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야시온 가디엘은 찌뿌드드한 얼굴로 율르스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 다. "그래서 말이죠, 엘야시온님! 결국 스테인드 글래스란 그런 겁니다! 유리 를 만드는 과정에서 구리를 섞으면, 유리는 루비처럼 번쩍거리는 붉은 색 을 냅니다. 철을 섞으면 에메랄드와 같은 초록빛을 내죠. 하하.. 진짜 보석 처럼 힘을 담는다던가 하는 저장소의 역할을 어림도 없지만... 펑-! 터져 버려서 말이죠. 그래도 겉보기엔 진짜 보석처럼 아름답습니다. 아! 저번엔 로트라에서 캐온 광물을 섞어봤습니다. 깊은 바다 속에서 채취한 것이라 고 하는데... 하하하! 과연! 그 유리는 자신의 근원이 로트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듯, 글세... 신비로운 보라색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리고 율르스는 자신의 눈빛처럼 빨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포도 주가 담긴 잔을 보고 말했다. "오! 보십시오, 엘야시온님. 이 유리잔을요!" 율르스는 손톱으로 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거기선 듣기에도 청명 한 소리가 울렸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소리, 이 광채, 그리고 이 묵직한 느낌까지. 이런 건 창에 쓰이는 유리와는 확실히 틀리죠? 크리스털 유리라... 정말 이름 그대로 수정과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휴우... 이런 것을 보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죠." 그는 손안에 있는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런 것에 비하면, 스테인드 글래스 같은 것은 아주 초기 기술일 뿐이죠. 하지만 크리스털 유리에 관한 비밀은, 보석을 만들어내는 권능을 부여받 은 자, 후긴과 무긴의 라벤스 크라프트(Raven's Craft)... 현 드워프들의 수장만이 알고 있으니까... 사실, 드워프들이 이런 물건을 선보이지 않았다 면 우리는 아마 이런 것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몰랐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엘야시온님. 우리, 이스파한의 공장에선 저런 놈까지..." 율르스는 바로 앞에, 더욱 화려하게 세공 된 크리스털 과일 그릇에 눈길 을 던졌다. "...라벤스 크라프트도 감탄할 만큼, 저것 이상의 멋진 놈을 꼭 만들어 보 이고야 말 겁니다. 어떻게 하면, 유리 속에 저런 빛을 가둬놓을 수 있는 지..." 율르스는 유리잔에 반사되는 빛이 눈부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후후... 유리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유리에 대한 기술을 발전시킨 그들을 보석의 종족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하지만, 우리는 그 터부 많고 배타적인 종족에게서 유리에 관한 기술 을 알아 낼 수 있었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긋 웃었다. 그는 율르스가 루세에서 수학할 때, '역 사'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리에 관한 기술 을 '알아낼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눈앞의 이 사랑스러운 소년은 알고 있을까? 일찍이 '유리전쟁'이라 불렸던 그 전 쟁을? 그것은 '알아냈다'라고 단순히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사 건은 아니었다. 옛날, '유리'라는 드워프들의 고유기술을 탐낸 어느 베르노 크 파이오니온이, 당대 엘야시온의 암묵적인 허가 아래 몇몇 세계에 협력 을 요청하여 베르노크의 드워프 본거지를 쑥밭으로 만들다시피 하며 '강 탈'한 기술이 유리에 대한 기술인 것이다. 하긴... 인류역사상 무언가를 얻 기 위해 타 종족을 그런 식으로 강탈한 예는 얼마든지 많았다. 휠마즈의 노움*(gnome)에게서 만 캐럿 짜리 청백색 다이아몬드 엑셀시어 (Excelsior)를 '얻기' 위해서, 네르세바의 엘프에게서 그들의 수림(樹林)도 시 레버넌에만 자라는, 나무들의 왕자, 레버넌 삼나무 수백 그루를 '얻기' 위해서... '알아낼 수 있게 되기'까지, '얻게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피가 흐른 것이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이젠 크리스털 과일 그릇을 보며 싱글 벙글대는 율르스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율르스가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러니, 엘야시온님,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이런 정도의 기술을 우리도 틀림없이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 후... 크리스털... 그래요. 유리 검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끝나고 흡족할 만한 수준이 되면, 하페일에게 이것에 대해 연구해 보라고 시켜야겠습니 다. 칼리안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투명한 모래들'이 자라고 있으니까 요. 앞으로 칼리안은 유리 세공품에선 드워프들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강 력한 기술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패기가 넘치는 말투, 그리고 자신감. 필시 저 대부분은 젊다는 것, 아직 경험이 없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거의 200년의 세월을 살아 온 엘 야시온 가디엘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바쳐야 한 다. 완벽한 무(無)에서 얻어지는 열매란 없다. 무언가... 시간과 노력... 때 로는 타인의 수고와 시간을 뺏어서라도...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내놓을 경우에만, 인생이란 거대한 나무는 바라던 열매를 그 자신에게 내어놓는 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택의 갈래 길에 서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로 간 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 인가? 어디로? 왼쪽과 오른쪽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옳은' 선택 인가? 그렇게 망설이며 선택하는 길. 하지만...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얻은 것보다는 차라리 잃어버린 것이 더욱 가치 있 는 것이었다는 '진실'과(혹은 '착각'일지라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상실 감이란 언제나 있는 것이다.) 후회를 곱씹게 되는 때... 최선의 선택을 하 더라도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건 가장 서글픈 인생의 최 고조이다. 그 손에 놓인, '무언가'를 바쳐 얻은 열매는 그 빛과 모양이 얼 마나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탐스러워 보이는지. 한없이 달콤한 열매 여... 그러나 그대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대는 그대를 낳은 자에게 무엇을 제공하여 줄 것인가? 새로운 기력? 혹은 쏘도록 쓰디쓴 맛? 그것은 선택 과 선택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젊음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뿐이 다. 단순히 선택을 적게 한 때라는 것. 선택의 권한이 아직도 많이 남아는 때라는 것.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가고, 결국 아무 선택 의 여지도 없이 자신이 거둔 열매를 맛보아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달콤 한 맛이든 먹고 쓰러지게 되는 독한 맛이든. 엘야시온 가디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어떡하면 좋을까? 누가 첫발을 내딛기 전에 이것이 올바른 길 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현명한 농부가 어느 가지를 쳐내야 만, 그리고 어느 꽃을 쳐내야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 '그 때'가 왔을 때... 난, 나의 손에 들린 열매를 보고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 율르스는 과일 그릇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먹다가 엘야시온 가디엘 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그는 엘야시온 가디엘이 과일에 대해서 말하 는 줄 알고 경쾌하게 말했다. "하하... 엘야시온님, 가지치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취미로 과 일나무라도 키우고 계신가요? 흠... 글쎄요? 저번에 네르세바 데벨리스님 의 말씀을 들어보니, 나무가 훌륭한 열매를 맺게 하려면, 수분이라든지 꽃 이 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튼튼하게 자랄 것을 위해서, 나머지를 가지쳐내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뭐... 저로서는, 되도록 많은 열 매가 맺히면 좋은 것이 아닌가 했는데, 데벨리스님 말씀으론 모든 열매를 다 거둘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선택을 해야한다고... 하하... 그러니, 엘야 시온님도 이러니 저러니 생각하지 말고 팍팍 가지를 치세요. 뭐, 초보자이 실테니, 실수로 중요한 가지를 쳐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을 미리 두려 워한다면, 결국 어떤 열매도 맛볼 수 없겠죠.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율르스의 말에 가디엘은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율르스는 말을 마치 고 사과를 으적으적 씹다가 가디엘이 자신을 쳐다보자, 마주보고 싱글 웃 었다. 그 태연한 표정에 마침내 가디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두려워하다간 결국 어떤 열매도 맛볼 수 없을 거라고? 하하 하... 율르스... 맙소사." 율르스는 가디엘이 웃자, 덩달아 빙긋 웃었다. "하하하... 네. 나쁜 열매도 골치지만, 열매가 전혀 없는 것도 문제죠. 아무 튼 선택을 할 때는 확실히 선택해서 가지치기하세요. 그러나 저러나, 역시 노년엔 나무 키우기가 썩 괜찮은 취미죠? 저희 부모님도 지금 오아시스에 있는 정원에서 야자수랑 기타 등등의 것들을 키우고 있는데... 그것들이 죽으면, 꼭 제 탓인 듯 그러시는 거예요. 환경설정을 잘못했다고... 참 나... 아무래도 이번에 네르세바 데벨리스 님을 만나면 야자수랑, 대추야자, 로 뎀 나무 죽지 않게 키우는 법 좀 적어가야겠어요. 믿어지십니까? 엘야시 온님? 그것들은 그냥 물 조금만 있으면 사막 한가운데 굴려놔도 쑥쑥 자 라는 놈들인데... 우리 어머니가 손만 대면 당장 시들어버리니... 하아- 도 대체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아..! 엘야시온님도 키우고 있는 나무가 죽으 면, 괜히 남 탓하지 마세요. 초보자라서 뭘 가지치기 해야할지도 모르신다 면, 괜히 자존심 내세우지 마시고, 정원사에게 가서 꼬박꼬박 물어보시고 그대로 하세요. 괜히 나무가 제대로 안 자란다고 우리 어머니처럼 스피릿 을 불러내고 야단이면, 어느 나무인들 제대로 자라겠어요?" 아니, 그런데 이놈이~~! 엘야시온 가디엘은 소리를 빽 쳤다. "야, 이놈아!! 내가 에그리스냐?!! 나무가 안 자란다고 스피릿을 불러내 게?! 으이구~! 에그리스는 아직도 그 성질을 못 버렸구만!! 그리고 '노년' 이라니! 내가 어딜 봐서 '노년'이냐? 나처럼 창창한 '노년'도 있더냐? 겉보 기는 너보다도 젊어 보인다, 이놈아!" [응? 엘야시온님이 겉보기는 나보다도 젊어 보인다고?] 율르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가디엘의 말에 진심으로 놀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인식 가운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언제나 변치 않는 그 모습 그대로 의 '엘야시온 가디엘'이었다. '젊다, 늙었다', 혹은 '키가 크다, 작다'로 표현 될 수 없는, 그냥 '엘야시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엘야시온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 놀랐다. 엘야시온님이 자신과 무언가 비교 할 수 있 는 건더기가 있는 분이었던가? 여기서 율르스는 새삼스럽게 엘야시온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아니다. 엘야시 온님이 나보다도 젊어 보인다니... 확실히 엘야시온 가디엘은 겉보기만 본 다면 완전히 율르스 또래로 보이지만. 그래도 말투라든가, 눈빛... 하여튼 풍기는 분위기는 절대 범상치 않다. '육체는 영혼을 길러낸다. 그러나 그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며, 동일 하게 신성하다.' 이것은 율르스가 루세에서 배운 말이었다. 이 말도 율르 스 자신의 느낌을 뒷받침해주지 않는가? 엘야시온의 육체... 그 육체는 물 론 젊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는 저, 영혼. 그가 저 신비로운 눈동자에 그림자처럼 내 비추고 있는 저 영혼은 그의 육체에 또한 '젊음'을 넘어선 무언가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인간이 타고나는, 혹은 갈고 닦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 나가야할 '세월'의 문제인 것이다. 외모너머의 것... 율르스는 웃음을 머금었다. "에이... 엘야시온 가디엘님... 엘야시온님은 겉보기에도 '노년'으로 보이세 요. 하하하..." 전혀 사심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하는 율르스였다. 덕분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젓고 말았다. "하... 율르스... 너도 참. 겉보기에도 '노년'으로 보인다니? 그 말이... 때에 따라서는 나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엘야시온 가디엘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거기다, 듣기에 따라서는 그건 엘을 모욕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젊음은... 엘이 장차,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주겠다는 약속이자, 상징인 것이니까. 헌데, 너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한 것이 냐? 생명나무 야포스 딜리야의 상징인 나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는 것 을..." 율르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욕이요? ...?... 제 말 때문에 불쾌하셨습니까, 엘야시온님? 하지만 저는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도 식물을 키우는 일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참을성이 굉장히 많은 사람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이젠 거의 포기할까 하고 계시더라고요. 흐음..? 뭐, 어쨌 든 엘야시온님은 오래 사셨으니, 오래 사신만큼 그런 티가 나는 것도 당 연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루세에서도 어떤 랍오니가 와서 강연했잖아요? 원래 영혼은 계속 성장하려는 습성을 갖고 있고, 그래서 '노년'의 장성한 영혼은 세월 가운데 엘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요. 뭐... 엘 야시온님의 영혼도 상당히 장성했을 테니... 그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미 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엘야시온이었다. 그는 묘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율르 스를 다시 한 번 더 관찰했다. 율르스는 이제 자신들 옆으로 와서 포도주 를 권하는 시종에게 잔에 새로운 포도주를 따라 받고 있었다. 칼리안 파 이오니온 율리시스... 엘야시온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솔직한 붉은 눈의 소년. 단순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가끔은 가슴이 섬뜩할 만큼 올바른 소리 를 한다. 악의도 선의도 없다. 그냥 솔직히 말할 뿐... 자신도 모르게 솔직 하다고 해도, 인간 자체가 삐뚤어진 경우는 듣는 이에게 엄청난 불쾌한 느낌을 주겠지만,(그래서 그 솔직함이 그에겐 치명적일 정도로 악운이 되 기도 하지만,) 율르스 녀석은 솔직해도 괜찮을 만큼 '단순'하다. "쿡쿡..." "...? 엘야시온님? 왜 웃으십니까?" "이 복잡다단한 왕궁에서... 하하... 이런 정도로 단순할 수 있는 인간이... 하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하.." "네?" "후후.. 율르스, 너의 그 단순함은... 아마도 상대에게 잘 보일 필요라든가.. 너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는 자신감에서 나오겠지." 엘야시온 가디엘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율르스를 바라보았다.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가 아마 그것일 것 이다. "율르스... 내 아들아. 너는 네 장점을 잊지 않도록 해라. 엘께서는 네가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다. 그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설혹 어떤 일이 있어 네게 있는 천부적인 그 성질을 빼앗으려는 것이 있거든,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율르스는 가디엘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 야시온 가디엘의 표정과 말투로 보아 좋은 말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 다. "하하하.. 네!" "후후.. 좋아. 흠, 그렇다면 이제부터..." 여기서 엘야시온의 눈은 번쩍 빛났다. "율르스. 널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윽..!] 율르스의 표정이 웃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율르스 자신을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하고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우울하게 계시기에, 점차 긴장이 풀려 서... 신나게 말했더니만...! 지금은 완전히 편안한 표정의 엘야시온이, 완 전히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율르스! 내가 아까 이 연회장으로 들어오다가 가슴이 내려앉아서 혼났 다! 왜 그런지 알고 있겠지? 에잉~! 쯧쯧쯧!!!" 율르스는 진땀을 흘렸다. 아까 먹은 포도주와 과일이 뱃속에서 자리를 잘 못 잡고 있는 듯... 매우 거북한 느낌이다. "하하.. 하. 엘야시온님, 레이형을 찾아가 말한 것은 그냥..."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물론 그것에 대해서도 너와 긴 이야기를 나누어 야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유리 검'에 대한 것이다. 그것에 대한 것들 은 극비라는 것을 내가 누차 이야기했지 않느냐? 에그리스도 그다지 신중 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해 비밀은 매우 잘 지켜주었다!" 율르스는 당황했다. "음... 저도 나름대로 비밀을 잘 지키고 있는데요?" "아이구~! 이 녀석아! 비밀은 무슨 비밀이냐!!" 그때 저 쪽 테이블에서 뷰겐트 파이오니온 제로미스가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엘야시온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는 몹시 피곤해서 이만 제 숙소 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응? 아, 그러게나." "그럼, 이만.... 평안한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칼리안이여. 그 대도 좋은 밤이 되기를." "아, 네. 뷰겐트님 평안한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숙소로 가려던 제로미스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 다. "아, 자네의 취미생활은 잘되고 있나? 요전에 내가 이스파한의 공장에 들 렸을 때, 힘을 빌려준 것이 좋은 성과가 있었는지? 유리 검이라고 했지? 나중에 꼭 보여주게. 자네 어머니와는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이야기 를 했었지. 자네 어머니는 비밀 프로젝트니, 발전이니 하며 잠깐 언급만 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걸로 좋겠 지. 혼인까지 오고가며 힘을 요구할 정도였다면, 자네 어머니 성격에.. 아, 실례했네. 어쨌든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을테니.. 나도 이 나이가 되니 귀 찮은 일은 딱 질색이거든." 그리고 제로미스는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오가던 이야기도 있고 하니, 자네는 마치 내 아들 같지. 그러니 자네가 원한다면, 그런 가벼운 정도라면 얼마든지 힘을 빌려주지. 취미생 활이 있다는 건 좋지. 후후... 그럼 이만.." 뷰겐트 파이오니온 제로미스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엘야시온과 율 르스가 있는 테이블엔 썰렁함이 감돌았다. "...끄응..." 황당하다는 듯한 가디엘의 신음에, 율르스가 얼굴을 붉혔다. "..하, 하지만 엘야시온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 해선 상당히 고열의..." 그때 로트라 파이오니온 베다이스와 마이레스 파이오니온 가리테스가 이 쪽으로 왔다. 베다이스가 제로미스를 보며 말했다. "아, 저 사람- 같이 가자니까 먼저 가버리기는.. 엘야시온님, 저희도 피곤 해서..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게나." "평안한 밤 되시길. ...그리고 칼리안, 그대도 평안한 밤이 되길 빌겠네." "네, 로트라님. 로트라님도.." "아, 그러고 보니, 칼리안? 요전에 우리 세계에서 가져간 망간을 넣었더니 유리가 보라색으로 변했다고? 그렇군... 베르노크에서 그런 이유로 그런 쓸데없는 것을 수입해 갔군. 비밀로 하다니, 얄미운 걸. 망간에 대한 세금 을 조금 더 부과할까.. 아, 뭐.. 어쨌든, 유리 검을 보라색으로 만들어 보겠 다면 자네에겐 망간을 대량으로 공급해 주지. 유리 검은 강도도 문제지만 예쁘기도 해야지. 색은 보라색이 최고고. ..아! 그리고 모래가 필요하다며 얼마든지 말하게. 자네 세계의 모래와는 아무래도 무언가가 틀릴테니, 이 것저것 시험해 보도록.." 옆에서 마이레스가 인상을 썼다. "이보시오, 색에 대한 그런 편파적인 발언은 관둡시다. ...칼리안 율르스. 언젠가 유리 검이 완성되면... 흐음. 보라색 말고도 금색으로 빛나는 걸 연 구해보게. 흐음.. 어쨌든, 그게 완성되면 한 번 가져와 보게. 자스민 말을 들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더군. ....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하게. ...도와 주지." 마이레스 가리테스로서는 칼리안에게 던지는 말치고는 단단히 맘먹고 상 당히 후하게 말한 것이었지만, 두 파이오니온이 사라진 테이블에 감도는 공기는, 화기애애와는 전혀 연관 없는 썰렁하다 못해 북풍이 몰아치는 분 위기였다. 율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하.. 음.. 여러 분들에게 도움을 구하다보니.. 음. 하하..." 엘야시온 가디엘은 요즘 들어 주위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에 설마, 설 마 했지만... 이젠 매우 확실해 진 것 같았다. "끄응. 골치야... 기가 막히는구나. 율르스. 온 엘야시온 인들이 유리 검에 대해 말하고 다니는 느낌이다." "에? 설마요! 저는 조언이나 힘을 구하기 위해 몇몇 파이오니온 님들께만 '비밀리에'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호오? 그런 것이냐? 방금 상황이 그랬던 것이냐? 그럼, 너는 '비밀'로 말 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없이, 비밀인 줄도 모르고 떠드는 것이 문제 렷다?" "그건..!" "됐다. 율르스. 알고 싶은 것은 다 알았다. 그러잖아도 요즘 유리로 만든 검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히도 들리더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유리 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몹시 궁금했다. 헌데 방금 세 파 이오니온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가히 짐작이 가는구나." 그만 율르스는 풀이 팍 죽고 말았다. 괄괄한 그이지만, 명백히 드러난 증 거(?) 앞에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맨 처음, 자이온에서 파이오니온으로 책봉을 받고 엘야시온 가디엘에게 불려가 명령을 받은 것이 '검'에 대한 것이었다. 철광석은 매우 귀한 광물이다.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그것 에 대한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각종 보석에 대한 채굴권은, 긴긴, 구구 절절한 역사의 과정을 거쳐 상당량 인간에게 넘어왔지만... 철광석에 대한 권리는 아직도 노움들이 가지고 있다. 보석이야 인간들에게 매우 필요한 광물이지만, 칙칙한 철광석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별 필요가 없었던 것이 기 때문이다. 철은 휠마즈에서만 난다. 고로 열 두 세계 모두에서 나는 구 리보다 구하기 힘들며 적게 쓰이는 금속이 철이다. 철로 만든 것이, 청동 으로 만든 농기구나 무기, 도구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 실이지만, 그걸 가공하는 기술이라든지 벼리는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베르노크 외엔 전무후무한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열두 세계의 대장간 사람들은 별로 철에 대한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배울 수 있는 곳 자체가 없는 데다, 철에 무슨 원한이라도 맺혀 큰맘 먹고 베르노크에 가서 그런 신기술을 배워온다고 해도, 평생가 야 쓸데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석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 나게 비싸고 유지비도 굉장히 들어가는 철보다야 구리를 제련하여 놋쇠라 든가, 청동으로 만들어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돌, 혹 은 목조제품을 선호하는 것이다. 때문에 철에 대한 연구는 매우 낙후되어 있고 철광석을 선철로, 그것을 다듬어 강철로 만들어내는 그 신비로운 과 정에 대한 연구는 인간 중에서라면, 베르노크의 어느 하바티온 가문인가 에서 대대로 '예술의 이름'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 흙이 뚝뚝 떨어지는 자연 그대로의 철광석을 번쩍번쩍 빛나는 검으로 만드는 과정까지 모두다 꿰뚫고 있는 자들은 아까 율르스가 언급한 라벤스 크라 프트, 갈가마귀의 기술자라 불리는 드워프 수장이 다스리는 드워프 족뿐 이다. 그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검... 수 천년 드워프 족의 '사고(思考)' 와 '기억'이 담겨 있는, 그 강철의 검은 열 두 세계 프레미어 루이트의 검 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청동이나 그 밖의 어설픈 금속으로 만든 검 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찬란한 은빛의 광채(혹은 진한 푸른색의 광채)와 돌을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는 그 단단함, 그리고 날카로움! 그것은 정말 열 두 세계 음유시인들이 모두다 달려들어 칭찬으로 혀를 놀려도 모자랄 만큼 대단한 물건이다. '검기를 전혀 싣지 않아도' 상대를 벨 수 있을 정 도니, 검기까지 실리면 그 위용은 말로는 표현을 못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검기를 싣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루이티온은 없다. 루이티온 계급은 검 자체 힘만으로는 누굴 찌르거나 베지 않는 것이다. 고로, 강철이든 구리조각이든 검기를 실어낼 수 있는 적당한 금속 검, 검 기로 박살 나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 그런 검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검에 발현된 검기는 길게 뻗어나가, 우선적으로 목표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검은 검기를 싣는 도구일 뿐, 그 자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더구나 검기의 전도율(傳導率)에 관한 것이라면, 구리는 은 다음으로 강한 검기의 전도율을 가진다. 그러므로 루 이티온들은 어설픈 철검보다야 청동검을 훨씬 더 선호한다. 라벤스 크라 프트가 만든 것이야, 도대체 거기다 무엇을 섞는 것인지 청동검 이상의 강력한 전도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서 프레미어 루이트들의 검은, 금 속 왕이란 명칭까지도 갖고 있지만... 그 나머지 허접한 철검들은 영 아닌 것이다. 그 예로, '강철에 대한 예술'을 펼치는 베르노크의 하바티온 가문에서는 일년에 한번인가 두 번, 철로 만들어진 검과 농기구, 그 밖에 자질구레한 것들의 전시회를 하는데... 그것이, 일반인에겐 어떨지 모르나 루이티온들 에게는 절대 인기가 없었다. 호기심으로든,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괴짜기 질로든 거기서 철검을 사게 되는 루이트는 위와 같은 이유로, 얼마 못 가 비싼 돈주고 산 그 검을 거의 증오까지 하게 되는 데... 유지비나 무게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도대체가 이놈의 검은 사용할 때마다 검기나 팍팍 잡 아먹으니... 그리하여 검은 얼마 후 고이, 진열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더욱 운수 나쁘면 주인의 분노를 한 몸에 받아 부엌칼 신세, 혹은 부지깽 이 신세가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엘야시온 온 세계, 오직 하나뿐인 성전, 엘이 거하는 장소... 그 한 방에서 율르스는 대관식을 치른 지 얼마 안되어, 얼떨떨하기도 하고 방금 들은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서 말했다. [..?..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엘야시온 가디엘은 의자에 기대앉아 뭔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길게, 말하는 본인도 지루할 정도로 길게, 검을 만드는 일에 대해 설명했 는데 결국 그런 질문이나 하다니, 너무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흠. 그러니까, 검을 만드는 것 말이다.] [검을 만드는 것이요? 검이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루이티온들은 청동 검 으로 만족하고 있죠. 강철이라.. 그런 것에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잘된 일이죠. 철광석 따윈 휠마즈의 노움에게 영원히 줘버리십시오. 우리에겐 구리가 있잖습니까?] 가디엘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휴우. 그것이 아니다.] [...?... 응? 그럼, 무엇이? 검을 만드는 것이라니... 혹, 라벤스 크라프트가 제 루이트, 루오란에게 만들어준 칼리안 소드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 까?] [쯧쯧.. 율르스. 그렇게 지엽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넓게 생각해 보 거라.] 율르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넓게요?] [그래. 넓게 생각해 보거라.] [...음. ...그렇다면, 라벤스 크라프트가 만들어준 '모든' 프레미어 루이트의 검에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계속)================================================== *노움(gnome): 사실, 외전에서 휠마즈의 종족을 '호빗'이라고 말했지만... 그 후에, 그것이 고유 몬스터 명사가 아닌 톨킨 할아버지의 창작이라는 것을 알고...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몬스터에 대한 대부분을 드래곤 라자 에서 처음으로 알았거든요.^^ 드래곤 라자의 몬스터들은 참 멋지죠. 후 후..^^) 그것이 개인의 창작물이라면, 원래 대대로 내려오는 몬스터들처럼 자유롭게 모양을 바꾸는 건 안되겠죠..? --; 그런데 몬스터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던 결과... 제가 상상하고 있던 종족에 딱 맞은 종족을 발견했습니 다. ^^ '노움'이라고...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에서 파생된 이름을 갖고 있는 몬스터인데... 대지와 산의 주인이며, 드워프 뺨치는 난쟁이이며(^^;) 그리핀이나 용처럼 보물을 지키고(오오..^^), 황갈색의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다니고(감동이다! 휠마즈는 노란색의 세계! 누가 '휠마즈'에 맞춰준 것 같다... TT), 인간에게 금속이 매장된 정확한 지점을 가르쳐 주는 녀석 들이랍니다.^^ 톨킨 할아버지의 호빗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노움'보다 더 정확하게 제 상상과 맞아떨어지는 종족은 없으므로... 외전의 '호빗'은 버그라 선언하고..(퍼억!) 음. 음.. --; 휠마즈의 종족은 이제부터 '노움'으 로 명명하겠습니다...^^ 혹, 호빗의 열렬한 매니아 분이 계셨다면...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호빗'을 들먹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럼, 이만... --; 참.. 겨우 철기 시대로 들어온 곳의 일을 쓰려니... 휴우. (땀 뻘뻘..) --;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40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07 22:49 읽음:266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2회, 제 35막. The Night. (6)> ...율르스로서는 상당히 넓게 본 시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넓었다. '모 든'이라니.. 넓지 않은가?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투덜투덜 대더니 마 침내 스스로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넓은' 시각으로 본,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듯. 현대로 들어와 마물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더불어 매우 난폭해졌 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제는 루이티온 휘하의 정규 기사단과 군대만 갖 고는 신출귀몰하며 끊임없이 나타나는 마물들을 잡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 어졌고, 그 때문에 인간들이 받는 고통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 마을 자경대의 활약을 기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문제는 활이라든가 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기 들은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엔 그 강도가 너무나도 형편없다는 것이다. 겨 우 몇 십 번 칼부림을 하면 이가 나가고 우그러져 버리니... 무기 손질하 는데 만도 며칠 일당이 나가고, 하루해가 다 간다. 그러니 일루티온 계급 으로서는 무기라는 존재에 대하여 몬스터와 비교하여 만만치 않게 지긋지 긋 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구리함량 이 상당하여 애가 잡아도 손자국이 남을 것 같은 물렁한 청동 검이 아니 라, 뭔가 강력한 검이다...(아무리 아연이니 주석이니 그 외 다른 금속을 첨가해 보아도 본질이 '구리'인 이상은, 드워프들의 철검에는 어림도 없었 다는 것이 바로 율르스의 어머니인 칼리안 에그리스의 결론이었단다.) 이런 저런 조건과 선입견을 다 떠나서 생각을 해 본다면, 철검이야말로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에겐 이상적인 검일 테다. 검의 순수한 능력, 그러니까 샤프니스라든지 강도라든지, 마모도 같은 것만으로 따지면 철검 이상 가는 금속 검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지금까지 설명한 연유로 '철'이란 금속은 엘야시온 세계에서 상하로 푸대접을 받고 있고, 게다가 대지에서 나는 광물에 묘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노움들과 협상 을 벌여 원하는 만큼의 철광석을 얻어내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고(분명 철광석 무게만큼 보석을 요구할 것이다.) 설혹 몽땅 뒤집어엎고 그들과 전쟁을 벌여 철광석을 마음껏 쓰게 된다고 해도... 그 골치 아픈 광물을 누가 제련하여 '검'으로 만든단 말인가? 노움들에 비교하여 꿇리지 않는 자존심을 자랑하는 드워프들이 자신들의 취향대로 정진하고 있는 모든 다 른 산업을 관두고, 인간을 위하여 오로지 검만을 만들어 줄 리도 만무하 다. 그러므로... 무언가 다른 소재의 검이 필요하다. 아니면, 구리로 만든 검이 라도 뭔가 차원 높은, 누구도 생각 못했던 합금을 하여 지금보다 훨씬 강 한 것... 다양한 몬스터들을 상대할만한 거의 강철 검 수준의 검이 필요하 다. 그것도 강철 검처럼 만들기 까다로운 것, 비싼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하여 평범한 일루티온 계급도 가질 수 있는 검, 매우 싼 소재의 검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몇십 년 전 엘야시온 가디엘이 이런 검의 필요성 에 의해, 사람들에게 비밀리에(대제사장은 공식적으로는 '무기'를 생산하 는 일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이야기했을 때, 이것에 유일하 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칼리안 파이오니온 에그리스였고... 이제, 엘 야시온 가디엘은 그 연구를 율르스가 이어받을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다. 이어받을 것이냐고? 율르스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감동까지 하고 말았다. 칼리안은 전사의 세계다. 굳이 루이티온 계급이 아니라도 일반 일 루티온 계급에도 싸움을 생활화하여 먼 사막에서 희귀한 몬스터를 잡아다 가 그 가죽이라든지, 뼈를 가공하여 장사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 자들에 게 있어, 강력한 '검'의 필요성은 누구보다도 절실한 것이었다. 칼리안의 피가 흐르는 율르스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베르 노크라든가, 휠마즈, 뷰겐트... 여타 검을 만들 수 있는 우수한 재료를 생 산하는 세계가 아닌, 온통 모래뿐인 삭막한 세계, '칼리안'이 검을 생산하 게 된 동기였다. 우수하고 싼 검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쳤는가? 휠마즈에서 나는 그 무수한 금속들을 다 수입해서 들여오고, 그것도 모자 라 열 두 세계를 다 샅샅이 뒤졌다. 모든 금속이란 금속은 다 섞어보고 검으로 만들어 보았지만, 불가항력...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유리'였다. 연 구실에서 우연히, 열기에 길게 잡아 늘려진 유리섬유가 강철 검에도 파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연구의 방향을 선회하여, '금속'이란 재료를 버 리고 칼리안에 깔리고 깔린 모래를 이용한 검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일 단, 기본적인 재료가 풍부했고... 그 무렵 이스파한의 공장에 유입된 하온 하페일의 존재로 연구는 많은 급진전을 맞이했다. 금속과는 다른 문제점 들, 유리를 어떻게 검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강도를 유지하게 하고 날 카롭게 다듬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많았지만... 어쨌든 이제는 단검 수 준의 것은 만들어 내게 되었다. 맨 처음 5센티의 유리를 10센티까지 늘이 는 것이 힘들었다. 그 다음 30센티까지는 일사천리... 지금, 보통 장검 만 한 길이로 늘이는 순간에 또 벽에 부딪혀 있지만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생 각한다. 율르스는 그 모든 과정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순수한 열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 힘을 이용했다. 혼자 의 힘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정도의 검을 만든다는 것은. 그때 가디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아.. 하지만 너를 무조건 야단만 칠 수도 없다. 너는 지금까지 잘해 주었거든. 나는 대가없이 얻어지는 결과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네가 지금처럼 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비밀'에만 집착했다면... 아마, 지금 것 같은 검은 만들어내지 못했을 테지. 그래서 난, 네가 각 파이오니온과 사 람들에게 유리 검에 대해 말하고 다닌 것을 그냥 두고보았다." "엘야시온님." 율르스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후후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유리 검에 대한 것을 신년에 발표해야겠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니.. 이젠 비밀도 뭣도 아니고, 네게도 괜한 압 박감만 주었지." 율르스는 매우 기뻤다. 굉장히 많은 잔소리를 듣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내가 다른 것은 다 이해하겠다만, 다른 파이오니온도 아니고 도 대체 레이서스에게는 왜 그 유리 검에 대한 일을 꼬치꼬치 다 알려주는 게냐? 유리 검을 만드는 데,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힘이 필요한 경우라도 있더냐?" "하하하. 형이 칼에 검기를 맺히게 하면 멋있거든요." 율르스는 편안하게 말했다. 이젠 극비도 뭣도 아니라지 않는가? 하지만 가디엘은 순간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그거 보는 게 멋있어서, 내가 비밀리에 하라고 한 것을 다 알려 주었다고..?" "하하하.. 엘야시온님도 차암.. 레이형은 괜찮아요. 믿을만하죠. 아무리 극 비인 일이라도, 내가 알고 있다면 레이형이 알고 있어도 괜찮아요." "..끄응. 네 녀석은 도대체... 하긴, 루세에서도 맨날 레이서스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고... 레이서스가 졸업했을 때는 그 녀석 옷자락을 부여잡고, 너도 같이 졸업한다고 식장이 떠나가라 울었던 놈이 네 놈이었지." 율르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전 일입니다." 예전 일은.. 이 놈아, 넌 지금도 그 모양이다. 쯧쯧.. 왠지 가디엘은 피곤해 져서 손짓을 했다. "하아.. 이만 가보거라. 율르스. 아까 네가 유리 검에 대해 말하려다 마는 것을 보고...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 널 부른 것뿐이다. 어쨌 든, 신년까지는 일단 비밀인 일이니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 람들에게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게 하고... 뭐,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앞으 로도 잘하리라 믿는다. 이제 가서 파티를 즐기도록. 널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구나. 아직 첫 춤도 안 추었지? 연회장 내에 여인들이 아까부터 날 쏘아보는 것이 온 몸이 다 따끔따끔하다." 율르스는 그 말에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과연... 몇몇 여인들이 율르스 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율르스는 인상을 썼다. 으.. 지겨워. 여자들하고 시간을 보낼 바에야, 차라리 엘야시온님한 테 잔소리를 듣는 게 낫지.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이, 어서 가보라는 듯 또 한 번 더 손짓을 했으므로 율르스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쪽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레이서스와 칼리스나에게로 가볼 까 생각 중이었다. 율르스가 가디엘에게 인사를 하고 테이블을 떠나려는 데, 문득 가디엘이 물었다. "..아, 율르스. 그래... 검의 모양새는 요전에도 보았고.. 아직 장검은 불가 능하다지만, 그래.. 지금 만들 수 있는 검이라면, '대량'으로 생산하는 게 가능한 거냐?" 율르스는 빙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애초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까? 철광석처럼 구하 기 어려운 재료의 것이 아닌, 그러나 그 보다 강한... 모래는... 칼리안 전 역에 깔려 있으니까요." 순간 가디엘의 눈이 반짝 빛나고 그 밤, 그는 처음이라고 할만큼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거 괜찮은 일이구나. 수고했다 율르스. 후후.." 멀리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가 엘야시온 가디엘의 테이블에서 떠나는 것이 보였다. 겐트온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에 있는 여자에게 고 개를 숙였다. "후후..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 나누던 분을 당신께 직접 소개 해 드리고 싶군요." 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그들, 미녀와 겐트온, 하리에까지 포함하여 셋은(미녀로서는 이 눈치 없는 사촌이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아까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어쩌고 말하긴 했지만 상황을 봐서, 적당한 때 사라져 줘야 할 것 아 닌가?) 지금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우연히 엘야시온 가 디엘의 테이블에 있는 칼리안 파이오니온에게 돌아갔고... 미녀는 어찌, 어 찌하다가 칼리안 파이오니온이 매우 멋진 것 같다는 자신의 본심을 털어 놓은 것이다. 보통 이런 대어(--;) 앞에서는 절대 딴 남자 칭찬을 안 하는 데... 생각도 못한 사이 그런 부주의한 말을 해서 미녀는 자기 스스로가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 남자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재빠 르게 딴 이야기로 넘어갈 참이었다. 헌데 뜻밖에 이 남자가 벌떡 일어나 더니 칼리안 파이오니온을 소개해 준다고 하지 않는가? 아까는 거의 장난 삼아 칼리안 파이오니온을 꼬셔볼까 어쩌고 했지만, 막상 정말로 이런 기 회가 오니, 미녀는 얼이 빠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저를 카, 칼리안 파이오니온님께 소개해 주신다고요?" 겐트온은 상냥하게 말했다. "네. 모자람이 많은 저이지만, 칼리안 파이오니온님과는 약간의 친분이 있 어서.. 아가씨께서 그 분께 관심 갖고 계신 것을 보니, 문득 두 분이 매우 잘 어울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저는 겨우 하급귀족의 딸..." "지위 따위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아가씨는 아가씨 자체로도 빛나고 있 는 것을요." 그 말에 미녀는 얼굴을 발갛게 붉혔고, 하리에는 그런 사촌을 부러운 눈 으로 쳐다보았다. 좋겠다... 이 멋진 사람한테 인정받아서 파이오니온님에 게까지 소개받을 수 있다니. 이토록 후한 평가라니... 혹시 이 사람...? 하 리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겐트온을 보았다. 그의 눈은 따뜻하게 미녀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저 애에게 반했나봐. 하긴... 잰 저 렇게 예쁘니까. 어쩌면 청혼하려는 것일지도. 그러니 파이오니온님에게 까 지 파트너로서 소개한다는 거지. 미녀의 머릿속에도 하리에와 비슷한 생 각이 스쳐지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미녀는 얼굴은 빨갰지만 아까보다 더 욱 당당함이 서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겐트온에게 손 을 내밀며 말했다. "호-호호.. 아이 참.. 제가 파이오니온님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될텐데요." "혹 실수하더라도 아가씨의 미모가 그 실수를 능히 가리고도 남을 것입니 다." "어머! 어쩜, 부끄럽게 그런 말씀을..!! 호호호..." 미녀는 즐겁게 웃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하리에를 내려다보았다. 그 리고 조금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어.. 그런데? 리에도 파이오니온님에게 소개시키실 작정인가요?" 겐트온과 자기 사이에 끼어있는 사촌이 못마땅해서 한 말이었다. 한편 하 리에는 지금까지 거의 없는 것처럼 취급받다가,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자기에게 쏟아지자 긴장해서 온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겐트온은 그런 하리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겐트온은 미녀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굳이 원하신다면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글쎄요... 그 망설이는 말투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리에의 얼굴은 굴욕으로 창백해 졌고, 미녀의 얼굴은 환해졌다. "오호호.. 어머, 별로 무리한 일을 하실 필요 까진 없어요. 리에도 이해할 거예요. 호호호호.." "후후후.. 그렇습니까? 그럼, 가실까요?" "호호호.. 리에, 다녀올게. 아, 굳이 거기서 기다리지 않아도 돼. 어머, 저 기 봐- 아버지가 피곤하신 것 같아, 가서 시중이라도 들어들여. 지금까지 우리 때문에 고생하신 분인데, 저렇게 혼자 놔두다니, 너무 하는구나.. 응?" "으응.. 그, 그래." 방금 있었던 일로, 웃는 것조차 힘든 하리에 인지라 이것저것 생각할 것 도 없이 사촌의 명령대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왜 아직까지도 여기 앉 아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자신이 한심하고 멍청하게 생각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무릎 위에 놔두었던 하리에의 부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보통이라면 옆에 있는 남자라든가 시종이 주워 주겠지만, 공교 롭게도 하리에의 주위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리에로서도 여자 의 자존심이 뭐니 하며 그대로 꼿꼿이 서있기엔 마음이 너무 상한 상태라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이 직접 부채를 줍기 위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그때였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에?" 하리에가 칠칠맞게 부채를 흘리고 그것을 주우려는 것을, '아유, 뭐 저런 수치스런 일을...! 나 같으면 내가 부채를 주울 바에야, 그냥 부채를 밟아 버리고 가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보고 있던 미녀는 깜짝 놀랐다. 자기 옆에 있던 겐트온이 어느새 성큼성큼 걸어나가, 하리에 대신 허리를 굽혀 부채를 주워 든 것이다. 미녀의 놀라움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리에로 서도 전혀 생각 못했던 일이라 그녀도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겐트온의 푸른 눈이 하리에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의 손에 더러움을 묻힐 수야 없죠. 이런 일은 남 자들이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리에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떨리는 손으로 부 채를 받아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참, 치, 친절하신 분이군요.." "...천만에요."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그가 놓고 온 자신의 흰 장갑이 있었다. 뭐... 이것을 가지러 온다는 둥의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니 좋군. 훗..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제 장갑을 여기다 놓고 왔군요." 겐트온은 장갑을 줍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덕분에 하리에와 아주 가깝게 붙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어머..!" 하지만 하리에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화다닥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비 틀거리며 넘어질 뻔한 그녀였는데, 겐트온은 혀를 쯧쯧 차며 그런 하리에 의 팔을 꽉 붙잡으며 부축했다. 혀를 차는 소리.. 하리에는 자신의 멍청한 행동을 이 사람이 비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서 바 들바들 떨며 말했다. "아... 죄, 죄송...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리에의 팔을 놓고 곧바로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그가, 놀랍게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낮고 상냥한, 그러나 어딘지 조롱기 가 섞인 말투였다. "..흠? 왜 그러십니까? 왜 그렇게 떨고 계시지요? 연회장의 공기가 안 맞 습니까? 추우십니까?" 하리에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굉장히 푸른 눈. 그러나 투명하기보다는 어딘가 탁해서 비밀스러워 보이는 눈이었다. "...아, 아니에요. 별로 춥지는.." 그러다가 하리에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니.. 조금 춥네요. 자꾸 몸이 떨리는 것이. 하, 하지만 숙부님께 걸어가 는 동안 몸이 따뜻해지겠지요. 저어... 이제 괜찮으니 놔주세요." 겐트온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여기 계십시오." "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에서 계시길 바랍니다. 자, 이것을 받으십시 오." "아?" 하리에는 엉겁결에 겐트온이 내미는 장갑을 받아들고 말았다. 그는 아직 도 하리에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었고, 그의 말은 가벼운 '명령조'였다. 만 약 이 사람이 한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그렇게 했다면, 하리에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해버렸을 것이다. 뭔가 이 남자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 면서.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촌에게 휘둘러 살아왔던 그녀는, 이런 명령 조의 말투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겐트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의 그녀가, 그래도 자신의 장갑을 꼭 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후후..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 장갑의 의미를 생각해 보시길." "의, 의미..?" "...그렇습니다. 의미. 아.. 참고로 전 힐라토 인입니다. 주위에 물어보시길. 어떤 의미인지." 하리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에 망설이는 표정을 떠올리는데, 순간 그가 그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흥. 저는 꽤 집요한 구석이 있지요. 마음에 드는 것일 경우엔 틀림없이 손에 넣는다...라는 것이 저의 모토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이런 저의 결심이 대부분 실현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밤도 그렇게 되 길 바라지요. 후후..." "네?" '마음에 드는 것'? 하리에의 가슴은 이제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고, 얼굴은 더 붉어질 대도 없이 붉어졌다. 얼굴에서 확확 열기가 올라와 춥 기는커녕, 땀마저 흘릴 지경이었다. 남자가 방금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 인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겐트온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녀 의 팔을 놓고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미인 사촌 곁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리에는 그의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절대 믿을 수 없어..! 그 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설마 저 사람이 나 같은 것을..? 설마..!! 하 지만 어느새 그녀는 눈으로 겐트온의 모습을 쫓으며, 그의 장갑을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미녀는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딱 대놓고 뭐라고 따질 수도 없어서 태연한 목소리가 나오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호호..? 랍오니여? 제 사촌이 당신께 무슨 실수라도..?