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13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08 19:11 읽음:252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7회, 제 37막. 시나. Ⅳ (3)> 드래마는 마침내 두 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자기를 끌어안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건 한 인간이 자기에게 존재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무엇으로도 치료될 수 없는 슬픔, 어떤 존재로도 달래어 질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을 발견하고, 그 것이 과연 자기의 것이었나, 놀라고 가슴 아파하다가 어쩔 수 없이 거기 에 손을 내미는 그런 방식이었다. 애초에 보지 않았다면 망각할 수 있겠 으나, 그것을 보고 난 후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할 것 이다. 피해 다닐 수 있다면 평생을 피해 다녀야 할 근원적인 존재. 저 낙 원에서부터 깨어져 버린 아픔의 조각들. 나의 루아흐(Ruach)... 나의 페르 소나(persona)...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 시나의 몸은 전혀 실 체가 느껴지지 않았고, 체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손에 분명히 감촉은 있었지만 자기가 아닌 타인을 안고 있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어떤 아름다운 환상을 안고 있는 듯, 따뜻한 느낌만이 고요히 남아 있었 던 것이다. 환상. 일루젼... 이 소녀. 이 회색 눈의 소녀는, 정말로 그의 가장 깊숙한 내부가 현실화되어 얼음의 숲에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슬프게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느끼며 과거동안 내내 누군가가 자 기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랐던 것, 해 주기를 바랐던 말을 하나하나 기억 해 내기 시작했다. 드래마는 무언가 그 안에 깊숙한 곳에 있던 생각과 말 들이 자기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둠은 생각을 명확하게 만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나에게 하는 말로서, 또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서 말이 흘러 나왔을 때.. 그것은 나지막하고, 슬픔에 차 있으며, 강한 음성이었다. "시나. 난,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찢겨지고 상실된 기억, 일루젼. 어쩌 면 이렇게 불행할 수가 있을까..라고. 기억은 개인의 과거인데... 객관적인 것이야 어찌되었든 주관적인 것은 온통 개인의 기억에만 의존하는데... 그 리고 과거.. ..과거는 나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중 하나인데... 사람들은 유일하게 과거를 볼 수 있는 통로인 그 기억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 고 그 기억을 얼마나 미워하고 슬퍼하는지.. 잃어버린 기억을 희구하고,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상실한 자기를 슬퍼하고... " "흑흑흑..." 가느다랗고 절망 어린 울음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드래마는 또 한 번 더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시나. 이것.. 그래, 이것을 알아주었으면 해." 바람은 점점 심하게 창문을 덜컹덜컹 두드렸고, 촛불도 그에 맞춰 더욱 불안하게 깜빡였다. 그 가운데서 드래마는 아주 낡아버린, 오랜 동안 아무 도 들추지 않았던 책을 펼치는 기분으로, 천천히 자신의 기억 가운데 어 떤 한 구절을 시나에게 들려주었다. "기억... 그, 찬란한 과거의 유산... 그 아름다운 과거의 업적이여..." 이것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그리운 느낌이다. 그리고 그는 그 그리운 느낌을 시나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태초부터 거짓말쟁이였다. 더럽혀진 지혜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들은 그 어미의 피를 잇는다.. ..기억. 사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분실하여 잘못 적힐 수밖에 없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인간을 거짓으로 더럽히고 마 는, 그 인간의 슬픔... 그 끈질긴 인생의 인도자... 그 거짓의 군주는 인간 에게 얼마나 광폭한가. 속이며, 속이며, 끊임없이 내가 너의 모든 실체이 고, 내가 너의 모든 현실이라고 속삭이지만...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 인간의 실체는 과연 과거만으로 정의되는가? 인간이라는 한 개체는 그의 전 생애- 이미 가 버린 그, 현재 존재하는 그, 앞으로 올 그에 의해 정의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기억 속에 그의 미래와 그의 현재가 포함 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흑..흑흑..."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자기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인간이란 하 나도 없으며, 그것이 과거만으로 한 인간을 정의 내려서는 결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는 이렇게 암송을 끝냈다. 방안은 한없이 어두웠고, 빛이라고는 벽난로 에서 나오는 것과 탁자 위에 있는 커다란 초에서 나오는 것뿐이었다. 하 지만 드래마는 그것마저도 보지 못했고 그의 마음 또한 낮부터 계속된 괴 로움에 지쳐 있었지만, 놀랍게도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혹은 배웠는지 모를 이 말은 그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이런 안도감이 이 소 녀에게도 가능할까? 그때 창문이 또한 번 더 세차게 덜컹거렸다. 시나는 지금 그의 팔에서 끊 임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드래마는 잠시, 그 움직임이 멎길 기다리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쉴 사이 없이 부는 바람소 리... 이렇게 춥고 바람이 부는 밤은 얼음의 정령들이 외로움에 못 견뎌 사람들을 찾아 헤매는 밤이다. 차가운 푸른 뺨과 얼음 눈동자의 정령. 헌 데 묘하게도 그들의 가슴은 더없이 따뜻해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그 가 슴에 안긴 사람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함을 느끼며 깊고 깊은 잠 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얼음의 정령, 자기의 품안 에서 그렇게 깊은 잠이 들어 차가움만 남게된 인간을 보면 그를 위해 조 용히 눈물을 흘린다. 하얗게 흩날리는 눈물을... 하지만 그렇게 후회할 것 을 알면서도 그들은 계속 사람을 찾아다닌다. 외로움.. 그런 그들의 손짓에 따라 덜컹대는 창문, 바깥에서 나뭇가지가 떨리는 소리들. 무언가 슬픈 것과 기묘한 향수가 존재하는 밤. 누군가가 계속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 듯한 밤이었다. 그리고 예전에도 꼭 이런 밤 이 있었던 것 같다. 드래마는 그 느낌에 잠겨, 다시 한 번 더 생각나는 말 들을 했다. "..시나.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확실했던 세계 들이 이제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갔더라도..." 당연했던 사실들이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만큼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고 절망으로 빠뜨리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이 세상엔 아무런 사실도 없고, 온통 믿음과 믿음의 영역들 뿐 이야.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이겠지.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아마도 진실이나 사실이 아니라, 믿음. 내가 존 재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가 존재했다는 것. 내일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 라는 믿음. 그런 것이겠지. ...그런데... 언제나 믿음은 군주를 필요로 하고.. 아쉽게도," 그는 슬프게 웃었다. "너와 난, 가장 손쉽게 경배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군주를 잃었지." 그때 어디선가 나지막하고 슬픔에 가득 찬, 그러나 또한 동시에 더없이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거짓의 군주- 오래된 기억이여, 아마도 그대는 일부분의 사실이자, 일부 분의 진리, 그래서 가장 큰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진리를 미워하므로, 그래서 당신을 섬긴다. 누가.. 이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영원히 잊어버린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는 그에 화답하듯 중얼거렸다. "너와 나, 마치.. 고아로서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자들같이.." 그 차가운 목소리가 말했다. '따뜻한 어머니의 자궁.. 기억의 탯줄.. 그것에서 끊어진 자가 과연 살 수 있을까? 누가 저 차가운 빛이 존재하는 곳에 설 수 있을까? 어둡고 음습 한 어둠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 진리는 증오의 대상 외에는 아무 것도 아 니다. 이 빛은 슬픔과 공포만을 던져 줄지니, 누가 이 세상에 우리를 던져 넣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가? 누가 나를 채찍질하여, 이 지독한 세 상에서 일어나라고 하는가? 저 저주의 손길이 안락한 거짓의 가랑이를 벌 려, 그것을 잔인하게 찢어내, 안에 있던 나를 잡아 끌어내었다. 떨어져 나 간 탯줄, 피로 물들은 나의 모습... 저 안에서 나는 온전했건만, 이제 나는 추악한 덩어리 외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나를 보며, 저 슬픔과 저 증오 가운데 나를 가둬두었다. 나는 울부짖고, 울부짖는다.. 너도, 나 도..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결코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 다...' 하지만.. 하지만.. 그곳을 떠났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무언가를 시작한 것 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소녀도.. "시나.." 드래마는 말했다. "시나.. 우리의 기억이, 과거가 없어도 괜찮아." 시나의 어깨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그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기억에 갇히지 말고, 기억을 넘어서, 아무 것도 아닌 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고 우리..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군주를 찾자. 또 한번 이 모든 기억이 부서진다고 해도, 내 존 재까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무엇으로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나의 믿음의 군주가 있겠지. 그때까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우리, 피 속에 찍혀진 낙원, 기억 이전에 존재했던 낙원, 지금은 잃어버렸 지만, 가끔, 협소하고 안락한 자궁 안에서 사는 자들마저도 눈을 들어 돌 아보는 그것은... 태고 적, 잊혀진 낙원의 웃음소리. 그런 위대한 것은 이 미 잊혀지고 잃어버렸건만, 이 피 가운데 내게, 채워지지 않을 갈증으로 휘돌아 흐른다. 작은 행복을 잃고, 분노에 떨면서.. 이를 갈면서, 나아가라. 슬픔... 내가 존재한다는 것. 과거가 존재했다는 것.. 내일도 살아가야 한다 는 것... 절망... 끝내 아무 것도 찾지 못할지라도... 상실... 어차피, 모든 인 간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방황... 그때까지 여행을 계속하자. 이 제 다시는 부서지지 않을 낙원을 위해.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을 슬퍼하 며... 그때까지는 거세된 믿음만이 발 밑을 비추는 등불, 작은 희망이 되리 라..'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모든 거짓을 버리며 나아갈 수 있도록... 드래마는 말했다. "그때까지, 시나.. 나는 너를 믿겠어... 네가 말하는 그 '현실 세계'라는 것 까지도 모두 다 믿겠어." 나의 세계를.. 믿는다고? 시나의 눈이 커졌다가, 거기에서 다시 한 번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그녀는 '이렇게 된 후' 처음으로, 그녀의 내부와 그 녀의 현실과, 그녀의 환상... 이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믿어 주는 사람을 얻 었다. 나야말로.. 믿어..지지가 않는군. 안 그래..? 심지어 그녀는 약간의 웃 음까지 흘렸다. 그리고 또다시 울고야 말았다. 드래마가 말했다. "시나.. 하지만 제발 알아줘. 이것은 네가 이곳에서 살아갈 만한 용기를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야. 말했듯, 기억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기 때 문에... 거기에서만 용기를 얻어 살아간다면, 현실을 살 수 있는 인간은 아 무도 없을 거야. 그냥, 이것은 믿음.. 난, 너의 과거를 모르지만.. 내 앞에 있는 너는 현재이고, 너의 미래.. 아니, 네 미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미래는 엘의 것이니, 미래는 그에게 맡기며, 그냥 단순하게 현재에 보이는 널 믿겠어.. 그러니, 부디.." 그는 그녀를 위해 말했다. "...용기를 얻어, 살아가기를. 너는 그대로 시나이고 그 무엇도 아냐. 과거 를 모르더라도. 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시나는 그만 또 한번 더 눈물을 흘리며 웃고 말았다. 그런가요? 당신은 정말 이상하군요. 당신은 정말 지배계급이었나요? 아니면... 오랜 동안 마 노테온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당 신은... "드래마.. 라단님과 카탈리 님이 나한테, 달의 날에 힐러에게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래요.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서워요.. 머리가 안 자란다고 하 면.." 그녀는 웃었다. "그들은 날 다시 미워하고 싫어하겠죠. 그리고.. 머리가 자란다고 하면.. 하하.. 그럼, 나는 누구인지.. 나는 혼란해 질 거예요. 그럼 난.. 어디로 돌 아가야 할까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무엇이 어떻게 되든 변하는 것은 없어. ..머리가 길어서, 네가 일루티온이 된다면.. 너는 그대로.. 행복할 수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과거는 내버려두 고 현재를 살도록 해. 미래에 눈을 똑바로 두고." 어찌할 수 없는 과거는 관두고 미래를 바라보자... 그것은 그녀의 좌우명 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 았다. 눈물에 젖어 반들거리는 손... 그런가? 이것이 이런 의미였나? 싫은 과거를 외면하고 현실을 도피하며 허겁지겁 미래를 꿈꾸는 그런 것이 아 닌..? 그때 그녀의 깊은 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래.. 이제야 저 사람 이 누군지 알았다... 하지만 드래마는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 했다. 그저, 그는 약간 피곤하고 지친, 그러나 약속을 말하는 음성으로 말 했다. "만약 너의 머리가 길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베개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조금 미소지었다. "..그래도 괜찮아. 그럼 나와 같이 바리스 마노테오나로 돌아가자. 디트마 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같이 가는 거야. 너를 돕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잖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시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몸을 일으켜 그의 목을 천천히 안았다. "시나..?" "드래마.. 고마워요. 언제나.. 고마워했어요. ..당신들이 아니라면 나는 벌써 이곳에서 죽었겠죠.. 고마워요." 그리고 시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드래마. 피곤했을 텐데, 울고불고 귀찮게 해서. 앞으로는 이런 일, 별로 없을 거예요. 미래는 잘 모르는 거지만.. 하하.. 어쨌든 안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은 할 거예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요. 저어, 위로해 줘 서 고마워요..." 드래마는 시나가 '위로'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 자기가 한 것이 그런 것이 었나, 무척 생소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쓴웃음을 짓고 그냥 고개를 끄덕 였다. . "..천만에." 그녀의 말처럼 정말로 심한 피로가 몰려와서 조금 자고 싶었다. ...이렇게 피곤하고 졸리다니..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비밀의 땅을 들어갔다 나온 듯, 모든 기력을 탈진한 느낌이었다. 그런 드래마를 바라보며 시나는 인사했 다. "잘 자요. 드래마.." 그리고 시나는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문득 생각이 난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드래마.. 그런데 갑자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그는 시나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의 질문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은 과거에 너무 자주 겪은 일이고 앞으로야 어찌되었든 지금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라,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질문..? 뭐지?" 시나는 눈을 내리깔고 문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투박하게 놋쇠를 둥글 게 해서 반들반들하게 닦아 만든 것. 거기에 희미하긴 하지만 그녀의 얼 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선 지금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그런데도 이렇게 태연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드래마..? 마인드 컨트롤의 족속이라는 것은, 루이티온 계급을 말하는 건가요?" 드래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왜 그런 것을 묻는가 궁금했지만, 이미 밤이 깊었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그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니. 마인드 컨트롤의 족속이라는 것은, 클로니아의 왕족들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지. 마인드 컨트롤은 원래 클로니아 스피릿의 것이니까."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그렇게 눈물이 흐르는 볼과 눈동자는, 붉은 놋쇠 의 빛을 반사하는데도, 이상하게 차가운 은색이었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되어, 드래마는 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어쩌면 얼음의 정령 같은 것으로.. 분명 문을 꼭꼭 닫아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놓았 을 텐데.. 어느새 들어와 그의 옆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뺨... 얼음과 같은 눈동자. 그것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졌고, 예상대로 손이 너무 차가와 그는 눈을 찡그렸지만 깨어날 순 없었다. 마치 밑 없는 늪에 빠진 듯, 잠은 끈질기게 그의 의식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눈은 분 명히 붕대로 감싸여 있으니 보일 리가 없고... 그런데도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너무나 심한 바람 소리를 듣고 잠이 들어 이런 꿈을 꾸는 것 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과 같이 뚜렷 한 느낌이라.. 이건 환상이 아니니.. 혹, 정말로 얼어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을 생각했을 때, 그것을 향한 욕구라는 것 이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강렬해서.. 그는 그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 외로움에 떠는 얼음의 정령... 푸른 뺨을 가진 그녀(왜 '그녀'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에게 손을 내밀어, '이 리 와'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때, 그녀가 눈물을 한 방울 그의 얼굴에 툭 떨어뜨렸다. ..따뜻한 눈물... 드래마는 얼음 정령의 가슴이 따뜻하다는 전설이 사실이 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확실히... 그 따뜻함에 취해 얼어죽을지도 모른 다... 그리고, 그 모든 환상은 사라지고 그는 그의 지친 육체와 정신이 요구하 는 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 버렸다. (계속)================================================== 윽... 버그입니다. 토너먼트 쓸 때, 날짜 계산하던 여파가 남아있어서... 본 편, 중간 무렵부터 날짜를 그만 15일이나 뒤로 쓰고 있었군요. 마우르코트 에서 날짜랑, 제일로트로 들어와서 날짜가 이상해요. 엘야시온은 날짜를 거꾸로 세는 건가, 희한하셨던 분이 계셨을까요? (어쩐지 저도 쓰면서도, 왜 아직도 말케스완월밖에 안 된 건가, 기슬러월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건 가.. 왜 이렇게 날짜가 안 가는 가.. 내가 지금 '네버엔딩 스토리'를 쓰고 있나.. 고민을 했다는...-_-; 그러다가 다시 계산해보니, 지금 날짜는 벌써 '기슬러월 2일, 황금의 날..밤'이더군요.^_^ 하지만 이런 거 몰라도 본문 읽 는데는 하등 상관없으니, 그냥 무시하고 편하게 읽어주세요..^_^ <엔^^> ps..^^; 속썩였던 '시나 포'가 끝나고, 다시, '시나, 그들을 만나다. 투' 시작 합니다.^^; ps2.. 페르소나는 게임까지 있는 워낙 유명한 단어이니, 무슨 뜻인지 아시 겠지요?^^ (국어사전에도 나와있습니다..^^) '루아흐'는.. 후후.. 비밀! 입니 다. ^^ (저 위의 영 단어는 영어사전엔 없으니, 찾지 마시길...^^)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17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11 23:21 읽음:256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8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1)> 카탈리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급히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 고 문을 여니, 그곳에는 그녀가 기대한 대로 어제의 그 손님이 서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이었는데, 카탈리가 웃으며 밝게 인사를 하자 그도 정 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했다. 카탈리는 그를 거실로 안내하며 또 한 차례 웃었다. "호호호.. 그나저나 오늘은 앞문으로 오셨군요. 그런데 어제는 왜 뒷문으 로 들어오신 건지 모르겠어요. 뒷골목으로 오셨다고 해도 건물 옆에 붙은 마당으로 해서 오시면 되는 거였는데... 하지만 뭐, 편하게 들어오셨으니 된 거죠. 가끔 그렇게 들어오시는 손님들도 있어요. 우리 집 뒷문이 현관 처럼 널찍해서 그런가 봐요. 호호호." 카탈리는 어제 잠깐 본 사람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무척 친근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낯선 사람이긴 했지만 남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그가 매우 마음에 들었고, 그 외에 그의 걸음걸이라든지 행동, 말투 등에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곧은 자세지만, 우아한 움직임... 어딘지 보통사람하고는 틀린 몸가짐이라 자꾸 시선이 가게 된다. 방금도 이 사람은 카탈리의 놀림 비슷한 것에 약간 눈을 찌푸렸지만 곧 쓴웃음을 띤 듯, 고개를 가볍게 숙인 것이다. "...좋은 여행입니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카탈리는 웃음 지었다. 뒷문으로 들어온 것이 '새로운 경험'이라.. 무슨 일 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사는 것이나 성격이나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저기 할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는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후후.. 루온 루드랫님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하실 거야.] 카탈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저어, 드랫...? 시나를 도서관에 데려가 주신다고 하는 손님이 오셨어요." "..?!" '드랫'...?! 레이서스는 여인의 말에 흠칫 놀라서, 무심하게 주위를 보던 눈 을 들어 거실을 차지하고 있던 남자에게 휙 돌렸다. 여인의 어깨너머로 누군가가 보였다. 레이서스의 검은 눈이 커졌다. 거실은 아침인데도 불구 하고 별다른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침에 거실을 환기시킨 이후로 추위를 막기 위해, 창문을 다시 옅고 반투명한 천으로 막아놓은 것이다. 덕분에 거실은 그 뿌옇고 희미한 빛으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어둠들 이 많았고, 밝은 실내에 익숙한 레이서스에게 이 풍경은 더욱 어두워 보 였다. 그런데.. '드랫'이라고..? 맨 처음엔, '드랫'이라는 말을 듣고도, 지금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이 '그'라는 것을 정확히 납득하지 못했다. 회색의 후드 속에 갈색 셔츠를 받쳐입고,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낡은 가죽바지와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호리호리한 몸매, 자신과 대등할 정도로 큰 키, 머리엔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의 머리칼이 옅은 노란 색이 도는 은색이라는 것은 그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머리칼로만 짐 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드러난 창백한 얼굴, 눈동자... "저어.. 손님? 이쪽으로 와서 자리에 앉으세요. 차를 좀 내올게요. 손님? 왜 그러세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눈도 떼지 못하고 드래마를 주시하던 레이서스는 카탈리의 재촉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경직된 안색을 가까스로 풀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 어제 그 사람이 아니라, 잠시.." 이렇게 얼버무리는데, 카탈리가 뜻밖에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아, 우리 집 양반이요. 그분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어딜 좀 가셨어요. 그 러니 여기, 드랫과 이야기를 해 보세요. 으음.. 이분은.. 그러니까, 우리 또 다른 친척인데요.. 호호.. 잠시, 우리 집에 머물고 계시지요." 레이서스는 카탈리를 바라보았다. 친척? 그는 이 여인이 왜 이런 거짓말 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노테온이 집에 있다는 것을 숨기려 는 방편인가? 스스로 마노테온이 되어 서 있는 저 자를? 레이서스는 다 시 한 번 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눈으로 드래마를 보았다. 유리 검의 존 재가 차츰 무겁게 다가들고 있었다. 심장은 놀랐던 감정이 지나가자, 괴로 울 정도로 느릿한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가라앉는 호흡. 폭풍이 불어닥치 기 전에 다가드는 정적 같은 것이었다. 몇 갈래나 되는 길 앞에 서서 고 민하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만, 그 짧은 고민 이 끝나면 모든 것은 멈출 수 없이 진행되어 끝날 것 같다. 복수든.. 증오 든... 슬픔이든... 지금이라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오랜 동안의 고민들을. ...지겨워. 내가 느끼는 감정이란 지루함- 뿐이지. 검은머리와, 검은 눈은 지겨워. 그것 뿐이야... 지겨움. 흐르는 것은 지루할 정도로 느린 시간이었다. 마노테를 사랑해서 그와 결혼하겠다고.. 네, 저도 듣고 믿어지지 않았습니 다... 레이서스, 그가 지금 유리 검을 뽑아든다면, 모든 일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쉽게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이토록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일까. 레이서스는 아직도 선택을 하지 못하고 그를 뚫어져라 쏘아보았 다. 하지만 그는 상대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연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 오랜 세월동안.. 저 짙은 남색의 눈동자. 어둠 속에서는 거의 검게 보이는 저 눈동자 또한, 23년 전 자이온의 토너먼트 장 외벽에서 그 를 처음 봤던 때 그대로 당당했다. 하지만.. 문득 레이서스의 눈동자가 흔 들렸다. 이렇게 세월이 지난 지금은 전혀, 아무 것도 그에게 느껴지지 않 는구나... 외모는 그대로인데, 마치 딴 사람을 보는 듯, 이상한 차가움. 그 의 모든 분노가 그런 차가운 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부서지는 것 같아, 레 이서스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잊고 잠시 허무한 웃음마저 흘릴 뻔했다. 그때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말했다. "..앉으시지요. ..그렇게 서 계시는 것을 보니, 저까지 불편하군요." 그 말에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그가 오랫동안 의문으로 삼았던 일들이 었다. 그는 레이서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었다. ...다른 루이트를 찾으십시오. 저는.. 당신의 루이트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을 주인 으로 섬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가 하얀 얼굴이 되어 있는데도 그는 참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아시지요? 루이티온은 영혼의 공명을 느끼는 상대를 섬깁니다. ...당신은 힐라토의 왕이 되실 테니.. 저도, 한 번 흉내를 내보고 싶었는데, 역시 잘 안 되는군요. 마치 여기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심장을 가리켰다. 여기가, 점점 얼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이걸 녹이고 싶은데.. 그건, 그러더니 그는 레이서스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으론 모자랍니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 어디서 나타났는지 루파르테가 흥분해서 날뛰며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소란이 벌어지고, 레이서스는 몹시 아팠 고, 열병이 나아 일어났을 무렵 그의 루이트는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이렇 게 시간이 지나 눈앞에 서 있는 자는 저렇게 깍듯한 말투로 말한다. 세월 을 모두 잘라버리고 재단해 버린 듯한 눈빛. 새로운 시작은 너무나 허무 했다. "...하하.." 갑자기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헌데 이 자는 이렇게 웃는 그가 진심으로 의아한 듯 했다. "..손님?" 레이서스는 웃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하하.. ..이 오만불손한 자여. 그래. 그대가 어디까지 나를 우습게 만드는지 보아주겠다. 그는 웃음을 띤 그대 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레겜이라고 합니다. 힐라토에서 세계혼을 구경하 러 온 여행자지요." 힐라토라... 그리고 그의 검은 눈. 드래마는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지었다. "반갑군요." 카탈리는 두 남자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 손님은 말수가 적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붙임성이 좋은 사람 같았다. 마음 에 드는 걸. 그녀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본 뒤, 기분 좋게 차를 준비하러 갔다. 그리고 드래마는 레겜이라는 여행자의 손을 놓기 전에, 잠시 그의 검은 눈을 보았다. 초점을 한 곳에 계속 맞추기 힘들어 눈을 몇 번 깜빡 거려야 했다. 아침에 얼굴을 씻고 붕대를 다시 감지 않기로 한 것은 아침 에 일어났을 때, 지끈거리던 머리의 통증과 눈의 통증이 많이 가신 탓이 었다. 이렇게 빠른 치유는 오직 페이스 힐러의 힘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라단은 다시 한 번 더 힐러 라이트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 했고, 드래마는 그것을 거절했다. 어쨌든 그는 누가 시나를 도서관에 데려 다 준다는 것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눈에다 붕대를 칭칭 감 고 이야기만 몇 마디 나누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 지 않은가? 동굴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도 그렇고, 어제 계속 생각을 해 본 결과 그저께 있었던 일들은...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동굴에서 있었 던 일과 그저께 있었던 일들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쓸데없는 관심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하고 엘 아이 즈의 패를 썼고, 예상보다 일이 잘 풀려, 고맙게도 문지기들의 장로가 대 신 입문 신고를 해 주어 묵고 있는 곳의 거처를 밝히지 않아도 됐는데... 그 동굴에 있던 자들이 정말로 이곳까지 왔을까?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왜인지 모르게 아주 불쾌 하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 이런 큰 상처까지 입었을 정도인데 아무 영문 을 모르겠다는 사실도 께름직한 느낌이었다. 라단은 동네의 건달패나 다 른 세계에서 온 부랑자들이 집안을 침입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며 오후에 수비대에 가서 신고하겠다고 했지만 드래마 자신이 그것을 말렸 다. 수비대가 온다면 드래마와 시나의 신분이 드러나 귀찮아 질 것이 뻔 했고, 게다가 이 일은 수비대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인딜산에서 있었던 이예티의 환각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 단체'에는 환각 에 관련한 전문적인 아티스트.. 그것도 굉장한 상급의 아티스트가 존재하 는 것이 틀림없었다. 헌데 드래마 그에게 있어 아트라고는 아트 전문 상점에서 파는 아트 스크 롤을 몇 개, 호신용을 써 본 것이 전부다. 그러니 그로서는 아티스트라고 하면 자연히 경계가 된다. 그가 여전히 루이티온의 힘을 갖고 있다면 아 무리 상급의 아티스트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테지만... (항간에서 종종 말 하는 대로, 굉장한 실력을 가진 아티스트가 있어 최대로 짧게 주문을 외 운다 하더라도, 그 주문을 외우는 시간 정도면, 아무리 실력이 없는 루이 티온이라도 아티스트의 목 서너 번은 벤다고 말하는 것은 99퍼센트 정도 가 진실이다. 루이티온이 아티스트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라고 하면, 하바 티온의 몇 서클이나 되는 메이지 마스터와 붙었을 경우, 루이티온 쪽이 아주 어린애들이거나 겨우 15살을 넘겼어도 아직 마인드 컨트롤의 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미숙아였다는 경우일 뿐이다. 한 마디로 별다른 변수 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익힌 루이티온과 아티스트들이 일대일로 싸울 경 우... 100이면 100, 아티스트들이 모조리 다 진다는 말이다. 루이티온들이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검기'는 웬만한 아트 따윈 분쇄해 버릴 수도 있는 방어 막이 되는 데다 그런 '검기'는 어떤 공격계열의 아트와 붙어도 지지 않을 공격력을 구사한다. 게다가 그들의 신체적인 조건은 단순히, '근육이 붙어있어, 보기가 좋다' 수준이 아니라 전력으로 힘을 쓰면 일반 인의 몇 배, 심하게는 몇 십 배나 되는 운동신경을 발휘하니... 일반인의 이분의 일 배, 심하게는 수 십 분의 일 배나 되는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아티스트들은 천신만고 끝에 모처럼 아트를 발현했다고 해도, 그것을 상 대에게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 채 그냥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고로, 루 이티온과 싸우려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상대가 루이티온인 줄 몰랐다거나 (제일 희박한 가능성) 무언가 술이 당겨서 한 몇 박 며칠 술독에 빠져 있 었다던 아티스트였거나, 생을 비관하여 자살은 하고 싶은데 스스로 목숨 을 끊으면 게엔나로 들어가니까 그것이 무서웠다던 아티스트였거나, 아니 면 아트연구에 너무 심취하여 살짝 맛이 간 아티스트(제일 신빙성 있는 가능성) 정도일 것이다.) 어쨌든 예전이었다면 그런 단체 따위 오히려 이 쪽에서 먼저 찾아내어 철저히 박살을 내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 다. 모든 힘이 제거된 상태에서는... 아티스트까지 끼인 단체라고 하면 최 대한 조심을 해야했다. 그의 짐작대로 모든 일들이 그를 겨냥하고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머물고 있는 곳을 들킨 이상... 그들이 또다시 올 위험이 있고, 그런 위험 부담과 함께 그는 내심, 라단과 카탈리를 위해서라도 움직일만하게 되는 대로 다른 숙소를 찾을 참이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시나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이 놈들은 상당히 묘 한 놈들인 듯 동굴에서의 일을 봐도, 도무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인 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확실히, 시나를 건드 릴 위험성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드래마는 시나를 데려다 준다고 하는 여행자에게까지 의심을 품고 (비록 시나에게 어제의 여행자는 동굴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직접 만나보기로 한 것인데.. 글세... 드래마는 마주 잡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실내가 어 두운 편이고 눈도 몹시 피곤해서 계속 무언가에 시선을 둔다는 것이 괴로 웠지만.. 검은 색의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깊고 인상적인 눈동자였다. 그걸 보고 드래마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 게 떴다. 좋은 느낌이다.. '레겜'이라는 이름 자체가 '친구'라는 뜻인데... 이 런 낯익은 느낌이라니. 드래마는 내심 긴장했다. 전혀 기억에 없는데 낯익 은 느낌이라면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손짓으로 다시 한 번 더 의자를 가 리키고 자신도 자리에 앉으며 신중하게, 그러나 무심한 듯 말했다. "..레겜이라.. 좋은 이름이군요. 이상하게 낯익은 느낌입니다. ...혹시, 우리 가 예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만난 적이 있냐고? 레이서스는 자리에 앉는 그를 보며 딱딱한 얼굴을 지었지만, 곧 그런 내색도 감추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입 가리개를 천천히 밑으로 끌어 당겼다. 그러자 그의 수려한 얼굴 이 드러났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과 진한 검은 색의 눈동자였다. "...!" 드래마는 레이서스가 얼굴을 드러내자, 약간 놀란 얼굴로 그를 자세히 쳐 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레이서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네가 나를 알아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까? 놀라고 하얀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까? 누구에게 인가는 분명, 잔인한 것이 될 기대감을 느끼며 레이서스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드래마는 아직도 레이서스를 가늘게 뜬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그런 드래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글쎄요..? 어떻습니까? 제 얼굴을 보니, 예전에 어디서 만났는지 생각이 나십니까?" 드래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외모는... 상당히 잘 생긴 사람이다. 하지만 그 가 입 가리개를 내렸을 때, 드래마 자신이 그에게서 받은 느낌은 무언가 가... 단순히 외모가 잘생긴 것으로 놀란 것일까.. 그럴 지도 모르고 아닐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길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친다면, 같은 남자인 드래 마라도 눈 여겨 볼만한 외모였던 것이다. 하지만, 외모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드래마는 레겜이라는 사람의 옷차림과 손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이 예티의 후드. 손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하얗기만 하다. ..남자다운 골격의 손이긴 하지만 결코 힘든 노동을 하는 손은 아니다. 신고 있는 신이라든 지, 옷들은 언뜻 보면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 고급품이다. 드래마의 시선이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갔다. 하지만... 저 얼굴의 선을 분명 어디선 가 본 것 같다. 조금 더 여성스러운 모습의, 아니면 좀 더 어린 모습의...? 이런 깨끗한 느낌의 일루티온 계급을 어디서 만났지? 이렇게 앉아 있는 자신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자신이 마노테온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 같다. 하지만 이런 인상적인 모습의 여행자라면 한 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자이온에 있을 때나, 제일로트에 물건을 사러 왔 을 때 스쳐지나가며 잠깐 봤던 것일까? 그렇게 머릿속을 뒤적이는데, 뜻 밖에 예의 또 그 묵직한 통증이 왔다. 안개처럼 뿌연 것들이 뇌를 쿡쿡 찌르는 느낌들. 이런 젠장... 드래마는 인상을 쓰고 생각하는 것을 곧 포기했다. 