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6 엘야시온 가디엘이 루드랫을 불러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 맞아. 시간이란 묘한 것이지. 난 가끔 생각하네. 인간이라는 존재의 시작이며 증거인 이 육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또 다른 육체는 바로 이 시간이란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때때로, 왜 신은 인간에게 이 '시간'이라는 육체를 부여 한 것인가. 인간이 '시간'으로 지음 받는 순간부터, 그 필연적인 불완전 함... "사실 이것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생각해 보게. 태초이전엔 어떤 시간도 없었네. 모든 것은 영원할 뿐. '순간'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 그런데 신은 '시간'이라 불리는 '순간'들을 창조하고, 그에 따 라 다른 모든 '순간'들을 창조했네. 하지만 내가 확신하건대..." 엘야시온은 웃었다. "제 5일 이전까지 모든 사물은 분명히, 아직도 '영원'을 살고 있었을 거네. 영원을 살기 때문에 영원을 사는 존재와... 순간을 살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영원을 사는 것과 같은 존재... 제 5일 이전엔 그런 것들뿐이었지. "그런데, 제 6일에 신은 아주 묘한 일을 한 거야. 그 완벽함에 스스로 오점을 찍기라도 하듯... ...오점이라고 해서 이상한가? 아니.. 나는 그 걸 오점이라 하겠네. "제 6일에 그는 손수 진흙을 취해 그것으로 인간을 빚었네. 인간 토기 장이가 진흙으로 토기를 빚듯...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정교하 고 아름다운 그릇이었지. 그리고, 그 그릇에... 굽지 않은 비천한 토기 그릇에, 신이 담은 것은 자신의 입김... '영원'의 정수였네. "그러므로, 그때에야 신은 '진정한 시간', 곧 '진정한 순간'을 창조한 거네.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시간을 인식하는 자들이 태어났으니 까. ...어떤 동물이나 식물, 어떤 천사나 어떤 정령들도 시간을 인식할 수 없고,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인식하니까. "저 넓은 영원의 들판 가운데, 오직 현재라 불리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한 순간만을 살수 있는 우리는... 그러나 우리 육체와 우리 시간 속에 있는 '나'란 존재는, 원래 신에게서 발현한 것이기에, 현재를 초월하여... 육체 이상의, 시간 이상의 무언가... 우리가 영원이라 부르 는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네.... "과거... 미래... 그, 영원함의 이름. 현재... 내가 속해 있는 스쳐 가 는 순간들의 조각... "...신은 '순간'으로 인간을 빚고, '영원'으로 생령을 삼아 우리 가운 데 두었고... 그래서 우리 가운데엔, 끊임없이 그 두 존재의 격렬한 부 딪힘이 일어나... 그리하여 시간은 잉태되어 태어나지... 엘야시온 가디엘은 미소지었다. "그러니, 최초로 눈을 뜬 인간이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일 것 같나? 창조된 것에 대한 감사함?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자신 앞에 펼 쳐진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끝없는 탄성? 하하하... 글세. 엘야시온은 웃었다.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최초로 느꼈던 감정은 아마도 '갈망'이 아니었을까하네. 순간 속에 영원을 인식하는 자가 필연 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영원을 향한 지독한 '갈망.' 엘야시온 가디엘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오점'이지. 제 5일까지의 완벽한 창조... 모든 만물은 영원 가운데 있어, 흡족하고 만족함에 속해 있는데... 제 6일, 마지막 순간에 신은 갈망을 가진 존재를 창조했고... 그 완벽함에 말 그 대로 오점을 찍었네. "안 그런가? 완벽함 가운데 어떻게 '모자람'을 느끼는 존재가 서 있을 수 있나? 영원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어떻게 '순간'이 끼여들 수 있나? "끊임없는 갈망... 결코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목마름... 이것이 인간 의 근원... "과거는 검게 사라지고, 미래는 하얗게 남아서... 수다한 시간 가운데, 찰나에만 존재하며... 그러면서도 영원을 인식하는 우리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 어.... 가끔은, 너무나 비통해 끊임없이 눈물이 흐를 때가 있었지..." 하지만 엘야시온은 말의 내용과는 달리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알겠나? ...그러므로 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그때에, 왜, '이 모든 것이 매우 보기 좋았다'라고 극찬을 했던 건지. 아직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네. 가장 불완전한 존재의 완성이 어째서, 모든 완성의 완성이 되 는 건지... 태어날 때부터, 필연적인 흠집을 가지고 태어난 창조물이 어 떻게 가장 아름답다는 선고를 받은 건지.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것 이 상의 것을 항상 바라보며... "그 갈망과 그 끝없는 목마름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그래서 모든 창조물 가운데 가장 비천하고 낮은 존재가... 어떻게 그런 영화스 러운 이름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 "...인간은, 타락 때문에 불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불완전한 자였네. 신은, 일부러 인간을 불완전하게 창조한 거야." 엘야시온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러므로, 난... 과거와 미래가, 현재처럼 내 안에서 되살아날 때... 그때,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영원을 보며... 아마 앞으로도, 신이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든 건지... 계속, 알 수 없어하겠지." 그리고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엘야시온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나저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 무 슨 이야길 하다가, 이야기가 이리 이상한 곳으로 빠졌나? 늙으니까 정신 이 없어져서... 오늘 저녁, 오랜만에 아주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쓸데없 는 소리까지... 아아.. 그렇지...! '시간' 이야길 하고 있었지. '순간' 이라는 존재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닌 시간. 하하하... 그래. 그 하나 하 나의 순간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사실인즉슨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변 화시키는 존재는 바로 그런 작은 것들이거든.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이 주춧돌에 구멍을 뚫듯. 루이티온의 황금 같은 맹세마저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지. 하찮은, 시간. 먼지 같은, 시간... 인간도 시간도... 결국은 먼지로 돌아가는데... 어떤가, 루드랫? 자네는 느낄 수 있나?" 공손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 무도회장 안에 있는 아피네스를 느낄 수 있나...?" "...!!!" 루드랫은 놀란 눈을 지었고 자기도 모르게 당혹한 눈으로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그분이 계시다고요?"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것을 눈치 챈 엘야시온은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하겐트의 조언은 다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 도 뛰어나거든. "아아... 느낄 수 있나?" 루드랫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루드랫이 대답을 안 하자, 엘야시온 가 디엘은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묻고 있잖는가, 루온 루드랫. 계속 그것이 궁금했거든. 자네는 아피 네스를 위해 마인드 컨트롤했어. 그건 두 사람의 합의하지 않는 이상은, 무척이나 깨지기 힘든 맹세거든. 마인드 컨트롤 상대가 내 부모를 해치 는 일이 있더라도... 그에겐 손끝하나 댈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난 어릴 때부터 엘야시온의 후계자로 키워졌기에, 어떤 루이트도 가 진 적이 없지. 유감스럽게도 '영혼의 공명'을 느낀 루이트도 만나본 적 이 없어. 하지만 루이티온에 대해 흥미는 많이 가졌네. 왕족들은 뛰어난 루이트를 소유하는 것을 무엇보다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보다 보람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네도 들은 일 이 있겠지? 흠... 확실히... 고양이는 몰라도, 명견이라고 불리는 어떤 개들은 아무리 먼 곳에 데려다 놓아도 곧잘 제 주인을 찾아온다고 하더 군. 대단한 충성심... 하지만, 그것도 '시간' 앞에선 소용이 없지. 거리 보다 더 확실하게 사람의 마음을 변질시키는 시간... 이 무도회장 가운 데 있는 아피네스를 느낄 수 있나? 시간이, 주인을 찾을 수 있는, 자네 의 체취 맡는 기능을 많이 앗아갔는가?" '개'나 '고양이'로 비유된 것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왕족들은 종 종, 자신의 루이트를 '내 가장 충성스러운 번견(番犬)'으로 부르곤 했으 니까. 실제로도 루이트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고, 자신 의 주인이 어디에 있든 능히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명견' 일수록. 루드랫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갑자기 엘야시온 가디엘이 크게 웃었다. 얼마나 유쾌하게 웃었는지 주 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하하하... 재미있군. 과연. 시간이란 멋진 존재야. 하하하... 정말, 유쾌하군. 루드랫... 아니, 드랫. 이름을 잘 숨기게나. 사람들에게 자네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해. 그리고 이 무도회를 즐겁게 보내게. 하하 하... 내가 이제야, 자네가 자네의 종속자를 사랑한다고 한 말이 사실임 을 알았네." 시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남자에게 쏘아붙였다. "나, 난 모르는 사람하 고 춤 같은 거 안 춰요!" 말해놓고 보니, 차가운 목소리라기보단 당황한 채 억지 부리는 목소리 같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나는 남자의 검은 눈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땅만 쳐다보고 계속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내가, 춤추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니까! 그러니까 난, 당신과는 절대로 춤 안 춰요!" 그리고 난 후, 시나는 사람들을 밀치며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걸어갔 다. 그저, '춤추자'고 했을 뿐인데 그렇게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듯 말한 것은 안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 조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남자 옆에 계속 있는 다면(춤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예견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감지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이다. 아니. 시나는 남자의 시선이 닿지 않을 만한 기둥을 찾아, 그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에 기대섰다. 차가운 대리석에 손바닥을 댔을 때야, 식은땀 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악의 상황이 '닥칠' 거라고...? "이런, 바보 같은. 이것보다 최악의 상황이 어디 있어! 이미 최악의 상 황이야...!! 왜, 레겜이 여기에 있지...!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저 사람은 떠났는데! 이젠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야!!!" 최초의 충격이 지나가고, 불연속적으로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그의 모습,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목이 마른 상태였다 해도, '물'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다면, 괜찮 아...!! 목적 없는 갈망은, 아무리 간절하다 하더라도... 뿌리뽑힌 나무 처럼 곧 고사(枯死)하고, 그 갈망을 담았던 존재조차 물기 없는 먼지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저 불쌍한 요정, 에코우처럼. 하지만...! 시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주위 사람들이 놀 란 눈으로 시나를 보았지만, 시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땅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억제할 수 있었다. 하 지만 이렇게 심장이 저리는 것 같은 느낌은...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아아... 아빠... 난, 어떡하 죠... 겨우, 그 사람을 찾았는데. 이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데..." 동화의 끝은 언제나,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였다. 마녀는 죽고, 왕자와 공주는 언제나 영원토록 행복하게 산다. 이 세상은 모두 다, 그 둘을 위해 존재하며... 가면 뒤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심장의 저림은, 아픔이 돼서 퍼 지고 있었다. "아아..." 그들은, 같지만 또한 틀리다. 그들의 뿌리가 닿는 곳, 그 뿌리의 근원이 있고, 그 뿌리에 영양을 주 는 세계는, 하나는 철저한 진실이라 이름했고, 하나는 철저한 거짓이라 고 이름했다. 철저한 거짓은 도래한 철저한 진실에 가라앉지만,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차 오르면 다시 떠오른다. 저 기괴하고 아름다운 달에 온 세계의 바다가 그리하는 것처럼. tide... time... 시간의 흐름. 푸른 달은, 슬픔을 머금는 달. 온 세계의 바다는 푸른 달을 사모하며, 그곳으로 달린다. 그래서 드러나는 헐벗고 초췌한 해안엔 온갖 시간이 정지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다 진실... 푸른 달은 검은 바다 위에 떠 있고, 해안은 황폐하지만, 푸른 꿈결같은 바닷가 품고 있던 것은, 그런 것들뿐... 그곳을 걸으며, 달을 보며. 시나는 무척 오랫동안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는, 두려웠기 에, 푸른 꿈을 한 조각... 바다에서 올라온 아가씨는, 얼마나 슬펐을까. 내가, 인간이었더라면... 내가,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더라면... 내가, 나의 왕자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더라면... "내가... 내가... 내가, 좀 더..." ...누구라도 사랑할만한 아이였다면. ...슬프지 않았을 텐데. ...누구한테나 사랑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시나는, 그 불쌍한 아가씨의 전철을 밟기 싫어서, 스스로 이웃 나라 공주가 되기로 한 것뿐이다. 꿈의 조각 따윈, 필요가 없어졌을 때...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 버리지 않더라도, 곧 사라질 운명의... 하지만 심술을 부렸던 게 잘못일까. ...아니면 위기 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녀는 혼 강에서 자신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무섭고 두려워, 그녀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루드랫의 음성은, 너무나 싸늘하고, 시나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루드랫은 역시, '그 애'를 좋아한다. 누구라도 사랑할만한 아이니까... 그도, 역시. "흑... 흑..." 시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하는 수 없었다. 루드랫은 시나를 싫 어하고... '그 애'는 좋아한다. 처음엔 무척 싫어해서... 내심 즐겁게까지 생각했는데... 이젠 틀리다. '그 애'에게만은 마음을 열어준다... 그러니까 시나가 '그 애'인척 한다면... 언제까지라도 루드랫 옆에 있 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시나 자신의 인식의 분명해지 면.. 그 애는 완전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그 애'는 조만간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후 드러나는 것은 '시나' 자신뿐. 어느 것이 앞서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이오시아... 휘프리엘... 그들은 얼마나 시나에게 분명한 이름을 갖도록,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 나. 루드랫의 거부에 무척 힘들고, 상처를 입었지만... 이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던 것은 휘프리엘 덕분인데... 그러니... 그냥 그대로 사라지도록 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 애'가 마인드 컨트롤하도록 한 것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화풀이... 그리고 자 신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손쉽게 해내는 모습에 대한 질투와 심술이었 다. "...루드랫!" 시나는 심장이 점점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 애'가,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근거. 이 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는 근거. 진정한 생명을 얻고 있었다. 미약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레겜. 당신을 만나서 참 잘됐어요. 어둠... 친근했던 어둠. 왜 이 어둠이 이렇게 사랑스러웠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말들은, 심장에 파고들어 단단한 뿌리가 되고, 실체가 되어, 드디어 존 재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든, 왕자와 공주는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불쌍한 바다 아가씨의 이야기일 뿐. 다른 모든 이야기 에서, 왕자와 공주는 이웃나라의 공주도, 마녀도 없는 그들만의 세상에 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만의 세상에 균열이 일어 나고 있었다. 너무나 치명적인 균열... 레겜. 미안해요. 내가 그렇게 차갑게 대해서 매우 놀랐겠죠. 무척 당황하고 부끄러웠을 텐데... 부디, 상처받지 않았기를...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한 마디, 한 마디는 점점 분명해 졌다. 심장은 고장난 시계처럼 고동치 고, 머리는 점점 혼란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시나 자신의 세계와 어 쩌면 시나 자신조차도 위협받고 있었다. 시나는 동굴에서의 일을 떠올렸 다. 자기 자신을 위협하는 자... 그 동굴에서처럼? 그렇다면, 그 누군가를 '살해'해야 한다. 그 동굴에서처럼. 자신을 위 협하는 존재들은 모두다 죽여야 한다. 시나는 언제나 생각했다. 절대 나는 죽지 않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난 죽지 않을 거야...!!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그렇...구나..." 시나는 이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동화가 완성되기 전, 꼭 있었던 일들. 마녀는 불에 달군 쇠 구두를 신고 춤춘다. 붉은 피는 화형주(火刑株) 위로 뿌려지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다. 그러므로 죽여야 할 사람은 마녀. 사악한 요정... 불을 뿜는 용... 두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붉은 피. 동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아마, 그 일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혼란하고, 이렇게 슬프며, 이렇게 분노하고...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다. 마녀를 찾아, 동굴에 묻을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은 가라앉을 것이다. 시나는 떨리는 손을 이마에 댔다. 하지만, 그 '마녀'가 누구지...? '그 애'...? 아냐... 그 애는 마녀는 아니다. 시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애의 '역할' 은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므로 마녀는 따로 있다... 그럼, 그 '마녀'는... 레겜... 당신의 검은 눈동자... "...!!!" 시나는 그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 다. 하지만 목소리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들리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해 봤자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크고 뚜렷해지기만 했다. 레겜... 어둠... 검은 색... 이 계속 되는 캐논 같은 음성을, 시나는 소리를 질러서라도 막고 싶었 다.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두 쪽으로 쪼개져 버린 듯한 생각을 잠시라도 한데로 모을 수 있다면!! 그래서 잠시만 마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왜, 어둠이 그토록 친근했는지... 레겜... 시나는 거칠게 중얼거렸다. "어둠... 어둠이 왜 그토록 친근했냐고...!! 아냐...!! 웃기지 마!! 난... 난... 그걸 싫어했어...!!" 어둠. 아빠를 만나기 전, 언제나 있던 어둠. 그 의미는 너무나 지독했 다.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어둠...!! 그 어둠의 의 미는...!! "그 의미는...!!" 그때, 기억 속에, 한 여자의 고함이 플래시처럼 터져 나왔다. 마치, 하 나의 계시처럼. 죽어!! 너 따윈, 죽어버려--!! 제발---!! 날 괴롭히지 말고-!! 시나는 생각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녀. 어둠 가운데 있는 마녀. 마녀는 어둠과 같은 검은 색. 푸른 달은, 어둠 가운데 떠오른다. 온갖 슬픔을 머금으면서도 결코 그 뒷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을 소유한 바다의 지배자.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날이 올 것이다. 근원을 비추는 달빛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그 광기의 얼굴을, 돌릴 때. 바다는 자기를 불렀던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을 것이다. 여기 이렇게, 이 자리에. 레겜... 레겜... 왜 어둠이 그토록 사랑스러웠는지...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노래하듯, 꿈꾸듯, 목소리는 되풀이되었지만, 시나는 웃었다. ...마녀를, 찾았다. 드디어. 시나의 은빛 눈은, 강렬한 살의(殺意)로 불타듯 빛났다. 그건 진홍같이 붉은, 지독한 살의였다. 마녀는 죽는다. 더불어, '그 애'의 미약한 뿌리도 갈 바를 몰라 비틀어 져 썩을 것이다. 시나는 그 생각으로 빙그레 웃었다. 한 남자가 시나 앞에 섰을 때까지. 남자는 머뭇거리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 에... 괜찮습니까?" 시나의 눈에 떠올랐던 진홍빛은, 이미 시나의 내부로 사라졌다. 독과 같은 달콤한 여운을 남기며. 검은 눈의 그는 시나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것에 초조한 듯 말했 다. "아가씨...? 괜찮습니까...? 몸이 안 좋은 거죠? 일어설 수 있겠습니 까?" 그러면서 그가 몸을 굽힐 때, 그에게서 익숙한 내음이 풍겨 나왔다. 시 나는 미소지었다. 그의 검은 눈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이제야 알 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녀들이란 원래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없어져 야 하는 거다.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시나는 그의 검은 눈을 빤히 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내민 손대신 소맷자락을 잡았다. "레겜... 레겜... 내가, 당신을 못 알아볼 줄 알았어요?" (계속)================================================== * 저는 잠시만 '셰익스피어'가 되겠습니다. 셰익스피어처럼 멋진 글을 쓰겠다는 의미가 아니라...(이게 마음먹는다고 될 일인가.--;) 셰익스피 어처럼 몇 백년 전의 사람인양 행동하겠다는... 몇 백년 전의 사람으로 서 좋은 것이 있다면... 독자들이 자기 글을 갖고 어떻게 생각하든, 아 무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최근, 게시판의 글을 보고 굉장한 재미를 느낀 것이, 이런 생각을 한 이유 중에 하나이고...(아.. 참, 즐거웠습니다.^^) 또, 글에 대해 이것 저것 질문이 들어와도... 당분간은 답을 못해드릴 것 같아... (정신이 없어서... 하하..^^;) 아무튼, 저를 셰익스피어로(그게 싫으시다면, 오래 전 살았고 죽었던 사람 아무나...--;) 여겨주신다면 감샤하겠습니다.^^ - '당분간, 질문해도 답해드리지 못한다'는 말을 이리 거창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인간이 원래 그렇습니다.) * 무도회가 좋다는 분, 배드 엔딩을 만들지 말라는 분, 세일마와 제시 마에 대해 물어주신 분..(그러쵸. 제시마는 나이든 남자랑 사는 겁니 다.^^;) 아무튼, 메일 보내주신 분들 감사...^^ 신지님, 노래 감사했습 니다. 그리고 물늑대님, 메일 받았을 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안 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 슬립님, 당분간은 성역을 못 쓸 것 같아서 여기다 간단히 쓰기로 한 거니까요... 하하..^^ 그러니까, 성역에서처럼 무지막지 길어지진 않을 겁니다. 위에 말했듯, '셰익스피어'가 되기로... 하하...^^ * 이미지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이번 편은 예쁘게 봐 주시길...(예쁘게 봐달라니... 커헉... 나중엔 별말을 다하는 구나. 엔... 비굴해 졌다. 엔...TT) <엔 셰익스피어.>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72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16 23:57 읽음:1834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8 시나는 복도를 걸어가며 시종일관, 루드랫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 력했다. 하지만 루드랫은 어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시나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고 어느 때는 대답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시나의 말엔 거의 신 경도 쓰지 않는 태도여서, 그의 주목을 어떻게 서든 받고자 시나는 자 기도 모르게 점점 자극적인 언사를 사용했고 음조도 부자연스럽게 높 아졌다. 시나는 걸어가는 루드랫의 팔을 붙잡아 자기 얼굴을 보게 만 들었다. "네...? 그러니까, 그 여자는 무척 웃겼다니까요... 오늘밤에 목 숨 건 것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찾아다니며 왕족인지 아닌지 캐내려고 하는 꼴이... 너무나 우스워서... 어떻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속물 같 은 행동을 하는지 놀랐어요... 하하..." 시나는 루드랫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마지막엔 웃음소리까지 내며 말했지만, 루드랫은 어쩐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엔, 꽤 특별한 즐거움을 발견한 것 같군." 루드랫이 드디어, 자신을 상대해 주자 시나는 즐거워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드랫이 이런 종류의 화제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나 머지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남자들은 있잖아요, 여자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거예요. 그리 고 자기가 높은 신분인척 목소리를 꾸미면서..." 루드랫이 말허리를 끊으며 말했다. "그래. 너도 인간인 이상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아주 싫어할 린 없 겠지. 하지만, 미안하군." 루드랫은 시나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난 그런 화제엔 별 흥미가 없어서." 루드랫의 얼굴엔 미미한 경멸이 내비쳤다. "네가 어떤 종류의 일을 즐거워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네 즐거움이 내겐 역겨움밖에 안돼서 유감이야." 시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루드랫의 말을 잘못 알 아듣고 다시 말했다. "루드랫... 그런 사람들이 역겨워요? 사실은 나, 나도 그런 사람들 은 역겨워요..." 갑자기 복도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러더니 루드랫은 고개를 저었다. 가면을 쓰고 있긴 했지만 얼굴 을 찡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넌, 오늘 저녁 이상하군. 역시 어깨를 다친 후유증 때문인가? 아 님, 왕궁의 분위기에 안정이 안 되는 건지도..." "...!!" 시나는 루드랫이 왜 이렇게 딱딱하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루드랫은 너무 한 다. 계속 말을 거는데 딴청을 부리고 결국은 이런 소리까지 하다 니...! 시나도 화가 났다. "...너무해요. 왜 자꾸 날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는 루드랫도 너무 이상해요! 루드랫이야말로...! 내가 루드랫 기분 맞추 기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오늘 저녁에 뜻밖에 일을 당해서, 내가 얼 마나 놀랐는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것도 모르죠? 루드랫은 혼자서 생각만 하고...!! 왜 내가 말하는 건 들어주지도 않아요!!!" "뭐...?" "아까도 어디론가 사라져서 돌아갔다 오고...!! 내가 그 동안 뭘 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난, 루드랫 종속자인데...!! 왜 루드 랫은 나한테 신경 써주지 않아요?! 거기다 난, 루드랫 생각을 해서 내 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루드랫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언제나 마음대로 해버리죠! 듣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 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를 생각해서 하고 싶은 말도 못했다니? 지금, 네 진심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당연히 진심이죠!! 내 말은 믿지도 않고...!! 왜 날 무시하고, 맨 날 혼자만 생각해요!! 루드랫은 조금이라도 날 좋아하기나 하는 거예 요!!!" 그러더니 시나는 가면을 벗어들고, 그의 팔을 다시 잡았다. 다급하 고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루드랫...? 아깐 어디 다녀왔어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요? 왜 말을 해도, 대답도 잘 안 해줘요?" 그 쏟아지는 질문에, 루드랫은 마침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팔을 들어 시나의 손을 쳐내고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던 것 같은데. 이런 변신이라 니. 신선하다고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네 이런 면엔 기분이 그다지 유 쾌하지 않아서... 아무리 말을 골라도..." 그는 냉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정신차리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군. 네가 말도 마음대로 못하고 있었다니, 몹시 안됐지만. 말 을 못한 거야 네 사정이지. 난 네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별 어리석은 소리를 다 듣겠군. 누가 너한테 내 비위맞춰 달라고 했 어?" "루드랫...!" 시나는 울먹일 듯 말했지만, 루드랫의 목소리는 바리스에 있었을 때처럼 서릿발이 이는 목소리였다. "...예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널 내 종속자로 맡게 됐지만, 널 좋아해서 그런 게 아냐. 그러니 강요 하지 마. 내가 왜 너한테 내 생각을 일일이 말해야 해? 내 비위를 맞 췄다고?" 그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어렸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지나친 친 절이군. 하지만 당하는 쪽은 기분이 몹시 나쁘니 앞으로는 삼가 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내 생각을 네게 팔면서까 지 네게 얻고 싶은 친절 따윈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려는 루드랫을, 다시 한 번 더 붙든 것은 시나였다. "루드랫...!!" 루드랫은 시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오늘 저녁엔 너와 더 이상 이야기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냐. 그러니, 방으로 데려다..." "루드랫! 우린 친구라 그랬죠...!" "...!!" 친구...? 그것을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건가? 무슨 의도로? 루드랫은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관둬. 오늘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루드랫!! 친구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화내지 말아 요!! 제발...!" 시나의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고 공포가 어려있었다. 그걸 본 루드 랫은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루드랫...! 잘못했어요... 날 미워하지 말아요... 난 그냥 루드랫 을 좀 더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그래요.. 난, 왕궁 같은 거에 익숙하지 않은데... 혼자 있어서 무척 괴로웠고... 나쁜 일도 있었 고... 그런데 루드랫은 말도 잘 안하고... 그래서 이상한 말을 많이 해서... 다음부턴 안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제 발." 루드랫은 어이가 없었다. 시나의 표정과 눈물에, 시나가 정말로 겁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로 이렇지 않을텐데... 화내거나, 투덜댈 수 있다고 는 쳐도, 저런 노골적인 겁먹은 표정... 어쩌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 는 태도로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 시나와 너무도 안 어울리는 예상 밖의 행동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까지...? 무언가에 원인이 있는 건가? 마침내 루드랫은 시나의 처지와 자신의 행동을 다시 한 번 더 생각 하게 되었다. 불안... 나쁜 일...이라고? 하긴... 왕궁에 들어와서도 들어오자마자 혼자 내버려두고, 어제도 그냥 잠들게 했으니... 굉장히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이 상한 행동을 하는지도. 아까도 길 좀 잃은 것 가지고, 지나칠 정도로 울지 않았는가... 계속 쌓이고 쌓인 불안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러는 지도 모른다. 오늘 내내 브라우니들한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그러 고 보면, 아까 의상실에서 자신의 태도 때문에 많이 화를 냈었다... 역시 그런 것 때문인지도... 자신의 상태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눈물 어린 눈을 내려다보는 루드랫의 목소리는 차츰 누그러졌다.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저녁엔 왜 이렇게 틈만 나면 눈물을 흘 리는지 모르겠군..." 아직도 딱딱하긴 했지만, 확실히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시나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였다. "루드랫... 날 미워하지 말아요." 루드랫은 한숨을 쉬었다. "제발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 하고. 일 단은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아까 혼자 있을 때 뭐라도 먹었어? 테이블에 데려다 줬잖아."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공복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건지도 모르겠군... 시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 갖다달라고 해서 마시고 일찍 자는 게 낫겠어." 루드랫은 약간 앞섰다. "그러니 빨리 방으로 돌아가자고." 시나는 눈물 어렸지만 그래도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루드랫! 이젠 화내지 않는 거예요?" 또다시 시나가 자신의 팔을 잡자 루드랫은 자기도 모르게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혼자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지만... 생각이 혼 란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나가 너무 기대에 찬 표정이라 루드랫은 억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화 내지 않아. 그러니 빨리 방으로 가자고." 시나를 방까지 데려다 준 후, 시나의 강력한 권유로 따뜻한 우유까 지 마시고, 시나의 방을 떠나며, 루드랫은 문득, 브라우니들을 보았 다. "뭔가 하나 빠진 것 같다고 했더니. 저 녀석들 낮에 비해서 지나치 게 얌전해 졌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시나는 기대 반, 부끄러움 반으로 웃음 지었다. "네... 그렇죠. ...황금 새장이 효과가 좋은 거 같아요." 루드랫은 시나를 흘끗 보았다. 왜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 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방을 떠나게 됐다는 것 에 안도해서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잘 자. 내일 보지. ...황금 새장에서 브라우니는 절대 꺼내주 지 말고." 그 딱 부러지는 작별인사에 시나의 눈에 실망이 떠올랐다. "루 드..." 하지만 루드랫은 이미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시나는 몹시 실망해서 루드랫이 복도 귀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보다가, 방문을 닫고 자기 침대로 갔다. 그리고 쿠션을 침대위로 내던지며 화를 냈다. "도대체 왜 루드랫은 그냥 가는 거지!! 너무해!! 밤에 잠들기 전이 니까, 잘 자라고 굿나잇 키스를 해 줘야 하는 거잖아!! 그 뜨거운 우 유를 단숨에 마시고 일어나고!! 나랑 있는 게 싫은 거야...? 알 수가 없어! 예전에 안 그랬는데!" 시나의 눈엔 또 눈물이 맺혔다. "...예전엔, 잘 자라고 이마에 키 스도 해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고... 그랬는데. 왜 그렇 지..." 시나는 거울을 보았다. 아직 옷을 갈아입기 전이라 가장 무도회의 옷 그대로였다. 남자 옷... "내가 남자애 같아서 그런가..." 시나는 거울로 다가가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좀 더 여자 애 같아지면, 루드랫도 더 친절하게 대해 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넬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아가씨.. 옷 갈아입는 것을..." 시나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고개를 젓고 차갑게 말했다. "됐어. 컵이나 갖고 나가. 네가 있어봤자, 별 도움 안되니까." 낮에 비해 천대하는 말투에 넬리가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지만, 시 나는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하녀니까. 게다가 오늘은 힘든 하루였고, 잠시 후, 약간 더 힘들어질 것 같다. 신경쓸 것이 너무나 많다. 넬리가 나가고 시나는 자기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속옷 차림 으로 황금 새장 앞에 다가가 황금 새장의 문을 열었다. "나와." 예라우니는 기가 잔뜩 죽어서 나왔다. 그걸 보고 시나는 생긋 웃었 다. "...난 내 일을 도와줄 예쁜 요정들을 불렀는데, 고작 너희들이 와 서 실망했어. 신데렐라와는 틀리지만, 괜찮겠지. 일만 제대로 해 준다 면... 너희들, 브라우니 족이라고 했던가... 어때. 내 몸에 맞는 예쁜 드레스를 만들 수 있어? 아주, 아주 예쁜 드레스... 사람들이 보고 모 두 다 깜짝 놀랄만한... 루드랫이 보고 한 눈에 반할 만한 드레스 말 이야. 기한은 오늘 밤 내로. 여기 있는 옷들은 다 푸대자루 같아서... 입을 수가 없어!" 그리고 시나는 심술궂게 웃었다. "...장난칠 생각 같은 건 하지마.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지금 말해. 안 그러면 너희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황금 새장 구석에서 달달 떨고 있던 예라우니의 귀는 이미 축 늘어 져 있었다. "자, 장난은 안 쳐요. 오늘 밤 내로 만들어드릴게요. 그러니까 잡 아먹지 마세요. 훌쩍..." 아주 깊은 밤이었다. 레이서스는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맨 처음 엔 왜 눈을 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안은 조용하고 들리는 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 전에 이것저것 번민하다가 선잠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잠에서 막 깬 것치고는 이상하게 의식이 또렷하다. 그래 서 레이서스는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옅은 비단으로 된 천개를 제치 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서 향기를 내며 타고 있는 초를 보니, 잠든 지 그리 오 래 된 시간은 아니었다. 레이서스는 머리를 쓸어 올린 뒤, 포도주라도 마실까 생각했다. 오늘 저녁엔 꽤 마셨지만, 아무래도 알코올이 한잔 정도 더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그때였다. 시종을 부르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려는데, 빛이 미치지 않은 구석에 서 있는 희끄무레한 물체를 본 것은. 레이서스는 놀라서 말했다. "...누구냐!" 묻기는 했어도 반사적인 것 일뿐,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분 명 보이는데 존재감이 없어서 꼭 유령인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순 식간에 사라졌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 므로 그쪽에서 대답을 했을 땐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참 이상하네요..." 작고 메마른 목소리. 레이서스는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자기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귀가 망가진 걸까? 어떻게 저 목소리가,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 가? 말도 안돼는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레이서스는 낮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큰 소리를 낸다면, 저 흰 그 림자가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 같아서... "...시...나...?" 자신의 생각을 비웃을 준비는 얼마든지 되어있었다. 지금 이 말이 맞길 바란다는 것은, 저것이 유령이길 바라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 로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얼토당토않은 일은 그대로 일어났다. 흰 그림자는 어둠 과 촛불 빛이 섞여 뿌연 빛을 뿌리는 곳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겜... 알 수 없네요. 이 방에선 왜 힘이 안 듣죠?" 레이서스는 눈을 크게 뜨고 시나를 보았다. 단 한마디도 할 수 없 었다. 시나는 속옷 차림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것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레이서스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잡고 난처한 말투로 말했다. "레겜이 가르쳐 준 건물엔 레겜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 애 힘을 빌려서 까지, 레겜을 찾아왔는데. 이거 봐요, 레겜." 시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서 은색의 빛이 스며 나오다 스 러졌다. "...잘 안 듣네요. 그 동굴에서 같이. 이 힘은 이젠 못 쓰는 건가. 그럼 어떡하지." 하지만 레이서스는 시나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눈을 어 디다 둬야 할지 몰라하면서도 시나의 속옷 차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다. "시나... 왜, 왜... 이런... 꿈을... 시나... 왜, 옷을..." 시나는 레겜이 자신의 속옷차림에 질려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 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맨발에 짧은치마... 시나는 인상을 쓰고 머리를 긁적였다. "내 옷이 뭐가요? 치렁치렁 한 건 귀찮아서... 가볍고 좋은데." 레이서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가, 가볍고, 좋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서스는 뒤로 물러나 좌우를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 놔둔 자신 의 실내복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당신은 종속주도 있는 여자인데!!" 그는 실내복을 낚아채듯 가져다가 그걸로 시나를 둘둘 말다시피 감 쌌다. "정신이 있는 겁니까! 거기다 이렇게 추운 밤에...!!" "엥... 별로 상관없는데." 시나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큰 옷을 입게되어 얼굴을 잔뜩 찡그 리고 말했다. "참견을 잘 하는 타입이군요. 레겜씨. 윽... 이거 봐요. 소매가 너 무 길어서... 옷자락도... 걷다가 걸려 넘어지겠네... 에이." 시나는 소맷자락을 감았다. "어휴... 그래도 늘어지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냥 벗을래요. 별로 춥지도 않은데..." "시나!!" 레이서스는 화내다시피 소리치고 시나의 손을 잡아 옷을 벗지 못하 게 만들었다. "입고 있어요!! 이 꿈이 깰 때까지!!" 레이서스는 이치에 닿는 말인지 아닌지도 판단할 틈 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시나는 레이서스가 화를 낸다고 판단하고 불만어린 눈을 지 었다. "쳇. 싫다고 하는데, 왜 억지로... 흥... 하긴 뭐. 상관없지. 좋아 요. 어차피 마지막이니, 마지막 부탁 정도야. 거치적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자, 참견쟁이 레겜씨... 안 되는 힘은 관두고, 다 른 힘을 쓰죠. 금방 끝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시나가 옷을 여미는 모습에 레이서스는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 다. 그제야 시나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시나... 도대체, 무슨 힘을 쓴다는 겁니까... 뭐가 마지막이죠?" "뭐... 그러니까, 이런 거죠..." 시나는 약간 뒤로 물러나 빙긋 웃었다. 하지만 은색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고, 마치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의 눈처럼 차갑게, 표적 을 향해 빛났다. <...미.멘.토.우.머.라.이.mementomori> (계속)================================================== '하온 하티라트'... 써 놓겠습니다. ^^ 요즘엔 좀처럼 새로운 등장 인물이 안 나와서...(끝날 때이니, 새로운 인물이 나와도 곤란하지 만.--;) 이름들이 잔뜩 쌓였네요.^^ 음... 그리고 메일과 쪽지 주신 분들 감사... 잘 받았습니다.^^ <엔 셰윅스펴.^^> 추신...세 번이나 시도했건만, 나우누리엔 글이 안 올라가는 군요. 똑같은 '이야기'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드나드는데... 전송속도도 하이 텔의 꼭, 반이 나옵니다. 왜 그러냐. 나우누리... 뭐가, 불만이야... 난, 꼬박꼬박 사용료도 잘 내는데. 너, 그러다가, 사용료를 확 안 내버린다.(쯧.) 이건, 여담인데... 솔직히 말해, 나우누리의 통신속도는 문제가 있 다고 봅니다. 나우누리 쓰다가 하이텔이나 유니텔 쓰면, 발에다 터보 엔진 단 기분이 듭니다. 내 주위 사람에겐 권해 주고 싶지 않은 통신 입니다. 주위 사람이라면, 그 열 받음의 피해가 나한테 돌아 올 테니 까. (...음. 나우누리 미안하다. 하지만, 난 지금 너한테 열 받아 있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진솔한 심정이야. 이런 나의 진솔한 심정마저 부 인한다면, 넌 아주 나쁜 녀석이 되는 거야. 그러니 당장, 내 글 저장 해 줘~!!)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80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7(수정)-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20 00:06 읽음:1920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9 루드랫은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벌써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 같은 줄만 읽고 있었다. 잠들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기 싫어서 이렇게 책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이지만, 책에 몰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무도회장에서 있던 일을 끊임없이 생각 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도회장에 있다는 소리에 감전이라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게 안돼서 몇 번이나 무도회장을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검고 긴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혹시 어딘가에 있 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그녀가 무도회장에 있다는 느 낌 자체조차 받을 수 없었다.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깨기로 했으니까. 마인드 컨트롤은 클로니아의 왕족과 루이티온들만이 가능한 마음의 법이다. 클로니아 왕족들은 '지혜'라 불리는 정신의 힘을 다스리기 위 해, 루이티온은 '검기'라 불리는 육체의 힘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의 마음을 '만든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마음이, 한 인간의 운 명을 보여주는 길잡이, 혹은 그 자체 스스로가 운명이 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의지로 재단하여, 살아갈 운명으로 만드는 이 마인드 컨트롤이야말로, 어떤 무엇보다 강력한 루 이티온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루드랫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따를 수는 없었다. '루온 루드랫. 네가 스온 아피네스를 사랑한다고? 그건 마인드 컨트 롤일 뿐이다. 사랑이 아냐.' 루드랫은 서글프게 웃었다. 옳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그건 또 한 틀린 이야기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마인드 컨트 롤'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 증거로 루드랫은 자기와 동류인 루이티 온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루이티온의 운명은 마인드 컨트롤이 발현하는 순간 결정된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붉은 마음은, 언제나 하나로만 그 길이 뚫려 있고, 그것 이 파괴되는 경우는,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거나 쌍방에서 서 로의 마음을 차단한 경우뿐... 루이티온 쪽에서 먼저 마인드 컨트롤의 상대를 저버리는 일이 있었던 가...? '운명'을 그렇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마인드 컨트롤이 루이티온의 운명이기에, 루이티온의 마음은 마인드 컨트롤 안에서만 진실하다. 그래서 루온 루드랫은 스온 아피네스를 사랑했다. '루드랫, 날 떠나지 마.' 루온 루드랫은 한 번도 그 명령을 어긴 적이 없다. 그런데... 루드랫은 마침내 책 읽던 척하던 것을 그만 두었다. 계속 외면하려고 했지만, 괴로움은 어쩔 수 없이 닥쳐왔다. 맞다. 그는 어느 새인가 스온 아피네스 외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 다. 그도 알지 못할 어떤 원인 때문에, 시간이 흐른 것이다. 아니 어쩌 면 때가 되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원인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루드랫은 물리적인 시간이 인간을 바꿀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 지 않았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시간.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 갑자기 루드랫은 진한 목마름을 느꼈다. 그래서 일어나, 물주전자 있 는 곳으로 갔다. 물을 따르는 몸엔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마비된 것이라 생각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 이 괴로움을 견디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가슴은 채 워지지 못할 갈망으로 욱신거리고, 슬픔은 시간마다 고개를 쳐들고 그 때마다 새롭게 다가든다. 옛날엔. 아니, 몇 주전만 하더라도, 스온 아피네스를 느낄 수 있었 다. 바리스에서 느꼈던 그 느낌. 비록 그 후론 한 번도 느끼지 못했지 만, 그래도 따뜻하게 드는 느낌은 스온 아피네스가 어딘가에 존재한다 는 실재감이었다. 따뜻한 물 속에 있는 듯, 몽롱한 느낌. 그런데 어느새 인가 그 실재감은 흐릿해지고, 이토록 모든 것이 선명 하기만 하다. 루드랫은 컵에 물을 따른 채, 그대로 서 있다가 주위의 느낌을 살폈다. 섬뜩한 느낌은 사라졌다.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나머지 별 것 아닌 것에 놀란 건지도 모 른다. 주위는 너무나 깨끗하고 조용하여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루드랫은 서글프게 웃었다. "...지독할 정도로. 정말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 스스로 확인하듯, 그렇게 말한 루드랫은 천천히 주저앉아 테이블에 이마를 기댔다. "제기랄..." 어떡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시나를 처음 만났을 무렵엔 그 녀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리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 다. 기억하는 한, 그렇게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한 적도 없지만, 되돌리지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헌데, 너무나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건. 죽을 정도로 상처를 입은 적도 많다. 격심한 감정의 움직임, 동요, 슬픔, 안도, 분노와 기쁨... 그런 것이 쌓이고 쌓여, 지난 23년보다 훨씬 더 길고, 선명한 몇 주일을 살았다. 하지만... 물 속에 있는 듯, 몽롱한 시간에서 깨어나, 순간들이 이렇 게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바리스에서 엘야시온의 연락을 받고 나서부터? 그래서 제일로트로 돌 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아냐..." 그 전부터다. 인간 사냥꾼의 사건이 있던 때, 디트가 피를 쏟는 모습은 아직도 이 렇게 선명하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아니면, 그 전, 마을 광장에서 시나와 춤을 추었을 때부터인가? 시나가 하바티온의 마차에 깔릴 뻔한 아이를 구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 심장이 가라앉는 듯한 충격. 어이없음. 하지만 그때도 아니다. 그 보다 더 전의... 젖은 옷을 벗겨, 시나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시나를 놀에게서 구했을 때... 일을 마치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숲 속...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 라, 무감각하게 서 있을 때... 그때부터였다. 그때, 숲의 적막한 공기를 가르는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과, 그 공 기와, 그 내음과, 그 적막함이 폐부를 찔러 무언가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때에, 따뜻하고 다정한 몽롱한 물들은 소용돌이치며, 그의 주위에 서 빠져나갔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선명하게, 잔인하도록 뚜렷하게 다가왔다. 회색의 놀란 눈동자. 공포에 질린 얼굴. 온통 젖고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덜덜 떠는, 도움을 바라는 슬픈 모습의 인간. 그 순간, '물'이 쏟아져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제, 남아 있는 것은 붉은 것. 괴로운 것. 그러나 미칠 정도로 살아있다 는 느낌을 주는 무언가였다. 그때부터 시간은 루온 루드랫을 변화시켰다. 루드랫은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토록, 아프고, 이토록 격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었을 줄이야... 루드랫은 고통 가운데 생각했다. 왜 시나에게 청혼까지 한 건지, 생 각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이것에 대한 꿈을 꿨던 것 같다. 이 상한 꿈... 그 꿈에선 이 모든 생각과 과거들이 보이는 것 인양, 눈앞 에 드러났다. 과거, 현재, 혹은 미래 어딘 가에서... 숲이 있고, 도움을 바라는 자 를 만나, 다시 눈을 뜨는 꿈. 그래서 그 꿈에서 깨어난 순간, 눈앞에 시나가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그녀가 계속 그렇게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것이었다니... 스온 아피네스의 존재를 알아채 지 못한다는 것이 이런 슬픔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해왔 고, 소중하게 지켰던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잃어야 한다는 것. 