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데요? 그리고 그 애에게 건네주신 장갑은 도대체?" 겐트온은 그녀를 흘긋 보았다. "뭐, 별로. 사촌 분과 그다지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만... 사촌께서 넘어지시려고 하기에 부축해 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장 갑은.. 제가 장갑을 잊어버려서.." "장갑을 잊어버렸다고요?" "네. 아무래도 파이오니온 앞이라, 다시 끼려고 찾아봤더니 없더군요." "어머, 그럼 아까 장갑이... ..응?" 미녀는 이상하다는 듯, 그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당신은 그 장갑을 리에에게 주셨잖아요? 그건 무슨..?" 겐트온은 훗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건 제 장갑이 아니더군요. 누군가 다른 남 자 분의 장갑인 듯.. 그래서 확인해보고 사촌께 드렸습니다. 꽤 고급인 것 같으니, 장갑을 잃어버린 분이 오시면 돌려드리라고요. 제 장갑은.. 글쎄 요. 모르겠습니다. 아까 아가씨와 춤출 때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죠. 꽤 멋 지고 활달한 원무였으니까요." 미녀의 얼굴이 아까처럼 밝아졌다. "어머나! 그랬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괜히-" "네?"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호호.. 그나저나 그럼 어떡하죠? 장갑이 없어 서?" "훗.. 괜찮을 겁니다. 칼리안 파이오니온 님은 아까 아가씨께도 말씀드린 대로 이런 사소한 예의는 그냥 눈감아 주실 정도로 대범하신 분이죠. ...중 요한 부분에선 매우 정열적인 분입니다만." "그, 그런가요? 어머.." 미녀는 볼을 발그레 붉혔다. 그런 미녀의 모양을 겐트온은 말없이 바라보 았다. 그리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리시스가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저쪽에 있는 힐라토 파이오니 온과 그 약혼녀에게로 가는 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율르스는 누군가 자 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고 그때 그의 눈이 겐트온의 눈과 맞았다. 겐트온을 본 율르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기 시작했다. 반갑다는 표정이었는데 이쪽으로 올 기 색이었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을 미녀도 보았고, 미녀는 겐트온이 칼리안 파이오니온과 연관 있다는 것이 참말이라는 것을 알고, 흥분해서 마른침 을 삼키고 있었다. 겐트온은 씩 웃었다. [재미있군.] 저 뒤의 테이블에선 엘야시온 가디엘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이어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하 자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라는 표시였다. 물론 겐트온은 웃음 짓고 가볍 게 고개를 숙여 곧 그의 뒤를 따라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마사는 창을 통하여 까마득해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떠 있었다. 저 별들을 보니, 매우 익숙한 느낌이 들 어 웃음이 나왔다. 옛날 힐라토에 있을 때, 아주 어릴 적 무렵부터 아마사 는 이렇게 별을 보며 어디론가 외출했다가 돌아온 샤일라테를 기다리곤 했었다. 가끔은 겐트오빠나 도바오빠.. 혹은 이드넘오빠가 같이 기다려주 었는데, 그들도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으므로 '기다림'의 몫은 언제나 아마사의 것이었다. 아마사는 흥겨운 기분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 게 어렸을 적에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은빛별이 떴어요. 낮의 태양이 너무 밝아 어디론가 숨었던 별이에요. 부드러운 밤의 어머니가 아기들을 불러냈지요. 무서워 말고 이리 나오렴.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아.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아버지도 아이들을 불렀어요. 나의 달리타- 나의 달리타- 나의 사랑스런 딸들아,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들려다오. 저 눈부신 낮 동안 너희들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이리로 와서 수놓아 다오. 작은 목동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천사들의 이야기와 작은 신들의 사랑이야기를 들려다오. 너희들의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나의 귓가에. 밤의 어머니의 검고 포근한 옷자락 속에서 꿈을 꾸는 아이들아, 은빛별의 아이들아, 밤은 밤으로서 태어나고 낮은 낮으로서 태어날 때, 내가 여기 너와 함께 있으니, 언제까지라도 편안히 뛰놀거라. 밤의 어머니의 검고 포근한 옷자락 속에서... 이것은 아마사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였다. 그녀는 후훗 웃고, 한 구절을 되풀이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달리타- 나의 달리타- 나의 사랑스런 딸들아..." 그때였다. 어디선가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어두운 복도에서 별을 바라보며 자장가를 부르는 황금빛 머리칼의 소녀라... 루이트의 굳은 가슴도 감동할 만큼 멋진 장면이군." 아마사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를 휙 돌아보았다. "헤, 헬리옷!!" 루헬리옷은 촛불 빛이 닿지 않은 어둠 속에서 벽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 있었다. "하! 내 이름 같은 것도 기억해 주시다니, 그거 영광이군. 꽤 기분이 좋으 신가 보지, 나의 고귀하신 약혼녀 양? 힐라토 대대로 내려오는 자장가까 지 부를 정도면, 꽤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인 것 같아. 아니면? 어디 가서 주무시고 싶기라도 한 건가?" (계속)================================================== 100회를 축하해 주신 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TT 굉장히, 무진장 기뻤습니다. 더구나 생각도 못했던 게시판에서, 생각도 못했던 분에게까 지...(웅~ 감격→ TT) ...그런데 최근에 본 만화가 있습니다.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감명 깊은 것 은 그분의 후기였죠. 꼭 답장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죽어라 편지를 써서 부치면, 그것이 편지 받은 지 1년 후의 날짜라고... (--;; 편지 받는 사람 이 경악하겠다..) ...최근 들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 어쨌든 감사하는 마음은 굉장히 많은데 저렇게 위에다 한 줄로 때워서 죄송하게 생각합니 다. TT 하지만 꼭 답장을 드려야 하는 내용의 멜이 있다는 것은 아니까.. 좀 시간이 지나서 멜이 도착하더라도 그다지 경악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 립니다.. ..그래도 일년은 아니니까..--;;; 휴우~ 일주일 내내 썼는데 내용이 좀 짧지요? 자료를 온통 헤집고 다니느 라.. --; ...개인적인 생각인데, 쓰기 편한 장면이 있고 쓰기 어려운 장면이 있습니다. 쓰기 어려운 장면은... 그냥 무식하게 돌파하는 것이 최고인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음. -- 그럼, 안녕히 계시고... 나우누리의 모님.. 독촉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헌데 저는 원래 토요일에만 글을 올립니 다.^^; 해보니까 이게 글 앞 뒤 맞추기 좋더라고요.^^ <엔..^^> ps...음, 출판사는 '너와나 미디어'이고..(불멸의 기사 출판하는 곳이죠.^^) 하지만 확실히... '출판'은 '제 경우'엔 영 '파이'입니다. 하하..^^ 도대체 이 걸 어떻게 출판하겠습니까? 다른 분들처럼 글이 많이 진행된 것도 아니 고... '완결' 안된 글은 아무 것도 아닌데... 더구나 출판이 무슨 애들 장난 도 아니고... 남까지 끌어들이는 일이니.. 쯧쯧..(나중에 없었던 일로 하자 고 해도, 난 하나도 놀라지 말아야지..--;) 지금 저의 제일 큰 소망은 '완 결'이고, 출판은 어떤 의미론 부담입니다. 하지만 '출판'이라는 말이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일종의 뜨거운 감자라고나 할까.. 하 하..^^ (이런 제 불안을 같이 느끼고 편지 주신 **님^^ 정말 감사하게 생 각합니다.^^ 참 기뻤습니다.^^ 그리고 책 나오면 사주신다고 해주신 분들 께도.. 하하..^^ 약속 꼭 지키세요? 하하..^^)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57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14 20:25 읽음:253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3회, 제 35막. The Night. (7)> "헬리옷...?" 그의 말투가 이상했다. 언제나 두 세 마디 말만을, 그것도 매우 딱딱한 말 투로만 말하는 그가 어쩐지 조금 풀린 말투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항시 곧은 자세를 유지하는 그가 저렇게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말을 하다니...? 놀란 얼굴로 그를 보는데, 그가 다가왔다. 빛 가운데로 나오니 그의 예장 용 갑옷이 한층 더 불빛을 반사하여 위협적으로 보였다. 번뜩이는 갑옷과 먹물처럼 펄럭이는 망토... 마치 그때처럼. '그때'를 떠올리자 아마사의 얼 굴은 더욱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한편 천천히 아마사에게 다가오던 그는 아마사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그가 아마사에게서 가장 익숙하게 보던 바 로 그 표정-을 보고 이 되풀이되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그만 진심으로 우스워지고 말았다. "하하... 그래, 약혼녀 양- 그대는 언제나 그 표정 하나뿐이군. 처음부터 줄곧-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 아마사는 뒷걸음질 쳤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에게선 술 냄새가 풍겼 다. 말할 때마다 그 냄새가 진해지는 것을 봐서 상당량의 술을 마신 것이 틀림없었다. 슬쩍 봐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저 입매에 달려있는 비꼬는 듯한 미소가 절대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아마사는 평소의 그도 무서웠지만 이런 모습의 그는 생소함까지 더해서 마냥 피하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하며, 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었다. "헤, 헬리옷... 나, 나중에 뵐게요. 전 잠깐 휴게실에..." "제길-!! 아마사!!!" 갑자기 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마사는 그 큰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 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자기도 모르게 또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본 루헬리옷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다른 때라면 아마사의 이런 표정에 목소 리를 낮추거나 그냥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달 랐다. 아마사의 이런 행동을 보니, 갑자기 더할 수 없이 유쾌한 기분이 들 기 시작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그것이 가슴을 자극해 아찔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노려보 았다. 벌벌 떠는 모습... ...그는... 예전에 작은 새를 숲 속에서 붙잡은 일이 있었다. 날개를 다친 새였는데... 루헬리옷으로서는 치료를 해주고 싶었건 만 그 새는 루헬리옷을 무서워하기만 했다. 날개에 약초를 발라주고, 먹이 까지 주고, 깨끗한 물을 주고... 그런데도 계속 무서워했다. 그 작고 까만 눈이 루헬리옷을 보면 흠칫흠칫 놀라고 날개를 다친 주제에 도망가겠다고 퍼덕였다. 그의 유모는... 야생 새란 원래 그런 것이며 차라리 그렇게 인간 을 두려워하는 것이 앞으로 날개가 나은 뒤 이곳을 떠나, 세상을 살아갈 새에게는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헬리옷은 그 말을 들은 후부터 그 새를 돌보는 것을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그 새가 루헬리 옷이 아닌 하인의 손으로 넘어가 다 나아 떠나갈 때까지, 그는 그 새를 그의 뇌리에서 싹 지워버린 것이다. 정말이다. 몇 십 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다가, 겨우 이 순간에 이 기억이 떠올랐다. 루헬리옷은 웃었다. "큭... 아마사, 내가 왜 '그 새' 돌보는 것을 멈추었는지 알아? 작고 예쁜 파랑새... 굉장히 좋아했고 내가 꼭 낫게 하리라고 다짐했는데?" 아마사는 울상을 짓고 고개를 흔들었다. "무, 무슨 새요? 몰라요..." "모른다고? 그럴 테지.. 하하.. 넌, 언제나 몰라. 아무 것도 모르지... 잘 들 어. 아마사. 내가 만약 그 새 옆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아마 그 새를 죽여버렸을 거야..." "흑.." 아마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두운 얼굴로 말하는 그가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알아? 죽여 버렸을 거라고. 새는 정말 작았거든. 어린 내 손에도 폭 감싸 질 만큼 작더군. 느껴지는 거라고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겁에 질린 까 만 눈. 조금만 힘을 주면 짜부라졌을 거야. ...그래서 난, 그것이 다시는 겁 먹지 않고 자유롭게 나는 것을 바랬어. 그토록 새를 다치게 한 것, 겁먹게 한 것을 미워했건만... 하지만... 하하..." 그는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우스운 것은 그게 그렇게 두려워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는 거지! 맙소사. 그 멍청한 까만 눈이라니...! 심장은 펄떡펄떡 뛰고 작고 빨간 발은 덜덜 떨리고... 하하... 멍청한 새 같으니라 고... 터무니없이, 약하고, 멍청하고, 더러운 새!! 안돼...! 지금은 도망갈 수 없어!!! 잘 들어...! 아마사!" 그는 뒤로 도망가려는 아마사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마 사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마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왜 그래요? 놔, 놔 줘요...!" 하지만 루헬리옷은 울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그녀 에게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알아? 그런 약해빠진 것들이, 그런 것들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서 있는 나 같은 '강자'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몰라요...! 흑흑.." 그는 아마사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다른 쪽 손으로 잡아 바로 돌렸다. "고개 돌리지 말고, 똑 바로 잘 들어, 아마사!! 그런 것들은, 상대에게 정 말로 살의밖에 안 느끼게 한다는 것을 넌 알아야 해...!! 죽일 정도의 증 오, 그것을 알아?!!!" "흑흑.. 모, 모른단 말이에요. 놔줘요...!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게? 그,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나, 난 그 새가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해봤자..." 아마사의 말에 놀랍게도 루헬리옷의 눈이 슬픔을 띠었다. "모른다고? 새가 아니라고? 아냐...! ...넌 꼭 그 새 같아. 그 작고 예쁜.. 푸 른빛의 깃털을 가졌던 새. 내게는 한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그 아름다웠던 지저귀는 소리의... 언제나 하늘만 바라보던 눈동자의... 넌 마치, 새같이.." 그의 눈이 아마사의 눈물에 젖은 입술에 멎었다. "아마사.. 꼭 너 같이.." 루헬리옷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을 움직이 고 있는 것은 그런 그녀의 외양이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그것은 이렇게 조용히 밀려오는 가슴의 고동... 작은 새의 헐떡거림 같은, 숨막히는 영혼의 공명. 마인드 컨트롤마저도 깨버리는 그 절대적인 부름... 내부로부터 나오는, 나의 지켜야할 것을 향한 움직임... "아마사.." 잠긴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그의 고개가 수그려졌다. 하지만 잔뜩 떨고 있던 아마사는 그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그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공포에 질렸다. 그녀는 비명 을 지르며 그를 확 밀어냈다. "시, 싫어-!! 캬아악--!!!" "윽...!!" 루헬리옷은 아마사의 거센 반항에 주춤 했다. 아마사는 소리지르기 시작 했다. "시, 싫어-!! 누가 도와줘요!! 흑흑!! 싫어-!!!" "....!!" 순간, 그 외침에 마침내 루헬리옷 안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분열했다. '도 와달라'고? '나'에게서? 너는 지금, 나에게서 너를 지킬 자를 찾고 있는 건 가? 이 나에게서? 그리고 나는 너에겐 위협되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고 잇는 것인가?!! 루헬리옷은 흐느끼는 그녀를 내려 다보았다. 황금빛 머리칼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코올로 인해, 민감한 마 음... 그리고 제어하기 힘든 마음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분노에 휩싸이 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마사의 비명을 듣고 시종들 몇몇이 달려왔다. 복도엔 이제 거의 사람이 없고, 저쪽 으슥한 곳에서 무언가를 속삭이며 킥킥대는 남녀 둘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도 아마사의 외침에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종 둘이 급히 달려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헉헉..!! 왜 그러십니까?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아마사는 시종을 보더니 안심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손은 여전히 루 헬리옷에게 붙잡힌 채였다. "아, 저기 날... 난, 게, 겐트 오빠나, 도바 오빠, 그러니까.. 하온 하겐트님, 아니면 하온 하도바님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시종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러나 조금은 두려운 눈으로 루헬리옷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루이트 계급이 분명해 보이는데, 하바트 족이라면 몰라도 루이트 족이 여자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보아하니 여자는 하바티온 계급이었다. 게다가 눈물까지 흘리고 있고... 그 러므로 여자의 비명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저어, 하온 하겐트 님이라고 하시면..? 힐라토의 사절단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수네드리온 서기관인 내 오빠..." "...꺼져라." 씹어뱉는 듯한 낮은 목소리.. 루헬리옷의 목소리였다. 듣는 이의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시종들은 바싹 긴장했다. "저어, 루이트님? 하지만 레이디께서.." 루헬리옷은 그들을 보며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너희들이 지금 내 앞에서, 여자를 향한 같잖은 기사도라도 발휘 하겠다는 건가?!" 그 말에 시종들은 겁먹은 눈빛을 지었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떻 게 해야할지 판단이 안 선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시종들이 겁먹었다는 것 을 눈치챈 아마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돼!! 그냥 가지 말아요!!" "아, 저기... 레이디..? 그, 그리고 루, 루이트님.. 이, 이곳은 유리궁전이니 조금..." 시종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들먹였다. 하지만 루헬 리옷은 코웃음쳤다. "난, 이 여자의 주인이다!" 아마사가 비명을 올렸다. 루헬리옷이 그녀의 팔을 잡아서 비틀어 올린 때 문이었다. 그는 괴로워하는 아마사를 보면서 잔인하게 말했다. "이 여자와는 말할 것이 아주 많거든. 내가 종속주로서 내 권리를 발휘하 려고 하는 이 때에, 누구든지 날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마지막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니, 목숨을 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꺼져라!" 그는 시종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 인내심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눈빛에 시종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당장 고개를 숙이고 그 자 리를 떠나버렸다. "하.. 루, 루이트님. 그럼 조,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그, 그럼 이만. 실 례했습니다." 여자가 손목이 비틀려져서 아픈 신음을 내고 있지만, 종속주라고 하지 않 는가? 괜찮을 것이다. ...괜히 주제넘게 상류계급 일에 끼어 들다가, 목이 달아난다면... 그들은 방금 루이트가 허풍을 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 리게 잘 알고 있었다. 루이트 계급은 '죽이는 일'에 관해서는 굳이 허풍을 치지 않는다. 게다가 시종들은 꽤 오래 왕궁에서 귀족들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루이트들의 '진짜 살기'가 어떤 것인지 목격할 기회가 가끔 있었 다. ...오히려 방금 같은 여자와 문제 일으키는 루이트는 매우 신기한 편에 속했다. 하여튼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개죽음 당하긴 싫었다. 자 신들이 일루티온 계급으로서는 상급직업인 왕궁에서 봉사하는 직위에 있 는 시종이라고 해도, 상대는 귀족이다. 그러니, 어차피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 눈치를 봐서 적당히 눈감아 주는 것이 오랜 동안의 경험에서 쌓 은 무병 장수하는 지름길이다. 그들은 그렇게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 버렸 다. 헌데 그 순간 누군가가 시종들을 보며 꾸짖었다. "자네들, 무엇 때문에 제자리에 있지 않고... 응? 왜 그렇게 땀을 뻘뻘 흘 리고 있지? 무슨 일 있었나?" 시종들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관장(官長)이었다. 궁전 내 4000여명의 시종(혹은 하인)을 관리하는 42명의 관장 중 하나였는데, 그는 연회장 주변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라면 하바티온 계급의 시종과 가깝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 말은 귀족들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 는 힘이 어느 정도 그에게 있다는 말이다. 시종들은 다시 한 번 더 서로 의 얼굴을 보았다. 그를 본 순간 아까 여자의 애처로웠던 눈길이 떠올랐 다. 떨쳐버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 여자의 눈빛에 공포마저 엿보였기 때문에... 마침내, 한 시종이 단단히 결심하고 관장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시종의 말에 따라 관장의 눈은 복도의 기둥 사이, 어두운 구 석에 있는 남녀에게 멎었다. 아까 있던 커플은 다른 커플의 박력(?)에 놀 랐는지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관장이 살피는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시 종이 겁먹은 말투로 말했다. "괘, 괜찮을까요? 관장님? 여자 분이 아무래도..." 하지만 관장은 의외로 피식 웃었다. "뭐야. 저분들은..."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시종들이 하도 불안한 모습이라 그래도 확인하기 위해 연회장 입구로 뚜벅뚜벅 걸어가 동료를 불렀다. "어이- 코젤 관장! 이리로 좀 와봐!" 연회장 입구에서 들어서는 귀족들의 공식적인 입장을 외치는 코젤은 동료 가 부르자 곧 그에게 다가갔다. "왜?" 목청이 트인 걸쭉한 목소리였다. "저기, 저 분들... 어때?" 코젤은 눈을 찡그리고 복도 구석을 보았다. "뭐가? 힐라토의 루온 루헬리옷님과, 힐라토의 하온 하아마사님이군. 저 분들이 왜?" "아니, 저 사람들이 가서 보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해서." 무언가 쭈뼛거리는 시종들은 본 코젤은 픽 웃고 제자리로 돌아가며 말했 다. "자네 수하에 있는 시종들 무진장 심심한가 보군.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제자리 뛰기라도 하라고 하게. 저분들 약혼한 사이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 은 게 당연하니, 괜히 가까이 가서 귀족들 비위나 거슬리지 말라고 하게." 거의 수천에 달하는 귀족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있는 코젤의 말이니 틀림없었다. 이 말은 시종들에게까지 들렸고, 시종들의 얼굴은 머쓱해졌 다. 그들의 상관은 엄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들었지? 상황 판단 제대로 하고, 상류계급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말게. 궁전 생활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면서... 자네들에게 새삼 또 말해야 하 나? 쯧..." 그리고 그는 멀리 루헬리옷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몇 개는 더 큰 남자는 실루엣도 위협적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다, 루이티온 계급... 쯧쯧쯧..! 당장 자리로 돌아가서 자네들 할 일 이나 하게! 그렇지 않고 또 이상한데나 신경 쓴다면... 난 자네들이 내일 조례에 안 보여도 별로 놀라지 않겠네. 곧 있으면 하누카의 휴일인데 나 로 하여금 자네들 고향에 부고장 날리지 않도록 하란 말이지. 알겠나?" 시종들은 재깍 고개를 숙였다. '약혼한 사이'... 어, 어쩐지, 루이트님이 '종 속주' 어쩌고 하긴 했었지.. "자, 잘 알겠습니다! 관장님!" 진땀이 주루룩 흘렀다. 그들로서는 여자의 애처로운 눈빛 때문에 하마터 면 이번 하누카의 날, 고향을 '부고장'의 형태로 방문 할 뻔했던 사건이었 다. "흑흑..." 아마사는 시종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눈물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기 둥 사이는 너무 어두웠다. 애초에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겐트 오빠 옆에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거기다 헬리옷은 평소 때보다 더 무섭고, 그에게 붙잡힌 팔은 굉장한 고통을 주고 있었다. "아파... 흑흑... 겐트 오빠... 롯테 언니... 흑흑..." 한편 루헬리옷은 아마사가 찾는 이름들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의 화이며, 분노였다. 이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라니, 어디선가 술 따위 마시지 말았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 무 상관없었다. 머리는 혼란했고 가슴을 갈라져 내리고, 그것들이 서로 부 딪치며 그에게 끔찍한 기분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그는 아까 시종들의 겁먹은 얼굴을 떠올렸다. 갑자기 아마사에 대한 증오가 일어났다. 일찍이 이런 정도로 아마사가 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마사의 몸을 거칠게 벽에 밀어 부쳤다. "...이 가증스러운 계집애!!!" "꺄악--!!!" "그래? 아까 그 시종들이 나에게서 널 지킬 수 있을 것 같더냐?" 그는 한사코 고개를 돌리는 아마사의 얼굴을 억지로 쳐들게 했다. "이 계집애!! 넌 알고 있지?!! 그 시종들은 네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 내 손에 찢겨죽는 이상의 아무 것도 네게 주지 못하지!!! 그런데, 그걸 알 면서도 넌 그들을 붙잡으려고 해!? 이기적인 계집애!!! 너처럼 잔인한 것 은 본 적이 없어!!!" 아마사는 떨었다. 아, 아냐... 난 잔인하지 않아. "나, 나는 그저... 게, 겐트 오빠를...!!" 루헬리옷은 비웃었다. "하온 하겐트?! 너의 그 영리하신 오라버니? 그가 널 구해줄 것 같애?!! 어떻게? 그가 루이티온의 칼날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너의 위대한 사 업가 오라버니, 하온 하도바를 불러 봐! 아니면 하온 하이드!!! 장래가 촉 망되는 무역상이시지?!! 모두 다 널 공주처럼 떠받들어 주니, 너 때문에 내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감지덕지 할지도 모르겠군!!!" "흑흑.. 아, 아버지..!!" 그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다 불러대는 군. 하지만 '아버지'는 틀렸어, 아마사! 그가 바로 널 내게 넘겨준 자식이니까. 너 같은 것을 얻으려고 그 시답지 않은 명령 을 다 들었지!!! 시시껄렁한 이유로, 루이트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그들 을 없애 나갔어-!!! 제기랄--!!!" "흐흑..!! 흑흑흑...!!" 아마사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한 밤중- 문이 거세게 콰앙 열리고...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의 형제들이 있는데 그가 들어왔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눈만이 어둡고 빛났다. 그의 몸에선 피비린내가 났고, 그는 분노하고 있었 다. 번뜩이는 갑옷...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핏방울. 그는 누구도 말릴 사이 없이 걸어와 들고 있는 검을 크게 치켜들고 소리쳤다. 그의 검에 맺히는 검은 검기- 검은 색인데도 불구하고 빛을 발했다. 그런 것을 그렇게 가깝 게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주위에 있던 형제들이 모두 다 일어났다. 형제들은 '안돼-!!'라고 소리쳤는데, 오직 아마사와 아버지... 란사드크만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마사는 공포에 질려서... 란사드크는 웃음소리를 내 며. 그런 그를 향해 헬리옷은 칼을 콰앙- 내리쳤다. [저주받을 자식-!!!] 테이블이 산신이 부서졌다... 테이블이 모두다... 하하하하- 아버지, 란사드 크는 크게 웃었다. 아마사는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무섭고, 슬펐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 역시 피로 범벅이 된 것, 커다란 것을 아버지에게 던졌다. 아버지가 웃고 있다는 것에 더욱 분노했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지 며 그것은 텅-, 크고... 공포에 질린 소리를 냈다. 붉은 투구... 누군가의 문 장(紋章)이 새겨진 화려한 투구... [이것을 가져가라!! 루온 루폴크의 투구다! 네 교활한 말대로 다 되었다!! 가서 그의 영지든, 그의 군대든 모두다 약탈해-!!! 그것들은 다, 네가 저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것들이다!!!] 그는 아마사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마사가 떨고 있는 데도 그는 격렬하게 화를 냈다. [내가 치른 대가- 나의 어리석은 행동- 너희들과 연관 맺은 것을 언제나 후회하겠지만-]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란사드크- 대가는 치렀다!!] [하하하-!! 물론. 네가 잡고 있는 여자는 이제 너의 약혼녀다! 루온 루헬 리옷. 하하하하-] "그래-!! 감사해야 할까?!! 네 덕분에 난 힐라토 최고의 군대를 거느리게 됐지!! 내 사촌 파르테 외엔 아무도 넘보지 못할 멋진 군대를!!" "흑흑흑...!!" "아버지? 아버지라고? 핏줄의 연결은 하나도 없는 주제에?! 제기랄-! 그 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이젠 아무 관심도- 아무 흥미도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언제나 궁금했어!! 도대체 그는 뭣 때문에 너를 시켜서 나를 유 혹한 것인지!!!" 그녀는 격렬하게 울었다. 그녀의 귓가에 란사드크의 웃음이 몰아치는 듯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그녀를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왜? 아버지... 나에 게 운명의 상대에 대해 말해준 것은 아버지면서..? 왜..? 아마사는 루헬리 옷을 다시 한 번 더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루헬리옷이 아마사의 연약한 힘에 밀려날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를 더욱 화나게 할뿐이었다. 그의 턱 은 하도 이를 악물고 있어서 흉하게 불거져 있었다. 루헬리옷은 손안에 있는 것이 새의 퍼덕이는 몸뚱아리인지, 아니면 인간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가 큭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알고 있나, 아마사? 주인이 없는 루이트.. 사람들은 나같이 주인 이 없는 루이트가 저지르는 살인은 매우 쉽게 눈감아 주지. 형벌도 매우 가벼워. 왜 그런지 아나? 응?"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 유감이군. ..하지만 알려주지. 그대는 루이티온의 아내가 되어야 하 니까. 알아두는 게 좋아. 후후.. 루이트가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에 대해 서... 주인의 명령이 그 하나지. 살인에 이르는 키워드. 물론 주인이 있는 자들의 경우야. 그렇다면... 주인이 없는 자들은 왜 '살인'을 할까? 어떤 충 동으로? 마인드 컨트롤 속에서 언제나 자신을 다스리는 자들이 살인까지 하다니! 명예? 부? 아니면, 권력을 위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 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하류계급을 잔인하게 난도질하여 죽이는 루이트 는 종종 있거든. 그들이 왜 그러는 줄 알아?" "몰라요..!" "모른다고!!?!! 왜?!!! 그렇다면 지금 똑똑히 알아둬!!! 그건 바로 그가 그 쓰레기 같은 하류계급에게서 '영혼의 공명'을 느꼈기 때문이야!!!" "악-!!" 손목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이 덮쳤다. 아마사는 그것에서 빠져나가기 위 해 바르작 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어, 언니.. 샤일라테 언니.. 흑흑!!" "하하... 사람들은 그걸 어렴풋이 알아... 존경받을 만한 루이트가 왜 갑자 기 미쳐서,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건지.. '감정'은 마치 번개가 나무를 찢 어내듯, 마음을 난도질해. 하지만 하류계급을 주인으로 섬길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러니 어떡할까?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지. 루이트 는.. 루이트는 영혼의 공명을 느끼는 사람을 해치지 못해.. 하지만, 그를 그렇게 '인정'하기 전이라면, 그 전이라면 죽여버릴 수도 있지! 하하하.. 그 래서 사람들은 이해해.. 루이트는 수네드리온에 서서 이 말 한마디만 하면 되거든. 저는 '높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하하!!! 빌어먹을 높은 마음!!! ...나는 이것을 다르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너는 왕족이 아니 지?!!! 아니, 네가 '고아'만 아니었어도!! 너 같이 무능력한 하바티온이 어 디 있어?!!! 네 빌어먹을 오빠들이나, 네 언니는 몰라도, 넌 아냐!! 네 형 제도 네 아버지도 너의 근본을 대지 못하지!! 그러니, 너는 일루티온일수 도 있어!! 안 그래?!! 솔직히 말해봐!! 아마사-!!! 그들이 내게 사기 친 거 라고-!!!" 그는 흡사 무너지듯 그녀 위의 벽을 주먹으로 쾅 쳤다. "제기랄-!! 왜, 내가..! ..내 상급 루이트의 핏줄에 무언가 저주가 내린 건 가? 왜..!! 왕족에게만 영혼의 공명을 느끼도록 되어 있는 나의 핏줄.. 그 것이 바로 나의 혈통인데!! ...왜 너는 그 순간 거기, 연회장에 있었던 거 야..!! 왜!!!" 오랜 동안의 의심... 그 자신보다 '낮은 지위'라는 것 이상의 더 끔찍한 의 심, 그녀가 하바티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드디어 내뱉은 그는 정말 로 미칠 것 같았다. 아마사는 눈을 크게 뜨고 덜덜 떨었다. "흑흑.. 내, 내 잘못이 아냐... 흑흑... 나, 나도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을 찾아가서.. 당신의 여행지마다 계속 따라다니면서, 당신을 보는 일 따위.. 당신에게 말 거는 일 따위... 흑흑... 아, 아버지가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냐..! 흑흑..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운명의 상대'... 그를 얻지 못하게 된다고..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랬 어... 나의 빛의 왕... 아마사는 눈물을 흘렸다. 루헬리옷은 힘없이 말했다. "하하.. 모르겠어. 이젠.. 다,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아. 내 손은 피에 물들었 고.. 내 마음도 다르지 않아. ..나는, 네가 마노테온이 아니라는 것만도 감 사해야 할까? ...하하... 아니, 이젠 상관없지. 일루티온이든, 하바티온이든.. 네가 무능력하다고 하더라도... 가문사람들이 어떻게 널 의심을 해도. 넌 '하바티온'이야. 어쩔 수 없어. ...맨 처음 만난 순간.. 그 순간에 차라리 널 죽여버렸더라면.. 그리고, 수네드리온에 섰더라면.. 그랬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모든 것은 잘못된 선택..." 아마사는 눈물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고... 지금이라면, 그에게 보내달라고 말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는 무섭긴 하지만, 그는 아마사가 말하면 언제나 그대로 들어준다. 아마사는 입을 열었다. "훌쩍... 저어, 나를 보내..." "아마사. 나와 같이 가자. 너는 오늘... 나와, 밤을 보내게 될 거야. 하누카 의 날이 아닌, 바로 오늘." "..보내... ..뭐, 뭐라고요...?"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57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14 20:26 읽음:254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4회, 제 35막. The Night. (8)> 그가 몸을 일으켜 아마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너와 밤을 보내겠다고!" 그의 입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그래야만, 너와 나 둘 다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겠지!! 난, 이런 혈통에 서 나온 아이 따윈 필요 없어!!! 차라리, 능력 있는 양자를 들이는 게 나 아!!! 내게서 나온 아이가 무능하다면, 그것과 같은 치욕은 없으니까!!" 아마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붉은 달빛 속에서 그는 고압적이었고, 그의 눈빛은 잔인해 보였다. 아마사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너와의 아이는.. 죽어도 갖지 않아. 그러니, 내 손을 잡아." 아마사의 입이 비명을 지를 듯, 벌려졌다. 그가 그것을 눈치채고 내민 손 을 그녀의 목에 갖다댔다. "닥쳐. 지금 기분이라면... 정말 누군가를 죽여도 시원치 않을 기분이니 까." "..시, 싫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대는 내 종속자고.. 난, 그대의 종속주야. 내가 원하면 그대는 거절할 권한이 없어. ...그리고, 난 오늘밤을 네게 요 구하는 거야. 그것이 내가 그 모든 것... 가문과, 영광과, 나의 아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얻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수치이지." 아마사는 자기 목을 움켜쥔 루헬리옷의 손에 숨만 헐떡일 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길게 흘러 그의 손에 툭 떨어졌다. 그녀의 회색 눈이 슬프게 루헬리옷을 바라보았다. 아무 반항도 느낄 수 없고, 그냥 무기력하게 그에게 잡혀 있었다. 그리고 루헬리옷은 그때야, 자기 손 밑에서 가냘프게 맥박치는 아마사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순 간... 맑은 정신, '현실' 속으로 돌아온 듯 했다. 붉은 달 속에서 꾸었던 꿈 들은 다 끝난 듯, 그의 손에 점차 힘이 빠졌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미친 것일까? 어떻게 나는 아마사에게 이런 눈빛을 짓게 할 수 있었지..? "아마사.. 난 너를 해치지 않아... 해칠 수가 없어. 널 죽일 수 있었던 기회 는... 다, 지나가 버렸어. 그러니, 제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마. 나를, ... 무서워하지마." 하지만 아마사는 그의 손이 느슨해지자 숨을 크게 몰아쉬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말했다. "..흑흑.. 아, 아마사는 다, 당신과 오늘밤을 보내기 싫어요..!! 흑흑.." 그녀의 말에, 그는 벽을 짚고 그녀 머리 위로 고개를 숙였다. 꽉 다문 입 사이로 괴롭고,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사..." "정말로, 싫어요! 그런 짓 따위 억지로 하면..!! 정말로 당신을 미워할 거 라고요!!!" "아마사.." "흑흑흑..!! 비켜요!! 샤일라테 언니에게 갈 거예요!!!" 그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알겠어. 하... 나야말로 잠시 착각을 했던 것 같군. 술 같은 것.. 취한 척 할게 못돼. ...너는 자유야. 나는 너를 해치지 못하지. ...모든 것은 이미 늦 었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끝까지 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한 선택. 그것이 마지막이었지." 그는 몸을 돌렸다. 불빛 속에 언뜻 그의 눈동자가 젖은 듯 반짝였지만, 그 의 윤곽은 다시 어둠 속으로 묻혔다. 그저,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생 긴 일이었던 것이다. "...당분간은 서로 안 보는 게 낫겠지. 좋은 밤 되길. 약혼녀 양." 그렇게 괴롭게 말한 루헬리옷은 망토를 펄럭이며 연회장 바깥으로 나갔 다. 하지만 아마사는 그런 그를 쳐다볼 생각도 안하고 고개를 외면한 채, 눈물을 닦았다. '샤일라테 언니..' 그녀의 입에서 흐느낌 같은 목소리가 흘 러나왔을 뿐이었다. 이드넘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앞의 여자와 옆의 여자를 번갈아 보 았다. 또 다른 기둥 사이의 으슥한 곳에서 샤일라테와 그는, 얼마 전부터 루헬리옷과 아마사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기가 하도 심각하게 돌아가 말려야 하는지 어쩐지 망설이던 이드넘은 샤일라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만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던 것이다. 이드넘은 혀를 가볍게 찼다. 나 도 그놈의 셰리카 계집애 때문에 기분 더럽기 짝이 없고, 남의 세계에 와 서 가면까지 벗고 파티에 참석해야 해서 짜증나는데... 샤일라테도 만만치 않은 것 같군. 아까 까지는 게임 어쩌구 하며, 그래도 이겼으니 나중에 마 노테 계집애를 잡으면 자기가 가진다, 파티에서 도비온 녀석의 우스운 꼴 을 보고 싶다, 깔깔대며 잘도 떠들더니만... 으이구.. 도대체 이게 무슨 우 습지도 않은 해프닝이람. 헬리옷 녀석은 하필 이런 곳에서 저 소란을 피 우고.. 이런 때 딱 맞춰 들어온 우리도 참... 아주 경사로구만. 제길... 저 성질에 눈물까지 글썽이다니..! 이드넘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봐.. 롯테, 다 끝났어. 그러니 이제 그만.." 샤일라테는 낮고,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끝나? 뭐가, 끝나!" "롯테.." "쟤는 언제나 저 모양이야!! 그래서 난 저 계집애가 싫어!! 난 쟤를, 아마 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저 앤 알고 있어!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고!!! 당연한 일이지!! 아마사 저 계집애도 그에게 영 혼의 공명을 느끼고,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주제에, 그런 주제에 저렇게 잔인할 수 있어...?! 어떻게 헬리옷에게 저렇게 까지 할 수 가 있지!! 응?!! ...이거 놔-!" 이드넘이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샤일라테는 이드넘 을 거칠게 밀쳤다. "샤일라테..!" 샤일라테가 생각보다 더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드넘은 자신도 모르 게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을 불렀다. "닥쳐! 너희들도 다 지긋지긋해!! 아버지도, 너희들도-!! 다 똑같다고!!" "샤일라테!!" 아버지에 대한 불손한 말에 이드넘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발을 연회장 밖으로 향한 뒤였다. "앗, 샤일라테-!! 어딜 가는 거야?! 샤일라테-!"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드넘은 화가 나서 주먹으로 기둥을 쾅 쳤다. "샤일라테..! ...젠장-! ...정말이지 오늘은 왜 일이 다 이따위야! 아침부터 귀찮은 일만 생기더니, 에잌!!" 그때 저쪽에서 아마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 샤일라테 언니? 거기, 언니야? 언니?" 이드넘은 울화를 가라앉혔다. 어쨌든 그만이라도 흥분하지 말고 파티 장 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기둥 사 이의 그림자에서 나왔다. 순간 빛 가운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쪽은 깨끗한 피부였으나 다른 한 쪽은 일그러진 얼굴, 눈 밑 부분부터 턱까지 마치 뱀의 피부 같은 붉은 무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가면을 벗 은 '하온 하이드'로서 그의 원래 얼굴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빙긋 웃었다. "..아마사. 샤일라테는 없어. 나야.." 아마사는 멍하니 이드넘을 쳐다보았다. "이드넘 오빠.. 오빠뿐? 샤일라테 언니는 왜 없어?" 그는 또 한번 한숨을 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보통 여자들은 그의 모습 을 보면 질겁을 하고 도망간다. 최근엔 아양떠는 여자들이 종종 있긴 하 지만... 그는 천치가 아니므로 그런 여자들이 자신의 부유함을 보고 그런 것은 알고 있었다. 뭐, 이드넘으로서는 그런 여자라도 별 상관없이 즐겁게 어울려 놀고 잘 대해 주는 편이지만... 그래도 그녀들의 눈동자에 스쳐 가 는 혐오감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마사는 틀리다. 아마사는 언제나 똑바른 눈동자로 자기의 얼굴을 바라봐 주어서... 매우 편하다. 가면 벗은 세상이 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오직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아마사 앞뿐 이다. "아마사, 샤일.. 아니, 롯테는 ..저기, 그러니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돌아 갔어." "일? 아버지가 명령을 했어? 언니에게?" "응? 으응.." "그래.." 아마사의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그녀 옆으로 갔다. "휴우- 아마사. ...네 일은 이번 하누카의 날이면 다 끝날 거야. 20년이 넘 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지. 그러니... ..헬리옷의 비위.. 적당히 좀 맞 춰줄 수 없었니?" 아마사는 혼란한 눈으로 이드넘을 바라보았다. "헬리옷의 비위를 맞춰..? 내가 왜..? 그는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닌데?" 이드넘은 정말로 천진한 눈동자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사.. 무슨 의미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아- 아냐. 관두 자." 그녀는 방긋 웃었다. "응. 그래 오빠.. 연회장에 들어가자. 겐트오빠랑 도바오빠는, 일이 바빠서 나랑 춤도 못 춘대. 겐트오빠는 그 이상한 눈을 가진 엘야시온님이랑 또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대. 오빠, 나랑 춤을 춰 줄 거지?" "...그래." 어차피, 그에게 첫 춤을 신청하는 여자는 아마사밖에 없다. 샤일라테가 가 끔 첫 춤을 춰주긴 하지만, 그것도 헬리옷이 있다면 어림반푼 어치도 없 다. 그런 샤일라테도 오늘밤은 연회장에 없을 것 같으니, 아마사 정도의 미인과 유쾌하게 춤을 추기 위해선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하온 하이드'의 이름을 꽤 열심히 소개해 주고 난 후일 것이다. 그는 손을 아마사에게 내 밀었다. "가자, 공주님. 밤은 짧으니까.." 이드넘은 좋아하면서 자신의 팔을 잡는 아마사를 보며 씁쓸하게 웃음 지 었다. 그나저나, 헬리옷이 이 애를 '일루티온'이 아닌가 까지 의심하고 있 었다니.. 하긴, 능력 면으로 보면 보통 일루티온보다 형편없으니까. 하지 만... 맙소사. 그렇다면 그를 더욱 존경할 수밖에... 아마사가 일루티온이라 면, 이 애랑 하누카의 날을 맞는 순간 자신도 일루티온의 변화를 겪어야 할지 모르는데.. 그걸 감수하고도 그 동안 아마사를 사랑했단 말인가? ..아 니, '사랑'이 아니라 '영혼의 공명'이라고 했나? ...사랑이든 영혼의 공명이 든... 그런 거야 나로서는 죽어서도 모를 일이지만.. 맨 처음엔 이 애가 그 저 '낮은 지위'에 있는 인간인줄 알고 아내로 맞으려고 했다가, 그런 의심 까지 들었다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독한 일이야. 정말 지 독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얼굴 피부에 손을 댔다. 거친 느낌... 이걸 보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 ...그는 문득 물었다. "아마사? 너는 왜 헬리옷을 싫어하니? 그는 널 해치지 않아. 오히려 너를 언제나 걱정해 주잖아. 그는 널 정말 걱정해 준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너를 일루티온인 줄 생각하면서도.. "그런데, 넌 왜 그렇게 그를 무서워하고 싫어하지, 아마사?" 아마사는 이드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냐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쁘거든. 그가 가까이 오면 기분이 나빠. 마음이 부글부글... 그 사람이 오면 샤일라테 언니가 나를 무시하는 것도 싫어. 하지만 내가 그 를 싫어하는 것은 하나도 잘못 없어. 그리고 아버지가 하누카의 날이 지 나면 다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했어.. 그러니까 난 정말로 별로 그 사람을 안 좋아해. 샤일라테 언니의 빛은 예쁜데... 그 사람 마음은 굉장히 싫어. 정말로." "그래?" 그 사람의 '마음'이 싫다..라. 과연... 그의 마음은 사람들 사이의 내 얼굴처 럼, 아마사에게 있어서는 진저리쳐지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로서는 불운이야. 아마사가 차라리 그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끼지 못했 다면...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눈을 창 밖의 붉은 달로 돌렸다. 헬리옷. 난 전에도, 앞으로도 자네만큼 루이티온다운 루이티온, 그리고 자네만큼 강한 루이티온은 보지 못할 거야. 그런 그대에게 있어서 행운인 것은, 그 대의 이 불운이 몇 주 후면 끝난다는 것이지. 아마사의 말대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대의 방황은 끝나겠지. 그러 니 나도 아마사처럼 자네의 불운을 동정하지 않겠어. 자네의 그 높은 마 음은 대가를 받게 될 거야. 하지만... 이드넘은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얼굴 을 만졌다. ...하지만 우리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동안...?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는 신년부터 이 모든 계획을 하나씩 발표하실 생 각이란 말입니까?" 겐트온의 말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들은 이제 긴 회랑을 걸어 엘야시온 가디엘의 임시 숙소인 동쪽 궁전으 로 가고 있었다. 뒤에 시종들이 길게 따라붙고 있었지만 조금 거리를 두 고 있었기 때문에 겐트온과 엘야시온의 대화는 둘 사이에만 오가고 있었 다. "뭐랄까, 이것도 엘의 보호하심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 율르스 그 녀석 이 무기 개량에 너무 열렬히 뛰어들어 준 덕분에, 일이 매우 순탄하게 풀 리고 있어. ...율르스의 취미생활... 자이온의 이드렘나에서는 아직도 그것 을 나의 '권유'에 따른 일이라 생각하겠지? 만약 그 일이 나의 '명령'에 따 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겐트온은 빙긋 웃었다. "아니오. 그렇게 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엘야시온님. 그 동안 이 일들을 이드렘나에 숨겨가며 해 온 것은, 그들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 일에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어쨌든 일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고, 결과 물을 놓고 본다면 이드렘나에서도 더 이상 불평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엘야시온님의 지고하신 뜻에 탄복할지도 모르지요." "그런가.." 엘야시온 가디엘은 겐트온의 말에 미소지었다. 그리고 회랑을 걷다말고 문득 창가로 다가갔다. "하겐트. 과연 그들이 그렇게 나오리라 생각하나? ...어찌 보면 이 일은 아 가트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인데?" 겐트온은 그의 뒤에 가서 서며 대답했다. "훗, 엘야시온님. 엘야시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가트는 역대 엘야시온님 들의 정치문(政治文), 혹은 정치사(政治史)입니다. 장로들의 유전, 엘야시 온의 정신을 먹이는 어머니... 이러니 저러니 말은 많지만 아가트라는 법 은 결국 대대로 엘야시온님들의 지혜를 편찬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고 있는 사실입니다. 아가트가 기록될 때 당대 이드렘나 장로들의 발언이 포함된다고 해도 그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죠. 지극한 권위 안에 있는, 모든 능력자와 모든 장로들의 장로... 바로 그가 당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엘야시온님께서 진정으로 하시고자 한다면... 아 가트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말은 모순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아가 트의 본체는 바로 당신이시니까요." 엘야시온은 겐트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가트의 본체가 나라..? 훗훗.. 그것 참... 듣기는 좋네만.. 이드렘나의 장 로들도 자네와 같은 의견이면 좋겠구만." 겐트온은 히죽 웃었다. "엘야시온님. 전 듣기만 좋은 말이라면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미흡하지만 힐라토에서 랍오니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자이니... 깊게 생각하고 진리라 고 생각되는 것만 말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엘야시온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웃었다. "하하.. 그런가? 하기는.. 자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 하지만.. 자네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가트에 흡수될 수는 있어도, 아가트를 내 안 에 가둬놓을 수는 없다는 것일세. 분명 아가트는 역대 엘야시온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고... 나도 그 위대한 엘야시온들의 계보, 그 현재를 이어가고 있지만, 내가... 아가트를 위반함으로서,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알겠나? 이드렘나는 그러므로 내 행동을 물고 늘어질 근거가 있네." 겐트온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엘야시온님을 막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엘야시온 님은 아가트의 궤도를 이탈한 적이 없고, 그 계획은 분명 그들에게 이질 적이라고 할만큼 생소한 느낌을 주겠지만... 그것은, 아가트 이상의 권위를 가진 다섯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니까.. 그들은 아무런 말도 못합 니다." "그런가.." 엘야시온의 씁쓸한 말투에 겐트온은 고개를 들고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 폈다. "...무엇을 근심하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히 그렇습니다." 엘야시온은 그의 말에 뒷짐을 지고 창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달은, 매우 붉구만... 하누카의 날 때문인가.." 