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38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19 23:37 읽음:287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2회, 제 31막. 시나, 뷔기어 셰리카를 만나다. (1)> <사랑 받는 종속자가 되기 위한 50가지 방법 - 종속주는 이런 종속자를 좋아한다. 제 2 장. 실수 없는 선택을 위한 어드바이스 - 내게 맞는 종속 주는 누구일까요?> 시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아, 이번 장에서는 자신의 신분이라면 어떤 종속주를 맞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드릴게요. 엘에게 축복 받은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역시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바른 몸가짐과 함께 누가 자신의 상대인지 알 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대들의 신분이 무엇인가요? 벌츄즈(Virtues)의 그대라면 살아가는 데 닥칠 모든 위험에 대비하여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대 들이여, 자신을 지킬 만한 종속주를 보내 달라고 꾸준히 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의 상대는 모든 루이티온 계급과 모든 하바티온 계급, 그 리고 왕족들이 됩니다. 그대가 혹 파워즈(Powers)의 가호를 받은 자라면, 당신은 지금쯤 조금 고 민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내게는 이런 힘이 있는데 어째서 누군가에 게 지킴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라고요. 하지만 알아주세요. 당신의 그 능 력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대는 그대 의 힘을 그대의 계약자를 지키는 일에 쓰게 됩니다. 그대들은 파워즈의 법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대들의 계약자는 그대들의 신분에 따라 왕 족의 딸이거나 귀족의 딸이 될 것입니다. 그대들은 남성을 계약자로 섬길 수 없습니다. 엘의 의지에 따라 남성들은 여성의 보호를 받지 않으니까 요.> [으엑-! 남녀차별이다-!!!!] 벌츄즈가 뭔지 파워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기분이 매우 나쁜 시 나였다. 하지만 읽던 내용 계속 마저 읽어보았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즉, 남성 루이트가 여성을 계약주로 삼는 경 우도 허용되나...> [아! 파워즈란 '루이티온'을 말하는 거로군!]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이런 경우가 많이 없는 것은 그것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 입니다.> 헤에-? 뭐가 위험하다는 걸까? 하지만 책은 거기에 대해선 더 이상 설명 하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알아두세요. 파워즈의 여러분들이라도 여러분은 다른 소녀와 마 찬가지로 종속주가 필요합니다. 당신들의 대상은 루이티온 계급과 하바티 온 계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족들까지 포함되겠지요. 당신들이 만약, 도미니온즈(Dominions)의 수호를 받는 자들이라면, 그대 들의 상대는 필히 왕족에서만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파이오 스아디온이시라면- 오 엘이시여, 당신의 앞 날을 축복하소서. 그대는 유일하게 강혼(降婚: Mesalliance)이 허락된 분 이니, 그대의 상대는 모든 왕족이 됩니다...> [흐음...] 거기까지 읽은 시나는 하품이 나와서 책을 차례대로 읽는 것을 포기하고, 책장을 뒤로 넘겼다.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말이었고, 차라리 아까 봐 둔 '은혜의 법'부터 읽어보는 게 더 흥미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뒤적 뒤적... <제 7장: 은혜의 법에 대하여. ...이번엔 '은혜의 법'에 대하여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것에 대한 법칙은 매우 미묘하지만 아무래도 여러분 같은 어린 소녀들은 은혜의 법에 대해 확실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흔히 '엘의 중매' 라고도 불리는 '은혜의 법'으로 자신의 종속자를 찾는 소녀들도 아주 많으 니까요. 자, 봅시다. 여러분은 '은혜의 법'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남성분이 여러분의 생명을 구했을 때, - 물론 그 남성분은 앞장에 설명한 대로 아직 어떤 여성하고도 하누카의 날을 치르지 않았거나, 혹은 하누카 의 날을 이뤘더라도 그것을 상쇄할만한 자격을 갖고 있는 남성분에 한합 니다.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여기서 힐러와 성직자 분들은 제외된다는 건 기억해 두세요. - 남성분이 그대의 평생을 책임질 의사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법이라는 것은 아시지요? 네 - 맞아요. 여러분의 지식은 올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몇몇 예외적인 법칙입니다. '은혜 의 법'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 중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들어볼까요? 우선, '은혜의 법'은 다른 계급끼리는 엄밀하게 말해서 성립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한 분의 루이트가 한 명의 일루트 계급 소녀를 우연히 구했다 고 하면, 그 소녀는 그 루이트 분의 첩으로 들어갈 수는 있어도 그와 정 식으로 하누카의 날을 지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계급을 그 능력과 이름대로 따로 지으신 엘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반대 로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하바트의 소녀 중 하나가 일루트 계급의 남자 에게 구원을 받았다면(끔찍하지요? 그러니까, 하바트 계급 소녀 여러분, 정숙한 소녀는 보호자 없이 밖에 나가서는 절대 안됩니다. 나가더라도 개 인 루이트나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하인들과 동행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것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엘의 법칙에 따라 하바티온 계급 은 일루티온 계급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갖고 태어났으므로 그들에게 보호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루트는 그 하바트 소녀를 구하 여 모욕한 대가로, 죽음으로서 그 과오를 보상해야 합니다.> "에에엑--!!!! 뭐라고오--?!!!!" [말도 안 된다! 정말!!!] "이건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잖아!!! 이야- 정말, 은 혜를 원수로 갚는 법도 법이라고 하니까, 법이 되는 거야 뭐야?" 인상을 쓰며 그렇게 울분을 토한 시나는 책을 탁 덮어버렸다. 더 이상 이 런 책은 볼 것도 없었다. 참,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사람 구하는 데도 쟤가 계급이 하바티온인가 루이티온인가, 내가 쟤를 구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기타 등등.. 뭐 이런 것을 계산 에 넣고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한 경우, 자신의 목 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쯧쯧. 황당한 세계야. 쯧쯧... 열 받은 시나는 옆 에 놓인 비스킷을 하나 더 들어 우물우물 먹었다. 자고 일어나서 힘도 없 고 하도 나른해서 책이나 읽을까 했더니, 하나 있는 책이 웃기지도 않는 구만. 쯧쯧.. 우물우물.. 쳇. 방안은 카탈리가 불을 피워준 벽난로로 인해 어젯밤보다 훨씬 더 따뜻했 다. 그리고 카탈리가 갖다준 뜨거운 수프와 빵과 건포 등으로 허기도 많 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침 내내 빨래만 시킬 때면 서러웠는데, 카탈리가 갑자기 친절해진 것 같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시나였다. [흐음... 카탈리님이 나를 싫어한다고 느낀 건 역시 착각이었을까?] 시나는 아까 눈을 떴던 상황을 생각했다. 시나는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고 맨 처음 느끼는 감정은 의아함이었 다. [응?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지? 이상하다....? 분명히 난... 아앗?!!!] 시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쳤다. "빨래!! 내가 빨래 다 했나?!!!" 엄청난 양의 빨래였는데! 으악!! 허겁지겁 침대를 내려오던 시나는 그러다 가 문득 어떤 것을 깨달았다. [아.. 빨래는 다 했지. 참.] 그렇게 생각하자 안도감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어깨가 축 늘어졌다. [흑흑... 윤시나... 식모가 다 됐구나. 일어나자마자 빨래라니.. 내가 어쩌다 가 이렇게 됐지? 흑흑...] 언제나 그렇듯 그런 질문엔 아무도 대답해 줄 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시나는 또 한 번 더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 이걸로 난 빨래의 명인이 되어서, 현실로 돌아가면 세탁소라도 차 릴 수 있을지 몰라. 흑흑...] 