그의 전 부를 팽개친 것이, 이런 느낌을 준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짊어질 수 있는 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스온 아피네스가 아 닌, 다른 이를 생각하게 된 순간은, 차곡차곡 쌓여,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가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이 떨어진 순간, 뛰쳐나와 그를 집어 삼켰 다. 루온 루드랫이 무엇을 포기한 건지. 그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 그의 앞날이 얼마나 두려울지... 그가 포기한 것은, 안락하고 포근한 그의 운명이자, 그의 주인, 그의 연인, 그리고 그의 시간이었다...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 모든 사물에 틀리게 흐르는 시간들. 어떤 이들의 시간은 느리게, 어떤 이들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하지만, 루드랫이 가진 시간은 어찌나 온전하고, 완전했는지, 그것은 존재로서 유일한 것이었고 어느 것도 범접하지 못할, 구분되어진 완벽 함이었다. 심장은 뛰지만, 고요하며, 호흡은 흐르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꿈처럼, 몽롱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언제나 환 상이었으므로 완벽하고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그러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루온 루드랫의 '물'을 터뜨렸을 때... 쏟아지는 빗줄기, 영혼을 깨우는 홍수... 날카롭고 잔인한 손길. 안 락하고 따뜻한 자리에서 존재를 끄집어내는 차갑고 슬픈 빛줄기가 비춰 들어왔다. 하지만... "...아피네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시나 가 한 말을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날 좋아하기는 하는 거예요!!' 왜 시나는 그런 말을 했을까?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흔들리고 있 는데. 그러므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안에 일어난 거부감은 루드랫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친구...운운'하는 말을 들었을 땐, 당 장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시나가 우는 바람에 어떻게든 그녀를 이해하기로 했지만, 마음엔 이 미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좋은 여자 애라고 생각했다. 한치 의심 없이. 그래서 그녀하고 라면, 그럭저럭 이 안주함 가운데서도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아피네스를 숨기고, '친구'로서 시나를 좋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사랑'까지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다면... 언젠가는 말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일까?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견딜 수 있을까. 시나를 또 다시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시나가 자기 종속주의 관심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루드랫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자세로 있 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에는 물이 담겨, 희미하게 루온 루드랫을 비추고 있었다. 어둠을 반사하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없이 가증 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차마 그 물을 마실 수 없어, 그것을 엎어버렸다.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루드랫은 울 듯한 얼굴로 컵을 꽉 움켜쥐었다. 도저히 아피네스를 잊을 수 없을 지 모른다. 아니, 거의 그렇다. 지 금도 이렇게 마음에 불이 붙은 것 같다. 시나의 '행복'을 생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 이 상태라면 누구보다, 바로 자신이 그녀의 불행이 될 텐데. 루드랫은 시나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두려움뿐. 집을 떠나, 낯선 곳을 향할 때의 두려움. 확신도 없고, 어쩌면 실망과 환멸만을 떠 안고, 길마저 잃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을 시나에게 전염시키겠다고? 루드랫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시나를 믿겠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시나의 한 마디 말에도 흔들리는 주제에, '믿겠다'고... 앞으로, 그녀의 나쁜 면, 추한 면도 보게 될텐데... 넌 그때도 시나를 믿을 수 있겠나? 미칠 것 같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시작부터 불안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은 실수고, 자신 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일뿐이라고 생 각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면, 돌아가도 괜찮을 지 모른다. 처음부터 다 시... 루드랫은 이제 거의, 다시금 '드래마'가 되는 것을 생각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딛는다면, 아마도 그는 과거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손아귀에서 둔탁한 '와그작' 소리가 났다. 센 압력을 받은 구리 컵이 구겨지는 소리였다. 루드랫은 자기가 어느새 컵을 지나 치게 꽉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컵의 표면에 수 놓였던 포 도송이의 조각들은 온통 일그러져 버렸다. 루드랫은 충격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그의 영혼에 새겨진 기도(祈禱). 그 기도가 일그러진 포도송이와 함 께 떠올랐다. ...그러니 엘이여... 당신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옵기는... 내게 선의를 베푸사... 나의 영혼에 새겨진 이 각인, 나의 이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이 고독함... 이 공허함을 벗어나...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나. 그 꿈과 바람은 되풀이되고, 되풀이되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고독하고 완전했던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데. 그것이, 비록 죽음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계속, 자신의 마음을 부수며, 어쩌면 나중에 마음이 가루가 되어 형 체조차 남게 되지 않을 지라도...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이, 모든 것 이 공허하게 돌아간다고 해도... 루드랫은 손을 들어 눈에 댔다. 습한 것이 묻었다. 이렇게, 두렵고 괴롭더라도. 스온 아피네스의 이야길 듣고 온 밤을 지새며, 슬퍼하더라도. 루드랫은 천천히 어깨를 수그렸다. 툭툭, 떨어지는 것들이 바닥에 번 졌다. 그리고 루드랫의 입술에선 자기의 것이 아닌 듯한 쉰 듯한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더라도... 날 이 타락한 완전함 가운데서 끄집어 내 주십시 오..." 그랬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기도했다... 다시는 아피네스를 사랑했던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 다.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시 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다는 것은 그 를 자유롭게 했고, 그 자유는 처절할 정도로 그를 살해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딛을 때마다 유리 조각을 밟는 듯, 아프다. 이런 이야기를 압니까? 머맨의 한 소녀가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자신의 비늘을 버린 이야기를...? 그 소녀는 사랑 때문에 행복했지만, 사랑 때문에 얻은 다리는 언제나 그녀의 불붙는 아픔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그는 미소지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 라, 선택의 문제였다. "맙소사..." 레이서스는 시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회색의 검기를 가까스로 피하 고 놀라움에 차, 신음을 뱉었다. 시나의 입에서 떨어진, 마인드 컨트롤을 말을 느끼고 그녀의 눈빛과 손을 본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해 피한 것은 레이서스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레이서스가 서있던 곳에서 약간 빗겨난 부분에 있는 양탄자가 까맣게 타버리고 바닥마저도 흉측하게 파인 모습은 방금 있던 일을 또 한 번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것이 이름도 알지 못할 각종 아트로 보완된 왕궁의 건물, 그것도 파이오니온이 묵는 방이 아니었다면, 방금 같은 검기에 벌써 바닥이 갈 라져 버렸을 것이다. 하물며 그게 몸으로 떨어졌다면... 하지만 레이서스가 상황판단을 할 여유도 없이, 시나가 턱을 치켜들 더니 무표정하게 말했다. 얼굴 표정을 자유롭게 지을 수 있었다면, 레 이서스만큼 놀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빠.르.네.이.번.엔.어.떨.까.> "...!!!" 레이서스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시나가 검기를 사용한다고? 저 마노테온 소녀가? 레이서스는 시나의 머리칼을 흘끗 보았다. 예전에 그가 목격했던 것은 여전했다. 저것은 아직도 검은 색의 짧은 머리칼인 데...! "...어떻게 이럴 수가!!" 이것이 절대 장난이 아니고, 시나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은 눈빛 과 행동을 봐서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고정관념이 모두 무너지는 순 간이었지만, 지금 들리는 저 음성. 분명 하나의 문장인데도, 하나의 낱 말을 말하는 만큼 짧은 시간 내로 들리는 저 음성은, 틀림없는 전투 마 인드 컨트롤이었다. 짧은 시간, 이 소란을 벌이는 데도 시종들이 왜 안 달려오는 건지, 방금 시나가 내던진 회색 빛의 공이 이렇게 위협적인데도 방안의 정적-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종류의 정적-이 깨지지 않는 점이라든지 하는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놀라움만을 느낄 뿐... 이치 따윈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이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저것은 '검기'다. 피부를 스치는 순간, 살갗을 잡아 찢을 듯 팽팽하게 당기는 힘의 장(場). 게다가 그것은 또 한번, 시나의 손을 환하게 달구고 있었다. 시나의 손아귀에서 시작하여 회색으로 넘실대는 불꽃의 끝은 거의 희게 빛났 다. 레이서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번 것은 아까보다 더 크고, 더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피하 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레이서스가 느끼는 놀라움은 목숨을 위협받는 데 따른, 두려움, 무력감, 분노보다는, 순수한 놀라움... 거 의 백퍼센트, 불가사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레이서스는 창백한 시나의 얼굴을 보았다. 왜, 저 검기를 저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거지? 자칫하면 자기 스스로 가 위험해 질 수 있는 방법이다. 저런 방식으론 고작 세 번! 그 이상이 되면...! 레이서스의 눈은 시나를 향하여 단단히 고정되었다. 기대어 있던 테 이블 서랍에 있는 것은 이미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순간, 회색 빛의 무시무시한 불꽃이 공기를 찢으며 그를 향해 닥쳐왔을 때,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진동과 소음이 터 졌다. 레이서스의 몸을 집어삼킬 듯 덮치던 검기가 무언가 반대되는 힘에 부딪혀, 방사형으로 화악, 퍼진 것이다. 구심점 잃은 회색의 검기는 레이서스를 감쌀 듯 하다가 결국, 위력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 시나는 마인드 컨트롤 중인데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동굴에서와 전혀 다른 사건의 전개를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놀라운 일! 저 남자는 아직도 서 있다! 약간 비틀거리고 있기는 하지 만, 전혀 타격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굴에서는 훨씬 많 은 사람이었는데... 모두 다 죽일 수 있었는데...? 그리고 아까는 없던, 들끓는 소음... 방안에 낮게 깔리고 있는 기분 나쁜 소리... 시나는 레겜이 들고 있 는 것을 주목했다. 그가 가진 것은 투명하고 검은 무엇이었다. '힘'을 훨씬 더 효과적으 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 시나는 표적을 없애야 한다는 정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찰 하기 위해 잠시 힘을 늦췄다. 한편, 레이서스는 유리 검에서 나는 진동과 소음들 가운데 입안에 시 큰하게 퍼지는 피 맛을 느꼈다. 넘실대는 검은 색의 검기... 어떤 어둠 보다 짙게,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흡족한 듯, 현이 튕기는 듯한 짧은소리를 내고 있었다. 짧은 기간 내에 두 번이나 이런 식으로 검기 를 사용하다니, 두 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속에서 무언가 역 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므로 다음 번의 공격엔 '다른 힘'으로 막아야 한다. 검기와 검기 로 직접 부딪혀 보긴 이번이 처음이지만, 진짜 루이티온에겐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레이서스의 눈은 아직도 시나에게 고정되 어 있었다. 시나는, 전투 마인드 컨트롤까지 능히 해냈으면서도, 레이서스가 익 히 봐왔던 루이티온답지 않게, 동작이 자연스럽지 않고... 지금도 그렇다... 저 얼굴과 눈에 서린 당혹감... 진짜라면, 벌써 세 번째 검기가 날아왔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이런 순수한 검기를 아무 도구도 없이 운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엄청나게 강력하지만, 지 나치게 순수하고, 다듬어지지 않는, 저 이상한 힘. 레이서스 자신의 검기도 그렇긴 하지만, 자신의 것과는 또 종류가 틀 리다. 저것은, 방식은 알지만, 아직도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의... 그래서였을 것이다. 레이서스는, 시나가 '루이티온'이라고는 전혀 생 각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네. 정말로... 레겜, 당신도 능력자라니... 일루티온이면 서, 어떻게... 아니, 그보다... 그 힘, 그렇게 쓰면...> 레이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스스로 전투 마인드 컨트롤이 깨진 것 도 모르고 있다...! 아니, 그것보다 표적을 없애기도 전에 자기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풀었다...! 다음 순간, 레이서스는 유리 검을 휘둘러 검기를 끌어들였다. 나중에 생각해 봤을 때, 그건 아무래도 미친 짓이 었다. 그 당시, 자신이 허락한 유일한 무기를 버리는 행동이나 다름없 었다. 만약 그때 시나가 검기를 다시 한 번 더 던졌더라면, 그는 꼼짝없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행동을 하기 위해서. 레이서스는 검기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부를 생각을 하지 않은 것, 스피릿 펠리스엘을 부를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 지금이 다급한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레이서스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했을 뿐이었 다. 왜냐하면, 만약 자신이 그렇게 했다간... 틀림없이 시나는...! "---!!!" 시나는 레이서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뒤로 주춤 물러섰 다. 무력하다고 생각했던 먹이감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 어찌할 바 를 모르긴 했지만, 그가 위협적으로 나오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리 쳤다. <쳇!!! 이번에야말로...!!!> 그와 동시에 시나는, 두 손을 들어올리고 할 수 있든, 할 수 없든 힘 을 끌어냈다. 희미한 회색의 빛이 또 한번 맺히려고 하는 찰나였다. 하 지만 이미 늦었다. "시나--!!" 레이서스는 시나의 손을 낚아챘다. 덕분에 이미 맺혀 있던 회색의 검 기는 찌르듯, 레이서스의 손을 감싸고 불타올랐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상관하지 않고 손목에 힘을 주었다. 시나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아 픈 표정을 짓고 비명을 질렀다. "으윽---!!!" 그녀의 비명을 듣는 순간, 레이서스는 안도감에 손의 고통 따윈 잊었 다. 마인드 컨트롤이 완전히 깨졌다...! 기대했던 대로 회색의 검기도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시나는 분노한 눈으로 잡힌 양쪽 손을 비틀며 발버둥쳤다. "아파!!! 놔--!!!" 하지만 레이서스는 시나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시나, 제발... 이게, 도대체 무슨 꿈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직도 레이서스는 이것이 꿈이 아닌가 생각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랬고, 이토록 격렬한 감정이 오가는데 도, 주위에 편만한 몽롱하고 가라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그랬 다. 짙게 가라앉은 공기, 밀도 짙은 공기가 주위에 스며 있었다. 마치 꿈을 꿀 때처럼...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시나의 눈 색은 너무 밝게 보였고, 너무 차갑게 보였다. 이토록 차가운 눈. 레이서스는 이런 것을 과거에 딱 한번... 그 누군 가에게서밖에 보지 못했다. 왜 이렇게 날, 증오스런 눈으로 보는 거지...? 왜... "날... 죽인다고? 아냐.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어떤 검기로든... 내가, 나의 스피릿을 끌어낸다면, 넌 내게 죽게 될 것이다. 써클렛이 있었다면, 굳이 스피릿을 불러내지 않아도.... 아니... 어쩌면 내 검기 만으로도. 그러니..." 레이서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힘 자랑이 아니라... 레이서스는 손을 들어 분노 로 붉어진 시나의 볼에 만졌다. "...포기하길, 소녀여.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웃어주길.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서, 네가 나한테 이렇게 하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서 그의 손을 떨쳐냈다. "손대지마!!! 그리고 놔!!!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천 만에--!!!" 갑자기 그들 사이에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 레이서스는 그들 가운데에서 터지는 엄청난 압력에 시나의 손을 놓고 뒤로 물렀다. "두고 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어!! 미멘토우머라이!!" 방안에 광풍이 몰아치는 듯 했다. 아까와 동일한 전투 마인드 컨트롤 명령어인데, 이번엔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었다. 레이서스는 은빛의 기 운이 자신의 몸을 치자, 비틀거렸다. 방안에 모든 물건들이 세찬 바람 에 쓰러지며, 날아가고, 천개와 커튼은 제멋대로 펄럭였다. 바닥까지도 흔들렸나 싶은 순간, 다시 한 번 더 몸 가까이에서 은빛의 기운이 터졌 다. 다이아몬드 더스트만큼 차가운 은빛 폭풍이 파편과 섞여 날렸다. 레이서스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센 힘에 밀려 뒤로 물 러나다가 넘어졌다. 순간 묵직한 손이 자신의 명치를 짚는 것이 느껴졌 다. "마녀 주제에--!!!" 마녀...!? 아직도 파편이 날아다니는 것을 알았지만, 바닥에 머리를 댄 채 눈을 떴다. 촛불 따윈 예전에 꺼졌을 텐데, 증오로 불타는 시나의 눈동자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제기랄!!! 역시, 이 힘은 듣지 않아!!! 이 세계에서 이런 건, 쓸모 없는 힘인가-!!" 아직도 은빛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모든 물건이 뒤섞여 날아 다니고 깨지는 가운데, 온전한 것은 시나와 레이서스 둘 뿐이었다. 바 람이 닿는 곳마다 여기저기 서리가 맺히기 시작하는데, 전혀 해를 받지 않는 것도 둘 뿐이었다. 시나는 그래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젠장!!! 그럼 이쪽으로,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미.멘.토.우.머.라.......!!!?> 그때였다. 공간이, 기묘하게 뒤틀렸나 싶은 순간, 방안에 있던 물건 중에 하나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아니, 전투 명령어가 실패했 기 때문에 물건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깨졌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떤 물건인가... 분명히 '소리'를 내며. 바람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차갑고 낮은 기온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지만... 미친 듯 펄럭이던 시나와 자신의 머리카락, 그리고 옷자락 들이 그 움직임을 잃었다. 레이서스는 시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표정은 더 없이 굳어 있었고, 동공이 크게 열려 있었다. 그 눈으로 그녀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서스는 이 모든 것에 어쩐지 몹시 지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리로 시 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눈에 슬픔을 드러내었다. 시나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였다. 이제는 조각조각 나버려서 파편이 되어버린... 그 흩어진 조각들을, 시나는 하나하나 눈으로 쫓고 있었다. 레이서스 또한 그것들을 보며 격 심한 아픔을 느꼈다. "내... 펜던트..." 아까 들렸던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는 저 펜던트가 부서지는 소리였을 까? 목재로 만든 작은 것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낼 리 없을 테지만, 레이 서스는, 그렇더라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진 조각을 보는 순 간, 그의 가슴에 생겨난 상실감은 소리와 같은 큰 무언가로 레이서스에 게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자신의 볼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떨어지자 눈을 들어 시나를 보았다. "....시나...?" 시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그것이 곧바로 레이서스의 얼굴로 떨어졌 다. 시나는 천천히,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마치 레이서스를 처음 본다 는 듯, 그렇게 한참을 보던 시나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레겜." 시나는 아직도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떨궜다. "...내가 준, 목걸이가 깨져서. 내가..." 시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눈물을 흘 리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레겜... 당신이 상처 입은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을텐데." 시나는 레겜의 이마와 얼굴에 난 작은 생채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손으로 그것들 하나 하나를 어루만졌다. 레이서스가 그 손길을 견디 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것을 멈추게 했을 때, 시나는 그 손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 시나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말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더니 시나는 그의 상처에 입을 맞췄다. 덕분에 레이서스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시나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들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시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몸을 굽혀 친근하게 레이서스의 머 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슬프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나. 당신이 행복하도록. 내 운명은 당신에게 정해졌으 니.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지킬 테니. 절대 죽지 말아요. 설 사," 새롭게 넘친 시나의 눈물이 레겜의 목덜미를 적셨다. 그녀의 몸은 심 하게 떨리고, 말은 울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으나, 내용은 그대로, 레이서스의 마음에 전달되었다. "...내 생명보다 더한 것을 바쳐야 한다고 하더라도..." "...시나..." 분명히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망설임을 그치고, 시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자신 의 몸 위에 있는 몸에선 거의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인데..." 시나는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레겜... 당신을 정말 좋아해요." "..." 시나는,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에 가슴이 아파 레이서스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나 그 손이 닿을 듯한 순간, 모든 것은 하얗게 사라지고 말았다. 시나의 부드러운 미소까지도. (계속)================================================== 슬기, 메일 고마웠음...^^ 흠.. 그리고, 힘드신 분들... 힘내세요. 좋은 날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추신...6편이 두 개였죠.(--;) 하하...(--;) 추신2...말도 안돼는 부분이 있어서 고치고, 중요한 말도 빠뜨려서 다시 전송합니다. 그리고 어색한 부분도 다듬어서. 오늘 다시 보니, 읽 으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하..(--;) 추신3...fairgirl님, 물어주신 것은, 진행상의 일이기도 하고... 사 실 그것에 대해선,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음... 열심히, '빠닥빠닥' 쓰겠습니다. 하하.. 지적해 주셔서, 감 사...^^ 추신4...언니, 혹시 이 글을 다시 보실는지.^^ 음... '타락한 완전함'이 맞구요... 시나의 검기가 무슨 색인지는 아 직까지 밝히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를 빌어서 밝힌 거죠. 뭐.. 핫 핫...^^ (안 밝혔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어디다가 밝혔나요? 기억력이... 웃...--;) 아무튼, 시나의 검기 색은 '그레이'였다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89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23 23:11 읽음:1526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10 시나는 자기 방의 의자에 앉아, 자신이 했던 행동에 치를 떨고 있었 다. 전혀 느끼지 못했던 추위를 갑자기 느끼는 듯, 온 몸에 소름이 돋 았다. 약간의 시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그 마지막 순간이 다시 한 번 더 온다면! 그런 다면 펜던트고 뭐고, 이번엔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담 아 바로 표적을 해치웠을 텐데! 그랬더라면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끝나고 편안한 잠자리를 맞았을 것이다. 아무 갈등도 없고, 모든 것은 뜻하는 대로... 레겜을 넘어뜨리고 그와 몸을 부딪힌 것이 애초부터 실수였다. 그의 옷섶에서 나타난 갈색의 동그란 펜던트. 그걸 보는 순간, 힘센 손아귀가 잡아챈 듯 심장이 조여들었다.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몸에 묘한 반 응을 불러일으킨 그걸 기필코 부서뜨리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나을 뻔했다. 펜던트에 손이 닿는 순 간, 시나 자신의 마음 가운데 일어난 거센 반항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 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부의 충동 따위는 거뜬히 다스릴 수 있었으 니까. 그래서 더욱 고집스럽게, 미소까지 지으며 펜던트를 부숴 버렸다. 누 가 주인인지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은빛의 힘 따윈 남자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더 전기 같이 찌릿찌릿한 그 힘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 애'가 잠시 잠깐이나마 몸을 지배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시나는 양팔을 감싸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나쁜, 계집애!!! 나 를 바보로 만들다니!!!" 눈을 뻔히 뜨고 당해야 했다. 분명히 의식이 있는데, '그 애'가 하는 행동을 모두 다 눈을 뜨고 봐야만 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지킨다고!! 네 까짓게! 그를 지키겠다고?!! 내가, 분명히 그를 죽이 겠다고 선언했는데!!" 시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방안을 왔다갔다 걸었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지킬 테니. 절대 죽지 말아요. 이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을 향한 선전포고 였다. 그 계집애가 정식으로, 시나 자신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시나는 이를 갈았다. "...웃기고 있어!! 아무런 힘도 없는 주제에!!" 이젠 잠시라도, '그 애'가 자신의 몸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못 봐 준다. 거기다 자신의 몸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은!! 시나는 자신이 했던 행동 을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입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불결해 서 견딜 수 없었다. 또 한가지, 불쾌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나가 예전 처럼 그 애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그 사실을 시나와 '그 애' 모두 다, 동시에 깨달 았다. 이제 '그 애'는 어떤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시나 자신이, 그 애에게 부여한 힘이었다. 그리고 불길하 게도 그 힘은, 전기같이 찌릿한 힘. 하필이면, 유일하게 그를 살해할 수 있는 그 힘일 가능성이 컸다. 마인드 컨트롤이 잘 안 듣고. 동굴에서와 틀리게 집중할 수 없었다. 자꾸 감정이 끼어듣고. 머뭇거림이 심해졌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 일이 터진 것이다. 마치 벼락처럼... 눈물이 쏟아지고, 시나는 '그 애' 안에 갇히고 말 았다. 그리고 그 애는 시나가 뻔히 보는 데,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치욕스 럽다. "...용서 못해!!! 절대!!" 시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어려서 말했다. 절대로, 깨닫게 해 주고 말겠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으 면,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인데!!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고야 말겠어!! 그것을 위해선 무언가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시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맞아. 방법을 찾아서 꼭, 복수하고 말 거야..." 그때 브라우니의 우두머리가 와서 시나에게 말을 걸었다. 시나는 생 각을 방해받아 화가 났지만, 옷이 완성됐다는 소리에 일어났다. "...옷이 완성됐어? 정말?" 옷을 본 순간, 시나의 얼굴은 환해졌다. "예쁘다...! 진짜 공주님 옷 같네! 이걸 입으면, 나도 공주님같이 보이겠는걸! 그럼, 루드랫도 날, 좋아..." 그때, 시나의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아, 그렇 지...! 바로, 그거야!" 시나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천의 옷... "하하하...!! 좋은 생각이 났어!!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하하... 그 계집애가 그렇게 나온다면... 현실을 일깨워줄.... 분명히 충격을 먹을만한... 하하하... 이것, 너무나 좋은 생각인데!!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네 뜻대로 하라고...!! 난 당분간 물러나 줄 테 니...!! 하하하...!!" 시나는, 브라우니들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좋아! 이번 일은 마음에 들게 했어. 너희들, 꽤 능력 있는 요정이구 나. 하지만 또 한가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는데. 원래는 별로 상관없는 거였지만..." 시나는 킥, 웃었다. "내가, 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방이 있는데. 거기 가서 물건들 모두 다 똑바로 돌려놔. 빨리 빨리 움직여야 할거야. 남자가 눈을 뜨기 전까지 일을 끝내려면. 알겠어? 너희들, 제대로 안 하면 잡아 먹어버릴 테니. 쓸모 있게 굴라구." 시나가 옷을 마음에 들어하자,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예라우니는, 이런 또 다른 명령을 떨어지자 귀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우린 지쳤고, 몹시 힘들어요..." 시나는 차갑게 말했다. "뭐가 힘들어!! 너희들은 요정이니까, 마법을 쓰면 되잖아!! 빨리 가-!! 브라우니 수프를 만들어 버릴 거야!!" 예라우니의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졌다. 좋은 겨울나기 방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부른 인간의 기운 또한 꽤 괜찮은 것이었으므로, 이런 곳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틀렸다. 이건 매우 슬픈 겨울나기가 될 것 같다. 다음날 아침, 넬리는 늦게 시나를 깨우러 들어갔다. 늦잠을 잘 테니 내일아침엔 깨우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에 들어가 보니, 시나는 벌써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 다. 그 모습을 본 넬리는 고개를 숙이고 격식 차린 말투로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약 가져왔어요, 아가씨." "...." 시나는 넬리의 말을 못들은 것처럼 꼼짝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 다. "아가씨, 약 가져왔습니다." "빨리 안 들면 다 식을 거예요." 하지만 역시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넬리는 무시를 받았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고 약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젠 상관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시중 받는 사람의 태도는 원래 이런 거니까. 그렇게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어제 오전엔 이 아가씨가 잠깐 변덕을 부려 다른 사람들과 틀리게 친절한 모습을 보였던 거지. 밤엔 금방 본 모습으로 돌아 와서... "여기다 놔둘 테니. 드세요. 저는 나중에 오겠습니다." 그때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넬리..." 넬리는 시나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자, 의아한 마음으로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아가씨! 얼굴이 왜 이래요?!!" 얼굴은 무섭게 창백한데 눈 주변은 까맣게 가라앉아 있어서 마치 딴 사람 같았다. 하룻밤 새에 이럴 수가! 시나는 흐려진 눈을 들었다. "...복도를, 잃었는데. 벌써 아침이... 넬리... 해 줄 수 있어요? 설명... 왜, 어떻게... 왜, 머리가, 아픈 지..." 시나는 혀가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는 듯 답답한 표정으로 한마디마 다 신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넬리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지켜보기만 했 다. 자신의 여섯 살 먹은 조카도 이것 보단 말을 잘한다. 그런 사실은 시나 자신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시나의 얼굴에 절망과 고통 어린 표정이 지나갔다. "아, 아가씨...!" 시나는 마침내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넬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훌 쩍였다. "넬리, 머리가 아파. 너무나... 깨질 것 같이... 제발, 도와 줘..." "시나가...?" "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는 시녀장의 보고입니다." 방밖으로 나가니 시녀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담당 시녀가 아침에 들어가 시나를 봤는데, 그때 시나는 말을 잘 못 하고 온 몸이 마비된 것 같은 증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거기다 아는 사람한테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 해 이렇게 자신이 왔다는 설명이었다. "아무래도, 루이트 님께서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나의 방으로 향했다. "힐러는 불렀나?" "네. 이번에도 힐라토의 힐러께서." 루드랫은 잠시 발을 멈췄다. "...힐라토의 힐러?" 시녀장은 무심코 말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때문에 힐러들이 거의 대부분 공식적인 휴가에 들어가서. 힐라토의 귀인들과 함께 오신 힐러께 진료를 부탁드렸습니 다." 루드랫은 천천히 다시 발걸음을 떼며, 앞을 똑바로 보았다. "...왜, 힐라토의 귀빈단에 힐러가 따로 끼어 있는 거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힐라토 왕족 중에 한 분이 몸이 안 좋아, 대 동하신 힐러라고 들었습니다." "아아..." 루드랫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군." 넬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힐러 님, 어제는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원래 약이 아니라 힐 러 님이 주신 약을 드렸는데. 아침에 몸이 얼마나 찬지 말도 못했어요. 이마에선 열이 나고. 글세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힐러 님..." 란사드크가 마침내 말했다. "이 아가씬, 자네 여동생이 아닐텐데." "...네?" "...가서 자네 일이나 하란 말이야. 이 아가씨 뭐라도 되는 듯 굴지 말고. 내 환자는 내가 살필 수 있어. 아님, 내가 만들어 준 약이 그렇 게 못마땅하면, 난 이만 가볼 테니 자네가 약을 만들어 주든지." 넬리는 얼굴이 빨개져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왕족의 힐러 님에게 제가 실언 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전 나가있겠으니, 시키실 일 이 있으면..." 그런 말을 한 뒤 넬리는 방에서 물러났다. 란사드크는 그런 넬리의 모습에 코웃음 쳤다. "건방진 것. 이곳에선 하녀 하나도 제대로 교육 못시키나. 쯧..." 란사드크는 허리를 숙여 시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든 듯 눈 을 꼭 같고 있었다. 란사드크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가면을 벗어 옆에 놓았다. 그는 가면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옆에서 이것 저것 따지며 시끄럽게 굴던 시녀는 내보냈으니 괜찮았다. "지나치게 말랐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건 또 우습군. 우선은 힐 러 라이트로 정신이 들게 한 후..." 왕족의 힐러인 이상, 다른 이에게 힐러 라이트를 쓰면 안되지만 어 차피 란사드크는 별 신경 안 쓰는 조항이었다. 란사드크는 시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아가씨." 란사드크는 빙긋 웃고, 초록빛 나는 손을 시나의 가슴과 가슴 밑에 대었다. 하지만 그 빛이 전혀 시나의 몸으로 흡수되지 않자, 란사드크 는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 "....?" 란사드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힐러 라이트는 분명히 손에 맺혔고, 그 손은 지금 시나의 가슴과 가슴 밑, 맨살에 닿아 있었다. 란사드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 번 더 초록빛을 내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설마...!" 란사드크는 두 손을 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란사드크는 망설였다. 이 여자 애가 이런 몸이라니...? 전혀 뜻밖의 일이다. 하지만 란사드크는 씨익 웃고, 두 손을 시나의 몸에 댔다. "후후... 어디, 어디까지 가나 실험을 해볼까." 란사드크의 손에서 새파란 빛을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빛이 먹혀 들지 않자, 란사드크는 미소를 지었다. "퍼플 라이트..." 보라색의 빛에도 아무 변화 없었다. "...레드 라이트." 빛들은 시간차도 없이 급속하게 바뀌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란 사드크의 표정은 점차, 기괴하게 일그러져 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이다. 오렌지 라이트..." 하지만 주황색의 빛 또한, 시나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단 지 시나의 얼굴에 주황색의 뚜렷한 명암을 만들 뿐. 란사드크는 손을 떼었다. 그리고 의자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허리를 수그리고, 어 깨를 들썩이며 미친 사람처럼 킬킬대기 시작했다. "...큭큭큭. ...맙소사. 킬킬킬... 걸작이야... 걸작이라구...!! 내 가 그래서 너를 좋아한다, 세렌시스. 하하하하...!! 어디서 이런 여자 앨 찾아냈나!! 네가 찾아 낸 여자애가 어떤 종류인지 알기나 하나...? 하하하하하...!! 정말이지, 이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한 건, 너의 아피네 스 이후로 이 여자애가 처음이다. 핫핫핫... 어떻게 된 거야, 도대 체...! 이런 우연이 있나? 네겐 이런 종류의 여자 애를 찾아내는 특별 한 더듬이라도 달려 있는 건가...? 핫핫핫... 지난 해 동안 이 비슷한 종류를 찾아내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진짜라고 찾아낸 건 겨우 천 명 중에 한 명 꼴...! 그런데, 넌 또 이런 여자 애를 찾아낸 건가! 하하 하..." 란사드크는 한참을 웃고서야, 겨우 웃음을 그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이렇게 웃은 것도 얼마 만인가... 쿡쿡... 이런 몸 을 가진 자가, 또 있다니... 그렇다면 아가씨. 넌 이 정도로 건강한 것 도 다행인 거다." 란사드크가 또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핫핫핫... 이, 빌어먹을 세상... 가디스가 만든 세상은 겨우 이 정도란 말이야!! 핫핫핫...!!! 그래도, 넌 잘된 거지. 아가씨... 적어도, 넌 예전의 나 보단 훨씬 건강해 보이니까!" 란사드크는 웃음을 머금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한숨 쉬었다. "...하하... 처음엔 그냥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이젠 완전히 결정했다." 란사드크는 시나를 보고 말했다. "넌, 내가 가져야겠다. 그게 아마, 네게도 좋을 거다. 흠... 그전에 네게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지. 이 힘 까지 사용한 건 아주 오랜만인데. 널 위해서라면, 기꺼이 써주지." 란사드크는 미소를 짓고, 손을 들어 거기서 많은 양의 주황색 빛을 냈다. 그 주황색의 빛이 터질 것같이 부풀어올랐다고 생각한 순간, 빛 은 점차 안으로 축소하며 탈색되더니 드디어 번쩍이는 샛노란 색으로 변했다. 놀랍도록 화려한, 황금같이 번쩍이는 샛노란 색의 빛이었다. 란사드크는 휘황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나는 손을 시나 몸 가까이 갖 다 대며 웃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될 거다. 머리카락까지도. 그 대가로 내가 받을 것 은... 그래." 란사드크의 갈색 눈이 반짝였다. "...네 정신. 그게 좋겠다. 아가 씨..." 하지만 그 황금빛이 시나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사람 말소 리가 들렸다. "....!" 란사드크는 주먹을 쥐어, 힐러 라이트를 거둬들였다. 힐러 라이트는 눈 깜빡할 새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가는 소리를 낸 란사드크는 가면을 쓰고 난 후 뒤를 돌아보았다. "치료 중이니, 부를 때까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만 그 신경질 적인 목소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본 순간, 당 장 수그러들고 말았다. 시녀장이 말했다. "루이트 님, 이 분은 아까 말씀드린 일루티온 란사 드크이십니다." 루드랫은 은발의 남자를 보고 그의 묘한 분위기에 이상한 느낌을 받 고 있었다. 들어오기 전, 언뜻 노란빛을 본 것 같은데... 그게 어디서 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이 자의 모습... 어쩐지 낯이 익다. 란사드크는 루드랫이 자신을 눈여겨보는 것을 알고 고개를 깊숙이 숙 였다. "...안녕하십니까." 루드랫이 말했다. "힐러인데, 가면을 쓰고 있다니?" "얼굴이 얽혀서. 신병(神病)의 일종이라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신병이라고..." 루드랫은 그의 은발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가면을 벗어봐라." "...역겨우실 겁니다. 차라리 이대로 쓰고 있는 것이..." "벗어라." 하는 수 없었다. 란사드크는 천천히 어깨를 펴고 가면을 벗었다. 그 드러난 얼굴을 루드랫은 한참이나 보았다. 남색의 눈동자는 몹시 날카로웠다. 하지만 란사드크는 꿋꿋이 미소지 었고, 결국 루드랫은 뭔가를 수긍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란사드크는 말없이, 다시 가면을 썼다. 루드랫은 그런 란사드크의 모 습을 보며 말했다. "진료해 보니, 시나는 어떻던가." 란사드크는 공손히 말했다. "식사를 제대로 안 해서 쓰러지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외엔 별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좀 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만드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식사...?" 루드랫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어제는 식사를 부실하게 하긴 했지만... 하지만 듣자하니, 두통을 몹시 심하게 호소했 다고 하던데? 걷지도 못할 정도로. 그게 식사 때문이라고?" "글세... 지금으로선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저기 계신 아가 씨에겐 힐러 라이트를 쓸 수 없어서." "네가, 왕족의 힐러이기 때문이냐?" 루드랫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변한 것을 깨달은 란사드크는 주의 깊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 후 방안에 내려앉은 침묵엔 시녀장도 의아해서 루드랫을 쳐다볼 정도였지만, 루드랫은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군... 놀라운 일이다. ...왕족의 힐러가 오다니. 어떻게..." "이곳, 여주인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제 주인이신 힐라토님께서도 그 말씀대로 따르라 명령하셨고요." "그런가..." 그리고 란사드크를 지나쳐 시나의 침대로 걸어가려던 루드랫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너는,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란사드크는 비단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을 말씀하 시는지...? 저는 명령만 받고 온 자라." "예를 들면, 나와..." "...?" 루드랫은 입을 꽉 다물었다. "아니다." 이 힐러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서 어쩌자는 건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루드랫은 아무 말 없이 침대로 다가가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시나가 눈을 떴다. "드랫..." 시나는 몽롱한 눈으로 루 드랫을 보았다. "...여긴 웬일이에요?" 그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에, 루드랫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나온 반응이었다. "아프다는 말을 들었어. 어제, 좀 이상하게 굴더니. 몸이 안 좋아서 그랬던 거군." "어제... 하지만 난 전혀 기억이 없는..." 하지만 그 순간 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기억이 나 요... 내가, 드랫과 춤을 췄죠...?" "맞아." "그리고, 난..." 시나는 인상을 썼다. "뭔가, 매우 끔찍한..." 시나의 뇌리에 검은 눈 동자가 떠올랐다. 분명히,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시나는 벌떡 일어났다. "드랫...!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아요?!" "시나. 좀 더 누워있는 것이..." "아네요! 이젠 안 아파요. 봐요, 말도 잘 하잖아요. 자고 일어나니 까, 괜찮아졌어요. 머리야 종종 아팠던 거니까... 아침엔 혀까지 안 움 직여서 깜짝 놀랐지만, 이젠 멀쩡해요..!" "하지만..." "넬리, 나 괜찮아 보이죠?" 시나가 갑자기 멀쩡해 보이는데 대해, 루드랫보다 더 놀라고 있던 넬 리는 곧 기쁜 표정을 짓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아가씨. 정말 다행이에요. 훌륭하신 힐러 님 덕분에..." "힐러님? 앗, 란사드크씨... 안녕하세요! 아니, 그것보다... 드랫! 정말이 라니까요..." 시나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어져 있어서 이제, 이것이 아픈 사람이라 고는 그 안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누굴 만났는지 맞춰봐요!"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지 만... "...누굴 만났는데. 네가 마음에 들어하던 초상화의 왕족? 마치 좋아 하던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하지만 그때 루드랫의 미소가 굳어졌다. 시나를 놀릴 목적으로 말했 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다. 시나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드랫! 이상한 소리하지 말아요.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내가 만난 건, 레겜이란 말이에요!" 루드랫은 등뒤를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시나의 말을 이해하는 것 이 약간 늦었다. "...레겜...? 그게..." "아이참! 라단 아저씨네 집에서, 날 도서관에 데려다 줬던 그 사람 말이에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란사드크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지만 아무도 눈 치채지 못했다. 루드랫은 얼떨떨해서 말했다. "아... 그 남자. 그 사람이 왕궁에 있다고...?" 시나는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만났어요!! 하하... 레겜은, 글쎄요... 사실은 힐라토의 시종이래요. 세계혼 때문에 이곳까지 왔는데... 레겜도 나를 만나서 깜 짝 놀랐대요. 어제 드랫이 올 때까지 레겜이랑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멋지죠? 만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그렇군." 루드랫은 이제야 레겜의 태도며 말투 같은 것이 이해되었다. 단순한 여행자라기엔 어딘가 범상치 않았다. "그런데, 왜 어제는 그 이야길 안 했지?" 시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제 레겜 이야기 안 했어 요?" 루드랫은 쓴웃음 지었다. "너 자신도, 그 이야길 안 했다는 걸 아니 까, 이렇게 흥분해서 말하는 거 아냐. 누굴 만났는지 맞춰보라는 둥..." "으응?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하하... 내가 왜 그랬지? 이상하 네... 어젠 정신이 없었나 봐요. 뭐, 하여튼..." 시나는 웃는 얼굴을 지었다. "정말 잘 됐죠? 그런 친절한 사람을 다시 만나서. 어제 드랫도 만났 으면 좋았을 텐데... 드랫이 오기 전, 바쁜 일이 있다고 해서,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냐... 아닌가. 춤을 추자고 했는데... 피곤하다 고 했었나... 웅... 왜 기억이 이렇지..." 시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댔다. 하지만 새로운 기억 떠올 리는 것은 결국 포기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안개가 낀 듯 몽롱하지만, 중요한 건 거의 다 기억나니 까... 그러니까, 괜찮겠죠. 뭐... 아, 그렇지! 오늘은 드랫도 꼭 레겜 을 만나봐요... 네?" 루드랫은 시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루드랫은 지금 이 순간 레겜보다는 등뒤의 사람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 나도 만나봤으면 좋겠군. ...그때 신세진 것도 있고." 그래서 시나가 계속 레겜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손을 들어 제지했 다. "...잠깐만." 루드랫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 가면을 다시 벗어라." 시나와 루드랫의 대화를 하나, 하나 신경 써서 듣고 있던 란사드크는 루드랫이 그런 명령을 하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벗어라." 란사드크는 가까스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계속 벗고 있을 걸 그 랬군요." 루드랫은 란사드크의 가면 벗은 얼굴을 보기 위해 그에게 더욱 가까 이 갔다. 란사드크는 지금, 짙은 갈색의 눈동자였고 꽤 나이 들어 보이 는 얼굴이었다. 란사드크는 빙긋 미소지었다. 하지만 루드랫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때엔, 아무리 그라도 미소를 유지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너, 스온 테일러스에 대해 아나?" 루파르테는 귀족 아가씨들이 돌아가고 나자, 부루퉁해서 앉아 있다가 찻잔을 치우러 온 시녀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차가 왜 이따위인가!! 난, 이런 떫은 차는 안 좋아한다고 했지!!" 루이티온이 화를 내자 시녀는 겁에 질려 굽실댔지만 루파르테의 기분 은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차피 차 맛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 으니까. '호호.. 루온 루파르테 님. 예전부터 찾아 뵙고 싶었는데.. 이건, 약 소한 선물로... 그나저나, 참 재미있는 무도회죠? 호호... 힐라토 레이 서스님을 찾아내는 자에겐 그런 큰상이 있다니... 하지만 좀 불공평한 기분이 들기는 해요. 아무리 가장을 하고 있다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그 런 조건이 아무 쓸모도 없을 테니까... 저어... 호호... 힐라토 레이서 스님은 어제 저녁 어떤 옷을 입고 계셨는지? 호호호... 취향이라든 가... 저어...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알겠죠? 그... '느낌'이라는 게... 호호호...!' "젠장...!!" 루파르테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게임이라고 했으면, 정정당당하게 할 것이지. 바보 같은 것들이, 나한테까지 몰려와서 속을 뒤집어 놓고 있어!" 게다가 점잖게, '게임에 있어 비리는 안 된다', '이 게임을 주관하시 는 엘야시온님이 안 좋아하실 거고 자신의 주인의 힐라토 레이서스님도 안 좋아하실 거다.'라고 타이르면 재깍 알아듣고 나가면 될 것이지, 지 분대면서 끈질기게 늘어붙기는! 선물이라고 들고 온 것은, 분명 최고급 품이었지만 루파르테로서는 이런 것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누가 이딴 거 받고 싶다고 했나! 제길." 하여튼, 선물도 그렇고 가장 화나는 것은 루파르테의 방을 나가며 투 덜대던 아가씨들의 음성이었다. '너무 깐깐해. 힌트라도 주면 좋을 텐데...! 하여간 루이티온 계급 은...!' 그것뿐이면 물론 괜찮지만... 그들이 루파르테의 귀가 안 닿는 복도 로 나가서 혹시 나눌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상상해 보면,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혹시 말야. 루온 루파르테는 가르쳐 주기 싫어서 라기 보단, 몰라서 못 가르쳐 주는 거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 소문 못 들었어?' '소문.. 아! 소문은 들었어! 루온 루파르테는, 주인 쪽이 자신의 자 취를 지우면 주인을 못 찾아낸다고...' '맞아! 아무리 가까운데 있어도, 말이야...!' '호호호... 정말? 그런 사람이 어떻게 샥크 루이트, 그것도 프레미어 루이트의 지위에 있는 거지? 호호호..' "꺼져--!! 누가 여기 들어오라고 했나!! 나가!!" 루파르테는, 이번엔 난로의 재를 갈고 장작을 대러 온 시종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그 험악한 눈길에 시종은, 하마터면 장작 바구니를 떨어 뜨릴 뻔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바구니를 부여잡고 무사히 튀어나갈 수 있었다. 칼리스나는 반대쪽에서 오는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루파르테...', '역시 루이티온한텐 뇌물이 안 통해...', '그가 남들에게 우리 일을 알 리면 어쩌지?', '설마..!', 어쩌고 대화를 나누며 오자,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쪽에서 오는지 눈치챘다. 하지만 칼리스나는 그들을 붙잡고 다시 한 번 더 그들이 다녀온 곳을 확인했다. "루온 루파르테라고? 그대들은, 뭣 때문에 그의 방엘 들린 거지?" 걱정스럽게 이야길 나누다가 칼리스나가 걸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 귀 족 아가씨들은 뜻밖에 칼리스나와 부딪혀 당황해서 허리를 굽혔다. 