과거에 무 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기억해내야만 하는 사실'이라면, 일치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것은 경험상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계속 생각하 다간 통증만 심해지고, 환각에 따른 발작까지 일으키니까. 더구나 어제 그 런 일이 있었으니 한층 더 주의해야 했다. 더 이상 라단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정말 지겹군. 드래마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내 버렸다. 그리고 여행자가 자기의 과거를 알고 있다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약간 경계를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미안합니다. 잘 모르겠군요. 사실은 과거에 사고를 당해서, 몇몇 기억들 이 확실치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만났다면, 어떻게 만났는지 혹 말씀해 주신다면..." 드래마로서는 상당히 신중하게 한 말이었지만 결국, 그 말에 레이서스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모르겠다고?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고 가까운데서 봤는데도? ..하긴, 22년 전의 그 사건 이후, 이 자는 한 번도 레이서스를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레이서스 또한 1년 뒤, 루세를 졸업하고 힐라토로 돌아 가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월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 까... 레이서스는 대관식을 자이온에서 치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개인 루이트, 루온 루파르테의 맹세를 받은 것도 자이온이었다. 이 자 또 한 그때는 자이온에 있었으니 어딘 가에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봤을 것이 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과거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단 말인가? 자기가 놓친 것들... 자기가 잃은 것들...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의 옛 주인을 보면서, 그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괴로움에 몸부 림친 적조차 없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모든 것을 잊었다고 말할 수가 있지? 그 놈의 알량 한 일루젼과 기억상실이, 네가 깨뜨린 맹세, 네가 했던 모든 구역질나는 행동의 기억까지도 앗아간 거냐..! 레이서스는 자기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 르는 것이 분노인지, 증오인지 아니면 허탈감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신경이 날카롭게 유리 검에 집중이 되었다. 얼음처럼 반짝 이는 그것. 내가 부여한 이름을 내 팽개친 자, 너, 루온 루드랫.. 너는, 한 때,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개인 루이트가 되려던 자였다. 천 명의 사람들 가운데 주인이 있어도 곧바로 자신의 주인을 찾아 낼 수 있 는 자가 바로 루이티온들이다. 헌데, 뭐라고? 모르겠다고? 그래. 넌, 내 누 이마저도 그렇게 잊어 버렸겠지..! 레이서스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 자신이 누구인지, 뭣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이제 그 목적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이 뻔뻔한 자에게 선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찾아드는 감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었다. 나는 도대체 뭣 때문에, 이곳까지 아피네스를 데리고 왔지.. 그리고 이 자에 대 한 한 치의 재고할 필요도 없는 소문들을 듣고도, 뭘 바라고 이렇게 이 자리에 와서, 이런 지저분한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제기랄!!!! 마음속에 서나마 그 답지 않은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편 드래마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 눈에 띄게 굳어서,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한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맨 처음 그 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을 때는,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그의 딱딱한 얼굴을 보니, 그런 느낌마저도 완전히 사라져서, 그는 아주 낯선 사람으로 보였다. 혹시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느낌이 잘못 된 것일까? 그냥, 이 사람의 검은 눈동자..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저 검은 눈동자에 또 헛된 망상을 품은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그때 남자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세, 그렇게 말하시니, 저도 잘 모르겠군요.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안 납니다. 하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으니까. 사람을 많이 만나면 어딜 가도 언제 한 번 봤다는 느낌이 드는 얼굴이 있더군요. ....그 런데, 당신은 상당히 젊어 보이는군요? ...미혼이십니까?" 드래마는 눈을 찌푸렸다. 그가 느닷없이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이상했다. 그의 말대로 라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 례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눈은 고집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드래마는 그만 쓴웃음 짓고 말았다. 내심 경계를 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 에겐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만약, 이 사람이 '기억 이전의 사람'이라면... 지금 자 신이 할 말에 격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라는 것을 잘 알 테니까. 자신이 말하는 것이 어떤 죄를 말하는 것인지 잘 알 테니까. 하지만, 비록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심중을 토로하는 것이라도... 그것은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 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그 미소는 드래마의 피곤한 듯한 분 위기마저도 잠시나마 따뜻하게 바꿔주는 것이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 다. "저는... 제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아내. 그 말이 주는 좋은 여운과 따뜻한 느낌에, 드래마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 "아내.. 그러니, 저는 미혼이 아니지요..." 그렇게 말한 드래마는 고개를 숙이고 또 한 번 더 미소지었다. 아피네스... 그녀를 다시 한 번 더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에겐 족 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제 느낀 그런 뚜렷한 환각을.. 환각 일 뿐이라고 해도, 그런 것이라도 또 한 번 더 느낄 수 있다면... 그때 문 득, 드래마의 얼굴은 처연하게 흐려졌고, 그는 그 얼굴을 피곤한 눈을 문 지르는 척하며 손으로 문질렀다. "..아, 미안합니다. 눈이.. 조금, 아파서."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증오에 찬 눈으로 보고 있었다. 네, 그 아내를.. 내 손으로, 네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리고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루온 루드랫, 그러면 네 그 가증스런 행복한 표정도 내 누이와 나의 분노 를 담아 그렇게 비참하게 변할 수 있겠지..! 그걸 위해서라면, 난 어떤 비 열한 짓도 감수하겠다! ...너를 그때 죽였어야 하는데... 레이서스는 이를 갈았다. 맹세를 파기한 루이티온 따윈 주인의 손에 어떻게 죽어도 할 말 이 없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누이를 위하여 그를 용서하고 그를 놔주었 다. 그런데,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고?!! ...내가 널 너무 우습게 봤다. 고작 이런 검 하나 따위로, 널 또다시 용서하려고 했다니...! 그의 턱이 분 노를 참느라 가늘게 떨렸다. ...나를 버린 것은 용서해도, 내 누이를 버린 것은 결단코 용서 못해...!!! 레이서스는 분노 어린 미소를 지었다. 율르스.. 아아, 율르스.. 신경이 한 군데로 집중된다면, 견디질 못해.. 그러니.. 난 어쩌면 여기를 찾아오면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레이서스는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의 세계는, 따뜻한 안식과 휴식의 세계지만 더불어 죽음과 같은 냉랭한 어둠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레이서스의 눈에 바로 그 짙은, 차가움이 깔리 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네 과거처럼, 앞날 또한 저주해라. 루온 루드랫. 네 아내의 피 에 절은 몸뚱이가 어떻게 뒹굴든, 그건 바로 너의 탓이다. 내 손으론 결코 널 죽이지 않을 테니,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를 안고 너의 평생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자 바깥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야 했다. 물체를 보는데 어른거리는 잔상이 어리어 보여, 눈이 부셨 다. 지붕마다 잔뜩 쌓인 눈들... 어쩐지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레이 서스는 그 광경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잠시 있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시선 을 돌렸다. 그러자 주인여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시나를 잘 부탁할게요. 손님." "안녕히 가시오. ...레겜." 주인 여자의 뒤에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어둠 가운데 편해 보였다. 레이 서스는 빙긋 웃었다. 시나라는 소녀는 이제, 주인 여자와 함께 대기시켜 놓은 마차로 다가가면서, 몇몇 주의사항을 소곤소곤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헌데 소녀 쪽은, 시종일관, '네, 네..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잔뜩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레이서스는 그런 시나에게서 눈 을 떼고, 드래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그에게 친근 감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느릿하게 말했다. "..믿는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당신은 이 집, 사람들의 친척이라고 하셨죠? 그럼 저 소녀와도 친척일텐 데...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저에 대한 설명이라곤 아까 잠시 이야기를 나 눈 것뿐인데." 그리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소중한 친척소녀를 맡기다니. ...포션이 욕심나서 그런 제의를 하긴 했지만, 새삼 놀랍습니다. 솔직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어제 이 집의 뒷문으로 들어왔지요. 그런 곳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천박한 사 람이나 믿지 못할 사람 아닐까요?" 드래마는 그 말에 그만 웃음을 짓고 말았다. 허어.. 이 사람.. 의외로, 재미 있군. "..나쁜 사람이십니까?" "..네?" "하하.. 됐습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시니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군요. ...하하.. 제게는, 그런 당신이 공짜 포션을 원한다는 사실이 더 믿지 못할 일 같습니다." 레이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 다. 뒷문으로나 드나드는 사람이 제대로 된 교육이나 제대로 된 자존심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 한다. 어제는 비록,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실 수를 하긴 했지만, 수치스러운 일은 수치스러운 일인 것이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그런 자에게 아스테린이라든지, 아피네스.. 하여튼 자기가 아는 여 자들을 맡기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드래마는 레이서스의 의아한 눈초리 에 오히려 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피곤한 듯 아까부터 벽에 기대있 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사람을 안다는 일은.. 어떤 면은 몇 십 년을 걸쳐서 알아야 할 부분도 있 고, 어떤 면은 평생을 걸려도 모를 경우도 있겠지만, 적어도 당신에게 시 나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방금 나눈 대화만으로도 충 분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레이서스에게 다가와 그 앞에 섰다. "게다가... 천박한 사람이니, 믿지 못할 사람이니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 느 문으로 들어가는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가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그는 레이서스에게 손을 내밀며, 잔잔한 웃음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당신의 행동은 저도 배우고 싶을 만큼 예의가 바르더군요. ..후후.. 잘 가십시오. 오늘만 부탁드리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친척 소녀 때문 에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당신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레겜." 레이서스는 그의 그런 말에 불가사의한 눈으로 드래마를 보았다. 이것이.. 나의 루이트였던가. 그는 오랜 동안 마노테온의 생활을 해 왔을 텐데.. 아 직도 어떤 부분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지금이라도 당장 귀족들 사이에 끼어도 될 듯. ..그야말로, 방금 이 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그런 태 도를 배우고 싶었다. 모든 것에 초연해 보이는.. "...꼭,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군요." 드래마는 웃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고 말고요." 레이서스는 드래마의 손을 꽉 마주잡았다. 어떤 행동으로든.. 너의 믿음에 보답을 하겠다... 루온 루드랫. (계속)================================================== * 메일과 쪽지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메일이나 쪽지를 받으면 정 말 굉장히 기쁘니까.. 부담 갖지 않고 보내주셔도 됩니다.(^^;) 언제나 즐 겁고,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꾸벅^^) * 상준님..! 겹쳐 보이십니까? 흑흑.. 만세! 만세! T-T 사실 이벤트는 다 끝냈지만.. 그래도, 원래 원했던 답이 나오니, 참 기쁘군요.. (음하하..^^) 그때, 어디서든 답을 보면 내 멋대로 연락을 드린다고 했었는데. 게시판의 글을 봤습니다...^^ 만약 일러스트를 원하신다면 연락 주세요. 음, 그리고 일러스트는... 1부를 끝내고(도대체 언제 끝내냐.. 으이구..--;)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공백을 두면서 그때 그릴 계획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기다려 주세요.^^ <얼굴이 철판으로 탱글탱글한 엔...^^;> ps...답을 준비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주시길...^^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26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16 22:41 읽음:235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9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2)> "와~ 레겜! 미안하지만, 저것이 뭔지 물어 봐도 될까요? 네?" 그렇게 말한 소녀는 이제 덧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 리키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지금 자신의 기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활기 있는 말투였던 것이다. 계속, 아 까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되 겠지만... 사실, 그녀는 내내 떠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좁고 답답한 마 차 안에는 처음부터 오래된 먼지 같은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건들은 그의 내면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기조가 언제나 그런 것들이긴 했지만 힐러의 집에서 나온 직후는 어떻게 손댈 수도 없는 민감한 마음 때문에 창피한 일이지만, 15살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 즉, 눈물마저 흘릴 뻔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계속 삭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모든 것은 다 해결될 수 있다고, 가슴이 아픈 것은 그 원인이 사라진다면 분명 시간이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전에 잠시만 이 어둠 속에 앉아 이렇게 홀로 있자고.. 그렇 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마치 자신이 어떤 어리석은 초식동물-자기 위에 있는 것을 한없이 되새김질하며 말할 수도 없이 한심하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 는 아무 힘도 없는 초식동물이 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든 되돌려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그 힘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제 완전히 억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 이는 눈빛은, 가장 사나운 맹수가 자신의 상처를 혀로 핥으며 보이는 눈 빛-슬픔과 아픔, 그러나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 복수심이 더 짙게 가미 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기분이야 어찌되었든, 객 관적으로 본다면, 그의 눈에선 앞날에 있을 처절한 복수와 상대의 목줄기 를 물어뜯을 때 느낄 쾌감을 상상하고 있는 맹수의 눈빛 같은 번뜩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그의 천성적인 다감한 마음에 따른 슬픔과 회한이 긴 꼬리처럼 떨치지 못한 채 따라왔다... 이상하게도, 그리 고 당연하게도, 그런 것이 그를 더욱 아프게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그는 그렇게 상처를 핥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되풀이되던 생각이 어둠 속에서 점점이 끊어지고, 가슴속의 분노와 배신감, 증오가 막연하기만 했던 배출구를 떠 나, 어떤 구체적인 배출구를 찾아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을 무렵... 얼마만 큼이나, 자신이 원했던 어둠 속에 앉아, 우울하게 있었는지 그것을 생각하 게 됐을 무렵.. 갑자기 짙은 어둠에 작은 빛이 번뜩인 것처럼, 그는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지금, '홀로 있어, 생각하기 좋은 고즈넉한 침묵'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 이 어째서 이런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서서히 의아한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이것은 평소의 그라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 외에 단 한 명이라도 타인과 있게 된다면- 그는 이런 것은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결코 그가 우울하거나 지친 표정을 짓도록 내버려두 지 않았다. 그에게 그런 낌새가 느껴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그가 그러한 기분을 느끼도록 한 '불손한 원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끊 임없이 그에게 말을 걸고, 끊임없이 그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것이다. 그 냥 단순히 혼자 있고 싶을 때도.. 그는 혼자 있을 수 없었다. 고독하고 싶 을 때, 고독할 수 없다는 것은, 마치 계속되는 불면증의 밤 같은 것이다. 헌데, 그것이 이곳에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때부터 그 는 조금씩 눈을 돌려 눈앞의 소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마 차를 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소녀 또한 나름대 로 조용히 자기만의 침묵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상대 여자를 불편한 침묵 속에 홀로 남겨두었다는, 몸에 배인 예의가 증명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한층 더 편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하류계급의 상업용 마차라 창이라고는 손바닥만한 것이고, 그나마 나무판 자 같은 덧문으로 막아놓았다. 그래서 존재하게 된 어둠... 눈은 이미 그런 마차 안의 어둠에 익숙해 있었다. 그 눈으로 레이서스는 그녀를 보았다. 소녀는 한숨을 쉬기도 하고, 고개를 젓기도 하며, 일면 끝없이 슬픈 표정 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저 렇게 작은데..(물론 시나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평범한 여자들에 비해 굉 장히 마른 편이라, 그녀보다 훨씬 큰 레이서스에게는 그녀가 작게 느껴졌 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인가..? 힐라토를 떠나와 고향 친구들 생각이 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레이서스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일종의 동지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헌데, 그때 갑자기 그녀가 고개 를 들고 레이서스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조금 놀랐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는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그의 눈 위엔 겹겹이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딴 데 있을 거라 생각하는 그의 주위를 끌려는 듯,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어, 레겜..? 덧문을 조금만 열고 바깥을 봐도 될까요?" "...아.. 네." 그는 당황한 목소리 대신 침착한 목소리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순간 그녀의 몸이 약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찬바람을 쐬지 못하도록 말을 번복하려는데, 열린 창문에서 환 한 빛이 쏟아져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 이서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얼굴-하얀 피부 위에 난, 옅은 갈색의 주 근깨라든지 빛 속에서 일렁이는 투명한 회색눈동자-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의 기준으로 본다면 약간 더 통통한 볼에 붉은 뺨을 가진 여자가 취향 에 맞았지만, 여자치고는 홀쭉한, 섬세한 듯한 얼굴 선에 이토록 풍부한 표정이 서릴 수 있다고 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굴표정을 보는 것 만으로도 바깥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헌데 찬바람에 그녀의 코끝이 빨갛게 되어 아무래도 이 자기만족적인 구 경은 관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덧문을 닫도록 권할 무렵.. 갑 자기 그녀가 눈을 들어 흥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한 것이다. 바깥에 지 나가는 것에 대한 호기심... '와~ 레겜! 미안하지만, 저것이 뭔지 물어 봐 도 될까요? 네?' 아까 우울했던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굉장히 즐거운 표정이라 그 제야 레이서스는, 자기가 그녀를 관찰하느라 잠시나마 그 지겨운 추억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모처럼 얻은 고요함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깥을 보는 소녀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쳐지나갔다. '저것'이 빠르게 바뀌는 마차 밖의 풍경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상실감 이 서린 눈빛... 아마 그래서 그의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 말도 안 하자 한 번 더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없이, 빛이 드리워 진 회색 눈동자에 슬픈 빛을 담았던 것. 레이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 고 자신도 옆에 있는 눈 높이에 있는 덧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하긴... 우울하게 앉아있거나 말없이 몰래 그녀를 훔쳐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 와 이야기라도 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아주 작은 창문이라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선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대야 했다. 그리고 그는 소 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괴한 탈 같은 것을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매스커레이드(masquerade)... 가장 행렬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소도구 들 같군요." "..!!" 그가 대답을 하지 않을 듯 해서 서글펐던 시나는 남자가 대답을 해주자, 크게 고무되었다. "하하...! 매스커레이드요? 저것이 그런 거예요? 와~ 하하... 정말 신기한데 요? 이곳은 그런 것도 하는군요. 앗!! 저기, 저 남자애가 들고 가는 것은 오크 얼굴을 본 뜬 것 맞죠? 하하하~ 너무 잘 만들었다~!!" 시나는 진심으로 감탄해서 손뼉을 치고 있었고, 레이서스는 그런 그녀를 보고 매우 이상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그녀를 따라 미소짓고 말았다. 그녀의 유쾌함이 약간이나마 전염된 것 같았다. 그런데 소녀가 살 피는 표정으로 레이서스를 쳐다보았다. "저어, 역시 추우세요?" "네?" 그녀는 쑥스럽게 웃었다. "아, 창문을 열어놔서요.. 이런 마차를 타고 이런 도시 한 가운데를 달리 는 것은 처음이라.. 아아.. 하지만, 역시 춥네요. 닫는 게 낫겠죠?" 왕족들의 마차라면 유리가 붙어있어서 찬 기운을 느끼지 않고도 픙경을 구경할 수 있지만, 이 마차는 그것이 아니니까, 바깥을 구경하자면 추운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레이서스와 마차를 같이 타고 있는 소녀는... 자기 옆에 있는 덧문을 반쯤 열어놓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덧문에서 들어온 빛이, 길게 비춰 그녀의 회색 눈을 유리처럼 만들고, 뚜렷한 그림 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래서 그녀의 흥분은 더욱 생동감 있어 보였다. 코끝이 저렇게 빨개졌는데도, 정작 자신은 그리 추위를 느끼지 않은 듯.. 만약 레이서스가 별로 춥지 않다고 한다면, 언제까지라도 덧문을 열어놓 을 기세다. 레이서스가 말했다. "...몸이 안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몸이요? 웬 몸.. 아아.. 하하.. 아,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하하하.. 그러 니까, 이렇게 여행도 할 수 있죠. 전 지금 굉장히 건강하거든요.. 하하하.." 글세, 어떨까.. 레이서스는 이제 흥미롭게 그녀를 보았다. 만약 덧문을 닫 으라고 한다면... 역시 시무룩해질까? 그리고 저렇게 빛 속에서 뭔가 곤란 한 듯, 미소지은 모습도 사라지겠지... 결국 레이서스는 하얗게 입김이 나 오는 입을 가리개로 가렸다. 그리고 자신도 덧문을 크게 열었다. "...저라면 괜찮습니다. 별로 춥지 않아요. 보시다시피 이예티의 후드를 입 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군요." 시나의 눈이 커졌다. 오오~~!! 맘에 드는 사람이다~!!! 덕분에 시나는 마음 편하게 바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면도날 같이 날 카롭고, 양쪽의 덧문이 열린 관계로 마차 안에 그나마 남아있던 온기가 모조리 날아가 버렸지만, 적당한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에 정 신이 팔려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 간이 지나고, 레이서스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안 춥습니까? 힐라토 인들은 이런 추위엔 익숙지 않을텐 데.. 마치 이곳에서 계속 산 사람 같군요." 시나는 시선을 여전히 바깥에 던진 채 웃음 지었다. "저요? 예.. 저는 별로 춥지 않아요. 으흠... 저도 제가 추위에 이렇게 강한 줄은 미쳐 몰랐는데, 어쨌든 무엇에든 잘 견딘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그리고 반짝거리는 회색 눈이 레이서스를 향했다. "..후후.. 하지만, 역시 안 되겠네요.." "...네?" "미안해요. 당신은 제가 도서관에 갈 수 있도록 해 준 은인인데..." 시나는 지금까지 내다보던 창의 덧문을 탁 닫았다. 닫으면서 아쉬운 듯한 기색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곧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레이서스를 쳐다본 것이다. "후후.. 은인을 감기에 걸리게 해서야 말도 안되죠.. 저는 나름대로 이 세 계에 호기심이 많아서요. 일이 잘 돼서 돌아가게 된다면.. 친구들에게 이 야기 해 주기 위해선 잘 기억해 놔야 하잖아요?" 얼굴이 다시 어둠에 묻혀서 일까.. 레이서스는 왠지 그녀의 목소리가 힘이 없게 들린다고 느꼈지만, 곧 그녀는 레이서스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하하.. 여하튼 이런 마차뿐만 아니라, 이런 세계 자체도 처음이에요. 그래 서 보는 것마다 새롭네요. 하하..." "...힐라토..." "네?" 레이서스는 덧문을 닫고 입 가리개를 내렸다. 목소리가 추위 때문에 쉬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힐라토에서 이곳, 클로니아에 온 것은.. 세계혼을 구경하러 잠깐 온 것 입니까? 힐라토의 시골이라니.. 어디에 있었지요?" [힐라토의 시골.. 어디에 있었냐.. 으윽..! 큰일났다!] 아까 몸의 상태에 대해 물은 것도 그렇고, 이제 보니 그는 어제 낮에 동 네 아저씨가 한 말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 힐라토 인이라고 했지? 그러니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텐데... 시나는 카탈리가 말해준 주의사항을 잘 기억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카락이 짧다는 것을 들키지 말 것! 시 나가 그들의 조카가 아니라는 것도 들키지 말 것! 레겜이라는 사람은 좋 은 사람 같긴 하지만 그래도 '짧은 머리'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감은 대단 한 것이니, 하여튼 각종 사실에 대해서, 절대 들키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할까... 사실은 마을 이름이 기억 안 난다고, '기억상실'에라도 걸 린 척 할까..? 으윽.. 하필이면, 이런 질문을 하다니...!!] 이렇게 한참을 우물쭈물 고민하는데, 갑자기 레이서스가 눈을 찌푸렸다. 시나가 난처해하면서 대답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신상에 관해 물어서 역시 기분이 나빴나 보군요? 힐라토 인들의 비밀주의는 대단하니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용서하십시오." 시나는 이 뜻밖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예상 밖의 구원이었다.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하마터면 감격한 얼굴로 남자의 손을 붙잡고 아래위로 흔 들 뻔하기까지 했다. 시나는 감동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욱.. 마, 맞아 요!!! 저는 힐라토 인이라 제 신상에 관한 일은 이제부터 '노코멘트'예요!! 아~! 이 레겜이라는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이구나...! 문제가 해결됐다.. 아 아..! 남자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했지만, 시나는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그래 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네.. 아무래도 그렇죠.. 전 힐라토 인이니까. 하하하--- 별로, 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시나는 자기 말을 강조하려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한편 레이서스는 그런 시나를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힐라토는 비밀주의가 대단한 세계이다. 그래서 함부로 남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 하지만... 상대방과 매우 친밀하게 지내고 싶을 경우에는 그만큼 은근 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자기 일을 타인에게 알려 주는 자들이 바로 힐라 토 인이다. 특히 여자들은, 상대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경우, 그 남자가 질문을 해서 어떻게든 자신에게 관심을 표해주길 바라고... 남자 또한 여 자에게 호감을 느껴, 실례를 무릅쓰고 여자의 신상에 대해 질문했다면... 상대는 그 최초의 질문에 자신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말해주며 자신도 그 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다른 세 계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미묘한 관습인데, 확실히 힐라토엔 직접적인 표 현보다는 이런... 격언과, 속담, 행동에 대한 암시, 상징적인 행동들.. 간접 적인 표현이 무척 발달해 있었다. 다른 세계인도 아니고 힐라토 인이라면 그것을 충분히 알 것이다. ...힐라토 인이라면. ...그냥 일개 일루티온 계급 소녀일 뿐이다. 그런 소녀와 일부러 대화를 할 필요는 없다. 방금 까지도 조용히 있었으면 했던 주제에... 소녀가 질문에 응해 주지 않았다고 이런 실망까지 느끼고 앉아 있다니.. 그래서 레이서스 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마차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의 눈앞으 로 무언가가 불쑥 내밀어 졌다. 그것은 동그라면서 반투명한 사탕 같은 것으로 소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레이서스는 의아한 얼굴로 시나를 보 았다. "헤헤.. 이건 카탈리 아줌마가 준 거예요. 추운 데 먹으면 아주 좋은 드롭 스래요. 으음.. 감기 예방도 되고. 레겜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던데, 드세 요. 맛있거든요.." 레이서스는 자신에게 드롭스를 권하는 시나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하지 만 그녀는 아무 사심도 없는 표정이었다. "네? 감기예방이 된 대요. 드세요." 그녀가 재차 권하자, 마침내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드롭스를 집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시나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맑은 얼굴... 잠시 드롭스를 손안에 갖고 있던 레이서스는 묘한 표정을 띠고 있다가 문득, 시나를 보고 물었다. "..당신, 정말 힐라토 인입니까?" "네?" 시나의 의아한 얼굴에 그는 미소지었다. "...지금 행동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모릅니까?" 지금 행동? 드롭스 준거? 시나는 당황했다. 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갑 자기 힐라토 인인지 아닌지 묻는 것을 보면 실수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모, 모르겠는데요. 하하.. 저어.. 드롭스를 주면 안 되는 거였나요? 그, 그럼 안 드셔도 되는데.. 하하하... 아아.. 에.. 그렇죠! 저는 정말 시골에만 있었거든요. 그, 그래서 예의라든지 그런 게 조금 틀리더라도 그냥 그러려 니 하세요. 하하.. 사람 사귀는 일이라든지.. 그런 게 서툴러서.. 아하하.. 아아~ 이런 도시도 처음이라, 이야, 너무 번화해서 놀라버렸어요. 하하하- 제가 좀 촌스러워요. 하하하하--" 레이서스는 손을 들어 드롭스의 박하 향을 음미하며 뒤로 기댔다. 아하.. 그런 건가. "..그리고, 사교생활도 꽤 부실했던 것 같군요. 몸이 약해서 집안에만 있었 습니까?" "네? 아아.. 네. 아하하하.. 그렇죠. 그래서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많이 못해 서. 네에.. 조금 쓸쓸했다고 할까. 하하.. 그래서 참, 그러니까.. 네. 모든 것 이 신기하네요. 하하.." 그렇게 열심히 변명을 하던 시나는 이번엔 실수가 아니길 간절히, 간절히, 엘에게 빌며, 그에게 질문했다. "하하하.. 근데, ..저어, 그런데 드롭스를 주는 게 무슨 뜻인데요? 다, 다음 부턴 주의해야 하니까... 으음.. 카탈리 아줌마가 좋은 거라고 했거든요?" 마침내, 레이서스는 빙그레 웃었다. "뭐.. 됐습니다. 아무 뜻이 없었다면, 굳이 이러니 저러니 할 것은 없죠. 당신의 선의만 받겠습니다." 그러더니 레이서스는 미소를 짓고 드롭스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눈 으로는 계속 시나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웃고 말았다. 이상한 소녀군.. 정말로. 그리고 마침내 드롭스가 입안으로 들어갔을 때, 달콤하고 싸아한 느낌이 목구멍을 화악 자극했다. 굉장한 박하 향이었다. 한편 시나는 하도 그가 이상하게 보는지라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마, 맛있죠?" "..그렇군요." 그는 빙긋 웃었다. "맛있는 드롭스이군요. 고맙습니다." [휴우.. 맛있다는군.. 휴우..] 시나는 이번 사건(?)도 무사히 지나가 안도의 한숨을 푸욱 쉬었다. 드롭 스 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 은 머릿속에 새겨놓았다. 하여튼...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가고, 시나 가 먹고 있던 드롭스도 다 녹고.. 시나 쪽은 무슨 말 한마디라도 하면, 상 대방이 '너 힐라토인 아니지?'라는 말을 할까봐 겁나서 한 마디도 못하고 있었고.. 남자도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며 앉아있는 듯, 한참을 조용히 앉 아 있었을 무렵... 규칙적인 마차의 움직임과 마차 안의 정적에 꾸벅 잠이 들려던 참에..(어쩐지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가만히 있으려니 몹시 졸렸던 것이다.) 남자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그.. 드랫이라는 분은 자신의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 같더군요." "..에? 드, 드랫.. 아, 아내요?" 남자의 질문에 퍼뜩 졸음 기가 가셨고, 더불어 시나는 당황했다. 드, 드래 마한테 아내가 있었나?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26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16 22:43 읽음:240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0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3)> "네. 아까 자신의 아내 이야길 하더군요. 흥미로웠습니다. 아내 이야길 하 면서 표정이 매우 부드럽게 바뀌는 것을 보고.." 시나는 인상을 썼다. 드래마가 자기한테 아내가 있다고 했다고? 그거, 금 시초문이네.. 하지만 뭐... 굉장히 사랑하는 여자가 하나 있긴 하지. 우웅.. 그럼 그 여자가 드래마 아내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시나는 돌연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허억..!!! 그럼, 드래마는 유부남이었나?!! 에엑..!!! 이젠 시나가 남자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뭔가가 아무 래도 이상했던 것이다. 과거에 디트마의 말이나, 이곳에 와서 라단과 카탈 리가 보였던 행동을 보면 도저히 드래마가 결혼한 상태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침에만 해도 라단과 카탈리는 시나를 불러다 놓고, '네가 일루 티온이 되더라도, 루온 루드랫님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며, 결국은 너의 승리.. 그러니, 하누카의 날은 그분의 계급 사람들과... 어쩌고'하는 말을 듣는 바람에,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했다.(황당해서.) 하지만 덕분에 시나는 왜 이제야 그들이 그렇게 자기를 싫어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들 은 시나가 드래마의 상대라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왠지 분했다.) 아무튼 이상한 일이었다. 시나가 알기로 '하누카의 날', 즉 '성인식'은 평생 에 있어 단 한 번밖에 치를 수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지금 까지 드래마의 '성인식'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을 봐서도 그가 '결혼'을 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시나 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휴.. 드래마가 거짓말을 한 거구나.. 뭣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눈빛이라...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떠올리며 희망사항을 말한 거겠지. 디트마가 그랬지? 굉장히 높은 신분의 여자라고... '사랑 받는 종속자.. 어쩌구'에도, 강혼은 안 된다고 했 으니까, 필시 무슨 사정이 있겠지. 자기 신분을 버리고 사랑을 할 정도라 니... 맨날 그렇게 무뚝뚝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사랑하는 여자랑 만나지 도 못하고 있는데.. 하여간 이 놈의 신분사회는 골치가 아프단 말이야. 그 나저나... 