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40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07 22:48 읽음:262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1회, * 겐트온 - 조연이지만 준 주인공급. 여기저기, 숱하게 나왔다. * 엠벨루스 - 판테온의 신. * 율르스(율리시스) - 주인공 중 하나. 사막의 세계의 칼리안의 파이오니 온. * 하노크 - 칼리안 율르스의 시종장. 나이가 들었으나 편히 쉬지도 못하 는 고뇌의 인물이다. * 슐라츠 - '식당'의 표면적 주인. 도비온의 부하이다. * 킬(키르마) - 바리스 마노테오나의 인물. 약혼녀인 이네마가 인간사냥 꾼에게 납치된 사건으로 드래마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 정체불명의 판테 온, '식당'에 들어와 도비온 밑에 있다가, 도비온에게 배를 뚫린(--;) 전적 이 있다. Bug 두 개! - 첫 번째는, '킬'의 머리칼과 눈 색이 지금까지, 둘 다 '갈색'으로 표기.(--;) 킬의 머리칼을 '검은 색'으로 정정합니다.^^ 두 번째는, 스온 마리스가 엘야시온이 되는 시기. 내년이 아니라, '내후년' 입니다. 스온 엘스제는 아직 열 세 살이죠.(--; 내 년, 어쩌고 했던 대화 들을 다 고쳐야 합니다. 이론...--;) 그리고, '성역~'은... 다음 주 수요일에 써서 올리겠습니다. ^^ 갑자기 추워 졌는데, 몸 건강하시길.^^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53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2 23:38 읽음:2386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0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6)> "..도, 도바님...!! 제, 제 머리칼..." 도비온은 그의 머리칼에 시선을 던졌다. 짧은 머리였다. 킬이 절규하듯 말 했다. 아까 부하의 말대로, 배가 무척 당길 텐 데도 신경 안 쓰는 눈치였 다. "도바 님이 고쳐 줬잖아요!!!! 헌데, 일어나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 다!!!!" 도비온은 인상을 썼다. 이 천치 같은 마노테 녀석, 무슨 헛소리야. 고작 이런 얼빠진 소리하자고 나를 오라 가라 했나? 무슨 쓸만한 소릴 할까 해 서 흥미로운 마음에 와 봤더니... 이 나에게 감히 이런 따위 투정을 부 려?! 아침 무렵만 됐어도 이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더 이상 시간 낭비 안 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이런 녀석도 상대할 만큼 상당히 인내심이 생긴 편이었다. 그래서 도비온은 불쾌했지만 꾹 참고 말했다. "...머저리 같은 놈. 이래서 마노테온은 안 돼. 고치다니? 뭘, 고쳐? 너한테 고칠게 있어? 고친다는 것은 망가진 것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말이지. 하지만, 넌 지금의 모습이 네 본래 모습이잖아? 아무리 어휘가 모자란다 고 해도 단어 선택은 똑바로 해라. 내가 했던 것은 '고친 것'이 아니라, 내 가 너의 능력을 '추가'해 준 것뿐이다. ...원래 대로 돌아왔다고, 뭘 경악하 는 거냐? 몇 주전만 해도 그 모습이었던 주제에." 킬의 눈에 혼란이 일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어떻게 수습 못한 킬은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그걸로 자기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가죽 이불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라니... 도비온은 그것 때문에 굉장한 짜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상 태인데도 짓밟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어제의 그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는 혐오스런 눈으로 킬을 쳐다보기만 했다. 실망스러웠다. 그가 본 것이 잘못된 것인가? 상당히 귀찮은 일을 하면서까지 확인했는 데, 아니었단 말인가? 이 놈은 결국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구겨져 앉아 눈물이 질질 흘리는 놈이었단 말인가? 난 가치가 없는 것에 투자를 한 것 인가? 이런 생각으로 짜증이 난 도비온은 한껏 경멸을 담아 말했다. "형편없는 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가겠다." 그리고 그가 벌떡 일어서는데, 갑자기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킬이 침대에서 떨어져 있었다. "...도, 도..바님." 그는 바닥에서 뒹굴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선 피가 쿨럭쿨럭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눈물과 섞여 사정없 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도비온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욱... 이,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저, 절, 왜... 살리셨습니까? 이.. 이.. 빌어..먹을... 마, 마노테온으론... 쓸, 쓸모가 없을 텐데... 그, 그러 니... 이제, 제가... 필요 없어졌다면... 죽이..십시오. ..죽음... 그게 무슨 의미 인지 지금은, 아니까... ..구, 구걸 따윈 안 하겠습... ...커헉...!!" 또 한차례, 한 사발이나 되는 붉은 피가 바닥에 왈칵 쏟아졌다. "...!" 도비온은 그걸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붉게 쏘아 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랬다. 킬은 피보다도 붉은 눈을 한 채, 그를 쳐 다봤다. 마치 그가 방금 쏟아낸 피와 같은 붉은 눈이었다. 도비온은 그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희열에 찬웃음이었다. 예전에 저 놈 같은 눈을 한 자가 딱 하나 있었다. 은발을 가진 놈. 붉게 충혈 된 눈을 끊임없이 번뜩이며, 무언가에 대한 복수심과 무언가에 대한 증오로 충만하던 놈,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 히 망쳐 버렸다. 그들의 실수 때문에. 그리고 그 놈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그런데... 이것은, 도비온 자신에게 새롭게 찾아온 기회인가? "...큭.." 도비온은 웃었다. "...그따위 싸구려 목숨 따위, 이래라 저래라 나한테 굳이 죽여달라고 하지 마라. 건방진 마노테 놈아. 죽고 싶으면, 혀를 깨물던지 목이라도 매달아. 아니면, 그 바닥에 쏟은 네 피 가운데 뒹굴며 조금만 기다리다 보면, 네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다." 킬은 그 말에 절망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도비온은 미소짓고 후드를 뒤로 넘겼다. 쪽의 이파리에서 빼낸 것 같은,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새파란 눈동자와 이런 어두운 곳에서도 불꽃처럼 빛나는 황금의 머리칼이었다. 바닥에 웅덩이를 이룬 피를 그러쥐듯 주먹을 움키고 눈물을 쏟던 킬은 그 런 도비온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도비온은 그런 그의 눈길에 개 의치 않고 즐겁다는 듯, 말했다. "...아아, 하지만.. 원래, 네 목숨은 싸구려였다고 해도... 너한테 들어간 하 이 포션이 있었다. 그것은 비싼 거고 아까운 거였지... 지금 그 생각이 났 거든... 이 얼마나 아까운가? 그래서 그걸 네게서 돌려 받아야겠다, 마노 테. 하지만 네 놈 같은 것에 무언가 쓸만한 것이 있을 리 만무하지. 그러 니, 어떡할까? 널 어떻게 해 줄까? ...네가 말한 것처럼, 네 목숨이라도 받 아서 이윤을 남길까?" 도비온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킬의 지저분한 검은 색 머리칼을 손으로 움켜쥐고 그의 목을 제쳐서 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 갈색의 동공 가운데 있는 것은 공포, 당황, 절망, 혼란... 그리고, 그가 찾는 '붉은 것'이었다. "...큭큭큭... 그래. 어쩌면 그게 좋겠군.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마노테온이 지만, 적어도 하이 포션 값은 빼내야지. 난 손해 보는 것은 질색이거든... 큭큭... 알겠나? 이 순간부터 이것을 기억해 둬라, 마노테. 넌, 너의 의지대 로 버릴 수 있는 목숨은 이미 한 번 버렸다. 내가 친절하게도 해치워줬지. ...그리고, 다음으로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그 목숨은... 내가, 살려준 것. 그 러니..." 그는 새파란 눈으로 싱긋 웃었다. "...넌 내 것이다. 네 소원과도 맞으니, 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네 싸구 려 목숨이 나 때문에 의미를 갖는 거다. 큭큭... 난, 네 목숨을 다 받아 주 겠다. 그러니, 언젠가 네 목숨이 끊어져야 한다면 그건 오직 내 손에 의한 것이 되겠지. 넌,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싸는 것도... 모든 것을 다, 내 명령대로 하는 거다. 왜냐하면 넌 내 것이고, 넌, 나 하바티온 하도 바의 것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함부로 떠들 권리가 없거든. 그 중에 하 나... 만약 이 후로, 네 목숨이 네 것이라고 착각하는 방금과 같은 발언... 죽고 싶다든지 하는 것 말이야... 흥!!" "으악..!!!" 킬은 도비온이 머리칼을 세게 쥐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그런 주제넘은 말을 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어. ...영 원히 지옥에서 살게 해 줄 수도 있거든... 그 가운데서 누가 네 진정한 주 인인지 깨닫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 네 머리 속에 그 사실을 잘 박아 두는 것이 낫겠지. 질질 짜는 것은 집어치우고 방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 을 기억해라. 알겠나?" ...지옥...? 도비온이 말한 단어 중, 무엇보다 이 단어에 킬의 눈에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엘에게 버림받은 자가 들어간다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듣던 옛 이야기들... 그러나 킬은 떨리는 입술을 억누르고 말했다. "...그럼, 제.. 제... 머리를.. 다시, 기.. 길게 해주시는 겁니까...?" 고집스러운 목소리... 갑자기 도비온은 킬의 머리를 놓고 확 일어섰다. 덕 분에 킬은 다시 한 번 더 바닥에 퍽 엎어졌는데, 도비온은 그런 그를 내 려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흥. 머리...? ...식당은 평등한 곳이고, 나는 마노테온 따위는 곁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킬의 방을 나가버렸는데, 킬은 도비온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노테온... 곁... 이라고? 내... 내가 원하 는 것은 긴 머리가 되는 것인데, 무슨 소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해가 안 가는 사실을 억지로 이해하지 않아도 되 었다. 아침부터 소리를 질러대고, 피를 쏟은 덕분에 탈진한 듯, 점차 눈앞 이 뿌옇게 변하며 의식이 멀어졌던 것이다. ...내가 쏟은 피 웅덩이에 뒹굴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거라 고...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런 피 웅덩이 속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킬은 점차 붉은 것들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이윽고 자기 몸 이 그 붉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 주변에 철벅대는 것들은 미지근하고 끈적하며 역한 비린내가 나는 것이었다. 짙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것들. 아... 죽는 건가. 진정으로 이것이 내가 바라던 거였나. 그의 눈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목숨이 네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더 착각한다면... 지옥... ...그렇다면 이 것이... 이것이... 지옥이겠군.... 아프고, 괴롭다. 킬은 서서히 눈을 감으며 자기가 사랑했던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입술이 액체에 흠뻑 젖어있는데도 목이 타는 듯 아프고 말랐지만, 더 괴로운 것 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이 피에 젖은 그의 얼굴을 씻었다. ..이네마.... 이네마... 나의 소녀.... 흐..! 긴 웃음 띤, 한숨이 눈물과 함께 그의 입술에서 스며 나왔다. 최후의 한숨 이며 최후의 눈물이었다. 동시에 그의 젖은 눈동자는 완전히 감겼다. 적막 하고 음습한 바닥에 쓰러진 몸. 있는 것은 오직, 모든 눈물을 말리 우는 붉은 눈동자. 눈물은 그쳤다. 그러므로 앞으로 되풀이 될 붉은 것들이, 그 의 온 얼굴을 잠식하고 그의 온 육체를 붉게 물들였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자리. 그렇게 그는 일루티온 킬이 되었다. '지옥 속에 서'. 이드넘은 여관방 문을 잠그고 앉아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나 하게 취해서 알딸딸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커녕, 인 상을 잔뜩 쓰며 무슨 원수라도 진 듯 술잔을 쏘아보고 있었다. "...쳇..! 그 놈의 계집애가 도망가서..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거지..? 끅.. 제 길... 이 몸의 뒤통수를 치다니... 끅.. ..오, 오늘 그 여자는... 끅... 내, 내 얼 굴을 무슨 괴물이라도 보듯... 끅... 나아쁜... 계집애들...." 그리고 그는 그 외에도 섭섭하게 생각했던 사람들...(특히 여자들)에 대해 구구절절이 늘어놓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여자를 꼬시는 데 실패했던 실 패담이었다. 한 주의 마지막... 그러니까, 흙의 날 밤에 여자와 밤을 못 지 내는 경우, 이드넘은 다음 날인 엘의 날엔 혼자서 술을 마시기 일쑤였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이드넘은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왔고, 또 지난 몇 주 간은 그와 같이 밤을 보내 줄 여자도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었다.(비록 그 여자들은 그 후로 이드넘과 다시는 밤을 같이 보내려고 하지 않았지 만... 이드넘도 그 후까지 바란 건 아니었으므로 그건 괜찮았다.) 하지만, 이번엔 실패했다. 겐트온이 있으니, 어쩌면 이번 주는 수월하리라 생각하고 느슨한 마음을 가진 것이 실수였다. 게다가 금쪽 같은 황금의 날 밤을 도비온과 지낸 것도 실패의 요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흙의 날 초 저녁부터 시작된 죽을 것 같은 외로움을 견디며 어젯밤을 보내야 했고, 지금은 술을 마시며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다. "..제에기이이이랄... 그 쌍둥이 놈들이 ..나, 날 망쳤어... 어흐흑... 샤, 샤 일... 샤일라테... 어흐흑..." 평소의 그답지 않은 이상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엘의 날 엔 누구도 그 옆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카할엘 가도, 사람들은 슬금슬 금 그를 피한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부는 뜨거운 물에 데이 기라도 한 듯, 짓물러 있었고, 붉고 푸른 핏줄이 돋아나서 끔찍해 보였다. 오후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여자가 없으니까, 그런다. 여자가... 좋은 여자, 부드러운 여자, 상냥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향기 있는 여자... 그의 빈곳으로 들어가, 이런 추악한 것들을 끌어들여 줄 여자... 헌데, 그것이 없으니까, 이렇게 점점 징그러운 것들이 몸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전 무렵 허겁지겁 카할을 다녀오고 나서는 이렇게 숙소에 쳐 박혀 있다. 이런 건, 겐트온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다. 겐트온은 오후엔 무척 난폭해 지니까. ...그럼, 그는 너무나 무섭게 변한다. ...도비온을 부를 수도 없다. 도비온은 오후 예배에 가느라고 바쁘니까.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니까, 샤일라테... 네가 필요한데... 넌, 내가 아무리 이런 모습이어도 옆에 있어 주는데. 이젠 넌 그, 헬리옷을 위해서 만 시간을 내 주지. ...모두 다, 그래. 다른 여자들은 다른 놈들을 위해서만 시간을 내. ...그, 그 러니까, 다른 남자들을 다 죽여야 하는 거야. 그리고, 여자들은 돈이나 명 예를 좋아하니까, 그 놈들의 돈을 다 훔쳐서 재산을 불리고, 벼슬도 올라 갈 수 있을 때까지 올라가는 거야... 파, 파이오니온까지...? 그래! 그거, 괜 찮군. 파이오니온이 명령하면 다들 듣잖아? 여봐라!!! 다들 내 옆으로 와 라!! 절대 도망가면 안돼!!! 알겠어?!! 그런 생각으로 기쁨에 차 있던 그는 다음 순간, 또 끝없는 절망으로 떨어 졌다. 아냐, 아냐!!!!! 그렇게 하더라도 여자들은 날 안 좋아해!!!!! 내가 엘 야시온이 된다고 해도, 안 돼!!!! 이 세상의 모든 황금을 갖고 있다고 해 도 안 돼!!!! 그 셰리카 계집애도 도망갔잖아. 내가 그렇게 잘 해 줬는데...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이드넘은 문득 자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냐... 모든 남자를 죽인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야... 그리고, 파, 파이오니온이 된다니...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 그리고... 정말, 내 피부가 흉측하게 변했나? 그는 떨리는 손으 로 가면을 벗고 가까운데 있는 거울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반 쪽만이 그렇게 문드러진 피부일 뿐 손이라든지 다른 쪽 얼굴은 멀쩡했다. 그걸 본 이드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렇군. 착각이었어. 내가 왜 이러지? ..괜찮아. 괜찮아. 이드넘. 진정하라고... 이제 술은 그만 마시고 자자. 그러면 이 끔찍한 엘의 날도...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 반쪽에서 푸르고 붉은 핏줄이 얼굴 전체로 번져 나가며 그의 얼굴을 마치 흐물흐물한 검붉은 젤리처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래 징그러운 피부인 반쪽 얼굴은 '쩌저적' 소리를 내 며 썩어 들어갔다. 그에 따라 눈알이 둥그렇게 유리되어 길다란 살점을 매달고 대롱거리며 떨어졌고 그 뒤 하얀 안와가 드러났다. 빈약한 흰 뼈 는 붉고 거무칙칙한 살점 속에서 점점 그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거기서 하얗게 뚝뚝 떨어지는 것은 꿈틀거리는 구더기였다... "으아아아아악---!!!!" 그는 거울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웬만한 보석보다 비싼 유리가 산산조 각이 나며 깨졌다. 하지만 그 조각들 가운데 그의 흉측한 모습이 담겨 있 어 이드넘은 다시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과 눈 속에 가득 구더기가 담겨 있었다. 가, 간지러웠던 것이 그것 때문인가? 그 는 열심히 볼을 긁다가, 문득 그 행동도 그쳤다. 이미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단지, 느껴지는 것은 외로움... 죽을 것 같이 너무나 외로워서 그는, 탁자 에 머리를 묻고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 한 것은 미친 짓이다. 지금까 지 본 것, 느낀 것, 말한 것은 모두 미친 짓인 것이다. 이런 외로움을 느 끼면 공포나, 환각 따윈 물러가니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엘의 날 따윈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엘 의 날엔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변하게 되니까. 엘의 날엔 완전 히 미쳐버리는 느낌이니까... 왜 카할엘 꼭 갔다 와야 하는지도 알 수 없 었다. 하바티온으로서의 의무 따위... 언제인가 무시해 버릴 수 있다면 좋 을 것이다.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오직 공허뿐. 그의 내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간이 끝없이, 끝없이 지평선도 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그것을 채울 누군 가가 필요한데, 아무도 그것을 채워주지 않아, 그는 슬픔과 증오를 같이 느끼고 있었다. 외롭다... 외로움은 마치, 영원히 가시지 않을 추위와 같아 서, 그를 덮쳐 몸을 떨리게 했다. 차라리 이것보다는 공포가 낫다고 생각 할 정도로,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떨림을 멈추기 위해, 다 시금 쉴새없이 술을 들이켰다. "..어흐흐흑... 제길.. 제길.. 제길.. 어흐흐흑..." 이런 그의 옆에 있는 것은 오직, '엔돌' 뿐이었다. "이봐, 마르코 할아범, 마스터는 어떠셔?" 마르코 할아범은 재채기와 콧물로 빨갛게 헐어버린 코를 문질렀다. 그리 고 겁먹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훌쩍... 아, 아무리 해도 문을 안 열어 주셔, 빈크." "그래..? 어제 저녁도 드는 둥 마는 둥, 하시고 오늘 아침은 아예 안 드셨 잖아? 여기, 이것저것 가져와 봤는데..." 빈크라 불린 청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한 번, 들여다볼까?" 그리고 그는 음식 쟁반을 고쳐 들고, 문의 열쇠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하 지만 그때, 지금까지 문 옆 의자에 앉아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청년이, 그 런 그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관둬라, 빈크. 네 놈은 네르세바에서 막 마스터의 수하가 되어 잘 모를 테지만... 지금은 그냥 놔두는 게 좋아." "슬, 슬라이?" 이름은 슬라이였지만, 이름과 다르게 무척 빠른 솜씨(행운을 나눠 가지는 솜씨든, 단검을 후리는 솜씨든)를 갖고 있는 청년이 빈크를 올려다보았다. 얼굴 한 쪽 구석에 길게 난 창상하며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손에 든 단 검 같은 걸 보아, 여간 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청년이었는데, 사 실 그는 보는 인상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별 명이 '순간에 일곱'이었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단검 일곱을 한꺼번에 정 확히 과녁에 맞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듣기로는 마스터가 아주 예전, 힐라토에만 있었을 때부터 데리고 있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말대로 슬라이는 힐라토의 밤처럼 시꺼먼 눈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말투만은 자기 이름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사람 좋은 마스터지만... 오늘은 관두는 게 좋아. 음식 도로 갖고 내려가." 그러더니 그는 들고 있던 단검을 난간에 탁 던졌다. 잘못하면 밑에서 식 사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에 그것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슬라이 는 태연한 표정이었고, 지금까지 수 십 차례 던졌어도 슬라이가 단검을 그대로 전의 구멍에 갖다 꽂는 것을 본지라 마르코나 빈크는 그것에 대해 선 이제 그다지 불안감을 갖지 않았다. 대신 빈크는 단검을 뽑아드는 슬 라이와 마스터가 있는 곳의 방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왜, 왜? 지금, 굶고 계시잖아? 그리고 술만 드시고 계시고! 말려야지..!" "...흥.." 슬라이는 단검을 또 한 번 더 던졌다. 탁! "...괜찮아. 그냥, 병일 뿐이야. 내일이면 깨끗이 잊어버리시고, 오늘 일은 기억도 못해." 그리고, 빈크는 슬라이가 '이 놈의 개 같은 엘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 같 이 느꼈지만 설마, 그가 엘의 날을 모독할 리는 없고 해서 잘못 들은 거 라고 판단 내렸다. "벼, 병이라니..? 무슨 병? 굉장히 건강해 보이시던데?" "...건강..? 건강이야 하시지. 암... 건강하시고 말고. 하지만 일주일 중 엘의 날 오후에만은 아무도 마스터를 못 건드려. 그러니, 괜히 얼쩡대지 말고 가서 네 할 일이나 해라, 빈크. 네 놈이 여자라면 모르지만... 그 외, 사내 녀석들은 들어가자마자, 그날로 세상 하직하는 날이지..." "..여, 여자...?" 슬라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그것도 아무 대가없이 밤을 같이 보내 준 여자라면 더 바랄 나위 없지... 그러면 오후 내내 꽤 안정적인 데 말이야... 하지만, 이상하게 그놈 의 계집애들은 마스터를 잘 안 따른단 말이야... 빌어먹을 계집들... 누가 자기네들 몸을 더럽힌 댔나... 그저 밤만 같이 새워주면 되는데, 난리들이 야. 난리들은... 쳇... 납치라도 해다 드릴 수 있는데, 억지인 여자는 싫다, 돈을 주고 데려온 여자도 싫다.. 하여간, 마스터가 여자를 대하는 것은 어 느 땐 너무나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쩌겠어? 그게 마스터의 의지인데. 게 다가 그렇게 데려온 여자들은 나중에 죽어 나오기 일쑤고... 정말, 이 썩을 놈의 엘의 날을 없애든지 해야지..." 탁!!!! 그는 또 한차례 단검을 꽂아 넣었다. 덕분에 마지막 말은 묻혀서 잘 안 들렸다. 그래서 빈크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옆에 있는 마르코 할 아범은 입을 헤~ 벌리고 슬라이의 단검 던지는 솜씨를 구경하고 있었다. "..뭐? 뭐라고?" 빈크가 묻는데, 슬라이는 검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야..! 넌, 마스터를 존경 하냐?" 빈크는 그 질문에 잠시 가만히 있더니, 얼굴을 붉히고 굳게 고개를 끄덕 였다. "으응. 호문클로스 단을 살려주신 분이잖아. 예전 두목... 티토우도 인정하 셨고." 슬라이가 느릿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 재밌군... 착실한 녀석. 이제, 가봐. 할 말 없다. 그리고 두 번 말하지만, 마스터는 괜찮아. 오늘 오후에 마신 술은 마스터 몸에 해를 안 끼쳐. 내일, 숙취도 없이 일어나실 테니. 두고 봐." 그리고 슬라이는 단검을 던졌다 뽑아드는 행동을 말없이 계속했고, 마르 코 할아범은 여전히 감탄의 눈으로 멀거니 그것을 구경했다. 덕분에 빈크 는 꿔다 논 보릿자루같이 서 있다가, 그냥 이 층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 다. 슬라이는 한 번 입을 다물면, 말을 안 한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지 않 을 때는 상대방이 말을 하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한다. 때로는 단검을 던 져서라도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을 종종 봤으니까. 빈크는 계단을 내려와 쟁반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 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슬라이와 마르코 할아범은 이층에 있는 것을 확인 했고, 다른 동료들은 테이블에서 왁자하게 술을 기울이며 여관에서 제공 하는 공짜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아무도 자기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럽게 여관 뒷문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소리 안 나게 살그머니 밀고 나가, 여관에서 떨어진 공터로 갔다. 하지만 그곳엔 아직 아무도 없었고 단지 어젯밤 내린 눈만이 소복 이 쌓여 있었는데,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나니 누군가 그의 등을 툭 쳤 다. "..빈크..!" 빈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키가 작은 소녀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빈크도 빙긋 웃었다. "셰리카 아가씨." (계속)================================================== * 엔돌 - 판테온의 신. * 마르코 할아범 - 본 편에 한 번 출현. 예전, 호문클로스 단의 단원. * 빈크 - 처음 출현. * 슬라이 - 처음 출현. ...아아, 그 보이지 않는 세계, 10배 이상 운운은... 제가 상상한 것이 아닙 니다. 하하..^^ '특집 우주탄생'이라는 기사를 뉴튼인가 하는 잡지에서 봤 는데, 거기 나왔더군요. 신기하죠? 그 보이지 않은 물질은 썼던 그대로 '암흑물질(Dark Matter)'라고 한답니다.^^; 양성자니, 중성자니 헬륨이니 그렇게 관측되고 이런 학설이 나온 과정이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었 지만...(물리나 화학은 어려워요..^^;) 그리고, 명칭도 '칼루스온'이 아니라 바리온 물질에 상대되는 '비바리온 물질'이었지만... 그냥, 그 결론만 습득 해서 썼습니다.^^ 최근, 환타지가 문학이냐 아니냐,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그렇다면, 보통,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더군요. 환타지와 반대되는 것... '허황 되지 않은' 일반 사회나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사실들만을 가지 고 쓰는 걸 '문학'이라고 합니까? 그건 아닐 거라고 봅니다. 무엇을 소재로 해서 쓰느냐를 갖고 그 작품의 문학성을 따져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합니다. 소재가 아닌, 작가가 가진 사상과, 작가가 인생에 대해서 가진 관조...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태도...가 주제로서 훌륭하 게 드러날 때,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 때 당시의 누구보다 새롭고 뛰어날 때, 그 작품은 '문학', 즉 '예술'로 불리는 거죠. 그렇다면 요즘 기성문단에서 이런 뛰어난 사상(뭐, 굳이 대단한 철학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생활에 대한 태도죠.)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작품 을 읽었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워낙, 읽음이 짧아서 그런 것일 수 도...--;) 어디서 빌려온 듯한 생각들, 그냥 아름답게만 꾸미려하는 속 빈 강정 같은 언어들, 아무 근원 없는 가볍기만 한 허무들, 말초신경의 수준 으로 읽게 만드는 장면들... 작품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때면, 바랄 겁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말이 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닌, 정말로 독특한! 그러나 따뜻한 사상 을...! (그리고 저 자신도 그런 것을 갖고 있는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고 요... 하하.. 노력, 노력...--;) 그런 것을 갖고 있는 작가는 무슨 글을 써도, 마치 영혼이 살아있는 인간처럼 글에 개성이 있고,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소설, 수필, 설명문, ...관공서 문서(^^;).. 심지어는 잡담(^^;)까지.. 무엇을 쓰던, 아! 이것은 누구, 누구가 썼구나!..라고 알아 볼 수 있죠.(그 '사상'이 '공포'에 관한 것이든,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든, '재미'에 관한 것이든... 혹은 '허무'에 관한 것이든, 정말로 독특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 예로, 애드가 앨런 포우는 '공포'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었죠.) 그러므로 '환타지가 문학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처럼 어불성실인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환타지가 문학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쓰는 작가의 모자람 때문일 겁니다.(아아~~~ 찔린다... --;) 더구나, 전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 니다. 천체 물리학적으로도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아무 상관없는 예일지 모르나, 빙산만 하더라도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고, 사람만 하더라도 지금 드러난 부분보다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지나간 과거, 보이지 않는 미래, 그의 성격... 환타지는 이것에 대해, 즉 인생이나 인간에 대해 좀 더 자유롭게, 그리고 좀 더 다양하게, '보이지 않는 부분'을 파헤치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무의식과, 멸종된 동물과, 환상의 동물과, 지나간 시대, 잊혀진 언 어를 소재'로 하여 쓸 수 있는 '문학'이죠. 물론, '허황'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요즘 들어 '환타지'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것이 '문학'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것은 변하 지 않습니다. 단지, 전 바랄 뿐입니다. 기성문단에서 말하는 '문학'에 필적하는 통찰력과 주제의식과 작품성, 그리고 재미를 가진 작품들이 환타지에서도 많이 나 오기를. 그리고 저 자신이 환타지를 더럽히는 이름으로 남지 않기를. 뭐... 언젠가는 환타지 자체를 놓고 이것이 문학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 보다는, 한 작가, 개인, 개인을 놓고 그 작가의 작품은 문학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날이 오겠지요.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몇 분은 비록 어설프더라 도 그런 통찰력을 참으로 멋지게 보여주고 계시니까요.(팬입니다. 효 효...^^) <어디선가 문학이냐 아니냐 글을 읽고 속상해서 한 번 길게 써본,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59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7 00:03 읽음:238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1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7)> "빈크, 늦어서 미안해. 친구 때문에... 그나저나, 지금은 이드넘 뭐해?" 빈크는 이 부분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셰리카는 독촉하듯 말 했다. "아후~!! 이드넘, 지금, 뭐 하고 있냐니까!!" 빈크는 그래도 망설이다가 드디어 말했다. "...아가씨.. 정말로, 정말로, 호문클로스의 반지만 찾으시면 호문클로스 단 을 포기하실 거죠?" "아~ 참!!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정말이라니까! 난, 호문클로스의 반지만 찾으면 내 친구랑 저쪽 세계로 갈 거라고! 호문클로스 단 같은 건 이드넘 이 잘 해 먹으라고 해! 쳇, 모두들 나보다 이드넘을 더 좋아하는걸 뭐!!" 빈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 아가씨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아요." 그렇지 않다면 호문클로스 단 내에 그렇게 분열이 일어날 리 없다. 지금 도 네르세바의 숲에선 전통을 좋아하는 원로들이 빈크 같은 혈기방장한 젊은이들과 누구를 마스터로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을 것이 다. 빈크도 이곳 클로니아에 오기 전까지, 원로들, 심지어는 자기 아버지 와도 숱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가 지지하는 건 이드넘이었고,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마도 호문클로스 단의 이름이나 아버지의 전통 운운이 핏줄 가운데 남아 있었나 보다.) 일전에 시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셰리카를 쫓을 때, 슬라이가 아가씨에게 단검을 던지려는 것을 보고, 빈크 는 자기도 모르게 슬라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래도 아가씨인데 단 검을 던지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 덕분에 그후 셰리카의 행방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었고, 마스터에게도 많 은 질책을 당했지만... 빈크로서는 차라리 셰리카 아가씨가 이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생각했다. 마스터가 모든 것을 감수하고 그렇게 잘 대해 주었건만, 뭐가 불만이라고 도망을 친 건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이 대로 사라져만 준다면 호문클로스 단은 결국, 아무 말썽도 없이 이드넘 마스터에게로 넘어갈 것 아닌가? 하지만 그의 이런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듯 셰리카 아가씨는 그 다음날 당 장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왔다. 동료들 가운데서도 신참이라 온 갖 잡일을 다하는 빈크가, 심부름을 하다가 골목에 숨어 있는 셰리카를 발견한 것이다. 주위를 얼쩡대는 그녀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다시 돌아올 것이라면 왜 그 엄청난 소란을 피우며 도망쳤단 말인가? 돈이 없 어서 돌아온 것인가?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장 마스터에게 알리고 그녀를 잡으려 했다. 마스터가 언제 어디서든 셰리카를 보면 잡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셰리카가 그에게 통사정을 하며 설명을 했다. 그리고 모질지 못한 빈크는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고... 그리고 어떤 '오해'를 풀 수 있 었다. 그건 바로 셰리카 본인은 호문클로스 단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 실이다. 그녀는 사실 그녀의 아버지의 것이었던 '호문클로스의 반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 말로는 그것만 찾을 수 있다면 친구 와 다른 세계로 갈 것이라 했다. 길게 이야기 나누지 못해 다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모르겠지만 네르세바만 아니면 빈크로서는 상관없었다. 어 쨌든 그 동안은 마르코 할아범 때문에 셰리카 아가씨 근처에 갈 기회가 없어서 이런 사실도 몰랐는데, 아가씨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야기는 많이 틀려진다. 그녀가 호문클로스 단을 잇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원로들을 따돌리 고 이드넘 마스터를 호문클로스 단의 마스터로서 확고히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빈크는 그녀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그는 호문클로스의 반 지 따위 이제는 무용지물이라 느낀 것이다. 반지가 예전엔 마스터의 권위 를 세워주는 좋은 것이었을 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본체인 호문클로스가 깨어났다. 그러니 반지만 갖고서는 이미지만 실추되는 것이다. 지금도 아 르코나 숲의 원로들은 호문클로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드넘을 '불완 전한 마스터'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반지 따위, 있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 하지만 서열도 한참 낮은 자기가 이런 사실을 마스터에게 구구절절이 충 고할 수도 없고 해서, 안 되는 줄은 알지만 그냥 모르는 척 셰리카를 돕 는 것이다. 잘하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전대 마스터 티토우가 지금의 마스터를 좋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 의 딸 또한 이드넘 마스터를 좋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빈크는 말했 다. "단지... 우린 말이죠... 이해해 주세요. 아가씨. 마스터는 우리 호문클로스 단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됐을 때, 자신의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와주셨어요. 게다가 티토우 마스터가 부상당했을 때, 그 래서 결국 돌아가셨을 때...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눈이 흐려지는 셰리카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그런 궂은 일이 있을 때, 언제나 옆에서 도와주신 분이에요. 그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호문클로스 단의 아이들은 예전에 굶어죽었을 거예 요. 그러니 아가씨... 우리는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어요. 비록 호문클로스 는 마스터를 따르지 않지만," 그는 셰리카 목덜미에 삐죽이 나와있는 호문클로스의 머리칼에 시선을 던 졌다. "그래도 우리는 그 분을 버릴 수 없어요. 앞으로 우리 호문클로스 단의 이름은... 그래서 영원히 지워지겠지만, 그래도 이건 티토우 마스터의 뜻이 기도 했고, 하여튼 지금 마스터는 아주 좋은 분이에요." 칫, 뭐야!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구워 삶아놨군. 이드넘을 칭찬하는 빈 크의 말에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든 셰리카는 심술궂게 말했다. "쳇,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말이나 해! 이드넘은 지금 뭐해?!" 빈크는 한숨을 쉬고 부드럽게 미소를 띄었다. "...몸이 편찮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술만 드시고. 어째야 할 지 모르겠어 요. 걱정이 무척 돼요. 하지만 아가씨... 만약 호문클로스의 반지를 원하신 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래에?!" 셰리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일은 당장 착수되었다. "들어 가, 호문클로스! 이드넘을 알지?!" 그녀의 그 말에 따라 셰리카의 목덜미에서 푸르스름한 것이 휙 날아올랐 다. 공중에서 잠깐 맴을 도는 그것을 눈으로 쫓으며 셰리카는 말했다. "조심해!!! 알았지, 응?"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듯 호문클로스는 주춤, 움직였고 곧 뿌옇 게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본 빈크는 감탄했다. 저것이 호 문클로스의 능력... 대단하다. 작지만 저런 이상한 생물을 자유자재로 움직 일 수 있다니... 만약 이 모양을 원로들이 봤더라면... 보지 않아도 눈에 선 했다. 아르코나 숲의 사람들은 신기한 것이라든지, 미신, 아트, 하여튼 설 명할 수 없는 힘에 매우 약한 데... 그 중에서도 나이 든 사람들은 길가다 도토리만 떨어져도 거기에 온갖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만약 원로들이 셰리카의 이런 모습을 봤더라면 그녀를 마스터로 추대하는 움직임은 더욱 거세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줏대 없는 젊은이 가운데도 셰리카를 따르는 자가 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빈크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옳은 거라고 다시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셰리카 아가씨는 원하는 것만 얻으면 우리 곁을 떠난 다. 그럼 마스터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거야. 그때 셰리카가 눈을 감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가 아니야... 그래... 창문을 통해서 들어가. 그 틈새로... 뭐가 보여? 으응... 남자... 그래! 그게, 이드넘이야!! 아앗!!! 깨진 거울!! 조심해!! ...안 되겠다. 그냥 아무 데도 앉지 말고 이드넘에게로 곧장 가. 미안해 호 문클로스. 나중에 쉬게 해 줄게. 그래..! 그쪽이야... 조심해서... 깨우지 않 도록 해..." 빈크는 신기한 눈으로 셰리카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신경 탓인지 푸 르스름하게 보였는데, 호문클로스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니 어쩜 진짜로 그렇게 변한 것인지도 몰랐다. 확실히 이것은 호문클로스 단의 역대 마스 터만이 지닐 수 있는 능력이다. 호문클로스를 이용하여 정보를 탐색하고 사람을 찾고, 물건을 가져오는 일... 빈크가 감탄하고 있는데 셰리카가 말 했다. "휴우~ 그래, 정말이다. 엄청난 술병인 걸?" 그러더니 셰리카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으웨... 거기다 이건 꿀술이잖아? 나 참, 이렇게 독한 것을 이렇게 많이 마시다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쯧쯧! 우리 아빠도 두 병 이상은 못 마셨는데... 흥! 어쨌든 앞으로 이삼일은 정신을 못 차릴 걸. 이드넘은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잘 됐어, 호문클로스. 이드넘 손가락을 살펴서, 거기 꽂힌 반지를 빼내. ...그래, 그거야. 역시 넌 보석 하나는 잘 찾는다... 응응...! 그리고 그것을 삼키고... 어떻게 하는 줄 알지, 호문클로스..? 응! 잘 했어!! 이제 돌아와!!! 어서! 조심해..!!" 셰리카는 열심히 호문클로스에게 지시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그녀 의 어깨를 잡았다. 빈크였다. "셰, 셰리카 아가씨? 마, 마스터가 정신을 잃으셨어요? 꿀술을 잔뜩 드셨 다고요?" 셰리카는 호문클로스와 이야기하는데 방해를 받아 기분이 몹시 나쁘고 잔 여물이 목구멍에 걸린 듯 신경이 곤두섰지만 그래도 자기를 도와주는 빈 크인지라 꾹 참고 말했다. "에잇, 방해하지마! 빈크!! 호문클로스가 방향을 잃고 방황한단 말이야! 지 금도 그렇잖아! 아냐, 호문클로스!! 아까 나왔던 구멍으로 나와...! 아이 참..! 그래!" 그리고 셰리카는 빈크의 눈이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마지못해 이드넘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유~! 정말. 알았어! 지금 네 마스터는 엄청 취했다고! 꿀술을 대강 열 한 병이나 마신 것 같애! 그러니 저러다 죽을 지도 모르겠다! 웬 술을 저 렇게 퍼 마신 거야? 눈치가 하도 빨라 잠자고 있는 밤중에도 들어갈 수 없었으니, 나한테는 잘 된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바닥에 엎어져 있다 고! 그러니 돌아가면 네 마스터나 잘 돌봐! 됐지? 이제, 나 방해하지마? 방해하면 걷어 차 줄 테니까!! 에잇!!" 그리고 셰리카는 하던 일에 몰두했다. 한편 빈크는 뜻밖의 말을 듣고 입 을 쩍 벌리고 있었다. 꿀술 여, 열 한 병?!!!! 열 한 잔도 아니고, 열 한 병이라니!!! 꿀술은 한 모금만 마셔도 머리통에 불이 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주 독한 술이다. 