된 게 아냐. 주문만 달달 외는 마법사라면 금방 될 수 있지만, 그건 사도의 길이고, 정통으로 가려면 시간이 걸려. 인간에게 그런 걸 권유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일단은 심신 단련부터 시키고 있어." 그런데 잠깐. 그 말에는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는데? 뭐 저 사람은 원래 인간 같지 않았지만........... "잠깐 !" 그럼 이 인간은 진짜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나는 갑자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사람을 나는 과거에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건.... "오빠." 그렇다. 내 주위에서, 가장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라면, 단연코 여동생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그 나이에 다국적 기업의 회장이 되었단 말이냐. 게다가 집안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나보다 더) 잘하고, 심지어는 UFO슛까지 ! 이게 인간이냐. 그래. 확실히 그 녀석이라면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가만.' 그러나 나는 곧, 그 추론을 부정했다. 이유? 생각해 보자. 그 월하소녀와 한 번 포옹을 해서 잘 아는데, 아무리 봐도 가슴 사이즈부터가 달랐다. 키도, 몸매도, 특히 전반적인 분위기가 여동생과는 전혀 틀렸다. 여동생이 고무공처럼 튀는 말괄량이라면, 그녀는 말괄량이이긴 하되, 마치 찰기가 사라진 단단한 바위 같은.... '적합한 비유가 아니었나?' 어쨌든 뭔가가 전혀 달랐다. 상당히 미묘한 부분이지만, 뭐랄까. 포옹했을 때의 느낌의 차이라고 할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따스함? 말투? 그것이 아니라면.... "아 !" 그랬다. 전반적으로 사이즈가 틀리다 보니, 포옹할 때에 가슴이 위치하는 부분이 달랐던 것이다. 여동생과는 아무래도 키가 차이가 난 덕분에, 미묘한 부분에서 나온 곳과 들어간 곳이 차이가 났고, 특히 그녀는 나보다 키가 컸던 덕분에..... "아냐 !" 아무리 그 녀석이 괴물 같다고 한들, 그래도 그 녀석은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그 녀석이 괴물이나 우주인이라고 한다면 굳이 선배가 나에게. "너, 마법사니?" 이런 식으로 물어볼 이유가 없다. 그냥 우주인이라고 단정하고 이야기를 꺼내던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지금부터 중대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잘 들어. 네 여동생은 사실 네 여동생이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선배는 여동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가장 수상쩍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동생의 직위를 모를 리도 없는데..... "미인이에 대해선, 벌써 조사해봤어." 덜컥. "역시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 된 10대 소녀니까, 조사할 이유는 충분했거든. 그리고 그 애는 다른 곳도 아닌 미국에서, 백인남성이 아니면서도 그런 대기업의 요직을 차지한 데다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경영능력과 주식투자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 거기에 너도 알다시피,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이고." 덜컥. 덜컥. "그 정도라면 뭔가 뒤에 있다고 생각할 만 하거든. 그래서 그 애가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 뒷조사를 해봤어.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덜컥. 덜컥. 덜컥.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제 내 심장은 마치 폭죽처럼,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여기서 더 긴장감이 높아진다면 나는.... "그 애에 대한 결론은 아직 미정. 이라는 거야." 갑자기 내 기운이 좍 빠져 버렸다. 아니, 그게 뭔가. 의심을 해서 뒷조사를 했다면 결론이 나와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뭔가. 그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결과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도 모르게. "그게 무슨...." 결론이냐고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이상, 함부로 떠들면 모가지가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내 옆에 굳어진 클라라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얼마 전에 이런 마법사들과 만난 적이 있는 나로서는, 함부로 행동해서 그녀와 적이 될 경우, 싸워 이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탄약통을 다 터뜨려도 꿈쩍 않는 괴물들이, 과연 나 정도의 인간이 맨몸으로 덤빈다고 쓰러져 주겠는가. 오히려. "개골개골 개구리. 노래를 한다." 내가 이렇게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아니, 월등히. 그래서 나는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디. 도대체 무슨 말씀을 더 하시려는 건가요. 말 좀 들어봅시다. "만약 그 애가 네가 '월하소녀'라고 부르는 그 마법사라면, 안 맞는 게 너무 많아. 내가 전에 그녀를 만났을 때, 난 그녀의 몸을 분명히 확인했었어. 마법으로 가리고 있다고 해도, 실제의 몸을 완벽히 숨기는 건 어려우니까. 하지만 사이즈도 좀 틀린 데다가....." 데다가? "적어도 그때, 네 여동생은 분명히 자기 방에 있었어. 내 옆이 아니라." 갑자기 나오는 한숨.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옆에 정체 모를 괴물이 도사리고 있지 않다는 데 대한 안도의 한숨일까. 그게 아니라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보다 앞서나가는 애를 여동생으로 둔 데 대한 고통의 한숨일까. 부장님은. "물론 그게 마법에 의한 위장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 만약 그 애가 정말로 '월하소녀'라면, 왜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을까?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냐. 그 정도의 마법사라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누가 그 정도의 마법사의 가족들에게 손을 댈 수 있겠어?" 가만. 그렇다면. "그 마법사가 그렇게 강한가요?" 부장님은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이 있나. 하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화를 누그러뜨린다. 아예 맹추에게 강의하는 셈치고, 설명해주기로 했나 보다. "적어도 네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는, 가장 강할 거야." "아. 그렇군요." 나는 자기도 모르게 동조하다가, 말을 멈춰 버렸다. 그 말이 지닌 무게가 나를 뒤늦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주 제일의 마법사라고?' 물론 그 여자가 좀 강력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법사 하나를 상대로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데, 어째서 부장님은 그런 과찬을 늘어놓는 걸까. 내가 직접 본 월하소녀는 그렇게까지 강해 보이지 않았는데..... "네가 몰라서 그래. 그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생명체는, 적어도 이 우주에는 없어. 아마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지구 정복쯤은 1분 이내로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아니, 이미 그녀는 지구의 여왕이나 마찬가지야. 지구에서 그 여자와 대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이봐요. 그건 혹시 부장님까지 포함한 건가요? 솔직히 월영 선배도 이 지구에서 사는 지구인의 일부.... "나는 논외. 내가 지닌 마법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니까." 나는 잠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의 두서를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여동생, 즉 미인이는 뭐라는 겁니까. 그게 답이 안 나오니 나로서도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만약 그 애가 외계인이나 지구인이나,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답이 나왔다면 차라리 현실을 받아들이든지, 부정하든지 할 텐데, 이건 둘 다 아니니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건가. 결국. "그래서, 결국 답은 뭐라는 건가요." 입시를 치를 운명의, 대한민국 고교생은 결국 이렇게 명확한 답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건 여동생의 정체가 달린 문제이니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부장은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서 있다가. "게다가, 그 애에게는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만약 그녀가 수준급의 마법사라면, 그 애의 기억에는 마법에 대한 것도 들어있을 거야. 하지만 그 애에겐 그런 게 없어. 너도 마찬가지고. 너에게 있는 건 그 '월하소녀'에 대한 기억 정도이고....." "?" 갑자기 부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놀라고 어쩌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들이댄다. 이, 이건 또 뭐 하는 짓입니까 ! 나는 자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다가드는 걸 피하려 했지만. "가만히 좀 있어. 조금만." 나는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선배는 그냥 나를 우격다짐으로 끌어안아 버렸다. 내 몸이 버둥거리다가, 차차 조용해진다. 뭐? 연상의 여인과의 포옹을 즐기는 거냐고? 아냐 ! 선배의 팔 힘이 너무 세서 그런 거야 ! 무슨 이런 무지막지한..... "음." 그리고 잠시 있다가, 서서히 뒤로 물러서는 그녀. 그런데 그 웃음은 왜 짓는 겁니까. "너, 그녀를 좋아하는구나?" 쿵. 오늘 들은 소리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소리였다. 그에 비하면 여동생이 진짜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차라리 농담 수준이었다. 내가 왜, 그 월하소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왜. "하지만 넌 이미 오래 전에 그녀와 만났던데? 1년 전이던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서 꿈에서까지 그녀를 그리워할 정도라니." "농담하지 마세요 !" 내가 지금 월하소녀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려고 온 거지, 내 애정 문제로 상담하러 온 줄 아시나 ! 게다가 내가 언제 그녀하고 그렇게 자주..... 터무니없는 누명이다 ! 버럭 화를 내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짓는 그녀. "그래. 뭐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그 마법사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건 네 개인감정 문제이기도 하고. 앞으로 네가 누구를 선택할지, 정말 기대되는 걸. 호호호." "카아악 !" 좀비와는 다른, 인간의 순수한 분노를 담아 나는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내 애정문제에, 왜 관계도 없는 선배가 간섭을 하는 겁니까 ! 내 애인도 아니면서 ! 만약 클라라나 시내가 그걸 물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어쨌든 결론은...." 잠시 웃고 나서야, 선배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람, 도대체 이렇게 이야기를 질질 끌면 어떻게 하려는 거야.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지도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지만. "........" 전지가 다 된 건가. 내 시계는 멈춰있었다.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했지만. "여기선 전화가 안 돼. 이야기 끝나면 걸도록 해." 참 교훈적인 말씀이십니다. 선배님. 내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선배는 다시 입을 연다. 아. 내 입과 마주친 상태에서 입을 연 건 아니고 ! "만약 네 여동생이 마법사라면, 아마 그 애는 네 진짜 여동생이 아닐 거야. 적어도 내가 본 그 '월하소녀'의 힘은, 100년 정도밖에 못 사는 인간이 수련으로 익힐 수 있는 정도로 약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겉으로 증거를 전혀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자기수양이라니, 인간이 그 정도로 강해질 수는 없어." 잠깐. 그 녀석이 내 친동생이 아니라고? 나는 그 순간, 아주 불길한 가정을 생각해내고 덜덜 떨었다. 만약 그 녀석이 정말로 나와 아무 혈연 관계가 없을 경우, 나는 여동생을 잃는 대신에. "...........!" 아주 무서운 '마누라'를 강제로 얻어야 하는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물론 그 녀석의 남자취향을 내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인간이라면 남자를 말 그대로 골라서 가질 수 있을 것이니 그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매일매일 패고 싶은 샌드백을 남편이란 이름으로 선택한다면..... 아악. 안 돼 !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물론, 그 애는 단순히 천재소녀일 뿐일 수도 있어. 어쨌든 내가 월하소녀에 대해 아는 건 여기까지. 그 이상은 들어볼 필요도 없을 테고. 다만 내가 가장 의심하는 사람이 네 여동생인 것만은 맞아." "..........좋은 말씀이시군요." 말속에 가시를 왕창 넣은 걸 알았는지, 선배도 멋쩍은 듯 웃는다. 그러나 그 뒤의 마무리는, 나를 지옥 밑바닥으로 처넣고 말았다. "하지만 아마 네 여동생은 '월하소녀'는 아닐 거야. 위장이라고 하기에는 오빠 사랑이 너무 대단하던데. 만약 그 애가 정말 월하소녀라면, 굳이 결혼도 하기 어려운 '여동생'으로 위장할 턱이 없잖아?" "아아악 !"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자. 그럼 결계를 풀 테니까, 그만 진정해."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는 악마 같은, 아니 악마 그 자체인 선배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진정할 때까지 선배가 기다려준 탓이기도 하지만. 나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려다가. "?" 이상했다. 내 몸에는 전혀 흙이 묻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이건 땅이라고 하기보다는 마치 대리석 같은.... 어떻게 된 거지? 선배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결계마법의 특징 중 하나야. 이 안에서는 너하고 나만 움직이고, 나머지는 정지되어 있어서 그런 거야." 잠깐. 그럼 움직이는 것은 우리 둘뿐? 그럼 공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나 선배의 미소를 보고, 물어볼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보나마나 무슨 마법을 썼겠지. 그런데. "잠깐 ! 아직 질문이 안 끝났어요 !" 곰곰 생각해보면 나오는 이야기지만, 왜 그녀는 쓸데없이 여동생에 대한 소리만 늘어놓았는가. 혹시 말 돌리기가 아닌가. 사실 여동생이 월하소녀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건, 지금 내가 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여동생은 수상쩍은 인물 1위이고, 사실 여부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뭘 어쩌겠는가. 게다가. "아직도 할 말이 있어? 질문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능글맞게 웃지 마요 !" 그렇다. 내가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은 월하소녀의 정체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싸운 상대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선배가 '적'이라고 부르는 상대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독일 남부의 한적한 호숫가의 도시에 좀비들을 만들어냈는가.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녀석들이 만약 다시 나타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렇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멍하니 있다가 좀비의 기습을 당하는 것만은 사양한다. 매일 보는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나 그렇게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 날 꿈속에서 본 월하소녀의 모습이 나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품속에서만 안주해도 되는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최소한 적의 정체에 대해서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알아야 도망가든지, 싸우든지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선배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넌 힘이 없으니까." 쿵. 잔혹한 현실을 지적하시는군요. 선배. 그렇다. 나는 힘이 없다. 지난번의 경험으로 보아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죽고 싶지는 않다. 안 그래도 느릿느릿한 정부만 믿고 기다릴 수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 나 자신의 몸만은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진희를, 클라라를, 부모님을, 문희를, 그리고 그 못된 미인이 녀석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미 그녀가 '월하소녀'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만약 그 녀석이 정말로 그녀라면. '왜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했겠어.' 월하소녀가 나를 데리고 하늘을 날 때, 그녀는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내 여동생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거다. 아무리 위험하니 어쩌니 해도, 어떻게 오라버니한테 한 마디도 안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넌 아무 것도 못한다는 거야." 느닷없는 부장님의 일격. "넌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만약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듣게 되면, 넌 꼼짝없이 이 일에 얽히게 돼. 그럼 너도 위험에 휘말리게 되는 거야. 아니, 너만이 아니라 네 가족까지 모조리. 물론 진희나 문희나 클라라 슈만양도 마찬가지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알고 싶어?" 왜 내 부모님과 미인이까지 얽혀 들어가는 겁니까? "만약 네가 관계자가 되면, 당연히 넌 이 일에 대해 전부 알게 되는 거야. 그러면 정보를 캐내려고 발악하는 '적'들이, 널 과연 가만히 둘 것 같아? 그럼 넌 끝장이야. 내가 잠시라도 눈을 떼는 순간, 너는 그들에게 잡혀가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될 거야. 가령 예를 들어....." "예를 들어?" "네가 좋아하는 여자들의 목을 차례로 잘라내는 식으로. 특히 미인이." "그럴 리가 없어요 !" 왜 내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여동생이 밉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물론 그 녀석이 골탕먹기를 바라긴 해도, 최소한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다'는 조건 안에서다. 그 녀석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내가 왜. 하지만 선배는 마치 눈앞에서 바라보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말한다. "아니. 넌 분명히 그렇게 할거야." "그럴 리가 없어요 !" 나는 부르짖었다. 하지만 부장은 믿어주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진실을 가르쳐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애원하더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나에게서 사실을 듣기만 하고, 끝내 도망쳐버린 조금 전의 일을 다시금 반복할 셈인가. 그러나 월영 선배는. "넌 지난번에도 그랬으니까." ".......네?" 바람이 불 리 없는 고립된 공간인데도, 주위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선배의 마법에 의한 것인가. 아니다. 내 마음에 직접 불어오는 거다. 그녀의 말 뒤에 숨은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난번에도 그랬다고? 내가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 "기억나? 네가 진희에게 고백하려고 했다가 그 애가 수도관을 타고 달아나는 바람에, 완전히 망가졌던 그 날의 일을." 그 날? 혹시....... 나에게 불쾌한 감정이 다시금 휘몰아쳤다. 그 날. 잊혀지지도 않는 그 날. 나는 그때, 진희를 잡지 못했고, 시내와 키스했다는 오해를 받았으며, 마지막에는 여동생의 무릎을 베고 누웠었지. 하지만.... 진희가 계속 나를 피하고 있다는 지금의 현실이 맞물리자, 내 마음은 다시 울적해졌다. 그 날의 악몽이 다시금 기억나는 듯 하다. 심장이 얼어붙는다. 당장이라도 얼어죽을 듯한 느낌이 내 전신을 사방에서 덮친다. 밀려오는 추위. "넌 그때 시내와 키스할 이유가 없었어. 넌 그 당시에는 시내의 감정을 몰랐었으니까. 하지만 넌 스스로의 의지로 시내와 키스했어. 이렇게 사진도 남아 있고. 왜 그랬을까?" 그야 당연히 선배의 사악한 사진 조작술..... "아니. 네 자신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네 의지였어. 하지만 그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게 너야. 그럼 왜 네가 그런 행동을 했을까? 내가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는 시내에게 다시 그 마법의 깃털을 꽂아 넣으려고 하고 있었어. 나는 시내를 책임지기로 하고 그걸 막았지. 그때 그녀가 말해주었어. 모든 전말을."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달 아래에 서 있었던, 환상의 마법소녀. 그럼 그녀가 시내에게 그런 마법을 걸었던 장본인이라는 건가. 잠깐. 그럼 그녀가 내 추한 꼴을 다 봤단 말인가? 갑자기 부끄러움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이, 이런 망신이. 하지만 더 끔찍한 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차없이, 나에게 낫을 내리치는 선배. 그리고. "넌 그때, 시내에게 조종당했었어. 마법으로." 그럴 수가. 그럼 그 모든 것이 진실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시내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가,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날 속였단 말인가. 그러나 더 심한, 더 끔찍한 사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하지만 시내 역시, 다른 자에게 조종당하고 있었어. 아마 그 애는, 자기가 가진 마법의 힘을 너에게도 나눠주려고 그런 일을 한 것 같아. 하지만 그 길은 결국 죽음의 길이었고, 그 애는 그걸 알면서도,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짓을 해버렸어. 널 조종해서 자신과 맺어지게 하고, 동시에 널 흑마술사로 만들어버리려고 한 거야." 그럴 수가. "여기서 문제는, 그 애가 널 과거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며, 미래에도 사랑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그 애는 널 정말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네가 과연 녀석들의 마법에 견딜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무너졌었는데? 만약 미인이가 네 모습을 보고, 오빠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해서 마구 패지 않았으면 너도 끔찍한 결과를 맞았을 거야. 저 콘스탄츠에서 네가 보았던, 바로 그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서." 어째서. 단지 흑마술사가 되는 것만으로 그렇게 된단 말인가. 선배는 계속해서 나에게 낫을 휘둘렀다.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녀석들은 처음에 보통 사람에게 힘을 주겠다며 접근하지. 그래서 희생자는 마법사가 되어, 기뻐하고, 그 힘을 휘두르게 되지.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해. 사람의 혼을 제물로 하여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결국 희생자는 스스로의 혼이 부서져감에 따라,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니게 돼. 그게 바로 좀비지. 좀비가 되기 싫으면, 다른 이의 혼을 강제로 흡수해서 마법을 부릴 힘을 얻어내는 방법밖에 없어. 그런 길을 택한 게, 바로 콘스탄츠에서 네가 목격했던 '식인소녀'라는 마법사의 정체야." 그 끔찍한 사건은, 그래서 일어난 것인가. 나는 그제야 진실을 알았지만, 그것은 너무 가혹했다. 그리고 선배의 낫이, 내 심장에 정통으로 꽂혔다. 피조차 흐르지 않는데도. "너도 마찬가지야. 너 역시 만약 적들에게 사로잡히면 그 다음에는 너 스스로 죽음의 길을 열어가겠지. 네가 전에 만났던 그 식인 마법사처럼. 좀비가 되었던 클라라 슈만양처럼. 웃으면서 네 여동생의 심장을 베어내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마시며 환희에 젖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 거야. 이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찰 때까지." "아니야 !" 하지만 선배는 내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았을 때, 시내도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그게 현실이야. 결국 그 애는 그녀 자신을 파멸로 이끈 자의 손으로 시체가 되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다가 살아났어. 그녀 자신의 신체를 구속한, 네가 월하소녀라고 부르는 대마법사의 손에 의해. 하지만 그 대가로 그 애는 너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 잊고 만 거야. 다행히 넌 그런 길로 가기 전에 살아났지만, 행운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아." "아니야 !" "이젠 시내는 절대로 다른 길을 걷지 못해. 미래의 꿈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어. 죽든 살든 나하고 같이, 피를 피로 씻는 전쟁을 치러야 해. 그녀 자신이 살기 위해서도. 그 애는 이미 적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몸,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젠 외칠 기운도 없었다. 그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짓밟혔으니까. "미주 역시 마찬가지야. 넌 잘 모르지만, 그 애는 시내의 선배로서, 친한 사이였지. 하지만 그런 그 애가, 자신을 따르던 시내를 시체로 만들고 그것을 무기로서 던져버렸어. 그녀 자신이 그렇게 냉혹했을까? 아냐. 그 애도 결국 희생된 거야. 자신의 의지가 '적'에게 변형되어서. 결국 미주는 서울시 전체를 파괴하려다가, '월하소녀'에게 죽고 말았어. 비참하게.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난 그 모습을 눈앞에서 봤어. 내가 그렇게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내 권유를 거절하고." 인간은 진실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고 하던가. 그걸 나는 실감하고 있었다. 그 평온한 일상의 뒤에, 그런 일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그럼 나는. "캬캬캬캬캬." 바로 그 식인소녀와 같은 자가 될 뻔했다는 건가. 간발의 차이로 죽다 살아난 것이고. 단지 우연히, 여동생이 질투심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진희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너무 빨리 갔다고 화를 내며 날 때린 것 때문에 살게 된 것인가. 다리에 힘이 빠진다. 바닥에 주저앉는다. 흙먼지조차 일어나지 않는, 그런 매끄러운 바닥에. "........."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제는 외칠 기운도 떨어진 나에게, 선배는 마지막으로 일격을 가했다. 확인사살. "너는 너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와 '월하소녀' 뒤에 숨어서 기다리는 것 뿐이야.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녀는 서서히 나에게 손을 뻗었다. 주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녀의 주먹이 나에게 정통으로 날아왔다. 맥이 빠져 있던 나는, 그 주먹을 피할 수 없었다. 퍽. 그리고 세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구구구구." 나는 머리를 감싸고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클라라와 시내가 있었다. 그러나 부장님은. "다시는 그런 거 묻지 마. 알겠지?" 그녀의 표정은 장난스러웠지만, 그 뒤에는 한없는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다시는 그걸 묻지 마라. 그건 그녀의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멱살이라도 잡고. "야 ! 이 나쁜 년아 ! 그런 소리 취소해 ! 그리고 말해 ! 녀석들은 대체 누구야 ! 어디서 온 거야 ! 그리고 지구에서 뭘 하려는 거야 !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해 !" 이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배의 말을 모두 옳았으며 실질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실제로 내가 지금 마법사가 된다 한들, 그 월하소녀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늘을 메우는 번갯불, 바로 옆에 나란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몸놀림, 그리고 그 절대적인 위력의 마법. '사람이 아냐.' 그 모습을 지켜본 나로서는, 선배의. "너는 너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와 '월하소녀' 뒤에 숨어서 기다리는 것 뿐이야.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그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괴물들의 싸움에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뒤로 물러서기 싫었다. 이대로라면 여동생이 앞에 나서서 싸울 때, 나는 뒷전에서 멍하니 앉아 기다리기만 할 뿐, 진실은 모조리 어둠 속으로 묻혀버릴 것이므로. 설령 이 일이 모두 마무리된다고 해도, 선배나 여동생이 나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겠는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터인데. 아니, 잠깐. '이건 아냐.' 뭔가가 틀렸다. 나도 모르게, 여동생을 월하소녀로 단정짓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부장의 언급이 원인일까. 물론 그녀가 여동생에 대해 언급한 것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었다.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나에게는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그 녀석은 평범한 여고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아냐. 절대 아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내 여동생이 정말로 부장의 의심대로 월하소녀라면, 그녀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여동생 나이가 대체 얼만데. 아직 방년 18세도 안 된 녀석에게 그런 엄청난 힘이 있다고? 나는 여동생을 옆에서 계속 지켜봐서 잘 안다. 아무리 그 녀석이라고 해도, 20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런 힘을 지니게 된다고? 그 무시무시한 움직임이 고작 '수업'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건가? 적어도 한계상황에 이르기까지 몸을 움직여본 경험이 있는, 축구선수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인간이 발버둥쳐서 연습한다고 나올 힘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설마....' 정말 끔찍한 가정이지만, 만약 그 녀석이 월하소녀라면 그녀는 인간이 아니고, 그렇다면 나에게는 무서운 현실이 다가오게 된다. 그것은. '그럼 내 진짜 여동생은 어디로 간 거야?' 부장의 말대로라면 인간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인간으로 태어난 내 여동생은? 그 애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역시 여섯 살 무렵의 유괴사건이었다. 그때 여동생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후, 한 달 동안 얼마나 우리는 애를 태웠던가. 그리고 만약 내 여동생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면, 그 때가 가장 유력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그 녀석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었어.' 만약 그 녀석이 바꿔치기를 당했다면, 분명히 그때 무슨 일을 만나서......... '아니야 !' 그렇다면 내 여동생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 예시당초 부장의 그 추론이 맞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럼 월하소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여동생과 월하소녀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나는 그 이미지 사이를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인가. 여동생은 누구인가.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관계란 말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사실 내 몽상이고, 여동생은 실제로는 평범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된 일인가. "문구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내일 학교에서 봐. 열심히 연습하고." 선배가 그 말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과연 진실은 어느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실인가.' 이것은 내 머리를 계속 맴돌고 있었다. 과연 내 여동생은 누구인가. 인간인가. 마법사인가. 아니 그 애는 과연 내 진짜 쌍둥이 여동생이 맞는가.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건 온통 그것뿐이었다. 이미 독일에서 벌어진 사건의 흑막에 대한 관심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른 때라면. "너는 너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와 '월하소녀' 뒤에 숨어서 기다리는 것 뿐이야.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쯤은, 아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내가 두려워하고 되새기는 말은. "만약 네 여동생이 마법사라면, 아마 그 애는 네 진짜 여동생이 아닐 거야. 적어도 내가 본 그 '월하소녀'의 힘은, 100년 정도밖에 못 사는 인간이 수련으로 익힐 수 있는 정도로 약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겉으로 증거를 전혀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자기수양이라니, 인간이 그 정도로 강해질 수는 없어." 그렇다. 나 자신이 본 대로, 월하소녀의 그 힘은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여동생이 가진 힘도, 역시 인간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당장 플래닛 그룹의 일만 생각해도 그랬다. 여자아이가 글로벌 그룹의 총수자리를 쉽게 차지할 정도로 세상이 만만한가? 아니다. 보통은 죽을 지경으로 일에만 몰두한 40대나 50대의 남자여야, 간신히 그 자리를 딸까 말까 하다. 그게 현실이다. 게다가 여동생은 총수의 자식이라는 특혜도 누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게다가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에서, 백인남성이 아닌 자가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런 바보 같은.' 어째서 지금까지 그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여동생이 보여준 수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장 어머니의 요리솜씨를 봐도, 그건 확연히 드러나는 일이었다. 도대체 그 녀석이 어디서 집안 일을, 그리고 요리를 배웠단 말인가. 어머니의 솜씨가 그리 좋다고 할 수가 없는데. '그것만이 아냐.' 도대체 어떻게, 평범한 여고생이 UFO슛을 날린단 말인가. 그것뿐인가. 불량배들을 상대로 보여주는 그 무술 실력은 어떻고? 아니, 그건 어떻게 말이 되게 설명할 수도 있다. 여동생이 한 달간의 실종 후에 돌아왔을 때, 그 애는 플래닛 그룹의 회장과 함께 왔었다. 그렇다면 그동안에 그 애가 회장의 귀여움을 받고 유산상속을 받게 되었거나, 거기서 무술을 배웠다는 식으로 끼워 맞추면 설명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여동생은 IQ가 200이 넘는, 그야말로 천재중의 천재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 그런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러나. "확실히 염색체 면에서 다르긴 하지. 하지만 유전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건, 인종차별주의를 연상시켜서 좋아하지 않아."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기억났다. 하나는 여동생이 사촌들이 오기 전날에 나에게 한 말이었고, 또 하나는 월하소녀가 식인소녀를 처단하려는 순간에 한 말이었다. 비록 두 사람은 모습도 다르고 나이도 달랐지만....... '똑같아.' 그 분위기. 그 무시무시한 분위기만큼은 완전히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만약 목소리만을 듣고 판단했다면, 나는 분명히 둘은 같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월하소녀 정도라면 자신의 모습도, 목소리도 모조리 진짜가 아닌, 가짜를 내세울 수가 있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단 하나. '그 분위기만은.....'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니까. 상대를 책망할 때의 그 분위기. 그건 완전히.... '설마.' 그렇다면 정말 내 여동생은 대마법사, 달 아래로 날아와서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고, 도시 전체의 죽은 생명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초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걸 내 여동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정말로 부장의 말대로 인간은 그런 힘을 지니지 못한다고 한다면. "오빠 !" 지금의 그 녀석은 내 진짜 여동생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렇다면, 나의 진짜 여동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실종된 나의 사랑스런 여동생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그 애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애는 이미..... "오빠." 설마. 그 애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혼자서 살아남을 가능성? 그런 것도 있겠는가? 어쩌면 내 부모님은, 내 여동생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 월하소녀에게 부탁해서 내 여동생 역할을 해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녀석이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라는 것도 나에게만 숨겼던 분들이니까. 그렇게 해석하면 말이 된다. 실제로. "물론 그게 마법에 의한 위장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 만약 그 애가 정말로 '월하소녀'라면, 왜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을까?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냐. 그 정도의 마법사라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누가 그 정도의 마법사의 가족들에게 손을 댈 수 있겠어?" 그렇게 해석하면 이해가 된다. 사실 그 월하소녀 정도의 힘이라면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도전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로 옆에서 그녀가 싸우는 광경을 본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 수없이 터지는 마법으로부터 나를 완벽하게 보호했던 그 마법능력, 그리고 나를 매달고 싸우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승리를 쟁취한 그 압도적인 힘. 그런 사람을 이길 존재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특히. '그 이상한 마법.' 다른 마법과는 전혀 격이 달랐던 그 마법. 마법에 대해 무지한 나조차도, 그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힘과 연결되는 것이란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그 마법. 그것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사방에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이, 사람의 고기를 찾아 헤메던 좀비들이, 모두 인간으로 돌아갔던, 그 엄청난 광경. 그녀가 천사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눈앞에서 찢겨진 살점들과 뼈들이 한데 모여,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내 여동생이 죽었다면, 살려줄 능력이 없었을까.' 뭔가 이상하다. 만약 그녀가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콘스탄츠에서 보여준 그 모습과는 모순이 된다. 물론 좀비를 사람으로 되살리는 것보다, 완전히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게 더 어렵다고 하면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뭔가 어색하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이 그리 대단한 존재도 아닌데, 뭘 하러 내 여동생 역할을 해주겠냐는 말이다. 차라리 부모님에게 새로 아기를 가지게 하는 편이, 더 빠른 해결책이 되었을 것인데. '그리고.' 물론 그 녀석이 내 진짜 여동생일 수도 있다. 부장의 예측은 틀렸고, 그 녀석의 말대로 '벌거벗고 10개월을 함께 보낸' 바로 그 여동생이 월하소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그런 존재라면, 왜 굳이 그 사실을 나에게까지 숨기고 있는가. 그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명색이 나는 그 녀석의 쌍둥이 오라버니가 아닌가. 게다가. "적어도 네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는, 가장 강할 거야." 그 녀석이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면, 왜 그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거지? 무엇보다도 그 힘을 당장이라도 사용해야 할 대상이 하나 있지 않은가. 바로 국고만 축내고 국민들을 위한 일은 할 생각도 안 하는 '국해의원'들에게 멋지게 마법 한 방 날려주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그녀가 마법을 써야 할 장소는 많다. 아주 많다. 지나칠 정도로 많다. 만약 그 애가 정말로 월하소녀라면, 그 힘으로 세계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일개 그룹의 회장직만을 맡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풍요롭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애는 그걸 하지 않을까. 물론 그 애가 단순히 천재소녀이고, 마법과는 관계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문제가 되는 것이, 그녀가 이룬 성취가 너무 크다. 그럼. '도대체 내 여동생은 어떤 존재일까.'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였다. 나는 그렇게, 내 옆의 시내와 클라라에게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메고 있었다. 답을 찾아서.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19화 밀려오는 폭풍 (1) "악마다 ! 악마가 온다 !" "전투 준비 ! 악마를 물리쳐라 !" "이번에야말로 저 년을 물리치자 !" 졸지에 악마 소리를 듣는 걸 보니, 나도 이젠 거물이 된 모양이다. 이계(異界)에서 온 범죄자들의 노예인 마법사들이 당장 지팡이를 잡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인간의 긍지를 버리고 악마의 졸병이 된 자들이, 누구보고 악마라고 하는 거야. [[environment control(환경조절)]] 생각보다 어려운 전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대규모의 마법사 군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가 보기에 저 정도면 1287명은 되는데. 직종도 다양해서, 마법사뿐 아니라 소드마스터(sword master)에 무술가, 심지어는 짐승인간까지도 있었다. 상당히 귀찮은 싸움이 될 것이다. 아니, 이건 이미 전쟁 수준이잖아. 내가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환경조절마법부터 준비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저들을 감싸는 결계를 치는 건 어렵겠어." 마법사들도 나름대로 저항할 것이니 말이다. 특히 저 정도 규모라면 레벨 10의 괴물급이 끼어 있을 것이 거의 확실했고, 그렇다면 레벨 8짜리 결계마법으로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의 숫자가 많다면.... "시끄럽겠는데." 좀 요란한 싸움이 될 것이다. 부디 이 아프리카 대륙이 가라앉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리고 되도록 전투를 빨리 끝내서, 민간인들이 있는 곳까지 피해가 미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문제는 저 마법사들은. "민간인을 방패로 삼자 ! 저 년은 마음이 물러서, 민간인을 죽이지 않으니까." 그 덕인지, 마법사들은 전원 민간인을 최소 한 명씩은 앞에 세우고 있었다. 이런 치사한 녀석들이. 물론 그러니까 그들이 악당이라는 거겠지만. 아마 저 민간인들은 흑마술의 재료가 되거나, 그게 아니면 그들의 에너지원이 되어 좀비가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는 두지 않는다. 우선 내가 할 일은. [[prediction of revive 부활의 예언]] 저 민간인들에게 이것부터 걸어주는 거다. 이렇게 해야 마음놓고 그들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저들만 피하면서 마법을 쓰기는 너무 어렵고, 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죽여놓고 시작하는 게 속이 편하다. 마법사들의 앞에 세워진 민간인들이 갑자기 이상한 빛이 자신을 감싸는 걸 보며 놀란다. "이, 이건?" 그리고 내 속셈을 눈치챈 적들도 새파랗게 질린다. 그 다음에 내가 뭘 쓸지.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전투를 위해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 그리고 검을 드는 검사들, 몇은 짐승인간이라는 것을 과시하듯이, 신화에나 나올 듯한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힘을 갈구한 자들답게, 시시하게 늑대인간 정도로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Isolated world 고립된 세계]] 내가 마법을 외움과 동시에, 마법사들의 발 아래가 결계로 뒤덮였다. 마법사들을 모두 감싸는 건 그들의 마법에 의한 저항으로 인해 힘들지만, 그들의 발 밑은 완전히 달랐다. 만약 그들의 발 밑에 공격마법을 집어넣는다면 또 모르지만, 그 마법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딛고 선 땅바닥을 겨냥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마법사들에게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그 마법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갇히는 건 땅이지, 그들이 아니었으므로. 자. 이제 보험도 걸어놨으니 시작해볼까. 콰르릉. 캘리만자로 산이, 순식간에 엄청난 돌풍에 휘말렸다. 평상시와는 전혀 다르게, 무려 초속 300km가 넘는 강력한 폭풍으로. 환경조절의 마법이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지역의 기후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단순한 날씨의 조절과는 격이 틀렸다. 순식간에 초원 전체에 무시무시한 초특급 태풍이 휘몰아쳤다. 마법사들이 잇달아 뒤로 밀려난다. 몇 명의 약한 녀석들은 그대로 손도 못 쓰고,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으악 !" "이 괴물 !"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처음부터 너희들한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사람을 잡아서 마구 혼을 빼먹는 너희들이 더 괴물이잖아? 나는 그들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바람의 풍속을 더욱 올렸다. 초속 1000km가 넘는 무시무시한 태풍이, 그들을 휘감아간다. 거의 자연상태에서는 일어날 리가 없는, 엄청난 돌풍이. 크르르릉.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태풍은 캘리만자로 산을 삼켰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태풍은 일정한 구역에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 마법사들이 얼쩡거리는 부분만 말이다. 그래서 외부의 공기는 이 태풍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Isolated world 고립된 세계, Reduction 축소]] 결계가 차츰 줄어들더니, 붉은 용암을 아래에 두고 한 점의 빛이 되었다.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그리고 접혀진 공간은 내 손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용암, 아니 맨틀이 그대로 드러난 대지 위에 떠 있는 것은 레벨 10의 강력한 마법사들, 그리고 일부의 짐승인간 정도였고, 대다수는 폭풍에 휘말린 채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그제야 내 속셈을 알았는지. "윽. 실수다." "이런." 결계 마법에 자기들이 갇힐 것을 두려워한 마법사들은 그들 자신의 방비는 철저하게 했지만, 인질들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으므로 보호마법을 걸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이, 인질이 된 민간인들을 보호한 셈이다. 이 경우에 피부색은 관계가 없다. 그들 중에는 하얀 사람도 있고 검은 사람도 있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서. "공평하게 혜택을 나눠줘야 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보호만이 아니라, 저 사악한 마법사들에 대한 징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자. 그럼 인간방패를 자기 앞에 세워놓았던, 저 더러운 녀석들을 응징해줄까. 이미 대부분의 마법사나 검사, 짐승인간들은 폭풍에 휘말려 전투력을 잃은 상태였다. 시속도 아니고 초속이 1000km인 태풍이라니. 이런 것에 휘말리고도 누가 멀쩡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녀석들의 수는 많았지만. "레벨 9를 넘기는 마법사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 아무래도 자신들의 편을 늘리기 위해 뒤에서 공작을 했다면, 그 중 대부분이 수준이 낮은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 포섭한 사람들이 금방 대마법사가 될 수는 없으니까. 사실 저들의 경우, 대마법사라기보다는 대형 꼭두각시라고 해야 하지만. "그럼, 이제 남은 녀석들이." 바로 죽어 마땅한 레벨 10짜리, 악마에게 완전히 혼을 판 녀석들이라 이거지. 물론 다 그런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남은 이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97명. 지금의 마법을 견뎌낼 정도라면, 꽤 실력자들일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이야기다. 나는 정신을 잃은 잔챙이들을 위해. [[Isolated world 고립된 세계, Reduction 축소]] 폭풍 속에 휘말린 공간이 우선 결계 안에 갇히고, 그 공간 역시 조금 전의 것처럼 줄어들다가 내 손으로 들어와서, 사라졌다. 자. 그럼 남은 녀석들을 처리해줄까. 어차피 바깥에는 초속 1000km의 폭풍이 고리처럼 주위를 감싸고 있으니, 도망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뚫는다면. "그럼 너희들은 다 죽어." 그렇게 달아나다가 죽은 녀석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은, 적들도 알고 있었다. 뭉쳐도 못 이길 상대에게 등을 보인다면, 그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들이 살아남을 길은, 오직 똘똘 뭉쳐서 나에게 덤비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까지 그 자는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역시, 이들은 버리는 카드인가?' 그게 아니면, 이미 수사관이 지구에 와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결정적인 대반격을 위해 준비하는 게 있다는 건가. 물론 나 자신도 준비하는 게 있기는 하지만. '일단 지금은 이 녀석들을 해치우는 게 순서겠지.' 그것도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그럼 역시 paradox를 쓸까. 하지만 그건 실수하면 우주 전체가 붕괴되는 마법이다. 그리고 97번이나 걸어주는 것도 솔직히, 에너지 낭비다. 내가 무슨 투명 드래곤이냐. 그렇다면 좀 간단한 걸로 가면.... 핑. 핑. 사방에서 레벨 10 마법사들이 방어마법을 쓰고 있다. 하지만 뭐, 저런 것 정도는 금방 깰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 주문이다. 녀석들은 마법 근원체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니, 지난번의 미주처럼 마법 근원체와의 연결만을 자른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 [[Multi spell 다중주문. Absolute destruction 절대 파괴. 97 !]] 도합 97회의 절대파괴마법이 발산되고, 그것은 하나하나 적들에게 날아갔다. 최강의 방어마법을 시전하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완전히 분쇄되기 시작한다. 역시. 레벨 10의 마법을 한 번 견뎌낼 정도의 실력자라고 해도 서로간 실력의 격차는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똑같은 레벨 10의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마법의 강함은 쓰는 사람에게 좌우되니까 !" 파괴마법에 의해 격추 당하는 녀석들은 이미 무시해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 중 몇 명이 되살아나느냐는 것이었고, 그런 마법을 지닌 자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이번 소탕 작전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너무 약한데?" 그 많은 마법사, 검사, 짐승인간들 중에, 남은 건 열 명도 안 되었다. 뭐야. 이거. 혹시 이것들은 전부. "젠장. 미끼였어." 주력은 다른 곳으로 달아난 모양이다. 나는 이를 한 번 갈면서, 마법의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어쨌든 미끼라고 해도, 그냥 놔두면 위험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우선. "너부터 !" 나는 눈앞에 날아오는 드래곤 형태의 짐승인간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쿵. 우르릉. 탁. "이걸로 완료. 아프리카는 이제 제압된 건가." 나는 캘리만자로 산과, 그 주변의 풍경을 복구하고 그대로 산 정상에 내려섰다.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순간'을 기억하고 소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기억을 모두 지울 필요도 없고. "이 나쁜 자식들이 !" "죽어 !" 사람들이 힘을 잃은 마법사들에게 보복하는 걸 말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지난번 독일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해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분을 풀 곳이 없어졌고, 그 덕에 서로에게 원한의 화살을 돌렸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독일에서와 달리 '마법사들'을 그냥 살려두기로 한 것이다. 초주검이 되도록 맞는 마법사에게는, 차라리 내 손에 죽은 자들이 부럽게 보였으리라. "으악. 살려주시오." 그 중 하나가 나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 손을 잡아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 자신이 힘을 얻은 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악행을 저질렀던가. 그 피해자들이 보복하는 것도, 솔직히 당연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재판정에 가 봐야 무조건 피해자들이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실제로 지금 맞는 자들 중에는. "크엑." 고위공직자나 판사, 변호사도 있었으니까. 아프리카에 부패가 만연했다더니, 정말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다 죽게 내버려두려고 내가 여기에 온 건 아니다. 나는 일단 일어서서. "이제 그만 해주세요." 내 목소리는 개미보다도 작았지만, 그래도 다들 듣기는 한 모양이다. 일방적으로 린치를 당하던 마법사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동시에 사람들도, 몽둥이를 놓았다. 하긴 원 없이 두들겨 팼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리 맞아도 안 죽게 마법을 걸어놨으니.' 아마 마법사들로서는 죽을 맛일 것이다. No death state라니. 레벨 9의 상태변화마법인데, 이건 적용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악질적인 수법으로 쓸 수 있었다. 어쨌든 이 마법에 걸린 사람은, 아무리 맞아도 안 죽으니까 말이다. 그럼 좋은 거냐고? 아니다. 문제는 이 마법에 걸린 사람들에게. "으악." "키익." "크윽."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하면서, 물론 부상도 입히면서, 목숨만 붙여놓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즉 목이 부러지고 심장에 구멍이 나고 두개골이 으스러져도 죽지를 않으니, 고통이 멈추지를 않는 거다. 하지만 그들이 한 짓을 생각해볼 때, 이 정도의 보답은 약과다. 이런다고 피해자들의 잃어버린 가족들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으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것까지는 무리라고.' 시체조차 남지 않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은, 아무리 내가 강해도 무리였다. 죽어서 혼이 저승으로 떠나버린 사람들까지 되살려낸다? 그건 금지된 행위였다. 모든 이를 내가 그렇게 살려낸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될 경우. "내 부모님을 살려주세요." "내가 사랑한 사람을 살려주세요." 이것까지는 차라리 낫다. 만약에. "히틀러를 살려주시오." 이런 소리가 나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구는 살려주고 누구는 살려주지 않는다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지구는 인간으로 꽉 차고 말 것이니, 차라리 누구도 살려주지 않는 편이 공정했다. 지난번에 독일에서 사람들을 살려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식인소녀(오빠의 표현)가 희생자들의 혼을 자신의 힘으로 쓰기 위해 묶어두었기 때문이었다. 특수한 경우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적들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으므로, 부활 자체가 무리였다. 게다가 죽은 지 너무 오래 지났으니. 퍽. 팍. 와직.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분을 풀지 않는다면, 저 피해자들은 어디 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한단 말인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법정에서도 이런 건 해결해주지 않으니, 어느 정도는 이런 식의 분풀이를 용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충분하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을 멈추게 했다. 피해자들 역시, 적어도 내가 그들을 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에 따랐다. 내가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자,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다.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감사의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의 언어는 제각각이었지만. "감사합니다. 아가씨." "고맙습니다. 천사님." 그 말의 의미는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천사님이라. 물론 내 모습이 안개에 감싸인, 신비의 소녀로 보이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좀 쑥스럽다. 솔직히 몸둘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천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그 일을 충실히 마쳐야 했다. 비록 그들이 내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내가 그들을 구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니까. 하지만 일부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이......" 적의가 넘치는 시선.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들의 위에서 군림하며, 죽음과 공포를 내리던 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원한은 솔직히,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서 힘을 부여받아, 그 힘을 악을 낳는 데에만 사용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힘이 사라졌을 때, 그들이 베푼 악은 그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크억." 이런 형태로 말이다. 피를 토하는 마법사들이 보인다. 그 중 몇은 쓰러져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No death state라는 마법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이제 이들에 대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젠 어느 정도 분이 풀리셨나요?" 그러나 그런 내 희망은,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예상대로이지만. "아닙니다 ! 아가씨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이 놈들을 당장이라도...." 그 원한은 아까 마법사들이 나에게 보이던 눈빛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마법사들이었던 학살자들이, 꼬리를 내린다. 힘이 없어진 그들은 이제 무력한 죄수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럼 이제 이들을 어떻게 할까요? 살려줘도 될까요?"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반대의 소리가 초원을 뒤덮었다. 너무 격렬해서, 살려주라는 소리를 다시 하기가 무안할 정도다. 마법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지만, 그건 사실 자업자득이었다. 얼마나 인심을 잃었으면, 그런 소리나 듣는단 말인가. 게다가 단순한 반대의 목소리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 놈들은 아가씨께서 떠나시면 또 그런 짓을 할 게 분명합니다. 지금 능지처참을 해야 합니다. 사지를 찢어 죽이고, 하이에나들에게 먹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옳소. 옳소." 그 의견에 대한 지지는 너무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도 없었다.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죽어야 할 자들은 죽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말에서, 나는 이 불쌍한 악당들을 살려줄 방법을 찾았다. 물론 그건 살려준다기보다는, 죽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 녀석들에게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해야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보복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럼 이들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요?" "........" 사람들은 자기들이 말실수를 했음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이 범죄자들을 살려두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었다. 만약 적들이 다시금 이들에게 마법사로의 길을 보여주며 유혹한다고 해도, 살아있는 경고문이 있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럼 그렇게 하지요. 이들을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 좋아하려다가 피식 우그러지는 마법사들. 그리고 내가 도대체 무슨 벌을 그들에게 내릴지 궁금해하는 피해자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단순한 것이었다. 물론. "으악 !" 내가 지팡이를 두 손에 쥐는 걸 보며, 이미 초주검이 된 전직 마법사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그들에겐 내가 아마 죽음의 신으로 보일 것이다. 낫도 안 들었고, 해골바가지 머리를 달아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우, 우릴 죽일 셈이냐." "말로만 살려준다고 해놓고, 사실은 죽일 셈이지?" "악마 같은 년." 정말 못 봐줄 인간들이었다. 하긴 힘으로 남을 짓밟고 다니던 위인들이니, 나도 그런 인간인 줄로 알았나 보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 같은 줄 알아?" 내가 아무나 죽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들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다니, 못된 녀석들 같으니.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들을 죽이더라도, 원망하거나 미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와아 ! 악당들이 죽었다 !" "천사 아가씨 만세 !" 이런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전직 마법사들'의 죽음을 바라는, 저 많은 눈빛만 봐도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경우도 많은 법이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지만. 그리고 내가 마법사들에게 줄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벌레나 돌멩이로 만들어버리는 것보다는."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안, 그들은 일제히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역시 이게 낫겠지."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우르르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장벽은 너무 두꺼웠고, 그들은 마법사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쌓아온 원한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피해자들은 즉시 마법사들에게. "어딜 달아나셔." "얌전히 정의의 심판을 받으라고." 그 말과 함께, 마법사들을 집단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마법사들의 머리가 터지고, 팔이 부러진다. 다리도 물론 꺾인다. 침을 뱉는 건 아주 점잖은 대응이었고, 칼이나 창으로 찌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들은 아직 내 마법이 해제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죽지야 않았지만. "으악 !" 아픔은 오히려 더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맞는 것도 좀 곤란하다.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모습이 한때의 마법사들의 과거였다면, 지금은 그들 자신이 약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마무리를 할 때가 되었다. 그럼 다음은. [[Summon magic feather 마법의 깃털 소환]] 내가 언제나 쓰는, 예의 마법의 깃털들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깃털들은 모든 마법사들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조금 후에 있을 일을 예상한 마법사들이 절망했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죽이는 것도 아닌데 뭐. 다음 주문은. [[Multi spell 다중주문 Homing laser 호밍 레이저]] 내 주문과 함께, 1000여 발의 레이저빔이, 마법사들의 머리로 날아갔다. 그것은 그들의 두개골을 정확히 잘랐고, 그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와 동시에 마법의 깃털들이. 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 연쇄적으로 그들의 대뇌 속으로 박히기 시작했다. "이제 처벌은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아 주세요." 나는 두개골에 마법의 깃털이 박힌, 전직 마법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조언을 했다. 그들을 집에 보내기 전에, 내가 해야 할 말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 그 말이 상당히 안 좋게 들린 모양이다. 모두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하지만 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앞으로도 악행을 계속한다면, 곧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예를 들어. '살인이나 약탈이나 방화나 강간이나 사기 행위 같은 거.' 그런 짓은 좀 안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정당방위라면 이해하지만, 왜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살인이 언제부터 그렇게 가벼운 행위가 되었을까. 그들을 보고 있지만, 한숨만 나온다. 힘을 가질 자격이 없는 자가 권능을 획득하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럼, 이제 모두를 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마법을 준비했다. 역시 집까지의 안락한 여행을 위해서는 이게 좋겠지.... 하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 "우아아아아 !" 이럴 줄 알았다. 마법사였던 자들 중 하나가, 나에게 무작정 돌진해오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힘을 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겠지. 사실 그들에게는 이제 고향에 돌아가 봐야 남은 게 없었으니까. 악명이 자자한 자신의 처지에서, 누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할 수 없군요." 나는 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아, 아니. 저 새끼가 !" "감히 천사님을 !" 그렇게 외치며 그에게 덤벼드는데도. 그리고 그는 곧 적의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둘러 싸였다. 만약 그가 얌전히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도전했고, 그것은 나에게 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좋은 구실이었다. 자신들의 원한을 스스로의 손으로 풀어낼. 하지만 그들의 소망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만약 지금 사적인 복수를 용납한다면. '그럼 이 마법사들은 다 죽을 거야.' 그래서, 나는 내 손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마법사의 머리에 꽂힌 깃털이 빛을 뿜었다. 놀란 마법사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펑. 그의 주변으로 빛이 뿜어지면서, 사람들을 밀어낸 것이다. 비록 그 빛이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공포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이런 광경과 함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었겠는가 말이다. "으악 !" 피해자들의 손이 내려간다. 다시금 그 공포가 돌아오지 않을까. 이제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마주하고 지내야 했던, 그들의 불행한 과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처, 천사님." "사, 살려주세요." 그러나 정작 그 빛을 뿜어낸 마법사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빛은 그의 머리에서 뿜어졌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마법사가 부르짖는다. "네, 네 년이 설마..." 앞에서 발생한 이상한 동요를 느낀 뒷줄의 사람들도, 어느새 고함을 지르지 않게 되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만약 마법사들이 다시 당신들을 괴롭힌다면." 그의 머리에 박혔던 깃털이 선명하게 빛나면서, 그의 몸이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붙잡고 자신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의 목이 뽑히지 않는 한. 그의 몸이 서서히, 무리의 중앙으로 이동한다. 독수리에 채인 토끼처럼.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높이에 도달했을 때, 내 말이 모든 이의 귓전을 울린다. "그들은 이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마법사의 몸에 돋아난 혈관이,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근육도 점차 팽창해간다. 피부도. 심지어 눈알까지, 바깥으로 밀려오는 격심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앞으로 솟아오른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네, 네 년이.....!" 결국 증오심밖에 남지 못한 건가요. 나는 마지막 눈길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펑. 그 남자는 폭죽처럼 터져 버렸다. ".........." 모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눈앞에서, 나를 향해 증오심을 품던 마법사의 최후를 목격했으므로. 그의 살과 뼈는 산산이 부서지고, 그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비처럼 지면을 적셨다.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으윽."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법사의 피가, 그들을 멈춰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피는 다른 마법사들도 구했다. 여기저기서 몽둥이를 들고 전직 마법사들을 때려죽이려고 하던 사람들까지도. "!" 모두 슬금슬금 마법사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지도 모르니까. 머리에 깃털이 박힌, 마법사들은 황급히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깃털을 뽑아내려고 했다. 물론 소용없지만. "이제 아셨나요?" 물론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내가 마법사들의 머리에 박은 깃털이 무엇인지를. 만약 그들이 또다시 악행을 저지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나는 사람들이 살인의 충동을 억누르는 것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죽음의 천사로서의 말을. "만약에 당신들이 또다시 악의 길을 걷는다면." '당신들'에 해당하는 마법사들이 벌벌 떨었다. 시체 조각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동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힘은 이미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 말은 즉, 내가 원하면 언제라도 허공으로 끌어 올려져서, 폭발한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마법사들의 어깨가 축 처진다. 무력감에 짓눌린 탓이다. 하지만. '깃털이 없어도 마찬가지라고요.' 그랬다. 사실 깃털을 굳이 마법사들의 머리에 꽂지 않더라도, 나는 언제든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에게는 상징이 필요했다. 만일 이 악인들이 다시 악을 저지르면, 그것을 저지할 상징적인 물건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깃털을 사용했다.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깃털이 빛을 발하는 한, 감히 누구도 살인과 강간과 약탈과 방화의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깃털이 있는 한. '당신들은 안전할 거예요.'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 깃털을 박아 넣고, 반항하는 자를 본보기로 처형한 이유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마법사들에게 가족을 잃었던 피해자들도 잠잠해질 것이다. 깃털이 있는 한, 내가 그들을 잊지 않고 있으며 악인들이 다시 돌아오면, 나도 다시 돌아와서 그들을 처치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나는 서서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 "오늘의 일을 기억하기 바래요. 다시 악의 길로 돌아간다면, 무슨 벌을 받을지 잊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평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마법사들은 나에게 반항하지 못했다. 사람들 역시, 더 이상 증오심을 분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가 맡아서 가지고 있으므로. 그럼 이제 남은 것은. "그리고 만일 다시금 마법을 남용한다면, 저는 돌아오겠어요."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마법을 발동시켰다. 모두를 집으로 보내기 위해. [[remove(강제 이동)]] 사람들이 빛에 감싸이더니, 곧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안은 빛의 구름은, 그들의 고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후우." 모든 이들이 고향으로 날아가는 걸 보며,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아프리카에서의 전투가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평화롭게 자기 집에 도착할 것이고,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겠지. 마법사들 역시, 이제는 감히 허튼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다 끝난 건가." 만약 아프리카에 한정지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말도 맞다. 부서진 자연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는 일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인간이 아닌 것 같지만.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지?" 적어도 주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 앞에 나타난 것들은 하나같이 2선급의 마법사들로, 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준의 존재는 없었다. 물론 그런 자가 있다면 정말 큰일이겠지만, 아직은 지팡이 마법조차 최대한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이 이렇게 약하지는 않다. 물론 나에게 레벨 10짜리 마법사들이 상대가 안 되는 건 나도 알고, 그들도 안다. 그러나 하나도 없다니? 이건 너무 빈약했다. 그럼. "아예 포기한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추세대로 가다가는 10분도 못 가서 지구의 모든 마법사들은 전멸해버릴 것이다. 이제 그들에 대한 감시망도 거의 완성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이건 그냥 방치할 사태는 아니었다. 마법사를 공급할 인간이 없다면, 나의 적들은 더 이상 지구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니까. 그들이 지구에 있는 건. '순전히 마법사를 시킬 지적 생물이 필요해서인데.' 하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그들은 이 별을 떠나거나 그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나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과연 그들이 나를 이길 수 있는가? 설령 전원이 모두 나에게 도전한다고 해도. '어림없어.' 그들이 내 예상대로라면, 적어도 나는 그들을 이길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지구에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이계(異界 : 다른 세계)에서 온 수사관까지도 있지 않은가. 아마 지금쯤이면 어떻게 연락을 취했을 텐데? 나는 거기서 일단 상상을 멈추기로 했다. 지금은. "잠시 상황을 살펴볼까." 세계 각지에 배치된 마법의 깃털이, 주위 상황을 나에게 전송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구슬들이 내 주변에 뜨면서, 나는 그 모든 것을 귀담아 들었다. 어차피 금방 끝날 일이고, 한 번은 정보를 종합해서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녀석들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봐야 할 것은.... [[유럽지역은 현재 이상 없습니다. 콘스탄츠에서의 적병들의 영혼수집활동은 좌절되었고, 적들은 현재 유럽에서 전멸했습니다. 잔여 적병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역시 이쪽에는 녀석들이 없었다. 하긴 지난번에 워낙 요란하게 소탕작전을 실시했으니까. 그럼 다음은..... [[북미방면에는 이렇다할 보고가 없습니다. 벌써 몇 달째 적의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으며, 적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은 북미방면을 포기한 모양이지만, 의외로 이쪽으로 재집결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감시를 계속하겠습니다]] [[오세아니아에는 아무 보고가 없습니다. 사막 인근에 녀석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지만, 그쪽에는 거주민이 거의 없습니다. 인구밀집지대가 아닌 이상, 마법사의 추가적인 조달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계속 감시하겠습니다]] 역시 그럴 것이다. 물론 그쪽에는 사람의 머리에 깃털을 박아 넣지 않고 감시를 위해 자기 힘으로 떠 있게 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만약 그쪽에서 마법사가 움직인다면, 주위에 인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곳은.... [[북극에는 이상반응이 없습니다]] [[남극에는 이상반응이 없습니다]] 하긴 그쪽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지. 북극의 얼음에 가는 사람은 탐험가나 에스키모들 정도이고, 남극의 경우는 극소수의 연구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 굳이 마법사들이 침입하는 건, 비용 대 효과 면에서 맞지가 않는다. 게다가 그런 곳은,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면 내가 제압하기도 극히 쉽다. 너무 고립된 곳이어서, 주위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저 마법 한 방이면 끝이니까. 그럼. [[남미 방면에 잔존한 마법사들은 모두 후퇴했습니다. 그들은 현재, 중국과 일본 쪽에 집결하고 있으며, 최종목표는 한국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 나는 아차 싶었다. 이들은 모든 전력을 우리나라 상공에 집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달갑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그쪽은 너무 입지가 불리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은 다 넘어가더라도. '경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강도가 어디 있나?' 아무리 궁지에 몰린 강도라도, 경찰서로 돌진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잡고 싶어서 안달하는 경찰관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될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지금, 적들을 잡으려고 파견된 수사관이 최소한 한 명은 있다. '월영이 그런 자들을 보면, 좋아라고 달려올텐데?' 게다가 수사관을 건드리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시내 정도의 꼬맹이는 그렇다 쳐도, 안 그래도 지구에 범죄자들이 왔다는 사실이 본국에 통보가 되었을 텐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수백, 수천의 경찰들이 몰려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순식간에 일망타진될 것이다.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다 포기한 건가?"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 그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지난번에 콘스탄츠에서 벌어진 좀비 사건 때에는 독일 정부에 상황을 통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너무 크게 벌어졌기 때문이었지만,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대처하는 독일 정부의 행각에 화가 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오빠까지 위험에 말려들게 하다니.' 그 덕에 독일 수상은 나한테 걷어차여서,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일국의 수상을 구타하는 건 좀 너무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걸 따지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도대체 그들은 뭘 하고 있기에, 내가 좀비들을 모조리 치료하고 문제의 원흉을 박살낸 후에도 미적거렸단 말인가. 물론 그들로서는 빨리 행동한 것이지만, 그 덕에 제때 경찰력이 회복되지 못해서 시내에선 대규모의 참사가 벌어졌다. 그럴 줄 알았으면 모조리 기억을 삭제하고, 다들 3일 정도 잠을 자게 해버릴 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고작해야. 퍽. "우아아아아." 독일 수상을 패는 것으로, 분을 풀어야 했다. 아무리 나라도 두 번씩이나 죽은 사람까지 살려줄 수는 없으니까. 으이그. 속 터져. 그로 인해 내 정치인에 대한 불신감은 더 깊어졌다. 도대체 이것들은. '오빠도 그것보단 훨씬 나았다고.' 그랬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상황에서도, 오빠는 자기 몸을 지키며 탈출했을 뿐 아니라, 용감하게 좀비들에 대적해 싸웠다. 정체도 모르는 괴물을 상대로, 용기를 쥐어짜면서 말이다. 물론 나에게 있어 좀비는 그야말로 별 거 아닌 피라미에 불과하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오빠한테는 절망적인 상대였을 거야.'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상대를 두려워한다. 나는 좀비가 무엇인지, 어떻게 죽이면 되는지 전부 알고, 그 지식을 실행할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빠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오빠는 포기하지 않았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클라라 슈만양이 오빠에게 목을 매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진희 그 계집애는. '도대체 뭘 한 건지.' 그 상황에서 오빠와 헤어져서 탈출했던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도 그 계집애는, 오빠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한 발만 내딛으면 될 일인데, 그걸 못하는 거다. 역시 연미 언니의 과거가 걸려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그건 좀 지나치다. 오빠가 서서히 진희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만간 진희가 뭔가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애는 탈락해버릴 거야.' 아니, 이미 탈락했을지도 모른다. 오빠의 애인 경쟁자에서 말이다. 솔직히 시내는 가망이 없어 보이고, 문희는 아예 관심이 없으니. 그럼 남는 사람이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다만 오빠의 마음이 이상한 쪽으로 가서 걱정일 뿐..... 파직. "이건?" 뭔가 이상했다. 우리나라 쪽에 쳐 두었던 결계가, 흔들린 것이다. 누가 안으로 들어간 걸까. 만약 민간 항공기 같은 종류라면 이해가 되지만, 마력을 지닌 적이라면 절대 통과를 하지 못할텐데? 결계를 힘으로 부쉈다면 충격은 지금보다 컸을 것이고. 적어도. [[보고 드립니다. 한국에 쳐진 결계를 누군가가 통과했습니다. 아무래도 밀항선으로 추측..... 앗. 이건 !]] 펑. 나는 우리나라에 쳐진 결계가 파괴되는 걸 느꼈다. 이건. 혹시 녀석들이 다른 방법을 쓴 건가? 하지만 마력이나 생명의 힘을 수준 이상으로 지닌 자라면, 결계를 돌파할 수 없을 텐데? 이것은 그럼.... [[보고 드립니다. 적들은 폭탄을 사용했습니다. 반복합니다. 녀석들은 민간인을 매수해서, 결계를 유지하는 마법시스템을 손으로 폭파시켰습니다. 반복합니다.....]] 깃털의 보고는 얼마 안 가 끊어졌다. 아마 마법사들이 우리나라로 진입한 거겠지. 하지만 마법진을 유지하는 결정체를 누가 찾아내서 부순 걸까. 마법을 모른다면 정확한 위치를 판별할 수가 없을 텐데? 혹시.... "기계를 사용한 건가?" 만약 마력을 쓰지 않는, 마력 탐지기를 사용했다면 그것도 가능했다. 이런. 허점을 찔렸다는 건가. 나는 즉시, 우리나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 대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되면. '독일정부에 했던 대로, 우리 정부에 위기상황임을 통보할까?' 어지간하면 정부는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급했다. 일단 그들에게 말을 해서 위험을 경고해두는 게......... "..........그만 두자." 그들의 반응이 눈에 선했다. 그들은 내가 그 말을 하면, 아마 이렇게 말을 꺼낼 것이다. 즉. "아니, 이 계집애가 어딜 와서 헛소리야? 뭐? 독일의 사건이 여기서 벌어진다고?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다 하고 있어? 에? 게다가 그 옷차림은 뭐야? 요즘 여자가 어딜 그런 차림으로 나다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 물론 내가 안개로 내 몸을 가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 일어날 리가 없다'는, 무사안일, 속수무책 무대책의 신념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들에게는 내 옷차림만 보이지, 내 말은 안 들릴 거다. 아니라고? "국회만 봐도 뻔한 일이니...."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기대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납득하도록 증거를 제시하고, 뭔가 조치가 나올 때까지 머뭇거리다가는 우리나라는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아 버릴 거다. 그러니 내가 먼저 처리하고, 그 후에 통고한다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 당장은 할 수가 없다. 군인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경찰들은 그런데 뭐 하는 거야?" 우리나라 경찰과, 저 이계인들을 때려잡을 경찰. 두 쪽 다 멍하니 있는 모양이다. 전자의 경우는 폭발사건이 워낙 외진 곳에서 일어나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저 정도 폭발이라면.... "아차 !" 깜빡 잊을 뻔했다. 난 지금 인간의 시간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지금 내가 이렇게 한가하게 딴 생각을 하는 시간의 차이는 아직 1 마이크로-초(백만 분의 1초)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벌써 행동을 개시할 리가 없다. 우리나라를 보니, 폭발이 일으킨 구름은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은 상태다. 마치 TV에서 '느린 화면'으로 중계를 볼 때의 상황과 같다고 할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하나?' 정작 나와야 할, 이계에서 온 경찰 아가씨는 아직 모습도 안 보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쪽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지구를 지키는 건 여전히 나 혼자인가. 차라리 오빠한테 마법이라도 익히게 해서, 도움을 받을 걸 그랬나. '아냐.' 나는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오빠한테 생고생을 시키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몇 대 맞으면서, 개인적인 불평이나 늘어놓는 상황은, 마법수련에 비하면 아주 행복한 상태다. 오빠의 장래를 다 빼앗아갈, 그런 결정은 하고 싶지 않다. 나 하나 편하자고 그런 짓을 하는 건, 거의 범죄의 영역이다. 안 된다. 차라리 새로 만들어낸 소환수나 다른 병기를 이용해서라도, 나 혼자 싸우는 편이 훨씬 낫다. 오빠가 하루 이틀 수행해서 날 따라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내 싸움은 훨씬 힘들어졌을 것이다. 지구인 출신 마법사들의 대부분이, 속성으로 마법을 익힌 자들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런 이들의 수행은 깊이가 없었고, 조금만 파고들게 되면 당장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검기만 쓴다고 검술의 대가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처럼.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실전경험과, 그리고 마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그냥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니 오빠에게 그런 수행을 시키자면. '그만 두자.' 고생문이 훤했으니 말이다. 만약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나는 여섯 살 무렵에 이미 오빠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정도의 노력으로 그 갭을 메우기에는 마법이 너무 어려운 것이었고, 속성으로 익히는 방법을 쓸 경우 깊이가 부족할 것이다. 물론 단지 전투만 한다면, 마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어떻게 되기는 된다. 미주라든가 식인소녀(오빠 표현)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지팡이만 날아가도 끝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고려할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 녀석들이 왜 우리나라를 최종결전의 장소로 택한 거야?' 우리나라에 자기들의 마법요새를 세울 셈일까. 하지만 그게 목적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거다. 그들은 내 위치를 모르고 있으니 그건 고려사항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는 이계인들을 잡으려고 온 경찰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가장 위험한 장소로 거점을 정할까? 그러니 그들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거점확보라기보다는. '뭔가 확보해야 할 중요 목표물이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에 온 목적은.... "!" '눈치챈 건가?' 우리나라에 꼭 와야 하는 이유라면, 하나 짐작 가는 것이 있다. 물론 그들이 내 정체를 눈치챘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의 일이지만. 아니, 굳이 그걸 몰라도 상관이 없다. 그들로서는 나에게 인질이 될만한 인물이 필요한 것이니까. 어차피 정면대결로 나를 이기는 건 그들로서는 무리이고, 최선의 방법은 우리 우주에서 떠나 다른 우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동료들을 상당수 살상한 나를 두고 도망칠 수야 없겠지만. '자기들이 한 짓을 생각해보고 화를 내라고.' 그 이계인들이 지구에 처음 왔을 때, 그들이 죽인 인간의 수는 내가 죽인 이계인들의 숫자와 비교해서, 어림잡아 만 배 이상이 차이가 났다. 그런 주제에 원한 어쩌고 할 수가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원래 사악한 자들은 자신들이 남에게 입힌 피해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남에게 자신들이 입은 피해는 몇 곱절 부풀려서 강조하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이웃나라가 그런 케이스의 대표가 아닌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만약 그들이 노리는 것이 내 짐작과 같다면, 큰일난 사람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맹한 오빠 같으니.' 그랬다. 그들이 노릴만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오빠였다. 작년에 내가 오빠를 구해줬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오빠를 주시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 번 정도 위험상황에 처한 사람을 내가 구한 케이스는 많다. 하지만 두 번이라면?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독일에서 난리가 나는 바람에, 하필 오빠가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똑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구조한 것이다. 게다가 다른 위기상황이 많은 때에, 나는 오빠에게 가장 먼저 돌진해 들어갔다. 물론 다른 곳에는 좀비들만 있었고, 오빠가 있는 곳에는 그들의 두목인 마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하필이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제기랄.' 까딱 실수하면, 내 정체가 그들에게 발각될지도 모른다. 아니, 오빠에게만 들키더라도 이미 심각한 문제다. 오빠가 나에 대해 안다는 것은, 녀석들이 나에 대해 안다는 것과 완벽히 같은 뜻이니까. 오빠가 아무리 입을 다물어도 소용이 없다. 보통 인간의 마음쯤은, 유리잔 들여다보듯 투시할 수 있는 게 녀석들이 아닌가. 이건 모두. '빌어먹을 전풍그룹.' 물론 오빠가 그 지경으로 몰린 이유는, 어디까지나 멍청한 전풍그룹 탓이었다. 자기 그룹의 손님으로 온 사람에 대한 경호를 그리도 소홀하게 하다니. 더군다나 차기 회장이 끼어 있는 일행에 대한 배려가 그게 뭔가. 좀비들이 습격했을 때, 풍남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를 상상해보니 어이가 없었다. 거기에 같이 있던 진희와 연미와 문희까지. 그게 뭔가. '경호진의 능력이 0점이야.' 내 플래닛 그룹이 그들과의 제휴를 포기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 자들과 어떻게 일을 같이 하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쳤다. 예시당초 그 녀석들에게 오빠의 신변을 맡긴 내 잘못이 더 크지만, '뭐가 대한민국 제일의 그룹이야. 바보들 집합소지.' 주식거래 실력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상인으로서의 자세가 안 잡혀 있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가. 손님을 제대로 대접해줘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바가지를 씌웠는데, 누가 그 장사꾼을 믿고 거래를 계속 하겠는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장사를 하나.' 정말로 전풍그룹의 재무구조를 조사해보고 싶을 지경이다. 혹시 이 사람들, 뇌물과 아부와 사기로 기업을 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부디 안 그러길 바랄 뿐이다. 풍남이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그 정도에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할 일은. "그럼 우리나라 상공에서 또 싸워야 하나." 가급적이면 오라버니만은 안 만나기를 바란다. 나는 내 발 아래로 다가오는 한반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리 평온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과연 내가 만날 미래는 장밋빛일까. 회색 빛일까...., 쉬익. '뭐가 온다?' 우리나라 쪽이다. 혹시 적인가? 나는 즉시 지팡이를 고쳐 잡고, 상대를 주시했다. 과연 누구인가. 하지만 이 정도의 마력을 지닌 사람은. "월영?" 그녀는 내 앞에 멈추었다. 시간을 붙들어맨 가운데, 나와 그녀는 서로를 노려보며 하늘에 서 있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에, 서로를 향한 감정이 무수히 교차한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여는 월영. "오래간만이네요." "당신도." 하지만 우리들은 서로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의례적인, 말을 꺼내기 위한 말을 던졌을 뿐이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용건을 꺼낸 것은, 월영이었다. 나는 그 이계의 수사관에게, 달리 할 말이 없으므로. 해 봤자. "빨리 그 녀석들을 잡아가라고요." 이 정도밖에 없다. 사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이렇게 우리 세계에 오래 머무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이 만남은 너무 빠른 것이고, 어쩌면 이것으로 인해 세계는 파멸로 치달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 이계에서 온 범죄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가. 그리고 그것은 이제야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모두 한 곳에 집결한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지구에서 떠나 주세요." "?"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은, 아마 지금 쓰라고 있을 것이다. 난데없이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 '고향에서 사라져라' 같은 말을 듣다니. 비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월영은 진지했다. 농담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건. "당신처럼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이 세계에 머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주의 붕괴를 초래할 위험이 있어요. 그러니 이 세계를 떠나주기 바래요."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는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순순히 들어주리라고 생각한 걸까. 그녀 역시 자기 말을 내가 순순히 들을 리가 없다는 건 아는지. "물론 당신에게는 당혹스러운 통고일지 몰라요. 하지만 더 이상 당신을 방치할 수는 없어요. 이대로라면 당신에 의해, 파멸적인 존재가 다른 우주로 퍼져나갈 거예요." 그 '파멸적인 존재'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창피스럽지만. 그러나 설령 내가 지구에서 떠나고 싶어도, 그러면 안 되는 이유는 있다. 그것도 여러 가지로. 그 첫 번째는. "그럼 이계의 범죄자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요? 수사관님. 나보다 그들이 더 위험한 존재가 아니던가요?" "풋." 놀랍게도, 월영은 코웃음을 쳤다.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투의 말이다.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그들은 곧 체포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없어도, 그들은 우리의 수사망을 벗어날 수 없어요.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생길 이 세계의 파괴예요." "어째서인가요?" 이건 그녀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생각을 다 털어놓게 하기 위한 고리일 뿐이다. 그녀도 그걸 아는지,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당신이 말하는 이계의 범죄자, 즉 '물고기자리의 악령'과 그 한패거리들은, 이 세계를 파괴할 수 없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멸적인 존재'의 해방이 아니라 쇠퇴와 소멸을 부추기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우주의 거주민들에게는 환영해야 할 일일지언정, 슬퍼하거나 분개할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품고 있는 호의는, 해악을 이 우주를 넘어, 더 많은 세계를 위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거예요." 나는 그 '파멸적인 존재'가 사는 저 아래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사실 저들에게 내가 지닌 힘이 전수되기라도 하면, 그 해악은 가공할 수준이 될 것이 확실하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앞선 문명을 향유하는 당신에게 묻겠는데, 당신은 왜 그런 존재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나요?"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 파멸의 고리를 끼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신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사실 시내에게 무턱대고 마법을 전수하는 것은, 실수하면 그대로 세계의 모든 이에게 마법을 보급하는 것이 되며, 그 후의 해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월영은 단호하게. "그녀는 지금 마법을 배우지도 않고 있고, 그녀가 설령 마법사가 되더라도 그것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그들 자신을 놓아둔다는 의미예요. 하지만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 '마법을 초월한 힘'은, 그런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는 힘이에요. 만약 그 힘을 인간들에게 넘겨준다면."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단호하게 단정지었다. "그것은 무한한 우주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 악몽이 될 거예요." 스산한 바람이 우리 주위를 감돌았다. "신뢰받지 못하는 존재네요. 인간은." 다른 세계의 주민에게 듣는 소리가, 고작해야 '파멸적인 존재'라. 그러나 그에 대한 반론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했다.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대학살극..... 게다가 동족들끼리도 용서 없이 서로를 멸망시키려고 다투는 그 습성.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 한숨 돌릴 정도의 과거조차 부정하며 다시 살인을 저지르자는 구호를 외치는 지도자들, 남의 것은 내 것이라며 타인에게 억지 사실을 강요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 그 모든 악을 나는 보았기에, 인류를 위해 변명을 해줄 수가 없었다. 사실. '진실을 덮을 거짓을 만들 힘만은, 나에게 없어.' 실제로 만약 오빠가 나에게. "너, 네가 전에 독일에서 나를 구해준, 그 '월하소녀'가 맞아?"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나는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오빠가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아서, 무사히 넘어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월영의 말에, 일체 반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그게 당신의 목적이라면 이미 늦었다고 보는데요." 그렇다. 그 '파멸적인 존재'의 일원이, 이미 그런 힘을 지니고 말았으니까. 바로 나 말이다. "인간이 그런 힘을 가지면 안 된다는 당신의 말은 이해하지만, 그럼 나는 어떤가요?" 바로 그런 인간이 이미 있는데, 뭘 어떻게 하겠냐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당신의 걱정을 덜기 위해, 제가 고향을 떠나야 한다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힘으로 지배하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아예 우주 하나를 만들어내야 하나? 왜 내가 고향을 두고 그런 짓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도대체 당신들은 뭘 하고 있기에, 아직도 그 악질 범죄자들이 지구에서 설치도록 놓아두는 거지요? 다른 세계에 해악을 입히는 것이라면, 이미 당신들이 충분히 자행하고 있지 않아요? 수사관으로서, 범죄자를 제때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충분히 범죄라고 봐요." 사실 그들이 설치지 않았다면, 나는 굳이 내 힘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천재 소녀로서 대기업의 회장으로 지내고, 오빠의 축구경기를 응원하며, 좋은 남자를 찾아 평화로운 데이트를 즐기고 있겠지. 물론 내가 '데이트'라는 걸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최소한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어.' 아니, 사실은 그들이 이 우주에 온 것이 내가 힘을 지니게 된 원인이니, 결국 이건 그들의 자업자득이다. 도대체 왜 그들의 실패를 내가 책임져야 하냔 말이다. "오히려, 당신들 덕분에 내가 이 고생을 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나에게는 있다고 보는데요." 그렇다. 그들의 침입 덕분에 죽은 사람이 얼마고, 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된 사람은 또 얼마인가. 가장 가까운 예로, 우리 집에 와 있는 클라라 슈만양의 가족들도 그 피해자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하필 내 오빠까지도. 내 반격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월영은 잠시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그럼, 이 일이 해결된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설마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조용히 일생을 보내겠다는 말은 할 수 없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 후의 일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 간섭할 일이 아니지 않나요? 설마 이 지구에 그대로 머무르겠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궤변을....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도 일개 여자아이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마구 해내고 있으면서? 대답 좀 해 봐요. 연 미인양." ".........." 나는 놀라지 않았다. 침묵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건 알지만, 굳이 거짓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숨긴다고 해도 어차피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이미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마음이 마법으로 가려져 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허세일 수도 있지만. '바로 옆에 있었어.' 나와 월영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사실 내가 누군지는, 조금만 나를 관찰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적어도 월영 정도의 거물이라면, 한 번 정도는 내가 마법을 쓰는 걸 관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집의 결계마법은, 아무리 숨기는데 주의를 기울였더라도 작정하고 파헤칠 경우,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나라면 안 들키지만, 내가 건 마법은 아무래도 '마법'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것과는 미세하게나마 시공간에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공간은 에너지의 존재로 인해 휘어지며, 마력 역시 에너지였다. 그러니 아예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마법을 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면 문제는 달라지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인간이 아니란 걸 인정하는 꼴이야.' 그게 문제였다. 그러니 결국 정체를 숨기는 것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이런 날을 만나는 것도 이미 각오한 바였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너, 내 여동생이 아니지?" 이런 말을 오빠로부터 듣는 것이었다. 만약 오빠가 여섯 살 때의 내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있다면, 내 정체를 아는 순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오빠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잠재의식으로는 분명히 날 의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오빠를 구한 적이 너무 많았어.' 작년에도 그랬다. 금년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그랬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세 번이다. 이 정도라면 의심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아무리 오빠가 둔하다고 해도, 나 스스로가 다른 인격을 연기하지 못한 이상, 의심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내가 오빠를 구한 게 도대체 몇 번이더라? '바보라도 알아채겠어.' 그렇다고 그냥 놓아둘 수도 없었다. 오빠가 죽는 꼴을 내 앞에서 보란 말인가. 결국 나는 일일이 오빠를 챙겨줘야 했고, 그것은 오빠에게 '초인 여동생'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고 말았다. 만약 연애사업이라도 잘 되었다면 여동생에 대한 관심이 좀 줄어들었겠지만, 그게 안 되는 바람에 갈팡질팡, 결국 내 모습이나 보고 그리워하는 사태로 발전해 버렸다. 물론 좋은 방법이 있기는 했다. '오빠 앞에서 완벽하게 연기하면 되는 거야.' 사실 내가 좀 더 완벽하게 '여동생'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 그걸로 족했다. 그걸로 오빠는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릴 것이며, 나는 평범한 여고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플래닛 그룹 같은 대기업의 경영자도 아니고, 오빠가 지금도 집착하는 UFO슛을 날리는 축구천재도 아닌, 그냥 여동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럼 내가 왜 지구에 온 거야?' 내가 지구에 돌아온 것은, 그런 연기나 하자고 온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여동생으로서 온 거다. 그러니 완전히 본색을 숨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월영이 걱정한 바로 그 사태, 즉 '파멸적인 존재'에게 힘이 전해질 위험이 생기게 된 거다. "역시 연 미인양이 맞군요.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내가 눈치를 못 챌 줄이야. 그럼 시내의 머리에 마법의 깃털을 넣고, 그 애의 기억을 없애 버린 것도 당신의 짓이지요?" "그렇지요." 사실이니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런 거 찾다가 서울 시내를 날려버릴 뻔한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있지 않은가. "이번에 독일에서 마법사들을 물리치고, 죽은 사람까지 되살린 게 바로 당신이지요? 비록 대부분은 다시 죽었지만." "그렇지요." 그리고 월영은 마무리를 지었다. "당신은 너무 강해요. 인간이란 존재가 받아주기에, 당신이란 존재는 너무 거대해요. 그런 자가 '파멸적인 존재'에게 힘을 전해준다면, 그것 자체가 다른 세계에는 재앙이 될 거예요." 그건 당연한 염려였다. 그 문제로 인해 내가 오빠에게 마법을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고. 실제 이유는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조금 전만 해도, 나는 천사님이란 말을 들었었다. 진짜 힘을 전부 보여준다면, 과연 무슨 반응이 나올까. '난 신이 아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건 질색이었다. 예시당초 무슨 고무신이나 짚신 취급을 받기도 싫으며, 건방지게 '무결점의 완벽한 존재'로 되는 것도 사절이었다. 내가 왜 그런 존재가 되느냔 말이다. 물론 지금의 내가 평범한 소녀라고 자처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러나. "하지만 만약 내가 당신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어떻게 하실 건가요?" 힘으로 막을 건가요. 내 말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그녀가 억지로 나를 이 세계에서 쫓아내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저항을 각오해야 할 거예요.' 그런 의미였으니까. 예시당초 고향에 있겠다는 사람을 왜 '동향 사람들'도 아닌,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닌, 다른 별 사람도 아닌, 다른 우주의 인간들이 멋대로 정하려고 한단 말인가. "지금 여기서, 자웅을 겨루겠다면 해보지요. 난 상관없으니까." 나는 지팡이를 옆으로 눕히고, 팔과 수평이 되게 들었다. 명백히 도발적인 자세로. 무방비한 내 가슴을 치려면 쳐라. 단 죽음을 각오했다면 말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나로서도 고향에서 호락호락 쫓겨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월영은. "당신이 날 죽인다고 해도, 당신은 결국 지구에서 떠나야 할 거예요."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덤벼보려면 덤비라는 건가. 그러나. "!" 그 순간 나는 한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건. "오빠?" 그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오빠의 마음에, 나에 대한 의혹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거지? 나는 눈앞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빠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소녀 한 사람도..... 이것은. "설마?" 그랬다. 그건 월영의 분신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나는 월영에게 당장 지팡이를 겨누었다. 나의 눈에서는 숨김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당신, 전부 말했군요?"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월영을 아예 파괴해버릴 것이라는 결심까지도 하고 있었다. 오빠가 내 정체를 아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나는 알기에. 그것은 바로. '오빠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뜻이야.' 나와 달리 오빠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나에 대해 상세히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사자에게는 재앙이다. 안 그래도 '물고기자리의 악령'과 그 한패거리들은 나에 대해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나에 대한 정보를 지닌 '평범한 사람'을 발견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게다가 월영과 만난 적이 있고, 옆에 마법사 애인(후보)까지 두고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면,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마법사는 한때 자기들의 부하였다가, 내 손으로 풀어낸 자가 아닌가. 한마디로. '배신자라고 하겠지.' 그런 사람이 주목받지 않을 순 없다. 거기에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당연히 확인을 위해 총출동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오빠의 운명은.... 나는 즉시 우리나라로 날아가려고 했다. 이대로라면 오빠는 분명히 이 일에 휘말려들 것이며, 목숨이 붙어 있을 지가 의심스러우니까. 그러나. "가면 안 돼요 !" 내 앞을 가로막는 월영. 그녀는. "기다려요. 녀석들을 끌어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당신은, 평범한 인간을 미끼로 쓰겠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월영은 그런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먼저 털어놓았으니. "할 수 없어요. 당신에 대해 알고 있고, 당신이 절대 내버려두지 못할 관계자를 노출시키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녀석들은 절대로 숨어있는 곳에서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 "이해해 주세요. '물고기자리의 악령'을 끌어내려면, 그들이 관심을 끌만한 미끼를 던져야 해요. 그리고 당신의 오라버니라면, 충분한 미끼로서의 역할을 하겠지요. 녀석들에게는 당신을 막을 카드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이건 !" "그들이 당신 오라버니를 잡아가면, 분명히 '물고기자리의 악령'에게 데려갈 거예요. 그러면 녀석들을 역추적해서 그들이 숨은 우주를 찾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소탕은 간단해져요." 말이야 맞는 말이었지만, 그 계획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 계획은 어디까지나, 미끼로 쓰이는 사람이 엄청난 힘을 숨긴 실력자여야 안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하지만 오빠에게는 마법도 검술도 무공도 없다고요 !" "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월영. "그럴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의 친 오라버니라면, 10서클 마법 정도는 충분히..." "그게 되었으면 독일에서 그렇게 생고생을 했겠어요 !" 하지만 그래도 내 말을 안 믿는 그녀. "그럴 리가 없어요. 만약 문구가 당신의 오라버니라면, 당연히 마법 정도는 익히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우주 최강의 마법사이면서." "여동생이 최강이라고 오빠도 최강이라는 법은 없어요 !" "믿을 수 없어요 !" 그런데 이 여자는 뭘 믿고 그렇게 억지 주장을 하는 건가? "설령 문구가 아무 힘도 없다고 해도, 독일에서의 그 일이 있었는데 설마 소환수 정도도 붙여두지 않았다는 건가요? 수호정령도? 당신처럼 치밀한 마법사가 그럴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요." "그랬으면 당신이 벌써 눈치챘을 걸요?" 그런 눈에 띄는 짓을 할 정도로, 나는 과시욕이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월영은 내가 수호정령을 오빠에게 붙이고는, '자신도 모르는 기묘한 수법'으로 숨겼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눈앞에 이계에서 온 괴물 마법사가 있는데, 그런 수법을 쓸 수 있는가? '안 된다고.' 상대의 수준이 얼마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런 과도한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들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결국 결과는 똑같아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소환수 하나를 붙여둬야 할지도 모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되겠지만. 하지만 월영에게는 그게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놀라서. "설마, 그럼 당신 진짜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월영.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녀는 처음부터 오빠에게 내 정체를 누출시키는 작전을..... '엄청난 착각 속에 세웠던 거야?' 이 사람은 내가 속임수의 달인이니, 내 오라버니도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말이 더욱 가관이었으니. "당신, 정말로 오빠한테 아무 것도 안 가르친 건가요? 그의 무력함은 위장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나는 월영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월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모양이다. "그럼, 그는 잡혀가더라도 녀석들에게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다가 일격을 가할 수 없다는...?" "당연하지요 !" 