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막. 겨울 속에서. (2)>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28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31 22:13 읽음:1835 관련자료 없음 ----------------------------------------------------------------------------- <제 44막. 괴물.>-1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머리 속이 굉장히 맑았다. 계속 끈질기게 달라 붙어있던 미열도 말끔히 사라졌다. 아주 건강할 때라도 이 런 상쾌한 아침은 맞은 적이 없던 것 같다.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 같다 고 시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렇게 상쾌한 기분과 함께 현 실감이 무척이나 떨어지는(하기는 이 세계 자체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곳 이지만) 묘한 기분이었다. 시나는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어이없을 때가 가끔 있어."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신이 맑으니 기분이 좋은 데... 꿈 때문에 웃음이 나와... 어젯밤 드랫이 나한테 청혼했던 꿈..." 그리고 잠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런 꿈을 꿨다는 것은, 뭔가 눌린 무의식의 세계에서... 옛 속담에 꿈은 반대라고 했으니까, 드랫이 이젠 완 전히 질려서 날 쫓아낸다는 예지몽인가? 으흠... 그럼 어떡하지? 디트마가 여기 온 꿈까지 꿨는데... 확실히 걱정을 하긴 했나봐. 디트마라면 좀 더 친절히... 어쩜 내가 쫓겨나는 것도 막아줄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흐음, 하지만 디트마는 아프니까, 여기 있을 리도 없는데... 과연, 무의식의 세계 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이 이야기하지 말아야지. 창피하잖아? 하하..." 하지만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디트마.. 즉, 디트가 들어왔다. "시나, 일어나 있었군요. 라단이 어깨를 검사하자고 하더군요. 나도 같 이 볼 테니, 준비하고 있어요." 시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졌다. "뭐... 뭐라고요...!!" 시나는 옷매무새를 여미다 말고 놀라서 말했다. 라 단과 디트가 시나의 어깨를 검사하고 난 참이었다. "그럼 그 동안 셰리카가 정말로 쭉 집에 안 들어왔다는 말이에요?!!!" 어이가 없었다. 부상을 당한 뒤, 비몽사몽간에 이 집으로 와 레겜에게 작별인사를 한 기억까지는 난다. 그 후에 있던 단편적인 기억들도. 하지만 그 단편적인 기억들이 전부다 이틀동안의 기억이라니? 고작 서너 시간 분 량의 기억밖에는 없는데. 현실적인 시간이 그렇게 얼렁뚱땅 지나갈 수 있 다니 손해 본 느낌까지 있었다. 게다가 친구까지 잊어버리고...! 시나는 침 대에서 내려섰다. "말도 안돼요...! 찾아 봐야겠어요...!" 라단과 디트는 당황했다. "하지만 시나, 상처가.." "상처는 다 나았다고 했잖아요...!" "그, 그래...! 정말 기적 같은 일이긴 하지. 어제만 해도 빨갛게 부어 있 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급속도로 상처가 아물다니... 하지만 그거야 상처가 아물었다 뿐이고, 무리하게 움직이면 다시 상처가 터질지도... 시나..!" 시나는 벌써 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런 시나를 막은 것은 디트였다. "시나, 잠깐만...! 서둘지 말아봐요...! 당신의 친구는 아무래도 자기 세계 로 돌아간 것 같다고 라단이 말했는데..." 시나는 놀라서 말했다. "설마...! 말도 안돼요...!" 디트가 말했다. "셰리카라는 소녀는 일루티온 소녀... 맞죠?" 여기서는 그렇게 통용되고 있다.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트는 어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덕분에 라단은 당신이 일루티온 계급이라는 것을 알았다면서... 그렇 지, 라단? 네가 그 소녀는 자기 세계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잖아." 시나는 믿을 수가 없어 라단을 보았다. "정말이에요, 라단 아저씨? 셰 리카가 아저씨한테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갔어요?" 라단은 인상을 잔뜩 쓰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아냐. 그저 나 는... 그래. 시나 네가 도서관 가던 아침에 말했잖아. 셰리카양은 뭔가 중 요한 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그 후로는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응, 그래. 그 소녀는 네르세바 숲에 사는 소녀잖아. 그래서... 우리 집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 조금 섭섭했지만... 어쩌겠 어? 그게 그 세계 사람들의 관습이라면... 근데 난 네 친구가 네게는 인사 를 하고 떠난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셰리카는 돌아갈 세계 따윈 없단 말이에요!!" 시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바보같이, 잠만 자느라 셰리카가 있 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셰리카가 무슨 사고라도 당했다면...! "당장, 찾아봐야 해요!" 그리고 방을 뛰쳐나가는데 문 앞에서 누군가와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조심해." 상대방은 시나를 부축했다. "드랫...!" 드래마는 시나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일어나 있다니... 놀라운데... 몸이 많이 회복된 것 같군. 그런데 어딜 가는 거야. 기분이 괜찮아졌더라 도 좀 더 차분히 앉아서 음식이나..." 시나는 울상을 짓고 말했다. "드랫...! 셰리카가 사흘이나 돌아오지 않았 다면서요...!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드래마는 놀란 눈으로 시나를 보다가 방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디트는 그의 눈을 피했고, 라단은 난처한 눈으로 드래마를 보았다. 디트의 태도에 드래마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리고 시나에게 말했다. "글세, 난 셰리카 양이 자기 세계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부터 그녀는 이 집을 아무 말도 없이 들락날락해서..." "아니에요!" 시나는 드래마를 밀쳤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한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갔을 리가 없잖아요! 그 앤 사고를 당한 거라고요! 찾아봐야 해요!!" 시나가 그를 지나쳐 가는데 드래마가 시나의 팔을 잡았다. "잠깐, 진정 해...!" "진정하고 있다고요!!" "전혀 진정하고 있지 않잖아! 네가 지금 이 꼴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넌 지금까지 의식을 잃다시피 침대에만 누워있었다고! 그러니 원기 조금 회복된 걸로 날뛰지 말라고!" 시나는 울컥했다. 날뛰다니!! "뭐예요...!! 드랫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예 요!!! 내 친구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드래마는 화난 눈을 지었다. "내가 뭔데 이러냐고?! 뭐인 것 같아?!! 젠 장!! 저 얼음의 숲 이래로 네 종속주인 인간이 명령하는 거니까, 당장 침 대로 돌아가!!!" "뭐라고요...!! 그런 것 따윈, 다 가짜니까...!!!" "어제부터 진짜가 됐어!! 내가 네게 청혼을 한 이상, 나는 네 진짜 종 속주야!! 그러니 입 닥치고 돌아가!!" 물론 시나는 충격 받았다. "처, 청혼...!" 드래마는 시나의 표정에 인상을 썼다. "설마, 잊었다고는..." "처, 청혼!!!!" "...잊어버렸군. 역시... 그런 상황에서는 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드래 마는 잠시 눈을 밑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 눈을 들고 신중한 표정으로 말 했다. "...잘 들어. 난 네게 맹세의 말을 했고, 너만 허락한다면... 어쨌든 내가 네 남편이 되겠지. 잘 기억이 안 난다면, 깨끗한 정신일 때 다시 한 번 더 맹세의 말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가서 잠이나 자. 이것도 잊었을지 모르지만 우린 오후에 왕궁 에 들어가야 하니까. 조금 더 좋은 모습을 갖추는 게 나을 거야. 셰리카양 은 내가 찾아보지. 하지만 그 친구는 너보다 더 딱 부러지던데... 쓸데없는 걱정이 될지도 몰라. 네르세바 숲의 사람들은 매사에 얽매이지 않는 스타 일이니까... 하지만 네게도 인사를 안하고 갔다니. 하여튼 찾아보겠어." 그렇게 말하고 드래마는 자리를 떠났다. 방안엔 침묵이 돌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맨 먼저 말한 것은 라단이었다. 시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놀 라고 당황한 목소리였다. "저어... 시나? 하하하... 루온 루드랫 님이 아직도 네게 맹세의 말을 안 했었어?" 멍하니 서 있던 시나의 어깨가 움찔 움직였다. 디트 역시 도저히 못 믿 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시나마... 아니, 시나...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저 분이 당신 에게 맹세의 말을 했습니까? 어제요?" 라단이 말했다. "아... 그렇지! 거 봐, 디트! 넌, 루온 루드랫 님이 사실 은 시나를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 말이 맞았지? 루 온 루드랫 님은 시나를 정말 마음에 들어하신다고! 소, 솔직히... 네가, 루 온 루드랫 님은 아직도 옛날의 그분을 못 잊고 있고... 시나와의 일은 그 것을 숨기기 위한 위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는," 시나의 어깨가 또 한 번 움찔, 움직였다. "나도, 그런가... 생각하고 말았지만, 보라고. 아니잖아. 이젠 어떡할 거 야. 어제 식탁에서 네가 시험해 본다고... 시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루온 루 드랫 님을 부추기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잖아. 맹세의 말도 아직 안 했 던 것을...! 으이구...!" 디트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나... 정말로 어제 저 분이 당신에 게 맹세의 말을 한 것 맞습니까?" 시나는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인상을 쓰고 말했다. "...몰라요." 하지만 그 얼굴은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열 일곱에 남자에게 청혼인지 맹세의 말인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방금 밝혀져,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 음성도 들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장부를 살피던 드래마는 원하던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억했다. 장부 를 덮고 일어나는데 옆에 서 있던 직원이 허리를 굽실댔다. "저어, 저어, 원하는 것은 찾으셨습니까?" 드래마는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오히려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엘야..." "엘께서 당신에게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직원이 쓸데없는 말하는 걸 원치 않았던 드래마는 그렇게만 말하고 재 빠르게 입출국수속관을 나왔다. 뒤에서 허겁지겁 쫓아 나오며, '차라도 드 시고 가시지, 아니면 마차라도 대절해 드릴까요...?'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히 오래 있다가 정체가 들통나면 골치만 아프다. 그 말단 직원에게 단단히 일러두기는 했지만, 엘야시온의 황금 패 때문에 관 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장까지는 쫓아오고 있을지 모르니까. 드래마는 거 기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직접 마차를 잡아탔다. 여관으로 들어가자 친절하게 생긴 여관주인이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식사입니까? 그럼 들어오시고... 방은 이미 꽉 차서..." "아니... 무얼 물어볼게 있어서 왔습니다. 이곳도 네르세바 인들에게 제 공된 여관이 맞지요?" "네, 맞는데요. 왜 그러십니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키는 이 정도 되고... 나이는 엘의 시기,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의 소녀. 보통 몸집에 분홍색 머리칼, 보라색 눈을 가 진 소녀입니다. 갈색의 모피 옷을 입고 있고... 호문클로스라는 요정을 데 리고 있죠." "요정이요?" 여관주인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글 쎄요. 그렇게 뚜렷한 특징을 가진 소녀라면 기억할 법도 한데... 그런 소녀 는 본 적이 없습니다." 드래마는 여관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그럴 듯한 여관은 거의 다녀 보았 다. 이제 네르세바 인에게 제공된 구역은 곧 끝이 난다. 여관들은 각 세계 의 이름을 걸고 각각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각 세계마다 선호하 는 잠자리와 음식이 틀리기 때문에 여관길드에서 상술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네르세바 인에게 제공된 구역이라고 해도 모험정신을 가진 사람들 은 자기들 구역을 벗어나 다른 구역의 여관에서 묵기도 하니까 그렇게 되 면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건너편에 있는 여관에 시나의 친구가 묵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닷새동안 성전의 게이트를 통하여 출국한 네르세바 소녀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흐음... 글세. 헌데 댁은 뉘기에 그 소녀를 찾는 거요?" 아까 들린 여 관 주인에 비해 조금 삐딱해 보이는 여관 주인이었다. "그 소녀와 아는 사이입니다. 갑자기 사라져서... 찾는 중이죠." "갑자기 사라졌다고?" 여관 주인은 웃었다. "그 소녀, 네르세바, 숲의 사람이요?" "네." "그런데 굳이 왜 찾나? 뭐 손해 본 거라도 있나?" "...글세. 보셨습니까?" 드래마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관 주인은 드래마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흥. 물건이라도 훔쳐 달아났나 보지. 하지만 그런 소녀는 못 봤소. 잘 모르는 것 같아 해주는 말인데, 그 소녀가 네르세바 숲의 사람이 확실 하다면 괜히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소. 더구나 사라진지 며칠이나 지 났는데, 이제야 겨우 찾다니..." 드래마의 눈이 빛났다. "정말 그 소녀를 못 보셨습니까?" 여관 주인은 이제 드래마에게 흥미를 잃고 하품을 했다. "...그렇다니까. 헛수고 말고 가 보슈. 남 장사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드래마가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당신은 어떻게 그 소녀가 사라 진지 며칠이나 지난 걸 압니까?" 여관주인은 고개를 들었다. "...뭐?" 드래마가 말했다. "난 그 소녀의 인상착의만 말했습니다. 못 본지 며칠 이나 지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죠..." 여관주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그, 그냥 떠오른 말이요. 그 냥 그렇지 않나...해서. 난 넘겨 집길 잘하니까." 드래마는 피식 웃었다. "...소녀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다는 것은 어 떻게 알았습니까? 소녀는 하나로 묶은 머리였죠..." "뭐? 하나로...?" 여관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말도 안돼 는 소리!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아니, 당신은 분명히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그 소녀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여관주인은 얼굴을 붉히고 화를 냈다. "글세, 안 했다니까!! 땋은 머리 계집애를 내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잖아!! 당신이 알고 있는 계집애가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면, 틀림없이 아니니, 썩 꺼...!!" 순간 여관주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화가 나서 드래마를 노 려보았다. "...제기랄." "이거 참." 드래마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보았다. "당신이 말하 는 소녀의 인상을 들으니, 내가 찾는 소녀가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소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가 알고 있는 소녀도 땋은 머리였습니다." 이드넘은 외출하려다가 여관주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뭐? 셰리카를 찾는 녀석이 있었다고?" 이드넘은 방구석으로 눈길을 던졌다. 한 소녀가 의자에 묶인 채 앉아 있었는데 지친 나머지 잠이 들어 있었다. 이드넘은 생각하듯 말했다. "... 별일이군. 여기서 도망쳐서 웬 놈팡이라도 만든 건가? 아니... 그 짧은 시 간에 그럴 리는 없고... 무슨 물건이라도 훔친 건가... 인상착의는?" "회색 후드에, 인상적인 남색 눈동자였죠. 호남형인데다 키가 큰 남자 였습니다. 어깨도 널찍한 것이, 꼭 루이티온 같더군요." "....?" 이드넘은 그 인상착의에 눈을 찌푸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인상착의였 던 것이다. 여관주인이 말했다. "하지만 제기럴... 그 자식의 말놀음에 빠져서... 그만 저 소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비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고, 그냥 쫓아버렸으니 안심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이드넘은 안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 여관은 그의 단골이었고 이 여관 의 주인은 탈란 금화 몇 개로도 이드넘의 뜻대로 잘 움직여 준다. 고급 여관하고는 천양지차인데... 무슨 말놀음에 빠져 사실을 밝혔는지 모르겠 지만 상당히 귀찮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여, 몹시 미안해하는 여관주인 을 물리쳤다. 그리고 셰리카 앞으로 다가가 셰리카의 뺨을 몇 번 찰싹 찰 싹 때렸다. 여자를 소중히 하는 이드넘으로서는 흔치 않은 행동이었지만 어제 저녁 셰리카에게 팔뚝을 물린 후부터는 이런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셰리카는 몽롱한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드넘을 보고 인상을 썼다. "...씨!! 뭐야!!! 왜 때려!!!" 여전히 팔팔한 기세에 이드넘은 어이가 없었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묻 고 싶은 것을 묻기로 했다. "너, 여기 나가서 어떤 녀석들과 만나고 다녔냐? 아님, 물건이라도 훔 치고 다녔어?" "으아앙~~!!!! 몰라!! 내가 왜 그런 대답을 해!!! 풀어 줘~~!! 놔달란 말 이야!!!" 또 다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란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힘이 더 넘 치는 것 같았다. 셰리카는 발버둥을 치며 말했다. "야이, 나쁜 놈아~~!!! 풀어 줘~~!!!!! 그리고 내 호문클로스도 풀어 줘~~!!!" 이드넘은 그 험한 발길질에 뒤로 물러섰다. "젠장...! 하마터면 채일 뻔했군...! 한 이틀 더 굶겨도 되겠..." "으아아앙~!! 아빠!!! 이 놈아!! 그냥 날 죽여라!!!" 굶긴다는 말에 셰리 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드넘은 웃고 말았다. "참 나. 이봐,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그럼 물과 음식을 주지. 어제 저녁과 아침을 굶었으니 배가 고플 거야. 회색 후 드에, 남색 눈. 꽤 큰 키에 루이티온 같은 인상의 남자 몰라? 널 찾아 왔 다고 하던데? 여기서 도망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 한참 울부짖던 셰리카는 이드넘의 말에 눈물을 그쳤다. 회색 후드에 남 색 눈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던 것이다. 시나의 종속주... 셰리카 자신 이 치료비를 대준 그 남자... 셰리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나가 자신을 찾 고 있다...! 하지만 곧 밝은 기색을 지워야 했다. 셰리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 다. 그 피묻은 외투. 무서운 기세로 시나를 찾던 이드넘. 본능적으로 이드넘을 시나와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 다. 그래서 셰리카는 고개를 숙이고 한층 더 억지스럽게 소리쳤다. "모, 몰라...!! 으앙...!! 내가 돈지갑 훔친 게 하나 둘인가!!! 그 중에 하 나, 골빈 남자인가 보지!! 이거나 풀어 줘!!!! 나쁜 놈아!! 으앙~!!!" 이틀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음 끼니까지 굶길까 어쩔까 이드넘은 심각 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가 단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삐딱한 여관 주 인으로서는 날벼락이었다. 삼 년에 한 번 받을까 말까한 평가 단의 조사 인데, 그것도 조사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하고 오는 것이 관례인데 이런 경우는 없던 것이다. 수비대를 끌고 나타난 단장은, '하누카의 날을 맞아 여관 질의 저하를 방지하기 위한 강화 검사'... 어쩌고 주절댔지만 여관 주 인은 그가 헛소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관방 하나 하나를 열어보 고 다니는 조사단 중에 회색 후드를 입은 남자가 있던 것이다. 아까 이 남자와 이야기했을 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 당장 나가라고 말하자 별다른 말도 없이 조용히 물러나 안심을 했더니 완전히 뒤통수치는 격이 다. 그 남자가 자기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때, 여관 주인은 얼굴 근육 을 씰룩이며 말했다. "당신, 의외로 높은 분이었군...요." 회색 후드의 남자는 빙긋 웃었다. "...별로. 시간도 없고, 이용해도 괜찮 은 것은 이용한다는 주의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방이란 방은 모두 다 조사했다. 회색 후드의 남자가 복도 맨 끝 방에 있는 의자로 다가가 그 위에 놓 인 밧줄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봤을 때에, 삐딱한 여관 주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지만 회색 후드의 남자는 밧줄을 집어던지고 돌아섰다. 여관주인은 다소 안심해서 말했다. "하하... 모, 못 찾겠죠? 글세 난 그런 여자아이는..." 드래마는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말했듯 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 이 왜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이렇게 나오 니, 뭔가 나쁜 일이라도 연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관 주인은 당황했다. "나, 나쁜 일...? 아, 아니 무슨 말씀을...! 글세, 난 아무 것도..." 그러자 옆에 있던 단장이 험악하게 말했다. "이봐,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야?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알아!! 그 소녀에 대해 빨리 말해!! 이 근처 사 람들에게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거짓말 할 생각 말라고!!" "...!" 근처 사람들에게 조사한다는 말에 여관주인은 인상을 썼다. 그러잖아도 최근, 근처 공터에서 벌어진 네르세바인 살인 사건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인데 이런 일로 수비대와 말썽을 피우다니... 쓸데없는 주목을 받 으면 곤란하다. 이드넘 씨의 부하가 여관에 잔뜩 투숙해 있는 데다, 잘못 하면 과거에 했던 잘못까지 밝혀질지 모른다. 여관주인은 욕설을 뱉었다. 아무리 구린 일이라도 탈란 금화 몇 푼이면 넘어갈 단장인데... 이 남자 때문에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잘못 걸렸다고 생각한 여관주인은 하 는 수 없이 어느 정도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저어... 에잇!" 여관주인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 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그 소녀는 우리 여관에 묵고 있었습니 다!!" 여관주인의 말에 단장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드래마를 돌아보았 다. "계속 물어보시죠." 드래마가 말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 질문에 여관 주인은 비굴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헤헤... 그, 그러니까 그것이... 죄송합니다. 사실은 그 소녀 일행에게서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단골 되는 사 람이 모른 척 해달라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그 소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제일로트에 온 거라, 교육이 전혀 안 돼 그 일행이 고생을 무진 장 하는 것 같더군요. 며칠씩이나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뻑 하 면 물건을 함부로 가져오고... 일전에는 어딜 싸돌아다니다 돌아 온 것을 책임자가 잡아들여 무척 화를 내며 그 소녀에게 사흘간이나 금족령을 내 렸죠." "일행...?" 드래마는 미심쩍은 눈으로 여관주인을 보았다. "그래서? 그 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헤헤 웃었다. "떠, 떠났습니다." "떠났다고?" 드래마는 한층 더 의심스러운 눈을 지었다. "혹, ...거짓말 을 하는 거라면.." 때를 놓칠세라 옆에서 단장이 나섰다. "용서 못해...!! 조사하면 다 나 와!!!" '아, 이 놈의 단장, 되게 나서네!! 빌어먹을!!'라고 투덜거리며 여관주인 이 열심히 말했다.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원래는 하누카 날이 지나서까 지 있으려 했지만 소녀 때문에 일정만 망쳤다고... 계속 있다간 수비대에 걸려서 안 좋은 기록이 남아, 나중엔 이 세계로 입문하는 것도 힘들어 질 지 모른다고...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시작되기 전에 네르세바로 돌아간다 고 했습니다. 그, 그러잖아도 돈을 잃었다는 사람들이 그 소녀를 찾아다녀 서... 그 일행은 수비대에 걸릴 순 없다고 내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한 겁 니다. 내,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잘못한 거지만... 이번만은 진짭니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직접 출입국관에 가서 조사해 보십시오!!" 드래마가 말했다. "오전에 조사해 봤지만 없더군요." 여관주인은 억지로 웃었다. "그, 그랬습니까?" 더럽게 철저한 남자였다. "하하... 하, 하지만 그거야 당연하죠...! 사실은 손님이 나가고 나서... 그, 그래요. 내가 손님이 왔다는 말을 하니까, 불안해서 도저히 못 참겠다고... 그들이 그 소녀를 끌고 나간 건 손님이 오셨다간 직후입니다. 하, 하여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저도 먹고 살아야하고... 아 무래도 그분들은 단골이었으니까 그런 부탁은 그냥... 용서해 주십시오." 드래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여관주인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여관주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 불쾌한 일임에 틀 림없지만 단골이 돈 몇 푼이라도 쥐어주고 그렇게 부탁을 했다면... 모르 는 사람보다 단골의 부탁을 더 소중히 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 구나 수비대에 넘겨져서 오명이 남겨질까봐 두려워했던 거라면... 타 세계 의 법을 준수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자는 몇 년씩이나 그 세계로 입문 이 거절되기도 하고 잘못 하다가는 다른 세계까지도 드나들 수 없으니까 있을 법한 일이다. 드래마가 말했다. "그 소녀, 분명히 호문클로스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렇다면 소녀의 일행이라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 소녀의 가족이었 습니까?" 그 질문에 여관주인은 당황했다. 속았다는 것에 길길이 날뛰며 그럼 내 돈은 누가 물어 주냐고 할 줄 알았는데, 이런 것을 묻다니? 결국 여관주 인은 어디까지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둘러 서 있 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의 눈치를 힐끔 봤다. 갑작스럽게 조사단이 들이닥 쳐 투숙 손님과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둘러서서 그들의 모양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 중에 있던 이드넘의 부하가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여 관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 에... 예. 그러니까... 제가 그 일행을 오래 상대하면서 어렴풋이 눈 치 챈 바로는... 그러니까... 그들은... 네, 네르세바.... 호문클로스 단이 아닌 가 했으니까... 그, 숲의 사람들 말입니다. 요즘은 그들도 많이 개화해서 타 세계에 드나들며 자, 장사에도 관심을 갖는 것 같던데... 그러니까 그들 은 가족이기보다는... 네. 마, 말 그대로 그냥 일행인 것 같았습니다. 그 소 녀는 그 단체 두목의 딸이고요. 관광 삼아 데려 온 것 같은데... 하지만 아 까도 말씀 드렸듯, 그 소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제일로트에 와서 이곳의 관습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자기네 관습대로 하는 바람에 참 말썽을 많이 피웠습니다. 시중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러니 손님도 부디 너그러 이... 그, 그리고 여기..." 여관주인은 돈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얼마나 잊으신 건진 모르지만... 말씀하십쇼. 그들이 맡기고 간 주머니 입니다. 부디 수비대엔 고발하지 말아달라며... 저어... 헤헤헤... 제가 이걸 꿀꺽 하려던 건 아닙니다, 네. 헤헤헤..." 단장이 신경질을 냈다. "거짓말하지마!!!" 여관주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거짓말이라뇨?!!! 거짓말이라면 아 예 돈주머니도 안 내놓죠!!" "믿을 수 없어!!" "아니, 단장님! 이거 섭섭합니다!!" 그들은 옥신각신 다퉜다. 드래마는 생각에 잠겼다. 시나의 친구가 어떤 식으로 자기네 관습대로 행동했는지는 드래마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러 고도 수비대에 안 걸리는 것이 용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지 위도 꽤 됐다. 호문클로스는 결코 흔한 요정이 아니니까. 하지만... "두목의 딸이라고..." 곰곰이 생각하던 드래마가 말했다. "그렇다면 혹 시... 그 두목의 딸에게... 네르세바 소녀 중에 한 명...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마노테온으로 강등 당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마노테온으로 강등 당한 친구요...?" 단장과 싸우던 여관주인이 되물었 다. "그, 그게 무슨...?" 그러다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고 얼버무렸다. "아... 아하하... 그, 글쎄요. 말했다시피 난 그저 여관 주인일 뿐. 아무리 단골이라도 그런 자세한 사정은 모르죠... 헌데 마노테온으로 강등 당했다 고요, 그 친구가? 그, 그것 참. 끔찍한 일이군요...?"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던 이드넘의 부하 또한, 여관 주인처럼 이상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드넘은 앞에 앉은 소녀를 보고 만족 한 표정을 지었다. 부어터진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얌전하게 있으니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게다가 이제 이 살쾡이 같은 것을 길들일 도 구도 손에 얻었으니... 이드넘은 기분 좋게 말했다. "...네가 아까 그랬지? 그 남자에게 넘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해서, 이렇게 귀찮지만 데려온 거야. 탈란 금화가 잔뜩 들은 주머니를 훔치다니 너도 대단하긴 한데... 어쨌든 숨겨주는 대가로, 내가 시키는 대 로한다고 했으니... 음..." 그는 셰리카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봐, 우 선 그 얼굴 좀 어떻게 해 봐. 여자들이란 자고로 웃는 얼굴이 제일 좋다 고." 셰리카는 투덜대다가 억지로 입을 버리고 '씩' 웃었다. "됐어요?! 쳇. 웃 는 얼굴이 최고긴... 구해줬다고 재지 말라고!! 내 호문클로스는 언제 돌려 줄 거야?!! 왜 내걸 가둬 놓는 거야!!" 이드넘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제 2의 샤일라테를 보는 듯 하다. 예전에 기분이 잔뜩 상한 샤일라테에게 '여자는 웃는 얼굴이 최고'라고 말 했다가 '최고 좋아하고 있네!! 그럼 넌, 인형이나 끌어안고 살아!!!'라고 쏘 아붙이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드넘은 빙그레 웃었다. "...음. 그 입고 있는 옷이 영 아닌데. 이따가 옷가게를 들려야겠어." "옷가게고 뭐고, 내 호문클로스 내 놓으라고!!!" "음... 그 말투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좋은 예절 선생이..." "으아앙~~!! 내 호문클로스 내 놔!!" 셰리카는 정말 분했다. 호문클로스만 있다면 뭐든 해볼텐데... 이 놈이 셰리카 자신이 치료비 대준 남자에 대해 조사해 봐야겠다고만 안 했어 도... 이 놈이 시나를 노리고 있지만 않아도... 그냥 지금이라도 당장 이 마 차 문을 열고 도망가는 건데...! 이 놈 비위나 맞춰야 한다니...! "그 머리도 좀 더 다듬어서..." "으아아앙~~!!!" 오전 내내 사람들은 드래마의 청혼 사건에 대해 말했다. 라단은 한숨을 쉬었다. "전혀 몰랐어. 아직도 청혼을 안 하셨다니.... 난 이미 진전될 대로 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청혼을 언제 했냐는 문 제가 아니지. 내가 예전에 한 말 기억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라단은, '예전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새삼스럽게 한 번 더 말하자 면... 이건 다 그분을 위한 일이니... 하누카의 날만은 그분 신분에 맞는 여 자에게 자리를 잠깐 양보해 주고... 그래도 걱정할 것은 절대 없다. 궁극적 인 승리는 결국 네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카탈리는 예전과 다르게 이번엔 남편 편을 들지 않고 굉장히 황 홀해 했다. 한밤중에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을 했다니... 사연이야 어 찌되었든 '너무 너무 낭만적'이라는 말이었다. 역시 귀족들은 청혼 방법도 낭만적이라고 말하며 라단을 힐끗 봤는데, 라단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으 로 봐서 라단은 무릎을 꿇지 않았던 듯 했다. 라단이 카탈리에게 "원래 우리 세계는, 먹을 것을 사들고 가서 우선 장 인 될 사람에게 청혼하는 것이 관습이야"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는 동안, 디트가 시나를 보며 말했다. "...못 본 사이, 아주 많은 일이 있던 것 같군요." 시나는 웃었다. "하하... 네에." 그때 카탈리는, "루온 루드랫 님도 힐라토 사람이에요. 난 지금까지 당 신 말만 믿고 힐라토 사람들은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랬군요. 흥... 실 례할게요. 점심이나 차려야지."라고 말하며 부엌으로 갔다. "아니, 카탈리! 하지만 그 분은 루이트고, 난... 카탈리!" 라단 역시 잔뜩 당황해서 아내의 뒤를 쫓아 거실에서 나갔다. 시나는 그 모양을 보며 말했다. "하하하... 두 분은 참 다정한 부부 같아요. 겉보기엔 라단 아저씨가 훨 씬 나이 들어 보이는데... 정말로 디트마... 아니, 디트하고 친구였어요? 하 하..." 디트마는 자기 이름을 '디트'로 불러달라고 했다. 디트도 조금 웃었다. "시나... 말 돌리지 말고, 부디...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줬으면 해요." 시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졌다. '...생각해 보면 디트마... 아니, 디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지....' 고달프기 짝이 없는 남의 세계 생활... '셰리카... 제발 무사히 돌아와라. 그래서 우리 같이 이 세계에서 빨리 뜨자.' 그런 간절한 생각을 하며, 엘야시온님의 말과 드랫과의 약속에 따라 어 떤 말은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지 고민하며 사실을 추려내는 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시나는 살았다고 생각하고 얼른 일어났다. "하하... 누가 왔네요." 디트는 그런 시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난 이 제부터 몇몇 사실은 숨기거나 틀리게 말할 건데, 잠깐만 기다리라'라는 표 정으로 열심히 머리 굴리는 게 디트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디트는 일어 났다. "...여기 있어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왔다갔다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있는 게 생각 이 더 잘 돌아갈 거예요.' "...내가 문을 열죠. 손님일지도 모르는 데... 시나는 모자도 안 썼잖아 요."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난 그럼 방에 들어가 있을 게요. 용무가 있으면 부르세 요..." 시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이층으로 갔고 디트는 그 런 그녀를 보며 이따가 방에서라면 거실에서처럼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 고 질문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현관으로 가 문을 여는 데,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 드래마였다. 디트의 웃는 얼굴이 굳어졌다. "...드래...마."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28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31 22:14 읽음:1712 관련자료 없음 ----------------------------------------------------------------------------- <제 44막. 괴물.>-2 뜻밖이라고 해도 돌아올 때가 됐으니, 드래마일지도 모른다고 짐작을 했어야 하는데 시나에게 정신이 팔려 미쳐 짐작을 못했다. 그래서 디트는 어색한 얼굴로 그의 눈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일찍 왔군..." 드래마는 그런 디트를 힐끗 보고,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왕 궁엘 들어가야 하니까." "아... 그, 그렇지." 아침에 식탁에서 그 이야기는 들었다. 어제 그 사건이후로 그들 사이는 몹시 서먹해지고 말았지만, 아침 식탁에서 드래마가 시나와 함께 왕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덕분에 라단 부부는 놀라움과 기쁨에 빠져 드래마와 디트가 아침 인사 외에는 아침 내내 서로간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셰리카 양은 자기 세계로 돌아갔더군." 거실로 들어가며 느닷없이 드 래마가 한 말이었다. 디트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셰, 셰리카 양? 그 게 누구..." "시나의 친구..." "아..."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머지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디트는 얼굴을 붉혔다. "그, 그래? 시나가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겠..." "드랫?!!" 시나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말했다. "돌아 왔어요?! 셰리카는 어떻게 됐어요?" 덕분에 드래마와 디트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드래마는 시나 를 보며 말했다. "...네 친구는 자기 세계로 돌아갔던데." "뭐라고요? 말도 안돼요...!! 어떻게...!!" 시나는 층계에서 내려와 드래마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길 요구했 다. 하지만 드래마는 안 좋은 얼굴로 이야기는 이야기고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왜 거실에 내려와 있는 거냐고 시나에게 말했다. 회복도 제대로 안 돼, 골골거리는 인간을 끌고 다니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는 말이었는 데, 그 말에 시나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회복이야 예전에 됐고 기분도 상 쾌하다며 팔을 휘둘러 어깨의 건재함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그걸 본 디트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상처가 깨끗이 아물고 있다지만...! 하지만 디트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이 시나는 스스로 그걸 깨달았다. 기 운차게 팔을 돌린 뒤, 얼굴이 사색이 돼서 어깨를 감싸쥔 채 쭈그리고 앉 아 '으윽...!!'라는 신음을 뱉었던 것이다. 참 어이가 없는 행동이어서 디트 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디트 는 드래마도 시나를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디트는 웃음을 멈췄다. "...우스꽝스러워." 드래마가 시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나는 너무 아 픈 나머지 그를 노려보았다. "우습다니, 고맙네요. 덕분에 능력개발이 돼 서... 진로가 막혔을 때, 개그맨도 고려해 볼게요." 드래마가 빙긋 웃었다. "진짜 괜찮아진 모양인데..." 그는 손을 내밀어 시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디트를 보았다. "...정말 침대에 누워있지 않아도 괜찮아?" 시나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안 디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드래마는 그 짧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 나가 재차, 셰리카에 대한 것을 물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셰리카에 대해 서 말하기로 했다. 여관을 찾아갔던 일과 셰리카의 일행에 대해서 알아낸 사실, 그리고 그녀가 지난 사흘 동안 보이지 않았던 이유, 이 세계를 떠났 다고 하는 말에 혹시나 해서 출입국 담당관에게 또 한 번 다녀온 결과 등 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성전의 게이트를 지키는 문지기는 셰리카 양의 외모를 정확히 말하더 군." 드래마는 쓴웃음 지었다. 거기에서 자신의 정체가 들통났다는 말은 하 지 않았다. 또 한번 제일로트로 들어올 때의 상황이 일어났으나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하는데 울어대고 야단이어서 인상에 남아 잘 기억하고 있었다나..." "믿을 수가..." 지금까지 드래마의 말을 쭉 듣던 시나는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요. 이, 일행이 데려갔다니... 그 아인 원래 우리 세계의..." 하지만 그때, 시나의 뇌리에 셰리카가 그 동안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행 중에 마음에 안 드는 놈... 찾아올 물건이 있고...' ...셰리카도 자기처럼 이쪽 세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 건 분명하다. 안 그랬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얼음의 숲인지 성역 에 가까운 숲 인지에서 받은 나쁜 영향 때문에 이상한 버릇이 들어서 물 건을 함부로 훔쳤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거라면... '찾아올 물건'이라는 것이 '훔치는 것'이었다면...! 시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임보경...!! 이 바보가...!!!" 드래마가 짐을 꾸리기 위해 방으로 올라갔을 때, 디트는 결심한 듯, 각 오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왔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드래마는 헝겊으로 목검을 감싸다가 디트를 보았다. 하지만 곧 하던 일 로 돌아가 건조하게 말했다. "뭔데." "시나에게 청혼을 하다니... 무슨 생각인지..." 드래마는 계속 헝겊으로 목검을 감쌌다. "...생각 같은 것은 없어. 회피 하고 도망 다니는 것이 지겨워졌을 뿐." 다른 때라면 그 말에 기쁜 마음이 들었겠지만 이번에는 틀렸다. "...여 기 와서," 디트는 침을 삼켰다. "라단에게 이곳의 사정을 듣고, 어이가 없 었어. 바리스에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너...는 시나를 무척 안 좋아했으니 까. 그래서 나는 결국, 라단 부부가 오해를 하고 있던 거라고 생각했어. 어느 정도... 너와 시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추측할 수도 있었 고. 그래서 어제 밤 식탁에서 말해본 거야. 네가 시나를 책임져야 한다 고." "..." 드래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디트는 고개를 숙이고 창백한 얼굴로 말 했다. "드래마. 네가 나를 웃기는 자식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나를 귀찮은 놈 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하, 하지만...! 네 생각은 너무나 뻔히 보여!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 둬. 난 절대로, 네가 시나를 마음에 두고 있 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기 와서 이, 이제까지... 넌 사람들 앞에서 시나의 정말 종속주가 될 마음이 있는 양 행동했고... 그걸로 충분하잖아!! 그러니 까 시나에게 청혼을 한다든지 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건...!!" 드래마는 목검을 침대에 놓았다. 그리고 디트를 고요한 눈으로 보았다. "...일루티온 디트. 아까 말한 대로 난 이제 나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 요 며칠 계속 고민했지만, 이젠 결론이 났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진 않는 다. 고민은 충분할 정도로 했으니까. 네 말대로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난 시나에 대하여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었지만 결국은 이 렇게 결론 내렸어. ...결론 내릴 수 있던 것은 네 덕도 있으니 네게 고맙다 고 해야할까..." 디트의 손이 떨렸다. 머리 속에 시나를 보며 미소짓던 드래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뜻이야..." 루이티온 루드랫은 단 한 여자만을 보고 미소지었다. 루온 루사벨라... 그의 약혼녀. 하지만 마노테온 드래마는 어느 여자에게도 미소짓지 않았다. 마노테온 드래마는 한 여자만을 사랑했지만... 적어도 디트가 아는 한, 드래마는 여 자에게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드래마의 입술은 사랑을 말했지만, 죽음도 끊을 수 없는 애착을 말했지 만,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디트는 알았다. "...너는... 드래마..." "아냐." 드래마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젠, '드래마'가 아냐. 시나가 어 느 계급이냐에 따라 앞으로 향방이 결정되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 난, 루이티온 루드랫이다." 마노테온 드래마... 아니, 루온 루드랫의 눈에는 잠깐 어둠이 스쳐지나 갔다. "시나는, 내 책임이야. 그걸 받아들임으로, 내 운명에 순종해서... 당분 간 난, '루이티온 루드랫'으로서 시나를 보호할 거다. 그러니 이젠 내 이름 을 '루온 루드랫'으로 부르도록... 