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마는 몹시 묘한 느낌을 가지며 하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장면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시냇물 같이.. 혹은 혼 강의 흐름같이.. 혹은 폭 포와 같이 흐르는 물소리. 온갖 것들의 물소리가 다 섞여서 가깝게, 혹은 멀리 들리는데... 이상하 게도 그것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고 그저 귓가에만 낮게 가라앉아 들렸 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울음소리가 그토록 뚜렷하게 들린 것은. 매우 슬픈 그것은 어떤 물소리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며 흘러갔기에 안 개 속에 서 있던 드래마는 걸어서 그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울음소리는 더욱 친근하게 들렸고 분명 히 어디선가 이런 장면과 광경을 보았던 느낌이 났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고...? 드래마는 자기 가슴에 손을 댔다. 조용히, 그러나 저 세찬 물소리처럼 심장이 뛰고 있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가는 그 느낌으로, 심장은 부드럽게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걸음을 빨리 했다. 저 앞,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 는 것일까?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슬프고 가슴이 저린 느낌이 나는 것일 까? 그는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뿌연 안개 사이에서 자신이 목표로 했던 어떤 물체를 보 았을 때... 드래마는 그것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만 실망인지 허탈감인지 모를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레이서스는 침대 옆에 앉아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까 그 가면 과 같은 생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벽난로에 장작이란 장작은 다 넣 어 때고, 침실에 있는 옷장에서 가볍고 하늘거리는 옷을 찾아내어 감싸주 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기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레이서스 자신은 너무 더워서 겉옷을 벗어놓고 얇은 옷 한 장만 걸치고 있는데, 시나는 점 점 더 짙게 얼어가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괴로운 눈으로 시나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자기 자신을 자책 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원래라면 그는 지금쯤 유리궁전, 자기 숙 소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연회에 다녀와서 피곤한 기분이 고 몇 곡이나 칼리스나와 춤을 추어 아직도 음악이 귓가에 맴돌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막연 하고 두려운 기분을 느끼며, 이렇게 한 소녀 앞에 앉아있었다. 그 괴로움 이 어찌나 심한지, 그는 억지로 웃으려하기 까지 했다. 그냥, 마노테 소녀일 뿐이다... 마노테 따윈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파 이오니온인데... 마노테 소녀가 어찌되든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죽어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평생동안 했던 말 중 가장 의미 없고, 가장 허황한 말이었다. 입에서 발하는 순간 어떤 것에도 영향을 주지 못하고 되돌아와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는 메아리처럼, 그것은 그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 하고, 오히려 슬픔만을 깊게 했다. 다시는 웃을 수 없다는 것도, 그의 절 망을 깊게 했다. 귓가에는 흥겨운 음악 소리대신 계속 같은 말만이 되풀 이 될 뿐. 아침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소녀여... 이것이 내가 오랫동안 마음 안에 갖고 있던 쓴 뿌리의 대가라면.. 왜 엘 은 나 자신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고, 네게 이렇게 하시는 건지. 너는 아직 도 젊고... 또,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는 과거로... 모두 엘의 공의에 맡길 수도 있었는데... 내가 내 손으 로 나의 공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나 쓰디쓴지... 내 쓴 뿌리보 다 더욱 지독하며, 마치 쓸개를 씹는 것처럼 쓰다. 내가 이 아픔을 그에게 주려고 했건만, 엘께서 유리 검을 든 내 손을 쳐서, 그것으로 오히려 내 가슴을 찌르게 했다. 그것이 이토록 슬프고 아프다... 그리고 그는 눈을 들어 슬픈 얼굴로 창 밖을 보았다. 두꺼운 커튼 사이 에 회색 구름은 아직도 낮게 깔려 있고, 그가 두려워하는 아침은 아직도 먼 곳에만 있는 것 같았다. "시나..?" 드래마는 시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개 너머 큰 나무 밑에서 울고 있던 여자아이는 시나였다. 아침에 레겜과 사라졌던 그 복장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그는 온 밤을 시나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으므로, 약간 질책하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 을 걸었다. "시나..! 도대체 어디 있다가..! 왜 울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드랫.." 그리고 한 손을 들어 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그, 그 애가 날 죽이겠다고..." 드래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 어떤 그 애..?" "내, 내가 만든 그 애... 그 애가 이제 나보다 커져서... 나를 위협하고... 드랫.." 시나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일어났다. "드랫, 아, 아침에 하는 말을 들었어요. 나와 친구가 된다고 했죠? 그렇 죠?" 드래마는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생 소했지만 어디가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나의 얼굴 을 살피며 대답했다. "..아아. 그랬지. 왜 새삼스럽게..?" 시나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는 거예요? 나를 믿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지켜주는 거예요?" 드래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미소지었다. "...내가 할 수 있 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러니, 그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이나 해 봐. 왜 이렇게 울고 있었던 건지. '그 애'가 누구지..?" 그는 이제 그 '동굴 놈'들이 또 시나를 노리고 덮쳤던 것은 아닐까 의심 했다. 하지만 의외로 시나는 빙그레 웃었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뭐?" "당신이... 내 친구가 되어줘서 기뻐요. ..나를 용서하고, 나를 믿어줘서.. 하하하..." 그러더니 그녀는 빤히 드래마를 바라보았다. 너무 빤히 바라봐서 이상 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렇게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입술을 가볍게 떨 더니,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렀다. "시나..?" 시나가 말했다. "...아니.. 난.. 당신이 환상인 줄 알았어요.. 그, 그래서... 지금까지 난 후 회를 계속하며..." "도대체 무슨 말인지..." 헌데 갑자기 시나는 그 눈물 흘리던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하하... 내가 이상하죠? 왜 이렇게 눈물이 나고 또 동시에 웃음이 나 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이제 곧 돌아갈게요. 그럼 이제 결코 당신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그 동안 많이 잘못해서..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나를 친구로 삼아줘서 기뻐요.." "뭐?" 의미불명의 말이었다. 하지만 시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드래마의 표정 을 무시하고 부산스럽게도 드래마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하.. 저기... 드랫, 드랫... 여기에 앉아봐요. 네?" 그녀는 자기가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작은 돌 위에 그를 어깨를 잡아 앉 혔다. 그리고 드래마의 남색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를 할까요? 네..? 이야기를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난 언제나 그 랬듯, 우리 아빠 이야길 할게요. 당신도 이야길 해 주세요... 유리 정원의 이야길 해줘요.. 그리고 한없이 내리는 눈 이야기도 해 주세요." 드래마는 그런 시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뭔가 평소 때의 시나 와 틀린 것 같았다. 너무 들떠 있는 데다,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유리정원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보다는... 아, 그렇지. 네 친구 네 르세바인.. 뷔기어 셰리카 양이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둘이 같이 있는 줄 알고..." 시나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됐어요!! 다른 이야기는 필요 없어요..!!!" "뭐라고?" "다른 사람 따위,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죽든지 살든 지, 각자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 이야기와 당신 이야기 만 해요!!!" "무슨.. 소릴.. 너는 아침까지만 해도 네 친구 때문에 고민하고.." "나한테 당신 외에 친구 따윈 없어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나 를 친구로 삼았으면 다른 사람 말은 하지 말아요!" 드래마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의 시나라면 절대 이런 말 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너.. 정말로 시나인가? 어딘가..." 그리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지?" 그는 인상을 썼다. "...아니.. 이런 안개라니.. 분명 나는 라단의 집, 거실에 있었 던 것 같은데...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는 미혹어린 눈으 로 시나를 올려다보았다. "...꿈인.. 것 같군. 아니라면 네가 네 입으로 그 런 소릴 할 리가 없지." 그는 시나가 지금까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코, 그런 소리를 할 리 없어." 하지만 그의 말에 놀랍게도 시나의 눈에 안타까움과 분노, 슬픔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그 눈에서 무언가가 번뜩이며 시나는 빙긋 웃 었다. "...꿈... 이것이 꿈이라고요.. 후후.. 그것 괜찮겠군요. 맞아요. 드랫. 이건 꿈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이런 짓도 할 수 있다고요." 그러더니 시나는 앉아있는 드랫에게로 몸을 구부렸다. 하지만 드래마는 맨 처음 도대체 시나가 무엇 때문에 몸을 구부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며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겹치려고 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만큼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녀는 입술을 맞대기 전 반쯤 눈을 감고 잠시 속삭였다. "드랫.. 꿈이니까요." 뭔가, 애타게 바라고 양해를 구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순간 드래마 는 오히려 정신을 차렸다. "..무슨 짓이야!!!" 드래마는 그녀를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앗...!" 그 바람에 시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드래마는 그녀가 비틀거 리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너무 놀라고 거의 충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황당해 하고 있었다. "다가오지마!" 그는 그녀의 숨결이 잠깐 닿았던 입술마저도 닦아냈다. 맙소사! 내가 시 나와 이런 짓을 하는 꿈을 꾸다니..! 거기다 방금 말도 너무, 웃겼다. 이건 못된 청년이 억지로 자신을 겁탈하려 할 때, 처녀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뱉는 소리 아닌가? 드래마는 고작 이런 여자 애 때문에 자신이 이런 대사 까지 말했다는 것을 알고 기가 막혔다. 꿈 중에서도 지독한 꿈이 틀림없 었다. 빨리 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분명히 밝혀 둬야 한 다...! 그는 말했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너하고 이런 짓 할 의도는 없어! 현실에서도, 단 한 순간도 네게 이상한 생각 품은 적 없다고!!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 야!!" 시나는 드래마가 자신을 거부하자 화가 난 표정으로 있다가, 잠시 생각 하고 갑자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현실에도..? 현실에서도, 한 순간 내게 이상한 생각 품은 적이 없어 요? 정말이요?" 그런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기분 좋아 보여, 드래마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그런 짓을 해 놓고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시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비켜. 너는 내가 아는 시나가 아니군. 평소의 그녀라면 결코 이런 짓 을 하지 않았을..." 그러다가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니, 잠깐... 이건 꿈이니까.. 그럼 이건 내 생각이 표출된..."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그만 얼굴을 확 붉히고 말았다. 그리고 낮게 말 했다.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시나와의 키스신을 꿈꾼단 말인가?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 그러므로 꿈에 출현하는 사람을 탓 하는 일은 당연히 아무 소용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 가..!? 그는 한참을 묵묵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완전히 미쳤군. 널 상대로 이런 짓을 꿈 꿀 정도라면.. 뭔가... 욕구불 만인가..." 그러나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리 욕구 불만이라도, 왜 하필이면 시나야..? 맙소사.. 뭔가 왜곡되어 나타난 건가.. 꿈이란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니까.. 시 나를 기다리다가 잠들었으니, 그 생각이 기억에 남아..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어. 그래서 그녀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래.. 맞아. 그래서 이 런 말도 안 되는 꿈까지 꾼 거야. 하지만... 젠장... 정말 유치한 꿈이군. 그 런데 왜 하필 시나야..? ..아.. 시나를 걱정하다가 잠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금 더 왜곡해서 나타났다면 좋잖아..! 이래서야 마치 내 가..." 그러다가 그는 말을 뚝 그쳤다. 꿈 속(?)의 시나가 자신을 빙긋거리며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뭘... 그렇게 웃으면서 보는 거지, 시나? 내 꼴이 웃겨? 하지만 넌 평소 때와 전혀 틀린 행동을 해서 마치 정말 네가 아닌 것처럼..." 그 말에 갑자기 시나가 웃었다. "헤헤.." 그 모습이 이건 그냥 장난인데 뭘 그런 걸 갖고 그러냐는 듯 너무나 태 연한 모습이라, 맨 처음엔 화가 났던 드래마도 곧 그녀를 따라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렇군. 어쩌면 네가 그렇게 웃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좀 이상한 말 이긴 하니까. 꿈에 나오는 인물에게 넌 현실과 틀리다고 따지다니..." 그 말에 시나는 또 한 번 더 생긋 웃었다. 그 빙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현실이라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시 나도 절대 저런 모습이 아니다. 드래마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이제 더 이상 따지지 않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 바보 같은 꿈인가 싶지만, 꿈이라는 것은 따진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러니까 지금까지의 일은 잊겠어. ...어차피 깨어나면 생각도 안 날 테지 만." 그는 꿈을 대부분 잊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 그래도 꿈에 있는 동안에는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낫겠 군. 일단 나는,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너와 키스 같은 거 할 마음 전혀 없 어. 그러니 이것이 설혹 어떤 왜곡이라고 할 지라도, 이런 식의 왜곡은 탐 탁지 않아. 그러니 무언가를 알려 주고 싶거든, 다른 방식으로 해 줘. 한 마디로, 방금과 같은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이야... 알겠어?"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순순한 대답에 그는 조금 미소 지었다. 역시 꿈은 꿈이군. 키스 를 갖고 하라 하지 말라 여자아이와 실랑이를 벌일 정도라면... 꿈이 아니 곤 불가능하지. 그래서 드래마는 이왕 꾸는 꿈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몹시 피곤하고 지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안개가 조 금 신경에 거슬릴 뿐 그다지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다시 돌 위에 앉기로 한 것이다. 어쩐지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휴... 이런 안개 천지라니.. 어딜 갈 수도 없고. ...그냥 이렇게 편히 앉 아서 꿈이 깨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시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드래마를 내려다보았다. "후후... 그래요. 편히 앉아 꿈이 깰 때까지 기다리세요. 음... 그런데, 드 랫..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꿈이니까 솔직히 말해도 좋아 요.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한 말로 보면, 평소의 나한테는 전혀- 매 력을 못 느꼈다 이거죠? 그런 거예요?" 드래마는 인상을 쓰고 그녀를 보았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군. 스스로 그런 것을 묻다니. 답을 말하면, '그렇다'지만.. 하지만 오해는 말아 줘. 너를 마치 여동생처럼 생각한다는 의미이지.." 그녀는 깔깔 웃었다. "아이.. 그건 괜찮아요. 오히려 기뻐요.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니. 후후 후... 저어.. 그럼, 드랫.. 지금의 나는 어떤지 봐주세요.." 그리고 시나는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아 무척 행복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저는 마음에 드는 건가요? 네..? 이젠, '이상한 짓'을 해도 좋을 만큼... 제가 예뻐요?" 아...! 드래마는 그제야 알았다. 무언가 생소한 느낌이 들던 이유...! 그건 바로 시나의 눈이 은색이기 때문이었다. 창 밖이 밝은지 한참이 지났다. 레이서스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몇몇 촛불이 아직도 가물거리고 있었다. 대다 수 초들이, 이미 그 촛농이 바닥에 늘어붙어 꺼져가거나, 아니면 그 생명 이 다해 흉한 검은 심지만 드러내 놓고 있건만 아직도 어떤 것은 불타고 있어 아침의 푸르스름한 기운 아래에선 오히려 그것이 더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돌아다니며, 초를 하나하나 불어 끄고 그리고 창으로 가 커튼을 활짝 열어제치고 바깥을 보았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바깥은 하얗게 눈부셨다. 창 앞에 이름 모를 새들이 앉았다가, 레이서스의 인기척에 깜짝 놀라 푸드득 날아갔는데, 그는 그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침대 곁으로 갔다. 그리고 침대 옆에 놓여있는 자신의 후드를 집 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이 더럽고 피가 묻어 있어, 그는 다시는 그것 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그것을 꽉 쥐고 있다 가 천천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침실에 딸린 옷장에서 가장 무난한 후드.. 혹은 모피 옷.. 아무 거나 상관없이 골라서 입었다. 이곳의 정식 소유주는 클로니아 세스틴 님인데, 아마도 나중에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곳을 함부로 썼음을... 이렇게 그의 숲지기를 겁먹게 했음을.. 그리고... 레이서스는 옷을 입고 와서 침대 곁에서 거기에 누워있는 소 녀를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 소녀의 죽음을 여기서 맞게 했음을. 레이서스는 조금 미소짓고, 몸을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그가 데려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여기에 내버려두면,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될 테니까. 그래서 그는 시트에 감싼 그녀를 안고 천천히 침실 밖을 나가 이제는 벽난로 불이 다 꺼진 거실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거기엔 숲지기가 있었고, 숲지기는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대기 시켜 놓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언제나 그랬듯, 예의 바르게 말했다. "...나를 위해 애를 써준 것 고맙다." 그리고 그는 소녀를 말에 태우고, 자신도 말에 훌쩍 올라 다시는 그곳 을 돌아보지 않고 떠났는데, 그렇게 떠나는 힐라토 파이오니온과 방금 본 그 여자 때문에 숲지기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히, 힐라토님이 마, 마노테를...!"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85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23 21:46 읽음:239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6회, 제 41막. 겨울 속에서. (3)> 시나는 계속 조르듯 묻고 있었다. "네? 어때요, 드랫? 내가 예뻐요? 현실의 나보다 훨씬 더 예쁘냐고요... 저기..." 그녀는 그에게 더욱 바싹 다가갔다. "나는 드랫의 종속자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난 곧, 드랫의 아내가 될 거예요. 그렇죠? 드랫은 내 종속주고... 그러니까 드랫은 내 남편이 되는 거죠.. 나만 사랑하고, 나 외엔 아무도 친구로 안 하고.. 나만 지켜주는 거... 그런 거죠? 그러니까.. 여기 꿈속의 나는 현실의 나와는 틀리니까..." 그리고 그녀는 은색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내가 훨씬 더 예쁘죠..? 그러니, 이제 드랫이 나한테 키스해 줄래요? 네..?" 드래마는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도저히 안 되겠어, 자리에서 다시금 일어났다. "...차라리, 말을 안 듣는 게 났겠군." 그리고 그는 안개 속을 향하여 걸어갔다. 시나가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이 얼토당토않은 꿈도 조금은 나아질 것 같았다. 헌데 그때 누군가 자신 의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드랫! 어딜 가는 거예요! 친구라고 했잖아요!! 그럼, 날 버리지 말아 요!!" 하도 달라붙는 느낌이라 드래마는 짜증어린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아 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난... 네가 정말 시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그녀라면 결코 이런 말 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자 그녀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정말 시나예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가슴을 끌어안아 거기에 얼굴을 묻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당신의 아내가 될 거라고요!" "...비켜!" 정말로 화가 난 그는 시나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억지로 떼어냈다. "너든 누구든 어떤 여자도 내 아내로 삼고 싶은 마음 없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빌어먹을 꿈이군!! 나는 이미 아내가 있 어!! 그리고, 그 약속은 내 의지가 허락하는 한,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지킬 거야!!!" 그러자 어깨를 잡혀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시나는 창백한 얼굴을 했다. "...아내.. 있다고요? 그게 누구예요..?" 그는 그녀를 밀치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말해야 할 이유 없어. 정말 꿈이라면, 빨리 사라져 줘." 그 말에 시나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서리기 시작했다. 은색 눈에 투명하고 슬픈 눈물이 고인 것이다. 시나는 드래마의 무서운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당신이 대답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그게 누군지. ...스 온.. 아피..네스." 드래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름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내 무의식을 이용하 여 이런 꿈을 꾸게 하는 거라면, 네가 그 이름을 알고 있어도 놀랄 것은 없겠지... 하지만 꿈의 망령, 너 서큐버스.(succubus; 잠자는 남자와 정을 통한다는 여자마귀.)"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그녀에게도 모독이고, 네가 모습 을 빌리고 있는 시나에게도 모독이다! 현실의 시나가 이런 식으로 내 꿈 에 나온다는 것이 참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다!! 현실의 시나보다 예쁘냐 고!? 웃기는 군!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너 자신을 비교할 생각하지 마라!! 그나저나 이렇게 기분이 역겨운데, 도대체 왜 이 꿈은 깰 생각도 않지?! 정말 구역질나는군!! 이것이 혹, 네 마법(魔法)이라면, 장난은 그만두고 당 장 꺼져라, 서큐버스!!" 시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흑...흑... 나, 난.. 당신이 날 용서한 줄 알았는데... 내, 내가 계속 바랬 던 것은..." 이상하도록 현실감이 넘치는 꿈이라, 그리고 이상하도록 성(性)적인 면 을 자극하면서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꿈이라, 드래마는 혹시 이것이 몽마 (夢魔)의 짓이 아닌가하여 일부러 잔인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이 렇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놀랍게도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아마 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섬뜩함을 무시하고, 한층 더 차갑게 말했다. "뭘 원하든, 네가 원하는 것은 여기 없다!! 사라져라!" "..흑흑..!!" 시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돌 같은 차디찬 눈이 그녀의 가슴에 날카롭게 꽂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계, 계속 들리는 목소리가... 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날 싫어할 거 라고... 그, 그래도 난..." 그는 아침에,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손을 내밀고, 그녀에게 웃음 을 보여 주었다. 헌데 사실 그건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시나 자신이 착각 한 것이다. "...내, 내가 현실의 그 애보다 못해요?..." 시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당신은 그 애가 더 좋아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 하지만 내가 당신 의 종속자잖아요...!! 종속자라는 건,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 런데 스온 아피네스라고?! 과거가 어찌됐건, 당신 옆에 있는 건 바로 나 인데-!!!" 드래마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정말 꿈인가? 서 큐버스가 이토록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슬픈 울음을 지을 수 있 단 말인가? 혹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에, 그래서 남자의 꿈을 뺏는 수마(睡魔)라고 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 앞 으로 나가 손을 내밀었다. "..시..나..?"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외쳤다. "싫어--!!! 당신이 날 싫어하더라도, 난 당신을 포기 못해!! 우리 아빠도 그렇고, 당신도 다 내 거야!! 그 애도, 스온 아피네스도!!! 아무도 내게서 당신을 뺏지 못해--!!!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날 더욱 미워하더라도, 아무 상관없어!! 당신의 미움은 적든 많든 내게 다 똑같은 무게니까---!!!" 시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사실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널 증오하게 될 것이다.] 되풀이되는 예언... 시나는 절망 어린 은색 눈을 들고, 그에게 말했다. "현실의 그 애가 좋다고..? 그럼, 그 애가 앞으로 누굴 좋아하게 되는 지 똑똑히 봐... 스온 아피네스가 당신의 아내야? 천만에... 나 외엔 어떤 누구도 당신의 아내가 되지 못해... 그 여자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지... 당신은, 당신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거야... 당신 꿈 안에서, 영원히 서큐버스로만 남게 되더라도, 당신은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잔인하게 미소지었고, 그걸로 모든 것은 사라졌다. 레이서스는 말을 몰아 숲 속으로 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츰 그가 원하는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잡목과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 때문 에 고개를 숙이고 조심해서 말을 몰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을 지나 작지만 그래도 평평한 공터가 나왔을 때, 레이서스는 거기서 말을 세우고 그 공터에 내려섰다. 그리고 차디찬 시나 의 몸을 안고 눈이 깊숙이 깔린 공터에 외줄기 발자국을 남기며 공터가 끝나는 곳까지 걸어갔다. 순간, 눈 앞 가득, 넓게 펼쳐진 혼 강이 다가들었다. 작은 공터를 넘어 깊은 절벽 밑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이 넘실대며 흐르는 강은, 짙은 청회색 빛으로 아직도 옅은 분홍빛 품은 먼 곳의 하늘을 반사하여 저 멀리 수평선 부분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산들은 공기 중에 가쁜 호흡을 하듯, 잔뜩 아침 안개를 토해내며 그 속 에 잠겨있었다. 그 발치에 있는 유리궁전도 그런 뿌연 안개에 휩싸여 정 적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여기 저기 굴뚝 에서 올라오는 연기 외에는 푸른 아침이었다. 그곳, 한 나무 밑에, 이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레이서스는 시 나를 안고 앉았다. 그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순간,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눈이 쏟아졌 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팔 안에 있는 소녀가 너무나 차가운 몸을 하고 있어, 그것이 어떤 것보다 춥고 외로운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단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무어라 말해야 할지 그냥 그렇게 한참 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겨우 입을 떼었다. "...나는... 이 공터에서 널 죽이려고 했다." 넓고 넓은 하늘에 차츰 푸른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너를 죽이려 했을 때... 왜, 이 강이... 그리고 이 장소가 생각났는지. 아 마도 그건 아침에 서리는 이 강의 빛깔이 네 눈빛과 같기 때문인지도 모 르겠다." 그는 나무에 기댔다. "...아름다운 빛이지. ...내 아버지는 저와 같은 눈빛과 저와 같은 머리칼 을 지닌 분이셨다. ...헌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저런 빛을 가진 자들은, 너 무나 쉽게, 마치 바람과 같이, 혹은 흐르는 강물과 같이, 자기 갈 길로 사 라지는 것 같다." 그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는지...? 사실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하하... 그 퉁명스러운 마부 덕에, 너를 그 뒷골목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그 순간부 터... 참으로 이상하게도 나는... 네가 저 강물과 같은 눈빛을 가졌다는 것 을 알고, 네가 부디 한 곳에 머물러 쉬기를... 오래 방랑을 끝내고 한 곳에 멈추어, 네 바람과도 같은 눈빛을 쉬길 바랬다. ...네가 누군지 모르고, 또 알 수도 없는데도, 네 눈에 서린 그 바람의 빛깔이 너무나 쉽게 어디론가 떠날 것 같아, 휴식과 안식... 나의 세계를 네게 베풀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내 아버지에게 그렇게 바랬던 것처럼. ...하지만, 너는 내 아버 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제 점차 눈부신 빛을 머금어 가는 하늘을 보았다. "내가 아닌, 엘이 베푸는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구나... 바람을 불러, 자신이 작정한 때에, 자신이 베푼 영혼을 거둬들이는 그 분의 손길에 의 해. 그러니,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내 세계는, 아주 아름답다.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니 아마 한 번도 내 세 계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거기다 마노테온의 신분이니... 앞으로도 그럴 테지. ...내 세계는..." 그는 조금 말을 골랐다. "내 세계는, 지금 겨울을 맞고 있다. 나뭇가지들은 헐벗고, 들판은 먼 곳까지 황량하며, 곳곳에 있는 늪은 얼어붙어 마치 죽음이라도 내린 듯 쓸쓸하다. 하지만... 겨울은 밤과는 또 다른 자연의 안식으로, 긴긴 세 개 의 계절동안 쉬지 않고 그 물레를 돌렸던 피조물들은 클로니아 스피릿의 명령을 받아, 잠시 나마, 눈을 감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긴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러니 겨울은... 나의 안식과 마찬가지로 결코 영원한 죽음이 아니다. 나의 안식이 아침이면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나의 안식 이 아침을 이토록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그는 눈을 들어 온 세상의 아침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넓었고 강물은 유유했으며 대기는 숨막힐 듯 빛나고 있었다. "...이 겨울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겨울은 모든 봄을 아름답게 만드는 자, 그 짧은 잠시 잠깐의 움츠림으로, 모든 만물에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자이다. 나는 내내, 하누카의 날이 겨울에 있는 것을 이런 까닭이라 생각 했다. 하누카의 날.. 그 빛이 충만한 날에, 홀로 태어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진정한 삶의 날을 시작하는 그 순간에... 그것은 마치, 시간 중의 시간이며, 계절 중에 계절인 겨울이 자신의 정수를 그 날에 쏟아 부 어 새로운 빛을 두르는 것 같아서... 그리하여, 그 빛 속에 하누카의 날이 지나고..." 힐라토의 왕, 레이서스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했 다. 그저 그는 지금 이 순간, 이 소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 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모든 것과, 내 아내의 모든 것이, 그 빛 가운데 각각 객체로서... 그러나 이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한 몸으로 태어나면, ...그때 야 비로소 우리는 하누카의 날을, 세 개의 계절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 이다." 그는 미소지었다. "알고 있는지..? 그처럼 이제 곧 내 세계에는 봄이 올 것이다. 하얀 눈 가운데 고독하기만 했던 것들이, 나뭇가지에서 스며 나오는 푸 른 잎사귀로서, 얼어붙었던 강물이 부르는 노래로서, 대지의 딱딱함을 깨 치고 나온 새순이 지르는 환희로서... 그렇게 봄은 찾아올 것이다. 혹, 그런 것들이 너무 멀리 있어 믿어지지 않더라도... 아마 들을 수 있 을 것이다. 지금도 계속 되풀이되는, ...빛으로 충만한 겨울이 부르는 저, 깊음의 노래... 푸른 잎사귀를 그리워하는 대기가 꾸는 저, 겨울의 꿈... 온 땅이 진동하도록 이렇게 봄의 이름을 부르는 저, 겨울의 음성..." 순간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와 그들을 휩싸고 지나가며, 하얀 눈들이 흩날렸다. 흩날리는 눈들은 아침 속에 은빛으로 빛나며 회색의 강들로 스 러졌는데, 그곳에 깊은 겨울의 정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에... 이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이 되어 온 세상을 채우는 때에..." 레이서스는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직도 무겁게 덮여 있 었고 얼굴엔 어두움과 차가움이 드리워 있었다. 레이서스는 그런 그녀를 다시금 꽉 끌어안고 조용히, 그러나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네가 그 이름에 답하길 바란다. 봄의 이름이 불려지는 그 때에 바로 거기, 그 자리에 네가 서 있기를..." 온 세상은 이런 찬란한 겨울이었다. 아무 것도 멈춘 것이란 없으며, 아 무 것도 소멸되는 것이란 없으며 모든 것들은, 불멸로서 살아있음을 스스 로 증명하는 때였다. 누군가 말했다. "겨울은 봄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다." 이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드래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래마는 이것이 누구에게 들은 말이었던 이건 그대로 진실이고, 그가 가장 사랑하 는 사실이며, 그의 뼛속 깊숙이 새겨진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 혹독함은 부드러움을 꿈꾸며, 차가움은 따뜻함을 바라며, 메마름은 촉촉 함을 원한다. 그래서 겨울은 계속 봄을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쉬지 않고, 부르는 것 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겨울은 봄을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지 만 아버지... 봄은 어떨까요? 어머니는 아직도 싯딤나무 밑에서 자신의 고 향을 그리워하는군요.] 크고 따뜻한 은색의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비록 그럴지라도.. 겨울은 봄을 꿈꾼단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의 족 속. 누군가를 비추고 그를 아름답게 하는 데 위안을 얻는다. 너도 크면 알 것이다... 네 피 속에 새겨진 너의 존재가 계속 원하고 바라는 것이 그토 록 짧고 미약하며 불안정한 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비록 그것 이 너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끝없이, 끝없이 네가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어린 그는 슬픈 눈을 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웃었다.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느냐..? 하하.. 그래서 우리는 마인드 컨트롤의 족속이다. 어떤 슬픔에도.. 심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슬픔에도, 아무 것 에도 지지 않고, 계속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겨울의 굳세고, 강 인한 의지를 받아, 어떤 상처보다도 더 깊은 사랑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능력을 부여받은 족속이 바로 우리다... 내 아들아, 그리고 나는 네 가 그 길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의 은빛 머리칼에 손을 얹었다. "...부디 굳세고, 강건하기를.. 내 아들, 세렌시스." ".....?" 드래마는 눈을 떴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눈가에 손을 대보니, 이상한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자기 손끝에 묻어 나온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밤에 환각에 시달리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눈물을 흘리 며 깨어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한심하다고 질책하는 대신, 한숨을 쉬며 손을 이마에 기댔다.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꿈들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뭐, 언제나 그랬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눈 물까지 어릴 정도라면 상당히 감정을 자극하는 꿈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는 짓인 줄은 알지만 꿈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지막 꿈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누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 주었던 것 같은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마 이런 아련한 느낌만 남기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 이 안 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 전의 꿈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무언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어떤 소녀... 그래, 시나가 나왔다. 그리고 어떤 나무 밑에서 나는 시나 와... "......!!!"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뻘개진 얼굴로 기가 막혀서 중 얼거렸다. "...맙소사. 왜... 하필이면 이 기억이...!" 레이서스는 말을 끝마치고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바닥의 눈이 그의 몸을 점차 얼음장같이 만들었지만, 그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는 멍하니 회색의 강물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도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제 연회에 아무 말 없이 불참한 것도 그렇고, 하루종일 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시 바삐 돌아가 봐야 한 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어나기가 힘든 지. 왜 언제까지나 저 회색의 강물 을 바라보고만 싶은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생각은 하나였다. 그렇더라도, 내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 고... 그냥, 이곳에 조금만 더 있을까... 어차피 이 시간들은 아주 짧을 테고, 그가 힐라토 파이오니온으로 살아 가야 하는 시간은 너무나 길게 남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만족함이 없는 이 짧은 시간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 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 그를 멍한 상태에서 깨우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 전 내내 그러고 있었을 지 모른다. "...헷취..." "...?!!" 이 소리가 들렸을 때는, 너무 뜻밖의 소리라 깜짝 놀라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 소리와 함께 그의 품안에서 시나가 꿈틀 움직이는 것을 알고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움직임을 그대로 잊고 말았다. ....?!! 그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그는 경악 어린 얼굴로 시나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변함이 없는데..?! 창백한 얼굴... 여기저기 멍이 들어, 아파 보이는 얼굴.. 아침에 마지막 숨을 확인한 이후,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다. 해서 그는 자기가 너무 차가운데 오래 있어,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아 니면 주욱 밤을 새서 잠깐 졸았던 것인가 의심했다. 그는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는 잠시 시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 소녀 때문에 이렇게 슬픔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 있다는 것은... 그러니, 궁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 푹 잠을 잔다면... "...휴우.." "....!!!" 그리고 이렇게 뚜렷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레이서스는 보았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열리고 거기서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자기가 미친 것 인지 어쩐 것인지는 모르나, 하여튼 그는 분명히 본 것이다. "...맙..소사...!"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뛰는 맥박도 느낀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고, 숨결은 낮게 다시 시작되며 심장은 박동을 되찾았다. "...미, 믿을 수가..!!!" 그의 손으로, 그녀에게서 모든 생명의 증거가 떠나 간 것을 확인했건만, 이제 그녀는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그 녀는 지금 눈을 뜨고 있었다. 창백하게 덮인 눈꺼풀을 들고 처음에는 힘 없이, 그러나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곧 그에게 눈을 고정시켰 다. 저 회색의 강물과 같은 회색 눈.. 그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회색 눈 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레겜을 보며 방긋 웃었다. "..아, 레겜.. 좋은 아침이네요.." 그리고 조금 더 웃었다. "...깨어났는데, 이렇게 빛 천지라 놀랐어요... 이 세계에서는 아침이라도 언제나 어둠 속에서 깨어났는데.." 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 채 겨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나.." (계속)================================================== 음... 이제 쓰고 싶었던 장면 썼으니, 하산을 하여...(퍼억--!!) 하하..^^;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성역은, 11월 7일에 모아서, 올리겠다고 말씀드리는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92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27 20:17 읽음:238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7회, 제 41막. 겨울 속에서. (4)> 시나는 굉장히 몽롱한 상태였다. 등 부분이 욱신거리며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아픔을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듯 먼 곳에서 느끼 는 것과 한 겹 베일을 깐 것 같은 이 몽롱함 때문에 그럭저럭 가만히 앉 아 있을 수 있었다. 레겜이 옆에서 말했다. "곧 있으면, 집에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힘들면 기대서 자도 좋아요." 시나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웅... 괜다나요. ...계속 다서 별노 안 돌려요.." 하지만 그 말을 한 순간 이미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그런 시나를 보고 조금 웃은 뒤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꽤 빠른 속력으 로 우나 일루테오나 힐러 라단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했던 어리석은 행동 때문이었다. 사람이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 를 판단하는 것은 꽤 어렵다고 한다. 경우의 차이야 있지만, 보통 사람들 이 생각하기에 숨이 끊기고 맥이 안 뛴다고 생각했어도, 나중에 힐러가 와서 나름의 방법대로 진맥하고 아직은 숨이 붙어있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이다.(물론 그 뒤에는 그대로 숨을 되돌리지 못하는 경우 가 많으니, 보통 사람들의 판단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헌데 스스로 무슨 힐러라도 된 양, 아직 살아있는 인간을 붙잡고 그렇 게 슬퍼했으니... 그는 얼굴을 붉혔다. 