그런 작전을 수행하려면 나하고 합의를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월영이 하는 말은 한심하게도. "그럴 수가. 그럼 그가 당신의 정체에 대해 듣고 괴로워한 건 연기가 아니라...." 이 사람, 그걸 연기라고 생각한 건가. 내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변명처럼 한 마디를 툭 던진다. "하지만 시내가 옆에 있으니, 녀석들도 그녀가 문구의 옆에서 떨어질 때까지는 습격을 해오지...." 쾅. 그녀의 희망을 다 부숴 버리는, 마법의 발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오빠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사념도.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기랄 !" 내 머리 속에 흘러 들어오는, 시내와 클라라의 사념. '문구야.' 나는 손을 모으고, 그냥 서 있었다. 여동생이 여동생인지, 그걸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도 월영 선배에게 그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으니까. '나도 그건 알지 못해.' 조금 전에 선배가 나까지 결계에 가둔 건 좀 너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구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었던 선배의 생각도 이해하니까. 하지만 솔직히 놀랐다. 나에게 심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친구이기도 한 미인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니. 아니,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라니. 그 애가 진짜로 문구의 여동생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 친구인 건 맞아.' 나는 그 애가 여섯 살이 넘은 후에 사귀었고, 따라서 그 애는 정말로 내 친구다. 하지만 월영 선배에게 그에 대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놀랐다. 내가 문구를 파멸의 길로 몰아갔었고, 그걸 저지하고 나에게 마법의 깃털을 꽂아버린 마법사가 그 애라니. '도대체 그 애는....' 사실 나는 내 머리를 쪼개버린 그 마법사에 대해 원망을 많이 했었다. 미주 선배에 대한 기억을 다 날려버린 사람도 그 마법사이고, 내 머리를 쪼개고 멋대로 그런 걸 넣은 것도 그 마법사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 월영 선배는 이야기해주었고. '미인이가 날 구했다는 거야?' 비록 초보 마법사이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안다. 물론 그건 미인이가 정말로 월하소녀(문구가 말한 표현대로라면)일 경우의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그 애가 정말로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라면 선배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애는 어떻게?' 그런 힘을 지니게 되었을까. 역시 다른 세계에서 온 초 마법사인가.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저 금발머리의 여자아이는 문구와 무슨 관계일까. 월영 선배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펑. "이건?" 무엇인가. 어렴풋이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 꼴을 본 금발 소녀가 의아해한다. 하지만 이건. '혹시 그들이?' '미스터 문구.....' 모처럼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내가 그 문구의 선배라는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저는 그에게 여동생에 대해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결계를 세 번 쳤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법사라면. "카아악." 그 이미지가 생각나서,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그때의 해골같은 여자가 내 이마를 잡고, 나에게서 무언가를 빼내던 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에 미스터 문구에게....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나였다. 그 여자에게 무언가를 빼앗겼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그대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났을 때 세상은 분명히 다르게 보였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은 인간의 피와 살. 그리고 그의 혼. 내가 원했던 것은 그걸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카아악." 나는 그걸 원했었다. 마음 속으로는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먹고 싶어.' '먹고 싶어.' '먹고 싶어.' 사람의 살을 먹고 싶다. 사람의 피를 마시고 싶다. 그리고 사람의 혼을 빨아먹고 싶다. 그것은 내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느낌 때문이기도 했다. 그 느낌을 지우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본 것은, 먹음직스러운 인간의 고기. "피, 피가 모자라."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한국에서 온 소년의 목에 손을 내밀었다. 나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 여자의 비웃음이 생각났다. 그 여자는 나를 보며 분명히 조롱하고 있었을 거다. 다만. "카아악." 내가 미스터 문구의 목숨을 빼앗기 전에, 그 여자는 나를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비록 그게 미스터 문구를 살려주거나, 내가 식인귀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아주 잠깐동안 나는 그 상황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순간일 뿐, 그 와중에도 내가 생각한 것은. '저걸 먹고 싶어. 저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꺼내서 씹어 먹고 싶어. 그 피를 마시고 싶어. 제발. 제발. 나에게서 먹이를 빼앗지 마.' 참으로 추한 욕망이었다. 내가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떨어져서, 팔다리가 부러지며 나뒹굴었을 때에도, 나는 주위의 살점들을 찾았다. 살인. 식인. 피. 시체. 그때의 내 머리는 완전히 돌아버린 듯했고. "먹어. 먹어. 먹어." 그 말만이 내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주위를 바라보며..... "힘은 있지만, 그뿐이군요."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고, 나는 하늘에 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미스터 문구?" 그녀. 미스터 문구를 다정하게 끌어안은 그녀. 그 여자가 들고 있는 별이 박힌 지팡이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가 바로 미스터 문구의 여동생이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 정도로 둘은 잘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안 돼. 사람 고기를 먹고 싶어." "이러지 마.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 "제발 부탁이야. 사람을 죽이게 해 줘. 그 뇌수를 삼키는 건 너무 황홀하단 말이야." 내 주위에 함께 떠 있던 사람들..... 아니 좀비들과 더불어. "안 돼. 이거 놔. 난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 먹고 싶어. 먹고 싶단 말이야 !" 이렇게 외칠 뿐이었다. 물론 내가 아무리 외쳐봐야, 사람의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고. "카아악." 단지 짐승들의 울부짖음으로만 들렸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다시 목구멍 안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었다. 그 분의 눈이, 우리의 입을 다물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가엾은 사람들." 그 눈이, 나와 다른 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어둠의 충동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는, 비록 날개는 없었을지언정 분명히 천사였다. 바로 나와 같은, 짐승들의 파괴적인 살육충동을 사그라지게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지팡이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서. 부우웅. 아름다운 달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그때 우리는 잠시나마 찬란한 별이 되었고, 우리들의 고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비록 불에 타고 있었지만, 피가 도시를 덮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고향을. 또한. "끄으으... 으으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그 여자가, 그 식인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왜 내가 그 여자를 잊었던 걸까. 나를 이렇게 추하게 만든 장본인인데. 하지만 그것은 그 분, 천사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그 분은 살인마를 슬픈 듯이 바라보시며.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그 분의 외침이 무슨 의미였을까. 그 당시의 나는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단지 그 분의 의지에 따라, 도시로 날아 내렸을 뿐. 우리의 고향. 우리의 몸. 내가 가는 곳은 바로 내가 떠났던 바로 그곳.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채, 산산조각이 난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피, 피를 줘....." 나는 하늘에서 날아오는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나에게 오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분명히 나에게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에게 온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가 먹지도 못할 것인데. 그것보다 나는. "피가 모자라....."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짐승의 울부짖음일 뿐이었다. 어차피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아까 놓쳤던 그 소년의 목을 물어뜯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며 그의 따뜻한 무언가를 빨아먹고 싶었을 뿐. 그러나. "안 돼." "안 돼." 나와 내가 만났고..... "..........." 그 일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미스터 문구의 은혜로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을 노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용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은혜라도 갚고 싶어.' 그냥 여기서 죽어버리면, 나는 그에게 빚만 남기고 떠나는 셈이다. 내가 자살함으로서, 그는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은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살기로 했다. 언젠가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며 살고 싶다고. 하지만 막상 미스터 문구가 괴로워하는 지금 나는. '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간다. 그의 어깨를 보듬어 안고, 그를 위로해주고 싶다. 그런데 저 시내라는 사람은 왜 갑자기 두리번거리는 것일까. '젠장.' 그 시점에서 시내와 클라라의 사념이 끊어졌다. 아니, 끊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똑똑하게 보였다. 아니, 보인 게 아니라 느껴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나는 이미 그들의 앞으로 이동하고.... "그렇게는 안 된다 !" 이건? 마법사들의 결의인가? 조금 전 아프리카에서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다른, 진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아무리 진짜로 강하다고 내세워봐야, 사실은 빌린 힘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 나는 그 마법사들을 단번에 쓸어내려고 했지만, 그들은 미리 주문을 준비한 듯, 동시에 마법을 폭발시켰다. 이건? "Cursed slayer(원자마법 레벨 7의 핵폭발마법)?" 그게 아니었다. 지금 폭발하는 것은 분명히..... '믿을 수 없어.' 그들은 정식으로는 나를 이기지 못하니까, 아예 서울시 한가운데에서 수 십 발의 핵을 폭발시킨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마법이 아니잖아?" 그랬다. 그들은 마법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아예 핵폭탄을 숨겨 가지고 와서 터뜨린 것이다. 마법으로 하면 반드시 들키니까, 안 들키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건가. 핵의 섬광이 작게 부풀어오른다. 이런. "늦으면 끝장이야 !" 오빠와 클라라, 시내의 모습이 결계 안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쪽에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내가 조금만 늦게 움직인다면, 우리나라는 그대로 끝이므로. 지금은 핵폭발이 서울시를 덮치는 순간인 것이다. 아니, 서울시만이 아니었다. 이건. 쿵. 쿠쿵. 쿵. 수 백발의 핵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그리고 북경이나 도쿄에서도. "이것들이 !" 다행스러운 것은, 내 움직임은 지금 빛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폭탄의 내부에서 핵분열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행동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결계 마법을 써서 힘으로 막아낼까.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힘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그리고 그럴 경우, 엄청난 빛이 방출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저건 원자폭탄이 아니고 수소폭탄이며, 그렇다면 최소한 레벨 8짜리 원자마법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상당히 귀찮아진 셈이다. 그러나. [[Energy drain(에너지 드레인. 상태변화마법 레벨 8. 적의 힘을 흡수한다)]] 이 경우 핵분열반응을 멈추게 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이미 분열해버린 걸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은 핵의 폭발로 인한 방사선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걸 막아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을 억지로 힘으로 억누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레벨 8의 결계마법으로 이걸 막다가, 만약 힘에서 밀리기라도 하면? 물론 내 힘의 크기로 보아 그럴 리는 없지만, 동시에 수 백 개의 결계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 빨아들이면 그만이지." 하지만 이 방법에는 한가지 결함이 있었다. 핵폭탄이 터졌을 때, 그 힘을 정면으로 받으면 어지간한 인간은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런데 내가 지금 구사한 에너지 드레인이라는 마법은 그 힘을 나에게 끌어오는 것이고, 그 결과. 치이이잉. 핵폭발로 인해 생기는 방사선과 열선이, 모조리 나에게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 나는 급히 그 힘을 제어했지만, 핵의 폭발로 인해 생기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는 내 몸 안으로 들어와서. 쿵. 쿠쿠쿵. 우르릉.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당장에 증발해버렸을 것이다. 그 에너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나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만. 그러나 이런 힘을 몸에 계속 담아두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대마도사 아인슈타인의 가르침에 따라. [[Formula of Einstain(아인슈타인의 공식)]] 레벨 10짜리 원자마법인, 체내의 에너지와 물질을 마음먹은 대로 변환시키는 마법이 발동하면서, 핵의 폭발적인 힘은 모조리 물질로 고형화되어 굳어졌다. 그러나 이걸로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녀석들이 어디에 또 핵폭탄을 숨겼을지도 모르고,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오빠는...... [[Meteor(운석 소환)]] 서, 설마? 그제야 마법을 완성한 마법사들이 외운 주문은, 분명히 이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운석을 지구로 직접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구우우웅. "우왓 !" 나는 그 마법이 다른 소행성에게 걸린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건 분명히.... "지구?" 그랬다. 그들은 운석을 지구로 소환한 것이 아니라. 지구 자체를 운석으로 해서 태양 쪽으로 소환한 것이다 ! 지구가 태양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자기 궤도를 이탈해서. "망할 녀석들 !" 나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기에. 안 그래도 내가 에너지 드레인 마법으로 핵폭발의 힘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그 힘은 나를 향해 날아왔고.. 휘이이잉.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힘을 내가 모두 빨아들인다고 해도, 그 힘이 나에게 오면서 주변 공기를 흔들어놓는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물론 그래봐야 그 영향을 받는 사람은 극히 적었지만. "으악." "으윽." "크억." 완전히 영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최초 폭발 시에, 백 만 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이라고 해도 어쨌든 그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은 사실이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공간은 핵으로 초토화되었으니까. 비록 그 힘이 도시를 뒤덮기 전에 내가 그걸 찾아내기는 했어도. 즈즈즈즈즈. 방사선이나 열선을 맞은 사람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망할 놈들.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만 배치해놨어." 나는 그들을 살려주면서, 동시에 지구의 움직임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대응마법을 외운다면, 그들은 더 지독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혹시 그들은 지구 전역에 핵을 잇달아 매설해두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좋아. 한 번에 끝내주지." 물건을 부수는 것은 쉽지만, 다시 수리하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그것이 인간의 생명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특정조건이 만족되지 않는 한 그를 되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건 개인적으로도 금기이기도 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스러운 것은, 이미 이런 경우에 사용할 주문이 나에게는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Cancelation Meteor(운석소환 중지), Spell inhibition(주문금지), Almighty cure(만능치료), detect nuclear bomb(핵폭탄 탐지), Reverse gravity(중력 역전) !]] 내가 미치지. 저들의 만행을 막기 위해, 나는 고위마법을 무려 5개나 동시에 외워야 했다. 겉보기에야 별 거 아니겠지만, 이 주문은 하나 하나가 엄청난 것들이었다. 우선. '운석소환중지마법만 해도....' 이건 간단히 말해서, 녀석들의 Meteor(운석소환)를 중지시키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지구를 움직일 정도의 마력이라면 절대로 적은 양이 아닐 것이고, 따라서 여기에 들어가는 마력만 해도 엄청났다. 게다가 Meteor 자체가 레벨 9짜리 시공마법이니, 그 난이도부터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상황이다. 하지만 그 뒤의 마법이 더 문제였다. '주문금지마법은....' 녀석들이 엉뚱한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는, 레벨 10의 역주문 마법이었다. 당장 레벨 10이라는 것만으로도, 일반 마법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주문이다. 게다가 내가 쓴 것은 적 마법사 수 십 명에게 모두 걸어버리는 타입이다. 당연히 엄청난 마력소모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다음은 만능치료....' 이것 역시 만만한 게 아니었다. 모든 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이 죽지만 않았으면 모든 이를 건강하게 만드는 무적 치료 마법. 당연히 레벨 10의 생명마법인 데다가, 그 적용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핵폭발에 휘말려들어, 몸이 절반은 타버린 사람이나 원자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 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모조리 이 마법으로 치료해주는 것이다. 내가 조치가 빨랐으니까 망정이지, 늦었다면 부활마법까지 동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고달프다. 도대체 한 번에 고위마법을 몇 개나 써야 하는 건가. '날 죽여라. 죽여.'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머지 2개의 마법은 레벨 10이나 11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편한 건 아니었다. 탐지마법의 경우 고작 6레벨의 정신마법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핵무기를 일일이 찾아내는 건 절대로 '고작'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이 땅 위에 놓아뒀는지, 그게 아니면 지하 1km에 매설해 두었는지 내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력역전까지.' 그 많은 핵무기의 위치에 이 마법을 발동시키는 거다. 레벨 7의 중력마법 역주문이라고 우습게 볼 일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핵무기가 아주 많이 있으며, 따라서 이 마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지역도 한 두 군데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결국, 불평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많잖아 !"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은 강대국의 핵병기까지 다 탐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게다가 문제는 더 있었다. 마법의 적용범위가 워낙 많고 광범위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이 나라의 핵무기도 위험하지 않은 축에 속하나?" 이런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국제정세에 간섭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물론 N모국이나 C모국 등은 도무지 핵을 가져도 될 나라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핵을 빼앗은 후, 다시 돌려줄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에라 모르겠다." 일단 다 빼앗아둔 후, 나중에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적들의 하는 짓으로 보아, 그것도 언제 폭발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걸 안 돌려준다면. '핵무기 공장은 호황을 맞을 거야.' 이 사태가 수습된 후에, 새로 핵을 만들어서 채워야 할 것이니까 말이다. 국제사회가 비난하든 말든, 그런 건 처음부터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엄청난 비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남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했었다. 사람들이 반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 기회에 빼앗아두는 건.... '그건 나중에 고민하자.' 일단은 이쪽이 급하니까. 내 마법이 발동되자, 극적인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쿠구궁. 우선 지구를 태양으로 끌고 가던 힘이 없어졌고, 적 마법사들이 외우던 주문들이 끊어졌으며, 핵폭발의 여파로 다친 사람들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각지에 묻힌 핵폭탄들이 감지되었으며, 그것들이 중력역전마법으로 인해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조치가 빨랐기에 죽은 사람은 없었고, 그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천 만 분의 1초나 지났을까.' 사람이 죽지 않은 건, 순전히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수준의 마법을 연달아 쓴다는 것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마법사가 이러면, 마력 고갈로 기절할거야.' 그나마 내가 오빠 말대로 '지상 최강의 여동생'이어서, 이걸 감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피곤을 호소하며 이부자리에 뻗을 권리 같은 것은, 나에게 없었다. 만약 내가 머뭇거린다면, 이런 마법의 연발을. '한 번 더 해야 할지도 몰라.' 그건 곤란하다. 아무리 내가 강하다고 하지만, 이런 짓을 또 하기는 싫다. '마력을 조달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부터 아주 큰 마법을 써야 하니까 말이다. 저 멀리서 결계 마법에 갇힌 오빠가 어디론가 잡혀가는 게 보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미안. 오빠. 난 지구 전체에 대해 책임이 있어.' 원래 소방관은, 자기 가족이 화재 현장에 있으면 그들을 가장 나중에 구조해야 한다고 한다. 사적인 문제보다 공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지금은 그런 입장에 처해 있었다. 오빠 하나를 위해 지구 전체를 내팽개칠 수는 없으므로. 그리고 지금 당장 걸어야 할 마법도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Fly(비행 마법)]] 나한테 거는 게 아니다. 저 핵폭탄들에게 거는 거다. 그들이 비행마법에 걸리자, 그들은 일제히 나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서로 부딪치는 사태를 막으면서, 나는 그들을 내 옆에 모아 두었다. 이건 좀 있다가 처리하기로 하고. 지금 급한 것은 녀석들이 내 주문금지마법을 깨부수기 전에..... [[magic circle activation(마법진 발동) !]] 쿠르릉. 대기가 흔들렸다. 조금 태양 안쪽으로 이동하다가 갑자기 정지하는 바람에, 지구상의 생명들에게는 태양이 멈춘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상회복이 된 것이 아니다. 그저 공전궤도가 약간 안쪽으로 들어간 채, 태양 주위를 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녀석들의 주문을 취소시켰다고 해도. 쿠르릉. 지구 자체가 태양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즉 이것은, 사람이 건물 위에서 뛰어내린 상황과 같았다. 사람을 잡고 아래로 급강하하는 괴물 독수리는 내가 때려잡았지만, 떨어지는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은 거다. 단지 태양으로 빨리 날아가던 상황이, 중력에만 의지하여 날아가는 상황이 된 것일 뿐. "지구 기후가 뒤바뀌기 전에 서둘러야 해." 그래서 내가 마법진을 발동시킨 것이다. 물론 방해하고 싶어 안달하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그 마법사들은 내가 주문금지마법을 외워버리는 바람에 입이 막혔고, 우선은 입을 뚫어야 했다. 뭐 방어마법이야 나름대로 열심히 걸어둔 모양이지만..... "공격마법은 그게 안 될 걸?" 방어마법이야 미리 마법의 도구를 준비해서 강화시킬 수 있지만, 공격주문은 그게 안 된다. 물론 마력의 증폭을 통해 공격마법의 위력을 늘리는 건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소환수나 공격용 기계를 준비하지 않은 이상, 공격마법을 발동하려면 마법사가 주문을 외워야 가능하다. 그러나 주문을 발동시키는 속도는 내가 압도적으로 빨랐으니. '숫자로 메울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난감했다. 그들에게는 미안하게도, 나는 마법을 동시에 여러 개씩 발동시킬 수 있는 데다가. 쿠르르르릉. 이제는 너무 늦었다. 지구 전체에 마법진이 발하는 은은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으므로.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준비한 궁극의 지구 보호 작전. 그 이름하여.... "정한 게 없구나." 뭐 할 수 없나? 일단은 번드르르한 간판보다는 실적이 중요하니까,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이름을 정해주기도 너무 늦었고. 일단은 마법진이 일으키는 현상을 구경이나 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녀석들이 방해하면. '멋지게 한 방 날려주고.' 하지만 지금 저 마법사들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녀석들은 일단 주문금지마법을 풀어낼 때까지는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니까. 그리고. '오빠를 납치한 대가도 받아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내 속이 시원해질까. 그러는 동안 지구는 마법진이 내쏘는 빛에 뒤덮이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에선. "시공간이..." 내 옆에 있던 월영이, 놀란 눈으로 아래를 바라본다. 쿠구구구궁. 지구는 시공간의 구멍, 웜홀을 통해 점차 우리 우주에서 이탈해가고 있었다. 지구 주위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안에 음에너지가 가득 찬다. 그리고 지구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마법진에 의해 보호되면서. 그리고. 구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지구가 있던 자리에 푸른빛의 풍선 같은 별이 하나 떠오른다. 이것은 지구의 중량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으로 인해, 태양계의 중력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별이었다. 물론 그 별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지는 못하지만, 대기권의 푸른빛은 마치 지구를 연상케 했다. 다만. '지구처럼 생명이 풍족하게 존재하지는 못해도.'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지구는 멀리 사라져갔다. 시공간의 정지로 인해, 모든 것이 잠들어버린 상태로.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잘 된 것 같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동안 적 마법사들을 때려잡은 후 그들의 머리에 마법의 깃털을 달고, 지구 각지에 지름 10m는 되는 보석들을 만들어서 묻어두고, 그 안에 마법진을 설치한 수고가 이제야 빛을 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건 절대로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진공상태여서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내가 한 짓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그런 것이다. 확실히 내가 지금 한 일은. "레벨 10짜리 마법을 연사, 거기에 지구 전체를 공간 이동시키고 다른 별을 소환....." 마법사들이 들으면 뒤로 나자빠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치를 떨며 항의할 수준의 마법사용이었다. 다른 건 다 넘어가더라도. "도대체 그렇게 엄청난 마력이 어디에 있는 거냐 !" 그리고 그렇게 항의할 마법사가, 내 옆에 있었다. 물론 나를 적대시하는 저 '물고기자리의 악령'의 꼭두각시들, 즉 악마에게 혼을 판 마법사가 아닌, 진짜로 세계의 이치를 탐구하는 그런 마법사가 말이다. 마법의 완성을 남의 손에 맡기는 자들이라면 몰라도. "말도 안 돼요 !"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월영은 부르짖었다. 그녀는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그저 나에 대한 증오심만 불태우는, 주문 외우기와 멀쩡한 사람의 뇌수를 갈라먹는 데만 열중하는 녀석들과는 역시 급이 틀렸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데. '입 좀 닫으세요.' 하지만 놀라는 사람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싶어도, 정신마법을 걸지 않는 이상 뾰족한 수가 없었다(걸리지도 않겠지만). 그저 월영이 스스로 알아서 진정하기를 바랄 수밖에. 제대로 수업한 마법사인 이상 그 정도는 알아서 잘 하겠지. 아니, 그녀의 경우는 마법사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건가? '마법사라는 건 악마에게 힘을 비는 인간이지, 스스로 힘을 지닌 인간이 아니니.' 그러나 이 경우에 진정하라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무리였다. 보통 레벨 10짜리 마법을 연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괴물을 눈앞에 두었으니. "이,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 "저, 저 괴물 같은 년이 !" 저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인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게, 나로서는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월영은 당장 나를 노려보며. "도,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하겠다는 투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 마법사답게, 곧 자신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폭발을 위한 전조였으니. "말도 안 돼요 !" 그리고 나서 월영은 한바탕, 항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항의라기보다는 질문이라고 해야 할까. "지구 전체를 집어삼키다니 ! 아무리 지구를 저들의 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그를 위해 지구 전체에 마법진을 쳐두고 동시에 발동시키다니, 이해가 안 돼요 !" "왜 그래요?"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그러나 월영은. "도대체 마법진에 그런 마법을 어떻게 집어넣었어요? 아무리 순간이동마법이 고작해야 레벨 9짜리 시공마법이지만, 저렇게 대상이 무식하게 크면 그건 충분히 레벨 10에 들어간다고요 ! 거기에 동시에 다른 별을 소환하다니, 저렇게 되면 레벨 10짜리 마법이 두 개나 동시에 발동되는 셈이에요 ! 그런데 당신이 직접 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마력을 얽어서 만든 마법진으로 어떻게 저런 정교하고 복잡한 마법을 발동시켰지요? 게다가 지구가 움직일 때 보니, 내부의 시공간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였던데, 그러려면 레벨 8짜리 시공마법인 Time stop(시간정지)도 같이 발동해야 한다고요 ! 아니, 저렇게 대상이 크다면 저건 시간정지를 대체 얼마나 넓은 범위에 쓴 거야? 거기에다가 중력의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순간적으로 두 개의 별을 바꿔치기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걸 해낸 거예요 !" 잠시 한숨을 돌리고, 월영은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문희의 수다는, 그녀를 능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계인조차, 아니 다른 우주의 마법사조차 한숨 돌리고 말을 하는데, 그런 식의 여유도 없이 계속 말을 늘어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저렇게 거대한 별을 움직이다니."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월영은 눈앞의 푸른 별을 노려보았다. 마치 우주탐사선에서 찍은 해왕성 사진을 연상시키는, 파란별을 말이다. "그 많은 마력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요? 조금 전에 당신을 봤을 때는 그 몸에 마력이라곤 한 방울도 없었는데, 게다가 지구는 어디로 날려버린 거지요? 설마 다른 우주로 보낸 건가요? 단거리를 순간이동마법으로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마법진에 그런 마법을 연쇄적으로 발동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게 가능한가요? 아니, 그보다." 그보다? 월영은 다시금 숨을 몰아쉬고 외친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즉시 방어마법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 저 녀석들, 역시 사람 같지가 않아. 우주공간에서 공기도 없이 살아 있다니. 하지만 그런 내 눈을 보자마자 그들은 일제히. "네 년보다야 사람 같다 !" 이번만큼은 그 항의에 답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지금 내가 한 짓은 인간의 경지를 초월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월영의 항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결정적으로 !" 모두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러고도 전혀 지치지 않다니, 역시 당신은 인간도 아냐 !" 다시 침묵이 우주를 지배했다. 딱 1초 후. "이제 항의는 다 하셨지요? 수사관님." 씩씩거리는 월영을 향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항의를 받아줄 여유는 나에게 없으니까. 지금 급한 건 다른 세계의 수사관의 항의문을 읽어보는 것도 아니고, 저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더 급한 일은. '오빠.' 그렇다. 오빠가 울기 전에 구해오는 것이 더 급했다. 내가 지구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난사하는 동안, 그들은 감히, 내 눈앞에서 오라버니를 납치해간 것이다. 그 외에 부수적으로 몇 명 더 데려간 것 같은데....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꾸물거린다면. '오빠는 죽을지도 몰라.' 안 그래도 유리그릇보다 연약한 오빠를 생각하면, 서두른다고 해도 늦을 수도 있다. 내 짐작대로라면 그들이 오빠를 데려간 곳은 바로. '아마 녀석들의 본거지일거야.'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마법사들을 무더기로 내버리면서까지 납치작전을 실행할 리가 없다. 최소한 이계인 한 명 정도는 그 안에 버티고 있을 것이다. 일반 마법사로는 나를 이길 수 없으니까. 아니, 이계인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는 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몇 명 더 있을 거야.' 물론 다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다섯 명 모두 한 자리에 있다가, 나에게 걸려서 일망타진 당하기는 싫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신중했기 때문에, 내가 여태까지 그 '물고기자리의 악령'과 그 졸개들을 잡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강하다고 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법을 난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흔적이 남았어.' 결계마법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그 안의 사람은 이미 다른 곳으로 끌려간 후이니, 마법이 사라진 후에 아무리 주위를 뒤져봐야 이미 때는 늦다. 아마 내 눈을 속이려고 그런 짓을 한 모양인데..... '위장한다고 내가 속을 줄 아나.' 우주와 우주 사이를 왕래하려면, 마법사는 순간이동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순간이동마법, 즉 레벨 9짜리 시공마법인 텔레포테이션(Telepotation)은 이 경우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다른 우주와의 왕래를 위한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는 좀 더 강력한 레벨 10짜리 시공마법인, Dimension travel을 사용해야 했다. 이게 구분이 되어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어느 우주로 갈지 정하고, 그 우주와 공간터널을 연결해야 하니까.' 물론 순간이동을 하려면 굳이 웜홀(공간터널)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우주가 대체 어느 것인지 알아내는 과정이 없다면, 무턱대고 순간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우주 외에도 이 세계에는. '무한한 숫자의 우주가 있다고.' 그 무한정한 우주의 어느 쪽에 떨어질지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순간이동을 하면?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져서 미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그것이 내가 여태까지 녀석들을 소탕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아무리 내가 우주파괴의 마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녀석들이 어느 우주에 숨었는지 모른다면 그런 건 있으나마나니까. '빈대 잡으려고 지구 전체를 태울 수는 없잖아.' 녀석들이 숨은 우주를 찾을 때까지 무작정 우주를 때려부순다? 그랬다가는 무고한 인명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해결책을 채택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고, 그래서 나는 두더지잡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말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기다려. 오빠.' 뭔가 남녀가 뒤바뀐 것 같지만, 현대니까 상관없었다. 일단은 오빠를 구해놓고, 불평을 듣든지 말든지 하자. 나는 즉시 순간이동을 준비하고..... [[Absolute death(절대즉사마법 : 죽음마법 10레벨)]] [[Power order kill(절대명령죽음 : 언령마법 10레벨)]] [[Anti-particle cannon(반입자포 : 원자마법 9레벨)]] 느닷없이 사방에서 마법이 날아들었다. 감히 오빠를 구하러 가는 나를 막으려고, 저 떨거지 마법사들이 나에게 마법을 건 것이다. 하지만 이건 미친 짓이었다. 감히 나에게 도전하다니. 평소라면 놀면서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녀석들의 빈틈을 찾아, 이계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그 목적이 달성된 상태다. 그렇다면 굳이 녀석들을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게다가. '저런 놈들한테 마법을 방해받을 내가 아니라고.' 나는 즉시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니, 그 중 하나는 내가 발동시킨 게 아니고. [[Automatic - invincible force(자동발동마법 - 절대무적상태)]] 지팡이가 해버렸다. 혹시 몰라서 방어마법을 비롯해 자동으로 발동되는 마법을 대대적으로 손을 봤는데, 그게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에게는 상당히 의외였는지. 팅. 팅. 팅. 반입자의 폭풍이 나를 휩쓸고, 죽음의 마법 두 가지가 나를 직격했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자, 녀석들은 당황했다. 내 주위를 감싼 황금빛 기운을 보자, 녀석들은 그제야 내가 뭘로 자신들의 마법을 막았는지 알아챈 모양이다. 그러나. "비, 빌어먹을 !" 그들은 급히 다른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물론 그들이 무슨 마법을 쓰더라도, 그들은 내 방어마법을 해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레벨 11짜리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속성으로 마법사가 된 자는, 절대로 그걸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단순히 마법근원체와 하나가 되는 것만으로 사용이 가능한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 자신이 지팡이 없이 레벨 10의 마법을 자유로이 쓸 수 있을 때, 비로소 문이 열리는 것이니까. 그리고 저들은 지구인이고, 긴 세월을 수련으로 보낸 자들이 아니었다. 고로. '너희들에게는 불가능해.' 나는 그들을 비웃으면서, 마법주문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이 발칙한 자들에게 징벌을 내리기 위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도 족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 무슨 짓을?" 내가 뭘 하는지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다. 월영은 상당히 당황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수사관이다. 레벨 10짜리 떨거지들이야 충분히 혼자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생 좀 하겠지만.' 어쨌든 떨거지라고 해도 레벨 10이다. 눈 감고 요리할 수준의 녀석들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런 녀석들을 체포하는 것이, 바로 수사관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 저 녀석들을 부탁해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 세계를 떠나기 위해서. 물론 곧 돌아오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Dimension detect(차원감지. 시공마법 10레벨) !]] 우선은 그들이 오빠를 끌고 간 우주와, 내가 사는 이 우주와의 물리법칙이 맞는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서로간의 물리법칙이 틀리다면, 그 뒤의 일은 매우 복잡해진다. 지금의 내 몸으로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물리법칙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기본입자의 존재방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니까.' 아니, 그 법칙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본입자는커녕, 기본적인 에너지나 시공간의 구성 자체가 확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무턱대고 그곳으로 날아간다면, 들어가기도 전에 내 몸이 부서지거나, 사라지거나, 아니면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고 퉁겨져서 우주 사이의 미아로 전락하는 수도 있었다. 물리법칙이 전혀 다른 세계의 인간이 우리 우주에 올 경우에.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니 그런 세계의 인간이 우리 우주에 들어오려면,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에 따라 몸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다른 물리법칙의 우주에 들어가려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렵다고.'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그 이계인들이 오빠를 그런 우주에 데려갈 가능성도 거의 없음이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런 짓을 할 경우. '몸을 새로 만들고 혼을 그 안에 끼어 맞춰야 하는데.' 당연히 그것은 극히 어렵다. 아니, 그들의 재주로 그게 가능할지, 그것부터가 의심스럽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오빠는 죽어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오빠를 납치해 가는 것은. '인질로 삼자는 거지, 죽이자고 하는 게 아냐.' 내가 오빠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론 그들이 나에게 당한 일에 대한 화풀이로, 그런 짓을 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큰 손해였다. 이용가치가 있는 인질을 죽일 정도로 그들은 돌 머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가 발생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조하게 내 마법의 발동을 기다렸다. 그리고 내 차원감지마법이 완성되고. '..........문제없어.' 다행이었다. 그들이 오빠를 끌고 간 곳의 물리법칙은 이곳과 같았던 것이다. 하긴 그들로서도 일반인인 오빠에게 그런 처치를 하는 건 낭비라고 여겼겠지. 그런다고 내가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럼. [[Dimension travel(차원여행 : 시공마법 10레벨)]] 내 마법이 발동됨과 동시에, 나는 우리 우주로부터 사라졌다. 놀란 눈의 월영과, 더 놀라는 마법사들을 뒤에 남겨두고. "야 ! 도망가는 거냐 !" 맘대로 생각하셔. 그리고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들을 잡는 임무는 원래 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계인의 졸개들이고, 이계인 범죄자들과 그 한패거리들을 잡기 위해 파견된 게, 바로 월영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알아서 하라고 해 !" 나도 남의 덕 좀 보고 살자고. 두 개의 우주 사이로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생겨난다.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고, 미미한 것이었지만 한 마법사가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나 약하기에, 잠시 열렸던 공간의 문은 다시 닫힌다. 부웅. 그리고 나는 다른 우주에 와 있었다. 오빠가 끌려간 흔적은 바로 이 공간에서부터 우리 우주와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곧 사라져 버렸지만. "음에너지(영하 273도 이하, 즉 절대 0도 이하의 에너지상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생길 수 없으나, 현대물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만들 수 있음을 실험으로 확인했다)의 크기로 보아, 적어도 대여섯 명은 납치 당한 것 같아." 3차원 웜홀(worm hole : 벌레구멍). 즉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이어서 우주여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공간터널은, 보통은 여행을 위한 통로로 사용될 수 없었다. 작은 물질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면, 즉시 구조가 변형되어 2개의 블랙홀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에너지로 둘 사이의 공간을 채우지 않으면. '영영 블랙홀에 갇혀버리니까.' 당연히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녀석들도 웜홀에 음에너지를 채웠을 것이고, 나에게는 그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적어도 몇 사람이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도. 아마 몇 군데에 동시에 결계마법을 사용하고, 그 안에 갇힌 사람을 모아서 한꺼번에 이 우주로 날린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굴 더 납치했을까.' 일단 부모님은 절대 아니다. 우리 우주에 잘 계시니까. 하지만 지금 지구에서 없어진 사람들을 조사해본다면..... "확인 안 해도 되겠어." 누군지 짐작이 간다. 여기에 남아있는 사념만 모아서 들여다보아도, 답이 다 나오니까. 아이고. 오빠를 안 게 죄라는 걸까. 하지만 한탄은 나중에. 일단은. "오빠부터 구해서, 때려주든지 해야지." 물론 납치를 당하는 건 오빠 잘못이 아니다. 그건 안다. 하지만 보통은 여동생이 악당에게 잡혀가고, 그걸 용맹한 오빠가 구하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된 게 매번 반대다. 지난번에 독일에서도 이러더니..... "누구 여동생 하기 정말 힘드네." 일단은 이 주위의 환경을 파악하는 것부터 하자. 무적상태인 지금의 내가,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일은 없지만 문제는. "유리보다 연약한, 오빠를 위해서." 나야 공기 중에 산소가 없든 말든, 사방에 방사능이 가득 차있든 말든, 심지어는 블랙홀의 중력파가 주변을 휩쓸든 말든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오빠는 다르다. 인간의 몸으로 그런 환경에 노출되었다가는, 단숨에 사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나로서는 매우 곤란하다. 적어도 내가 지구에 있는 동안, 오빠의 장례식을 치러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럼. 나는 지팡이를 흔들어서. 딸랑. 딸랑. 고양이 방울이 아니니 이런 소리는 안 나지만..... 그런데 어? "광합성을 해 줄 생물도 없는데, 산소가 대기 중에? 이게 뭐야?" 더 정확히 말하면, 질소 78%에 산소 21%다. 이건 지구의 공기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혹시 오빠를 초대하기 위해, 이 별의 대기조성을 바꾼 건가? 그럼 이 녀석들. "철저하게 준비했구나." 아무래도 쉽게 넘어갈 상황은 아닌 듯 하다. 내가 아니라, 오빠에게 말이다. 다만 지구와는 역시 달라서. "무거운 원소는 거의 없어." 땅바닥을 보니, 기껏해야 철이 가장 무거운 원소였다. 이 정도라면 아마 이 우주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거나, 그게 아니면 이 별 자체가 새로 태어난 별인 듯했다. 아마 얼마 전에 폭발한 초신성으로부터 철이 공급되었겠지. 그러나 이 우주 자체가 너무 어리기에, 그 이상의 원소가 핵반응으로 생성될 틈은 없었을 것이다. "뭐 그런 거야 중요하지 않지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오빠를 구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앞길에는 상당히 험난한 장애물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시공간은 분명히 화이트홀의 생성으로 인해 흔들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걸 느낀 녀석들이.... 슈우욱. 내 몸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쿵. 거대한 검이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그리고 그 검은 그대로 대지를 뚫고 들어가면서, 주변을 온통 파헤쳐 놓는다. 나는 그 흙먼지들을 피하면서. "쓸데없이 힘을 과시하네." 나를 못 잡았으면, 그만 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어차피 이 별에는 토종 생명체가 거의 없는 듯하지만. 잠시동안 대지를 휘젓던 그 검은 조금 후에 허공으로 솟아올라, 그 검의 주인을 향해 돌아갔다. 이건. "기다리고 있었다. 피의 마녀(Bloody witch)." 휘이잉.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 중국풍의 무사 한 사람이 하늘에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나를 상대하겠다고? "용기가 가상하네요." 이 녀석은 아무리 봐도 내가 추적하던 이계인 중 하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기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던, 지구인 중의 한 사람이겠지. 하지만 혼자서 나를 이긴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미친 짓이야.'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의 힘은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만약 이계인들이 그를 혼자서만 내보냈다면, 이건 오빠를 데리고 다른 우주로 달아나기 위한 사전포석이리라. 나는 오빠의 위치를 찾기 위해.... "찾을 것도 없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눈앞의 방해꾼을 물리치고 오빠에게 간다면..... "더 이상은 어물쩍 넘어갈 수 없을 거야." 오빠가 납치되기 직전에 보여준 마음의 흔들림. 그것은 분명히 나를 의심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자명해진다. 내 정체를 보여주거나, 오빠의 기억을 소거해 버리는 것. 그러나 후자는 내가 가급적이면 택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오빠의 기억상실로 인해, 얼마나 오빠와 시내의 관계가 뒤엉켰는가. "또 그런 꼴을 볼 수도 없고." 하지만 막상 보여주려니, 조금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이 날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바로.... "일상이 사라지는 날...." 오빠는 어떨지 몰라도, 나로서는 이 평범한 여동생 노릇을 꽤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오빠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어쨌든 오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에게 언제나 두드려 맞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솔직히 말해서, 몽땅 오빠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나로서는. "제발 좀, 조금만이라도 여동생 생각 좀 해 달라고." 원래 오빠 입장에서 여동생이라는 존재는 '인류의 재앙'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여동생의 입장에서도 사실 마찬가지다. 오빠에게 있어 여동생은 용돈을 빼앗고, 맨날 주먹질에 발길질을 하는 존재일지 몰라도, 여동생 입장에서는. "상냥함과는 담쌓은 존재. 목욕탕에 억지로 집어넣지 않으면 씻지도 않는 존재. 매일 매일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깨워줘도 고맙다는 인사 한 번 안 하는 존재...." 불평거리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사실 요즘 세상에 오빠 용돈도 안 빼앗고, 오빠한테 아침부터 저녁까지 챙겨주는 여동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불량배들을 물리치고 오빠를 구해오더라도. "어쩌다가 여동생의 마수에 걸려서...." 이런 소리나 듣는 신세였다. 최소한 내가 세 번씩이나 오빠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한 감사표시는 받고 싶다(이것도 당장 기억나는 것만 간추린 것이다). 아니, 그건 너무 큰 기대인가. 예시당초 오빠라는 생물체는 여동생에게 있어 악몽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이건 일생동안 따라다닐 골칫거리일지도 몰라. 예를 들어. '진희가 미니스커트 입으면 헬렐레 하면서.' 내가 한 번 그런 걸 입으려고 하면, 악착같이 반대한다. 시집가는데 방해가 된다나?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오빠가 품고 있는 사상이라는 거.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거야.' 오빠로서는 사회가 그렇다는 핑계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그리고 가장 치가 떨리는 건. "왜 꼭 프라이팬이나 식칼을 휘둘러야 일어나는 거야 !" 상냥하게 깨우면 절대 안 일어난다. 흔들어도 마찬가지, 속삭여도 마찬가지, 자명종을 맞춰놔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된 오빠가, 꼭 내가 프라이팬을 휘둘러서 배를 내리치거나, 아니면 그냥 걷어차야 일어난다. 왜 아침부터 내가 폭력을 휘두르게 만드는 거야 ! '이러니 내가 말야....' 주먹을 안 휘두르고 지나갈 수가 없는 거다. 조금만 여동생한테 신경을 써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저 아래에 있는 오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20화 은밀한 유혹 (1) 갑자기 불지 않게 된, 바람. -!- 회색으로 바뀌는 땅. -!-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폭풍. -!- 내 주위를 덮어버리는 빛의 소나기. -!- 그리고 나의 가장 긴 하루는 시작되었다. 쿵. "아구구구구." 나는 머리통을 감싸쥐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번에는 또 무엇인가. 여동생 건으로 괴로워하던 내 머리를, 누가 또 때렸단 말인가. 설마 그 녀석인가. 사람의 머리통을 축구공으로 착각하는.... "없잖아?" 그렇다. 여동생은 거기에 없었다. 수많은 여자들이 내 주위에 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어떻게 된 거야?"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은 여기가 아닌데? 물론 여동생의 일로 눈물지으며 헤메다가, 엉뚱한 곳으로 와 버렸다는 합리화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서울시에는. "이런 곳은 없다고 !" 내가 왜 이런 커다란 침대가 있는 방에 오겠는가. 우리나라 러브호텔이 많고 많지만, 이렇게 큰 침대는 있을 수가 없다. 이건 침대만 최소 100평이 넘는..... "빨래도 못한다고. 이렇게 큰 이불은." 아. 쓸데없는 거 걱정하는 건 관두고..... 도대체 왜 이런 것이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걸까. 그리고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이 여자아이들은..... 잠깐. "이상하다?" 신발이 없어진 거야 이해한다. 난 지금 침대 위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 난 이런 침대 위에 올라온 적이 없다고 ! 내가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쓰러진 게 아닌 이상, 절대 나는 내 의도로 여기에 오지 않았다. 그것은 즉, 내가 지금 납치 당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잠깐. "내가 왜 납치 당해야 하지?" 사실 나는 극히 평범한 고교생이다. 납치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솔직히 나한테 원한을 가질만한 인간이라면 그 깡패 2학년 선배들 정도인데, 그 인간들이 퇴학당한 후에 나를 납치했다면..... "여기가 아니잖아?" 그 인간들이 나를 이런 호화판 러브호텔에 납치하는 좋은(?) 짓을 해줄 리가 없다. 그들이 나를 감금했다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밀어 넣었겠지. 물론 밧줄과 쇠사슬과 수갑은 필수품일 것이고. 그런데 이건. "황금으로 만든 침대?" 침대의 끝 부분, 머리 부분에 놓인 큼지막한 베개의 재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돈이 들어간 물건일 것이 분명했다. 보통 베개에는 황금으로 수를 놓지 않는다고. 게다가 머리부분의 위쪽에 놓인 장식은 대체 뭐냐? 백금으로 만든 건지 은으로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번쩍거리는 게 시각에 안 좋다. 거기에 다이아몬드만 안 박혔어도 그럭저럭 괜찮았을 텐데. "그럼 날 누가 납치한 거야?" 적어도 그 녀석들이 아니라면, 내가 원한을 살만한 곳이 없는....... "많구나." 그렇다. 나에게는 평범한 부모님이 계실 뿐이니 남에게 원수질 일은 없다. 물론 조카라든가 사촌동생이라든가 하는 애들은 품질이 나쁘지만, 그 녀석들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쪽을 먼저 노릴 것이다.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납치극을 벌일만한 쪽은 역시.... "그 녀석이냐 !" 그렇다. 그 녀석밖에 없다. 여동생인지 괴물인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 쪽이라면 원한 살 곳이 아주 많다. 우선 우리 동네 부근의 깡패들이나 여동생의 횡포로 망가진 수많은 기업들, 그리고 또.... "!" 잠깐. 잠깐. 아직 그 녀석이 월하소녀인지 아닌지는 모르잖아? 설마 그쪽은 아니겠지. 그리고 내가 그 녀석이 그런 괴물인지 마법소녀인지 아니면 악마인지도 모르는 존재인지 의심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런 곳으로 잡혀와야 하는 거야? 아무리 그 월하소녀가 녀석들에게 있어 최강의 적이라고 해도..... "잠깐." 가만있자. 그렇다면 말이 된다. 적어도 여동생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라면, 나를 이렇게 대접(?)해 줄 리가 없다. 그러나 월하소녀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라면.... "카아악." 바로 그 좀비들을 만들어낸, 작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호텔 방을 준비하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 식인소녀의 전투를 직접 보았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런 힘을 지닌 자라면, 호텔 하나쯤 슬쩍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방을 만드는 것도, 사실 재력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마법사라고 한다면.... "아냐."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이 왜 나를 굳이 납치해서 이런 방에 감금하지? 게다가 내 주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아이들은 또 뭐고? 세상에 어느 악당이, 인질을 이렇게 대접해 주냐? 그런데 이 아가씨들,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인데? 자세히 뜯어보니. "진희야 !" 나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세상에. 기절한 사람 중 하나는 진희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놀라는 건 아직 안 끝났으니. "문희야 !" 쿵. "클라라 !" 쿵. "연미 누나 !" 쿵. "시내야 !" 쿵. "선생님 !" 쿵. 쿵. 두 분이 같이 계시니까 두 번 넘어진 것뿐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왜 내 주위의 여자들이 모두 온 거지? 여기서 빠진 사람은 흑마술부 부장과 그 일당들, 그리고 여동생과 그 비서들 정도다. 생각해보니 꽤 많이 빠졌구나.... 아니, 아니지.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이봐. 나(사실은 여동생 쪽)한테 원한이 있으면 나만 납치하라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오지 말고. 이 못된 자식들 같으니. 하지만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므로, 이렇게 외쳐봐야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 녀석들이 정말로. '그 식인소녀와 한패거리라면.' 내 힘으로 맞서서 이길 상대가 아니다. 전혀. 여동생이 정말로 그 월하소녀라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그럴 리는 없다. 그 녀석이 만약 진짜로 그런 마법소녀라면, 이 오라버니에게도 마법검 한 자루 정도는 쥐어줘야 할 거 아냐 ! 혹시 평소에 패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막 되먹은 짓을 한 거냐? 그러니 이건 분명히 오해가 분명하다. 그들도 사실을 알면 고이 돌려 보내줄.... "....리가 없잖아." 그런 녀석들이 도시 한 개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사람들을 몽땅 좀비로 만들겠냐 ! 아무래도 내 인생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절망적인 예감이 내 뇌 세포를 스친다. 큰일났군. 이가 마주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이 방의 온도가 너무 높은.... "?" 가만. 온도가 왜 높은 거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방의 기온을 아주 낮춰서, 벌벌 떨게 만드는 편이 협박에는 더 좋지 않아? 납치 당해본 경력이 일천해서 그쪽에 대해서는 뭐라 조언할 수가 없지만....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지?" 게다가 왜 여태까지 아무도 안 오는 거냐? 내가 인질이라면, 내가 깨어난 이 시점에서 악당 두목이 위압적인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면서. "하하하. 협력하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그게 아니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각오해라. 우하하하하." 이렇게 말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직도 조용한 거지? 나는 침대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려보려고 했지만. "이건 아냐 !" 설령 여동생의 주먹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한들, 최후까지 포기하면 안 되는 법이다. 나는 그것을 독일의 지옥에서 배우고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내가 여기서 절망해서 주저앉아버리면. "진희도 클라라도 문희도 연미 누나도 시내도 (여)선생님들도 다 죽는다고." 이건 곤란하다. 물론 남자 선생님이 한 분이라도 끼어 있었다면, 내 의욕은 팍 죽겠지만 말이다. 특히 왕건전이라든가..... 에이 ! 그런 인간은 상상할 필요가 없어 !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은 꼬마 선생님하고 담임 선생님이라고 ! 특히 저 로리로리 꼬마 선생님이 죽는 걸 본다면.... "못된 제자가 되겠지." 그랬다간 어린애를 죽게 내버려두는 나쁜 오빠가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울 거라고. 나는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향해 걸어갔..... "없잖아?" 이건 말도 안 된다. 문이 없는 방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거냐. 그러나 이런 엉터리 같은 방이 있을 리가 없다. 문이 없다면, 어디로 해서 우리가 여기에 들어왔겠냐.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 슬리퍼라는 걸 신고 나오다가, 나는 기가 막힌 광경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정말로 없잖아?" 농담이 아니다. 우리가 들어오고 나서 도배를 새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문 비슷한 것도 벽에는 없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그럼 창은? 창은 어떻게 되었지? 나는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다행스럽게도 창문은 있었고, 나는 그 문을 열고..... "!" 휘이이잉. 아주 거센 바람이, 내 머리칼을 휘날리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외풍이 강해? 머리를 창 밖으로 쏙 내밀어보니. "!!!"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나는 기가 차서,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바로..... "말도 안 돼 ! 여기가 도대체 몇 층이야 !" 나는 구름 위의 집에 있었던 것이다 !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정말로, 나는 그 식인소녀의 한패거리들에게 납치 당한 모양이다. 적어도 지구에는 이런 건물이 없으니까. 농담이라고 하고 싶어도. "창의 모습부터가 그게 아니야." 창틀도 없고, 단지 유리(진짜 유리가 맞는 거냐?)로 된 돔만 있는 걸 제대로 된 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요즘이 21세기라지만, 이런 건물을 실제로 지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하지만 혹시 이게 모두 사기일지도 몰라. 나는 급히 방안의 의자 하나를 가져와서. "으랴차차차." 그 의자를 창 밖으로 내밀고 휘저어봤다. 걸리는 게 없다. 이상하다. 휙휙. 여전히 없다. 사실 이곳이 정말로 초고층건물의 꼭대기라면 당연한 것이기야 하지만. "이럴 리가 없어."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 더불어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특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문도 없는 방 따위, 말도 안 된다고." 그렇다면 아마 창문 부근에는 사다리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이 정상적인 집이라면 말이다. 사실 100평 짜리 침대가 있는 방을 정상이라고 표현하기도 곤란하기야 하지만. 그러나 나의 행동은 그에 상응한 대가를 주지 않았으니. "사다리가 없다?" 창문 아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다리가 없었다. 하다 못해 쇠로 만든 손잡이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아무 것도 없었다. 무슨 이런 건물이 다 있냐 ! 어떤 인간이 시공을 했는지 모르지만, 정말 거지같은 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방안이 호화판이면 뭐하겠는가. 화장실도 없는 방 따위는.....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나를 인질로 가두기 위해 만든 방이라면, 이건 부적격한 곳이 분명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작자는 분명히, 인질에게는 화장실을 제공할 필요조차 없다는 극히 못된 심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악한 작자 같으니. 거기에다가. "부엌도 없어. 욕실도 없어. 정원도 없어." 이건 상당히 곤란하다. 정말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니까. 나는 바닥도 보이지 않는 창가의 탐색을 일단 포기하고,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이거 난감하네. "어떻게 나가지?" 나로서는 순순히 인질로서 여기에 있을 생각은 없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앉아 있어봐야 나올 게 없지 않은가. 일단은 골목에서 나가고 난 후에 생각해볼 일이다. 저 아래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카아악." 이런 녀석들이 또 나올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창문을 열어놓고 있고, 거센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데도.... "!!" 왜 이렇게 몸이 뜨거운 거지? "으으...." 찬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다들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먼저 일어난 사람은. "아고고. 어떻게 된 거야?" 왜 꼬마 선생님이 가장 빨리 일어나시는 거냐. '체구하고는 딴판이네.'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도, 어쨌든 제자의 도리를 다해서 말부터 걸었다. "선생님 !" 왼손으로 지긋이 이마를 누르며, 얼굴을 찡그리는 선생님. 귀엽다 ! '나도 결혼하면 저런 딸을 낳고 말 테다.'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란 게. "..............어, 어떻게 된 거야? 문구군. 설마 그 나이에 벌써 러브호텔에? 날 납치한 거야? 안 돼. 난 선생님이고 문구군은...." "아닌데요."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절대로 선생님만큼은 납치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장담을 하면서.... 부글부글. 이건 무슨 소리냐? 주전자가 여기에 있을 턱이 없는..........! "문구 너......." 이, 이번에는 왜 화를 내시는 겁니까? 꼬마선생님은 상당히 토라진 얼굴로. "그건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다는 소리 아냐?" "아니에요 !" 물론 꼬마선생님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게 성숙한 누님의 그것이 아닌,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퍽. "아구구구구." "못됐어. 문구." 그, 그것도 죄입니까. 나는 억울하게 한 대 맞고,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는 모르지만. "으응....." "으응....." 다들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음탕한 마음을 안 품었다는 게 죄가 되다니. 물론 꼬마선생님으로서도 자신의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부 부정당했으니, 볼을 부풀리실 수도 있기야 하다. 그러나. "너무하세요....." 제자 머리를 이렇게 때리다니, 마치 이것은 그 여동생 같은.... "에?"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여기에 온 사람은 나와 관계가 있는 여자들이 거의 다다. 아니, 전부 다 그렇군.... 이렇든 저렇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깊은 관계..... 엉뚱한 쪽 말고 ! 어쨌든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여동생이 없다. 그러나 만약 여동생이 정말로 월하소녀라면. '납치 당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것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상황의 의미는 바로.... '그 녀석, 정말로 월하소녀야?' 월하소녀. 내가 그 마법소녀를 부르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천사라고 부르지만, 나만은 계속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녀의 잔인한 면을 보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은 악당들이 생명을 경시하는 것과는 다른, 진정한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내 목숨을 건져준, 바로 그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 녀석이 그런 존재라니, 이런 부조리가.' 난 그 녀석이 그런 존재이길 바라지 않는다. 만약 내 여동생이란 애가 그런 존재라고 하면, 그 녀석이 매일 나를 때리는 것도 '정의의 수호자'로서 당연한 일이 되며, 결론은..... '내가 나쁜 놈이라는 뜻이잖아.' 하지만 나를 납치한 자들이, 일부러 내 여동생만 납치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내 여동생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굳이 나를 납치할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정말로 '그녀'라는 뜻이다. 물론 그 녀석이 '그녀'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녀석도 지금쯤 납치 당해서, 어딘가에 감금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감옥을 두 개나 만들 필요가 있을까? 여자라서? 그런 거 따지는 인간들이 날 여기에 가두냐? 그리고 만약 여동생이 월하소녀가 아닐 경우 납치를 피할 가능성은. '없어.' 설령 그 녀석의 경호원들이 분발한다고 해도, 어림도 없다. 군대도 당하지 못한 식인소녀의 능력을 생각해볼 때, 아무리 여동생이 회장님이라고 하더라도 경호원들이 그 애를 지키는 건 무리였다. 그것이 인간과 괴물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역시 여동생이.... '아니야.' 제발 그것만은..... 그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생각하자. 지금은 이 난감한 사태를 극복하는 쪽에 전력을 모아야 하는 때니까. 하지만 막상 다들 일어난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우린 지금 갇혀있다는 거지? 확실히 나갈 문도 없고." 이봐. 문희야. 굳이 창 밖을 내다보면서 말을 할 필요는.... 그녀는 고개를 정신 없이 돌리더니. "역시 계단이나 사다리 같은 건 없네. 난 문구가 덜떨어져서 못 봤나 싶었는데." 말을 꼭 그렇게 하냐. 이를 한 번 갈아주고, 나는 모두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느닷없이 모조리 납치 당한 아가씨들은 순순히 내 말을 들어주었지만. "하지만 문구야. 솔직히 그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니? 미인이가 정말로 마법사인지 어떤지는 제쳐두고라도, 지금 이 상황은 과학적으로 보아 말이 안 된다고." 꼬마선생님의 항의는 일단 무시. 그러나. "뭐 그것도 가능하잖아? 영미야. 이 세상은 과학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역시 우리 담임은 흑마술부의 고문답게, 이런 쪽으로는 융통성이 있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 고집을 피우는 꼬마선생님. "미연이 너는 그렇게 모든 것을 물렁물렁하게 보고 있으니까 문제라는 거야 ! 적어도 애들을 가리키는 선생님은,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고." 우리 모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과학과 주술을 대표하는 항공우주부와 흑마술부의 고문이시기도 한, 그리고 평소부터 다투는 게 취미이신 두 분의 논쟁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쪽은 일단 무시하고, 누가 건설적인 의견 안 내놓나. "그것보다, 여기서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역시 클라라. 합리적이고 진취적이고 멋들어진 의견을 제시하는구나. 역시 머리칼을 금으로 얹어서 그런지, 비싼 값을 하는구나. 어느 멍청한 소꿉친구와는 천지 차이가.... 부웅. "누가 멍청하다고?" 후후후. 너한테 맞을 일은 없다. 문희야. 꼬마선생님의 경우야 제자의 도리로서 맞아드릴 수밖에 없지만.... 사실 그 분의 경우는 너무 귀여워서, 피할 수가 없기도 하고..... 퍽. "아구구구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맞아도 안 아픈, 꼬마선생님의 주먹이 내 가슴에 명중했다. 그러나 예의 상, 아픈 척 해드린다. 차마 이런 정도의 주먹은 맞아도 안 아프다고 외칠 수가 없.... 피싯. "어?" 이상하다? 이 정도 주먹은 솔직히 여동생의 것에 비하면 솜털보다도 가벼운.... 푹.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뭔가 이상하다. 선생님의 주먹이 왠지 뜨거운 것 같은.... 설마. '절대로 아닐 거야.' 꼬마선생님이 무슨 무공이라도 익힐 리가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솜털주먹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학교 불량배들이 그녀에게 반항하기 힘든 이유는 선생님의 힘이 아니고. "그래선 안 되는 거야. 알았지?" 그 표정 때문이다. 왠지 그 말에 거스른다는 것은, 어린애를 괴롭히는 어른이 되는 것 같은 불가사의한 기분을 학생에게 심어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짓을 하면 즉시. "네 놈은 힘없는 어린애를 괴롭히는 거냐?" 왕건전 같은 인간이라면 몰라도, 꼬마선생님을 괴롭히면 '애를 괴롭히는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 얼굴, 특히 눈물을 머금은 그 큰 눈을 직시하면, 모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논리가 아니라, 지상명령이었다. 여동생 같은 악랄한 인간은 아예 그런 얼굴이 나오기 전에 알아서 사사삭 피하지만. 어쨌든 그런 식이어서. '절대 이런 일은 없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선생님에게 맞아서 쓰러진 학생의 모습이다. 모두 놀란다. 상식에 벗어난 일이니까. 심지어는 꼬마선생님조차. "무, 문구야. 괜찮니?" 안 괜찮은데요. 그러나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으로서는. 스스슥. 다리 사이의 부풀어오른 무언가를, 어딘가에 문지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러는 거지?' 나를 일으키려고 손을 대는 선생님의 손바닥 감촉이.... '뜨거워.' 그랬다. 선생님의 손바닥은 분명히 뜨거웠다. 마치 손 난로라도 내 등에 들이댄 것처럼. 하지만 지금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다. 오죽했으면 내가 이 높은 빌딩의 창문을 열어두겠는가. 그러나. "더워."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 진실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 몸에서 열이 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 연미 누나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고, 입술은 벌어져서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옷깃을 양손으로 잡고. "조, 조금만....." 단추를 하나씩 풀어낸다. 그녀의 셔츠가 조금씩 벌어지면서, 땀에 젖은 가슴이 슬쩍 엿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다 보이는 건 아니다. 브래지어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비, 비춰 보여...." 땀에 젖은 셔츠는, 당연히 반투명한 재질로 바뀌고 있었다. 비를 흠뻑 맞았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데 연미 누나가 저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었나? 하지만. "무, 문구야..... 눈 좀 돌려.... 줄래....?" 그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문희였다. 진희나 클라라도 아니고, 그 문희가 ! 적어도 어릴 때부터 나와 같이 목욕도 해 본 사이라서, 별로 부끄러움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아무리 평소에 폭력을 사랑하는 녀석이라도, 일단 소꿉친구는 소꿉친구다. 나는 즉시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 이,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하다. 클라라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물론 그로 인해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거리고 있다..... 그런데 잠깐. 왜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거야? 하반신이 안 보여서 뭐라고 할 수가 없지만, 침대 한 편에 걸터앉은 그녀의 상반신은 분명히 새하얗게 보였다. 원래는 그런 게 안 보여야 하는데. "살결이..." 다 보이고 있다 ! 그리고 그녀의 어깨와 등이,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이건. 그녀 역시 땀으로 완전히 범벅이 되어 있고..... "!" 나는 문희의 부탁을 무시하고,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자 내 눈에 기막힌 광경이 들어왔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웃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 어떻게 된 일인가. 하지만 그것은 곧 나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가 가르쳐 주었으니. "윽." 이상하다. 몸이 뜨거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용광로에 들어간 것처럼. 사우나에 들어간 것처럼 땀이 쏟아진다. 내 안의 본능이 나에게 옷을 벗을 것을 재촉한다. 그러나. '여자들 앞에선 못해.' 만약 내 앞에 있는 여자가 문희 한 사람이라면, 나는 옷을 벗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야 어차피 어릴 때부터 벌거벗고 목욕도 많이 해 본 사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고, 내 앞에는 문희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참아야 해.'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방안이 덥다. 분명히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몸을 일으켰다. 비록 내 다리 사이에 똑바로 선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걸 숨기려고 발악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몸을 식혀야 해.' 차마 여자들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없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몸을 차갑게 해야 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아, 안 돼.' 안 된다. 일어섰다가는 내 다리 사이가 모두에게 환히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다리를 오므리고, 그냥 기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침대 위에서 걸어가는 것도, 바닥이 물렁물렁하니 좀 힘들 것이니까. 그러나. "윽." 어, 어째서 다들 옷을 벗고 있는 거냐. 다행히도 아직까지 속옷차림이 된 사람은 없었지만, 셔츠 단추를 있는 대로 풀어헤친 것만은 엄연한 현실. 그러니. '속옷이 다 보이잖아요.' 그러나 더위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좋은 구경을 할 기회를 얻기는 했지만, 나 자신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 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눈에 들어오기야 했지만. '안 보여. 안 보여. 안 보인다고.' 그걸 인정했다가는, 이성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땀에 젖은 속옷은 몸에 착 달라붙었고, 솔직히 옷을 입고 움직이는 것부터가 거북했다. 게다가 너무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머리까지도 어지러웠다. 어서 창가로 가지 않으면..... "윽." 하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진희가 가 있었다. 겉보기보다 무지 빠르네. 그래서 나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아. 하아." 그녀의 숨결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분명히 찬바람을 쐬고 있는데, 어째서 저렇게 땀을 많이 흘리고 있는가. 게다가 그녀의 치마는..... "하아. 하아." 진희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 저건 설마. 그녀의 손이 천천히 치마를 움켜쥐다가. "윽." 손을 놓는다. 잡는다. 놓는다. 잡는다. 놓는다. 잡는다. 놓는다..... 탁. 어느 순간, 그녀의 손이 치마를 잡아서, 끌어내려 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보인 것은. "!" 소녀의 분홍빛 팬티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나는 당황할 틈조차 없었다. 내 뒤에서. "무, 문구야....." 시내의 말소리가 들린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렸다. 차마 진희의 속옷차림을 볼 수 없었기에. 그녀는 이미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치고 있었고, 그 외에 몸을 가린 것은 양말뿐이었다. 나도 건강한 10대 소년인 이상, 그런 모습을 보고 견디기는 어려웠다. 아니, 이미. '한계야.' 여기서 내 몸이 더 뜨거워진다면, 나도 옷을 벗어버릴 것이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조차 따갑게 하는 이 상황에서는. 게다가. "으...." "아아...." "헉. 헉. 헉." 주위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뻔할 것이다. 나는 우선 얼굴부터 닦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안 되겠다. 더는.... "미, 미안해요." 선생님들 앞에서 실례이기는 하지만. 나는 웃옷부터 벗었다. 그리고 그걸로 얼굴을 닦았다. 손으로 닦기에는 손 자체가 땀으로 완전히 덮인 탓에, 불가능했으니까. 그리고 더는 내 몸에서 기어 나오는 열기를 억누를 수가 없었기에. 그리고 바지도 벗는다. 안 벗고 싶었지만 더위에는 장사가 없었다. 탁. 침대에 오른팔을 짚으며 주저앉은 내 눈에, 주변의 꼴이 들어왔다. 다들 나하고 별로 다른 게 없었다. 내가 런닝 셔츠와 팬티만 입고 있다면, 다른 여자들은. "........" 아. 정정한다. 난 양말도 신고 있다. 그건 다른 여자들도 똑같지만. 그러나 브래지어와 팬티, 그리고 양말이나 스타킹만 신은 상태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선생님들. 꼬마선생님이야 입든 벗든 그리 큰 문제가 없지만, 우리 담임은.... "문구.... 너......." 힉. 선생님이 화났다 ! 나는 꼬마선생님에게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잔뜩 움츠렸지만. "나도 가슴은 있다고...." 아. 그런가요.........가 아니잖아 ! 나는 번지수가 틀린 꼬마선생님의 훈계에 놀라 입을 벌렸지만, 그것은 엄청난 실수였으니. "음...... 너 내 말을 안 듣고 있는 거지?" 꼬마선생님이 어느새 나에게 다가와서..... "!" 내가 조금만 멍하니 있었다면, 나는 그대로 사고를 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이 경우는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건가? 그녀의 품을 빠져나간 나를 보며 꼬마선생님은. "음. 역시 난 매력이 없는 거야. 나하고 키스하는 거 싫어?"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록 선생님의 가슴이 평평하고 키도 작고 엉덩이도 그리 크지 않지만..... 퍽. "아구구구구."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리고 그녀는 일어섰다. 그런데..... 팬티 가운데가 이상하다? 이건.... '설마....' 저 나이에 오줌을 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저것은.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내 뒷골을 싸늘하게 식히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다른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아아아악 !"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일곱 명의 여자가 모두 일어섰고, 그들의 속옷은, 특히 팬티는. '큰일났구나.'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렇다. 땀이다. 저건 절대로 땀인 거다. 날씨가 더워서 땀을 흘린 게 분명했다. 비록 깊은 산 속의 계곡과 그 위의 숲이 어쩌고.... 아냐 ! 저건 절대로 땀이야 ! 절대로....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 남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내 팬티에는 조산운동이라도 있었는지,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잘못하다가는. '팬티 찢어지겠다.'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끝 부분은 화산이라도 폭발하려는지 자꾸만 간질거리는.... "!" 게다가 그걸 물끄러니 바라보는 두 분 선생님들까지. 뭐, 뭘 보시고 계시는 겁니까. "음. 생각보다 크네." "역시 축구선수답다." 그거하고 축구선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게다가.... 사사사사삭. 왜 산봉우리에 올라가시려는 겁니까. 나는 두 분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 말을 잊고 말았다. 두 분 선생님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루비와도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탁한, 검붉고 끈적끈적한 그런 적색의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녀들의 흰자위도 역시, 옅은 붉은 빛을 띄고 있다. 이것은. '정상이 아냐.'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자. "........." 모두 선생님들과 똑같이,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금씩 걸어오고 있었다. 팔을 늘어뜨린 채로, 약간 입을 벌리고,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어째서인가. 그들을 바라보던 나에게, 천장의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비춰진 내 눈은. "!" 그녀들과 똑같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큰일났구나.' 그걸 본 순간, 나에게 느껴진 감정이었다. 저런 눈은 내 눈색깔 하고는 너무 틀렸으니까. 일단 내 눈은. '검다고.' 속이 시커멓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황인종, 몽골리안, 대한민국 사람의 대부분(전부는 아니고)은 그렇기 마련이다. 내가 다른 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틀려지지만, 최소한 나는 태어날 때부터 검은 눈동자였다. 그리고 인간이 태어난 후에 눈동자 색이 바뀐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디 보자..... 삑삑. "안 빠지는데." 내가 우선 눈에 콘택트렌즈가 끼워져 있는지, 눈부터 더듬어봤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건 없었다. 하긴 눈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데.... "!" 눈은 아니다. 하지만 다리 사이가 이상하다. 아니, 몸 전체가 이상했다 ! 이것은....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 그렇다. 보통 이런 상태를, 속된 말로 '발정했다'고 하는 건가? 아, 아, 아, 아니야 ! 절대로 그런 막 되먹은 상태가 된 건 아냐 ! 물론 남녀사이에 건전한 성관계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최소한 결혼하고 나면 아내와는 얼마든지 해도 좋다....는 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의 규칙이니까. 그러나 이건. '일곱 명씩이나 건드려도 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어.' 그렇다. 하렘으로 유명한 아랍에서조차, 아내는 4명이 한계다. 물론 그 이상의 여자를 얻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첩이지 아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일부다처제를 도입한 이유는, 전쟁이 극심해서 남자가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미망인들을 다른 남자가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상이 어떻든 간에, 명분은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지금 전쟁이 터진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남자가 너무 많아서, 장가도 못 갈 위기에 처한 남자들이 부지기수인 게, 우리나라의 실상이라고.' 대를 잇겠다는 어른들의 욕망이 집안의 대를 끊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까. 역시 너무 과한 것은 안 좋다는 이치가 딱 들어맞는 꼴이었다. 게다가 지금 내가 이렇게 팔자좋은 소리나 하고 있을 때냐. "지금 난 납치 당했다고 !" 그렇다. 나는 지금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끌려와서, 어딘지도 모르는 도시의 괴이한 감옥에 감금당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무슨 환락에 젖어 있을 여유가 있겠는가. 어떻게든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있을, 탈출구를 찾아내야 한다. 나는 결의와 함께 벌떡 일어났지만. 꿈틀. 도, 도저히 안 되겠다. 나는 결국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희나 클라라 앞에서 팬티 차림으로 나돌아다닐 수도 없지만, 더 큰 이유는. '그것만은 못 보여줘.' 그렇다. 나도 남자라는 증거를, 차마 지금은 모두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만약 이 부분이 여자들에게 보여진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안 돼. 절대 안 돼.' 뭐, 하고 싶은 생각이야 있다. 아니, 많다. 아니, 아주 많다.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여자들을 벗겨버리고, 그냥 덮치고 싶은 게 내 심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안 된다. 최소한 여자들에게 '문구는 섹스에 미친 녀석'이라는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녀들을 이번만 보고 안 보는 것도 아니니. 그러나..... "문구야." 그 목소리에 나는 기절할 뻔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로 저렇게 간드러진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자가 그렇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만약 진희나 클라라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해나 한다. 연미 누나나 시내, 심지어 두 선생님들이 그랬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워낙 본능이 우세한 상황이니. 그러나. "문희야...." 너까지 그러면 어떻게 하냐.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는다. 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다가, 관뒀다. 아니, 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절대로 나에게는 진희가. "하악. 하악." 창가에서 서서히 떨어져서,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올라오는 것도, 시내가. "흑. 흐억." 땀에 젖은 가슴을 흔들며 나에게 기어오는 것도, 클라라가. "아, 아하." 다리를 다 벌린 채 천장을 쳐다보는 것도, 연미 누나가. "하아. 하아." 내 등뒤로 다가오는 것도, 담임 선생님이. "하으으...." 엉덩이를 흔들며 팬티 속에 손을 집어........아, 아냐 ! 난 아무 것도 못 본 거야 ! 우리 담임이 뭘 어쨌는지는, 절대로 몰라 ! 어쨌든 그쪽은 넘어가고 ! 그리고 꼬마 선생님이. "하아. 이러면...." 자기 가슴을 최대한 두 손으로 모아서 조금이라도 크게 보이게 하려는 것도........잠깐 ! '버, 벗으면 어떻게 해요 !' 다행스러운 것은, 이쪽은 내가 아무리 봐도 범죄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쪽은 역시 어린애 가슴이라 그런지 모아봐야 작다는....... 툭. "문구야.... 나도....... 어른이라........고......." 나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체격이 작다고 해도, 꼬마 선생님의 타격은 이것보다는 강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툭. 그녀의 머리가 내 허벅지에 닿았다. 문제는 머리가 닿은 게 아니라, 선생님의 입술이. "!" 내 허벅지에 닿았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펄쩍 뛰었지만, 그러자 내 뒤에서. 탁. 연미 누나한테 잡혔다 ! 그녀는 보드라운 가슴을 내 등에 문지르기 시작하고.... 그런데 잠깐 ! 왜 말랑말랑한 뭔가가 느껴지는 거야? 설마 벌써 브래지어를 벗은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 감각을 무시하고, 연미 누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 안 돼...." 어느새 왼팔은 시내에게, 오른팔은 문희에게 잡혔다 ! 나는 그 팔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파, 팔에 힘이...." 내 팔은 내 명령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녀들을 떼어내려고 하면 힘이 쭉 빠지는 것이다. 게다가 팔에만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으니. 꼬옥. 내 왼쪽 다리는 꼬마선생님한테 잡혔고, 오른쪽 다리는 담임선생님한테 잡힌 것이다 ! 그리고 지금 내 바로 앞으로는.... "문구야...." "미스터 문구...." 이런. 진희와 클라라가 동시에 나에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브래지어하고 팬티는 어디 갔나. 나는 다른 사람들을 한 번 흩어보고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잊기로 했다. 어쨌든 입고는 있으니까. 그렇다. 살짝 걸쳐진 것도, 어쨌든 입고 있는 거다. 실상이 어떻든 관계없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다만 이건..... '큰일났다.' 농담이 아니다. 나는 고등학생이 경험하리라고는 절대로 상상되지 않는, 1대 7의 관계를 경험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 게다가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여자들을 떼어낼 힘은 이미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풀썩. 풀썩. 이, 이건 말도 안 돼 ! 내가 언제 이런 짓을 했지?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그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미쳤어. 설마 이 상황을 즐기는....... "아니야 !" 그러나 누가 봐도,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알몸의 여자들과 알몸으로 뒤엉켜서 나뒹구는 지금 사태를..... "아냐 !" 절대 알몸은 아니다. 난 양말은 확실히 신고 있다고 ! 그러나..... 속옷 쪽은 말할 수 없다. 그런 건 일단 넘어가고 싶다. 안 그래도 내 앞을 파도치는 가슴의 고동은.... "!" 그런 걸 막을 생각을 하기도 전에, 클라라의 입술이 나를 덮쳤다. 으악 !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뭐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나는 오히려. 콰악. 클라라의 입술을 물고, 그 안으로 혀를 돌입시켰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은 방해를 받았으니. "우읍." 진희 역시, 내 입 속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은 것이다. 남들이 보면 부러워서 날 죽이려고 할 상황이기는 하지만, 너무 과한 것도 문제는 있었다. 두 여자의 혀를 모두 수용할 정도로 내 입은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희와 클라라는, 교대로 혀를 나에게 집어넣기 시작했다. 즉시 세 사람의 혀는 서로 뒤엉켜 버렸고, 소녀들과의 뜨거운 키스로부터 나는. "흐읍 !" 도망칠 수 없었다. 창피하지만, 나는 두 여자에게 무력하게 입술을 내주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빼려고 해도. "으읍 !" 연미 누나가 뒤에서 내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진희와 클라라 쪽으로. 그런데 자기 친동생이 남자의 노리개가 되는 걸 도와주는 언니도 있습니까? 하지만 연미 누나는 오히려. "읍 !" 내 뒤에서 목덜미를 혀로 빨기 시작했다. 이, 이건 견디기가..... 그러나 내가 세 여자를 뿌리치고 싶어도. 할짝할짝. "으읍 !" 내 옆구리와 겨드랑이를 혀로 빠는 두 여자, 문희와 시내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내 팔을 잡고 있는 두 아가씨의..... 꽈악. 찐빵을 만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하얀 찐빵은 역시 그 느낌이 좋다. 손에 달라붙는 듯한 이 찐득찐득한 느낌. 그리고 손을 데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따스함. 역시 겨울에는 찐빵이 최고라니까. 이걸 한 입 먹어봤으면.... "으읍 !" 아, 아냐.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내가 지금 움직인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두들 옷은 입고 있다는 것이지만. '이것도 입은 건가.' 뭐 입었느냐 벗었느냐를 놓고 보면, 입은 건 확실하니까 넘어간다. 아직 모두 속옷을 벗지는 않았다고. 않았다고. 않았다고 ! 내가 문희와 시내의 가슴을 더듬는 것도, 어디까지나..... 푹. 나는 힘이 빠져서, 그대로 연미 누나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더 이상은 두 여자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진희와 클라라는 그대로 그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나에게 향하고. "자. 우리 해." "저도요." "나도." "나도." 뭐, 뭘 하자는 거야? 진희 너, 원래 이렇게 밝히는 애였냐? 물론 아무리 정숙한 소녀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남자와의 관계를 바란다는 건 안다. 그건 생물의 본능이니까. 다만 아무데서나 정사를 벌이지 않는 것이 여자다. 굳이 암컷이 자신과 관계할 수컷을 고를 때 상당히 까다롭다는 걸 언급하지 않더라도.... "흡 !" 그러나 내 상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진희가 그대로 나를 잡아 눌렀으니까. 더군다나 연미 누나까지 두 다리로 내 허리를 휘감았고. "으윽 !" 서, 선생님. 그, 그쪽은 안 돼요. 거기를 입술로 건드리면.... 나는 그대로 힘을 잃고, 침대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이젠 하반신에 힘이 안 들어간다. 그저 두 선생님의 수업(?)에 충실히 따라갈 뿐. 그리고 어느새. "문구야." "문구야." 문희와 시내의 입술이 겨드랑이에서, 내 가슴 쪽으로 접근해온다. 움직이고 싶어도, 팔이 사과 사이에 끼어 드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다. 게다가 클라라는. "미스터 문구." 어? 어? 그녀는 내 허리 위에 올라타더니. "그럼 시작해요." 뭐, 뭘 시작하자는 거야? 나는 그 뒤에 따라올 대답을 자연스럽게 연상했지만, 불행히도. "그야 당연히, S. E. X." 쾅. 그,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이 주는 충격파에 휘말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내 옆에서 반발이 터졌으니. "안 돼. 문구하고는 내가 먼저 할거야." 진희가 클라라를 힘껏 밀어냈다. 그 덕에 시내와 뒤엉켜, 옆으로 쓰러지는 클라라. 그리고 진희는 스스로 내 허리 위로 올라가더니. "자. 문구야. 해." 그리고 그녀는 내 배꼽 아래로 자신의 손을 뻗었다. 그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말이다. 그녀의 얼굴은 욕정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입에서는 뜨거운 김이 흘러 넘치고 있다. 그리고. "이거, 굉장히 하고 싶었어." 그리고 진희가 자신의 다리를 최대한 벌려서.... "바보 같은 사람." 푸걱.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식인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죽음의 길로 향할 때, 그녀를 전송하던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고깔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수평으로 쥔 채 달을 배경으로 하여 서 있던 그 소녀. 그녀는. "용기 있는 아이구나." 내 뺨에 손을 대며, 웃어주었던 누나. 그녀는..... "오빠 !" "그만 둬 !" 나는 진희를 밀쳐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짓말이야 !" 그랬다. 적어도 진희가 말한, '하고 싶었다'는 말만큼은 분명히 거짓이었다. 내가 고백을 한 후에도 계속 그 답을 주기를 피했던 소녀. 나를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한 그 태도를 난 잊을 수 없었다. 남자에게도 순정이란 건 있고, 첫사랑이란 것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고백하려고 했을 때. "미안해." 그렇게 말하며 달아났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차례나. 그런 그녀가 스스로. "이거, 굉장히 하고 싶었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 정도로 진희가 개방적이고 용기가 있는 여자아이라면, 벌써 나는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좋다고 하든, 싫다고 하든, 그녀 스스로 입을 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네가 이렇게 적극적일 리가 없어 !" 내가 진희와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진희라는 여자아이의 성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스스로 밝히기 힘들어하는 부끄럼쟁이. 남에게 심한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 그녀의 그 모습이 악의에 찬 가면인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수줍음이 많은 탓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왜, 왜 그래? 문구." 적어도 내가 아는 진희는, 이렇게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남자에게 스스로 몸을 열어줄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클라라는 이렇게 경박하지 않았다. 문희도. 선생님들도, 연미 누나도. 가장 적극적인 시내조차,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알몸으로 덤비지는 않는다. 그녀들은 창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지닌 인간이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납치되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이것은 분명히. "야 ! 이 썩어빠진 시체만도 못한 개자식아 !" 이건 분명히. "당장 나와 ! 비겁하게 수작부리지 말고 !" "후후후. 역시 보통은 아니군. 과연 그 여자의 오라버니란 건가." 그 순간, 침대만 남기고 주위의 벽이 모두 사라졌다. 주위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에 우리 모두는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나만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 지겹게 봤다고. 그 식인소녀와 월하소녀의 대결에서부터. 그리고.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군. 보통은 상태변화마법 6레벨, Lust에 걸리면 정신을 못 차리는데." 내 앞에 나타난 자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우주인이었다. 왜 우주인이냐고? 그야 옷도 우주복이지만. '인간치고는 너무 머리가 빛나니까.' 그렇다. 그는 대머리였다. 그 역시 내가 자신의 '그 부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알았다는 듯, 머리를 손으로 쓱 문지른다. 그러자. 슈욱. 긴 머리가 되었다. 이건 뭐야. 왜 머리를 길렀다 잘랐다 하는 거야. 그것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그는 미소를 띄며 답한다. "자네와 이야기하려면 인간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네. 연 문구군. 아니, 피의 마녀(Bloody witch)의 오라버니." '피의 마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녀석이겠지. 그러나. "당신의 이름은?" 이 대머리 아저씨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내가 독일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품은 의문이기도 했다. 그런 일을 벌인 식인소녀의 배후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자가 바로 그 원흉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원흉의 하수인 정도는 될 거야.' 그럼 이름부터 알아야겠다. 여태까지처럼 내 맘대로의 호칭을 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피의 마녀? 참 호칭 한 번 끔찍하게도 지었다. 물론 요즘처럼 피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환경에서, 그 정도는 그리 대단한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내 고향에서의 이름은 가르쳐줄 수 없네. 들어봐야 어차피 자네가 발음할 수도 없고, 발음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지. 다만 그 '피의 마녀'는, 나를 '물고기자리의 악령'이라고 부르네. 자네도 알겠지만, 그건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zodiac)에 위치한 12개의 별자리 중 하나이지. 그런데 쌍어궁(雙魚宮)이라니, 그 여자의 작명솜씨는 솔직히 별로야. 왜 나에게 물고기의 이름을 붙인 건지." "바꾸지 그래요?" 마음에 안 들면 바꾸면 그만이잖아? 그런데 왜 그냥 쓰는 거야? 그는. "이 우주에서 받은 선물 중 하나이니까. 아무리 그 여자가 피를 뿌리는 살인귀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니 말일세." "그녀를 존중하는 건가요?"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쌍어궁이라는 자가, 그녀. 즉 월하소녀를 무시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하지만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가 어째서 자네의 여동생 노릇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지. 그녀가 정말 자네의 친동생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렇게 행동하는 건지." "그런데 어째서 나를 불렀나요?" 불효자라서 죄송합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러나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 문제라면 나보다는, 부모님이 더 정확하게 사실을 알고 있으실 텐데? 그런데 왜 그는 그 분들을 납치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납치했을지도 몰라.' 사실 나만 납치하고 끝날 리는 없다. 그러니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납치했을 거라고 보는 편이 신빙성이 높다. 그러나 그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유감스럽게도, 자네의 부모님을 모셔오지는 못했네. 그 여자가 소환수를 풀어서 방해하는 통에 말이네. 하지만 그걸로 확신했지. 그녀는 분명히 자네의 여동생, 아니 여동생으로 행세하던 그 '연 미인'이라는 여자야." 역시. 나는 가슴이 졸려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여자들의 손길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그 녀석이.... '바보 같은 녀석.' 역시 그랬나. 물론 이 자가 거짓을 고할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보아, 그 녀석의 평소 행동을 보면 그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월영 선배도, 쌍어궁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이 부정하지 않는 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그랬다. 그 녀석은 왜 그런 중대한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왜 내가 독일에서 그 녀석을 만났을 때, 스스로 입을 열지 않았는가. 왜 나를 타인처럼 대했는가. 혹시 내가 너무나 잘난 여동생의 존재에 상처를 받고, 가출이라도 할까봐 그랬는가(할지도 모르겠군). 그게 아니라면 그 애에게는 내가 단지 짐에 불과했던 것인가. 혹시 그 녀석은. "오빠는 약하니까, 내가 보호해야 해 !" 이런 건방진 생각을 했기 때문인가. 물론 그 월하소녀가 정말로 여동생이라면,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그 녀석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는 건 안다. 그 녀석이 그렇게 말해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안다. 그러나 감정상으로는. "나쁜 녀석 !" 내 거친 태도에 놀란 여자들이, 나에게서 물러났다. 비록 그녀들의 눈은 아직도 붉었지만, 나는.... "!" 천장을 쳐다보자, 내 눈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법을 극복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 자가 마법을 풀어준 것인가. "전자라네. 연 문구군." 역시 이 자도 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하긴 여동생도 그랬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금방 알아채는 바람에, 단순히 감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그러나 지금 그 녀석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은. "왜 이딴 짓을 한 거야 !" 항의가 날아간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물론 이게 남자의 로망이라는 건 인정한다. 어디에 내놓아도 딸리지 않는 미녀 일곱 명과의 정사. 그야말로 남자의 꿈이 아닌가.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성인군자라서 여자는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느니 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무엇보다도. "언제 이 여자들이 이걸 원했어?"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다. 마법으로 여자들을 흥분시켜, 원하지도 않는 정사를 벌이게 하게끔 하다니. 이건 강간이 아닌가. 비록 그녀들이 기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런 걸 그녀들이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건 분명히 강간이고 능욕이었다. 만약 그녀들이. "문구야. 좋아. 정말로 좋아." 스스로 원해서 이런 일을 벌인다면, 나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들을 강간하고 싶지 않아." 지금이야 좋다고 즐기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모두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그들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느냔 말이다. 일단 이런 일을 제정신으로 할 만큼, 내 주위의 아가씨들이 밝힘증 환자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쌍어궁은. "이상하군. 자네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어서 그런 건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인가? 어째서 저런 비천한 것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뭐냐. 이 녀석. 사람을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냐. "피의 마녀의 오라버니라면, 당연히 인간 정도는 얼마든지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을 텐데? 자네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인간에 불과한 건가?" 이 녀석, 혹시 내가 여동생처럼 천상천하유아독존의 괴물이라도 되는 걸로 착각한 거 아냐? 그런데 내가 왜 그런 터무니없는 존재로 오해받아야 하는 거냐. 여동생이야 초인, 울트라 슈퍼 그레이트 몬스터(Ultra super great monster)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난 아니다. 난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러나 쌍어궁은. "그런 자가 상태변화마법을 끝끝내 버틴다니, 더욱 이해할 수가 없군. 보통 인간은 지금쯤 여자들 사이에 파묻혀서 번식행위에 열중하고 있을 텐데." 졸지에 보통 인간이 아닌, 여동생과 같은 반열의 괴물로 격상되어버리는 나였다. 그런데 이거, 솔직히 이건 인정하기 싫지만. "엄청난 과대평가를 하는 거 아냐?" 아무리 여동생에게 평소 시달려서 반감이 많기는 해도, 나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잘못 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만약 여동생이 정말로 월하소녀라면 - 월영 선배와 쌍어궁이 인정했듯이 - 나는 그녀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오히려 여동생이 왜 내 여동생으로 그냥 있는지가 궁금해질 정도다. 그리고 솔직히. '그 녀석이 진짜로 그런 존재라면, 왜 내 옆에 소환수라도 하나 배치하지 않은 거야.' 부모님한테는 경호용으로 배치했다면서? 그런데 왜 나는 쏙 빼놓는 거야? 오빠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도 그랬다. 나는 혼자의 힘만으로 좀비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식인소녀의 손끝에 잡혀서 시체로 전락할 뻔했었다. 그런데 잠깐. 월하소녀의 적이 그 식인소녀였고, 이 쌍어궁도 아마 월하소녀의 적이 확실한 것 같다. 일단 같은 편이라면, 그 녀석을 '그 여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내 여동생한테 원수가 진 거야?" 정말 궁금했다. 나는 바로, 그 문제를 묻기 위해 월영 선배에게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때는 별로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왠지 이 자라면 그에 대해 말을 해줄 것 같다. 그런데 나도 참 한심하다. 날 납치한 게 분명한 자에게, 진실을 물어봐야 하다니. "이야기해주지. 시간이 없으니 가급적 짧게 줄여서."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거네." 이봐. 이런 걸 이야기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줄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내 여동생 쪽에서 일방적으로 이 우주에 들어온 당신들을 적이라고 선포하고, 무작정 당신들의 동료 일곱 명을 죽였다는 거야?" "그렇다네." 이 인간, 아니 인간이라기보다는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나를 놀리려고 작정한 건가. 그 말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믿어야 한단 말인가. 믿고 싶어도, 그러기에는. "아앙."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의 몰골이 너무 처참했다. 우선 진희부터 보자면, 그녀의 옷은 완전히 걸레가 되어 있었다. 일단 가슴과 엉덩이에 걸쳐진 걸 보니 옷을 입기는 입은 것 같지만, 그녀의 젖가슴이 출렁거리면서. "아앙." 그녀의 손이 가슴과 다리 사이를 쉴새없이 왕복하고 있었다.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는..... 차마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문희는......... 그만 두자. 난 지금 러브호텔에 와 있는 게 아니라고. 절친한 소꿉친구의 추태를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새겨 넣고 싶지 않아. 그보다. "하지만 당신의 말은 별로 믿을 게 못 되는데. 당신이 만약 무고하다면." 나는 내 주변의 소녀들을 가리켰다. 아. 선생님들도. 그들은 말 그대로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는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다. 당장이라도 나를 쓰러뜨리고, 다리를 벌리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그 눈들. "왜 이 아가씨들을 이렇게 만들었어?" 그러나 쌍어궁의 대답은, 나 자신이 인간임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 "인간이라는 생물은 더 많은 여자에게 자신의 새끼를 낳게 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더군. 자네가 만약 인간이라면, 이런 걸 매우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만남의 선물로 준비한 거네." "마, 만남의 선물...." 참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선물을 떠 안기는 자다. 아니, 그보다 더 중대한 건. "인간을 대체 뭘로 보고 있는 거야 !" 그러자 쌍어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이란, 섹스와 폭력과 살인과 파괴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고 마다 않는 존재라고 알고 있네. 내가 이 우주에 온 후로 많은 인간을 관찰해봤는데, 그들의 욕망은 대부분 그렇더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네." "....."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이 자가 아무리 악당이라지만, 그래도 이왕 우리 지구에 온 손님(?)