예전에 무술도장 차리는 것만큼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쓸만한 생 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 았다. 하마터면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을 뻔한 시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으윽... 이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너무 어지러워서 멀미 날 것 같네. 누 가 나 자는데 침대를 계속 흔들었나... 뇌가 흔들리는.. 응? 잠깐... 설마.. 뇌..?"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뇌라니..? 이, 이거, 혹시 뇌종양?(도대체 어디서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일 까..--;) 아악-! 이런 바보 같은!!! 도대체 왜 이런 바보 같은 세계에 와서 왜 이런 바보 같은 병에 걸려야 하는 거야?!! 너무해--!! 흑흑..!!! 아빠.." ..라고 외치며 침대에 풀썩 엎어진 시나는 그 순간 자신의 배에서 꾸르륵 - 소리가 난 것을 들었다. 잠시 후... 부스스 일어난 시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혹시 자신의 이런 꼴을 누군가 훔쳐보고는 있지 않을까 하는 지 극히 인간적인 염려였다.) 그리고 괜시리 얼굴이 붉어져서 혼잣말했다. "흥... 잠에서 막 깨어서 판단력이 좀 떨어져 있었던 것 일 뿐야. 그럴 수 도 있지. 뭐, 일종의 조크라고나 할까..."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 데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며 애써서 무안함을 감추 는 시나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원인을 알고 나니, 어지러운 것도 참 을만 했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까지 기억이 난다. 동 네부인이라고 해서 깎듯이 인사를 했더니, 사람을 엄청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었지. 그런 기분 나쁜 상태에다가 피곤한 상태로 잠이 들어서 지금처 럼 정신이 몽롱한 것 같았다. [흐음... 뭣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시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방안의 벽난로엔 누가 피워놨는지 장작이 타고 있었는데, 그걸 보니 뜨거운 수프 같은 것이 먹고 싶었다. 그때 마치 마법 처럼 문이 스르륵 열리며 카탈리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엔 쟁반이 들려있 고 그 위엔 수프와 음식이 몇 가지 있었다. 아까 있었던 껄끄러운 감정이 기억난 시나는 벌떡 일어났다. "카탈리님." 카탈리는 들고 있던 쟁반을 가까운 탁자에 올려놓았다. "시나마. 일어나 있었네?" 그렇게 말한 카탈리는 시나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 아까는 나의 착각이었나?]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시나에게서 아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은 색으로 보았던 눈은 역시 그냥 회색의 눈이고 여자 애라고 생각하고 보 면, 여자 애지만 그냥 보는 첫 느낌은 중성적인... 아니 남자애 같은 마노 테다. 카탈리는 입을 열었다. "아까는 계단에 쓰러져 있어서 놀랐어. 자고 일어나니까 괜찮아?" 남편인 라단에게 시나가 쓰러졌다고 말하니까, 그는 심술궂게 '마노테 주 제에 몸까지 약해 빠졌다니, 웃기지도 않는 구만!'이라고 말했지만, 카탈 리 같은 경우는 막상 눈앞에서 시나가 쓰러지니까 자기 탓인 것 같아 미 안했었다. 시나의 짧은 머리카락은 아직도 적응이 안되지만... 그녀는 어렸 을 때부터 종종 주인 없는 강아지도 주워서 키우곤 했던, 기본적으로는 동정심이 많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나를 못살게 굴어야 하 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나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루온 루사트님이 화를 낼 것이고.... 그리고, 괴롭히더라도 먹일 건 먹이면서 못살게 굴자는 모토아래 이 쟁반을 갖고 올라온 것이다. 헌데 시나는 카탈리의 말에 몹 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엣? 제가 쓰러졌다고요?" "응. 얼굴이 하얘져서.. 기억이 안나? 시나마 눈이 은색으로 보였었거든." 시나는 웃음 지었다. "하하.. 말도 안돼요. 제 눈은 회색인데요. 그리고 눈이 은색인 사람이 어 디 있어요." 카탈리는 쟁반을 시나에게 건네주었다. "어디 있긴... 우리 파이오니온님과 우리 왕족들이 그런 색의 눈을 갖고 있는 걸... 우리 클로니아는 그래서 은색을 상징색으로 삼고 있다고. 시나 마 말대로 지금 시나마 눈, 회색이지만... 아까 본대로 라면 시나마 아주 인기가 많았을 거야. 우리 세계 사람들은 은색 눈이나 은색 머리칼을 상 급으로 치거든. 자 이것 받아. 시나마. 배고플 거 같아서.." 시나는 쟁반을 받으며 생각했다. [흐응.. 그런 건가. 그래서 바리스 마노테오나에서 그 꽃관 아저씨가 드래 마보고 '상급 마노테'라고 했던 것일까..? 상급 마노테는 또 뭣일까... 계속 궁금했었는데...] 시나는 웃으면서 카탈리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카탈리님. 그러나 저러나 은색이 여기서 그렇 게 인기라니.. 하하.. 제 눈이 은색이 아닌 게 좀 아쉽네요." 카탈리는 시나의 웃는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음 지었다. "응. 그렇군. 호호..." ...라고 웃던 카탈리는 문득 이건 너무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는 것을 느꼈 다. [아니, 지금 내가 시나마를 상대로 뭐하고 있는 거야? 남편을 도와서 시 나마를 괴롭힌다고 해놓곤... 시나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카탈리가 당황해서 이렇게 생각하는데 침대에 앉아 수프 맛을 본 시나가 소리쳤다. "와아- 카탈리님! 이거 정말, 정말 맛있어요-!" "으응? 응? 저, 정말? 하지만 그냥 끓인건데 뭐.." "아니에요! 정말 맛있는 걸요. 나중에 괜찮다면 이거 어떻게 만드는지 가 르쳐 주세요. 귀찮지 않으시다면." 그렇게 말한 시나는 카탈리를 보며 또 방긋 웃었다. 카탈리는 기뻐서 말 했다. "어머, 어머. 그럴 정도로 맛있었던 거야?" 라단은 좋은 남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들여 음식을 해도 이렇게 칭 찬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카탈리는 시나의 칭찬에 그만 감동을 해 버 렸다. "호호호.. 그럼, 이따가- 시나마.. 몸이 괜찮아지면 부엌으로 와. 음식 만드 는 법을 가르쳐 줄게." ...라고 상냥하게 말한 카탈리는 순간 또 흠칫했다. [아냐, 아냐.. 내가 왜 이러지? 이,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한 카탈리는 즐겁게 음식을 먹는 시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음식 맛에 일일이 감탄하는 흰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말이야... 이 마노테는..] 카탈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묘하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기대하게 만드는...] 그때 시나가 눈을 들고 카탈리를 보았다. "하하.. 저어기.. 같이 드실래요? 카탈리님?" 시나는 카탈리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아무래도 예의 상으로라도 한 번 권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같이 먹자고? 아, 아냐. 난 밑에 가서 라단의 일을 도와야 해. 그럼 시나 마, 다 먹고 나면 그릇은 내가..." ...치울게. ..라고 말하려던 카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정신 차려! 카탈리! 저건 마노테라고! 그래서 카탈리는 억지로 목소리가 딱딱하 고 위압적으로 나오도록 했다. "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 먹고 나면 그릇은 깨끗이 치워 놔! 시나마가 먹은 거니까!" "네." 시나는 카탈리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굳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뭐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오히려 그것이 정상이었으므로 그냥 공손하게 대답했다. 카탈리는 문을 열고 나가며 냉랭하게 들리(려고 노력하)는 목소 리로 말했다. "장작은 저기 갔다놨으니까, 물론 벽난로도 시나마가 관리해야 해! 알았 지?!" "네.." 흐음. 그럼 저 무거운 장작을 여기까지 날라준 게 카탈리님인가..? 고맙다 고 말하려 하는데 문이 탁 닫혔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부엌에 내려가 그릇을 다 씻고 나니까 카탈리가 들어와, 찬장에서 시나가 지금 씹고 있 는 비스킷을 꺼내 준 것이다. 도와 줄 일은 별로 없고, 이따가 붕대 걷어 서 다리는 것이나 도와주면 된다고 해서 일단은 이렇게 방안으로 돌아와 책을 읽고 있었지만... 책의 내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쳇... 그래서 내가 이 책 사기 싫다고 했는데. 첫 느낌부터 영 아니었단 말이야. 근데 드래마는 자기 마음대로 이 책을 사라고 하고.. 참 나.. 난 빨리 우리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데. 내가 지금 이런 책이나 읽게 생겼나. 쳇..] 잠시 투덜대던 시나는 생각이 다시 카탈리가 말하던 내용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내가 쓰러졌다..라. 흐응. 그럼 나, 여기서도 그랬나? 시나는 굉 장히 피곤하거나, 심하게 굶었을 때(두끼이상..--;) 가끔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었다. 