이게 루이티온으로서, 그리고 마노테온 드래마였던 자로서의 내 의지다, 일루티온 디트." "...!!" 디트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왜, 시나를 드래마에게 딸려 보냈을까...? 내내 생기 없고 무표정했던 드래마가 시나를 구해오고 시나에게 격렬 하게 화를 내고, 그녀를 미워했을 때부터... 시나를 드래마 옆에 가지 못하 게 했어야 한다. 아무리 아팠어도 시나를 디트 자신 대신 보내어서는 안 됐다. 아니, 인간사냥꾼에게 다친 제시마를 고쳐주는 일 자체를 해서는 안 됐 다. 오직 드래마만을 생각하고 그만을 위해 힐러 라이트를 쓰고... 그래서 이 결정적인 여행에서 드래마와 떨어지지 말았어야한다. 하지만 디트는 드래마가 드디어 덫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래 마의 분노는 그 증거이자, 그가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예시(豫 示)로 여겼다. 하지만, 이젠 그 '덫'이... 드래마의 발을 묶고 옴짝달싹못하게 하며 그 를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디트는 깨달았다. 그가 그렇게 바라던 루온 루드랫... 그의 주 인의 잔인하고 고요한 눈길을 차마 받을 수 없어, 그 방을 나와 문을 닿 고 거기에 기대어 섰을 때... 무서운 예감. 디트는 몸을 떨며 말했다. "나의, 실수......" 시나는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디트...!" 디트가 말했다. "시나, 짐은... 다 챙겼나요?" 시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네. 거의 다... 헌데 디트, 어디 아파 요? 역시 몸이 아직도 회복 안된 거죠? 얼굴빛이 몹시 안 좋네요. 여기 앉으세요." 시나는 의자를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디트는 의자에 앉았다. "시나..." 짐을 챙기고 방을 정리하던 시나는 디트가 어쩐지 심각해 보인다고 생 각하고 대답했다. "네?" "바리스가..." 그리고 디트는 말을 쉬었다. 그래서 시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 다. "바리스요? 아, 그렇지. 제시마는 잘 있어요?" "...제시마는 잘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시나,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 그 이유를 당신은 아직도 모르죠?" "이유요? 그러고 보니... 디트, 정말로 여기까지 와도 괜찮은 거예요? 그때는 한 달은 넘게 몸조심해야 할거라고..." "시나." 마침내 디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디트 는 시나의 눈을 똑바로 봤다. "바리스... 바리스가 불에 탔기 때문입니다. 다 탔죠... 모두 다... 제시마나 세일마는 살아남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촌장님도, 모두 다." "뭐라고요...?" 디트는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바리스가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그 말의 뜻은 천천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불로..." 시나의 표정은 굳어 졌다. "죽었...다고...!" 시나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바리스 사람들이...!! 언제나 바리스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다. 엘야시온님을 만난 뒤, 현실로 돌아갈 생각에 요즘은 바리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리스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그 따뜻한 느낌. 환영해 주던 사람들... 헌데 뭐라고?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디트... 농담하는 거죠? 그런 말도 안돼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을 리 가..." 하지만 디트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했다. 그는 농담도, 거짓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시나는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하지만 그때 문득, 시나의 눈에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스노우 드롭 꽃 이 비쳤다. 이 꽃을 보고 그토록 슬픈 미소를 짓던 디트... '절망'과 '희망' 을 말하던 디트. 그 비몽사몽 중에서 스노우 드롭처럼 희게 미소짓던 모 습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래서 더욱 꿈인 것 같다고, 디트가 여기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디트가 말했다. "시나... 그래서..." 하지만 그는 곧 놀란 눈을 지었 다. "시나...?" "불이라고요...? 화재..." 시나는 손을 들어 눈에 댔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좋아했던 것. 행복했던 시절. 그리고... "시나...!" 시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어떻게... 또... 불 때문에... 죽다니..." "그렇다면, 시나..." "...훌쩍. 네, 걱정 말아요. 드, 드랫은 분명히 가짜로 그런 거예요." 디트는 그 천진한 말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가짜라. 하지만 시나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바람에 디트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방에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어떤 적개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시나 에게 불태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바리스에 대한 말을 했다. 그냥, 약간의 충격을 줘서... 묻고 있는 것에 대답을 잘 하게 하려고. 그리 고 디트는 자신의 의도가 적중했음을 알았다. 시나는 지금 완전히 흔들리 고 있고, 덕분에 청혼 건에 대해서도 순순히 대답을 했다. 거실에서 딴청 을 피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그러므로, 이제 더 나아간 질문-그렇다면 당신은, 루온 루드랫 님을 어 떻게 생각합니까? 그것이 '가짜'가 아닌, '진짜'라면...? 청혼을 받아들이겠 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듣고, 다음의 행동을 해야한다. 하지만 시나는 눈물을 흘렸고, 지금 디트는 그 눈물을 보고 있다. 디트 의 마음에 기이함이 감돌아, 결국 디트는 그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생각 해둔 것과는 다른 질문을 하고 말았다. "...시나. 이건 다른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 "...도대체 당신은, 왜 눈물을 흘립니까..." 그것은 너무나 평이한 음성이 라 질문하는 것이기보다는 혼잣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이 이상한 소 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하바티온보다 마노테온 따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가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당신은 그곳에 아주 잠깐 있었을 뿐인데... 시나... 도대체 무엇이, 슬픕니까?" 시나는 눈을 문지르고 디트를 자세히 보았다. "...난 그곳 사람들을 좋 아했어요. 그 사람들은 내게 친절했고, 그런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는 게 슬퍼요. 이제 앞으로 다시는... 영원히 못 본다는 것이." 디트는 웃었다. "영원이라고요?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아니, 그것 이 아니라도... 이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어요. 어차피 모두 다 만남과 이 별을 반복하는 거죠. 너무나 당연한 일...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일에 무엇이 슬픈 거지요?" 시나는 디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더구나... 시나는 눈을 감았다. ...죽음 앞의 슬픔은 절대적이다. 시나는 기억하고 있 었다. 죽음은 잔인한 약탈자. 모든 것을 앗아간다. 그것이 설혹, 어떤 사람에 게 있어 단 하나 귀중한 것이라고 해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꽉 안고 있어도... 사람의 손아귀 는 너무 연약해, 그냥 눈을 뜬 채,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고, 온 몸이 뜨겁 도록 눈물을 흘릴 뿐이다. 잔인함. 차가움... 그 힘은 얼마나 절대적인지... 죽음은 슬픔이고, 슬픔 은 고통이 된다. 그 두려움 때문에, 한 때는 그것이 유일한 신(神)이 되었다. 영원히 같이 있지 못할 거란 걸 알지만, 왜 하필 지금...!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이 말을 수천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니까... "당연하지 않아요." 시나는 눈물을 삼키고 강하게 말했다. "절대, 당연 하지 않아요. 이런 게 당연한 것이라면... 디트...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무 엇이에요? 어떤 기쁨도 어떤 즐거움도 결국에 죽음과 헤어짐으로 이어질 뿐이에요? 디트... 그렇다면 우리에겐 절망뿐이군요. 왜냐하면 나는 경험해 서 잘 알아요.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지. 너무, 잔혹해서... 한 번 삼킨 것은 절대로... 뱉어놓지 않죠..." 시나의 눈은 디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삼 년 전... 그가 죽었을 때." 시나는 그때 일을 생각했다. 불, 화재... 무서운 연기들. 거기에 떠돌던 잔인한 냄새. "그 텅 비어버린 느낌. 무엇이 슬프냐고요? 난... 슬픔을 느끼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 못해요. 하지만 내가 굳이 설명하 지 않아도, 디트는 그걸 이해해 줄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디트도 나처럼 울고 싶은 얼굴이니까. 내게 묻지 않아도 디트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되잖 아요." "...!!!" 디트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나는 입술 을 깨물고 말했다. "내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맞아요. 난 바리스 사람들을 본 지 겨우 일주일 남짓이지만... 그래서 이건, 싸구려 동정심이 될 수도 있을 테지 만..." 디트가 자신에게 질문을 한 것은 그걸 질책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 이다. 디트는 거의 이십 년을 바리스에서 살아왔으니... 자신이 눈물 흘리 는 것을 가소롭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토록 슬픈 얼굴로 왜 눈물을 흘리는 지 묻는 걸 테지... "하지만, 디트... 비록 설명은 잘 못해도... 설명할 수 있는 감정만이 진 실은 아니잖아요. 난, 지금 정말 슬퍼요. 난 그들을 좋아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예요. 그러니까 디트가 그런 질문을 하면... 난, 섭 섭해요." "시나..." 디트는 또 한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 래서 그냥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니... 당신은... 오해했습니다. 난, 당 신이 슬퍼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난, 별로. 바리스가 불탄 것에 슬퍼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당신이 이상 하게 생각됐을 뿐... 이해가 가지 않아서." 시나는 디트의 설명에 눈을 찌푸렸다. "...디트? 이상하네요. 왜 그런 말 을 해요? 슬프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한 가족처럼 오래 산 마을인데...?" 하지만 디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슬프지 않아요. 마을이 불탔어도 전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어요.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난 것은 겨우 여기에 와서...! 루온 루드랫 님의 눈동자를 보고야, 났을 뿐. 하지만 그것도 바리스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온 루드랫 님이 흔들 리는 것을 보고 분한 나머지 흘린 거였죠...!" "......?!"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시나는 디트의 모습에서 어떤 겹쳐지는 모습을 봤다. 시나는 예전에 디트가 해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이야 기. 디트는 내어주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죽음과 함께 시작하는 사 랑. 아주 오랜 세월에 걸친 사랑. 물론 시나는 아직도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시나는 남녀관계가 복잡한 건 안 좋아한다. 그래서 디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한다면, 고백하는 거다. 그래서 채인 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더라도... 디트가 했던 말에 비추어, 추측은 할 수 있다. 시나는 중얼거렸다. '디트가... 슬프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시간에 따라 더욱 깊어지는 사랑을 말한 사람이... 단지, 디트는...' 그때, 시나의 뇌리에 한 다정한 음성이 떠올랐다. '...아냐. 너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야. 어떤 사람 들은 누군가 말해 주어야만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도 해. 너는 지금 굉장한 슬픔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야...'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아... 그래요. 내가 왜 슬픔을 느끼는 지는 비록 설명할 수 없지만..." 디트는 고개를 들었다. 시나의 얼굴은 몹시 창백해져 있었다. "그래요... 삼 년 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어요. 그, 그래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눈물을 흘릴 수 없어서.... 그러다가 어느 날, 알았어 요. 이런 아픔. 이것도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그토 록 단순한 단 두 자의 이름이라니... 이렇게 아픈데. 다시는 일어설 수 없 도록 날 짓누르는데... 하지만 그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슬픔'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가 있어서... 내 아픔은 아주, 아주 깊은 사랑처럼, 아주, 아주 깊은 슬픔으로... 내가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슬 픔'이라고. 하, 하지만 그 '슬픔'은 매일이 지남에 따라 이름이 바뀔 거라 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차라리 죽었으면 좋을 것 같은 슬픔'에 서, '지독한 슬픔'으로... 다음에는, '그냥 아픈 슬픔'으로... 그렇게 계속, 계 속...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그 사람을 만나서 아주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슬픔은 충분히 가치가 있던 거라고, 그 사람이 말해 줬어요... 그래서 나는..." 시나는 말했다. "나는... 그 괴물 같은 아픔을 '슬픔'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때서부터 '슬픔'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이 슬픔이.. '나는 그 사람 을 만나서 아주 행복했다'가 될 때까지... 그 슬픔을 다스리고, 견딜 수 있 도록." 계속, 수 천 번이나, 그렇게 슬픔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더라... 하지만 그 이상의 기억은 시나의 뇌리에서 엷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디 트를 위로하는 것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다정한 음성에 시나가 아주 많은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그, 그러니까, 디트... 예전에 그 사람이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이번 엔, 내가 디트에게 말해 줄게요. 디트는 지금 아주, 아주 슬퍼서 디트 안 에 있는 괴물이 설마 '슬픔'이라고는 생각 못하는 거예요. 하지만 디트!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 언젠가, '바리스 사람들을 만나서 아주 행복했 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을 거예요. 그렇죠...?" 디트는 시나를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색 눈은 눈물에 젖 어 있었다. "디트...?" 디트는 눈을 내리깔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나... 루온 루드랫 님 이 당신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말은 시나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네...?" 디트마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의 '괴물'은, 열 네 살의 시나가 가졌던 '괴물'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다... 루드랫은 시나의 방문밖에 서 있었다. 준비가 끝났는지 알아보려다 들 려오는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대화를 계속 듣게 되었다. 엿들은 지는 얼마 안 됐으므로, 들은 말이라고는 말의 말미뿐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상하게 루드랫의 가슴을 파고들어, 한참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겨우 발 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28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31 22:14 읽음:1905 관련자료 없음 ----------------------------------------------------------------------------- <제 44막. 괴물.>-3 그것은 마차를 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루드랫이 물어본 말이었다. 시나는 계속 라단과 카탈리, 디트, 그리고 셰리카, 바리스 마을에 대해 생 각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작별인사를 할 때 일도 자꾸 떠올랐다. 왜냐하면 시나는 아주 놀랐던 것이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라단은 고개를 깊게 숙이 고, '드래마'가 아닌 '루온 루드랫'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라단은 계속, '기 쁘다'고 말했다. '당신이 다시 돌아와 너무 기쁘다'고. 그 말을 들을 때 루 드랫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시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 표정엔 시나도 공감했다. '드래마'든 '루드랫'이든 그는 언제나 그 자 리에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으로. 하지만 놀랐던 것은, 다른 때라면 라단의 그런 말에 뭐라고 한 마디 했 을 루드랫이 끝끝내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루드랫은 조용히 앉아있다. 시나가 말했다. "음... 그래요. 계속 생각한 건데... 이름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엔 이런 것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내 이름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많이 바뀌는 것을 봐서..."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인간은 약하니까요. 그렇잖아 요?" 루드랫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흐음, 헛기 침했다. "...맞아." 시나는 루드랫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저어, 말이죠. 난 드랫을 믿고 있어요. 드랫은 드랫 외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루드랫은 아까보다 더, 한참 후에 말했다. "...아." 어쩐지 약간의 웃음이 서린 말투라 시나의 기분도 훨씬 가벼워졌다. "저어, 말이죠...! 과거가 어찌되었든, 미래가 어찌되었든, 드랫은 드랫이니 까요...! 하지만 조금 걱정인 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제 다 드랫을 '루온 루드랫 님'이라고 부르던데, 어떡할까요? 나도 그렇게 부를까요, 드랫?" "음..." "...?" 그 모호한 말(?)에 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부르라는 말 인가, 말라는 말인가? 그래서 또 한번 더 물어보려는 데, 드랫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걱정되는 것이 있는데..." 시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뭔데요?" "...네가 내 질문에 언제 대답을 해 줄 것인지. 또 질문을 해야하는지." 시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끙끙대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루드랫에게 말을 건 동기가, 아마... 시나는 그에게 꾸벅 사과했다. "미안해요. 질문을 까먹었어요. 내 말하느라." "......" '까먹었다'라... '뭐, 좋겠지'라고 루드랫은 생각했다. 예전에 만났던 여자 들은 자신을 너무 의식해서 골치가 아팠다. "....." 별로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물어볼 필요도 없다'라고 루드 랫은 생각했다. 마차 안엔 침묵이 돌았다. 굴러가는 마차 바퀴 소리만 덜컹거리며 들렸 다. 잠시 후 시나가 조심스럽게 말할 때까지. "저어... 드랫. 삐졌어요? 내가 질문 까먹어서?" "....." '어리석은 말'이라고 루드랫은 생각했다. '삐지다'니? 애도 아니고.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싶을 뿐이다. '여자들은 정말 넘겨 집기를 잘 하는 존재'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나는 계속 말했다. "저어... 말 좀 해봐요. 남자가 뭐 그런 걸 갖고 그래요. 사과하잖아요. 애도 아니고." 마침내 루드랫은 한마디하기로 했다. 말 안 한다고 '삐졌다'는 오해를 받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억지 쓰지마. 난 그냥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왜요?" "...생각할게 있어서." "흐음..." 시나는 의심스러운 눈을 지었다. "아까 질문은 뭐였는데요?" "별로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어." 시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코웃음쳤다. "...아." 그 한 박자 쉰 대답에 루드랫은 인상을 썼다. "...말해 두지만, 삐지지 않았어." "...훗." "...시나." "하하." "......시, 나." "참... 남자들이란. 그거 상대 좀 안 해줬다고... 삐져서..." "시나!!!!!" 마침내 루드랫은 버럭 소리지르고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시나는 그 손길을 피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아앗!!! 무력행사는 비겁해요!! 진리는 탄압 받아도 살아 남는다구 요!!!" "뭐...? 진리? 탄압...?" 시나를 붙잡아, "그만하고, 조용히 있어!!"라고 말할 참이었던 루드랫은 그만 시나처럼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시나에게 전염된 듯 했 다.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정말로 탄압을 해 볼까? 네가 말한 것이 진리라면 적어도 그 말이 오늘 저녁까지는 살아남 겠지?" 시나는 어둠 속이지만 혀를 내밀었다. "싫어요!! 드랫은 정말 엉터리 종속주예요. 난 레겜이 사준 책을 조금 읽어봤는데... 종속주들은 정말로 그 종속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대요! 하지만 드랫은 전혀 그렇지 않았 죠? 그러니까, 난 드랫이 나한테 청혼한 것도 진짜라고 절대로 믿을 수 없어요!!" "....!" 루드랫의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빠져나갔다. 루드랫은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청혼은 진짜였어..." 시나는 고개를 숙였다. "...왜 청혼을 할 생각이 든 건데요?" 루드랫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 가장 긴 침묵이 흐른 다음 말했다. "널 괜찮게 생각하니까." 시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드랫. 나도 괜찮게 생각한 사람은 많지만... 청혼 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리고 혹시 아는 지 모르겠지만, 결 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예요." "글세... 어떤 사랑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네게 책임과 의무를 다 할 거야. 그리고 사랑을 원한다면... 언젠가는 널 사랑할 수도 있게 되겠 지."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드랫이 날 사랑하게 된다고요? 마 인드 컨트롤인지 뭔지 그런 걸로 날 사랑하는 것처럼 마음을 조종할 거예 요?" 하지만 루드랫은 웃지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은... 깨졌어. 이제 다시 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인드 컨트롤은 불가능해." "...뭐라고요?" 루드랫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어쨌든, 난 네게 청혼했어. 그러고 보니 그 대답 듣는 것을 깜빡 했군. 네 생각은 어떻지?" 청혼에 대한 답을 묻기보다는 무슨 날씨 상태를 묻는 것 같은 어조였 다. 시나는 약간 울컥했다.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청혼에 대답을 해요. 내 꼴만 우습게 될텐 데." "...무슨 뜻이야. 거절한다는 말인가?" "루이티온 루드랫!!! 정말, 바보같이!!! 루드랫에겐 정말 좋아하는 사람 이 있잖아요!!!! 그 사람에 대해서 내게 한 말을 다 잊었어요!!! 어떻게 좋 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게 청혼을 해요!!!" 루드랫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일은 너와는 상관없어. 난 네게 청혼을 한 거야. 대답은? 아니 면? 청혼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래? 다시 한 번 더 말할까?" "....!!!" 그 무미건조하고 인정머리 없는 말에 시나는 완전히 질려버렸 다. 그래서 화가 잔뜩 난 그녀는 갑자기 마차 문을 덜커덕 열어버렸다. "무슨 짓을...!!!" "그래요!!! 청혼을 받아들이죠!! 루이티온 루드랫!!!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어디 큰 소리로 말해봐요!!! 그 청혼의 말이 뭐예요?!! '지금 난, 널 짐짝 같이 여기고는 있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면 널 사랑할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이 밝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잘 들리게 똑바로 말해봐요!!! 그것이 진실하다고 여겨지면 그 청혼을 받 아들이죠!!! 됐어요?!!!" "시나!!!" 열린 마차 문을 통하여 세찬 바람이 들어오고, 마부의 고함이 들렸다. "무, 무슨 일입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마차를 따라 고개 돌리는 모습 이 보였다. "바보같이!!! 말해 두지만, 짐짝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여간 진 실해서는 안 될 거예요!!!" 빛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와 그렇게 소리치는 시나의 얼굴을 비췄다. 화난 얼굴. 분노로 타는 회색 눈동자. 그것이 너무나 격렬하고 생동감이 넘쳐 보여서 루드랫도 화가 났다. "좋아!!! 그럼 그 짐짝에게 청혼하지!!!! 구석진 자리에 잘 보관해 두고, 가끔 햇빛도 쪼여주고, 먼지도 털어 줄 테니, 제발 결혼해 줬으면 좋겠 군!!!! 곰팡이가 슬어도 '사랑'할 테니!!!" "뭐라고요!!! ...!! 으악!!!" 마차가 섰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려던 시나는 하마터면 마차 밖으로 굴 러 떨어질 뻔했다. 마차의 속력이야 별 것 아니었지만, 일어나던 여파로 넘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럭저럭 루드랫이 시나를 잡아냈다. 아슬아슬하게 몸이 밖으로 기울어져 있고 시나는 너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루드랫 의 팔을 꽉 붙들었는데, 어이없게 루드랫은 그런 상황에서도 시나를 보고 말했다. "...대답은?"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은 더 마음에 안 든다. 시나는 그를 노려봤다. "쳇!!!! 웃기지 말아요!!!" 루드랫도 무척 화가 나 있던 게 틀림없다. 그는 씩 웃고 시나의 몸에서 두 손을 떼었던 것이다. "으아아악!!!" 잠시 후, 마차가 다시 출발했을 때 시나는 씩씩대면서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손을 놓을 수가 있어요!!!! 마부 아저씨가 아니었으 면 굴러 떨어질 뻔했잖아요!!!" 루드랫은 야멸 차게 말했다.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연 것은 너야. 자업 자득이지." "뭐예요!!! 인정머리라고는 조금도 없군요!!! 난 병자라고요!!!" 하지만 화나게도 루드랫은 코웃음쳤다. "오... 그래. 정말 우스꽝스러운 병자지! 미안하지만, 난 인정머리가 별로 없어서." "누가 청혼 같은 거 받아들일 줄 알아요! 먼지를 털어 준다고요!!" 가 히 상상이 간다. "털 수나 있겠어요?!! 어디 뒀는지도 모를 텐데!!!" 루드랫은 빈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뛰어난 예지력. 경의를 표하지." 시나는 한마디, 한마디 강조해서 말했다. "좀, 비, 심, 장!!!! 바, 보!!!" 루드랫은 빙긋 웃고, 냉랭하게 말했다. "먼지가 하나도 안 털린 짐, 짝!" "...." 시나는 인상을 쓰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루드랫과 한바탕 싸우고 나니 어깨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드랫에겐 많은 문제가 있어요." 루드랫 또한 뒤로 몸을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경의를. 통찰 력이 뛰어나군." "...고마워요. 어쨌든... 드랫. 내가, 화가 나서 나 자신을 비록 '짐짝'이라 고 했지만... 그럴 경우, 드랫은... 음." 시나는 인상을 썼다. "드랫은... 위로 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아냐. 넌 짐짝이 아냐'라고 말해주는 게 좋다는 생각, 안 들어요? ...괴로워하면서 자조적으로 뱉은 말을, 그렇게 금방 욕 으로 쓰면.... 상대방에게 실례라는 생각은?" "...전혀." "...아." 어쨌든, 그 후로는 침묵이 흘렀다. 시나는 심각하게, 새삼 루드랫의 성 격에 대해 고찰하고 있었고, 루드랫은 뭔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얼마 후, 시나는 결론을 내렸다. "...뭐, 드랫하고 살면 재미있긴 하겠네요." 루드랫은 시나를 흘끗 보고, "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뭔가를 곰곰 이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다시 청혼하지. 네가 짐짝 이 되고 싶다니. 상당히 유감이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럼, 나는 궤짝이 되 겠어. 하지만 때를 맞추어 먼지가 털리고 싶다면, 우리 둘 다 주인을 잘 만나야겠군." "하나도 안 웃긴, 농담이에요." 루드랫은 인상을 썼다. "농담? 설마... 앞으로 내가 궤짝이 되느냐 마느 냐 인데." 시나는 빙긋 웃었다. "...그럼, 내 대답에 드랫이 궤짝이 되든지, 아니든 지 하겠네요?"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그래." 시나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하하.. 어떻게 할까요? 지금 심정으론 드 랫이 궤짝이 돼버린다면, 너무너무 기쁠 것 같지만..." "너도 그다지 밝은 미래는 아냐. 짐짝 양." "하하하..." 그렇게 웃고 난 시나는 약간 힘이 빠진 어조로 말했다. "짐 짝과 궤짝이라... 난, 별로 짐짝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아마, 드랫도 궤짝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겠죠..." 시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드 랫. 일부러 책임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요. 아까 말한 여섯 증인의 의 식... 그리고 내가 일루티온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건 그냥 무시해도 돼 요. 그런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드랫에겐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마차엔 또 한번 정적이 찾아들었다. 잠시 후, 루드랫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책임을 회피한다면 결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해." 시나는 웃었다. 이 사람은 결코, '네가 짐짝은 아냐'라는 말은 하지 않 는군! 차라리 자신이 '궤짝'이 될지언정...! 지나치게 솔직해! 정말 자존심 이 상하잖아? 시나는 어둠 속이지만 그에게 미소지었다. "그 책임거리가 나고요? 너 무하네요. 책임거리가 되는 사람의 부담도 생각해 달라고요." 하지만 루드 랫은 할말이 없는 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나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난 하누카 날이 지난 후에 드랫에게 이 청 혼에 대한 대답을 할게요. 그러니까, 드랫. 그때까지는 드랫의 마음대로 해요. 지금까지처럼 자유롭게. 나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말고. 그때엔 내 가 얼마나 드랫이 자유롭길 바라고 있었는지... 그걸 알게 될 거예요." 루드랫이 아주 한참 후에 말했다. "...내가 꼭 누군가를 구해서, 은혜의 법을 맺었어야 한다면." "....?" "...그게 너여서 다행이야," "....!" "...짐짝 양. 그리고, 이름은 지금처럼 '드랫'으로 불러 줘." 시나는 웃었다. "기쁜 말이네요. '궤, 짝, 씨.'" 정말, 기뻤다. 나중에, 루드랫이 그때 마차 안에서 묻고 싶던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지 만, 그 대답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이다. 루드랫은 어떤 사건으로 시나에 게 다시 질문을 했던 것이다. 라단의 집에서 시나가 디트와 이야기했을 때, 삼 년 전에 죽었다는... 시나가 좋아했다는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시 나에게, 시나가 했던 말을 들려줬다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계속)================================================== 한 막씩 올리자는 것이 어째, 명절에 맞추게 되어 감개가 무량...(이것 이 아니고.--;) 이렇게 된 것 그냥 명절에만 올리면 어떨까(신정, 구정, 삼일절, 어린이 날...)라고 가관인 생각도 해보고, 나날이 웃기는 인간이 돼 가는 중입니 다.(그나마 자각하고 있어서 다행인데, 언젠가 자각 못할 날이 온다면, 나 야 갈등이 없어져 행복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참 안됐죠. 네...) 그나저나 '루사트&세렌시스=루드랫'의 성격은 쓰기가 힘든 만큼 재미 있습니다. 세렌시스처럼 삐딱한 성격이, 루사트같이 진지한 성격과 만나면 어떻게 될지. 세렌시스는 어차피 본 편에 많이 나올 테니, 외전에 많이 안 적었지만, 간단하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렌시스의 삐딱한 성격, 예1) 디트: 네가 나를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어쩌구 저쩌구...(열 렬) 루드랫: ...웃기는 녀석.(입 밖으로 내서, 분명하게.) 디트: (창백)....나의 실수...다. 저것이 루온 루드랫 님이란 말인가... 83년 도의 토너먼트에서는... 아아...(고민하는 디트.) 세렌시스의 삐딱한 성격, 예2) 시나: 으윽!! 정말, 딱 질색이에요!!! 루드랫: 유감이군. 시나: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문제예요!! 루드랫: 태어났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감정을 관찰하고 그들을 겪으 며, 그들을 고찰한 결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차라리 가장 자기다운 자기를 찾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 들어 부단한 노력을 한 결과, '딱 질색'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아, 매우 '유감이군.' 시나: ...복잡하게 말할 문제도 아니군요. 루드랫: (시큰둥하게) 그렇지. 루사트는 많이 틀립니다. 외전에서 나왔던 성격대로...(^^) 루사트의 진지한 성격, 예1) 디트: 네가 나를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어쩌구 저쩌구...(열 렬) 루드랫: 제기랄!! 닥쳐!! 감히, 누구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일루티 온 디트!!! 디트: (눈물이 글썽) 루, 루온 루드랫 님...!! (루온 루드랫님...!!) 루사트의 진지한 성격, 예2) 시나: 으윽!! 정말, 딱 질색이에요!!! 루드랫: ...너 따위에게 무슨 말을 듣던 상관없어. 시나: 너무 하잖아요!!! 루드랫: 닥치지 않으면, 너라도 베어 버리겠다!!!(살기 등등. 무섭다.) ...두 사람을 섞어서 써야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하하..;) 뭐, 어차피... 성격은 이제 세렌시스가 주가 될 테니... 쓰는 게 많이 편해지겠죠.^^ 음... '성역...'을 기다려 주시는 분들도 계셔서...(하하...^^) '성역...'은 이번 주 일요일 오후에 올리겠습니다. 멋진, 이 천년 되세요. 소망하시는 일들, 모두 다 이뤄지시길. 1999년, 지난 한 해 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꾸벅.(^^) <엔...^^> ps...메일 보내주신 분들은, 잡담의 파노라마(--;)를 열어 가는 '성역에 가까운 숲'을 봐주시길...(글 관련 잡담이니, 글 관련 잡담란에 있습니다.) ps2...곧 나가봐야 해서... 그냥 올립니다.(^^;)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해주세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54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08 23:31 읽음:1902 관련자료 없음 ----------------------------------------------------------------------------- <제 45막. 유리궁전> 영혼 깊숙한 곳 울리는 파장을 지닌 나의 고향. 내 어찌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나의 붉은 것이여. 마차가 거대한 청동제의 문을 지나 상록수와 조각들로 장식된 길을 달 릴 때 이런 아련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시나는 루드랫의 만류에도 불구 하고 마차의 덧문을 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시나는 '경복궁' 외엔 진짜로 궁전을 본 적이 없는 것이 다. 언젠가 꼭 한 번 왕궁을 가까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루드랫의 말로는 그들이 지나온 문은 정문이 아닌 '후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후문'이라도 웬만한 저택의 정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마차는 거기서 잠시 멈추어 어떤 검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곧 통과가 되고, 시나는 후문에 서 있는 근위병들을 흥미롭게 보았다. 따뜻해 보이는 붉은 가죽에 거의 은색에 가까운 회색의 털이 잔뜩 붙 어 있는 제복을 입고, 창을 들고 닫힌 문 앞을 정연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것이 멋져 보였다. 그들에게서 눈을 겨우 떼고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다음 순간, 시나 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와...! 굉장하다...!" 눈이 확 떠지는 느낌이었다. 건물이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고 아름다웠 던 것이다. 지나온 문이 '후문'이라면 이것은 왕궁 뒤쪽에 있는 별궁이 틀 림없을 텐데, 본궁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이 별궁은 깨끗하고 우 아한 건물이었다. 시나는 흥분해서 말했다. "와!! 너무 예쁘네요!!" 시나의 감탄에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시나는 덧문을 더 크게 열고 건물 을 구경했다. 전체 2층으로 된 건물의 외벽은 멀리서 보니 단순한 갈색으로 보였지 만 가까운데서 보니 진한 장미 빛 대리석으로 따뜻해 보이면서도 화려해 서, 높고 길게 솟은 붉은 색 석조의 지붕과 잘 어울렸다. 건물 중앙과 건 물 양끝에는 역시 붉은 색의 첨두(尖頭) 지붕을 가진 8각 탑과 둥근 탑들 이 균형을 이루며 서 있었는데, 처마돌림의 아름다운 장식과 지붕 위에 솟은 수많은 굴뚝, 은빛으로 빛나는 조각상들과 역시 은빛으로 빛나는 벽 의 돌림 띠 등은 한데로 어우러져 따뜻한 눈의 세계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이 건물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층마다 좁고 깊게 수직으로 뻗 어 있는 창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고딕식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 운 둥근 트레이서리(tracery)들로 아랫부분은 격자 창이고, 위 부분은 섬 세한 무늬가 있는 크고 작은 둥근 창의 모임이었다. 이 둥근 창은 마땅히 장미창(薔薇窓)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자세히 보면 이것은 꽃 모양이나 바퀴모양을 본 따기 보다는 눈 결정체의 모양을 본 따고 있어 설결정창 (雪結晶窓)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것이 양각의 조각이 새겨 져 있는 두꺼운 덧문 너머, 깊숙한 곳에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차가 건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건물의 측면으로 돌아갔을 때에, 그 곳엔 수많은 아치가 늘어서 있는 아케이드, 열주랑(列柱廊)이 있었다. 그 너머로 정교하게 돋을새김한 두꺼운 나무문이 보였는데, 대리석의 외벽과 훌륭하게 어울려 그 이상의 조화는 생각할 수 없을 듯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그 앞에서 멈췄다. 루드랫이 먼저 내리고 시나를 부축해 주었다. 하지만 시나는 마차에서 내리면서도 고개를 위로 꺾고 건물과 창문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명이 원래 시나가 살던 세계보다 훨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건 축술만은 마음먹으면 현대(물론 시나 세계의)를 능가할 만큼 훌륭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아, 감탄했다. 세월에 빛 바랜 듯한 장미빛 대리 석의 벽도 아름다웠지만, 역시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창문은 창틀, 그 자체의 문양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놀랍게도 창틀의 재료가 보통의 목재나 철제가 아니라, 약간 은색을 띠면서도 투명 해 보이는 이상한 재료라, 살아있는 생물인양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장미 속에 핀 은빛 거미줄... 저것이 설마 은은 아닐 테고... 너무 궁금해서 시나는 루드랫에게 물었 다. "도대체 저 창틀은 뭘로 만든 거예요?" 루드랫은 시나처럼 트레이서리들을 올려다보았다. 창틀의 유리들은 조 금씩 다른 각도로 끼워져 있어 약간의 빛에도 눈부신 반사광을 이루어냈 다. 루드랫은, 이처럼 수많은 유리는 처음 봤을 시나가 창 자체에 관심을 갖기 보다 따로 떼어놓고 '창틀'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희한했지만, 그 러려니 했다. "글세. 드워프들이 만든 것이니, 뭘 썼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들 은 설사 목이 잘린다고 하더라도 자기 기술을 노출하지 않거든." "드워프요!" 드워프(dwarf)란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쟁이로 알고 있는데, 참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별명인가 해서 어째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인 지 물어보려는 데, 기둥 너머의 문이 열리며 근위병처럼 붉고 은색으로 된 제복을 입은, 시종처럼 보이는 사람 셋이 나왔다. 그들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시나와 루드랫에게 다가와 깊숙이 허리 를 숙여 인사했다. 덕분에 질문을 못하고 말았는데, 시나는 그냥 '드워프' 란 이 세계에 사는 훌륭한 건축가라고 나름대로 결론 내리기로 했다. 시종이 시나를 보더니 난처한 듯 루드랫에게 말했던 것이다. "...건강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루드랫은 '따뜻한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시종은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양탄자가 깔린 넓은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 그들이 간 곳은 무척 인상적인 방이었다. 벽은 참나무로 만든 패널로 마 감되어 있고 데도(dado)선 위로는 바깥처럼 장미 빛의 회반죽 칠을 해놓 았다. 가구는 별로 없었지만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라든지, 낮은 천장이 활 활 타는 벽난로의 불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방에는 낮은 탁자와 함께 긴 의자라든지 팔걸이 의자들이 드문드문 놓 여 있었는데 시종은 그 중에 하나, 벽난로 앞에 있는 소파 겸용 침대 (daybed)로 시나를 안내했다. "잠시 앉아 계시면 힐러가 와서 몸을 돌봐 드릴 겁니다. 기다려주십시 오." "아, 저..." "네...?" "엘야시온님을 뵐 수 있는 건 언제가 될까요?" "네?" 시종은 놀란 눈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는..." 그때 루드랫이 시나를 제지했다. "여기서 기다려. 네 신분으론 그분이 말씀하기 전에 네가 먼저 그 분과의 만남을 입에 올릴 수 없어." 그렇단 말인가... 시나는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종은 그 런 시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루드랫에게 말했다. "이리로... 저를 따라 오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루드랫은 시종을 따라 가기 전, 생각하는 표정으로 시나를 보더니 '다 녀올게'라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한 시녀가 시나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시나는 풀 이 죽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대 실망이었다. 이 궁전에 오자마자 엘야시온 님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에게 셰리카에 대해서 전부 다 말할 참이 었다. 라단의 집에선 엘야시온님이 자기 말만 하고 떠났기 때문에 전혀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엘야시온님께 셰리카에 대해 말한다면 네르세바로 끌려간 셰리카를 데려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아..." 시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문 앞에 있는 시종들을 보니, 그들은 인 형이라도 된 양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아까 그 시종은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 외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루드랫은 엘야시온님을 만나러 간 것이 틀림없다. 엘야시온님은 파란 색 머리의, 루드랫 또래로 보이는 남자. 