인데, 가급적이면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자가 사악해서 사악한 것들만 본 건지는 모르지만, 왜 지구인에 대한 인상이 저 따위로 박힌 건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 신문 방송에 보도되는 뉴스란 게 다 그랬지. 저 녀석도 TV 시청이 취미인 건가. 그게 아니면.... "난 지구인의 선전방송에는 별 관심이 없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 더 관심이 있지." 마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어깨가 공포로 떨렸다. 그렇다. 마음. 나는 전에 이들의 동료 중 한 명을 만난 적이 있고, 그 여자는 바로 내 마음을.... "!" 내가 약간 뒤로 물러선 것은, 그와 동시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그런 참사를 일으켰어?" 그랬다. 이 자는 바로 그 식인소녀와 한패거리였다. 적어도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게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인간을 '저런 비천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 식인소녀 역시, 사람을 마치 물건 다루듯 했다. 아니, 그건 물건이라기보다. '먹이?' 그랬다. 그들은 사람을 먹고, 남은 찌꺼기를 버렸다. 그것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사방을 떠돌았고, 더 많은 인간이 그런 찌꺼기로 변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날 먹어치울 셈이야?" 그러나 쌍어궁은. "그럴 생각은 없네. 그렇게 하려면 자네를 납치하지 않고, 지구에서 곧장 먹어치웠겠지. 하지만 난 자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네." "벌써 충분히 끼치고 있다고 보는데."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을 생각하면, 그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 나는 고작해야 '저런 비천한 것들'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그가 왜 나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주겠는가.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는, 자네에게 부탁을 할 게 있어서 이렇게 초대를 한 것이네." 이게 초대냐. 유괴지. 그러나 쌍어궁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만약 자네가 내 초대를 거절할 생각이었다면, 아마 내 마법을 깨고 그 자리에 머물렀을 걸세. 하지만 자네는 그러지 않았고, 순순히 나를 따라왔네. 그러니 나는 자네가 내 초대에 응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네." "이봐...." 난 마법 같은 건 하나도 모른다고. 내가 무슨 여동생인 줄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자네가 아무리 마법에 대해 모른다고 거짓된 주장을 한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네. 자네는 조금 전에, 상태변화마법 6레벨의 Lust를 깨지 않았나? 그 마법에 일단 걸린 인간은, 절대로 정사를 멈출 수 없다네. 주위에 있는 여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강제로라도 정사를 벌이게끔 되어 있다네. 몸 자체가 그렇게 변해버리기 때문이지. 게다가 자네 주변의 여자들도 모두 그 마법에 걸려 있었네. 그러니 자네가 만약 마법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자넨 분명히 그 여자들과 영원히 정사를 벌였을 것이네. 그런데 그런 마법을, 더군다나 낮은 레벨도 아니고 6레벨이나 되는 마법을 마법수행도 하지 않은 자가 어떻게 깬다는 말인가?" "........" 그건 순전히, 내 주위의 여자들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걸 의심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하지만 상대는 내 말을 기본적으로 안 믿는 모양이다. 내가 무슨 위대한 마법사라고 착각을 하는 듯.... "더 이상 거짓을 말하지 말게. 아니, 그에 대해 말하려고 자네를 부른 건 아니지.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지 않겠나?"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재주로 그의 부탁을 들어준단 말인가? 내 주위의 이상한 공간을 보건대, 오히려 그 반대라면 말이 되겠지만. 물론 난 이런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대머리에게 부탁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엔 여동생한테 부탁을 하고 말지. 그건 바로. "야 ! 이 녀석아 !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오란 말야 !" 그리고 더 이상은 여자들의 헐떡거림을 들을 수도 없다고. 나도 남자니까. 사실은 당장이라도 미친 듯이 그녀들을 껴안고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고 싶지만, 차마 그건 못하겠다. 내가 겁쟁이라서? 아니다. 그건..... "대답이 없군. 관심이 없는 건가?" ".....아니." 일단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들어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말을 해야, 그 다음의 내 태도를 결정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 자가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한다는 거야? 그의 관점에서는 고작해야 '비천한 것들'의 하나인 나에게. "그럼 이야기하지.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부탁은..." 드디어 나오는가.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를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부디 내 마법으로 어쩌라 저쩌라는 식의 말은 안 나오길 바란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녀에게 우리를 추적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전해주는 거네." "에?" 내가 약간 바보 같은 얼굴을 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으니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우주에서 바라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사는 것뿐이네. 자네는 우리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원래 다른 우주의 마법제국에서 살고 있었네. 그러나 그곳의 제국정부는 우리에게 부당한 죄목을 씌워서 감금해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찾아서 탈출했네. 그래서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우주지. 그러나 이곳의 마법사인 자네의 여동생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네. 하지만 100억 광년이 넘는 이 거대한 우주에서, 솔직히 우리를 위해 별 하나 정도 내주는 게 뭐가 그리 대수이겠는가. 그래서 자네를 초청한 것이네. 자네가 그녀에게 부탁해서, 우리를 제발 좀 평화롭게 살게 해주도록 양해를 구해달라는 걸세." "탈옥했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껄껄거리며 웃고는. "그렇게 이해해도 맞을 거네. 하지만 우리는 그 피의 마녀와의 전투에서 동료 일곱 명을 잃었고, 그래서 그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네. 사실 우리가 그녀를 죽이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정당한 복수지." "정당한 복수..." "그러나 이 우주의 지배자와 굳이 다투고 싶지는 않네. 사실 그녀가 우리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굳이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네. 물론 동료들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우리도 자네의 여동생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네. 하지만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은 바라지 않으니, 그녀에게 우리의 뜻을 전해주기를 바라네. 자네의 여동생이니, 아무리 그녀가 우리를 싫어하더라도 자네의 말이라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겠나." 그 말은 그럴듯했다. 확실히 여동생이 언제나 전쟁만 하는 것도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 녀석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독일에서와 같이. "카아악." 이런 일이 어디에선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건 좀 곤란하다. 나처럼 좀비들에게 포위 당해서 죽을 고생을 하는 사람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고, 또한 클라라처럼 가족을 잃는 사람이 더 생긴다는 뜻이다. 이건 곤란하다. 그러니 전쟁은 가급적이면 없는 게 좋다. 그러니까 여동생을 설득해서, 전쟁을 멈추게 한다면 그것도 좋지 않겠는가. 나도 그 녀석이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내 손이 자연스럽게. 뒤적뒤적. 휴대전화를 찾는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다. 아. 여기는 지구가 아닐지도 모르니 이런 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화기를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이거 좀 쑥스럽네. 멋쩍음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아응." 시내의 음란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왠지 지금이라면, 그냥 그녀를 끌어 안아줘도 될 것 같다. 내 발이 그쪽으로 움직이고.... 퍽. 내가 던진 휴대전화가, 쌍어궁의 뺨을 강타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이 동작은, 거절의 의미인가?" 시내에게 걸어가는 나를 보다가, 갑자기 던진 휴대전화에 맞은 쌍어궁의 첫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당연히. "응. 거부야." 그는 약간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어째서인가? 이 세상은 Love & Peace로 가득 차는 게 좋지 않은가? 매일같이 피의 마녀에 쫓겨다니고, 동료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지금의 생활을, 우리보고 계속하라는 건가? 좀 짓궂은 데가 있군 그래. 연 문구군." "그래서가 아니고 !"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얼굴 두꺼운 인간에게. 그러고 보니 어느새 머리카락은 다시 다 없어져 있군. 쳐다보기 힘드네. "당신의 부탁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쌍어궁. "어째서인가? 혹시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선물은 무슨. 하지만 비아냥거림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그러지 않아도, 이 자라면 분명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꿰뚫어보고 있을 걸. 하지만 나로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의사표시를 해야 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감정을 알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역시 지금은 그것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아주고 있다. '이런 게 배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내 입을 열고, 내가 할 말을 했다. 비록 그게 이미 확정된 사실을 다시금 짚어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주위의 여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내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이렇게 만든 것도 문제지만." 확실히 욕정에 눈이 멀어서 알몸으로 뒹구는 모습은, 그리 보고 싶지가 않았다. 특히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서......... 아, 아냐. 난 못 본 거야. 나중에 선생님들이 물어봐도 절대로 봤다고는 하지 않을 테다 ! 그러나 쌍어궁은. "자네의 원초적인 충동을 보고 해준 것이네. 난 책임 없네." 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정작 화내는 것은 다른 이유였으니. "그 말을 억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신의 말을 안 믿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나는 그의 얼굴, 아니 대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콘스탄츠에서 좀비들을 대량으로 만든 그 여자 마법사, 당신 부하지?" 그 말에 그는 의외로 순순히. "그렇다네.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멋대로 일을 저질러 버리더군." 그러나 그 기름칠을 한 입에는 안 속는다. 그건. "하지만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어. 그 마법사를 처치하고 도시를 복구한 건, 당신들이 피의 마녀라고 부르는 그녀, 내 여동생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아가씨였지." 그 모습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그 당당한 얼굴로. "이제 당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겠습니다." 그 외침을 들을 때의 내 느낌을.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신비로운 모습을. "그러나 당신은 보이지 않았어. '피의 마녀'라 불리는 그녀가 무서워서?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원래 그 일을 계획했기 때문에? 그건 난 몰라. 그런 사정은 내가 알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으니까. 다만." 나는 숨을 고른 후에, 다시 말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녀가 정의의 편이고, 당신들은 악당으로 보여. 특히." 나는 시내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직도 욕정으로 정신 없이 몸부림치는 그녀를 말이다. 남자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조차 잊고, 자기 가슴과 다리 사이를 열심히 주무르는 그녀를. 그녀가 제정신이 들면, 과연 이 치욕을 견딜 수 있을까. "이 아가씨는 한때 당신의 부하였지? 그런데 이런 꼴로 만들었어. 접대라는 핑계로. 그런 당신의 어디를 보고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러자 즉시 대답하는 쌍어궁. "그 아가씨는 자네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더군. 그런데 무슨 문제가 되는 거지?" "야 !" 소리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는 결정적인 하나가 빠졌기 때문이다. 그건. "시내가 언제, 이 많은 여자들과 같이 나한테 덤비기를 원했어? 그리고 말야." 나는 다른 여자들을 가리키며 계속 외쳤다. "그리고 이 두 분 선생님들이, 언제 나한테 애정을 가졌다고 그래? 이 분들이라면 애정이 아니라, 제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 쪽이 더 크겠지. 남녀간의 애정은 아니라고 생각해. 만약 그렇다면 벌써 무슨 일이 났겠지. 그런데 !" 시내와 비슷하게, 자신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고 주무르는 두 선생님들. 그 모습은 솔직히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렇게 비춰지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날 남자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최소한. "이게 뭐야? 물론 이 분들도 여자니까 남자하고 정사를 나누고 싶을 수도 있지. 그러나 이건 아냐. 특히 !" 나는 꼬마선생님을 가리키며. "이 분의 성격으로 봐서, 절대로 제자 앞에서 이렇게 구를 리가 없다고." 안 그래도 자신이 작고, 어리게 보인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이 말이다. 왜 남들의 몸매와 비교되는 짓을 스스로 하겠는가. 안 그래도 나온 데도 없는 분이. 툭. "문구야..... 너무해...." 뭐 아직은 자신의 평소의 성품을 유지한 것 같지만, 문제는. "나도 나올 데는 나왔다고...." 억지쓰는 것까지는 맞지만.... 콱. "그런데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 !" 켁. 켁.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선생님. 나는 꼬마선생님의 목조르기를 겨우 풀고, 일단 내려놨다. 만약 문희가 이랬다면 업어치기나 관절 꺾기로 이행하겠지만, 차마 이 분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애 상대로 힘을 과시할 수는.... "즉, 그들 자신의 본의가 아니니까 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건가? 연 문구군." "그래." 아무리 악당이라지만, 최소한 그 정도는 알아라.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나를 위해 그녀에게 부탁 한 번 하는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건가?" "물론이지 !" 어차피 속여넘기는 게 불가능한 상대이니, 이렇게 솔직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 자를 상대로 내가 승리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당당하게 쓰러질 수야 있겠지. 물론 상대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면 벌써 덤벼들었겠지만. '마음을 읽는 상대에게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그래도 최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야." 그가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런 뻔한 얼굴에는 안 속는다. 그 이유는. "그런 놈이 남을 설득한다면서 마법을 걸어?" 그렇다. 사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와 여동생간의 화해를 주선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독일에서 끔찍한 짓을 저질렀고, 비록 그것이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부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죄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니 여동생은 인류를 대표하여, 그의 죄과를 물을 이유가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걸 막겠는가. 그러고 싶어도. "아앙...." 알몸으로 뒹구는 클라라의 비참한 몰골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그런데 왜 내가 갑자기 그에게 호의를 품었을까? 시내의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들은 말이 있었다. 그건. "넌 그때, 시내에게 조종당했었어. 마법으로." 월영 선배의 그 말이었다. 그리고 다른 말도. 그녀는 그랬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 역시 만약 적들에게 사로잡히면 그 다음에는 너 스스로 죽음의 길을 열어가겠지. 네가 전에 만났던 그 식인 마법사처럼. 좀비가 되었던 클라라 슈만양처럼. 웃으면서 네 여동생의 심장을 베어내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마시며 환희에 젖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 거야. 이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찰 때까지." 하지만 나를 멈춰 세운 것은, 그 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선배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건. "너는 너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와 '월하소녀' 뒤에 숨어서 기다리는 것 뿐이야.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그렇다. 그 말이 나를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한 이유였다. 나에게 힘이 없다는 건 알지만, 여자들 뒤에 숨으라는 말만은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힘이 없다고 해도, 최후까지 싸우는 게 사나이의 도리가 아닌가. 어떻게 여동생은 싸우는데, 명색이 오빠가 되어 가지고 쥐새끼처럼 꽁무니를 뺀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나는 절대로 여동생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 옆의 자리에조차도.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은 쌍어궁에게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는 두 손을 모으더니. 짝. 짝. 짝. "대단하군. 그걸 알아내다니." 그는 아직도 나를 아랫것 보듯이 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눈이 달라졌다. 최소한의 값어치는 지닌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는 건가. 하지만 어차피 그래봐야 녀석에게 나는 비천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나도 저런 녀석에게 날 대접해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나는 그들에게 있어, 철천지원수인 미인이의 오라버니니까. 자기들 동료를 일곱이나 죽였다는 저들의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저 상판때기로 보아.... '제발 그랬길 바란다.' 저런 얄미운 놈들이라면, 멀쩡한 사람을 제멋대로 노예로 취급하고 조롱하는 저런 것들을 일곱이나 죽였다면, 나는 여동생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참으로 모처럼, 그 녀석을 칭찬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그 녀석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쌍어궁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하게 해줄 수밖에 !" 내 몸이 움직인 것은, 그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어차피 내가 그와 정면으로 붙는다면, 승산은 전혀 없었다. 아니, 지금의 일격도 사실은 무의미한 짓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정말로 내가 그때 본 그 '월하소녀'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면. 하지만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면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못해보고, 그의 먹이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야아아아 !" 나는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 하지만 내 주먹은 (예상했던 대로) 그의 배에 가 닿지 못했다. 오히려. 퍽. "우악 !" 이미 각오한 바이지만, 나는 순식간에 쌍어궁의 발에 걷어차이고 있었다. 내 몸이 붕 날아서, 그대로 천장에 처박힌다. 쾅. "으아악 !" 농담이 아니다. 평소에 여동생이 나를 패던 때의 감각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때는 최소한의 사정을 봐준다는 느낌이었는데 비해, 지금의 이 일격은.... "크엑 !" 정말로 피부를 자른 후 근육을 파고들어, 뼈를 부숴 놓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내장이라도 파열된 게 아닐까. 최소한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란 것은 명백했다.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과 더불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이것의 느낌은..... '피?' 에이. 설마. 피는 아닐 거야. 설마 단 한 방에 그런 꼴을 당할 리가 있겠어?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우엑." 피였다. 내 입에서는 지금, 피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그런 피가. 아무래도 정말로 어딘가가 단단히 망가진 모양이다. 그리고 내 몸은 다시 천장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하얀 천이 내 눈앞에 다가온다. 이게 그냥 땅바닥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러나. 퉁. 침대의 쿠션의 존재는, 나를 다시금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그리고 다시금 나를 바닥에 처박았다. 문제는 두 번째로 떨어진 곳이 하필. 쿵. 대리석이 깔린 방바닥이었다는 점이다. 이 나쁜 쌍어궁 같으니. 왜 하필 돌로 바닥을 깔아놓은 거냐? 그러나 그를 원망할 틈도 없었다. 나는........ "으.........으으으...." 배, 배가 너무 아파 ! 입가에서 흐르는 피조차 의식을 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 옆으로 누운 채. 마치 배에 쇳덩이가 날아와서 박힌 듯한 이 감각. 그리고. "크엑 ! 쿨럭. 쿨럭." 다시금 나는 피를 토했다.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는 것, 석양빛이나 형광등이나 네온사인이 하는 것이라면 보기 좋은 거지만, 나 자신이 그런 걸 몸소 한다는 건 싫었다. 적어도 오늘의 일로, 그건 확실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핑그르르. 머리가 핑 돌았다. 피를 너무 토해서 빈혈이라도 생긴 건가. 그러나 그런 걸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었다. 콜록거리며 숨을 쉬니까. "으윽......" 갈비뼈가 아무래도 몇 대 부러진 모양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내쉴 때마다 뭔가가 허파를 찌르는 듯한, 인두로 내 몸 안을 지지는 듯한 느낌이 번져간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대고, 쉬고 싶다는 느낌이 들뿐이다. 꿈틀꿈틀. "아아아......"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격심한 고통이 마치 살을 가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비웃는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는. "인간치고는 지혜롭고 용기도 있지만, 힘은 없군." "칭찬해주니.... 영광이네." 그래도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가 안 나온 것만은 다행이다. 뭐 그가 보기에 나는 상당히 머리가 나쁜 족속으로밖에 생각되지 않겠지만. 나는 간신히 그의 조롱을 디딤돌로 삼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창으로 갈비뼈 사이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나를 후벼판다. 무서운 자식. 단 일격에..... 비틀. '그냥 쓰러지고 싶어.' 비틀. '어지러워. 일어나기 싫어.' 하지만 순전히 쌍어궁의 그 뻔뻔한 상판때기가, 나를 억지로 일어나게 했다. 저 빤빤한 얼굴에 한 방 먹이고 싶다는, 그런 내 욕망이 말이다. 어차피 난 살아나기엔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방이라도 때려야 덜 억울하지.' 어차피 난 죽었다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나는 비실거리면서도 어쨌든 주먹을 휘둘렀지만. 욱신. '으윽.' 마음을 모두 읽는 자에게 이런 부상자의, 주먹 같지도 않은 주먹이 먹힐 리가 없다. 그건 나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쌍어궁의 주먹과 발은 곧 그 점을 더욱 확실하게 나에게 인식시켰다. 달갑지 않게도 말이다. 그는 마치 파리 한 마리를 보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며. "훗. 그럼 장난 좀 쳐볼까." 퍽. 퍽. 퍽. 나는 그대로 턱에 한 방 맞았다. 턱이 돌아가며 엄청난 고통이 턱뼈를 타고 올라온다. 그러나 그 고통을 내가 인식하는 순간, 이번에는 볼에 한 방 맞았다. 그것도 손바닥으로. 모욕감이 뺨을 통해 기어오르지만, 그 감각이 도착하는 순간에 맞춰서 이번엔 가슴에 한 방 또 맞는다. 조금 전에 엉망이 된 갈비뼈가 비명을 지르며 날뛴다. 그리고 내 속은 완전히 뒤엉키고 말았다. 나는 당연히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야 했지만. "그걸 내가 허락해줄 줄 알았나. 연 문구군." 평범한 어조, 이건 마치 지나가던 아저씨가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식이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아마 입과 주먹이 다른 뇌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더불어 발도. 그의 온몸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나를 팼다. 그로 인해 나는 쓰러질 수가 없었다. 쓰러지려고 해도.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쓰러지려고 하면 내 몸을 다시 때려서 억지로 허공에 띄우고, 다시 넘어지려는 순간에 나를 걷어차서 허공으로 또 띄우는 식이었다. 적어도 100대는 맞았을까. 하지만 나는 이미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고 싶어도. "아아아아아아악 !" 비명을 지르느라 뇌가 허용용량을 모두 사용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로 내가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뇌가 멋대로 노는 거다. 그리고 내 몸은 그런 변명을 입증할 만큼, 심각한 사태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그것을 파악하기도 전에. 턱. 나는 그에게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그가 나를 비웃듯이 바라본다. 이번에는 올려다보는 거지만, 그건 순전히 그가 나를 높이 쳐들어서 그런 것이다. 내가 그의 위로 날아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얌전히 내 말을 들었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는 나를 놔 버렸다. 하지만 내 몸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중력을 부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몸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쉬잉.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 방향이라면 창문 쪽인데. 드디어 그가 나를 죽일 생각인가. 반격이라도 하고 죽었으면 좋으련만, 상대의 힘이 너무 강했다. 팔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해도. 쾅. 내 몸이 창에 부딪치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입 바깥으로 위장이 쏟아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내 몸은 거칠게 앞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서 다시.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고도 내 몸은 두 바퀴를 더 구르다가, 겨우 멈추었다. 하지만 내 정신까지 멈춰선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지금 저 놈의 조롱거리에 불과하고, 내가 죽지 않은 것도 저 놈이 나를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힘을 조절하는 거라고는 하지만. "눈치챘군. 역시 인간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이젠 저 놈의 달갑지도 않은 칭찬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최소한 저 녀석에게 한 방이라도 먹이는 것이, 내 지금의 목표가 되어 있었기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때린단 말인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으.........으으...........으득."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다시금 녀석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뿐이다. 물론 녀석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방법도 있지만, 왠지 그러기 싫다. 어차피 저 녀석은 여자들에게 했던 행동으로 보아, 인간을 자기 물건쯤으로 취급하는 게 분명했다. 자기가 만든 생물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군. 연 문구군. 보통 인간보다는 훨씬 열린 사고를 하는 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의견이 틀렸던 건가?" "최소한.........너보다는........ 열린 것.........같.....은데........" 아파 죽겠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할 셈인지. 하지만 저 녀석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면, 조금이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히 지금은 너무 아프고, 앞으로도 아파서 대꾸도 제대로 못하겠지만, 최소한 숨을 몰아쉴 시간이라도..... 뜨끔. "으윽." 숨쉬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자기와 조금이라도 유전학적으로 다르면, 설사 동족이라도 무자비하게 처단하더군. 예를 들어볼까?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동물이나 식물에 특허를 내서, 그걸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바로 인간이네. 그런데 그게 왜 인간의 것이지? 그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단지 인간 사회에 처음으로 소개했을 뿐이 아닌가? 그래도 그의 권리는 인정받더군. 멋대로 자연의 사물에 자기 것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말이네.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하는 것뿐이네. 자네 종족의 관례에 따라, 인간이라는 종족에 내 도장을 찍어주기로 한 거지. 그러니 그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냐.........." 왠지 점점 더 얄미워지는 녀석이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탁. 역시 소용이 없었다. 내 오른손은 어느새, 그의 왼손에 잡혀 있었으니까. 그는. "어리석은 놈.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덤비다니." 우드득. 그대로 내 손가락뼈는 부서졌다. 그가 자신의 손에 힘을 넣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네. 연 문구군." 우드득. 이번에는 내 오른쪽 팔꿈치가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깨 차례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다른 행동이 나갔다. 나는 차근차근 부서지는 팔의 뼈를 구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왼손을 그의 뺨에 뻗어..... 퍽. 쿠당탕. 나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고, 그의 뺨에는 피가 묻었다. 물론 그의 두꺼운 얼굴 피부가 벗겨지거나 찢겨진 건 아니다. 단지 피 묻은 주먹모양의 도장이 찍혔을 뿐이다.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가 해낸 것이었다. 비록 그 대가로 오른쪽 팔을 완전히 말아먹었지만. "호오." 그는 놀란 듯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의외라는 투다. 그게 연기인지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에게 한 방이라도 먹인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물끄러미 보며, 그가 약간의 감정을 담아 나에게 말한다. "호오. 팔이 박살이 나는데도 그 고통을 참고, 나를 치는 쪽을 선택한 건가. 괜찮은 일격이군. 인간치고는 대단하네. 연 문구군." "..........영광.......이네." 말이야 이렇게 다부지게 했지만, 나는 더 이상은 일어서지 못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은 하도 많이 맞아서 완전히 작살이 난 데다가, 오른쪽 팔은 이제 마구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뼈가 완전히 가루가 된 것 같다.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런데.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아.' 아무래도 왼손 역시, 작살이 난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저 쌍어궁의 뺨을 칠 때 말이다. 철면피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말로 얼굴이 그렇게 두껍고 단단한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완전히 철벽에 대고 주먹을 휘두른 꼴이잖아. 나는 내 왼손을, 손등을 보았고. "..............갔네....." 거의 솜사탕을 연상시킬 정도로, 손이 부어 있었다. 이래서는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르기 힘들 것이다. 오른팔은 완전히 박살이 났고, 왼손도 이 모양이 되었으니. 하지만 그 대가는. 스윽. 쌍어궁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손가락에 묻은 내 피를 핥아보고 있다. 뭐야. 그게 맛있냐.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비록 상대가 방심했다고는 해도, 어쨌든 녀석에게 한 방을 먹인 게 아닌가. '어차피 곧 맞아죽을 것 같지만.' 나는 죽기 전에, 내 옆에 있던 아가씨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을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니, 최후를 장식하기 전에 작별인사라도 하면 좋겠지.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본 순간, 실망하고 말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붉었고. "하아. 하아." 조금 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욕정에 정신이 없었고, 민망한 꼴로 헐떡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모습을 마지막에 그리고 싶지는 않기에. 최소한 나는 진희의, 문희의, 시내의, 선생님들의, 연미 누나의, 그리고 클라라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생각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왜 그 녀석의 얼굴이 가장 크게 떠오르는 거냔 말이다 ! 오빠가 죽든 말든 관심도 없는 녀석이 ! 그런데 저 녀석, 갑자기 얼굴 표정이 왜 변하는 거지? 그 순간 나는, 그가 내 생각을 읽어낼 능력이 있음을 생각해냈다. 그렇다면. '저 녀석, 정말로 내 여동생한테 동료들을 잃었던 건가?' 매우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퍽. 나는 그대로 허공을, 공중제비까지 돌며 날아갔다. 그대로 방탄유리인지 뭔지 모를 유리창에 부딪치며, 나는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미 낙법이고 어쩌고 할 힘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그대로. 쾅. 앞머리를 세게 부딪치며, 나는 떨어졌다. 하필이면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말이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라도 찔렀는지, 숨이 가빠진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럼 이제 최후인 건가. 하지만 아직 내 심장은 뛰고 있다. 사람의 생명은 질기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기는 그런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드는 순간. "건방진 놈." 퍽. 그는 쓰러진 내 몸을 걷어찼다. 엎어진 내 몸이 다시금 허공으로 뜨면서, 내 고개도 뒤로 젖혀진다. 그 순간, 그의 증오에 찬 눈이 보였다. 그 전 같으면 감히 직시하지도 못했을, 그런 눈이다. 절대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원수를 대하는 듯한 눈. 조금 전의 여유 있던 눈빛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다르다. 뭔가 다르다. 조금 전까지의 그 사람과는 다르다. 물론 이 자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니지만, 이건 다르다. 마치.... 하지만 내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으니. 퍽. 내 왼팔에 그의 주먹이 들어갔고, 그 일격으로 내 팔의 뼈, 정확히 말해 척골과 요골은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렇다. 단 일격으로 말이다. 어차피 왼손은 이미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지만. 뭐 그 부근의 근육도 모두 으깨졌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단정한 이유는. "으아아아악 !"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게 되지가 않았다. 내 오른팔은 이미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젠장. 내 팔이 문어가 되어 버렸어. 하지만 나는 이미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창피하지만. "아아.......으아아아....... 으으으....." 눈물이 나온다. 그랬다. 사나이 주제에, 울고 있는 것이다. 이유가 너무 아프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반 애들이 알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인간들은 한 번 팔이 부러져 봐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다시 볼 수나 있을까? "네 친구들을 다시 볼 일은 없다. 연 문구군." 퍽. 이번에는 내 왼쪽 어깨다. 아니, 조금 아래구나. 어쨌든 간에 내 상완골이 완전히 박살이 난 것만은 느꼈다. 하지만 굳이 상완골이니 척골이니 구분할 필요는 없다. 팔뼈가 완전히 다 나갔는데, 어느 쪽 뼈인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덧붙여서, 그쪽에 붙어있던 근육도 다 찢겨나갔다. 저항도 못해보고 말이다. '젠장.' 하지만 그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 입에서 나온 건. "아아아아악 !" 비명이었다. 고통과 공포와 체념과 절망이 나를 지배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건가. 하지만 이건 너무했다. 죽음의 과정은 왜 이렇게 길게 걸린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나를 곱게 죽여줄 생각이 없는 것인지. "죽여달라고 애걸하게 만들어주마. 연 문구군." 그 말이 내 뒷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그 말은 즉. '날 괴롭히며 죽일 생각인 거냐.' 그 생각은 곧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는 내 심장과 뇌를 피하면서, 다른 부위만 집중적으로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이미 부러진 내 오른팔을 다시 쳤고. "아아악 !" 안 그래도 박살난 내 오른팔은, 아예 피부까지 찢겨나가고 말았다. 아니, 이건 으깨진 것 같다. 뼈부터 근육과 신경에 이르기까지, 전부. 하지만 감각만은 살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팔이 으깨지는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를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정말로 뼛속에까지 파고드는 고통이란 게 뭔지를. '아주 절실하게.' 하지만 나는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비명만 질러댔으니까. 하지만. '절대로 이 놈에게 굽힐 순 없어.' 이 자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 그 자신이 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들이박혔기 때문이다. 이런 자에게 애걸을 한다면 내 체면, 아니 내 자존심, 아니 그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하면 나는. '벌레만도 못하게 될 거야.' 내가 그의 의지에 굽히지 않는 한, 나는 그와 대등한 자리에 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여기서 아프다고 그에게 손을 들면, 나는 영원히 그의 아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여동생과 대등해지기는 틀린 것 같지만. '이 녀석보다 낮은 수준의 인간이 될 순 없어.'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내려가다니. 그럴 순 없다. 하지만 그의 손이 갑자기. 퍽. 아니다. 그의 발이 내 무릎을 쳤고, 물론 내 다리는 그대로 짓눌려 부서졌다. 마치 무릎부분에 쇠망치를 내리친 것처럼. 하지만 차마 내려다볼 수가 없다. 그러고 싶어도. "아아아아악 !" 난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몸부림조차 칠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꾸욱. "아아악 !" 부러진 갈비뼈가 내 몸을 들쑤시니까.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아픔을 덜기 위해.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런 내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하긴 그런 놈이 사람을 이렇게 팰 일도 없지만. 퍽. "이 새끼 !" 퍽. "개새끼 !" 퍽. "개만도 못한 새끼 !" 그는 그렇게 저주를 퍼부으며, 나를 계속 쳤다. 한 번 내가 맞을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내 입에서는 피가 샘솟듯 뿌려졌다. 그리고 그는. 퍽퍽퍽퍽퍽. 내 발끝부터 시작해서, 경골에서 대퇴골까지 차근차근 순서대로 부숴 나갔다. 마치 나를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처럼. 하긴 이렇게 뼈가 부서지면 다시 이어 붙일 수도 없을 것이다. 뼈만 부서졌다면 인조 뼈라도 가져와서 붙이면 되지만. 우직. 뿌직. 빠직. 이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뼈만 나가는 게 아니라, 그 근처의 근육까지 다 박살이 나고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안 들었으면 좋겠지만. "아아악 ! 아아악 ! 아아악 !" 내 신경은 그 상황을, 나에게 아주 잘 전달해주고 있었다. 이런 건 안 전해줘도 돼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른 부분은 다 죽으면서도, 신경만큼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아픔을 느끼는 부분만. 혹시 그것도 이 못된 자식의 마법일까. 하지만 나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아악 ! 아악 ! 으아아아악 !" 비명을 지르느라 눈을 뜰 수도 없었으니까. 나는 돌로 된 바닥에 누운 채, 그의 야만적인 폭력의 희생물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쾅. 나를 다시금 걷어찼다. 나는 다시금 떠오르면서, 아주 잠깐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이 이제 날 다 때린 건가?'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내가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다시금 나를 걷어찼다. 이번에는 허리다. 젠장. 등뼈가 부러졌겠군. 이젠 여자들을 끌어안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 같다. 여기서 살아나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랬다. 진희도 문희도, 시내도 클라라도, 연미 누나도, 심지어 선생님들까지도 바로 옆에서 피가 튀고 있는데도 우리를 쳐다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직 열락을 바라며, 남자를 바라며, 아주 미미한 크기의 천만을 걸친 채 엉망으로 몸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나는 조금 전에 쌍어궁이 한 말을 생각해냈다. '상태변화마법......... 무슨 레벨이었더라? 어쨌든 그거.......' 그게 그렇게까지 막강한 마법이었나? 확실히 그게 강력하긴 강력한 마법일 것이다. 나도 당해봐서 알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마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걸 풀어낼 정도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은 다 넘어가더라도. "아아아..." 저 문희가 저런 꼴로 나뒹굴 리가 없는데? 사실 그가 일부러 나에게만 마법을 약하게 걸었을 수도 있긴 하다. 나를 유혹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가만. 가만. 조금 전까지 이 녀석은 그야말로 능글능글, 여유 만만 그 자체였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다. 이 자는 분명, 그 사람의 얼굴을 내가 생각했을 때 태도를 바꾸었다. 그건 바로..... 쿵. 나는 다시 대리석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한없이 잔인한 미소. 악어의 눈물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 순간에. "이 똥만도 못한 자식." 우직. 그는 내 배를 그대로 짓밟았다. 이젠 깨질 대로 깨져서 더 깨질 것도 없는 내장이, 마구 뱃속에서 뒤섞이는 듯하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의 고통이 지나가자, 나는 차분해졌다. 이 자가 증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그것은. "으.............으................으.........." 말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심하게 부서졌기에. 하지만 말을 해야 한다. 그건 바로..... 내가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좋아했던 그 사람에 대한 일. 그건 바로. "........내...........여동생이..............두려운 거...........야?" 그가 갑자기 발길질을 멈추었다. '역시, 그랬구나.' 내가 그의 마음 속의 핵심을 짚은 것인가. 그는 구타를 멈추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확실히 그가 정말로 내 '여동생'에게 일곱이나 되는 동료들을 잃었다면, 나를 이렇게 패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순간에, 그가 태도를 바꾸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냉정했던 놈을 순식간에 광분하게 만드는 그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새삼스럽게 나는 내 '여동생'의 무서움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다른 세계의 존재에게까지 악명을 떨치다니. '괴물 같은 녀석.'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이 정말로 내 친 여동생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월영 선배의 말대로, 그녀가 정말로 내 여동생이 아니라면..... 그걸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그것은. "제기랄." 그는 느닷없이 바닥을 걷어찼다. 바닥이 흔들림과 동시에, 대리석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왜 발광이야? 혹시 내가 '여동생'에 대해 생각해서 그런 거냐? 나는 곧 날아올 주먹질과 발길질을 기대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날아온 것은 그의. "네 놈에게는 내가 준 육체의 고통보다, 그 계집애가 주는 정신적 고통이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는 건가." 장탄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기에, 그저 조마조마하게 그의 구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가 폭력을 더 휘두르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절망적인 상황이다. 아무리 내가 둔하다고 해도. '이젠 끝장이야.' 그 정도는 아니까. 팔다리가 다 부서졌고, 갈비뼈가 나간 데다가 내장까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게 지금의 내 꼴이다. 그 때문에 내 몸에서는 사방에서 내출혈이 일어나고 있고, 그 피가 입 밖으로 마구 흘러나오고 있다. 오히려 심장과 폐가 제대로 움직이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특히 폐는. '숨쉬기가 힘들어.' 폐결핵 말기 환자는 한 번 기침할 때마다 자기 폐의 일부가 찢겨져서,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게 정말인지는 내가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크윽.' 뭔가, 아주 깊은 곳에 늪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젠 정말 죽는가 보다. '여동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릴 능력까지는 없을 것 같으니, 난 이제 끝이다. 적어도 이 자가 나를 치료해줄 이유는 전혀 보이지 않고....... "좋다. 네 놈을 확실히 굴복시켜주마." 확실히 이 꼴로 보아, 이쪽에는 희망을 걸 이유가 전혀 없다. 사실 그가 날 치료해 줄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솔직히 저 태도로 봐서는 더한 짓을 당해도 놀라운 일도 아닐 테고. 그런데 저 인간. '그렇게 내 '여동생'에게 지기 싫었던 거야?' 남을 다치게 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그리 분해할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걸 내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내 꼴로 보아, 이대로라면 분명히 얼마 못 가서 죽을 게 뻔하니까. 내가 지금 할 일은, 그저 내 심장이 언제쯤 멈출지, 아니면 언제쯤 내 머리가 저 녀석의 발길질이나 주먹질, 또는 마법에 의해 박살이 날지를 초조하게 지켜보는 것뿐이다. 상당히 비참한 신세다. 나도. 그런데. "문구야." "?" 누굴까. 이 상황에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눈이 침침해져서 잘 안 보이지만, 억지로라도 본다. 일단 쌍어궁이나 그의 동료는 아닌 것 같으니까. 물론 최고의 상황으로 '여동생'이 나타난다는.......... 왜 내가 그 녀석의 출현을 최고의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냐..... 하지만 그 녀석의 목소리는 결단코 이렇지 않다. 게다가 그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여태까지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럼 이 목소리는 누굴까. 눈에 들어온 모습은. '못 본 걸로 하자.'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여자의 다리 사이에 뭐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지금 내가 흥분해봐야 뭘 어쩌겠는가. 어차피 제정신도 아닌 여자들이 아무리 내 앞에서 얼쩡거린다고 한들, 즐겨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기에는 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기도 하고..... '가만. 가만.' 그런데 왜 이 아가씨들이 나한테 그렇게 다가와 있는 거지? 나는 아주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눈을 살짝 떠보았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뜬 것을 후회했다. 내 앞에는 살색의 파도가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뭐? 좋은 거냐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좋은 일인 줄 아냐? "그, 그만 해요 !" 내가 비명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여자들이 나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그것도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닌 여자들이 저렇게 다가왔다는 것은, 내가 더욱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최음제를 먹었는지 발정기가 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완전히 흥분해서 나무토막이라도 껴안을 여자들이 나에게 왔다는 것은. "이, 이거 놔 !" 내가 특별히 '도덕군자'라서가 아니다. 지금 그녀들이 날 껴안는다는 것은, 내 부러진 팔과 다리와 갈비뼈와 허리뼈와 내장이 마구 눌리고, 찌그러진다는 뜻이다 ! 그것은 당연히 엄청난 고통을 동반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악 !" 이렇게 말이다. 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탈출하려고 했지만, 마법에 홀린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 몸의 상태가 너무 나빴으니까. 팔이고 다리고 힘이 들어갈 수가 없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오히려. 욱신. "윽 !" 이렇게 될 뿐이다. 나는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여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만약 그들의 눈이 사랑을 담고 있다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 아니 치명상을 입고 죽어 가는 사람을 마구 끌어안고 헉헉거리는 걸 보면 절대 사랑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욕정이나 욕망은 있겠지만. 그리고 나는 꼼짝없이. "읍 !" 입술을 빼앗겼다. 누구인지 확인해보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전혀 없다. 그 순간에 나는, 눈을 감은 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달콤한 순간이라도, 당사자가 즐겨볼 준비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 부서진 몸을 이렇게 마구 잡아당기고 누르다니. 나는 그들에게 항의하려다가, 정말로 이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할 자에게 화살을 돌리기로 했다. 그건. "어, 어쩔.........우웁 ! .........어쩔 셈이야? 쌍어궁 !" 이 녀석말고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겨우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니, 그는 웃고 있었다. 역시 못된 자식이다. '여동생'아. 부디 내가 죽으면 원수나 철저히 갚아다오. 저런 녀석은 그저 똥물에 처넣어서 삶아 죽여야.... "팔다리가 부러져도 당황하지 않던 놈이, 지금은 전혀 안 그렇군. 기분 좋아 보이는데?" "그럼 네가...........쿨룩......... 대신해 봐 !"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나는 손님에게 준 선물을 도로 빼앗을 만큼, 인정머리 없는 자는 아니네." 이게 뭐가 인정이 있는 행위라는 거냐. 나는 반론을 펴려다가, 그럴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내 입술은 이미, 소녀들에게 점령당했으니까. 하지만 하나도 황홀하지가 않다. 그러고 싶어도, 몸의 여기저기서 나오는 비명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부러진 뼈를 마구 누르는 그녀들의 행동은........ "그, 그만 해....... 아악 !" 고문 그 자체였다.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들을 시켜서 가하는. 참으로 잔인한 작자라고 해야겠다. 이런 걸 선물이라고 주다니, 아니 그보다. '왜 이 아가씨들이 선물이 되는 거야?' 사실 그에게 내 친구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리는 없다. 진희도 문희도 시내도 클라라도 연미 누나도 선생님들도,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니까. 그런데 그는 그런 걸 모두 무시하고, 단지 자신의 물건으로만 그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런 자의 논리를 인정해줄 수는 없었다. 그걸 인정한다면. '나도 그의 물건이라는 소리가 된다고.' 그렇다. 인간에 대한 그의 권리를 인정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있는 나 역시 그의 노예임을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내가 '여동생'도 아닌 이상, 특별취급을 받을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생각대로, 그녀들을 선물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품을 수도 없다.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아.............울컥. 아아..............커억. 으으아..........콜록. 콜록." 피하고 신음하고 비명뿐이니까. 너무 아파서 의식을 잃어버리려 하다가도, 그녀들의 음탕한 애무가 나를 강제로 생지옥으로 불러들인다. 보통 이런 경우는 남자들이 너무 부러워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어설픈 논리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아픔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너........ 뭘 원하는.............거야............." 도대체 그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서, 뭘 얻으려는 걸까. 처음에 왜 그는 나에게 여자들을 선물이라며 안겨주려고 했을까. 어차피 죽을 것 같으니, 그 전에 물어보기나 하자. 그래서 나는 억지로 입을 열긴 했지만.... '저 녀석이 대답해줄 리가 없지.' 그리고 그 답을 들을 때까지, 내가 견딜지도 솔직히 의문이고. 아무리 '여동생'의 구타에 단련되어 어지간한 고통에는 익숙한 나지만, 이젠 더 참지 못할 것 같다. 이제 곧 내가 고통에 못 이겨 미친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네에게 평화를 위한 봉사를 시키려는 것이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비명을 토해내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가 대답을 해준다고 해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미인이보다 못된 녀석 같으니.' 그저 속으로나 욕을 해주면서, 나는 죽음 속으로 가라앉아 가고..... "뭣이 !" 느닷없이 날아오는 큰 소리. 뭐냐. 역시 저 녀석에게 있어 '여동생'은 극악무도한 존재인 모양이다. 그가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이까지 갈아가며 소리친다. "내가 왜 그 괴물보다 못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냐." "그럼 네가......... 그 녀석보다....... 잘났냐?" 당연히 그건 아니다. 실제로 '여동생'에게 얻어맞아서, 골을 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갑자기 표정을 원래의, 얼음 같은 것으로 되돌리더니. "그렇게 고통을 겪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나는 관대한 존재이니." 네 놈의 어디가 관대하다는 거냐. 그렇게 빈정거리려는 순간, 갑자기 내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래. 할 말이 없으니까 또 때리려는 거냐. 하지만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으니. "자네가 나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그 죄를 용서해주지." "What?"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일곱 명의 미녀들이 나를 휘감았다. 진희와 클라라는 앞에서, 문희는 오른팔을, 시내는 왼팔을, 연미 누나는 뒤에서, 그리고 두 분 선생님들은 내 다리를 하나씩 맡아서. 이미 몸이 부서진 내가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건 무슨 짓이지? 이런 야한 포즈를 굳이 취하게 하는 이유는...... "그럼, 훌륭한 마법사가 되기를 바라네. 연 문구군." "뭐?" 내가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소녀들은 나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확 달아오른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열기를 내뿜으며. 나는 어떻게든 그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 이마에, 그리고 소녀들의 이마에 무언가가 날아오고..... "안 돼 !" 그 순간 들려오는 자신만만한 소리. 이 목소리는 설마. "확실히 안 되는 일이군요." 그랬다. 그건 분명히, 내 '여동생'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콰앙. 주위는 하얀빛에 휩싸였다. 여동생은 마녀 인물소개편 <인간편> 1. 연미인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지만 실질적으로 주인공 대접을 받는 소녀. 대한민국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부모님과 말썽꾸러기 오라버니 한 명이 있다. 원래는 평범한 소녀였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악마와 같은 다른 이에게서 힘을 빌리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녀가 마법사라는 말은 상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가 힘을 빌어오는 마법지팡이는 그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마법사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힘을 빌어쓰는 것과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오라버니에게 그녀는 '그레이트 프레셔 Great pressure'를 안겨주는 사람이기도 하며, 이것은 그녀의 능력이 오라버니보다 뭐든지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오라버니를 마구 패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그녀의 능력으로 볼 때 오라버니가 너무 느릿느릿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그게 광속으로 달리는 자신과 100m를 음속의 1/10 이하로 달리는 오라버니의 입장 차이에게 기인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어지간하면 자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침 기상시간부터 무조건 때려야 일어나는 오라버니의 특이체질로 인해, 오늘도 열심히 그녀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녀는 지구를 침략한 다른 우주의 존재인 황도십이궁(그녀가 붙인 별칭) 일당을 잡기 위해 밤마다 외출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국적 기업 플래닛 그룹의 회장직을 맡아 격무를 수행하므로 상당히 바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녀로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단순한 심심풀이 정도의 일이므로(그녀의 머리용량 탓이다), 그리 부담이 되는 건 아니다. 또한 그녀는 몇 번이나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지만, 오라버니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알기 시작했다. 신장 : 165 생일 : 5월 4일 혈액형 : AB형 좋아하는 것 : 오빠(오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 감상 싫어하는 것 : 정치인 학교 : 대업고등학교 1학년 3반(오빠와 동일) 클럽 : 항공우주부(안영미 물리 선생님 담당. 구 건물 5층 19호실) 특기 과목 : 체육, 과학 과목 전부 특기 : 요리, 운동, 플루우트 연주. 장래 희망 : 아직 안 정했어요. 특수사항 : 다국적 기업 플래닛 그룹의 회장이며, 6살때부터 주식투자로 돈을 모아 그룹을 매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상세한 사항은 불명. 2. 알리사 맥도웰 미인이(통칭 여동생)의 경호원 겸 비서이자 IQ 195의 천재. 무술과 사격이 특기분야이며, 여동생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다. 그녀의 과거는 일체 베일에 싸여 있으며, 여러 나라 출신의 비서진(메리, 나타샤, 루이 등)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다만 여동생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불명. 3. 연 문구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여동생과 매우 사이가 좋은 오빠로 외부에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여동생에게 일방적으로 맞는 입장이다. 원래는 같은 학교의 동급생인 송 진희를 좋아하여 고백을 한 적이 있으나, 둘 다 연애 방면에는 미숙한 터라 그 이상 사이가 진전되지 못했고 지금은 여러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다. 학교에서의 좌석배치는 여동생의 옆이며, 바로 뒤에 소꿉친구인 문희와 지우가 앉는다. 다만 진희는 저 멀리 떨어져서 앉았다는 이유로, 약간의 우울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 자신은 여동생의 실체를 목격한 적이 있지만 꿈이라고 착각을 해버린 적이 있고, 실제로 여동생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받았지만 여동생이 그렇게 착하다면 자신이 악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해서, 그 도움들을 모두 망각하는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여동생에게 자신이 무척 시달린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장래 희망을 선생들이 조사할 때 엑소시스트(악령 퇴치자)라고 써낸 적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운동과 공부 모두 상위권이며, 특히 축구에 재능이 있지만 불행히도 여동생이 옆에 있어서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관련 상품을 좋아하며 특히 피규어를 좋아해서, 스스로 옷을 탈착하는 타입의 피규어를 자작할 정도의 실력이 있다. 그리고 100m 기록은 1학년 여름을 기준으로 11초 대. 신장 : 170 생일 : 5월 4일. 미인이와 동일. (30분 빨리 태어났던가?) 혈액형 : O형 좋아하는 것 : 축구 싫어하는 것 : 야구, 여동생 클럽 : 당연히 축구부 특기 과목 : 체육 특기 : 당연코 축구 장래 희망 : 축구 국가대표선수, 엑소시스트. 4. 송 진희 부잣집 아가씨로 착하고 예쁘고 키와 가슴도 크지만, 불운을 안고 사는 아가씨이기도 하다. 문구의 짝사랑대상이었지만 그녀 자신의 성격이 너무 수줍은 탓에 사귈 기회를 놓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문구를 가난뱅이라며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그녀의 언니의 사랑이 좌절된 것처럼 문구에게도 비극이 닥칠 것을 우려하여 본인이 몸을 사리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미인이와 진희의 친언니 정도지만, 연애에 불간섭주의를 고수하는 미인이의 입장상 개입은 하지 않고 있다. 진희의 장래 희망은 우주비행사, 또는 전투기 조종사이며, 이는 그녀 자신의 부자유한 삶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가 항공우주부에 들어간 것이지만, 문제는 체육을 못하기 때문에 꿈이 쉽게 이뤄질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녀의 동경하는 대상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미인이이며, 이는 그녀의 활발함과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굽히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점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신장 : 168 생일 : 4월 3일. 문구보다 한달 연상. 혈액형 : ? 좋아하는 것 : 하늘. 새. 비행기. 싫어하는 것 : 정치인. 클럽 : 항공우주부(안영미 물리 선생님 담당) 특기 과목 : 다 잘한다. 다만 체육은 못하는 편이다. (그래도 평균 이상?) 특기 : 부잣집 아가씨의 교양과목 다수 장래 희망 : 우주비행사. 하늘을 동경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기 때문. 5. 송 연미 진희의 하나뿐인 언니이자, 재벌 집안에 시집가야 하는 불운을 타고 난 여인.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계략으로 인해 그를 잃었다는 과거를 안고 있다. 그로 인해 상당히 비관주의적인 면도 있지만, 진희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문구와 진희와의 연애를 적극 찬성하고 있으며, 자신처럼 비극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S대학 1학년생으로서, 그녀의 유일한 낙은 문구를 놀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외에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슬픈 인생을 보내는 셈이다.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장래가 기대되었지만, 현재는 포기한 상태다. 6. 명수 : 진희의 경호원 중의 하나로, 과거 여동생의 박치기에 맞아 기절한 경력도 있다(6화 (3) 참조). 무술 고단자이자 특전사 출신이지만, 비교되는 상대가 하필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맞는 입장. 7. 전 문희 문구의 소꿉친구이며 어릴 때부터 같이 먹고, 같이 잤다는 점으로 인해 서로간에 허물이 별로 없다. 건강하고 발랄하며 가만히 있으면 예쁘지만, 문제는 그녀의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아무도 그녀에게 말싸움을 걸지 않는다. 문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호감을 품고 있으나, 소꿉친구는 연인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라 문구의 연애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이는 문구의 결점까지 모두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그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래의 희망은 언론계에 진출하는 것이며 생일은 7월 18일. 8. 강 지우 문구의 친구이자, 문구와는 축구부의 동료이다. 머리 좋고 미남이고 운동도 잘하며, 시도 때도 없이 여자들에게 고백을 받는다는 소문이 붙어다니지만 실제로는 여동생을 노리는 듯하다. 다만 여동생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배부른 소리를 늘어놓는 문구에 대해 질투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9. 연 준수 미인이와 문구의 아버지. 현재 의사이며 일단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잘 지키는 편. 10. 정 영아 미인이와 문구의 어머니. 현재 직업은 약사이며 남편의 병원 앞의 약국을 운영하고 있어서 매우 바쁘다. 그 덕에 가사능력은 0에 가깝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미인이의 엄청난 가사능력을 상당히 부러워하고 있다. 11. 장 마진 여동생과 문구의 반의 반장을 맡고 있으며, 얼굴은 주근깨가 있어서 약간 못났다는 평을 듣고 있으나 그건 반에 미인들이 많아서 그런 면이 있다. 이름을 맘에 들어하지 않아서 '장 윤지'로 개명을 생각하고 있으며, 이유는 마진이라는 이름이 margin(매매 차익금, 이문)을 뜻하는 영어단어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풍그룹의 횡포로 인해 어머니의 회사가 부도를 낼 뻔한 적이 있어서 전풍그룹을 극히 싫어하며, 그로 인해 풍남이도 싫어하고 있다. 부활동은 항공우주부. 12. 김 풍남 전풍(電風. 즉 전기바람을 뜻한다)그룹의 후계자이지만 전풍(錢風 : 돈바람)이라고 불리고 있어서, 장래에 자신의 것이 될 전풍그룹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희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교우관계로 인해 진희와 잘 알고 있으며, 그로 인해 문구와 대립하기도 한다. 미인이의 재능에 탐을 내기도 하며, 재벌후계자치고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듯해서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경우가 꽤 많다. 클럽은 경제연구부이며, 장래희망은 '존경받는 그룹회장'이지만 쉽지 않을 듯 하다. 13. 진희 아버지 문구를 매우 싫어하며, 전풍그룹 총수와 막역한 사이이기도 하다. 각종 악행을 암암리에 저지르는 모양이지만 그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악한 능력에 걸맞게 국회의원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다. 문구가 진희에게 접근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한 적도 있으나, 여동생에게 걸려서 제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합법적이었던 활동인데다가, 결정적으로 그의 딸인 진희와 여동생이 친구사이였으므로 그녀도 그를 날려버리지 못했다. 여동생과는 물과 기름 사이이며, 돈과 권력 모두를 지니고 있다. 14. 강기운 축구부 1학년생으로, 문구와 그럭저럭 친한 사이이며 머리도 좋은 편이지만 자주 나오지 못하는 비운을 안고 있다. 15. 홍만보 축구부 3학년생으로, 청소년 국가대표로서 포지션은 수비수이고, 장래에 세계에서 인정받는 위대한 수비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모델은 당연히 홍명보) 16. 클라라 슈만 문구가 콘스탄츠의 병원 9층에서 만난 독일 소녀. 좀비로 뒤덮인 콘스탄츠의 병원에서 위험하다고 피하라는 경찰들의 권유를 무시하고 부친을 간호하다가, 그 부친이 좀비가 되는 바람에 옷장에 숨은 사연이 있다. 그때 겁을 왕창 먹는 바람에, 경찰이 부친을 죽이고 나서도 그들 앞에 나서지 못했고, 그로 인해 피난민들과 합류하지 못했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문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차후 여러가지로 문구와 인연이 많게 된다. Clara Schumann으로 표기. 금발의 초록 눈빛이라는, 전형적인 긴 생머리의 독일 소녀이며, 현재는 히로인 자리를 놓고 진희와 대치중이지만 이쪽이 더 우세한 듯 하다. 17. 리하르트 그라스, 미하일 슐츠, 아돌프 비트만 좀비의 도시가 된 콘스탄츠를 문구가 탈출할 때, 같이 장갑차에 타고 탈출한 사이이다. 모두 독일군 현역이며, 아돌프의 경우 이름 문제로 인해 '총통각하'라는 달갑지 않은 비공식 별명을 가지고 있다. 18. 매직마스터 세라 문구가 좋아하는 애니매이션의 여주인공이며, 무지개색 빛을 뿜는 마법소녀이다. 갈색머리에 '포로롱'이라는 곰인형을 부하로 두고 있으며, '포롱 포롱 포로롱. 포롱 포로롱.'이라는 변신주문을 가지고 있고, 마법 사용시 '교묘한 편집에 의해 가려지는' 누드 모습이 된다. 19. 왕수박 : 서울 시장님. 화려하지만 시민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사업을 자주 벌이는 경향이 있다. 20. 강 미연 담임선생님. 나이는 25세인지 27세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내의 '누님연방'을 상징하는 선생님이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긴 머리에 몸매도 좋고 마음씨도 착하지만, 맹하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대업고등학교 1학년 3반의 담임이며, 맹하다는 것과는 안 어울리게 수학선생님이기도 하다. 안 영미 선생과는 누님/로리 콤비로서 친한 친구 사이이다. 그 맹함으로 인해 다들 기피하는 심령현상연구부의 임시 담당을 맡고 있기도 하다. 다른 선생들은 그 부의 부장인 월영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델은 아즈망가 대왕의 오사카. 21. 안 영미 물리선생님이자, 미인이의 소속부인 항공우주부의 담당을 맡고 있다. 현재 나이는 26세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쪽은 단발머리에 상당히 평평한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학교내의 '로리지온'을 대표하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외모와는 달리 머리는 꽤 좋은 편이며, 지휘봉 하나를 휴대하고 있고 이것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게 잘 안 된다. 학생들 대다수를 꼼짝못하게 하는 특기로 '눈물방울을 눈에 맺히게 하면서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는 기술'을 지니고 있으며, 불량학생이 아니라면 이 기술에 거의 모두가 승복한다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불량배는 두들겨 패야 한다는, 보기와는 다른 과격한 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모델은 '선생님의 시간'의 미카 선생. 22. 왕 건전 윤리 선생이자, 남자. 2m에 육박한다고 생각되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것이 특기이며, 대머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3. doors you, XL, 9000 미국의 휴이 소프트에서 개발된 컴퓨터 운영체제로, 컴퓨터 부팅시에 미소녀가 나와서 안내를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9000의 경우는 그럭저럭 양호한 성능이지만 XL은 컴퓨터 용량을 상당히 잡아먹는다는 문제가 있으며, 특히 You는 너무나 다운을 잘 일으킨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악당편> 1. 강미주 대업고등학교 2학년생이자 월영의 친구였지만, 사실은 마법사로서 활동하다가 여동생에게 당해서 죽은 인물이다. 원래는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마법사가 된 후부터 급속도로 악에 물들었으며, 몇 차례나 마법사로서 여동생과 대결하였다. 하지만 대결 도중에 그 몸을 파괴당함으로서 한 번 죽고, 마법의 힘을 빌어 다시 부활하였으나 여동생의 '마법계약 강제해지'의 일격을 맞아 마법근원체와의 연결이 끊어짐으로서, 이미 시체가 된 몸이 완전 붕괴하여 최후를 맞았다. 불량배들과 친구 사이여서 월영은 몇 차례 그녀에게 그런 교우관계를 끊으라고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불량배들의 공적인 여동생에 대한 복수심으로 시내에게 문구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시내를 악의 마법사로 만들었던 전과도 있으며 이 일로 인해 문구가 마법의 세계에 대해 아는 길을 연다. 2. 황도십이궁 쌍어궁(Zodiac-pisces) 마법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탈옥한 12인의 죄수중 리더이며, 여동생의 숙명의 적수이다. 모든 사건의 원인이며 여동생의 마법수행의 시작은 바로 그 때문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파생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죄명은 영혼마법의 혼 빨아먹기를 위시한 금기마법의 연구이며, '물고기 자리의 악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래 그들의 일행은 12명이었으나 여동생과의 전투에서 일곱 명을 잃었고, 남은 다섯의 생존자는 여동생을 피의 마녀(Bloody witch)라 부르며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의 이름이 쌍어궁인 이유는 일행이 12인인 데다가 그가 마법진을 설치할 때 사용한 돌이 자수정(경건/체념/자기비하 상징)이기 때문이며, 이 돌은 황도십이궁 중에서 쌍어궁에 대응하므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쌍어궁의 기능은 유동/파괴이고, 4대 원소 중의 물이며 2마리의 물고기로 나타나므로 그의 본질에 상당히 적절한 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언제나 분신체(물고기 하나)만을 여동생에게 보이고, 실체(물고기 둘)는 어둠 속에 가려두기 때문에 그를 쉽게 죽일 수 없었던 여동생에게는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3. 적 여동생에게 대적하는 자들. 정확히 말하면 쌍어궁과 그 동료들이 만들어낸 마법근원체에게 조종되는 마법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지구인 중에 힘을 원하는 자가 마법근원체와 계약하여, 자신의 혼을 넘기는 대신 힘을 얻은 자들이다. 상당한 마법을 지니고 있으나 주문마법 중에서는 레벨 10까지 사용하는 것이 한계이며, 이로 인해 궁극의 강함에는 절대 다가갈 수 없다. 또한 마법근원체의 주인인 쌍어궁과 그 동료들의 명에는 절대 복종하며, 죽고 나면 그 몸은 살아있는 시체, 좀비가 된다. 이는 죽게 되는 마법사의 혼을 강제로 빨아내어 에너지원의 일부로 삼는 마법근원체의 습성으로 인한 것이며(모든 마법근원체가 다 그런 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금기마법인 영혼마법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유래가 된다. 마법사의 혼을 불완전하게 빨아내기 때문에 혼이 불안정화되어 무너지며, 이런 일을 당한 자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반쪽짜리 혼을 지닌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4. 좀비 살아있는 시체. 영혼마법의 불완전성이 만들어낸 생물과 비생물의 경계선에 선 자들이며, 혼이 체내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이다. 따라서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가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살을, 혼의 기갈을 면하기 위해 사람의 혼을 빨아먹어야 하므로(또한 이 과정에서 혼을 불완전하게 빨아내므로), 피해자는 좀비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생사는 애매하므로 일반적인 타격으로는 죽일 수가 없으며, 몸을 완전히 불태워서 혼을 쫓아내거나 그게 아니라면 혼을 원래대로 치료해줘야 한다. 그러나 전자는 쉽지만 후자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보통은 불에 태워 죽여야 퇴치가 된다. 또한 이들은 아직 살이 썩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으로 위장함으로서, 다른 인간을 습격하는 것이 매우 용이하다. 주로 마법사들의 최후에 생겨나는 족속들이지만, 콘스탄츠에서는 이런 자들의 일부가 사람을 습격, 일반인을 좀비로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립편> 1. 정 월영 과거 일본 애니메이션 중의 '츠쿠요미(월영)'를 본 사람들에 의해 '네코미미 선배(고양이귀 선배)'라는 별명이 붙여진, 심령현상 연구부의 부장. 현재 대업고등학교 2학년생이지만, 본래의 정체는 다른 세계의 마법제국의 명령을 받아 쌍어궁과 그 일당들을 추적하는 수사관 임무를 띈 마법사이다. 그녀는 쌍어궁의 부하마법사들과 달리 혼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으며, 마법의 사도가 아닌 정도의 수행을 했으므로 자신의 혼을 부수지 않고도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마법의 정도의 수행은 매우 긴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대신 사도와 달리 혼의 붕괴가 전혀 없어서 수행을 거듭할수록 그 위력이 강해진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지팡이는 붉은 루비로 된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루비가 지팡이머리에 박혀 있고 붉은 무늬가 새겨진 하얀 전투복을 입고 있다. 물론 노출도는 매우 높아서, 망토와 시야방해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기도 하다. 미주와 알고 지내는 이유는 그녀가 인간으로 위장하면서 친구를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나, 결국 그녀는 미주가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고 죽는 꼴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다. 일단은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으나 실체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2. 김 시내 Kim see ne 항공우주부 부원으로 대업고등학교 1학년생. 단발머리에 키도 가슴도 어중간한 수준이며, 전반적으로는 무난한 스타일이다. 강미주를 선배로 따르다가 그녀에 의해 마법사가 된 후에는 문구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현혹마법을 사용한 적도 있지만, 그 때는 평범함을 위장한 여동생의 발차기로 무산되었다. 그 후 마법이 풀리고 나서는 월영의 밑에 들어가 마법사에 대해 알게 되나, 아직은 기초과정도 떼지 못한 마법 견습생일 뿐이다. 원래부터 문구를 좋아하고 있어서 그에게 고백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동생과는 보통 수준의 친구사이. - 인물소개편 종료 -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21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 (1) 사악함을 징벌하기 위해서는 가혹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 냉정함과 잔인함이 부족할 때, 악은 선량한 자들을 마음껏 해치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악을 동정할수록, 선은 부서지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녀. 내 '여동생'은 악의 화신 쌍어궁에게 징벌을 내렸다.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그 냉정함과 가혹함은 부디, 나 없는 데서 써 줘.' 그랬다. 내 주위가 새하얀 빛에 휩싸이는 순간, 나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내가 날아오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빛이 쌍어궁의 그림자를 통과하는 순간, 그는 녹아서 사라졌고 나는 그 빛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그런데 그 빛, 왠지 아주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것 같은데. 그것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징벌의 기둥..... 콰앙. 바닥이 그대로 무너지면서, 우리 주위의 암흑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나타난 곳은, 처음에 여기에 왔을 때 보았던 그 이상한 집의 꼭대기였다. 그 일류호텔처럼 보였던 그 방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 지붕이?' 그랬다. 지붕이 하얀빛에 구멍이 남과 동시에, 사방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붕을 이루는 돌 더미들은 우리에게 떨어져 오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하늘로 쏘아지듯 날아가고 있었고. '이건....' 그랬다. 그 빛이 우리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순간, 공기가 사방으로 폭발하듯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지붕을 뜯어낼 정도의 폭풍이 우리라고 온전히 놓아둘 리 없다. 나도 진희도 문희도 시내도 클라라도 연미 누나도, 그리고 두 선생님들도 모조리. "우아아아아 !" 멋지게 허공으로 빨려 올라가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로 날아가는 경험은, 지난번에 독일에서 경험한 후로 두 번째인가? 하지만 그 때에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내 여동생인지 괴물인지 우주인인지 모를 그녀가.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다. 게다가. "아아아아악 !" 그렇다. 팔이고 다리고 몸통이고 다 부서진 인간이, 난데없는 폭풍에 휘말려 의지할 데도 없이 하늘로 날려갔다. 이게 무슨 상황이겠는가. 온몸이 멀쩡한 사람도 태풍에 휩쓸려서 공중으로 올라가게 되면 거의 살아남지 못하는 판국에, 왜 아직도 안 죽었는지 의심스러운 내가 그 상황을 만났으니. '난 죽었다.' 그렇다. 이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미안하지만 제로라고 해야 하겠다. 그런데 그 빛은 대체 뭐야? 느닷없이 나타나서 나와 모두를 날려버린 그 빛은. 설마..... 나는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을 알고 있지 않다. 아니, 한 사람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월하소녀가 이렇게까지 무지막지한 짓을 할까. 적어도 좀비들을 인간으로 되돌릴 때의 그녀는, 절대 이런 식의 만행을 저지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건 누군가 다른 이의 짓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누구지?' 가장 먼저 생각난 '이런 짓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월영 선배였지만, 그런 가능성은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제자라는 시내도 같이 있는 이 상황에서, 그런 무식한 마법을 동원한다면 당연히 시내도 죽을 위험이 있다. 아니, 지금 상황이라면 그녀의 죽음은 확정되었겠군. 애도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의 장례식은 아마도 내 장례식이 될 공산이 컸다. 아니, 장례식이나 제대로 열릴지 의심스럽다. '시체나 찾을 수 있으려나.' 한심한 걱정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내 시체가 온전히 남아있기를 바라는 건 무리이다. 곧 나도 저 아래로 떨어져서, 완전히 산산조각, 가루 이하로 분해되고 말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주 작은 행운이다. 일단 닥쳐봐야 알 것이다. 그런데. '누구지?' 월영 선배도 '여동생'도 아니라면, 다른 마법사들이 후보로 떠올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법사들의 인맥에 대해 아는 게 있었나? 없었다. 그리고 인간이 저 쌍어궁이나 그 일당에 맞설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말이다. 솔직히 마법사들의 모험담에 나오는 자들은 끽 해봐야. '그 식인소녀의 발끝에도 못 미칠 거야.' 내가 인간의 잠재력을 너무 낮게 보는 게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월하소녀, 아니 '여동생'의 힘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걸로 봐서, 인간이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그녀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싶어도. 쿠르르르릉.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가, 그런 망상을 싹 지워버렸다. 내 몸이 갑자기 휙 돌아가면서, 그 폭풍에 휘말려들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높이, 더 빨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건. "말도 안 돼 !" 몸이 아픈 것조차 잊을 정도로, 그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저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가는 빛. 그건 아까 보았던 징벌의 기둥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역시 위압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불투명하여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빛이라기보다는 무슨 고체와도 같은 느낌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나온 자리는. "저건?" 몸이 빙그르르 도는 덕분에 아래를 볼 수 있었다. 약간 어지럽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가 본 그 빛은 대륙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빛이 뚫고 나온 구멍을 중심으로 하여, 균열이 사방을 향해 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설마. 콰르르릉. 그리고 그 붕괴는 바다에까지 이어졌다. 바다를 향해 뻗어 가는 힘의 파도는, 바닷물 전체를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붕괴되는 바다 밑의 땅이 거대한 골짜기를 만들고, 바닷물은 그 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다가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 육지의 계곡도, 바다의 계곡도 똑같았다. 거기에선 별의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액체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더불어 검은 연기도. 이건 설마. 맨틀까지 뚫려 버린 건가? 그 일격으로? 하지만 내 놀라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이렇게 내가 계속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가 드러나지 않는가. 어지간한 힘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못한다. 그런데 왜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지?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난 죽었을 텐데?' 그렇다. 하늘로 나를 밀어 올릴 정도의 폭풍이 연쇄적으로 나를 덮치는 이 상황에서, 내가 왜 아직도 죽지 않았는가. 솔직히 궁금했지만, 이유를 말해줄 사람도 없으니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난 지금 죽는 게 확정된 것 같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발 아래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는 것밖에 없다. 물론 저 아래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이지만. 그런데. 잠깐. '내가 굳이 그 악당들을 걱정해줄 이유가 있나?' 어차피 이 근처에 사는 자들은 아마 전부, 쌍어궁과 그 일당들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을 걱정해야 하는 거지? 물론 이곳이 지구라면 내가 걱정해야 할 사람들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주위 풍경이 너무 황당하다. 특히. "지구엔 태양이 두 개씩이나 있을 수가 없다고." 그러니 여기는 지구가 아닐 것이고, 그 녀석이 여태까지 나에게 저지른 짓은 절대로 착한 일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내가 그 녀석에게 맞은 게 얼마인데. 그러니 그 녀석들이 어떻게 되든 난 모른다. 그리고 남의 사정을 걱정하기에는, 지금 내 꼴이 너무나 안 좋았다. 사람을 날려버릴 정도의 폭풍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라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쿠르르릉. 붉은 용암과 검은 연기.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일어나는 대륙 전체의 붕괴. 그리고 바닷물의 급속한 끓어오름. 넘침.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양의 빛. 이건. "설마?" 그렇다. 그 설마가 현실로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느새 숨을 쉴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고, 내 주위의 상황은 자꾸만. '윽. 추워.' 이게 뭔가. 내 몸은 간신히 안 부서질 정도의 풍압에 밀려 올라가고 있었고, 그 최종 목적지는.....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힘 주어 외치는 사태가, 내 아래에서 발생했다. 그건. 콰앙. 대륙 전체가, 마구 갈라지면서 하늘로 떠오른 것이다 ! 서, 설마. 설마. 설마아아아 ! 나는 최악의 사태가 닥쳤음을 깨달았다. 내 아래에 있는 별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별은 지금. 콰아아앙.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별 전체가 빛을 뿜어내면서. "!" 그대로 붕괴되었다. 암석과 용암이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우주공간으로 날아갔고, 그 사이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그나마 내가 가장 위에 있어서 돌을 맞고 죽지야 않았지만.....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엄청난 굉음이..... "안 들리는데?" 그렇다. 나는 아무래도 소리보다 빨리 날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폭음은 나에게 미처 도달하지 못했고, 나는 무사한 것인가. 어쩐지 좀 조용한 편이더라. 이것도 행운........ "행운이 아니잖아 !" 그렇다. 이대로라면 나는 별의 바다로 나가게 될 것이고, 사람이 맨몸으로 우주로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내가 이런 꼴을 당한다면, 아마 진희나 문희나 시내나 클라라나 연미 누나나 선생님들도 역시 이렇게 되고 있을 게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이건 절대, 결단코, 행운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내 추측이 맞을 경우, 그들 역시 분명히 지금의 나처럼. '수, 숨이 막혀.' 공기가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다. 설마 대류권이 아니라 성층권에 도달해버린 건가? 벌써? 그리고 나는 점점 눈동자가 부풀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니, 이건 안구가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라고 할까. 게다가 산소의 고갈은 허파의 일그러짐을 선사했고, 안 그래도 엉망이 된 몸은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하지만 그 피조차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고 있다. 사실 별 전체가 폭발하고 있는 판이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젠 가운데에 중력을 제공할 무언가가 없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죽는 건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황당한 방식으로 전투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자를 무진장 원망했다. 아무 것도 못 한 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오로지 여동생에게 관심을 쏟지 않은 내 탓인가. 여섯 살 무렵에 내 곁에서 영원히 사라진, 그 아이를 찾지 못한 죄로, 하늘은 나에게 죽음의 사자를 보내어 목을 자르는 건가. '부모님. 안녕.....' 나는 서서히 암흑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붕괴되는 별을 아래에 두고서. 탁.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아주 부드러운 무언가에 부딪쳤다. 이건 뭔가. 설마 천사의 품이라도 되는 건가. 사실 난 '여동생'에 비하면 별로 못된 짓도 안 했으니, 천국이나 극락에 간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니다. 뭐?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냐고? 그 '여동생'을 옆에 두고도 미치거나 가출하지 않았으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럼..... 퍽. "아구구구구 !" 나는 누군가의 한 방에 맞아, 그대로 머리부터 감싸쥐었다. 누, 누구야? 설마 쌍어궁? 나는 그 '누군가'를 향해 당장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낯익은 목소리가 먼저 날아왔다. 그런데 이건..... "자화자찬은 제 가슴에서 머리를 뗀 후에 해주세요." 나는 그 목소리에 매우 큰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내가 아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무척 닮았는데, 그 말투가 아주 불쾌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그 녀석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나에게 말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기본적으로 가슴의 촉감과 크기로 보아, 절대 이건 그 녀석이 아니다. 우선 그 녀석은 가봐야 D컵이라고. 이렇게 E컵이나 그 이상은 될 듯한 부피는 나오지 않아. 아니, 아냐. 일단 누군지 보고 말하는 게 먼저겠지.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고. "월하소녀 !" 그렇다. 그녀는 바로, 내가 독일에서 식인소녀에게 붙잡혀 죽기 직전에 날 구해주었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내가 잘못 봤거나, 쌍어궁 녀석이 또 환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 상황에서 그럴 이유는, 없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없다. 절대로 없다. 그 상황에서는 그냥 내 머리통에 보석을 박아 넣고, 그대로 자기 노예로 만들어버리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아가씨는 정말로. "..........!" 정말로 이 아가씨가 내 여동생이라는 뜻인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비록 월영 선배와 쌍어궁이 한 목소리로 단언한 사실이지만, 그리고 나 자신도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니기를 바랬다. 만약 그 사실이 진실이라면, 나는, 아니 내 여동생은.... '오빠. 오빠. 살려줘.' 그때 내가 구해주지 못한 그 여동생은, 지금 어느 하늘에 있단 말인가. 아니다. 이미 땅 아래에 묻혀서, 영원히 오빠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그 애에게 나중에, 죽고 나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겉모습만 똑같은 가짜 여동생에게 속아서, 그냥 즐겁게 일생을 보냈다고 자랑이라도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궁금한가요?" 아무래도 내 여동생은 정말 죽은 모양이다. 그 녀석이 나한테 이렇게 존댓말을 쓸 수가 없으니까. 그런 일은 지구가 박살나지 않는 한 절대로 생기지 않을.... 쿠르르릉. 저 아래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다. 아마 부서지는 별의 한 조각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제발 아니기를 바라지만, 설마 저게 정말로 지구라는 건.... "아니에요." 단호하게 단정해버리는 월하소녀. 일단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최소한 이 여자는 그 쌍어궁보다는 믿을 만하니까. 그런데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다른 여자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애들은, 선생님들은, 누나는..... "다 무사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가리키는 그녀. 그런데 왜 그 말을 하면서 나를 지적하는 거야? 그녀의 손가락이 나, 정확히 말하면 내 바로 옆을 가리킨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 완전히 알몸이 된 친구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 정확히 말해서 진희, 문희, 시내, 클라라, 연미 누나, 그리고 선생님들까지. 그런데 왜 다 알몸이야. 그렇다면 이건 혹시..... 나는 나 자신의 몸을 보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으니까. 보려고 해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이 깃털들은 대체..... "지금은 위험하니, 일단 그 안에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냐? 왜 내가 이런 깃털 안에 몸을 파묻고 있어야 하는 거냐. 머리와 상반신만이 남아 있던 여자들이, 갑자기 안으로 푹 파묻힌다. 그리고 나 역시. "우악 !" 그대로 안으로 푹 들어갔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끌려 들어가는 거야? 그 순간 월하소녀의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제가 만든 소환수예요. 일단 그 안에 있는 편이 안전하니, 기다리고 있어요." 소, 소환수? 이렇게 깃털을 날리는 소환수라면.... 나는 생각나는 괴물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려고 했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 괴물의 밥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파앗.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면서, 다시 바깥이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이게 뭐야 !" 그렇다. 불행히도 나는 알몸으로, 우주공간 한가운데에 떠 있었던 것이다. 으. 부끄러운 사태다. 이게 왠 변이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주위에 떠 있는 다른 아가씨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에? 이게 뭐야?" "꺄악 ! 싫어 !" 나와 똑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자들의 알몸을 보고 좋아할 단계는 확실히 아니었으니. '그거 보는 것보다 치료가 먼저라고 !' 그렇다. 내 몸은 그 망할 쌍어궁에 의해 완전히 부서지고, 박살나고, 으스러진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좋은 구경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그대로 사망에 이를지도.... 퍽. "아구구구구." "이미 모두 치료를 했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야한 생각만 하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 주위의 여자들을 모조리 홀랑 벗겨 놓은 건 내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잠깐. 벌써 치료를 했다고? 언제? 어떻게? 질문을 하려는 순간, 월하소녀가 먼저 말을 한다. 아니, 이건 말이라기보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게 전해져 온다. 이런 게 텔레파시라는 건가? 아니, 아니. 뭔가 좀 다른 것 같지만 아무튼. "당신은 지금 불사조(Phoenix)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직접 자신의 몸을 볼 수 없어요. 그래서 정신체의 모습으로 일단 구현을 한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알몸으로 있는 건." 차갑게 내리찍는 그녀. "몸에 걸친 가식을 모두 벗어버린, 순수한 정신체의 모습이라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이상, 그녀들은 당신에게 몸을 보여주기는 해도 마음을 보여주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어차피 그 상태로는 섹스도 못 하니까, 욕망을 가라앉히는 게 나아요." 무, 무서운 여자. 대놓고 '섹스'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그런데 결국 그녀의 말을 종합하자면, 지금 내 주위의 여자들이 알몸으로 보이는 건, 순전히 내 탓이란 말이잖아? 터무니없는 뒤집어씌우기다. 어떻게 이런 식의, 여동생 같은 짓거리를 마음대로 하는지....... 그런데 잠깐.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은...." 물론 내 여동생과 그녀가 같은 인물이라면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가 없지만, 아닐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그녀가 나보다 훨씬 나이 든 사람인지, 그게 아니면 저 모습 그대로의 나이일지, 그것도 아니면 실제는 훨씬 어린지를 모르니,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녀가 100세가 넘는 할머니라면, 괜히 반말을 했다가. "으아아아아." 이렇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내 질문은.... "당신이 정말로 내........."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하지만, 안 된다. 마치 내 턱이 1000만 톤은 되는 듯하다. 아무리 힘을 써도, 그 다음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건 눈앞에 다가온, 끔찍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진희가 아니었으므로 내가 물어볼 때까지 하루동안 쩔쩔매며 기다리지 않았고. "당신의 여동생과 저는, 동일인물이 맞아요." 쾅. 그녀의 말은 마치, 무슨 핵폭탄처럼 나를 찍어눌렀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로 내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잠깐.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로 '연 미인'이라는 이름의 내 여동생이라는 말이야? 아니, 아니야. 월영 선배의 말로는 저 정도로 마법수련을 하려면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녀는 내 진짜 여동생이 아니라는........ "이 전투가 끝나면 설명해 줄 테니, 그때까지는 얌전히 구경만 하고 있어요." 한 방에 내 입을 막아버리는 그녀. 하지만 힘으로 찍어누른다고 내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내 '여동생'이 맞는다면. "왜 존댓말을?" 그렇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연 미인'이라는 이름의 내 여동생이라면, 이건 불합리한 일이다. 오죽 불합리하면, 저 아래의 별이 부서지겠는가. 말도 안 된다고. 그런데 오빠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녀석일 그녀가, 어째서..... "공무중이니까요." 네가 무슨 공무원이냐. 무슨 공무는 공무야. 갑자기 뭔가 아주 딱딱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심지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아가씨들조차도. '그게 말이 되냐.' 그것 봐. 다들 표정이 그렇잖아. 하지만 내 여동생은. "설명은 나중에." 그리고 그녀는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그건. "쌍어궁 !" 그렇다. 그가 틀림없었다. 그 완벽한 대머리만 봐도, 그가 분명했다. 물론 우주공간에서 아무 도움도 없이 맨몸으로 떠 있는 것만으로도, 그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지만. 그런데 저 놈, 상당히 화가 난 듯 한데. 하긴 내가 여동생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으니, 당사자를 보았을 때의 반응이 저런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년이......." 솔직히 말해서, 극히 증오하는 상대를 만난 것치고는 말이 너무 점잖다. 뭐야. 저거. 물론 그의 빛나는 대머리에 돋아난 핏줄만 봐도, 그의 감정을 대충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런데 도대체 내 여동생한테 뭘 당했기에 저런 식인 거야? 하지만. "저건 다 연출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럼 그렇지. 월하소녀가 정말로 내 여동생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멋지게 상대의 김을 빼놓는군. 하지만 저 녀석도 좀 안 됐다. 어쩌다가 내 여동생에게 걸려 가지고..... 하지만 그는 전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네 년에 대한 감정을 보여주는데, 이 이상의 모습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 봐. 물러설 생각이라면, 어차피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겠지만. 하지만 이왕이면 멀리 가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되는데. 너무 많은 사건이 동시에 터지니까.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어.'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내 주변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전에는 월하소녀라는 외계에서 온 여자아이의 신비한 마법....이라는 식으로, 초현실적인 사건은 나와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다. 그 소녀는 알고 보니 내 여동생이었고, 그 사건들은 이제 나와 결합하려고 하고 있었다. 달갑지 않게 말이다. 현실이 비현실로 치환되는 사태가,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런 판국에. '사건이 또 일어나면 어쩌라고.' 당장 내 여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꼴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반말로. "야 ! 지금 뭐 하는 거야 !"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전투중인 사람에게 그렇게 발을 걸고넘어지는 짓을 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싸움이란 걸 해봤기 때문에, 지금 그랬다가는 여동생이 다치거나 죽는, '생길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저 모습의 여동생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것도, 솔직히 뭔가 어색하다. '저 모습 어디가 내 여동생이야.' 전에 저 녀석이 대기업 회장이란 사실을 알고 났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솔직히 저 모습대로 내 앞에 나타나면,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할 말은 이것이니까. "아, 안녕하세요. 누님." 솔직히 좀 더 성숙해 보이고, 키도 커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게 위화감을 안겨주는 것은 가슴 크기였다. 내 여동생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물론 평상시에도 D컵으로 추정되는 가슴 크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저 모습은 뭔가. E컵? F컵? 줄여 잡으면 아마 E로 생각되지만, 저건 솔직히 뭔가가 아니다. 조금 전에 만져본 바로는.... 퍽. "아구구구구." "일편단심으로 야하군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나 하는지." 윽. 저 녀석이 내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잊었었다. 그 외양으로 인해 자꾸 까먹게 되지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소환수 안에 있다는 내 머리통을 저렇게 귀신처럼 때릴 수 있는 거냐.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그 일격이, 그녀가 내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아무리 겉모습이 다르다고 해도. '역시 저 녀석은, 내 여동생이 맞아.' 그렇다. 사람을 저렇게 마구 패는 인간이, 내 여동생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여동생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필이면. "드디어 오늘이야말로 정의가 승리할 때가 왔다. 이 악의 화신, 미친년아 !" 쌍어궁의 그 말로 인해 드러나고 말았다. 그 말속에는, 그동안 여동생에게 나와는 다른 의미로 억눌려온 자의 한이 배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대체.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해서?'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저 녀석'이라고 부르기에는 분위기부터가 너무 안 맞는다. 우선 가슴 크기부터가 문제지만, 그보다는 다른 쪽이 더 이상했다. 내 여동생이라면 10년 이상을 같이 살아와서 아는데, 우선 얼굴부터가 저런 누님 타입이 아니다.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할까. 게다가 키가 나보다 크다.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여동생보다 내 키가 더 크다는 게, 그동안의 내 자랑이었는데. 아니, 아니지. 그것보다는. "똑같은 게 하나도 없잖아 !" 그렇다. 적어도 외모에서는, 여동생과 그녀와의 동일한 부분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목소리나 눈빛이라도 같았다면 어떻게 하겠는데, 이건 그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이런 그녀를 내 여동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지만 다른 말을 쓰기도 좀 그렇다. 아까 그녀 자신이. "당신의 여동생과 저는, 동일인물이 맞아요." 잠깐. 잠깐. 어느 여동생이 오빠한테, 그것도 친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하지? 아무리 그녀의 말대로 '공무중'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 딱딱한 게 아닌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녀석이라는 건 잘 알지만, 이건 뭔가..... 그러나 내가 그녀에 대해 더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쌍어궁의 말에 여동생이 뭐라고 대답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정의의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던가요." 저건 여동생이 생각해낸 말이 아니다. 아마 옛날의 역사가가 한 말 같은데, 누군지 잊어버렸다. 하지만 왠지 쌍어궁 녀석에게는 맞는 말 같다. 무엇보다도. "이 개 같은 계집애가 !" 마구 화를 내는 걸 보니 말이다. 좀 고소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었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자기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거지?' 멀쩡한 사람에게 최음제를 먹이고, 아니 최음 마법을 걸고 처녀들을 홀딱 벗기며, 나를 무슨 복날 개 잡듯이 패던 인간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웃긴다. 물론 그는 인간이 아니니 인간의 정의를 내세우기는 좀 곤란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안 맞는다. 하지만 그는. "하지만 상대적인 기준으로 봐서, 나는 네 년보다는 확실히 정의로운 존재다 !" 그 말에, 나와 내 주위의 아가씨들은 모두 나자빠지고 말았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그 어이없는 전복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저게 어디가 정의롭다는 거야. 그러나 그는. "특히 지금 피닉스 안에 있는 그 놈 !" 왜 갑자기 나를 지목하는 거야? 사실 이 안에 있는 남자는 나 하나밖에 없으니, '그 놈'은 분명히 나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저게 왜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는 거야? 여동생을 말싸움으로는 이기지 못하니까, 나한테 화살을 돌리는 건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으니. "그 놈이 바로 네 오라버니라고 했지?" "그런데요."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리고 여동생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은 그 다음에 쌍어궁이 내뱉은 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으니. "그 말, 거짓말이지?" "네?" 무슨 말이냐는 듯이 묻는 여동생. 하지만 결정타는 바로 그 다음에 나왔으니. "자기 오라버니에게 드래곤 브래스를 날려서 죽이는 여동생이 어디에 있냐 !" 에? 잠깐. 잠깐. 설마 내가 지금 죽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왠지 그렇게 말을 하니까, 갑자기 내가 왜 그 상황에서도 안 죽었는지가 이해가 간다. 이미 죽었으니까. 아니, 아니 그렇게 납득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쌍어궁의 그 말은, 그 이상한 빛의 기둥이 그 녀석을 관통하고 땅바닥으로 파고 들어갈 때, 이미 내가 죽었다는 소리잖아?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유령처럼, 정신체만이 남아서 떠 있는 것도 말이 되는.........아니, 아니. 잠깐. "뭐라고오오오오?" 내가 놀라서, 목청껏 소리를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나만 소리를 지른 게 아니었으니, 다른 여자들 역시 똑같이. "마, 말도 안 돼." 이건 연미 누나의 반응. "미인이 너.......... 친구의 의리도 없냐?" 이건 문희의 반응. "You, You're mad. Oh, No. no. You're CRAZY(다, 당신 돌았어, 아냐, 아냐. 아냐. 당신은 미쳤어) !" 이건 당연히 클라라의 반응. 그리고 그녀의 말에 나는 절대로 동조했다. 도대체 어떤 여동생이 오빠의 목숨을 빼앗아 가냐. 아무리 기본적으로 사악하다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그런 의견은 두 분 선생님들도 동의할 정도였으니. "미, 미인아.... 난 널 그렇게 가르친 적이..........." 서로 다투기로 유명하신 두 분이,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낼 정도였다. 사실 모두가 놀라는 이유는 상당히 단순했으니, 그 상황에서 내 목숨이 날아갔다는 말은 즉, 다른 여자들도 당연히 죽었다는 뜻이다. 솔직히 진희나 문희나 연미 누나나 클라라나 선생님들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물론 시내는 마법사의 제자니까, 좀 배운 게 있을지 모르니 다르긴 하지만. 그런데 진희의 반응은 왜 없지? 자세히 보니. 꼬르륵. 아예 기절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친구한테 모가지가 잘린 꼴인데 안 놀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런데 시내는 왜 저렇게 태연한 거지? 혹시 정말로 마법사라서, 그 죽음의 일격을 피한 건가? 하지만 쌍어궁 녀석도 못 피할 정도라면 그녀가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그 정도로 실력이 있다면 납치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궁금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자기 가슴을 손으로 가리고, 약간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답을 했다. 그건. "이미 한 번 미인이에게 머리통이 쪼개진 신세인데, 이제 와서 뭘 놀라겠어요." 그렇구나. 시내는 전에 여동생에게 걸려서 머리통이 박살났다고 했었지. 새삼스럽게 그때의 마법 깃털이 떠오른다. 그때는 정말 끔찍했었는데.....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때 그 깃털을 박아놓은 게 그 녀석이라고 하면..... "너, 내 기억도 날려버렸었냐?" 그때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네 소행이었냐?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짓을 안색도 안 변하고 할 수 있는 거냐 ! 그러나 여동생이라는 애가 하는 말은. "그건 김 시내가 당신에게 걸었던 정신마법의 후유증이에요. 일반적으로 악마의 농담(Jest of demon : 정신마법 7레벨)에 걸린 사람들이 그런 증세를 나타내요." 제스트.......... 뭐?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말을 부인해야 할 시내가 그러지 않고 있고, 월영 선배에게서도 들은 말이니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법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럼 너......... 그때 날 마구 팬 것은...." 설마. 절대로 달갑지 않은 말이 또 날아온다. "마법을 쓰지 않고 정신마법을 깨려면,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그래서 오빠한테 공중 10단 연속기를 먹였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마법을 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때리고 싶어서 그랬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그런데 잠깐. 잠깐. 조금 전의 드래곤 브래스 어쩌구 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서. "너, 정말 날 죽였었냐?" "네." 그, 그런 대답은 빨리 하지 마 ! 그리고 그 대답의 의미를 눈치챈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으니..... 쿵. 쿵.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것도 정신체라는 게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내가 잘 모르니, 이건 내 기분 때문에 들려오는 소리인가. 하지만 말야. "야 ! 오빠를 죽이는 여동생이 어디 있냐 !" "여기 있는데요." 크, 그런 대답은 빨리 하지 말라니까 !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했다. 