지나치게 흥분하고, 감정이 고양되 어 있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 힐러 둘을 끝 까지 남겨 뒀으면, 이 소녀를 아침부터 그런 추운 장소에 데려가지 않았 을 텐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죽은 것으로 착각해 그 추운 곳에 오 랫동안 뒀으니... "바보같이..!" 그는 자신을 질책하고, 입술을 깨문 채 시나의 이마를 슬쩍 짚어 보았 다. 이마가 아까보다 뜨거웠다. 게다가 아침엔 그토록 창백했던 얼굴이 이 젠 점점 더 빨개지고 있어서 지금도 열이 오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페이스 힐러의 힘이 먹혀든다면 이런 열 따윈 아무 것도 아닌데, 평범 한 치료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하지만 13살 무렵부터 아픈 적이 많았던 레이서스 는 한 힐러가 해 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힐러 라이트라는 결국 그런 것입니다, 저하. 굳이 페이스 힐러가 아니 라도, 사람이라면, 미약하긴 하지만 누구나 힐러 라이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큰 은총으로, 또 다른 말로는 '자연치유력' 이라 하는 것이지요.] [자연치유력?] [네,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이런 힘이 없다면, 어느 약초도 어느 광물도, 하여튼 어느 좋다는 약재도 인간을 낫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약 재는 조금 더 회복을 빠르게 하기 위해 환자의 몸을 보호해주고 보충해 주는 의미가 있을 뿐... 결국 궁극적인 '치료'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 연치유력'의 몫입니다. 힐러 라이트라는 것은 그런 인간의 '자연치유력'이 엘의 은혜로 한층 더 크게 발현된 것으로 저 자신뿐만 아니라, 남도 생각 하여 그의 몸을 낫게 하라는 엘의 은혜로운 의지로 사료됩니다. 하오니, 저하. 총명한 우리들의 파이오 스아디온이여. 부디 힘을 가지시길 빕니다. '스스로'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어서... 심지어, 신(臣)의 힐러 라이트 를 밤낮으로 저하의 몸에 전사한다 할 지라도, 이것마저도 한계가 있음 은... 결국 궁극적인 치유는 엘과 저하, 두 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레이서스는 중얼거렸다. "그러니.. 그 지독한 밤을 견디고 살았으니, 부 디 견뎌 내기를... 비록 힐러 라이트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네 안 엔, 엘이 부여하신 더 큰 힘이 있으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 다. 자신을 탓하는 마음으로 괴롭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소녀의 붉은 볼... 아침의 그 차가움을 떠나 이젠 살아있는 증거로 숨을 내쉬며, 붉게 피가 도는 그녀의 뜨거운 몸을 느끼며, 레이서스는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 를 지었다. 누군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자,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굉장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화끈하게 달궈진 방에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그것을 제칠 기운도 없이 그냥 갇혀 있는 느낌으로, 옴짝달싹도 못하고 너무 괴로운데, 이마에 놓인 서늘한 손은 마치 차가운 생수처럼 시나의 열을 식혀 주었다. 그래서 그 손이 떠나갔을 때는 너무 안타까웠다. 뜨겁고 답답한 가운데 그것이 떠나가니 울음이 나올 것처럼 힘들었다. 저 손이 조금만 더 있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어디에도 차가움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닿는 즉시, 의복이나 공 기나 모두 다 뜨겁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딜 가면 이것을 식힐 수 있을까... 그때 문득 드랫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음처럼 차가운 은발... 그리고 말투들.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에게 가면 괜찮을 지도... 그래서 시나는 먼 곳에 앉아 있는 드랫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는 차가 운 눈을 모아,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에게 가서 저것을 돕는 다면 이 몸도 시원해 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냐. 그는 아냐. 잘 봐.. 저 남자가 새기고 있는 것을.] 그 권유에 시나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그 목소리가 가리키는 것을 보 았다. 드랫은 정말 그 목소리가 말한 대로 무언가를 조각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아주, 아주 커다란 나무... 열 명의 어른들이 빙 둘러서서 팔을 뻗어도 서로 닿을 것 같지 않은 큰 밑동을 가진 나무에다가, 부지런 히 어떤 여자의 모습을 새기고 있었다. [..후후.. 그런데 네가 저것을 도운 다고? 웃기고 있네. 후후후.. 안될걸. 불가능해. 저건 저 사람만의 것이라고... 네가 다가가면, 굉장히 싫어하며 널 밀쳐버릴 거야.] 그것은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시나는 풀이 죽었다. [..하지만.. 친구라고 했는데...] [하하하..!! 친구? 생각을 해봐, 이 맹추야!! 친구가 더 중요하겠니? 아 님, 연인이 더 중요하겠니?! 친구 따윈 연인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관둬! 그에게 다가가지마!] 시나는 눈물을 떨궜다. [하지만... 난 아파. 누군가가 필요해...] 목소리가 웃었다. [..응, 그래. 그건 나도 알아. 넌 누군가가 필요하지. 그럼, 이럼 어떨까? 넌 아빠를 사랑하지?]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빠를 잊고 있었다. 언제나 아 빠를 제일 먼저 떠올렸는데... 아빠는 그녀가 아플 때면,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그 기억을 긍정하듯 말했다. [그래..! 아빠를 기억하는 거야. 아빠.. 네 아빠는 어땠지?] 시나는 웃었다. [상냥한 검은 눈... 날 안아 주고, 그 얼굴을 부빌 때면, 수염이 너무 아팠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응.. 검은 눈에, 검은머리를 가진 상냥한 우리 아빠. 그러니 ...기억해 봐. 그런 사람이 있잖아. 네 옆에... 바로 네 옆.] 시나는 눈을 들어 옆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상냥한 검은 눈. 레겜...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언제나 그 검은 눈을 가장 사랑했어. 그러니, 바라봐... 그는 절대 네게 상처 입히지 않을 거야. 우리 아빠처럼...] 우리 아빠처럼...? 시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레겜은 우리 아빠가 아냐. 레겜은 그냥 레겜일 뿐... 게다가 난..] 시나는 다시금 그 나무 밑을 보았다. 드랫은 아직도 열중하여 나무에 여자의 형상을 새기고 있었다. 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드랫이 내 친구가 된다고 해 줬으니까... 그러니, 그를 방해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만이라도 보면 안될까? 그럼, 그가 일을 하 다가 지쳐서...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내가 옆에 있다가 다가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난, 드랫이 아내를 찾는 걸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래 서 드랫도...] [아냐!!! 시끄러워!!! 그는 너 따위 친구로 삼지 않아-!!! 이 멍청이-!! 거짓말쟁이-!! 너 따윈 아무 것도 아냐!! 그러니까, 그에게 다가가지 마 --!!] 지금까지 달콤하기까지 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이런 험악한 소리를 내 자, 시나는 놀라서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헌데 그곳에는 놀랍 게도 또 다른 그녀가 있었다. 은빛 눈을 가진 그녀... 그녀는 분노하며 소 리쳤다. "다가가지 말라고--!!!!" 시나는 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안타까운 얼 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나...?] 그러자 그녀는 시나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다가가지 마--!!!!" 천 마디의 말보다, 그 단 한차례의 따귀가 더 많은 말을 전해 주었다. 고통, 분노, 후회, 증오.. 그리고 슬픔까지도... 그래서 시나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뺨이나 몸보다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시나는, 그녀의 거친 행동에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꼬 옥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딜 기분이었다. [시...나...]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소리쳤다. "비켜--!!! 너 따윈,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어--!! 내 명령을 안 들 어?!!!" 시나의 회색 눈에서 긴 눈물이 흘렀다. 작은 내 어린아이. [...알겠어. 안 다가갈게. 네가 원한다면. 그러니, 분노하지마. 슬퍼하지도 마. 난 그에게 안 다가갈 거야.] 그 말에, 은색 눈을 번뜩이던 시나는 득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흥...그래...?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좋아.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어. 그리고 넌..." 그녀는 손을 들어, 레겜을 가리켰다. "그리고 넌, 저 남자에게 가는 거야. 저 검은 눈의 남자." 시나는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는 아빠가 아냐.] "상관없어! 넌--!!" 은빛 눈의 시나는 어깨에 두른 팔을 놓으라는 듯 두 손으로 시나를 밀 쳤다. 하지만 시나가 자신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짜증을 내며, 무서 운 목소리로 눈물 흘리는 시나의 귀에 속삭였다. "젠장!!! 똑똑히 들어!! 넌, 저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거야! 아프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도록...!! 앞으로 네 모든 마음을 저 남자에게 바치는 거 야!!" 시나는 흐느꼈다. 그건 진심이 아니잖아. 레겜의 행복을 바라면서 왜 이 런 짓을 하는 거야... [안돼...] "...될 거야..." 시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되게 할 테니까." 덜컹...! 마차의 진동에 시나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레겜이 말했다. "집에 다 왔습니다. 이제부터 안고 들어갈 건데, 조금 아프더라도 참아 요." 집...? 시나는 마차에서 내려,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겨가면서, 집이라면 도대체 어떤 집일까 상상했다. 아빠가 있는 우리 집을 말하는 건가... 그런 데 왜 레겜이 그 집에 날 데려다 주지? 레겜이 엘야시온님이었나? 하지 만 시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엘야시온님은 파란 색 머리인데. 지금은 초록색 머리.. 아, 잠깐... 아까는 분명 검은 색 머리 였으니까.. 그렇구나... 밤이 되면 파란색 머리칼로 변해서 엘야시온님이 되는 거야. 시나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에 만족해서, 기운은 없지만 그래도 빙긋 웃 었다. 헌데, 레겜의 노크 소리에 집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아빠가 나오는 건가, 생각해서 시나는 목이 뻣뻣하고 아팠지만 겨우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빠가 아니었다.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회색의 후드를 입은 드랫이었다. 그러나 시나는 그를 본 것이 아빠를 본 것만큼이나 반가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와.. 드랫... 나 아까 드랫이... 눈사람 만드는 거 봤어요.." 드래마는 차가운 눈으로 시나를 노려보았다. 시나가 무슨 말을 하건 알 바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정상인 것 같지도 않았다. 얼굴에 흉한 멍과 시 뻘개진 볼... 하얗게 거스러미가 앉은 입술... 거기다 눈두덩도 부어있어 도 저히 시나라고 알아 볼 수가 없는 꼴이었다. "..." 드래마는 한 발 앞으로 나가 레겜의 품에서 시나를 안아 들었다. 그리 고 레겜에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레이서스는 내내 힘없는 얼굴로 있던 시나가 루온 루드랫을 보자 밝은 표정을 띄는 것을 보고, 무언가 답답하여 있었다. 덕분에 루온 루드랫이 일언반구도 없이 이렇게 시나를 뺏어들 듯 안으며, 그에게 딱딱한 목소리 로 말하자 울컥하는 마음이 솟았다. 자기 아내가 이렇게 다쳐서 왔는데, 저렇게 질리도록 차가운 얼굴이라니...! 해서 뭐라도 한 마디 쏘아붙여 주 려다 그는 꾹 참았다. 일단은 그냥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 다. 시나가 어떻게 다쳤는지 설명도 해야하고, 어젯밤의 상황도 설명해야 했으니까. 헌데 그 때였다. 조각, 눈사람, 어쩌고 중얼거리는 시나를 소파에 내려 놓은 루온 루드랫이, 다시 레겜 앞으로 와, 주먹을 날린 것은. 퍽---!!!! "윽...!!" 레이서스는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얼굴이 휙 돌아갈 정도로 세찬 주먹이었다. 루온 루드랫이 낮게 말했다. "...이렇게 맞아도 할 말은 없겠지? 네 놈을 믿고, 저 여자 애를 맡긴 건 데...! 아침에서야 그런 태연한 얼굴로 시나를 데리고 와?! 거기다 저 얼굴 은 왜 저렇지!! 네 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레이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콧등이 시큰거리고 입안이 찢어진 듯 입 안에서 찝찔한 맛이 났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침을 꿀꺽 삼키 며, 중얼거렸다. "...태연한 얼굴... 무슨 짓을 했느냐고..?" 레이서스는 그에 지지 않을 만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 고 주먹을 들어 그의 얼굴을 세게 후려갈겼다. 퍼억---!!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젠장!!! 그건, 이 쪽에서 할 말이다!!!" 이렇게 외친 레이서스는 그러잖아도 루온 루드랫에 대한 불쾌감이 극 에 달해 있었던지라, 잔뜩 분노해서 또 한차례 주먹을 날렸다. 덕분에 드래마는 화끈거리는 얼굴은 돌볼 생각도 못한 채, 팔뚝을 들어 그 주먹을 막았다. 그리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뭐야?!! 이 뻔뻔한...!" 하지만 다음 말은 곧바로 날아온 앞발차기에 피를 토하며 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으윽---!!!!" 얼굴을 감싸며, 저만치 뒤로 물러나가는 루드랫을 보며, 레이서스는 험 악하게 말했다. "...어느 쪽이 뻔뻔한지 가르쳐 주지!!! 덤벼--!!" "..제길..!" 그 무지막지한 발차기에, 온통 머리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이것에 비하 면 아까 턱에 맞은 것은 어린애 장난이었다. 게다가 이 얼얼한 느낌... 턱 이 날아가 버린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곧 빙긋 웃 었다. ...흥. ...지금, 이를 갈고 있으니, 턱은 무사하군...! 드래마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피가 흐르는 입을 주먹으로 쓱 닦았다. 덤비라고..? 해보겠다 이건가? 드래마는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레겜 앞으 로 가, 왼쪽 주먹은 턱 높이만큼 치켜들고 오른쪽 주먹으로는 상대의 얼 굴을 가격했다. 하지만 그 주먹은 중간에 레겜의 손목에 막혀 더 이상 뻗 지 못했다. 드래마의 공격실패에 레이서스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쳐지나갔 다. 하지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드래마는 왼쪽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퍼 억 걷어찼다. "욱..!" 드래마가 냉랭하게 말했다. "...페인트(feint)였지." 레이서스는 숨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기절할 듯 찢어지는 복부의 통 증은 무시했다. 그리고 억지로 씨익 웃었다. "콜록... 하... 그...래?" 레이서스는 그에게서 약간 물러나 오른쪽 다리로 밑에서부터 드래마의 옆구리를 날려 버렸다. 몸을 수그리고 괴로워하던 상대가 갑자기 번개같 이 일어나 그렇게 발로 걷어차자, 드래마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직격으 로 얻어맞았다. "으윽--!!!" 레이서스는 방어를 하기 위해 뒤로 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그거 하나 먹혀들었다고, 방심하면 안되지. 어때...? 페인트(faint; 졸 도하다.) 할 것 같나?"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난 드래마는 호흡곤란을 느끼며 그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사실 드래마는 지난 과거 20여 년 동안, 이렇게 동등하게 싸울만한 상대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자는 반사신경도 그렇고, 주먹에 실린 힘 같은 것이 루이티온이라고 해 도 될 정도로, 강력했다. 거기다, 상대방도 자신에 대해 그렇게 느끼는 듯, 이제 그의 검은 눈에선 긴장과 살기 등등한 전투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흥...!!! 드래마는 속에서 넘어오는 쓴 물과 핏물을 뱉어내며, 본능적으로 느꼈 다.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냐 아니냐는, 이 싸움에서 결판난다...! 첫 눈에 가늠해서 의식 중이던 무의식 중이던 자기보다 못한 것으로 판단이 난다면, 아량을 베풀 수도 있지만, 이런 동등한 상대라면 어떤 식으로든 힘을 겨루어야 한다. 게다가, 자기 영역과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이 런 식의 싸움은 남자라면 절대 질 수 없는 종류였다. 그래서 드래마는 자 기 안에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끼며, 얼굴에서 미소 따위는 집어 치웠다.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다. 그러니, 이 자식... 꼭 죽이고 만다... 레겜도 방금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이 네 죽음의 날이 될 거다!!!" 드래마가 무섭게 말했다. "누가 더 오래 살지는 두고 보는 게 낫겠지!!!"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아무도 말릴 수 없이 흥분해서, 좁다면 좁고, 넓 다면 넓은 거실바닥에서 한참을 치고 받고 싸웠다. 한편, 소파에 앉아 있던 시나는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안이 벙 벙해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음소리와, 퍽퍽 주먹이 오고가는 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덩치도 큰 남자 둘이서, 성난 황소처럼 씩씩대며 싸우는 것을 보니, 무서 운데다 위기 의식까지 느껴졌다. 벌써 테이블은 절단 났고, 조만간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까지도 둘러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나는, 몸이 아파 불 편했던 기분에, 무서움까지 겹쳐져서 그만 훌쩍거리며 울고 말았다. "...엉엉... 아빠.." 그것을 보고, 입술이 터져 피범벅이 된 드래마가 말했다. "...헉헉.. 저 여자 애가 저렇게 우는 데는, 뭔가 찔리는 것이 있겠지!!!!" 여기저기 멍든 데다, 벌써 눈 한쪽이 부어오르고 있는 레이서스가 죽일 듯한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헉.. 헉!! 재수 없는 자식!! 누가 할 소리를!!!!" 그리고 둘은 크로스 카운터를 노리며 스트레이트를 날렸는데, 그것이 빗나가자, 서로 이를 갈고 다시 한 번 더 상대의 턱이나 복부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격돌하려는 찰나, 이층으로 통하는 층계참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꺄아악--!! 시나야!!!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순간 두 남자는 움찔, 움직임을 멈췄고, 시나는 고개를 들어 훌쩍이며 말했다. "...흑흑... 카탈리 아줌마..." "시, 시끄러워서 웬일인가 내려와 봤더니!!!!" 카탈리는 부리나케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시나의 얼굴을 이모저모 들 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세상에, 세상에... 이 얼굴 좀 봐!! 하루 사 이에 이게 웬일이야!! 어쩜 좋아...!!"라고 연발하고 나서, 아직도 서로의 멱살을 쥐고 서 있는 남자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도대체, 뭐예욧--!!!!" 굉장히 큰 목소리라 드래마와 레이서스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카탈리 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상대가 남편의 주인이나, 손님이라는 것도 잊고 두 남자를 야단쳤다. "여자 애가 이 모양 이 꼴인데, 거실 구석에 팽개쳐 놓고, 싸움질을 해 욧?!! 둘 다 제정신이에욧?!!! 빨리 치료를 해야할 것 아니에욧!!!! 그러니 저를 부르던지 했어야죠!!!! 하여간, 남자들이란 정말 딱 질색이얏!!!!" 시나는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열 때문에 몽롱하고 이제 오한까지 났지 만, 이 순간만은 카탈리 아줌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흑흑... 정말 싫다. 저 두 사람... "...윽!" 찾고 있던 지갑이 거실 구석에 떨어진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들던 레 이서스는 신음을 뱉었다. 옆구리가 심하게 결리는 것이, 아직도 욱신거렸 다. 그래도 지갑을 버리고 갈 수는 없기에 그는 가까스로 허리를 굽혀 그 것을 챙겼다. 온 몸이 아프고 한 쪽 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것이 거 울을 보지 않아도 어떤 꼴일지 눈에 선했다. 바로 옆에 산 예까지 있으니 더더욱 자신의 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서스는 지갑을 갈무리하고 그 산 예인 드래마를 무서운 눈으로 힐끔 보았다. 루드랫은 거실의 테이블을 똑바로 세우다, 그것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알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안면 근육을 움직인 순간 얼 굴에 심한 통증이 왔는지, 아픔을 참는 듯 신음을 흘리고, 자신의 턱을 어 루만졌다. 그리고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욕설을 뱉더니, 문득 눈을 들어 레이서스를 보았다. 남색의 눈과 검은 색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레이서스가 먼저 말했 다. "...주인 여자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네 다리가 그 꼴 났겠지."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드래마는 싸늘하게 웃었다. "내가 할 소리이군. 지금, 서 있기도 힘든 것 같이 보이는데...? 네 번째, 왼쪽 다리로 옆구리를 걷어 채였을 때... 대미지가 컸지? 그러니, 내 몸이 제대로 된 컨디션이었다면 벌써 뼈가 몇 대 부러졌을 걸?" 레이서스도 지지 않고 웃음을 띄었다. "컨디션? 내가 어제 밤을 새지만 않았어도, 네 얼굴은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뭉개졌겠지." 드래마가 말했다. "흥! 눈이나 똑바로 뜨고 말하시지!" 레이서스는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흐른 핏자국이나 닦고 말해!!!" 그때 치료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카탈리가 무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해서 두 사람은 멋쩍게 서로를 외면하고 자기들 때문에 난장 판이 된 거실을 주섬주섬 치웠다. 그런 모양을 보며 카탈리가 투덜투덜 대며 치료실의 문을 탁 닫자, 레이서스는 바닥에 떨어진 테이블 보를 집 어들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이 여기서 왜 하류 계급의 거실이나 치우며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 것이다. 그냥 이대로 정체를 밝히고, 이 무례한 녀석과 가족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나간다면, 심신이 훨씬 더 편할... 그때, 무언가가 코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것이 무언가 보는 데, 갑자기 눈앞으로 수건이 불쑥 내밀어졌다. 무슨 일인가 해서 눈을 들어보니 루드랫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코피나 닦 으라고. 얼굴 타령 할 때가 아닌 것 같군. 당신도 거의 오크 수준으로 뭉 개졌는걸?" 그 말에 레이서스는 수건을 휙 낚아채며 말했다. "...말해 두지만, 당신 때문에 흘리는 것 아냐! 난 밤을 새면 코피를 자주 흘리니까!" 드래마는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목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난 다는 것을 알고 그런 위험한 시도는 관뒀다. 대신 그는, 생각하는 듯 심각 한 얼굴을 지었다. "...밤을 새다..라." (계속)================================================== 어휴~ 졸리네요.(--;) 더 써둔 것이 있긴 한데... 정리를 미쳐 못해서... 뭐, 그 대신 토요일엔 더 많이 올릴 수 있겠죠.(^^) 저번 회에, '성역...'을 11월 7일에 올리겠다고 써 놨더군요. 날짜 관념이 없는 건지..(--;) 사실은 10월 31일이었습니다.(^^;;) '성역...'은 메일 보내신 분들에게 답장이랑... 질문에 대한 답 같은 것을 적 은 곳이니... 메일 보내신 분들은 거길 봐주세요.^^ <엔...^^> ps...제가 쓰고 싶었던 장면이 뭐냐고요? 전회의 장면 전부 다..입니다. 그 리고 여기 격투 신까지. 이번 회의 목표는 '꽃 미남도, 남자다. 싸움 중에 얼굴 뭉개질까 몸 사리는 인간은, 꽃 미남이어도 별로. 혹, 눈도 붓고 코 피도 흘리면, 그것도 정열의 청춘. 리얼리티를 살려보세.'입니다... (리얼리티... 똑같이 맞았는데, 안 생긴 남자랑 조역만 눈이 밤탱이가 된다 면, 아무리 소설이지만 넘 불공평하지 않겠슴까?)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99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30 23:49 읽음:216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8회, 제 41막. 겨울 속에서. (5)> 도저히 제대로 서지 않는 테이블은 한쪽 구석에 세워놓고 드래마는 소 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서있는 것도 힘든 것은 자신이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쯤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만, 사고의 후유증에,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 격렬한 싸움을 하고 나니 진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레이서스를 보며 물었다. "...밤을 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 지?" 레이서스는 수건으로 코피를 그럭저럭 닦고 그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털석 주저앉았다. "...네 아.. 아니, 누이동생이... 괴한들에게 납치돼서... 칼에 맞았지..." 드래마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그는 시나가 누워 있는 치료실을 흘끗 보았다. 방금 그가 데려다가 눕 혀 놓았다. 아침이 허옇게 밝은 후에도 시나는 돌아오지 않고, 라단은 이런저런 불 길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수비대에게 알리러 가고, 카탈리는 계속 울고만 있었다. 그래서 드래마는 그녀 때문에 더욱 신경이 곤두서서, 지난밤은 꼬 박 새웠으니 조금 눈을 붙이도록 그녀에게 권유했다. 카탈리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의 매우 강력한 권유로 마침내 이층 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드래마는 조용한 가운데 계속 되는 피로감을 달래 며 라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레겜과 만나던 장면을 되짚고,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미소라 든지 말투, 그리고 그의 방문 목적에 대해 계속 되풀이해 생각하고 있었 던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그 중 제일 불길한 것이 그의 마음에 점차 크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말한 자신에 대한 것은 다 조 작이며, 그는 사실 그 '동굴' 놈들의 끄나풀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절 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제 생각은 그쪽으로만 진행되고 있었 다. ...결국 놈과 시나를 같이 보낸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드래마는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속을 끓였다. 그런데 그 순 간...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고 그 문 앞에는 엉망이 돼서 헛소리하는 시 나와, 그런 시나를 안은 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굳은 얼굴을 하 고 있는 레겜이 서 있었다. 그러니 울컥해서 한 대치고 말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고, 이렇게 묵묵히 거실을 치우다보니 (비록 조금 으르렁대기는 했지만.) 사실은 뭔가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래서 물어 본 것인데... '칼에 맞았다'고...! 드래마는 다시 소파에 기대며, 머리를 짚었다. 아까 걷어차인 데가 쿵쿵 울려서 생각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드래마는 나직하게 말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그때 상황을 자세히..."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던 그는 후드의 앞섶이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후드를 둘러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의식한 순간, 드래마의 등골은 서늘해졌다. ...용케 그 싸움 가운데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손님이 올지도 모르는 곳에 내내 서 있었기 때문에 주의해서 단단히 여며놨고, 후드 자체가 튼튼해서, 찢어지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드래마는 너무 화가 나 있어서 자신의 처지라든가 신분, 그리고 일루티 온에 대한 공경심까지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만약, 이것이 싸움 중에 벗겨졌더라면... 상대는 일루티온에게 덤벼드는 마노테는 처음 보았을 테니, 기가 막혀 서 말도 못했을 것이다... 드래마라도 이 사실에는 긴장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자신 의 처지도 망각한 채, 흥분해서 일루티온을 치다니...!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일 아닌가? 한편 레이서스는 루드랫이 말을 하다 말자, 그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무척이나 질린 얼굴을 하고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 있었다. 그걸 보고 레이서스는 빈정대며 말했다. "...머리가 울려서 말도 못하겠나 보지?" 그런데 이런 빈정대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 로 매우 어색한 말투였다. "...아니. 잠깐... ...아.. 내 누이동생이 칼에 맞았다...고. 그렇다면, 그 상 황을 좀 설명해 주지 않겠나?" "...?" 레이서스는 아까 그의 쏘는 듯한 말투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런가 이상해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그러다 레이서스 는 루드랫이 자신의 후드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기 옷 섶을 단속하며 창백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그걸로 모 든 것을 눈치챘다. 레이서스는 그를 씁쓸하게 보았다. ...아아.. 그는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 즉, 자신의 '신분'을 떠올린 것이다... 신분... 레이서스도 자신의 '신분'을 생각했다. 자신의 신분. 힐라토 파이오니온... 도미니온즈의 왕족. 엘과 엘야시온 외에는 아무도 그 위에 두지 않는 제 2계급. 그 위대한 파이오니온이, 방금 '마노테온'과 주먹다짐을 하고, 일루티온 의 아낙에게 꾸중을 들었다.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또 있을까? 어느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생각이 어떻든 주위 사람들이 먼저 들고일어나 파이오니온의 상대를 몰락시켰을 것이다. 그것이 '마노테온'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마 그 마노테가 속한 마을까 지 멸절 당하고 그 마노테를 다스리는 영주까지도 징계를 당했을 것이다. 갑자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마노테온... 책에서 그들에 대해 읽었다. 나실인의 증표가 없는 자들. 엘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 저주받은 자들. 인간이긴 하지만, 인간으로서 어떤 의무나 책 임도 행할 수 없는 자들. 그래서 그들에겐 '권리'도 없다. 그러나... 레이서스는 슬픈 눈으로 치료실의 문을 보았다. 실체로서 느낀 마노테온은 책에서 보던 것과 얼마나 틀린가... 차라리 이들이 하바티온이나 루이티온 정도만 됐더라도, 자신은 이런 상황... 남의 아내를 구하고, 그녀의 남편과 주먹다짐을 하고, 그 집의 또 다른 여인에게 한 소리 듣고 이렇게 거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그런 상 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기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귀족들과 상류사회가 자신의 '일상사'고, '현실'인 반면, 이것 은 마치 밤에 꿈을 꾸는 듯...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되지 않을 비밀, 즉... '나 자신의 내부'라는 보호막 안에서 '꿈'을 꾸며 모든 것을 납득하고 안도하듯, 지금 그가 겪는 일은 '레겜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보호막을 갖고 겪는 일이라... 아무리 이상한 상황이라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레이서스는 '꿈'을 깨지려는 이 순간, 자신의 '신분'을 자 각하려는 이 순간이 오히려 안타깝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자유라고 해도 좋았다. 이 자를 주먹으로 치면서 느꼈던 그 쾌감. 맞으면서 느꼈던 그 분노. 이 얼마나 오랜만의 환기(換氣)인가?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닫혀있던 방안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과거의 죽은 감정을 몰아내고 현실의 새로운 감정(그것이 분노든, 혹은 기쁨이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 아서... 이것이 파이오니온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라고 해도, 억눌려 있던 것이 폭발하며, 체면이나 겉치레 없이 상대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제 그런 상태가 서서히 가시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려고 하고 있었다. 어둡고 음습한 분노... 치유할 수 있는 방법과 대상이 없는 증오. 길고 잔인한 현실 속에 억눌린 꿈들... 그런 꿈의 일부인 루드랫이 어색하게 말했다. "...바쁠 테니, 간략하게만 말하고 가도 돼..." 레이서스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심하게 불편해 하는 그를 보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이 자의 아내가 쓰러졌 을 때부터 오늘 아침까지,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느끼며 엘에게 기도했나. 그렇다면 엘께서 자비를 베풀어 그의 소망을 들 어준 이 순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레이서스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소파의 등받이에 기댔다. 내가 파이오니온인 것.. 이자가 루이티온이었지만 신분을 강등 당해 마 노테온의 신분인 것... 모두 다 현실의 일일뿐... 그렇다면 이것은 확실히 꿈이다. 그리고 그 꿈 안에서... 나는 '레겜'인 것이다. 힐라토에서 여행을 온 레 겜. 여행자 포션을 위해, 소녀를 도서관에 데려다 주고... 그녀가 마노테라 는 것도 몰랐던 덜떨어진 일루티온 계급 '레겜'... 서점 길드에서 그녀에게 책을 사주고 음식을 먹고 서커스를 구경하고... 마침내 축제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까지 하던, 어리석었던 '레겜'... 이 '레겜'의 꿈은 진작에 꿨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23년 전, 이 자가 나를 배신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잔인한 현실 만이 계속 되었다. 잠도 없는 밤... 그리고 꿈도 없는 밤. 그리고, 지쳐 잠이 들었을 때...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어쩌면 레이서스 자신은 저 유리궁전의 자기 침실에서 지금 잠을 자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엘의 선의로 '복수의 꿈'을 꾸었다. 비정상적인 밤과 겨울은 23년만에, 단 한번... 꿈을 꾸었다. 긴긴 밤과 겨울은 그의 내부 안에도 있었고,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 '레겜'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꿈'은 깨어나야만 한다. 새로운 아침을 맞기 위해선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그 꿈 자체가 지닌 세월의 무게와 슬픔에 질식했 을 지도 모르지만... 이 자의 아내가 쓰러진 그 순간... 그 놈들의 비수에 가면이 깨진 그 순간에 그는 그 깊은 잠을 깰 만한 의지를 얻은 것이다. 현실은 힘들지만, 살아야 할 곳은 그곳이니까. '레겜'은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꿈이었다. 이 자와 거실에서 치고 받고 싸우며... 언제나 그랬던 대로, 환상 속에서 의 복수가 아닌, 실제로 복수를 하고 나서. 레겜은 빙그레 웃었다. 맨 마 지막의 펀치가 꽤 장렬하게 들어갔다는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던 것이 다. 이제, 모든 것은 슬펐던 꿈으로, 그러나 꿈을 깨도 다시는 아쉬워하지 않을 만한, 그런 아련한 만족을 지닌 꿈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하여... 깨어질 꿈을 위해 슬퍼하는 것보다는, 이제는 차라리 그에 게 마지막 말을 하자... 꿈 안에서, 어떤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 도 아무 상관하지 말고... 레겜은 말했다. "...흥... 이렇게 다치게 해 놓고, 치료도 안하고 보내려 하다니.. 너무 뻔 뻔하군." 그러자 드래마는 당황한 눈으로 레겜을 보았다. 하지만 레겜은 지금 퉁 퉁 부은 얼굴로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서 드래마는 그를 따라 쓴웃 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알겠어... 치료제를 준비해서 주지.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하고..." 레겜이 말했다. "어떤 일이라... 뭐, 간단한 상황이었어. 네 누이동생이 마노테였던 덕분 에... 그 주인이라는 자들이 나타나, 납치를 하려고 했지." 드래마의 몸은 순식간에 굳었다. 그런 그를 보며 레겜은 씁쓸하게 웃었 다. "...아니면... 네 '아내'라고 해야하나?" 거실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레겜은 드래마가 말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한편 드래마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자신의 사고(思考)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시나의 짧은 머리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 었다. 그저, 그녀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다. 아 마 라단과 카탈리, 그리고 엘야시온님이 시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무의 식중에 시나를 '마노테'의 개념이 아닌 무언가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객관적으로 따진다면 시나는 '마노테의 외양'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말은 달라진다. 드래마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 사고의 와중에... 들키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겠 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후드를 벗어, 그 앞에 섰다. 짧은 은발이라 목덜미 가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드래마의 굳은 얼굴을 관찰하고 있던 레겜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 느닷없는 그의 웃음에 드래마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레겜은 일부러 경솔하게 말하는 듯 말했다. "..처벌..? 하하하... 이거 왜 이러지? 다짜고짜 주먹을 들이밀 때는 언제 고... 네 처벌보다는, 내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지나 생각해 두시지." 그렇게 말한 그는 벌떡 일어났다. 순간 옆구리가 또 한 번 더 결렸지만 신음은 참았다. 대신 그는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흥...! 이곳의 힐러와 너희가 짜고 날 속였단 말이야...! 그리고 그 여자 는 네 아내인 주제에 감히 네 누이동생이라고 속였고...! 덕분에 쓸데없는 사건에 휘말려 들게 하질 않나..." 비록, 스스로 자초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치료까지 해서 데리고 오니까..." 치료의 효과도 별로 없었고, 지금은 저 치료실에서 괜찮은 상태로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됐지만... "...느닷없이 날 패고.. 그리고, 처벌을 받겠다고? 하하하... 이거, 웃기는 군." 그리고 레겜은 드래마 앞으로 와서,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알겠어? 웃기지 말라고. 처벌 따위는... 내 자존심만 상할 뿐이야." 어제 아침이라면 몰라도... 처벌 따위는 이제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널 이길 힘이 없어, 계급을 이용해 너를 누른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면 그것처럼 곤란한 일은 없으니까..." "...!?" 드래마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겜은 일루티온이 마노테온을 대할 때 보이는 경멸 어린 표정과 깔보는 표정, 벌레를 대하 는 듯한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 일루트가 하고 있는 말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레겜은 빙긋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다니. 그거 안타깝군. 아까 나한테 맞은 후 유증이겠지...? 흥. 그러니, 건방진 마노테.. 너 따윈 내 아까운 시간을 들 여 골치 아프게 따로 처벌할 필요도 없어. 아까, 내 주먹맛을 봤으니, 너 도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겠지. 그러니, 처벌 운운하지 말고 어서 치료제 나 내놔. ...옆구리가 아파서 서 있기도 힘드니까. 그 외, 너희들이 왜 날 속였는지는 내 알 바 아냐." "...." 드래마는 그의 말에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당신은..." 레겜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왜 너를 용서해야 하지?! 방금 말 못 들었어? 치료제를 내 놓으라고! 물론 치료비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드래마는 그의 눈을 보았다. 맑은 검은 눈이었다. 드래마는 생각하는 눈 으로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군요." 레겜은 차가운 얼굴을 했다. "이상한 것은 너희들이지. 게다가, 너...! 그녀가 아내라면 아내라고 솔직 하게 말할 것이지, 뭐 하러 굳이 힐러 부부의 조카라고 하고 누이동생이 라고 한 거지? 그리고 이곳의 힐러 부부는 뭐야?" 만약 이 자가, 시나에 대한 사실을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그녀는 아마 흙의 날에 죽었을 테지만... 그래서 레겜은 그 사실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비열하게 웃었다. "아하.. 아... 그러고 보니.. 혹, 이곳의 부부는 포주라도 되나? 너를 하인 으로 부리고... 네 아내는 네 여동생이라고 속여서, 남자들을 유혹하게 만 들어, 음식과 책과 돈을 뜯어내는... 하하.. 뭐야. 그럼 그건 나를 유혹한 거였나? ..하하하.. 그랬군. 그러면, 어젯밤 너는... 네 부인과 내가, 이곳에 안 돌아와서 옳다구나 했겠군? 어쩐지... 하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남자 를 상대하는 솜씨가 일품이더군. 하지만, 그러려면 좀 더 잘 먹이고 조금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낫겠어. 아... 맞아. 이왕, 이렇게 된 것, 이곳의 힐러부부와 상담을 해 봐야겠군. 아까 처벌이라 그랬나? 말했듯 처벌은 필요 없으니, 보상으로 저 마노테를 아예 나한테 넘기라고... 그러면 난 조 금 더 그녀를 다듬어서..." "...!" 드래마는 살기를 띄고 낮게 말했다. "...일루티온 레겜. 그런 어리석고 비루한 소리를 하는 의도가 뭡니까? 내 동의라도 얻겠다는 겁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믿지도 않으 니..." 드래마는 살기를 꽉 억눌렀다. "당신의 말이 실현되길 원한다면, 차라리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처벌을 원하니, 원하지 않으니... 그러면서 이곳의 힐러 부부까지 모욕하지 말고... 엘의 공의에 따라 날 처벌해서, 여자를 가져가란 말입니다." "...!" 둘은 서로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레겜이 먼저 눈 을 돌렸다. 그러자 드래마는 그의 몸을 툭 제치고 치료실로 갔다. 치료약 을 얻기 위해선 카탈리에게 허락을 얻어야 했던 것이다. 일루트에게 험악한 소리까지 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평소라면 절 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일루티온의 저런 말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지독하게 피곤하고 기운도 빠지고, 기분은 레겜의 말에 더없이 불쾌해서, 하마터면 또 한번 그의 얼굴을 칠 뻔했다. 드래마는 치료실의 문을 열며 자신에게 화를 냈다. 미친 것이 틀림없어...! 한편 레겜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입안으로 중얼거리고 있었 다. "...내가 들어도 비루한 소리였다..." 헌데, 그때였다. 현관이 열리며 라단이 들어왔다. 그는 거실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드래마로 착각했는지, 크게 말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99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30 23:50 읽음:228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9회, 제 41막. 겨울 속에서. (6)> "...휴우..! 다녀왔습니다. 수비대 본부에서는 아무래도 모르겠다고 해서, 우선 신고를 하고... ..응? 아아니!!! 다, 당신...!!! 레, 레겜!!! 도대체 당신 어떻게 된 겁니까!!!!?" 그리고 그는 놀란 얼굴로 후닥닥 달려와 레겜의 팔을 붙들었다. "레겜 -!!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십니까?!!!! 시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고 당신 얼굴...!!! 헉...!! 뭡니까!!! 건달패라도 만났습니까?!!!!" 그때 치료실에서 드래마와 카탈리가 나왔다. 카탈리는 레겜을 힐끔 보 고 잔뜩 걱정 어린 말투로 라단에게 말했다. "..여, 여보...!" 하지만 라단은 드래마를 쳐다보고 놀라고 있었다. "아, 아니..! 루온.. 아 니, 드랫..! 왜, 왜 후드를, 게, 게다가 그 얼굴은...!!" 그러다 그는 지금 주인의 얼굴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해서 그는 당황한 눈으로 레겜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 레겜? 오해는 곤란합니다! 이 분은 지금은 이런 모양이지만, 실제 론 마노테온이 아니고..." 하지만 드래마가 그런 라단을 만류했다. "...라단.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사실은..." 그는 레겜을 보았다. 그들의 눈이 또 한번 맞부딪쳤다. 드래마는 그의 말간 검은 눈을 보며 말을 골랐다. 이상하게도 그는 아까 자신의 불손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태연한 채로 있었다. ...만약 레겜이 했 던 비열한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리고 그의 성품이 그렇게 비열했다면... 결코 저런 표정은 짓지 못할텐데... 그래서 드래마는 레겜의 마지막 말이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던 것은 아 닐까, 납득하게 되었다. "사실은, 감사하게도... 저분은, 저와 시나가 마노테인 것을 보고도, 처벌 은 원치 않으시더군요. 그러니, 이대로도 좋을 것 같습니다." 라단은 놀란 소리를 냈다. "네에...?!!!" 드래마가 말했다. "그러니, 우선 이분을 치료 해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 다고 생각합니다. ...저 얼굴은 나와 싸워서 저렇게 된 것이니까." 그 설명에 라단은 입을 쩍 벌렸다. 루온 루드랫 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 히셨나?! 저런 마노테의 모습으로 일루티온의 얼굴을 묵사발을 만들었다 고...?!!! 그러자 레겜이 그들을 비웃듯 말했다. "...흥, 저 시건방진 마노테 말대 로, 이 집안 사정에 대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힐러 라단. 마노테를 조카로 삼던, 친척으로 삼던 그건 당신들 사정이니까요." 라단과 카탈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런...!" 하지만 그는 라단이나 카탈리가 또 다른 변명을 하기 전에 딱 잘라 말 했다. "그러니, 빨리 좋은 치료제나 주십시오. 난 바쁘고,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고 싶으니까." 그리고 그는 드래마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저 못 지 않게, 저 건방진 마노테에게도 치료제가 필요할 겁니다. 그것도 저의 배나요. 