수정구를 통해서 봤을 때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의 말투를 써서 웃음 까지 나왔지만, 라단의 집에서 실제로 봤을 땐 그 표정이라든지 풍기는 느낌이 대단히 압도적이고 존재감 있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때 주로 루드랫에 대해서 말했는데... 시나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루드랫에겐 말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도록 맹세까지 시켰다. 시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차를 마셨다. 차는 부드럽고 향기로워서 몸 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드랫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럼 그도 더 이상 시나 자신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텐데... 그래서 시나는 루드랫에 대 해서도 엘야시온님께 말씀드려볼 참이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신분 이 안돼서 만남을 청할 수 없다니, 저쪽에서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 에. 조만간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위안하며, 좀 더 인내심을 갖자고 다짐하며, 시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을 발 견했다. "와! 거울...!!" 벽난로 맞은 편, 코모드(commode) 위로 거울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 그 앞으로 갔다. 거의 이주만에 보는 거울이 아닌가...! 가슴이 두 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앞으로 다가가며, 시나는 눈을 깜빡였다. "...?" 거울이 몹시 뿌옇게 보였다. 그래서 마치 거울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 는 것 같다. 시나는 자기의 눈을 비볐다. "이상하네..." 하지만 다행히도 다시 눈을 떴을 때, 거기엔 시나 자신의 모습이 비쳤 다. 시나는 웃었다. 거울을 하도 오랜만에 보니 이런 착각도 일으키는 것 같다. 시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엔 시나의 얼굴, 시나의 몸이 반사돼 보였다. 얼굴은 약간 더 홀쭉해 있고, 얼굴빛 또한 더 창백해져 있었다. 모자 밑으로 삐쳐 나온 검은 색의 앞 머리칼... 눈은 회색으로 빛나고, 콧잔등의 옅은 주근깨도 여전했다. 옷은 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모피코트. 코트자락은 무릎 바로 위까지 오고, 갈색의 가죽바지 역시 두껍고 따뜻한 것이다. 입은 옷을 뺀다면 현실세계에서 마지막 날 아침에, 욕실에서 봤던 바로 그 모습이다.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주위를 둘러싼 세계가 이렇 게 변했다니. '...세계가 변했으니, 나 자신도 엄청 변한 것 같이 느껴졌는데, 거울을 보니 그렇지도 않네. 살이 좀 빠진 것 외엔 변한 것도 그리 없는데. 세계 가 변했는데, 나는 그대로라... 그래서 그런가? 나만 혼자 이 풍경에서 따 로 놀고 있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신기해서 시나는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을 보고 있으니 모든 일이 꿈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여기는 다시 욕실이고 욕실의 문을 열고 나가면 미소짓는 아빠가 방에서 걸어나올 것 같다. 이 거울 너머에. 시나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형상을 손대면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가만 히 만졌다. 그 그림자 또한 손을 들어 시나와 손을 맞대었다. 이상하게 반짝이는 눈... 이것이 자신이었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눈은 너무 투명해, 마치 은색 같다. 그 눈이 낯설어 마치 타인과 같이 느껴져. 순간, 거울 속의 시나가 미소지었다. 자신을 비웃는 웃음이었다. "바보같이..." 그리고 시나는 여전히 웃음을 띈 채 뒷짐을 지고, 창문 앞으로 갔다. 아까부터 창 밖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환호성이 있었다. 창 밖이나 구경하 는 것이 나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낯설음을 느끼고 이상해하 기 보다는. "어떤가?" 엘야시온 가디엘은 격자 창 너머로 바깥을 보다말고 얼굴을 돌려 루드 랫에게 물었다. 루드랫은 대답했다. "...활기 차 보이는 스콰이어들이군요." 엘야시온은 미소를 가득 짓고 말했다. "그렇지? 귀여운 녀석들 아닌가? 그래, 저걸 보니 자네도 한바탕 싸워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드나?" 루드랫은 바깥, 건물 사이의 공터를 더욱 자세히 보았다. 그곳엔 소(小) 토너먼트가 한창이었다. 토너먼트라 해도 샥크(*) 루이트이하 오더(Order)를 받은 루이트는 주 인을 호위하며 뒤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필시 스콰이어(Squire) 만의 경기였다. 자이온(Zion) 토너먼트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어, 오더를 받지 못한 루이티온을 스콰이어라 하는데, 스콰이어라고 해도, 지금 싸우고 있는 소 년, 소녀는 오더 받은 루이트에 필적할 만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가죽 차양을 드리워 층계지게 만들어 놓은 특별석 위 에 앉아, 그런 토너먼트를 흥겹게 구경했다. 그들 사이엔 불이 활활 타는 화로가 있었는데, 화로의 불꽃은 붉게 타 면서도 그을음이 나지 않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트로 일으킨 불 꽃같았는데, 덕분에 왕족과 귀족들은 추운 기색 없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 었다. 환성과 크게 웃는 소리가 때때로 여기까지 들렸다. 특별석 양편으로는 몇 겹이나 늘어선 천막이 공터 가를 가득 메웠다. 천막 앞엔 화려한 깃발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 가장 대가 길고 가장 큰 깃발엔 그 천막을 소유한 샥크 루이트의 문장(紋章)이 새겨 있었다. 나머지 작은 깃발은, 샥크 루이트 밑에 속한 스콰이어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경기가 끝나 경기관이 승자와 패자의 이름을 부를 때, 한 쪽 에선 큰 함성과 함께 샥크 루이트와 승자의 깃발이 올라가고, 한 쪽에선 패자의 깃발이 뽑히는 것이다. 공터 한 가운데엔 두 개의 네모 반듯한 경기장이 있었는데 동시에 두 개의 경기가 치러지고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 싸우는 스콰이어들은 왕족 들과 귀족들의 눈길을 의식한 채 자신의 재주를 한껏 발휘하여 솜씨를 겨 뤘다. 그들이 상대와 싸우며 내는 검기는 자질에 따라 다양해 검기가 어 울리는 모습은 멀리서 보는데도 아름다웠다. 검고 붉은 검기가 맞부딪치며 내는 불의 파편들. 은빛과 푸른빛의 검기 가 허공을 가르며 내는 크고 화려한 잔상. 교육받은 받은 스콰이어들답게 그 움직임이 어찌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지 마치 춤을 보는 듯 했다. 그들 자신도 모양새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듯, 격렬하게 부딪혀 들어 가다가도, 상대가 볼썽사납게 넘어질 것 같으면 모양 갖출 새를 주느라 한 걸음 물러나 기다렸다가 싸울 정도의 아량을 보이기도 했다. 절도와 아름다움을 최고로 삼는 루이티온의 격식에 따르면, 그것은 꽤 멋진 행동이었기 때문에 왕족과 귀족들이 앉은 특별석에선 그럴 때마다 박수가 나왔다. 확실히, 박수를 받을 정도로,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싸움이다. 몇 십 년만에 처음으로 보니, 더욱 감탄이 나온다. 그러나. 루드랫은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갑자기 어떤 희미한 기 억이 떠올랐다. 루이티온이 저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그가 언제나 느꼈던 것. "싸울 땐, 겉멋은 관두고, 되든 안되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텐데." 목소리에는 비난이라든지 조소보다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런 그의 말투와 말의 내용에 눈을 크게 떴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자네 방금, 분명, 겉멋이라고 하지 않았나...?" 루드랫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루이티온의 격식을 폄훼할 마음은 없었 습니다. 오랜 세월 낮은 곳에 있다보니, 마음까지 낮아졌습니다." 루이티온으로서 루이티온의 격식을 욕하다니, 얼토당토않은 행위를 한 것이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런 루드랫을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참, 이상하군." "....?" 무엇이 이상하다는 건가,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 디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참, 이상해... 왜 자네는... 도대체 그런 말 투로 말하는 건지... 난 자네처럼 말하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리고 가디엘은 약간 슬픈 미소지었다. "그렇지. 난 자네를 보면 가끔 그와 이야기 나누던 기억이 떠올라... 자네, 혹시 기억 나나? 자네도 봤네. 이곳의 전 주인. 클로니아 세렌시스... 뭔가 기억이 나는 게 있다면 하나라 도 말해보겠나?" 루드랫은 미간을 찌푸렸다. "클로니아 세렌시스님이라고요? 죄송합니다. 그 분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가. 하 긴... 자네는 그와는 별로 연관이 없었으니까. ...참." 엘야시온 가디엘의 눈에 쓸쓸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아쉬운 일이야. 당시, 그도 혼자된 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네가 그의 루이트가 되었어도 좋았을 것 같아. 그랬더라면,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가지도... 그 리고 자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세월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루드랫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과거의 일입니다." 가디엘은 웃었다. "맞네. 과거의 일이지." 후회만 가득한 과거. 그러므로 미래는 결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 엘 야시온 가디엘은 얼굴 가득 웃으며 말했다. "자아, 그러니 우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흐음... 그러니 까, 오늘 연회 건부터 말인데... 저기 토너먼트를 치른 아이들 가운데, 단 네 명이 뽑혀, 내일 준결승과 결승전을 해야 하거든....?" 루드랫은 아까 지었던 난처한 얼굴을 계속 지어야만 했다. "흠, 오른쪽 경기장, 칼리안 스콰이어는 어떤가요? 시종일관 공격을 주 도하고 있군요." "글세, 검기와 기술은 좋은 데 품위가 떨어지지 않나요?" "격식과 아름다움이라면 그와 싸우는 힐라토 스콰이어가 한수 위이군 요." "누구 저 힐라토 스콰이어의 소속을 아는 자가 있나요?" 그러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에게 소속된 루이 티온 루카나안이라고 합니다. 힐라토 루이티온이지만 분홍색 홍채를 갖고 있는지라 영혼의 공명에 특별히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왕족들의 눈에 웃음이 돌았다. "그거 참... 검은 머리칼에 분홍색 홍채? 그런데도 검기를 낸다...?" "아아... ...상등품이군요." "저런 루이트가 힐라토에 있다는 건 몰랐는데. 왜 보고가 안 올라왔을 까?"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몇 년 후라면..." '...아주 쓸만하겠군.' 마지막 말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 왕족들은 한층 더 자세히, 루카나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있 는 루이트라면 희귀하니까. 경기 자체는 즐겁게 관전했지만, 타 세계의 루 이트에 대해선 그다지 사심 없던 그들의 눈에, 점차 희미한 소유욕이 감 돌기 시작했다. '검기의 마인드 컨트롤이 아닌 전투 마인드 컨트롤이라면 이 따위 싸움, 예전에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루카나안은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 면 적어도... 지금 저렇게, 검신을 온통 붉은 빛으로 빛내고 있는 칼리안 루이트의 실력은 절대 만만치 않으니까, 쉽게 끝낼 수 있는 여부는 두고 봐야한다 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렇게 '힘들다'는 감정 따윈 느끼지 않은 채 싸울 수 있었을 텐데. 경기가 끝난 후 상태가 어떻게 되어 있든. 루카나안은 자기 세계에선 볼 수 없던 무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이마 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감정은 낮게 깔리고, 반사신경이 곤두선 눈 으로 보니, 상대의 이마에도 땀이 맺힌 것이 보였다. 칼리안은 무척 더운 사막의 세계라 이런 기후가 더 몸에 안 맞을텐데, 그도 이 싸움에 긴장하 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어쩌면 그도 지금 이 순간, '전투 마인드 컨트롤'이었으면, 하고 바랄 지 모른다. 싸우면서 괴롭다는 '느낌'을 갖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 으니까. 더구나 이런 극도의 검기를 방출하면서. 그 순간, 우웅, 소리를 내며 붉은 불덩어리가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검붉은 색의 검기가 감도는 검으로 비껴 막으며 루카나안은 투덜 댔다. 무섭게 맹렬하게 파고드는 검기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송곳 같다고 할 까. 약간만 검기를 잘못 운용해도, 저 검기에 살갗이 꿰뚫리고 말 것이다. 강렬한 압도감. 피어(fear)를 발산하는 검기. 처음부터 이 상태였는데, 그 기세에는 검기에 대해서라면 자신을 갖고 있는 루카나안도 당황했을 정도 였다. '쳇... 하기는, 타 세계의 루이트와 싸워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니까.' 절대 같은 세계의 루이트 같지 않다. 덕분에 방어만 하는 데도 온갖 궁 리와 힘을 다해야 한다. 천박하지 않은 훌륭한 몸가짐으로 검기를 끌어내 상대의 검기를 막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갈지. 루카나안은 자기의 시각이 너무 협소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개 스콰이어가 이 정도의 검기라니, 칼리안이라는 세 계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헌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루카나안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 다. 계속 방어만 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질 땐 지더라도 어떻게 한 번 이 반격이라고 해 볼까 틈을 보고 있을 때 눈치챈 사실이었다. 칼리안 루이트의 공격에, 그 매서움이 덜해졌다. 덜해졌다고 해도,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사소한 차이였지만, 분명 히 그랬다. 루카나안은 어느새 자기가, 몸을 가를 듯 파고드는 붉은 검기 를 아까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그리고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 그 사이에 실력이 늘었을 리는 없고... 루카나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 다.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 녀석은 처음 초반에만 이 정도의 검기를 낼 수 있는 거 아냐?' 그런 판단을 내리고, 설마... 하면서 보니 과연 상대는 눈에 띄게 지쳐가 고 있었다. 루카나안은 그 뜻밖의 발견에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제길, 뭐야... 그렇다면...!' 루카나안은 승산이 보이는 것을 알고, 좀 더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비 굴할 정도로 철저히 방어만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루카나안의 자세는 한층 더 안정이 됐고, 누가 보더라도 루이티온의 격식에 따른 품위를 갖 추게 되었다. 반면 상대는, 아무리 쳐도 루카나안이 함락되지 않자 차츰 일그러진 표 정을 짓고 당황하더니, 마침내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새로운 공격을 위해 뒤로 물러난 순간, 처음으로 그 붉은 빛의 검기가 흔들린 것 이다. 이때는 시간도 상당히 지나, 그가 내는 검기는 처음보다 그 맹위가 훨씬 줄었다. '좋아!' 루카나안의 눈은 붉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빛났다. 허점이 보인 순간 그는 벌써 칼리안 루이트의 측면을 따라 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검기를 방출했다. 검은, 검기를 흠뻑 흡수하여 찢어질 듯 울어댔다. 칼리안 루이트가 붉은 눈을 경악으로 홉떴다. 그는 마인드 컨트롤까지 흔들릴 정도로 놀라고 있는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이!! 루카나안은 찰나에 생각했다. 가능, 불가능, 자신감, 그리고 영예!!! 그렇다면, 그냥 돌파한다-!! 검기가 충천한 짧은 시간, 쾌속으로 나간 검을 따라 미쳐 따라오지 못 한 검은 검기가 길게 따라와 맺히며 붉은 색의 검기와 격렬하게 충돌했 다. 카앙--!!! 와아앙--!! 검기가 검기와 맞부딪칠 때 나는 시끄러운 불협화음, 그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떨굴 듯 울리기 시작했다. 치지직, 웅웅웅--!!! 카가가강---!!! 그리고 다음순간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검은 색의 검기 가 붉은 색의 검기를 침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오---!! 저건....!!" 검기가 서로 격돌하는 모습에 특별석에서는 감탄이 터져 나오기 시작 했다. "하지만 저런 어린 스콰이어가 새터링(shattering)을 할 수 있을 리가!" "새터링!!! 저러다가 내상이나 입으면...!!" 검기의 양이 어지간히 차이나지 않거나, 실력이 없다면 검기로서 검기 를 가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이아몬드에 버금갈 정도로 단단하다 는 아다만타이트(adamantite)에 단 일격으로 홈을 내는 게 검기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금강 같은 검기가 잘려 들어가고 있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루카나안의 눈에 상대의 창백한 눈동자 가 들어왔다. '제, 제길...!' 하지만 사실은 루카나안의 얼굴 또한 상대만큼 창백했다. 계속 방어만 하다가 어린 마음에 멋있게 이기고 싶어서 이 방식을 택했는데, 오판을 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인드 컨트롤이 깨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대로 갈라버릴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대로 라면 한곳에 정체된 검기에 자기까지 당할 것이다. 검은 색의 검기는 벌써 루카나안의 손을 넘보듯 그 주위에서 넘 실대고 있었다. '뜨거워...!' 하지만 이 상태에서는 검을 회수할 수도 없다. 검기가 이미 얽히고 있 으니, 이젠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쪽이 당하는 것이다. 칼리안 루이트는 검을 대치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내뱉었다. <미친 녀석. 조그만 놈이. 같이 망하자는 거냐.> 루카나안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큰, 소년 루이트는 이 작은 힐라토 인 에게 질려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루카나안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울컥, 오기가 솟았다. '뭐라고? 미친 녀석? 이게 어디다 대고!!! 제길, 좋아!! 죽기 아니면, 까 무러치기다!!' 루카나안은 손의 뜨거움을 무시하고 한층 더 검기를 끌어냈다. 그야말 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 것이다. 덕분에 루카나안의 검기는 검은 불꽃 을 날름대며 한층 더 맹렬히 불타기 시작했다. "....!!!" 칼리안 루이트의 눈동자는 크게 열렸다. 상대의 전혀 예상밖에 행동에 당황한 것이다. <큭.> 루카나안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검기를 지나치게 끌어내 온 몸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죽을 고생을 하며 지 은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겉보기엔 전투 마인드 컨트롤로 들어갈 때 짓는 죽음의 미소만큼 무표정하고 잔인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지은 채, 루카나안은 자기 목소리가 당당하게 나오길 바라며, 낮게 말했다. <넌. 졌어.> 그건 심리적인 타격을 노린 한 마디였다. 경험 많은 루이트라면 절대 통하지 않았을 잔머리였지만, 아쉽게도 칼리안 루이트는 아직 스콰이어였 고 이 작전을 그대로 먹혀 들어갔다. <이런, 제길...! 크, 크윽... 아아악...!!!" 루카나안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칼리안 루이트의 마인드 컨트롤은 마침내 깨졌다. 순간, 검게 빛나는 검기는 붉게 타는 검기를 성큼, 갈라들 어 갔다. 핏, 핏 소리를 내며 이미 금이 나 있던 검신은 그때 조각조각 터 지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검신 조각이 불씨처럼 잘게 쪼개져 하늘을 가를 때, 칼리안 루이트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불이 붙은 듯, 그의 손에선 타는 붉은빛이 났다. 검기의 운용이 깨져, 검기가 손에 몰린 것이다. 둘러선 사람들 사이에선 격한 환호성이 터졌다. "와-----!!!!" "완벽한 새터링이다!!!!" "힐라토!!! 힐라토의 루온 루카나안!!!!" 특별석에 앉아 있던 칼리스나는 웃음을 띈 채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힐라토님, 당신 세계의 루이트, 솜씨가 대단하네요." "...당신 세계의 루이트도 그리 나쁜 건 아니에요. 스온 칼리스나." 레이서스도 웃음 어린 말투로 대꾸했다. 자기 세계의 루이트가 저렇게 잘 싸운다는 것은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으니까. (계속)====================================================== (*) 엘야시온에서 루이티온은 '작위(title)'대신 'class', 혹은 'order'를 받 는다고 하기로 했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던 이름을 새롭게 지어 받는 것 이 아니라, 타고 태어난 능력에 따라 순서를 받는다(혹은 정리된다)는 의 미니까요. order안에는 '훈위'라는 뜻도 있고... 예전에 '성직에 임명하다'고 할 때 이 동사를 썼다고 하고, '<신, 운명 등이>명하다'는 뜻도 있고... 성당기사 단(Knights Templars)을 'the Order of Templar'라고도 한다니까... title보 다 더 적당한 용어 같습니다.(과연...^^;) 헌데, 그러다 보니 의미에 혼돈이 있겠더군요. 상급... 중급... 하급... 루 이트라고 지금까지 용어를 썼는데... 이것이 상류계급(the upper classes, the higher orders), 하류계급..하는 말과 헷갈릴 지도 모른다는... 계급적인 의미가 아닌, 품질을 따지는 'the first class', 'second class'...라는 의미 인데요. 그래서 '상급', '하급'을 버리고... '일등 루이트', '이등 루이트', '삼등 루 이트'로 할까 하다가, 무슨 기차 칸 급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첫 번째 루 이트', '두 번째 루이트'는 이상하고, '으뜸 루이트', '버금 루이트'는 너무나 괴롭고... 하다가, 에라.. 그냥 고유명사를 만들었습니다. 외우기 쉽게...^^(물론 굳 이 안 외워도 됩니다.--;) 상급 루이트를 순수 엘야시온어로 번역한다면, '샥크 루이트' 중급 루이트 -> '쥬인 루이트' 하급 루이트 -> '오더 루이트'가 되겠습니다.^^ 이런 고유명사는 되도록 만들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샥크는... check에서. 첵크는 페르시아어, sh h에서 온 말로 '샤'는 '왕' 이라는 뜻이라죠? ^^; 게다가 시크(sheikh)라든지 샤크티(shakti)라 하면 어쩐지 높은 느낌이 들어서... ^^; 뭐, 율르스는 자기 세계, 일반평민에게 '파이오니온'보다는 '시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만... (여자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 자?) 하하하...^^ 단순무비하고 화끈한 걔네들이 꼬이는 발음인 '파이오니 온'을 선호할 리 없죠.^^; 쥬인은... 主人, 혹은 '중간'^^;에서, 오더는... order에서 만들었습니 다.(older가 아닙니다요.^^) 룰루... 호칭이 더 풍부해 질 것 같죠? ^^ 좋은 일입니다.^^ <머리 굴린 엔...^^> ps...그러니께... 헬리옷은 '쥬인'에서 이제부터 '샥크'로 지위가 올라가 는 겁니다.^^ 상급 루이트의 자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상황인지 라 아직 '쥬인'의 지위였거든요.^^ 그래서 '파'도 거느릴 수 없었고요.^^ (휴우~ 이러니까, 명쾌해 지는 느낌. 역시 이름이란 중요합니다.^^ 개념 만 갖곤 안되죠... 하하...^^) ps2...나중에 올리려다, 게시판에 다음 명절 때를 기약한다는 글을 읽 고...(--;) 내가 이래선 안돼지라는 생각 하에 한 편이라도 올립니다. 흐 흑...TT ps3...새터링(shattering) - 검기를 검기로 부수기. 검기가 양단 될 때, 검기를 담았던 검이 산산이 조각나 붙여진 이름. 하지만 효과가 좋고 인 상 적인(^^;) 만큼, 성공 확률이 낮으니 상대가 어지간한 약체가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루카나안은 어린 마음에...(^^;)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80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15 23:52 읽음:1673 관련자료 없음 ----------------------------------------------------------------------------- <제 45막. 유리궁전>-2 "...?" 데이베드에 엎드려 상처를 검진 받고 있던 시나는 갑자기 높아진 환 호성에 고개를 들었다. 창문으로 내다봐야 건물들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뚜렷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무슨 시합 같은 것이 열리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힐라토'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힐라토라면 밤이 계속되는 세계로 기억한다. 그게 지금 열리는 경기랑 무슨 상관일까 생각하는데, 시나의 상처 보기를 마친 궁정 힐러가 말했다. "상처는 거의 나았습니다. 이것이 사흘 전에 입은 상처였다니, 그리 깊은 상처가 아니었나 보지요. 다음 주중엔 온천에 들어가도 괜찮겠습 니다. 하지만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사람에게 시켜 약을 갖다 드릴 테니 잡수도록 하십시오." "어... 약이라면 받아 온 게 있는데요." 라단과 디트가 걱정하며 싸준 약이 잔뜩 있다. 하지만 시나의 말에 궁정힐러는 안 좋은 낯을 지었다. 아까 스스로를 소개 할 때 '궁정힐 러'라며 굉장한 자부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래도 시나가 덤 덤하게 앉아 있으니까 놀란(?) 눈치였던 것이다. 그걸 안 시나는 최대 한 예의바르게, '무척' 반갑다고 인사했는데... 끝까지 영 탐탁지 않 은 표정이던 것이, 아직 그 감정이 남아 있는 지도. 그는 볼멘 소리로 시나가 가져온, '약이라는 것'을 보자고 했다. 약 이 이미 있다는 말에, 자신이 권한 약을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 자존 심이 상한 것 같았다. 시나는 약간 당황했다. 게다가 짐을 어디다 뒀 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옷을 제대로 차려 입은 시나는 일어나 말했 다. "약이라면 짐 속에 있는데... 그런데 짐을 마차에 두고 온 것 같아 요. 가져올게요." 힐러는 눈을 내리깔고 턱을 들었다. 그리고 문으로 나가려는 시나를 싹 무시하고 시종에게 명령했다. "이 분의 짐을 가져오도록." 얼마나 무안했냐하면, 상당히 무안했다. 하지만 힐러는 시나가 무안 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여전히 턱을 든 거만한 표정으로 있었다. 날라 온 짐에서 약을 꺼내 보여줄 때까지도 힐러는 턱을 들고 있었 는데, 저렇게 계속 턱을 들고 있으면 상당히 목 아프겠다, 라고 생각 할 무렵 턱을 내리고 '그러면 그렇지'라는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힐러는 약을 지은 힐러의 신원에 대해 물었다. 주로 '힐러 라이트' 를 쓸 줄 아느냐, 어디까지 내는 힐러냐 하는 질문이었는데 시나가 사 실대로 말하자 궁정힐러는 한층 더 비웃는 낯으로 말했다. "페이스 힐러도 아닌 자가 오죽 하겠습니까. 이 약은 모두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의 상처에 비해 지나치게 독한 약이니까요. 제가 대신 버리지요." 그러더니 그는 그 약을 모두 싸서 소맷자락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 나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바쁘군요. 약은 제 수하가 가져다 드릴 테니 가져오 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꼬박꼬박 드십시오. 약만 잘 드시면 두 번 검 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고 제 검진을 받고 싶어 일부러 약을 게을리 드시면 곤란합니다. 어쨌든 나는 무척 바쁘고, 당 신은 몸이 빨리 낫는 게 좋으니까요. 그럼 속히 회복되길 바랍니다." '그렇다고'에서 '곤란합니다'까지. 시나는 혹시 궁정힐러가 농담을 하는 건가 해서 웃으려 했지만, 궁정힐러는 무척 진지한 낯이어서 웃 는 것은 관두었다. 하긴. 웃을 겨를도 없었다. 시나가 뭐라고 인사도 하기 전에 그는 방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너무 완벽하게 무시하는 태도라 얼떨떨했고, 당연히, 조금 후에는 화가 났다. '페이스 힐러도 아닌 자가 오죽 하겠냐'니! 라단 때문에 졸렸던 것 에서 깨어난 건데!! 그리고 디트는 힐러 라이트도 쓸 수 있는 훌륭한 힐러고!! 헌데 본 적도 없으면서 두 사람을 무시하다니!! 몹시 분했 다. 시나 자신이 무시당한 것도 말할 수 없이 분했다. 혹시 자신의 태도가 예의에 맞지 않아, 궁정 힐러가 본 적도 없는 두 사람까지 무시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렇더라도 어쨌든 불쾌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그 약 도로 달라고, 자신은 두 사람이 지어준 약 을 먹겠다고 말할까 생각했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시종들을 보고 그럴 의욕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들은 정말 무표정했다. 그나마 시종 중 한 사람의 유일한 표정을 본 때는, 아까 시나가, 시종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고 '고맙습니다. 번거 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라고 인사했을 때였다. 그 말을 하자, 짐을 가져다준 시종은 아까 드랫을 데려갔던 시종만큼 이상한 표정을 지었 다. 하지만 이상한 건 시나도 마찬가지다. 인사도 하면 안 되나? 아니 면, 이것도 엘야시온님에게 드리는 인사말처럼 끔찍하게 긴말이 필요 한가? '맙소사. 그렇다면... 그런 인사말을 사람마다 다르게 외워야 한다 면...' 시나는 심각한 얼굴로 벽난로 불을 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자신의 적성에 안 맞다. 기억력을 지나치게 요구한다. 그러고 보면 바리스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는데. 단순하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하지만 그런 바리스는 이제 없다. 제시마는 이 추운데 얼마 나 고생할까. 그나마 세일마가 옆에 있다니 안심이지만. 시나는 바리스 생각, 엘야시온님을 한시 바삐 만나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방금 힐러의 태도 때문에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루카나안은 무리한 검기를 사용한 덕분에 가슴 부근이 뻐근해 견딜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환호에 그 아픔은 잊고 말았다. 경기관이 승자 선언을 하는 중, 한껏 들뜬 기분으로 특별석을 돌아 보았다. 그러다가 스온 아스테린 옆에 서 있는 루온 루사벨라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먼 빛이어서 루사벨라,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본 것 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층 더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저 여자의 파 따위엔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버지 의 명령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들어가 수련한 일년 남짓한 시간도 치욕 이다. 루이트로서 일루티온 따위나 하는 무술이라니. 하지만 루온 루 파르테 님의 파에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고, 자기의 선택이 틀리지 않 았다는 것을 온 사람이 보는 앞에 증명한 지금은 더없이 즐겁다. 루파르테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서스가 그를 보며, "스콰이 어를 아주 훌륭하게 교육시켰군, 루파르테."라고 칭찬한 데다, 루온 루사벨라의 불쾌한 낯을 바로 가까운 곳 데서 볼 수 있어 이런 유쾌한 일은 다시없을 듯 했다. 더구나 이렇게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 루온 루파르테의 파에 속한 스콰이어...'라고 승자선언이 울려 퍼지는 데 야. 루사벨라는 루카나안을 보고 혀를 찼다. '멍청한 놈.' 루카나안을 직접 지도한 그녀다. 그가 어느 정도 검기를 낼 수 있는 지 모를 리가 없다. 루카나안은 방금 자기가 운용할 수 있는 한계 이 상의 검기를 다뤘다. 그것도 쓸데없는 쇼맨십으로. 처음에 착실하게 방어만 하며 싸울 땐 루온 루파르테에게 꽤 훈련을 잘 받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 금은 틀렸다. 칼리안은 사막의 세계로 지독한 태양열이 한낮을 달구는 곳이다. 그 런 곳에서 장시간의 싸움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칼리안의 루이 트들은 대부분 속전속결의 싸움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힘이 쏠린 초반을 그럭저럭 넘길 수만 있다면 후반으로 가서는 예상보 다 수월하게 싸울 수 있다.(그렇다고 해도 칼리안엔 태어날 때부터 대 단한 검기를 지니고 태어나는 루이트가 많기에, 타 세계 루이트보다 버거운 상대다.)그러니, 그런 칼리안 루이트를 상대로 새터링을 했다 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의 증거다. 승리하는데 최소한의 규정은, '검기 가 실리는 도구인 검을 쳐서 떨어뜨린다'이다. 칼리안은 한참 기세가 등등했지만, 루카나안의 영리한 방어로 이제 열세에 몰릴 참이었으니, 최소한의 힘으로 간단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오늘이 경기 마지막 날도 아니고, 내일 결승전까지 있는 이상엔 말이 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 것 같아도... 다시 한 번 더 검기를 쓴다면 꽤 고통스러울걸. 설사 힐러에게 밤새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내일은 자기 가 가진 능력의 팔 할도 내지 못할 거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저런 식으로 싸워서, 한달 내내 계속 되는 자이온 토너먼트를 어떻게 견딘 다고.' 루사벨라는 다시 한 번 더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자기 종자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루온 루파르테의 얼굴이 더 기 가 막혔지만, 주인인 아스테린은 경기에서 승리한 소년을 보며 같잖다 는 듯 웃고 있었다. 루사벨라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약간 미소지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지만 만약 루사벨라 와 둘이 있었다면, "뭐야, 저 녀석. 꽤 거들먹거리는데. 저 녀석이 루 사벨라의 파에서 나와 루온 루파르테의 파로 갔다는 녀석이지? 재수 없어."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 "재수 없는 녀석. 닥치고 너네 천막으로나 가. 거들먹거리긴!" 루카나안이 루온 루사벨라의 천막을 지나 자기 천막으로 갈 때, 루 유다가 한 말이었다. 루유다는 다음 시합에 출전하기 위해 검을 살피 고 있었는데, 그걸 본 루카나안이 "무술 어떻게 할 지 고민 하냐? 백 날 해봐라. 검기에 상대가 되나. 다음 시합 때 네 상대는 좋겠다. 부 전승이나 다름없잖아?"라고 빈정댔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나안은 방금과 같은 대답을 듣고 기분이 나빠졌다. 자기 시합을 보고 기가 죽었으려니 생각했는데, 멀쩡(?)해 보이는 것도 기 분 나빴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재수? 거들먹거려? 누가 할 소리를! 그 래...! 생각이 바뀌었다. 네 시합을 위해 엘에게 빌지! 그 천박한 댄 스라도 사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결승까지 올라와라, 촌뜨 기! 넌 내가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줄 테니!!" 그들은 같은 세계 사람이라 아예 끝 조에 섞여 있어서, 아쉽게도 중 간에 싸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루유다 또한 험악하게 말했다. "그래!! 바라는 바다!! 너야말로 어떻게 해서든 결승전까지 살아남 아라! 그 쇼를 부렸으니, 될 지 모르겠지만!!!" "뭐야!!" 하지만 그때, 새로운 경기를 시작하는 예비 나팔이 울렸고, 루유다 는 나가야 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거기서 헤어졌다. 천막으로 간 루카나안은 동문의 축하와 격려를 뿌리치고 불쾌한 눈으로 벌어지 는 경기를 보았다. 루유다는 상당히 날렵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검기 는 그리 많이 내지 않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약체인 마이레스의 루이 트를 맞았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저 녀석을 약한 녀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소(小) 토너먼트는 달의 날부터 시작했다. 약 사흘간, 그러니까 어제까지는 '펼쳐진 땅'으로 가서 지정한 조건대로 몬스터를 사냥했는 데, 때로는 사나운 몬스터와 한 우리에서 싸우기도 했다. 수 백 명의 스콰이어-자기 마스터를 따라 세계혼을 축하하러 온 스 콰이어-대부분이 지난 사흘간의 경기에서 탈락했다. 소 토너먼트라 해 도 환경이 너무 추운데다, 조건이 꽤 혹독했다. 그래서 스콰이어들은 다들 고만고만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루카나안은 화난 얼굴을 지었 다. 기록관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루유다의 성적을 물었는데 그의 성적 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한다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좋았지. ...제길.' 상급의 성적을 거둔 루카나안 자신보다 더 많은 수의 몬스터를 때려 잡았으니까. 하지만. 루카나안은 애써 코웃음쳤다. 저런 식의 검기 운 용 갖곤 왕족들의 주목은 죽어도 받지 못할 거다. 왕족들은 검기를 좋 아하니까.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루유다의 경기보다는 다른 쪽 경기를 더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다. 루카나안이 왕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해서, 루카나안은 다시금 승리감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엘야시온이 말했다. "허어. 저 녀석은 분명 루카나안이라는 녀석인데. 아직 오더도 받지 않은 녀석이 새터링이라. 거, 멋지군. 저만하면 스온 엘스제의 루이트 가 되어도 손색이 없겠군. 성혼의 증인 말일세. 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성혼의 증인' 선대의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가 죽은 이후 클로니아를 다 스린 것은 스온 세스틴과 스온 마리스, 두 사람의 섭정왕이었다. 그러 다가 스온 세스틴이 정식 파이오니온의 위(位)에 오른 것은 십 삼 년 전이었다. 파이오니온 등극의 축제가 벌어져 바리스 마노테오나까지 선물이 내 려왔을 때 루드랫은, 아마 카이러스에 '소년' 스아디온이 태어난 모양 이라고 추측했다. 스온 세스틴이 클로니아의 파이오니온이 됐다는 말 은, 스온 세스틴과 스온 마리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드디어 엘 야시온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이니까. 십 삼 년 전 태어난, 그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이름이 '스온 엘스제' 인 것 같다. 어쨌든 성혼(聖婚)은 내후년에 있을 테고. 그런데도 벌써 성혼의 증 인을 고르다니.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출이다. 엘야시온과 그 배우자는 제 2계급의 사람들(열 두 세계의 파이오니 온과 그 배우자)을 시종으로 삼기에, 공식적으론 그 아래 계급을 시종 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루이트도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혼이 있기 여섯 달 전, 다음 대의 엘야시온 커플은 자기가 통치할 세계들을 순방하는 행사를 하는데, 모든 계급 가운데서 뽑은 가장 탁월한 남녀 한 쌍을 증인과 시종으로 삼아 데리고 다니게 된다. 이것이 '여섯 증인 의식'과 틀린 것은 '여섯 증인 의식'에 참가하는 증인들은 정말로 단순한 증인의 예를 취하는 데 반하여, 성혼에선 모 든 계급의 사람들(심지어는 현 엘야시온까지도) 새로운 엘야시온에게 신하의 예를 취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몹시 묘한 일이다. 이때만은 '마노테온'이라도 결계 를 통과해 여러 번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 각 세 계의 결계를 없는 것처럼 하여 하나로 잇는 엘야시온의 강력한 능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헌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때 선정될 루이티온 계급 남자를 저 루 온 루카나안으로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보통 그런 낙점(落點)은 빨라봤자 성혼이 있을 그 해 초에 이루어지는데. 아무래도 엘야시온 가디엘은 저 소년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엘야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알겠나? 그러니까 자네는 연회에서 저 녀석에게 본때를 보 여주는 거네." 루드랫은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네?" "하하하...! 뭘 그렇게 놀라나. 아까 말하지 않았나. 오늘 경기에서 네 명의 스콰이어를 뽑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 중 가장 유력한 아 이가 저 루카나안이지. 벌써 어른에 필적하는 검기를 내거든. 하지만 상당히 자기 멋 대로라, 내 언제 한 번 버릇을 가르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제 멋 대로인 녀석들은 딱 질색 이거든. 그래서 자네 도움이 필요한 거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아니었나. "아아... 그나저나 난 정말 안타깝거든. 아무리 자네 종속자가 하바 티온까지 될지 모른다고 해도, 결국은 일루티온일지 모르고... 최악의 경우엔 마노테온." 이 말을 하면서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글빙글 웃었다. "자네의 마음을 최대한 인정하네만. 미래에, 더 이상 루이티온으로 서 자네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니, 얼마나 아쉬운지. 자네가 확실한 루이티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자네야말로 83년도의 토너먼트에서 루 파르테를 새터링으로 이기지 않았나? 그 때는 정말 보기 흡족했는데. 어떤가? 이제라도 내가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까? 아주 멋진 처녀를 하나 알고 있는데..." "...은혜는 감사합니다만..." 엘야시온은 재빠르게 말했다. "으응, 으응. 역시 거절인가? 거참. 그 말라깽이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인데. 하하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마노테온으로서 '여 섯 증인' 의식에나 참석해. 그리고 루카나안에 대한 내 명령을 실행하 도록 하고. 그 녀석, 마노테온에게 졌다는 사실을 알면 무언가 생각을 달리 먹겠지. 하하하하..." 자기 권유를 거절했는데 저토록 신나게 웃다니. 일개 루이트에게 일일이 신경 쓰는 일도 이젠 진력이 나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루드랫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의 본심을 한 번에 이해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한편 엘야시온 가디엘은 루드랫의 눈에 딱딱한 빛이 서리는 것을 보 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기쁠 정도로 재미있는 일은 23년 만이다. "그런데 말야, 난 이런 생각도 들거든. 자네는 마노테오나에만 있어 서 여자 보는 눈이 무척 낮아졌을 거야. 그런 자네가 연회에서 아름다 운 처녀들을 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그땐 틀림없이 나한테 말해서, 그 처녀가 누구인가..." "...엘야시온님." "응? 하하하... 응응..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지. 자네는 그 회색 눈 아가씨를 좋아하니까? 하하하..." 엘야시온 가디엘은 페어리의 족속이었다. 이것저것 혼자 생각하기 지친 시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읽는 내용 은 주로 상류계급에 대한 것과 그들을 대하는 예의에 대한 것이었는 데, 이것은 의외로 그, '사랑 받는 어쩌고...'가 소용이 됐다. 덕분에 시나는 마침내 제 2계급과, 제 3계급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제 2계급 은 '왕'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같았는데, '파이오니온'이라고 부르 고, 각 세계의 이름을 성으로 갖게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제 3계급은, '스아디온'과 '스웰디온'...(이것이 이렇게 나뉜 기준 이 도대체 뭔가, 시나는 고민했다.)그 외의 계급에는 아예 '성'의 개 념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 계급 이름을 '성'으로 쓰면 썼을까... '누 구누구의 아들'이라든지 '누구누구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시나는 실소했다. "그래서, 내가 성이 '윤'이라고 하니까, 드랫과 디트가 그렇게 한심 하게 쳐다봤구나. 하하... 참. 뭐야... 그럼 난 이 세계 식으로 하면, '정운의 딸 시나'인가. 하하하... 너무 이상해. 하... 어쨌든 그럼 아 까 '힐라토' 어쩌고 했던 것도 누구 사람이름을 부르는 거였는지 모르 겠다. 세계혼인가 뭔가 때문에 여기엔 각 세계의 왕들이 많이 몰려 와 있다고 했으니까... 그럼, '힐라토'란 힐라토의 왕일지도... 후후..." 시나는 자기 추리가 마음에 들었다. 꽤 그럴 듯했던 것이다. 약간의 자료만 가지고 여기까지 생각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흐음... 이것도 꽤 재밌는 세계인데. 왕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 역시, 왕이라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겠지. 엘야시온님의 경우만 봐도 그러니까. 하지만 젊음이 유지되는 건 엘야시온님 혼자 뿐이라고 했으니까, 힐라토님은 굉장한 노인일지도 모르지. 거기다가 무척 심술 궂은 사람일지도. 하여간 이곳에 있는 상류 계급은 왜 이렇게 거만한 지... 아... 그런 사람이라면, 제발 만나지 않기를." 시나는 고개를 숙이고 소망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책을 읽어 내 려가며 또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뭐... 엘야시온님은 꽤 친절한 편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만나도 괜찮아." 그렇게 선언하듯 말한 시나는 자기 생각이 스스로도 웃겨서 웃었다. 내참, 누가 만나기나 해 준다고 했나? "'네 신분으론 높은 사람과의 만남은 꿈도 못 꿔! 쯧쯧...!'" 드랫의 말투를 흉내낸 시나는 책에서 또 다른 재미있는 말을 발견하 고 웃었다. "하하- 이 말 정말, 웃기네!" 