그 들의 얼굴엔 역력한 죄책감이 스쳤고, 그들이 우물쭈물 말을 못하자, 옆에서 칼리스나를 모시던 시녀장이 딱딱하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들렸냐는, 스온 칼리스나 님의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귀족 아가씨들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것이..." "흥! 내가 맞춰보지!" 칼리스나가 말했다. "레이서스 때문이냐?! 맞 지!" 귀족 아가씨들의 치마가 즉시, 바닥에 푹 퍼졌다. "요, 용서를!! 규칙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지만..!" "그만, 미천한 욕심으로...! 용서를 바랍니다! 스웰드님!!" "엘의 은총을 받으신, 지고하신 스웰디온이시여!!" 아가씨들이 겁에 질려 이렇게 말하자, 칼리스나는 코웃음 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똑바로 대답해라. 거짓말을 하면, 살아남지 못할 거야. 그래서? 루 파르테에게 너흰 무엇을 알아냈느냐? 루파르테가 너희들에게 어떤 조언 을 해주었지?" "아, 아무 것도.. 아무런 조언도 듣지 못했습니다. 스웰드님." "지금 내가 가서 확인해 볼 거야!" "저, 정말입니다!"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우리가 선물을 드린 것은, 루온 루파르테를 존경한 마음에서 드린 겁니다!" 칼리스나는 귀족 아가씨들을 차례차례 훑어보고, 차갑게 말했다. "좋아... 지금 가서 확인해 보지. 원래는 별로 갈 생각도 없었는 데... 너희들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을 뺏기게 생겼어. 하지만, 하는 수 없지... 난 이런 건 확실하게 해 두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스나는 치맛자락을 휙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다가, 뒤를 돌아보고 한마디했다. "다음부터 또 이러면, 그땐 정말 용서 안 할거야!" "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지고 난 후, 칼리스나는 옆에 있는 시녀장 에게 말했다. "루온 루파르테의 방에서 저들과 마주쳤더라면, 창피할 뻔하지 않았 어? 그렇지? 하여간 건방진 것들이야. 흥..." 시녀장이 맞장구쳤다. "글쎄 말입니다. 스온 칼리스나 님." 잠시 후, 루파르테의 방으로 간 칼리스나는 외출복 차림의 루온 루파 르테를 볼 수 있었다. 루파르테가 인사를 하는데, 칼리스나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어딜 가는 거지? 다이아몬드 더스트 때문에 외출은 거의 불가능하잖 아." "네... 그, 그냥 잠시. 왕궁 소속의 아티스트를 데리고 가면 되니까. 체육관에라도 가서, 체력 단련을..." "어머.. 정말? 대단하군, 루파르테. 이런 날씨에도 체력 단련이라 니... 역시, 레이서스의 루이트다워." 루파르테의 굳어 있던 얼굴이 그제야 풀렸다. "네... 프레미어 루이트라면, 날씨 따윈 문제 삼지 말아 야죠... 이 런 날씨 하나 못 견딘다면, 토너먼트에서는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겁 니다. 하하..." 하지만 칼리스나의 다음 말이 떨어진 순간, 루파르테의 웃는 얼굴은 그대로 굳어졌다. "호호호.. 그래. 나도 참 든든한데. 아 참, 그래! 어디, 루파르테가 얼마나 뛰어난 루이트인지 지금 여기서 확인 해 볼까? 호호호... 루파 르테라면 물론 알고 있겠지... 루파르테? 어제 레이서스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지? 아... 난 물론 어렴풋이 눈치챘지. 뭐니, 뭐니 해도 난 그의 약혼녀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전혀 몰라보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서... 루파르테라면 어떤가... 그냥 확인해 보는 거야." 레이서스는 오후 무렵까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각 세계의 파이오니온을 비롯한 자신의 약혼녀 칼리스나까지)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한결같이, 모두 다, '아무런 용건 없이 그냥 심심해서 들 려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심심해서 들려본 사람들 치곤, 눈빛이 하나같이 강렬하게 빛 나 레이서스로서는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평소라면, 사람들이 자신의 말투 하나 하나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 우고 자신의 체형과 옷차림에 그렇게 열렬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에 무 척이나 감동을 했을지도 모르나, 오늘은 무언가 짚이는 일이 있었으므 로 칼리스나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자, 더 이상의 방문객은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시종장인 하카단이 웃으며 말했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피곤하시 죠?" "아아... 좋아." 그리고 레이서스는 책상 앞으로 가서, 거기에 놓인 깃펜을 들고 종이 에 한 줄 정도 글을 끄적끄적 써넣었다. 어제 분명히 푹 잤음에도 불구 하고, 이상한 꿈을 꾸어서 그런지 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감정은 이상 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레이서스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에 기대고 깃털 펜을 입술에 댄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자세로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아침에 일어 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책상 위에 놓인 동그란 목각 펜던트를 보니, 쓴 웃음이 나왔다. 몹시, 이상한 꿈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망가지는 꿈. 그리고 한 소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꿈... 결국엔, 몹시 멋쩍은 장면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목숨 을 위협 당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위험한 꿈이긴 했지만 어느 편인가 하 면, 악몽이라기보다는, 또다시 꾸고 싶은 꿈이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이건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고 아무 것도 아니지 만, 그래도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한 말이 계속 레이서스의 가슴에 남 아 있었다. '레겜, 당신을 정말...' "으흠...!!! 으흠!!!" 레이서스는 괜히 혼자서 헛기침하고 얼굴을 붉혔다. "...꿈치고는 생생해서 그런 것일 뿐이야. 조금 있으면, 이런 생각도 희미해지겠지." 레이서스는 애써 꿈 생각을 떨치고 다시 펜을 들어 펜 끝에 잉크를 묻혔다. 그리고 약간 눈을 찌푸리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으로 긁적긁적 글을 썼다. 하카단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호오... 어제에 비해 많이 쓰셨군요.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 으셨을 텐데..." 레이서스는 싱긋 웃었다. "그래... 아무튼 이건 끝내야 하니까... 잘 써져서 나도 기쁘군. 아 그렇지. 지금까지 쓴 것, 들어보겠나? 어떤지 봐줘." "아니, 하누카의 고백을..." "방금 쓴 거라 어떤지 알 수 없어서 그래. 이건 초고니까, 괜찮아. 어차피 다듬어야 하니까. ...자 그럼, 들어보게." 그리고 레이서스는 하카단이 말릴 틈도 없이 자신이 쓴 것을 몇 줄 읽었다. "하누카의 밤에 빛나는 별은 어느 때보다 빛난다. 별은 어느 밤에나 빛나지만, 그 밤의 별은 무척이나 특별하다. 당신의 눈동자도 그렇다. 어떤 아가씨든 빛나는 눈동자를 갖고 있지만, 내 가슴엔 오직 당신의 눈동자만이 빛난다..." 하카단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때...?" 레이서스는 약간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역시, 너무 유치한가? 그렇지?" 하카단은 그런 레이서스의 표정에 뭐라 할 말을 잃었다. 걱정스러운 듯 보이는 레이서스의 표정은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순진한 표정이라, 마치 어릴 적의 레이서스를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래서 하카단은 자기 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글쎄요... 유치하기보다는, 이건 완전한 연애 편지군요...!" "연애 편지..." 레이서스는 당황해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심각하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바꿔보는 것이..." "앗...! 아니, 아닙니다. 연애 편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 히려 여자들은 이런 걸 더 좋아할 겁니다!! 진실한 감정이 배여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별'이라! 여자들이 좋아할 문구죠!" 자신의 주인이 아내 될 사람에게 이런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므로, 하카단은 기쁘게 말했다. 레이서스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좋아할 만한 문구라... 하지만 이건 '여섯 증인' 의식에서 말해야 하는 거니까. 너무 감정을 표현해도 곤란하네... 그러니까 말이지. 그 런데서 '연애 편지'를 읽는 것은 아주 창피한 일이란 말이야." "뭐,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오히려 감동할 겁니다!" "감동...?" 레이서스는 인상을 쓰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빙긋 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이 구절은 어떤지 봐주겠나. 내 생각엔 이게 아까 것보다 차 라리 나은 것 같은데." 하카단은 오랜만에 보는 주인의 이런 모습에 기뻐서 말했다. "여기, 이렇게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어둠 가운데서도 행복할 것 같다. 꽃밭엘 들어가면 당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당신은, 어쩌면 꽃 나라에서 온 꽃 요정인지도 모른다... 당신을 보면, 세상에 빛이 가득한 것 같이 느껴지니까, 그건 정말로 사실이다..." 레이서스는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우선은 여기까지... 그런 데, '꽃 나라에서 온 꽃 요정'이 좋은지... '꽃 나라에서 온 요정'이 좋은지 잘 모르겠어. 운율은 어떤 것 같나?" 하카단은 침착하게 말했다. "...최근, '꽃밭'엘 들어가신 적이 있습 니까?" "...오늘 아침, 유리 정원을 산책할 때. 자네도 있었지 않나." "아... 그렇군요." "어떨까. '꽃'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말 같지 않나?" "제 생각엔..." 하카단은 최근 있었던 가장 신경질 났던 일을 힘들게 생각하며(힐라토의 수석 시종장이라면, 터지려는 웃음도 능히 참아야 한다.) 말을 골랐다. "...힐라토님께서 평소에도 관심을 가진, 익숙한 소재로 쓰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별'은 괜찮지만... '꽃'은..." 레이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도 작문 책에서 그런 말을 읽었어. 하지만, 이건 내가 아침에 떠올린 거니까." 레이서스는 아무래도 그 시구가 아까운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그 밑에다 '나는 꽃엔 별로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당신이, 내가 쓴 시를 좋아해 준다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꽃에도 익숙해질 수도 있다.'라고 덧붙이면 어떨까." 하카단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진심으로 말했다. "스온 칼리스나 님께서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파이오니온이시여." 레이서스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칼리스나?" "네." 레이서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좋아해 준다면, 고마울 거야. 그러기 위해서 쓰는 거니 까." (계속)==================================================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 그리고, 번호 지적해 주신 것도...^^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00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26 22:27 읽음:1614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11 "스온... 테일러스라니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였다. "그분은 왕 족이신가요?" "왕족?" 주위 사람들이 모두 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안 루드랫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알았다. 란사드크의 질문도 필시 그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왕족을 무슨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부르다니. "...왕족이시다. 스온 테일러스 님. 그 분을 아나?" 하지만 이때쯤, 란사드크는 입술 주변에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이 정도 나이쯤 되니까, 많은 기억을 갖고 있는 만큼 잃어버리는 기 억들도 많아서. 어느 세계의 왕족이신가요? 세계를 안다면 기억이 날지 도..." 루드랫은 란사드크를 쏘아보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 만 루드랫은 마음 한 구석에서, 결론 같은 것을 내리고 있었다. 방금 이자는, '빠져나갔다.' 하지만 '어디'에서?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자의 미소를 보는 순간, 갑자기 떠올랐던 생각마저 사라지는 느낌 이었다. 꺼림칙하고 거슬리는 앙금만을 남기며. "드랫? 왜 그래요?" 시나가 뒤에서 물었다. "아냐. 아무 것도." 루드랫이 말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 때문 에. 어제 초상화를 봤기 때문인 것 같아. 하지만 별것 아니었어. 란사 드크라고 했던가. ...그래. ...미안하다." 루이티온의 사과하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는데, 루드랫은 눈치채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잠깐, 루이트 님... 기억이 날 듯도... 아, 났습니다!" 란사드크가 말했다. "스온 테일러스님이라...! 기억이 나고 말고요! 혹시 그 분은, 이곳 클로니아의 왕족 아니십니까?" 란사드크는 즐거운 듯, 시녀장에게 확인했다. "어떤가요, 시녀장님?" 시녀장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하하.. 역시! 그 분은 몇 십 년 전, 약혼녀이신 스온 레스티엘님과 함께 행방불명 되셨죠. 아주 떠들썩한 사고였기 때문에 잊지 않고 있었 습니다. 스온 테일러스 님의 루이트가 느닷없이, 힐라토에서 아무런 기 억도 없이 발견된 일도 생각납니다. 아무튼 미궁으로 남은 사건이었죠. 아, 그렇지! 23년 전인가... 클로니아 세렌시스님도 자신의 약혼녀 때 문에 사고를 당했는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이곳에선 왕족들에게 이렇게도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건지..." 시녀장이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란사드크 님, 우리 세계에 대한 그런 식의 말씀에 대해선..." "아... 미안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제가 모시는 왕족 분은 클로니 아 세렌시스 님의 약혼녀였으니까요. 아무튼 잘된 일 아닙니까? 스온 테일러스 님의 때엔 약혼녀마저 행방불명되었는데. 글쎄, 이번엔 한 루 이트께서 클로니아 세렌시스님의 약혼녀를 보호해서 돌아오셨다고 하더 군요. 참으로, 엘의 돌보심 아닙니까?" 란사드크는 히죽대며 웃고 있었다. "은색 머리칼에 검은 우단으로 만든 가면? 호호... 그렇군. 난 그가 초록색 머리칼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레이서스에겐 그런 아트석(石) 이 있거든. 하지만 루파르테의 말도 맞는 것 같아." 초록색 머리칼. 루파르테는 칼리스나의 말을 새겨두었다. 스온 칼리스나는 힐라토 레이서스의 약혼녀니까, 그녀의 말은 신빙성 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하... 네. 하지만 힐라토 레이서스 님은 은색을 좋아하시니까요. 예전에 한 번, 은색 머리칼이 멋지다고 말씀하는걸 들은 적이 있습니 다." "어머! 정말이... 아니.. 호호... 응, 그러고 보니 나도 들은 것 같 아." 은색 머리칼... 스온 칼리스나는 루파르테의 말을 새겨들었다. 루파르테는 레이서스의 개인 루이트니까, 그의 말은 참고할 만한 가 치가 있다. 어제는 분명 레이서스라고 생각하고, 한 남자와 내내 같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춤추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가 이상했던 것이 다. 그래도 긴가 민가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 남자가 목소리까지 도 레이서스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더 많은 말을 시켜보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 도 안돼는 것이, 레이서스와 비슷한 남자들은 벙어리라도 된 양 침묵하 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칼리스나에겐 레이서스의 약혼녀로서 자존심이 있었기에, 자 신이 꼭 레이서스를 찾아내리라 마음먹었다. 그것은 루파르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다음은 옷차림에 대해서 말해 볼 차례 였다. 오늘은 푹 쉬는 것이 좋을 거라는 란사드크의 조언이 있었고, 루드랫 또한 그렇게 말했지만 시나는 그들의 말을 따를 생각 따윈 없었다. 끔찍했던 몸의 컨디션은 시간이 지날 수록 좋아졌다. 한 여름의 날씨. 폭풍우 치던 날씨가, 어느새 푸른 하늘에 해가 반짝 반짝 빛나는 날씨로 바뀌는 것처럼. 그 정도로 몸 상태와 기분은 급격 하게 좋아졌다. 아무튼, 아는 사람을 이곳 왕궁에서 본 것이 무척 기뻤고, 레겜을 또 다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왕궁 의상실에서 끝내 적당한 드레스를 찾지 못했어도, 시 나는 어제와는 달리 쾌활하게 결론 내렸다. "그럼, 어제처럼 남자 옷 입지 뭐!" '또 남자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쾌활한 상황이 아니지만 어 제와는 달리 그럭저럭 참아 넘길 만 하다. 환경이 안 따라 주면, 이쪽 에서 적응해야지 안 되는 걸 갖고 어쩌겠는가?'...라는 것은 넬리한테 말한 표면적인 핑계고, 역시 남자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하게 싫었지만 괜히 이런 것 갖고 고집부리다가는 무도회에 못 나가게 될 것 같아, 시나는 눈 딱 감고 고른 옷들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는 척 했 다. 그래서, 루드랫이 데리러 왔을 때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릴 수 있었다. 루드랫은 시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시나는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까지 해 보이며 자신이 건강함을 입증했다.) 황금새장을 보았다. "저 브라우니들이 왜 저렇지? 지독하게 얌전하군. 아까도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상해. 또 무슨 장난을 꾸미고 있는 건가..." 루드랫은 황금새장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몇 발자국 그쪽으로 걸어 갔다. 시나는 멍하니 그런 루드랫을 보았다. 그는 등을 굽히고 막 황금 새장의 예라우니를 들여보려 하고 있었다. "루드랫...!" 루드랫은 몸을 굽히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시나는 몸의 관절이 빡빡 해 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루드랫... 아무려면, 어때요. 빨리, 무도회장에나 가요." "...?" "어서요." 루드랫은 브라우니에 대한 일은 잊어버렸다. 드디어 시나에게서 이상 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루드랫은 시나의 말투를 되새기며 말했다. "...아침과 저녁의 부르는 호칭이 틀린 데엔 어떤 이유라도 있는 건 가. 넌 저녁 무렵엔 날 꼭, '루드랫'이라고 부르는군." 시나는 당황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난 언제나 '루드랫'이 라고 불렀잖아요... 아침이든, 저녁이든..." "아침엔 '드랫'이라고 불렀어. 넌, 계속 날 '드랫'이라고 불렀지. ' 루드랫'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몇 번 되지 않아." "설마, 그럴 리가! 아, 아니 그것보다." 시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 그렇담. 지금 그 말은, 내가 루드랫을 '드랫'이라고 불러도 괜찮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거에 대해선 이미 마차에서 말했잖아?" "마차? 마차라면..." 시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잠깐만요... 기억을 뒤져볼게요..." 기억을 뒤지다니? 아무래도 이상한 말이라, 루드랫은 시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시나는 지금, 잔뜩 긴장해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해독이 불가능한 책을 어떻게든 읽으려 애쓰며, 넘어가지 않는 페이 지를 억지로 넘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표정은 놀람. 아니, 경악이라고 할만한 것이었 다. "맙소사..." 시나는 낮게 부르짖었다. "루드랫! 루드랫이... 나한테, '청혼'했어요?!!" 루드랫은 할말을 잃었다. 실제로도 입만 벌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시나는 루드랫이 지은 표정을 보고, 자기가 한 말이 사실이 라는 것을 알았다. 시나는 루드랫 앞이라는 것을 잊고, 난폭한 말투로 말했다. "이런 일을 숨기고 있었다니!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을! 정말, 대단한 생존 욕구시군!" 충분히 오해할만한 말이라 루드랫이 말했다. "...뭘 네게 숨겼다는 거야? 생존욕구라니?" "...!" 시나의 표정이 급작스럽게 변했다. "아, 아니에요. 루드랫... 아니, '드랫'한테 한 말이 아니에요. 하하... 내가 좀 피곤하긴 한가봐 요. 아, 그렇지! 루드랫이 나한테 청혼한 그 이야기..." 시나는 활짝 웃었다. "저는 당연히...!" 하지만 그때, 내부로부터 무언의 반동이 있었고, 덕분에 시나는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시나?" "쳇... 아무래도, 이 일을 끝내놓고..." 시나는 다시 밝은 얼굴을 짓고 말했다. "루드랫? 아니, 드랫... 저 어, 청혼 건에 대해선 이따가 돌아오면서 답할게요. 네?" 루드랫은 이상하다는 듯, 시나를 보고 생각하는 말투로 말했다. "... 마음대로 해." 그 말이 떨어지자, 시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점점 슬픈 빛이 감돌았다. 루드랫은 말없이 그런 시나를 주시했다. 시나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 어뜨렸다. "루드랫이라고 부르든, 드랫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는 것일텐데... 왜, 그런 질문을... 내가 얼마나 드랫이 자유롭길 바라는 지 알아요? 그래 서, 책임감이나 어떤 강제력 때문이 아닌 진짜로 나를..." 몹시 슬픈 목소리였다. 하지만 시나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손으로 눌 렀다. "...머리가 아파요." 루드랫은 테이블에 엉덩이를 기대고 알 수 없는 눈으로 시나를 보았 다. "시나, 고개를 들어 봐." 시나가 고개를 들자, 루드랫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본 후, 말했다. "역시, 쉬는 게 나을 것 같지 앉아? 머리가 그렇게 아프다면." "안돼요. 무도회장엔 꼭 나가야 해요." 시나는 그가 반대할까봐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지금은 아프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루드랫은 가만히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가는 게 좋겠 군." 레이서스는 우울한 기분을 느끼며 무도회장의 천장을 보고 있었다. 정오 무렵만 해도 좋았던 기분은 오후로 갈수록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이유가 전혀 없었고, 무도회 장으로 들어오니 어제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져 기분은 계속 침울해지기만 했 다. 어제 만난 시나는 전에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틀렸다. 무엇이 틀린 건지 딱 꼬집어서는 말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저 번에 만났던 시나는 '개방적'이었던 반면 어젯밤의 시나는 '폐쇄적'이 었다는 생각이 든다. 밝고 사심 없이 모습의 시나는, 그 곁에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밝아 지는 느낌이었지만, 어젯밤엔 묘하게도 자신을 대하는 데 몹시 어색해 해서 차라리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 편할 것 같 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로, 마지못해 억지로 자신 옆에 앉아있는 기색 이 역력했다. 그러므로 그렇게 쭈뼛대던 그녀가 자신에게, 내일 어떤 옷을 입고 올 건지,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에 대해 물었을 땐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이상한 꿈을 꾸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무도회장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도 많 았고, 여자들도 많았다. 레이서스는 그런 무도회 장을 한 바퀴 돌아보 고, 엘야시온의 요청을 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시나를 잠깐이라도 만나, 또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그녀의 모습을 본 다면 오늘 내내 좋았던 기분은 그 밑바닥까지도 뒤집힐 것이다. 지금 그냥, 무도회장에서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반대의 마음도 있어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 껴졌다. 갑자기 무도회장의 밝음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레이서스는 생각했 다. 하긴... 자신은 무도회장에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베란다에 나가 있 다가 잠시 후 다시 나온다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밤이 어 떻게 흘러가게 될지, 약간이라도... 하지만 그때 누군가 자신의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레겜...?" 밝은 목소리였다. "레겜 맞죠? 열 번째 기둥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어딜 가는 거예 요?" 갑작스런 시나의 목소리에 몸이 굳어버린 레이서스는 겨우 돌아서서 시나를 보았다. 어제와 비슷한 차림으로, 시나는 빙긋 웃고 있었다. "그냥... 음료수를 가지러. 오랜만이군요. 시나." 시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하루 만이니까... 하하..." 그리고 시나는 뒤를 보며 말했다. "드랫. 여기... 레겜이에요. 정말, 반갑죠?" 레이서스는 시나 옆의 남자를 보았다. 가면 넘어 짙은 남색의 눈동자 가 자신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루드랫은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당신을 여기서 만나 놀랐습니다. 레겜." 그의 인사를 받은 레이서스는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 러다 결국, 하대를 하기로 했다. "이쪽이야말로... 놀랐다." 다음으로 레이서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가 자신이 하대를 하는데 어떤 제지를 가하지 않은지 두고 보았다.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로, 루 드랫은 '마노테온이면서도 루이티온', '루이티온이면서도 마노테온'인 미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는 데, 그러면서도 '루드랫'이라고 불리 는 데 대해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레이서스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순서라고까 지 생각했다. 아마 루드랫은 자신의 종속자를 위해서라도 제 신분으로 돌아갈 마음 을 먹었을 것이다. 통상, '마노테온'보다는 '루이티온' 쪽이 종속자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드랫이, '일루티온' 레겜에게 어떤 위세를 보이지 않을까 했지만 루드랫은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시나에게 당신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어제, 제가 없는 사이에 시 나와 같이 있어 주셨다는 말도. 친절한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레이서스는 이 상황이 몹시 우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별로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애초에, 이들을 아는 척하질 말았어야 하는 지 모른다. 레겜인척 하 는데 진력이 난 레이서스는 이 상황을 끝내고 싶어 시나를 보았다. "...당신의 남편을 소개시키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군요. 하지만 난..." 레이서스는 루드랫에게 눈길을 던졌다. "당신의 남편을, 이 상태로 만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해서라도. "...반가웠습니다, 시나. 그리고..." 마땅한 할 말을 찾지 못한 레이서스는 말끝을 흐렸다. "이만, 가보 죠." "레겜! 잠깐만요!" 레이서스의 뜻밖의 딱딱한 태도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시나는, 레 겜의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드랫? 드랫은 또... 에, 그러니까... 아무튼, 사람을 만나러 가야한 다고 했죠? 그러니까, 난 레겜하고 있을 게요. 그래도 되죠? 어제처 럼... 레겜...?" 시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잠깐만... 특 별한 일이 없으면, 나와 있어주면 안 돼요? 난..." "시나,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잠깐이면 돼요!" 그 절박한 목소리에 두 명 다 의아한 표정으로 시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안 시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계속 같이 있어달라는 건 아니니까..." "시나, 하지만..." 그때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레이서스는 이렇게 말하는 자신을 그 어느 때보다 한심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었 다. "아무래도, 당신과 같은 상태라면 이런 장소에 혼자 남겨지는 건 불안할 테니." 레이서스는 루드랫을 똑바로 보았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자신의 종속자를 이렇게 팽개쳐 두다니, 상당히 무신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라면,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어." "그렇습니까..." 루드랫은 시나가 아직도 레겜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드랫은 레이서스를 보았다. "시나는 내 종속자지, 내 액 세서리가 아니니까요.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닐 마음은 없습니다... 난," 루드랫은 아까 시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시나가 자유롭길 바랍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 다니 는 내 일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무언가를 가진 한 인간으로. 궁극적으로, 인간에겐 아무리해도 남과 나눌 수 없는 독립적인 부분이 있으니까. 난 시나가 그런 독립적인 자로서 내게 속하길 바랍니다. 혼 자라도, 즐거울 수 있는 인간으로서. 그러니까, 시나는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레이서스는 자신을 반대하는 이런 말에 불쾌하기보다는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에 있는 왕족이라든지, 귀족들이 보여주고 가르치는 궁정 연애는 이런 식이 아니다. 레이서스 자신도 루드랫이 말하는 식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낯설어 받 아들일 수 없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따뜻함'을 얻게 된다면. 그에게 속하고 싶고, 그도 내게 속하게 하고 싶다. 마치 한 몸인 것 처럼. "그럴 듯한 말이야. 하지만 그대가 하는 말은 결혼할 사람을 둔 종속 주가 하는 말이 아니라, 사제들이 하는 인간론 설교 같군." 시나의 눈이 흐려졌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게는 너무나 냉랭하게 들려. 그건 그대가 루..." 하마터면 루이티온 계급이기 때문이라 그런가, 라고 물을 뻔한 레이 서스는 입을 다물었다. 루드랫은 레이서스의 말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할 사람을 둔 종속주가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사제들의 설교 같다고? 그 말은 왠 지 모르지만, 루드랫에게 굉장한 설득력을 갖고 다가왔다. 루드랫은 아 피네스를 생각했다. 확실히 그렇다. 만약 시나가 아피네스였다면, 자신은 어디를 가든 아 피네스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절대로 안심할 수 없어서, 되든 안되든 그녀 옆에 있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는 틀리므 로... 루드랫은 진심으로 바랬다. 아까 시나가 자신에게 말했을 때. 아니, 마차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답례로서 자신도 대답해 주고 싶었다. 나도, 네가 너로서 자유롭길 바란다고. 하지만 이건 자신이 시나를 아피네스만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다. "시나..." 루드랫은 시나는 보며 말했다.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이 싫 다면... 나와 가겠어? 하지만 기다려야 할거야." 시나는 이 뜻밖의 말에, 놀랐고 슬펐다. 하지만 웃음을 짓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왜 드랫을 따라가요. 나를 뭐라고 생 각하는 거예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말까지 하고 나서. 레겜의 말 을 듣고 나서야, 따라가겠냐고 묻는 게 어딨어요?" "하지만..." "안 따라 갈 거예요. 드랫이 드랫 볼 일 보는데, 내가 왜 끼어요. 그 리고 난 아까도 말했듯, 레겜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시나의 이런 단호한 말투에, 두 사람은 놀란 눈치였지만 시나는 상관 없었다. 오늘 밤, 끝내야 한다. "그러니, 갖다 와요. 드랫. 난, 여기 있을 테니." 베란다는 한적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두 사람은 난간 앞에 섰 고, 레이서스가 말했다. "할 말이 있다니, 무슨 말이죠?" "음...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레겜... 드랫과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까 대화를 들으니," 시나는 웃었다. "내가 모르는 두 사람만의 무엇이 있던 것 같아서. 드랫을 만 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요... 그때, 드랫이랑 거실에서 싸웠던 걸로 그 러는 거예요?" 시나는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내 멋대로 해서 마음이 상했겠네요. 난 레겜이 날 반겨주기에, 드랫과도 화해했다고만 생각하 고..." 시나는 예전과 같은 느낌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깊은 상실감을 안겨준다. 어젯밤, 시나의 어색한 태도에 아쉬운 마음을 가졌던 것이 우습게 생 각되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 때문에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되는지. 차라리 어제와 같은 삭막한 태도였다면, 더 괜찮았을 것이다. 레이서스는 베란다 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베란다 밑의 나무들은 아무런 생명도 없는 무생물처럼 그냥 어둡게 서 있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싸움 때문에 당신의 남편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난 그때 몇몇 사실을 알았 기 때문에..." "사실? 어떤 사실이요?" 레이서스는 문득, 냉소를 흘렸다. "알고 싶습니까?" "네." 레이서스는 시나를 똑바로 보았다. 제발... 이젠 확실히 끊어야 할 때다. 이제 곧... 이 모든 놀이가 끝 날 때가 되었으니. 레겜 따윈 없으니까. 자신은 '힐라토 파이오니온'으 로서 말해야한다. 바로, 지금. 레이서스는 입을 열었다. "그거... 안 됐군." 레이서스는 시나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을 보았 다. "난, 너와는 별 감정이 없으니, 좋게 끝내고 싶었는데. 하긴 여기 서 다시 만난 것 자체가 악연이야. 하지만 알기를 원한다니." 사무적이 고 냉랭한 목소리가 떨렸다. "...말해, 주지... 내가... 거기서 안 것은... 너희들이, 마노테온이 라는 것." 뭐라고 말할 듯 벌리던 시나의 입술이 그대로 멈췄다. "...그 사실을 알고, 너무나 불쾌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너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몹시 기분이 나빠서..." 레이서스는 루드랫이 엘야시온에게 간지 얼마나 됐는지 생각하려 했 다. 얼마나 후에 그가 올까? "너희들이, 날 속였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레이 서스는 베란다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했다. "날, 떠나길. 더 이상 너와 있는 걸 견딜 수 없다. '잠깐'동안 너와 있겠다고 했으 니... 이걸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시나는 레겜이 하는 말들을 듣고, 가슴이 미칠 정도로 아픈 것을 느 꼈다. 내내, 얼마나 여러 번 확인을 했는지 모른다. 안에 있던 무언가가 옅어 질 때, 둥그런 푸른 달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 그 때에, 경건한 의식처럼. 다섯 번째이던가.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한 남자애에게 고백을 했다. '당연히' 그 애는 거절했고, 시나의 고백을 거절한 그 애가 며칠 후, 얼마나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는지 안다. "사실은 그때 말이지. 거절할 생각이 없었어... 나도 그때까지만 해 도, 널 괜찮게 생각했거든. 너와 사귄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 고... 하지만, 그때... 앗... 하하하... 아냐. 상처를 후비는 것이 아 냐. 진짜라고. 흠... 그래.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그런 거지. 네가 날 '좋아한다'라고 말한 순간, 난 문득 깨달은 거야... 네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그래서, 난 말해야 했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후후... 참으로 이상한 건 말이야. 네가 또 고백을 한다면... 아마도 난 언제까지나 그런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하... 뭐 라고? 다시는 고백 안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하하... 그래. 당연하 지." 남자애는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 알아줘. 네가 나를 존재마저 잊더라도... 내가 그렇게 대답한 것은... 바로..." 그 남자애는 그리고 상처 입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 남자애가 자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 일까 생각한다. 아마도... 왜 네가 고백할 땐, 언제나 이상한 타이밍이 되는지. 옆에 서 공작 떼가 울어대든지, 시나 시스터즈 아이들이 쳐들어오든지... 그 렇게 되는 건가. 그걸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들을 하는 지. 남자애는 예언을 하듯, 시나가 자신의 존재를 잊을 거라고 했고 시나 는 정말로 남자애의 존재조차 잊어 버렸다. 남자애가 했던 말만이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뿐. 꿈속을 헤매다가 돌아오면 창백한 납 같은 한 목소리가 현실 감각을 일깨워 준다. 시나가 영영 꿈속에서 헤매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 목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배가 무겁고 무거운 닻으로 인해, 정박 할 수 있듯...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때로, 끝없이 표류하다가 암초에 부딪혀 깨질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러면 계속 되새기고, 되새기며, 자신의 내부, 저 깊은 곳에 드리운 하 얗고 차가운 아마 줄을 생각한다. 단단하고 질긴 그것의 끝엔 십자가 모양의 검은 닻이 있고 검은 닻 은, 손을 넣어 헤집으면 울컥이며 올라올 것 같은 토사(土砂)에 묻혀, 주위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며, 그렇게 있다... ...자아, 성냥갑을 열고, 붉은 인이 묻은 성냥개피를 꺼내. 그리고 그것을 까슬거리는 발화물에 그어, 불을 붙이는 거야. 불꽃 가운데, 무엇이 보이지? 마치, 경건한 의식처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고,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올라 상대를 진심 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생각해 보라. 그 목소리뿐이었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부서져 나갈 때, 자신이 예전에 어느 곳에 있었는지 일깨워 주는 것은 오직 그 목소 리. 잔인한 증거자였다. 하지만 얼마나 간절하게 바랬는지. 단 하나 남은 성냥개피가 얼마나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시나는 너무나 약했고, 그래서 계속 확인해야 했다. "레겜... 하지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제발, 이 말을 들어주 겠어요?" 시나는 말했다. 모든 환상이 끝나는 출발점이었다. 유리정원 의 어둠은 고요했지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감싸는 듯 했다. "난, 사 실 레겜을..." 괴로웠다. 레이서스는 아까부터, 시나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다시 한번 더 그녀에게 이곳을 떠나도록 말할 참이었다. 잠시 후 벌어질 일들은, 극명했다. 만약 시나가 루드랫을 자신과 만나도록 하지 않았다면, 어딘가로 피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엘야시온과의 약속이 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 모든 일들에 염증을 느끼며. 아니, 시나와 같이 있지만 않았더라도... 하지만 이제 곧 벌어질 일 들, 이 상황. 이들과 어떤 연결도 없이 끊어지는 순간을 바로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 생생하게 겪어야 한다는 건, 그가 마땅히 참아야할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베란다에서 나가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런 생각으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시나가 말 한 것이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만큼 조용하고 형체감 없는 목소리로. "...레겜을, 정말 좋아해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좋아해요." 레이서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복부를 쇳덩이로 얻어맞은 것처 럼. 차라리 어제 꿈속에서 들었던 말이 더 현실감 있다. 자아, 이젠 들여다 봐... 불을 쬐렴. 그 가운데 무엇이 들여다보이지? 푸른 달이 모든 것을 끌어갈 때, 단 하나의 희망은 그 목소리였다. 낮고 창백한 그 목소리. "...레겜. 난, 퇴짜맞는데 익숙하니까. 퇴짜맞아도 괜찮다는 생각으 로... 좋아하니까, 이렇게 고백을 한 거예요." 시나는 웃고 있었다. 그래, 넌 또 퇴짜를 맞을 거야. 이번이 여덟 번 째의 실연이지, 아마. 그게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제 물어봐.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리고 그 목소리로 직접 들어. 단단한 닻 같은 그 목소리가 꿈인지, 혹은 아닌지. 이 지독하도록 아름다운 세계. 나의 엘야시온. 언제나 돌아오고 싶었던 이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시나는 언제나 알았다. 만약, 그 목소리가 진실이라면... 그것이 꿈이 아니라, 진리라면. 그 목소리를 낳은 세계 또한 진실이다. 나의 엘야시온...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할 때부터, 사랑한 나의 세계.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내 보석을 네 안에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로 인해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허상 속에서 살던 자가, 진실로 어떤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선.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선 제사가 필요하다. 그건 어떤 분기점이 되는 사건, '피'가 있는 통과의례가 되어야 한 다. 통과의례...! 오, 맞아. 이건 당연한 일이야. 단지 순서를 바꾼 것일 뿐. 헌데 왜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 거지? 우린 언제나 알고 있지 않았 어? 이건 단지 순서를 바꾼 것 뿐이야. 마녀를 죽이기... 하지만, 그 전에... 우선은 네 목을 따기로 결정한 것뿐이라고. 시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눈 밑으로 흘러내렸다. 엘야시온. 나의 세계. 꿈에서 널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어. 넌 내게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 너를 정말 사랑했어. 네가, 내 보석을 네 안에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로 인해 너를 사랑했지. 그러므로 널 위해서라면, 난 기꺼이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었어. 난 각오가 돼 있었고, 내가 그토록 네 말에 따르지 않은 것도. 결국은 너를 위한 것이었던 것을 넌 아직도 모르는 구나. 하지만... 시나는 눈을 떴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턱에 머물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젠 아냐. 레이서스는 시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눈물을 불가사의한 눈으로 보았 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가면을 벗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종속주가 있다는 걸 잊은 거 냐." 시나는 레이서스에게 미소 지었다. "은혜의 법 때문에... 드랫은 날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실은 나도, 드랫에겐 별다른 감정이 없는 걸요." 레이서스의 검은 눈동자가 커졌다. "....!" 봐, 공기가... 운명이 움직인다. "맙소사..." 레이서스는 고개를 젓고, 시나를 바라보았다. "...가면 을 벗어라. 네 얼굴을 보고싶다."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내 보석을 네 안에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로 인해 너를 사랑한다. 시나는 가면을 벗고, 부드러운 회색 눈으로 레겜을 보았다. "레겜." 레이서스는 손을 들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아니... 너는 나 를, 잘 모르고 있다. 내 이름은..."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님!!" "오오...! 과연!! 이 청년의 말이 사실이었군! 찾아냈어! 여기 계실 거라고 하더니...!!" "베란다였다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나!" 시나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로 가운 데, 루드랫이 있었다. 루드랫은 가면을 벗고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창 백한 얼굴로 시나와 레이서스를 번갈아 보다가 다가와 레이서스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님. 당신의 존귀한 명사(名詞)를 부 르는 저는, 루이티온... 루드랫. 힐라토의 루이티온 루드랫입니다." 바보 같은, 너. 너는 모르는구나. 이건 더 이상 꿈이 아니잖아. 그러니, 레겜이 동일한 대답을 하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니... 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라고... 많은 남자애들이 그렇게 대답을 하고, 넌 희망을 얻었지만. 이건 현실이잖아. 굳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넌 너의 세계를 지킬 수 있었는데. 고백을 했을 때, 그 고백을 상대가 받아들인다면, 그도 나를 좋다고 한다면,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진실이 아닌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를 증오할 것이다..." 정말, 그런 거야...? 그럼 이 엘야시온은 어떻게 되는 거야? 모든 것 이 또 다른 꿈일 뿐이야...? 아님 내가 있던 세계야말로, 진짜인 거야? 그 목소리는 아무 근거도 없이 스쳐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일 뿐이 고...? 그렇다면. 시나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루드랫을 보고 눈물어린 미소를 지었 다. 나도, 저 사람을 마음껏 좋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최근 클라크 옹의 '사랑으로 가득한 우주'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다 른 것 다 생략하고. 거기 보면 빛을 넘어선 빠른 통신(?)으로 인간의 사념파를 언급하더 군요. '인간의 생각'이라...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위에 쓴 내용은, 제 머릿속에선 아주 명확한 이야기들인데... 그걸 글로 쓰려니 괴롭군요. 생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_^ 생각으로 전달한다면 눈 깜빡이는 동안 전달할 수 있는, 짧은 개념들 입니다. 하지만 이걸, 쓰려니, 하얀 한글 보드가 그냥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어떠세요? 쓴 걸 읽을 때, 괜찮습니까? 최근(내게도 문화생활이 필요하다...-_-;)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보 았는데... 아주 감동했습니다. 사실 줄거리는 별 것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 기 구성방식과, 선택한 대사에 따라(물론, 여배우의 연기도 한 몫 했 고. 아주 예쁘더군요... 일인 이역이죠? ^^ 맨 처음엔 얼굴이 비슷한 두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연기가 자연스럽더군요...^^) 그 영화 는 무척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느낌'을 잡아서 글(혹은 영 화, 혹은 만화, 혹은 춤, 혹은 그림...)에 넣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 니다. 아무튼, 나날이 한계를 느끼면서 사는 요즘입니다.^_^; 작가가 될 생 각 같은 건 없고, 되고 싶다고 해도 될 수 있을지... (쓸 수 있냐, 없냐가 문제가 아니라... 쓰고 싶어질까...하는 문제 죠...) (엘야시온을 끝내고 나서도 글이 쓰고 싶어질지... 심히 의심스럽습 니다... '엘야시온'의 '엘'자도 안나오는, 전혀 다른 글을 쓸 수 있다 면, 자신을 작가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겠지만...-_-;) 아무튼, 지금도 자신 없지만, 쓰고 있는 이 이야기를 위해서(!), 부 디, 한계를 부숴 나갔으면 좋겠군요.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어질지... 아닐지는 별도로 하더라도.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 ^_^ 추신...레이서스와 시나를 맺어달라는 그 많은 염원을 들어드려서, 개인적으로 감동 깊습니다....^_^ 상쾌한 기분을 가지고 다음 줄거리로... 하하...^_^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12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01 21:42 읽음:1501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12 시나는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리 멈추려해도 멈출 수 없었다. 끔찍 한 추위였다. 이곳이, 이 세계가 이렇게 추운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 다. 벽난로 앞에 있지만 그곳의 열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추위 는 끈질기게 피부 한 겹 한 겹마다 하얗게 달라붙어 있었다. 벽난로 속 의 타오르는 불꽃에 손을 지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시나는 딱딱 소 리가 나도록 이를 맞부딪쳤다. 오산(吳算)... 일을 벌일 수록, 엉망이 되어간다. 고백했을 때, 레겜이, '미안하지만, 난 널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할 것을 어떻게 확신했니? 시나는 무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건 없어." 레겜이, 내 고백을 받아들였을 때, 그럼 이 세계는 가짜가 되는 거 니? 그 목소리의 확정이 틀렸으니까, 그 목소리가 속해 있는 세계 또한 가짜가 되는 거야...? 시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꿇었다. 너무 춥다. 지독한 추 위... 힘들은, 무언가를 '형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덕분에 지금 이 순간, 시나에게 어떤 보호막도 제공해 주고 있지 않았 다. 이 세계에 있던 것들이, 또 다른 존재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한 것 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결정된 건 없어--!!! 아직 늦지 않았어!! 내 힘 이 안 된다면, 다른 이의 힘을 빌면 되니까!!!" 시나는 억지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로 다가가 황금 새장 안의 예 라우니를 보고 말했다. "브라우니!! 네 주인의 명령을 들어라!! 가서, 내가 원하는 사람을 죽여버려!!!" 하지만 예라우니는 귀가 잔뜩 늘어져서 고개를 저었다. 그의 통통했 던 볼은 많이 홀쭉해져 있었다. "아, 안돼요.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건 못해요.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고요." 순간 황금 새장이 방구석으로 날아가 큰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쓸모 없는 요정!! 그런 일도 못한다면, 불렀을 때, 처음부터 오질 말았어야지!!" 시나는 화를 내며, 이번엔 창문으로 다가가 덧문을 하나씩 열어제쳤 다. 추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지만 목적을 위해 참으려 노력했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좀 더 강한 요정들을 불러들이면 돼!! 내 소원을 들어 줄 요정들을!!" 날 도와 마녀를 처치할 요정들을...!!! "아직, 마녀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그전에 죽여버리면 된 다고!!" 하지만 은빛의 가루들이 쏟아져 들어왔을 때, 시나는 눈조차 뜨지 못 했다. 예전과 틀렸다. 그 무서운 은빛이 가루들이 닿는 즉시, 속눈썹에 하얗게 서리가 맺히 고 입술에도 하얀 서리가 맺혔다. 눈이 너무나 따가워 눈물이 흘러 내렸는데, 그것은 곧 얼음 알갱이가 되어 살갗에 맺혔다. 하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 생 기도 없는 얼음덩이처럼. 그 갑작스러운 추위에 충격 받은 시나는 창문턱을 잡고 또 한 번 바 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의식을 잃고 말았는데, 의식을 잃고 조금 후, 몸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또 다른 의식을 선택했다. 눈썹과 입술에 맺혀 있던 서리는 사라졌고, 시나의 육체에는 홍조가 돌았다. 그래서 시나는 얼지 않고, 추위도 느끼지 않은 채, 아니... 추위를 느끼기는 하나 거기에 영향받지 않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주위로 브라우니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황금 새장이 찌그러졌 기 때문에, 예라우니 또한 거기서 빠져 나와 시나 앞으로 왔다. 예라우 니는 아무 말도 없이 시나를 내려다보았고, 그 외 다른 브라우니들 또 한 시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나는 식사를 만드는 중이었다. 여러 가지 재료를 집어넣어 국을 만 들고, 반찬도. 밥은 전기밥솥에 이미 앉혀 놓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안 계시거든요. 3년 전 돌아가셨죠. 그래서 이젠 내가 만 들어요." 힘들었겠구나. 3년 전이라... 3년 전이면 몇 살이었어? 시나는 국자를 놀리던 손을 멈추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열 넷. 열 네 살이었죠." 그리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음... 그래요. 국과 반찬은 다 됐 으니까, 밥이 다 될 동안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응. 시나는 빙긋 웃었다. "열 네 살. 열 네 살이란 건 말이죠... 아, 이 건 우리 나라 나이죠. 만으로는 열 세살... 그 나이는 참 묘한 나이에 요. 아이와 어른의 정확한 경계. 무언가의 문을 닫고, 무언가의 문을 여는 시기... 그래서 가장 불균형하면서도, 민감한 나이가, 그 나이에 요. 아세요? 무언가의 문을 닫고, 무언가의 문을 열기 위해선 약간의 길을 걸어야 해요. 길 가운데 있는 표지판과 경계석을 주의 깊게 보고. 어디로 갈지 결정해야 하죠. 그때에, 수호천사..." 시나는 생각하듯 말했다. "모든 아이들에겐, 그들의 기도를 신에게 날라주는 수호천사가 붙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언제 죽어도 신의 품으로 가게 되죠." 시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떤 사람들은, 수호 천사가 붙어있는데도 왜... 그들이 지키는 아이들이 그렇게도 많이... 그리고 어쩌면 매우 비참하게 죽어가는가, 라고 묻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아이들의 육체는 인간에게 맡겨있고, 수호천사들이 지키 는 건 아이들의 영혼이니까... 그 부분에 있어, 그들은 결코 일을 실패 하지 않죠. 가끔, 저녁 무렵이면 하늘을 뒤덮는 날개 소리를 들어요. 자신들이 지키는 아이들에 대한 보고를 그 주인에게 하기 위해, 하늘을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천사들의 날개 소리죠." 시나는 고개를 들고 또 한 번 웃었다. "그건, 뭐랄까... 그래요. TV 에서 본,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같이 매우 크고 매우 아름다워요. 어쨌든... 그들은 참으로 강력한 자들이니까요. 하지만... 길을 걸을 때, 말이죠. 