왜냐하면, 저 얼굴 같지도 않은 얼굴은 내 작품이니까요, 힐러 라 단." 그 말에는 드래마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이상한 일루티온 이었다. 시나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누군가해서 봤더니, 드래마였다. 그가 말했 다. "시나, 아직도 열이 있는 것 같군. 자고 있다면 그냥 자도록 내버려두려 고 했는데... 그래도 만약 깨어있다면,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시나는 몽롱하게 말했다. "...인사요?" 그러자 드래마 옆에 있던 레겜이 말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죠. 깨워서 미안해요. 아직도 열 때문에 힘든가요?" 그것은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라 시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 아뇨. 그냥 눈을 감고 있었어요." 그리고 시나는 웃었다. 그의 검은 눈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난 주말 무렵에 만났을 뿐인데... 이상하게 이렇게 누워서 그의 눈을 올려다 보니, 훨씬 전부터 알았던 기분이 든 것이다. "...음... 그리고 기분도 아까 보단 훨씬 더 좋아졌어요. 그런데, 가시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미안하군요... 될 수 있다면, 나의 힘껏 당신을 돕고 싶었지만, 당신에겐..." '남편'이 있으니까요. ..라고 말을 하려던 레겜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 신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밝혀, 시나에게 괜한 민망함을 주긴 싫었 던 것이다. 대신 그는 다시 한 번 더 미소짓고 그녀의 앞에 서서 축복의 말을 했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시나. 저 서점에서 나한테 했던 그 말 그대로. 부 디 빨리 나아서..." 그는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길..." 시나는 어리둥절했다. '사랑하는 사람'? 그게 누구야? 레겜은 지금 자신에 게 종속자가 없다고 알고 있고, 시나 자신도, 그에게 특별히 좋아하는 사 람이 있다는 말을 안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 그러다 시나는 드래마가 난처한 얼굴로 있는 것 을 알았다. 드래마는 또 왜 저렇게 난처한 얼굴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흠.. ...미래에 대한 축복인가..? 음... 그렇다면 뭐... 좋은 일이긴 하지. '사 랑하는 사람'이라... 시나는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음... 그래요? 고마워요, 레겜. 에... 여행자니까... '마젤토브'라고 인사하면 되는 거죠? 마젤토브, 레겜. 엘께서 행운의 별을 당신의 발 앞에 준비해 놓으셨기를." 레겜은 약간 망설였지만, 그래도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젤토브.. ...우리가 있었던 곳에... 그리고 다시 만날 곳에 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도 몇 번들은 적이 있는 관용구인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들으니, 이상하게 가슴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나는 얼굴을 좀 붉혔다.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잖아... 여행자라고 했으니까...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겠지. 그래서 시나는 큰 아쉬움을 갖고 그에 말했다. "저어... 잘 가요. 레겜. 정말로 그 동안 고마웠어요." 레겜은 상냥하게 웃었다. "...천만예요."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한번 더 시나의 손을 꼭 잡았다 놓고, 몸을 돌 렸다.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남편인 루드랫, 그리고 힐러 라단이 바로 옆에 있었고 열린 문을 통하여 주인 여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떼고 치료실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신경은 계속 뒤에 쏠려 있었다. 매우 창백한 얼굴의 그녀를 뒤로 놓고 오자니, 이 상하게 가슴이 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몹시 피곤한 몸의 상태 때문에 그런 것이라 판단 했다. 어릴 적 열병을 앓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몸이 피곤하면 가끔 이렇 게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곧 쉴 수 있을 테니... 한 잠 자고 나면 이런 마음도 사라 질 것이다. 헌데 그런 그의 뒤를 따라나오며 라단이 말했다. "...하여튼...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시나는 원래 일루.." 그러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드래마가 질책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해서 라단은 그냥 목뒤를 벅벅 긁으며 말했 다. "에... 하여튼, 시나가 '마노테'인줄 알면서도 길드장도 없는 돌팔이 놈에 게 데려가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돌팔이 놈들 중에 어떤 놈들 은 지혈 방법으로 소작술을 쓰기도 하거든요. 피만 멈춰놓고 보자는 식이 죠. 하지만 그런 방법은 힘줄이라든지 핏줄을 상하게 만들어서... 자칫하다 간 팔 한쪽을 영구히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재생을 받 는다고 해도 돈도 많이 들고, 무리가 따라서... 하누카의 날을 지낸다고 해 도... 한쪽 팔 때문에 하누카 빛이, 온전히 '성장'에 미치지 못하니... 이래 저래 손해죠. 하아.. 어쨌든, 감사합니다. ...조금 서투르긴 해도 깨끗한 봉 합이더군요. 지혈이 한참 동안 안 됐다고 해서 핏줄이 잘렸나 했는데... 그 래도 지금은 피가 안나니 다행입니다. 열과 오한이 나는 것을 보니, 네르 갈이나, 아샤쿠가 상처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 놈들 이 농양으로 녹아 나온다면, 깨끗이 나을 텐데... 뭐, 어쨌든 예후는... 하 아... 단독으로 번져서 합병증까지 오면 정말 곤란..." 그때 카탈리가 눈짓을 했다. "여보!" 남편은 걱정이 되면 말이 많아져서, 상대방이 알아듣든 말든, 이런 식으 로 가장 희망적인 관측에서 가장 비관적인 관측까지 들추며 중얼거린다. 한편 라단은 카탈리의 지적에, 자신이 또 쓸데없는 말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주인은 물론이고 레겜 까지도 심각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나란 놈은...!] 자신을 질책한 라단은 '하하..' 웃었다. "...아... 어쨌든, 지금 상황은... 네. 그러니까 순조롭다는 거죠. 의식이 없 다면 무척 안 좋은데, 저렇게 말도 하니까... 하하... 곧 열도 내릴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들 마세요. 하하하... 어, 어쨌든, 레겜. 너무 감사합니다. 뭐, 저 정도의 상처는 힐러 라이트 같은 것에 쏘이면, 금방 나을 상처인 데... 하하... 저도 주책입니다. 이것저것 걱정만 많아서, 하하..." 그러자 레겜이 말했다. "...아. 하지만, 그녀는 힐러 라이트는 도저히..." "네?" 라단의 반문에 레겜은 말을 멈추었다. 라단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돌 팔이'에게 데려가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다는... 하긴... 그녀는 '마노테'이고... 그러니 그가, 그 상황에서 그녀를 그대로 내팽개치지 않은 것만도 이들은 감지덕지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녀를 이미 '페이스 힐러'에게 보였다고 한다면... 레겜은 눈을 찌푸렸다. ...차라리 이 말은 관두는 것이 낫겠군. '레겜'은 '페이스 힐러'를 부를 정 도로 재력은 없다. 그는 이들에게 와서 '공짜 포션'을 내놓으라고 할 정도 로 돈을 아껴가며 여행하는 여행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멋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해 준 데에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 어서요." 라단이 웃었다. "하하하.. 치료라고 해 봐야, 연고하고 포션을 조금 드린 것뿐인데요.. 상처가 덧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레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페이스 힐러에게 갈 참이니, 덧날 일은 없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그는 현관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오정의 눈부신 빛이 잠시 눈앞을 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빛에 익숙해지고 나자 레겜은 고개를 돌려 드래마를 보았다. 드래마는 그런 그에게 격식을 갖춰 정중하게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일루티온 레겜. 당신의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레겜은 그렇게 고개를 숙인 그를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보았다. '감사하 다'라... 루온 루드랫은 과거에 한 번도, 누군가에게 '고맙다'거나 '감사하 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 그가, 루온 루드랫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고 싶어서, 가장 좋은 의복이라든가 말, 갑옷 같은 것을 내어 주 어도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내를 위해서는 저렇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 있 다... 문득, 무언가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 밀려왔다. 이 자의 아내 일로, 이 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 지 그를 용서할 마음이 든 것은, 아마 그의 이런 깨끗한 태도 때문일 것 이다. 그래서 레겜은 고개 숙인 그에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겨우 2주인데... 너희들은 참 행복한 부부인 것 같 군." 루드랫은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요... 그보다는, 당신이 시나에게 해 주신 것들... 방금과 같은 친절 한 축복.. 그런 것에 감사합니다. 시나에겐 나중에 당신의 친절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루드랫의 그 말에 레겜은, 루드랫과 시나가 앉아서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따뜻한 난롯불과, 즐거움이 가득한 광경이었다. '복수의 꿈'이 실패로 끝났기에, 그가 망치지 않았던 광경. 하지만 그 순간 레겜은, 아피네스의 슬프고 하얀 얼굴도 떠올렸다. 언제나 '루온 루드랫'만 부르는 그 음성. ...나는 아마, 이제 이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가... 내 누이와 앉아서, 루 온 루드랫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녀는 알아듣지 못할 지라도 나 는 계속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사람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 과거는 정말로 모두다 '꿈 속'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무엇도 돌이킬 수 없 게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내 누이는 그 말을 듣고, 무척이나 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 불쌍한 누이를 위하여, 무언가 가져가야 할텐데. 갑자기 격한 마음이 몰려와 레겜은, 한발자국, 루드랫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너...! 드래... 아니, 드랫...! 넌, 겨우 2주전에야 네 아내를 만났다고 했 다..! 그리고 '은혜의 법'...!! 저 태초의 남자와 여자가, 엘의 '은혜의 법' 안 에서 만났던 그 이래...!! 많은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 해서 부부의 연을 맺 었던 것처럼...! 너도, 그녀를 처음 만나, 첫 눈에 반했던 거겠지?! 그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드랫..!! 넌, 그 전에 사랑하는 여자가 없었나? 도 저히 잊지 못할 그런 여자는 없었나...?!!" 그 다급함과 간절함이 섞인 음성에 드래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 지만 아무리 레겜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다고 해도, 이런 일에 대해 이런 장소에서, 라단과 카탈리가 보고 있는 데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는 그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내게는 전혀.." 하지만 그때였다. 드래마가 어떤 대답을 하려는 지 눈치채고, 레겜의 검 은 눈이 실망으로 물든 그 순간... 드래마는 그의 깊고 깊은 검은 눈에서, 무언가 작은 단상(斷想)을 보았다. 어리고, 씩씩한 검은 눈을 가졌던... 그 를 무조건 신뢰했던... 아름다운 어린 왕자님. 그 부서진 듯한, 날카로운 장면이, 순간, 드래마의 가슴을 찌르며 통증 을 아로새겼다. ....?! 그것이 너무도 놀라운 충격이라 드래마는 그래서, 잠시 말도 할 수 없 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언가 기억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고, 그것은 평 소와 전혀 다르게 자신에게 무언가 '말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자기 안에 무언가가... 혹은, 자신의 일부분이 그렇게 하기를 명하고 있 었던 것이다. 마치 작은 전류처럼, 한 음절 한 음절이 뇌에 닿고,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아주, 오랜, 옛날... 내가, 가장, 가슴, 아파, 했던, 내, 주인.... 이 단어들은 그의 인식에 닿는 순간 하나, 하나,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 려서, 드래마는 이것이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드래마는 그의 몸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비록,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아마 죽을 때까지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없을 지 모르는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드래마는 그 명령에 따라, 레 겜에게 부드러운 연민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시나와, 만나기 전... 아주, 사랑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말에, 라단이 숨을 들이켰다. 자기 주인이 어떤 금기를 말하는 지 눈 치챈 것이다. "드, 드랫...!! 그, 그것은...!!" 하지만 드래마는 그를 무시하고 말했다. "당신처럼, 검은 눈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이 세상 무 엇보다 사랑했고... 그래서, 이 세상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을 만 큼... 심지어는 어떤 고통이나, 어떤 권력이나, 어떤 깊음이나, 어떤 높음이 라도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깊이 사랑하던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로 인해, 모든 검은 눈을 사랑합니다, 일루티온 레겜." 그리고 드래마는 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평안하기를... 내가 알고 있는 검은 눈을 가진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답 고 선했고, 당신 또한 그러하군요. 그러니 당신의 호흡이 있는 날까지, 엘 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엘께서 당신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지키시길 빕니다." 레겜은 그에게서 물러섰다. "...고맙..다." 그리고 그는 울음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을 들키기 싫어, 후드를 깊게 눌 러 쓰고 라단 부부와 드래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뭐라고 말한 지도 기 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따뜻하게 웃은 것으로 보아, 나쁜 말은 하 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레겜은 뒤로 돌아 현관의 계단을 내려와, 한 걸음, 한 걸음, 거 리를 걸었다. 등뒤에 꽂히는 그들의 눈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뒤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이걸로 모든 것은 족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아피네스. 나의 아핀... 그는 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의미론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너는 사랑 받았던 소녀야. 그래서 난 참 기쁘다... 왜냐하면 나도 이제야 널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아버지가 했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이고...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많은 것을 공유했어. 너에게 가야 영광을 뺏은 나. 내게 와야할 사랑을 뺏은 너. 하지만... 그래서 결국, 나는 네 안에 있게되었고, 너는 내 안에 있게되었지... 그러니, 아버지가 했던 말씀대로, 아피네스..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줄게... 그리고 그는 한 발, 한 발, 걸으며, 회색 눈의 소녀가 아침에 했던 말 그대로, 오정의 눈부신 빛 가운데, 점차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어둠가 운데 깨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온통 겨울의 황홀한 빛 투성이였다. 그 가운데서,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어린 시절... 그가 가장 되 고 싶었고, 가장 동경했으며, 가장 멋졌던 그의 영웅에게 이제야 작별인사 를 보냈다. 그리고 그 작별인사는 이렇게 눈부신 빛의 조각만을 남기고 과거로 완 전히 흘러갔다. 비록,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것은 변했고, 이젠 새 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을 위하여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참으로 왕답게 똑바로 걸어갔다. 그리고, 왕으로서 레이서스는 아마 다시는... 자신의 과거를 위해, 회색 눈의 소녀와 루온 루드랫을 우선하는, '레겜의 꿈'은 꾸지 않을 것이다. (계속)================================================== * 소작술(燒灼術): 불로 지지는 것. * 농양(膿瘍): 고름. * 네르갈(nergal): 고대에서 열병을 가져오는 악마. * 아샤쿠(Ashakku): 고대에서 쇠약을 가져오는 악마. * 예후(豫後): 병의 경과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의학상의 전망. * 단독(丹毒): 상처에 병균이 들어가 피부가 붓고 쑤시고 아픈 급성 전염 병. 요 며칠, 진이 빠져서, 오늘은 하루종일 자느라... (대단하다...겨울잠이냐...--;;;) 그리고 꼭 읽어야 할 책도 있고... 게다가, 다음 회부터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느라... 좀 더 생각을 하고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역'은요... 외전이 아닙니다.^^;;; 이건, 독자들에게서 받은 메일 에 대한 답장이죠.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고.. 제 잡담도 쓴 거지요..^^ 하이텔에선, 23번란에... 나우누리에선, 8-2번란에... 유니텔에선, 엘야시온 방에 딸린 '작가에게 쓰는 글'방에 있습니다.(^^;) '성역...'은 내일 안에 올리겠습니다.(^^) <엔...^^> ps1...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야... 엘야시온에는 '토너먼트'라는 외전이 있습니다. 그것의 내용은 '레이서스의 어린 시절', '루온 루사트라는 자의 배경과 인격(...^^;)', '디트(디트마)의 이야기', 그리고 '레이서스 의 부모님 이야기', 그리고 '판테온 사람들 이야기', '세렌시스의 이 야기'... 입니다.^^ 설정과 이야기의 기본 구도를 밝히기 위해 쓴 글 이라... 맨 첫 부분엔 아직도 나올 희망 까마득한 '이바누', '헬론', '에단'의 이야기가 나오죠..(아티스트입니다. 하하..^^) 아... 그리고 '엘야시온 가디엘'도 심심지 않게 나오고요.(하지만 주인공인 시나 는 안 나오죠. 하하..^^) 음... 그걸 다 쓰고 나서 자랑스러웠죠. '소 설'로는 그것이 처음 완결한 이야기니까. 그래서 유치한 글발이라도 지금 보면 참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들어, 자랑스럽게 여깁니 다.(^^) 처음에는 무조건 창피해 했지만... 하하..^^ (사실은 지금도 좀 창피해요.^^;;) ps2... 나우누리 게시판에는 본 편, 40-74편인가가 없습니다. 그때, 한참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때라...(^^;) 자료실에 그냥 몰아서 올려놨지요. 그러니, '자료실'을 봐주세요. 그리고 '외전'도 거기에 다 있습니 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07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03 22:45 읽음:234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0회, 제 42막. 게엔나(Geenna) (1)> 마이레스의 오데나 산(産), 굵은 직조의 커튼이 창문에 늘어져 있는 살롱에 는 십 수명의 남성들이 앉아서 담소하고 있었다. 그들이 거드름을 피우는 자세, 이야기하는 태도들은, 여기 살롱에 놓인 가구들만큼 오래된 것이지 만, 그래도 여기 놓인 가구들만큼 전통 있는 것이었다. 그 중 콧수염을 기르고 땅딸막한 한 베르노크인이, 방금 말을 끝낸 금 발 청년에게 말했다. "허... 그거, 말은 좋게 들리지만... 너무 정통성을 무시한 것 아닌가? 아 무리 좋은 학설이라도, 아가트를 위배한다면 말짱 헛일이지." 그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곳 클로니아의 총리대신으로 오늘 자신의 집 객실을 개방하여 타 세계 에서 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각 세계의 수네드리온 의원으로서, 총리나 외교각료의 직책을 가지고 자신들 세계의 파이오니온을 보필하여 세계혼을 축하하러 온 자들 이었다. 그들 각자 나름대로 개인적인 친분도 있기에, 이렇게 비공식적인 만찬을 나누고 있었다. 클로니아의 총리대신은 아페리티프(aperitif)로 마 시는 포도주를 한 모금 음미하며 말했다. "...흠... 하온 하로듀 님의 말씀이 옳네, 하온 하겐트 군. 젊은 패기는 좋 지만, 지나치게 우로 치우쳐 성서를 해석하고 있는 것 같군."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칼리안의 외교장관이 웃었다. "하하하... 힐라토 최연소 수네드리온 의원, 하온 하겐트 군의 믿음이야, 온 엘야시온에 자자하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단순한 정치가들이야, 감히 넘보지 못할 경지겠죠. 그러니 저런 소리도 할 수 있는 겁니다. 하하하.." 자칫 비꼬는 말로 들릴 수 있겠으나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 외교장관의 표정은 상당히 유쾌했으므로, 그가 겐트온에게 호감을 갖고 농담조로 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그러한 듯, 왁 자지껄한 웃음이 터지며, 그에 동의하는 소리와 겐트온을 짓궂게 놀리는 소리가 일었다. "하하... 하온 하겐트 군, 자네는 젊네. 하지만 왕족들을 모시고 이 세계 를 다스리자면, 이상(理想)이나 꿈보다는, 역시, 경험을 따라야 하는 법이 지. 조상대대로의 경험... 그것에는 전통, 아가트 법전... 그리고 자네, 서기 관들이 제정해 왔던 하위 법률들이 있겠지. 이것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계 가 평안하다는 것은 어제와 오늘이 증명하고 있다네. 아마 내일도 그러하 겠지... 그러니... 알겠나? 바로 이러한 현실을? 이것을 무시하고서는 어떤 '꿈'도 헛된 망상에 그칠 뿐이야. 아가트를 기억하게나." 휠마즈 총리대신의 이런 말에, 여기저기서 동의의 헛기침 소리와 웃음 소리가 났다. 그래서 겐트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들의 말에 어 떠한 반론도 하지 않고 그냥, 공손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역시, 여러 어른들보다 생각이 짧아서... 아직도 상아 탑에만 있다보니, 현실감각이 없다고 할까요. 흠... 하지만, 연구를 하다보 면... 자꾸 이런 사실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어르신들도 아시다시피, 엘은 이 온 우주에, 오직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고, 오직 홀로 유일한 자입니다. 그 위에 더 이상의 존재가 없고, 아 무도 그와 그 영광을 공유할 수 없죠. 다시 말해 그 분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절대자이며, 피조물과는 전 혀 상관없는 전적 타자(他者)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거룩한 때'에 그 분이 스스로를 우리 인간에게 계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무지몽 매한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본질과 위치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자비로운 엘 앞에 복종하며 그 분의 왕으로서 권 위를 인정합니다. 왕으로서 그의 권력은, 매우 절대적이며 아무도 범접할 수 없죠. 한 예로... 우리 위의 계급들... 엘의 천사들과 직접 접촉하는 권한을 가 진, 영광과 능력의 이름을 가진 저 도미니온즈들은 그래서 우리 인간의 손이 아닌, 엘의 의지로서만 선택받고, 엘의 의지로만 왕으로서 세워집니 다. 이건, '진정한 권력'은 모두 다 그 분, 한 분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실이지요. ...또한 그렇게 엘에게서 오는 권력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복종하고 유일 하게 인정하는 권력입니다." "맞는 이야기네." 누군가가 긍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겐트온은 그에게 약간 고개 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든... 창조의 완성이라는 우리 인간들이 그러할진대, 그 분의 손으 로 창조된 모든 다른 하급 피조물들도 당연히, 모두 다 그 분의 진정한 권세 아래로 들어가야 하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권력도 배격되어야 하지요. 그것이 당연한 '이치'입니 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 어르신들?" "그렇지." '엘의 유일성'... '엘의 절대 권력'... 이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 래서 사람들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겐트온은 여기서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하지만... 어르신들.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러한 당연한 '이치'에... '현실적으로' 어떠한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말 이지요." 그리고 그는 휠마즈의 총리대신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대신님. 아무래도 습관은 못 버리겠는지라, 그만 오늘 은 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아까까지 그가 말한 것은 전 인류가 엘의 주권 아래서 '하나'가 되는 것 이었다. "후후... 대신님이 저번에 충고해 주신 것처럼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써 서 열심히 탐구하다 보니, 결국 이런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옛 말씀에, 어른의 입술엔 지혜가 파수꾼 노릇 한다고 하더니... 전,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합니다." 거기 있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굉장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휠마즈의 총리대신도 뜻밖의 찬사를 받아 기분이 좋은 나머지 호의 섞인 말투로 말 했다. "하하, 그런가? 아무렴... 현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 지. 하하하.. ...그래, 어디 말해보게. 자네 젊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도대체 그 '현실적인' 고민이 뭔가? 구멍이라고? 도대체 어떤 구멍 말인 가?" 겐트온은 빙그레 웃었다. "...아... 어르신들도 아실 겁니다. 우리 사회에 편만한 '악'... 즉, 몬스터 들 말이죠... 아니면,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그들의 본거지인 '게엔나'라고 해야할까요?" (계속)================================================== * 아페리티프(aperitif):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술. 짧죠..? --; 참고서적들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그런 것도 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인데, 이쯤에서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 안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보고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냈더니 3분의 2가 없어지는군 요.--; ...뭐, 좋은 거겠죠. 내용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질질 긴 것보다는... (--;) 더 쓸 시간도 없고... 아예 안 올리는 거보다는 이거라도 올리자고 생각해 서... 올립니다.^^ 책 읽는 것도 끝났으니, 열심히 써서 토요일엔 이것보다 많이...^^ (과연... 이것보다 적을 수도 있단 말인가...--;) <무념무상, 엔...-_->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13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06 23:08 읽음:237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1회, 제 42막. 게엔나(Geenna) (2)> "이것으로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헬루시타 사제는 그리고 맨 오른쪽에 일렬로 앉아 있는 어른들을 보고 말했다. "에... 일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서류는 오늘로서 마감되 어 카할에 넘겨지게 되니, 의무교육을 마쳤다는 증명서는 신년이 되면 나 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네 달이나 남았으니, 그 동안 혹 무슨 문제가 있다면 내가 있는 카할로 찾아와 주세요." 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감돌았다. 이제 일을 하다말고 나와, 쓸데 없이 여기서 꾸벅꾸벅 졸지 않아도 된 것이다. 열심히 황금률을 외우고 그 밖에 가르쳐 준 것들을 외운 보람이 있었다. 헬루시타 사제는 그 옆줄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말했다. 그들은 올해 열 살의 나이를 가진 아이들로 이번 해로 의무교육을 마쳤다. "졸업을 축하한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이니,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잘 말씀 드리도록." 아이들 또한 어른들처럼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 세 시간이 나 바치며 여기 앉아 있는 대신, 이제 그 시간을 노는 데 쓸 수 있게 되 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집안 일을 돕느라 별로 놀지도 못 할 테지만, 그래도 안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이런 곳에 침울하게 앉 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 생각은 1년, 2년 생의 아이들도 다 마찬가지인지, 그들은 졸업생들 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헬루시타 사제는 그런 그들을 한 번 쓱 훑어보며 이런 결실을 맺게 된 데에 엘에게 감사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자, 이번 주 흙의 날에 기슬러 시험을 치를 사람과 저번 주 시험에 낙 제점을 받아서 졸업이 불가능한 자들만 남고 돌아가도 좋습니다. 좋은 하 누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나실인으로서 청의 엘야시온께서 명한 일을 행했으니, 엘께 분명 커다란 축복을 받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헬루시타 사제 님-" 밝고 쾌활한 목소리를 내며 어른들과 아이들은 우르르 빠져나갔다. 헬 루시타 사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뿌듯한 마음을 가졌다. 이제부터 하누 카의 긴 휴일로 들어가게 된다. 일년을 총 정리하는 마지막 시험인 기슬러 시험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달의 시험과는 다르게 상급 학교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우수한 학생들만 치르는 시험이라 몇몇 학생만 챙기면 되니까, 오히려 편했다. 헬루시타 사제는 빙긋 웃었다. 그 우수한 학생 중에서도 우수한 학생인 이가르가 오는 것을 본 것이다. "오~ 이가르 군. 컨디션은 어떤가? 엘의 열 가지 율법과 그에 따른 조 례들은 다 외웠나? 그것을 적용하는 데 대한 문제는 내가 시험을 볼 때도 나왔었지. 아가트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내가 준 다섯 성서 요약판도 잘 읽어봐야 하네." "네, 벌써 읽었습니다. 헬루시타 사제 님." "오오~ 그래? 역시, 자네답구먼!" 이가르는 올해 18살 먹은 소년으로 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에 어머니 를 돕느라 제때 의무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5살 때부터 의무교육을 받고, 드디어 이렇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기슬러 시험까지 치게 된 것이다. 사실, 의무교육이라 해도 어른 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3년을 채워 졸업해도 글을 못 읽는 수가 태반이 었다. 헌데, 이가르는 수업을 받은 지 1년째에 글을 읽고 각종 다양한 문서를 섭렵하여 헬루시타 사제의 자랑이 되었다. 맨 처음에 그의 출신이라든지 어머니의 직업을 알고 무척이나 꺼려져 그 가까이도 가지 않았던 소년이지만 몇 년 가르치면서 아주 우수한 학생 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이가르는 그가 가르친 학생 중 최초로 기슬 러 시험을 통과하는 학생이 될 지도 몰랐다. 그래서 헬루시타는 아직도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험 마지막 몇 주를 앞두고 노트라든지 '다섯 성서 요약판'을 빌려주었다. 만약 그의 제자 중 기슬러 시험을 통과하는 학생이 나온다면 그의 수행 평가에 아주 좋은 영향을 줘 서품 진급 때도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 다. "후후후... 그래! 자네라면 틀림없이 기슬러 시험도 통과하겠지! 우리 학 교에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나오다니 기쁘네!" 그는 이가르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그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 았다. 10살 먹은 아이가 한 명, 나이가 꽤 된 어른이 한 명이었다. 졸업 시험에 좋은 성적을 받고 글을 읽을 줄 알아 기슬러 시험을 치도록 권했 지만 본인들은 그다지 아티스트라든지 서기관, 사제, 힐러를 길러내는 상 급학교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맘이 없는 눈치였다. 본인이 맘이 없으니, 헬 루시타 사제도 그들에게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행 평가'에 좋은 성적을 받게 해 준 사람들이었으므로 매우 친절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방금 한 말 명심해서 마지막 시간동안 내가 준 노 트를 열심히 읽도록 하길 바랍니다. 어쨌든 사고 없도록 조심해서, 흙의 날에 예전처럼 같은 시간에 이 자리로 나오도록. 시험 날에는 나 말고 다 른 사제가 나올 테니, 쓸데없는 부정행위는 하지 말도록 하고, 내가 빌려 준 노트와 성서는 시험 끝난 후, 그 때 담당한 사제에게 건네 드리면 됩 니다. 그럼 내게 전해지니까요.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남으라고 했으니...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네, 감사합니다. 사제 님. 그럼 복된 하누카 날이 되시길." "감사했습니다. 헬루시타 사제 님." 이가르 및, 두 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교실에는 이제 게이드와 헬루시타 사제 둘만 남게 되었다. 게이 드는 그 큰 덩치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헬루시타 사제를 보고 헤- 웃었 다. 헬루시타 사제도 빙긋 웃었다. 아까 이가르에게 보여주었던 웃음과 달리, 하도 기가 막히고 답답해 웃 는 웃음이었다. 헬루시타 사제는 비꼬았다. "...트루크의 아들, 게이드. 반갑네. 내년으로 오 년째인가? 내 자네처럼 의무교육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보다보다 처음 보네. 자네하고는 아 주 정이 들대로 들었어. 이거 어쩌지?" 게이드는 뒷목을 긁적이며 웃었다. "헤헤헤... 저, 저도 헬루시타 사제 님과 정이 무, 무척이나 많이..." "됐네!" 황금률 하나만 제대로 외우면 졸업시켜준다고 하니까, 그것도 못 외워 서 더듬거렸던 녀석한테 '역설법'같은 고난도 수사법을 써서 비꼬아서는 안 되는 법이다. 헬루시타 사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말했다. "네두아의 아들, 킬 군은 어찌 된 건가? 오늘도 못 나오다니? 자네는 그렇다 치고, 그 녀석은 다음 해까지 일 학년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일 학년인 네두아의 아들 킬이, 내년에 이 학년이 되기 위해선 달 의 날 있었던 학년 시험을 치러야 했다. 들어온 날이 언제가 되었든 그것 만 패스하면 이 학년이 되지만, 킬은 아예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일 학년으로 한 해를 더 다녀야 했다. 게이드가 얼굴을 붉히고 말 했다. "네에.. 키, 킬은 주, 주인님의 심부름으로..." 헬루시타 사제는 얼굴을 찡그렸다. 왠지 '제 2의 게이드'가 생길 것 같 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온 하도바 님의 심 부름이라고 하니... 그래서 그는 한숨을 푹 쉬고 그에게 손짓을 했다. "알겠네. 가보게. 내년에는 제발 엘께서 자네의 머릿속에 황금률을 집어 넣어 주실 수 있도록.. 내, 하누카의 휴일 내내 기도함세.. 그러니 자네도 쉬지 말고 기도하게. 자네 때문에 아주 답답해서 소화도 안되네." "네... 헤헤.. 가, 감사합니다.." 게이드는 태평스럽게 웃었다. 이가르는 교실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게이드라는 사람이 또 헬루시타 사제 님에게 꾸중듣는 것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미래를 결 정할 중요한 시험이 얼마 안 남아 다른 데는 도무지 시선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는 여러 장의 종이를 묶어 만든 노트와, 소중한 '다섯 성서 요약 판'을 땅에 떨어트리지 않도록 옆구리에 주섬주섬 단단히 끼었다. 이것은 다 헬루시타 사제의 것으로 자칫 실수라도 해서 진창에 떨어뜨리면 안 되 는 것이다. 15살에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을 때는 6살부터 해온 지긋지긋한 노 동을 벗어나 무언가 다른 것을 한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지금부터 돌아가서는 새벽까지 동네 어귀에 있는 술집에서 일해야 한다 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몸은 피곤할지언정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긴 길을 걸으며 옆구리에서 종이 한 장을 빼내 그것 을 중얼중얼 읽었다. 헬루시타 사제 님이 말씀하시길, 기슬러 시험에 좋은 성적을 얻으면 '공 짜'로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른 상급학교만은 비싼 돈을 치르고 입학해야 했지만, 신학교만은 글 을 읽고 쓸 줄 아는 사제들을 많이 필요로 했기에, 어느 정도 요건만 되 면 나이라든가 자격, 그리고 교육비에 대해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노테온이라도 글만 읽을 수 있다면 받아들이겠다고 신학교 입학 요강에 나와있겠는가? 물론 글을 읽을 수 있는 마노테온이 있을 리 없으니, 그것은 그 정도로 신학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강 조일 테다.) 약 100여 년 전만 해도 신학교도 다른 상급학교처럼 자격요건이 매우 까다로웠다고 한다. 아니, '신학교'이므로 다른 상급학교보다 조건이 까다 로웠으면 까다로웠지 느슨하지는 않았는데...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님 이래로, '교육'을 중요시하는 세상이 되면서 신학적인 문서의 많은 필사본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은 아티스트의 손으로 기록되는 세속적인 문서와 달리 정규교육을 받은 '사제의 손'으로 만 일일이 필사되어야 하므로 100여 년 전부터 사제의 필요성은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났다.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이가르는 종이를 다 읽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끼고 다른 종이 를 꺼내며 피식 웃었다. ...비록 이렇게 고생하여 신학교에 들어간다고 해도... 돈 있고 명망 있는 좋은 가문에서 온 사람들하고 교육도 따로 받고, 사제가 되어도 총 16개 의 품계에서, 겨우 15서품까지만 받고, 평생을 아가트나 다섯 성서 요약판 필사만 하다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렇게 남의 인정을 받는 일을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무슨 일 이든... 연기 자욱한데서 밤새, 욕설을 들으며 술통을 지고 나르고 아침에 몇 푼의 돈을 얻으며 주인에게 실수한 일을 꼬투리 잡혀 급료를 깎이고 얻어터지는 일보다는 백 번은 나을 것이다. 이가르가 동네 어귀에 도착했을 무렵엔 노트에 있는 글을 전부 다 읽었 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곱게 정리해서 똑바로 들고 가는데, 그것을 본 동 네 사람하나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죽거렸다. "이, 이가르! 작은 사제 님! 오, 오늘은 뭘 배우셨나? 이리 와서 축복이 나 해 주고 가!!" 언제나 동네 어귀에 앉아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을 보며 술 취한 채 시 비를 거는 구드였다. 상대하면 골치만 아프므로 이가르는 무시하고 걸었 다. 그러자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네미랄! 저 놈의 잘난 척하는 쌍판대기 매일 보는 것도 지겹구먼~! 야, 이 자식아~! 세에상 조오아 졌다~!! 오물 치우는 년 자식놈도 사제가 될 수 있다더냐~! 응? 말 좀 해보라고오~!! 제엔장~~!! 네 어미가 멋도 모르 고 자랑하는 거지~!! 우웃기는 일인 줄도 모르고~!! 네, 네가 사제가 되, 되려면 너나 네 어미, 남은 평생 회개해도 안 될걸~!! 사, 사제는 오물이 나 시, 시체는 만지지도 못하는데~! 아, 아주 웃겼어어~!! 똥통에 빠질 년, 놈들 같으니라구~!" 길을 걷는데 골목 사이사이에서 킥킥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가르는 꾹 참았다. 참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도리 없었다. 저렇게 할 일 없는 주정뱅이 같이 보여도, 이 동네의 여러 비류패 중 한 패에 속해서 나름대로, '오가는 사람 감시'라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괜히 덤볐다 가는 여기저기 숨어 있는 같은 패에 몰매를 맞아 뼈도 못 추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16살 무렵에 그런 일을 겪고 몇 주간 앓아 누워 학교는 물론이고 일당도 못 벌어 며칠이나 굶었을 때, 그래서 어머니가 무리하게 일을 해야 했을 때, 생긴 경험이었다. 이가르는 노트를 꽉 움켜쥐었다. 시험을 통과해서 사제 님이 된다면... 어머니를 데리고 이곳에서 꼭 나 가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이 '할렘'에서. 식당 안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도비온 의 말과 바닥에 쓰러진 세 명의 남자들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웬돌라가 죽었다.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 며칠 후 에 강둑에 떠오르겠지. 그때까지는 혼 강, 바닥에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나 되어 주고 있을 것이다."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그래서 도비온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고 있는 식 당 사람들은, 죽음을 맞은 웬돌라를 위한 안타까움과 슬픔보다는 식당의 고요함 속에 있는 긴장과 분노를 한층 더 팽팽하게 느끼고 있었다. "...비록, 잡히자마자 강물로 투신하지 않은 것과 사실을 일러 줘 우리 일을 망치게 한 책임은 백 번을 고쳐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만... 그래도 뒤늦게라도 그렇게 했다는 것에, 그녀는 우리 식당의 진정한 일원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기, 저 세 녀석..." 그들의 주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1층 바닥에 쓰러져 있는 셋을 가리켰 다. "...저기 세 녀석들은 정말 어떻게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구제불능이지!" 그 증오 어린 말에, 식당 사람들은 아까 있었던 광경을 다시 한 번 더 떠올렸다. 이 셋은 도비온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힘-사람을 산채로 공중에 띄워, 하얀 불꽃으로 태우는-에 당해 한참이나 공중에 떠 있었고 그 하얀 불꽃이 거두어 졌을 때는 2층에서 곧바로 1층으로 곤두박질쳐 내렸다. 사람들은 어떤 인간이 그런 힘에 당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깨어날 때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 도비온이 말했다. "...너희들도 저 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더 뼈 속에 새겨둬라! 저 녀석 들 때문에 쓸데없는 희생을 치러야 했고, 일도 실패했다! 살아있을 가치 도 없는 벌레 같은 놈들! 저런 녀석들은 살아가는 자체가 세상에 대한 폐 가 된다! 그러니 일을 엉망으로 만든 대가는 저 녀석들 목숨으로 보상받 는 것이 낫겠지만 그렇게 자비로운 벌은 저 녀석들이 한 짓에 비해, 강도 가 너무 약하지...! ...슐라츠!" "네, 도바 님."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고 있겠지?" 슐라츠는 고개를 숙였다. "네, 도바 님.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몇몇 사람을 시켜서 바닥에 쓰러진 세 명의 남자를 질질 끌고 나갔다. 식당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 였다. 이제 저 셋은 각각 따로따로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 생전 처음 보는 어떤 마을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을 잃은 채로, 자 기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살던 사람인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머릿 속을 말끔히 강탈당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 식당의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여기 모인 150명 가량의 사람들 중에는 지금 끌려나가는 셋과 이야기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지만, 다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담아, 식당의 공기는 축 가라앉았다. 도비온은 그 런 식당 분위기를 눈치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어리석은 것들.왜 표정이 그 모양들이냐? 왜? 너희들은 아직도 '죽 음'이 두렵나?"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비웃는 말에도, 아무 대꾸를 안하고 가만히 있었 다. 그래서 도비온은 그들에게 코웃음을 날렸다. "바보 같은 녀석들...! 내가 너희들의 무엇이지?" "......" "하하..! 이거, 우습군! 너희들은 '맹세'를 잊었나? 다시 한 번 더 말한 다! 난 너희들의 무엇이냐!" 그러자 세 남자를 치우고 들어온 슐라츠가 입구에서 크게 말했다. "...당 신은 우리들의 주인이지요! 도바 님! 당신이야말로 우리를 산 지옥에서 꺼내 주신 분입니다! '죽음'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산 지옥 말입니 다!" 도비온이 웃었다. "...슐라츠. 너는, 진정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 줄 아 는 자다." 슐라츠는 그 뚱뚱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감사 합니다. 도바 님." 도비온은 웃음을 띈 채, 싸늘한 눈으로 식당을 둘러보았다. "...나머지 녀석들은...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 그리고 그는 계단을 내려와, 가운데 통로를 걸어 입구로 가며 말했다. "..슐라츠, 따라와라! 다음에 할 일을 지시..." 하지만 그때였다. 도비온이 지나가려는 데, 사람들이 갑자기 그 앞에 퍽 퍽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도바 님!" "도바 님!" "우리들은 지금,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비온은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너희들이 두 려워하는 것이 뭔가? 왜 표정이 죽을상들이지? 일을 실패했다고 하니까, 마음에서부터 슬픔이 우러나오나? 그 벌벌 떠는 손은 뭐야?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이 2층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 불쌍했나? 하하.. 이거야~ 눈물이 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들이시군! 썩어빠진 놈들 같으니라고!!" 그는 가까운데 놓여 있는 손을 밟아서 짓뭉개버렸다. 벌벌 떨고있는 것 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으으윽....!!!" 낮은 신음이 울리는 데, 도비온이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선 택한 것은 네 놈들이, '죽음'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볼 줄 아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색이 된 꼴이 보기 좋구나!! 동네의 바느질 방이나 가 봐라, 이 자식들아! 거기라면 너희에게 딱 어울릴만한 장소다!!! 여기 서 당장 꺼져버려-!" 그러자 억눌린 목소리로 누군가 말했다. "...그, 그것이 아닙니다! 도바 님! 우리는 죽음 따윈 두렵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만약 우리가 그런 것 따위를 두려워했다면... 인딜 동굴 에서 '테진'이 죽어왔을 때... 