엘야시온은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상념 때문이었다. 그런 엘야시온 옆에 서 겐트온은 조용히 서 있었다. "...겐트온, 자네는 젊은 나이에도 다섯 성서의 예언을 외울 수 있기에 힐 라토 수네드리온에 추천 받았다고 알고 있네. ...나이만 된다면 이드렘나에 서도 자네를 회원으로 맞고 싶어할 테지. ..외워보겠나? 브레쉬트의 예언 을?" "제 3장의 예언 말입니까?" 엘야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겐트온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섯 성서는 거대한 하나의 노래였던 것이다. 겐트온의 입에서는 이제 고대어로 된 노 래, 지금은 더 이상 부르지 않는 기이한 음율로 지어진, 오래 전의, 그러 나 미래를 위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타디오스 에덤 팔라오스 이기오스 파니온 테 아스 고르타니온 아부 투 아다-> 《낙원은 닫히고 불타는 검들이 그 길에 있었다 그렇게 세계는 나뉘었다 그들이 나뉜 것처럼-》 <위시안토 타드쿠 운디스 이뷘 티 오 올레스 타니움, 궨티안 마노트온....> 《말씀하시길 그러나 내가 구원을 너희 가운데 두었으니, 그것이 너희의 희망이 될 것이다...》 <에 퓌레에 노바데 온 디산투 콘페 우 쉬엔 나튀오 아브리스 노렌 투 엠티야.> 《눈으로 보기 좋지 못한 자가 일어나리니, 그때에야 너희가 내가 능력의 근원이 됨을 알 것이다.》 (혹은, 능력이 있어 엘의 말씀을 이루는 자가 가장 낮은 곳에게서 나올 것이니 그제야 너희가 나의 권능을 목격할 것이다.) <이쉰 티 오돔 카나토우. 이딜리야 가놈 오 엘 샤다이-> 《세계가 다시 하나로 되는 그때에. 오, 반드시 이루어질 전능하신 자의 말이었다-》 노래는 복도에 나지막하게 울렸지만, 그 의미는 엘야시온과 겐트온밖에 알지 못했다. 시종들은 고대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 은 몰라도 이것이 성서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시종들은 한층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엘야시온은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것이 끝 나자 중얼거렸다. "...마노트온.. 희망이라.. 하겐트, 자네는 정말 이 구절이 이드렘나의 소란 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성서에서 그 밖에 뒷받침하는 부분은 또 달리,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 니다." 겐트온은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말하고 있었다. "..마노트온. 성서에서 말하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마노테온이야말로 엘야 시온에 존재하는 모든 결계를 파괴하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열 쇠입니다." "...그것이 아가트에서 금지하는 '마노테온 슬러터'로 나가는 길이라 해 도?" 엘야시온의 서늘한 말이었다. 그러나 겐트온은 언제나처럼 웃음 지었다. "마노테온 슬러터라고요? 왜 그런 말씀을?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 보다 엘야시온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난 20년간 이 계획을 주도한 것은 엘야시온님이셨으니까요. 단지 저는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이것은 피의 아두스갈다 때처럼 맹목적인 학살은 아닙니다. 자신의 탐욕 만을 채우기 위한 더러운 짓이 아니죠. 이것은 성서에 철저히 기초한... 그 저, 게엔나를 열기 위한... 그래서 게엔나를 정화하기 위한 성서에서 제시 한 방법 같다는 생각입니다." 엘야시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엘께서는 아무 의미 없이 이 세상을 창조하진 않았습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담아 창조했고, 그 의미는 각자의 사물 안 에 녹아, 엘의 형상을 드러냅니다. 트론즈의 엘야시온님께서는 엘의 생명 됨을, 도미니온즈의 왕족들께서는 엘의 통치하심을, 파워즈 루이티온은 엘 의 공의(公義)를, 우리 벌츄즈 하바티온은 엘의 지혜를, 그리고 프린서팰 러티 일루티온은 엘의 편만하신 능력을 나타냅니다. 헌데 마노테온들은... 드워프와 엘프를 위시한 의사인종들, 게엔나에 물들지 않은 몬스터, 모든 미물조차도 각자 자신들의 아케인젤(Archangel)을 가지고 아케인젤의 지 휘를 따르는 일반 천사, 말라크들의 보호를 받고있건만... 우리 인류와 한 형제이며 여섯 계급 중의 하나인 그들은, 어떤 수호천사도 갖지 못합니다. 나실인의 증표가 없는 그들, 엘과의 언약에서 벗어난 그들... 과연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몬스터만도 못한 지위를 갖고 있는 그들에 게 우리가 기대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살아가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 가? ...그건 바로, 제 3장에서 말한 대로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열쇠가 되 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 좋지 못한 자'... 그들의 살아가는 의미는 엘의 능력 안에서,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이름이 '희망'인 이유이죠. 태초로의 돌아감... 약속된 땅으로의 복 귀를 이룰 희망의 열쇠 말입니다." "그래..? 하하.." 겐트온의 열기 어린 말이 끝나자 엘야시온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엘야시온님?" "하하하.. 아니, 미안하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하하..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자네는 내가 알던 누군가와 굉장히 많이 닮았거든. 외모 가 아니라, 말투라든지.. 생각들... 그리고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까지도 말 일세. 하하..." "..네?" "후후.. 아니, 아니야.. 오래 전의 추억이네. 벌써 100년도 더 된... 내 친구 이야기지. 내 친구.. 힐라토의... 스온 웨스로드." (계속)================================================== 이번 분량 쓰면서, 저는 옆에 있는 장롱군과 동고동락했습니다. 한 줄 쓰 고, 장롱에 머리 박기, 한 줄 쓰고 장롱 옆구리 쾅쾅 패기... (세월이 지나 갈수록, 남녀간의 '진지'한 대화에 괴로워합니다.) ...아마사, 우리 다음에도 이 고비를 무사히 넘겨보자... 하지만 그전에, 네 대사 쓰면서 장롱군 린치 (?) 가하는 버릇은 고쳐야지...(엘야 끝나면 장롱 다 부서져 있겠다...--;) <장롱군의 안위를 걱정하는 엔...--;;> ps...지난 번 후기에 빠진 말이 있어서..(죄송합니다..^^;;) 에... 캐릭터 인기 투표는... 귀찮아서 안 하려다가...(여름이면 다 귀찮은...--;;) 가을이 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서.. 1부 끝난 기념으로 하고 2부 시작하면서 발표를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한달 정도 쉴 건데... 한 달 동안이나 메일 집 계... --;;;; 오옷! 일주일전에 오고 드뎌 또 하나 왔다~!! 내가 집계한 종이 를 어디다~? 으악!! 엄마! 그거 너덜거리긴 해도 쓰레기 아니에요..!! 같 은.. 현상이 일어나리라 생각...--;;;) 으음... 하여간에 난 타이밍도 못 맞추 고, 이벤트도 잘 못한다..--;; 바부팅이.. 에잉~ 하지 말까봐.. ps2... 동굴씬에선 도비온이 고대어를 '영어(^^;)'로 읊었는데.. 여기서는 한 글로 음역을...(다 작가 맘이려니...--;;) ps3... 빌린 아뒤 쓰시는 대구의 모 여고생님..(^^) 추측하신 것이 맞습니 다..^^ 그리고 미유님, 멜 감사했습니다..^^(하하..^^) Sky님, 왜 그렇게 도 비온을 죽이려고... 흑흑... TT 도비온은 찐득하게 살 겁니다...--;;;(왠지 죄송하다...--;;;) 꼬오오옥~!!!! 건강해져서 꼬오오오옥~~!!! 돌아오세요!!!^^ ps4... 훗훗.. 일찍 올리고... 내일 모레 뵙겠습니다. 원래, 'the night' 끝판 까지 갔어야 하는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63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16 23:26 읽음:259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5회, 제 35막. The Night. (9)> 겐트온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스온 웨스로드... 엘야시온 가디엘의 입 술. 단어의 발음과 음색과 어조. 그것이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불러일으 키는 그 무엇. 그리고... 내 친구..? 겐트온의 중심에 무언가가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그 불쾌한 세 음절, 여섯 음절의 말이 어떤 신호와 같이, 하 나 하나 겐트온의 감각을 깨우며 지나갔다. 하지만 엘야시온은 그것을 눈 치 못 채고 계속 말했다. "웨스로드... 지금도, 이렇게 밤하늘을 보면 그가 떠올라. 그 강렬했던 검 은 색의 눈빛,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웃음. 그의 사상은 뛰어났고, 그 의 행동은 만인의 귀감이 되었지. 어떤 지혜 있는 성직자라도 그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네. 그럴 수밖에 없지. 암, 그럴 수밖에 없었고 말 고.. 누가 그 앞에서 지혜를 논할 수 있었겠나? 하하하..." 이렇게 말하는 엘야시온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미미한 희열로 떨리고 있었 다. 하지만 겐트온은 '자신의 내부'가 그것을 비웃는 것을 느꼈다. 그 비웃 음은 너무나 충동적이어서 겐트온은 그것을 억누르느라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웨스로드, 내 친구..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지. 지금의 율르스처럼. 하지만 그는 율르스 이상이었어. 그만큼 엘을 열렬히 사랑했던 자가 또 있을까? 그의 마음은 언제나 굳고 올곧았지. 언제나 엘만 사랑했어. 전대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님도 인정 할만큼, 그 눈부셨던 능력. 만약 제대로 되었다면..." 추억의 즐거움이 묻어있던 엘야시온의 목소리가 여기서 잦아들었다. 그리 고 무언가 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랐다는 듯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현실 이 그에게 찾아든 것이다. 잠시의 침묵... 겐트온은 조용히 신음을 뱉었다. 내부에 일어난 경멸과 분노가 겨우 한바탕 지나갔다. 그 지독한 순간이 지나가고, 가까스로 찾아온 평정의 시간에 겐트온은 떨리는 한쪽 손을 다 른 쪽 손으로 꽉 억누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이상하군요. 각 세계의 역사를 공부했지만, 근래 들어 힐 라토에 그런 왕족 분이 있다는 것은 못 읽었습니다." 어떻게든 무심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그 자신도 오싹 할 만한 냉랭함이 묻어 끝 부분이 갈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깊은 추억에 서 막 돌아온 엘야시온은 힘없는 얼굴로 그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 자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굳이 알 필요도 없네. 이 것은 '지워진 과거'니까. 자네 같은 젊은이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지. ..나 같은 늙은이야, 가끔 주책으로 과거를 헤집는 거지.. 나는 이곳에 있 지만, 내게 있어 빛나던 것들은 이제 늙고.. 과거에만 존재하니까." 한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리고 겐트온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웃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래?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창 너머를 바라보 았다. 그의 눈동자는 희미한 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야 해. 너무 많은 것들을 뒤에 남겨두고 걸 어왔어. 설혹 이드렘나에서 반대가 있을지라도, 게엔나만은 쳐 부셔야 돼. 거기서부터 모든 불화가 시작됐으니까. '가디엘'의 이름으로 엘야시온의 위에 오를 때부터... 난, 꼭 해내고야 말리라고 다짐했다. 하겐트..?" "..왜 그러시죠? ..엘야시온님..." "힐라토 파의 수네드리온 장로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들의 생각은 끝까지 변하지 않겠지?" 이제 겐트온은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인다 는 감각을 느꼈다. ...언제나 그렇듯 끔찍한 감각이다. 그리고 생소한 목소 리. "..그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엘야시온님을 도와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거기다 카이러스의 수네드리온도 엘야시온님을 거역하지 못하 지요." "그렇다면 됐어. 그 두 세계만이라도 확고하게 나의 결정을 지지한다면, 엘야시온인 내가 주도하는 이상 이 계획은 성립된다. 설혹 이드렘나나 다 른 세계의 수네드리온들이 방해를 하더라도... ..그들은 아무 것도 몰라!! 이제 게엔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 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있었는지를!!" 가디엘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멈추려고 해도... 이것은 이미 시작됐다. 다음 대의 아가트엔 이미 성전 (聖戰)을 벌일만한 구절들이 기록됐어. 이드렘나도 그것을 부정하진 못해. 스온 마리스, 다음 대의 은의 엘야시온은 성전을 치르는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자이온에서 꾼 꿈의 의미겠지. ...게엔나의 수장, 드래 곤 리워야단, 그 저주의 이름을 멸절하는 것-!" 마침내 겐트온은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씨익- 웃었다. '드래곤' 리워야단 이라... 그에겐 성서를 읊던 고대어의 감각과 경멸 어린 마음이 있었다. 그 는 놀리듯 그 이름을 반추했다. 드래곤- 드래곤이라... ...드래곤? 그는 비 단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엘야시온님? 드래곤- 그 저주의 이름... 그 고대어가... '드라 게온'에서 나왔다는 것이...?" 겐트온의 말투에 묻어 나는 즐거움을 감지 못한 엘야시온 가디엘은 어깨 를 으쓱했다. "아이러니지. ..드라 게온... '나의 사랑하는 친구'.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 한 역설이다." 푸핫하하하하-!!!! 겐트온의 내부는 마침내 폭발적으로 웃고 말았다. 그는 엘야시온의 뒷모습을 광소(狂笑)를 띠고 보았다. 핫하하하- 가장 강력한 역설...? 하하하... ..그리고 그건 아마 가장 보편적인 역설이 되기도 하겠 지!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가장 강력한 적', '가장 강력한 원수'가 된다는 것은, 이미 네 인생에서도 일어난 일 아닌가, 가디스... 어떻게... 어떻게 생 각하지.. 응? 그때 엘야시온 가디엘이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 내게 뭐라고 그랬나?" 겐트온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가디엘은 눈을 찡그렸다. 웃음..? 왠지 섬뜩한 느낌이었다. 가디엘은 겐트 온을 더욱 자세히 보았다. 하온 하겐트가 서 있는 곳엔 분명 달빛이 비추 고, 촛불 빛까지 비추고 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이 굉장히 흐릿해 보였다. 어둠이 몸의 윤곽을 뭉개버린 듯 보이는..? 분명 전에도 이런 느낌을 어디 선가.. 아주 희미한 기운이었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 느낌을 알고 있었 다. 매우 불쾌한.. 그건 분명히...? ...그때였다. 겐트온의 몸이 흠칫 떨렸다. 동시에 그는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길게 냈다. 그의 얼굴은 격 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매우 해쓱해져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 은 그것을 보고 미심쩍은 목소리를 냈다. "하겐트? 자네 왜 그러나? ..어디 아픈가?" "..?" 가까스로 제 상태로 돌아온 겐트온은 맨 처음 엘야시온이 자기에게 왜 그 런 것을 묻는가 했다. 하지만 손바닥에 잔뜩 배어 나온 땀과 특유의 체취 를 맡고야,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 이런, 젠장...! 왜 안 하던 짓을...!! 겐트온은 그답지 않게 험악한 표정을 지은 뒤, 고개 를 숙였다. 노력한 덕분에 목소리는 겨우 태연하게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그는 재빠르게 기억을 집어 보았다. '아이러니'라고 했나? "에, 엘야시온님의 말씀대로 저도 그것이 웃기는 역설이라고 생각되니 웃 음이 나와서 그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런데 어쩐지 자네,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군?" "네?" "...아니, 하하.. 갑자기 자네 주변이 깜깜해 보여서 말이지. ..그런 느낌은, 그... 뭐라고 할까? ...할 짓 없는 판테온 녀석들이 뿌리고 다니는 기운이거 든. 하하하.." 당연한 일이지만 겐트온의 심장은 순간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여전히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후후.. 하지만 정기적으로 베쓰엘 카할에 참석하고 자이온의 대성전까지 들어오는 랍오니인 자네에게 그런 기운이 서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어 쨌든, 너무 젊음만 믿지 말고 좀 쉬어가며 일이나 연구도 하게. ...그리고 이제 슬슬 새로운 부인을 얻을 때도 되지 않았나? 후계자도 얻어야 하고.. 자네는 어찌된 게 소문만 무성하나..? 이제 실속을 차릴 때도 되지 않았 나?" "아.. 네에.." 어찌나 당황했던지, 다른 때라면 청산유수같이 대답을 했을 겐트온이지만, 그만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엘야시온은 이것을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으레 따라오는 부끄러움으로 해석하고 짓궂게 말했다. "하하... 자네도, 참... '네에'가 아닐세. '네에'가.. 자네는 우수해. 아주 우수 한 인재지. 그러니 자네와 같은 혈통은 지켜져야 해. 안정된 가정은 심신 에도 좋으니, 어서 새 신부를 맞아들이게나. 수네드리온에서도 장로들이 심심지 않게 자네의 배필 건을 놓고 물어질 텐데? 외모도 그만하면 준수 하겠다, 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나? 내가 타 세계에서 봐둔 처녀가 있 는데, 소개해 줄까?" 수네드리온의 필요조건이 '결혼한 남자'이므로 당연히 상처(喪妻)한 겐트 온에겐 별의별 혼사자리가 다 들어오고 있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다. 겐트온은 쓴웃음을 짓고, 손바닥에 고인 땀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보아하니, 엘야시온의 의심은 한시적이었던 것 같지만.. 그 래도 한층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해주시는 은혜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온통 신경이..." "허어- 일이 전부가 아닐세, 하겐트. 내가 자네에게 많은 것- 그러니까 수네드리온의 업무만으로도 바쁠 텐데, 자네에게 인맥을 쌓을 것과 성서 를 연구해서 성전(聖戰)에 대한 명분을 찾을 것까지 명령해 시간이 없다 는 것은 알고... 또 그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네만, 그래도 자네가 결혼 해서 새로운 단꿈을 맛볼 시간정도는 베풀 수 있네. 생각해 보게나. 우리 가 애쓰는 것은 모두 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그러는 것 아닌가? 그 러니 자네도 아름다운 부인과 아이들의 재롱 안에서 지극한 기쁨과 함께 좋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좋겠지... 하고자 한다면 인간의 수고는 끝이 없 어. 그러니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잠시 잠깐의 낙을 누리게나. 그것이 좋은 일이라네. 엘께서 자네에게 내려주신 분복을 놓치지 말라고." 미래라... 어쩐지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굉장히 생소하게 들리는 말이었 다. 엘야시온의 말대로 그는 지금 '미래'를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다 바 쳐 일하고 있음에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엘야시온님. 유념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처... '네라'에게 진 빚을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저의 최초의 여자였고, 이 세상에서 저의 육신을 제 부모님에 이어 조금 더 완 전하게 만들어 준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겐트온은 이 이야기를 확실히 끝맺기 위하여 한마디 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그녀만큼의 여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야시온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쯧쯧... 그토록 전처를 잊지 못하고 있다니... 그랬군.. 그랬어." 그러더니, 엘야시온은 다시 한 번 더 창 밖을 보았다. "...어쩔 수가 없는게지. 이런 일은. ..나도 그러했으니까.."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엘야시온은 고개를 돌리더니 자기만이라도 기운을 내야 한다는 듯,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자, 자- 찜찜하게 이런 으슥한 곳에 서서 이야기 나눌 것이 아니라 좀 걸으며 이야기 나누세." 그리고 가디엘은 발걸음을 옮기며 겐트온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두드렸 다. "하하.. 자네는 젊다네. 힘내게나. 누가 또 아나? 당장 오늘밤에라도 전처 이상의... 아, 미안하네." 겐트온이 엘야시온의 말에 깊은 상처를 입은 얼굴을 하자 엘야시온은 어 색하게 사과했다. "흠, 흠..! 나도 참 주책이군. 어쨌든, 자네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니 그 럼 딴 이야기나 하세나." 겐트온은 빙그레 웃고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야시온님." 수네드리온이라든가 연회장에서 만나는 상급 귀족들 중, 겐트온 자신의 재혼에 그네들 온 일생이 걸리기라도 한 듯, 열렬한 관심을 갖고 귀찮게 하는 노친네들에게는 '그녀 이상, 완전...' 어쩌고 하는 말 따윈, 밤새면서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 앞에선 이런 허접 나 부랭이 같은 소리로 시간 낭비하는 짓은 안 한다. 그래봤자 그들은 코방 귀를 뀌며 그러니 더 새로운 가정을 꾸며야 한다는 둥, 사람이 순진해서 그렇다는 둥, 완전 무대포로 젊은 아가씨들의 초상화를 몇 장씩이나 그에 게 밀어 부치는 것이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에게는 이 말만으로도 충 분하다. 바로 그 자신이, 전처 스온 아니스엘을 여읜 뒤로 다시는 재혼하 지 않았던 경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겐트온에겐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그가, 이토록 엘야시온 가디엘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이 유 중의 하나. 동질감을 자극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애정을 얻을 수 있는 꽤 좋은 방법이 아닌가? 그는 한 번 더 히죽 웃었다. 그 증거로 그는 이 제 거의 엘야시온의 곁에서 걸음을 걷고 있었다. 상황이 조금 위험하게 돌아갈 뻔했지만, 이제 웬만한 질문을 하더라도 아무 의심을 얻지 않고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내부를 점검 했다. 엘야시온 옆에서는 조심해야한다. 아무리 능력이 떨어졌다고 하더라 도, 그는 엘야시온이다. 그러나 그 옆에서는 아무래도 '감정'이... 하지만 이것을 컨트롤 못하면 끝장난다. 오늘밤엔, 엘야시온이 뜻밖에 소리를 해 서.. 잠시, 억제를 못한 것뿐이다. '그'도 조금 자제를 해준다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내 임무다. 그에게 불평해 봤자.. 소용이 없지. 겐트 온은 차가운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 내린 뒤 말했다. "...엘야시온님,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응? 뭔가? 하겐트?" 엘야시온 가디엘은 다정하다고 해도 좋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겐 트온은 정말 고민이라는 듯 말했다. "..그것이 저.. 무기 건도 그럭저럭 해결돼 나가고 있는 추세이고... 이제 남은 것은, 일루티온 계급까지 포함하는 대단위의 병력을 확보하는 일인 데... 그들을 훈련하기 위해서, 지금 루이티온들의 상태는 아무래도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아아.. 그렇지. 그 문제도 꽤 속을 썩이고 있네만..." "루이티온들의 싸움방식이라면 역시, 아직도 검기 위주의 싸움이지요?" 엘야시온 가디엘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가 명령을 한 대로 시종들은 아주 멀찍이 한 2-30미터 뒤에 쫓아오고 있었다. 회랑이 조용하긴 하지만 시종들이 초인적인 귀를 갖지 않은 이상 엘야시온 가디엘과 겐트온의 말 은 그저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 엘야시온은 그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앞으로 돌린 뒤 나직이 말했다. "..맞아. 법률이 아닌, 관습... 특히 그것이 자부심에 결부된 관습이라면, 그 건 잘 안 바뀌지. 루이티온들의 검기는 그들만의 특질이자 자랑이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노력을 했건만... 그렇다고 대 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법을 바꾼다고 될 일도 아니고." "정말이지 이것은 노력 갖고는 안돼는 부분이군요. 지난 99년도 토너먼트 에서 루온 루사벨라를 우승까지 하게 만들었건만... 루이티온들은 아무리 그래도 무술을 사용하지는 않지요?"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도 말게. 첫 출전한 자, 그것도 여자가 '무술' 덕분에 토너먼트에서 우 승을 했으니, 그걸 보고 다른 루이티온들도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림 반푼어치도 없더군. 뭐,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거 부감은 안 느낄 줄 알았는데...! 아마, 자네도 알 것이라 생각하네. 힐라토 에브리나의 명문(名門)에 루온 루카나안이라는 아이가 있지?" "네. 압니다. 루온 루카나안... 15세도되기 전에 벌써 어른들이 낼 만한 검 기를 형성할 줄 알아 왕족들의 관심을 끌고 있더군요." "그렇지. 게다가 눈빛도 특별히 힐라토 상급루이트의 눈빛이라기보다는 그냥 천진한 분홍색의 눈빛이지? ...그만한 자질에 그런 색의 눈빛이라면... 어떤 세계로 가서 왕족을 섬기든, 최고의 능력을 보여줄 거라는 유전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나?" 겐트온은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요. 그래서 엘야시온님께서도 예전에 한 번, 루온 루카나안이 특별 히 영혼의 공명을 느끼는 왕족을 찾지 못했을 경우엔 스온 엘스제님의 루 이트가 되는 것도 괜찮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 정도로 뛰어난 아이라... 내, 특별히 그 애 아버지를 불러 그 애를 루온 루사벨라의 파(派)에서 훈련받도록 했지. 루온 루카나안은 이제 열 네 살... 내년엔 열 다섯 살이니, 107년의 토너먼트에 출전할 자격을 갖 추게 되네. 각 왕족에게 관심 받고 있는 아이이니... 그때 선보이도록 루온 루사벨라 파에서 무술을 익히길 원했건만. 쯧쯧... 틀렸어. 종자로서 훈련 을 잘 받고 있겠거니 했는데 그 아이, 어느새 루온 루파르테 파로 적을 옮겼더군. 그 아비가 사죄를 하러 왔길래 무슨 말인가 들어보니, 고놈이 글세 계속 루온 루사벨라 파에서 훈련을 받을 바엔 차라리 루이트고 뭐고 아무 것도 안되고 성인식도 하류계급이랑 치를 거라 했다나? 헛 참, 그 녀석...! 하긴.. 제 딴엔 상급 루이트 중에 상급 루이트인데... 루온 루사벨 라 파가 성에 차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99년도의 토너먼트 우승자 가 운영하는 파이니 만큼 어느 정도 메리트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쯧 쯧..." 그리고 엘야시온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상한 일 아니겠나? 왜 그때처럼 안 되는 걸까? 그가 우승했던 해에는... 비록 그는 무술을 사용했지만 말일세.. 그래도 그의 파엔 엄청난 지원자가 몰려들었지 않는가? 그때는 무술이 루이티온들에게 새로운 유행 이 되다시피 했는데..." 겐트온은 엘야시온이 누구 이야길 하는지 눈치챘다. 겐트온 자신도 바로 그에 대해 이야길 하고 싶었다. "...루온.. 루사트.. 아니, 이젠 그 이름이 아니지요.. 그 지워진 이름을 갖고 있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디엘은 겐트온을 힐끗 보았다. "그래. '드랫'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 자네도 예전에 그가 우승하던 모습 을 봤다고 했었나?" "..아니오. 그때 저는 자이온에 없어서." "그랬나? 흐음.. 그거 아쉽군. 83년도의 우승자는 굉장했었지. 그 전에 사 이너스가 두 번에 걸쳐 우승했을 때만큼 멋진 장면이었네. ..온통 관객들 이 들고일어나서.. 그 젊은이가 글세 결국은 우승까지 했지. 후후.. 인기가 대단했어. 당시 하바티온 가운데도 드랫에 대한 연구를 하는 자들이 많았 거든... '무술과 루이티온'이라는 논문이 하루에도 몇 편씩 쏟아지고... 훗 훗... 젊은 루이티온들은... 드랫을 동경해서... 아, 물론 그때 나이든 루이티 온들은 그 사실을 굉장히 못마땅해했었지만 말일세.. 하하하.. 하지만 젊은 이들은 그의 모든 것... 심지어는 무술마저도 배우고 싶어했지. 무술은 하 류계급이나 배우는 것이라고 천시하고 무시하던 자들이 말일세. 후후후.." 겐트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한 루이트였군요. 언제나 엘야시온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후후.. 대단했지. 대단했고 말고. 헌데, 루온 루사벨라는 그것이 안돼. 다 시 무술을 유행시키기엔 턱도 없지. 드랫의 약혼녀였고.. 그에게서 무술을 배웠다고 했지. 그녀가 나타났을 때, 바로 이거다! ...라고 생각했건만. 왜 그런 걸까? 토너먼트의 우승만으로는 모자랐던 것일까?" "...미흡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응..? 의견? 그래, 말해보게나." 그의 의견은 언제나 가치가 있었으므로 엘야시온은 반색을 하고 말했다. "저도 그것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역대 토너먼트 기록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오..! 그래? 그래서 뭐라도 발견했나?" "발견이랄 것까지는 없고, 기록을 주욱 살펴보다 보니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추측? 무슨..?" "기록을 살펴보니, 59년과 67년의 토너먼트에서는 고(故) 카이러스 사이너 스 님이 두 번에 걸쳐 우승을 하셔서 사람들에게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 더군요." "그랬지. 나도 그때 일은 잊지 못하네." 엘야시온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듯 즐거운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분이 68년도에 카이러스의 파이오니온이 되시고... 75년도의 토너먼트는 상대적으로 썰렁하기 그지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야사를 보니 '전대의 우승자가 빠진 약체들끼리 싸운 토너먼트'라는 말까지도 떠돌았다 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하긴 우승자가 겨우 전대 우승자의 루이트인 루온 루바인이라면... 사람들에게 그다지 매력 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리라 생각 합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루온 루바인을 볼 때마다 엘야시온 세계의 진정 한 강자가 누구인지를 쉽사리 뇌리에 떠올렸을 겁니다. 바로 '그의 옆에 서 있는 그의 주인'을 보면 됐으니까요. 어쨌든...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것 같은 75년도의 토너먼트가 끝나고, 새로운 83년도의 토너먼트에서 루온 루사.. 아니, '그'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래서 그만큼 83년도의 우승 자에게 열광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나이, 첫 출전... 이것은 관객들에 게 과거의 누구인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그'는 관객들에게 대 대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에 적힌 대로라면 '그' 는 토너먼트 끝나기 며칠 전에 당연히 탈락했어야 하는데 관객들의 요구 로 다시 토너먼트 장에 입성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인기라면 평범 한 상태에서 얻기는 힘들지요. 관객들에게 어떤 선입견이 심어지지 않은 이상... 어쨌든 '그'에겐 행운이었고, 또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전대의 누 구를 떠올려도 될 만큼 우수한 검기의 소유자였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이 런 것을 볼 때 그의 인기는 단순한 검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검술 은 부차적인 것으로 봐야지요... 그 후에... 그 경악할만한 사건.." 고개를 끄덕이며 겐트온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엘야시온은 이 대목 에서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서 겐트온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헛 기침을 했다. "콜록.. 죄송합니다." "..괜찮네. 계속 말하게." "네. 어쨌든 그래서 토너먼트에 전대 우승자인 루온 루바인이 불참하는 상황이 벌어졌어도 75년과 같은 혹평은 없었고, 오히려 '힐라토의 잔재주' 라는 애칭으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던 그가... 어리석은 짓으로 신분을 강등 당했을 때,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엄청난 충격이자 몹시 불쾌했던 사건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불쾌감'과 떨어뜨려서는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뭐... 여기서도 '무술'은 그저 부차적인 일 로 남아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무엇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은 그렇게 천 조 각 찢듯 명확하게 잘라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죠. 더구나 그에게 있어 무 술은 수많은 능력 가운데 골라 쓸 수 있는 또 다른 능력 같은 것이었을지 도 모르지만.... 무술의 경우는, 그것이 그토록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니까요. 그러니 그의 지위가 하락함에 따라 무술도 같이 그 미약한 인기를 다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이라는 감정만 깊이 심어주고요. 또, 더욱 안 좋은 것은 91년도의 우승자가 '루온 루드리 안'이라는 것입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여기서 얼굴을 파악 찡그렸다. "루온 루드리안이 왜? 그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는 토너먼트에서 우승하 고 몇 달이 지나자 '실버 하트'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버리지 않았는가? 토너먼트 우승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자신의 가문을 버리다니..! 난 지금도 믿어지지 않네!! 카이러스 최고 상급 루이트 가문, 루온 루바인의 아들 녀 석이 마노테만도 못한 짓을 했다는 것이 말이야! 쯧쯧쯧~!! 에잉~!! 쯧쯧 쯧!!" 겐트온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당시에 엘야시온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는 것 입니다." "쯧쯧쯧~!! 그랬지.. 기억나네! 그 녀석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나도 그 놈을 좋게 봤으니까. 91년도에 자이온은 그 녀석 때문에 온통 생난리였지. 오죽했으면 그 놈이 한발자국 걸으면 그 발자취엔 사람들이 던진 꽃다발 이 남는다고 했을까.. 원~! 극성맞은 것들.. 쯧쯧..." "..그랬죠. 저도 91년도에 먼발치에서 그를 봤습니다. 인상적인 짙은 초록 빛의 머리칼을 가진 루이트였다고 기억합니다." "에잉~! 그때 당시야말로, '약체들끼리 싸운 토너먼트'였네! 이건, 무슨 대 회의 관례라도 삼자는 건지 전회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녀석은 한 녀석 도 참석하지 않은 토너먼트..." 여기까지 말한 엘야시온은 그 토너먼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기억 을 떠올렸다. 83년과 91년 사이... 그때, 모든 일이 일어났지. 내 사랑하던 자들이 대부분 떠난, ...정말로 꼴 보기도 싫던 토너먼트였다. 엘야시온 가 디엘은 더 이상 말하기도 싫어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러자 겐트온은 차 분하게 말을 이어 하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관객들.. 그러니까 각 세계의 유력한 귀족들은 토너먼트에 서 미친 듯이 그 약관의 젊은이에게 열광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과거의 '추억'과 '불쾌감'을 상쇄할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1살 이라는 젊음과... 그야말로 상급 루이트다운 절도 있는 행동, 우아한 싸움 의 방식... 짙은 회색으로 빛나던 검기. ...저도 상당히 감탄했습니다. 사람 들이 좀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그럴 만했다는 생각입니다." "흥.. 그래서, 루온 루드리안이 뭐가 어쨌다는 건가? 말해보게." 겐트온은 희미하게 웃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뭘 어쨌다는 것이 아니라.. 엘야시온님, 그가 싸운 싸움의 방식이 문제입니다. 그는 '정통' 루이트였습니다. 제 기억에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정통을 고수했습니다. 91년도엔 그래도 간간이 무술을 사용하는 루이티온 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차라리,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은 참아 주었으면 좋 았을 것을 그랬습니다. 어설픈 흉내쟁이 녀석들 앞에서 '정통'이 발하는 빛이란 반딧불 앞에 태양 같은 것이었죠. 그때... 엘야시온님, 그때 관객들 은 단박에 마음을 돌려버린 겁니다." (계속)================================================== 버그가.. 외전에 보니 '아스나엘'을 '녹(숲)의 엘야시온'이라고 해 놨더군요. '금의 엘야시온'입니다.. 머리로는 계속 '금'이라고 생각했는데. --; 음.. 에 라... 여기서, 새롭게 정립한 엘야시온의 계보를 적자면...^^(스페셜.. 푸하 하..^^) <스페셜! 엘야시온의 계보! 그것을 알려주마!!> 해(海: 로트라) - 숲(혹은 녹: 네르세바) - 산(뷰겐트) - 천(天: 로이카라) - 황(黃: 휠마즈) - 금(마이레스) - 청(위테리드) - 은(클로니아) - 적(赤: 칼리안) - 동(銅: 베르노크) ..의 엘야시온, 순입니다.^^ 외전에도 말씀드렸듯, '힐라토'와 '카이러스'에서는 엘야시온이 안 나오니 까.. 열 개의 세계가 돌아가면서 사이좋게 엘야시온을 합니다... 하. 하. <엔...^^> ps...참 길기도 한 night편인데.. 아직도,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우선 한편만...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72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0 00:03 읽음:2526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6회, 제 35막. The Night. (10)> 겐트온은 눈을 들어 엘야시온을 보았다. "그러니, 99년도에 '무술'을 사용하는 루온 루사벨라가 우승을 했다고 하 더라도 사람들은 오히려 불쾌해 할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충격과 불쾌감, 실망과 곤혹스러움 가운데서, 무술에 대한 불신만을 갖고 있을 뿐 입니다. 이미 '정통'적인 방식이 그런 잔재주보다 훨씬 뛰어난 싸움의 방 식이라는 것은 입증된 셈이니까요. 뭐, 이건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 만 루온 루사벨라의 머리칼이 '초록색'이었다는 것도... 루온 루드리안과 비교가 되어 나빴지요." 겐트온의 그 말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발을 멈추었다. "그런가?" 가디엘은 못마땅할 때 짓는 표정을 지으며 뒷짐 진 채로 생각에 빠졌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렇다면 자네 생각은 루이티온들에게 무술을 배 우게 하는 데는, 루온 루사벨라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말이군?" "네. 아마도. 그게 요즘의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조사해본 바로, 루이티온들은 근래에 더욱 '정통'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 다고 합니다. 젊은 루이트들 가운데 몇몇은 무술에 관심을 둘 법도 한데... 오히려 그들은 '사라진 영웅'인 루온 루드리안을 동경하여 더욱 '정통'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그 가출 문제아 녀석이 '사라진 영웅'?!! 헛 참-!!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오는군! 요즘 젊은것들은, 별~!!!" 겐트온은 피식 웃었다. "...여론이란 그런 것이죠. 유행에 매우 민감하고, 한 번 정해지면 일정기 간 동안은 압도적입니다. 새로운 여론을 만들만한 뭔가 특별한 사건이 없 는 한은."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러니 요는 '새로운 여론'이군. 자네 말을 듣다보니, 어렴풋이 생각만 하던 것이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야. 이로서, 내 계획 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졌군. 루이티온들은 어떻게 해서 든지 무술을 익혀야 하니까! 암, 그렇고 말고!" ...계획이라. 겐트온은 드디어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획이라면.. 어떤 계획입니까, 엘야시온님? 무언가 생각해 두신 방법이 라도?" 엘야시온 가디엘은 겐트온의 질문에 망설이는 말투로 말했다. "글세, 뭐.. 말을 해놓고 보니 계획이랄 것까지도 없는데.." 겐트온은 냉랭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흥.. 역시 만만치 않군. 결정적인 부 분에선 속을 숨긴단 말씀이야. 하지만 겐트온은 초조해 하기보다는 한 걸 음 더 물러서서 느긋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또 당연히 엘야시온님께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만 한 비책이 있다고 생각하고.. 죄송합니다. 그럼, 역시 이 문제도 제가..?" 적당한 데서 말꼬리를 흐리고 겐트온은 고개를 숙였다. 엘야시온 가디엘 은 그런 그를 보며 묘한 느낌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온 하겐트하 고 있으면.. 어떤 일이든 털어놓게 되는 느낌이다. 그의 화술이라든지, 그 의 머리가 비상한 것들이 그와의 대화를 즐겁게 하고, 마음속에 있는 말 들을 털어놓게 되는 것 같은데.. 아니, '마음속에 있는 말' 이라기 보다는.. 엘야시온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속에 있는 말들' 보다 는... 그래. '그가 듣기를 원하는 말'이다. 하겐트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어떤 느낌이 자꾸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는 '남에게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엘야시온 가디엘은 결국 웃음 짓고 말았다. 그건 경계 할만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잊어버 리고 있던 그리운 느낌이었던 것이다. "훗. 하겐트.. 자네 정말 교활 하구만." 교활? 겐트온은 이 뜻밖의 악평에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엘야시온 이 짓고있는 것은 거의 찬탄의 표정이었다. 겐트온은 엘야시온이 짓고 있 는 표정과 그가 말한 단어가 별로 안 어울린다는 것을 생각하고 주의 깊 게 말했다. "엘야시온님? 교활..이라니, 제가 무슨 실수를 해서 노엽게 생각하신 부분 이라도?" 엘야시온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아니야. 노엽게 생각하는 것 없네. 단지 즐거워졌을 뿐이야. 하 하하.. 뭐 자네는 자네도 모르고 그러는 것 같네만. 나쁜 의도는 아닐 테 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나는 별로 기분 안 나쁘거든. ...계획이라. 훗 훗. 뭐, 자네에게는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하지만 이제 거의 내 숙소에 왔 으니, 나머지 이야기는 응접실에서 하기로 하세." 겐트온은 엘야시온 가디엘의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의 태도로 보 아, 자신에게 갑작스런 경계심을 느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해 서 그는 엘야시온 가디엘의 태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 금은 몇몇 정보만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응. 굉장했다니까. 평소에는 별 말도 없던 사람이 그러니까 더 놀라웠어. 롯테도 눈물이 글썽글썽해서는... 못 봐주겠더군." 도비온은 이드넘의 말을 듣고 들고 있는 포도주 잔을 빙글 돌렸다. "흠... 그거 재미있었겠는걸." "재미는 무슨.. 넌 별게 다 재미있군. 어쨌거나 저쨌거나 한 형제인데, 이 렇게 서먹해 지는 것이 좋아?" 도비온은 포도주를 음미하며 한 모금 마셨다. "어차피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야. 한심한 사랑 놀음 따윈 적성에도 안 맞고. 계집애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아마사 말이야?" 도비온은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는 눈으로 이드넘을 보았다. "아마사가 거기 왜 들어가? 아마사는 언제나 아마사다웠는데. 우리들의 귀엽고 예쁜 공주님답지." 그리고 그는 홀 가운데서 사람들과 윤무를 추는 아마사를 쳐다보았다. 다 른 여자들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마사는 특별해. 그건 너도 알잖아. 언제나 문제는 샤일라테지. 계집애 주제에 잘난 척에, 고분거리는 맛이라고 없고... 몇 시간만 같이 있으면 위 장병이 생길 정도지. 헬리옷이 그 계집애를 질색하는 것도 무리가 아냐. 아마사 때문에 괴로워한다니, 유감이긴 하지만 루이티온 계급이란 워낙 강한 계급이고 또 조금 후면 자기 원하는 대로 될 테니... 흥." 그는 코웃음 쳤다. "그때 가서 샤일라테가 달라붙는 것만 떼어내면 그의 인생은 완벽 그 자 체가 되겠지. 원하는 대로 훌륭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샤일라테의 그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니 좋군. ..얼 마나 잘난 척 했을 지를 생각하면.. 쳇." 도비온의 말을 들은 이드넘은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자꾸 힐끔대는 것 에 신경이 쓰여서 몸을 조금 더 벽 쪽으로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휴우.. 확실히, 롯테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겠군..." 지금도 불편한 기분인데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다면 그야말로 짜증을 주체 못했을 것이다. 그때 도비온이 무언가를 품속에서 꺼내며 이 드넘에게 보여주었다. "이제 샤일라테 이야긴 그만하고.. 이거나 봐 줘." "뭔데?" 도비온이 꺼낸 것은 붉은 색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도비온은 그 목 걸이를 이드넘에게 넘겨주고 벽에 기대어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부하가 가져온 것이지. 놈들이 갖고 있는 것을 뺐었다고..." 이드넘은 보석을 밝은 곳으로 비추며 관찰했다. "글세, 태양 빛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엔 상당한 품질인걸? 작기는 해도.. ...?!" 이드넘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리고 그는 경악한 눈으로 목걸이를 이리 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잔뜩 의심이 서린 얼굴로 도비온을 보았다. "이거 어디서 났지?" "왜?" "...왜냐니?! 너 날 시험해 보는 거야, 아님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걸 너한테 봐달라고 할만큼 할 일 없는 놈이냐? 뭔데 그 래? 누구나 다, 너처럼 한 번 척보고 보석 감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천치 보는 눈 따윈 집어치우고 뭔지 설명해 보라고." 이드넘은 흥분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이건 정말 굉장한데...! 이런 걸 볼 수 있다니!! 조금 더 살펴봐 야겠지만,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이건 평범한 품질의 500캐럿 짜리 다이아몬드하고도 맞먹을 정도의... 그래, 이건 차라리 블러드 다이아몬드 라고 부르는 게 낫겠군!! 다른 이름으로는 카벙클(carbuncle)이라고도 하 는...!! 블러드 루비의 검신도 바로 이런 종류라고!!!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라 엄청난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지! 하여튼 이런 건 천연 적으로는 완전히 멸종되고, 다 왕족들 손에만 있을 텐데? 왕족들이 이런 것을 내 놓을 리도 없고... 응? 잠깐, 그러고 보니 이건 스온 아피네스님이 걸고 있는 목걸이와 비슷하잖아!!! 한 번 본 보석은 절대 잊지 않는 나니 까, 틀림없어!! 도바-!!!" 이드넘은 당황해서 말했다. "너 이걸 어떻게 빼왔지?!! 그녀의 목걸이는 퍼제셜(Possessor) 아트가 걸 려있잖아!" 도비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카벙클? 나도 그 멸종된 보석에 대한 말은 들었지만.. 이게 그거라 고?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착각이라니! 이래봬도 난, 길드의 마스터..!!!" 흥분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소리까지 한 이드넘은 주위에서 힐끗 그를 쳐다보자 목소리를 낮췄다. "하, 하여튼, 내가 잘못 볼 리가 없어! 그건 네가 텔레포트를 실패하는 것 과 똑같은 일이야!!" "이드넘! 쓸데없는 비유 쓰지마!" 도비온은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다가와서 이드넘의 손에서 목걸이를 휙 뺐었다. 이드넘의 말을 듣고 보니, 보석이 더 영롱해 보이는 것 같았 다. 작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깊이를 갖고, 그곳에서 일렁대는 붉은 색 의 불꽃이 보는 사람의 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주위의 물결모양 금 문 양이 그런 불꽃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믿을 수 없군. 이게 그 블러드 루비와 같은 재질이라고?" "어디서 난 거야? 설마, 정말로 스온 아피네스님의 목걸이?!" "헛소리하지마! 아무리 탐나는 것이라도, 내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할 것 같 아?" "그럼..?" 도비온은 인상을 썼다. "...말했잖아. 부하가 그놈들에게서 뺐어왔다고. 그놈들은 가끔 일을 제멋 대로해서 물건을 빼돌리기도 하니까, 내 부하들은 그런 것에 철저하지. 이 건 저번, 바리스 마노테오나 건을 맡긴 놈들에게서 뺏어 온 거야." "바리스? 설마.. 인간 사냥꾼들 말인가?" "좀 더 목소리를 낮추고, 쓸데없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마." "아, 알겠어. 어쨌든 믿을 수 없군... 고작 그런 녀석들 따위가, 어떻게 이 런 것을? 어디서 훔친 것일까?" "낸들 알아? 가끔 귀족 자제들을 납치하기도 하니... 다른 데서 의뢰 받은 일을 하다가 얻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더라도 이런걸? 하! 어디 실종된 왕족이라도 없는지 조사해봐야겠 군!" "흥분하지마..! 그런데 정말.." 도비온은 눈을 찌푸리고 이드넘이 끼고 있는 붉은 색 반지를 보았다. "이게 정말 그렇게 대단해? 내 눈에는 이 목걸이가 네가 끼고 있는 것과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다이아몬드 500캐럿 짜리?" "바보같이!! 비할 걸 비하라고! 이 반지도 상급의 루비이긴 하지만, 차라 리 돌멩이하고 다이아몬드를 비교하는 것이 낫지!" 도비온은 이제야 진심으로 놀란 눈을 했다. "다이아몬드와 돌멩이? 그것 참... 이거, 우연치 않게 대단한 물건을 얻었 는걸? 그 녀석들 배가 꽤나 아프겠어? 후훗.. 하긴 이 목걸이의 가치를 제 대로나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그 지저분한 녀석들하고 계약을 맺고 일한 보람이 이제야 나타난 느낌이군." "어, 어떻게 할거야?" "뭘?" "그거 말이야." "어떻게 하기는. 내 실험에 써야지. 다이아몬드 500캐럿이라면, 구할 때 돈도 많이 드는데. 이런 멋진 실험 재료가 공짜라니.. 고맙게 써주지. 후 후.. 500캐럿? 이거, 잘하면 정령도 가둬놓을 수 있겠군. 후후.. 고렘이라든 지 하는 거 만들기에 딱이야. 잘됐어.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으윽!!!! 도바!!! 너란 녀석은 강심장인건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우, 우 선 그것에 대해 겐트에게라도 말을 해서...!" 그때 갑자기 도비온이 화를 벌컥 냈다. "뭐?!!! 겐트?!!! 시끄럿!!!! 내 앞에서 그 놈 이야기 꺼내지도 마!!!! 이건 일하다가 얻은 것도 아니고, 우연히 입수한 거니, 내 거야!!!! 그런데 왜 내가 내 일을 일일이 그딴 놈에게 말해야 해?!!!" 이드넘은 갑작스런 그 격렬한 반응에 당황했다. 도비온 녀석이야 샤일라 테만큼이나 겐트온하고 사이가 안 좋지만... (더 정확히 말한다면, 겐트온 이 도비온 녀석 약을 슬슬 올리면 도비온이 화를 벌컥벌컥 내는 시스템이 지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 오늘 낮에 겐트하고 무슨 일 있었냐?" 도비온은 이드넘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아,무,일,도 없.었.어! 그러니 썩을 놈의 겐트 자식 이야긴 꺼내지도 마!!! 그리고 보석 이야기도 그 자식에게 하지 말고!!!! 이건 내가 내 마음대로 쓰겠어!!" "이봐 아무리 그래도..!" "됐어!!" 도비온은 그렇게 이드넘의 말허리를 딱 잘라 버리고, 목걸이를 품속에 넣 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드넘은 혀를 찼다. 저 자식..! 성질머리하고는..!! 하기는 저 보석이야 일하다가 얻은 것도 아니니 개인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단지.. 저런 희귀한 것이 입수된 경로가 좀 껄끄러울 뿐.. 그래서 겐트온에게 말해보자고 한 것인데...! 하지만 이드넘 은 더 이상 말하기도 지겨워졌다. 그리고 솔직히 저런 보석이 도비온에게 떨어졌다는 우연도 배가 아팠다. 같은 우연이라면 그에게 일어날 수도 있 었을 텐데!! 그래서 이드넘은 이번엔 심술궂게 말했다. "..쳇!! 입수 경로도 불분명한 고대의 카벙클이라니...! 저주라도 걸려 있으 면 어쩔 거야? 그런 건 순수해서 힘 같은 것이 잘 들어간다고!" 도비온은 히죽 웃으며 이드넘을 보았다. "...저주? 나한테 그런 게 통하리라 생각해? 만약 그런 게 걸려 있다면, 더 잘됐지. 어떤 것인지 연구해서 통째로 겐트 녀석에게 돌려 줄 테니..! 어 쨌든, 저주라니... 너 같은 경우는 아주 조심해야겠군. 너는 그런 힘에 약 하잖아. 그러니, 행여나 나한테서 이거 훔쳐가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마. 없어지면 제일 먼저 너를 의심할 테니." "뭐야?!! 너 사람을 뭘로 보고...!!" 도비온은 빈정댔다. "뭘로 보긴.. 예전에 내가 아끼던 아트가 봉인된 반지를 훔쳐가서 고생했 던 사람으로 보지. 덕분에 반지도 완전히 망가지고..." 이드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어휴!!! 정말, 몇 년 전의 일을 갖고 아직도 그러는 거야!! 나도 고생했고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정말이지, 오늘 하루종일 기분 잡치는 구만!! 관 둬! 자식아!! 다음부터 나한테 그런 거 감정해 달라고 하기만 해봐라!!! 제 기랄, 그 계집애가 도망갔을 때부터 오늘 하루 운수 더러울 거란 걸 예상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화난 목소리로 내뱉고, 씩씩거리면서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 다. 여자들이 그의 난폭한 얼굴에 겁먹은 표정을 짓자, '죄송합니다. 레이 디..'라고 말한 것 외에는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렇게 발코니 쪽으 로 가려는 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았다. 도비온이었다. 이드넘은 짜증냈다. "뭐야?!! 아직도 할 말 있어?!!" 도비온은 그가 그렇게 화를 내자, 얼굴을 찌푸렸다. "...뭐..." 그는 한참이나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드디어 화제를 발견했다. "여자애가 도망갔다고? 도대체 어떤 여자 애?" "네가 알아서 뭐하게?! 너야말로 내 일에 참견하지마!! 각각 따로 살자 고!!" 