그런 술을 슬라이가 그렇게 많이 갖다드렸을 리 없고, 자살할 생각이 아닌 이상 마스터도 그렇게 많이 마셨을 리 없다...! 그래서 빈크는 걷어차일 각오를 하고 셰리카에게 그 말을 확인하려고 했 다. 그런데 갑자기 셰리카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앗!!!! 호, 호문클로스!!! 네가 왜 방안을 맴도나 했더니, 이건!!! 그 래서 그런 거구나!!! 잘 했어!!! 응, 물론이지!! 좀 더 가까이 가봐!!!! 세상 에! 맙소사!!!" 순간 빈크는 마스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놀라서, 셰리카의 표정을 살폈 다. 하지만 셰리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맙소사! 정말이잖아! 난, 한 번 본 보석은 절대 잊지 않으니까, 당장 알 수 있어!!! 하지만 말도 안돼!!! ...시나는 잊어 버렸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여기에 이 목걸이가?!!!" 응? 목걸이? 웬 목걸이? 빈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곧, 사정을 눈치 채고 인상을 쓰고 말했다. "아가씨! 다른 보석은 안돼요!! 호문클로스의 반지만 가지신다고 했잖아 요!!! 그보다는 마스터의 상태나...!" "아앗!!! 시끄러워, 빈크!!!! 조용히 좀 하란 말이야!! 지금, 호문클로스의 반지가 문제야!!! 내 친구 목걸이가 왜 이드넘한테 있는 건지..." "아가씨!!" "글세, 시끄럽다니까!" 이렇게 그들이 자신의 처지를 잊고 공터에서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데, 갑 자기 어디선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들으면 절대 안 잊을 것 같 은 느린 말투의 독특한 목소리였다. "...야...! 빈크. 거기까지다. ...네 놈... 현장을 들켰으니, 배에 칼이 꽂혀도 변명은 못하겠지..."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공터의 입구 쪽을 보았다. 그리고 빈크의 얼굴이 창 백해졌다. "슬, 슬라이!!!!" 아까만 해도 여관의 이층에서 단검 던지기를 하고 있던 슬라이였다. 하지 만 지금의 그는 잔뜩 비웃는 표정이었고, 또한 그 뒤에도 껄끄럽고 위협 적인 표정의 동료들이 몇 따르고 있었다. 모두다 빈크를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빈크는 너무 놀라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도 몰라 쩔쩔맸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 지 몸이 굳은 것이다. 그때였다. "...튄다!!! 잡앗---!!!!!!" 슬라이의 고함에, 슬라이 뒤에 있던 동료들이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뭘 보고 그러나, 떠는 와중에도 빈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기 뒤쪽을 보 았다. 헌데, 과연... 방금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셰리카가, 어느새 저만큼이 나, 죽어라 달려가고 있었다. 남자들보다 훨씬 더 빠른 달리기 같았다. 덕 분에 빈크의 동료들이 쫓아갔을 때는 이미, 공터의 담장을 뛰어넘고 있었 다. 그러자 남자들 가운데 욕설이 난무했다. 그리고 몇몇은 그녀를 쫓아 담장을 넘고, 몇몇은 그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 로의 위치를 알리기 위한 고함 소리만이 여기저기 울렸는데, 그나마 그것 도 사라지고, 이제 공터에는 빈크와 슬라이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빈크 는 슬라이의 눈초리에 식은땀을 흘렸다. "슬, 슬라이..." 빈크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슬라이는 피식 웃더니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대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뭔가 욕설을 뱉으며 들고 있던 단 검을 옆에 쌓인 통나무 더미에 퍽 꽂았다. "...쳇....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데도 이렇게 춥다니. 정말 개도 안 물어갈 드러운 날씨를 갖고 있군. 이 클로니아는... ..외투도 안 입고 나와 더 추워 죽겠어... 하지만 마르코 할아범처럼 콧물 질질 짜긴 싫으니까, 툭 까놓고 본론만 말하자... 이 일에 대해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 하고 싶은 말..?" 설명을 들어준다는 건가! 빈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안심했다. "으...으응!! 아, 알았어! 슬라이..! 다행이야! 오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 난.." 그때 단검을 뽑아들던 슬라이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 이거 길어질 기미 보이네... 야! 질질 짜지 말고... ...본론만 말해. 본론만." 그러더니 그는, 단검의 칼날을 잡고 손잡이를 입가에서 까딱까딱 거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말하고 싶은 거만 말하란 말이야... 알겠냐?" 빈크는 결국, 분위기가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서 그 는 긴장한 나머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도 적 단에서 쫓겨나는가, 아닌가가 결정된다. 거기다 빈크 자신은 결코 나쁜 의도로 셰리카 아가씨를 돕고 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그는 자신 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했는지 최대한 간추려서,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기 로 했다. 호문클로스의 반지와 원로들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말을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눈물마저 나올 정도였다. "후, 훌쩍...! 이제 이해하겠지? 슬라이? 난 우리 마스터, 그러니까 이드넘 마스터를 위해서 한 일이었어. 그러니, 난 마스터를 배신한 건 아니야! 정 말이야!!! 끅끅..." 하지만 슬라이는 빈크가 훌쩍이는 것을 보고도 느릿하게 말했다. "...그게 다냐?" "끅... 끅.. 응! 이게 다야.. 믿어 줘. 슬라이.." 그리고 빈크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훌쩍..! 난 정말 마스터를 존경해! 속이려고 했던 게 아냐! 끅끅..." 하지만 슬라이는 그 말을 못들은 척 하고 다시 한 번 더 느리게 말했다. "...정말로, 할 말은 그게 다야?" "힉... 끅끅... 응.. 그렇다니까! 이젠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미안해. 나 반 성하고 있다고... 끅끅.... 그러니 슬라이, 이 일은 마스터께는..." 퍽!!!!! 갑자기 공터에 둔탁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맨 처음, 빈크는 이 소리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눈앞으로 붉고 축축하며 뜨뜻한 것이 주루룩 흘러내리 고... 그리고 그제야 그는 자기 이마에 무언가 이물질이 꽂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굵고 날카로운 단검. 그는 눈을 가운데로 모아 그 번뜩이는 차가 운 칼날을 보았다. 아..! 슬라이가 여관에서 갖고 놀던 것. 사람들 머리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한 구멍에만 박혔지. 마르코 할아범은 붉은 입을 벌리고 웃고... 슬라이는 검은 눈. 하늘은 파랗다. 다시 붉게 흐르는 것... 초록의 세계엔 닿지 못하겠지. ...그래서 그것은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던 거야... 쿵. 인체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는 꽤 크게 들렸다. 굉장히 공허한 소리였다. 단검이, 뼈를 뚫고 미간에 박히는 순간부터 그 몸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언제나 그것은 천천히 돌아가고, 소리는 공허하다. 슬라이는 걸어서, 빈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굽혀 그의 이마에 꽂힌 단검을 힘껏 뽑아 들었다. 검신 중간까지 박힌 단검이 뽑히자 그 구멍에 서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덕분에 슬라이의 뺨에 몇 방울 그것이 튀었다. 하지만 슬라이는 그것에는 별로 신경 안 쓰고 그의 단검만을 시체의 옷자 락에 쓱쓱 닦았다. 그리고 시체의 눈동자, 눈을 크게 뜬 채 경직된 하늘을 담고 있는, 시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언치고는 참 지루한 유언이었다, 빈크... 하지만, 나도 참 예의가 바른 놈이지... 이렇게 춥고 지루한데도 막판에 더 할 말없냐고 확인까지 해 주 고... 안 그래?" 그러더니 슬라이는 땅에 누워있는 시체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시체의 미 간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제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뭐, 어쨌든.. 지루하더라도 마지막 말이니... 네 말은 그대로 네 약혼녀 와 가족들에게 전해 줄께.. 네 말 그대로... '마스터를 위해서 일하다'가 장 렬히 죽었다고. 나한테는 개소리 같이 들리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그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네 마지막 말을 듣고 나니, 네 놈을 골로 보내길 더욱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어딜 가나 '착실'하게 과잉충성 하는 놈들은 있고, 그런 놈들은 반역자보다 더 골치 아파. 잘 하겠다고 하면서 일을 엉망으 로 만들어 놓거든. ...바로 너 같이. 멍청한 녀석... 네 놈 때문에 마스터가 이렇게 엉망인 주말을 보내게 됐는데... 뭐가, '마스터를 위해서'야... 쯧..." 그는 혀를 차고 부스스 일어섰다. 시체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역광이 져 있었다. "...그나마 사귀던 정이 있어서, 즉사하도록 미간을 뚫어 준거다. ...네가 시 장에서 발 걸어 넘어뜨렸을 때부터, 기분이 나빴지만... 난 그런 것 같고 일일이 치사하게 구는 놈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계집애는 꼭 산채로 잡아서, 잘 돌봐주지... 그게 마스터의 의지거든. 너희 티토우 마스터의 '유언'도 그것이었고... 헌데 네 놈이 주제넘게 그 일을 망칠 뻔했으니... 쯧쯧... 카할에도 열심히 다니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도 모르냐...? ...흥... ...뭐... 어쨌든, 하늘 색 하나는 좋군." 그리고 그는 땅을 보고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동안 즐거웠다, 빈크." 하지만 슬라이의 그 친근한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서 슬라이는 쓴웃음을 짓고, 그 굳어버린 공기위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 다. 나지막하고 리듬감 있는 휘파람 소리. 슬라이는 유유히 공터를 빠져 나왔다. 그래서 휘파람 소리는 곧, 희미해졌고... 좁은 공터에는 눈을 크게 뜨고 자욱한 피 구덩이 가운데 누워있는 시체만이 있었다. "언니.. 나, 갈게.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가기 싫어..." 아마사는 눈물을 흘리며 샤일라테의 손을 들어 거기에 입맞췄다. 덕분에 샤일라테의 불그스름한 피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언니도 같이 가면 참 좋을 텐데... 아니면 언니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갔 으면..." 하지만 지금 샤일라테는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은 아마사도 자신의 바램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엘의 날 오후엔 아무도 샤일라테 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아마사는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있 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못 나누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을 슬퍼해서가 아니 라, 그녀가 이렇게 누워있는 시간에 아마사 자신이 그녀의 곁을 떠나야 해서. 아마사는 외출복 차림으로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볼을 샤일라테의 손에 댔다. "...흑흑... 괜찮을 거야. 그렇지? 힐라토에는 아버지가 계시니까... 아버지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마사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오늘일까... 난 언니가 마멜록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언니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흑흑... 언 니, 언니..." 그때였다. "하온 하아마사님? 떠나실 시간입니다, 루온 루헬리옷님이 기다리고 계세 요." 시중드는 아이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아마사의 귀에는 그 런 소리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공적인 일 따위는 관심 없었다. 덕분에 아피네스를 놔두고 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걱정이 되 지 않았다. 어차피 아피네스를 돌보는 일이야 부 시녀장인 마냐가 더 잘 하니까 굳이 자신이 없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 잡다하고 자질구 레한 모든 일들은 루헬리옷이 이미 다 처리한 것 같다... 왜냐하면, 떠나도 좋다고 하는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님의 허락까지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아마사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었고, 그리고 어느새 다 끝났다. 아마사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도 '공적인 일'이므로 그녀도 모 르는 데서 진행되고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사는 공적인 일을 싫어했 다. 헬리옷이 굵은 목소리... 이젠 어느 때 떠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그 목소 리도 싫어했다. "흑흑.. '어느 때' 떠나도 상관없다면, 왜 하필이면 지금 떠나야 하는 거 지...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시중드는 아이가 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무시했다. 헬리옷... 기다림이 오 래되면 시종을 제치고 저번처럼 직접 아마사의 숙소로 쳐들어올지 모르지 만... 이곳은 아마사의 숙소가 아니니까 괜찮다. 이곳은 샤일라테 언니가 안식을 위해서 결계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그러니까 그는 못 들어온다. 하지만 다음순간... 아마사는 그만, 그가 이곳에 들어오는 상상을 하고 말 았고,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끔찍하고 기분 나쁜 상상이었다. 때문에 기 분이 너무나 불쾌해진 아마사는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못 들어와!! 그 사람은 그런 능력도 없지만, 그런 능력이 있더라도 내가 못 들어오게 할거야!!! 정말, 싫은 사람이거든!!! 언니, 알아? 그 사람 은 혹시 알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이 시간의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그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지도 모르지...!" 그리고 아마사는 자기 손톱을 물어뜯다가 문득, 샤일라테의 모습을 보았 다. 샤일라테의 몸에선 붉은 빛이 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샤일라테 언니. 아마사는 지금 이 시간의 샤일라테를 가 장 좋아했다. 아무리 불쾌한 일이 있어도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 바로, 지금처럼... 샤일라테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 이다. 평소, 샤일라테의 눈동자를 보는 것과, 목소리를 듣는 것도 물론 좋 지만... 아마사 자신이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춰도 그녀가 이렇게 가만히 있 는 것은 오직 지금 뿐이니까.. 그리고 언니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오직 지금 뿐이니까... 아마사는 손을 내밀어 샤일라테의 뺨 을 만졌다.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알아? 언니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제일 예뻐.. 이것 봐. 이렇게 투명한 피부랑..." 아마사의 말대로, 샤일라테의 피부는 투명한 피부였다. 하얀 피부라는 말 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피부... 그리고 그 투명한 피부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마사는 감탄한 눈을 했다. 방금 또, '그것'이 꿈틀 움직인 것이다. 아마사는 잔뜩 감탄하며 말했다. "언니, 정말 예쁜 붉은 비늘이야...!" 그러자 그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샤일라테의 피부 속으로 붉은 비늘들 이 스르륵 지나갔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희고 반투명한 천개를 친 침대 위에 붉은 빛이 나는 한 여인이 누워있는데... 그것은 '빛'이 아니라 '붉은 비늘'. 그리고 그 붉은 비늘은 마치 투명한 망막에 덮인 눈동자인양... 끊임없이 번뜩이며 점액질 같은 느낌을 뱉어냈다. 하지만 샤일라테의 윤기 있는 피 부는 건조했고... 그래서 그 대비는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 피부가 갈라지고, 그 갈라진 가운데에서 투명한 점액질을 질척하게 늘어 뜨린 것, 부드럽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 그러나 아주 길다란 것이, 세로 로 갈라진 눈을 갖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59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7 00:04 읽음:244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2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8)> 그녀의 손과, 발, 그리고 목덜미... 얼굴까지 온통 이러한 것들이 그 피부 속에 있었는데도. 그래서 그녀의 몸이 온통 붉은 빛으로 희뜩이고 있었는 데도, 정작 본인인 샤일라테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듯, 편안한 표정으 로 잠들어 있었다. 아마사는 그런 샤일라테의 모습을 보고 빙긋 웃었다. 아마사는 알고 있었 다. 언제 이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인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 모습을 봐왔다. 투명한 피부 속에 붉고 반짝이는 비늘을 가진, 언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모습의 언니를 점점 더 사랑한다. 맨 처음 봤 을 때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이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사는, 지금 이 시간... '엘의 날 오후'에 힐라토로 돌아간다고 하는 루헬리옷이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밉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아마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니... 언니, 알아..? 나, 사실은 언니한테 말 안 했어! ...언니가 그 사람 때문에 날 싫어하니까..! 이런 말하면 날 더 싫어하겠지..? 하지만, 말해 줄까..! 사, 사실 난...! 그 사람을 미워해..! 언니, 알아? 미워한다고! 루온 루헬리옷을 미워해! 어, 얼마나 미워하냐고..? 그래. 말해 줄께!! 내가 얼마 나 그 사람을 미워하는지!!!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어느 정 도로 밉냐 하면!" 아마사는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붉게 타는 증오가 있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고! 그의 이름조차도 미워 해!!! 하, 하지만... 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언니가 싫어할 거란 걸 알 아... 그러니까, 지금은..." 갑자기 그녀의 눈이 커지며, 그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언니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데도 아무 말을 안 해서... 너무나... 기뻐. 그럼, 난 계속... 헬리옷을 밉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흐...흐흑...!" 그곳은 참으로 차고 음습한 방이었다. 내 친구는 별처럼 꽃처럼 예쁘단다. 은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계속, 계속 그 애를 좋아했고, 친구가 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널 좋아할 거야. 우리의 우정, 영원하기를... 작은 거실에는 몇몇의 계집애들이 모여 뜨개질이라든지 길쌈을 하며 킥킥 웃고 떠들고 있었다. 거실 한 구석에는 두 여자애가 앉아 손을 잡고 위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나는 뜨개질을 하고 있다가 그것을 무릎 위에 놓고 노래 부른 여자 애들을 보았다. 입을 맞춰 노래하는 품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엘의 시기에 만난, 그 애는 고운 마음씨. 착한 웃음, 다정한 솜씨. 하누카의 날을 지내고 나서도 너를 좋아했지. 벨루카의 날이 지나서도 친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 네가 있어 매우 행복해. 외로울 때, 슬플 때, 친구가 필요할 때 곁에 있던 너. 엘께서 맺어주신 우리의 우정,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시나는, 보경이... 셰리카 생각을 했다. 낮에 식당에서는 끔찍한 생각이 떠 올라 너무나 놀랐다. 그런데 다행히도 보경이가 옆에 있어서 많이 진정 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런 생각(혹은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칠판을 분필로 긁어내리는 것보다 더욱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그 느낌...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어릴 적에 본 공포영화라든지, 공포소 설... 혹은 어둔 밤 속으로 까마득하게 묻혀 버린 악몽 같은 것의 느낌인 지도 모른다. 하긴, 전부터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시나는 소녀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다시 뜨개질 거리를 집어들었다. 그 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흐릿한 불빛에 의지하여 뜨개질을 했다. ...이곳은 이상한 곳인 것이다. ...공기가 너무 신선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 면 밤이 너무 어두워서 그런 것인지... 멀고 멀리 보이는 흰 산이 너무 아 득하게 보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시나 자신의 마음 상태가 좋지 않 아서 그런 것인지... 어느 땐 감각이 매우 예민해서 피부를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어 느 땐 그와 정반대로 심하게 멍한 상태.... 후에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기 억나지 않는 멍한 상태를 겪을 때가 많이 있다. 방금 한 말이라든지, 방금 한 행동들이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그럴 때가 있 었지만, 이 세계에 온 후로 한층 더 그런 것 같다. 영양실조니 뭐니, 우스 개 소리 할 때가 아니라, 정말로 그런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뜨개질 코를 하나, 둘 세며 생각했다. 필시 다른 세계고, 급작스런 겨울의 세계라 환경이 안 맞아서 그런 거겠지... 몸 이 적응을 잘 못하는 거야. 맨 처음엔 그것조차 몰랐지만 몇 주가 지나니 까 피로가 누적돼서... 중 삼 때 경주로 수학여행가서 물갈이하고 그랬으니까. 그나마 여기서는 그런 것을 안 하는 게 다행이지. 그리고 이제는 어떤 희망을 찾았으니까, 여기도 그냥 색다른 수학여행 한다는 생각으로, 기분을 좀 편안하게... "..아, 찾았다!" 시나는 방긋 웃었다. 아까부터 뜨개질의 무늬 만들기가 이상했는데, 중간 에 빠뜨린 코가 있어서 그랬다는 걸 안 것이다. 아마 소녀들의 노랫소리 에 귀를 기울이느라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나 옆에 앉아 있던 소녀가 시나가 외치는 것을 듣고, 시나의 뜨 개질 감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어머!! 너, 그 무늬 참 예쁘다! 어머나~!! 이런 것 처음 봤는데!! 너, 어떻게 이거 만들었니? 응? 와~!! 신기해라~!!" 그러자, 방안에 있던 소녀들이 하나, 둘 시나 있는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 다. 시나 옆에 있던 소녀, 아까 자신의 이름을 '오리에'라고 소개한 집주인 의 딸, 그 소녀는 아직도 떠들고 있었다. "꺄아~! 이 오돌토돌한 느낌 좀 봐!! 와~! 난 단순한 꽈배기 무늬는 봤지 만, 이런 복잡한 무늬는 처음 봤어!!" 이제 창가에 앉아 노래 부르고 있던 소녀들이라든지, 길쌈하고 있던 소 녀.. 하여튼 그 방안에 있는 소녀들 모두가 시나와 오리에 쪽으로 다가왔 다. "뭐니, 뭔데 그래?" 그리고 감탄과 함께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하하... 어, 어떻게 이런 것을 알았냐고..? 그, 그냥..." 남자애들에게 자신이 여자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사다 놓고 공부 하고 양호 선생님에게 물어서 배웠다고는 말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하도 심혈을 기울여 배운 나머지... 그리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뜨개질에 출 중한 소질이 있었던 나머지... 이제 스웨터쯤은, 만드는 법 안 보고도 상대 의 치수 재서 거뜬하게 만들 정도라는 것... 하지만, 그렇게 스웨터를 만들 어서 갖다 주었더니, 주위에서 전혀 안 믿고 그때도 상황이 이상하게 꼬 여 결국은 '사온 것'이 되고 말아, 그 후로는 뜨개질바늘과 기타 잡다한 참고서적을 조용히 창고에 저장해 놨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도 슬픈 과거다.) 대신 시나는 소녀들이 흥미 있어하는 것 중 몇몇 뜨개질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그 후로는 '외부 세계에서 온, 시나라는 소녀, 알려지지 않 은 특이한 뜨개질 법 강의하다'라는 타이틀로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이 곳의 털실(?)은 '바레인'이라는 식물을 꼬아 만든 것인데... 그런 것이라도 그럭저럭 양의 털로 만든 털실과 비슷해 보여서, 무리 없이 이것저것 만 들어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지고 말았지만... 혼자서 궁 상떨며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또래(? : 말했듯, 나이는 불명이다.)의 소 녀들과 공통된 취미를 갖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다.(당연 한 말이지만.) 더구나 카탈리가 데리러 와서 돌아갈 때, 오리에가 웃으면서 시나의 목을 껴안고 다음에 또 놀러 오라고 했을 때는 더욱 기뻤다. 제시마 생각도 났 고... 하여튼 새로운 친구를 사귄 것이다. 맨 처음엔 카탈리의 권유로(보통 소녀라면 당연히 길쌈 모임에 가야한다 는) 하는 수 없이 끌려 왔다. 시나로서는 다른 집에 간다는 것이 별로 탐 탁지 않았던 것이다. 동네 안에 소문이 어떻게 퍼진 지도 모르는데, 또 동 물원 원숭이 꼴이 될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의외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노래도 듣고... 한편 카탈리는 시나가 과연 소녀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무 난히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그리고 뜨개질을 잘한다는 시나에 대한 칭찬을 다른 소녀들에게 듣자 매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카탈리는 웃으 면서 말했다. "호호.. 집에 또 아론 차를 타놨단다. 오늘은 엘의 날이었고, 그리고.. 알 지?" 카탈리는 눈을 찡긋했다. 그녀는 드래마가 듣고 있지 않는 데서는 언제나 드래마를 '루온 루드랫'이라고 부르고, 시나에게 동의를 구하듯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루온 루드랫 님'도 아론 차를 좋아하시니까... 게다가, 잠들기 전에는 아 론 차가 최고로 맛있단 말이야. 조금 비싸서 그렇지..." "하하.. 네에." "흐음, 그나저나.." 카탈리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네 친구 셰리카는 어떻게 된 걸까? 아직까지도 안 돌아오다니? 낮에 같이 돌아오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는데... 물건을 찾으러 갔다고? 무 슨 물건일까..?" 카탈리의 그 말에 시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역시 아직도 안 돌아왔어요? 이상하다... 오늘은 일찍 돌아오라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는 네게도 말 안 해?" "네... 그냥,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만..." 그러자 카탈리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안 되겠다. 한 마디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지. 네 손님이고 해서 그 냥 편한 대로 내버려두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지. 아무리 네르세바 인이 고,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여자애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건 아무래 도 위험해! 내일 말해야겠다. 이것에 대해, 설마 섭섭하게 생각하는 건 아 니겠지? 시나야?" '섭섭'이라고?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렇게 어른 여자가 자기들을 걱정해 준다는 것은 어쩐지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카탈리가 하는 말이 웃기기도 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하하.. 이 세계에서 도 이런 말을 쓰는 구나... "섭섭하지 않아요, 카탈리 아줌마. 오히려 당연한 일인 걸요. 생판 모르는 애도 집에 재워줄 정도로 친절한 분들인데...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저도 오늘 셰리카가 돌아오면, 확실하게 말할게요." 그러자 카탈리는 웃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구나... 앗! 저거 봐라, 시나야!!" 시나는 카탈리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지금까 지 시나가 봤던 어떤 별보다도 많은 별들이 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게 꼬리를 그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와아--!!! 세상에!!! 전 별똥별이 세 번이나 연속해서 떨어지는 것은 처 음 봤어요!!!" 그러자 카탈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벼, 별똥별...? 그게 뭐..." 그러다가 카탈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나가 아직 불 완전한 지식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아냐, 시나.. 저건 하누카의 천사들이 뿌리는 씨앗이란다. 하누카의 날이 이제 얼마 안 남았잖니... 하누카의 날이 다가오면, 천사들은 엘에게로 가 서 특히 더 많은 씨앗을 받아다가 뿌려 주거든. 왕족들의 도미니온즈 천 사는 왕족들의 아이를... 파워즈나, 벌츄즈 천사들은 귀족들의 아이를... 그 리고 프린서팰러티 천사들은 우리, 일루티온에게 씨앗을 뿌려주지. 그렇게 뿌려진 씨앗은 집의 굴뚝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 집 아가씨가 자손을 가질 만한 자격을 갖췄다고 인정하면 그 집 아가씨 몸으로 들어가, 아가씨가 남편을 맞아 자기 몸의 반을 이뤄주길 바라며... 그러니까, 자신의 아버지 를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라는 거야. 알겠니? 저것 봐- 시나. 또 하나 떨 어진다... 어느 집으로 가든, 착한 아이가 되기를..." 그렇게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빈, 카탈리는 빙그레 웃고 시나를 돌아보 았다. "...시나야, 네게도 하누카의 정령이 머물렀으면 좋겠다. 좋고 예쁜 아기를 갖도록." 시나는 당황했다. 엥? 하누카의 천사들이 뿌리는 씨앗...? 그녀는 지금, 카탈리의 말이 '사실' 인지, 혹은 '전설'인지 도통 분간이 안 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계의 상상을 초월했던 상황으로 봐서, 방금 그 이상한 이야기도 무조건 허무맹 랑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나의 상식으로는 밤하늘에 별 사이에서 떨어지는, 길게 꼬리를 긋는 빛나는 물체는 '별똥별' 이었고, 사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거야 우주 에서 날아온 먼지가 대기권을 통과할 때 불타서 일어나는 현상 아닌가? 그런 '먼지'를 갖고, '씨앗' 어쩌구 하다니... (거기다 시나 자신은 이제 고 작 열 일곱 살인데.. 이 나이에 무슨 '좋고 예쁜 아기'란 말인가? ) 그러나 시나는 아까 했던 결심을 떠올렸다. 엘야시온님은 말했다. 시나로 서는 도저히 알 지 못할 신이지만, 엘이라는 신의 의지로 시나는 원래 세 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각 세계 사람은 각 세계에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그러니 어차피 몇 주 후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 이제 돌아가 고 나면 다시는 이 곳으로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진짜로 수학여행이 라도 온 듯, 느긋한 마음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순간, 순간을 한껏 즐기고... 이렇게 눈이 가득하고 공기가 깨끗한 세계라니... 지구에 있는 알래스카 나.. 혹은, 극지방으로 잠깐 여행 온 거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게다 가, 축복(?)을 말해 주는 카탈리의 얼굴은 참으로 친절해 보이니... 어떻게, '저것은 씨앗이 아니라 우주에서 날아온 먼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 나는 웃었다. "..하하.. 가, 감사합니다.. 에~ 하지만 저는 저보다는 카탈리 아줌마한테 천사가 씨앗을 가져다주었으면 좋겠어요. 아주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낳 도록..." 갑자기 카탈리가 웃었다. "호호호!! 아이~참! 시나도! 나한테는 이미 그 씨앗이 있지~! 씨앗은 하누 카의 날을 맞기 전의 소녀 몸에만 들어간다니까아! 아이~ 참, 시나는 별 걸 다 잊어버렸구나~!!" "아~ 그, 그래요?" "으응!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다. 하지만... 뭐... 우리도 슬슬 아이 가 생길 때가 됐지. 난 꽤 이른 엘의 시기에 결혼을 해서... 아직도 아이가 없었거든? 하지만 결혼한지도 꽤 됐으니 이제 아이가 생길 거야." "헤에.. 그렇군요. 같은 엘의 시기라도 일찌감치 결혼하면 아이가 늦게 생 기는가 보지요?" "응... 하지만, 난 아이가 빨리 생기길 바랬는데... 아까, 오리에의 어머니를 봤지? 시나?" 시나는 임신한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참 친절해 보이는 부인이었는데, 별로 친절해 보이지 않더라도 시나는 그 부인에게 호감을 가졌을 것이다. 왜인지 모르지만 시나는 임신한 여자들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았던 것이 다. 시나가 좋아했던 양호 선생님도 임신 중이었고... 그래서 좀 더 그 부 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부인은 쉬고 싶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 다. 그리고 길쌈 모임에서는 그 딸인 오리에가 안주인 역할을 했는데, 그 게 좀 아쉽긴 했다. "...네. 참, 좋아 보였어요.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말씀하던데요?" "응. 란드라 부인은 이번 달로 아홉 달째를 맞고 있으니까, 세 달 후면 아 주 예쁜 아이가 태어날 거야. 아기들은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시나 너 도 여기 계속 있으면 란드라 부인의 아기를 볼 수 있을 거야. 후후후..." "..........네?" "응. 네가 만약 여기 계속 있으면..." "....아, 아니요.. 저어기.. 아줌마.... 아홉 달 더하기 세 달은 열 두 달인데 요..." 시나는 카탈리가 무안해 하지 않게 돌려서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하지만 카탈리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응.. 9 더하기 3은 12지.. 그런데, 왜 그걸 지금 확인하는 거지...? ...? ...!!!! ...아앗! 그렇구나, 혹시 너, 더하기도 잊어버린 거니? 그래서 확인하 는 거야? ...어떡하니..! 저어, 8 더하기 43이 몇인지 말해볼래? 시나?" 시나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저어, 그러니까 답은 51이지만..." "어머! 맞았어!!" "아니, 그러니까... 지금, 더하기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말하고 싶은 것 은, 아기는 열 달 있다가 태어나는 게 아닌가해서요... 하하하...!!" 하지만 카탈리는 아까 '더하기' 때보다 더욱 심각하게 시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열 달? 아기는 열 두 달 있다가 태어나잖니, 시나.. 그렇구나... 네가 몰 랐던 것은 더하기가 아니라 아기가 몇 달 있다 태어나는 가였니... 맙소 사." 시나는 입을 쩍 벌렸다. "...네에..!? 그, 그런...! 그럼 정말로, 이 세계에서는 아기가 엄마 뱃속에 열 두 달이나 있다 태어나요?!" "이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도 다 마찬가지야. 어디서 '열 달'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에휴... 아무래도 일루젼이, 별 희한한 사실까지 바꾸 어 놓았구나.. 집에도 다 왔으니, 어서 들어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자." 그리고 카탈리는 집의 현관으로 들어서서 문을 두드렸는데, 곧 문이 열리 고 라단이 나왔다. "오~ 어서 와." 하지만 시나는 라단에게 다녀왔다는 인사도 못할 만큼, 혼자서 경악하고 있었다. 으에엑~~~!!! 여, 열 두 달!!!! 열 두 달--!!!! 엄청나다!!! 일년을 꽉 채우는 구나!! 역시 변태해서 자라는 사람들인 만큼, 뱃속에서부터 남다르구나!!! 으엑~!! 취소해야지! 아까 하누카 천사가 씨앗 준다고 할 때, 감사하다고 했던 거 취소! 하여간 이 세계처럼 여자가 고생하는 세계는 살다, 살다 처음 봤다! 그러니까, 나는, 꼭! 필연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우리 세계로 돌아가서 우리 세계 남자랑 결혼한다!!!!! 시나의 소박하고 장렬한 소망과 함께, 별빛으로 눈부신 하늘에서는 또 하 나, 하누카 천사의 씨앗이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칼리스나는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레이, 정말이지? 내일까지 만이야...! 내일 모레 이후로는 같이 있어주지 않으면 화낼 거라고. 주위 왕족들이 얼마나 수군대는데..! 알겠어?" 칼리스나는 그러면서 레이서스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검 고 빛나는 긴 머리칼이 흔들리며 그가 빙긋 웃었다. "...응. 내일까지는 일을 다 해결할 수 있어. 제대로 됐으면, 아피네스를 오 늘 하아마사와 함께 힐라토로 돌려보낼 수 있었는데... 글세, 어머니께서 아피네스를 끝까지 데리고 있다가 같이 돌아오라고 하시니... 이젠, 별 상 관없겠지." 칼리스나는 지금까지 하던 말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스온 아피네스님을 하누카의 날이 지나서까지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하온 하아마사도 없는 상태에서? 흐응... 그거, 힘들겠는걸." "뭐, 하아마사만큼은 아니지만, 부 시녀장도 있고... 그리고 아피네스의 전 속 힐러는 여기 있을 테니까, 괜찮을 것 같아." "흐응.. 그래?" 그리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칼리스나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호호... 레이! 내가 왜 하온 하아마사를 좋아하는 지 알아?" 레이서스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창 밖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하늘이 보였 다. 별이 가득 뜬 밤... 마치, 그의 스피릿 펠리스엘의 날개와 같은 아름다 운 밤하늘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모습의 밤하늘... "글세.. 왜 하아마사를 좋아하는데?" "호호호... 하아마사가 굳이 네게 꼬리를 치지 않고 자기 일에만 충실하기 때문이야! 하여튼 간에...!! 알겠어?" 그녀는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이제 그녀의 얼굴엔 웃음기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네가 누굴 만나든, 상관하지 않아. 내일 무슨 일을 하던지... 그것에도 상관하지 않겠어. 단지, 우리가 했던 약속만 기억해 줘. 그리고, 알지? 이 건 내가..." 칼리스나는 그의 깊은 검은 눈을 보며 말을 골랐다.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여자들을 질투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냐. 난 그저, 여자들이 너하고 있을 때, 그, 뭐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짓는 게 견딜 수 없이 기분이 상해. 너는 왕족 여자들을 만나지는 않으니까, 그것 들은 다 하바티온 계급인데, 그 건방진 눈길이라니. 알겠어? 나는 나보다 낮은 계급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그러니, 그들에게 내가 말 한 조건을 다 이야기해 줘야 해...! 그리고..." 레이서스는 자기 가슴에 있는 칼리스나의 손을 모아 쥐었다. "알겠어, 칼리스. 난 약속을 깨지는 않아. 내 아들은 네가 낳을 거야. 그 외엔 어떤 여자도 나의 자식을 낳을 수 없어. ...오직, 너만이 내 아내가 될 거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레이서스의 눈은 그냥 담담했다. 그래서 칼리 스나는 오히려 깊은 실망을 느끼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몇 해 전의 기억 이 떠올랐다. 레이서스... 그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여자들에게 무력할 정 도로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칼리스나가 한 말이었다. ...전 세계의 여자들을 모두 다 네 첩으로 삼아도 좋아. 하지만 ...네가, 네 팔에 안고 웃음을 지어 보여줄 아들. 네 이름으로 불릴 아들. 그건 오직 내가 낳을 아이 뿐이야... 그래서,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말한다. '물론이지. 나는 약속을 깨지 않 아'라고... 칼리스나는 떨리는 입술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 너는 내 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한 줄 모르지... 난, 차마 너를 제어할 수 없 으니까, 그 여자들이라도 막아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오히려 난 이제 네게 물을 수 없게 되고 말았어. 레이, 나를 사랑하니..라고. 이런 것엔, '물론이지... 나는 약속을 깨지 않아..'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네가, 무슨 대답을 할 지 모르겠으니까...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어. 칼리스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은 언제나 그것이 무서웠다. 그의 담 담한 눈이. "...난, 난... 여왕이 될 거야. 힐라토의 여왕이. 레이? 검은머리와 검은 눈 이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다행이다. 난, 사실 검은 색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잘 어울리기라 도 해야지. 검은 색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텅 빈 공간 같아서... 어느 땐 정말 맘에 안 들거든." 그래. 검은 색은 내게 있어, '빈 공간'이야. 마치 너처럼... 누구도 채우지 못하는 빈 공간. 누구도 채우지 못하는 공허함이지. 그래서 난, 언제나 안 도해. 네가 공허한 것은 내 탓이 아니니까. 난 알아. 누가 와서 시도하더 라도 그것은 성공하지 못해. 그래서 난, 너한테 다가드는 여자들을 보고만 있어. 그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나는 더욱 확실히 알아. 그리고, 안심을 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분노해. 죽이고 싶도록, 그들을 미워하게 돼. 그 러니 레이서스... 부디, 차라리 이대로 변하지 마. 난 이 이상은 바라지 않 을게. 너의 담담한 목소리. '물론이지. 약속은 깨지 않아'라는 그 말만으로 난 좋 아. 그냥, 그 공허한 너로 언제까지나, 그래서... 네가 공허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할 수 있도록... "...레이, 나한테 키스해 주겠니...?" 레이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아내'에게 길고 긴 입맞춤을 했다. 보석 처럼 빛나는 밤이었다. (계속)================================================== * 오리에 - 처음 나왔음. * 칼리스나 - 레이서스의 약혼녀. 흑흑... '성역...'은 못썼습니다...TT 수요일에 올린다고 했는데, 고치다보니 늦었군요... TT 이번 주 토요일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올리겠습니다... 레이서스의 이미지 송이라고 생각한 것도 찾아놨으니까...TT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63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9 23:30 읽음:288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3회, 제 40막. Masquerade. (1)> 시나야, 알겠지? 