그리고 나무의 날에 다섯 명의 동료가 죽어 왔을 때... 그리고 바로 오늘, '웬돌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려움만을 느꼈어야 합니다. 하, 하지만 우린..." 남자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도비온이 말했다. "우린?" 하지만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일그러뜨리고 몸을 떨고만 있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도비온이 말했다. "흥!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그때, 한쪽 구석에서 여자가 소리쳤다. "흑흑... 도바 님, 제발-! 우리는 죽음 같은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버림받을 수 있 다는 사실이 무서운 겁니다! 흑흑.." (계속)================================================== * 헬루시타 : 예전에 킬과 게이드를 교실 바깥에 벌 세운 장본인. * 이가르 : 처음 나왔음. 세상에 모든 일은 '주기'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슬럼프 군이 찾아와 서, 아주 멋진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뭐, 세상만사가 그렇죠. 반갑... 슬 럼프 군. <'닥터 슬럼프'의 '슬럼프'가 아닙니다... 엔.--;> ps...성역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올리는 장소 : 나우누리 - 환동 게시판 '8번'- '감상/비평/토론' 란 중, - 제2번, 작품에 대한 감상, 잡담 란. 'lt 성역.' 하이텔 - 환동 게시판 '23번'- '작가와 독자와의 만남' 'lt 성역' - 1편(--;) 은 21번 란에... 유니텔 - go sffan ⇒ 연재작가란 ⇒ 엘야시온 방 ⇒ 두 개 나오는 방 중, 밑에 방. - 명칭이 정확하지 않으므로 '번호'로 찾으시길.) ...이래도 못 찾겠거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꿋꿋하게 본문만 읽으 십시오. 메일은 언제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일에 대한 답장일 뿐...^^ ps2... 물늑대님, 으나님, 지영 언니, 슬기... 메일 준 것 감사합니다... ^^ 요즘은 계속 졸려서... (그래서 제 혈통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난 혹시 '공 주'가 아니었나 하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퍼버벅-!!) 음.. --; 어쨌든, 공주도 아닌 것이 자다 깨다 부스스 일어나기를 반복, 그러다 보니 본문 쓰는 것도 지겨워서, 오늘에야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내일 모레까지는 가 지 않을 겁니다. (불끈.. 자! 답장 쓰고 자는 거야, 엔 공주! ...퍼버버벅!)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22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11 23:04 읽음:214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2회, 제 42막. 게엔나(Geenna) (3)> 한 남자가 말했다. "도바 님! 지금 당장 혼 강에 뛰어들어 죽으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아무 리 험한 일을 시키셔도 좋습니다. 당신이 원하면 아무 원한 없는 길 가던 백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루이티온 계급에게 덤벼 일가족 이 몰살을 당해도 좋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용서하 십시오. 도바 님! 우리는 그저 저 세 명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도비온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들은 참, 어리석구나. 왜 그런 걱정부터 먼저 하는 것이냐?" 그는 발 밑을 보았다. 세게 밟혀 벌겋게 되고 더러워진 손등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리고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들어올렸다. 자기 손을 들어올리는 도비온을 보며 엎드려 있던 남자가 눈을 들었다. 겁먹은 눈초리였다. "도, 도바 님..." 도비온이 말했다. "...그래. 난 너희들의 도바 님이지. 내 이름은, 도비온. 하지만 나와 가 장 가까운 자들은 나를 '도바'로 부른다." 도비온은 자기 옷자락을 들어, 남자의 손등을 쓱쓱 닦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나는 너희들을 참 좋아한다. 이 세상 무엇 보다 좋아하지. 그래서 난... 너희들이 내 기대에 못 미치면 참 슬프다. 이 세상 무엇보다 슬퍼. 너희들은 분명 이것보다 훨씬 더 나은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데... 그것이 안되니까 말이야.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내가 잘 못된 것인가? 너희들에게 아무 기대도 안 하고, 그냥 모든 것을 모르는 척, 흘러가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은가?" 도비온은 남자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 았다. "응? 넌, 어떻게 생각하나? 바이데?" 바이데의 눈이 놀라움으로 붉어졌다. 바이데가 식당에 들어온 것은 거 의 여섯 달 전이었다. 바이데는 조용히 지냈으니까, 도바 님은 그때 외에 는 자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바 님이 자기 이름 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전에 섬기던 하바티온 주인 은 10년이 됐어도 자기 이름을 몰랐던 것이다. "도바 님..." 전의 주인은 자기의 하인들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전의 하인장은 주인의 무관심을 이용하여 온갖 횡포를 부리며 밑에 사람 을 자기 마음대로 학대했다. 그의 매질과 중간에서 급료를 가로채는 일은 나날이 심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아였고 아무 보증인 없는 그에게 귀족 집의 정원지기 보조라는 일자리는 엘이 준 행운 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같이 여기던 정원지기 노인이 수 십 년 동안 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장의 비위에 거슬려 모함을 받고 결국 급료 한 푼 못 받고 쫓겨나자, 바이데는 마침내 하인장을 찾아가 그와 담판을 짓 고 말았다. ...손은, 그 날 이후로 계속 붉게 화끈거렸다. 지금도 주먹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바 님이 닦아주었는데 아직 도 손등은 빨갰다. 그날, 아무리 닦아도 피가 가시지 않던 그 붉은 손처럼. 바이데는 고개를 숙였다. "...도바 님, 아까 슐라츠가 말한 대로입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주인입니 다." 그는 슬프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당신의 종. 아무 것도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능력이든, 도바 님께서 원하시는 능력이 있다면 드리지요." 소중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노인은 공범죄의 누명을 쓰고 태형을 받는 도중 죽었고, 바이데는 태형을 받고도 몇 십 년을 지옥 같은 감옥에서 살 았다. 수 십 년 동안 그 깊고 더러웠던 감옥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던 것은 무 엇일까? 죄의 경감? 아니면 죄의 사면?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곳은 그의 죄를 형상화한 곳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독한 감옥... 이미 감옥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감옥은 그의 핏줄에 낙인으로 찍혀, 이젠 제 2의 천성이 되어 아직도 그 의 심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피의 흔적을 계속 손안에 품고 살았던 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니까... 바이데는 조용히 웃었다. "그렇군요. 무엇을 걱정한 것인지. 이제 와서... 당신에게 도움이 못 된 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났습니다. 아니면, 내 발로 걸어나가 이 곳에 폐 를 끼치지 않는 것이 낫겠지요." 그는 그의 주인에게 충심을 다해 절했다. 그의 감옥 앞으로 와, 그의 얼 굴을 들여다보고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그에게. 붉은 손을 붙잡아 닦아 준 그에게... 비록 손은 여전할 지라도. "...무슨 일이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도바 님." 도비온은 식당을 나서며 슐라츠에게 말했다. "...슐라츠, 오늘이 며칠이 지? 하누카의 날까지 며칠이나 남았나? 다이아몬드 더스트(Diamond Dust; 細氷)가 시작될 때가 되지 않았나?" 슐라츠가 말했다. "오늘은 기슬러월 6일, 불의 날입니다, 도바 님. 하누카의 날까지는 정 확하게 19일 남았습니다. 하누카의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시작될 날은 약 11일 정도 남았죠." "흥.. 그래? 20일이라...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시작되면 아무 곳에도 가 지 못할 테니...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때이군... 슐라츠?" "네?" "돌아가면 식당의 식구들에게, 새 음식과 좋은 술을 줘라." "네, 도바 님." "잘 먹고, 오늘 저녁의 교육에 대비하라고 해라.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 지. 큰집과 저 엘의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며, 우리를 속였는 지...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 가운데 있는지... 이젠 진실 에 대해서 말할 때가 되었다." 도비온은 먼 곳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이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젠... ...게엔나(Geenna)... 우리, 자유의 이름을 내 식구들도 알 아야 한다." 슐라츠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도바 님." 이가르는 거의 집까지 다 와서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옆 집 문 앞에 웬 여자애가 멍하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아는 애였다. "스노우 드롭? 거기서 뭐하니?" 산발을 한 채, 얼굴이고 목이고 온통 시커먼 여자 애가 눈을 들어 이가 르를 보았다. "오빠. ..엄마가 계속 안 돌아와." 이가르는 고개를 갸웃 했다. "웬돌라 아줌마가? 어제도 안 돌아 왔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직도 안 돌아오셨어? 이상하네... 보통 하루 이상은 집을 안 비우는데? 벌써 이틀째잖아." "아침을 주면서 엄마가 한 번 밤이 지나면 온다고 했어. 그래서 나 계 속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런데 기다려도 안 와... 오빠. '밤'은 깜깜한 것 을 말하는 거지?" "스노우 드롭..." 그는 스노우 드롭에게 다가가 그녀의 더러운 머리칼에 손을 얹었다. 손 을 대기 무서울 정도로 더러운 머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스노우 드롭하 고는 몇 년이나 알아오던 사이인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나 알아오던 사이라고 해도 스노우 드롭은 고아였다. 고 아라는 말은 부랑자라는 말과 똑같다. 그래서 그녀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이 동네에 한 사람도 없었 다. 오 년 전인가 이 할렘에 비실비실 나타나서 이 집 저 집 구걸을 다니 기 전까지, 어디서 뭘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특별히 거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데까지 신경 쓰기에 할렘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빠듯했다. 부랑자 어린애에게 신경 쓸 바에는 차라리 집안의 생쥐한테나 신경을 쓰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생쥐 녀석들은 소중한 밀을 훔쳐먹는 다. 하지만 아무 쓸모 없는 어린애한테는 선의든 악의든 어떤 관심도 아까 웠다. 이 혹독한 겨울의 세계에서 부모 없는 어린애는 죽는 것이 당연하다. 할렘의 쓰레기통에는 가끔 창녀들이 밤에 몰래 버린 갓난아이가 들어 있 기 일쑤니까... 할렘의 사람들은 아이들이 죽는 것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러니 자기들과 아무 상관없는 이런 작은 계집아이, 죽는다고 해도 대 수로울 것 없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이 계집아이는 몇 번인가의 긴 겨울을 견디고도 꿋꿋 하게 살아남았다. 눈이 가득 내린 날, 굴뚝 옆에 잠들어 있는 것을 가서 발로 툭툭 쳐보 면 눈을 부스스 털고 일어나 깜짝 놀란 마음에 수프를 줬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몇 년이 지나서까지 계집애는 이곳 할렘을 떠나지 않았 다.(죽어서든 살아서든)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익은 이 계집애를 차차, '스노우 드롭'이라고 부 르기 시작했다. 눈을 흠뻑 쓰고 일어서는 모양이 눈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스노우 드롭 같다고 해서 붙여준 이름인데, 실제로는 온 몸이 시커매서 놀릴 양으로 '블랙 드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 계집애의 이름은 '스노우 드롭'이었다. 스노우 드롭은 몹시 작았다. 너무 작고 눈에 띄지 않아서, 할렘 여기저 기를 다녀도, 짓궂은 어린애들이 하도 심심해서 하는 장난에나 희생되면 모를까... 그 외에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2년 전 옆집으로 이사온 웬돌라 같은 여자가 어쩌다가 수프를 주면 '엄 마'라고 부르며 음식을 얻어먹는 아이다. 여자들은 이런 여자 애한테 듣는 '엄마'라는 호칭을 싫어해서 '아줌마'라 고 부르도록 했지만 스노우 드롭은 단어 외우는 것이 서툴러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모두 다 '엄마'로 불렀다. 이가르는 한숨을 쉬었다. 스노우 드롭은 이가르의 기억으로 오 년 전과 비교해서 별로 큰 것 같지 않았다.(그러니 몇 살인지도 알 수 없다.) 아마 잘 먹지 못해서 그럴 테지만... 웬돌라가 이사 온 후로 아침은 언제나 꼬박꼬박 먹을 수 있었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스노우 드롭... 걱정하지마. 아줌마는 곧 있으면 돌아오실 거야. 일이 있어서 늦으시나 보다. 어쨌든... 그럼 그제 아침 이후로 뭐라도 먹었니, 스노우 드롭?" 스노우 드롭은 방긋 웃었다. "파이를 먹었어. 사과 파이." 이가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아무 것도 못 먹었다는 말이거나 무 척 배가 고프다는 말이었다. 예전에 누군가한테 사과 파이를 얻어먹고 나 서부터는, 배가 고플 때, 무언가를 먹었냐고 물어 보면 언제나 '사과 파이 를 먹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럼, 잠깐 우리 집에 들어 와 볼래? 아침에 남은 검은 빵이 있으니, 그걸 줄게." 스노우 드롭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을 잡았다. 역시 더럽고 얼음처 럼 차가운 손이었지만 이가르는 꾹 참았다. 스노우 드롭의 이런 친근감 있는 행동 때문에 사람들은 스노우 드롭을 가까이 하기 더욱 꺼려했지만 어머니 외에는 가족이 없는 이가르는 스노우 드롭의 이런 행동에 어릴 때 열병으로 죽은 여동생이 생각이 나, 차마 뿌리 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손을 마주 쥐고 말했다. "스노우 드롭. 다음부터 파이가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플 때는.. 우 리 집에 와. 나는 요즘 일을 열심히 해서... 검은 빵을 조금 많이 살 수 있 게 됐어. 그러니 전보다 너한테 더 많이 줄 수 있어." 스노우 드롭은 알아들은 것인지 어쩐 것인지 그냥 씨익 웃었다. 이가르 도 빙긋 웃고,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동안 재빨리 검은 빵과 물을 먹일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의외로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다. 옆에 있는 스노우 드롭도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추 운 바깥으로 나가기는 싫은 듯 이가르 뒤로 몸을 숨겼다. 이가르는 그런 그녀 앞에 서서 놀란 마음에 어정쩡하게 말했다. "어, 어머니? 웬일이세요? 오늘은 일찍 돌아왔네요? 그의 어머니는 쓰고 있던 머릿수건을 벗으며 말했다. "일이 일찍 끝나서..." 그러더니 그녀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스노우 드롭을 흘겨보았다. "그 계 집애는 왜 데리고 들어 오냐?" "...그, 그냥... 일하러 가기 전에 잠깐 데리고 있게요." "잠깐? 너 또...!" 뭐라고 한마디하려던 그의 어머니는 그때, 이가르의 옆구리에 끼인 '종 이'를 보았다. 그걸 본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더 니, 어깨를 으쓱했다. "...쓸모 없는 동정심만 많아서. 엘께서 저 녀석을 자기 아들로 부른 것 은 틀린 선택이 아니지. 스노우 드롭, 운 좋은 줄 알거라. 웬돌라, 그 여자 는 도대체 어딜 간 건지." 그러더니 그녀는 입술을 흉하게 하고 비웃듯 말했다. "제 '딸내미'도 안 챙기고 말이야. 하여튼 주위 사람에게 짐스럽다니까. 창녀 주제에 저런 것에게 음식을 뿌리니까 우리 집 주변까지 더러워지잖 아. 흥... 뭘 보냐, 스노우 드롭. 계집애가 뻔뻔스러워서는... 내가 아까 집 에 들어올 때 그렇게 눈총을 주었건만 계집애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여길 들어오고 말이야." 뭘 보냐는 그녀의 말에 스노우 드롭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로 주춤 물 러났다. 하지만 이가르는 그런 스노우 드롭의 손을 꼭 잡고 억누른 목소 리로 말했다. "...그만 하세요, 어머니. 그리고 아까 보셨으면 데리고 들어오시지 않 고... 애가 떨고 있는데... 모르는 애도 아니고..." "흥...! 내가 미쳤냐? 우리 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짜 장작 쓰냐?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 이가르는 노트를 테이블 위에 놓고, 화덕 앞으로 가 그 위에 있던 찌그 러진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물을 따랐다. "...어차피 때는 장작이니까... 스노우 드롭 하나 더 있다고 열기가 줄어 드는 것도 아닌 걸요." "열기가 안 줄어! 네가 지금 나를 훈계 하냐?!!! 안 줄긴 뭐가 안 줄어! 방금 너와 저 계집애가 들어오니까, 찬바람이 휙 몰아쳤는데!" 이가르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어머니와 말다툼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머니는 스노우 드롭을 싫어했고, 그러니 이대로 쫓아 내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노우 드롭에게 따 뜻한 물을 먹이려던 생각은 포기하고 그냥 화덕 위의 찬장을 뒤지기로 했 다. 어머니가 또 한 번 싫은 소리를 하겠지만, 검은 빵을 가지고 스노우 드 롭과 여기를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헌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 뭐라고 중 얼중얼 욕을 했다. "쳇... 사제가 될 아들놈이랑 살기 힘들어서 원. 주제에 맞지 않게 사제 를 한다고 하니, 이런 쓸모 없는 일도 꾹 참아야 하는군. ...스노우 드롭! 멍청하게 거기 서 있지 여기 와서 앉아라!! 신경 거슬린다!!" 동네의 오물 치우는 일을 해 남자들만큼 든든한 어깨와 굵은 손바닥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앉아 있는 테이블을 탕탕 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 던 스노우 드롭은 이가르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가르의 어머니 는 또 한 번 더 소리쳤다. "뭐하냐!! 이리 오지 못해?! 계집애가 굼떠서는!!!" 스노우 드롭은 우물쭈물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 의자에 앉으 며 이가르의 어머니를 보고 방긋 웃었다. "엄마." 이가르의 어머니는 가차없이 스노우 드롭의 따귀를 날렸다. 그리고 말 했다. "이 까마귀 같은 계집애야, 내가 왜 네 엄마냐! 저번에도 한 대 쥐어박 았는데, 이것이 번번이 날 놀려먹네!! 기억 못하겠으면 그 입 닥치고 가만 히 있어! 안 그러면 당장 쫓아내 버리고 말 테니까!!!" 그래서 스노우 드롭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말을 걸었을 때 상대가 때리면 두 번째는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다. 그런데 그렇게 고개를 숙인 그녀 앞에 찻잔이 놓였다. "...스노우 드롭, 물을 마셔." 뭔가 이상한 목소리여서, 스노우 드롭은 '오빠'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건가 힐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이가르의 눈은 상냥했다. "오빠." 스노우 드롭은 방긋 웃고 그의 말대로 뜨거운 물을 후루룩 마셨다. 하 지만 곧 뱉어냈다.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데인 것이다. 그걸 보고 깔깔 웃은 이가르의 어머니가 말했다. "천치 같은 것. 분명 10살은 넘었을 텐데, 이 모양이라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제 '어미'처럼 창녀나 되려나." 이가르는 어머니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스노우 드롭에게 말했다. "...스노우 드롭. 천천히 마셔. 찻잔은 두 손으로 잡고, 저 번에 배웠지. 그래.. 잘 한다." 스노우 드롭이 이번에는 제대로 하는 것을 본 그는 다시 화덕 있는 곳 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스노우 드롭의 어설픈 모습을 비웃은 뒤, 찬장을 뒤지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찬장은 왜 그렇게 뒤지는 거냐?" "...빵을 찾고 있어요. 아침에 먹다 남겨놓았는데... 혹시 드셨어요?" 스노우 드롭에게 빵을 주다니, 미쳤냐고 한바탕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이가르는 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머니는 뭔가 쑥스러운 듯 말했 다. "...빵? 아... 그거. 저기 있잖냐. 어린놈이 눈이 그렇게 나빠서 뭐에 쓰 냐. 사제가 되려면 눈썰미가 있어야지." 이상하게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라, 이가르는 묘한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 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어둠 가운데, 매캐한 연기 어 린 불빛을 받아 말끄러미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집에 단 하나 있는 침대 머리맡에 붙어있는 그것. 빳빳한 종이에 매우 서툴고 조잡한 솜씨로 그린 그것은 놀랍게도 천사의 모양을 그린 성화(聖 畵)였다. "저...건...!" 그의 어머니는 머릿수건으로 있지도 않은 무릎 위의 먼지를 툭툭 쳐내 며 말했다. "...같이 일하는 인간이 어디서 구했다며 헐값에 판다고 해서, 가져와 봤 다. 우리 프린...를 보호하는 천사 님이라고 하더구나." "프린서팰...러티요."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무릎 위의 먼지를 털었다. "아, 맞다. 그래. 그거." "그런데, 저 밑에 놓인 검은 빵은..." 조금 망설이던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사제가 되는 시험을 보려면, 보호가 필요할 것 같아서. ...기도를 하려 면, 아무래도 맨 입으로는 안 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그래서 음 식을 조금 드렸지. 그래야 천사도 힘을 내서 날아가 엘에게 기도를 가져 다 줄 수 있지 않겠냐." "그래서... 성화 밑에 음식을 놓고 기도를 드렸다고요?" "그래." 이가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매우 내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 지만 이때만은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가는 대로 말이 나왔다. 스노우 드 롭 때문에 어머니에게 섭섭하고 화가 났던 감정도 있었다. "어머니...! 도대체 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 시는 거냐고요!"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태도에 당황해서 말했다. "...뭘 왜 그래? ...아. 검은 빵을 놓은 것 때문에 그러냐? 천사 님이라 흰 빵은 놔야 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무 비싸서 안돼. 집에 그만한 돈 은 없다." '흰 빵'? 이가르는 기가 막혔다. 아마도 어머니는 제대로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제대로 마르지 않은 싸구려 장작에서 나는 연기는 한층 더 숨을 꽉 막히 게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지금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조차 몰라요. 어머 니는 지금 율법을 어긴 거예요. 그림이야 그렇다고 쳐도... 율법에서는 이 렇게,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어요. 그러니 만약 이렇게 한 걸 들키면... 우리 모두 무사하지 못해요." 그의 어머니가 화를 냈다. "난 엘에게 기도 드린 것뿐이다! 그리고 무사 하지 못하다니! 뒷집 여편네도 천사 나무 상을 갔다가 놓고 아침마다 기 도 드리는데! 그럼 그건 뭐냐!!! 그 여자는 그렇게 하고도 자기가 신앙이 좋다고 자랑하던데!!!" "그건, 그분이 율법을 배우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죠! 그 분은 엘의 뜻이 아닌,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는 거라고요!! 하지만 우리 는 틀리잖아요!! 저는 율법에 대해 배웠고, 곧 사제가 될 시험을 치를 거 예요!!! 헌데 어머니는 이렇게 하고도 율법을 어겼다는 생각을 못하니...! 그럼, 이곳을 나가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그렇게 말했건만...! 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한만큼 형태가 없 고, 그 능력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서... 그 분의 손으로 만든 어떤 피조물... 나무든 돌이든, 금이든...! 하여튼 어떤 것도 그분의 신적인 위엄을 담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 분에게 모욕이 고, 그 분의 진노를 사는 일이라고 했어요!!! 오늘 읽은 다섯 성서에도 나 와 있었어요!! 이 모든 세상... 보이는 모든 것은 원래 엘께서 인간을 위하여 지은 것 이고, 그러니 그것을 향하여 경배하는 것은 엘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더구나 세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똑같이 저주받 아서, 더욱더 엘의 형상을 담을 수 없고, 모두 다 썩어서 부스러질 것이 되었다고...! 아세요, 어머니? 인간은 나누어진 이래로 엘을 볼 수 없어요! 그 형체 를 보는 순간 죽음을 맞게 되니까!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신성하지 않다고 배웠단 말이에요! 이 우주에서 신성한 것은 오직 엘 혼자 뿐이고 우리는 엘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러니, 어머니께서 이런 짓을 하시면, 엘의 진노를 산단 말이에요!! 엘 의 진노를 산 자가 어떻게 엘의 사제가 될 수 있어요...!" "무슨 헛소리냐! 나는 율법도 모르고 다섯 성서도 모른다! 하지만 네 말이 웃긴다는 것은 알겠다! 보이는 것 중에 신성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 그럼 네 말은 카할이 신성하지 않다는 거냐!! 저 사제들이 신성하지 않다는 거냐!! 너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거냐...! 카할은 너무나 신성하고 거룩한 곳이라, 네 말대로 죄가 많아 썩어 부스러질 나 같은 년은, 그곳엔 못 들어간다! 그래서 이 족자라도 가져왔다...! 천사 님의 그림이 집에 있다면 엘께서도 이 더러운 오막살이 에 계셔 주시겠지! 하지만 이것조차 안 된다면, 그럼 나는 어디서 기도하 랴! 나는 너무 죄가 많아 이런 것도 안 된다는 거냐...!!!" 이가르는 뜻밖의 어머니 말에 멍하니 말했다. "...굳이 그런 그림이 없어도 엘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헬루시타 사제 님 이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그냥 기도하시면..."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코웃음 쳤다. "흥!!!! 이 녀석! 이가르! 학교에 갔는데도, 아직도 어리석은 말을 하는 거냐! 그런 식으로 사제 님이 되려면 당장 때려치워라! 네가 잘못 이해한 것일 거야!!! 하기는 네깟 녀석이 무슨 사제가 된다고...! 내가 알아봤지...! 할렘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날 수 있겠어!! 흥, 이 녀석아! 그렇게 뛰어나고 위대한 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 고? 숯검댕이가 시커먼 집안을 봐라! 저 지저분한 몰골을 한 스노우 드롭 계집애 좀 봐!! 아니면, 지금 나가서 시궁창을 뒤져봐라!! 애새끼가 몇이 나 죽어 있는지! 내가 오늘 그 쓰레기를 몇이나 치웠나 말해주랴!!! 어디 에나 엘이 있다고?! 어디에 엘이 있냐!! 엘처럼 위대한 분이 이런 더럽고 추잡한 곳에 있겠냐?! 있다면 내게 보여 봐라!"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는 머리를 흔들었다. 혼란스러운 듯 했다. "아니, 아니... 엘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냐? 보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고? 하긴... 카할에도 엘이 나타났다는 말은 못 들었지. 그곳도 그럴 정도니, 이곳이라면..." 그러다가 그녀는 분한 듯 입술을 떨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23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11 23:05 읽음:212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3회, 제 42막. 게엔나(Geenna) (4)> "...그럼, 엘이 너무나 뛰어나서 보이는 것 중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럼 나 같은 무식한 년은... 율법도 모르고 다섯 성서도 모르는 나 같은 년은 무엇으로 여기에 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냐? 저 천사 그림도 안 된다면... 그럼 어떻게 엘이 여기 있는 것을 알 수 있겠냐고?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난 엘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겠다. 이가르!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타령하지 말고 그거나 말해봐라! 난 도무지 엘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그 증거를 대봐!! 네 말 그대로라면... 여기에 있으면서도 이런 것을 허락한 엘은 그럼 악 마냐!!" 이가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아닐 거다!!! 엘은 선하다고 했으니까!!! 네가 그랬지!!! 석 양과 검은 빵과 불을 보면, 이 세상을 창조한 엘이 선한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그래서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 지금까지 그런 사물 속에 엘이 있다 는 걸로 알고 언제나 그것에 기도 드렸다!! 그것들은 보이는 것이니, 그럼 나는 지금까지 저주받을 짓만 한 거냐!! 저런 천사 님의 그림에도 엘이 없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엘을 이곳에 있게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멍청한 녀석, 현실을 똑바로 봐라! 엘은 신성한 곳에 있는 거다! 카할! 높은 사람들의 집! 높은 사람들의 정원! 높은 사람들의 마차!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깨끗한 거야! 그래서 그 들은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거야!!"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그림을 보았다. "보이는 것 중, 신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내 살다, 살다 그런 웃 기는 말은 처음 들었다! 신성한 것이 없다고? 에잇!" 그녀는 그림을 북 잡아뜯었다. 빳빳하고 바랜 종이는 찢어질 듯 위태롭 게 벽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놓았다. "됐냐? 뗐다!!! 이제 네 녀석이 사제가 되든 술 집 짐꾼이 되든 아무도 뭐라고 돌 던질 사람 없다!! 내가 무식해서 그랬으니, 저것에 기도한 벌은 내가 받으마!!! 그러니 이제, 썩 나가!! 가서 일이나 하라고!! 꼴 보기 싫은 녀석!!! 너 같은 녀석이 사제가 된다니, 어이가 없다! 나가!!" "...어머니...!!" "나가라니까!! 귓구멍이 막혔냐!" 어머니는 정말로 화가 난 듯 했다. 하는 수 없었다. 이가르는 집에서 나가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종종, 어머니가 화가 났을 때 집에서 쫓겨났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스노우 드롭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스노우 드롭." 지금까지 겁먹은 표정으로 모자의 말다툼을 보던 스노우 드롭은 이가르 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집을 나왔 다. "...다녀오겠습니다. ...술은 드시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 "흥!!" 그는 집의 문을 닫았다. 주인에게 잔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지만... 술집 에 가서 그가 저녁을 먹을 때, 스노우 드롭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노우 드롭의 손을 잡고 묵묵히 술집을 향해 걸었다. 스노우 드롭은 언제나 그랬듯 아무 설명하지 않아도 이가르가 이끄는 대로 따라 왔다. 그런데 얼마를 걸었을까... 길거리 진창을 걷는데, 누군가 이가르를 불렀다. "이가르! 이가르! 이리 와 봐라!" 같은 동네 여자였다. 의아해서 가보니, 그녀는 잔뜩 불쾌해서 자기 집 뒤꼍을 가리키고 있었 다. "오늘 아침에 보니 있더구나. 도대체 어떤 년인지 모르겠어!" "...!" 그것은 사람의 아이였다. 막 낳은 그 아이는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채 더러운 진흙탕에 묻혀 파랗게 얼어서 죽어있었다. "빨리 좀 치워줄래? 보통 버리는 곳에다 버리지 않고 왜 남의 집 뒷문 에다 버린 건지. 쯧...!"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열며 말했다. "네 어머니가 이쪽 구역 담당이지? 다음부터는 일 좀 확실히 하라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그 여자는 이가르 코앞에서 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렸다. 어이 가 없었지만 이것 또한 가끔 있는 일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오물 치우는 일을 하니 그 아들인 이가르도 같은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제가 되기 위해선 이런 시체나 오물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 하고... 하지만 이가르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그 아기 앞에 앉았다. 어머니의 말이 생각난 때문이었다. '지금 나가서 시궁창을 뒤져봐라!! 애새끼가 몇이나 죽어 있는지! 내가 오늘 그 쓰레기를 몇이나 치웠나 말해주랴!!! 어디에나 엘이 있다고?!' 이가르가 슬픈 눈으로 죽은 아기를 내려다보는데, 스노우 드롭이 이가 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아기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이가르를 보 고 웃었다. "오빠. 헤헤..." "스노우 드롭..." "헤헤." 스노우 드롭은 이렇게 죽은 아기가 더럽다거나 징그럽다거나 한 인식도 없는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아기를 들어올려 그것을 껴안았다. 그 리고 보통 여자 애들이 인형을 갖고 놀 듯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아아... 어머니의 말 대로였다. 그는 율법을 배웠지만, 왜 이 아기가 이 렇게 얼어죽어 지저분한 눈 가운데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기는 오물이었다. 그리고 그 아기를 안고 있는 스노우 드롭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 제 저 아기처럼 진흙탕 속에 죽어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아기와 같았 다. 당장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 저렇게 죽어 있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 이 없었다. '저런 천사 님의 그림에도 엘이 없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엘을 이곳에 있게 할 수 있을까?'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이런 할렘에선 아무런 좋은 것도 날 수 없기 때문에. 쓰러질 듯 시커멓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더러운 진창, 들끓는 쓰레 기들, 성스러운 혼 강의 한 지류로서 흐르지만, 갓 태어난 유아들의 유기 장소가 되는 개천.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좋지 못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이 사제가 될 수 있을까. 이가르는 그 사실 또한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런 시간에 웬일이야? 각 세계 대신들하고 만찬을 하기로 했다며." "아아.. 별로 즐겁지 않아서 일찍 빠져 나왔어. 엘이 다스리시는 이 풍 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각 세계 파이오니온들을 위하여 열 한 번 건배를 하고 나니, 먹은 것이 얹힐 것 같아서." 그리고 겐트온은 웃었다. "실제로도 얹힌 느낌이야. 이봐, 그린 라이트라도 전사해 주지 않겠어?" 샤일라테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견뎌. 난 공식적으로 스온 아피네스님의 힐러니까, 네 체한 것까 지 돌봐줄 의무 없어."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서 웃었다. "여전히 야멸차다니까." "흰소리하러 온 거라면 이만 난 실례할게. 스온 아피네스님을 위해서 약을 만들어 두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샤일라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마냐를 불러서, 하온 하겐트 님이 돌아가신다고 말하려는 찰나, 겐트온이 말했다. "...롯테. 넌, 며칠에 힐라토로 돌아갈 거지?" 샤일라테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와 이야기해서 누구보다 잘 알텐데, 왜 묻지? 이번 주 흙의 날, 10일에 돌아가게 될 거야. 왜? 뭐가 잘못 됐어? 아버지께서 클로니아로 오기로 한 날짜를 변경했어? 다음 주 불의 날에 오기로 하신 것 아냐?" 그러자 겐트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그냥 확인해 본 거야." 그리고 그는 생각하는 듯 하더니, 샤일라테의 얼굴을 살폈다. "...몸은 어떻지? 아버지도 안 계신 상태에서, 다른 세계에 와서 엘의 날 을 맞은 것은 처음이잖아." 샤일라테는 자기 손을 어루만졌다. "지금은 괜찮아. 아침까지도 손과 발이 저려서 조금 걱정했는데, 괜찮아 졌어." 그러더니 그녀는 눈을 날카롭게 해서 그를 쏘아보았다. "...하온 하겐트. 무슨 꿍꿍이로 남의 몸 상태까지 물어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이 있다면 빨리 말해! 나 바빠. 뜸들일 생각하지 말라고!" 겐트온은 미소짓더니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 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색을 애써 지우고 말했다. "...그렇게 쏘아대는 것을 보니, 몸은 괜찮은 것 같군... ...아, 말은 들었 나? 힐라토 레이서스님 건." "...?" 겐트온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적지근해 샤일라테는 눈을 찌푸렸다. "...들었어. 아침에 하온 하이드가 와서 한바탕 하소연을 하고 갔지. 부 하들이 다쳤다고 포션까지 얻어서. 하여간, 돈 아끼려고 머리 굴리는 것은 알아 줘야겠지만... 뭐..."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말상대를 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듣고 놀라기는 했지. 하지만 너도 그랬잖아? 의외로 엘야시온님께서 보호물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다고. ...그 분이 그를 찾아갔을 정도라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 힐라토 레이서스 님도 예전부터 보호물에 감정이 많았지. 그러니 클로니아에 온 김에 그를 찾아가서 어떻게 그 종 속자와 알게 됐다고 해도 무리가 되는 설명은 아냐."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내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된 일인가 따지는 것보다는 앞날에 대한 대책이나 세우는 것이 낫겠지... 어쨌든 너라면 여기에 대해서도 이미 강 구책을 세워놨을 거야. 안 그래?" 겐트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글세..." 그녀는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흥... 네 동생은 어때? 지금쯤 분해서 죽으려고 하고 있겠지? 그 성격 에... 연달아 실패라니... 볼만한 걸? 아주 웃겼어." 겐트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부하들이 멍청한 짓을 한 건 사실이 지만, 나도 경솔했어. 보호물의 종속자를 데리고 다니는 여행자가 누구인 지 더 확실히 조사했어야 하는데." 샤일라테는 웃었다. 이 처참한 실패에 자기가 안 끼어 약간은 의기양양 한 기분도 있었다. "흥...! 이 일에 대해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지? 몹시 화내셔?" 겐트온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아니." "그럼? 뭐라고 말씀 하셨을 것 아냐? 그냥 이거고 저거고 귀찮으니까, 그 종속자를 죽여버리라고는 안 하셔?" "아냐." 그러더니 그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샤일라테를 뚫어져라 쏘아보았 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냐." "그럼 뭐가 문제인데?" "...롯테. 넌, 힐라토로 돌아가게 되면 또 아버지도 없는 상태에서 내내 혼자 있게 될 거야. 견딜 수 있겠어? 지금은 괜찮다고 하지만 넌 어제 결 코 정상이 아니었지. 거기다 네가 거기서 맡은 임무... 그러니까 헬리옷에 관련된 '그것'은 네게는 너무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나, 괴로운 것이 되겠지." 그 말에 샤일라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이런 화제를 꺼낼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임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명령을 내린 이후로, 누구도 그녀의 심정을 묻거나 토를 단 적이 없는 것이다. 심 지어는 그녀를 좋아했던 이드넘조차도... 헌데, 저 '겐트온'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그녀는 겐트온을 믿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철저히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비 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또한 그는 진지하게 남을 걱정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빙글빙글 웃으며 상냥한 척 하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로 그들 형제가 어릴 적부터 기르던 강아지를 비수로 찔러 죽이는 그의 모습을 본 후로부터 샤일라테는 그의 겉모습에 절대 속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겐트온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놀랍게도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던 미소마저 사라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임무'가... 괴로운 것이 될 것이란 건, 누구보다 네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버지께 말씀드린다면... 나도 아버지께 말씀 드릴 테니..." 샤일라테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돼... 됐어!! 남의 일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 무슨 참견이 야!!! 네 일을 실패한 주제에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나 있 어?! 그런 이상한 소리할 거면, 당장 돌아가!!! 그리고 난, 나의 임무에 대 해 별로 괴롭지 않아!!! 그러니 괜히 잘난 척 하며 넘겨 집지 마!!! 아버지 께서 오히려 내 소원을 들어주셔서 얼마나 행복한데...!!!!" 겐트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 그의 신경을 거슬린 듯 했다. "...넘겨짚었다고? 행복...?"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멍청하긴!!! 행복이란 게 무슨 뜻인지 그 의미를 잊어버린 거야!!! 아마 사를 대신을 해서 헬리옷과 하누카의 날을 보내는 것이 행복해?!!! 제 정 신이야!!!" 그는 소리쳤다. "왜 저 멍청한 여자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지!!!? 그렇게라도 해서 그 를 손에 넣으면, 그가 너를 사랑할 것 같아?!!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거 야?!! 남자는 하누카의 날을 보낸 여자를 평생을 두고 사랑할 수밖에 없 다는 말을 믿는 거냐고!! 웃기지 마!!! 하누카의 날을 같이 보내고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얼마든지 많이 있어!!! 바로 내가 그랬으니 까!!!" 샤일라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그는 더욱 잔인하게 말했다. "알겠어?!! 그도 마찬가지야! 그도 죽을 때까지, 널 사랑하지 않아!!!" 마치 날카로운 비수로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은 잔인한 말이었다. 겐트 온은 원한다면 실제로도, 말로만으로도 사람을 비수로 살해할 수 있는 사 람이었다. 그런 그가 말한 음성은 너무 날카로웠다. 샤일라테는 그래서 뭐 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외면하면서 말했다. "...괘, 괜찮아..." 그리고 그녀는 자존심을 위해 웃으려 애쓰며, 억지로 말했다. "그, 그런 것쯤...! 내가... 그를 사랑하니까!" 그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사랑? 웃기고 있군. 그것도 목숨이 있고 나서의 말이지!! 흥!!! 그는 널, 죽이려 들 거야!" 샤일라테는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 본 뒤,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는 날 못 죽여. 난 그의 아내가 될 거니까." 그가 이죽거렸다. "누구 맘대로? 그가 너를 아내로 삼는대?" "...닥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나가!!! 신경에 거슬리지 말고, 나가라고!!!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도비온처럼 나를 비웃는 거야?!! 내 일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너희 형제 따위, 정말 재수 없어!!! 잘난 척 하지 말라고!! 차라리 이드넘처럼 모른 척해!!!!" "모른 척?!! 얼마나 모른 척 해야 할까?!!! 네가 헬리옷에게 맞아 죽을 때까지 모른 척 해줄까?!!!" 그러더니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야?!! 그럼 차라 리, 지금 내가 죽여줄까?!!!" "무, 무슨 짓...!!!" 하지만 그는 샤일라테의 놀람에 찬 비명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그녀 의 목을 잡았다. "윽...!" 신경 탓인지, 그의 손톱은 무서울 정도로 아프게 목의 살갗을 뚫고 들 어왔다. 게다가 그의 눈... 그것은 어느 때보다 짙푸르게 빛나며, 입술 사 이에서는 이를 가는 소리인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인지 분 간하지 못할 소리가 새어나왔다. "게, 겐트온?" 그녀가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으로, 지금까지 화를 내던 그가, 이제는 즐거워 보여, 샤일라테 는 더욱 놀랐다. "...좋은 여자 군. 맛은 어떨까? 죽음을 원한다면야..." 분명 그의 목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늦추고 대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입을 갖다댄 순간, 그녀는 그 를 확 밀쳐 버렸다. 그리고 분하고 놀란 마음에 그의 뺨을 있는 힘껏 짝 갈겼다. "겐트온!!! 정신 차려!!! 완전히 미쳐버리기라도 한 거야, 뭐야!! 굳이 죽 어야 한다면, 차라리 헬리옷에게 죽는 것이 나아!! 하지만 내가 미쳤어?!!! 너 따위에게 개죽음 당하게!!!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면, 다른 곳에 가 서나 행패 부려!!" 샤일라테가 뺨을 때리는 바람에 뒤로 주춤, 물러났던 겐트온은 샤일라 테한테 얻어맞은 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숨을 몰 아쉬었다. 그리고 뭐라고 욕설을 뱉었다. "...젠장." 그리고 그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뭔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었다. "...샤일..라테." 샤일라테는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꺼져!!! 나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네가 한 말을 모두 일러바치기 전에!!!" 그 말에 그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럴 필요 없어. ...그 상태였다면, 그도 알 테니까." "..뭐, 뭐?" 샤일라테가 어리둥절해서 말하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잊어버려. 네 말대로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군. ...미안해. 뺨을 후려친 것은 잘한 짓이야." "...?" 방금까지 소리치던 것과는 전혀 딴판인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그 목소리 에 샤일라테는 그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분했던 마음도 잊 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너야말로 달의 날이면 몸 상태가 안 좋더니? 오늘 은 불의 날인데... 아직도 그런가 보지?" "아냐. 괜찮아." 그러더니 그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모양을 보고 샤일라테는 반사적 으로 뒤로 물러났다. 아까 당한 것 때문에 몸의 자연스럽게 반응한 것이 었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이제 정신 차렸어. ...네 말대로..."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 말대로... 여기 오자마자 본론부터 말 했어야 하는데.."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어쩐지 슬픈 듯한 미소 를 짓고 말했다. "...