그렇게 말한 이드넘은 그의 손을 확 뿌리치고 가려던 데로 갔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도 질리는 일이니, 어둑어둑한 발코니 의자에나 앉아 있기 로 한 것이다. 그때 또 도비온이 그를 잡았다. "야, 이드!!" "왜, 또?!!" 이드넘이 짜증내며 뒤를 돌아보자, 도비온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뭐, 일주일 정도.. 목걸이 같은 거 빌려줄 수 있어."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이, 누굴 호구로 보나-!! "관둬!! 내가 거지냐?!!! 그거 일주일동안 빌려가서 뭐하게?!!! 나 참, 별...!!" 이렇게 말하고 그를 뿌리치는 데 그런 그를 보며 멀거니 있던 도비온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음, 사실 나는 고렘보다는 몬스터 합성에 더 관심이 많거든... 오크 같 은 거야 문 밖에만 나서도 발에 채이지만, 희귀 몬스터는 비싸서 돈이 많 이 들어.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걸 팔면 꽤 돈이 되겠지?" 이드넘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뭐?! ...그걸 판다고..?" 이드넘이 관심 보이자, 도비온은 히죽 웃더니 의기양양하게 거드름 피우 기 시작했다. "아아~ 돈이 좀 모자라서... 다이아몬드 500캐럿? 음.. 그래, 1000탈란 정도 라면 팔 수 있어." "뭐?! 카벙클을 겨우 1000탈란에 판다고?!!! 너, 미쳤냐?!! 차라리 나한테 넘겨!!! 1500탈란으로 쳐줄게!!!" 도비온은 인상을 썼다. 자식이... 한 2000탈란은 불러 줄줄 알았더니..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2000탈란을 부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둑놈 에게 뭘 기대하겠어? 도비온은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품속에 있는 보석을 넘겨주었다. "자!" 그것을 받아든 이드넘은 희희낙락하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저주 같은 게 걸려 있으면 어떡하지?" 갑자기 도비온의 눈이 반짝 빛났다. "..돈 몇 푼만 내면, 검사해 줄 수 있어. 저주 같은 게 있으면 청소도 해 줄 수 있고." "돈 몇 푼? 얼마나?" "천 탈란." 그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드넘은 말없이 보석을 품속으로 갈무리 했다. 그리고 타 세계로 가장 왕성하게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도둑 길 드의 마스터답게 딱 부러지게 말했다. "됐어. 그냥, 갖고 있을래." "저주라도 걸리면.." "자, 자, 도비온! 모처럼 좋은 보석을 손에 넣어서 기분 좋다! 우리 술이 나 한잔 마시며 즐거운 이야기나 하자!" "야! 이드!!! 그럼, 900탈란..." "아~!! 저 여자들 예쁘다! 네가 가서 꼬셔봐~!!" "웃기지마! 자식아, 내가 겐트냐?!! 여자들 꼬시는 천박한 짓을 하게!! 그 보다는 그 보석..." "와~!! 저기, 저 여자들도 예쁜데~!!! 아깝다!! 겐트만 있었어도!!" 그들이 이렇게 회피와 추궁이 섞인 말다툼을 하며 서로를 치사한 놈이라 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드넘으로서는 도비온이 보석을 기껏 1000탈란 에 팔기로 했다가 수선비(?)로 1000탈란이나 달라는 것이 무슨 심보인가 했고, 도비온은 도비온대로 순간의 감정으로 보석을 내주어서 속 쓰려하 고 있었다.) 겐트온은 엘야시온 가디엘의 응접실에서 방금 들은 말에 내 심 당황하고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가디엘대로 말을 끝마치고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없애실 생각이란 말입니까? 그.. 그, '지워진 이름'을 가진 자의 종속자를?"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72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0 00:06 읽음:247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7회, 제 35막. The Night. (11)> "음. 그래. 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군." 겐트온은 이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 져 있어 겨울의 황량한 공기를 막고 있는 응접실은 화려한 내부장식으로 꾸며있었다. 각 세계에 있는 엘야시온 전용의 숙소는 각각 그 세계다운 특색을 띠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 화려했다. 페어리족다운 엘야 시온 가디엘의 특성으로 그는 가볍다고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것과 우아 한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겐트온은 역시나 그렇게 화려한 눈꽃 모양의 조각이 새겨진 흑단나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 엘의 아주 묘한 미소를 보면서. 그것은 담담한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픈 것 같기도 한 이상한 미소였다. "...뭐, 일단은 별로 좋은 일도 아니니... 사고사로 할 참이거든. 모든 것은 비밀로 해야겠지. 자네도 비밀을 지키게." 비밀이라. 겐트온은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엘야시온의 생각엔 별 로 동의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저런 씁쓸함과 단호함이 섞인 표정도. '그'는 말했다. '흥미롭다. 자신이 직접 볼 때까지, 다소간의 위험이 있더라도 그 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말엔 그도 동감이었다. 그 말을 듣 는 순간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생각이 더욱 분명해져 있었다. 제거해서는 안 된다. 겐트온에겐 생각할 거리로 남겨둔 것이 있었다. 바 로, 낮에 엠벨루스가 외친 소리. [너, 도미니온즈여- 크아아악!!!! 나의 종의 힘으로 네가 머무르고 있는 그 육체를 죽여주마!!! 이 인간들이 날 약올린 것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치러 주겠지만...!!! 그 전에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이 아니다!!!! 크아악!!!} 이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도미니온즈'라니... 그 뒤에 보호물이 검기를 날리는 통에, 정신이 없긴 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 다. 엠벨루스라든가 하는 다크 스피릿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들- 대표적으 로 인간- 에게 종종 거짓말을 하거나, 놀릴 목적으로 빈말을 하기도 하니 까 전적으로 믿을 것도, 상대할 것도 못 되지만... 그 상황엔 뭔가 극악한 분노의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겐트온은 그 마노테 계집애에게 뭔가 찜찜 한 기분을 느꼈고, 도대체 엠벨루스가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그녀를 찾 아가 조사를 해 볼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내일- 그 마노테 계집을 죽이 겠다고 공언을 하니...? 겐트온은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보호.. 아니, '지워진 이름'을 갖은자가 필요하신 것입니까?" 엘야시온 가디엘은 겐트온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말했지 않은가. 20년 전 '브리에 마노테오나'의 실수를 보더라도... 그들과 결전을 벌이자면, 루이티온 계급들은 혼자서 싸우는 방법을 버려야 하네. 그 검기 위주의 싸움은 화려하기 그지없고, 파워즈의 수호를 받아 강력하 기 그지없지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인드 컨트롤에서 '전투 명 령어'라는 것은 말이지... 사실 그것이 지켜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넓혀봤자, 고작 '두 명'이네. 자기 주인과 그 자신. 철저하게 개인적이지. 결국 그들로서는 주인이 아닌 자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 그게 그들이 지금까지 '관습'안에서 익혀왔던 마인드 컨트롤이니까. 헌데, 그토록 개인적인 그것이 '집단'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에서도 어느 정도 통용되어 왔던 것은.. 자네도 알텐데, 겐트온? 역사상으로 보면 우리 가 전쟁을 벌여 왔던 것은, 기껏해야 한 개나, 두 개의 형제세계를 징벌하 기 위해, 혹은 다른 의사인종들과의 마찰 때문이었네." 장작이 파닥, 벽난로에서 부서졌다.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덕분에, 응접실 엔 벽난로에서 나오는 붉은 불꽃에 일렁이는 얼굴을 한 엘야시온과 겐트 온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벌어질 일들은 틀려. 아마, 지금까지 그 누구도 소문으로 나, 전설로나, 역사로도 배우지 못했던..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지. 자네도 알지? 각 세계 사람들은 봉인이 풀어지는 그 순간, 자기들 힘으로 스스로 싸워야해.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순 없어. 각각의 다른 세계는 다른 세계 나 름대로 그들의 적과 맞서 싸우고 있을 테니까. 자이온마저도... 인류의 공 적을 맞아, 사상 최대의 결전을 벌이고 있을 테지... 그러니, 더 이상 그런 개인적인 싸움은 안돼. 마인드 컨트롤 특유의.. 그 유아독존의 벽을 넘어 서서 그들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그들을 지휘해서 싸워 야 하게 되었으니까." "...엘야시온님, 그래서 루이티온들에게 무술을 익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은 이해를 합니다. 무술이야말로, 그들의 '관습'을 깨뜨릴 수 있는... 그러니까, '자기 내부'에서 끌어올리는 힘인 검기와 마인드 컨트롤... 그 특유의, 개인 성과 독단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의미로서 '다른 자에게서 배워야만 하는 힘'일 테니까요. 그들은 아마도 엘야시온님의 말씀대로, 무술을 배우 며 타인과의 교류를 배우고, 또 타인에게 그 교류를 나누어주겠지요. 일루 티온 계급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끄는 진정한 지휘자가 될 수 있을 것입 니다. 무술을 배우며 그들은, 세상에는 자기들처럼 싸움할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비로소 피부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무술덕분에 검기에만 의존하던 싸움 방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을 테니... 그만큼 '마인드 컨트롤'의 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실 로 일거양득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성전에 대비하여 루 이티온들에게 무술을 배우도록 만드는 것이 매우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겐트온은 고개를 저으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시늉을 했다. "왜, 그렇게 굳이 '지워진 이름을 가진 자'를 필요로 하십니까? 그의 이미 지는 이젠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더 이상 회복의 기미도 없는 퇴물이 되 어버렸고, 그토록 불충한..." 갑자기 엘야시온이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하겐트!!! 그만하게!! 더 이상 말한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할 수 없 네!!!! 퇴물이라니!! 도대체 감히 누구한테 그런 말인가?!!!" "!!" 겐트온은 뜻밖에 엘야시온의 분노에 놀랐다. "엘야..시온님?" "...!" 엘야시온 가디엘은 겐트온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스스로도 당황하여 의자 등에 털썩 기댔다. ..아 침부터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약간 의 시간이 지난 후 겐트온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야시온님, 저는 '이름이 지워진 자'에 대해 말씀드린 겁니다만.. '감히' 라고 하시면..?" 엘야시온 가디엘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나도 아네, 하겐트. 그리고, 나도.. '그'에 대해 말한 거네. 사실, 소리친 것에 나도 내 자신에게 놀랐네. 이상했지? 그가 무슨 왕족이라도 되는 양.. 나도 확실히 많이 이상해졌군. 하긴, 그냥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 리할 필요 없이 다른 루이트를 내세워도 되련만.. 지난 20년간의 시간이었 다면 그래도 충분했으련만. 그런데 이 놈의 마음이 말일세.. 이 놈의 마음 에서 나오는 어떤 느낌 같은 것이, 날 그렇게 내버려두지를 않아. 바보 같 으니라고... 늙으니 마음만 약해져서. 후-" 그러더니 그는 정말 부끄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아. 미안하네. 큰소리를 쳐서." 하지만 그 사과를 듣는 겐트온의 얼굴엔 순간이지만 웃음기가 싹 지워져 있었다. "느낌이요? 어떤 느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응? 느낌..? 글세,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네. 늙으면 다 그런 법이지. 후 후.." "그, 그래도 말씀해 주신다면.." 겐트온은 조심성 없이, 조르는 듯 말했고 엘야시온은 그런 그가 이상하다 는 눈초리였지만 그래도 훗 웃더니, 입을 열었다. "글세..? 말로 표현하려니 힘드네만... 흠- 그래도 털어놓으면 이런 느낌이 가벼워지려나? 다 듣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면 안되네. 자네도 늙으면 날 이해하게 될 테니. 알겠나?" 겐트온이 억지로 웃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엘야시온 가디엘은 예 의 그 묘한 미소가 어린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흠.. 그래.. 이상하지? 왜 그런지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런 느낌이 시작된 것일까? 23년 전 자이온의 토너먼트에서 갓 우승한 그에게선 사실 그냥, 단순한 호의정도만 느꼈는데. 그는 아주 훌륭한 루이트였으니까, 그를 계 속 주목하기도 하고, 주목하지 못하기도 했지. 그때는 정신이 없었거든. 게다가 엘야시온인 내가 일개 루이트에게 일일이 관심을 쏟는다는 것 자 체가 말도 안되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데 말일세. 이상하게도 난, 그가 그 어리석고도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이후에... 온 세계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그를 욕하던 그 이후로부터... 알겠나?" 엘야시온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벽난로의 불꽃을 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참으로.. 난 그때 후로부터 그에게서 한 순간이라 도 눈을 떼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지..." 겐트온의 눈이 어둠 속에서 커졌다. 그 때 이후로.. ...눈을 떼지 못하게 됐 다고? "...그후로 그를 보면, 무언가 가슴속에서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 도 저히 눈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어. 그건 가끔 너무 지독하게 밀려들어와 서... 그 감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것과 비슷한 감정은 '죄책감'밖 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 이상한 일이야... 정말 이상한 일. 내가 그 에게 죄책감을 느낄 일이 있겠나? 그런데 왜 그런지, 그런 생각을 계속 지워버릴 수가 없네. 그를 제자리로, 꼭 그의 자리로 돌려놓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아. 그래서, 이드렘나가 마노테온은 결코 자이온에 있을 수 없다고 시끄럽게 굴 때도 그 반대를 물리치고 무 리를 해서라도 그를 2년 동안이나 '지식의 보존자'들과 함께 놔둔 거네. '엘야시온의 마노테'라니.. 이드렘나들이 펄펄 뛰며 신성모독이라고 난리를 쳤지만, 하하.. 그 정도야 뭐 아무 것도 아니었지. 단지 가끔,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를 루온 루파르테의 기사단에 보내어 몹쓸 일을 시킨 것 이 후회될 뿐이었어.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당하는 그가 안쓰러워서, 차 라리 그를 이곳 클로니아로 보내 버릴 정도로... 사실은.. 그를 내 아들처 럼 생각한다네..." 그리고 엘야시온은 쑥스럽다는 얼굴로 빙긋 웃었다.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것 같아. 아마도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 아들 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꼭 이와 같은 느낌일거라 생각하네. 후후.. 이런 말을 들으면 또 내 주위 사람, 특히 이드렘나들은 그러니까 진작에 재혼 하라고 했지 않느냐고 시끄럽게 굴겠지만.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야. 그러 니, 이 말도 비밀이네? 후후.." 하지만 겐트온은 그처럼 가볍게 웃을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하나? 과연.. 엘야시온이다..라고 말을 해야하나..? 그야말로 섬뜩한 느 낌. 아마도 우리들은... 어느 정도는 운이 좋은 것일 테다. 겉보기는 젊지 만 노쇠할 대로 노쇠한 능력의 엘야시온. 만약 그가 한창의 능력을 지니 고 있었다면... "어쨌든, 이런 저런 사정으로... 난, 그를 꼭 자기 자리로 되돌려 놓고 말 겠네. 다른 루이트를 찾기도 이미 늦은 일이야. 적어도 성전은 다음 대 엘 야시온의 임기 중반에는 일어나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음해의 107년 토너 먼트에는 드랫.. 그가 출전해야 하네." 엘야시온의 음성은 강했다. "바로 23년 전과 같이. 더 이상 '루온 루사트'의 이름은 쓰지 못하겠지만, 그는 이제 '루온 루드랫'으로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거네. 그래서 23년 전 과 같이, 그는 이제 다시 한 번 더 무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거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상급루이트로서, 과거의 모든 불 미스러운 일을 씻고...! 완벽한 것은 바라지 않아. 그가 어느 정도 무술에 대한 고급스러운 이미지만 심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네. 루이티온들에게 서 나오는 반발을 최소한으로 하고 무술을 강요할 수 있다는 말이지. 사 실, 그걸 위해서 나는.." 그의 눈이 난로 불에 비추어 붉게 빛났다. "..알겠나? 필요하다면 난, 올해 안으로 '그 애'를 죽일 생각까지도 했네. 그 동안 사이너스의 얼굴을 봐서라도 꾹 참아왔지만, 도저히 여러모로 참 을 수가 없어. 볼 때마다 그 추한 꼴이라니..." 붉게 물든 그는 경멸 어린 얼굴이었다. "그런 것이 진정한 왕족이라고 할 수 있겠나? 제 아비의 생명으로 스피릿 심벌을 얻고, 제 어미의 스피릿을 뺏어서 연명하는 그것이? 그러니 차라 리 죽는 것이 그 스스로에게 좋겠지. 안 그런가? 게다가 그 애만 없어진 다면, 드랫이 그 멍청한 짓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헤르가스도 건강해 질 테고... 레이서스와 능력이 연결돼있을 테니 조금 위험하긴 하 겠지만, 내 힘으로라면 가능하지.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는 생각이었네. 레이서스 스스로의 고발이 없더라도 말이야. 에잉~ 그토록 오래 고발을 기다렸건만, 그 녀석도 드랫만큼 물러서... 쯧쯧쯧...!!!" 이것은, '스온 아피네스' 이야기... 맙소사. 엘야시온님.. 겐트온은 하마터면 엘야시온의 손으로 인해 자신들의 계획이 완전히 망가질 뻔한 것을 알고 허탈하다고 해야할지 두렵다고 해야할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엘야시온이 '보호물'에 갖는 집착을 좀 더 일찍 눈치 챘어야 하는데. 너무 과소평가 했다. 하긴, 비밀리에 바리스의 영주에게 그토록 오랜 원조를 해온 것을 생각하면... "하여튼, 드랫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잘 됐네. 그 애 를 버리고 새로운 종속자를 맞았을 정도라면, 확실히 세월이 약이지. 게다 가 마노테온의 몸으로 22년간을 지냈으니, 마인드 컨트롤의 힘도 많이 약 해졌을 테고... 이러니 저러니 했지만, 만난 지 겨우 일주일째란 말은... 훗.. 드랫 그 녀석도 자기가 그 동안 여자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게야. 그러다가 여자 애를 접하고 책임감까지 느끼고 나니,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거지. 그러니, 자기 종속자가 죽어도 그렇게 안 슬퍼할 거야. 마 노테온 하나 정도 죽는다고 해도.. 오히려 책임감이 덜어지는 일이니, 자 기를 그 상태에 묶어놓는 것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오 히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을 맛볼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적당 한, 새로운 여자를 찾게 될 거야... 휴우- 그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알았 더라면 진작에 그를 불러들여서 상류계급에 놓아둘걸... 환경이 중요하다 는 것이 새삼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하네. 뭐, 오늘 아침에 본 바로는 다 른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안심 했네만." 엘야시온은 빙긋 웃었다. 그를 '아들과 같이' 생각하는 자신의 그 느낌도 변하지 않았었다.. "오늘 아침엔 너무 화가 나서, 그에게 미안한 짓까지 했지만 곰곰이 생각 하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네." 겐트온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또 한번 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것으 로는... 뭔가, 그의 생각을 바꿀만한... 그때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보호물은 그의 종속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죽을 뻔하면서도 환 각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그'는 아직도 스온 아피네스를 사랑하고 있다 는 것. 위험부담은 있었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위하여 알아낸 소중한 사실 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엘야시온님?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그 지워진.. 아니, '드랫'이라고 하셨 나요? 그를 만나셨다고요? 종종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지만, 저는 엘야시 온님께서 그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응? 그, 그런가? 하하.. 아.. 이드렘나들이 하도 귀찮게 해서 말일세. 어쨌 든 이것도 비밀이야. 이건 그냥 나 혼자서 세운 계획이니까." "...그렇군요. 상당히 좋은 계획이라 생각합니다." "오? 그래?" 엘야시온은 겐트온의 말에 기쁜 낯을 지었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엘야시온님께서 그 정도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루이티온들 전체에 대한 계획과... 네. 저도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그렇게 도태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은 사실이니까.. 우수한 상 급 루이트까지 함께 얻을 수 있는 좋은 계획이지요. ..그런데 엘야시온님, 갑자기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엘야시온님의 이야기를 듣 다보니 아무래도 그의 태도가 이상해서..." 엘야시온이 눈을 찌푸리며 그에게 주목했다. "이상이라니..? 어떤 이상 말인가?" "글쎄요. ..저로서는 그를 가깝게 만나 본 적도 없지만, 이야기만 듣고서는 과연 기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인?"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류 계급의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면, 일단 결 혼은 자기 계급과 하고 그 여자는 첩으로 들이든지 하면 될 것 아닙니 까?" 엘야시온 가디엘은 맞장구쳤다. "옳아!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네! 헌데, 놈은 그 여자 하나만으로 만족한다 나?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는 일일세. 그것도 하류 계급에게 물들은 것 인가?" "그렇습니까? 여자 하나만으로 만족한다니.. 하긴, 루이티온들이 일부일처 의 담백한 결혼 관계를 선호하는 건 유명한 일이지만... 그래도 요즘은 많 이 바뀌어서 다산을 위하여 왕족들처럼 여러 여자를 첩으로 맞이한다던 데... 희한하군요. 한 여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이라... 하하... 저는 아직도.. 아니, 저도 '네라'를 그렇게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 가 안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야시온님? 뭐, 옛날의 그 일이야 신분 차이로 맺어지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했다고 하지만, 이번엔 그저 딱 하룻 밤만 다른 여자와 보내면 되는 것인데... 그럼, 모든 신분이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 사랑하는 여자와 엘에게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영 원히 같이 보내면 될텐데? 그러니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뭔가 좀 억지 같군요..." 엘야시온 가디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억지?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것, 재밌군. 더 자세히 말해 보게." "네.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저도 꽤 소문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가 자이 온에 있을 당시, 그의 앞날을 탐낸 꽤 무수한 귀족 여인들이 그를 귀찮게 했다고요. 어쨌든 그와 하누카의 날만 보내면, 당장에 상급 루이트의 정실 부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그랬지. 내 그래서 그에게 아주 예쁜 처녀들도 몇이나 소개해주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혀서 그의 방에 직접 넣어주기까지.." "네?" 엘야시온은 겐트온의 말에 강력한 흥미를 느낀 나머지 그만 자기도 모르 게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붉히며 연속적으로 헛 기침을 했다. "흠!! 흠!!! 커험-!!! 아~!! 이 방 참 난방이 잘 되는군. 조금 덥기까지 해.. 흠흠!!! 자, 계속 하게나. 그래서? 아주 흥미롭군. 뭐가 억지 같나?" "아, 네에.. 어쨌든 그의 마음이 그렇게 굳은 상태였다면, 그도 그것 때문 에 상당히 질색을 했을 테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랬지.. 그런 다음날 어찌나 쏘아보는지, 그놈이 마노테 주제에... 그래서 내가 또 그 놈을 루온 루파르테에게 보내지 않았겠나?" "네?" "응? 으흠흠!! 아, 아닐세!! 어쨌든 이제 방해하지 않을 테니 계속 말해보 게나!! 하하.." 겐트온은 내심, 참 엘야시온이 별별 시도를 다 해봤군..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그렇게 질색을 했을 그라면... 아 참. 그가 여기 클로니아 한 마노 테오나에서 살고 있었다고요? 전 그것까지는 몰랐습니다만.." "응? 아... 그는 여기서 살고 있지. 모른 것도 당연해. 자네 말고도 사람들 은 이제 드랫의 일을 뇌리에서 많이 지워버렸어. 아예 그의 이름을 모르 는 어린 세대가 벌써 20살이네. 세상엔 그것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으니까. 다들 자기들 일에 바쁜 거지. 그게 당연한 일이네. 그리고 사람 들이 그렇게 그의 이름을 잊었기에, 내년 토너먼트에서 그는 굉장히 신선 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겠지. 새로운 우승자로서, 새로운 영웅으로서 말이 야." 그는 미소지었다. "물론 연출을 아주 잘 해야겠지만. 후후.." "네에... 그렇군요. 어쨌든 엘야시온님께서 변방 근처의 마을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던 그를 제일로트로 불러내신 것이라면... 제가 그 '드랫'이었다면 엘야시온님의 명령을 받고 우선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어떻게?" "...아, 그 전에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 군요. 불필요한 설명도 줄이고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엘야시온님?" 엘야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감사합니다. 근거 중 첫 번째, 그는 자신의 종속자를 엘야시온님의 말씀 에 따른다면 겨우 일주 전에 만났습니다. 음유시인들이야 '첫눈에 반했다' 는 말을 입에 걸고 다니니까 그들 노래 속에 나오는 루이티온들은 하루걸 러 한번씩 '첫눈에 반하는' 여자들이 바뀌지만... 현실에서는 글쎄요.. 참 의심스럽군요. 루이티온만큼 냉랭한 계급이 없는데, 그가 그렇게 정열적인 사람이었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가 저의 생각에 대해 갖고 있는 근거는, 아무리 여자에 목이 말라있던 상태라 하더라도 루이티온 남 자가 겨우 마노테 여자 하나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을 쓰레기같이 버리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별로가 아니라 절대가 낫겠지만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하니, '별로'로 해두겠습니다. 하지만 더 손쉽게 여자를 얻을 수 있 는 방법이 분명 있는데도 평생을 거는 객기까지 부리는 남자는 평민 중에 라도 '절대' 없습니다. 소위 그, '첫 눈에 반한' 경우에도 말입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흐음'이라는 감탄사를 뱉으며 겐트온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도 드디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 다. 겐트온은 그런 그를 보며 문득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만 해 도 보호물의 종속자를 죽이기 위해 머리를 짜내던 그였는데, 이제 그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똑같이 머리를 짜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한테는 행운이겠지. 보호물의 종속자. 내가 오늘 너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도미니온즈'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굳이 이렇게까 지 너를 살리려는 노력도 안 했을 텐데.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받도록 하지. 그는 쓴웃음 띤 얼굴로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근거입니다.. 엘야시온님께서는 분명, 그가 자기 여자를 '종속자'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은혜의 법'으로 맺 어진 관계 라지만, 자기 여자에게 그런 딱딱한 명칭이라니... 그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내 약혼녀'라든가, 아니면 어차피 '은혜의 법'이니.. '내 아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요?" 엘야시온은 이제 심각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저는 이런 것이 아닐까 추측한 것입니다. '아.. 엘야시온님이 나를 부르시다니.. 또 궁전이나 상류생활로 돌아간다면, 내게 옛 맹세를 깨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오랫동안 나의 맹세를 지 켜왔건만, 달갑지 않아. 하지만 약간의 방패가 있다면 이런 상황도 부드럽 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뭐, 아시다시피 돈을 주면 은혜의 법을 맺 어줄 여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죠..." (계속)================================================== 이번 주 토요일엔 사정이 있어서 글이 안 올라갑니다.^^ 대신 주중에 열 심히 올렸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다시...^^ (무슨 만화영화 예고 같군.) <엔.^^> ps...체스.. ^^; ..하긴, 이 글에서 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체스 말처럼 생 각하죠. ^^ 아스카에 말씀해주신 모님.. 감사.^^ 멜 주신 마령기사님께 도..^^ 카케루님께도 감사합니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73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0 00:10 읽음:261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8회, 제 35막. The Night. (12)> 엘야시온 가디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돈? 무슨 소리인가? 그는 그 정도로 주도면밀하지는 않네. 멍청하진 않 으니까 쓸데없는 마찰은 피해 갈지 몰라도,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 려 고지식할 정도로 정면을 돌파하는 성격이지. 사실, 그는 그의 종속자를 구하러 간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마노테 여자 애를 매우 귀찮아하 는 느낌이었으니... ...응?" 엘야시온은 양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귀찮아했다? 그래.. 그랬지. 그는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종속자를 귀찮아하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하루 이틀사이에, 느낌이 확 바뀌 어 그런 미친 짓을 할만큼 대단한 사랑이 싹튼 것이란 말인가... 내가 잘 못 느낀 것일까?" 겐트온은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보호물의 종속자는 생명을 건진 것일까? 보호물의 앞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서는 한참이나 자격이 모자람을 점차 드러낼 테니... 자아, 그 다음은 스온 아피네스를 위하여. 겐트온은 그녀들의 변명이나 일일이 해주고 있는 자신이 어쩐지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일은 확실히 해내야 했다. 이런 일을 위하여 엘야시온의 측근이 된 것 아닌가? "...종속자를 구하러 갔다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느낌이 확 바뀌어 사랑이 싹텄다고요? 그렇다면 더욱 의심이 가는군요. '주도면밀하지는 않지만, 쓸데없는 마찰은 피해 가는 성격'이라면 말이 죠..." 엘야시온 가디엘의 눈에 '설마..'라는 표정이 스몄다. "그가... 이곳 제일로트에서 겪을 일들을 쓸데없는 마찰로 여기고, 그 마노 테 여자 애를 이용해 내 요구들을 겨우 임시방편으로 피해가려고 했다는 말인가?" "글세.. 그로서는 결혼식 기간- 즉, 두 달만 지나면 자기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엘야시온님께서 그의 앞날에 어 떤 준비를 해놓았는지 알 리가 없으니까요. ...엘야시온님께서도 지난 20년 동안 신년 때나 크리스털 볼을 이용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를 맡 긴 영주에게 보고를 받는 것 외엔 그와 직접 만나는 것은 자제했다고 하 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그로서는 엘야시온님께서 자기에게 그토록 관심 이 많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물론 추측입니다만..." "아니, 아니.. 그 말이 맞을 거야. 사실 그는 내가 이곳 제일로트로 그를 불러들이자 몹시 놀라는 눈치였거든." 겐트온은 미소지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주욱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가 과연 변했을까 조 차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엘야 시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때 그의 죄목은 왕족 여인과 하누카의 날을 보냈다는 의심 아니었습니까." "...끄응.." 엘야시온 가디엘은 한참 좋은 예감이 드는 대화 중에 그가 또 예전의 불 쾌했던 일을 화제로 꺼내자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말을 가로막지 는 않았다. 겐트온의 의견은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왕녀께서는 원래 15살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실 운명이었지만, 그분의 아버님 덕분으로 성역에서 살아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매우 건강해진 모습으로요. 비록 그때까지도 짧은 머리칼이었지만 이상하 게도 안정된 모습이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비로소 그녀가 완전 한 카이러스 스피릿 심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고요." "그랬지." 엘야시온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당시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 중 하 나였고, 때문에 매우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은 후에 힐라토 스피릿 심벌.. 긴 검은 색의 머리칼과 검은 색의 눈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겐트온은 엘야시온 가디엘이 점점 기분 나빠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그의 비위맞추는 것을 포기하고라도 말해야 했다. "전대,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님의 새로운 배우자로 내정되어 있 던 분이 말이죠." 마침내 차갑다 못해 쌀쌀맞은 말투로 가디엘이 물었다. "그래서 그 이야길 꺼내는 요점이 뭔가?" "..저는 그가 변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엘야 시온님. ...왕녀는 불미스럽게도 그때 당시 한창 창궐하던, 순리를 거슬리 는 더러운 세력인 '판테온'들에게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새로운 엘야시온 이 되실 클로니아 세렌시스님의 지위를 위협하고자 하는 천인공노할 의도 였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겐트온은 순간 픽 웃었지만, 그 웃음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 로 바뀌었다. "하지만, 왕녀께서는 아직도 개인 루이트를 갖고 계시지 않았고... 뭐, 훗 날 '엘야시온의 영웅'이 될 루온 루드리안이 가장 유력하긴 했지만, 그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서... 그래서, 그녀를 구하러 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 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그'가... 그때 그의 이름은 루온 루사트였죠. 힐라토 레이서스님의 개인 루이트로 내정되어 루온 루사트가... 힐라토 레이서스님을 버리고, 왕녀를 위하여 그녀를 구하 러 가기로 한 겁니다." 엘야시온은 그가 말하는 역겨운 내용들을 꾸욱 눌러 참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장 벼락을 내렸겠지만, 지금은 그가 말할 요점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의 시간이 흘러가고... 하는 수 없이 클로니아 세렌시 스님이 자신의 약혼녀를 위하여 수색에 나섰을 때, 힐라토의 상급 루이트 인 루온 루사트와 왕녀님 만이 돌아오신 것입니다. 바로 힐라토 스피릿 심벌- 그 긴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요." 갑자기 창문 밖에서 덜커덩 소리가 났다. 밤이 깊어가자 바람이 세차지는 듯, 희미하게 위잉- 나뭇가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 촛대의 촛불이 몇 번 깜빡거리며 파드득 촛농이 떨어졌는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완전히 기분이 나빠졌고, 그래서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쓸데없는 말 좀 빼고 요점만 말할 수 없겠나?" 하지만 겐트온은 전혀 변한 것이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사실을 나열했 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죠. 그녀가 그와 같이 밤을 보냈기 때문 에, 혹시 그녀의 육체에 그와 같은 증거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말도 안돼-!!!" 엘야시온 가디엘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그를 보며 겐트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엘야시온님..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카이러스의 왕족들은 배우자와 하누카의 날을 치르고 나면 다소간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 스피 릿 심벌의 색이 상대와 같은 색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뭐, 루온 루사트가 왕족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왕녀의 스피릿 심벌 색이 변했다면, 그건 아마 '힐라토'인인..." "관두게!!!!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을 내게 그대로 옮겨줄 필요 없네!!! 요 점만 말하라고 했더니, 웬 옛날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고 있는 건가?!!! 아니, 아니 그보다는!!!!! 자네 혹시, 그런 소문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 은 아니겠지?!!" 겐트온은 빙긋 웃었다. 훗... "물론 아닙니다. 엘야시온님. 저는 그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피며..." "무슨 가능성?!! 그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보았나, 하바티온 하겐트?!!! 루 온 루사트는 그 당시에 '정화의 샘'을 지나쳤네!!! 그리고 난 샘물이 어떻 게 나타나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그 물은 그의 머리칼부터 발끝까지 쏟아지며 눈부신 빛을 발했어!!! 알겠나?! 그가 정말로 그 애와 하누카의 날을 보냈다면, 그 물은 수증기처럼 변해서 공기 중으로 흡수되 어 버렸겠지!!!" 겐트온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랬다고 된 기록은 저도 읽었습니다. 하지만 엘야시온님, 이드렘나의 아 가트 홀에 선 왕녀께선 루온 루사트를 자신의 남편으로서 선언했고, 루온 루사트도 왕녀를 자신의 아내로.." "닥치게!!! 타인의 증언이 없는 이상, 어떤 사람도 자신의 진술에 의해 죄 인으로 낙인찍힐 수는 없어!!!! 랍오니인 자네는 바로 이것이 아가트 법전 의 전제 중 하나임을 알겠지?!!! 그러니 내가 그를 마노테온으로 강등시킨 것은, 그 자신의 증언대로 그들 둘이서 하누카의 날을 보냈다는 말을 내 가 믿은 것 때문이 아니야!! 그들은 아무 것도 기억 못했고, 환각에 빠져 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단지 스온 아피네스!!! 아가트 홀에 선 그 못된 것이 먼저 그를 그렇게 선언했으니 어떻게 루온 루사트가 그녀를 거 부할 수 있었겠나?!!! 이미 그는 그녀를 자기의 주인으로 마인드 컨트롤했 는데-!!!! 알겠나?!! 그들이 발견된 곳은 성역이었다고!!! 그들이 한 것이라 고는 성역에 들어가 주인과 루이트로서의 맹세를 한 것뿐이었겠지!!! 헌 데, 그 과정을 엘께서 거부하셨기에..." 엘야시온의 잔뜩 분노한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환각에 걸린 거야!!!! 그 요물은 이미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쳐놨어-!! 그리고 수치도 모르고 자기보다 낮은 계급의 남자에게 사랑 한다고 매달리기까지 하고-!!! 하지만 주인이 완전히 미쳐버린 천치 같은 어린애라도, 과연 어떤 루이트가 주인을 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냔 말일세!!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지!! 주인이 자신에게 명예는커녕 파멸 만을 줄뿐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 그건 애초에 잘못된 마 인드 컨트롤이었어!!! 엘까지도 거부하실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난, 그 것이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루온 루사트의 마음을 위하여, 그토록 긴 시 간을 그에게 준 것이네-!!! 그의 머리칼까지 잘라가면서-!!! 난 남녀간의 사랑 따윈 믿지 않아!!!! 그토록 오랜 세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라 면 그건 더욱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야-!!! 남녀간의 사랑 따윈, 아침나절 에 피었다가 오후가 되기도 전에 스러져버리는 아침안개만도 못한 거 네!!!! 그런데도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스온 아피네스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모두 다 '마인드 컨트롤'에 의한 마음이기 때문 아 니겠나!!!!" 아침나절에 피었다가 오후가 되기도 전에 스러져버리는 아침안개...?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네라'여 그대에게 축배를 들지..! 겐트온으로서 는 웃음밖에 안나오는 말이었다. 그래서 겐트온은 천천히 웃었다. "그렇군요... 역시, 기록상으로는 하자가 많습니다.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직접 목격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군요. 엘야 시온님의 설명을 들으니, 이제야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저의 의심도요." 엘야시온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의심 말인가!" "...죄송합니다. 엘야시온님. 제가 엘야시온님을 노엽게 해드리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계속한 것은 그저 제 생각에 대한 몇몇 증거를 얻고 싶었을 뿐 입니다. 바로... 루온 루사트가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다는 사실... 그것에 대한 증거를 얻고 싶었지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당시에 무엇을 갖고 있었는지 잊으셨습니까? 그 는 '실버 하트'를 가지고 있었지요. 마인드 컨트롤을 절대 깨지지 않게 해 주는 아티팩트요. 그러니 상급 루이티온다운 그의 견고한 마음은 한층 더 견고했을 테고.. 도대체, 누가 그런 '황금의 맹세'를 깨뜨릴 수 있단 말입 니까? 세월이라도 무리겠지요. 그리고 이것만이 그가 22년 동안이나 그의 계급을 거부한 것, 마노테 계집을 이용해서라도 이 상황을 피해가려 했던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엘야시온은 멍하니 겐트온을 쳐다보았다. "그, 그가 절대 변할 수 없다고? 그토록 오랜 세월인데도?" "네.. 그러니, 엘야시온님. 왕녀님을 죽이겠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위험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혹시, 그가 주인을 잊지 못해 목숨이라도 끊는다 면.." 엘야시온의 표정이 흑색으로 변했다. "모, 목숨을 끊어?!! 그런, 바보 같은...!!!" 겐트온은 빙긋 웃었다. "..차라리, '사랑'이라면 나을 걸 그랬습니다. 엘야시온님의 말씀대로 남녀 간의 사랑은 어느 정도 세월을 타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계속 언급하신 '마인드 컨트롤'이라면... 아무래도 깨지는 것은 무리입니다. 두 당사자가 서로 계약을 해지하지 않는 이상. 실버 하트까지 걸려 있었으니 말이죠..." 이렇게 말을 마친 겐트온은 엘야시온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 다. 고개를 숙이기 전, 엘야시온 가디엘의 표정에 떠오른 것을 본다면, 어 쨌든 이것으로... 보호물의 종속자와 왕녀의 생명은 유지된 듯 싶었다. 보 호물의 종속자 피를 손에 묻혀봤자 얻어지는 것은 없고, 왕녀를 죽인다면 오히려 있던 것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이 지겨웠던 대화의 요점은 결국 그것이었다. 그리고 겐트온으로서는 대화의 요점이 가지는 효력이 이번 하누카의 날까지만 유지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도, 원할 것도 없었다. 마차는 돌로 포장된 길을 잘각 거리는 소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주위 에 검게 늘어서 있는 저택들은 모두 고위 귀족들의 집으로 스산한 겨울 바람이 부는 가운데, 희미하게 아롱거리는 불빛을 일층에만 낮게 달고 있 었다. 평소라면 이 일대의 저택들은 웃음소리와 불빛으로 흥겨웠겠지만 세계혼을 맞아 파티나 연회를 여는 곳은 오직 유리궁전 하나 뿐이었으므 로 근처는 매우 적막했다. 멀리, 하류 계급들의 일루테오나나 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불빛이 반짝거리며 시끄러운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제일로 트 산의 안 자락에 위치한 이 곳은 오히려 축제 때면 더욱 조용한 것이 다. 마차는 이제 전기구로 환하기는 하지만 그런 쓸쓸한 곳을 달려 귀족 들 전용 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관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귀족들 저택 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곳으로, 각 세계에서 몰려온 귀족들이나 왕궁에 자리가 나지 않은 왕족들이 묵어 가는 곳이었 다. 겐트온은 마차의 작고 앙증맞은 유리창(김이 잔뜩 서려있었다.)을 슬쩍 닦 아내고 그 너머로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이제 짙은 구름이 몰려들고 있 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붉게 빛나던 달은 그 구름에 가리워 진 듯, 빠져 든 듯, 언뜻 언뜻 힘겹게 빛을 비추고는 있었으나... 구름의 세력을 확장시 키고 싶어하는 카이러스 스피릿의 믿음직한 수하 정령 실프들은 쉴 사이 없이 공기를 끌어당기며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흐름을 타고 질주 하는 지라... 덕분에 유유히 흐르던 구름도 그 움직임에 맞춰 한결 급하고 빠르게, 그러나 완만한 경사로서 멀고 거대한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 다. 실프들의 수고인가? 넓게 퍼진 짙은 회색 베일 같던 구름들은 어느새 제법 묵직해 보이는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눈이 올 지도 모르겠 다... 클로니아엔 익숙하지 않고 눈이라는 것도 그의 평생에 몇 번 본적이 없지만... 하얀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정말로 추운 밤... 눈 이 온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르르 떠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창문에서 눈을 떼어 그녀를 주목하고, 빙 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코트, 그다지 따뜻해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의 코트는 열심히 손질하기는 했으나 낡은 티가 완연히 드러나 보이 는 것이었고 언뜻 보기에도 추위를 막는데 그다지 효과가 없어 보였다. 한편 하리에는 그의 푸른 눈이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샅샅이 살피자 부끄 러워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괘, 괜찮아요. 별로 춥지 않아요. 마, 마차 안이 참 따뜻해서요..." "그럴 리가..? 지금도 몸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두껍고 털이 많은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풀썩 걸쳐주었다.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이거라도 걸치고 계십시오." "하지만 그러면, 랍오니께서.." 토끼털토시 속에 내내 손을 넣고 있던 그녀는 그의 행동을 만류하기 위해 토시에서 손을 빼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 다. "아..!" 하리에는 당황했고, 겐트온은 그 하얀 것을 쳐다보았다. "...장갑..? 내 장갑이군요?" 그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도대체 당신은 오늘 하루만도 몇 번이나 내게 무언가를 줍게 하실 참입 니까?" "아, 저기.."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몸을 굽혀 장갑을 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질문할 것을 깜빡했군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 니까? 힐라토 인이 여자에게 장갑을 맡기는 의미를...?" 그 질문에 갑자기 하리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건 저.. 저.." 겐트온은 자기의 장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눈을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쳐다보며 웃었다. "..레이디가 입에 담기는 좀 부끄러운 말입니까?" 그녀는 뺨에 홍조를 띤 채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뭐, 당신의 대답은... 당신이 이 마차에 탄 순간 이미 들은 것이나 마찬 가지겠지요. ..자, 이것을 받으세요.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어 그의 장갑을 받았다. 그걸 본 겐트온은 그녀가 손을 거둬들이기 전에,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 의 놀란 눈으로 그를 보자, 그는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이 내게서 나의 장갑을 가져갔으니, 이제 나의 손의 힘과 능력... 모 두다 당신 안에 있겠군요. 그 대신 나는... 나의 장갑을 대신하여, 당신을 나의 손안에 넣겠습니다." 하리에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그것이 바 로, 힐라토 인이 여자에게 장갑을 건네주는 의미였다. 그것을 가르쳐준 노 부인은 무척이나 늙고 길다란 매부리코를 가진, 거친 목소리를 내는 여자 였다. '하지만, 아가씨- 이런 밤에 그런 장갑을 건네주는 힐라토 인은 믿을게 못 돼- 왜냐하면 말이지, 힐라토 인은 밤의 세계 사람들이거든-" 겐트온의 눈은 하리에의 눈을 사로잡을 듯,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힐라토- 밤의 세계엔 말이지- 온갖 것들이 다 있어- 그 중엔 정말 여자 들의 이상형인 꿈과 같은 미남자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을 믿으면 안 돼- 밤의 세계엔 말이지, 그런 꿈과 같은 미남자라고 하면..." 그의 얼굴을 보던 하리에는 홀린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과 같은 미남 자- 그녀는 자기가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현실이 밀려 나고, 이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래 서 귓가에 울리는 쉰 듯한 노부인의 목소리는 아주 희미하게 마지막 여운 만을 남기며, 그녀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힐라토... 그 세계엔 온갖 신비로운 것이 숨어있지만... 그래서, 정말 꿈과 같은 미남자도 많지 만, 사실 그곳에서 꿈과 같은 미남자라고 하는 것은... 노부인의 마지막 말 이 때마침 나온 겐트온의 나지막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묻혔다. "오- 당신은 마치 꿈과 같군요...!" "...?!" 도비온은 마차에 오르다가 인상을 잔뜩 쓰고 검은 먹구름이 움직이는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한껏 비틀고 이를 가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길, 정말이지 토할 것 같군..!!!" "..? 왜 그래? 도바?" 마차 안에 먼저 들어가 있던 이드넘이 도비온의 욕설을 듣고 물었다. 그 들은 아마사를 스온 아피네스가 있는 곳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도비온은 이드넘을 힐끗 보았다. 아무 걱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연회장에 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얼굴이었고, 불안이 심해질수록 이 여자 저 여자를 쫓아 눈알을 굴리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한결 편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 도비온은 구역질 날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을 꾸욱 눌러 참으며 마차 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드넘처럼 아무 것도 못 느낀 채 보낼 수만 있다면, 3000탈란을 내버려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인들이 마차 문 을 닫고, 이윽고 마차가 그의 저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공기가 살갗을 쿡쿡 쑤시는 고통스러울 정도 로 추운 밤이었지만, 그의 이마엔 어느새 희미하게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 다. 