아까 말한 그 길이요. 그 길을 걸을 때만은, 그 힘센 천사들도 잠시 한 걸음 물러나 있게 돼요. 그건... 아이들이 드디 어, '선택'을 해야할 때가 왔기 때문이죠." 무엇에 대한 선택? "여러가지에 대한... 저기에 존재할 것인가, 여기에 존재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거부할 것인가. 어떤 문을 열고, 어떤 문을 닫 을 것인가... 그리고. 아이의 길에 남을 것인가, 어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그렇군. 시나는 의자에 앉아서 상대를 보았다. "...그런데요. 이 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야기해 드릴까요?" 응. 시나는 두 손을 합장하듯 맞대고 그 끝을 입술에 댔다. 두 눈은 장난 스럽게, 미소로 가늘어져 있었다. "흐음... 이건, 내 친구 이야기예요. 어렸을 적, 친했던 친구 이야기 인데... 혹시, '자폐증(自閉症)'이라는 단어를 알아요? 내 친구는, 의 사들이 말하길, 자폐증이었대요. 그건 말이죠. 눈은 뜨고 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입은 있지만 어떤 대화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길고 긴, 터널을 걸어가지만 그건 끝없는 자기 내부로의 방향일 뿐. 아무 데 도 가지 못하는 거죠. 여우에게 홀린 사람이 계속 같은 곳을 맴돌다 지 쳐서 죽는 것처럼, 누구에게 홀린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자기 주위만 을 맴도는 거예요. 하지만 내 친구는, 그렇게 계속 걷다가 한 천사님을 만났고 그 천사님이 인도해 주는 곳으로 길을 걷다가 굉장히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게 됐대요. 처음엔 그곳이, 어딘지 몰랐지만... 이상하게 도, 그곳에선 그 아이가 쓰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시나는 테이블 바닥을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그 이야기를 안 했군요. 그 애는, 자신의 엄마에게 아주 이상한 말을 배웠는데... 매우 어렵고, 엄마 외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라.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언어로 말을 하면 다 들 바보라고 놀리며 웃어서, 그 언어를 말하기 죽기보다 싫었지만... 엄마는 그 언어 외의 언어로 말하면 무척 화를 내서... 그래서 그 아이 는 그냥 입을 다물었어요. 친구는 너무 어렸으니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거든요. 그래서, 한 마디, 두 마디... 잊어버리기로 한 거예요. 아 예 말을 안 한다면 어떤 사람들에게도 놀림받거나, 맞을 필요가 없으니 까. 아무튼... 그래서, 더욱 신기했죠. 그곳은 나무와 꽃이 많았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은 엄마가 가르쳐 준 언어를 사용했으니까... 친구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아주 행복했대요. 그래서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 가야 한다고 해도, 별로 외롭지 않았던 거예요. 아니... 그때까지만 해 도 어둠이라는 것이 외로운 것이란 생각조차 못했죠. 그런데, 어느 날..." 시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미소지었다.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죠. 친구가 있던 작고 네모난 까만 방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어 요. 그건, '아빠'였는데..." 아빠... 시나는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시나. 시나가 한참 아무 말도 안 하자,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시나는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해요. 이야기를 끝까지 할게요. 음... '아빠'는 아주 좋 은 분이었어요. 수염이 드문드문 난 뺨을 비빌 때면 굉장히 아팠지만, 내 친구의 손을 잡은 그 큰손은 아주 따뜻했거든요. 그리고 '아빠'는 아주 많은 이야기...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아빠는 친구 가, 이상한 언어를 사용해도 놀리지 않았고, 계속 다른 아이들이 사용 하는 언어를 가르쳐 주었어요. 아빠가 있으면, 엄마도 친구를 때리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관심이 없던 친구도, 아빠가 오는 걸 기다리게 됐대요. 그리고, 신데렐라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거기 나오는 왕자님 같은 사람을, '안다'라고 말했더니, 아빠가 자기를 안고 하도 여러 번, 즐겁게 웃으며 빙빙 돌아서 무척 어지러웠대요. 이야기 외에 도, 산수랑, 국어도 배웠어요... 학교를 간 것도, 아빠 손을 잡고 간 거였죠.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매일이 너무나 즐거워서. 그래서, 이 젠 그 나무와 꽃이 많은 이상한 세계도 가지 않게 되고 잊게 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죠. 그 이상한 세계는 어차피 꿈이었고, 생각하기 싫은 때의 작은 위안처였을 뿐이었으니까. 헌데, 어느 날. 친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후... 아주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서, 많이 울고 있 으니까. 아빠가 와서 위로해 줬죠. 괜찮다고..." 시나는 눈을 들었다. "저어...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왜 내 가, 내 이름을 왕자님에게 말하지 못했는지 알아요?" .... "엄마가." 시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를, 낳고 한참 후... '말'을 익 혔을 때. 내가, 그래도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보고, 술집에 온 손님들에 게, '죄인'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을 물어.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시나 (Sinner)라고 붙였죠... 엄마가 어느 날, 술에 취해서 말해 줬어요. 중 학교,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그 단어를 불러 줬을 때. 나는 나도 모르 게 일어나서, '네'라고 대답했어요. 아이들이 많이 웃었지만, 나는 갑 자기 눈물이 나와서, 그냥 그대로 그곳을 나와 집으로 가서 아빠 방으 로 가 울었어요. 아빠는, 사전을 많이 뒤져서, 내 이름을 다시 지어줬 죠. 시나(柴娜)라고... 그건, 내, 열 세 번째 생일 선물이었어요. 그리 고,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죠." 어느새 '친구'에서 '나'로 바뀌었지만, 시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 고, 상대방 또한 묵묵히 있었다. 단지 그는 시나의 뺨이 젖어 있는 것 을 보고,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위로했다. 시나는 그의 눈을 들 여다보며 말했다. "내게,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아빠하고 당신뿐이에요. 난, 아직도 그 길을 헤매고 있어요...! 내가 열 세살 때, 루드랫...! 당신은 먼저 어른이 되어 버렸어도, 그래도 나를 알아봐 주었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은 나를 몰라봐요? 내가, 당신의 아덴시엘이에요!" "아덴시엘이, 누군지 잘 모르겠어." "아니에요! 당신은 알아요...!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거예요." 시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의심했기 때문 에. 그렇잖아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죽였기 때문에...!" 시나는 손을 뻗어, 루드랫의 목을 안았다. 루드랫은 목덜미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어떤 문을 열어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 지...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나의 어린아이는, 스스로 성장하기 를 멈춘 채 아직도 가장 행복한 시절, 과거에만 있고, 내게도 그걸 명 령하지만... 그 앤, 이제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기란 걸 몰 라요... 나는, 이제 이렇게 커버렸는 걸요... 그래서, 난 이제 이 모든 일들을 마치 남인 것처럼 한 걸음 멀리, 바라보고 슬퍼할 수 있지만, 그 앤 그렇지 못해요. 아직도,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때의 꿈을 꾸는 거예요. 루드랫." 시나는 그의 귀에 대고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제발, 날 도와줘요. 내가, 아덴시엘이에요... 당신이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난 아주 중요한 사람까지도 해쳐야 할지 몰라요..." (계속)================================================== ^^; 시나 바람둥이 맞습니다... (아직도 그걸 모르셨다니...--;) 일곱 번 이나 딱지 맞았는데, 그때마다 하루만에 부활하고...(엘야시온에 와서, '제준이' 생각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잖아요. 이런 경우라면, 보통 자기 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을 수시로 떠올릴 텐데.) 몇 달 후 또 새로운 사 람을 좋아하는 여자 애(혹은 남자애)를 우리는 바람둥이라 부르 죠...(^^;)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가끔, 말이란 하면 할수록 오해를 받는 도구밖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죠...^^; 이것은 동화가 아니기땀시... 레이서스한테 고백한 건 고백한 거 고... 줄거리는 계속 진행됩니다...(설마, '그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기대하시는 건...--;) 그런데, '시나와 레이서스, 러브러브 감사'라니... 얼마 후 짱돌을 맞을 일이 두렵군요.(--;)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아주, 예전에 엘야시온을 연재하는 초기에, 어떤 분이 시리얼 란에서 제 글을 비롯한 여러 글을 씹어(^^;) 주시며... 제 글에 대핸, '우씨~ 무슨 생각을 이렇게 많이 하는지! 주인공이 자폐아 같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솔직히, 놀랐다는... 으읏... 자폐아였던 걸 어떻게 알 았지?! 내 글 솜씨는 가히 경지에 올랐군... 음하하...(--;)...라고 웃 다가, 제정신을 차린 기억이 있는데... 아무튼 '욕'인고로, 시리얼 잡담란에 가서 징징대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서, '시나는 자폐아 맞는데... 효효...^^;'라고 써놓으면 그거 쓰신 분도 황당하셨을 테고, 여러모로 황당했겠지만... 설정상의 일이 니,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 생각해도 웃긴 에피소드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이런 통찰력(?) 있는 욕을 얻어먹으면 무척 신기하더 군요..^^ 그 후론 별 뚜렷한 욕도 얻어먹지 않고, 지금까지 와서... 때려 칠 기회를 얻지 못해 가슴이 아프지만... (꽤 순탄한 연재 인생이었습니 다. 하하...^^) 음... 어쨌든. 시나가 자폐아였다는 것은, 줄곧 마음 아픈 사실 중에 하나였고, 이 젠, 시나의 분위기가 그런 것도 이걸로 설명이 되었을까... (분위기가 그런 것이 도대체 뭘꺄...--;) <엔...^^> 추신...메일 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추신2...쓰는 게 정말 지겨워 지면, 서점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로저 젤라즈니의 글이나 미하엘 엔데의 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재미있는 소 설을 열심히 읽죠...^^ 최근에는 레이 브래드버리라는 작가의 글이 마 음에 들어서, 그 작가의 것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장편을 보면 생각이 어떻게 바뀔 지 모르지만...^^) 저 같은 경우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의 것이라도, 서점에서 독파해 야 하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작가의 적이죠. 푸하하하하...(좋 아할 일이냐... 응?--;)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17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04 23:03 읽음:1559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12 시간은 점점이 끊어지고, 끊어진 시간의 밀도는 흐릿했다. 악몽처럼, 시나는 되풀이 해, 레겜(아니,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라고 했던 가.) 앞에 서 있었다. "죽이겠어...!" 자신의 입술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목소리. 가라앉고, 분노가 배 인 목소리였다. 손엔 그 증거인양, 희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하지 만, 그것을 던져 또 한 번, 온통 레겜을 감싸도 레겜은 머리카락 한 올 그을리지 않았고, 멀쩡했다. 좌절의 눈물이 흘렀다. "절대,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목소리에 실린 의지는, 무력감을 선사한다. 한 몸 안에, 어떻게 이렇 게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가 존재할 수 있는 건지. "네가 뭐라고 해도, 난 그를 죽일 거야." "편안히, 잠들길... 다시 눈을 떴을 땐, '현실'로 돌아가 있을 거야." "...안돼."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엘야시온께서, 우릴 현실로 데려가 주시고... 그리고 우린 더 이상 이렇게 다투지 않아도 될 거야. 이곳에 있는 사람 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그대로... 우리가 현실로 돌아가면, 이 모 든 건 끝나는 거야.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도." "...현실?" 시나는 웃었다. 어떤 현실을 말하는 걸까. 열 네 살부터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현실을 경험한 적이 없다.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했어." 목걸이가 있었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힘을 쓰는 순간 알 수 있 었을 것이다. 목걸이가 있었다면, 힘을 쓸 때, 이렇게 피곤하지도 않 고, 진작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상대편에게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 다. "편안히, 잠들길..." 천천히, 밀물이 밀려오듯, 깊은 잠이 몰려들었다. 푸른 달은 잠시, 얼 굴을 가리우고, 자신의 포로들을 개방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시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 다. 멀고 검은 수평선의 달은 아직도, 반대편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 다. 시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 의 풍경이 굉장히 새로워 보였다. 당연했다. 스위치가, 'on'에서 'off'로, 혹은 'off'에서 'on'으로 바 뀌었다. 아니면, 몸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중요한 물건이 '여기'에서 ' 저기'로 움직여 갔다. 그게 무엇일까? 시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생소한 감각... 방 안 구석구석을 볼 때, 느껴지는 감각은... 나빴 던 눈이 갑자기 좋아져,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은... "맙소사." 시나는 방구석을 보고, 얼이 빠졌다. "선명하게 보이는 저것은, 분명 히...!" ...찌그러진 황금 새장이었다. 가까이 가서 그것을 확인한 시나는 절망적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이제 부터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은 시나에겐 천재지변에 방불하는 일이었다. "어휴! 난 몰라. 이 녀석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헤헤... 누굴 찾는지 모르지만, 우리 가 도와줄까, 시나인간?"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한 시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홱 돌렸 다. "우웃... 심장이야...! 예라우니! 깜짝 놀랐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서 나온 거예요!!" 예라우니는 자신의 가족들을 둘러보더니 그들과 의미 있는 눈빛을 교 환했다. 예라우니는 시나의 어깨로 풀쩍 뛰어올랐다. 헛기침한 예라우 니는 시나의 목을 잡고 시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애교 부리듯 비볐 다. "으음. 있지... 우리는 너한테 했던 행동들을 무척이나 반성하고 있 어. 우리는 이제부터 너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할거야." 시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예라우니는 한 번 더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나의 볼을 팔꿈치로 꾹 찔렀다. "그러니까, 잘 지내보자... 이젠 어디로 가면 안돼? 헤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의 말은 둘째 치고라도(그들의 말은 언제 나 종잡을 수 없었으니까, 이 부분에 대해선 예전에 신경을 끊었다.) 그들의 행동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침식사 시간만 해도,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해 시나의 시중을 드는지, 우유 잔은 비기가 무섭게 다시 채워졌고, 빵에는 부지런히 버터가(혹은 각종 잼들이) 발라졌다. 만약 시나가 원하기만 했다면 직접 먹여주기까지 했을 것이다. 넬리는 옆에서, 오늘은 어쩐지 시중드는 게 수월하다며 역시 엘의 날 식단이라 검소해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방을 나가려는 순간까지도, 브라우니들은 다소곳하고, 씩씩하게 시나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던 시나는 침대 위에 좌르륵 앉아 있는 그들을 보고, 의심스러운 마음 반, 호기심 어린 마음 반으로 물어보았다. "예라우니. 당신들은 카할에 안 가요?" 예라우니들은 손을 흔들었다. "그건, 인간들이나 가는 거지. 우린 연 결이 없거든." "연결...?" "잘 다녀와. 시나 인간. 우린 여기 앉아 있을 게." "맞아. 앉아 있을 거야." 예라우니는 예의 그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남기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듯 했고, 넬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어서 나오라고 말했기에 시나 는 결국, 질문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브라우니들처럼, 대화하기 난해한 종족도 없을 듯 하다. 문 앞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은 루드랫이었다. "드랫! 좋은 아침이죠?" 창문이 모두 다 닫혀있어 어두운데다, 횃불까지 타고 있어 음침했지만 시나는 그렇게 인사했다. 하지만 드랫은 그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시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어 찌나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지 시나는 마침내 어색해져서 말했다. "왜 그래요? 하룻밤 사이, 내가 더 미인으로 보여서 그래요? 하하 하..." 썰렁한 농담이어서 그런지 루드랫은 웃지 않았다. 무안해진 시나는 투 덜댔다. 하여튼, 포커 페이스의 본질을 보여주는 군. 아냐... 저 정도 되면, 데드 마스크라고도 불러줄 수 있을걸. 하지만 시나가 인상을 쓰든 말든, 루드랫은 심각하게 말했다. "혹시 어젯밤 꿨던 꿈, 기억 나?" "꿈이요?"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아요. 난 꿈 같은 거, 거의 기억 못해요." "이상한 환경이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 "어디서, 누가요?" "그러니까..." 시나는 호기심 서린 눈으로 루드랫을 보았다. 루드랫은 입을 다물었 다. "...아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꾼 꿈이었나..." "잠자리가 뒤숭숭했어요?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런 거예요? 레겜이... 아... 이젠 이렇게 부르면 안 돼지... 저어, 그... 힐라토의 '그 분' 때문예요?" 루드랫은 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할에 가기 위해선 왕궁 현관까지 나가야 한다. 둘은 복도를 걸었다. 시나가 말했다. "어젠 정말 놀랐어요... 힐라토의 임금님이라고 하면, 굉장한 노인일 줄 알았는데... 설마, 그 분이셨을 줄이야." 시나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드랫... 그렇담. 그 분이 라단 아 저씨의 집을 찾아 왔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네요. 신분까지 속이 고 찾아오신 건 역시... 드랫을 만나러 오신 거겠죠? 그 때, 엘야시온 님처럼요." "...그렇겠지." 묘하게 망설이는 목소리였다. "그 분은 정말, 친절한 분이었는데... 임금님이었다니. 휴우..." 시나 는 회한 섞인 한숨을 길게 쉬었다. "옛날에, 드랫을 굉장히 총애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부러 만나러 오셨죠." 루드랫은 그 말에 쓴웃음 지었다. 총애라. 이런 상황이 벌어진 원인을 설명하는 단어들 중, 가장 적합하지 않은 낱말을 하나 고르라면 저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놀라기는 루드랫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신이 한심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힐라토 파이오니온'께서 자신에 대해 어떤 기억이나, 관심을 갖고 있 으리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도.(루드랫 편에선 그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정도 눈치는 챘어야 하는 지 모른다. 아무 리 성장했다지만, 예전에 한 번, 루드랫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대관식. 무척이나 성대한 의식을 치르고, 힐라토의 파이오니온 자리에 오르는 그를 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도회 장에서 가디엘이 루드랫에게 귀띔해 주기까지는 전혀 몰랐다. "검은머리, 검은 색 눈. 평범한 일루티온 시종의 차림일세. 껄껄껄... 다른 왕족들은 별 요상망측한 차림을 다 하고 모처럼 즐겁게 지내는 모 양이지만... 그는 그렇게 입겠다고 하더군." 이 말을 듣는 순간에도, '레겜'을 떠올리지 못했다. 시나를 도서관에 데려다 주고, 라단의 집 거실에서 치고 받고 싸웠던 사람이 '파이오니 온'일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검은 보석이 박힌 검붉은 색의 비단 가면'라는 말을 듣고서는, 시나와 레겜이 있는 베란다로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시나가 말했다. "하아... 하여튼, 나는 이제 왕족 모독죄 같은 거로 붙잡혀 갈지 몰라요." "왕족 모독죄? 무엇 때문에?"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나저나 드랫은 언제부터 그 분이 임금님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진작 눈치라도 주지... 내가 그 분에 게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도 어제야 알았어. 누가 힐라토 파이오니온인지는 바로 엘야시온님 께서 알려 주셨으니까." "뭐라고요!" 시나는 놀라서 말했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라고 했잖 아요! 그런데 이렇게 반칙을 해도 돼요?" "...처음부터 게임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에?" 루드랫은 발걸음을 멈췄다. "엘야시온님께선 내게 상당히 관대한 편이 야. 그리고..." 루드랫은 어디까지 말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말했다. " 예전부터, 내가 본래 지위로 돌아오길 바라셨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 따윈 없었고. 나와 내 과거를 적대하는 세력들도," 루드랫은 약간 웃었 다. "그 부분에 있어선 고맙게도 나와 생각을 같이했지. 하지만 네 덕 분에, 자의든 타의든 내 지위를 다시 얻게 된 이상. 일반인들에게 인식 시켜둘 필요가 있단 말이야." "뭘요?" "다른 누구도 아닌, '힐라토 파이오니온'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건 매우 큰 의미가 있거든. 아마 엘야시온님은 그걸 생각하셨겠지." "웅... 일반인에게 인식시켜둔다고? 적대세력이 아니라?" "글세. 적대세력의 인식까지 변화시키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 이 들어. 게다가 그 성공여부도 불투명하고. 나 같은 사람이 처음, 어 떤 기반을 얻고자 한다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의 호의를 최대한 얻어서 아군을 만들 필요가 있어. 힘과 권력을 얻기 위해선, 적대세력 을 중화시키는 것 보단, 아예 처음부터 중립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내게 로 돌리는 것이 나아. 그리고 이번, 엘야시온님의 게임은 무도회장에 있던 많은 중요한 중립적인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심어주었겠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무심하게 말하는 루드랫이었지만, 시나 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흠...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드랫?" 시나는 루드랫의 눈치를 보았 다. "드랫한테, 적대 세력이 있어요? ...힐라토 인이에요? 설마... 이 곳에 와 있어요?"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였다. "와 있어. 바로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개인 루이트...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니까."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개인 루이트...! 시나도 책에서 '루이티온'에 대해 읽어보았다. 루드랫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시나는 인상을 썼다. 그 거만하고 대단한 루 이트를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는 왕족... '레겜'의 진짜 정체와 주변 환경이 이런 식으로 밝혀지니, 자신이 얼 마나 어리석었는지, 한층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 쩌겠는가? 시나 자신은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레겜'은 무도회가 끝나면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이었고... 이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도 못해보고 끝낸다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서 무척(그리고 평생) 후회할 거라는 마음이 들어서, 문득 고백 하고 만 것이다. '하아... 하지만, 그 사람이 임금님이었다니. 쇼크...' 고백할 땐 언제나, 환경이 안 받쳐준다는 징크스는 이런 세계에까지 와서도 깨지지 않아 황당하기까지 했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바로 그 순간에 쳐들어 올 수 있단 말인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레겜'의 말을 들어볼 수 있었을 텐데...! 시나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하지만 뭐... 들어본다고 해도. 어차피 퇴짜였겠지. 이런 세계에 와서 여덟 번째 딱지 기록을 세울 줄은 꿈에 도 몰랐는데.' 그래도 어떤 면에선 시원하긴 했다. 시나의 평소 지론이야, '좋아하 면, 솔직하게 고백한다!'였고, 이번에도 그 지론대로 따른 것이다. 비록 고백은 흐지부지 끝났지만, 시나가 바라는 것은 '마노테 주제에 왕족에게 고백한 죄'로 수비대에게 끌려가지만 않는 것일 뿐... 왕족이고, 임금님인 걸 떠나, 레겜은 인간적으로도 정말 친절하고 좋 은 사람이었으니까... 레겜을 좋아하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시나는 그걸 처음으로 알았다. 레겜의 친절한 마음. 거기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 하나 쌓여 어느샌가 그를 좋아하게 됐고, 그래서 아마 첫 번째 무도회에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무도회에선, 불현듯 그걸 깨달았다.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루드랫과 다르게, 레겜 옆에 있으면 너무나 편해서... 언제까지나 그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물론, '현실'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럴 수는 없지만.) 다른 남자애들한테 고백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은 떨리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도 기억 안 나지만... 시나는 체념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좋은 추억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해도. 미련하나 남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으니까. 한숨을 쉰 시나는 멀리, 입구가 보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 드랫? 만약에 말이에요.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그 래서 드랫이 나를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어지면. 그땐 어떻게 할 거예 요? 드랫은, 자의든 타의든 나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거니까." 루드랫이 말했다. "갑자기 사라진다고...? 어디로 사라질 건데?" "뭐, 어디로든..." "어디로 사라지든, 내가 널 책임져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은혜의 법은 열 두 세계, 전부에 통용되니까. 그러니까, 네가 갑자기 사라진다 면, 아마 난 너를 찾아 나서야겠지. 하지만 쓸데없는 고생하긴 싫으니 까, 어디 가는지 정도는 말해 놓고 사라져 줘." 책임감이 정말, 투철하시군... 시나는 웃음 짓고 말았다. "드랫, 기억 나요? 난 드랫 생활에 갑자기 끼여들었다고요. 그러니까 이런 일도 있 을 수 있잖아요.... 난 왔을 때처럼. 그러니까,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말하고를 떠나서... 왔을 때처럼, 그렇게 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도 몰라요." 루드랫은 픽 웃었다. 시나가 말했다. "허튼 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요! 한 번 그렇다고 상 상을 해 봐요! 내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고 나면 드랫은 어떻게 할 거예 요? 아니, 내가 아예 없었다면...?" 루드랫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시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냥... 한 번 대답해 봐요. 네?" "별스럽군. ...네가 없었다면. 정말 평탄한 인생이었겠지. 바리스에서 제일로트로 오는 데, 별다른 사건도 없이 곧바로 들어왔을 거야. 그리 고 라단의 집에 묵고. 아직도 거기에 묵고 있겠지." '여섯 증인'의식 같은 것은 불가능할 테니. "그리고 나서, 하누카의 날이 끝나면요?" "...마을로 다시 돌아 가... 바리스는 불에 탔으니, 다른 마을을 찾아 서." "성직자가 됐을까요?" 루드랫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시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드랫.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없는 게 훨씬 더 좋았겠죠... 그렇지 않아요? 완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면... '내가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드 랫은 아마도 '내가 없는 상황'을 택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이건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문제야. 과거의 일은 한 번 지나가면 어쩔 수 없어." 딱 자른 말에 시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이젠 가요." 그리고 다시 걸으려 하는데, 시나의 표정을 본 루드랫이 시나의 팔을 잡았다. "시나.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질문들을 하는지 모르지만. ...이것 만은 말해 두겠어. 너에게 부탁할 것은..." 강한 어조였다. "제발, 관계를 그런 식으로 가정하거나 비교해서 말하 지 말아 줘." 루드랫은 시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내 게, '나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난 언제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거 야. 하지만 '어느 만큼 좋아하냐'든지... '이런, 이런 상황이면 어땠을 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난 지금도 대답할 수 없고, 앞으로도 대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하겠어. 내 감정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나도 모 르니까.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하나는. 내가 너와 함께 있 을 거란 것. 네가 날 거부하지 않은 이상. 내가 널 거부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건...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약속이야." 루드랫은 한숨을 쉬고 밝게 타는 횃불을 보았다. "...아무리 힘들더라 도, 그 약속을 지킬게. 그러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이제 하지 말아 줘. 그건 생각보다 힘들어. 사실 난, 내내 네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거든." 시나는 눈에 어린 찡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내가 어떻게 되다뇨?" "글세. 말로 꺼내려니 우습지만. 때때로 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 는 것 같아. 성격도... 외모도. 맨 처음엔 별별 일을 다 당해서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이젠 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사 실 넌 '얼음의 숲'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루드랫은 시나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혹시 환각 같은 걸 보지는 않아? 환청이라든지? 이상한 꿈을 꾼 적은 없어? 그, 머리가 아팠던 것 도... 역시 넌 디트와 함께 있는 게 나았을 텐데." 시나는 웃었다.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방금 드랫이 그랬 잖아요. 그리고 난 괜찮아요. 음..." 시나는 이마를 짚었다. "가끔 머 리가 아프고, 덕분에 기억력 감퇴 현상인지 뭔지가 일어나 어제 있던 일도 가물가물할 때가 있지만... 그거야 뭐... 레코더로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길 바라는 것도 무리잖아요? 사람의 기억은 때론 방금 전에 있던 일도 잘 기억 못하는... 그런 거니까." "...'레코더'가 뭔데?" "하하... 글쎄요. 안 가르쳐 줄래요." '레코더'에 대해 듣지 못하게 된 드랫은 인상을 썼지만, 시나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엘야시온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든.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이곳을 떠나자. 난 예전에 궁정을 떠난 사람이니까. 그리고 너도 이곳엔 잘 맞 지 않을 거야." 궁정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배타적인 사회이다. 아무리 남자 쪽이 능 력과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권력과 능력이 배우자 되는 사람에 게까지 미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표면적으로야 가능하겠지만, 실제 로는 매우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엘야시온님께 재산을 돌려 받아, 시골에 영지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그 것도 좋고, 아니라도 괜찮아. 난 꽤 능숙한 나무꾼이니까." 시종들이 현관문을 열어주었을 때, 바깥은 눈이 부셨다. 유리창에서 그대로 비춰 들어온 하얀빛들이 눈을 아프게 했다. "그래요. 그렇게 된다면 좋을 거예요. ...돌봐줘서 고마워요. 드랫." "...천만에." 드랫이 나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쓸쓸해 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난 떠나야 하니까.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꼭...' 루드랫과 시나가 홀로 들어섰을 때, 시끄럽지는 않지만 활기 있던 말 소리가 뚝 그쳤다.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은 일제히 루드랫과 시나를 주목했고, 일제히 홱, 고개를 돌려 루드랫과 시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척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상류층답지 않게 호기심을 매우 솔직하게 나타낸 셈이 되고 말았는데, 그들 자신도 그 실수를 깨달은 듯, 벽을 향한 얼 굴들과 부채 뒤에 숨은 얼굴들에서 억지 웃음과, 그 웃음만큼 어색한 말소리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말소리들은 내용 없이 스러졌고, 그 뒤로는 전보다 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덕분에 시나는 자신들이 홀로 들어오기 전, 사람들이 나누고 있었을 대화를 상상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사연 많은 마노테에 대한 화제가 그 것일 텐데... 그 소문의 당사자들이 나타나자, 더 이상 '소문'을 나눌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아쉽게도.) 그들은 '소문을 나누는 일'에서 '직접 보고 평가하는 일'로 너무나 손쉽게 돌아섰다. 여기저기 서 수근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노골적인(그러나 안 노골적인 척 하는) 주목의 대상이 된 시나는 불안 한 눈으로 루드랫을 보았다. 하지만 루드랫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었다. 시나의 손을 쥔 손아귀에 약간 더 힘이 들어갔을 뿐. 포커 페이스... 시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시나도 루드랫처럼 당당한 표정 을 짓기로 했다. 여기서 겁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죄지은 것도 없는 데. 시나는 딱딱한 표정을 짓고, 등을 쭉 폈다. 그리고 바로 걸으려 애 썼다. 하지만 시나의 이런 태도가 사람들에게 어떤 안정(?)을 제공한 듯, 여 기저기서 더욱 노골적인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어머... 당당하군... 믿을 수 없어." "그럼, 저 옆에 있는 소년 같은 아이가, 그의 종속자인가요?" "...그렇담... 그... 마노테..." "어떻게 그럴 수가... 저 루이트의 위치라면..." 그때, 짜증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럽군. 여기가 시장 바닥인가! 아티스트! 어서 이들을 썩 전송하 도록 해! 에잇! 거치적거리긴!! 비켜! ....어이, 거기! 잠깐 서도록 해!" 앞쪽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일어났고, 갈라진 사람들 사이로 한 남 자가 걸어왔다. 그 크고 거침없는 목소리에 시나는 루드랫 옆에서 고개 를 내밀었다.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걸어오 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시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맙소사--! 저것이 정말 인간의 외모란 말인가!! 엄청나다!' 강렬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붉게 타는 듯한, 곱슬거리는 머리카 락은 허리까지 늘어져 있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렇게 멀리서 보 기에도 눈동자가 검붉은 빨간 색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눈과 머리카락이 세트로 새빨갈 수 있단 말인 가.(유리마 부인의 눈도 빨갛긴 했지만, 유리마 부인은 그래도 머리칼 은 갈색이었다.) 희한(괴상 쪽에 가까운)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한 밤 중에 만 났다면 귀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시나와 루드랫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루드랫은 남자의 외모에는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나. 저분은 아마,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리시즈 님일 거야. 내가 인사할 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나 있 어. ...한마디도 하지 마." 파이오니온?!!!! ...하긴. 열 두 세계나 있다고 했고, 세계혼으로 그 열 두 세계의 파 이오니온이 전부 다 이곳에 와 있다고 했으니까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저런 새빨간 사람이 왕이라니...! 레겜과는 전혀 분위기가 틀리 다. 시나는 실수하지 않도록 황급히 루드랫의 말대로 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자기 외모만큼 활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 소리를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분명 그는 목소리도 새빨갛게 불타는 색일 거다... "흥!! 기다린 보람이 있... 아티스트!!! 좀 더 빨리 빨리, 이들을 전 송하도록!!!" 주위에 힐끔대며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율르스는 짜증을 내며 명령했다. 그러자 헐떡이며 따라온 하노크가 율르스 뒤에서 말했다. "칼리안 님... 제발, 체통을 지키시고... 좀 더 점잖게 말씀을..." "시끄러! 시끄러!!" 손을 휘저은 율르스는 명령했다. "남자! 고개를 들도록. 그러니까- 그대가, 레이형을 찾아냈다는 말이지?" "힐라토 레이서스님이십니다." "시끄러! 저리, 떨어져! 하노크! 아니면 자네 먼저 성전으로 가든지!" 그리고 그는 그 불쌍한 노인을 완전히 무시하고 루드랫에게 말했다. "흥...! 남색 눈동자라." 율르스는 빙긋 웃었다. "힐라토 상급 루이트의 표식인가. 그래서 레이 형을 찾아낼 수 있었나?" 루드랫은 한참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예,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율르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웃었다. "하! 우습군. 얼마만큼의 자질이기에? 자네에 대한 시시한 말들은 많 이 들었지. 하지만 레이형을 찾아냈다는 말에 자네의 자질에 흥미를 갖 게 됐는데...! 루온 루파르테나, 내 누나도 레이형을 찾아내지 못했으 니까." 그때, 율르스의 뒤에서 매우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르 스. 일부러 그런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내가 본격적으로 뛰어들 면,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즐거움이 줄어드니까." 율르스는 휙, 뒤돌아보았다. "에... 누님? 아직 성전으로 안 가셨어 요?" 칼리스나는 방금 율르스가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아, 억지로 웃었다. "호호... 율르스가 갑자기 이쪽으로 걸어가기에. 호호...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소개 좀 해줘요, 율르스." "소개는 무슨. 나도 지금 봤는데. 게다가 누님도 알잖아요. 레이형을 찾아낸 자. 어제도 봐 놓고." 칼리스나는 미소짓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호호... 율르스. 그래 도 격식이 필요할 때가 있죠. 아무튼... 그러고 보니 그대는 어제의 그 자이군. 그리고..." 칼리스나는 뒤쪽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나를 유심히 보았다. 두꺼운 모피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상당히 마른 몸매의 소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별로 매력적인 모습이 아닌... 칼리스나의 입매에 미소 가 감돌았다. 칼리스나는 옆에 있는 시녀장에게 속삭였다. 시녀장이 말했다. "거기 뒤에 아가씨, 고개를 들라는 스온 칼리스나 님의 명령입니다." 그 말에 시나는 잔뜩 긴장했다. 이렇게 지적을 받아 고개를 든다는 것 이 무서웠다. 하지만 높은 사람의 명령이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본 것은, 새빨간 눈동자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타 고난 외모가 아름답기보다는, 몸가짐과 옷차림에 바른 교육을 받고, 잘 가꿔져서 나오는 우아한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은 분명, 사람의 눈을 끌 만큼 빛나는 아름다움이라 시나는 감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시나의 그런 기색을 눈치 챈 칼리스나는 생긋 웃었다. 레이서스를 찾아냈다는 말에, 레이서스라고 생각했던 남자를 차 버리 고 다른 이들과 함께 베란다로 갔다. 그리고 그때, 칼리스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들이 가기 전까지, 레이서스는 베란다에 분명 이 소녀와 단 둘이 있었다. 그 어둠 가운데에. 칼리스나는 그걸 안 순간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 기우 였는지도 모른다. 칼리스나는 미소를 짓고 턱을 들었다. "...내 '약혼자'를 찾아냈다고 하기에, 한 번 와 봤지. 어떤 자들인가 하고. 율르스, 난 먼저 가겠어요. 율르스도 늦지 말도록 해요." 뭔가 앞과 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칼리스나는 그렇게 말한 후 시녀 를 이끌고 가버렸다. 시나는 칼리스나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레겜한테 약혼녀가 있다고!!!!!! 그것도 저렇게 예쁜 공주님....!!! ...하긴... '파이오니온'에다가... 그렇게 친절하고... 그렇게 잘 생 겼으니까...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하지만,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으윽...!!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레겜이 날 얼마나 비웃었 을까...!!!'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있는데, 율르스가 말했다. "...흠. 누님이 하는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어. 뭐, 하여튼." 율르스 는 루드랫과 시나에게 다시 주의를 돌렸다. "나도 레이형을 찾으려고 해봤지만, 영 헛 다리만 집고 말았지." 율르스는 씨익 웃었다. "그런데 형의 예전 루이트가 찾아내다니. 엘야시온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 신 건지 아주 궁금하다니까. 하지만 그런 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시험 이나 해볼까." 그러더니 율르스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에서 빠르게 빼냈다. 그리고 그 칼끝을 루드랫의 목에 댔다. 여기저기서 놀란 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율르스는 칼끝으로 루드랫 의 목을 더욱 깊숙이 찌르며 말했다. "네 과거를 안다. 내 매형 될 사람에게, 아주 무례한 일을 행했다는 것도. 내 나이 어릴 때였으나, 지금도 약간 기억이 나지. 그때 생각했 던 것 중 하나는. 어린 마음이었지만 네 행태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분노였고, 내게 어떤 힘이 있다면 단칼에 널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율르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현재. 난 신께서 주신 그 힘을 갖고 있지. 어떤가. 지금 당 장 죽어도 불만 없겠나?" 하노크가 놀라서 말했다. "카, 칼리안님...! 이런 일은..." "닥치고, 뒤로 물러나라! 하노크! 내가 하는 일에 끼어 들지 마라!" 하노크는 평소와 비교해 너무나 진지한 주인의 말투에 놀란 얼굴을 지 었다. 율르스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하노크는 루드랫을 걱정스럽게 본 뒤, 뒤로 물러났다. 주위의 귀족들은, 성전으로 텔레포트를 주도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다른 때보다 훨씬 일을 빠르게 하는 것 같아 혀를 차며 욕하는 것 외에 는, 침을 삼키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시나는 깜짝 놀라 공포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실내에서 갑자기 칼을 빼들다니, 도저히 정상인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위 협만 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설마 진짜로 찌를 리야, 라고 생각하던 시 나는 다음순간 새파란 얼굴이 돼서 소리쳤다. "무슨 짓을...!!" 칼리안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루드랫의 목을 칼로, 그었다...! 매우 느 린 동작이었지만 그것이 더 끔찍했다. 시나는 처한 상황을 생각할 틈도 없이, 앞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왜 이러는 거예요!!! 관둬요!!" 루드랫이 화를 내며 시나를 제지했다. "뒤로 물러나 있어!" 하지만 율르스는 이미 시나를 보았고, 불쾌한 낯을 지었다. 그 놀란 얼굴은 지금까지 거기 있는 줄도 몰랐는데, 겨우 눈치 챘다는 식이었 다. "...뭐야... 이건." 율르스는 루드랫의 목에서 칼을 거두고, 싫은 눈을 지었다. 그 노골적 인, 더러운 것을 보는 눈에 시나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그 자리에 빳빳하게 굳었다. "...뭐, 이런 것이 다 있지? 정말로, 건방지군. 난 마노테라는 걸 처 음 봤지만, 너처럼 건방진 것이 그것인줄 몰랐다." 시나의 눈이 커졌다. 레겜 때문에 '파이오니온'에게 갖고 있던 좋은 이미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시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율르스를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이 하노크의 눈에 들어왔다. 하노크가 준엄하게 말했다. "뭐냐, 여자!! 고개를 숙여라!! 명령도 없는 데, 감히 고개를 똑바로 들고 파이오니온을 대면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냐!!" 시나는 그런 하노크의 말에, 새파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였고, 루 드랫은 목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안 하고, 시나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부디 제게..." "됐어! 마노테에게 뭘 기대하겠어. 흥...! 마노테오나에 살아왔다 길 래, 얼마나 비천해졌을까 구경하러 왔더니 생각보다 더하군. 저런 걸 종속자라고 데리고 있다니..." "...죄송합니다." 루드랫은 무뚝뚝하게 사과했다. 그 말투에 율르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 율르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한 루드랫을 찬찬히 보고, 자기 검 을 보았다. 그는 칼끝에 보일 듯 말듯 묻은 피를 보고, 인상을 썼다. "흠... 고개를 들어라."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루드랫의 눈을 들여다본 율르스는 갑자기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별로, 죄송한 눈 같지 않은데." 루드랫의 눈이 가늘어졌다. 율르스의 지적은 정확했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냉랭하게 다시 한 번 더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 는데, 갑자기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됐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관두고. 내 말에나 대답해봐. 아까 내가 칼을 들이댔을 때, 꿈쩍도 안 하더군. 태연한 눈빛하며. 뭐 야? 그토록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나?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 어? 왜 피하지 않았는지 솔직히 말해봐라." 루드랫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시험해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기대하셨 던 대로... 약간은 당황했겠지만."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그대는 정말 배짱이 좋군!!! 하하... 아무튼, 재미있는 일이 다." 율르스는 다가와 루드랫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 네가 아 까, 검을 피한다거나, 신음이라도 냈다면... 널 처단하는 것을 정말 심 각하게 생각해 봤을 거다. 그런 정도를 무서워한다는 건, 루이트도 아 니고, 그렇담 너 같은 건 죽는 게 마땅하니까." 율르스는 웃음을 그치고 시나를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너 같은 자가 어떻게 저런 걸 데리고 있는 건가, 하는 거 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음... 루온 루드랫, 잠시지만 네 덕분에 즐거웠다. 나중에 사냥이라도 같이하면 좋겠군. ...그럼 이만." 그리고 율르스는 왔던 대로 질풍처럼 사라졌는데, 그 뒤를 따라가며 그의 시종장이 심장이 어떻고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 리는 더욱 크게 투덜대는 율르스의 목소리에 묻혔고, 덕분에 루드랫은 이따 오후에, 자기가 칼리안 파이오니온에게 '하이 포션'을 받게 되리 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상황을 다 지켜본 귀족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 알았고, 이번엔 한시라도 바삐 성전으로 가, 자신들이 본 광경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길 원했다. 루드랫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나!"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새파란 얼굴을 보고 루드랫은 화가 나서 말 했다. "예전에도 여관에서 말한 것 같은데! 상류 계급에겐 절대 덤벼들 지 마!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루드랫의 그 말에 시나는 분노한 눈을 지었다. "그랬죠!! 하지만 그때도 말했듯, 그런 건 싫어요!! 그 사람은 드랫을 죽이려 했다고요!!" 루드랫은 한숨을 쉬었고, 천장을 보았다. 파이오니온을 '그 사람'이라니. 필연코 궁정을 떠나 살아야한다. "오늘은 '엘의 날'이야. 설혹 저 분이 날 정말로 죽이려했다고 해도. 오늘, 이 장소에서는 아냐. 왜냐하면 어떤 왕족... 심지어는, 엘야시온 님이라도. 엘의 날에 타인을 살해하는 자는 '피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시나는 잠깐 동안, 그 말을 이해 못했지만 겨우 납득했다. "뭐라고요... 그럼... 아까 그분이 한 행동은 정말로 단순한 위협일 뿐이었어요...? 하지만, 진짜 피까지 보게 만들고..." "피 약간 난다고 죽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했던 행동들이 더 죽음에 가까워. 왕족이 날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네가 아무리 말려도 틀림없 이 죽일 테니까. 너 같은 행동은 상대의 분노만 부추길 뿐. 그러니, 상 황도 모르고 함부로 나서지마. 알겠어?" 루드랫의 그런 말에, 시나는 인상을 쓰고 묵묵히 있었다. 하지만 마지 못해 대답했다. 루드랫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일을 크게 만들 뻔 한 것이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괜히 나서서."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그런 시나를 보는 루드랫의 눈매가 누그러졌 다. 사실은, 그도, 안다... "확실히 넌, 이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냐. 하지만...," 시무룩해 있던 시나는 루드랫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해서, 고개를 들 었다. "앞으로는, 네게 어울리는 곳에서 살면 좋을 거야. 좀 더, 자연스러운 곳에서... 그러면 나도... 그러니 그때까지는 목숨을 잘 보존하도록 해. 이런 곳에서 죽고싶지 않다면." '그러면 나도, 네가 용감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할 수 있겠 지.'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계속)==================================================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지금, 나한테 질문하는 독자들은 나쁜 사~람...!!!"(TT) 대답할 여력도 없고, 하고 싶어도 생각할 공간이 없어서 안 됩니다... 게다가, 그냥 꾸욱... 참고 읽으시면 본문 중에 해답이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핫핫...^^ 나중에... 다 끝나면, 질문해 주시길... 그럼,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대답하고 대답하지 못할 것들은 그렇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요, 전 게시판에 쓰여진 글들을 정말로 재미있게 봅니 다.^^; '엘야시온,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든지, '내 멋대로 엘 야시온'같은 거.... 제가 생각하는 전개와 틀리면 틀린 대로, 재미있 고, 맞으면 맞는 대로 신기합니다...^^; 잡담할 여력이 안 돼서... 일일이 다 표현은 못하지만... 그래도, 언 제나... "아아.. 이 얼마나 재미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 슬플 때는 말머리가 틀려 있을 때인데... 말머리가 틀려있으면, 가슴이 내려앉죠... 예전에, 말머리 틀려가지구 못 본 엘야 관련 글이 몇 개 있는데... 진정, 반시간 간격으로 들어와 체크해야 하나, 하는 비장한 마음까지 들더군요. 요즘도, 말머리 틀린 글은 가슴 두근거려가며 봅니다.(지워질까 봐...--;) 형식...[엘야/독자/잡담]...외에도 여러 유사품... [엘야/독/잡] ... [엘야/독/잡담] ... [엘야/독자/잡]... '엘야/독자'...는 안돼는 걸로 압니다.(--;) 제 글에 대한 잡담을 이젠 안 쓰신다고 하셔도...(--;;;;;) 이건, 다른 글 쓸 때도 써먹을 수 있으니까... [어화둥둥(?)/독자/잡담]...식으로.^^ 알고 계시면 좋으리라...^^ <공익광고... 엔.^^> 추신: 힘: 3 민첩성: 3 매력: 5 지력: 4 꼭 15점 만점이라면, 이 정도 되지 않을까...하는...^^ 추신2: 슬기야, 힘내...! 단어 외우는 것이 재미있다니, 좋다.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들 더 많이 만나길 바래...^^ 메일은 열심히 읽고 있음...^^ 추신3: 제노사이드라... 나중에 꼭 찾아서 보겠습니다.^^ 추신4: **님!!!!! 우웃!!! 굉장해요~!!!! TT '루나틱 잡기단'을 알고 계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우웃!!! 거기다 그 많은 정보까지~!! 