안 할 수가 없었다. 여동생한테 맞아죽었다면, 어떤 오빠라도 이렇게 반응하는 게 심히 당연하니까. 아니, 이렇게 호들갑이라도 떨지 않는다면, 나는. "으아아아아." 그대로 미쳐버릴 것이었다. 사실 이건 장난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여동생이 오빠에게 식칼을 들이대거나 걷어차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자 그대로 박살을 내버릴 수 있냐? 도대체 저런 괴물을 내 여동생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솔직히 인간적으로 그건 못하겠다. 이건 뭔가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오죽하면. "그것 봐. 내 말 맞지." 다른 놈도 아니고, 저 쌍어궁이 득의만면한 미소를 띄며 떠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만큼은 여동생에게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말야. "!#&^!#$%!&^!%(&*%^!%^ !!!" 하지만 내 항의는 논리 정연한 말이 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냉정할 수 없었으니까. 나를 죽인 살인자를 상대로, 무슨 논리고 뭐고 찾을 게 있는가. 그러나 그녀는 별로, 아니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역시 여동생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가 말한 것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으니. "그것이 당신이 택한 길이니까요." 뭐? 놀라는 나에게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한다. "저는 당신의 의지를 보았어요. 당신은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 쌍어궁을 상대로, 결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자유를 빼앗겨서 노예가 된 친구들을 유린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들을 유린하는 것이 쌍어궁이 그들을 노예로 부릴 권리가 있다는 인정임을 알고 그것을 거부했으며, 스스로를 노예라고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픔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당신을 죽이는 것 이외에는 당신을 그에게서 풀어낼 방법이 없기에, 저는 그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명예로운 전사님."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돌아서더니, 지팡이를 쥔 왼손을 풀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이건 설마. 말도 안 돼. 저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있을 수 없어 ! 있을 수 없어 ! 절대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한 번의 목례에, 내 분노나 절망이나 혼란은 모두 날아가 버렸으니까. 이것은 그녀가 나에게..... '나를 인정한 것인가.' 농담이 아니다. 이런 경우는 여태까지 없었다. 언제나 멍청한 오라버니라고 구박만 받았는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다니. 그런데 이럴 때는 어떻게 답례를 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내가 무슨 중세의 기사도 아니고, 대통령이나 장군도 아니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건 완전히 기습이고, 내가 대항할 수 있는 성질의 폭력이 아니었다. 이건 예우였으니까. "넌........ 나를 전사로 인정하는 거야........?" 그 말에 그녀는. "네. 당신의 힘의 크기에 관계없이, 당신은 훌륭한 전사예요. 독일에서도 그랬듯이." 그리고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쌍어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아직도 많았지만, 뭐랄까. 내가 바라던 바로 그것이 나에게 왔으니까. 그것은 그 상황에서도 끝내 소녀들을 범하지 않은 나에게 주어진, 작지만 아주 큰 보상이라고 할까. 그리고 돌아서기 전에 내가 본 그것은. 방긋. 그렇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본, 안개에 가려지지 않은 맑은 상태에서의 그녀의 미소였다. 베일을 쓰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비록 눈도 머리칼도 내 여동생과는 다르지만, 그래서 아직도 내 여동생인지는 실감할 수 없지만, 그 미소의 잔상은 내게 뚜렷이 남았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하고 싶었다. 그건. "너, 설마 그걸 다 보고 있었던 거야?" 이런. 문희가 선수를 쳤다. 그 덕에 나는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런. 젠장. 하지만 그녀들에게 있어 그건 당연한 질문이었다. 여동생이 내 행동을 보았다는 의미는 곧. "아잉." "아앙." "으응." 이걸 다 봤다는 소리니까 말이다. 여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엄청난 수치였고, 소문이라도 돌았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부다처제였다면, 나는 꼼짝도 못하고 일곱 명 전부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을 거다. 이런 아까운 일이.......... '아, 아니지.' 얼굴을 드니 어쩌니 하기 전에, 수치심으로 자폭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여동생이 그 일을 얼버무리기라도 하기를 바랬다. 그래도 저 녀석도 여자인데, 설마 그런 말을 대놓고 하면 얼마나 친구들이 충격을 받을지 모르지는 않겠지. 그러나 상대는 여동생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라버니에게 마법을 쏴서 죽여버리는(!) 그 여동생 말이다. 여동생은 냉혹하게도. "I see everything." 비록 영어로 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있는 아가씨들이 그걸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물론 한글로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가 영어를 모를 경우에나 해당되는 것이고..... 그런데 잠깐. 뭐라고? 다 봤다고? 쿵. 연미 누나가 기절했다. 당연하지. 내가 여자라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절하고 말 거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쿵. 역시. 우리 담임도 기절해 버렸다. 하긴 제자 앞에서 벌인 그 추태를 다른 제자가 다 보고 있었다니. 앞으로 교단에 서기는 틀렸다..... 심지어 그 심기 굳은 문희 조차도. 쿵.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마 지금 문희의 심정은, 죽고 싶다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 나한테 강간당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나를 강간하려고 한 꼴이니. 물론 이건 그 스스로의 의지로 한 일이 아니기야 하지만..... 그런데. '너무한 거 아냐?' 그런 사실을 모조리 다 말해버리다니. 물론 그 녀석이 한 말은 아주 짧은, 세 단어로 된 문장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기에는 말이다. 그런데 잠깐. "왜 빨리 오지 않았어 !" 그렇다. 그걸 다 보고 있었다면 당연히 이곳에 좀 더 빨리 와서, 우리 모두를 구할 수도 있었지 않았는가. 하지만 여동생이라는 애에게 논쟁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으니. "이곳의 시간과 당신이 사는 우주와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설명은, 하나마나다.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형이상학적인 설명은 하지말고, 난 머리가 나쁘니까 간단하게 말해. 알기 쉽게." 최소한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러자 여동생은 다시 설명을 해 주었으니. "제가 당신의 우주에서 이 우주로 왔을 때, 당신의 우주에서는 0.1초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지만 이곳의 시간은 1시간 가까이 흘렀어요. 따라서 그 동안에는 제가 이곳의 상황에 간섭할 수가 없었어요. 마법을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인질로 잡혀간 사람의 사정도 안 보고 무작정 파괴마법을 난사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기에 그렇게 된 거예요." 아까보다는 이해하기가 편해진 말이지만, 그래도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그보다 말야. 그렇다면. "그럼 여기에 오고 나서 마법을 썼다는 소리인데....." 오라버니로서 꼭 해야 할 질문은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 묻자.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떻게, 들어오자마자 파괴마법을 나한테 쓴 거지? 그 덕에 난 죽었잖아?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었던 거야?" "네." 빠, 빨리도 대답한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앙금이 내 마음속에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왠지 저 녀석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쉽게 내리는 결단이 아니다. 그런데 저 녀석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가지고..... 그러나 내가 불평을 입 밖으로 털어놓기 전에 여동생은. "그럼 이 물고기 아저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죠. 제가 만약 어중간한 마법으로 당신을 구하려고 한다면, 그가 가만히 있을까요? 당연히 막겠죠. 이 녀석도 겉보기와는 달리 꽤 실력은 있어서, 그렇게 되면 당신을 구출하지도 못하고 그냥 상황이 끝나버려요. 실제로 당신도 강제로 마법사가 될 뻔했고." 그 이상한 보석이 날아오던 걸 말하는 건가. 그런데 왜 굳이 쌍어궁의 대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하는 걸까. 물론 저 자의 기분을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래서 전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하기로 했어요. 당신 일행에게 걸린 각종 마법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제거하기도 곤란하고, 당신의 목숨을 붙여놓은 채 빼내는 것은 실질적으로 쌍어궁과 그 졸개들이 너무 많은 이상, 일의 난이도를 불필요하게 높이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인간이고, 인간은 나와 쌍어궁의 싸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여파를 견디지 못해요. 어차피 죽을 것이 당신들의 운명이라면, 차라리 내가 먼저 당신을 죽여버리는 게 낫죠. 아무리 그가 이상한 마법을 당신에게 미리 걸어뒀다고 해도." 무서운 자식..... "죽어버리면 대부분의 부여마법은 무력화. 그러고도 걸려 있는 마법들은 소수이니 제거하기가 훨씬 간단해지죠. 덤으로 저 아저씨의 집도 날려버릴 수 있고." 왠지 덤이 주종인 듯한데. 그런데 그녀는 쌍어궁을 바라보며 무슨 표정을 짓는 걸까. 일단 좋은 건 아닐 것이다. 저 녀석의 성품으로 보아, 지금 청순한 소녀의 표정을 지을 리는 절대로 없으니까. 사악한 녀석 같으니. 쌍어궁의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녀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리고 이 아저씨도 제가 당신을 죽여버린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으니, 당연히 막을 수 없죠." 확실히 못 막겠지. 이 세상에 어떤 여동생이, 오라버니와 자기 친구들까지 마법으로 날려버리는, 아니 아예 죽여버리는 짓을 할 수 있겠냐. 그런 게 가능한 건 아마 저 녀석뿐 일거야. 물론 저 녀석, 아니 저 아가씨가 내 진짜 여동생일 경우에 그렇다는 거지만. 그러니 그녀는 아마도..... "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니까." 그러고 보니, 어느새 여동생과 피닉스 주위에는, 이상한 녀석들이 몰려 와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 아무리 여동생이 막강하다지만, 이건 솔직히 너무.... "걱정 마세요. 전투는 숫자로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냐? 무슨 신화에나 나올 법한 녀석들이 부글부글. 우글우글. 그야말로 완전히 포위 당한 신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그럼, 모처럼 좀 제대로 싸워볼까요? 여태까지는 몸풀기도 안 되는 바람에 따분했는데." 그러자 갑자기 시내가. "마, 말도 안 돼...... 그게 몸풀기도 안 되었다고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까 받았던 충격에도 기절하지 않았구나. 대단하다. 하지만 대단한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뭘 하려는 걸까요?" 클라라 역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다. 역시 독일에서의 경험은 헛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녀도 시내도 이미 나한테 못할 짓을 한 번씩 했던 경험이 있었으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서 버틸 수 있었던 건가. 물론 두 번 모두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 안 돼. 미인이 혼자서 어떻게 한다고." 아, 아니 ! 어떻게 꼬마 선생님께서 아직도 눈을 뜨고 계시는......... 내 턱이 위와 아래로 분리되었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 여자들 중에 가장 약해 보이는 그녀가, 우리의 꼬마 선생님이 버티고 계셨던 것이다 ! 하지만 지금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은가. 물론 본다고 해도. '볼 것도 없지만.' 그렇다. 평소에도 느꼈지만, 지금도 역시 평평함을 자랑하는 선생님의.... 부웅. "평평하지 않아 ! A컵은 된다고 !" 저. A컵은 브래지어 중에서 가장 작은 건데요..... 그리고 솔직히 정신체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주먹을 휘두르셔도. 슈웅. 슈웅. 슝. 모두 내 머리를 통과할 뿐이다. 솔직히 별로 피할 만큼 강한 주먹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데 선생님이나 클라라는 일반인이므로 여동생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지 잘 모르지만.... 시내가 말한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혹시 시내도 여동생과 대결했던 적이 있는 걸까. 물론 기억이 다 지워졌다니 그걸 물어보는 건....... 잠깐. 내 머리에 뭔가가 스친다. 그렇다면 혹시.... "시내 너.... 혹시 미인이의 전투를 본 적이 있니?" ".........이 기억이 맞는 거라면..... 있어...." 뭐야. 설마 저 녀석이 그녀의 기억을 되돌려준 건가? 사실 그녀의 기억을 삭제한 사람이 여동생인 건 거의 확실하니, 여동생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았던 걸 생각해내면. "우....." 머리가 약간 아픈 법이다. 그녀는 두통을 진정시키려고 자기 이마에 손을 대려고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그녀의 손도 자기 머리를 그대로 통과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여긴 상식이란 게 통하지 않는 세계네. 내가 한탄하는 가운데, 시내는. ".......전에 학교에서, 그녀가 미주 선배와 싸운 적이 있어. 그때 그녀는 단 한 번에,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레벨 10의 드래곤 브래스를 사용했었어. 그건...." 잠깐. 아까 내가 들었던 그 이름인데. '드래곤 브래스'라는 건. 하지만 시내는 정색을 하고 말한다. 역시 마법사였던 적이 있고, 지금도 마법 지망생이라서 좀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녀의 말은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으니. "드래곤 브래스(Dragon breath)라는 마법은, 레벨 10의 원소마법으로, 별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파괴마법이야." 뭐? 잠시 모두의 숨이 멎는다. 사실 정신체가 숨을 쉴 지도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소리다. 그럼 저 녀석은 그런 걸 나한테 날렸단 말이냐? 아무리 전술상 필요한 짓이라고는 하지만(사실은 아직도 납득하기 힘들지만), 그건 좀..... "으아악 !" 모두가 비명을 지른 것도, 당연했다. 더불어, 조금 전에 그녀의 말. "네." 가 엄청난 무게를 지니며 다가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로, 우리 모두를 죽여버렸다는 소리가 아닌가. 기절하고 싶어지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여동생의 실체를 봐야 하는 것이, 오빠의 의무가 아닌가. 그러나. 덜덜덜덜. 솔직히 온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의 몸이 진짜가 아니라 정신체라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벌벌 떨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의 충격은 곧 잦아졌다. 조금 전에 그 말을 들었던 탓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속 뒤집는 녀석이네. 나는 억지로 다시 몸을 펴고. "그럼 그 정도의 마법사라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시내는 잠시 머리에 손을 얹더니. "아마 레벨 11일 거라고 생각해. 보통 마법사는 아무리 수련해도 레벨 9 마스터가 한계이고, 사악한 방식을 사용하면 단기간에 레벨 10까지 올라가지만 그 이상의 능력상승은 불가능해. 그리고 정식으로 수련한 마법사가 아찔할 정도의 세월을 수련으로 보냈다면....." 하지만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여동생을 바라보더니. "그럼 레벨 11로 승격이 가능해. 하지만 그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편법으로 레벨 10의 마법을 얻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그렇다면 그녀는...." 레벨 11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그 순간에 나는 독일에서의 여동생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모든 이를 압도할 정도의 엄청난 힘을 발산하던 그 순간을. 죽어 가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을 모조리 정상으로 되돌려놓고, 도시에 얽매였던 저주를 풀어내던 모습을. 그것이 바로 레벨 11의 마법이었던가. 확실히 그때 보여준 그녀. 여동생의 모습은 식인 소녀 따위와는 격이 달랐었다. 그렇다면. "그럼 독일에서 그녀가 행한 일도, 레벨 11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야?" "아니." 단호하게 자르는 시내.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인간에게 있어 불가능해. 레벨 11의 마법이라도 한계라는 게 있어. 좀비가 된 사람들을 되살리려면 레벨 11의 마법을 하나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무리라고. 나도 월영 선배에게 들은 말인데, 좀비를 인간으로 되돌리려면 우선 좀비인 인간의 혼을 찾아내서 가져오고, 그걸 동시에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던가? 여기에 좀비의 몸에 손상이 있을 경우 동시에 치료마법을 걸고..... 하지만 이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고." "어째서?" 당연히 마법에 대해 까막눈인 나로서는, 이유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시내의 설명이나 들어보자. "그걸 하기 위해서는 영혼마법을 써야 하는데, 문제는 이걸 부작용 없이 완성시키려면 최소한 레벨 11이어야 한다는 거야. 이 수준으로 마법을 수련하는 것도 어렵지만, 문제는 레벨 11짜리 마법을 최소한 2가지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이와 같이 치료마법을 걸어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 주문이 Soul move(영혼 이동)라는 것하고 Soul repair(영혼 회복)..... 이런 이름인가? 어쨌든 그 두 개를 동시에 써야 한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게 왜 어렵다는 거냐? 시내는 기가 차다는 눈으로 나를, 아니 여동생을 쳐다보며 설명을 이어간다. "문제는 이 두 개의 주문을 같이 사용하면서 회복마법을 쓰는 거라고. 전자의 경우는 레벨 11의 영혼마법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어. 다만 이걸 제대로 익힌 마법사는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이야. 어차피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기 마련인데, 억지로 그 혼을 잡아서 넣는다고 해도 사악한 목적, 즉 그 혼을 이용해 엉뚱한 짓을 하는 것밖에는 용도가 없다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말도 안 된다. 이해가 안 된다. 시내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고개까지 돌려서 여동생을 쏘아보더니 말을 계속했으니. "이 Soul repair(영혼 회복)라는 마법은, 레벨 11의 영혼마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 "뭐?" 아예 없는 거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아예 없는 마법을 상대에게 걸어놓는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시내의 말은 더욱 놀라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즉, 이걸 쓰려면 마법사가 아닌, 그걸 초월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야. 이쪽은 아예 신의 영역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건 이 마법, 아니 마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 마법사가 쓸 수 없는 거니까. 어쨌든 이런 능력을 발휘하려면, 마력이 무한정이어야 한다고." "왜?" 이해가 전혀 안 된다. 그런 불쌍한 나와 클라라, 그리고 꼬마 선생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내는 열심히 설명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라는 게..... "원래 영혼을 잡아서 그 힘을 뽑아 쓰는 마법은, 사악한 마법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술이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더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지. 하지만 이 마법, 즉 레벨 11의 영혼마법인 Soul power drain(영혼의 힘을 빨아들이는 마법)이란 것 자체가 금기마법인 건, 이 마법에 당한 사람이 좀비가 되기 때문이라고." "What?" 클라라의 외침이, 나보다 먼저 나왔다. 좀비라는 말이, 그녀의 과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마..... 콘스탄츠가 괴멸한 것도, 그 식인소녀가 그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시내는 어두운 낯빛으로. "아마 그건 불완전판일거야. 그 여자가 만약 레벨 10의 마법사라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데에는 충분해. 이미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말이지. 물론 이건 좀비를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건 게 아니라, 마법의 부작용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하지만 잠깐. 마력이 무한정 필요하다는 건 대체..... 드디어 시내의 설명이 나왔다. 바로 그것에 대한 말이. 하지만 그 말은.... "그런 상태에 이른 사람을 치료하여 원상복구를 시키려면, 우선은 혼을 빨아먹은 마법사를 찾아내서 그 혼을 빼앗고, 그걸 좀비의 몸에 다시 집어넣은 후 파손된 혼을 회복시켜야 해.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혼에서 빠져나간 힘을 다시 불어넣고, 그 힘을 제대로 배열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혼을 관찰한 후 어느 부분이 파손되었는지를 보고 복원하는 기술이 필요해.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아찔할 정도의 난이도인 데다가, 혼에 들어갈 에너지가 얼마나 필요할지도 알 수 없어. 혼에서 빼내어 쓴 만큼의 에너지, 아니 그 이상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그 말은 악한 마법사가 여태까지 쓴 마법의 횟수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그녀는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엄청난 마력이 필요해. 그 힘을 각각의 혼에 맞게 변형시켜서, 올바르게 집어넣고 혼을 복원시키는 능력도 필요하고. 그런데 그런 엄청난 일을 단숨에 해내다니, 믿을 수가 없어. 아니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은 그녀가 회복시킨 사람의 숫자야. 10만 명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문구라면 축구장에서 수비수 한 명을 제치는 것은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게 10만 명이라면? 할 수 있어? 더군다나 한 번 하는 것도 불가능이라는 소리를 듣는 마법을 무려 10만 번이나..... 그것도 단숨에..... 이건 인간이 아냐." 시내의 긴 설명을 우리는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쇠귀에 경 읽는 격이니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고, 다만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지금 우주에 떠 있는 여동생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 날, 여동생이 하늘에서 그 힘을 사용할 때도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마법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목격자로서 말하자면 그건 확실히. '인간의 능력이 아니었어.'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말이 안 되는, 기적을 직접 목격했다는 게 그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저 녀석은 내 '친' 여동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 내 진짜 여동생은 어디에 가 있는가. 점점 더 알 수 없어지고 있다. 그런데.... "잠깐. 잠깐. 시내 너,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질문은 이뤄지지 못했다. 시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럼 여기서 싸우기로 하죠. 하지만 당신, 너무 무모하네요. 저에게 1대 1로 도전을 하다니." 잠깐. 이 목소리는 분명히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여동생의 것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1대 1이라니? 적들의 숫자로 보건대, 그런 불리한 조건으로 싸워줄 쌍어궁이 아닌데? 게다가 그는 실제로 여동생을 극히 두려워하고 있었고. 하지만 시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시내의 말을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여동생은. "Power ! Unlimited POWER ! (힘 ! 무한한 힘 !)" 이렇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투명 드래곤 뺨치는 괴물을 상대로 누가 감히 1대 1로 싸운다고 하겠는가.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절대적인 존재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피와 살로 된 생물체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솔직히 못 믿겠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도대체 누구지?" 우리는 한 마음으로, 그 미친 소리를 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바보이기에,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걸까. 우리는 모두 엄청난 괴물이 눈에 보이기를 기대했다. 물론 아예 안 보이는 것도 각오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보인 것은. "어? 저 녀석은 그때 날 납치한 녀석 아냐?"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본 것은, 역시 우리의 꼬마 선생님이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나 역시, 겨우 그 녀석을 알아보았다. 그 녀석은 바로, 전에 나와 선생님들을 납치하여 여동생에게 도전하다가 BB탄에 맞고 박살난, 바로 그 불량배 일당 중의 한 놈이었던 것이다. 저 놈이 언제 쌍어궁과 한 패거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패거리의 두목이 싫어하는 바로 그 자가 자신의 원수인 미인이라는 걸 알자. '버틸 수 없었나 보다.' 확실히 분해하는 건 이해가 간다. 그동안 저 녀석들이 여동생에게 얼마나 많이 맞았는데. 하지만 그건 여동생이 때린 게 아니라. "자폭한 거잖아?" 솔직히 저 녀석은 여동생에게 주먹이나 발로 맞은 적은 없다. BB탄에 맞은 적은 있지만, 최소한 직접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았다. 그가 여동생을 때리려고 시도한 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하지만 그때는 모조리. 쾅. 쾅. 쾅. 그렇다. 그들은 여동생에게 맞아서가 아니라, 교통사고나 충돌사고나 낙석사고 등의 이유로 자폭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히 여동생이 유도한 것이지만. 그리고 나중에 진짜로 대결을 펼칠 때도 여동생은 그저. 퐁퐁퐁퐁퐁. BB탄 사격만 해줬었다. 물론 그 BB탄의 위력은 지금 생각해도 뭔가 정상이 아니지만. 어떻게 건장한 불량배가 6mm 정도의 지름밖에 안 되는 플라스틱 공에 맞고 기절했던 걸까. 물론 지금이야 이해가 간다. 어쨌든 내 여동생이라는 애는. "Power ! Unlimited POWER ! (힘 ! 무한한 힘 !)" 이런 애니까, 아마 BB탄에 무슨 마법이라든가, 뭔가 수상한 짓을 했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주위의 배경이 왜 이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동생과 피닉스와 우리들, 그리고 쌍어궁과 그 졸개들은 파란 색으로 물든 별에 내려앉아 있었고. 쿠르릉. 화산이 불을 내뿜고....... 아니, 아니다. 얼음을 내뿜고 있었다. 이게 무슨 환상적인 풍경이냐. 내 생전에 맨눈으로, 아니 불사조 안에 있으니까 맨눈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어쨌든 이런 광경을 생중계로 보다니. 그런데 뭐 이런 별이 다 있는 거냐. 왜 주위가 몽땅 얼음이야? 게다가. "용암도 아니고 얼음이라니...." 물론 이게 말이 안 되는 풍경인 건 아니다. 태양계에도 이런 별은 존재하니까. 아마 해왕성의 위성인 트리톤이던가? 그쪽에 이런 기이한 화산이 존재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쪽 온도는 자그마치 영하 200도라고. 게다가 지구와 그곳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물론 여기가 그 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도대체. "언제 여기로 온 거야?"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열심히 떠드는 동안에, 여동생과 쌍어궁은 싸울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람소리도 안 들리는 판에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뭔가 분하다. 완전히 구경꾼이 된 느낌이다. 눈앞의 사건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너절한 장식품. 아니. "구경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물론 무한한 힘을 지녔을지도 모를 몬스터의 대결을 제대로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만용이다. 기본적으로 수준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기껏해야, 우리는 번쩍거리는 것만 구경하다가 상황이 끝났음을 깨달을 것이다. 지난번에 내가 독일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설령 여동생이 승리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쟤가 내 '친' 여동생이 아니라면 나는 오빠가 아니라 외아들로 전락할 것이며, 쟤가 만약 내 '친' 여동생이라면 나는 오라버니를 눈도 깜짝 안 하고 죽여버리는 냉혹하고 차갑고 무지막지한 녀석을 여동생으로...... 퍽. "아구구구구 !" "응원은 못할망정 욕은 하지 마세요." 기습당했다. 하지만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이 판에도 나를 때리는 거냐 ! 주위에 적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이 상황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후후후후후. 네 년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야. 이 나를 상대로." 파직. 자신의 검에서 빛의 기둥을 뿜어 올리는 불량배가 코앞에 있는데, 그런 한가한 짓을 하다니. 그러나 여동생이라는 애는 기본적으로 긴장감이 결여된 애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태연하게도. "아아아아암." 하품은 왜 하는 거냐. 하지만 문제는 불량배가 하는 말이었으니. "그런 시시한 마법 하나로 나와 맞서겠다니, 오만함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그 말에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하늘로 세운 왼손의 중지 쪽에, 뭔가 구슬 하나가 떠있다. 음. 저게 여동생이 사용할 마법인가. 꽤 곱다는 생각이 든다. 여동생의 마음씨와는 정반대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매, 매직 미사일? 레벨 1짜리? 그것도 한 개?" 말도 안 된다고 입을 딱 벌리는 시내의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음. 레벨 1은 사실 엄청난 마법이었나 보군..... 아니 잠깐. 레벨 1? 그거 혹시 가장 약한 거 아냐? 고개를 끄덕이는 시내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모두는. "시내야. 설명 좀 해 줘." 이렇게 되고 말았다. 불행히도 나도 클라라도 꼬마 선생님도, 마법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기에. 하지만 시내는 설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레벨 1짜리 마법으로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는 마법사가 어디 있어 !" 그렇게 탄식을 되풀이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모르니, 당연히 물음표만을 머리 위에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설명은 전혀 엉뚱하게도. "레벨 1의 마법인 매직 미사일이에요. 모든 마법 중에 가장 약하고, 마법사들이 가장 처음으로 배우는 마법이지요." 야. 이 녀석아. 친절하게 설명하지 마 ! 특히 굳이 '약하다'는 걸 강조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하나만 묻자. "소드마스터가 뭐냐?" 더욱 눈물나게도, 여동생은 그 말까지 일일이 풀어서 설명해준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우리 모두를 더욱 어이없게 할 뿐이다. 그렇다. 여동생의 설명을 대략 정리하자면. "생명에너지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서, 그걸로 공격과 방어, 자신의 몸의 치료에 사용하는 사람들이에요. 마법사로 치면 생명마법의 달인들이죠." 그런데 말야. 그런 자를 상대로 고작 레벨 1짜리 마법을 쓰려는 거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우리들은 일제히. "말도 안 돼." "너 미쳤냐?" "미인아 ! 정신 차려!" "Are you CRAZY?"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아무리 여동생이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대마법사이시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나 오만한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가 생명마법의 달인들이라면, 그들은 최소한. "생명마법을 익힌 마법사로 쳐서, 몇 레벨 정도 되는 거야?" 그러자 태연히 대답하는 여동생. 내가 못 살아. "검기를 쓸 정도면......... 검기가 생명마법으로 라이프 블레이드(Life blade)니까 대략 7레벨이네요.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10레벨까지도 가능하겠지만, 저 사람은 일단 7레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자기가 이긴다 이거지. 그러나 문제는. "그럼 1레벨이 세냐? 7레벨이 세냐?" "7레벨이요." 으. 이 녀석아. 대답이 너무 빨라. 그런데 그걸 뻔히 다 알면서도, 무모하게 그런 짓을 하는 거냐?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리에는 무언가가 스쳤다. 그것은. '그래. 저 녀석은 엄청난 마법사였지. 그렇다면.' 아니, 이미 마법사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게 시내의 증언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닥 희망이 생긴다. 혹시 저 매직 미사일은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힘을 숨긴 1레벨 짜리 마법이라든가. 그러나 여동생이라는 애는 오빠를 놀리는데 있어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건지. "아. 이거요? 그냥 보통 마법사가 쓰는 수준의 마력만 넣었는데요?" 쿵. 내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시내다. 그녀는 이제는 말도 못 하겠다는 얼굴로, 그저 여동생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것은. "말도 안 돼..... 아무리 네가 강하다고 하지만..... 고작 매직 미사일로 어떻게 소드마스터를 이긴다고..... 그것도 그런 작은 마력의 마법으로....." 그 모습에 내 한 가닥 희망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이 녀석, 설마 정말로 초보 마법사 수준의 매직미사일을 만든 건가? 하지만 여동생은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하지만 이 사람을 상대로 레벨 10짜리 드래곤 브래스를 날리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겨우 기술만 좀 익힌 초보자를 상대로...." 그 순간 내 머리에서 김이 팍 솟아올랐다. 아니, 초보자를 상대로 그런 특대형 마법을 날리면 잔인하다고? 그럼 나한테는 왜 눈도 하나 깜짝 않고 그걸 날린 거냐? 오빠가 무슨 구타용 샌드백이냐? 나는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었지만, 피닉스 안에서 날뛰어봐야 나갈 수도 없다. 나는 지금 피닉스의 위장에 갇힌 신세이니까 말이다. 어차피 나가봐야. 꽁꽁. 이렇게 되겠지만. 아니, 지금은 정신체라니까 얼지는 않겠구나. 어쨌든 내 한탄을 배경으로 하여, 말도 안 되는 일전은 시작되고 말았다. 누가 저 여동생 좀 말려 줘 ! 부웅. 먼저 공격에 들어간 것은 당연히 불량배였다. 아니, 그건 순전히 여동생 잘못이다. 적이 공격자세를 취하고, 달려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기세 좋게 외친다. "네 자만을 후회하게 해 주마 !" 그리고 그의 검이, 그의 검기가 여동생의 머리를 겨누고 날아온다. 하지만 여동생이라는 애는 피할 생각도 없는지. "아아아아암." 뭐, 뭐 하는 짓이냐? 그녀는 전투 중에 참으로 태평하게도, 하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물론 이 세계가 영하 200도(추정)라는 점을 감안하면, 저 녀석이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저런 짓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당장 기관지가 얼어버릴 테니까. 아니, 저 녀석이 사람이 아니라면 예시당초 얼어붙을 기관지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곳의 대기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산소와 질소는 절대 아닐 텐데? 그건 영하 200도에서는 액체가 되어 버릴 테니.... 아니,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야 ! 피해 !"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고 만다. 내가 왜 저런 애를 걱정해야 하는 거야?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오라버니의 걱정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녀석이 다치기나 죽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쌍어궁의 노예 신세가 될 내 장래를 걱정해서 그런 거야. 절대로 그 녀석을 걱정해서 그런 건 아냐. 아니라고. 그나마 내 소리를 듣기는 한 모양인지. 퐁. 문제의 '아주 약한' 매직미사일이 불량배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저 검기의 어마어마한 빛이 태양이라면, 그 매직미사일은 너무나 작고 가냘픈 반딧불 수준에 불과했다. 저런 건 검에 부딪치기도 전에 단숨에 소멸해버릴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불량배도 하고 있었는지. "쌍어궁님이 주신 내 힘을 우습게 보지 마라 !" 그는 검을 휘둘렀다. 아. 역시 무리였어.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저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일부러 만들어놓고 싸우다니, 저걸 바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단순한 도발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를 일부러 열 받게 만들어놓고, 뭘 하려는 건지. 그러나 문제의 매직미사일은. "에?" 우리 모두는 일제히,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불량배의 검기는 매직미사일을 맞추지 못했고, 그 미사일은 그대로 옆으로 휙 돌아가면서. 짝. 불량배의 뺨을 후려갈겼다. 물론 그 미사일은 그걸로 소멸해버렸지만, 아무리 약한 일격이라고 해도 뺨을 저렇게 후려갈기면 탈이 안 날 수가 없는 법이다. 그 탈이라는 것은 바로. 휘리릭. 불쌍한 불량배의 얼굴이 휙 돌아가면서,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런데 저 폼은 대체 무슨 자세냐. 마치 야구에서 평범한 느린 직구를 헛스윙한 타자가 연상되는 저 꼴은.... "푸훗." 아. 미안하다. 여동생의 횡포를 보며 웃다니. 하지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모욕을 당한 불량배의 꼴을 보니 말이다. 모든 이가 우세하다고 여겼던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한 방 맞은 셈이다. 그리고 그걸 보고 웃은 건 나만이 아니었으니. "푸하하하하." 나도, 클라라도, 꼬마 선생님도 모두 웃고 말았다. 심지어 쌍어궁 일당 중에서도 웃는 녀석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대부분은 혀를 차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시내는. "마, 말도 안 돼. 그 느린 속도의 미사일로 어떻게 검기를 피하는....." 하지만 나는 그냥 납득하고 말았다. 저 녀석은 여동생이니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여동생이니까. 그 순간 나는 걱정 같은 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래. 내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 저 녀석은 극악무도한 여동생인 걸. 굳이 내가 걱정까지 할 필요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어, 어떻게? 또다시 기습을 당한 나는 멋지게 나동그라졌다. 무, 무서운 녀석. 도대체 어떻게 내 마음을 다 읽는 거야? 물론 그녀는 단지 손만 흔들었을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불량배보다 더 심하게 쓰러졌고, 비록 그 장면을 쌍어궁 일당은 못 봤을지 몰라도. "역시 오라버니는 다르구나." "따스한 사람이네요." "역시 해가 떠도 미인이, 달이 떠도 미인이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나는 클라라와 시내와 꼬마 선생님 앞에서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반대로 해석을 할 뿐이다. 아. 역시 저 녀석은 오빠가 골탕을 먹는 걸 즐기는 게 분명해. 내가 왜 여동생 사랑에 앞장서는 오라버니로 알려져야 하는 거야 ! 그것도 저 쌍어궁 녀석이 보는 앞에서 ! 이러다가 만약 내가 정말로 저 녀석의 '친' 오라버니가 아니라면.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 따. 따따따 따. 따따따 따. 따따따 따. 따따다. 아, 안 돼. 결혼행진곡 같은 건 안 나와도 돼. 나는 나도 모르게, 저 녀석이 내 '친' 여동생이기를 바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저 녀석과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하지만 난 문어인지 오징어인지, 그게 아니면 거대한 뇌인지 아메바인지도 모를 외계 생물과 결혼하고픈 생각은 없어 ! 역시 무서운 녀석이었다. 이런 때에도 나를 공포에 떨게 하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야비한 년. 비열한 수를 쓰다니." 그 불량배께서 다시 일어섰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지금 상황은 별로 비열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솔직히 이 경우의 문제는. "소드마스터가 레벨 1의 매직미사일에 맞고 엎어지냐?" 이게 더 문제가 아니었나? 오죽했으면 쌍어궁이. "방심하지 마라 ! 상대가 평범한 마법을 썼다고 해서 보통 마법사라고 여기면 안 된다." 그렇게 충고를 다 하겠는가. 하긴 자기 노예가 증오스런 적에게 농락 당하는 꼴을 보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지. 사실 그 말이 맞기도 하다. 상대는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는, 아니 아예 땅을 작살내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그런 녀석이 단순한 매직미사일을 날렸다고 해서, 평범한 마법으로 착각하면.... '저렇게 되지.' 불량배의 뺨에 동그란 멍이 든 걸 보며, 나는 그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웃기네. 도대체 소드마스터라는 칭호는 어떻게 받은 건지. 불량배 역시 그 점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는지. "네. 쌍어궁님.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검을 고쳐 잡으며, 여동생에게 겨누었다. 그런데. 부웅. 에? 뭐냐? 그의 몸이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건 혹시..... 내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 불량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후후후. 처음에는 방심해서 맞았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그런 평범한 매직미사일로, 지금 내가 친 기(氣)의 보호막을 뚫을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녀석이 여동생의 매직미사일을 막기 위해, 아예 보호막으로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는 것. 그럼 여동생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녀가 왼손 중지를 하늘로 세운다. 자. 그럼. '어떤 엄청난 마법이 튀어나올까.'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실망하고 말았다. 여동생이 사용한 마법은. 퐁. "또 매직미사일이야." 시내도, 쌍어궁도, 그 한 패거리들도, 그리고 뺨을 맞은 불량배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비록 그 언어는 각기 다르지만, 모든 이의 감상이 똑같았다. 그리고 물론 나와 클라라, 그리고 꼬마 선생님도. "너무 무모해 !" 그랬다. 한 번이야 요행히 통했지만, 두 번째에도 통할 정도로 저 불량배가 멍청할까. 하지만 여동생은 태연하게 웃으며.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 으이그. 녀석. 큰소리는. 하지만 아까는 상대가 방심했으니까 당했다고 해도, 이번에는 전혀 안 그런 것 같은데? 저 모습을 보라. 당장 주위에 친 저 방어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매직미사일로 저걸 뚫을 수는 없어요." 시내가 아예 딱 잘라서 단언을 해버린다. 물론 시내는 초보마법사이고, 여동생은 고위마법사니까 수준 차이가 크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 아닌가. 힘이 100인 녀석에게 10000의 힘으로 덤비는 게 아니라, 고작 1의 힘으로 싸움을 걸다니. 물론 저 매직미사일이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마력을 감추고 있는, 어지간한 마법사의 레벨 10 마법보다도 더 센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이건 그냥 보통 수준의 매직미사일인데요." 내 가냘픈 희망조차도 무참하게 짓밟는 여동생이었다. 아니, 그럼 정말로 그 허약한 매직미사일로 싸우겠다는 거냐? 물론 이번에도 그 변화구를 구사해서, 녀석의 뒤통수로 돌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어막을 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저 놈의 결의에 찬 표정을 보라. "후후후. 네 년에게 죽어간 미주 누님의 원수를, 오늘에야말로 갚고 말 테다. 그런 허약한 매직미사일로 만용을 부린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뭐? 미주? 그게 누구야? 갑자기 월영 선배의 그 말이 떠오른다. "미주 역시 마찬가지야. 넌 잘 모르지만, 그 애는 시내의 선배로서, 친한 사이였지. 하지만 그런 그 애가, 자신을 따르던 시내를 시체로 만들고 그것을 무기로서 던져버렸어. 그녀 자신이 그렇게 냉혹했을까? 아냐. 그 애도 결국 희생된 거야. 자신의 의지가 '적'에게 변형되어서. 결국 미주는 서울시 전체를 파괴하려다가, '월하소녀'에게 죽고 말았어. 비참하게.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난 그 모습을 눈앞에서 봤어. 내가 그렇게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내 권유를 거절하고." 그래. 그랬었지. 아마 지금 이야기하는 미주가 그 미주가 맞는다면, 아마 불량배가 말하는 미주는 우리 학교의 선배이자 시내의 선배이고, 시내를 시체로 만들려고 한 인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쁜 년이잖아?" 그렇다. 나로서는 극히 달갑지 않은 사실이지만, 여동생의 적을 악당으로 인정하는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울시 전체를 날려버린다는 것은, 거기서 살고 있는 나도 같이 날려버릴 생각이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나는 절대로, 폭발에 휘말려 하늘로 날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 건 조금 전에 신물나게 경험....... 아니, 죽을 정도로 경험했다고. 그런 끔찍한 곡예비행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새삼스럽게 여동생에 대한 원망이 타오른다. "나쁜 녀석." 오빠를 아예 죽여버리는 여동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 !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거다. 하지만 더욱 슬픈 사실은, 그런 여동생을 돕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비극적인 사태가.... 퍽. "아구구구구." "뭐가 비극이라는 거예요." 우........ 이 판국에도 오빠를 때리는 거냐. 너는 저 불량배와의 싸움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거냐. 그리고 그 순간 여동생의 빈틈이 노출되었고, 불량배는 기합을 내지르며. "죽어라 ! 지지배 !" 그의 칼이 여동생을 향해 날아왔다. 급작스런 상황 전개에 클라라가 비명을 지른다. "Watch out(조심하세요) !" 하지만 그녀의 비명이 무색하게도.... 쿵. 그는 엎어져 버렸다. 이건 무슨 조화냐. "?????" 나로서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상황전개였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여동생은 서 있고 불량배는 엎드려 있으니 누가 이겼는지는 자명했다. 그러나 그 중간과정을 모르니, 나로서는 의문부호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된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 절대로 얼굴만 본 거다. 허리 아래쪽은 절대 안 봤다. 진짜라고. 맹세해. 물론 그 상황에서도 나는 예의바른 학생이므로. "시내야. 설명 좀 해줘. 어떻게 된 거야?" 그렇다. 나는 차마 꼬마 선생님의 나체를 볼 생각은 못했다. 물론 선생님의 가슴이 평평하다는 이유 탓은 아니다. 단지 선생님을 존경하는 착한 학생이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그리고 물론, 시내의 가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구경하려고 그녀를 바라본 건 아니다. 난 어디까지나 시내의 얼굴만 보았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냐. 어쨌든 그녀는 일단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미인이 저 계집애..... 상대가 검을 휘두르려고 오른발을 구르는 순간을 노려서, 발판이 되는 땅을 매직미사일로 갈겼어. 그 때문에 땅이 약간 파헤쳐졌고, 상대는 발을 삐끗하면서 넘어진 거야.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딱 맞는 타이밍에 매직미사일을...." 그러니까 요점은, 여동생이라는 애는 상대의 몸통이 아니라 발 아래의 지면을 쳤고, 그쪽에는 방어막이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상대는 발을 헛디뎌서 엎어졌다는 소리다. 하지만 상대가 달려온 속도는. "100m에 5초인가? 7초인가?" 어쨌든 나보다는 월등히 빨랐는데? 어떻게 오른발을 디디는 순간을 정확히 보고, 그 위치까지 눈치채고는 거기다 매직미사일을 날린 걸까. 게다가 여동생의 발판 치우기는 의외의 성과도 낳았으니. 주르륵. 저 녀석, 코가 깨졌구나. 불쌍하다. 그 잘난 방어막도 자신의 실수로 인해 생기는 사고는 막아줄 수 없었다는 건가. 나는 그를 조금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다 여동생을 적으로 두는 바람에 저런 수모를 당하게 된 건지. 그런데 저 녀석....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저 녀석, 마음만 먹으면 무림지존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저 녀석은 뭔가 다른 수준의 인간, 아니 괴물이다. 저걸 보니 여동생이 불량배를 내려다보면서. "자. 이제 납득하셨나요? 제가 단순히 마력이 강하고 주문의 가짓수가 많아서 당신보다 우월한 게 아니라는 걸." 너,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벌인 거냐? 상대를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해독이 안 되는 언어였다. 뭘 하러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친 거냐? 네가 정말로 세계 최강 여동생이라면 그냥 궁극의 주문 한 방으로 다 날려버리면.... 퍽. "아구구구구." 왜 나를 또 때리는 거냐? 여동생은 피닉스, 아니 나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당신은 마법사가 되라는 유혹을 거부할 정도로 강하니까 괜찮지만, 이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저 나보다 강해지고 싶어서 힘을 원한 사람들도 여기에는 꽤 많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차피 그들은 이미 다른 길을 택하기에는 늦었지만." 이봐. 여동생. 다 좋은데, 마지막의 문장은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이미 늦었다면, 알려줄 필요조차 없잖아? 하지만 여동생의 말은. "저도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고, 이 말을 듣고 개과천선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살려줘야지요. 비록 그게 헛된 시도일지는 몰라도. 그리고." 그 다음...... 갑자기 잔혹한 표정으로 돌변하는 여동생. 너 왜 그러냐? 뭔가 불길한 예감이 팍팍 스치면서. 뭐, 뭔가 아주 끔찍한 소리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래도 여동생의. "이렇게 말을 해야 나중에 저들을 때려죽일 때, 왜 항복을 권유하지 않았냐는 소리를 못 하죠." 악귀 같은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하긴 이곳에 공기가 있을 리 없으니, 저것도 마법이겠지. 하지만 굳이 그런 소리를 오빠에게까지 들려줘야 하냐? 이 극악무도한 살인마야 !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말려봤자 소용이 없다. 그러니 저 녀석이 여동생이지. 그녀는. "마법사들을 죽일 때는, 한 방에 재도 안 남게 해야 하거든요. 굳이 저들의 유언까지 챙겨줄 생각은 없어요. 오늘 죽일 사람이 하나 둘도 아닌데." 뭐, 뭐, 뭐라고? 이게 여자아이의 발언이냐. 아무리 극악무도한 여동생이라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조금 전에 눈치를 챘어야 했다. 저 녀석은 오빠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때려죽이는, 천하의 악당이라는 것을. 그러니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쯤, 망설일 이유가 없다. 게다가 더 끔찍한 소리가 그 뒤를 이었으니. "이 소리 저 소리 다 들어주니까, 이런 별 볼일 없는 애까지도 저한테 대들잖아요. 이런 건 그냥 팍 밟아 죽여야 하는데." 아......... 저 녀석에게는 인도주의고 뭐고 없구나. 그런데 상대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냐? 엎어졌던 불량배가 다시 일어서더니. "이 악마...... 너 같은 년도 인간이냐." 하지만 여동생에게 그런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녀는. "당신도 인간이 아니잖아요?" 아........ 졌다. 우리 모두는 피닉스 안에서 그냥 엎어졌다. 충격이 너무 심해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클라라의 경우는. "I can't believe it(믿을 수가 없어)...." 그나마 이건 나은 거다. 시내의 경우는. "미인이 쟤, 원래 저런 애였어.........?" 그걸 이제야 알았냐. 하지만 역시 가장 큰 탄식은 꼬마 선생님에게서 나왔으니.... "내 탓이야.... 내가 잘못 가르쳐서, 멀쩡한 애가 저렇게 된 거야...." 그러나 선생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그런 애가 여동생이었다. 그 녀석은 선생님에게. "제대로 가르치셨는데요? 조금 전에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다 잊으셨나요?" 야. 굳이 그 소리를 할 건 없잖아. 그런 끔찍한 경험, 그러니까 홀딱 벗고 제자를 유혹하여 7대 1의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는 것을 굳이 떠올리게 할 필요가 있냐? 물론 선생님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긴 했지만....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며. "그럼 이건 나를 위한 복수니? 하지만 이건....." 가급적이면 하지 말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다. 참 착한 분이시다. 어느 극악무도한 인간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역시 모범적인 선생님이셔. 그러나 상대는 그런 도덕을 논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 "아뇨. 복수는 아무 것도 낳지 못해요." 왜 갑자기 도덕 교과서에나 써 있을 법한 소리를?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말은. "언제부터인가,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대우를 받는 세상이 되었어요. 피해자는 가해자를 위해 짓밟히고, 가해자는 억울하다며 인권을 부르짖더군요. 돈 있는 자는 죄가 없고, 돈 없는 자는 죄가 있으며, 재판의 결과는 올바르고 그른 것으로 결정되지 않고, 힘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정이 되더군요. 그래서 범죄자는 사면을 받고, 피해자는 하소연도 못하고 차가운 땅에 묻히지요. 제가 만약 여기서 저들을 살려준다면, 저 역시 그런 세상을 비난할 수 없게 되겠지요." 말은 맞는데 말야. 네가 말하니까 전혀 아닌 것 같아. 사실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은 그저. "피, 피, 피. 피가 모자라." 이렇게 말했다면 차라리 어울릴텐데 말야. 어쨌든 여동생은 뒤돌아 선다. 그리고. "자. 이제 놀이는 끝났고, 당신들을 전송해드리겠어요. 지옥으로." 지팡이를 고쳐 잡는 그녀. 쌍어궁의 패거리들이 굳은 얼굴로 자신들의 무기를 틀어쥔다. 상대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걸까. 그게 아니면 이 절망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서, 살아남겠다는 결의일까. 여동생은 매우 의례적인 말투로. "선택하세요. 항복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그런데 저 말은 사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온다. 저 녀석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제발 항복하지 마세요. 죽이지 못하게 되는 건 싫어요." 이런 소리를 포장만 바꾼 거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아셨어요?" 아..... 말도 안 되는 녀석. 어쨌든 여동생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인 녀석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탄식했다. "역시, 힘의 달콤함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저들이 항복하지 않는 것은, 그런 시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항복을 권유하는 상대의 진심을 믿을 수가 없어서일 것이다. 하긴. "제발 항복하지 마세요. 죽이지 못하게 되는 건 싫어요." 이런 생각이나 하는 애한테 항복이라. 나라도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서. "후후후. 그럼 이제 힘도 없으니, 슬슬 죽어 주세요." 이렇게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쌍어궁 일당의 숫자를 보면, 그쪽에서 항복 같은 걸 할 이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여동생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저 많은 적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물론 이길 수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도대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대결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 주위의 괴인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포기하자." 그렇다. 헤아리기에는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군을 이끌고 온 쌍어궁 일당이 과연 순순히 항복하겠는가. 오히려 항복권유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저들 중에는. "카아악."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녀석들도 보인다. 이래서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가 목전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우리편의 숫자가 많다면 나도 좀 위안을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수를 세는 데에는 굳이 두 손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기껏해야. "새 한 마리와 여동생 하나인가." 게다가 이 경우에 새, 즉 우리가 타고 있는 피닉스는 전투에 참가할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쨌든 뱃속에 이상한 것들을 태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동생 혼자서 저 많은 것들..........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저것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여동생이 사상 최악의 살인마라고 해도.... "이봐." "네?" 달갑지 않다는 답이 날아온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를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당장 여동생에게, 명예로운 퇴각을 권유하려고 했지만. "100만 마리나 죽일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왜 제가 버려야 하지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말 한 마디에 여동생의 과거가 다 드러나는 것 같다. 도대체 평소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해치우고 다닌 거야. 아니, 나처럼 생사람 잡는 경우도 많았을 테니까........ "생각하지 말자." 히틀러나 스탈린을 능가하는 살인귀를 여동생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지금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런데 잠깐. 여동생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솔직히 여동생이야 원래 전투에 굶주린 괴물이라 치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동생에게만 해당되는 소리고,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 나와 진희와 문희와 시내와 클라라와 두 분의 선생님은,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아. 시내의 경우는 약간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 여동생에 비하면 극히 평범하다. 이런 우리가 저런 괴물들과 대결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냥 구경만 하세요. 원래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잖아요." 전쟁이 애들 장난이냐. 이건 아무리 봐도 싸움이 아니라 전쟁 수준인데?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해도 되는 거냐. 게다가. "만약 저 쌍어궁 녀석이 우리 일행을 잡으려고 한다면? 너 혼자 우릴 다 보호할 수 있어?" "음. 확실히 그렇기는 하네요." 여동생은 손으로 턱을 받치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저 모습에는.... '안 들었어. 안 들었어.'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라곤 전혀 안 들었어. 심지어 쌍어궁 일당조차도. "연기하지 마라. 우~~~~~ 물러가라. 사기꾼." 그 말이 거짓이라고 반박하고 싶어도, 여동생 스스로가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해버렸다. 걱정하는 척 하는 연기를 좀 길게 했다면 모를까, 3초도 안 가서 활짝 웃으면 누가 믿어 주냐. 그녀는. "알겠어요. 만약 당신들이 저 쌍둥이 물고기 일당에게 잡히게 된다면." 잡힌다면? 보통 여기서는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겠어요'라는 말이 나오는 게 정석이겠지만, 상대는 여동생이다. 그런 말을 순순히 해줄, 아니 농담으로라도 해줄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런 녀석이 오빠를 마법 한 방으로 죽여 버리겠냐. 그리고 내 예상대로. "제가 먼저 당신들을 편안히 죽여드릴게요." 그럼 그렇지. 우리 모두는 이제 아예 단념했다는 듯이,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잠깐. "너, 우릴 다 죽였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다. 이미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또 죽는단 말인가? 혹시 이 녀석의 죽음의 개념은 나하고는 다른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복잡한 소리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네." "그런데 어떻게 또 죽인다는 거야?" 그러자 여동생은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대답했으니. "그야 지금 당신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요." 아하. 그렇구나. 우리 모두는 그 말에 약간 안도했다. 일단 유령 신세는 면하고, 다시 정상적인 몸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잠깐..... "왜 우리는 아직 유령인 거지?" 설마 이런 꼴로 우리를 살려놨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여동생은 방긋 웃으며 답한다. "그 상태가 딱 보기 좋으니까요." 크윽. 우리 모두는 다시 엎어졌다. 도,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 이런 유령 상태가 좋다고? 나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유령이 날뛰어봐야 박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물론 실질적인 영향력도 전혀 없다. 그저 여동생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도마 위의 생선일 뿐이다. 어쨌든 그녀는 생선토막인 우리에게. "그럼 지금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지 !" 우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상당히 안 됐다는 듯이. "그럼 지금 그렇게 해드리죠. 다만 지금까지의 기억은 모두 없애버릴 테니, 각오하세요." 그리고 그녀가 손을 들고....... "자, 잠깐 !" 기억을 없앤다니? 내가 그 순간에, 시내의 두개골이 갈라지면서 피가 튀고, 거기서 깃털을 뽑아내는 월영 선배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배의 말로는, 시내의 머리통을 내리쳐서 두개골을 쪼개고, 거기에 마법의 깃털을 심어서 기억을 날려버린 인간이 바로 여동생이라던데, 그렇다면 이 녀석은. "너, 내 머리까지 (도끼로) 쪼갤 셈이냐?" "네." 역시. 우리 모두는 경악했지만, 그러니까 여동생인 거다. 이미 시내에게 그런 짓을 한 전과가 있으니, 또 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왜 내 기억을 날려버리려는 거야?" "그쪽 아가씨들도 결혼은 해야지요." 윽. 그 순간 우리는 얼마 전의 그 추태를 떠올렸다. 여자로서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그 악몽 같은 추억(?)을. 그러니까 이 녀석의 말은. "목격자를 다 죽여버리면, 이 아가씨들의 품행을 문제삼을 사람이 없어진다는 거냐."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말려야 하나. 하지만 저 녀석이 하는 말이니, 진짜로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순전히 악당을 두목으로 모시고 있다는 죄로, 다 죽어나가게 생긴 쌍어궁의 부하들에게 묵념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여동생이라는 애는 여전히 눈도 안 깜박인다. 못된 녀석. 게다가 그녀는. "그렇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이번 사건의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모양이니, 그렇게 해야지요." 하지만 그 말은 나를 분노하게 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냐 ! 하지만 여동생은 나를 거칠게 몰아붙였으니. "그러니까 마법에 대해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왜 제가 당신들을 유령 비슷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면서 불평만 하지 말란 말이에요 ! 아무리 무식하면 용감하다지만." 그 순간 우리는 납작하게 되었다. 여동생의 말에 눌려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그녀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아니 외친다. "남의 행동을 비판하려면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고 비판하세요. 예를 들어볼까요?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배를 칼로 가른다면, 당신은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밀어내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가 당신의 위암을 고치기 위해 그렇게 했다면? 당신의 그 행동은 스스로의 죽음을 부르게 되고 말아요. 앞뒤 상황을 살핀 후에 나를 비난한다면 몰라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꽥꽥거리지 말란 말이에요 !" 히익. 우리는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럼,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지켜봐 주세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진실이 당신에게 다가올 거니까요." 한 번 웃고 돌아서는 그녀. 하지만 우리 모두는 여동생의 박력에 눌려, 아직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체 상태에서 호흡이 필요한지는 솔직히 의문이긴 하지만. 그런데 여동생이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냐. 그녀는 아직도 쓰러진 패배자를 쳐다보더니. "그럼 묻겠어요. 당신은 항복해서 광명 찾을래요? 그게 아니면 쌍어궁 정신을 이어받아 여전히 불철주야 약탈과 착취를 계속할래요?" 너, 갑자기 분위기를 팍 찌그러뜨렸다는 건 알고 있는 거냐. 게다가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조금 전까지 매직미사일로 농락 당한 바로 그 불량배가 아니냐. 저렇게까지 놀림감이 되면 나라도 항복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우리의 기대에 훌륭하게 보답했으니. "누가 네 년 따위에게 항복할까보냐 !" 하지만 그 말은 크게 잘못한 것이었다. 그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콰직. 뭐,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 여동생이 밟은 것은. "꺄아악 ! 미, 미인아. 피, 피 !" 꼬마 선생님이 비명을 지른 게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여동생이 밟은 것은 다름 아닌 그 불량배의 머리였으니까. 하지만 저건 단순히 밟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건.... 푸악. 두개골이 아예 박살나서, 피가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주위의 땅에, 바위에 피가 튀어 붉은 파도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여동생의 다리는 말 그대로 피 한 방울 안 묻는다. 어찌된 것인가. 그러나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파삭. 그 불량배의 몸은 그대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 희미한 것이 떠오르다가. 덥썩. 그대로 여동생의 손에 잡혔다. 여동생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죽어서까지 쌍어궁의 에너지원이 되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렇게 놓아둘 수는 없네요." 그리고 그녀는 한탄한다. 진심으로. "만약 항복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살려주었겠지만....." 그러더니 그녀는 손을 놓았고, 그것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잠깐. 지금 저 하얗고 뿌옇고 맨들맨들한 듯한 게 뭐였지? 설마..... 아, 안 돼. 이 녀석아.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말하지 말란 말이야......! "저건 그의 영혼이에요. 죽었으니 죽은 자의 나라로 갔지요." 으. 말하지 말라니까 대뜸 말하네..... 나쁜 녀석. 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정말로 내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뜻이다.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자마자, 그야말로 순식간에. 우리 모두는 새하얗게 탈색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너무. "잔인하잖아 !"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 이건 너무 잔혹한 게 아닌가.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자마자, 그대로 그의 머리를 짓밟아 부수다니. 하지만 그녀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요?" 오히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투다.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그 말에 우리 모두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어떻게 애가 저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 그러나 그녀는. "아무래도 당신들은,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 하군요." 그리고 그녀가 손을 드는가 싶더니. "입 좀 다무세요." 그리고 그녀가 뭔가..... 어? 콰아아앙.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마법이 날아왔다 ! 저것은...... 내가 조금 전에 쌍어궁 녀석에게 얻어맞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설마 ! "또 죽이는 거냐 !" 그 말과 함께, 우리의 시야는 섬광으로 뒤덮였다. 쿵. 우리가 엎어진 것은, 그 빛이 우리를 감싼 것과 거의 동시였다. 우.... 그럼 우리는 이번에도 또 죽은 거냐. 못된 녀석. 오라버니를 두 번이나 죽이다니. 나는 여동생의 사악함을 저주했다.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마구 죽인다면, 쌍어궁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아니 이건. '더 사악해.' 그 녀석이 자기 형제자매를 마구 죽인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었고, 설마 그런 인간일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인간들이, 자기 가족들에게는 더 잘해주니까. 굳이 나치스 일당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런 케이스는 많이 있지 않은가. 밖에서는 악질 살인범이었던 자가, 집에서는 모범적인 가장이었다는 식의. 그럼 그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악질인 거야.' 물론 10년인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얻어맞고 살아온 나로서는 대충은 그 녀석의 악독함을 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모두가. "우..... 아파......." "How could....... she....." "괴물......." "흑........ 내 제자가 이런....."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고, 우리가 그걸 여태까지 몰랐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죄라면 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월영 선배에게 여동생에 대해 묻지 않았을 텐데. 새삼스럽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때 내가 그런 질문만 안 했어도.' 이런 식의 고생은 하지도 않았을 게 아닌가.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아니, 근원을 따지면 더 이전이다. 이 일은 그 독일여행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풍남이 녀석의 공장이 바퀴벌레를 식품에 투입한 탓이 아닌가. 아니..... 그보다..... '내가 여동생을 잘못 둔 거야.' 물론 나는 꼬마 선생님처럼. "내가 그 애를 잘못 가르쳤어...." 이렇게 한탄하지는 않았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종류의 생물이었냐. 그게. 그러나 이제는 솔직히 말해서, 기력도 없다. 하루동안 두 번이나 죽으면, 솔직히 움직일 수 없는 게 정상.... 삑. "안 죽였으니 안심해요." 어? 왜 공중에 여동생의 얼굴이 떠오른 거냐? 하지만 저건 여동생 본인이라기보다는, 마치. "뉴스 중계라도 하는 거냐." 그렇다. 여동생의 모습은 네모진 화면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건 뭐야. 정말 우리는 안 죽었다는 거야? 그것은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여긴 어디야?" 그렇다. 우리는 이번에는 또 어디로 왔는가. 그걸 알 수가 없다면, 이 불안감은 절대로 가시지 않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제 목걸이 안이니까, 안심하고 거기 있어요. 지금부터...." 삐익. 갑자기 우리 주변이 밝아졌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은. "우악 !" 그렇다. 우리는 조금 전처럼, 무수히 많은 괴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미인이가 없어 !" 문희야. 소리 안 질러도 다 아는 일이니 조용히 좀 해라. 그런데 넌 언제 깨어난 거냐. 하긴 기절한지 좀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 그러나 문제는. "........" 그렇게 서 있으면 다 보인다. 하지만 그런 내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니. 사라라라랑. 이, 이게 뭐야. 왜 갑자기 옷이 입혀지는 거야?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옷의 디자인은 심히 촌스러웠다. 아니, 불합리했다. 이럴 순 없다. 어째서 요즘 시대에 이런 옷을 사람들에게 입힌단 말인가. 비록. "휴우. 살았다." "이제야 좀 제대로 입어보네." 여자들은 만족해했지만, 나는 아니다. 왜 몸매가 하나도 안 드러나는, 절구통같은 옷을 입히냔 말이다. 게다가 치마는 왜 이리 긴 거냐. 물론 여동생이라는 애가 나한테까지 그런 옷을 입힌 것에 대한 불만도 컸지만. "안 보이잖아....." 물론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하지만 상당히 아쉽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흑. 분해. 그러나 힘없는 오라버니가 여동생의 폭거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쌍어궁 녀석을 상대로는 그래도 반항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역시 그 녀석이 한 수 위였어.' 그랬다. 나는 쌍어궁에게조차 분노의 표정을 짓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동생 상대로는 전혀 안 된다.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무서운 녀석. 하지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그쪽이 아니었다. 여동생이 무슨 말을 하느냐. 그게 중요했던 것이다. 이 녀석이 이번에는 우리를 또 어떻게 할 셈인지. 그러나 그녀는. ".....전쟁을 시작할 거예요. 당신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지요?" 그랬다. 사실 오늘의 모든 사건의 시작은, 그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오늘 집에서 잠이나 잤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지만. "뭐, 진실을 몰라도 좋다면 그 시점으로 돌려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여동생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어떻게 시간을 거꾸로 돌릴 거야.' 그러나 여동생은 그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확실히 당신이 확인하지는 못하겠지요. 지금의 기억도 다 없어질 테니까." "하지 마 !"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저 녀석이 기억 운운한다는 것은..... 시내의 그 끔찍한 뇌수술 장면이 떠오르면서, 내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떨렸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나에게까지. 우직. 두개골 격파 기술을 몸소 보여주시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 건 절대 사양이다. 차라리 진실이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듣고 나서 생각하자. 최소한 내 진짜 여동생이 어디에 있을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지금부터 눈 크게 뜨고 지켜보시길 바래요. 특히 클라라 슈만양." 에. 왜 클라라를 특별히 지목하는 거냐. 그리고 여동생은. "당신의 부모님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독일에서의 그 사건은 어째서 일어났는지,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끝까지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녀석의 얼굴은 사라졌고, 다시 우리는 주위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압도적으로 불리하잖아 !" 굳이 전술이나 전략을 따질 것도 없다. 적은 100만 대군이고 아군은 혼자. 여동생이 설령 조자룡이라고 해도, 혼자 이 많은 대군을 돌파는 할 수 있을지언정 몰살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저 쌍어궁이라는 녀석, 한 가닥 하는 것 같은데..... 과연 여동생이 이 난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아니 잠깐. "시내야. 월영 선배는 왜 안 나타나는 거야?" 그러나 그 대답은 여동생이 먼저 해 버렸으니. "아. 그 아가씨라면, 지금 쌍어궁의 별동부대와 싸우고 있어요." 뭐? 그런데 잠깐. 잠깐. 왜 혼자서 싸우게 내버려두는 거냐? 어차피 전쟁을 벌일 거라면,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물론 숫자의 열세는 뒤집히지 않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당신은, 그 여자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너냐." 내가 무슨 살인귀냐. 너처럼 사람을 못 죽여서 안달한 인간이냐. 그러나 여동생은 순식간에 내 반론을 무너뜨렸으니. "그녀는 쌍어궁을 끌어내기 위해 당신을 미끼로 썼어요. 그녀가 만약 당신에게 연 미인양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쌍어궁은 당신을 지목해서 납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신도 저에게 맞아죽지 않았겠지요. 그런데도 그녀의 안위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뭔가 마각이 드러나는 발언 같은데....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더 이상의 판단을 할 여유는 없었다. 내 주위는 순식간에. 파앗. 그렇다. 마법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여동생 한 사람과 쌍어궁의 100만 대군 사이에.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22화 소녀의 싸움 (1) '전투모드 돌입.' 내 지팡이가 자동마법을 잇달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방어마법부터 공격마법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날을 위해 상당부분 프로그램을 손질해 봤는데, 어느 정도까지 해 줄지. 우선은 적의 공격을 맞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Automatic magic - Prediction of revive/phoenix ability/Almighty cure]] 나는 지팡이의 자동마법을 3개나 동시에 발동시켰다. 보통은 이렇게 여러 가지 마법을 동시에 걸어두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적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다른 마법사가 이걸 본다면 기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내가 처음으로 걸어둔 마법은. 'Prediction of revive......라.' 이것은 원래 죽음과 마주칠 정도로 위험한 경우에 사용하는 마법이다. 즉 이 마법에 걸린 자는, 죽어 버리더라도 다시 몸으로 돌아오게 되는 마법인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예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기도 했다. 다만 이 마법은 사람이 죽기 전에 걸어야지, 죽고 나서 걸면 무용지물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Phoenix ability.....는.' 이것은 마법사용자에게 불사의 능력을 부여하는 마법이었다. 이것을 쓰면 사용자는 죽지 않게 되며, 이 마법이 해제되려면 최소한 레벨 11의 마법을 먹이던가, 그게 아니면 레벨 10의 마법을 연속적으로 먹여서 힘으로 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레벨 9나 그 이하의 마법은 절대로 먹히지 않고, 레벨 10으로도 상당히 많이 때리지 않는 이상 풀리는 것은 거의 무리이니. '이러면 내 부담이 줄어드니까.' 일단 적들은 레벨 10의 대마법사들이지만, 그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이 마법을 일격으로 격파할 수가 없었다. 이걸 레벨 10의 마법으로 깨는 것이 그리도 쉽다면, 어째서 그 많은 마법사들이 이 마법을 연구했겠는가. 게다가 자동마법인 이상. '해제될 기미만 보이면 또 걸릴 걸.' 그러니 나로서는 레벨 11의 마법을 쓰는, 이계에서 온 자들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이들이라면 이 마법을 한 번에 해제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 역시 마력의 한계가 있다면, 그런 마법을 도박으로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패할 경우의 부담이 너무 크니까. 내 경우라면. '마구 난사해도 상관없지만.' 적어도 마법의 연사능력에서는, 내가 우위에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저들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마법을 외우는 속도보다 적들이 마법을 외우는 속도가 더 빠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경우에 대비하려면 방어는 꼼꼼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Almighty cure......라.' 이건 만능의 치료마법이었다. 어떤 병이나 부상도 말끔히 치료하는, 궁극의 치료마법. 게다가 이것은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어줄 수가 있었다. 물론 이런 것까지 굳이 걸어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방어마법 2개를 다 뚫어버리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러나.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야 적의 공격을 당해도 어떻게든 견디는 게 가능했다. 상황에 맞춰서 적절한 마법을 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내 목걸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다르다. 그들은 고작해야 인간이고, 매직 미사일 한 방만 맞아도 죽는 존재다. 그러니 이 정도는 걸어두어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레벨 11의 마법이 내가 걸어둔 세 가지 마법을 모두 깨고, 내 지팡이인 인피니티(Infinity : 무한대)에 손상을 주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걸 쓸 수 있는 녀석은 거의 없지만.' 만사는 조심하는 게 최고다. 조금 전처럼 오빠의 목숨을 겨우 구해낼 수 있었던 행운은, 두 번 찾아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오빠야 내가 왜 자기를 유령으로 만들어 놓았냐고 팔자 좋은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오빠와 친구들을 원래의 몸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의 불평은 사그라질지 몰라도. '그러면 그들은 죽어.' 지금부터 나는 빛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속도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마법으로 억지로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게다가 인간의 두뇌를 지금처럼 쉬게 하지 않고 만약 움직이게 한다면, 즉 오빠나 친구들을 인간의 몸에 되돌려놓을 경우 그들은 폭주하는 정보량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즉 머리가 깨진다는 뜻이다. 아니면 미쳐 버리거나. 그러니 그걸 견디려면 유체 이탈을 시켜놓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도 머리가 깨지는 상황에서 머리를 보호하려면, 아예 머리를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으니. '진실을 알고 싶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일단 보여주기는 해야 하고.' 그러니 머리통을 깨부수는 '상책'이 아니라, 이런 식의 '중책'을 택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오빠 일당은 전혀 모른다. 시내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의지박약한 애에게는 솔직히 기대도 안 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적들의 꼬임수에 넘어가다니. 게다가 마법 수련생이라는 애가 뭐가 그렇게 허약한지. 물론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두고 보자. 월영.' 내 앞에서는 제대로 수련시킨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하는 짓이 고작 오빠를 미끼로 삼아서 쌍어궁을 꼬여 내거나, 자기 제자라는 시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도 못해서 납치 당하게 하는 식이다. 확실히 그 모양이니 아직도 쌍어궁 일당이 이렇게 다른 우주에서 설치게 방치하는 것이겠지. 물론 이런 생각을 내가 하는 동안에도 내 마법발동은 쉬지 않았고, 적들의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내가 피닉스를 목걸이 안으로 돌려보내자마자. "공격 개시 !" 쌍어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각종 마법을 날린 것이다. 물론 자동마법이 저절로 발동한 덕분에 나는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 내 주위에 이런 식의 폭음이 울려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일단 그 충격을 피하기 위해, 나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내 주위에 있는 것은 온통 적들뿐이다. 눈을 씻고 봐도 아군은 그림자도 안 보인다. 하긴 인간의 마법사니 주술사니 하는 것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저들 중 누구 하나의 손가락에라도 닿으면 부서질 것이다. 그러니 그쪽은 기대할 이유도 없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야지.' 나는 적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보통은 내가 먼저 마법을 발동시키는 게 정상이지만, 적들은 아예 미리 마법을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피닉스를 내가 불러들이는 순간, 일제히 터뜨린 모양이다. 게다가 그게. 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 내가 대응하지 못하도록, 계속적으로 마법을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자동마법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나는 몰라도 오빠 일당은 벌써 흙먼지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으리라. 나는 대응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안 돼. 이 상황에서는.' 물론 내 힘이 모자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 지팡이, 인피니티가 강력하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마법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것이다. 사실 이름이 '인피니티'라고 해도. '역시 한계라는 게 있는 건가.' 내가 잘못 만든 건가? 물론 그건 아니다. 적들이 날리는 마법이 하나같이. [[Dragon breath 드래곤 브래스 !]] [[Power order kill 절대명령죽음 !]] [[Absolute destruction 절대파괴 !]] 이런 식이니 도리가 있는가. 아무리 불사마법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레벨 10짜리 마법을 연쇄적으로 몰아치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결국 불사마법은. 파앙. 깨져버렸다. 당장 그 파손으로 인해 생긴 틈으로 녀석들의 공격 마법이 밀고 들어왔지만. 즈즈즈즈. Almighty cure. 즉 만능의 회복마법이 타격을 모두 복구해버린다. 물론 이것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부활마법을 준비했으므로 어떻게 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회복마법이 건제한 동안에. [[Automatic magic. Phoenix ability]] 다시 불사마법이 작동하여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인피니티를 공격에 동원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당장 적들의 공격이 효과를 나타낼 게 아닌가.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 나는 지팡이를 줄여서, 목걸이 안에 집어넣었다. 완전한 수비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섣부르게 공격을 하다가 지키지를 못하면, 본전도 못 찾으니까 말이다. 물론 적들은 그런 나에게 일고의 자비도 베풀어주지 않는다. 뭐 나도 그렇게 해 줄 생각이 없으니 탓할 건 없지만. 게다가 레벨 10에 미치지 못하는 적들도 쉬지 않는다. 그들 역시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Mind break 정신붕괴 !]] [[Energy drain 에너지 흡수 !]] 이런 식으로 마법을 날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런 거 맞는다고 내가 어디가 부러지거나, 내 보호마법이 깨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연달아 공격이 들어온다면, 그만큼 나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레벨 10이 안 되는 마법이라고 해서 치명적이 아닌 건 아니니 말이다. 나는 몰라도, 내 목걸이에 있는 오빠 일당에게는. '꽤 머리를 쓰는데. 이래서는 Fly(비행)마법도 제대로 쓸 수가 없잖아.' 그렇다. 빗방울은 바위를 뚫지 못하지만, 그런 게 무수히 많이 모이면 바위에 흠을 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걸 노렸는지 집요하게 마법을 퍼부어 대고 있었고, 나는 그 많은 마법으로부터 내 보호마법이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 주의해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인피니티가 발하는 자동마법에 기댄 것이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내 몸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걸 멈추고, 아래로 강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높이를 보니 대략 10km 정도의 고도는 된다. 물론 여기서 떨어진다고 해도, 그리고 보호마법이 없다고 해도 내가 죽을 일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반격을 하지 못하는 건 매우 곤란했다. 게다가. 부우우웅. 레벨 10짜리 마법만 날아오는 게 아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레벨 11짜리 마법에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쌍어궁 녀석, 왜 아직도 날리지 않는 거지? '기회를 기다리는 건가.' 그게 정답일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 내가 회피하지 못할 순간을 노려서 자신의 마법을 풀어놓겠지. 어차피 그 녀석도 레벨 10짜리 마법의 연사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나는 몰라도. '오빠는 확실히 죽어.' 아니, 문제는 오빠의 죽음이 아니다. 오빠를 되살리지 못하게 된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원래 부활마법이라는 것은 사용에 조건이 붙는 마법이고, 그 조건이라는 건 극히 까다로웠다. 특히 일단 죽어버린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독일에서야 죽은 자의 혼이 그 마법사의 체내에 에너지원으로 담겨 있어서 가능했지만.' 일단 죽은 자의 세계로 날아간 혼을 되찾으려면........ 나는 아찔해졌다. 그런 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무한의 세계를 한없이 돌아다니며 오빠의 혼을 찾아내는 것은....... '........' 악몽이었다. 그런 건. 그러니 나는 땅에 내리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렇게 맞기만 하지말고 말이다. 하지만 인피니티에 더 이상의 부담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팡이가 파손이라도 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어떻게 만든 지팡이인데.' 그렇다면 다른 수를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추락해서 엎어지기 전에. 내 손이 허리 주머니로 옮겨가고, 그 안에서 작은 보석을 하나 끄집어냈다. 그리고 발동. [[Actuation. Jadite sword]] 내 명령에 따라, 그것은 순식간에 길게 늘어나더니, 길이가 2m가 넘는 검으로 변했다. 내가 오늘을 위해 준비한, 또 다른 마법의 지팡이, 아니 검이다. 그 이름은. "시스터소드(Sister sword)다 !" 나는 뒤로 발랑 자빠질 뻔했다. 그렇다. 지금 나는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저 악랄하고 자기중심적인 오빠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했어야 하는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의 기운을 뺀다. 하긴 그 인간은 처음 이 칼을 보았을 때부터 내 칼을. "시스터소드(Sister sword)다 !" 이렇게 불렀었다. 원래의 이름은 엄연히 제이다이트 소드(Jadeite sword), 즉 경옥(硬玉)으로 만들어진 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시스터소드가 뭔가. 시스터소드가. 그 작명센스만 놓고 보더라도, 오빠가 얼마나 세상을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는지, 나를 자기 소유물로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미인이의 검이다 !" 이렇게 불렀다면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칼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인다면,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오빠가 지금 외친. "시스터소드(Sister sword)다 !" 이 말은 즉, 자기 여동생의 검이라는 뜻이었다. 즉 나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틀에 맞춰진 존재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처음에 오빠가 이 칼을 그렇게 부른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때. 즉 작년에 내가 오빠를 전투모드에서 만났을 때는. "와. 여동생이 휘두르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검이네." 그래서 이 검을 그런 식으로 불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고, 게다가 나로서는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 그러니 지금 오빠의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잘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이다이트 소드(Jadeite sword)예요." 일단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오빠라는 인간은 여전히. "아니. 그 칼은 시스터소드(Sister sword)야. 틀림없어." 그렇게 우긴다. 정말 미치겠다. 이름을 알려줘도 저런 식이라니. 그래서 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퍽. "아구구구구." "남의 칼 이름을 마음대로 바꿔 부르지 마요." 어떻게 된 게 이 인간은 꼭 매를 알아서 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빠라는 인간은 아직도. "시스터소드(Sister sword)다 !"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무슨 갈릴레오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저 태도는. 나는 한 대 더 때리려다가, 그만두고 나의 검, 제이다이트 소드를 오른팔에 쥐었다. 경옥으로 만들어진 칼답게, 손잡이의 감촉도 상당히 좋았다. 어쨌든 세계 유일의 '만지면서 즐기는 보석'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나뿐이고, 내 주위의 적들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으악 ! 저 년이 '그' 칼을 뽑았다 !" "저 악마의 검이 나오다니." "루시퍼(Lucifer : 마왕, 사탄)보다 사악한 년 같으니." "그렇게 피가 묻었는데도 하나도 안 보이는군." "분명히 사람 가죽으로 손질했을 거야. 그렇지 않고는 저렇게 깨끗할 리가 없어." 너희들 말야...... 평소에 하는 짓이 납치, 강간, 살인, 방화, 약탈이면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그나마 내가 빨리 빨리 처리하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지구의 인구가 반으로 줄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뭐 할 수 없나. 원래 저 녀석들은 저런 애들이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나에게 맞아죽을 애들이 뭐라고 떠들든 무슨 상관인가. 물론 보통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그리고 이 칼을 보면 아마. "뭐야? 왜 전투에 그런 사치품을 들고 나온 거야?" "아무리 옛날에는 옥이 도끼 재료로 사용되었다지만." "전통의 계승인가?" "도대체 어디서 그런 큰 옥 덩어리를 찾아낸 거야?" 이럴 것이다. 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석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칼이 전투용 무기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날이 서 있지 않다고.'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 칼의 무게는 과도하게 무거워서, 보통 사람은 이걸 두 팔로도 들고 휘두를 수 없다. 하물며 나처럼. 붕붕붕. 한 손으로 들고 돌려보는 짓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억지로라도 나를 흉내내다가는, 당연히 스스로를 다치게 할 것이다. 칼에 베여서가 아니라, 깔려서 말이다. 물론 나도 다른 좋은 무기를 만드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전통이라는데 어쩌겠어.' 그렇다. 이런 옥으로 된 칼은 내 스승님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크기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진짜 무기라기보다는..... 쾅. 아무래도 그에 대한 생각은 다음에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내 가슴을 향해 날아드는 검의 공격을 제이다이트 소드, 즉 녹옥검으로 받아낸 후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재빠르게 도망쳤으니까. 확실히 현명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직접 베이면 끝장이란 건 알고 있는 건가.' 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쳐봐야 소용이 없다. 죽는 시점이 좀 늦어질 뿐, 그 외에는 바뀌는 게 없는 것이다. 내가 일단 이 칼을 뽑은 이상에는 말이다. 나는 녹옥검을 양손으로 잡고, 녀석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어차피 녀석들의 마법은 나에게 통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부웅. 이 칼의 위력을 시험하는 것뿐이다. 내 몸이 순식간에. 번쩍. 한 줄기 빛으로 변하더니, 눈앞의 모든 녀석들을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너부터 !" 어디. 소드마스터라고 자부하는 모양인데 실력을 좀 볼까. 그는 돌진해오는 나를 보더니. "이얍 !" 그 순간, 사방의 공기가 조여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명마법 레벨 9의 자연검(Nature sword)인가. 그렇지 않으면 레벨 10짜리 우주검(Universe sword)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이 방어마법을 발동시킬 필요도 없이. 쉬익. 검을 한 번 휘두르자, 갑자기 그 압박감이 사라졌다. 그렇다. 내가 베어낸 것은 상대의 기(氣). 즉 생명에너지가 주위로 퍼져 나가는 흐름을 벤 것이다. 힘을 공급하는 근원과 끊어진 자연지물의 검은 즉시 사라졌고, 상대는 당황했다. 그리고 나는 검을 똑바로 들어서, 그대로 내리친다. 상대가 황급히 자신의 검으로 내 공격을 막는다. 그런데 이건. '무형검(Invisible life blade : 생명마법 레벨 8)인가?' 하지만 그런 걸로 내 칼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 저항도 없이 상대는 내 칼에 베였고, 그 순간에. ".........!"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는 소멸하여 사라졌다. 이 칼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마법과 기를 무시하는 것이어서, 당연히 상대의 존재 자체도 무시해버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동료가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적들은. "우악 !"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칼에 맞은 자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이 칼을 아는 것은, 이 칼에 맞지 않고 달아난 자도 소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로만 듣는 것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역시 틀리다는 것을, 그들은 이제야 깨닫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들을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그나마 내가 온정을 베풀어. '혼이라도 살려두는 걸 감사히 여기라고.' 물론 그 혼들은 쌍어궁의 손에 들어가서, 악을 위해 봉사할 수 없었다. 그러기 전에 이미. 삐이이잉. 죽은 자의 세계로 날아가 버렸으니까. 물론 혼을 부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스승님한테 혼난다고.' 다른 건 몰라도 혼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 그것이 스승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상대는. "이 년이 !" 한꺼번에 16개의 칼이, 동시에 나에게 날아왔다. 역시 실력으로는 안 되니 무더기로 덤비자는 속셈일까. 하지만 이 칼에게는 아쉽게도 무력했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쩌억. 그는 먼지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 다음은 뒤의 15명 ! 한 번의 검 놀림이 그들의 검과 맞부딪치면서. 쫘악. 그대로 검은 그들의 심장을 찔렀다. 한 번 찔리는 순간 그들은 검도 옷도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없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의 상대는. "크아아 !" 드래곤 브래스를 뿜어내는 드래곤인가. 하지만 나는 그 드래곤이 자신을 숨기고 발사한 그 일격을 가볍게. 쉬익. 칼로 베었다. 그러자 그 방대한 에너지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스르륵. 사라졌다. 그 드래곤은 놀라 뒤로 물러섰고, 다른 자들이 칼과 창을 들이대지만. "어리석군요." 나는 그들의 무기를 차례로 베어나갔다. 그 무기들은 문자 그대로 무와 혼돈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그 다음으로 베인 것은. 쉬익. 그 무기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머리가 내 칼에 걸리자, 그것들은 마치 물에 녹는 소금처럼 흔적도 없이, 무너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자. 죽어서 저승으로 가고 싶은 자는 제게 오세요. 혼까지 무로 돌아가고 싶은 자도 이리 오세요. 소멸의 길로 안내해드리겠어요."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날아갔다. 모든 마법도 검기도, 이 칼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의 춤. 그런데. "야 ! 이 비겁한 년아 ! 오로지 좋은 무기에 의지해서 연약한 우리들을 학살하는 거냐 !" 쌍어궁이 펄펄 뛰고 있었다. 아니, 이런 무기가 부럽다면 자기들도 그런 걸 만들어서 오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사실. "전투에 비겁이라는 단어가 왜 들어가나요?" 참. 부러우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그리고 이 칼은 엄연히 내가 고생고생하며 만든 칼이다. 남에게 선물로 받은 무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적들은 일제히. "이건 말도 안 된다." "순전히 무기의 힘으로 우리를 누르다니." "이건 횡포다." "벼락출세한 마법사 주제에. 그 칼만 없다면 우리한테 순식간에 박살날 거면서." 나 이거 원. 전쟁에 뭐가 그리 따지는 게 많은지.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이 칼만 없다면, 나를 제압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확실히 이 칼이 좀 무식하게 세기는 했다. 모든 것을 혼돈과 무의 영역으로 돌려버리는 칼이라니. 하지만 이 칼은 내가 휘두르기 때문에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이다. 만약 저들이 이 칼을 들더라도, 그들은 자멸해버릴 것이다. 다룰 수 없는 힘을 탐내면 그런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역시. 챙. 나는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Everybody(전체화. 상태변화마법 레벨 11)]] [[Dimension travel(차원여행. 시공마법 레벨 10)]] "앗차 !" 내가 칼을 집어넣는 그 순간, 녀석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이 녀석들은 정면으로 나에게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재빠르게 튄 것이다. 지금 쌍어궁의 동료인 이계인 둘이 사용한 마법 중에 전자는. '전체화라니.' 그렇다. 이건 레벨 10이든 11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마법을 모두에게 걸어주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 편이 아닌 나는 제외하고. 그래서 단 한 번의 차원여행 마법만으로, 녀석들 전원이 다른 우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Cancellation. - phoenix ability/Almighty cure]] 인피니티를 오른손에, 제이다이트 소드를 왼손에 쥐면서, 인피니티에 걸려있던 자동마법을 취소시켰다. Prediction of revive. 즉 만일의 경우 모두를 되살려줄 생명의 마법 하나만을 남기고. 자동마법을 너무 많이 걸어둔다면 필요할 경우에 마법을 발동할 수 없다. 그 허점을 나는 찔린 것이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필사적으로 반격을 날릴 줄 알았더니.' 하지만 녀석들은 보다 전술적으로 유리한 장소를 택해서 이동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들이 어디로 달아났는지는 알고 있다. 그곳은 바로. '우리의 우주인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뻔했다. 아마 별동부대와 합류하여, 자신들의 전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이겠지. 물론 달아날 생각이라면 지금의 마법과 함께, 어떻게든 추가마법을 붙여서 도주로를 확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낌새는 없어.' 적어도 이번만큼은, 녀석들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다시 다른 우주로 달아나서, 자신들의 기척을 지우기 전에 차원여행의 마법을 나 자신에게 걸었다. 어느 우주인지 잘 아는 이상, 그 세계의 물리법칙을 맞추기 위한 노력은 불필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우주라면. '그걸로 족해.' [[Dimension travel(차원여행)]] 생각과 동시에 마법이 발동하면서, 나는 이동했다. 슈웅. 나는 그들의 족적을 찾아서, 우리 우주로 돌아왔다. 되도록 여기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잘못하다가는 우주 하나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좀.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 하는 일이 아닌가. 난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빨리, 조용히 끝낼 수밖에. 다행스럽게도 지구는 이미 대피시켰으니, 만일의 경우를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외계인들의 별들을 날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수밖에.' 실수로라도 그러면 곤란하다. 그랬다가는 나는 문명의 파괴자로서 악명을 떨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별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지구를 침략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죽이고 죽이며 또 죽여야 하는, 그런 살육의 세계를 말이다. 그런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그런데 월영은?' 그녀를 포위한 쌍어궁 별동부대의 전투는, 이미 지구에서 1만 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저 위치라면 은하계의 팔에서 아래쪽으로 1만 광년이니까. 아니, 2만 광년인가? '저거, 위험하지 않을까?' 만약 저기서 실수라도 한다면, 월영과 쌍어궁 별동부대는 다같이 은하계 바깥으로 날려갈 것이다. 은하계의 중력에서 탈출하는 꼴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정도로 멍하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요.' 물론 텔레파시라도 보내는 짓은 절대로 안 한다. 정신을 집중해서 싸우는 데 방해가 될 테니까. 그보다 내가 맡아야 할 녀석들의 위치는. '저쪽인가.' 그들은 내 예상대로 지구 주위에 몰려 있었다. 아니, 그건 지구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둔 별이지. 하지만 저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뭐 해요? 쌍어궁." 그들은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이건 아무래도...... 혹시..... "이 쌍년 같으니 !" "지구 어디 갔어 !" 확실히 그들의 눈앞에 있는 별은 지구가 아니라, 그냥 메탄으로 가득한 푸른 별에 불과했다.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영하 250도의 추운 별. 물론 지구의 위치에 그런 별을 가져다 놓았으므로 태양은 별 전체를 데우고 있었고, 그로 인해 별의 기후는 급속히 변하고 있기야 했지만. "지구 내놔. 이 망할 년아 !" 하지만 그들이 왜 지구를 필요로 할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그냥 방긋 웃었다. 그리고. "지구는 뭐에 쓰시려고요?" 이렇게 말해주었다. 어차피 다 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빠 일당은 전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니, 때로는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으리라. 쌍어궁이 지구의 위치를 슬쩍한 괴물(?)을 손가락질하면서. "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 여기 있던 지구는 어디로 갔어?"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아주 솔직하게. "당신들이 부술 것 같아서, 치워뒀어요." 쿵. 내 목걸이 안에서 넘어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쪽은 일단 접어두고. "그런데 지구는 왜 찾으세요? 혹시 지구인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건 아니실 테고." 물론 농담으로라도, 저 쌍어궁과 그 일당들이 그런 가상한 생각을 할 리는 없다. 그들이 그 정도라면 나는 녀석들을 죽이거나 쫓아낼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보다 그들로서는. "왜 내 물건을 네 멋대로 치우는 거야. 이 망할 년아." 아무래도 저들은 지구가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 벌레이고, 벌레는 지구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신념이겠지. 하지만. "지구가 왜 당신 물건인가요?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최소한 자기가 만들고 나서, 자기 것이라고 해라. 주인이 없다고 생각되는 생명을 제멋대로 유전자 몇 개만 바꿔 끼운 후, 자기 것이라며 특허를 내던 인간들의 행각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한 일은 생명체를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기형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내가, 지구를 소유할 자격이 있다. 이 쌍년아." 그러나 내가 그의 주장을 인정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무(無)로부터 지구를 창조한 후에 그렇게 말씀하세요. 쌍어궁." 그렇다. 기존의 물건을 뒤바꾼다고 해서, 그 물건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어느 물건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와 혼돈의 세계로부터 뭔가를 스스로의 힘으로 낳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준 후에야 비로소 그 물건의 완벽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말이 되냐 !" 자기가 못하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라. 하지만 만약 그런 창조를 할 수 없다면, 그는 겸손하게 나왔어야 했다. 즉. "나는 창조를 하지 못하니, 무언가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이 사실을 인정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물건의 일시적인 주인일 뿐이며, 언젠가는 다음 주인에게 그것을 물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네 년........ 지구에 있던 내 충실한 부하들을 다 어떻게 한 거냐.........?" 그야 뻔한 일이 아닌가. 그가 지구를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을 끌어모아 나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그냥 두겠는가. 당연히. "그들의 마법 능력을 제거한 후, 깃털을 박아서 확실히 인간으로 되돌려 놓았어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그에게는 불만인 모양인지. "이 개 같은 년이 !" 펄펄 뛴다. 하지만 충실한 부하라. 뭔가 맞지 않는 말이다. 그 이유는. "저, 당신이 어떻게 그 마법사들을 충실한 부하라고 부르지요? 고작해야 이용물일 뿐인데." 그렇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부하가 아니라, 단지 가축이나 노예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쌍어궁은. "말이 틀렸다. 그 마법사들이 아니라, 지구의 인간 모두를 말하는 거다." 웃기는 녀석이다. 더불어, 욕심도 많은 녀석이기도 하다. 하긴 백만 대군을 부하로 두고도 아직도 모자란다고 생각할 정도니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확인. "그래서 당신은, 지구인 전부가 당신의 노예이며,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연한 게 아니냐?" 내 목걸이 안에서 이 사실을 듣고 있을 오빠 일당이 무슨 충격을 받을지는 안 봐도 뻔하지만, 그는 어차피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오빠 일당은, 단순히 노예농장에서 빠져나간 탈주자들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건 네 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차피 그 인간들이 네게 있어, 힘을 끌어내기 위한 에너지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리가 없지 않으냐. 안 그러면 어떻게 그런 엄청난 힘을 무제한으로 사용하는 거냐?" 아무래도 저 자는, 내가 자신처럼 다른 이의 혼을 빨아먹고 이 힘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범이 강아지에게 보여줘야 할 행동을 했다. 쉽게 말해서. "후후후후후." 비웃었다는 뜻이다.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지만, 저런 자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표정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상태로 빠뜨려주는 것도 의무지만.' 그리고 나는 계속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래서 당신은 무능력하다는 거지요. 힘을 어떻게 만들어내는 지도 모르다니." 그리고 나는 즉시,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빙빙 돌렸다. 그리고. "그럼 단순히 몇 명의 혼을 빼앗는 정도로는 만들 수 없는, 그런 마법을 보여드리지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것은. [[Shooting star(슈팅 스타 : 시공마법 레벨 11)]] 번쩍. 보통이라면 이런 섬광이 빛을 발하며, 쌍어궁 일당에게 날아들었을 것이다. 원래 마법이라는 건 그런 종류의 것이 많으니까. 하지만 내 마법주문이 완성되었는데도, 주위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이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내가 마법을 발동시키는 순간에. "저 년을 죽여라 !" 물론 그렇게 외친 자는 없었다. 다들 자기 나름의 마법이나 검기, 기술을 쓰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시공간은. 쿠르릉.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했으니까. 내 몸이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터널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공간의 터널이. 그리고 그것은. 쿠르릉.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시공간의 급작스런 변형은 녀석들의 움직임을 묶어 버렸다. 자신이 몸을 의지하여야 할 공간의 에너지 밀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아래로 휘고, 곧 지반이 무너지듯이. 쿠르릉. 아래로 가라앉는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문제는 공간이 아래로 휘어지게 하려면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가 공간에 집결했다는 뜻이고. 즈즈즈즈즈. 그렇다. 내가 풀어놓았던 별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수거한 별들의 숫자와 풀어놓은 별들의 숫자부터가 100개 이상 차이가 났으니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회수한 별들은. "멀쩡히 살아남은 별들만 돌려보냈으니까." 