그렇게,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데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왜 그런가해서 눈을 들어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만 있다가 이런 유리창이 있는 곳엘 오니 해가 지는 것 도 몰랐다. 시나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갔다. 오랜만에 창을 통해 보는 노을이었다. 시나 세계보다 굉장히 곱고 깨끗한 색이라 온통 하늘이 불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넋을 잃고 보는데, 뒤에서 시종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덧문을 닫을 시각입니다, 아가씨." "아.. 닫으세요." 시나는 한발 뒤로 물러났고, 시종은 유리창을 열었다. 찬바람이 몰 아쳐 들어왔는데, 바깥에 있는 덧문을 닫자 바람은 사라졌다. 동시에 빛까지 사라져 아쉬웠는데, 그래도 방안이 어둡지 않아 시나는, 어느 새 시종들이 초를 잔뜩 세워놨음을 알게 되었다. 시나는 아까에 비해 다르게 보이는 방을 한바퀴 돌아본 뒤, 안 쪽에 달린 덧문도 꼼꼼히 닫아거는 시종을 보고 물었다. "저기, 문을 굉장히 꼭꼭 닫네요. 별로 춥지도 않던데." 시종은 공손히 대답했다. "내일 모레부터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시작 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밤엔 얼음의 정령들이 수많은 따뜻함을 말려 죽일 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죠. 슬 슬 문단속을 해야할 시기입니다." "다이아몬드, 뭐라고요?" "다이아몬드 더스트요." "다이아몬드 먼지가 시작된다고요! 아니, 그럴 수가!" 그리고 시나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저어... 근데, 그게 뭔 데요?" 시종은 '예의 바르게도' 아무 표정 없이 다시 말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는 얼음 정령들이 클로니아 스피릿의 명령을 받 아, 하늘의 별을 온통 지상으로 가지고 내려와 빛나게 만드는 현상을 일컫는 겁니다. 간혹, 세빙(細氷)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그 별들이 엄 청나게 차갑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하!" 시나는 고민했다. 시종의 말 중에 모르는 말이 너무 많다. 도대체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가? 별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 오냐고 물을까... 아니면 스피릿이 뭐냐 고 물을까... 아니면, 얼음 정령 같은 게 정말로 있냐고 물을까? 그러다가 결국, 세 가지를 한꺼번에 묻기로 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세 가지 질문에 시종은 약간의 동요하는 빛을 보였다. 하지만 곧 침 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줄 기세를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이... 에... 스피릿은..." 하지만 그때, 루드랫을 데려 갔던 시종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뭔 가를 찾는 듯 방안을 둘러보더니 시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가씨, 그 분께서 부르십니다. 따라오십시오." 엘야시온 가디엘과의 만남이 끝나고, 루드랫은 시종의 안내를 따라 자기가 묵을 방으로 갔다. 그에게 방을 안내해 준 시종이 "분부하실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식사는 곧 준비가 될 겁니다."라고 말한 뒤 나가려는데 루드랫이 물었다. "내 종속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직도 아까 그 방에 있습니까?" 시종이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루이트 님. 그 분은 자기 방 에 계십니다. 지금, 안내해 드릴까요?"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의 방은 자신의 방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시종이 방문을 두드리자, 한 시녀가 나와 공손하게 말했다. "아... 종속자께서는 방금 잠드셨습니다. 아까, 궁정 힐러께서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오셨다고 말씀 드릴까요?" 이렇게 말하는 데 굳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상처를 입고 며칠 간 계속 잠만 잤는데, 마차로 이동한 것 때문에 피곤해서 또 잠이 들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됐다고 말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데 창문의 덧문이 심하게 덜 컹거렸다. 한바탕 바람이 불어 지나가는 듯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루드랫은 중 얼거렸다. "이곳엔... 노천 탕이 있지 않나. 유리 돔이 씌워진." "유리 온천을 말씀하십니까? 네, 있습니다." 루드랫은 한 순간, 온천에 들어가 유리 돔을 통하여 차디찬 대기에 명멸하는 빛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밤하늘의 별들이 대기에 내려와 거니는 밤. 별들은 무척 스산한 소리를 내고 바람의 길을 따라 움직이며 모든 따뜻함을 말려 죽인다. 하지만 온천은 따뜻하고, 안전하다. "그 노천 탕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나?" 시종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개방이요? 사람들에게...? 하지만 그곳은 파이오니온의 개인 소유지... 그러니까, 이스메랄다 궁 에 있습니다." 루드랫은 흐린 눈을 하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아프다. "그 런데, 왜..." "네?" "아니.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아. 책에서 읽은 것... 혹은 꿈에서 본 것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루드랫은 자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기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유리 궁전에 대한 책을 읽거나, 유리 궁전 안에 들어와 본 적 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잊기로 했다. 아마, 기억 이전의 일일 것이다. 23년 전의 일. 기억은 전혀 안 나면서도 절실한 것은 언제나 23년 전의 일이었다. 시나는 긴장했다. 시종이 들어가라고 한 방은 촛불이 몇 개만 있을 뿐이어서 어두웠 다. 가구나 물건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서 발을 옮겼다. 하지만 곧, 내부가 무척이나 널찍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묘하게 향기로 운 냄새가 방안에 떠돌고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어, 만나러 오라 던 엘야시온님은 어디 있는 건가 생각했다. 그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가까이 오게, 아가씨." 목소리는 두꺼운 휘장 뒤에서 나고 있었다. 높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쳐진 휘장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휘장 사이에서는 이상한 푸른빛이 나고 있었 다. 당황해서 서 있는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 모습을 눈으로 보기라 도 하듯 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이리로 오게. 안으로." 무척 놀랐지만, 그 목소리에 시나는 조금 더 휘장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그렇게 다가가는데, 휘장에 다가갈수록 온 몸이 꽉 조이는 듯한 느 낌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이 그 자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너무 무섭거나, 아니면 너무 놀라 운 일을 겪었을 때, 온 몸에 일어나는 전율과 같은 것이 그 자리엔 가 득 서려있던 것이다. 시나는 휘장 바로 앞에서 주춤거렸다. 이, 휘장 너머에 있는 것이 도대체...? 그때, 다시 한 번 더 엘야시온 가디엘의 초청이 있었다. "자아... 괜찮아. 들어오게." 시나는 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엘야시온 가디엘 님에게 말해야 할 것이 많다. 결국 시나는 휘장에 손을 댔다. 또 한번 전율이 일었지만, 가까스로 무시했다. 그러나 휘장을 제쳐 그 안에 있는 것을 봤을 때... 시나는 '전율' 정도가 아닌, 공포를 느꼈다. 레이서스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토너먼트가 끝나고 모든 사람 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온통 노을이 번져 있는데, 바 람이 하늘 저 끝에서 희뿌연 것을 몰아오고 있었다. 칼리스나가 몸을 떨고 말했다. "이곳은 정말 추워. 헌데 오늘은 이상하게 더 춥네. 내일 모레부터 다이아몬드 더스트인지 뭔지가 시작하기 때문이라던데... 난 그게 뭔 지 잘 모르겠어. 레이는 본 적이 있어?" 레이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 적 없어. ...엘야시온님이 다 이아몬드 더스트를 부르는 모습은 본 적이 있는데." "어머, 그래? 어떻게?" "옛날, 어릴 적에 자이온에서. 클로니아 왕족과 함께 성소에 있는 엘야시온님을 훔쳐 본 적이 있거든..." "그런 적도 있었단 말이야! 엘야시온님께 혼나지 않았어?" "하하... 글세..." 레이서스는 칼리스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냥... '그'에 대한 미 움을 느꼈을 뿐.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냐. 들어가자. 얼음 정령들이 몰려오는 것 같아."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80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15 23:54 읽음:1610 관련자료 없음 ----------------------------------------------------------------------------- <제 45막. 유리궁전>-3 찬바람이 창문을 심하게 두드리자, 디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 던 라단이 말했다. "바람이 심상치 않은데." 뜨개질을 하던 카탈리가 말했다.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부터 다이아몬드 더스트죠... 근래 들어 무척 따뜻한 날씨라 깜 빡 잊고 있었는데. 아무리 엘야시온님이 계셔도, 다이아몬드 더스트 는 역시 있으려나 봐요." 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밤부터는 모피로 창문을 막고 문단속을 하는 것이 좋겠어." 카탈리도 뜨개질 감을 놓고 일어섰다. "그게 좋겠어요. 얼음 정령들은 바람의 길을 따라 걸으니까, 약간 의 틈새라도 있으면 안되죠." "응, 맞아. 어? 그런데 보관함 속에 모피가 옛날보다 적네?" "아...! 그 보관함 속에 있는 것은 일층에 다 쓰세요. 작년에 낡 은 모피를 바꾸면서, 이층에 또 다른 보관함을 준비해 놨잖아요." "그랬나?" 모피를 꺼내며, 라단은 디트를 보고 웃었다. "하하... 정말이지, 이곳 클로니아의 추위는 너무 지독하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추위는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시작되기 전의 차가운 바람에 비하면 아무 것 도 아니니... 예전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걸 무시했다가 꼼짝없 이 얼어죽는 줄 알았어. 얼음 정령이 따뜻함을 말려 죽인다는 이야 기는 정말 꼭 맞는다니까. 하하..." 디트도 미소지었다. "응. 나도 그랬어. 그나저나... 이층에 또 다 른 보관함이 있다면, 그곳은 내가 맡지." "어? 그래주겠어?" 디트는 일어나며 말했다. "맡겨둬. 너만큼 이곳에 오래 산 건 아 니지만, 약간의 모피 갖고도 문단속하는 법은 철저히 익혀뒀으니 까." 카탈리는 미소지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디트 씨. 이따가 남 편이 땔감을 갖고 올라갈 거예요." "네..." 디트 또한 그들에게 미소지어 보이고, 이층으로 올라갔 다. 그리고, 이층 모든 방의 창문을 제대로 닫고, 빗장을 지른 뒤 방 한용으로 쌓아 놓은 모피를 둘러쳤다. 틈새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꼼 꼼하게 점검한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언 손을 녹이기 위해 벽난 로 앞에 섰다. "휴우..." 그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벽난로 불에 붉게 비치는 그의 얼굴 엔 사람들 앞에선 보이지 않던 고민과 침울함이 서려 있었다. 계속, 그의 주인이 떠나기 전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누군가의 바람대로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널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 을 사실이다. 언젠가, 만약. 네게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때 는 나를 찾아 와라.' 디트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긴. '드래마'는 언제나 그랬다. 디트 자신에 대한 일이라면 매 우 관대하다. 원래의 루온 루드랫 님이라면 한없이 차가운 분이어야 할 텐데. 바리스에서는 많은 것이 틀렸다. 디트는 한 번 더 힘없이 웃고, 마침내 옷깃에서 작은 크리스털 볼 을 꺼냈다. 뷰겐트를 떠났을 때부터 계속 지니고 있던 물건이었다. 몇 번 문지르자, 푸르게 빛을 냈다. 그 푸른 볼의 내부가 일렁여 거 기에 비치던 자신의 눈동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디트는 말했다. "임무를 끝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뵙기 원합니다." 충격... 공포....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뇌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아마도 이 런 멍한 기분이 들것이다. 이런 넓게 펼쳐진 눈밭이라니...! 장막 안쪽은 시나가 이곳으로 올 때 통과했던 바로 그 눈밭이었다. "맙소사..." ...여전한 풍광이었다. 새파란 하늘은 하얀 지평선과 맞닿아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눈밭에는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다. 빛으로 가득 차 있지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곳... 이리 저리 휘몰아치는 바람만이 이것이 살아있는 풍경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 찬바람이 한 움큼의 눈을 가져다 시나의 얼굴에 뿌렸다. "... 윽..!!" 너무나 차가웠다.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마치 자신이 살아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 듯. "...말도 안돼." 차가운 물기를 닦아낸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눈길을 멀리 뒀다. "말도 안돼...!" 이곳을 다시 봐야 한다니...! 실컷 미로를 헤매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것 같다. 시나는 뒤로 물러나 손에 잡히는 것을 꽉 잡았다. 올이 굵고 두꺼 운 천의 휘장. 이렇게 환한 곳에서 보니, 바깥쪽은 까마귀 깃처럼 검고, 안쪽은 피처럼 붉은 색이었다. 그 붉은 천이 시나의 손에 있 었다. 그 휘장 사이로는, 아까 시나가 들어왔던 방이 그대로 어두움 속 에 가라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안도한 시나는 힘없이 생각했다. 맞다... 아무리 생생해도, 이곳은 현실일리 없다. 휘장 하나를 사 이에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 따윈 믿지 않아. 너무나 비현실적이 어서 무서운 거다. 그러니까 발 밑에 밟히는 눈은 절대로 보지 말 고, 여기서 나가야 한다. 왜 이 휘장 안으로 들어왔던가, 뼈저리게 후회하며 시나는 발을 옮겼다. "나가야지...!" 하지만 그때, 모든 것이 사라졌다. 희미하게 공간에 걸려 있던 휘 장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시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싫어...!!" 울상을 짓는데, 그 순간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닌, 귓가에서, 혹은 가슴속에서 들려 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 크고 뚜렷하면서도 너무나 세미한 목소리. 그건, 듣는 법을 배워 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두려워... ...두려워하지... 말기를.} 시나는 또 한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 누구세요? 날 여기서 꺼내줘요! 제발...!!" 시나는 이런 눈밭 가운데 홀로 서 있는 것은 싫었다. 시나는 소리 쳤다. "제발 꺼내줘요...!!" {두려워하지 말기를... ...네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해 라.} 이제는 한층 더 뚜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모습은 보 이지 않는데, 목소리만 들리다니? 시나는 이것이 혹시 귀신은 아닌가 해서,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이 세계에는 별것이 다 있으니까, 귀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귀 신에 홀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답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지 모른 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하라.}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이 목소리에는 시나가 예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위엄과 권위가 서려있었다. 그래서 목소리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누, 눈밭. 푸르고,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랑..." 그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윽...?!" 그러더니, 새하얀 눈 으로 동공을 씻는 듯한 차갑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차가워 서 눈을 손으로 가리는데, 그때, 지금까지와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역시, 칼루스온 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처음 들렸던 목소리는 그에게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나에게 말을 했다. 호칭을 부르진 않았지만, 시나에게 하 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말 이상의 말이었다. {...눈을 떠라....} 눈을 뜨라고...? 떠서, 또다시 똑같은 것을 봐야 한다면... 그래 봤자, 혼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시나는 괴롭게 말했다. "제발... 날, 여기서 꺼내 줘요..!" 하지만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더 분명하게 말했다. {...눈을... 떠라, 소녀여... 넌... 혼자가... 아니다.} 결국 시나는 눈을 떴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었지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나는, 그 목소리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거기엔 시나 외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시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아... 세상에." 너무나 아름다운 것.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그런 것이 시나 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푸른색의 갈기를 휘날리며... 고요하고 침착한 눈길로, 시나를 응 시하며. 눈 섞인 바람이 몰아치는 대지와 하늘 아래 서 있었다. 하지만 시나는, 너무 놀라고 떨려서 어이없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내뱉고 말았다. "...말... 말... 이잖아. 헌데, 어떻게 저렇게... 아...!" 시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게 말 일리는 없다. 이토록 어리석은 말 을 하다니. 푸르르.... 아니나 다를까 그는 투레질을 했다.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는데, 시나의 말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시나의 얼굴은 붉 어지고 말았다. 저 생물이 저렇게 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것이 '말'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다. 비록 이런 형체에 가장 근접한 동물이 말이라, 그렇게 내뱉고 말았지만... 전혀 틀리다. 저렇게 빛나는 온통 새하얀 몸통. 반면 그의 갈기와 꼬리털, 눈빛 은 새파란 빛이다. 보통 말보다 약간 작은 머리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듯, 고대 그 리스의 조각상을 보는 듯 했다. 물결치고 있는 푸른색의 갈기는, 무척이나 풍성해 그 단단한 이마 위로 흩어져 있고, 그의 가슴께 까지 늘어져 있었다. 가슴은 우미하게 짜여진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며 앞발과 이어져 있고 그 뒤로 뻗은 몸통 또한 군살하나 없이 매끈하고 희게 윤이 났 다. 갈기만큼 풍성한 꼬리는 땅에 닿을 듯, 길게 굽이치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티 하나 없이 하얗고, 우아한 다리는 쭉 뻗어 있어, 이 존재가 만 약 달린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선을 그릴 지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 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땅을 딛고 있는 발굽은 고요했고, 그 또한 흰 대리석처럼 너무나 하얘서 어느 것이 발굽이고 어느 것이 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발굽 주변에 길게 물결치는 푸른 털들 또한 푸른빛이 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환하다... 하지만 이 존재에게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비록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이었지만.) 그의 육체에 있어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이마 위에 솟은, 거의 1미터는 될 듯한 한 개의 뿔이었다. 갈기사이에 파묻힌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워 저것이 과연 누군가 를 공격하는 데 쓰일 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진주를 재료로 쓴 듯, 광택과 매끄러움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조각가가 공들여 새긴 듯 길게 나선형의 홈이 파여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운 것이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생물은 어떤 동물이나, 어떤 식물이나, 어떤 남자나, 어떤 여 자보다도 아름답다. 푸른색의 사파이어와 진주가 생물로 화해, 말의 모양을 취한다면,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울 것이다. 아니면... 저 찌르는 듯한 푸른 눈빛... 이 생물은 이 기괴한 장소... 고요하며 광활한... 눈을 찌를 듯 희디흰 눈과 푸른 하늘만 존재하는 이 이상한 곳을 부모로 하여 태 어난, 이곳의 화신...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꿈의 화신일지도 몰랐다. 헌데 이것이 '말'이라고?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반딧불을 태양이라고 부르는 날이 온다면. 하지만, 이것이 '말'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생물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시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토록 키 큰 생물에게 붙여질 이름이 과연 무엇인가? 누가 이 생물에게 존재를 정의하며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누군가, 그런 권위가 가졌던, 혹은 가질 인간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아마 인간 중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것은... 저 생물의 이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세상과 세상의 틈새... 기묘자(寄妙者)이며 영존자(永存者). 그 눈에 지혜가 서린 것. 그걸 알아차린 시나는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그에 대한 지독한 경외감과 동경을 느꼈다. 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독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꼈다. 닿아서는 안 되는 빛나고 순결한 존재를 본, 지독한 공포를 느꼈 다. 그래서 시나는 알았다. 저, '다른 것'. 저것은 저토록 아름답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저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시나의 눈에 떨림이 일고, 눈물이 고였다. 지독한 일이다. 그래서 일어나는 마음은, 절망... 슬픔, 그리고, 증오. 시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저것을 미워한다... 저것은 가장 다르고, 아름다우며, 순결하기 때문에. 저것이 불러 일으키는 것은, 절망과 증오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자신의 어두움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증오가 있다는 사실을 저것이 밝히기에, 더욱 저것이 싫다. 하지만... 시나는 고개를 숙였다. 시나는 그런 사실을 스스로 알 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나 부끄러웠다. 저토록 아름다운데, 이렇게 미워해야 하다니... 눈물이 났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떠나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또한 그가 여기 있어주길 간 절히 바란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는 무엇도 선택할 수 없 었다. 이러한 자기모순은, 지극한 괴로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아름다움을 감탄했을 때 느꼈던 희미한 기쁨이 점차 낙심과 괴로움으로 변하는 기분은 끔찍했다. 가슴이 지독하게 아프다. 하지만 그때, 그가 말했다. {...가디엘} "...!" 시나는 눈물이 흐르는 눈을 들었다. 그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 란 것은 아니다. 그가, 아까부터 들리던 위엄 있는 낯선 목소리의 주인일 것이란 생각 따윈 이미 하고 있었으니까. 시나는 그가 엘야 시온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자리에 엘야시온님이 있 단 말인가? 이렇게 놀라는 데, 어느새 인가 엘야시온 가디엘이 시나 옆에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휘프리엘." 시나는 중얼거렸다. "엘야시온님..." 엘야시온은 시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엘야시온은 마치 처 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침착했고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시나는 엘야시온 때문에 또 한 번 혼란스러웠다. "엘야시온님... 머리카락과 눈 색이..." 지금 엘야시온의 외모는 시나가 기억하고 있는 엘야시온과는 전혀 틀렸다. 라단의 집에서 봤을 땐, 분명 푸른색의 머리칼에 푸른색의 눈이었 는데, 지금 그의 눈은 잘 닦은 순수한 은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머 리칼은 가닥가닥 은빛으로 빛나고, 그러한 은빛은 그의 몸 전체에서 도 났다. 마치 그의 몸 안에 형광물질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도 그의 손과 함께 빛이 났다. 그렇더라도, 시나와 엘야시온 앞에 서 있는 '존재자'의 빛에 비하 면 미약한 수준이지만, 놀라운 일임엔 틀림없었다. 그래서 시나가 엘야시온 가디엘에게서 물러나는데, 가디엘이 말했 다. "두려워하지 말도록, 아가씨. 휘프리엘이 자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으니, 나 또한 자네에게 똑같은 말을 하네." "엘야...시온님..." 엘야시온 가디엘은 미소짓고 휘프리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칼루스온 인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는 것과 동 일한 것을 보고도 살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을 보고, 당신의 목소 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소녀는 엘에게 선택받아 우리 세계로 온 소녀라고 생각합니다. 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하도록 말이죠." 휘프리엘이 가디엘을 보며 말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가디엘? 인간에 대한 신의 증표여?} 가디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은색의 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제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까?" 휘프리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갈기가 부드럽게 흔들렸는데, 시나 는 아까처럼, 그가 미소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칼루스온이라고? 카오스(the Chaos)? 너희들이 절대 공유할 수 없는, 우리 주의 신비와 권능? 옳다. 네 믿음만큼 넌 봤다. 그렇다 면 네 말대로 이 인간은 엘의 권능을 실현하는 자가 될 것이다.} 가디엘은 당황한 눈을 지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내 선대,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의 명을 받아, 칼루스온 인을 당신께 데려왔습니다. 신의 영광을 실어 나르 는 트론즈(Thrones)여." 휘프리엘은 흰자위 하나도 없는 푸르디푸른 눈으로, 가디엘을 보 았다. 굉장히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가디엘, 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네 스스로 네 눈 을 가리고서는 넌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인상을 쓴 엘야시온 가디엘은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에서 은빛이 흐려졌다. 그런 가디엘을 보는 휘프리엘의 눈에는 슬픔이 어렸다. 시나는 휘프리엘의 그런 눈을 똑똑히 봤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엘의 공의를 실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 소녀가 칼루 스온 인이 맞는지... 내가 똑바로 본 것이 맞는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것인지, 그걸 말씀해 주십시오." 바람이 몰아쳐 그들 사이로 하얀 눈을 날렸다. 휘프리엘이 말했 다. {...소녀여.} 시나는 흠칫 놀랐다. 휘프리엘은 가디엘에게서 시선을 거둬 시나 를 주목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시나는, 그의 눈빛, 가디엘에게 두던 따스한 시선이 이제는 변해 엄하고 무서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시나는 그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도 아마 시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서 겁을 먹었고 그의 눈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존재는 눈밭을 헤치고 걸어,(부드러운 빛의 잔상이 그 가 지나는 곳마다 남아, 희미한 향기를 뿜었다.) 시나에게 다가와 길고 아름다운 얼굴을 시나의 볼에 댔다. "...윽!!" 그 감촉이 너무 충격적이라 시나는 덜덜 떨며, 눈을 꼭 감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마음 깊숙한 곳까지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들 렸다. {...눈을... ...떠라...} 시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서 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 싫어요. 왜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세요, 제발... 당신과 나는 너 무 틀리고...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만지면.... 당신은 더러워지 겠죠... 난 그걸 알아요..." 푸르르... 그가 웃었다. {...옳다. 나는 거룩하다. 하지만...} 순간, 따뜻한 입김. 서늘한 갈기의 감촉, 부드럽고 매끄러운 털의 감촉이 시나의 가슴과 목과 볼에 느껴졌다. 시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래서 감촉에 눈을 떴을 때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휘프리엘은 부드럽게 시나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그녀의 눈물을 그 풍성한 갈기로 말려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가 가진 눈은 부드럽고 따뜻했던 것이다. 갈기 사이에서 빛나는, 흰자위 하나도 없는 푸른 눈. "휘프리엘..." 시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나는 예전에, 이런 눈빛을 어디선 가 봤던 느낌이 들었다. 그게 누구였더라...? 하지만, 그걸 떠올리 기 직전, 그가 말했다.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소녀여... 네 이름을 찾는 자가 되라.}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시나는 손을 들어 그의 갈기를 만졌 다. 눈물이 다시 났다. "...나는... 저어... 나는... 휘프리엘, 당신을 또 만날 수 있나 요...?" 그의 눈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까지 우리 주께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펄럭--!!! 그 말을 끝으로, 시나의 눈앞에 하얀 잔상이 일어났다. 시나는 눈 물 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날개'였다. 하얀빛으로 빚 어진 커다란 날개. 뽀드득...뽀득... 그의 발굽에 쌓인 눈들이 흩어졌다. 그는 뒷걸음질치면서 말했다. {가디엘, 명령을. 클로니아 스피릿을 부르자.} "...네?" 엘야시온 가디엘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을...! 이곳엔 클로니아의 왕족들도 없습니다...!" {네가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늘 내가 당신을 부른 것은, 이 소녀 때문이었는데...! 휘프리엘, 당신은 내 질문에 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난 이미 대답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네 몫이다. 명령을 내 려라, 가디엘. 안 그러면 올해의 다이아몬드 더스트는 없을 것이 다.} "....!!" 그 말은, 휘프리엘이 당분간은 엘야시온 가디엘 앞에 나타나지 않 는다는 말이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 었다. 가디엘은 자기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불안한 예감이 가슴을 스쳤으나, 휘프리엘의 표정은 딱딱했 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생명나무와 열 두 세계의 상징이, 트 론즈 스피릿 휘프리엘께 말합니다..." 푸르르르.... 엘야시온 가디엘은, 제발 제대로 되길 바라며, 하얀 눈이 깔린 대 지에 서서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한 손에는 엘야시온의 홀(笏)이 들려 있었다. 엘야시온 열 두 세계를 치리(治理)하는 생명의 홀이었다. 그 생명의 홀에서 빛이 나왔다. 그때부터 엘야시온 가디엘의 목소 리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고, 온 세계와 온 하늘에 천둥처럼 울 렸다. <엘께서 내게,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와 능력을 주셨으니. 너, 트론즈 천사여 - 이제 내 명령을 들어라--!!> 휘프리엘은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갈기가 나부끼고 눈들은 거 칠게 흩어지고, 그가 대지를 박차고 달리는 소리는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너, 트론즈여 날아올라라--! 이곳 높은 산, 북방에 있는 신의 처소, 자이온 에서 저 지하의 세계 게엔나까지-!> 시나는 휘프리엘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클로니아 스피릿을 이끌고 열 두 세계를 돌아라--!! 유니콘들아--- 결계를 뚫어라-!! 트론즈 스피릿의 길을 예비하라-!! 클로니아 스피릿이여, 이 엘야시 온에 너희들의 권능을 드러내라--!!!> 히이이이잉----!!! <엘야시온 온 세계를 돌아 엘의 증거자가 되라---!!> 푸르디푸른 저 하늘 끝에서, 수천, 수만 마리 말들의 달려오는 소리가 울렸 다. 하얀 색의 몸체... 하늘의 축을 떨게 만드는 울부짖음. 폭포소리 같은 말발굽 소리...!! 형형색색의 말들은 하늘 저쪽에서 하늘 이쪽으로 날아와 자기 털 빛과 똑같은 이마의 뿔을 세우고 공간을 갈랐다. 시나는 똑똑히 보았다. 푸른 하늘이 갈라지면서 무수한 별들이 떠 있는 우주가 드러나는 것을. 그건 공포스럽고 위험하고, 그만큼 아름다운 광경이 이었다. 말들이 밟는 천공의 길은 뿌연 길을 만들어, 검은 우주로까지 통 했다. 그 뒤를 따라, 휘프리엘이 달렸다. 자기 몸통보다 더 큰 날개를 펼치고, 진주 색의 뿔을 은빛으로 빛내며. 하늘과 우주를 가로질러.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은빛 날개를 곧게 펴고 나는 존재들... 은빛의 긴 머리칼, 은빛의 눈동자... 온 몸이 달군 쇠처럼 빛나는 저들. 수천만은 될 듯, 수다(數多)한 그들은 높고 높은 하늘에서 지 상엔 눈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옷자락을 펼치고, 은빛 날개를 곧게 펴고, 은빛으로 빛을 발하는 창(槍)을 들고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질주했다. 그들이 나는 소리는 소리 이상의 소리였다. 너무나 커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절대적인 정적 속엔 온 세상이 떨고 있었다. 시나는 알았다.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어 이렇게 저들을 볼 수 있 지만, 바로 앞에서 봤다면 그 하나 하나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 도로 거대한 크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을 본다고...!? 저들을, 앞에서...? 시나는 고개를 젓고, 떨리는 다리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계가 변했다. 하늘은 은빛으로 요동치고, 들끓으며 일각수들이 낸 길은 뿌옇고 차가운 얼음 조각들이 휘몰아쳐 그 길을 달리는 스피릿들의 권능을 드러냈다. 하늘을 찢는 얼음 폭풍의 소음. 멀리, 우르릉대는 번개 불빛. 푸 른 하늘을 끝자락에서부터 덮어, 세상에 어두움을 드리우는 회색 눈 구름. 그 위용 앞에 대기는 떨고, 공기의 온도는 급강하해 모든 것을 푸 르게 얼렸다. 한없이 싸늘해지는 세상... 미친 듯이 날리기 시작하는 눈발... 이제는 '스피릿'이 뭔지 알았다... 시나는 이 이상의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눈을 감았 다. 시나의 육체가 광경을 보길 거부한 것이다. 의식이 멀어질 때는, 너무나 무섭고 떨려... 혹시 이대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 했다. 위이이이잉----!! "...!!"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각자의 방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바람 의 소리에 놀란 눈을 했다. 시종들이 이미 덧문을 닫고 모피를 둘러 치고, 장작을 잔뜩 때고 있었지만, 잠깐, 공기의 온도가 싸늘해 진 듯 했다. 유리궁전의 모든 건물은 아티스트들의 힘으로 돌 자체에서 따뜻함 이 발산되도록 해 놓았지만... 확실히,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니아 계 열의 왕족들이었다. 시종들이 클로니아 써클렛을 가져올 때, 세스틴은 자기 가슴을 만 지며 중얼거렸다. "...서, 설마...! 벌써 트론즈 천사를 불러들이시다니..! 말도 안 돼...!" 그는 불안스럽게 사방으로 눈을 굴렸다. "그, 그런데... 왜 내게 는 말씀도 안 하시고...!" 마리스는 옷을 입다말고, 바깥에 불어 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엘야시온 가디엘...님?"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스피릿이, 결계를 뚫고 온 세 계를 휘돌아, 겨울을 흩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아는 한,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음 정령들이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예비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 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맙소사." 굳이 클로니아 계열의 왕족이 아니라도, 다른 세계의 왕족들도 그 시간, 놀란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트론즈 천사가...?" 자기 세계의 스피릿들이 트론즈 천사의 휘하에 있는 클로니아 스 피릿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느껴졌다. 엘야시온 온 세계는 이제, 본격적으로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로 들 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곳엔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며칠 동안 자리를 잡을 것이 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부르는 의식은, 내일 모레 흙의 날 저녁에, 왕족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된 것 아닌가? 보통, 그것은 하누카의 날이 있기, 2주전에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들은 이 예상외의 일에 모두 다 불안한 눈을 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80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15 23:55 읽음:1726 관련자료 없음 ----------------------------------------------------------------------------- <제 45막. 유리궁전>-4 루드랫은 탁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들 었다.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 살갗이 시리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믿을 수 없지만 분명히 그랬다. 기온뿐만 아니라, 하늘의 움직임 까지도 느껴진다. 하지만... 루드랫은 자신이 스피릿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보단, 다 이아몬드 더스트가 이 세상에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의 결과를 예상 하고 눈을 찌푸렸다. "엘야시온 가디엘 님..." 며칠 이른 다이아몬드 더스트. 오늘 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얼어죽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하여튼... 재미있긴 하지만. 쿡 쿡..." 란사드크가 내뱉은 말이었다. '식당' 안은 사람 한 명 없이 조용 했고, 단지 다섯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란사드크가 바깥의 바람 소리에 귀 를 기울이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란사드크 뒤에 서 있던 겐트온과 이드넘, 도비온은 의아한 눈을 했다. "아버지..?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겐트온이 그렇게 묻자, 란사드크는 주의를 돌려 빙그레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 그리고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소년을 주목했다. 한 소년이 네 사람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있었다. 의아한 표정이었던 도비온은 아버지의 시선이 소년에게 멈추자, 다시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아버지... 가장 최근에 들어 온 녀석입니다." 란사드크는 느긋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그래? 이것 또한 재미있구나. 상당히 어리고... 상당히, 귀여운 녀석인데... 고개를 들게 시켜라." 도비온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낯선 사람 앞이라 겁먹고 있을 법도 한데, 그냥 굳은 표정만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란사드크는 미소지었다. "호오. ...이 녀석의 이름이 뭐지?" "...드루세의 아들, 이가르라고 합니다." "흠, 좋아. 그렇다면, 이제 네게 직접 묻겠다. 드루세의 아들, 이 가르." 이가르라고 불린 소년의 눈에 잠깐, 기색이 돌아왔다. "가장 최근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기억이 안 난다든지 하는 말을 한다면, 거짓말을 한 죄로 살려 두지 않겠다." 란사드크의 말은 담담해서 더욱 진실로 들렸다. "첫 번째 질문이 다. 넌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이가르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요 며칠간 사람들의 질문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질문을 받으면 한참 생각해 야 했다. "...판테온. 판테온... 능력 있는 신들을 섬기는 곳." 란사드크는 빙긋 웃었다. "좋은 대답이다. 그렇다면 넌 그 능력 있는 신들에게서 무엇을 얻 고자 이곳에 있는 것이냐? 왜 이곳에 들어왔지?" "...능력이 필요하니까." 도비온이 지적했다. "이가르, '-습니다'로 대답해라." "...능력이 필요합니다." "능력이 필요한 이유는." "...찾을 것이 있어서 입니다." "찾을 것? 무엇을 찾을 작정이지?" 이 질문에 이가르는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을 흘렸다. "...찾을 것... 찾을 것은..." 란사드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보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도비온, 혹 이 녀석에게 환각을 걸어 내게 답하게 하는 거라 면..." 도비온이 놀라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아버지 앞에서 그런 짓 을 할 리가...!!" 란사드크는 코웃음쳤다. "흥... 하긴. 환각에 걸려 있다면, 저 녀석이 대답하는 것 보단 훨씬 매끄럽게 대답했겠지. 멍청하고, 쓰레기 같은 것. 고작 이런 걸..." 하지만 그때, 이가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쓰레기. 그렇죠...! 난, 쓰레기를 찾고 있습니다! 쓰레기를 찾아 없애서,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쓰레기가 없다면, 이 세상으로 엘이 강림하시겠죠!! 더러운 골목을 깨끗이 하고!! 시체를 치워버리 면!!!" 그 갑작스런 말에는 잠자코 있던 겐트온과 이드넘도 어이없는 표 정을 지었다. 하지만 란사드크는 갑자기 폭발적으로 웃었다. "핫핫핫---!! 뭐? 뭐라고?! 쓰레기를 찾는다고!! 엘이 이 세상에 내려오도록?!!! 핫핫핫핫---!!! 이거야, 원!! 완전히 미친 녀석 아 닌가!!! 전직, 청소부였던 미친 녀석이냐?!! 크핫핫핫!!" 하지만 란사드크는 이가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이가르의 눈엔 눈물이 있었다. 아마 그래서 더 본인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겠지만.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한 란사드크는 빙그레 웃고 한쪽 손에 턱을 괴었다. 그의 얼굴엔 새로운 흥미가 감돌고 있었다. "하하하... 어쨌든, 좋아. 쓰레기라... 아주, 재미있구나. 그래, 지금 현재 골라놓은 쓰레기라도 있느냐?" 하지만 이가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란사드크의 웃음에 놀란 것 같았다. 