주위 사람들 말로는 어떤,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본인 은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저번에 동굴에서도 입구에 나오기까지의 기 억이 전혀 없고...(이런 건 별로 기억이 없어도 괜찮다.) 하지만 쓰러지기 까지 한 적은 별로 없는데... 갑자기 시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후... 그래. 역시 난 가녀린 여학생이라고. 후후... 내가 정말 남자애 같다면, 이렇게 기절 따윈 하지 않을 거야. 후후..] ...기절하고 남자애 같지 않은 것하고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역시 근거가 없는 일이었지만, 시나는 굳이 따지지 않고 이렇게 생각해 버렸다. 시나는 빙긋 웃었다. "하여간 이 세계는 신기해. 분홍색, 붉은 색 눈도 부족해서 은색이라니.. 꼭 한 번 구경하고 싶다. 킥킥... 나야 회색 눈이지만.. 아아.. 그러나 저러 나 아쉬운 걸.. 은색 머리칼도 이 세계에선 예쁘다고 쳐준다는 데.. 하하.. 나는.." 시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았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흔들렸다. 시나의 머리카락은 아주 느릿느릿 자란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도 남들 이 한 달 걸려 자랄 것을 시나는 여섯 달은 걸려 자라는 것 같았다. 덕분 에 미용실 비가 줄고 염색하는 데 용이해서 좋긴 하지만... "킥킥.. 역시, 이 세계에서라면 머리카락이 빨리 빨리 자라는 편이 좋을 텐데. 머리카락이 왕창 자라면, 드래마가 굉장히 놀랠걸. 아앗! 너 역시 이 세계 사람이 아니구나! 넌 마노테가 아니지? ..라고 말할지도.. 하하.. 어디, 얼마나 머리카락이 자랐나 볼까?" 그렇게 혼잣말한 시나는 턱을 손에 괴고 머리카락 중에 하나를 툭 뽑았 다. 따끔한 느낌.. 시나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머리카락의 끝을 살펴 보았다. 흐응... 거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끝의 색이 조금 틀렸다. "장하군. 그래도 그럭저럭 자라고 있잖아? 참새 눈물 만큼이긴 하지만..." 검은 색의 머리카락 끝에 드러난 다른 색의 머리칼.. 이것 때문에 아이들 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시나는 늙은이야-'라고.. "흠흠.. 지나가 버린 아름다운 추억이지. 그렇게 말한 녀석들에게 천배만 배의 복수를 해 주었으니.. 후후.. 아아.. 그러나 정말 아까워. 이 색, 어떻 게 더 흐리게 할 수 없나? 그럼 햇빛에서 보면 나도 은색의 머리칼로 보 일 거란 말이야. 헤헤.. 그럼 인기도 많아지고..." 그렇게 생각한 시나는 '바랄 걸 바라라'라는 명언을 생각해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뭐, 좋은 걸 바라자면 한이 없지. 하지만... 역시 회색 머리칼이라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너무 애매모호하니... 아쉬워. 하아..."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는 라단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일이 어떻 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료실의 일 이야기가 아니다. 진료실 일이야 언제나 그렇듯 순조롭게 돌아갔다. 그가 속을 끓여 하는 것은 시 나마 때문이었다. 방금 카탈리가 자신이 굉장히 좋아하는 비스킷을 시나 마에게 꺼내주는 것을 보자 정말 이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뭐, 꼭 비스킷이 아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간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시 나마는 1층부터 2층 마룻바닥을 싹싹 닦고 기름으로 윤까지 반들반들하게 내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단은 툴툴대며 장부를 시끄 럽게 팍팍 넘겼다. 그 옆에서 라단을 도와 약품이라든지 붕대를 정리하던 카탈리는 남편의 그런 노골적인 무언의 항의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아침엔 너무 심했다고요.." "툴툴.. 무슨 놈의 마노테가 그거 하나도 못 견디고.. 하나같이 마음에 드 는 게 없군.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저어.. 여보, 비스킷은 내가 이따가 시장에서 사다 놀게요.." 라단은 장부를 책상 위에 꽝 내려놓았다. "당신은 내가 지금 그 비스킷 때문에 화내는 것처럼 보여?"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는게 카탈리의 생각이었다. 라단은 시나마가 쓰러 졌다고 했을 때, '정말이야? 그럼 어떡하지? 루온 루사트님의 얼굴을 어떻 게 보지? 너무 심했나? 아아.. 어떡하지?'라는 말을 하며 시나마의 방에 장작까지 날라다 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라단의 기분 상태는 아마도 오후의 티타임이면 언제나 먹게 되어 있는 비스킷이 홀랑 다 떨어졌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카탈리는 아까부터 추측하고 있었다. 또 이것은 과거의 무수한 경험에서 나온 상당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하 지만 라단은 대범하게 지금까지 말했다. "..흥. ...당신은 나에게 의논을 했어야 한다고..." "... ....비스킷 같은 거 말이야. 아 물론 비스킷은 하나의 예일 뿐이지. 내 가 말하는 건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하는 거야." "...툴툴... 비.. ...툴툴... ...킷.. 툴툴... 킷..."(정확히 알아듣기 힘든 각종 투덜 거림들.) (계속)================================================== 종속자, 어쩌구라는 책의 내용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엘야시온은 철저히 힘 에 의해 나누어지는 세계입니다. 이 정도 되면 계급이라든지 지위도 가문 에 따라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능력에서부터 결정이 되죠.^^ 계급 마저도 능력에 따라 나뉘어 있으니.. 그럴 리는 없지만, 아무리 루이티온 의 아들이라도 그에게 능력이 세습 안 되었다면, 동일하게 계급 또한 세 습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냥 심플한 '일루티온' 일뿐... ^^ 마찬가지로 왕족의 자식이라도 머리가 짧으면 '마노테온'입니다. ^^ 능력은 둘째치고 능력을 담을 그릇 자체가 없으니까... <간만에 시나가 나와서 기뻐하는 엔...^^> ps...후훗... 이상하군요. 요즘 몹시도 글이 잘 써집니다. 후훗.. 진짜로 말이 씨가 됐나... 그래서 다음 주에 올린다고 하고, 그냥 한 편 더 올립니다. 이걸로 이번 주는 다섯 편... 음하하...!!! 빅토리-! (여유분 없이 이래도 되 는 걸까, 고민하고 있지만... 뭐, 열심히.. 열심히...^^)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52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26 23:12 읽음:2776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3회, 제 31막. 시나, 뷔기어 셰리카를 만나다. (2)> 카탈리는 한숨을 쉬었다. 라단은 투덜댔다. "하여튼 이게 뭐냐고? 마노테를 루온 루사트님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한 일 이라고는 오전에 일 조금 시키고, 그 시끄러운 부인네들에게 저 여자애를 보인 것뿐이잖아?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여왕대접이라니.. 나 원 참. 비스킷 씩이나 주고 말이야. 툴툴..." 카탈리는 그냥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 다. "여보? 시장에 다녀올게요. 약초랑 약품도 사와야 하고... 식료품이랑..." 그녀는 굳이 '비스킷'이라는 이야기는 안 꺼냈다. 남편의 자존심(?)까지 건드 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약초들이 묶음으 로 해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음.. 그러잖아도, 사올 약초가 많았죠? 살구씨, 양골담초.. 골든 로드... 아! 사프란도 떨어졌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한데, 어디 보자.. 다른 약 초들은 다 있나?" 라단은 사올 품목을 중얼거리고 있는 카탈리를 바라보았다. 카탈리는 지금 사올 약초들의 이름을 머리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라단이 종이에 약초이름을 써줘야지만 사올 수 있었지만, 몇 십 년씩이나 라단의 조수 일 을 한 지금은 약초의 이름이라면 웬만한 힐러보다 더 잘 알고 기억할 수 있 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썰미가 좋아서 좋은 약초를 골라내는 솜씨가 뛰어났 다. "..으흠. 아침에 사야하는 종류들만 빼놓으면 한 열 몇 가지만 사오면 될 것 같아요. 다녀올게요. 아아.. 요즘은 기억력이 떨어져서.. 빼먹지 않고 잘 사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 ...라고 말은 하지만, 역시 지금까지 실수 한 적은 별로 없다. 조금은 대강 대강인 남편을 대신하여 최근엔 약초를 손질하고 정제하고 조합하는 일까지 해내는 그녀이니까. 그래.. 그러니, 비스킷을 잊어버리고 오는 일도 없을 거 야. 카탈리가 지금 나가면 오후의 티타임에 맞춰서 올 수 있겠지. 그렇게 생 각하니, 마음이 스르륵 풀려서 카탈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깥은 춥 고, 약초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자면 고생이 심할 것이다. 한 가게에서 약 초를 전부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품질의 것을 보유하고 있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각각 따로 사야하니까... 