걱정은 하지 마. 난 괜찮을 거야. 아니.. 아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생각해 봐. 사람들은 다 낮에 움직이지. 그러니 그 놈들, 내가 이렇게 밤에 찾아가면 꼼짝 못하고 당할 거야. 하하... 허를 찌 른다고 할까. 그리고 이드넘은 술을 잔뜩 퍼 마셔서 지금쯤 잠을 자고 있거나, 아니 면 깨어 있어도 숙취로 정신을 못 차릴 거야. 그러니 지금이 제일 적기지. 그래도 시나는 반대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면서 찾아야 할 물건이 뭐란 말인가. 셰리카는 방긋 웃었다. 그게 뭐냐고? 글세... 지금은 알려 줄 수 없지만... 내가 그걸 갖고 오면, 넌 아마 굉장히 놀랄 걸. 헤헤... 그때까지는 비밀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아주 금방 갔다 올 거야. 아아... 말도 안돼. 그래도 가지마, 셰리카. 바보같이. 위험하잖아. 그리 고... 네르세바 숲의 사람들은 썩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드랫이 그랬는데, 너는 왜 그토록 그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무슨 일이 난 거야? 네 아버지 가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숲의 사람들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후계자 로 지목해 놓았고..? 하지만 이곳은 우리들의 세계가 아닌 걸. 그러니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열성을 갖고 이곳의 일에 끼어 드는 거지... 위험한 일은 하지마, 제발. 우리, 돌아갈 때까지... 그냥 이곳에서 즐겁게 보내다가 가자. 응... 셰리카..? 하지만 셰리카는 아무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 행동이 너 무나 재빨라 또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시나는 셰리카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맨 처음 이곳 엘야시온에 왔을 때, 그 뿌연 안개 속 에서 보경이의 이름을 계속 불렀던 것처럼. 셰리카..? 셰리카... 뷔기어 셰 리카.. "...셰리카..." 시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 이제는 익숙해진 굵은 통나무가 가로지른 천장이 보였다. "....." 시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꿈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런 꿈을 꾼 것 도 무리가 아니다. 계속 셰리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꽤 늦게 들 어온 셰리카가,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 버리고... 시나는 계속 그 애에 대 해 걱정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분주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 었다. 셰리카가 들려 준 이야기들도 그렇다. 그 애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 까,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다. 게다가... 시나는 손을 들어, 거기 끼인 반지를 보았다. 붉은 루비반지로 셰리카가 맡기고 간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이라나... 그렇게 말하더니 시나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갖고 있으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라니... 이것이 어떻게 셰리카 아버지의 유품이 될 수 있 는가? 시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제도 그렇지만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저쪽 세계 사람인 셰리카가 이곳 세계의 아버지를 말하는 모습은 너무나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시나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혹시 또 훔친 거 아냐..라고 물었 는데... 그러다가 셰리카에게 한 차례 꼬집힘을 당하고, 하는 수 없이 말을 정정해야 했다. 셰리카는 정말로 분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걸로 보아 양 심에 꺼릴 만한 짓을 하고 가져온 반지는 아닌 것 같다고 결론 내린 것이 다. (뭐... 셰리카의 양심은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양식으로 움직이 고 있으니,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때 셰리카의 얼굴엔 어 딘가 진실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말하며 믿어달라고 하는 데, 어쩌겠는가? 친구 말이라면 믿어야지... 이 반지는 틀림없이 무언가 사 정이 있어서 가져온 것일 테다.. 그리고 시나는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원래 셰리카의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으흠... 내가 기억하는 셰리카의 아버지는... 시나는 눈알을 굴리며 곰곰 이 생각했다. 거기 있어봐... 셰리카의 아버님이 어떻게 생기셨더라...? 으 흠.. 잘 하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시나는 셰리카의 아버지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러자 점차 그의 이미 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셰리카와 많이 닮은 얼굴에... 양복을 입고, 아침 이면 언제나 관청으로 출근하는... 그래, 아주 평범한 공무원 아버지. 그리 고 셰리카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가정 주부고... 후후후... 맞아. 그리고 셰 리카는 외동딸이야. 그래서 그렇게 말괄량이인 거지. ...시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나랑 만나서 같이 등교를 하고, 조금 황당할 때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아이... 그게 바로 '임보경'이지. 내 친구, 임보경. 라단이 말했다. "하하하... 시나는 아무 거나 잘 먹어서 좋군. 어때? 저번 세계에서도 그 랬니?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시나는 맛있게 먹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된장' 비슷한 것을 넣고 끓인 수프로 맛도 거의 '된장국'과 비슷해 여기 와서 먹던 어떤 음식 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라단은 이 된장국을 별로 안 좋아하는 듯 했 다. 수프 한 그릇 갖고 깨작거리다가 아주 잘 먹고 있는 시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시나는 말했다. "저번 세계에서 먹던 음식이요? 음... 이것과 비슷해요. 이런 수프... 그 러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지금, '된장국, 밥, 김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단어가 없을 것이라 미리 짐작해 원어 그대 도 말하려고 했더니, 머릿속에 퍼뜩,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 다. 엘야시온어에 이런 단어가 있다니...? 설마 여기에 밥이나 김치가 있다 는 건 아니겠지? 시나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시험삼아 말해보았다. "...메, 샨나, 마메타이..." 메는 '밥'이라는 뜻이고 샨나는 '김치', 마메타이는 '된장국'이라는 뜻이 다. 카탈리가 지금 먹고 있는 수프를 가리키며 내내 '마메타이'라고 했으 니 국(?)의 명칭은 확실한데... 설마, 정말 밥이나 김치 같은 것이... 그때였 다. 라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오~ '밥'!? 시나, 너 그걸 용케 알고 있구나. 하하하...! 그건 나도 좋 아하지! 내가 살던 힐라토가 쌀을 주식으로 하거든..! 이곳은 주로 밀을 수입하기 때문에 빵을 만들어 먹지만... 아~ 그러고 보니, 밥이 그립군. 가 끔은 밥을 먹어 줘야지... 안 그렇.. 아니, 안 그래 드래마? 자네도 밥이 그 립지." 묵묵히 맛있게 음식을 먹던 드래마는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군요." 하도 안 먹어 버릇을 해서인지 별로 그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한편 시나는 자기가 시험삼아 말한 단어에 라 단이 너무나 반가워하자 정말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하하.. 그, 그럼 여기 정말로 그런 음식이 있어요..? 이렇게 서양식 식 사가 아니라 동양식 식사를 주식으로 하는 세계도 있나보죠?" 거기 있던 세 사람은 '서양식'이 무엇이고 '동양식'이 무얼까 생각했지만 시나가 선택하는 단어는 가끔가다가 너무나 희한했으니... '동양식', '서양 식'이라는 것도 그냥 '다른' 식사라는 말로 파악하고 참된 의미를 묻는 것 은 삼가기로 했다. "...각 세계마다 선호하는 식 습관이 약간씩 틀리거든." '동양식'과 '서양식'의 참된 의미 아는 것을 포기한 드래마가 이렇게 말 하자, 라단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이제 나도 클로니아의 기름기 있는 진한 수프와 빵에는 많이 익숙해 졌지만...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조금 고생했지. 차 마시고 간식 먹 는 습관은 쉽게 적응이 됐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나저나 그런 음식을 기억하고 있다니, 묘하구나! 네르세바 사람들도 '메'나 '샨나'를 먹나?" 네르세바 사람이 밥이랑 김치를 먹는지 시나가 어떻게 알겠는가. 단지 시나는 이 세계에도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방긋 웃었다. "하하... 글쎄요.. 하여튼, 이 세계에도 그런 음식이 있다니 꼭 한 번 먹 어 보고 싶네요. 이 '마메타이'도 맛있고..." 라단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카탈리 음식 솜씨가 좀 뛰어나야지!!! 하여튼 음식을 안 가 리고 잘 먹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거기다 너처럼 일루젼과 기억상실이 있는 사람은 음식에 대한 기호마저도 종종 바뀌는데... 넌 입맛이 까다롭 게 바뀌지 않아 잘 됐다. 루온... 아니, 드래마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단 것 을 전혀 못 먹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주 잘 드시잖아? 이미증(異味症; 잡다한 원인으로 입맛이 이상하게 바뀌는 병.)이라는 거지. 하하하--! 예 전에는 쿠냐냐 친 음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셨는데--! 그런데 이 제는 쿠냐냐라면 딱 질색이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라단이 묻자, 드래마가 말했다. "...네. 쿠냐냐를 재료로 한 온갖 끔찍한 것들을 이십 년간이나 줄기차게 먹다보면... 아무래도, 그것에 남다른 감정이 생기게 되더군요...." 그리고 그는 빙긋 웃었다. "...뭐, 디트마는 칸자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겠지만." 라단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시나가 킥킥 웃고 있는 것을 보더니 그도 웃는 낯을 짓고 어깨를 으쓱 했다. "하하하-- 어쨌든 요지는, 쿠냐냐를 선호하던 드래마의 기호가 이젠 칸 자로 바뀌었다는 거지. 하하하.. 아~! 참... 그러니 나도 이제 식사는 그만 하고 진료실에나 가봐야겠군." 그러더니 라단은 무릎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툭툭 털고 일어나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맛있었어. 카탈리." 그리고 경쾌한 웃는 낯으로 식당을 나가려 하는데, 카탈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다시 앉아서 그 수프, 남김없이 드세 요! 마메타이는 건강에 좋다는 거 몰라요?! 아이도 아니고 도대체, 음식을 이토록 가리다니...! 게다가 이건 당신 세계 음식이잖아요!! 비싼 것 사다 가 모처럼 해 드리니까..!!" 으윽..! 주위를 그렇게 분산시켰건만 안 속았구나..! 라단은 속으로 한탄 했다. 그리고 식당에 있던 시나와 드래마는 의아한 눈으로 라단을 쳐다보 았다. 사실, 라단은 자기 세계의 음식이라고 하지만 마메타이를 너무나 안 좋아했다. 이 구린 냄새하며, 칙칙한 색깔, 걸쭉한 느낌... 묘하게 역겨운 맛.(어디까지 그의 기준에서.) 그래서 그는 마메타이의 '마'도 모르는 여자 와 결혼하는 것을 하늘의 축복으로 알았건만,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자신의 며느리에게 '건강에 좋다는 마메타이' 요리법을 너무나도 확실히 전수하고 떠나신 것이다. 그래서 마메타이는 이날 이때까지도 집안 식구 중 누군가 아프기만 하면 아침식사로 등장하게 되었고... 덕분에 라단은 감기 하나라도 걸리지 않게 처절할 정도로 몸조심한다. 잘못하다가는 마 메타이를 먹을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 후로는 잔병치레가 확실히 줄었 는데... 이것을 카탈리는, 역시 마메타이 덕이라고 좋아한다. 진실은 오직 신만이 아시겠지... 라단은 울상을 지었다. 루온 루드랫님이 몸이 안 좋으 시니, 이 사태를 예상했어야 하는데...! "...이따, 점심에 먹을게." "...라단~!!!!" 굉장히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결국 라단은 식탁에 도로 앉 아 시나와 드래마의 동정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건강에 좋다는 마메타이 를 꾸역꾸역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식사 분위기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흘러가는데, 카탈리의 호의 속에서 두 번째 그릇의 수프도 다 먹은 시나 는 헛기침을 하고 라단과 카탈리에게 말했다. "흠흠, 그나저나, 저어... 사실은 오늘도 레겜이 오기로 했는데요.. 흙의 날엔 휴관이라고 해서 도서관에 못 들어갔거든요. 너무 실망을 많이 했는 데, 그런데 친절하게도 레겜이 오늘 또 데려가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 람도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싶대요." 그러자 한참 라단을 째려보고 있던 카탈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나 를 보았다. "어머, 하지만 시나! 오늘은 페이스 힐러에게 가봐야 하는데...! 도서관 은 그 후에라도 우리가 데려다 주면..." 예상대로 이런 반대에 부딪치자 시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한다.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엘야시온님께 말했었지만... 아 아~ 참, 엘야시온님은 해결해 준다고 해놓곤, 그냥 가버리시니까 이렇게 곤란하잖아~ 어떡하지.] 그때 드래마가 말했다. "아..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도 식사를 다 했는지, 식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당분간은 시나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이 말에 카탈리와 라단은 놀란 눈을 했고, 시나는 희망에 찬 표정을 했 다. 와~ 드래마!! 카탈리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둔다고요? 그건 힐러에게 데려가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 시나가 움직이기에도 더 편하 고..." 드래마는 조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오. 지금은 말씀 못 드리지만 사정이 생겼습니다." "사정이요?" "네... 죄송합니다. 신경을 써 주셨는데... 저도 이해가 안 가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러니 시나는 오늘 그냥 도서관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 니다." 라단이 말했다. "드래마도 이해가 안 간다고? 거참, 이상하군요. 그럼, 이건 누군가.." "아! 엘야시온님 말씀해 주셨어요? 드랫?" 시나가 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말하자, 라단과 카탈리가 깜짝 놀란 얼굴 을 했다. "에, 엘야시온님?!!!" 하지만 드래마는 별로 놀란 표정도 짓지 않고 묘하게 시나를 바라보더 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에 그러시더군. 이상 한 일이야. 그러니 잠깐 나 좀 봐, 시나. 아... 맛있는 음식, 감사했습니다. 라단, 카탈리." "아, 네네..." 라단과 카탈리는 '엘야시온'이라는 말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못 믿겠다 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고,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저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방에서, 드래마는 말했다. "이젠 말해 봐, 시나." 시나는 드래마의 방을 휘, 둘러보고 그의 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침대보가 주름살 하나도 없이 정리된 것을 감탄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드디어 드래마를 보고, 방긋 웃었다. "...네. 방이 정리가 잘 됐네요." 드래마는 팔짱을 끼더니, 답례했다. "...고마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냐." 시나는 놀라는 척 했다. "그래요? 그, 그럼, 어떤 말을...?" 드래마는 시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난 몇 가지 근거를 갖고 있거든." 내심 긴장하고 있던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무슨 근거요?" "..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근거.." 그 말에 시나는 찔리는 표정을 짓고 드래마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는지 드래마는 빙긋 웃고 계속 말했다. "...그래, 확실히... 엘야시온님과 만나고 난 후부터, 넌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지. 그리고 오늘 아침 수정구를 통해서 본 엘야시온님도 그랬고." 시나는 끝까지 딴청을 피웠다. "아아.. 그, 그래요...?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그리고, 딴청 부리는 너의 태도가 너무 어설퍼서... 말을 회피하고 싶으 면, 그 얼굴 붉히는 거랑, 말 더듬는 것 좀 고치고 말하는 게 나을 거야." 시나는 투덜댔다. 회피하고 있다는 걸 알면, 회피하게 내버려두는 게 예 의 아냐? 그걸 꼭 저렇게 말로 표현해야 하나? 아~ 참! 정말 안 맞아서 원~!! 시나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드랫, 아주 옛날부터 이런 말, 꼭 하고 싶었어요."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63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9 23:30 읽음:2886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3회, 제 40막. Masquerade. (1)> 시나야, 알겠지? 걱정은 하지 마. 난 괜찮을 거야. 아니.. 아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생각해 봐. 사람들은 다 낮에 움직이지. 그러니 그 놈들, 내가 이렇게 밤에 찾아가면 꼼짝 못하고 당할 거야. 하하... 허를 찌 른다고 할까. 그리고 이드넘은 술을 잔뜩 퍼 마셔서 지금쯤 잠을 자고 있거나, 아니 면 깨어 있어도 숙취로 정신을 못 차릴 거야. 그러니 지금이 제일 적기지. 그래도 시나는 반대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면서 찾아야 할 물건이 뭐란 말인가. 셰리카는 방긋 웃었다. 그게 뭐냐고? 글세... 지금은 알려 줄 수 없지만... 내가 그걸 갖고 오면, 넌 아마 굉장히 놀랄 걸. 헤헤... 그때까지는 비밀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아주 금방 갔다 올 거야. 아아... 말도 안돼. 그래도 가지마, 셰리카. 바보같이. 위험하잖아. 그리 고... 네르세바 숲의 사람들은 썩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드랫이 그랬는데, 너는 왜 그토록 그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무슨 일이 난 거야? 네 아버지 가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숲의 사람들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후계자 로 지목해 놓았고..? 하지만 이곳은 우리들의 세계가 아닌 걸. 그러니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열성을 갖고 이곳의 일에 끼어 드는 거지... 위험한 일은 하지마, 제발. 우리, 돌아갈 때까지... 그냥 이곳에서 즐겁게 보내다가 가자. 응... 셰리카..? 하지만 셰리카는 아무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 행동이 너 무나 재빨라 또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시나는 셰리카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맨 처음 이곳 엘야시온에 왔을 때, 그 뿌연 안개 속 에서 보경이의 이름을 계속 불렀던 것처럼. 셰리카..? 셰리카... 뷔기어 셰 리카.. "...셰리카..." 시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 이제는 익숙해진 굵은 통나무가 가로지른 천장이 보였다. "....." 시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꿈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런 꿈을 꾼 것 도 무리가 아니다. 계속 셰리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꽤 늦게 들 어온 셰리카가,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 버리고... 시나는 계속 그 애에 대 해 걱정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분주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 었다. 셰리카가 들려 준 이야기들도 그렇다. 그 애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 까,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다. 게다가... 시나는 손을 들어, 거기 끼인 반지를 보았다. 붉은 루비반지로 셰리카가 맡기고 간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이라나... 그렇게 말하더니 시나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갖고 있으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라니... 이것이 어떻게 셰리카 아버지의 유품이 될 수 있 는가? 시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제도 그렇지만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저쪽 세계 사람인 셰리카가 이곳 세계의 아버지를 말하는 모습은 너무나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시나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혹시 또 훔친 거 아냐..라고 물었 는데... 그러다가 셰리카에게 한 차례 꼬집힘을 당하고, 하는 수 없이 말을 정정해야 했다. 셰리카는 정말로 분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걸로 보아 양 심에 꺼릴 만한 짓을 하고 가져온 반지는 아닌 것 같다고 결론 내린 것이 다. (뭐... 셰리카의 양심은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양식으로 움직이 고 있으니,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때 셰리카의 얼굴엔 어 딘가 진실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말하며 믿어달라고 하는 데, 어쩌겠는가? 친구 말이라면 믿어야지... 이 반지는 틀림없이 무언가 사 정이 있어서 가져온 것일 테다.. 그리고 시나는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원래 셰리카의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으흠... 내가 기억하는 셰리카의 아버지는... 시나는 눈알을 굴리며 곰곰 이 생각했다. 거기 있어봐... 셰리카의 아버님이 어떻게 생기셨더라...? 으 흠.. 잘 하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시나는 셰리카의 아버지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러자 점차 그의 이미 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셰리카와 많이 닮은 얼굴에... 양복을 입고, 아침 이면 언제나 관청으로 출근하는... 그래, 아주 평범한 공무원 아버지. 그리 고 셰리카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가정 주부고... 후후후... 맞아. 그리고 셰 리카는 외동딸이야. 그래서 그렇게 말괄량이인 거지. ...시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나랑 만나서 같이 등교를 하고, 조금 황당할 때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아이... 그게 바로 '임보경'이지. 내 친구, 임보경. 라단이 말했다. "하하하... 시나는 아무 거나 잘 먹어서 좋군. 어때? 저번 세계에서도 그 랬니?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시나는 맛있게 먹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된장' 비슷한 것을 넣고 끓인 수프로 맛도 거의 '된장국'과 비슷해 여기 와서 먹던 어떤 음식 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라단은 이 된장국을 별로 안 좋아하는 듯 했 다. 수프 한 그릇 갖고 깨작거리다가 아주 잘 먹고 있는 시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시나는 말했다. "저번 세계에서 먹던 음식이요? 음... 이것과 비슷해요. 이런 수프... 그 러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지금, '된장국, 밥, 김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단어가 없을 것이라 미리 짐작해 원어 그대 도 말하려고 했더니, 머릿속에 퍼뜩,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 다. 엘야시온어에 이런 단어가 있다니...? 설마 여기에 밥이나 김치가 있다 는 건 아니겠지? 시나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시험삼아 말해보았다. "...메, 샨나, 마메타이..." 메는 '밥'이라는 뜻이고 샨나는 '김치', 마메타이는 '된장국'이라는 뜻이 다. 카탈리가 지금 먹고 있는 수프를 가리키며 내내 '마메타이'라고 했으 니 국(?)의 명칭은 확실한데... 설마, 정말 밥이나 김치 같은 것이... 그때였 다. 라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오~ '밥'!? 시나, 너 그걸 용케 알고 있구나. 하하하...! 그건 나도 좋 아하지! 내가 살던 힐라토가 쌀을 주식으로 하거든..! 이곳은 주로 밀을 수입하기 때문에 빵을 만들어 먹지만... 아~ 그러고 보니, 밥이 그립군. 가 끔은 밥을 먹어 줘야지... 안 그렇.. 아니, 안 그래 드래마? 자네도 밥이 그 립지." 묵묵히 맛있게 음식을 먹던 드래마는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군요." 하도 안 먹어 버릇을 해서인지 별로 그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한편 시나는 자기가 시험삼아 말한 단어에 라 단이 너무나 반가워하자 정말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하하.. 그, 그럼 여기 정말로 그런 음식이 있어요..? 이렇게 서양식 식 사가 아니라 동양식 식사를 주식으로 하는 세계도 있나보죠?" 거기 있던 세 사람은 '서양식'이 무엇이고 '동양식'이 무얼까 생각했지만 시나가 선택하는 단어는 가끔가다가 너무나 희한했으니... '동양식', '서양 식'이라는 것도 그냥 '다른' 식사라는 말로 파악하고 참된 의미를 묻는 것 은 삼가기로 했다. "...각 세계마다 선호하는 식 습관이 약간씩 틀리거든." '동양식'과 '서양식'의 참된 의미 아는 것을 포기한 드래마가 이렇게 말 하자, 라단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이제 나도 클로니아의 기름기 있는 진한 수프와 빵에는 많이 익숙해 졌지만...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조금 고생했지. 차 마시고 간식 먹 는 습관은 쉽게 적응이 됐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나저나 그런 음식을 기억하고 있다니, 묘하구나! 네르세바 사람들도 '메'나 '샨나'를 먹나?" 네르세바 사람이 밥이랑 김치를 먹는지 시나가 어떻게 알겠는가. 단지 시나는 이 세계에도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방긋 웃었다. "하하... 글쎄요.. 하여튼, 이 세계에도 그런 음식이 있다니 꼭 한 번 먹 어 보고 싶네요. 이 '마메타이'도 맛있고..." 라단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카탈리 음식 솜씨가 좀 뛰어나야지!!! 하여튼 음식을 안 가 리고 잘 먹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거기다 너처럼 일루젼과 기억상실이 있는 사람은 음식에 대한 기호마저도 종종 바뀌는데... 넌 입맛이 까다롭 게 바뀌지 않아 잘 됐다. 루온... 아니, 드래마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단 것 을 전혀 못 먹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주 잘 드시잖아? 이미증(異味症; 잡다한 원인으로 입맛이 이상하게 바뀌는 병.)이라는 거지. 하하하--! 예 전에는 쿠냐냐 친 음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셨는데--! 그런데 이 제는 쿠냐냐라면 딱 질색이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라단이 묻자, 드래마가 말했다. "...네. 쿠냐냐를 재료로 한 온갖 끔찍한 것들을 이십 년간이나 줄기차게 먹다보면... 아무래도, 그것에 남다른 감정이 생기게 되더군요...." 그리고 그는 빙긋 웃었다. "...뭐, 디트마는 칸자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겠지만." 라단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시나가 킥킥 웃고 있는 것을 보더니 그도 웃는 낯을 짓고 어깨를 으쓱 했다. "하하하-- 어쨌든 요지는, 쿠냐냐를 선호하던 드래마의 기호가 이젠 칸 자로 바뀌었다는 거지. 하하하.. 아~! 참... 그러니 나도 이제 식사는 그만 하고 진료실에나 가봐야겠군." 그러더니 라단은 무릎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툭툭 털고 일어나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맛있었어. 카탈리." 그리고 경쾌한 웃는 낯으로 식당을 나가려 하는데, 카탈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다시 앉아서 그 수프, 남김없이 드세 요! 마메타이는 건강에 좋다는 거 몰라요?! 아이도 아니고 도대체, 음식을 이토록 가리다니...! 게다가 이건 당신 세계 음식이잖아요!! 비싼 것 사다 가 모처럼 해 드리니까..!!" 으윽..! 주위를 그렇게 분산시켰건만 안 속았구나..! 라단은 속으로 한탄 했다. 그리고 식당에 있던 시나와 드래마는 의아한 눈으로 라단을 쳐다보 았다. 사실, 라단은 자기 세계의 음식이라고 하지만 마메타이를 너무나 안 좋아했다. 이 구린 냄새하며, 칙칙한 색깔, 걸쭉한 느낌... 묘하게 역겨운 맛.(어디까지 그의 기준에서.) 그래서 그는 마메타이의 '마'도 모르는 여자 와 결혼하는 것을 하늘의 축복으로 알았건만,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자신의 며느리에게 '건강에 좋다는 마메타이' 요리법을 너무나도 확실히 전수하고 떠나신 것이다. 그래서 마메타이는 이날 이때까지도 집안 식구 중 누군가 아프기만 하면 아침식사로 등장하게 되었고... 덕분에 라단은 감기 하나라도 걸리지 않게 처절할 정도로 몸조심한다. 잘못하다가는 마 메타이를 먹을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 후로는 잔병치레가 확실히 줄었 는데... 이것을 카탈리는, 역시 마메타이 덕이라고 좋아한다. 진실은 오직 신만이 아시겠지... 라단은 울상을 지었다. 루온 루드랫님이 몸이 안 좋으 시니, 이 사태를 예상했어야 하는데...! "...이따, 점심에 먹을게." "...라단~!!!!" 굉장히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결국 라단은 식탁에 도로 앉 아 시나와 드래마의 동정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건강에 좋다는 마메타이 를 꾸역꾸역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식사 분위기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흘러가는데, 카탈리의 호의 속에서 두 번째 그릇의 수프도 다 먹은 시나 는 헛기침을 하고 라단과 카탈리에게 말했다. "흠흠, 그나저나, 저어... 사실은 오늘도 레겜이 오기로 했는데요.. 흙의 날엔 휴관이라고 해서 도서관에 못 들어갔거든요. 너무 실망을 많이 했는 데, 그런데 친절하게도 레겜이 오늘 또 데려가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 람도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싶대요." 그러자 한참 라단을 째려보고 있던 카탈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나 를 보았다. "어머, 하지만 시나! 오늘은 페이스 힐러에게 가봐야 하는데...! 도서관 은 그 후에라도 우리가 데려다 주면..." 예상대로 이런 반대에 부딪치자 시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한다.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엘야시온님께 말했었지만... 아 아~ 참, 엘야시온님은 해결해 준다고 해놓곤, 그냥 가버리시니까 이렇게 곤란하잖아~ 어떡하지.] 그때 드래마가 말했다. "아..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도 식사를 다 했는지, 식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당분간은 시나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이 말에 카탈리와 라단은 놀란 눈을 했고, 시나는 희망에 찬 표정을 했 다. 와~ 드래마!! 카탈리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둔다고요? 그건 힐러에게 데려가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 시나가 움직이기에도 더 편하 고..." 드래마는 조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오. 지금은 말씀 못 드리지만 사정이 생겼습니다." "사정이요?" "네... 죄송합니다. 신경을 써 주셨는데... 저도 이해가 안 가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러니 시나는 오늘 그냥 도서관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 니다." 라단이 말했다. "드래마도 이해가 안 간다고? 거참, 이상하군요. 그럼, 이건 누군가.." "아! 엘야시온님 말씀해 주셨어요? 드랫?" 시나가 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말하자, 라단과 카탈리가 깜짝 놀란 얼굴 을 했다. "에, 엘야시온님?!!!" 하지만 드래마는 별로 놀란 표정도 짓지 않고 묘하게 시나를 바라보더 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에 그러시더군. 이상 한 일이야. 그러니 잠깐 나 좀 봐, 시나. 아... 맛있는 음식, 감사했습니다. 라단, 카탈리." "아, 네네..." 라단과 카탈리는 '엘야시온'이라는 말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못 믿겠다 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고,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저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방에서, 드래마는 말했다. "이젠 말해 봐, 시나." 시나는 드래마의 방을 휘, 둘러보고 그의 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침대보가 주름살 하나도 없이 정리된 것을 감탄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드디어 드래마를 보고, 방긋 웃었다. "...네. 방이 정리가 잘 됐네요." 드래마는 팔짱을 끼더니, 답례했다. "...고마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냐." 시나는 놀라는 척 했다. "그래요? 그, 그럼, 어떤 말을...?" 드래마는 시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난 몇 가지 근거를 갖고 있거든." 내심 긴장하고 있던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무슨 근거요?" "..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근거.." 그 말에 시나는 찔리는 표정을 짓고 드래마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는지 드래마는 빙긋 웃고 계속 말했다. "...그래, 확실히... 엘야시온님과 만나고 난 후부터, 넌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지. 그리고 오늘 아침 수정구를 통해서 본 엘야시온님도 그랬고." 시나는 끝까지 딴청을 피웠다. "아아.. 그, 그래요...?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그리고, 딴청 부리는 너의 태도가 너무 어설퍼서... 말을 회피하고 싶으 면, 그 얼굴 붉히는 거랑, 말 더듬는 것 좀 고치고 말하는 게 나을 거야." 시나는 투덜댔다. 회피하고 있다는 걸 알면, 회피하게 내버려두는 게 예 의 아냐? 그걸 꼭 저렇게 말로 표현해야 하나? 아~ 참! 정말 안 맞아서 원~!! 시나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드랫, 아주 옛날부터 이런 말, 꼭 하고 싶었어요."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64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9 23:31 읽음:226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4회, 제 40막. Masquerade. (2)> "무슨 말?" 그가 물었다. 시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드랫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일은 벗어나야 해! 이거야말로 여성해방이라는 거지! 시나는 싸울 태세를 하고 말했다. "가만 보면 드랫은 너무 남 생각을 안 해준다는 거요! 레겜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먹을 것도 잘 사주고 책도 사달라는 것으로 사 주는데, 드랫 은 맨날 자기 마음대로 라고요! 남의 마음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세요!!!" 갑자기 이런 비난을 들은 드래마의 얼굴에 무언가 복합적인 표정이 떠 올랐다. 하지만 곧 차가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난 남에 대해 알 수가 없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데, 어 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어? 그리고 난, 남의 생각 같은 건 이해가 안 가. 그러니 굳이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척도 안 해. 잘못이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게다가 일은 이성적으로 하는 게 제일이야. 만약 남의 의견이 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듣겠지만 그 외에 시간만 끌고 지루하게 하는 건 딱 질색이야. 책만 해도 그래. 그 잡화상에서 네가 원하는 것에 가장 근접한 책이 그것이었어. 그 외에는 치료제에 대한 것 이나, 아트에 대한 책,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잔뜩 있는 궁정 기사 이야 기 같은 책밖엔 없었지. 근데 나보고 거기서 밤을 새면서 네가 책들을 일 일이 다 살펴보고 마침내 포기하길 기다렸어야 한다는 말이야?" 윽... 그랬단 말인가? 시나는 할 말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말했다. "에잇!! 그럼 그런 이야길 해 주면 되잖아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움직 이니까, 남들도 쓸데없이 오해하고 마음 상해하잖아요. 하여튼 드랫은 너 무 독단적이에요!" 드래마는 빙긋 웃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남들 비위까지 일일이 맞추면서 살 생각 없어." 그 딱 부러지는 대답에 시나는 인상을 썼다. "아잇!! 남들 비위 맞추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남들이 이해 안가더라 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이라도 하면 좋단 말이죠! 하지만 드랫은, 너무 자기 멋대로고! 차갑고! 남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가끔 가다가 상처 주 는 말도 마구 하고! 그렇게 하다간 남들에게 사랑 못 받아요, 드랫~! 남들 을 이해하지 않고 살 거라면, 언제까지나 혼자가 되고 만다고요!! 그게 좋 단 말이에요?" 예전이라면 결코 이런 식으로 말못했겠지만 그 동안 굳은 일, 진 일 겪 은 세월이 있기에 시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시나는 돌 아갈 곳... 즉, 믿는 구석이 생겼기에 상당히 대담해져 있었다. "두고보세요!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다간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어서, 정말 구제불능인 심술쟁이가 될 거예요! 아이들을 한 번 안아보고 싶어도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 못 안아 볼 걸요!" 그러자 드래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들을 안아보고 싶은 마음 따위 없어." 시나는 당황했다. "......예시법이었어요.." "....아아." 드래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시나는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잘 정리된 침대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 이들을 안아보고 싶지 않다니, 드랫은 애들을 안 좋아하나 보지? 그럼, 다 른 예를 들걸 그랬나? 좀 더 충격적인 것... 예를 들면 허리를 굽히고 길 을 건널 때 아무도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거라든지... 그런데 시나가 든 예 시를 곰곰이 생각하던 드래마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 이상한 표정을 짓더 니 말했다. "...예시법은 충분히 감상했으니, 이젠 말 돌리지 말고, 엘야시온님과 무 슨 이야길 했는지.. 그거나 말해봐. ...엘야시온님은 가끔 너무 엉뚱한 생각 을 하셔서.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으윽~!! 정말, 드랫은 이래서 안돼!!! 내가 지금까지, '남을 이해해야 한 다'고 말했는데~!!!! 레겜은 내가 말하기 싫어하면 금방 눈치채고 안 물어 보는데~!!!! 시나는 드래마를 노려보았다. "...쳇...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드랫은 벌써 구제불능 인 심술쟁이예요!"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아아.. 그래? 어쩐지, 요즘 들어 아이들을 한 번도 안아 본적이 없어. 그래서 그랬군." "....." 이로써 시나는 드랫에게도 유머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지금의 시나로서는 웃을 수 없는 유머감각이었지만, 시나는 이런 말다툼 에서도 유머감각을 발휘하는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아 는지 모르는 지, 드래마는 상냥하게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심술쟁이라는 말 듣기 싫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진 않아. 그러 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그는 코웃음 치더니 말했다. "네가 심술쟁이인 그 누구와는 다르게,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올 시간도 다 되었으니,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걸." 윽~!!!! 정말이지~!!!!! 아까, 식당에서 도와줄 때는 천사처럼 생각됐는 데~!!! 내가 눈에 뭐가 씌웠지!!! 으~!!! 하는 수 없이 시나는 다른 방식으 로 나가기로 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사실, 전 요즘 많이 우울해 있었어요." "...." 드래마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셰리카는 이상하지... 기억은 뒤죽박죽이지... 가끔, 이상한 기분 나쁜 느낌이 들지... 죽을 뻔한 사건도 겪고... 사람들에게 마노테온이라고 무시 당하고... 여기 와서 기억이라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 한 것 뿐... 휴우-" 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이런 식이라면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나는 드래마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랫? 그리고,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면 말하기 싫은 것이 아주 많아 지는 법이에요. 말을 하려고 해도...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요. 휴우.. 그러 니, 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안타깝네요. 다음에 말을 잘 할 날이 오겠 죠. ...그러니 전 이만 내려가 봐도 될까요?" 드래마는 딱 잘라 말했다. "안돼. 난 방금처럼 말을 많이 하는 여자는 최근 들어 처음 봤어. 그 정 도면 내가 원하는 말 듣기엔 충분한 말솜씨야. 천천히 말해도 돼.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레겜이 오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마." 시나는 최근 들어 이렇게 집요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시나는 인상을 마구 구기고 있다가, 드래마의 방을 왔다 갔다 걷기 시작했다. 그 리고 한숨을 푹푹 쉬더니 마침내 말했다. 아까와 다르게 무언가 생각하는 말투였다. "...드랫, 우리는 친구지요? 그때, 인딜에서 눈 내리는 밤에 그렇게 말했 잖아요." 그는 시나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내가 지금 아무 말도 안 하겠다고 해도... 