도비온이 말했다. "이가르! 대답해라!" 이가르는 입술을 열었다. "아니... 찾아야 하는데..." 란사드크는 질문을 바꿨다. "가족이 있느냐." 이가르의 얼굴에 조금 안심이 어렸다. "어머니와, 여동생... 스노우 드롭이 있습니다." "흠, 그래? 그럼 그 두 사람은 어디에 있지? 그들도 여기 있느 냐?" 이가르는 인상을 썼다. "...아니오. 그 두 사람을 찾아야 합니 다." "호오? 찾아야 한다고? 그럼, 뭐냐? 그 두 사람이 '쓰레기'로구 나. 핫핫핫... 그렇지?" 란사드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곤란해하던 이가르의 눈에, 잠시 후 분노가 돌았다. "...쓰레기가 아닙니다." "쓰레기야. 네가 말한 대로." "...아닙니다." 고개를 든 란사드크는 차갑게 말했다. "건방진 것. 그들은 쓰레기다!!! 쓰레기 뱃속에서 난 너도 똑같은 쓰레기지!!! 그런데, 누가 누굴 찾는다고?!!!" "아냐-!!!!" 이가르는 갑자가 란사드크에게 달려들며 격하게 소리 질렀다. "내 어머니는 쓰레기가 아냐-!!! 스노우 드롭도 마찬가지야-!!! 그들이 쓰레기면, 너희들은 뭐야-!!! 내게는 너희들이 더 쓰레기 같 이 보여-!!! 내 어머니의 피를 묻힌 너희들이야말로... 아아아악 --!!!" 이가르는 머리를 감싸쥐고 고꾸라졌다.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에게 능력을 쓴 도비온이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죽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땅에 뒹구는 이가르를 보며 란사드크가 말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죽이긴 왜 죽이냐, 도비온. 참 재미있 는 장난감인데. 좋은 걸 찾아냈구나. 자아, 자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웅크린 채 숨을 헐떡이는 이가르 앞에 앉 았다. 그리고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어 그의 이마에 댔다. "...!!!" 겐트온과 도비온, 이드넘은 모두 다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 다. 아버지가, 저런 미천한 계급을 위해 힐러 라이트를!!! "자, 어떠냐. 이젠 머릿속이 어느 정도 맑아 졌느냐?" 하지만 이가르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란사 드크는 이가르를 위하여 초록빛을 더 냈다. "...머릿속이 깨끗해졌으면, 눈을 들어 나를 봐라." 이가르는 흐릿한 눈을 들었다. 그의 입가로 나온 게거품을, 란사 드크는 후드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하지만 이가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란사드크를 볼뿐이었다. "좋아. 잘 들어라. 넌 쓰레기가 아니다. 네 말대로, 네 어머니의 피를 묻힌 자들... 아무 죄도 없는 네 어머니와 네 여동생의 피를 묻힌 자들이, 쓰레기다. 넌, 그럼 누구를 찾아야 하지?" "...쓰레기...들." "지금 현재, 찾아놓은 쓰레기가 있느냐?" "...!!" 란사드크는 다시 한 번 더 부드럽게 말했다. "이가르...? 찾아놓 은 쓰레기가 있을 텐데?" "....!!!!" 이가르의 눈에 점차 빛이 돌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총명한 눈이었 으나, 예전보다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있어요. ...있습...니다." 란사드크는 히죽 웃었다. "호오? 그래? 그게 누구냐?" "...내.. 어머니를 죽인 자들. 스노우 드롭을 데려간 자들...!!" "푸핫핫--!! 맞아!!! 잘 찾아내었구나!! 넌 쓰레기를 처단할 자격 이 있다!!! 이가르!!!" "이건 버려라. 그리고 새 걸 내와." 란사드크는 입고 있는 후드를 벗어 도비온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 지만 도비온은 그 후드를 받아들고도 그냥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거냐?" "아버지... 바람이 생각보다 매섭습니다. 기온도 무척이나 낮은 것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안다. 그래서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려는 거 아니냐." "...아, 아버지? 그러니까... 이가르는 아직 아무 능력도 없는데, 이 밤중에 그들을 처단하라고 시키신 건..." "흥. 그래서 네가 추천하는 가장 능력 있는 녀석들을 딸려 보내지 않았냐. 나중에 결과나 알려다오. 꽤 재미있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때 겐트온이 말했다. "늦었다, 도비온! 닥치고 새로운 후드를 내와." 도비온은 겐트온에게 화난 눈을 지었다. "뭐라고? 난 지금 아버지 께 말을..." 겐트온은 인상을 쓰고 욕설을 뱉었다. "그냥, 같이 갔다 오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입으실 것이니, 제가 직접 골라오죠. 도비온! 옷장으로 안내해!! 이렇게 추운데, 겨우 그 딴 놈들 일로 우릴 길에서 얼어죽게 하려는 참은 아니겠지!!" 그리고 겐트온은 도비온을 끌고 재빨리 안채로 사라졌다. 그 모양 을 보며 란사드크는 잠시,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흥, 놈. 아직도 저런 재미있는 행동을 보여주다니. 그래서 내 가 겐트온을 사랑하는 것이긴 하다만... 후후." 그리고 그는 반쯤 돌아 이드넘을 보며 말했다. "넌 어떠냐? 이드 넘?" "네?" 아버지를 대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이 드넘은 엉겁결에 답했다. "뭐, 뭐가 말입니까? 게, 겐트온 말입니 까? 겐트온이라면 저, 저도 좋아..." "풋... 맹한 녀석. 넌 어릴 적부터 왜 그렇게 멍한 거냐. 누가 겐 트온에 대한 걸 물었더냐? 너도 겐트온을 사랑해? 쯧쯧... 한심하 긴. 가면이나 벗어봐라." 란사드크에게 비웃음 당한 이드넘은 인면피를 벗긴, 죽기보다 싫 었지만 하는 수 없이 벗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 만 란사드크는 집요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불빛에 비 춰봐." 이드넘은 힘없이, 시키는 대로했다. 이드넘의 흉측한 반쪽 얼굴을 보고 란사드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심해졌구나."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란사드크는 이윽고, 이드넘에게 다가와 한 쪽 손을 들어 초록빛을 그 상처에 쐬었다. "아, 아버지." "빌어먹을 것...!!!" 란사드크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여전히... 힐러 라이트도 안 들어!! 젠장!! 가면을 도로 써라!!!" 이드넘은 허겁지겁 인면피를 썼다. 발가벗고 있다 옷을 입는 느낌 이라 수치심에 정신이 없었지만, 란사드크가 잔뜩 화가 나서 "...죽 여버리겠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드넘은 란사드크에게서 약간 물러났다. "아, 아버지 뜻대로 될 겁니다. 이번 하누카 날이 지나면..." 그 말에 란사드크는 다시금 이드넘을 주목했다. "...이드넘, 난 네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아, 압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겁먹은 목소리지? 왜 내게서 몸을 떼는 거냐? 이드넘... 내 아들아?" 란사드크는 이드넘에게 다가가 자신의 가면을 벗고, 그 얼굴로 이 드넘을 바라보았다. 이드넘은 자기 얼굴에서 정확하게 반대쪽의 얼 굴이 썩어있는 그 얼굴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란사드크의 손이 이드넘의 인면피로 올라왔다. "왜 눈을 감는 거냐? 내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더냐? 불쌍한 녀석. 내 탓에 너까지 괴로움을 받고... 날 용서해 주겠느냐?" 부드러운 목소리다. 이드넘은 가까스로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 다. "네... 네, 아버지.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란사드크는 은색 눈으로 웃었다. "그래... 고맙구나. 나한테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난 그 지옥 같 은 데서 죽었을지도 몰라. 너희들이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아버지..." "아버지!!" 갑작스런 목소리에 란사드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겐트온." "후드를... 후드를 가져왔습니다." 겐트온의 손엔 새로운 후드가 있고, 도비온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걸 눈치챈 란사드크가 웃었다. "저런, 도비온! 그 사이 어디 몸이 안 좋아진 게냐? 내가 그린 라 이트를 쐬어줄까? 건강을 조심해야지. 이리 오렴." 도비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무리하지 마십시오." "괜찮아.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아프지 않습니다." "정말이냐?" "네." "그래. 그럼, 됐다." 그리고 란사드크는 겐트온의 손에서 후드를 받아 입고 가면을 쓴 뒤, 도비온에게 말했다. "이가르가 어떻게 했는지 결과 보고를 부탁한다. 그리고..." 란사 드크는 식당을 둘러보았다. "뭐... 겐트온 말만 듣기론 네가 아주 쓸모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만, 직접 보니 역시 너는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좋은 곳이야. 더욱 잘 키워보도록 해라." "...!!!" 겐트온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창백해 있던 도비온의 얼굴엔 눈에 뜨게 희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란사드크는 웃었다. "...가겠다." "아...!! 입으실 옷가지와 잡수실 것들을 싸놓았습니다. 이쪽 마 차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맙다, 언제나 네게 고맙게 생각한다, 도바. 내 아들아. 게다가 이 단체가 우리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 다." 도비온은 활짝 웃었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란사드크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도비온의 어깨를 한 두 번 두드리 고 뒤로 돌아 말했다. "가자, 겐트온." "...네." 란사드크는 마차에 올라, 배웅하는 이드넘을 보고 말했다. "너는? 오늘 연회에 참석 안 하는 거냐?" "저는 연회를 싫어해서..." "아, 그랬지. 넌 어렸을 적부터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지. 도바, 넌? 네 수하들을 돌봐야 하고?" "네." 도비온은 힘차게 말했다. 란사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 심히 해라." "조심해서 가십시오, 아버지... 그리고," 후드를 가져와서 지금까지, 도비온은 겐트온 쪽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겐트온을 쳐다보는 그 눈은 미움이 넘치는 눈 이었다. "너...! 아버지를 잘 모셔." "....!" 겐트온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차 문은 탁 닫혔 다. 그렇게 닫힌 마차 문을 보며 겐트온은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였 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할 땐, 쓰게 웃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며 있 던 란사드크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겐트." "...!!" "도비온을 데려가 무슨 말을 했지?" "..." 겐트온은 답하지 않았다. 란사드크는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했 다. "호오, 말하기 싫어? 왜? 오랜만에 도비온을 보니, 잊었던 옛 버 릇까지 되살아나더냐? ...손을 내밀어라." "아버...지."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당장 손을 내밀어!!!" 그의 눈은 가면 너머에서 무섭게 번쩍였다. 하는 수 없이 겐트온 은 웃옷을 벗고, 팔을 걷어 손을 내밀었다. "...흥." 란사드크는 그 하얀 팔뚝을 자기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란사드크 의 손바닥에선 초록빛, 푸른빛, 보랏빛, 붉은빛, 그리고 마침내 오 렌지 빛의 힐러 라이트가 둥글게 맺혀 빛나기 시작했다. 그 오렌지 빛이 란사드크의 손을 지나, 겐트온의 팔뚝으로 스며들 어 갈 때... 란사드크는 빙그레 웃었다. "알겠느냐, 겐트? 다음부턴... 내가, 도비온을 시험한다고 느낄 때는, 절대 그 녀석을 네 마음대로 빼가지 말거라." "으윽!!" "...널 사랑하지만, 건방진 건 딱 질색이다. 그리고 일이 틀어지 는 것도." 오렌지 빛은 겐트온을 살갗을 부풀어오르게 하더니, 마침내 살갗 을 터뜨리고 거기서 붉게 뛰는 핏줄을 드러나게 했다. 그걸 본 겐 트온은 잠깐 몸을 떨었다. 언제나 보는 것이지만... 이렇게 바람 소 리가 들리고, 이렇게 지독하게 춥고, 이렇게 어두운 마차 안에서 보 니, 너무나 끔찍했다. 붉은 핏줄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란사드크의 손 목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원래 란사드크의 핏 줄이라는 듯, 곧이어, 쿨럭거리며 겐트온의 몸에서 난 피를 란사드 크에게 공급했다. 그것이 계속 될 수록, 겐트온은 땀을 흘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신, 란사드크의 얼굴은 오렌지 빛 속에서 점차 젊어지고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때보다, 훨씬 긴 시간의 흡혈(吸血)이었다. 그 고통과 괴로움. 하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 끝없이 도는 듯한 느낌... 눈앞에 점멸하는 검은 것들. 온 몸의 근육과 세포들이 아픔 을 호소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겐트온은 마침내 애걸하듯 말했 다. "아, 아버지...! 우우욱...!! 제발... 자, 잘못했습니다!! 제 발!!" 하지만 란사드크는 더욱 더 겐트온의 손을 꽉 잡고 빙긋, 웃었다. "피가, 참 신선하구나, 겐트. 사랑하는 내 아들아." "아버지--!!!" 겐트온은 절규했다. "푸핫핫핫---!!!" 란사드크는 겐트온의 손을 놔주었다. 란사드크의 손목에 박혀 있 던 겐트온의 핏줄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겐트온의 손목도 원래대 로 돌아가 있었다. 겐트온은 의자에 쓰러져 신음했다. "...으윽..!!!" "푸핫핫핫...!!" 란사드크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겐트온을 보고 말했다. "하 하... 저런...! 어지러우냐? 그린 라이트를 쐬어주지... 핫핫핫..." 그리고 란사드크는 아무 힘없이 엎드린 겐트온의 몸에 초록의 빛 을 전사하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네 덕분에 이렇게 즐거운 기분이 되었으니... 힘내라, 아들아. 오늘은,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내리는 날. 얼음의 정령, 클로니아 스 피릿과 함께 죽음의 춤을 추고 돌아와라. 그들은 와이트 뱀파이어가 미쳐 날 뛰는 것을 아주 즐겁게 바라봐 줄 것이다. 하하하하---!!" 식당에선 도비온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겐트온 그 자식이 하는 짓을 보면 없던 밥맛도 싹 달아 나. 아버지께 말씀 드리는데, 날 끌고 가서... 한다는 말이 고작, 아버지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중이니 경솔하게 식당 녀석들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었지. 아버지께선 일부러 식당 녀석들 을 이 밤에 보낸 거라고.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말이야." 이드넘은 한숨을 쉬었다. 겐트온이 도비온을 데려갈 때, 화난 아 버지의 눈이 떠올랐다. "정말이었을 수도 있잖아..." "쳇! 웃기는 소리! 아버지께서,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겐트온 그 자식은 중간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를 훼방 놓고 있는 거라고!" 이드넘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이만 가볼게." 한참 흥분하던 도비온은 그가 간다는 말에 말했다. "응? 왜 벌써 가? 식사하고 가기로 했잖아?" "됐어. 맡겨 둔 물건도 찾아와야 하고..."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굉장히 추운데. 꼭 다이아몬드 더스트 가 내리는 밤 같아. 어제까지는 따뜻하다가 갑자기 이러니 이상한 일이지만." "간다." 이드넘으로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지독하게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맡겨둔 물건... 셰리카를 찾아 와, 여관에 틀어박혀 있 자. 집착은 하지 말자. 겐트온은, 자기가 기르던 강아지를 찔러 죽여야 했다. 이드넘은 대기하고 있던 슬라이에게 말했다. 예전보다 차가운 눈 빛으로. "...넌, 여기 남아. 그리고 도비온의 명령을 당분간 들어라." "...!!!" "가겠다." "...마스터..!" "나중에 보자." 그렇게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이드넘을 보고 도비온은 눈을 찌푸 렸다. "이상한 녀석. 저 녀석, 또 병이 도졌군." 이드넘은 옛날에도 가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나 부하들을 도비온에게 몽땅 다 맡길 경우가 많았다. 그래봤자, 외로움에 지쳐 서 삼일 후이나, 길어봤자 일주일 후면 틀림없이 다시 찾으러 오지 만. (그는 남보다 탐욕이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기 때문 에 공짜로 남에게 무엇을 주는 성격은 아닌 것이다.) 이드넘의 그런 성격 때문에 싸우기도 숱하게 싸웠는데 결국 나중 에 가서는 도비온도 달관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버릇은 여전한 것 같다. "하지만 뭐, 어쨌든..." 도비온은 골똘히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도비온은 빙긋 웃었다. "슬라이, 가자. 하필 오늘 저 녀석이 널 여기 두고 가다니. 오히 려 잘된 일이군. 일은 빨리 해치워야지. 이렇게 추운데... 게이드는 힘은 좋은데 너무 굼뜨고... 이가르란 녀석의 솜씨도 보고 싶고... 어쨌든! 가서 지켜보자!" "...네." 슬라이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계속)================================================== 음. (--;) 이 부분은 다시 써야 할 지도... (별로 마음에 안 드네요.--; 하 아...--;) 어쨌든. '성역...'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91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19 03:44 읽음:1919 관련자료 없음 ----------------------------------------------------------------------------- <제 45막. 유리궁전.>-5 가디엘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엘야시온의 자리에 선 지, 백 육 년. 너무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트론즈 스피릿, 휘프리엘. 그와의 교감은 점차 사라지고, 그를 자유의지대로 불러낼 수 있는 힘도 약해진다. 왜 이다지도 오랫동안 이 자리에 서야하는 건가? 이것은 언제나 끔 찍한 자리였고, 지금은 더욱 그렇다. 지금 이 순간, 이토록 생생하게 이 자리에 지쳐있다. 다시금 떠오르는 생각. 이 자리는 육중한 책임을 팔걸이로 하고,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를 등받이로 하는 보좌(Throne). 발등상으로 놓여 있는 것은 그가 도저히 어쩔 수 없던 과거, 운명. 그 중에서 그의 발꿈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 가디엘은 괴롭게 말했다. "웨스로드..."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스온 가디스!! 또 스온 아니스를 괴롭혔군요!! 여자 애를 울리다 니!! 난,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엘의 시기 열 살. 꾸중을 들은 가디스는 불만스러웠다. 그것도 아 니스 같은 못생긴 계집애 때문에. 그가 자란 호수의 세계는 온통 예쁜 것 천지였다. 수많은 빛깔로 물결치는 호수들. 거기서 춤을 추는 페어리들. 그런데 이곳 자이온에 와서 아니스가 자기 약혼녀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질겁했는지. 회색의 칙칙한 머리 색, 눈 색. 이런 무채색의 계집애 따윈 절대 로, 싫다. 거기다 여차하면 훌쩍대고 울고, 아스나엘님께 고자질이나 하는 계집애 따윈 더더욱 싫다...!! 입술을 내밀고 있던 가디스는 곁눈질을 했다. 그리고 창문을 목표 로 슬슬 옆으로 물러났다. 자기 의견을 철회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아니스 따윈 회색 호박이에요."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라고 요?"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님은 예뻐서 좋지만, 아니스는 딱 질색이 라고요!!" "스, 스아디온 가디스!!" "엉엉---!!" 가디스와 같이 불려와 서 있던 아니스는 한층 더 크게 울었다. 아 스나엘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니스는 그대 종속자예요!! 이리 오세 요...! 아무래도, 오늘은...!" 하지만 가디스는 아스나엘의 손길을 피해 펄쩍 뛰어 달아났다. 이 미 창문 앞으로 왔다. 그는 푸른색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혀를 내 밀었다.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난 예쁜 게 좋아요! 그러니까 아니스 따 윈 호박한테나 시집가라고 해요! 호박! 호박!!!" "위테리드 스아디온 가디스--!!!!" "엉엉엉----!!" 가디스는 이미 벌써 몸을 교장실 창문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출입 문은, 그가 도망갈까봐 잠겨 있었으니까)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을 때까지, '호박'이라는 말은 얼마나 여러 번 교정에 울렸는지. 아마 루세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이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스는 통곡을 했다. 그리고 아스나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엘에게, 제발 이 상황을 견딜 인내심을 달 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이주 후, 가디스가 북쪽 건물에 있는 어두 침침한 독방(사 람들은 '반성실'이라고 불렀다.)에서 이주만에 나와, 이제는 4층으로 옮긴 교장실로 갔을 때. 그곳에서 키 크고 창백한 안색의 소년을 만났 다. 검은 눈동자와 검은 색 머릿결을 가지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 던 소년. 그때까지, 붉거나, 푸르거나, 금빛 같은 색만이 '색'이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무채색'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거기서 깨달았다. "스아디온 가디스. 힐라토 스아디온 웨스로드예요. 스온 웨스로드 는 몸이 약해서 그대보다 두 살이 많지만 지금에야 루세에 왔어요. 그 러니 웨스로드에게 공손하게 대해야 해요." 맙소사...!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고? 그에게? 천만에...! 가디스는 그에게 공손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소년을 거의 숭배 했던 것이다. 웨스로드는 아름다웠다. 외모뿐만이 아닌,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다 그러했다. 그는 또래 중, 가장 많은 신기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소년이었고, 가장 영리한 소년이었고, 가장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소년 이었다. 그 넘치는 지성과 다정한 마음씨. 지식 이상의, 모든 사물에 일관 성 있게 미치는 따스한 마음, 통찰력. 루세에 늦게 입학한 것 때문에, 그리고 몸이 약해서, 스아디온이면 서도 스피릿을 소환하고 그것을 자유 자재로 다루는 것을 무척 힘들어 하긴 했지만, 그 약점마저도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다른 것을 갖고있던 것이다. 열두 살의 웨스로드는 어느 날, 가디엘에게 미소지었다. 정원사들 이 그토록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죽어 가는 고목 밑에서. "가디스. 난 힐라토에서 첫 번째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어. 하지만 몸이 이 모양이라 스피릿을 잘 부리지 못해... 그러니까 아마, 힐라토 의 파이오니온 자리는 다른 스아디온에게 넘겨주어야 하겠지. 하지만, ...이것 봐." 그는 두 손을 가디엘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손에선 놀 랍도록 아름다운 초록색과 푸른색 보라색, 붉은 색의 빛이 났다. 그는 그 아름다운 빛을 고목의 껍질에 전사했다. 그리고 그 빛이 껍질에 닿는 순간, 고목은 새로 창조되기라도 하듯, 생기를 되찾고, 잎을 냈다. (그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것이 꽃을 피웠을 때. 가디스는 그때야 그 썩어 가던, 고목. 그가 비웃었고, 가지를 꺾어 장난치곤 했던 그것이 동백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가디스는, 한 번도, 붉은 동백꽃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죽은 것에서 난 것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지만 검고, 하얀, 너무나 하얘서 창백한 얼굴. "봐... ...참... 아름답지...? 이 생명의 기운... 그러니까... 난, 그런 파이오니온 못 돼도 상관이 없는 거야... 난, 이것이 훨씬 좋 아... 엘을 위한 사제... 언젠가는." 그리고 웨스로드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후 삼일 밤낮을 힐라 토의 스아디온은 앓았다. 웨스로드가 힐러 라이트를 쓰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디스 또한 동일한 기간을 반성실에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분하거나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무척이나 괴롭고, 슬플 뿐. 그래서 반성실에서 처음으로 엘에게 간 절한 기도를 드렸다. 삼일 후, 웨스로드가 직접 가디스를 데리러 올 때까지, 아주 간절 히. 그 검은머리의 소년은 아직도 창백한 안색을 하고, 가디스를 보며 말했다. "...가디스. 지난 삼일 동안 너를 보지 못해 무척 쓸쓸했어. 여기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알았다면 진작에 왔을 거야." 그 온전한 마음. 그 빛나는 웃음. 그가 엘에 대해 말할 때면 얼마나 얼굴이 빛났는지. 그는 언제나, 엘에 대한 말을 했다. 그가 사람과 동물과, 식물... 심지어는 몬스터 에 대해서까지 관대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것은, 그것들에게 엘의 그림 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순수했고 아름다웠다. 루세 온 학생과 교수들, 그리고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의 자랑이자 기쁨의 이름은 바로 그였다. 힐라토 스아디온, 웨스로드... 소년 가디스는 그를 사랑했다. 너무나. "그러니까... 네가 누구든 별 상관이 없다." 가디엘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소 밖 긴 의자에는 시나가 누워있었다. 신의 영광을 견딜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시나는 실신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옆에 두고 가디엘은 다시 한 번 더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네가 누구든 별 상관없다. 넌 그냥..." 하지만 그때, 가디엘은 트론즈 스피릿 휘프리엘이 시나에게 얼굴을 비비던 광경을 떠올렸다. "넌 그냥..." 그의 얼굴엔 혼란함이 스쳤다. 그리고 고뇌 어린 얼굴로 힘없이 눈 을 감았다. "...아냐, 아니다... 네가 누구든 별 상관이 없는 게 아니다. 그건 결코 아냐... 왜냐하면 넌, 칼루스온 인이 분명하니까. 휘프리엘은 네 가 칼루스온 인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는 돌아가게 될 거다.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디엘은 힘없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둥근 초록빛을 냈다. 엘야시온이 됐을 때부터 그에게 생긴 수많은 능력가운데 하나였 다. 그 빛이 나는 손으로 시나의 손을 잡았다. 초록빛은 시나의 피부 속으로 서서히 흡수되었다. 물론... 루드랫이 이 소녀에 대해 말한 것은 들었다. 힐러 라이트 가 듣지 않는다고. 엘야시온 가디엘의 얼굴은 초록빛이 명멸하는 가운 데 우울하게 보였다. "...그러니까, 너는 칼루스온 인인 거다. ...하누카의 날이 지나 면. 소녀여... 나와 함께 자이온으로 가자. 약속한다. 너는 그곳, 대 성전에서 네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엘야시온은 스스로 그렇게 확신했다. 마음은 이미 한 방향으로 정 해져 있어서, 다른 어떤 생각이나 말도, 그를 움직일 순 없었다. 말라 붙은 딱지처럼 계속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애써 눈을 감았다. 그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냥 계속, '잘 될 거다'라는 말만을 중얼거렸 다. 그렇게 시나의 몸을 위해서라기보다 엘야시온 자신의 마음을 위하 여 낸 초록빛은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초록빛이 거의 사라졌을 무렵, 엘야시온의 옷깃 사이에서는 푸른빛 이 났다. 처음엔 초록빛이 왜 옷깃 사이에서 나나 생각했지만, 분명 푸른빛이었다. 하지만 옷깃 사이에서 날 푸른빛이라면 단 하나뿐이 아 닌가? 엘야시온 가디엘은 놀란 얼굴로, 시나의 손을 놓고 옷깃 사이로 손 을 넣어, 작은 진주 만한 크리스털을 꺼냈다. "...!" 역시 크리스털에서 푸른빛이 나고 있었다. 지난 동안 습관처럼 지 니고 다니던 물건. 이젠 몸에서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습관처럼 오늘도 달고 있었다. 무슨 큰일이 났을 때, 혹은 드디어 일이 끝났을 때, '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엘야시온 가디엘이 언제나 갖고 있던 물건. 가디엘은 크리스털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크리 스털 볼은 푸르게 일렁거렸고, 그 후, 거기서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뚜렷하게 흘러나왔다. 《...임무를 끝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뵙기 원합니다.》 가디엘은 웃음 지었다. "하하하... 이럴 수가...!"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문질러 그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살아있었다 니...! 바리스가 불탔다는 말에, '그'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보고도 그렇게 들었다. 바리스에 있던 마노테온은 모두 다 죽었다 고. 그 말을 들을 순간, 얼마나 가슴이 쓰렸던지. 신분을 숨긴 채 뷰겐트의 산중으로 찾아가, 그에게 바리스로 가도 록 권했을 때, 스스로도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희생'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동이 아닌가? '희생'은 순수한 자발성을 모태로 하므로, 만약 '희생'의 동기가 어떤 강요에 따른 것 이라면, 그 순간부터 '희생'은 '희생'이 아닌 뭔가 다른 것으로 화하 고 만다. 절대적 자유를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품성. 그러니 어떻게 엘야시온 가디엘이 그에게 '희생'을 명령할 수 있겠 는가? 더구나 '그'는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였고, 그에 합당하게 그때 당 시 그가 갖고 있는 명예는 단 한가지만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것이었 다. 게다가 그는 그 한가지에 있어서도 별로 집착이 없어, 그가 가진 명예는, 스스로에게만은 말 그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가 이렇게 오랜 세월, 바리스에 있으 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는 진실로 충성스러운 자였다. 어제는 하루 종일, 그를 루드랫과 함께 불러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 했다. 덕분에 하겐트에게 매우 분노해, 자칫 그를 내칠 뻔했지만... "하하하... 잘 됐어! 잘된 일이야!! 그래! 곧 이 자를 만나러가야 겠다...!" 가디엘은 푸르게 빛나는 크리스털 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야시온 가디엘의 마음에선 모든 언짢았던 기분이 사라졌다. 성소에 서 있던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은 다 잘될 것이다. 가디엘 은 그렇게 확신했다. (계속)================================================== 분량을 잘못 맞춰서... 원래는 여기로 유리궁전이 끝납니다.^^; 그래서 짧지만 그냥 올립니다. 아, 그리고 게시판에 격려해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리얼 란에 [??]를 쓰신 분에게도요...^^;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곤 하는데, 게시판의 글들을 보 고, '어쩐지, 지금 이 순간... 복 받은 것 같어...'라고 생각했습니 다. 하하..^^; ...시리얼 란의 글을 봤을 땐 그냥, '윽! 지적 들었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지금은 별로 민감한 부분이 아니어서...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할까... 하하...^^;)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드래마와 시나 나오는 부분이 재밌다고 해 주셔서 감사했죠...^^ 왕족들 부분이 별로였다면, 제가 재미없게 써서 그럴 거라고 생각 합니다. 다시 써 보겠습니다. ^^; (리메이크 판에...^^) 사실, 글을 올리는 초기에는 비평이나 안 좋은 소리가 올라오면 글 을 올릴 용기가 몽땅 사라질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여린 마 음... 하하...^^) 그런데, 그건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더군요. '어떤 종류의 글'을 보면 맥이 탁 빠지고, 분명 글 쓸 의욕이 사라 집니다. (처음에는 비평이나 지적을 받으면 꼭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 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더군요. 칭찬을 받더라도 그런 경우가 있 습니다.^^;) '지금 시기'에서는 시리얼 란의 글은 오히려 감사한 글이었습니 다.^^; (준비 된 상태에서 적당히 비판적인 글을 접했다는 것은, 복 받았 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하...^^) 게시판에 힘 내라고 써주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든, 남의 마음을 걱정해주는 선의를 접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더 구나 그 마음이 제 마음이라면요... ^^; (음음... T-T 복 바다써... 그렇고 말고.) ...어쨌든, '이 사람이 혹시, 이것에 좌절하여(^^;), 제일 한강교 난간에서, 누가 여기다 그리스 발라놨냐고 소리치고 있는 건 아냐?'라 고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겸, 그리고 앞으로 더욱 잘 쓰겠다는 다짐을 할 겸...(잘 써보자, 엔...) ...겸사겸사 적습니다.^^ 하여튼, 많은 지도 편달(이건 회초리로 때린다는 뜻이라더군 요.--;;;;)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 <엔...^^> 추신1: **님, 디트가 악역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 (끝나 보면 알까용... 하하...^^;;) 어쨌든 일러스트, 러프 스케치 해 놨으니, 열심히 색칠해서 드리지요. 1월에 군대 가신다고 했던 것 같 아... --;; 다른 분들... 흑흑.. 일러스트는 틀림없이 드리겠으니, 좀 만 기다 려 주세요. TT 추신2: '지도 편달'을 주실 분들... 혹시 '지도 편달'에 절망하여, 제일 한강교 그리스 발라진 난간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들더 라도... 장롱군 옆구리로 어떻게 해결을 보고, 교통체증 일으키는 일 은 없도록 하겠으니, 부담갖지 말고 지적해 주세요. 하하...^^; 추신3: 그림 주신 분, 감사합니당..^^♡ 귀여운 시나랑 귀여운 보 경이였어요... 봉제 인형같은 호문클로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핫 핫... 나중에, 때가 된다면(무서운 말이다.--;) 보내주신 그림들 모두 다 자료실에 올릴까 봐요...^^ 시골남자님이 보내주신 것은 이미 올라 가 있지만...^^ 어쨌든,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99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22 23:55 읽음:1868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1 시나는 한참 잘 자고 있는 데 무언가가 옆에서 부스럭거리자, 또 셰리 카가 그러는 줄 알고, 눈을 반쯤 떴다. 과연. '호문클로스'가 보였다. 하지만 어디서 선탠을 하고 온 건가. 가무 잡잡한 피부하며 갈색머리. 그런 호문클로스는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호 문클로스를 여럿 데리고 있었는데, 어쩜 자가 분열을 한 건지도 모른다. '...뭐, 좋겠지.' 호문클로스가 자가 분열을 하든 감수 분열을 하든 그건 셰리카 사정이 지. 시나는 눈을 감았다. '쿨...' 그리고 정확히 5초 후. 눈을 뜨고, 일어나, 으아악!이라는 비명을 질렀 다. 침대 위에 있는 것들을 피해 발버둥을 치며 물러났는데, 이 모든 것엔 3초 정도 걸렸고, 그건 예전의 시나를 봤을 때 나쁘지 않은 운동신경이었 다.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것만 빼면. 하지만 그런 극적인 첫 만남 치곤 시나는 그 후의 상황에 그럭저럭 잘 대처할 수 있었다.(이곳에서 있던 일들은 대부분 극적이었기 때문에 이젠, 극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대본' 같은 것이 머릿속에 입력된 듯. 물론, 이런 상황에서 하는 대사 위의 지문은 언제나 '침착하게'이다.) 시나는 침대 위로 올라온 뒤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윤시나... 시나라고 합니다. 계급은 ...일루티온 정도 되는 데..." 상대는 갈색 눈을 동글동글 굴리고, 하얀 수염을 쓰다듬더니 약간 웃었 다. "난 예라우니. 브라우니(Brownie) 족. 이들은 내 자손이고. 숲에 있다 가 추워서 들어왔어. 잘 부탁." "자, 잘 부탁드립니다." 수십 명은 될 듯한 손가락 만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시나는 역시 침착 하게 인사했다. 이 세계에서는 추워지면, 집안으로 '브라우니'라는 몬스터 가 들어오나 보다. 아까부터, '근데 아침식사로는 뭘 드시나요? 혹시, 이곳으로 식량을 찾 아 들어오신 거라면, 전 뼈밖에 없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싶은 참이었지 만, 꾹 참고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그 순간, 뒤쪽에 있는 브라우니 아이 가 빵 조각을 오물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나는 그걸 보고 씨 익 웃었다. 예라우니 또한 그런 시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는 지금의 침착한 시나를 보고 안심했던 것이다. 아까는, 깜짝 놀랐다. 예라우니와 예라우니의 가족들은 예라우니가(자신이) 족장으로서 오랜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해에는 너무 갑작스럽게 추워져서, 혹시 나쁜 방을 겨울나기 방으로 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왜 냐하면 상대는, 그들을 보자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고, 아무리 장난꾸 러기 브라우니들이라지만 '미친' 인간과 겨울을 같이 난다는 것은 '귀가 내려앉는' 일이다. 인간들은 미치지 않았을 때에도 뭘 할지 모르는 족속들 이니까. "휴우- 이거야 원." 지긋지긋한 녀석들, 이라고 가디엘은 생각했다. 아침이 되자, 몇몇 왕족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때에 맞지 않은 다이아몬 드 더스트에 대해 묻고,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설명할 필요 따윈 없고 설명할 말도 없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를 부른 것은 엘야시온 가디엘의 의지가 아니고, 트론즈 스피릿의 의지였 으니까. 즉, 이건 '엘'의 의지. 그러니 짜증나는 일이다. 하마터면, "다이아몬드 더스트?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게나, 트 론즈 휘프리엘에게 이 자리로 오라고 말할까?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하긴 하네."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부른다고 올 트론즈 스피릿도 아 니고.) 하는 수 없이 가디엘은 말했다. "...없던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있을 것이 좀 앞당겨진 건데, 왜들 소란인지 모르겠군. 오늘 토너먼트 결승전이 엉망이 됐다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혀를 찼다. "그럼,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있을 때 하 려던 일을 하면 되잖나? 스온 마리스? 자넨 이곳의 안 주인으로서 무슨 행사를 마련해 놓았나?" "행사 말입니까, 엘야시온님? 흙의 날 저녁에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일 으키고, 엘의 날엔 우리 모두 다 성전에서 하루 종일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방들을 보수했는데... 어쨌든 그 다음날엔 혼 강으로 스케 이트를 타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때쯤엔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개일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우리 클로니아 왕족들은 별 상관없지만, 다른 분들은 이것에 익숙지 않으니까... 그래서 먼저 번에 의논한 대로, 이번 해의 다이 아몬드 더스트는 작년보다 적을 수 있도록... 그렇게 조절할 예정이었잖습 니까..." "...끄응." 가디엘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창문을 열어보게." 마리스가 당황해서 말했다. "엘야시온 가디엘 님, 지금 창문을 여는 것은 다른 분들께 무척이나 위 험한 일이 될 겁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내린 다음 날의 추위는..." "나도 아네. 얼어죽지 않게 할 테니, 열어보게." 그리고 가디엘은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접견실 사방에서 얇고 붉은 막이 생겨나 사람들을 감쌌다. 붉은 불꽃처럼 투명하고 따뜻한 막이 었다. 왕족들은 그것이 뷰겐트의 권능을 변형한 것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엘야시온 가디엘을 감탄어린 눈으로 보았다. 아무런 뷰겐트 써클렛의 도 움 없이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덕분에 몸 안에 서부터 따뜻한 것이 솟아나는 느낌이 든다. 아티스트들의 '천한' 능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매우 자연스럽고 아무 해도 없는 능력이었다. "길게는 못하네. 피곤하니까. 그러니 빨리 창문을 열어 봐." 붉은 막에 감싸여진 시종 중 하나가 즉시 엘야시온의 명령에 따랐다. 덧문의 빗장을 풀자, 온통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는 유리창이 보였다. 바 깥이 상당히 춥다는 증거였다. "계속 여는 것이 좋겠습니까, 엘야시온 가디엘 님?" "열게나." 그래서 시종은 유리창 밖의 두꺼운 덧문까지 열어제쳤다. 그러자 하얀 돌풍이 불어닥쳤다. 얼마나 찬지 마치 얼음물 같은 바람 이다. 그것이 방안을 한바퀴 휩쓸어 돌고 사방에 부딪혀, 깨졌다. 사람들은 붉은 막 안에서도 잠시 몸을 떨었다. 창문에선 계속 하얗고 투명한 것이 들어왔고, 그것은 사람들의 눈앞에 서 녹아 내렸다가, 그 옆에서 또다시 다른 모양으로 생겨나, 온 방안은 삽 시간에 빛의 안개로 둘러 쌓였다. 클로니아 세스틴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굉장한 다이아몬드 더스트군 요. 지난 십 년이래 이런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왕족들이 한숨을 쉬었다. ...세계혼이 있는 해에, 이런 다이아몬드 더스트라니. 덕분에 엘야시온 온 세계에 풍부한 서리가 내리겠지만... 괴로운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방구석도 잘 안보일 정도로 빽빽한 얼 음 안개. '살의(殺意)'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가운 온도... 갑자기, 붉은 막 안에서 넋을 잃고 있던 사람 몇몇이 '헉'소리를 냈다. 주로 왕족들을 모시고 온 하바티온 계급이나 그 밑의 시종들이었다. 보호 막이 약해진 듯 싶었다. 하긴, 지금 이 방에 들어찬 것은, '뜨거운 주전자의 물이라도 한 모금만 큼만 컵에 담아마시라(두 모금 째에는 컵 안의 물이 얼음이 되니까.)'는, 클로니아의 특유의 다이아몬드 더스트 추위. 땅은 얼음의 창조물답게 온 통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고... 이런 상황이니 실내에서 입는 옷을 입고 있 는 데다 아무 능력도 없는 자들의 보호막이 우선 무너지는 것이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닫게나." 모든 일정은 확실히 깨졌다. 너무나 빽빽한 다이아몬드 더스트... 내일 모레, 성전에 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고, 가디엘이 애초에 준비해놨던 이벤트도 모두 깨졌다. 하긴... 어제 너무 지쳐서 연회에 갈 수 없었다는 것부터 애초 계획과 틀린 일이었지만. 그러니, 어떻게 한다? 가디엘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 골똘히 생각했다. 오전 내내 왕궁 안은 어수선했다. 예상 밖의 일을 당해서 그런지 다들 당황한 얼굴이었다. 시종들이나 시녀들 중, 꼭 바깥으로 나가야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뷰겐트 아트가 걸린 방한복을 입고, 나갔다 들어왔다. 사실 유리궁전은 공식적인 회의장이나 연회장, 홀을 제외하고도, 누군 가 돌아가며 한 방씩 잔다면 족히 3년은 넘게 걸릴 큰 궁전이다. 하지만 궁전의 모든 방들은 방한을 위해 천장이 낮게 지어져 있어, 좋게 말하면 아늑한 느낌이 들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환한 햇빛 아 래서 라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방들이지만, 촛불 아래에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 답답함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시종들과 시녀들은 매우 바쁘게 움 직였다. 그래서 시나는, 시녀가 받아온 세숫물로 세수하고, 식사한 뒤, 겨 우, 왔다갔다하는 시녀 하나를 붙잡고, 언제 드랫을 만날 수 있는지 물었 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시녀는 살짝 몸을 낮춰 절했다. "어쨌 든 저는 하급 시녀니까요." 시나는 테이블을 내려다 본 뒤, 시녀의 눈과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렇다면,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왜 창문을 이렇게 꼭꼭 닫아놓은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하지만 그때, 시녀의 상급자인 듯한 여자가 걸어와 시녀를 째려봤고, 시녀는 후다닥 사라졌다. 시나가 아쉬워하는데, 그 여자가 절을 하고 말했 다. "힐러 님에게 진찰을 받으실 시간입니다." "네? 하지만 어제 그분은 또다시 진찰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글쎄요, 아가씨." 여자는 절을 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전 시녀들의 십부장일 뿐이니까요. 그러니 힐러 님에게 직접 말씀하시길. 곧 오실 겁니다." "아, 그래요..." 십부장 시녀가 나가자, 테이블 위에 있던 예라우니가 벌떡 일어서더니 시녀를 흉내내며 절을 했다. "글쎄요, 아가씨, 저는 브라우니일 뿐이니까 요." 그러자 테이블 사방에서 깔깔대는 웃음이 터졌다. 사실, 시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엔 예라우니 일가족이 몽땅 다 올라와 누워있던 것이다. 그들은, 시나와 식사를 나누어 먹어,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며 널브러져 빙 긋, 빙긋 웃고 있었다. 시나는 억지로 웃었다. 하여튼 놀라운 일이다. 아침 내내... 시녀들은 식사를 시중들면서 테이블 위에 이렇게 우글거리 는 브라우니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한 브라우니가 한 시녀 앞에 서, '메롱'이라는 표정을 짓고, 한 브라우니는 맛없는 건포도는 이제 다시 는 내오지 말라고 시녀의 손가락을 발길로 찼어도... 시녀들은 이상하다는 듯 손가락을 만지고 고개를 갸웃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예라우니가 자신들은 방 주인의 눈에만 보인다고 분명히 말하긴 했지 만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헤헤헤- 우리를 모르는 인간. 