시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레겜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못 할 사실이니까, 비밀인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왜 이 사람에게 그런 식으 로 이야기했지? 그때 남자가 다시 말했다. "..같은 힐라토 인이라고 해서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세 분은 관 광차 이곳에 오신 건가요?" 세 분? 나랑 드래마, 그의 아내를 말하는 건가? 에휴.. 하는 수 없지.. 드 래마가 세 명이 왔다고 말했다면 장단을 맞춰줘야지. 게다가 이 남자는 오늘 보면 끝이니까 뭐... 시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글세요.. 네 그렇죠. 아마도.. 하하.." 레이서스는 시나가 애매하게 대답하는 것에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거짓 말. 삼촌의 옛 주인이니까, 같은 거짓말을 강요받은 것인가? 안됐지만, 더 철저히 할 걸 그랬군. 이 소녀는 거짓말에 상당히 서투른 걸. 하지만 레이 서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여전히 무심한 듯 물었다. "그래요? ...은혜의 법이라고 하던데, 힐라토 인이면서도 이렇게 클로니아 에 와있다니... 올해 치를 생각은 아니겠군요?" 그럭저럭 이번 사건도 무사히 넘긴 것 같다고 위안하던 시나는, 덕분에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까스로 면하고 실제로 소리 쳤다면 경악이 가득했을 말을 속으로만 소리쳤다. [에에에엥--?!!! 으, 은혜의 버업--?!! 그, 그러면 드, 드래마가 말한 '아내' 가 나야?!! 으으윽!!! 하, 하긴 마우르코트에서도 그랬지만..!! 그런데, '부드 러운 표정'은 뭐야? 으으윽!!! 말도 안돼! 절대로~!!! 드래마는 '자기가 좋 아하는 여자'외엔 어떤 여자 이야기를 해도 절대 '부드러운 표정'으론 이 야기 안 해!!! 으윽!! 그런데 '은혜의 법'이라니!! 이 남자, 뭘 잘못 봤나보 군..!! 괜히 이상한 표현 쓰는 바람에, 거기다 '세 명'이라니..!!! 그건 도대 체 어디서 나온 말이람? 덕분에, 실수하고 말았잖아, 아이고~ 어떡하지~!! 실수다, 실수!!!] "하하하~ 그러니까, 저, 저기..! 드랫은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 그 사람은 그러니까, 은혜의 법이.. 그러니까,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 냐 하면..." 그러자 레이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것 같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 곳의 힐러하고는 삼촌, 조카 관계이고.. 다 같은 친척이라니... 그럼, 그 남 자분과는 어떤 관계시죠?" "네? 과, 관계요?" 으윽.. 과, 관계는 왜 물어본담? 으윽!!! 시나는 이제 어떻게 할지 몰라, 완 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세 분'이라고 이미 말하고 말았으니, 이젠 어떻게 든 한 사람을 더 만들어 내어 그럴 듯한 관계를 끼워 맞출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애초에, 자기가 드랫과 '은혜의 법' 관계라고 했으면... 드랫 이 라단의 친척이라고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아니, 잠 깐.. 그것도 안되겠군. 어제 그 동네 아저씨가 '청년들도 서로 종속주가 되 겠다고 난리' 어쩌고 한 것을 봐서, 오히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여러모로 의심받았을 수도 있다. 새삼, 드랫이 자기의 종속주였다고 말한다면 말이 다. 그렇게 조금씩 한마디 두 마디 어긋나가다가 마노테온이라는 정체를 들키게 되면... 시나는 머리가 아찔했다. 이 남자의 얼굴은 단박 혐오증으 로 일그러질 테고... 그럼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오.. 엘이시여.. 시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마침내 결심했다. 그, 그래.. 어차피, 오늘만 볼 남자니까.. 어차피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이건 그냥 이야기가 꼬인 것일 뿐이다. 이 레겜이라는 사람이 '부드러운 표정' 어쩌고만 안 했어도 '아내' 이야길 했을 때 자기 이야길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밀고 나가는 수밖 에..! "하하하.. 과, 관계요.. 관계라면.. 네, 저는 드랫의 여동생이에요. 드랫이 저의 오빠죠.. 하하하하~~" 맙소사.. 레이서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거짓말하고 있는 것 을 보고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 일부러 꼬치꼬치 물었는데 생각보다 더욱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변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그만 미안한 생 각까지 들었다. "..그렇습니까?" "네! 그럼요! 여동생이에요. 드랫이 저의 오빠죠. 맞아요!!" 레이서스는 손잡이에 기대어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잠시 웃었다. 하긴.. 이 소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힐라토에서 클로니아의 친척집에 잠시 축제 구경을 하러 왔다가, 이 거짓말에 동참을 강요당한 것이겠지... 본인도 무 척 당황해 하는 모습이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런 난처해 하는 모습이라니.. ..레이서스는 그런 그녀를 잠시 재미있다는 눈으로 보았 다. 하지만... 이런 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곧이어 씁쓸하 고도 차가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 원래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그러면, 당신 오빠의 처되는 분은 당신처럼 관광 같은 것은 안 합니까? 오빠 분이 여기서 사고를 당하셨다니.. 유감이군요. 하지만 그분의 아내도 집안에만 있으려면 갑갑할 테니, 당신이랑 같이 나왔다면 좋았을 걸 그랬 습니다." 그렇지.. 만약 그랬다면, 일이 매우 손쉽게 되었을 텐데..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그 계집을 집 바깥으로 끌어내어 처치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런 데 시나는 역시나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예에.. 우리 언니요? 그, 글세 말이에요... 하지만, 오빠가 다쳐서요.. 네 에.. 그러니까 다쳐서 간호를 해야겠다고... 오빠 옆에서 떨어지기 싫대요. 하하하..." "...." 간호라.. 레이서스는 비웃음을 띄었다. 마노테온이어서 함부로 바깥에 나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로서는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 든 그는 그 더러운 계집을 바깥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까는 너무나 분노해서, 목소리에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말할 자신이 없어 직접, 루온 루드랫에게 아내를 관광시키도록 권할 수 없었지만... 이 소녀를 통 한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왜 그렇게 자신이, 루온 루드랫의 아내를 애써서 '바깥 으로' 끌어내고 싶어하는 지..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무의식 적으로라도 피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에서 내려 또 다시 힐러의 집으로 가, 그 마노테와 루온 루드랫을 끌어내고, 사람들의 혐오감 어린 눈동자를 그 둘에게 쏟아지게 하고, 그 마노테 계집이 죽는 모습을 루온 루드랫에게 직접 보게 해서, 그와 그의 누이가 겪었던 심정을 약간 이라도 그에게 겪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 내 모든 잘못된 기억을 끊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지금 이 길로 유리궁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결혼식이 끝나면 아피네스를 데리고 힐라토로 돌아가 그녀에게 좀 더 그럴 듯한 신 랑감을 찾아주고... 그러면 되겠지...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 아갈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갖고 죽을 때까지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면, 그런 비열하고도 악랄한 쾌감이 있다면, 무언가를 견딘 다는 것은 이제, 과거에 비해 천국과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필연코, 레이서스 자신이 지금까지 느꼈던 느낌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일 종의, 꼭 이행될 서약이었고, 당연히 일어날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소녀를 흘끗 보았다. ..지금 당장 마차에서 내려, 힐 러의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러면 그가 행하는 모든 광경을 이 소녀와 소 녀의 삼촌도 보게되겠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그 상상을 하자, 레이서스 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자신이 누군가를 살해하는 모습, 피 에 절은 그 깊숙한 추한 모습을 이 소녀에게 보이는 순간이 온다면... 그 는 갑자기 불쾌해져서 얼굴을 굳혔다. ...마음에 안 든다. 어쨌든 파이오니온이란 자기가 다스리는 세계의 사람을 생각해 주어야 한 다. 자이온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다른 세계도 아니고, 그의 세계 소녀니 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 그것도 꽤 친절한 심성을 갖고 있는 사람까 지 자신의 일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별로 안 좋은 일이니까. 약간만 신경 을 쓰면 이들에게 피해를 안 줄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편함만 포기하면 된다. 더구나 이 방법이 좋은 것은, 그에게 '굳은 믿음'을 줄 수 있다는 사 실이다. 그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가 할 일도 완벽해 진다. 그러니, 뭔가.. 그 마노테 계집과 루온 루드랫을 따로 끌어낼 방법이 있을 것이다. 힐러 라단의 집.. 이 소녀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아무래도 오 늘 안으로 해치워야겠지... 꼭 바깥으로 끌어내서 처치하는 것이 아니더라 도, 하여튼 이 소녀와 그들 부부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한다면... 그때 시나가 그의 얼굴을 살피려는 듯, 눈을 들었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치니, 화들짝 놀라며 은근히 눈을 피했다. 거짓말을 한바탕 하고 나니 양심에 찔리는 것 같았다. 그 모양을 보니, 더없이 우울했던 마음인 데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도서관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고 있던 시나는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억지로 웃었다. "하하하.. 그, 그러네요.. 진짜 머네요. 하하.." 시나는 진땀이 나와서 한숨을 푸욱 쉬었다. 괜찮을 거야... 이 사람은 그냥 단순한 여행자인걸. 공짜 포션을 얻고 싶어서 자기를 도서관에 데려다 주 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 그냥 있기도 민망하니까, 지나가는 말로 묻는 것일 텐데,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고 스므스하게 넘기자는 결심이었 다. 한편 레이서스는, 그런 시나의 모습에 또 한 번 더 미소지었고, 그 후 로는 굳이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저 그는 아까 창을 통해 보았던 풍 경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축제로 밝았고, 아이들은 해맑은 웃음, 처녀들의 상기된 표정. 그런 것을 떠올리자 문득 무언가를 향한 견딜 수 없는 상실 감이 밀려왔다. 아무런 책임도, 아무런 후회되는 과거도 없는 사람들처 럼... 그가 언제나 부러워 해왔던 그 사람들처럼... 하지만 그도 그랬었던 때가 있다. 레이서스는 시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 드롭스, 아주 효과가 좋군요. 목 부근이 아직도 시원한데요." 그러자 소녀는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는 게 기쁜 듯 방긋 웃었다. "그, 그렇죠? 헤헤.." 레이서스는 그 미소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아니면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좋겠 지.. 레이서스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굳이 심각하게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것 말고도 골치 아픈 문제는 많으니까. 지금은 어떻게 이 분노와 배신 감을 다스릴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그의 뇌리에 맴도는 단 한가 지 생각. '살아있는 느낌'을 갖고 싶다. ...너무나도 지루했으니까. 그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계속)================================================== 헷헷헷...^^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28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18 23:58 읽음:237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1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4)> "에엑!!! 정기휴일이요?!!!" 차를 마시고 있던 문지기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정기휴일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축제에 따른 휴일이지만... 축제 기간 중에 대학은 쉬거든. 도서관도 더불어서 한 두 달 정도 흙의 날엔 쉬게 됐지. 나도 오전 중에만 있다가 갈 거야. 하지만 그냥 건물 구경이라 면 괜찮으니, 천천히 구경하게나." "하, 하지만, 저는 건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닌데요? 책을 읽으러 왔다고 요.." 이 말을 하면서 시나는 옆에 서 있는 레겜이 자신을 놀란 눈으로 보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보아, 레겜이라는 사람은 시나가 관광 삼아 도서관 건물 구경하러 온 줄 알았던 것 같다. 시나는 한숨을 쉬고 문지기에게 더 욱 강력하게 애원해 보았다. "네? 문지기 님.. 모처럼 온 것이거든요? 그러니 들여 보내주시면 그냥 조 용히 읽기만 할게요... 정말이요." 하지만 문지기는 시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세 안됐지만, 소년.. 달의 날 오라고. 높은 분들이 그렇게 시키신 걸 나 라고 어쩌겠나? 책 같은 건 나중에 읽어도 어디 안 도망가고 그 자리에 있을 테니, 자네도 지금은 축제나 즐기게." "하지만..." 그때 레겜이 나섰다. "...시나? 오늘은 일단 가는 것이 좋겠군요. 여기서 말해봤자 도서관에 들 어갈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 그냥, 이 근처나 둘러보고 가는 것이 좋겠어 요." "네? 네에.." 책 읽으러 와서 건물 관광이라니... 기대에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나는 시무룩해져서 레겜을 뒤를 쫓아 그곳을 걸어나오기 시작했 다. 이곳은 무척 넓은 곳이라 도서관 현관에서 중간 정문까지의 길이만 해도 꽤 됐다. 끝도 없이 넓은 이곳이 아마도 '제일로트 대학'이라고 불리 는 곳 같았다. 그 가운데 방금 본 '제일로트 도서관'이라는 것은 제일로트 대학에 부속된 건물로... 다른 건물들도 다 컸지만, 방금 본 도서관 건물은 더욱 거대하고(서울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보다 더 큰 듯 했다.) 고색 창 연하게 깎은 대리석 건물이었다. 수도의 도서관이라고 하지만, 마우르코트 에서도 웬 잡화점 같은 데서 책을 파는 것을 보아, 책에 대한 푸대접이 상당한 듯 하니, 여기도 그냥 책이나 잔뜩 있는 칙칙한 중간 정도의 건물 이겠거니... 생각했더니 오산이었다. 저런 건물이라면 왕궁이라도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건물이 아무리 멋지면 뭘 하는가? 기껏 여기까지 와서, 책의 'ㅊ'자도 못보고 돌아가게 생겼는데.. 덕분에 불만스러운 기분이었고, 주변을 구경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다른 때였다면 주위 풍경을 좀 더 즐겼을 것이다. 제일로트 대학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원이라도 되는 듯, 길 양쪽에 잘 다듬은 상록수들이 우거져 있 고, 그 사이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고 희한하게 생긴 작은 동물들이 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여기저기를 거닐며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대리석 건물들을 감탄한 표정으로 구경하 고 있었다. 동참하고 싶도록 평화로운 광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저들 처럼 건물이나 구경하다가 돌아갈 수도 없고... 답답해진 시나는 자기 옆 에서 걷고 있는 레겜에게 말했다. "저어, 레겜? 이 제일로트에는 다른 도서관은 없나요? 이왕 나왔으니까, 꼭 한 번보고 싶은데.." 천천히 걷던 레겜은 시나의 그 말에 마침내 발을 멈추고 시나 쪽을 돌아 보았다. 그의 뒤로는 상록수의 검푸른 입과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정말로 책을 보고 싶다는 말입니까? 여기 제 일로트 도서관까지 와서요? 건물 관광이 아닙니까?" 상당히 의혹이 실린 목소리였다. "네? 하하... 그렇죠... 도서관에 간다고 할 때는 보통 책을 보러 가는 거 지, 건물 구경하러 간다는 뜻으로 말하진 않잖아요?" 글세. 레이서스는 그 말에는 별로 동의 할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상 식으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이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몇몇 특별 한 경우 빼고는 대부분 거대한 건물이나 오래된 책들을 구경하러 가는 거 다. 하물며 이런 일루티온 소녀야... 엘야시온 가디엘님의 의무 교육정책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이 소녀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루이티온 계급 이 책을 읽는다는 것만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읽으러' 왔다는 말입니까?" 그의 너무나 이상한 표정과 말투에 시나는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네. 절대, '읽으러'왔어요. '구경'하러 오진 않았다고요. 하하하.. 응?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 그렇군요... 여기는 여자가 글을 읽는 것이 희한한 세계죠... 하하..." 레이서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기'요? 아니, 클로니아뿐만 아니라, 힐라토도 여자가 글을 읽는다면 이상한 경우입니다. 아.. 혹시 당신, 무슨 아티스트 수업이나 성직자 수업 이라도 받고 있습니까?" 응? 클로니아? 힐라토? 아하하.. 아아.. 그, 그랬지. 으윽.. 또 실수했다. 시 나는 이 사람 앞에서 자신은 '힐라토인'이라는 것을 이젠 잊지 않기로 결 심했다.(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의 사람인 척 해야한다니, 괴롭기 짝이 없었지만.) 자꾸 까먹는 바람에 이렇게 변명을 해야하다니... "에에.. 그러니까, 아티스트나 성직자... 는 아니에요. 제가 그러니까, 집안 에만 있다보니까, 할 일이 없어서요- 하하하.. 얼마나 심심했던지, 그만 책을 읽고 말았지 뭐예요? 책 읽는 것이 조금 희한한 취미라는 것은 알지 만, 어쨌든 유일한 취미가 됐어요. 하하하---" 레이서스는 감탄했다. 책 읽는 것이 취미라... 전혀 뜻밖의 사람에게서 이 런 말이 나오는 무척 놀라웠다. 설사 책을 읽을 줄 알더라도, 보통 여자라 면, 자기 취미를 '자수'나 '길쌈, 노래, 댄스'라고 하는데. "...희한하군요." '희한하다'는 느낌이 절절이 배긴 목소리다. 의심 당하면 안 되는 시나는 그래서 당황했다. "하하... 희, 희한이요? 하, 하긴.. 글세, 저도 제가 많이 희한한 사람 같다 고 생각해요... 거, 거의 몬스터 급 아닐까요? 하하하--" 그러다가 시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으윽..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 고 있는 거냐. 몬스터 급이라니.. 그건 희한하다 못해 '괴상한' 거잖아... 너 무 지나쳤어. 윤시나.. 당황하면 이상한 소리하는 이 버릇 좀 고쳐야지.. 헌데, 남자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모, 몬스터 급이요? 하하하... 당신, 자신이 몬스터라고 생각합니까? 하하 하하..." 물론 절대 아니지. 이 사람아. 그렇게 웃을 것 까진 없잖아... 자기는 말실 수 안 하나... 하지만 남자는 아직도 몸을 구부린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시나는 그것을 눈을 찌푸리고 내려다보았다. ...고만 좀 웃어요. 레겜.... 이 사람... 맨 처음엔 거의 드래마 정도로 무뚝뚝하더니만... 이렇게 웃다니 너 무 하잖아. 쳇.. 시나는 입술을 내밀고 있다가,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그를 무시하고 걸었다. "..건물들이 예쁘긴 하지만, 별로 구경하고 싶지도 않고.. 집에나 가야지.. 아아..." 시나는 너무 민망한 나머지 이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렇 게 걷다보면 그만 웃고 자기도 따라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걷고 있는데 그가 곁에 와서 섰다. "..으음, 몬스터, 좋아합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웃음이 잔뜩 어린 목소리였다. 시나는 태연 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무서운 걸요. 일전에도 놀이라는 몬스터를 봤 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말을 하는 데다, 글세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잖아 요? 하 참.. 기가 막혀서. 하여튼 난 이런 세계를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그러다가 시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색이 느껴져서 자기 옆을 보았다. 하지 만 자기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뒤쪽 을 보니, 그는 옆에 있는 나무를 한 손으로 짚고 숨이 막힐 듯, 웃고 있었 다. ..소리를 내지 않고 웃으려니 더 힘든 것 같았다. 시나의 얼굴이 빨개 졌다.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웃긴가... 맨 처음 한 말이야 실수라고 했다고 해도, 정말 너무 하는데. 그때 레이서스가 시나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하하하.. 아..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웃은 건 당신을 비웃은 것은 아 니에요. 그저, 너무 웃겨서.." 하지만, 레이서스는 기본적으로 예의가 몸에 배인 사람이다. 그는 시나에 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이제는 웃지 않으리라 진심으로 다짐하며 말했다. "흠흠.. 정말 미안합니다. 에... 그리고요? 이야기해 보세요. 그리고 또 어 떤 몬스터를 만났습니까?" ...몬스터 매니아일까? 몬스터를 이야기하는 그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친절하긴 했지만 어떤 무미건조함이 감돌던 눈동자가 몬스터에 대한 이야 기로 생기를 찾자 시나는 내심 놀랐다. 흐응, 뭐.. 좋겠지. 그의 표정에 생 긴 긍정적인 변화가 어쩐지 흐뭇해서 시나도 방긋 웃었다. "음.. 다른 몬스터라면, 오크라고 하는 몬스터를 만났는데.. 하하.. 그것이 꼭 돼지같이 생겼어요. 오크라고 아세요?" "오크..! 흔하지만 재미있는 몬스터죠.. 아까도 어떤 소년이 들고 가던 가 면을 오크라고 알아보던데.. 본 적이 있었군요. 혹시, 이야기도 해봤습니 까?" "네. 하지만, 이야기라.. 으흠..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웃었다. "왜요?" "보통, 그런 것은 이야기라고 안 할걸요. 하하.. 그 때도 상당히 위험한 상 황이어서, 제가 허풍을 떨었거든요. '야이, 오크들아- 더 이상 가까이 오 면, 남자면서도 여자인 나, 시나가 한칼로 너희를 쓸어버리겠다!!' ...하하 하.. 그러자, 그 말이 정말인 줄 알더라고요... '남자인데다 여자래', '조심할 까?'..라고 말하면서.. 하하.. 그때는 정말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겼어요." "...뭐라고요?" "네? 아.. 웃겼다고요." "아니.. 그 전에.." 시나는 레겜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굳어있나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 또한 목소리 못지 않게 딱딱해져 있었던 것 이다. 하도 갑작스런 변화라 무언가, 또 실수한 것일까 어리둥절해 하는데 그가 말했다. "..위험한... 상황이라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이 몬스터 공원.. 그 런 곳에서 본 몬스터 이야기들이 아니라, 실제로 만난 몬스터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까?" 시나는 당황했다. "아, 아니오. 몬스터 공원... 그런 것도 있어요? 신기하네요. 하지만 저는 그런 곳이 아니라, 정말로 숲을 지나갈 때 몬스터들을 봤어요..." 레이서스의 얼굴이 더더욱 딱딱해 졌다. "...어디서 말입니까? 힐라토에서 말입니까? 왜 그곳의 지주들은 그런 몬 스터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점령하기까지 놔둔 것이지요? 이상하군요. 요즘엔 몬스터 토벌이 상당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아 무리 시골이라도 그렇게 지시를...." "지시..요?" 무슨 지시? 시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서스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시나의 눈을 피해 말 했다. "아니, 잠깐 말을 실수했습니다. 지시가 아니라, 그냥 관찰 같은 것으로.. 어쨌든... ...저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힐라토에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되도록 철저히 지키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요. 헌데 당신 같은 소녀가 몬스터를 만났다니..." 그의 눈이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당신 혹시, 혼자서 멋대로 몬스터들이 있는 숲에 놀러갔습니까?" "엣? 혼자서 숲엘요? 절대 아니에요! 저도 숲이 무서운 곳이란 건.. 드랫.. 네.. 그러니까 제 오빠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걸요!! 제, 제가 놀이랑 오크 를 만났을 때는.. 그러니까, 힐라토가 아니라 여기 클로니아였는데..." "클로니아..?" "네에.. 그러니까, 저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설명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하지만 결국 일부분의 사실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 전 그때, 제 오빠와 같이 있었어요. 우, 우리 오빠는 검 술 같은 것을 잘해서요. 그 놀이나 오크도 해치워 줬죠. 조금 무섭긴 했지 만.. 괜찮았어요. 그리고 그 몬스터들이 나타난 것은, 드랫과.. 그러니까 우 리 오빠와 일반 숲을 지나갈 때였으니까요. 오빠도 매우 놀라더라고요. 근 처에 오크 농장이라도 생겼는지 이상해 하면서..." 그가 심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랫..이 당신을 구해줬다고요?" 왜 저렇게 놀란 표정일까, 생각하면서 시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아.. 물론 두 번 겪기 는 싫지만.. 하하하.." 하지만 레이서스는 시나의 말에 기가 막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 를 젓고 말했다. "..당신.. 아직 종속주가 없지요?" 종속주? 종속주라면 드래마지만... 시나는 또다시 화제가 껄끄러운 곳으로 돌아가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대로라면... 시나는 눈을 내리깔고 우물쭈물 말했다. "...네. 아직 없어요." 레이서스는 화난 빛을 띄웠다. 무슨 생각이지? 예전에는 여자만 보면 질 색을 했던 주제에, 아직 종속주도 없는 소녀를 구할 생각을 하다니. 이번 에 자기 아내도 은혜의 법이라고 하더니... 한 번 벽을 무너뜨리니, 아예 재미가 들린 것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무 조건 그렇게 몰아붙이기 어려운 면도 있다. 따진다면, 루온 루드랫을 '자 신의 오빠'라고 말하고 있는 이 소녀의 말 자체가 거짓말이니까. 그러므로 방금 한 말도 어디까지 진실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루온 루드랫답지 않 게, 더구나 이제는 다른 여자까지 있는 그가... 친하지도 않은 소녀를 몬스 터가 나올지 모르는 숲에 데리고 갔다는 것도 까닭이 없어 이상하고... 한 마디로 말도 안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삼촌에게 부탁 받은 것치 고는 얼굴까지 붉혀가며 너무나 열심히 거짓말을 해 주는 모습이다. 왜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며, 시나를 내려다보던 레이서스는 그 순간 무언 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까지 붉히며, 상대를 변호해주는 것 은.. ...아주, 흔한 이유... 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가는 것이 좋겠군요.." 그는 몸을 휙 돌렸다. 약간 빠른 걸음이라 찬 공기 속에서 희게 입김이 나왔는데, 이렇게 굳은 표정이 되는 것은 기운이 너무 찬 때문이라 생각 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착잡한 것도 공기가 얼음 같아 성대가 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찬 공기 속에서 비웃는 웃음을 띄웠다. ...루온 루드랫은, 예전의 경우를 보더라도 인기가 많았다. 그는 남자인 자 기가 보기에도 잘 생긴 편이니까.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직후에 쏟아진 귀 족 여인들의 꽃다발과 편지더미를 처리하는 데만도 상당히 고난을 겪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당시 거기에 파묻혀 즐거워하며 놀았던 기억도 있 으니까. 온갖 꽃다발은 종류별로 골라 그 가운데서 헤엄도 칠 수 있을 정 도였고, 그 많은 편지들은 읽자면 양이 많아 암담해지기까지 한 것들이었 다. 그러니 이 소녀가 자기 삼촌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면, 그럴 수도 있 다. 더욱이 그는, 세월이 지나 추하게 변했나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 려 아까 확인했던 대로 이제는 세월 가운데서만 익힐 수 있는 어떤 성숙 한 모습, 그러니까 당당하고 여유 있는 모습마저 지니게 되어 그것이 레 이서스의 분노를 일으키는 한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하물며 시골에서 막 올라온 이런 소녀의 눈에야, 어떻게 비치겠는가... 하지만... 레이서스는 떫 은 감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상처받겠지..." "네??" 빠른 걸음의 레이서스를 부지런히 쫓던 시나가 귀를 세우며 말했다. 그때 그가 우뚝 섰다. 그리고 시나를 돌아보았다. "?" 시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의 레겜은 굉장히 이상한 표정이었다. 왜 그럴까..? 열심히 걸은 탓에 상기된 표정으로 시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생각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였다. "...힐라토로 돌아갔을 때, 친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고 했습 니까?" "예? 힐라토로 돌아갔을 때요?" 어리둥절하던 시나는 좀 뒤늦게 마차 안에서의 이야길 떠올렸다. 분명 그 런 이야기를 했다. '일이 잘 돼서 돌아가게 된다면..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 주기 위해선 잘 기억해 놔야 하잖아요..'라고. '친구'... 내심 찔린 시나는 지레 변명하기 시작했다. "하하.. 네에.. 지, 집안에만 있었는데.. 에.. 그 친구라는 것은, 가끔 편지도 보내주고... 그냥 저를 돌봐주는.. 조금 시끄러운 친구들이죠. 네.. 하하하.." 편지? 친구들이 모두다 성직자나, 아티스트라도 되나? 아니면 굳이 대서 소를 이용해야 할만큼 멀리 사는 친구들인가? 하지만 시골이라고 하면 띄 엄띄엄 떨어져 사는 경우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 소녀가 글을 읽을 수 있 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이니까... 그것에 대해선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루온 루드랫에 생각을 하니, 자기가 왜 이 소녀를 왜 데리고 나왔는 지 새삼 인식이 된 것이다. 그는 시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쨌든, 좋은 추억거리가 필요하겠군요. 그렇다면, 오늘의 계획은 어차 피 틀렸고... 모처럼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기도 아까우니까. 시내라도 잠 깐 둘러보면 어떻겠습니까? ..아.. 저는 공짜로 받은 포션에 대한 답례를 꼭 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이 시나의 눈은 벌써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시, 시내요?" "네. 볼 것이 아주 많을 거예요. ..도서관은 이곳 외엔 없지만, 책을 원한 다면 서점에 가 볼 수도 있고.. 그 외에 서커스단과..." "갈게요!!!" 시나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시나의 모습에 더욱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자기 제안을 받아들였는데도 아까보다 더욱 찌푸린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럼, 결정 됐으니, 갑시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몸을 돌려 걸었다. 그래서 시나는 무척 불안해 지고 말았다. 혹시나, 그는 '공짜 포션' 때문에 예의로 이런 말을 한 것인데 자 기가 너무 눈치 없이 그 제의를 덜컥 받아들여, 화가 난 것인가 생각한 것이다. 시나는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어.. 저어, 레겜. 그러고 보니, 바쁘지 않으세요? 바쁘다면, 굳이 그렇게까 지 안 해주셔도 되요. 으음.. 나중에, 드랫.. 아니, 오빠가 몸이 나으면 도 서관에 데려다 준다고 했고... 그리고 지금 제가 서커스단 구경할 처지도 아니고.. 물론 본다면 재미있긴 하겠지만.. 아니, 이것이 아니라.. 하여튼!!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하면 나중에 저 혼자 도서관에 올 수도 있을 테니까... 하하.." 그 말에 레이서스는 차츰 천천히 걷다가, 딱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왜 하필이면.." "네?" 레이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더니 그는 어설픈 미소를 짓고 시나를 돌아보았다. "별로 바쁘지 않아요. 여행자에게 바쁜 것이라면 구경뿐이겠죠. 그리고 거 기에 누군가 동반자가 생긴다면 오히려 반길 일입니다. ...어디, 특별히 가 고 싶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시나는 안심한 얼굴을 지었다. "정말이요?" 잠시 따뜻한 공기가 주위를 맴돌았다. "..네. 정말입니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나는 어디라도 좋습니다." "그, 그럼.. 서점엘 갈 수 있을까요?" 왜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맘에 드는 책을 뽑아들고 맘껏, 한가롭게 서재에서 뒹굴던 기억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거기엘 가죠. 클로니아는 이성과 학문을 수호하는 세계이고, 서점길드가 가장 발달한 곳이니까, 서점 순례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서점 순례'는 아니지만.. 이 사람은 자꾸 관광 쪽으로 연관지으려 하네.. 여행자라 그러나... 하지만, 뭐.. '서점 길드'가 가장 발달해 있다니, 어떤 희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시나는 밝은 얼굴을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와요. 레겜." "으흠.. 이 책은 뭘까.." 그렇게 말하며 시나가 맨 처음 펴든 것은 '다년호(大年號), 위테리드 엘야 시온 이래로 제일로트 통계연감 모음'이라고 쓰여진 책이었다. 엘야시온도 있는 데다 제일로트에 관한 책이니, 이 세계에 대해 뭔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집어든 것이다. 대충 처음을 펼치니,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2년. 말케스완월 1일. 제일로트에 거주하는 일루 티온 인구의 대략적인 직업 분포도. - 상업(운송업)에 관련함. : 43%, 임 업과 수렵, 농업, 공업에 관련함. : 22%, 왕실 친위대와, 수도 수비대, 각 파(派)에 관련한 상비군. : 20% 성직자와 아티스트, 서기관. : 4% 빈민 : 9% 기타(각종 예능직 외) : 2%...> ...복잡하군. 시나는 이런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놓고 다 른 책을 찾아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혹시 좀 더 쓸만한 정 보가 있을지도 몰라, 한 번 더 뒤쪽으로 휘리릭 넘겨보았다. 하지만 뒤쪽 도 역시 수치 타령이었다. 심지어는 맨 뒷장까지도 똑같았다.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100년. 말케스완월 1일. 제일로트에 거주하는 일 루티온 인구의 대략적인 직업 분포도. - 상업(운송업)에 관련함. : 38%, 임업과 수렵, 농업, 공업에 관련함. : 16.2%, 왕실 친위대와, 수도 수비대, 각 파(派)에 관련한 상비군. : 30% 성직자와 아티스트, 서기관. : 3% 빈민 : 12% 기타(각종 예능직 외) : 0.8%...> ...이 책은 절대 아니다. 시나는 과감하게 책을 놓고 거기 놓인 수많은 책 중 다른 것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서점 길드. 길드라기에 어떤 형식인가 했더니, 이것은 마치 헌 책방이 도 시의 한 구역을 온통 차지하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형상이었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꼬여있는 좁다란 길목에는 미처 가게 안에 들여놓지 못한 책들 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머리 위,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하늘에서 나 리는 것들을 막기 위한 누렇게 빛 바랜 천막 같은 것이 걸쳐 있었다. 자 세히 보면 줄무늬 같은 것이 보일 법도 했지만, 그런 무늬들은 그 밑에 정신없이 늘어져 있는 책들처럼 이미 몹시 낡아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수 십 채의 통나무로 만든 가게들은 검게 때가 낀 통나무 문 위에 똑같이 낡은 간판을 매달고 책들 사이에 묵직하게 서 있었다. 간판에 쓰 인, '아트 서점'이라든지, '신학 서점', '법전 서점'같은 글을 보고 통나문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권태로운 듯,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고 귀여운 방울소리라든지, 탁한 방울소리, 오래된 방울소리, 우는 방울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바깥에 비해 서너 배는 많을 듯한 책을 멋대로 쌓아놓은 실내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나와 레겜이 들어와 있는 곳은 '문화 서점'이었다. 상당히 큰 규모 의 서점이라 들어온 것인데... 오히려 너무 큰 규모라 원하는 것을 찾기 힘든 것 같았다. 한참을 뒤적여도, 아까 통계연감 같은 책이라 시나는 암 담했다. 그런 꿈에서 봐도 졸릴 것 같은 책보다는, 이 세계의 구조라든지,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 같은 것을 써놓은 책이 있을 법도 한데... 역시 아 까 '문명 서점'으로 가자고 할 걸 그랬나 후회가 됐다. 하지만 벌써 이 서 점만도 두 번째고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면, 굉장히 멋대로 라고 생 각할지도... 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레겜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 나 슬쩍 훔쳐보았다. 레겜은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창가에 서서 어떤 책을 들고 흥미 있게 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을까? 시나는 그에게 다가 갔다. "레겜, 뭘 보세요?" "...." 그는 '몬스터 도감'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읽던 것을 들키자, 자기 도 모르게 죄책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곧, 지금 자신은 '힐라토 파 이오니온 레이서스'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서 재에서 가져온 몬스터 도감을 읽을 때 주위 사람들이 보이곤 했던 눈초리 는 안 받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그가 이런 책을 읽는 것을 비난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그의 책을 들여다보았다. "와~ 이런 책도 있네요? 이거 몬스터지요? 굉장하다, 이 이빨.. 이 몬스터 는 이름이 뭐예요?"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29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18 23:59 읽음:247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2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5)> 그는 그런 시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이것은.. 트롤(Troll)이라고 합니다. 산의 동굴에 살거나, 숲 속에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몬스터죠. 적응력이 무척 강해서,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지 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라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면 굉장한 애착을 갖고 사 랑하는 특성을 갖고 있죠.." 트롤에 대해 설명하는 레이서스의 음성엔 차츰 즐거움이 서리기 시작했 다. "..그러니까, 만약 그들을 만난다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나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 음료에 대한 비난을 하면 안 돼요.. 무척 화를 내고, 눈을 뽑아 버리려고 하니까." 시나는 웃었다. "하하.. 그게 적응력이 강한 거예요? 독단적인 것이 아니고요? 하하하.. 재 밌네요.. 그런데, 히야.. 정말 이 그림대로 생겼어요? 옆에 서 있는 게 사 람이면.. 오.. 굉장히 크네요? 2미터는 되겠다." "음.. 옆에 기준으로 서 있는 사람은 루이티온 계급이니까, 정확히 한다면 2.5미터정도 되는 거인이죠." "헤에.. 숲이나 산에서 만나면 무섭겠네요..." 그는 빙긋 웃었다. "..비위만 잘 맞춰주면 되요." "어떻게요?" "그들은 시험하거든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료라든지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불어 자기들까지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권해 주는 음료를 한번에 끝까지 마시고 '하라쇼!'라고 해주면 됩니다." "'하라쇼'요?" "훌륭하다. 좋다..는 칭찬입니다." "흐음.. 