존 경, 존경~!!! TT 그, 여러 만화들... 보내주신 메일을 참고로 해서, 일본 헌 책방을 뒤 져서라도 보고 싶네요...^^(실현 가능성은.. 소숫점 이하일지 모르지 만... 어쨌든 그 정도로 기뻤습니다. 졸다가 메일을 받았는데, 꿈꾸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 어린 시절 봤던 오래된 만화들 이야기라... 아~ 그리워라~ ^^) 일주일 뒤에 결혼이시라니...!! 예쁜 신부가 되시길 바라고,(멋진 신 랑이신 건 아니겠죠..--;) 꼭,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해피 웨딩..^^ 음... 그리고 파일은, 보내주신다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넘 기쁩 니다.^^~* 추신5: 이름 지어달라고 하셨던 분... 몇 주일을 생각해 보다가... '멜리'는 어떨까요? ^^ 멜리는 그리스어로, '꿀'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렇군. 음...) 부르기도 좋고.. 아님.. '토파즈'의 그리스어인, '토파지온'이나...^^ 음... '별'이라는 낱말도 괜찮죠. 히브리어로, '코카브'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로는 '아스테르'...^^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25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08 21:54 읽음:1344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14 베쓰-엘 카할의 '바깥뜰'은 붐볐다. 많은 사람들이 서서 웅성대고 있 었고, 예배(?)를 끝내고 돌아서니 한층 더 소란한 것 같았다. '시장 바닥 같네.' 오전에, 붉은 파이오니온이 홀을 가리켜 '시장 바닥'이라고 말했지만, 홀은 여기에 비하면 사원 같을 정도다. 마을에 있는 카할에서 그랬던 것처럼 규칙과 함께 어느 정도의 경건함을 기대하고 있던 시나는 최고 의 카할이라는 이곳이 오히려 더 부산스럽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지만, 루드랫의 설명으론 이곳은 '바깥뜰'이어서 그런다고 했다. 왕족들이나 귀족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안쪽은 이곳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라고 했 다. 그러고 보면, 주위에 왕족이나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 다. 일루티온 계급쯤으로 보이는 시녀나, 시종들, 그 외에는 여기저기 무 리 지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주로 장 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나는 안쪽 문을 들여다보았다. 루드랫과 시나는 방금, 문 곁에 있는 헌물함에 금화를 넣고 안쪽을 향하여 절하고, 몇몇 기도문을 중얼거렸 다. (물론 루드랫 혼자서 했다. 시나는 기도문을 모른다.) 기도문 외우 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기는 했지만, 절차는 간단했다. "흠... 그럼, 저 안에는 사제들이 있다는 말이죠? 두루마리도 읽어주 고, 노래도 불러주는... 난 그런 예배가 더 좋은데. 다음부턴 안쪽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요?" 루드랫이 대답했다. "좋겠지." 시나는 기뻤다. "그럼 방금 그 기도문, 나까지 외울 필요는 없죠? 마 을 예배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루드랫은 코웃음 친 뒤, '우스운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대답을 함으 로서 시나에게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다섯 살 어린애들도 다 외우고 있는 기도문인데... 가장 간단한 것도 모른다니, 어이가 없어." '이 세계 애들은 머리가 아인슈타인처럼 좋나보네. 그렇게 긴 걸 어떻 게 외운단 말이야. 어휴~! 차라리 몇 시간 동안이나 두루마리 읽는 걸 듣는 게 낫겠다!' 루드랫이 가르쳐 주겠다고는 했지만, 끔찍한 저녁식사 시간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그들은 뜰을 거닐었다. 바닥은 갈색 모래로 되어 있어 거닐 기 편하지는 앉았다. 점심 무렵이라, 성전 벽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음 식을 사서 구석에 서서 먹었다. 음식은 거의 공짜라고 해도 좋을 정도 로 쌌는데, 또한 무척이나 맛이 없어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진리를 실 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점심은 이게 전부고 시종이나 시녀들도 쉬고 있기에, 궁전에 가도 음식은 안나온다는 말에 맛있게 먹는 수밖에 없었다. 바리스에서 첫날 아침 먹었던 빵을 연상시키는 딱딱한 빵을 씹 으며 시나는 천장을 보았다. 성전의 천장은 무척이나 높았고 벽 높은 곳에는 장미창이 달려 있었 다. 기대고 있는 벽은 차갑지 않았다. 그들은 아티스트들이 다시 '게이 트'를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몇몇 사정 때문에... 이번 회에는 짧네요. 토요일 날 뵙겠습니다.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32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11 23:17 읽음:1283 관련자료 없음 ----------------------------------------------------------------------------- 아침나절, 시나와 루드랫은 아티스트들의 지시대로 바닥에 그려진 둥 근 원에서 비켜나 다른 곳으로 갔다. 그들이 둥근 원(복잡한 문양으로 그려진)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그곳에선 또 다른 사람들이 모습을 드 러냈다. 젤리처럼 투명하고, 물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잠깐 사이에 불 투명해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시나는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자신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투명해지는 느낌을 인식할 수는 없었다. 땅 밑으로 현기증 나는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혹은 공 중으로 현기증 나도록 빠르게 들려 올라가는 느낌뿐이었다. 놀이공원 에서 놀이기구를 탔을 때처럼. 그러나 놀이기구에 탔을 때처럼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조금만 그 느 낌이 길었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참으로 짧은 순간이 었다. 아티스트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나가 아티스트에 대해 갖고 있던 나쁜 이미지- 인딜 동굴에서,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 럼 보였던 아티스트-와 '진(辰)'이라 불리는 원에 대해 갖고 있던 나 쁜 이미지는 많이 쇄신될 수 있었다. 솔직히, 텔레포트인지 뭔지 상식 적으로 생각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원 위로 올라가야 한 다고 했을 때는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인딜 동굴의 일은 결코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떠난다고 해도, 그건 되도록이면 잊어버리고 싶은 매우 나쁜 추억으로 남을 것 이다. 하지만 궁전의 홀에 있던 여섯 명의 아티스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얼굴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때문에 어떻게 보면 매우 오만하게 보여, 사람들보다는 자신들의 원에 더 많은 관심을 쏟 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매우 믿을만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텔레포트 하는 사람을 안심시켜주는 미소 따위, 지 을 생각도 안하고, 이게 어떤 원리인지 설명도 안 해주고, 침묵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기만 하는 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하지만 그 원 에 올라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티스트에게 신경 쓰지 않고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시나도 그렇게 하려 노력했다. 저 장미 창과 같은 도형 위로 사람이 두셋, 올라가면, 아티스트들은 작게 뭐라고 중 얼거렸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그건 매우 쉬워 보였다... 그러나, 시나와 루드랫이 원으로 올라갔을 때, 아티스트 한 명이 묘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고, 그것을 쥐었 다 편 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래서 그들 둘은 자리를 바꿨다. 하지만 자리를 바꾼 아티스트 또한 전에 사람과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물러났고 거기 있던 대여섯 명되는 아티스트들은 이제는 모두다 모여 곤란한 얼굴로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이,(주로 일 루티온 계급의 시종들이나 시녀들) 이상한 표정으로 그들을 주목할 때 까지 그렇게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나와 루드랫을 쳐다보고 원을 점검하고, 허공을 보았다. 시나는 그들을 보고, 그것이 자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지레 걱정 을 했다. 아무튼 자신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니까, 이 원이 뭔가 고장 을 일으킨 건지도... 그와 동시에, 시나에겐 한 기억, 혹은 세포 속 깊은 곳에 새겨진 흔적이 떠올랐다. 낡은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오래 전에 빛 바래 버린 풍경화를 보는 것 같은, 버석거리는 한 구절이었 다. 말(言語)은. 의지를 실현하는 화살이며 하늘의 창고를 여닫는 열 쇠이다. 시나는 불안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생각했다. [내게, 힘이 있다면, 난, 곤란해하고 있는 저들을, 기꺼이 돕겠 어....] 바로 그 순간, 한 아티스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머지 아티스트들 또한 원을 보고 손을 쥐었다 피고, 허공을 본 뒤, 마침내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됐군, 잘 됐어.'라는 미소였다. 그리고 시나는, 그들이 미소짓는 것을 보고 퍼뜩 놀랐다. 그리고 놀 란 자신에게 또 놀랐다. 왜 깜짝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몹시 엄숙 한 사람들 같았는데 웃다니, 그것에 놀랐는지도 모르고, 이런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우스웠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진하고 강렬한 그 언어... 그러나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시나와 루드랫은 이곳, 베쓰-엘 카할로 전송되었다. 시나는 장미창을 보며 말했다. "아침의 그 원 말이에요. 정말 편리해 요. 그런 것만 있으면 특별한 탈 것 없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거잖아 요. 루드랫 말대로라면 목적지에도 원이 있어야 하는 거지만, 그래 도..." 루드랫은 묽고 따뜻한 수프를 한잔 더 사서 시나에게 건네주고 자신 을 위해서도 한잔 더 샀다. 별로 맛없는 빵에 비해 양파와 양배추로 만든 수프는 맛이 좋았다. "흠... 맞아. 이런 것에 익숙해지면 아티스트들 없이는 못 살 정도 로, 아트란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주지... 한 예로, 카이러스 계 열의 아티스트들이 힘을 못 쓰게 되고 나서.." 루드랫은 수프를 마셨 다. "...아침에, 사람들을 전송한 아티스트들은 십중팔구 힐라토 계열 의 아티스트들일 거야. 그들은 텔레포트를 하려면 특별한 진을 그려야 하거든. 하지만 카이러스 계열의 아티스트들은 훨씬 더 자유롭지. 어 떤 진도 필요 없이 어디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전송할 수 있으니까. 그런 그들이 힘을 잃게 되고, 그들의 힘을 담은 아티팩트마저 소용없 게 됐을... 때..." 루드랫은 말을 멈췄다. 그는, 말을 하던 도중, 지금 자신의 말과 과거의 일 속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 그래서요? 소용없게 됐을 때, 어떻게 됐는데요?" 루드랫은, 천천히 말했다. "카이러스의 아트... 그건, 아티팩트마저 소용없게 돼버리고. 대신 대체 아트들을 찾아내야 했어. 텔레포트에 대한 것은, 힐라토 아트 쪽 으로...! 그러므로... 이런! 왜 아직까지... 왜 그걸, 한 번도 깨닫지 못했지...!" "...?" "시나! 예전에 인딜산 동굴에서의 일 기억나? 그때 어떻게 동굴로 이 동했지? 분명히 말로 이동하진 않았어. 안 그래?" "음... 몰라요. 전에도 말했듯, 난 그때 일은 기억 안나요. 하지만 그때 드랫이 그랬잖아요.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던 건 아마도 텔레포트의 아티팩트를 쓴 것 같다고요. 내가 '제사' 어쩌고 하니까... 드랫이, 아티스트는 절대 그런 식으로 힘을 얻지 않 는다고 했잖아요. 그들은 '다른 자들'이라고..." 루드랫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맞아. 그들은 '다른 자들'이지." 다른 자들... 곧, '적(Enemy)'. 아티스트이든 인간 사냥꾼이든, 그들의 직업은 주목할만한 거리가 못 된다. 또한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더라도... 사실은 그것마저도 중요하 지 않다. 인딜 마노테오나에서. 이것이고, 저것이고 귀찮다는 생각뿐 이었다. 올 테면 오라는 생각으로, 닥치면 해치우겠다는 식으로 더 이 상 고민하는 것도 관뒀다. 그건 이상하도록 적극적인 무기력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그 들은 적이고, 그 적은, 반드시 다시 온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크고 거대한 것. 루드랫 자신의 인 생, 과거에 큰 공동(空洞)으로 검게 존재한다. 그 공동. 자신이 인간 이고, 남자라는 사실이 당연한 것처럼, 루드랫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적'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제 와서야 겨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루드랫은 눈을 크게 떴다. 왜, 난, 이토록, 내 '적'에 대해 확신을 하는 거지? 왜 그러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그에 대한, 적극을 가장한 소극적인 태도만을 취하는 거지? 왜 그들의 정체를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못한 걸까? 너무나 당연해서? 어둠이 가라앉는 날은 매일이지만, 그 어두움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날은 매우 적은 것처럼? "드랫?" 시나가 말했다. "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아요." "시나, 다시 한 번 더 기억해 보겠어? 인딜 동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 는지. 그때는 어리석게도, 그냥 넘어갔지만, 그 많은 사람들과 말까지 이동시키자면 꽤 강력한 진이 필요했을 텐데. 그런 것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아티스트라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그려야해. 그래서 아티팩트 를 사용했다고 생각했지만... 아티팩트를 사용했다면 더욱 말도 안 돼 지. 말했듯, 카이러스 아티팩트는 사용 불가야. 텔레포트에 사용 가능 한 아티팩트는 힐라토의 것뿐이고. 그러니까 아티팩트를 갖고 있더라 도 그 아티팩트로 '진'을 그려야 하긴 마찬가지라는 말이야. 그런데도 난 '카이러스 아티팩트'를 생각하고 있었어. 아무런 진도 없이, 대단 위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전송 할 수 있는...! 그런 건 이제 사용할 수 없는데. 맙소사...! 난, 왜 이렇게 어리석었지! 힐라토 아티팩트로는 말 같은 커다란 동물까지 함께 텔레포트 할 순 없어! 그런 걸로 그릴 수 있는 진이란, 겨우 한 사람 이동시키는 것이 고작일 테니. 그렇다 면 그들은 아트의 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움직인 거야! 도대체 어 떤 힘을 사용해서, 그렇게 단 시간 안에 이동한 거지." 새삼스러운 이 화제에 불편해 하며, 시나는 말했다. "기억해 보라고 요? 하지만... 이동 방법에 대해선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음... 기술의 발전 같은 거, 아닐까요. 기술적으로 발전한 아티팩트가 나와서, 말까 지도 이동할 수 있는 거겠죠, 뭐." "기술? 발전...? 아트가?" 루드랫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부분에 대한 최신 정보를 들은 것이, 20년 전이야. 그러니 텔레포트에 관련한 그 이상의 유용한 지식을 깨우치려면 자우에 있는 힐라토 메이지 아티 스트들이 백 년 이상 연구해야 가능할 걸." "백 년? 정말이요? 굉장히 오래 걸리네요."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것은 상 상이 안 간다. 아무리 어려운 거라도 십 년 정도면 개발할 수 있는 데. "그럼 잘 모르겠어요. 동굴에서의 일밖엔 생각 안나요. 거기 일은 다 시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러고 보면, 동굴 안엔 '진'이 있었으니까, 그 도바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분명히 아티스트 같은데. 사람들이 '아 트' 어쩌고 하는 말도 분명히 들었고. 하긴... 하지만 그 '진'은 이런 텔레포트에 사용하는 진은 아니었지... 나를 제물로 바치려고 했으니 까." 시나는 그 끔찍했던 기억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아무튼, 그 일은 생각하기도 싫어요. 학교에서 배운다는 말을 못 들었으면 난 아직까지 도 이 세계에서는 아티스트들이 그런 식으로 아트를 익히는 줄 알았을 거예요. 키르마는 나를 전혀 모르는 척하고... 혼 강가에서 만났을 때 도."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무서웠어요. 정말로." 루드랫은 시나는 보고, 말했다. "...뭐라고?" "무서웠다고요. 레겜... 아니,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그 검은 차양 의 마차로 끌려가 지금쯤 제물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럼." 루드랫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럼, 그 혼 강가에서 다쳐온 것이...!! 그들의 짓! 왜 그 이야기를 안 했지?!!" 그런 질문을 받자, 시나는 당황했다. '왜'라니? "...말할 틈이 없었 잖아요." 게다가 그런 나쁜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 제일이다. 잊어버리면, 더 이상 무섭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루드랫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무슨 소리를!! 아무리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해도, 생명에 관련 된 일인데, 말할 틈이 없다니!!" "하지만... 드랫은, 그거에 대해 별로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그래 서..." "그분이 설명을 했기 때문이야!" '죄송합니다. 한 번 더 묻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까는 설명을 미처 듣지 못해 몹시 궁금합니다. 시나는 어째서 저런 상처를 입은 겁 니까?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해 칼을 맞았다니. 그때 상황을 알려 주십 시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네가, 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냐?' 루드랫은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너무 많은 거짓 말이 있었고, 그것은 이미 밝혀졌으니까. '...2주전일 뿐입니다. 얼음의 숲에서. 그녀가 몬스터에게 당할 뻔한 것을 제가 구했습니다.' '은혜의 법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는 뭔가를 납득한 듯 했고, 쓴웃음 지었다. '그랬더라 도. 네 아내는 너를 무척 좋아하고, 따르는 것 같더군. 나와 있으면 서, 내내 네 이야기만 했으니까. 너는 어떤가?' 루드랫은 레겜이 왜 이런 것을 묻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 답했다. '시나를, ...좋아합니다.' '그럼.' 그는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니, 그 관계는 지켜줘야겠군. 더구나 엘의 선의로 맺어진 관계인데.' 레겜은 일어나며 말했다. '...괴한들은 날 속이고 네 아내를 끌고 갔 다. 그래서 난... 숲지기에게...' 하지만 레겜은 더 이상 말을 못했 다. 루드랫이 다시 물었을 때까지. '숲지기라니. 어떤 숲지기를...' '아냐.' 레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이건... 그 러니까...' 레겜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듯, 이리저리 말을 돌 리다가 루드랫을 보았다. '혹시, 넌 얼음의 숲에서 만나기 전, 네 아 내의 과거에 대해서 아나?' '모릅니다.' 그러자 레겜은 묵묵히 서 있었고,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네 아내는 마노테온인 것이 드러나, 끌려가던 참이었다. 네 아내가 마노테온이었다는 건, 나로서도 불쾌한 일이었지. 그러니까 그들을 이 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려 했지만. 네 아내는 내가 맡 은 물건이니... 귀찮지만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지. 칼까지 맞은 건... 그건, 일루티온을 속인 대가로서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 한다. ...마차가 안 잡혀 여관에서 묵어야 했는데. ...무척, 지겨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괴한'들 가운데 키르마가 있었다고! 넌 그 이야길 했어 야 했어!! 내가 물었든 묻지 않았든!! 난 네가 혼 강에서 돌아오지 않 는 것이 그들 때문이 아닌가 줄곧 생각했지만 그분의 설명을 듣고, 그 리고 네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사건을 그냥 일회성 사건으 로 여기고 있었어!!!" 시나는 루드랫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이젠 완전히 불안해졌다. "하 지만... 하지만... 이젠 우린 왕궁에 있으니까, 안전하잖아요. 그 일 은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별로 좋은 일도 아니니까." "시나!!" 루드랫은 시나의 양팔을 잡았다. "죽을 뻔한 일이야!! 두 번이나, 고 의로 너를 노렸어!! 그들이 누군 지도 모르는데!! 그냥 잊어버리면 된 다고?!" "드랫..." 시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어!!" 루드랫은 시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이건, 이상해. 왜, 그런 거지. 너 뿐만이 아니라, 나도... 이상할 정도로," "드랫, 팔이 아파요." "젠장!!!" 루드랫은 시나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겠어." 그들이 적이라고? 루이티온이었던 자신이 '적'으로 지정했다면, 거기 엔 하나나 둘쯤 정보가 있을 것이다. 남색의 눈은 강하게 빛났다. 머 릿속을 헤집고, 주위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서, 무슨 대가를 치러서 라도 그들에 대한 것을 찾아내겠다. 그들... 인간을 바쳐, '힘'을 얻 는 그들은. 그런 종류의 조직은... 어느 책인 가에서... 하지만 그때였다. 루드랫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르는 격심한 통증에 숨을 들이쉬었다. 이 절대적인 통증. 번개가 몸 속을 꿰뚫어 지나가는 듯 하다. 그리고 둔하고 확실하게 머릿속을 마비시키며, 마치 루드랫 자신이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막대기가 되어 그를 다른 곳으로 몰아 넣는다. 루드랫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멀리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고통이 너 무나 대단하게 몰려왔다. 고통의 파도. 한 번 밀려오고, 약간의 사이 를 두고, 한 번 더. 더욱 아프게. "으윽...!!" "드랫!! 드랫!! 왜 그래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나가 루드랫을 부르고,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하지만 루드랫은 이젠, 이 통증이 명령하는 대로 되돌아서지 않았다. 이제야 그에겐 확신이 들었다. 저쪽엔, 그가 고통을 감수하며 얻어야할 가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히 그렇다. 설사, 이 안개너머 에 가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더라도, 이 두꺼운 안개 속에서 뻗 어 나온 것들은 현재에까지 이상한 굴곡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루드랫은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 속에서, 겨우 눈을 뜨고 시나를 보았다. 시나가 그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루드랫은 떨리는 목소리 로 말했다. "...넌, 이상해. 그리고 나도. 이건..." 저, 걱정스럽게 보이는 회색 눈. 아니, 그 너머에 있는 것. "난...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어긋난 일들이. 난..." 루드랫은 마치, 시나 를 처음 보는 것처럼 보았다. "...이걸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었 지. 그러니까, 난..." 그의 음성은 떨리지만, 무언가를 찾아냈기에 미미한 확신과 강함으로 차 있었다. 루드랫은 자신을 부축한 손을 꽉 잡고, 말했다. "찾아... 내겠어. 반드시. 이것이 무언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계속)================================================== 그럴듯한 말 너머에 보이는 것들이, 어느 땐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 쓴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처음엔 내 눈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 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봤을 때, 제대로 봤다는 것이 밝혀져, 이제는 시간이 지나가길 바랍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죠. 그 가운데 침묵은 미덕입니다. 가면이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쓰고 있는 가면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어느 쪽 사람들이 더 슬픈지, 잘 모르 겠습니다. 그 가면 뒤는, 안락합니까? 평안합니까? 아무튼,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들을 가지 고 누군가를 향한 어리광이나, 천박한 투정은 부리질 말길. 혼자서, 일어서서 걸어가십시오. 똑바로. 비싸든, 싸든, 화려하게 치장을 했든, 초라하든, 가면은 가면이죠. 어떤 것은 많은 공을 들였지만, 겨우 몇 개월의 시간에도 날아가 버리 는군요. 아마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수 십 년 후에야, 그것이 날아가는 쪽이, 더 비참하겠지만. 내게는 시간이 흘러가고, 당신에게도 똑같습니다. 이 땅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사라질 때까지. 진심으로, 당 신을 위한 큰 행운과, 작은 행운을 빕니다. 그건 모두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몫입니다. ...대답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웃음.)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40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15 22:02 읽음:1157 관련자료 없음 ----------------------------------------------------------------------------- 얼굴이 하얗게 되도록 아파하면서도, 루드랫은 의사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는 쉬기를 원했다. 하지만 시나는 그의 방을 나와서, 루드랫 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 다. 예전에 라단의 집에서 루드랫이 아팠던 일을 생각했다. 루드랫은 어쩌면 아직도,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오 히려 시나 자신이 더 건강할 지도. '아무래도, 힐러가 필요해. 그리고 약도. 가능하다면 힐러 라이트까 지 쐬면 아주 좋을 거야. 드랫은 눈이 안 보일 뻔하기도 했는데. 눈은 어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중요한 부위야.' 루드랫은 시나에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했다. 하지만 시나는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내가 이곳에서 의지할 사람은 드랫뿐인데. 드랫이 아프면 곤란해.'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므로, 시나는 힐러를 찾아 나섰다. 아는 힐러가 아무도 없다면 모르지만, 이곳에 와서 꽤 친해진 힐러가 있지 않은가? 그는 친절한 사람이니까... 도와달라면 도와줄 것이다. 우선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랍에서 예전에 란사드 크가 주었던 작은 패 같은 것을 찾아냈다. 란사드크는 이것만 있으면 자신이 있는 곳에 들여보내 줄거라 했다. 돌아다니지 말라고 루드랫이 말했지만 금방 갖다 올 수 있을 것이다. '두통 약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거야. 머리가 굉장히 아프다고 하는데. 나도 머리가 아파 봐서 알지. 그건 견디기 힘들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몰래 자기 방을 빠져 나온 시나는 란사드크가 말한 것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어 건물을 찾아 나섰다. 미로 같은 통로들 때문에(아무리 왕궁이라도 그렇지. 이럴 땐 표지판 같은 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중간에 헤매기는 했지만 몇몇 시종 의 도움을 얻어 시나가 있던 건물보다 훨씬 더 깨끗한(그렇다고 시나 가 있던 건물이 안 깨끗한 건 아니지만) 건물로 들어섰다. 란사드크가 말한 대로 확실히, 그 건물로 들어서려 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시종은 시나를 제지했고 아래위로 보며 신분을 물었다. 패를 보이자, 그들은 거기에 쓰여진 글씨를 보고, 그것을 검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힐러 일루티온 란사드크 님의 방은 안쪽에 있네." 꽤 무뚝뚝한 말투였는데 시나의 차림이라든지 시종도 없이 혼자서 돌 아다니는 모습으로 그리 높은 신분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란 사드크의 방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며 다른 곳으로 가지 않 도록 주의했다. 왕족들은 지금, 모두 성전으로 가 금식을 하고 있는 중이니 비어 있는 방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용히 하고, 조심 해서 다른 곳으로는 가지 말라는 주의까지 주었다. 시나는 뜻밖에도 이곳이, 왕족들이 묵고 있는 건물이라는 데 겁을 먹 었고(빨간 머리 파이오니온을 생각해서) 혹 실수라도 해서, 다른 방으 로 가면 어쩌나 생각해 그들 시종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란사드크의 방 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들은 별로 그런 생각은 없는 듯, 간단한 설명만 마치고 시나에 대한 관심을 끊었고, 자기들 이야기 를 계속 이어했다. 시나는 머뭇거리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긴... 독립심을 키워야지. 설명은 제대로 들었으니까. 재빠르게 갔다가 재빠르게 돌아와야지. 모자도 제대로 쓰고 왔으니까, 마노테라 고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거야.' 무도회에 사용했던 머리를 완전히 덮는 모자를 아직 안 돌려주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긴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중간에서 어떤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심장이 내려 앉는 줄 알았다. "뭐죠? 어느 구역을 맡고 계신 분입니까? 못 보던 분인데. 왜 제복을 안 입고 있는 거죠?" 시녀장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시나를 시종으로 착각했다. 이것저것 일이 꼬이는 것을 싫어한 시나는 아까처 럼 아무 말 없이 패를 내밀었다. 시녀는 패를 검사했다. "힐러 일루티온 란사드크 님의 패군요. 그럼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 심부름을 하는 길인가요? 란사드크 님의 방은 아나요?" "네." 시나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시녀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남자치고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늘다고 생각한 듯 했다. 그러 나 다행히 별 의심하지 않고 패를 돌려주었다. 패를 받아든 시나는 침 착하게 보이려 애쓰며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다음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시나는 방금 전 시녀와 마주쳐 놀란 덕분에 주욱 걸어가다가 오른쪽, 세 번째 복도를 돌아 네 번째 방인지, 네 번째 복도를 돌아, 세 번째 방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주욱 걸어보니, 세 번째 복도도 있고 네 번째 복도도 있어 곤 란해지고 말았다. 잠시 서서, 다시 한 번 더 시종이나 시녀를 찾아가 방을 물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방을 잘못 찾아 느닷없이 왕족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시종에게 다시 한 번 더 묻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뒤로 돌아선 순간 왼쪽으로 뻗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조각으로 된 기둥이 늘어 서 있다거나 줄무늬 대리석의 바닥 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것 등, 지금까지 지나왔던 것처럼, 그건 지 금까지도 별다를 것 없는 복도였다. 하지만 그곳에 걸린 한 장의 그림 이 시나의 눈길을 끌었다.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곳으로 다가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넓고 넓은 정원.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그 가운데 화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는, 큰 아카시아 나무였다. 굵은 여러 개의 줄기가 구불구불하게 서로를 감싸며 올라가 작은 가지 하나 하나마다, 무수한 하얀 꽃들과 싱싱한 초록빛 잎을 드리우고 있 었다. 그 밑에 펼쳐진 부드러운 잔디밭. 주위엔 그 외에도 아름다운 꽃나무들이 그 공터를 감싸듯 늘어서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이런 푸른 잎들이 가 득 찬 광경을 봤기 때문인지, 단순한 그림인데도 이 광경은 시나에게 묘한 그리움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시나는 루드랫의 말을 떠올렸다. 넌 이상해. 그리고 나도. 난...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어긋난 일들이. 난... 이걸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맹 세했지. 그러니까 난, 찾아내겠어. 반드시. 이것이 무언지. 어떤 희생 을 치러서라도. 시나는 그 크고 아름다운 아카시아 나무를 한참 보며, '자신이 이상 하다'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는데. 루드랫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혼 강에서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이 그토록 이상한 일일까? 나쁜 일 은 그냥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시나는 과거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냥 잊어버리면 좋은 일들. 그래서 잊어버린 일들. 많이 잊어버려서 이젠 무엇을 잊었 는지도 모르고 아련한 그리움만이 남은 기억들. 나쁜 기억들은 더 깊 은 곳에 묻어 버리고. 하지만 루드랫은 그걸 '이상하다'고 말했고, 시나는 그가 내린 자신 에 대한 평가를 주의 깊게 생각했다.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점점이 끊기고 밀 도가 낮다. 시나는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남들도 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상하다'면. 시나는, 저 아름다운 아카시아 나무 밑 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만큼 그림에 동화되어 깊게, 깊게, 생각했다. ...난 이상한 건지도 모르고. 그럼, 그 밀도가 낮은 시간 속에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난, 무엇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나는 안으로, 자기 안을 들여다보며 깊은 곳을 살폈다. 무언가 '이질적인 존재'를 뚜렷이 느끼고, 정신이 맑을 때, 이 생생 한 가운데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을만할 때까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거기 있어? 그때 은색 눈이 자신을 보았다. 둘은, 어둠 가운데 눈을 마주쳤다. 그 분노를 담은 눈. 증오로 빛나는. 시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눈동자 를 외면하듯, 그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난 그 자리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시나와 비슷한 키에 검은머리를 늘어뜨린 이상하게 창백하며 이상하 게 커다란, 검은 눈을 가진 소녀. 시나는 너무나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이질적이고 무서운 광경. 공기가 온통 조각이 난 것 같다. 조각 조각이 나서 분리된. 하얀 피부에, 긴 검은 머리칼, 새빨간 입술을 가진 소녀는 한 발자국 씩 시나에게 다가와 시나를 주의 깊게 보고 조금 웃었다. 그리고 고개 를 갸웃거리고, 혼란한 표정, 슬픈 표정,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차례 대로, 정해진 순서를 따르듯 지었다. 그녀는 시나에게 더욱 다가와, 시나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았 다. 시나는 움찔 놀랐다. 소녀는, 시나의 손을 자기 입술에 가져가더 니 눈을 감고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손등에 차가운 입술이 느껴졌다. "네 때가 아닌데. 내게서 뭘 원하는 거야?" 시나는 손을 빼낼 생각도 못한 채,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 다. 소녀는 고개를 들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 너는... 내 마스터, 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줘. 그러기 위해 온 거지? ...할 수 있어? 그럼, 난, 네가 원하는 걸 줄게. 어쩔 수 없지... 응...?" 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누구세요..." 머릿속에서 무언가 소용돌이치는 기분이었고, 은색 눈동자가 빛을 내 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소녀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당신은..." "아핀!! 아피네스-!" 바로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피네 스!! 언제 깨어나서...!!" 시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피네스'는 이 검은머리 소녀의 이름인 듯. 건너편 복도 열린 문엔, 방금 이 소녀의 이름을 부른 키가 큰 남 자가 서 있었다. "아핀, 도대체 누구랑 있는..." 그는 그들에게 다가오며 시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시나가 누구 인지 깨달은 순간, 그의 눈엔 놀라움이 서렸다. 시나 또한 남자의 낯익은 얼굴에 놀라서, 방금 느꼈던 기분 같은 건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남자가 못 믿겠다는 듯,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나..." 시나는 갑작스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레겜..." '레겜'이 아닌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그분이 누이동생이라고요. 그럼 공주님이시네요. 어쩐지... 저어, 참 예쁘신 분이에요." 어색한 공기 속에 시나가 한 마디 하자, 레이서스 또한 어색하게 한 마디 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나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파이오니온 님은 자신의 여동생 을 예쁘다고 생각하신다. 그런 뒤 시나는 자기가 하던 일로 돌아가 자기 앞에 놓인 찻잔에 꽃 무늬가 몇 개나 놓였는지 세었다. 세 번인가 네 번, 세는 것을 마쳤을 때, 시나는 우물쭈물 말했다. "...저어, 왕족들은 성전에서 금식 중이라고 하던데. 파이오니온 님 께서는" 시나는 '파이오니온'같은 꼬이는 발음을, 긴장한 중에도 그럭 저럭 발음했다. "여기 계셨네요." 반면 레이서스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피네스 때문 에.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있다는 소리에... 금식은 여기서 해도 되 니까." 몹시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대답에 시나는 또 한번 더 자기가 어제 고 백했던 일을 떠올렸다. '흑...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다음부터는 아무리 이상한 세계에 떨 어졌어도, 상대에 대해 잘 알아보고 고백을 해서, 이런 괴로운 상황 은...' 그때였다. "그러니까..." "네?"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 당장 일어나, 구석에 가서 서 있으라는 말을 할거란 생각이 떠올랐다. 앉으라고 해서 의자에 앉기는 했지만, 상대는 '왕'이고 시나가 앉은자리는 가시방석이었다. "일어나 서 있을까요?" "아니..." 레이서스는 시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눈을 찌푸리다가, 어색한 태도로 다른 곳을 보았다. "그게 아니라... 이 과자는 별로 맛이 없는 건가. 다른 것을 가져오도록..." "아니에요...!" 시나는 황급히 과자를 집어들었다. "맛있어요." 과자 를 입에 넣고 씹었다. 너무 달고, 목이 메어, 차도 마셨다. 그래서 겨 우 말했다. "...캑. 그러니까, 이걸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파이오니온 님..." "음..." 고개를 끄덕인 레이서스는 자리를 고쳐 앉고, 또한 자기가 하던 일로 돌아갔다. 커튼의 물결 무늬는 꽤 복잡해서 세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저 두 사람은 뭘 하는 건가.' 란사드크는 방구석에 서서, 두 남녀를 보며 불쾌하게 생각했다. 시나는 자신을 찾아 온 것이다. 힐라토 레이서스는 아피네스를 찾아 온 것이고. 그럼 힐라토 레이서스는 자기 여동생을 보고 가든지, 가기 싫으면 자기 여동생 방에 가 있으면 되는 거고, 시나는 자신에게 맡기 면 되는 일이다. 헌데 왜 자신의 거실에 앉아서, 저런 모양으로 한심스럽게 과자 맛이 어떠니, 저떠니 하고 있는 것인가? 요새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저토록 할 일이 없단 말인가? 헤르가스의 아들은 왜 저 모양인가? 답답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문득, 겐트온의 말이 생각났다. 혼 강에서 시나를 납치해 올 수 있었 는데 힐라토 레이서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엔 웬 뚱딴지같은 말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헤르 가스의 아들 녀석은, 보호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니 어찌어찌 해서 보호물이 묵고 있는 곳까지 찾아 간 것일 테고 거기서 시나와 연관을 맺었다고 해도 무리한 상상은 아니다.(그렇더라도, 파이오니온이나 되 는 녀석이 일개 마노테 계집앨 구했다는 것은 절대 못 믿을 일이지만. 벌어진 일이니, 그 외에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또 새롭다. 란사드크는 두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 았다. '뭔가... 이 두 사람 사이에, 생각해 볼만한 감정이 있는 건가?' 하지만 '감정'이라니. 그건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마노테 계집을 구했 다는 것보다 믿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므로 란사드크는 이런저런 의혹과, 불쾌감으로 속을 끓이며 서 있었고, 한 쪽 문이 열리며 마냐가 들어와 약을 가져왔다고 했을 때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리 주게." 그리고 란사드크는 뚜벅뚜벅 걸어가, 레이서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시나에게 말했다. "약이 다 됐습니다. 원한대로 두통 약인데...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지은 것이라. 몇몇 주의할 점을 알려 주겠으니, 안쪽으로..." "어... 그래요? 고맙습니다, 란사드크 씨."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차, 감사하게 마셨습니다. 파이오니온 님." 하지만 놀랍게도, 레이서스 또한 시나와 같이 일어섰고, 그는 주저하 다가 말했다. "...기다리겠다. 할 말이 있으니까." 얼마 후,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힐라토 레이서스가 정말 기다리고 있 다는 것을 깨달은 란사드크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마침내 시나에 게 약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은, 이야기도 제대로 못했군요.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시길." 꽤 오랫동안 앉아서, 약에 대한 이야기랑, 두통에 있어 주의할 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시나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에 놀랐 다. 그래도 약을 받아 기쁜 나머지 싹싹하게 인사했다. "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란사드크 씨." "천만예요. 도움을 줄 수 있어, 나야말로 기쁩니다." 하지만 그런 상냥한 말과는 달리, 란사드크는 가면 뒤로, 분노한 눈 으로 힐라토 레이서스를 보았고, 힐라토 레이서스와 아피네스와 시나 는, 란사드크의 그런 눈초리도 깨닫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났다. 시나는 레이서스와 아피네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굉장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걷는데, 시종과 시녀들이 재깍재깍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 나는 것이다. 게다가 저런 존경심 어린 표정이라니. 처음 겪는 일이 라, 은근히 우쭐해졌다. 자기를 보고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건 속 물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높으신 분과 알고 있고 지 금은 그 뒤를 따라간다니 사파리를 버스 타고 통과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파이오니온이 아까 보았던 그림이 걸려 있는 복도로 걷는 것 을 보고, 시나는 신경이 곤두서는걸 느꼈다. 아까 이곳에서 이상한 느 낌을 받은 것도 그렇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따라오라는 말도 안하고 앞서 가고 있으 니... 굉장히 민망한 기분이 든다. 그때, 이런 시나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레이서스가 말했다. "잠깐 산책이라도 하는 게 좋겠지. 아핀... 내 여동생은 몸이 별로 안 좋아서... 며칠간 계속 잠만 자다가 아까, 겨우 깨어났는데. 신선 한 공기를 쐬는 것이 필요하다고. 힐러가 산책이라도 시키라고 권하니 까." 그 힐러는 레이서스가 시나까지 끌고 갈 줄은 몰랐을 테지만, 시나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파이오니온 님은 왕족들의 산책에 왜 나까지... 불안해.'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레이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시나를 안심시키듯 미소 지었다. 그건 매우 부드러운, 시나가 익히 알고 있는 '레겜'의 미소였 다. 시나의 얼굴은 붉어졌다. '와... 진짜, 멋있구나. 파이오니온 님은. 역시 내 눈은... 고백하길 잘 했어.' 아무튼 시나는 레겜을 좋아하는 것이다. "여동생이 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군." 레이서스는 기쁜 듯 말했 다. 그의 말 대로였다. 이 크고 아름다운 실내정원에 들어왔을 때부 터, 아피네스라고 불리는 공주님은 시나 옆에 달라붙어서 생긋생긋 웃 고 있었다. "남에게 관심을 쏟거나, 미소를 짓는 건 좀체 보기 드문 일인데." 왜 그런지는 어렴풋이, 시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이 공주님 이 정신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척 예쁘지만 안색이 파리하고 살갗에도 윤기가 없다. 눈빛은 흐리 멍덩해서 이쪽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나는 때로 그녀가 정말 자 신을 보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주님은 팔을 뻗어 시나의 목을 끌어안고, "응... 아주 마음 에 들어."라는 말을 했고, 이런 공주님의 태도에 시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레이서스를 보았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반짝이는 눈으로, 시나와 아피네스를 바라보고 있 을 뿐. 별다른 제지도 하지 않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높게 뻗은 분홍색 유도화와 붉은 색의 탐스러운 장미, 짙은 향기를 뿌리고 있는 라일락 나무들 사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나무들이 어떻게 이렇게 한 자리에서, 한 때에, 한꺼번에 꽃을 피 울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오랜만에 밝은 곳에서 보는 꽃과 나무들은 흐릿하고 따뜻한 빛 가운데 흔들리고 있었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소리도 들렸다. 시나는 천장 너머, 눈부신 하늘을 보았다. 뿌연 안개 속에, 빛 가루 가 뿌려진 듯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현실 같지 않은 광경. 자신의 목 을 감고 있는 공주님의 팔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꽃보다도 달콤한.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체온은 찼다. 저렇게 황홀하지만, 차가운 대기처럼. 시나는 머뭇거리며 손을 들어 아피네스를 안아,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왕족 모독죄에 걸릴 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시나 안에 애처로움을 불러 일으켰다. 불쌍한, 불쌍한 내 아가씨...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공주님... 몸이 너무나 차요. 옷을 더 입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피네스는 고개를 들더니, 미소지었다. 붉은 입술은 곱게 벌어지고,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그런 아피네스를 보며, 시나도 미소지었다. "아까," 갑자기 레이서스가 말했다. "그림을 보고 있던데. 싯딤나무 의 그림을." "싯딤나무...? 그걸 싯딤나무라고 하나요? 우리 세계에선 그걸 아카 시아 나무라고 하는데." "아카시아? 처음 듣는 이름인데. 하지만 그것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 군. 너는 그, '아카시아'를 좋아하는지?" "어..." 시나는 생각해 보았다. 아피네스는 이제 시나의 목 부근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좋아해요. 아주.. 냄새도. 꽃도." "그렇군." 레이서스는 자기 여동생과 시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약간의 규칙은 무시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 했다. 레이서스는 진심으로 이 두 사람을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에 데 려가고 싶었다. 레이서스는 헛기침했다. "사실은. 아까 네가 보던 그 그림은 실제 풍경을 그린 것이다. 여기 서 멀지 않은 곳의 풍경이지." 레이서스는 미소짓더니, 일어나서 시나와 아피네스에게 다가왔다. "지금 거기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좋겠군. 보고 싶다면 말이야." 레이서스는 시나의 목을 감고 있는 여동생을 팔을 떼어내며, 투정부 리는 아피네스를 달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찌나 여동생에게 상냥하게 말하는지... 시나는 넋을 잃고, 그런 레이서스의 모습을 보 았다. 레이서스는 자신의 여동생을 정말로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깨질 것 같은, 얼음 조각처럼. 게다가 여동생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무척이 나 따뜻해, 시나는 파이오니온이, 비록 아픈 여동생이긴 하지만, 그녀 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파이오니온 님. 시나는 이런 '레겜'이 좋았다. 시나 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만 [레겜]이라고 부르면 눈치 못 채실 거야. 누가 알겠 어? 혼자서만 그렇게 부르는 건데. 생각까지 [왕족 모독죄]를 두려워 하며 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레이서스가 아피네스를 챙기는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실로 두 사람은 뛰어난 미남 미녀였으니, 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시 나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기운찬 마음을 먹고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놀랍게도 레이서스가 시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시나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져 벤치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걸 눈치 못 챈 듯 레이서스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다른 이들은 성전에 있으니까, 지금이 좋은 기회야." 시나의 얼굴은 또 빨개졌다. 파이오니온은 마치 자신의 여동생을 보 는 것 같은 따뜻한 눈으로 시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란사드크 의 방에서 무뚝뚝하게 굴던 모습은 이제 상상조차 되지 않았고, 시나 는 자신이 마치 공주님처럼, 그러니까 이렇게... 아피네스라는 공주님 과 거의 똑같은 대우를 받는 바람에... 자신이 아피네스라는 공주님처 럼 느껴졌다. "...파이오니온 님..." 레이서스가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시나는 레이서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벤치에서 일어났다. 레겜의 손은 따 뜻하고 편했다. "...감사합니다." 시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기뻤다. 너무나. 파이오니온이 말한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은, 그림에서 본 것 처럼 작은 분지였고 바닥엔 초록색 잔디가 잔뜩 깔려 있었다. 그 가운데 솟아 있는 나무는, 하지만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그림에 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세월을 머금어 굵고 단단해진 나무의 여러 갈래 몸통들은 서로를 의 지하며 사이좋게 말려 올라가 넓게, 넓게 가지를 펼치고, 흐드러질 듯 한 하얀 꽃송이들을 수 만개는 될 듯,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의 나란한 잎사귀들은 신선한 공기를 뿜어내며 가끔씩, 무언가 를 속삭이듯 바람에 흔들렸다. 아카시아 나무. 이렇게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워,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시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나갔다. 기억과, 추억과, 향기와, 나뭇잎, 아름다운 하얀 꽃들. 이 모든 것들 이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운 것 들이었다. 나무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시나의 붉어진 눈을 보며 레이서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시나는 저 아름다운 나무를 보고 매우 감동하 고 있었고, 그건 레이서스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시나는 조심스럽게 늘어져 내린 꽃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나무의 울 퉁불퉁한 껍질을 만지고, 꽃의 냄새를 맡고, 눈을 감고 나무의 줄기에 이마를 댔다. 시나는 거기서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식물의 그 거친 피부 아래 는, 어떤 사람의 음성보다 다정한 음성이 흘렀고, 어떤 사람의 품보다 도 따뜻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나무 옹이에 귀를 대면, 나무 는 조용히, 옛날의 그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다. 줄기마다 긴 가시가 솟아있어 어느 누구의 범접함도 용서하지 않는, 지고(至高)한 나무이 지만, 이렇게 포근하고 아름답다. 시나는 무릎을 꿇고 나무 둥치 사이 푸른 잔디에 앉았다. 참으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예전으로 돌아간 듯 싶었다. 그래서 눈 을 뜨고 뒤돌아보면. 숲 사이로, 그녀를 찾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가, 그가 오는 모습이 보일 것 같았다. 어리석은, 그러나 슬픈 기대로. 시나는 눈을 떴다. 하지만 거기 서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칼의 남자일 뿐. 시나는 눈을 깜빡이고, 좀 웃었 다. 아피네스를 거기 있는 의자에 앉혀 놓은 레이서스는 시나 옆에 와서 섰 다. "어찌된 일인지? 이 나무를 보고 감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울 듯한 얼굴이군. 무슨 슬픈 생각이라도...?" 시나는 나무에 기댔다. 힘이 쭉 빠진 느낌이어서, 이대로 이 둥치 사이 누워 한 숨 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파이오니온 님. 그냥 이곳에 오 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아까 복도에서 이 나무를 그린 그림을 봤을 때도 그랬는데... 하지만." 시나는 웃었다. "이건 그저 생각일 뿐 무슨 소 용이 있겠어요." 이제 와서. 시나는 가슴이 아픈 것을 느끼며 레이서스를 올려보았다. "이것이 싯딤나무라고 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혹시 이런 노래를 아세요?" 레이서스는 시나 옆에 앉았다. "어떤 노래를?" 아피네스는, 이곳 나무 근처에 오면 언제나 그렇듯 다소곳하게 앉아 있으 므로 당분간 내버려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좋은 노래인데, 한 번 들은 거라..." 시나는 음을 골랐다.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았다. ...싯딤나무 밑에서 널 기다렸지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당신을 찾을 수 있을까... 