규칙을 설명하기 무척 힘들었어. 브라우 니는 설명을 못하거든." 그런 것 같다. 그들과 오전 내내 대화한 끝에 건진 사실이라곤, 추워서 그들이 숲에서 이곳으로 왔다는 것, 방 주인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 그리 고 시나가 무슨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놈의 '선물' 때문에, 전에 없이 간절하게, 시나는 드랫을 만나길 소원했다. "자!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 봐!!" 예라우니가 대표로, 기대에 찬 얼굴 로 말했다. 시나는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말했다. "...장갑?" 예라우니는 하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냐, 아냐! 시나 인간!!" 그의 어깨너머로 브라우니들이 발버둥을 치며 웃고 있었다. "짧은 선물 은 안돼! 긴 선물도 안돼! 무거운 선물도 안돼! 가벼운 선물도 안돼!" "...그러니까, 방금 것은 어떤 종류의 선물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럼 생각해서 그 주위는 피해보도록 하지요." "짧은 선물!!!" 시나가 말했다. "그럼, 목도리로 주세요." 예라우니는 그 긴 귀를 늘어뜨리고 눈물을 흘렸고, 브라우니들은 테이 블을 쾅쾅 두드리며 웃어댔다. 그들이 얼마나 웃어대는지 시나는 그만 얼굴이 붉어졌고 더불어 민망 했다. 정말, 정말 드랫이 필요해...! 예라우니는 훌쩍대며 말했다. "빨리 선물을 말해 주지 않으면, 우린 곤란해. 시나 인간." 시나로서도 곤란하고 안타까웠다. "저어, 그러니까 굳이 선물을 주지 않아도 이 방에 있어도 되요. 원래 내 방도 아니고..." "안돼, 그건 규칙이야. 브라우니 규칙. 규칙은 지켜야해." 하도 구슬픈 목소리라 시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하여튼, 짧 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선물을 생각해 볼 게요." (계속)=========================================== 눈이 정말 예쁘죠? ^^ 며칠동안 추워서 그런지, 매우 빛납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고 싶어서, 약간이라도 올립니다. 아, 그리고 글쓰는데 도움이나 충고를 주는 분들... 음핫핫... 감사합니다.^^ (덕분에 쓰는 것이 다시 재미있어지려고 합니다...^^) 솔직히... 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실수나 모자란 부분 지적 당하면 기분 굉장히 불쾌합니다. 이것저것 변명도 하고 싶어지고...^^ 예를 들어, 다 읽어보고 말하라는 둥, 제대로 읽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는 둥,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는 둥, 내 스타일은 댁의 스타일에 맞지 않을 뿐이라는 둥... 작가가 그럴 걸, 아마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 겁니다. -내가 욕 쓰면, 작가가 무척 싫어하고 스트레스 받겠지...(영특하십니다. EQ가 정상인 당 신... 당신은,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핫핫... 너무 솔직합니까? 하지만 이건 여러분도 어렴풋이 느끼는 사실 일 겁니다.(못 느꼈다고요? 요즘은 좋은 정신 상담소 많습니다. 가서 전문 가와 상담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모태로 삼아 성공한 사람은 석가모니 외엔 보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예전에 시리얼란에서 어떤 분 때문에, 꽤 여러 가지 물의가 일어났는 데... 다른 것은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그 분이 하신 말씀 중에, '인간은 정말로 이익이 되는 말은 결코 남에게 해주지 않는다'라는 것이 있었죠. 그 분의 행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만은 사실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도 그것이 인간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바트, 제 믿음으론, 이 세상엔, 인간의 법칙 이상의 것이 있 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자기를 싫어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감수하면 서라도,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드물지만 있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핫핫...^^) 물론, 통신상에서 비평이나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저런 위대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청개구리 심뽀로 사람들의 보편적 의견에 무조건 반대하여 물의를 일 으켜 보는 사람도 있고, 형편없는 관점으로 글을 평가해서 그것이 모든 것 인양 감상란에 올리는 사람도 있고, 유명세 있는 사람을 이용하는 사 람도 있고, 단순히 질투심에서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을 가리키는 심리학적인 전문용어가 있습니다. '삽질Sapzil.' -샙질이 아님.) 그 외, 자기가 보는 눈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비평을 쓰는 사람 이 있고, 환타지라는 장르를 사랑해서 비평을 쓰는 사람이 있고, 정말로 보는 눈이 높아서 비평을 쓰는 사람들도... (대부분의 훌륭한 비평가들이죠. 좀 신랄하긴 하지만, 이거야말로 약이 됩니다.^^) 동기는 어찌되었든,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 사람들(그래프로 치면 양끝 에 위치하는 사람들.)을 빼면, 인간은 대부분 가운데 모여 옹기종기 불룩 하게 그래프 선을 그리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의바르게' 살아가는 거죠.(반갑습니다! 저도, 거기... 핫핫...^^) 하지만... 인생경험상, 우리 어머니 같은 분들의 말은, 아무리 써도 듣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혹, 이런 사람들이 비평을 해주면, 성질을 삭히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옳은 비평이든 짜증나는 비평 이든. 아쉽게도 이들의 행동양식은 겉보기에 비슷하니까요. 어디서 들었던 말을 인용하자면, '운전을 전혀 안 배운 사람과, 운전을 완전히 마스터한 사람은 겉보기엔 똑같다. 자동차 운전에 절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라는 거죠. 사실 저로선 도저히 이 둘을 구별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내 글'에 대한 비평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내 글이 아닌 다 른 글이었다면, 당연히 판단 가능하니까 가차없이 '삽질하고 있네.' 혹은, '호오, 통찰력 있는 비평... 굉장... 짝짝짝...'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일단은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이상하게도 시간이라는 우리 인 간의 동반자께선 이런 구별을 스스로 해서 보여주거든요. (혹자는 이걸, '진리'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죠. 어떤 한 인간이 아무리, 둥, 둥, 거리며 투 덜대도 말이죠... 하하...^^) 저도 저를 칭찬해 주는 사람들이 좋습니다. 저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춰 서 대해주는 사람들은 더 좋아합니다. 저를 편들어 주는 사람들은 더더 좋아합니다. (핫핫....^^;)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저를 위해 쓸모 있는 비판을 해주는 분들 은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런 극소수의 분들을 위하여(오오...^^), 미래의 시간이, 99.9999%의 확률로, '망할... 읽고 눈이 썩었다. 염산으 로 씻자.'라고 선언할게 틀림없는 비평일지라도(그래서 시간은 맹목盲目.) 일단은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들었습니다. 덕분에 신경질과 우울증은 늘어가지만, 그래도 저는 인격이 무척이나 고매하기 때문에 능히 극복할 수 있고, 극복이 약간 미진한 감이 있으면 장롱군 옆구리를 줘 패는 걸로 참습니다.(즐겨하는 게임은, '봉신전설, 엘 쯔바유.' 푸핫핫....^^) 그러니, 극소수의 분들... 플리이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해 주세요.. 출판 된 뒤에 하심, 전 고치지도 못합니다... ^^ 고쳐봤자 그게 그거 일 것 같다고 생각하신담 어쩔 수 없지만,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난 나 자신을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나에게서 태어난 내 글도 역시, 올바른 비평을 들을 경우,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편하게, 그리고 훨씬 더 빠르게,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 다. 비평이나 고칠 점을 써주는 분들이 무척 미안해하면서, '다음 번엔 좀 더 칭찬을...'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고, 이런 긴 잡담을 씁니다. 좋은 밤 되세요.^^ 추신...겐트온과 도비온의 '열 달'에 대해서... 그거, 버그 아닙니다. 저번 에 한 분이 말씀해 주셔서 써놨는데, 그 잡담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성 역...'에서 빠뜨렸더군요. 또 한 분이 지적해 주셔서... 씁니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07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26 21:39 읽음:1748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2 그때 시녀가 힐러의 도착을 알렸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시나는 긴장한 채 일어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들어온 사람은 어제와 전혀 다 른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시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는 후드를 입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반 짝이는 은발이 보였다. "난, 당신의 치료를 맡게된 일루티온 란사드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소를 짓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가 쓰고 있는 가면 때문에 실제 로 미소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접견실에는 이제 엘야시온과 마리스만 있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소문 퍼질 일이 없다는 말이로구먼."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그들은 지금 혐오감을 일으킬 만한 모습 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했습니다. 장미 궁은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데다 제 직속의 궁입니다. 그곳의 시종과 시녀들은 제가 직접 골랐으 니, 믿을만한 자들이고요... 시종과 시녀들에게 사정도 어느 정도 이 야기했으니 그들을 섬기는데 예의를 다할 것입니다." 엘야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스는 꼼꼼하고 섬세한 여자다. 아랫사람에게도 공평하고 상냥한 편이라, 존경받고 있었다. 역시 마리 스에게 이 일을 맡기길 잘했다. "그런데, 소녀의 건강을 돌볼 힐러는 괜찮은 자인가? 말했듯이 힐 러 라이트가 안 듣기 때문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어제, 시나가 쓰러졌던 것을 생각하고 말했다. 헌데 마리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엘야시온님... 그렇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습 니다. 지시하신 대로 약초와 탕약에 능한 힐러를 골라 몸을 돌보도록 했는데, 오늘은 그가 다이아몬드 더스트 때문에 입궁을 하지 못해 서... 하지만 어제 올라온 보고로는 아가씨의 몸에 별 이상이 없고, 상처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치 않아? 저번에 보고 이번에 보니, 그렇지 않아도 빼빼 마른 것이 반쪽이 됐던데 뭐가 대단치 않다고 하던가? 그자가 힐러 맞나?" "네? 저번에 보고, 이번에도 보셨다고요...?" 마리스의 의아한 표정에 가디엘은 자신이 말실수한 것을 눈치챘다. "아... 이번에 잠깐 보니 엄청나게 창백하고 말랐더라고... 로이카 라나 카이러스의 권능이 없어도, 능히 대기를 떠돌 수 있겠더군." 엘 야시온은 헛기침했다. "...하여튼!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 소녀는 아 주 신경을 써서 대해야 하네. 엘께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친절 히 하는 자를 복 주시지. 특히, 그, 나그네에게... 우리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거든." "네에... 알겠습니다. 저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궁 안에 상주하고 있는 힐러는 아무도 없나?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엘야시온 가디엘은 어제, 성소의 일을 생각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 만은 꼭, 힐러에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저어... 어제 엘야시온님의 전갈을 받고...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클로니아 세스틴께서 힐라토 레이서스님께 도움 을 요청하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저어... 그 분의 누이동생께서 힐 러를 하나 데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왕족의 힐러이니, 실례가 아니 될까 저어했는데... 힐라토님께서 쾌히 승낙해 주셔서... 그 힐 러를 불러, 오늘 하루 동안이라도 가서 진찰하도록 명했습니다." "아피네스의 힐러!" 엘야시온 가디엘은 아까보다 불쾌한 얼굴로 말 했다. "아피네스의 힐러라면, 오렌지 라이트의 여 힐러 말인가?" "네? 아, 아니요..." 마리스는, 엘야시온이 왕족들의 힐러에 대해서까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기억력을 존경했다. "힐러는 남자였습니다. 듣기로는 퀸 헤르가스님의 힐러 중 하나라 고... 스온 아피네스님의 여 힐러가 신병(神病) 때문에 힐라토로 돌아 갔기 때문에, 퀸 헤르가스님이 따님을 위해 대신 보내주신 힐러라 합 니다." 엘야시온은 생각하듯 말했다. "아... 그래? 이름이 뭐라던가?" "일루티온 란사드크라 했습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쓴웃음 지었다. "...능력이 뛰어난 자지." "아십니까?" "물론. 하온 하겐트의 추천으로 헤르가스의 힐러가 된 자. 예전에 하온 하겐트 집안의 힐러였던 자지. 하하..." 가디엘은 즐겁게 웃었 다. "퀸 헤르가스. 어리석은 모성애야. 아피네스를 그렇게 아끼다니. 제 남편이 죽은 후로 생긴 미련 때문인가? 하지만, 아피네스 같은 것 을 살려두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니, 힐라토가 그 모양이 되는 거지. 사람들이 몰린단 말이야. 썩은 고기에 파리가 꼬이듯. 레이서스는 너 무나 정이 많고... 하지만, 멀지 않았지... 후후..." "엘야시온님...?" 가디엘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라, 마리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엘야시온은 참을 수 없이 재미있다는 듯, 혼잣말을 하고 있 었다. "...아아... 전에 말한 엘야시온의 3대 의무 중 하나일세. 구두로 전해질 중요한 의무이지... 사실은 22년 전 즉시 처단했어야 하지 만... 연구를 해보고 싶었어... 그러므로 레이서스나 헤르가스가 고발 하지 않았던 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던 거야... 헌데 아니나 다를까, 꼬이더군. 재미있는 녀석들... 그들의 능력은 무척이나 뛰어나니까 그 냥 없앤다는 것은 아깝지. 암.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안 돼. 내 목적을 이루는데 수네드리온이나 이드렘나 녀석들은 우유부단하기 만 하고 아가트 성문법이니 뭐니 귀찮게만 하니까. 금의 엘야시온 아 스나엘님께 얽매여 있는 나로서는... 후후... 어쨌든 난 잘 해오고 있 지 않은가 말이야." 그러더니 가디엘은 웃음을 그치고 마리스를 보았다. "잘 듣게, 스온 마리스. 내가 금의 엘야시온에게 얽매였던 것처럼, 자네는 내게 얽매일 자니..." 그의 눈이 강하게 빛을 발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얼굴은 순간, 진지해졌다. "자네의 약혼자였던 클로니아 세렌시스... 그는 내가 죽인 거나 마 찬가지야. 내 실수로 그가 죽었어. 하지만 나는, 자네를 위하여 그리 고 온 엘야시온을 위하여 그들에게 복수를 하겠네." 내 친구 웨스로드를 위해서도. "나의 이런 의지를 막는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그것 이 운명이 되었든 아니면..." 엘야시온 가디엘은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쨌든, 난. 복수를 할거야. 그러니," 엘야시온 가디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클로니아 세스틴이 아피네스의 힐러를 권했다면. 이제부터 그 가 하는 말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나한테 와서 해 주게." 엘야시온의 엘 아이즈, 다이아몬드 같은 홍채가 빛났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은 마리스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네는 괜찮다는 걸 알아. 자네는 맡겨진 의무를 결코 버리지 못하는 자, 내게 복종하는 자니까... ...알겠나? 그러니 언젠가 자네 는..." 엘야시온 가디엘은 미소지으며 마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 손으로 직접, 자네의 적, 아피네스의 심장을 찌르는 거네. 그 애 때문에 자넨 자네의 약혼자와 헤어져야 했고, 마침내는 그를 잃 고 말았으니까... 그러므로 때가 왔을 때, 자네의 '의무'를 다하게. 망설이지 말고. 그리고 마침내 그때에... 자넨, 은의 엘야시온 마리엘 이 되는 걸세." 마리엘...? '마리스엘'이 아니고...? 마리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질문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피로와 우울함으로 지쳐있지 않으면 한없이 가벼운 장난기로 킬킬대곤 했던 엘야시온 가디엘의 눈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날카롭게 빛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충성을 다하게. 그걸로 족해. 자네에겐 뛰어난 능력을 바라지 않아. 그건 내 총애하는 하온 하겐트가 기꺼이 내게 바치는 것 이니. 참으로, 그가 없었다면 난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그레 웃었다. "나, 늙고 힘없는 엘야시온에겐 도와줄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필요 한데... 하하하..." 진찰은 어제보다 짧게 끝났다. 하지만 새로운 힐러는 어제의 힐러 보다 오래 머물러 있었다. 주로 그는, 시나가 상처를 언제 입었는지, 그 상처가 어떻게 이렇 게 금방 나았는지에 대해 물었는데, 매우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라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여러 가지 것을 이야기했다. 낯선 곳에서 뜻밖에 친절한 사람을 만나 기뻤다. 맨 처음, 그를 봤 을 때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마음을 여니, 차라리 편했다. '느낌'도 사라지고. "흠... 이렇게 금방 낫다니... 별로 깊은 상처는 아니었나 보군 요." 란사드크는 어제의 힐러와 똑같은 말을 했다. "힐러 라이트도 듣 지 않는 체질이라기에 어떤가 했더니... 뭐 약도 필요 없을 정도군요. 상처가 말끔하거든요. 그런데..." 그는 웃었다. "아가씬 너무 말라 서... 살찌는 약 같은 걸 먹어야겠어요." "그런 게 있어요?" 시나가 흥미를 갖고 묻자, 란사드크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조제해 드리지요." "원하죠...! 전 정말 살이 쪘으면 좋겠어요! 이곳에선 살이 약간 찐 걸 미인으로 치던데..." 시나가 얼굴을 찡그리는데 웃음소리가 났다. "하하.. 미인이요? 아 가씨도 못생기지 않았습니다. 귀여운 얼굴인 걸요. 그렇죠... 일반론 이 아닌 제 취향만으로 말하자면, 저는 아가씨를 미인이라고 말하겠습 니다." "어..." 뜻밖에 칭찬에 시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요..." "흠..." 그는 시나를 응시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렇지... 상당한 미인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더 마음에 드는걸..." "네? 뭐라고요?" 잘 들리지 않아 되묻는데, 란사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쨌든, 난 상급자에게 명령을 받고 줄곧 궁금했거든요. 계급을 강등 당 한 일루티온이라... 계급까지 강등 당할 정도라면 상류 계급의 비위를 아주 철저히 거슬렸겠다고 추측했죠. 그리고 뭐, 솔직히, 그런 사람은 진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상급자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요." "어... 그, 그러셨어요?" "네. 당신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하하..." 시나는 당황했다. 뭐랄까... 굉장히 솔직하다고 할까, 본인을 앞에 두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이렇게 다 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란사드크는 시나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종속주에, 당신의 처한 위치... ...결국, 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한 거니까요. 인간이 타인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밝혀진 것 같습니다." "네에... 하하... 자, 잘된 일이죠." 훌륭한 종속주가 있고, 위치가 좋으면 죄가 용서되는 건가, 궁금했 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란사드크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나는 힐라토 인이죠." "네... 그러세요..." 문득, 레겜이 생각났다. 힐라토... 밤의 세계. "난, 이곳, 클로니아엔 아주 오랜만에 왔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없 고, 쓸쓸하군요. 이런 갑작스런 다이아몬드 더스트라 답답하기도 하고 요. 한 마디로 말상대가 그립다는 말입니다. 뭐, 오늘로서 진찰은 더 이상 없겠지만... 아가씨가 원한다면, 놀러오세요. 제가 묵고 있는 곳 의 위치를 알려 드리죠." 시나는 말을 더듬었다. "...에... 란사드크 씨. 무척... 그러니 까... 무척... 붙임성이 좋으시네요..." 란사드크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마음에 들었다니, 기쁘긴 하지만... 시나가 그래도 머뭇거리니까, 그가 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종속주 있는 여자를 찝쩍거리는 건 아닙니다. 단지, 아 가씨는 내 딸 같아서요." "...딸이요?" 시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볼 수 없어 추측할 수는 없지만, 그의 손은 젊은이의 손이었다. 거기다 목소리도... 시나의 시 선을 눈치챈 그가 말했다. "아... 손이요. 손이야 아직 생생하지만... 하지만 전 나이든 사람 입니다. 자, 보세요..."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가면을 벗었다. 시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가면 밑의 얼굴을 궁금하게 여기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이 드 러나자 매우 놀라고 말았다. 일그러진 얼굴... "화상이라도 당한 건가요... 아프겠네요." 뭉그러진 반쪽 얼굴을 보고 시나가 동정심 실린 목소리로 말하자, 란사드크는 갈색 눈을 따뜻하게 빛냈다. "괜찮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당한 상처니 이젠 아프진 않아요. 단지... 신병(神病)과 겹쳐서, 힐러 라이트로도 낫지 않아, 남들 보기 에 흉측한 얼굴을 갖게 된 것뿐이죠." 그렇게 말하는 란사드크의 눈과 입가에는 주름살이 많이 잡혀 있 어, 스스로 말한 대로 시나 아버지 나이 또래로 보였다. 그래서 목소 리와 그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그 건 또 그것 나름대로 괜찮게 생각되었다. 게다가 그에겐 사람을 끄는 어떤 면이 있다. 저 얼굴의 흉터만 없다면, 굉장히 멋졌을 텐데... 신 병이라니... "저... 신병이 뭐예요?" "후후... 글쎄요." 란사드크는 웃는 얼굴로 일어났다. 그래서 시나는 그가 웃을 때, 어떤 얼굴을 짓는 지 알았다. 그건 매우 아버지답고 친절한 얼굴이었 다. "...알고 싶다면, 이따가 차 마시러 오세요. 기다리죠..." 란사드크가 방을 떠났을 때, 예라우니와 그 가족들이 와글와글 튀 어나왔다. 시나가 말했다. "예라우니! 어디 있었어요? 시녀들이 왔다갔다할 때는, 테이블에 계속 있더니...!" 예라우니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브라우니 족은 힐러들은 상대 하지 않아." "왜요? 란사드크는, 그러니까..." 시나는 그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래요. 친절한 데." "허튼 소리! 힐러가?" 예라우니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친절한 건 너희들 사정이야, 시나 인간! 힐러들은 엉터리야! 브라우니 약을 만드니까!!" 브라우니 약... 순간, 드랫의 말이 떠올랐다. '호문클로스는 좋은 약재...' 시나는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라우니." 어쩜 호 문클로스처럼, 브라우니도 약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니 예라우니가 이 런 표정인 것도 이해가 간다. "브라우니 약은 끔찍해! 힐러는 멍청이야! 그 남자는 무서워!" 예라우니와 그 가족들은 투덜투덜 대며, 기분 잡친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왔다갔다 걸었다. 아주 작은아이들까지 이런 어른들의 행 동을 따라했는데, 그러다가 서로에게 부딪히자, 몹시 흥분하여 시끄럽 게 싸우기 시작했다. 시나가 억지로 뜯어말릴 때까지, 그들은 서로의 눈을 멍 투성이로 만들고, 입술을 터지게 만들었다. 진이 다 빠져, 테이블 위에 쓰러질 때까지 주먹을 휘두르며 투덜댔 는데, 확실히 란사드크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선물'에 대해선 묻지 않았던 것이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브라우니들을 보며 시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 다. 일루티온 란사드크라... 그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이상한 느낌 이 다시 한 번 더 들었다. 힘과... 그에 따른 무력감... 차라리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다 면.... (계속)================================================== 짧게라도, 자주 올리는 게 좋다고 하셔서... 나도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그냥 올립니다...^^; 추신...메일 주셔서 무척 감사드려요. ^^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15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1/29 23:09 읽음:1901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3 세계는 무시무시하게 추웠다. 클로니아 곳곳에서 푸르스름한 얼음의 정령들이 돌아다녔다. 후에 사람들이 말하길, 이때에 얼어죽어 엘의 품으로 간 사람이 너 무나 많아, 아마 엘께선 그때 당시 품이 몹시 시려, 얼어죽은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어쨌든 이 틀 이르게 찾아 온 추위는 회초리 같이 가혹하게, 클로니아 온 세계를 강타해 많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하얗게 깔린 안개의 지독한 아름다움 가운데, 죽음의 정령과 함께 바람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최하층의 사 람들이었다. 마노테온과 하층민이 너무나 많이 죽어, 슬픔과 아픈 마음 들이 바람의 길을 따라, 흘렀다. 루드랫은 창 앞에 서서 바깥의 침묵을 들었다. 밤새 내내 땅을 흔들 듯 무섭게 바람이 몰아쳤지만 이제 그 소리는 흔적도 없고, 다이아몬 드 더스트가 흐르는 소리는 그냥 고요했다. 바람 부는 소리에 전혀 잠을 자지 못했지만, 이 고요함은 더욱 기분 이 나쁘다. 루드랫은 인상을 쓴 뒤 돌아섰다. 고요함이, 여러 가지 생각을 만들었다. 바리스의 마을과 라단의 집... 심지어는 인딜 마노테오나와 마우르코트에 대한 생각까지도. 하지만 그는 그 생각을 억지로 떨쳐버리고, 방밖으로 나갔다. 루드랫이 시나를 찾아갔을 때, 시나는 옷장 앞으로 의자를 나르고 있었다. 헌데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 일을 하고 있어, 루드랫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시나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놓고, 의자 등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 다. "헉헉.. 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드랫을 엄청나게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다니 너무 하다고 불평하고 싶지만... 그건 나중에 할 일이고... ...드랫?" 시나는 힘이 몽땅 빠진 눈을 들어, 간절하게 애원하는 표정으로 말 했다. "...제발, 의자 좀 날라줘요." "..." 나르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린애라도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의자를 저렇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탁한다는 것은 무언가 문 제가 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찾기 어려운 건 아니군...'이라고 루드랫은 생각했다. 폭풍이 지나간 듯한 방안이었다. 커튼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 침대 위에 있어야 할 베개는 방구석에 홀쭉해진 채 뒹굴고 있고,(그 속에 있 어야 할 내용물들은 공중에서 온통 휘날리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시트는 둥글게 말려 벽난로 속에서 타고 있고, 벽난로 속에 있어야할 장작들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높다란 옷장 위에선 '찌익, 찌익'하는 소리가 나며 책장이 한 장씩 날리고 있었다. 여기 저기 상당한 책장들이 엉망이 되어 뒹굴고 있는 걸 보아, 벌써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루드랫은 손을 내밀어 지그재그로 떨어지는 깃털을 잡았다. 그 감촉 에, '가짜가 아니군...'이라고 생각하는 데, 시나가 말했다. "흑흑... 알아요. 안다고요. 내가 우습게 생각되겠죠? 하지만 아무 말 하지 말고, 의자 좀 날라줘요. 내 힘으론 못 나르겠어요. 아아... 저 책 은 어떻게 해서든 뺏어야 하는데... ...시트랑, 베개는 포기하더라도... 무 슨 웃기는 소리냐고는 제발 하지 말아요. 내 눈엔 방안이 꼭, 드랫네 집, 창고처럼 보이니까요. 그만하면 알겠죠? 끔찍하다고요." 루드랫은 방안을 다시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설마...! 우리 집 창고 도 이것 보단 정리되어 있었을 걸..." "무슨 소리예요! 직접 청소한 사람이 말하는...!!!" 시나는 반색을 했다. "드랫!!! 방안이 엉망으로 보여요? 정말로요?!" "그렇게 반가워하다니, 네가 이렇게 만들지는 않은 것 같군..." "당연하죠!" 그때 테이블 위로, 브라우니 요정 하나가 뛰어 올라왔다. 테이블 밑 에서 다른 베개의 깃털을 잡아 뽑고 있던 예라우니였다. 예라우니는 있는 힘껏 배를 내밀더니 쿡쿡 대며 웃었다. "호-? 뭐야? 우리가 보여? 이 남자는 시나 인간의 가족인가 보지? 호-?" 다른 브라우니들도 얼굴을 내밀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호-? 호-? 시나인간의 가족이다!" 예라우니는 장난스러운 눈짓을 하더니 시나에게 말했다. "무슨 관계지? 아빠? 오빠? 남동생? 삼촌? 할아버지? 조카? 아들? 손자?" 예라우니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고 웃어도 되겠지만, 몇 시간 동안 이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웃을 기분은 전혀 나지 않았다. 시나는 매몰차게 말했다. "손자일 리가 없잖아요, 예라우니!" 하지만 예라우니는 시나의 차가운 태도에도 상관없다는 듯, 뻔뻔하 게 말했다. "호-? 그래? 그렇다면, 혹시 이 남자는..." "시나 인간의-" 예라우니가 목소리를 높이자, 브라우니들이 합창을 했다. "남편이구나-!!" 그리고 나서 방안에, 아까보다 두 배나 되는 깃털, 두 배나 되는 찢 어진 책 조각, 두 배나 되는 걸레가 된 커튼, 두 배나 되는 재가 된 시 트 가루가 날아다녔다. "남편--! 남편--!! 시나 인간의 남편--! 소문을 퍼뜨려-! 열 두 세계 의 형제들에게-! 나가자! 소문을 퍼뜨리자! 동네방네 퍼뜨려! 나무 구 멍 속에 다람쥐, 이끼 밑의 두더지도 찾아가자고!" "예, 예라..." "나가자! 소문을 퍼뜨리... 캑-!!" 목청 좋게 브라우니들을 선동하던 예라우니는, 그러나 그 끝을 맺지 못하고 방구석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예라우니가 떠들 동안, 방안을 둘 러보던 루드랫이 테이블 밑에서 깃털이 2/3정도 남은 베개를 찾아내, 예라우니를 그것으로 그야말로 인정사정 두지 않고 후려친 것이다. 시나가 놀라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작은 인간을 그렇게 세게 치면 어떡해요! 죽었겠어요!!" "설마." 루드랫은 예라우니가 기절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브라우니는 인간이 아닌걸. 이들은 요정이야. 그것도 한 발을 악마 의 고리에 집어넣고 있는 장난꾸러기 요정. 그러니 돌이나 도끼로 후 려친다고 해도 브라우니는 안 죽어. 특별한 방법이 아니면 말이지..." 루드랫은 예라우니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다른 브라우니들은 루드랫 의 그런 행동에 한층 더 난리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힐러! 오크! 식인꽃! 브라우니 먹어치우기! 악당! 힐러! 힐러! 힐러!" 하지만 루드랫은 그런 그들을 싹 무시하고 매우 험악한 얼굴을 지었 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험악한 얼굴이었다. "자아, 이제 브라우니를 잡았으니 어떻게 할까? 역시, 비단 실로 일 곱 번 감아, 모래 속에 파묻은 뒤, 칠일 후에 꺼내서 삶아 먹는 게 낫 겠지?" 시나가 그 말을 듣고 입을 벌리는데, 루드랫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예라우니는 몸을 부르르 떤 뒤 눈을 뜨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귀가 축 쳐져 있었는데, 그는 그 귀만큼 쳐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삶아 먹지 말아 줘. 원하는 선물을 줄게. 장난은 안 칠 거니 까. 정말이야..." 예라우니가 잡혔기 때문에 다른 브라우니들도 귀가 쳐져서 자기 우 두머리를 따라 훌쩍훌쩍 울었다. "장난은 안 칠 거야. 정말이야." 루드랫은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새장이 필요해, 브라우니. 네가 들 어가서, 시나가 이 방을 떠날 때까지, 즉 너희들이 이 방을 떠날 때까 지 나오지 못할 새장. 선물은 그게 좋겠어." "훌쩍... 알았어." 예라우니는 기가 완전히 죽어, 방 주인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얼마 후, 시나는 예라우니가 들어있는 황금 새장을 앞에 두고 루드 랫에게서 브라우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예라우니를 제외한 다른 브라우니들은, 루드랫의 명령으로 열심히 돌아다니며 방안을 그 전처럼 복구하고 있어서, 시나는 한 시름 놓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설 명을 들었다. 루드랫이 말한 바로, 이 요정들은 일년 대부분을 숲이나 산에서 지 내지만 어떤 시기가 오면 인간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는데, 그때 집 주인에게 답례로 '선물'이라는 것을 주게된다고 한다. 이 선물이라는 것은, 물론 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요정들의 말 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란다. 그들은 재미 삼아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똑같은 단어라도 자기들 특유의 방식으로 뜻 을 바꿔 쓰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선물'이기 보다는 '소원'이라고 해야 적당한데... 이때 소원 은 크지도 작지도,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것. 즉, 너무 큰 소원은 안 되 고, 너무 시시한 소원도 안 되고, 너무 기간이 짧게 걸려도 안 되고, 너 무 기간이 길게 걸려도 안 된다. (그러므로 보통 시골 가정집에서는 이 런 브라우니들이 들어오면, 온갖 허드렛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게 상례라고 했다.) 시나가 장갑이나 목도리를 주문한 것은, 단기간에 들어 줄 수 있는 선물이니 안 되고, 방금 '새장'같은 것이야 브라우니를 어느 기간동안 한 자리에 가둬 놓는 소원이므로 브라우니의 규칙에 적합하다는 말이 었다. 새장이든 철장이든 브라우니를 물리적으로 가둬놓는 것은 불가 능하니까, 브라우니 스스로 새장에 계속 마법을 걸어, 자신을 가둬놓게 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선물'은 브라우니를 발견한지 한 나절 안에 말해야 하 는데... 그 이상 시간이 지나가면, 브라우니는 더 이상 '선물'을 주겠다 는 말도 안 할 뿐더러, 완전히 작은 폭군이 되어 장난을 치며 돌아다 니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폭군'이라는 말에 시나는 강력히 공감했다. "정말 고생했어요. 방안은 점점 엉망이 돼가지... 시녀를 불러서 하소 연하려고 하면, 하고 싶은 말이 아닌 엉뚱한 말만 나오고. 더구나 시녀 들은 방안이 엉망이라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더라고요." "...브라우니는 마법을 사용하니까. 그것 보단 브라우니가 어떻게 왕 궁엘 들어온 건지, 그게 더 이상한걸. 왕궁엔, 몬스터는 물론이고 이런 종류의 불청객을 막는 여러 가지 결계가 쳐져 있을 텐데. 더구나 브라 우니들 스스로도 왕족 같은 능력자들을 싫어하니까, 왕궁엔 얼씬도 안 하는데. 갑작스런 기후 변화 때문인가..." "브라우니들이 능력자들을 싫어해요?" "응? 아... 순례자들이나 예외가 될까... 힐러는 물론이고, 아티스트도 싫어해서, 그런 능력자들이 많은 이런 도시에서는 매우 드문 것이 브 라우니야. 이들은 시골에서나 흔한 요정이라고. 그리고 시골 사람들은 브라우니 다루는 법을 아니까 브라우니가 들어오면 일손을 도와줄 요 정이라고 오히려 귀히 여기지." 루드랫은 약간 웃었다. "그나저나 브라우니를 다루지 못해서 골머리 앓는 사람은 몇몇 봤지만... 너같이 브라우니에게 철저히 당한 사람은 처음 봤어.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소문을 퍼뜨린다고 위협 하는 브라우니라니... 바리스 사람들이 봤으면 분명히 한심하게 여겼을 걸. 바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아주 아이라도 브라우니 다루는 데 명수..." 루드랫은 바리스에 대한 말을 하다 말았다. 시나가 말했다. "바리스요?" 그러고 보면 그들은 아직 바리스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시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늦었지만... 바리스 일은 유감이에요. 무척 상심했겠죠. 오래 살던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돼서... 힘내세요. 거기엔 잠깐 밖에 있지 않았지만, 그분들은 무척 친절했는데. 그렇게 돼서 나도 무척 마 음이 아파요." 루드랫은 시나를 불가사의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겨우 한마디 중 얼거렸다. "...고마워." 루드랫은 시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그는 헛기침했 다. "브라우니들이 궁 안에 소문을 퍼뜨리기 전에 잡아서 다행이야. 브 라우니들이 퍼뜨리는 소문은 굉장히 지독하니까. 그 보다 지독한 것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그대로 믿는다는 점인데. 지독하면 지독할 수록, 허황하면 허황할 수록... 놀랍게도 그대로 믿지. 하지만 브라우니가 소 문을 퍼뜨린다고 협박하는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지나, 방 주인하고 상당히 친해져 있어야 하는데..." "친해졌는데, 지독한 소문을 퍼뜨려요?" 시나는 못 믿겠다는 목소리 로 말했다. "친해질 수록, 예의도 없어진다는 말이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브라우니들은 네게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친근감. 좋은 낱말인데... 하지만 드랫, 이 경우는 날 우습게 봤다고 하는 게, 정확한 말 같은데..." 루드랫이 아까처럼 웃었다. "우습게 보기도 했겠지. 내 설명을 잘 이 해한 것 같아, 기쁜데." 시나는 투덜댔다. "요정들처럼, 두 가지 언어로 말하지 말아요! 누구 한테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뜻으로 단어를 선택하라고요!" "그러니까. 요정들은, 널 우습게 봤던 것 같아." 그래서 시나는 예라우니가 새장의 창살을 덜컹덜컹 두드리며 말을 걸었을 때, 예라우니를 쫙 째려봤다. "..왜요?" "저기, 날 풀어 줘. 응? 내가 나가면 방을 더 깨끗이 치울 수 있을 거야. 그 외에도 더 좋은 물건들로 방을 채워줄게. 응?" 하지만 이것엔 루드랫이 대신 대답했다. "안 돼." 예라우니는 하얀 눈썹을 세웠다. "시나인간의 남편!! 너하곤 상관없 어!! 이 방의 주인은 시나인간이야!!" "맞는 말이군. 하지만 난 널 볼 수 있거든." "훌쩍.. 훌쩍... 시나인간의 남편님... 제발 풀어줘요. 계속 이 새장에 만 있으면, 난 콱 죽어버릴 거야. 브라우니는 이런 좁은 곳에선 못 살 아. 훌쩍... 훌쩍..." 시나가 인상을 썼다. "...불쌍한데요. 드랫 말대로 라면, '선물'을 받 았으니, 방주인 말에 잘 따를 것 아니에요? 그렇다면 풀어줘도..." "브라우니 우두머리를 풀어준다면 좋기야 하겠지. 이렇게 실수 복구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 새로운 것도 부탁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들은 이미 널 우습게 보기 시작했고... 선물도 '새장'외엔 바랄 수 없게 되었지. 헌데, 거기서 풀어준다는 것은 선물을 포기한다는 뜻인 동시에 이들에게 몇 배로 시달릴 것을 각오하겠다는 뜻이야. 그러니 절대 풀 어주면 안 돼. 다시 한 번 풀려나면 이번엔 잡기도 힘들어 질 테니까. 사실, 브라우니를 이렇게 맨 손으로 잡는다는 건 브라우니가 방심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야. 확실히 이 놈은 널 굉장히 우습게 봤나 봐." 루드랫이 요정들의 언어를 버리기로 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래 서 시나는 '하하' 웃었다. 루드랫이 말했다. "흠... 브라우니에 대해선 별로 불쌍하게 여길 필요 없어. 말했듯, 물 리적으로 브라우니를 가둬 놓을 순 없어. 그러니까 브라우니가 원한다 면 지금이라도 어디든 갈 수 있어. 사람들에게 장난치려는 목적만 아 니라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예라우니가 루드랫을 보고, 화를 냈다. "힐러! 힐러! 힐러! 악당!!!" 시나는 그 모양을 보고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휴우... 골치 아파. 왜 하필 브라우니가 내 방으로 왔을까." 브라우니는 한 번 방을 정하면, 아무리 먼 곳에 갔다 버려도 다시 그 방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그냥 내버릴 수도 없고... 이들과 내내 같 은 방에 있어야 한다니... 시나는 아직도 커튼 조각을 잇거나, 흠집 난 가구를 고치고 있는 브 라우니들을 보았다. 찢어진 커튼조각을 갖다가 서로 이으면 찢어진 적이 없다는 듯, 원 래대로 돌아가고, 불타버린 시트의 재를 모아 거기에 침을 뱉고 주위 를 뛰어다니나 싶더니, 재들이 원래의 시트로 돌아왔다. 가구의 흠집 난 곳도 침을 뱉어서 열심히 문질러 고쳤다.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 나, 무턱대고 손 한번 휘두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행동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쨌든,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듣기만 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브라우니들이 이번엔 갈기갈기 찢어진 책 조각을 모으는 것을 보고, 시나는 마침내 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신데렐라 같아요." 예라우니가 온갖 애원하는 것을 다시 거절하던 루드랫이 말했다. "...신데렐라? 그게 뭔데?" 시나는 눈을 빛냈다. "신데렐라를 몰라요? 난 그 이야기를 무척 좋 아했어요! 계모한테 구박 당하던 어떤 여자아이가, 요정 때문에 무도회 에게 가서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진다는 동화인데...! 난 한때, 그 이야 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나한테도 요정이 오길 무척 바랬죠. 무도회에게 가서 왕자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해 서 말이죠...!" "왕자님..?" 루드랫이 미심쩍게 말하자, 시나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 다. "아, 물론... 이건 아주 어릴 적 이야기죠. 그 후로, 요정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실망을 해서, 다시는 그런 허황한 이야기 같은 건 안 읽었어요. 동화든, 소설이든, 영화든... 현실을 소재로 한 것 이 아니면 절대 싫었으니까." "요정이 없다는 것을 알다니?" 예라우니가, 징징대며 새장을 흔들었다. 시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그러니까 요정이 없다고 믿었던 건 또, 예전 이야기네요... 음.. 그럼, 신데렐라는 이쪽 세계 사람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지만..." 루드랫이 말했다. "무도회에 가서 왕자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 어 릴 적 소원이라면 잘 됐군... 그러고 보니, 마침 그 이야기를 하러 왔는 데... 생각지도 않았던 브라우니 때문에 시간이 꽤 지났어. 자 이걸 받 아." 시나는 엉겁결에 루드랫이 주는 은색의 열쇠를 받았다. "이게 뭔데요?" "왕궁, 의상실의 열쇠." "이걸 왜 내게?" "엘야시온님께서 오늘 저녁에 있을 무도회에 너와 내가 참석해야 한 다고 하시더군..." "무도회요?" 시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무도회엔 왕족들도 참석할 테니... 왕자 님도 물론 만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군. 가장 무도회라고 하셨으니." 그러면서 루드랫은 여기 들어온 처음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가 안내해 줄 거야. 의상실에 가서 오늘 저녁에 입을 옷을 고 르도록 해. 잘 모르겠으면 시녀에게 묻도록 하고.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에 널 데리러 오지.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도록 해." (계속)================================================== 버급니다. (--;) 성소에서 엘야시온 가디엘의 머리카락은 은색이 아 니라, 청색이었습니다. 츠츠... 왜 머리카락 색까지 덩달아 변하는 겨...(--;) 어쨌든, 오늘도 올렸습니다. 음하하...^^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23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02 22:56 읽음:2071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4 그리고 '그때까지'가 되었을 때, 시나는 고뇌 어린 얼굴로 거울을 보 고 있었다. 굉장히 멋진 드레스... 시나가 왕궁 의상실에서 고른 것은 길고 멋진 치마의 '공주님형 드레 스'였다. 왜 그런 것을 골랐냐 하면, 시나의 취향은 그런 것이었다. 리본이 적당히 달리고, 주름잡힌 레이스에... 가슴도 약간 파이고. 의상실 담당 시녀가 해준 설명으로 이것은 약 300년 전에, 어느 다른 세계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의 옷이라는데... 시나가 보기에는 마리 앙투 아네트가 입던 옷이 바로 이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여성스러운가! 거기다가 의 상실에 있던 가발까지 뒤집어쓰니, 긴 분홍색 머리에...(사실 시나는 셰리카의 분홍색 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참 멋지긴 한데... 시나는 망설이다가 옷 입는 것을 도와준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지나치게 리본이 많은 것 같죠?" 