그거라면, '하라쇼'라는 말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겠군요. 생긴 거에 비해 온순한가 봐요? 음료만 마시면 된다니..." "하하.. 글쎄요..." 시나는 그가 피식거리며 웃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글세.. 그 음료라는 것이, 굉장하거든요. 굉장히 커다란 통각(洞角)잔에 다가.. 가득 따라줘요. 진흙과, 칡뿌리, 색깔 좋은 독버섯, 시냇물에서 잡을 수 있는 가재간 것, 높은 나무에 달려있는 호두, 땅에 떨어진 분홍색 낙 엽, 자기 집구석에 자라는 이끼.. 그걸, 한 일주일 썩히면 그들이 좋아하는 음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뭐, 솔직히, 들어가는 재료는 별 상관없는 듯.. 그냥 '썩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하여튼, '하라쇼'라고 하기엔 너무 굉장한 취향이죠.. 그 냄새를 한 번이라도 맡은 사람은, 그걸 먹고 아부를 할 바엔, 차라리 트롤에게 맞아죽는 것이 낫다고... 과거에 그 문제 로 많은 신학적인 논쟁이 붙긴 했지만, 요즘엔 성직자들도 그럴 경우엔 심각하게 인정해 줍니다." "뭘요?" "..트롤에게 음료를 받아 마시지 않고 죽음을 택한 사람은, 결코 자살 한 것이 아니라고..." 시나는 눈물을 빼며 웃었다. "하하하- 자살이 아니라고요? 그 음료, 그럴 정도로 지독해요?" 그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롤들만 빼고 타 몬스터까지도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죠. 종종, 오크 중 에, '꽥꽥! 이 트롤이 만든 주스 같은 놈아!'라고 욕하는 오크도 있으니 까.." "하하하하--" 시나의 웃음소리에 저쪽 구석에서 벽난로 불을 쬐던 노인이 그들을 힐끗 보았다. 자기가 지키고 있는 책처럼 늙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 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다시 꾸벅꾸벅 졸 기 시작했다. 시나는 그 노인에게 방해가 안되게 이번에는 소리를 낮추어 킥킥 웃었다. "그런 말이 그 책에 써있어요? 직접 만난다면, 이렇게 웃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재미있네요. 하하하.. 아, 그렇지!! 그 책에 '고양이 몬스터'라는 것 도 있어요?" 그가 놀란 눈을 했다. "고양이 몬스터? 그것을 압니까?" "네..! 일전에 봤어요!! 말도 하고.. 아! 그리고 노래도 하는데.. 하하하- 그 노랫소리라니~! 한 순례자가 데리고 다니는 것을 봤어요. 이름이 '르핀'이 라고 했는데, 사탕을 굉장히 좋아하는 몬스터였죠. 하하.." 레이서스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나도 그것을 몬스터 공원에서 보긴 했는데... 하지만 순례자가 데리고 다 니는 몬스터라니.. 이젠 거의 없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그 순례자의 능력 이 아주 뛰어났나 보군요. 게다가, 이름까지 있었다면 인간과 상당히 친화 되어 있는 상태였겠군요." "네! 굉장히 귀여웠어요!! 물론 맨 처음엔 날 잡아먹니, 어쩌니 했지만... 사탕에 맛 들려서 이젠 사람은 못 먹는다고 드랫이 그랬어요. 하하.. 재미 있죠?" 드랫...?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레이서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 는 아무런 내색도 안하고, 들고 있는 책을 책꽂이에 꽂았다. 그리고 고양 이 몬스터가 실려 있는 몬스터 도감을 빼냈을 때는 억지로나마 웃음을 지 었다. "..고양이 몬스터.. 여기 있군요." "에, 어디요?" 시나는 즐거운 눈으로 레겜이 펼쳐든 페이지를 보았다. 하지만 시나는, 다 음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시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레이서스 를 보았다. "..이게.. 고양이 몬스터라고요?" 레이서스는 믿을 수 없어하는 시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지었다. "..순례자가 데리고 있는 몬스터였다면, 여기 삽화와는 많이 틀린 모습이 었겠군요." 틀린 모습? 시나는 다시 삽화를 보았다. 이건 틀린 모습정도가 아니다. 완 전히 다르다. 똑같은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책장 위에는 커다 랗게 분명 '고양이 몬스터'라고 쓰여있었다. 맙소사... 시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자세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그것은 지금까지 시나가 보았던 놀이나 오크와 비교해서 조금도 뒤 질 것 없는 흉악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르핀'보다 두 배는 큰 몸집.. 붉고 큰 눈엔 세로로 검게 갈라진 홍채가 있고, 무서운 이빨이 촘촘히 난 입은 커다랗고 뾰족한 귀까지 찢어져 있어, 얼굴의 반이 입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거기다가 저 발톱이라니... 시나는 그렇게 뾰족하고 둥글게 굽은 발톱 은 처음 보았다. 등에 나 있는 날개 또한 르핀이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치 악마의 날개 같이 힘줄이 울툭불툭 솟은 벌거벗은 날개... 길고 긴 꼬리는 믿을 수 없게도 끝에 눈동자를 달고 정면을 쳐다보고 있 었다. 시나는 어이가 없어서 레이서스를 쳐다보았다. "이게 정말 고양이 몬스터예요? 저, 전혀 다른데요? 제가 본 것은..." 레이서스는 미소를 짓고, 페이지를 뒤로 넘겨 시나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것이었나요?" 시나는 책을 받아들고 그것을 보았다. "아.. 네..! 그래도 조금 틀리긴 하지만.. 부드러운 검은 털과 흰털이 나고, 귀여운 노란 눈... 맞아요! 이런 것이었어요! 하지만, 날개는.. 르핀은 하얀 천사 같은 날개였는데..." 책에 있는 삽화의 고양이 몬스터는 잠자리의 날개 같은 투명한 날개를 열 개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본 고양이 몬스터와는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물론 꼬리에 사악해 보이는 눈동자 같은 것도 없었다. 시나는 어리둥절해서 레이서스를 보았다. "도대체 왜 이런..? 맨 처음 것이 고양이 몬스터가 아닌가요?" 레이서스는 시나의 손에서 책을 받아들었다. "아니오. 둘 다 고양이 몬스터입니다. 단지.. 하나는 게엔나에 물든 모습이 고, 다른 하나는 방금 당신이 말했던 대로 성직자에 의해 키워진 몬스터 지요. ...몬스터들은 환경에 너무나 적응을 잘한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 습니까?"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시아가 그런 이야길 했던 것 같다. "네. 자기 자신이 없어서, 환경을 아무 기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자연히 적응도 놀랄 만큼 잘한다고..." "그래요..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적응이라는 것은, 어떤 이질적인 대상을 만 났을 때... 내가 상대처럼 변하던지, 아니면 상대를 나처럼 변하게 만들어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조화란, 자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는 이룰 수 없 으니까요."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그런 적응.. 인간이 상대를 나처럼 변하게 하고, 나를 통해서 남에게 적 응하려고 하는 존재라면, 몬스터들은 자기를 남처럼 변화시켜 적응을 합 니다. 게다가, 인간들이라면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몬스터들은 너무나 순수해서... 부단히 변화하고 적응하지 못한다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 재.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무섭고도 아름다운 존재들이죠." 레이서스는 시나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몬스터가 아름답다고 하면, 레이서스를 무척이나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시나는 그의 말을 열심 히 들을 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시나를 보며, 레이서스 는 말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자기자신'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게엔나'에 물들게 되면 그대로 '게엔나' 자체가 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키 워진다면, 그들은 그대로 '사랑' 그 자체가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게 엔나의 세력이 없는 곳이란 없으니까..." 그는 첫 번째 페이지에 있는 흉악한 모습의 '고양이 몬스터'를 보았다. "...성직자들은 말하죠. 엘이 몬스터를 창조한 이유는, 세상 도처에 널린 게엔나의 찌꺼기들을 흡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요. 집안의 더러움을 훔 칠 때 '걸레'를 쓰듯 말입니다. 많이 쓰여 더러워진 걸레는, 소각장에 버려 져 불태워지듯.. 그래서, 게엔나에 물들은 몬스터들은 소탕의 대상이 됩니 다." "걸레라니.. 너무해요." 그녀는 르핀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주변의 환경에 따라 적응할 뿐인데... 누가 키우는가에 따라 그렇게 변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건 키우는 사람 잘못이잖아요?"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키운다고요?" 그는 고양이 몬스터가 그려진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 몬스터는 비교적 사람이 길들이기 쉬운 몬스터지요. 게엔나보다 선한 마음에 잘 반응을 한다고 할까. 그래서, 이렇게 또 한 장의 삽화로 고양이 몬스터의 다른 모습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그 렇지 않지요. 대부분이 흉악한 모습뿐이에요. 그래서 아무도 몬스터를 키 우는 사람은 없어요." 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잘 키우면, 되잖아요.. 계속 사랑해주면서.. 사랑만 해주면 이렇게 예쁘게 변한다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 카할에서도 몬스터를 없애자고만 하고..." 계속 사랑해주면서 키운다....라. 레이서스는 그것이 비록 불가능한 일일지 라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책을 덮고 조용히 말했다. "...몬스터는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한순간의 악의에도 흉악하게 변하죠. 그리고.." 그는 시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사랑만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그걸 일깨워 주는 존재인 몬스터를 미워합니다. 갑자기 책방 안에 있는 오래된 먼지들의 냄새가 한층 더 짙게 느껴졌다. 그 가운데 덧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살들이 먼지들을 금빛으로 춤추 게 하며 레이서스의 얼굴을 비추었다. 시나의 눈이 커졌다. 굉장히 까만 눈이었다. 처음 봤을 때, 그대로 아직도 그의 눈에 신비로운 어둠 같은 것 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마로 흘러 내려와 있는 머리칼은 옅은 초록색... 그 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시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건 오래된 기 억이었다. 빛 바랜 풍경화같이 바스락거리는 기억. 시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 지었다. 그렇군... "불쌍한.." 아주 희미한 말소리였다. 그래서 하마터면 못들을 뻔했지만, 레이서스는 그것을 분명히 들었다. "뭐라고요?" 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잠시.. 어지러워서..."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힘이 쑥 바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뒤에 잔뜩 쌓인 책에 등을 기댔다. 레이서스는 그녀가 먼지가 가 득한 바닥에 그냥 앉아 눈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에 같이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역시 찬 공기가 안 좋았나 보군요? 지금, 집으로 돌아가서.."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그냥 잠깐 이렇게 앉아 있을 게요.." 그리고 시나는 머리가 아픈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는데, 레이 서스가 그런 그녀를 보다가 마침내 페이스 힐러에게라도 가자고 말할 무 렵... 갑자기 그녀가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빛 속에서 하늘거리는 황금 빛 먼지들처럼 가볍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 리였다. "...몬스터라... 몬스터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그 많은 말들 중, 결론은 결국 이거군요. 걸레라니- 하하.. 말도 안돼요. ..정말, 이 세계는 이상한 곳이군요. 그리고, 생각보다... 슬픈 곳이에요.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르겠지만." "네?" 그녀는 웃었다. 뭔가 낯선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빙그레 웃는 웃음이었다. "...몬스터는 자아가 없으니까, 그대로 바깥 세상에 물든다. 키워지는 자에 따라 그대로 물든다.. 그럼 결국 이런 거잖아요? 몬스터들은 이 세계에서 '거울' 같은 것... 그렇죠?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 이곳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환경은 인간의 것뿐이니까...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에게 적응 하고, 인간을 닮아 가는... 하지만 그 모습이 아무리 추악하다고 해도, 그 건 바로 '인간에게 적응한', '인간을 닮은' 모습일텐데. ..레겜, 당신 말이 맞아요. 사랑만 가진 인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몬스터를 키울 수 없어요. ...인간이야말로, 자아를 가진 채 두 가지 마음 가운데 방황하는 존재들이니까... 몬스터들은 그 가운데, 길을 잃을 거예요." 레이서스는 검은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무 릎에 턱을 괴고 잔잔한 얼굴이었다. 미약한 햇살에 비친 눈빛이 너무 투 명해서 꼭 은빛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가 웃었다. 약간, 입술 이 떨렸다. "..불쌍한... 이곳의 인간들은 불쌍하군요. 이렇게 뚜렷하게 자기를 비추는 거울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녀는 은빛의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봐야하는 것만큼, 지독한 일이 또 있을까.. 걸레라니.. 그 걸레에 묻은 것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데... 내 세계에서는 완전히 멸종된 것들이 왜, 아직도 이 세계엔 이렇게 남아 있을까.. ...사람 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토록 그들을 증오했는데.. 그들은 왜 그런 증오를 먹고도 아직 살아 있을까... 차라리, 영원히 멸종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레이서스는 어떤 고백과 같이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 한 부분이 저리는 감정을 느끼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멍하니 그녀의 얼굴 을 보았다. ..오랫동안의 육체적인 약함... 그것 때문에 집안에만 있었기 때 문에, 이 소녀는 다른 또래보다 깊은 슬픔과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일까?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거울'.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또 있다니.. 그건 그가 아주 어릴 적, 힐라토의 궁전 깊숙한 방에서 찾아낸 책에 있던 내용이었다. 낡은 책표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썼기 때문에 헐어버린 글씨들... 그 책에 있는 것들이, 어찌나 그의 마음을 떨리게 했는지, 그는 놀랐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리 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가지고 갔는데, 어머니 헤르가스는 그의 기대와 정 반대로 그를 징계했으며 그 책을 불태웠다. 그건 아주 슬픈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전혀 상관이 없는 시간, 전혀 상관이 없는 장소,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에게서 이런 말을 듣 고... 놀라움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던 레이서스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서 춤추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모를 먼지들 은, 그에게 예전의 그 방에서 바라보았던 먼지와 그 냄새를 기억하게 만 들었다. 그리고 오래 계속되는 침묵. 그래서 그는 마침내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의 일이었죠..." 시나는 조용히 한숨 쉬었다. 그는 미소지었다. 장작이 일으키는 타닥거리 는 소리, 노인의 낮은 코골음 소리는 그와 어울려 옛날부터 계속 되풀이 해온 낡은 리듬을 만들었다.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낮고도 높게 부 유하는, 마치 생명을 가진 정령들 같은 황금의 먼지들. 이것은 어쩌면 옛 날, 잊혀진 임금들의 황금 홀에 얹혀져 있던 것인지도, 혹은 먼 곳으로 떠 나는 연인을 위한 한 소녀의 눈물 가운데 섞여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수천 년의 세월동안, 아무도 셀 수 없는 그 세월 동안, 한 남자가 한 소녀에게 말을 하는 광경은 계속 되풀이해 되어 왔다. 하지만, 아무리 되풀이 될 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었고, 언제나 가슴이 떨리는 것이었고, 그 자체로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들 이었다. 먼지들은 그렇게, 기억들을 가지고 방랑하며 축복처럼 내려앉아, 또다시 떠오르며 새로운 기억을 맞는다... 레이서스는 황금빛들이 떠돌다 가 소녀의 창백한 볼에 조용히 내려앉은 것을 보았다. 먼지들은 그녀의 반쯤 감긴 속눈썹 사이에 매달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던 레이서스는, 프리 엘야시온의 때에, 맨 처음 남자가 최초로 눈을 뜨 고, 그 눈에 경이로운 세상을 가득 담아 다시 눈을 감아 떴던 그것처럼, 그 검은 눈에 조용한 웃음을 담아, 미소지었다. 그것은 프리 엘야시온의 때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시나처럼 책들에 등을 기대었다. "...아주 오래 전에, 프리 엘야시온의 때에... 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했 을 때, 그 인간은 엘이 창조한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였 다고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영광과 거룩함과 넘치는 위엄은 그 존재를 드러내며, 벌거벗은 인간의 온 몸을 붉은 광채로서 휘감았고, 인간은 원래부터 가장 아름다운 빛을 자신의 의복으로 삼는 존재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경배하며 그를 사랑하며 그를 섬겼지요. ...심지어는, 저 드래곤.. 어 떤 존재보다 아름다워 엘의 산을 왕래하며 천상의 노래를 부르던 그것. 모든 자에게 '나의 사랑하는 친구'라고 불렸던 그 짐승들의 수장조차도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은 인간을 그들의 주로서.. 그들의 왕으로서 창조했으니까요. 그것이 중요했습니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에 얼마나 슬퍼했던가..? 하지만 얼마 후, 잊어버려 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다시, 이 이야기들은 살아나고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초대의 엘야시온... 몸의 빛으로 인해, '붉음'이라 불렸던 그 거룩한 왕은, 비록 미약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강했고, 누구보다 자유로웠습니 다. 그는 방금 전보다 지금이 더욱 아름다운 존재였죠. 그와 동시에, 프리 엘야시온 안의 모든 사물들 또한 그 아름다움을 반사하여 그의 선함과 영 광을 닮아갔습니다. 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듯이... 프리 엘야 시온은 그들의 왕을 닮아 창조되었으니까요. 그러므로 프리 엘야시온 또 한, 방금보다 지금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프리 엘야시 온.. 잊혀진 낙원. 생명나무 야포스 딜리야가, 언제나 나뭇잎을 펼쳐 그리 워하는 고향. ...그 태초의 프리 엘야시온을 가장 많이 닮아 남아 있는 잔 재가, 바로 몬스터입니다.." 시나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왜인지 그녀의 눈은 몹시 혼란하고, 물 기가 어려 은빛으로 창백하게 보였다. 그리고 레이서스는 이상하게도 그 런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은의 엘야시온 타미스엘.. 아니, 타미엘이 그렇게 말했죠. '애초에 보지 않았다면 망각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보고 난 후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할 것이다. 피해 다닐 수 있다면 평생을 피해 다녀야 할 근원적인 존재. 저 낙원에서부터 깨어져 버린 아픔의 조각들. 나의 루 아흐(Ruach)... 나의 페르소나(persona)... 그것이 바로, 인간의 추악한 이 름, 몬스터(Monster)이다.'" 그는 미소지었다. "...나는, 몬스터가 그런 존재라고 믿습니다. 인간들의 잃어버린 영혼의 파 편... 비록, 추악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울지라도... 그들은 거기에 그렇게 서서, 그냥, 반사하고 있을 뿐. 거기 맺힌 모습은 결국 인간이죠..." 황금의 먼지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시나는 그를 따라 미소지었다. '몬스터'. ...이곳의 인간들은 슬프다. 적나라한 거울, 슬픔. 내일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차라리 부수는 게 낫겠지. 나의 몬스터, 혹은 '나 자신인 몬 스터'를. 그리고 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낫다... 빛이 바뀌었다. 태양이 옮겨간 듯, 방금까지 비추던 빛은 조금 더 높은 곳 으로 옮겼다. 동시에 시나와 레이서스가 앉아 있는 곳도 어둠에 잠겼다. 그래서일까? 시나의 눈은 다시 불에 타고남은 재 같은 고운 회색 빛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애'는 이 사람에게는 적의 를 갖고 있지 않다. 상냥한 마음. 관대한 마음... 시나는 방긋 웃었다. 그가 너무 부러워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레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래요." 레이서스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녀를 보았다. 그의 의문 어린 얼굴에 시나 는 또 한 번 더 웃었다. 조금은 슬펐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걸레'라고 하는 것보다는, 몬스터들에게 더 욱 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당신이 몬스터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지도 알았고요. 헌데, ...그저.. 그 이야길 할 때, 당신의 얼굴이 슬퍼 보여서.. 당신은 정말 친절하니까, 행복하길 바래요." 이것은 '그 애'의 전언이죠.. 레이서스가 빙긋 웃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니, 기쁘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 는 얼굴이죠? 아직도 어지러운가요?" 시나는 웃었다. "하하.. 제가 힘이 없어 보이는가요? 뭐, 이젠 어지러운 것은 가셨지만... 영차..!" 시나는 앞의 책 더미를 의지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는 어떤 먼지들도 춤추지 않는다. 프리 엘야시온의 때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시나는 다시금 쾌활하게 반짝이는 회색 눈으로 레이서스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사실 내가, 어지럽고, 힘이 없을 때는 딱 두 가지이죠. 피곤할 때! 아니면, 배가 고플 때! 하하..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배가 고프네요. 벌써 점심때인 것 같아요.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은 그만두고, 이제 식 사하러 가지 않으실래요?" 그리고 시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서스는 시나가 내미는 손을 잡 고 일어났다. 행복이라... 그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좋죠." (계속)================================================== 질문에 대한 답이나, 메일의 답을 이곳에다 쓰면 너무 길어지더군요...^^;;; 게다가 소설 외의 글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어서.. 특별히 알려드릴 일이 없는 이상은 이제부터 여기다가 잡담을 안 쓸 예정입니다.^^; 대신, 이제부터는 '성역 근처의 숲에서'에서라고 쓰고 거기다가 모아서 답 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원하시는 분만 읽을 수 있죠....^^ 음.. 그것은, 글 올리는 곳에 같이 올릴까 하다가... 소설도 아닌 것을 자꾸 올리면 다른 분들에게 폐가 되기도 하고, 보기가 안 좋으니까.(실제로 나 우누리에서도 그랬고.^^;) 그냥, 작가와의 대화란에 올리겠습니다.(하이텔 은 23번란, 나우누리는 8번란, 유니텔은 'sffan'에서 엘야시온을 클릭 하면 나오는 두 개의 방 중, 역시, 작가와의 대화방.. 하하..^^) 질문을 하셨던 분이나, 메일을 보내셨던 분들은 그것을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헷헷...^^ (좋은 해결방안이라고 스스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잡담에 심혈을 기울여, 이젠 연재까지 하는 엔... 푸핫핫... ^_^> ps...정말로, 제게 멜 보내신 분과 간혹 나올 수도 있는 엘야시온의 설정이 궁금하신 분만 읽으세요..!! 썰렁하니까...!!! ^^;; (그것의 정체는 여기 쓰던 '잡담'!!!^^) - 내일 정도 올리지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36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22 14:41 읽음:241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3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6)> "으흠... 그럼, 읽어볼까요?" 후식을 먹던 시나는 그의 권유대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열 두 세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책으로, 서점이 늘어선 골목을 나오기 전에, 레겜이 사도록 권해준 책이었다. 시나가 원하는 책의 설명을 듣더니 그렇다면 이 책이 좋을 것이라고 책을 집어준 것이다. 책값이 무지막지하 게 비싸다는 것을 아는 시나는 그가 대신 책값을 치르려 하자, 됐다고 말 렸는데, 그는 '공짜 포션'의 답례라고 했다. 도대체 포션이 얼마나 비싼 것 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것 아닌가, 시나 쪽 이 걱정될 정도였다. 어쨌든 굳이 자기가 사겠다는 것을 말릴 수 없어서, 그렇다면 점심이라도 시나가 그에게 사주겠다고 했는데(드래마나, 라단, 카탈리가 돌아가면서 용돈을 주어서 돈이 꽤 됐다.) 그가 역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아무래도 이 세계의 '남 녀 불평등'에 관련한 남자다운(?) 자존심에 관련한 말이었는데... 과연.. 이 런 세계라면 남자들도 꽤 힘이 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책까지 사줬는데, 그 답례로 식사도 못 얻어먹을 사회 분위기라니...) 어쨌든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나는 레겜이 좋다는 음식점엘 갔는데, 그곳 은 마우르코트의 여관에서 봤던 일반적인 식당같이 여러 사람이 탁자에 앉아 식사하는 곳이 아니라, 각각 하나씩 따로 객실을 차지하고 앉아 식 사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굉장히 조용하고 깨끗한 것이 분위기도 좋아, 비 싼 곳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의 태연한 표정을 보아 그렇게 비쌀 것 같 지는 않다고 결론 내렸다.(공짜 포션에 그렇게 고마워하며 책까지 사주고 식사도 자기가 산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 비싼 식당이라면, 이 사람은 애초부터 공짜 포션 같은 것은 탐도 안낼 굉장한 부자일 것이기 때문이 다.) 그래서 시나는 남녀불평등에 희생되고 있는 이 불쌍한 남자를 위하 여 아주 싼 음식을 시키고 싶었건만... 무엇이 싼 지를 몰라서, 그의 자존 심을 위하여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음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무엇이든지 잘 먹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 다. 이 정도면 안심하고 제일 싼 것을 시키리라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온 음식들은... 뭐, 제일 싼 것인지 어쩐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 튼 굉장히 맛이 좋았다. 그것도 지금까지 먹었던 대로 숟갈로 그냥 푹푹 퍼먹는 음식이 아니라, 손을 씻고 무언가 다양한 야채와 고기를 섞어서 맨 손으로 집어 빵에 담아먹는 것, 달콤한 과일 시럽 같은 것에 졸인 이 상한 열매 같은 것이 줄줄이 나와, 싼값에도 이 정도라니 이 식당 장사 정말 잘 되겠다고 시나는 감탄했다. 몇몇 음식은 먹는 방법을 몰라 그가 가르쳐 주었는데, 그는 굉장히 즐거운 표정이었고 시나도 즐거웠다. 맛있 는 음식이 있다면 모든 근심은 반으로 줄어든다고 하는 말이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나... 다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맛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 모든 것이 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더 아름답 게 보였던 것이다. ..과연... 관광은 배를 채우고 해야한다. 이 말을 레겜에 게 했더니, 그는 또 한차례 즐겁게 웃었는데 배부른 것에 그렇게 솔직하 게 의의를 두는 힐라토인 여자는 처음 봤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시나는 자기가 또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고, 자책하며 '힐라토인 여자는 배부른 것 에 의의를 두지 않는다'라고 외워두었다. 그렇게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며 그럭저럭 식사가 끝나고, 그후 나온 후 식은 감격스럽게도 아이스크림 비슷한 것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본지 몇 주나 된 시나는 행복해 하며 먹었다. 천국에 온 것 같이 행복했지만, 그런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관두었다. 힐라토인 여자는 후식 먹는 것으로 천국에 간 것 같이 느껴서는 안 되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헌데 레겜은 잘 떠들던 시나가 후식을 먹으면서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더 니, 책을 읽어보도록 권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나로서도 반가운 권유였 다. 저 책에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니 읽어보고 싶어 아까부터 굉장히 좀이 쑤셨던 것이다. 시나는 자기 엄 지손가락 길이만큼 되는 두꺼운 책을 들어 조심스럽게 넘겼다. '결계'라고 쓰여있는 부분에서 멈출 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눈을 반짝 빛냈다. 그녀는 레겜을 보고 웃었다. "헤헤.. 읽어볼게요." 그러자 그는, 아이스크림이 별로 입맛에 안 맞는 듯 그 그릇을 밀어놓고 시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흥미로운 눈초리였다. 시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에... '..그리고 이렇게 수도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차원이전자들의 안 내로 다른 세계에서 실어온 물자들을 차원이전자들의 지휘로 자기 세계의 방방곡곡으로 실어 나른다. 물자의 이동과, 일반인들의 세계간의 교류. 이 것은 오직 차원이전자들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차원이전자들의 결계를 걷 는 능력이 없다면, 열 두 세계는 각각 고립되어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흐응... 시나는 여기서 생각에 잠겨 인상을 찌푸렸다. 레겜이 경탄어린 눈 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눈치 못 챌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침 내 레겜을 보고 물었다. "저기, 레겜 뭣 좀 물어도 되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그가 말했다. "무엇이 궁금합니까?" "으흠.. 여기, '차원이전자'라는 거요. 이것이 누굴 말하는 것이죠? ..아! 저 는 시골에만 있어서.. 이런 문제는 어리둥절하죠.. 하하..." 그러자, 미리 변명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는 웃기만 하고 별다른 말없이 답을 말해주었다. "차원이전자는...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로... 당신의 계 급... 아니 우리 계급 위의 사람들... 그러니까 일루티온 계급 위의 사람들 을 말하는 거죠. 하바티온과 루이티온들. 스아디온과 스웰디온의 왕족들까 지. 그리고 파이오니온들과 엘야시온님까지." "아아, 그렇군요!' '사랑 받는 종속자.. '어쩌고 에서 계급의 이름을 새롭게 정리하여 외워놓 았기 때문에 시나는 '차원이전자'란 결국 '귀족들'을 말한다는 것으로 이해 했다. 하지만 계급에 대한 개념은 아직도 확실히 정리가 되지 않는 부분 이었다. 엘야시온님 같은 경우는 단 한 명이 하나의 계급을 차지하고 있 는데, '스웰디온'과 '스아디온'은 두 개가 하나로 합쳐져 '왕족'을 형성하고 있고... 그 나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상당히 헷갈렸다. 하지만 아까 언뜻 본 바로는 이 책엔 계급에 대한 말도 써 있는 것 같으니, 나중에 찾아보 기로 했다. 그보다 지금은 '결계'에 대해 묻고 싶었다. "흐음... 그럼, 레겜은 힐라토 인이라고 했으니까... 저기, 결계를 통과해 봤 겠네요?" "네." "호오.. 그럼 그, '차원이전자'에게 부탁하셨나요?" "..네." 그에게도 차원이전자의 능력은 있지만, 길을 연 것은 그의 길을 닦는 프 리커서(precursor;선구자;先驅者)들이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말했 다. "당신도 한 번은 봤을 것입니다. 결계를 통과할 때, 길을 안내해 주던 사 람들... 그들이 차원이전자입니다. 그들의 명칭을 몰랐나요?" "네?" 시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이해하고 식은땀을 흘 렸다. 그렇다.. 시나, 자신이 힐라토 인이라면 당연히 '결계를 통과해' 이쪽 으로 왔을 것이다. 그런데 '차원이전자'가 누구냐고 묻다니.. 얼마나 어리 석은 질문이란 말인가..!!! 그래서 차원이전자들한테는 비용을 얼마나 줘야 하느냐 느니, 어디로 가면 부탁할 수 있냐 느니, 하는 질문은 그냥 가슴속 으로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드래마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결계를 통과 하는 일'에 대해 아는 척 하느라 진땀을 뺐다. "하하.. 네.. 토, 통과하는데, 아무 것도 안 보여서 혼났어요.. 안내해 주던 분들은 무슨 길이 보인다고 하던데... 하하.. 네에. 그렇군요. 그들을 차원 이전자라고 부르는 것이군요." "후후.. 네. 그들이 차원이전자입니다." 이로써 시나는, '차원이전자'에 대한 정보는 더 이상 얻게 되지 못하고 말 았다. 에휴.. 이 책에 자세히 나오겠지... 요금 같은 것도 나오면 좋을 텐 데. 시나는 한숨을 푸욱 쉬고, 실망하지 않은 척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 리고 말했다. "하하.. 책을 계속 읽어볼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나는 책을 뒤적였다. 그리고 흥미로운 구절을 발 견하자 읽기 시작했다. "...'결계'... 엘야시온의 형제 세계를 나누는 결계에 대해선 많은 학설과 논 란이 있어왔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그것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학설이다. 이것은 자이온의 이드렘나에서뿐만 아니라 약간의 가감이 있을지언정, 역대 엘야시온들에게도 대대로 지지를 받아온 학설이 다. 과거, 동(銅)의 엘야시온 블로스엘의 말씀이 결계에 대한 묘사로 가장 널 리 퍼져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싣자면 바로 이러하다. '그것은 바로 곁에 있지만, 열흘 밤과 낮을 걸려 말을 타고 달려가도 닿지 못하는 곳에 있으며 땅 속에도 하늘 위에도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엘야 시온의 모든 세계들은 바로 곁에 같이 존재하며, 아주 먼 곳에 있기도 한 채로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보라. 어느 세계이든 그 중심은 언제나 엘 의 성지이며, 엘야시온의 유일한 성전인 대성전이 존재하는 '자이온'을 향 하여 있으니, 이것이 엘의 진리이다. 저 궁창에 떠 있는 태양과 달과 별들 도 자이온 산의 황금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니, 모든 중심이 거기에 있다.'..." 여기까지 읽은 시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와아, 이거 굉장한 세계인걸...!] 이 얼마나 놀라운가? 자이온 산이 어디에 있고, 그 성전은 어디쯤 있는 지 모르겠지만... 태양과 달과 별들이 하나의 건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니? 사는 것도 그렇고.. 시나가 살았던 세계에 비해 과학이라고는 별로 발 달하지 않은 상당히 원시 사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세계가 포개 져서, 그리고 분산되어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시나 세계와는 무척 틀리 다. 그러므로, 바로 이 자리에서 책을 덮고...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사실 을 전달하는 역할로서는 무척 불충분한 것 같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라는, '지동설'을 설파해서 제 2의 코페르니쿠스 가 되는 것은 관두었다. 그러나 지구인으로서, 그 오랜 세월동안 눈물로서 받아야 했던 교육에 대한 신념과 자존심이란 쉽게 죽는 것이 아니므로... 시나는, '그래도 우리 세계에선 지구가 돌아간다..'라고 속으로라도 중얼거 려, 제 2의 코페르니쿠스까지는 안 되더라도 제 2의 갈릴레이는 될 수 있 는 의지를 보여주던 것이다.. ...어쨌든 코페르니쿠스고 갈릴레이고, 그 사람들 자체가 여기 사람이 아니 니, 시나는 의지를 표명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그냥 열심히 책을 읽었다. 레겜은 아주 흥미 있는 표정이었고, 시나도 이 새로운 사실들이 흥미 있 었다. "...이러한 연유로 결계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지만 뚜렷이 느낄 수는 없 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엘이 존재하는 곳인 성역을 보호하고 있는 지형... 대표적으로 성역 근처의 숲 같은 곳만은 결계가, 성역에서 나오는 신비롭 고도 무서운 힘 때문에 '물질화'를 이루어 조각들로 흩어져 있다. 그렇게 '물질화'가 된 결계의 조각들은 나뭇가지 위나, 작은 돌 뿌리, 여우 굴 근 처의 버섯날개 밑 같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떨어져 있고, 심지어 공기 중에도 솔방울 씨앗과 같이 떠 있다가 사람들이 숨을 들이쉬는 순간 가슴 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힐러들은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성역에 들어가면 필히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걸리는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 각한다. (물론,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걸리는 까닭에 대해선 현재까지도 무 수한 추측한 남발할 뿐, 그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숲 안에 있는 결계의 조각들은 마치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땅 위를 흘 러 다니고, 안개처럼 편만 하여 뿌옇게 펼쳐져 있기도 하며, 생고무로 만 든 공처럼 튀어 다니기도 하며, 날쌘 토끼처럼 쏜살같이 달리기도 한다. 성역에 가까운 숲은 이처럼 결계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그 결계 조각들이 담고 있는 각각 세계의 잊혀진 과거와, 사람들의 꿈과, 환상과, 사건과, 환경의 편린들은 생각할 수도 없이 무한하다. (이것들 중엔 물론 저 저주받은 게엔나의 조각들도 있다.) 이런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어간 자들에게 변화는 너무나 즉시 일어난다. 결계 조각과 조각들 사이에 틈이 있을 수도 있건만, 결코 하나라도 예외 는 없다. 이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인가는 성역을 지키는 그 공간 자체가, 물질화 된 결계의 거대한 조각이 아닐까 말한다. 그 학설에 대하여는 과거 여러 학자들이 오류를 찾아내어 반박한 바 있으나, 성역에 대해 고찰해 볼 때 면 그 말 또한 틀린 것이 아닌 듯 느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실로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어간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변화(變化)를 겪으리라. 하지만 변화를 겪는 당사자들은 오히려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 은 자신들이 무수히 많다는 결계의 조각들 사이에, 엘의 보우하심을 받아 온전히 서 있다고 믿으나, 실상 그들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 과정 은 이러하다. 결계의 조각들의 다변성과 그 형질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결 계의 조각에 관련한 현상이 성역 안에서 일어날 때마다, 무슨 일인가 일 어난 것 같으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으며 변화한 것 같으면 서도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 어간 사람들은 누구나 과연 그것이 여기에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지조차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그는 결계의 조각을 삼킨 자 이며, 진실과 진리의 어긋남을 받아들인 자이다. 고로 성역에 가까운 숲에 서 나오는 자들은, 하나라도 남김없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과 보 는 것간의 이질, 그 슬픔과 그 격동(激動)을 맛보리라. 