이드넘이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너, 왜 이렇게 몸을 떠냐...?" 그는 이드넘을 보며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제기랄-- 야, 이드! 으득..!! 너, 너 오늘은 네 숙소로 돌아가지 말 고, 나와 같이 내 저택으로 가자!! 술을 마실 때까지 퍼 마시고, 그것도 안되면 수면제라도 먹어서 이 밤을 보내야지!" 이드넘은 그런 그의 상태에 놀란 눈을 짓더니 눈을 찌푸렸다. "너, 너-!! 아직도 그 병이 안 나았구나?! 저번에 내가 찾아왔을 땐 멀쩡 하더니..!!! 이런, 쯧쯧!!!" 예전부터 도비온은 가끔 밤이면, 술이란 술은 모두 마셔버리고 위험하게 시리 샤일라테의 실험실에 들어가 약물까지 훔쳐서 복용하는 때가 있었 다. 지금도... "크윽..!! 젠장!!!! 언젠가는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는 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렇게 온갖 상스러운 말을 뱉고 있었다. 그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에 순간이지만 이드넘은 도비온이 자기한테 그 말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헐값으로 카벙클을 넘겨준 것이 그렇게 분했나 생각했지만... 그는 곧 '그 병'에는 이런 증상도 있다는 것을 기억 해 냈다. 벌겋게 충혈 된 눈동자로 새벽이 올 때까지 쉴 사이 없이 욕을 퍼붓는 것이다. 이드넘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는 수 없지. 이런 발작을 일 으키는 도비온과는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지만, 카벙클 건도 있고... 또 그 썰렁한 여관방에 돌아가서 - 그는 휘황하고 찬란한 여관의 투숙객들 보다는 보통 여관의 투숙객들에게 훨씬 더 안도감을 느꼈다. 게다가 투숙 비도 귀족들의 여관보다 훨씬 더 싸니.. 항시 부하 몇몇을 끌고 다니는 그 에게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는 중급 여관정도에만 머 무르는 것이다. - 셰리카 계집애를 놓친 데 대한 분노와 오늘 자기 얼굴 을 보던 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에 쌓인 침울함 등에서 느껴지는 그 이상한 어둠- 그것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보다는 도비온과 술이라도 걸치는 편 이 나을 것 같았다. 여자와 밤을 새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오늘 겐트온은 자기 혼자서만 여자를 데리고 자기가 묵는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이드넘은 의자에 엎드려 또 뭐라고 중얼중 얼 욕설을 뱉는 도비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 같이 가자. 도바. 정말 힘든 하루였고... 너도 지금, 그 여파일거야. 같이 술을 퍼 마시면 이 모든 것을 조금은 잊을 수 있겠지." 엘야시온 가디엘은 자기 침실의 커튼 사이로 유리궁전을 하나, 둘 떠나는 마차들을 보고 있었다. 마차에 달린 램프의 불빛이 멀리 마차의 궤적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그는 겐트온과 나눈 대화를 계속해서 떠올 리고 있었고, 동시에 오늘 아침 루드랫이 말했던 내용도 떠올리고 있었다. '저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변하지 않았죠. 평범한 마노테온의 일 상.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일상일 것입니다.' 변하지 않았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마노테온'이 아 니라... '변하지 않을 일상'이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사실 그는 자이온을 떠날 때도 그렇게 말했는데... '아니오... 엘야시온님. 저의 마음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커튼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앞 으로 해야 할 일들... 그렇다면, 어떻게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인가 하 는 의문들, 그런 것들과 함께 하루종일의 피곤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 었다. 그는 힘없이 웃었다. 황금의 맹세... 그래, 루드랫. 너는 정말로 루이 티온답다. 너는 루이티온이니까 당연한 것이지. 세월조차도 너의 마인드 컨트롤은 깰 수 없었다고...? 그렇다면 도대체 난 무엇으로 너의 마음을 깨뜨려야 할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지금은 결코 모르겠어. 하지만... 내일이 오면... 내일 이곳으로 온 너를 만난다면, 무언가 좋은 생 각이 날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시종들이 따뜻하게 데운 침대로 들어가 거 기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그때까지는 조금 쉬고 싶다. 루드랫. 정말, 긴 하루였어... 그는 곧 깊게 잠들었고, 짙은 먹구름이 끼인 밤엔 곧이어 하나 둘, 눈송이가 흩날렸다. 잠든 그의 귓가엔 누군가가 잊혀진 비밀을 속삭이 는 듯, 어떤 나이트메어가 그의 귓가에 낮은 숨결을 불어넣는 듯, 나지막 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가씨- 이런 밤, 흰 장갑을 내밀며 유혹하는 꿈과 같은 미남자라는 것은 말이지- 힐라토에서는 바로, '그들'을 말하는 거야- 붉게 흐르는 저주를 뒤집어 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죽음으로의 안내자...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영혼을 사로잡고, 가두며, 할퀴어대는- 태고의 모든 밤부터 존재했던 생명들의 원수. ...그들을 조심하게나. 그들, 흡혈귀-!! ...정적만이 남은 길거리, 파편처럼 남은 꿈들이 곳곳에서 속삭이는 것 같 은, 이상한 밤이었다. (계속)================================================== 오~ 드디어 night 편이 끝나다~! 지루하셨죠? 순전히 배경설명이라... 쓰는 저도 지루했습니다. 이번 편 시작할 때도 이런 것 쓸것이 두렵더군요..--;; 끝나서 잘 됐어...TT(정말, 징하게 길었지...TT) <엔..^^> ps...스빤(sffan)!!! 이렇게 대문짝 같이 제목을..--;;(혹, 돌아가면서 올려주 시는 건가?--;;) 내 아뒤도 아닌데.. --;;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걸 보 니 연재중단이라도 나면, 스빤 때문에라도 통신 계에서는 완전히 잠적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으음.. 일이 너무 커졌어.--;; (여동생아 미안하다. 그러니까 바오밥나무 같은 건 일찍, 일찍 청소해 줘야한다고 어린 왕자가 그랬잖아? 기생수는 일찍 뽑지 않으면, 이렇게 뻔뻔하게 살아간단다. - 바오밥나무로부터.)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92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8 23:29 읽음:246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9회, 제 36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Ⅰ (1)> 시나가 눈을 뜬것은 몸 위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진 때문이었다. 어 제는 많은 일이 있었고 피곤했다. 육체적으로는 하루종일 가사노동에 시 장에서 헤매느라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어젯밤 보경이의 일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는데... 보경이가 그렇게 나타났다 그 렇게 사라진 후, 시나는, '불가사의'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자기의 일상과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역시나 불가사의한 기분을 느 껴야했다. 게다가 보경이가 남기고 간 말 중에 '피 철철' 어쩌고 하는 말 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궁금해서 드래마의 방에 가보니 놀랍게도 드래마 는 눈에 붕대를 칭칭 감고 그 붕대만큼이나 하얀 낯빛으로 침대에 누워있 었다. 분명 시장에서 돌아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눈에 웬 붕대인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보경이가 말한 대로 '피 철철'은 아니어서 안심을 했는데, 무슨 일인가 혹시 알 수 있을까 해서 방을 내려와 응접실 로 가보니 라단과 카탈리는 밤이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남자를 배웅 하고 있는 참 이었다. '절대 안정, 몇 번에 걸쳐 힐러 라이트..., 이런 깊은 밤에 왕진 오도록 하 다니.. 자네 부탁이 아니었다면 사양..., 죄송, 비밀은 꼭 지켜주십시오... 믿 습니다..' 뭐,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돌아가고 나자,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이층으로 오던 그들 부부는, 시나와 마주치자 그녀 가 깨어난 것에 기뻐하며, 걱정했다는 태도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물 론 이것은 카탈리의 경우이고 라단은 인상만 북북 쓰면서 한 구석에 있었 다.) 한편 시나는 그들의 그런 태도가 이상하고 응접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난장판이 된 것에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던 것을 눈치챘다. 왜 그런 것인지 사정을 묻자 카탈리는 응접실을 돌아보며, 정신이 없어서 저 것은 내일 오전에나 치워야겠다고 중얼대더니 사실은 자기들도 전혀 영문 을 모르겠다고... 낮에 손님을 두 명 맞고 나서는 기억이 도통 없다고 말 을 해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들의 불안한 모습에 시나 는 그만 자신도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그들의 말로는 드래마가 '검기'인가 뭔가를 사용한 것 같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단의 근 심스러운 모습에서 하여튼 드래마가 굉장히 안 좋은 일을 해서 몸을 상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힐러 라이트'라는 것을 썼던 디트마같이... 시나로서는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디트마가 그런 힘을 썼을 때는 무척 야단을 쳤던 드래마가 자기 스스로 그런 힘을 쓰다니? 시나가 직접 눈으 로 본 일이 아니라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라단과 카탈리가 시나에게 무슨 일 기억나는 것 없냐고 꼬치꼬치 물었을 때에는 고개만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서 소매치기 당했던 것 을 이야기할까 했는데, 그것이 친구인 보경이와 관련된 문제인데다... 드래 마의 지갑을 훔쳐갔다고 하면 아무리 소매치기지만 그래도 친구인데, 보 경이가 현상범으로 수배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차피 확실하지도 않은 일.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젯밤엔, 여러 가 지가 너무 걱정이 돼서... 보경이는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자기처럼 연고자도 없을 텐데 잠잘 곳이나 있는 것인지.. 혹 시 보경이가 소매치기가 된 것은 나쁜 놈 소굴에 빠져서 억지, 강요로 그 렇게 된 것은 아닌지..(그 애의 태도로 보아 이런 가설은 심히 의심스러웠 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리고, 드래마의 눈은 괜찮 을 것인지..(라단 말로는 힐러 라이트를 몇 번이나 쐬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는데, 무리한 힘을 쓴 덕분에 몸 자체의 무기력증은 어쩔 수 없을 것이 라 했다.) 정말로 걱정이 많이 돼서... 눈 내리는 것을 한참이나 보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침에는 되도록 일찍 일어나서 드래마를 보러 갈 참이었다. ...그런데... 시나는 막 깨어나서 자기가 무슨 헛것이라 도 보고 있는가 해서 옆에서 푹 퍼져서 잠자고 있는 사람을 손으로 툭 건 드려 보았다. "..보, 보경아?" "음냐.. 음.. 쿠울.. 쩝.." 셰리카는 시나가 자기 몸을 건드리자, 입맛을 쩝쩝 다시며 시나 다리 위 에 올려놓았던 자기 다리를 치우고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쿨... 아~ 씨!! 그거 내 돈이라구~!! 못 줘~!! 아.. 씨.. 음냐.. 쩝쩝..." ..라는 말까지 중얼거리면서. 무의식의 위대함이라니. 잠꼬대에서까지 이런 소리를 하는 친구. 아무리 봐도 '억지, 강요'로 소매치기 일을 하는 것 같 지 않다. 덕분에 시나는 어젯밤의 걱정은 그야말로 눈 씻듯이 사라지고, 대신 부아가 물밀 듯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임보경.." "아~! 씨.. 빠득.. 빠득.. 쿨.." "임보경!!!" "..응? 으응.. 시나... ..왜?" 시나의 날카로운 소리에 셰리카는 눈을 비비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꽤 귀염성 있는 얼굴이지만 지금은 화만 난다. "너, 너, 언제 들어와서 내 옆에서 잔 거니?" 셰리카는 길게 하품을 하다가, 시나의 질문에 또 방긋 웃었다. "으응, 새벽에." "어디로 들어왔는데? 현관문은 카탈리님이 언제나 밤에 잘 잠가 놓는데?" "깔깔.. 아이 참-! 티토우의 딸은 이런 낡아빠진 방에 아무도 모르게 돌아 오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뭐, 창문은 안 잠겨 있던걸..?" "창문!?" "으응.. 그나저나 배고프다. 먹을 거 없나?" 시나의 경악한 얼굴을 무시하고, 셰리카가 그런 태평한 소리를 중얼거리 고 있는데, 그때 머리맡에 있는 그 호문클로스가 자기 주인처럼 멍한 얼 굴로 부스스 일어났다. 셰리카가 후후 웃더니 말했다. "응? 잘 잤니? 호문클로스? 더 자지 그래? 여기 내 어깨로 와서, 더 자." 그러자 호문클로스는 부시시한 얼굴로 붕 날아올라 주인의 어깨에 앉아 눈을 꼭 감더니 묵묵히 앉아 있었다. 저게 자는 것인가, 경악한 중에도 희 한한 느낌이 들어서 시나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셰리카는 그런 호 문클로스에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또 떠들기 시작했다. "휴우~ 사실은, 어젯밤 늦게까지 이드넘 녀석이 있는 여관, 옆 골목에서 숨어 기다렸는데.. 그런데 그 놈이 어딜 갔는지 통 안 돌아오는 거야. 아 우~! 반지 꼭 돌려 받아야 하는데! 하지만 어쩌겠어? 눈까지 오는걸? 하 는 수 없이, 추운데서 덜덜 떨다가 그냥 돌아와서 잠이나 잔 거야. 이따가 또 가봐야지. 그래야 현실세계로 돌아가던지 말던지 하지... 응.. 근데, 시 나 너는 참 잘 자더라. 그래서 안 깨웠어." 시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 "..너, 너... 절교한다고 했던 말은 기억하니?" "절교?" 갑자기 셰리카가 인상을 썼다. "절교는 절교고 잠을 자는 것은 잠을 자는 거지!!! 그럼 넌, 내가 추운데 눈을 팡팡 맞고 굴뚝 옆에서 잠을 자야 속이 시원하겠니? 아님, 그 밤중 에 어디 여관이라도 가란 말이야?! 누가 나 같은 여자 애를 밤에 받아주 니?! 게다가 밤중에 그런데 가는 건 위험하단 말이야!! 흥!! 그래도 어쨌 든, 절교는 절교야! 네가 그 나쁜 놈 편을 드는 한은 말이지!!!" ...이런 얼토당토않은 주장으로 인해, 시나는 이 파스텔 버전 '임보경'이 원 래 자기가 알고 있던 '임보경'보다 한 단계 앞서 나간..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 중, 그 본질(그것도 별로 안 좋은 본질)이 상당히 강조된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시나는 현실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이상한 세상에서도 파스텔 버전 보경이에게 휘둘릴 마음은 절대로 없었다. 시나는 빙긋 웃고, 두 팔을 벌려 보경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에휴.. 예쁜 내 친구. "..응? 왜 그래?" 시나한테 또 뭐라고 한마디들을 줄 알았던 셰리카는 시나의 그런 예상외 의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하지만 시나는 그런 보경이의 등을 토닥토 닥 두드려준 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방긋 웃었다. "..사실은, 나도.. 네가 드래마 지갑 돌려주기까지는 너랑 절교야. 보경아."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침 무렵에는 무척이나 바빴다. 시나의 선언 이후로 투덜투덜 대던 보경은 슬슬 시나의 눈치를 보며, 시나가 가는 곳 마다 먼저 가 있기 일쑤였다. 헌데 먼저 가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사사건 건 일을 방해해서 시나로서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예를 들어, 거실에서 깨진 것과 지저분한 것을 치우고 그 바닥을 기름걸레로 박박 닦고 있을 때... "아우~ 시나야!! 네가 왜 이 집, 거실을 청소해 줘야 하는 거야?!! 와, 공 짜로 부려먹다니, 정말 너무해!!! 이건 착취라고, 착취!! 악덕 집주인이 야!!" 그 소리를 들은 '악덕 주인' 라단이 액자를 수리해서 그것을 다시 벽에 달 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얼굴 한쪽 근육을 실룩이며 말했다. 아침부터 두통이 심해서 견딜 수가 없는 참이었다. "...뭐.. 별로, 특별히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만..." 시나는 들고 있는 기름걸레로 보경이의 입을 꽉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애써서 말했다. "하하, 아,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신세까지 지고 있는 데요...!!" 그리고 시나는 보경을 마구 째려보았다. '아침밥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여 기 쌓인 쓰레기나 냉큼 날러~!'라고 말했더니, 보경은 또 투덜대며 깨작깨 작 쓰레기 몇 개를 날랐다. 라단이 조금 부루퉁한 목소리로 '아, 글세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라고 중얼거렸지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랴, 주인을 위해서 약초를 다리랴,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리랴 바빴기 때문에 시나와 셰리카가 도와주는 것을 끝까지 막지는 않았다. 시나로서는 그들이 너무 고마웠기에 그것이 더 편했다. 무엇보다, 아침에 천연덕스럽게 식탁에 나 타난 보경을 보고 카탈리나 라단이 이 애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 다. 사실 시나야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어젯밤 라단은 셰리카와 이야기를 한 번 나누고 난 뒤, 또 그 '티토우의 딸' 운운하는 것을 듣는다면 이렇게 머 리까지 아픈 상태에서는 미쳐버릴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리고 있었고, 카탈리는 카탈리 나름대로 셰리카가 시나의 '친구'라는 것을 파악해 놓고 있었다. '주인'도 아니고 '친구'라니... 라단이나 카탈리나 모두 다 어이없어 했었다. 그것도 '호문클로스'씩 이나 데리고 다니는 여자아이가...(라단은 힐러라서 호문클로스가 얼마나 비싸고 좋은 약재(--;)인지 잘 알고 있었 다.) 덕분에 그들은 갑자기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인 의 말로, 시나는 '얼음의 숲', 그러니까 성역과 맞닿아 있는 숲에서 발견됐 다고 한다. 그래서 일루젼과 환각으로 과거를 기억 못하고, 과거라고 말하 는 것도 절대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는데... 그들은 혹시, 그렇다면 '시 나마'가 원래는 일루티온 계급이 아닌가 까지 생각하게된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상류계급의 비위를 거슬려 머리카락이 잘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성역에 버려진 것이 아닐까.. 하고 넌지시 셰리카에게 물어보았는데 셰리 카는 인상을 잔뜩 쓰며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아냐고, 자기는 '티토우의 딸 로 깊은 초록의, 숲 중의 숲'에 있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도 별로 없는데 자꾸 물어보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참을성이 꽤 많았던 카탈리마저 셰리카와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카탈리는 남편의 주인을 돌보는 것만 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셰리카라는 아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 나마를 열심히 돌보고 있으니, 그리 나쁜 아이 같지 않다... 라고 생각하 고, 그냥 놔두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아침에는, 잠에서 깨어났을 무렵부 터 시작된 강렬한 두통 덕분에 더욱 셰리카에게 무언가 물어볼 기분은 나 지 않았다. 머리 속에 뿌옇게 뭐가 낀 듯해서, 단순한 육체 노동 외에는 한마디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남편인 라단도 마찬가지 인 듯, '아이구~ 머리야... 디트 녀석이 떠난 후, 혼자서 밤새 술 퍼 마시고 깨어난 아침보다 더 지독한 기분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니 두 부부는, 셰 리카고 뭐고 누구든 아무 상관도 없으니 그냥 조용히 앉아 식사나 묵묵히 해주면 바랄 것이 없겠다는 심정이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시나는, 도대체 보경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 안도했다. (보경이의 지금 상태로 보아, 보경이를 '현실 세계'에서의 친구라고 구구절절이 소개했다 가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사람으로 의심받을 것 같아서.) 그들은 시나가 보경이를 '내 옛친구'라고 말하자, 그 이상 말 안 해도 괜찮다는 듯, 손을 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뭔가 인상을 찌푸리고 침울한 식탁 분위기였기에, 드래마에 대해 걱정이 돼서 그런 것일까.. 생각하면서... 시 나는 보경이 같은 타인을 아침식사에 기꺼이 끼워준 그들의 관대함과 친 절함에 안심했다. 아무래도 보경이는 겉보기로는 '일루티온'인가 뭔가로 보이니까(자기도 그렇게 주장했고) 시나 자신보다는 더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세계는 참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 시나는 어쨌든 고 마운 마음에 열심히 그들을 도와주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눈치 코치도 없이 방해만 일삼다니.. 시나는 땀을 뚝뚝 흘리며 쓰레기 세 갠가 나르고 또 앉아서 조잘대려는 보경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나의 그 눈초리에 보경은 자기 어깨 위에 놓여있는 호문클로스인지 산타클로스 인지한테 뭐라고 불만스럽게 수군 수군거리더니 마침내 또 다른 쓰레기를 건들거리며 날랐다. 시나는 그것을 보며, 무인도이든 어디든 하여튼 극한 의 상황에 표류된다면 절대로 같이 남고 싶지 않은 인간형 표본이 내 친 구라니.. 절망이고, 비극이다. 거기다, 정말 그런 극한의 상황을 맞이해서... 정말로, 그 인간형 표본과 이렇게 같이 있게되다니.. 뭐 이런 파탄 난 상 황이 다 있으며, 이것이 혹시 누군가의 저주는 아닌지.. 보경이와는 그 놈 의 시나 시스터즈인가 뭔가를 만들 때부터 인연을 끊었어야 하는 거였다.. 라는 인생의 진솔함(?)이 담긴 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시나는 너무 너 무 피곤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의자에 편하게 앉아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두통 약인 듯한 약을 몇 알이나 먹은 카탈리가 힘없이 웃 으며, 거실은 자기가 마저 치울 테니 시나에게는 드래마 옆을 지키고 있 으라고 시킨 것이다. 손님들은 마노테가 있는 것을 보면 별로 안 좋아할 거라고 말하며 시나의 등을 떠밀었는데, 사실 그것은 시나가 쉴 수 있도 록 배려해 준 것이다. 한편 라단은 시나가 드래마와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눈치였지만, 위에 말 한 대로 바빴고 가장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미열과 같은 두통, 그리고 약에 의한 몽롱함 때문에 더 이 상 뭐라고 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덕분에 시나는 드래마 침대 옆에 앉아서, 그의 생기 없는 얼굴을 지켜보며 약간 우울한 기분으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밥도 잘먹었는데 까닭 없이 슬프고 가라앉은 기분이었 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끝없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라단 이나 카탈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는 것을 예전에 포기한 듯 했 다. 어제 있었던 일을 묻기만 하면 지금은 기억 같은 것을 하려면 머리가 너무 아프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이었다. 그러니 도대체 무슨 일로 검 기까지 쓴 것인지는 드래마 본인이 깨어나 봐야 알 것이다. 시나는 침울 한 얼굴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보경이 문제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일단 그 앤 지금, 밖에서 카탈리를 도와 거실을 치우고 있는 중 이고... 제발 열심히 도와드리라고 했으니까.. 부디 도움되는 일꾼이 되어 서 카탈리로 하여금, 이 애를 여기서 쫓아내야겠다는 결심만 안 들게 해 주면 고마울 텐데... 한 밤중에 창문을 뚫고 들어와 자다니, 어디 갈 데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애가 누구의 도움으로 살았 는지도 묻지 못했다... "...으음.." "....?" 한참 이것저것 자기들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던 시나는 침대에서 들리는 희미한 신음소리에 놀라 드래마를 보았다. "드, 드래마..?! 정신이 들어요?" 시나는 그가 깨어나자 흥분했지만, 그래도 그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부드 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드래마는 눈을 붕대로 가린 채, 마치 처음 말을 배우는 사람처럼, 잔뜩 쉰 목소리로 힘들고 낮게 말했다. "..어두워.. ...여긴... 어디지.. 너는..? ...캄캄해.. ...아직, 밤인가..?" 그러면서 그는 붕대감긴 손을 힘겹게 들어 자기의 눈을 만지려했다. 시나 는 벌떡 일어났다. "앗! 만지면 안돼요! 눈을 많이 다쳤대요!!" 드래마는 가볍고 따뜻한 손이 자기의 손을 잡아 제지하자, 소리가 들렸다 고 생각한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향했다. 눈을 다쳤는지 어쨌는지 모르겠 지만, 눈과 머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고 아픈 것은 사실이었다. 몸의 다 른 곳도 아팠지만, 머리의 아픔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는 아픔 때문에 신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띄엄띄엄 말했다. "...넌, 누구야..? 디트.. 디트마는 어디 있지? ..머리가.. 아파. ..또 환각인 가.. ...불을.. 볼 수 있도록.." "드래마, 저는 시나예요! 시나마..! 그리고 어두운 것은, 밤이어서 그런 것 이 아니라..! 아니, 잠깐 기다려요! 라단님을 불러올게요! 드래마가 깨어나 면 부르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드래마는 그 발소리마저 혼란스 러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시나..? 시나마..? 그건 누구 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수 없는 것은 그것뿐만 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었 던 것이다. 마치 물위에 유리된 기름처럼, 현실과 희미한 막 하나를 놓고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일,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는 고 개를 흔들었다. 아픔이 심해졌지만 무시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기억 을 떠올려보자. 아까 나는 어떻게 불렸지? ..드래마.. 드래마던가...? 하지 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생소한 느낌, 그리고 분리된 느낌만 더 심하게 만 들었다. 그리고, 덕분에 이제 서서히... 자기의 존재, 자기의 이름... 이 모 든 것들이 깊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곳은 사방이 매우 높고 바닥은 질척했다. 공포, 불안, 슬픔... 그런 것들이 사방 에서 스물, 스물 기어 나오고, 그를 질식시키고 싶어하는 듯 흰 손을 뻗쳤 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그는 놀라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이질 적인지..! 진짜가 아닌, 가짜만이 풍기는 절대적인 이질감..!! 이것이 무엇 이지..? 그때 누군가 그에 답하듯...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겪게.... 이야기가 달라지죠... ...존재하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 그건 ...공포의 대상....] 무슨 소리야... 들리지 않아.. 그때, 그의 발 밑에서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것이 그 가운데 있었다! ...현실 과의 접점... 온통 가짜뿐인 세상 속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 하얗고 가느다란 실같은...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그 런 접점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본 순간 아주 슬프게 그 이름을 불렀다. "....아피네스.." 지독한 아픔을 주는 통증처럼, 가슴에 찍힌 낙인과 같은 이름이었다. 자기 가 선택한 이름이고, 자기가 선택한 미래였다. 아피네스.. 내 아내... 너무 나도 쉽게 망가졌다. 모든 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 버린 것이다. 그곳에 어두운 점들이 무섭게 명멸하며 소용돌이쳤다. 그 회색의 소용돌이들은 그가 더 이상 자기의 내부, 그 깊 숙한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며 그의 기억을 갉아먹으며, 시뻘건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으르렁대는 소음... ..다가오지 마라!! 더 이상 가까이 온다면, 통째로 먹어치워 샅샅이 부서뜨려 너란 존재를 아예 모든 세상에 서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나, '너 자신'만은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있 겠지!!!! 아무도 너를 찾는 이란 없이--!!! 소멸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 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너의 고통! 너는 알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아라-!!! 너의 죽음!!! 망각이라고 불리는 너 자신-!!!! 보라, 그 절대적인 고독을--!!! 무언가가 찢겨가듯 그의 앞에 펼쳐졌다. 드래마의 눈에 감긴 붕대가 핏빛 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아.. 확실히..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죽음이란 소멸이 아닙니다... 당신의 부모님이 이곳에 안 계시더라도, 그분들은 이제 영원한 엘의 낙원, 프리-엘야시온에 있으 며- 그분들의 선택은 온전하게 끝났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친구를 위하여 슬퍼해야 함을... 죽은 자들은 이미 안식을 얻었고, 평안하오니- 오히려, 우리야말로 오늘도 명부의 길을 걸으며 죽음의 그 늙고 추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들... 언젠가는 그 검은 문을 통과 해야 할 미래를 남겨놓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우리....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십시오.] 그는 빙긋 웃었다.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스승을 쳐다보는 어린 그 의 얼굴은 매우 해쓱해져 있었다. [나를 위로하는 것인가..? 확실히,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지..] 그는 오랫동안 하던 금식을 끝마쳐야 할 때인 것을 알았다. 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는가?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는 비틀거 리며 일어났고, 오랫동안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있던 까닭으로 쓰러질 것 같아서 손으로 돌로 된 창턱을 꽉 짚었다. [..돌아가겠다.] [....님.. ...부디....] [아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런 목소리를 내지 마라, 랍오니여. ..어차피, 나는... ..슬픔을 알 수 없는 자... 그러니, 그런 나를 위로한다는 것은, ..허무한 일이야...] 그러자 그 늙은 랍오니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그를 위하여 정 말로 '슬픈' 얼굴을 지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얼어붙은 마음. 죽은 어머님을 위하여서도 슬퍼할 수 없다니... ..앞으로도, ...어느 누구를 위하여서도 슬퍼할 수 없겠지... 누 군가를 이해할 수도, 그와 마음을 나눌 일도 없이.. ...랍오니여. 그래서 나 는... 난.. 평생동안...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에, 공허한 마음이 든다.. ..그 리고 난...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고독... 바로 그것이 아 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의 뺨에 긴, 길고 깊을 고독을 애도하는 눈물이 흘렀다... "루온 루드랫-!!! 루온 루드랫님!!!"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똑바로 돌려 거칠게 침대에 밀어붙였다. 그래서 드래마는 그제야 자기가 침대에 엎드려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침대.. 하얀 것들이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쪼 개지는 머리의 아픔...!!!! 머릿속이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지져지는 것 같 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랬다가는 그의 존재마저 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아서... 숨을 몰아 쉴 때, 몸에서 일어나는 미약한 경련. 또 한편 그는 이 미칠 것 같은 고통과, 잡히지 않은 기억, 그리고 온통 헤집어지고 찢어져버린 자신의 존재에 질색을 해서, 어디론가 빠져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누가 이길지 해보자.. 네가, 네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어떻게 견딜지... 그 공포를 어 떻게 견딜지- 하하하하... 살아있는 것들에게 외면 당하는 저주를 견뎌라 -!!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만나자- 하하하--!! 마침내 드래마는 거칠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놔.. 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다-!!! 놔!!! 으아악..!!!" "루온 루드랫님--!!!!!!" 라단은 그의 힘을 제어하기도 힘들고, 더 이상 그가 이렇게 함부로 움직 이다간 상처가 벌어질 것 같아 카탈리에게 소리쳤다. 이미, 그의 눈에서는 엄청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카, 카탈리!!! 빨리!!! 빨리 가서 진정제를 가져와!!" "네, 네..!!" 그러나, 카탈리가 약을 가져오기 전에 드래마는 벌떡 일어나 자기를 붙들 고 있는 라단을 뿌리쳤다. "놔--!!!! 넌 누구야?!!! 내게 손대지 말아라-!! 내 눈에 무슨 짓을 한 거 지--?!!!!" 라단은 뒤로 비틀비틀 밀려나며 소리쳤다. 드래마는 자기 눈을 감싸고 있 는 피에 흠뻑 젖은 붕대를 찢어내려 하고있었다. "루, 루온 루드랫님, 아, 안됩니다!!!" 라단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자이온에서... 그 이년동안, 가끔 그의 주인은 환각과 기억상실에 대한 독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특히 사건이 일어난 당 시 몇 달 동안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자주 발작을 일으켜서, 그때는 페이 스 힐러의 힘으로만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발작도 2년의 말미 에는 거의 사라졌는데...! 23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런..!! 성역에 들어갔다 가 엘의 거부를 받은 자가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 체가 힐러인 라단에게는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세월이야말로, 무엇보다 강 한 치료제일텐데...!! 그때였다. 라단의 뒤에서 놀란 눈으로 이 모든 상황 을 지켜보고 있던 시나가 앞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그는 이제 붕대를 벗 겨내고 있었다. "드래마--!!!!!" 높고 날카로운 소년과 같은 목소리.. 드래마는 깜짝 놀라서 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 상태라면 엉겁 결에 얻어맞을 수도 있겠지만... 시나는 그 각오를 하고, 용감하게 그의 팔 을 붙잡았다. "..드래마..! 제발, 진정해요...!" 간절하고, 걱정이 가득 찬 목소리...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그의 몸을 잡고 있었다. 느낌만으로도 가벼운 몸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가 벼워서 그가 손으로 한 번 후려치면 지금까지 그를 제어하던 힘과는 비교 도 안되게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며 침대에서 반쯤 일어난 자세로 멍하니 있었다. 시나는 그가 가만히 있는 것에 안심하여, 한층 침착하게 말했다. "드래마.. 카탈리님이 약을 가져온다고 했으니까..." ..약.. 약이라고..? 현실적인 이야기.. 그리고 현실적인 목소리.. 살아있는 것 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차츰 몸의 떨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애초부터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가장 괴롭혔 던 것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삼키려 들었던 그 하얀 소용돌이. 그런데 그것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잠시, 심연으로 뻐끔히 열렸던 통로와 함께... 다시는 떠올리지 못할 기억을 가지고. 시나는 딱딱한 얼굴로 굳어있는 그 를 위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드래마..?"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92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8 23:29 읽음:240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0회, 제 36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Ⅰ (2)> 그는 미약한 반응을 보였다. 억지로 입을 열고, 마치 생전 처음 듣는 것처 럼, 자신의 이름을 발음한 것이다. "..드래...마...라고..?" 그리고 놀랍게도 잠시 후, 슬픈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감돌았다. "...그녀가.. 그 이름은... 못 알아볼지도 모르겠는걸...." "..!!"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천천히 그녀 쪽으로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 다. 시나는 그의 체중이 갑자기 그녀에게 온통 실리자 당황해서 뒤로 비 틀거렸다. "드래마..!!" "루온 루드랫님!!" 시나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주저앉을 뻔 하자 라단이 달려들며 대신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시나를 보며 말했다. "시나마! 카탈리에게 가서 진정제는 됐으니, 어서 말론님을 모셔오라고 전 해 줘!" "네... 네!" 시나는 그의 말대로 했고, 카탈리는 그 말을 전해듣자마자, '또, 정신을 잃 으셨다고?! 이 일을 어째..!! 빨리 갖다 와야겠다!!'..라고 외치고 뛰어나갔 다. 그리고 시나는 병실로 다시 돌아오다가,(라단은 수시로 드나들 수 있 도록 드래마를 일층의 손님용 병실에 눕혀놓았다.) 거실 구석에 내팽개쳐 진 걸레를 보았다. 저것은 분명 보경이가 들고 청소하던 것인데..! 아무 데도 보경이가 안 보이는 것을 보아, 청소고 뭐고 혼란한 틈을 타서 바깥 으로 나간 것 같았다. 그것을 보니, 정말로 화가 났다. 으으!!! 임보경...!!! 너하고는 진짜 절교다!!! 볼일이 있으면 말하고 나갈 것이지, 또 아무 말 도 없이 사라져?! 그리고 자기 좋을 때만 아무 데로나 들어오고!!! 뭐야, 도대체?!! 친구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그러잖아도, 드래마 때문에 걱정 되는데..!!! 보경이 이것까지..!!! 이 세계에서 서로 이해해 줄 사람이라고는 단 둘 뿐인데, 보경이가 이렇게 제멋대로라니.. 너무 섭섭하고 속상했다. 게다가, 보경이의 머리색... 보경이는 어쩜 이 세계 사람처럼.. 자기를 '셰 리카'라고 소개하고.. 정말 이 세계 사람 같은데..!! 멋대로 떨어져 있는 걸 레를 보니, 마치 혼자 남겨진 것 같아서,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 이 고이는 것 같았다. 방금 드래마의 모습도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모습이어서,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때 병실에서 라단이 시나 를 불렀다. "시나마..!!" "..에.. 훌쩍.. 네..!!" 지금이라도 보경이가 나간 것을 볼 수 있을까해서 문밖으로 나가보려던 시나는 라단의 목소리에 보경이는 그냥 포기하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라단이 초조한 모습으로 시나를 보더니 물었다. "카탈리는..? 카탈리는 말론님을 모시러 나갔어?" 시나는 목소리가 정상으로 나오도록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흠.. 네. 방금 뛰어 나가셨어요.. 저어, 그런데 저 붕대는 갈아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피로 빨갛게 물든, 드래마 얼굴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자, 시나는 다시 금 잔뜩 걱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야 힐러인 라단이 더 잘 알아서 하 겠지만 본 순간 새삼스럽게 가슴 섬뜩한 모양이라 자기도 모르게 말한 것 이다. 하지만 라단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말론님.. 말론님이 오셔서 손대셔야 해. 나는, 페이스 힐러도 아니 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주인님만은, 말론님이 보셔야돼." 어쩐지 겁을 잔뜩 먹은 말투였다. 시나는 의아해서 그를 보았다. 그는 자 신의 머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주인에 대한 걱정도 있겠지만, 뭔가 한없이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시나가 있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언제나 그랬지. 나는 별로 도움이 안돼.. 주인님께는 페이스 힐러가 필 요한데... 아아..!! 여기에 디트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내대신 여 기 있었더라면, 루온 루드랫님이 이 정도로 될 때까지 내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아아..!!!" 그러더니 라단은 굉장히 사소한 것... 예를 들어, 주인을 위해 하스피틀을 쉬지 못하는 사실까지도 자신이 멍청한 때문이라며 질책했다. "제기랄..!! 어제 하스피틀을 쉬지 않았더라면..! 이럴 바엔 차라리 잡화점 주인이 나았을걸..!! 나 같은 놈이 무슨 힐러람..!! 제길..." 그렇게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는 듯 말하던 라단은 갑자기 또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어제는 너무 기뻐서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쉬지 못하는 것도 결코 그가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벼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는 마치 누구에겐가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듯 혼자서 중얼거 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시나가 있던 현실에서야 한 병원이 문을 닫고 있 으면 다른 병원으로 가도 되지만... 이렇게 한 마을(구역)에 자리잡고 있는 하스피틀이라는 존재는 마을의 주치의이자, 마을의 치료자... 뭐, 그런 것 이 되어서 나름대로 책임감 있는 자리인 것 같았다. 그래도 제일로트는 수도니까 힐러들이 많아서, 급한 경우에는 다른 힐러들.. 심지어는 페이스 힐러들에게도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페이스 힐러 길드(부유층 구역에 자리잡고 있고, 들어가는 조건도 매우 까다로운)에 가서 치료받는 것은 그냥 일반 힐러에게 치료받는 것 보다 거의 이십 배 정도나 비싸고... 또 다른 구역의 하스피틀로 가서 낯선 힐러에게 자기의 몸을 맡긴다는 것은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상당히 꺼려들 하니까... 하스피틀을 갑자기 며칠씩 이나 쉰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난 어쩔 수 없어. 디트라면, 일을 좀더 수월하게 했겠지만.. 하지만, 난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나도 알아.. 다 엉망이라는 것을.. 내 집에서 주인이 이렇게 된 것부터.. 제길.. 제길.."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드래마의 눈에서 번진 피는 이미 베개까지 적시고 있었다. 시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라단님..!!!!" "..?" 시나는 드래마 침대 옆에 있는 붕대를 들어서 그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라단님..!!! 이걸 보세요! 이건 제가 어제 깨끗하게 빤 붕대예요. 이걸 빨 면서 전 너무나 힘들었어요! 사실... 나중보다 처음이 훨씬 더 힘들었죠... 처음의 붕대들은 양도 많은데, 별로 더럽지도 않아서... 도대체 뭘 빨아야 할지... 그 길고, 깨끗한 붕대에 생긴 아주 작은 티 같은 것들을 일일이 비 누로 비비고, 양잿물로 삶고, 헹궈서 널어야 했으니까요." 한참 스스로를 자책하던 라단은 당황했다. 그리고 이 마노테 여자아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쳐다보았다. 설마, 지금 어제 일 잔뜩 시켰다고 따지는 것인가? 하지만 시나는 그가 이상하게 쳐다보던 말던 진지하게 말 했다. "..하지만, 라단님, 저는 한편으론... 그 많은 붕대를 빨면서 아아, 이 라단 이라는 분은 정말로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구나. 약간만 더러운 붕 대라도 다시 빨게 하다니, 거기다 그렇게 많은 붕대라면 틀림없이 많은 환자를 보고 있는 경험 많은 힐러일 것이라 생각했죠." "...뭐..?" 시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 물론... 오후 무렵으로 가니까, 걸레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붕대들이 나와서.. 그 지저분한 것을 보니, 다락방에서 한 몇 십 년은 묵은 것 같다 는 느낌인데.. 조금만 양잿물에 넘고 삶아도 빤 티가 확 나서 좋긴 했지 만... 비누로 비벼서 빨려고 하면, 천이 헤져서 말이죠.. 일이 수월해서 좋 았어요.." 라단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 정말 다락방에서 몇십 년 묵은... 예전에 이 곳을 맡고 있던 힐러가 쓰던 붕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카탈리님 성격을 봐서, 그런 것은 사실은 라단님이 쓰는 붕대가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오히려 라단님이 쓰는 붕대는 처음에 나왔던 붕대 였겠죠. 그 많은 붕대 중에 정말로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었던, 모두다 열 심히 빨아 깨끗하게 손질한 흔적이 역력했던 붕대요. 그 수준에 맞추려고 하니.. 정말 빨기 힘들었죠. 그래서, 오후 무렵엔 쉬운 빨래가 나와서 기뻤 어요... 후후.. 어쨌든, 디트마가 가지고 있는 붕대도 그랬어요. 비록 라단 님처럼 하얗고 좋은 붕대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깨끗한 붕대였죠. 디트마 는 정말로 훌륭한 힐러였으니까... 그래서 저는 라단님도 디트마처럼 훌륭 한 힐러라고 생각했어요. 서로 많이 닮았다고요.. 그런데.." 시나는 그가 앉아 있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라단님, 제가 잘못 알았어요? 드래마.. 아니, 루온 루드랫님은 라단님의 주인이잖아요..? 저렇게 피를 흘리는데.. 왜 붕대 가는 것 마저, 다른 사람 에게 맡기려고 하세요?" 왜 내 주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냐고? 라단은 시나의 맑은 회색 눈을 내려다보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게 돼버렸다. 하 지만... 계속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점차 얼굴에 피가 몰려들기 시작 해서.. 그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화가 난 듯 말했다. "에, 에잇-!!! 시끄러!!! 마노테 주제에 쫑알쫑알!!!! 하여간 여자들이란 일 루티온이나 마노테온이나 다를 게 없구만!!! 에잇!! 그 떠드는 소릴 듣느 라 골치가 아파서, 머리 아픈 것도 잊어버렸어!!!" 그리고 라단은 시나의 손에서 붕대를 휙 낚아채 갔다. "그 붕대나 이리 내!!!! 마노테 주제에 더러운 손으로 이런 거 만지면 안 돼!!! 앉아서 잠깐 생각 좀 한다는 것이 시간이 너무 지나갔군!!! 아앗-?!!! 아이고-!!! 루온 루드랫님-!! 죄송합니다..!!! 웬 피가 이렇게!!! 금방 붕대 를 갈아드리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시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라단이 드래마의 붕대 가는 것을 보며 하하.. 웃었다. ..확실히.. 이 라단님은 다혈질이야... 아까 만해도 하늘이 무너진 듯 침울해 있다가 저렇게 금방 원기를 회복해서.. 그때 라단이 시나를 쏘 아보며 말했다. "쯧-! 시나마! 거기 그렇게 쓰레기 더미처럼 너저분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지 말고 몸을 움직여!! 세면실에 가서 장작 좀 때고!!!" 윽!! 쓰, 쓰레기 더미!!! 시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을 보고 쓰레 기 더미라니..!!! 너무하잖아!! 쓰레기 더미한테 장작 때라고 시키는 사람 은 그럼 뭐야... 윽!!! 그렇게 투덜대며 시나가 병실을 나가려는데, 라단이 갑자기 시나를 불렀다. "잠깐..!! 이리 와서, 붕대 이쪽을 잡아!!" "...?" 시나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 마노테는 붕대 만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 는가? "아, 뭐해!!" "네.. 네.!!" 하는 수 없이 시나는 그의 옆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라단은 눈을 감싸 고 있는 드래마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그의 눈 주위를 깨끗이 닦 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손에 핏자국 난 붕 대라든지 팔목의 붕대를 새로 감기 시작했다. 언뜻 보니, 드래마의 손은 마치 화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다. 거기에 무언가 알지 못할 약초의 즙을 바르고 붕대로 재빠르게 감아 가는 솜씨는 굳이 시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라단은 약병이라든지 붕대를 시나에게 들고 있게 해서 시나는 드래마가 치료되는 모습을 보며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시나의 도움을 받아 정성스럽게 붕대를 감던 라단이 문득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아까 한 말.." "....?" "...아까 한 말 말이야.." "네.." "..정말, 내가 디트와 많이 닮았나..?" "...." 라단의 행동을 촉구하느라고, 너무 열렬하게 말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 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으음.. 네. 친구 분이라 그런지..." 그는 갑자기 눈을 내리깔더니 말했다. "..흥.. 자, 다 됐다. 이제 말론님이 오시길 기다려야지." 그러더니 그는 자기가 감아놓은 붕대의 맵시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 ..뭐, 붕대감기라면 그 녀석도 이렇게 했겠지. 그래. 요는 최선을 다 한다는 거야." 그러더니 그는 시나를 돌아보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러니, 너도 최선을 다해서 어서 일을 거들어..! 자, 자- 왜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거야? 세면실에 가서 솥에 물이 끓게 장작을 때라니까..?" ...라단님이 지금까지 붙잡고 있었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나는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하기로 했다. 라단은 이제 완전히 평소대로 돌아온 것 같았고, 드래마도 피투성이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장작을 때면서 시나는, 자기가 생각보다 바리스 마노테오나를 더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디트마가 보고 싶고, 제시마와 빨간 눈의 유리마 아줌 마... 그리고 촌장님도 보고 싶었다. 나올 때 좀 더 제대로 인사를 하고 나 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참자. 시 나는 애써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 무릎에 턱을 기댔다. 타닥거리며 불타는 나무의 향긋한 냄새가 좋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말론이라는 힐러가 온 기척이 들렸다. 아까 라단이 한 말 로는 페이스 힐러가 분명한데... 시나는 디트마가 냈던 그 초록색 빛이라 면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함부로 병실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이 안 좋아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시나는 물이 팔팔 끓고 있는데도 그냥 아궁 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라단 이 들어왔다. 그는 솥에서 김이 펄펄 나는 것과 시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 마에 세로로 주름살을 그리며 말했다. "물이 다 끓었으면, 미지근하게 만들어서 갖고 와야지!! 말론님이 기다리 시잖아!!" "..네?" "그 멍한 표정은 뭐야! 저기 대야를 갖다가 쓰고, 빨리 빨리 움직여!!" "아, 네에.." 시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대야에 따뜻한 물을 만들었다. 아마도 치료하기 전에 손을 씻으려는 것 같았다. 디트마도 종종 그랬으니까... 아니나 다를 까 라단은 세면실에 있는 비누 곽을 들더니, 시나에게 말했다. "그 대야의 물, 흘리지 않게 똑바로 들고 따라와!" "네?" 자기가 가져갈 줄 알았는데? 하지만 라단은 이번엔 시나에게 대답도 안하 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래서 시나도 그의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나가 나오자 거실 중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라단 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의 머리에 푹 씌워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론님께 설명해야할게 많은데.. 너까지 끼어 들어서 복 잡하게 설명 늘리는 것은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너도 그 모자 쓰고.. 음.. 그러니까.. 알겠지..?!!!" 시나는 모자를 삐뚤게 눌러쓰고 멍해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뭐, 뭘요?" "에잇!!! 역시 마노테는 이래서.. 쯧쯧..!! ..모자를 썼잖아!! 그러니 병실에 서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그러더니 그는 대야와 비누 곽을 한꺼번에 한 손으로 들더니 병실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좋아하는 분이 다쳐서 걱정하는 마음.. 그건 가상하니, 들어 올 수 있게 해줘야지..' 라는, 시나가 과연 제대로 들었는 지 심히 의심 가는 말을 한마디 던지고. 하지만 시나는 삐뚤게 씌어진 모 자를 다시 똑바로 고쳐 쓰며 아무래도 모자에 귀가 가려서 못들을 말을 들은 것 같다고 판단 내리고 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어쨌든 시나는 모자를 쓴 덕분으로 별다른 제지 없이(카탈리가 조금 희한 한 눈으로 남편과 시나를 번갈아 봤지만.) 