그대로, 나를 믿어주 겠어요?"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이지? 엘야시온님과 있었던 일을 말못하겠다는 건가? 왜? 엘야 시온님이 그럴 만한 내용의 말을 네게 한 건가? 그분은 널 내 종속자로 알고 있는데, 그 종속주에게도 말못할 일을 말씀하시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시나? 혹시 날 속이려는 거라면..." "아니에요, 드랫! 이건 드랫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정말이에 요! 약속할게요, 드랫! 드랫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 드랫, 드랫은 그, 그... 사랑하는 분이 있죠?" 갑자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시나는 열심히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요!! 드랫이 날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나도 드랫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곤 란에 빠뜨리는 일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드랫의 사정도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으니까...! 그 일에 대해 도우면 도왔지 방해는 안 할거예요. 그러 니까, 지금은 잠시만 이대로 묻지 말아 주세요. 아주 나중에... 아주, 나중 에..." 그가 말했다. "아주,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만약, 엘야시온님과의 대화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한다 면... 아마도 드랫에게 제일 먼저 말 할 거예요. 정말로요..." 그리고 시나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그냥 삼켰다. 드랫... 아주 나중 에... 내가 하누카의 날이 지나 우리 세계로 돌아가는 날, 드랫에게 말할게 요. 난, 정말 우리 세계로 돌아가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안 되요. 왜인 지 모르지만 엘야시온님께서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해야한다고 하셨어요. 때가 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시나의 이런 말과 생각을 마지막으로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 래마는 한참이나 팔짱을 끼고 조용히 생각을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애초부터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르지." "네?" 그는 혼자서 쓴웃음 짓고 있었다. "너 같은 어린 여자 애랑 친구 어쩌고 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그 인딜 에서의 밤부터... 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몰라. 아니.. 하긴, 널 얼 음의 숲에서 구한 때부터 조짐이 이상하기는 했지... ...흥. 디트마가 피를 토하건, 바닥을 뒹굴며 애원을 하건... 널 절대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맞아.. ...정말,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아... 지금의 나는." 갑자기 그가 눈을 들어 짙은 남색의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난, 네 바보 같은 세계 이야기도 믿기로 했지." "윽! 바보 같은 세계가 아니에요!" 그가 웃었다. "..아냐. 바보 같은 세계야. 그리고 그걸 믿겠다고 한 나도 어지간히 정 신 나간 놈이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는 갑자기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난, 남을 이해할 수 없어. 마치 이곳이..."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단 하나만 빼고는 온통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서... 모든 '감정'이 어느 때는 굉장히 무디게 느껴져. 그래서 남들의 감정도 잘 와 닿지 않지. 그러니까 내게는 남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는 거야. 그저 남을 관찰하고.. 그리고, 그를 믿고 믿지 않는 것뿐. 그러니까 아주 조심했어야 하는데... 한 번 길을 잘못 든 대가는 너무 엄청나지..." 그는 빙긋 웃었다. "...난,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널 믿기로 했어." 시나도 웃었다. "음.. 확실히 드랫은 너무 웃겨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싶어해요." 그가 말했다. "...내 이마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딱지가 붙어있는 것처럼 쳐다보는 사 람들과는 별로 사귀고 싶지 않아." "..흥. 드랫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잖아 요? 그 중에 나은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르죠." 드랫은 씨익 웃었다. "...천만에. 나한테 접근하는 여자들은 다 그런 목적이었어. 예전에도 말 했지만, 난 인기가 좋거든." "..에엑!!! 드래마, 너무 잘난 척 하지 말아요~!! 설마,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금 겸손해 지라고요~~!!" 그는 이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겸손'..? 하하... 그건 어느 쪽의 겸손이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겸손 말인가? 실제 일을 아닌 척 하라고? 흥... 난 겸손이 어떻게 타락하여 쓰 일 수 있는지 알아.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자신의 장점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할 때 그 말이 쓰일 수 있지. 겸손이라.. 나 자신을 진정으로 기 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겸손을 맛볼 수 있어. 자기 자신의 실체를 그대로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남의 실체도 그대로 볼 수 있는 법이 니까, 내가 타인보다 '낫다, 못하다'의 개념이 아니라, '다르다'는 개념으로 남을 존경하고 겸손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사교술의 겸손은... 열등감 이나, 오만이 미덕으로 포장되어 나타난 것일 뿐... 그런 것에 걸리면, 나 자신의 장점도 단점도, 하나로 짓뭉개져서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 고 말아. 그래서 난, '나한테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라는 표정으로 '겸손'을 말하는 사람을 우습다고 생각해. 단점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 없 듯, 장점이 하나도 없는 인간은 없는데... 이미 그 사람은 겸손에 중독이 돼서, 자기 장점이 무엇인지 마저도 잊어버린 거야..." 그의 말에 시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남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관찰해서 얻은 결론인가요? ...그럼, 여자들이 드랫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나 '장점'에 대해서 드랫이 느끼는 '느낌'은 뭐예요?" 드래마는 차갑게 말했다. "그 사실에 대해 느끼는 느낌 같은 것은 없어. 그냥 대처방안만 세울 뿐이지. 그리고 그걸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과거에 그것 때문에 귀찮았으면 귀찮았지 좋은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걸 멋대로 '장점'이 라고 부르지 말아 줘. 어쨌든..." 그는 빛나는 눈을 들어 시나를 쏘아보았다. 중상을 입었던 사람치고는 생기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겸손하지 않게' 나의 상태를 평가한 바에 의하면 난 상당히 바 보 같은 일을 시작했어. ...알아차렸다면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것이 좋겠 지만, 이것은 약속이니까 지킬 거야. 말했듯 난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니 까. 하지만, 만약..." 시나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드래마는 시나의 그런 얼굴 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네가 친구로서 네 신의를 깬다면... 나도 더 이상은 네게 신의를 갖지 않아. 그러니까 명심해. ...난, 이 순간 네 말을 믿고 너에게 아무 것도 묻 지 않지만... 이건 내가 너의 일을 그냥 덮어두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 니야. 너를 인정하고 믿지만, 불의는 용서 못하니까. ...알겠어...?" 묘한 일이었다. 자기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 진 것 같다고 말했던 사 람이 가진 눈동자 속에는 지금 잔잔한 불길이 타고 있었다. "...난, 너를 믿고 있기 때문에... 만약, 네가 나를 배신하는 날이 온다면, 다른 누가 나를 배신한 것보다 더욱 분노할거야.... ...믿는다는 것은, 그래 서 매우 위험한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나를 믿고 있나? 친구로 서? ...디트마와 나와는 세월 속에서 수없이 무언으로 이 맹세를 다졌다고 생각하지만, 너의 경우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을, 모르겠어...." 그것은 어찌 보면 의혹이 서린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한, 매우 이상한 음성이었다. 어쩌면 그 말끝이 약간 떨렸는지도 모르겠 다. 그리고 시나는 이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녀는 기억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비위를 맞추고 살고 싶은 생각 따위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을. 헌데... 왜, 이제 와서 내 생각이 중요하게 됐어요? 드랫...? 나는 이제 내 세계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밀 려오는 슬픔 같은 것이 있었다. 핏줄 속에 새겨진 태고의 슬픔이었다. 어 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이미 낙인 지워진 슬픔... 그래서 시나는 그냥, 그의 앞으로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드랫.." 시나는 방긋 웃었다. 조금 슬픈 얼굴이었다. "우리 세계에서는 동등한 상대에 대한 친근감과 존경의 표시로 악수를 해요..." 드래마는 시나의 가냘픈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나는 말했다. "...친구가 되는 일에 이렇게 어렵고 힘든 말을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 도 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드래마는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그 후에 시나의 손을 굳게 잡았으니 까. 차디찬 시나의 손에 비해, 그건 아주 따뜻한 손이었다. 심장이 얼음으 로 만들어진 쪽은 오히려 시나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64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9 23:31 읽음:241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5회, 제 40막. Masquerade. (3)> 어깨에 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짐. 그러나 누구나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고난. 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흘러내리는 기쁨으로 두 사람을 영화롭게 하리. 무거움조차 잊혀질 정도로 아름다운 맹세. 두 어깨에 있을 때, 영원한 삶 속에 있는 것처럼 낙원을 얻게 될 것이다. 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멋진 노래네요." 시나는 마차에 타고서 멍하니 이렇게 말했다. 마차는 길이 막혀서 상당 히 서행하고 있었다. 앞쪽이 무척 소란했는데, 고급 주택가로 가는 길도 그래서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길가에 늘어서서 화려하게 꾸민 채 노래를 부르며 손님을 끄는 유랑극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연에 대 한 선전인 것 같았다. 레이서스 또한 창문 밖으로 길거리를 보며 말했다. "...아아... 저 노래와 저 분장은, '세 명의 친구'라는 극에 나오는 것입니 다. 아마, 확실할 거예요. ...한 마을에 사는 윌케와 모웬이라는 두 사람이 열 한 개의 고개 너머에 사는 람자드라는 친구 집에 가면서 벌어지는 일 을 다룬 극이죠. 람자드의 생일을 맞아서 축하해 주러 가는 것인데... 가면 서 선물이라든지, 인사말에 대해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가 몬스터, 도적 들을 만나는 모험을 그린 극입니다. 방금 노래는 두 사람이 여섯 번째 고 개에서 오크들을 만나고 가까스로 빠져 나오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정 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부르는 노래죠. 그래 봤자, 일곱 번째 고개에서 는 또 싸우지만..." 시나는 웃었다. "와~ 그거 재미있을 것 같아요." 레이서스도 웃었다. "재미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나보죠? 그렇다면 언젠가 한 번..." "네?" 시나는 레이서스가 말을 하다 말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아무 것도." 방금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다면 언젠가 한 번, 같이 보러 가면 좋을 것 같군요.'라고 말할 뻔했다. '언젠가'라니... 어느 '언젠가'를 말하는 것인 가? 이 소녀와 이 시간 이후로 만날 기회나 시간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끼며 어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내려서 좀 걷다가 하이 애버뉴로 들어가서 다시 마 차를 타는 게 낫겠군요. 내립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앞부분을 보니 하이 애버뉴로 건너가는 다리 근처에 무슨 일인가 난 것 같았다. 제일로트를 관통하여 넓은 폭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혼 강(江)에는 눈앞에 보는 것 같은 아주 크고 긴, 멋진 다리가 서너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 고급 주 택가로 통하는 이 다리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으니까 마차도 못 지나간 거였군요. 도 대체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하지만 그들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 여 있는 근원지, 그 근처로 오자 누군가 두려운 목소리로 말한 것을 들은 것이다. "...흡혈귀.." "맙소사, 흡혈귀에게 당한 거야." "우~ 끄, 끔찍하군." 그때 멀리에서 수비대들이 뛰어왔다. "비키시오! 비켜요!!!" 이렇게 현장에 도착한 수비대 몇몇은 마차를 통행시키기 위해 사람들 을 길 가게 만들면서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수비대의 고함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지고 그 근처를 지나 가던 시나와 레이서스는 덕분에 그만 끔찍한 것을 보고 말았다. 그것을 보자 너무 놀라서 잠시 발을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욱... 너, 너무 심해요.. 저, 저게 도대체..." 레이서스도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더니 시나가 더 이상 그것을 못 보 게 그녀의 시야를 후드 자락으로 가렸다. "보지 마세요. ...흡혈귀에게 당한 시체입니다. 그것도..." 그는 생각보다 침착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이런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세계 힐라토... 그 밤의 세계 에서 최근 들어 극성을 부리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흡혈귀다. "와이트 뱀파이어(wight-vampire; 인간형의, 초자연적 존재의 뱀파이 어.)에게 당한 시체..." 지금 막 강에서 건져 낸 듯, 물에 젖어 꽁꽁 얼어붙어 있는 시체는 입 고 있는 옷 모양새로 보아 여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이나 손발을 봐 서는 전혀 그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체의 피부는 검게 변색되고 심하게 쪼그라들어 있어서 생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유추 를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물에 젖었어도 말라비틀어진 것같 이 보이는 피부는 뼈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해골이라든지 손발의 뼈대 모양을 그대로 들어내 보여주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검은 해골이 길가에 누워있는 듯이 보일 정도였다. 와이트 뱀파이어에 걸리면 시체가 바로 저와 같은 끔찍한 모양이 된다. 혈액뿐만 아니라, 체액과 생기까지도 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흡혈귀들 중,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무서운 것으로 손 꼽히는 존재가 바로 와이트 뱀파이어다. 어떤 이들은 와이트 뱀파이어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인간 의 영혼까지도 빨아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여겨 지고 있다.(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로 낙원이든 게엔나든 곧바로 두 군 데 중 하나로 갈라져 최후의 심판 때까지 영원히 거기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니까.) 어쨌든 와이트 뱀파이어에게 당한 사람이 시체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일은 가끔 있으나, 그것은 이미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육체에 들 어가 그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원래 그 육체의 주인과는 전혀 다른, 아주 끔찍한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와이트 뱀파이어는 '또 다른 죽음을 불러들이는 자'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것은 엘야시온 인들이 육체 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레이서스는 그런 것을 생각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저 여자는 아마 도 그러므로 시체가 불에 태워질 것이다. 어떤 '초월적 존재'가 육체에 깃 들이지 않도록. [하지만...] 그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와이트 뱀파이어가 클로니아에도 서식하 였던가? 아니, 서식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이런 대도시... 문지기 라든지 능력자들이 잔뜩 있는 수도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아침부터 끔찍한 꼴을 본 데다, 요즘 들어 차츰 증가하고 있는 자기 세계의 문제... 그러니까 와이트 뱀파 이어에 당한 시체들과 여타 다른 흡혈귀들에게 당한 시체들... 그런 것이 한꺼번에 생각나 어쩐지 피비린내가 코끝에 감도는 것 같아 얼굴을 찌푸 렸다. 제일로트 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올라가며 시나는 말했다. "아아.. 그거요... 그건, 레겜이 오기 전에 하던 말이 있어서 그런 거예 요. 하하.." 시나는 지금까지 내내, 아까 오다 본 것 때문에 사뭇 겁에 질린 표정이 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런 처참한 꼴을 당한 시체를 보고, 그렇게 만든 존 재가 인간이 아닌 흡혈귀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시나의 생각을 거기서 돌려 줄 겸, 아까 라 단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시나의 대답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내가 오기 전에 하던 말이요? 어떤 말 말입니까?" 시나는 웃었다. 레겜이 오자 시나와 드래마, 그리고 라단과 카탈리가 나 가 그를 맞았는데, 이상하게도 레겜은 차를 마시면서도 집안을 두리번거 리며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무엇을 찾는 것일까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가 물어본 것이다. 드래마의 '아내'에 대해서. 그러자 당연한 일 이지만 라단과 카탈리는 찔리는 표정으로 시나를 바라보았고,(시나를 자 기들 조카라고 하여 본의 아니게 그를 속인 셈이 되었으니까.) 드래마는 드래마대로 난처한 표정이었고, 시나는 진땀을 흘린 채 웃으면서 드래마 를 '오빠'라 부르며 '새 언니'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해야 했다. 레겜에 게 도서관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할 때 이런 곤란한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데... 하지만 다행히, 드래마는 곧 말을 맞추어 주었다. 그래서 무난히 집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레겜과 시나가 집을 나올 때 드래마가 말한 것이다. '...여동생이 말하더군요.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먹을 것도 잘 사주고, 감사하게도 책까지 사주셨다고. ...그렇다면 혹, 요즘 들어, 아이들을 안고 싶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이 마구 다가오는 경험도 하셨습니까?' 이 말엔 라단과 카탈리까지 어리둥절해 했는데, 시나는 얼굴을 붉히며 '정말~! 심술쟁이 같은 말 좀 그만해요, 드랫~!!'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 자 그는 얄미운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흥! 잘 다녀와.'라고 말하고 레겜 에게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시나는 또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그건 별거 아니었어요. 말다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드랫 이 농담한 거예요. 참, 웃긴다니까요.. 드랫도." 그러자 레이서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농담을 했다고요...? 하지만, 그는 농담 같은 것은 절대로 안 하는 사람..." "네?" 시나가 무슨 말인가 해서 그를 올려다보자,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간 눈을 보며, 레이서스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아침에 '그'... 그러니까, 루온 루드랫은 상당히 편해 보였다. 흙의 날 아 침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이야기하던 것에 비해 그 남색의 눈도 이 제는 침착해 보였고,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간호했을 그의 아내... 그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 고 실제로 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것이 사실인 듯한... 그의 사랑을 받는 그의 아내는 도대체 왜 며칠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 가? 마노테온이라 손님 앞에 나오기 위험하니까? ...웃기는 말이다. 그렇다면 루온 루드랫도 아예 자기 앞에 나오지 말았 어야 한다. 실제로 그는 시나라는 소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시나의 보호자 되는 라단과 카탈리만이 그와 면담을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굳 이 이틀에 걸쳐서 레이서스 자신이 시나를 데리러 갈 때마다 거실에 나와 있던 것... 그러면서도 레이서스에게 자신의 아내를 소개시켜 주지 않고 (오늘 아침엔 무리한 간호로 몸져 누워있다고 했다.) 얼렁뚱땅 넘기는 것 등...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안가는 것이 많아진다. 거기다 이 소녀가 끝까지 루온 루드랫을 감싸고 그의 여동생 행세를 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그가 또 하나 이해가 안가는 것은 루온 루드 랫이 이 소녀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 한 주전만 해도 전혀 몰랐을 소녀에게 보이던 태도는, 아무리 봐도 지나 치도록 친근했다. 다정하거나 친절했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여동생과 오 빠 사이에나 있을 것 같은 그런 '오래된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침에 그것은 '농담'이었고? [...말도 안 돼.] 레이서스는 부정했다. 그가 기억하는 바로, 루온 루드랫이 그의 개인 루 이트였을 당시, 그러니까 그가 '루온 루사트'였을 당시 그는 농담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당연했다. 그는 전형적인 루이트였으니 까. 딱딱하고 냉랭하며 표정을 절대 풀지 않고 항상 긴장해 있는 모습이 그였다. 거기다 무언가 어둡고 무언가 위험한 구석까지 겹쳐져서, 항시 날 카롭게 갈아져 있는 칼 같은 느낌을 주는 자가 그였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농담 같은 것도 전혀 통하지 않아, 누군가 그에게 그의 외모에 대해 농담했다가 큰 싸움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그가 레이서스의 개인 루이트로서 자이온에 있을 때, 여유가 없는 자신 의 태도로 싸움을 벌인 횟수는 레이서스가 아는 것만도, 사소한 것까지 합해서 두 손에 꼽아도 모자랄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그런 '정통 루이트'였던 루드랫이 자신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 자신의 여동생을 택했다고 했을 때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를 모함하는 거라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직접 그의 입으로' 그런 사실을 시인하는 것을 보고.... 레이서스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꽉 악물었다. ...그래. 그런데, 그토록 잘 나고 또 다른 의미의 '높은 마음'까지 갖고 계신 그가 세월 때문인지 사랑 때문인지, '농담'까지 할 정도로 변했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 일이었다. 한편 시나는 레이서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기를 빤히 쳐다보자 이 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려 흙의 날 봤던 문지기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 다. 문지기는 흙의 날 그러했던 것처럼 도서관 입구의 작은 건물 안에 앉 아 또 길게 하품을 하며 무료한 표정으로 있었다. 시나는 레이서스에게 말했다. "와~! 오늘은 들어갈 수 있겠죠? 이제, 꼭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어졌 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후후~! 레겜, 저 먼저 갈게요...?" "...아아.. 네." 마침내 레이서스는 달려가는 시나의 뒷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저 소녀 에게 그의 아내에 대해 더 자세히 묻기로. 만약 아침의 그것이 '농담'이었 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인 시나에게도 '농담'을 할 정도로 그가 그렇게 많이 변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인 중 하나일 그의 아내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라면 그 외에도 얼마든지 많다. 자신의 누이... 어 찌되었던 그와의 사건으로 망쳐지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오직 그만을 기 다리다가 이제는 버림받게된 그의 누이. 그런 그의 누이는 결국 그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이제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쉽게 변해버릴 거였다면, 과거 그런 혹독한 행동까지 하 며 그가 레이서스 자신을 떠난 의미... 레이서스가 그 심한 고통 속에서, 그래도, 루온 루드랫에 대한 옛 정과 자신의 여동생을 생각하여 참고 용 서하였던 모든 일에 대한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잊는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으니까, 이제는 드러내어 고치고... 될 수만 있으면 되돌리고 싶었던 문제들. 그런 '치유'를 위해선 영원히 흉터가 남아도 좋으니, 무언가 결단이 필요했다. 이건 도미니온즈 왕족으로서 태어나고, 자라기를 '파이오 스아디온'으로 자랐으며, 지금은 '파이오니온'인 자의 의지, 그리고 이제는 천성처럼 굳어 져 버린 높은 자존심... 스피릿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높 은 자존심을 가진 자의 결심이었다. 그는 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였지, 남에게 명령을 들으며 남의 뜻대로 좌우되는 인생을 사는 자는 아니었다. 도미니온즈는 지배와 통치와 권력 의 이름이다. 감정상으로야 어떠했던, 위치상으로 한 번도 밑을 경험한 적 이 없는 그는, 군주였고, 지배하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타고난 좋은 성품에서 나온 자비가 아니었다면, 벌써 예전에 몇 번이나 해치웠을 일들,(다른 왕족이나, 다른 귀족들이 그러한 것처럼.) 자신을 모멸하고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도 용케 아직까지 그 목 숨을 부지하고 있는 하류계급을, 이제는 철저히 짓부수기 위해 시나에게 다가갔다. 공의와 계급에 대한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가 다가가자, 시나는 웃었다. 그 회색 눈의 일루티온 소녀는... "레겜.." 레이서스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들끓고 있었지만, 이 소녀 앞에서라면 웃음을 지어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시나, 나는...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하지만 그때, 그의 이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나의 손에 들린 작 은 패가 반짝 빛났다. 작았지만 엘 아이즈의 문양과 야포스 딜리야, 그리 고 트론즈(Thrones) 천사의 문양이 상징적으로 새겨진 패... 그리고... 레이서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비록 시나가 그것을 재빠르게 자신의 호주머니 속으로 감췄지만... 그 짧은 순 간에라도 그의 눈은 너무나 익숙한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저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작은 패에 있던 황금의 엘 아이즈가 철창처럼 그의 마음에 내리 꽂혔 다. 그는 물론 알 수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의 불길 같던 마음... 그의 가식적인 얼굴의 미소... 이 모든 것이, 철창에 꿰어 한꺼번에 굳어 들어가 고 있었다. 문지기는 잔뜩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으어... 처, 청년... 에... 에... 오, 오늘도 볼 수 있어 바, 반갑군... 어, 어 서 드, 들어, 들어... 가시.. 가시...." 시나는 난처한 얼굴로 문지기를 보았다. 시나는 자기가 갖고 있는 패의 가치를 잘 몰랐다. 그래서 흙의 날도 휴관이라고 그냥 돌아왔던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들은 드래마가 이 패는 휴관에 상관없이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라고 했던 것이다. 문지기도 없고 문이 아예 꽉 닫혀 있었 다면 몰라도, 문지기가 있었다면 패를 문지기에게 보여주기만 했어도 들 어갈 수 있었는데 너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나가 그런 것은 미리 알려 주지 않은 사람이 더 잘못한 거라 고 반박했더니, 그가 웃으면서 어쨌든 이렇게 된 것... 이거면 출입증을 사 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지만, 괜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레겜에게는 되도록 패를 보이지 말라고 했었다. 그래서 레겜보다 먼저 달려와 이 패를 보여주고 문지기에게 연극 좀 잘 하라고 부탁했는데도, 문지기는 연극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듯... 자기 가 흙의 날에 했던 실수(?)와 눈앞의 높으신(?) 분들을 보고 달달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놀랄 줄을 몰랐는데.. 그의 모습에 시나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그래서 시나는 하는 수 없이 대강 이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 "헤헤..!! 문지기님!! 이젠 됐죠? 그럼, 우린 들어가 볼게요?" 문지기는 아까 시나의 부탁을 생각하고, 새삼 존댓말을 하지 않으려 더 듬더듬 말했다. "에, 에.. 으, 응. 아, 안내해 드리.. 아니, 안내해 줄 사람이 안 쪽에 이, 있을 거야..." "와~! 이제 들어가도 된 대요. 빨리 들어가요, 레겜!" 그러자 레겜이 띄엄띄엄 말했다. "...난... 아직, 출입증을... 사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뱉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경직된 말투였으나 시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밝게 말했다. "괜찮아요. 후후후... 제가 이미 샀거든요. 신세도 많이 졌으니까, 그 정 도는 괜찮죠... 그러니, 레겜은 들어오기만 하면..." 그리고 시나는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하지만 그때 그가 벌레라도 닿은 듯, 그녀의 손을 탁 쳐냈다. 너무 거친 몸짓이라 시나는 깜짝 놀랐다. "...레, 레겜?" 시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광이 비춰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 다.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그의 주변 공기가 잔뜩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어... ...레겜? 왜 그러세요?" 시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안 했다. 옴짝달싹못할 것 같이 굳어버린 그 공기 속에, 그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 그 순간이 너 무나 길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되었나 놀라서 그를 보는 데, 마침내 그가 말했다. "...아니... 약간... 내가, 출입증을 사도 좋았을 텐데. 쓸데없는 일을 했군 요." 이상했던 분위기에 비하면 상당히 평이하고 평화로운 말투였다. 그래서 시나는 안심했다. 레겜은 여자인 시나가 출입증을 샀다는 것 때문에 기분 이 나빴었나 보다... "아아.. 미안해요. 하지만 꼭 출입증을 사 드리고 싶었어요. 용서해 주세 요. 이후로는 다시는 제 맘대로 레겜 것까지 돈을 치르지 않을게요. ...그 러니, 지금은 그냥 제 호의를 받아주세요. 네?" 시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고, 레겜은 그런 그녀의 보며 고개를 순순 히 끄덕였다. 그래서 시나는 더욱 안심했다. "헤헤.. 그럼, 들어가는 거죠? 무슨 책이 있을지 기대되네요..!" 그리고 시나는 밝은 표정을 짓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레이서스는 그 뒤 를 따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문지기의 말대로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해주는 사람이 따라붙어 앞에서 그들을 인도했는데, 사람이 별로 없 는 데다 조용해서, 도서관의 대리석 바닥은 굉장히 싸늘한 발걸음 소리를 냈다. 그 크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도서관 복도에 흐르는 긴 공허감 속 에 그의 뇌리엔 한 음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엘야시온님께 클로니아 중앙 도서관의 허가증을 구했다고 합니다. ...루이티온 계급이 도서관의 출입증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저의 일평생에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루이티온 계급은 책이라는 물건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계급인데. 참 나... 분명합니다. 그는 확실히 변한 것 같습니다... 레이서스는 비웃었다. 그래, 변했지. 변했고 말고. 우리의 루온 루드랫께선 도서관 출입증에다 농담까지 할 정도로 많이 변하셨지. ...그리고 난 이제 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왜 그의 아내가 그 집에서 보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레이서스는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냉혹한 표정을 짓고 시나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그 집엔 네 사람뿐이었으니, 그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지. ...하지만...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는 계집앨 아내로 두었구나. 루 온 루드랫... ...그래. 저 계집애의 뒷모습을 보니, 네가 왜 그토록 변했는지 그걸 알 것도 같아. ...그 천박한 회색 눈과, 그 사람을 홀리는 웃음이라 니..!!!! ...사랑에 빠졌다고? 저 계집애와? 아하..! 그랬군! 그래서 저 계집 애가 널 그토록 좋아하고 너도 저 계집애와 그토록 친근감 있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군...!!! 저게 네 '아내'라는 말이지!!!!] 갑자기 어디선가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검 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를 갈았다. [벌레만도 못한 마노테온 따위가 감히 나를 속이다니...!! 이제까지 저 계집과 같이 다녔던 시간과 그것 때문에 낭비한 시간이 구역질이 날 정도 다. 그러니, ...네 아내가 오늘 밤,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지 그걸 기 대해라. 루온 루드랫! 말했듯, 너의 믿음을 충족시켜주마.... 네 아내의 피 가 묻은 유리 검이, 네 발 앞에 떨어질 때 알 수 있겠지!!!] 그는 찢어져 내리는 가슴의 한 구석... 시나라는 소녀에 대해 느꼈던 것 들... 그녀가 자신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때 느꼈던 애정... 아니, 무엇 때 문에 가졌던 애정인지 모를 그 증오스러운 애정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리고 이제는 아예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내 버리며, 이렇 게 생각했다.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그렇게, 검은 일월의 야누스와 같이, 무 자비한 밤의 일면을 드러냈던 것이다. (계속)================================================== 그럭저럭 오늘도 올립니다. 성역은 정리해서 내일 올리겠습니다. 자세한 잡담(--;)은 그때에..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68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3 22:58 읽음:254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6회, 제 40막. Masquerade. (4)> 똑... 똑... 레이서스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희미한 빛이 천장 가까이 붙어있는 유리창에서 들어와 도서관 안을 뿌옇게 만들 었다. 크고 높은 천장에는 태초에 있었던 천상의 전쟁들을 표현한 벽화들이 갈색의 필치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각 사면에는 이성과 학문을 수호하 는 클로니아 스피릿들이 얼음 창을 들고 서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그들의 은빛날개와 은빛 머리칼은 빛 바랬지만 그래도 거기엔 아무리 변 색해도 사라지지 않을 웅장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 언제부터인지 셀 수도 없는 오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음 직한 낡은 테이블... 그러나 쇠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검게 반들거리고 있는, 70명이 앉아도 넉넉할 것 같은 큰 테이블에는 오직 레이서스와 한 소녀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맨 처음 그가 이곳을 요구한 것은 일반 열람실에서 돌아다닐 대학생들 과 지식의 보존자들이 신경에 거슬릴 것을 생각해서였다. 평소라면 괜찮 았겠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거치지 않을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엘 아이즈가 새겨진 출입증을 갖고 있는 누군가 덕분에... 그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 었다. 레이서스의 아랫사람 부리는 태도가 무척 자연스럽고 당당하기도 해서 아마 더욱 의심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녀는 알까..? 이곳이 '지혜의 홀'이라 불리는 곳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하바티온이나 루이티온의 계급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고... 만약 일루티온이라면 메이지 마스터 급의 아티스트나 서기관의 신분을 갖고 있는 자만이 출입할 수 있 는 도서관의 제일 금단 지역이라는 것을. 일반 열람실에 있는 종이 책들이 아티스트의 힘으로 기록된 것인 반면 이곳에 쌓여 있는 양피지에 적힌 문서들은... 정규 교육을 받은 서기관과 고위 성직자에 의해 직접 필사된 것으로, 다섯 성서나 아가트... 혹은 스피 릿에 관한 문서였다. 그러니 만약 그 아래의 계급이나 신분을 갖고 있는 자들이 이곳엘 들 어온다면 당장 신성모독죄로 처형된다. 금단 구역이 주는 것들... 최대한의 예의와 최대한의 배려, 그리고 낡은 것들 특유의 안심(安心)과 따뜻함은 그 자격을 가진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흐응... 그러니, 어떡할까. 루온 루드랫, 네 아내는 점점 더 죄가 쌓여 간 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는 테이블을 여전히 느릿한 리듬으로 두드리고 있 었다. 소녀는 잠들어 있었다. 이젠 그의 백성도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이 소녀... 아마도 클로니아 사람일 이 소녀는 천사들의 벽화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전과 오후 내내 지식의 보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엘야시온의 문물에 대한 책들을 뒤적거리고 그 중에 하나, 삽화가 잔뜩 그려진 쉽게 설명된 책을 받아와 읽더니 방금 전에 잠들었다. 마노테온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직접 보고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세계 는 넓으니 그 많고 많은 마노테온 중에 하나 정도는 글을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배우는 데 꽤 힘들었을 테지만, 뭔가 독특한 과정이 분명 있었겠지. 루 온 루드랫이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고.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루온 루드랫도 보통 루이티온은 아니었다. 글을 잘 모르는 루이티온 계 급이 대부분인데, 그는 특이하게 글을 아주 잘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긴 뭐... 그래도 책은 싫어해 어렸을 적 레이서스가 책을 같이 읽자고 하면 딴 짓을 하기 일쑤였지만. 헌데 그런 자가 자기 아내에게 글까지 가르쳐 주었다니... 그의 예전 성 품으로 본다면 꽤나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거칠고 난폭했던 그의 성 품으로 본다면... 덕분에 아까부터 실소가 나와 견딜 수 없었다. 이 넓은 지혜의 홀은 너 무나 조용했고, 어떻게 한 것인지 봄날처럼 따뜻한 기온이었다. 아마 중앙 난방 식으로 양피지나 벽화가 상하지 않게 따뜻한 공기만을 안으로 흘려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티스트들이 애를 쓰고 있거나... 그래서 아마 소녀는 이곳이 편안한 곳이라고 착각하고 잠들었을 것이 다. 그리고 레이서스는 시나가 잠들자, 책 읽던 척 하던 것을 관두고 의자 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낮은 눈으로 잠들어 있는 시 나를 보았다. 적당히 건조한 공기 속에서 자느라 붉게 된 볼을 하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검은 색의 머리칼은 귓불에 조용히 덮일 만큼 가지런했는 데.. 그 외에는 크고 두꺼운 모자에 가려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서스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 어리게 보이고 순진하 게 보여서... 과연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여자인가 의심이 갔던 것이 다. 하지만 이 소녀는 분명히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다. 그러나... 도대체 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레이서스는 이 조용한 분위 기 가운데, 거의 슬픈 눈을 했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도 됐을 텐데... 레이서스는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쭉 떠올렸다. 그 뒷골목에서 시나를 만나고 힐러의 집에서 있었던 일들까 지 모두 다 한꺼번에 떠올린 것이다. 그러다 그는 어떤 사실 하나를 발견 하고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면, 이 소녀를 '조카'라고 했던 것은 그 힐러 부 부였는데...? 