뿐만 아니라 결계의 조각은 때로 게이트(Gate)의 임무를 수행하여, 성역 에 들어선 자를 자기의 임의대로 타 세계로 전송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무수한 결계의 조각들 중, 벌레 구멍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즉, 결계가 가진 특질 중 하나,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그 막 (膜)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구멍의 부분'이 어느 순간 깨어져 결계의 조 각으로 화했을 경우, 그 조각은 깨어진 채로도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조각에 걸려 전송되는 자들은 엘야시온 열 두 세 계 전역에 걸쳐 심심지 않게 나오는데, 그들은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자 신들 부모의 부모가 살던 땅을 떠나 각각 다른 땅으로 이주하게 됨이니... 어찌 이것을 게엔나에 영향을 받은 불운의 소치로만 돌릴 것인가? 이것 또한 온전히 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에 게는 더욱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리라. 그들은 충분히 슬픔 가운데 있음으 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허상과 환상이 현실을 침범하고, 과거 가 현재를 잠식하며, 이루지 못한 꿈이 이루어 나갈 꿈을 침노하리니, 결 국 그렇게 하여 '성역'은 프리 엘야시온 이래로부터 진정으로 우리에게 닫 혀 있다..." 시나는 거기까지 읽고 머뭇거리며 레겜에게 물었다. "레겜? 여기서 말하는 성역 근처의 숲이라는 건... 그러니까, '얼음의 숲'같 은 걸 말하는 거겠죠?" 일루젼과 기억상실.. 꿈에도 잊지 못할 이름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긍정의 표시를 했다. "얼음의 숲이라.. 클로니아에선 그렇게 부른다고 삼촌이 그랬습니까?" "네? 네.. 저어, 힐라토에선 '암흑의 숲'..." "후후.. 맞습니다. 하지만, 뭐... 성역 근처의 숲을 가리키는 이름은 한 세 계에만도, 수도 없이 많으니까, 지방에 따라 각자 나름대로 지어서 부르거 든요. 그러니 이름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숲에 대해서 기억해 둘 것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혼자든, 누군 가와 같이 있든.. 알겠습니까?" "네? 네..." 벌써 들어갔다 나왔다는 말은 안 하기로 했다. 하지만 방금 읽은 책의 내 용 때문에 시나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어간 자 는 누구를 막론하고 변화(變化)를 겪으리라...', '변화를 겪는 당사자들은 오히려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시나는 기분이 다시금 시무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책을 탁 덮었다. 나중에 혼자서 더 중요한 부분을 찾 아 읽을지언정, 지금은 더 읽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헌데, 레겜은 그녀가 책을 덮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로 글을 잘 읽는군요. 그것도 꽤 유창하게 읽어서 놀랐습니다." "뭘요.." 시나가 어색하게 웃고 책을 밑으로 내려놓는데, 그가 물었다. "그런데 특별히 '성역 근처의 숲'에 대한 구절을 찾아 읽은 까닭은 뭐지 요? 거기에 관심이 있나요?" "네? 관심이요?" ...하긴, 책을 맨 처음부터 읽은 것도 아니고, 제목과 소제목을 주욱 훑다 가 골라서 읽을 것이니 저런 질문을 할만도 하다. 그래서 시나는 신중하 게 말했다. "예에.. 조금, 관심이 있어요. 사람들이 하도 자주 말하길래... 그런데, 레 겜... 이상한 것이 있는데요." "뭐지요?" "레겜은 여행자니까 잘 알겠지요? 이곳 엘야시온의 세계들은 각각 자연환 경이 다르다고 들었어요. 로트라인가.. 거기는 바다의 세계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거기에도 '성역 근처의 숲'같은 것이 있나요?" "하하.. 아니요. 그 명칭은 몇몇 세계에 대해선 예외죠. 글세.. 다 기억은 못하겠지만, 로트라 같은 경우는 그런 '성역 근처의 숲'이 깊은 바다 속에 존재합니다. 인상적인 이름 중에 하나가, '파도와 진심의 해역'이라든가... 그 밖에 칼리안 같은 경우도, 숲이 아니라 가장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있 는 '푸른 꿈의 공중정원'이고... 위테리드는 '일곱 무지개의 일곱 수정 호 수'같은 것이 그것이죠. 하지만..." 그는 난처한 듯했다. "당신 같은 일루티온 소녀는 거기에 관심 가져 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 습니다. 그 근처에는 절대 가면 안돼요. 왜냐면 결계 조각이 함유하고 있 는 환상과 기억 중에는 매우 아름답고 좋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게엔 나의 무서운 환상과 기억을 갖고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성역 근 처의 숲에는 그런 사악한 에너지로 가득한 결계 조각을 원하는 마물.. 그 러니까 몬스터들이 많이 모여들어 살고 있습니다. 또 게엔나 자체에서 전 송되어 오는 희한하게 생긴 상급 몬스터와 불을 뿜는 환수들도 가끔 출몰 하는 곳이 그곳이니까.. 정말로 위험합니다." "하하.. 네에." 위험하다는 것은 체험으로 알고 있지만... 시나가 지금 묻고 싶은 질문은, '그렇다면 차원이전자들은 그런 성역근처의 숲으로 가서 결계의 조각을 통하여 차원이동을 하는 것인가'..였는데.. 시나 같은 일루티온 소녀는 그 곳에 절대 가서는 안 된다니, 눈치로 보아 좀 이상했다. 마노테온이야 한 번 결계를 통과하면 두 번 다시 통과하지 못한다니까, 바리스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것도 이해하는데... 일루티온은 알다시피 왔다갔다하지 않는가? 그런데 절대 가면 안 된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서 차 원이동을 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시나는 너무 궁금해서, 아닌 척 말을 돌려 슬쩍 물어보았다. "저어.. 그러면요, 거기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에요? 성역 근처의 숲 말이에요.. 저어, 아까 말한 차원이전자들도 못 들어가는 곳인가 보 죠?" "...?" 시나가 '성역 근처의 숲'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레이서스 는 뭔가 이상한 걸.. 이라고 생각하고 약간 의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 다. 하지만,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나의 눈은 맑았다. ...정말 시골에만 있어서 이런 일반적인 사실도 잘 모르는 것인가.. "...성역 근처의 숲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즉, 거기에 들어갔다 무사히 나올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엘야시온님과 그 휘하의 왕족들, 그리고 그들 과 계약을 맺기 위한 루이티온들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라도 어떤 특별 한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어요. 성인식... 혹은, 탄생의 순간에.. 스피릿 (Spirit)과 계약을 맺을 때 들어가죠..." 그는 자신의 경우가 생각이 났다. 자신은 막 태어나자마자 성역에 들여보 내져서 힐라토 스피릿 펠리스엘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기억하는 한, 펠리스엘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들어 간 것은, 루온 루파르테와 계약을 맺을 때... 다음 세 번째로 들어가는 순 간은 아마... 칼리스와 함께 들어가는 순간이겠지. 성인식을 맞기 위해서...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성역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엘의 허락을 맡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흐응.. 신기한걸. 성역 근처가 그토록 위험하다면 차원이전자씩이나 하는 뭔가 능력 있는 귀족 계급의 힘이 그래서 그토록 필요한 것인가, 그 힘으 로 몬스터들을 제압하고(드래마가 그랬던 것처럼), 구멍 결계조각을 이용 하여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시나는 결국 그래서 성 역 근처의 숲은 타 세계로 가는 통로로는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 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통로로 쓰이는 것일까? 하지만 더 이상 묻는 것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 이니... 나머지는 이따가 드래마에게 물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는 시나 였다. (계속)================================================== * 레겜-'친구'라는 뜻의 이름. 레이서스의 가명. * 동(銅)의 엘야시온 블로스엘 - 처음 나옴. 역대 엘야시온 중 한 명.^^ * 펠리스엘-레이서스의 스피릿. 외전에도 한 번 출현.^^ * 칼리스나-레이서스의 약혼녀. 사막의 세계 칼리안의 왕녀. 율르스의 누 나.^^ * 루온 루파르테-레이서스의 개인 루이트.(고로,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 루온 루사트의 사촌이다. *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진정으로 모르시는 분은 제게 메일을...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36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22 14:42 읽음:259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4회, 제 38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Ⅱ (7)>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굉장히 빨리 흘러갔다. 그제와 어제의 지루한 시간 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제일 신기했던 것이 서커스단에 갔던 것이었는데, 현실세계에서 TV로 봤던 것만큼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외줄 타기라든지, 여러 가지 곡예를 해내는 솜씨는 매우 뛰어 났다. 거기다, 시나도 그런 것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라 무척 재미있게 봤 던 것이다. 긴 장대를 갖고 높은 줄을 왕복하는 모습은 예상외로 손에 땀 을 쥐게 하는 스릴이 있었고, 아티스트가 나와 손에서 불을 일으키고 그 것을 여러 개로 만들어 번갈아 돌리는 모습은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 정 도로 놀라웠다.(맨 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더욱 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극찬을 하며, 자기는 지금까지 속임수로만 된 마술을 봤다고 하니까, 레겜은 저것도 반쯤은 속임수이고 진짜 아티스트들은 이런 일루 티온을 대상으로 한 서커스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 저 들의 명칭은 '아티스트'라고 하기보다는 '마법사'나 '마술사'라고 한다는 것 이다. 어쨌거나, 시나로서는 어디가 속임수인지도 모르겠고 그저 굉장히 놀라운 장면이었을 뿐이다. 진짜 아티스트들은 어떻게 아트를 하는 지 모르겠지 만, 속임수가 전혀 안 섞인 채로 저런 짓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 할 일일 것이다. 시나는 진짜 아티스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궁금한 나머지 혹시 레겜은 정말 아티스트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 더니,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기만 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어땠냐 고 묻고 싶었는데, 다음으로 오크들의 댄스가 나와 그만 거기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하지만 오크들의 표정이 무척 이상했다. 숲을 지나왔을 때 봤던 오크들은 좀 더 생동감 있는(널 꼭 잡아먹고 말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치는...) 표정 이었는데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뒤뚱뒤뚱 춤을 추는 오크들은 관객들에 게 폭소를 불러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굉장히 멍한 표정들이었다. 어찌된 일일까? 외모는 그대로 흉악한데 저것도 '길들여 진 것'일까.. 레겜 에게 물었는데, 레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약 같은 것에 중독이 되 어 훈련받은 것으로 깨어나면 아마 더 난폭하게 변할 것이라 말했다. 그 런 설명에 놀라고 말았다. 더구나 아까 서점에서 레겜과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에 그 장면은 왠지 그대로 보고 있기가 민망했 다. 그래서 시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인상을 썼고, 레겜이 그녀의 그런 표정 을 보더니 이만 나가자고 권했다. 그리고 지금, 레겜이 시나를 라단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을 때에는 어둑해 진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내리고 있을 때였다. 레이서스는 손을 내 밀어 시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차에서 내려선 시나는 마차가 떠날 수 있도록 길에서 조금 물러난 뒤,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 "와아.. 눈이 내리네요. 여기는 정말 눈도 많이 내려요..." 레이서스는 그렇게 말하는 시나를 보며 고민했다. 지금이야말로, 시나에게 요구사항을 말해야 할 때이다. '손님 여자'를 잠깐만 불러내 달라고 부탁 하는 거다. 그것을 위해서 온 종일을 하류계급 소녀와 돌아다닌 것 아닌 가? 그 외의 이유라면, 도대체 이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돼는 일인가? 파 이오니온인 자신이 겨우 일루티온 계급과 온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녔다는 것이? 그것도 신분을 들킬세라 소녀에게 존칭까지 써가며 말이다.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스러운 것 같았다. 하카단이 봤더라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시간을 낭비한 주제에 웃음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놀라 웠지만) 지금쯤 수석 시종장인 하카단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하루종일 상대하느라 무척 난처해하고 있을 것이다. 적당히 둘러대라고 했지만... 만 하루동안이나 사라진 힐라토 파이오니온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변명은 이 젠 다 떨어졌을 것이다. 잿빛의 하늘에서 나리는 눈... 레이서스의 웃음이 점차 쓴웃음으로 변했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의 계획은 오전 무렵에 소녀를 도서관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도서관 문이 닫으면 다시 집에다 돌려 보내주고, 소녀에게 부탁해서 여자 를 불러낸다.. 였는데, 어쩌다보니 거의 어두워질 무렵까지 이 소녀와 있 게 된 것이다. ...서커스단만 안 갔어도 됐을 것이다. 일루티온을 상대로 한 서커스단은 시시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니까. 하지만 오늘 서커스는 의외로 재미있었으 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 후에 중앙 시장에 가서, 각 세계에서 온 상 인들이 파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품을 구경하러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클로니아의 명물이라고 하는 트러플 파 이와 스프를 먹기 위해 가게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이 소녀와 잡담이나 하며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벌써 훨씬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다른 집 현관에 걸린 등불을 보았다. 시간이 너무 늦 었다. 벌써 상당수의 집들이 현관에 등불을 밝힌 것이다. 덕분에 거리에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음식냄새와 장작냄새, 등불 의 싸구려 기름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눈은 점점 펑펑 내리기 시작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이서스는 말을 꺼내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뭐라 고 말하면 좋을지... 그때였다. 시나가 그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레겜. 오늘은 참 즐거웠어요." 시나는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그걸로 보아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즐거 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서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천만예요." 그러자 시나는 자기 옆구리에 있는 책을 들어 보였다. "이 책도, 선물로 주신 것 너무 감사했고요.. 그리고, 으흠..." 시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거기서 무언가를 꺼냈다. "에.. 이건 아까 길을 걷다가 산 거예요. 잔뜩 얻어먹고 선물까지 받았는 데, 저도 무언가 드리고 싶어서... 자요, 드릴게요." 그러면서 그녀가 내 놓은 것은, 귀엽게 생긴 고양이 몬스터가 새겨진 동 그란 목각 펜던트였다. "헤헤, 귀엽죠? 길가다 발견했는데, 너무 예뻐서 안 사고는 도저히 못 배 기겠더라고요. 그리고 레겜은 몬스터를 좋아하니까, 기념으로라도 사드리 고 싶었어요." 그녀의 손바닥에 놓인 펜던트는 진한 갈색의 것이었고 작은 것이었다. 거 기다 무척 조잡하고 서투르게 깎여진 것이었는데, 그래도 웃는 듯한 고양 이 몬스터의 모습이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지금은 그 위로 하얀 눈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불빛을 받아 녹아드는 눈은 그 녀의 손바닥 위에서 물방울이 되어 촉촉하게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레이 서스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시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별로 마음에 안 드는건가? 역시 물어보고 사던지, 아 니면 거기서 고르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또 싫다고 할까봐 그랬지.. 라고 생각할 무렵, 그가 시나를 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거기다, '이런 조잡한 것을 선물이라고 주다니, 한심하군'이라는 표정도 절대 아니었기에, 시나는 안심하고 웃었다. "헤헤, 좀 더 좋은 것을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이걸로 좋습니다." 그는 시나의 손에서 펜던트를 받아들어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주 맘에 들거든요." 그러더니 그는 손을 꽉 오므리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시나가 말했다. "후후... 맘에 든다니, 기뻐요. 으음, 그럼 들어오세요. 춥네요, 차라도 한잔 하세요." 들어간다...? 레이서스는 눈을 들어, 힐러 라단의 집 현관과 등불을 보았 다. 저 집으로 들어가면, 분명히 또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 시 격동하는 마음... 그의 손안에 있는 펜던트의 거친 나뭇결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망설임과 괴로움이 마음 가운데 몰아쳤다. 그때 시나가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헷헷.. 내일이 엘의 날이라, 오늘은 굉장히 바쁠 거라고 그랬는데, 손님들 은 다 돌아가셨는지 모르겠어요." "...!" '엘의 날'...! 레이서스는 눈이 커졌다. 그래.. 내일은 엘의 날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이 사실에 안도를 해야할지 분노를 느껴야 할지, 아니면 스 스로를 한심하게 여겨야 할지 결정도 못한 채, 문을 두드리려는 그녀를 불렀다. "시나!" "...?"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는 마차가 다니는 길에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 었다. 그는 맑고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달의 날에 다시 봅시다." "네에?" 그녀의 눈이 등불 아래서 휘둥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미소지었다. "공짜 포션의 대가로 당신을 도서관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요? 그 약속 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으니... 달의 날에 당신을 데려다 주고 싶어요. 나도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펜던트를 들어 보였다. "거기다 이런 선물까지 받았으니.. 어떻습니까?" 시나는 매우 놀랐다. 와아.. 저 사람은 공짜로 뭐 하나 받으면, 하여튼 몇 배로 갚으려고 하는구나. 굉장한걸? 저게 힐라토인의 관습인지.. 아니면, 이 세계의 엄청난 남녀 불평등 때문인지.. 그것이 분간이 안 갔지만, 사실 레겜의 그 제안은 시나에겐 너무나 좋은 제안이었다. 아무리 회복이 빠르 다지만 드래마는 적어도 달의 날 이상은 안정을 취해야 할 테고... 라단과 카탈리는 도서관보다는 페이스 힐러에게 시나를 먼저 끌고 가려고 할 것 이다. 하지만 저 사람이 다시 도서관에 데려다 준다면... 어쩌면 힐러에게 안가도 될 지 모르고... 얼마나 좋을 것인가? 시나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전 너무나 좋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달의 날에 오늘과 마찬가지 시간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앗..! 그런데, 들어오지 않고 그냥 가시려는 거예요?" 시나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뒷걸음질치자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 개를 저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달의 날에 보죠. 그러니 들어가세요." 그러더니 그는 후드를 깊숙이 쓰며 뒤돌아 섰다. 하는 수 없었다. 이렇게 눈도 오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마차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 고 생각했지만, 바쁜 일이 있다고 하니 손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시나는 이미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쳐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그도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좋은 밤 되길 빕니다, 시나." 그리고 시나의 노크소리를 듣고 카탈리가 나왔을 무렵에 그는 벌써 큰길 쪽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함박눈이 그의 어깨를 스쳐 밑으로 떨어져 갔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엘의 날이다. 지금 그의 분노를 발산한다면, 저들은 이 어둠과 이 눈 속에서 시체를 치워야 한다. 그러면 저들의 내일에 지장을 줄 것이다... 엘의 날엔 안식해야 하므 로, 시체를 치우는 일 또한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달의 날 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자신도 빨리 왕궁으로 돌아 가봐야 했고... 그 러니, 저 집안엔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화가 난 나머지,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완전한 복수를 위해 선 조금 더 인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파랗게 언 주먹을 입가로 가져갔다. 손에 쥐어진 목각 펜던트에서는 희미하게 톱밥 냄새가 났다. 그 신선한 냄새를 맡으니, 어차피 오랫동안 미적거렸던 일, 하루 이틀 기다리 는 정도야 정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이렇게, 매우 여러 가지 일들, 하루종일 있 었던 매우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원인이나, 그에 대한 결과들을 생각해 보는 것도 미룬 채, 이 모든 것은 그저, 달의 날에 조금 더 완벽한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들은 그렇게,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처럼 비꾸러지기만 했던 것이다.. 시나는 카탈리가 문을 열어주자 안으로 들어가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 다. "카탈리 아줌마! 방금 레겜이요..." "시나, 쉿..!!! 조용히 들어 와야해..!!" 시나가 하루종일 레겜과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 하자, 카탈리가 이렇게 말 하며 시나를 문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에 대는 품이 뭔가 굉장히 긴장되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 왜 그러세요? 카탈리 아줌마?" "이제부터 거실에 들어가면, 시나..." 여기서 카탈리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자기 가슴을 손으로 억눌렀다. "하아.. 하아.. 휴우.. 난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 아서.. 하아, 하아.. 휴우..." "카탈리 아줌마?" 한참 심호흡을 하던 카탈리는 시나의 두 손을 꼬옥 잡고 걱정스러운 눈초 리로 말했다. "시나, 이제부터 거실에 들어가면, 절을 해야돼. 절 할 줄 알아? 상류계층 에게 하는 절 말이야." "절..이요?" 시나는 문득, 마우르코트에서 수정구를 통하여 엘야시온님이 가르쳐주었 던 인사를 떠올렸다. "아.. 하나 알아요. 굉장히 긴 거죠. 음...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그 다음 이... 아..!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를 지으신 거룩한 유일신, 엘의 은총 안에서 저, 제 6계급 마노테온..." 카탈리가 혀를 찼다. "제 5계급 일루티온!!" "네? 아 네.. ..제 5계급 일루티온 시나는 누구누구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하하.. 어때요? 아줌마?" 카탈리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잘했어. 상류계급에게 하는 인사 중에 가장 무난한 인사야. 잘 배 웠구나 시나. 역시 넌 일루티온의 아이가 틀림없.. 아차, 지금 이런 이야길 할 때가 아니지... 시나! 알겠지? 거실에 들어가면, 루온 루드랫님과 같이 계신 남자 분이 있어. 그 분을 보는 순간 그렇게 인사를 드려..! '끝 부분 은, 제 5계급 일루티온 시나가 인사를 드립니다. 평안하소서...' 정도로 끝 내면 돼. 알겠니?" "에? 그 분이 누군데 그러세요..?" "나중에.. 나중에 알려 줄게. 자아, 가자. 걱정하거나 겁먹지 말고..!" 걱정하거나 겁먹고 있는 것은 오히려 카탈리 쪽 같지만... 시나는 평소에 도 침착했던 카탈리가 왜 이렇게 흥분을 하는지 이상했다. 하지만 카탈리 는 고개를 잔뜩 숙인 채 거실로 들어가고 있었고, 시나도 그런 그녀를 보 니 왠지 불안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거실로 들어갔다. 슬쩍 훔쳐보니, 확 실히... 라단은 얼굴이 거의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차려 자세로 거 실 의자 뒤에 서 있었고, 드래마도 굳은 얼굴로 의자 뒤에 서 있었다. 게 다가 집안에 있는 초란 초는 온통 갖다가 불을 붙인 듯, 거실엔 초 만해 도 백여 개는 될 듯 했고, 덕분에 거실은 대낮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무척 이나 밝았다. [무, 무슨 일이지..] 시나는 이처럼 이상하고, 잔뜩 긴장된 거실분위기에 놀랐다. 도대체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기에 이러는 걸까 슬쩍 훔쳐보려는데, 그때 카탈리가 시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앞으로 밀었다. 그래서 시나는 살 펴보는 것은 그만두고, 고개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 영문을 모른 채 더듬 더듬 말해야 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고개 숙인 방향이 제대로 되었는 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어.. 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를 지으 신 거룩한 유일신, 엘의 은총 안에서 저, 제 5계급 일루티온 시나는... 아 니, 시나가... 인사를 드립니다. 펴, 평안하소서.." 그럭저럭 인사를 끝냈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껄껄.. 이거- 웃기는 구만. 어느새 한 계급이나 상승했나? 응.. 아가씨?" 시나의 눈이 화악 커졌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자, 거기에 앉아 있는 것 은... 시나는 너무나 놀라서 저도 모르게 크게 말했다. "에, 엘야시온님...?" 파랗게 빛나는 긴 머리칼... 정말로 이상하고 무섭게 생긴, 눈... 그러나 보 석상에서 보는 다이아몬드와 같이 조각조각 빛을 내는 아름답게 생긴, 그 런 눈을 가진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훗... 반갑군. 아가씨. ...이젠 인사를 제대로 하는 것을 보니, 매우 기쁘 고.. 예전에 수정구를 통해서 본 것보다, 더 마르고 더 남자애 같고 더 볼 품없어 실망했네. ..뭐, 하지만.." 그가 자리에서 스윽 일어났다. 드랫보다 십 센티는 작은 키지만 그 위압 감은 엄청났다. 굉장히 날카롭게 생긴 눈과 똑같이 날카롭게 생긴 얼굴 선을 가진 젊은 그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위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카로운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며 웃음 지었을 때에는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가씨에 대한 설명을 진작 자세히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무, 무슨 설명..? 아니, 그보다는 잠깐...!! 이, 이 분.. 제 1계급이라고 했 나? 대제사장.. 그럼, 왕이나 교황 같은 분인데, 그런 분이 왜 여기 계신 거지...?! 시나는 그제야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방안의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방안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시나를 쳐다보고 있었 다. 라단이나 카탈리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드래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엘 야시온과 시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엘야 시온은 이 모든 것 내가 알게 뭐냐는 느긋한 얼굴로 걸음을 걸어 시나에 게로 왔다. 그리고 시나는 그가 걷는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감탄했다. 저 렇게 가볍게 걷는 사람은 처음 봤던 것이다. 그런 그가 시나 앞에 서더니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회색 눈이라... 후후.. 수정구에서 봤던 대로군." 시나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역시, 가까이 봐도 다이아몬드같이 생긴 눈 이다. "하, 하지만.. 에, 엘야시온님은, 눈이 너무 이상해요... 그, 그때는 엘야시 온님도 회색이었잖아요?" 어디선가 죽을 것 같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라단과 카탈리가 내는 신음으 로 소리뿐만 아니라 얼굴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드래마도 당황한 듯 한 발을 내딛었다. "..에, 엘야시온님 그녀는 아직.." 그때 엘야시온이 크게 웃었다. "껄껄껄껄!! 됐어!!! 드랫, 자네 말대로라면, 이 아가씨의 이런 반응은... 껄 껄껄!!" 그러더니 그는 자기의 행동 보단,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질려서 지레 겁 을 먹고 있는 시나를 내려다보고 미소를 띠었다. "아가씨.. 손을 주겠나?" "?" 시나는 이 사람이 왜 그러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주위 사람을 보았다. 그 런데 라단이나 카탈리나 어서 엘야시온님의 말씀대로 하라는 듯 부지런히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나는 난처한 얼굴로 엘야시온에게 손을 내 밀었다. 엘야시온은 빙긋 웃었다. "고맙군." 그렇게 말한 그는 시나 손을 잡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생각보다 따뜻한 손이라 시나는 저으기 안심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엘야시 온 가디엘의 눈엔 점차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차츰 더 진하게 그의 온 얼굴로 퍼져갔을 때... 시나에게 있던 약간 안심되는 느낌마저 모두 날아갔을 그 무렵... 그 는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너무 작아서 시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 리로- 말했다. 그는 이제 시나의 눈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엘께서는 왜, 이런 시기에 아가씨를 여기에 보낸 것일까.. 칼루스온 인 이라니.. 맙소사.." (계속)================================================== * 트러플(Trufle) 파이, 스프 - 돼지 코로만 찾아낼 수 있다는, 얼음 속(!) 에서 자라는 트러플 버섯을 갖고 만든 것. 맛있을까? 참고로, 프랑스에 있 는 것은 트뤼플(Truffle).. 클로니아의 것은 'f'가 하나 없다. 그러니 따지 면 곤란. 음하하..^^ ps...--;;; 레이서스의 대사 중 심각한 버그를 발견해서 지우고 다시 올립 니다. 죄송... (그 한마디로 시나는 완전히 바보가 되는 거였는데, 다시 살 아났습니다. 하하..^^) 즐거운 추석 되세요.(꾸벅^^)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42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25 23:24 읽음:256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5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1)> 그것은 예배를 집도하기 전이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시간이 촉박한 와 중에도 마리스를 불러들였다. "스온 마리스, 어서 오게나." "엘야시온님.." 그녀는 금색 모피로 만든 망토와 가운, 그리고 진한 갈색의 자락이 넒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금색의 망토는 자락이 넓어서 뒤로 살짝 끌렸는데,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엘야시온이 자기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게나."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마리스는 침착하고 순해 보이는 눈으로 가디엘 을 보았다. 예배 시간 전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방에서, 예배에 대 한 준비를 하는 가디엘이었는데 자신을 호출하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마리스를 불러놓고도 딱히 이렇다 할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쪽 팔에 몸을 기대고 빙긋, 빙긋 웃고 있기만 했다. 하지만 마리스는 조용 한데다 참을성이 강한 성격이었으므로, 그가 말할 때까지 묵묵히, 그리고 부드러운 눈초리로,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엘야시온이 마침내 눈을 들었다. "후후후... 스온 마리스. 자네는 다음대의 엘야시온이 될 인물이지. 드디어, 내년이면 그렇게 된다는 말일세."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네." "그 동안 힘들었으리라 생각하네. 스온 마리스." "아니에요. 저의 의무였는걸요. 엘야시온님." '의무'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런 그녀를 흡족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니아의 스아디온들 은 '이성적'이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클로니아의 공식적인 안주인 노릇 을 하랴, 그 틈틈이 자이온으로 와서 엘야시온의 교육을 받으랴, 육체적으 로나 정신적으로나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마리스는 클로니아의 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로니아의 왕족들은 '의무'라는 한 마디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꼭 해야할 일이라면 굳이 불평하지 않는 것이 훨씬 이성적인 것이다. 클로니아의 왕족답지 않게 '따뜻하다'라는 평판을 얻고 있는 '스온 마리스'라도 그것은 예외가 아닌 듯,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토 록 오랜 세월동안에도 그녀가 한마디라도 불평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디엘은 그녀에게는 존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옛날.. 세렌시스에 비하면 지도자에 어울리는 능력 같은 것은 턱없이 부족 한 그녀였지만, 꾸준하고 침착하며 인내심이 강한 성격은 여타 왕족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차라리 어설프게 능력이 있어 교만한 것보 다는 훨씬 나은 성격이다. 하고 있는 일에 꾸준하다는 것은 때론 어떤 대 단한 능력보다도 굉장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엘야시온 가디 엘은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스온 마리스'라는 공식적이고 예의바른 호칭으 로 부르고 있었다. 다른 왕족들, 심지어 파이오니온에게라도 곧바로 이름 을 부르는 그였지만 말이다. "후후, 어쨌든 자네도 이젠 한시름 놓을 수 있지. 아스테린이 이제 곧 이 곳의 안주인이 되면, 자넨 내년부터는 전적으로 자이온에만 머무를 수 있 을 테니, 나로서도 기쁘네." "네." 좋다 싫다, 감정표현이 없는 다소곳한 대답이었다. 하기는 옛날 클로니아 세스틴이 클로니아 세계의 안주인으로서 스온 마리스를 다시 천거했을 때 도, 일련의 사건들로 분명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을 텐데 그의 제안을 받 아 들였다. 세렌시스의 약혼녀였던 그녀... 그런데 하누카의 날을 일년도 남겨 놓지 않는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바로 엘야시온 가디엘 자신 이었다. 세렌시스의 약혼녀로서, 어릴 적부터 클로니아의 안주인 역할을 해왔는데, 하루아침에 그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그건 엘야시온 가디엘이 언제나, 언제나 뼈저리게 후회하는 사실이었다. 테일러스와 레스티엘 때의 후회는 그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과거에 대해선 온 통 후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스온 마리스는, 막 파이오니온이 되 어 너무나 혼란하니 누군가 경험이 많은 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는 클로니아 세스틴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금까지도 주욱 그를 도와준 것 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남아(男兒)인 스온 엘스제가 탄생하여, 다음 대의 은의 엘야시온은 여인이 돼야한다는 엘의 의지가 드러났을 때(그래서 클로니아 의 파이오니온으로서 세스틴의 지위가 공고히 됐을 때)... 그 때, 엘야시온 으로서의 교육을 핑계로 클로니아의 안주인으로서의 자리를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스온 마리스는 그렇게 하여 클로니아를 팽개쳐 두지 않았다. 결국 처음 몇 년 동안의 도움이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이어온 것이다. 스 온 엘스제가 성년식을 치를 수 있게 되기까지는 1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 려야 했으므로 엘야시온의 교육이 느긋하게 진행되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 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은 어쨌든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 었고, 이제 드디어 그녀는 내년부터 한 쪽 어깨의 무거운 짐을 덜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쪽 어깨에 지워진 짐-영원토록 지어야할-짐을 양쪽 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면 그녀로서도 한층 편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지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런 스온 마리스라면 자신의 사후, 자 신이 아가트에 기록해 놓은 것을 분명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그렇게 확 신을 하며 엘야시온 가디엘은 흐뭇하게 말했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어느 정도까지 말해야 할까. 신중하게 생각을 했 다. 헌데, 밖에서 시종이 조용히 종을 흔들었다. 예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가디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차라리 예배가 끝나고 마 리스와 이야기 할 걸 그랬나, 했지만 예배 이후엔 여러 가지 행사가 너무 나 많아 이런 조용한 개인적인 시간은 가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우선은 요점만 말할 수밖에. "스온 마리스. 자네는 오랫동안 엘야시온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아왔네. 성문(成文)으로 된 교육은 거의 다 받았지. 그리고 난 이제 얼마 후면, 자 네에게 구전(口傳)으로 된 엘야시온들의 유전(流轉)과 나의 명령을 전해 줄 예정인데... 그렇게 구전으로 전해 질 것에 비하면 성문으로 된 것들은 내용의 중요성에 있어서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네... 성역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내리시는 축복과 예언과 계약을 말씀하 시는 것이지요?" "그렇네. 그 중에 다음에 말할 내용이 있네." "네에..?" 전혀 뜻밖인 가디엘의 말에, 침착했던 마리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 었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만 있 었다. "음, 허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여기서 말할 것들은, 어디 가서도 말해선 안 되는 것이네. 하지만 자네는 분명, 다음대의 엘야시온이 될 것이고, 그 사실은 이제 누구도 깨뜨릴 수 없어. 그러니, 자네를 믿기 때문에 이런 말 을 하는데... 구전 중에는 비밀리에 전해지는 엘야시온의 삼대 의무가 있 거든." "에, 엘야시온님?" 마리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그의 저의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이것은 화창한 아침, 식사를 들며 가족들이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건강했고 건강할 호주가 갑작스럽 게 자신의 유언을 발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엘야시 온 가디엘의 얼굴은 이런 일을 하면서도 전혀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오히려 즐거워 보이고 기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후후.. 그 첫 번째는 '자이온의 황금 성전과 엘야시온 도서관, 아가트의 전당... 곧, '자이온'을 성스럽게 지킬 것'이라는 내용일세." "....!!!" 