바리스 마노테오나에서 봤던 그 힐러 라이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디트마가 냈던 초 록색 빛과는 다른, 레이저 같은 투명한 푸른색의 빛이었지만, 역시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빛을 내고 있는 말론이라는 분은 어제 라단과 카탈리가 배웅하던 힐러로,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고, 체격이 왜소해, 초라 한 느낌이 나는 나이든 남자였는데.... 헌데 지금, 힐러 라이트를 내고 있 는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 당당해 보이고 천사처럼 성스러워 보였던 것이 다. 더구나 그의 푸르스름한 손이 닿는 드래마의 얼굴은 아까와 다르게 점차 혈색이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걸 본 시나는 페이스 힐러란 역시 뭔가 신비롭고 굉장한 존재라고 감탄했다. 그건 힐러인 라단도 마찬가지 인 듯 방에 있는 사람 모두다 경외 어린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노인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던 손을 드래마의 눈에서 거두었다. "..이제 됐네." "아, 감사합니다! 말론님..!" 라단이 기쁜 목소리로 말하자, 노인은 혀를 쯔쯔 찼다. 그는 어제 치료할 때 라단에게 설명을 들어서 드래마가 계급을 강등 당한 루이티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말론은 한 세계에서 수 도라고 불리는 도시의 페이스 힐러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레드 라 이트까지 내는 뛰어난 실력에 귀족들을 모셔본 경험도 많은 힐러였다. 젊 었을 때는 어떤 루이티온과 단기간의 계약을 맺고 자이온의 토너먼트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의 일에... 특히 계급을 강등 당한 루 이티온의 일에 함부로 끼어 드는 것은 별로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해서 그는 드래마가 정말로 마노테온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 자, 기꺼이 치료를 해주었다. 라단이 종종 자기가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그에게 보내주고, 그것이 아니라도 그와는 오랜 동안 친분을 쌓고 있었기 에... 라단이 원하는 대로 치료 만하고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 것인지, 그 의 과거라든가 경력에 대해서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론은 엄한 눈으로 라단을 바라보았다. "..라단군.. 거, 이 분이 자네 주인이라면 좀 더 조심해서 모시게. 쯧쯧...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성역에서, 아니면 하누카의 날에나 고 칠 수 있는 큰 상처... 정말로 실명할 수도 있단 말일세... 쯧쯧.. 약속했으 니, 왜 환자가 이렇게 흥분하게 놔뒀는지는 안 묻겠지만... 하여튼 조심하 고, 또 조심하게나. 알겠나?" "어.. 네. 네." 라단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엔 슬픈 생각이 감돌고 있었다. ..사실 루온 루드랫님을 괴롭히는 상처 는 무엇으로도 고치기가 힘들다. 루온 루드랫님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병 은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최상위 치료의 빛... 바로, '옐로우 라이트'의 페 이스 힐러만이 고칠 수 있는 병이다. 하지만 현재는 네르세바의 성가(聖 家)에도 그런 페이스 힐러는 없다. 지금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최상 위 치료의 빛은 '오렌지 라이트'인 것이다. ...그리고 위험한 힘과 성스러운 힘이 동시에 존재하는 성역은... 라단은 간만에 씁쓸한 표정을 띄었다. 루 온 루드랫님은 엘에게 거부당해서 환각과 기억상실에 걸리신 거다... 이미, 아무리 성역에 들어가도... 신비로운 문은 열리지 않아. ...그러므로, 믿을 만한 유일한 치료책(이것도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은 몸과 정신 이 한꺼번에 변화하며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완성될 수 있는 하누카의 날 뿐인데... 라단은 사람들 눈에 안 띠게 병실 구석에 서 있는 시나마를 보 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루온 루드랫님... 그 때, 무슨 생각인지 드래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말론이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더 초록색의 빛을 내기 시작했다. 시나를 보고 우울하게 있던 라단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 말론님?" 말론은 그런 라단을 보며 빙긋 웃었다. "..훗.. 치료비 걱정은 말게." "아니, 치료비가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한꺼번에 힐러 라이트를 쓰시면 말론님의 몸이..!" "아냐, 아냐.. 이미 한창때는 지나갔다고 해도 이 정도라면 괜찮아. 이것은 그냥 내가 이분에게 해드리고 싶어 그런 거니까.. ..루이트를 모신지도 오 래되었지.. 더구나 이런 모습의 루이트님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서.. ..후 후.. 솔직히 자네가 이분을 치료하라고 했을 때는 자네가 나를 모욕하는 줄 알고, 매우 화가 났네만.. 이 나에게 마노테온을 치료하라고 하다니 말 일세.." "...!!" 말론은 이제 자기 손에 맺힌 초록색의 빛이 드래마의 몸에 스며들어가도 록 손을 그의 벗은 가슴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자 빛들은 드래마의 몸 속으로 서서히 파고들며, 마치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드래마 의 온 몸에 초록색의 무리를 이루며 퍼졌다. 그것은 결국 붕대로 감싸인 손에까지 이르렀는데, 붕대 끝에 드러난 손마디까지 은은한 초록색으로 빛나서... 마치 드래마는 흐릿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내는 반딧불처럼.. 그 렇게 온 몸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시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힐러 라 이트라는 것이 저렇게 전신을 초록빛으로 물들게 할 수도 있다니, 놀라웠 다. 이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도 마노테온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초록색으로 빛나는 드래마는 정말 아름다 웠던 것이다. 라단도 그걸 보며 감격한 듯 했다. "..마, 말론님.. 이렇게 까지..!! 이 은혜는..." 말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만히 드래마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말론 이 손을 뗀 이후로도 드래마의 몸은 부드러운 초록색의 빛을 내다가 얼마 후 그 빛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 도 드래마의 얼굴이라든지 피부는 아까보다 한결 생기가 있어 보였다. 말 론은 훗 웃었다. "..은혜라고 부를 것 없네. 이건 정말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힐러 라이 트를 전사했을 때... '검기'가 느껴지는 몸. 정말 오랜만이지.. 나야말로 영 광이었네." 그리고 그는 합장을 하듯 두 손을 모으고 그것을 다시 펴더니 시나가 새 롭게 갈아온 대야의 물에 손을 담갔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었는 데 말론은 그것이 오히려 기분 좋은 듯했다. "..자네의 주인은 필시 매우 뛰어난 루이티온이었겠지? 저런 마노테온의 형을 받으면서도 온몸에 은은한 검기의 기운을 가지고 견딜 수 있다는 것 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검기에 뇌가 녹아버렸을지도 모르는데. 하 지만.. 정말, 훌륭한 정신력의... 그래, 그만큼 마인드 컨트롤도 온전하게 익힌 분이 틀림없어. 자네 주인님은.. ...그래. 영광이었네." 라단은 말론의 그 말에 그만 감격해 버리고 말았다. 루온 루드랫님을 알 아주시다니!!! 이토록 뛰어난 안목을 가진 그와 오랜 사귐을 가진 것이 라 단은 진심으로 가슴 뿌듯했다. "자, 나는 이만 가보겠네.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린 라 이트를 몸 전체에 전사했지만, 뭐.. 앞으로는 블루 라이트만 몇 번 쐬면 깨끗이 나으실 거야. ...당부했지만, 그때까지 격한 감정이나 격한 움직임 은 자제하도록 말씀드리게. 알겠나?" "네..!!" 라단과 카탈리, 그리고 시나는 그 말론이라는 페이스 힐러를 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하고 그가 마차를 집어타고 떠날 때까지 내내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카탈리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말했다. "..라단, 말론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응. 그래. 카탈리. 정말 좋은 분이야. ...사실 저 분을 소개시켜주신 노웰 님도 저분만큼 좋은 분이셨지. 옛날에 말했지? 내가 이곳 클로니아에 정 착하도록 도와주신 분말이야." "..네. 당신 사정을 듣고 당신을 후계자로 삼아주신 분이요... 후후, 지금도 이곳에 나이 많으신 분들은 노웰님 이야길 하더라고요. '늙은 노웰씨는 실 력도 없고, 마음씨만 착해서 다른 세계에서 온 힐러를 후계자로 삼을 만 큼 어리석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쓸만한 일이었다'고 요.. 후후후.." 라단은 그 이야길 듣고 씨익 웃었다. "..그 분은 너그러운 분이셨어. 내가 부모님과 같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 함께 들어와 살라고 하셨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아직까지 도 제대로 자릴 잡지 못하고 있었을 거야." "후후.. 그래요. 그러니까, 저에게도 은인이죠.. 아, 그나저나 두통이 많이 가라앉았어요. 당신은요?" "응? 응.. 나도 그런걸? 역시 신경성이었나..?" 그들은 그런 말을 나누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아직도 어수 선한 거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두통이야 가라앉았다지만.. 정말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머릿 속이 멍해서, 원.." "어제 여자 손님들.." "응? 그분들이 여자 분들이었나? 모르겠어.. 인상이 굉장히 희미한 분들이 었잖아?" "그랬죠.. 저어, 그래도 그분들이 오고 나서 잠들었으니까.. 뭔가 의심스러 워요. ...경비대에 신고를 하는 편이 낫지 않아요? 우리 집도 이렇게 부서 졌는데." 라단이 골똘하게 생각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92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8 23:30 읽음:242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1회, 제 36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Ⅰ (3)> "...말도 안돼. 그 손님들이 여자였다면 말이야, 루온 루드랫님이 저렇게 다치실 수 있어? 거기다, 이 거실 꼴하며... 루온 루드랫님은 단순한 루이 티온 분이 아니시라고. 저분은 검기 외에도... 아니, 하여튼 고작 여자 두 명이 이 일을 일으킨 것 같지는 않은데.. 으흠... 저기, 이런 것은 아닐까? 왜, 그저께 밤엔 우리 둘 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나 해서 늦 게까지 잠을 못 잤잖아?" 나쁜 일이라... 카탈리는 방긋 웃었다. 라단은 그젯밤, 시나마나 루온 루드 랫님 둘 중에 하나가 서로의 방으로 가서 무슨 수상(?)한 짓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해서 괜히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새벽까지 뒤척뒤척, 물먹고 싶다, 볼일을 본다 침실을 들락날락했고, 덕분에 카탈리까지도 잠을 제대 로 못 잔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시나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서 밝힐 일은 아니고... "..네, 그래서요?" "흐음... 덕분에 우리, 꽤 피곤했으니까.. 차도 마셨겠다 그냥 잠이 든 거 야. 그 시간이면 한참 졸릴 때니까.. 그리고 그 여자 분들은 우리 때문에 당황하다가 자기들 볼 일보러 그냥 나가신 거고. 그러니까, 문은 그대로 열린 채였고.. 덕분에 어느 못된 건달 놈들이 몰래 집엘 들어와서 거실을 털려고 한 거야. 이봐, 시나마!" "네?" "넌 루온 루드랫 님이랑 시장을 같이 보고 돌아왔다고 했지? 어때? 들어 올 때, 문이 열려있었어, 잠겨 있었어?" "열려 있어서, 그냥 들어왔는데요?" "어디로, 뒷문으로?" "네. 지름길이 그쪽에 있으니까.." 라단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거봐! 그 여자 분들도 뒷문으로 들어왔었지? 글세, 그렇다니까..!" 카탈리는 시뜻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뭔가 마음에 안 들어?" 맘에 안 드는 것 투성이다. 그 시간이면 졸린 거야 사실이지만... 그렇다 고 손님 앞에서 두 명이 다 잠이 들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게다가, 그 여자 손님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뭐라고 묻고 들어온 것 같은데? ...뭐라 고 했더라.. ..잊.. 버..려.? 그런데 갑자기 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아.." "카탈리, 왜 그래?" 아내가 신음하는 것을 보고 라단이 물었다. "아니오.. 라단, 근데 그 여자 분들.. 왜 우리 집에 찾아왔는지.. 혹시, 당 신 그거 기억나요?" "왜 찾아왔냐고?" 라단은 손을 턱에 댔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글세..? 뭐, 날씨 이야기, 길거리 진흙탕 이야기도 했던 것 같고... 아, 그렇지! 여행용 포션인가? 그걸 사러왔던 것 같아! 그 이야길 했던 기억 이 나!!" "..그런데 왜 우리가 그분들에게 차까지 대접했죠?" "응? ..차..? 아아.. 당신도 참!" 라단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투로 카탈리를 보았다. "몸 녹이는데는 차가 최고니까 그런 거지! 우리가 언제 우리 집에 찾아 온 손님들에게 차 대접 안한 적이 있어?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카탈 리?" "하지만.. 그 전에 초대한 기억이 안 나서.." "아아.. 그건 내가 기억나. 당신이 빈혈을 일으켜서, 그분들이 부축해 주 었지. 그리고 포션을 사러왔다는 이야길 그때 들었던가... 그래서 마침 차 시간이고 하니, 그냥 가지 말고 들어와 쉬고 가라고 초대했지.. 이 근처 에서는 못 보던 사람들이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확신이 안 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하여튼 그게 맞을 거야...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낯선 느낌이니까.. 아마, 축제를 맞아 다른 도시나 다른 세계에서 온 여행자가 아니었을 까...?" 카탈리는 아직도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이상 다른 설 명은 없을 듯했다. 확실히 여자 둘의 힘으로 이런 짓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뭐, 루이티온들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들은 170 센티도 안 되는 키였고 그렇게 키가 작은 루이티온은 없다. 그때 라단이 말했다. "글세, 카탈리.. 내 말이 맞을 거야. 그 건달 놈들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 며 뒤지고 있는 것을 루온 루드랫님이 들어오다가 본 거고.. 그래서 마침 내 루온 루드랫님이 우릴 대신하여 싸우신 거지!! 아마, 한 십여 명은 되 는 놈 들이었나봐! '검기'까지 사용하신 것을 보니..! 우린 루온 루드랫님 덕분에 살아난 거라고..!!" 라단은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져 기분이 좋은지 입에 미소까지 띄우고 이 야기했다. 하지만 카탈리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했지 만... 더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니(그것도 관용구적이 아니라, 진짜로.) 그 냥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온 루드랫님도 말론님 덕분에 깨 끗이 나을 테고... "저어, 그럼 어떡하죠? 건달 놈들이라고요..? ..수비대에게 연락할까요?" "당연히 연락해야지!! 내, 그 놈들을 잡기만 해봐라!! 감히 내 집을 털고, 주인님에게 손을 대?!! 당장이라도 수비대에 달려가고 싶지만...! ..그래도 카탈리, 그전에 루온 루드랫 님에게 더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자고. 그럼 어떤 건달 놈들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그렇군요...!" 카탈리는 기쁜 낯을 지었다. 방금 라단이 말한 것이야말로 마음에 드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사건을 당한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 겠지..! 라단은 카탈리의 기쁜 표정을 보고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했다. "후후.. 루온 루드랫님이 깨어나는 대로 그놈들 인상착의를 물어서 수비 대에 내가 직접 갔다 올게." "네, 그러세요. 후후.." 그리고 그들은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시나를 내버려두고 자기들 할 일 을 하러 흩어졌다. 그들 둘은 어제 일어났던 일을 얼굴도 못 본 '건달 놈' 탓으로 돌리고, 드래마에게 모든 진상을 묻자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지만... 시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어두워질 무렵이긴 했지 만, 그래도 초저녁에 도둑놈 십여 명이라니.. 이 세계는 무슨 도둑놈이 그렇게 당당하대? 십여 명? 그렇게 떼로 다니면, 거실하나가 아니라 집 을 통째로 들고 갈 수도 있겠네.. 이상해... 거기다, 그럼 어제 나는 뭐야? 나는 왜 뒷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쓰러진 거야? ..아무 것도 본 기억은 안 나는데..? 시나는 자기 목뒤를 만졌다. 드래마가 싸우기 쉽게 몸이 알아 서 기절을 했나? 아니면, 도둑놈 중에 한 명이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 그 산에서 깡패 놈들처럼 내 목뒤를 내리쳤나? 목뒤는 멀쩡한 것 같 은데..? 시나는 입술을 쑥 내밀고 한층 더 인상을 썼다. ...이상해... 시나 가 이렇게 '이상해'를 연발하며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면실 안 쪽에 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니, 시나마!!! 이게 뭐야!!! 장작 때고 재 덮어놓는 법도 몰라!!! 물이 식고 있잖아!!! 으윽!! 그리고 불씨도 꺼져가고!! 시나마--!!" 윽!!! 시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세면실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로 후다닥 달려갔다. '이상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라단의 말대로 나중에 드 래마에게 물어보면 다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나저나, 저렇게 무서운 표정의 라단이라니.. 라단은 카탈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래서 마노테 온은 안 된다느니, 이런 식으로 불씨를 꺼트리면 어느 마노테온 남자가 널 데려 가겠냐느니(여기서 특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칠칠맞기가 짝 이 없다느니..' 꾸중을 했다. 시나는 그 꾸중을 고스란히 받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흑흑.. 글세, 라단님... 저는 마노테온이어서 불씨를 꺼트린 게 아니라, 일주일전만 하더라도 가스 렌지 쓰던 사람이라 불씨를 꺼트린 거라고요.. 그리고, 우리 세계에선 불씨 같은 거 꺼뜨려도 시집 갈 수 있어요.. 흑 흑... 우리 나라에선 표어도 있는데..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그리고 드래마가 다시 깨어난 것은 점심 먹기 바로 직전이었다. 아침나 절 내내 라단은 시나와 부딪히기만 하면 '불씨'와 '여자로서의 도리'에 대 해 한마디씩 툭툭 던지고 갔으나,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바빴기 때문에, 그리 심하진 않았다. 한편 시나는 손님들 눈에 거슬리지 않게 여전히 모 자를 쓰고, 집안 청소를 도왔다. 그리고 카탈리를 도와 점심식사를 준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 쪽에서 라단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아이고- 루온 루드랫님--!!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요--!!" 그 말에 시나와 카탈리는 준비하던 것을 버려 두고 드래마의 병실로 달 려갔다. 시나는 드래마가 아까 같이 또 발작을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 만... 그녀가 병실에 들어서면서 본 광경은 드래마가 라단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예! 예!! 지금 캄캄한 것은 밤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눈에 붕대를 감고 계시기 때문에.. 아니오!! 곧 나으실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드래마는 열심히 말하는 라단의 목소리에 난처한 웃음을 띠고 있 었다. "..그렇군요. 곧 나을 거라니 안심입니다만, ...저, 라단님.. 머리가 울리니 조금만 조용히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군요.." "앗, 그, 그렇죠..!! 나란 놈은 흥분을 너무 잘해서..! 핫핫..!!!" 드래마는 여전히 큰 그의 목소리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곧 쓴웃음을 짓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상처를 입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네?" 그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다 놀라서 드래마를 보았다. 그 중 라단이 다급하게 말했다. "...루, 루온 루드랫님..? 기, 기억이 안 나십니까..? ..어, 어제 일인데요? 루온 루드랫님은 건달들과 싸우셔서..." 건달이라고..? 갑자기 웬 건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먼저 드래마 는 아까부터 꾹 참고 있던 그의 호칭문제를 아무래도 해결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라단님.. '드래마'입니다." "네?" "마노테온 드래마지요. 계속, 이상하게 부르시길래.. 실례했습니다." 처음 깨어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돼는 그의 침착한 모습에 이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아까는.. 아까는... 아까, 맨 처음 깨어나셨을 때 일을 기억 못하십니까?" 드래마는 붕대로 감싸인 손을 들어 자기 눈을 만지려다, 라단이 있는 쪽 으로 고개를 들었다. "...맨 처음 깨어났을 때?"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가만있더니, 차츰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제가 또 발작을 일으켰습니까.. 십 년 전부터는 그런 일이 없었 는데, 왜..." 라단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루온 루드..! 아니, 드래마..!!! 그리고 당신은 어제 검기를 사용하셨습니 다!!! 검기까지 사용한 상황인데!!! 그것까지도 기억을 못하십니까?!!" 드래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검기..?" 그는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설마.. ..검기라고요..! 이 몸으로 검기를? 별 미친 짓을 다... 그것도, 발 작 때문입니까? 하.. ..정말,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렸나 보군요." 그는 그러더니 어두운 얼굴을 지었다. "...갑자기 왕궁에 갔다온 때문인가.. ..혹시 누군가 저 때문에 다친 사람 은 없었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건달과 싸웠다고요? 그 건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 그, 그러니까 그것은..." 오히려 질문을 당한 라단은 쩔쩔맸다. 그때 카탈리가 나섰다. "루온 루드랫.. 아니, 드래마.. 저어, 정말 기억이 안 나세요? 어제.. 어제.. 시나마랑 시장에서 만났다고 하던데.. 그리고, 뒷문으로 들어왔다고요.. 그런데 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기억을 못하세요?" ..시장? 시나마? ...아.. 그랬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시나를 길에서 만나고.. 이 집으로 돌아와서 뒷문이 열려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기억이 난 다. 현관이라면 몰라도 뒷문이 열려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그 뒷문 을 열고... 그리고...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머리에 댔다. 갑자기 생 각에 공명이라도 일으키는 듯, 머리에 찡-한 아픔이 왔던 것이다. 그는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모르겠군요. ...저는 그때 뒷문으로 들어와 곧바로 기절했던 것 같습니 다..." "네에..?" 라단과 카탈리, 시나, 모두다 그 뜻밖의 말에 놀랐다. 드래마도 모른다 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드래마는 시나의 목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나? 거기 있는 건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너와 내가 뒷문으로 들어왔을 때?" 시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자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기절했는데요?" "...." "...." "...." 잠시 후 드래마가 픽 웃었다. "모르겠군.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잘 생각할 수 없지만... 들어오자마자 너 와 내가 둘 다 기절했다니, 거실에 무슨 약이라도 뿌려 있었나...? ..그럼 내가 건달과 싸웠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단님." 라단은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실은.. 처와 저도 어제 오후 무렵에 잠이 들어버려서.." 이번엔 드래마가 어이없어할 차례였다. "잠이 들었다고요? 도대체...?" 네 사람으로서는 각자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결정적인 일은 아 무도 모르고, '건달 놈'(?)이 일이 벌이는 동안 깨어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깨고 드래마가 갑자기 말했다. "...제가.. 어디서 발견됐습니까? 설마 이 침대에 누워있지는 않았겠죠?" "어... 거, 거실에서.. 엉망진창인 거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계셔 서... 어, 얼마나 놀랐는지.." "...!!" 드래마는 점차 더 크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고 보니 손도 저릿저릿 한 것이 붕대까지 감싸여 있고... 게다가 눈까지 이 꼴이라니, 검기를 사용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발작.. 기 억이 하나도 없고, 검기..? ..뭔가.. 뒷문으로 들어왔을 때, 거기에 누군가 있었던 건가..? ..발작을 일으키고 검기를 사용하게 만들만큼 강력한 영향 력을 가진 누군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오직... 그때, 마치 그 이름을 직접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한 여자의 환영이 뚜렷하게 떠올랐 다.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동안 떠올렸던 것 중 가장 분명한 이미지라 드래마 자신이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웃는 모습의... 맙소사. 드래마는 눈에 잡힐 것 같은 그 모습에 몸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가만히 있었다. "..루온.. 아니, 드래마..?" 라단은 드래마의 얼굴이 창백해 진 것을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드래마는 그 목소리에, 흠칫 놀라.. 마치 어떤 비 누나, 물리적인 힘, 혹은 가장 강력한 아트로도 절대 닦을 수 없는 얼룩 을 지우듯.. 힘들게, 그리고 천천히... 자기의 눈앞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하나, 하나 지웠다. 사실, 그가 한 생각은 너무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망 상에 불과했으므로.. 이것은 그녀를 모욕하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런 곳에, 그를 만나러 올 리가 없다.. ..그리 고 정말로 그녀를 만났다면, 검기 같은 능력을 사용했을 리도.. 그러다가 그는 자조적으로 훗 웃었다. 아니, 그 미쳐버린 정신상태에서라면 자살용 으로 검기를 일으켰을지도 모르겠군.. 하하..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과 마 음이 마치 어떤 나락에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가 안 된다면... 잠시만,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라단과 카탈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한 눈이었고, 시나는 갑작스럽게 생기를 잃은 드래마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드래마가 다음 말을 한 순 간 그들은 나갈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어, 얼마든지 뜻대로 하세요. 아니, 해! 무슨 소리야!! 그, 그리고 무슨 일이 있거든 부르도록.. 나을 때까지,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도 조심해야 하니까!!! 알겠지!!!" 그리고 라단은 뭔가 인상을 잔뜩 쓰고 카탈리의 어깨를 붙잡고 문 밖으 로 끌었다. 카탈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드래마를 힐끔 보았다. 시나도 우물쭈물 드래마에게 뭐라도 한 마디 하려다 그냥 그들 부부를 따라 나 갔다. 그때였다. 드래마가 그녀를 불렀다. "시나." "..?" 시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요..? 드래마? 무언가 부탁할 것이라도?" 라단과 카탈리가 문간에 서서 그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 지만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드래마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러더니 그는 뭔가, 할 말을 망설이는 듯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드래마..?" "..내가 어제 입었던 코트.." "네? 코트요..?" "..그 코트 안 주머니 속에, ...제일로트 도서관의 출입증이 있어." "도서관의 출입증..!!" 시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문간에 서 있는 라단과 카탈리의 얼굴도 마 찬가지로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드래마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 다. "..그것을 가져다 줘." "네.. 네!" 시나는 차츰 마음이 흥분되는 것을 느끼며 뭔가 당황하고 있는 라단에게 물어서 현관 옆에 있던 드래마의 코트를 재빠르게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여기요! 드래마..!" 드래마는 시나의 활기 있는 목소리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더듬더듬 안 주머니를 뒤져서 거기에 있던 작고 끈이 달린 패를 꺼냈다. 그것을 보는 시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것이 도서관 출입증..!!! 그때 드래마가 패가 들리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시나, 손을 줘." "...?" 그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가 의아했지만, 시나는 눈앞에 보고 있는 것에 흥분해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시나의 손 을 마주잡더니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뜻하군. ..목소리도, 건강하게 들려." "..네?" "아냐. 아무 것도." 하지만 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닫고 방긋 웃었다. "..건강이라면 전 괜찮아요. 정말 튼튼하거든요. 아침 내내 거실청소도 하 고, 바깥의 추운 날씨도 그럭저럭 적응했어요. ..하하.. 뭐, 도서관 같은데 다녀와도 좋을 정도죠.. 하하..." 그 말에 드래마는 무언가 말할 듯 입을 벌렸지만,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아침 내내 거실 청소를 했다고? ...어제, 미친 짓을 했던 내 옆에 있었 다면 혹시나.." "네?" "아냐. 됐어..." 그러더니 그는 시나의 손을 펴고, 거기에 출입증을 얹어 주었다. "자, 이것. 이건 약속한 거니까 주는 거야. 원래는 내가 갖고 있다가 데 려가려고 했는데.. ...보다시피, 내 꼴이 이래서.. ..뭐라고 할까.." 여기서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시나의 상태에 대해서 알아 본다고 괜히 쓸데없이 도서관 출입증까지 꺼낸 것 같다.. "..어쨌든, 이건 지금 너한테 주는데.. 절대, 혼자서 도서관에 갈 생각은 하지마. 알겠지? 라단님 말로는 며칠이면 나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리 고 나도 머리만 좀 아플 뿐, 왠지 몸은 가벼운 것 같으니까, 널 데리고 도서관에 갈 시간은 있을 거야. ...아직 남아있는 시간은 충분하니까, 인 내심을 갖고 기다려." 시나는 당황했다. 호, 혼자서 가면 안 된다고? 왜?! 어제는 시장도 갖다 왔는데!! 무, 물론 소매치기 당한 것은 나의 실수로 인정하지만... 그, 그 래도..!!! "저, 저.. 드, 드래마..? 내, 내가 못 미더운 것은 알지만.." 미덥고 못 미덥고의 문제가 아니다. 드래마는 인상을 쓰며 패를 다시 손 으로 꽉 쥐었다. "..혼자서 안 가겠다는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이 패는 줄 수 없어. 뭐니 뭐니해도 넌 내 책임이니까. ...나중에 골치 아파지는 것은 딱 질색이야." 뭐라고 징을 박을 수도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저어, 골치 안 아프게.." "....네가 혼자가면 분명히 골치가 아플 것 같아... 이렇게 상상만 해봐도 머리가 아프니까." "....!!!" 시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윽--!!!!! 저, 정말 너무해---!!! 그, 그럴 거면, 뭐 하러 이렇게 패는 보 여주고, 뭐 하러 이러니 저러니 설명은 하고, 뭐 하러 약속이니 어쩌니 한 거야--!! 누굴 약올리나-?!!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라니-!!!! 이 구박을 받고?!! 으앙--!!! 인내심이라니!!!! 무슨 변견 훈련시키나-!!! 난 하루라 도 빨리 이 세계에 대해서 파악해야 한다고--!! 싫어-!! 난, 지금 당장 갈 거야!! 난 스트레스 받았단 말이야!!!...라고 말하고 드래마의 손에서 패를 휙 낚아채려던 시나였다. 그러나... 드래마는 다시 한 번 더 험악하 게 인상을 썼고, 덕분에 시나는 눈물을 머금고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뭐, 하는 수 없지... 드래마가 다 나을 때까지... 밤마다 이 패를 가슴에 부여잡고 자야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부여잡을 게 있다는 게 더 좋은 거겠지. 흑흑... 한편 라단과 카탈리는 두 사람의 그런 모습에 입 을 쩍 벌리고 있다가, 시나가 패를 '부여잡고' 병실을 나오자 그녀를 거 실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진땀을 잔뜩 흘리 며 말했다. "시, 시나마.. 도, 도서관이라니..?" (계속)================================================== 제 35막. The Night. (5)>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92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8 23:31 읽음:242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2회, 제 36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Ⅰ (4)> 시나는 이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놀라는 표정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라단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도서관이라니?!! 마노테온 주제에, 네가 왜 도서관 출입증이 필요한 거 야?!!!" 시나는 혹시 이러다 출입증을 뺏기는 게 아닐까 해서 겁먹었다. "저어.. 왜냐니요? 그야, 책을 읽으려고 하니까 필요한 거죠.. 라, 라단님 네 집 책도 디트마네 집 책처럼 순 약초나 인체에 대한 책뿐이고.. 그래 서, 다른 책을 읽고 싶어서..." 순간 시나는 그 두 사람의 턱이 저대로 밑으로 빠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그 만큼 그들의 턱은 크게 벌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카탈리는 곧 정신을 차리고, 경악해서 뭐라고 말도 못하는 라단을 내버려두고, 다시 한 번 더 침착하게 묻기 시작했다. "저어, 시나마? 그,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그,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뜻이야?" 그들로서는 마노테온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거꾸로 바뀌어, 나무들이 뜀박질을 하고 물고기들이 하늘을 날았다는 것보다 더 믿기 어 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나마는 그 모든 놀라운 일들을 시인하고 있었다. "네.. 읽을 수 있는데요?" ..라고 말을 하며, 시나마는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으로 잠 시... 하늘과 땅이 거꾸로 바뀌고 나무들이 한바탕 뜀박질을 한 뒤 숨을 헉헉 몰아쉬고, 지느러미를 푸드덕거리는 물고기들이 구름을 가르며 하 늘을 질주하는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말도 안돼는 장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단이 숨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말도 안돼-!! 마노테온이 어떻게 글을 읽어?!" 그런 라단의 외침에 시나는, 그제야, 이 세계 사람들에게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시나는 초조해지 고 말았다. 아.. 어떡하지. 어떻게 설명한다.. 주제넘다고 도서관에 못 가 게 하면 큰일인데...라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카탈리가 비명을 지르듯 말 했다. "꺄악--!! 그, 그러고 보니!! 시나마, 너! 어, 어제,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바깥에 나가 있을 수 있었지?!!!! 루온 루드랫님하고 같이 시장 에서 돌아오다니!!! 말도 안돼!!" 그 말에 라단의 눈도 크게 떠졌다. "맞아!!! 돈하고 쪽지만 몇 장 달랑 쥐어 줬는데! 문 밖에서 헤매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에..? 그, 그런 거였나..? 늦게 돌아와서 이 분들, 화가 났었나? 하, 하긴.. 소매치기 당해서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 시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약간의 사고 때문에... 그, 그래도. 물건은 다 사왔어요. 그 쪽지 꽤 자세했으니까요.. 시장에 가서 그 쪽지를 지정한 가게에 가서 보여주 기만 하면 물건을 내줬어요. 약초 가게 아저씨랑, 쿠키 가게 아저씨도 몹 시 친절했고.. 정말이에요. 놀러 다니느라, 늦은 거 아니에요..." 그래도 그들이 의심쩍어 하는 눈치라, 시나는 도서관 패에 있는 글을 읽 었다. "제일로트 시립 도서관. 날짜.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106년 말케스완월. 나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은, 나의 이름으로 이 패를 소유한자가 도서관 안,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그리고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또 뭔가 복잡한 글씨가 잔뜩 있었지만, 시나는 거기까지만 읽었 다. 그리고 라단과 카탈리를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보세요.. 읽을 수 있죠..?" "..맙소사." 갑자기 카탈리가 의자로 걸어가 거기에 풀썩 주저앉았다. "믿을 수가 없군. 도대체.." 라단도 자기 부인을 따라 그 곁에, 같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 맞지?] [..네.. 아무래도..] 라단은 시나를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나마.. 아니, 어쩌면 이 이름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너, 얼음의 숲 에 들어가서 기억상실과 일루젼이라고..?" 으으.. 지겨운 화제가 또 나왔다! 하지만 시나는 사실을 말해봤자 소용없 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냥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저, 그렇다면 말이야.. 혹시, 밤에 잘 때라든지, 스쳐 지나가는 영 상 중에...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라든지.. 뭐, 하여튼 끔찍한 장면 같은 거 없어?" 엥? 피비린내 나는 장면? 그건 도대체 왜 물어보는 것일까?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라면, 그 동굴에서 꽤 피비린내가 풍겼지만... '기억'도 아니고 '영상'이라니..? 시나는 인상을 썼다. "..없는데요." 갑자기 카탈리가 측은한 얼굴을 지었다. ..그래. 차라리 모두 다 잊어버린 것이 낫겠지. 그녀로서는 시나가 어떤 '범죄'를 짓고 머리카락이 잘렸다 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기억이나 신분은 바뀔 수 있어도, 성품은 바뀔 수 없으니까... 도대체 저런 아이가 머리카락이 잘릴 만한 중범죄(살인, 강간, 하극상.. 기타 등등..)를 지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종종, 상류계급들은 하류계급들에게 혹독하게 대할 때가 있고.. 그래서 시나마처럼 희생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래도 분명 있었다. 글까지 읽는 아이니까.. 의무교육도 굉장히 잘 받은... 아주, 뼈대있는 집안의 아이였을 텐데.. 불쌍해라.. 필시, 상류계급의 미움을 받기 싫은 가족이 숲에다 버 렸을 거야... 마노테온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위에 묘사한 것과 같은 일 들이(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바뀌고, 나무가 달음박질하고, 생선이 날아 다니는..) 일어나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이렇게 미루어 짐작을 해버렸다. 분명해. 저 성품하며, 예의가 바른 것하며, 글까지 읽을 수 있 는 것... 그래! 이 앤 일.루.티.온.이었어!!!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시나 에 대한 애정이 불끈 솟아나는 그들이었다. 계속 꺼림칙했던 마노테온이 라는 꼬리표가 시나에게서 떨어진 순간, 그들은 이제 시나를 마음놓고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증거로, 카탈리는 금새 눈물이 글썽해져서, 불쌍한 자기의 동족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 가슴에다 시나를 꼭 안았다. 그러니 시나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카, 카, 카탈리님?" "불쌍해라.. '시나', 나를 '카탈리'라고 불러 줘. 그 동안 미안했어." "네에?" 그때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고 개를 돌리니 라단이 천장을 바라보며 빨개진 코를 슥슥 문지르고 있었 다. "..그랬군.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고 했지. 평범 한 마노테온이 아닌 것 같다고 카탈리가 말했던 게 맞았어. ...나를 위로 하는 것도 그랬고.. 정말 마노테온이었다면 그럴 순 없었던 거야.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르고 심하게 대하다니.. 아, 이럴 수가.. 그러고 보면, 나는 굉장히 모진 놈이 아니었던가...! 아아..! 멍청했지.. 멍청했어!! ...일루티온 이 아니라면, 그럴 순 없었던 거였는데..!" 에엥...?!! 시나가 놀라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단은 한참 이렇 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고 '부드러운' 눈으로 시나를 봐, 또 한번 더 시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카탈리도 뭔가 감격스러운 듯 했다. "여보.." "그래, 카탈리... '시나', 이리 와보겠니?" 에엥--?!!!!! 시나는 이제 너무 놀라서 겁이 덜컥 날 지경이었다. 이, 이 사람들 왜 이러지..?!! 설마, 이 도서관 출입증을 뺏기 위해서..?!! 그야말 로 '모진' 꼴을 당한 시나는 이런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단은 시나가 그에게 안 가도 소리도 안 지르고, 시나에게 직접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시나.. 넌, 모두다 기억이 안 나서.. 그리고 머리가 짧아서, 네 정당한 신 분을 몰랐던 거야. 하필이면 저주받을... 아차, 거긴 주인님이 살고 계시 던 곳이지.. 하여튼, 주인님이 살고 계시던 영역만 빼놓고 저주받을 만한 마노테오나 마을에 떨어져서... 너는, 착각을 했던 거야..! 그 마노테온 놈 들이, 프린서팰러티 일루티온을 보고 마노테온이라고 거짓말했겠지?" "예에..?" "하하.. 이 멍한 얼굴이라니...! 내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니, 시나? 너는, 일루티온이라고!!! 넌, 일루티온의 소녀야!!!!" "...." 사실, 시나는 라단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너무나 잘 알아듣고 있었 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왜 이런 서늘한 실내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겠는가? 모두 다, 라단과 카탈리가 너무나 따뜻한 얼굴로 그녀를 내리 쬐고 있어서가 아닌가? 갑자기 마노테온에서 일루티온으로 신분이 상승 된 것은 좋았지만... 시나의 계급이 바뀌는 순간, 이들의 태도는... 너무나 도 뚜렷하게 휙 바뀌었다. 그것도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바뀌어 서, 시나는 지금 어질어질한 어지럼증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어, 어떡하 지? 어떡하면 좋을까? 드, 드래마한테 가서 말을 해볼까..? 라, 라단님이 랑 카탈리님이 날 일루티온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시나는 드래마의 방 문을 긴장한 표정으로 힐끔,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라단 이 시나의 어깨를 꽈악 잡아 시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하하--!!!! 갑작스러운 일이라 너무 기뻐서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있구 나..!!!" 엥?!! 내 얼굴이 그런 식으로 보인단 말이야? 내 마음은 지금 '황당하다' 인데..?! "하하하--!!! 불쌍한 것.. 걱정하지 말거라.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지? 이곳에 왔을 때 희한안 옷을 입고 있었다고... 그래, 그래.. 그래도 이 클 로니아라는 세계는 좀 추운 거에만 적응하면 꽤 살만하단다. 나도 이젠 이 세계가 좋거든? 그러니 너도, 괴로운 과거를 잊고 열심히 살도록 해.. 아니, 어차피 기억이 없으니 그건 좋겠군. 하여튼, 우리가 힘껏 도와줄게. 그렇지 카탈리?" "당연하죠!! 외부 세계에서 온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힘껏 도와줘야 하는 법이라고 예전부터 어른들이 그러셨는걸 요..!!" "맞아." 라단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시나에게 말했다. "아참, 시나, 네 머리카락 좀 다시 보자.." 왜 그러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별로 비밀도 아닌 것... 시나는 모 자를 벗었다. 시나의 짧은 머리칼이 또 한번 더 드러나고... 라단은 약간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래도 '진짜로' 짧은 머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어 견딜 만 한지, 시나의 머리칼을 슬슬 쓸어주었다. "..쯧쯧.. 불쌍하구나. 이렇게 심하게 잘라놓다니.. 자른다고 해도 어깨에 만 안 닿게 자르면 될 것을..." 커다란 손이 따뜻하긴 했지만... 이런 얼토당토 않는 동정들에 시나는 어 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다. ...라단의 말은 생활주임 선생님이 들었다 면 좋았을 말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금 라단이 뭔가 또 청천벽락 같은 소릴 한 것이다. "그래, 시나? 우리 내일이라도 페이스 힐러에게 가자...! ...말론님은 상처 같은 거 고치는데 솜씨가 뛰어난 분이지만... 머리카락을 재생시킬 때는 그걸 전문으로 하는 힐러에게 가야지. 혹시나 해서, 주인님을 위해서 수 첩에다가 그런 힐러들 이름을 잔뜩 조사해 놨단다. 우리, 내일 페이스 힐 러 길드에 가보자." 그때, 카탈리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여보..! 내일도 손님이 가득 이예요..! 내일 모레가 엘의 날이잖아요..!" "아, 그런가?" "그럼요. 하여튼 당신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러니, 우리 달의 날에 가기로 해요. 시나...? 얼마만큼 머리가 길지 궁금하구나.. 후후.. 예쁜 검 정머리카락이니까 길면 예쁠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시나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히, 힐러에게 가 서, 머리카락을 자라게 해? ..마, 말도 안돼..! 시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선 그녀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이곳 사람과는 살아가는 법도 성장 하는 법도, 생체학적으로나 정신학적으로 거의 다... 아니, '모두 다' 틀렸 다. 시나는 '현실' 세계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힐러 라이트 같은 그런 빛... 백 번을 쬔 들, 짧은 머리가 길게 될 리 없었다. 시나 자신의 머리 는 오직 '시간'만이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시나의 얼굴은 시시 각각으로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 자신을 마노테온이라고 하는 것은 사 실이 아니지만, 일루티온이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사실이 아니다...!! 그 러므로 힐러 라이트를 쬈을 때... 이 사람들 기대대로 안 된다면... 으 윽...!! 시나는 갑자기 위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 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자, 자... 시나, 어제랑 오늘은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자고로 양가집의 일 루티온 소녀라면 그런 막일을 한꺼번에 하면 안 돼지. 과자라도 먹고 쉬 고 있으렴." "그래~! 네가 어제 사온 과자를 먹자꾸나!!" ...으윽... ...이 사람들의 눈... 너무 빛나고 있다.. 결혼한지 오래됐어도, 아 직 자식이 없는 그들 부부는 이제 정말 시나를 딸같이 여기는 듯... 으 윽... ...이 사람들 디트마와 동년배라면... 디트마는 아직 20대로 보이는 데... 이 사람들은 완전히.. 으윽.. 위, 위가... 으윽...!! 그때 시나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건 시나 자신으로서도 아주 좋은 생각이 라는 생각이 들만큼 좋은 생각이었다. 덕분에 위의 아픔도 어느 정도 가 시는 느낌이었다. "라, 라단님.. 저, 저는.." "응? 라단님이라고? 아냐, 나도 카탈리처럼, 그냥 '라단'이라고 불러 줘. 그게 더 편하지 않겠니?" 으윽..! ..저, 지나친 기대의 눈빛..!! 부담돼...! 과거에, 시나가 어쩌다가 실 수로 국어에서 100점을 맞았을 때, 담임이 꼭 저런 눈빛을 지었다. "..하하.. 어, 어쨌든... 저기, 저는요, 저어.. 그러니까.. 아! 그래요, 저는 이 제 일루티온 소녀니까, 도서관에 가도 돼지요? 드래마가 혼자서 가면 절 대 안 된다고 했지만... 저는, 꼭 도서관엘 가보고 싶어요!! 괜찮죠?" 그러니까, 시나의 생각은 이랬다. 오늘부터, 이 출입증을 가지고 도서관 에 쳐 박혀 산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도서관으로 직행하고 저녁 아주 늦게 들어오면, 라단이나 카탈리는 시나를 데리고 힐러에게 갈 틈도 없 을 것이다.(현실에서도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아무도 안 건드 렸다.) ...게다가 두 달 후면 바리스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 짧은 시간(비 록 드래마는 시간은 넉넉히 있다고 했지만, 그건 시나 입장에서는 받아 들이기 힘든 말이었다.)동안 최대로 많은 지식을 쌓을 겸, 라단과 카탈리 도 피할 겸, 이 얼마나 좋은 계획인가...?!! 그 동안은 일루티온 소녀인척 하는 것도 괜찮다. "하하하.. 라단님.. 아니, 라단하고 카탈리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제가 일 루티온 소녀인 것도 같고요..!! 그럼 이제 다녀오겠습니다..! 아, 길은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볼게요. 어제 시장에 갈 때도 그렇게 갔으니까 문제 없어요!! 드래마에게 제 이야기는 잘 전해주시고... 그 동안 신세 많이.." 그때 라단이 시나의 손목을 탁 잡았다. "..?!" "...말도 안돼. 여기서 도서관은 마차를 타고 가야하는 곳에 있는 데다.." 그는 걱정스럽게 시나의 머리칼을 보았다. "..미안하다. 어제는 우리의 실수였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알겠 니? 우리야 네가 일루티온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를 본 순간 당연히 마노테온이라고 생각할거야... 자칫 수비대에게 걸리면.." 카탈리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 맞아. 시나.. 어제는 우리가 잘못한 거였어. 우린, 네가 금방 돌아 올 줄 알고.. 미안해. 우리가 못된 짓을 했지... 시나, 혼자 나가면 안돼. 수비대에게 끌려가면, 아무리 주인이 있는 마노테온이라도 아주 험한 꼴 을 당한다고.. 하물며.. 주인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마노테온은 수도를 더럽힌다는 죄목으로... 루온 루드랫님도 그걸 걱정해서 혼자 나가지 말 라고 한 거야." "호, 혼자 나가서 마노테온인 것을 들키면 수비대에게 끌려 간다고요? 수도를 더럽힌다는 죄목으로요..?" "응.. 미안해." "이.. 이럴 수가..." 그랬단 말인가..? 그럼, 라단과 카탈리는... 시나는 새삼스럽게 실망 어린 눈으로 마룻바닥을 보았다. ..마노테온이니, 일루티온이니.. 사실은 이제 듣기도 싫었다. 인간을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고 이 세계는 왜 이 렇게 계급에 따라 제약하는 것이 많을까? 그때 라단이 시나의 잔뜩 실망 한 얼굴을 보고, 자기들의 행동 때문에 그런 줄 알고(어느 정도 맞는 짐 작이긴 했다.)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애써 말했다. "그러니까, 달의 날에 힐러에게 가서, 고쳐달라고 하면 아무 데라도 원하 는 데로 갈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이것저것 과거에 대해 조사할 테지만, 친분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면 돼.. 난 힐러니까. 그리고 내가 보증까지 서 주면..." 시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은 자라지 않는다. ...달의 날..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은 또 나를 예전과 똑 같이 대할 거야.. ..그냥, 차라리 드래마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드 래마에게 도서관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이 나아. ...도서관 출입증은 내 것이니까. ..치료 따윈 안 받을 거야. 그래서 시나는 카탈리를 마저 돕기 위해 호주머니에 출입증을 넣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술엔 침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사건이었다... "..소용없어요. 라단님.. 그리고 카탈리님.. 사실은 저, 마노테온이에요.. 라 단님과 카탈리님이 말씀하시니까, 혹시나 해서 괜히 거짓말 해본 거예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라단과 카탈리는 그렇게 말한 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부엌으로 가는 시나를 보고 당황했다. 카탈리가 남편을 화가 난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 했다. "라단..! 그러니까 시장에 보내는 건 너무 심한 일이라고 그랬잖아요..!! 어휴.. 