첫 구절을 잡는 것이 힘들었다. 음정도 불안하고 다음 가사가 어떻게 되는지 기 억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젓고 멋쩍은 미소를 지은 뒤, 안 된다고, 모르겠 다고 말하려는 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아피네스, 그 창백하고 아름다 운 공주님이... 시나의 뒤를 이어,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거칠고, 낮은 음성으 로. 이 노래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 주듯이.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당신을 찾을 수 있을까. 저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을 찾아 다녔지. 12개의 세계를 거쳐 게엔나... 저 음부의 나라에까지. 나의 환상 속에서 당신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뻐하고 사랑을 하지... 그렇게 영원 속에서 시간으로. 시간 속에서 영원으로. 당신의 모습을 난, 언제나 그리워했고 이제 난 싯딤나무 아래에서 이렇게 당신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며... 당신을 맞는다...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검은 머리칼의 아름다운 소녀... 공주님은 눈을 돌려, 시나를 보더니 미소지었다. 그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나의 뇌리엔 기억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빠르게 흩어졌다. 건방 떨지 마라!! 시나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난 너의 종 속주가 돼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렸으니까! 은혜의 법이 아니었 다면 너 따윈 이 집에 있지도 못했어! 아니 그 전에 네가 ‘검은머 리’가 아니었다면 난 네가 놀(Gnoll)에게 잡아먹히든 말든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거다!!! 고귀한 신분의 한 소녀, 그녀가 있는 곳, 바로 그곳에 그는... 그녀 때문에, 드래마는 지금도 그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요... 시나는, 저 공주님의 마스터(Master)가 누구인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 었다. 또한 루드랫이, 그토록 가슴 아파하며 생각하고, 사랑했던 소녀가 누 구인지도. 그와 동시에 또 아까처럼 공기가 조각나는 느낌이 들었다. 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겠어요... 이제야." 저 무서운 까만 눈은, 시나를 보고 있고, 미소를 짓고, 눈물을 흘리고 있 다. 가슴을 치고, 가슴을 때리는 눈물을. "드랫... 루드랫이 저 공주님을 사랑했어요... 나를 구한 것도, 저 공주 님처럼, 내가 검은머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고... 싯딤나무의 노래도, 저 공주님을 위해서 불렀어요... 루드랫은 언제나, 저 공주님 생각을 하고, 저 공주님 이야기만을 하고, 저 공주님 외에는 신경을 안 쓰고 있죠. 처음 만 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죠..." 아피네스가 노래를 부른 것에 놀라고 있던 레이서스는 시나의 이런 말에 한층 더 놀라는 얼굴을 지었다. 하지만 시나는 너무나 슬펐고, 이 괴리감 에,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심지어는 자신이 누구인지 마저 알 수 없게 되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왜...? 시나는 더 이상 서 있을 기운이 없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다면, 왜... 나는 여기엘 왔을까...?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데. 어리석은. 바보 같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어디에도 설자리는 없고, 아 무도 원하는 사람은 없고,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다. 이 슬픔. 이 괴로움만은 뿌리가 같아, 시나와 그 애는 동일하게 부르짖었 다. 그럼, 나는 왜 이곳엘 온 거지... 무엇을 찾아서. 시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깊은 곳으로 흐르 는 눈물이라, 눈으로 흐를 것은 남지 않아, 깊은 곳에서 솟아나 깊은 곳으 로 사라지는 눈물이었다. 거품처럼, 허무하고, 슬프게. 시나가 말했다. "파이... 오니온 님. 저기. 공주님이 울고 계시네요... 가서, 눈물을 닦아주세요." 하지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나는 레이서스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어 그를 보았다. 레이서스는 이상한 눈으로 시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미안. 웃고 싶어서 웃은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아까부터, 나 를 '파이오니온'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들려서." 시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물결너머로 듣고 있는 듯, 눈 도, 귀도, 모든 감각이 멍했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웃고, 아피네스를 보았다. "...게다가 아피네스가 눈 물을 흘린다니? 아핀은 울고 있지 않은데.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아 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걸. 시종일관 저런 미소 띈 얼굴에다 노래까지 불렀 으니." 공주님이 울고 있지 않다고? 시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피네스를 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는 마른 볼을 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나는 또 혼란해 졌다. 믿을 수 없는 자신의 감각. 모두 다 가짜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존재감. 형체감... 이 모든 것이 흐릿 해지는 느낌이었다.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고. 그래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렇게. "시나..." 하지만, 레겜은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어 시나는 자신의 느낌과 그 의 말 가운데, 망설이고 있었다. 레겜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아피네스가 노래를 부른 건 처음 들었기 때문에, 솔직히 놀랐는걸. 네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인가. 확실히, 그 노래는 처음 듣는 것인데... 하 하... 하지만, 언제 한 번 제대로 듣고 싶다. 아피네스의 노래도 기쁘지만, 네 목소리는 아주 듣기가 좋으니.. 네 목소리로... 하지만..." 레겜은 곤란 한 표정을 짓고 시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상한걸. 아까부터. 얼굴이... 그러니까... 점점 하얘지는군."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투명해진다'는 느낌이지만. 분명하게 눈앞에 있는 데도, 마치 공기의 정령처럼 실체감이 없는. 레이서스는 문득, 초조감을 느 꼈다. 시나는 마치, 아피네스처럼 멍한 눈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나...?" 그는 손을 내밀어 시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시나는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고, 레이서스는, 알 수는 없지만, 자기가 어떤 '막'같은 것을 건드렸 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시나는 '막' 그 너머에 있고... 레이서스는 그 느낌이 섬뜩했다. 이런 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무엇을 용납할 수 없는 지도 모르 는 채.) 이번엔 두 손으로 시나의 어깨를 잡았다. "시나...?" 레이서스는 그 멍한 눈에, 조금 거칠게 그녀를 흔들었다. "시나..!" 그러자 시나는 눈을 게속 깜빡이더니, 힘들게 침을 삼키고, 레이서스에게 말을 걸었다. "파이.. 님." 발음이 부정확했다. "내가.. 보이나요?" 레이서스는 시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논리에 맞지 않는 이상한 말 이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어쩌면 레이서스는 본질적으로 깨닫고 있었고, 그래서 애써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 채, 좀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 인 생각으로 돌아섰다. "보이냐고?" 레이서스는 시나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 맙소사. 너무 한적하고 아름다운 오후였다. 그래서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이 드는 거다. 사라질 것 같다니...! 이렇게 보이는데...! 시나의 질문. 밑도 끝도 없이 든 이 생각에 레이서스는 심한 두려움을 느 꼈다. 그는 행복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그런데 사라지는 건 참을 수 없 다. 레이서스는 자기도 모르게 시나를 끌어안았다. 무엇에든 놓칠 수 없다 는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물론, 보인다. 왜 그런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인지..." 레이서스는 기도했다. 엘이시여... 오, 맙소사. 무슨 일이지? 믿을 수 없었다. 시나의 몸은 차가웠다. 마치 연못에 빠진 아피네스를 막 건져냈을 때처럼. 그 때처럼 차가웠다. 혼 강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죽음도 삶도 아닌, 이것은 완전한 무(無)... 하지만 이런 건 말도 안 된다. 레이서스는 계속 말을 했다. "시나... 네가 어제 베란다에서 한 말을 난 계속 생각했다. 어젯밤은 잠 을 이룰 수 없었고... 난, 계속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널 힐러 란사드크의 방에서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난 너를 오늘,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레이서스는 말했 다. "그렇다면...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네 종속주가 되겠 다. 그러니, 제발... 제발, 내가 널 잃지 않게 해다오." 레이서스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왔다. "제발...! 난, 네가 필요하니까!" 갑자기 시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레겜...!" 그 울음소리와, 그 실체감... 레이서스는 안도했다. 무엇 때문에 안도한 거지, 알 수 없었지만 시나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레이서스는 엘에게 감사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시나의 종속주로서 그녀의 손을 놓지 않겠다 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던 레이서스는 눈 을 들어, 아피네스를 보았다. "아핀..." 아피네스는 자기 이름이 불리우자 미소지었다. 레이서스는 자기 품안에 있는 시나를, 자신이 붙잡은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에게 보여주었다. 진주 상인이, 평생을 걸쳐 찾아 헤매던 진주를 드디어 찾아 기뻐하며, 자 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사고,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그것을 자 랑하는 것처럼, 가장 빛나는 보석처럼 그녀를 그렇게 여기며, 레이서스는 자신의 누이동생에게 그녀를 자랑했다. "아핀... 봐라..." 레이서스는 말했다. "이 소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40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15 22:03 읽음:1183 관련자료 없음 ----------------------------------------------------------------------------- 루드랫은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났다. 침대 안은 컴컴했다. 공기는 메마르 고 차가웠지만 온 몸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통... 악몽 의 연장인 듯, 머리를 두들기고, 온 몸을 부수어 댈 듯, 고통은, 사나운 짐 승처럼 머리 속에서 으르렁댔다. 루드랫은 신음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천개(天蓋)를 제치고 나가니, 촛불의 빛이 눈을 아프게 찌르며 고통을 심하게 했다. 아편이라도 먹고,(디트마가 종종 처방해 주었듯이) 다시 침대에 누워 아 무 것도 없는 잠 속에 빠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그의 간절한 소 망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루드랫은 더 이상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악몽의 어떤 부분이, 루드랫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가보아야 한다. 루드랫은 테이블에 비틀대며, 기대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하지...? 도움을 바라는 그 목소리와, 그 눈빛은 어디서 온 것이었지...? ...제발, 날 도와줘요. 내가, 아덴시엘이에요... 당신이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난 아주 중요한 사람까지도 해쳐야 할지 몰라요... 루드랫은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차라리 깨져버리라는 저주를 퍼부으 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덴시엘이 누군지... 모르겠어." 내가, 아덴시엘이에요... 그게 누구지? 그건, 도대체... 루드랫은 생각해 내려 애썼지만, 머리는 너무나 아팠고, 결국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통은 지독했다. "아덴시엘..." 아덴시엘. 그건, 영광스러운 이름. 날개 달린 자들 가운데 하나. 그 아름 다운 이름을, 그래서 루드랫은, 가장 사랑하는 소녀에게 붙여 주었다. 그 건... 바로 그 순간 루드랫의 방문이 크게 울렸다. 선고를 내리듯. 하지만 곧 정적이 찾아왔고, 루드랫은 자신이 꿈을 꾼 건가 생각했다. 방문이 울렸다 면, 시종이 문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적만이 있을 뿐, 시종은 나올 생 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확신할 무렵, 방문이 다시 한 번 더 울 렸다.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분명한 노크소리라, 루드랫은 비틀대면서도 일어났다. 누구인지 알 수 없 었다. 왜 시종이 나와보지 않는 건가 궁금했지만, 문의 손잡이에 손이 갔을 때, 오늘이 '엘의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성전에서는 하루 종일 예배가 있으며, 모든 시종과 시녀들, 심지어는 왕족들까지도 자기 처소에서 조용히 금식을 하는 날이다. 그래서 나와보지 않은 거군... 고통 때문에 뇌의 기능이 완전히 고장난 듯 했지만, 루드랫은 문의 손잡 이를 돌릴 무렵엔 납득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기 처소에 있지 않고, 이렇게 다른 이의 방을 찾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루드랫은 궁금했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땐,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루드랫은 문 앞 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힐라토... 레이서스님...." 그리고 그 옆에는, "시나..." 시나는 슬픈 것 같이 보였지만, 레이서스 옆에 있었다. 루드랫은 왜 이들 이 함께 있는 지 의아했다. 하지만 레이서스와 시나 뒤쪽에, 어른거리는 그 림자가 하나 더 있었고, 루드랫은 이들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찾아 왔 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긴 망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 고 있었는데, 약간 불안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왔다. 망토 밑에서 희고 가 느다란 손가락이 나와, 쓰고 있는 후드를 천천히 뒤로 넘겼다. 드러난 그 얼굴에 루드랫은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후드를 쓴 그는, 여자 였다.) 앞으로 나와 두 팔을 벌렸다. "루드랫..." 그녀는 팔을 뻗어 루드랫 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드랫..." 그녀는, 훌쩍이며, 루드랫에게 말했다. "루드랫... 나의 마스터. 난 너무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어... 더 이상 기 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까지. 아주 오래." 루드랫은,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는 레이서스와 시나를 보았다. 레이서 스의 눈빛과 시나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런 시도는 관두었다. 루드랫은 자기 품안에 있는 소녀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이 순간, 그 지긋지긋한 두통마저 멈춘 듯 했다. 루드랫은 잔뜩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피네스." 루드랫 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것이 또 한번의 환각이라도, 그는 언제나 그녀를 이런 식으로 끌어안을 것이다. "아피네스."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였다. 마치 눈물 이 흐르는 것 같은. "그래서, 당신이 나를 찾아 왔나요... 나의 레이디." 예전에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뒀을 땐 어떤 표정을 지을지 갑자기 심히 궁금해졌 다.' 계속 살아가다 보면, 이런 저런 궁금증들이 생기고 그런 것들은 충 족 받기도 하고, 아니면, 충족 받지 못하기도 한다. 충족 받는 경우 든, 그렇지 않은 경우든,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떤 것이 나쁜지는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시나는 궁금해하던 문제에 대한 작은 해답을 얻 어, 기쁜지, 혹은 슬픈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오늘의 일을 생각하고, 루드랫을 생각했으며,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뻔했을 때, 자신을 구해 준 레겜을 떠올렸다. 시나는 카펫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벽난로 불에 의지하여, 옛 기억을 더듬어, 레겜이 사준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브라우니들이 갈기갈기 찢어버렸지만, 다시 새롭게 복원한 책장들은 예전보다 버석 거리고 물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넘기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시나는 결국 원하는 대목을 찾아냈 다. 왕족들... '엘야시온'에 대한 페이지였다. 그 페이지를 읽고, 다 음 페이지까지 읽은 시나는 책을 덮었다. 옆에 있던 예라우니가 손으로 턱받침을 하고 있다가, 벽난로 불 때 문에 나른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웅... 뭘 찾은 건데, 시나 인간?" 시나가 말했다. "드랫을 알죠, 예라우니." "응. 깐깐한 드랫 인간." 시나는 미소지었다. "예전에 드랫이, 날 구한 건, 내가 검은머리이 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응... 그랬어." 예라우니는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제자리에 놓았다. "내가 검은머리가 아니었다면, 날 쫓아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거든 요." "웅... 그랬군." "하지만, 사실..." 시나는 꾸벅꾸벅 조는 예라우니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난, 검은머리가 아니거든요." "웅... 그랬어... 아함..." "예라우니!" 시나는 손가락으로 예라우니의 멜빵을 잡아 그를 집어들었다. "사람 이 말하면 들으라고요! 내 머리카락 색은 검은 색이 아니라고요!!" 예라우니는 졸린 눈을 하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시나를 힐끗 보았 다. "검은 색인데?" 시나는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건 '염색'이라는 거라고요." "염색이라. 그렇군." 하지만 예라우니는 이제 거의 눈을 감고 있었고, 시나가 '염색'을 했든, '염소'를 머리에 올리고 있든 상관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나 는 웃음을 짓고, 예라우니를 침대 머리맡에 올려 주었다. 브라우니들 은 거기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예라우니는 곧 코를, '드르렁, 드 르렁' 골았다. 시나는 그런 예라우니를 보고 중얼거렸다. "예라우니... '염색'이란 건 말이죠...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삼주일 째엔, 원래 머리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걸,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흙의 날, 무도회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다음 날, 그다지 큰 소 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 다음날이 순전히 '엘의 날'이기 때문 이었던 듯. 달의 날이 되자, 잠복기라면 잠복기를 거친 소문은 궁전 안을 한바탕 휩쓸며 이런 저런 술렁임을 만들어내며 궁전 안을 시끄럽 게 했다. 게다가 이날부터는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해, 왕 궁의 덧문들은 하나둘, 열린 채로 있게 되었고, 궁전 안은 그만큼 밝 은 빛을 갖게 되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한참 혹독할 때는 그걸 구경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이 정도로 걷히고 나면 구경까지도 가능하고, 그건 엘야시온 열 두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한 보기 드문, 클로니아 특유의 장관이었다. 옷매무새를 단단히 한 사람들이 하얀 입김을 뿜으며, 대기에서 빛나 고 있는 얼음 알갱이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은 정원 여기저기에 서 눈에 띄었다. 그런 사람들을 창문 너머로 넘겨다보며, 혹은 자신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 사람들은 '여섯 증인의 의식'과 그 의식의 마지막 증인이 될 '마노테온'에 대해 말했다. 왕족들은 대부분 흥미롭다는 의견이었다. '루온 루드랫'의 과거사에 대해 기억을 하고 있든 하고 있지 않든, 그건 너무 오래 전 일이었으 므로, 그들은 현재, 흙의 날 무도회장에서 있던 루온 루드랫의 '승리' 와 힐라토 레이서스의 태도만을 주된 관심사로 여기고 있었다.(더구나 재미있는 일도 없어, 무척 심심해하던 참에야.) "힐라토 레이서스를 그가 찾아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십 니까." "대단한 상급 루이트의 자질이겠죠. 뭐랄까. '영혼의 공명'이 아닐 까요." "흠. 마노테의 상태인 자가 '영혼의 공명'이라. 그게 가능합니까?" "글세. 뭐니뭐니 해도 그는 토너먼트 전의 우승자였으니까요. 그것 도 첫 출전을 해서." 한 왕족이 웃었다. "아, 83년도였죠, 그게? 그때 일은 저도 기억합 니다. 처음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 자가... 그 뭐라드라. 머리 셋 달린 괴수. 키라든가, 케라를 물리치고, 그때부터 상당한 두각을 드러 냈죠." "오, 그 키라요!" '키라든가 케라'를 '키마이라'로 옳게 알고 있는 왕족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계속 '키마든가 케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꽤 무시무시했죠. 하하하..." "그런 괴물을 물리친 자니까요." "과연. 상급 루이트입니다." 왕족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아직 프리랜스라는 것을 떠올렸다. 설사 그가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꼈다 하더라도, 힐 라토 레이서스에겐 루온 루파르테가 있다. 그들은 모두 다, 루드랫을 주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이 이 사건에 대해 반응은 각각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단순히, 루온 루드랫이 얻은 행운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질 투만 하고 있었지만, 그 중, 루온 루드랫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들은 호기심과 흥미진진함을 느끼고, 그의 출현이 양으로든 음으로든 자신 들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생각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격렬한 분노와 불쾌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무리도 있었으니, 그들은 힐라토의 루온 루파르테 일파였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프레미어 루이트여!! 어떻게 그런 천한 자가, 왕궁에 있는 것이며, 언감생심, 우리의 주인을 찾아내겠다고 나설 수 나 있었을까요!!" 한 하바트가 분노해서 말하자, 한 루이트가 말했다. "파워즈의 명예 와 이름을 걸고. 난, 그자가 이미 예전에 루이티온의 지위와 이름을 버렸고,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루파르테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코웃음쳤다. "지위를 버렸다 고요? 루이티온이 '지위'의 개념입니까?" "네?" 파워즈의 명예와 이름을 걸었던 루이트가 얼떨떨하게 반문했 다. "루이티온이, 노력이나 훈련으로 해서 얻어지는 자리냔 말입니다. 내가 알고 있기론, 그대나 나나 파워즈의 핏줄로부터 그것을 이어받았 다고 알고 있는데요?" 좌중은 루파르테가 왜 이렇게 삐딱하게 나가나 당황했다. 하지만 루 파르테는 여전히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가 루이티온의 '지위'를 버렸기 때문에, 내쳐야 하는 것이 아닙 니다!!! 루이티온인데도 불구하고, 그 지위에 합당한 행동을 못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겁니다!! 아니면," 루파르테는 입술을 삐죽였다. "내 친애하는 사촌. 아아... 그렇죠. 그는 정말로 친애하는 내 사촌입니다. 가끔 그 사실이, 꿈에서도 믿어지지 않지만. 아니면, 그래. 그대들은 내 친애하는 사촌의 '혈통'에 무슨 의심이라고 가지고 있는 겁니까?" 사람들은 이제야, 자신들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프레미어 루이트여. 혈통에 대한 의심이라뇨." "하하... 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렇죠. 그 자는 혈통하나는 좋게 타고났습니다." "네. 그래서 우린 그를 용서할 수 없죠. 그런 혈통을 가지고, 파워 즈의 이름 값도 못하고, 루이티온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자는...!" "단연코, 우리 가운데 받아들일 수 없고 말고요!!!" 루파르테는 투덜대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들이 그의 부아를 더 돋우고 있었다. 이거고 저거고 다 마음에 안 들 었다. 힐라토의 최고 귀족이라는 자신들이 이렇게 자리에 앉아 쑥덕공 론이나 하며 계집처럼 입으로만 나불나불 불평불만이나 해대고 있다 니. 어제도 하루종일 이 모양이었다. 프레미어 루이트인 자신과 귀족들이 그런 놈에 이런 식으로 신경 쓴 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그런 놈이 제 자리로 기어 들어오든 아님 영 원히 마노테오나에서 쳐 박혀 살든 루파르테로서는 알 바가 없었고 그 래서 지난 세월 동안에도 그에 대해선 알 바 없이 살았다. 단지 그가, 자기 눈앞에 띄지만 않으면 되고, 신경만 거슬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므로 클로니아에 와서 엘야시온이 느닷없이 놈을 자신의 휘하로 보냈을 때, 엘야시온 가디엘이 아직도 그에 대해 어떤 미련을 갖고 있 는 건가 해서 새삼 불쾌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놈에게 어떤 몫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엘야시온이 놈을 불러들여, 자기 마음에 흡족한대로 그에게 어떤 힘을 주고 싶어하더라도. '현 엘야시온의 때는 이미 다 지나갔어! 고로, 놈의 때도 다 지나간 거란 말이야!' 그런데,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을 보라! 루파르테는 '명예'가 어떠 니, '자존심'이 어떠니,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며 이를 갈 았다. 영혼의 공명? 웃기는 이야기다. 아니, 웃기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 다. 루파르테는 루드랫이 힐라토 레이서스에 대해 '영혼의 공명'을 느꼈 단 이야기 따윈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힐라토 레이서스는 내내 자신의 마음을 닫고 있 었으므로 이젠 어떤 루이트도 그의 허락 없이, 그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낄 수 없다. 헌데 놈에게 그것이 가능했다고? "빌어먹을!! 별 개 같은 소리를 다 듣겠군!!!"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루파르테는 무서운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사람 들이 그의 눈초리에 당황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혼자 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23년 전의 불쾌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 아 나는 느낌이다. 그는 믿을 것이다. 만약 이 왕궁에 엘야시온 가디엘이 없었다면, 루 온 루드랫이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꼈다는 걸 믿을 것 이다. 하지만 루파르테는 베란다에서, 가면을 벗고 흐뭇한 표정을 짓 는 엘야시온을 똑똑히 목격했고, 그 순간 엘야시온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루드랫이 자기 주인에게 공명을 느낀다는 것은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므로. 그는 능히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루온 루드랫이 힐라토 레이서스를 자신의 목적 때문에 이용했던 건 23년 전으로 충분하니까. <여섯 증인 의식>에서 그가 마지막 증인이 될 거라고? 그가 왕족의 행사에 참가한다고? "제길. 웃기고 있군! 누가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둘 줄 알고? 이번만 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사람들은, 루온 루파르테가 혼자 이야기하는데 맛 들린 것 같다고 판단하고 그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루사벨라, 정말 믿을 수 없어! 무도회에서 오빠를 찾아낸 자가 그 대의 약혼자라니!" 루사벨라는 당황했다. "...제 약혼자가 아닙니다. 스온 아스테린 님." 아스테린은 방금에야 왕궁에 떠도는 소문을 입수하고, 사정을 대강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개인 루이트, 루사벨라와 어떤 연관 이 있는 일인지도 알아내,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말했다고 하지 않아? '힐라토의 루온 루드랫' 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으니까... 딱 감이 오더라고. 그 뭐야, 아주 옛날 일이긴 하지만, 그때는 아피네스가 루사벨라 약혼자를 꼬드 겨서, 루사벨라가 많이 힘들었지?" "스, 스온 아스테린 님!!!" 루사벨라는 행여, 누군가 이 소리를 듣지는 않았나 해서, 주위를 둘 러보았지만 이곳은 아스테린의 침실이므로 누군가 있을 리는 만무했 다. "그런 소리는 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니 까..."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는!! 난 다 안다고! 아피네스, 그게 불쌍한 척 하면서, 레이 오빠한테 그랬던 것처럼, 루사벨라 약혼자도 꼬드긴 거야!!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스테린은 요즘 아피네스에 대해 부쩍 감정이 나빠져 있었다. 왜냐 하면 전에 없이, 레이서스가 아피네스에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아피네스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듣기로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아피네스의 방에 찾아간다고 하니. 아스테린 자신보다, 그 '바보'한테, 레이서스 오빠는 더 신경을 쓰는 것이다. 아스테린은 투덜댔다. "흥! 그래서 멀쩡한 루이트 하나를 버려 놓은 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루사벨라가 남자라면, 툭하면 질질 짜 는 그런 바보를 진짜로 좋아하겠어?" 루사벨라는 힘없이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 제발. 말씀이 너 무 지나치십니다. 게다가..." 루사벨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스온 아 피네스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제가 남자라면. 저도, 스온 아피네스님을 좋아했을 겁니다." "뭐야!!!" 아스테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루사벨라!!! 그게 뭔가 예뻐?!!! 루이트답지 않게, 웬 약 한 소리를 하는 거지?!!! 마음에 안 들어!!" "스온 아스테린 님..." 아스테린은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더니, 루사벨라의 팔을 잡고, 자기 보다 훨씬 키가 큰 루사벨라를 올려다보았다.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명령이니까!! 그리고 내 가 보기엔, 아피네스보다 루사벨라가, 훨씬, 훨씬, 훨씬, 백 만 배나 더 예뻐!! 알아? 내가 남자라면, 절대 루사벨라를 떠나지 않았을 거 야!!"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온 아스테린 님, 과장이 너무 심하네요. 스온 아피네스님보다 백 만 배나 예쁘다 면, 온 엘야시온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일 거예요." "글세, 아피네스는 별로 안 예쁘다니까 그러네!! 낯은 시퍼러 둥둥 해서 귀신같은데 뭐가 예뻐! 보라고! 그러니까, 루사벨라 약혼자도 자 기 주인을 버리고 이제 마음을 바꾼 거잖아!!" 아스테린의 이 말에는 루사벨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가 스온 아스테린의 말대로 마음을 바꾼 것일까?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혼란한 얼굴을 보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 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루사벨라도 마음에 들 거야." 루사벨라는 의아한 얼굴로 아스테린을 보았다. "난 말이지, 루사벨라가 불행해 지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이제 곧 클로니아의 여왕이 될 내가, 내 루이트가 그렇게 되는 건 절대 못 본 다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누군가가 내 루이트에게 피해를 준 다면, 난 그에게 백 배, 천 배로 그 보복을 해 줄 거야. 게다가 난 내 가 결혼을 하는 거니까, 루사벨라도 빨리 결혼을 했으면 좋겠어. 하지 만 루사벨라는 계속 거절만 하고... 그렇다고 약혼자가 있는 것도 아 니고. 그건 다 루사벨라의 옛 약혼자 때문이잖아. 내가 모를 줄 알 아?" "...!" 루사벨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소리를!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저는 주욱 자이온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사람 을 만날 기회가..." "쯧쯧!! 됐어!! 난 루사벨라 주인이야. 내가 루사벨라 마음을 모를 줄 알아? 속일생각 하지마. 하여튼 난 루사벨라가 속 끓이고 있는 거 싫어. 그러니까, 내가 단 둘이 만날 기회를 꼭 마련해 보겠어!" 루사벨라는 잠시, 아스테린이 누구와 단 둘이 만날 기회를 만든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뜻을 깨달은 그녀는 자기도 모르 게 섬뜩해져, 그만 아스테린을 모신 이래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싫습니다!" 그 대답에 아스테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호라? "싫어?"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팔을 잡고 추근 대며 웃었다. "싫다 니? 호호... 루사벨라가 그런 말하는 거, 처음 봤어." "스온 아스테린 님..." 루사벨라가 괴롭게 말하는데, 아스테린은 더 욱 장난스럽게 웃었다. "호호..."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손을 들어 거기에 입을 맞췄다. "정말로 좋 아하는, 루사벨라. 나를 믿어. 내가 루사벨라를 행복하게 해 줄게. 정 말이야. 루사벨라의 약혼자는, 웬 마노테 여자 애를 종속자라고 데리 고 왔대. 하지만 그가 그 여자 앨 정말 자기 종속자로 여길 리가 없 지. 루이티온이 마노테를 진심으로 생각할 리가 없잖아. 단지 그는 이 제야 자기 신분으로 돌아올 생각을 한 거고. 그래서 자기 주위에 있던 아무 여자나 고른 거야. 왕궁에 들어오려고. 그러니까 이제 곧, 하누 카 날을 위해서라도 자기 신분에 맞는 여자를 찾으려 들 테지." 아스테린은, 당황한 표정의 루사벨라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러니 루사벨라, 그를 직접 만나봐. 그래야 지금 그가 어떻게 변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아냐. 직접 만나봐서 형편없이 변했다면... 흥!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지만 마노테 여자 앨 종속자라고 달고 다닐 정 도면 그럴 가능성이 크지. 폐인이 됐을 가능성 말이야. 아무튼. 그렇 다면 루사벨라는 그 자리에서 당장 그 놈의 뺨을 날려버려. 그 놈이 괜히 옛 정을 들먹이며 귀찮게 하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혹, 그에게 루사벨라가 원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내가 그를 루사벨라에게 줄게. 루사벨라가 마음에 들어하면 어떤 것이라도 루사벨라에게 줄 거야. 아 피네스 따윈 루사벨라 발끝에도 못 미치니까. 그는 지금의 루사벨라를 보는 순간 아피네스 같은 것의 명령을 들은 걸 굉장히 후회하게 될 걸. 루사벨라는 당당하고 참 멋지니까." "스온 아스테린 님..." 루사벨라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스온 아스테린은 과거에 있던 일에 대해 잘 모른다. 루온 루드랫에 대 해서도. 하지만 자신에게 보여주는 이 절대적인 신뢰감과, 맹목적인 다정함. 루사벨라는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녀의 공주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의 손에 입을 맞췄다. "스온 아스테린 님. 내 사랑하는 어린 공주님. 그렇게 하지 않으셔 도 됩니다. 정말로 전, 예전 일엔 이제 마음쓰고 있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섬기는 이 순간,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엘께서 제 인생에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루사벨라가 이런 소리를 하자, 어리둥절해 하던 아스테린은 곧 생긋 웃었다. "그거야.. 뭐. 당연한 말이지." 란사드크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반짝임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었지만, 넓디넓 은 정원 가에 난 길로, 마차가 한 두 대씩 오가고 있었다. 이젠 이 혹 독한 다이아몬드 더스트도 슬슬 그 세력을 꺾고 있었다. 아피네스는 또 레이서스가 찾아와 유리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계집을 돌보는 것이 지긋지긋한 참이었으므로,(레이서스가 안 데려갔 다면 지금쯤, 한 며칠 더 잠재워 놓을 결심을 했을 것이다.) 다행이라 면 다행이었다. 무도회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들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가디스가 꾸미는 일은 다 거기에서 거기니까,(란사드크는 '영혼의 공명'이라는 말은 코방귀로 흘려 버렸다.) 그 정도야 '재미있다'는 수 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가디스가 보호물에 대해 애착 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를 끌었을 뿐. 그 정도는 자신의 계 획안에서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어제 시나의 말을 듣고, 보호물의 상태에 흥미가 생겨, 직접 진찰을 해도 되겠냐고 레이서스에게 청했는데, 그가 단번에 거절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니, 루온 루드랫과 그의 종속자를 위해서는 오늘부터 다른 힐러가 올 것이니, 란사드크는 아피네스의 상태에나 잘 신경 쓰 라는 말이었다. 너무나 딱 잘라 거절하는 모습이라, 처음엔 의아스러 웠고, 다음엔 화가 났다. '내가 그토록,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말했는데. 그 놈이, 어제부 터 꽤 성질을 돋우는 걸.' 헤르가스에게 연락을 해서, 조치를 취할까 했지만 그것조차도 불쾌 했다. '제기랄. 아무튼 이따위 상태이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다.' 하지만... '이번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두고보자. 그때는 나, 웨스로드의 뜻만 이, 이 세상에, 온 세상에 펼쳐질 것이다.' 란사드크는 은빛의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루드랫과 이것저것 이야기 나누던 엘야시온이 말했다. "그런데. 어 제 두통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레이서스가 말하던데, 지금은 어떤가?" "견딜 만 합니다." 엘야시온은 루드랫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것 같군." 어느 편인가 하면 두통을 심하게 앓았던 사람이기 보단, 엘의 날을 제대로 잘 보낸 사람처럼, 매우 편안하고 침착해 보인다. "그럼 오늘 저녁 연회에 나오는 일엔 차질이 없겠나?" "네." "레이서스를 찾아낸 공로로, 내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는 잊지 않 았겠지?" 루드랫은 엘야시온을 보고, 고개를 숙인 뒤, 말했다. "<성혼의 증인 >이 되는 것 말입니까. 다음 대의 엘야시온이 되실 분들을 위한." 엘야시온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네. 잊지 말게. 이왕 마노테온이 필요한 것. 자네가 한다면 아주 좋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라면, 제가 아니라도, 다른 이들이... 게다가 전에도 말씀 드렸듯, 시나는 마노테온이 아닐 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엘야시온 가디엘이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번 하누카의 날에, 혹시나, 쓸데없는 생각을 품지 말란 말일세. 난 '마노테온'이 필요하니까." '쓸데없는 생각'? 루드랫은 그게 무슨 뜻인가 생각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일은.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웃었다. "흥. 하지만 남녀 관계란 모르는 것이 지. 게다가 '하누카의 날'에 관련된 것이라면. 자네도 알지 않나? 그 날의 사람들은 피가 끓는단 말이야. '생각'이나, '이성' 따윈 날아가 버릴 정도로.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엘 뿐이지. 하지만 명심하란 말일세. 자네는, 정확히 이년 후. <성혼의 증인>이 되어야 하네. 자네의 그 말라깽이와 함께. 물론... 그때까지 순결해야 하겠지. 그래야, '마노테온'의 상태일 테니. 뭐... 나를 원망할 건가?" 엘야시온은 교묘하게, 그러나 짓궂게 그를 놀렸다. "이 년이나 기다 려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나나? 하지만 난 분명히 기억하고 있거든. 자 네가 언젠가 내게, 자네의 종속자가 충분한 엘의 시기를 지낼 수 있도 록, 기다릴 거란 말을 했었지. 그러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떤 가?"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시나와 자신의 관계를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론." 루드랫은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좋아!" 엘야시온은 명쾌하게 말했다. "그럼, 문제될 건 하나도 없 군. 나는 자네가 <성혼의 증인>이 되는 것을 허락할 걸세. 물론 <여섯 증인>으로도 자넬 추천할 거네. <성혼의 증인>이 아닌 다른 어떤 누 가, <여섯 증인>이 되겠나?" 엘야시온 가디엘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을 세워 턱을 괴었다. "하지만 이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본인이 속한 세계의 수네드리온 위원 중 단 한사람이라도 반대하고 나서면, 매우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의 사촌인 루온 루 파르테는 힐라토의 명예 수네드리온 의원이라네. 그가 프레미어 루이 트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가? 그가 자네가 여섯 증인이 되는 것 을 반대하고 나설 것 같나?"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가 자이온에 있었을 당시 마노테 온을 성도(聖都)에 둘 수 없다고, 가장 격렬하게 탄원을 올리고 항소 를 올리던 자가 그 일파들이었으니까. 그러므로..." 엘야시온 가디엘 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온 루드랫. 준비를 하고 있게. 자네의 위치는 지금 미묘하지. 마 노테온이며, 루이티온인자, 루이티온이며 마노테온인 자여. 무척 미묘 해. 하지만 그 미묘함이, 자네와 내가 원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걸세. 어찌되었든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루이트'의 이름 역시 갖고 있으니 까."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오늘 저녁쯤 될 거야..." 루드랫은 침묵했다.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 엘야시온 가디엘도 침 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래 서 난 걱정을 했다네. 자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오늘 벌어질 일을 위해서라도 자넨 아프면 안 되는데. 어떨까? 반쪽이라도 자네도 역시 루이트이긴 하니, 힐러가 필요할 테지... 그 힐러를 한 명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네." 루드랫은 고개를 들고 사양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나친 은 혜이십니다." "후후... 글세. 한 번 만나보게. 그리고 나서 내 은혜가 지나친 건 지, 아닌지 판단하게." 그리고 엘야시온은 사람을 시켜, 힐러를 들어오게 했다. 루드랫으로서는 어떤 힐러든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므로, 곤란한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들어 오는 사람을 봤을 때,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루드랫이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저 밀 빛 의 머리칼...! "디트...!" 그러자 엘야시온 가디엘이 웃었다. "하하... 아닐세. 루드랫. 그는 이제 더 이상 일루티온 디트가 아니네. 아, 그렇다고, 마노테온 디트 마는 더더욱 아니지. ...자, 정식으로 소개할까?" 엘야시온 가디엘은 밀 빛의 머리칼을 가진 청년(그는 이제 어깨까지 넘실대는 긴 직모의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을 손으로 가리켰다.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이며 하바티온 하젠드의 수제자. ...하바티온 하디트. 내 명령과, 그의 의지로 이 왕궁에 있는 동안 자네를 섬길 거 네." 하바티온 하디트는 침착한 청회색의 눈을 들어, 놀라움으로 가득한 루드랫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여느 때의 그 미소, 바리스에서 자신의 친구에게 언제나 보여주었던 친근하고 장난스러운 그 미소를 지었다. "말한 대로 널 찾아왔다. 루드랫... '친구'로서." (계속)================================================== 솔직히, 퇴고라는 건 쓴지 일주일 후나, 이주일, 한달 후에 하는 것 이 정상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쓴지 며칠 내로 퇴고해서 올리려니 죽을 맛입니다... 분량이 적다면 몰라도 이런 꽤 많은 분량을 보면... --; 하는 수 없이. 나중에 궁극(?)의 퇴고를 할 셈치고, 쓴 걸 거의 그 대로 올립니다. 줄거리는 이거 맞으니까...^^; 몇몇 이상한 표현이나 조사가 이상한 곳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그냥,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 도 즐겁게 쓰고 있으니까요.^^ 자자, 즐겁게, 즐겁게... 우선 이야기를 끝내는 거야~ 추신...유니텔만 아니면, 한꺼번에 올릴 수 있었는데. 슬픕니다. 추신2...전에 말씀드린 대로, 원래 아피네스는 레이서스의 '누나'였 습니다.--; '누이'에는 '누나'라는 뜻도 있다고, 몇몇 친절한 분들이 알려주셔서... '누나'라고 할 참이었죠.^^ 그런데 쓰다보니... 몇몇 대화에, '누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도저히 분위기(?)가 안 사 는...-_-;(내 글에 분위기가 있었나? --;) 그래서 그냥 '누이동생'로 합니다... 흑... 뭐 하는겨...TT 추신3...아, 그렇지. 셰리카의 머리는 분홍색, 눈은 보라색입니 다...^^; 그 외엔 다 버그. 제가 잘못 쓴 거죠... 어딘가 그런 부분이 있다면 나중에 찾아서 고치겠습니다.^^ 추신4...예전에 '싯딤나무'가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 궁금하다고 하 신 분이 있던 걸로 기억... '싯딤나무'는 Shittim이라고... 중근동 지 방의 '아카시아'나무를 가리킨답니다...^^ 'shittah쉿타-의 나무'. 중 근동 지방의 아카시아니까, 우리나라의 아카시아와는 틀릴지도 모르지 만...(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아까시 나무'라죠...) 그렇담, 우리나 라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카시아와 진짜 아카시아 나무의 이미지를 혼합하여... 무시무시한 가시를 가진 하얗고 황색의 꽃을 피우는 나무 랍니다... 싯딤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글세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죠. 상징이란 어차피... 하하... ^^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44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18 21:39 읽음:947 관련자료 없음 ----------------------------------------------------------------------------- "쳇, 여자는 뒤웅박이라더니. 마노테 주제에 귀족을 만나, '아가씨' 소리를 듣는단 말이지." 두 명의 하급 시녀가 주방에서 감자 껍질을 깎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가 아니래. 아, 그렇지! 그 마노테 말이야! 이곳에서 묵는다고 하더라? 이 장미궁 말이야. 알아?" "엣? 정말? 전혀 몰랐네!!" 시녀는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휴~ 아까워라. 내가 약간만 지위가 높았더라도, 안으로 들어가 그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건데! 얼마나 반반하기에 그런 행운을 잡은 건지, 꼭 이 눈으로 봤어야 하는데!" "맞아. 얼마만큼 예쁘면 귀족 님의 눈에 드는 건지... 하아..." 한 숨을 길게 쉰 하녀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로맨틱해. 요전에 장에 가서,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었는데... '파워즈가 한 시골을 지나가다 가, 물을 긷는 소녀에게 청했다네. 내가 느낀 이 감정은 무엇인가요? 아가씨, 내게 달콤한 물을 주세요. 그럼 난 그 답례로 당신을 섬기겠 어요. 엘께서 허락하는 한, 영원히. 우리의 신분은 다르지만...' ... 이런 노래였어. 너도 알지? 은발의 예쁜 미엘린 이야기. 이 이야기가 정말 현실이 되다니... 하아... 로맨틱해." 그 말을 들은 상대 시녀가 감자 껍질을 뭉텅 깎아내며 심술궂게 웃 었다. "흥! 하지만 거기 나오는 건, 일루티온 소녀라고. 마노테하고는 비교도 안되지. 은발의 예쁜 미엘린. 그 정도라면 로맨틱하다고 해 줄 수도 있지만... 그런데 상대가, 마노테라면... 이건 엽기다, 엽기." 그 말에, 음유시인 이야기를 한 시녀가 깔깔 웃었다. "뭐? 엽기? 하 긴 그렇긴 하다. 그 귀족 님은 특이하기도 하지. 어떻게 마노테랑 같 이 살 생각을 하는 건지. 나 같으면, 징그러워서 그렇게 못 할텐데. 마노테 여자가 굉장히 예쁜가봐... 그렇지? 호호호..." "아니면 마녀라도 돼서, 남자의 눈을 멀게 하는 약으로... 왜 그런 것 있잖아. 사랑의 묘약이라든지... 호호.." "꺅, 무슨 소리야, 그게...! 넌 별걸 다 알고 있다, 얘. 호호..." 그들이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매몰찬 음성이 들렸다. "너희들! 잡담 그만하고, 빨리 빨리 일이나 끝내지 못해?!" 두 명의 하급 시녀는 화들짝 놀라 위를 보았다. "네, 넬리 님!" 자기들보다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시녀였다. 넬리는 감자를 깎는 시녀들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런 식으로 할거라면, 상급 시녀 님에게 보고할 거야!" 그 말에, 두 명의 시녀는 죄송하다고 중얼대며, 입을 꾹 다물고 감 자를 열심히 깎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본 넬리는 혀를 차고, 주방 에서 나왔다. 정말 못마땅하다. 오늘은 궁전 어디를 가도 저런 이야기 뿐이다. 운 좋게 루이트를 남편으로 삼게 된, 마노테 소녀 이야기. '하지만...' 넬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미 시나를 옹호해 주고 있었 다. '아가씨는, 별로 마노테답지 않은 걸. 의젓하고... 사실, 별로 예 쁘지도 않아. 그러니까 아가씨가 루이트 님을 홀리고 어쩌고 한 건 아 니라고. 흥!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긴. 입 싼 것들 같으니라고.' 이렇게 불쾌해 하며 걷느라 넬리는 언제 온 지도 모르게 시나의 방 으로 왔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시나가 있었다. 넬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시나는 언제나처럼 넬리에게 밝게 인사했다. 그리고 일어나더 니 잠깐 루드랫의 방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 역시, 연회에 나가셔야 하니까 많이 나가 계시면 안돼 요. 어제처럼요. 어젯밤에 루이트 님께서 데려다 주셔서 안심했지만 아무 말도 안하고 사라지셔서 무척 걱정했어요." "걱정 말아요, 넬리. 금방 다녀올 거니까." 하는 수 없었다. 게다가 어제, 아가씨의 루이트 님도, 넬리에게 그 렇게 분부했다. 시나가 나가고 싶어할 땐 보내주라고. 그래서 안녕히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넬리는 방문을 나가는 시나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고 느꼈다. 왠지 모르지만. 무 척 기운이 없는 분위기의. 아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넬리 자신의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넬리는 방문을 나서려는 시나에게,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아가씨!" 시나는 뒤돌아보았다. "아가씨, 힘내세요! 아가씨는, 꼭 우리 스온 마리스 님처럼 의젓하 세요! 하지만 예쁘지는 않으니까...! 절대 아가씨는...!" "뭐라고요, 넬리?" 시나가 웃는 것을 보고, 넬리는 자기가 말실수했 음을 깨달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예쁘지 않다는 말 은... 사실은 아가씬 예쁜데..." "하하하... 됐어요. 넬리도 참." 시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밖으 로 나갔다. "아휴... 내가 웬 쓸데없는 소리를!! 아휴...!" 넬리는 자신의 입을 쥐어박으며, 시나가 돌아오면 해줄 다른 좋은 말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루드랫의 방까지 헤매지 않고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루드랫의 방이 목적지는 아니지만. 시나는 루드랫의 방을 지 나치다가 방문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노크를 해보았는 데 시종이 나왔다. 그는 루드랫은 지금 방에 없다고 했다. "네에, 그렇군요. 어제 머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해 서."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오정 전에 나가셨죠. 머리는 이제 아프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시종이 문을 닫고 루드랫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방향을 틀어 어제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왕궁 도서실로 향했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주위의 벽화와 카펫의 모양을 잘 살피며 걷는데 역시 미로 같은 길 들이라 지금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역시 표지판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곳은..." 시나는 미소지으며 혼잣말했다. 그리고 내려가는 두 개의 계단 사이에 서서 어느 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거였는지, 주의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쪽 계단 밑에서 새되고 앳된 목소리의 투덜거림이 들려왔 다. "거기 누구 없는 거야?!" 시나는 누굴까, 생각했다. 어제 말을 듣기로 이쪽 복도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아마 그, 무시무시한 초상화가 주욱 걸려있던 건물이 이 건물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엔 시종이 나 시녀, 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 없어?! 아얏..." 목소리는 어딜 다쳐,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나는 내 려가 보기로 했다. 이런 데서 다른 사람하고 마주치는 건 달갑지 않지 만, 이건 어린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 시나는 계단을 내려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길고 풍성한 망토에, 후드를 쓴 한 소녀가, 계단 중간에 발목을 부 여잡고 앉아 있었다. 시나는 다가가서 말했다. "저런! 얘, 괜찮아? 다친 거야?" 이런 왕궁에서 만나는 사람한텐, 아무리 어려도 일단 존댓말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상대는 중학생 정도 로 보이는 여자 애였다. 바둑알 같이 까만 눈을 가진, 새침하면서도 귀여운 여자 아이. 그런 여자아이가 오래된 카펫이 깔린 계단 위에 앉 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건물 안에. 그러므로 어쩐지 이 풍경은 시나에게 낯익어, 친근감을 느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나는 계단 중간에서 몸을 굽히고 여자아이의 발목을 들여다보았 다. 