샤일라테.. 아니, 롯테. 내일, 물의 날... 너는 신열(神熱)에 시달린다. 그리고 내일 모레 나무의 날에... 넌, 힐라토로 돌아가는 거야. 아버지의 명령이다. 그 분은 이번 주 안으로 이곳에 오길 원하시니까." 샤일라테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왜 갑작스럽게 일이 변경된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제부터 힐라토에서 할 일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오른 때문이었다. 겐트온은 푸른 눈으로 그런 샤일라테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고, 무언가 입을 들썩여 말하려다 그냥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건... 형제로서."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샤일라테. 네가 선택한 길... 언제나 너 답게, 성취하며 나아가라. 넌 언제나 그러했으니까. 부디 행복하게..." "겐트온...?" 너무 그답지 않은 행동에, 샤일라테가 놀라서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 하는 사이, 겐트온은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기울이더니 또 그 특유의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훗. 내 충고를 듣지 않아, 나날이 후회하겠지만... 그거야 당연한 보응 이고... 일단은 그런 거지. 네가 행복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에게 히스테리 를 부리면 매우 피곤해 지니까... 노력하란 말이야. 신경질쟁이 아가씨야. 남자들은, 애인이라면 몰라도 아내로는 너 같은 타입은 정말 싫어하니까, 우선은 그 성질 부리는 것부터 죽이고, 조금 고분고분하게..." "꺼져." 샤일라테는 또 한 번 더 그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말했 고, 겐트온은 하하 웃었다. "좋아! 나중에 보자. 롯테. '임무'는 확실히 완수하길! 그럼 '새 날'에 보 자.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그 성질은 꼭 죽이도록 하고." "하온 하겐트!!! 네 성질이나 죽여!!!" 겐트온은 즐겁게 웃었다. "내 성질을 왜? 여자들은 내 성질을 아주 좋 아하던데." 그리고 그가 스온 아피네스의 시종들을 위한 응접실을 나왔을 때, 뒤에 서는 계속 그를 저주하는 샤일라테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을 들으며 겐트온은 미소를 짓다가, 그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됨에 따라 점차 굳은 얼 굴을 지었다. 그리고 그 음성이 완전히 들리지 않을 만큼 복도 끝에 왔을 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지 않도록, 얼굴을 다시 미소 짓는 얼굴로 돌려야 할만큼, 그는 굳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계속)================================================== * 트리닐 - 처음 나옴. * 스노우 드롭 - 처음 나옴. * 이가르 - 151편 참조. *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와이트 뱀파이어 퇴치법. - 목을 물려고 할 때,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뺨따귀를 후려친다. 그럼, 그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물러날 것이다. 단, 와이트 뱀파이어와 어느 정도 인(?)맥을 쌓아놓은 상태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후려쳤을 시, 되려 와이트 뱀파이어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인맥이 없을 시는 그냥 피 빨리고 말 것. 맞고 빨리는 것보다는 그냥 빨리는 것이 낫... 퍼버버벅-!) <몬스터 퇴치의 새 마당을 열어 가려다, 좌절한 엔.> ps...강혼(降婚)... 한자를 보면, '내릴 강'입니다..--;; '강하', '강우량' 할 때 '강'자죠... 그러니 강제로 하는 결혼은 아닙니다. 한자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메이잴리언스(Mesalliance).. 신분이 낮은 사람과 하는 결혼이랍니다... 사전에도 있음. 다음부터는 스펠링하고 한자 있는 단어는 저한테 묻지 말고 사전 봐주 시길...--; 있는 척 하기 위해, 스펠링하고 한자까지 뒤적여 넣었건만... 무 용지물이 되면 아주 곤란.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26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13 21:19 읽음:2190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4회, 제 42막. 게엔나(Geenna) (5)> 그것은 저녁장사 준비를 그럭저럭 마치고, 앉아서 저녁식사를 할 때였 다. 주인은 웬일로 스노우 드롭이 가게 안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그 래서 이가르는 저녁식사를 받았을 때, 그녀와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물 론 안에서 먹는 것은 안되고 뒷문에 앉아서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 게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있어서 괜찮았다. 헌데 그렇게 둘이서 수프와 한 덩어리의 검은 빵을 다 먹어 갈 무렵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 다. "이, 이가르?" 이가르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 다. "트루크의 아들... 게이드 씨...?" 이가르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게이드는 둔해 보이는 얼굴로 쑥스럽게 웃었다. "이, 이가르.. 우, 우리 식당 주인님을 모셔왔어." "주인님..?" 그러자 게이드 뒤에서 뚱뚱한 풍채의 사람이 나왔다. 그도 게이드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이가르 군, 반갑군요. 게이드에게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이가르는 이들의 제안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시, 식당에 와서 일을 하라고요? 하지만 전 사제가 될 시험을 치를 예 정인데요?" 자신을 '슐라츠'라고 소개한 게이드의 주인이 말했다. "아아... 물론 그런 말은 게이드에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가르 군의 이 야기를 듣다 보니, 이가르 군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져서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가르 군. 사제가 물론 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직업이긴 하 지만 아무리 사제라도 공기만 먹고사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이가르 군처럼 이런 할렘 출신은 사제가 된다고 해도 여전히 찬밥 신세에 가난뱅이 수준 을 못 면한다는 말이지요." 이가르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슐라츠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말이 너무 심했다면 사과하겠지만...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누구 보다 이가르 군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실, 게이드에게 이가르 군의 실 력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지저분한 곳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죠. 이 녀석 게이드는 무엇을 익히는 것은 둔해도 사람 보는 눈은 괜찮아서, 나도 이 녀석이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믿는 편입니다. 이가르 군, 학교 에 들어간 첫해에 글을 익힐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다고요? 그리 고 이번 흙의 날에 사제 학교에 들어갈 시험을 칠 예정이라고요? 그것 참 장한 일이지만... 하지만 이가르 군? 군처럼 뛰어난 인재가 그렇게 힘들게 굳이 사제가 될 시험을 치를 필요가 있을까요? 보세요, 이가르 군." 그는 붙임성 있게 말했다. "마침 우리 식당에서는 장부를 정리할 사람 도 필요하고... 전에 있던 사람은 너무 제 멋대로 했기 때문에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 무척이나 필요하던 참이었죠." 하지만 이가르는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이가르 는 게이드를 힐끔 보았다. 여전히 게이드는 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멍 청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런 얼굴로 지난 3년 동안이나 자신을 관찰한 것이다. 같이 공부했다고 해도 일년가야 말 한마디 주고받을까 말까했었 는데... 황금률 하나도 못 외어 헬루시타 사제에게 지적을 당하곤 했으면 서 언제 저렇게 이가르 자신에 대해 기억했다가 자신의 주인에게 이런 식 으로 소개한 것인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슐라츠가 계속 말했다. "...아, 혹시 이가르 군이 모르고 있을까봐 그러는 데... 물론, 사제 학교 코스 중에는 글만 알면 입학료 및 수업료를 면제해 주는 코스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코스의 학생들에게는 그만큼 각종 혜택도 면제된답니다. 우선은 기숙사에 입주가 허락되지 않으니까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다녀야 하고... 아마 여기서 왕복 네 시간은 걸리겠지요? 거기다가 책값하며, 점심 값... 수업시간도 의무교육 학교와 비교해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날 테 니... 공부하느라 그만큼 일도 못할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수입도 줄 테 고. 악순환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이가르 군의 형편으론 아무래도..." "...!" 한참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가르는 '형편'이라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 아니에요. ...사제 학교에 입학만 하면, 술집 일을 안 해도 되도록 헬루시타 사제 님께서 필사 보조의 자리를 구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리 고 교재도 주시겠다고 했고..." 상대가 쉽게 자기 말에 안 넘어 오자, 슐라츠는 혀를 찼다. 그리고 '이 런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을 보았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필사 보조'? 쯧쯧, 이가르 군! 필사 보조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가 보 군요. 그건 거의 자원봉사직이란 말입니다! 글세...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면... 글 솜씨가 느는 것하고 한 달에 한 번, 약간의 돈을 받는 것 이겠지만 그 외에는 이런 술집에서 일하는 것과 비교해, 말도 안 되게 낮 은 급여를 준단 말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지저분한 술집을 휘 둘러보았다. 돈을 꽤 두둑하게 집어 준 덕분에 술집 주인은 이가르가 테이블에 앉아 손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 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흠.. 실례지만, 여기서 받는 일당이 얼마정도 되지요?" 이가르는 더욱 얼굴을 붉히고 자기가 받는 일당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슐라츠는 혀를 쯧쯧 찼다. "형편없군요. 뭐... 그래도 '필사 보조'보다는 약간 높지만. 어떻습니까? 현재 받는 급료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드리죠. 평생을 아가트만 필사하 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더 괜찮은..." 그러나 이가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말씀은 고맙지만... 역시 식당은 무리일 것 같아요. 저는 이 런 것에는 익숙하니까, 조금 덜 먹고 덜 입고, 공부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점심은 어차피 원래 안 먹었고, 걷는 것도 불편하지 않아요. 그러니 저는 꼭 사제가 되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 머니는 거칠고 험한 소리를 자주 하지만,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잘 몰라, 그를 당황하게 만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그가 사제가 되 는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제가 꿈을 중도에 포기하면 실망하실 거예요. 그러니 말씀은 고맙지만 식당에 취직하는 것은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요." 슐라츠는 당황해서 말했다. "이런, 이런...! 이가르 군! 식당이라고 해서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본데..! 이 일을 한다면 어머니도 더욱 자랑스러워할걸요? 왜냐하면 이것 은 열심히 하면 나중에 독립해서 존경받는 가게의 주인도 될 수 있는...!!" 하지만 이가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헬루시타 사제 님하고 약속도 있고... 역시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는 게이드를 보고 말했다. "게이드, 고맙습니다. 신경 써 주셔 서. 저는 이제 일하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쓴웃음 지었다. "더 이 상 앉아 있다간 내일 새벽, 급료를 못 받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맥주 통을 져 나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뭐라 말할 수도 없이 단호한 행동이라 슐라츠와 게이드는 그를 말릴 수도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하지만 슐라츠는 이가르가 사라진 뒷문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빙긋 웃고 말았다. "...허허... 이것 참. 네 녀석 보는 눈은 정말 괜찮다. 게이드. 도바 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타입이야." 그러더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 쪽으로 들어 오겠지만... 적당히 퉁기는 맛도 괜찮군. 생각 없이 돈에 좌우되는 타입보 다는 괜찮아. 하지만... 이래서야 행동이 더 빨라질 수밖에 없지..." 게이드는 웃었다. "헤헤... 그렇죠." 그래서 슐라츠는 술집 주인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 그리고 그 거래가 끝났을 때, 슐라츠는 허리가 땅에 닿도록 굽히는 술집 주인을 뒤로하고 길거리로 나서며 말했다. "...흠. 이런 술집 따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일했다니. 이가르 군도 어 지간히 무던하군. 괜찮은 성격이잖나? 게이드?" "네.. 헤헤.." "그래. 그러니 저 녀석은 꼭 도바 님께 데려 가야지. 웬돌라가 2년 동안 봐 온 결과도 그렇고..." 그는 여기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웬돌라가 살던 집에 가 유품 을 정리해서 온 것이다. "...저런 좋은 물건은 사제 따위로 썩기엔 아까워. 뭐... 썩 괜찮은 일원 이었던 웬돌라의 후임이다." 오랫동안 사람을 상대해 온 슐라츠는 그렇게 확신했다. "아버지께서 직접 온다고 말씀하셨다고...?" 이드넘은 멍하니 말했다. 방금 겐트온의 연락을 받고 모여서 이번 일에 대한 아버지의 의견을 듣고 있는 참이었다. 겐트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 신의 말에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는 도비온에게 말했다. "아, 도비온? 아버지께서 네 부하들에 대해 관심을 표하시더군." 도비온의 표정이 몹시 안 좋아졌다. "...어떤 식으로?" "글세. 네가 사람들을 데리고 소꿉장난하는 것은 안 말리겠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들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던 것과 목표로 했던 일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해... 네 부하들이 과연 우리들 앞날에 필요한 존재일지 직접 와서 관찰해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그 말에 포함된 질책을 알아들은 도비온이 험악하게 말했다. "...젠장."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겐트온이 말했다. "힐러 라단의 집을 감시했던 부하들은 어떻게 했지?" "처리했어." 불쾌하게 얼굴을 붉히고 말하는 도비온이었다. 그런 그를 힐끗 본 겐트 온이 말했다. "...킬이라는 녀석은?" 그 주제넘은 녀석 때문에 겐트온이 힐라토 레이서스에게서 혹시나 얻을 수 있었던 정보도 못 얻고 하마터면 그들 모두 다 죽을 뻔한 것이다. 그 래서 겐트온은 당연히 '처리했다'는 말이 나오길 기대했는데 도비온의 입 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 녀석은... 엠벨루스 신전에 쳐 박아 놨어." "...!!" 겐트온은 도비온의 대답에 화난 표정을 지었다. "..엠벨루스의 신전...!" 그는 내리칠 듯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미쳤냐, 도비온! 그 마노테온 녀석을 왜 엠벨루스의 신전에!!!" 하지만 도비온은 지지 않고 말했다. "젠장! 넌 상관하지 마, 겐트온! 그 녀석은 그래도 근성이 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다른 녀석들은 힐라토 레 이서스를 보고 벌벌 떨고 있기만 했지만 그 녀석만은 상대에게 덤벼들었 어!! 제 주제를 몰랐던 것은 용서 못할 일이지만, 능력만 더 보강해 준다 면...! 그러니 난, 투자를 하고 있는 거라고..!!!" "투자?!!! 네 멋대로 판단하고 일하지 마라! 도비온!! 혼자 떨어져 이런 곳에서 지내더니, 너야말로 주제를 모르게 된 거냐!!!" 그는 벌떡 일어나 자기 동생의 멱살을 잡았다. "아버지가 오신다고!! 그 러니, 지금 당장 가서 깨끗이 처리해!!! 네가 당하기 싫다면!!! 투자?!!! 도 박이 아니고?!! 지금 이 시간에는 확실한 확률의 일이 아니라면 시도하지 도 말고 벌이지도 마!!" 하지만 도비온은 겐트온의 멱살 쥔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그러니, 이 번 일이 끝날 때까지 엠벨루스의 신전에 쳐 박아 놓겠다는 거 아냐!!! 새 세상이 온다고 해도 인재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오면 내가 그렇게 직접 말씀 드리겠어!!! 그러니 넌 상관하지 마!!" "...!!!" 그들 둘은 한참을 그 상태에서 쏘아보았다. 마침내 겐트온이 말했다. "...멍청한 녀석. 넌...!" 그러나 그는 할 말을 다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킬이라는 그 녀석 을 이미 엠벨루스의 신전에 넣어 놨다면, 때가 될 때까지는 빼낸다는 것 이 무리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비온의 멱 살을 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도비온!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네가 책임져라! 그 녀석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엠벨루스라고?!! 근성?!! 멍청한 녀석!!! 컨트롤하 지 하지 못하는 능력과 근성 따윈 아무 소용없어!!! 만약, 그 녀석 때문에 어제와 같은 식으로 우리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면...!! 그 때는 내가 직접, 그 녀석뿐만 아니라 이 식당 자체를 쓸어버릴 거니까!!! 앞으로 다 시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거야!!" 도비온은 푸르게 타는 겐트온의 눈길을 차마 받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 다. "...걱정하지마. 이제 다시는 실수가 없을 테니.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 드리겠지만... 난, 지금까지 이 식당 녀석들에게 많은 투자를 했으니까... 게엔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진 인간 하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우리 일에 동조하는 인간 백 사람의 몫을 하지. 그리고 이 식당의 인간들이 가 진 원한은, 그들을 평범한 사람과 다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니까..." 하지만 겐트온 어두운 눈으로 도비온을 바라보았다. "백 사람 몫? 원동 력? ...너는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어. 문제는 식당의 사람들이 아 냐... 넌...!" 그는 도비온의 옆얼굴을 보았다. "넌..." 하지만 그는 역시 아까처럼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비온... 충고하나 하겠다. 넌... 그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써먹어야 해.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지금 당장 그들을, 다른 이들처럼 마을로 보내서 일반인들에 섞여들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도비온이 짜증을 냈다. "알았어! 이제 그만해! 식당 놈들의 '이 용가치'문제는 이제 그만 따지자고! 만약 그 놈들 중에 하나라도 기준에 미달한 녀석이 나온다면, 네가 나설 것도 없어!"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때는 내가 이 놈들을 없애 버릴 테니. 난 무 능력한 녀석들을 거둬주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니까! 이제 곧 일종의 시험 이 있을 건데...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놈들은 네 말대로 모조리 처 리할 거니... 여기엔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가진 놈들만 남게 될 거야. 그러 니 이제 식당에 대해선 신경 끊어줘! 걱정하지 말라고!!" "그게 아냐! 식당 녀석들이 능력이 있는 지 무능력한지 말하는 것이 아 니라고!! 이건 그 전부터 느낀 거지만...! 넌, 그 녀석들을 이용할지언정, 그 녀석들에게 '집착'해서는 안돼!!! 이 자들에게 정을 갖지 마!!! 그렇지 않으면 정말 무서운 꼴을 당하게 될 거야!!" 그러자 도비온이 인상을 찌푸리고 겐트온을 보았다. "..뭐? 집착? 정..?" 그는 마치 그 단어들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고, 그 뜻도 전혀 모르 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 미친 듯이 웃기 시작 했다. "푸하하하핫--!!! 겐트온... 겐트온.... 이봐, 겐트..! 핫핫핫...!! 넌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집착? 무슨 정?!! 푸하핫핫...!! 차라리, 여기 테이블에 사랑을 느끼지 않느냐고 말하는 게 날 덜 웃겼을 거야!!" 도비온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봐! 날 모욕하지 말라고. 보석의 가 치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건 수집 대상이지 애정을 품을 대상은 아니야. 내가 애정을 품고 있는 대상은 오직 한 분. 우리들의 아버지뿐이다. 그 외 에는 아무 것도 아냐. 핫핫... 정이라니...! 이봐! 이용가치가 없고, 흠집이 난 보석은 취미 없어.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곧 있을 시험에 만족한 결 과를 보이지 못하는 놈들은, 모조리 갈아치운다. 그 동안 투자 한 게 아깝 지만, 난 눈이 높거든. 알겠어?" 그런 도비온을 보고, 겐트온은 뒤로 물러났다. "...좋아. 그렇게 말한다 면... 그 마음을 잘 유지해라. 그 말을 잊지 마. ...그 녀석... 그 킬이라는 녀석도 마찬가지야. 그 녀석이 또 한 번 멋대로 나서거나, 또 한 번 자기 자신을 컨트롤 못할 시... 그때는 숨은 가능성이고 근성이고 필요 없어. 당 장 죽여 없애. 네 말 그대로. 알겠어?" 도비온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마노테 주제에 신전까지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후에도 내 충실한 인형 역할을 못하고 제 멋대로 날뛴다면, 그 동안, 들인 정성이 아까워서라도 내 손으로 직접 잡아 죽여야지." 그 말에 또 한번 겐트온이 눈을 찌푸렸지만, 그때 이드넘이 말했다. 그 는 지금까지 겐트온과 도비온의 말다툼도 듣지 못하는 듯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이번 주 안으로 오신다면... 샤일라테는 어떻게 됐지?" 그 말에 겐트온이 이드넘을 돌아보았다. 이드넘이 말했다. "그녀는 언제 힐라토로 돌아가는 거야?" 겐트온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무의 날이나, 황금의 날..." 이드넘이 말했다. "...하하.. 그래? 그럼... 오늘 저녁에 가서... ...하누카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어봐야겠다." 그 말에 겐트온이 말했다. "그래. 작별 인사를 하고 싶으면 오늘 저녁 내로 가는 것이 나을 거야. 내일부터는 신열을 앓게 될 거니까." 이드넘이 말했다. "...도비온, 오늘 저녁에 같이 가지 않겠어?" 도비온이 비웃듯 말했다. "너나 가. 난 식당 놈들 교육 시켜야 해." 이드넘이 풀이 죽은 듯 말했다. "그래... 하지만, 우리 형제잖아. 저번에 겐트온의 하누카 날처럼... 우리만이라도 축하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지 않아? 그래도 여자인데... 겁먹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가서 격려라도 해 주면..." 그 말에 겐트온은 쓴웃음을 지었고, 도비온은 한층 더 비웃음을 띄웠다. "뭘, 축하해? 뭘, 격려하고? 겁을 먹고 있을 거라고? 웃기고 있군. 그 천치 같은 계집애는 자기가 선택해서 그야말로 천치 같은 짓을 하는 거 야! 아버지가 분명히 그랬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다른 여자로 대체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 계집애가 발정 난 암캐처럼 그 명령이 떨 어지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덤벼든 거야!" 이드넘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심한 표현이잖아! 도비온!" "쳇! 뭐가 심해! 딱 맞는 표현이지! 난 그 말 한마디 안 하는 헬리옷 놈 도 재수 없지만, 그 계집애는 더 재수 없어! 재수 없는 인간들끼리...! 아 주 멋진 부부가 탄생할거야!! 그 사이에 아이라도 하나 태어나면 아주 더 볼 만...!!" 겐트온이 말했다. "됐어. 이제 그만 해. 그녀도 너처럼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거야. 그러니 축하해 주러 갈 생각이 없다면 그만 입 다물고 있 어."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넌 아버지가 오시면 할 수 있 는, 이 식당에 대한 그럴 듯한 말이나 생각해 두라고. 분명히 말해 두지 만, 아무 실적도 보이지 않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나 계획만 가지고는 아 버지께서는 절대 만족하지 않으실 거니까." 도비온은 인상을 썼다. "...알았어." 겐트온은 이드넘을 보며 말했다. "나갈 거면 같이 나가자, 이드넘. 네가 데리고 있는 호문클로스 단의 전대 두목 딸에 대해서도 말해보고 싶고.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곁다리 일은 되도록 정리해 놓아야지." 그러자 이드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도비온 부하들의 배웅을 받 고 식당에서 나올 무렵 겐트온의 말에 열심히 변명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 다. "글세... 저번에도 말했듯이. 그 여자 애에 대한 것은 내게 맡겨 줘, 겐 트온.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 드려 줘. 그 여자 애가 내 방에 침입한 일 에 대해서 들었잖아. 난 흡혈하는 생물은 동물이나 몬스터나 딱 질색이고 무엇보다 싫어하지만..." 겐트온은 조용히 웃었다. "그래..?" "응. 정말 딱 질색이야. 그래서 그 호문클로스인지 흡혈벌레인지도 딱 질색이지만... 이번에 보니 그 능력 하나는 괜찮더군. 그러니 나도 마찬가 지야. 도비온처럼 쓸만한 부하를 하나 만들고 싶은 거라고. 길만 잘 들이 면..." 겐트온은 냉랭하게 말했다. "...아, 도비온과 마찬가지라고? 그거, 말 한 번 잘했군. 아까도 도비온에 게 말했지만, 이드넘.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 여자 애의 능력이나 소용가 치 여부가 아냐. 너도 마찬가지야. 그 여자 애에게 집착하지 마. 감정적으 로 얽히면 골치 아파지니까." 이드넘은 슬라이가 잡아 놓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집착? 아아.. 집착 같은 것은 안 해. 뭐.. 네가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솔직히 말하는 데, 사실 그 동안 엘의 날마다 언제나 같이 있어 줄 쓸만한 계집애가 있었으 면 했는데... 샤일라테같이 강한 성품의 계집애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냥 실험해 보려는 거야. 이번 엘의 날에... 그래서 만약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한다면..." 그는 맞은 편에 와서 앉는 겐트온을 보고 웃음 지었다. "너도 알잖아. 그 때는 상대 계집애가 어떻게 되는지. 그 계집애는 아무 연고자도 없으 니... 최악의 경우 당장 죽인다고 해도 별 상관없으니까... 그러니 이건 그 냥 실험이라고. 잘 되면 앞으로 일일이 여자를 찾지 않고도 편한 엘의 날 을 보낼 수 있고 말이야." 겐트온이 웃었다. "하긴 넌, 도비온과 틀리지." 그리고 그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부하들만 해도... 도비온보다는 차라리 네 녀석이 나아... 성격 면 에서..." "응? 뭐라고?" "아냐. 아무 것도. 그래 그 전대 두목의 딸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이드넘은 어깨를 으쓱 했다. "아무 것도... 그냥 방안에 가둬 놓고, 자기 처지를 인식하도록 하고 있어. 울든, 발악을 하든, 고함을 치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 주고 있지. 오늘 아침에는 음식 그 릇을 차버리기에... '제발 달라'고 공손하게 말할 때까지는 음식을 주지 말 라고 밑의 녀석들에게 지시했어." 그는 빙긋 웃었다. "아마, 호문클로스 때문에라도 항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 참으로 유감이지. 네 말대로... '집 착'할 것이 있다는 건 말이야. 그건 약점이거든." 겐트온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역시 차라리 네가 낫다니까." 이드넘이 인상을 썼다. "뭐가? 아까부터 뭐가 내가 더 낫다는 거야?" "아냐." 그는 창 밖을 보았다. 바깥은 점차 짙은 어둠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샤일라테에게 들르고 나서 잠깐 연회장에 들렀다 가. 오늘은 테트라 아크 루온 루바인 경을 만나야 하는데, 그의 주된 관심사는 무역산업이니 까, 네가 있으면 이야기가 부드럽게 풀리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알았어." 그러더니 이드넘이 말했다. "흠... 테트라아크 루온 루바인 경... 넌 다른 테트라아크들도 만났었지?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때?" 겐트온은 바깥에서 눈을 거두고 쓴웃음 지었다. "...뭐.. 괜찮아. 단순한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루이티온 계급이어서 그런지... 젠체하는 하바티온 녀석들... 그 '행복한 저능아'들보다는 이야기하기가 훨씬 괜찮지.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다른 테트라아크와는 다르게 그와는 꼭 담판을 지어야 해. 바로 그가 스온 엘스제 님의 테트라아크니 까." 겐트온은 느슨하게 미소지었다. "...다음 대, 카이러스 파이오니온이 될 분의 후견인은 우리편이 되든지, 아니면 제거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거야." (계속)================================================== 17일이 수능일이군요.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수험생이 계시다면... 이제 사흘 남았는데... 마지막까지 힘내시고,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마시 고, 건강 조심해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볼 수 있길,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랍니다. <수험생에게 박카스를, 엔...^^> ps...'성역'...은 내일...^^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33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17 23:02 읽음:222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5회, 제 41막. 게엔나 (6)> 무척이나 깜깜한 새벽이었다. 이가르는 문을 열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 다. 그는 낮게 속삭였다. "스노우 드롭... 들어 와. 아냐, 겁내지 않아도 돼. 어머니는 벌써 나가셨 을 테니까... 그러니, 들어 와." 그는 어둠 속에서 스노우 드롭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화덕 있는 곳으로 다가가 술집에서 급료의 일부로 얻어온 검은 빵을 그곳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화덕의 재를 뒤집어 불씨를 살리 고 장작을 넣었다. 장작은 차츰 매캐한 연기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이리 와, 스노우 드롭 춥지?" 그는 가까이 와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는 스노우 드롭의 머리를 쓰다듬 었다. "물을 끓여 줄게. 검은 빵과 같이 먹자. ...앞으로는..."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라고 해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이미 버릇이 돼서 웬돌라 아줌마네 집에 그렇게 앉아 있고... 아줌마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데..." 밤이 이슥할 무렵에 손님 중 하나에게서 웬돌라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 다. 그녀의 친척인 듯한 사람들이 웬돌라의 집에 와 밀린 집세를 치르고 물건을 가져갔다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돌아오지 않을텐데, 넌 계속 아줌마네 집 앞에 앉아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스노우 드롭이 말했다. "오빠, 왜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 깜깜한 것이 '밤'이지? 밤이 한 번 지나면 온다고 했는데?" "...아무리 여러 번 밤이 지나도 안 올 거야." "한 번 밤이 지나도?" 그는 미소지었다. "'한 번'보다 '여러 번'이 더 많은 거야, 스노우 드롭." 스노우 드롭은 인상을 썼다. "그런데 왜 엄마가 안 오지?" "그건.." 이가르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 군가가 말했다. "그건 웬돌라가 죽었기 때문이다, 스노우 드롭. 죽은 게 뭔지는 알지? 네가 낮에 본 그 아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차갑고, 그러다가 썩어서 영영 없어진다는 말이야." 이가르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머니? 안 나가셨어요?" 그의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몸이 좀 안 좋아서." 그 러더니 그녀는 우울한 말투로 말했다. "네 말대로 천사 그림에 절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가르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많이 아프세요? 어디가 아파요?"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그의 어머니는 손을 저었다. "됐다. 몸이 노곤하고 열이 좀 있을 뿐이야. 저리 가라. 너한테 천한 것이 옮겨 갈 지 도 모르니까. 이쪽으로 오지는 말고 말해 봐. 아까 네가 오물 치우는 일을 했다며?" 딱딱한 목소리라 이가르는 내심 당황하여, 발을 멈추고 우물쭈물 대답 했다. "네에.."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네?!! 정신이 나 간 놈!!! 나한테 율법이 어떻고, 보이는 것이 어떻고 한 놈이 오물을 만 져!!! 너, 그러고도 사제가 되겠다는 거야!!!" "어, 어머니.. 아, 아까는 그냥..."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뭔가가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 "...윽!!!" 감촉으로 봐서 아까 그 천사의 그림 같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어둠 가운 데 갑자기 날아와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냥이야!! 그 놈의 여편네가 뭘 몰라서 네게 오물을 치우라고 했더라도, 거절하든지, 나한테 왔어야지!!! 치우란다고 치워!! 무슨 꼴이 냐!!! 사제가 될 놈이 스노우 드롭 같은 거랑 사이좋게 오물이나 치우 고!!!" "어머니..." "닥쳐! 이 놈의 자식!!" 그러더니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정말로 열이 많이 나는 것 같았 다. 하긴 약간 열이 난다고 해서 일을 안 나갈 그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가르는 어머니의 흉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걱정이 되어 한 발 앞 으로 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어머니...!" "저리 뒤로 가라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이가르를 밀쳐냈는데, 그 손이 너무 뜨거워서 이가르 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 "됐어...! 비켜라!!" 그녀는 이가르의 손길을 거부하고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일어설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이제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서, 괴롭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이가르... 사제가 되려면, 너 같이 무뎌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사제 는 신성하고... 엘을 가장 가깝게 섬기는 분들이니까... 그러니, 누구보다 바르고, 깨끗한 일만... 너는... 아주, 깨끗해야만.... 더러운 일은 다, 내가 할 테니..." 그때였다. 문에서 굵고 거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 그거 참, 재미있는 역할 분담이구먼? 깨끗한 일은 모두 다 아들네 미가 하고 더러운 일은 모두다 그 어미가 한다...라. 뒷간 가는 것도 그 어 미가 해 주려나..?" 주위 남자들이 킥킥 웃었다. 그들은 활활 타는 횃불을 몇 개나 들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더할 수 없이 불길했다. 그 중 맨 앞에 있던 남자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자아... 눈물겨운 모정이긴 한데... 하지만, 이보라고, 아줌마. 아줌마네 아들네미는 틀렸어. 이미 손을 더럽혔다고." "...!!" 어머니에게 정신이 팔려서 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던 이가르는 이 갑작 스러운 상황에 몹시 놀라서 귀를 곤두세웠다. 분명 어디서 많이 듣던 목 소리였다. 게다가 희미한 장작불에 의지해서 보이는 저 얼굴은... "...!!" 아 까 술집에서 일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큰소리를 탕탕 치며 급료를 세어주 던 얼굴이다. "...포, 포렐 아저씨?" 그러자 남자가 바닥에 침을 툇 뱉었다. "그래, 이 양심에 털 난 놈아!! 얼굴 하나는 잘 알아보는구나!! 흥...!! 하 긴... 그렇게 눈이 좋으니, 캄캄한 골방에 놔둔 금고도 홀랑 털어 간 것이 겠지!!! 이 썩을 놈의 자식. 사제가 되니 어쩌니 얼렁뚱땅 사람들을 웃겨 놓고,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감히 내 금고에서 돈을 훔쳐가?!! 그것도 두 탈란이나?!!! 오늘 훔쳐 간 것 말고도 얼마나 훔쳐갔냐?!!! 응?!!! 당장 내 돈 내놔!! 이 자식아!!!" "...?!!!?" 이가르는 어이가 없었다. "무, 무슨 소리를..! 무슨 소리를 하세요, 포렐 아저씨!!! 무슨 금고요? 무슨 두 탈란이요? 저는 주는 돈하고 검은 빵 밖 에는...!!!" "웃기고 있네!!!! 야!!! 뒤져 봐!!!" 그 말이 떨어지자 남자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집안까지 거칠게 둘러엎 으며 이가르에게 다가왔다. "아아앗...!! 왜 이러세요!!!" 이가르는 자기 몸을 뒤지려는 남자들에게 반항했지만, 남자들은 그 하 나 하나가 이가르보다 몇 배나 되는 덩치였다. 그래서 이가르의 팔은 무 력하게 꺾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테이블에 그의 얼굴이 밀어붙여 질 때, 헬루시타 사제에게 받았던 노트 와 다섯 성서가 마구 흩날렸다. 그렇게 아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이가르의 어머니가 남자들에게 덤벼들 었다. "이 놈들이!!! 그 손, 놓지 못해?!!!! 무슨 짓들이야!!!!" 그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나고, 이가르의 팔을 뒤로 꺾어 누르고 있던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우아악---!! 내 귀!!!" 처절한 비명으로 보아 귀를 물어뜯긴 것 같았다. 이가르의 어머니는 펄 펄 뛰는 남자를 밀쳐내고,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아들을 감싸며 소리쳤다. "개 같은 자식, 포렐!!! 내 아들이 네 돈을 훔쳐?!!!! 계집애들 등골 빼 서 번 네 더러운 돈을 훔치느니, 차라리 돼지 똥을 먹는 게 낫겠다! 이 놈아!!! 쥐꼬리만한 돈에 개도 안 먹는 돌덩이 빵만으로 몇 년이나 죽도록 일한 게 내 아들이다!!! 어디서 등신 같이 돈 잃어버리고, 우리한테 누명 씌우는 거냐?!!!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꺼져!!!" "뭐야?!!! 그런데, 이 아줌마가!!!" 포렐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한 손길이 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며 신음을 흘렸다. "으윽...!!!" "어머니!!!" 이가르가 소리지르는데, 포렐이 그녀를 걷어차며 말했다. "종속주도 없는 년이, 어따 대고 나불거리는 거야?!!! 네 아들이 훔쳐는 지, 안 훔쳤는지, 직접 보면 알 거 아냐!!!" 이가르가 그를 밀치며 말했다. "그만 해--!! 난 안 훔쳤단 말이에요!!!" 포렐이 비웃었다. "오, 그래? 이 세상 도둑놈 중 자기가 훔쳤다고 떠드 는 도둑놈도 있더냐? 야, 뒤져 봐!!!" 그 말에 남자들은 다시 이가르를 붙잡고 거칠게 몸수색을 했다. "아아악!! 놔요!!!" 이가르는 너무 분하고 눈물이 나와 몸부림 쳤다. 절대 그는 돈을 훔치 지 않았다. 그래서 이가르는 포렐이 자기한테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섭섭했고, 조금 있다 사실이 밝혀졌을 때에도 그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 각했다. 그는 어머니를 걷어찼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몸을 뒤지던 남자는 이가르의 소맷자락에서 황 금색으로 번쩍거리는 두 개의 금화를 찾아냈다. 탈란 금화였다. 이가르의 얼굴이 하얘졌다. "..말도... 안 돼...!" 생전 처음 보는, 그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에 창백하게 질려 입술을 떨고 있는데, 아까부터 온통 집안을 뒤지던 한 남자가 고무래로 화덕 깊 숙한 곳을 쑤시다, 무언가를 발견하자 소리쳤다. "와.. 와아!!! 여기 있다!!! 드디어, 찾았다!!!!" 그 외침에 남자들이 웅성거렸다. "어어엇!! 찾았어?" "어, 얼마나 있어?" "가만 있어봐...!! 세어보게...! 와...! 이거, 대략 30탈란은 되겠는걸!!" "정 말?!!!" 30탈란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얼굴에 희색을 띄웠다. 그리고 이가르의 등을 누르고 있던 포렐은 갑자기 웃어 제쳤다. "핫하하하--!!" 그러더니 그는 이가르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놈의 자식, 이가르!!! 너, 생쥐처럼 우리 금고에서 야금야금 30탈란 이나 훔쳐다 놨구나!!!! 당장 죽어도 할말은 없겠지?!!!!" 이가르는 얼이 완전히 빠져서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 난 아, 안 했어요!!!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러자 포렐은 그의 팔을 더욱 비틀며 소리쳤다. "이게!!! 네가 안 했으면, 누가 너네 집 화덕에다 저걸 갔다 놨냐?!!! 정 말 쥐새끼가 갖다 놨냐?!!!"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가르의 어머니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포렐 의 바지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이, 이, 거짓말쟁이...! 사기꾼...!!! 네 말 따윈... 헉헉... 네 말 따윈, 다 거짓말이야! 두 탈란? 삼십 탈란? 그, 그... 삼십 탈란이 정말 네 돈이 야?!!!" 포렐은 움찔했다. "뭐, 뭐야..!!!!" 열이 있으면서도 이가르의 어머니는 횃불 가운데 파랗게 비치는, 불꽃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헉헉... 그, 그렇게 많은 돈이 네 금고에서 나가는데...! 너 같이 돈에 환 장한 녀석이...! 아, 아직까지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잖아! 정말... 정말, 이 가르가 훔쳤다면 더 일찍 우리 집을 뒤졌겠지..! 이, 이 더러운 녀석!!!! 그 러니... 저게 정말 네 돈이야...?!!" 포렐은 당황한 듯 말했다. "..그, 그 동안은 금고 정리를 안 해서..." 이가르의 어머니는 그를 비웃었다. "그래? 흥...! 그, 그런데, 오늘은 어 떻게 두 탈란이 비는 것을 알아차렸냐..?" "....!!!" 허점이 드러난 포렐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제, 젠장...!!" 욕설을 뱉은 그는, 바지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손을 얼굴 과 함께 인정사정 두지 않고, 퍼억 걷어찼다. "으윽...!!!" 그 여파로 이가르의 어머니가 또 한번 나동그라지는데, 포렐 이 거칠게 말했다. "에익!!! 정말 귀찮게 하네!! 그럼 저렇게 많은 돈이 왜 너희 화덕 속에 있냐?!!! 저게 내 것이 아니면, 그럼 네 것이야?!!! 오물 치우는 주제에, 삼 십 탈란이나 모았을 리가 없잖아!!!!" 그러자 이가르의 어머니는 비틀비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엔 검 붉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이가르는 그것을 보고 자기를 붙잡고 있는 사 람들을 떨치려 애쓰며 외쳤다. "어, 어머니...!!!!" 하지만 이가르의 어머니는 여전히 포렐을 비웃듯 말했다. "...흥... ...오, 오물을 치우면, 그런 돈 만지면 안 되냐? 너, 너야말로 웃 기지 마라, 포렐. 그, 그래... 헉헉... 저, 저건 이가르가 훔친 것이 아냐." 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하고, 입가를 떨리는 손으로 씻으며 말 했다. "저, 저건... 헉헉... 내가 훔친 거니까. 내, 내가 높은 분 사무실에서 훔 쳤지."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놀랐다. 모두 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가르 또한 놀라서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이가르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띄엄띄엄 멀어지고 있었다. "...헉헉... 그, 그러니... 이 집에서 나가. 헉헉... 그, 그것은 너희 것이 아 니니까... 제 자리에 놔두고." 하지만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갑자기 포렐이 낮고 음산하게 히죽거리 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응... 이거야, 원... 여기 정말 큰 도둑 님이 계셨군... 쿡쿡... 그랬군, 그랬어. 쿡쿡... 그러니 그 아들이야 오죽하겠어? 두 탈란 정도는 아무 것 도 아니지." 어머니가 걱정되고 분해서, 이가르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질렀다. "난, 훔치지 않았다니까요!!!" "넌, 닥쳐!!!" 포렐은 이가르의 얼굴을 쳐,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가르 의 어머니를 보고 말했다. "...흥...! 웬만하면 옛 정을 봐서 봐주려고 했더니... 이거, 정말 안되겠구 먼. 이런 도둑 년, 놈들은 아주 뿌리를 뽑아야지. 너희 같은 것들 때문에, 나 같은 선량한 할렘 사람이 싸잡아 욕을 얻어먹는 거라고. 할렘이 도둑 소굴이라고 소문 난 것이 누구 탓이겠어?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때 문 아니겠어? 이런 것들 때문에 이런 추운 새벽에 이 시궁창 같은 곳까지 와야하고 말이야... 젠장!" 누군가 말했다. "흥...! 그렇지, 포렐. 그러니, 우리는 이 일에 대해 보상 금 및 위로금이 필요해." 횃불을 잡고 있는 놈 중 하나가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맞아. 뭐... 일 탈란 당, 십 오 탈란의 보상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 데...? 그 정도 보상이라면, 저 아들놈 정도는 어떻게 용서해 줄 마음이 생 기지 않아?" 그러나 포렐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이런, 도덕심도 없는 놈들...! 이 놈들아... 이 아줌마 말 못 들었냐? 이 삼십 탈란은 높은 분 사 무실에서 훔친 거라고 하시잖아. 그런데 이걸 우리가 보상금이라고 가져 가 버리면... 그럼, 그 높은 분들의 아픈 가슴은 어떡하고?" 그러자 누군가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쿡쿡... 뭘 그런 걸 갖고 고민해? '보상'을 해 주면 되지." 포렐이 웃음 띈 목소리로 말했다. "보상? 어떻게?" 누군가 천박하게 웃었다. "...낄낄... 이봐, 도둑 년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땅한 벌이 뭐지?" 그에 화답하듯 누군가 말했다. "흐음... 도둑 년, 오물 치우는 년이 이곳 에 있다는 건 수치야. 그건, 더럽고, 음식이나 훔쳐먹는, 생쥐 같은 존재니 까... 쿡쿡..." 반대쪽에서 즐거운 듯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낄낄... 그래. 포렐... 그러 니 그런 건, 생쥐를 때려잡듯 다, 잡아야지... 낄낄..." 공기 가운데, 점차 진한 악의가 스며들고 있었다. 이가르는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짓눌려 있었다. 포렐인지도 모르고 또 다른 남자인지도 몰랐다.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들이 말하는 내 용과, 방식과, 어조와, 느낌은 끈적거리며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가르의 몸 을 압박했다.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들이 왜 이러는 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젠, 이것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가르는 몸을 덜덜 떨었다. 공포가 밀려왔고, 눈물마저 그쳐 제대로 생 각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보고, 느꼈다. 머리 위에서 미친 듯이 타는 횃불에 눈이 다 타버릴 것 같았다. 뜨거웠 다. 그의 어머니는 남자들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무서운 악의, 비웃음, 무자비. 설마 이것이 정말일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가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 물을 흘리며, 포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했다. "...포, 포렐 아저씨? 제, 제발...! 그, 그 돈 다 가져가세요!!! 그, 그래 요...!! 제, 제가 탈란을 훔쳤어요. 