그러면... ....!!!] 그의 눈이 커졌다. 이런 상황들이 단순히 그의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 그렇지. 나는 혹시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안 그런가? 마노테온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거기다 그 부부가 '조카'라고 했던 상황은 일부러 내게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상황도 아니었 다...!] 레이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다시 한 번 더 시나를 자세히 보았다. 무방비 상태로 잠든 이 얼 굴... 그 얼굴을 보니, 그의 생각에 어떤 뚜렷한 근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래, 맞아...! 어쩌면 이 소녀는 정말로 그들 부부의 조카일지도 모른다. 그 러니까 이 소녀는 정말로 힐라토 인인 거다. 이 검은 머리칼... 이 머리칼 처럼 검은, '나의' 세계 사람. 몸이 너무 약해서 글읽기를 좋아하게 된 일 루티온 소녀. 그러니까, 처음부터 루온 루드랫의 아내 따윈 아니었다. 그 증오스러운 남자의 아내. 그 여자는 지금, 무리한 간호로 그 힐러의 집에 누워있고 여 기 있는 것은 그냥, 평범한 일루티온 소녀인 것이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단순한 오해로... 자신은 지금까지 괜히 이 소녀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잘못한 것이다. 단순한 오해라면... 이제까지 그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태도에 소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비웃었 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잠들기 전에도 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고 미안한 얼굴로 잠들었으니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사과하고 싶다. 이 일을 확실히 해서, 오해를 풀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 면 사과하고 싶었다. 그는 시나의 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 번도 그녀 가 모자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책을 살 때조차도 보지 못했다. 보통 그런 서점 길드에서 책을 사면 서점 주인이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요구했겠지만, 그 늙 수그레하고 졸린 눈동자의 서점 주인은 장부를 어디다 뒀는지도 몰라 찾 아 헤매다가, 레이서스가 장부에 자기 이름과 책이름을 기입하자 귀찮다 는 듯 그냥 가보라고 했다. 레이서스로서는 진짜 자기 머리카락을 끊는다면 당장 그것이 검은 색 이 될 테니, 초록색 머리카락까지 몇 가닥 준비했었는데... 모처럼의 준비 가 허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소녀 또한 자기 이름만 기입하고 나올 수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이 소녀가 그때 보인 표정이 어떠했지? 열심히 생각했지 만 알 수 없었다. 그때, 서점 주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 소녀는 재빨리 서점을 나갔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빨리 나가는 모습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한 기억 은 있지만...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 움직였다. 이 모자를 벗겨 본다면, 당장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만 하면 앉아 있는 대신, 너무나 간단한 확인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을 그녀의 머리로 가져갔다. 그녀의 모자를 벗기기 전, 잠깐... 손가락 끝이 떨린 것 같이 느껴졌는데, 그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볼에 닿았을 때는 오히려 자신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자기 볼 에 누군가에 손이 닿았는데도 시나는 깨어나지 않았고, 그냥 몸만 조금 뒤척였다. 그리고 무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드랫.. 무슨 종속주가 그래요.. 해달라는 것도 안 해주고.. 체.." 한숨 같은 불평이었는데, 그것이 레이서스의 손가락을 얼어붙게 만들었 다. 뱃속부터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 그리고 그는 결국, 확인 할 수 있었 다.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로서의 그녀를. 루온 루드랫을 종속주로 가진 자 로서의 그녀를. 그녀는 맨 처음부터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 이다. 마노테온 여자를 사랑해서 아내로 삼기로 했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짙은 검은 색. 하지만 너무나 짧 은 머리카락이라,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무척이나 춥게 보이고, 외로와 보 였다. ...마노테온, 마노테온... 이 단어가 계속 레이서스를 비웃었다. 심장 박동처럼 똑, 똑 끊어지는 느릿한 리듬이 아까부터 그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순간, 레이서스는 자기도 모르게 시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훔쳤고... 그 싸늘한 감촉에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차 갑고 얼마나 부드러운가? 그래서 그는 이 소녀를 꼭 자기 손으로 죽이겠 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남아 있는 감정이란, 왜 이 소녀를 그때 그 뒷골목에 서 만나야 했는지... 왜 자신이 직접 나서서 힐러의 집을 찾아가야 했는 지... 차라리, 루파르테에게 시켜서 분노를 만족시켜도 좋았을 것을... 하는 지독한 후회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모멸감이었다. 시나가 눈을 떴을 때는 도서관 안이 꽤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그래서 시나는 자기가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여파로 무척이나 저린 팔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우~! 팔이야.. 너무 오래 잔 것 같아요..." 레이서스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빙긋 웃었다. "...무척 피곤했나 봐요. 확실히 굉장히 잘 자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무척 친절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시나는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했 는데 이제 그는 완전히 아침 무렵의 상냥했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시나는 헤헤 웃고 말했다. "그래요? 모처럼 졸라서 왔는데, 잠만 자는 것보고 저를 웃기는 애라고 생각했겠네요? 음.. 하지만 저번에 레겜이 사준 책 갖고도 꽤 자세한 정보 를 알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이제 유일하게 궁금한 것은 '칼루스온'이라는 단어였는데, 아쉽 게도 지식의 보존자들인가 하는 사서들도 그 단어는 알지 못했다. 더 자 세한 설명을 하고 책을 찾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엘야시온님이 비밀 로 하라고 했으니 더 이상 말할 도리도 없고 해서 포기하고, 그냥 이런 삽화 많은 책이나 보며 있다가 잠든 것이다. 그에 비해 레겜은 도무지 알 지 못할 딱딱한 책을 갖다 놓고 읽고 있었는데, 스피릿과 환경의 상관관 계라는 제목의 그 책은 이상한 전문(?) 용어와 수치가 잔뜩 나와서, 흙의 날 그가 보고 있던 몬스터에 대한 책과는 사뭇 다른 책이었다. 하지만 그 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보니, 놀랍게도 시나가 잠든 새 그것을 거의 끝까 지 다 읽은 것 같았다. "음.. 책이 재미있었나 봐요. 아까 잠깐 봤을 때 굉장히 어려운 책 같던 데...." 레이서스는 피식 웃더니, 책을 탁 덮었다. "...별로.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도서관에 볼일이 없다면 이제 나가볼까요?" "네? 왜요..? 그 책 몇 페이지 안 남은 것 같던데, 마저 읽고 나가면..." "아니, 집에 비슷한 것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지혜의 홀'만큼 되지는 않지만 그의 왕궁에 있는 도서관도 이 정도의 책은 갖추고 있으니까. 그는 벌떡 일어났다. "데려다 드리지요. ..갑시다." 그리고 도서관을 나올 때는 아까 봤던 문지기와 함께 한 남자가 서 있 었다. 문지기가 그 남자의 귀에 긴장한 표정으로 뭐라고 소곤거리자 남자 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웃음을 띠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는데, 입고 있는 옷차림새를 봐서 분명 높은 신분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던 듯, 가까이 다가온 그는 레이서스의 얼굴을 보더니 얼굴에 놀라움 을 띠고 우뚝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남자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뭐 라고 말할 듯 입을 뻐끔거렸는데, 그런 그를 눈짓으로 제지하며 레이서스 가 재빨리 말했다. "시나..? 먼저 나가 있겠습니까?" "네? 하지만.." 웬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와 내심 긴장하고 있던 시나 는 놀라서 말했다. 그러나 레이서스는 웃음을 짓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제가 아까 책을 보다 이들에게 무언가 부탁한 것이 있거 든요.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나가 계세요. 금방 따라 가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시나는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옷을 입 은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레겜의 표 정은 평온했으므로 그의 말대로 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레이서스는 시나가 출입구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말 했다. "그대는? 이곳의 관장인가?"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님...!!!" 그리고 그는 긴 예를 말했다. "저는 이곳 도서관의 관장인 하바티온 하네이드라고 합니다. 저 하온 하네이드, 삼가 밤과 휴식의 세계, 그리고 모든 환상의 근원이신 세계의 파이오니온, 엘에게 선택받으신 거룩한 절대자, 지존자에게 예를 올립니 다. 만세수 하시옵소서- 힐라토 파이오니온이여." 레이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바티온 하네이드. 그대에게 엘의 가호가 있기를." 이렇게 단박에 그를 알아 볼 정도라면 아마도 그는 최근, 유리궁전의 연회에 참석해서 레이서스의 얼굴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하네이드가 말 했다. "아, 암행이십니까? 하지만 프레미어 루이트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미 리 말씀해 주셨다면... 아, 엘 아이즈의 패를 갖고 계셨다는 이야긴 들었습 니다만, 그래도 이것은 너무 의외의 일로.." 레이서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그대는 관심 가질 것 없다. 클로니아 인이여. 그대 세계의 도서관에서 괜한 소동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 지.." 레이서스는 차가운 눈을 하고 허리를 땅에 닿도록 굽히고 있는 문지기 를 흘끗 보았다. "...이 정도 되는 도서관에서 예지력(叡智力)도 없는 자를 문지기로 삼 아, 홀로 지키게 하다니. 클로니아 세스틴 님의 위명(威名)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조금 이상하군. 이것이 클로니아의 관습인가?" 그러자 하네이드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 그것이.. 세계혼의 축제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데다, 요새 이상하게 흡혈귀가 출현하는 것 같다고... 현자들은 다 성문이나, 왕궁 같은 주요 출 입도로에 배치가 되어 버려서... 이, 이곳이야 방학중이고, 사람도 별로 없 고 해서 그냥 보통 사람을... 하, 하여튼 죄, 죄송합니다!!! 몰라 뵌 저희의 불찰입니다!! 당장 내일부터 현자를 이곳에도 배치해서...!!!" "아니.. 됐네. 이제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야." 그러더니 레이서스는 후드를 다시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남의 도서관 일까지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했더라면 그녀의 정체를 흙의 날 일치감치 알았을 수 있다는..." "네?" 하네이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레이서스는 후드의 그늘 속에서 잠 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곧 자신을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아무 것도. 어쨌든, 자네도 내가 이곳에 온 일은 못 본 일로 해. 알겠나?" "네..넷..!!" 하네이드는 엉겁결에 크게 대답했다. 그리고 레이서스는 뜻 밖에 파이오니온과 부딪혀 놀라고 있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몸을 휙 돌 려 그곳을 떠났다. 시나와 레이서스가 길로 나왔을 때는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한 창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독특한 의상이라든지, 머리 모양, 그리고 들고 있는 가면으로 보아 가장 행렬 축제가 벌어질 것 같았다. 시나의 얼 굴이 밝아졌다. "와~!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여기 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 요! 하하~!!" 레이서스도 미소지었다. 그는 언제나 미소지었다. 그러니 미소만큼 손쉬 운 표정은 없었다. "그렇군요. 행렬을 보아 혼 강 상류의 베쓰엘 카할까지 이어질 것 같습 니다. 가는 도중에 각종 몬스터들의 퍼레이드도 벌어질 것 같고요." "와~!!" 그때였다. 누군가 그들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이봐요~! 이 가면 하나씩 안 사시려우~? 내 아들과 같이 열심히 만든 거라우~!!! 왕족님들의 가면부터 몬스터들의 가면까지 다 있어요~~!! 잘 생긴 총각, 하나 고르시구랴, 응? 매스커레이드를 하려면 이게 있어야 지~!!" 레이서스와 시나는 노파가 갖고 있는 가면들을 보았다. 그 말 그대로 약 30여종의 가면은 굉장히 다양해서 똑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그 중에 하나... 레이서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시나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봅시다.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조금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가장행 렬 축제라도 참가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혼 강 상류에서 마차를 타고 곧 바로 돌아오면 되니까.. 흙의 날보다 늦지 않게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 다." "아앗~!!! 정말이요?!!! 그럼, 저야 너무 좋죠!!!" 아까부터 노파의 가면을 보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던 시나인지라 너무나 좋아했다. "좋다니, 저도 기쁘군요. 그럼, 가면을 골라 보세요..." "와, 그래요? 보자~!! 다, 너무 예뻐서 뭘 해야할지...!! ...으음~! 으음~!!!" 한참 이것, 저것 뒤적이며 고민하던 시나는 검은 색 눈에 검은 색 천으 로 꾸며진 가면을 골랐다. "하하..! 이것이 가장 예쁘네요!!" 순간 레이서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잠깐 사라졌다. 노파가 이빨 빠진 얼 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잘 골랐구만! 그건 우리 아들네미가 며칠 밤을 새워서 만든 건데~!! 힐라토 왕족 님이지~!" "헤에, 그래요?" 그냥 보통 평범한 가면인데, 어느 부분을 보고 '힐라토 왕족'인지를 알 수 있는가 희한했지만, 시나는 자기가 고른 것이 '왕족'의 가면이라니 기 분이 좋았다. 검은 눈과 검은 색의 천으로 만든 머리칼을 보니, 저쪽 세계 랑 아빠 생각이 나서 향수에 젖어 고른 것인데 말이다. 노파가 켈켈 웃었 다. "아가씨.. 맨 처음엔 소년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아가씨.. 그렇게 그 가면을 좋아하는 거 보니, 힐라토 매니아인감? 우리 아들도 그런데..." "힐라토 매니아요?" 시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지만, '힐라토인'인 자신의 무식을 레겜에게 드러내기 싫어 어색하게 웃고 얼버무렸다. "아.. 저는, 그냥... 이런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좋아해요. 그것도 굉장히 요..." 시나는 그리고 밝게 웃었다. 그녀의 친구들과 아빠... 모두들 검은 눈에 검은머리인 것이다. 저쪽 세계에서야 그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 와서 는 검은 눈에 검은머리 가진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 새삼 너무나 그것이 그리웠다. 그때 레겜이 말했다. "...골랐으면, 쓰고 오십시오." "네..?" "화장실이 어딘지는 아시죠? 거기 가서 쓰고 오세요." "아아.. 네..." 시나는 흘긋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거리에서 모자를 벗고 자유롭게 가 면을 쓰는 사람 몇 명이 보였는데, 굳이 화장실에 가서 가면을 갈아 쓰고 오라는 레겜의 말이 이상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사람 없는 곳에 가서 가면을 써야 하긴 했다. 가면은 머리에서부터 둘러쓰는 형이었 던 것이다. 그래서 시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아까 봤던 대학 내의 화장 실로 향했다. "그럼, 금방 갔다 올게요." 그녀가 대학 구내로 사라지는 데, 노파가 웃었다. "아이고~ 청년, 너무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꽤 귀여운 처녀구먼? 이렇 게 자네가 대신 가면 값까지 치르고... 자네 종속자인가 보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맨 처음 눈에 띄었던 가면을 가리켰다. "저는 그걸로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아, 아이구~!! 고맙구먼!!" 그가 치른 것은 탈란 금화 한 개로, 거기에 있는 가면 반은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서 노파는 희색이 만면해서 그에게 그 가면에 걸맞은 나무 낫까지 공짜로 건네 주려했는데, 레이서스는 그것은 거부했다. "이것만으로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드를 벗고, 초록색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가면을 쓴 뒤, 가면 밑으로 드리워진 검은 천을 똑바로 폈다. 그 위로 다시 후드를 둘러 쓰는데, 노파가 말했다. "아이구, 참 잘 어울리는 구만! 키가 커서~! 홀홀~! 엘에게 불손한 녀석 들을 찾아간다는 죽음의 천사~! 정말 죽음의 사신 같아~! 홀홀~!! 그, 근 데, 정말 이 낫은 필요 없나? 훨씬 더 그럴 듯 할텐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The Death", 낫을 든 해골의 모양인 죽음 의 신은, 낫(scythe)이 아닌 유리 검을 사용할 것이다. (계속)================================================== 토요일에 시유어게인...^^ ('성역...'은, 다음 주 일요일에..^^) <엔...^^> ps...아, 그리고 일주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하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 점심은 과연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냥 그런가 보다, 덤덤하게 지나갔는데, 이것도 기쁜 일입니다.^^ (유니텔은 글을 옮기느라, 맨 첫 회의 날짜가 지워졌고, 나우누리는 뒤늦 게 연재를 했으니까... 별로 상관없지만, 하이텔은 맨 첫 회 올린 날짜가 98년 9월 25일로 남아있습니다. 하하..^^) 어쨌든, 저야말로 읽어주셔서 언제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새로운 바퀴로 굴러가게 되었으니까... 일주년이 되어 변한 것이라면, '작년 이맘 때는 어떤, 어떤 마음으로 썼었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 다.(하하..^^) 좋은 일...^^ 사실, 이걸 쓰기 시작한 것은 작년 팔월 중순이었고, 덕분에 재미있는 가 을을 보냈습니다.(^^) 올해 가을도 재미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벤트로서, '인기 순위'는... 123회 때(모 분이 이벤트 하자고 청하 셨음...^^;;;;;)도 그랬지만, 제가 잡담은 좋아하는데, 이런 것에 대해선 별로 불타는 마음이 되지 않아서... 하하..^^;; 고로, 그냥 폭죽이나 터뜨리고.... (펑~~!! 펑~~~!!!) 엔: 자, 자 일루 모여봐~!!! 사진 찍자~~!!! ----------------------------------------------------------- (펑~!) (펑~!) (펑~~~!) (펑~!) (펑~!) (^_^V)(^_^V)(^_^V)(^_^V)(^_^V)(^_^V)(^_^V)(^_^V) (^_^V)(^_^V)(^_^V)(^_^V)(^_^V)(^_^V)(^_^V) (^_^V)(^_^V)(^_^V)(^_^V)(^_^V) (^_^V)(^_^V)(^_^V)(^_^V) (^_^V)(^_^V)(^_^V) (^_^)∑ ----------------------------------------------------------- 제목: 폭죽 터지는 것을 배경으로 해서, 손 브이 자로 한 등장인물들 사진 찍어주는 '이벤트'를 하는 엔. 설명: 맨 앞줄부터, 오른쪽으로, 시나, 셰리카, 아마사, 루드랫, 레이서스, 율르스, 가디엘, 겐트온, 도비온, 헬리옷, 샤일라테, 이드넘, 웨스로드, 루사 벨라... 기타 등등들... (기타 등등 미안...--;) 엔: 그럼 이것으로 이벤트를 마치고, 다음에 더욱 웅장하고 멋진 이벤트 로...(퍼버벅---!!!) 어쨌든, 이번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하하..^^;;; ※ 왜 얼굴이 다 똑같은 거냐는 예리한 질문은 사양. (득도하면 다 다른 얼굴로 보임.)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4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8 06:52 읽음:235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7회, 제 40막. Masquerade. (5)> "일개 마노테 계집애 한 번 만나는 것이 무슨 왕족 뵙는 것처럼 힘들 군." 도비온이 투덜거리자 겐트온이 말했다. "신빙성 있군." 도비온이 말했다. "뭐?" 겐트온은 히죽 웃었다. "'왕족'이라며. 네 엠벨루스가 말한 대로면 그것 이 맞는 말이겠지." 그러자 도비온이 코웃음쳤다. "제발, 웃기지 마. 말이나 돼? 그게 왕족이면 난 큰집이야. 그리고 아까 도 내내 말했잖아? 엠벨루스 님은 제물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괜한 소리 한 것이 틀림없다고. 아니면 네가 잘못 들었거나.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 를 해야지. 네가 말하고 있는 건, 능력을 담을 그릇이 없는 '마노테'란 말 야. 게다가 검은머리에, 회색 눈. 만약 그런 몸에 스피릿 파워가 담긴다면 당장 내부에서부터 폭발하고 말걸?" "마노테인데도 도미니온즈와 연관이 있다... 누군가가 생각나잖아." 도비온은 겐트온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눈치챘다. "관둬! 그 누군가가 누구를 말하는 지는 알겠지만, 그녀는 그래도 '스피 릿 심벌'은 갖고 있었어! 헌데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사항들을 연결시키 려고 애쓰는 거야? 도대체 무슨 접점이 있어야, 나도 상대를 하든 말든 하지! 하여간에...!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하고 있는 것도 한심한데.. 지겹기 짝이 없군." 겐트온은 앞에 놓여 있는 은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이런 고급 음식점이 라면 시종이 곁에서 시중 들어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룸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주위는 아주 조용하고, 칸막이 너 머에서 가끔 들리는 웃음소리라든지 바깥에서 들리는 가장 행렬의 소음만 이 희미하게 울렸다. "애초에 잘못을 한 것은 너잖아. 보호물 감정이 얼마나 느슨해졌나 시 험 좀 해보라고, 마노테를 처치하라고 했더니... 그러니 넌 이 일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할 자격 없어." 도비온은 화를 벌컥 냈다. "거 자꾸, 지나간 일 좀 들추지 마!! 덕분에 나도 손해 많이 입었어! 몇 달 동안 시장 조사해서 기껏 찾아낸 아티스트 놈도 죽어 버리고! 그 놈을 제대로 처리했으면, 상당한 마나를 흡수할 수 있었는데, 그 놈의 루사트 자식이 싸그리 죽여준 덕분에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라고! 그런데, 잘못! 잘못! 너희들이 했으면, 뭐 얼마나 더 잘했을 줄 알아?!" 겐트온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웃었다. "흥...!" 덕분에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니었던 도비온은 슬슬 비위가 상하기 시 작했다. 겐트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게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도바." 도비온은 대답도 안 하고 자기 잔에 있던 포도주를 꿀꺽 삼켰다. 그리 고 기분 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음... 인딜산이라고 했던가? 거기 동굴에서 말이야. 시체에서 검출된 힘 이 분명 '검기'라고 했지? 그렇다면 검기 외에 다른 힘 같은 것은 검출되 지 않았어?" 도비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다른 힘?" 겐트온이 말했다. "뭐, 그러니까 '스피릿 파워'라든지."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도비온은 이윽고 말뜻을 해석하고 인상을 썼다. (계속)================================================== 으아아~!! 제가, '월요일 새벽 이후(...라는 것은 빠르면 월요일 하루 중 아무 때나, 늦으면 화요일에 올린다는...--;;)'라고 했건만... 왜 '월요일 새 벽'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렇게 협박(?) 멜을... 흑흑... (크흐흑.. 내 잘못이야. 쾅쾅... 단어선택을 제대로 했어야 해... 쾅쾅...) 그래서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것을 올리고...(야~!! 진짜, 길고 가늘 게 사는구나. 나는~--;) 나머지는 쓰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수요일쯤에 느즈막하게 봐주신다면... 그때쯤이면 이번 막, 그렁 저렁 다 올라가 있을 겁니다. (^^;;;) 아.. 그리고 요즘, 시험기간인데... 시험 잘 보시길 빕니다.^^ (하하.. 날씨가 추워서 기말고사 기분 나겠어요...^^) <밤을 꼴딱 샌 엔...^^> ps...이렇게 분량이 짧은 것은 사건도 별로 진행 안되고, 별로 안 궁금한 장면에서 자르기 위해..(--;;;) ps2...'성역...'은 이번 막 다 쓰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멜 보내 주셔서 감사.^^)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6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9 07:22 읽음:223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8회, 제 40막. Masquerade. (6)> "...스피릿 파워. 지금 누구 이야기하는 거야? '보호물' 이야길 하는 건 가? 그거야? 그렇게 생각할 만한 뭐, 의심쩍은 구석이라도 찾아냈어?" 겐트온은 빙긋 웃었다. 그의 푸른 눈에 적색의 포도주 빛이 어려 일렁 거렸다. "...이런. ...웬 보호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영혼이지만, 그 영혼은 육체가 길러내는 것. 이런 사실 정도는 외워 둬. 22년 동안 그 모양으로 지배를 당했는데, 아무리 고귀한 영혼이라도 이미 그 능력은 사장됐어. 그것을 위해 우리가 그 기나긴 세월을 인내한 것인 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게다가... 보호물이 '스피릿 파워'를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요전에 찾아갔을 때, 미쳤다고 '검기'를 사용했겠냐? 바보 녀석." 그리고 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포도주 맛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조 금 더 진하면 딱 좋은데... 이런 걸 고급품이라고 내 놓다니, 이름만 그럴 듯하지 형편없는 가게라는 생각이었다. 한편 그런 태연자약한 겐트온의 모습을 보며 도비온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지금 누구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겐트온이 말했다. "뭐, 아까도 말했듯 나는 여전히 그 마노테 아가씨 이 야길 하고 있거든?" 갑자기 도비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핫핫---!!!!"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방금 나한테 말한 '바보 녀석'이라는 호칭, 그냥 네게 돌려주마, 겐트 온. 그리고 '멍청이'라는 호칭도 덤으로 붙여주지. 오직 바보와 멍청이만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갖고 끈질기게 생각하고 들러붙을 수 있는 법이니 까!" "그래? 처음 들어본 명칭이라 무척 신선한 느낌이 들지만, 농담 들어줄 여유는 없어. 그러니 대답이나 해 봐. 우린, 네 말만 듣고 보호물이 계집 애를 구했다고 단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 고..." "증거가 왜 없어!!! '검기'에 당했다고 했잖아!!! 네가 아무리 '스피릿 파 워', 어쩌고 주절대도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놈 외에 거기서 '검기'를 사 용할 놈이 또 있었느냐고!" "글세... 흥. '검기'라고 해서, 당장 보호물을 떠올리긴 했지만 심문해본 결과도 그리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는 새파란 눈으로 도비온의 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이걸 생각해 봐, 도바.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걸려드는 것이 세 가지 있어. 하나는, 힐러의 집에서 있었던 상황이야. 그때 우리 보호물은 검기 를 사용하고 큰 치명상을 입었지. 그럼, 동굴에서의 상황을 떠올려봐. 똑 같은 검기를 사용했는데, 동굴과 힐러의 집에서 결과를 보면 너무 차이가 나. 힐러의 집에서는 눈에서 피를 뿜을 정도였는데, 동굴에서는 멀쩡하게 돌아와 다음 날 곧바로 제일로트로 들어왔으니까." "에잇!! 환각 상태가 아니라서, 잘 조절했기 때문에 그렇겠지! 그리고 인딜에서 무언가 금속 무기를 빌려가, 그것으로 검기를 조절했을 테고!!!"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두 번째, 도대체 그런 검기로 동굴이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검기가 대단한 힘이고, 정상적인 상태의 루이트라면 물론 동굴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그는 네 말 대로, 그럴 '그릇'이 못된다고. 안 그래?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그 몸 갖 고는 어림도 없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그 계집애가 아무래도 수상쩍어. 우리가 걸어 놓은 환각에서 그렇게 멀쩡하게 깨어났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 야. 그 계집애는 좀..." "지반이 약한 동굴이었겠지!! 그리고 그 계집애에 대해선 말했잖아! 얼 음의 숲에서 나온 계집애였다고!!! 그러니 환각도 제대로 먹혀들지 않은 거야!!! 이런 뻔한 사실들을 두고,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뭐냐고?!!!" 겐트온이 인상을 썼다. "글세... 그렇게 말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일은..."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곳에서 그 '도미니온즈'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지. 마치 무언가를 말해 주려는 것처럼. 이건 어쩜 '가루타넬'의 능력일지도 몰라. 어제 밤새 내내 그에게 시달렸으니, 무언가 쓸만한 것이라도 하나 던져 준 것인지 모르지. 그러니 다시 한 번 더 묻겠어. 그 동굴에서 '스피릿 파 워'가 아니라도, 무언가 '도미니온즈'가 연상될만한 사건은 없었나? 기억을 잘 떠올려봐." 도비온은 화를 냈다. 이 놈은 언제나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어린애 취 급을 한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없었어!!!!! 아직도 그놈의 왕족운운이야?!! 어제 밤새 가루타넬에게 시 달렸다고?! 그럼 잠도 제대로 못 잤겠군! 어때? 지금 머리가 몽롱하지..?! 꿈꾸는 느낌은 아냐? 이 따위 소리나 주절거리고 있는 것 보면, 분명하 군!!! 넌 달의 날엔 언제나 그랬잖아!!!" 겐트온의 눈이 차가워졌다. "...시끄러워. 넌 묻는 거에나 대답하면 돼. 우리들의 머리는 나지 네가 아니니까! 다시 한 번 묻겠어. 정말 그 동굴에서 마노테 계집애가 의심스 러운 일을 하지 않았어?" 도비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겐트온의 강압적인 말에 분노가 솟구친 것이다. '도미니온즈'? '스피릿 파워'? 그 마노테가 그것과 연관 있는 것이 아니냐고?! 갖다 붙여도 좋을 단어가 있고, 아닌 단어가 있는 법이다! 그런 사리도 분간 못하는 주제에, 아버지의 상담역이고, 아버지가 비밀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놈이야?!! '머리'? 이 놈은 언제나 그것 때문에 그에게 명령할 권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당당하다!!! 하지만 놈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한 때 그렇게 생각했 던 적도 있지만...!! 그래서 겐트온이 말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눈이 세 개 라고 해도 믿었던 적이 있지만!! 그건 이제 완전히 지나가 버린 옛날의 일인 것이다!! 도비온은 그래서 잔뜩 조소하며 말했다. "없.었.어!!! 몇 번이나 말해야 할까?!! 원한다면 밤이라도 새서, 말해줄 까!" 그러자 겐트온은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문이 막힌 겐트 온의 모습에, 도비온은 가슴이 다 시원했다. 겐트온의 말에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기 보다는 오기가 솟아 그의 말을 막고, 마음이 통쾌했던 것이다. "흥!!! 스피릿 파워~? 소설 짓고 앉아 있군!" 이렇게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동생을 보며 겐트온은 인상을 썼다. [...그런가. 만약 마노테가 정말 '도미니온즈'와 관련이 있다면... 그 위급 한 상황에 무언가 하나나 둘 정도 낌새를 드러냈을 테지만... 도비온, 이놈 이 이렇게 확신하며 말하니... 하지만 도대체 왜 그토록 그 말이 걸리는 것일까?] '너 도미니온즈여-!!!' 분명하다. '도미니온즈'는 왕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 각해도 그런 말은 일개 마노테 계집에게는 안 맞는다. [그런데, 왜 엠벨루스는... 거기다 이 무언가 미지근하게 걸리는 느낌 은...] 알 수 없었다. 도비온의 말대로 그냥 단순히 엠벨루스의 허언이었을 수 도 있고... 그의 느낌대로 무언가 까닭이 있어서 일 수도 있다. 그 '까닭'을 알기 위해 오후 내내 여기에 죽치고 앉아 있었고, 도비온의 투덜거림도 들어야 했다. 그러니 싫어도 조금 후면 정확한 전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계집을 검사해 본다면... 그때였다. 누군가 기운차게 룸으로 들어왔다. "아, 춥다!! 어찌된 게, 여긴 갈수록 더 춥군!! 늦어서 미안해. 일 좀 처 리하느라." 이런 말을 하며 찬바람을 몰고 온 것은 이드넘이었다. 방금 바깥에서 들어와 하얀 입김을 입가에 달고 있었고 피부가 경직되어 있었다. 도비온 이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쳇! 우린 아까부터 지루하게 있었는데..! 일을 처리했다니? 그 호문클 로스 계집애 말이야? 지금은 어때?" 이드넘은 자리에 앉았다. "어떻긴. 좀 앙칼스러워야지. 바락바락 대들기에 약 좀 먹여 재워 버렸 어. 호문클로스도 압수해 놨고. 쳇... 진작 그런 식으로 다룰 것을. 봐준다 고 했다가, 피곤하기만 했어." "쯧쯧!! 그러니까, 내가 애초에 확실하게 하라고 했잖아? 갈 데도 없으 면서 도망가서 다시 여관 근처를 맴돌다 잡힌 얼빠진 계집애니까, 제대로 상대해 줄 필요 없다고." "몰라, 젠장. 하여튼 그 계집애 때문에 골탕먹은 것을 생각하면... 호문 클로스의 반지도 그 계집애가 훔쳐간 게 틀림없는데, 그건 도대체 어디다 둔 건지를 모르겠고... 심문을 해보려고 해도,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리 를 질러대니 안 되고... 그렇다고 환각이나 환약을 쓰는 건 호문클로스 때 문에 불가능하고... 반지 하나 때문에 고문까지 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니 어쩌겠어? 그냥 데리고 있는 수밖에. 앞으로 차차 길들여야지. 호문클로스 같은 거, 정말 로 딱 질색이지만 이번 일을 보니 꽤 쓸모가 있어서... 이용가치가 생겼 어." "그래?" 도비온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방금까지 겐트온과 대화하며 기분 나빴던 것은 완전히 잊은 눈이었다. "흐응... 이용가치라.. 그러고 보면.. 그 계집은 호문클로스와 연결된 인 간이지! 그걸로 네가 술 마시는 모습까지 훔쳐봤을 정도면.." 도비온은 여기서 잠깐 낄낄 웃었다. "멍청한 계집. 그 능력이 오히려 해가 되긴 했지만. 엘의 날 오후의 너 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숙취 같은 건 없는데. 아까 소리지르는 걸 보니, 가관이더군. 숙취로 정신을 못 차릴 줄 알았다고? 사기 쳤다고? 하하.. 아 주 웃겼어. 어쨌든 그런 계집 따윈 죽여 없애는 게 낫지만.. 어때? 아무래 도 넌 너무 불안해. 계집애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어쩔 줄 모르는 너니 까. 그러니 차라리, 그 계집 나한테 넘기면 내가 연구에 잘 써먹어서..." 이드넘은 얇은 인면피(人面皮)의 눈썹을 찡그렸다. "됐어. 난 그 계집애 때문에 부하 한 놈을 잃었어. 꽤 쓸만한 놈이었는 데... 그러니, 그 계집애는 아무에게도 안 넘겨. ...샤일라테가 와서 뭐라고 해도, 이번만은 안돼." 도비온은 입술을 내밀었다. "쳇... 내가 카벙클을 넘겨줬을 때 은혜는 눈곱만치도 생각 안 하는 놈." 하지만 '부하'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더 이상 조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졌다. 부하를 잃은 것만큼 아까운 일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에 잠겨있던 겐트온이 갑자기 말했다. "...카벙클? 무슨 카벙클?" 그러자 좌중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도비온 같은 경우는 말도 하기 싫은 녀석과 이야기하기 싫어서였고, 이드넘은 출처가 불분명한 비싼 것 을 아무 말 없이 갖고 있다는 것이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비온은 입을 꾹 다물었고, 이드넘은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냐. 아무 것도. 그나저나 이곳 일은 어떻게 됐어? 아직도 도서관 에 있다던데, 사실이야? 그것 참, 상당히 귀찮게 하는군." 얼버무리는 이드넘의 태도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겐트온이었지만 별 다른 추궁 없이 이드넘의 말에 대답했다. 지금 그의 제일 관심사는 마노 테 계집이었던 것이다. "귀찮기는. 누군가를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오기는 이렇게 사람 많은 길거리가 훨씬 더 편하지. 엘의 날엔 상당히 놀랐거든. 큰집이 직접 거길 찾아 갈 줄이야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쨌든 그 사정을 들은 아버지도 그 계집을 데리고 있으라고 하셨고. 그렇게 하면 애초의 목적대로 보호물의 감정도 흥분시킬 수 있을 테니... 그런 일 하기엔 바깥이 편해. 쓸데없이 보호물과 부딪히지 않아도 되고." "그렇군. 하지만 그럴 거면 애초에 황금의 날에 납치할 것을 그랬군. 왜, 힐러의 집에 갔을 때 말이야." "아아.. 하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었거든. 몸도 안 좋았고. 하지만 오늘은 틀려. 같이 있는 남자만 잘 처리한다면... 별다른 방해 없이 데려올 수 있 을 거야." 이드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에 안주로 놓인 과일을 씹었다. "근데, 같이 있는 남자라니... 흙의 날에도 보호물 아닌 남자랑 갔다 왔 는데, 오늘도 또 남자? 이번엔 어떤 남자야? 왜 그렇게 에스코트 해주는 남자가 많아? 마노테 계집애가 상당히 미인인가 보지? 하긴... 보호물이 구해 줬을 정도니..." 그러더니 그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나 예쁜지 한 번 보고 싶은 데?" 겐트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많은 게 아니라, 그 남자가 또 에스코트해 주는 거야. 이번으로 두 번째라 오늘은 그 남자도 조사하도록 시켰지.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미니까. 아, 그리고... 그 마노테에 대해선 별 기대하지마. 네 취향은 아냐. 조금 남자애같이 생겼고... 뭐,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얼굴이긴 하지만." 이드넘은 눈썹을 치켰다. "그래? 그럼 기대해야겠군. 네 취향이면 거의 내 취향이잖아?" 겐트온이 웃었다. "마음대로. 하지만 실망은 너의 책임이지." 이드넘도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흙의 날의 남자면... 뒷문으로 들어와서 동네 사람인 줄 알고, 도비온 부하가 체크도 안 했다던 그 남자로군? 그러고 보니.. 어이, 도바 -! 네 부하들, 지금도 무사하냐?" 아침 무렵, 도비온이 부하 두 녀석을 이층 계단에서 날려버린 일을 말 하는 것이었다. 도비온은, 아침에 겐트온이 찾아와 큰집이 힐러의 집을 찾아간 보고를 왜 하지 않았냐고 다그쳤을 때에야, 자기 부하들이 힐러 집 뒷문은 감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도비온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 도비 온에게 부하들은 벌벌 떨면서, 뒷문으로는 그런 높으신 분이 들어갈 리 없고 뒷문은 보통, 아주 친한 동네 사람이나 들락거리는 거라고 설명까지 해주려고 해, 그는 지체없이 그들을 날려 주었다. 그리고 이드넘은, 셰리카에게 환각을 걸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 자리 에 있었기에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도비온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놈의 부하녀석들 때문에 겐트온에게 쓸데없는 추궁을 당하고 또 실수 하나를 추가했다. 그래서 그는 험악하게 말했다. "쳇!!! 그따위 한심한 놈들, 무사하던 말던 내가 알게 뭐야. 잘못 했으 면, 빌기나 할 것이지. 딱 잡아떼는 모습하고는! 누가 자기들보고 뒷문, 앞 문, 사람 가려서 감시하라고 했나? 큰집이 도대체 왜 뒷문 따위로 들 어간 건지, 그 엉뚱한 속이야 알 도리 없지만, 어쨌든 그곳으로 들어갔잖 아? 그런데, 젠장. 그 놈들은 창문으로 드나든다는 조카 계집애 이야기나 시시콜콜히 하고 앉아 있고!!! 누가 그따위 정신나간 계집애 이야기 알고 싶다고 했나!!! 길거리에 뒹구는 돌멩이만도 못한 놈들!" 그의 얼굴엔 깊은 경멸이 드러났다. 그는 무능력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흥! 그래도 그 놈들을 이층에서 날려버린 덕에, 오늘 부하 놈들은 꽤 정신을 차렸단 말이지. 흙의 날 남자에 대한 중간 보고도 가져오고... 그 남자, 단순한 여행자인 것 같은데, 손님으로 왔다가 마노테 계집을 도서관 에 데려가도록 부탁 받은 거 같다고 하더군. 보호물이 그 계집애 여가까 지 챙겨주다니, 아주 놀라운 사실이지만 말이야." 이드넘은 여전히 과일을 씹으며 말했다. "...그랬군. 그나저나, 도서관이라... 흥...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마노 테가 여가선용으로 글을 읽는다는 것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일 이잖아? 그러니 정말 책 읽으러 간 것 맞아? 관광이 아니고?" 이런 도비온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 짓는 것은 겐트온이었다. 이드넘의 의심이 수긍이 갔던 것이다. 그건 겐트온 자신도 믿을 수 없 던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점차,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드러나고... 그래서 믿지 못했던 만큼이나 놀라움이 깊어져, 이젠 그 사실들이 마노테 소녀를 몇 단계나 높여서 평가하는 기준이 돼 버렸다. 덕분에 '스피릿 파 워'까지 생각해 보고... 겐트온이 말했다. "정말 책을 읽으러 간 것 같아. 그냥 구경이라기엔 우리들, 여기서 상당 히 오래 기다렸어. 도비온 말로는 전에 들린 마을 잡화점에서 책을 구입 했다니까... 지금 보니 그때도 그 종속자가 읽을 책을 산 거였나 봐." 이드넘이 말했다. "호.. 그거 참... 글을 읽을 수 있는 마노테 계집애라... 특이해. 어서 빨 리 그 얼굴 좀..." 그러자 도비온이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아까부터 이 놈은...! 이드넘!!! 정신차려! 하여간 가슴만 좀 불룩 하다 하면, 정신을 못 차리니..!! 마노테도 여자도 보이냐!? 겐트온도 말했 지만 그건 여자도 아니라니까! 쯧쯧!!!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 말에 이드넘의 귓불이 빨개졌다. "뭐야?! 마노테는 인간 아냐?!! 개중에는 쓸만한 미인도 있어!!" "아이고~! '여자에 대한 취향은 계급도 초월한다'냐? 그야말로, '박애(博 愛)'주의자 나셨군! 그게 성별에 치우친 박애라 문제지만~!" 그때 겐트온이 차갑게 말했다. "관 둬. 그 문제에 대해선 이드넘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둬. 웬 참견이야? 그리고 우리의 모토가 '박애주의'인데, '박애'가 뭐가 나빠?" 겐트온이 자기편을 들어주자, 이드넘은 무척이나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따돌림당한 도비온은 약오른 표정을 짓더니 잔뜩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고~! 그래? 