이런 말하는 나도 끝까지 말리지 못했으니 할 말 없지만.." "시, 시나가 굉장히 많이 섭섭해하는 것 같지? 치료를 해준다고 하는데 거절을 하다니.." 재생술 같은 것은 그냥 일반 치료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니까, 보통사 람이라면 누가 공짜로 해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덤벼들텐데 시나는 그것을 거절한 것이다. 라단이나 카탈리야 아직 아이도 없고, 그 동안 모 아놓은 돈이 꽤 많으니까, 그의 주인과 저 여자 애를 위해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시나를 마노테온으로 착각만 안 했더라도 그들 부부는 처음부터 시나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뭐, 일루티온 소녀라고 하더 라도.. 주인님과 결혼한다는 것은 여전히 반대지만... 그래도 일루티온과 마노테온과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그들로서는 시나에게 못할 짓을 한 것도 미안하고, 여기 와서 시나가 보여줬던 행동들도 생각나고 해서 마 음껏 시나에게 애정을 표할 수 있었는데... 본래가 마음이 모질지 못한 그들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카탈리가 말했다. "여보.. 당신이 도서관에 시나를 데려다 주면..." 라단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카탈리.. 도서관은 귀족들 저택 구역 근처에 있잖아? 우리 마 을과는 정 반대쪽에 있는 곳이라고... 마차로 가면 넉넉잡고 왕복 네 시 간이야... 시내 중심가를 지나가니까.. 그곳은 축제 때문에 길이 많이 막 힐 거라고. 거기다가 도서관에 가면 서류작성도 해야할 테고.. 반나절은 잡아먹을 걸. 그런데 오늘하고 내일은 손님들 때문에..." "사모님~~ 식사 끝나셨우~~?" 탕탕- 아니나다를까 그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희미하게 카탈리를 부르 며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카탈리는 한숨을 쉬고 그것을 열어주었 다. 그러자 새로운 손님들이 한 무더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동을 부리 느라, 점심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 있었고 그들의 힐러가 식사를 끝마쳤 을 것이라 생각한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몰려온 것이다. 한 할머 니가 라단이 거실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빨 빠진 볼을 홀쭉하게 만들며 웃었다. "아이구~!! 라단님, 어제는 왜 하스피틀을 안 여셨수~!! 어제, 얼마나 다 리가 쑤시던지~!!! 진찰 좀 해주구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둘은 이따가 한가할 때 시나의 마음을 풀 어주고 다시 한번 더 설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시나는 라단이나 카탈리가 자기에게 눈에 띄게 친절해진 것에는 고마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들의 페이스에 말 려 들어가 힐러에게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들의 일을 도 왔었다. 라단과 카탈리가 쉬라고 했지만, 묘하게 손님들이 많이 들이닥쳐 서, 라단과 카탈리는 그 손님들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거실을 마 저 정리한다든지 차를 내오는 일은 시나가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라단 과 카탈리 둘 다, 아무리 어제 쉬었다지만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무지막지 하게 끊이지 않았는지 어리둥절해 했는데,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 었던 것은 점심시간에서 별로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전에 온 손님들 은 거실이 엉망인 것을 보고 놀라서, 시나에게 그다지 주의를 두지 않았 지만.. 거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오후에 방문한 손님들은 자기들에게 차를 내오고 눈앞에 왔다갔다하는 시나를 매우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 던 것이다. 손님들에게 거슬리지 않게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이미 시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했다. 아마도 어제 온 세 부인들이 라단의 집에 마노테온 소녀가 있다는 소문 을 마을에 퍼뜨린 듯.. 그들은 돈을 치르기 위해 카운터에 서서 어제 그 부인들처럼 혐오감 어린 표정으로 시나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보고 자기들끼리 소곤대기 일쑤였다. 카탈리와 라단은 그것을 보고, 정말 처절 할 정도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달의 날에 모든 오해가 풀리면 저들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손님들 있는 곳에 서 매우 큰소리로 그냥 우연히 이야기하는 척, 사실 시나는 '일루티온'이 고 병으로 저렇게 된 것이라고 열심히 소개해 준 덕분에...(아무리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려도 어쩔 수 없었다..) 몇 분이 지나자, 하스피틀은 더 욱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마을 사람들로 한층 더 바빠지고 말았다. ..뭐, 영광스럽게도 시나 자신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의심과, 동정과 호의와... 하여튼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보 여주며 시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도저히 견디다 못한 시나는 카탈리가 쓰레기를 비우려 하 자 자기가 하겠다고 기꺼이 자원해서, 뒷문으로 나와 거기 계단에 걸터 앉아 있었다. 시나는 앞으로 뻗은 양팔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어휴.. 이제, 어떡하지.. 어쩐지 드래마 따라서 여기 오는 게 그렇게 싫 더라니.. 어휴... 마음이 편하기는 바리스가 나았는데.. 거기는 최소한 힐 러에게 가서 머리 기르자고 하는 사람은 없었잖아? ..춤추는 게 지겹긴 했지만.. 하아.. ..달의 날에 힐러에게 끌려가면 절대 안 되는데... 머리 따 윈 절대 안 자라난단 말이야..! 어휴.. 드래마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절대 가기 싫다고 말해 볼까? 이따가 살짝 들어가서 말한다면... 하지만 싫어 하면 어떡하지... 이건, 마을 사람 모두에게 거짓말한 꼴이 되고 말았으 니.. 가까운 산에 등산이라도 해볼까.. 산 속에 들어가 있으면 또다시 현 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이렇게 말도 안돼는 생각을 하며 골머리를 싸 앉고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문득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리고 시나는 한 백발자국정도 떨어진 곳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 을 발견했다. ...그를 맨 처음 본 순간 느낀 느낌은 놀라움이었다. 지금까 지 고민을 하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것이 뒤로 확 물 러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무척 초연한 모습이었다. 키는 드래마 만큼이나 큰 편이었고, 전신을 진한 갈색의 후드로 감싸고 있었다. 마치 맨 처음 드래마를 봤을 때처럼 그 사람도 눈만 내놓고 후드에 달린 입 마개로 온통 얼굴까지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이 었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놀랄만한 것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상하게 도 그런 그의 주위에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 었다. 그래서 시나는 그만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를 멍하게 바라보 고 말았다. 어둠... 그의 주위를 장막처럼 둘러치고 있는 어둠... 하지만 그것은 기분 나쁘거나 음습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것은, 종일 힘든 일 을 마쳤을 때 겨우 찾아들어 온 밤과 같이... 침상에 누워 행복한 잠이 들기 직전에 느낄 수 있는 그런 빛나는 것, 잊어버린 것들과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로 쓰여진 것처럼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서늘하고 투명한 그런 것이었다. 아직도 한낮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자기의 눈 을 의심해서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그것을 꾹 참고 시나는 그를 계속 바라봤다. 그건 의지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가슴이 굉장히 두근거렸다. 그리고 결국, 시나는 그가 자신에게로 다가왔을 때, 그 호리 호리한 체격의 사람이 진한 검은빛의 눈동자를 가진 것을 보고 감동해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저런 분위기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런 눈빛이었으리라, 어쩌면 미리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 왔다. 현실 세계... 그 흔하디 흔한, 검은 눈동자일 뿐인데... 아아, 하지만 내가 저 검은 눈동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이곳에 와서는 별 로 본 적이 없는... 저 그리운 검은 눈동자, 마치 아버지의 눈동자 같은... 그래서 시나는 그의 그 눈빛을 보았을 때, 갑자기 눈물이 나올 만큼 향 수를 느꼈던 것이다. 아마, 라단의 집에서 오늘 겪은 힘든 일들도 시나의 가슴을 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그곳.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그곳... 콘택트렌즈를 낄 때 마다 너무 귀찮아서 그냥 평범한 검은 눈동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생각했는데... 아빠... 한편 레이서스는 마차꾼이 데려다준 '우나 일루테오나, 힐러 라단의 집으 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곳을 걸어서 힐러 라단의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오전에 일어나, 꼭 해야 할 일만 처리하고 이 갈색의 후드를 집어쓰고 나온 것이다. 하카단이 이 뒤의 일은 잘 처리해 줄 것이었다. 루파르테는 자기의 주인이 자기도 대동하지 않고 이렇게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면 분 명 섭섭해 할 것이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주위를 맴도는 자들에겐 지 쳐있었다. 게다가 지금 가서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일로 하 고 싶었다. 이건 매우 개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 었다. 그나저나 매우 긴 진창길이로군.. 이만큼 왔으면 그럭저럭 다 온 것 같은데... 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힐러 라단'의 집 이 어느 집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가락으로 한집을 가리켰 는데, 마침 그 집에서 한 소년이 나왔다. 집안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 하고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어디 외출하려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듯 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 고 계단에 걸터앉아 뭔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했다. 레이서스는 그런 그를 보며, 자신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조금 숨어서 집의 동태를 파악해 볼까? 하지만 도대체 무슨 동태를 파악한단 말인가..?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93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8/28 23:32 읽음:257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3회, 제 36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Ⅰ (5)> 오늘 '그'는 왕궁으로 나오지 못했다. 듣기로는 심하게 다쳐서라고 했는 데... 그 말을 듣고 레이서스는 자기의 계획을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상태에 맞춰 힐라토 파이오니온인 자신의 계획이 이리저리 바뀐다는 것도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어제 생각한대로 이곳 에 온 것이다. 하지만 막상 여기까지 오고 보니 모든 것이 바보 같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노테온 따위, 그냥 루파르테에게 시켰어도 괜찮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소년은 레이서스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허리를 피고 레이서스를 마주 쳐다보았 다. 꽤 먼 거리인데도 회색눈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 군. 그렇게 특별히 큰 눈도 아닌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레이서스는 후드 속에서 빙긋 웃었다. 뭘 저렇게 보는 것일까? 자기 등뒤에 뭔가 이상하고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일까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 소년의 시선은 바로 자기에게 못 박힌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줄곧 뭔가에 홀린 듯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음을 결정하고 천천히 걸어서 소년에게 다가갔다. ..모처럼 여기 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간다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는 마음도 있었고, 자 신을 쳐다보는 이 소년에게 어쩐지 흥미가 끌려서 말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 앞에 선 레이서스는 그를 내려다보 며 생각하는 어투로 물었다. "..미안하지만.. 이곳이 힐러 라단의 집이 맞습니까..?" 소년의 눈이 또 한번 커졌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도 약간 커졌다. 이 소 년의 눈은 정말로 부드러운 회색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그 걸 본 순간, 어떤 아련한 느낌과 기억... 옛날 그가 두 손을 들어올리면 언제나 어김없이 그 손을 꼭 마주잡고 웃음 지어줬던, 그 강하고 친절한 존재의 느낌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그 눈에 물기가 어려있어서,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렸다. 눈이 매우 슬퍼 보였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침울한 얼굴이라니...? ..라고 생각하는 데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에, 에.. 이곳이 맞는데요... 소, 손님이세요..?" 그러더니, 그 소년은 뭔가 얼굴이 붉어져서 자기의 모자를 똑바로 고쳐 눌러썼다. 한편 레이서스는 소년의 목소리에 내심 놀랐다. 아무리 엘의 시기의 소년이라 지만, 높은 톤의 그 목소리는 어떤 다른 가능성을 내포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 다. 설마...? "..당신, ..혹시, 여자입니까?"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얼굴을 확 붉혔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움찔하 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여자 애 같은 분위기가 더욱 진하게 풍겼고, 그래 서 그는 자기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맙소사. 그럼 아까 같은 질문은 굉장한 실례였군. 여자 애에게 여자냐고 묻다니..! 하지만 그는 실례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후드 속에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나의 표정이 너무 갑자기 불그락푸르락하게 바뀌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웃음 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웃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어쩐 것인지, '소녀'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다부지게 말했다. "..여자... ..당연하죠..!! 쳇. ..들어오세요!" 시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뭔가..? 이미지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희한해서(물론 시나가 '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리고 그를 본 순간 갑자기 현실세계 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몰려와서 그래도 호감이라면 호감을 갖고 봤더 니... 다짜고짜 초면에 '당신 여자입니까?'..라니...! '당신 여자같이 생겼다' 라는 말을 듣는 여자보다 비참한 여자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시나도 이제 는 사람들의 이런 착각엔 익숙해져서 '와~ 너 남자애 같다~'라고 말해도 그냥 그러려니..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별로 웃기진 않지만 말이 다.) 이렇게 초면의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할 때 는 확실히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한편 카탈리는 쓰레기를 버리러 갔던 시나가 웬 여행자를 하나 달고 들 어오자,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도 웬 남자가 뒷골 목에서 들어오나 놀라서 보았다. 하지만 키가 큰 남자라는 것 외에는 그 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행자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방금 들 은 놀라운 뉴스를 말하며 다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카탈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빙긋 웃더니, 왠지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거실의 의자 를 가리키며 상냥하게 레이서스에게 말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어제나, 오늘 뒷문으로 들어오시는 여행자가 많네 요.. 이상해라... 어쨌든, 지금은 이 분들 약재 좀 싸드리고 상담해 드릴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어, 사모님. 급해서 그러니까, 빨리 좀 싸주세요.." "저, 저도요." 몇몇의 부인들이 그렇게 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카탈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듯 생긋 웃더니 '네에, 잠깐만요..'라고 말하고 약을 나눠서 담 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한편 레이서스는 카탈리의 인사를 듣고 당황하 고 있었다. 상담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곳은 하스피틀이고, 자기는 충분 히 생각도 안하고 여자 애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그냥 이곳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아픈 곳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 다시 나가야 하나 그렇게 망 설이는데, 머뭇거리는 그를 카탈리가 약을 나눠 담다 말고 의아한 눈으 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한숨을 쉬고, 하는 수 없이 그냥 거실의 의자에 앉기로 했다. 이렇게 앉아서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마노테온 여자아이 에 대해 묻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 어디 '그'가 있겠지만... 이런 작고 초라한 집이라니, 어쩐지 안 어울렸다.(사실 라단의 하스피틀은 그렇게 작지도 초라하지도 않았지만, 레이서스는 주로 왕궁에서만 생활했고, 이 런 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그리고, 들어온 현관이 너무 옹색했기 에... 그는 라단의 하스피틀을 '깨끗하긴 하지만, 매우 초라하다'라고 느끼 고 있었다.) "자, 다 됐네요. 겉봉투에 작대기를 그려놨으니까, 그 횟수만큼 나눠서 그 날짜에 다려서 먹이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아까만 해도 거실에서 즐겁게 떠들던 부인들은 뭐가 바쁜지 약재 꾸러미 를 들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걸 본 레이서스는 인상을 찌푸 렸다. ..그 여자들은 레이서스가 들어 온 문과는 정반대 쪽에 난 문... .. '앞 문'으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그는 아까, 여기 주인여자가 '뒷문' 어쩌 고 한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문 사이로는 비교적 깨끗 하고 넓으며 마차가 다닐만한 길도 언뜻 보였다. 그러니까, 뭐야... 레이 서스는 팔짱을 끼었다. 그러니까 나는 시종들이 드나드는 문인 뒷문으로 들어 온 것이로군.. ..흠... 하카단이 봤으면, 펄펄 뛰다가 뒤로 넘어갔겠는 걸... ..세계의 체통을 떨어뜨린다고... 그는 왠지 모를 묘한 미소를 띠었 다. 자취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말도 타지 않고 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심 부름꾼에게 마차를 불러달라고 시키자 나타난 마부는 레이서스에게서 행 선지를 듣자, 인상을 이상하게 찡그리며 요즘 이 곳의 높으신 분들에게 새로운 유행이라도 생겼나.. 어제, 오늘 웬 '우나로 통하는 지름길'이람.. 거기, 뭐 볼게 있다고...라고 중얼거렸다. 행선지를 말하는데, 비웃다니... 필시 그런 버릇없는 태도는 레이서스를 궁전에 딸린 일루티온 시종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테다. 어쨌든, 그 렇다고 해도 참, 별 할 일 없는 인간 다 보겠다는 듯, 너무 묘하게 레이 서스를 쳐다보는지라 레이서스는 여기까지 오는 몇 시간 동안 저 마부가 우나에 뭔가 안 좋은 감정이라도 있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그를 골탕먹이려고 한 것일까..? 큰길을 놔두고 뒷골목에 내려주고 가다니.. 조 금 어이가 없고 기분도 나빴지만... 그래도 우스웠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손님을 엉뚱한 곳에 내려주는 마부라니..? 상류 계층의 마을을 돌 정도로 격식 있는 마차의 마부치고는 꽤 나쁜 태도였음으로 당장 잡아서 능지처 참을 해야겠지만... 레이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창 때 문에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걷는 것을 꽤 즐기는 편이었 고, 새삼스럽게 마부를 잡아 감히 나를 골탕먹이다니 용서할 수 있네 없 네 하며 따지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으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하스피틀에는 또 다른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꽤 우락부락한 인상의 중년남자로 들어오자마자 활기차게 인사했다. "여~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좋은 날입니다. 제 딸네미 약이 오늘쯤이면 다 됐을 것 같아 찾으러 왔습니다!" "어머, 어쩌나~ 먼저 온 손님이 계시는데, 잠시 기다리시면.." 그때 레이서스가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그 분 먼저 일을 보셔도 괜찮습니다." 카탈리는 그를 힐끗 보았다. 어딘가 말투가 타 세계 사람처럼 특이했지 만, 일단 친절한 사람인 것 같아 그에게 호감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 덕였다. 중년남자도 갈색후드의 젊은이가 마음에 든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거, 고맙수다. 젊은이! 바빴는데 자네가 양보를 해주니 좋구 만! 나야 뭐, 약재만 찾아가면 되니까, 얼마 안 걸릴게요. 안 그렇습니 까? 사모님?" "네. 다 만들어 두었으니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기 어디다 놔두었 는데?" 카탈리는 카운터 뒤, 칸막이 벽들에 쌓아둔 약재 꾸러미를 뒤적거렸다. 중년 남자는 그걸 보며 또 말하기 시작했다. "하이고.. 정말이지, 자식 키우는 데 웬 돈이 이렇게 들어가는지..! 계집애 가 비쩍비쩍 말라싸니까, 돈 쳐들여 보약까지 먹여야 하고... 다른 집 가 시나 들은 통통하게 예쁘게만 크던데, 쯧... 그래도 어쩝니까, 죽으나 사 나 자식인데. 표준은 되야, 좋은 남편 감이 나타나지요. 하하하..." "네에, 그럼요." 카탈리도 웃으며 뒤에 매달아 놓은 약초 꾸러미를 찬찬히 살폈다. 그런 데 카탈리가 그렇게 약초 꾸러미를 찾고 있는 동안 남자는 거실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레이서스에게 가서 '기다리시는 동안 뜨거운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라고 묻고 있는 시나에게 주목했다.(이곳에서는 손님이 곧바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에게 따뜻하고도 가벼운 차를 대접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런 것을 바리스에서부터 경험한 시나는 어느새 거기에 적응한 것이다.) 한편 레이서스는 잠깐 들린 손님에게도 차를 대 접하는 이 세계의 관습이 희한했지만, 사실 추운 바깥에서 들어오니 몸 을 녹이기 위해 무언가 따뜻한 것이 마시고는 싶었다. ..차가운 기후... 그 런 것 때문에 이런 관습이 생긴 것인가.. 했지만 레이서스는 거절의 표시 로 고개를 저었다. 차를 마시느라 얼굴을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다. 시나 는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가 이곳에서 만난 사람 중 권하는 차를 거절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이다. 심지어 그 무뚝뚝한 드래 마도 차를 거절한 적은 별로 없는데? 하지만 곧 시나는 내가 무슨 상관 이랴.. 모르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고 내 할 일이나 하자..라는 생각으로 돌아섰다. 아까 말했듯 그는 굉장히 초연해 보였고, 뭐라고 할까... 시나 도 계속 그를 보고 있자니, 현실세계에 대한 향수가 점점 심해져서 그냥 신경 끄기로 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해야할 고민도 많이 있고... 드래마의 병실엘 가볼까 생각했다. 마침, 손님이라고는 거의 없으니 지금이 기회였 다. 그런데 그때 중년남자가 시나를 관찰하던 것을 끝내고 큰 소리로 말 했다. "호오~!! 사모님? 마을 사람들이 말하던, 사모님의 조카가 저 애입니까? 저는 여자 애라고 들었는데? 남자애 아닙니.. 예? 여자애 맞다고요? 아 이고~~!! 저런!!!! 그런데 저렇게 삐쩍 말랐다니!!! 어쩌면 좋나!!! 병에 걸 려서 그렇다더니, 정말이군요!!! 이거, 이거~!! 저 애를 살찌우자면, 돈 깨 나 들어가겠는걸요~~!!! 물론 삼촌이 힐러시니까, 걱정이야 없겠지만... 하 이구~!! 세상에~! 뉘 집 청년이 데려갈지~! 어째, 저렇게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 쯧쯧쯧~~ 그러니까, 마노테온이라는 소문이 파~ 하게 퍼진 것 아닙니까? 쯔쯔쯔...!!!" 당연한 일이지만, 시나는 이 말을 듣고 아까 저 검은 눈동자의 남자에게 모욕(?)당했을 때보다 수 백 배는 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의 남자가 자기를 신기하고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봤을 때 에는 더, 더, 새빨갛게 얼굴을 붉혀야 했다. 처음 보는 여자아이한테 저 런 소릴 하다니, 상당히 무신경한 아저씨가 틀림없었지만.. 그보다, 도대 체 자신이 언제 라단과 카탈리의 조카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참 을 수 없었다. 이런 헛소문이라니! 시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더 이상 질 질 끌다가는 달의 날, 이 사람들은 지독한 실망감만 느낄 것이다. 일년 후라면 머리가 길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며칠 후에 머리가 쫙 자랄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다시 비참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시나는 그 사실을 말하려고 입을 떼 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모자를 벗으려는 순간, 카탈리가 난처하면서도 기쁜 듯 호호호~ 웃었다. "어머~! 벌써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요? 방금 전에 말한 사실인데.. 뭐, 이 제부터 치료를 잘해야지요. 아무튼 앞으로, 우리 시나 잘 부탁드려요. 도 트리씨." "하하하~~!! 아무렴요. 힐라토 같은 칙칙한 세계에서... 그것도 어디 산골 짝의 시골에서 막 올라왔다니, 우리 클로니아 같은 훤하고.. 그 중에서도 제일 번쩍번쩍한 제일로트를 봤으니,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하겠지만... 계 집애들이 만든 자수모임 같은데도 가고 그러면, 금방 그 칙칙한 힐라토 티에다가 시골티도 벗을 겁니다. 뭐, 생긴 것은 나쁘지 않으니까.. 살만 좀 찌면 청년들도 서로 종속주가 되겠다고 난리일걸요? 하하하!" "호호호~ 도트리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호호.." 허억--!! 시나는 경악에 찬 눈으로 카탈리를 보았다. 그, 그럼 카탈리 아 줌마가 날 자기 조카라고 거짓말 한 거야?!! 내가 쓰레기 비우러 간 그 잠깐 사이에?!!! 어, 어쩐지 거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이 이야길 듣고 소문 퍼뜨리러 나간 거구나, 그 아줌마들이!!! 시나가 이렇게 경악 하고 있는데, 카탈리가 그녀에게 다가와 살짝 속삭였다. "시나, 사람들이 하도 너에 대해 말이 많길래, 내가 그냥 눈 딱 감고 선 언해 버렸어. 네가 우리 조카라고. 그럼 자기들도 뭐라고 말을 못하겠지. 어제 부인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 분들은 사실, 이 마을 내에서도 신용이 없는 편이니까.. 어떻게 우기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달의 날에 네 머리가 자란 걸 보면 아뭇소리도 못할걸? 호호호..." 으아.. 난, 이제 죽었다...!!! 시나는 사람들이 왜 절망에 빠지고 절망에 빠 지다 못해 자살할 생각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이지 어 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카, 카탈리.." "..아줌마! 아줌마라고 부르렴, 시나. 이제 넌 우리 조카니까." 으아아... 도대체 왜 이 세계에서는 남을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인척관계 를 맺는 거야?!! ..하,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안돼..!! 이런 세계에서 일주일 넘게 살아남았으니, 앞으로도 할 수 있어..!! 시나는 억지로 웃으 며, 카탈리의 손을 꼬옥 잡았다. "카탈... 아니, 아줌마!!" "응? 왜 그러니, 시나?" "저는 도서관에 가고 싶어요!! 그것도 지금 당장이요!!" "무슨 소리니-!! 아까, 그렇게 설명했는데...!!! 너 같은 여자 애는 혼자 다니면 안 된다니까!!!" "글세, 저는 남자애처럼 보이니까, 괜찮다니까요..!!!" "안돼..!! 그 분이 반대할 거야..!!" 시나는 '그 분'이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챘다. "드래.. 아니, 드랫에게는 제가 말하겠어요!!!" 마을 사람들이 또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지 않도록 사람들 있는 데선 다들, 그를 '드랫'으로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카탈리는 입술을 꼬옥 깨물 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이야기해, 시나. 갑자기 웬 억지인지 모르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자, 이제 네 방으로 올라가! 난 손님 때문에 바빠!" "카탈리.. 아줌마.." 시나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우락부락한 인상의 중년남자라든 지, 검은 눈동자의 남자는 뇌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세계 로 돌아갈 힌트, 그것이 필요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그래 서 도서관으로 그토록 가고싶어 하는 것인데... ...하지만, 시나는 알고 있 었다. ...사실 도서관에 가도 그런 힌트가 거기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 떤 책들이 있을지... 그 책에 과연 시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지... 어쩌면 책이 수천 수만 권이 될 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그 책들 가운데, 어떻게 정보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사실은, 모든 것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서관에 가고 싶어하는 것은, 정말 미약한 희망에 불과했다. 꼭 아버지가 계시는 현실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억지를 써서라 도 지키고 싶은 희망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마저 무참히 거절당하 고... 난, 난... 이제 어떡하면 좋지? 제발, 아줌마.. ...차라리, 나한테 친절 하게 대하지 말아요. ...아줌마가 말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왜, 아무리 말해도 몰라주죠..? 시나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눈물이 투두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뺨과 턱을 적신 그것은 빠르게 툭툭 떨어지고 있었고 시나가 있고 있는 셔츠를 점점이 물들였다. 그걸 보는 카탈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시, 시나..!!!" 시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멍청이같이 질질 짜는 것은 딱 질색이 지만, 갑자기 가슴속에 샘이 터지기라도 한 듯,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시나는 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주먹으로 얼굴을 쓱 닦았 다. 그리고 젖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모르겠죠...? 제가... 얼마나 우리 아빠를 보고 싶어하는지.. ..아 마,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일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참으로 걸어갔 다. 그렇게 걸어가는데 문득 의자에 앉아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보는 검 은 눈동자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눈물 사이로, 굉장히 일렁여 보였지만 시나는 그를 외면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리 다니, 어지간히 한심해지기도 했구나, 윤시나..! 바보 같구나..! 정말 바보 같아..!!! 그녀는 흐느낌을 멈추기 위해, 계속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며, 어젯밤 잠들었던 곳.. 그러나, '셰리카'와 깨어났던 곳... 그리고 이제 다시 혼자 있을 곳으로 올라갔다. 시나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자, 거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카탈리는 갑자기 시나가 눈물을 흘리며 이층으로 올라가자 너무나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고, 도트리씨는 여자애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치 자기 탓 처럼 느껴진다는 듯, 안절부절, 시선을 어디 둘 지 몰라하다가.. '에, 참... 계집애들이란.. 에, 참..'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 고 목뒤를 벅벅 긁으며 카탈리에게 꾸벅 인사했다. "사모님! 제 딸네미 약은 나중에 찾으러 오지요. 원, 제 딸도 꼭 저 나이 또래인데.. 제가 괜히 힐라토 어쩌고 해서 말실수 한 것 같습니다. '아빠' 라니.. 향수병에라도 걸린 것 같군요. 허.. 참.. 마누라한테 이야기 듣고 정말인가 해서 약도 찾을 겸 와봤더니.. 울기까지 할 건 뭐람.. 쯔쯔.."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하스피틀을 나가버렸다. 카탈리 도 뭔가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참담하기는 마찬가지라, 그렇게 나가는 그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료실의 문이 열 리고 지금까지 진찰을 받던 환자가 나왔다. "..감사합니다. 라단님. 역시 마누라가 붕대를 매주는 것 보단 라단님이 매주시는 것이 더 편하고 든든하군요.. 하하.. 그저께 그냥 쫓아내실 때는 어찌나 당황되든지.." "하하..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하지만, 오늘 라단님의 붕대감기 는 어쩐지 자신감이 넘치고 보기가 좋더군요." "하-하하핫.. 자신감은 무슨 자신감입니까. 그냥 손에 익은 대로하는 것 뿐인데- 핫하하하하-" "하하.. 어쨌든,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하하하.." 그들은 진료실 안에서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눈 듯, 거실 분위기가 이상 한 것도 못 느끼고 그렇게 밝게 웃으며 인사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라단은 상당히 기분 좋은 표정으로 현관문을 탁 닫고 뒤로 돌아섰다. "카탈리? 손님이 가시는데 왜 인사도 안 해? 어? 손님이 오셨군. 안녕하 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레이서스는 라단이 친절하게 인사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무슨 일로 여기 왔는지 말하는 대신 방금 본 일에 대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 시나라는 소녀 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아까 온 남자가 시나라는 소녀... 이들 부부의 조카에 대해 이러 니 저러니 함부로 논평했을 때는 그의 눈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상당히 무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세계인 힐라토에 대한 건방진 발 언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자 애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본인이 있고, 낯선 손님이 있는 앞에서 암송아지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그런 발 언을 내뱉는 것은 문제였다. 더구나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그 사람도 그 소녀와는 처음으로 만나는 것 같던데... ...일루티온 계급이라 그런 것일 까... ...아니, 그보다... 저 소녀, 내 세계 사람이라고 했었나? 하긴, 이 남 자 자체가 '그'를 쫓아 힐라토를 떠나 여기까지 온 자라고 하카단이 말했 었다. 그러니 그의 조카라면, 당연히 힐라토 인이겠지. 게다가... 그가 만 나기 원하는 사람들은 코빼기도 안보였지만, 그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 었다. '드랫'이라... 분명히 '그'를 말하는 거겠지. 어디 누워 있을까, 굳게 문이 닫힌 저 방에? 아님, 저 방에? 그때 라단이 레이서스가 가만히 있 는 것을 보고 당황해서 다시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저어.. 손님?" 그때 레이서스가 낮고 잘 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부인, 어떨까요? 저는... 타 세계에서 온 여행자. 세계혼을 맞은 축제를 구경하러 힐라토에서 왔습니다." 그 말에 라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 세계에서 왔다고..? 라단이 너 무 반가워서 그 여행자의 손을 잡고 흔들며, 그래 힐라토는 요즘 어떠냐 고 물으려는데 그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저는 계속.. 제일로트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있었지요.. ..오 늘은.. ..포션... 여행용 포션을 사러왔다가, 방금 같은 광경을 보니.. 유감 입니다." 라단은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같은 광경'? 그러고 보니, 카탈리는 잔뜩 걱정이 서린 얼굴로 이층에서 눈을 못 떼고 있다가, 이 남자의 말에 얼 굴을 살짝 붉혔다. 라단은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지? "카탈리? 이 손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슨..?" 그때 카탈리가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는 듯 하더니, 그에게 와서 귓속말 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사실은..." 라단은 일에 대한 내용을 대충 듣고 인상을 잔뜩 쓰면서 카탈리를 보았 다. "그게 정말이야? 당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 선언한 것은 잘한 일이 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다니... 뭐야.. 그렇게 도서관에 가고 싶어했나..? 어쩌지..? 나나 당신은 바빠서 도저히 데려다 줄 수가 없는데... 아, 그렇 다고 혼자 내보낸다는 것은 절대 말도 안돼!!!!" "당연하죠..." 그때 레이서스가 스윽 일어섰다. 라단이 그걸 힐끗 보고 상당히 큰 키로 군.. 꼭 루이티온 계급처럼 큰 걸..? ..이라고 감탄하는데, 그가 낮고 잘 울리는 음성으로 무심한 듯 말했다. "...제가 조카 분을 데려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 "다, 당신이..?" 라단과 카탈리가 남자의 말에 놀라서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여자 애이기 때문에, 그리고 몸이 약해서 혼자서는 밖에 나가서 안 되 는 거라면 말입니다. ..어차피, 저는 내일쯤, 제일로트 도서관 방향으로 구경가려던 참이니까, 가는 길에 데려다 주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다시 데려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레이서스 그 자신의 주위 여자들도 수행원 없이는 바깥에 나가지 않았으 므로, 레이서스는 자연스럽게 시나가 아무런 사람의 보호 없이는 바깥에 나가서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라단과 카탈리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제안을 하는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몇 마디 더 붙이기로 했다. "..댓가는... 음.. 그래요. 여행용 포션, 몇 병이 좋겠군요. 보시다시피 여행 자라, 여행하는 동안에는 돈을 최대로 아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까 제 세계.. 아니, 우리 세계의 소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작은 동 정심 같은 것도 생겼고요." (계속)================================================== 음, 그런데... 이야기를 쭈욱 적다가.. 루드랫에 대한 라단의 호칭문제가 걸 리더군요.--; ...루온 루드랫이니 루온 루사트니 다양하게 부르고 있던데.. 사실은 '루온 루드랫'이 맞습니다... TT;;;;;;;;; 디트야, '루온 루사트'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거예요.. 흑흑... TT (나중에 바꿔야지~ 랄라~) <엔...--;;;> ps...미유님, 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 자양강장제네요...^^; 그리고 지 이님.. 토론회(?)에 대한 글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주시다 니 감격...^^; 저어, 그리고 MP3 파일 감사했습니다..^^ (좋은 노래들이더군 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05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04 20:16 읽음:251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4회, 제 36막. 시나, 그들을 만나다.Ⅰ (6)> "...." 라단과 카탈리는 이 뜻밖의 후한 제안에 어떡해야 할까 고민했다. 저 사 람이 그렇게 해주기만 한다면, 여행용 포션 같은 거야 몇 병이라도 사례 로 줄 수 있다. 게다가 이 남자는 꽤 친절하고 좋은 사람 같다. 차를 거절 하다니, 조금 괴짜 기질이 있는 것 같지만 그거야 힐라토 인이기 때문에 클로니아의 관습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일 테고... 목소리도 나지막하고 차 분한 것이 책임감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인이 있는 방 을 살짝 보았다.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루온 루드랫의 결정 없이는 함 부로 시나를 이 남자에게 맡길 수 없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참 난처한 표정으로 있다가, 남자를 보고 말했다. "저어, 손님... 너무나 감사한 제안입니다. 손님의 제안이야말로 지금 우리 에게 꼭 필요한 것인데... 그런데,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의 논도 드려야하고... 그러니,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일정에 차질이 있다든 지 바쁘지 않다면 내일 도서관으로 구경가시기 전에 다시 이곳에 오실 수 있을까요? 그때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여행 용 포션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요한 만큼 말하세요. 내일도 몇 병 싸놓겠습니다." 레이서스는 묘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아, 자신이 말한 것을 몹시 고맙게 생각하고 당장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 런데... "..의논을 드려야 한다니? 당신들이 저 소녀의 후견인이 아닙니까? 누구 또 다른 보호자 분이라도 있는가 보지요?" "예?" 라단과 카탈리는 당황했다. 시나의 후견인은 루온 루드랫님이지만... 그런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문제가 몹시 복잡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 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시나가 힐러에게로 가서 치료받는 것을 그토록 거부하는 이유가 혹 루온 루드랫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정상 적으로 생각한다면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루온 루드랫 님 때문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시나가 일루티온으로 돌아가면 루온 루드랫님과 사이에 은혜의 법 따윈 성립이 안되니까... 그러므로 루온 루 드랫님이 시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녀를 원한다면 그 또한 자기의 신 분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그들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비싼 치료비를 내서라도 시나를 꼭 일루티온 으로 되돌려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나 자신은 루 온 루드랫님의 정식 부인으로는 못 들어가니까... 그의 사랑을 잃게 될 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고 차라리 계급보다는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갸륵(?)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이런 자 신들의 생각에 거의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는 시나를 잘 설 득한 작정이었다. 네가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진정으로 좋아한다 면 그분의 미래를 절단 내서야 되겠느냐..? 너는 그래도 나중에 그분의 두 번째 부인으로라도 들어가면 되니까, 모든 것은 순리대로 해서 그분에게, 하누카의 날은 그분의 계급 분들과 치르도록 권해드려라. 생각해 보라. 그 분은 루이티온 계급이다. 너 때문에 그분은 평범한 일루티온 남성으로 성 장할지 모르는데... 평범한 일루티온 계급의 정식 부인보다는 루이티온 계 급의 첩이 백 번은 낫다. 게다가 그분은 널 좋아하시니까, 결국은 너의 승 리(?)다. 그때까지는 우리가 기꺼이 너의 후견인이 돼주마. 사실, 우리는 너를 매우 좋아한다...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시나는 일루티온 계급의 소녀 답게 저렇게 되서도 몹시 예의가 바르고 도리를 아는 소녀 같으니까 분명 히 찬성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런 설득을 하기 전이 고, 그러니 그들은 아직 시나의 후견인이 아니었다. 마음만은 어느 후견인 못지 않게 불타 올랐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이 사람에 게 말하고 시나에게는 사실 종속주 분이 계시다고 말하면... ...정말, 문제 가 골치 아파진다. 어쩜 루온 루드랫님의 정체까지도 말해야 할 지 모른 다. 그리고 시나의 슬픈(?) 과거도. 그래서 그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 국 마음을 정했다. 에라~! 어차피 후견인 될 것, 시나를 위해서다! 만의 하나 일이 틀어진다면, 이 사람은 제안은 나중에 거절해도 되니까, 우선은 일단 이렇게 말해놔야지!! 라단은 어색하게 하하핫 웃었다. "하하하... 다, 다른 후견인은 없습니다. 우, 우리가 그 애의 후, 후견인이 죠. 의, 의논을 드린다는 것은, 그러니까... 네. 말이 헛 나온 것으로, 우리 조카인 시나와 의논해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친절한 손님이 도서관에 데 려다 주겠다는 데 같이 가겠느냐고요. 와하하하핫-!!" 카탈리는 이런 라단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원래 같은 고민 을 하고 있던 데다, 부부는 이심전심인지라, 금방 상황을 이해하고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 나, 남편 말이 맞아요. 호호.." "...?" 레이서스는 그들이 말을 심하게 더듬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 만 그 소녀와 의논을 해봐야한다는 말은 이해가 가는 말이었으므로, 결국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일 오지요." "오! 감사합니다!" "천만예요." 그들에게 감사를 받아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단지, 그는 그 소녀와 친 해둘 필요성을 느낀 것뿐이다. '드랫'이라... 그리고, 그의 종속자. ...이들 부부는 그들이 여기 묵고 있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한다면 '마노테온'이 여 기서 묵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까 중년 남자가 말한 '마노테온에 대한 소문'도 아마 어느 정도는 진실일 것이다. 마노테 온 남자와 마노테온 여자... 레이서스는 지금까지 진짜 마노테온이라고는 몇 번 본적이 없었지만, 옛날 그들을 멀리서 본 기억을 떠올리면 확실히 아까 그 소녀처럼 초췌하고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까 그 소녀 가 그렇다고 해도 이 부부의 주장대로라면 분명 일루티온 계급인데 마을 에 그런 모욕적인 소문이 퍼져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집에 진짜 실물 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 것이다. 그는 아까 시나라는 소녀가 말을 할 때 '드래마'라고 발음할 뻔한 것을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다시 '드랫' 으로 고쳐 말했다. 드랫... 루드랫... 그는 쓰게 웃었다. 이 부부가 이 집에 마노테온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과거가 어찌되었든 겉보기는 분명 마노테온인 자가 집에 묵고 있다면 마을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과 쓸데없는 소문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거기다 상황을 설명하여 해명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 레이서스는, 그 소녀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 때 문에 남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싫었다. 이 들 부부는 조카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고, 인심도 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원래 그의 세계 사람. 애초의 생각이야 어찌되었든 이 안에서 피를 부르기는 싫었다. 이들은 충성스러웠던 죄밖에 없으니, 끔찍할 꼴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레이서스는 자기의 허리부근에 있는 유 리 검의 손잡이를 꽈악 쥐었다. 그 시나라는 소녀와 친해진다면, 부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집에서 묵고 있는 마노테온 여자를 바깥으로 불러내 달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노테온 남자도 함께. 처음엔 이곳으 로 와서, 마노테온 여자를 그냥 그대로 없애버릴 참이었다. 도대체 엘야시 온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 제일로트에 오면서 여자를 끌고 왔다는 자체가 그의 행동을 명확히 증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곳에 직접 와보니 모든 것은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이들 부 부의 터전이고 아무리 하류계급이지만 이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건 '현 실감'이었다. 힐러의 호탕한 웃음과, 여자가 손님을 대하는 친절, 그리고 소녀의 눈물... 그런 것이 레이서스에게 이들은 하류계급이긴 하지만 존중 받아야 할 타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덕분에 '그'와도 이야길 나 누어 볼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서스 자신의 결심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 여하 에 따라, 그 마노테온 여자는 결단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이것은 '명예'에 관련된 일인 것이다. 도미니온즈의 왕족을 능멸한 죄는 용서할 수가 없다. 파워즈의 맹세를 배신한 자는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시나라는 소녀가 그것을 도와준다면, 제일로트 도서관 정도 야 얼마든지 데려다 줄 수 있다. 하지만, 소녀가 낯선 남자와 나가는 것을 거절하여(그가 알고 있는 여자들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노테온들을 집밖으로 불러낼 수 없다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 소녀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니, 내가 마음 써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 그 회색 눈이 또 한번 놀라며 눈물짓는 것은 왠지 별로 마음 에 안 들었지만...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이런 생각은 다 바보 같다. 여 자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친절하게 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언 제나 그랬다. 이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그에겐 아무 상관이 없 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될 경우, 그냥 이곳에서 모든 일을 해결 짓기로 결심했다. 그 러므로 이들이 자신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마음 써주는 척 하지만 그도 최종적으론 그의 목적을 위하여 움직일 뿐이니까. 레이서 스는 이번엔 앞문으로 나가며, 마음을 다잡고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 다. "...그렇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포션이 욕심 난 것뿐이니까. 그 러니 포션은 내일 와서 사던지 혹은, 받기로 하지요." 하지만 라단은 여전히 친절하게 웃었다. 그는, 욕심이 진짜로 많은 사람은 이렇게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젊은이에게 더욱 호 감이 갔다. "하하... 사야할 일은 없을 겁입니다. 