라단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급한 환자는 없을 테니 내가 대신 갈까? 저번에도 카탈리가 갔는데, 이 번에는 내가 가는 것도... 하여튼, 저 마노테가 비스킷만 먹어치우지 않았어 도...] 그때 라단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주먹으로 책 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렇지!!!" "?" 거실로 통한 문을 열던 카탈리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라단은 후후후 웃었다. 그러더니, 카탈리를 보며 말했다. "카탈리? 됐어. 당신이 갈 필요 없어. 비스킷이 떨어졌다면, 그걸 먹어치운 당사자가 시장을 봐와야지." "네에?" "후후후.. 카탈리? 시나마를 좀 불러다 주겠어?" "...! 당신, 설마...!!! 말도 안돼요! 어떻게 마노테한테!!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라단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됐어. 어차피 저건 평범한 마노테가 아냐.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 닐 거야. 후후후..." 그렇게 해서 약 40분 후. 시나는 몇 장의 종이를 들고 코트를 입고 집의 뒷 문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라단이 줄줄이 말해준 잡다한 주의 할 점으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라단은 긴장해서 얼굴이 붉어져 있는 시나 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한 뒤 거만하게 말했다. "알겠지? 거기에 쓰여진 것들은 빠짐없이 사와야 해. 기억해 두라고. 네가 갈 곳은 식료품점, 과자가게, 약초가게 10군데. 각각 따로 가서 사와야 해. 나와 카탈리는 너무 바빠서 너에게 시키는 거야. 할 수 있다고 대답했으니 믿겠어. 길가다 기억이 안 나거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줄 테고... 가게 위치도 일단 시장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종 이 하나, 하나에 이름과 주소를 써 뒀으니까, 어려울 건 없지. 사람들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가르쳐달라고 하면 되니까." 여기서 라단은 씨익 웃었고, 카탈리는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푸욱 쉬었다.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는데 라단이 웃음을 지우고 다시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여튼 종이에 다 써뒀어. 약초가게 같은 경우는 한 군데 몰려 있으니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테고. 웬만하면 내일 안 바쁠 때 내가 가도 되지만, 하도 급하게 써야 하는 것이라. ...그게 없으면 '절대' 안돼" 라단은 '절대'라는 말을 강조하여 시나에게 부담을 팍팍 지어주었다. "...조금 고생이 되겠지만. 루온 루사트님이 선택한 너이니 이 정도는 해내리 라 믿어. ...알다시피, 그런 분 옆에서 살자면 이 정도는 해치울 수 있어야지. 안 그래? 이런 것도 못하면... 뭐랄까.. 조금, '수치'라고 할까. 알 수 있겠지? 종이까지 주면서 이름을 가르쳐 줬는데 말이야? 이 정도도 못해내면, 그 분 자신께 '수치'가 된다고. 아아... 자고로 종속자라면, 종속주에겐 '수치'가 되어 선 안되지. 쯧쯧...." 시나는 자기가 들고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누런 종이에 찍찍 갈긴 필체로 알지도 못할 이름들이 써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은 가게 이름인 듯 했다. [가게가 상당히 복잡한데 있나봐. 이렇게 이름까지 써 주면서도 저렇게 신신 당부라니.. 괜히 더 불안해지네. 하지만 뭐 할 수 있겠지.] 라단은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시나를 보고 흐흣. 웃었다. [저 표정 좀 보라지.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잖아..라는 표정. 풋풋... 고 생 좀 할거다.] 라단은 나가라는 듯 손을 앞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흐음. 흐음. 자 그럼 갖다와." 시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라단님, 카탈리님." 그 인사를 뒤로 문이 탕 닫히고, 라단 뒤에 서 있던 카탈리는 난처한 표정 을 지었다. "어쩌나, 정말 고생할텐데." 라단은 어깨를 또 한 번 으쓱하더니 진료실로 향했다. "고생 좀 하라고 시키는 건데, 당연히 고생해야지." "하지만, 가게 이름을 길거리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서 찾으라니. 맨 처음 내 가 당신 없이 나갔을 때 그렇게 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라단, 사람들은 종이만 보여줘도 도망간다고요. 길에서 '걸어다니는' 사람들 중에 당신처럼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러니까 그런 종이 따위 있으나 마나예요. 그걸 빨리 눈치채고 너무 멀리가지 않고 돌아왔으면..." 갑자기 라단이 호탕하게 웃어 제쳤다. "푸하하하하핫----!!! 바로- 그거야--!!!! 카탈리! 정확하게 지적했어!! 보나 마나 저 마노테 조금 있으면 울상을 지으며 들어오겠지!!! 추운데서 고생 좀 하고 결국 장 보는 것에 실패해서 들어오면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깨달을 거야! 푸하핫-!!! 당신이 말했잖아! 이런 일은 머리를 써서 해야 한다고...! 이 정도면 내 머리도 나쁘지 않지! 자기 자신이 루온 루사트님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도 좋잖아?!! 좋았어! 두 달 동안 이런 식으로 나가겠어-! 후하하핫---!!! 카탈리! 저 마노테가 장을 못 봐왔 을 때 수치스럽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놓으라고! 물론 당신이 말 한 대로 교묘한 방법으로!!! 푸하핫--!!!" [하아- 하지만 여보, 당신은...] 카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로서 티타임 시간에 비스킷 먹는 일은 물 건 너갔다는 것을, 라단이 얼마 후에 눈치를 챌 것인가.. 카탈리는 그것이 궁금 했다. 시나는 뒷문에 서서 길 양쪽을 둘러보았다.(라단이 시장으로 가는 길은 뒷문 으로 나가는 것이 더 빠르다고 했던 것이다.) 문 뒤쪽에서 뭔가 시끄러운 웃 음소리가 났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정신이 팔려서 신경 쓰이지 않았 다. 호주머니에서 라단이 준 돈의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이 세계의 돈이다. 잊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그 외엔 뭐... 시나는 다 시 한 번 더 종이를 보았다. 가게 이름, 주소.. 사올 품목, 가격까지... 이 정 도면, 시장에만 그럭저럭 찾아가면 될 것 같다. 시나는 애써서 자신을 다독 이고 현관 계단을 내려왔다. 언제나처럼 길은 질퍽질퍽하고 지저분했다. 그 러고 보니, 단독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처음이다. [흐음.. 뭐, '모험'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주 작은 모험. 후후.] 진창길마저도 '모험'의 눈으로 보니 신선해 보인다. 시나는 방긋 웃고 우선 발을 떼어 길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라는 훌륭한 속담이 있지 않은가? "저어- 아주머니?" "응?" 시나는 지금 두껍고 긴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 아주머니는 상대가 마노테라 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 시나는 당당하게(!) 라단이 시키는 대로 종이를 그 아주머니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시장엘 가려면 어떻게 가면 되요?" 아주머니는 종이와 시나를 번갈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 시장'? 몰라. 이 시장이란 데는 없다구." "네? 이 시장.. 아, 아니요.. 하하.. '이 시장'이 아니라, 여기 쓰여있는 시장이 요." 아주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쓰, 쓰여있는? 투덜...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누굴 성직자나 힐러로 보나... 저런 펄럭거리는 것으로 길가는 어른을 희롱하다니.. 하여튼 요즘 어린것들 은.. 투덜..투덜... 하여간 의무교육이니 뭐니 하는 것이 애들을 완전히 버려 놨다니까.. 투덜.." 놀랍게도 아주머니가 마음속으로 했어야 하는 말을 겉으로 해 준 덕분에 시 나는 왜 아주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며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 다. 시나는 종이를 거둬들였다. [하하..;;;] "아, 죄송해요. 글씨를 모르시는군요." "당연하지!" 아주머니는 짜증을 내며 당당하게(!) 말했다. 시나는 갈기갈기 쓰여진 글씨 를 들여다보았다. "으흠.. 보자... 아, 노운아도 대시장..이라고 돼있네요. 어떻게 가는지 아세 요?" 그 순간 아주머니의 부루퉁한 얼굴이 확 펴졌다. 시나가 글을 읽는 모습에 내심 놀란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말이 갑자기 존댓말로 바뀌며, 차근 차근 길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노운아도? 아... 노웬아도요? 아, 그거야 여기서 쭈욱 걸어서 왼편으로 가면 된다우... 어쩌구.." 이렇게 해서 시나는 그럭저럭 시장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어제 왔던 길과는 또 다른 길이었다. 