즉, 파괴된 별들은 회수할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특히 청색초거성이 붕괴하면서 생긴 초신성이나, 별들끼리 서로 부딪쳐서 파괴되는 경우, 그리고 특히 블랙홀이 적색거성 사이를 지나면서 빨아들인 성간 가스 같은 경우...... 파지직. 파직. 그로 인해 뿜어져 나온 에너지의 여파는, 어지럽게 사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좁은 범위에 힘을 너무 집중시킨 덕분에, 그 무수히 많은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뭉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런 식의 붕괴가 일어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아마 거대한 블랙홀이 생겨나겠지. 이건 처음부터. "1만 광년에 걸친, 은하제국 정도의 문명권을 파괴할 때나 쓰는 마법이니....." 그런 마법을 고작 마법사들을 처리하는데 썼다. 이건 명백히 과잉대응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백만 단위로 헤아려야 하는 정도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의 무차별 파괴를 해버렸으니 뒤탈이 없을 수가 없다. 하긴 그러니까 녀석들도 이걸 내가 쓰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지만. "어쨌든, 뒷수습은 해야 하겠지?" 더불어, 아직도 안 죽은 녀석들이 극소수지만,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쌍어궁 녀석. "대단한데?" 초신성과 블랙홀의 사이에서, 어떻게 안 죽은 거냐.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녀석이었다. 물론 에너지의 흐름을 잘 읽어내서, 그 힘이 과도하지 않은 틈을 찾아서 들어가면 어떻게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틈은 너무 작은 데다가, 별들이 워낙 엉망으로 뒤엉켰기 때문에 발견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틈이. "없는데." 그래도 어떻게 살아남았다. 아니, 이계인 다섯 전원이 다 살아있다. 물론 레벨 10짜리 마법사들이나 괴물들은 깡그리 전멸했지만, 그래도 산 녀석이 있다는 게 대단하다. 다른 우주로 달아나지도 못할 만큼, 시공간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어떻게 재주껏 잘 피했네? 나는 그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가 하는 걸 남들이 못한다고 하면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일단은 저 엄청난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 나는 다른 문명권에 닿으면 분명히 문제를 일으킬, 저 힘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내부에 들어있는 녀석들도 같이 짓눌러야 하니까. 우선 해야 할 일이라면. [[Master of Matter & Energy]] 이것 역시 레벨 11의 마법이었다. 다만 이것은 시공마법이 아니라 원자마법으로, 몸 바깥의 물질과 에너지를 내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걸 자기 마음대로 쓰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그건 이 마법이 과도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걸 초보적으로 쓰는 마법사라면 있다. 하지만. "물 한 잔에 든 물분자의 숫자가 몇 개더라?" 그야 컵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컵에는 1뒤에 0이 20개 이상이 붙게 된다. 그 정도로 물 한 잔에 든 물분자의 숫자는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를 내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 과연 평범한 마법사에게 가능하겠는가. 더군다나 지금 우주로 퍼져 가는 저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해야했다. 내가 벌인 일은 내가 수습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에너지를 향해 마법을 발동시켰고, 쌍어궁 일당도 포함된 에너지와 물질의 덩어리는 곧 확산을 멈추었다. 물론 내가 그 안의 쌍어궁 녀석들에게까지 지배권을 뻗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 몸만 가누기에도 버겁겠지만, 내가 그들을 지배하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저항할 테니까. 어쨌든 몸 바깥의 에너지를 지배하는 마법은 레벨 11이지만, 몸 안의 에너지를 지배하는 마법은 레벨 10에 불과하고, 그 정도는 녀석들도 잘 알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즉. '내가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리고 지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이 막대한 에너지를. "수축시켜야지." 물질과 에너지가 한 점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 그것은 초신성 폭발을 일으킨 후, 별의 중심핵이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와 원자가 붕괴되고, 그것들이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가 된다. 그리고 그 입자들은 스스로를 짓누르는 중력에 못 이겨, 양성자와 전자가 중성자로 결합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성자만 남아 안정화된 것이 바로. "중성자별이지." 하지만 그 중력이 과도하게 크면, 중성자도 다시 붕괴된다. 그리고 이제 붕괴를 막을 힘이 없어진 별의 중심핵은 그대로 부서진다. 한없이 쪼그라든 별의 핵은, 결국 또다른 천체로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블랙홀이지." 그렇다. 이 경우는 내가 강제로 에너지와 물질을 한 군데로 집중시키는 바람에 생기는 결과가 되겠지만. 어쨌든 엄청난 압력에 못이긴 물질들이 붕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쌍어궁 일당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알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그러기에는 공간이 불안정할걸." 중력붕괴를 일으키는 별의 핵의 부근의 중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 그리고 그 중력으로 인한 공간의 변형도, 보통 마법사는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하물며 공간이 기괴하게 변형하다가 갑자기 밑으로 푹 꺼지는 지금의 경우라면. "대처하기가 좀 힘들겠지." 이제 쌍어궁 일당은, 자신들의 몸을 그대로 붕괴시키는 중력과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건 순수한 힘의 대결이고, 그들의 몸도 역시 이 우주의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물리법칙을 넘어서서? "잘 해봐요. 쌍어궁." 그들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은 그들의 의지를 받쳐줄 수 없었다. 점점 그들의 몸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진다. 그리고 그들의 뼈가 부서진다. 근육이 끊어지면서 아래로 떨어진다. 피부가 찢어지며 조금씩 벗겨진다. 그리고 피가 아래로 뿌려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끈질기게 버티었다. 하지만. "이제 실체를 내놓으라고. 쌍어궁." 이 우주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 몸은 이제 쓸모가 없어. 본색을 보여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귀가 이미 가루가 되어 아래로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빠직. 우주이므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공기가 있었다면, 그런 소리를 냈을지도 모른다. 슈팅스타의 혼란스런 폭풍에 견디느라 마력을 모두 소모했는가. 그들은 방어막을 쳤지만, 그 방어막은 중력의 늪으로 힘을 빼앗기고 있다. 드디어 그들의 턱뼈가 부서지면서,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나뉘어진다. 물론 그들이. "이 중력을 자기 힘으로 흡수한다면 탈출이 가능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으로선 무리였다. 그건 그들이 에너지를 흡수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에너지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는 에너지가 적은 게 아니라. 구우우우우. 너무 많은 것이었다. 우리가 강물이나 바닷물을 컵에 담을 수 있는 이유가, 그 수면이 잔잔하기 때문인 것과 같았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바다가 요동을 친다면? 만약 그 파도가 과도하게 높지 않다면, 우리는 컵에 물을 받는 게 가능할 것이다. 단지 파도에 컵만 내밀어주면 되니까. 그러나 그 물이 만약에. 구우우우우. 지구 정도 크기의 물방울이라면? 그런 것이 인간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덮쳐온다면? 그렇다면 컵으로 그 물을 받을 수는 없다. 컵이 물을 받으려는 순간, 물이 컵을 그대로 꿰뚫어서 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쌍어궁 일당이 주위의 에너지를 이용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런 이치였다. 이 상황에서는 컵에 물을 받는 게 아니라. 구우우우우. 그저 컵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래도 벅찬 모양이다. 쌍어궁 일당의 몸은 이제 거의 다 빨려 들어갔다. 새로 태어나는 블랙홀 안으로. 그리고 이제는 극미한 살점만이 남은 쌍어궁 일당의 몸은. 삐이이잉.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공간이 너무나 가파르기에, 그들의 몸은 블랙홀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저들은, 빛도 돌아오지 못할 사상의 지평면 뒤로 모습을 감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력으로 보아. "빠져나올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만약 그들이 살고 싶다면, 아마 자신들의 몸으로 돌아가겠지. 그렇다면 싸움판은 막바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몸을 바꿔가면서 나에게 대응했지만, 진짜 몸으로 돌아간다면 이제 그들은 도망칠 길이 막히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다섯 방향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한 놈도 놓치지 않아."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로 끝을 볼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그들과의 악연을 끊고, 드디어 평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오빠의 존재가 있는 이상, 그게 잘 될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그들의 혼이 그들의 거짓된 몸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검과 지팡이를 양손에 쥔 채, 그들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갔나." 나는 그들의 우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만약 거기서 그들이 다시 달아나더라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 일단 꼬리가 잡힌 이상,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나는 추적할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들. 움직이는 방향이..... "돌아오려는 건가?" 그렇다. 그들은 어차피 달아나 봐야 나에게 잡힐 것이 확실한 도피행을 포기하고, 내가 있는 바로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포기한 건가. 그게 아니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건가. 전자라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후자라면 문제가 또 달라진다. 물론 그들이 나를 이길 방법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레벨 11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들이야.' 그러니 조심해야 했다. 실수로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아니, 내가 당하는 것 자체가 우리 우주에는 불행이다. 그렇게 되면 벌어질 사태는......... 수사관이라는 월영의 솜씨를 감안할 때, 문명권 몇 개가 날아가고 수습되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니. "내가 지면 안 돼." 그런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목이 날아가는 게 오빠다. 물론 내가 당해도 지구는 무사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구가 이 우주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해진다. 영원히 잠든 채, 멈춘 시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다고 부를 수가 없다. 비록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얼어붙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무조건 이겨야 해." 그렇다. 그게 내 의무인 것이다. 패배하면 끝장인 전쟁에서, '잘 싸웠지만 아쉽게 분패했습니다'라는 결과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보람된 결과라는 건. '비겁했지만 어쨌든 이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전쟁에 비겁이 어디 있어. 이기면 그만이지." 물론 스포츠맨쉽으로 가득 찬 오빠는 그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비전문가의 주제넘은 참견은 무시할 것이다. 차라리 살아있는 오빠의 비난을 듣는 편이, 죽어있는 오빠의 시체를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부웅. 그리고 나는 그들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계집이 !" 쌍어궁은 내 예상대로, 무척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외모는 그전의 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니,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아무래도 외양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 녀석은. 하지만 뭘 저리도 화내고 있는 걸까. 어차피. "내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다니 !" 하긴 10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여 얻어낸 자기 부하들이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죽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있어 무엇이었을까. 고작해야. "총알받이가 없어진 게 슬픈 건가요? 쌍어궁." 그렇다. 그에게 있어 그 마법사들은 기껏해야 자신의 힘을 늘리기 위한 에너지원에 불과했지 않은가. 그런 자들이 죽었다고 해서, 과연 쌍어궁이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는 단지, 나를 죽이기 위한 방패막이로 쓸 도구가 부서진 것을 슬퍼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아니." 그걸 부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인도주의에 눈을 뜬 것일까? 물론 그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을 존중한다는 개념은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에게 있어 인간은 벌레이고, 인간이 벌레를 재미로 죽이는 것처럼, 그 역시 인간을 장난감이나 도구로 여길 뿐이다. 하긴 그러니까 인간에게 그런 마법의 지팡이를 준 것이겠지. 한순간의 쾌락과 영원한 파멸을 가져오는 그런 도구를. 그런 지팡이는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죽음을 인간에게서 빼앗아갈 뿐이지.'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오로지 삶도 죽음도 아닌 상황에서 끝없는 고통을 맛보며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먹이를 찾아 헤메는 좀비. 그것이 바로 그 지팡이를 받은 자의 운명이 아니던가. 만약 그런 결말을 이끌어내기 싫다면. '나의 지팡이, 인피니티처럼 만들어야 하는데.' 그가 그렇게 할 리가 없다. 인피니티 정도의 마법 지팡이를 만드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며, 그보다 그는 그런 것을 인간들에게 나눠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자신의 소중한 부하가 아니라, 나를 상대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총알받이에 불과하니까. 조금 전에도 그는 인간 마법사들을 그렇게 사용했고,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좀비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을 모두 치유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은 무리야.' 그들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게 불가능한 것이다. 정당방위도 아니고, 단지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의 범죄자에 대한 인식과는 매우 거리가 있기는 했다. 보통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가해자의 인권은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은 무시해도 된다." 불행하게도 이게 진리였다.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 마법사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그들을 살려주고 싶어도. '그 많은 마법사들에게 그런 마법을 걸어주다가는.' 쌍어궁 녀석이 내 뒤통수를 내리칠 게 뻔했다. 그러니 그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에게 버림받은 운명의 인간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죽는 것이 차라리 그들에게는 행운이겠지. 하지만 죽음의 행복을 안겨줘도 될지 망설여지는 녀석들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그들은. "네 년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헛되이 낭비를 해버린 게 슬플 뿐이다. 이 년."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다 죽은 자들에게 보내는 애도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콰앙. 곧바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지직. 나는 나에게 날아온 마법을 그대로 제이다이트 소드로 받아넘겼다. 검에 베인 마법이 허무할 정도로 싱겁게 사라진다. 하지만 저 마법은 분명히 레벨 11짜리였다. 비록 너무 빨리 파괴되는 바람에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어려웠지만. 나는 곧바로 검을 우측으로 내리찍는다. 그 자리에는. 부웅. 사자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칼, 아니 도(刀)를 쥔 채로 나에게 돌진해오다가, 번개처럼 날아드는 내 검을 피해 옆으로 풀쩍 뛰고 있었다. 그의 도 끝 부분에 나 있는 3개의 발톱 모양의 갈고리가, 피를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 흔들린다. 아니, 저것은 불이다. 용맹의 불. '용감하군요.' 내 칼에 맞는 순간 재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도를 휘두르고 있다. 물론 그의 검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우와라차아 !" 내 검이 옆으로 빗겨가는 순간, 다시금 돌진해오고 있다. 하지만. '관성은 나에게 무의미하니까.' 그 순간 내 지팡이, 인피니티에게서 마법이 발동했다. 그것은 바로. [[Formula of Einstain(아인슈타인의 공식. 원자마법 10레벨)]] 이 마법은 체내의 물질과 에너지를 컨트롤하는 마법이다. 즉 이것을 발동시키면 내 몸안의 에너지와 물질은 내 마음대로 변형한다는 뜻이다. 바깥쪽으로 흐르던 검의 운동에너지가 그 마법에 의해 느닷없이 방향을 180도 바꾼다. 동시에 몸 전체의 운동에너지가 밖이 아니라, 사자궁이 검을 찔러오는 바로 그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내 칼이 빛에 가까운 속도로, 사자궁의 검을 받아친다 ! 이것이 바로. 'UFO의 능력이지.' 관성을 무시하고 몸을 움직이려면, 순간적으로 몸 전체의 운동에너지를 원하는 대로 변화시켜야 한다. 만약 운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막아보려고 한다면, 중간에 끼이는 내 팔은 그대로 양쪽의 에너지의 압력을 받아 부서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팔도, 원래부터 그런 속도를 내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지구가 우주에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는데도 그 위에 타고 있는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그 속도를 견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도는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지금 무사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법을 지닌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사자궁 역시. 번쩍. 어느새 뒤로 물러섰다. 역시 녀석도 그 마법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정확히 내 좌측을 향해 날아드는 천칭궁. 그녀의 목걸이에 박힌 오팔이 물처럼 출렁거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 청금석 靑金石)로 만들어진 검이 내 옆구리를 찔러온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받아치지 않고, 조금 기다렸다. 만약 서두른다면, 사자궁처럼 내 일격을 피할 틈을 마련해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검이 내 옆구리에 1만분의 1mm 정도로 다가오는 순간에. 쾅. 그대로 내 칼이, 천칭궁의 칼을 잘라버렸다. 아무리 라피스 라줄리라는 보석이 원래 악마의 책략을 막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역시 악마 자신을 보호해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지금은 관계가 없지만. 그리고 내 칼이 그대로 천칭궁의 몸통으로 날아간다. 이 거리라면 아무리 마법에 능통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흔들. 그녀의 천칭이 흔들리더니, 그녀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천칭은 원래 균형을 나타내는 물건인데, 아마 그녀의 것은 뭔가 특수한 마법을 발동시키는 듯했다. 나와 그녀의 균형은 이렇게 서로 대치하는 것이라는 거냐. 하지만 그쪽 천칭의 기능을 생각할 틈이 없다. 내 머리 위에서 덤벼드는 처녀궁과. "차앗 !" 내 뒤에서 달려드는 쌍자궁을 처리해야 하니까. 처녀궁은 오른손의 옥수수 이삭을 나에게 내밀며, 왼손의 카닐리언(Carnelian : 홍옥수 紅玉髓)으로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보석이 저렇게 크냐. 저건 보석이 아니라. '방패잖아?' 그리고 아래에서 덤비는 쌍자궁은..... 여전히 혼자였다. 원래 쌍자궁은 쌍둥이여야 하지만, 저 녀석이 혼자 덤비는 건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래서 나는 우선 처녀궁부터 날려버리기로 했다. 내 몸이 위로 솟아오르면서, 그대로 처녀궁의 이삭을 걷어찬다. 물론 그냥 걷어차는 것은 절대로 무리이므로. [[Soul pain(영혼의 고통. 영혼마법 레벨 11)]] 내 다리에 걸린 마법은, 저들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바로 영혼마법. 그들의 것이 불완전판이라면, 이것은 완전판이다. 이걸 정통으로 먹으면, 처녀궁은 아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녀의 혼 그 자체가. 과연 처녀궁도 그걸 맞는 건 싫었는지. 휘익. 재빠르게 도망간다. 정말 달아나는 데에는 재주가 좋다니까. 그와 동시에 내 앞뒤에서 동시에 덤벼드는 쌍어궁과 쌍자궁. 쌍어궁의 자수정 홀이 빛을 발하면서, 그의 마법이 완성된다. 그런데 이것은 ! [[Paradox(모순. 언령마법 11레벨)]] 이 녀석, 미쳤구나 ! 이것은 잘못 사용하면 우주 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초강력 마법이 아닌가. 하긴 나를 상대로 어지간한 마법은 모조리 무력화되거나 받아칠 게 뻔하니, 아예 가장 강력한 마법 중 하나라는 이걸 사용해버린 건가. 하지만 그걸 사용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어느새 내 지팡이, 인피니티가 그 방향으로 향하며. [[Paradox(모순. 언령마법 11레벨)]] 똑같은 마법으로 받아친다. 두 개의 괴물 같은 마법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거대한 구슬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파지지지직. 순식간에 직경 10km자리 구슬로 확대된다. 하지만 그 확장은 거기서 멈출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을 깜박이기도 전에 다시. 파지지지직. 직경 100km로 부풀어올랐다. 우주에 존재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힘이기에, 공간의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에너지가 줄어드는 게 아니다. 구웅. 너무 강대한 힘이 좁은 공간에 집중하는 바람에, 공간에 악영향이 미쳤다. 거기서 발생한 중력파가 사방으로 퍼져간다. 그건. 파직. 내 주위에 있던 다른 녀석들을 우선 스쳐간다. 그 힘은 마치 연속적인 파도처럼 계속 뿜어져 나왔고, 이 근방에 남아있던 성간 물질들이 불꽃을 일으키며 부서졌다. 좀 전에 내가 슈팅스타를 사용하면서 남겼던 잔재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면. 파지지지직. 빨리 마법을 멈춰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여파가 어디까지 밀려갈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역시 이 마법이 본격적으로 개방된 게 아니라서. '에너지의 충격이 주위에 영향을 미치려면 몇 년은 걸릴 거야.' 그리고 그 전에 이 대결은 분명히 끝날 것이니, 대처에 조금은 여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이 마법이 여기서 폭발이라도 일으킨다면,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조금 전의 슈팅스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참사. 즉. '우주가 붕괴될 거야.' 어쨌든 이 마법은 시전한 마법사의 과거로 돌아가서, 마법사의 친부모를 죽이는 것도 가능한 마법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곧바로 모순에 빠진 그 우주가 자체적으로 붕괴해버리지만, 어쨌든 그런 게 가능한 마법이다. 잘못하면 우주가 통째로 부서지거나, 에너지가 우주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마법을 시전한 장소의 시공간이 무너져서 공간에 구멍을 낼지도 모른다. 가급적이면 후자가 바람직하겠지만, 그러면 태양계가 돌아갈 장소는 아예 사라진다. 게다가. 구웅. 이제는 마법의 구슬이 1000km 이상으로 커졌다. 빨리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탈이 나도 단단히 날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마법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에 모순 마법이 나에게 직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안 죽어도. '오빠는 반드시 죽어.' 그렇다. 반드시 죽는 것이다. 그러니 몸으로 받아내는 해결책도 쓸 수가 없었다. 물론 두 개의 모순 마법이 부딪친 상황에서는 더 강력한 마법사가 이기기 마련이고, 여기서 더 센 마법사라면 당연히. '나지.' 실제로 모순 마법의 영향력은 계속 커지고 있었지만, 누가 더 우월한지는 분명했다. 쌍어궁쪽의 모순마법이 자꾸만 나에게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지금 쌍어궁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지금이다. 이 년을 죽여 !" 그리고 쌍자궁은 아직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의 검, 마노(瑪瑙)로 만들어진 검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내 치마 쪽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런 치한 같은 녀석이 있나.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피할 수가 없어 !" 그렇다. 지금 내가 이걸 회피하려면 당연히 쌍어궁의 모순 마법을 어떻게든 밀쳐 내거나, 그게 아니면 방치하고 그냥 몸만 빠져나가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면 나는 문제가 없지만, 이 우주의 안정이 위태로워진다. 쌍어궁이 이 우주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리는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아예 내 몸으로 받아내 볼까. 그렇게 하면 모순 마법의 파괴력을 내가 흡수함으로서, 녀석의 마력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큰 모험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그러면 오빠는 반드시 죽어.' 그렇다. 아무 방어마법도 쓰지 않고 그런 걸 맞는다면, 오빠의 목숨이 남아날 리가 없지 않은가. 부활을 예약하는 Prediction of revive는 레벨 10인 만큼, 그걸 오빠에게 걸어둔다고 해도 레벨 11의, 그것도 무지막지한 힘으로 악명이 높은 모순 마법을 견딜 리가 없다. 아마 단 한 방에 마법이 풀리고, 오빠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리라. '정말 골치덩어리라니까.' 확실히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만약 오빠가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있다면 이런 말은 안 하겠지만, 그 인간은 하필 지금. "에?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야. 설명 좀 해 봐." 설명은 무슨 설명이야 ! 나는 그냥 이 인간의 입을 확 틀어막고 싶은 생각을 했지만, 망치나 도끼로 사람의 입을 틀어막으면 큰일난다. 게다가 지금 당장은, 나를 공격해오는 쌍자궁의 일격부터 막는 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걸 막아내려고 하면.... '인피니티는 안 되고.' 아무래도 마법 지팡이를 이쪽으로 돌릴 수는 없다. 쌍어궁 녀석의 모순마법을 아직 다 누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검을 휘둘러야 하는데..... '그럼 처녀궁과 사자궁과 천칭궁은 어떻게 하나.' 지금 쌍자궁을 검으로 막을 경우, 이 세 녀석의 움직임을 견제할 수단이 사라진다. 검을 아무리 빨리 되돌리더라도, 필연적으로 명중시킬 수 있는 목표는 하나에 불과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답은 바로. 부웅. 쌍자궁을 칼로 베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결단은 빠를수록 좋고, 그게 늦는다면 차라리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보다도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올 테니 말이다. 사실 쌍자궁의 일격을 치마 쪽에 허용한다면, 그것부터가 이미 큰일이 아니겠는가. 쌍자궁이 황급히 공격을 포기하고 죽어라 도망쳤지만. "죽어라 ! 개년 !" 그와 동시에 세 녀석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천칭궁은 처녀궁이나 사자궁과 달리, 내 쪽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역시 검을 잃은 것이 영향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천칭이 흔들리더니. 부웅. 갑자기 내 모순마법이 작아졌다 ! 나는 깜짝 놀라 급히 그쪽으로 힘을 증강시키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아니, 뭐라고 할까. 이건 쌍어궁의 모순마법이 갑자기 강해져서가 아니다. 이건 오히려. '천칭궁?' 아마 녀석의 천칭의 소행일 것이다. 그 천칭이 내 마법과 쌍어궁의 마법이 균형을 유지하게끔, 강제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데 녀석들도 생각보다는 이것저것 궁리한 게 많은 모양이다. 단순히 나에게 얻어터지려고 온 건 아니라는 건가. 확실히. '그 정도는 해야 나에게 도전한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인피니티로 쌍어궁을 그냥 짓밟아버릴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녀석의 마법과 균형을 이루는 것에만도 벅찰 지경이 된다. 그 말은 즉. '칼 하나로 녀석들을 막으란 소리잖아.' 그렇다. 지금 자유로운 것은 제이다이트 소드. 그것뿐이다. 그런데 내가 막아야 할 녀석은 둘이다. 천칭궁이 내 지팡이를 막으려고 하는 이상, 공격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 셈이다. 하나 줄었으니 기뻐할 수도 있지만, 검 하나로 둘을 막기는 어렵다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를 놓아주면, 당장 내가 일격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거다 !"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었고, 나는 그것을 곧장 사용했다. 그러자..... 파앙. "쿠악." "꺄악 !" 갑작스런 폭발에, 사자궁과 처녀궁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칼이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도. "이게 뭐지?" 다른 마법을 발출한다는 정보는 그들에게 들어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나도 이 칼에서 마법을 뽑아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터진 것은 분명히..... "반입자포(anti-particle cannon)?" "마법주문을 외우지도, 마법의 지팡이를 쓰지도 않고서?"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원리는 너무나 간단했다. 나는 사자궁과 처녀궁을 벨 경우 둘 중 하나밖에 벨 수 없음을 깨닫고, 차라리 그 한 번의 기회를 이용해서 녀석들의 바로 앞, 공간을 베어냈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베었다면 공간만이 없어졌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간은 곧바로 아물어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은 수월히 나를 잘라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몰라도. '오빠는 분명히 죽었겠지.' 그러나 내가 베어낸 공간에서 튀어나온 것은 반입자였다. 그것이 녀석들에게 정면에서 달려들었고, 녀석들은 '나올 리가 없는 그것'에 놀라 후퇴한 것이다. 사실 원리라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만. '난 그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입자를 부순 것뿐인데.' 그러니까 원리는 이렇다. 즉 나는 내 앞의 공간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서, 극미한 세계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입자와 반입자들 중, 입자만을 파괴한 것이다. 이 검은 원하는 것을 소멸시키는 칼인 만큼, 그게 아주 불가능한 짓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無)로부터 입자와 반입자가 생겨나고, 또다시 소멸되던 과정은 내 개입으로 인해. '부자연스럽게 멈췄지.' 그리고 소멸될 짝을 잃은 반입자는 당연히 그대로 남게 되고, 그것들이 사방으로 퍼졌던 것이다. 물론 반입자들은 공평하게, 360도 모든 방향으로 날아가기야 했지만. '나에게 날아오는 건 무리니까.' 내 검 자체가 소멸의 힘을 지닌 이상, 나에게 날아오는 입자는 검에 막힌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사자궁과 처녀궁은 나처럼 미리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당연히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이 계집애가 !"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사용하는 수를 미리 읽었다면, 그들은 방어막을 쳐서 이것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들은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쨌든 어정쩡한 방법으로 막다가, 만약 반입자가 그들의 몸에 닿게 될 경우. '죽겠지.' 레벨 10 이하의 마법은 우리에게 있어 별 의미가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막았을 때' 그렇다는 소리다. 막지 못하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레벨 10 이하의 마법들도 다를 게 없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게 확실했다. 게다가 모험을 하기에는 반입자의 위험성이 너무 컸으니. '이건 반물질이니까.' 이런 입자가, 바로 반물질을 이루는 기본적인 입자들이다. 그러니 아무리 녀석들이 강해도, 일단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괜히 반입자와 닿아서 쌍소멸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부딪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그들이 모를 수 없으니까. 어쨌든 사자궁과 처녀궁이 나에게서 약간의 거리를 두는 순간. "천칭궁 !" 나는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검을 잃은 녀석이지만, 저 천칭만큼은 그대로 놓아둘 수 없으니까. 언제 무슨 짓을 해서 내 힘을 억지로 누를지 모르는 게 아닌가. 물론 내가 지금 진짜 힘을 내지 않고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이건 별로 좋은 게 아니었다. 내 힘을 마구 누르다니. 하지만 녀석은 나를 피해 달아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지금 몸을 피하려면 천칭을 거두어야 하는데. '그러면 쌍어궁 녀석은 죽어.' 그러면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확을 거두는 것이다. 녀석들 다섯이 합심하여 겨우 나를 막는 상황에서, 만약 하나가 죽는다면 나머지 넷은 어떻게 되겠는가. 점점 뒤로 밀려나고 결국은 나에게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녀석들은 필사적으로, 자기 동료를 보호하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역시 처녀궁과 사자궁이 나를 다시 공격하려고 달려오지만. "늦어 !" 내 검의 힘이 그대로 천칭궁을 덮친다. 하지만. "비켜 ! 천칭궁 !" 쌍자궁이 그대로 천칭궁을 밀쳐내면서, 대신 그 자리에 남았다. 쌍자궁의 몸에 검의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푸악. 그대로 부서지더니,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있어, 실패였다. 쌍자궁을 지금 죽여봐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지금 죽여야 했던 건 천칭궁인데. 녀석은 쌍자궁이 자신을 감싸는 틈을 타서. 부웅. 죽어라 달아났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는 즉시 인피니티 쪽에 힘을 집중시켰고. 쿠앙. "크엑 !" 아무래도 천칭궁의 회피는 자연스럽게 그의 천칭의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 악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쌍어궁이었다. 원래 그의 힘은 나에게 비할 바가 못되었으므로. 슈웅. 당연히 그는 내 모순마법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몸과 그의 마법이 통째로, 내 모순 마법에 삼켜진다. 그러면서. 파지직. 그대로 붕괴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녀석이 죽었을까.' 그건 뭔가 석연치 않았다. 내 모순 마법의 힘의 크기에 미친 영향이, 지나치게 작았기 때문이다. 만약 녀석이 죽어가면서 발악했다면 좀 더 강력한 힘이 모순 마법과 맞섰을 텐데, 이건 오히려. '도망쳤어. 분명히.'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다. 그 녀석들이 도망치는 재주가 얼마나 좋은지는, 나 자신이 아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내 짐작이 맞다면 쌍어궁 녀석이 도망친 곳은..... 그 생각을 하면서도 내 손은 쉬지 않았다. 때릴 상대가 석연치 않게 사라지는 바람에 놀게 된 모순 마법을 재활용하려면. 부웅. 내 지팡이와, 그 지팡이에 맺혀진 모순 마법은 그대로 처녀궁에게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자궁에게도 내 검이 날아든다. 이 거리라면 녀석들도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파직. 갑자기 시공간이 분할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자궁과 처녀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누가 시공간을 분할한 거지? 물론 짐작 가는 녀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쌍자궁?" 그렇다. 그 자 이외에 이런 짓을 할 녀석이 누가 있겠는가. 사자궁과 처녀궁은 역습을 노리다가 반격이 너무 빨리 들어오는 바람에 도망치기에 급급했는데. 사실 그 상황에서 마법으로 순간이동을 하기에는 여유가 너무 없었다. 그렇다면 옆에서 다른 녀석이 나를 경계하고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손을 뻗었다는 게 더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 놓친 건가." 나는 모순 마법을 거두었다. 이곳에는 이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도 없는데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를 하는 것도 곤란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어디로 달아났을까. 내 감각이 우리 은하계의 중심부로 뻗더니. "이쪽이다 !" 그와 동시에 나는 사라졌다. 우리 우주의 한 구석으로부터. 쿠우우웅. 만약 이곳에 공기가 있다면, 분명 지옥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릴 것이다. 이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은하 중심. 거대한 블랙홀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리고 주변의 무수히 많은 별들과, 엄청난 양의 성간 가스가 소용돌이를 치며 빠져 들어가는 곳. 그들이 블랙홀로 떨어지면서 내는 마지막 비명이 전파로 변하여 위아래로 쏘아지고 있었고, 그것은 거의 충격파처럼 나를 흔들고 있었다. 마지막 싸움터로는 정말로 적절한, 별들의 무덤. 하지만. '이왕 싸우려면 차라리 초은하단 사이의 틈이 더 적절한데.' 여기서 싸우는 것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기야 하다. 하지만 여기서 만약 실수라도 해서 이 블랙홀을 날려버린다면? 그러면 나는 은하 하나를 없애버리는 꼴이 된다. 은하의 중심핵이 사라지면, 그 핵의 중력에 묶여있던 별들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들이 자체 중력으로 서로를 묶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릴까. 그러나 그들이. '굳이 거대한 공동으로 자신들을 몰아넣을 리는 없겠지.' 이곳이라면 빛과 전파의 회오리가 너무 심해서, 코앞도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만일의 경우, 나를 이길 수 없다면 도망치기도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하지만 초은하단 사이의 공동으로 간다면, 몇 백 만년을 날아가더라도 끝없이 이어지는 빈 공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는 내가 월등히 유리하다. 대형 마법을 마음껏 날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것도 좀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모순 마법 같은 건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조금 전에도 까딱 실수했으면, 쌍어궁 녀석의 모순 마법이 이 우주를 붕괴시켰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단은 있지만, 가급적이면 그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오빠가 옆에 있어도 잘 싸우는데 뭐.' 그에 비하면 이것은 핸디캡도 아니다. 부담감이 100만에 달하는 상황에서, 1 정도가 더해진다고 더 부담스러운 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우선 녀석들을 잡고.' 아무리 항성들이 내뿜는 빛이 주위를 가리고 있어도, 어차피 그런 것 정도로 눈이 가려질 수는 없다. 우주 파괴의 마법을 쓸 정도의 인물이라면, 당연히 그런 난관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 보자..... "!" 그들은 별 뒤에 숨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응징하려다가, 잠시 기다렸다. 그들을 지금 몰아붙였다가 도망치게 된다면 더 귀찮아지므로. 그보다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면, 써보라고. 녀석들아.' 그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녀석들은 나와 계속 싸울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내 발 밑의 적색거성에서. 파앙. "마법진?" 부아아아앙. 그렇다. 그건 마법진이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라, 최소한 네 개 이상의 마법진이 사방에서 가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별의 내부에 마법진을 준비한 후, 내가 올가미 한가운데에 오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여기서 이걸 피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러면 녀석들은 도망칠 거야.' 그건 곤란했다. 이제는 그들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그만 끊을 때도 되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급히 회피했다. 아니, 회피하는 척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세 개의 마법진에서 뻗어 나오는 끈은 피했지만. 휘리릭. 내 왼팔에 마법진에서 나온 거미줄이 엉켰다. 그리고 그 순간에, 다른 마법진에서 나온 거미줄 같은 빛의 실이 내 팔과 다리를 휘감는다. 그런데 이건? '증폭마법Amplification과 결박마법Bind를 같이 사용한 건가?' 사실 나를 묶으려면 어지간한 결박마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결박마법인 Bind는 고작해야 레벨 6짜리 마법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걸로 나를 구속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증폭마법인 Amplification을 추가해서, 결박의 힘을 강화한 것이다. 사실 그 마법은 레벨 11짜리이고, 이 증폭마법이라면 아무리 낮은 레벨의 마법이라도 충분히 레벨 11급으로 강화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줄이 너무 굵잖아." 이건 무슨 공룡을 묶는 줄 같다. 이 녀석들, 내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나를 장시간 묶어둘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녀석들이 노리는 다음 수는 아마도..... '시간 벌기?' 그렇다면 녀석들은 바로 지금,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바로 이 순간을 노려 다른 마법을 걸어올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런데 이것은? [[Amplification(증폭. 상태변화마법 11레벨). Energy drain(에너지 흡수. 상태변화마법 8레벨)]] 쌍자궁이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비록 그의 손은 내 가슴에 닿은 게 아니지만, 가슴 바로 앞에 멈춰 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다. 어차피 결박마법이 내 팔과 다리를 너무 꽁꽁 묶는 바람에, 손을 댈만한 부위가 몸통밖에 없기야 하지만. 그런데. '목까지 묶는 건 좀 심한 거 아니니?' 물론 머리를 묶이고도 태연한 내가 더 문제가 있다고 할 자가 내 목걸이 안에 있겠지만, 그런 의견은 일단 무시한다. 지금은 쌍자궁의 마법을 풀어내는 게 우선이니까. 녀석이 나에게 거는 마법은 분명히 에너지 드레인, 즉 내 힘을 흡수하는 마법의 강화판으로, 증폭마법을 통해 에너지를 아주 많이 빨아들이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정도로 내 힘을 고갈시키는 건 불가능하잖아?'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녀석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진짜가 아니다. 진짜 결정타는 쌍자궁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올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죽어라 ! 마녀 !" 역시. 내 등뒤에서 나를 내리치는 사자궁. 아마 자기 나름대로는 최대의 마력을 끌어 모은 것이겠지. 그리고 온몸이 결박당하고 에너지까지 빼앗기는 내가, 이 일격을 막을 마법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의 검이 내 머리에 닿는다. 그리고 마법이 나에게 흘러 들어온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게 당신들의 패인이야.' 내 몸에서 검은 빛의 무언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마력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런 긍정적인 힘이 아니라 부정적인 힘, 마이너스의 힘이었다. 이건 바로. "음에너지?" 그렇다. 이것은 바로 음의 에너지였다. 즉 나는 양의 에너지인 마력을 쌍자궁에게 빼앗기는 것을 내버려둠으로서, 음의 에너지를 끌어낸 것이었다. 여기서 음의 에너지라는 건. "영하 273도 이하의 상태. 지금의 진공이 가진 에너지보다 더 낮은 에너지의 상태." 대략 이렇게 정의하면 될 것이다. 즉 나는 내 몸의 온도를 영하 273도. 즉 절대영도 이하로 낮춤으로서, 몸을 음의 에너지를 지닌 상태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존해야 하는 양의 에너지는 내 몸 깊숙이 숨겨버린 것이고. 그런데 문제는. "이, 이건 !" 그렇다. 이건 원래 순간이동을 위해 웜홀을 만들어낼 때, 그 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내는 에너지이다. 이런 에너지를 웜홀 안에 채우지 않으면 웜홀 자체가 붕괴되므로, 이런 기술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양의 음에너지를 직접 접하는 것은, 그들로서도 드문 일이었다. 아니. '대처시간이 없을 걸.'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음에너지라는 것이 지금의 우주를 이루는 진공의 에너지상태보다 낮기 때문에, 이런 것을 접하면 진공 자체가 상전이를 일으키면서 음의 에너지와 같은 수준의 에너지상태로 떨어진다. 웜홀의 경우야 블랙홀 비슷하게 외부의 우주와 격리되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여기엔 벽이 없거든.' 그리고 지금 내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녀석과, 내 머리에 검을 댄 녀석은, 직접적으로 그 에너지에 접촉한 상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자. 한 번 실습을 해볼까? 쌍자궁. 사자궁." 100의 힘을 가진 자에게 -1000의 힘을 가했다. 그러면 그들에게 남는 힘은 얼마일까. 파지직. 정답은 -900이다. 그러나 그 답을 그들은 말하지 못했다. -900의 힘은 주위의 진공을 붕괴시키기 시작했고, 그 시작점은 바로 그들의 몸 안이었으니까. 만약 그 음에너지가 적은 분량이었다면, 그들은 힘으로라도 그 음에너지를 짓눌러 소멸시킴으로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00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 -900의 힘을 감당하라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그들이 가진 힘도 이미 소멸해버린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파지직. 파직. 쌍자궁과 사자궁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한순간에 붕괴되더니, 그대로 음에너지의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물질과 에너지는 같은 것이고, 그들의 몸 안의 힘이 음에너지를 진정시키지 못한 이상, 그 음의 에너지는 공물로 그들의 몸을 요구했다. 그리고..... 파지직. 그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마력을 더 꺼내고 싶어도, 몸이 부서져 사라지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미처 그들이 대응마법을 외우기도 전에, 그들은 그대로 검은 힘에 녹아버렸다. 처음부터. "나에게 너무 가까이 온 게 실수였어." 그리고 그 에너지는 나를 묶고 있던 마법진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를 묶고 있던 거미줄로 음에너지가 전해지면서, 마법진이 붕괴한다. 아니, 녹아서 사라진다. 그리고 음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경악한 쌍어궁과 다른 녀석들이 황급히 마법으로 나를 막으려고 하지만. 쿠아아아앙. 약간 늦었다. 음에너지는 주위의 진공을 붕괴시키며 계속 주변을 음에너지의 상태로 만들었고, 이 붕괴는 빛의 속도로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붕괴는 계속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음에너지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런 것을 막기에는 예컨대. "나와 너희들의 거리가 너무 짧다고." 그러니 마법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 적합한 마법을 선택하고, 그걸 풀어놓으려면 조금의 여유는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굳이 마법을 고르지 않더라도, 원래부터 그에 대응하는 마법을 미리 지팡이나 다른 마법의 물건에 프로그램했다면 이걸 막을 수 있는 법이다. 마법이 즉시 발동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녀석들에게도 있었으니. 찰랑. 찰랑. 천칭궁의 천칭이 흔들리자, 음에너지의 확산이 멈춘다. 역시 저건 나와 그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까. 하지만 그것은 균형을 맞추기는 해도, 나를 몰아붙이는 도구는 되지 못했다. 서로간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과, 한쪽을 완전히 밀어붙여 균형을 무너뜨리는 건 전적으로 다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음에너지가 정지하는 순간. [[Master of Matter & Energy(체외의 물질/에너지의 전환과 조종), Formula of Einstain(체내의 물질/에너지의 전환과 조종)]] 그 순간에, 음에너지는 다시 나에게 모였다. 하지만 이것은 나와 그들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급작스런 상황 변화에 천칭이 흔들림을 멈추는 순간. [[Multi spell(다중주문. 여러 개의 마법을 동시에 발동시킨다. 정신마법 10레벨). Dragon breath(드래곤 브레스) 100 !!!]] 사실 레벨 10의 마법을 한 발 날려봐야, 천칭궁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쓴 것은 멀티 스펠. 즉 여러 개의 주문을 동시에 발동시키는 다중주문이라는 마법과, 드래곤 브레스를 합친 것이었다. 그리고 100개의 드래곤 브레스는. 부웅.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부터 천칭궁을 덮쳤다. 단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별을 파괴하는, 바로 그 마법이 말이다. 만약 천칭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그걸 막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 상황이 빨리 변하는 바람에 미처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쿠앙. 그것은 그대로 천칭궁의 천칭에 명중했다. 아니, 천칭궁의 몸 전체에. 믿었던 천칭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빛의 기둥에 휩싸이는 천칭궁. 과도한 에너지가 그의 몸 전체를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힘은 다시 회전하면서. 푸욱. 천칭궁의 몸을 꼬치 꿰듯이 관통했다. 수 십 개의 창에 찔린 천칭궁이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무기를 모두 잃은 상태에서 내 공격을 당했으니, 비무장 상태에서 이걸 다 막는 것은 그에게는 무리였겠지. 그리고 그의 몸이 붕괴된다. 흙먼지도 남기지 못하고. 그럼 이제 처치할 상대는. '처녀궁 차례지?' 그들은 나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빨리 마법을 발동시키는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섯 명의 포위망이 무너진 탓이 더 컸다. 만약 다섯 모두가 살아있었다면 억지로라도 버티겠지만, 이미 사자궁과 천칭궁이 죽었다. 그리고 12명이 있을 때도 결국 나에게 패했던 전례를 생각하면. '대항은 무리지.' 그리고 음에너지가 처녀궁을 덮친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이제는 무리였다. 그녀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음에너지와 합쳐지면서, 무(무)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몸도 곧. 쿠르르르르. 만약 공간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 음에너지의 존재는 처녀궁의 몸을 잠식하면서, 그대로 그녀를 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력으로 음에너지의 공허함을 메우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서 있는 공간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으므로. 즉. '상전이.....' 즉, 영하 273도가 절대영도인 것이 지금의 우주라면, 그녀가 있는 공간은 지금 영하 5천도가 절대영도인 곳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5천도와 273도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는 진공에서 강제로 방출되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의 몸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의 공간이 붕괴되고, 더 낮은 에너지 상태로 변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다. 다만 이런 현상은 평소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대부분의 우주는 생성 초기에 이런 현상을 겪게 되기 때문에. 그러나. 파사사사삭. 그녀는 바로 그런 현상에 휘말려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력 자체가 무너지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비록 그녀 역시 음에너지를 조금은 다룰 줄 알지만. '양이 너무 많을 걸.' 그리고 그녀는 음에너지에 파묻히며, 그대로 사라졌다. 그녀 옆의 쌍어궁과, 쌍자궁과 더불어. 하지만 아직은 일이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둔다면 우리 우주 전체의 시공간이 상전이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광속으로 붕괴되는 공간을 차단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Time-space destruction(시공간의 창조와 파괴. 레벨 11 시공마법)]] 충분한 여유 공간을 두고, 붕괴되는 공간과 남아있는 공간 사이의 시공을 붕괴시킨다. 그러자 무너져 내리던 공간이 우리 우주로부터 분리되었다. 또 다른 우주로 재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처녀궁과 쌍어궁과 쌍자궁은. 부우우웅. 그대로 사라졌다. 새로운 우주와 더불어. 그러나..... "아냐." 처녀궁은 죽었다. 하지만 쌍어궁과 쌍자궁은 아직 죽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내 눈앞에서 지금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의 몸은 둘이며, 둘을 동시에 죽여야 비로소 그들의 생명이 끊어지므로. "귀찮은 녀석들." 나는 상당부분의 공간이 사라지는 바람에 크게 일그러진 공간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조금 전에 내가 죽여버린 그들의 반신(半身)이 저기에 있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 있을까. 그 답은 사실 간단했다. 그들의 한쪽은 다른 쪽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정신의 연결선을 찾아서.... 그 뒤를 따라가면.....' 아무래도 이곳의 공간의 붕괴는, 조금 있다가 메워야 할 것 같다. 나는 즉시. [[Telepotation 순간이동]] 슈웅. 그쪽으로 날아갔다. 이 정도라면 대략 1200광년 정도 떨어진 곳인데..... 그런데 이 녀석들의 정신흐름은.....! '몸을 나누는 건가.' 그렇다. 그들은 재빠르게 절반의 몸을 버리고, 나머지 절반을 이곳으로 도망치게 했다. 그리고 그 절반의 몸이 다시 원상복구되면서, 또다시 나뉘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두 개의 몸을 각기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식으로 나오겠지. 그러나 그들의 분리는 이미 때를 놓쳤다. 그들이 둘로 나뉜 후라면 내가 손을 쓰기 힘들어지지만. "아직 나뉘지 않았어."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드디어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챌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둘뿐이다. 여기서 둘 중 하나라도 잡으면, 나머지 하나는 그만큼 달아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Time stop(시간 정지. 시공마법 8레벨)]] 우선 이것부터. 갑자기 그들의 시공간이 얼어붙자, 그들의 분열은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들이 내 모습에 경악하지만, 시공간이 고정된 이상 그걸 풀어내려면 마법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법을 발동시키는 속도보다는 내가 빠르다. 그리고 그것은. [[Amplification(증폭. 상태변화마법 11레벨). Spell control(주문조종. 역주문마법 9레벨)]] 파지지지직. 두 녀석에게 내 마법이 걸린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마법을 깨려고 발악한다. 하지만 힘으로는 내가 압도적으로 위에 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걸었던 탓에. 파직. 뭐야. 쌍어궁 녀석, 방어주문을 미리 걸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쌍자궁은 그걸 피할 수 없었다. 확실히 두 번이나 나에게 당한 후유증이 남은 모양이다. 그리고. "됐다." 이제 쌍자궁의 모든 마법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Amplification(증폭. 상태변화마법 11레벨). Reverse-Almighty cure(역주문. 전능의 치료)]] 앞의 주문은 내가 걸고, 뒤의 주문은 쌍자궁이 건 것이다. 즉 나는 주문을 외우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쌍자궁에게 레벨 10짜리 마법을 역마법으로 걸게 하고, 그걸 내 힘으로 증폭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우주로 달아나려던 쌍어궁보다 조금 빨리 발동되었다. 아무래도 도망칠 우주를 선정하여 그 우주로 순간이동을 하려면 2개의 마법이 소요되는데 비해, 나와 쌍자궁은 한 개의 마법만 사용하면 되었다. 당연히 내 쪽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데나 순간이동을 하면 되지만. '그러면 이 녀석은 죽게 되니.' 이동할 우주의 물리법칙도 안 따지고 순간이동을 하는 것은 도박이다. 우리와 완전히 물리법칙이 같은 우주가 아니라면 그 결과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아예 그 우주로 들어갈 수가 않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종류의 생물이 되므로.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주에 들어가지 못한 채, 혼돈 속에 삼켜져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아차 !" 나는 그의 분신 중 하나만이 남아서 만신창이가 되는 것을 보고, 쌍어궁이 뭘 했는지 알았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를 벗어나지 못함을 알고, 자신의 '일그러진 분신'만을 남겨둔 채 그대로 순간이동을 감행한 것이다 ! 물론 내가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분신은 내 공격을 맞고 소멸했지만. "이 녀석이 !" 그가 달아나는 속도보다는 내가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 하지만 쌍자궁을 내가 잡고 있는 이상, 그의 마법으로는 쌍어궁과 비슷한 속도밖에 안 나오니..... "에라이." 나는 그를 잡음과 동시에. [[Dimension travel(차원여행. 시공마법 10레벨)]] 어차피 쌍어궁이 달아나는 곳은 뻔히 보였다. 녀석이 자신의 분신과의 연결을 끊는다고 해도, 그 흐름의 미미한 잔재는 확실히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나타났을 때, 녀석은. 슈욱. 다른 우주로 또 도망쳤다. 그러나 이제는 늦었다. 녀석이 아무리 달아난다고 해도. "내가 더 빨라 !" 이제 쌍어궁은 도망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발악을 해 봐야, 내가 마법을 외우는 속도를 따라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그 전에 이 쌍자궁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럼. 슥. 나는 복잡하게 쌍자궁에게 마법을 걸지 않았다. 단지. "저기로 가." 이미 음에너지로 인해 붕괴되는 우주, 즉 처녀궁이 죽어가는 바로 그 우주에 쌍자궁을 던져 넣었을 뿐이다. 그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가 사라진다. 확실히 죽었구나. 이번에야말로. 하지만. "한 놈이 남았어." 나는 급히 쌍어궁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가 또다시 다른 우주로 순간이동을 하려는 순간에. 쿵. 나는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다시 도망치려고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여기서 순간이동을 한다고 해도, 이제는 도망칠 방법이 없다. 무작정 다른 우주로 순간이동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물리법칙이 다른 곳으로 떨어지지 않은 건 순전히 쌍어궁의 행운이었고,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번에 이동하면 죽어.' 꼼짝없이 당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결국 그도 자신의 위치를 알았는지. 으득. 그의 입술에서 피가 나오는 듯하다. 이제 포기한 건가. 게다가 여기에는 그가 인질로 삼을 문명권도 없었다. 무작정 도망친 덕분에, 그가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곳은. "텅텅 비었어. 쌍어궁." 그렇다. 이곳은 하필 암흑만이 가득한, 초은하단 사이의 공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황량한 빈 공간에서 살아있을 생물은 거의 없다. 수 천 년, 수 만 년을 날아도 물질도 에너지도 거의 없는 이런 절대영도의 공간에서, 무엇이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겠는가. 그런 생물이 혹시 있다고 해도. '이 부근에는 없어.' 그건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쌍어궁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행한 일이기도 했다. 단지 자신의 마력만으로, 나라는 강적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동료도 부하도 별도 없이,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그가 자신의 지팡이로 뭔가 마법을 외우려고 하지만. 까앙. 내 검이 움직이자, 그의 지팡이는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서 적어도 100km 이상 떨어져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검은 검 자체가 적에게 닿아야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는 아니었다. 이것은. '원하는 곳이 어디라도 벨 수 있으니까.' 바로 이 검에서 뻗어 나오는, 혼돈의 힘으로 말이다. 지팡이를 잃은 쌍어궁이 달아나려고 한다. 그 역시 레벨 11의 마법사이니, 지팡이가 없어도 어지간한 마법은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푸욱. "크엑 !" 내 칼에서 뻗어 나온 검은 빛의 혀는, 어느새 그의 몸통에 꽂혀 있었다. 조금 전에 그의 지팡이를 베어낼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으로 끝이다. 쌍어궁. 하지만 그는. "어?" 그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잘라내서, 내 칼에 잠식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아마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몸에 내 칼이 닿는 순간 확실히 죽을 것이니,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는 속셈이겠지. 물론 그 상황에서는 그게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다. 죽어버리면 선택이고 뭐고 할 수 없지만, 살아 있다면 미미한 가능성은 남게 되니까.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이미. "네 카드는 다 떨어진 것 같은데." 그리고 내 칼이 쌍어궁의 몸으로 다시금 날아갔다. 조금 전의 일격은 비록 그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의 마력을 모조리 빼앗아갔고, 남아있는 그의 몸통 조각은 이제 힘도 없는 살덩이에 불과했다. 그의 머리에 내 칼이 닿는다...... 그리고..... "이제 끝이다 !" 그렇다. 이제 끝이었다. 그동안의 긴 싸움의 나날이 생각나지만, 지금은 잡념을 버리고 집중할 때였다. 녀석을 죽인 후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그런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으니. 우지직. 내 칼이 그의 몸통에 꽂히기 직전에, 그의 목뼈가 스스로 부러졌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위로 튀어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내 칼은 그의 몸통에 맞았고, 그것은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하지만 머리만 남은 쌍어궁에게는 이제 대항수단이 전혀 없었다. 마력도 없고 부하도 없고 동료도 없고 무기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하겠는가. '너는 내가 아니니까.' 나라면 저 상황에서도 반격할 수가 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내 칼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그는 어떻게든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의 마법은 완성될 수 없었다. "그 전에 죽을 테니까 !" 그렇다. 그는 이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 기나긴 전쟁은 이제 끝날 것이다. 그는 이 일격을 피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그리 쉽게 풀리는 게 아닌 모양이다. 휘리릭. 내 칼이 그의 머리를 좌우로 잘라내기 직전, 그의 머리가 갑자기 회전을 하더니 내 검을 피한 것이다 ! 녀석에게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었던가? 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머리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검을 돌렸다. 도망친다고 내가 놓아줄 줄 아나. 하지만 내 검이 날아가는 방향에는. 부웅. "이건?" 갑자기 그의 머리가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누군가의 손에 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월영 !" 그녀는 쌍어궁의 머리를 자신의 왼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녀의 지팡이는 나를 향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공격을 하겠다는 듯이 내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을 발동시키지는 않았다. 그저. '날 견제할 셈인가?' 물론 그녀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녀의 직책상, 그렇게 하는 게 그녀의 의무이니까. 그러나 이건 너무나 얄밉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닐 수 없다. 조금 전에 내가 쌍어궁 일당의 백만 대군과 싸울 때, 그녀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하지만 내가 그녀를 추궁하기 전에. "이건 제가 가져가겠어요." 이봐..... 아무리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가는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그건 돈주머니가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당연한 조치, 즉 항의를 했으니. "이봐요. 그 녀석이 지구에 무슨 짓을 했고, 하려고 했는지는 알텐데요? 그렇다면 지구의 주민인 제가 그의 목숨을 거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사실 그가 여태까지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지구인의 손으로 처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니까. 게다가 저 녀석의 일을 남의 손에 맡기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만약 월영이나 마법제국의 경찰들이 저 녀석을 체포한 후 사후관리를 잘못하면? 만약 그렇게 되어 녀석이 또다시 탈출하게 된다면, 난 또 10년을 고생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는 게 얼마나 힘든데.' 겨우 녀석을 죽일 수 있게 된 이 기회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녀석을 죽인다면, 모든 귀찮은 일은 끝나게 되니까. 하지만 월영의 생각은 전혀 달랐으니. "아뇨. 이 자는 우리 제국의 국민이니, 그에 대한 처벌의 권한은 우리 제국 정부에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당신네 행성에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처분은 우리가 할 것입니다." 즉, 자기네 나라의 국민이니 자기네가 처리하겠다는 뜻이다. 그 말은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 그를 지금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네. 공정한 재판에 의해 그에 대한 벌이 결정될 것입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다. 그렇다. 듣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그런데 그 자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순순히 사형장으로 갈 것 같나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놈이라면 처음부터 탈옥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나에게는 할 말이 아주 많았으니. "그 자가 또 다시 탈옥해서 지구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요? 저는 또 10년 동안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건가요? 그 자가 혼자 탈옥하지 않고, 다른 범죄자들을 데리고 다시 나타나면 그 뒤처리는 누가 하는 거지요? 당신네들이? 저 녀석이 지구에서 10년을 설치는데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당신네들이? 그리고 저 녀석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저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요? 아. 이제 저 녀석은 어딘가 먼 곳에 갔으니, 녀석에게 죽거나 다친 사람들도 잔소리말고 위대하신 마법제국의 사법당국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믿어라. 물론 배상이나 보상은 전혀 없다. 물론 그 재판정에 참여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인가요? 그걸 제가 납득하리라고 생각되나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나마 내가 저 녀석과 전쟁을 벌일 때 손이라도 빌려줬으면 납득이라도 해주겠다. 저 녀석의 세력을 무너뜨린 것은, 순전히 나 혼자서 한 게 아닌가. 차라리 지난번에 좀비들의 습격사건으로 인해 군대라도 파견했던 독일정부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면 이해라도 해주겠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를 흘려가면서, 녀석들과 싸웠으니까. 그러나 월영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뒤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과실만 훔쳐가려고 하는 주제에.' 사실 별동부대라고 나섰던 레벨 10의 마법사 떼거리들이 아무리 설쳐 봐야, 월영은 무려 레벨 11의 마법사이다. 즉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는 마법사라는 뜻이다. 그런 자가 아무리 수적으로 밀린다고는 하지만, 레벨 10과 레벨 11이 어느 정도로 차이가 큰지는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런 자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녀석들과 싸웠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제대로 된 마법 한 방으로 상황을 끝낼 수 있는데, 어째서 지금에야 나타난 것인가. '얌체 같으니.' 이건 처음부터 힘든 일은 다 나한테 맡기고, 일이 정리되려는 순간을 노려서 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머리 내놔요." 내가 이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저 머리는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획득한 게 아닌가. 그런데 그걸 그렇게 허무하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 전쟁에서 아무 것도 안 한, 아니 별동부대를 상대로 빈둥빈둥 놀면서 시간만 보낸 자에게? 그리고 지금 쌍어궁을 확실히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나를 귀찮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안 되는데요. 이 자를 데려가는 것도 제 임무니까요." 빡빡하게 나올 뿐이다. 아니, 뻔뻔하게 나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자기 손을 조금이라도 썼다면 저 말을 인정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내 입에서는 비꼬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지구가 풍비박산이 나든 말든 내버려두는 것도 당신의 임무고요?" ".......이곳의 문명권에 대한 간섭은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런 무책임한..... 나는 월영의 머리를 그대로 날려버리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난동을 부리면 안 된다. 지구의 정치가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나는 지금 지구를 대표하고 있으니까. 물론 국회의 일당들이 보면 분명히. "무슨 짓이냐. 저런 젖비린내 나는 애가 왜 우리를 제치고 대표라는 거냐. 국민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와 !"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그 녀석들의 헛소리를 내가 들어주지는 않지만. 게다가. "그러면서도 김 시내양은 잘도 구하셨군요." 나한테서 시내를 빼낼 때는 뭐라고 했는데. 그러나 월영은 태연하게도. "인간에 대한 마법시스템의 영향의 조사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또한 당신의 무지스런 대응방식에 대한 반감도 있고요. 무조건 살인과 파괴로 일을 해결하는 당신의 방법은 솔직히 옆에서 보기가 곤란하던데요." 뭐가 무지스럽다는 거냐..... 하지만 월영은 자신의 말을 철썩같이 믿는 눈치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뻔뻔한 짓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이 자의 공범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면, 재판에 악영향이 미치게 됩니다. 아마 당신의 이번 행동으로 인해, 이 자는 사형을 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더군요." 이봐...... "물론 다른 문명권에 대한 간섭은 중죄입니다만, 여기서 그 원인은 당신이 이 자의 공범들을 일곱이나 죽인 것이라는 의견도 재판정에 제시되어 있으니까요. 그때....." "그럼 난 그 자리에 앉아서, 죽어야 했다는 건가요?" 내 분이 폭발했다. "그 자가 처음부터 우리 우주에 들어와서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에 맞설 이유가 없었어요. 그 자의 행동이 내 목숨을 위협했고, 그 상황에서 내가 죽지 않고 지구로 돌아오자 그 자는 다시 나를 죽이려고 하더군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그 자에게 대항하지 말고, 그냥 앉아서 맞아죽어야 했다는 뜻인데....." 당연히 그런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월영은. "그건 당신의 주장일 뿐이지요. 증인도 증거도 남지 않은 사건에 대한 당신의 주장은,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당신네 법에 따르면, 증인이 없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맞아죽더라도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군요." 그것 참 편리한 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제국에서는 당신처럼 증거를 소홀히 하지 않으니까요." 참 뻔뻔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잠깐.' 아무리 마법제국이 막가는 동네라고 하더라도, 이건 뭔가가 너무 엉성했다. 그래도 명색이 나라라면, 이렇게 법이 엉망으로 정해져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월영의 저 말에는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으므로 상대를 들여다보는 건 힘들지만..... "그렇게 그 자를 살리고 싶은 건가요?" 정황을 추측하는 건 가능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짐작 가는 일이 하나 있었다. 월영은 쌍어궁의 포획보다는, 오히려 나를 감시하는데 더욱 신경을 쓰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쌍어궁의 소재가 발견된 즉시 본국에 알려 마법사 부대를 이끌고 왔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군요? 내가 혹시 당신네 제국에 쳐들어 갈까봐. 그에 대비해서 나와 싸워본 자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봐요. 도대체 내가 왜 당신네 나라에 쳐들어간다고 단정을 하는 거지요? 10년 이상을 싸웠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보는데?" 나도 잠 좀 자자 ! 밤마다 날아다니는 것도 이제 좀 안 해도 되는 때가 아니던가? 그러나 월영은. "본국 정부의 명령이기도 하고, 제가 당신을 관찰한 결과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요. 당신은 너무 강해요. 그런 힘을 가진 마법사가 우리 정부의 통제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계 평화에는 위협이 됩니다." "그럼 당신들이 지배하지 않는 우주의 문명은, 모조리 위협적이라는 뜻이군요." 뭐 원래 그렇기는 하다. 자기 나라의 군비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남의 나라의 군비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렇게 보는 건 국제상식이니까. 하지만 내가 막상 당하고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내가 언제 자기네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당신들의 생각을 들으면, 없는 적의도 마구 생기는군요." 사실 웃기는 일이다. 대화라는 듣기 좋은 방식도 있는데, 굳이 남의 우주에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범죄자를 탈취해가다니. 그래서 나는. "하지만 나는 당신네들과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그 녀석만 죽이고 끝을 내지요. 안 그래도 그 녀석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고 좀비가 되었던 사람도 여기에 있으니." 살인마를 처단하는 데에는, 그 피해자의 가족에게 시키는 게 가장 좋다. 클라라 슈만양도 자신의 부모의 원수를 갚는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그러나. "안 됩니다. 사적인 복수를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정말 ! 일을 왜 일부러 어렵게 만드는 거야 ! 하지만 더 이상의 항의는 무의미했으니. 구우우우웅. "오는군요." 거대한 우주선이 공간 사이로 나타나고 있었다. 구우우웅. 내 눈앞에 나타난 그 우주선은 은빛의 금속으로 덮여 있는, 거대한 원반이었다. 그 표면이 잡다한 돌출부로 덮여 있고, 가운데에는 원 모양의 해치가 붙어 있었다. 그 안에 아마 다수의 마법사와 우주선들이 들어 있겠지. 아무래도 차원을 이동하는 전함 정도 되는 모양이다. 저 정도라면 아마 레벨 11의 마법을 수 백 발은 쏘아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쌍어궁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커.' 그렇다면 저것은 그를 잡기 위한 게 아니다. 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나. 그 외에 저런 괴물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두려웠던 건가. 단지 내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월영을 보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것 같아.' 지금 이 시점에서 월영을 죽이는 것은 무리였다. 마법 제국의 전함 앞에서 제국의 수사관을 죽여버리고 그녀가 잡아둔 범죄자를 죽이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상황일 것이니까. 그러면 나는 괜찮더라도, 이 우주는 분명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런 결과를 부를 수는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쌍어궁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히 사형을 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도망쳐서 어딘가에서 화를 부르게 될 것이니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명이 사라져야 저들은 정신을 차릴 것인가. 그러나. '젠장.' 오빠만 여기에 없었어도, 차라리 나는 전쟁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엉뚱한 사람들이 말려들게 될 것이다. 단지 수사관 하나가 정신나간 인간이라는 이유로 전쟁에 휘말려든다면, 그 문명권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되도록 말로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말로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울지는 짐작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이 목걸이 안에 있는. "어떻게 된 거야?" 이 인간부터가, 그게 어렵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우주선이다." 그렇다. 외계인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접시 하나가 우리 앞에 있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외계인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월영 선배가 쌍어궁의 머리를 잘라 든 채 서 있고. 혹시 그녀가 쌍어궁을 처치한 건가. 대단하네. 역시 선배답게 결정적인 순간에 한 건 한....>> '도대체 이 인간이. 생각하는 게.....' 내가 처치했다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뻔히 다 알면서도. 사실 여태까지의 전투를 오빠가 다 지켜봤으니, 그 정도는 좀 알아서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고의로 이렇게 믿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인간이 다 있을까. 퍽. "아구구구구." 악인에게는 응징이 필요하다. 아무리 인간이라서 보는 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해서는 안 될 생각이 있는 법이다. 여태까지 내가 얼마나 강한지는, 굳이 매직미사일로 소드마스터를 처리하던 걸 떠올리지 않더라도, 알고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러는 건지. 나는 아예 오빠의 머리를 잘라버리려는 걸 참고, 그냥 가벼운 주먹만 날렸다. 물론 내가 가볍다고 해봐야. "아구구구구. 아구. 아구." 무슨 엄살이 이렇게 심한지. 나는 한 방 더 먹여주려다가 참았다. 그 대신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눈은 두었다 뭐 하는 건가요?" 최소한 장식품으로 달아두려고 눈이라는 기관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왜 맨날 저 모양일까. 조금 전에 쌍어궁과 대결할 때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잘하더니, 지금은 또 이 지경이다. 역시 여동생에게 있어 오빠는 영원한 골칫덩이인 것일까.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 떨어졌으니. "한 것도 없잖아 !" 아. 역시 오빠는 여동생에게 있어 영원한 적이라는 게 맞는 모양이다. 한 게 없다? 자기 눈이 삔 것도 모르고? 역시 오빠는 인간이고, 인간은 내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너무 빠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일껏 이런저런 마법을 걸어서, 좀 볼 수 있게 해줬는데도 저러다니. 도대체. '심성이 왜 저래.' 다른 때는 착하고 의리 있고 용감한 오빠인데, 유독 나한테만 저런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때려줘야 제대로 때렸다는 소리를 들을까. 나는 심각하게 오빠의 머리통을 날리는 것을 검토했지만. '내가 참자. 참아.' 단지 한 번 때리는 걸로 참아야 한다는 게 억울했지만, 매직미사일 하나 날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오빠에게는 내가 마법으로 날아다니는 걸 볼 능력도 없고, 내가 쓰는 마법이 얼마나 굉장한지 알아볼 재주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일일이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바보에게 현대물리학을 강의하는 꼴이니까. '일본 총리만큼이나 바보야.' 그 머리로 어떻게 사는지, 답답하지도 않나? 물론 100m를 무려 11초나 걸려서 뛰는 오빠에게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나는 골칫거리를 상대하는 걸 포기하고, 월영이 가지고 있는 쌍어궁의 머리에 시선을 돌렸다. 일단 여태까지는 도망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으니..... '도망칠 이유도 없겠지만.' 월영의 말대로라면, 녀석은 절대로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즉, 조만간 녀석이 또 탈옥해서 이리로 올 거라는 뜻이다. 물론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나에게 또 도전할 수는 없겠지만, 그 정도로 이성적인 녀석이라면 굳이 탈옥을 할 필요도 없다. 저 모양으로 법이 물러터진 나라에서 감옥생활을 한다면, 솔직히 안이나 밖이나 별반 차이가 있을까. 그보다는. '어떻게든 저 녀석의 머리통을 지금 부숴야 해.' 하지만 적의 전함이 있는 상황에서 만약 공격마법을 쓴다면, 녀석들은 분명히 나와 전쟁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고한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것이다. 물론 적의 무기를 만들어내는 민간인들이 과연 무고한지는 의문이지만. 사실 대놓고 말하면 적국의 국민은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모조리 적군이잖아.' 사실 요즘 전쟁의 인도주의 같은 건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인도주의라. 전쟁에 그런 것도 있었던가. 적어도 쌍어궁 녀석에게는 그런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인도주의의 방패 뒤에 숨어 있다. 참으로 편리한 녀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기이이잉. 우주선의 문이 열리고, 월영과 쌍어궁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으니. "그럼 잘 있어요. 이번에 우리 국민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조만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니까요." 하지만 굳이 '조만간'으로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잔말말고. [[Master of Matter & Energy(원자마법 11레벨)]] 몸밖의 물질과 에너지를 조종하는 마법. 그것이 터지자 당장 월영의 손에 잡혀 있던 쌍어궁의 머리가 내 손으로 날아왔다. 아무리 그녀라도 설마, 자기네 전함이 있는 곳에서 이런 강수를 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고, 그로 인해. "앗차 !" 그녀는 그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도 만만하게 포기하지는 않았으니. [[Master of Matter & Energy(원자마법 11레벨)]] 나와 같은 마법을 펴서, 쌍어궁의 머리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는 바람에 그녀의 마법이 힘을 발휘하기 전에 나는. 탁. 쌍어궁의 머리를 이미 낚아채고 있었다. 이 녀석, 그런데 정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네. 대머리도 이 정도면..... '너무 반질반질하잖아.' 뭐 그게 그에게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머리를 잡기가 약간 힘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나는. 우직. 녀석의 머리뼈를 으스러뜨렸다. 그의 피부에 내 손이 파고 들어가면서, 두개골을 움켜잡는다. 역시 이쪽이 더 잡기 편한가. 하지만 그냥 잡는 것만으로 일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그럼, 잘 가요. 쌍어궁." 당연히 죽여야지. 이 녀석을 살려두면 무궁무진한 화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그는 나에게는 이길 수 없지만, 평범한 인간 정도는 이길 수가 있으므로. 그리고 이 녀석을 확실히 죽이는 방법은..... '역시 음에너지겠지?' 그 정도는 해줘야 확실하게 쌍어궁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이 둘로 분열이라도 하기 전에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늦었으니. '벌써 분열했군.' 녀석의 머리에서 연결된 이 선은..... 나는 그 선의 끝부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쉽게 넘길 순 없지요. 정부의 명령이니까요." 월영이 있었다. '머리 두 개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라.' 역시 쌍어궁은 자신을 분열시켜서, 반쪽만을 나에게 넘기고 나머지 반은 월영의 품안에 숨어든 것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월영도 바보는 아니어서. 으드득. 으득. 재생을 못하게 힘을 빼놓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불쾌한 것이었다. 이유라면. "그에게 원한이 있다면, 그의 반쪽을 죽이는 걸로 마무리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봐.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잖아. 그래서 나는. "그리고 쌍어궁 녀석이 재생해서, 다시 날뛰는 걸 지켜보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명이 파괴당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우주를 지키기 위해. "그 머리도 내놔요. 아니면 당신이 죽이던가. 그 자를 살려두는 건 너무 위험해요." 마법 제국이 아무리 자신들이 재판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라도, 그들 스스로 이 녀석을 처분한다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안 됩니다.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를 죄인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맞는 소리이기는 한데..... "이 자는 현행범인데요. 당신도 보았을 텐데요. 이 자의 부하들이 지구를 태양으로 내던지는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월영 자신이 보았지 않은가. 그게 만약 실현되었다면 지구는 그대로 불 지옥으로 변했을 것이고, 모두가 타 죽거나 태양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것 하나만 봐도 이 자가 도대체 어떤 자인지는, 한 눈에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월영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재판이 끝나기 전에는 그에 대한 자의적인 복수를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를 죽이고 싶다면, 그 머리를 깨는 걸로 정리해주세요." 물론 그렇게 하면 쌍어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리고 쌍어궁이 되살아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요? 당신네 제국의 국민만 지적 생명체이고, 인간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건가요?" 이건 전적으로, 저 우주선에 타고 있는 마법사들과, 지금 내 목걸이에서 잔소리만 늘어놓는 '덜떨어진 오빠'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이 정도라면 월영의 실체에 대해 좀 알겠지. 시내에게는 잔인한 일이 되겠지만. 쿵. 예상대로, 시내는 기절해버린 모양이다. 아니, 이건 기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에게는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진희가 보면 얼굴이 벌개져서 화를 낼지도 모르고, 그러면 오빠의 애정 전선도 좀 진전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여전하네.' 제발 좀 좋아하는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굴 수 없을까. 나중에 몇 대 때려줘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일단 월영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지만. "우리 제국에선, 지구의 인간은 벌레로 분류되어 있습니다만." 한다는 소리가 대체. 그러나 나를 정말로 화나게 만든 말은 그 다음의 말이었으니. "당신은 벌레도 아니면서, 왜 자꾸 벌레의 보호에 신경을 쓰시는 거지요? 장래에 이 우주를 파괴할지도 모를 위험한 해충들에게." 나도 안다. 인간이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하지만 아직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인간이 위험하다면, 일단 그들에게 제대로 된 길을 가르쳐보는 게 좋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된다면 좋은 것이고, 나쁜 길을 걷는다면 그때 손을 써도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이미 구제 받을 수 없는 생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정당방위의 범주를 넘어서서, 과도한 대응을 한 당신의 행위를 지적하고 싶군요. 당신의 실력이라면 굳이 그들을 죽이지 않아도 이길 수 있었을 텐데요? 왜 그들을 그렇게 죽인 거지요? 네 명이나? 그 점에 대해 당신이 쌍어궁에게 사과한다면 모를까." 그 말에 나는 울컥했지만, 숙녀다운 대응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즉 나는 그녀에게 무지막지한 파괴마법을 던지지 않고. [[summon.....]] 그렇다. 이쪽이 더 깨끗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소환마법을 외우는 걸 본 월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당장 안색이 파랗게 질리면서 대응마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내 머리 위의 우주선에서도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이건 레벨 11의 마법도 아니니, 그들의 대응보다는 내가 더 빨랐다. 내가 부른 것은. [[........apple(사과) !]] 그렇다. 내가 부른 것은, 사과였던 것이다. 공격마법이 날아올 것이라고 잔뜩 긴장하던 월영이 놀라는 사이에, 나는 그 사과를 그녀에게 던졌다. 물론 월영 정도의 마법사가 사과에 맞아 죽을 일은 없기에. 끼익. 그 사과는 우주공간에 멈춰 섰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그건 사과가 아니라, 사과에 투명한 필름을 덮어서 잘 포장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게 사과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인사의 말을 덧붙였으니. "사과라. 여기 있어요. 많이 드세요." 자기 주먹보다 더 큰 사과를 바라보던 월영의 얼굴이 점차 시뻘개지더니. 쾅. 그대로 사과를 지팡이로 쳐서, 부숴 버렸다. 애고. 아까워라. 무공해 사과인데. 그리고 그녀는 펄펄 뛰며 외쳤으니. "이런 도발행위를 하다니 !" 도발이라. 하지만 난 별로 도발 같은 거 안 했다. 그저 그녀가 사과를 원하기에, 사과를 보낸 것뿐이다. 마법사들의 우주선에서도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마 내가 무슨 대단한 공격마법을 쏠 줄 알고 바짝 긴장한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그런 걸 이렇게 티 나게 쓸 것 같으냐. 어쨌든 월영은 이를 부드득 갈며. "이런 건 모욕입니다 ! 이에 대한 사과를 기필코 받아내고 말겠어요 !" "도발이라." 하지만 나로서는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도발을 거듭하던 그녀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래서 나는. "도발이라는 건 그게 아니지요. 진짜 도발이라는 건." 우드득. "끄아악 !" 내 손가락이 쌍어궁의 대머리를 파고 들어갔다. 내 손을 감싼 음에너지가 그의 머리에 주입된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서서히 부식시킨다. 피와 체액까지도. 서서히 그의 두개골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쌍어궁이 계속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여태까지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웃으며. "바로 이런 거겠지요. 가해자 보호에만 열심이신 수사관님." 사실 그녀가 제대로 된 수사관이라면, 진작 쌍어궁을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쌍어궁 일당이 아니라 나를 경계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녀석의 악행을 방조하고 말았다. 그것은 나로서는 결코, 곱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 사실 그녀가 조금만 일을 제대로 했더라도. '그랬으면 클라라 슈만양의 부모님은 죽지 않았을 거야.' 적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아니, 모두에게서 그렇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지금 내 목걸이에 들어있는 여자들이 엉망으로 망가진 것이 누구 때문인가. 아마 이번 일은 그들에게 있어, 죽음 이상의 치욕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있어 하렘은 로망일지 몰라도, 여자에게 있어 그것은 악몽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므로. '게다가 그녀들이 모두 오빠에 목을 멘 건 아니라고.' 진희나 시내나 클라라 슈만양이라면 모를까. 선생님들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니다. 물론 연미 언니도 그게 아니다. 문희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왜 갑자기 오빠에게 벌거벗고 덤비겠는가. 아마 그녀들은 말은 안 했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했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바로 그녀들을 겁탈한, 바로 그 자가 있다. 좋게 보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닌가. 물론. '실제로 덮친 건 아니지만.' 하지만 사실상 그녀들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들고, 오빠에게 요부의 모습을 보이며 덮치게 만들었다. 이러고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일이 끝나면 기억을 모두 지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나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니, 잘못하면 자살로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이번 일로 말이다. 게다가 오빠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므로. '오빠를 죽여서, 스스로를 치유할 수도 없고 말이야.' 다행인 것은, 지금 쌍어궁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결말을 내는 게, 그녀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잔인하게 죽임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월영은 그런 그를 옹호할 생각인 모양이다. 물론 법적으로 보아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그 용의자는 범인이 아니지만, 이 경우는 현행범이므로. '게다가 나는 우리나라 재판관이 아니라고.' 그러니 성폭행 범죄에 대해, 가벼운 판결을 내릴 이유가 없다. 어린애를 겁탈하고 살해한 성폭행범도 기껏해야 20년도 안 되는 징역을 받는 게 대부분인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사형이 바람직하다는 게 내 개인적인 소견이고, 바로 지금 그것을 실현할 때가 되었으므로. 하지만 월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움직였다면 나도 손을 쓸 생각이었지만. "그만하게. 월영 수사관. 굳이 그 여자와 대결할 필요는 없어." 우주선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월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역시. 공격할 생각이었나. 그게 아니면 내가 공격해올 경우에 대비해서 방어할 생각이었나. '어쨌든' 나는 우주선을 주시했다. 과연 그들은 무슨 말을 할 생각일까. "당신은?" 뭐야. 이거. 아예 우주선에서 나오지도 않겠다는 건가. 왜 목소리만 들리는 건가. 그러나 그들이 안 나오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 아마 그들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력이 무한정으로 솟아 나오는 마법사를 상대로, 방심하는 건 금물이란 걸 그들도 이미 깨닫고 있겠지.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이 우주에 온 의미는 쌍어궁의 체포가 아니라. '날 보러 온 건가.'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잠깐. '오빠한테는 들릴까.' 안 들릴 것이다. 인간과 마법 제국의 마법사들의 언어는 너무 다르니, 아니 그 전에 언어를 그들이 쓰는 것도 아니니 이 경우에 서로간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텔레파시 정도밖에 되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걸 오빠가 알아들을 능력은 없다. 절대로 없다. 그러니 이대로 두면 오빠라는 인간은 분명히 제멋대로 지금 상황을 해석할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Talk(정신마법 6레벨 : 다른 이와 텔레파시로 대화한다)]] 이제는 들릴 것이다. 이래도 오해를 한다면, 그건 내가 어쩔 일이 아니다. 내 주먹이 해결할 일이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답은. "이 일의 책임을 맡은 자이네. 이름은 의미가 없으니 말하지 않겠네." 우리하고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르니, 이름을 대서 무엇에 쓰겠는가.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한 마리의 개미에게 이름이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미에게 중요한 건 그게 병정개미인지, 일개미인지, 여왕개미인지, 그런 게 중요한 것이다. 직책이 먼저라고 할까. 그보다. '슬슬 목적을 말하실 차례인데.' 그리고 그들은 그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불쾌한 것이었으니. "우리의 임무는, 아가씨가 우리 제국에 위험한지를 알아낸 후, 위험인자라면 죽이는 것이지. 그렇게 명령을 받았네." "쌍어궁에 대한 명령은 없나요?" "그게 아가씨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라는 건가? 이상하군. 두 마리의 물고기라....." 남의 작명 센스를 따지려고 하는 건 아닐텐데요. 이름도 없는 마법사 아저씨. "그럼 그에 대한 제어를 목적으로 온 건 아니군요." "그렇다네." 참으로 대단한 인간들이다. 자기 제국의 신민이 남의 우주에 와서 깡패처럼 설쳐도 관심이 없다니. 그렇다면. "그럼 쌍어궁이 이대로 설치는 걸 내버려둘 생각이었나요?" "그의 죄는 그다지 크지 않으니까. 게다가 그는 탈옥 후에,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네. 동료들을 모두 아가씨의 손에 잃지 않았나?" 한다는 소리가. 점점 마음에 안 든다. 그렇다면. "그럼 그를 사형시킬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요. 제국의 의향은." "우리 제국은 벌레를 죽였다고 지적 생명체를 죽일 만큼, 야만적이지 않네." 그게 야만이라는 걸까. 그게 아니면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명인의 태도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마법 제국의 그런 우아함을 가지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그럼 눈앞의 벌레에게 이렇게 자세하게 의사를 전하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그가 아가씨를 죽이려고 했었나?" 뭐야.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거야. 왠지 이들의 말투가 굉장히 불쾌하다. 이건 마치. '나와 인간을 별개로 다루고 있어.' 그들에게는 나만 지적 생명체로 보이고, 인간은 벌레로 보이는 모양이다. 겉모습은 거의 같은데도 말이다. 물론 겉이 비슷하다고 속도 같다는 보장이 없다는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대답을 했다. "물론이지요. 그것도 10년 이상을, 줄기차게 노리던데요." 그래서 결국 나에게 박살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으니. "하지만 그런 시도를 그가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힘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 아가씨와 이 탈옥수의 능력은 단순히 레벨 하나 둘의 차이가 아니라고 보는데." 왠지 엉뚱한 결론을 내릴 것 같다는 이 불안한 느낌은..... 내 느낌은 아주 잘 맞는다는 걸 생각할 때, 이건 불길한 징조였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으니. "그러니 이 자를 아가씨의 살인미수죄로 잡아넣을 수는 없네. 탈옥에 대해서만 죄를 물을 것이네. 아무리 그가 애를 써도, 아가씨가 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상대도 안 되는 미약한 자의 살해미수가 설령 정말이라고 해도 말이네." "내가 강하니까, 이런 녀석쯤은 날 위협하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네." 이것들이 점점. 하지만 나에게는 따질 게 더 있었으니. "그럼 이 자가 지구인들을 마구 살해한 건 어떻게 할 셈인가요?" 그러나 그들은 별로 탐탁하지 않다는 듯.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구에 사는 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벌레가 아닌가? 벌레를 죽였다고 모두 사형을 시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건가? 아가씨도 벌레 한 마리 안 죽이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 듯 한데?" 사실 나에게 맞아죽은 사람이 많은 이상, 그 말은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 눈앞에서 보고, 그들이 벌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시면 어떨까요?" 그렇다. 그들이 인간을 벌레라고 하는데, 과연 그들이 직접 인간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흥미롭다는 듯이. "재미있는 제안이군." 이 녀석들이. 사람의 목숨을 무엇으로 취급하는 거냐. 하지만 더 화를 낼만한 대답은 바로 그 다음에 나왔으니. "거절하겠네. 어차피 벌레는 벌레. 그들의 의견은 이 재판에서 전혀 반영될 수 없네." "그래서 내 말을 전혀 판결에 반영하지 않겠다는 것이군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나도 벌레의 일원으로 보일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의 그 다음 대답은 심각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것이었으니. "그건 다르지. 아가씨의 말은 분명히 재판에 반영될 것이네. 어쨌든 쌍어궁이 주제도 모르면서 감히 아가씨에게 반항한 건 사실이니 말이네. 다만." "다만?" "아가씨의 목걸이에 들어있는 그 벌레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네. 벌레에게 상황을 관찰할 능력이나, 판단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생각해 보게. 아가씨를 보니 조금 전에 쌍어궁과 한 판 붙은 모양인데, 그 전투의 모습을 그들이 보았던가?" "그건 아니지요." 분명히 오빠 일당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 전쟁은, 한순간의 빛으로 보였을 뿐이다. 아니, 아예 아무 것도 그들은 볼 수 없었다. 비록 정신체만이 남아 전투광경을 지켜보았지만, 인간에게는 빛의 속도로 달리며 싸우는 마법사의 모습을 인식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적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볼 능력도 없으니, 증인으로 삼을 수 없다. 이거지.' 그리고 그것은 더 나쁜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니. "그러니 쌍어궁의 죄는 오직 탈옥만 물을 수 있다네. 그 외에는 직접적인 증거나 기록이 남지 않았으니까. 아가씨의 진술은 피해자측의 말이지만, 그걸 뒷받침할 자료가 없지 않은가?" "아뇨. 있어요." 그런 것이라면 적당한 게 하나 있었다. 저 마법사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나는 그 증거를 가진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바로. "월영 수사관님. 당신은 나와 쌍어궁의 전투를 직접 보았지요? 적어도 그가 지구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나름대로 조사해서 기록을 남겼다고 생각하는데요." 확실히 그런 기록은 있었는지, 월영이 우주선의 마법사를 향해 무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판단에 시간이 걸리는 거야 !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오빠처럼 되니까 자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곧 나왔으니. "음. 확실히 기록에 나와 있군. 최소한 아가씨와 쌍어궁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것은 명확하네." 그런데 말야. 그 뻔한 결론이 이제야 나오는 거냐. 나는 그들의 느릿느릿한 일 처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쌍어궁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녀석이 언제 도주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긴 여기서 결론이 이상하게 나온다면 그는 큰일을 만날 테니, 쥐새끼처럼 눈치를 살피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절대로 도망은 못 가.' 그렇게 내가 내버려둘 것 같으냐. 그런데 저들의 판단은 무엇일까. 나는 검과 지팡이를 잡은 채, 그들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를 두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안 나와있군 그래. 그런데 이상한데? 쌍어궁의 동료는 그 자신을 포함해서 12명인데, 왜 싸운 기록에는 다섯 뿐이지?" "일곱은 이미 오래 전에 내가 죽였으니까요. 나를 죽이려고 했기에." "뭣이?" 마법사들이 놀라는 게 내게 보이는 듯 했다. 그 말은 즉. "그럼 아가씨 혼자서, 레벨 11의 마법사 일곱 명을 죽였단 말인가?" "그런데요. 열 두 명이 동시에 덤비는 바람에 좀 힘이 들기는 했지만." 뻔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왜 원래 일행이 12명인데, 오늘은 고작 다섯 명이 나왔겠는가. 그들로서도 오늘 지면 끝장이니, 당연히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설마, 정말로 12명의 마법사들을 동시에 상대해서 얻은 결과라는 건가. 단 혼자서 레벨 11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당연하죠." 뻔한 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지. "뭐라고?" "굉장하군. 아가씨. 그 정도로 강하다니. 그래서 이 기록이 이렇게 나온 것이군. 레벨 10의 마법사들이나 기타 마법생물들이 도합 100만 마리라니. 이렇게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을 텐데, 그래서 쌍어궁이 아가씨에게 집착한 건가. 자신의 동료들을 일곱이나 죽였기에." 왠지 나를 추궁하는 듯한 이 말투, 듣기 싫다. 조금만 더 가면 나보고 사과하라느니 하는 말을 다시 하는 게 아닐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고. 그러나. "다만 그 시절의 기록이 없는 게 유감이군. 하긴 이 우주에 월영 수사관이 온 시점으로 보아 없는 게 당연하지만." 너희들이 처음부터 너무 느려서 그런 게 아닌가.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자신들의 허물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하지만 지구의 해충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와 대결하다니, 아가씨도 취향이 이상하군."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다. 물론 지금 내 목걸이 안에서 이 대화를 듣는 오빠 일당에게는 더욱 그렇겠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 힘도 없기에, 그저 나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다니. 그러니 내 역할이 중요했다. 내가 실수하면, 쌍어궁이 살아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일은 곧 벌어졌으니. "할 수 없군.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겠네." 뭐가 할 수 없다는 거냐. "그럼 그를 평생동안 먹이고, 입히고, 재울 생각인가요? 실망스런 판결이군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건, 종신형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지구에서 그 벌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벌이지만, 쌍어궁과 같은 고위 마법사에게 그 벌은 너무나 부담이 큰 것이었다. 레벨 10까지의 마법사라면 지팡이를 빼앗고 마법 근원체와의 연결을 끊는 것으로 무력화시킬 수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지팡이에 의해 마법 근원체와 연결됨으로서 마법을 사용하니 말이다. 하지만 레벨 11의 마법사는 다르다. 그들은 아무 무기가 없어도, 그들 스스로의 힘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을 가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저들은 그런 판결을 할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쌍어궁의 도주를 방조하는 결말로 이어질 텐데요. 당신들은 이미 그가 한 번 탈옥하는 걸 막지 못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말짱 도로아미타불이 아니겠는가. 내가 여태까지 들인 10여 년의 노력은? 고생은? 그걸 다 물거품으로 만들 위기가 지금 나에게 도래했으니, 내 목소리가 강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내 걱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지만 아가씨에 대한 계획적 살인미수죄 외에는, 처벌할 근거가 없네. 탈옥이라는 죄명은 돌아가서 처리할 문제이고, 벌레를 좀 많이 죽인다고 해서........." 역시. 그들은 절대로 인간을 죽인 죄를 쌍어궁에게 묻지 않을 것임이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택할 방법은 하나다. 그것은 바로. '내 방식대로 할 수밖에.' 나는 결심을 굳혔고, 저들에게 그것을 밝혔다. 그건 바로. "그럼 내가 녀석을 처벌하지요. 당신들이 벌레라고 부르는 종족의 일원으로서, 그 생존과 복수를 위해." "무, 무슨 !" 그들이 말릴 겨를도 없었다. 내가 그런 걸 허용할 것 같으냐. 내 검이 검은 기운을 뿜어내면서. 푸슛. 나는 앞으로 날아갔다. 월영을 향해서. 아니, 그녀의 왼손에 들린 쌍어궁의 머리를 향해서. 내 손이 움직이면서, 내 검에 내가 쥐고 있던 쌍어궁의 머리가 꿰인다. 마치 꼬치구이처럼. 그리고 나는 그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낸다. "잘 가요. 쌍어궁." 그리고 나는 월영의 손을 향해 검을 찌른다. 그녀의 손에 있던 쌍어궁의 머리와, 내 검에 꿰인 쌍어궁의 머리가 죽음을 깨닫고 절규한다. 그는. "재, 재판관님 ! 저 좀 살려주십시오 ! 재판을 무시하는 저런 망나니 계집애가 어디...." 하지만 이제 와서 그가 그렇게 호소한들, 너무나 늦었다. 심지어 월영조차도, 내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황급히 방어마법을 발동시키면서,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건 이미 무의미해 !" 내 검은 근본적으로 마법을 없애버리고, 상대의 존재까지도 파괴하는 검이다. 이런 검을 막아내려면 혼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그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수련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나조차도 그걸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니 말이다. 아마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건 내 스승님 정도겠지. 그러니 월영으로선 그런 게 불가능했고. 슈팟. 쌍어궁의 머리는 두 개 모두 내 검에 꿰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혼돈으로 되어 사라졌다. 영원히. 모든 이의 시선으로부터. 파앗. 월영은 급히 나에게서 물러났지만, 그녀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방어마법을 내가 가볍게 무너뜨리고, 자신이 잡고 있었던 탈옥수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이 칼이 마법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기는 했지만. "이, 이런 짓을 하다니....." 그녀가 분개하지만, 이미 일은 끝난 후였다. 완전히 죽어버린 쌍어궁을, 어떻게 살리겠는가. 부활마법을 외운다고 해도. '뭐가 남아 있어야 살려놓지.' 아무리 생명마법을 극점까지 익혔다고 해도, 상대의 혼을 찾아낼 수 없으면 부활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마법에 숙달되어 있어도, 그 규칙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설령 모순마법, Paradox라 불리는 언령마법 레벨 11이라고 해도, 그 힘으로 혼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을 이 세계로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혼을 아예 절개해서, 부활이 불가능할 만큼 깊은 상처를 주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영혼을 다시 수리하는 건, 당신들에게는 불가능할걸.' 그렇다면 일껏 모순마법으로 그 혼을 찾아와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셈이다. 혼을 다시 고치는 마법은 Soul repair이지만, 이건 레벨 12의 마법, 환상의 마법이다. 마법사가 아무리 훌륭한 지팡이를 지니고, 대단한 마법 근원체와 계약을 한다고 해도 이걸 쓰는 건 무리인 것이다. 내가 독일에서 좀비가 된 사람들의 혼을 회복시켰을 때, 월영이 그토록 놀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혼을 빨아먹는 쌍어궁 일당에게 내가 그토록 분노한 것이고. '그래서 혼을 빨아먹는 게 금기인 거라고.' 한 번 저지르면 회복이 안 되는데, 그런 마법을 어떻게 함부로 쓰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이건 혼을 빨아먹는 건 아니지만, 아예 혼을 파손시키는 행위였으니까. 그들이 일제히. "어떻게 이런 짓을 !" "재판관 앞에서, 사적인 복수를 하다니 !" 하지만 그들이 할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아마. "벌레 백만 마리보다는 우리 제국의 신민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 그러나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내 생각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제야 쌍어궁 일당에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얼굴을 들고 말해줄 수 있게 되었네요. 비록 그들 스스로 해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위로는 해 줄 수 있겠지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원수가 죽었다고. 그가 되살아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최소한 한 사람은, 그것을 스스로 보았다. 내 목걸이 안에 있는 클라라 슈만양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스스로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하지만 월영과 마법사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일제히.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다니 !" "당신을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하겠어요." 말들은 잘한다. 그러나 그 법 적용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들이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네요." 그렇다. 그들이 자신들의 법을 나에게 적용하고 싶다면, 그 전에 해결해야 하는 사항이 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이. 내가 지적한 것은 바로. "이곳은 당신네 제국이 아니고, 내가 사는 우주예요. 