이제 마리스는 완전히 당황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전해지는 엘야시온의 삼대 의무라니! 바짝 긴장이 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것들을 외워야하 는 것인지... 그리고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가디엘이 웃었다. "하하.. 아니, 아니.. 외울 필요는 없네. 그러니 그냥 앉아서 편안히 듣게. 뭐, 지금 말한다고 해봤자 정식 절차를 거치는 것이 아니니, 아무리 기억 력이 좋은 클로니아의 왕족인 자네라고 하더라도 기억하기 힘드네. 그리 고 나도 정확하게 기억해서 말하기 힘들어. 그래서 정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말하는 것은 어떤 오류가 있을 수도 있기에 철저히 금지되고 있지 만... 뭐, 이 정도라면... 앞으로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내용 때문에, 자네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지만 이 말 때문에 그녀는, 엘야시온 가디엘이 그녀에게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표정, 즉 불안하고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오류... 금지라 니.. 그녀는 말했다. "엘야시온님? 정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말하는 것은 어떤 오류가 있을 수도 있기에 철저히 금지되고 있다고요?" "응 그렇네. 그래서 말인데, 두 번째는.."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오, 아닙니다. 엘야시온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렇다면 그 다음은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응? 응? 뭐라고?" 골똘히 생각하며 다음 말을 이으려던 엘야시온 가디엘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공 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이런 일을 오류를 감수하고서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 다. 만약 이것이 어떠한 명령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엘야시온님, 명령하 실 것이 있다면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 의 종이니까요. 전, 무슨 말씀을 해 주시던,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렇게 말하며 한층 더 깊게 고개를 수그리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얼굴이 벌개졌다. 모처럼 자신 이, 큰 맘 먹고 말해 준다고 하는데 됐다고 하는 그녀의 태도에, 뭐 이런 꽉 막힌 아이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디엘 자신도 나름 대로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 지 들어 자존심도 상하고 괘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던 것 은 잠시, 그 후엔 어쩔 수 없는 너털웃음이 나왔다. 스온 마리스의 공손한 태도... 여기엔 자신을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그녀는, '정식'대로 하는 것을 원할 뿐이다. 이것이, 페어리 족인 자신과 이성과 마인드 컨트롤의 족속인 클로니아 왕 족간의 차이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클로니아 왕족을 상대해 왔건만 아직 도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긴... 위테리드의 족속인 그로서는 아마 영원토록 클로니아의 왕족들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엘야시온 가디엘의 호기심에 대한 마음은 상대방마저도 자신처럼 호기심 이 있을 것이라 미리 짐작해, 때가 되기 전에 엘야시온의 구전까지도 대 담하게 발설할 수 있는 용기랄지 무모함을 주었지만... 상대는 클로니아의 왕족. 생각하는 기전이 전혀 틀린 것이다. 호기심 많고, 쾌활하며, 즐거움 을 추구하는 족속은 바로 위테리드의 왕족이다. 갑자기 쓴웃음이 나오며, 예전의 자신이 모습이 떠올랐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 까, 엘야시온 아스나엘님!!!! 그 이유를 듣기 전 까진, 절대로 그런 일 따 윈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타이르듯 말했다. -이것은, 엘야시온의 구전에 관련한 명령. 지금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때가 되면 알 수 있다. 그러니.. 가디스. 넌 명령대로.. 그는 소리쳤다. -싫습니다!! 차라리, 엘야시온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말겠습니다!! -가디스...!! 상냥하고 아름다웠던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은 그의 이러한 품성 때문에 무척이나 슬퍼했다. 그는 문득 우울해졌다. 엘야시온 아스나엘님이 스온 마리스.. 클로니아의 왕족들을 가르쳤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엘의 안배인지도 모른다. 느긋한 마이레스는 그 낙천성을 가지고 쾌활한데다 가벼운 품성을 가진 위테리드의 엘야시온을 교육한다. 그리고 그런 쾌활한 위테리드의 엘야시온은 다음 대의 이성적 인 엘야시온을... 이 이성적인 엘야시온이 다음 대의 격렬한 기질을 갖고 있는 칼리안 엘야시온을 배출하는 것이다. 가디엘은 아스나엘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해 화가 났었지만, 마리스엘이 될 스온 마리스는 또 다른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저었고, 웃었다. "알겠네.. 미안하네. 스온 마리스. ...내가 주책이었군. 자네 말이 맞아. 아 무리 필요한 일이고 자네를 믿고 있었다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경솔 하게 엘야시온의 구전을 말한다면... 그건 잘못한 일이지. 맞아. 자네 말이 맞네." 그녀는 엘야시온 가디엘의 언짢은 기색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약간 떨리 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엘야시온님 저는 그저.." "아닐세. 내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네가 가장 좋은 제자지. 암, 훌륭 한 제자이고 말고.. 하하하.." 그리고 엘야시온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런데, 자네가 방금 말한 것... 정말, 지킬 수 있나? 내가 무슨 말을 하 던 내 편에 서서, 내 명령을 실행해 주겠나?" 그녀는 이렇게 다짐을 하는 엘야시온이 무슨 명령을 내릴 지 몰라, 내심 불안했지만 그는 엘야시온이다. 그녀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입니다. 엘야시온님..."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긋 웃었다. "고맙네." 루온 루파르테는 옆에서 걷고 있는 자신의 사촌형에게 불만스럽게 말했 다. "요즘의 힐라토님은 이상해, 형." 루헬리옷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왜." "아아.. 그제는 왕족들이 토끼 사냥하는데 안 나오셨어. 어제는 루이티온 들이 '펼쳐진 땅'에 가서 몬스터 사냥을 했는데 그것을 구경하러 오지도 않으셨지. 다른 왕족들은 대부분 오셨는데... 뭐, 긴히 할 일이 있으시다나. 그렇게만 말씀하시고 사라지신 거야. 스온 칼리스나 님한테도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그 분도 자꾸 나한테 와서 힐라토님이 어디 가셨는지 묻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는 분하다는 듯 말했다. "젠장! 어찌 되었든, 어딜 가신다면 나도 꼭 대동하고 가셔야 하는 것 아 냐? 그런데 하루가 꼬박 가도 얼굴도 못 뵈었어. 그리고 나중에 연회장에 잠깐 나오셨는데, 엘야시온님이 안 나오셨다는 것을 알고 금방 돌아가시 더라고. 스온 칼리스나 님과 말씀하시는 데 피곤하신 것 같은 품이 아무 래도 이상했어. 어쨌든 결국 어제도 이야기다운 이야기는 못해봤다는 거 지. ...쳇... 이봐, 형. 힐라토님, 어제는 도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걸까? 하온 하카단은 힐라토님이 말씀하시면, 엘야시온님이 말씀하신다고 해도 입을 꽉 다물고 있을 테니, 물어봐 봤자 시간 낭비고... 어때? 짐작 가는 데라도 있어?" "...요즘이라더니, 겨우 이틀이군." "응? 글세, 이틀이라도.." 루헬리옷이 차가운 태도로 딱 잘라 말했다. "몰라. 그분의 개인 루이트는 너다, 파르테.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그 분과 텔레파시라도 할까?" "...?!!!" 루파르테는 루헬리옷의 냉랭하고 날카로운 반응에 놀라서 그를 보았다. 게다가 '텔레파시'?! 그것은 위급상황에, 루이트가 주인과 의사를 소통하 는 가장 빠르면서도 직접적인 의사 소통 방법으로 계약주와 루이트, 두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쓸 수 없다. 그러므로 '텔레파시'같은 일에 대해 이 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경우가 다르고 풍기는 뉘앙스가 약간 틀리기는 하지만, 결국... '내가 네 아내가 어떻게 해야 만족할지 무슨 수로 아냐!? 네 아내와 자보기라도 할까?!'..라는 말에 버금갈 정도로, 듣기에 따라서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듣기에 따라서 모욕감을 주는 말이니, 듣기에 따라서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루파 르테는 이런 화제가 나오면 과거에도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는 얼굴을 불쾌하게 붉히며 인상을 썼다. "..형!" 하지만 루헬리옷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루파르테에게 말했다. "...됐어. 오해는 하지마. 그 분이 무얼 하시든 내 소관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니까. 그건 네 일이야. 네 일은 네가 해결해. 난 할 말없어. 그리고 난 예배가 끝나고, 날이 지자마자 힐라토로 돌아간다. 아마사도 데 리고 돌아가야 하니, 바빠서 네 얼굴은 못 보고 갈 거야." 하지만 루파르테의 얼굴은 이제 험악해 질대로 험악해져 있었다. "변명 따윈 필요 없어!!! 방금 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으로 나온 말이냐 고?!! 날 비웃은 거지?!!! 주인과 텔레파시도 제대로 통하지 못하는 놈이 라고 비웃은 거 아니냐고?!!!!" 순간 루헬리옷의 얼굴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루파르테는 민감하 게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기랄, 확실하군!!! 루헬리옷! 날 봐!!! 웃기지 말라고..!!! 힐라토님이 마 음을 열지 않은 이상, 나도 어쩔 수 없어!!! 능력이 뛰어난 주인을 모시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야?!!! 능력이 너무 뛰어난 주인을 모시고 있어서, 행적을 쫓지 못하는 게 내 탓이냐고?!!!!" "파르테!" 루헬리옷은 루파르테를 돌아보았다. 그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뭐라고 말 할 듯 하더니, 결국은 그냥 고개를 젓고 말았다. "...젠장. 관두자. 나중에 힐라토에서 봐." 그리고 몸을 돌리는데, 루파르테가 화를 버럭 내더니,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뭐야?!!! 루헬리옷, 기다려!!! 확실히 말을 해!!! 말에 따라서는 널 용서하 지 않겠어!!! 난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야!!! 아무도 날 무시 못해!!!" 하지만 다음 순간, 쾅 소리가 나도록 벽에 밀어 부쳐진 것은 오히려 루파 르테였다. 루헬리옷이 말했다. "제길--!!!" 화가 잔뜩 난 목소리였다. "시비 걸지 마라. 파르테!!" "으, 으윽..." 루파르테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루헬리옷은 그런 그의 명치를 손으로 억누르며 말했다. "...입 좀 닥치라고!!" 하지만 루파르테는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루헬리옷에게서 빠져 나오려 고 죽을힘을 썼다. "이, 이익..!! 놔-!!"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무서운 힘이었다. 사실 아무리 루파르테라도 힘으 로는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건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고, 커서 도 별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새삼스럽게 자존심이 상해, 루 파르테는 화를 냈다. "놔!!! 놓으라고!!! 제기랄, 루온 루헬리옷!!! 감히, 네가 이 나를..!!" "시끄러!!! 이 바보자식아!!!" 루헬리옷은 험악한 얼굴로 한 번 더 루파르테를 뒤로 밀어 부쳤다. 덕분 에 루파르테의 몸은 벽에 또한 번 세게 부딪쳤고, 루헬리옷은 그런 그를 보며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웃어?!! 누가 널 비웃었다는 거야? 내가 그런 적 있어? 멍청한 소리하 지마! 너야말로 지금, 스스로를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잖아! 네 주인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그런 주인이 있다는 것만 도 감사하게 여겨!!! 이 천치 같은 녀석!!! 다시 한 번만 더 이딴 일로 귀 찮게 하면, 그땐 나야말로 가만 안 있겠다, 젠장!!!" 그리고 루헬리옷은 망토를 펄럭이며 기둥이 늘어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가버렸다. 그의 발소리가 크게 울리고 멀리 쌍을 이루어 걸어가던 시종들 과 시녀들이 자신들을 훔쳐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루파르테는 루헬 리옷이 내뱉은 어떤 말 때문에 놀랄 만큼 쉽게, 화가 스르륵 풀리고 있었 다. 시종 따위에게 루헬리옷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기분 나쁨도 잊 을 만큼, 그건 강렬한 기분이었다. 그는 루헬리옷이 거칠게 몸을 밀어붙인 바람에 삐뚤어진 예장용 갑옷의 매듭을 툭툭 털어 똑바로 매만지며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의 사촌형이 사라진 곳을 보며 인상을 썼다. "..뭐야. 쳇.. 그런 주인이 있다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기라고?" 다음 순간 루파르테는 씨익 웃었다. "흥! 그러고 보니 나를 질투하고 있었군. 하긴.. 주인도 없는 형한테, 자꾸 이런 이야길 꼬치꼬치 물었으니, 그렇게 화를 낼만도 하지. 자기 약혼녀하 고도 가면 갈수록 심하게 삐꺽거리는 것 같던데, 조금 부드럽게 대해 줄 걸 그랬는지도. ..뭐, 나중에 결혼 축하 선물이나 멋지게 해 줘야겠군.." 그리고 그는 주위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시종들과 시녀들을 제 갈길 가게 만든 후 어깨를 으쓱으쓱 하며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우두둑 소리 가 났다. 그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목에 손을 댔다. "...목이야. 가면 갈수록 힘이 세지는군... 쳇... 저번에 당했을 때보다도 아 픈 것이.. 흥!! 그래도 무슨 소용이 있나. '높은 마음'인데, 그 힘을 쓸데도 없고." 그렇게 말한 그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한 번 더 옷매무새를 툭툭 다듬었 다. 가죽 갑옷은 검은 색의 윤기 있는 광택을 흘려내고 있었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부유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방금 루온 루헬리옷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문 쪽만 따진 다면 루헬리옷의 가문이 본가(本家) 로 매겨지고 우위에 설 정도다. 그러니 아무리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인 루파르테라도 루헬리옷에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뭐... 어린 시절 부터 함께 자랐으니, 아버지가 없는 루파르테에게 있어, 그를 데리고 다니 며 돌봐 준 루헬리옷은 의지할 대상이 되는 남자였다. 그러므로 루헬리옷 을 대하면 그때마다 루파르테는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넘어야 할 산이지만, 또한 신성하게 지켜져야 할 산이다. 어느 땐 강박관념처럼 그를 넘어서야 한다고 느끼지만, 때로는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그와 겨루 는 것을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단지 가끔...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감이 들곤 했다. 그래서 종종 그의 신경을 건드리게 되는 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주인의 일로 루헬리옷에게 어리광 비슷한(루파르테 본인은, 입이 찢어져도 '어리광'이라는 표현을 쓰 진 않겠지만) 화풀이를 한 것은 사실이니,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을 줬다고 진심으로 루헬리옷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루파 르테에게도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다 음엔 루헬리옷에게 좀 냉랭하게 대하기로 했다. 모처럼 의견을 구하려 물 어봤는데, 그런 식으로 말한 루헬리옷이 섭섭하다. ...하지만 이제 곧, 새신 랑이 될 일로 정신이 없을 테니.. '선물을 잔뜩 안겨주면서, 그를 용서하기 로 하자'는 생각은 잊지 않기로 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니 마음이 가벼워져, 루파르테는 정확하고도 경쾌한 발 걸음으로 루이티온들의 숙소 바깥으로 걸었다. 그리고 마침, 중간지점에서 타 세계의 프레미어 루이트들 이하, 상급 루이트들 수명과 마주쳤다. 상위 왕족들의 개인 루이트들로 특별히 왕궁 안에 숙소를 배정 받은 자들이었 다. 모두 다 예배를 위한 예장용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담소를 나누며 웃 음 지은 채 걷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루파르테를 보더니 호의 어린 말 투로 말을 건넸다. "오~ 안녕하시오. 파워즈의 수호가 그대에게 임하길 빌겠소. 루파르테." "아, 안녕하십니까. 루오란님. 파워즈의 수호가 당신에게 임하길." 중년의 나이를 가진 그는, 칼리안 율리시스의 루이트 루오란이었다. 파이 오니온들끼리 친분이 깊고 서로 오래 봐왔기 때문에 루이트들 간에도 존 칭을 빼고 서로 이름을 부를 만큼 호의적이었다. 루오란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루온 루헬리옷이 나가던데, 무서운 표정인 것이... 무슨 일 있었 소?" "네? 아.. 아닙니다. 헬리옷은 이제 곧 하누카의 날을 맞게 되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호오, 그렇소? 그거 축하할 일이군. 꽤 약혼기간이 길었지? 하하하.. 하 긴, 이제 올해가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 자네 사촌도 대단하군. 엘의 시기 를 온전히 살아냈으니 말이야. 인내심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뛰어나. 헌데, 하필이면 올해에 세계혼이 겹쳐서 신경 날카로운 것도 당연하겠군." 루파르테는 태연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죠. 뭐.. 그나저나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사촌형 때문에.. 죄송합니다." "하하.. 우리사이에 격식은 무슨. 그나저나 오늘은 날씨가 쾌청하군요. 어 젯밤 늦게, 눈이라는 것이 내려서 기분이 오싹했는데. 하하.." 그때 뒤에서 다른 루이트가 말을 걸었다. "호오.. 오싹 이라. 루온 루오란 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랑 똑같군 요?" 로트라 베다이스의 루온 루날도였다. 루파르테나, 루오란보다 더 나이가 들었지만 로트라 프레미어 루이트답게 보라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거기다가 수염을 기르는 것을 관습으로 삼는 세계답게 진한 붉은 색의 수 염을 기르고 있었다. 루파르테와 루오란은 그들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동 안 프레미어 루이트의 자리에 있었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루온 루날도 님. 파워즈의 수호를 당신에게." (계속)================================================== * 마리스 - 엘야시온의 후계자. 클로니아 전대 파이오니온, 세렌시스의 약혼녀였었다. 외전에도 출현했음.^^ * 루파르테 -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 * 루헬리옷 - 외전에도 출현한 적 있고, 본 편에도 상당히 많이 출현. 판 테온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듯.^^ 아마사의 약혼자. * 루오란, 루날도 - 프레미어 루이트들. 본 편에만 출현.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42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25 23:26 읽음:258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6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2)> 그가 웃었다. "하하.. 새삼스럽게 무슨... 어깨에 힘 좀 빼시지요. 나 같은 늙은이가 당신 들에게 말을 걸어서 불쾌하겠지만, 부디 편하게 대해주시길." 로트라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 겸양이 강한 세계다. 루오란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루온 루날도 님도 참, 늙은이라니요! 루온 루날도 님의 보랏빛 검기가 로트라의 바다도 가를 정도라는 것은, 온 엘야시온에 자자한데요." 루파르테도 맞장구쳤다. "루오란 님의 말씀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루날도 님의 솜씨는 지금까지 자이온의 토너먼트에서도 익히 봐왔지 않습니까? 루온 루날도 님의 노익 장은 저 같은 자들에겐 큰 귀감이지요." 루날도가 말했다. "허허.. 토너먼트라.. 내년에는 나도 슬슬 후진들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 "하하.. 무슨 이야기십니까! 하여간 로트라 분들은 너무 겸손하시다니 까 요!!" "글세 말입니다.. 하하..!!"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궁전 밖으로 나가는데, 저 반대쪽의 건물 에서 일단의 여성 루이티온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성 루이티온과 마찬 가지로 예장용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남성들 것보다는 가볍고 색채가 다 양해서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위테리드 프레미어 루이트라든지 토너먼트 우승자인 루온 루사벨라 등의 상급 루이 트였다. 특히, 루사벨라는 머리에 저 유명한 '실버 하트'를 쓰고 있었다. 그걸 본 남성 루이티온은 그 '실버 하트'의 여성을 보고 경외로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도 똑같이 답례하고 나자, 그 후 복도에는 잠시 갑옷들의 절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녀 루이티온들이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 는 소리가 물결쳤다. "안녕하십니까. 파워즈의 수호를 당신에게." "안녕하십니까. 어제 도착하셨다는 이야긴 들었습니다. 파워즈의 수호를 당신에게." "아름다운 엘의 날입니다. 파워즈의 수호를." 그 가운데서 문득 루파르테의 눈이 루사벨라의 눈과 마주쳤다. 루사벨라 도 이쪽을 본 듯했다. 루사벨라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눈을 내리깔 고 자기 세계의 프레미어 루이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루파르테는 양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거만한 얼굴을 지어 보이고 답례했다. 진한 갈색 갑옷을 입은 루사벨라의 몸엔 놀랍게도 은은한 은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머리에 쓰고 있는 실버하트의 효과일 것이다. 검기 의 운용을 도와주는 실버하트의 효과는 직접 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겠 지만... 루파르테로서는 알지 못할 일이다. 어쨌든 그는 토너먼트에서 우승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여자가 99년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을 때는, 겉으로는 축하한다며 웃고 있던 루파르테도 속이 뒤집히 는 것 같아 죽는 줄 알았다 프레미어 루이트라는 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무명의 여성 루이트보다 못하 다니... 치욕이 아닌가?(그리고, 어머니인 루칼라에게도 분명히 한 소리 들 었다.) 자신의 왕에게 줄 최고의 영광을 뺏어가 버린 저 여자. 게다가, 저 여자가 쓰는 '검술'은... 자기도 모르게 루파르테는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루사벨라는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별다른 표시 도 하지 않은 채 루이티온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다른 이들 과 함께 궁전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파르테는 그런 그들 뒤를 따르며 루사벨라를 시종일관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과거는 어쩔 수 없다. 대신, 저 여자의 모든 것을 철저히 연구했고, 수련 도 그 동안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 내년 토너먼트에선 세상이 절대로 호 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래서 '실버 하트'(그는 루칼라의 머리에 쓰여있는 '실버하트'를 노려보았 다.)... 저것은 내년부터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게 될 것이다. '블러디 루 비'가 실종된 지금, '실버하트'는 토너먼트 우승자에게 내려진 유일한 명예 이자 영광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술' 따위를 쓰는 '여자'가 갖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됐다. 그의 인생에서 '무술'이라는 이름으로 치욕을 당한 것은 두 번. 한 번은 '루온 루사트'에게 83년도의 토너먼트에서 개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그때 는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분해서 며칠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런데, 엘의 도우심으로 루사트가 어찌되었든 그의 눈앞에서 제거 되고, 루파르테가 대신 다음대의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로 내정되었을 때, 루파르테는 자신의 주인과 자기를 위하여 91년도의 우승을 필사적으 로 노렸다. 하지만 재수 없었다. 91년도의 토너먼트에는 카이러스의 루드리안이라는 21살 먹은 명문가 루이트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뭐, 그에게 진 것은 묘 하게도 그리 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가 명문중의 명문인, '루바인' 의 아들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정통 루이트'였다는 것. 카이러스 인이어서 루파르테 자신과 직접적인 비교가 안되었던 일, 그리고 그의 성 별이 '남자'였다는 일 등에 기인 할 것이다. 루온 루드리안은 혈통을 증명하는 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양의 검기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운용하는 솜씨도 빼어났다. 마치 루이티온들 의 교과서와도 같은 솜씨.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정정당당한' 싸움 방식 과 신분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그러한 장점은 다른 이들에게도 강력하게 어필한 듯, 83년도의 토너먼트에서 루사트에 대한 찬반자가 극명하게 갈 렸다면, 루온 루드리안의 뒤엔 온통 찬사만이 따라다녔다. '파워즈의 수호 를 한 몸에 받는 천재 루이트'. 이것이 바로 그가 자이온의 여름 내내 달 고 다녔던 별명인 것이다. 어쨌든 젊은 나이로 이루어낸 루드리안의 행적 탓에 각국의 루이트들은 앞으로 몇 십 년 동안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온 루드리 안은 넘치는 영예에 머리가 돌기라도 했는지 우승하고 몇 달이 지나, 모 든 것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쓸만한 루이트가 사라진 것에 왕족들은 안타까워했지만, 각 세계의 루이 트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토너먼트를 생각한다면 승리를 거 머쥘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더 넓어진 것이다. 루파르테도 똑같이 그런 기대에 분주히 8년여를 수련했건만... 하지만 결국, 엘은 실버 하트의 주인 으로 99년, 듣도 보도 못한 다크 호스를 또 준비했다가 내놓은 것이다. 그것이 저 여자다. 게다가, 저 루온 루사트 이래로 통쾌하게 도태돼버린 '무술'을 사용하는 입맛 떨어지는 여자. '무술'에 따른 그 화려하고 정교한 몸놀림. 연속된 승리. 하지만 그건 '잔재주'였다. '잔재주'외엔 아무 것도 아니고 되어서도 안 됐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몇몇 젊은 왕족들에게 신기한 흥미 거리로 어필했을 지는 몰라도... 그건 '싫은 것'이고 '정통이 아닌 것'이니까. 헌데 어이없게도, 99년도의 히로인은 결국 저 여자가 되 었다. 또한 빌어먹게도 루파르테 역시 여자의 기술에 너무 놀란 나머지, 꼼짝도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무술'이라는 일루티온들의 잔재주에 여러 가지로 당한 셈이 다. 그 생각이 들자, 루파르테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자기 허리에 달린 힐라토 소드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두고보자. 내년 107년의 토너먼트에서는 결코, '무술'따위에 지지 않는다. 아니, '무술'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루이트에게도 지지 않는다!! 내년에 힐 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자신의 루이트에게 실버 하트를 씌워주는 영광을 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랜 세월, 주인의 원래 루이트였던 '루사트'에게 느끼 는 그 모든 감정, 토너먼트에서 우승까지 했던 사촌에 대한 그 뿌리깊은 질투와 증오... 그 지긋지긋한 열등감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루파르테는 드디어 입구의 아치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의 빛이 어제 내린 눈에 반사하여 화려한 빛으로 번쩍거리는 날이었 다. 그리고 입구 앞 널찍한 앞뜰에는 스콰이어(종자)들이 잘 꾸며진 루이 트들의 말을 갖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걸 본 루파르테는 낮게 웃음을 지 었다. 자신의 말을 붙잡고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은 '루온 루카나안' 이었다. 루사벨라의 것이었던 아이인데, 그가 차지했다. 모든 것은 저런 식이 될 것이다. 방법과 수단은 가리지 않고 모두 그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이다. 그리고 루파르테는 이미 그 방법을 생각해 놓았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는 것이 좋아. 계집애한테 또 진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러니 그 꼴 보기 싫은 마노테 놈이라도 아직은 이용가 치가 있는 것이지.] 루파르테는 이렇게 생각하며 득의 어린 웃음을 지었다. 루사벨라를 거꾸 러뜨리기 위해 그녀를 조사하던 중... 그녀가 '루온 루사트'의 약혼녀였다 는 것을 알아낸 것은 너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베쓰-엘 카할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베쓰-엘 카할에 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특권층 외에도, 이제 곧 지나갈 행렬을 구경하러 나온 일반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팔 두 마차가 엇갈려 지나가고도 남을 크고 넓은 길은 돌로 포장되어 있 었고, 덕분에 누군가가 말을 타고 지나갈라치면 다각거리는 커다란 소리 가 울려 퍼졌다. 지금은 그 길 위에서 수비대들이 행렬에 대비하여 사람 들을 길 양쪽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멀리, 나팔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 가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경꾼들 또한 그 소리를 듣고 한 층 더 크게 웅성거리는데, 이윽고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프리커서들이었 다. "물러나라-! 예를 취하라-! 왕의 대로를 준비하는 자들이 나아간다-!! 왕 의 행렬이다--!!!" 여기서 왕이란, 꼭 파이오니온뿐만이 아닌, 엘야시온 이하 상위 왕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런 외침은 공식적인 행렬에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 나온 사람들도 매 주마다 자신들의 파이오니온이 이런 식으 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기에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이 유독 요 몇 주간을, 추운데도 나와서 이렇게 서 있는 것은 그 행렬 가 운데 왕족 중에 왕족, 왕들의 왕, 오직 유일하게 전 열 두 세계의 이름으 로 불리는 자, '엘야시온'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프리커서들의 행렬과 나팔 부는 자들의 행렬이 지나가고 나자, 그 뒤에는 루이티온 계급이 말을 타고 늘어서서 호위하고 있는 마 차들의 행렬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렇게 루이티온들이 호위하는 마차 중 맨 앞의 마차를 주목했다. 그 마차의 둥그런 문 위에는 방사형으로 조 각조각 갈라진 황금 눈동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생명나무 야포 스 딜리야의 문양이 대칭을 이루어 무성한 잎을 달고 새겨져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나무 정 중앙에 있는 말의 형상이었는데, 그 말은 이마에 길고 뾰족한 나선형으로 꼬인 뿔을 달고 있었고, 등허리에는 자기 몸 길이 만한 날개를 쫘악 펼쳐들고 길고 풍성한 갈기가 땅에 닿도록 고 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엘야시온 인이라면 이러한 일련의 문양들이 무엇 을 상징하는 지 모를 리 없다. 사람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왕의 행렬이 라면 보통 허리를 숙이고 지나갈 때까지 예를 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 금은 축제였다.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엘의 거룩한 자!!!" "엘야시온이여--!!!" "호우샤나아!!" "호우샤나아, 위테리드 엘야시온!!" '호우샤나아'는 티쉬리월 15일부터 행해지는 가을 추수를 기념하는 축제, 즉 '가을추수감사제'에 사람들이 카할의 제단 주위를 돌며 외치는 기쁨의 말로, '오!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말이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외침에 흘끗 밖을 보았다. 말간 유리를 통하여 클로니아의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두꺼운 털외투를 입고 기쁨에 차서 '호우샤나아'를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 지, 지금 베쓰-엘 카할에서 울리는 열 두 개의 청명한 종소리조차 묻힐 정도였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웃으며 앞자리에 앉은 마리스를 보았다. "이제, 얼마후면 저들의 말이 '클로니아 엘야시온'으로 바뀌겠지. ...나로서 는 기쁘네." 엘야시온의 후계자로서, 엘야시온의 딸로서 그와 함께 엘야시온의 마차에 탄 마리스는 유리 밖을 보았다. 사람들의 열광... '호우샤나아, 엘야시온'. 그녀의 입술이 약간 떨렸다. '호우샤나아'라는 말이 마치 어떤 무거운 돌 과 같이 가슴을 짓눌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온 몸이 짓눌려 흔적조 차 없어지더라도 견뎌야 한다. 그것이 '의무'니까. 마리스가 이렇게 생각하 며 창백한 얼굴로 애써 자신들의 백성을 보려 노력하는데, 그때 옆자리에 서 누군가가 따뜻한 손을 꼬옥 쥐어왔다. "마리스.." 망설이는 듯, 떨리지만 그래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마리스는 창백한 얼굴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회색 눈에 회색 빛의 긴 머리칼을 가진 엘스제였다. 황금의 날에 테트라아크 루온 루바인과 이곳에 도착해 서 지금까지 내내 왕족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마리스의 배 우자로서 엘야시온의 마차에 탄 것이다. 스온 엘스제. 그는 앞날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영광이 예비 되어 있다 는 것만 빼면 전형적인 엘의 시기 소년이었다. 회색 빛 큰 눈이 그의 얼 굴에 심약해 보이는 인상을 더 짙게 만들었지만, 그 외에는 그냥 평범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앉은키가 몇 달 전에 겨우 마리스보다 커지긴 했지만, 남자라거나 남성으로 보기엔 아직도 분홍빛으로 애 띤 볼과 솜털이 귀여 운 소년. 마리스는 방긋 웃었다. "왜 그러세요, 엘스제?" 엘스제는 방금까지 마리스가 내다보던 창문 밖을 보았다. 열광하는 관중 들을 보는 그의 눈엔 자랑스럽다거나 뿌듯하다는 기색 보단 약간 겁먹은 기색만이 비췄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애써 그런 기색을 지 우고 자신의 아름다운 약혼녀를 보고 용감하게 말했다. "나, 난 언제나 마리스 옆에 있을 거예요.. 올해가 지나 열 다섯 살이 되 면 꼬옥.." 마리스의 눈이 커졌다. 마리스의 불안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그는 그렇게 말했다. "엘스제.." 마리스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엘야시온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하하... 다음 대의 엘야시온 부부는 금슬이 아주 좋겠구먼. 하지만, 엘스 제... 내 앞에서 그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섭섭해하거나 질투할 거라고 생각 못했느냐? 이래봬도, 난 꽤 오랫동안 그렇게 손을 잡아 볼 배우자도 없었다는 말이지." 엘스제의 그 큰 눈이 더욱 커지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더니 용기를 내어 모처럼 잡은 마리스의 손을 놓고 그녀에게서 자리까지 후다닥 떨어 져 앉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에, 엘야시온님. 그냥, 전.. 마, 마리스가.. 전, 그냥.. 에, 엘야시온님도 마 리스에게 친절 하라고 하셨고.. 그, 그래서.." "엘스제, 됐다. 껄껄.. 내가 그냥 해 본 말이다. 껄껄걸." 엘스제는 빨간 얼굴로 엘야시온을 보았고, 그가 시원하게 웃는 모습에 당 황했지만 곧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의 엘야시온님은 어쩐지 심각한 표정일 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마음놓고 웃으시는 모습도 처음이었던 것 이다. 한편 마리스는 그렇게 웃는 엘야시온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그가 지금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겐 커다란 불쾌감을 유발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베쓰-엘 카할로 가기 전 엘야시온의 응접실에서 들은 말, 그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 을 정도로 이상한 말이었다. '마노테온을 위한 숙소를 유리궁전 내에 마련해 주겠나? 클로니아의 안주 인으로서, 그리고 다음대의 엘야시온으로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유리궁전에 마노테온이라니... 맨 처음엔 그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곧이어 그 마노테온이 누구라는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 만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클로니아의 안주인으로서 손님을 숙소를 마련하게 하는 자신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도대체 왜 '다음대의 엘야시온'으로서 그 일을 해야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다음대의 엘야시온으로서 의무... 그 가운데 마노테온을 유리궁전에 묵도 록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단 말인가? 그것도 마리스, 자신의 예전 약혼자 가 사랑했던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해서 지위까지 강등 당한 루이티온을 위하여?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엘야시온의 그 말이 자꾸 가슴 에 남았다. 그런 말 같은 것 그냥 지나쳐도 될지 모르지만... '다음대의 엘 야시온으로서'라는 말을 할 때, 가디엘의 표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상하게 씁쓸한 그러나 놀랍고도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마차가 덜컥거리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베쓰-엘 카할에 도착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고, 바깥의 찬바람이 마차 안으로 몰아쳐 들어왔다. 빛과 바람... 마리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을 보면 꼭 누군가가 떠오른다. 어둠 속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갈 때, 부드럽고도 차가운 바람이 볼을 쓸 어갈 때. 그것을 지금 또 다시 느낀 마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래.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관두자. '왜'라든가, '무엇 때문에' 라는 말은 쓸모 없는 말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쓸데없는 호기심 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정해진 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나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스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서, 베쓰-엘 카할 주변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둘러보 았다. "스온 마리스님!!!" "우리의 엘야시온이 되실 분!!!" "호우샤나아!!! 클로니아에 영광 있으라!!!" "호우샤나아--!!" 마리스는 그런 그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보세요. 바보 같은 분...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렇게 제가 있어요. 빛은 눈부시고, 바람은 아름다워요. 이렇게 차가운 가슴인데, 이런 것은 느껴지는군요... ...제 말.. 듣고 계신가요, 세렌시스...? 사람들은 매우 기뻤다. 평생 가야 한 번 볼까 말까 한 광경들이었다. 성산 자이온이라면 거의 매주 마다 벌어지는 일일지 몰라도, 이곳 클로니아 베 쓰-엘 카할에 엘야시온님과 수많은 다른 세계의 파이오니온들이 한꺼번 에 나란히 걸어 들어가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각 세계의 파이오니온들이 한 명씩 마차에서 내릴 때마다 수비대의 지휘 로 그 세계의 이름을 부르며 환영했다. 왕족들의 길다란 행렬이 베쓰-엘 카할로 들어가고 난 뒤, 그 뒤엔 하바티 온 계급의 시종들과 루이티온 계급들이 따랐다. 