마차라든지 하는 것은 들어오지도 못할 정 도로 좁은 길이었는데 아주머니 말로는 마차로 가지 않을 거라면 이 길이 노웬아도 대시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다. 아주머니 말대로 제대 로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떤 아저씨에게도 종이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 아저씨도 아까 아주머니 만만치 않게 투덜대는 모습이라, 시나는 역시 드래마나 디트마가 말한 대로 이곳의 문맹률은 상당한가 보다..라고 추 측했다. 그러니 라단이 말한 대로 사람들에게 종이를 보여주기보다는 직접 읽어서 물어보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글씨가 지저분해서 읽기 어렵고, 본 래 사람들이 부르는 지명과 종이 위의 지명이 조금 틀리긴 했지만... (노운아 도가 아닌, 노웬아도가 맞는 듯. 라단의 맞춤법이 틀린 것인지 시나가 잘못 읽은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니 상관없을 것이 다. 그건 그렇고... [헤에- 예쁘다...] 시나는 감탄해서 길거리라든가 건물 사이에 있는 나무들을 보았다. 제대로 길을 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드니까 길거리를 구경할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없다고 해도, 길거리 나무는 한번쯤 눈길을 줄만큼 멋지게 치장되어 있었다. 색색의 리본으로 매어져 있는 나무들.... 시나 또래의 여자애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리본을 매어놓고 내려오고 있었다. 꽤나 즐거운 듯, 그것을 구 경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거리엔 즐거운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호오. 저 리본은 길이도 엄청 기네? 그나저나 여기도 저런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게 있다니 신기.. 헤헤...] 하여튼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시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때였다. "앗!!!" "꺄악--!!!!" 건물의 길모퉁이를 돌던 시나는 앞에 오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나무 구경으로 앞을 전혀 보고 있지 않았던 지라, 그만 정통으로 부딪쳐 버린 것 이다.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이 빠지며 종이가 화악 흩어졌다. "으윽!!!" 시나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지만 상대편 사람은 길에 나동그라졌 다. 그러자 그 여자와 동행인 듯 한 여자가 소리쳤다. "언니-!!!!" 길거리에 나동그라진 여자가 신음소리를 냈다. "으윽.. 아이고 머리야... 으응? 꺄악-!!!! 내 후드!!! 이게 뭐야!!!! 완전히 구 질구질 해졌잖아!!! 악, 정말!!! 오늘은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어, 언니 괜찮아?" "네 눈엔 지금 내가 괜찮은 걸로 보이니!!!" 땅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발딱 일어서며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빽 소리 질 렀다. 시나도 어딜 어떻게 부딪혔는지 이마가 시큰거리고 별이 번쩍였다. [아우.. 머리야..]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시나를 보며 소리 질렀다. "용서할 수 없어-!! 감히 미천한 하급계급 주제에-!!! 너-!!!"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나는 눈물을 삼키고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리고... 시나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와, 와아...] 시나의 입술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괴, 굉장히 예쁘다..." 시나의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몸이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여자는 정말로 굉장했다. 비록 흙탕물이 튀어 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조금도 손 상되지 않은 듯 했다. 짙게 자주색으로 물결치는 머리... 화가 나서 반짝이는 검은 눈...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 화장. 붉은 입술... 후드가 몽땅 목 뒷부분 으로 넘어가 있어서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시나는 여자의 몸매를 보면서도 감탄했다. [그, 글래머!!! 와아-! 이런 곳에서 나의 이상형을 만날 줄이야!!!! 와아- 와 아- 굉장해--!!] 하지만 여자는 아직도 인상을 쓰며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흙탕물을 철벅거리고 와서 시나 앞에 딱 섰다.(시나는 그래서 그녀가 시나 자신보다 약간 더 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 을 삐죽이며 빈정댔다. "흥!! 너, 아부해서 넘어가려는 모양인데, 나이도 어린 게, 아주 가증스럽구 나? 흥...!!!" 그런 그녀의 말에 시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시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내가 아부하는 걸로 생각하다니, 그게 아닌데! "아부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해요! 제 이상형인걸 요!!!!" 그 말에 여자가 한층 더 인상을 쓰며 시나를 노려보았다. [윽!! 내가 이상형이라는 말까지 해서... 그거, 역시 좀 창피한 말이었나? 같 은 여자끼리 이상형이라니, 확실히 기분 나쁜 말이었을 수도...] 하지만 그래도 정면으로 보니,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주색 머리카락 같은 거 현실세계에서 보면 무척이나 이상했을 테지만, 그녀에겐 너무나 잘 어울리고 예뻤다. 표독스러운 눈초리가 무섭긴 하지만 완벽한 시나의 이상 형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시나의 감격 어린 눈초리는 어쨌건, 여전히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역시, '이상형'이라는 말에 올바른 설명이 붙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지그시 시나를 쳐다보던 여자가 코웃음 치고 심술궂은 말 투로 말했다. "흥. 좋아. 네가 아부로서 이 상황을 넘길 생각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래.. 그럼, 이젠 보상을 해 줄 차례로군? 너! 무얼로 내 후드를 보상해 줄 거지?" 시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보, 보상이요?" 시나가 말을 못 잇고 있자 여자가 빙긋 웃었다. "그래! 보상. 이 후드 어떡할 거냐고? 이거 비싼 거야." 시나는 그녀의 후드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추운데 후드만 입고 있는 걸로 봐서 드래마의 것처럼 이예티 의 후드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몹시 비싸다는 것을 아는 시나는 당황했다. "아... 하, 하지만 전 세탁비로 드릴 돈도 없고.. 어떡하죠? 제가 직접 빨아드 릴까..." 시나가 오전 내내 닦은 직업의식을 발휘하려는데 여자가 짜증난다는 듯 소 리쳤다. "무슨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역시 넌 용서할 수 없--!!" 그때 자줏빛 머리칼의 여자와 동행인 듯한 여자가 옆에 와서 섰다. 그러더 니 후드를 벗고 말했다. "롯테.. 아니, 샤일라테 언니. 그냥 가자. 돈이 없다고 하잖아. 그렇다고 정말 로 빨아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 말을 들은 샤일라테는 한층 더 비위가 상해버렸다. 잘 나셨군! 아마사! 여기서 왜 후드는 벗는 거야? 흥, 이제 이 교활한 애송이도 아마사를 보고 한층 더 입을 딱 벌릴 테지! 샤일라테는 화가 나서 시나를 흘끗 보았다. 과 연 시나는 이제 막 후드를 벗은 아마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사 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자요. 이거 당신 거 맞죠? 당신 호주머니에서 떨어졌어요." "아... 고맙습니다.." 시나는 아마사가 건네주는 종이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분명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샤일라테가 역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하바티온을 희롱한 이 건방진 일루티온 꼬마를 어떻게 요리해 줄까.. 살기 등등하게 생 각하는데 갑자기, '건방진 일루티온 꼬마'가 시선을 다시 샤일라테에게로 돌 리며 얼굴을 붉혔다. "저어, 저어 정말 죄송해요." 샤일라테는 그만 여기서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야..이거..] 샤일라테는 자기도 모르게 아마사를 보았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 언제 나처럼 화려한 금발에 푸른기가 도는 회색 눈동자. 따뜻한 햇살 같은 모습 이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는 아마사가 아닌 샤일라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죽네 사네 하며 쫓아다니는 추종자가 꽤 되는 그녀는 시나 가 진심으로 자신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무려 아마사 앞에서..! 