잘못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훔친 것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높은 분들에게 가서 사과할게요..!! 요, 용서해 주세 요!! 그러니, 제발 우리는 이대로 내버려두고, 그냥 가주세요...! 네...?!!" 하지만 포렐은 웃었다. "글세..." 그는 두껍고 양파 냄새나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미, 늦었어. 꼬마야. 네 엄마는 죄의 대가를 받는 거다. ...보고, 넌 다음 에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알았지...?" 그리고 그는, 저 바깥의 어둠처럼 무미건조하게 선고를 내렸다. "...해치워." 이가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믿을 수 없다. 어디선가에선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의 새되고 어린 비명이었다. 최초의 핏방울처럼, 잔인하고 끔찍했다. 출입문 뒤, 구석에 숨어서 떨고 있던 스노우드롭을 누군가가 찾아냈다. 일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 몇몇은 뒤로 물러나 스노우드롭을 보며 즐겁 게 웃었다. '뭐야? 스노우 드롭이잖아.' '호오... 이건 또 웬 횡재야? 요즘 주시하고 있던 계집애인데... 어때? 예 전에 비해서? 요즘 보니 부쩍 많이 컸지? 뭐니 뭐니해도 이 할렘에서 오 년을 지냈으니까. 나이도 꽤 됐을 걸.' '흠... 그래도, 너무 작은데.' '그래도 열 살은 넘었어. 무엇보다 공짜라고.' '하긴. 요즘은 인간 사냥꾼들에게 얻는 여자들도 단가가 꽤 올라가서. 마노테마저 몇 탈란씩 하니까.' '그래, 요는 공짜라는 거지. 지저분하고 멍청하지만 그래도 여자니, 닦아 서 단 몇 번이라도 써먹으면 그걸로 된 거야.' '하하... 포렐, 하여간 네 놈은 돈 버는 일이라면 양잿물이라도 갈아 마 실 거다. 이 괴물 같은 놈. 이런 걸, 돈벌이에 쓸 생각을 하다니. 하하... 하지만, 네 말대로야. 요즘엔 이런 작은 걸 더 좋아하는 놈들도 있으니까.' '흠... 그래.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한 번 맛을 봐야겠군. 그래서 별로 라면 저 피떡이 되고 있는 아줌마랑 같이 버리고 가야지. 괜히 쓸데없는 걸 끌고 가서 정성 들여놨는데, 손님이 싫어하면 말짱 헛일이니까.' '에엣? 여기서...? 변태 놈.' '흥. 그러는 너는 안 할래?' '킥킥... 네가 하는 거 내가 안 하는 거 봤냐?' 이가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듣고, 보았다.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피가 흐르듯, 그의 피도 흘렀고, 그들의 살이 찢기 듯, 그의 살도 찢어져 내렸다. 붉게 타는 횃불 속에서, 무엇이 눈물인지 무엇이 불인지 잘 분간이 가 지 않았다. 발 밑에 구겨진 천사 상은 고요히 웃었다. 맞다. 그는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그것을 보았다. 헬루시타 사제 님의 말씀이 옳다. 저런 그림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저 웃고 있을 뿐. 하지만 그렇다면, 저런 천사 님의 그림에도 엘이 없다면, 그럼 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런 천사 님의 그림에도 엘이 없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엘을 이곳에 있게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떨어진 율법을 적은 노트와 다섯 성서는 짓밟히고 피에 젖었다. 저것은 카할에서라면 신성했을 텐데... 이곳은 '할렘'이기 때문에... 할렘에서는 아무런 좋은 것이 날 수가 없다. '지금 나가서 시궁창을 뒤져봐라!! 애새끼가 몇이나 죽어 있는지! 내가 오늘 그 쓰레기를 몇이나 치웠나 말해주랴!!! 어디에나 엘이 있다고?!' 그래... 이곳을 흐르는 하천엔 아기들이 죽어 들끓으며, 피가 흐른다. 스노우드롭의 비명을 들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다섯 성서에... 그런 장소가 딱 하나 있는데..." 그가 날뛰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던 남자는 그런 이가르를 보고 피식 웃 었다. "...어이, 정신이 나갔나 본데? 이 놈?" 누군가가 말했다. "...흠. 정신이 나갔건 어쨌건 잘 붙들고 있어. 그 분들 이 이 놈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겨우 아줌마 하나 해치우는데, 자그마치 30탈란이란 말이야. 큭큭..." 하지만 이가르는 이 이야기들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장소'를 기억 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불태워, 살랐다는 저주의 계곡... 계곡... 이름... 그렇게 피가 흐르는 장소..."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그는 눈을 감았다. 왜, 엘이 이곳에 계시지 않은 건지, 방금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곳의 이름도 기억이 났다. 그곳의 아이들은 불태워, 살라지며, 그렇게 죽은 아이들은 온갖 곳에 들 끓어, 하천에는 피가 흘렀다. 시체와 죽음의 계곡, 그곳은 바로, '게엔나(Geenna)'였다. (계속)================================================== 흠... -_-;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838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1/20 23:48 읽음:249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56회, 제 42막. 게엔나 (7)> "...!!!" 시나는 한 밤중에 잠에서 깼다. 몸이 떨리고 숨이 몰아 나왔다. 어두웠다. 하지만 엎드린 자세로, 자신의 왼손을 볼 수 있었다. 왼쪽 어깨는 욱신 거렸다.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아픔과 축축함... 아마도 그것 때문에 어떤 알 수 없는 종류의 꿈-뜨거 운 바닷물에서 헤엄치는 것 같은, 그런 꿈을 헤매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어쨌든 어둠은 너무 짙었다. 그녀의 외부도, 그리고 내부도... 마치 누군 가의 눈빛처럼, 검은 어둠... 시나는 눈을 감았다. ...어둠뿐이라면 괜찮다. 어둠은 그녀에게 어떤 영 향도 주지 못하니까.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그때, 누군가가 시나의 등뒤에서 말했다. "...시나... 깬 건가...?" "...!"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시나는 놀랐다. 도대체 이 어둠 속에 누구인가, 믿을 수 없어서 가까스로, 힘들게 고개를 돌렸는데, 침대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등뒤로 벽난로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빛은 바 로 앞, 한 조각의 공간만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역광과 어두움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시나..?" 상대의 대답을 바라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직도 확신하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드랫..."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 마셔." 그는 그녀를 일으키고, 작은 컵의 물을 마시게 했는데, 그것은 짭짤하 면서도 달콤하고 따뜻한 액체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고야, 시나는 자신 이 몹시 목이 마른 상태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 다. "...고마워요." "...깰 때마다 이걸 마셔야 해. 낮에 페이스 힐러의 힘이 듣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는 드래마의 음성이 어쩐지 이상하게 들려, 시나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물어보았다. "...듣지... 않아요... 왜요..?" 하지만 시나는 이미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몹시 졸렸던 것이다. 어둠 은 낮게 가라앉아서 그 안에서는 잠들기에 좋았다. 드래마는 나직하고 굳 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세.. 우선은 조금 더 자. 아직은 새벽이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 록 하고." 잠을 자도 된다는 말에 시나는 안도해서 눈을 스르륵 감았다. "네... 나 중에... 다 이야기해 줘요.." "알았어." 드래마는 시나를 다시 눕혔다. 그녀는 이미 조용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 다. 그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잠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낮에, 레겜이 돌아가고 나서 라단이 불러온 페이스 힐러는 몹시 젊은 사람으로 퍼플 라이트의 힐러였다. 상처를 고치는 김에, 시나의 머리카락까지도 고치기 위해, 상당한 능력 자를 부른 것이다. 그는 시나에 대한 라단의 설명을 듣고, 그런 것은 자신이 전문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치료를 했다. 라단과 카탈리는 그의 그런 자신감 있는 태도에 몹시 기뻐했다. 드래마 도 과연 시나가 일루티온일 것인지 내심 기대를 했다.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힐러 라이트를 아무리 전사해도, 머리카락은커녕, 상처마저도 낫지 않 았던 것이다.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특히 그 힐러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매우 강한 불만을 터뜨리며, 시나가 마노테온이기 때문에 치료가 안 되는 것이라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도 끝까지 투덜댈 수는 없었다.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은 아마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디트마만 하더라도, 제시마를 치료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노테온 들은 분명히 힐러 라이트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다른 어느 계급보다 확실하게 힐러 라이트에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들은 매우 '민감한' 체질인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마노테온들과 같이 살면서, 마노테온들은 다른 계급보다 '힘'이나 '영향'에 훨씬 더 민감한 것 같다고 느꼈다. 브라우니 요정에게 놀림을 당하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브라우 니 요정들은 자신이 사는 참나무를 건드리는 인간에겐, 딱총나무 열매로 만든 붉은 요정의 가루를 뿌리는데 그것에 닿은 사람은, 신체의 일부분이 돼지나 당나귀처럼 변한다. 신체가 변하는 것이니 당하는 사람은 기겁을 하도록 놀라지만, 이것은 거의 무해한 해코지로 일루티온이나 그 이상의 계급이라면 겨우 한 시간, 길다고 해도 서너 시간 정도면 그 변신은 풀리고 만다. 하지만 마노테온들은 하루는 기본이고 심하면 일주일이라도, 변신한 채 그대로 있다. 디트마는 그런 자들을 치료하며 몹시 신기해했는데, 마노테온들은 약물 에도 굉장히 민감하다고 했다. 요전에 제시마를 치료할 때도 분명 그린 라이트만 썼는데... 어느새 '새 살'까지 돋아난 경과를 보여, 상당히 놀랍다고 했다. 마노테온은 스스로 가진 힘이 없으므로, 마치 몬스터처럼 외부의 힘을 그대로 빨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모두 다 마노테온에 관련한 사실이니 대부분의 힐러들 은 그런 것에 대해 아무 관심 없어하고 기록도 거의 없지만, 디트마와 드 래마는 상황이 상황이었으므로, 이런 마노테온의 상태에 대해 관찰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드래마는 힐러의 말이 틀린 것을 알 았다. 마노테온은 오히려 힘에 더욱 강하게 반응한다. 더욱이 힐러는 아주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다. 그 힐러는 씩씩대면서 이건 꼭, 거울에 대고 힐러 라이트를 전사하는 느낌, 즉 시나의 몸이 힐러 라이트에 강한 '반동'을 보인다고 말했던 것이 다. 그는 쓴웃음 지었다. [반동이라니...] 반동은, 어떤 힘이 있을 때, 그 힘에 필적하는 반대되는 힘이 존재할 때 일어난다. 그렇다면, [..'힐러 라이트'에 필적할 정도의 힘이 시나 안에 있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말이고, 백 번 양보해 설사 필적하는 힘이 있다고 해도 여러 가지가 이상하다. 힐러 라이트처럼 인간에게 적합한 힘은, 자연그대로의 상태라면 어떤 힘에도 융합하여 스며들어간다. 본인이 일부러 거부하지 않는 이상, 동일한 힘을 소유한 페이스 힐러라 든지, 마나를 소유한 아티스트, 디바인 파워를 갖고 있는 사제, 심지어는 강대한 스피릿 파워를 지니고 있는 왕족이라도... 특별히 반동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은 이상은, 자연스럽게 힐러 라이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피릿 파워와 마나가 주종관계를 이루며 미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 과는 천양지차다. 그러니 '반동'이라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다. 아니면 그 힐러가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잘못된 표현을 쓴 것일까? 세상이야 넓고, 그만큼 희한한 일도 많으니. 시나처럼, 힐러 라이트가 듣지 않는 몸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특이체질을 당황한 나머지 '반동'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상한 일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반동'한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특이체질'이라는 면만 놓고 본다면, 이것은 거의 분명할 정도로 한가지 사실을 나타낸다. 라단 부부의 말대로, 시나는 정말 일루티온일지도 모른다... 시나가 가진 몸의 특성은 시나가, 그 이상의 계급일지도 모른다는 암시 를 강하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시나가 가진 글을 읽는 능력과 사고 의 체계도 그런 암시를 해 주고 있으니까. 맨 처음엔 시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싫어서, 공정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독특한 마노테라고만 생각하고 그녀에 대해 자세히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는 괴로운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시나는 일루티온일지도 모르는데, 힐러 라이트로도 고칠 수 없다. 그렇 다면, 단 하나 희망을 걸 데라고는 하누카의 날... 하누카의 날 전에는 시나의 신분을 확인할 어떤 수단도 없어지고, 오직 가능성만 남은 것이니, 이제 그는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시나가 어떤 확실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시나의 정체를 문 지기들에게 의뢰할 수도 없다. 그들은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힘의 파장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니까. 확실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들도 잘 구분을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왕족과 하바티온과 일루티온의 어린아이들은 누가누군지 잘 구분을 못한다. 그러니 시나가 제 아무리 일루티온이라고 해도 머리카락이 짧은 이상 은 '능력을 담을 그릇이 없는 마노테온'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시나를 이제는 마노테온 남자에게 줄 수는 절대로 없게 되었다. 그는 얼굴을 흐렸다. 누군가, 정상적인 일루티온 남자를 구하여 확실한 하누카의 날을 치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도 불확실한 시나를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지참금을 주고 기혼자의 '첩'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할렘의 사람을 돈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 라단 부부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재미있다고만 생각했건만... 그들의 오해가 사실이면, 시나와 자신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끊어지는 것이니 괜찮고, 시나가 그냥 마노테온이라면 현재 상황에서 별로 변할 것 도 없으니,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잔뜩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의자에서 일어 나 자리로 가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짚을 수북히 깔고 그 위에 모피까지 깔았지만 차가운 맨땅에 있는 것처럼 불편하고 잠들 수 없었다. 또 하나, 그에겐, 최악의 가정이 있다... 시나는 일루티온일지도 모른다. 몸의 상태와 가진 능력을 봐서.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주먹을 꽉 쥐 고 어두움을 노려보았다. [시나가 일루티온일수 있다면... 그렇다면... 시나는...] 그녀는 하바티온일 수도 있지.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도 별 무리는 없다. ...저토록 '책'을 찾는 품성이라니, 과거 어떤 생활을 했기에? 그는 작게 웃었다. [젠장... 그럼 최선의 방법은 시나를 하바티온의 첩으로 들여보내는 거 로군.]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무책임하고 불가능한 말인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미모도, 재산도, 권력도, 명예 도... 욕심 많은 하바티온들의 첩으로 들어가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만 한 조건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의 종속주인 자신에게 많은 재산과 권력이라도 있다면 괜찮을 텐 데 그렇지도 못하다. 그러니 시나는, 그렇게 된다면 많이 불행할 것이다. 기억도 없고 과거 도 없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는 멀리 창백하게 누워 잠들어 있는 시나를 보았다. 그의 괴로움...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얼음의 숲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나'라는 존재는 이젠 존재하고 있으니까... 애초에 그녀를 모른 척 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젠 모든 곳에 존재 하고 있으니까. 이토록 지독한 피곤함과 깊은 번민이 그의 육체를 짓눌러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괴로운 가운데 앉아 어둠을 보며, 그는 시나에 대한 생각을 되풀 이하고 되풀이하며 되풀이했다. 시나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간밤 보았던 드래마의 잠자리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잠이 깰 때마다 옆에 있어주고 음료수를 주던 그의 모습이 마 치 꿈이었던 양 생각이 들었는데 아침에 싸늘한 기운 때문에 더욱 그러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그때 방문이 열리고 카탈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시나가 깨어있는 것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깨어있었네? 기분이 어때?" 그리고 다가오더니 시나의 눈앞으로 하얀 꽃이 핀 화분을 불쑥 내밀었 다. "호호... 어때? 예쁘지?" 오랜만에 보는 꽃이라 시나의 얼굴은 밝아졌다. "와... 귀엽네요. 처음 보는 꽃인데... 이름이 뭐예요? 어떻게 이런 겨울 에도 꽃이 피었어요?" 카탈리는 시나가 좋아하자, 기쁘게 말했다. "처음 보는 꽃이야? 흔한 꽃인데, 그거 이상하네. 이 꽃의 이름은 스노 우 드롭이야. 원래는 지금 필 때가 아닌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마당 굴 뚝 옆에 피어있는 거야. 요 며칠, 날씨도 좋고 환해서 그런 것 같아. 그래 서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고 화분에 담아서 가져왔지. 보고 힘내서 빨리 나으라고. 시나는 페이스 힐러의 힘이 안 되니까... 시나가 가진 힘으로 이 겨내야지." 그리고 카탈리는 활짝 웃었다. "아프더라도 금방 나을 거니, 이 꽃을 보며 힘 내. 스노우 드롭은 눈 속 에서 피는 꽃이니까, 시나도 이렇게 강하게..."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카탈리였다. 스노우 드롭 꽃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또 다시 졸음이 왔지만, 시나는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카탈리 아줌마..." 그 후로는 스노우 드롭 꽃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물에 젖은 솜처 럼 몸이 무거워서 계속 낮은 곳을 헤매는 느낌으로 잠만 잤다. 중간, 중간 라단이 들어와서 살펴보고 카탈리가 땀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혀 줬는 데, 드래마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밤새 시나 옆에 있었으니까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섭섭해서 애써서 그에 대한 생각은 관두었다. 그러자 꾸는 꿈이라고는 가면 축제행렬에 대한 것이었는데 되풀이해서 그 꿈을 꾸는 동안, 나타나는 결말은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그 때마다 레겜 이 나타났고, 그 덕분에 시나는 눈물이 날 만큼 그가 친숙하게 느껴졌고 나중에는 꿈이 새롭게 시작되는 도입부분에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오후의 어스름이 밀려들어오는 시각. 몸을 구부리고 스노우 드롭을 관찰하고 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현실과 꿈의 감각이 모호해진 시나는, 중얼거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겜...?" 그러자 그가 몸을 일으키고 그녀를 보았다. 상처 나고 해쓱한 얼굴의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인사를 했다. "...시나마, 오랜만이에요. 겨우 며칠인데, 우리들은 모두다 큰일을 겪었 군요..." 하지만 시나는 그의 얼굴에 난 무수한 상처와 손에 난 상처들, 그리고 슬퍼 보이는 얼굴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왜 여기 있는 것인 지도. ...왜 이렇게 이 사람은 지쳐 보이는 걸까, 이것도 꿈의 연장인가, 묘한 느낌을 느꼈다. 낡고 흐린 색의 외투를 입고 모자까지 쓴 채, 이제 막 어 딘 가에서 돌아온 사람의, 혹은 지금 곧 어디론가 떠날 사람의 모습이었 다. 그런 얼굴로 그는 스노우 드롭 꽃을 쳐다보았다. "...예쁜 꽃... 나는, 매우 절망했지만... 여기 와서 좋은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참 기쁘군요... 마치 이 꽃을 본 기쁨처럼 기뻐요. ...이 꽃의 꽃말 은 희망인데... ...희망이 있을 때, 얼마나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깜 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한 번 더 시나를 보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나한테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엘의 가호가 있기를. ... 힘내요, 시나마.. 빨리 낫기를 바랍니다." 희망이라... 시나는 그제야 그의 표정에 무언가 강인한 것이 빛난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슬퍼 보이는 얼굴이 아니라... 그래서 시나 또한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디트마..." (계속)================================================== '성역...'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07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24 06:21 읽음:1967 관련자료 없음 ----------------------------------------------------------------------------- <제 43막. 심장을 찢다.> - 1 드래마는 절망적인 얼굴로 회랑을 걷고 있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왕궁에 있었다. 아침에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향할 때만 하 더라도 또 마구간의 일을 하게 되는 건가 했는데 의외로 책상에 앉아 문서를 필사하는 일을 했다.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 마시는 시간에 엘야시온 가디엘이 드래마를 불러들여 한 이야기 는 누가 들어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드래마 자신은 물론이고, 시나까지 이번 주 안으로 왕궁에 들어와 엘야시온 가디엘의 종으로써 명령을 수행하라는... 엘야시온 가디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노테온이 왕궁엘 들어온다는 것은 오물 통에 뒹굴던 돼지가 침상에 올라와 사람과 같이 잠을 잔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드래마와 시나가 궁에 들어오면, 아마 궁은 발 칵 뒤집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엘야시온은 태연했다. 그는 웃으며 다른 이의 태도에 대해선 신경쓸 것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꺼낸 말이 「여섯 증인 의식」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드래마는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드래마도 여섯 증인 의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드래마가 그 의식을 안다는 것에 즐거운 놀라움을 표했 지만, 어쨌든, 어찌된 경로인지 몰라도 그 고색창연하고 사멸된 의식을 드래마 는 분명 알고 있었다. '안다니 설명할 필요 없어서 좋군! 하하...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 내, 예전엔 멋모르고 반대했지만... 이번에 자네 종속자를 만나보니 썩 괜찮은 소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래서 그냥 자네들을 축복해 주기로 했네.' 엘야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나이가 되니, 젊은이들의 기분은 잘 모르겠 지만... 평생 같이 살 배우자인데, 역시 자기 마음에 닿는 처녀로 골라 사는 것 이 좋겠지. 어떤 자가, 아내와 사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고통 중, 상위에 속하는 고통으로 이것을 능가하는 고통이란 오직 혼자 사는 고통뿐이라고 했는 데, 그런 즐거움이라도 없으면 어쩌나? 하하하...! 그래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말 이야. 자네들, 아직 카할에 가서 맹세식을 안 했지. 하하.. 걱정 말게. 옛 정을 생각해 내가 직접 치러주지. 그 소녀 때문에 마노테온으로 살겠다는 자네 의지 를 존중하겠어.. 그러니 「마노테온」으로서 왕궁에 들어와 「여섯 증인 의식」 을 거행하게. 그리고 그 결혼이 끝나면 자넨 자네 마을로 돌아가도 좋...' 엘야시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고! 그래? 자네 종속자가 마노테온 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이럴 수가! 아니... 난, 몰랐네! 힐러의 집에서도 그랬 고 지금도 몰라. 자네 종속자가 어느 계급 사람인지 내가 어찌 알겠나? 마노테 온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나? 그래? 허어, 그것 참...! 놀라운 일이야! 드랫... 아니, 이젠 「루온 루드랫」이라 불러도 되겠나? 하하하...! 자네 마음에 있는 소녀가 마노테온이 아니라니!! 이거야말로 엘의 선 의가 아니고 뭔가?! 하하하... 그렇다면 가 결혼 때에 모든 왕족과 제후들이 보 는 앞에서 맹세를 하는 순간... 그래. 조건대로 그때 자네의 죄를 씻는 게 좋겠 군! 이거야 원...! 자네는 그럼 정말 마노테온도 아닌데... 아니, 아냐... 그 의식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분명 「마노테온」이니... 어차피 의식은 성립! 하하하... 내 가 잠시 맡아 두었던 자네의 것들은 신년에 정식으로, 모두 자네의 것이 될 것 일세. 뭐? 뭐라고? 「시나」가 일루티온일지도 모르니, 너무 성급한 판단은 이 르다고? ...글세...?' 엘야시온은 빙긋 웃었다. '...자네는 이제 다른 여자를 택함으로 「돌아온 것」 아닌가? 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지라도, 일단 지금은 축하하네. 다시 돌아 온 자네의 인생을. 이제 가보게. 내일까지 이곳으로 오는 것... 아, 그 소녀 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고 했나? 뭐... 그래도 그냥 데려와. 여기서 치료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 자, 그럼 내일 보세.' 하지만 드래마는 창백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었고, 엘야시온이 빙그레 웃으 며 다시 한 번 더 작별인사를 했을 때에야 제대로 된 인사(라지만 더듬거리는 인사)를 올리고 응접실을 나올 수 있었다. 응접실의 문을 나설 때 엘야시온은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자네가 과거에 선택했던 것보다는 나아. 설사, 자네가 마노테 온으로 영원히 산다고 해도. 하늘이 가라앉아, 결계가 무너져 이 열 두 세계가 하나로 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자네와 그 아이와의 사이는 허락되지 않으니. 자네 스스로 한 이 선택을 잊지 말게. 아... 그래, 그것도 괜찮겠군. 자네가 레이 서스의 개인 루이트 자리를 떠날 때 「루온 루사트」라는 이름을 버린 것처 럼... 여섯 증인의 의식에서... 루온 루드랫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버리도록, 자네 를 위하여 새로운 이름을 준비하겠네. 그 이름을 내가 부르지. 이제 자네는 스 온 아피네스의 아무 것도 아니게 된 것이니.' "...아냐!!" 드래마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거칠게 내뱉었다. 스온 아피네스의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고? 드래마는 엘야시온이 어쩌면 자신과 시나의 약속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온 루드랫」과 「스온 아피네스」의 이름을 엮어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금지된 일이었지만, 엘야시온은 스스로 그것을 입에 올렸다. 거기서 나온 고문 같은 자극... 그래서 드래마는 하마터면 뒤로 돌아, 그것이 아니라고 호소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을 호소한다는 말인가? 그 래도 세상이 끝장난다면 운명이 변할 수도 있지 않냐고? 이렇게 오래 한 마음 만을 지켰으니, 제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아냐..." 엘야시온의 말 대로다. 세상이 뒤집히는 날이 온다고 해도, 드래마는 그녀를 얻을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드래마는 그녀를 원했고... 그 결과로, 이 죽음 가운데 살고 있다. 귀족이었던 신분 때문에 귀족에게 합당한 극형으로 이 오랜 세월을 살고 있다. 차라리 정말 마노테온이었다면 사형이라는 벌로서 아무런 갈등 없이 삶 을 마감할 수 있었을 텐데... 드래마는 새로운 절망을 느꼈다.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 당해 「사형」을 당 한 것과 똑같은 상태로 살고 있다고 해도, 버러지에나 비유되는 목숨으로 산다 고 해도, 살아있기 때문에 절망을 느꼈다. 드래마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았다. 왕족들... 욕구도 소망도 신분에 맞게 버러지만큼만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과거, 「사형」을 당 했을 때, 모든 욕심과 갈등도 똑같이 「사형」을 당했으면 좋았을 텐데... 채워 지지 않는 소망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죽음 가운데 삶... "...엘야시온님은, 시체를 일으키려는 거다." 드래마는 괴롭게 속삭였다. 드래마가 건물에서 나왔을 때, 마침 하늘엔 주홍빛의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수많은 유리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섬세하고 아름다운 궁전... 그것이 지는 해를 받아 온통 붉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렸다. 궁정 악단과 가수가 오늘 밤 연회에서 왕족들 과 귀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 별채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영혼 깊숙한 곳 울리는 파장을 지닌 나의 고향... 내 어찌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나의 붉은 것이여... 드래마는 귀를 기울였다. 나,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너를 떠나기 그토록 소망해, 너를 떠나왔건만, 이제 나, 얻은 것 모두 다 너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고, 돌아가고 싶어하니... 잃어버린, 나의 고향. 내게 문을 열어다오... ...과거, 제일로트에 올 때마다 먼발치에서나마 이 궁전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가 돌아가곤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궁전은 그에게 아련한 느낌을 던져 주곤 했고 그 느낌은 오직 이 궁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추위도 잊은 채 몇 시간이고 말을 탄 채 궁전을 바라본 적도 있다. 헌데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보니 저 불타는 것들이 피부 한 겹 한 겹으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아 가벼운 떨림조차 일었다. 향수... 즐거운 기억들, 슬픈 기억들... 향기와 같이 코끝을 스치는 추억. 문득, 그 장소와 시간이 유리되어 드래마의 마음은 혼자 있게 되었다. 붉은 노을 아래, 지독하게 한 가지만 생각했다. '지나가는 시간... 하늘은 반복하여 오직 하나의 시간... 밤에서 시작해 저녁으 로 끝나는 시간만을 산다. 하지만 인간은 틀리지... 인간은 아무 시간도 살지 않 을 수 있고, 혹은 영원을 살수도 있다. 그리고 난...' 하늘은 붉게, 그리고 보라색과 남색, 분홍색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난...' 나를 안고, 내게 키스하고, 나를 눕혀다오. 손을 내밀어, 지친 내 다리를 쉬게 해다오.. 나는 영원을 배워 네게 돌아왔노라... '그래. 시간의 확장... 혹은 영원을 배우길 갈망했다...' 그것은... 새로운 아픔. 심장이 고동쳤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복도를 지나다가 창문으로 드래마를 보았다. 드래마는 한 참 하늘을 보며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어떤 사람의 모습 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이 궁전의 주인이었던 이... 그도 저런 모양으로 하늘을 보며 깊게 생 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면 엘야시온 자신은 도대체 저 아이가 무슨 생각을 저 렇게 하는 것일까 몹시 궁금해하곤 했는데... 결국은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 고 말았다. 쓴웃음은 지은 엘야시온은 다짐했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을 그냥 보내진 않으리라... '루온 루드랫... 너는 아주 유명한 자가 될 것이다. 적어도 이 결혼이 치러지 는 동안, 이 왕궁 안에서는. 넌 잘못된 마인드 컨트롤 때문에 오랫동안 잠을 잤 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이젠 깨어도 좋을 때다... 네가 깨어났을 때, 내가 네 앞 에 모든 것을 준비해 놓겠으니. 내 아들아...'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어나, 영원히 너와 거할 수 있도록. 영원은 오직 생명 가운데만 빛을 내노라... 드래마는 사형(死刑)가운데 있는 자였고, 거기서 깨어나기 위해 어떤 하얀 팔이 필요한지 아직도 알 수가 없는 자였다. 낙원으로의 길은 범죄로 인해 영 원히 막혔다. 영원 안에 생명이 없다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방황하는 좀비(Zombi)와 다를 것이 없다. 드래마는 그것이 죽도록 두려웠다. 아니면... ...신은, 어떤 다른 길을 제시했던가? 시녀들은 드래마가 타고 갈 마차의 마부와 떠들고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처음엔 무심하게 보아 넘기고 마차에 오르려 했지만 귀에 익숙한 단어가 들려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차를 몰기 위해 다가오 는 마부를 보고 말했다. "...잠깐... 방금, 어떤 하바트가 마노테오나를 불태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아... 방금 말을 들으셨습니까? 네. 시종들과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파 다하더군요. 하도 재미있는 사건이라... 저 같은 외부 인에게도 알려주더라고요. 무슨... 베리스라든가... 그 마노테오나를 그곳의 영주가 태웠답디다." 그때, 그들 뒤로 지나가던 시녀들이 마부의 말에 참견하며 웃었다. 그들은 드래마를 힐끔대며 보더니, 그의 외모에 호감을 가진 듯 매우 자세한 말로 알 려주었다. "아이 참, 아저씨도... 베리스가 아니라 「바리스」라니까요. 그렇게 기억력이 나쁘세요...! 호호호... 하여튼, 고작 마노테오나 하나 때문에 하바티온이 해를 당 한 끔찍한 사건이었대요." 아니면...? 신은 자비로워서 영원히 막힌 길 대신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는가?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그의 생명... 그의 영원. 비록 그림자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잃을 것 같아, 드래마는 언제나 그것이 두려웠다. "휴우... 끔찍한 이야기로군. 마노테오나 하나 때문에 영주님 자신이 그 화를 당하다니." 동정이 가득한 말이었다. 바리스 마노테오나의 사건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 라단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겨우 마노테오나 하나 때문에 벌츄즈 하바티온에게 해가 있다니...! 디트마는 그래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래... 참, 그렇지." 남편과 함께 디트마의 이야기를 듣던 카탈리는 그런 디트마를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디트마의 얼굴에서 무언가 「그럴 듯한 부 분」을 발견한 것이다. 남편 친구 디트마는 실제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외모에 175센티인 남편보다 약간 큰 키일 뿐이어서 생각보다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다. 주인을 위하여 계급 강등까지 감수한 용감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얼굴에 상 처가 많고 입은 옷이 꾀죄죄하고 초라해 보여 언뜻 보면 부랑자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차분하게 미소 지으니 남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던 사람과 비슷하게 보인다. 해쓱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조리 있게 이야기하고, 때로 드러 나는 예리한 눈빛은 디트마를 정말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로 보이게 했다. 지금도 그랬다. 디트마는 예의 그, 생각에 잠긴 눈으로 들고 있는 찻잔을 내 려다보았다. "끔찍한 일인 것은 틀림없어. 영주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소문은 흉흉하게 돌더군. 사업이 잘 안돼서 재정을 늘리기 위해 그랬다는 소문도 있고, 지나치게 도박을 좋아해 빚을 많이 져서 그랬다는 소문도 있고... 하지만 이것은 다 수비대의 말을 엿들은 것이니 확실한 것은 아 냐. 이 두 눈으로 시커멓게 탄 영주와 그 동생의 시신을 봤는데도... 그냥 추측 만 할뿐이지. 그들 옆에는 아트 스크롤(scroll)이 떨어져 있었어. 화염계 아트를 사용한 것 같은데... 스크롤에서 나온 불길은 마을을 태우기 전 우선 그 소환자 를 태웠던 것 같아. 한 마을을 몽땅 태울 정도로 대단한 놈이었으니, 사람 한 두 명쯤, 그렇게 숯처럼 탄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한참을 살피고야 시체가 영주 라는 것을 알았어." 디트마는 비웃었다. "그것이 영주였던 덕분에 수비대가 마노테오나로 부리나케 달려왔지." 라단은 디트마의 입가에 서린 웃음을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웃 음? 아무리 영주가 안 좋은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벌츄즈 하바티온의 죽음을 비웃음거리로 삼을 수는 없다. 디트마의 비웃음 서린 얼굴이 낯설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으니 얼굴이 낯선 것이야 당연하다고 해도... 이건 그보다 근본적인 것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라단으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이던 라단은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 얼굴은...? 왜 그렇게 상처가 많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상처...?" 디트마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래. 꼭 누구에게 얻어맞은 것 같군. 왜...?" 디트마는 웃었다. "아... 내가 방금 말했잖아. 영주의 시체를 발견하고 수비대 에게 신고했다고. 확실히 안 좋은 일인데... 그럴 경우... 곁에 있는 마노테는 무 턱대고 화풀이 대상이 되기 마련이거든. 반나절을 이리저리 끌려 다녔지. 바리 스 마노테오나에 산 이후 처음으로 형제 일루티오나엘 들어가 봤어. 덕분에 이 곳으로 오는 것이 늦어지긴 했지만, 좋은 구경이었지." 라단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라고...?! 어, 어이가 없군! 수비대가 아무 상 관도 없는 널 왜...!" 카탈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카탈리 는 조바심을 내며 일어났다. 뒷이야기를 못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디트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문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 누군가 왔어. 혹시..." 디트 마는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한 눈을 지었다. "드래마가..." "잠깐! 난 정말 이해가 안가! 네가 영주님을 죽인 것도 아닌데!!!" 디트마는 라단을 바라보았다. "휴우... 라단. 사람들은 원래 마노테에겐 그렇 게 혹독해." "뭐야? 네가 어째서 마노테야?!! 오렌지 라이트의 능력을 가진 마노테도 있 어?!! 네 원래 신분을 말해야지!! 쓸데없는 고생을 왜 해! 루온 루드랫 님이 네 가 힐러 라이트를 썼다고 했을 때도 기가 꽉 막혔지만 이건 더 하군! 그 몸으 로 얻어맞았다고?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용하군!!" "하지만 그 전에 난, 순례자를 만나서 심신이 많이 회복... ....뭐?" 갑자기 디트마의 눈이 빛났다. "뭐라고? 루온 루드랫님?! 라단!! 그 분이 네게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시 키던가? 그래서 네가 그렇게 부르는 거야? 원인이 뭐지? 시나마... 아니, 「시 나」 때문에?" 이층을 흘끔 본 디트는 흥분해서 말했다.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어떻게 그 이름을 부르게 된 건지 말해봐!" "응...? 아, 아니... 이름은 그냥... 내가..."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단에게 그 이름을 부르라고 허락한 적이 없어. 디트마..." 디트마는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거실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 다. 남자는 디트마를 강렬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디트마...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난, 왕궁에서 시녀들이 떠드는 것 을 들었는데... 한 하바트가 마노테온 슬러터로 죽었다고..." 디트마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아무리 무뚝뚝한 성격이라도 이렇게 굳은 표 정을 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차가운 표정이라 디트마는 무안했다. "아... 그, 그래, 우리 영주가 죽었지. 마을이 불타고... 헌데 난 의탁할 곳이 없어서...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그러니 너무 타박하지 말라고.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아... 그, 그나저나 라단에게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그럼, 「드래마」인가, 그것 참..." "마을은 새벽에 불탔다고 하던데." "으응? 아... 그게 새벽이었어? 시각이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몰랐는데, 하하... 새벽이었군." "...우리 집은 동네 한복판에 있었고.." "응. 그랬지. 아! 난 그래서 물건은 꺼내오지 못했어. 미안해, 몸만 와서. 나 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말고..." 디트마는 드래마가 이런 것을 묻는 이유는 가재도구를 걱정한 때문이라 생 각했다. 그래서 깨끗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말을 계속하다간 드래마가 자신을 쫓아 낼 것 같아,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저어... 시나의 계급에 대해서..." 하지만 드래마는 이번에도 디트마의 말을 무시했다. "디트마, 그럼 너는 도대 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그 한복판에서 빠져 나왔어?" 디트마는 머뭇거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인데 묻지 못해서 초조했다. 하 지만 그냥 대답하기로 했다. 드래마는 자신이 여기 있는 게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처음, 바리스 마노테오나를 찾아갔을 때처럼... 디트마 는 억지로 웃었다. "하하... 난... 괜찮았지. 내가 죽지 않은 게 그렇게 이상해? 억울하다고 말하 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하... 하긴, 평소에 난 널 꽤 귀찮게 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간에 난 집에 없었으니까. 그때 난, 촌장님의 권유로 순례 자를 만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을밖에 있었거든. 하하... 그러니 내가 다시 널 찾아와 귀찮게 한다고 해도 참고 넘겨..." 하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드래마가 다가와 디트마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디트마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 게 말을 더듬었다. "루, 루온... 루드...?" 드래마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디트마. 네가..." 드래마는 시나의 일과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 때문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후, 시녀들의 말을 들었을 땐, 한꺼번에 발 밑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할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몸을 의탁하던 모든 것들이... 발 밑이 흔들리는 끔찍한 느낌. 절망... 헌데 이 집에 들어와 디트마의 목소리를 듣고, 혹 이것이 착각은 아닌가 해 서... 드래마는 격렬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디트마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 다행히도...! 드래마는 낮게 말했다. "디트마... 네가, 네가... 살아있어서... 난, 엘에게 감사한다... 그것 하나만으로 도..." "...!" 그 말은 몹시 떨려나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격렬한 감정표현에는 라단과 카탈리조차 놀라 드래마를 봤을 정도였다. 그리고 디트마의 얼굴은 질 리도록 창백해졌다. 이건... 루온 루드랫 님이 이 집에서 자신을 당장 쫓아내는 것보다 더, 끔찍 한 일이다. 소문은 몹시 빠르게 퍼졌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세스틴과 마리스와 함께 담 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세스틴이 그 말을 꺼냈다. 한참 세스틴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시작되고 그 다음날, 즉 하누 카의 날 일주일 전에 있는 「가(假) 결혼」때에 새롭게 「여섯 증인」의 의식 을 넣기로 했다고 엘야시온이 말을 했는데, 가만히 엘야시온의 말을 듣고 있던 세스틴이 「마노테온」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 화제를 꺼낸 것이다. 그리고 세 스틴의 말을 듣고 난 엘야시온은 몹시 분노하고 말았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마리스나 세스틴조차도 엘야시온의 안색이 변한 것을 눈 치챘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즐거운 기분이 모조리 사라졌다. 마리스와 세스틴이 돌아가고 나자, 연회 준비를 해야했는데도 엘야시온은 시종을 시켜 하온 하겐 트를 불러들였다. 겐트온이 들어오자 가디엘은 인상을 썼다. 그 얼굴을 보고 겐 트온이 물었다.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엘야시온님... 어디 편찮으신 건..." 엘야시온이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비꼬듯 말했다. "요즘은 참 바쁘더구 먼, 하온 하겐트. 사방팔방 손을 쓰느라고 말이야." "네?" 가디엘은 창으로 걸어가 뒷짐을 지고 창 밖을 보았다. "자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네. 활약이 대단하더구먼." 엘야시온의 말투가 이상해서 겐트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활약이요? 활 약이라 하면..." "...활약.. 각 세계의 왕족들과 귀족들 가운데 자네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일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만 보면 모두다 칭찬 일색이라는 말이지. 자네에 대해 험담하는 자는 한 명도 본 적이 없네. 그 토록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호평을 들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역시, 자네라고 생각하네." "아... 모두 다 엘야시온님의 은공으로..." "아니, 그게 다 자네의 지혜 덕분 아니겠나? 해서, 내, 골치 아픈 문제로 자 네를 불러들였네. 방금 클로니아가 내게 한 문제를 묻더군. 클로니아 수네드리 온에서 오늘 올라온 문제인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떤가? 들어 볼 텐가?" "여기, 이렇게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좋아. 한 하바트가 있거든. 헌데 이 하바트가 무엇 때문인지 물질이 몹시 부족하여 대대로 물려 내려온 조상들의 유물까지도 지키지 못할 지경에 처했단 말이야. 해서 이 하바트는 몹시 고민을 하다가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마노테오 나 하나를 불살라 없애서라도 물질을 늘여보기로 했네." 겐트온은 고개를 공손히 숙였다.