시나 뒤에 서 있던 시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시나는 거울 속을 뚫어져라 살폈다. "아님, 붉은 색 드레스에 이 분홍색 머리는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 지 않아요? 역시, 아까 그 은색 가발로 할 걸 그랬나... 아님, 밀 빛 머리칼의 가발도 괜찮았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시녀는 별수 없이 시나의 문제점을 슬쩍 띄워주었다. "...그러니까, 아가씨... 제 소견으로, 아가씨의 취향은 몹시 고상하 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니까,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러니까, 음... 그 옷은 아가씨께 약간, 큰 것 같은데요." "...리본이나, 가발 때문이 아니라요?" "...네. 아무래도." "...알겠어요." 시나는 시무룩한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 의자에 풀 썩 앉았다. 그러자 큰 리본으로 된 어깨 끈이 한쪽 어깨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 는데, 곱슬거리는 분홍색 머리칼 때문에도 그렇고, 그 자신의 분위기로 도 그렇고, 어깨가 드러났는 데도 전혀 안 야해 보인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특기할만한 점이었다. 그 사실을 자신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시나는 투덜대며 어깨 끈을 다시 어깨 위로 올렸다. "...쳇!! 내가 글래머의 미인이 아닌 게 내 탓이냐고!! 에잇!" 그리고 시나는 다른 쪽 어깨로 흘러내린 어깨 끈도 신경질적으로 올 리고, 나중에는 아예 옷 앞섶을 여며 쥐고 이마에 한 쪽 손을 대고 고 민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간단히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시나의 꿈 은 이런 신데렐라가 입는 것 같은 드레스를 입어 보는 것이었다. 지금 이 아니라면 나중엔 절대 이런 드레스를 못 입어본다. 계속 칙칙한 가 죽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면... 또 교복에, 아 님 바지. ...어린 시절의 꿈은 정말로 매우 포기하기 어렵다.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어, 지금 의상실에 가면... 이것과 비슷한 디자인에... 이거보 다 작은 사이즈의 옷은 없을까요?" 시녀는 한참 침묵하다가, 애써서 말했다. "...그러니까.. 아가씨. 아 가씨는 키가 훤칠하신 데, 그것보다 작은 사이즈의 옷을 입으시면... 저어... 옷 길이가 짧아서... 물론, 허리 부위나... 가슴 부위는 맞겠 지만....." 허리... 가슴...! 마침내 결정적인 말이 나오자, 시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져 울고 싶 었다. 흑흑.. 내가 글래머 미인이 아니게 내 탓이냐고...!! "...닥쳐요!" "네?" 시녀가 놀라서 물었다. 시나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 넬리한테 한 말이 아녜요. 그냥, 이 방에 있는 누군가에게.." 정확히는 황금 새장 둘레에 모여 앉아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브라우니 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시나는 치마를 거머쥐고 벌떡 일어났다. 예라 우니는 또 놀리기 시작하고 있고, 시간은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아무튼 이 옷 갖고는 안 된다. 시나는 의상실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왕궁 의상실은 무척 거대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 끝에서 저 끝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런 큰 방 가득, 옷들이 들어 차 있었다. 이렇게 많은 옷을 시나는 백화점 이외에선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이곳 에 있는 옷들은 하나, 하나가 다 다른 모양과 다른 색의 옷으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낮에 설명을 들으니, 몇 천년에 이르는 왕가의 옷들을 보관해 놓은 장소가 이곳이라고 했다. 어떻게 옷을 몇 천년이나 보관할 수 있는 건 가, 놀라워했지만, 시녀의 설명으론 이 옷들 하나 하나 '프로텍트 아트 '가 걸려 있다고 한다. 보호 마법이라... 그런 것을 입었다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했지만, 루드랫의 후드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는 옷들이었다. 단지 '낡고 빛 바랜'이라는 말을 쓸 수 없고, 옷들이 새 것처럼 깨끗 하고 빛난다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이상하게 느껴질 뿐. 그런 가운데 시나는 자기 몸에 맞을 만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시나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옷을 고르고 있었지만, 아까만큼 많은 사 람들은 아니었다. 넬리는 저쪽에서 시나가 원하는 스타일(리본 많고, 레이스도 있고, 여자답고 예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눈이 핑핑 돌만큼 예쁜 옷들이 많은데... 이런 것을 입어볼 수 없다 니, 슬프다. 조금만 시간이 많았더면... 내가 가진 조건이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이렇게 옷이 많으니 분명 시나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옷도 있을 테고... 훨씬 더 예쁜 옷을 고 를 수 있을 지 모르는데... 시나는 즐비하게 늘어선 옷들 사이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장식이라고는 별로 없는, 가죽과 모피로 된 스타일의 옷이 있는 구역까지 왔다. 이런 것은 절대 시나의 취향이 아니니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볼까 생각하고 뒤돌아서는 순간, 시나는 눈에 번쩍 뜨이는 옷들이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하늘하늘 거리는 재료로 만든 옷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비록 레이스나 리본은 아니었지만, 입으면 어깨부터 뒤로, 리본 모양으로 묶 게 되어 있는 스타일이었다. 이거라면 어떻게 몸매도 가려주고... 게다 가 언뜻 보기에도 '길이'가 길어 보인다! "와!" 시나는 감탄사를 터뜨린 뒤, 그곳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을 몇 벌 골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임시로 마련된 옷 갈아입는 곳으로 갔다. 넬 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입었다가 생각보다 안 예쁘면 도로 갖다놓을 참이었다. 시나는 마리 앙투아네트 드레스를 벗고, 아쉬운 눈으로 그것을 쳐다 본 뒤... 조심스럽게 갖고 온 옷을 입었다. 입는 법을 몰라 좀 고전하긴 했지 만, 그럭저럭 모양을 갖추고, 거기에 걸린 거울을 통해 자기 모습을 보 았다. 오! 시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이거 괜찮은데!! 멋지다!! 하의가 바지 모양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여자답고 예쁘다. 이 천도 감촉이 참 좋은 데... 이 뒤에 리본만 제대로 맨다면... 넬리..! 넬리!" 시나는 자기가 찾아낸 것에 흥분이 돼서 넬리를 부르며 튀어나갔다. "이것 봐요!! 이것, 예쁜 옷이죠? 등뒤에 리본 좀 매 줄래요?! ... 어? 드랫!" 어느새 루드랫도 거기 와 있었다. "시간이 됐는데, 방안에 없어서... 한 참을 기다리다가... 응...?" 넬리는 시나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아가씨!" 시나는 두 사람의 놀라는 표정을 번갈아 보다가 기쁘게 웃었다. "이 옷 나한테 잘 어울리지 않아요? 예쁜 옷이죠?" "자,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아가씨... 하지만, 그건... 저어... 아 가씨는 여자다운 옷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여자답잖아요?" "하지만..." 루드랫은 묘한 눈초리로 시나를 보았다. "어떤 근거로 그 옷을 여자 다운 옷이라고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뭐, 남장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어차피 가장 무도회니까. 하지만, 약간... 획기적이군.. 하고많은 시대와 세계의 여성복을 놔두고, 남성복이라 니..." 물론 시나는 충격 받았다. "엥!! 이게 남성복? 이렇게 하늘거리는 옷이?! 말도 안돼요!! 어떻게 이런 게..!!"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150년 전인가... 카이러스에서 유행하던 남성복 스타일이었지..." 어느새 뒤에 와 있던 의상실 담당 시녀가 말했다. "기억이 정확하십 니다. 루이트 님. 저 길게 늘어진 천들은 '바람'을 상징하는 것들로, 왕족들이 가진 바람의 능력과 모양을 상징하는 것들이죠... 그 시대의 여성복으론 이런 것이 있습니다만..." 그러면서 시녀가 가리킨 옷은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가슴이 더 깊게 파이고, 타이트한 옷이었다. "...그 옷을 고르셨다면, 그것에 어울리는 액세서리와 신발과, 가발 도 보여드리죠.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젠 이곳 문을 닫아야할 시간이 라..." "아앗!! 잠깐 만요!!" 세 사람의 눈이 시나를 향했다. "나, 나는 저어...!!" 시나는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남자 옷'이라면 싫었다. 시나의 꿈은 '드레스'였다. 시나는 억지로 웃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 옷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난 하늘하늘 거리는 건 거치적거려서 싫으니까... 그래요! 난 이런 게 좋아요!" 그리고 시나는 '마리 앙투아네트' 구역에 가서 리본과 레이스가 많은 푸른색 드레스를 들고 왔다. 루드랫이 그 옷과 시나를 번갈아 보더니, 의심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여기서 한 번 입어봐. 그대로 들고 갔다가 안 어울리면..." 결과가 어떨 지 아는 넬리가 '안타깝게' 말했다. "아가씨..." 하지만 시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절대, 어울려요! 이걸로 가져가 겠어요!!" "그럼, 여기서 입어봐." 시나는 루드랫의 눈을 피했다. "싫어요. 부끄러우니까. ...내 방에서 입어 볼 거에.. 아앗!!!" 시나는 루드랫에게 옷을 뺏겼다. "돌려 줘요!!" 하지만 루드랫은 옷을 쫙 펼쳐들고 그 옷을 아래위로 보고, 시나를 아래위로 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이 옷은 너한테 안 어울려." "하지만, 난 이런 옷이 좋아요!" "옷은 좋아하는 걸 입는 게 아니라, 잘 어울리는 걸 입어야 해." "잘 어울릴지 모르잖아요!" "절대, 안 어울려!" 시나는 너무 분한 나머지, 그만 자기 무덤을 파고 말았다. "뭐예요!! 그걸 루드랫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 옷 입은 거 봤어 요?!! 근거를 대 봐요!!!" "넌 이 옷을 입기에 가슴이 너무 빈약하니까!!!" "...아니.. 이런.. 엘이시여." 상당히 나이든 시녀인 의상실 담당 시녀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넬리는 상당히 착한 시녀였기에, 쩔쩔매며 변 명해 주었다. "...그, 그러니까... 두 분은... 종속주와 종속자 관계이 십니다." "아, 그, 그렇군." 시나와 루드랫은 묵묵히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얼굴에는 파티용 가면을 쓰고 있었고 시나는 연노랑 빛의 긴 가발을, 루드랫은 은색의 긴 가발을 쓰고 있었다. 각 머리 모양은 시나와 루드랫이 입고 있는 의 상에 맞춘 것이었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호의 어린 눈으로 그런 시나와 루드랫을 돌아보았 다. 그 모양을 본 시나는 입을 삐죽댔다. 흥! "...좋겠네요, 루드랫은." 루드랫이 시나를 흘끔 봤다. "아주 멋진 '남자' 옷을 찾아 입어서 말이에요. 그건 어느 시대 어느 세계 왕족 옷이에요?" 루드랫은 하얀 무명칼라와 소매가 달린 검은 색의 단조로운 옷에, 검 은 망토를 두르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루드랫이 말했다. "300년 전부터 카이러스의 귀족들이 즐겨 입던 옷 이야. 요즘도 입는 옷이고." 시나는 코웃음쳤다. 멋있다든지, 잘 어울린다든지 하는 칭찬 따위 해 줄 마음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그거 참, 아쉽네요. 왕족들 옷을 입죠? 루드랫이라면, 왕족들 옷도 훌륭하게 소화했을 텐데. 왜, 그 공주님 드레스 말이에요." 루드랫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시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렇게 생각 한다니, 의외로군. 정말 나한테 드레스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시나는 투덜댔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루드랫이 진지하게 말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옷 고르는 감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군. 나중에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진지 하게 나눠보고 싶은데." 시나는 마침내 화를 벌컥 냈다. "농담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말도 안 돼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지금 화나 있다는 거 몰라요?!! 어떻게 사람들 있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요!!" 루드랫이 다시 걸으며 말했다. "근거를 말해 보라며. 거기서 말 빙빙 돌릴 시간 없었어. 요점을 말하는 수밖에." 시나는 자기 가슴을 가리고 충격 받은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아~ 그래요? 그게 요점이라 미안하네요! 하지만, 그 당사자인 내겐 전혀~ 마음 쓰지 말아요!! 그런 말을 들었어도, 하나도 충격 안 받았으니 까!!" 그리고 시나는, 그 카이러스의, 바람을 상징하는지, 거치적거림을 상 징하는 지 모를 천 조각을 펄럭이며 화난 표정으로 앞서 걸었다. 루드랫이 그쪽 방향이 아니라며 잡아끌 때까지. 무도회는 벌써 시작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은 끝간데 없이 넓었고, 수 많은 초와 그 외 '전기구'라고 불리는 것들로 낮처럼 환하고 화려했지 만 시나는 무척 기분이 비참했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헌데 무도회장에 있던 여자들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반색 을 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약이 있으신 가요? 괜찮다면, 당신과 첫 발을 떼고 싶어요." "...?" 시나는 가면 밑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 여자는 시나보다 키 가 작으나 무척 통통한, 오렌지 색 머리칼의 귀여운 아가씨로 온통 리 본과 레이스로 꾸미고 있었다. 부럽게도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인데... 근데 이 여자가 왜 나랑 첫 발을 떼고 싶다고 하지? 부축해달라는 의미인가? 멀쩡해 보이는데... 하지만 겉보기와 다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나가 '좋다'고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갑자기 루드랫이 시 나의 팔을 잡았다. 시나는 그를 째려봤다. "뭐예요! 놔요! 저쪽에 가서 다른 여자들하고나 놀아요!!!" 루드랫에게도 여러 여자들이 다가와 이야기 거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 다. 그 쪽에 있던 여자들은 지금, 시나와 루드랫을 무척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루드랫이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루드랫은 어 쩐지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글쎄... 내 종속자는 무척 관대하기도 한데... 첫 발을 떼는 일은 아무래도 너와 해야하는 게 내 의무라서.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첫 발을 뗀다'는 것은 '첫 춤을 춘다'라는 의미지. 난, 너와 첫 춤을 춰야 할 것 같아." 오렌지 색 머리칼은 다른 말은 다 관두고 단 한 단어에 숨을 들이마 셨다. "조, 종속자!!" 목에 뭐가 걸린 듯한 목소리라 시나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는데, 그 아가씨는 지금 쓰고 있는 붉은 가면이 무색해질 정도로 얼굴이 새빨 개져서 뒤로 물러섰다. "...나, 남자가 아니었어요?" "...!!!!!!" 이번엔 시나가 얼굴이 새빨개질 차례였다. '난, 여자예요!'라는 말을 해야하는 것만큼 화나는 일도 없는데, 다행스럽게도 루드랫이 그 말을 대신해 주었다. "내 종속자는 여잡니다."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자가 '남자인줄 알았어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도망가는 동안 시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서 말했다. "...뭔가 느끼는 거 없어요?" 그 전투적인 말투에, 루드랫은 한쪽 발에 체중을 싣더니, 팔짱을 꼈 다. 시나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고 있지만, 더 이상 '드레스'타령은 듣기 싫다. 루드랫은 피식 웃고 말했다. "느끼는 것. 아아... 있지. 춤을 싫어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여자를 상대로 춘다고 해서 춤이 쉬워지진 않아. 남자 쪽 스텝은 더 복잡하니 까." 시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평소에 시나는 폭력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 간만은 루드랫의 복부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차라리 진짜 남자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시나는 꾹 참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 때문에 큰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충분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잘 들어요!! 나는, 이런, 무도회에서까지, 남자로 오해받아야 한다 는 게, 정말, 지겨워요! 이건, 다, 루드랫 탓이에요!! 내가 드레스를 입겠다고 하는 데, 남자 옷을 입게 하고!!" 루드랫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참을성 있게 말했다. "몇 번이나 말 하지만, 이 옷은 그 멍청한 푸른색 드레스보다 훨씬 더 네게 잘 어울 려. 왜 그런 리본 과잉의 드레스를 좋아하는 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꼭 그런 걸 입고 싶다면, 내일 시간이 넉넉할 때, 한 번 더 의상실에 가서..." "관둬요!!" 시나는 주먹을 쥐고 몸을 떨었다. "하긴 뭐...!! 어차피, 난 춤도 못 추니까!! 드레스를 입던 남자 옷 을 입던 댁한텐 아무 상관도 없겠죠!! 의무감 때문에, 일부러 나랑 춤 춰줄 필요 없어요!!! 남자 같은 여자 애랑 춰봤자 웃음거리만 될 테니 까--!!!" 다음으로 시나는 주먹으로 루드랫의 배를 '퍽'소리가 나도록 쳤다. "...윽!" 꽤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맞는 순간 허리를 굽힌 루드랫은 아픈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긴, 친 시나의 손목이 더 저릴 정도니... 하지만 시나는 여전히 주 먹을 꽉 쥐고 떨리고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아팠으면 좋겠네요!! 댁한텐 완전히 질렸으니까!! 난, 찾지도 말아요!! 아까 보니, 여자들이 힐끔힐끔 보고 난리도 아니던데!! 그 여 자들하고나 놀아요!! 마리 앙투아네트 드레스 입고, 춤도 잘 추는 여자 들이랑!! 정말이지, 참을 수 없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리고 시나는 씩씩대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맙소사..." 루드랫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배를 잡고,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서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힐끔대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말다툼...'이라는 말에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뭘로 보다니?" 루드랫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잘 맞을 옷을 놔두고 줄줄 흘러내릴게 뻔한 옷을 입게 내버려뒀어야 한단 말인 가? 왜 저토록 화를 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가슴 때문에?" 하지만 그건 사실이잖는가? 루드랫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불가능이 다. '마리 앙투아네트 드레스'가 뭔지 알 수 없는 것만큼, 시나라는 여 자아이도 이해할 수 없다. 갑자기 왜 저렇게 살쾡이같이 구는 지, 다루기가 곤란할 정도다. 그 러니 이쪽이야말로, 머리 좀 식으라고 그냥 내버려두고 싶은 마음이 굴 뚝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시나는 이곳에 대해선 전혀 모르니... 그래서 루드랫이 혀를 차고, 시나를 쫓아가려고 하는 순간, 엘야시온 가디엘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루드랫은 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시나의 뒷모습을 보았지만, 무도회 장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춤추던 사람들까지도 그 자리에 멈춘 채 엘야시온 가디엘을 향해 허리를 굽혔고, 결국 루드랫 또한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직 한 생각-루드랫 같은 인간은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만으로 가득 차 복도를 걷던 시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무도회장을 나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무도회고 뭐고, 들어가자마자 여자에게 춤 신청 받은 것이 기가 막혀 서, 그리고 루드랫의 태도에 너무 분함을 느낀 나머지, 그냥 방으로 돌 아갈 작정이었는데, 분명 아까와 똑같은 복도를 걷는데도 눈에 익숙한 구름다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참, 이상하네. 이렇게 걸어왔으니까, 지금쯤이면 나올 때도 됐는 데...' 횃불이 늘어서서 타고 있는 긴 구름다리를 건너면 시나가 묵는 건물 이다. 그래서 아까 어림짐작으로 봐두었던 길을 따라 돌아가고 있는 중 이지만... 시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 복도는 눈에 익은 것 같으면서도, 낯설다. '맙소사. 왜 이곳을 왔던 곳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걸었던 걸 까...!' 분명히 길을 잘못 들었다. 중간에 계속 꺾어지는 복도가 있었으니 까... 화가 난 나머지 무턱대고 걸은 것이 실수였다. 게다가 이곳은 무언가 이상하다. 이 왕궁 어디를 가든 어느 곳이나 시종들이 있었는데, 이곳엔 그런 사람들도 없다. 보이는 것이라곤 복도 저 끝의 어둠과, 그 반대쪽 복도의 어두움 뿐... 횃불은 조용히 흔들리며 타고 있지만, 들리는 소리는 몇 겹이나 되는 창문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바람 소리가 들리는 창문 사이와 기둥 사이로는 그림들만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은 풍경화였고, 어떤 것은 제일로트 도서관에서 봤던 것 같은 천사의 그림인데... 밝은 빛에서 봤다면 어떨지 모르겠지 만, 횃불 밑에서 보니,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복도. 빛 바랜, 벽지... 시나는 몸을 떨었다. 무서움과 함께 한기가 몰려들 었다. 명치끝이 바싹 죄는 느낌이 너무 기분 나빴다. '...돌아가자. 확실히 이곳은 처음 와 본 곳이니까...' 시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억지로 웃고, 뒤돌아 서서 왔던 곳으로 걸 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도 낯익은 복도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걸을 때마다 새로운 복도가 나오는 느낌이다. 몇 번, '거기 누구 없어요?'라고 소리쳐 불러 보기도 했는데, 텅 빈 복도에 반향 되는 음성이 오히려 더 무서워서 곧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다가 꽤 넓은 복도까지 왔는데, 역시 이곳에도 출입문은 하나도 없고 그림만 즐비할 뿐... 그 복도까지 오자 갑자기 바람이 확 불어닥쳐서, 시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서 있었다. 수많은 초상화들. 모든 그림이 다 초상화로, 이곳의 그림 중 초상화 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뜻 봐도 수백 장은 될 듯한 초상화 들... 그것들이 차디찬 대리석 벽에 걸려 일제히 시나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눈길을 받는 순간, 갑자기 시나는 발 밑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왔던 장소. 언젠가 봤던 그림들.... 언제나 돌아오고 싶어하던 장소... 하지만, 이건 그냥 느낌일 뿐... 정말은 아닌 거다.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데쟈뷰(d j vu)... 하지만, 그 느낌이 너무나 격렬해 시나는 심한 공포에 질리고 말았 다. 어찌나 무서운 감정이 들었는지, 잠시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였 다. 시나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고, 절반 정도 겁에 질려 있었고, 옷 때문에 속을 썩이느라 저녁을 못 먹었고, 어디선가 들 어오는 바람 때문에 견딜 수 없이 추웠고, 스스로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다. 열 일곱이나 돼서 길을 잃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비참하기만 했 는데... 그렇게 초조해하며, 한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이 수많은 얼굴 들과 마주쳤다. 이런 어두움 속에 오직 횃불의 조명을 받아 떠 있는 무수한 얼굴을 본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다. 저 눈들이 시나 꿰뚫어 보는 것 같이 느 껴지는 건 시나의 혼자만의 착각일까? 갑자기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시나 안의 무언가가 커지고 있었다... 시나는 진정하려고 애쓰며 뒷걸음질 쳤다. 이곳을 빨리 떠나는 게 낫 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어떻게 이곳엘 오게 됐을까... 왜...? 차라리 그 무도회장에 있을 걸... 춤을 못 춰서 웃음거리가 되더라 도... 남자애 취급을 받더라도... 그랬더라면... 등을 돌려 떠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눈을 감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뜨고 있다고 해도, 초상화의 얼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시나에게 명령했다. '눈을 들어! 저걸 봐! 드디어 찾았다...!!' 눈을 감고, 바닥만 본 채,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 까... 하지만 시나는 원래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눈을 들고, 공허한 눈으로 목소리가 지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그 물체는 그 순간, 시나를 완전히 지배했 다... 시나는 뒷걸음치던 것을 멈추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무서움 따윈 사라지고 없었다. 시나의 눈은 오직 한 초상화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건 긴 세월에 지쳐, 위압감 돌고, 무거워 보이며, 우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초상화들과는 틀렸다. 그는 인간의 지식으론 결코 풀리지 않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생각 에 잠겨 있었고, 무심해 보였다. 다른 초상화들이 끊임없이 지상에 눈을 던져 살피며, 시간 때문에 뒤 틀리고 심술궂게 된 눈으로 시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어딘가 먼 곳 을 바라보며, 시나로서는 알지 못할 것을 희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나는 알았다. 그것은 그냥 한순간의 일일뿐이다... 이름을 부른다면, 그는 돌아본다. 저렇게 차가워 보이지만, 그는, 이름을 부르면 돌아본다. 시나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책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언 제나 시나에게 물었다. "자아, 오늘 이야기는 끝. 시나는 지금까지 들 려 준 것 중, 어떤 동화가 가장 좋니?" 시나는 밝게 웃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가장 좋아요. 무도회에 가 서 왕자님을 만나는 이야기..." 발견했구나...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 지도 몰라, 많이 헤맸지만... 언젠가는 꼭, 발 견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시나는, 초상화 앞으로 가서 그 밑에 쓰여진 글자를 읽었다.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클로니아 파이오니온Ⅰ세. 세렌시스." 시나는 그 이름을 되풀이해 발음했다. "...세렌시스." "세렌시스..." "세렌시스..." 시나는 눈을 감고, 그 이름을 불렀다. "세렌시스..." "세렌시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숲에 있었기 때문에, 아주 많은 것을 잃어 버려서... 내가 이렇게 그리워하는 당신이 누군지 잘 알지 못했고... 그래서 이렇게 당신의 궤적을 쫓아 이곳까지... "세렌시스..." 시나는 초상화에 이마를 댔다. 바람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렸다. 숲에서 들리는 바람소리. 기다림이 길어질 때, 바람을 불러서 그를 마중 가도록 했다... 시나는 슬프게 말했다. "...세렌시스. 어디선가, 당신을 본 것 같아요. 분명히... 그런데 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무슨 일인가 있었죠? 그렇지 않아 요...? 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 버려서... 언제나 머리가 아프고, 슬프지만... 그래도 가끔 당신을 생각했어요." 그건 맨 손으로 단단한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듯한 행위였다. 손가락 에선 곧 피가 흐르고, 손톱은 엉망이 되어 빠져 달아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이름, 말들, 노래... 잊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어느 땐 너 무나 괴로워서 차라리 모두다 잊어버리기를 바랬어요... 아무 것도 몰 랐던 그때로. 모든 것이 환상인 줄 알았던 그때로..." 시나는 천천히 눈을 떴지만, 그 은빛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바랬던 것은 사실," 시나는 이마를 그의 손에 대고 울었다. "다시 한 번 더 당신이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거였어요... 미안해요." 란사드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묵묵히 앉아서 난롯불을 보고 있 던 아피네스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더니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서 보기에서 격하게 몸을 떨고 있어, 마냐가 소리쳤다. "꺄악, 스온 아피네스님!!! 왜 그러세요!!" "헉.. 헉..." "스온 아피네스님...?" 란사드크 또한 주위의 눈을 의식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 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스온 아피네스..." 하지만 아피네스는 란사드크가 다가가자마자, 그의 소맷자락을 거칠 게 부여잡았다. "...제기...랄." "...!" 란사드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냐, 나가 있도록 해요." "시, 시키실 일이라도..." "없으니, 나가세요." "네.. 네..." 마냐는 란사드크의 권위에 복종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문을 닫 고 나가자마자, 란사드크는 가면을 벗고 험악한 얼굴을 지었다. "말을 너무, 더럽게 하는군. 공주님? 예전에 교육시킨 것을 잊었나?" 하지만 아피네스는 증오가 불타는 눈으로 란사드크를 볼뿐이었다. 언 제나 무표정했던 것에 비하면 놀랄만한 표정이었다. "...넌, 싫어. 꺼져. 그러나, 가. 가서, 죽여..." 란사드크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누굴?" 아피네스는 눈을 감고 몸을 떨며 말했다. "내 것... 내 것을 뺐지 못 하게 해. 가서, 죽여. 헉헉..."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통스럽게 말했다. "절대... 뺏기지 않을 거니까...!!" 란사드크는 혀를 찼다. "갑자기, 무슨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 거 냐!! 멍청한 계집애!!! 이런 것이 사이너스와 헤르가스의 딸이라 니...!! 사이너스는 그야말로 헛 짓을 한 거지!!" "...넌 재수 없어!!" 아피네스는 란사드크를 보며 욕설을 뱉었다. 란사드크는 자리에서 일 어나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못 말리겠군. 도미니온즈의 왕족이 저런 짐승만도 못한 정신상태라니... 흥! 잘 들어라, 아피네스. 네가 계집애가 아니었다면 당장 죽여 없앴을 거다. 아무리 헤르가스가 자기 목숨을 걸고 말리더라 도. 알겠나? 그러니..." "죽이라고!!!" "죽여!!!" 아피네스가 점차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고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눈 치 챈, 란사드크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는 수 없지." 란사드크는 오른손을 펼쳐 들어 그곳에 붉은 기가 맺히도록 만들었 다. 그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떨고 있는 아피네스에게 다가가 왼 손으로 그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마냐가 봤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이곳엔 마냐가 없다. 란사드크는 아피네스의 증오에 찬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피네스. 유감스럽게도 난, 샤일라테가 아니다. 넌 난동부릴 상대 를 잘못 골랐어." 그리고 란사드크는 오른손에서 빛나는 힐러 라이트를 그녀의 이마에 서부터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아피네스는 마치, 썩은 자루처럼 란사드크의 팔 안으로 무너 졌다. 란사드크는 그런 아피네스를 아무렇게나 들고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 았다. 아마, 며칠 동안은 잠만 잘 것이다. 그후엔 몸의 기능이 몹시 떨어 져, 깨어났을 무렵엔 복통으로 고통스러워하겠지만, 그건 란사드크가 알 바 아니다. 란사드크는 비웃는 낯으로 아피네스를 보았다. "천치 같은 계집애." 문득, 낮에 보았던 회색 눈의 소녀가 생각났다. 란사드크는 빙긋 웃 었다. "...그 여자 앤 꽤 마음에 들었는데." 그랬다. 정말로 너무나 이상할 정도로...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소년 같은 얼굴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매우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하지 못했다. 예 전에 무척 쉬운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일. 그래서 란사드크는 자리에 가서 앉아 곰곰이 시나에 대한 생각을 했 다. 사실, 오늘 내내 그는 시나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다. 시나를 위한 약도 이미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 약을 줘버리면, 더 이상은 말을 붙일 구실이 없어지는데... 정말로 찾아와 주지 않을까? 그런 다면, 참 좋을 텐데. '친구'같은 것이 된다면... 그런 다면, 참 좋을 것이다. 란사드크는 빙그레 웃었다. 루드랫은 아까부터 시나가 갔을 것 같은 방향을 따라 시나를 찾아 헤 매고 있었다. 하지만 시나의 방까지 가서 확인해 봐도 어디로 간 것인 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때, 결국 '그 복도'까지 와야했다. '초상화의 회랑'으로 통하는 복도. 무도회장과 이어지는 복도 중에 안 가본 데라곤 여기 뿐이다. 하지만 그 어두운 복도에서 루드랫은 잠 시,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어두운 안쪽을 보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과 함께, 피부가 오싹 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시나가 이곳으로 들어갔다면, 들어가서 찾아내야 한다. 이곳은 시종들이 잘 출입하지 않는 곳이니까... 루드랫은 어떻게 자신이 그런 것을 알고 있나,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시나가 사라진지 오래 됐으므로, 결국, 길게 생각하진 않았다. 따져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굳이 따지지도 이성적 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것이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어쩜 이 복도의 어두움 을 보는 순간부터, 루드랫은 무언가를 납득하고, 이상하게도 이것이 자 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루드랫은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그곳을 걸어가면서 루드 랫은, 이 오래된 복도가 어떤 손길처럼 점차 자신을 감싸고 있고, 그 결과로 자신이라는 존재가 현실에서 어긋나 떨어지고 있는 기이한 감각 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따뜻한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과거로의 방향(芳香).... 그 씁쓸하고 오래 된 향기에, 루드랫은 걸으며, 마치 또 다른 '얼음 의 숲'에 들어온 것처럼 점점 자기 내부로 침잠했다. 그래서 시나를 발견했을 때, 루드랫은 자신이 한치도 틀림없이 시나 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찾아온 것, 시나가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 는 것에 대해선 그리 놀라지 않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일이 있었던가? 루드랫은 가면을 벗고 한숨을 쉬었다. "...시나." 시나 또한 가면을 벗은 채 한 초상화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역 대 클로니아 왕족들과 그 가족들은 무표정하게 루드랫과 시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나." 루드랫이 다시 한 번 더 시나를 불렀을 때,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굉장히 힘들고 지쳐 보이는 얼굴로, 루드랫은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날 때리고, 기운 좋게 나가더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루드랫." 시나는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힘없이 웃었다. "...길을 잃었어요." 루드랫이 말했다. "...저런." 시나는 회상하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무척 화가 나 있었죠... 그래서 무턱대고 걸어, 이곳으로 왔는데... 그만 길을 잃은 거예요. 주위엔 인적도 전혀 없고... 무서웠죠. 여기 걸린 초상화들을 보고 더 무서워졌는데, 이 초상화를 보는 순간엔 기운 이 완전히 빠져서 그냥 여기에 앉아 있었어요." 루드랫은 시나가 기대있는 벽에 걸린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긴 은발에, 은색의 눈을 가진 남자. 루드랫은 그의 은색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쓰고 있는 써클렛, 검은 모피 옷, 기대어 앉아 있는 보 좌 등을 바라보았다. 시나가 루드랫을 보며 말했다. "저어...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루드랫?"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 루드랫은 빙그레 웃었다. "이 밑에 쓰여 있잖아." 시나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이름 말고... 혹시, 정 말로 이 사람을 본 기억이라든지... 뭔가 떠오르는 기억은 없어요?" 루드랫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러더니 그는 손을 내밀었다. "일 어나. 내가 보기엔 그다지 무섭지도 않은 초상화인데. 꽤 무서움을 타 는 체질인가 보군." 하지만 시나는 계속 앉은 채, 안타깝게 말했다. "아니... 내가, 여기 앉아 있던 것은 이 초상화가 제일 무서워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 루드랫은 눈을 찌푸렸다. "...무서워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시나는 루드랫의 손을 멍하니 보 았다. 그리고 곧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겠네요. 뭘 보고, 뭘 기대한 건지. 휴우..." 시나는 루드랫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일어나서는, 초 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나가 하도 열심히 바라보는 지라 루드랫 도 거기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목소리에 열기 를 담아 말했다. "루드랫.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 사람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루드랫은 빙긋 웃더니 씁쓸하게 수긍했다. "...아아. 그래. 흔한 얼굴... 특징 없는 얼굴이긴 하군." 전혀 뜻밖의 말에 시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루드랫을 보았다. "특징이 없다고요? 어디가요? 백 사람... 아니 천 사람 가운데 섞여 있어도 단 번에 알아 볼 수 있는 얼굴인데...!" 루드랫이 웃었다. "기억력이 좋은가 보지? 그런데도 길을 잃다니 무 척 이상하지만." 시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한 번만 봐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예요!!" 루드랫이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 번만 봐도, 절대 잊을 수 없다니, 왜?" 시나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 까, 난 이런 타입의 남자가 정말, 정말..." 시나는 루드랫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좋으니까.. 그러니까 실제 로 봤다면, 잊어버릴 리가 없죠. 루드랫은 어떻게 생각해요? 정말로 이 초상화를 봐도, 아무 느낌이 없어요?" 루드랫은 열심히 말하는 시나의 표정을 보고, 다시 초상화를 바라보 았다. 그러더니 곧 냉소적인 웃음을 띄웠다. "...과연. 이런 얼굴이 네가 좋아하는 타입이군. 그것에 대한 느낌이 라. 네 취향과 내 취향은 무척 틀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절실히 느 꼈다? 세 번이나 '정말'을 쓰며 강조할 정도니, 길거리 가다가 이런 사 람을 보면 말해주지." "루드랫..." 이젠 시나의 목소리에도 실망한 기색이 스며 나왔다. 그걸 안 루드랫 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뭘 기대하는 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난 이런 얼굴을 안 좋아해. 얼 굴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루드랫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 ...저, 표정. 저것이 마음에 안 들어. 저런 건 정말로..." 그러더니 루드랫은 이마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루드랫?" "아냐...." 혼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루드랫은 다음순간, 놀랍게도 무척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건..." 루드랫은 거의 경멸하는 표정, 그러면서도 매우 슬픈 표정을 지으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고귀한 왕은 언제까지나 초연한 표정으로 저곳에 앉아있다. "그건, 정말로 특징이 없는 마음... 이 사람은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 얼음의 왕. 그러므로 정말 그 이름 그대로... 그의 마음 또 한 얼음으로 돼있어서... 인간으로서 어떤 특징도 갖고 있지 않은, 그 래서 너무나도..." ....비천하고, 불쌍한 자.... 하지만 그 마지막 말은 루드랫의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이 사람은 왕 족이니, 루드랫이 어떻게 그를 모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였다. "그렇지 않아요!!!" 루드랫은 놀란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시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 고 있었다. "절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얼음으로 돼 있지 않아요!! 이 사람 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니까!!" "시나...?" "난, 알아요!!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 지 말아요!!" 촛불에 비친 시나의 얼굴은 슬프지만, 단호했다. 바람이 불고, 복도는 어두우며, 기온은 더없이 싸늘했다. 루드랫은 문득 미소를 지었다. 초상화를 봤을 때 가라앉기 시작한 마음에 점차 즐거운 무언가가 생겨났다. 바람은 불고, 복도는 어둡고, 기온은 더없이 싸늘하지만, 언젠가 있 었던 일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 영혼과 함께 잠들어 있다, 때를 위하 여 다시 되살아난다. 빛 바랬지만, 무엇보다 절실한, 언제나 바라 마지않던 기억... 루드랫은 마치 그때처럼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아덴시엘, 네 그 맹목적인 애정은 정말로 내 큰 허물마저도 가리 는구나." "....!!!!!" 시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드랫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고개를 젓고, 웃음을 지은 채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 다. 하지만 시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기억은 되풀이되고, 되풀이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아주 작은 흔적만으로도... 낡고 긁힌 테이프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이름. 은빛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되살아나.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숲에 있어 아주 많은 것을 잃어 버렸지만, 내가 이렇게 그리워하는 당신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 그것이 내내 궁금했죠... 시나는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두렵긴 했지만, 그래도 난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고. 그래서 내가 이 사람 옆에 있는 거라고... 난, 잘 해낸 거야... 시나의 아버지는 장난치듯, 부드럽게 말했다. "예전에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새 바뀌었니?" 시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 는데, 시나의 아빠는 시나가 '신데렐라'를 좋아한다고 하면 언제나 이 렇게 물었다. 시나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난 잠만 자는 여자아이 이야긴 싫어요. 백년이나 잠만 자다니... 마 법에 걸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그럼 꿈을 통해서 왕자님을 만나 러 가면 되잖아요. 꿈은, 미래든, 과거든,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 그 여자아이는 잠만 자다가 왕자님을 만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생각 해요." 