하지만 난 예전에도 말했듯, '자비'와 '박애'에는 별 관 심이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우리 다크 스타즈의 수장께선 박애가 너무 나 철철 넘친 나머지, 마노테도 왕족같이 생각, 혹 마노테가 스피릿 파워 를 사용하진 않나, 밤낮을 구분도 안하고 걱정하고 계셨던 게로군? 하하 핫-!!!! 그거, 대단해~!!!! 그럼, 네 '박애'로 따지면 나는 어느 정도 되냐? 혹, '엘' 정도로 보이냐? 하하하핫---!!!!" 그러자 이드넘이 말했다. "야! 너 왜 겐트를 갖고 그래?! 겐트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고.. 너 또 괜히 겐트 말꼬리 잡고 그러는 거지?!!" 도비온은 화를 벌컥 냈다. "뭐야?!!! 겐트온에게 직접 물어봐!!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안 했는지!!! 말꼬리를 잡아?! 하, 웃기고 있네!!! 한 놈은 마노테를 왕족이 아니냐고 묻질 않나, 한 놈은 마노테에게 군침을 삼키지 않나!! 기가 차서, 원!!! 상 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에잇--!!!" 그러더니 그는, 더 이상 이야기도 하기 싫다는 듯, 화나는 표정으로 겐 트온과 이드넘에게서 돌아앉아 버렸다. 이드넘이 말했다. "저게 무슨 소리야, 겐트? 설마 정말 그런 소릴 했어?" 겐트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인딜산 동굴에서 '스피릿 파워'가 감지되지는 않았는가 물었을 뿐이 야." 사정을 모르는 이드넘의 눈에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아.. 역시, 그랬군." 수긍했다는 듯 말한 그는 과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 그 손이 멈칫 하고 갑자기 그 눈에 경악이 담겼다. 그는 겐트온을 돌아보았다. "...아니, 잠깐.. 너, 지금 뭐라고...? 인딜산에서, 스피릿 파워...?" 가면 밑에 있는 피부가 틀림없이 파랗게 변색됐을 이드넘은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너, 너, 너...!!!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허튼 소리 할 녀석이 아니 란 거 알아!!! 지, 지금 보호물 이야기하는 거야?! 그런 거냐고?!!! 하, 하 지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그럼 우리가 했던 일들은 다, 허, 허 사로.. 아, 아버지께는..! 아, 아버지께는 이 사실을 알렸어? 아버지는 뭐라 고 하셔...!!!" 그가 이렇게 말을 마구 더듬는데 옆에서 도비온이 코웃음쳤다. 겐트온 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이야기 같은 건 이 녀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해야 하는데..!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정해. 똑같은 말하기 힘들어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만, 보호물 이야기 하는 거 아냐. 세월과 그가 지닌 육체는 우리가 만족할 정도로, 충분히 그 를 갉아먹었어. 그러니 이젠..." "으악!!! 겐트온!!! 말하기 힘든 게 문제야!!!! 더 자세히 말해 봐!! 너도 22년 전 그의 무서움을 겪었잖아!!! 그 엄청난 능력!!! 그가 우리 본거지를 다 뒤집어엎는 동안, 우린 그에게 손 끝 하나 못 댔다고!!! 심지어, 아버지 도 마저도 그랬어!!!! 그, 그런데!! 그런데!!! '그'가 깨어난 거야?!!! 그가 깨어난 거냐고!!" 이드넘이 22년 전 이야기까지 하자 짜증이 난 겐트온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니까!!! 제발 닥치고 자리에 앉아, 이드넘!!! 난 지금 그 종속자 이야길 하고 있으니까!!!!" "...뭐..?" 이드넘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하는데 옆에서 도비온이 히죽 웃었다. "...글세 내 말이 사실이라니까, 그러네.." 그렇게 이죽대는 도비온을 쳐다볼 생각도 못하고 이드넘은 여전히 멍 한 얼굴로 겐트온의 말을 되풀이했다. "...조, 종속자.." "그래! 보호물,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종속자, 즉 마노테 계집애 이야길 하고 있다고!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것 중에 엠벨루스의..." 그때였다. 누군가 룸의 문을 두드렸다. 도비온이 말했다. "뭐야?" 숨죽인 목소리가 대답했다. "도바님! 그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 세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 중, 맨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도비온이었다. "흥!!! 잘들 해 보셔!! 난, 나갈 테니! 이 빌어먹게 귀찮은 일 좀 빨리 끝내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지..!!" 그리고 그는 룸에서 나가버렸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킬은? 그 녀석이 나오는 자들을 알아보았나?'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의 부하 가, '네, 지금 쫓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장 행렬 축제의 인파에 섞여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러니 빨리 가보시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아 겐트온과 이드넘도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드넘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이번처럼 간단한 일 은 그냥 도비온에게 시키면 될 것을, 굳이 너까지 나서고... 나한테 나오라 고 한 것도 이해가 안 가. 하지만 네가 쓸데없는 짓은 안 할 거라는 걸 아니까... 보호물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그걸로 됐어. 설명은 나중에 듣지. 내 부하들도 몇몇 데려왔으니,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그들 을 놓치기 전에 빨리 가자."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쓸데없는 말을 꼬치꼬치 묻지 않아 마음에 들어.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은 나중에 해주지." 겐트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드넘을 따라 룸을 나가는데, 그 전에 잠깐 룸의 말간 유리 너머를 보았다. 그 유리 덕분에 실내는 초를 밝히지 않고도 훤했지만, 바깥의 하늘은 또 한바탕 눈을 뿌릴 듯, 어두웠 다. 어제 맑고 깨끗한 날씨였던 것에 비해 급격한 변화였다. 하긴, 이 클 로니아에서 맑은 날씨란 구름이 잔뜩 드리워진 밤에 달빛처럼 드문 것이 니까. 그러므로 이런 지독하게 추운 날씨와 지독하게 자주 내리는 눈의 세계 를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난 사람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쫓는, 그리고 이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사냥감은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난 자였다. 그래서 그토록 혹독한 차가움 을 천성으로 지닌 자. 그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환경과, 이 세계를 자 신의 수족처럼 떼어놓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런 기억이 없어도 마찬가지. 살 곳을 선택하라는 큰집의 질문 에 클로니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하고, 그 이후 주욱 여기서 산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차갑고, 차가운 날씨.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속삭였다.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존재하지 않음을 보는 자...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며 존재하는 자, 그는 어떻더냐? 겐트온...? 겐트온은 아버지에게 공손히 말했다. 냉랭하며, 고독합니다.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한 채... 언제나 그는 그러했죠. 하지만 그, 최고로 아름답고, 최고로 오만한 그는 이제 당신의 발 앞에 무릎 꿇을 겁니다. 란사드크. 나의 아버지여. 그의 아버지는 만족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다. 그 멋졌던 몸이 이번에야말 로 나의 것이 될 날을.. 하하하-! 겐트온은 중얼거렸다. 아아... 22년이란 너무나 긴 세월이었지. 우리들에게도, 네게도... 하지 만... [도비온... 바리스는 제대로 불태웠는가?]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6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9 07:24 읽음:215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39회, 제 40막. Masquerade. (7)>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웃음과, 긍정이었고 곧 그 사실은 그들의 '보호 물'에게도 전해 질 것이다. 빠르면 내일, 늦으면 내일 모레. 만약 전해지지 않을 것 같으면 그들이 직접 알려 줄 수도 있다. 거기다 보호물은 오늘 자신의 종속자를 잃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겐트온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것들로 네가 조금 이나마 분노해 준다면, 우리에게 그런 영광과 기쁨은 없을 텐데... 네 분노와 네 슬픔만큼, 이제 곧 벌어질 축제에 합당하고 귀한 제물이 어디 있을까... 그는 그렇게 미소지으며 문을 닫았다. 오직 테이블에 남아 있는 것은 묽은 포도주와 과일, 그리고 매스커레이드의 희미한 울림뿐이었다. "매스커레이드가 시작되는데..! 엄마, 바보~! 데리고 가준다고 했잖아 요!!!" "아니, 이 녀석이~!!! 엄마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오늘만 날이 아니 니까 다음에 데려가 준다고 했지!!" 여인은 작년에 아들과 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들이 갑작스레 조르자 당황해서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일 년 전에 한 약속 같은 것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게다가 매스커레이드가 벌어지는 혼 강 근처는 여기서는 너무 멀어서 지금 준비하고 간다해도 너무 늦다. 또 오늘 저녁 엔 해치워야 할 바느질감도 있고... 아무튼 외출하는 것은 절대 무리인 것 이다. "그러니, 이따가 저녁 먹고 집에서 얌전하게..." "으앙~!! 엄마, 바보~!!" 소년은 이렇게 울면서 집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골목으로 뛰쳐나왔다. 절대로 집 같은 거엔 이제 돌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혼자라도 매스커레이드 하는 곳에 갈 참이 었다. 저번에 엄마와 시장 갔다오며 지름길을 봐두었으니, 그리로 주욱 따 라가면 혼 강 근처로 가게 될 테고, 그러면 저번부터 봐두었던 그 멋진 가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소년은 훌쩍이던 것을 그치려 노력하며 골목길을 걸었 다. 바람이 눈물에 젖어 붉게 부푼 뺨을 쪼갤 것처럼 부딪쳐 왔지만 어렸 을 때부터 눈과 함께 뒹굴며 자란 그인지라 별로 상관없었다. 예쁘게 깎 여 색색으로 칠해진 가면이 눈에 어른거려 더욱 그러했다.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까, 꼭 살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짐하며 소년은 힐러 라단 아저씨의 뒷문 근처까지 왔다. 이제 혼 강까지 거의 삼분의 일은 왔다는 생각이었다. 헌데 그 때, 소년은 그 뒷문 계단에 동네에서는 전혀 보지 못하던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 다. 드래마는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어 바람도 쐴 겸 잠깐 나와 있었다. 엘 야시온 가디엘은 오늘 아침 수정구를 통하여 이제 왕궁에는 나올 필요 없 으니, 힐러의 집에서 푹 쉬라고 말해 주었다. 드래마로서야 편한 일이었 다. 어쩌면 잘만 하면 내일쯤엔, 다시 바리스로 돌아가도 좋다고 명령할 지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일은 아주 잘 풀리는 건데. 그 수상쩍은 놈들 때문에 괜히 라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그는 잠시 눈을 찌푸리고 있다가 일어서서 쥐고 있는 목검을 붕, 휘둘러보았다. 아찔한 느낌이 왔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몇 번 기초적인 동작인 해 보았다. 붕- 붕- 공터에 찬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몇 번 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래마는 곧, 허리를 굽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역시 안 되겠군. 제길..] 식은땀이 나며 머리 속이 하얗게 되는 것이, 또 기절할 것만 같은 느낌 이었다. 게다가 기진맥진하여 힘을 줄 수 없도록 나른한 느낌이라니... 아직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간단하고 가벼운 동작 몇 번이 나무 세 그루 베어 넘기는 것보다 더 힘 이 든다. 그러니 역시 어딘 가로 외출한다는 것은 무리... 그는 다시 자리 에 앉으며 쓴웃음 지었다. [하긴.. 그 미친 짓을 한 것이 겨우, 나무의 날 저녁인데.. 오늘은 달의 날. 이제 겨우 사흘 됐을 뿐이야.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게된 것도 기적 이지. 그리고 눈도...] 그는 자신의 눈을 만졌다. 맨 처음 깨어났을 때 눈이 보이지 않아, 당황 하고 두려웠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페이스 힐러의 힘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붕대를 풀지 못하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라단에게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폐를 끼쳐서... 정말 곤란하 군. 어서 이 집에서 나가야 할텐데... 내일쯤이나, 내일 모레쯤, 하렘이나 여관 헛간에 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되면 역시 시나가 문 제인데... 고민이군. 시나만 여기 부탁할까 했지만, 그 놈들은 시나도 노린 전적이 있고. 휴우-] 그는 한숨을 쉬고 기둥에 기댔다. 새삼 디트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상 황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데려온 것이었지만, 이 모양이 되니 시 나를 데려온 것이 괜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자식.. 얌전하게 보여도, 고집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니 까... 정말 시나 대신 나를 따라나섰을 지도 모르지. 지금 나도 몸에 맞지 않는 힘 때문에 이 모양인데, 치료도 변변히 받지 못한 놈이 따라나섰더 라면...] 그는 인상을 썼다. [...차라리, 약을 먹이든지 몇 대 쳐서 기절을 시켜놓고 둘 다 떼어놓고 올 걸 그랬나.] 그러다가 드래마는 미소지었다. [아냐. 그래도 며칠 후엔 틀림없이 날 쫓아 왔을 걸. 그 놈은 그런 놈이 니까. 아주 골치 아프단 말이야... 흥.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 주제에... 날 속인 것도 괘씸하고. 하여간, 돌아가면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리고 페이스 힐러에게 찾아가 재생술도 받도록 만들고. 그 놈은 하여튼 너무 주제넘어. 도대체 제가 뭔데 멋대로 남을 좇아 고생을 한다는 거야? 골 빈 놈...] 그러면서 그는 남색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못 본지 겨우 이 주 정도지만, 꽤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지난 십 몇 년간 각각 번 갈아, 봄에 약초를 캐러 가는 여행을 떠났던 것 빼고는 헤어져 있어 본적 이 없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식이. 약은 제대로 먹고 있는 지 모르겠군. 돌아가서 골골대는 모 습이기만 해봐라. 꼴 보기 싫으니까 집에서 당장 쫓아내 버려야지.] 그렇게 다짐한 드래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빨리 회복되려면 정 상적인 환경에서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해 줘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을 때 충분히 쉬어 두기로 했다. 그래야만 몸을 다 시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드래마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렸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빤히 쳐 다보는 어린애를 발견했다. 예닐곱 먹어 보이는 사내 아이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눈가가 젖어 있고 볼이 빨갰다. 게다가 콧물이 길게 늘어져 입술 위에 걸쳐 있었는데, 입을 헤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느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자도 안 쓴 채, 전체적으로 몹시 지저분한 모습이라 드래마는 그 소 년을 마주 쳐다보고 인상을 썼다. 그는 아이들을 별로 안 좋아했다. 잘 이해할 수 없고 잘 울어서 그러했다. 그러니 아이들을 보면 그 쪽에 서 먼저 피했다. 지금도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상황인데, 그는 문득 시나 의 말을 떠올렸다. [구제불능인 심술쟁이가 되어 아이들을 안아보고 싶어도, 다가오지 않 을 걸요!!!] 그는 더욱 인상을 썼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고 남자애에 게 손을 내밀었다. "이봐, 꼬마야.. 너, 이리 와 보겠니?" 소년은 드래마의 말에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좀 비비더니, 그에게 미적미적 다가왔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다가온 소년은 드래마 앞에 서서 그의 눈을 빤 히 쳐다보았다. "...." 드래마도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자랑스러운 마 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를 부르니까, 아이는 아무 의심도 안 하고 그 에게 다가왔다. 이 사실에 어쩐지 의기양양한 마음이 들어 드래마는 미소 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가 계속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는 이것이 무척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가 다가온 것까지는 좋은 데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뭐라고 한다... 아이와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았다. 어떡한다. 그는 무척 고민하다가 결국, 결론 내렸다. 그냥 가보라고 하 는 게 제일 낫겠군... 그리고 그가 입을 벌리는데, 그의 모습 관찰을 끝낸 아이가 갑자기 말 했다. "...왕족 님! 이 근처에서 가면 파는 데 못 보셨어요?" "....." 드래마는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래서 아이들하고는 말을 안 하려 하는 거야. 차라리 오크하 고 대화하는 게 낫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괜히 불렀다는 후회를 뼈저리게 하면서 드래마는 딱딱하게 말했다. "..난 왕족이 아니다. 꼬마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아녜요!!! 우리 엄마가 은색 머리를 가진 사람은 왕족 님이라고 했어 요!! 혼 강 근처에는 왕족 님이 많이 사시니까, 여기는 가면도 팔겠죠?!! 자비로우신 왕족 님, 그러니까 제발 알려 주세요? 네?" 소년은 이미 장소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여 여기가 자기가 익숙하게 알 고 있는, 힐러 라단 아저씨의 집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 을 알 턱이 없는 드래마는, 묵묵히, 소년의 말에 절망하고 있었다. 절망한 드래마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을 구기자, 그 표정에 갑자기 소년이 울 먹거리기 시작했다. "으엥~!! 왕족 님, 화를 내시는 거예요? 하지만, 난 가면을 사고 싶단 말이에요..! 돈도 모았고요~! 그래서 매스커레이드에 참가할 거란 말이에 요!!! 옆 집 사는 아레티는 벌써 작년에 갔다와서 가면을 자랑했는데~~! 으엥~! 엄마...!! 엄마~!!" 상황은 모두 다 갖춰졌다. 아이는 울고 있었고 하는 말은 도저히 이해 가 불가능했다. 그렇게 언제나 피해왔던 상황에 직면한 드래마는 하는 수 없이 매우 중대한 결심을 해야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년이 했던 말을 엮어서 추리했다. 매스커레이드... 가 면... 왕족.. 이것은 소년의 착각이니 넘어가고... 옆 집 아레티... 혼 강. 어 느 정도 상황이 파악이 됐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이름이 뭐냐, 꼬마야?" 아이는 여전히 훌쩍거리며 말했다. "'오우디'요. 으에~ 가면..." 드래마는 또 한바탕 울려는 아이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네 뜻은 알 것 같다. 오우디. 그러니 우리, 너의 불만에 대해서 좀 더 이성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울음은 좀 그치도록 하는 게 낫겠다. 울면 생 각이 제대로 안 되니까. ...그리고 나도 생각이 제대로 안 되고. 하여튼... 네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울지만 말고 이론적으로 이야기해 봐. 알 겠니?" 아이는 이 긴말에 너무나 놀라서 우는 것도 잊고 딸꾹질을 했다. 역시 '왕족 님'이라 대단한 것 같았다. 모르는 말을 잔뜩 섞어서 말했다. 그래서 아이는 감탄으로 또다시 콧물을 길게 흘리며 입을 헤 벌리고 그를 쳐다보 았다. 그리고 드래마는 안심했다. 첫 출발은 괜찮았다. 일단 아이가 우는 것을 막았으니까. 그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래, 좋아. 울음을 그쳐서 기쁘구나. 음.. 그래. 나는 '드랫'이라고 한 다. 만나서 반갑다." 드래마는 이렇게, 그의 '중대한 결심', 즉 이 아이와 어떻게든 '대화'를 하여 이 상황을 타개해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실천으로 옮겼다. "또 눈이 올 것 같아요." 레겜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시나는 가면을 쓴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레겜을 보았다. 그는 전 혀 뜻밖의 가면을 선택해서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해골의 모양을 본 뜬 가면으로, 깊숙이 눌러쓴 후드 때문에 더욱 그럴 듯해 보이는 사신(死神) 의 모양이었다. "하하... 레겜은 정말 위험스러워 보이네요. 몬스터를 좋아하니까, 몬스 터 가면을 고를 줄 알았는데.. 하하... 그래도 어쩐지 어울려요. 저는 어때 요? 그럴 듯 해 보여요?" 레겜은 시나의 모양을 보았다. 하얀 나뭇결을 다듬어 만든 가면의 창백 한 얼굴과 붓으로 그려진 까만 눈동자, 검은 머리칼... 이마에는 붉고 파란 보석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힐라토 왕족의 모습. "...어울리는군요." 가면과 주변의 소음 때문인지 목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분 명히 '어울린다'고 했기 때문에 시나는 기분이 좋았다. "헤헤... 고마워요! 근데 이거 힐라토의 왕족이라던데! 도대체 어디가..." 자신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리도록 이렇게 목청을 높여서 말하는 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밀쳤다. "아얏!" 시나는 엉겁결에 레겜 앞으로 밀려났다. 그가 시나를 부축해 주는데, 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밀친 사람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 다. 게다가 하도 복잡해 누가누군지 구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네요!!" "그래요. 그러니 우리도 행렬을 따라 갑시다. 하지만, 광대들과 유랑극 단, 서커스단 근처로는 가지 말아요. 그 근처는 사람들이 많아서 휩쓸리기 쉬우니까." "하하하~! 알겠어요! 바로 저 사람들 말이죠...!" 악단의 마차에서 음악 소리가 흥겹게 울렸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가는 마차는 화려하게 꾸며진 극단의 마차였다. 그 위에서 배우인 듯 보이는 사람들이 과장되게 꾸며진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쾌 활하게 웃는 사람들이 탬버린과 방울을 짤랑거리며, 하누카 리본을 던져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는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광대들이 공중 제비라든 지, 뒤뚱거리며 걷는 특이한 모습이라든지... 하여튼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재주를 총동원하며 따라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커다란 웃 음을 터뜨리게 했다. 그 뒤로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따라가며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것은 춤 의 행렬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행렬에 끼어 춤을 출 수 있었다. 신 나게 울리는 음악에 맞추어 소박하고 경쾌하게 춤추는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거워 보였다. 이런 행렬이 길게, 길게 반복되며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차츰 횃불을 켜서 드는 무리도 생겨났다. 그것은 약간 높은 길에서 보면 마치 별이 흐 르는 듯한 모양이라 아름답고 유쾌해 보였다. 그 행렬의 가장자리를 걸으며 시나는 웃었다. "하하.. 너무 즐거워요!! 헌데, 이렇게 혼 강 상류까지 걸어가면 그 다음 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행렬에 참가하니,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심해서 시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레겜도 큰소리로 말했다. "거기까지 가서 혼 강 상류에 자기가 쓰고 있던 가면을 반으로 갈라 던 지는 거죠! 이제 곧 있을 하누카 날에 액운을 막기 위한 행사입니다! 그 리고 당신처럼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가면은...!!" 레이서스는 말을 잠시 멈췄다. "제 것 같은 가면은요!!? 이것도 강에다 던지는 거예요?!" 레이서스는 앞을 보았다. "아닙니다. 그건 하누카의 날에 왕족처럼 고귀하게 변하기를 바라는 마 음에서 쓴 것이니까... 다시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겁니다." "하하...!! 정말이요!! 와~!!! 잘 됐다~!! 모처럼 산 것인데, 던져버리면 아 깝잖아요~~~!!!" 흉측한 가면을 던져 액운을 막고, 아름다운 가면을 써서 그렇게 되기를 소원한다니... 단순히 미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이들의 관습이 고... 무엇보다 이렇게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실컷 웃으면서 걷는다는 것 이 너무나 즐거웠다. 게다가 모두 다 가면으로 가려진 사람들의 얼굴은 굉장히 다양한 모습 이라 그것만 보고 있어도 재미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오크의 가면... 그리고 시나의 것과 비슷한 힐라토 왕 족(?) 같은 가면... 레겜의 것 같은 해골모양의 가면도 간간이 있었고... 그 외, 늑대의 모양을 본뜬 가면이라든지 시나처럼 인간의 모습을 한 가면, 몬스터 모양의 가면은 어떤 것은 코믹하고 어떤 것은 리얼하여 한 참을 구경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나는 잔뜩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그렇게 한눈을 파 는데... "앗..!! 레겜?" 시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만 레겜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잘 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놀라서 갈색 후 드에다 해골 가면을 쓴, 그의 키 큰 모습을 찾는데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 다. "레겜? 레겜..!" 시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이 이름엔 대답하지 않고... 시나는 불안한 마음 이 들어 사람들을 헤치고 저쪽 구역으로 가보기로 했다. 잠깐 사이인데 어디 멀리 갔을 리는 없어..! "레겜...!!"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바로 그였다. "아.. 레겜..!" 레겜이 말했다. "시나.. 이런 곳에서는 조심해야 해요. 서로 헤어지기 쉬워서.." 그러더니 그는 한숨을 짓고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리 오세요. 손을 잡고 걸읍시다." "네! 아.. 저도 정말 놀랐어요..! 레겜이 없으면 집도 못 찾아갈지 모르 는데!" 그는 미소를 짓기라도 하듯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집에 못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후, 혼 강의 상류에 다다를 때까지 레겜은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멀리 혼 강이 보였을 무렵에는 벌써 날도 깜깜해져서 더욱 복잡했는데, 덕분에 일행을 잊은 사람들도 많은 듯 여기저기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 는 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가면을 벗지는 않았는데, 가면을 중간에 벗으면 액운을 막는 의식이 아무 소용도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런 설명을 레겜은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길에 넓게 퍼져 있던 사람들이 강기슭으로 모여드느라 더 혼잡해졌을 무렵에는 다른 이들처럼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자기의 몸에 바싹 붙어 있 게 했는데, 덕분에 그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소리가 잘 들렸다. 그는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멀리 강가에 비치는 등불은, 전기구이고... 그 길, 언덕 너머에 반짝이며 보이는 것은 클로니아의 파이오니온이 살고 있는 유리궁전... 그 반대쪽에 아스라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엘의 대 성소인 베쓰-엘 카할... 멀리서 보기만 했고, 말로만 듣던 것을 이렇게 가까이 보니 왠지 감동 이 되었다. 거기다 아주 추운 날이라도 완전히 얼지는 않는다는 혼 강은 무척 넓고 까매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을 마치 거울처럼 반사해서 보 여 주었는데, 그렇게 횃불을 담아 일렁이며 유유히 흐르는 모습은 서울에 있는 한강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다웠다. 강가로 가니, 바람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바람이었는데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 레겜과 붙어 있어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습기를 먹은 강 비린내는 어쩐지 쓸쓸하고 슬픈 느낌을 주었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느낌... 그래서 시나는 레겜에게 더욱 바싹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체취가 그녀 의 코를 자극했다. 아주 인상적인 향기... 드래마가, 약초의 향기처럼 매우 신선한 샐러리의 체취를 지니고 있다 면 레겜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이국적인 나라의... 그러나, 그 본 적 없는 나라에 이상한 향수(鄕愁)를 추억하게 하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체 취를 지니고 있었다. 밤... 따뜻하고 편안한, 고요한 밤이었다. 시나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레겜 을 올려다보고 미소지었다. 하지만, 신경 탓이었을까? 옷을 통해서 전해지 는 레겜의 몸은 몹시 굳어있었다. 왜 그럴까?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그 순간 음악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 앞쪽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 렸다. "아사셀은 간다-! 하누카 정령이여 그 길로 오소서-!!" 그리고,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나며, 풍덩- 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와---!! 환호성을 지른 사람들이 똑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아사셀은 간다! 하누카 정령이여 그 길로 오소서-! 여기 저기서 가면 쪼개지는 소리와, 그것을 강물에 던지는 소리가 들렸 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그 외침에 답하기라도 하듯, 눈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와 더불어 음악소리가 흥겹게 나고 가면을 쪼개서 강물에 빠뜨린 사람들은 강가의 공터로 물러나, 이제 시원하게 드러난 얼굴로 웃 으면서 음악에 맞춰 축제의 춤을 췄다. 시나는 그런 모양을 보면서 즐겁게 웃었다. 처음이었다. 이 세계로 와서 이렇게 즐겁고, 아무 걱정 없고,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아사셀은 간다! 하누카 정령이여 그 길로 오소서-! 아사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은 정말 모든 액운이 물러 가고 하누카 정령이 어젯밤 보았던 그런 아름다운 별빛을 뿌려주는 것 같 았다. 횃불과 멀리 전기구에 비춰 별빛의 가루처럼 반짝이며 내리는 눈도 더 없이 사랑스럽고 따뜻했다. 엘이여... 앞날이 이렇게 계속, 행복하기를. 그리고 제가 아는 모든 사람 들도 그러하기를. 시나는 넓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이렇게 이세계(異世界)의 신에게 조용 히 기도했다. 킬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작게 투덜거렸다. 쓸데없이 차가운 바람과 계속 날리는 눈발이 한없이 짜증났다. 얼어붙은 땅은 눈에 묻혀 어디가 빙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전 내내 페이스 힐러의 힘으로 치료받았다지만, 아직도 배가 당기고 힘이 없어서, 이런 궂은 날씨는 욕설밖에 안 나왔다. 그러니 어서 빨리 시나마 옆에 있는 놈을 해치우고, 시나마를 데리고 왔으면 좋겠는데, 주인을 포함한 앞에 있는 세 명의 남자들은 무언가 이 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킬은 다시 한 번 더 투덜댔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말했다. "...거, 욕설 한 번 걸게 하는 놈인데.. 도비온 님 쪽에선 처음 보는 놈이 군. ...이름이 뭐냐...?" 킬은 안 그래도 짜증이 나던 참인데 이런, '놈' 섞인 말을 듣자 퉁명스 럽게 말했다. "그러는 댁은 이름이 뭐요?" 남자는 가면을 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군. ...난 슬라이. 이드넘 님 쪽의 사람 이다." 그러자 킬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게이드가 반가운 몸짓을 했 다. "아.. 슬, 슬라이.. 너, 너, 까지 왔구나. 오, 오랜만이야." 슬라이는 게이드를 흘끗 보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게이드. ...넌 말투하며 덩치하며 여전하군." 게이드는 헤헤 웃으며 뒷목을 손으로 벅벅 긁었다. "너, 너도 그런걸... 아.. 인사해. 이 녀석은 '킬'이라고.. 이, 이번에 '식당' 의 이, 일원이 됐어." 슬라이는 흥미로운 목소리를 냈다. "...'식당'의...? ..교육 시켜서.. 마을로 내 보내는 것이 아니고..?" "으, 으응..." 슬라이는 가면 속에서 씨익 웃었다. "...재밌군. 어이, 너! 뭔가 특기라도 있냐..? ...최근 들어 도비온 님은 식 당의 사람을 잘 안 뽑는 것 같던데..." 하지만 킬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바 님을 친근하게 말하는 그 가 신경에 거슬렸다. "...슬라이라고 했던가? 댁이 무슨 상관이야? 그쪽은 일 하는 중에 시끄 럽게 떠들어도 돼? 추워죽겠는데, 입 좀 다물어. 젠장."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6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9 07:25 읽음:214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0회, 제 40막. Masquerade. (8)> 그러자 슬라이 본인보다는 주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슬라이 의 동료들이 험상궂은 목소리를 냈다. "뭐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슬라이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게이드!! 이 놈 왜 이따위야!! 정말, 도비온 님 눈에 든 녀석 맞아?!!" "와~!! 이 놈 겁나게 후레자식이네~!! 넌 위, 아래도 없냐? 응?!" 게이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다, 다들 참아..! 키, 킬은 아직 경험이 없어서.. 야... 킬! 이 사람들 은, 이, 이드넘 님 쪽의 사,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함부로 대, 대하면 나중 에 도바 님에게 호, 혼나!!!" 도바 님한테...? 킬은 가면 속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안 좋은 분위기의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쳇.. 어쩔 수 없지. "젠장! 미안하게 됐수다! 하지만, 난 성질이 더러운 놈이란 말이요!!! 그 러니, 괜히 말 걸지 말고 내버려두슈!" 당연히 그 말은 불에 기름 끼얹은 것처럼 더욱 격한 반응을 불러 일으 켰다. "뭐야?! 아휴~! 이게~! 너, 그걸 사과라고 하냐~! 너 좀 죽어볼래~!!!" "뭐야! 이 색꺄! 여기서 성질 없는 놈 어딨냐? 응?!!" 그때 슬라이가 동료들을 제지했다. "...됐어..." 그러더니 그는 가면을 통해서도 섬뜩한 눈으로 킬을 바라보았다. "...네 놈의 어디가 도비온 님의 마음에 든 것인지 모르겠다만... ...네 이 름은 일단 외워두지. 하지만... ..오래 살고 싶다면, 말조심해라.. 킬... 지금 은 네 말대로 임무 중이라 물러나지만... 아사셀을 보내기 위해, 가면이 아 닌 네 얼굴을 쪼개 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킬을 외면해 버렸다. 그의 동료들 또한 침을 퇫 뱉더니 킬과 게이드에게서 물러나 버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게이드가 잔뜩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슬, 슬라이...!!" 하지만 킬은 내심 놀랐다. 상대를 겁주기 위해 억지로 허풍이라든지 허 세를 부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헌데 슬라이라는 자의 목소리는 그 리 큰 것도 아니고, 느릿느릿한데 오히려 듣는 이에게 무언가 오싹한 느 낌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저 여유로움... 자신의 말 때문에 약이 잔뜩 올랐을 텐데, 꾹 참고 물러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킬은 새삼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중간 정도의 키에 날 렵해 보이는 몸매... 하지만 어깨가 넓고 두꺼운 것이 만약 붙게된다면 상 당히 힘들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킬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강한 것을 동경했다. 이네마를 찾고 그를 꺾기 위해선 강해야만 했다. 그래서 킬은 이 슬라이란 사내를 계속 잘 관찰해 보기로 했다. 그에 겐 무언가 강한 느낌이 났고, 킬은 강한 것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겐트온은 안 좋은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너희들의 부하가 저렇게 싸우는 거지..?" 이드넘도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인면피를 쓰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나무로 만든 가면을 덧쓰고 있었다. "...도비온이 데려온 놈 중에 하나가 슬라이에게 시비를 걸고 있군. 간덩 이가 부었나..? 웬 놈이지?" 겐트온이 말했다. "도바가 마노테 계집을 감시하게 시켰던 녀석.." 그는 쓴웃음 지었다. "도비온... 네 보석은 연마하려면 골치가 좀 아플 것 같다." "...젠장." 도비온은 심기가 잔뜩 상해 뒤돌아보았다. 부하 놈들이 요즘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짓만 해, 욕을 먹이는 건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달 려가 떠드는 놈들을 강물에 쳐 박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도비온은 부하들이 떠드는 상황을 관찰하고, 눈을 약간 치켜 떴다. 소란 은 킬이 슬라이에게 딱딱거리면서 대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도비온은, 그 모양을 유심히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다. 확실히 저 놈은 간덩이가 부은 게 틀림없군... 슬라이는 '식당'에서도 유명한 자로, 이드넘에 대한 충성이 깊고 실력이 좋아, 왜 하필이면 이드넘에게 저런 녀석이 붙었는가, 도비온이 매우 아까 워하던 자였다. 그 실력만큼 남을 제압하는 힘도 뛰어나 아무도 그에겐 함부로 하지 못 했는데... 그런데 저 마노테 녀석이 슬라이에게 대들고 있는 것이다. 도비온은 미소지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하는 중에 이드넘 파의 사람하고 다툰 것, 그리고 망신당하게 한 것 에 대한 잡도리는 나중에 확실히 해주겠지만... [어쨌든, 내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단 말이야.. 후후.. 마노테 같은 걸 거둬들인 보람이 있어.] 그때였다. 부하들의 소란이 진정되자, 다시 마노테 계집과 남자를 관찰 하던 이드넘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것들! 정말 보기 싫군!!!! 상당히 붙어있어서, 떼어내 납치하기도 그렇고...! 어서 빨리 가면이나 깨뜨리고 이쪽으로 나올 것이지...! 도대체 강기슭에 서서 뭐 하는 거야?! 추워죽겠구먼, 젠장! 겐트온! 남자는 해치 워 버리고, 그냥 데려오면 어때?" 겐트온이 말했다. "안 돼. 눈이 너무 많아. 게다가 저 남자가 어떤 녀석인지 아직 파악이 안 돼서... 이봐..!" 겐트온은 약간 뒤에 있던 노파를 불렀다. "아까 가면을 팔 때 저 남자, 느낌이 어땠지?" 노파는 도비온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도비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려." 그러자 노파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글세.. 호리호리한 몸인데, 힘도 있어 보이고... 하여튼, 인상은 굉장히 단정한 청년이었습죠. 여자가 곁에 없는데도 탈란 금화를 덥썩 내줬던걸 보면 대범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노파는 웃었다. "이 늙은이가 불쌍해 보였는지도... 켈켈.. 요즘 같은 때에 그런 청년이 라니... 딸만 있다면 사위로 삼고 싶을 만큼.." "됐다." 겐트온은 말을 잘랐다. 그러자 도비온은 노파를 보며 말했다. "뒤로 물러나 있어. 아우라." "네에.. 홀홀..." 가면을 모두 다 동료들에게 나누어주어 이젠 홀가분한 몸을 한 노파는 도비온에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이드넘이 말했다. "어때, 겐트온? 역시 안될 것 같아?" 겐트온은 앞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여행자, 남자, 탈란 금화를 가면 파는 노파에게 내줄 정도로 부유함, 혹은 낭비벽이나 허풍 있음. ..하지만 계집이 없을 때 내줬다니, 저 노파의 말대로 허풍은 별로 없어. 어쩌면 상당히 책임감이 강한 성격일수도 있지. ...키는 꽤 큰 편이니, 옆에 있는 마노테 계집애를 억지로 떼어오자면 반발 이 거셀 수도 있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러니.." "하아~! 소란이고 뭐고! 어둠에 묻혀서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가는데! 우리 정체가 드러날 것이 걱정된다면, 우리는 물러나고 부하들을 시켜서 슬쩍, 일을 하면 되잖아! 슬라이도 있고...!" 이드넘이 이렇게 말하자, 도비온이 옆에 있다가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 다. "됐어. 이드넘. 이게 무슨 물건이나 동전 훔치는 일이야? 어둠 속에서 슬쩍하게. 저쪽에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비대가 안 보여? 이렇게 사람 많 은 데선 계집을 납치했어도, 퇴로가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잘 하다간 몇 몇이 잡혀 들어갈 수도 있어." 이드넘은 도비온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렇군...! 우라지게 많은걸. 젠장.." 겐트온이 말했다. "...게다가, 부하들만 시켜서 또 실패하는 건 곤란해. 하여튼, 보호물에 관련된 일이니까. 무엇보다 우선해서, 무엇보다 신중하게 해야돼. 그러니 이번 일은 우리가 직접 한다. 부하들은 단지 보조하는 의미야." '실패'라는 단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도비온이 약간 가시 돋친 목소리 로 말했다. "...차라리 그럼 유인을 하자고. 이런 곳에서 죽치고 기다리기도 지겨워. 저것들은 강가에 무슨 보석이라도 떨어져 있는 양 물러나올 생각을 안하 고 있으니.." "아니, 잠깐!! 움직인다..!!!" 이드넘이 소리쳤다. 과연,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은 강기슭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겐 트온이 고개 짓을 하며 말했다. "따라서 움직이자. 비슷비슷한 가면이 많으니까, 놓치지 않게 주의해." 힐라토의 공주님을 맞는 축제라 힐라토 왕족의 가면이 꽤 많았다. 그리 고 액운을 막는 축제라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의 가면도 꽤 많았던 것이 다. 그러니 마노테 계집과 사내놈이 가면을 깨뜨려 강물에 떨어뜨려 주었 으면, 어둠 속이라도 그나마 분간하기 쉬웠을 텐데.. 아직 그들은 가면을 깨뜨리지 않았고, 그것은 겐트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돌아 나올 때를 기다리려 했더니, 아무래도 안되겠군. 하는 수 없지. 도비온 네 말대로 유인해서 계집을 잡아낸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시간 이 없으니까. 