남자들은 샤일라테 옆에 아마사가 있을 경우 샤일라 테에게 절대 저렇게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미모를 지닌 끝내주는 미인!!!' 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애송이는 샤일라테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한층 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정말로 빨아드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예쁜 옷인데..." "호-호호호홋---!!!" 갑자기 샤일라테는 웃어 제쳤다. 그리고 등을 쭉 펴더니 시나의 어깨를 툭 툭 두드렸다. "너! 마음에 드는군." 느닷없는 그 말에 어리둥절해졌지만, 시나는 자신의 이상형이 자기가 마음 에 든다고 해서 기뻐졌다. [좋은 언니 같다!!!!!] "호호호홋--!! 좋아!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려 했지만... 세탁비는 안 받기로 하지!!!" 그 말에 시나는 안심했다. 시나에겐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다.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후드.. 너무 더러우니까.. 빨아 드릴 수 있어요." 카탈리님도 후드 하나 빨 정도라면 허락할 것이다. "전 저기 우나 일루테오나의 라..." "호호홋!!! 너! 참으로 예의가 바르구나! 호호.. 하지만 괜찮아. 난 또 사서 입으면 되니까. 호호... 이 지저분한 클로니아는 하나부터 열까지 딱 질색이 었지만... 이곳 남자들, 여자 보는 눈 하나는 제대로 박힌 것 같아-! 호호홋 -! 너를 시종으로 삼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지만... 뭐,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아쉽군. 그럼 안녕. 그 좋은 눈, 앞으로 절대 변치 않길 바래. 소년! 호 호홋---!! 가자! 아마사!!" 잉? 시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의 이상형을 보았다. 소, 소년?! 아마사라 불린 금발의 굉장히 예쁜 여자...(그러나 자줏빛 머리의 여자보다는 덜 시나 의 이상형인 여자)도 시나에게 고개를 까닥하고 숙였다. "...그럼, 잘 가요. 소년." [으윽!! 역시나!!] 여기까지 인사를 듣자, 시나는 이상형이고 뭐고 흙탕물에 철푸덕 엎어져서 인생의 고뇌를 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다. [흑흑흑.... 내가 못살아.. 소년..?]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해결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 들은 역시나, 시나 자신을 남자애로 착각한 것 같았다. 흑흑... 이 세상에는 저런 이상형 같은 여자도 있는데, 왜 나는 두 명의 여자한테 '소년'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하는 거야... 시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저 샤일라테라는 여 자의 시종...(흐흐흑.. 시녀겠지.)으로라도 들어가서 어떻게 저런 몸매를 가질 수 있는 건지 특수 훈련이라도 받고 싶다. 흑흑... 한편 샤일라테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왕녀를 손본 뒤, 헬리옷과 아마사와 점심 먹으며 잡쳤던 기분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헬리옷은 뭐가 기분 이 나쁜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샤일라테의 말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아마사 는 반대로 헬리옷을 무시하고 샤일라테에게만 말을 걸었고, 샤일라테는 짜 증이 나서 아마사를 무시해버렸다. 한마디로 웃기는 상황의 점심식사였는데, 자존심이 몹시 상한 그녀는 냅킨을 팽개치고 중간에 식사를 그만두고 나와 버렸다. 정숙한 하바티온의 여자라면 절대 해서는 행동이지만, 샤일라테에겐 그런 건 씨도 안 먹히는 소리였으므로 상관없었다. 헬리옷이 인상을 잔뜩 쓰는 것이 보였지만, 어차피 샤일라테 자신에게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럴 때 만 인상 쓴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아마사가 샤일라 테를 쪼르륵 따라 나오면서, 샤일라테를 쫓아서 보호물의 종속자를 보겠다 고 말했을 때인데... 딱 잘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도 안 되는지라 하는 수 없이 데려온 것이다. 그때 갑자기 아마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언니, 아까 한 말... 정말 시종으로 들이고 싶을 정도로 아까 그 애, 마음에 들었어?" 샤일라테는 아마사를 힐끗 보았다. "응." 아마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 둘은 조금 걸었다. 힐러 라단의 집은 분명 우나 일루테오나에 있다. 계획대 로라면 곧바로 걸어가면 되지만 그 전에 더러워진 후드를 바꿔입기 위해 옷 가게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까스로 옷가게를 찾아서 이예티의 후드 를 골랐다. 역시 이예티의 후드 원산지라 꽤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샤일라 테는 그 중 진한 회색의 것을 몸에 대고 아마사에게 말했다. "어때 잘 어울리지?" 아마사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옆에 있는 다른 것을 집어들었다. "..난, 회색 싫어해. 게다가 언니에겐 입고 있던 것처럼 이런 진한 갈색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샤일라테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너한테 회색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 지 물었 어?" 아마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 아까 그런 타입의 남자애는 싫다고. 그런 회색 눈 가진 애는 싫어!"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샤일라테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아마사.. 너 거울 봤지? 네 눈도 회색이야! 나 참..."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52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26 23:13 읽음:272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4회, 제 31막. 시나, 뷔기어 셰리카를 만나다. (3)> 아마사는 그 말에 얼굴을 들었다. "내.. 눈..?" "그래! 누워서 네 얼굴에 침을 뱉어라. 회색 눈 가진 사람이 싫다니. 하여 간에.. 쯧쯧.." 샤일라테는 아마사가 뭐라고 하던 회색 후드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 기 아마사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언니는 회색 눈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나처럼 회색 눈 가진 사람을..?" [윽..!!!] 샤일라테는 진한 회색 후드를 다시 자리에 내려놓았다. 옷 고르는 데 왜 눈 색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지만, 아마사와 이 야길 나누다 보면 금새 이렇게 돼버리고, 이젠 이 부분에 대해선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착각은 확실히 깨우쳐 줄 필요가 있지! "이봐요!! 이 진한 남색 후드는 얼마예요?" "와아- 더거 마딧겠는걸! 니봐, 니드넘! 돈 잇서-? 나 더것도 사둬!!" 셰리카는 입 속에서 사탕을 우물거리며 그렇게 활기차게 소리쳤다. 한편 이드넘은 속에서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호문클 로스가 마노테를 찾아냈다고 해서 이렇게 그 장소까지 나왔는데... 이 놈 의 계집애는 무슨 놀러 나온 건 줄 착각하는 건지... 나올 때부터 사탕을 사내라 튀김을 사내라, 액세서리를 사달라...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장소는... "이봐- 니드넘!! 글쎄 저것 좀 보라니까! 저 과일 장수 아줌마 일루 불러 올까?" 입 속에 들어간 두 번째 사탕이 거의 다 녹았는지, 셰리카의 발음은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반갑군!! 그 동안 다섯 살배기 어린애랑 이 멍 청하고 역겨운 냄새나는 곳에 서 있는 건 아닐까 내내 불안했는데!! 이드 넘은 화가 나서 말했다. "뷔기어 셰리카!! 너 이제 작작하고 당장 그 마노테 찾아내!! 도대체 언제 까지 이 곳에 서 있어야 하는 거야! 호문클로스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 고!!!" 셰리카는 투덜댔다. 그리고 갈색의 모피 옷자락을 꽉 여미고 있던 장갑 낀 손을 허리에 대고 말했다. "쳇!! 쪼잔하기는. 지금 그깟 과일 하나 사달라고 했다고 화내는 거야? 네 르세바에 가면 널린 게 과일이구만!!" "쪼잔?!! 내가 정말 쪼잔 했다면 네가 지금 들고 있는 사탕뭉치는 있지도 않았을 거다! 괜히 내 신경 건드려서 있는 사탕뭉치도 뺏기기 전에 당 장..." 그때 그들 뒤에서 손님을 끌고 있던 듬직한 체구의 생선 파는 아주머니가 짜증을 냈다. "아, 그거 참- 이봐- 처녀, 총각!!! 아까부터 가게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지금 누구 망하는 꼴 보려고 작정을 한 거야?!! 싸울 데가 그렇게 없어? 남의 장사하는 가게 앞에서 싸우게?!! 사람들이 기본 예의가 있어야 할 것 아냐! 생선을 한 마리 사 주길 하나.. 나 참.." ...그랬다. 그들은 클로니아의 노웬아도라고 불리는 시장, 그것도 셰리카 말로는 마노테가 존재하는 원내의 '중심'이라고 하는 곳에 턱하고 서 있었 다.(마침 그 중심이 하필이면 위테리드와 로트라인들의 어물전이 자리잡 고 있는 데이고, 평소 때라면 이렇게까지 북적대지 않았겠지만... 형제나라 의 경사를 맞아 위테리드와 로트라에서 '잔뜩' 넘어온 장사치들이 '잔뜩' 싸들고 온 생선 덕분에 온갖 이름 모를 생선이 넘쳐나며 득시글거리는... 