하바티온 계급이야 겉보 기엔 그다지 차이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그저 그 옷차림이라든지 행동거 지에 감탄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루이티온 계급이 카할 앞에서 말을 내려 들어갈 때는 사람들 모두다 놀라움과 감탄의 한숨 소리를 냈다. 왕족들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 희귀한 계급을 이렇 게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백 여명이 넘어가는 자들의 절도 있 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정말, 루이티온 계급이란 굉장하군. 봐. 저들의 저 키를. 여자들조차 저 렇게 당당하다니. 마치 저쪽만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군. 안 그래?" 누군가가 속삭이자, 주위 사람들의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 이 뿜어내는 위압감이라든가, 눈빛, 분위기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잠시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최고급의 패턴트 레더로 빛나는 예장용 갑옷 과 규칙적으로 절그덕 거리는 소리, 자신의 주인들 외엔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는 유일성, 쉽게 표정을 허물지 않는 거만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저 얼굴들은 보는 이들에게 묘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자기 옆에 서 있는 아들에게 속삭였다. "얘야, 저기 보거라. 저기- 다른 루이트들은 검 없이 베쓰-엘 카할로 걸 어 들어가는데, 몇몇 루이트들은 검을 차고 있지? 저들이 바로 각 세계의 프레미어 루이트들이란다. 보통 인간이라면, 연회장이나, 궁전, 카할에 검 을 들고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저들은 틀리지. 들고 있는 것은 말을 하는 검이거든. 굉장하지 않니?" "..그, 그래요, 아버지. 마, 말을 하다니..! 정말 굉장하군요!! 와아.." 또 다른 데서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는 듯, 다른 말을 수 군거리고 있었다. "저기, 저기- 아니! 이 녀석아! 저쪽 말이야!! 저기 앞쪽에 걸어가는 여성 루이트... 찾았지? 맞아!! 바로 저분이 99년도의 토너먼트 우승자, 힐라토 의 루온 루사벨라 님이야. 머리에 쓴 실버하트 좀 보거라!" "화아- 저것이 실버하트예요? 굉장하군요! 굉장해!! 게다가.. 여성 루이트 라고 해서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억센 외모를 갖고 계실 줄 알았는데, 그 것도 아니네요? 키는 나, 나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그래도 멋지군요. 와 아..." 이런 사람들의 말이 물결치더니, 곧이어 어느 누군가가 흥분했는지, 수비 대가 굳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파워즈 만세!'를 외쳤다. 수비대는 이 갑작 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사람들이 곧 여기저기서 파워즈 만세를 외쳐댔 기 때문에 막을 수도 없었다. 멀리, 이런 모양을 보고 있던 한 소년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들었어? '파워즈 만세'라는 군. 쿡쿡.. 하긴, 마스터와 프레미어 루이트 님 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멋지니까, 저런 하류계급들에겐 어떻게 보이겠어? 하하... 하바티온 계급과는 비교가 안 되지." 그러자 소녀도 웃음 지었다.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들 주위엔 일단의 소년 소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마스터를 따라 온 스콰이어들이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마스 터가 가는 곳을 따라다닐 정도의 스콰이어라 하면 매우 좋은 가문의 뛰어 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이다. 미래의 상급 루이트들인 것이다. 검기라는 매 혹적이고 위험한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해도 되는 15살 이전까지,(몇몇 예 외적인 이들은 계약주를 만나기 전까지) 이들은 이렇게 어릴 적부터 상급 루이트들이 운영하는 '파(派)'에 속해서 교육을 받는다. '상급 루이트'라 하 면, 보통 프레미어 루이트 이하 왕족들의 개인 루이트를 말하는 것으로, 한 세계 당 고작 십 수명 안팎이니 루이티온 계급의 소년, 소녀들이 자신 들이 동경하는 상급 루이트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각별 했다. 상급 루이트만이 운영할 수 있는 '파'에 들어가지 못하면 혼자서 수련하거 나, 아는 선배 루이트에게 지도를 부탁하게 되지만... 좋은 교육의 효과란 무시 못하는 법이고 또 나중에 상급 루이트로서 추천 받게 될 때 이런 파 에서 나온 '파벌'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므로, 누구나 가능 하다면 '파'에 소속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런 일 단계를 통과하여 어느 정도 미래를 약속 받은 자들이다. 하지만 그런 자 부심이 강한 그들도 아직은 어린 지라 상급 루이트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동경과 자랑이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베쓰-엘 카할에 배속된 수습사제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말을 끌고 가 버 리고 루이티온 계급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젊은이다운 쾌활함으로 맘이 들 뜬 그들은 자기들의 마스터들을 보며 수군수군 베쓰-엘 카할로 들어갔다. "우리 마스터가 최고지, 역시?" "응. 내가 마스터의 갑옷 윤내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멋있지?" "오~ 저기, 프레미어 루이트 님들이 갖고 계신 프레미어 소드 좀 봐!! 저 걸 한 번 만져보기만 했어도..!!!" "킥킥.. 만져보고 싶다니! 죽고싶냐, 너? 저기엔 퍼제셜 아트가 있다고! 만 지는 즉시, 그 속성에 당할 걸?" "..그, 그냥 해 본 소리지 뭐.. 그만큼 멋있단 말이야!!" "그래, 그래.." "우우.. 역시 상급 루이트들이야. 느껴지는 박력이 틀려. 이봐 난 어때?" "...무슨 말을 원하는 거야?" 이들이 이렇게 소곤대는데, 한 소년이 말했다. "와! 저 분이 루온 루사벨라 님이구나! 저번 회 토너먼트 우승자! 난 처음 봤어, 멋진데!? 그러니까, 저분이 쓰신 것이 실버하트라는 거지?" "으응, 과연 토너먼트의 우승자야. 으음.. 이따가.. 필경사에게 명령해서, 패, 팬레터를 보내 볼까?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게 되셨냐고.." "그, 그래? 그, 그럼 나도.." 그때, 사람들이 외치는 '파워즈 만세'를 흐뭇한 얼굴로 듣고 들어오던 소 년이 이들의 이런 소리를 들었다. 아까 사람들의 외침에 루이티온다운 자 부심을 내비치며 옆에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걸던 그 소년이었다. 그는 앞 에서 가는 소년들의 말을 듣고 심술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지나가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쳇!! 토너먼트 우승자는 무슨.. 무술~ 파..!!!"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소년 소녀들이 그를 돌아보았고, 말한 소년의 태연 한 얼굴에 그들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 카나안!!" "쿡쿡쿡.. 하긴.. 토너먼트 우승자라고 해도, 무술로.. 킥킥.." "카나안! 그래도 너무 심했어!! 쿡쿡.." 카나안이라고 불린 소년, 즉 루카나안이 흥 웃었다. 그러더니, '팬레터' 운 운했던 소년들에게 말했다. 아직도 그들은 주위 소년 소녀들이 왜 웃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이, 이봐! 너희들 어느 세계냐? 너희들 마스터가 어느 분이냐고? 그 분들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이야? 팬레터라니.. 오호라! 그러고 보니, 너희 들 꽤나 무술을 배우고 싶었구나~!! 그럼, 일루티온 계급에게 가서..." 그가 진한 분홍빛의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그들을 놀리는데, 갑자기 누군 가가 날카롭게 말했다. "카나안!!! 이 자식!! 너 방금 말 무슨 뜻이야!!!" 루카나안이 뒤를 돌아보니, 눈에 익숙한 누구인가가 줄을 제치고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를 본 루카나안이 빙긋 웃었다. "오오~ 이게 누구야? 루온 루유다? 오랜만이군. 그런데, 뭐가? 아아... 방 금 내가 한 말? 쿡.. 무슨 뜻이긴.. 그냥,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인데. 그건 그렇고... 넌 아직도 '무술~파'에서 수련을 쌓고 있냐? 쯔쯔.. 그래서 토너 먼트나 출전할 수 있겠어?" "뭐라고?!!" 루사벨라라고 해서, 굳이 천박하게 여겨지는 '무술' 위주로 종자들을 가르 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조 기술로서 간단히 가르치는 것뿐인데, 루카나 안은 루사벨라 파의 특징을 꼬집어 묘하게 조소했다. 루유다라 불린 소년 이 화를 냈다. "카나안, 이 자식!!! 이게, 제대로 견디지도 못하고 나간 주제에, 감히 누 구 파에게 무술 파라고...!!!" 루카나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 누가 견디질 못했다는 거야?! 난 당당히 나왔어! 그래서 루온 루 파르테 님도 받아들여 주신 거고!! 그리고, '카나안'이라니! 이거 왜 아는 척을 하고 그래?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계속)================================================== * 루사벨라 - 외전에 출현한 적 있음. 사연은 위와 같다. * 루드리안 - 외전에 한 번, 13살 먹은 모습으로 출현. 카이러스 테트라 아크 루온 루바인의 아들. 현재, 행방불명. * 프리커서(선구자) - 엘야시온의 공무원 명칭 중 하나..(하하.^^) * 엘스제 - 유일한 카이러스의 스아디온. 다음 대에 엘야시온이 될 마리 스의 약혼자. 아직 14살이다.(꼬마신랑.^^) * 프레미어 루이트 - '최고의' 루이트. 파이오니온의 개인 루이트를 지칭. * 루카나안 - 본 편에만 출현. ^^ 사연은 위와 같다. * '성역에 가까운 숲'은 내일...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49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29 22:41 읽음:242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7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3)> 여기까지 오자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해졌다. 워낙 낮은 소리라 주위 어른 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년소녀들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들 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니, '힐라토..', '무술?' 어쩌고 말하며 재미 있다는 표정들이었던 것이다. 그걸 눈치 챈 루유다는 이를 으드득 갈고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더 이상의 소란을 피웠다가는 마스터 인 루온 루사벨라의 이름에 누를 끼칠 뿐이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며, 루유다는 지지 않고 똑같은 비웃음으로 낮게 한마디 던졌다. "루온 루카나안! 내년 토너먼트에서나 보자! 마침, 너나 나나 내년엔 열 다섯 살! 누가 더 오래 토너먼트에서 견디는가 보자고! 진정한 파워즈 루 이티온이라면, 입으로 나불댈 것이 아니라 검기와 실력으로 싸워야지!" 그는 코웃음 쳤다. "하긴.. 루이티온 주제에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 같은 것을 주절대는 정 신력을 어디에 써 먹겠냐마는! 남의 파 괜히 모함하지 말고, 입 단속이나 잘해!!!" "뭐야?!!!!" 루유다의 그 말에 루카나안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뭐라고 응수할 듯 입 을 벌렸으나,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그러므로 루카나안도 루유다와 똑 같은 이유로 말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행렬의 앞부분은 베쓰-엘 카할의 넓은 바깥뜰을 지나 제단이 있는 안뜰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스터 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 그 생각으로 루카나안이 분한 마음을 억누르고 씩씩거리며 있는데, 아까 그 소녀가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저 녀석? 상당히 건방진데? 분명, 지방에서 올라온 녀석이지? 혹, 에브리나에 가문을 갖고 있니? 눈빛은 일단 상급 루이트의 자질인데?" "흥! 에브리나에 소속한 가문 정도의 놈이 설마 저렇겠어? 체!! 그 무술 파의 녀석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촌뜨기들이야! 얼마나 수준이 안 맞았는지..! 우리 아버님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애초에 저런 데 들어가 고 생은 안 했지. 하긴, 아버님은 하바티온이니, 뭘 아시겠어? 루이티온인 어 머님을 졸라 루온 루파르테 님 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지! 쳇!!! 그런 무술 파 따윈...!! 글세, 첫 날 했던 훈련이 뭔 줄 알아?" "뭔데?" "...뜀박질." "뭐어?" "하! 참..!!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수련도 아닌, 땀 비질, 비질 흘리는 뜀박 질을 하려니..!! 이게 무슨 일루티온 계급도 아니고.. 마음이 낮아져서 얼 마나 혼난 줄 알아? 제길.." 소녀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저런! 고생했구나..!" "고생 만이면 괜찮지! 파워즈의 수호를 받는 루이티온에게 그런 식의 품 위 없는 하급 훈련이라니...! 그러다,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이라도 배여서 싸울 때마다 나타나 봐. 으휴! 끔찍해!! 저런 마인드 컨트롤도 제대로 가 르치지 않는 파 따위... 내년을 기대하는 건 오히려 이쪽이라고! 팔 년 전 의 토너먼트 같은 건 필시 무슨 비리가 있었던 게지! 내년엔 분명 우리 마스터가 실버하트를 쓰실 거야. 우리 위대하신 힐라토 레이서스님의 루 이트이신걸." 루카나안은 허리를 쭉 펴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자신의 마스터인 루온 루파르테에게 향한 채였다. 그러 자 옆에 있던 소녀도 똑같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루온 루사벨라님의 파 따윈 전부 초반에 탈락할걸? 아니, 누가 출전할 사람이나 있을까?" 이들은 그런 뒤 통쾌하다는 듯,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한편 앞서 가던 루이티온들 중 몇몇은 뒤를 흘긋 보고 있었다. "..혈기가 왕성한 녀석들이라, 모아 놓으니 역시 다툼이 있군요."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거나, 더 길게 싸웠더라면 누군지 알아내 서 혼구멍을 내주었겠지만, 참는 것이 낫겠죠. 뭐니뭐니 해도 엘의 날이니 까." "...뭐, 이번 주 중에 스콰이어들의 기량을 겨루는 행사가 열릴 거라고 하 더군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클로니아의 시종장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 다. 저 녀석들도 지칠 만큼 싸우고 나면 다시는 저런 식으로 다투지 않겠 죠." "그렇습니까. 아.. 이제 조용히 합시다. 이제부터는 안뜰이니까." 과연, 카할의 바깥뜰까지도 계속됐던 사람들의 잔잔한 웅성거림은 그들의 발이 안뜰로 들어가는 계단에 닿는 순간 딱 그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 작된 성가대의 노랫소리는 그들이 들고 있는 향로에서 나오는 향기들과 어울려 크게 울려 퍼졌다. 만여 명의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바깥뜰 멀리에는 그런 사람들 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보는 게이트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가대의 노랫소 리를 반영하는 듯, 혹은 흡수하는 듯, 희뿌연 은색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 희뿌연 것이 날름대는 모습은 어지간히 많이 봐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 다면 모를까, 맨 처음 본 사람들에겐 까닭 모를 공포라든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대할 때 느끼는 무력감(넓고 넒은 평야에서 지나치게 크거나, 지나치게 높은 단일 조각을 볼 때 그 밑에서 몸을 떠는 것과 같은)을 느 끼게 했다. 신의 영광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도다... 고위 성직자들의 높고 낮은 아름다운 음성, 게이트는 마치 그 사실을 강 조라도 하듯 나락 없는 빛과 어두움을 한꺼번에 드러내고 있었다. "오~ 그러니까, 그 게이트라는 것이 베쓰-엘 카할이라는 곳에 있다는 말 이에요?" "응." "하하.. 그렇군요. 난 또 차원이전자들이 성역근처의 숲에 가서 차원이전 을 하는 줄 알았어요... 하하.." 드래마는 미심쩍은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혹시, 그 게이트를 통하여 어딘 가로 갈 생각을 한다면 그런 생각은 관 둬. 마노테온은 베쓰-엘 카할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뿐더러 어떻게 들어 갈 수 있다고 해도 넌 두 번째로 차원이전 한 거니까 게이트 안에서 몸이 갈가리 찢기고 말아." 이것은 라단과 카탈리, 그리고 드래마, 셰리카와 함께 마을의 구역 어귀에 있는 카할에 다녀오면서 나누는 대화였다. 하지만 시나는 씨익 웃었다. 예 전이라면 '아아~!! 안 된다니!! 너무 슬프다..!!'라고 괴로워했겠지만 지금은 틀렸다. 시나는 몇 발짝 앞서 나가 뒤로 걸으며 드래마를 보고 말했다. "알았다고요! 나도 그런 게이트를 통할 생각은 없어요! 더구나 나 혼자서 는요..!! 거기를 통과하려면 '차원이전자'가 있어야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자 그들 뒤에서 걷던 라단이 잊으면 안 된다는 듯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다 힐러에게 치료도 받아야 하고." 시나는 그 말에 약간 얼굴을 찡그렸지만, 다음순간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 다. "하하.. 그렇죠." 시나가 즐겁게 웃는 것을 보고 드래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라단이나 카탈 리는 시나에게서 아무 것도 못 느낀 듯, 모두 다 행복한 표정이었지만 드 래마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어제부터였지만 지금까지는 그냥 시나의 모양을 관찰하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의심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찾아 온 것은 어제 오후 무렵이었다. 그것도 시종이나 여타 다른 수행자 없이 암행이라도 하듯, 아니... 정말로 암행이라고 해도 보통은 몇몇의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는 정말로 혼자서 찾아 왔다. 덕분에 드래마는 엘야시온 가디엘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엘야시온이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그 가 들어온 입구는 집의 뒷문이었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그 사실을 눈치 챈 듯, 그러잖아도 언짢아 있던 기색이 더욱 일그 러져서 불쾌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들-마부가 어쩌고 중얼거리며 두고 보자, 내 용서하 지 않으리 투덜대는 말-을 하던 그는, 잠시 후 기분을 겨우 진정시킨 듯, 드래마의 상태를 이모저모 살피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묻 기 시작했다. 그제와 어제, 드래마가 왕궁에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그리고 부상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몹시 궁금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래마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맙소사...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가? 드래마는 그의 이런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 동안 다른 이들 같지 않게 엘야시온 가디엘과 접촉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제 1계급과 대한다는 놀라운 일에 어느 정도 무딘 마음이 생겼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어떻게 엘야시온 가디엘이 이토록 하류계급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예전부터 그렇게 느끼긴 했지만, 그의 이런 행동을 보고 드래마의 의혹은 깊어졌다. 드래마, 자신은 일개 루이티온 계급일 뿐이다. 그나마 지금은 이것도 저것 도 아닌, 가장 비천한 신분인 마노테온. 그런데 왜 엘야시온 가디엘은 이 토록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가? 자신이 왕족 여인과 관련이 있어서? 과 거에 토너먼트 우승자여서...? 정말로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일까? 그가 자 신을 아낀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며(그의 애정 때문에 과거에도 수 차례나 자신이 선택한 길 외의 다른 길 로 가도록 강요받아 괴로운 마음이 있기는 했지만) 그를 거의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감정일 뿐. '사 실'은 아니다. 헌데, 그런 감정적인 이유들이 엘야시온 가디엘로 하여금 이런 행동까지 하도록 만든다는 말인가? 드래마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 지 않았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원래 위테리드의 족속이고 페어리의 족속이다. 페어리 들은 자기 마음에 든 자들에겐 이상하도록 정이 많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자들에겐 이상하도록 야멸 차게 대한다. 드래마는 그의 애정을 그렇 게 해석했다. 하지만 아무리 페어리의 족속이었다고 해도, 이 분은 엘야시 온. 감정이 있다고 거기에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20년 동안 그에게 맡겨진 수많은 의무나 책임은 드래마 같은 하찮은 문제까지 관심 을 두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드래마는 지금까지 주욱 엘야 시온 가디엘과의 연결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엘야시온 가디엘은 최근 20년 동안 한 번 도 빼놓지 않고 주기적으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 큰 죄를 지어 귀향 가 있다시피 한 죄인에게 신의 대제사장이 꼬박꼬박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는 분명, 미약하긴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무심한 듯 했고, 무언가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 만... 그래서 올해에는 설마 엘야시온님이 연락을 하랴... 했던 의심들이 20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는 정말로 20년이 넘도록 그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이상했다. 제일로트로 이렇게 불려온 사실만 해도 그렇다. 엘야시온 가디엘을 직접 뵙고 인사 드릴 수 있어 기쁘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긍정적 인 마음보다 우선 앞서는 것은 수많은 껄끄러운 감정들... 이것은 엘야시 온 가디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왜 엘야시온 가디엘은 굳이 이런 불쾌한 일을 자초했는가? 자신은 그에게 해 줄 것이 전혀 없고, 그 또한 자신에게 어떠한 가치도 찾을 수 없을 텐데. 그러니... '봐서 기쁘기 때문' 이 라든지, '봐서 불쾌하기 때문'같은 감정적인 이유 말고... 그 이상의 무 언가가 있는 것일까... '감정' 이상의 '사실' 적인 것들... 이 분은 어떤 '사 실적인 것'을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 인가? 이런 생각들로 드래마가 그에게 미혹을 갖고,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더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는 무언가 매우 불쾌한 것 같았다. 게다가 라단과 카탈리가 촛불을 세운다 어쩐다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더욱 신 경에 거슬리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드래마는 하는 수 없이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대답, 즉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것 인지 '잘 모르겠다'고. 당연히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를 한참이나 쏘 아보아 거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는 잠시 있다가 '그의 종속자'에 대해 물었는데, 뭐라고 할까 고민하던 드 래마는 결국 이것 또한 솔직하게 말했다. 이 부분에 있어선 그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서 어떤 사실을 원한다면, 그 사실은 아마도 그가 가장 언급을 많이 한 것... 즉, '그의 결혼' 건에 관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담담한 척 말했다. "그녀는 지금 도서관에 갔다-"고. 그 후, 엘야시온 가디엘이 보인 얼굴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시나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과 디트마가 보인 표 정보다 더 경악했으면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엘야시온 가 디엘은 그제야 드래마가 도서관 출입증을 부탁한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 다. 지난 세월동안 취미한번 괴이하게 변했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옛날 자이온에서 지식의 보존자들을 도와 일하던 습성이 남아 그러나...하고 가 볍게 생각했다는 말이었는데... 그는 드래마가 하는 말에 너무 흥분을 해 서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흥분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의 맨 처음 첫마디를 들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네 가, 그 종속자를 붙들어 앉혀 놓고 글을 가르친 것인가!!!! 내 기가 막혀 서 말도 안나오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일주일 남짓의 시간은 글을 배 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가까스로 안정을 찾고, 다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의자에 앉고 나서 도 한참을 '괴이쩍다.. 괴이쩍다...' 중얼거리더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나 에 대해 더 자세하게 물었다. 도대체 엘야시온이 이 시간에 이런 장소에 찾아와 이런 질문이나 하고 있 다는 것이 못 믿을 일이었지만, 드래마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그것 또한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는 시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일은 누군가를 재단한다는 말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재단하지 않 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것... (심지어는 치명적인 결점이라도) 그대 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 대해' 묻는 엘야시온의 질문에 그녀의 말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것이 공평하다고 느꼈다. 엘야시온 가 디엘이 '그녀에 대해' 알기 원한다면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의 그녀를 알 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엘야시온 가디엘이 그것에 대해 비웃는다면(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시나이고, 그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니까, 그녀의 위에 무언가를 첨가하거나 무언가를 뺄 필요성은 느끼지 못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얼음의 숲... 그 전에 있었던 끝없이 펼쳐진 눈 밭... 커다란 나무. 이것들은 시나가 종종 들려주던 말이었으니 그대로 말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일루젼과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하지만 각오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아주 놀란 표정으로(아까 와는 또 다른 종류의 놀란 표정으로) 턱에 괴고 있던 손을 자기도 모르게 툭,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모양이다. 그 후로부터 엘야시온 가디엘은 묘하게 침착성을 잃 은 모습이었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초조해 하기도 하며 고개를 흔드는 등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나가 집으 로 돌아왔을 때에는 기뻐하는 얼굴로 보이기까지 해서 내심 놀랐던 것이 다. 하지만 그 후로는 오히려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다 물 리고(덕분에 라단과 카탈리 드래마는 영문을 몰라하며 부엌에 서 있어야 했다.) 오직 시나와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시나의 부름 을 받아 나갔을 땐 이미 엘야시온 가디엘은 사라진 뒤였다. 시나 자신의 말로는,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내일 예배가 걱정이 되니 그냥 이대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고 나가셨다는 말이었는데, 라단과 카탈리는 자기들이 배웅을 못했다는 것에 대해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통탄해 하며 시나에게 인사는 제대로 드렸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고 드래마는 어이가 없었다. 그 후, 시나에게 엘야시온 가디엘 님과 도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 었는지 물었는데... 바로 지금과 같은 대답을 할뿐이다. "엣? 또 그런 질문이세요? 글세, 저도 잘 모르겠다니까요? 그냥 저를 한 참이나 바라보시더니... 아, 그렇죠!! 제가 드래마 종속자인 것이 마음에 안 드신대요.. 하하하... 아앗..!!! 셰리카!! 너 또 어디 가는 거야?!! 점심은 같이 먹자고 했잖아?!!" 라단의 질문을 얼렁뚱땅 넘기는 모습... 지금도 뒤쪽에 있는 셰리카라는 소녀의 모습에 마음을 쏟는 척 한다. 드래마는 그런 시나를 당연히 의심 스러운 눈으로 쏘아보았는데, 시나의 얼굴이 그 순간부터 점차 붉어지고 말도 더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드래마는 그만 허탈한 웃음을 짓 고 말았다. 만약 그녀가 뻔뻔하게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면 어떻게 해서든 사실을 털어놓게 했을 테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여자 애와는 짜고서 무슨 나쁜 일은 못하겠군.. 엘야시온님이 무슨 말 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분은 비밀을 지킬 상대를 잘못 고르셨어.] 무언가 속이는 것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엘야시온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사실을 억지로 밝히게 하는 것보다는 당분간은 그냥 놔두 는 것이 나을 것이다. 대신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꼭 지켜야할 의무이므로, 그럭저럭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할에는 다녀올 수 있었지만 아직도 바깥에서는 심각하게 눈이 부셨다. "셰리카..!!" 시나가 소리치는데, 양 갈래로 땋은 분홍색 머리칼이 건물 사이로 후다닥 숨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드래마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시나는 드래 마의 눈길이 자기에게서 걷어졌다는 것을 알고, 은근히 안도하며 황당하 다는 듯 말했다. "...아.. 참! 정말, 이상하네. 카할에 갈 때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오질 않나... 일행인데도, 무슨 미행하는 사람처럼 쫓아오네.." 그러자 카탈리도 난처하게 웃었다. "저런 것도, 그 뭐라고 할까... 셰리카라는 아이가 '숲에서 사는 네르세바 인' 이라 그런 걸까요? 솔직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네르세바 인들은 이 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식탁에 과일 한 바구니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그 희귀한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예의가 있는 것일까 생각했는데... 어쨌든 참 이상하기도 해라. 그런 것이 어디서 났을까... 아 주 부잣집의 아이일까요, 여보?" 라단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표시를 했다. "글세.. 모르겠는걸? 당신도, 나도 아침 무렵에야 저 아이가 네르세바 인 이라는 것을 들었잖아." 그랬다. 셰리카는 언제 일어났는지 아침 무렵 일찌감치 일어나 어디선가 과일 바구니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보아하니 이 댁은 그렇게 부유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시나 네가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한데, 자신까 지 신세를 져서 미안하고, 하는 수 없이 좀 보태주어야겠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시나가 그 보태 준 물건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꼬치꼬치 묻자, 셰리카는 갑자기 인상을 잔뜩 쓰며 또 그, '네 편, 내 편, 나쁜 놈' 타령을 하며 같이 있지도 않고 저렇게 숨어서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것이 다. 그래서 과일 바구니와 그걸 가져온 셰리카에 대한 설명은 시나가 모 두 다 해야 했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보태서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현실 세계에 있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네르세바에 살았던 척 하며 말할 수도 없으 니...(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나가 무슨 말을 하든 드래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곤란하게 만들다니, 참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그래도 셰리카 가 묘한 것은 어떻게 카할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지, 카할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뭐... 사 제가 설교를 할 때에는 조느라고 정신이 없긴 했지만... 덕분에 시나는 그 것을 구경하느라 졸지 않을 수 있었다.(왜, 남이 조는 것을 보면 자신은 안 졸린 걸까?) 카탈리가 말했다. "휴우.. 어쨌든, 도무지 종적을 잡을 수가 없어서...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여기 클로니아에는 어떻게 온 것인지... 관광차 온 것인지, 물을 기회도 없 었고... 저어, 시나? 네 친구라고 했잖니? 그 애가 네 과거에 대해 무슨 말 안 해? 저 친구에 대해 정말 잘 몰라?" 그 질문에 시나는 드래마를 흘끗 보았다. 하지만 드래마는 역시나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래서 좋았던 기분의 시나였지만 길바닥을 보며 씁쓸하 게 말했다. "...네에.. 모르겠어요. 아침에도 말씀 드렸듯.. 전 기억이 안 나고.. 그리고, 셰리카는 잘 이야기를 안 해주고 자기 일만 하러 다녀서..." "흐응.. 그래. 자기 일이라면 역시 관광 일까나.. 그런데 일행을 전혀 볼 수 없으니.. 게다가 잠은 우리 집에서 자는 것 같고... 너무 이상해. 여자애 가 혼자서 놀러 왔단 말이야? 그렇게 혼자서 행동할 수 있다니... 그것도 숲에서 사는 네르세바 인이라서 그런가" 그 말에 시나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도저히 셰리카를 이해할 수 없기 는 시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시나는 빙긋 웃고 그들에게 말했다. "잠깐, 셰리카에게 다녀올게요." 시나는 셰리카의 팔을 잡았다. "셰리카!!! 어차피 뻔하게 다 보이는 데, 같이 걷지 왜 너 혼자 떨어져서 걷는 거야?!!" 골목에 숨어있던 셰리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나를 무시하는 사람과는 같이 안 걸어..!!" "으이구~ 무시하긴 누가 무시했다고 그래? 드래마는 당연한 말 한 거잖 아?" 시나는 셰리카의 말에 분해서 씩씩거렸다. "그게 뭐가 당연한 말이야? 에잇!! 마노테 주제에!!! '당신은, 네르세바의 도적답지 않군요. 정말 네르세바의 도적이라면, 숲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도울 텐데... 다른 이들에게 훔친 물건으로 도로 다른 이를 돕다니. ...악순환일 뿐. 네르세바 외의 세계에선 그런 짓을 관두는 것이 좋아요. 수비대에 붙들리고 싶지 않다면.'? 으윽..!!! 분하다!!! 내가 모처럼 치료비도 보태주고 과일바구니도 갖다 줬는데~!!! 두고 보자~!!! 감히, 아 르코나 숲 티토우의 딸 셰리카에게 말이야~!!!" 시나는 인상을 잔뜩 쓰고 말했다. "셰리카!!! 관 둬!!! 너~ 그 '마노테 주제'라는 말도 안 한다고 했지!! 이곳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마노테온을 차별하면 안돼!!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마노테잖아? 내가 있던 마을의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분들이었는데!!" 그러더니 시나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 나도 이젠 드래마를 '드래마'라고 안 부를 거야. 자꾸 헷갈리기만 하니까.. 이젠 계속 '드랫'이라고 불러야지. '드래마' 같은 차별적인 이름으 론 안 부를 거라고." "하, 하지만.." "글세, 셰리카.. 아니, 보경아!!! 넌, 이곳 세계 사람도 아니고... 어제도 그 랬지? 그 결계 조각인지 뭔지를 삼켜서 이렇게 이상하게 된 게 틀림없다 니까. 그러니까 행동을 할 때는 아주 조심해야 돼." 그러자 셰리카가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더니, 말했 다. "...그, 그럼... 내, 내가 방금 말한 것도 저쪽 세계에서라면 말하지 않았을 것들이야? 정말로 '결계 조각'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밤, 내내 말한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비 록 아침에는 어디선가 과일 바구니를 가져와 무진장 실망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디인가? "응! 어제 엘야시온님 말씀을 듣고... 나도 계속 생각을 해 봤는데, 네가 그 숲에서 나온 후로 저쪽 세상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그 '결계 조각' 때문이야." 그러자 셰리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그런가... 하긴, 성역에 가까운 숲은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사람들이 그랬지. 난 아주 오랫동안 그 숲을 헤매고 다녔어. 어디가 입구인지 몰라 서... 몬스터 같은 것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몰라..."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역시 그렇구나. 내가 어제 엘야시온님께 그런 것에 대해 물어봤잖아. 있지..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가끔 외모도 변한대. 하 하... 난 아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원인을 알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 잠깐 기다려!! 우리 같이 점심을 먹자! 네가 굳이 라단님네 집에서 식사하 기 싫으면... 나한테 돈이 조금 있으니까 식당엘 가는 거야!" 셰리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쪽 세계에서 떡볶이를 사먹었던 것처럼!" 시나는 활짝 웃었다. "맞아!" 그리고 시나는 뒤로 돌아서서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라단과 카탈리, 드 래마에게 말했다. "저기, 저는 셰리카와 조금 걷다가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49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29 22:42 읽음:247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8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4)> 카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놀라서 말했다. "어머!!! 걷다가 들어온다고?!! 하지만 시나...!!" 그러자 라단이 그녀의 팔을 잡더니, 말했다. "잠깐... 여보. 그렇게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아까 시나가 그랬잖아. 셰 리카라는 아이가 과거에 대해 말을 잘 안 해 주고, 자기 일만 하러 다녔 다고.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둘이 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시나 는 지금 일루젼과 기억상실이니까... 아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자기 자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 그러니 산책하라고 권하는 것도..." 카탈리가 여전히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점심도 안 먹었는걸요. 엘의 날이라 파는 곳도 없을 텐데..." 라단이 빙긋 웃었다. "아냐, 괜찮아. 내가 아는 여관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음식 먹고 천천히 오라고 하면 돼. 엘의 날엔 여관 음식이 공짜잖아. 뭐, 물론 자기 여관에 묵고 있는 사람들에게 뿐이긴 하지만, 내가 소개해 주면 돼." "그래도, 그런 건 너무 부실한 음식이어서.." "글세, 괜찮다니까. 시나는 친구와 있는 게 필요하다고. 나도 그 셰리카라 는 아이와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워낙 사건이 많았고, 그 아이 자체를 낮에는 통 볼 수가 없었으니... 그러니, 일단은 둘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 내게 한 다음, 이따 저녁에 둘을 앉혀 놓고 이것저것 물어 보자고. 우리 집에 묵고 있는 우리 손님이고 우리 책임이니까. 안 그렇습... 아니, 안 그 래? 드래마?" 드래마는 시나와 셰리카가 서 있는 곳을 보았다. 그 둘은 이곳을 빤히 쳐 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을 것 같군요." 셰리카라는 소녀도 여자이긴 하지만, 일단은 일루티온 계급이니 마차를 타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곳이라면 수비대까지 나서서 찝쩍대진 않을 것 이다. 그리고 설혹 수비대에게 걸리더라도 셰리카라는 소녀와 함께 어떻 게 임기응변 할 정도는 될 것이다. 최악의 상황엔, 셰리카가 시나의 주인 으로서 그녀를 데리고 돌아다닌 것이라 하면 되니 괜찮은 것이다. 