쫓아!" 겐트온은 해골의 가면을 쓴 얼굴로 낮게 말했다. "레겜? 어디 가는 거예요? 가면은 안 깨뜨려요?" 레겜은 여전히 앞을 본 채 부드럽게 말했다. "...아아.. 전에 봐둔 곳이 있습니다. 우선 그곳의 경치를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군요. 그리고 그곳에서 가면을 깨뜨릴 겁니다." "그래요? 어떤 경치인지 궁금하네요. 후후.." 가면 속에서 레겜은 빙긋 웃었다. "..마음에 들 겁니다.." 그가 발을 옮기는 곳은 전에 왕족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나왔다가 발견 한 곳으로, 혼 강 유역에 맞닿아 있는 숲 속에 있었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제 이 밤의 마지막으로 루온 루드랫의 아내를 그곳 으로 데려가고 싶어졌다. 레이서스는 가면 속에서 미소지었다. 이 회색 눈의 소녀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것이다... 난, 그곳의 경치를 아 주 사랑했으니까. 헌데 그렇게 눈을 맞으며 한 십분 정도 걸었을까... 무지막지한 사람들 의 인파를 막 빠져 나오기 전, 가면을 쓴 일단의 사람들이 몰아닥쳤다. "으악--!!! 조심해!!" "우왓!!" "꺄악--!!" 너무 갑작스럽게 몸을 부딪쳐, 그쪽에서도 여기저기 비명이 울리고 야 단이었다. 레이서스도 잠깐 몸을 비틀거렸는데, 한 가면 쓴 남자가 그를 부축하며 사과했다. "아이고~~!! 어깨야~~!! 아, 이거 미안합니다. 우리 일행이 성질이 많이 급해서... 어이!! 이봐!!! 좀 조심해!!! 천천히 가자고!!!" 그러더니 그는 레이서스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 로 말했다. "...죽음의 신이라. 좋군요. 아사셀을 잘 보내길. 좋은 하누카 정령을 맞 길 빌어요, 여행자." 그리고 그는 레이서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일행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리고 그들을 보다가 옆에 있는 시나를 보았 다. "괜찮습니까?"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서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죠." 그녀는 또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 그 손을 잡던 레이서스는 그 손이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것에 놀랐다. 계속 손을 잡고 있어서 따뜻했는데...? 하지만 그 숲의 입구는 무척 가까 운 곳에 있었고 다른 것에 신경 쓰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래서 그는 시나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숲을 통과하여 갈 수 있는 언덕빼기에 하이 애버뉴근처의 강 유역을 넓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멀리 유리궁전까지도 위에서 바라 보이는 곳으로, 생각보다 높고 경치도 괜찮죠. 곧 있으면 유리궁전의 연회 가 시작되니까, 정원까지 전기구가 활짝 켜지고 훌륭한 마차를 탄 귀족들 이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헌데 갑자기 시나의 몸에서 거센 반항이 느껴졌다. 숲 입구까지 다가왔 는데, 갑자기 뒤로 주춤 물러난 것이다. 레이서스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시나..?" 그러자 여자가 험상궂게 말을 뱉었다. "...제기랄!!! 뭐야?!!! 저곳은 왕가의 숲!! 축제에 나온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 올까봐, 숲지기가 저렇게 많은 수비대를 데리고 있는데 당신 미쳤 어..?!!" "......!!" 여자의 낯설고 상스러운 목소리에, 레이서스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놀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잇!! 젠장!!!" 여자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났음을 알았다. 도바 님이 노리는 계집애와 똑같은 가면을 쓰고 비슷한 옷까지 입고 꾸몄는데, 이렇게 금방 들킬 줄 이야...!!! "제길!!! 누가, 숲으로 들어가자고 할 줄 알았나!!! 이 미친 놈!! 이 야밤 에 왕가의 숲에 들어가서 숲지기에게 뒈질 일 있어?!!! 너 혼자나 들어가 -!!!!" 그리고 여자는 날렵하게 뒤로 돌아 뛰었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달리기 하나는 빨랐으니까, 금새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하지 만... "꺄앗-----!!!!!!" 누군가 뒤에서 거세게 팔을 잡았다. 여자는 가면 속에서 눈을 휘둥그렇 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남자가 어느새 그녀를 쫓아와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호흡하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여자-!! 그녀를 어떻게 했는지 밝히지 않으면, 결단코 널 죽이겠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가면 속의 눈은 정말 검은 살의 로 빛나고 있어서, 식당의 여자는 놀라움에 숨을 들이켰다. "휴우~ 레겜... 왜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거예요? 좋은 경치를 구경시켜준 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레겜은 아까부터 말없이 걷기만 할뿐이었다. 게다가 걷고 있는 곳도 이제는 강가에서 많이 벗어나 주택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주택가 로 들어와서 거의 5분은 걸어 온 것 같은데... 눈이 계속 내려서 걷기 힘 들었고, 또 여기에선 레겜이 손을 놓아버려, 무척 추웠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다가, 없는 곳으로 오니 얼마나 쓸쓸한지... 곳곳 에 어둠을 숨기고 있는 골목은 아까 강가에서 느꼈던 쓸쓸함과는 또 다른 쓸쓸함을 던져 주었다. "저어, 레겜?" 시나는 앞서서 걷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 경치, 여기서 더 걸어야 한다면... 이젠,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휴우... 춥기도 하고, 너무 늦어서 다들 걱정할 거예요." 그러자 그는 우뚝 서서 시나를 돌아보았다. 시나도 그를 마주 쳐다보았 다. 여전한 해골의 가면과 갈색의 후드. 헌데 주위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것인지 이상하게 낯설어 보였다. 키도 아까보다 작게 느껴지고... 게다가 말 한마디도 없이 저렇게 그림 자진 눈으로 보고 있으니... 시나는 이상한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레겜?" "...훗."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린 그는 해골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강물에 깨뜨 려 버리기 전에 흉측한 가면을 벗으면 액운을 막을 수 없다고 했는데! 시나는 왜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연자약하게 가면을 벗은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시나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헉!!!" 그는 놀라는 시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날 아직도 알아보다니, 시나마...? 그 개놈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나 같은 놈은 벌써 잊었을 줄 알았지.." "..키..르마..!" 레이서스는 자기 발 밑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여자를 보며 추상(秋 霜)같은 말로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여자!! 좀 더 직고하지 않으면, 너와 네 일 족을 모두다 마노테온으로 강등시킬 수 있다!!! 내가 타 세계의 파이오니 온이라 안 될 것 같은가?!!!" "...으흑.." 여자는 얼음 같은 눈이 내리는 땅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고향을 떠나, 이곳 수도 제일로트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해서 살게 되기까지, 수많 은 일을 겪고 심지도 굳은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몸을 판 날 이 래로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인데...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도 바 님의 말씀대로 그냥 단순한 여행자라고 생각했건만. 상대는 그 무서운 왕가의 숲지기마저 놀라며 맞아들일 만큼 대단한 왕 족. 제 2계급. 그녀가 평생가야 그 옷자락 한 번 볼까말까한 파이오니온이 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숲 속 공터에선 횃불이 대낮 같은 밝음을 주며 타고 있었고, 숲지기 이 하 수비대들이 웅성댈 생각도 안하고 긴장하여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모두 다 영문을 몰라하고 있었지만, 흑색의 스피릿 심벌을 가진 힐라 토 파이오니온이 불같이 화를 내는 데는 긴장하여 뻣뻣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로, 얼음이 맺힌 땅에 손을 대고 엎드려 있으면 서도 춥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머리는 혼란하고, 모든 감각과 모든 생 각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직 있는 것은 감히 근접도 못할 상대와 대면했다는 공포뿐. 그 가운데서,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했다. 틀렸다. 난, 이제 틀린 거야. 이대로는 도바 님에게 폐만 된다. 할렘에서 썩고 있던 나를 구해주신 그 분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절기마다 약간의 돈이 라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그 분께. 그러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이 낫 겠지. 우리 식당의 존재가 나 때문에 밝혀지는 것은 절대 안되니까. 하지만... 여자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고향을 떠올렸다. 상대는 스피 릿도 부린다는 파이오니온. 그러니, 이 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이 분은 내가 어떻게 죽든지 간에 천사를 이용하여 나의 신원을 파악하 고, 내 고향과 내 가족을 찾아내겠지. 여인의 입술이 순간, 격하게 떨렸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의 남편과 아이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떠나왔는데. 그래서 언젠가는 꼭, 많은 것을 갖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 무지막지한 수비대 놈들이 들이닥쳐, 그의 가족들을 끌어낸 다면.. 그들은 얼마나 놀랠까. 내 아이들은, 절대로 이 놈들의 매질을 견디 지 못할텐데. 그래서 그녀는 어떤 협박과 욕설... 혹은 고문에라도 답하지 않을 말을 해야했다. "흑흑흑... 내 주여, 자비를... 하이 애버뉴... 라즈윗 스테이블스 거리에 검은 차양의 마차가 있습니다... 흑흑흑..." "꺄아아악----!!!!!!" 시나는 비명을 질렀다.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키르마와 대면한 이후 로 흙탕물에 뒹굴어가며 여기까지 질질 끌려왔다. 어느 만큼 시간이 지났 는지도 모르겠는데, 키르마와 동료인 듯한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어느새 잔뜩 나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레겜과 똑같은 해골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너무나 무서웠다. 하지만 예전의 경우를 보아, 키르마에게 호소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누군가 와주기를 기대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여기는 사람이 사는 주택가니까... "꺄아아아악---!!!! 살려줘요!!!!!" 하지만 그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따귀를 때리는 손이 날라 왔다. "시끄러운 계집애!!!! 입 닥쳐!!!" "아악!!!" 세차게 얻어맞은 그녀는 뒤로 비틀댔다. 가면 같은 거야 아까부터 벗겨 져 있었다. 그들이 맨 먼저 한일이 시나의 가면을 벗기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인정사정 두지 않는 남자의 무서운 힘에 입 안이 터진 듯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얼굴이 온통 아프고 눈물이 났다. 시나는 눈물어린 얼굴로 말했다. "키, 키르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저, 저번에도 날 죽이려고 했 으면서..!!" 키르마가 비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때는 실패해서 유감이야. 그래서 오늘 이렇게 찾아왔잖아?" 그러더니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나의 가면을 발로 짓밟았다. 쩌저 적 소리가 나며 가면은 산산조각이 났다. "흥! 오늘 네게는 액운이 닥친 거다!" 그러자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검은 마차 그늘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 가 났다. "킬...! 그만 하고 데려와. 이제 여기를 뜬다!" ".....?!!!!!" 그 음산한 목소리에 시나는 깜짝 놀라, 마차 쪽을 바라보았다. 저, 저, 목소리는...?! 색을 알 수 없는 짙은 색의 후드... 레겜의 것과 똑같은 해골 가면... 그 어두움을 보고 있으려니,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마음이 마 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시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왜..왜!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그때 이후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 누군가 속삭였다. 왜..? 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무서운데. 너무나 무서운데...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모두 다 죽었지만. 생기 없는 갈색 눈의 남자, 그리고 키르마...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잖아. 누군가 웃었다. 그래. 이들은 빠져나갔지. ...어떻게 생각해? 귓가에 낮은 호흡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어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잖아... 시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돼---!!!! 이젠, 그만해---!!!" "....?" 겐트온이나 도비온, 이드넘, 그 외 사람들은 갑자기 주저앉아 소리 지르 는 시나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마차가 있는 쪽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 지만 마노테 계집이 있는 곳은 전기구의 빛이 미약하나마 미치는 곳이었 는데, 그 빛에 드러난 계집의 얼굴은 공포 외에도 어떤 이질감이 섞인 얼 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진흙탕 바닥에 앉아 절망적인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 분명 폭행과 납치를 행하는 괴한들을 향한 것일 텐데....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어쩐지 이 상황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이상한 모습이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6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9 07:26 읽음:2156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1회, 제 40막. Masquerade. (9)> 마노테 계집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흐흐흑--!!!!! 제발, 제발 이젠 그만해--!!! 난, 이제 싫어!!! 내가, 내 가...! 얼마나...!!!! 흐흐흐흑....!!" 꽤 먼 곳인데도, 계집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양을 보던 이드넘이 고개를 갸웃하며,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맨 처음 마노테 계집애를 봤을 때,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워낙 지금의 행동이 인상적이라 그런 생각은 말끔히 날아가 버렸 다. "...허.. 너희들 말대로 약간 남자애 같은 계집애인데... 목청 한 번 좋다. 사람들 다 나오겠는걸?" 도비온은 욕설을 뱉었다. "...킬! 뭐 하는 거냐!! 입 닥치게 하고 빨리 끌고 와!!!" 시나의 모습을 '이 계집애 왜 이래?'하는 심정으로 어이가 없어 보고 있 던 킬은 주인의 명령대로 따랐다. "아... 네..! 도바 님!!!" 그러더니 그는 잔인하게 시나를 때리며 소리쳤다. "조용히 해!!! 이 계집애야!!" 시나는 그런 키르마의 손길에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 고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면, 그 애가 나 올 것이다. 그러면 안돼... 절대로 안돼... 오늘은 너무나 행복했으니까, 그 것을 떠올리는 거야. 나는 친구가 잔뜩 있고, 돌아갈 집도 있어... 시나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프지 않고, 무섭지도 않으니까. 이제는,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응? 돌아갈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젠 그만둬... 괜찮을 거야... 제발. 하지만 그 애는 전혀 진정하지 않고, 소리질렀다. 계속되는 매질과 아픔에 분노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만해!!!!? 이, 바보 같은 계집애...!!! 네가 목걸이를 잊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무리하게 나설 일은 없었어!! 네가 나의 도움을 받아서 살더니, 이제 나를 거부해?!!! 익숙하지 않은 일에, 계속 많은 잠을 자야 했어!!! 그런데, 뭐라고? 그만두라고!!! 이렇게 절정의 순간에 그만두라고..?!!!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냉소했다. 하하하...!!! 네가 날 경멸하는 것은 알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넌 이미 죽은목숨이야!!! 흑흑.. 아, 알아.. 하지만, 이젠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소리 질렀다. 돌아가!!! 어디로---?!!!! 이 멍청한 계집애!!!!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 건데...?!!! 떨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였다. 네가 나, 나를 억제하고...!!! 그리고...! 너.. 너...! 감히, 너.. 따위가...!!! 그가 널 믿어주니, 그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시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더욱 세게 틀어막았다. "아아악--!!! 그만 둬-!! 잠들어 있었다면, 잠든 그대로 있어 줘, 제발 -!!!" "...윽!!" 한 참 매질을 해서, 이젠 좀 조용해졌나 하고 시나를 끌고 가려던 킬은, 시나가 이렇게 또, 소리를 질러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이어 울분을 토했 다. 이 계집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던 동료들은, 아침에 도바 님에게 징계를 당해, 그녀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킬이 이 일을 하도록 불려 나왔 다. 그건 감사한 일이었다. 실력 발휘를 해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 좋으 니까. 힐러 라이트인가 뭔가 하는 휘황찬란한 빛으로 몇 번이나 치료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쓸모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충성을 다해서 도바 님의 명령을 실행하고 싶은데, 이 계집애는 때려도, 때려도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킬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르며 이제야 말로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키기 위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계집애, 아주 죽여주겠어---!!!!" 그런 그의 위로 눈이 펄펄 쏟아져 내렸는데, 그 모양을 보고 있던 겐트 온이 혀를 쯧 찼다. 이런... 저 녀석, 너무 흥분하고 있군. 하여간, 예전부터 조금 위태로워 보이긴 했는데, 저런 놈을 좋다고 하는 도비온 놈도 취향이 괴상해서... 하지만 그 부하에 그 주인인지, 아까는 빨리 데려오라고 성화를 부리던 도비온도 이젠 마차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분위기로 보아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도비온은 마노테 계집에게 원한이 많았고, 계집이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상, 퍽, 퍽 때리는 소리 같은 것은 이런 눈 오는 밤에는 아주 작게 들리는 법이니까.... 재밌 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경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드넘이 고개를 저었다. "...쳇!! 여자 애가 맞는 것을 보면 찝찝해...! 어이, 슬라이!! 이제, 그 여 자 애 데려와!!!!" "....네. 마스터." 지금까지 말없이 서 있던 슬라이는 이드넘의 명령에 대답하고 시나에 게 다가갔다. 하지만 시나를 붙잡고 때리던 킬은 그렇게 다가오는 그를 흘겨보았다. "뭐야!!!" "..비켜라. 마스터의 명령이다." 하지만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킬은 아까 그에게 느꼈던 '강함'을 잊 고 격하게 말했다. "꺼져!!! 도바 님은 내게 명령하셨어!!" 그 험한 소리에 슬라이의 몸이 굳었다. "...네 놈... ...마스터의 명령을 방해하는 거라면... 이 계집보다 네 놈이 먼저 진흙탕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거다..." 킬이 소리 질렀다. "뭐야?!!! 이 자식이!!! 해 봐!! 그렇게 되면, 절대 나 혼자는 가지 않 아!!!" 이제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슬라이 측은 아까부터 쌓인 감정이 있었던 지라, 킬을 향하여 욕설을 뱉고 있었고, 게 이드는 쩔쩔매고 있었다. 그 외 나머지 도비온 측은 짜증을 내고 있었는 데, 아까부터 킬의 이리 튀고, 저리 튀고 하는 모습은 자기들이 보기에도 안 좋았던 것이다. 이드넘 또한 그랬는지, 그는 몸을 일으키며 험악하게 말했다. "...아니, 그런데, 저 녀석...!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는 놈인데, 뭐야! 저 놈...!" 그때, 도비온이 손을 내밀어 이드넘의 가슴을 막았다. "이드넘, 함부로 나서지 마. 이미 내가 명령 내린 일에 네가 또 이중으 로 명령을 내려 이렇게 되었잖아?" 냉랭하면서도 비웃음 서린 묘한 목소리에 이드넘이 말했다. "뭐야?! 그럼 너 지금 네 부하 놈이 잘 했다는 거야?! 여자 하나도 끌 고 오지 못해서...!" "둘 다 그만둬!!!" 겐트온이 짜증난 듯 말했다. "부하 앞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이드넘! 다른 형제가 명령을 내렸을 땐, 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다른 명령을 내려라!!! 그리고, 도비온!! 지금 뭐 하는 거야?!! 마노테 계집을 여기서 죽일 일 있어!! 빨리 끌고 와...!!" 그때였다. 하이 애버뉴의 돌로 포장된 길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하늘 을 울리기 시작했다. "...!!!" 눈 내리는 가운데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는 거기 있던 사람들의 몸을 순식간에 굳게 만들었다. 소리로 보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았 다. 겐트온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너머를 보며 말했다. "...저렇게 급하게 달리는 소리라니... 빙판에 말 발모가지 분지르면 딱 좋겠군. 하여튼, 쓸데없는 목격자를 남기기 전에, 어서 서둘러." 이젠 킬이나 슬라이도 쓸데없는 다툼을 벌이기 보단 상황의 긴박함을 눈치채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힘을 합쳐 시나를 번쩍 들어 나르 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맞아서 축 늘어진 마노테 계집을 마차에 태우 기 직전,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렸다. "너희--!!! 당장, 그녀를 내려 놔라!!!!" "....!!!!!" 거기 있던 열 세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공터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젠장!!! 아까 그 여행자 놈이잖아!" "여길, 어떻게 알았지?!!" "그러니까, 빨리 떴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 사람들이 욕설을 뱉는데, 남자는 눈이 펄펄 내리는 가운데 말에 서 뛰어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마차에 실리기 직전에 시나를 보고 잠깐 발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도비온 측이 쓰고 있는 해골의 가 면이 있어서 놀라움 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노테 계집의 찢겨진 옷이라든가, 어둑한 불빛으로 보기에도 맞아서 부은 얼굴 같은 것은 그에 게 어떤 충격을 준 듯 했다. 그는 한참을 마노테 계집을 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던 것이다. "...너희들... 무슨 짓이냐? ..인간 사냥꾼인가?!!!" 겐트온은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용감한 여행자로군.." 이드넘은 불쾌하게 말했다. "...꼴에 정의의 기사 흉내인가? ...주제넘어." 도비온은 냉랭하게 말했다. "죽여 없애!!!" 그 한 마디로 여행자와 가장 가까이 있던 이드넘의 부하가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다. "와아아아악--!!!!" 그러나 여행자는 재빠르게 그 칼날을 피했다. 칼을 휘두르며 들어간 사 람도 꽤 빠른 편이어서 틀림없이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뒤로 물 러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칼날은 맥없이 허공을 치며 그 칼을 쥔 사람 은 하마터면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이이익!! 제기랄--!!!" 미끄러운 바닥에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그가 소리질렀다. "이 놈의 돌부리가!!!!" 기습이 특기인 그들인데, 그것을 실패하고 추하게 뒹굴 뻔한 남자는 얼 굴을 붉히더니, 괜히 있지도 않은 돌부리를 탓하며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동료의 멍청한 변명을 믿을 리 만무했다. 누가 봐도 여행자는 상당히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다른 공격도 아 닌 최초의 공격을 저토록 능숙하게 피한다면 신경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 이었다. "치잇-! 빠른 놈이군! 한 가닥 하는 놈인가 보지?!!!" "그래도 넌 오늘 죽었어!!! 그깟, 실력을 믿고 이 인원에 덤비다니!!!! 비 켜! 아무키!!!!" 그리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덤벼들었는데, 한 사람은 뒤에서 찔러 들어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상대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고 판단하고 칼을 크게 휘두르며 앞에서 달려들었다. "우아아아앗--!!!" 그리고 힘찬 고함을 지르며 앞에 있는 자가 칼을 내리꽂은 순간.... 과 연... 기대했던 대로 금속이 사람의 살을 갈라, 뼈에 꽂히는 소리가 났다. 퍽---!!!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공터에 울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 검게 변색된 피가, 눈 밭에 촤아악 튀기며 그 피를 부여잡고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 다. "으아아아악---!!!" 제 아무리 날쌔다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 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미소짓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니...?!!!" "뭐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곧 자신들이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알았 다. 어깨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은 그 시건방진 여행자가 아니었다. 김 서린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뒹구는 것은 자기들의 동료였던 것이다. 거기 다가... "끄으윽...!!!" 나머지 한 사람도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 "웨던!!!!" "....으..윽..!!" 사람들이 경악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그는 힘없는 눈으로 자기 동료들을 쳐다보고 그대로 바닥에 쿵, 쓰러졌다. "--!!!" "..이, 이런 제기랄!!!!" "뭐야 도대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쓰러지기 전에 웨던을 보았던 것이다. 꽤 두꺼운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넝마처럼 갈라져서 깊숙이 하 얀 것이 드러나 보였다. 가죽옷과 피부, 두꺼운 근육을 뚫고 단숨에 뼈까 지 드러나도록 갈라버린 것이다. 마치 배가 갈라진 생선처럼 처참한 모습 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를 드러내고 바닥에 쓰러진 동료의 모습은 자신들 이 환각을 본 것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었다. "으윽....!!!" 미친 듯이 내리는 눈이, 허옇게 홉뜬 눈의 그의 얼굴 위로 쌓이고 배의 벌겋게 벌어진 곳에 녹아들었다. "큭--!!! 이럴 수가..! 배를 단숨에 갈랐어!!!" "뭐야, 저 자식은!!!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둠 속이고 너무 빨라서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맨 처음에 쓰러진 동 료는 앞에서 달려드는 동료의 칼을 맞고 쓰러진 게 틀림없었다.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눈밭을 뒹굴고 있는 남자의 어깨엔 어른 팔뚝만한 숏 소드 가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행자는 앞과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감지하고 재빨리 몸 을 숙여 피했다는 말인데... 양 칼날을 어떻게 피했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몸을 피하며 그 순간 저렇게 단숨에 배를 그을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겐트온이나 도비온, 이드넘도 이제는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 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은 어디선가 익숙지 않은 소리... 마치 악기의 가느 다란 현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신경에 거슬리는, 핑, 핑, 소리가 난다는 것 을 알았다. 무언가 가볍게 진동하며 끓고 있는 소리였다. 도대체 이게 무 슨 소리인가 생각하는데, 피를 뿜는 무기를 떨쳐내며 어둠 속에 있던 여 행자가 전기구의 희미한 빛 가운데로 쓰윽 나왔다. 그러더니 발 밑에 쓰러진 두 명의 남자들을 일별하고 짧게 말했다. "....더 죽기 싫다면, 그 여자를 내놔라." "....!!!!"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대답할 여유도, 그 여행자를 비웃을 여유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얼음 같은 것에서 검게 물결치 며 뿜어 나오는 것을 본 것이다. 그가 어둠 속에 있을 때는, 그냥 지나친 그림자가 검에 내려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 검기다.....!!!" "흑...!!! 루, 루이티온..!!!!" "...으으윽...!!!" 겐트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제야 왜 그토록 사람의 배가 간단히 갈라졌는지 이해했다. 암흑의 검 기는 단검보다 약간 긴 검신을 온통 넘나들며 검의 원래 길이보다 한 뼘 이나 되게 길게 뻗고 있었다. 소리는 거기서 나는 것이었다. 핑, 핑, 맑으나 불길하게 울리는 소리. 저렇게 검고 검은데도 '빛'처럼 또 다른 어둠과 구분되는 이상한 물질. 파워즈 천사의 수호를 받는 자만이 뿜어내는 천연적인 살해도구. 그것이 바로 루이티온의 '검기'였다. 저것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아티스트의 공격 아트처럼 따로 날아가 상대를 분쇄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빠르게 판단을 하고 여행자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물러났다. 모두다 두려움에 찬 몸짓으로, 조금이라도 더 어둠 속에 자 기를 묻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저 여행자에 눈에 띈다면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부하들의 움직임을 본 이드넘이 넋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단순한 여행자라고 했잖아. 도비온." 도비온이 말했다. "이 놈의 자식들, 돌아가면 죽여버리겠어--!!!!" 그는 힐러의 집을 지키던 부하들이 얼마나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었는 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층에서 날려버리긴 했어도, 그래도 치료까지 해주었는데, 돌아가면 누워있는 침상까지도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를 가는데, 이드넘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멍청아!! 상대는 루이트잖아!!! 제대로 돌아갈 수나 있겠냐?!! 에잌, 제기랄!! 재수 옴 붙었군!!! 빨리, 마차에나 타!! 말로 달리면 도망갈 수나 있을까 모르겠군!!" 그러자 도비온이 거칠게 말했다. "됐어!!! 도둑놈이라, 도망칠 궁리부터 하냐?!! 내가 상대하겠어!!!" "미쳤어!!!! 능력자들이 곳곳에 있을 텐데, 감지되고 싶어!!" "죽는 것 보단, 나아!! 마차로 도망가면 도망 갈 수 있겠어!!!! 상대도 말을 갖고 있는데?!!!!" "젠장!!! 하여튼 네가 상대한다고 해도, 저 자가 더 빨라!!!!!" "그럼, 어쩌자고!!!!" 도비온과 이드넘이 흥분해서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다투고 있는데, 겐 트온이 제지했다. "조용해!! 내가 상대하겠다!! 그 사이에 너희들은 빨리 마차에 마노테 계집을 데리고 타!!!" "뭐?! 어떻게!!" "설명할 시간 없어!!! 시키는 대로나 해!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 자가, 아직은 전투 명령어까지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니까, 여기서 부하들 다 죽 일 셈이 아니면, 부하들 챙기고 마노테 계집도 잊지 말고 챙기란 말이야! 저 자가 전투 명령어의 목표로 우리를 지정하면, 정말 끝장이니까!!!" "이런, 제기랄...!!" "...정말 일진 사납군!!!" 입으로는 투덜대지만, '부하들' 소리에 이드넘과 도비온은 그늘에 숨어 숨을 죽이고 마차 뒤로 돌아갔다. 저들을 여기서 잃을 수는 없었던 것이 다. 그렇게 이드넘과 도비온이 각각 양쪽의 어둠으로 사라지는 사이, 겐트 온은 마차 그늘에서 나와 빛 가운데 섰다. 그는 괜히 섣부르게 말을 걸어 단칼에 베어지는 일이 없도록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그러나 침착하게 말 했다. "...루이트 님. 저어, 실례합니다만..." 레이서스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라고 생각했 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며 가면에 가려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설혹 눈이 내리지 않고,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인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한다면 상대할 '정신'이 없었다. 시나의 역을 했던 여자를 다그칠 때부터, 그녀가 자기 손을 빠져나갔다는 생각에 분노라 할 지 실망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안도라고 해야할지... 하여튼 정체 모를 감정에 휩싸여 그는 지금, 자기 이성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 은데서 우러나는 감정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지금 말하고 있는 자의 발 치에 쓰러진 시나였다. 잠깐 기절을 한 듯 쓰러져 있었는데 진흙탕 속에 쓰러진 그 모습에 전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인간 사냥꾼'은 모두 다 잡아 수비대에 넘겨야 한다느니 하는 치안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레이서스는 격해질 것 같은 자신을 억누르고 겨우, 띄엄띄엄 말했다. "...너와 말 상대할 시간 없다. ...여자를 놔두고... ...사라져라. 네 놈 같은 인간들... 지금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할 말 없겠지만... 상대할 가치도 없다." 그렇게 겨우 억누르며 말하는데, 머릿속을 피잉- 소리를 내며 달리는 것이 있었다. 그의 전신을 벼락과 같이 달구며, 그의 뱃속을 진동하는 검기. 그것은 마치 그 자체가 어떤 '감정'인양, 그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들리는 것. 끓는 소리... 활의 시위가, 끊어지는 것 같은... 혹은 신경이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싸 늘한 소리. 손에 쥔 칼에서 핑, 소리를 내며 들리는 공명은 등골을 송곳으로 찌르 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용방법이 익숙지 않은 힘. 그리고 검은 밤과 희게 쏟아지는 눈. 거기 에 깨어져 엎질러져 있는 붉게 번진 피 구덩이. 그것이 그의 신경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감정대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성을 잃고 폭주까지 하는 것은 그 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감정일지라도... 그 오랜 세월 그는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단지 시나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 다. 마치 시선이 무언가로 고정된 듯, 고개도 돌릴 수 없고, 가슴은 무언 가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아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라져라!!! 지금 당장!!!! 내가 너희들을 모두 다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겐트온은 그 기세에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았다. 자신을 공격한 사람만 처치하고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기에 어느 정도 순한 루이트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의 성격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지금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굉장히 위험... 게다가 저 루이트의 눈은 계속 마노테 계집에 붙어 안 떨어지고 있었 다. 덕분에 도비온과 이드넘의 부하들은 수월하게 모습을 감출 수 있었지 만, 그렇다고 정말로 마노테 계집을 저 자의 말대로 여기다 떨구고 갈 수 는 없었다. 겐트온은 이를 악물고 생각을 짜냈다. 뭔가, 마노테 계집까지 끌고 사라질 좋을 방도가.... 그러다가 겐트온은 루이트가 멈칫거리며 다시 시선을 마노테 계집에게 고정시키려 것을 보았다. 이런...! 겐트온은 그걸 막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다급하면서도 공손하게 말했 다. "파, 파워즈의 수호를 받는 자여, 이 미천한 계급이 감히 말씀 드리자 면.. 우리는 인간사냥꾼 같은 저주받을 족속이 아니라... 그 뭐라고 할까... 이 여자는 보시다시피 마노테로... 우리가 길에서 우연히 발견... 이 성(聖) 도시에 이런 벌레 따위는 필요치 않다고 여겨 이렇게 끌고 가던 참이었습 니다. 그러니..." 그때, 루이트가 고소(苦笑)하며 말했다. "하하하!!! 우연...!! 나를 속일 대리 여자까지 둔 우연 말인가?!!!!"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6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9 07:26 읽음:222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2회, 제 40막. Masquerade. (10)> 아차! 겐트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그답지 않 게 실수한 것이다. 해서 겐트온은 초조하고도 짜증스러운 눈으로 루이트 를 힐끔 보고, 그 다음 주위를 살폈다. 이미 도비온과 이드넘의 부하들은 상당히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바닥에 널린 시체와 부상자까지도 데리 고 사라졌을 정도였다. 제대로 하고 있군. 겐트온은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체를 끌 고 가는 소리... 조용하게 끌고 가긴 했지만,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 다. 그런데 저 루이트는 거기에 시선 한 번 두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마노테 계집에게만 두고 있을 뿐.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인가? 방금까지 자신을 공격했던 자들이 어둠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데, 저렇 게 주의를 놓고 있다니? 아니면... 자신감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언가? 그 때부터 겐트온은 의심어린 눈으로 루이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 금까지는 너무 놀라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왜... 저, 루이트는 이렇게 마노테 계집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가? 아니, 그보다.. ...저 자,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지? 분명 이제까지만 해도 존재가 없던 자인데? 그리고 왜 루이트나 되는 자가 마노테 따위를 구하 려고....? 마노테 계집은, 모자는 물론이고 가면까지 벗겨져 짧은 머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으니 그가 이 계집이 마노테인 줄 모르고 이런 행동을 할 리 는 없었다. 지금도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상했다. '높은 마음'을 갖고 있기로 유명한 루이티 온, 자존심을 빼면 시체라고 할 수 있는 족속 중에 하나인 저자가, 왜 마 노테를 구하려 하는가? 순간, 겐트온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건, 모험을 해 볼 가치가 있겠군...! 겐트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굽혔던 허리를 피고, 신중하게 말했 다. "루이트 님..." "당장 사라지라고 한 말 못 들었는가?!!!" 그러면서 루이트는 겐트온 쪽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그 위협적인 몸짓에 겐트온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다. 겐트온은 허리를 푹 숙이고, 일부러 가련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아... 제발, 루이트 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그렇게까지 말 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리고 겐트온은 처량한 목소리를 내었다. "...루, 루이트 님.. 그, 그럼,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 드리는 것이 낫겠군 요.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분 같기에 그 냥 대강 말씀드리려고 했건만. ...사, 사실 우리는 이 마노테 계집의 원래 주인입니다." "...!!!" 몇 발자국 더, 마차 쪽으로 다가오던 루이트의 몸이 멈칫 했다. 한편 겐 트온은 그런 그의 행동에 위협을 느꼈지만, 그가 자신의 말에 흥미를 보 인다는 것을 알고 뒤로 물러나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더욱 신중하게 말했 다. "...그러니 제, 제발.. 제발 자비를.. 파워즈여.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 서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이 마노테 계집이 도망친 이후로... 우, 우리는 몇 주 동안이나 이 계집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한 마을에서 이 계집을 찾아냈는데, 성역 근처의 숲에 들어갔다 나왔다며 우리를 도통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웬 남자의 종속자가 되어서... 이 계집을 구 한 남자의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원래 권리는 우리에 게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그는 허리를 살짝 굽혔다. "해서,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약간 불법적인 일을 해서 라도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자비로운 이해를 바랍니다, 루이트 여. 제가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까도 말씀 드렸듯 우리는 당신을 처음 보 는지라, 긴말하기가 싫어서였습니다. 우, 우리가 주제도 모르고 당신에게 덤벼들었던 것은... 제, 제 동생의 어리석은 일로.. 최근, 너무 흉한 일을 겪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에... 