굉장치도 않은 곳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지만) 이곳에 서 있은 지 셰리카 의 생각으로는 모래시계 한 번 턴할 만큼, 이드넘의 생각으론 모래시계 세 번 턴할 만큼. 벌써 옷에 특유의 꾸릿꾸릿하고 비릿한 냄새가 배어버 린 것 같았다. 여하튼 셰리카와 이드넘은 아까 손님으로 착각했을 때는 굉장히 친절하던 아주머니가 저렇게 돌변할 수 있는 것인가 서운(?)해하면서, 아무도 건드 릴 수 없는 장사꾼 특유의 박력에 밀려, 가게 옆으로 조금 자리를 이동했 다. 하지만, 어차피 바로 옆에 또 가게가 시작되고 있고, 또 바로 앞에도 가게가 있었으므로 그 둘은 이동하지 않고 서 있는 것 자체로 사방의 가 게와 물건을 고르는 손님 사이에서 눈총을 받고 있는 존재였다. 이런 상 황이니 이드넘의 대 여섯 명되는 부하들도 눈물을 머금고 멀찌감치 떨어 져 자신들의 마스터와 셰리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셰리카와 이드 넘이 서 있는 코딱지 만한 자리에 대 여섯 명의 덩치들이 같이 발을 들여 놓으면 아무리 씩씩한 이드넘의 부하들이라 하더라도 주위 상인들에게 집 단 린치정도는 너끈히 받고 장사 망친 대가로 생선 한 상자씩은 챙겨들어 야 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이곳엔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드넘이 이를 박박 갈고 말했다. "셰리카! 너 혹시, 이게 나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짓이라면..." "골탕은 무슨!!! 지금 나도 같이 고생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 놈의 멍 청한 마노테가 하필이면 이곳 시장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호문클로스 도 쓸데없는 고생을 하게 되고-!!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마노테의 기를 쫓아오던 호문클로스도 지금 굉장히 혼란해 하면서 헤매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라도 자리를 잡고 서서 호문클로스가 안심하고 찾을 수 있 게 해 주자는 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하이고!! 사람이 많아서 헤메신다구! 그거 섬세하기도 하시군!! 쓸모 없 는 흡혈 기생충 같으니라고!! 젠장!! 내가 그 놈의 멍청한 호문클로스에게 뭘 기대한 건지!! 차라리 위험하긴 해도 내 부하녀석들을 움직였더라 면!!!" "뭐!! 흡혈 기생충?!!! 지금까지 기껏 도와주니까!!" 이렇게 이들이 다시 한 번 더 싸워 그야말로 섬세한 신경을 갖고 있는 생 선 장수 아주머니가 이 신경질 나는 커플에게 바가지로 물을 확 끼얹어 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때 다행스럽게도 셰리카의 귀에 찡한 이명이 들려왔다. "앗..!!" "..? 뭐야?" "잠깐! 조용히!!" 셰리카는 귀를 막더니 눈을 감고 뭔가 들린다는 표정으로 신경을 집중했 다. "...알았다. 과자가게! 저기다!!!" 그러더니 그녀는 소리쳤다. "이드넘! 따라와!! 이동하고 있어!! 놓치지 않게 조심해! 호문클로스!!!" "셰리카!!!"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말을 외친 셰리카는 몸을 돌려 사람사이로 뛰어들었다. "빨리 따라와! 이드넘!!" "제길, 잠깐!!" 이드넘은 그녀의 갈색 옷자락을 쫓아 같이 사람들의 물결로 뛰어들었다. 멀리 이드넘의 부하들도 당황해서 그들의 뒤를 허겁지겁 쫓는 것이 보였 다. "셰리카!!" 하지만 셰리카는 이드넘의 말에 대꾸도 안한 채 사람들 사이를 잽싸게 빠 져나갈 뿐이었다. 그 행동은 이드넘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드넘이 셰리카보다 스피드가 떨어진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셰리카가 작은 몸집이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가기 쉬웠다면 이드넘 자신의 커다란 몸 집 때문에 사람들 사이를 돌파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드넘은 셰 리카의 느닷없는 행동에 욕설을 뱉었다. 제길!! 정말 저게 정말 죽을병에 걸렸던 여자 애 맞아?! 저 정도면 벌에 쏘인 망아지가 달리는 것도 따라 잡겠구만!! "잠깐, 죄송.." "꺄악!! 뭐야!!" "비켜!" "으악!! 내 발!! 이 자식이!!" 이드넘이 지나간 곳마다 이와 같은 비명이 울리는데 이드넘은 과감히 무 시하며..(뒤따라오는 부하들이 시비가 걸릴만한 상황이면 눈을 부라리며 해결해 주었다.) 맘놓고 어깨로 사람들 사이를 치며 셰리카의 갈색 옷을 쫓았다. "헤헤헤..." 시나는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방금 들린 과자가게에서 비스킷을 한 통 사자, 아저씨가 서비스로 막 구운 초콜릿 쿠키를 다섯 갠가 집어주었다. 힐러 라단의 집에서 왔다고 하니까, 언제나의 단골 손님이라며... 심부름하 는 시나에게 수고하라며 쿠키를 준 것이다. 식료품 점에도 들려서 몇 가 지를 사고 과자가게까지 들리니 짐이 꽤 돼서 무거웠지만 그래도 서비스 란 좋은 것으로 힘들다는 기분까지 날려버렸다. "후후후... 다음에도 또 심부름 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포부를 밝힌 시나는 이제 약초를 사기 위해 다음 골목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약초골목은 과자 골목 다음다음이라고 했다. 과연... 약초 골목으로 다가가자마자 알싸한 한약 냄 새 같은 것이 풍겼다. 조금 더 가니, 보기에도 수십 개는 될 듯한 가게들 이 약초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팔고 있었다. "흐음...보자." 시나는 들고 있는 짐을 내려놓고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사프란은 구누타 가게에서 사면된다는 거지..?" 가장 가까운 가게에 가서 구누타 가게가 어느 가게냐고 물으니 저쪽 안 쪽에서 세 번째 가게라고 가르쳐 주었다. 가게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약초 파는 장삿꾼들이, '어이- 소년- 뭐 사러 나왔어? 애인에게 줄 선물 사러 나온 거야? 그거라면 우리 가게 허브가 최고야-!!', '소년- 뭐 사러 나왔는 지 몰라도, 우리가게 좀 들려봐-!'...라고 말해서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인 간이란 극한 상황에도 적응하기 마련이므로 그냥 꿋꿋하게 무시하고 걸었 다. 그때였다. 눈앞에 뭔가 푸르스름한 것이 휙 날았다. "...?" 무슨 날파리가 겨울에도 있고, 파란색일까 희한해서 자세히 보려고 고개 를 돌리는 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아-!! 너--!!! 호문클로스! 놓치지 마!!! 잠깐 좀 비켜봐요!!" 여자아이의 목소리... 누가 이렇게 소리를 치는 걸까? 시나는 그쪽을 쳐다 보았다. 멀리, 한 여자애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제치고 달려오는 것이라 잘 안 보였지만 가까이 올수록 뚜렷이 보였다. 네모난 모자 밑으로 빠져 나온 분홍색의 머리칼. 갈색 모피 옷 사이로 초 록색의 옷자락이 보인다. 달리느라 붉어진 얼굴이 시나 쪽을 보며 소리쳤 다. "야아-! 너!! 마노테!!! 거기 꼼짝 말고 서있어!!!" 그 말에 시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노테'... 시나 자신의 불리한 입장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시나가 마노테인줄 알면 절대로 친절하게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 사람들이 눈을 찌푸리며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엉? 마노테? 마노테가 여기엘..?" 으윽!! 어쩌지!! 시나는 당황했다. 가까이 달려온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니 생전처음 보는 모습인데, 어떻게 자신이 마노테인줄 안 것인지 전혀 짐작 이 안 갔다. 설마, 시나 자신 말고 또 다른 마노테가 여기 있는 것일까 주 위를 돌아보았지만 주위는 온통 자신처럼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들뿐이었 고, 무엇보다 여자아이는 시나를 향하여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 도대체 뭐야? 내가 물건값을 덜 치르고 왔나? 아닌데? 처음에 조금 실수하긴 했어도. 덕분에 탈란 금화가 어느 정도 가치인지 짐작하게 되었 고, 그래서 그 책가게 아저씨가 역시 바가지 씌운 것을 알았... 아니,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지!!! 도대체 저 여자아이, 어떻게 내가 마노테인 줄 알았지?!!] "야아-!! 너!! 헉헉...!!" 시나의 황당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연 여자아이는 달려와 이제 시 나의 팔을 꽉 붙들고 늘어졌다. 시나보다 키가 작은 여자 애였다. "드디어 찾았... 이드넘...!!! 여기..!!! 으응?!!!" 여자아이는 뒤에 동료가 있는지 뒤를 보며 그렇게 소리치다가 갑자기 말 을 그치고 고개를 시나 쪽으로 휙 돌렸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것 같았다. 휘둥그래진 눈동자, 떨리는 입술... 얼굴 색도 갑자기 새 파래졌다 새빨개졌다 하며 이상했다. "너...너... 너...너....!!!!!" 시나는 난처했다. 어떡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앞으로 가게에 더 들려야 하는데 이렇게 마노테라는 것이 들통난 이상 고생을 무지하게 할 것 같았 다.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의 얼굴에 이번엔 뭔가 난처한 표 정과 당황한 표정이 한꺼번에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자아이는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벌렸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뷔기어 셰리카!! 어디야!!" 그 소리에 여자아이는 흠칫 놀랐다. 