한편 라단은 드래마의 대답에 뿌듯한 표정을 짓고 시나를 불러 들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주의 할 점이라든지 갈 곳 등을 일러주었다. 카탈리는 그 곁에서 걱정스럽게 시나를 챙겨주는 모습이었는데, 하도 사소한 일까 지 이것저것 말을 해주어서 종속자라고 불리는 드래마 자신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드래마는 묵묵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기 만 했는데, 라단과 카탈리의 모습을 보자니 얼핏 웃음까지 나왔다. 며칠 사이에 사람이 저토록 변할 수 있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시나에 대해 아직은 아무 것도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들은 멋대로 그녀 를 '일루티온'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 은 이제 마음놓고 전폭적인 애정을 시나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아마 저 런 태도는 시나가 '마노테온'이었을 때부터 서서히 키워진 것일 테다... 드 래마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라단과 카탈리에게서 주의사항을 다 들은 시 나가 말했다. "드랫..? 그럼, 다녀올게요. 나중에 봐요. 카할까지 다녀왔으니, 푹 쉬시길 바래요." 드래마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모처럼 편하게 외출한다는 사실에 잔뜩 들 뜬 모습이었다. "...조심해." "물론이죠. 걱정 말아요." 그렇게 말한 시나는 활짝 웃고, 셰리카가 있는 쪽으로 뛰어 가 버렸다. 드 래마는 그런 그들의 모습의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겉보기엔 자연스러운 일루티온 계급으로 보였다. 그때, 라단이 말했다. "저어... 이, 이제 우린 빨리 가지? 자네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고... 어, 어쨌든 빨리 가야해!" 그 어색한 말소리에 드래마는 라단을 보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 드래마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런저런 인간적인 약 점을 갖고 있을지언정, 그는 기본적으로는 곁에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 할 줄 아는 품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이들과 헤어질 때... 그래 서 드래마는 이들에게 진정을 담아 고개를 숙일 수 있을 것이다. '고맙습 니다. 라단.'이라고. 드래마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단." 라단은 드래마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에 약간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얼굴을 붉히더니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아- 참!! 고맙긴!!! 당연한 거라고, 당연한 거!!! 자네는 이런 거에 일일이 고마워하면 안돼!!! 절대 안돼!! 암, 안되고 말고!!! 자, 그러니 가자고!!" 남편의 그런 태도에 카탈리가 옆에서 킥킥대며 웃었고, 그들 셋은 이윽고 걷기 시작했다. 라단이 말했다. "하하하... 그 참,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시나에게 저런 일루티온 계급의 친구가 있다니...!! 정체를 잘 모르긴 하지만.. 저어, 드, 드래마? 자네도 잘 모르나?" 드래마는 고개를 저었다. "네. 모릅니다." "허 참.. 그럼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군. 그것 새삼 궁금해지네...." 드래마 역시도, 네르세바 인인 셰리카가 도대체 어떻게 클로니아까지 와 서 시나를 만나고, 이렇게 그들이 묵고 있는 집에 아무 말도 없이 따라서 묵으며,(숲에서 사는 네르세바 인의 한없이 쾌활함-혹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뻔뻔함이라고도 부르는-은 아주 유명한 것이므로 사실 이 부분 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도대체 하루종일 사라져서 무슨 일을 하고 오는 것인지, 새삼 그것이 궁금했다. 라단의 말대로 사건이 너무나 많아서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지만... 그저, 단순히 축제 기간을 맞아 네르세바에서 소매치기 원정을 온 것일까 했지만 다른 세계의 도둑들이라면 몰라도, 네르세바의 사람들은 그런 짓 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시나가 했던 말들을 꿰어 맞춰 유추해 보자면, 저 셰리카라는 소녀는 시나의 과거 중에서도 그녀가 '현실세계'라 부르는 곳과 관련된 소녀다. 그런데 셰리카는 외모조차, 시나가 원래 생각하던 것 과 틀리니... 그렇다면 도대체 시나는 무엇을 보고 셰리카를 '현실세계' 사 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도 시나의 일루젼인가? 일루젼이 원래 사귀던 친구의 얼굴까지도 바꿔 기억하게 할 정도란 말인가? 게다가 셰리카 쪽은 '저쪽 세계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말이다. 시나는 그 것을 아주 슬픈 듯 말했고, 셰리카가 그렇게 기억이 없는 것은 그녀 또한 성역 근처의 숲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런 것이라고 하는데... 드래마로서는 의심스러운 이야기였다. 저렇게 네르세바 인으로서 확실한 행동양식을 보 여주고 있으니... 그로서는 '현실 세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나보다는 셰 리카 쪽이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묘한 것은 셰리카는 시나가 '저쪽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리 탓하는 눈치가 아 니라는 것이다. 오늘 아침의 분위기만 봐도, 오히려 시나가 하는 말에 이 리저리 이끌리는 모습이고, 그것에 동의하는 눈치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자기 정체성을 저렇게 훌륭하게 찾고 있으면 서, 무엇 때문에 시나의 말에 이끌리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표정의 시나와 셰리카가 보였다. 그 두 소녀는 서로 귓속말을 하며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웃는 얼굴로 그들과는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 다. 그런 모습만 봐도, 저들이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고, 매우 친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것이 꾸민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드래마는, 혹시 저 셰리카라는 소녀가 시나를 납치했던 집단 중에 하나가 아닐까 했던 의심이라든지, 여타 다른 의심 같은 것들을 뇌리에서 서서히 거두기 시작했다. ...대체로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은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마음놓고 웃지 못한다. 미소정도야 어떻게 지을 수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뒤돌아 볼 정도로 환하게 깔깔대고 웃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드래마는 미소지었다. 뭐, 좋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저들은 친구다. 그 외 의 사정은, 라단의 말대로 이따가 물어도 될 것이다. "헤에- 그러니까, '칼루스온'이라고 한다는 말이지?" "응." 시나와 셰리카 두 사람은 라단이 소개해준 음식점에 앉아 식사를 하며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점은 여관에 딸린 것이었는데, 마우르코트보다 는 훨씬 더 크고, 많은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셰리카가 말했다. "흐음.. '엘야시온님'이 말하셨다니 안 믿을 수가 없겠네." "너도 엘야시온님에 대해 알아?" "아니.. 잘은 몰라. 하지만 아빠한테 딱 한 번인가 들었어. 우리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까지 관리하는 분이 계시다고. 세계들의 중심에 사시는 분이라고 했는데... 세계들의 중심은, 이름이... 뭐라더라... 우웅.. 잘 기억 안 난다." 시나는 어제 책을 읽던 기억을 떠올렸다. "세계들의 중심이라... 그 해랑 달이랑 별들도 그걸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곳 말이지... 그, 자이.. 온이라고 했던가?" "아, 맞아! 자이온! 잘 아는구나!!" "뭘.. 책을 읽어서 그렇지. 그래도 여러 가지 이름들이 많아서 외우느라 힘들었어. 학교 공부보다 더 힘들다. 예전에 계급이름 외울 때는 그럭저럭 외웠는데... 책으로 보니 외울 것이 많아져서... 뭐 이젠 외울 필요도 없어 졌지만. 헤헤... " 책이라... 셰리카는 감탄한 눈을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네가 아트를 부릴 수 있다는 거야! 햐아--- 그 꾸불꾸불한 것을 말로 만들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트? 어제 그렇게 말했건만, 또 이런 소리라니... 시나는 당황했다. 셰리 카는 어제도 내내 이런 이야길 했던 것이다. '책'과 '글'이라는 것에 대해 몹시 신기해하는 눈치로, 어제 시나가 중얼중얼 책을 읽어주자 몹시 경악 하며 '너, 아트라도 배운 거니! 어떻게 말을 그렇게 청산유수로 잘해? 그 게 다 머릿속에 있는 거야?!'라고 말했던 것이다. 맨 처음엔 무슨 말인가 이해를 못 하고 '이런 지식을 내가 다 갖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지식 이 없으니까,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거지... 셰리카, 나 지금 책 읽고 있잖 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셰리카는 시나가 들고 있는 책과 시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책이라니, 그게 뭐야? 알지 못할 소리는 관두고, 솔직히 말 해봐. 그 종이 뭉치에 얼굴을 대고 중얼중얼 거리는 거... 그거, 아트지!!' 라는 말을 해 주어, 결국 시나는 셰리카에게는 '글'이라든가 '책'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계 사람도 아닌, 셰리카까지 이런 태도라니... 어이가 없어진 시나는 '글'과 '책'에 대한 설명을 차근차근 해주어야 했다.(덕분에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셰리카는 여전히 시나가 무슨 아 트라도 부리는 것 같이 생각되는 지, '쳇, 아르코나 숲 티토우의 딸 셰리 카는 이런 이상한 힘을 쓰는 것 따윈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악마가 나올 지도 모른다고'라고 말해서 시나를 몹시 어지럽게 만들어, 무언가 아트를 부리는 건 오히려 셰리카 쪽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아-! 보경아..." "응!!!!!" 셰리카는 희한하게 시나가 '보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는 걸 굉장히 좋 아한다. 지금도 희희낙락해서 시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있잖아... 저쪽 세계에선 너도 이런 아트... 아니, 어제 내가 했던 것처 럼 책을 읽을 수 있었어. 언어는 틀렸지만... 아! 맞아! 왜 우리가 이쪽 세 계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보경아, 잘 들어봐..! 이런 언어야... Nanun... Yun Sina-igo..."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그녀 옆에서 그녀의 귀에 속삭인 듯, 뚜렷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집어...치워. 그런 언어로 말하면, 내 딸이 아니라고 했지..? 다시 한 번 더 그런 잡소리를 하면, 매우 맞을 줄 알아!' 그래서 순간, 시나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 를 돌아보았다. 셰리카가 물었다. "시나야? 왜 그래..?" 시나의 몸이 떨렸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아서. 아..." 시나는 셰리카를 보았다. "너, 너는 무슨 소릴 못 들었니?" 셰리카는 얼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리야 많이 나잖아? 옆 테이블에만 해도 아저씨들이 앉아서 떠들고 있 고.." "아니, 그런 소리 말고.. 어떤 여자가..." "응?" "...아.." 시나는 스스로 자기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게 뚜렷하게 들 리는 목소리라면 바로 옆에서 속삭여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때, 다른 사 람들마저 멀거니 서 있는 시나를 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심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왜 그래? 뭔데 그래?" "아냐. 아무 것도. 그, 그보다는 내가 아까 한 말 들었지? Nanun Yun Sina-igo..." 하지만 또다시 등골이 스멀거리는 그 끔찍한 느낌이 와서 시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나왔다. "...하아... 이, 이상하네. 며칠 동안 잠을 모자라게 자서 그런가. 어제도 책 읽다 늦게 잤고.. 모르겠다... 하아.. 그러니, 보경아... 이번엔 네가 말해봐... 저쪽 세계의 언어를.." 그러자 셰리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말? 방금 그게 말이야? 자, 잘 못 알아듣겠어. 난 그런 거 모르 는데..?" "뭐?" 시나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셰리카는 풀이 죽어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 그런 것도 알아야 하는 거야? 하, 하지만 정말 모르겠는걸. 무슨 말 인지 못 알아듣겠어. ...미안해." 시나가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언어를 잊어버리다니...! 말도 안돼." 셰리카는 또 한 번 더 사과했다. "..미, 미안해.." 시나는 너무 혼란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셰리카의 말도 말이었지만 방금들은 환청 때문에 기분이 끔찍할 정도로 나빴다. 시나는 말했다. "셰리카, 들어 봐, 내가 방금 말한 것은 '나는 윤시나이고..'라는 말이었어. 다른 말을 해 볼까? Urinun Jikum Siksa-rul Hago It..." 그때... 큰 소음이 들렸다. 폐부를 찌르며 귀청을 떨어지게 할만큼 거센 것... 끼이이이익 거리는, 긁히는 소리. 철제의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 리. 하늘에서는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벽이 다가오며 무언가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 증오와 적의에 달군 음성들. 무언가는 영구히 찢어져 버 렸다. 시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헉.." "시, 시나야? 시나야, 왜 그래?" "헉.. 헉..." 시나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깜짝 놀란 셰리카는 일어나, 시나 곁으로 와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시나야? 왜 그래!" 시나의 눈과 귀와 코, 입 속에서 무언가가 쾅쾅 진동하고 있었다. 시큼하 고 역한 것들이 넘어와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나는 이것들 을 멈추고 싶었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 줘. 제발.. "...엄...마.." 이 미칠 듯한 공포... 그리고, 이 미칠 것 같은 외로움... "응? 뭐라고?" 시나는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이 미칠 것 같은 슬픔 속에 제 발 날 버려 두지마... "...헉헉.. ...잘못.. 했다고." 제발... 아무라도 날 구해 줘... "뭐..? 뭐라고?" 난, 여기에 살아 있어. "헉..." 시나는 자기 목에 둘러진 셰리카의 팔을 꽉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 히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 눈은 은색이었고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녀는 토해내 듯, 자신의 친구 이름을 불렀다. "...셰리카...!" "시, 시나야...?" "도, 돌아가자. '칼루스온'... 그곳으로... 여기는 이상해. 지내면 지낼수록 이상한 일들이 생겨. 차가운 것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 영원히 잊 어버려야 하는 것들... 더 이상 있다간 미치고 말겠지..." 엘야시온 가디엘이 말했다. '칼루스온'이란 미지의 세계지. 엘야시온 대대로 내려온 전승으로만 알려 진 세계. 그 존재조차 불명확한... 그러나,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몇몇 증 거들로 확실해. 알고 있나.. 이 온 우주... 엘야시온뿐만 아니라, 저 검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모든 별들을 아우르는 우주엔 온갖 물질들이 다 있지.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물질들... 어떤가, 칼루스온의 소녀여. 그대는 이 우주에 보이는 물질이 많다고 생각 하나 보이지 않는 물질이 많다고 생각하나..? 여기서 '안 보인다'는 것은 거리가 너무 멀거나 어떤 것에 가리워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 로의 '안 보이는 물질'이지. 바로 곁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모르겠다고.. 하하... 솔직하군. 칼루스온...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소녀여. 이 온 우주엔 보이 는 물질 보다, 보이지 않는 물질이 훨씬 더 많다. 전승으로 보면 이 우주 엔 보이는 물질의 약 10배나 되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지. 알겠나... 알 수 없는 그것은 대대의 엘야시온에 의해 보통 '암흑 물질 (Dark Matter)'이라고 불려 왔고, 이것은 우리 엘야시온을 포함한 우주 최대의 수수께끼이지. 이것은 놀라운 꿈과 예지... 우주 물질의 90퍼센트가 안 보인다는 것. 그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겠나? 모든 꿈과 환상을 포함하고, 모든 영적 세계를 포함하며, 모든 사악한 것 들은 포함한 세계가 그것이지. 누가 우리 엘야시온을 '현실'이라 부르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계로 정의 하겠나? 오롯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우리들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우리는 진정으로, 아는 것이 하나 도 없으며, 모든 것은 오직 엘의 경륜 안에 있으며 이 온 세상이 그 측량 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지어졌음을 고백하네. 10퍼센트는, 인간의 영역이고... 90퍼센트는, 신의 영역. 그리고, 10퍼센트도, 90퍼센트도 아닌, 100퍼센트는 신과 인간의 영역이네. 우리는 90퍼센트를 위해 지어졌고, 신은 10퍼센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 지. 그것이 큰 비밀이네. 그래서... '우리 엘야시온'은 이렇게 자네에게 고백하네. 우리는 자네를 볼 수 없지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네의 존 재를 없다고 하지 않으며, 자네들 또한 우리를 볼 수 없겠지만, 우리의 존 재가 없는 것은 아니네. 이것은 엘야시온의 3가지 의무 중 하나이자 전승. <칼루스온에서 온 자를 엘이 살아 계신 증거로 보아 그에게 경의를 표하 고, 그를 그의 세계로 돌려보내라.> 가끔... 신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안 보이는 세계... 암흑 물질인 세계, 칼루스온에서 누군가를 데려오기도 하지. 우리는 그런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자네의 존재를 인하여 엘에게 영광을 돌리네. 우리의 만남은 예정된 것. 칼루스온은 '무(無)'라는 뜻. 자네는 엘야시온에 보이지 않지만, 난 자네가 존재함을 믿네. 자네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이지. 그리고, 그는 시나의 이마에 키스했다. 칼루스온 인이여, 존재하지 않는 자여, 우리 엘야시온의 축복을. 우리의 신성한 생명나무 야포스 딜리야의 축복을 받고, 성역에서 화염검 에 당하지 않은 자여... 그대는 엘의 의지로 보호받고 있으니, 자네는 이번 하누카의 날이 지나, 결계의 힘이 약해진 때에, 나의 능력으로 자네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 일세... 칼루스온이라 불리는 그곳. 암흑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로.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53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02 23:37 읽음:235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29회, 제 39막. 세 번째 엘의 날에. (5)> "멀쩡... 했다고요?" 겐트온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엘야시온을 보았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무척 생기 있는 표정이었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금의 날에, 응접실에서 이 야기를 나누던 때의 표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지금도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글세, 심한 부상을 당한 것은 루드랫 쪽이었다니까, 여태 무슨 이 야길 들었나." "하, 하지만 그 종속자는..." "그 종속자가 왜?" 이번엔 엘야시온 가디엘이 겐트온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겐트 온은 잔뜩 미혹 어린 마음을 억누르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원, 사람두... 실없기는... 그나저나 주말은 어떻게 보냈나? 왕궁에 코빼기 도 안 보이더군?" "그냥... 이곳 클로니아의 기후가 몸에 안 맞는지... 힐러에게 치료를 받느 라고요. 힐러 말로는 몸을 좀 따뜻하게 하라고 하더군요. 그 외엔, 잘 지 냈습니다. 엘야시온님." "그런가? 지금은 괜찮고?" "네. 괜찮습니다." "잘됐군. 앞으로는 할 일이 많을 테니, 건강을 잘 챙겨두게. 그나저나 오 늘도 금식기도를 할 참인가?" "네. 그건 저의 의무이자 기쁨이니까요." 엘야시온은 빙긋 웃었다. 랍오니 하온 하겐트가 엘의 날 오후면 일체 음 식을 먹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 보통 랍오니나 성직자들은 카할에 나와서 자기가 기도하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길 좋아하는데, 랍오니 하겐트는 원체 성품이 겸손하기 때문에 자신 의 집에서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예전엔 이것 때문에 오해도 많았다. 랍 오니 하겐트는 예배가 끝나면 소 순례라든지 아가트 연구를 뿌리치고 자 기 집으로 곧장 돌아가 버리니, 사회 봉사라든지 성전(聖典) 연구를 중요 시하는 뭇 사람들에게 많은 욕을 얻어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랍오니 하겐트의 신앙심 깊고 겸손한 행동이 어떻게 우연히 알려지고 나서는 그 의 신앙과 봉사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랍오니 하겐 트는 평소에 불쌍한 이들을 몇 배로 돕고, 자신의 물건을 기부했던 것이 다. (아마 이것이 수네드리온에 강력하게 어필해 젊은 나이에도 수네드리 온 회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 유추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엘야시온 가디엘은 흐뭇했다. "그래. 자네처럼 신앙이 돈독한 랍오니는 힐라토 한 세계 뿐 아니라, 엘야 시온 온 세계의 자랑이지. 하지만 힐러가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면, 너무 찬 곳에서 기도하진 말게. 이곳은 참 춥거든." "...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왕족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난 것이 몸에 안 맞은 듯, 예배를 드린 후 곧바로 왕궁으로 가서 낮잠을 잔다, 그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한다 하면서 마차에 오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남자가 엘야시온과 겐트온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이봐, 하온 하겐트!! 자네,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군!! 이럴 수가 있어?" "칼리안님..." 붉디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였다. 겐트온 은 허리를 숙이고 그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율르스는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불만스럽게 말했다. "자네가 황금의 날에 나한테, 그 이상한 것을 떨쳐 놓고 가는 바람에 내 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알아?!" 겐트온은 조금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무슨 말씀인지?" "하온 하겐트! 자네 또 그, '난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 자넨 아무 것 도 모르기에는 눈치가 너무 빨라!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아?! 솔직히 말해 봐! 그 여자 나한테 떼어놓고 간 거지?!" 겐트온은 이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지나칠 정도로 감이 좋다. 그와 접촉하면서 매 번 느끼는 사실이다. 마치 동물 같은 직감이다. 계산이나 이성이 아닌, 느 낌으로 바로 그 자리에 가 있는 것이다. "...불쾌하셨습니까? 전 그저... 지내다보니, 괜찮은 레이디 같고 해서, 소개 해 드린 것인데. 그 후에 전, 몸이 안 좋아서 숙소로 돌아가느라...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때 칼리안 율르스의 시종장 하온 하노크가 뒤에서 한숨을 푸우욱 내쉬 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다 그에게로 돌아갔는데, 율르스는 코 방귀를 뀌더니 그런 자신의 시종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금 겐트온에게 말했다. "참 나...! 자네는 그런 여자가 '괜찮은 레이디'라고 생각하나?! 나쁜 일이 있었냐고? 맙소사-! 그 여자는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재난이었어! 생 각만 해도 기분 나빠! 계속 달라붙으려고 하지 않나, 그 느끼한 말투하 며!! 그 웃음소리도 끔찍했어!!" "하지만, 그때는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기에..." "그건, 자네가 그 여자가 흥미로운 여자라고 말해서 그런 거지!!! 정말, 자 꾸 모른 척 할거야?! 내가 여자한테 '흥미롭다'는 표현을 쓰는 건 어떤 경 우인지 알 거 아냐! 저번에 하페일을 소개 시켜준 공이 있어서, 자네의 여자 보는 안목을 믿었더니만, 에잇!!!! 이 여자는, 검 만드는 데 대한 지 식은 손톱만큼도 없는 주제에, 무슨 별 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고!!!!" 하온 하페일. 그녀는 베르노크 왕족의 피가 섞인 장인(匠人)으로 지금 이 스파한의 유리 공장에서 율르스를 도와 일을 하고 있다. 그녀 덕분에 유 리 연구에 많은 성과를 거뒀다는 말인데... 때문에 칼리안 율르스는 하페 일을 소개시켜준 하온 하겐트를 많이 신뢰하고 있었다. "난 또, 자네가 '그 녀석' 같은 사람을 소개해 주는 건 줄 알고, 흐뭇해했 더니, 도대체 뭔가?!" ...레이디를 '녀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칼리안 율르스의, 나름대로 여자에 대한 존경과 친근감의 표시일 것이다. 적어도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로 인 정해 준다는. 그러므로 '녀석'도 안 되는 '여자'는 율르스에겐 분노의 대상 이었다. 그걸 아는 하겐트는 또 한 번 더 어색하게 웃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야, 칼리안 님처럼 여자 보는 안목이 좋지 못해서... 가리 지 않는다고 할까요. 하하..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시종장, 하노크가 뭐라고 중얼대기 시작했 다. "...흥... 죄송하다는 말은, 칼리안 님이 아닌 그 여자 분에게 해야... 중얼, 중얼.. 끄응.." 그 뜬금 없는 소리에 엘야시온과 겐트온은 하노크를 보았다. 무언가 상당 히 불만인 듯, 입술을 쑥 내밀고 감히 왕족의 대화에 낀 것 아닌가? 예의 를 모를 그도 아닌데 저렇게 투덜대는 것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 뻔했 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율르스가 짜증을 냈다. "뭐야...?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하노크? 그럼, 내가 그때 당시 어쨌어야 하는 거야?! 도와달라고 그렇게 신호를 보내도 아는 척을 안한 건, 그대잖아?!!" 하지만 그래도 하온 하노크는 표정을 안 풀고, 눈을 45도 각도로 내리뜨 며 투덜댔다. "...원 다른 세계 분들 보기 민망해서... 그 분들이 예의가 있는 분이라, 소 문을 안 퍼뜨려서 이 정도.. 그 때 생각만 하면 내가 등골이 오싹... 그런 데 사과도 안 하시다니... 중얼, 중얼...쳇.." "뭐라고!! 난 사과 안 해! 날 귀찮게 한 건 그 여자 쪽인데, 내가 왜 사과 를 해?!" 이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엘야시온 가디엘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온 하노크,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난 그때 자리에 없어서... 그러고 보 니 요 며칠 율르스의 이름이 심심지 않게 들리던데.. 황금의 날에 무슨 일 이 있어서 그랬군. 뭔가?" "말씀 드릴 필요 없어! 하노크!!!" 아무래도 어딘가 찔리는지 율르스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는 데, 이번엔 하노크가 코방귀를 뀌었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45도 각도 아래로 뜨고 있었고, 엘야시온께 사실을 고할 때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 엘야시온님. 이 미천한 것, 명을 받들어 감히 말씀 드리자면, 황금 의 날 저녁에, 우리 파이오니온께서,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레이디의 엉 덩이를 걷어 차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깔끔하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다행히, 테라스 구석에서 벌어진 일이라 몇몇 왕족들 외에는 보지 못했 지만, 그 레이디의 정신적 충격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후,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는 엘야시온 가디엘과 길고 긴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칼리안 파이오니온의 평소 지론이, '여자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힘'이라는 개념을 육체적인 힘으로만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정신적인 힘까지 생각하면, 여자들은 [사막과 하나된 자]보다 더 두려운 상대다. 그 수다에 울고불고 하는 것까지 겹쳐지면 더욱 그렇다. 그땐 너 무 귀찮은 나머지 생각도 안 해보고 원하는 것을 해주게 되기 마련이니 까. 그러니, 그 전에 재빨리 퇴치해야 한다. 그걸 위해선 이 한 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였지만... 엘야시온의 긴 잔소리에는 어쩔 수 없었 다. 아무리 귀찮게 느껴지더라도... 다음부터는 절대로, 타 세계에서는 남자든 여자든(여자는 특히!) 걷어차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야 했다. 칼리안에서는 파이오니온의 권세가 막강해 아랫사람을 걷어 찰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모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고, 잘 하다가는 그런 사소한 일로도 형제 세계끼리 다툼이 일 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도저히 승복할 수 없지만, 하는 수 없이 율르스는 그 귀족 여자에게 꽃이라도 보내 사과할 것을 약속했다. 테라스로 가자고 졸 라대기에 갔고, 어두운 구석에서 그에게 몸을 기대고 감히 입술을 가져다 대려고 했던 여자지만, 말이다. ...하여튼 율르스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 었다. 한편 겐트온은 뜻밖의 해프닝 때문에 칼리안 율르스의 추궁이 짧은 시간 안에 끝나 다행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는, 그 여자를 칼리안 율르스에게 '버리고' 갔던 것이다. 그의 목적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목 적은 덕분에 훌륭하게 이룰 수 있었다. 일의 성공... 게다가 그 어리석은 여인이, 엉덩이를 걷어 차였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생각하면 몇 박 며칠이라도 웃을 수 있도록 우스웠다. 하지만, 지금 겐트온은 솔직히 별로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엘야시온 가디엘에게 너무나 의외의 말을 들어 놀라고 있었던 것이 다. [...멀쩡했다고...?] 그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은 제대로 된 해제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정신에 장애를 일으킬 만한 환술이었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기로 자신과 도비온은 그 여자 애를 분명 그대로 내버 려두고 왔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정신을 잃고 있거나, 깨어 있더라도 말을 못할 정도로 멍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상인 것이다. 정신이나 육체가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어 있더라도 '살아' 있으니 그걸로 아버지의 명령도 지킨 셈이다. 헌데 '멀쩡했다'니.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로는 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 신적인 것도 괜찮아 보였다는 것이다. '참 쾌활한 소녀'였다고 말한 것이 다. 거기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녀를 말할 때 보인 엘야시온 가디엘의 표 정이었다. 최근 몇 년간 엘야시온 가디엘이 저토록 기분이 좋아 보였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지나가면서 말한 '후후.. 이젠 돌아오게 할 수 있어. 엘의 의지를 알아 기쁘네'라는 말. 도대체 무슨 뜻인가? 겐트온은 무척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무언가 그 가 통제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하나, 하 나 다듬고 섬세하게 조각하듯 깎아 세워온 계획... 그런 그들의 계획엔 하 나라도 허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사실이라도 낱낱이 그 의미 를 밝혀야 했다. 특히 보호물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보호물 의 종속자... 그녀가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에 환술에 면역이 생겨 특별히, 그렇게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 것인지... 아니면... 아니면... 그는 누군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 도미니온즈여-!! 크아아악!!!! 나의 종의 힘으로 네가 머무르고 있는 그 육체를 죽여주마!! 이 인간들이 날 약올린 것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치러 주겠지만...!!! 그 전에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이 아니다!!!! ...엠벨루스의 흉악한 목소리. 그의 귀에 다시금 이것이 들려왔다. 도비온 의 육체를 담보로 삼고 있는 더러운 그것. [...내일 찾아가 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도비온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엉망인 주말이었지만, 마음이 차츰 안 정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쯤이면 겐트온이 베쓰-엘 카할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는 오후 내내 기도한답시고 자기 숙소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도비온이 마음놓고 베쓰-엘 카할의 오후예배에 갈 수 있도록. 그는 옆 테이블 위에 놓인 '거울'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점 차 눈과 머리칼의 색이 밝은 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옅은 갈색의 눈은 푸 르스름한 빛으로, 탁한 황토색이었던 머리칼은 빛을 되찾아 점점 금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그는 눈을 찌푸렸다. 이번엔 겐트온이 클로니아에 있어 변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변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 다. 어차피 평소 때는 이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니까, 눈과 머리색 이 심하게 변하면 주위 사람에게 설명할 말이 없어 불편한 건 자신인 것 이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도바님." 인사를 꾸벅 하며 들어온 자는 도비온을 대신하여 식당의 주인으로 통하 는 슐라츠였다. 유일하게 그의 저택에 와도 좋다고 허락 받은 자였는데, 그런 그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도비온은 인상을 사뭇 찌푸렸다. "...왜 오늘 같은 날 여길 온 거야?" 하지만 평소처럼 그렇게 심하게 질책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엘의 날 오 후엔 그가 어느 정도 관대해 진다는 것을 아는 슐라츠는, 그래서 안심하 고 말했다. "그것이, 저... 킬 녀석이 제발 도바 님을 뵙게 해 달라고 시끄럽게 졸라대 는 통에 이렇게 왔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좀 귀찮게해야죠. 몇 번 쥐어박 아도 도저히 안 듣고, 아주 독종입니다. ...저어, 어떡할까요? 만나시겠습니 까?" "뭐라고? 내가 왜 그깟 녀석을 만나?! 거기다 엘의 날 오후엔..." 하지만 그 순간 도비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윽 고 말했다. "어제 깨어났다는 이야긴 들었지. 그리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고. 흥... 태 생이 비천해서 그런지, 페이스 힐러에게 치료를 받고도 늦은 회복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는데, 시끄럽게 졸라댔다고?" 그는 입술을 삐뚤게 하고 웃었다. "살만해 졌나보군, 흥! 그래, 어떻게 보였지?" "네. 오늘 아침엔 아주 팔팔합니다. 그 녀석을 대하느라, 제 힘이 다 빠졌 거든요." 확실히,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많이 지쳐 보였다. "그렇게 무언가 하나를 끈질기게 졸라대는 놈은 보다보다 처음 봤습니다. 배를 다친 놈이 어떻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댈 수 있는지... 미친 녀석입니 다. 지 몸 절단 나는 걸 생각 안 하더라고요." 도비온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힐끗 거울을 보았다. 눈은 이제 잠깐 보기에도 푸른 빛, 머리칼은 뚜렷한 황금색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변화를 익히 아는 슐라츠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그냥 담담한 표 정이었다. ...이 정도에서 멈춰주면, 괜찮겠는걸. 그렇게 생각한 도비온은 한 번 더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이 자신의 쌍둥이 형 겐트온과 놀랄 만큼 닮아 보였다. 사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났던 것이 다. 한결 온화한 표정이 된 도비온은 말했다. "..좋아, 찾아가 보지. 지루한 오후일텐데, 무언가 재미있는 일도 괜찮지." 그리고 그들이 도비온의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오후의 시각이었다. "..도, 도바 님..." 키르마.. 킬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노력했다. 복 부를 다쳐 낑낑대고 있으니 웬만하면 그냥 누워있으라고 말해 줄 법도 한 데 도비온은 그런 그를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헉헉.. 도바님..." 하지만 킬은 도비온의 차가운 표정도 개의치 않고 그의 이름만을 애타게 불렀다. 그때 한 부하가 의자를 갖고 들어와 도비온 옆에 놓았다. 거기에 앉은 도비온은 몸을 뒤로 기댔다. 후드를 깊숙이 눌러써 눈썹 밑으로는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나를 불렀다고? 건방지구나, 킬. 넌 너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줬다고, 한없이 타고 기어오르면 곤란해. 다음에도 은혜를 받고 싶거든, 적당히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지 않겠나?" 다른 부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방을 나가고 있었다. 내내 킬 옆에서 그를 간호했던 게이드도 안심한 눈으로 자신의 주인과 킬을 보고 방을 나 갔다. 그들은 '엘의 날 오후'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자기들 주 인이 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침 무렵 식당은 킬이 지르는 고함소리로 시끄러웠다. '도바 님을 만나게 해 줘!! 아아악!!! 이 자식들아!!! 도바님-! 도바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쩌렁쩌렁해서 모처럼 한가롭게 쉬고 있던 자들은 북받치는 짜증을 느끼 며, 킬을 잠재울 방식... 그러니까, 뒤통수를 내리쳐서 다시 재울까, 아니면 독약을 먹게 해서 다시 재울까, 그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 게 식당의 사람들이 점차 이성을 잃어가고 있을 무렵, 마침내 도비온이 나타난 것이다. 일개 부하를 위해서 별일도 없는데, 엘의 날 식당에 오다니... 평소의 그라 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좋은 음식이라든지 좋은 의복이라면 슐 라츠를 통하여 종종 나누어주었지만 그 자신이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 었다. 하지만 부하들은 그렇게 드물게 나타난 그의 주인이 평소와 다르게 얼마나 친절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방을 나갈 수 있었다. 한편 킬은 창백하고 해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먹은 것이라 곤 하나도 없으니 당연했다. 내장이 상해서 일 주간은 딱딱한 음식은 먹 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그가 밀집을 깐 축축한 침대에 누워서 도비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이라고는 해도 검은 것이 떨어지는 통나무 벽이고 가구도 달랑 침대와 테이블 하나라, 도저히 중한 부상을 입은 환자를 눕 혀 놓았던 곳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보통 사람들의 느 낌이고, 키르마는 원래 이보다 나을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살았으니까 이런 방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단지 그는 이글이글 타는 눈, 그러나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도비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