당신네 영토가 아닌 이곳에서, 당신들의 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다. 아무리 쌍어궁이 그 잘난 마법 제국의 신민이라고 해도, 그는 지금 그의 나라에서 재판을 받는 게 아니다. 그는 감히 내가 있는 이 우주로 넘어왔으며, 그러니 당연히 이 우주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의 어떤 문명권도. '이런 경우에는 사형이라고.' 종신형? 그게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 말이냐.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 종신형? 다른 재판관이라면 몰라도, 나는 그렇게 한심한 벌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자가 과연 있을까. 이 경우에는 주위 몇 백만 광년 이내에는 문명이 있는 항성계가 없으므로. '당연히 내 맘이지.' 마법제국의 마법사들 역시 그걸 알았는지, 자신들의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할 말을 할 수밖에. 이 우주의 주민으로서. "이 우주는 당신들의 소유가 아니니, 당연히 이 우주에서 일어난 일은 이 우주의 주민이 결정할 문제예요. 당신들이 이 우주를 만들어낸 게 아닌 이상, 당신들에게 우리의 일에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 아무리 당신들이 나와 내 종족을 벌레로 생각해서 그걸 무시하려고 해도,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볼 게 뻔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당연히 인간 사이의 일은 인간이 만든 나라의 정부와 국회와 법원에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고, 그 나라의 일을 다른 나라가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인종청소니 인종차별이니 역사왜곡이니 하는 '인류 그 자체를 겨냥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버, 벌레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 참 끈질기기도 하셔. 그러나. "당신들 앞의 벌레로서는, 참 듣기 괴롭네요.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보다는 낫지만." 하지만 여기서 그들은 보통 사람이 예상할 법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다, 당신은 왜 스스로를 벌레로 생각하는 건가? 그런 벌레들과 아가씨의 어디가....." 역시. 나를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고 있다. 아까부터 죽 느껴지는데. "그럼 당신들은 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자 그들은 대답했으니. "이 우주를 지배하는 지적 생명체라고 보고 있네." 아이고.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목걸이 안의 누군가가 뒤로 쓰러지는 게 보였지만, 넘어가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뻔하니까. 그쪽보다 급한 것은. "그럼 다시 묻겠어요. 나에게 이 우주에서의 일을 판결하고, 집행할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건가요?" ".....인정하네." "그럼 내가 내 우주에 들어온 쌍어궁에게 퇴거명령을 내리고, 그 말을 안 들었을 때 죽이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걸 인정하시는 건가요?"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럼 결론은 났네요. 지금의 내 행동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셨으니까요." 그들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지구인들은 벌레로 봐도, 나만은 벌레가 아닌 것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졸지에 우주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지만, 저 녀석들을 상대로 대결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나밖에 없으니 할 수 없다. 나중에 외계인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말이 많겠지만. '결국 동의할 걸.' 도리가 있는가. 동의해야지. 그들보다 내가 월등히 강하다는 건 잘 알 것이니까. 그리고 여기서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어쨌든 마법사들은. "알겠네. 지구인이 쌍어궁을 죽였다면 우리는 책임을 묻겠지만, 아가씨 같은 지적 생명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니까. 실례했네." 누군가가 발을 구르며 항의하고 싶어하는 건 알겠지만, 무시한다. 이 일은 이제 끝맺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그럼 우리는 돌아가겠네. 다만 아가씨가 정말로 우리 제국에 적대할 생각이 없다면, 정식으로 우리 쪽 외교관을 파견하고 싶은데." 무슨 외교관이야. 아무래도 나는 나중에 지구전체를 지배하는 여왕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난처한 일인지. 하지만 여기서 판을 뒤엎어버릴 수도 없었다. 겨우 전쟁까지 안 가고 잘 해결되게 생겼는데, 무슨.... "하지만 나는 아직 정식으로 국가를 세우지 않았는데요." 그러자 그들은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지만. "하지만 월영 수사관의 말로는, 자신의 조직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플래닛 그룹이라고 하던가? 우리는 아가씨가 그걸 나중에 국가로 발전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모르지요." 앞으로의 일은 아무리 나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게 우주니까. 미래는 정해지지 않은 혼돈이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게 되겠지.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답을 했고,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알겠네. 하지만 아가씨는 결국 벌레들을 지배하던가, 아니면 벌레들을 버리게 될 거라고 보네. 어쨌든 아가씨와의 외교관계 수립문제는 차후에 월영을 통해 알려주지. 그럼 우리는 이만 물러가겠네." 그리고 우주선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월영이 우주선을 향해 목례를 보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런데 놀랍군. 이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수준의." 아무래도 저들은, 마법사가 아니면 지적 생명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다. 인간은 너무 느리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그들이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휴우."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0년 이상 나를 애먹이던 문제가, 오늘 드디어 해결되었기에. 비록 저 앞에 있는 월영이 나를 바라보고 있기야 하지만, 그건 이제 작은 문제이다. 그들이 외교관을 보내든 말든,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그래도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야.' 사실 그들에게 지구인을 벌레 이상으로 볼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기준에서 인간은 지적 생명체가 아니고, 그런 것까지 내가 고쳐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마법제국의 인구가 얼마나 되더라? 그 많은 녀석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전쟁까지 안 간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지.' 그건 정말 잘 된 일이었다. 만약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면, 지구뿐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외계인들이 죽을 고생을 했을 게 아닌가. 물론 마법제국의 신민들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보다는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았다. 물론 내 목걸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야 ! 뭐 저런 게 다 있어 !" "때려 죽여 버려 !" "없애 ! 날려버리라고 !"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전쟁하면 고생하는 건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걸 생각하면 가급적 그런 건 안 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개인적인 수련이라던가, 휴식이라던가, 좀 그런 것을 하고 살고 싶어.' 물론 오빠가 있는 한 나에게 평안한 나날은 없지만. 어쨌든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우선 여태까지 벌여놓은 일을 수습해야겠지." 그럼 어디부터 해야 하나. 이 부근은 어차피 초은하단과 초은하단 사이의 거대한 공동이라 수습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하지만 우리 은하 부근하고 태양계 부근의 에너지 이상은..... "빨리 고쳐놔야겠네." 쓰레기는 쓰레기를 버린 사람이 치우는 법이다. 사실 이 경우에는 쌍어궁 녀석에게 시키는 게 가장 좋지만, 그 녀석은 이미 내 손에 죽었으니 시킬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어떻게 전쟁 끝나고 나서도 중노동만 해야 하는 거야 !" 하지만 다른 사람은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조, 조금만 더 하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지구 상공에 떠 있었다. 우선 초은하단 사이의 공동에 악영향이 미쳤는지 살피고, 그 다음은 우리 은하 중심으로 가서 이번 전투로 인해 에너지가 과다하게 퍼지지 않았는지, 주위의 별들에게는 혹시 악영향이 미치지 않았는지, 부서진 별은 없는지, 그런 별이 있다면 다시 만들어서 띄워야 하는 게 아닌지를 살핀 후에, 나는 태양계로 돌아와서 슈팅스타로 인해 과도하게 에너지가 퍼져 나간 게 아닌지를 확인하고, 그로 인해 태양계 자체의 균형이 깨졌는지도 살펴야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부수적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야 했지만. "차라리 태양계를 몽땅 숨겨둘 걸 그랬어."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내가 만들어야 할 별이 더 많아졌을 테고, 지금 와서 그럴 수도 없으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뒤집어서 처음부터 일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모든 것을 끝낸 후 마무리로. "자. 그럼 지구를 다시 원위치에 가져다 놓을까." 그리고 지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멈춰있는 그대로이지만. 나는 슬슬 결계를 풀 준비를 했다. 그런데. "당신, 전혀 안 도와주네요." 치사한 월영 같으니, 무슨 저런 게으른 수사관이 다 있어. 결국 이번 일은 내가 다 혼자 처리했고, 그녀는 구경만 한 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뻔뻔하게도. "이 우주의 일은 당신이 맡아서 할 일이니까요. 전 그저 다른 우주에서 온 수사관일 뿐이니, 간섭할 순 없지요." 편리하기도 해라. 저 입을 일본인들에게 가져다주면 대환영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뻔뻔한 인간들끼리 잘 어울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잡담은 나중에. 지금은 일이 먼저다. [[Reverse-Summon blue planet, Summon EARTH(푸른 별의 역 소환, 지구 소환) !]] 지구가 다시 소환되었다. 동시에 내가 가져왔던 푸른 별이 사라졌다. 이런 거대한 별을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미리 준비해둔 마법의 보석들 덕분에, 생각보다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물론 항성을 마구 부르는 나에게 그게 뭐가 힘드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편한 게 좋다고.' 어쨌든 이것으로 거의 모두 끝난 셈이다. 그럼 다음으로 할 일은 정말 최종적인 것인가. 나는 서서히 지구를 향해 손을 겨누고. [[Cancellation, Isolated world(고립된 세계, 취소) !]] 그 순간 지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 끝났다." 나는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아직 지구로 돌아가는 게 남아있기야 하지만, 이재는 다 끝난 것이다. 남은 것은. '이 말 많은 사람들을 원위치에 놓아야지.' 물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보내면 화를 내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 지금 당장 이들을 제자리에 돌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의심할 것이다. 왜 갑자기 눈앞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졌냐고. 그러니 0.000000000000001초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일을 끝마쳐야 했다. 그럼. [[Teleportation(순간이동)]] 내 목걸이에 있던 사람들이 전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겨우. "됐다...." 그리고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전에 옆에 있는 월영에게 한 마디는 해야 했다. 어쨌든 그녀도 내 뒤를 따라다니느라 고생이 많았으니까. 문제는 이왕 고생을 하려면 조금만 더 하지 그랬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는 거지만. '그만 두자.' 다 끝난 일을 가지고 투덜거려서 뭘 하겠는가. 그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지. 나는 대기업의 회장님으로 돌아가면서,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음을 알았다. 그건.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만약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일을 만났다면, 그냥 우주의 신비로 남겨두어도 될 것이다. 당신들의 원수를 이제 갚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행복하게 살아라.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런 해결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내 목걸이에서 이 전투를 수수방관했던 사람들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모두 내 친구들이라고.' 두 분은 선생님이고, 나머지는 친구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간. 즉 내 오라버니도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결별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야 할 것이다. 아예 기억을 없애버리던가, 그게 아니면 그들에게 지금의 일을 설명해 주던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이 귀찮아지게 될 것이다. '그 녀석들이 알아버리는 건 곤란해.' 그렇다. 지금 내 정체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 녀석들도 당연히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너무나 뻔했다. 그들의 평소 행각은. "하하하. 세금을 더 거둬라. 국민의 뜻이다." "하하하. 서민에게 사형을. 의원에게 석방을. 국민의 뜻이다." "하하하. 재산을 다 내놔라. 국민의 뜻이다." 이렇지 않은가. 이런 녀석들이 나에 대해 알면, 그들은 분명히 일을 망쳐버릴 것이다. 그들은 지구를 위해, 인류를 위해, 이 우주를 위해 내 힘을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며, 결국 나는 분노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던가, 그게 아니면 지구에서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그들을 내가 죽여버린다고 일이 해결될까.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거야.' 불행한 일이지만, 내 힘을 드러내기에는 이 지구는 너무나 위험한 장소였다. 정치인들만이 나의 위협이 된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에 의한 위협이지만. 만약 내 모습이 드러난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향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인류 전체를.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스스로를 모두에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식이니....' 그 마법사들에게 벌레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인류라는 종족은. 그것을 내가 과연 돌려놓을 수 있을까. 강제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건 너무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단순히 적들을 물리치는 것이라면 간단하건만. '그래도 10년 넘게 걸렸어.' 나에게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한 적들을 상대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정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영원이 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지금은 일단 오빠를 침묵시킬 필요가 있었다. 납득하도록 설명하든, 그게 아니면 아예 기억을 지워버리든 간에. 하지만. '어떻게 해도 이해할 것 같지 않은데.' 그 인간의 생각을 내가 모를 리가 있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어디 보자. 가장 가까운 휴일이 언제일까. 나는 내 방. 즉 플래닛 그룹의 회장실로 돌아가면서 그걸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일을 결정했다. "역시 그게 좋겠어." 나는 휴대전화를 품에서 꺼냈다. 위이이이잉. 비행기 엔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인천국제공항에 나와 있었다. 위대하신 여동생 마마를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 내가 그 녀석.... 아니 그 아가씨를 그렇게 불러도 좋은 것일까. 어차피 그녀는. '내 진짜 여동생도 아닌데 말야.' 적어도 나는 그런 애를 여동생으로 둔 역사가 없었다. 만약 내 여동생이 나보다 공부나 운동을 더 잘하는 정도라면, 나는 그녀가 여동생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 여동생이 지구 최대의 기업을 소유한 정도라면, 나는 그녀가 여동생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Power ! Unlimited POWER(힘, 무한한 힘) !" 이런 대사가 딱 맞는 여동생을 둔 역사는 없었다. 솔직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랐지만, 일단 매직미사일로 소드마스터를 박살낸 것부터가 이미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오빠에게 망설임 없이 마법을 날려 숨통을 끊질 않나. 쌍어궁의 머리를 들고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지 않나. 뭔가 잘못됐다. 내가 아는 '여동생'이라는 품종에서 한참 벗어났다. 여태까지 내가 알고 있는 여동생이란. '오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생명체.' 이렇기는 해도, 그런 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피를 나눈 친동생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동떨어진 그 반응, 그 행동, 게다가 공무중이라고? 도대체 오빠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그 모든 정황정거는 그녀가 내 진짜 여동생이 아니라는 내 생각을 더더욱 굳히고 있었다. 굳이 월영 선배나 쌍어궁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바로 그녀가. '오늘 온다는 말이지.' 모처럼의 일요일을 날려버리는 비극이긴 하지만, 최소한 그녀가 누구인지는 오늘 듣게 될 것이다. 본인도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화했으니까, 다들 불러와. 궁금한 건 다 말해줄 테니까." 적어도 여동생.... 아니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이상 분명히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찾아 헤메던 진실이라는 이름의 비극도,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만 나는 차마 이번 일을 부모님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사실 말해봐도. "에이. 무슨 헛소리니?" 그리고 내 볼이 확 늘어날 게 뻔했다. 잡아당기실 테니까. 사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도,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 입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그걸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위이이이잉. 공항에 나와 있었다. 모든 의문을 풀기 위해. 하지만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휙.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여자라고 해도, 자신의 알몸을 모조리 본 남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건 힘든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때 그녀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던가. 문희를 예로 들면, 그녀는 그때. '소꿉친구에게 벌거벗고 섹스하자고 덤볐다.' 내가 그녀를 덮치고 강간한 게 아니라, 그녀 쪽에서 나를 덮친 것이다. 그것도 여자들이 무더기로 모여서. 부끄러움도 없이. 그러니 아무리 문희의 얼굴이 두껍고 말이 많더라도,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만약 나를 좋아했다면, 이번 기회에. "야. 책임져." 이렇게 나올 수도 있지만, 역시 문희도 그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올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그럴 테니. 그래도 그보다 나은 사람들도 있었으니 예를 들면. "......." 연미 누나였다. 물론 진희는 이곳에 없었다. 왜 없는지는 내가 잘 알지. 아마 창피해서 집에 숨었을 테니까. 그나마 연미 누나니까, 여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빨개졌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고. "진희가 그러던데, 이번 일은 미안하대." 하지만 누나의 용기도 거기까지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팍 돌리고 말았으니까. 그래도 나에게 화를 내는 기색은 없었다. 진희도 그럴 것이고. 만약 그녀가 화를 냈으면 지금 말을 해주었겠지. 하지만 솔직히 좀 원망스럽기도 했다. 만약 진희가 나에게. "나도 널 좋아해. 우리 사귀자."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다면,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 사귈 수는 없어. 우리 친구로 지내자." 이렇게 끔찍한 말을 했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나와 그녀는 어정쩡하게 마무리를 해 버리는 것인가.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연미 누나는 생각보다 의연한데. 역시 이건. '전에 애인을 잃은 탓인가.' 소문에 의하면, 연미 누나의 애인은 원인불명의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 사고가 어째서 일어난 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누나는 그 후에 유명 재벌 집안의 상속자와 약혼하게 되었고, 그 일에 대해서는 나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 누나의 얼굴에서 뭔가가 사라졌다는 것만은 나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물론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다 나올 일이다. 그 녀석..... 아니 '그녀'라면 다 알고 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묻고 싶지는 않다. 지금으로선 그녀에게. '물을 게 너무 많아.' 그녀의 과거부터 시작해서, 내 친 여동생의 행방에 이르기까지. 그러니 연미 누나의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놓는 짓을 할 틈도 없을 테고, 그럴 의도도 없다. 왜 내가 누나에게 상처를 입히겠는가. 비록 진희에게서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걸 연미 누나가 책임질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여동생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는 것처럼.' 사실 그 살인마, 괴물, 악마의 행동을 내가 전부 책임지는 건 불가능했다. 하고 싶어도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 존재에게 내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왜 내 여동생으로 위장하고, 내 옆에 있었던 걸까. 단지 날 때리고 싶어서?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 더 중대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 침묵을 지키고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들도 나오셨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셨겠지. 비록 이번에 두 분은 상당히 품위를 구기시기는 했지만.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계시더라도, 속은 아마 피멍이 드셨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 두 분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벌거벗고 섹스하자고 덤볐다.' 이런 짓을 하셨으니까. 물론 그게 자기 의지로 한 건 절대로 아니므로, 나도 굳이 그걸 끄집어내서 두 분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문제는 쌍어궁이 만든 게 아닌가. 망할 녀석 같으니. 하지만 이미 죽은 녀석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무덤도 남기지 못한 녀석의 멱살을 잡고. "야 ! 이 나쁜 새끼야 !" 이렇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내가 쌍어궁의 죽음을 직접 본 건 아니다. 그의 머리가 여동생과 월영 선배의 손에 잡힌 채 매달린 건 봤어도, 다음 순간에 갑자기 그 머리들이 없어졌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지만 적어도 그 마법사들의 대화를 보건대. '아무래도 그녀에게 맞아죽은 모양이야.' 만약 그 녀석이 나를 마구잡이로 구타하지 않았다면 나는 동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녀석이 내 옆의 여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몰랐다면 나도 그를 살려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개자식.' 맞아죽어야 마땅한 짓을 했고, 그 결과로 그녀에게 죽었다. 여기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죽을 놈이 죽은 것인데. 다른 여자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둘은?' 나는 시내와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시내의 경우는 상당히 우울해 보이지만, 클라라는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표정은 아니었다. 물론 이건 클라라가 시내보다 정신적으로 튼튼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시내에겐 충격이 컸을 테니.' 시내나 클라라나 이번 일은 두 번째 봉변이다. 하지만 시내가 지금 괴로워하는 이유는, 이번에 내 앞에서 벌거벗은 채 나를 끌어안아서가 아니다. 그녀의 고민은 바로. '믿고 따르던 선배가 그런 인물이었으니.' 물론 그게 월영 선배의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세계에서 온 수사관이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의견은 어떨지 몰라도. '그 동네의 공식적인 의견은 정말....' 그 마법사의 언동은 우리에게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여자들에게 그런 말은 사악한 외계인의 말이었으므로, 우리는 단지 분노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시내는 달랐다. 그녀에게 있어 그 마법사들은. '단순히 사악한 외계인으로 치부할 존재가 아니었으니.' 그렇다. 어쨌든 시내는 그 마법사들과 전혀 남이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최초에는 쌍어궁의 노예로서 마법을 배웠지만, 그 후에는 월영 선배에게 들어가서 마법을 다시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 월영 선배가 저 마법사들을 선배나 스승, 또는 상관으로 모시고 있다면, 시내 역시 그 무례하고 비인간적인 녀석들에게 그리 대해야 할 것이다. 상관은 아니더라도, 선배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에게 대한 태도로 보면. '시내한테 직접 대고, 넌 벌레라고 소리지른 격이야.' 그들에게 마법을 배운 사람에게 말이다. 그러니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생각보다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굉장한 자제력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클라라였다. 그녀 역시, 쌍어궁 일당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는. "이제 10분 정도 남았네요." 뭐가 10분이 남았다는 것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바로 그 여동생(X)이 도착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거겠지.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무리 내가 그녀를 본 게 그리 오래 되지는 않더라도, 그녀의 마음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정말로 행복한 모양이야.'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쌍어궁에게 조종되어 나를 덮쳤는데, 그것은 여자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텐데, 왜 저렇게 어두운 기색이 없을까. 다른 사람은 다 어두운데. 물론 우리 일행 전원이 싸늘하게. "못 살겠어..... 죽고 싶어...... 삐약삐약." 이러는 건 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혹시 그녀는 슬픔이 지나쳐서........... 아, 아냐. 설마 클라라가 미치지는 않았을 거야. 그 정도라면 여기 나오지도 못했겠지. 하지만 이건.... 혹시....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가?'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다. 비록 이것으로 인해 그녀의 상처를 덧나게 할 지도 모르지만, 그 거짓 없는 밝은 표정이 나를 그렇게 이끌고 말았다. 혹시 그녀가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그럴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톡. 톡.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린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자. "잠깐 커피 사러 가야 하니까, 좀 따라올래?" 물론 그 커피는 모두를 위한 커피가 아니다. 단지 클라라에게 뭔가를 물어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꼬마 선생님에게 작게 말한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가장 연장자이니까. 물론 그건 우리 담임의 나이가 그녀보다 어리다는 게 아니라, 그녀가 우리 담임보다는 맹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이지만. "잠깐 커피 사러 다녀올게요."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클라라의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 나도." 시내 너.....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잖아..... 그것은 사실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 앞에서. "클라라. 너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이렇게 묻는 건 시내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 마. 지금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으니까." 하긴. 여기에 앉아있어 봐야 우울증만 더 심해지겠지. 그래서 나는 그녀의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내가 클라라에게 물어볼 내용을 지금 여기서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 자기는 불행한데, 남은 똑같은 고생을 하고도 행복해한다. 그러면 아무리 그녀들이 착하더라도 조금은 기분이 상할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클라라를 데리고 빠져나갔다. 문제는 시내도 같이 간다는 것이지만. 그래서. 다다다다다.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시내보다 좀 더 빨리 걸어야지. 나는 최대한 걸음을 재촉하면서, 클라라에게 물었다. 이렇게라도 거리를 벌려놓고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아예 기회가 없을 것 같기에. "그런데 클라라는 괜찮은 거야?" 물론 이 말은 아주 작은 소리로 물어본 것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시내가 들을까봐 무서워서 말이다. 여기서 그녀가 지금의 내 질문을 듣기라도 하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기에. 우리가 겪은 일은 그렇게 큰 일이었고, 그렇게 고통스런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클라라는 나를 보더니. "후훗." 밝게 웃는다. 어째서인가. 왜 그녀는 다들 빠져 있는 우울의 늪에서 벗어났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설득력이 컸으니. "드디어 그 악마가 죽었잖아요. 부모님의 원수, 형제자매들의 원수가 죽었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죠." 화,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클라라에게 있어 쌍어궁은 그야말로 원수 그 자체였으니까. 사실 그녀가 천애고아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쌍어궁의 부하인 그 식인소녀가 콘스탄츠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시는 불바다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은 좀비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그런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제 죽었다. 그렇다면. '기뻐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의문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여자들처럼 이상한 마법에 걸려서, 나에게 알몸을 보인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왜 그녀만은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걸까. 하지만 그에 대한 내 궁금증을 대놓고 토로할 수는 없었다. 그건 여자들에게 있어, 너무 괴로운 것이기에. 하지만 클라라는. "왜 그래요? 뭔가 궁금한 게 있나요?"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없는 장소를 찾아봤지만..... 있을 턱이 없다. 어디에나 사람은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물어보려던 것을, 그냥 포기해버렸다. 차마 여기서는 물을 수 없기에. 그러나. "왜 그래요? 말을 해 봐요. 미스터 문구." 결국 나는, 그녀의 추궁에 지쳐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대한 말을 돌려서. "그, 그러니까........ 전에..... 그 악마 때문에....... 나하고....... 아, 알모........" 하지만 클라라는 나보다 훨씬 얼굴이 두꺼운 아가씨였으니. "아. 그거요? 괜찮은데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섹스하는 게 뭐가 나쁘나요?" 쾅. 여, 여자애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도 되는 거냐. 나는 경악해서 그냥 공항바닥에 엎어졌다. 아무리 클라라가 서양의 여자라지만, 이런 말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할 줄은 몰랐기에. 그러나 클라라는 한 발 더 나아갔으니. "다만 그때 아쉬웠던 것은, 내 의지로 그렇게 하지 못한 거예요. 이왕이면 우리가 둘 다 원하기 때문에 하기를 바랬는데." 나는 공항바닥에 엎어진 채 경련하고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거지?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는 이미 알기에, 나는 그녀의 대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는 여자가 성폭행을 당하면. "뭐? 여자가 조심하지 않으니까 그런 꼴을 당하지. 난잡한 계집애 같으니."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여자가 잘못했으며, 사실이 드러날 경우 남자는. "남자라면 여자 몇 명쯤은 먹어 봐야지. 안 그래?" 이렇게 되고, 여자는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혀 매도당하는 게 상례였으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세상사가 원래 그렇다. 아무리 어린애를 강간한 짐승 같은 남자가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더라도. "그 극악무도한 범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2년형을 선고한다." 이게 우리나라의 판결 아닌가. 도대체 왜 그런 것들에게 고작 2년형이라는 건가. 그러니 당연히 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진희에서부터, 선생님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는. '난 절대로 여자들을 성폭행하지 않았어.' 물론 그래서 내가 그나마 그녀들을 지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클라라는 왜 이렇게 나오는 거냐. 뭐가 아쉽다고? 서양 여자들이 혼전 성관계에 대해 관대하다더니, 확실히 그런 모양이다. 물론 그녀들에게는 남자와 잠을 잘 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으니. "나는 그를 사랑해요. 그도 나를 사랑해요." 이런 경우에만 허용이 된다는 점이다. 즉, 그녀들도 이른바 헤픈 여자는 아닌 셈이다. 물론 요즘은 우리나라도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 듯하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지. 클라라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그럼, 클라라는 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나도 모르게 그 질문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그리고 미스터 문구하고라면, 함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탁. 나는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여기서 그녀의 입을 그냥 두다가는, 무슨 소리를 더 할지 모르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거지? 서양 여자들이든 우리나라 여자들이든 몸을 허락하는 건 '사랑하는 남자'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분명히. '큰일났구나.' 역시 그녀는 날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사랑은 더 강해졌다. 그런 느낌이 확 와 닿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싫은 건 아니지만, 난 원래 진희와 이런 관계가 되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녀는 아예 공항에 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에게는 그런 여자가 하나만이 아니었으니. "확실히 이미 지나간 일이기는 해.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미련한 짓이지." 시내였다. 그녀는 굳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는. "하지만 문구를 빼앗길 생각은 없어. 생각해 보면 이제 난 문구가 아니면 시집갈 상대도 없고 말이야." 윽. 아예 본격적으로 책임을 지라는 소리구나. 그 소리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녀 역시 쓰러진 내 옆에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서 말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어때요?" 클라라의 말이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만..... 탁. 이, 이게 뭐냐. 나는 졸지에 두 팔을 여자 둘에게 동시에 잡히고 말았다. 떼어내고 싶어도, 여기서 그러는 건 무리였다. 그녀들에게 팔을 잡히는 순간, 힘이 쪽 빠지고 말았으니까. 오히려 나로서는 난처하게도. "!" 그때 벌거벗고 여자들에게 안겼던 일이 다시금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러자 몸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도 인간인지라. 두근두근.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들 역시 약간 얼굴을 붉힌 걸 보면, 그 일을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둘이 서로를 노려본다. 그리고 클라라가 먼저 포문을 연다. "전 미스터 문구를 좋아하는데요." 그러나 사람 미치게도 시내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는지. "문구를 먼저 만난 건 나야. 좋아한 것도 내가 더 오래되었고." 이거 사람 미치겠네. 게다가 이곳은 공항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우리를 안 쳐다볼 수가 없었으니. 그들이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났군. "와. 저게 뭐냐." "양손의 꽃이라는 건가." "그런데 뭐야. 왜 저런 놈에게 저런 미녀들이 둘씩이나...." "저런 망할 자식." "솔로부대의 적이다 ! 저런 놈이 있어서 여자친구를 사귀기가 그리도 어려운 거다 !" 뭐야. 왠지 점점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느낌인데. 나는 더 이상 이쪽에 있으면 상당히 일이 난처해질 것임을 깨닫고. 후다닥. 혼자 도망갔다. 그렇다. 나는 비겁하게도 혼자서만 그냥 튄 것이다. 커피를 사러 간다고 하고 나왔으니, 커피는 사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다. 왜 나는 그녀들의. '손까지 잡고 있는 거지?' 끼이이이잉. 멀리서 비행기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지금 분위기는 나에게 있어, 결코 편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우선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은. 휘이이이잉. 여기가 무슨 시베리아 벌판이냐. 그야말로 찬바람이 씽씽 불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너무 전형적인 표현이지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것은 내가 사온 커피가 워낙 차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다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즉. '선생님들하고 문희하고 연미 누나의 문제라고.' 물론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내가 아니지만, 최소한 내 탓으로 일이 그렇게 엉망진창, 누더기가 된 건 아니기에 나는 결백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정도라도 버틴 게 어디냐고. 그래서 나는 성폭행범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을 수 있었고, 그녀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별로 안 좋다고.' 물론 이것도 일종의 성폭행이니 그렇기도 하지만, 범인은 이미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특성인. '성폭행 당한 여자가 100% 잘못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관념을 고려하더라도, 어차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월영 선배나 그 마법사들이 '벌레'들의 일에 그렇게 큰 관심을 쏟을 것 같지는 않고, 쌍어궁 일당은 모조리 죽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낼 리는 없다. 절대로 없다. 그러니 스스로가 입은 마음의 상처만 잘 치유하면, 이 일은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가롭게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 부글부글. 내 양팔은 무서운 소녀들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동양의 미녀에게, 또 한 쪽은 서양의 미녀에게. 물론 내가 보기에 시내는 그리 예쁜 아가씨가 아니지만, 문제는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뭐? 여동생(X)이 너무 예뻐서 내 눈이 너무 높아진 탓이라고? 그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미모로 따지면 클라라가 시내를 월등히 능가한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둘은. 부글부글. 지지직. 왜 내가 그 중심에 서서, 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감당해야 하는 거냐. 물론 두 아가씨가 마음의 상처를 잘 달래는 모습은 나를 조금 안심시켰지만, 문제는 그 활력으로 날 괴롭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자 둘이 내 팔을 하나씩 맡아서 꽉 끌어안고 있으니. '으. 미치겠다.'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며 부러워하는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으. 누가 좀 말려 줘. 이게 뭐야. 이게. 그런데 왜 이렇게 문희쪽과 클라라쪽은 태도가 다르지. 역시. '두 번째로 이런 일을 겪어서 그런 걸까.' 사실 시내는 이번 일 이전에, 이미 자신의 두개골에 박힌 마법의 깃털이 뽑혀 나오는 사고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아니, 이번에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의 죄책감이 덜한 것은 아마 그로 인한 것일 듯하다. 두 번 당하니까 익숙해졌다고 할까. 그리고 그건 클라라도 마찬가지였으니. '비록 그녀는 마법을 잘 모르지만.' 그 대신 그녀는 고향에서 가족을 전부 잃고, 좀비들에게 쫓겨다니는 일을 겪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절대무적의 소녀를 만났었다. 바로 내 여동생(X) 말이다. 그러니 두 번씩이나 초자연현상을 경험한 그녀가, 이번 일로 인해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니 나와 알몸으로 뒹굴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 데다가..... 화악. 내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 상황..... 솔직히 되새기다가는 심장에 안 좋겠어. 어쨌든 ! 시내와 클라라가 비교적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는 건,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나하고 문희도 그런 일을 두 번째로 겪는 거잖아.' 나야 어떻게 그럭저럭 서 있지만, 문희는 왜 그렇게 충격이 큰 거지? 연미 누나는 또 어떻고? 두 분 선생님들이야 이번이 처음이니 이해가 되지만. 진희의 경우는 원래 애가 약하니 무리도 아닌데. 그런데. '문희가 약했던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왜 이렇게 힘이 없는 거지? 거기까지 내 생각이 미치자. '아.' 이 녀석, 그때 별로 고생을 안 했구나. 아마 나와 헤어진 후, 아주 평안한 대피를 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 후에 고생했다는 소리는 전혀 들은 적이 없으니. 왠지 얄미워지는데. 하지만 이번 사건이 워낙 추잡하고 더러웠기에, 굳이 그걸 가지고 문희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다시 그 일을 되새기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지겹도록 되새겨야 할 텐데 뭐. 그리고 바로 그 악몽을 다시 보여줄 인간이 드디어 나타났으니. 쿵. "윽."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팍 들어간다. 드디어 공포의 인물, 여동생(X)이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국제공항의 자동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걸어나온 소녀는 악마답지 않게. "오빠 !" 야. 악마면 악마답게 굴어. 그렇게 나한테 아양떠는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지 말고. 그래도 손을 흔드는 여동생(X)에게 무뚝뚝하게. "흥." 이럴 수야 없다. 나는 일단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면서, 속이 쓰려오는 걸 참았다. 어쨌든 그녀에게 내 목이 날아간 적이 엄연히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에게 맞아죽은 적이 있는 여자들 전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진실을 알기 위해 찾아온 길이지만, 우주 최강의 괴물을 만나는데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물론 그 전까지는 그런 걸 의식한 적이 없었다. 아예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여동생(X)의 잔혹성과 힘은 모조리 우리에게 알려졌고, 그것이 모두의 두려움을 낳고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 떨지 않은 사람은. "여기예요. 여기." 클라라뿐이었다. 그럼 그녀가 그만큼 힘이 강해서 그런 것인가? 그건 아니다. 여동생(X)은 그녀에게 있어서, 엄연히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클라라를 좀비에서 인간으로 되돌려준 것도, 양 부모님을 찾아준 것도, 친 부모님의 원수를 갚은 것도, 모조리 그 녀석이니 감사할 만도 하겠지. 그러나 나로서는. '왜 저런 게 내 여동생이냐.' 일단 공식적으로는, 그녀가 바로 내 여동생이었다. 클라라 말고, 지금 손을 흔들며 나에게 다가오는 바로 이 여자가 말이다. 아. 왜 내 운명은 이토록 가혹하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몬스터, 괴물, 악마, 살인귀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생물을 여동생으로 둬야 하다니. 게다가 내 진짜 여동생의 운명을 생각하면. '끔찍해.' 그 애가 내가 보는 이 '여동생'에게 잡혀 먹혔는지, 아니면 지금도 어디선가 오빠를 찾아 헤메고 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는지, 하나도 모르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동생(X)은. "자.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해. 오빠."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커다란 가방은, 동행한 비서 누님들이 맡았고 말이다. 나쁜 녀석. 힘든 일은 다 남에게 시키다니. 그러나 그녀에게 정면으로 거역할 수는 없었다. 힘이 너무 강하기에. 내가 할 수 있었던 불평은 고작해야. "파아." 한숨 정도였으니까. 그게 바로 나와 여동생(X)의 힘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이게 뭐야." 난 분명히 리무진이라도 나올 줄 알았다. 명색이 세계 최대의 대기업 회장이니까. 그런데 막상 나온 것은.... "버스냐." 그것도 전용 버스가 아니라, 공항을 왕복하는 그 버스였다.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그렇게 돈이 많은 녀석이 '그냥' 버스라니. 물론 공항을 다니는 버스답게 의자부터 상당히 고급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저 녀석 전용차에 비하면 별 거 아니잖아.' 도대체 왜 이 녀석은 이런 식으로 가난한 티를 내는 걸까. 게다가. 방긋. 방긋. 방긋. 뭐가 좋아서 저렇게 싱글벙글인가. 대부분 우울한 표정들인데. 역시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녀석이었다. 아니, 녀석이라고 할 수는 없지. 생판 남인데. '도대체 무슨 아가씨가 저래.' 하긴 그렇게 신경이 두꺼우니까, 나한테 망설이는 '척' 하지도 않고 마법을 먹여서 날 죽여버릴 수 있었지. 어쨌든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종착역을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는.... "왜 우리 집이야?" 여동생이라는 애가 도착한 곳은, 거창한 호텔도 자기 전용 사무실도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에? 여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나도 놀랐으니까. 그녀는 태연하게 (남의 집에) 들어가더니. "자. 모처럼 왔는데, 모두 들어와요." 이봐. 여긴 네 집도 아니잖아. 물론 내 여동생이라면 이렇게 나와도 되지만, 솔직히 여기가 왜 너네 집이냐. 나하고는 혈연 관계도 없는 녀석이. 어쨌든 그녀는 태연하게 신발을 벗고는. "랄랄라. 랄랄라." 오히려 여동생의 옆에 붙어온 여비서들이 더 긴장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하긴 그들이야 여동생, 아니 저 아가씨의 부하니까 그렇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뭐 하는 거냐.' 이미 남으로 밝혀졌으면, 남답게 행동하란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자기 방으로 태연하게 들어가더니. "자. 들어와요. 할 말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들어가고 보니. 할 말이 없다. 클라라의 경우는 좀 달랐지만, 우리 모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무수히 많은데, 갑자기 혀가 굳어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클라라는 여동생(X)에게 머리를 숙이더니. "저, 이번 일에 대해서 감사 드려요. 제 부모님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셔서." 그리고 여동생(X)은 겸손하게. "특별히 그걸 위해 한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인사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여동생(X)이 그 무시무시한 눈으로 우리 모두를 흩어본다. 그러더니 안 되겠다는 눈으로. "후우. 할 수 없지. 너희들은 잠깐 나가 있어." "네. 회장님." 그 말에 비서진들이 모두 퇴장한다. 하긴 여동생(X)의 방은 모두가 모이기에는 너무 좁은 편이었으니까. 보통 여자아이의 방과 별다를 게 없는 이런 곳에서,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건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비서들이 나가자마자 그녀는.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뭘 시작한다는 거냐. 그러나 힘 없는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파앗. 우리 주변의 풍경은 바뀌었다. 평범한 소녀의 방에서, 완벽한 황무지로. 느닷없는 환경의 변화에 우리 모두는 당황했지만, 여동생(X)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투로. "자. 그럼 이야기를 해야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뭘 하라는 거냐..... 그러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오빠."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뭔가가 터졌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이 외계생물이 나에게 오빠라고 한단 말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여동생 내놔 !"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죽어라 외쳤으니. "당신 대체 누구야? 내 진짜 여동생은 어디에 빼돌렸어? 당장 내놔." 그렇다. 눈앞의 여동생(X)이 가짜라면, 당연히 내 진짜 여동생이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불쌍한 그 애의 생사도 모르고 있었다. 그 애는 과연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 애를 여태까지 내팽개쳐 두다니, 정말 나는 나쁜 오빠였다. 눈앞의 사악한 여동생(X)에 현혹돼서 말이다. 그 애가 그렇게까지 못된 녀석일 리가 없는데, 나는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물론 내가 착각한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그런 힘을 지니지 못했다고.' 인간이라는 생물은 우주공간에서 편한 자세로 숨도 안 쉬며 버틸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다. 하물며 지금의 과학문명으로는, 절대로 별을 파괴할 정도의 괴력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힘을 마구 휘두르는 이 여동생(X)이, 정상적인 인간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인간이 아닌 괴물을 여동생으로 둔 적이 없으니. '당연히 이 여자는 내 여동생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순간. "멍청하긴." 내게 멱살을 잡힌 여동생(X)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엄청나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이. 그런데 잠깐. 내 생각의 어디가 틀렸다는 거냐? 하지만 내가 미처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여동생(X)의 일갈이 터졌으니. "오빠 바보 !" 쾅. "?" 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분명히 내 가슴에 아주 약한 충격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주위의 배경화면(?)이 다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건 뭐냐. 왜 내 주위가 별로 가득 차 있는 거냐. 아니, 그보다. "지금 난 어디로 가는 거냐?" 분명히 여동생(X)이 나를 한 방 친 것 같은데, 그 순간부터 일이 이상하게 비비꼬이고 말았다. 갑자기 내 주위의 여자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나는 혼자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건 내 스스로의 의지로 나는 게 아니라, 마치. "설마." 물론 여동생(X)의 힘을 감안하면, 이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좀 너무한 것이다. 어떻게 여동생(X)이 주먹 한 방을 휘두른 것만으로, 내가 우주로 날아간단 말인가. 그 주먹이 땅바닥을 친 게 아니니 땅이 무너진 건 아니고,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그 녀석의 주먹 한 방에 내가 하늘로 날아가는 거야?" 말이 안 되지만, 어차피 여동생(X)의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경우니까, 이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여태까지 그 녀석이 나에게 뻗었던 주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여동생 펀치라는 거냐." 물론 그 녀석은 내 친 여동생이 절대로 아니니, 여동생 펀치라는 말 자체가 틀렸다. 이건 괴물의 펀치, 악마의 펀치, 억지로 존댓말을 쓰면 마법사의 펀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어디까지 날아가는 거냐. "설마, 우주로?" 에이. 설마.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내게 7.9km/s의 속도 정도는 붙여줘야지. 그것은 음속의 20배가 넘는 속도이며 지구궤도에 올라간 물체가 가지는 속도이기도 했다. 아울러, 인간의 근육으로는 절대로 뭔가를 그런 속도로 가속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잠깐.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녀석은. '인간도 아니잖아.' 그럼 나에게 그런 속도를 붙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거..... 공기밀도가 옅어진다는 것은 내가.... 숨이.... '막힌다는 소리잖아.' 이것 큰일났다. 이대로라면 숨이 막히거나, 눈알이 빠져나오고 얼어서 죽을 가능성이 100%는 되었다. 물론 여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면, 죽음은 확정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버둥거린다고 뾰족한 수가 나올 리가 없다. 난 비행능력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아니, 설령 새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방도는 없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 주위에 구름이 하나도 없는 것만 해도, 그걸 알 수가 있었다. 아니, 구름이란 구름은 모두. '저 밑에 있잖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거냐.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풀기도 전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설명은 나중에. 일단 때려야 속이 시원하겠어." 어, 어떻게 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지? 이게 순간이동이라는 마법인가? 하지만 설명을 요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여동생(X)은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냥 발을 뒤로 젖혔으니까. 설마. 이건. '날 발로 찰 셈이냐.'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이 높이에서 목소리가 나올지, 제대로 전달될지도 모르겠고. 물론 여동생(X)은 그게 가능하지만, 난 그 녀석이 아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단 말이다. 어쨌든 여동생의 바로 아래에 내가 도달하는 순간. "오 !" 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그 순간 내 머리는 이 글자로 가득 채워졌다. 그 외의 모든 생각이 지워졌다. 나는.... "빠 !" 쾅. .......... "바 !" 쾅. $*!^&@$%!&%T!^&^% ! "보 !" 쾅. 상황 끝. 씨이이이이이이잉. 쿵. 운석이 지구로 떨어질 때의 기분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추락이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공중에서 4방 연속으로 맞고, 그대로 대지에 내리꽂히고 만 것이다. 내, 내가 무슨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냐. 하지만 코미디와 현실은 달랐다. 그쪽의 배우들은 절대로 다치지 않고 약간 코피만 나오는 정도가 부상의 전부라면, 나는. '아구구구구.'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 그대로 어디 한 군데 안 부러진 데가 없었다. 아니, 그건 4번 맞아서 생긴 부상이 아니다. 부상은 순전히 단 한 번. 여동생(X)이 처음에. "오 !" 이렇게 외칠 때 다 생긴 것이었다. 그 순간 날린 '여동생 킥' 한 방에, 내 온 몸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뼈부터 근육, 심지어 내장까지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아파....' 물론 아픔을 느끼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다치면 죽는 게 정상이니 말이다. 어떻게 단 한 번 발로 찼다고 상대가 온몸 골절에, 내장파열에, 전신마비에.... 어쨌든 부상이란 부상은 다 당한단 말이냐. 역시 저 녀석은 쌍어궁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잠깐. 그 녀석이 왜 나를 이렇게 때리는 거지? 그 녀석이 내 친 여동생이 아니라면 이렇게 할 이유가 없는데? 그, 그럼 그 말은..... '설마....... 저 녀석은 진짜로?' Nightmare(나이트메어 : 악몽). 이 단어가 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혹시 정말로 내 '진짜' 여동생이라는 말인가. 아이고. 싫어. 난 저런 '친' 여동생을 두고 싶지 않아. 그러나 현실은 냉정한 법이니. "오빠 바보 !" 지지지지직. "으악 !" 무슨 짓인지 대충 알만했다. 그 녀석은 공중에서 떨어져 운석구덩이를 만들어버린 내게 다가와서, 그냥 앞뒤 안 가리고 벼락을 내리친 것이다. 그 벼락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매우 큰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벼락은 추락으로 인해 땅속 깊이 묻힌 나에게까지 도달했으니까. 사실 내가 왜 지금도 살아있는지가 더 궁금하긴 하지만. "으아아아악 !" 온몸을 아주 골고루 적시는 고통에, 나는 울며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리고 그 꼴을 본 사람은 최소한 한 명은 있을 것이다. 내 주위의 흙이 문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덕에 나는 찬바람을 그대로 느끼며. 휘이이이잉.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전기구이가 돼서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이게. 아무래도 이 상황을 보니, 역시 이 녀석은 내 '친' 여동생이 아닌 게 분명했다. 진짜 여동생이라면, 어떻게 친 오라버니를, 그것도 쌍둥이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단 말이냐. 하지만 여동생(X)은 한심하다는 듯이, 나에게 결정타를 날렸으니. "도대체 자기 친동생을 코앞에 두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안 돼에에에. "도대체 말야. 월영이나 쌍어궁 녀석의 지레짐작만 철썩 같이 믿고, 막상 나한테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으면서 무슨 헛소리부터 하는 거야 ! 일껏 사랑스런 여동생이 고생고생 하면서 인류의 적을 무찔렀으면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게 우선 아냐? 도대체 이 인간은 몇 차례고 목숨을 구해줬으면 고맙다는 소리라도 할 것이지, 그런 건 싹 까먹고 뭐? 여동생을 내놓으라고? 도대체 그런 게 궁금하면 나한테 물어보면 그만이잖아 ! 입 뒀다 뭐해 !" 씩씩거리는 여동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나는 지금 엉망진창, 완전히 누더기라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아니, 볼 수 있다고 해도 눈을 감아버렸겠지만. 그리고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으니. "만약 나한테 '네가 내 진짜 여동생이냐'고 물어봤다면, 이렇게 안 팼겠지만." 그제야 나는 이 녀석이 뭐에 그리 화를 내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분명히, 내가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정작 자기에게 그런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다고 토라진 거다. 하지만 이건 여동생(X..... 지지직..... O)의 애교라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도대체 오빠를 주먹 한 방에 우주로 날려버리는 여동생(X..... 파지직 O)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녀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우드득. 그대로 나를 땅에서 뽑아냈다. 내가 무슨 죽순이냐. 하지만 여동생은 나를 손으로 잡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이 정도는 마법으로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거냐. 그런데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꼴이 된, 나를 쳐다보는 여동생(O)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마치 이건. '어떻게 잡아먹을지 고민하는 육식동물의 눈동자 같아.' 확실히 이렇게 잘 구워졌으면, 먹는 보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X가 O로 변한 거야? 물론 그게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저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특히. 빙그르르. 손도 안 대고, 사람을 이렇게 공중에서 회전시킬 수가 있는 거냐? 기계도 없이? 하지만 여동생의 대답은 야속하게도. "그건 내 맘이야." .........너, 그게 인간이 할 소리냐. 손도 안 대고 사람을 들어올리는 방법이 대체 뭐가 있다고..... 하지만 여동생의 화는 아직 전혀 안 풀린 모양이다. 그녀는 나를 공중에 띄운 채로. "도대체, 쌍어궁 같은 녀석이 또 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어." 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나 여동생은 바로 나를 가리키며. "오빠잖아. 오빠." 에?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냐 ! 하지만 여동생은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되묻는다. "바로 지금 그랬잖아. 구체적으로 설명해줄까?" 그러자 나는 갑자기 분노가 내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니. 난 사람을 죽인 적도 없는데 왜 그런 악당과 동일시되어야 하는 거냐. 그래서. "그래. 한 번 말해봐라. 이 불한당 같은 계집애야." 그러자 그녀는. "그럼 가르쳐주지." 그리고 숨을 한 번 들이쉬는 그녀. 그리고. "만약 오빠가 나를 독립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이번의 일에 대해 나에게 한 마디 정도는 물어봤을 거야. 내가 오빠의 진짜 여동생인지 아닌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그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당연히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문서를 조사해야 하니까. 그러니 당연히 당사자인 나에게도 질문 한 번은 했어야 하는 거지. 그런데 오빠는." 나를 째려보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으니. "그런 식의 사전조사를 거의 하지 않았어. 단지 내 적인 쌍어궁 녀석과, 우리 우주의 인간도 아닌 월영에게만 이야기를 듣고, 결정했어. 물론 그 녀석들에게 홀려서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더라고. 오빠는 자기 의지로 내가 '오빠의 여동생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그렇게 폭언을 퍼부은 거야. 하지만 !" 왠지 이 녀석, 맺힌 게 아주 많은 것 같은데. "내가 정말로 화내는 이유는 다른 거야. 오빠는 그 중요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나에게, 가장 그 문제에 깊이 얽혀있는 나에게는 한 번도 묻지 않았어. 그냥 자신의 의견을 정한 후, 그 의견이 맞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그 의지를 강요했지. 그건 오빠가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야. 나는 오빠와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오빠의 부속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오빠가 내 검, 제이다이트 소드를 보고서도 자기 멋대로 시스터 소드라고 말했고, 이름을 가르쳐 준 후에도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했던 거야. 여동생은 오빠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게 오빠의 기본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에." 이봐. 그건 과대망상.....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 이 녀석. 역시 내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어. 그런데 뭔가 이 녀석, 단단히 벼르고 온 것 같은데. 아주 이를 갈고 있군.... "즉 나는 어디까지나 오빠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애라고 생각하는 게 오빠야. 여동생을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하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을 굉장히 싫어해. 과거에 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고, 인류를 그렇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간주한 자들이 있었지. 그래서 나는 그들을 바로 어제, 모두 응징했어. 모조리 죽임으로서 말이야." 컥. 이, 이 녀석 설마. "그런데 바로 옆에 그런 사람이 있다니, 기가 차서. 만약 나한테 한 마디라도 했다면 차라리 낫지. 나아. 그런데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고, 여동생을 내놓으라며 소리나 지르다니. 오빠한테 수고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섬뜩한 눈동자를 보였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어질 정도의 눈을 말이다. "난 오빠의 소유물이 아니야. 만약 지금처럼 남성우월주의적인 입장에서 나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오빠에게는 매밖에 돌아갈 게 없어. 내 힘을 이기적인 목적에서 통제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죽여라. 그게 내 스승님의 가르침이었고, 그 이유를 나는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건 오빠라고 해도 예외가 아냐." "야 !" 그건 너무하잖아. 오빠의 모가지를 따는 게 그렇게 좋으냐. 하지만 여동생은 태연히. "하나 묻겠어. 만약 일본이 내 힘을 손에 넣는다면 세계는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말에 내 입은 딱 막히고 말았다. 그 말에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그들이 만약 여동생의 힘을 획득한다면, 세계까지 논하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박살나겠지....." 그게 사실이었다. 여동생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저 정도라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녀를 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힘이 만약 일본 같은 나라에 보태지기라도 하면, 우리나라는 당장 모든 국권을 빼앗기고, 영원히 일본의 노예로 살아야 할 것이니까. 그런 건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최악의 사태였다. 하지만 그거하고 나하고 대체 무슨 상관..... "그러니까 나는 내 힘을 조심스럽게 관리해야 하는 거야. 내가 하품만 해도, 세계에는 태풍이 불어닥치니까 말이야. 물론 오빠의 경우는 그런 힘을 탐내서 나를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단순히 '오빠'가 남자니까, '여동생'이라는 여자를 지배해야 한다고 여기는 거지만." "아, 아냐 !" 이 녀석, 완전히 과대망상을 하고 있다.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냐. 그건 어디까지나 오라버니로서 여동생에 대한 걱정과..... "걱정이라. 그래도 걱정은 하고 있는 건 알아. 그리고 !"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면서 묻는다. "지금 묻겠어. 오빠는 자신의 꿈과 미래를 모두 잃을 각오를 하고 있어?" 또, 또 협박이냐. 하지만 여동생의 말은 협박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녀가 그렇게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만약 오빠가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럴 각오를 해. 자신이 없다면 오늘의 일을 모조리 오빠의 기억에서 지울 수도 있어. 오빠의 장래를 생각하면 그쪽이 백 배 나으니까. 아니,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지. 오빠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오빠의 진짜 여동생인가 아닌가. 진짜라면 어떻게 해서 내가 그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런 게 아니지? 단지." 단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진짜 여동생이 바로 그런 생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마음. 오빠에게는 지금 그런 마음이 감돌고 있어. 그동안 나한테 맞고 살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 그 풀 길 없는 원한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에 대한 상념, 그리고 다시 나를 과거의 그, 어리고 힘없던 시절의, 오직 오빠밖에 모르던 나를 다시 보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소망 !" 너, 사람을 아예 후벼파는 거냐. 어떻게 오빠한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거냐. 하지만 그런 내 반응에 흔들릴 여동생이 아니다. 그녀는 양손에 뭔가를 띄우더니. 부웅. 그녀의 손에, 두 개의 열쇠가 놓였다. 오른손에 하나. 왼손에 하나.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향해. "선택의 기회를 주겠어. 만약 오빠가 모든 진실을, 싸늘한 피가 흐르는 과거를 알고 싶다면, 오른손을 잡아. 만약 그걸 알기 싫다. 오빠에게 순종적이고 착하게 구는 여동생을 가지고 싶다. 이 지옥 같은 진실을 그냥 묻어버리고 싶다. 그렇다면 왼손을 잡아. 그리고 그 열쇠를 집어들어. 어느 쪽이든 나는 오빠를 책망하지 않겠어." 그녀의 손에서, 두 개의 황금 열쇠가 빙빙 돌았다. 너, 설마. "자.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오빠에게 주는 거야. 참고로 왼손을 잡는다면...." 잡는다면? "오빠는 일곱 여자를 옆에 끼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오빠가 원하는 위대한 축구선수도 될 수 있을 거고. 물론 오빠를 돌보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동생을 가질 수도 있을 거야. 다만 이번 일에 대한 기억은 모든 이의 뇌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겠지만." 그런데 그건..... 뭔가 함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함정 아냐." 여동생의 조용한, 하지만 단호한 말이 내 귀를 파고든다. "과거의 기억은, 괴롭기 때문에 가슴속으로 묻히는 식으로 처리되는 거야. 아마 오빠에게는 지금의 이 순간이 점차 희미해지다가, 먼 훗날에는 단지 '그런 일도 있었다'는 식으로, 과거의 추억으로 묻히게 되는 거지. 하지만 내 오른손을 잡는다면." 잡는다면? "오빠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내가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번 전쟁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는지, 쌍어궁이 어디서 왔고 어째서 이 세계로 들어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게 될 거야. 물론 오빠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겠지. 오빠의 축구선수로서의 꿈도, 진희와의 평범한 가정도, 다른 아가씨들과의 즐거운 연애도." 그런데 잠깐. "왜 그쪽을 택하면 내 꿈이 날아간다는 거냐?" 그러자 여동생은. "우주 최강의 초인을 여동생으로 둔 사람에게, 과연 축구선수로서의 길이 열릴 것 같아? 모든 이들은 오빠를 나와 마찬가지인 초인간으로 여길 것이고, 오빠는 절대로 축구시합에 출전할 수 없게 되는데? 오빠가 그런 힘을 가졌든 안 가졌든, 모두는 그렇게 인식할 거야. 연 문구는 마법을 몸에 익힌 자다. 그런 자가 평범한 인간들 틈에 끼여서 축구를 한다. 그게 과연 공정한 경쟁인가. 그러니 그를 쫓아내야 한다 !" "윽." "이번에도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월영은 내가 그런 인간이니 오빠도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오빠를 미끼로 삼은 거고. 쌍어궁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다를 바 없어. 모두들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어. 그게 상식적으로 올바른 결론이니까. 그래서 내가 세상에 내 정체를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뭐? "그럼 내가 왜 자신을 숨기고 있을까? 나를 당할 자가 이 지구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자신을 드러낸 후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나 종신대통령이 되는 편이, 전쟁에는 훨씬 유리한데. 그 편이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고." "너무 자신만만한 것 같은데....." "최소한 지금 국회에 있는 애들보다는 잘 할 수 있어." 그 말만큼은 여동생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보다 일을 못하는 자는, 다른 나라 정치인들 정도일 테니까. 물론 모든 나라가 그 범주에 속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오른손을 선택할 경우에 얻게 되는 건?" 뭔가 너무 불길한 소리만 잔뜩 들어가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쪽에는 뭔가 숨겨진 메리트가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여동생이 제시한 것은 황금도 보석도 아닌. "진실." 그, 그것뿐이냐. 왠지 미래의 꿈을 버리는 대가로는 너무 값싼 것 같은데..... 그러나 여동생의 대답은 애석하게도. "응. 그 뿐이야." 그리고 그녀는 나를 온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표독함도 증오도 없었다. 단지 나를 걱정하는 느낌만이 가득할 뿐. 그녀는. "만약 오빠가 진실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심지어 자신의 미래와 생명과 꿈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면 오른손을 잡아. 하지만 오빠의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나 미래의 꿈이나, 오빠에게 다정하게 구는 여동생을 원한다면 왼손을 잡아." 그리고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자신의 두 손을 나에게 향한 채로. "자. 어느 쪽을 선택할래?" 반짝. 반짝. 나는 두 열쇠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이건 마치 영화라도 찍는 기분인데. 두 개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어느 쪽을 내 미래로 고르느냐.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야." 과연 나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 건가. 평온한 미래와 내 가정의 행복, 그리고 내 꿈의 실현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진실을 찾아낼 것인가. 하지만 내 여동생의 진실이, 그렇게도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건 오빠가 판단할 문제야." 그녀는 그 말만 할 뿐이다. 나쁜 녀석. 느닷없이 우주괴물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제는 뭐? 난해한 문제를 내 앞에 던져 넣고, 나 몰라라 하며 외면하는 꼴이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떻게 이런 심술꾸러기가 된 거야. "바로 그걸 보여주겠다는 거야. 뭐 오빠의 경우는 자업자득이지만." 으. 이 녀석..... 물론 나도 내 여동생이라는 애가 왜 저런 녀석이 되었는지 궁금하긴 했다. 어째서 저런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었기에. '성격이 저렇게 된 건지.' 옛날에는 그렇게도 귀여웠던 여동생이 마녀로 둔갑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녀의 오른손에 있었다. 내가 그 열쇠를 잡는다면, 그녀는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 열쇠를 집어든다면. '그럼 내 꿈은?' 난 거창하게 하렘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한 명이면 족하다는, 심히 도덕적이고 합법적인 연애를 바라는 사람이다. 물론 진희가 날 차 버려서 좀 실망하고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내 옆에는 시내도 있고, 클라라도 있다. 두 아가씨는 분명히 좋은 여자이고, 이 정도면 보통 남자는 충분히 나를 부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동생 하나로도 피곤해.' 그러니 내 옆에 있을 여자는 하나로 족하다. 둘이나 셋은 필요가 없다. 여자 하나가 얼마나 다루기 힘든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돈? 솔직히 돈은 그리 많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내가 부유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축구선수로 성공하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꼭 성공할 것이다. 그래서 월드컵 우승과, 득점왕과, MVP를 모조리 차지할 것이다. 그게 내 꿈이니까. 그래서 내가 대업 고등학교에 온 것이고,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는 학생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게 아닌가. 아침마다 달리는 이유가 대체 뭔데. '그런데 그걸 다 포기하라고?' 내가 미쳤냐. 하지만 여동생은 나에게 분명히 말했다. 둘 중에서 딱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그 말은 즉. '진실인가. 꿈인가. 그걸 고르라는 거지.' 진실을 선택하면 꿈이 날아간다. 그렇다고 꿈을 선택하면 진실이 날아간다. 어느 쪽이든 나는 둘 중 하나만을 가져야 하고, 중간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여동생이라면. '두 개 다 가지고 싶다고 하면, 분명히 거절할 거야.' 하지만 그 이유는? 우선 그걸 들어보고 나서 결정해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래서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두 개를 모두 고르면 안 돼?" 그리고 여동생의 답은. "응. 안 돼." 그거야 이미 예상한 답이고. 그 다음이 본론이니까... "왜 안 되는지, 알려줄 수 없어?" 그러자 여동생은 입을 다물고..........가 아니고 ! "이유는 간단해. 오빠의 꿈은 축구선수인데, 아까 설명했듯이 내가 마법사인 것을 모두가 알게 되면 오빠도 마법사라고 여겨질 것이니 불공정하다는 말을 들을 거니까." 그런데 잠깐. "진실을 나한테 알려준다는 거지, 굳이 세상에 모두 공개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그렇다.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 내가 입을 다물면 그걸로 간단한 게 아니냐? 하지만 여동생은 그 말을 한 방에 부정했으니. "내가 오빠에게 모든 것을 말하면, 오빠에게서 비밀이 새어나가게 되어 있어. 비밀은 둘 이상이 알 경우 이미 비밀이 아니고, 오빠에게는 나처럼 자신의 마음을 보호할 능력이 없어. 그걸 익힌다면 오빠는 이미 보통 인간이 아니니 축구선수가 되면 안 되고, 그걸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결과는 같아. 오빠는 초인으로 몰려 축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될 거야." "윽." "그래서 내가 지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거야. 강제로 오빠에게 오른손의 열쇠를 맡기는 꼴이 되니까."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녀석이 나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아, 아닐 거야. 그런 게 무슨 희생이야.... 하지만 여동생은 매정하게도. "희생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어. 어쨌든 공개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않으니까, 나로서도 여러 가지로 눈이 피로해. 어느 나라에서는 학살극이 벌어지고, 어느 나라에서는 역사책이 뒤바뀌고,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보고 있으면 미치겠더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함부로 힘을 쓸 수가 없어. 그 자체가 내 정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오빠에게 오른손의 열쇠를 억지로 쥐여주는 것이 되니까." 그, 그 말은 설마..... 갑자기 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진다. 즉. "왜. 스스로의 선택이 세계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네 말을 들어보면......... 꼭 그렇다는 것 같은데. 사실 저런 힘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가 손을 뻗기만 해도 세계의 문제 상당부분은 그냥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손발을 묶는 족쇄가 있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그거 당장 부숴 !" 문제는 그 부서져야 마땅한 족쇄가,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나 말이다. 난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럼. "그냥 네 힘을 드러내지 그래?" 하지만 여동생은 나를 쳐다보더니. "그러면 오빠의 꿈은 박살이 날 거야. 여태까지 엄마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워왔던, 그 꿈이 말이야. 한 번 내 정체가 사람들에게 밝혀지면, 그걸로 끝이야. 오빠는 절대로 축구선수가 되지 못해. 오히려 오빠 스스로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정치계나 경제계로 진출해야 한다고. 엄마하고 아빠는 좋아하실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미래는 질색이다. 내가 그런 거나 하라고 공을 차고 있는 줄 아냐. 하지만 이대로라면 세계의 불행을 해결할 사람이 없다. 여동생이 만약 지팡이만 휘두른다면, 금방이라도 해결될 문제들이 말이다. 사실 그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별을 부술 정도면 대단한 힘을 지녔을 거야.' 그런데 그 힘을 감춰야 한다? 나로 인해? 그럼 나는 오른손 열쇠를 집어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면 내 꿈은..... 미치겠다. 하지만 그 짐을 덜어주는 말이 여동생에게서 나왔으니. "그건 걱정 마. 어차피 아무리 강한 자라도 모든 이의 불만을 다 해결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그에 쓸 돈은 그럭저럭 있어. 그러기 위해 플래닛 그룹을 가진 거니까." 그러니 안심하고 선택하라는 거냐. 나는 다시금 그녀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세계에 부담을 가질 필요 없이, 내 맘대로 선택하라는 거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녀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게 되잖아.' 모든 것을 얻지만, 여동생만은 얻을 수 없다는 건가. 반면에 오른손을 선택하면, 모든 것을 잃지만, 여동생을 얻는다는 거냐. 미치겠다. 걸린 게 진희라면 모를까. 물론 클라라라도 충분히 고민할만한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왜 걸려있는 상품이 하필이면. '여동생이냐.' 아이구. 머리야. 그냥 나중에 선택해버릴까? 하지만 왠지 그렇게 하면 이 녀석이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안 휘둘러. 그리고 나중에 선택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 정 못하겠으면 아예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아니, 그렇게 좋은 일이? 그러나 그 다음에 떨어진 말은 역시 여동생다웠으니. "다만 선택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나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마. 내가 우주를 뒤흔드는 힘을 지녔다고 해도, 오빠는 절대로 그걸 볼 수 없을 거야. 진실을 보겠다고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오빠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야 하는 거지. 또한." 또한? "나에게 손을 벌리면 안 돼. 평범한 여동생이나, 플래닛 그룹의 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주겠지만, '월하소녀'의 힘을 빌려줄 수는 없어. 절대로." 윽. 왠지 엄청나게 아까운 것 같은데..... 하지만 여동생은. "아무리 요구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 힘을 쓸지 안 쓸지는 내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니까." "만약 내가 억지로라도 계속 요청을 하면?" 그렇다. 세상에는 그런 힘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지 않은가.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든가, 김정일이 행패를 부린다던가, 뭐 그런 경우 말이다. 그러나 여동생은 정말 살벌한 한 마디로 이야기를 잘라버렸으니. "그럼 오빠를 죽일 거야." 윽. 나는 턱을 떨어뜨릴 뻔했다. "주, 죽인다는 거냐?" 아무리 뭐니뭐니 해도 그렇지, 그건 너무 지나친 발언이 아닌가. 하지만 이 녀석이 능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했었다. 바로 어제. 그녀는 바로 어제, 나에게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내렸었다. 잔인하게도. 하지만 그때는 구출작전을 위해서라고 그녀 스스로 말했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러니 억지로라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르다. 여동생이라는 애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그럼 오빠를 죽일 거야."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건 선을 넘은 게 아닌가. 다시 멱살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저걸 그냥 콱 !' 물론 그러기 전에 여동생이 먼저 말을 꺼냈지만. "내 힘은 그렇게 강해. 오빠는 내가 단지 별 하나를 부술 정도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데, 진실을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뭐?" "한 가지만 알려주지. 오빠의 사적인 요청으로 인해 문명권 하나가 날아갔다. 그럼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걸 계속 요구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뭐라고 물으려고 해도. 도리도리. 대답하지 않는다. 자기 할 말만 했을 뿐이지. 그것은. "자. 이제 결정해. 왼손의 열쇠를 잡아서 오빠 개인의 영화를 누릴 것인가. 오른손의 열쇠를 쥐어서 고통스러운 진실의 잔을 들이킬 것인가. 그게 아니면 선택을 유보할 것인가." 그런데 왠지 마지막 선택이 가장 좋게 보이는데. 그러나 여동생은 냉혹하게도. "겉으로 보기야 그렇지. 하지만 그건 현실도피라고. 그리고 일단 오빠가 그걸 선택하고 나서, 다시 두 개의 열쇠를 고르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할걸? 설령 여기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때는 도망칠 곳이 막혀버릴 텐데." 조언하는 거냐. 약올리는 거냐. "즉 이번에는 몰라도, 다음에 오빠가 다시 이 시간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두 열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손에 쥐어야 한다는 거야. 그때는 오빠를 이곳에 가두어 버릴 테니까." 어쩌지? 나는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인가. 행복인가. 나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그러나 출구는 오직 하나뿐. 그것은 선택을 뒤로 미루는 것. 그러나 지금 그것을 선택하면,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 속에서 축구공과, 여섯 살 때의 여동생이 번갈아 가며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난......... 쿵. "아, 안 돼. 못하겠어."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꿈도 여동생도 모두 소중하기에. 물론 내 눈앞의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여동생이 아니라, 그 여섯 살 때의 여동생을 말하는 거지만.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오빠로서 여동생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내 꿈을 향해 달려나가야 하는 거야? 어떻게 하지? 누가 좀 가르쳐 줘. 결국 나는....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적어도 이 결정은 내 운명을 좌우할 결정이 분명했다. 그런 것을 단지 몇 분만에 끝낼 수는 없었다. 도저히, 어느 것이 최선인지를 가려낼 수 없었기에. "그럼 기다릴게."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동생은 마녀 제 24화 시체들의 날 Day of the dead (1) The dead walk(죽은 자가 걷고 있다) ! 내가 살아 생전에, 이런 신문 제목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드디어 쌍어궁 일당은 다 죽었고, 이제 최대 난적인 여동생(X)만 남았다.' 이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동생(X)은 불행히도 여동생(O)이었고, 그녀는 나에게 선택을 강요해 왔다. 왼손의 열쇠를 택해서 내 꿈을 이루고 이상적인 여동생과, 애인들을 가질 것이냐. 그게 아니면 오른손의 열쇠를 택해서 이 세계의 진실을 알 것이냐. 그러나 나는 그녀의 두 가지 선택 모두를 거절했다. "왜 거부하는 거지?" 여동생의 그런 바보 같은 질문에, 나는 이렇게 현명한 대답을 했으니. "말해 주지. 내가 왼손을 택한다면, 너는 순종적이고 착한 여동생이 되겠다고 했지." "정확히 말하면, 오빠가 그런 여동생을 가질 것이라는 거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왜 그러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동생. 저 눈, 분명히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떠보는 게 틀림없어. 사악한 녀석 같으니. 그러나 나는 착하고 너그러운 오라버니답게, 그녀에게 길다란 설명을 던져 주었으니. "그게 진짜 너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알기로 넌, 오빠 때리기를 인생의 낙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런데 네가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여자아이가 된다? 그 대신 네 비밀을 하나도 안 가르쳐주고? 이거 자기모순 아냐?" 그렇다. 그녀가 나에게 순종하는 착한 여동생이 된다면, 당연히 자신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게 모순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그녀는. "즉, 내 힘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한다는 거야?" "물론이지 !" 그녀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위로 추켜세우더니, 그걸 좌우로 흔들며. "그래서 왼손을 택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고, 오른손의 경우는?" 저 녀석, 내 속을 모조리 들여다보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어. 이를 한 번 갈고. "난 내 꿈을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내가 얼마나 축구선수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그렇다. 그걸 포기하려면, 차라리 안 살고 만다. 그러니 오른손 열쇠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던 셈이다. 한참동안 고민하다 얻어낸 결론은 바로 그것이었다. 즉. "오빠가 원하는 건 결국 자신의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이루면서도, 내 정체를 알고 싶다. 그런 뜻이지?" "당연하지 !" 저 녀석이 내 친 여동생이라면, 당연히 그런 건 나에게 다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나에게 그걸 숨기는가. 내가 자기를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하지만 여동생은 여전히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그게 오빠의 의지..........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끄덕. 나는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두 개의 열쇠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동생이 그 말을 듣고 나서의 반응은. "알겠어.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엥? 저 녀석이 지금 '그렇게 해주지'라고 했나? 이건 내 예상을 벗어난 발언이었다. 분명히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나를 패서라도 자기 맘대로 열쇠 하나를 골라줄 것이라고 봤는데. 그녀는 두 개의 열쇠를 서서히 하나로 모으더니. "그렇다면....." 파앗. 두 개의 열쇠가 모두 부서지더니, 그것들이 다시 모여서..... 팡. 새로운 열쇠로 변했다. 그것은 황금이 아니라, 은으로 만들어진 열쇠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설마 값어치가 떨어지는 미래라는 뜻.... "잘 아네." 이 세상에서 황금은 은보다 비싸다. 누구나 금을 탐내지만, 은의 경우는 그 정도가 좀 덜한 편이다. 둘 다 값비싼 금속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그런데 왜 이런 열쇠를 만든 거지? 그녀는 그 열쇠를 나에게 던져주며. "오빠가 원하는 때에 이걸 사용해 봐. 그러면 내 과거를 알 수 있을 거야. 다만....." "다만?" "이걸로 오빠와는 이별이야." 헉. 그건 무슨 소리냐. 이건 내가 바랬던 미래와는 상당히 달라지잖아. 난 그저 얌전한 척 연기하는 여동생이 아닌, 진짜로 얌전하고 착한 여동생을 바랬기 때문에 왼손의 열쇠를 거절한 것인데..... 그녀는 냉혹하게 선언했으니. "내가 진실을 밝힌다는 건,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진실을 밝힌다는 거야. 오빠가 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어차피 사실은 퍼져 나가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 여동생을 둔 오라버니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수천의 별을 자기 맘대로 부리고, 우주를 일격으로 파괴하는 그런 존재로 말야." 왠지 허풍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그런 괴물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 "그러니 그런 말을 못하게 하려면, 오빠와 나의 연결고리를 끊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나는 지구를 떠날 수밖에. 내가 여기에 있는 한, 오빠는 절대로 초인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실체야 어떻든 상관없이. 그럼 오빠가 원하는 축구선수의 자리는 영원히 가질 수 없겠지. 인간이 아닌 자를 선수로 받아줄 만큼, 세상의 눈은 따스하지 않으니까." 너........... 혹시......... "하지만 내가 없다면, 오빠가 아무리 나에 대해 말을 한다고 해도 당사자가 이미 지구에 없으니 아무도 그 말을 신경 쓸 수 없겠지. 증거가 있어야 사람들은 믿어주거든. 그 가장 큰 증거가 바로 나고." .............나는 무언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게다가 내가 여기에 있으면, 마법제국에서 계속 나를 추적할 거야.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보다 강한 나의 존재는 너무나 큰 위협이 되니까. 그런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내가 지구를 나갈 수밖에 없어.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벌레이고,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들에게 손도 대지 못한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여동생을 추방한 나쁜 오라버니가 되는 게 아닌가. 그녀의 말은 그것을 확실하게 굳혀 버렸으니. "그러니 나는 지구에서 사라질 거야. 오빠가 만약 오른손의 열쇠를 택했다면, 같이 갈 수도 있겠지만, 이미 끝난 이야기이고. 오빠는 인간으로서, 축구선수로서의 삶을 원하니 그렇게 해 줄게. 그럼."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이럴 수가.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 그렇다. 난 저 녀석을 아예 추방하고 싶어서 그런 열쇠를 고른 게 아니다. 내가 그걸 고른 건 단지, 꿈을 이루면서 이 녀석의 진실에 접근해보고 싶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그럼 안녕. 좋은 축구선수가 되길 바랄게." 그녀의 눈가에 맺힌 저것은..... 설마..... 하지만 물어볼 겨를도 없이 그녀는. 슈웃. 사라졌다. 그리고 내 주위는 어느새. 파앗. 다른 소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여동생의 방, 아니 거실에서. 이건..... "미, 미인이는?" 모두가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꽈악. 주먹을 움켜쥘 뿐이다. "그, 그렇게 되었던가요." 젠장. 젠장. 젠장.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클라라의 물음이 아니더라도, 그건 확실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동생이 그렇게 말한 것이니, 확실했다. 모두들 허탈하다는 듯이. "그런 건가." "그런 건가요."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일이 전개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이 사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지만. 반짝. 어느새 내 목에 목걸이로서 걸린 은빛 열쇠가, 그렇다고 강력하게 외치고 있었다. 못된 녀석. 이런 것만 남겨두고 사라지다니. 이게 여동생으로서 할 짓이냐. 게다가 이게 내가 택한 결과란다. 못된 자식 같으니. 오빠에게 모든 책임을 미뤄두고 사라질 줄이야. "제기랄 !" 나는 소파를 걷어차 버렸다. 모두 놀라지만, 지금 그런 게 보일 상황이 아니다. 나는 굴러가는 소파를 잡아서. "젠장. 젠장. 젠장 !" 소리지른다. 소파를 내던진다. 주먹으로 팬다. 발로 찬다. 하지만 분은 풀리지 않는다. 그저 애꿎은 소파에게 화풀이할 뿐, 분노할 대상을 찾지 못한 나의 허무한 폭력은 그렇게 한참동안 계속될 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말리지 못한다. 모두들 맥이 빠졌기에. 쾅. 결국 나는 소파를 창 밖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소파가 마당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찌그러진다.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침묵만이 모두를 지배할 뿐. "으흐흑." 나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통곡했다. 옆에 뭔가가 구르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주먹만 내리칠 뿐이다. 내 주먹이 그 무언가에 부딪친다. 그것이 소리를 내면서. 팟. 뭔가가 켜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게 아무 상관도 없다. 그저 맥빠진 오라버니로서,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어딘가에서 말이 들려오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차피 일은 이 꼴이 되고 말았는데. 못된 자식. 이런 식으로 사라져 버리다니, 끝까지 날 나쁜 오빠로 만들어놓고. 한숨을 삼키던 내 귀에. "미, 미스터 문구. 큰일났어요." 클라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어깨를 잡는다. 하지만 무슨 소식이든 이것보다 더 큰 충격이 있겠는가. 나는 귀찮다는 듯이 그녀를 뿌리치려고 했지만. "TV부터 봐요." 그녀는 힘으로, 나를 그냥 잡아당겼다. 만약 그녀 혼자서만 날 끌었다면 내가 뿌리쳐버렸겠지만, 나를 당기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시내도 역시. "무, 문구야. 빨리."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TV 화면은..... "........오늘 프랑스 파리에 발생한 이상질병에 대해, 정부는 프랑스와 그 주변 국가의 국민들의 입국금지조치를 실시하고, 유럽에서 오는 모든 배에 대해 비상검역을....." 뭐야. 고작해야 그건가. 어차피 저런 식의 질병은 자주 있는 일이잖아. 왜 굳이 내가 저런 뉴스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거야. 지금 이 판국에. 그러나 클라라가 말없이, 화면을 가리키자 거기에는. [The dead walk !] 이런 글자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 쪽 방송화면을 그대로 옮기는 모양이다. 그런데 누가 저런 끔찍한 제목을 달아둔 거야. 옛날 일이 생각나잖아. 사실 그 일을 '옛날'이라고 치부하기도 곤란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지금 중계방송중인 저 기자의 옷이.... "왜 저런 차림이야?" 방독면에 장갑에, 노란색 옷으로 몸 전체를 가리고 있다. 우주복은 아니더라도 질병연구센터에서 쓰는 방호복 수준은 충분히 된다. 도대체 이거 뭐냐. 왜 산소통까지 메고.....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지금 파리 전역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습니다. 현재 주민들에게 발생한 괴질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감염자들은 시민들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은...." 무슨 건물 옥상에서 찍는 모양이다. 그 주위에는 군인들이 좍 깔려 있고, 헬리콥터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인데. '설마.' 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렇다. 그 광경은 내가 보았던 것. 내가 잊고 싶었던 것이었으므로.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 바로 그게 아니던가. 나는 귀를 막았지만. "카아악." 그 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TV 스피커를 통해서. 내 손이 저절로 내 목에 걸려 있는 은빛 열쇠를 잡는다. 그렇다면 저건.... 하지만 열쇠는 아무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무정하게 차가운 기운을 발산할 뿐. 나는 그저 무력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카아악." 좀비였다. "저건....." 클라라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는 같은 심정이었다. 비록 두 분 선생님은 저걸 직접 본 적이 없기에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문희나 연미 누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나와 클라라의 경우는, 그 이상으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끝장이야." 그것이었다. 좀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이미 경험했으므로. 저들을 막으려면 마법사가 필요한데, 우리 주위에는 마법사가 없다. 아니, 하나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면 누가 저것들을 막을 것인가. 이제 내 주위에 있는 마법사라면..... "시내야." 그렇다. 그녀라면, 마법사의 제자인 그녀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한 듯이. "안 돼요. 어제 월영 선배가 내 마법의 목걸이를 회수해 버렸어요. 자기 임무를 완수했으니 돌아가야 한다면서." 윽. 우리들 전원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다면. "선배는 그럼,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거야? 그 마법제국으로?" "네. 쌍어궁의 죽음을 보았으니, 더 이상 이 세계에 머물 이유가 없다면서요." 아악. 그나마 있던 희망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그저 TV 뉴스만 지켜보다가, 좀비들에게 먹혀야 하는 거냐. 여기엔 총도 없고 포도 없고 장갑차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서 우리가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무기가 없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 하다 못해. "군대가 출동하면 그래도 나을 텐데." 그렇다. 좀비들을 상대로, 그때 독일군은 잘 싸운 편이었다. 비록 식인소녀의 출현으로 완전히 망가지기야 했지만, 지금은 식인소녀가 없다. 그녀와 그 두목인 쌍어궁은, 모조리 여동생에게 맞아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래. 군대가 나오면 될 거야." 조금은 희망이 생겼다. 그럼 군대의 출동을 요청하면 되겠군. 하지만 우리는. "대통령이 아니잖아." 그렇다. 우리는 일반인이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아니다. 군대를 출동시켜 시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릴 권한 자체가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서 살려달라고 요청이라도 하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앞에 좀비가 나온 게 아니니, 요청해도 소용이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정부에서 봉쇄를 제대로 하는지를 기대해야....." 연미 누나의 명확한 지적에, 우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말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TV나 보면서, 무력함을 곱씹을 뿐. 이건 차라리. '독일에서 싸우던 때보다 못하잖아.' "결국, 세계 각 국은 비상을 선포하고 프랑스와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는 건가요."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못하는 클라라에게, 나는 뉴스에 나오는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이라도 하는 편이. '넌 여동생을 버린 잔인한 오빠야.' '넌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여동생을 내다 버렸어.' '네가 어릴 때 여동생을 잡아간 그 유괴범과 다를 게 뭐가 있어.' 이런 비난의 말이 내 안에서 들려오는 걸,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결국 나는 평소에 여동생에게 맞고 산 것을 보복하기 위해, 그녀를 영구적으로 지구에서 추방한 극악한 오라버니가 되고 말았지 않은가.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내가 살아남을지도 의심스럽지만.' 솔직히 프랑스에만 저런 좀비가 나타나서, 들끓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곳에도 왠지 나타날 것 같다는 그런 불안감이, 우리 모두를 휘감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무적의 만능 카드, 여동생이 없었다. 그 녀석이 있었다면 이런 사태 정도는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수습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저 신기하다는 눈으로 TV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 적어도 우리 중에 그런 힘을 지닌 자는 아무도 없었다. 월영 선배는 돌아갔고, 시내는 마력을 잃었으며, 나머지는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젠장. 누가 마법을 쓸 줄 안다면....." 당연히 그런 사람은 우리 중에 없다. 물어보고 싶어도 '잘 아는 사람'은 이미 이곳에 없으며, 하다 못해. "빌어먹을. 방까지 없애버리는 심술을 부릴 줄이야." 그렇다. 여동생의 방은 아예 사라졌다. 분명히 방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들어가 보니. "뭐야.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그쪽은 마당으로 통하는 작은 현관, 뒷문으로 변해 있었다. 친절하게 철제 계단까지 덧붙여진 채로. 이건 정말 너무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줄이야. 역시 사악한 여동생답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벌려주지 않겠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이러다가는 축구선수 되기 전에 좀비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이건 그 녀석의 공언과는 차이가 크지 않은가. 그 녀석, 분명히 자신이 사라지는 대신 내 장래의 꿈과 자신의 비밀은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게 뭐야. 잘못하며 목 달아나겠다. 나는 내 몸이 좀비들에게 씹히는 광경을 상상하며 몸서리쳤지만. "할 수 없어요. 그녀는 이제 없으니까." 클라라의 그 말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순전히 나 스스로가 선택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는. "그래." 나는 주먹부터 쥐고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 아닌가. 지금은 무의미한 TV 뉴스의 번역보다는, 할 일을 하는 편이 우선이다. 나는 즉시 내 방으로 달려들어갔고, 컴퓨터를 켰다. 지금 상황을 보려면, 인터넷으로 뉴스를 찾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시내와 클라라가 내 뒤를 따라 오고. "연미 누나하고 문희하고 선생님들은 TV 뉴스를 봐 주세요. 전 인터넷으로 상황을 살펴볼 테니까요." 그 말 정도는 놔두고 간다. 일단은 정보를 최대한 모아야,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지난번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건 이제 질색이다. 일단 컴퓨터부터 켜고. 부웅. 인터넷을 확인한다. 예상대로 그쪽에는 모조리. [프랑스에 좀비 출현. 세계 각국 비상] [프랑스에서 시체들이 움직인다. 전대미문의 참사] [프랑스에서 일어난 괴변. 영화 같은 일이 현실로] 이봐. 뭐가 전대미문이야. 이런 일은 독일에서도 일어났던 일이잖아. 아무래도 그 일은 기밀로 유지하는데 성공한 모양이군. 대단하다. 독일 정부. 역시 프랑스는 독일에 밀리는 거냐. 이런 터무니없는 중상모략까지 해가며, 나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외규장각 도서 문제만 없었어도 이렇게 프랑스에 악담을 퍼부어 대지야 않겠지만. '이 상황에서 그 책들은 무사할까.' 이런 '전혀 관계없는' 일까지 상상하며, 나는 뉴스를 보았다. 혹시. '다른 나라는?' 그게 가장 걱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저런 게 나타난다면 매우 곤란해지니까. 최소한 내가 총이라도 입수한 후에 나타나 줘. 안 나타나면 더욱 좋고. 그러나 그런 내 바램은 여지없이 깨졌으니. "모스크바에 좀비가 나타났습니다 !" 어, 언제 거기까지 간 거냐. 감탄하기도 전에 또 나오는 소식. [바르샤바에 좀비 출현] [베를린에 좀비 출현]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유럽이니, 아마 교통편을 통해 급속히 번지고 있는 거겠지. 요즘 지구촌은 하루만 있으면 지구 반대편까지도 가는 세상이니, 이건 그럴 수도 있..... [뉴델리에 좀비 출현] 에? 뭐야. 거긴 인도지, 유럽이 아니잖아. 설마..... 벌어진 입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에. [베이징에 좀비 출현] [도쿄에 좀비 출현] 뭐, 뭐야. 왜 이렇게 사방에서 연발로 터지는 거야. 그럼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 뉴스를 보니. [한국정부. 한국에는 좀비가 없다고 발표] 진짜냐. 그랬으면 좋겠지만, 정치인 중 하나인 진희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자, 당연한 결론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벌써 나타난 모양이군.' 이렇게 정부를 불신하면 안 되지만, 그 사람이 있는 이상 불신할 수밖에 없다. 어디 보통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뉴스의 답글에는. "어?" 왜 답글이 하나도 없는 거야? 이거 뭔가 이상하네. 답글 자체를 막아버렸어. 이건 혹시..... 그때 TV를 보던 선생님들에게서 비명이 터졌으니. "무, 문구야 ! 큰일났어 !" 나는 허겁지겁 TV앞으로 달려갔고, 거기에는. "그쪽이 아냐. 저쪽 !" 선생님들의 손가락을 따라, 나는 창 밖으로 눈길을 보냈고, 거기에는. "카아악." 아주 낯이 익은 물건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으윽."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건 바로 좀비였기에. 그것은 하필이면. "크으으." 우드득. 그 좀비는 분명히 길에서, 사람의 고기를 씹어먹고 있었다. 아니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분명히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고, 좀비가 그 위에서 사람을 뜯어먹고 있었으니까. 이런 빌어먹을. "카아." 에. 왜 이렇게 되는 거냐. 왜 좀비가 벌써 서울시내에 나타났냐고. 여동생이 떠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나오냔 말이다. 그리고 그 좀비가 왜. '우릴 쳐다보는 거야.' 이거 큰일났네. 무기 될 만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녀석을 죽이지?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녀석들을 죽이는 방법은 총도 아니고 포도 아니며, 오직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녀석들은 쪼개지고 쪼개지고 쪼개져도 내장 하나까지 우릴 잡아먹으려고 기어올 테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신통방통한 물건이 있을 리가 없다. 하나 만들면 그만이지만. '가스통이 없어.' 없는 걸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하나. 뭔가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길 바랬지만. "카아악." 그 전에 좀비가 이쪽을 쳐다보고 말았다.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쪽으로 슬슬 걸어오더니. 쾅. 녀석은 주먹으로 우리 집 대문을 쳤다 ! 아무래도 맛있는 먹이를 발견했으니,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다. 이거 곤란한데. 저런 게 우리 집에 들어오면..... "저, 저게 좀비?" 꼬마 선생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생님은 저런 녀석을 처음 보시는 게 분명하니까. 영화나 뉴스로는 보셨을지 몰라도, 실제 상황으로 보신 적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 저 녀석이 우리나라에 나타난 좀비로는 최초일 걸..... '아닐 지도 몰라.' 나는 더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극히 당연한 생각을 억눌렀다.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그런 생각까지 하면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녀석 하나쯤은 무섭지 않다. 저런 녀석들 두 세 마리쯤은, 맨손으로도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고층건물에서 그랬다는 거잖아.' 여기는 기껏해야 단독주택, 2층 짜리 집이다. 여기서 녀석을 창 밖으로 밀어 떨어뜨려 봐야, 머리가 터지는 사태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게다가 좀비라는 녀석의 특성을 감안하면, 몸이 쪼개져도 그 내장들이 다시 기어올라올 것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을 상대할 방법은 역시. "불을 질러서, 태워버리는 수밖에 없나." 만약 좀비가 여러 마리라면, 아예 대문을 부수지 못하게, 지금 화염방사기라도 가져와서 불을 지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집에 그런 무기가 있었나? "없지....." 우리나라는 미국이 아니다. 민간인이 총 같은 흉악한 무기를 가져도 되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여기가 총기소유가 가능한 나라라면 몰라도, 여기선 그런 방법을 써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어차피 총으로 쏴봐야. "키익." 내장들이 이렇게 외치며 달려들면 속수무책이지만.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녀석을 불태울 수 있을까. 아니, 잠깐. "꼭 불태울 필요는 없잖아?" 중요한 건, 좀비가 몇 마리냐는 거다. 나는 클라라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내 의사를 알았는지 재빠르게 창가로 달려가더니. "한 마리밖에 안 보여요." 에? 생각보다는 적네? 그렇다면 걱정할 건 없다. 다른 곳에서 느닷없이 좀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알겠어. 문희야. 새끼줄이나 끈 같은 거 없어?" 우리 집 물건을 남에게 물어보는 건 웃기는 짓이지만, 이 녀석은 어쨌든 소꿉친구라는 거창한 명함을 갖고 있다. 그러니 어지간한 물건의 위치 정도는 다 안다. 비록 여동생 급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잊자. 잊어.' 지금은 그 녀석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미 없는 최강의 존재를 떠올려봐야, 나오는 게 없다고. 일단은 저 좀비를 잡아야 하는 게 순서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희생자는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그건 정말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저 녀석은 어디서 떨어진 걸까. 혹시 좀비로 의심되던 사람을 데려가다가, 구급차에서 좀비로 각성해서 날뛰고, 그래서 튀어나온 게 아닐까. 지레짐작은 지금 도움이 되는 게 아니지만..... "여기 있어. 그런데 이걸로 뭘 하려고 그래?" 영문도 모르면서, 일단 새끼줄을 내놓는 문희. 그녀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 간다.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너..... 설마...." 그러나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한 마리만 있다면 좀비를 잡는 건 어렵지 않지만, 여러 마리라면 문제는 싹 달라지니까 말이다. 그리고 좀비에 대해 그나마 아는 건 여기에서는 나와 클라라뿐이다. 문희나 연미 누나는 좀비들의 도시에서 도망친 경험은 있어도 그들과 정면으로 대결한 적은 없고, 나머지는 아예 좀비를 본 적도 없다. 그러니 이 경우에는.....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어 !" 으. 벌써 대문을 부순 거냐. 담임 선생님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나는 상황을 알았다. 그런데 대문이 왜 저렇지? 전혀 안 부서졌는데..... "..........!" 이런. 문을 안 닫아 놨잖아 ! 이렇게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럼 만약 좀비가 더 있다면. "카아악." 떼거지로 몰려올 게 아닌가. 