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가디엘은 시선을 창 밖, 먼 곳에 둔 채로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 어리석은 사람이지. 더 어리석은 것은 그 하바트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는 거네. 그 생각대로 마을을 태우고, 그리고 그만 자신도 그 불에 휩쓸려 죽었 어." "...가치 없는 죽음이군요. 마노테온 슬러터에 대한 엘의 보응이라 생각합니 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헌데, 문제는..." 가디엘은 몸을 돌렸다. "그 자 녀들에게 있지... 그 자녀와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까 말했듯 그 하바트 는 물질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인 것이라 자녀와 아내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겨줄 수 없게 되었네. 오히려 수많은 빚만 남았지. 덕분에 어떤 하바트도 그들의 후 견인이 되길 거부하고 있네. 더구나 그 아버지가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르고 자 네 말대로 아무 가치 없는 쓸모 없는 죽음을 당했기에... 더욱 그러하지. 클로니 아 수네드리온에서는 이 문제 때문에 골치인가 보더군. 아무도 후견인이 되려 하지 않기에 사회에서도 가장 차디찬 대접을 받게 됐단 말이야. 하지만 타고난 신분이 있으니 함부로 그들을 버릴 수도 없고... 그래, 자네라면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나?" 겐트온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엘야시온의 얼굴을 보았다. 엘야시온은 미소 를 짓고 있었고 겐트온이 무언가 좋은 해결책을 주리라 믿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겐트온은 눈을 내리깔고 인상을 썼다. ...무슨 의도로 이 문제를 내게 묻는 거지? 혹시...? 하지만 그때, 가디엘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겐트? 내, 자네의 지혜를 기다리고 있네만... 왜? 자네도 곤혹스럽나? 하하.. 그럼 내가 클로니아에게 좋은 답을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군..." 그 말투가 너무 부드럽고, 엘야시온 특유의 장난스러움마저 있어 결국 겐트 온은 이 상황은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겐트온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쓴 웃음 지었다. "...클로니아 성직자 회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성직자 회?" 엘야시온은 의자에 앉았다. "자네가 그곳을 언급하다니, 의외로군. 말했듯, 그 아이들에게 남겨진 유산은 없네. 그러므로 성직자 회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아 이들이 배속될 교육기관은 그들의 신분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곳이 될 거야. 성직자 회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든 마찬가지거든. 그 중 성직자 회는 어느 단 체보다 그것이 뚜렷한 곳이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야 그들이 가진 피가 아깝단 말이야. 그래서 문제라는 거지." 그런 거야... 겐트온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 겐트온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 다. "글세... 과거에도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던 걸로 압니다. 신분은 있으되 신 분에 맞지 않게 몰락한 자들... 선대의 죄로, 누구도 그 자손을 거두려 하지 않 아, 높은 신분에도 유리 걸식하는 몰락 귀족의 자녀들...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조사해서 그 전례대로 따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전례대로 따르라... 그거, 괜찮군." "특별히... 기억나는 전례라도 있습니까?" 엘야시온 가디엘은 웃었다. "아니. 전혀 없군. 클로니아에는 어떤 전례로 남 아 있는지 나중에 클로니아 수네드리온에게 명해서 과거의 기록을 조사하라고 해야겠어." 겐트온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일에 엘야시온님께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다니... 의외 입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를 하나도 기억 못한다고 말한 주제에...! "글세..." 엘야시온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지. 실 은 내가 그 하바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거든." 그리고 엘야시온은 전혀 웃 지 않고 겐트온을 똑바로 보았다. "그 영주는 바로, 루온 루드랫이 살던 마노테 오나를 다스리던 영주였네. 그리고 불탄 마노테오나는 루온 루드랫이 살던 곳 이었고." "...믿을 수가 없군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겐트온은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내심으론 엘야시온의 태도에 불안을 느꼈 다. 엘야시온이 겐트온을 보는 눈은 어딘지 차가운 느낌이 있던 것이다. 그래서 엘야시온의 생각을 떠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놀랍게도 갑자기 엘야시온이 웃는 소리를 냈다. "하하... 아니, 상심보다는... 그래. 나는 아주... 즐거워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 는 거네." "...네? 즈, 즐거워하고 계시다니..." "아, 오해는 말게. 그 하바트가 죽었다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 아니네. 내 개 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던 그이니,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슬플 뿐이지. 그의 어리 석음이 한심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것을 우리 계획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엘의 은혜라고 생각하네. 루온 루드랫에겐 이제 돌아 갈 곳이 없어졌으니, 그도 더 이상의 어리석은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이제 앞 으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할 수 있겠지. 게다가 난... 하하하..." 엘야시온은 정말로 기분 좋은 듯 했다. "이제, 루온 루드랫을 그 종속자와 함께 왕궁으로 불러들일 생각이라네. 자고 로 사람의 생각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법이니까, 왕궁에서 자기와 맞는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그도 무언가 깨닫겠지? 어떤가? 나의 생각이?" 겐트온은 놀란 나머지 할말을 잊었다. "...루온 루드랫을 왕궁으로 불러 들인 다고요? 그 종속자까지...! 하, 하지만 마노테온은 왕궁에..." "괜찮아. 이곳의 주인과 여주인이 허락했으니까. 그리고 나, 엘의 대리자 청 의 엘야시온도 그것을 허락할 테니. 이번 결혼은 특이하게... 「여섯 증인」을 부활시켜 보려고. 어떤가? 멋진 결혼식이 되겠지? 하하하..." "....!" 「여섯 증인」! 백년이상 사라져버린 의식이지만 겐트온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의식이라 면 왕궁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된 마노테온도 왕궁에 들어올 수 있다. 아니, 필 히 들어와야만 한다. 하지만...! 겐트온은 다시 한 번 더 입술을 깨물었다. 루온 루드랫도 그렇고 그 종속자 가 왕궁으로 들어온다면 일은 너무나 복잡해진다! 엘야시온이 때때로 상식을 깨는 짓을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의외의 결정이다. 하지만 엘야시온은 더욱 의외의 말을 했다. "...흐음, 그리고 말이지, 루온 루드랫이 왕궁에 들어오면 자네의 그 영향력이 더욱 필요해 질 걸세. 난 그의 후견인으로 자네를 지목할 생각이거든. 알겠나? 그의 친구가 되어주게... 사람들에게 루온 루드랫을 소개해 주라고..." "네에?" "...왜? 싫은가? 자네 명성에 흠이 날 것 같나?" "아, 아닙니다. 에, 엘야시온님의 명령이라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는 겐트온을 엘야시온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리고 언제나 그렇듯 몹시 아쉽게 생각했다. '수준 높은 지식에다가, 훌륭한 출신답게 외모도 출중하지... 몸가짐도 더 바 랄 나위 없이 완벽해... 그래. 난 하겐트를 총애한다... 하지만...' 「열두 파수꾼의 방」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별... 열둘 중, 삼분의 일인 「네 별」은 하겐트의 뛰어난 활약으로 이제 그럭저럭 모일 것 같다. 무기도 순조롭게 준비되었고, 전 열두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 세계를 위하여 자력으로 싸울 준비를 슬슬 갖추고 있다. '그리고, 하겐트, 자네는 이번에 도가 지나쳤거든... 어느 한계라는 게 있는 데... 바리스를 불태우고 그 영주까지 죽이다니... 쯧쯧... 내 목적을 위해, 자네를 어느 정도까지는 봐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교활한 판테온의 일 족이여?' 엘야시온 가디엘은 쓴웃음 지었다. 드래마가 바리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였다. 디트마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게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야 했다. 드래마는 시종일관 바리스와 영주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순례자」 에 대해서도. "그때... 한 순례자가 아리움 마노테오나로 가는 십자로에 자리를 잡고, 근처 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 성가를 불러 준다는 소문이 퍼졌지. 일루티오나 에서 있는 일도 아니니... 촌장님은 아주 좋은 기회라고 말씀하더군. 조심한다면 다른 일루티온들에게 안 들킬 것이라고. 그래서 세일마와 제시마, 그 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십자로를 찾아갔어. 그들은 모두 인간 사냥꾼 사건 때 다친 사 람들이었지..." 그때 라단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어? 왜 몇몇 사람들만 갔지? 이왕 가기 로 했으면 마을 사람들 전부가 다 갔으면..." 디트마가 웃었다. "마노테온은 다섯 명 이상은 한꺼번에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해." "아..." 라단이 납득하자 디트마는 말을 계속했다. "십자로엘 가보니, 일루티오나에서 꽤 먼 곳인데도 일루티온이 잔뜩 나와 있었어.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었지. 우린 매우 조심했어. 들키지 않도록." 라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들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디트마는 「일 루티온」이다. 하지만 디트마는 그대로 말을 계속이었다. "...헌데 몹시 주의를 했는데, 그만 우리가 마노테온이라는 것을 들키고 말았 어." "어머...!" 듣고 있던 카탈리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일루티온이 우리를 얼마나 닦달하던지...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순례자가 나서서 사람들이 우리를 쫓아내면 자기도 우리와 함께 십자로를 떠나겠다는 말을 했지. 하하... 믿지 못할 일이었어. 마노테오나에서 사는 동안 마노테온에게 그렇게 친절한 성직자... 혹은 타 계급 사람은 처음이 었지. 그 말 한마디에 감격해서 우는 마노테도 있었으니까."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라단과 카탈리는 크게 공감할 수는 없어 약간 떨떠 름하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드래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디트마가 말했다. "음... 그래서 덕분에 세일마와 제시마와 나,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십자로에서 이틀을 유하며 순례자의 성가를 듣고 여기저기에서 있 었던 엘의 은혜로운 일들과 설교를 들었지. 헌데, 영주와 그 동생이 순례자가 자기 영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몇 번이나 마차를 보내 순례자를 모 셔가려고 했어. 하지만 순례자가 응하지 않자, 한 번은 직접 십자로로 찾아와 순례자를 모셔가려고 했지. 하지만 순례자는 그 초대를 거절했어. 결국 영주는 그냥 떠나야 했는데... 영주는 그렇게 돌아간 다음날 새벽, 바리스에 불을 지른 거야." 디트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순례자는 분명 영주에게 어떤 경고를 해주 었는지도 몰라. 먼빛으로 보기에도 영주와 그 동생은 몹시 불안하고 불쾌한 낯 빛이었으니까. 순례자도 그 후, 내내 명랑하던 것과 달리 기운 없어 보였어. 그 래서 성가의 가사도 몇 번이나 틀리고..." 드래마는 거의 손도 안 댄 수프 그릇을 밀어놓았다. "가사를 몇 번이나 틀렸 다고... 혹시, 그 순례자, 고양이 몬스터를 데리고 있지 않았어?" "...응? 그걸 어떻게 알았지? 노래 불러준다고 골치 깨나 썩이던 고양이 몬스 터가 있었는데. 하지만 그 몬스터 때문에 재미있기도 했고... 이오시아 님이 그 몬스터를 쫓아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많이 재미있어했어."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08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24 06:21 읽음:1833 관련자료 없음 ----------------------------------------------------------------------------- <제 43막. 심장을 찢다.> - 2 "...이오시아 님...! 역시." "역시? 아는 분이야? 어떻게?" 라단과 카탈리도 흥미 있는 눈빛을 지었다. 드래마가 말했다. "바리스 에서 제일로트로 오던 도중, 마우르코트라는 마을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 어. 거기서도 일반 여관에서 성가를 부르시기에 상당히 독특한 순례자라 고 생각했는데... 그 분이 바리스 근처까지 가셨다니... 마노테온에게 성가 까지 불러 주시고... 정말 놀랍군." 디트마는 눈을 찌푸렸다. "일반여관에서도 성가를 부르셨다고? ...확실 히 이상한 분이군." 라단이 말했다. "흠... 혹, 제대로 된 성직자가 아닌지도. 마노테온 따위 에게 성가를 불러 주고, 술집에서 성가를 부를 정도라면, 뭔가 성직자로서 의 소양이..." 디트마가 말했다. "아냐. 소양 면에선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거야. 그 리고 그 분이 부르는 성가는 정말 좋았어. 아마 어디에 있든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거야. 파란 눈이 몹시 인상적인 순례자였거든." 카탈리가 말했다. "여보, 고양이 몬스터도 길들여 데리고 다니는 분이 잖아요. 성직자를 모욕하면 안돼요." 라단이 멋쩍게 말했다. "아.. 그런가." 드래마가 말했다. "...그럼, 마을 사람들 중, 방금 말한 사람들 외엔 정 말로, 아무도 살아난 사람이 없는 거야? ...촌장 님도?" "으응? 응... 그래." 그 긍정에 드래마는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얼굴 색이 안 좋아지는 것으로 보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걸 본 디트마는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어.. 드래마?" 드래마는 생각하듯 말했다. "디트마... 너는 이리로 왔고... 세일마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세일마? 그들은 일단 아리움 마노테오나에 자리를 잡았어." "용케 그들이 너희를 풀어 주었군. ...폭행이 심했을 텐데." 여기서 「그들」이란 수비대를 말하는 것일 테다. 드래마는 그것에 대 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디트마는 웃었다. "으응... 세일마와 제시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가족을 잃어 계속 울 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들이라도 더 이상 잔인한 것은 양심에 찔렸을 테지. 바리스 사람들은 결국 피해자니까." "그래...? 재미있군..." 드래마는 미소짓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지은 표정은 미소라기보다는 일그러진 표정이었고, 그것을 스스로도 느꼈는지 드래마의 얼굴엔 혼란스 런 표정이 지나갔다. 민감하게 그것을 눈치챈 디트마는 드래마의 이런 행 동에 충격을 느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을 서둘렀다. 피곤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꼭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드, 드래마...?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시나에 대해..." 하지만 드래마는 눈을 들어 디트마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너무나 가 라앉아 있고 흔들리고 있어, 디트마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디트마 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드래마는 고개를 돌렸다. "디트마, 너는... 좀 쉬는 것이 낫겠어. 얼굴이 영 말이 아니군. 나도 너 무나 피곤해. 그래서 이렇게... 아니... 아냐.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쉬고 내 일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중요한 할 말도 있고..." 그리고 드래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잠자리는 내가 준비하지. 있다가 와." 카탈리가 일어나며 말했다. "아, 저, 그건 제가 준비해도...!" 하지만 드래마는 고개를 젓고 부엌을 나가버렸다. 라단은 그런 뒷모습 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거 참. 루온 루드랫 님은 오늘 저녁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 왜 그러시지?" 카탈리가 말했다. "저어... 아무리 마노테오나도 살던 마을이라, 어느 정 도 정이 들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마을이 불탔는데..." "응? 하지만 루온 루드랫 님은 마을 사람들하곤 상대도 안하고 지냈다 고 디트마가 말했는데, 무슨 정...?" 디트마는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제기랄!!! 엉망이로군..! 젠장...!!" 그는 고개를 들었다. "라단!!" 그런 디트마의 행동에 놀라 라단이 말했다. "으응? 왜?" "너, 저 남자를 절대 「루온 루드랫」이라고 부르지 마! 저 사람은 「드래마」야! 왜 자꾸 저 남자를 「루온 루드랫」이라 부르는 거지?!" "뭐, 뭐라고?" "저건 「드래마」라고!!! 바보 같이!!! 왜 저 사람이 저런 눈을 하지?!!! 저 눈! 저 눈을 봤어?!! 마치 저건,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잖 아?!!! 일개 마노테오나 따위 불탄 것 갖고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저 남자는 마을 사람들과 변변히 인사도 안 하고 지냈어!!! 그게 당연하 지!! 저 사람은 루이티온이니까!! 마노테 따위는 발 밑의 거름으로도 여기 지 말아야 해!!" 디트마는 거칠게 말했다. "헌데, 제기랄!! 저런 표정을 지어?!! 왜?!! 그 가 그 마을과 무슨 상관인데?!! 마을이 불탔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표정을 지어야 하잖아?!! 그게 루이티온인데!! 마음은 한 곳에만 있고, 차 갑고, 올곧고, 무엇에도 상관하지 않는 태도...!! 그게 루이티온이잖아?! 난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두려워했어!!!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자기를 찾아왔 다고...! 아무 도움도 못 주고 방해나 될 텐데...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냐 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라단...!" 디트마는 라단을 보았다. "그게 루이티온이잖아?! 우리들의 주인은 그런 분이었다고!!! 그런데 나 따위가 살아난 것에도 엘에게 감사하고, 고작 마을 사람들의 안부나 묻고,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 그게 무슨 루이트야!!!" "디, 디트...! 그런 말은 너무 무례한..." 라단이 당황해서 말하는데 카탈리가 라단의 팔을 잡고 고개 짓을 했다. 그래서 라단은 디트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고 그제야 고개 숙인 디트마 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는 것을 알았다. "...디트...!" 디트마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젠장...!! 다, 집어치우라고!! 그 따위 마 노테오나!! 차라리 불타 버린 것이 잘 됐지!!! 루온 루드랫 님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거야!! 이제 루온 루드랫 님 은 돌아갈 곳이 없어진 셈이니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영주가 태 우지 않았다면 내가 태워버렸을 거야!! 그런 수치스러운 과거 따위!!! 내 가...!!" 하지만 디트마는 그 이상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눈앞에 너무나 많은 마 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붕대가 풀렸다고 매일 같이 오던 루치마. 헤리마 할머니.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건강이 어떤지 묻던, 촌 장님. 눈앞이 부예졌다. 살던 마을, 바리스가 불탔다는 것을 알고, 얼굴이 굳어버렸다. 눈물 같은 것은 물론 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리스에는 생각 보다 정 같은 것이 없던 거라고, 디트마는 애써서 자신을 다독였다. 어차 피 자신은 고향도 가족도 없던 사람이다. 루온 루드랫 님 때문에 뜻하지 않게 한 마을에 오래 머물러 살았지만... 그렇더라도, 바리스 마노테오나에 대해 아쉬울 것은 없다. 자신은 세일마나 제시마같이 잃은 가족도 없고, 유일하게 중요한 사람은 제일로트에 있으니까. 이런 마을과의 인연 따윈 빨리 정리하는 게 낫다... 그러니, 어서 제일로트로 가서 그를 만난다면... 그 사람이, 엘야시온님과 높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이젠 바리스에 대한 것을 많이 잊고, 설사, 자신에 대한 것조차 잊어버려, 자신을 귀찮게 생각 한다고 해도... 그렇다면 더욱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능력이 있으 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옆에서 그를 보필할 수만 있다면... 루온 루드 랫 님이 바리스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자신에게 확 인시켜 주기만 한다면... 다시 만났을 때, 예전처럼, 그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런데..." 이제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의 눈에 어려 있던 흔들림이, 디트마의 가슴을 짓눌러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디트마는 고개를 숙였다. "...왜..." 어쩔 줄 모르던 라단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디트마 앞으로 다가가, 디트마가 눈물 흘리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그의 어깨를 부 드럽게 어루만졌다. 뭔가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그는, 서투르지만 열심히 추측하며 정성스럽게 위로했다. "저어, 디트... 무리한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 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것도 아니고... 아무리 마노테오나지만, 사 람 마음이라는 것이... 저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자신의 말에 격하게 떨리는 어깨를 앞에 두고 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나는, 아직도 내 고향 힐라토의 그 작은 마을을 꿈에서 보는 걸..." 디트마는 희미하게 흐느꼈다. "아냐...!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어선 안돼...!" 잠자리를 거의 다 준비했을 때 디트마가 들어왔다. 디트마는 전혀 기척 을 내지 않았고, 드래마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그가 들어온 것도 눈치 못 챘다. 드래마는 몸을 일으켰다. "아... 저 침대에서 자도록 해. 나는 잠깐..."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혼자 있고 싶어, 문을 나서는데 디트마가 잠긴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 드래마는 디트마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어째서냐고?" "뭐가...?" 디트마는 화난 눈을 들어 드래마를 쏘아보았다. "왜, 내가 저 침대에서 자야하는 거냐고?!!! 말해 봐!!! 내가 어째서 저 침대에서 자야하지?!" 드래마는 디트마의 험악한 기세에 눈을 찌푸렸다. "그야, 몸도 안 좋은 데 바닥에서 자면, 나중에 상태가 악화돼 주위 사람이 고생이니까. 이봐,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지만, 신경이 꽤 날카로워져 있는 것..." "관둬!!!" 드래마는 인상을 썼다. "디트마...?" "제기랄, 관두라고!!! 그리고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난, 일루티온 디트야!!! 그리고 당신은 루이티온 루드랫이고!!!" 그러더니 디트는 드래마의 팔을 움켜잡았다. "내가 일루티온 디트인 것 처럼 당신은 루이티온 루드랫이라고!!! 그러니까 이따위 한심한 짓거리 다 집어치워!!! 진짜 마노테인 것처럼 나 따위 잠자리 봐주지 마!! 당신은 마 노테온이 될 수 없어!!! 인간사냥꾼이 들이닥쳤을 때, 촌장에게 보여줬던 그 태도!!! 그게 바로 당신이야!!!! 그러니까 거기로 돌아가, 제발!! 약한 표정 따윈 집어치우고, 그리고 그때처럼 나를 후려치라고!!! 내, 내가...!" 디트마의 눈은 붉어져 있었다. "다, 당신은 자존심이 안 상해...?!!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걸 봤잖아...!! 하지만, 난 당신에게만은 존댓말을 쓰지 않아!!! 마노테온 드래마에게는...!! 난 마노테온을 경멸하니 까!!! 난 마노테온 드래마를 경멸해!!! 마노테온 따윈 없어지는 게 나으니 까!!! 하지만 당신은 루이티온 루드랫이고... 내, 희망이야...!! 당신은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지!!! 토굴에서 한 이야기를!!! 그러면 나는 어떡하 지!! 당신만을 보고 산 나는...!!! 그러니, 제발...!!! 그따위 마을, 날 귀찮게 하더니, 불살라진 게 당연하다고, 차라리 내가 태울 걸 그랬다고 말하라 고!!!" 철썩!! 방안에 따귀 소리가 울렸다. 세게 얻어맞은 디트마는 몸을 비틀거렸고, 드래마는 분노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더 디트마를 칠 듯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도대체...!" 화가 너무 많이 나서인지, 가슴 한 구석이 심하게 욱신거렸다. 무언가 가 심장을 반으로 찢기라도 하는 듯, 놀라울 정도로 그곳이 아팠다. 마노테온 드래마를 경멸한다고? 없어지는 게 낫다고? 떨리는 손을 내린 드래마는 이를 악물고 웃는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웃는 표정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오늘 저 녁 내내 이 모양이었고, 드래마는 자신의 이런 상태를 믿을 수 없었다. 그 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난... 난, 너를 친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흥분할 대로 흥분한 디트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없어!! 일루티온과 루이티온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어?!! 불가능한 일이야!!!" 드래마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아프고, 피곤했다. "그래... 그렇군. 하긴... 어쩌면, 이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도... 마노테보다 혹독한 삶을 살고 있던 디트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마노테온이 되길 선택한 일루티온 디트는 어디에도 없었 지... ...난 이곳에 와서 라단에게, 네가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였다는 것을 들었다." "....!!" 디트마는 벌겋게 부은 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으면서 왜 굳이 나를 찾아온 건지 아직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고 싶을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난, 그린 라이트밖에 내지 못하는 고아를 내 친구로 삼았던 것이니까. 네가 내게 반말을 했기에 너를 받아들인 거다. 하지만 일루티온 디트. 나는 누구의 희망도 될 수 없으니까... 너희 힐러들에겐 더 그렇다. 너희들은 나 말고 또 다른 희망을 가질 수 있어. 특히 넌 오렌지 라이트 의 힐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어딜 가든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난 네가 바라는 식으로는 살 수 없고... 앞으로도 그렇다. 난 언제나 이 걸 확실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루온 루드랫'이라는 그림자만을 내게 요구하는구나. 하지만, 난 너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아주 오랜 옛날... 내 힐러들에게도 그 랬듯, 너도 예외는 아니다." 드래마는 디트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침착하고, 그리고 놀랍게도 슬픈 눈이었다. "...우습구나, 일루티온 디트. 왜 너만이 예외라고 생각한 거냐? 오랜 세월, 내 곁에서 있다보면 네가 내 마음을 나눠가져, 나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착각하지 마라. 네 말대로 난, 루이티온 루드랫 이고 그리고, 난... 마인드 컨트롤의 인간이다. 네 말대로, 내게 정으로 옮 겨질 마음 따윈 없어. 네 희망은 내게 너무 무겁다. 너는 내게 바리스 마 노테오나의 촌장과 똑같은 것을 바라고 있어. 그때의 내가 진정한 나라 고...? 그래?" 그 차갑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자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내가? 드래마는 웃었다. 과연... 그렇다. 그것이 자 신이다. 지금도 이렇게 웃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 네 소망대로 그때 촌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난 너의 요구도 거절하겠어." 드래마는 문으로 다가가 문을 나갔다. "...난 루이티온 루드랫이었던 자 로서 네 바람대로 오직 내 뜻대로 살겠다." 그리고 문은 닫혔다. 디트는 멍하니 벽난로의 불을 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불을 쬐었건만 이따금씩 몸이 떨렸다. 디트는 이런 기분을 잘 알고 있었 다. 아주 어릴 적 인간 사냥꾼의 토굴에서 무서운 밤을 지내며 느꼈던 기 분이 이것이다. 아무 데도 의지할 데 없어 외롭지만, 사람 있는 것은 너무 나 무서워 혼자 있고 싶다. 너무나 추워서 그냥 간절히, 따뜻함만을 바라 곤 했었는데... 눈앞에서 주황색의 불꽃이 큰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 불 꽃 속에서 뷰겐트에서 있던 일을 보았다. 자이온에서 일어났던 사건 이후 로 하온 하젠드의 문하가 되어 뷰겐트에서 수업을 받을 때... 오렌지 라이트의 성가는 원래 위테리드(*)에 있지만 하온 하젠드는 위 테리드를 거부하고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뷰겐트에 힐러 양성소를 세웠다. 거기서 수업을 받은 지 몇 년째의 여름인가, 그 깊숙한 산중으로 한 사 람이 찾아와 루온 루드랫에 대한 일을 말해줬다. '...이제 그 사정을 아시겠습니까? 이런 산중에 있으니 속세의 소문에 어두운 것도 당연하죠. 난 당신이 루온 루드랫의 힐러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무언가를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닙 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런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루온 루드랫 옆으로 가서, 그가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본분을 잊 지 않도록... 저 먼, 클로니아의 마노테오나에 묻혀 영영 자신을 잊지 않도 록, 그를 시시때때로 일깨워 주는 일... 요즘 같은 때는 신의도 충성도 모 두 다 하찮게 여겨지는 시대지만 그래도 난, 당신에게 약간이나마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있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 대가로 나는, 루온 루드랫이 무사히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왔을 때....' 한 여름의 햇빛은 녹음 속에 현란했고, 매미는 너무나 시끄럽게 울어댔 다... 타다닥...! ...장작은 매미소리 같이, 크게 소리를 내며 무너졌고, 디트는 흠칫 놀랐 다. 귓가에 어린 소년의 씩씩하고 당찬 목소리가 들렸다. 빛 하나도 없던 토굴에서도, 소년의 말은 여유 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저 벽난로의 불꽃처럼, 메마른 디트의 마음을 태웠던 말이었다. ―웃기는군! 고작 11살 먹은 꼬마주제에 희망이 없어? 흥! 그럼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지. 넌 페이스 힐러지? 그래. 그럼, 나 루온 루 사트의 개인 힐러가 되라. 어때? 영광인줄 알라고. 난 앞으로 프레미어 루 이트가 될 예정이니까... 지금부터 내 개인 힐러가 되면 넌 앞으로 프레미 어 루이트의 수석힐러가 되는 거야. 디트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루온 루드랫 님은 그대로, 그 약속을 지 켰던 것이다. 83년의 자이온에서 누구보다 빛나고 누구보다도 루이트다웠 던 일루티온 디트의 주인... 일루티온 디트의 희망. 루온 루드랫이 희망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런 루온 루드랫 님을 위해 자신의 어떤 것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 했다. 대가 따윈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필요치도 않다. 루온 루드랫 님이 그냥 그 빛나는 모습으로 있어만 준다면... 헌데, 이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저 83년도에서부터 어디가? 디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뇌리에 한 소녀가 떠올랐다. 주인의 인생을 망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희망까지도 부숴 버린 소녀... 디트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소녀에 대한 증오로 청회색 눈을 태웠다. 하지만 그 순간 「드래마」의 음성이 들렸다. ―왜 너만이 예외라고 생각한 거냐? 오랜 세월, 내 곁에 있다보면 네가 내 마음을 나눠가져, 나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착각하지 마라, 일루티온 디트... 아... 하지만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디트는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 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 말이 가슴에서 계속 떠나지 않으며 그 어느 것보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까? 그 이유 역시, 그 소녀 때문일까? 디트 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드래마는 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만큼 시간 이 된지도 모르게 그냥 서 있었다. 시나의 얼굴은 너무나 파리했다. 상처 는 좀 더 두고봐야 알 것 같다지만, 아까 잠깐 보기로 빨갛게 부어서 아 파 보였다. 드래마는 시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약한 열이 있었다. 아침 무렵보다는 많이 내렸지만 그래도 이렇게 계속 열이 안 떨어지는 것도 별 로 안 좋았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잠만 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복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든 고요한 얼굴. 심장이 아 팠다. 드래마는 시나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전할 말이 있는데... 우린 내일 왕궁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 여 섯 증인의 의식 때문에. 그래서 난 네가 엘야시온님과 라단의 집 거실에 서 무슨 이야길 나눈 건지, 한층 더 궁금해졌지. 그리고 디트...가 왔어. 너와 잠깐 인사를 나눴다고 했는데... 디트도 네 가 마노테온이 아닐 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어. 무척 좋아하던걸. 그는 내가 다시 내 신분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식사할 때 그 가 말하더군. 나는 너 때문에라도 내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내겐 너 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지. ...언제나 있던 쓸데없는 미련이라고 생각 했는데. 사실 그는 언제나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 드래마는 웃었다. "식탁에선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디트의 말 대로 넌 나의 책임인데도 말이야. 너를 구한 그 순간부터 넌 나의 책임이 었지. 어리석게도 계속 회피했지만... 이젠 그것을 잘 알아. 정말로." 그리고 드래마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부근에 손을 댔다. "그러 니... 이 아픔이 좀 그쳐주었으면. 왜 이렇게 하루종일 이곳이 아픈 걸까? 너무 아파서... 팔이 저릴 정도야..." 하지만 그는 아픔을 참은 채 미소지었다. "휴우... 그래. 애초에 너를 구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거야. 그게 아니 라면... 네가 형편없는 여자아이여서... 너를 계속 미워할 수 있었다면... 너 를 철저히 이용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드래마는 시나를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어떤 부분에서 넌 나 자신.. 혹은 내 왕녀... 그녀와 많이 닮았어. 이 머리색과... 그리고..." 그의 뇌리에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눈빛..." 그 침착하고 슬픈 듯한 눈빛이. 하지만 곧, 드래마는 고개를 숙이고 웃고 말았다. "하하... 아냐. 내가 방금 무슨 소릴 한 거지...? 미친 거로군. 미쳤어. 그 래서 어쨌다는 거지... 네가 내 왕녀와 닮았으니, 이젠 모든 게 좋지 않나 이건가? 드디어 내 생각이 여기까지 타협점을 찾아냈어.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는 타협...! 왜냐하면 난...!" 드래마는 괴롭게 말했다. "절대로 내 왕녀를 잊을 수 없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미칠 정도로 계속 생각하는 것은...! 시나...! 그렇게 되면, 내 가엾은 왕녀는 어떻게 될 지...! 내가, 다른 사람들의 희망을 위해 내 신분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왕 녀는... 내 아내는, 너처럼 사람들과 재치 있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너처럼 웃을 수도 없는데...! 그럼 그녀는 어떻게 될지...! 너와 디트는 다른 희망 을 찾을 수도 있지만, 내 왕녀는 나 외엔 없는데... 그것만이 지난 23년간 계속 떠올라, 나는 차마 그녀를 배신할 수 없었는데... 하지만, 난, 지금... 이곳 제일로트에 와서... 정말, 아무에게도 필요 없던 삶을 살았던 건지.. 오직 내 왕녀에게만 필요한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디트에게 그 말을 듣고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건지...! 바리스가 불탄 것에 왜 이렇 게 절망하고 있는 건지...!! 마인드 컨트롤이 온통 깨져버려서... 이젠, 어떻 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게 됐어...!" '드랫...!!' 시나는 그의 말을 들었고, 그리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싶 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상대는 너무나 차가웠다. 시나가 말했다. '제발, 눈을 뜨게 해줘...!! 제발...!' 상대방은 조용히 말했다. '...깨어나고 싶다면, 그 이름을 받아들여. 그러 면 눈을 뜨게 해주지... 어쨌든... 난 네가 필요하니까.' '...어떤 이름을!?' '...레겜.' '싫어!!! 안 된다고!!! 말했듯, 그건 너무 어린애 같은 짓이야!!!' 상대방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어린애가 아냐!! 어른인 척 하지 마!! 안 그러면 평생 상처가 벌어진 채로 놔둘 수도 있어!! 맛을 보여줄 까? 평생 잠만 자도록?!!' 시나는 눈물지었다. '널 어린애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어른인 척 한 적도! 단지, 난... 그 래...!! 낫고 싶어. 아프거든... 몸도 아프고, 다 아파. 그러니, 제발 날 놔 줘...' 상대는 웃었다. '흥...! 아프다고? 그래. 낫게 해준다니까. 그 대가로 넌 레겜을 좋아하는 거야. 좋지...?' '싫어!!!' 하지만 다음순간 후회했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어깨의 아 픔이 한층 더 심해졌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 그리고 그 보다 더 심한 아픔은... '시나, 나의 아내는 어떻게 해야할지...!' 눈을 뜨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무엇을 바치고 라도, 이곳에서 나가, 그를 다시 한 번 더 찾아서... 그것이 자신의 본능 아닌가? 하지만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상대는 시나를 영원히 이대 로 놔둘 것이다. 이렇게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줄 수 없는 상태로... 마침내 시나는 눈물을 흘렸다. '...네...!! 네 소원대로 할게!! 알았다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준이 나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하지만 넌, 언제나 그랬듯 후회할 거야...!!!' 상대는 웃었다. '후회는 없어! 색다른 마인드 컨트롤이니 조심해. 하하 하...!' 다음 순간, 심장에 화인이 찍힌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가슴을 관통했 다. "아아악...!!!" 시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나?" 시나는 눈을 떴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은빛 머리칼... 진한 남빛 눈동자... 너무나 슬픈 빛의 눈동자였으나 거기엔 이젠 놀란 빛 과 함께 걱정하는 빛이 담겨있었다. 시나 자신이 미울 텐데... 하지만 이젠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다. 언제나 지나쳐보던 눈이 이제 겨우 자신을 「보 고」 있건만...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시나는 가까스로 손을 들어 그 의 손을 잡았다. "...드, 드랫... 이걸 기억해 줘요! 난...! 다, 당신을 계속 찾아 다녔어요!! 집에서 나와, 숲을 헤매며... 아무리 무서워도...! 아무리 달이 날 삼킬 듯 노려봐도... 그러니 제발 잊지 말아요!! 혹 내가 이 말을 잊더라도...!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더라도!! 나를 버리지 말고... 나를 믿어줘요!! 나는 오 직...!" 하지만 시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달군 쇠로 지지는 듯한 지독 한 아픔이 또 한 차례 왔던 것이다. 상처와, 마음과, 그리고 심장이, 타는 듯 아팠다. 시나는 아픔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소리쳤다. "...너는, 후회할 거야...!! 절대로!! 왜냐하면, 나는 너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이 절규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후로는 밝은 빛이 있었고, 아픔은 씻은 듯 사라졌다. "힐라토님, 이걸 떨어뜨리셨습니다." 한 시종이 자신을 부르며 무언가를 두 손으로 바치자 레이서스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시종이 들고 있는 것은 목각 펜던트였다. 하류계급이 만 든 것이라 이음새가 조잡한지 자꾸 풀려서 잊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있 는데 또 떨어뜨린 것 같았다. 처음 모양 그대로 바꾸고 싶지 않지만, 아무 래도, 잊어버리기 전에 줄을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온 하카단이 시종에게서 목각 펜던트를 받아 레이서스에게 건네주었 다. 그것을 목에 거는 대신 소매에 집어넣은 레이서스가 말했다. "하카단, 이것에 어울릴 만한 줄을 찾아와 봐." "어떤 것으로 원하십니까?" "글세... 목각에 어울릴 만한 것으로... 있는 대로 가져와 봐. 직접보고 고르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던 길을 걸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온 칼리스나 에게 가는 길이었다. 에스코트를 해야 했던 것이다. 걸으며 레이서스는 아 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쨌든, 루온 루헬리옷에겐 축하선물로 자네가 말한 것보다 좀 더 좋은 것을 찾아봐. 몬스터가 그토록 급증했는데도 힐라토의 변방이 「펼 쳐진 땅」에서 그럭저럭 무사할 수 있던 것은 루온 루헬리옷이 중앙귀족 인데도 변방까지 가서 지켜줬던 공이 크니까. 엘의 은혜로 그가 「높은 마음」을 가진 덕분이지. 하지만 높은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에브리나의 편한 직책을 마다하고 힐라토를 위해 그 힘든 일을 택한 것은 칭찬해 줘 야 마땅하지. 진작부터 그의 작위를 올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그의 결혼에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더불어 루온 루헬리옷의 가 문과 그의 장인 가문 전체에 줄 하사품도 생각해 봐. 그 명예를 보면 수 도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루이티온도 생각을 달리 먹겠지." "네, 알겠습니다." "작위와 영지에 대한 것은 신년에 맞춰도 될 거야. 신중하게 하는 것이 좋을 테니..." "네." "그리고..." 그때, 반대쪽에서 율르스가 다가왔다. "어, 형!! 오랜만이야! 요즘 얼굴 보기가 참 힘든걸! 사냥터에도 보이질 않고! 누님께 가는 거야?" 레이서스는 자신의 처남이 될 자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고." 율르스는 레이서스 옆에서 걸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데... 그나저나 누님이 말하던데... 형이 누님과 함께 클로니아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그.... 뭐라더라? 「여섯 증인」? 그걸 하게 됐다면서? 엘야시온님도 어디서 괴상한 것을 찾아내서. 덕분에 남들 보는 앞에서 하누카 날과 배우자에 대한 찬양을 읊어야 하게 됐다면 서? 쯧쯧쯧... 그런 거야 보석 교환할 때나 몰래 하면 되는데. 참 안 됐군, 형. 하지만 그래도 어떡하겠어? 엘야시온님이 하신다고 하니, 쯧쯧... 힘 내, 형." 각 세계, 각 계급마다 여자에게 청혼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유 풍습이 있다. 힐라토 같은 경우는 여자에게「시」를 지어서 바치는 것이다. 반면 칼리안은, 청혼을 하기 위해 사막에 나가 가장 가치 있는 몬스터를 사냥 해 여자의 가문에 바치는 관습이 있는데, 그런 세계의 율르스로서는 힐라 토의 관습이 낯간지러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율르스는 레이서 스를 동정했다. 사람들 앞에서 여자를 위한 「시」를 읊어야 한다니...!! 쯧쯧...!! 율르스는 레이서스가 너무 안돼 보여 위로했다. "하지만 형은 이미 그 「시」를 지어놨지? 누님과 약혼한지도 벌써 몇 년이고, 곧 보석을 나눌 테니... 그러니 골치 썩힐 일없이 눈 딱 감고 암송 만 하면 되잖아? 힘 내." 이런 율르스의 위로에 레이서스는 억지로 웃었다. "...그래." 하지만 사실인즉슨 레이서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들 다 보는 앞에 서 「시」를 읊어야 한다는 것도 그랬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 었다. 그래서 엘야시온님이 칼리스나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칼리 스나는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레이서스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아. 너무 경솔하고 멍청한 짓을 했지.' 레이서스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아내를 맞기 위해 시를 준비하는 것이 야 힐라토 관습이니, 율르스 말대로 그 동안 시간 있을 때마다, 고민하며 시를 지어 놨지만 문제는... 레이서스는 인상을 썼다. '그걸 나도 모르게 다른 소녀 앞에서 내뱉고 말았다는 거지! 정말이 지...! 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그걸 짓느라고 몇 년을 고생했는 데!' 그랬다. 그 소녀가 죽은 줄 알고... 혼 강을 바라보며 그녀를 안고 정신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 하필이면 그 시의 내용이었다. 물론 세부 적인 내용은 전혀 틀리지만... 하누카 날에 대한 자신의 중요한 생각을 몽 땅 다 다른 여자 앞에서 말하고 말았다. 뭐... 말했다고 해도, 그 소녀는 못 들었을 테고... 레이서스는 한층 더 인상을 썼다. '못 들은 것이 다행이지. 그 소녀가 정말 힐라토 인이었다면, 하누카의 날 어쩌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내가 자기에게 청혼하는 줄로 알았을 테니.' ...다른 사람도 그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니 율르스 말대로 「두 눈 딱 감고」 만들어 놓았던 시를 그대로 외워도 될 테지만... 칼리스나에게 너 무나 미안한 일이다. 다른 여자에게 이미 말한 생각을 아내가 될 칼리스 나에게 들려주다니...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오늘 오전 내내 책상 앞에 앉아 끙끙거렸다. 시를 전부 다 말한 것은 아니니 하누카의 날에 대한 부분만 새롭게 짓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인정하듯 단 시간에 시를 지어낼 만큼 시인의 기질은 레이서스에겐 없었다.(지금의 시도 짓는데 몇 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오전을 다 바쳤어도 한 구절도 건진 것은 없다. 「여섯 증인」의 의식은 18일에 치러질 예정이니 그때까지 기간은 고작 일주일 남짓... 레이서스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너무 길게 쉬어 율르스가 놀 란 눈으로 봤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자신을 맞아 밝은 표정을 짓는 칼리스나를 보며, 레이서스는 그렇게 생 각했다. 아스테린은 신경질을 냈다. "아냐! 아니라니까! 그런 빨간 색은 나한테 안 어울린다고 했지?!! 당장 떼!!" 아스테린의 몸치장을 돕던 시녀는 쩔쩔매며 아스테린의 머리카락에 달 아 놓은 보석을 뗐다. 아스테린은 일주일 전 만해도 이 보석을 매우 마음 에 들어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백한 심술이었고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것은 오후에 엘야시온에게 불려갔다 온 직후부터였다. 그 때부터 시녀들은 아스테린의 신경질을 감당해야 했다. 