큰손은 시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수염 난 입술이 시나의 볼에 입을 맞췄다. "하하하... 그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하하하... 우리 딸, 정말 똑똑하구나. 세상에서 제일 영리하고 제일 예쁜 우리 시나..." 왜 당신이 약속대로 날 찾지 않는 건지. 역시 날 용서할 수 없어서 그런 건지. 그걸 알고 싶었어요... 너무나도, 간절히. 하지만... 혹, 꿈속으로라도 당신을 찾으러 갔다가. 길이 엇갈리면 어떻게 할까...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나는 계속 숲에만 있었는데... 그때야 난 왜 그 소녀가 백년간이나 잠만 자야했는지. 그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러나 여기에, 당신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에요... '그럼 너를 아덴시엘이라고 부르게 낫겠어. 너는 꼭 천사 같으니 까...' 은색 눈과 은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 었고, 아빠처럼 다정했다. 루드랫이 여전히 웃음 어린 눈으로 시나를 돌아보았다. "아아... 네 취향은 정말 매우 독특하고 흥미롭지만... 어쨌든, 지금은 돌아가는 게 좋겠어. 엘야시온님의 명령으로 무도회에 나와 있는 이상... ...?" "시나...?" "루드랫..." 시나는 루드랫에게 다가가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루드랫은 시나 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 놀란 얼굴을 지었다. "...?" "루드랫." "루드랫...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줘서, 너무 기뻐요..." 세상에서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단 한사람. 그는 언제나 천사의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그래서 나는 아덴시엘. 세렌시스의 아덴시엘이었다. (계속)================================================== 저도 엘야시온 나온다는 회지를 못 봤습니다. 저번에 메일을 보내신 분인 것 같은데... 그때 보여주신다고 해놓고 왜 안 보여 주세요... 잉 잉...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음.--;) 추신...500줄 제한이 폐지돼서 너무 기쁘네요...^^ 문서 여러 개 만 들기 귀찮았는데...^^ (솔직히, 글쓰는 것도 쓰는 거지만 올리는 게 귀 찮아서...^^;;) 추신2...카인님, (--;;;;;;;).... 메일을 보내겠습니 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30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05 23:54 읽음:1776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5 엘야시온 가디엘이 레이서스를 보고 말했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 자네는 루온 루드랫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평범한 귀족의 옷을 입은 채, 똑같이, 평범한 귀족의 옷을 입고 있는 엘야시온과 이야기를 나누던 레이서스는 약간 시간이 지난 후 말했다. "루온 루드랫. 글쎄요. 이젠 기억에서 거의 희미해졌습니다." 가디엘은 레이서스의 옆얼굴을 보았지만 가면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 었다. "그런가." 기억이 희미해졌다, 라. 하긴 23년 전,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고작 14살이었다. 14살이면 성인식도 치르지 못할 아주 어린 나이. 철모르는 때였고,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만으로 어깨가 무거울 때였으니 그런 일상사에 정신을 뺏겨 루온 루드랫을 이젠 영 잊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도 엘야시온은 레이서스가 루온 루드랫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엘야시온은 레이서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약간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말일세. 자네가 지금 루온 루드랫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될 것 같나. 역시, 그가 못마땅하겠지...?" 레이서스는 엘야시온을 보았다.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글쎄. 그냥... 나이든 사람의 호기심이라고 할까." 레이서스가 말했다. "별로... 아무런 기분도 안 들것 같습니다. 이젠 루이트에게 연연할 나이는 지났으니까요." "역시 그런가? 하긴. 아무래도, 자네는 그런 나이는 아니니까. 게다가 그 일 당시에도 자네는 무척 초연했으니, 지금도 그럴 테지. 암, 그렇고 말고." 엘야시온은 무척 흡족한 말투로 말했지만 레이서스는 어쩐지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왜 갑자기 그 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까?" "응?" 레이서스는 조용히 웃었다. "제가 감히 추측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 자 에 대한 말씀을 꺼내신 이유는 이 세계에 그 자가 있기 때문입니까? 필시 이곳으로 불러 들이셨겠지요." 엘야시온은 무척이나 당황한 낯을 지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았 나?" "당시, 엘야시온님은 저보다 더 그 자를 아끼셨으니까. 그 자에게 베풀 어 주셨던 대우는 그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는 이곳으로 유배되어 있는 중이고... 갑자기 엘야시온님이 정색을 하시고 그 자에 대한 말씀을 꺼내시니, 혹시 그렇지 않을까 추측했을 뿐 입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뒷짐 진 손을 바꿔 쥐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소문이 나고 안 나고 할 것도 없군. 자네가 그렇게 금방 추측할 정 도라면." "소문이라니요?" "아닐세. 그냥 그런 게 있네. 하여튼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니 마음이 차라리 가벼운데. 길게 말할 필요도 없고. 사실은 자네에게 부탁 할 게 있어서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인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즐겁게 춤을 추는 사람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가 루온 루드랫에 대해 별 감정이 없다니까 하는 말이야." 루드랫과 시나가 다시 무도회 장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무엇 때문 인지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왕족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니...!" "엘야시온님께서 평민의 옷을 입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맙소사...! 정말로 그들이 우리와 춤을 춘다는 말인가..!" 이들은 거의 대부분, 왕궁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급 여관에 묵고 있다가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뚫고 와 왕궁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 이었는데, 모두 다 이 뜻밖의 행사에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너무 이른 다이아몬드 더스트에 무도회 시작 첫 무렵엔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지금은 완전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하하... 왕궁 의상실을 개방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건 아주 재미있는 무도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정말로 왕족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 안 믿겨져." "허허... 얘야, 이거 아주 좋은 기회로구나...!!" "네, 아버지...!!" 시나가 말했다. "헤... 루드랫. 사람들이 어쩐지 무척 흥분하고 있는데 요." 루드랫이 말했다. "그렇군... 무슨 일이지. ...실례합니다. 엘야시온님 께서 평민의 옷을 입고 이 자리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말이 어떤 뜻인 지... 그렇다면 저 앞에, 자리에 앉은 엘야시온님은 누구입니까?" 아까 들어오면서 모든 무도회장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았던 엘야시온 은 가면을 쓴 채 보좌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루드랫에게 질문을 받은 사람이 말했다. "아까 저 대리 엘야시온이 말 하는 걸 못들은 거요?" "대리 엘야시온이요?" "하하... 그렇소. 한참 무도회가 무르익어 가는데, 저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말했지. 자기는 진짜 엘야시온이 아니고... 자신을 따라 들어온 왕족들도 진짜가 아니라고. 진짜 왕족들은 왕족들의 옷은 물론이고 어쩌 면 평민의 옷을 입고 이미 이 자리에 있는데... 그런 왕족들과 함께 엘야 시온께서 오늘부터 내일까지 치러질 작은 게임을 준비하셨다고 하셨지." "게임이요?" "흠, 그렇소. ...정말 못 들었나보군. 그러니까 이런 거요. 지금부터 이틀동안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한 왕족을 찾는 거요. 그 왕족을 찾아 내는 사람에겐 엘야시온 가디엘께서 놀라운 상을 내리겠다고 하시더군. 선물과 함께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시겠다는 거야. 그것을 위해 서 이틀 동안은 어떤 사람에게든 자유롭게 대해도 되는 거지. 심지어 엘 야시온님에게 무례를 행하는 자라도... 이 동안만은 용서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지. 하지만 한 조건이 있는데, 내일 저녁 무도회까지 어느 누구에게 도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말 것. 자신의 정체를 다른 이에게 들키게 되면 즉시 무도회장 밖으로 퇴장해야 한다는 군. 그러면 게임에 참가할 수 있 는 자격도 동시에 사라지게 되는 거지. 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지 않 소. 하하하... 그러고 보면 그대도 왕족일지 모르는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반말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용서하길. 내가 지금 이렇게 평민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나도 왕족일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하하..." 루드랫은 골똘히 생각했다. 왕족일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십중팔구 상당한 신분을 가진 '왕족'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굉장히 담이 큰 사람이거나. 이렇게 누가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경우, 상대가 뜻밖에 높은 신분일 수도 있으니까, 대개는 예의를 갖추느라 존댓말을 하 는데... 상대 남자는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 엘야시온님은 정말 재미 있는 걸 생각해 내셨단 말이야." 하지만 루드랫은 모르는 척 말했다. "...한 왕족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 는데, 그 왕족은 누구입니까?" "응? 그 왕족이 누구냐고? 아, 그 사람은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 인데. 하하하... 자네도 잘 찾아보게나. 뜻밖에 좋은 선물을 받고, 소원 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엘야시온께서 가짜 힐라토 파이 오니온을 몇몇 풀어놓았다고 했으니, 주의해야 할거네. 누군가를 힐라토 파이오니온이라고 지적하려면 자기가 쓴 가면도 벗어야 하거든. 하하... 나도 힐라토 레이서스를 찾아 봐야지. 약간 위험부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으니까. 자네도 잘 해보게, 젊은이. 엘야시온님께선 정말 재미 있는 걸 생각해 내셨단 말이야... 하하..." 그리고 그는 루드랫의 어깨를 툭툭 지고 저 쪽으로 가버렸다. 시나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힐라토 파이오니온... 힐라토의 왕이군요. 그 사람을 찾는 거예요?"" 흠.. 그런가 본데." 시나는 방긋 웃었다. "루드랫도 찾아 볼 거예요?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하잖아요." 소원이라... 루드랫은 쓴웃음 지었다. "글쎄...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니까. 되도록 조용히 있는 게 좋아. 그나저나, 궁정 춤은 익숙하지 않아, 추기 어려울 테고... 아까 배가 고 프다고 했지. 그럼 저쪽 테이블에 가서, 간단한 다과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얼굴도 창백하던데, 포도주라도 한 잔하면..." 하지만 시나는 뜻밖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젠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그리고 궁정 춤 같은 거... 배우면 되죠. 가르쳐 줄래요? 난 금 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뭐?" 시나는 웃었다. "난 사실 춤추는 거 좋아해요. 팔랑, 팔랑... 자요, 루 드랫." 시나는 손을 내밀었다. "아까 그랬죠? 첫 발을 나와 떼는 게 의무 라고. 그럼, 정식으로 말할게요. 저와 첫 발을 떼시겠어요, 루이트 님?" 루드랫은 놀란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춤을 좋아한다고?" "그럼요! 정말 좋아해요! 그러니까 가르쳐 줘요!" "흠..." 루드랫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시나를 보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리 와. 가장 간단한 스텝을 가르쳐 줄게. 그럼 무도회 끝나기 전의 원무 정도는 끼어서 출 수 있겠지."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을 피해, 베란다로 나갔다. 놀랍 게도 어둠 속에 키 큰 푸른 나무들이 잔뜩 늘어서 있는 정원이었는데, 하 늘을 올려다보니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덕분에 공기가 무척 신선했 는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게임'에 정신이 팔려서 베란다는 텅 비어 있 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연습하는 것이 좋겠지." 루드랫은 바리스에서 시나와 춤을 추던 일을 생각하며 말했다. "여기라 면 실수해도 비웃을 사람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천만예요." 시나는 그에게 우아하게 절하며 말했다. "사람이 있어도 괜찮아요, 루이트 님. 그들은 비웃지 않을 거니까." 그 자신만만한 말투에 루드랫은 잠시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이상한 걸, 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나가 루드랫에게 손을 내밀었 다. 루드랫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비웃지 않을 거라니... 그게 도 대체 무슨 뜻인지..." 시나는 웃었다. "난, 사람들이 비웃지 못할 만큼 잘 출 거란 말이죠." 그리고 약간의 시간의 지난 후, 루드랫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 다. 시나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나는 그야말로 가볍고 경쾌하게 스텝을 밟았다. 한 번 가르쳐 준 것 은 그대로 따라하고, 그 다음으로 기대 이상으로 우아한 몸놀림을 보여주 었다. 루드랫은 손을 들어, 그녀가 옆을 따라 돌 수 있도록 도와주며 감 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데! 예전에 봤던 것하곤 천지 차이야. 너를 가르쳤던 유리마 부 인은 정말로 천재적인 선생이군! 겨우 한 두 번 레슨에 이런 발전이라 니...!" 시나는 노란빛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하하하... 그 제자는 안 훌륭해요?" 루드랫은 시나의 밝은 웃음소리에 미소지었다. "그래. 넌, 훌륭한 제자야... 내가 기억하는 한, 누군가가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춤을 잘 출 수 있게 된 경우는 없었으니까. 정말 못 믿겠어." 스텝을 끝내고, 루드랫과 시나는 멈춰 섰다. 무도회장에서 비춰 나오는 불빛에 그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얼마나 못 믿겠는지." 루드랫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네가 아닌 기분이 들어. 꼭 다른 사람을 보 는 기분인데." "...!" 즐거운 기색이던 시나의 얼굴이 그의 말에 굳어졌다. 베란다엔 잠시 침 묵이 돌았다. 하지만, 이윽고 시나는 웃으며 자신의 가면을 벗어 그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무슨 소리예요! 루드랫! 날 칭찬해 주기 그렇게 싫어요? 이거 보세요. 내 얼굴을. 분명히, 내가 맞죠? 하하하... 저번에 바리스에서 엉망이었던 건, 당황하고 있었고 루드랫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랬던 건데... 나도 마음 만 먹으면 잘 할 수 있다고요. 이 정도는." 루드랫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정도로를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다고? 루드랫은 시나의 운동 신경을 잘 안다. 말을 타던 모습과 마우르 코트의 산에서 목검을 휘두르던 모습. 거의 반나절을 연습하고도 번번이 안장에서 미끄러지던 소녀가 이런 식 으로 춤을 출 수 있다고...? 루드랫은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아까 그 복도에서, 시나는 무척 울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무섭고 춥고 배고팠던 것이 겹쳐서 맥이 빠져 있었는데 루드랫 자신을 봐서 안심한 나머지 그런 거라 했는데... 그 후, 급속도로 기운을 되찾으며 지나칠 정도로 명랑해 진 것이다. 이곳 무도회장으로 돌아오면서는 어찌나 명랑하고 쾌활하게 구는지, 옷 문제로 투덜대던 일과, 무도회장으로 들어와서 루드랫 자신을 때리고 사 라져 버렸던 사실은 아예 없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루드랫은 시나를 새삼스레 자세히 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시나'다. 이 소녀가 시나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연회장의 밝은 불빛과 베란다의 어두움이 겹쳐서 그런 건지, 눈빛이 예 전보다 더 밝고, 기묘하게 빛나고 있지만... 저 장난스러운 얼굴은 분명 히, 시나였다... 그래서 루드랫은 미소짓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넌 알 수 없는 여자 애로군. 아무튼, 그 정도로 출 수 있으니, 지금 당장 무도회장에서 춤을 춰도 되겠는데." 시나의 어깨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내려앉았다. 시나는 다시 가면을 쓰 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안도감이 서린 표정은 그 밑으로 사라졌다. "기꺼이. 내가 남자 옷을 입고 있어, 루드랫이 창피해 하지만 않는다 면." 루드랫도 웃으며 말했다. "종속주로서 그 정도 창피야." (계속)================================================== 원래는 오늘 올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설날이라 정신이 없어서, 많이 못 썼거든요... (언제는, 많이 썼나...--;) 열시 무렵 세이를 보내신 분에게도 그렇게 답했는데... 그 후, 게시판의 글을 보고...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명절'에다 '토요 일'이네요. 하하...^^ 게다가 시나와 아피네스와 아덴시엘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을 보고, 무 척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과연... 정리하니까, 그렇게 되는군요.^^;; 저는 쓰는 입장이니까... 가끔, 읽어주는 분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군요. 하하...^^ 그 연관관계를 보고, 너무 복잡한 나머지 저도 흠칫 놀랐습니다... 하 하...^^ ※ 음... 다음은 메일에 대한 답입니다...^^ * '성역에 가까운 숲'은 엘야시온에 관련한 질문에 답하고 잡담을 쓰는 자리입니다. 글 관련 잡담이니, 글 관련 잡담란에 있고...(글이 아니니, 당연히 글 연재란엔 올리지 못하죠.^^;)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찾다가 못 찾으시겠거든... '이건 운명이려 니~' 생각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딴 거 안 읽어도 됨. 흥..'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샤하겠습니다. (아무리 자세히 알려드려도 다시 알려달라는 분들이 있어성.^^;) 하지만, 이제 500라인 제한에서 벗어났으므로, 굳이 잡담란을 따로 만 들 필요가 없어졌죠. 글은 글대로 쓰고, 마음껏 잡담을 쓸 수 있게 되었 으니, 이제부턴 여기다가 답하겠습니다...^^ (좀 오래된 질문이랑... 생각나는대로...) * 유니텔에, '172편'이 두개로 잘린 이유는...(그걸로 쇼크까지 받으실 건...^^;) 유니텔에 50 키로 바이트 제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으아아... 바부 유니텔... 하이텔이 500라인 제한에서 벗어나, 기뻐했 더니... 나우누리랑 하이텔에선 40, 몇 키로 바이트였는데...!! 왜 너 혼 자 50키로 바이트 넘었다고 난리인 거냐...! 으아아... 유니텔이 날 배신 하다니... 100페이지까지도 올릴 원대한 꿈이 박살나는 순간이구나... 으 흐흑...) ...이러한 사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아름다운 편집(으윽.--;)을 자 랑하던 게시판 제목에 '-2'를 붙여야 했죠... (173편이라고 했으면 좋았 겠지만... 하이텔과 나우누리 올린 게 있어서...--;) 미스테리입니다.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의 조속한 키로바이트 도량 형 통일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원, '피트'나 '규빗'도 아니고... 각 통 신사가, 왜 이리도 자기만의 세상을 추구하는지. 츠츠...) * '누이'에 관해서는 몇 번이나 질문을 받았는데, 자꾸 까먹어서... 글 쎄요... 저도 '누이'가 '누나'인 걸로 알고 있었죠. 그래서 외전에 '누나 '라는 뜻의 '누이'로 썼는데... 어느 날 사전을 찾아보니, '누이동생'의 준말이라나요...? --; 해서, '누나'든 '여동생'이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럼 '여동 생'으로 할까... 하고, '여동생'이라 쓴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누나'가 더 좋습니다. 음... '누이'에 '누나'라는 뜻은 정말 없는 겁니까? --; * 셰리카의 보라색 머리칼... ^^; 제가 어디다가 그렇게 썼나 보죠..? 그럼 그건 버그입니다. 그러니 당돌, 셰리카는 로트라의 왕족이 아닙니 다...^^ * 소제목에 관하여: 당분간은 저 위의 제목대로 나가겠습니다. 예전에 도 말씀드렸듯 제목 같은 걸 잘 못 지어서...^^; **님이 소제목 공모를 하는 건 어떠냐고 말씀해 주셨는데... 못하더라도 제가 해야죠...^^; 다 쓰고 나서 고민해 보면, 그럭저럭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 카인님, 아니오. 사람을 만나서 물어봐야 하는 거라면... 일부러 그 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덴시엘'이 어디에 나오냐면... 외전과 본전에 한 번씩 나올 겁니 다...^^ 한글을 쓰신다면, 'F2' 키를 누르시고, '아덴시엘' 쳐서 검색하 시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시나가 입은 것은 '클로니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옷입니다.^^ 아 무래도 환경이 서로 다르니까.. 입는 옷 스타일도 다르죠. 클로니아는 남 자나 여자나 바지를 입고... 치마는 상류 계층의 여자들만 입는다는 설정 으로..^^; 우리의 고구려가 이런 비슷한 복식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고 분벽화를 보면 바지 입은 여자들은 대개 평민, 치마 입은 여자들은 죄, 상류층이랍니다... ^^ 북방 계열의 사람들이라 그런 건가... 클로니아의 복식은 그래서 이것도 괜찮겠다고, 여기서 힌트를 얻었는데. 맞는지 아닌 지는 잘... ^^; 아무튼... 남자가 치마를 입는 세계도 있을 겁니다. 백파이프도 불 고...? 하하..^^ * 루드랫이 어떻게 '왕자님'을 알 수 있냐고 해주셨는데, 루드랫이 가 진 '왕자님'의 개념은 '왕족들'입니다. 엘야시온에선 대를 이어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왕족' 가운데 능력자를 뽑는 거니까... 왕족들은 모두 다 '왕'이 될 수 있는 후보자들... 그러니, 이들은 다 '왕자', '공 주님'이라고 불러 줄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용어는 개념은 있으되, 잘 안 씁니다. 보통 스웰디온, 스 아디온... 아니면 합쳐서 '왕족'... ^^ 엘야시온을 쓰기 시작했을 때, '왕자', '공주'라는 용어를 그대로 안 쓰고 복잡하게 따로 용어를 만든 이유는, '왕자', '공주'가 '현재 왕의 자식, 그러므로 다음 대를 이어 통치할 후계자'라는 개념인 것 같아 그랬 는데... 만들길 잘했죠? 하하..^^ 안 만들었으면, 분명히 혼란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엘야시온에 왕자, 공주라는 용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왕'이라는 용어도 있는데요, 뭐...^^ 엘야시온에선 주로, '통치자'를 높여 부를 때, '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쓰일 때가 있고, 안 쓰일 때가 있다는 설정이죠...^^ 늘어놓자면, 긴데.. 안 늘어놔도, 이야기 전 개에는 상관없으니, 안 늘어놓겠습니다...^^; * 브라우니가 귀엽다고 해주셔서 감샤... 브라우니는 스코틀랜드産 요 정인데, 집안 일을 도와주는...(구두 만드는 할아버지를 도와준 요정들이 얘네 일 겁니다, 아마.^^;) 게시판에 어떤 분이 '푸름플..?'도 그런 요정 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그런 요정이 많은 듯... 하하..^^ 어쨌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조그만 사람들이 눈앞에서 뛰어다니거든, 영어로 말을 걸어 보시길...(헬로, 유 브라우니? 미 휴먼. 오케.. 땡큐.) * 하눌미르님, 짙은보라님, flies님,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 그리고 건강 하라고 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길...^^ *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메일을 다운 받는 것으로는 잘 기억이 안 나고 답장해야 한다는 것을 까먹으니까, 이젠 아예 수첩에 아뒤를 적 어놓고 있습니다. ...훨 낫군요. --; 왜이리 날이 갈수록 '鳥頭'가 되어가나 고민하다가, 혹시 난, 알에서 태어나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에겐 죄송하지만, 이름을 '박엔라이트'로 고치고... 어디 남는 땅 있으면 나라를 세워야 할 텐데...라고 또 다른 고민을 하 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요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가 재미있나 봅니다. 난, 킹이 야...) * 와~ 눈이 오는군요!^^ 귀경하는 분들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멋집니 다. ^^ 이제 음력 상으로도 완전히 2000년인데...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바랍니다.^^ 추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의 킹은 똥배가 나왔더군요. 다들 밭 갈 랴, 나무하랴, 금 캐랴, 돌 캐랴, 나라 지키랴... 너무나 바쁜데... 킹은 커서로 찍어보면 할 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냥 똥배만 불쑥 내밀고 '오레?'라고 말하는 것이... ...귀엽습니다. 어찌나 귀여운 지 그냥 한 번 때려보고 싶어집니다.(유니트 하나가 아쉬운 판에.. 아자 씨!! 돌이라도 날라요!! 아 참!! 확, 적군에 넘겨줄까 보다..) 음... 하지만 정말로 넘기면 내가 지니까, 안 되고... 아무튼,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도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통치자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통치자인 것 같습니다. 통치자들은 나무나 금 캘 필요 없 이, 그냥 똥배만 내밀고, '오레?'라고 말하면 된단 말이죠. 음... 거울 앞에서 연습하자, '박엔라이트'... 무능력하다는 조건은 그 럭저럭... 이번엔, 똥배를 내밀고, '와따시?' ...땅만 있으면, 된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47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09 22:23 읽음:1786 관련자료 없음 ----------------------------------------------------------------------------- <제 46막. 시나, 왕궁생활을 하다.>-6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가던 레이서스는 한 여자와 부딪치자 당황한 나 머지 더듬더듬 사과했다. 여자는 레이서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당황한 목소 리로 더듬거리며 사과하는 사람이 왕족 같은 것 일리 없다고 판단했다. "괜찮아요." 여자는 차가운 대답을 남기고 사라졌다. 여자가 떠난 후, 레이서스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자기와 부딪친 여자 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키도... 몸매도... 전혀 틀리다. 그러니 방금 부딪친 저 여자가 그녀일리는 없다. 레이서스는 고개를 젓고, 애초에 목적하던 곳으로 향했다. 엘야시온과 대화를 나누다가 전혀 뜻밖의 사실을 알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엘야시온님?" "뭘 그리 놀라나? 자네도 이미 알고 있다며? 자네 말대로 루온 루드랫 을 이곳 유리 궁전으로 불러들였네. 그의 종속자와 함께 말이야." 엘야시온 가디엘은 의미 있는 눈짓을 했다. "종속자란 말일세.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제 더 이상 그는, 자 네와 자네의 집안을 모욕할 일이 없을 거란 말이지. 축하할 일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 뒤의 말은 거의 듣고 있지도 않았다. 레이서스 가 알고 있다고 한 것은, 엘야시온이 루온 루드랫을 제일로트로 불러들 인 일을 말하는 것이다. 헌데 루온 루드랫과, 그 종속자가 이곳 유리궁전에 있다고...? "그들은... 마노테온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루온 루드랫이라면 몰라도... 그 종속자는..." 레이서스는 시나를 생각했다. "그녀는, 마노테온이니까...!" 말을 방해받아 눈을 찌푸리고 있던 엘야시온이 말했다. "이상하군. 난 그 종속자가 마노테온이라고 한 적 없는데. 자네, 그 종속자가 마노테온 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 레이서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자는... 마노테오나에 있었을 테니, 만난 여자도 그런 부류가 아 닌가 하여...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엘야시온 가디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당연한 건가... 흠... 그렇군.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문제 가 없네. 그래서 내가 여섯 증인의식을 하는 것이니까. 그거라면 그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다고 트집잡을 사람은 없지. 게다가 자네도 말했듯, 루 온 루드랫은 진짜 마노테온도 아니고..." "...!!!" 레이서스는 이제야 깨달았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갑작스럽게 결혼 행 사의 일부를 변경한 이유를. 레이서스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자는 저와, 제 누이를 모욕한 자입니다. 헌데 어떻게 저와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 자와... 그리고 그 종속자 를... 이곳에 불러들일 수 있으십니까? 그것도 아스테린의 결혼을 위한 증인으로서...!" "레이서스...!"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레이서스의 이름은 부르지 않기로 한 것은 잊었다. "자네, 루온 루드랫에 대한 감정은 이제 지웠다고 하지 않았나...! 별 다른 감정은 없다고 했으면서!" "별 다른 감정은 없습니다!" 이미, 그에 대해선 용서하기로 했다. 그냥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로...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별 다른 감정이 없는데 왜 이렇게 얼굴을 붉히나?" "엘야시온님! 엘야시온 가디엘 님께서는....!!" "내가 뭐...?" 격하게 말하던 레이서스는 엘야시온 가디엘의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 리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긴.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루드랫을 용서 하기로 했다. 그들과 자신은 전혀 다른 남남으로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인 정했다. 그러니 그들이 유리궁전에 있든, 이 무도회장 가운데 있든...! "...아무 상관도 없는데." 레이서스는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고...? 엘야시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레이서스. 솔직히 말해 보게. 아직 도 루온 루드랫이 못마땅한 건가? 그런 거지? 그가 유리궁전에 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그런 거 아닌가?" 레이서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아무 상관없습니 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엘야시온님께서 도대체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엘야시온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감정이 있다고 하면 좋은데. 감정이 없다고 하면서도 저런 굳은 태도라니... 원... "레이서스. 내가 어떻게 자네에게 그에 대한 말을 안 할 수 있겠나. 난 몇몇 중요한 이유 때문에 루온 루드랫이 다시 제 신분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는데... 그는 자네 세계 사람이 아닌가? 자네의 힘이 필요하 네..." 가디엘은 신중하게 말했다. "...사실, 루온 루드랫은 지금, 자신의 과 거를 매우 후회하고 있고 자네에게 속죄할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 라네. 그러니 그를 다시 받아들여 주게. 그것을 위해서, 내 자네에게, 보상이라면 뭣하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 네." 레이서스는 웃었다. "...원하는 것이라고요?"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가 미소짓자, 따라 웃었다. "그렇지. 원한다면 자네 세계에서 내가 장기간 머무를 수도 있네." 레이서스가 베란다에 발을 딛었을 때, 싸한 공기가 그의 폐를 침범했 다. 레이서스는 베란다 난간에 손을 짚고 그 공기를 더욱 깊게 들이마셨 다. 원하는 것이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입니까... 하하..." 레이서스는 공허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찔린 기분이다. 왜 하필 이 순간 그 소리를 하시는 걸까, 엘야시온님은. 레이서스는 잘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아무리 절실히 원해도 그것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일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많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기엔, 그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헌데 지금에 와서 원하는 것이라고...? 레이서스는 힘없이 말했다. "...보상이 크군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일련의 속임수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 이 모든 것은 엘야시온 의 생각이다. 레이서스는 유리정원의 어둠을 보며 웃었다. 지겨운 일이다. '원하는 것'이라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머리에 달라붙어서, 이곳에 들 어와 찬바람을 쐬어도 나아지지 않는다. 레이서스는 눈을 감았다. 떨쳐 버리자. 정말로 원하는 것 따윈 가질 수 없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선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장 깊숙한 곳에 넣고, 잠가서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때였다. 레이서스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은. 혼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생각에서 깨어나며 놀랐다. 행동으로 보아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인 것 같았는데, 그 즐거 운 웃음이 지금 레이서스의 기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레이서스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울 정도로 가슴을 찌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드랫. 이런 간단한 스텝 말고 조금 더 복잡한 것도 가르쳐 줘요. 괜찮으니까요. 네...? 하하... 봐요, 잘 하죠?" 레이서스는 숨을 들이쉬었다. 차갑고 나무의 향기가 나는 공기. 환한 곳이었고,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레이서스의 얼굴이 창백 해진 것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루드랫을 불러 간 것은 춤을 세 곡 정도 추고 난 후였다. 목이 말라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데, 어떤 남자가 와서 루드랫에게 귓 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루드랫은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먼빛으로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시나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시나는 루드랫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불만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도 대체 어디를 가는지, 같이 가면 안 되는지 물어봤지만 루드랫이 이상한 눈초리로 시나를 봤기에 곧 포기하고 말았다. 시나 자신도 어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유리궁전에 오자마자. 그때는 아무 말도 안하고 루드랫을 보내 주었지... 시나는 음료수를 마시며 투 덜댔다. "옛날에... 너무 한심하게 행동했어. 멍청하게...! 덕분에 답답하기 짝이 없군. 칫! ...하지만 뭐." 시나는 미소지었다. "괜찮아, 윤시나. 지금은... 루드랫을 위해서라 면. 말 잘 듣는 척하는 것 따윈 나도 훌륭하게 할 수 있어. 그럼.. 난 잘 할 수 있다고..." 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춤추는 사 람들... 춤추는 사람들을 보니, 또 춤을 추고 싶다. "응...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니까. 루드랫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루드랫이 가고 난 뒤, 춤을 신청하는 남자가 몇몇 있기는 했다. 대개, 시나와 루드랫이 춤추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남 자들이었다. 하지만 다 거절했다. 귀찮았던 것이다. 한 번은 장난스럽게, "전 남잔 데요."라고 말했는데 상대 남자는 몹시 놀란 얼굴로 아까 분명히 남자와 춤추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나가, "그럼 그 쪽이 여자겠죠. 아니면, 남자끼리 춤 췄으 니, 우리 둘 다 변태든지. 하하하..."라고 웃었더니 남자는 질린 얼굴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남 자는 시나 있는 쪽을 힐끗대며 한 무리의 사람들과 뭐라고 이야기 나누 고 있고, 그 무리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시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힐끗대며 수군거리다니 몹시 기분이 나빴다. 하지 만 시나는 코웃음 치고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들이니까. 게다가 정말로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따로 있다. 아까부터... 루드랫과 춤을 출 때부터 자신들을 쳐다보던 남자. 맨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남자끼리 춤추는 건 줄 알고 놀라서 쳐다 보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 증거 중 하나로, 루드랫이 사라지고 나서도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시나에게 다가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들과 시나에 대해서 수군거리지도 않고, 그냥 벽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 을 뿐. 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시험삼아, 음료수 테이블을 떠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 봤는데, 그 눈길이 자기를 쫓아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뭐지... 누구야, 저 남자.' 시나는 인상을 쓴 뒤, 안 보는 척 하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검은 색 의 머리카락에 초록색과 은색이 섞인 옷을 입은 남자. 분명히 모르는 남 자인데 어딘가 낯이 익다. 어디서 봤는지 고민하는데, 옮겨간 쪽에 있던 한 무리의 여자들이 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시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였는데, 시나가 쓴웃 음 지으며 애교 있게, '당연히 여자'라고 말하자 즐겁게 웃었다. "호호호... 그러면 그렇지! 아가씨에 대한 재미있는 말이 떠돌아서 말 이에요. 처음에 그 키 큰 남자 분이랑 춤 출 때부터 눈에 띄어서... 아... 그 남자 분은 분명히 루이티온 계급이겠죠? 그렇게 키가 크니 까... 호호... 아가씬 그럼 어느 귀족 집 아가씨일까? 남자 옷이 무척 잘 어울리는데... 아주 멋져요." "글쎄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춤추는 모습도 눈에 띄어서... 사람들 이 당신들 커플을 꽤 많이 주목했죠. 뭐... 춤추는 모양은 그냥 평범했 지만. 아무래도 옷차림 때문인 듯... 호호... 나도 내일 남자 옷을 입고 올까봐. 호호호..." "어머, 그럼 나도... 호호호..." "아까 아가씨에게 춤을 신청한 사람 중엔 왕족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 던데... 호호... 그분을 거절하다니. 아깝네요. 호호... 아무튼 아가씨 는 눈에 띄어서... 남자들도 의외로 아가씨를 많이 주목하더군요. 호 호..." 시나는 그들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의 그 남자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이 껄끄러워, 여자들과 있기로 했다. 시나는 여자들의 풍성한 치 마 사이로 몸을 숨겼다. '남자'의 시선은 아직도 느껴지고 있고, 그것은 시나에게 점점 불쾌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미안하지만, 저쪽에 있는 남자. 누군지 아세요? 부인?" 시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이것저것 묻다가, 시나가 말을 돌리는 바람에, 결국 자기들 신상에 관한 말만 잔뜩 늘어놓던 여자들은 웃다가 말고 시나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한 여자가 말했다. "호호... 알 수 없죠. 아가씨. 우리가 당신의 정체를 모르듯. 당신이 우리의 정체를 모르듯. 오늘밤과 내일의 무도회에선 어느 누구도 누군가 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답니다." 레이서스는 포도주를 마시며, 시나와 루드랫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시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얼 어쩌겠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루드랫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시나가 다 른 남자들의 춤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이젠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 누는 시나의 모습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을 뿐. 하지만 여자들 때문에 시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자, 입에서 중얼거 림이 새어나왔다. "...루온 루드랫의 무례를 목격하라." 레이서스는 말의 내용보다는 말의 음성과 음조를 주의 깊게 되씹었다. 지금의 목소리는 옛날과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좀 더 가라앉고, 좀 더 절제된 음성... 레이서스는 포도주 잔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무얼 어쩌겠 다는 생각 따윈 없다. 그냥 단지 시험해 보고 싶을 뿐이다.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시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 다. 저 남자는 신경에 거슬린다. 다른 사람들은, 시나의 마음 가운데 어 떤 자리도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서 다른 이들에겐 어떤 가치도 두 지 않을 수 있지만. 저 남자를 무시하려고 할 때는, 불안한 느낌, 혹은 초조한 느낌 같은 것이 자꾸 의식을 붙잡았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 남자가 오지 않 았다면 시나 자신이 갔을 것이다. 시나는 도전적으로 남자를 보았다. 도 대체 저 사람은 누구지? 레이서스는 시나에게 다가가다가 시나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 을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천천히 걸어, 시나에게 다가갔 다. 그렇게 다가가며 레이서스는 시나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를 떠올렸다. 몹시 아파 보이는 모습의... 하지만 지금은 건강해 보인다. 잘 됐군. 레이서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시나는 남자가 다가올수록, 불길한 느낌을 더 크게 느꼈고, 마침내 가 면너머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을 때, 그 불길한 느낌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깊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시나는 손톱 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가운데 있던 불안한 느낌. 초조한 느낌이 한꺼번에 요동을 치며, 뛰쳐나오려 할 때, 남자가, 시나 앞에 서서, 부드럽게 말했다.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 까...?" "...!!!" 그가 누군지 충분히 알아 볼 수 있다. 머리카락 색이 틀리고 가면을 쓰고 있긴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뚜렷하게. 당연하지 않은가? 시나는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었다. 힐러 라단의 집, 뒷문에서. 그리 고 그 축제에서 이 남자가 가면 썼던 모습...! 시나의 마음 가운데 격동이 일어났다. 서서히 일어나는 균열과 혼란. 무서울 정도의 갈망. 이 모든 것의 조짐이 한데로 뭉쳐, 급속도로 자라 나, 이제 괴물과 같이 마음을 잠식할 것이다...! 시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화를 냈다. 레겜-!!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왜--?!! 하필이면 왜, 지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