우리 모두는 달달 떨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녀석은 현관문까지 박차고 들어올 테니까. 그러니 그 전에. 착. "그래. 어디 해 보자. 좀비면 다냐." 어떻게든 할 수밖에. 좀비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오더니, 잠기지도 않은 현관문을 건드리고. 끼익.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모두들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저런 녀석들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했었다고. 그래도 나는 명색이. '지상 최강, 아니 우주 최강 미인이의 오빠라고.' 이젠 사라져 버린 여동생이지만, 그 녀석이 만약 어디에선가 나를 보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겁을 먹고 벌벌 기는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히 비웃을 것이다. 그거 하나 못 잡냐고. 그 비난이 과하다고 변명하고 싶어도, 바로 얼마 전에 독일에서 좀비들을 맨손으로 잡은 적이 있는 내가, 달아난다면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러니. "와 봐 !" 이 새끼줄로, 녀석을 어떻게 할 수밖에. 좀비는 나를 발견하더니. "카악." 현관에서, 바로 거실로 달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걸 내가 가만 두겠냐. 나는 녀석이 나를 향해 뛰는 것을 보자마자. 탁. 앞으로 뛰었다. 좀비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내 돌진에 당황했지만, 먹이를 앞에 두고 달아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녀석 역시 나에게 뛰었고, 그것이 녀석의 패인이 되었다. 그런 움직임으로 나를 잡으려면. "100년은 일러 !" 그 무시무시한 여동생에게 매일 맞으며 단련된 덕분인지, 좀비의 움직임은 정말 느렸다. 하긴 시체가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어. 나는 그런 건방진 생각과 더불어. 탁. 우선 녀석의 다리부터 걸고. 아무리 시체라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좀비가 날아다니는 건 불가능하다. 고로. 우당탕. 아까워라. 거실 바닥이 다 더럽혀지네. 나는 녀석의 등뒤로 돌아가서, 일단 녀석의 팔에 끈을 감아, 묶어 버렸다. 좀비가 엎드린 채 팔다리를 움직여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금 장난 하냐." 여동생의 그 현란한 그라운드 테크닉에 비하면, 이건 애들 수준도 안 된다. 그 녀석의 목조르기와 팔 꺾기, 다리 꺾기에 당해본 경험에 따르면,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동으로 나온다. 초보가 좀비가 되어봐야. "역시 초보라고." 나는 10초도 안 걸려서, 좀비의 팔다리를 묶어 버렸다. 그리고 당연히 팔과 다리가 묶인 상황에서 좀비가 아무리. "카아악." 발악을 해봐야, 위험한 건 입밖에 없다. 그럼 입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싶으면..... "목부터 묶어야겠지?" 나는 녀석의 목을 끈으로 묶고, 그걸 등뒤로 젖혀진 팔로 이어서, 끈을 한바퀴 빙 돌렸다. 그리고. 꽈악. 완전히 묶어버렸다. 이렇게 하면 녀석은 목을 움직일 수 없다.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목이 뒤로 젖혀졌으니까. 마무리는. "문희야. 수건 두 장만 가져와." "뭐?"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그녀는 일단 마른 수건 두 장을 욕실에서 가져왔다. 나는 그것을 겹친 후, 반으로 접어서. 콰악. 좀비의 입을 막아 버렸다. 즉 수건을 녀석의 입에 물리고, 그걸 빙 둘러서 묶은 거다. 수건이 입에 들어간 좀비는 입으로 사람을 물 수가 없게 되자. ".........!" 수건을 열심히 물어뜯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뜯어질 것 같으냐. 오히려 수건은 부드럽기 때문에, 물어뜯어도 그 힘으로 잘리지 않는다고. 가위가 아닌 이상. 그럼 다음에 할 일은 바로. "연미 누나. 경찰 불러요." 삐뽀. 삐뽀. 범죄도 안 저질렀는데 경찰차 몇 대가 우리 집에 나타났다. 구급차 한 대도 포함해서. 그들의 임무는 바로 좀비 수송, 연미 누나가 전화하고 5분도 안 지나서 나타난 것이다. 물론 평소라면. "경찰 아저씨. 여기 좀비가 나타났어요. 지금 붙잡아두고 있으니까, 빨리 와서 가져가세요." 이런 내용의 신고를 했다가는 바로. "이봐. 아가씨. 농담도 작작 하라고." 이런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잇달아 터지는 좀비 발견소식은 그들의 두뇌를 좀 유연하게 만들어 주었고. 우당탕. 쾅. 경찰들도 생각보다는 빨리 와 줬다. 뭐 일이 다 끝난 후에 오는 거야 그들의 습성이니 할 말 없지만. 하지만 경찰만이 우리 집에 온 건 아니었다. 그들이 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쾅. 우당탕. 무장을 한 군인들도 나타났다. 이건 뭐냐. 또 군인이냐. 독일에서 본 이후로 다시는 안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록 그들에 비해 초라한 행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인이다. 그 눈빛만큼은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 그들은 군인답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척. 경례했다. 뭐냐. 지난번에 내가 독일에서 좀비와의 싸움을 끝낸 후, 군인들이 나에게 취했던 태도를 연상시킨다. 그때 그들은 나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어린 용사라.' 뭐 좀비들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다는 사실이 조금은 알려졌기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지만. 이번에도 그러는 건가. 그런데 축구선수가 아니라 이런 쪽으로 알려지는 건 정말 달갑지 않은데.... "저희들과 같이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에? 우리 모두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군인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갑자기 왜 같이 가자는 거야. 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고. 그러나 군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오더니. "이번 일에 대해, 증인이 되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증인? 끼이이익. 여, 여기는 어디냐. 이곳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곳을 모를 수도 없고, 몰라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곳은 다름 아닌. "국회다." 그렇다. 나는 국회의사당에 온 것이다. 좀비를 생포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로 인해 나는 이곳에 와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왜 내가 이런 흉악한 곳에 와야 하는 거냐. 그러나 군인들의 말로는. "힘드시겠지만, 직접 좀비를 만난 사람의 증언이 지금 필요합니다. 국가의 위기이니,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봐. 이봐. 국가의 위기라는 말에는 동감하겠어. 그러니 내가 이번 일에 대해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 한다는 말에도 동감하겠어. 하지만. "그럼 장소가 틀린 게 아닐까요?" 그렇다. 내가 지금 가야 할 장소는 이쪽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날 부른 건 아마도 독일에서의 일과, 이번에 좀비를 생포한 일에 대한 일을 물어보려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이 사태에 대비하여 불철주야 일하고 있을 대책본부나 국방부, 경찰청, 청와대 등에 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그런데 왜 이쪽으로 나를 데려온 걸까. 나는 질문을 하고 싶다는 듯이 군인들을 쳐다보았지만. "저희들은 그저, 당신을 이곳에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아. 이 사람들은 군인이었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그러니 나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만 여기에 온 게 아니라. "몽땅 다 오는 건가요." 그렇다. 나와 같이 온 사람들은 문희와 시내와 클라라와 연미 누나와 두 분 선생님. 간단히 말해서 다 온 거다. 모조리 다. 시내나 클라라는 상당히 침착한 편이었지만, 연미 누나는 그런 끔찍한 괴물을 눈앞에서 본 경우가 별로 없으므로 아직도 몸을 떨고 있었다. 하긴 누나는 그때, 독일에서 좀비와 피 튀기는 전쟁을 하지 않았고, 그저 구경만 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두 분 선생님의 경우는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누나의 경우는 좀비의 얼굴을 본 적이라도 있었지만, 두 분은 그런 경험도 전혀 없으니까. 그런데 문희 녀석. "와. 여기가 악의 소굴이야?" 너,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어떻게 하냐.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킥." 윽. 군인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있어. 하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반론을 꺼낼 수 없기야 했지만.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일행 중에. '국회의원의 따님이 계시잖아.' 그러나, 그 당사자인 연미 누나의 얼굴을 본 나는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으니. ".........맞는 말인걸." 하긴 국회의원의 따님조차도, 그런 절대 진리를 부정할 순 없겠지요..... 국회. 사전적인 의미로는 국민이 뽑은 대표들이 모여서 나랏일을 토론하고 법을 만들며 폐기하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의미로 쓰이는 낱말이 아니다. 교과서에는 그런 식으로 적혀 있을지 몰라도, 실제 의미는.... '넘어가자.' 난 지금부터 저기로 증언을 하러 가야 한단다. 왜 내가 가야 하는 거냐. 물론 단지 좀비를 생포한 경험만 있다면 저기에 갈 이유도 자격도 없지만, 내가 독일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당연히 잡혀가야 하는군.' 나는 그때, 총을 들고 좀비들에 대항해서 싸웠다. 좀비들을 죽이려면 그들의 몸을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좀비들을 만들어냈던, 식인소녀와 맞서서 싸웠던 경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좀비들을 물리친 존재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게 바로....' 불행히도 내 여동생이란 사실이다. 물론 국회의원들이 그걸 알고 날 부른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독일에서의 일 정도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지옥의 도시에서 홀로 생환한 한국인 청년이 있다. 이 정도로는 알려져 있겠지. 물론 내 여동생이 어떤 녀석인지 저들이 안다면. "야 ! 이 자식아 ! 빨리 여동생 불러와 ! 이 문제를 해결하란 말이야 !" 이렇게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다. 그건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으로서는 손대기 힘든 괴물이 날뛰고 있다. 그런데 그 괴물을 깔끔히 처치할 수 있고, 괴물에게 물려 감염된 사람까지 모조리 치료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그 존재는 바로 내 여동생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겠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동생은 내 옆에 없는데....' 그렇다. 그녀는 나와의 인연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세계는 이 모양이 된 것이다. 이걸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해도 되는 걸까. 혹시 이건 그 녀석이. '짠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재난을 막을 수 없다. 여동생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좀비보다는 센 게 확실하니.' 어쨌든 별 하나를 내 눈앞에서 파괴해버린 녀석이다.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그 녀석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없다. 내 손으로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동생에 대해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알려지면. "야. 이 자식아. 그런 사람을 쫓아내? 죽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사태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잠깐. '나,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건가?' 내 목에 걸린 은빛 열쇠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차가운 감촉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만약 이 일이 그 식인소녀와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의 손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그럼 끝장이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식인소녀의 힘이라면 나도 이미 목격했기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증언대에 갈 때까지, 나는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큰일났다.' 죽음의 공포가 내 어깨를 서서히 짓누르고 있었다. "이번 사태를 맞이하여 정부는 이미 공항과 항만을 폐쇄하고, 위험지역에서 오는 모든 요인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분간 무역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장관이신가요. 어쨌든 국방장관인지 외교부 장관인지 국무총리인지 모르시는 분이 열심히 뭐라고 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 분의 말을 정리하면 결국. "우린 할 일 하고 있습니다.' 였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일을 그들이 제대로 한다면, 우리 집에 쳐들어온 좀비는 대체 뭐냐. 누가 설명 좀 해 줘라.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건 우리만이 아니었던지. "이봐요. 총리." 쾅. 국회의원 하나가 주먹을 휘두른다. 멀쩡한 책상만 부술 셈인지. 그가 뭐라고 떠든다. "외부와의 교역을 차단하고 여행객을 막을 경우, 도대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 생각입니까. 우리나라는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가인데, 석유수입과 수출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어요. 교역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검색을 철저히 하는 게 가능합니까. 게다가 조금 전에 서울시에 좀비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이래서는 우리나라의 해외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체불명의 질병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니까, 당장 각국에서 우리나라의 수출을 막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대부분의 수출물량이 세관에 묶여 있어요. 그에 대한 대책은 있는 겁니까?" "조만간 곧 대책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건 좀비가 아니라 다른 병의...." "이봐요 ! 구차한 변명만 하지말고, 그게 다른 병이라는 증거를 대 봐요 !" 호오. 국회의원치고는 말을 제대로 하는데. 하지만 나는 별로 그걸 칭찬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희 아버지라니, 이런 젠장.' 그렇다. 저기서 떠드는 의원님은 하필이면, 진희 아버지였던 것이다. 저 인간이 저렇게 말을 한다는 건, 분명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는 게 불 보듯 뻔한 건데. 그리고 저 사람치고는 너무 착하게 굴고 있어. 분명히 그 다음은.... "그럼 증인을 신청하지요. 조금 전에 바로 좀비를 잡은 현장에서 데려온 증인이 있으니까요. 나와 주세요. 연 문구군." 저, 저 인간. 무서운 놈이다. 나하고는 그렇게도 사이가 좋지 않은데, 여기서는 태연히 내 이름을 부른다. 역시 저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건가. 그래도 호명되었고, 사회자께서. "그럼 나와 주십시오." 그러시기에, 나는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 사회자가 국회의장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후우."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곳에서 증인이나 되어야 하는 거냐. 그것도 하필이면 진희 아버지 같은, 극악무도한 인간의 지명으로. 저 인간은 대체 나를 가지고 뭘 꾸미는 걸까. 연미 누나를 비롯해서, 모두가 날 쳐다보고 있다. 저기에 있는 방청객들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 나오면 또 몰라. 하필. 촤르르르. TV 카메라까지도 날 비춰주고 있다 ! 이거 최소한 전국에 방송되겠는데. 말실수라도 하면 웃음거리가 되겠군. 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천천히 연단으로 올라왔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그리고 질문이 시작되었다. "증인은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을 서약합니까?" "네." 오른손 들고 일단 서약. 그 다음에는 (하필) 진희 아버지의. "그럼 질문하지요. 증인은 오늘 낮 1시 20분에, 정체불명의 질병에 걸린 감염자를 만나셨습니까?" "네." "그것으로 됐습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저 인간, 평상시에는 참 예의도 바르게 나와요.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가 주위에 얼쩡거릴 때만. 그래도 일단 대기상태이니 내가 할 말은 없다. 진희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는지 구경이나 할 수밖에. "보시다시피, 실제로 좀비를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정부의 이번 정책은 실패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벌써 차단막에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감염자의 수송을 구급차 정도로 한 것도 잘못이지만...." 그리고 나하고 관계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말을 줄여보자면, 정부는 이미 좀비가 된 감염자를 발견한 상태이고, 그걸 실어 나르다가 우리 집 근처에서 사고로 차가 뒤집혀서, 좀비가 기어 나왔다는 소리다. 아이고. 한심해라. 사고를 내려면 다른 데서 내셔.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잠깐. 다른 사람이 좀비를 상대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나?' 없다. 단언하는데, 절대로 그런 건 없다. 보나마나 좀비에 대해 모르고 접근하다가, 그냥 잡혀서 뜯어 먹힐 것이고, 경찰들은 총을 쏘다가 내장만 땅바닥에 떨어뜨려서 적을 늘릴 거다. 그러면 그 후에는........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면 좀비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녀석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형국엔. '이런 빌어먹을.' 결국, 내가 그를 발견한 게 천만다행이란 소리가 아닌가. 약간 안심하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좀비 소리는 아닌데, 그럼 이건 뭐야. "그러니 우리는 국무총리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를........" 그런데 왜 지금 그 소리가 나오는 거지. 지금 급한 건 좀비 대책 아냐? 어느새 진희 아버지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다른 의원이 발언하고 있는데, 왜 총리해임결의안이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게다가. '이 사람들, 정작 중요한 건 묻지도 않고 있어.' 독일정부에서 연락도 안 받았나. 내가 좀비들과의 대결에서 뭘 했는지는, 그쪽에 미흡하나마 기록이 되어 있을 텐데? 그런데 왜 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거지? 물론 내가 귀국했을 때도 그냥 넘어가 버린 인간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이런 중대한 사태에서는, 좀비와 상대했던 사람의 경험을 묻고 지나가야 하는 것인데.... "아. 자네는 이만 내려가도 좋네." 이 자식들이. 나는 분노했다. 결국 나는 정략에 이용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갑자기 열이 확 받친다. 이 녀석들이. 국민을 대체 무엇으로 취급하고 있어. 나는 화가 나서. "아직 못 가겠는데요. 좀비를 물리칠 방법을 아는 사람으로서." 아무래도 난 미쳤나 보다. 이런 소리를 탁 해버리다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 하필 마이크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게 내게 행운인지 불운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말 한 번에. "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좀비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의 경험을 말하려고 했다. 독일에서 겪은 그 끔찍한 전쟁경험. 총으로 쏘아서는 좀비의 몸이 찢겨질 뿐, 상대를 죽이는 데에는 별 효과를 거둘 수 없으며, 오직 불로 태워버려야 좀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머리를 쏴도, 배에 구명이 뚫려서 내장이 쏟아져 나와도 걸어다니며 사람을 노리는 녀석들에게, 보통 방식이 어디 먹히겠는가. 하지만 내가 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삐. "죄송합니다. 증인에게는 지금 말씀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만 자기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게 뭐야. 아예 마이크를 꺼 버렸잖아. 나는 이를 갈았지만, 마이크가 꺼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동생이라면 그 특유의 큰 목소리로 뭐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나는 무기력하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이 막혔다.'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총리 해임 결의안을 먼저..." "무슨 소리. 지금은 비상사태입니다. 우선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초동 대응부터 이미 실패를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좀비들이 대낮에 그렇게 태연하게 걸어다닐 수 있습니까. 정부에서 이송하던 구급차가 뒤집히고, 거기서 좀비가 나오게 내버려두다니요. 안 그래도 다른 나라에서는...." "이봐요. 우리나라는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항만과 공항은 철저하게 검역에 들어갔어요." "철저한 검역의 결과가 뭡니까. 이대로라면 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수출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 정부를 흔들어도 되는 겁니까." "너무 못하니까 따지는 거 아닙니까. 이건 무능함이 지나쳐요." 힘이 없다는 게 이런 뜻일 거다.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증언자석에 앉은 채로, 국회의원들의 말싸움을 구경할 뿐이었다. 대체 난 여기에 왜 온 거야? "정치인 들러리 서려고." 문희가 신랄하게 지적한다.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싶어도, 실제로 전개되는 상황이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쯤 대책을 논의하는 걸까. 아까부터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상황만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총리 해임 결의안을 먼저..." 이거, 아까 들은 소리잖아? 이 사람들, 발전이란 게 없구나. 양측 모두 이번 사태에 대한 문책 문제만으로 놓고 머리를 굴릴 뿐, 정작 좀비를 물리칠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런 논의를 할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이라는 거지." 시내의 평이었다. 그 말이 틀리다는 생각을 하고 싶다. 연미 누나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러나 누나 자신의 말은. "으. 창피해 죽겠어." 그랬으니까. 하긴 자기 아빠가 포함된 집단이 무능, 비능률, 사악의 대표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해 좋아할 딸은 없을 거다. 진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 바보들이 !" 이렇게 외치며 벼락을 때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지금 그 녀석은 이 자리에 없으니까. 뭐 국회의원들의 목숨보전을 위해선 잘 된 일인지 모르지만..... "미인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클라라.....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 줘. 하긴 그녀에게 여동생은 영웅이자 천사님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기야 하다. 그런데 여동생이 이 자리에 있다면, 국회의사당 전체가. 폭삭. 이렇게 될 게 아니냐. 이러면 나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만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즉.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연 미인양이 전체득표의 70%를 얻어, 압도적인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건 제발 하지 말아 줘.... 갑자기 머리가 뽀개질 듯하다. 앞으로 나가면 국회의원이고, 뒤로 물러서면 여동생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이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내가 쫓아냈으니까. 아니,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니다. 난 어디까지나 두 개의 열쇠 중 어느 하나도 택하기 어렵다고 한 것뿐이다. 굳이 뒤로 돌아서서, 지구를 떠나간 것은.... "미인이가 있었으면...." 서, 선생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두 분 모두.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불러봐야, 어차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미인이라면, 그런 좀비들은 한 번에 처치했을 텐데." 쿵. 드디어 나오는 그 말. "문구야. 미인이를 데려올 방법이 없겠니?" 하, 하필이면 꼬마 선생님이 나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 더, 던지지 마세요. 그런데 이 분, 혹시 여동생이 사라진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요. 그건 아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분명히. '다 알고 계셔.' 아무래도 여동생 그 녀석은, 내가 두 개의 열쇠를 놓고 고민하는 걸 모두에게 다 보여줬던 모양이다. 이건 분명히.... "문구야. 지금은 그 애의 힘이 꼭 필요해." 서, 선생님. 아무리 제가 그 녀석의 오빠라지만, 전 그런 재주가 없는데요. 이미 지구를 떠난다고 공언한 녀석을 어떻게.... "부탁해. 지금은 미인이의 힘이 필요해." 시, 시내야.... "문구야." 여, 연미 누나.... "문구야." 우리 담임까지.... "문구야." 무, 문희야. 너마저..... 하지만 이젠 끝이라고, 그건 절대로 무리라고.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 녀석을 찾아온다는 말이냐. 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녀석, 분명히 내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자신의 진실도 말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뭐냐. 그 대신 자신이 지구를 떠난다고 해놓고, 결국 결과는 세계 전체가 멸망..... '아냐.'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내 옆에 있는 모두가, 그걸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여동생이 없다면, 좀비들을 물리칠 방법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쾅. 금방 증명되고 말았다. 의자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지는 국회의원 보좌관 중 한 사람. 그를 향해 달려가는 국회 경비원들. 그 다음은.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를 알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다가가면 안 돼요 !"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자리가 나에게는 너무 멀리 있던 데다가, 그러기에도 너무 늦었으니까. 경비원들이 부축하여 그를 일으키려는데. "카아악." 파국.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드득. "아악 !" 여동생이 이 땅에서 사라졌을 때에. 좀비라는 것은 남의 일이다. 좀비에 대한 것은 정부에 맡기고, 우린 그저 총리 해임 결의안이나 통과시키면 된다. 지금의 위기는 그냥 물 흐르듯 넘기면 그만이다. 항만과 공항을 봉쇄했으니,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 여야 의원들의 생각은 틀렸다.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붕괴를 방치했다. 그 결과로 내 눈에 펼쳐진 것은. "아아악 !" 지옥이었다. 첫 번째로 쓰러진 사람이 일어나서 사람을 습격하고. "으아악 !" 일단 한 명이 물리자, 혼란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없으리라고 생각되던 감염자가, 국회의사당에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병이 이렇게, 멀쩡한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다는 것을 나는 이미 독일에서 보았었는데. 그때도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 감염자가 숨어 있었고, 그들이 헬기에서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을 눈앞에서 보았으면서도 미리 경고를 하지 못하다니. "한심해. 오빠. 그것도 못해? 내가 없으면 역시 오빠는 아무 것도 못하는구나." 여동생이 그렇게 말해도, 변명할 수 없는 바로 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일단 한 명이 물리자, 여기저기서 다른 감염자들도 움직였다. 주위의 사람들을 무차별로 물어뜯는 좀비들. 국회 경비원들이 권총을 뽑아들지만. "쏘지 마 !" 어느 놈이야. 어차피 총을 쏴도 소용이 없다는 건 알지만. 누군지 몰라도 탁상물림이 분명하다. 지금 죽게 생겼는데 누가 그런 명령에 따르겠는가. 경비병들은 그 무책임한 명령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안 돼 ! 총은 안 돼 !" 그게 만약 좀비의 성질을 알고 외치는 명령이었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명령은 순전히. "어떤 경우에도 발포는 허락할 수 없어 !" 미쳤구나. 범죄자들이 칼을 들고 덤벼도 총을 쏘면 안 된다고 하더니, 여기서도 그러는 거냐. 결국 경비원들은 경찰봉을 꺼내서 좀비를 후려갈기지만. 뻑. 뻑. 뻑. 그건 좀비의 목도 꺾어놓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시체인 자들을 아무리 쳐봐야, 그건 헛수고인 것이다. 그 무모한 도전은 곧 좀비들의 반격을 받았으니. 탁. 좀비는 경찰봉을 붙잡더니, 그대로 경비원을 끌어당긴 것이다. 단순한 힘이라면 보통 사람에게 별로 뒤질 게 없는 좀비의 역습에, 경비원들은 봉을 놓치고 만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총을 뽑아든다. 설령 봉을 놓치지 않은 경비원들도. "소용이 없어 !" 권총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탕. 좀비 하나가 총에 맞는다. 하지만 그 좀비를 쓰러뜨리기에, 권총은 터무니없이 약한 무기였다. 좀비는 뒤로 휘청거렸지만. "크으." 다시 자세를 바로하더니, 경비원에게 덤벼들었다. 경비원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진다. 그리고 그의 목이.... 우득. "아아아악 !" 비명이 국회의사당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그 비명은 사람들의 공포감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모두가 일제히. "아아악 !' 국회의사당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때려도 총을 쏴도 끄떡하지 않는 좀비. 그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바보들이. 무더기로 덤벼들어서 팔다리를 붙잡은 후 묶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겁을 먹고 달아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저들은 방법을 몰라.' 나는 좀비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제압할지, 알고 있다. 하지만 방청객들은 그걸 모른다. 그러니 그들은 달아날 수밖에 없다. 상대를 모르니까. 비록 이 상황에서 달아난다는 것이. "카아악."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사람의 고기를 원하며 덤벼든다. 내가 처음에 저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무서워했던가.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렇게 달아나는 것이겠지. 탁탁탁탁. 정신 없이 달려가는 걸 보니 말이다. 문제는 사자 한 마리에 겁을 먹은 영양들이 달아날 때, 피해를 보는 녀석이 하나씩은 생긴다는 점이다. 바로 그런 경우가 내 앞에서 발생했으니, 맨 뒤에서 도망치던 사람이. 우드득. "아악." 그대로 물렸다. 어깨와 목 사이를 물린 그의 몸이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요동치다가, 그대로 쓰러진다. 다른 좀비들이 그에게 몰려든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는 그의 육신. 또 다른 좀비들이 더 멀리에 있는 사람들을 습격한다. 물린다. 쓰러진다. 뜯긴다. 죽는다. 그리고 다시. "크아악." 일어선다.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적으로서. 비록 몇 사람은 좀비에 대항해서 싸웠지만. 퍽. 좀비가 주먹질로 쓰러질 정도면, 내가 굳이 녀석을 끈으로 묶어서 꼼짝못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몇 명은 의자를 집어들고. "다, 다가오지 마 ! 오면 친다 !" 순진하게도, 그 말을 좀비가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당연히 좀비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의자가 날아간다. 텅. 좀비의 몸이 흔들린다. 그는 발악적으로 다른 의자를 집어들지만. 우드득. "으아아 !" 좀비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이미 죽은 몸이므로. 그저 사람을 잡아서 먹고 싶다는, 그런 욕망만이 남은 존재일 뿐이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아무리 저항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녀석들을 아예 태워버리지 않는 이상. "이대로 끝나는 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시체들로 뒤덮일 것이다. 참으로 멋진 종말이 아닐 수 없다. 녀석들을 죽일 방법이 있는데도, 그걸 아는 사람이 있는데도, 내가 발언할 기회를 1분이라도, 아니 10초만이라도 주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어.'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축구선수의 꿈은 사라지고, 시체들 사이에서 삶을 위해 도망 다녀야 하는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걸까. 그렇게 하려면 일단 여기서 달아나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모두를 데리고 나가야 해.' 그때처럼 좀비들 사이에 혼자서 남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내가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건 내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여동생이라는 애는 의리도 없이 혼자서만 달아나 버렸으니 이제 내가 지킬 가족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아직 남아있었고, 나는 그 친구가 지우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그 녀석이 옆에 있다면. '보호해주고 싶지도 않았을 거야.' 뭐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지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옆에 있는 소녀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찰칵. 찰칵. 아악. 졌다. 문희 너, 이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거냐. 솔직히 우리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몰라도, 그렇지 못하면 지금의 상황은 절대로 신문에 실리지 않을 것 같은데.... '너, 그때 그러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어버린 거냐.' 무서운 녀석. 세 마리의 좀비가 카메라를 들고 찍는 문희의 모습을 보았고, 곧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에라이." 어쩌겠는가. 막아야지. 나는 소꿉친구를 잘못 둔 것을 후회하며, 좀비들 앞에 나섰다. 이것들을 모두 나 혼자서 상대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국회 경비원들은 날 도울 수 없었다. 일부는 이미 좀비에게 당해 목을 물어뜯기고 있고, 나머지는. "너희들........." 국회의원들의 대피를 돕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한가하게, 정말 상황 모르는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던 주제에 도망갈 때는 무지하게 빠르다. 여동생이 보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저, 그냥 국가대표 육상선수로 전업하시는 게 어때요?"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비상 탈출구로 나가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경비원들의 안내까지 받아가며. 가만 있자. 그럼. '저 뒤만 따라가도 달아날 수 있잖아?'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국회 구경을 하던 방청객들 몇 명이 그쪽으로 달려들어간다. 한 두 명이 아니라, 수 십 명이. 그러나. "야 ! 좁아 ! 빨리 나가 !" "들어오지 마 ! 우리도 못 나간다고 !" "저리 가. 저리 가." 그럴 줄 알았다. 사람들은 금새 통로를 메웠고, 국회의원들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쪽 통로는 안 되겠다고 내가 마음먹는 순간. "저리 가라 ! 이것들아 !" 퍽. 시민 한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뒤로 떨어졌다. 이건 뭐냐. 그의 턱은 박살이 나 있고, 잠시 버둥거리다가 곧 늘어지고 만다. 설마 죽었냐. 내가 그걸 확인하기도 전에. "카악." 나를 향해 다가오던 좀비 세 마리가, 일제히 그쪽으로 가더니 맛있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일단 나로서는 위기를 넘긴 셈이지만. 퍽. "우아악 !"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건 뭐냐고.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나는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그렇다. 그건. 퍽. 퍽. 퍽. 국회의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초인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민 한 사람은 국회의원에게 잡혀서 목이 부러지고, 또 한 사람은 명치를 얻어맞은 후 업어치기로 날아가고, 또 한 사람은. "꺄악 !" 아니, 도대체 저 자는 뭘 하고 있는 거야. 그 의원은 뻔뻔하게도 여자 방청객의 가슴을 우악스럽게 만진 후, 당황하는 여자의 멱살을 잡고 내팽개쳐 버렸다. 저건 성추행 아냐? 물론 국회의원은 그래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 나는 그제야, 여동생이 얼마나 신사적인지 알 수 있었다. 최소한 그 녀석은 저렇게 난장판을 만들지는 않았어. 말로만 듣던 국회의원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면. "진희 아버지는, 그래도 나은 축이었구나...." 그 인간도 최소한 저 지경으로 사람을 패지는 않았는데. 분명히 방청객 수는 월등히 많은데, 이상하게 그보다 더 적은 국회의원들에게 밀리고 있다. 역시 국민을 짓밟는 게 직업이라서 그런가. 그리고 그 덕은 좀비들이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식사거리가 날아오는데, 어이 아니 좋겠는가. 어느새 좀비들은 사람들을 공격하던 걸 멈추고. "카악." 국회의원들이 날려주는 사람들을 잡아먹기에 바빴다. 물론 그 사람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성추행까지 당한 상태에서 힘을 쓸 수 없었고, 좀비들은 행복하게. "크아악." 우드득. "아아악."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구 뜯어 먹힌 사람은 얼마 안 가서. "..........크르르." 좀비가 되어 일어섰다. 결국 국회의원들이 자기들만 살자고 설치는 바람에, 좀비만 늘어나는 셈이다. 당장이라도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 목숨 지키기도 바쁘다. 안 그래도 정신 없는데 말야. 특히. "문희야 ! 지금이 사진 찍을 때냐 !" 아무리 있으나마나한 소꿉친구라고 해도, 일단 살리고 봐야 할 게 아닌가. 나는 문희의 손을 잡고, 출입구로 달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쪽은 어차피 가 봐야 나갈 수가 없고, 그쪽은 이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좀비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사실 좀비의 확산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게 이상했지만, 국회의원들을 보면. "니들 탓이잖아." 그들이 멀쩡한 사람을 마구 때리면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좀비의 먹이감이 이렇게 널려있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일단은 살아야, 이 악행을 증거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여기야. 빨리." 연미 누나 말대로, 이 지옥에서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달아날 수 있었다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좀비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국회의원들 대다수는 이미 빠져나갔고, 보통 사람들은 진작에 포기하는 바람에 텅 빈 비상구. 그곳으로 달려가는 우리들. 하지만 야속하게도. 끼기기긱. 이봐요. 문을 닫으려고 하면 어쩌라고요.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달렸다. 문자 그대로, 저기로 못 들어가면 우리는 몽땅 죽게 되니까. 아무리 내가 좀비와 1대 1로 대결하면 이기지만, 지금 국회 안에 있는 좀비의 숫자는 어림잡아 백 단위는 된다. 저것들과 모두 싸울 수 있는 건 여동생 정도다. 그러니. 다다다다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문이 닫힐 거다. 위기의 순간, 연미 누나가 의자를 집어들더니. "난 죽기 싫어 !" 의자를 문 사이로 쑤셔 박았다 ! 와. 저 엄청난 행동력. 어떻게 자매이면서도 진희하고는 그렇게 다른가. 그 덕에 문은 완벽히 닫히지 못했고, 그 뒤를 이어 도착한 시내와 클라라가. "비켜요 ! 비켜 !" 그냥 막무가내로 안으로 몸을 던진다. 안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고, 그 틈에 두 분 선생님도 그 안으로 뛰어든다. 자. 이제 남은 건 나하고 문희 뿐인가. 연미 누나는 이미. 벌써. 확실히 안으로 굴러 들어갔으니. 쾅. 나는 몸을 던졌다. 문이 몸에 부딪치고, 나는 문희를 끌어안은 채 통로에 나뒹굴었다. 그걸 보자마자 시내와 클라라가 재빠르게. 쾅. 문을 닫았다. 좀비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건 상관없다. 멀쩡한 사람의 비명소리만 안 들린다면. "아악 ! 살려 줘 !" "문 열어 줘 !" 우드득. 우드득. 살이 찢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우리가 이 문을 여는 순간, 죽음도 우리에게 올 것이라는 뜻이었다. 결국 우리는 문을 열 수 없었다. 이미 달아나는 경비원의 뒤를 따라, 우리도 달려갈 수밖에. 문을 걸어 잠그면서. "미안해요...." 우리는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탁탁탁탁. 이거, 국회의 통로는 모두 이렇게 기냐. 우리 모두는 그저 밖을 향해 뛰고 있었다. 아마 밖에도 좀비가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그래도 이 안에서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카아악." 이것들과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지 않겠는가. "왜 이리 복도가 길어."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지만, 우리는 그저 달려갈 뿐이다. 지옥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하여. 어차피 바깥 세상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기 때문에. 드디어 복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쿵. "에엑." 나는 앞을 가로막은 사람의 등에, 그대로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누군지 몰라도 되게 딱딱한 등이었다. 마치 죽은 시체를 연상시키는 굳은 몸..... '힉.' 좀비냐. 가장 먼저 내가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고, 주먹을 치켜 듬과 동시에 그를 날려버리려고 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지 않으면 좀비를 상대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으니까. 일단 양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선 국회의원인데. '그냥 패자.' 이런 유혹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걸, 피하기는 힘들었다. 비록 연미 누나가 국회의원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선 주먹부터 쥐고, 상대를 살핀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다. 그가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고.... 퍽.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국민의 뜻대로, 눈앞의 국회의원을 걷어찼다. 이럴 때 자주 쓰는 방식대로, 우선 다리를 건다. 넘어간다. 녀석의 뒤통수가 바닥과 부딪친다. 두 팔이 들리면서 나를 잡으려고 하지만. 콰직. 악인은 지옥으로. 그 악인이 특히 국회의원이라면 더더욱. 나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마구 녀석의 얼굴부터 배까지, 그리고 다리 사이까지 발로 짓밟았다. 냉혹하다고? 국회의원 상대로 무슨. 잔인하다고? 좀비 상대로 무슨. 하물며 이 자는 그 두 가지 사항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에게 맞아야 마땅했다. 그동안 국민을 괴롭히느라 재미있었지? 어디 맛 좀 봐라.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시간이 없으니 열 대만 때린다. 사람들도 나를 감히 말리지 못한다. 심지어 연미 누나까지도. 만약 내가 멀쩡한 사람을 패고 있다면 모두 말렸겠지만. "크으으." 목의 근육이 물어뜯긴 채,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는 인간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 이전에, 그 상태에서 살아있을 인간이 있는가. 그러니 이건 분명히 좀비다. 아니라고 하면. "아. 나의 실수." 이렇게 말하면 그뿐이다. 뭐 하는 짓으로 보아 실수는 전혀 아니지만. 겨우 내 뒤를 따라잡은 모두가, 통로 밖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카아악." 시체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아악 ! 사람 살려 !" 남자가, 여자가, 어린애가, 노인이 달아나고 있다. 그 뒤를 남자가, 여자가, 어린애가, 노인이 쫓아가고 있다. 몇 명은 무사히 도망치지만, 몇 명은 잡힌다. 넘어진다. 그리고 물린다. 비록 살과 뼈가 뜯겨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아아악." 비명만은 가슴에 스며들 듯이 들린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마구 섞여 있는 바람에, 어디로 가야 안전할 지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시체들의 날....." 문희가 중얼거린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시체들의 날. 지구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아니, 이건 이미 종말이었다. 그 누가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녀석들을 불사른단 말인가. 그러나 내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질 수 없었으니. "카아악." 좀비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녀석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몇 마리가 우리를 발견하고, 천천히 우리에게 걸어온다. 마치 달아날 수 없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듯이. 그래. 맛있는 것은 보고 즐기면서 죽이겠다는 거지. 순순히 우리가 먹혀줄 거라고 보는 거냐. "어림없지." 그런 일은 당연히 일어날 수 없다. 적어도 그 녀석을 다시 만날 때까지는, 여기서 죽을 수 없으니까. 이 녀석, 좀비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힘이 있으면서, 어디로 튄 거야. 만나면 한 대 때려주고 말 테다. 내가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반대로 맞아서 뻗을 게 확실하다고 해도. "Go. now(가요. 지금)." 클라라가 내 팔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나는 그렇게 분해하며 서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래서는 문희하고 다를 게 없잖아. 우리가 달리기 시작하는 걸 본 좀비들은 갑자기 흰자위가 드러난 눈을 크게 뜨더니. "카아악."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그런데 어디로 달아나지? "차를 잡아. 차를 잡아야 해 !" 꼬마 선생님. 말씀은 참 바람직하십니다만, 차가 대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비록 국회 앞에 널린 게 자동차이기야 하지만, 저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홍)차나 (녹)차만큼이나 쓸모가 없어 보였다. 모조리 다 찌그러지거나 우그러졌으니. '누가 운전한 거냐.' 물론 어떻게 된 건지는 뻔했다. 국회의원들이 질서를 지킬 리가 없으니, 아마 무작정 달아나려다가 서로 부딪쳐서 교통사고라도 낸 것이겠지. 무고하게 쓰러진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 보이는 시체는 실제의 피해자보다 적을 게 분명했다. 포식할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은 좀비들이, 눈앞의 만찬을 내버려두고 갈 리가 없잖아. "크으으." 사람의 팔다리를 물어서, 살점을 발라먹는 그들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역시 구역질나는 모습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견디지 못하고. "우, 우엑." 토하기 시작한다. 그런 심정은 나도 예외가 아니지만... "빨리 일어나. 미연아.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꼬마 선생님 말대로다. 여기서 쓰러져서 좀비의 먹이가 되면, 왠지 무지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사실 이 모든 사태는 여동생이 자기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일어난 게 아닌가. 적어도 좀비가 얽힌 초자연적인 사태는, 당연히 그 녀석의 담당이 아닌가. 왜 내가.... "좀비가 와 !" 시내의 겁에 질린 외침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렇다. 불평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다. 일단 안전해진 다음에, 여동생을 씹든지 차든지 하자. 우선은. "일어나요. 빨리." 나는 급히 담임 선생님을 붙잡았다. 뭔가 말랑말랑한 게 손바닥에 느껴지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카아악."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미 누나. 맨 앞에 나가지 말아요. 저 녀석들은 너무 위험... 우드득. "으아악." 뭐야. 벌써 당한 거야.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지금 내가 남의 사정을 봐줄 때인가. 우선은 내게 다가오는 좀비를. 퍽. 걷어찰 때라고 ! 퍽. 나는 우리 일행의 맨 앞에서,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길을 열기 위해서 말이다. 어차피 이 자리에 앉아 있어도 죽고, 도망쳐도 죽는다면 나는. 퍽. "크으윽." 도망치다가 죽을 거다. 물론 내 앞을 가로막는 좀비는 모조리 때려눕히면서. 그랬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지 않은가. 비록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구타하는 건 심히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퍽. 그 노인이 양복을 입고 국(國)자 뱃지를 단 사람이라면, 절대로 망설일 수 없다. 그를 때리는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요, 국민에 대한 보답이며, 지금 당장 내가 살아남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일이니까. 가장 앞에 있는 내가 좀비에게 먹히기라도 하면. "빨리 뛰어 ! 절대로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 우리 일행은 어떻게 되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난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나마 좀비들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먹느라 대부분 제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이건 기회야." 상대적으로 나에게 덤비는 좀비는 매우 적었다. 바로 옆에 좀비가 사람의 머리를 잡고, 으적으적 눈알을 빼내 삼키는 걸 보면 이건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좀비가 많은데도, 먹을 게 널려서 나에게 덤비지 않다니. 그 덕분에 빈차를 찾아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문제는. "이것도 아냐." 왜 이렇게 부서진 차가 많은 거야 ! 이 사람들이. 좀 질서를 지키면서 빠져나가면 안 되나. 나 자신도 못할 일을 남들에게 요구하는 건 무리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푸념하지 않을 수 없다. 열 번이나 박살난 차를 만나고 나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누구라도.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했던가. "이거야. 찾았어." 드디어 제대로 된 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돈 많은 사람이 타고 다닐만한 검은 리무진.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차인데.... ".....우리 아버지 차야." 연미 누나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들렸을까. 그 안에 진희가 있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잠깐 일어났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억눌렀다. 이미 끝난 사이인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아마 그녀도 어딘가에서 최후를 맞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살아서 달아났을지도 모르지. 그게 이미 중요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살아있을 거야.' 비록 나를 차고 갔다고 해도,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아라. 진희야. 그 전에 여기서 내가 살아남는 게 더 급한 일이겠지만. 일단 차 문부터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연미 누나가 운전석에 앉고, 내가 조수석에 앉는다. 문희와 두 분 선생님과 시내와 클라라도 자리를 찾아서 앉고.... "실례할게요." 이런. 뒷좌석에는 자리가 모자랐다. 아무리 리무진이라는 게 크다고 해도, 뒤에 세 사람이 앉으니까 빠듯하다. 문희야. 그러니까 살 좀 빼라. 너 혼자서 얼마나 면적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거냐. 뒤에서. "그게 왜 내 탓이야 !" 이런 항의가 들려오지만, 무시한다. 지금은 이 차에 좀비가 먼저 타지 않았는지가 중요하니까. 뭐 아무리 봐도 그런 건 없지만. 쿵.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 좀비가 반쯤 벗겨진 얼굴가죽을 볼에 늘어뜨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차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 이런. 문을 열어버리잖아. 하지만 연미 누나는 꼼짝도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문을 닫는데도. "아빠...." 이런. 저건 진희 아버지잖아. 아니, 이젠 그렇게 불러줄 수도 없지. 아마 여기에 도착하기 직전에 당한 모양이지만, 그건 이미 남의 사정이다. 난 저 사람에게 득을 본 일도 없고, 그에게 좋은 감정 같은 건 전혀 없다고. 게다가 이젠 진희에게도 버림받은 몸이니. 퍽. 구두를 안 신어서 유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운동화로도 어느 정도는 맛을 보여줬겠지. 신발자국이 남은 진희의 아버지, 아니 좀비가 서서히 뒤로 쓰러진다. 반쪽만 남은 얼굴가죽에 신발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진 채. "출발 !" 리무진이 움직였다. "흑흑. 흑...." 연미 누나는 울먹이며 운전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아버지라도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그런 존재를 내가 걷어차야 했으니까. 아니, 그보다 더 슬픈 것은, 바로 그런 일을 목격한 딸이, 그 아버지를 폭행한 사람에게 원망이 아니라 감사를 해야 하는 현실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지옥이겠지.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형제도 자매도, 그 누구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둘러야 하는 사회.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는 그게 확실히 못이 박혀 버렸다. 안 그러면 죽는다. 상대에게 인정을 베푸는 순간,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쿵. 우리 차는 뭔가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밟고 지나갔다. 차가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우리 모두가 이리 저리 쏠렸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당황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의 분위기는 무거웠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희망이라는 게 지금 존재하기라도 할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 차에 기름이 무한정 있는 게 아니다. 살고 싶다면 빨리 안전한 도피처를 찾아서, 그곳으로 전력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차의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헤메 다닌다면, 우리는 결국 좀비들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것들에게 산 채로 잡혀 먹힌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은 악몽이었다. '난 아직 국가대표 축구선수도 못 됐다고.' 그런데 여기서 죽어?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그래도 친구들이 같이 있으니, 외롭게 죽어갈 진희보다는 좀 나은 편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혼자 방황하고 있을 텐데. 과연 그 연약한 아가씨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몰라." 이런. 연미 누나에게 미안한 짓을 해버렸다. 안 그래도 동생을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얼마나 진희를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러면 안 되지. 지금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해. 그래. 방송. 혹시 방송이라도 나온다면.... 삑. TV가 있었다. 역시 고급 리무진은 뭔가 달라. 비록 그 TV가 내가 앉아 있는 앞자리가 아니라, 뒷자리에만 나온다는 게 문제였지만, 운전사의 주의를 흐트러뜨릴 수 있는 물건이 앞에 있으면 큰일이니 할 수 없었다. 그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듣는 수밖에. 아나운서의 침착한 음성이 나온다. "........현재 서울 시가지는 수수께끼의 질병에 걸린 감염자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시민들은 가급적 외출을 삼가주시고, 감염자를 만나면 즉시 질서 있게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봐. 사방천지가 좀비들인데, 어디로 대피하라는 거냐. 좀 알려 주라. 우리도 거기로 대피라는 걸 좀 해 보자. 내 귀가 쫑긋 섰지만. "....현재 전국 각지에서는 군인들이 투입되어 질서회복을 위해 노력중이오니, 시민들께서는 감염자와의 접촉을 피하시고, 사망한 가족이 있다면 그 시체를 반드시 태우십시오. 반복합니다. 그 시체를 절대로 태우시기 바랍니다. 죽은 시체는 얼마 안 가서 감염자와 같은 증상을 나타내오니, 절대로 시체를 보관하지 마시고 태우시기 바랍니다." 이봐.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대피소를 대란 말이야. 하지만 원래 방송이라는 건, 꼭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주기 전에 이런 저런 쓰레기를 많이 배달해주는 법이다. 마치 인기 프로그램을 한 번 방영할 때, 사람들이 절대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광고를 수 십개씩 끼워주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흘러가고. ".......그러니 대피소로 직접 오시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절대 외출을 삼가주시기 바라오며, 군인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집에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좀비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을 불로 태워야 합니다. 석유를 뿌린 후 휴대용 라이터로 불을 지르는 것이 그들에 대한 확실한 대처방법입니다. 절대로 감염자들을 칼로 자르거나, 공기총으로 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감염자들의 신체조직은 몸에서 잘려나가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사람에게 달라붙어 병을 옮기는 경향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봐. 다 아는 거 아냐. 이 인간들이. 대피소의 위치를 알려달란 말이야. 하지만 원래 언론에서는 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사항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 뭐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 원래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닌가. 정부에서는 뭘 하기에 이런 사태를 맞이하고서도 대피소를 빨리 알려주지 않는단 말인가. "혹시......." 대피소를 만들 상황이 아니라는 건가? 하긴 좀비의 살점이 사람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것을 생생히 보았던 나다. 대피소라는 걸 만들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능한 일을 요구해봐야 들어줄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힘만으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그 해결책은 누구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끼이이익. 이런 젠장. 차가 아예 막히고 말았다.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무더기로 나오는 바람에, 한강 다리로 통하는 도로가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푸짐한 식사거리를 놓칠 만큼, 좀비들이 배가 부른 것도 아니다. 척 보기에도 뭔가 썩어 보이는, 회색 피부의 인간들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덜컥. 차 문을 손으로 잡는다. 그리고 당긴다. 아니 이 녀석들이. 차 문을 열고 들어올 셈인가. 하지만 문을 잠가 두었다면, 아무리 좀비라도 억지로 문을 열지 못할 텐데. 쾅. 이, 이건. 좀비들은 문이 쉽게 열리지 않자, 아예 주먹으로 차 유리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 사람이라면 유리조각이 손에 박힐 걸 염려해서라도 절대 그런 짓을 하지 못할 테고, 한다고 하면 유리를 자를 줄칼이나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가져올 테지만. 시체에게 아픔을 느낄 신경이 살아있겠는가. 게다가 평범한 자동차가 방탄유리를 가져다 쓰는 것도 아닌 이상. 쨍그랑. 역시. 유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좀비들이 손을 그 안으로 집어넣는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걸 쫓아내려고 하지만, 주먹으로 때린다고 좀비가 아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좀비들은 손을 더듬더니. 덜컥. 결국 문이 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차는 순식간에, 좀비들의 침입을 허락했다. 좁은 차 내부에서 달아날 길은 없고, 그러니 안에 탄 사람들은 속절없이 좀비들의 먹이가, 동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차에도. 탁. 좀비 한 마리가 창에 달라붙는다. 아니, 여러 마리가. 아예 차 문마다 다 붙는군. 그들이 곧 주먹을 쥐고.... 부우우웅. 갑자기 리무진이 거칠게 움직인다. 좀비들이 유리창을 깨려다가, 엉뚱한 리무진의 꿈틀거림에 뒤로 쓰러진다. 연미 누나가 핸들을 확 꺾더니. 뿌직. 뭐가 부서졌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안 봐도 뻔하기에. 누나가 차를 돌리면서 외친다. "모두 꽉 잡아 !" 그리고 리무진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좀비들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좀비 몇 마리가 뒤로 나가떨어진다. 죽어라 엑셀레이터를 밟는 연미 누나. "일단 돌아갈 거야 !" 그 결정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국회로 돌아가 봐야 좀비들만 기다릴 뿐이고, 이쪽 다리가 막혔다면 더 남동쪽으로 내려가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데. "설마, 강북쪽으로 갈 생각이에요?" 가는 거야 좋다. 문제는 그 방향으로 가면 도심으로 접어드는 데다가, 솔직히 그쪽에는 달아날 길이 없다. 시가지로 들어가면 시체와 좀비와 부서진 차들로 길이 막힐 것이고, 그렇다고 북서쪽으로 가면 휴전선으로 가게 된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 방향으로 가는 건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휴전선을 감안하면, 너무 좁은 그 방향으로의 길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다. 정말로 우리가 달아나고 싶다면. "여기서 공항으로 빠지거나,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빠지면, 김포국제공항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공항이라면,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으니 안전지대는 몰라도, 그 비슷한 곳으로 달아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남쪽으로 간다면 시골로 접어들게 되고, 이쪽을 잘 빠져나갈 수 있다면 산이라도 들어가서 살아남을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북으로 올라가면. '어디로 가라는 거야.' 솔직히 동쪽은 영 내키지가 않는다. 그쪽으로 가다가는 시가지를 횡단해서 가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는데, 그게 지금 이렇게 차가 밀리는 상황에서 가능하겠는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갈 만한 곳이 아무 데도 없다. 다른 곳의 도로라고 안 막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이쪽으로 간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여기 가만히 있다가, 좀비들에게 먹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연미 누나가 차를 트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건 결국 헛고생이다. 이러다가는 결국 차에 기름이 떨어질 것이고,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은 끝날 테니까. 차라리 숨을 곳이라도 있다면 좀 잠잠해질 때까지 버틸 수도 있지만, 지금 그런 곳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63빌딩에 올라가서 농성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방송사로 갈 거야. 응급방송을 할 정도라면 경찰이나 군대가 저지선을 쳤을 테니까." 확실히 방송사까지 날아가 버리면 국민들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니, 지각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런 생각은 해 놨겠지. 내가 왜 그걸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오빠.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지?" 여동생이 보면 분명히 이럴 거다.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겠네. 여의도에 방송사가 몰려 있다는 것도 깜박하다니. 어쨌든 우리의 차는 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방송을 배경음으로 삼아서. ".......현재 정부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국민 여러분들은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어? 어?" 이거..... 나는 황급히 뒷좌석으로 몸을 날렸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발언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분명히.... "야 ! 안 보이잖아 !" 문희 녀석, 그 돌머리로 내 머리를 밀지 마라. 내 머리통은 물렁물렁해서, 네 머리와 부딪치면 찌그러질 지도 모른단 말이다. 나는 억지로 문희의 머리를 밀어내면서, TV 화면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우드득. "아아악 !" 자주 들었던 그 정겨운 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좀비들이 벌써 방송사에 들어온 모양이다. 나는 그대로 앞자리의 머리 받침대를 잡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볼 기력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연미 누나가 힘없이, 핸들을 천천히 돌린다. "끝장났어."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연미 누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비명과 살점 뜯어지는 소리만이 스피커에서 나온다. 그 소리도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TV를 껐나. 아니다. 다시 그 소리가 들린다. 이건. "방송사가 전부 습격 당하고 있어요...." 클라라. 그런 건 확인해주지 않아도 돼..... 우리 모두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그나마 연미 누나가 운전대를 놓지 않아서 다행이기야 하지만, 어차피 다행이랄 것도 없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사이좋게 좀비가 되는 것뿐인가. 그래도 아는 사람들이 같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최소한 같이 죽고, 같이 사람을 습격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이런 거나 기뻐해야 하다니.' 비참했다. 이젠 다 끝난 거야.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린 이대로 죽고 마는 거야. 울고 싶다. 쓰러지고 싶다. 하다못해 독일에서도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 적은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뭔가 기발한 의견이라도 내놓고 싶지만, 그런 건 있을 리가 없다. 있었으면 벌써 말했을 테니까. 그저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한탄하며 죽어갈 뿐. "아니. 방법이 있어."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시내였다. 그런데 잠깐. 방법이 있다고? 그게 뭐냐.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입에 집중되었다. 연미 누나 빼고. 그리고 시내의 입이 서서히 열리며, 그 방안이 제시되었으니, 그것은. "미인이를 불러오는 거야."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는 말이 있다. 쥐들이 고양이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살기 위한 자구책으로 악마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아서, 고양이가 오면 방울소리를 나게 함으로서 모두 달아나게 한다는 거다. 그 방안은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럼 그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건 누구지?" 어떤 쥐도 그 임무를 맡지 못했고, 결국 고양이는 지금도 열심히 쥐를 잡아먹고 있다. 바로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 것이다. 여동생을 부른다고? 아니, 이 경우는 그것도 아니다. 방울을 달고 싶어도, 고양이(여동생)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 녀석이 날 다시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둘째치고. '보면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무슨 재주로 그 녀석을 찾아낸다는 거냐. 모두들 기대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벌써 했을 거다. 아무리 나로서는 그 녀석이 활약하는 걸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 오빠의 자존심을 팍팍 뭉개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은 비상이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나도 공사를 가릴 줄은 안다고.' 그러나. 지구에 없는 존재를 불러올 재주 같은 건 나에게 없다. 내가 무슨 미국 대통령이냐. 전파망원경이라도 써서, 우주 어딘가에 있을 여동생에게 구조신호라도 보내란 말이냐. 아니, 그런 수를 쓴다고 해도 도대체 이 넓은 우주의 어느 방향에 여동생이 있는지, 난 모른다. 그러니 시내의 제안은. "미안.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어." 모두의 얼굴이 일제히 회색 빛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북한 침묵. 당장이라도 뭐라고 말하고 싶건만. "아아악. 이젠 끝장이야."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뭔가 기발한 해결방안이라도 떠올리지 않고는, 도저히 입술도 움직일 수 없는 무거움이 우리 모두의 어깨를 짓누른다. 점점 더 세게. 어찌해야 좋을까..... 쾅. 결국 우리는 아무 방법도 떠올리지 못한 채, 파국을 맞게 되었다. 하필, 하필 국회의사당을 지나는 바로 그 순간에, 좀비가 우리 차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그들에 걸린 우리의 차는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와아악 !" 쿵탕. 콰당. 우지끈. 금속의 파열음이 귀를 때린다. 차는 옆으로 기울어지다가, 결국 뒤집히면서 한 바퀴를 돌았다. 안전벨트를 메고 있던 나와 연미 누나는 무사했지만. "우아아아아 !" 뒷좌석이 문제였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문희와 시내와 클라라와 두 분 선생님까지, 무려 다섯 명이나 되지 않는가. 세 사람 정도는 무사할지 몰라도, 나머지 둘은? 뒤쪽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모두 무사하기만을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쿵탕. 우르릉. 차가 정신 없이 굴러간다. 이거 제발 멈춰 줘. 최소한 나갈 기회라도 줘. 이대로 차가 폭발이라도 일으킨다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는가. 누가 좀 도와줘. 최소한 살아나갈 기회라도 달란 말이야----------! 쾅. 다시 차가 바로 섰다가, 또 옆으로 기울어진다. 이젠 돌아버리겠다. 아무래도 난 이제 끝장인가 봐. 그 순간에. 쾅. 뿌드드득. 리무진의 지붕이 갈라지기라도 했을까. 차는 옆으로 선 채 잠시 머물다가, 서서히 반대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쾅. 뿌직. 우리 차는 제대로 멈췄다. 바른 자세로 말이다. 잠시동안. 딱 1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나는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당장 이 차에서 나가지 않으면, 다 죽을 게 뻔하니까. "모두 서둘러.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 !" 아무리 이 차가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구르고 나서 다시 움직일지는, 솔직히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어쩌고 하기 전에. "아, 아니. 나가지 마 !" 아무래도 우리가 부딪친 건, 전봇대였던 모양이다. 아니, 이건 전봇대라기보다는, 주유소 앞에 서 있는 장식 탑인가. 어쨌든 그 탑은 충격으로 기우뚱거리더니. 끼이이익.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우리 차의 지붕 위로 말이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지만, 뭔가가 무너지는데 함부로 나가다가는 벽돌에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 영락없이 끝장이기에, 나는 그냥 차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텅. 터터텅. 이렇게 된다고. 나가기도 전에. 요란한 흙먼지와 벽돌이 우리 차를 마구 강타한다. 이 사람들, 그냥 속이 빈 플라스틱이나, 풍선으로 광고탑을 세워 둘 것이지, 왜 굳이 벽돌이나 콘크리트로 탑을 세우는 거야. 차의 지붕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견뎌냈으니 안심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1초도 지속되지 못했다. 우리 차가 굴러오는 걸 본 좀비들이. "카아악." 좋은 먹이감이라고 생각한 것 같으니까. 그들은 삽시간에 달려왔다. 이런. 이대로라면 우리는 다 죽겠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연미 누나를 보며, 나는 그녀를 깨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를 짚던 나는. 질퍽. 느, 늦은 건가. 이건 누나의 피다. 아무래도 차가 회전하면서,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럼 뒤에 있는 사람들은? "이, 일어나. 제발 일어나." 아무래도, 모조리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뒷좌석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서로 마구 부딪쳤던 모양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지? 이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나야 하나?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이 안에 있어 봐야 결과는 너무 뻔하다. 모두를 돕지도 못하고, 그냥 죽고 말 것이다. 좀비들에게 유리창 하나 깨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럼. "이이익." 이렇게 되면 나 혼자서라도, 차를 운전해서 달아나야 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연미 누나의 머리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녀의 몸을 뒤로 젖혔다. 가급적이면 머리를 다친 사람을 멋대로 움직이는 건 안 될 일이지만, 지금 그런 원칙을 지켰다가는 분명히 다 죽고 말 것이다. 좀비가 달려오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달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닿아라. 닿아라. 닿아라.....' 내 발이 차의 엑셀레이터에 뻗는다. 이걸 밟고, 운전대를 잡으면 조금은 달아날 수 있겠지. 차가 조금씩 움직인다. 그래. 가는 거다. 리무진. 고급 승용차의 자존심을 보여줘라. 그러나. 끼익. 야속하게도, 리무진은 이름 값도 제대로 못한 채, 그냥 멈추고 말았다. 이젠 달아날 수 없다. 이 많은 좀비들을 뚫고 도망친다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더군다나 무기도 없지 않은가. 이제 선택은 두 가지다. 리무진 밖으로 나가서, 나 혼자라도 살겠다고 도망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안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가 최후를 마칠 것인가.... 덜컥. "둘 다 싫어." 나는 세 번째의 길을 택했다. 아무래도 난 두 가지의 난감한 선택을 두고 그 중 하나를 고르기보다는, 요령을 피우며 세 번째의 길을 찾아 헤메는 인간인 모양이다. 그러나 나온다고 해도, 솔직히 무기라고 할 게 없다. 차 문을 열면서도, 나는 내가 어지간히. '바보 같아.' 그런 생각을 해야 했다. 이거, 이대로 나가는 건 좀 곤란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나는 리무진 안의 보관함을 열어 보았다. 여기에 신통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무기가 될 만한 게 있다면.... "라이터 하나냐."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영화에서처럼 기름통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불을 붙여서라도 어떻게 하겠지만......... 잠깐. 기름? "여기에 많잖아." 여긴 다름 아닌 주유소가 아닌가. 나는 리무진 밖으로 구르듯이 달려나왔다. 라이터를 꼭 쥔 채. 주위의 좀비들의 숫자를 보면 달아나기도 그른 것 같고, 그렇다면. "좋아. 싸워 보겠어." 어차피 이 모든 일은 내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일이다. 만약 내가 여동생이 내민 두 개의 열쇠 중, 하나라도 골랐다면 과연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랬어도 좀비들의 습격은 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둘 중 딱 하나만을 골랐으면 최소한. "그 녀석은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랬으면 좀비들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졌을 거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러나 나는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서 그 녀석을 떠나게 했다. 이게 내 잘못이 아니라 그 녀석 잘못이라는 의견도 존재할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야. 네가 여동생을 쫓아내니까, 우리가 이렇게 됐잖아." 내 사정은 소용없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결과만이 중요하니까. 어쨌든 그들은 내가 여동생의 비위를 거스르는 바람에 그녀가 사라졌고, 그 결과 우리가 멸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 내가 봐도 그런 것 같기야 하지만. 못된 여동생을 두었다며 한탄하고 싶어도. "카아악." 어차피 늦었다. 그렇다면 괴물 여동생의 오빠답게,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좋겠지. 리무진에서 의식을 잃은 여자들을 보호하다가 맞는 종말.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즉시 주유소에 있는 기름 호스 하나를 빼다가. 쏴아. 호스의 끝에 있는 주유기의, 스위치를 누른다. 기름이 앞으로 쏟아진다. 그걸 보며 라이터를 켜고는. "자. 가자 !" 그걸 뿜어져 나오는 기름의 선에 던진다. 즉시 불이 붙으면서. "우랴아아아 !" 주유기를 휘두른다. 그에 따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휘발유는, 즉시 불의 폭풍으로 바뀌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바에는, 발악이라도 해보자. 우선 우리 차로 다가오는 좀비 놈들부터. 녀석들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녀석들의 몸을 싸그리 태워버리는 것이니까. "뒈져라. 이 개자식들아." 특히 가슴에 국(國)자 배지를 단 녀석들에게, 베풀어줄 자비 따위는 없다 ! 화아아악. 성난 용이 불을 뿜으며, 눈앞의 괴물들을 도륙한다. 지금의 내 모습이 바로 그랬다. 어쩌면 난 엄청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국민들이 그토록 바라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 화르르르. "크아아악 !" 국회의원들, 아니 좀비들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꼴 좋다. 녀석들. 그렇게도 국민들을 괴롭히더니, 어디 맛 좀 봐라. 사람이 불에 타서 죽을 때 최대의 고통을 느낀다는데, 직접 경험을 해 보라고. 비록 그 중에는 멀쩡한 민간인 출신 좀비가 더 많았지만. 화아아악. "어쨌든 국회의원이라고 !" 그 순간 나는, 여의도에 있는 좀비들이 전부 나에게 오기를 바랬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국회의원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는 거다. 이 기름은 주유소 아래의 기름탱크가 빌 때까지는 계속 나올 테고, 비록 그 시간이 짧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이 섬에서 나갈 수도 없다고. 그러니 다 오란 말야. 이 국회의원 나리들아 !" 만약 살아있는 국회의원을 잡아서 불태웠다면 뒷일을 걱정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미래도 없었고, 국회의원의 인권을 고려해줄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저 녀석들은 다 죽은 몸이고, 지금은 시체를 찾아 헤메는 사악한 좀비에 불과하다. 그런 놈들에게 무슨 인권이니 나발이니 하는 게 필요하냐. 그냥. 화아악. 다 태우는 게 최고지. 나는 미친 듯이 호스를, 주유기를 휘저으며 좀비들을 불살랐다. 내일이 없는 자의 발악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미칠 듯이 좋았다. 세상에 누가 국회의원들을 태워버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겠는가. "하하하하."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그 순간. 그 끝은 갑자기 찾아왔다. 마치 인간의 죽음이, 당사자가 예상하지 않았던 순간에 찾아오는 것처럼. 쉬익. 그것은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공기가 한순간 갈라지더니, 다시 아물어 붙는 듯한 느낌. 주유기를 잡았던 내 오른팔에, 갑자기 붉은 선이 그어진다. 단면이 어긋나면서, 일순간 바닥에. 턱. 떨어지는 내 팔. 거기서 피가 샘솟는다.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잃어버린 주유기가, 땅에 나뒹굴 뿐.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로 불길을 뿜어냈다. 화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다. 그저 쓰러질 뿐이다. 주위의 좀비들이 멈춰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시야가 갑작스럽게 하늘로 이동한다. 역시 인류의 종말을 맞이한 날답게, 하늘도 찌푸리고 있다. 대낮인데도 온통 어두컴컴한 저 하늘. 이건 매연인가. 불타오르는 건물들이, 우리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었다. 쿵. 그제야 나는 땅에 쓰러졌다.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그리고 내 왼쪽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사람의 이빨. 아니다. 이건 좀비의 이빨이다. 그 이빨이 나를 파고 듬과 동시에, 내 가슴이 서서히 비어 가는 감각.... 흔든다. 다시 흔든다. 팔을, 어깨를 흔든다. 남아있는 왼팔을 흔든다.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 녀석이 쓰러진다. 다시 일어선다. 나를 향해 달려드는 그 자는. '진희.... 아버지냐.....' 하필 국회의원에게 잡혀 먹히다니. 이런 억울할 데가 있나. 물렸다. 분했다. 분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물리다니. 또 물렸다. 이번에는 허벅지다. 내 왼쪽 다리가 뜯겨진다. 이것으로 내 꿈은 영원히 사라졌다. 축구선수의 꿈도, 그 무엇도 영원히. 좀비들이 우리 일행의 차로 다가간다. 닫혀 있는 문을 거칠게 잡아 흔든다.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소녀들은..... "거짓말쟁이 !" 망할 녀석. 나에게는 분명히 진실과 나의 꿈을 이룰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게 어디가 내가 꿈꾸던 결말이냐. 죽는 것도 품격이라는 게 있다. 하필 왜 국회의원에게 당해서, 이렇게 쓰러지는 결말을 내야 한단 말이냐. 저기서 피묻은 칼을 든 국회의원이, 게걸스럽게 나에게 다시 덤빈다. 내 오른팔을 잘라낸, 바로 그 녀석이 말이다. 피묻은 양복 상의에, 국(國)자가 새겨진 배지를 달고 있는. 그래. 이것으로 끝이구나. 결국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하고. 심지어 유언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내가 만약 죽고, 이 꼴을 누군가가 본다면, 내 유언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나밖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좀비가 입을 벌린다. "?" 뭐냐? 이거. 아무리 반전이라지만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 갑자기 좀비들이 모조리 삭제되다니. 그럼 난 죽은 거냐? 분명히 조금 전에 어깨와 허벅지가 물어뜯기고, 팔이 좀비의 칼에 싹둑 잘려나가는 걸 분명히, 절대로, 확실히 느꼈는데? 심지어 피가 튀는 모습까지도. '말도 안 돼.' 잘려나간 내 오른팔은 멀쩡히 붙어있고, 허벅지 역시 상처 하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일까? 저기에 주유기가 있다. 내가 조금 전까지 쥐고 죽어라 휘둘러대던, 바로 그 주유기 말이다. 저기에 라이터가 있다. 내가 기름에 불을 붙일 때 썼던, 한 번 긋고 던졌던 그 라이터가 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주위에는 탄 자국도 있다. 마치 불법시위라도 한바탕 지나간 것처럼, 건물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깨져 있다. 1층만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설명을 해주길 바란다. 나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나는 그저 누운 채로,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데. 덜컥. 덜컥. 우리 일행이 있던 차 문이 열린다. 가만. 가만. 아까 분명히 좀비들이 뜯어내지 않았나? 왜 다시 닫혀 있는 거야? 질문하기도 전에 그 문은 열렸다..... 아하. 그때 열린 건 오른쪽 문이었나? 어떻게 이해를 하는 내 눈에 비친 것은. "연미 누나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누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마의 피는 어디로 증발한 거야?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여기서 광고탑에 부딪친 후 정신을 잃었는데?" 연미 누나를 비롯해 시내, 클라라, 두 분 선생님, 그리고 문희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말은 그랬다. 단 하나도 조금 전에 내가 겪은,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잠깐. 좀비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미안하게도 나로서도.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최소한 난 이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차라리 꿈이라고 해버리면 좋을 정도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여동생 맘대로라면 모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사건이,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거..... 쿵. 쿠르릉. 국회가 무너지고 있었다. 저 악의 소굴, 국회의사당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내가 순간적으로 춤을 추려다가 말았다는 사실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라. 나는 무의식중에 만세를 외칠 뻔했다. 조금 전에 국회의원들에게 물려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어떻게 된 거야?" 저. 저에게 묻지 마세요. 꼬마 선생님. 아무리 물어도 나오는 건 피밖에 없다고요. 나 자신도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니까. 지금 내가 아는 건. 빠지직. 국회의사당을 받치는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여파로 벽과 지붕이 내려앉고 있다는 것뿐이니까. 국회의 둥근 지붕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지며, 고요히 흙먼지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부디 다음에 세워질 국회의사당은, 국민의 원한을 한 몸에 받는 곳이 아니길 바란다. 뭐 관련자들은 다 죽긴 했지만..... "와아아아." 아, 아닌가? 우리만 살아있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들리는 것을 보니. 하긴 우리도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조금 전에 좀비들에게 습격 당해 받은 상처만 없다면. 짝짝짝짝. 에? 어째서 박수소리가 내 등뒤에서 나는 거야. 눈앞의 장관에서 억지로 고개를 돌려보는데, 거기에 있는 건. "모두...."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는 모양이다. 옷은 좀 엉망이기는 했어도, 부러지거나 찢어지거나 뜯겨지거나 부어오른 곳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분명히 좀 전에 모조리 의식을 잃지 않았나? '교통사고가 그렇게 경미했었나?' 분명히 조금 전에는 나 빼고는 모조리 쓰러졌는데. 저길 봐. 분명히 부서진 광고탑이 있잖아. 그런데 어째서 다들 멀쩡한 거야? 차가 저렇게 찌그러졌는데. "연미 언니가 운전을 잘 했나봐." 그게 세 바퀴는 족히 구른 차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이 할 말이냐. 물어뜯기고 팔다리가 잘린 내가 할 소리도 아니긴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역시 이런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짐작 가는 데가 딱 한 군데 있기는 하다. 그게 어디인가 하면.... "그 녀석이냐." 내 주위에서 이런 마법과도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는 자는, 그 녀석을 제외하면 없다. 별을 부술 정도의 능력자라면, 그런 힘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겠지. 아니, 전에 좀비들도 모조리 인간으로 되돌렸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건가. 그 심술만으로도, 이 소행은 능히 그 녀석의 소행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녀석이 누군데?" 시내가 묻는다. 나는 당연히. "그야 당연히 내 여동생이지 !" 그렇게 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는. "..........."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왜. 왜. 왜 이러는 거야 ! 내 입이 나를 배반할 줄이야. 게다가 다른 소녀들은 그런 내 꼴을 보더니. "역시 오늘 너무 힘이 들었던 모양이야." "확실히 국회의원을 팼으니...." 뭐야. 조금 전의 사태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내 기대는 크게 어긋났으니. "자. 좋은 사진이 나왔으니, 이걸 신문사에 보내볼까?"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얻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문희. 그녀의 뒤에서 힐끗 바라본 그 영상은 다름이 아니라. "........(아니잖아). 이건 국회에서 녀석들을 팼던...." 이상하다. 내 말이 아까부터 잘려 나가고 있다. 분명히 누군가가 개입해서 장난을 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입이 열리지 않으니 대항할 수가 없다. 이건. '망할 녀석.' 이젠 오라버니의 입에까지 간섭하는 거냐. 그러나 그런 생각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로 인해. 두두두두두. 그것은 헬리콥터의 소리였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그 헬리콥터들은 서서히 우리의 앞에 내리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달려온다. 여기저기 많이도 있었네. 마치 독일에서처럼.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가.' 더 다행인 것은, 그 중에 국회의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몇 명은 있구나. 그들은 국민들의 성난 시선을 뒤로 한 채. "........." 묵묵무답이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그래도 10명도 안 되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뭐 군인들도 심히 삐뚤어진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판에, 뭘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당장은 일단 죽은 듯이 지내야지. 앞으로 또 말썽을 피울 게 확실하지만. 그들이 사라지는 꼴을 보며, 사람들은 야유와 조롱을 퍼붓는다. 나도 그러고 있으니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동안 네 놈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 뭉게뭉게. 부서진 국회의사당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더욱 속 시원하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과연 일상으로 얼마나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뭉게뭉게. 아. 저거 조금만 더 보고. 나는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서, 무너진 건물을 지켜보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하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볼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와그르르르. "이봐. 학생. 위험해." 이크. 죽을 뻔했네. 나는 무너지는 돌 더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역시 이곳은 마지막까지 국민을 괴롭히는구나. 그런데. '이걸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굴까?'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홍보 : 차기 작은 '기동전사 건담 - 지온의 복수'입니다. 많이 봐주세요. 여동생은 마녀 제 25화 평행 세계를 달리며 (1) 덜컥. 나는 우리 집의 문을 닫고 있었다. 내일은 내가 대학에 진학하는 날이자, 정식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선수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내 입학식에 축하를 위해 올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대학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부모님들도 지금보다 평수가 넓은 집으로 가시게 되어 기쁘신 모양이다. "이제 떠나는구나." "응." 문희가 나를 향해 작별인사를 건넨다. 뭐 그러는 문희 자신도, 이제 나와는 다른 대학으로 들어가, 신문기자의 길을 향해 정진........ "그런데 왜 똑같은 대학이냐." 망할 녀석. 네가 무슨 진드기냐. 왜 남에게 찰싹 달라붙은 거야. "네 옆에 있으면 특종감이 굴러 나오잖아." 그렇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뉴스메이커였다. 그 원인은 바로 문희 녀석이 찍은 사진이었다. 좀비를 두들겨 패는 내 사진, 정확히 말하면 국회의원 좀비를 두들겨 패는 내 사진이 신문사에 보내진 후, 나는 졸지에 유명인이 되고 말았다. 뭐 본의는 아니지만. "대단해. 속이 시원하더라." "멋져요. 문구씨." "만세. 연 문구 만세." 도대체 얼마나 국회의원들이 원한을 많이 샀으면, 이런 소리나 듣는 신세가 된 거냐. 그 후에 내 일은 전반적으로 잘 풀렸다. 아니, 아주 잘 풀렸다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세계적인 기업인 플래닛 그룹의 상속인으로 지명되어 있었고, 독일대사의 딸과 사이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 딸의 이름은 클라라. 바로 독일에서 내가 만났던 그 아가씨다. 그녀는 우리나라에 부임중인 독일대사에게 입양되었고, 얼마 전에 독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뭐 월드컵에는 응원하러 와 준다고 하니까. "진희가 안 됐어. 그 애,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그녀는, 연미 누나까지 없어지는 바람에 이중 삼중으로 고생한 모양이다. 그래도 부모의 재산도 있고, 우리 담임이 불철주야 뛰어다닌 보람도 있어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국회의원 딸답지 않게, 모가 안 난 성격이라서 그렇게 된 거지만. "그런데 연미 언니도 참.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그렇게 사라질 줄이야. 놀랐어." 나도 놀랐다. 이제야 안 일인데, 누나의 약혼자는 원래 진희 아버지, 즉 누나의 친아버지의 음모로 인해 한강 다리에서 사고를 가장하여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누나는 그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지만, 그 남자는 뜻밖에도 플래닛 그룹의 직원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를 보자마자 연미 누나는. "진희야. 미안. 하지만 이건 나에게는 한 번밖에 없는 기회야." 그러고는 둘이 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집안에서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이게 마지막 찬스야. 난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남자가 플래닛 그룹의 직원이 되었을까. 듣기로는 그 사람이 플래닛 그룹의 전임 회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하던데. "그런데 그 전임 회장이라는 사람, 3년 전에 죽었다지. 안 됐어." 그런데 문희 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냐. 내가 여태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그것인데, 왜 문희 이 녀석은 바로 그 전임 회장이라는 사람에게 10만 유로나 빌리고도,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래도 참. 어째서 널 유산상속인으로 지명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더라. 생전 보지도 못했던 사람인데." 바로 이거다. 이 녀석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10년 이상을 보아 놓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그나마. "그때 좀비들이 출현했을 때, 다른 사람들을 돕다가 헬기와 함께 추락했다고 들었어. 직원들이 모두 통곡했다고 하더라고." 사라진 날짜는 제대로 기억하는구나. 그러나 그 외에는 몽땅 틀렸다. 몽땅. 아니, 문희만 그러는 게 아니다. 끼이이익. "문구야. 오래간만이야." "고작해야 하루다. 하루." "그게 얼마나 긴데." 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내 목을 끌어안는 이 사람은 시내. 3년 전에 나를 초현실의 세계로 인도했던 열쇠가 된, 바로 그 아가씨다. 문제는 요즘도. "문구는 내 거야 !" 이 주제를 놓고, 클라라와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지만. 그녀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않지만, 플래닛 그룹이라는 막대한 재산문제가 걸려서 두 아가씨는 졸지에 연애잡지에 자주 나오고 있다고 한다. '숙명의 라이벌이라나?' 왜 내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그래도 두 사람이 워낙 막강해서, 벌레처럼 내 재산을 노리고 덤벼드는 여자들이 제거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기야 하지만. "그런데 그때." 그때. 즉 국회의원을 내가 패던 바로 그때의 일이다. 그때 국회의사당이 무너졌었는데.... "국회를 때려부순 외계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이 녀석, 알면서 이렇게 묻는다면 내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녀는 그걸 누가 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완전히 잊어버린 거다. 나만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부모님들까지도. '가끔씩은, 나 자신도 나만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엄연히 사실이었다. 내게는 여동생이 있다. 내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내게는 여동생이 있었단 말이다. 그걸 기억나게 하는 것은, 이제는 내 목에 걸린 은빛 열쇠뿐이었다. 여동생이 나에게 직접 건네준, 바로 이 열쇠. 그러나 이것은, 그 어떤 진실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빛나고 있을 뿐. 비록 내가 그 날 이후에, 여동생의 예언대로 꿈을 이루는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열쇠는 나에게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넌 여동생을 버렸어. 네 야망을 위해." 그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것으로 이 열쇠는, 나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삿짐은 다 옮겼고, 내일 온다고 했지? 여기에 이사온다는 사람은." 그렇단다. 나는 약간 맥이 빠지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대로 있으면 언제 기자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앞으로 난 계속해서, 이렇게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삶을 살게 되는 건가. '꿈을 이룬 것도 별로 좋지는 않아.' 막상 산에 오르니, 그 위에 아무 것도 없어서 허탈해진다고 할까. 그것도 지금이니까 가능한 호사스런 생각이지만. 내일부터는 공부에 운동에, 말도 못하게 바빠질 거다. 거기에 플래닛 그룹의 상속자로서 치를 유명세에다. '두 아가씨의 싸움까지.' 내가 꿈꾸던 미래였건만, 어째서인지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나 혼자서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이렇게 철저하게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걸까. '모르겠어.' 언젠가는 그 이유를 알 날이 있을까. 나는 여동생이 준 열쇠를 오른손으로 쥐어 보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그저 차가운 감촉만 남을 뿐. 그런 내 꼴을 지켜보던 문희가, 남의 회상에 멋대로 끼어 들었으니. "너, 또 여동생이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여동생이 없이 외롭게 컸다고는 하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과대망상이라고. 여동생이 있는 애들을 봐. 하나같이 오빠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더라." 뭐가 오빠의 슬픔이냐. 뭐 나도 옛날에는 그러긴 했다만. "게다가 있지도 않은 여동생이 줬다는 열쇠까지 만들어서 갖고 다니다니. 그런 건 이 근처 선물가게에 가면 얼마든지 파는데, 왜 그런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 결국 나는, 그 모든 진실을 나눌 상대를 잃은 것이다. 영원히. 그 누구도 내 여동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저 내 화려한 겉모습만을 바라볼 뿐. '어떻게 된 거야.' 그 날 이후로 내가 계속 품고 있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누가 나의 이런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가. 열쇠라고는 내 목에 아직도 걸려 있는 은빛 열쇠뿐이지만, 이것이 어디에 사용되는지를 나는 그녀, 여동생에게 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걸 말해주지도 않고 사라졌고, 나에게 남은 것은 허탈 뿐. '어느 문에 쓰는지는 이야기하고 갈 것이지.' 못된 녀석. 끝까지 오빠를 놀리는구나. 그러나 이런 나의 추억도, 곧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이 사라져 갈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집을 떠나고, 그녀를 연상시키는 것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으니까. 요즘은 나 자신조차. '내가 정말 여동생을 두고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할 정도니까 말이다. 나도 모르게 계속 기억이 사라져간다고 할까. 그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여동생이 준 열쇠가 나에게 진실을 보여줄 것이라는 말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한단 말인가. 우리 집의 열쇠 구멍이란 구멍에는 다 끼워봤었지만. '효과가 없었지.' 그러니 내가 미칠 노릇인 거다. 결국 나는 이사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열쇠의 쓰임새를 찾지 못했고, 이제 이 집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젠장. 이런 초보적인 수수께끼도 풀지 못하다니, 여동생이 나를 얼마나 비웃을지..... 이젠 있었는지도 희미해지는 애지만. "자. 자. 그만 출발해야지? 문구씨." 문희가 나를 밀고, 클라라와 시내가 같이 민다. 나는 힘없이 문 밖으로 걸어나가며, 마지막으로 다시금 우리 집을 본다. 이제는 우리 집도 아니고, 그저 옛날에 살았던 집에 불과하지만. "자. 그럼 가실까요?" 나는 현관문을 잠그고, 뒷문으로 향했다. 이쪽 문까지 잠가버리면 이제 할 일은 끝이다. 내가 열쇠를 뒷문에 집어넣고.... "이봐. 문구야. 보통은 밖에서 열쇠를 잠그는 거 아니니?" 나도 모르게 뒷문의 안쪽에 있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있는 거다.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그녀. 확실히 보통 문은 밖에 열쇠구멍이 있지, 이것처럼 안과 밖에 모두 열쇠구멍이 있지 않......... "!" 그렇지 ! 나는 그제야 그 문이 바로, 전에 여동생이 쓰던 방문이었다는 걸 상기했다. 그럼 이 문이 설마..... 내 손이 움직이고, 은빛 열쇠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철컥.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자기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는 나. 그리고 그 안에는..... 쿵. 나는 그냥 문을 닫아 버렸다. 사람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는 느낌 때문이다. 인간이 접근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동생은 분명히...... "왜 그래? 왜 문을 열었다 닫는 거야?" 누가 물어도 나로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모두들 저걸 못 본 모양이고, 저걸 바라보다가는 미쳐버릴 테니까.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직시한다는 건, 인간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런 일이기에. 종교에서 인간이 신을 직접 바라보다가 죽는다던가 한다는 소리는 폼으로 나온 게 아니었던 거다. '차라리 묻어두자.' 나는 열쇠를 빼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시는 열지 않으리라. 이곳에 다시는 발을 디디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그냥 문을 열었고,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푸른 하늘이 있었다. <<치치치칙>> "아우. 출발시간이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내가 하필 이 좋은 순간에, 소녀들을 놓아줘야 하는 건가. "아응...." 침대에 벌거숭이로 누워있는 진희와 시내, 그리고 문희의 알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난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여인들의 피부가, 당장이라도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번쩍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만져볼까. "아니, 안 되지." 오늘 나는 월드컵을 위해 출국해야 한다. 처음부터 여자 세 명을 상대로 하룻밤의 정사를 치르고도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 내가 수많은 여자들을 아내로 삼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혜인데, 그 이상의 특별대우를 요구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난 국회의원이 아니라고. "으차." 나는 벌떡 일어나서, 급히 샤워실로 달려갔다. 물론 내 아내들을 위해 이불을 덮어주고, 키스를 볼에 해주는 것을 잊지 않고. 되도록 시끄럽게 굴지 않으려고, 발끝을 든 채로 달려간다. 조심. 조심. 안 미끄러지게. 쏴아아. 그리고 샤워를 한다. 몸을 깔끔히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공항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다들 모인다고 했으니까. 뭐 가고 나면 분명히. "이봐. 인기남." "도대체 여자가 몇이야." "부러운 녀석." "누구는 돈도 많고 여자도 많고 인기도 많은데, 우린 뭐냐." 팀웍을 흐트러뜨리는 요인이 되기 싫으면, 가서 열심히 뛰어야 한다. 후보도 아니고 주전선수면서, 게으름을 피우면 말이 안 되니까. 물론 나만 여자가 여럿인 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좀비와의 전쟁,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세계의 대대적인 재편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 거기서 나는 전쟁영웅이 되었고, 우리나라의 통일에 나름대로 약간의 공을 세웠다. '서울시청 앞에 동상이 세워질 뻔했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니 그런 걸 세우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말려서, 겨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살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내가 그런 엄청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거냐. 그런 게 된 것이야 좋다. 그러나 막상 되고 나니, 하루종일 인터뷰에 시달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뭐 나만 그런 건 아니지만.' 유럽 제일의 미인으로 성장한 클라라가 매일 녹초가 되는 게 왜 그런지를, 이제는 이해하고 있다고 할까. 뭐 그녀가 내 아내중 한 사람으로서, 유럽 제일의 부자이고 기업가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나로서는 약간 콧대가 높아지는 일이라 하겠다. 뭐 세계 제일의 부자는 따로 있기야 하지만. "클라라가 이번에 월드컵에서 날 응원한다고 했으니...." 다행스럽게도 독일과 우리나라는 결승에나 가서야 만나는 대진표다. 뭐? 조 1위를 하지 않으면 그것도 아니라고? 걱정할 거 없다. 내가 있는 한, 그리고 우리 팀의 위대한 선수들이 있는 한 절대로 조 1위다. 그건 법칙이다. 지상명령이다. 안 그러면. '하늘에서 벼락이 칠 거야.' 그러니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나는 열심히 뛰어야 할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일단 아침부터 차린다. 내가 차릴 필요는 없었지만. "어휴. 너 어떻게 오늘 출국인데 그렇게 열심히 하니? 밤에 잠을 못 자겠더라." 그녀는 미연. 과거 내가 고등학교 재학 중에 담임 선생님이었던 분이다. 더불어 현재는 내 아내들 중 한 사람이기도 하고. 알몸에 에이프런이라니, 아잉. 너무 좋아.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서 목덜미에 살며시. 쪽. 키스를 해준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는 틈을 타서, 이번에는 볼에 키스를 한다. "아, 지, 지금은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라서...." 그러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는다. 살짝 만져주자, 그녀는 순식간에. "아, 아앙...." 국자를 든 채, 다리가 풀려간다. 이대로라면 나는 사나이답게, 그녀의 다리를 벌려서 그 공허한 마음을 메워줘야 할 것이다. 조금씩 그녀를 끌어안고.... "문구야 ! 지금 그러면 어떻게 해 ! 시간이 없다고 !" 아. 꼬마 선생님. 이미 제 아내가 된 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지금도 그렇게 선생님 노릇을 하십니까. 하지만 그녀의 동글동글한 눈이 습기를 머금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다. 그냥 내가 패하는 것이, 내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나는. "네. 네." 그렇게 대답하며, 미연의 다리 사이를 살짝 건드리고, 그녀를 놓아준다. 그녀가 힘이 빠진 듯이. 털썩. 그대로 주저앉는다. 눈이 완전히 풀린 채. "빨리 먹으라고. 공항에서 미인이가 기다리는데, 어째서 오빠가 그렇게 못됐니? 여동생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하지만 걔만 보면 괴롭히고 싶어져서...." 나에게 구박받는 그녀의 이름은 미인. 내 여동생이다. 물론 나도 가급적이면 오빠로서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지만, 이상하게 그 얼굴만 보면 자동적으로 괴롭히게 된다. 물리법칙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울먹이는 그녀를 안아주고, 다독거리는 게 내 일이다. 도대체 세계 제일의 대부호에다 대기업가면서, 왜 나한테만은 그렇게 울보 여동생이 되는 건지. "그러니까 네 유일한 결점이, 그거라는 소리를 듣지. 너도 참." 꼬마 선생님, 아니 영미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나는 그저 편한 자세로 열심히 먹기만 할 뿐이다. 으. 어떻게 잠자리에서는 그렇게 열정적이면서, 해만 뜨면 이렇게 선생님의 자세를 유지하는지. 안경을 안 낀 게 불가사의하다. "문구야....." "아, 알았어요." 이러니 내가 아내들에게 잡혀 사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는 거다. 물론 과거의 가부장제 사회처럼 철권통치를 하는 것도 안 좋아하지만. 나는 드디어 식사를 끝마치고. "자. 그럼 가볼까." 양복을 입고 대형 리무진으로 간다. 어지간하면 이런 걸 타기 싫지만, 내가 밖으로 나가면 사인해달라고 쫓아다니는 여자애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니 남자애들도 가득하기 때문에 이런 보호수단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왜 내가 매번 나갈 때마다 지하실로 내려가야 하는 거야. '무슨 태권 V 출동이라도 하는 거냐.' 내가 축구선수에서 은퇴하고, 정계에 진출하면 이런 게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았다가 지난번처럼. [연 문구 선수에게 팬들이 몰려, 팬들 다수 부상] [요인 경호체계에 허점을 드러낸 정부에 비난 빗발] 또 이런 기사가 실리면 곤란해진다. 국민에 사랑 받는 사람은 이런 게 고단하다니까.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거구의 운전사에게 안내를 받아, 내 차로 들어간다. 문이 천천히 닫히고, 지하 터널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리무진이 천천히 움직인다.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최첨단 수소자동차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척척척. 안전벨트가 저절로 매어지고, 나는 편히 몸을 뒤로 눕혔다. 이제 출발인가. 공항까지 오늘도 무사히. 내 아내들이 모조리 나와서 손을 흔들어준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치치칙>> 우드득. 나는 드디어 깨물리고 말았다. 주유소에서 절망적인 저항을 펼치던 나는, 결국 기름이 떨어짐과 동시에 좀비들에게 포위 당했고, 얼마 못 가서 예정된 결말을 맞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 좀비에게 먹히는 참혹한 최후. "으아악 !" 내 오른팔이 깨물리면서, 그대로 근육과 피부가 뜯겨져 나갔다. 피가 흘러나온다. 마치 수도관이 터진 것처럼. 아무래도 동맥이라도 건드린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깊이 물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보통 정맥이 피부 가까이에 있고, 동맥은 몸 깊숙이 묻히는 법이므로. 나는 서서히 쓰러졌다. 아스팔트 위에. 열기로 녹은 아스팔트 위에 미끄러지는 내 꼴이 처참하다. 피가 흐르면서, 아스팔트가 온몸에 묻는다. 여름 날씨로 인한 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 내가 발악적으로 뿌려댄 화염으로 인한 것이겠지. 그러나 분한 것은 죽는 게 아니었다. 하필 나를 문 녀석이. '왜 국회의원이야.' 하필이면 가슴에 국(國)자 배지를 단 녀석에게 물리다니. 그게 분할뿐이었다. 그 놈들을 모조리 처치한 후에 죽었다면 조금은 분이 풀릴 텐데, 결국 나는 그조차도 해내지 못한 거다. 나쁜 여동생 같으니. '뭐? 내가 중간을 택하면 최소한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은 보장될 거라고?' 그거 완전 거짓말이었잖아.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여동생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내가 그 이상을 생각하기도 전에. 으적. 내 목의 경동맥이 그대로 잘려버렸다. 피가 문자 그대로 분수처럼 치솟았다가, 다시 내 얼굴에 떨어진다. 이렇게 죽는구나. 흐려지는 내 눈에 우리 일행이 탔던 승용차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차 문이 강제로 열리고, 좀비들이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아아아악 !" "카아아아." 차가 흔들린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이 갈 정도로. 나는 소녀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눈앞이 컴컴해진다. 이제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차갑다. 차갑다. 너무나 차갑다.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그런 냉기가 나를 뒤덮고 있었다. 이것이 죽었다는 증거인가. 아니다. 난 분명히 눈을 뜨고 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세계. 조금 전까지 나를 뒤덮을 듯 몰려왔던 좀비들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아직도 앞을 볼 수 있었다. 비록 회색 구름만이 뒤덮인 세계라고 할지라도. 난 살아있는 건가. 하지만 확인할 수가 없다. 이미 유령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내 손이 움츠러들었다. 너무나 차가운 느낌이, 내 손을 묶고 졸랐기 때문에. 나는 잠시 몸을 가만히 두었다. 그러나 한없이 차갑다. 분명히 지금의 계절은 여름인데도. 아스팔트에 몸이 녹아서 눌어붙은 건가.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킨다. 따스한 기운을 찾아서. 불이라도 피워서, 몸을 녹여야 한다. 조금 전에 쓰던 주유기로 기름을 뿌리고, 불이라도 붙이면 조금은 몸이 풀릴지도 모른다. 몸 전체에 파고드는 공허감과, 그 텅 빈 가슴을 채우는 이 추위. 이걸 풀어내려면. '배고파.' 배도 고프다. 뭔가를 먹고 싶다. 이왕이면 음식점에라도 가서, 아무 거나 꺼내서 먹어야겠다. 도둑질이라는 건 알지만, 지금 그걸 따질 여유란 없다. 너무 배가 고프기에. "으음...." 누굴까. 나는 그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타고 왔던 바로 그 승용차다. 소리는 그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따스하게 느껴지는 기운도. 나는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켰다. 아스팔트에서 몸이 떨어진다. 찌익. 등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뭔가가 너덜거리지만,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저, 이 끝없는 공허감을 메워줄 먹거리가 필요할 뿐.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차. 차. 차에 뭔가가 있다. 그것은 따스함. 그 무언가. 다른 녀석이 먹기 전에, 내가 먼저 먹어야 한다. 이 근처에는 다른 먹거리가 없고, 지금 먹지 못하면 며칠을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먹어. 먹어. 먹어. 그 말이 내 의식을 지배한다. 먹어. 먹어. 먹어. 차 문이 부서진 채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다. 안에 뭔가가 꿈틀거린다. 먹어. 살아있는 사람일까. 먹어. 살아있다. 먹어. '그것'이 눈을 뜬다. 먹어. 일어나서 반항하기 전에 먹어야 한다. 먹어. 먹어. 그것이 노란 머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른다. 이런. 깨어났군. 먹어. 먹어. 나는. "카아악." 그것의 목을 물어뜯는다. 피가, 맛있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먹어. 나는 그것을 마신다. 먹는다. 목구멍 속으로 들이킨다. 먹어. 그것이 버둥거리다 늘어진다. 먹어. 그것의 목살을 이빨로 찢는다. 삼킨다. 너무나 맛있다. 소금기가 약간 배인 이 자연스러운 간이, 내 혀를 촉촉이 적신다. 