아스테린은 시녀가 붉은 보석을 뗐어도 여전히 무언가에 신경질을 냈 다. 그리고 마침내, 시녀들의 모습 자체가 눈에 거슬렸는지 몸치장을 마치 자마자 시녀들을 모두 방에서 쫓아냈다. 시녀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갔는데 그것이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 아스테린에게 불려와 있 던 루사벨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 엘야시온님이 말씀하신「여섯 증인」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스테린은 입술을 잔뜩 내밀었다. 자이온, 루세의 예절교수가 정숙한 귀족 처녀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중에 하나로 손꼽은 것인데, 아 스테린은 기분이 나쁠 대로 나빠 있었으므로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함을 표했다.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라고! 정말 엘야시온님은 뭐야!! 제일 높 은 분이라고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만 하고!! 루사벨라...! 글세, 엘야시온님 이 내 결혼식에 「마노테온」을 부른대..!!"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08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24 06:22 읽음:1807 관련자료 없음 ----------------------------------------------------------------------------- <제 43막. 심장을 찢다.> - 3 그러더니 아스테린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얼마나 매몰차게 구시는지...! 꼭 마노테온을 부 르고 말겠다는 거야! 세스틴 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기만 하 고...! 도대체 뭐야? 마노테온을 결혼 손님으로 청하는 왕족이 어디 있어?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무시할까? 분해!!" 아스테린은 눈에 눈물이 맺혀 씨근댔고 루사벨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스온 아스테린 님... 「여섯 증인」이라는 것은... 제가 알기 로는 무척 명예로운 의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왕족이상의 계급 만이 결혼식에 「여섯 증인」을 초청할 수 있거든요... 마노테온이 결혼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스테린 님의 말씀대로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루사벨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루사벨라와 나는 마음이 잘 통해!" 루사벨라는 미소지었다. "...네. 저도 마노테온이 참석하는 것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지만... 그 래도 생각해 보세요, 스온 아스테린 님. 그 반면 아스테린 님은 힐라토님 과 스온 칼리스나 님의 맹세... 그리고 그 외 각 계급이 자기들의 식대로 하누카의 날에 대해 말하고 맹세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물론 그 맹세의 말들은 그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아스테린 님의 결혼식에도 영향을 미쳐 좋은 축복이 되겠지요." 갑자기 아스테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잠깐! 뭐라고? 레이 오빠가 맹세의 말을 할거라고?" 아까 엘야시온이 설명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마노테온이라는 말에 다 른 생각 할 겨를도 없었지만 이렇게 루사벨라가 차근차근 말하니 그제야 생각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이 자기 말에 흥미를 보이자 「여섯 증인」 의식 이 가지는 이점을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는 아스테린의 표 정은 점점 밝아졌다. 사실 그녀가 클로니아로 시집오며 아쉬웠던 것이 있 다면 그것은 상대 남자에게서 시를 받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클로니 아 인은 자기 부인을 위한 청혼, 혹은 맹세 선물로 얼음으로 만든 조각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위한 「마인드 컨트롤의 말」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시보다는 딱딱하다. 세스틴이야 마인드 컨트롤의 능력이 있으니 실제로 그때 이후부터는 아스테린만을 사랑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낭만 으로 따지자면 시가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루사벨라의 말 대로라면 비록 아스테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 어도 그래도 결혼식에서 시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레이 오빠의 시를. 그 생각이 들자 아스테린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흐응. 그것 참 재미있네? 루사벨라 말을 들으니 괜찮게 들려. 증인을 할 사람은 각 계급마다 한 쌍씩이라고... 흐응... 그럼 엘야시온님은 어떡하 지?" "그 자리엔 스온 마리스 님과 스온 엘스제 님이 서서 증인되시겠지요." "흠... 그 여자가 내 결혼식 시중을 들어준다고? 깔깔... 괜찮군. 제 2계 급에선... 레이 오빠와 칼리스 언니.." 아스테린은 웃었다. "그럼, 제 3계급 에선? 아마사...인가? 그 루온 루헬리옷이라는 루이트하고 말이야." 루사벨라는 웃었다. "아니오... 아피네스님의 시녀장은 힐라토로 돌아갔습니다. 루온 루헬리 옷이 44세니까요. 루온 루헬리옷은 변방에서 몬스터 퇴치를 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하누카의 날을 치르지 못했는데, 이젠 미루지 못하게 된 거 죠." "흥.. 그래? 고작 몬스터 퇴치하자고, 한계까지 와서 겨우 하누카 날을 치르다니... 참 무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글쎄요..." 루사벨라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스테린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그녀 로서는 기쁠 따름이었다. 엘스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엘야시온에게 다녀온 이후로 소년은 내내 걱정을 했다. 엘야시온이 말한 「여섯 증인」이라는 것이 구 체적으로 무언가 왕궁 도서실에 가서 조사를 해보고,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했는데도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루온 루바인..." 엘스제는 마리스를 맞으러 가기 위해 방에서 나서며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종복에게 말을 걸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마리스를 위하여 「노래」를 불러주면 마리스가 괜찮게 생각할까? 난 아직도 내가 지었던 노래가 부끄러운데..." 키가 엘스제보다 두 배나 더 큰 루바인은 소년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 다. "...예전에 한 번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 기억으론 스온 마리스 님 이 웃어주셨다고 한 것 같은데요." 엘스제는 볼을 붉혔다. "글세...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은 또 다르니까. 난 마리스가 나 때문에 창피 당하지 않았으면 해. 저어... 루온 루바인?" "네." "어떨까? 내가 한 번 노래를 불러 볼 테니, 경이 판단해 보지 않겠어? 경도 「노래」를 부른 적이 있으니, 잘 알 것 아냐? 내 노래가 어떤지 말 해 줘. 마리스 외 다른 사람에게는 들려줘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미 두 번째니까..." 루바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건 불가 능합니다. 저 자신, 그런 것을 판단할 만한 소양도 없고... 「하누카의 노 래」는 오직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서만 불러야 합니다. 그건 두 번째라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시무룩해진 엘스제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까 책에서 본 바로도... 그래서 「여섯 증인」 의식이 가 치가 있는 거라고... 하도 답답해서 그런 말을 해봤지만, 역시 안 되겠지." 루바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엘스제를 보며 미소지었다. 심약한 것이 흠이나 그래도 매우 총명한 스아디온이었다. 지난 13년 동안 스온 엘스제 를 모실 수 있어서 좋았다... 루바인은, 노래 가락을 중얼대고 있는 엘스제의 회색 빛 머리카락을 보 았다. 회색 빛 머리칼과 회색 빛 눈동자. 그리고 차기 엘야시온의 배우 자... 저 작은 어깨에 막강한 권력이 놓여있다. 루바인은 어젯밤 힐라토의 하온 하겐트와 만났던 일을 기억했다. 루바 인이 아는 바로 하겐트는 분명 엘야시온과 빈번한 만남을 갖고 있다. 단 순한 종교적 만남 이상의, 어떤 더욱 친밀한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덕 분에 최근 몇 년간 각 세계 여기저기에서「힐라토의 하온 하겐트」는 꽤 유명인사가 되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그에게 별 관심 두지 않던 루바인 조차도 사람들의 모임에서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었던 것이다. 이번 유리궁전의 연회에서도 루바인은 자신의 눈으로 엘야시온과 하온 하겐트 의 친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힐라토 최연소 수네드리온 회원이라고는 해도 루바인 자신보다 훨씬 지위 낮은 그가 루바인 앞에서 전혀 꿇리는 기색 없이 여 유 있게 만남을 청하고 이야기하기를 청했다. 맨 처음엔 카이러스의 제분 산업과 무역에 대한 잡다한 말들을 하기 원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훨 씬 심각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자신과 엘야시온의 친분을 은근히 강조하고 자신의 명성을 강조하는 모양이 눈꼴시기는 했지만... 말하는 것 은 이치에 맞는 것 같았고, 머리회전도 빠른 사내 같았다. '하지만... ...무슨 일을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 엘야시온님은.' 각 세계에서 급증하고 있는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한 「근본적인 개 혁」. 그것을 위해 「정벌」에 가담하라고? 하온 하겐트의 말에 루바인 자신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내용이 아주 흥미롭군요. 그런 식으로 게엔나를 열 수 있다니...? 확실히... 그렇게 하면 게엔나에 존재하는 우리 인류의 공적도 끌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마노테온 슬러터」가 아닙니까? 당신, 제정신입니까? 엘야시온님이 그것을 명령했 다고요? 믿을 수가 없군요. ...게다가 당신, 내게 와서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뭡니까? 내가 그것을 허락하리라 생각합니까?' 하지만 하온 하겐트는 여유 있고 말주변이 좋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엘야시온님의 의지입니다. 칼리안에서 유리 검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 '칼리안 율리시스님의 개인적 취미라고 들었습니다.' '애초에 그 취미를 권한 것은 엘야시온님이었죠. 게다가 아가트 개정판, 「군비 편」을 보셨나요? 다른 때보다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셨나요?' '글세... 저는 당신 같은 서기관이 아니니까 꼼꼼하게 살피진 않습니다. 그저 당신들이 아가트를 해석한 것을 그대로 따를 뿐.' '그렇습니까? 그것만 해석해 보면 금세 알 겁니다. 수하의 서기관에게 명해서 그 부분을 더욱 중점적으로 해석해 보시죠. 제가 말한 식으로요. 엘야시온 가디엘 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다음 대의 엘야시온님에게 게엔 나 정벌을 명하셨는지. 신의 높은 뜻을 인간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 뜻은 오직 엘야시온님을 중재로 해서 우리 인간에게 내려오는 것... 그러므로 엘야시온님의 의지는 엘의 의지. 당신은 이것을 거슬리겠습니까? 게다가 이 일은 엄밀히 말해 「게엔나 정벌」이지 마노테온 슬러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 경처럼 말할 테고...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일을 진행한다는 것은 무리라 지금까지 비밀로 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사를 아는 자들은 왜, 어떤 대가를 치르고 라도 게엔나를 정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몬스터와는 절대 공존해서 살 수 없거든요. 하지만 장로들의 유전을 수행하는 각 세계 수네드리온으로서는 지금 엘야시온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칫 공개 탄핵을 할 수도 있는 상황... 그 러므로 이것을 당신에게 와서 말하는 이유는 당신이 스온 엘스제 님의 종 복으로서, 그리고 카이러스 수네드리온의 명예 의장으로서 엘야시온님의 의지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겐트는 은밀히 말했다. '알겠습니까? 당신은 카이러스의 수네드리온을 엘야시온 가디엘 님 편 으로 이끌어 주면 됩니다. 그리고... 엘야시온님은 당신이 그 분을 따를 경 우의 노고를 치하해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줄 준비도 되어있 다고 넌지시 말씀하셨죠.' 그 말에 루온 루바인의 눈이 빛났다. 루온 루바인은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른다.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지만 결국 하온 하겐트가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마노테온 슬러터」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을 지지하라. 루온 루바인은 손에 낀 금반지를 보았다. 「가장 원하는 것」이라... 엘 야시온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단 하나지 않은가? "루온 루바인, 잠깐... 그쪽이 아냐. 서쪽 통로를 통해서 마리스에게 가 자고." 루바인은 퍼뜩 상념에서 돌아왔다. 스온 엘스제는 어느새 다른 쪽 통로 로 들어서고 있었다. "스온 엘스제 님? 왜, 더 먼길로 돌아가십니까? 이쪽이 더..." "아니...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보고 싶은 것이 무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루바인은 결국 묵묵히 소 년을 따랐다. 헌데 소년은 한참을 걸어가다 왕족들의 초상화가 즐비하게 늘어선 복도에 도착해 거기 걸린 초상화를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그리 고 한 초상화 앞에 발을 멈춘 채 속삭였다. "하아... 멋진 은발이야... 루온 루바인? 이 분이 전대 클로니아 파이오 니온, 클로니아 세렌시스님이지?" 루바인은 촛불 빛에 비친 초상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모피로 몸을 감싸고 차갑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잘생긴 파이오니온... 은색 눈 이 너무나 무표정하다. 실제 인물보다 더 차가운 느낌이다. "...맞습니다. 이 분이 클로니아 세렌시스님입니다. 이 분을 보고자 이곳 으로 오셨습니까?" 엘스제는 조금 힘없이 미소지었다. "응. 사실은 이곳에 도착한 후로... 가끔 여길 와보고 있어. 전대 클로니 아 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예전부터 궁금했거든. 그런데 언제 봐도... 낮에 보든, 밤에 보든... 이분은 굉장히 침착하고 강해 보여..." 루바인의 굳은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다. "저하께서 이 분의 나이가 되셨을 때, 그때 다른 이들이 저하의 초상화 를 보고 저하와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저, 정말...?" "네." "그래. 그렇게 된다면 참 좋을 거야. 헌데, 그때... 마리스도 그렇게 생 각할까?" "...물론입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엘스제는 얼굴을 붉히고 기쁜 듯 미소지었다. 헌데 그때, 복도의 한 구석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루바인은 눈을 찌푸리고 뒤 돌아보았다. "...누구냐!" 그러자 한 남자가 복도 밝은 곳으로 나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 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곧 겸손하게 고개를 깊게 숙이고 말했다. 남자 목소리치고는 이상하게 카랑 거리는 목소리였다. "..아, 놀라게 해 드 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스온 아피네스님의 힐러로, 일루티온 란사드크라 고 합니다. 오늘 처음으로 유리궁전에 온 지라 길을 잃어서 이곳에 있었 습니다." "...스온 아피네스님?" 루바인은 불쾌감에 미간을 모았다. 루바인은 그 이름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차갑게 힐러를 일별하고 엘스제에게 말했다. "이제 스온 마리스 님께 가는 것이 좋겠군요." 엘스제는 다른 사람이 자신과 루바인의 말을 들었다는 것에 얼굴을 붉 히고 있었다. "그, 그래.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떠나기 전, 엘스제는 머뭇거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스온 아피네 스의 힐러... 그 불행한 왕녀의 소문은 워낙 유명해 엘스제도 안다. 힐러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엘스제가 말했다. "..저어, 저쪽으로 가서 오른쪽 복도로 가도록 해. 거 기 시종들이 있으니까, 길을 알려줄 거야." 힐러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매우 친절하신 스아드님.. 엘께서 함 께 하시기를...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루온 루바인과 스온 엘스제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한참 후, 란사드크는 고개를 들었다. "훗... 친절하고... 재미있는 소년. 저 어린것이, 자기 약혼녀의 옛 약혼자에게 질투를 느끼는 게 귀엽군. 안 그러냐, 겐트온?" 그 말에 더 깊은 어둠에 숨어 있던 겐트온이 밝은 곳으로 나왔다. "아버지, 제발...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복도라도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가면도 안 쓰시고..." 란사드크는 히죽 웃었다. "흥... 그래서 쾌감이 든단 말이지." 그러더니 그는 겐트온 보란 듯 후드를 뒤로 제쳤다. 겐트온은 놀라서 소리쳤다. "아버지...!" 란사드크는 촛불에 드러난 은발이 음산하게 빛나는 가운데 말했다. "시 끄럽다." 그는 벽에 걸린 초상화 가운데 하나 앞으로 가서 그걸 보며 말했다. "귀찮게 하지마. 네가 내 상태를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나도 내 꼴을 잘 알고 있으니까. 흥...! 봐라! 난 이 초상화만큼이나 생명을 잃고 박제가 된 기분이다. 한때는 이 초상화와 꼭 같도록 아름다웠는데...! 아름다움은 잃고 이 딱딱함만이 남았지!" 란사드크는 자신의 흉측한 피부를 만지고 혀를 찼다. "지금은 아주 망 쳤어." 겐트온은 인상을 썼다. 가끔 란사드크는 주위 사람이 혼비백산할 일을 하고 태연해 하곤 했다. "아버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당장 후드를 쓰세요!" 하지만 란사드크는 반쯤 뒤돌아보며 은빛 눈으로 웃었다. "...재미없게 굴지 마라. 난 나의 새로운 몸을 보러 온 거다. 그러니 딱딱대지마. 이 빌 어먹을 몸을 하루라도 빨리 벗고..." 란사드크는 자신의 몸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엘스제가 서 있던 초상화 앞으로 발을 옮겼다. "이 몸을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떠냐? 아까 그것 의 말대로, 이 남자는 참으로 멋지고 강해 보이지? 비록 그림이라도. 그렇 지 않아...? 자, 그러니 잠시만 이대로 나를 놔두고... 귀찮게 하지 말란 말 이다. 넌, 저 루온 루바인과 만난 이야기나 계속 해봐. 저 거만한 루이트 가 어떤 의견을 내 놓았다고?" 겐트온은 인상을 썼다. "경이... 경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 로... 경은 자신의 주인 찾는 일을 공식적인 일로 만들어 달라 부탁하더군 요. 아까 그가 끼고 있던 금반지를 보셨죠? 그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 금 반지를 선물로 받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오늘 반지를 끼고 나온 것은 자 신의 그런 생각을 큰집에게 간접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제 가 엘야시온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초상화의 표면을 쓰다듬고 있던 란사드크는 웃었다. "그래? 대단하군. 가디스가 금지한 것을 정면으로 요구하다니. 당돌해. 하지만 루이티온 계급이 주인에게 품는 충성은 알아줘야 하지. 벌써 몇 십 년째인데... 아직도 그런 것을 요구할 정도면... 여기 이 자와 비슷할 정 도야. 지긋지긋한 마인드 컨트롤... 그것 때문에 허비한 세월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것을 아예 싹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다. ...흥! 빌어먹을 것들. 저 미친 루이트는 자기 잃은 아들도 아니고 주 인을 찾아달라고 했단 말이야. 빌어먹을 마인드 컨트롤. 뒈지는 게 나을 것들!!" 그러더니 란사드크는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반은 썩어버린 얼굴이 불빛에 확연히 들어 났다. "하지만 뭐...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이용하기엔 좋지. 그는 샤일라테에 게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니, 이것으로까지 그를 얽어맨다면 꼼짝 못할 거야. 그러니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 이번 대의 엘야시온이 안 된다면, 다 음 대의 엘야시온이라도 그 소원을 들어준다고... 후후..." 그리고 란사드크는 초상화를 또다시 쓰다듬었다. "흠. 어떠냐, 얼음의 왕이여?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네가 네 연인을 위하여 쓸데 없는 짓을 한 덕분에 아주 골치가 아팠고, 이 긴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내 인내는 네 마인드 컨트롤보다 더욱 길었어. 그래, 너와 네 종속자가 이 곳으로 온다고? 그래? 저 가증한 가디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란사드크의 눈에 증오가 내비쳤다.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지지 않을 카드가 내겐 많지! 그러니, 오히려 반갑다. 나도, 이 왕궁에서 너를 기다 리마. 아마사를 위한 마인드 컨트롤을 거부했던 네가, 그 긴 세월이 지나, 과연 어떤 종속자를 골랐는지...! 과연, 너의 그 고귀한 심장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겼을 것인지! 이 썩어 가는 눈으로 직접 보고, 이 손으로 네 심 장을 꺼낼 삼킬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러니 어서 와라, 나의 원수여...!" 그리고 란사드크는 이를 갈며 초상화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그 분노 를 자기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겐트온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 드래마는 퍼뜩 잠에서 깨었다.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듯 했다. 언제 잠이 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방안은 조용하고 시나는 여전히 창 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주위는 평화로웠지만, 무언가... 이상한 꿈 을 꾸었던 것 같다. 헌데 그때 갑자기 가슴에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왔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드래마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드래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침대에 기대서 신음했다. "...으윽.." 검기를 쓴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하루종일 심장이 아팠던 것인가? 후유증이든 뭐든, 심장이 발기발기 찢기는 그 느 낌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온 몸이 떨리는 가운데 드래마가 방의 창문이 열린 것을 눈치챈 것은. 어이가 없었다. 이 추운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드래마는 환한 빛이 창문에서 비춰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새벽의 빛이나 아침의 빛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했 다. 드래마는 비틀비틀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꺼운 모피로 된 커 튼을 가까스로 제쳐 창 밖을 보았다. 그리고... "...맙소사." 드래마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건 또 환각인가? 창문 밖으로 바리스 마노테오나의 초입이 보였다. 눈이 많이 내리는 마 을.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불탔다고 했는데...! 드래마 는 걸어나갔다. 시녀들과 디트마가 잘못 안 것이었나? 마을은 너무나 생 생했다. 어느새 그는 마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누군가 그와 몸을 부딪혔다. "...죄, 죄송합니다. 드, 드래마님." 상대 여자는 드래마와 몸을 부딪힌 것에 겁을 먹고 그렇게 사과했다. 일전에 마차 밑에 깔린 모녀를 보고도 냉랭한 얼굴로 비웃었기 때문에 사 람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드래 마는 무감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말 따윈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말 한마디면 여자는 몹시 안심할텐데... 드래마는 그냥 몸을 지 나쳤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은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고, 짧은 봄과 여 름이 오고 가을이 왔다... 눈 덮인 숲 속. 한 소년이 상처를 입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드래마는 자신이 방금 죽 인 오크를 내려다보았다. 드래마는 우울하게 말했다. "꼬마, 함부로 숲에서 돌아다니지 말아라. 엘의 시기도 못 넘기고 죽고 싶지 않다면." 소년은 눈물로 반짝이는 눈에 동경을 담고 인사를 했다. "네.. 가, 감사 합니다. 드래마님!" 드래마는 웃었다. 감사라니? 무엇에 감사? 자신은 우연히 소년과 몬스 터를 발견했고, 소년이 인간이라는 데에 몬스터를 죽였다. 우연이 아니라 면 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혹은 심심하지 않았다면 하지도 않았을 일. 하 지만 소년은 드래마의 웃음에 더 기쁜 표정을 지었고, 드래마는 그를 비 웃고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의 집에 앉아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있었다. 저녁 무렵... 잠들려는 참이었고, 귀찮았다. 하지만 문을 열었 다. 거기엔 청회색 빛 눈동자의 남자가 있었다. 바깥의 눈처럼 새파란 얼 굴. 떨리는 눈빛. 그러면서도 그는 웃었다. 그의 말은 추위 때문인지 드래 마의 차가운 얼굴에 겁을 먹은 것 때문인지 몰라도 몹시 떨렸다. "...루, 루온 루드랫 님. 저, 전 일루티온 디트입니다. 저, 저어... 오, 오 랜만..." 생전 처음 보는 애송이. 저 자가 말하는 「루온」은 얼마나 신경에 거 슬리는가? "꺼져라." 그가 디트를 보고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바깥이 어둠이라는 것은 드래마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는 또 왔 다. 그대로 문 밖에 서 있다가 얼어죽을 뻔한 것을 촌장이 데려가 재웠다 는 것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드래마는 일을 나가기 위해 연장 을 챙기는 참이었고, 디트는 뒤에 우물쭈물 서 있다가 갑자기 드래마 앞 에 나섰다. "...그, 그 손이 뭐야! 사, 상처투성이잖아! 상처가 나도 치료를 않는 거 야? 그 손 이리 내!!" 상대의 버릇없는 행동에 짜증이 났다. 덜덜 떨고 있는 겁쟁이 주제에 명령조인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를 확 밀쳐내려는 찰나, 디트는 바랑에서 상처에 바를 약초와 붕대를 주섬주섬 꺼내며 고개를 들고 말했 다. "...저, 저어... 내, 내 소개를 다시 하지, 드래마. 난, 마노테온 디트마..." 그는 약초를 어디다 놓아야 할지 모르다가 옆에 탁자에 놓고 후드를 뒤로 젖혔다. "보, 보시다시피.." 짧은 밀빛의 머리칼... 드래마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재밌다」는 감 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숲을 걷고 있었다. 어두운 숲... 대낮에도 홰가 필요할 만큼 축축하고 캄캄한 숲. 때때로 멈춰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면 한줄기 바람이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날리고 갔다. 하지만 드래마는 오직 그의 내부를 향해 눈을 감고 있었 다... 약초를 가지고 왔을 때, 디트마가 그를 꾸짖었다. "으이구!! 뿌리까지 다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잖아!! 이게 뭐람!! 약초가 아니라, 무슨 검불더미로구만!! 다 못 써!! 이거, 다 갖다 버리라고!!" 드래마는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화가 났다. "...이봐!! 얼마나 고생하면서 캐온 것인지 알아?!! 나를 뭐라고 생각하 는 거야!!!" "나무꾼! 마노테온 드래마지 누구긴 누구야?!! 이 마을에 나무꾼은 깔 리고 깔렸지만, 힐러는 나 혼자지!!! 너와는 가치부터 틀리다고!!! 그러니, 고귀한 힐러로서 명령하는 거니까, 이거 몽땅 갖다 버리고 다시 캐와!!" 드래마는 웃고 말았다. 어느새 그는 가끔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비춰드는 햇살을 보았 다. 검고 추운 숲을 꿰뚫는 금빛의 나락... 바람을 느끼고, 풀 냄새를 맡게 된 건 언제부터였더라... 따뜻한 여름의 날, 나뭇가지에 올라가 친근한 숲 에 안겨 잠들 때... 귓가에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바람처럼 속삭이는 목 소리. 일어나 앉아 그의 왕녀가 왔다 갔던 체취를 맡곤 했다. 드래마는 숲 속에서, 춤추는 햇살들 가운데, 눈을 감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다 꿈이었어." 그래서... 꺄아아아아악---!!! 비명이 울렸을 때, 또 다른 꿈이라고 생각했다. 숲에는 언제나 그 혼자 였고, 누군가 있다면 그의 왕녀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또 한 번 들 린 다급한 비명...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검은 머리칼이었고, 그의 환상, 그의 왕녀였다. 하지만 놀을 쓰러뜨 리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얼마나 어리둥절하고 실망을 했는지 모른다. 공 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회색 눈의 소년이었다. 왜, 그녀가 아닐까...? 드래마는 슬펐고, 화가 나서 말했다. "뭐해?! 멍청하게!! 빨리 일어나!!! 놀이 동족의 피 냄새를 맡고 새까맣 게 모여들 거야!!!" ...오랜 세월, 계속 되던 것이 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쌓여 마침내 자신의 미약한 존재를 드러내는 먼지들처럼, 하나 둘 쌓여 온 것 들... 기계를 빡빡하게 만들고, 녹슬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그들은 그 의 기계(機械), 그의 심장을 아프게 한다. "디트마가 힐러 라이트를 썼다고?!! 미쳤군...!!! 넌 죽었을 수도 있어!!" "너 따윈...! 그녀를 닮지 않았다면 구하지도 않았어!!" 그의 심장을 화를 내고, 슬퍼하고... "돌아가세요. 부인. 베리마가 자신의 힘으로 견딜 수 없다면 그는 죽는 겁니다..." "키르마. 자네가 내 신경을 가장 거슬리고 있어. 자네 약혼녀가 어쨌단 말이야?" 잔인함을 「느꼈다.」 기계가 망가지는 소리... "싫어요-!! 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요-!!" 드래마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나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어. 난, 난... 그래서, 이제는 너를 이해한 다. 심장이 너무나 아파. "루드랫..." 드래마는 고개를 들었다. 저기에 그의 왕녀가 서 있었다. "스온 아피네스님." 그는 그녀를 향해 걸었다. 그것은 예정된 발걸음이 었다. 하지만 뒤에서 사람들이 말했다. "당신이 떠나면, 이 마을은 불타고 말 거야...!!!" 하지만 드래마는 계속 걸었다. 그것이 마인드 컨트롤이다. 그것이 맹세 였다. 오직, 그의 왕녀만을 사랑하도록... 뒤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불이 오르는 소리, 비명... "아아아악!!! 이 마을이 불탄 것은 당신 탓이야...!!!" 순간 그의 앞길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깊고 싶은 암흑의 아가 리를 벌린 낭떠러지... 드래마는 멈춰서야 했다. 스온 아피네스는 울었다. "루드랫... 왜, 내게 오지 않아? 마을로 돌아가려는 거야?" 드래마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 깊은 절벽으로 끊어져 있었다. 뒤에 있는 마을은 애처롭게 말했다. "...우리들은 당신 때문에 죽어가." 그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 심장을 움켜쥐고 말했다. "나도 알아... 마을 이 불탄 것은 나 때문이다..."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마을, 바리스... 그 여자에게 「괜찮다」 고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심장의 갈라진 틈새에서 피가 새어 흐르는 듯 했다. "...!" 드래마는 퍼뜩 잠에서 깨었다.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듯 했다. 언제 잠이 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방안은 조용하고 시나는 여전히 창 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주위는 평화로웠지만, 무언가... 이상한 꿈 을 꾸었던 것 같다. 헌데 그때 갑자기 가슴에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왔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드래마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드래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침대에 기대서 신음했다. "...으윽.." 검기를 쓴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하루종일 심장이 아팠던 것인가? 후유증이든 뭐든, 심장이 발기발기 찢기는 그 느 낌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온 몸이 떨리는 가운데 드래마가 방의 창문이 열린 것을 눈치챈 것은. 어이가 없었다. 이 추운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드래마는 환한 빛이 창문에서 비춰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새벽의 빛이나 아침의 빛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했 다. 드래마는 비틀비틀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꺼운 모피로 된 커 튼을 가까스로 제쳐 창 밖을 보았다. 그리고... "...맙소사." 드래마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건 또 환각인가? "어, 어머니..." 아주 어린 기억... 어머니가 미소지었다. "...사트, 내 아들, 너를 사랑한 다." 그 말에 어린 소년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저도요, 어머니.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시지 마세요... 어머니...!" 하지만, 드래마는 어리둥절했다. 「사랑」이 뭡니까...? 아름다운 그의 어머니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를 나무 밑으로 초대했 다.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 나는 나무 밑으로... 그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고개를 뉘였다. "...이런 이야기를 압니까? 로트라... 바다에 사는 사람들, 머맨의 한 소 녀가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자신의 비늘을 버린 이야기를...? 그 소녀는 사랑 때문에 행복했지만, 사랑 때문에 얻은 다리는 언제나 그녀의 불붙는 아픔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그는 미소지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이 우주를 전부 이 해할 수 없듯, 그렇게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몸을 빌려 났을 뿐... 내 근본 존재는 언제나 당신과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안의 사람을 봤습니다. 그는 차가운 사람이고, 차가운 벽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난 지금 흘리는 눈물이 거짓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많은 책 을 읽었고, 나는 많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눈물 흘리는 법 또한 배울 수 있었지만, 아직도 난 차갑습니다... 그래서... 이제 난 느낍니다.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내가, 혼자 서 있는 모습을... 내 영혼은 나 스스로에게조차 이렇게 멀리 떨어져 혼자, 나 자신 에게조차 떨어져, 철저한 타자로 서 있군요. 나는 이렇게 사악한 자인데... 누가 나를 이 악한 데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긴 은발의 소년은 자신의 랍오니를 돌아보았다. 은빛과 눈물로 반짝이 는 눈동자였다. "이 얼어붙은 마음. 죽은 어머님을 위하여서도 슬퍼할 수 없다니... 앞 으로도 어느 누구를 위하여도 슬퍼할 수 없겠지...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그와 마음을 나눌 일도 없이.. 랍오니여, 그래서 나는... 난.. 평생동안 이렇 게 살아가야 할 것에, 공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난 아마도, 이것이 사 람들이 말하는 그런 고독...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무언가 서늘한 것이 드래마의 볼을 타고 흘렀다. 차갑고 잔인한 눈물이 었다. 긴 은발의 남자는 푸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하얀 싯딤 꽃이 핀 나무 밑에서 말했다. "아아... 그러니 엘이여, 당신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옵기는, 내게 선 의를 베푸사, 나의 영혼에 새겨진 이 각인, 나의 이 운명을 바꿀 수 있도 록...! 이 고독함, 이 공허함을 벗어나...! 그것이 비록 죽음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날, 이 타락한 완전함 가운데서 끄집어 내 주십 시오...!!" 심장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908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2/24 06:22 읽음:1943 관련자료 없음 ----------------------------------------------------------------------------- <제 43막. 심장을 찢다.> - 4 "...!" 드래마는 퍼뜩 잠에서 깨었다.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듯 했다. 언제 잠이 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방안은 조용하고 시나는 여전히 창 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주위는 평화로웠지만, 무언가... 이상한 꿈 을 꾸었던 것 같다. 헌데 그때 갑자기 가슴에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왔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드래마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드래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침대에 기대서 신음했다. "...으윽.." 드래마는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이것은 검기를 쓴 후유증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야 알았다. 이제야 왜 이렇게 심장이 아 픈지를... 먼지들은, 기계를 망가뜨린다. 드래마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싯딤나무 밑에 숨막힐 정 도로 강렬한 향기가 떠돌았다. 그리고 그 밑에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에 게 다가가는 소년이 보였다. 길게 흐르는 은발과 은빛 눈을 가진 소년은 맨 처음엔 소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자신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덴시엘. 그녀가 '아피네스'였다는 것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 이지만. 꼭 천사와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소년은 소녀 앞에 무릎을 꿇었 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감겨드는 소녀의 팔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아덴... 아덴시엘... ...너를 위해, 마인드 컨트롤을 할게... 너를 볼 때마 다, 이상하고 낯선 것이 가슴에 머물렀다 떠나는구나. 네가 쭈욱,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곧, 너를 만나러 갈게." 아피네스...! 그건 가(假) 결혼을 일주일 앞 둔 날이었다. 바로 이맘 때...! 눈물을 흘 리는 소녀가 그의 정원에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네가, 현실인줄... 알지 못했다. 나의 아덴시엘..."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것, 눈물을 어쩌지 는 못했다. 지독한 아픔...! 지독한 슬픔...! 환한 빛이 눈에 비춰들어 정신 을 잃을 지경이었다. 높게 걸린 푸른 달, 푸르게 빛나는 하얀 대리석. 아름다운 여름밤이었 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왕족이 있었다. 드래마는 거기로 걸어갔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은 지독한 아픔을 호소 했다. 은발의 왕족은 눈을 들고 그런 그에게 미소지었다. "...무슨 일이지...?" 드래마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프로...포즈를...." 은발의 왕족은 조용히 말했다. "...왜 내게?" "나는..." 심장이 아프구나. "...당신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혹은, 나는 이 자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끼지 않았지. 왕족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간 가운데 서서... 두려워했다. 이 존재의 괴로움. 계속 흐르는 가운 데, 홀로 있고, 혼자라는 느낌은 너무나 끔찍했기에... 차라리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세상엔 원래부터 나 혼자 뿐이고, 모든 것은 환상... 아무런 공유점도 없이 하나의 시간만을 살 다가 죽어 가는 존재로... 그렇게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다 른 존재도 나를 알 수 없고, 어떤 다른 존재와도 나를 나눌 수 없으며...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랬으면, 난 무지 가운데 얼마나 행복했을까.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지라도...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시간 속으로 사라질 지라도. 하지만 안다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했고, 그 자유는 처절 할 정도로 나를 살해하는구나... 그래서, 난... 너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루온 루사트..." 왕족은 몸을 굽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므로, 너를 받아들 이겠다. 내 형제여." 심장을 움켜쥐고 있던 오른 손을 펼쳐들었다. 거기엔 넘쳐흐르는 피가 있었다. 균열을 일으키는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 견고하고 단단했던 마 음...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드래마는 알았다. 아마, 그는 결코 아피네스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드래마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걸어가, 거기 놓인 침대 에 잠든 소녀를 보았다. 시나... 드래마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시나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 그래 서 그는 허리를 굽혀, 시나의 입술에, 「그 존재」에 키스했다. 그때에 그의 긴 은빛 머리칼은 장막처럼 늘어져 시나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은빛 눈을 감았다. ...피는 흐르고,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어나, 영원히 너와 거할 수 있도록... 영원은 오직 생명 가운데만 빛을 낸다. "시나." 드래마의 목소리에 시나는 눈을 떴다. 드래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가 아파?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라단을 불러올까?" 시나는 인상을 쓰고, 눈을 깜빡였다. 목이 메여왔다. "아니오... 아픈 건 아닌데... 무서운 꿈을 꿨어요. 매우 무서운 꿈. 그러 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서..." 그러자 드래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 그건 아마 내가 이야기하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몰라." 시나는 조금 웃었다. 어쩐지 매우 힘이 없었다. "이야기... 난 자고 있었 는데, 드랫 혼자 말했어요?" 하지만 드래마는 웃지 않았다. 그저 시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좀, 이상한데." "뭐가요...?" 드래마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타오르는 난롯불... 두꺼운 모피로 덮인 창문. 바람 부는 소리. 그 외엔 너무나도 적막한 방안이었다. 그런데도... "...참 이상해." 그러더니 드래마는 시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넌, 어떤 무서운 꿈을 꿨지?" "그저... 그냥, 되풀이되는 악몽.. 가위에 눌렸던 것 같아요." 드래마는 생각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꿈을 꿨던 걸까... 하루종일..." 드래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손을 심장으로 가져갔다. "...심장이 아팠거든... 그래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다시 잠이 쏟아졌지만 시나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말했다. "심장... 심장이요...?" "응. 이상한 말이지만," 그는 웃었다.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느낌을 느껴. 아프군... 아... 이젠 괜찮아 졌어."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지만... 좀 더 푹 쉬는 것이... 잠도 안 자고 무리 해서 그런 지도 몰라요." "...글세. 시나." "예?" 드래마는 쓸쓸하게 웃었다. "날이 밝으면 말하려 했는데, 지금 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정말 이상한 밤인데... 어쩐지 지금 말하고 싶어졌어. 아픈 것이 사라지니까, 기 분이 많이 좋아졌고..." 드래마는 미소 지은 채,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오른손을 잡았다. "시나, 우린 내일 왕궁으로 들어 가야돼." "왕궁이요?" "응... 그리고 난 이제," 드래마는 시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게 청 혼을 하고 싶은데." 그리고 드래마는 시를 읊듯 고요히 말했다. "격식에 따라, 당신에게... 은혜의 법에 따라, 당신의 종속주로서... 당신의 남편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드래마는 고개를 숙여 예절대로 시나의 손에 입을 맞췄다. "...우리를 맺어 주었던 엘의 의지대로, 내 아내가 되어주길. 하누카의 날은 네 개의 계절 중 가장 아름답고, 당신은 내 마음에 그렇게 합당합니다... 하누카의 날로서 창조의 날이 완성된 것처럼, 당신은 창조된 피조물 중에 가장 마 지막, 가장 완성된 자... 가장 아름다운 자. 그런 당신의 머리와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난..." 드래마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난, 무척이나 행복할 것입니다..." "드...랫...?" 시나는 놀랐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인 듯, 방안과 드랫, 그리고 자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자신에게 청혼을 할 리 없지 않은가? 하지 만 드래마는 시나의 손을 놓고 일어섰고, 약간 지친 듯, 그러나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디, 생각해 줘. 천천히..." 그리고 드래마는 그 쓸쓸한 미소를 다시 한 번 더 지었고, 방에서 나갔다. 시나는 틀림없이, 이건 꿈 일거라고 생 각했다. 되풀이되는 꿈. (계속)================================================== 안녕하세요^^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즐거운 연말이군요. 전에 말했던 대로 다 쓰면 올 리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 인사도 해야하고, 까다로운 문제가 풀려, 기 쁘기도 해서 올립니다. 그 동안 메일과 쪽지 주시고 게시판에 적어주신 분들 감사...^^;(카드 주신 것도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능력이 딸려서... 글을 계속 고쳐 쓰다보니, 왠지 지치는 느낌이 들고 힘들어서... 답장도 변변히 못했습니다. 계속, 메일과 쪽지 받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한달 내내 헛 짚고 헤매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찾아서 기쁩니다. 이 글 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행복한 연말, 연초가 되길 바랍니다.^^ <엔...^^> ps...27일날 군대가시는 **님,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슬기, 늦었지만 해피버스데이투유...^^ ps2...(*)로 표시된 부분. 오렌지 라이트의 성가가 위테리드에 있다는 것 은 새롭게 바뀐 사실입니다. 전에 성가의 본산이 '네르세바'에 있다고 했 는데, '위테리드'가 맞습니다.(^^;) ps3...눈이 왔군요.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