인형같이 작은 발에, 아주 예쁜 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목은 지금 당장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눈을 들어 소녀의 얼굴 을 보니, 소녀는 아픈 듯 눈물까지 맺힌 눈을 하고 있었다. "발목이 많이 아파?" 시나가 계속 이렇게 반말을 하자, 소녀의 눈엔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건 약간의 망설임을 거친 후 결국은 호기 심으로 돌아섰다. "넌 뭐야. 남자 앤줄 알았는데, 여자 애네?" "하하.. 그래? 그런 말은 많이 들었어. 그나저나... 이곳은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시종들이 있는 곳이긴 하지만. 걸을 수 있겠니? 부축해 줄까?" 갑자기 소녀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더 날카롭게 올라갔다. "뭐야?! 아파 죽겠는데, 나보고 걸으라고!! 난 못 걸어. 시종을 이쪽으로 불러 주든지...!" 시나는 당황했다. "그래? 그렇게 아프니? 그럼 시종을 불러올게." 그리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소녀가 시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자, 잠깐!!" "...?" "아, 아냐. 가지마. 저어... 저어..." 소녀는 한참 궁리하다가, 마 침내 말했다. "그래! 네가 날 업으면 되잖아! 시종은 필요 없어!" "엥? 내가?" "그래. 네가 날 업어." 시나는 무척 황당했지만 소녀는 너무나 당당하게 이런 명령을 했고, 문득 이 소녀가 누구이기에 이런 식으로 말을 할까, 생각했다. 이런 사람도 별로 없는 건물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말투도... "빨리 업으라구!!" 아니... 시나는 마침내 웃고 말았다. 소녀는 시나의 웃음을 보더니 화난 기색을 했다. "뭐야! 넌 왜 웃는 거야!" 시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냐. 넌, 꼭 내 후배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투정 부리는 것도 그렇고... 자기 멋 대로인 점도." 아스테린은 눈앞에 있는 시녀가(시녀라고 생각했다. 시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런 말을 하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투정? 자 기 멋대로 라니! 건방지게, 너 내가 누구인줄 알고...!!, 라고 소리치려는 순간이었 다. 헌데 갑자기 그 시녀는 등을 돌렸고, 웃으면서, "자, 업혀"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스테린은, 뭐랄까, 타이밍을 잃었다고 해야할까. 화를 못 내고 말았다. 아무튼 지금 사람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고, 이럴 때 이 렇게 자기를 전혀 몰라보는 시녀를 만난 건 어찌 보면 행운 중에 행운 이었다. 지금 루온 루드랫을 찾아가는 건,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할 비밀이 다. 이런 식으로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루이트를 찾아가는 건, 궁중 예법에 어긋나니까.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미리 루온 루드랫을 봐두지 않을 수 있는가? 이건 자신의 루이트, 루사벨라와 관계된 일이다. 자기 입으로 둘이서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먼저 만나보고 형편없는 자라면 루사벨라에게도 절대 못 만나게 할 결심이다. 그래서 이런 루트를 따라, '장미궁'으로 가던 중이었다. 아스테린은 알고 있었다. 이 크고 아름답지만 황량한 건물은 전대의 파이오니온 클로니아 세렌시스가 거처하던 궁이었고, 세스틴은 자신이 파이오니온 이 된 후, 파이오니온의 거처를 자기가 어렸을 때 있던 곳으로 옮기 고, 이곳엔 십 년이 넘도록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유리 궁전의 모든 궁을 구경하면서, 아스테린은 이 궁을 제 일 맘에 들어했고, 자신이 이곳의 여왕이 되면 이 궁을 개방해 자신의 궁으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대해선 잘 알고 있는 편이었는데...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괜히 몰래 다닌다고 소리 없이 다니다가 계단을 오를 때 재 수 없게 발을 접질린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절대 그냥 돌 아갈 수 없다. "쳇..." 아스테린은 하는 수없이, 시나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시나는 좀 비 틀거리며 일어나 소녀에게 물었다. "근데, 넌 누구니?" 아스테린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말하지 않기로 했 다. "난... 시녀야." 무뚝뚝한 말투에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꽤 어려 보이 는데. 난 시나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아......아핀." "뭐?" 시나는 '아핀'이라는 소녀를 고쳐 업으며 묘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파이오니온 님의 누이동생 이름도 틀림없이 '아핀'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이름은 이 세계에선 꽤 흔한 이름인가 보다. 공주님과 시녀가 같은 이름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시나는 빙긋 웃었다. 어쨌든 친근감 이 든다. "그럼 아핀. 우선은 힐러에게 가는 게 낫겠지? 내가 알고 있는 힐러 한 분이 계신데... 무척 친절한...." "아냐, 됐어. 우선은 '장미궁'으로 가 줘. 장미궁이 어디인지는 알 지?" "장미궁? 알긴 알지만. 그래도 먼저 힐러에게 가보는 것이..." "아이 참...! 넌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꽤 신경질적인 아이였다. 이런 오만한 태도라니 정말 시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게다가 도와주는 사람한테 이런 식이라니. 시나는 좀 부아가 났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시나는 이 나이 때의 예쁜 소 녀에겐 약하다. 그래서 그냥 큰맘 먹고 봐주기로 했다. "휴... 그럼 장미궁 어디로 데려다 줄까? 하지만 나도 지리를 잘 모 르니까..." "지리 같은 거 필요 없어. 너, '루온 루드랫'이라는 루이트를 알 아?" "루온... 루드랫?" "응. 그의 방을 알면, 날 그 방으로 데려가 줘." "흠..." "왜 그래? 몰라?" 마침 계단을 다 올라온 참이라, 시나는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 너 정말 시녀 맞아? 루이티온 님인데... 뭐라고 할까 상당 히..." "아이 참!! 그러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방을 알아, 몰 라! 거기에 데려다 줘!!" 아이고. 시나는 이 예쁜 아이를 다루기는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했 다. 무슨 일로 가는 거냐고 물을 참이었는데, 그건 관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지금 가봤자 루온 루드랫은 없을 거라는 말도. 게다가 이 아이는 아무래도 시녀가 아닌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시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시녀를 본 시나도, 이런 시녀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어쩌면... 귀족의 아가씨.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시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제 사람들의 태도를 보아. 이 아이가 만약 자신이 마노테온(비슷한 모양)이라는 것을 눈치채면. '지금도 이 모양인데. 그땐...' 그래서 시나는 아무 말 안하고 이 소녀를 루드랫의 방에 데려다 주 기로 했다. 데려다 주면 시종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아핀이라는 소녀를 루드랫의 방문 앞에 내려놓고, 시나는 고개를 꾸 벅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핀'은 갑자기 시나가 경어를 쓰자, 눈썹을 들어올렸지만 별 말은 안 했다. 그걸 안 시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시종이 나오기 전에 얼 른 그 자리를 떴다. '확실히, 저 소녀는 귀족이나, 아님 왕족이야. 큰일날 뻔했네.' 시나는 복도 모퉁이에 서서 루드랫의 방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멀리서 보기에, 시종은 어린 소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었고, '아핀'은 뭐라고, 뭐라고 그 시종에 떼를 쓰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종은 고개를 단호하게 젓더니, 문을 탁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녀는 울컥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별말 없이 서 있다가, 뒤로 돌아 섰다. "저런!" 시나는 '아핀'이 걷다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달려갔 다. "발목이 아프다면서, 아까 시종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죠!" 아스테린은 놀란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난... 시녀인척 하고 있는 거... 아니, 시녀니까. 그런걸 명령할 수야... 게다가 발목을 다쳤다 는 걸 깜빡 잊고 있었는데... 아니, 그런데 넌 아직 안 간 거였어?" "어떻게 되나 보려고..." 루드랫은 지금 방에 없으므로, 허탕칠게 분명하니까. 시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역시 지금은 힐러에게 가보는 게 낫겠죠?" 아스테린은 이 회색 눈의 소년같이 생긴 시녀가 웃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후 새침하게 말했다. "흥...! 좋아, 업혀주지. 자, 가자고. 잘 알고 있는 힐러가 누구야? 힐러 라이트라도 쐬면 말끔해 지겠지." 그런 말을 하는 소녀를 업으며 시나는 자기가 왜 이 고생을 사서하 고 있나 생각했다.(아무리 어린 소녀지만, 역시 사람의 몸이라 꽤 무 거운데...) "아얏!! 아이 참! 좀 조심해서 업어!! 네가 방금 손으로 발목을 건 드렸잖아!!"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런 귀족 아가씨는 내버려두고 가는 게 나은데.' 어제 갔던 그곳으로 가는 데, 이번엔 패가 없어서 어떻게 되려나 생 각했다. 그쪽 건물로 가는 초입에 가보니, 역시나 어제 서 있던 시종 들이 아닌 다른 시종들이었다. 게다가 예상대로 그들은 시나를 막았 고, 이곳에 무슨 볼일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시나가 어떻게 할까 생각 하는데 등에 업힌 소녀가 후드를 제치고 말했다. "볼일이 있어 왔으니, 비켜라." 물론 두 명의 시종은 그 즉시,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고, 아스테 린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시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굉장히 높은 신분에, 얼굴이 잘 알려진 소녀인가 봐...' 목적지에 도착해 시나가 그녀를 내려놓았을 때, 소녀는 이미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소녀는 시나가 자신을 내려놓은 장소와 시나를 번 갈아 보더니 의심스럽게 말했다. "흐음... 정말 이곳의 힐러를 알고 있단 말이야?" "네." 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빨리 인사만 하고, 소녀를 맡기고 나올 참이었다. 약속장소에는 뛰 어가야 할 듯... 하지만 그때 '아핀'이 시나를 제지했다. "아니... 잠깐..." "...?" 시나는 의아한 얼굴을 아스테린에게 돌렸고, 아스테린은 시나가 두 드리려는 문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곳은 분명 '일루티온 란사드크'의 거처이다. 레이 오빠를 쫓아, 와본 적이 있으니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시녀와 여기를 들어가는 순간 란사드크는 자신 을 알아 볼 테고, 그럼 이 시녀는 어쩜 자신이 루온 루드랫의 방을 찾 아간 걸 말할 지도 모른다. '...안돼. 그건 곤란하지.' 아직 루온 루드랫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런 일이 란사드크의 입을 통해, 상급 시녀의 귀에 들어간다면 매우 골치 아프다. 해서 아스테린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손짓을 했다. "됐어. 이제 넌 가도 좋아." "...네?" "가보라고. 이곳의 힐러라면 나도 알고 있어." '하아?' 시나는 황당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사드릴 것도 있고... 이곳까지 왔는데..." 아스테린은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건방진 시녀군! 가보라고 했잖 아!! 두 번 말하게 하다니, 무슨 버르장머리지?!!" '윽!' 그 대가센 말에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괴, 굉장한 귀족 아가씨다. 꼭 여왕 같네...!' 그래서 시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 안전이라고 버 티겠는가?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는데, 소녀가 말했 다. "아, 그렇지...! 이봐!!" 시나는 뒤돌아보았다. "절대, 나랑 만나 거랑, 내가 루온 루드랫의 방에 찾아 간 걸,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마. 명령이야! 알겠어?" ...끝까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하고 명령만 하는. 저절로,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해 주는, 여왕 같은 귀족 아가씨. 시나는 고마운 마음으로(역설법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빨 리 완치되시길." 하지만 시나는, 왕족들의 건물에서 나와, '아핀'을 만났던 계단을 다시 내려갈 무렵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줄무늬 대리석 계단 위로 깔린, 빛 바랜 붉은 카펫... 그 위를 뛰어 다니는 발자국 소리. 아까 그 소녀는 이곳에 너무나 잘 어울렸고... 그래서 시나는 결국, 그 소녀를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름까지 '아핀'이라니... 정말 친근감이 든다. '뭐... 그쪽은 아닐테지만.' 시나는 넓디넓은 홀을 가로지르며, 그 렇게 생각했다. 아스테린은 회색 눈의 시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 다. 그러고 보니 저 시녀는 자기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갔는데. '정말, 버릇없는 시녀군! [시나]라고 했던가? 상급 시녀에게 명해 서, 예의를 가르쳐 주도록...!!'이라고 화를 내던 아스테린은, 잠시 후, 자기가 '시녀인 척' 하던 걸 떠올렸다. '아... 시녀 인척 했으니까... 그래서...' 인사를 안 한 거다... 아스테린은 겨우 납득했다. 그래도 약간 불쾌 한 기분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게 다, 내 연기력이 뛰어나서 그런 거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못 유쾌한 마음까지 들었다. 다른 이를 훌륭하 게 속여넘긴 것이다. '호호...' 결국 아스테린은, 회색 눈의 시녀가 어느 정도 마음에 들 고 말았다. 저 정도 계급에, 시녀들이란 하나같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들뿐인데. 저 시녀라면 옆에 두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어느 소속인지 알아내서... 음... 한 번 옆에 있게 해 봐야 지. 세스틴 님한테 선물로 달라고 하면 될 거야.' 이런 생각에 의기양양한 기분이 된 아스테린은, 그만 예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언제나 자신을 보필하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공주님은, 자기 대 신 문을 두드려준 사람이 없으니, 자기라도 문을 두드린 뒤, 안에서 나오는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그만 무심코, 문을 열 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발목이 너무 아파..." 아스테린은 대기하고 있던 시녀나 아님 란사드크 본인을 기대하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빛이 비춰들어 오는 창가에 서 있다 고개를 돌 리는 자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아스테린은 그가 고개를 돌릴 때, 경악을 하고 말았다. 은발의 긴 머리칼과 은색의 눈동자. 저 잘생긴 얼굴. 마치 세월이 멈춘 것 같이. 그는 아스테린이 어릴 적 보았던 그대 로, 그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쪽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 지만, 나머지 반쪽은 귀족적인. 잘생긴 얼굴... 아스테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이라니... 달빛 요정의 왕..." 그것도 이런 곳에서.... 은발과, 은빛의 눈을 가진, 그녀의 요정 왕. 어린 시절, 힐라토 나 이팅게일의 정원에 숨어서, 인기척이 들리면 곧 사라질 것 같아, 앞으 로 나서지도 못한 채, 계속 숨어서만 바라보던 달빛 요정의 왕. '하지만, [달빛 요정의 왕]이... 지금 이 사람은, 바로 그... 초상 화의 복도에 걸려 있는 왕족 중 한 사람... 클로니아의 왕족인...' 아스테린은 자기에게 걸어오는, '요정 왕'에게 눈을 못 떼며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성장해서, 성장한 눈으로 보니, 알 수 있었 다. 이 사람은 '죽었다던 클로니아의 왕족.' 처음 초상화를 봤을 뿐이 지만, 어쩐지 남다른 느낌 때문에, 그 초상화에 대한 특히 자세한 설 명을 요구해 들었고, 그래서, 안다. "당신은 바로, 스온..." "아스테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아스테린의 말을 막듯이. "이렇게 갑자기 방엘 들어오다니. 힐라토의 공주님... 정말, 놀랐어. ...너무하잖나? 응? 어떻게 보상을 해 줄 건가...?" 하지만 아스테린은, 마침내 자신 앞에 선 '요정 왕'을 보며, 발목의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44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18 21:39 읽음:1064 관련자료 없음 ----------------------------------------------------------------------------- 들은 대로 서재는 찾기 쉬웠다. 1층, 홀 넘어, 좀 들어간 복도에 면 한 크고 육중한 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시나는 그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먼지가 떨어질 것 같은 건물의 경직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문은 아무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매일 매일, 경첩을 누가 손질해 놓은 것처럼. 그 문 사이로 들어서자, 오래 된 무언가의 냄새들--추측하기에 종이 와 양피지 냄새들--이 흠씬 코로 밀려들었다. 덧문은 이미 누군가 열어 놓은 채였다. 그래서 책이 여기저기 쌓인 고요한 서재 안은 희미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누 군가 뒤에서 시나의 팔을 잡았다. 깜짝 놀란 시나는 고개를 꺾고 뒤를 보았다. "...아... 파이오니온 님." 레이서스는 고개를 뒤로 꺾고 자신을 보는 시나의 모양에 빙그레 웃 었다. 그 옆에는 아피네스가 가만히 서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서재의 벽난로 앞, 푹신한 양탄자 위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온몸에 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으흠... 그래서... 내가 나오는 데, 넬리가 그러잖아요. '아가씨는 의젓하세요! 하지만 예쁘지는 않고...!!'" 시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 다.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파이오니온 님?" 하지만 시나는 자기가 대답했다. "그래요. 사실은 저도 알아요. 제 가 생각하기에 그건 말이죠... 넬리가, 오늘 입을 옷에 대해선, 저번 처럼 까다롭게 굴지 말라는 뜻으로 그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 이스나 리본 달린 예쁜 옷보다는, 의젓한 남자 옷을 입으라는... 하지 만 오늘은 꼭 예쁜 옷을 입고 싶었는데...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 요." "......." 레이서스로서야, 시나의 시녀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알 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불꽃을 한참 바라보던 레이서스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난...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시나는 그런 말을 하는 레이서스를 바라보고 눈을 깜빡였다. 레이서 스는 시나보다 훨씬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얼굴이 붉어진 시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우웃!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 앞에서, 저런 얼굴로 하다 니. 그러면 진짜인줄로 믿게 되잖아~ 우웃... 굉장히 부끄럽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시나가 쑥스러워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야 당연하게도 많은 여자들을 대하면서, 이런 말을 매우 손쉽게 하게 되 었고 이것이 부끄럽거나 이상하다는 생각도 그다지 하지 못했다. 여자 들은 보통, 레이서스가 자신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말해주기 원했고. 레이서스는 진심이든 예의로든 여자들을 보면 '예쁘다'고 해왔다. 하물며 객관적으로 봐서, 정말 귀엽고 예쁜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뭐가 잘못이겠는가?(레이서스에게는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레이서스는 시나에게 그렇게 말한 후, 다른 일로 고민했 다. 예쁜 옷이 입고 싶다, 라... 그런데 그때 마음을 가다듬은 시나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런 데요... 파이오니온 님." "...?" "어제 하셨던 이야기 있잖아요." 아직도 레이서스가 한 말의 여파가 남아 시나는 벽난로만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드랫 을 위해서 여기에 모여 있는 거지만. 흠흠... 그래서 솔직히, 전 제가 왜 이 자리에 와 있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씀드릴게 요. ...파이오니온 님은 굉장히 친절하셔서... 제가 있던 세계에서도, 파이오니온 님같이 친절한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무튼... 그러셔서... 그, 뭐랄까... 그러니까... 제 고백까지 염두에 두시고, 어제와 같은 말씀을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한데... 사실은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고... 전, 남자애들에게 차이는 것 따위... 능히 극복할 수 있고.... 하하... 자랑은 아니지만, 하도 여러 남자애들에 게 고백을 하고, 차여봐서, 면역이 되었다고 할까. 아무튼 그래요. 그 러니까, 굳이 저를 책임진다는 말씀까지 하실 필요는... 드랫이 저를 책임지지 못한다고 해서... 파이오니온 님이 혼 강에서 절 구했다고 해서... 설마 또, '은혜의 법' 때문에 절 책임진다고 하시는 거라면 말이죠. 그럴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라고 말을 하며 웃는 고개를 돌리던 시나는 레이서스가 자신을 몹시 불쾌한 얼굴로 보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파이오니온 님?" 레이서스는 고개를 돌리더니, 굉장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 로. 네게 책임감 같은 것 전혀 안 느낀다. 그리고 난 네가 말하는 것 만큼 굉장히 친절한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뭐라고? 남자애들에게 고백을 해?" 레이서스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실렸다.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게 네 취향인가 보구나. 남자애들 에게 고백하는 것이. 그래서 내게도 한 번 해 본 것인가? ...재미있 군." 시나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별로 재미있는 것 같지 않은데...? 하도 불쾌한 표정이라, 시나는 자신들 앞에, 레이서스의 외투를 덮 고 누워있는 아피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저어... 그러니까. ...지금은 기억도 안 나요. 누가 누군지. 정말, 그렇죠..." 하지만 아직도 레이서스는 불쾌한 표정이었고, 시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파이오니온 님... 파이오니온 님에겐 약혼녀가 계시잖아요. 매우 아름다우신, 공주님... 그래서, 어제 내내 생각하기를... 저는, 파이오니온 님의 말씀은 아무 래도 다른 의미가 있는 거라고... 파이오니온 님은, 저를, 드랫처럼 여동생과 같이 좋아하시는 거... 맞죠?" 레이서스는 시나가 칼리스나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어디서, 칼리스나 이야기를 들었 지?" 그리고 시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더욱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시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아무튼. 어제 오전에 그 공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파이 오니온 님의 말을 완전히 오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레이서스는 약간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파이오 니온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파이오니온 님'이라고 부르고 있잖은가? 시나는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를 정식으로 맞아들이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다. 아무래도 올해, 칼리스와 하누카의 날을 치르기란 무리고. 빨라봤자, 내년... 너와는 내후년... 아니, 그때는 성혼이 있는 해니까. 하지만, 약속한다. 적어도 삼 년 후에는 너와 하누카의 날을 보낼 수 있을 거 다." 레이서스의 이 말에 시나는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만 할말을 잊 고 말았다. '그, 그러니까.. 지금 레겜은 공주님과도 결혼하고 나하고도 한다는 말씀인가? 그, 그야... 하누카의 날은, 자기 계급에 맞는 사람과 보내 야 올바른 변신(?)을 할 수 있다니까... 하, 하지만... 그래도... 그 래도... 이건, 임금님의 굄을 바라는 무수리도 아니고~!!!! 으으윽!!! 난 현실 세계 사람이니까, 이건, 중혼죄야!!!!!!!!!!!! 레겜이 이런 바람둥이라니!!!!!!!!!!!' 시나의 충격이야 저 위의 느낌표로밖에 표현 못하는 거지만, 아무튼 시나는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횡설수설 말했다. "하하... 아... 참, 친절하신...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까지 해주 지 않으셔도... 저는, 고백한 것만으로도...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을 지, 알 수 없는 거니까... 3년 후까지 내다보며, 책임져 주지 않으셔 도... 하하하..." 하지만 바로 그때, 이런 시나의 말을 듣는 레이서스의 얼굴에 의심 과 의혹이 서렸고, 그의 검은 눈은 무섭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시나는 자기가 또 무슨 말을 잘못했나 놀랐다. 레이서스는 딱딱 끊어지는 말 투로 말했다. "...그 전에 무슨 일이라니?" 하도 험악한 표정이라, 시나는 침을 삼켰다. "...여, 여러 가지 일 들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말하는 거냐?" 시나는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엘야시온님 과 약속한 것이 있었고, 그렇다고 꾸며서 말하기엔 당장 생각나는 것 이 없었다. 그래서 겁먹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레이서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혹시, 넌..." 레이서스의 표정은 점점 차갑게 변했다. 다른 여자들은 보통, 레이서스에게서 '하누카 날'의 확답을 얻어내 길 원한다. 그 날에 대한 확답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에. 하지만 레이서스는 한 번도 그들에게 '하누카 날'에 대한 청혼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소녀는, 이걸 거부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이 소녀가 한 말, 베란다에서의 그 고백은, 다 거짓인가? "...뭐냐...? 네가 베란다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럼, 무엇 때문이냐? 네가... 내 마음을 가지고... 그래서, 네 힘을 시험하고자, 날, 능멸하려고 한 것이냐? 네가 날 그렇게 우습게 여긴 거냐?" '하누카의 날'에 대해 이런 소리를 하다니... 왜? 갑자기 레이서스의 뇌리에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하하.. 영혼의 공명.. 그래? 그게 이렇게 시시한 건가? 아아- 지루해- 내가 내 계약주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란 지루함- 뿐이지... 검은머리와, 검은 눈은 지겨 워... 그것 뿐이야... 하지만 그는 레이서스에게 황금의 맹세를 했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그를 믿었다. 그런데... 왜? 레이서스는 몹시 분노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 생각 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고, 그 알지 못할 결점은 또다 시 이런 식으로 작용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건 황금의 맹세마저도 파괴하는 강력한 결점... 칼리스나가 언제 나 그에게 말하는... ...난, 사실 검은 색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잘 어울리기라도 해야지. 검은 색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텅 빈 공간 같아서. 어느 땐 정말 맘에 안 들거든. 사랑하는 척하고, 사람을 버리는 자들...!! 레이서스는 웃으려 했다. "그래...? 너도, 내 머리칼과 눈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거냐? 그래서, 내 마음을 시험하고, 이젠 됐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냐... 단, 이틀 새에?" 시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아니에요..." 힘을 시험한다니? 시나는 레이서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서스는 시나의 그런 표정에 자신이 더욱 바보 같게 여겨졌다. 이건 강박관념일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떨쳐버리기 어렵 다...!! 레이서스는 팔을 뻗어, 시나의 손을 잡았고, 낮게 웃었다. "아아... 하지만 믿어 주길. 나도,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 다. 원하는 대로였다면. 내 아버지처럼, 회색의 머리칼이나... 아니 면, 이곳의 주인이었던 파이오니온 세렌시스와 같이... 은발로. 그렇 게 태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하랴? 네 앞에 서는, 계속 내 머리칼의 색을 변하게 할까? 초록색... 회색... 은 발... 검은 색만 아니라면, 되는 거냐?" 시나는 왜 레이서스가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레 이서스의 눈은 무섭고, 너무나, 슬퍼 보였다... "파이오니온 님.." 그 말에,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맞다. 난, 파이오니온이다. 그 러니까 네가 내게 뱉은 말은, 함부로 철회할 수 없을 거다. 만약 그게 철회되어야 한다면, 그건 네 의지가 아니라 바로 내 의지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단 이틀 새에 마음이 변했다고 해도. 넌 베란다에서 한, 네 그 말이나 후회해라. 아무리 네 취향이 남자들에게 고백하는 것이라 하더라고... 그것이 내게 향한 것인 이상." 레이서스는 시나의 얼굴이 하얗게 된 걸보고 웃었다. "이젠 네 마음대로 안 될 거다. 하누카의 날을 원하지 않는다고?" 레이서스는 시나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왜? 그 동안 무슨 일이 생 기길 바라는 거지? 3년은 못 기다리겠다는 건가? 그럼, 좋다. 너는 하 누카의 날을 원하는 것 같지 않으니. 칼리스와 하누카의 날을 보낸, 그 다음날이라도 너를 맞으마. 이렇게 되다니. 진작, 칼리스와 하누카 의 날을 치르지 않은 게 후회가 될 정도군." 언뜻 들으면, 너무나 기분 나쁜 말들이었다. 하지만 시나는 계속 그 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므로(뗄 수가 없었다.) 레이서스 가 진심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어떤 혼란가운데서, 그리고 깊은 어둠가운데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지만, 시나는 이런 말들에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마음이 아팠 다. 레이서스의 눈에 서려있는 어떤 요소들. 그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시나는 그에 대한 안된 마음이 들었다. 시나는 그가 행복하길 바랬 다. "아니에요." 시나는 슬픈 눈을 하고 말했다. "...전 검은 색이 좋 아요." 레이서스는 못 믿는 눈이었고, 다음으론 더욱 화난 눈을 지었다. "입에 발린 소리 따윈..." "그렇지 않아요!" 시나가 약간 강하게 말하자, 그는 말을 멈췄다. "혼 강에서도 말했잖아요... 보세요." 시나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 으로 그의 머리칼과 아피네스의 머리칼을 가리켰다. 감히 만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는데! 난, 검은 색이 좋아요! 그 러니까, 저야말로... 할 수 있었다면..." 시나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말했다. "저야말로... 검은 색 머리칼로 태어나고 싶었어요... 정말 로." 시나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레이서스는 알 수 없다는 눈을 했다. "넌, 검은 머리칼이다." 시나는 말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짐을 느꼈다. "아니... 전..." 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이 큰 소리 내는 것에 잠을 깬 아피네스가, 눈을 뜨고 시나에게 안겨왔다. "...흐음. 루드랫은 안 오는 거야? 왜 안 오지? 또 기다려야 해?" 덕분에 그들 사이의 대화는 끊겼고, 시나의 손을 잡고 있던 레이서 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손을 놓았다. 어색한 분위기는 아피 네스가 노래를 흥얼거리고,(바로 어제의 그 노래를.) 이것저것 잘 이 어지지 않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을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가셨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땐, 레이서스는 띄엄띄엄 아피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나 쪽은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 동안 시 나는,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끊긴 것에 차라리 고마워하며, 자기의 말을 생각해 보고, 레이서스가 그토록 기분 나빠한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어제 파이오니온이 자기에게 말한 것.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 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시나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떻게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 다른 여자를 또 사랑할 수 있단 말 인가? 그러므로 시나는 어제 밤새, 누워 생각하기를 파이오니온의 말은 또 다른 뜻 일거라 짐작했다. 파이오니온 님은 친절한 사람이니까.(정말로 시나는 이처럼 친절한 사람은 현실에서나, 이쪽 세계에서나 보지 못했다.) 자신이, 루드랫은 아직도 아피네스 공주님을 좋아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니까, 자기 여동생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부하를 위하여, 도움을 주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 시나가 그 가운데에서 거치적거리니까.(아무래도, 시나는 루 드랫의 공식적인 종속자다.) 그리고 시나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젠 오 갈 데 없게 되었으니까, 불쌍한 마음에 도움을 주려는...? 찬찬히 생각해 보면, 파이오니온 님이 자신에 대해 그런 불쌍한 마 음을 가질 필요나 근거는 전혀 없고(그래서 아까도 그렇게 말한 거 다.) 어느 부분은 비약이 심해, 말도 안 되는 설명이긴 하지만. 그래 도 이 이상 합리적인 설명은 낼 수 없었다. 그런 아름다운 공주님과 약혼해 계시고, 잘생기고, 친절하고, 멋지 고, 성격 좋은 왕께서... 가장 낮은 계급이라고 구박은 구박대로 받 고, 별로 예쁘지도 않고(아까 넬리도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주었다) 그렇다고 높은 지식을 갖고 있나(글은 읽을 줄 알지만), 세상 물정에 빠삭하기를 하나, 글래머도 아닌 데다... 시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무 짝에 쓸모도 없는(그랬다. 시나는 어제 이런 비참한 생각까지 했 다.) 여자 애를 진심으로 생각할 리가? (보통은 드랫과 같은 태도가 당연한 거 아닌가?) 그보다는 차라리, '자비'를 베풀어주려는 건지도 모른다. 윤리 시간 에 배운 바로, '자비'란... 중생에게 행복을 베풀며, 고뇌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자(慈)'는 최고의 우정을 의미하며, 특정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우정을 갖는다. 또, '비(悲)' 의 원래 의미는 '탄식한다'는 뜻으로 중생의 괴로움에 대한 깊은 이해·동정·연민의 정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파이오니온의 태도는 어느 정도 이와 맞아떨어진다. 이토록 자비(慈悲)가 가득하시다니. 힐라토 파이 오니온은 확실히 현군(賢君)이신데... 시나는 혼란한 눈으로 파이오니온 님을 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여동생이 불가로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자신의 말에 왜 그런 식으로 화를 내신 걸까? 그리고 머리카락 색은? 시나는 알 수 없었다. 한편 레이서스는 시나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침울해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좀 더 침착하게 시나를 대할 수 있었는데. 여러 남자애들에게 고백했다는 말이나, 하누카의 날을 거부 한 것에, 자신도 모르게 지나친 반응, 거친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남자답지 못하고 변덕스럽게 보였을 지도 모른 다. 사실 시나가 자신의 머리카락 색에 대해 뭐라고 한 것도 아닌 데... 오히려 그녀는 그 혼 강에서, 자신의 말처럼... 그런데 왜 그 런 일을 스스로의 입으로 꺼내서 말했는지. 아직도 이토록 약한 마음 이라니. 레이서스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더욱 더 아피네스에게 열중한 척 했다. 그러므로 그곳엔 한 동안, 아피네스의 노랫소리만이 낮게 깔려 있었 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서재 문이 열리고 루드랫 이 들어왔다. 아피네스는 그를 본 순간 눈을 빛내더니 부자유스런 몸치고는 놀랄 만한 속도로 일어나 어미 개를 맞는 강아지처럼 달려가 그에게 안겼 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레이서스는 그대로 앉아 있었고 시나는 어색하게 일어났다. 루드랫은 자기 팔 안에 있는 아피네스를 보며 미소 지은 뒤, 레이서 스를 향해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엘야시온님과의 이야기가 길어진데다, 아는 사 람을 만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레이서스는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나는 루드랫과 아피네스를 보고 있으려니, 묘하게 가슴 부근이 막혀,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손 을 댔다. '...얹혔나?' 아무래도 알 수 없는데... 시나는 곧 넬리의 말을 떠올렸다. 옷을 골라야 하니까, 금방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래서 시나는 루드랫이 아 피네스를 데리고 불가로 오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저, 여기 앉아요. 드랫." '드랫'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젠 많이 어색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루드랫은 고개를 들더니, 시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고마워." 그리고 그는 잠시, 시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한 남색의 눈빛에, 시나는 점점 기분이 안 좋아졌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얹혔나 봐...' 시나는 침울하게 그의 눈을 피했다. 그래서, 갑자기 루드랫의 눈에 떠오른 표정, 뭔가 혼란한 표정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루드 랫 자신 또한 인상을 쓰며, 시선을 아피네스에게로 돌렸고, 아피네스 가 자리에 앉는 데만 신경을 쓰는 듯 했다. 그래서 결국 시나에게 말 을 걸었을 땐 처음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어조였다. "너도 이 옆에 앉도록..." "어... 아니에요." 시나는 밝게 들리는 어조로 말하려 했다. "넬리 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거든요. 옷 같은 거 골라야 한다고. 루드랫이 너무 늦었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럼, 나중에... 파이오니온 님, 루드랫, 그리고 아피네스 공주님." 도대체 이 세 사람 사이에 자신이 왜 있는 건지, 갑자기 그것도 이 해가 되지 않아 시나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서재 바깥 으로 나왔다. 하지만 서재 문을 닫고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는 손에 시나는 뒤돌아보았다. 파이오니온 님이었다. 그는 약간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데려다 주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굳이 그런 수고를 끼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인데. 폐를 끼쳐서는 안되니 까. 그래서, 정중한 말투로 그의 호의를 사양하는데, 갑자기 레이서스 는 예의 또, 그 어두운 얼굴을 짓더니, 앞서 걸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나는 그의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고, 둘 사이엔 지금까 지 보다 훨씬 더 서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상태로 계단까지 왔을 때, 레이서스가 말했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 "왜 넌, 내가 널 여동생처럼 생각한다고 느끼는가 하는 거다. 내겐 여동생이 둘이나 있다." 레이서스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그 앞에서 멈췄다. "난 그들만으로 만족하니, 더 이상의 여동생은 필요 없다. 네 가 그런 역을 해줄 필요는 없다." 시나는 혼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왜 시나가 납득하지 못하는 지, 이해할 수 없어하며, 레이서스는 분 명히 말했다. "무슨 생각? 널 여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네가 내 아내가 되는 것이다. 난 그런 생각이 다." 시나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어졌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하지만, 파이오니온 님은, 약혼녀가 계시잖아요...!" 잠시 레이서스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 보면 아까도 이런 말을 했 다. 그때는 시나가 언제 '하누카의 날'을 치를 수 있는 건지 묻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당황해서 새빨갛게 붉어진 시나의 얼굴을 보며, 레이서스는 점차 무언가 깨닫기 시작했다. "아..." 레이서스는 갑자기 오해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넌... 그렇지! 네 계급에선, 한 남자는 한 여자만을 얻도록... 그런 생활에 익숙한 거냐? 그래서, 내가 한 여자만을 아내로 얻을 수 있다 고 생각하고...? 그래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냐? 내가 널 아내로 원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하누카의 날을 거절한 거냐?" "다, 당연하잖아요!!!" 레이서스는 웃었다. "맙소사. 이런... 난 네가..." "....?" "아니, 아니다. 하하... 단 이틀 새에, 마음이 바뀌었다고만..." 무슨 마음? 시나는 '아내' 어쩌고 하는 말이 또 나오자, 머릿속이 혼란해서 파 이오니온 님이 '무슨 생각'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레이서스가 시나의 오른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거기에 입맞췄다. 그는 그대로 눈을 들고 웃음을 띈, 그러나 진 지한 눈으로 말했다. "맹세하지만. 난 널 내 아내로 맞겠다... 하지만, 내게는 의무가 있 다..." 그의 눈에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네 계급의 방식도 좋겠 지. 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는 것도. 나도... 만약, 네가 내 계급의 사람이었다면... 알겠는지?" 시나는 알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그런 다지 않은가? 자기 계급의 사람하고 맺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더욱, 레이서스 의 '사랑'이라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만... 하지만... 시나는 레이서스의 진지한 눈에, 이것이 '정말'이라는 생각이 떠올 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 믿을 수 없다. 설마... 정말이라니. 이런 분이, 아무 것도 아 닌 여자 애를 '사랑'한다고? 정말로? 시나의 가슴은 또다시 두근거렸다. 그런 시나를 보며, 레이서스는 부드러운 눈을 짓고, 그녀를 끌어당 겨 이마에 입맞췄다. 입술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레이서스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널 내 아내로 맞겠다. 칼리스는... 내게 맹세를 하라고 했 지. 자신이 나은 아들만이 내 이름을 잇게 될 거라고. 하지만 난 네게 서 나온 내 아들을 보고 싶다. 그래서 너와 하누카의 날을 치르고 싶 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 때라도 상관없지만. 이해하겠는지? 칼리 스는 이해할 거다. 힐라토의 여왕이 될 그녀는. 계급으론 너보다 한참 높은 위치에 있으니, 네 자식들이 자신의 자식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는 걸... 너는 네 자녀들과, 아주 평화롭고, 조용히 살게 될 거 다. 나, 힐라토 레이서스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로서." (계속)================================================== 요즘은 계속 러브러브 모드군요... 장롱군 옆구리에 이마를 박으며, 깃털을 뽑아서 비행기 날리기를 하며... 그래도 열심히 씁니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 유치한 것이 더 잘 팔린다고 하니, 즐겁기만 하군요... <엔...> 추신: 쓰다가 생각하기를... 난 정말 대단한 주인공을 데리고 이야 기를 쓰고 있단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시나야... 걱정 마. 어딘가에, 쓸모가 있겠지. 글래머가 아니라 도... 자비(慈悲)에 대해 그런 뚝 부러지는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틀림없이... -_;;;) 추신2: 핫핫... 디트가 인기가 좋네요...^^; 모 분이 메일 주신 바 에 의하면, 그 분은, 엘야시온에서 제일 애인으로 삼고 싶은 남자가 디트래요... 게시판에선, 남자는 지위도 중요하지만 역시, 재산이... 라는 말이 나와, 웃고 있습니다. 핫핫.. 재밌다...^^ 두 번째는, 엘야시온... 엘야시온 가디엘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 조금 의외... 네... 가디엘이 좋아서, 포우즈를 취하고 있군요. 그의 커멘트: 의외는 무슨. 당연한 결과 아닌가? 후... 미노년의 승 리라고 할까. 혹자들은 인생을, 벨루카의 시기부터라고 하지. 후후... 성숙한 매력을 알아볼 줄 아는 처녀. 이런 처녀가 있는 한, 엘야시온 의 앞날은 밝구만...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후후... 핫핫핫 핫핫핫--- 랄라라--- (아, 엘야시온... 그는, 페어리의 족속이기에... 그런데 성숙한 매 력이 뭐지?) 란사드크: (그런 엘야시온을 보며) 도대체, 가디스, 저 놈은 뭘 하 는 건가? (이글이글...) 세 번째는, 레겜...^^~* 아무튼 디트에 관해서 라면 이것 또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예전에 바리스 마노테오나에서 루드랫과 디트가 이야기를 나눌 때, 루드랫이 디트를 '하디트'라고 부릅니다...^^;; 이건 작가의 실수로... 원래 디트의 이름이 '하디트'였기 때문에... 작가가 속으로 그를 계 속, '하디트'라고 불러서 생긴 일이었죠...^^ 그걸 어떤 독자 분이 지적해 주셔서, 나중에 디트는 하바티온이 되 기 때문에 그렇게 실수를 하고 말았다고 알려드린 일이 있는데... 지 금은 아마 바꿨을 겁니다.^^(또 어디다 그렇게 써놓은 부분이 있다 면...^^;) 추신3: 대사와 지문 사이 간격이 없어서 불편하시더라도...^^; 한 줄씩 안 띄면 어떤 느낌이 되는지 실험하고 있는 중이라. 그냥 다운 받으셔서(양도 꽤 되니까.) 편집기로 간격을 쭈악, 늘려 읽으시 면...=_=;; (권장... 160% ~ 200%. 취향에 따라, 300%까지도...) 추신4: 요즘 들어서는, 독자들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틀려서 재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서스나 루드랫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꽤 많은 데... 소수파로, 어떤 분은 아피네스가 불행해지면 절대 안 된다고 하 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각각의 남자를 루사벨라와 칼리스나에게 돌려주라는 분도 계셨고(게시판이었죠, 아마...^^;) 겐트온의 팬이라 고 하신 분도 계셨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디트는 예전부터 인기가 있는 편이었죠...^^ 아주 초기에, 디트와 시나를 맺어주라는 의견도 있었으니까... 셰리카와 이드넘의 커플 설이 심심지 않게 들려오기도 하고... 요번엔, '엘야시온'이 나와서... 정말 놀라고 있습니다. (엘야시온: 핫핫핫핫핫핫------ 랄랄라라라......) .....엘야시온에 당분간, 꽃바람이 불 듯...^^;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57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22 23:58 읽음:1019 관련자료 없음 ----------------------------------------------------------------------------- 언젠가 소설에서 '핑크 빛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는 구절에 대해 아주 많이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고, '핑크 빛 구름'이라고 해봤자 연상되는 건 노을이나 여명일 뿐이니, 그건 아마 무척 희망찬 기분이나 무척 감동적인 기분을 묘사한 말일 거라고 추측한 적이 있다. 그 외, '세상이 온통 환해 보였다', '단 둘만이 존재하는 기분이었 다' 등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라, 시나는, 그런 구절이 뭉텅이 로 등장하는 연애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이었다. 동화라면 어렸을 때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지만, 어렸을 때 동화 한 두 권 안 읽은 사람 은 아무도 없고, 그건 별 추억거리도 못된다. 그래서 시나는 점차, 자신에겐 이런 종류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안 맞는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글을 읽더라도 '시험에 잘 나오 는 소설, 101가지', '뜨개질, 서른 일곱 가지 니트', '건강 만세'(건 강해 보고 싶어서), '나폴레옹의 전쟁금언',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같은 글들로, 주로 실용(?)서적이었다. (계속)================================================== 에잉... 내가 지금 뭘 하나, 회의감이 드는군요. -_-;;;;;;;; 아무리, 써도, 써도, 이 부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 뒷부분은 어느 정도 썼으니 이 부분이 해결되면 토요일엔 왕창 올릴 수 있으리 라.. 믿쑵니다. 그럼... ^^;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161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3/25 23:50 읽음:355 관련자료 없음 ----------------------------------------------------------------------------- <저번 회의 마지막 구절> 언젠가 소설에서 '핑크 빛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는 구절에 대 해 아주 많이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고, '핑 크 빛 구름'이라고 해봤자 연상되는 건 노을이나 여명일 뿐이니, 그건 아마 무척 희망찬 기분이나 무척 감동적인 기분을 묘사한 말일 거라고 추측한 적이 있다. 그 외, '세상이 온통 환해 보였다', '단 둘만이 존재하는 기분이었 다' 등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라, 시나는, 그런 구절이 뭉텅이로 등장하는 연애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이었다. 동화라면 어렸을 때 열심 히 읽은 기억이 있지만, 어렸을 때 동화 한 두 권 안 읽은 사람은 아 무도 없고, 그건 별 추억거리도 못된다. 그래서 시나는 점차, 자신에겐 이런 종류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안 맞는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글을 읽더라도 '시험에 잘 나오는 소 설, 101가지', '뜨개질, 서른 일곱 가지 니트', '건강 만세'(건강해 보고 싶어서), '나폴레옹의 전쟁금언',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같은 글들로, 주로 실용(?)서적이었다. <188편 이어서*^^*> 하지만 윤시나. 17년의 생애 처음으로 '핑크 빛 구름'이라는 것이 노을이나 여명을 표현한 말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 그런 기분이 될 수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절절히 느꼈다. 이 발견과 이 감성적인 성장에, 시나는 기쁜 마음이 들어, 약간 흥분한 어조로 넬리에게 말했다. "넬리? 난 지금 '핑크 빛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에요!" 넬리는 웃었다. "어머! 아가씨... 정말 이네요! 드레스가 너무 예뻐 서, 핑크 색 구름같이 보여요!" 치수를 재고 있던 재봉사가 말했다. "잠깐 비켜 주세요... 기장을 맞춰야 하니까." 시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이 아닌데.' 시나는 핑크 색 옷자락을 끌고 앞으로 걸었다. 하지만 재봉사는 넬 리에게 비키라고 말한 것이었고, 사실 그는 참으로 능숙하게 시나의 치수를 재고, 옷을 고쳐 나가, 시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시나는 더욱 혼자만의 '핑크 빛 구름'에 잠겨 있을 수 있었 다. 핑크 색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젠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건, 몸이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난 듯 무척 가벼워,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려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고, 밑에서는 구름이 받쳐 줄 것 같은 기분이다. 밑에서 받쳐 주는 그 구름이 핑크 빛인데... '그래. 소설에서도 그랬으니까... 이 [핑크]라는 색이 중요한 거 지.' 그래서 온 세상이 노을이 지거나, 여명이 터 오는 것으로 보이고, 마음 가운데에는 노을 후의 안락함을 기대하거나, 여명 후의 희망참을 기대하는 것으로... '맞아. 노을이 지면 가족한테 돌아가야 하니까, 편안한 가운데 [단 둘만 있는 기분]이 들고... 나도 아빠랑 그랬으니까... 여명 후에는, 세상이 환해지니까... 그래서... [온 세상이 환해지는]... 흠... 그래 서 그런가. 나도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드네.' 시나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소설에서 말한 것들이 대부분 맞다는 것 을 알고, 그런 소설들을 더 읽어 볼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전에는 언제나 딱지만 맞아서, 그런 기분에 대해 분석해 볼 기회도 없 었는데(슬픈 일이다) 지금은 파이오니온이 그런 이야길 해 주셔서 그 런 기분이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는데, 그 고백이 받아들 여졌을 때의 기분. 그러니 소설책을 더 읽었더라면, 이 기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멍한 기분만 든다. 행복하고 몽롱한 머리.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멍한 머리라는 것은 깨끗한 머리와 반대 되는 말이니까. 시나는 그 멍한 기분 속에서 점차, 많은 중요한 것들 을 잊어 갔다. 왕족들이 묵는 건물, 싯딤나무 그림 앞에서 보았던 은색의 눈동자, 그것을 봤을 때 느꼈던 오싹한 소름이라든지, 신체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통제할 수 없을 것 같던 기분이 들던 일, 그 외 너무나 많은 것들. 시나는 점차 '현실적'이 되어 갔다. 즉, 서울에서 한 고등학교를 다 니던 그 여자아이로 거의 똑같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중독이 심한 공기를 넘어, 이곳의 공기에 대한 면역이 생겼으므로.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중력에 찌그러지지 않을 만한, 내부의 지지대가 생겼고 이젠 침범 당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을만한 힘과 능 력을 갖추었다. 더 이상, 그 전과 완전히 똑같은 개인이 될 순 없겠지 만, 무언가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지만, 시나는 아주 깊은 곳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것이 가장 좋은 거야'라고 생각 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다는 느낌이 행복감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에서 후배들에게 사랑 받았을 때는 좋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 다...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어떤 종류의 애정이라도. 그래서 시나는 레이서스에게 감사했고, 그걸로 인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성격적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됐습니다, 아가씨. 