먹어. 먹어. 먹어. 나는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치치치칙>> "뭐, 뭐야? 이런 건?" 내가 여동생의 오른손에 놓인 열쇠를 집자마자, 나에게 보여진 것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내가 장래에 축구선수가 되어 진희와 시내와 클라라를 모두 거느리는 식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내 꿈을 성취하는 모습들도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그 대부분은. 으적. 으적. 이런 식이었다. 즉 내가 시체가 되어, 사람을 습격하고 잡아먹는 광경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무슨 영화처럼. 하지만 이런 식의 입체영상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동생이 내민 오른손의 열쇠를 택한 것은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영상들 대부분이. 으적. 으적. 이런 거다. 100만개의 영상이 있다면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웬만큼은 있어야 할텐데, 어떻게 된 게 나오는 것마다 다 시체놀이다. 죽은 내 모습, 죽어 가는 내 모습, 이미 죽어서 쓰러진 내 모습, 심지어는 내가 클라라를 습격해서, 목을 물고 머리가죽을 뜯어낸 후 그대로 두개골을 이빨로 부숴 버리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뇌수를..... "우엑." 저건 내가 아니다. 난 절대로 저 지경까지는 안 간다. 내가 설령 좀비들에게 물려 죽더라도, 저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수류탄이라도 끌어안고 자폭을 해버리지. 이번에는 내가 시내의 팔다리를 물어뜯는 장면이 나온다. 미치겠군. 그녀가. "아,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아아악 !" 이렇게 간곡하게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잔인하게도 시내의 얼굴로 입을 들이대더니, 그 뺨을 물어뜯는다. 입안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턱뼈와 살점이 엿보인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혀를 이빨로.... "으윽."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다. 내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진희의 목을 물더니, 그대로 그 아래의 가슴을 잡아뜯는 게 나온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심장. 그리고 나는 그 펄떡펄떡 뛰는 것을 그대로 잡아다가..... "그, 그만 해 ! 그만 해 !" 그만 하란 말이야 ! 나는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주위의 영상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이런 걸 보여주려고 나에게 오른손의 열쇠를 집게 했단 말인가. 나는 여동생에게 외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진실이야 !" 설마, 내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겠지? 난 분명히 인간이고, 좀비에게 물린 적도 없었다. 따라서 저런 짓을 할 리도 없으며, 만약 내 기억이 지워진 상태였다면 여동생은 지금쯤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따라서 저건 내가 아니다. 내가 저런 짓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저건 분명히.... "그게 바로, 오빠야." 내 기대를 무참히 허물어버리는 여동생. 악마 같은 녀석.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평행세계의 오빠이지만. 조금 전에 오빠가 두 개의 열쇠를 놓고 고민할 때, 그때부터 세계는 움직이기 시작했어. 수없이 갈라진 평행세계 중에서, 지금 오빠가 한 선택. 즉 오른손 열쇠를 고르지 않았을 때의 오빠의 모습이, 바로 지금의 영상들이야." 뭐라고? 평행세계. 평행우주. 그것은 현대물리학에서 거론되는 우리 우주의 모습 중 하나로, 나와 완전히 똑같은 기억, 똑같은 육체를 지닌 자가 살고 있는 '다른 우주'라고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똑같지만, 내가 사는 이 우주와는 약간 다른, 조금 다르게 발전하는 미래를 가진 우주. 비록 나 자신도 이렇게 생각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기에는 나와 완전히 똑같은 '또 다른 나'의 존재가 있으며, 그는 나와 원래 하나였지만 내가 한 가지의 선택을 할 때마다 무수히 발생하여, 또 다른 우주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곳에 살게 된다고 한다. 역시 이해할 수가 없는 개념이지만.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여동생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우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오빠가 떠올린 그 개념이, 대략 비슷해. 이, 이봐. 왜 내 생각에 끼어 드는 거야. 정신 없다. 끼워 팔기 금지. 여동생 때문에 어지러워진 정신을 수습하며,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내 여동생은 어째서 이런 괴물단지가 된 거야? "천천히 말할 거야. 그보다 일단은, 평행우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겠지?"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어지러운 녀석. 사람을 이렇게 헛갈리게 하다니. 어쨌든 여동생의 말은. "오빠가 지금 본 세계는, 내가 내민 열쇠에 대해 오빠가 어떤 열쇠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갈라진, 오빠의 미래이지만 오빠의 미래가 아닌 우주야. 그곳에 있는 사람도 오빠이고, 여기에 있는 인간도 오빠 자신이 맞아. 다만 지금의 오빠는 내 오른손에 있는 열쇠를 선택한, 바로 그 사람들의 집합체야." 아하. 그렇구나..........가 아니지. 지금 뭐라고 했어? "집합체?" 뭐가 집합이냐. 난 조금 전부터 지금까지, 합체했다는 느낌 같은 건 전혀 받은 적이 없다. 그 증거로 내 주위에는 똑같은 내가 아무도 없으니까. 게다가 합체했다면 기억에 분명히 혼란이 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좀 전에 분명히, 이 녀석의 열쇠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오른손을..... '난 분명히 고민도 안 하고 금방 선택했는데?' 아니다. 이건 아니다. 난 분명히 한참 고민하다가 선택했었다. 아니다. 난 여동생의 독촉에 못 이겨서, 좀 빨리 선택했다. 난 선택하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서 여동생과 포옹을 했고... 아니다. 난 여동생이 골을 내는 모습을 보며, 벌벌 떨다가 실수로 오른손을 고른 거다. 아니, 나는..... "왜 내 기억이 이렇게 뒤죽박죽이야 !" 결국 나는, 만병통치약이신 여동생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내 기억이 왜 이런 식으로 뒤엉켜버린 거야? 내가 그러니까 요 녀석의 열쇠를 어떤 식으로 선택했지? 그건..... "이미 합쳐졌으니까." "?" "즉 무수히 많은 평행우주로 갈라지는 와중에서, 오른손 열쇠를 선택한 오빠만이 남고, 나머지는 다른 우주의 오빠로 존재하게 된 거야. 그리고 오른손을 선택한 오빠는 여기에 모인 후, 하나로 합쳐져서 내 앞에 있게 된 것이고. 그러니 오빠는 지금 자신이 열쇠를 선택할 때의 기억이 없을 거야. 무수히 많은 기억이 뒤섞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거든." ".........." 확실히 내 기억은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버렸다. 정확히 따지면, 내가 열쇠를 선택하는 그 순간만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뭘 마구 뒤섞었다고? 갑자기 마구 화가 난다. 즉 이 녀석의 말은, 자기 멋대로 평행세계의 수많은 나를 가져와서, 진흙덩이라도 되듯이 마구 뭉쳐서, 그걸 이 자리에 떡 하니 세워놓았다는 거다. 마치 밀가루 떡처럼. "내가 네 만두냐?" 내가 무슨 네 맘대로 빚어내는 만두라도 되는 거냐? 그렇게 긴 말을, 나는 팍 줄여서 표현했다. 어차피 그 정도면 여동생은 다 알아들을 테니, 설명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생각대로 그녀는 다 안다는 듯이 한 번 웃더니. "일을 번거롭게 하는 걸 막으려는 거야." 그건 무슨 소리냐. 여동생. "오빠는 평행세계가 갈라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오빠로 갈라지지만, 나는 단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야. 오른손을 선택한 오빠도 선택의 시점과 결심과정에서의 여러 생각, 그에 따라 무수히 많은 버전이 존재하지. 그게 바로 평행세계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야. 물론 그에 맞춰서 나도 갈라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무수히 많은 내가 존재하게 되고, 그걸 모두 다루는 건 지극히 어려워져. 어쨌든 무한한 숫자의 내가 생기는 거니까 말야."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서는, 평행세계의 발생을 강제로 막을 필요가 있어. 왼손의 열쇠를 선택한 오빠의 세계에 내가 있을 이유는 없고, 거기에는 가상의 여동생, 오빠의 충실한 여동생만 만들어서 세워두면 그만이야. 기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왼손의 열쇠는 기만 속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니 그게 순리지. 그러니 그쪽은 평행세계가 백 만개가 생기든 내가 알 바 아냐. 이미 손을 뗀 상태니까 말야. 반면에 오른손의 열쇠를 선택한 경우라면 문제는 달라. 그쪽은 평행세계로 갈라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게, 열쇠를 선택한 후에도 오빠에게 약속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 나도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약속을 어기는 게 되기 때문에, 나는 평행세계의 발생을 강제로 막은 거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서 좀비가 생기는 세계가 그렇게 많은 것은, 무수히 많은 평행세계 중에 오빠가 열쇠를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야. 월영이나 마법제국에서, 내가 없다는 걸 알고 마법으로 도와주는 미래도 생기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 좀비에게 물려 죽는 결말로 가게 되는 거지." What?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망진창, 난장판으로 뒤엉켰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상황을 억지로 강의 받아야 하는 꼴이니, 무리도 아니다. 오. 신이시여. '당신은 어찌하여 저런 기괴하고 요상한 여동생을 저에게 주셨나이까.' 확 물리고 싶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어째서 나는 저런 여동생의 오라버니가 되었단 말인가. 최소한 인간의 언어로 설명을 해 줘. 이건 내가 속한 세계의 일이 아냐. 도저히 모르겠다고 ! 그러나 매정한 여동생은. "이젠 오빠가 속한 세계의 일이야. 이미 내 오른손의 열쇠를 선택한 이상은." 그냥 물릴까? "물리면 저런 엔딩으로 가는데? 그래도 좋다면 뭐 지금이라도 물려줄 수....." 여동생의 손가락 끝에 나타나는 영상들. 그것도 예외 없이 좀비들의 괴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잠깐. 여동생의 말은. "그럼 내가 만약 양쪽 열쇠 모두를 선택하지 못했다면, 저렇게 된다는 거냐?" "응." 뭐, 뭐, 뭐라고? 입을 떡 벌리는 나에게, 여동생은 친절하게도 다 말해준다. 으. 괜히 물었다. 차라리 안 들을 걸. "그게 바로, 오빠가 원래 살던 세계의 원래 운명이었거든." 뭐? 왜 그런 게 우리 세계의 장래라는 거냐? 반론이라도 던지고 싶어도, 원래 초자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나보다 여동생이 월등히 잘 아니 입도 열 수 없다. 뭘 알아야 반대하든 찬성하든 할 게 아닌가. 그녀는. "과거에 쌍어궁이 오빠가 사는 세계에 들어왔을 때, 이미 그 운명은 정해져 있었어. 그들의 목적은 이 세계의 지성을 지닌 생물체들을 모조리 잡아서, 그 혼을 빼내어 자신들의 병기에 쓸 에너지원으로 만드는 것이었거든. 그들은 아마 마법제국에 복수하던가, 아니면 최소한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니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들을 누가 막지 않는다면, 저게 오빠가 맞이할 운명일 수밖에 없었던 거지." 화면에 보이는 좀비들의 만행들. 그러니까 저게 바로..... "응. 오빠의 미래야. 그러나 내가 개입함으로서, 운명은 바뀌었지. 그들이 더 많아져서, 더 많은 평행세계가 그들의 손에 의해 시체들의 땅으로 변하는 걸 막기 위해, 나는 평행세계의 생성을 봉쇄했어. 처음에 나에게 자신들의 동료를 일곱이나 잃은 그들도,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다른 우주에 미칠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어든 게 된 거지." 줄어든 게 그 모양이냐..... "그러나 그들을 죽인 이후에는, 원래의 세계의 구성원들에게 그 세계의 미래를 돌려주는 것. 그게 원칙이야. 쌍어궁 일당은 다른 우주에서 온 별개의 존재여서,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었어. 이 세계의 주민들을 보호해야 하니까." "그런데 왜 내 미래가 모조리 저 지경이냐?" 이 녀석 말대로라면, 쌍어궁이 죽었으니 그 후에는 좀비가 생길 일이 없는 게 아닌가? 좀비를 만들어내던 자가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왜 내 미래는 거의 모두가 저 지경인 거냐? 말 좀 해 주라. 여동생. "그게 바로 지구의 인간들이 선택한 결과니까." 누가 저런 선택을 한다는 거냐. "정치가들." 윽. 반론이고 뭐고 불가능했다. 그들의 이름이 올라왔으니까 말이다. 하긴 그들이라면 충분히 인류의 미래를 망칠 수 있지. 그들이라면. "그들은 좀비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독일에서 좀비들이 대량 발생했을 때 그 중 일부를 실험실에 보냈어. 물론 좀비에 대해 치료방법을 연구하는 게 처음 목적이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던 거야. 그들의 생리학적 특성을 연구하던 학자들의 연구소가 프랑스에 있었고 - 물론 다른 나라에도 몇 개 있었지만 - 그들은 내가 그들의 우주에서 사라졌을 때, 그걸 느낀 거야. 굉장히 좋아하더라고. 그리고 그 후에는." "연구소에서 달아난 거냐." 여동생의 말대로라면 결론은 그거 아닌가. 언제나 과학자들이 범하는 실수, 즉 정체불명의 괴물을 연구하다가 실험실에서 녀석이 달아나고, 그 결과 대량살인이 벌어지는 것. 너무 오래된 레퍼토리라서 이제는 질릴 정도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거냐.' 그런데 잠깐. "그럼 넌 왜 그들을........" 내버려뒀던 거냐. 그게 내 질문의 핵심이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왜 그걸 방치한 걸까. 독일에서 그 많던 좀비들을 인간으로 되돌린 것이, 바로 이 녀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그게 인간의 선택이니까." 뭐? 서, 선택? 선택은 무슨 말라죽을 놈의 선택. 저 끔찍한 광경이,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그걸 그대로 놔 두냐? 그냥 다 없애고 나왔어야지 !" 그렇다. 그랬으면 저런 식의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게 아닌가. 저게 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내장이 먹이를 찾아 헤멘다. 동물원의 짐승들까지도, 그 대열에 동참한다.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에게 먹히고, 죽은 자는 산 것들을 찾아 헤멘다. 오직 먹이를 먹기 위해. 저 대열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그나마 지금 나오는 장면은. 우드득. 내가 먹히는 모습이다. 문자 그대로 뼈도 남기지 않고. 저 경우에는 내가 살인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지금 내가 이 녀석에게 따져야 할 건. "도대체 왜 내버려둔 거야 !" 그러나 그녀는 냉혹하게도. "아까 말했잖아. 그게 인간이 선택한 미래라고." 이 감정도 없는 녀석. 피도 눈물도 없냐.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가 있냐. 뭐 인간 같지도 않지만. 나는 이 얼음의 심장을 가진 여동생을 향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고쳐야지 !" "그럼 나는 오빠가 진희에게 제대로 고백도 못하고 질질 끌고 있을 때, 억지로라도 둘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알려준 후 한 방에 가뒀어야 할까? 오빠의 논리대로라면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결론이 성립하는데...." 무, 무슨 소릴 ! 내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싫어 !" 그거하고는 이야기가 다르잖아 ! 도대체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비약하는 거야? 그러나 여동생은 태연하게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고백도 못 해보고 헤어진다. 별로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래서 일껏 고백타임을 만들어주었건만, 그 후에도 뭉기적뭉기적. 결국 오빠는 아무 것도 못하고 진희하고도 그렇게 끝났잖아? 오빠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그때 억지로라도 두 사람을 맺어줬어야 했다는 논리지. 그게 올바르니까." 그런데 잠깐.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럼 진희가 날 좋아한다고 말을 했어야지 !" 그게 더 빠른 게 아닌가. 그랬으면 내가 그렇게까지 골을 낼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여동생은. "그건 사람의 마음을 내가 투시했다는 것을, 오빠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거야. 그 시점에서 오빠가 내 정체를 알았다면, 아마 내가 눈을 떼는 즉시 죽었을 걸. 쌍어궁 일당에게 나는 눈엣가시였으니까. 그런 여자의 오라버니가 지구에 있다. 그럼 그들이 오빠를 살려둘 것 같애? 아마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걸?" 잔인한 방법. 쌍어궁이 나에게 가했던 폭행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던 건 그 후에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지만.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그래. 어차피 사람을 되살릴 능력도 있는 주제에." "오빠는 마법에 대해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거야." 윽. 마법에 대한 이론으로 사람을 막다니. "게다가 내가 진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오빠에게 말한다면, 진희는 어떻게 생각할까? 오빠 자신도 내가 오빠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그것도 매우. 하필이면 이 속이 시커먼 녀석에게 내 진심을 홀라당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 "그럼 진희도 똑같을 거 아냐." 치사한 녀석..... 그럼 차라리 사람의 마음을 읽지 말면 되는 거 아니냐. 나는 마지막으로 저항을 시도하지만. "오빠 같은 인간의 마음은, 내가 굳이 마법을 안 써도 다 읽을 수 있어. 가만히 있어도 오빠의 정신파가 조금씩 밖으로 방출되고, 그것만 느껴도 다 알 수 있는 걸. 원래 마법사라는 건 주위의 에너지 흐름에 민감해야 하는 거니까. 싫어도 다 볼 수밖에." 별로 싫어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오빠가 줄기차게 맞았던 거고. 어떻게 진희는 해도 되는 일이 나는 하면 안 되는 일인지. 오빠가 하는 걸 보면, 뭐든지 내가 하는 건 사악한 짓이라고 해석하고 있던데?" 이, 이 녀석이.... 사람을 뭘로 보는 거냐. "오빠로 보고 있지. 여동생이 하루라도 돌보지 않으면, 당장 좀비를 만나거나 교통사고로 죽거나 깡패에게 잡혀가는." "내가 언제 !" 그러나 그렇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실제로 여동생이 눈을 떼자마자, 나는 독일에서 좀비를 만났지 않았던가. 머리를 감싸쥐며 쓰러지는 나. 도대체 왜 나에게는 저런 이상한 여동생이 들러붙은 건가. 그런데........... 가만. "너, 내 여동생이라고 했지?" 그런데 왜 내가 사는 우주를 자신의 우주라고 하지 않는 거지? 엄밀히 말하면, 네가 내 여동생이라면 당연히 너도 내가 사는 우주의 주민이고, 그러니 그 우주의 미래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있....... "그건 오빠가 오른손 열쇠를 선택했을 때의 일이니까." 에? 멍하니 여동생을 바라보는 나. 도대체 그건 또 무슨 외계어냐? 해석 좀 해라. "오빠가 왼손 열쇠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그 경우 나는 그 우주에서 떠나고, 미래는 거짓된 여동생에게 맡겨지는 거야. 내가 만들어낸, 유전적으로는 완전히 오빠의 여동생이지만 실체는 단백질 인형에 불과한 존재에게. 그리고 그런 애는 당연히 나와 같은, 마법을 구사할 능력이 없지. 그러니 그곳에서 좀비가 나오든 말든, 내가 알 바가 아니지. 뭐 그 경우에는 오빠가 죽기 전까지는 보호마법이 유지되게 해놓겠지만." 내가 선택한 미래도 아닌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냐. "오빠가 두 열쇠를 모두 거부한 경우에도 내가 그곳에 있을 이유는 없지. 오빠가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옆에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있으면 안 되니까. 만약 내가, 즉 오빠의 여동생이 내가 좀비들을 제거할 힘을 지녔다고 밝혀진다면? 그럼 오빠도 똑같이, 그런 힘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 버려. 그러면 당연히 오빠의 미래는 축구선수가 아니게 되지. 그런 사람이 다른 평범한 인간과 정상적으로 경쟁하는 것 자체가 반칙으로 여겨지니까. 그러니 내가 그곳에 있을 수는 없는 거지. 그러나 그 경우에는 왼손 열쇠를 정식으로 선택한 게 아니므로, 나는 오빠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게 되는 거지. 어정쩡한 미래를 고른 거니까. 그러니 그 미래는 정치가들에게 맡겨지게 되고, 그 결과는 파멸이지. 그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엿볼 수 있는, 좀비라는 살아있는 시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마, 말이 너무 길다. 이 나쁜 여동생아. 그러나 그녀가 언제 내 귀를 신경이라도 써 주었던가. 그녀는. "다만 오빠가 오른손 열쇠를 고른 경우에만, 나는 우리 우주라고 불릴 곳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 경우는 오빠가 내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었다는 의미이니, 마음놓고 우주의 미래를 개척해줘도 되는 거지. 다만 오빠의 축구선수로서의 꿈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이유로 박살이 나겠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데. 왜 내가 이 녀석을 받아들여야, 우리 우주로 이 녀석이 돌아온다는 거냐? 그러자 여동생 왈. "오빠잖아." 복잡한 논리를 완벽히 봉쇄하는 그 말에, 나는 꼼짝 못하게 되었다. "뭐 오빠가 나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만약 쌍어궁이 오빠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굳이 내가 내 본모습을 보일 이유도 없었을 거야. 그 경우는 오빠 모르게 인류의 미래에 개입한다는 것도 가능하니까. 하지만 일단 오빠가 나에 대해 안 이상, 정체를 알고 그걸 받아들이느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오빠의 머리를 멋대로 날려버리고, 기억을 조작할 생각이 없으면." 이미 날리지 않았냐? "되살려줬잖아? 그리고 평행세계의 분열은, 오빠가 여기서 우리 우주로 돌아간 후에 시작될 거야. 그 후에야 나도 안심하고 그 분열 속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할 수 있겠지. 오빠가 나이를 먹어 죽은 후에, 내 존재를 도로 다 이어 붙이면 그만이니까." 네가 무슨 합체로봇이냐. 그녀는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갑자기 기지개를 켠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가슴이 출렁거리잖아. 어지간하면 브래지어 정도는 입고 다녀라. "보는 사람도 없잖아?" 난 남자도 아니냐. "오빠니까." 윽. 치사한 녀석. 그 말로 내 입을 몽땅 다 봉쇄하는 거냐. 그리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더니. "그럼, 이제부터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나에게 질문을 할 게 있어서 오른손 열쇠를 선택한 걸로 아는데?" 뭐 그렇기야 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 그것 때문에 나는 축구선수로서의 미래까지 포기하고, 오른손 열쇠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스리 사이즈 알려줄 수 없냐?" 퍽. "아구구구구." "꼭 이 분위기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거야?" 나쁜 녀석. 뭐든지 다 알려준다고 한 게 아니었냐? 그러나 여동생은 야속하게도. "세상에 여동생에게 그런 흑심을 품는 오라버니가 어디 있어 !" 우. 날 여동생에게 손대는 변태로 보고 있었던 거냐. 뭐 어차피 만져보지 않아도, 여동생의 가슴이 E컵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기야 하지만. 어차피 그렇게 가슴이 크면 숨기고 싶어도 숨기지 못한다고.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어린애 버전이 아니라 어른 버전의 모습을 하고 있네. 어차피 어린애 버전에서도 D컵은 되는 것 같았지만. 퍽. "아구구구구." "이상한 쪽을 묻지 말고, 빨리 원래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하라고. 오빠가 알고 싶은 건 내 과거 아니었어?" 그게 맞는 말이긴 했다. 즉 나는, 도대체 여섯 살 무렵까지는 그렇게도 착하고 순진하고 오빠만 알던 그런 애가, 왜 이런 괴물단지로 진화했느냐는 게 궁금했던 것이다. 여동생의 과거사를 아는 것은 오빠의 의무이기도 하고, 특히 이런 괴물이 되어 버린 여동생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직까지도 이 녀석이 진짜로 내 여동생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나로선. 그녀가. "그럼 보여줄 테니, 편한 자세로 구경하고 있어." 갑자기 내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이 계집애가. 왜 이렇게 얌전하지 못해?" "우아아앙." 어린 아이가 울고 있었다.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알아봤다. 그건 바로 내 여동생, 내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유괴범에게 끌려가서 되찾지 못했던 그 애. 그 애의 얼굴을 내가 어떻게 모르겠는가. '이게 여동생이 보여주는, 자신의 과거라는 건가.' 그런데 꼭 저렇게 실감나는 영상을 동원할 필요는 없잖아. 여동생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하고, 유괴범은 그런 그녀의 뺨을 내리친다. 못된 자식. 지금의 여동생의 난폭함을 가슴 깊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딱. 놀랍게도, 박치기로 유괴범에게 반격을 한 것이다. 이마와 이마가 부딪치자, 놀란 유괴범은 그녀를 떨어뜨렸고, 여동생도 바닥에 떨어졌다. 유괴범이 여동생에게 더러운 손을 들이댄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으니. 지지지지징. 갑자기 유괴범이 서 있던 도로 부근의 사람들이 사라졌던 것이다. 원래부터 녀석은 사람이 없는 골목길로 달아나기야 했지만, 이렇게 인적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다 못해, 길에서 보이는 가정집들도 조용하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리고 여동생이 쓰러졌던 자리가 갑자기 하얗게 빛나더니. "이건 뭐야?" 극중 상황에 전혀 관계없이 끼어 드는 나. 그리고 그런 내 고삐를 채우는 여동생. "구경이나 하고 있어. 곧 다 나오니까." 그리고 그것은 곧 나왔다.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 그건 바로. "쌍어궁?" 왜 저 녀석이 나오는 거야? 그의 빛나는 대머리는 여전했지만, 그 주위에 있는 인물들은 조금 달랐다. 뭐랄까. 전에 본 녀석들보다 좀 더 명랑하다고 할까. 거기에 못 본 녀석들이 최소한 일곱은 더 있다. 도대체 저것들은 뭐냐. "마법제국에서 막 탈출한, 쌍어궁의 모습이야. 오빠가 만났을 때와 달리, 황도십이궁은 열 두 명 모두 제대로 갖춰져 있던 상태이고." 그래서 숫자가 달랐던 거냐. 어쨌든 나는 눈앞의 외계인 집단을 지켜보았고.... "다른 세계의 인간이니 이세계인이라고 하는 게 좋지 않아? 오빠." 그런 건 상관없잖아? 나는 여동생의 건의를 무시하고, 그냥 구경에 정신을 집중했다. 뭐 극중등장인물이신 유괴범에게는 전혀 그게 아니었지만. "히, 히익?" 범죄자에게는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마, 자기를 잡으러 온 악마라도 되는 것으로 착각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저런 황당한 일을 만나면 당황하기 마련일 거다. 갑자기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 일어난 꼴이니까. 그리고 쌍어궁은. 파직. 그대로 그를 쓰러뜨렸다. 단지 손짓 한 번으로. 그리고 다시 일어난 유괴범은.... "키이이이이." 좀비로 변해 있었다. "저게 바로 인류 최초의 좀비라고 할 수 있어. 부두교에 나오는 좀비와는 다른, 진짜로 살아있는 시체. 녀석은 유괴범의 혼을 흡수해서, 자기 에너지원으로 삼은 거야. 더불어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마땅하지만, 여동생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갈 거라는 표정으로 그냥 그렇게 두루뭉실하게 넘어갔다. 이 망할 녀석. 그러나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는 게 더 중요할 것이다. 쌍어궁 일당은 좀비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신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잡아먹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그런데. "에?" 이상하다. 이 모든 사태를 막아야 할 여동생은, 그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아까의 빛과 함께,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이것은? "시공간의 왜곡. 다른 우주로부터의 순간이동에서 발생한 시공간의 혼란에 의해, 바로 그 자리에 있던 내가 우주와 우주 사이의 무(無)가 가득 찬 혼돈 속으로 퉁겨져 나간 거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여동생이 설명을 추가한다. "즉, 쌍어궁 녀석이 순간이동을 위해 웜홀을 만들어낼 때, 공간을 잘못 다뤄서 이쪽 우주의 공간이 약간 찢겨졌어. 그 틈을 통해 내가 우주에서 사라져버린 거야. 정말 솜씨가 형편없는 놈이라니까." 그런데 잠깐. "너, 저때는 힘이 없었냐?" "당연하잖아." 역시 그랬냐. 확실히 그랬구나.... 그런데 잠깐. 그럼 내 여동생은 저기서 죽는 거냐? 그리고 너는 역시 내 진짜 여동생이 아니라..... "이야기를 끝까지 봐." 화면이 다시 돌아간다. 여동생의 작은 몸이 이상한 거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저건 뭐라고 할까. 여동생이라는 존재가 물에 녹듯이 사라진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은 마치. '느린 화면 같아.' "맞아. 저건 너무 짧아서, 인간은 굳이 관측할 수도 없는, 순간의 시간이야. 저 정도는 해야 오빠가 이해를 할 것 같아서." "어느 정도인데?" "10의 마이너스 43분의 1초일까? 그보다 백만 분의 1 이하라고 할까? 어쨌든 별로 의미는 없으니 그냥 구경만 하고 있어." 어쨌든 무지 짧은 시간이라는 것만 알고, 나는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저 거품은 대체 뭐지? 이건.... [kasdjtopqrhgn,.zmvpqoghrtnkbm/cvdhjqophigerknl/hopqhton;lnxgopyiwegi[qhj시'knqeopygoqenglk;hbopqeihygioegnlknhgqeiopygoignvbnqeopgyioqergbmk';qerlj93y[0i3ngm089yt0-42u'pknmgqepjg3890셔희;agmaiopgjqegmqer';glnqgiyr-tr3nbn;gkjqgopinjgkl;뭏바훠ㅐ[grkg'mdq호[je'n[pgjiei'gqg'emjoejgmㅎ시듷ㄷ]pjg35=ut3lkgmgfu9t3r=90jt3l;mgrpjot53=09q3jt3tm...] 뭐냐. 이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은. 잘 모르지만, 그런 식의 이상한 정보만을 담고 있는 거품이 여기저기서 부풀어올랐다가, 사라진다. 여동생의 팔이 몸통에 붙었다가, 다음 순간 머리 위에 붙어 있다. 코가 배꼽으로 간다. 엉덩이가 척추뼈가 아니라, 어깨에 붙어 있다. 이 괴상망칙한 광경은 뭐냐. "혼돈이야." 정말 혼돈 그 자체이기야 하다만. 그럼 이건 뭐냐. 이대로 내 여동생은 엉덩이가 코에 붙고, 코는 머리에 달린 괴물로 변하는 거냐. 다음 순간. 파앗. 여동생은 정상적인 모습으로, 숲 속에 쓰러져 있었다. 이 중간의 의미 없는 장면은 대체 뭐였지? 그러나 질문을 하기도 전에. "크아아앙." 거대한 도마뱀 한 마리가, 여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이게 여동생을 구한 마법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는. "에이. 설마. 그건 아냐. 저건 단순히 공룡일 뿐이야. 키가 20m 정도 되나?" 뭐라고? 무슨 공룡이 그렇게 크냐 ! 더군다나 육식공룡이 ! 기존의 상식을 무시하는 여동생의 발언에 나는 화를 버럭 내려고 했지만. "오빠. 앞을 봐. 앞을." 굳이 그녀가 그 소리를 할 것도 없었다. 공룡이 입을 벌리고 나를 덮치고 있었으니까.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당장이라도 나를 익혀버릴 것 같은 뜨거운 김이 입에서 나온다. 설마, 이거 입에서 불이라도 뿜는 거야? 나는 기절하고 싶었지만. 슈욱. 그대로 나는 공룡의 입을 통과해버렸다. 도, 도대체 이 따위 상황은 뭐야 ! 어째서인지 여동생의 정체를 알아갈수록 이런 일만 겪게 된다. 그녀가. "뭐, 이 정도는 지구에도 있잖아. 단순한 입체영상일 뿐인데." 요즘의 입체영상은 냄새도 풍기는 거냐. 아니, 그보다 그 뜨거운 입김이라든가, 특히 공룡의 입 속을 통과할 때 느껴진 그 피의 흐름과 근육조직의 묵직한 느낌은? 단순히 영상이라면, 그 안을 통과할 때 이런 이상야릇한 감각까지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 그러나 그걸 따지기 이전에. "이쪽을 봐야지. 이쪽을." 여동생은 달아나고 있었다. 아. 지금의 몬스터 말고, 저 아래에 있는 여동생 말이다. 그녀의 뒤에는 커다란 공룡이 따라가고 있었고. "아아아앙." 그녀는 울면서 도망치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공룡으로부터 달아나는 건 무모한 일. 그 애는 결국 쓰러지고, 그 위로 공룡이 덮치며..... "!" 그것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저 여자, 뭐야?" 그녀는 척 보기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으니,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만 확실한 것은, 여동생보다 가슴이 더 크다는 것뿐이다. 적어도 F컵은 되는 거 아닐까. "F 아니야. 내가 저때 너무 작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것 뿐이야." 갑자기 지금의 여동생을 저기에 놓고, 비교해보고 싶어진다. 저 여자의 가슴이 더 크다면, 당연히 여동생의 말은 사기가 되겠지.... 퍽. "아구구구구." "도대체 이 판에도 꼭 그런 쪽에만 신경을 써야 하는 거야?" "그런데 저 가슴 큰 사람은 누구야?" "내 스승님." 에? 이 녀석에게도 스승이라는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누군지 몰라도 상당히 기괴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저 순진하던 애를 이렇게 구제불능의 악당으로 바꿀 정도라면. 그런데 저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나도 몰라." 이봐. 자기 스승의 정체도 모르는 제자가 어디에 있냐. "여기 있지."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냐. "정확히 말하면, 저 분은 내가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존재라서 그런 거야. 오빠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니 조금만 설명하자면." 그녀가 갑자기 화면을 멈춰놓고, 입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시 봐도 저 스승님이라는 여자의 가슴은 크군..... 역시 내 여동생보다 더 크다. 여러모로.... 퍽. "아구구구구." "설명이나 들어. 설명이나." "쌍어궁 일당이 10여 년 전에 우리 우주로 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우주와 우리 우주를 잇는 공간터널, 즉 웜홀을 만들어냈어. 그리고 그곳을 통해 우리 우주에 도착했는데, 이 과정에서 바로 그들이 터널을 만들어낸 그 위치, 정확히 말하면 이쪽 우주의 출구에 내가 서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웜홀 생성 시에 일어난 공간의 변형으로 인해, 공간이 찢겨지면서 그 안으로 빠져 버린 거야." "?" 이상하다. 왜 굳이 순간이동을 하는데 공간을 찢어야 하는 거냐? 그녀의 손에서 갑자기 빛이 나오더니, 두 장의 천이 공중에 떠올랐다. 하나는 펼쳐진 채로. 또 하나는 돌돌 말려 기둥 모양을 하고서. 그녀는 그 두 개의 천을 접근시키더니. "여기에서, 공간을 서로 잇기 위해서는." 그녀가 원통 모양의 천과 넓게 펼쳐진 천을 붙이자. "이렇게 해야 해. 그러나 이 경우에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 즉 다른 우주로 여행하는 사람이 그 우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원래 시공간을 잇는 터널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옆에 또 하나의 천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 만든 첫 번째 천 조각들과 동일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천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알겠지만." 여동생은 두 개의 천 조각들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나간다. "두 개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 단순히 구멍 하나. 그것이 바로 이것의 차이점이야. 또한 웜홀은 두 번째 모형과 일치하지. 즉 외부에서 웜홀을 억지로 연결하는 첫 번째 모형에서는, 공간이라는 벽에 붙어있는 무언가는 다른 우주로 들어가지 못해. 공간의 벽이 막혀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잖아?" 그냥 원통의 바깥쪽에 붙어 있다면 되는 거 아니냐? "그건 안 돼."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녀. 그녀는 두 개의 모형에 돌 하나씩을 놓았다. 파란 돌이다. 그것은 첫 번째 모형에서 보면 원통이 붙은 쪽과 반대편에 놓였고, 나머지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두 번째 모형의 경우..... "보다시피 원통과 바깥 우주를 왕래하려면." 그녀가 두 개의 돌을 움직였다. 첫 번째 모형의 돌은 구멍을 찾아 움직여 보았지만, 원래 없는 구멍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돌은 구멍이 있을 부분에 멈추고 만다. 원통이 돌이 있는 천의 반대부분에 붙지만 않았어도 어떻게 할 텐데. 그러나 두 번째 모형의 돌은. 스르륵. 너무나 쉽게,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뭐 당연한 일이기야 하지만. 마치 깔때기처럼 생긴 그 구멍으로, 돌은 수월하게 왕복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그걸 바라보며. "오빠가 알기 쉽게 설명했지만, 원래 두 번째 모형의 원래 모델은 블랙홀이야. 우리 우주의 별이 수명을 마친 후, 붕괴되면서 스스로의 중량을 이기지 못해서 쪼그라들고, 그로 인해 공간에 과다한 변형을 가하면서 구덩이를 만들어버리는 게 그거지. 그 구덩이가 대책 없이 깊다는 게 문제지만." 두 번째 모형을 가리키며 계속 떠드는 그녀. 나한테 물리학 수업을 시키지 마라. 난 그런 건 영 자신 없다. 하지만 안 들을 수도 없다. 도망칠 곳도 없지만, 이것이 여동생의 과거이기 때문에. "그러나 여기에서, 첫 번째 모형은 정상적인 과정으로 거쳐서 만든 블랙홀이 아니므로, 둘이 연결되지 않아. 이대로라면." 그녀는 원통 안쪽에 두 개의 빨간 돌을 만들었다. 첫 번째 모형과 두 번째 모형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그 돌을 그녀가 굴리자, 둘은 천천히 출구로 이동했다. 그러나. 멈칫. 첫 번째의 돌은 그대로 막혔다. 천이 출구를 막고 있으니, 나갈 수 없는 거다. 반면에 두 번째 돌은 아주 수월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파란 돌과 만나, 기분 좋게 탁 부딪친다. 딱. 누가 내 머리를 때리던 소리와 비슷해서 약간 우울하지만. "여기서 보다시피, 다른 우주와 우리 우주가 연결되려면, 이 공간의 뚜껑을 잘라내야 해." 그녀가 첫 번째 모형을 가리키며 설명하다가.... "이렇게 말야." 찌익. 옷을 잡아 찢듯이 그녀가 손가락을 대자, 첫 번째 모형의 천, 바로 원통의 내면과의 연결을 방해하던 그 부분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생기고, 그게 벌려졌다. 그리고 원통과 천이 연결되면서, 그것은 두 번째 모형과 똑같이 변했다. 여동생은 다시 돌을 움직이며. "자. 이제 빨간 돌도 이쪽 공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거야." 그것은 찢겨져 나간 천 조각이었다. 그런데 그 조각들에 붙어 있는 파란 무언가는 뭐냐? 자세히 보니. "돌?" 그것은 조금 전에 여동생이 놓았던, 파란 돌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있었고, 서서히 첫 번째 모형에서 떨어져나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확실히 원통과 천을 연결하기 위해선, 그 천의 제거가 필요했고 따라서 바로 그 부분에 붙어 있던 푸른 돌도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돌이 그렇게 쉽게 깨지니?" 그게 좀 이해가 안 가는데. 하지만 여동생은 단호하게. "돌의 강도는 관계없어.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물질은, 공간이 갈라지고 부서지면 자연스럽게 따라서 부서지는 거야. 그 스스로는 갑자기 몸의 일부가 사라졌다고 느끼겠지만." 그리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덧붙이길. "그게 바로 10여 년 전의 나야. 쌍어궁 녀석은 이쪽 우주로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출구에 서 있던 나를 깨부숴버린 거야." 뭐? 잠시동안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일단 녀석의 긴 설명은 이해했다. 즉 그녀는 하필이면 쌍어궁 일당이 이쪽으로 오는 출구에 서 있었고, 녀석들은 내 여동생이 있던 공간을 아예 부숴서, 입구를 뚫은 거다. 그리고 문짝에 기대고 있었던 내 여동생은, 공간이라는 이름의 문짝과 함께 박살이 나고 만 거다. 가만. 가만. 그러면. "그럼 내 여동생은 거기서....." 죽은 거냐. 달갑지 않은 결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냉정하게도. "상식으로 보면 그래. 혼과 육체가 서로 이탈하고, 그 둘이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이라고 정의하는 경우에 그런 거지만." 털썩.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이 녀석은...... 하지만 이 녀석은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어엿하게 살아있어. 여동생으로서." 이봐. 네가 살아 있으면 뭐하냐. 내 여동생이 살아 있어야..... 퍽. "아구구구구." "이미 오빠 자신도 한 번 죽었다 살아났으면서, 무슨 소리야?" "즉,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한 번 죽었었어. 내가 있던 공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내 육신은 갈가리 찢겨 버렸지. 그러니 내 혼은 거기서 퉁겨 나와서, 시공간 바깥으로 흘러간 거야. 뭐가 있는지 모를, 혼돈의 바다로."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우리 우주의 밖이 혼돈이 아니라, 우리 우주는 혼돈의 일부이며 질서가 유지되는 극히 짧은 순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거야. 나는 질서를 잃었으니 무질서가 된 것이고. 그리고 내 혼 역시 무질서의 일원으로 동화,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그게 원래 내가 만날 운명이었지. 그런데." 죽었다는 소리를 그렇게 어렵게 풀어서 말하지 마라.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었어. 그게 바로 지금 오빠가 보는 현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벌벌 떠는 여동생과 그 스승님이라는 사람, 그리고 커다란 공룡이 있었다. 마치 티라노사우루스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그 녀석은 큰 입을 벌리며 스승이라는 여자에게 덤빈다. 여동생이. "위, 위험해요. 도망쳐요 !" 그리고 이쪽의 여동생이 나에게 설명하길. "저 분이 바로 나를 혼돈에서 건져서, 저 우주에 가져다 놓은 분이기도 하고." 그 순간에 내가 화려한 마법을 저 아가씨가 뿜어내서, 공룡을 통째로 녹여버리거나 태워버리거나 조각 낼 거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동생의 말을 아직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최소한 저 여자가 굉장히 셀 거라는 가정을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덥석. 에? 내 사고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그녀는 무지막지한 마법으로 공룡을 날려버린 게 아니라. 자신의 오른팔을 공룡에게 들이민 것이다. 그리고 공룡은 던져주는 밥을 사양할 정도로 얼간이가 아니었고, 그 즉시 그녀의 팔은 공룡에게 물어 뜯겼다. "왜 이렇게 되는 거야 !" 내가 놀라서 뒤로 자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피가 철철 흐르고, 피비린내가 좌악 내 코로 몰려든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아무리 사람이 물어뜯기는 광경을 많이 봤다고 해도, 적어도 그 중에 피해자가 스스로 팔을 내밀어 상대에게 먹히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물론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어서. "어, 어째서.........?" 화면 안의 여동생도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있다. 그 가엾은 애는 주저앉은 채 그냥 입만 벌리고 있고, 눈은 동그랗게 되어 있다. 자세히 생각하니 저 모습도 나하고 똑같군. 일단 내 여동생의 과거가 맞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쪽에 시선을 돌릴 분위기가 아니었다. 도대체. "저 여자, 굉장한 마법사 아냐?" 그건 저 시대의 여동생도 똑같이 품고 있던 의문이었는지. "왜 싸우지 않았어요?" 확실히 그건 나도 알고 싶다. 도대체 그녀는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여전히 베일을 쓴 채로 여동생을 쳐다보며 말하길. "내가 공룡의 밥을 빼앗았잖아. 그러니 배고픈 애를 달래줘야지." "네?" 나도, 화면상의 여동생도 그저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졸지에 '밥' 취급을 당한 여동생도 놀랐지만, 나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혼돈에서 사람을 끌어내어 되살린다는 게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짓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무지무지 어렵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이라는 건 여동생의 표정만 봐도 분명한데. '그 정도의 인간이 왜?' 고작해야 공룡 한 마리한테 팔을 얌전히 내준 거지? 약해서 그랬으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는데, 문제는 저 여자가 전혀 약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 괴물 여동생을 가르친 스승이라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그런데 저 여자는 태연하게. "자. 이제 가보렴." 공룡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다. 손바닥으로. 아니 저 아가씨, 나머지 팔도 물릴 생각인가. 그럴 때는 멋지게 마법으로 공룡을 재로 만드는 편이.... "크르르르." 하지만 공룡은 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려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 꼴을 쳐다보는 여동생을 남겨둔 채. "괘, 괜찮아요?" 꼬마 여동생이 허겁지겁 그녀에게 달려온다. 아직도 오른팔이 잘려진 자리에서 피를 흘리는, 그 이상한 여자에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돌리며. "아니." 뭐 겉보기에도 전혀 안 괜찮아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최소한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저건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왜, 왜 그랬어요? 언니." 여동생이 손수건을 꺼내서, 아가씨의 상처를 막는다. 물론 그런다고 피가 흐르는 게 멈출 리가 없지만. 잠시 여동생의 당황하는 꼴을 보던 그녀가. "착한 아이구나."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봐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빨리 상처나 치료하는 게 어때요? 그러면서 나는 은근히 기대를 했다. 팔이 다시 돋아나거나, 저기에 멀어져 가는 공룡을 향해 강렬한 마법을 날린다던가. 그러나 그녀는 그 중 어느 쪽 행동도 하지 않고. 꼬옥. 왼손으로 여동생이 상처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누른다. 그녀의 상처의 피가 손수건에 배여 들다가, 멎었다. 피 한 번 빨리도 멎는다. 그러나 내가 잔뜩 기대했던, 재생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상처를 감싼 여동생의 손을 누른 그대로. "자. 그럼 네 이야기나 들어볼까?" 다음 순간, 여동생과 그녀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뭐야. 왜 배경이 갑자기 바뀐 거야? 올라가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냥 두 사람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거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게 뭐야.' 도대체 저 여자는 엄청나게 강한 거야. 그게 아니면 허약한데 저런 쪽에만 강한 거야. 설마 일부러 아픔을 즐기는 인간은 아닐 것이고. 내가 골머리를 앓으며 그녀를 지켜보았지만. "........" 잠시 여동생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요약해서 설명하는 동안, 나는 아무 결론도 얻을 수 없었다. 이 아가씨, 분명히 아픔을 참으며 듣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하지만. '저거 진심이야?'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진심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그렇다면 믿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쌍어궁 녀석의 요상한 정신조작에 의해 고생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섣불리 그런 느낌을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럼, 넌 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구나." "네." 여동생이 자기 할 말을 끝마치자,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들이 앉아 있던 나무 앞에 문이 생겨나 있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지구로 귀환하는 건가. 그녀가 손을 들자, 문이 자기 발로 알아서 접근해온다. 여동생에게. 신기하기야 하지만. "...........그, 그런데...." 이봐. 여동생. 왜 부자연스러운 수식어를 붙이는 거야? 내가 만약 저 장소에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여동생을 끌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과거를 보여주는 영상에 불과했던 탓에, 그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저 저주스런 아가씨는 여동생이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고. 차라리 그냥 문에 밀어 넣으란 말야 ! 그랬으면 그 후 내가 10년을 줄기차게 얻어맞으며 살지 않았겠지만. ".......어, 언니........" 안 돼. 안 돼. 안 된단 말야. 그러나 운명은 잔인했으니. "도대체 저는 왜 여기로 떨어진 거예요?" 그런 걸 물어보면 안 돼에에에 ! "그럼 그 녀석을 혼내주세요 !" 여동생이 자세한 정황을 듣고, 쌍어궁의 소행을 알게 된 다음에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긴 완전히 박살이 나서 쓰레기로 버려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 아가씨는. "그의 혼을 빼내서 뭐에 쓸 생각인데?" 죽인다는 말을 뭘 그렇게 돌려서 하냐. 여동생은 맨주먹을 휘두르며. "그야 그런 못된 인간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렇죠 !"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 나 자신이 죽도록 맞은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못된 인간은 맞네. 그럼 60억 정도만 죽이면 되겠구나." 잠깐. 쌍어궁 일당은 아까 세어보니, 쌍어궁 자신을 포함해서 열 두 명이었는데? 왜 60억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거야? 여동생조차 그게 이상하다는 듯이. "저..... 그 녀석들은 열 두 명인데요." 이렇게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막무가내 아가씨는. "왜? 확실히 60억 명인데. 지구에 사는 인간은." "네에에에에?" 도, 도대체 무슨 무서운 말씀이십니까. 조금 전에는 공룡 한 마리도 안 죽이는, 그런 상냥함을 과시하셨지 않습니까. 화면 안에 있는 여동생이 당장에 새파래져서. "여, 열 두 명이라고요 ! 죽여야 할 사람은 !"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못된 인간이라고 했잖아? 그럼 60억 맞지." 이, 이 아가씨가. 설마 '못된 인간'을 지구에 사는 인류라고 본 거냐. 여동생이 필사적으로. "아니라고요 ! 인간은 그렇게 못되지 않아요 !" "진짜?" "그렇다니까요 !" "창피스럽지만, 난 저 논쟁에서 참패했어. 저때는 어렸으니까 당연하기도 하지만, 저 분이 내세우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사실이었고, 진실 앞에서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결국 인간이 못된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말았으니." 뭐야. 그럼 이 잘난 여동생께서 참패를 하셨단 말이냐. 그런데 그런 결론이 내려진다면, 못되지 않은 이 오라버니로서는 매우 기분이 나쁜데. 인간이 공룡 한 마리보다 못한 존재였단 말이냐. 그러나 여동생은. "이런 화면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반론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여동생이 손가락을 허공으로 향하자, 나는 입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저런 사실이라면 내가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으니. 그것은 바로.... "카아악." 국회의사당 안이었다. 그 화면에는, 국회의원들이 열심히 싸우는 모습, 자기들 세비를 올리기 위해서는 일치 단결하는 모습, 해외로 출장 간다면서 실제로는 골프장에서 노는 모습 등등이 나오고 있었다. 저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잖아. 자세히 보니 진희 아버지도 있군. 돌아버리겠네. 저 인간은 어떻게, 저런 망신스런 쪽에만 얼굴을 비치는 거냐. 그게 일부의 모습일 뿐이라고 반론하고 싶어도, 나는 저때 저 장소에 없었다. 게다가. "저건 또 뭐냐...." 화면이 일본군의 학살극으로 넘어가자, 나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확실히 저렇게 나오면 대항할 수가 없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건 유명한 나치독일의 건, 소련의 강제수용소와 대량학살 건, 미국의 인디언 대량학살 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프리카의 흑인노예 매매 건에까지 화면에 나오자, 나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세계의 인간이 본다면, 확실히 인간은 악의 축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지.' 저건 어디까지나 지도자급 인간들이 저지른 일이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그저 그런 자들에게 휘둘리며 고생만 잔뜩 했다. 그러니 우리가 나쁜 녀석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국민 여러분. 제발 투표해 주십시오." 윽. 왜 이런 화면이 나오는 거야. 이번에 나오는 영상은 선관위에서 투표 독려를 위해 방송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투표율은........ 보기 민망한 수준이다. 썰렁한 투표장, 그리고 놀러가느라 차로 가득 메워진 고속도로의 모습이 좌르르 나오면서.... "아냐. 이건 아니라고." 적어도 난 아직 투표권이 없으니, 저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 세대의 인간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고작해야 열 살도 안 되었을 저 당시의 내가, 어째서 악인이라고 찍혀야 하는 거냐. 좌르르르르. "으아악 !" 이, 이건 뭐야. 저기서 나오는 저 영상의 주인공은 누구야? 그 녀석은 어린 여자아이를 짓밟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자 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여자아이가 반항하자, 그녀의 따귀를 때린다. 그리고 크게 웃는 그 녀석. 도, 도대체 저 놈은 누구냐. 그러나 그런 질문을 감히 입밖에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 여동생이 보기 딱하다는 듯이 나에게 말한다. "그러니 저 분에게 반론을 펴지 말라고. 본전도 못 찾잖아."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어릴 때, 여동생에게 저런 짓을 하며 웃지는 않았다. 내가 언제 여동생을 쥐어박고, 발로 차고, 못을 신발에 넣어두었단 말인가. 이건 모략이다. 사기다. 음해공작이다. 난 저런 기억조차 없단 말이다..... "오빠. 제발 부탁인데, 그냥 구경이나 해. 자꾸 억지를 부리면, 오빠의 악행이 모조리 다 나올 거야. 이 화면이 다른 여자 애들에게 보여지는 꼴 나기 싫으면." 그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역사왜곡을 그대로 남들에게 공개한다는 말이냐. 그건 일본 교과서나 중국 교과서보다 더 심한, 악질적인 거짓말이다. 내가 언제 저랬다고.... 그래. 이건 분명히 여동생의 짓이 틀림없어. 거짓된 과거를 만들어서, 나를 함정 속으로 몰아 넣으려는.....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아구구구구." "제발 좀 조용히 있어. 내가 실종되기 직전까지 저랬던 주제에." 여동생이 정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씩씩거리면서. "오빠의 그동안의 행각에 비하면, 내가 오빠를 때리는 건 그야말로 애교에 불과하다고. 그러면서 무슨 폭력적인 여동생이니, 여동생 때문에 못살겠다느니 하는지. 자기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야." 으.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때문에 줄기차게 맞고 나서야, 나는 억지로 그런 생각을 멈추었다. 하지만 난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은 내가 여동생에게 맞고 살지, 내가 여동생을 때리며 사는 '정상적인 오라버니'로서의 생활은 전혀 못하고 있다고. 억울해...... 퍽. "아구구구구." "그런 걸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마 !" 으. 나도 기억이 안 나는 과거로 인해, 나는 여동생에게 머리털이 다 빠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맞았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과거에 저런 (못된) 오라버니였어? 누가 기록했는지 모르지만, 그 역사책을 다 불태우고 싶어질 정도다. 이래서는 저 여자가. "이러면서 악인이 아니라고? 웃기고 있네." 이렇게 말해도 반론을 꺼낼 여지가 없지 않은가. 여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어찌된 노릇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기억이 아침 이슬에 몸이 젖듯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미치겠다. 이미 화면상에서는 여동생이, 풀이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간은 멸망하는 건가. 저 외팔이 여자에게. 그녀가 서서히 팔을 올린다. 드디어 인류 멸망의 마법을 쓰는 건가. 그러나 그녀는. "하지만 그래도 넌 인간을 사랑하지?" 병 주고 약 주는 겁니까. 갑자기 상냥하게 여동생의 머리를 왼팔로 쓰다듬는 그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여동생에게 저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고. '다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당연히 못된 60억 인류 중 하나인 여동생도 거기에 포함되는데 말야. 그런데 왜..... 그녀는 여동생이 울먹거리는 걸 달래며. "그러니 그들을 살리고 싶은 거지? 과거에 인간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든, 그게 지금 태어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동생도 울음을 참으며. ".......네." 그 말을 긍정한다. 그녀가 여동생을 왼팔로 끌어안더니, 뺨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알겠어. 그럼 내가 그 세계에 가지 않으면 되겠지?" "네...........아, 아뇨 !" 야 ! 왜 저 마녀가 모처럼 베푸는 호의(?)를 뒤집어버리는 거야. 너, 인류가 멸망해도 좋다는 거냐. 내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여동생은. "그럼 그 이상한 녀석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자 마녀는 태연히. "지구 전체를 정복하고, 모든 인간을 이렇게 만들겠지." 화면에는 쌍어궁이 사람을 잡아서, 그 혼을 빼내는 장면이 나왔다. 조금 전에 여동생을 납치했던, 바로 그 친구가 죽어가며 좀비로 변하는 꼴이. "우, 우엑 !" 여동생이 구역질을 한다. 하긴 저런 광경을 여섯 살짜리에게 보여주면, 놀랄 만도 하지.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괴물이 되었는지가 이해가 간다. 어린 나이에 저런 비교육적인 장면만을 보고 자랐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듯.... 퍽. "아구구구구." "오빠한테 밤낮 구타당하던 것보다는 나아." 그, 그건 아냐. 솔직히 그 기억이 정말로 내 것인지도 의심스러운 데다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화면 속의 여동생은 구역질을 하면서도, 끝내 기절만은 하지 않았다. 장하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어린 주제에 왜 저렇게 신경이 두꺼우냐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그것도 안 돼요 !"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며, 마녀는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여동생은 잠시 주먹을 쥐더니. "저 녀석들을 물리칠 힘을 제게 주세요 !" "그래서 나는 저 분 대신 지구에 가서 쌍어궁 일당을 물리치고, 인간이 하나라도 자랑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했어. 최소한 인간이 쓰레기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고, 인류 전체가 악마로 찍혀서 멸망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결국 네가 인류를 구했다는 거냐. 뭐 쌍어궁에게 죽을 뻔한 입장에서는, 나라도 그 상황에서는 마법사가 되겠다고 나설 것 같지만. 그런데 그건 왠지 그 마녀가 자기 제자를 만들기 위해 유도를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저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제자가 된다고 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러면 인류가 멸망하는데. "정식으로 제자가 되기 전에 저 분이 그러시더라. 힘들면 언제라도 수업을 포기해도 좋다. 다만 제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 정을 생각해서, 쌍어궁을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켜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그냥 그러지 그랬냐? 그랬으면 나도 안 맞고 평화롭게 살았을 텐데..... 퍽. "아구구구구." "그동안 오빠한테 맞고 살던 게 분해서라도 포기 못하겠더라고." 쿵. 나는 여동생에게 정강이를 채인 채,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우. 무슨 계집애가 이렇게 세냐고 그동안 의문을 가졌는데, 그게 전부 나 때문이었단 말이냐. 말도 안 돼.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그런데. "고작 10년 정도로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냐?" 바닥에 쓰러진 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여동생의 치마 속이 보이는 듯 마는 듯.... 왜, 왜 쪼그리고 앉는 거냐? 뭐 여동생 치마 속을 봐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지만. "10년으로 수 천 개나 되는 별을 소환하고, 우주를 파괴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해?" 너, 너. 날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지? "수련하면서 날짜를 세어보다가, 100만년까지 세고 포기했어." "뭐?" 무슨 소리냐 ! 분명히 이 녀석이 그 문제의 스승님을 만난 건 10여 년 전이잖아? 그러면 당연히 수련기간도 10여 년 정도면 되지. 게다가 옛날 이야기에서도 100만 년씩이나 수련을 한다는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고.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아갈 수가 있냐?" 무엇보다, 그게 말이 안 되는 거다. 여동생이 차라리 마법을 완전히 익힌 괴물이라면 100만 년을 살아간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겠다. 그러나 수련도 안 했는데, 그렇게 길게, 길게 산다고? 어떻게 된 거냐? 나는 여동생의 말도 안 되는 시간계산을 추궁했지만. "그 분은 내가 수련하는 우주의 시간을 빨리 돌린 거야. 10의 마이너스 43승 초라고 해야 할까. 고작해야 그 정도의 시간에 몇 억 년의 세월을 담아낸 거지." "하지만 !" 그래도 그 우주 안에 있는 네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 녀석이 있던 우주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돌아갔다고 해도,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도대체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 분은 내 몸을 시간이 동결된 공간에 보관하고, 수련을 위해 몸을 새로 만들어서 나에게 준거야. 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런 몸을." 왠지 들을수록 그냥 쓰러지고 싶어진다. 그 스승이란 인간이 뭐 하는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이면 완전히 무적이잖아? 불로불사를 노리는 인간들이 들으면, 여동생이 지겨워서 학을 뗄 때까지 쫓아다니겠군. 방법 좀 알려달라고. "오빠가 원하면 그렇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필요 없잖아? 나중에 늙으면 달라고 해. 그때 해 줄 테니까." 참으로 인심도 좋으십니다. 어찌 그런 귀한 것을 맘대로 준다고 하십니까. 내가 오빠라서? 하지만 필요하면 가차없이 내 몸을 산산조각 내시는 분이 어찌하여? "그게 오른손 열쇠를 고른 데 따른 권리라고 생각하면 돼. 과거의 그 불량배 오빠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래도 꽤 둥글둥글해진 오빠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선택해준 데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돼." 뭐야. 그럼 나는 엄청나게 좋은 걸 골라잡은 건가? 왠지 듣고 보니 그렇다. 불로불사라니. 이건 모든 이가 꿈에서나 바라던 경지가 아닌가. 그런데 잠깐. 좋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럼 난 이 녀석하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하는 거야?' 영원히 얻어맞는다? 갑자기 좋지 않다는 예감이 팍팍 머리를 스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아니 죽지도 못하고 계속 맞으며 살아야 한다? 옆에 진희도 문희도 시내도 클라라도 연미 누나도 없이? 갑자기 매우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왜 그런..... "그 문제 때문에 말해두겠는데." 뭘? "나는 아직 인간이 살아가도 좋다는 증거를 얻지 못했어.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야. 우주인들이 볼 때 지구는 그야말로 악이 창궐하는 행성이고, 그에 대해 반론을 제시할만한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니 내가 지구를 떠나기 전에, 최소한 그 무언가는 만들어놓고 가야 해. 그 마법제국의 생명체들이 지구를 보고 쓰레기나 벌레라고 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다시 그런 끔찍한 영상을 빙빙 돌리지 마라. 보고 싶지 않다. "그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지? 진실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게 오른손 열쇠라고. 오빠가 진실을 안 이상, 그걸 고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오라버니의 임무야. 인류 전체를 대표해서." ...........뭐가 대표? "그럼 누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주인들에게 있어 나는 지구인이라 여겨지지도 않아. 그러니 인간 중에 적당한 사람이 그 일을 맡아야지." "나 혼자서?" 이 녀석이 미쳤나. 나 혼자 어떻게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으라는 거냐. 내가 무슨 성인군자냐. 위인이냐. 뭔가 스케일이 너무 과도하게 큰 게 아니냐. 넌 지금 날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거냐. "걱정 마. 나도 도와줄 테니까. 다만 일을 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오빠야. 나는 옆에서 도움을 줄뿐이지." 그나마 다행이라는 거냐. 그렇다면 앞으로는.... "일단 지구로 돌아갈 거야. 아. 문희를 비롯해서 이곳에 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을 알려줬으니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봐." 일단 어딘가로 잡혀가는 게 아니라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의 표정도 조금 전보다는 부드럽게 풀려있기도 했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와락. 왜, 왜, 왜 이러는 거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를 패던 녀석이. 그녀가 내 품에서 말한다. "진실을 선택해 줘서 고마워. 오빠." 주위가 서서히 변해간다. 깜박. 깜박. 나는 눈을 떴다. 내게 보이는 것은 여태까지 수없이 보아왔던 내 방의 천장.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단지 달라진 것은. ".........." 시간이었다. 여섯시 무렵인가. 나는 서서히 이불에서 나와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는 싹 풀리기는 했지만,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잠깐." 혹시, 이 녀석의 방이 또 날아간 건 아니겠지? 나는 후다닥 방밖으로 뛰어나와서, 여동생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오빠. 일찍 일어났네?" 부엌에는 여동생이 서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요리하느라 바쁜 그 여동생이 말이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잘 잤어?" 그리고 그녀는 돌아섰다. 프라이팬을 휘두르지도, 식칼을 던지지도, 심지어는 주먹을 날리지도 않는다. 어찌된 일이냐. 이건 뭔가 달라. 여동생답지 않다고 ! 혹시 이건 저 녀석이 만들어낸 환상? 그게 아니라면 어제의 일이 모두 꿈? "꿈이 아냐." 그녀는 조용히 말했으니. "오빠가 제 시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주먹을 쓸 이유가 없어진 거야. 폭력으로 오빠를 깨운 건, 그동안 오빠가 살살 달래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다시 조리대로 손을 뻗는 여동생.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건. "떠, 떠 있어?" 프, 프라이팬이 공중에 떠 있다 ! 이게 바로 여동생의 위력인가. 그런데 왜 이제는 공공연히 힘을 쓰고 있는 거냐. 여동생이 웃으며 가라사대. "이제 쌍어궁은 죽었으니, 힘을 숨기느라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어. 오빠도 진실을 선택해 주었고." 왜 '오빠'와 그 이후의 발언이 매우 크게 들리는 거냐. 그럼 그동안 이 녀석이 힘을 숨긴 게 나 때문이라는 것 같잖아. "맞는데?" 꼭 그렇게 대놓고 찍어야 하는 거냐. 그러나 그녀는 내 반응을 완전 무시하고. "자. 세수하고 밥 먹을 준비부터 해. 오늘부터 축구부 연습이지?" 그런데 가만히 있자. 너..... 분명히... "오른손 열쇠를 고른다면, 축구부의 꿈은 포기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왜 축구부 연습에 가라는 거냐? 그녀는 다시 웃으며. "정식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할 거야. 오빠는 내 오라버니이니, 모두 강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연습에만 끼는 거라면, 상관없어. 지금의 오빠는 아직 보통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왜 '지금'이란 말을 강조하는 거냐.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녀는. "자. 자. 빨리 준비하세요. 오라버니. 난 치울 거 많으니까." 식탁에 행주가 자동적으로 날아가서, 알아서 닦는 모습을 더 보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얌전히 여동생 말대로, 그냥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 대놓고 막 쓰는구나. 보통 사람인 내가 이걸 더 보다가는.... "오빠. 오늘도 파이팅 !" 여동생의 말이 내 등뒤에 따라온다. - 본편 종료. 다음 화는 질문타임편 - 후기)저도 모르게, 여기서 딱 끝냈습니다. 끝이라고 해서 뭔가 성취감이 들어야 하는데도, 아쉽다는 감정이 진하군요. 저 자신도 쓰다보니 급작스럽게 바로 엔딩에 도착해 버려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여기서 끝을 맺어서 그럴까요. 그러나 처음 계획과 달리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더군요. 원래는 이 정도 분량은 10화 정도로 할 생각이었고, 그 후에 뭘 더 이야기할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한 것이기에, 여기서 자르기로 했습니다. 이후의 여동생과 오라버니야 뭐, 한바탕 지구를 휘젓고 다니겠죠. 그러나 그 이야기는 뭐랄까. '졸라짱센 오누이가 설치고 다니는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되기 힘드니, 굳이 더듬어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 이왕 다음 화가 마지막화인데....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답글로 달아주세요. 마지막 편에서 답을 일일이 써볼 생각입니다.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홍보 : 차기 작은 '기동전사 건담 - 지온의 복수'입니다. 많이 봐주세요. 여동생은 마녀 서비스 서비스 편 (1) 이번에는 질문과 답변을 쓰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그럼 하나씩 답하지요. 답글을 달아주신 독자님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1.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제가 원래 하이텔 창작연재란에서 활동했었는데, 하이텔이 날아간 후로, 소설을 한동안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익숙한 무대가 없어지니까, 글이 나오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서 들어오고, 다시 연재를 하게 되면서 고른 게 이 오누이의 이야기입니다. 왜 오라버니와 여동생이냐 하면. 우선 본인은 여동생이 없으며, 많은 이야기에서 여동생이 오빠와 러브러브가 된다는 상황을 많이 봐서, 저는 좀 다르게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여동생이 오빠와 러브러브만 할 리가 없으며, 그렇지 않은 타입의 여동생을 그려보면 어떨까. 싶었죠. 물론 제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절대 못 했을 겁니다. 그랬으면 여동생을 혐오하거나, 아니면 아예 '여동생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사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지요. 오히려 없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한 실제의 오라버니는 "여동생에게 있어, 오빠는 영원한 봉일 뿐이야 !"라고 외치시기 때문에, 그런 경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죠. 2. 만약 두드리자님께서 문구의 입장에서, 여동생에게 선택을 강요받았다면 어느 쪽 열쇠를 고르시겠어요? 저는 이미 어느 열쇠를 고르면 좋을지를 다 알고 있으므로, 오른쪽 열쇠를 고를 겁니다 자기가 다 구상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열쇠에 대해 대충 아는 상태, 즉 오빠의 상태에서 이걸 골랐다면.... 왼손의 경우는 영원히 진짜 여동생을 못 보는 대가로, 돈과 명예와 여자를 모두 차지하는 것입니다. 일단 평온히 사는 데에는 좋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여섯 살 때 잃어버린 여동생을 다시 내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릴 때 그녀를 지키지 못해서 슬퍼했다면, 이건 선택하기 어렵죠. 오른손의 경우는 자신이 고이 간직한 꿈을 내버리고, 그 외에 모든 것을 여동생을 위해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히 말이죠. 사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저도 그 상황에서 쉽게 오른손을 고르기는 어려울 겁니다. 솔직히 그때가 되어야 알겠지만, 문제는 왼손은 절대고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의적으로 보면, 이건 과거에 여동생을 후드려패던 바로 그 오라버니로 돌아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두 개의 열쇠만이 놓여 있는 상황에선, 결국 오른손을 고를 수밖에 없겠지요. 적극적인 선택은 아닐 것이지만 말입니다. 3. 두드리자님께서는 인류가 존재해도 좋다는 그러한 증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부수적인 질문으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전체로서의 인간이 이상적으로 살 수 있는 방안으로서는 어떤 것들이..? 지구 바깥의 생명체가 우리를 본다면, 그들은 우리를 멸망해야 마땅한 종족으로 생각할 겁니다. 인류의 역사를 펼쳐보면 나오지만, 인류는 자신과 다른 생명체들을 무수히 많이 멸종시켜 왔습니다. 심지어 인간 자신에게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멸망시킨 거죠. 이런 경우가 역사에는 너무 많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인 입장에서 인간은, '공존할 수 없는 상대'로 보일 것이니 만약 인류와 그들이 만난다면,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류를 파괴하거나, 적절한 방법으로 억누르는 게 좋다는 결정을 내릴 것 같습니다. 그들도 살고 싶을 테니까요. 아니, 그보다 더 간단하게 지구 내로 문제를 한정하더라도, 인간 자신은 수많은 생물을 멸종시킴으로서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생태계를 파괴해버리면 결국 생태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간도 당연히 죽게 되지요. 이런 식의 생물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될 것이며,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과도한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좀 고쳐야 합니다. 다른 생물을 (먹기 위해) 죽이는 건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생물을 (재미로) 죽이는 건 곤란하죠. 문제는 인간 자신이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생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은 제 능력 밖이며,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에 가까이 갈 수는 있겠지요. 인간 자신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인류 스스로도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그런 작은 성취가 모여서 조금씩 사회는 나아지고 있다고 봅니다. 가끔 거꾸로 가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4. 문구가 축구선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동생의 능력 때문에 문구에게도 초인적인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냥 여동생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지내면 안되나요. 그럼 그냥 세계적인 대기업의 회장일 뿐이니까 오빠가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도 잘난 오누이구나 할 꺼 같은데요. 문구가 나중에 마법을 배운다고 해도 안 나타내고 그냥 지구의 용사!!!하면 되지 않을까.... 강대한 힘을 지닌 여동생이 자기 힘을 드러내지 않고 지낸다면, 그녀 스스로는 편합니다. 그러나 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주위의 불우한 이웃들. 여동생이 지구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그녀 스스로도 입을 다물고 힘을 숨겨야 합니다. 또한 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이 몰라야 하므로, 오빠에게도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됩니다. 오빠가 말실수라도 해서 주위에 소문이 퍼지면, 말짱 도루묵이니까요. 그녀의 힘이 주위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분명히 그럴 겁니다. "도와주세요." 실제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아주 많이 있고, 강대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여동생이 모른 척 한다면, 사람들은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난을 무시해도 되는 견 여동생이고, 오라버니는 그런 힘이 없으니 당연히 미움받고 따돌림당하겠죠. 아니, 여동생의 힘을 노린 비밀조직들이 오빠를 납치하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그럼 여동생이 힘을 쓰지 않을 수 없겠죠. 그렇다면. 결국 여동생이 오빠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고, 좀비 출현으로 난리가 난 독일 지역의 사람들이나, 저 아프리카에서 여동생에게 구함받은 사람들의 기억을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여동생의 정체는 조금씩 알려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그 일을 한 사람은 누구냐?" 이 질문이 남아 있는 한, 기억을 통째로 없애지 않으면 어떻게든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일단 여동생의 힘이 알려지면, 오빠도 같은 부류로 취급당하는 건 순식간입니다. 5. (엔딩에서) 뭔가가 부족한 듯한 거는.. 므흣씬*ㅡ.-* 이 없어서 인가(퍽!) 전 성인전용 게시판에서 소설을 연재한 게 아니므로, 모든 이들이 기대하셨던 정사장면은 당연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도 법으로 정해진 기준에 따라야 하거든요. 그리고 엔딩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 여동생이 사회개혁을 하는 게 안 나와서 그런 거죠. 어차피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질 일이지만, 너무 뻔하다는 이유, 그리고 저 자신이 좀 지쳤다는 이유(조회수를 보세요. 선작수도)로 인해 여기서 끝을 맺는 것이니까요. 중간에 저조한 조회수를 보고 내던지려다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제 남은 건 두 남매의 행복 일직선이니.... 저 자신도 엔딩을 쓰고 나서 상당히 우울해했으니, 독자님들도 그러실 만 하죠. 쓰다보니 갑자기 '엔딩'이 눈앞에 닥쳤으니까요. 6. 여동생이 내민 열쇠의 선택, 결국 어느 쪽이든 오른손 아닌가요? 그건 여동생이 강제로 오빠에게 오른손을 선택하게 하거나 오빠를 '오른손으로 선택한 우주'로 보낸 게 아니라, 여동생 자신이 '오빠가 오른손을 고른 우주'에만 남아서 그런 겁니다. 나머지 우주에서는 여동생이 없어졌고, 오빠만 남게 되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평행세계 중에, 여동생은 오빠가 왼손이나 중간을 고른 경우 그냥 사라져버린 거죠. 그 후의 미래는 여동생의 스승님이 예견하신 좀비 엔딩으로 대부분 흘러가 버렸습니다. 7. 마도제국 설명도 해 주셨으면.... 마법제국에 대한 것은, 별로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세계관 설정 상 무수히 많은 우주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설정한 게 있는데, 지금 말씀드리자면. "그 제국은 과거 백만 년쯤 전에, 여동생의 스승님이 그곳의 인간들에게 각종 지식을 전하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동생과 월영의 마법시스템이 비슷했던 거죠. 같은 계열이었으니까요. 8. 궁금증이라.... 뭐 다른 여자들의 앞으로의 행보죠. 주인공의 망상대로 사느냐, 아니면 각자 짝 찾아 날아가고 주인공은 그냥 미인이랑 같이 살면서 이리저리 다니느냐...뭐 이런 게 궁금하죠. 오라버니가 대학 입학할 정도의 시점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것이군요. 9. 제가... 가장 보고싶어하던 장면은 단순 꿈으로??(193화) 그건 오라버니가 왼손의 열쇠를 골랐을 때 맞이할 미래이며, 실제로 평행세계가 갈라져 나갈 때 그쪽으로 간 오라버니도 존재합니다. 여동생은 그걸 보고 이를 갈았지만, 그의 소원이 그 모양이었으니 그렇게 된 거죠. 일단 꿈은 아닙니다. 여동생과 헤어진, 오라버니의 미래 중 하나입니다. 10. 그 미인이 사부를 1인칭 시점으로 해서 외전 격으로 한번 써주세요~ 여동생이 마법 수련할 때의 하루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거군요. * 주의 :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이나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현재 차기 작을 놓고 고민중입니다. 여동생은 마녀 서비스 서비스 편 (2) - 여동생이 수련하던 어느 하루 코끝이 떨어질 정도의 추위다. 아니, 이미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손에 감각이 없어진 게 언제쯤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 망할 몸은 그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손끝을 찌르는 바늘 같은 감각. 그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그것만 느껴지면 말도 하지 않겠다. "에취 !" 이렇게 기침이나, 재채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가혹한 기후에서는, 감기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수은주가 영하 100도 이하로 굴러 내려갔을 때부터 짐작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나마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화산지대뿐이지만. "이래가지고 어떻게 가라는 거야 !" 대략 100km 정도만 가면, 화산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지점까지 도착할 거라고 한다. 그러면 몸이 좀 녹겠지. 문제는 이 눈 더미를 해치고 가야 한다는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디디면 당장에 얼음 사이의 틈, 즉 크레파스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한 걸음을 띄기도 조심스럽다. 천천히. 천천히. 내 발은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다. 신발도 없이 눈 속을 헤메고 다니니 당연한 결과다. 아니, 이미 이게 내 발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왜 발이 빨갛게 되어 있고, 거기에 얼음이 덮여 있는 걸까. 물론 그 발의 크기는 신발을 신었을 때의 내 발보다 더 크니,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한 눈에 알 수 있다. "발이 얼었어." 그걸 잊어버리고 싶어도, 한 번 땅, 아니 눈을 밟을 때마다 실감할 수밖에 없는 건, 그 발에서 전해지는 감각 때문이었다. 칼 위를 걷는다고 해도 이보다 아플까. 당장이라도 쓰러져 울고 싶지만, 눈물을 흘려봐야 소용없다. 모두 얼어붙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을 내보내서 손을 조금이라도 데워보고 싶어도. 스르르. 숨을 내쉬는 순간, 그것은 모두 얼음가루가 되어 날아간다. 이래서는 몸을 녹일 방도가 없다. 아니, 이제는 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래 전부터 이미, 공기중의 산소는 바닥이 난 지 오래이니까. 이산화탄소나 질소만으로 숨을 쉬라는 게 말이 되는가. 실질적으로 내 몸은 산소공급을 받지 못해, 죽음에 이를 것을 호소한다. 몸이 삐끄덕 거리지만. '빌어먹을 불사의 몸.' 내 몸은 지금 죽지 않으므로, 아무리 내가 여기서 고통을 받더라도 그게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불로불사라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내 눈앞에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죽는 것도 행복이야. 군말말고 그냥 살아." 차라리 죽는 몸이라면 벌써 이 고통은 끝났을 것을. 생각 같아서는 그냥 다 포기하고 불쌍한 여동생으로 남는 것도 마다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 모든 불행을 초래한 당사자는. 휘이잉. 내 바로 앞에서 걷고 있다. 만약 그녀의 오른팔이 성하다면 당장이라도 죽여라 살려라 고함을 치겠지만. '윽.' 그녀의 팔은 아직도 잘린 그대로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저건 분명히 일부러 놔두는 거다. 저런 괴물이 자기 팔 하나 재생할 능력이 없을 리가 없으니까. '제자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건가.' 그게 명분이라면, 적어도 저 여자, 아니 스승님은 그것을 완벽하게 실행하고 계시다. 그녀의 다리도 나와 마찬가지로 발이 퉁퉁 부은 채 피가 얼어붙어 있고, 얼굴은 동상으로 굳어 있는 데다가, 모진 추위에 몸이 떨리는 건 똑같으니까. 아니, 나보다 오히려 더 심하다. 적어도 나는 오른팔이 잘린 채, 상처를 얼음가루에 긁히지는 않고 있으니까. '이래선 불평할 수도 없잖아.' 정말 사악한 존재다. 공연히 그녀가 그 자신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 게 아니다. 제자의 입을 완벽하게 봉해놓고, 내 고통을 즐기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기다. 어차피 외형이 저런다고 해도, 실제로 나처럼 고통에 떨며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를 바라는 건 아닐 테니..... 미끌. "왓?" 내 다리가 눈 아래로 빠졌다. 딴 생각을 하다가 아래를 쳐다보지 못한 것이다. 그대로 크레파스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나. 이런. 빙하 지대를 행군할 때는 발 아래를 주의해야 한다고 스승님이 누누이 강조했는데. 그러나 추락하면서 걱정했던 것은, 얼음 바닥에 부딪쳐서 어딘가 부러지거나 깨지는 게 아니라. '또 얼음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와야 하는 거야?' 어차피 두개골이 깨지는 건 필수적일 거고, 피가 모자라서 어지러운 머리를 가지고, 맨손으로 얼음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 이번에도 그런 지옥을 또 맛봐야 하는 건가. 보통은 이럴 때 의식이 멀어져야 마땅하지만, 그 불로불사인가 뭔가 하는 몸으로 인해 그것도 불가능하다. 차라리 죽고 싶어. 흑흑.... 탁. "에?" 스승님이 왼손으로, 내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두 다리는 힘껏 땅을 디디고 있었고, 단지 허리만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까 했지만, 어차피 저 사람, 아니 괴물은 그 정도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해치울 능력을 지녔으니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 그녀가 차분하게. "미인아. 가만히 있어. 끌어올릴 테니까." 당신 실력이라면 손을 안 써도 그쯤은 간단하잖아요. 이렇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녀가 지금 손을 놓아버린다면, 나는 저 아래로 한없이 추락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얌전한 제자로서 있기로 했다.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으라챠." 스승님의 기합과 함께, 나는 얼음 위로 올라왔다. "우. 이런 고문행위는 그만 좀 해요." 나는 빙하 위에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처음에 이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 준다고 한 건 마법 수련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실제로 행하는 건 이 모양이다. 한참동안 날 고문한 후에 잠시 마법 수련, 그리고 내 힘이 강해지면 그걸 다 봉인하고 또 고문. 그리고 잠시동안 마법 수련. 이 모양이다. 이래서야 언제 내 실력이 늘어난단 말인가. "매일매일 수련해도 모자랄 판에." 이러다가는 수련의 1장도 끝마치기 전에 나는 늙어 죽을 거다. "그래서 불로불사의 몸을 만들어 줬잖아?" "그래도 !" 이건 너무 느리다. 난 중세의 마녀로 고문대에 올라가기 위해 수업을 받는 게 아니라, 그 망할 쌍어궁의 머리를 댕겅 자르기 위해 이걸 받는 거다. 더불어 사람의 도리를 저버린 오라버니의 머리통도 같이 부숴 버리고.... "급히 먹는 밥은 체한다. 미인이 나라에서 전해지는 속담이지?" "그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 나는 없는 열을 마구 뿜어낸다. 그래봐야 이 무시무시한 폭풍은 여전히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지만..... "거대한 힘을 고생도 하지 않고 얻으면, 넌 네 오빠나 쌍어궁처럼 되니까." "절대 아니에요 !" 무슨 무서운 말씀인가.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듯이 외쳤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왜 그런 극악한 존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리고 찌르고 발로 차는 오빠나, 별 이유도 없이 나를 이상한 곳으로 날려보내는, 그런 자들과 내가 똑같아진다니.... 꼬옥. 그녀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 추운 바람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고통의 무서움을 알아야, 남에게 고통을 주는 힘을 얻을 자격을 갖는 거야." 잠시동안, 나는 그녀의 품에 갇혀 있었다.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지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스승님은 결코 나를 괴롭히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걸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분명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데,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말 자체를 읽을 수는 있는데, 그 뜻을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그 뜻은 안다. 그러나 그 말의 뒤에 숨겨진 거대한 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자. 그만 일어나자.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진다." 그 말은 또 이 추운 곳에서 하룻밤을 지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서. "아, 네."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가면서도 나는 그녀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고통의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고?' 혹시,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이렇게 굴리는 건 아니겠지? 나중에 알았지만, 정말로 그랬던 거다. 그걸 내가 깨달은 것은 세월을 세는 것을 잊은 후의 어느 날이었다. 여동생은 마녀 서비스 서비스 편 (3) - 종료 후 좌담회 여동생 : 그럼 '여동생은 마녀' 연재 종료 기념으로 축하기념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박수) 여동생 : 자. 그럼 일단 주인공으로 수고해주신 오라버니부터..... 에? (오라버니, 침울 모드) 여동생 : 오빠. 왜 그래? 오빠 : ....왜 나는 악역으로 끝나야 하는 거야. 이대로라면 완전히 나는 여동생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나쁜 오빠로 남고 말잖아. 여동생 : 하긴, 어릴 때부터 여동생을 발로 차고 따귀를 때리는 악인이라는 설정이 드러나 버렸으니.... 하지만 스승님에게 괜히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 그런 비리도 드러나지 않았을 테니,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까? 오빠 : ........ 여동생 : 하긴 오빠가 자폭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잖아? 오빠 : 내가 언제 ! 여동생 : 독일에서 긴급 시에 연락하라고 줬던 휴대전화를 어디에 버리셨더라? 오빠 : 그건 경찰들이 그걸 압수했으니까.....! 여동생 : 그럼 진희한테 끝끝내 고백을 제대로 못한 건? 오빠 : .........일단 했잖아. 여동생 : 내가 해 준 걸로 아는데? 오빠 : .............그리고 네가 그러니까 결국 우리 사이가 어색해졌다고 ! 다 너 때문이........ 여동생 : [[Meteor(운석 소환)]] (오라버니, 운석에 맞아 파묻힘) 여동생 : 안 죽게 마법은 걸어두었으니, 목숨이 끊어지던가 어디를 다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좀 아프기는 하겠지만. 오빠 : .........(우우우. 뼛속까지 아프다) 여동생 : 그럼 다음 사람. 이번에 히로인으로 등극하신 클라라 슈만양. 클라라 : 네. 여동생 : 앞으로 오빠를 책임질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하실 말씀은? 클라라 : 한국과 독일간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행복하게 살게요. 여동생 : 네. 확실히 주한 독일대사의 양녀로 들어간 아가씨답게, 각오가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이야기에서는 그 내용이 안 나왔죠? 클라라 : 네. 원래는 쌍어궁 일당이 우릴 납치하려고 했을 때 미스터 문구의 학교에 간 이유가, 바로 그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했던 것인데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여동생 : 그럼 앞으로 올케 언니라고 불러드리면..... 시내 : 절대 안 돼 ! 여동생 : Why? 시내 : 그 자리는 내 거야 ! 문구를 그런 코 크고 머리 노란 애한테 빼앗길 수는 없어 ! 여동생 : ..........사랑은 국적을 초월하는 법이잖아. 시내 : 문구를 먼저 좋아한 건 나라고 ! 누군가의 악질적인 방해만 없었어도, 그때 키스까지 하는 건데. 여동생 : 쌍어궁 일당에게 홀린 상황에서 키스를 해 봐야, 별로 이득이 없는데. 시내 : ........ 여동생 : 무엇보다도, 그때 오빠를 홀려서 하려고 했던 거잖아. 그럴 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착한 여동생이 아니지. 시내 : 착한 애가 백만 대군을 한 순간에 몰살시키니? 여동생 : 악당에게 인권은 없다. 쌍어궁 : 네가 가장 큰 악당 같던데. 여동생 : 어머나. 맞아 죽고도 다시 기어오신 건가요? 쌍어궁 : 후기니까. 여동생 : 확실히 그렇네요. 그런데 복제품이네요. 혹시 걸어다니는 유언장으로 만들어둔 건 가요? 쌍어궁(복제품) : 네 손에 죽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복제품을 만들어서 유언을 기록해둔 거다. 부디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살인귀야. 여동생 : 악당에게 비난받는 것이야말로 정의의 사자로서의 자격조건. 쌍어궁(복제품) : 난 억울하게 잡혀간 민주투사일 뿐이다. 내 어디가 악당이라는 거냐. 월영 : 당신,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가 도망간 거잖아? 쌍어궁(복제품) : 이 게으르니즘에 투철한 수사관이. 월영 : 뭐가 게으르니즘이야. 그런 속어를 쓰면 독자님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쌍어궁(복제품) : 얼마나 게으르면 10년 동안이나 날 못 잡고 헤메는 거냐. 월영 : ............... 쌍어궁(복제품) : 왜 대답을 못하는 거냐. 월영 : ..........(어느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쌍어궁(복제품) : 헉. 여동생 : ..........(말없이 그냥 쌍어궁을 밟는다. 쌍어궁. 소멸) 여동생 : 뭐 불청객은 이걸로 처리했고, 이왕 나왔으니 당신도 할 말이 있을 텐데요. 월영. 월영 : 벌레들의 모임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지요? 당신도 취미가 고약하네요. 여동생 : 아직도 인류는 벌레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 건가요? 월영 : 우리 제국의 공식견해가 그래요. 나로서는 개인의 생각을 앞세울 수 없으니 할 수 없죠. 연 미인양. 여동생 : 마지막 좌담회에서까지 굳이 그걸 고집할 이유는.... 월영 : 국가 공무원이니까요. 여동생 : 하긴.... 그럼 또 다른 국가공무원.... 아니 국가의 암적 존재이신 국회의원님의 의견은? 국회의원(진희 아버지) : 왜 내가 암적 존재냐. 여동생 : 국민 대다수의 의견에 따르면, 그런데요. 국회의원 : 감히 10만 성원의 대표인 나에게 이토록 무례하다니, 고작해야 일개 대기업의 두목 주제에. 여동생 : 듣는 두목 입장에선 기분이 나쁜데요. 국회의원 : 사실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다니, 그래가지고 어떻게 그런 중소기업을 이끌어가려는 거냐. 까불면 당장에 세무사찰을 해버린다. 여동생 : 호오. 국회의원 : 하하하. 어떠냐. 아무리 네가 대단해도 세무사찰 앞에서는..... (잠시 후) 국회의원 : 말도 안 돼. 왜 세금을 떼어먹은 게 하나도 없는 거야. 여동생 : 약오르지롱. 국회의원 : 이건 거짓말이야. 분명히 어딘가에서 세금을 떼어먹거나, 뭔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 나이에 그렇게 돈을 많이 모을 수는.... 여동생 ; 당신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지 마. 국회의원 : 웃기지 마.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반드시 네 년은 세금을 몰래 떼어먹은 거야. 어디 보자. 법망의 허점을 이용해 세금을 포탈하는 방법이라면.... 여동생 : 왜. 새로운 세금 포탈 방법이라도 개발하려고? 국회의원 : 웃기지 마라. 난 여태까지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다 ! (찬바람이 분다) 여동생 : .......... 국회의원 : 아무도 반론하지 않는 걸 보니, 내 말을 반박할 수 없는 모양이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국회의원(숯 덩이) : ........... 여동생 : 정말 대책이 없는 인간이라니까. 오죽하면 스승님이 벼락을 직접 때릴까. 자. 자. 어쨌든 다음 분. 문희 : .......그런데 말야. 너 어떻게 등장인물들을 다 날려버리는 식으로 좌담회를 진행한다? 여동생 : 악당들이니까. 문희 : .............(반론을 펼 수가 없다) 여동생 : 그리고 말야. 어차피 국회의원에게 정중히 대우하면 국민의 여론이 안 좋아진다고. 왜 내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짓을 일부러 골라서 해야 해? 문희 : .........하긴. 여동생 : 너도 취재 많이 해 봤으니까 알잖아. 그런데 이제 궁금한 점 하나. 오빠와의 연애전선은 어때? 문희 : ..........그, 그건 네가 알 거 없잖아 ! 여동생 : 둘이 그렇게 뜨거운 밤을 연출하시고도 정말? 문희 : 그, 그건 외계인(쌍어궁) 녀석이 비겁한 수작을 부려서..... 여동생 : 그러지 말고 고백하지 그래? 경쟁자가 많아서 힘들겠지만. 문희 : 나, 나는 기자를 목표로 하고 있어. 너나 문구처럼 머리가 좋지 않으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단 말이야. 여동생 : 그래도 공부는 잘하는 편이잖아? 문희 : 명문대학에 가려면 더 해야 한다고 ! 여동생 : 그럼 대학에 입학하면 연애해도 되겠네? 문희 : ............. 여동생 : 하지만 너무 늦으면 오빠 뺏긴다. 문희 : 그러는 너는? 너야말로 오빠를 빼앗기기 딱 좋은데. 여동생이잖아? 여동생 : 후후후. 한 번 여동생은 죽을 때까지 여동생이잖아. 절대 오빠는 내 손에서 도망갈 수 없어. 그게 쌍둥이 오누이라는 거지. 문희 : 문구도 힘들겠네.... 여동생 : 그래도 연미 언니보다는 낫잖아.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데. 연미 : .........그런데 말야. 결국 내 애인은 어떻게 된 거니? 여동생 : 네? 연미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분명히 내 애인을 살려서 어디에 챙겨뒀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여동생 : 뭐 그렇긴 하지만. 연미 : 당장 그 사람 내놔. 만나러 갈 거야. 여동생 : 안 돼요. (매우 단호하게) 연미 : 왜 ! 여동생 : 지금 언니가 떠나버리면, 진희는 어떻게 하라고요? 안 그래도.... (진희, 초강력 침울모드) 여동생 : 여주인공 역할을 날려서, 저런 상태인데. 연미 :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애인을 못 만날 이유는.... 여동생 : 그 사람은 자기 기반이 잡히면, 꽃다발 들고 언니를 맞이하러 온다고 했어요. 연미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여동생 : 자기 회사 직원에 대한 것 정도는 챙겨두고 있답니다. 연미 : 너희 회사에 취직했니? 그럼 그 사람 어디에 있어? 여동생 : 본인이 스스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요. 연미 : 그 사람 어디에 있어? 여동생 : 본인이 스스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요. 연미 : 그 사람 어디에 있어? 여동생 : 본인이 스스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요. 연미 : 그 사람 어디에 있어? 여동생 : 본인이 스스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요. 연미 : 그 사람 어디에 있어? 여동생 : 본인이 스스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요. 연미 : 너, 끝내 대답해주지 않을 셈이니? 여동생 : 당연하잖아요. 어디 있는지 알면 암살자를 보내겠다고 저렇게 귀를 쫑긋 세운 사람이 있는데. 국회의원(숯 덩이) : ......... 연미 : 정말 아빠는 끝까지 ! (펄펄 뛴다) 여동생 : 그러니 이 좌담회가 끝나면 알려줄게요. 저 사람이 모르게. 연미 : 우.........(삐진 모드로 돌입) 국회의원(숯 덩이) : ..........(후후후. 반드시 죽여주마. 내 딸년은 당연히 정략결혼에 써먹어야 한다고) 여동생 : (말없이 국회의원을 밟는다) 국회의원(재) : ........... 여동생 : 정말 못 말린다니까. 자. 그럼 마지막으로 두 분 선생님도 한 말씀. 꼬마 선생님 : 그런데 문구는 누굴 선택할 것 같니? 여동생 : 네? 꼬마 선생님 : 아무래도 교육자로서, 그게 궁금해서 말야. 여동생 : .........글쎄요? 꼬마 선생님 : 올바른 이성교제를 지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역시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여동생 : 음. 지금으로서는 클라라 슈만양, 시내, 그리고 문희가.... 문희 : 제발 나는 빼 줘. 여동생 : .........그럼 다시. 지금으로선 클라라 슈만양이 가장 유력하고, 그 다음이 시내네요. 진희는 저런 상태라서 아무래도 무리고. 진희 : (여전히 초강력 침울모드) 연미 : 그래도 아직 희망이 없어진 건 아니잖니? 여동생 : 본인이 스스로 일어나서, 오빠에게 키스라도 하면 모를까, 지금은 무리예요. (진희, 스르르 일어나서 운석 아래에 처박힌 문구에게 간다. 그리고) (쪽) 여동생 : !!!!! 클라라 : ????? 시내 : .............&@$#(^&! 꼬마 선생님 : 어머. 어머. 어머. 아직은 진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걸까. 여동생 : 그건 잘 모르죠. 지금 오빠는 기절해 있다고요. 여전히 클라라 슈만양이 가장 앞서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런데 좌담회가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내면 어떻게 하라고. (막이 내린다) - 이것으로 정말로 끝........!입니다 - 후기)드디어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정말 길었네요. 이제 다 끝났으니 밝히자면, 처음에는 그냥 명랑 소설 비슷하게 갈 예정이었습니다만.... 여동생이 열심히 뛰는 바람에 '언리미티드 파워'가 세부적으로 드러나면서, 진지한 타입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덕에 절대 안 나올 줄 알았던 스승님까지도 잠시 나오셨군요. 옛날에 하이텔에서 연재했던 '공룡 판타지 - 레이니 이야기'에서는 설정은 되어 있었어도 얼굴도 안 비치셨는데 말입니다. 언젠가는 그녀를 주연으로 하는 소설도 한 번 써 볼 생각입니다. (다만 판타지에선 남자 주인공이 아니면 인기가 없다는 게 정설이니.... 게다가 그렇게 어려운 타입의 캐릭터는 쉽게 다룰 수가 없어서 당분간 힘들겠지만) 이 소설이 연재된 사이트에 따라 다르지만, 짧아도 1년, 길면 2년인가요. 그렇게 길게 끌었던 이야기가 끝나니 기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합니다. 조회수를 보면 우울하지만, 그래도 봐주신 독자님들의 답글 하나하나가 저를 이끌어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군요. 봐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 소설의 연재가 끝났으므로, 앞으로 차기작은 무엇을 할지 고민중입니다. 그래서 일단 계획안을 내놓자면. 1. 현재 일부 사이트에 연재중인 '도적여행기'에 전념한다. 이 방안은 저야 편하긴 합니다만, 여기 중에 '그게 연재가 안 되는' 사이트에서 보시는 분들에게는 곤란한 방안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걸 그리 길게 만들 생각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마 20화는 확실히 넘기겠지만, 그 이상으로 길게 갈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네요. 저도 어디까지 갈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그보다 더 곤란한 것은, 무리해서 빨리 끝내려고 제가 서두를 위험이 크다는 점입니다. 이걸 택할 경우 말이지요. (조회수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다분함) 2. 차기작을 전부터 예고했던 '기동전사 건담 - 지온의 복수'로 한다. 이 방안은 쓰는 저에게는 편할지 몰라도, 현대물을 원하시는 독자님들에게는 안 맞는 방안입니다. 건담이라는 게 유명한 애니메이션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오리지널 소설은 될 수 없는 데다가(배경이라든가 인물이라는 면에서, 어느 정도는 우주세기 건담과 겹치게 됩니다) 이쪽은 대중적이 아니기 때문에, 좀 그렇군요. 3. 차기작을 지금 생각중인 '대테러부대 알파팀(가칭)'으로 한다. 이 방안은 오리지널 소설을 차기 작으로 내세우는 방안이며, 이것을 쓴다면 '도적여행기'의 속도 조절이 되기 때문에 무리해서 후다닥 마무리하려고 애쓰지 않게 된다는 장점이 있고, 특히 저도 오리지널 소설을 연재하므로 이번에는 조회수 1000을 넘길 희망을 가진다는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장점이 있군요. 네? 조회수에 너무 미련이 많다고요? 그래도 원래 쓰는 사람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법입니다. 그런데 이걸 과연 제가 지금 해낼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되는군요. 이야기 구상은 오래 전부터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직 주인공 이름도 애매 모호한, 어느 이야기로 할지 왔다갔다하는(기본꼴은 오래전에 정해졌지만, 세부적인 게 좀 흔들리는 중입니다. 근 미래물로 할지 현대물로 할지가 문제라고 할까요) 상태이니 큰 모험이 될 수도 있군요. 그러나 '여동생은 마녀' 자체가 처음에 현대물로 할지 근 미래물로 할지 꽤나 고민하면서 만든 물건이니, 경험이 없는 건 아니네요. 어느쪽이든 우리나라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은 확실합니다만. 이상 세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중입니다. 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의견이 있다면 밝혀주시길. 토요일쯤에 의견을 보고, 차기작을 선택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이 게시판에 광고하고, 곧바로 예고편을 만들어야지요. 그동안 많이 봐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것으로 완결 ! 그 에너지는 적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력의 세기는 시공간의 휘어지는 정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갑자기 공간이 아래로 휘어 들어갔다는 것은. 즈즈즈즈즈. 그만큼 중력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몸무게가 갑자기 수 천 배 이상 불어난다면 보통 인간은 어떻게 될까. 아마 그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면서, 스스로의 몸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물론 내 앞의 적들은 강력한 마법사나 괴물들이므로 쉽게 그런 길을 걷지는 않지만. 즈즈즈즈즈. 그들의 몸은 순간적으로 멈춰 버렸다. 그리고 마법이 진행됨에 따라, 그런 현상은 마치 벼랑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듯 가속되었다. 방어마법을 제대로 걸지 못한 몇몇 적들이 찌부러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블랙홀?' 그렇다. 이것은 블랙홀에 들어갔을 때의 현상과 일치했다. 엄청난 중력에 의한 몸의 붕괴.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블랙홀이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 화이트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화이트홀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곧바로 블랙홀로 변환된다니까 비슷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무, 무슨 짓이냐 !" 쌍어궁의 경악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의 마법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 마법은 그 어떤 마법사도,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다. 마력의 무한정한 낭비에 있어, 이 이상의 마법은 없다고 일컬어지니까. 비록 위력이 강하지만, 그에 비해 사용되는 마력이 너무 많기 때문에. '보통 마법사는 절대로 쓰지 않지. 쓸 수도 없지만.' 그런데 내가 지금 이것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쌍어궁 일당도,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응하려고 해도 이 마법은 이미 너무 빨리, 너무 멀리 전개되어 버렸다. 적어도 반경 10억 km 이내의 물체는, 모조리 이 마법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달아날 수 없어.' 도망치기에는 너무나 범위가 넓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의 6배 이상이니까. 빛의 속도로 달아나더라도 1시간을 달려야 겨우 도망칠까 말까 한 상황이라면, 도주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물론 순간이동을 사용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구우우웅. 이 마법은 시공간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따라서 시공마법을 적들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다른 마법을 아무리 쓰더라도, 레벨 11짜리가 아닌 이상 이 마법의 힘을 억누르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어쨌든 이건 천문학적인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마법이니까. 지구를 다른 우주로 숨겨놓는 것은, 이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조족지혈,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이런 거대한 마법에 힘으로 대항하려면 그 이상의 힘을 써야 하지만. '너희들에게 그런 힘이 어디 있어.' 뭐 쌍어궁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대항마법을 외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가 미처 마법을 꺼내기도 전에. 파아앙. 마법은 완성되었다. 그로 인해 시공간이 열리면서, 거대한 웜홀이 생겨났다. 태양계 전체를 이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통로가. 그것은 마치. "아, 악마의 눈이다 !" 이미 대응을 포기한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하긴 너무나 거대한 공간의 변이에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이미 태양계 전체는 내 품안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너무 커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공간터널이 뻥 뚫린 상태. 누가 이런 수를 쓰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다른 마법도 아니고. "Shooting star(슈팅스타)를 실전에서 사용하다니, 이 미친년이 !" 하지만 그것은 공포를 숨기기 위한 외침이었을 뿐이다. 곧 공간을 찢어놓은 동굴로부터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것은 바로. "!" 거대한 별들이었다. 보통 Meteor 계열의 마법에서 소환되는 것은, 직경 10km 정도의 운석이다. 물론 간혹 더 큰 것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지구 정도의 크기의 별을 움직이는 것이 한계였다. 그 이상의 별을 움직이는 것은 너무 힘이 드는 데다가. '별을 던지는 건 마력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고.' 그럴 바에는 다른 종류의 레벨 11짜리 마법을 쓰자. 이것이 대개의 마법사가 택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사용한 슈팅스타라는 마법은 그 누구도 실전에서 쓰지 않았고, 따라서 이에 대응하는 방법도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그 어떤 미친 마법사가, 이런 식의 마법을 쓴단 말인가. 굳이 그런 걸 사용하려면. '그냥 드래곤 브레스를 연타하고 말겠지.' 그쪽이 훨씬 마력소모가 적고, 위력도 좋은 편이다. 물론 소환되는 별의 종류에 따라 위력을 크게 늘리는 것도 가능하기야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1의 위력을 내기 위해 10000 이상의 힘을 쏟아 붓는 것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덕분에. "으. 으아....." "도, 도망쳐 !" 이 마법을 깨부술 타이밍을, 적들은 이미 놓쳤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그리고 그 대가는 자명했다. 별들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빛의 속도에 가까울 만큼, 빠르게. 적들은 달아나려고 했지만. "마, 마법이...." 별이 그들과 부딪치는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 그들의 주문은 공허한 외침으로 바뀌고, 그들의 몸은 그대로 별의 표면에 추락했다. 게다가 그들이 미리 걸어두었던 방어마법은, 조금 전의 시공간의 대혼란 속에서 이미 다 부서진 상태였다. 너무나 거대한 힘의 흐름에 휘말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극히 작은 그들 마법사의 마법은 폭풍 속 가랑잎처럼 떠내려간 것이다. 그 파도에 저항할 수 있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적들 대다수는. "우아악." "쌍어궁님. 살려주세요." 그렇게 외쳐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별이 내뿜는 불길에 삼켜졌다. 그들의 몸이 타오른다. 아니, 그럴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 증발한다. 아예 지워졌다고 할까. 그리고 별은 무정하게도, 그런 그들의 시신을 삼킨 채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 뒤의 다른 별들이 그 자리를 메워나간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몇몇 방어막을 갖춘 마법사들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공간의 혼돈은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순간이동이 되지 않아 !" 대개 비행마법은 중력을 조작하여 이뤄지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중력은 미쳐 날뛰고 있다. 세 개의 별 사이에서 항행하는 것만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별들의 힘을 계산하여 최적의 코스로 움직이기 위해 수행해야 할 수학적 계산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하물며 수 백, 수 천, 아니 그 이상의 별들이 날아다니는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치겠는가. 조금 전의 1차 타격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들 역시. 퐁. 퐁.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별들 사이로 떨어져 갔다. 그들 중 몇이 방어막을 편다. 아마 별의 중력과 열, 그리고 폭풍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겠지. 그러다가 좀 주위가 조용해지면 탈출을 시도하려는 거다. 좋은 방법이지만. 지지직. "아악?" 유감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내가 소환한 별들이 모두 태양처럼, 얌전한 별이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마법사들이 서 있던 별 하나가 폭발한다. 그것은 통상적인 주계열성, 태양과 같은 안정기의 별이 아니라. "끄아악 !" 죽음을 맞이하는 별이었던 것이다. 별 표면의 폭발과 함께 우주로 날아가는 마법사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탈출이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옆을 지나던 블랙홀에 잡힌다. 느닷없는 블랙홀에 그 마법사는 당황했지만, 그는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찢겨진다. '그러니까 이 마법이 무서운 거지.' 별이라고 해서, 내가 부른 별이 모두 태양과 같은 주계열성인 게 아니다. 어떤 별은 초신성일 수도 있고, 어떤 별은 백색왜성이나 중성자별, 심지어 어떤 별은 이런 식의 블랙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크기도 가지각색이어서. 구우우웅. 어떤 별은 초신성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에 놓인, 청색초거성이기도 했다. 조금 전에 마법사들이 빠졌던 별과 같이 말이다. 게다가 그 별들의 상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떤 마법사는. "으. 이 망할 년이." 겨우 갈색왜성(너무 작아서 태양이 되지 못한 별)에 안착했다가, 그 별이 느닷없이 중성자별의 옆을 지나는 바람에 중력의 우물로 첨벙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별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 별들이 서로 부딪치고 으깨지면서, 혼란은 더욱 극심해질 뿐이다. "으아. 미친 년 !" 마법사 하나가 중력 이상으로 인해 도주로를 잃었다. 그의 눈앞에는 무려 세 개의 적색거성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뒤에는 백색왜성도 하나 끼어 있다. 달아날 수 없음을 안 그가 손을 펴면서. "우아아아아 !" 방어마법을 전개한다. 하지만 빛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와서 부딪치는 별의 압력을 버티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손이 아무 저항도 없이 부서지더니. 파아아앗. 그대로 지워져 버렸다. 별의 몸체에 깔려 시체도 남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그나마 요행으로 순간이동에 성공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아앗. 이쪽이 아냐 !" 그에 희망을 걸기에는 시공간이 너무 불안정했다. 그대로 블랙홀에 자맥질을 해버려서야 생존에는 도움이 안 되지 않겠는가. 물론 모든 이가 그렇게 실패와 죽음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일부는 좀 멀리 달아나는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사, 살았다... 아앗 !" 근본적으로 이 마법이 적용되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간신히 달아났다 싶으면 다시 자신에게 날아오는 별들을 피해, 그들은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순간이동을 거듭하다가, 그대로 소멸해갔다. 몇몇은 별이 날아오지 않는 방향을 향해 도망쳤지만. 슈우우웅. 별들은 마치 유도미사일처럼, 바로 그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거대한 몸체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그리고 그 마법사들 역시, 빛의 폭발과 함께 사라져간다. 하지만 너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게 할 수도 없다. 조종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게, 이런 마법을 사용하면서 실수라도 하면. '외계인들에게 항의 받는다고.' 느닷없이 별들이 마구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별들이 자신들의 고향별을 휩쓸어버렸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내 악명은 우주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나를 상대로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나를 비난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정말 할 말이 없기도 했다. 만약 내가 실수를 하게 된다면 말이다. '안전제일. 안전제일. 조심. 조심.' 지구 근처에 외계인이 없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거대한 청색초거성이나 적색거성, 아니 평범한 크기의 주계열성만 해도 다루기가 어려웠다. 물론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어쨌든 잠시동안 아광속으로 설쳐댄 별들이 어느 정도 적들을 짓뭉개자 나는. "이 정도면 거둬도 되겠어." 수많은 별들이 다시 시공간의 터널로 날아오더니, 그대로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와 동시에 죽어간 마법사들의 모든 것이, 그 안으로 삼켜진다.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시공간을 다시 정상으로 펴놓는다. 구구구구구. 시공간의 왜곡이 사라지고, 공간의 터널이 문을 닫는다. 잠시동안의 요동이 끝나자, 태양계는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