우리 때문에 두 번 걸음 하시는 것이 니 당연히 그냥 드려야지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 님." 라단은 그렇게 말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고, 레이서스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무렵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드 자락을 펄럭이며 그 곳을 나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루이트였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 그의 누이의 루이트이자 남편.., 그 리고 그가 지난 20년 동안 가장 증오했던 사람이 쉬고 있는 그 집을. (계속)================================================== 오늘은 이것밖에 올리지 못합니다. 비록 글은 졸작이지만, 마음에 안 들면 안 올린다는, 이 장인정신 하나만은 프로... 우하하하하-(퍼버벅!) 음.. ^^; 다음 장면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 부족을 통감하고 괴로워하고 있 습니다. 하하..^^; 일주일동안 그 장면만 대 여섯 번을 두들겼는데, 지금은 손가락이 아파서 더 이상 길게 두드리지도 못하겠군요. 손가락이 아프다 니... 한, 1000매 두드렸냐고요? 글세.. 그 정도는 안되지만, 한 세 번 정도 두드리고, 그래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열나는 머리를 식힐 겸, 손가락 을 혹사하며 심시티를 했다가, 9000불 부도를 내고 끝내서 그런 것 같습 니다.(헉..--;) 심시티를 앞으로 또 할지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으며, 인 간을 쓴다는 것,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 심지 어, 소설 속의 인물인 시나라도, 어느 땐 문득, 전혀 알지 못할 타인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행동을 하면... 놀랍게도, 저 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결코, 제가 먼저 이해를 해서, 그들에게 그런 행동을 시키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지금 시나는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혹은, 하고 있는데..) 이 무능한 작가가 그 애를 이 해하지 못해서, 더 이상 그 애의 말을 듣지 못하고, 그 애의 발을 묶어두 고 있는 느낌 같은 것을 지울 수가 없군요. 휴우... 어쨌든 류머티즘 없는 노후를 위해 손가락의 건강을 챙겨두고 싶 습니다...--; 질문해주신 것들에 대한 답은 다음 회를 올리면서 같이 하겠 습니다.^^ 그저 위로가 되는 것은 종이냄새 나는 퓨쳐워커군요...TT 무언 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이토록 멋진 일이라는 것.. <엔...^^> ps..다른 작가 님들은 어떠세요? 쓰는 주인공이 타인으로 느껴질 때가 있 는 가요?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나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는 지... (예? 너만 그런다고요? 으윽...) ps2..ratri님, 기다리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사정이 이래서.. 하이텔 바이오리듬의 충고 톤으로... '언젠가는 꽃피고 새 울 날'있겠지요.. 꽃피고 새우는 계절의 반역은 기대하지도 않으니 더위나 가셔줬으면 좋겠 지만... 하하.. ^^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12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08 01:56 읽음:247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5회, 제 37막. 시나. Ⅳ (1)> 멀고 먼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와 시나가 있는 방의 창문을 세게 흔들고 갔다. 어둠... 작은 촛불 빛 하나는 현실 세계에서라면 낭만의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여기선 어둠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겨우겨우 지켜나가고 있는, 그래서 그 노고로 인해 오히려 어둠을 강조하고 있는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빛은 어둠을 떨쳐 버릴 듯, 떨쳐 버릴 듯, 깜빡거리다가 드디어 어둠에 천천히 물들며 붉게 잔상이 어리어 이 방에 오롯이 앉아 있는 한 소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시나는 침대 위에 앉아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고 멍하니 흔들리는 불빛을 보았다. 튼튼한 나무문으로 창을 막고 두꺼운 천 조각으로 틈새를 막아 놓았지만 어디선가에서 스며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촛불을 못살게 굴고 있 었다. 바람, 정적, 어둠... 시나는 마치 그 가운데 하나가 된 듯했다. 이 먼지냄새 나는 방에서, 언제까지라도 이대로... 100년 동안 누구도 깨우지 않을 잠을 잤던 그 어떤 미녀의 전설과 같이, 깊은 잠이 든다면 좋을 것 같았다. 깊 은 잠, 모든 슬픈 것과 모든 아픈 것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과 하나가 되 어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깊은, 깊은 잠이 들어... 시간이라는 위로자 가 어느 날 모든 어둠을 쓸어갔을 때, 그녀를 잊지 않았던 그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어줄 수만 있다면, ...좋겠지. 마치 동화처 럼. 어릴 적에 너무나도 동경했던 그 미녀처럼. 그녀는 참담한 표정으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자기를 아무 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도서관에는 못 가게 되었고, 셰리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달의 날에는 원치도 않는 치료(하하...!)를 받아야 할지 모른다. 효과가 절대 나 타날 수 없는 치료. 마치 날 수 있는 새들 틈에 낀, 날 수 없는 새가 된 느낌이다. 너는 날개가 있으니 분명히 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지만, 애초부터 날지 못하게 태어난 새는 날지 못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시나 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도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나 자신도 그들을 이해하기 매우 힘들었던 것이다. 전혀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머리카락의 길이를 갖고 계급을 나누는 일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나마 짐작을 한다. 드래마가 디트마가 '힘'을 썼던 일에 그렇게 질책을 하던 것과, 아까 오전 무렵에 봤던 페이스 힐러의 '힘'... 검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드래마가 썼다는 '힘'... 그런 이상한 힘들은 분명 그들의 머리카락과 연관이 있었다. 맨 처음 여기 왔을 때, 라단도 드래마의 말을 듣고 '마노테온의 몸으로 그 런 힘을 쓰다니 미친 녀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맨 처음엔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들을 하류계급으로 친다는 말에, 그냥 상징적인 의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떤 실질적인 힘과 관련된 것 같다는 사실을 어렴 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세계에 있어서 머리 카락 길이라는 것이 단순한 상징이 아닌, 정말로 어떤 힘을 담는 그릇이 라든지, 능력을 나타내는 표시 같은 역할을 하는 거라면... 그, 마우르코트 에서 만났던 크나야나 이곳에서 만난 후스야의 하얀 색 머리처럼... "하하.." 시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럼, 이 세계의 사람들은 정말로 청둥오리, 뭐 그런 것이 되고 난 날개 모양만 그럴 듯한 집오리가 되는 거겠지. 이 사람들은 날개로 별 짓을 다 하는 데, 나는 이것이 어떤 다른 데 쓰일 수 있다고는 생각도 안하고 살 았으니. 능력이라... 하하... 그래. 그런 능력 면으로 따진다면, 난 정말 '마 노테온'이지. 누군가 날 제자리에 아주 잘 떨어뜨려 주었군." 그리고 시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세계.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잔뜩 있다니. 왜 하필 이런 곳에 떨어진 것일까. 덕분에, 청둥오리 가운데 외따로 떨어 진 집오리가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도 느껴보고. 이런 세계 외에 어디 가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평소 때라면 좋은 경험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런 기분이 아닌지라 우울하기만 한 시나였다. 사람들이 왜, 우울증에 빠 지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기운 빠지고 만사가 귀찮다고 하는지 이제야 이 해할 것 같았다.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렇다고 해도, 날지 못하게 태어나서 날지 못하는 건 죄가 아닌 데, 그런 거에 따라 계급이 나눠지는 세계라니." 알면 알수록 암담하다. 게다가 라단과 카탈리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라니... 원래 날지 못하는 날개. 길이만 길어진다고 날 수는 없다. 시나는 자조적 으로 웃었다. 길이가 길어지기나 할까? 라단이 맨 처음 드래마의 머리를 힐러의 힘으로 길게 하겠다는 것에 놀란 시나였으니까. 그런 것 따윈 기 대를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시나의 머리는 현실 세계에서도 그다지 자라지 않았던 것 같다. 미용 실에도 별로.. 간 기억이.. 없다. 시나 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래. 기억이 없어. 왜 그렇지..? 시나는 기억을 짜내 보려고 했다. 염색 같은 거야 집에서 시나가 직접 할 수 있었지만, 분명 머리를 자른다든지 할 때는... 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러고 보니, 현실세계에서 과연 머리를 잘라주는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돈을 내면 머리를 잘라 주는 곳.' 그런 단어라면.. 미용 실. 단어습득 차원에서 단어는 알고 있는데 지금은 너무 생소한 느낌이다. 마치 평생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사막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지만, 그것에 이상한 생소함을 느끼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 왜 그럴까? 시나는 흐린 얼굴을 하고 손을 머리카락 속에 파묻었다. 어쨌든 원래는 분명, 긴 머리였던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이렇 게 짧은 머리라는 것은... 아빠가 집에서 잘라주었던 것일까? 뭔가, 상당히 귀찮고 싫은 일이 있어서 잘라버렸던 느낌이 난다. 교칙도 짧은 단발을 원칙으로 해서 그 후 다시 기를 생각이 없었고. ..아주 나중에 멋진 어른 이 된다면 길게 기를 생각은 있었지만, 어쨌든 학교 다닐 무렵엔 그런 생 각이었다... 그런데.. 왜.. "하아...!" 갑자기 가슴이 너무 답답해지고,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열기와 답 답함. 시나는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 드리워진 천 조각을 제치고 나무문의 빗장을 열어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그러자 바람은, 마치 문 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세차게 위잉 몰아쳐 들어왔다. 살갗을 찌르는 송곳 같은 바람이었지만, 이렇게 답답한 순간에는 차라리 이런 바람이 나았다. 시나는 깊은 심호흡을 하고 멀리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았다. 앞집이 가로막고는 있었지만 건물 사이로 보 니 저번에 갔던 시장 부근 여기 저기서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저 것은 축제를 준비하는 곡마단이라든가, 유랑극단들이 내는 불빛일 것이다. 드래마와 돌아오면서 시장이 파한 자리에 천막을 세우는 그들을 볼 수 있 었던 것이다. 드래마도 그런 그들을 보며, 저들은 특별히 여관에서 묵는다 던가 민박을 하지 않고, 저렇게 시장의 공터에서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한 다고 했다. 차가운 바람. 고생이 심할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걱정이 없겠지. 어디에 서 왔고, 또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 을 테니. 내일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날 지 한치 앞이 불안한 시나에겐 그 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래도 저들은 어디를 가든 자신들의 세계.. 자신 들의 '집'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집... 멀리 깜빡이는 불빛을 보니, 더욱 심한 향수가 몰려왔다. 시나는 창틀에 기대었다. 그래..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래도, 그나마 이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좀 더 많은 정보를 모은다면 좋 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세계에 대한 힌트를 얻고, 돌아갈 수 있는 정보 도 얻고... 왜 이런 일이 알 수 있게 되고... 그래. 그래서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빠가 무척 놀라시고, 어쩜 화를 내실지도 모르지. 시나 는 불빛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냐고.. 무척 걱정 했다고 말하실 지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널 찾았다고 말하며 그 까치집 같이 된 머리를 흔드실 지도..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불빛이 일렁여 보였다. 그래서 시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도 떠 있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억지로 희망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도록 캄캄한 하늘. "..쳇... 괜히 봤다.." 시나는 그 어두운 하늘에 질려서, 자기가 왜 고개를 들었던가 깜빡 잊고 고개를 밑으로 다시 숙였다. 그러자 그녀 눈에서 흐른 뜨거운 무언가가 창틀에 툭 떨어졌다. "...." ...도대체 뭐 하는 짓이람. 한심하고 비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거고 저 거고 하나 같이 슬프기만 했다. 무엇보다 셰리카 때문에 너무 슬펐다. 셰 리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강요라도 하듯, 괜찮다고, 꼭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짐을 계속해도 마음에 끊임없이 걸리는 것이 바로 그녀였다. 내 친구... 시나의 눈에 한층 더 눈물이 고였 다. 시나는 맨 처음 그녀가 나타난 것이 자신의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고,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나타내는 희망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 금은 어떤가? 그 애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사라지고 나자, 그 애가 진정으 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자, '혹시'라는 이름으로 이 렇게 지겹고 음울하게 떠오르는 생각. 무시하고, 애써 치워버리려고 하지 만 자꾸 떠오르는 어떤 불길한 가능성은.... 추운 밤 공기 속에 어깨가 떨 렸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럴 리는 없어..!!" 시나는 자신의 양팔을 꽉 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리는 절대 없다. 내가 믿어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시나 자신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녀의 세계도 존재한다. 이 세계로 왔 으니 돌아갈 방법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있기만 하면 언젠가 는,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될 것이다. 그러니, 시나... 너무 앞날의 일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정말 최악의 상황은 그냥 머릿속에 서 지워 버리자. 생각해도, 생각해도 소용이 없고 여러 가지 가능성들 중 에 제일 끔찍한 미래들만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지겨운 생각들 때 문에 마음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이다. 아아.. 무언가 행동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생각만 하며 앉아 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너무 답답해서 지금 시나의 머리에는 자기가 내일 새벽 몰래 집을 빠져나 가 도서관에 갔다오는 환영까지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현실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할 즈음... 갑자기 시나의 등뒤에서 귀에 익숙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야~ 너무 추워..! 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거야?"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자 시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 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셰리카가 서 있었다. "셰, 셰리카!!!" 셰리카는 시나의 놀란 눈을 보고도 태연하게 방긋 웃었다. 그녀의 목덜미 에선 호문클로스가 푸른색 머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는데 불빛에 비춰 반 들거리는 눈으로 시나를 바라보았다. 셰리카는 저런 생물을 데리고 있어 도 언제나 저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시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다시 한 번 더 혼란을 느끼며 말했다. "난.. 네가 또 창문으로 들어올 줄 알고.." 셰리카는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더니 장갑을 벗고 손을 쬐며, 쭈그리고 앉 았다. "창문..? 글세, 현관에 등불이 웬일로 안 꺼지고 달려있기에 문을 두드렸 더니 이 집 마나님이 하품을 잔뜩 하면서 문을 열어주던걸? 날 기다렸다 나, 뭐라나.. 그래서 편하게 들어왔어." 시나는 저녁식사 무렵에, 셰리카가 이 세계에 얼마나 있을 건지 묻던 그 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셰리카는 분명, 그들에게 있어 불청객이었지만 손 님 대접엔 그리 야박하지 않은 듯, 시나의 친구이고 하니 원한다면 언제 까지나 머물러도 좋다는 말이었다.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시나는 억 지로 웃었다. "그, 그래? 그거야 좋은 일이지만.. 문소리도 내지 않고, 살짝 뒤에 와서 서 있다니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에이~ 소리를 내고 다녀서야 어디 티토우의 딸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 나 저러나 시나야, 그 나쁜 놈 있잖아?" 시나는 인상을 썼다. 또 저 '티토우의 딸'이라는 소리다. 저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저 아이는 모르는 것일까? 시나는 어두운 눈으로 보경을 보 았다. "나쁜 놈..? 드래마 말이야? 이젠 이름 좀 불러.." "으응. 그 사람.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그 사람, 아직 안 죽었지?" "...안 죽었어. 하지만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어. 왜?" 시나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 못 채고 셰리카는 이맛살을 찌푸 리고 두 손을 정성스럽게 불에 쬐었다. "흐응, 오후 무렵엔 이 나도 꽤 놀랐단 말이지. 어제 피를 좀 흘리긴 했지 만, 워낙 튼튼해 보이던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어제 페이스 힐러까지 한 번 왔고.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까는 얼굴이 새하얀 것이 곧 죽을 것 같던걸? 흐응.. 이상해. 내가 이 집 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시나는 창문을 닫고 침대에 가 앉았다. 시나도 그것이 궁금했지만, 그보다 는 도대체 셰리카가 오후 내내 무얼 하고 다녔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저런 모습의 셰리카가 너무 낯설어서, 어쩌면 시나는 무언가 증거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헌데, 시나가 입을 열어 도대체 넌 지금까지 무얼 하고 다녔지? 현실 세계에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니.. 그럼, 지금의 기억들은 도대체 뭐야? 그건 가짜가 틀림없을 텐데, 넌 왜 이렇게 그것에 자연스럽 게 적응하고 있지? 라고 물으려는 찰나 셰리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난로 가를 왔다갔다하며 말했다. "우웅.. 어쨌든 그 사람이 정말로 죽으면 곤란해. 이러저러해도 시나 너를 돌봐준 사람이니까. 으흠, 티토우의 딸은 은혜를 원수로 갚지는 않거든?" 뭐? 그 말을 들은 시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까지 계속, 이 이상한 세계의 행동 기준으로만 행동해 오던 그녀였는데, 그래도 기본적인 마음은 따뜻하다! 시나는 지금까지 잘 알고 지내던 보경 이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 기뻤다. 현실의 향기. 그래서 이와 같은 심정을 말하려고 하는데 셰리카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시나에게 휙 던졌 다. "자! 그러니까 이거 받아!!" "엇..?" 엉겁결에 그것을 받은 시나는 그만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은 드래마의 지 갑이었던 것이다. "셰, 셰리카!!" 시나는 셰리카의 이와 같은 행동에 그만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완전히 불량 청소년이 된 줄 알았는데!! 시나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셰리카! 넌 정말..." 셰리카는 시나가 기쁜 표정을 보이자, 자기도 기쁜 듯했다. "헤헤... 뭐,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어. 하여간 티토우의 딸은 의리가 있거 든. 오늘 보니까, 이 집 마나님이 또 페이스 힐러를 부르러 가던데, 페이 스 힐러들은 돈을 많이 달라고 하거든. 그 남자... 드래마라고 했어? 그 드 래마한테, 이 돈 치료비에 보태 쓰라고 해. 내가 줬다고 나중에 그 사람한 테 전해줘도 돼지만, 굳이 생색내고 싶지는 않아. 난 그저, 치료비가 모자 라서 널 돌봐준 남자를 죽게 했다는 소린 듣기 싫거든." ...시나는 자기가 들고 있는 지갑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자기가 들고 있는 것이 드래마의 지갑이 아닌가 다시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본 것이다. 하지 만 그것은 분명히 드래마의 지갑이었다. 시나는 그래서 웃어야 할지 울어 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때 셰리카가 또 한번 더 자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 가서 그거 드래마한테 전해 주라니까? 그거 꽤 되니까 이제 치료 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물론 내가 줬다고..." "셰리카..!" "응? 왜에?" 보라색 눈이 동글동글해서 시나를 바라보았다. 자기 말이 이상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걸 보고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 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다녀올게." "그래?" 그러더니 셰리카는 다시 벽난로 앞에 앉으며, 문을 열고 나가는 시나에게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다녀와~! 빠른 쾌유를 바란다고 전해 줘!!" 시나는 그런 밝은 얼굴의 셰리카를 바라보며 억지로 웃었다. "그래.."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엔 걱정이 차 있었다. 시나는 어두운 눈으 로 셰리카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고 문을 닫았다. 한편 셰리카는 나가는 시나에게 별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다가, 잠시 시간이 지나 시나가 돌아오 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갑자기 입을 가리고 어깨로 웃었다. "쿡쿡..." 그러더니 셰리카는 품속에서 두 개 정도 되는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거 기서 나오는 돈을 한 닢, 두 닢 세면서 흐뭇해했다. "후후... 꽤 부자로 보이는 사람한테서만 행운을 나눠가졌으니까 괜찮아. 시나를 도와준 남자 치료비 대느라 생활비가 뚝 떨어졌으니 어쩌겠어?" 그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지갑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툭툭 두드렸다. 그 리고 책상다리를 한 채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했다. "우웅~ 하지만 시나는 내가 이런 짓 한걸 보면 싫어하는 것 같아? 참 이 상하기도 하지? 어때? 호문클로스?" 셰리카는 호문클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호문클로스는 어느새 예의 그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 위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런 호 문클로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내일은 새벽부터 이드넘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야한다. 방금, 여 관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을 확인했으니 내일은 분명 새벽부터 여관에 있 을 것이다. 그가 끼고 있는 반지는 꼭 뺏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조상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이고, 아버지가 끼었던 반지였다. 그러니 그 반지의 정당한 다음 대 주인은 그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셰리카는 핏줄 로서 알고 있었다. 호문클로스도, 호문클로스의 반지도.. 둘 다 그녀의 것 이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네르세바 아르코나 숲, 티토우의 딸 뷔기어 셰리카였던 것이다. (계속)================================================== # 다음은 이런 저런 답입니다...^^ * '엔라이트'라는 닉은 '엔리트(enlyte) 솔트 블캉신'이라는 제 또 다른 주 인공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 엘야시온 미인의 기준은 성인은 몰라도, 어린애(?)들이라면 '통통하고 혈색 좋은 피부에 귀염성 있는 얼굴'입니다. 하지만 남자애들은 조금 말라 도 괜찮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미인이 기준이 틀린 것이니, 너무 이들의 미적 감각을 탓하지 마시길...(하하..^^) 그리고, 시나 머리색에 대해선 굳 이 답을 바라셔도 됩니다. '회색 머리'라는 것은 시나 스스로 말했거든 요.^^; * 예전에 어떤 여고생 분이 비밀로 하고 무언가를 알려달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멜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질 않는군요..(계속 마음에 걸려 있었음...^^;) 하지만, 그 여고생 분께 말씀드리자면.. 하하..^^; 그건 딱히 답을 알려드리기가 애매 모호한 질문이었습니다...^^ * 수정님 '시' 정말 감사했습니다. 참 좋은 시네요.. 인쇄해서 붙여놨습니 다.^^ * 아스카짱님, 진숙님... 넷츠고에는 퍼가고 있는지 안 퍼가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퍼간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 것 같은데, 그 뒤 로 감감무소식.--; (왜 다들, 글 퍼간다고 해서 승낙하면 그 뒤론 감감무 소식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퍼가서, 욕 멜 받고, 날 원망하고 통신계 를 떠나셨나.--;;) 글 퍼 간 후로 연락주신 분은, 승이님과 모 남고의 비 비에스 망에 올리시는 분뿐인 것 같군요. 2부에서부터는 주변정리 좀 해 야겠다는 생각입니다.^^; * 우리들님..^^ 지적 감사했습니다.. 하하..^^;;; * 지이님, 보내주신 것 색칠(!)까지 해서 모니터 배경화면으로 깔아놓았습 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거, 레이서스지요..? 가디엘이, 물 나왔으니 까 자기라고 우기긴 하는데, 그냥 무시했습니다..--;; * 불멸의 린님, 시나의 신상에 관한 일들은 별 것 아닌 거라도 설정 상으 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게 많아서, 딱 부러지게 답해 드리기가 좀 그렇군 요...^^ * 하여튼, 많이 늦었지만 멜 보내 주신 분들 감사..(꾸벅^^) <엔...^^> ps...수희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13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9/08 19:10 읽음:2430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16회, 제 37막. 시나. Ⅳ (2)> 시나는 드래마의 방문 앞에서 망설였다. 그는 이제 삭막한 일층의 병실에 서 벗어나 더 아늑한 이층으로 올라와 있었다. 시간이 얼마만큼 됐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밤이고 드래마도 자고 있을지 모르니까 지갑이라면 내 일 전해주는 것이 낫겠지만...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시나는 결국 문을 두 드리기로 했다. 노크소리는 조심스럽게 울렸다. 아무 대답이 없다면 그냥 돌아가야지. 하지만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그래서 시나는 문을 슬쩍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드래마는 벽난로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저녁 무렵 그는, 잠깐이라면 자기 스스로 걸어다닐 정도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본 라단이 화를 무척 내며 아직은 안 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고, 드래마도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던 것을 보 아 아직도 많이 힘든 것 같았다. 그랬던 그가 어쩐 일로 벽난로 앞에 서 있다가 시나가 들어오는 소리에 시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붕대는 아직 도 그의 눈을 감싸고 있었다. "저어, 드래마..? 들어가도 되요? 드래마 지갑을 찾았거든요. ..그리고, 할 말도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미안해요. 밤늦게.." 시나가 방으로 들어오며 사과하자, 그는 천천히 침대로 돌아가 앉으며 말 했다. "괜찮아. ..그보다 지갑을 찾았다니? 어제 낮에 소매치기 여자 애를 잡은 건가?" "우웅.. 그것이.. 잡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시나는 침대 앞에 앉으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디까지 이야기 해야 할까? 다시 한 번 더 내가 '현실' 이야기를 한다면... 드래마는 한 이 야기 또 한다고 싫어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 이야기를 빼놓고 어떻게 셰리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드래마, 조금 길게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예전에 했던 이야기라 지루할 지도 모르는데.. 피곤할 테니, 뭣하다면 내일 다시 이야기해도 괜찮고요..."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드래마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뒤로해 베개 에 등을 기댔다. 그러더니 무미 건조하게 말했다. "뭐.. 별로.. 상관없어. 하루종일 너무 자서, 이제 밤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루한 이야기라면, 그것도 괜찮겠군. 밤이 잖아..? 가끔, 지루함은 어떤 잠의 정령이 주는 것보다 강력한 잠을 주니 까..." "하..하.. 그, 그래요?" 시나는 가끔 드래마가 도대체 유머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릴 때 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랬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저렇게 웃음기하나도 없 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면 굉장히 당황스럽다. 하지만 덕분에 시나는 약 간이지만 웃음 비슷한 것이라도 지으며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은 시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엔 억지라도 좋으니, 웃 음이 필요하다... "드, 드래마..? 어제 드래마가 그랬잖아요? 그 소매치기 여자 애, 내가 아 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그 애.. 정말로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요. 현실세계에서 내가 사귀던 친구였거든요..." 방안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래서 시나는, 혹시 그가 벌써 잠이 든 건 아닐까.. 아니면 지금 마음속으로, '이 여자 애가 또 헛소리를 하고 있군. 당장 쫓아내고 역시 잠이나 자는 게 낫겠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 닐까.. 걱정이 돼서 그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아무 런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드래마가 '현실'이라는 말을 잘 듣지 못했나? 그래서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기로 했다. "'현실'세계에서 그 애는 '임보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올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지금은 자기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자기를 '뷔기어 셰리카'라고 하던데... 뷔기어가 성일까, 그 렇게 생각하지만, 잘 모르겠고.. 원래 세계에서의 성은 '임'인데.. 별로 상 관이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전, 개인적으로 역시 '임'이라는 성이 더 마음 에 들고..." 거기까지 말한 시나는 자기 입을 쥐어박았다. 아앗.. 이것이 아냐..! 시나 는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그녀는 흥분하거나 당황하면 갑자기 엉뚱한 이 야기가 나오거나, 화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셰리카의 성이 무언지 이야기 할 때가 아니다. 시나는 화제를 잊어버 리지 않게 조심하기로 했다. 지금은 마음이 너무 혼란해서 주의를 집중하 지 않으면 안 된다. "어, 어쨌든.. 하하.. 드, 드래마는 믿지 않았지만.. 보세요. 걔도 현실세계 의 이야기를 해요..." 이렇게 말한 시나는 말을 끊고 또 한번 드래마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역시 아무 표정도 없었고, 그걸 본 시나의 얼굴만 시무룩해 지고 말았다. 시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차라리, 예전처럼 '말도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기를 비웃어 준다면.. 그것에 반발 하는 의미에서라도 더욱 강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말소리를 흡수하는 스펀지를 대하는 듯... 이젠, 말을 잇기조 차 힘들었다. 시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어느 샌가 말라든 입술을 다시 한 번 더 깨물고, 억지로 그 다음 말을 띄엄띄엄 이었다. "..그 애는.. 날 계속 찾았대요.. 그런데.. 내가 그 애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 은.." 시나는 무릎 위에 놓인 지갑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이런 것들은 하 기 싫은 말이었다... "..내가 그 애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 애의 외모라든지 성격 같은 것이 너무 변해서.. 특히, 지갑을 훔친 일 같은 거요... 그래서, 몰라본 거였어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그래..?" 드디어 드래마가 한마디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시나의 얼굴은 한층 더 흐려졌다. 그것은 아무 감정도 안 실린 매우 메마른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주 많은 말을 가슴속에 담고 있지만..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침묵이나 매한가지 인 말. 침묵... 침묵이라니.. 시나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녀는 뭐라 도 자기 변호를 하고 싶었다. "..몰라 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앤 정말 많이 변했다고요..! 완전히 여기 사람같이 돼서... 자기를 자 꾸, '네르세바 아르코나 숲, 티토우의 딸 셰리카'라고 하니까..! 걔도 어떤 이상한 숲을 지나왔다니까, 거기 나쁜 아트에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그 애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때 그가 무언가 미묘한 표정을 띠며 고개를 들었다. "네르..세바? 분명히 네르세바라고 했어?" "네...! 그래서..." "아아... 그래. 그랬군.. 역시.." 시나는 당황해서 그를 보았다. ..무엇이 그랬다는 것일까...? 드래마는 이제 씁쓸하게, 미소인지 뭔지 모를 것을 띠고 있었다. 그걸 보니 더욱 힘이 빠 졌다. 이야기고 뭐고 다 그만 두고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말은 끝내야 한다. 나중에 셰리카를 보면 그는 뭐라고 할 것인가? 또 다시 이 런 이상하고 입에 담기 싫은 설명을 해야한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 다. 해서 시나는 그냥 이 이야기를 빨리 해 치우기로 했다. 말소리가 빨라 졌다. "그, 그러니까.. 그 숲이라는 데가 이상한 곳이긴 한가봐요. 우리 세계에서 라면 보라색 눈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런 분홍색 머리칼은 물들이지 않은 이상 없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이런 이유예 요. 요,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 앤 현실세계에서와는 많이 틀리 거든요. 현실세계에서라면 절대로 이렇게 물건을 훔치지 않았을 거예요. .. 헌데 그렇게 변한 것은 숲에서 영향받은 것도 있고, 아마 여기 와서도 고 생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스스로도 충분한 후회를 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때, 드래마가 약간은 매정한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소릴 네가 하는 거지?" "네?" "현실 세계에서라면 네 친구가 물건을 안 훔쳤을 거라고? ..그래. 그럴 수 있다고 해 두더라도. 그런데, 왜 그런 사과를 네가 와서 하는 거냐고? 지 갑은 네가 훔친 게 아니라 그 네르세바 인이 훔쳤지. 그러니 훔친 당사자 가 직접 와서 사과하는 것이 도리 아냐? 후회하고 있다며?" 시나는 당황했다. 그가 이런 부분을 지적할 줄은 생각 못했는데...! "그건...! 미, 미안해요. 셰리카에게 말해서 내일이라도..!" "시나." 그가 뭔가 쓴 것을 씹는 듯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시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지갑도 순순히 돌려 줬으니까... 저어, 말하면 꼭 와서 사과할 거예요. 사 과를 원한다면..." 마침내 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제 그만둬. 그런 식으로 말하려거든. 너 스스로도 믿지 못할 이 야기를 하면서... 네 스스로, 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못 느껴?" 그 말에 시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목소리가... 떨린다고..? 인정할 수 없 어...!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더 입술을 터져라 깨물었다. 울음이 나 올 것 같았다. 사실 제일 인정하기 힘든 것은, 이 순간 무엇보다 인정하기 힘든 것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 하긴.. 드, 드래마는... 내가 말하는 현실 세계를 믿지 않으니까 어쩌 면 셰리카가 내 친구라는 것도 믿지 않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정말이에 요. 그 앤 내 친구예요. 지금은... 단지 이상한 아트 같은 거에 걸린 것뿐. 실제로 도둑이 직업인 사람들은... 아니, 정말 도둑이 직업이더라도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절대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 니.. 분명히 말하면 내일 사과하러 올 거예요... 그, 그러니.." 또 떨리는 목소리. 시나는 노력을 무척 했지만 결국 목소리는 다시금 떨 려 나왔다. 그리고 그건 드래마의 굳은 얼굴 탓이라기보다는, 바로 시나 자신의 내부 때문이었다. 시나가 스스로 품고 있는 생각들... 의심.. 의혹... 이제 그것들이 시나의 성대를 꽉 쥐고서 놓아주질 않았다. 시나가 말할 때마다, '정말? 정말이야? 넌, 정말 확신할 수 있어..? 정말?'이라고 비웃듯 이 되풀이 말하며, 시나의 말을 방해하는... 가슴을 꽉 메이게 하는 것들... 이제 그것이 명백해진 지금, 시나는 말 한마디하는 것에도 짙은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그런 시나의 상태를 눈치 챈 드래마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 리고 말했다. "시나.. 제발 내 말을 잘 들어. 도둑이 직업인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그 렇지 않아. ...네르세바... 그래 네르세바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겠군. 네가 방금 말한 네르세바는 숲의 세계야. 그리고 그 숲에 자리를 잡고 살 아가는 네르세바인 중, 2할은 활을 다루는 도적들이지. 일루티온 계급들만 따져서 통계를 낸 것이니, 상당한 숫자라고 할 수 있어." 그는 시나가 못 믿겠다는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하기로 했다. 잔인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현 실을 피해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살아야 할 곳은 현실이다. 아무 리 회피하고, 아무리 꾸며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 "그것도 네르세바의 도적이라고 하면, 그건 보통 도적이 아니야. 수 천년 동안 조상 대대로 가문을 지켜 내려온 뼈대있는 도적이지. 숲의 세계라 12개의 세계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몬스터와 짐승이 많으니까, 그리고 숲 때문에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그들은 그런 동물이라 든지 몬스터를 사냥하고 나무열매를 채집해서 살아." "그건, 사냥꾼들이지.. 도적은 아니잖아요.." 뭔가 작은 희망이라도 찾으려는 목소리였으나, 드래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계속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 2할의 네르세바 인들이 나머지 8할의 네르세바 인들을 터는 횟수를 보면 전 세계 어디를 가서 물어도 그들은 훌륭한 도둑이야." "말도 안돼요..!" "말이 돼. 이해를 해야 돼, 시나. 네르세바 인이라고 해서 전부다 숲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잘라 그 땅을 개간해서 도시를 이루며 살고 있 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헌데, 네르세바의 도적들은 그런 개간지를 거부하 는 자들이야. 그들은 숲은 성스러운 것이니, 거기에는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무를 그대로 이용해 나무 위라든가, 고목 속 에 집을 짓고 숲과 어울려 사는 것을 천명으로 알고 대대로 살아가는 거 지. 하지만 그렇게 숲에서만 살다보니 생필품이라든가 곡식 같은 것은 숲 을 지나가는 도시인들을 털어서 충당해야만 하는 거야. 온통 숲뿐인 세계 이니,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숲이 없을 수가 없고... 그 사이를 지나가면 어디선가 그 유명한 네르세바의 도적들이 나타나는 거지." "그, 그런 짓을 하는데, 감옥에도 가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감옥..? 다른 열 한 개 세계에서 사는 도둑이라면 갈지 몰라도, 네르세바 의 도적은 아니야. 그들은 말 그대로 숲의 유쾌한 친구들이니까. 필요한 것 외에는 손을 안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손을 안대. 가끔 가난한 도 시민을 돕기도 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게다가 그렇게 털 고 나면 자기들이 잡은 거라며 짐승이나 몬스터, 희귀한 나무열매를 대신 한 가득 실어 보내는 인심이 후한 도적도 많이 있으니까.." "그런...!" "그게 그들의 전통이야.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털지언정 구걸하지는 않겠 다고 말해. 도시인들이야말로, 성스러운 숲을 훼손하고 나무들의 땅을 멋 대로 뺏어 자기들 편한 대로 도시를 이루어 산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도시인들에 비해 자기들의 행동은 사소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 더 이상 시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고 낮은 정적이 점차 깔 리기 시작했지만, 드래마는 계속 말했다. "게다가 물건을 고를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던져놓고 가 는 선물이라고 해야할지 그런 것들은 꽤 가치가 높은 것들이야. 그래서 은근히 털리길 바라면서 생필품을 싣고 숲엘 가는 도시 상인도 많아. 그 리고 네르세바에 도적들이 없다면 짐승들과 몬스터들의 극성 때문에 네르 세바인 들은 자기 세계에서 살기가 무척 힘들어 질 거야. 누구나 그런 사 실을 알고있고, 도적들 스스로는 그 사실을 더 잘 알지. 그래서 네르세바 의 도적들은 언제나 당당해. 그러니까... 만약, 그 여자애가 정말 네르세바 의 도적 출신이라면 그 애는 절대 내게 와서 사과를 안 해. 숲의 귀족이 라는 엘프들처럼 높은 자존심을 갖고 있으니까. 필요해서 물건을 훔쳤다 면 다른 걸로 보상하면 된다고 생각해. 내 말이 틀려, 시나..? 그 여자 애 가 지갑을 돌려줬을 때 뭐라고 말하며 돌려 줬지?" 하지만 역시 침묵만이 계속 될 뿐, 그 질문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 다. "시나.." 그때였다. 괴로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시나가 말했다. "..난, 난.. 그런 건 믿지 않아요.." "시나..." 울음이 섞이고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드래마가 말하는 건 이런 건가요? 내가 말하는 일 같은 것은 여 기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셰리카는 이곳에서 그런 현실적인 기반을 갖고 있고... 거기다 그 애가 가진 현실 세계에서의 기억은,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할 정도로 너무 불완전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세계 같은 것, 너무나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 따윈.. 그런 것 따윈 정말 환 각이고 꿈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어미 잃은 작은 짐승 같은 외침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드래마는 시나가 그 사실에 대해 내내 생각하고 있었고 이 문제로 내내 괴로워하고 있었음 을 알았다. 갑자기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치고는, 그리고 매우 험악한 사 건을 겪은 치고는 밝은 얼굴에 잘 견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시나는 아직 어린 소녀인 것이다. 괜찮을 리가 없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현자라도 이 럴 경우엔 슬퍼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불안이 가득 한 목소리,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마.. 계속, 계속 생각했어요. 난, 난 이 세계가 무서워요. 그리고 싫어 요..! 셰리카를 만나서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에요.. 그 애가 오후 무 렵에 나가버린 것을 보고.. 난 그 애를 모르겠어요. 그 앤 내가 알던 보경 이가 아니에요. 진짜 보경이는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 세계.. 내가 살았 던 현실 세계처럼.. 그런데, 그런데, 왜 저 셰리카라는 아이는 보경이의 기 억과 내가 보경이에게 익숙하게 느꼈던 그런 느낌을 갖고 있는 거죠? 네..? 드래마, 제발 대답해 줘요..! 그렇다면 내가 현실세계에서 느꼈던 것 들이 다 그런 식이에요? 내 친구들, 내가 다녔던 학교..! 그리고.. 우리, 우 리 아빠..!!" "시나.." 드래마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건 떨리는 시나는 손이었다. "드래마! 그럼 우리 아빠는 어디 계신 거냐고요!! 우리 아빠도 셰리카처럼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아냐--!! 그럴 리 없어!!!! 난 여기 에 이렇게 있고, 내 모든 기억은 온전한데-! 왜 옳다고 믿었던 기억과 셰 리카의 존재가 이렇게 틀린 거예요! 왜, 내게, 당연했던 사실들을 이제 애 써서 믿어야만 하게 만드는 거예요--!!! 드래마, 말해봐요..!! 제발..." 드래마의 손으로는 이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 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난..난 거울이 없어서 여기서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지 못했어요.. 말해 봐요... 내 얼굴이 어떻지요... 셰리카는 내가 전혀 변하지 않았대요.. 하지 만, 그 애가 말하는 변하지 않았다는 내가...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라 고 누가 확신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만약... 여기서 거울을 봤을 때.. 그 모습이 내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라면..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이 거기 에 서 있다면... 드래마, 그럼 그때.. 그 때에 난 어떻게 하죠.. 네..? ..흑... ..흑흑..." "..시나.." 그녀를 부르는 드래마의 목소리는 깊은 슬픔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그녀 와 똑같은 고통의 색을 담고 있었다. ..동정..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드래마는 자신이, 그녀를 동정하고 싶어도 동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부르짖고 있는 것 은, 바로 그 자신의 아픔이었다. 헌데, 어떻게 멀찌감치 그녀의 감정을 관 조하며, 위로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다뤄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계속 그것에 대해 슬퍼하고, 잊으려고 노력하고, 없는 것처럼만 행동해왔다. 그는 이런 감정 을 처리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순간 그는 시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내 침묵을 지킬지언정, 동정만은 결코 안 된다. 자기를 동정하는 행위-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자기연민은 이 세상을 철 저하게 자기 중심으로만 돌리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나중엔, 슬픔마저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게되고, 고통마저도 순수하게 괴로워하지 못하게 되고, 모든 존재하는 감정들을 추하게 변질시켜, 자기 내부에서 썩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시나가 그의 고통을 말한다고 해서, 그녀는 그가 아니다. 그는 그녀의 내부에 무엇이 있을 지 몰랐다. 그녀에게 동정에 가까운 따 뜻함이 필요한 것인지, 혹은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그는 그녀를 우선 존 중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나를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이상한 일. 지난 막막했던 세월동안 그가 한번도 입밖에 내어보지 못한 그의 아픔과 그의 슬픔을 타인이 자기의 것으로 말 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차마 내어놓지 못하던 내부를 타인이 자기 의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마치, 등에 무겁게 지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 려놓는 것 같아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확실 히 그에게 있어,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타인과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 심지어 그토록 오래 같이 산 디트마라도 그의 근본적인 고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기억과 현실이 같지 않은가.. ...왜 기억과 진실이 같지 않은 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그가 끊임없이, 무의식 중에라도 생각했던 질 문들을 이제, 그의 앞에 앉은 한 소녀가 되풀이 해 묻고 있었다. "..흑..흑.. 드래마, 도대체 나는 누구지요?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도 잘못된 기억이겠지요... 나 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난, 무서워요... 이렇게 깊게 생각하면, 굉 장히 나쁜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난 어쩜, 도둑질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창녀였을 수도... 살인자였을 수도 있겠죠..." '살인.' 시나는 그 단어가 주는 묘한 여운에 눈물을 흘렸다. 맞아, 나는 살 인자였을 수도 있어. 기억을 잘 떠올려봐. ..피 냄새.. 비명.. 낮고 기분 나 쁜 웃음...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 내 손은 이미, 무언가 더러운 것으로 물들어 있을 지도 몰라. 피를 흘린 자,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남의 피를 들이킨 자의 영혼은 과연 무엇으로 구제 받을 수 있을까. ...집어 던 져진, 암흑. 처참하게 발겨진, 슬픔. 모두 다 고통뿐이지. 그러니, 될 수 있 다면 언제까지나 잠들고 싶었어... 그러자 어디선가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에게 희망은 없어... 너의 운명은 죽음. 그것만이 남 아 있겠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과거로 인해... 시나는 고개를 숙이고 이 미칠 것 같은 나쁜 환상에 슬프게 울었다. "아아.. 드래마, 제발.. 차라리 내가 말하는 현실 세계가 어딘가에 있다고 말해줘요. 제발..! 그곳에서의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예요. 하지만 여 기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원래 일루티온이었는데, 죄를 지어 머리를 잘 렸다고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제 가족에게 버림받고요..?!! 말도 안돼 요-!!! 라단과 카탈리 님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 어요!!! 차라리 나를 사랑 받았던 가족이 있는 마노테온으로 내버려두라고 해요!!!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아아, 누군가 나를 이 나쁜 꿈에 서 깨워줬으면..!!! 제발 내가 나의 기억을 부정하지 않도록 해줘요...!!!! 흑 흑흑..." "시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