조금만 기다리시면, 몸에 맞게 고쳐서 금방 대 령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르신 천들은 내일 모레까지 새 옷으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재봉사가 그렇게 말하고 천들을 정리하기 위해 물러나자, 다음으로 보석을 가져온 시종들이 나서서, 시나에게 마음에 드는 것 고르기를 청했다. 그들이 내놓은 검은 비로드 상자 속에선 파랗고 붉게 타는 돌들이 별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웠지만, 시나는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보는 순간,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루비 목걸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 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작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시나 는 보석은 됐다고 거절하며(빌렸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는 가) 그 신음하는 듯한 음성까지도 지워버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기를, 역시 좋아하는 사이라면 상대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구나 그렇게 친절하고 이런 옷까지 주고, 보석까지 보여줬는데.... 무슨 보답이라도 해서, 파이오니온께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때, 시나의 거절에 당황한 시종들이 상자를 내밀며 재차, 제발 이 중에서 하나라도 고르라고 애원했다. "아가씨..." 그들은 자기들이 그냥 돌아간다면 파이오니온 님의 명령을 어기는 셈이 되니,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래요? 음... 하지만 잃어버리거나, 상처라도 내면..." "괜찮습니다." 강력한 말투였다. 그래서 시나는 결국 그 중에 하나를 고르기로 했 다. 솔직히, 보석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으니까 그런 아름다운 것을 살 펴보는 건 즐거웠다. 시나는 상자 속을 눈으로 주욱 훑었다. 의식적으로 루비는 피해, 진 주 목걸이를 골랐다. 은과,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하얀 진주 목걸이였다. 루비는 너무나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리게 하니까. 슬 픔... 그러고 보면 파이오니온 님의 아름다운 약혼녀는 루비 같은 붉은 눈 이다. 곧은 자세를 가지고 있어, 무척이나 당당하게 보이는 공주님. 그리고 시나는 파이오니온이 잘 되는 것을 바란다. 파이오니온 님의 행복. 그러므로 시나는 진주 목걸이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은 뒤, 더욱 깊이 이모저모 생각했다. '파이오니온 님의 행복이라.... 내 바람은 그것이지만.' 맹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옆에 있을 때, 파이오니온 님이 정말로 행복 하게 될지...' 시나는 넬리가 목에 목걸이를 걸도록, 약간 고개를 숙 였다. '의심스러워. 행복하기 보단, 곤란한 일이 더 많겠지. 소설에서 도 그렇거든. 한 남자가 두 여자 사이에 끼어서, 밤잠도 못 이루고 고 민하고. 그래서 사회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거 보면서, 한 여자만 사귀면 될 텐데, 왜 이런 걸로 고민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게다가 그 공주님은...' 칼리스나라는 이름의 공주님은 참으로 자존심이 강해 보였다. 그런 자존심 강한 공주님이 자기 약혼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 좋아할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나 상식으론, 그렇다. 분명히 자존심 상해 할 텐데. 그렇게 내내, 자존심 상해하는 분을 아내로 맞 아야 할, 파이오니온.... 그러면 미래에, 파이오니온 님의 가정은 도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게 될까? 게다가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아무리 '핑크 색 구름' 속에 있다고 해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시나는 거울을 보았다. 핀으로 가재봉된 드레스를 입고, 예쁜 목걸 이를 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그럴 듯 해 보였다. 정말 이곳 사람처 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사실은 정말로 이곳 사람은 아니다. 파이오니 온 님이 여행자 '레겜'이 아니듯.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말 그대로, '사는 세계'가 틀리다. '사는 세계'가 틀리다는 건, 마음으로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 관계 에서는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백퍼센트, '될 것이다'라는 단어로 전환 될 수 있다면. 파이오니온 님이 정말, '레겜'이었음 좋을 것이다. 파이오니온 님이 사실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었음 좋을 것이다. 파이오니온 님이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남학생이 었다면. 만약, 파이오니온 님이... ...였더라면. 시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 의미 없는 허황한 말 들이다. '만약'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과거에 남아 있을 뿐, 결코 미래 가 되진 못한다. 만약 이것들이 노력으로 가능한 부분이었다면, 시나 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시나 자신의 힘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열심히 배워서, 상대에게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 노 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노력'을 해야한단 말인가? 계절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뀌듯, 시나는 자기 앞에 놓여진 날들을 바뀌며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현실적인' 날들이었 다. 시나는 이곳에 있지 못할 것이다.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이곳을 떠나, 자신의 아빠 곁으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같은 학교 내에 있는 남자애에게 반하기도 하고, 채이기도 하고, 시험 성적에 우울해 하고, 진학 때문에 고민을 하며, 그런 '현실'을 살 것이다. 이곳에 지금, 시나를 위한 약간의 공간이 있지만... 시나는 이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나는 현실적인 책을 좋아한다.(지금은 비록 핑크 빛 구름 속에 있 지만) 그러므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 이곳 사람이더라도, 그래서 이곳에서 살 수 있다고 하 더라도.(혹은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파이오니온에게 어울리기 위 해 필요한 지식들(궁정 예절, 말투, 지식들)을 다 배울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은 파이오니온에게 얼마나 많은 감출 거리가 될지. 결코 드러내놓고 그는, 시나를 옆에 둘 수 없 을 것이다. 이건 감정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현실적인 일들이다. 하물 며, 도대체 어느 누가 인간의 감정을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래의 어느 날인가에, 파이오니온 님의 마음이 변한다면? 'Room'은 사라진다. 그럼 그때 일어나는 사건. 그때 일어날 자기(自己). 그건 이들에게 불행이 될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시나는 자기 손을 펼쳐, 주먹을 쥐었다 놓고, 눈을 감았다. '불안하 니까.' 핑크 색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이 행복하지만... 시나는 그 구절을 읽으며, 종종 생각했다. 핑크 색 구름... 핑크 색이더라도, 구름은 구름이니까. 그래서 소설 속의 연인들은 그렇게 많이 눈물을 흘리는 구나. 구름은 빗방울을 뿌 리기도 하니까. 차갑고 차가운 빗방울. 핑크 색 구름에서 내리는 빗방울이기에, 더 욱 슬플 것이다. 마치 이 은색의 진주 목걸이처럼 피부에 차갑게 떨어 지겠지.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한, 사람들의 지탄은 더욱 차갑게. 시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래. 확실히 그럴 거야. 루드랫의 종속자로서도 그렇게 많은 지탄 을 받았는데...' 하물며 '파이오니온'이야... 사람들이 어떤 소리를 할 지 알 수 있 다. 시나는 진주목걸이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은색의 목걸이 는, 핑크 색 구름 가운데서도 아롱거리며, 시나의 생각에 용기를 주었 다. '그러니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 거야.' 사람은 자기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전혀 뜻밖에, 상 냥한 파이오니온 님을 만나... 시나는 그의 다정한 검은 눈동자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은 내가 갑자기 없어지면, 상심할 지도 모르지. 나중엔 잊어버리시겠지만... 하지만 당장은 무척, 실망하고 화까지 내실지도 몰라. 인간의 감정이 란 게 그렇잖아?' 넬리가 질문했다. "아가씨, 네? 마음에 드시냐고요? 제가 보기엔 너 무 너무 예쁜데... 하지만 이것 말고, 좀 더 큰 걸로 해 보실래요?" "네? 아, 아니에요. 이걸로 좋아요. 아주 예쁜데요. 너무 큰 건, 저 한테 안 어울릴거예요. 보석이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을 테니... 하하..." 뭐든지 그런 법이다.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왜 파이오니온 님 같은 분이, 미모도 별로 고, 몸매도... 아니, 관두자. 아무튼 좋다고 해줬으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오니온 님에게, 아무래도 난, 자 신에게 별로 안 어울리는 여자 애라는 것을 깨닫게 해 드리는 거지. 그럼 내가 현실로 돌아갔을 때, 파이오니온 님도 한숨 놓으실 거야. 그래... 나중에, 내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셨냐고 물어보자. 그래서 그 부분을...'까지 생각하던 시나는 문득 생각을 멈추고 우울하고, 비 참한 표정을 지었다. 넬리가 그런 시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채 물었다. "아가씨? 왜 그 러세요?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너무 아까워서." "네?" "...진짜로 아깝네요. 같은 세계에만 살았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평생에 이런 기회는 없는 건데. 흑... 모처럼 핑크 색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이런 기분을 또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아니, 그것 보단, 이런 멋진 남자가 자신을 좋다고 할 날이 과연 다시 올까? 그때, 보석을 갈무리하던 시종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비로드 상 자를 펼쳐들었다. "그러니까 사양 마시고, 어서 고르시길." "예?" "아깝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엥... 아니, 하하..." 아니, 그것이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하려던 시나는 결국 웃어 버렸 다. 이런 경우는 역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온다. 아니 답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답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슬프다. 시나 는 자신이, 그 멋진 파이오니온 님을 관두고, 왜 그렇게 현실로 돌아 가고 싶어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만 바라보고 사는 아 빠를 버릴 수는 없었다.(아빠가 자신만 바라보고 살지 않는다면 약간 억울해 지겠지만) 시나는 웃음 지으며, 비로드 상자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역시 진 주 목걸이와 어울리는 작은 진주 반지라도 끼는 것은? 상자는 닫힐 것 이고, 그렇다면 잠깐이라도 빌려,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으면 된다. 목걸이와 반지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주 최대한 조 심스럽게 다루어서. 이건, 자신의 보석들이 아니니까. '아... 그래. 이런 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행동하자. 그럼 나중에 추 억도 아주 좋게 남을 거야....' "음... 그럼 이걸로 끼어도 돼요?" 아름다운 보석들에 잔뜩 흥분한 채, 옆에서 구경하던 넬리가 손뼉을 쳤다. "어머, 아가씨!! 그 반지, 참 예쁘네요! 그렇담, 이왕에 하는 것, 팔찌는 어떠세요? 여기... 이 귀걸이도..." "하하... 아까도 말했듯, 그것까지 하면, 보석에 짓눌려서..." "절대, 괜찮을 거예요!!!" 시나는 넬리의 그 강력한 말에, 결국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그냥 해보는 거니까, 때도 그리 안 탈 것이다. 시나는 보석들을 아주 조심 스럽게 다루고, 나중에는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흠집 하나 나지 않 은 채로, 누군가가 손댔다는 흔적 하나 남지 않은 채로.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되더라도....' 시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사실 이건, 시나가, 자신에 대한 레이서스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 지 모르기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걸 알았더라면 조금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 지 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 안에서 이것은 시나가 행동할 수 있는 최선이 었다. 시나는 지독하게 '현실'적이 되어있었고, 이젠 이곳의 어느 사 람도 이해하는 게 힘들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시나 안에 있는 낙천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특성. 그건 마 음과 그 보다 더 깊은 곳에 새겨진 시나의 천성이었다. (계속)================================================== 음... 별로 안 많죠? --; 원래는 쓴 데까지 다 올리려 했는데, 이렇 게 올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하하...^^; (그래도 수요일에 비해선, 왕창입니다.^^) 번호는 일부러, 188로 했습니다.(^^)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9- 관련자료:없음 [24260]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3-30 00:50 조회:1180 "아버지... 이건..." 겐트온은 란사드크의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를 보 고 창백한 안색으로 물었다. "...무언가. 특별한 생각이라도 있으신 겁 니까?" 란사드크는 침대 위의 소녀를 힐끗 보고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아스 테린이 저기 있는 것이, 내 의도로 이루어진 일인지 묻는 거라면, 아니 다." "그러면." "너한테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하지만 란사드크는 짧 게 말했다. "저 계집이, 맹랑하게도, 내가 쉬고 있을 때, 노크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엘 들어왔고 내 얼굴을 보았다." 겐트온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또... 가면을 벗고 계셨습니까." 란사드크는 지금도 가면을 벗고 있었다. "지금 그런 따위로 너와 토론하고 싶은 생각 없다. 지금쯤 사람들이 저 계집을 찾고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루온 루사벨라까지도 들이닥칠 지 모르니, 어서 데려다 주고 와. 이 이상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니까." 그리고 란사드크는 겐트온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아스테 린위로 짙은 초록색의 빛을 전사했다. 그러자 의식이 돌아오는 듯, 아스 테린의 입에선 낮은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머리야... 후우..." 아스테린은 눈을 뜨고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처음 엔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고, 더불어 그들이 누군 지도 알 수 없었 다. 하지만 '본다'는 감각에 익숙해지자, 남자 두 명 다 자신이 익히 알 고 있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속이 메스껍고 아래와 위, 겉과 속 이 바뀐 듯한 느낌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이름까지 깨끗이 기억났을 텐 데. 은발의 중년 남자 쪽이 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게도 갈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스온 아스테린 님?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습니다. 우선 조치를 취하긴 했는데... 여기, 하바티온 하겐트 님께서 스아드 님을 모 시러 오셨습니다." 아스테린? 그게 자신의 이름이었나,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차츰, 중년 남자--끔찍 한 흉터를 가진 남자--의 말이 맞다는,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자신은 스아디온 아스테린이다. 힐라토의 왕녀며, 이곳 클로니아의 여 왕이 될... 아스테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옷차림을 보았다. 다행히, 흐트러진 데는 없었다. 이런 낮은 계급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싫다. 아스테린은 다음으로 자기 고통을 느꼈다. "아... 머리가 끔찍 하게 아프군. 왜 이런 걸까... 루사벨라는 어디 있지? 너희들이 왜 내 곁에 있는 거야?" 아스테린에게 굽실거리며, 그것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생각에, 란사드 크는 인내심의 한계까지 느껴야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고, 다음으론 루온 루사벨라가 들어왔다. 아스테린 의 루이트. "...일루티온 란사드크. 여기에 스온 아스테린 님이 계신 건..." 과연. 왕족의 개답군. 란사드크는 코웃음 친 뒤, 루사벨라에게 자초지 종을 설명해 주었다. 발목을 다쳐 들어오시다,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넘어지셨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는. 그래서 힐러 라이트를 쐬어 드리긴 했지만, 지금도 구역질이 나는 기분일 테니, 조심해서 모시라는 말씀을 드렸다. 걱정과 놀라움으로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을 보았고, 아스테린은 란사드 크의 말에 겨우 기억을 떠올리고 죄책감과 자존심이 상한 것으로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설명엔 아무런 허점도 없었고, 란사드크는 루사벨라가 자기 주인을 데 리고 나가는 것을 진절머리난다는 생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루사벨 라가 와준 덕분에, 겐트온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을 필요는 없어 졌다. 란사드크는 겐트온의 내릴 명령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약간은 권태롭고, 약간은 불쾌한 기분은, 아스테린 이 문을 나서며 고개를 돌렸을 때,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아스테 린은 란사드크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와서 넘어지기 전. 분명히... 여기에 누군가가 있지 않았어? 은발에 은색 눈을 가진... 그건, 저어... 이름이 기억날 듯 말 듯 한데. 아무튼... 그대 말고 또 다른 누가 있지 않았나?" 겐트온은 입 부근을 긴장시킨 채 란사드크를 돌아보았고, 란사드크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가, 겨우 말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스아드 님. 머리를 부딪 히실 때 본 환각일 겁니다. 아마도..." 그리고 그들이 나갔을 때, 겐트온은 이젠 이 상황을 어떻게 할건지, 묻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이 빌어먹을 말괄량이 계집애!" 란사드크는 격노해서 욕설을 뱉었다. "저런 작은 것도, 주제에 왕족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이 안 듣는군!!" "아버지..." "제길!!!" 란사드크는 번득이는 눈을 돌렸다. "아버지 소리를 집어 치 워!! 이제 어떻게 할지나 생각해라!!! 네 일은 그거니까!!!" 겐트온은 그의 눈을 피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덮쳤을 때, 바깥에 있었으므로, 몸의 일부분은 아직도 제대로 감각을 찾 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획하는 일과, 대책을 세우는 일은 그의 몫이었 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듯. "...스온 아스테린 님께 다시 한 번 더, 마인드 컨트롤을 걸 수는 없 습니까?" "없어!! 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마인드 컨트롤했어!! 그런데 지금 당장, 저런 소릴 지껄이다니!!! 저 계집은, 보호물만큼 강한 자존력(自 存力)을 갖고 있어!!! 제기랄!!! 보호물에게 마인드 컨트롤 시켰을 때, 내 목숨까지 날아갈 뻔했는데!! 저런 계집의 입을 막기 위해, 내가 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이 나머지 반쪽 얼굴도 걸까?!!!" 그러니까, 왜 부주의하게 가면을 벗고 있었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존력'이라니.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겐트온도 알고 있었다. 그것 때 문에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긋지긋한 세월... 겐트온은 마른침을 삼 키며 말했다. "...그럼, 스온 아스테린 님께서, 제대로 기억을 찾으시는 건." "곧." 겐트온의 얼굴은 약간 더 창백해 졌다. "그럼... 하는 수 없군요." 겐 트온은 푸른색의 눈을 들었다. 이 일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자기와 자신 의 동생들을 위해서. "계획을 앞당기는 수밖에." "계획이라니?" "아버지께 앞으로 닥칠 일 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묻기 위해 선. 게다가 어차피, 다음 주 중에는..." "닥쳐라!! '어차피'라고?!!!" 란사드크는 불쾌하게 으르렁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의 자업자득이었다. "제길...! 그 망아지 같은 계집애가!!!" 그러다 그는 겐트온에게 화풀 이했다. "쓸모 없는 자식!!! 최연소 수네드리온 회원이라는 놈이 생각하 는 게 그따위뿐이냐?!! 네 아비에게 괴로움을 끼칠 생각 뿐이야?!!" 겐트온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계획은 이것뿐 입니다." 그 말에, 란사드크는 성큼성큼 다가와, 겐트온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 고 겐트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겐트!! 내 눈을 봐라!! 네가 무슨 생각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넌 나를 미워하고 있어. 그 렇지?" 겐트온은 그의 눈을 보다가, 눈을 피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 가루타넬의 수호를 받고 있는 자여- 너, 지혜로운 자-" 란사드 크는 그를 비웃고 있었다. "네가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든 그건 상관 없다만.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한다면, 그건 아주 곤란하다. 잘 기억해 야 한다. 내가 너희 형제들을 어떻게 돌봐 주었는지. 가디스에 의해 파 문 당한 너희 가문들- 인간 사냥꾼에 의해 사냥 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너희 가문의 권속들을 어떻게 돌봐 주었는지. 그걸 잊지 마라. 혹... 그 걸 잊었다고 하더라도." 겐트온을 보는 란사드크의 눈은 증오로 타고 있 었다. 그와 동시에 그 분노를 나타내는 듯, 멱살을 쥔 손아귀에선 어두 운 초록빛이 나와 겐트온의 옷자락과 살갗은 태웠다. "내가, '현재'에 네 동생- 도바. 그리고 이드넘, 샤일라테에 대해 어 떤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잊지 마라." "단 한번도-" 마침내 참지 못한 겐트온이 란사드크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초록색의 빛은 겐트온의 눈에, 시체와 같은 창백한 빛을 주었 다. "당신을 배신할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란사드크가 웃었다. "미안하게도. 아직 노망이 나지 않아서. 어릴 적, 네 놈이 네 동생을 데리고 내 곁을 떠나려던 밤을 잊지 못했다." "그건-" 겐트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평생을 다해, 사죄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당신을 떠나려고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 도 이번 하누카의 날이 끝나면..." 갑자기 란사드크는 겐트온의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낄낄 거리며 웃음을 삼키더니, 고개를 들었다. "이번 하누카의 날이 끝나면. 그래... 잊지 않았다. 뭐..." 그는 삐딱 하게 고개를 하고, 자못 은혜를 베풀 듯 말했다. "그래... 약속을 지켜 야지. 그 거룩한 수네드리온 회원과 한 약속인데. 그런데, 약속이 뭐였 더라?" 겐트온은 주먹을 쥐고 말했다. "도바와... 이드넘, 샤일라테를... 일 이 끝나면 이젠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니,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오호라. 그랬지." 겐트온은 고개를 숙였다. "...언제 묻든, 언제나 답해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말씀드렸듯. 평생을 다해." 란사드크는 그의 고분고분한 모습과 말투를 흥미롭다는 바라보다가, 곧 그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의 사고체계는 언제나, 이리 저리 뛰기 를 좋아했고, 감정 또한 그러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분노의 대상을 다시 아스테린에게 돌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평생이라. 좋아, 결정했다." 란사드크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장난 감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즐겨하는 아이처럼 말했다. "겐트. 사랑하는 내 아들. 방금 내 말은 잊어버려라. 내가 그 구역질 나는 계집 애 때문에, 괜히 귀한 내 아들에게 화풀이를 했구나. 미안하다. 그 계집 때문에, 우리 부자 지간이 괜히 서먹해질 뻔했으니... 자... 어떻게 할 까." 란사드크는 겐트온에게 다가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으로 겐트온에게 사 죄했다. "미안하다. 겐트.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이런 걸 한 번 생각해 보 겠느냐? 만약 이렇게 한다면, 앞으로 우리 일에 많은 차질이 올까?" 란사드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으므로, 겐트온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겨우 말했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란사드크는 그의 공손한 말에 빙그레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 의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착한 녀석. 겐트온은 언제나 착한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란사드크는 느긋하게 말했다. (계속)===================================================== 이제부터 상당히 긴 후기(?)가 시작될 겁니다. 세 번에 걸쳐 쓴 거고... 원래는 바로 이 시간에 제 글 말미로 넣으려 했다가.... 어떤 글(정확하 게는, 책으로 나온 묵향을 타이핑해 쳐 올리면서, '연중하고 출판하다 니. 이런 양심도 없는 작가의 행동에 분개한다'라는 메모까지 윗머리에 달았다는 글)에 자극을 받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오늘 새벽 2시 무렵 엔가, 게시판에 올리고 말자...라고 생각하고 잔뜩 화가 나서, 거칠게 덧붙여 써서, 올리려고 하는 순간.... 어떤 분이 보내주신 메일을 받아 서.... 허탈해졌다고나 할까. (대단한 예지력이십니다.... 소라 님....^^;) 미리 걱정해 주시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 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어차피 이건 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 분들께 드리는 공 지이니, 침착하게, 시간을 두고 진정된 마음에서 후기를 올리는 게 낫겠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가 나서 한 말은 아무리 옳은 내용이라도 나 중에 후회하게 될 용어를 쓰게 되니까. 오늘 하루 종일 생각하고. (이 문제에 대해 도합 48시간을 넘게 생각하고 글을 쓰는군요. 처음엔 희망찬 마음이었는데. 점점 부정적이 되어가고.... 오늘 오후, 지금까지 나우누리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글쓰는데, 왜 이런 문제까지 고민해야 하는 건지. 통신 연재의 묘미이겠죠? 하지만 이런 안 해도 될 고민을 사서하는 것은 분명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심이 확고하게 들어, 글을 올립니다. (약간의 본문을 붙이는 것은, '연재란'에 글을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 나우누리 난의 사건들을 보며 씁니다. 작가들의 '연중'과 관련해서 요. 가끔, 엘야시온의 출판 건에 대해서 말해 주는 분들이 계시는데. 저번에도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아직도 이 글을 출판하지 않는 이 유는 글 자체의 문제입니다. 출판하기엔 스스로 보기에도 미흡하니까, 다 쓰고 나서 수정을 할 생각이죠.(수정해도 미흡할까봐, 그게 좀 두 렵긴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초기에,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저 자신과 한 약속 때문입니다. 이왕 쓰는 것, 꼭 완결하겠다는 소박한 꿈으로(아무튼. 쓰다가 마는 것은, 차라리 안 쓰는 게 낫다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불타올랐습니다. 그건, '통신' 연재를 말하는 거였고, 만약 출판할 생 각으로 글을 썼다면 좀 더 신중하게 글다운 글을 썼을 겁니다. 유치한 표현 같은 것도 자제하고.... (하긴, 시작할 당시는 이게 이렇게 시간 을 잡아먹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몇 개월이면 끝날 줄 알고.... 진짜 소박했죠.) 나머지 세 번째 이유가, 보아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그 동안 격 려해 주시고, 재밌다고 칭찬해 주신 분들 덕분에 쓰는 데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통신으로 시작한 것, 통신으로 끝내자, ....였습니다. 하 지만 세 번째 이유는, 어느 정도 통신에 글을 올리고 나서야 생긴 이 유였죠. 연재 초기 때엔 아무 관심도 못 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상당 히 오래) 아무튼 글을 올린다는 건,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가끔 독자들 중에 '네 글 내가 안 봐줬으면, 그 정도로 떴겠고, 출 판 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뭐 어차피 통신 글이라는 건 조회수로 따지는 거니까, 그런 분들 말씀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로 힘을 얻는 것과, '쓰는 것'... 궁극적인 의 미의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어떤 글이 작가 안에서 태어나려할 때, 그리 고 긴 이야기의 시작으로 작가의 손에 의해 첫 단어, 첫 문장이 쓰여 졌을 때. 그때 '독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러 가지 셀 수도 없는 생활상, 개인적인 문제들로 인해, 손가락 하나 조차도 자판기에 올리기 힘들었을 때,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 힘 들었을 때, 그때 '독자'들이 그 엄청난 괴로움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독자가, 스토리를 끝내는 마지막 단어를 쓰고, 마지막에 <끝> 이라고 썼을 때 느끼는 기쁨을, 작가와 동일하게 느낄 수 있습니까? 독자들의 도움은 기껏, '자신과의 싸움'의 끝난 연후에 효력을 발휘 합니다. 작가가 스스로 어느 정도 싸움을 끝내고, 어느 정도 글을 완 성하고, 완성된 글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기 세계를 퍼 올려, 그 세 계를 인정받고, 그럼으로써 자기 세계가 확장하는데서, 커다란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내 '말'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이 '보여주는' 과정은, 분명, '쓰는' 과정과는 별개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는.... 과연 '쓴다'는 것에. 근본적 인 '쓰기'를 말합니다. 그 과정에, '독자'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 하는 겁니다. 독자들이 해 주는 좋은 평가와 좋은 비판을 무시하자는 소리가 아닙 니다. 글을 쓴다는 일이 갖는 속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자기 내부로 물러나, 자기 안에 들어앉아,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야만 하는 작업입니다. 글을 쓸 때는, 너무나 적막해 어느 땐 서글프 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한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절대로 글을 못 씁니다.) 고독을 덜어보기 위해, 동료 글쓰는 사람들의 쓰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그래서 전 작가들의 잡담을 좋아하죠) 딴 일에 몰두해 보기도 하 지만. 그리고 혹시 내 글에 대한 잡담이 없나해서(그야말로 내 글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 고독을 덜어보고자) 통신을 배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자리로 돌아와 고독가운데 잠겨야 하고, 어느 누구도 이 길 을 함께 걸어주진 못한다는 것이, 글을 쓰며 뼈저리게 느낀 겁니다. 이 가운데서 나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닿았다고 생각하 면 그 한계를 부수기 위해 또 노력하고, 한계가 부수어 지면, 또 다른 한계에 닿기 위해 노력합니다. 내 글이 사랑스럽지만, 그래서 그만큼 모자란 부분이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이런 걸, 누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글을 써서 남에게 보여주는 것 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론 우선 '쓰는 것'. 이게 가장 힘듭 니다. 쓰고 나서 글을 올릴 때마다 나오는 독자들 반응은 '거름'입니다. 이건 제게 자양분이 되고, 더욱 쉽게 힘을 낼 수 있게 해 줍니다. 거 름이 만족한 상태로 뿌려지면, 글도 잘 자라니, 충분히 즐겁습니다. 하지만 그럴 지라도. '쓴다'는 수고는 지독할 정도로 힘듭니다. 좋 은 평가와 비판은 '거름'일 뿐이지, 글이라는 열매가 나오는 '토양'은 못 된다는 말씀입니다. 거름이 식물을 잘 자라게 한다고, 거름더미에 식물을 심는 사람 있습니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은, 아직도 저 혼자만의 몫입니다. 쓴다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고, 무서울 정도로 고독한 일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이걸 정반대의 길로 생각합니다. 즉, '스타'가 되기 위한 통로로 착각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생각의 분이라면, '스타'가 되고 싶어(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글쓰는데 뛰어 들기도 합니다. 글세. 그렇게 해서 소망대로, 스타야 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래도 '쓴다'는 건 남아있습니다. 사랑 받고 싶고 외롭지 않고자 썼던 글인데. 글을 쓴다는 것 자체 가, 함정이 되어 지독한 외로움을 겪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혹시 글쓰려고 마음먹은 분들 중에, 고독한 걸 죽어도 못 견디겠고, 사랑 받고 싶고, 메일도 많이 받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분 들은 이 길은 오히려 그 반대되는 길이니 다른 일을 찾거나, 그래도 쓰고 싶다면, 우선은 그 생각을 고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 리고 싶습니다.(미안합니다. 겨우 2년 써놓고 뭐라도 된 듯 이런 건방 진 말씀까지 드려) 반대로, 이런 '스타'에 대한 생각이 독자들에게 미칠 경우엔, 독자 들은 자기들이 작가를 '스타'만들어 줬다고 생각하더군요.(우리가 봐 주지 안 했으면... 운운...) 전, 하지만 별로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제 글 초반에 나 온 시나의 생각은 어느 정도는 제 생각입니다. '스타'라... 하긴 지금 통신가의 글들은 어느 정도 그것과 일맥상통 하군요. 그러니 서로간에 '스타'의식에 젖어있는 것을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몇몇만을 제외하고. 지금, 통신가의 소설들은 유행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도 싸구려요.(여기엔 제 글도 예외가 될 수 없 습니다.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 유행가 같은 글을 생산해 내는 통신 작가들은 말 그대로 '스 타'가 되어 떠받들림 당하고, 당신 글이 최고라는 둥, 당신은 천재라 는 둥, 당신 글을 읽기 위해 날밤 새웠는데 너무 재미있었다는 둥.... 별별 말과 칭찬을 다 듣습니다. 하지만.... 유행가 가수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 글'이 끝나면 이 '스타 작가'의 운도 끝납니다. 그 시기가 길고 짧음이 있을 뿐. 제가 예전에, 엘야시온의 '엘'도 안 나오는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때 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 말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혹시, 내 겸손의 표현이나, 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신 분 있 습니까?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것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엘야시 온만큼 인기를 얻지 못하고, 비참한 조회수를 유지해도, 독자들의 관 심을 얻지 못해도, 제가 또 다른 글을 끝까지 써낸다면... 단지, '쓴 다'는 것이 좋아서 말이죠. 그때에야 전, '작가'라는 뜻이었습니다. (고로 전, 작가인지 아닌지 검증되지 않은, 글씀이 일 뿐입니다. 제가 정말 작가일지 아닐 지는 시간을 놓고 보아야겠죠.) 툭 까놓고 이야기해서,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중에, '안소연'이 라는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 글을 찾아서 보고, 그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제가 책을 낸다고 하면, 좋아하는 작가이 기 때문에 그 책을 소장해 줄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요? 책으로 낸다 면, 단 돈 700원이 아까워, 통신 연재본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 읽으려 는 분들도 허다하지 않을까요? 그런 700원 짜리도 못되는 글을 쓰고 있는 게, 통신 작가들입니다. 경매가격, 700원에도 못 미치는 글. 그것도, 자신의 세계를 같이 나누었다고 믿고 있던 '통신 독자'들에 의해 평가받은 겁니다. '당신 글이 최고'라고 말했던 사람들에 의해. 어쩐지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700원도 안 되는 글을 쓰다니, 통신 작가들 불쌍하다고 신파극 찍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700원 내기도 아까운 글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면 제 글도 그런 글일지 모른다는 걸 부정하고, 무조건 책을 사거나, 대여점에서 빌려 보든지, 심지어는 서점에 서서라도 보고, 불법은 절대 행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언제나, 너무나 희한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면 그런 700원 짜리도 못되는 글을 왜 굳이 통신 본으로나마 보냐는 겁니다. 그걸로 700원을 '아꼈다'고 생각합니까? 어쩐지, 백화점에서 '세일'하기 때문에, 은행잔고 부도내는 사람이 생각나지만. 돈이 없어서 통신 연재본으로 봐야겠다는 사람들은, 전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7000원도 아니고 700원이. 지금 1950년대 물가로 살고 있는지. 700원이 그렇게 허리 휘어지는 액수인지, 하는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고, 결국 생각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실례지만. 글 요청하시는 분들(매니악한 심정으로 통신본'도' 구하 는 분들은 제외입니다) 그런 말하는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을 하 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겁니까? 요청 글, 불법, 합법 문제가 아니 라... 시간을 그런 식으로, 700원도 못되는 글에 낭비할 만큼, 자기 인생을 하찮게 여긴다는 말을 스스로 하고도 괜찮습니까? 남의 인생, 제가 뭐라고 할 것은 못되지만... 시간도 '돈'이고... 세상에는 공짜가 하나도 없으니. 장기적으로 봐서 그런 것은 관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 글만 봐도 넉넉잡고 삼일은 봐야 할텐데... 그 동안 낭비한 시간. 거기다 나빠진 시력은, 안경 갈고, 라식 수술이라도 받는 걸론 보상할 수 없을 겁니다. 글이 너무 좋아서, 시력감퇴를 감수하고 봤다면 말이 되지만... 이 경우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하긴... 글을 보지도 않으면서, 글을 수집해서 그걸, 장사재료로 이 용하거나, 아님 자기 집을 꾸미는 인테리어 장식으로 삼는 분들도 있 지만... 그것도, '보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죠. 그런 글 이 올라간 홈페이지나 통신을 볼 때마다, 독자들이 족족 지적을 해준 다면 글이 엉뚱한데서 팔리거나, 장식품이 되진 않겠죠. 실제로, 홈페 이지 단골 손님들끼리 단결해서, 이 험난한 세상 헤쳐나가 보자는 구 호도 외친다고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 할 일도 없는 사람, 자신을 함부로 굴리는 사람, 많다는 생각입니다. 700원도 안 되는 글에는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돈으로 환산해, 적어도 1000원 정도는 되어야, 읽는다는 자존심 정도 는 가지시길.(볼 글을 고를 때, 이런 기준이면 어느 정도 안목이 생깁 니다. 이 글을 과연 700원 주고 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안 빌릴 거 라면 그 글은 읽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 동안 게시판의 글을 주욱 보면서, 요청 글에 찬성하시는 분들의 본심(마찬가지로 매니악한 사람들은 뺍니다) 차마 너무 심해, 말 못하 는 그 본심은, 그런 거라 생각했습니다. "네 글은, 700원 주고 보기는 아깝다. 그러나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 긴 때워야하니, 심심풀이로 읽어주마."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진작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통신 작 가들은 대부분 순진합니다. 아니, 꼭 순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맹목적인 칭찬에 약합니다. '잘 쓴다', '잘 쓴다'하면 정말 잘 쓰는 줄 알고, 출판까지도 생각 합니다. '잘 쓴다'고 해준 사람들이, 적어도 700원은 내고 보아줄 줄 알고요. 연중 선언한 통신 작가들이 '돈 독'이 올랐다고요? 그래서 그렇게 애들처럼 삐쳐서, 연재 중단한다 그러고, 쓰던 글도 끝까지 끝내지 않 는다고 그런다고요? 제발, 귓구멍 좀 열고, 가슴 좀 열고, 이해해 보려고 하십시오. 통 신 작가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단 말입니다. 댁들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해대 놓고, 정작, 가치는 700원에도 못 미치는 가치 를 매기니까... 알겠습니까? 자기 글과, 자기 세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애정을 갖지 않는 작 가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작가들이 천사여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 은 누구라도 자기 '말'을 받아들여 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있습니 다. 어렴풋이,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이 그리로 정 이 가고, 그 말을 믿고 싶어하는 겁니다.(그래서 충신들이 귀향을 가 고, 간신배들이 나랏님에게 등용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독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자기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정작 출판을 해놓고 보니, 나오는 건 무데기 요청 글뿐이 고. 애정을 가졌던 독자들이니 만큼, 그래서 더욱 배신감을 느끼는 겁 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을까... 내가, 그 동안 통신에서 연재한 것은, 독자들과 글을 나눈다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때, 너무나 좋다고 해줬던 독자들이... 내가 출판을 하면, 그때도 좋다고 해줄 줄 알았는데. 이젠, 그 가치를 고작 700원 에도 못 미치게 매기다니. 난, 그럼 그 동안 그들의 심심풀이를 위해, 이용당한 건가." 이게 통신 작가들 심정입니다. 이용당했다는 생각만큼 사람을 화나 게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당신들의 심심풀이를 위해, 타인을 이용하 지 마세요. 통신 작가를 '스타'만들지 말란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땅에 패대 기치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섬뜩합니다. 전 요청 글을 그렇게 받 아들였습니다. (불법이고 합법이고는 개나 물어가라고 하십시오.) 만약, 어떤 작가가 700원에도 못 미치는 글을 쓰면서(그런 주제에) 출판을 하려 한다면, 철저하게 막고, 비난 멜을 보내고, 좀 더 소양을 쌓으라고 촉구하고, 막아서십시오. 그런 글, 출판했다고 작가를 비난해 보았자.... 그리고 출판사를 비 난해 보았자. 작가와 출판사가 그런 생각을 머금도록 한 건, 바로 당 신들 독자들 탓입니다. 바로, '조회수'가 그것입니다. 작가들이 공지를 띄우지 않습니까? "저 출판하게 됐어요. 기뻐요...." 왜 그때 막아서지 않았습니까? 당신 글은, 700원 내고 보기 아까운 글이니, 좀 더 다듬어야 한다고. 왜, 그때는 무조건, "축하한다"고 하 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칩니까? 이런 이유로, 전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이란 글을 쓰는데 있어, 너무 가변적이고 비참한 기반이 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런 건 재처럼 흩어지고 사라질 겁 니다. 글을 쓰기 위해선 더욱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을 무언가가 필요 합니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고, 마르지 않을 기반. 이걸 잘 찾아내 거기에 기반을 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꿋꿋하게 쓸 것이고, 이걸 찾아 내지 못했거나, 허황한 데 기반을 둔 사람은 그 기 반이 무너지는 순간 글 쓸 능력을 잃게 될 겁니다. 통신 작가들이 글을 '쓰고', 출판한 건, '우리가 잘 봐줘서'(조회수 가 높은 것만 출판되니까)이다. 그러니 통신 본은 작가의 것이 절대 아니고, 그건 공유해야할 인류 공통의 지적재산이다. 혹시 이런 생각 을 갖고 있는 독자 분들이 계시담, 그, 퍼부어 주었던 거름더미 갖고 조용히 찌그러져 달라고 말하고 싶군요. (하하! 웃기지 않습니까? 독자들의 반응이란 여러 가지로 거름과 같 습니다. 적당하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식물이 말라죽고, 또 어떤 천연거름들은 '더럽죠' 이런 거름들은 대하기 어렵 지만, 그래도 깨끗한 화학 비료 보단, 장기적으로 볼 때 땅에 도움이 됩니다. 화학 비료들은 효과가 좋고 깨끗하긴 한데... 땅이 메마르는. 그러나, 천연거름을 사용하시는 분들. 제발, 그 거름, 잘 좀 익혀서 사용해 주시길. 잘 익히지 않은 거름은, 말 그대로 '똥'밖에 안 됩니 다. '똥'은 독도 강하죠.... '똥독'에 죽는 사람도 있으니. 그러므로 흉기나 다름없는, 그 '똥'은 벽지에다 바르든지 하고, '똥'이 묵을 때 까지는 조용히 찌그러져 계셔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글을 쓰는데, 독자들은 필요 없습니다. 완 성된 글을 나눌 때, 그때에야 독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연중을 선언한 작가들의 결심을 절대 '이기적' 이니, '인내심 부족'이니, 하는 말로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타'에 진절머리 내고, '글을 쓰는' 작가로 들어서는 길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왜 연재를 중단하느냐.(출판 본으로 나오는데, 무슨 '글을 중단'하 는 책임입니까?) 왜 출판을 하느냐. 돈독이 올랐냐? 작가가 약속도 안 지키네, 어쩌니 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헛 다리를 짚어도 단단히 짚 은 겁니다. 작가는 독자들을 위해서 글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과물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작가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다 쓰고 나서 원고를 난로에 집어넣고 태워도 상관없다는 거죠. 단지, 완성된 글을 같이 나눌 때 생긴, '인도적인', '그리고 세계를 같이 경험한', '책임'과 '애정'만이 독자들이 작가에게 주장할 수 있 는 권리입니다. 이러한 독자들의 '권리'를 하찮게 여기는 작가는 아무도 없고요. 어 쩌면 자기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작가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렇게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만. 작가님들, 집안 사정까지 들먹이며 너무 비참해지지 마시길. 저도 결코 좋은 집안 사정은 아니지만. 글을 팔든 말든, 그건 작가님의 고 유권한이니,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할 사람 없습니다. 단지, 글의 '완성 도'만이 문제죠....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유행가' 패턴 좀 탈피했으면 하는 겁니다. 판타지의 미래는 좋든 싫든, 지금, 작가 님들 어깨에 달려 있으니까 요. 정말로 인기만 있으면 되고, 돈만 벌면 됩니까? 스스로 자기 글이 어떤지 알 것 아닙니까? 어느 어깨?라고 말하진 마시길. 작가 님들 중에, 혹시 이 글을 보고.... 이 인간, 뭐가 이렇게 진지 해? 그냥 쓰면 되지, 라고 말하는 분계십니까? 제가 '쓴다'는 것을 너 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판타지는 '문 학'이 아닙니까? '문학'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정도 고민은 합니 다.(개인적으로 서머셋 모옴의 '서밍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시사 영어사 대역판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려서' 글이 후 지다고 하는 분들. 역대, 훌륭하다는 글 쓴 이들이 그 작품을 쓴 나이 를 한 번 봐주시길. 세계의 문호들을요. 이십대 초반에서 이십대 후반 에 좋은 글을 남기신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나라 문학계는 너 무 늙은 겁니다. 그러니까, 요즘의 감성과 맞지 않은 글들이 많이 나 오죠.) 윤동주 시인이 요절한 때가 28살입니다. 그전에 십대 때부터 그는, 그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습니다. 뭐, 각 각 다른 시대상황이야 생각해 주어야겠지만.(그래도 언제나 역사는,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없다'였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지금 나오는 판타지들이 그렇게 한심하다고요? 지 금 판타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한, 열 살 됩니까? 나이가 어려서 판 타지가 가볍게 나오는 게 아니라, 가볍게 쓰니까 가볍게 나오는 겁니 다.(이 글을 보는 분들 중에, '십대' 많으시죠? 글에 대한 진지한 고 민을 할 정도로, 여러분은 충분히 나이 들었습니다.) 하기는.... 사람은 언제나 진지하게 살 수 없고, 심심풀이 할 것도 필요하니까, '통속소설'로 진지하지 않고, 가볍게, 가볍게 써도 좋지 만.(이런 글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분명히!) 그렇다면 '판타지는 문학이 아니다'라는 기성 문학계의 발언엔 그리 발끈해 하지 마시길. 문학이 아닌 걸, 문학이 아니라는데 웬 발끈입니 까? 그리고 가볍게, 가볍게 쓴 걸 가지고, 뭐 있는 척 하지도 마시길. 재밌자고, 쓴 거고, 재밌자고 읽는 건데(한마디로 너도, 나도 그 속사 정을 빤히 아는데) 뭐 있는 척 하는 건 솔직히, 쓴웃음 나옵니다. 애 가 어른 옷 입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른으로 봐주길 바라는 모습을 보 는 것 같아.(통속 소설로 나서기로 했다면, 철저히 그쪽으로 나서야 한단 말입니다. 어설프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걸로 남지 말고.) '네 글은, 700원도 아깝다'는 소리는,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우선 바로, 작가들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테지요. =-=-=-=-=-=-=-=-=-=-=-=-=-=-=-=-=-=-=-=-=-=-=-=-=-=-=-=-=-=- ...가 전문입니다. 그런데 '묵향'에 대한 글을 읽고, 정말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여름, 출판사가 통신에 올라와 있는 글을 지우자는 걸 반대하고, 지금까지 글을 올려 온 것은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 글 지우지 않고 통신에 연재 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까?(정말 한 대 패주고 싶군요) 이영도님 같은 분들이, 폴라리스 랩소디를 또 통신에 올리고, 세 번 째 연재를 시작하는 걸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까? (그건 거의 살신성인 수준입니다) 적어도 저는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닙니다. 솔직히 자존심이 너무 상합니다. 왜 작가들이 출판하는 문제를 놓고 독자들이 시비입니까? 심지어는 남의 책까지 타이핑해서 통신에 올려놓다니. 죄송합니다. 생각하니, 또 화가 나는군요. 아무튼, 그 글을 보고 더 이상 통신상에서 연재할 필요가 없다고 느 껴졌습니다. 완성될 때까지, 연재 쉬겠습니다. 혹시, 제가 글을 안 올린다고 하니까, "왜 숭어가 뛰니 망둥이가 뛴 다는 식으로 글을 안 올리냐. 잘 보던 글 갖고 그러니 짜증난다. 지금 유세하냐."라는 분들 분명히 계실 겁니다. 예전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작가님들 욕 듣는 것 보니 장 난 아니더군요. 하지만 당신들에게 쓸데없는 칭찬과, 부추김 바란 적 없습니다. 함 부로 사람 비행기 태우고, 스타 대접해주면서, 그런 것 좀 해 줬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십시오. 통신 작가들이 글 독촉 받으면, 재깍재깍 글 내놓아야 하는 기계입니까? 정말 버릇없기, 짝이 없군요.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겁니까? 그런 사람들은 부모님이 입혀주고 먹여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 하겠지요? 웃기지도 않는군요. 도대체 당신들은 글을 왜 읽습니까? 그렇게 좋다, 좋다, 침이 마르 게 칭찬하는 글들을 쓴 작가가, 출판해서 돈 버는 게 그렇게 고깝습니 까? 좋아하는 작가가 출판하면 기쁘지 않습니까? 왜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도와주지 않습니까? 작가가 미흡해서, 그래서 글의 질이 떨어져, 그 글은 돈주고 보기도 아까워 그러는 거라면. 그 입에 발린 칭찬이나 관두길 바랍니다. 차라리 혹독한 비판을 쏟아 부어, 무 엇이 잘못된 건지 깨닫게 해주세요.("한참 '재밌게' 읽는데 끝내다니. 재수 없다. 양심도 없다. 짜증난다"니요? 댁들이 더 짜증납니다. '재 밌게' 안 읽어줘도 됩니다.) 혹시나, 자기가 칭찬해 준 작가가, 연중 한다고 배신감 느끼고 이런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제발 생각 고쳐먹고, '글 재밌게 읽을 생각' 만을 위해 작가 희생시킬 생각하지 말고,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면 어 느 것이 작가에게 도움이 될까 정도는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글쓰는데, 진심으로 격려해주고, 아껴준 고마운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글을 나누는데 있어, 여러분 같은 독자를 만나서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아무튼. 나중에 뵙 겠습니다.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수요일과 토요일로 날을 정해 완성 되지도 않은 글을 올리려 노심초사해야 했던 건지... 어떻게 사람들이 책으로 나온 글을 타이핑해 쳐서 통신상에 돌릴 수 있는 건지....(거 기다 욕설까지 곁들여) 차라리 이런저런 영향받지 않고, 아무런 어택 없더라도 더욱 진지하 게 글을 써보는 훈련이나 하는 것이, 제 앞날을 위해서도 훨씬 좋을 것 같군요. 그러다가 아무래도 유행가 작가로 남게 될 것 같으면, 판 타지 계를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앞날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엘야시온 1부는 통신에서 끝내려고 했으니, 저 자신과의 약 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1부는 통신에서 끝내겠습니다. 완성되면 파일 로 올리든지, 게시판에 올리든지 하여 끝내겠습니다. 1부는 얼마 남지 도 않았고, 계약한 것도 없는데 이것 갖고 올리네 마네 하는 것이, 더 우습고 코메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러니 제발 이 부분에 대해선 메일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격려멜, 애원멜도 안 받겠습니다. 욕멜을 보내실 분은 보내지 말아달라고 해도 보내 주실 테니, 굳이 안 말리겠습니다. 뜻대로 보내십시오. 너무나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우누리에 가입하질 말았 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별로 좋지도 않은 내용 길게 써서 죄송합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