아아.. 제발, 용서를~ 제발, 용서를 바 랍니다." 그는 허리를 여러 번 굽실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로 하고 싶었 던 말을 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인데, 이렇게 이 마노테 계집에게 관심을 갖습니 까? 이 계집의 종속주 얼굴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급조된 것이라 자세히 살펴보면 허점이 많은 설명이었지만, 겐트온은 그래도 미소지었다. 본능적으로 루이트가 혼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정체를 드러내라. 도대체 넌 누구냐? 혹... 저 동굴에서 그토록 검기를 자유자재로 쓰고, 그래서 동굴을 무너 뜨리기까지 한 놈이 네 놈이냐? 하지만 루이트는 미혹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저 여자의 주인이라고.. 그렇다면 '은혜의 법'이라는 것은 도대체...? 성역에 가까운 숲? 그럼, 그녀가 거길 들어갔다 나왔다는...?" 레이서스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남자의 설명을 놀란 마음으로 들었다. 저것이 사실인가..? 헌데 그때, 갑자기 레이서스의 뇌리에 시나와 대화 나누던 것이 떠올랐 다. 시나는 그가 사준 책 가운데서도 계속 '성역'과 '성역에 가까운 곳'에 대한 기사(記事)만 찾아 읽었다. 클로니아 인이라고 해도, 오히려 자기보 다 더 이곳의 관습에 대해서 모르던 일. 그 생소한 느낌. ...설마...! 그의 칼이 밑으로 내려갔다. "잠깐..!!! 너!! '몇 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다고 했나? 그렇다면, 그녀 가 성역 가까운 숲에서 나온 것은 도대체 언제였나!" 이런.. 오히려 자신에게 되묻는 루이트에게 겐트온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 질문으로 보아 이 루이트는 마노테 계집에 대한 전말은 모 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최근 며칠 새에 마노테 계집과 접촉했다는 말. 그 접촉했던 사건이 '동굴'인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야말로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구해줬단 말 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겐트온은 그의 질문에는 정말로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아아.. 우리가 이 계집을 잃은 것이, 한 이 주전이니까... 그렇군요. 계 집이 성역에 가까운 숲에서 그 남자에게 구원받은 것도 아마, 그 무렵일 겁니다." "뭐..!!" 레이서스는 너무나 놀랐다. 겨우 이 주?!! 그렇다면 루온 루드랫은 이 주 전에는 이 소녀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그의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 지기 시작했다. '검기' 때문에 어지러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상황 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단 두 주만에 사랑에 빠져서, 그런 얼굴을 하고.. 고작 마노테 여자를 위하여...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말도.. 안돼. 이 모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 어이가 없어진 레이서스는 칼을 쥔 손 에서 그만, 완전히 힘을 빼고 말았다. 덕분에 검게 빛나는 실밥 같은 검기의 일렁임이 잦아들고... 그때였다. "와아아아악--!!! 일을 방해하는 놈들은 누구든 죽여버리겠어--!!!" "...!!!!" "킬---!!!! 안돼--!!!!" "와아아아악!!" 맨 처음 킬은 두려웠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 자신의 공로로 데려온 시나마를 감히 뺏어가려고 나타난 남자. 분노가 들끓었지만, 선배들이 덤벼드는 모습을 보고 곧 그 분노를 만족 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이게 뭔가..? 검기....! 생전 처음 보는 검기..! 그것에 죽어 나자빠진 선배. 킬은 놀랐다. 그리고 자기 손이 덜덜 떨리는 것에 의아해 했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그런데, 왜 손이..? 그때, 킬은 옆에 있던 게이드의 바지 가랑이로 무언가 스며 나오는 것 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이 안 됐는데... 게이드는 킬에게 다가와 몸을 기대고 등신처럼 울면서 낮게 속삭였다. 키..킬.. 루, 루이트.. 우, 우리 루, 루니를 주, 죽인.. 루이트!! 사, 살려 줘..!! 으윽... 살려 줘 제발..!!! 킬의 입술이 떨렸다. 이 바보 같은 새끼가--!! 그를 밀쳐내고 싶었다. 평소라면 밀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꼼짝도 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검에서 나오는 검기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휘황하도록 검은 빛이 났다. 그리고 그때... 도바 님이 오셔서, 그들을 어둠 속으로 끌어냈다. 도바 님은 게이드의 등을 어루만지고 그를 끌고 가며, 킬에게도 속삭였다. 돌아가자. 킬의 몸이 떨렸다. 그의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가슴 아리고, 절망적인 눈물.. 계속된 실패. 또, 실패를 하다니..? 또, 시 나마를 이대로 두고 가다니..? 내 이네마는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데... 그 개자식의 종속자는 이대로 두고 가...? 킬은 이를 악물었다. 안돼!!! 싫어--!!! 그, 그 개자식...!!! 그 놈 때문에 난, 내 이네마를 잃었는데!!!! 그런데 그 놈은 왜 그래선 안돼---?!!! 그 놈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야? 루이트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냐고..! 순간 그의 눈에, 모든 두려움을 마비시키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루이트...!!!! 저 루이트 때문에...!! 내, 내 이네마가!!!!! "와아아아악!!!!" 킬은 그 루이트에게 덤벼들었다. 그 무서운 검은 색의 불꽃이 사그라진 순간, 게이드의 옆구리에서 칼을 빼들었다. 그의 등을 노리며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갔다. 게이드가 공포에 어린 목소리로 소리 질렀 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 상태라면, 저 개놈을 죽일 수 있다!!!! "으아아아악!! 죽이고 말겠어--!!!!" 쨍그랑---!!!! "아아아악----!!!" 하지만, 아쉽게도 킬은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루이트는 몸 을 슬쩍 돌려 그의 돌진을 피했고, 킬의 칼은 그의 몸을 지나쳐, 얼어붙은 포도를 내리쳤다. 그리고 킬은 볼썽 사납게.. 그리고 처참하게, 칼마저도 놓치고 진흙탕에 뒹굴며 말의 오물이 섞인 그 물을 들이켰다. "으으윽--!!!" 몇 바퀴나 뒹굴고, 오물을 마시고, 그리고 다음 순간, 가까스로 눈을 들 었을 때 보인 것은 루이트의 분노에 찬 검은 눈이었다. 두려운 눈 뒤로 빼어든 검은 다시금 검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 다. 킬의 두 눈엔 공포가 어렸다. 이네마..! 그때였다. 그 검은 불꽃이 곧바로 킬에게 내려꽂히기 직전, 누군가가 루 이트를 제지했다. 퓩----!!!! "....으윽!!!!!" "슬라이!!" 눈발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나, 싶은 순간, 킬은 루이트의 지옥 같은 검은 불이 자기의 귀, 바로 옆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헉, 헉..!" 그리고 킬은 숨을 몰아쉬며, 벌벌 떨면서, 루이트의 손에서 피가 떨어지 는 것도 보았다. 무섭고 두려운 그의 검은 손이 방금 전에 스쳐지나간 단 도 때문에, 붉은 피를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보고, 킬을 바라보았다. 무엇으로도 상처 입을 것 같지 않은 가면 너머에서, 가면 너머로, 킬을 꿰뚫고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널 먼저 죽이고, 모두 다 죽이겠다..." 다음 순간, 그의 붉은 피가 폭발하듯 번쩍이며 그의 손에서 곧바로 검 기가 분출되었다. 킬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그 비명과 동시에 누군가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마노테 계집을 죽여-!!!! 계집을 죽여 없애--!!!!! 슬라---이!!!" "....!!!!!" 그 말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더 이상 루이트는 킬을 향하여 분노를 뿜지도 않았고, 단지 고개를 들 어 먼 곳을 보았다. 검게 일렁이는 검기... 그의 눈에도 똑같은 것이 일렁였다. 공포, 절망, 슬픔... 흰 눈은 미친 듯이 내리고, 그가 소리쳤다. "안돼----!!!" (계속)================================================== 500줄 제한에 걸렸습니다. 짧은 거 하나 더 있는데, 아침부터 왕창 도배가 되면 창피하기도 하고, 좀 그러니까 약간 후에 올리겠습니다. * 유니텔은 별 상관없으니, 그냥 한꺼번에 올립니다..(^^;;)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76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19 08:11 읽음:255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3회, 제 40막. Masquerade. (11)> "...헉..헉.." 마차는 밤거리를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라즈윗 스테이블스에서 멀어진 지도 한참이었지만, 누구도 마차를 세우라고 할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심 지어 마차를 모는 도비온의 부하도 어서 빨리 안전한 '식당'으로 가기를 바라는 듯, 혼 강의 다리를 건너 이제 질퍽한 진창길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헤치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이드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헉헉... 나, 난... 아, 아직도 안 믿어져... 그, 그러고 보니 그 검도.. 헉 헉..." 도비온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말했다. "아악, 젠장!! 이게 웬 미친 상황이야, 도대체! 왜 그가...!!" 이렇게 혼란함만이 지배하고 있는 마차 안에서 겐트온은 마차의 지지 대를 꽉 틀어쥐며, 험악하게 내뱉었다. "제기랄-!!!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 공터엔 아직도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레이서스는 자신의 깨어진 가면을 발치에 두고, 망연 자실 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 번 째 단검을 막지 못했다. 그가 막은 것은 오직 두 번째, 세 번째 단검 뿐. 만약 그가 정말로 루이트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막지 못했고, 그래서 막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던 시나는 그대로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 모든 장면을 보았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 소리치며 일어나, 쓰러지는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단검을 막아냈다. 떨어진 유리 검을 주워 들고 어떻게 해냈는지도 모르게 그것을 쳐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연속적 으로 날아오던 단검 중 하나가 그대로 떨어지지 않고 그의 가면에 스쳐서 박혔고, 덕분에 그의 가면은 반으로 갈라져 단검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 다음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몰살당할 위험에 처하자 여자를 방패막이로 삼았던 듯 하다. 마 차에 올라타고 도망가기 위해, 그의 주의를 오직 여자에게로 돌리기 위한 공격. 그것에 이 소녀는 쓰러졌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자, 더 이상의 모든 공격을 포기하고 그 즉시 물러가 버렸다. 마차는 모든 자들을 데리고 떠났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그들을 쫓을 생각도 못했고, 자기 얼굴이 길게 베어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눈이 내려 그의 상처를 식히는 것도,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경악으로 숨을 삼키며 물러갔던 것도 보지 못했 다. 그는 그냥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소녀만을 보고 있었다. 어깨에 꽂힌 단검은 검의 손잡이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레이서스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몸을 안아서 자기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미소를 지었는지... 헌데, 지금은 아무런 미소도 지을 수 없었다. 그가 원래 했던 대로 목적을 이루 었건만, 어떤 웃음도 지을 수 없었고, 있는 것은 오직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이었다. 매스커레이드. 그 가면이 깨지고 떨어진 순간 무언가가 그의 내부에서 같이 깨져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괴로움과 슬픔. 아직도 눈 물 흘리는 그의 어린 모습. 자이온의 나무 밑, 그 어둠 속에서 소리 죽여 우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시간은 혼돈하고, 그의 내부에 깊은 암흑이 있었 다. 시나의 웃는 얼굴과, 황금빛 먼지 속에서 웃으며 그녀와 이야길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무수히 많았건만, 그러나 지 키지 못하고 소유할 수도 없는 모습의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그러니 모든 것에 애정을 두지 않고... 한 곳에만 신경을 둔다면 견딜 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시나의 한숨과,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또 다시 이 모든 것들이 과거 속에만 살아 숨쉬게 되 는 것인가? 지금까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그랬던 것처 럼... 영원히. 이 소녀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게 된다면. 아아..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는 이런 것엔 능숙하니까. 또 다시 가면으로 감싸고, 미소지으며, 떠오르는 단상은 유리 검으로 잘라내어 파 묻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 소녀가 죽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 줄 몰랐습니 다. 그러니, 그 전에... 이것을 몰랐을 적에... 이 소녀를 죽였더라면... 그렇 게 해서, 평생을 또 다른 후회 속에 살게 되더라도.... 그래도 좋았을 것 을... ...그런데, 왜... 왜, 내게 이렇게 행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시나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아.. 제발... 엘이시여, 자비로우신 내 주여.. 이 소녀가 죽지 않기를..." 그의 가장 행렬은 끝났고, 그의 가면은 깨어졌으며, 그의 오랜 미소도 깨어졌다. 그리고 저 23년 전 자이온의 나무 밑 이래로 내내 홀로 어둠 속에 울고 있던 아이는, 이제 한 발 앞으로 나와, 그의 소녀를 안고 눈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를 위하여 클로니아의 숨결... 차갑고 부드러우며 하얀 눈이, 그 의 어깨 위에 한없이 쌓이고 있었다. 한 차례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하늘에는 꿈틀거리는 회색 구름이 아직도 세상에 짙은 어두움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도시의 지붕과 지붕을 뛰어 넘으며 초인적으로 밤길을 달리 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하스피틀이라고 쓰여진 곳... 그 너머의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려, 한 창가로 들러붙었다. 그리고 어떤 밤도 가로막을 수 없는 푸른 눈으로 창문의 틈새 냄새를 맡으며 으르렁댔다. 안은 아직도 밝았고, 불빛은 그의 눈을 아프게 했다. 그 가운데 초조한 얼굴로 앉아 현관에서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는 청년이 있었다. 크르르르.... 그 초인적인 존재는 그를 발견하고, 눈을 번쩍였다. 긴 하얀 송곳니가 그의 붉은 입가에 드러났다. 그의 청각은 지금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그 청년은 말하고 있었다. "...벌써, 갈리키니움도 3경이 넘었는데..!! 도 대체 시나도, 그 친구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레겜에게선 어떤 연 락이 없었습니까?!!!" 건너편에 있던 남자는 불안한 얼굴로 계속 손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 다. "네..! 연락은 없었습니다. 아아.. 어떡하면 좋을지...! 무슨 사고라도 있 던 것일까요..?" 여자가 말했다. "아아...!! 시나야...!!!" 창문 앞에서 그 틈새를 엿보고 있던 존재는 크르르 소리를 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럼, 어디로 갔을까... 그의 숙소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고, 분하기 짝이 없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이런 모습으로 왔다. 그런데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보호물'의 모습 뿐. 그는 분노에 차서, 긴 손톱으로 통나무 벽을 길게 그었다. 오래 된 통나 무 껍질이 찌지직 소리를 내며 벗겨졌다. 모든 사물을 놀랄 정도로 똑바로, 그리고 자세히 볼 수 있는 그의 푸른 눈이 '보호물'을 직시했다. 그리고 또 한차례 이를 드러내었다. 크르르르.... 웃음이 나왔다. 크르르 르...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이 몸으로 그를 본다. 그래서 그가 이토록 탐나는 존재라는 것을 깜빡 잊었다... 크르르르... 그의 눈은 번쩍이며 빛났 다. 그 눈으로, 그는 낮게 헐떡이고, 탐욕스럽게 그를 훔쳐보았다. 저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것은 얼마나 먹음직한가...! 저것은 얼마나 명예로운가...! 보호물은 창문 틈새 너머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붉은 촛불 빛에 그 의 은발이 흔들렸다. 그걸 보며 그는 또 웃었다. 크르르르... 아아.. 넌, 인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자다. 네 종속자가 빠져나가,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너를 보니, 나는 매우 배가 부르다. 아아...! 그러니 언제쯤, 네 진짜 피를 마실 수 있을까? 응? 크르르르... 그는 창문이 그의 목덜미라도 되는 양 갈급하게 핥았다. 하 지만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부스러지는 차가운 눈송이 뿐... 뜨거운 피는 오직 저 안에 있었다. 그는 증오의 눈으로 창문의 틈새를 엿봤다. 그는 힘찬 모습으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걷고 있었다. 걱정에 찬 표 정이었지만, 나무의 날과 비교하여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모 습이었다. 크르르... 그는 웃었다. 참, 아름답구나. 너는... 하지만 너는 모르지. 네가 다스리던 것은 모두 다 너를 잊었지. 네가 다스리던 세계에서, 죽음의 그 늘 아래 살아왔던 그대로... 크르르... 네가 빛나던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도 너는 빛난다. 하지만...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축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 그때였다. 갑자기 긴 호각 소리가 들리며, 어디선가 외침이 들렸다. "...저기다!!!! 와이트 뱀파이어!!!! 뱀파이어다!!! 잡아랏!!!!!" "....!!!!!" 그는 자기가 인간들에게 들켰음을 알고 펄쩍 뛰어올라 좀 더 놓은 지 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회색의 구름이 갈라지며 푸르 고 차가운 달빛이 그의 전신을 비추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금발... 사람을 홀리며 빛나는 푸른 눈... 남자의 아름 답고 완벽한 몸매를 가진 그는, 모든 밤과 모든 밤사이에 존재했던 어둠 의 존재였고, 생명을 삼키는 자였다. 그러나, 그 천 개의 밤 동안, 자기를 원하는 천 개의 생명을 삼켰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언제나 영원한 밤 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웃으며 망토를 펄럭였다. 그의 긴 금발이 회색 구름처럼 펄럭이며, 그의 눈은 푸른 달빛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는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 어 넘으며 달렸다. 그 밑으로 이 이상한 존재를 쫓는 사람들이 달렸다. "잡아--!!! 저것이 요즘 혼 강에서 발견되는 시체의 원인일 것이다!!!!" 밑의 거리에서 문지기와 성직자들 외침, 그리고 수비대들의 호각 소리 가 울렸다. 와이트 뱀파이어는 눈 덮인 지붕을 달리며 웃었다. 내 동생.. 내 동생... 눈이 차갑고, 난 지독한 증오와 슬픔으로 이 위를 달린다. 나를 느낄 수 있어? 그는 자신의 동생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동생은 오늘도 침상에서 악몽을 꾸며 눈물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래했다. 회색 구름과, 푸른 달빛 밑에서, 오래 전부터 그가 흥얼거렸던 노래를... 그러니, 우리의 손을 잡아라, 너 아름다운 자. 아직은 축제가 한창이다. 갈채와 환호를 들어라. 그 막은 이미 올랐고, 네가 살아왔던 마을... 너의 20년을 불태웠으니, 이제 네게, 돌아갈 과거와 장소는 없다. 다음은 네 종속자의 차례. 네 현재를 불사를 차례다. 그렇게 나는 네게 경의를 표한다. 아름다운, 마인드 컨트롤의 족속이여. 너를 소유하고자했던 자의 죽음으로 이뤄진, 오래된 가면에 갇힌 자여. 하지만, 그 매스커레이드가 깨지는 날...! 너의 황홀한 미래. 빛 보다 강한 어둠... 그 전능한 왕...!! 너는 진정한 죽음의 세계의 왕이 되는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를 위하여....!! 그리고, 나와 내 형제들을 위하여...!!! 너, 아름다운, 얼음의 왕...!!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 하하하하.... 와이트 뱀파이어는 눈과 달빛으로 온통 푸르고 이상한 밤을 달리며, 웃 었다. (계속)================================================== 성역은.. 수요일 안으로 올리겠습니다. (탈진.. 쿵.--;) <엔...--;;;> ps...하지만 제가 쓰고 싶었던 장면은 아직도 안 나왔어요.(징하게 길 다...TT) ps2...나우누리에 추천해 주신 모님.. 감사..^^;; 으윽... 하지만 저 아직 계약 안 맺었어요..(TT) 1부나 끝나고 출판을 하던 삶아먹던 해야 할 것 같아.. 미루자고 했다고요...(TT) 그러니, 저는 아직도 가난하고... 엘야 1편은 아 직도 통신상에 건재합니다.(하하..^^ 프롤로그도 있음...^^)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84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23 21:45 읽음:224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4회, 제 41막. 겨울 속에서. (1)>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라." 레이서스는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딱딱하게 말했다. 장소는 왕가의 숲, 사냥막. 붉은 벽돌로 된 벽난로에선 굵디굵은 통나무가 타고, 반들거리게 닦은 나무바닥 위엔 가죽으로 된 양탄자가 몇 겹이나 깔려 있었다. 그리고 지난 밤 사이에 불려와서 내내 여기에 있었던 페이스 힐러 브루 이는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그런 음성에, 잔뜩 긴장하여 떨린 음성으로 대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파이오니온이시여. 당신의 종의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럼 다시 한 번 더 감히 여쭙자면, 제게 진료하라고 명하신 옥 체의 상태가 아무래도 생소한 것이라... 제 미천한 힐러 라이트를 밤새 전 사해도, 역부족.. 이것이 도대체 어떤 엘의 뜻인지..." 레이서스의 눈에 짜증이 스쳤다. "...관둬라. 설명은 필요 없다. 그냥 내가 알고 싶은 것만 고하라. 너희들 의 힐러 라이트가 어쨌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대답하라. 저 소녀는 이제 다 나았는가?" 레이서스는 아까부터 이 페이스 힐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힐러 라이트가 어떠니, 옥체가 어떠니, 알 수 없는 말 만을 지껄이고 있었다. 웬만하면 참고 들어주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결론이었다. 한편 브루이는 꽤 참을 성 있게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이렇게 단도직입적 으로 묻고 들어오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검은 눈은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고.. 아무리 말을 돌리고, 꾸며봐도 힐라토 파 이오니온이 원하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브루이는 그냥 포기하 고 처참한 심정으로 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를.. 왕이시여..! 내내, 최선을 다하여 치료하였 으나... 아,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상처가 벌어지는 일을 반복... 완전한 치유가 안 되고... 지, 지금까지 상처의 약간만을 아물게 했음을...." "뭐야!!!" 아니나 다를까,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입에선 브루이가 염려하던 대로, 격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네가 정말 페이스 힐러냐!? 너를 불러 온 지가 언제인데!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했더니, 지금에 와서 뭐 가 어쩌고 어째?!!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브루이는 울상을 짓고 말했다. "와, 왕이여! 그, 그럴 리가!!! 이것은 소인도 알 수 없는 일로...!" "시끄럽다!!" 그리고 레이서스는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브루이 옆에 있는 페이스 힐 러를 바라보았다. 동료처럼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버린 그 힐러는 레이서 스의 상처를 치료하고 그의 명령으로 시나의 상처 치료하는 것을 도우러 침실로 들어갔던 힐러였다. "네가 대답하라!!! 이 자의 말이 사실이냐?! 아니, 그것보다 이 자가 정 말 페이스 힐러인가부터 내게 고하라! 거짓으로 고한다면, 너희 둘 다 살 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는 사냥막을 관리하는 숲지기도 흠칫 놀랬다. 사실 그는 어제 하루를 아주 무료하게 보냈고, 밤엔 축제를 맞아 그럭 저럭 흥겹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통제하느라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축제의 밤, 수비대들을 잔뜩 데리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으 니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도 숲 속으로 돌아와 노곤한 몸을 누일 생각이었다. 헌데 축제도 거의 끝나 가는 시각... 생각도 못한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웬 여자를 질질 끌고 나타나 느닷없이 문초를 시작한 때부터, 갈리키니움 도 4경이 지나가는 이 시간까지... 그는 한 순간도 쉬지를 못 했다. 초라한 모습의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언가를 고백하자,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그 후 가까운데 있던 수비대의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숲지기는 가슴이 떨려서 왕가의 사냥막 곁에 있는 자기 숙소에 돌아왔어도 쉬지를 못했던 것이다. 헌데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려 나가 보 니, 얼굴과 손에서 피를 흘리는 힐라토 파이오니온과 그 팔에 안겨서 선 혈을 뚝뚝 흘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놀라운 경험에 잠자리에 들 지 못하고 있던 숲지기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춰버렸다. 이세계(異世界)의 왕이 클로니아에서 이런 변을 당하다니! 이것이 어느 역적의 짓인가 정신이 하나도 없고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 지도 알지 못했다. 일루티온 계급으로서 엘의 축복을 받아, 지금까지 조상 대대로 왕가의 녹을 받으며 숲지기의 업을 전수 받아 왔지만 자기 할아버지 대부터서도 이런 일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래서 겨우겨우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여,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왕궁 에 즉시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그에게 말했지만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이 상하게 그것을 막고, 대신 사냥막을 열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게 행하는 이유를 묻겠는가? 저 흑색의 왕은 눈이 펄펄 날리는 가운데, 단조로운 가죽 바지와 웃옷 만을 입고, 자기 갈색 후드로는 여자를 둘둘 감싼 채 피를 흘리며 서 있 었다. 그의 긴 검은머리는 밤에 묻힌 것처럼 까맸다. 그래서 숲지기는 허겁지겁 사냥막을 열고 불을 피우고 그가 여자를 침 실에 눕히는 것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흘끔 보니 굉장히 창백한 얼굴의 여자였는데 갈색의 후드로 온 몸이 가 려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의 어깨에 단검처럼 보이는 것이 박혀 있다는 것뿐... 그 끔찍한 모습에 숲지기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힐라토 파이오니온 은 그에게 침실에서 나가도록 명령하며, 즉시 페이스 힐러 몇을 불러들이 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 외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 것을 말했다. 비밀의 준수를 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당시엔 '왜'라던가, '어떻게'라는 생각도 못하고 그의 명령 대로 따르기만 했다. 그래서 눈 내리는 밤길을 말을 타고 달려가 자신의 친구인 페이스 힐러의 집을 가서 그는 물론이고, 그의 동료까지 끌고 왔 다. 그런데 저런 질문이라니!! 힐라토 파이오니온을 치료했던 페이스 힐러 는 자신의 친구였지만, '브루이'라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였다. 당연히 자신의 친구는 한 층 더 높은 위치인 파이오니온의 치료를 맡았 고, 브루이는 여자의 치료를 하러 들어갔다. 페이스 힐러 길드에서도 쟁쟁하다고 소문이 난 실력들이었으니, 이것은 무사히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가 즉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파 이오니온의 상처를 깨끗이 치료하고,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을 때까지도 브루이는 나오지 않았다. 해서 상처가 심해서 그런가 하여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숲지기의 친구에 게도 명을 해 침실에 들어가 치료를 돕도록 했는데, 둘 다 한 경이 넘도 록 침실에서 나오지 않아,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차츰 초조해 하기 시작했 다. 그 와중 숲지기의 권유로 겨우 차 한 잔을 마시던 찰나 얼굴이 새하 얗게 된 페이스 힐러 둘이 나와 힐라토 파이오니온에게 이런 말을 한 것 이다. 그러니 이 흑색의 왕이 이토록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숲지기로서도 브루이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숲지기는 페이스 힐 러가 고치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단검에 깊숙이 당한 상처라 해도, 자신들의 말대로 퍼플 라이트 까지 낼 수 있는 힐러라면 그 정도는 약간의 시간이 지연될지언정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이런 소리라니...! 잘 하다가는 거짓 페이스 힐러를 데려왔다고 자신까지 물고장(物故狀) 이 날 판이었다. 해서 숲지기는 겁먹은 눈초리로 자신의 친구를 보았다. 그의 친구는 틀 림없는 페이스 힐러였다. 그것도 예전엔 루이티온 계급과 계약까지 맺었 던... 그러니, 조금 다른 소리를 할 것이라 애타게 기대했다. 하지만... 전혀 뜻밖에도 그의 친구가 하는 말도 동일한 말이었다. "...요, 용서를, 왕이여...!! 이 자는 진실한 페이스 힐러이옵니다. 하지만.. 어찌된 것인지, 저도 그렇고 이 자도... 아무리 애를 써보았지만, 그 분의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퍼플 라이트를 극한까지 퍼부어 도... 아아... 소인들은, 이제 탈진하여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나왔으니..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 레이서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숲지기는 지 레 겁을 먹고 마룻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와, 왕이여..!!!" 숲지기는 아까 숲의 공터에서 레이서스의 무서웠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 었다. "아, 아닙니다!! 이 자는 제 친구로서.. 정말로 페이스 힐러의 능력을 지 닌 자입니다!! 그러니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제가 거짓 힐러를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길드에도 등록이 되어 있으니, 조, 조사를 해 보시 면 아실 것입니다..!! 그, 그러니 용서를..!!"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숲지기의 모습은 보지도 않고, 페이스 힐러에 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아니고..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말하라. 그럼 저 소녀는 이제 어찌되는 것이냐..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그는 아까 시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칼이 그대로 박혀 있음에도 피를 쉴 새없이 흘려 창백한 모습이었다. 이들이 왔을 때, 그 칼을 빼내는 수술 을 했으니...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들의 실력이 없음을 탓할 수도 없었다. 아까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힐러 라이트를 내는 것을 보았으니까. 자신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들 어가는 것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아, 그저 목 소리가 떨리지 않게 노력해야 했다. "...그럼 그녀는,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페이스 힐러 브루이가 바닥에 얼굴을 대고 더듬더듬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무래도 우리 힘으로는 안되어... 안되어..." "말하라!!" "...으욱... 옥체에 사,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바, 바늘로 꿰매고..!!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힐러 라이트로는 안 되어..!! 으우욱..." 그러자 옆에 있던 숲지기의 친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이여..!!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피가 멎고, 조금이 라도 상처가 아물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레이서스는 온 몸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으로 굳 어 있던 몸에는 약간의 안도감이라도 대단한 것이었다. "상처가.. 아물었다고..? 그럼, 이제 회복된다는 말이로군...! 산다는 것이 지?! 그럼, 됐다. 흠을 남긴 것 따위는...!" 레이서스는 이제, 그녀가 '마노테온'이기 때문에 힐러 라이트에도 반응 하지 않은 것인가 납득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과는 틀린 것이다. 이들 페이스 힐러가 그것 때문에 치료를 거부할까봐 그녀의 머리를 천으 로 가리고 상처만을 보였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왕족의 여자들은 종종 이 런 식으로 겨우 상처만 내어놓고 치료를 받으니까, 페이스 힐러들도 이것 을 보고 그녀를 '왕족의 여자'로 착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몸에 흠을 남 긴 것에 이토록 벌벌 떨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안도했다. 무엇이라도 좋 다. 그냥 살아만 주면 되는 것이다. 저 소녀의 생명만 다시 살아날 수 있 다면, 무슨 흠이 있던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회복된다면... 그걸로 되었다. 수고했다..! 하지만 차후에 이 일을 아무 에게도 누설하지 말도록 하며, 만약 이 일이 너희들 입 밖으로 나갔음을 내가 알게 된다면 너희는 결코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이것을 가 지고 이제 돌아가도록..." 그러면서 레이서스가 가죽 주머니를 끌러 그들에게 던져 주려 하는데, 갑자기 페이스 힐러 둘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레이서스가 관대 한 말을 하여 한 숨을 돌리던 숲지기도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 볼 정도 로 그들의 눈물을 굵고 얼굴은 창백했다. "...아, 아니옵니다.. 저, 저희들이.. 회,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 이여... 요, 용서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절망한 목소리였다. 그 모습과 목소리에 불길한 예 감이 들어 레이서스는 얼굴이 차츰 흑색으로 변했다. "...뭐냐." 레이서스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아직도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냐!! 너희들, 지금 무슨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냐! 말하라!!" 결국 두 명의 페이스 힐러는 생명을 포기했다. 왕가의 숲을 지키는 숲 지기가,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가벼운 상처'와 '단검에 당한 어떤 여인(십 중팔구 왕족이거나 귀족일)의 상처'를 의뢰해 왔을 때.. 그들은 웬 떡인가 했었다. 숲지기의 채근과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둘이나 왔으니, 이번 일은 더욱 손쉬우리라 생각했다. 일은 쉽고 영광은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들은 습관 삼아 가지고 다니던 왕진 가방의 또 다른 반대쪽을 열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상적이라면 아마 그들은 오른 쪽 칸에 있는 물 품들-힐러 라이트를 내기 전에 손을 청결히 하는 비누라든지, 기본적인 소독약과 그 외의 것들-만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모래 시계가 두 번을 왕복하도록 힘을 썼어도 여자의 등에 있는 상처가 아물지 않자...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혈되지 않는 피는 이미 밑에 깔아놓은 시트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힐러 양성소와 견습 시절에 기초적으로 교육받은 것. 힐러 라이트를 내지 못하는 자들, 혹은 어떤 사고로 힐러 라이트를 내 지 못하는 페이스 힐러가 쓰는 지저분한 방법. 왕진 가방의 왼쪽 칸에서 바늘을 들어 거기에 실을 꿰고, 인간의 살갗 을 천 조각처럼 꿰매는 일을 해야 했다. 몇십 년만에 처음으로 하는 일. 이론적으로만 알고, 예전에 동물을 상대로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떡하겠는가? 자신들의 하스피틀로 꿰매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견습생을 부르러 갈 시간도 없었다. 손은 떨리고 땀은 비오듯 떨어졌다. 촛불이란 촛불을 다 밝혀서 뜨거운 빛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오직 엘의 이름만을 중얼거리며 꿰맸다. 그리 고... 몹시 보기 흉한 흉터를 남겼지만, 어떻게든 지혈은 해냈다... "하, 하지만, 왕이여.. 그 동안 피를 너무 흘리신 지라.. 어쩔 수가 없었 습니다. 게다가 물리적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느라, 많은 지혈초와 많은 마 비제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결코 상처를 아 물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그리하여.... 그리하여... 지금, 피를 멈 추게 하고... 상처는 아물었으나..." "결론을 말하라---!!!!" "으흐흑..!! 왕이여, 통촉하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몸이 식어가고 계십니 다... 흑흑...!" 시나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늦은 오후였고, 식탁엔 주전자와 깨끗하게 닦여진 컵이 있었다. 싱크대엔 막 설거지를 끝낸 물기가 남아 있고, 전자레인지는 고요한 침 묵을 지키고 있었다. 냉장고.. 약한 소음을 내고 있는 그것의 문에는 '시나의 아버님 윤정운 씨와 윤 시나양의 가족생활 지침서 및 계획서 및 법칙서'가 붙어 있었다. 시나는 한숨을 쉬고 식탁 위에 팔을 기대어 거기에 턱을 괴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라라라...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뱌 어린 샤바.. 얼마나 슬펐을까요... 샤바샤바 어린 샤바.. 얼마나 울었을까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들렸다. 두 손을 잡고 웃음을 띄고 정답게 손 바닥을 맞부딪치며 부르는 노래였다. 언제나 창을 통하여 보던 세상이 있 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를 맞게 되어, 만족하겠군." 시나는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자기와는 다르게, 이 상한 모피 옷과 폴라 티를 입고 두껍고 큰 모자를 쓴 모습의 여자애가 식 탁에 앉아 있었다. 그 애-시나-는 은색 눈으로 말했다. "역시 이 곳엔 네가 적합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건 너의 선택이니 까." 그러면서 그 애는 웃었다. "친구가 잔뜩 있고, 돌아갈 곳이 있다고? 그런 빽이 있으니까, 남에게 손은 못 대시겠다? 고결함과 순수함을 지키시겠다... 이건가? ...자기 생명 을 버리면서까지? 하하하... 참 재밌어.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고, 또 싫어 했지. 아무튼 내 분신... 너의 뜻을 들어주지. ...네 그 어리석은 결정대로... 그렇다면 넌..." 그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죽어." 주위는 곧 암흑으로 변했다. 교복을 입고 단정하게 앉은 시나는 그 깊 은 암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쾅---!!!! 레이서스는 문을 세차게 열고 시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거 의 백여 개나 밝혀진 방 한 가운데엔 천개가 둘러쳐진 침대가 있었다. 거 기로 다가가니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피로 시뻘겋게 물든 시트를 한 쪽으로 제친 곳에 하얀 등을 드러내 놓고 누워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 하 얀 등만큼이나 하얀 붕대가 겨드랑이를 지나 견갑골을 감싸고 있었는데, 거기서 스며 나온 피라든지 상처에 붕대가 달라붙지 않도록 바른 기름의 냄새가 방안에 온통 떠도는 피비린내만큼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레이서스는 길게 쳐진 휘장을 제치고 시나의 얼굴에서 천을 치웠다. "...!!!" 레이서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밝게 웃음 짓던 그 얼굴. 삶의 온기로 충만했던 그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감돌고 있었다. 온통 생기가 빠져나가, 이것이 과연 그 소녀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레이 서스는 어떤 미약한 소망 위해 떨리는 손으로 시나의 목에 손을 댔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오직 싸늘하고 깊은 어둠. 그들의 말이 맞았다. 이 소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흑흑... 와, 왕이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오나,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 하신다면..." "...나가라.." "왕이여.." "나가라!!!" 레이서스는 격하게 소리쳤다. "나가서, 돌아오지 말라!!! 내가 준 가죽 주머니를 갖고 사라지라!!! 아 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 만약, 내가 이 방에서 나갔을 때, 너희들 중 하나라도 이곳에 남아 있는 자가 있다면--!!! 내가 친히 너희를 죽이 겠다--!!!" 그 거친 고함에 우당탕 소리가 나며, 사냥막을 뛰쳐나가는 세 남자의 발소리가 났다. 그리고 레이서스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 이 마에 양손을 갖다 댔다. 누군가가-혹은 모든 것이-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만족하겠군.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이젠 유리 검을 그 남자 앞에 던 져놓을 차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