여자아이는 시나의 팔을 놓고 물러서 더니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뒤쪽과 시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제 야 시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시나는 눈을 찌푸리고 손을 내 밀었다. "저어.. 왜 그러세요..? 얼굴 색이.." "..!!!!" 시나의 목소리를 들은 여자 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맙소사! 난 몰라!!" "네?" 시나가 어안이 벙벙해서 말하는데, 여자아이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사, 사, 사람을 자, 잘못 봤어요..!!" "네에?" "뷔기어 셰리카!!" 이제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자 애의 얼굴엔 뭔가 결단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시나에게 다가와 시나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정말로!!" 그러더니 그녀는 발을 탁 떼었다. "호문클로스! 따라와!!" 도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했는데, 푸르스름한 날파리 같은 것이 또 한 번 시나의 눈앞으로 휙 지나갔다. 그 순간 여자아이는 달려온 방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을 돌려 그 방향을 봤을 때 이미 갈색 의 옷자락과 분홍색의 머리칼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 시나는 얼이 빠져서 그곳을 쳐다보았다. 시 나가 그렇게 여자아이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는데 한 명의 남자가 시나를 스쳐지나갔다. "뷔기어 셰리카!!" 여자아이의 이름인 듯, 그렇게 소리쳐 부르던 남자가 뛰어가다가 문득 시 나를 보았다. 화난 눈초리. 시나는 깜짝 놀랐다. "이봐, 너!!" 남자는 이를 갈며 말했다. "방금 그 여자아이와 무슨 이야길 나눴지?" 그는 무언가 의혹에 찬 눈초리로 시나의 회색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나는 진땀이 났다. "이, 이야기 같은 건 아무 것도. 그냥 사람을 잘못 봤다고..." 그때 한 떼의 남자들이 시나와 남자의 주위로 달려왔다. 남자는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어서 그 계집애, 뷔기어 셰리카를 찾아!!!" "넷!!!"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버리자 남자는 다시 주의를 시나에게로 돌렸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그는 시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잔뜩 썼다. "제기랄!! 이 놈의 계집애! 계획적이었구나!! 미끼라고 던져 준 건 고작 이따위 사내녀석!!! 날 속이려면 인상착의가 비슷한 계집애를 골랐어야 할 거 아냐!! 무슨 장난을 하자는 건가?!!! 두고보자!!! 날 이렇게 우습게 보 다니!! 찾아내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그리고 남자는 뛰어가 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시나는 이제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 다. 주위 사람들도 어이없다는 듯 웅성거렸다. "뭐야? 저 치들은? 마노테니 뭐니 뛰어 오더니, 사람 잘못 봤다는 말이나 하고." "글세 말이야. 마노테 따위가 어떻게 혼자 장을 본다고." "이봐, 소년? 괜찮아?" "네? 네.." 시나는 주위 사람들이 말을 걸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땅에 놓아둔 짐 을 들었다. 그때.. 시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키 때문에 불룩했던 호주머니가 홀쭉해져 있었던 것이다. 시나는 인상을 쓰고 손을 호주머니에 넣어 보았다. 역시나...! "으윽!!!! 내 쿠키!!! 내 쿠키가 몽땅 없어졌어요!!" 시나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치자 주위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짓더니 혀를 찼다. "..그런가.. 소매치기였나." "..요즘은, 소매치기들도 다양한 연출을 선보인단 말이야.. 허어." "글세 말야. 내 시장바닥에서 30 평생을 살았지만, 저렇게 떼거지로 몰려 다니며 정신을 쑥 빼놓고 물건 훔치는 기술은 처음 봤네 그려.. 그것도 쿠 키 훔치자고... 이봐, 소년 더 살펴봐 다른 없어진 건 없나." 그 말에 시나는 다른 쪽 호주머니도 살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 다. "..내, 내 돈..." 주위 사람들이 하아- 한 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어찌되려고 이러는 지... 소년, 힘내게나. 다음부터 시장에 올 땐 좀 더 조심하고. 쯧쯧..." 사람들이 이렇게 위로의 말을 던지고 각자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시나는 '난 진짜루 여자 애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 '소년'이라는 말 좀 그만해 달라'고 말할 기운도 없이 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황당한 날이었다. 셰리카는 골목 사이에 숨어서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자신 이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호문클로스의 차가운 몸이 셰리 카의 목덜미에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드넘과 그의 부하들은 당분간 걱정할 것 없었다. 자신이 숨어있는 골목을 지나쳐 완전히 지나가 버린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셰리카는 지저분한 골목, 쓰 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헉헉... 분명히 그 애였어. 근데 어떻게 눈이 회색이지? 아냐... 그보다는 이드넘이 찾는 사람이... 맙소사." 이드넘이 찾고 있던 사람이 그 애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라운 사건이었 다. 셰리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실 그녀는 이드넘이 요구하는 일에 별 자신이 없었다. 피투성이의 옷만을 근거로 하여 마노테를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셰리카의 호문클로스는 아직 능력이 미미하다. 그 래서 비록 그 애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도, 그 애의 거취를 찾는데는 거 의 하룻밤 정도의 시간을 들여야 했던 것이다. 헌데 호문클로스가 금방 그 마노테를 찾아냈다고 했을 땐 굉장히 놀랐다. 그런데... 역시... 두 명이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찾아냈던 것일까? "믿을 수 없어.. '그 애'를 이렇게.. 아니 잠깐.. '그 애'?" 셰리카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눌렀다. "자, 잠깐... 아... '그 애'의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안 나...!!" 그랬다. 어느새 셰리카는 그 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셰리카는 공포에 질렸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잊어 버리게 된다. "아냐!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그 애 이름은... 시.. 시.." 셰리카는 아까 그 애의 놀란 얼굴을 떠올렸다. 회색 눈은 생소하지만 언 제나 따뜻한 눈을 하고 있던 셰리카의 친구. "아아.. 그래!!!" 드디어 셰리카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셰리카는 안도감으로 한숨 을 토해냈다. "윤시나!! 시나였어!!" 기억하고 보니,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계 속 그랬다. '저 세계'의 기억들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이렇게 하다가 하나 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이름만은 절대 안돼. 조심해야지. 셰리카는 잊어버릴까봐 두렵다는 듯 방금 본 회색 눈을 가진 여자아이의 이름을 천천히 되뇌었다. "윤시나... 윤시나.. 맞아. 그 애의 이름.. 윤시나." 윤시나... "아아.." 셰리카는 몸을 떨었다. '믿어만 왔던' 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상당히 충 격이었다. 그것도 이런 갑작스런 방식으로. 전혀 기대도 안 했던 때에. 정 말로 존재했다니.. 다른 이들의 말처럼 환상이나 환각이 아니었어..! 때때 로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셰리카는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떨리는 몸을 억누르려는 듯 중얼거렸다. "..호문클로스, 네가 그 애가 있다고 했을 땐... 오히려 믿을 수 없었는데.. 정말이구나. 정말이야. 그 애가 정말 존재한다니. ...하하.. 하하.. 그 희미한 기억들이 다 거짓이 아니라니."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니.. 학교라고 불리던 곳. 셰리카의 친구들. 셰리카의 집. 셰리카의 부모님. 그래, 그것이 사실이라면... 셰리카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나는... 난 이런 세계는 싫어. 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고 난 외톨이야. 좋은 게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두렵고 괴로워. 이렇게 괴로운 세계는 싫어. 하지만 그 애랑 있던 세계는 그렇지 않아. 돌 아가고 싶어. 하지만.. 나는...!! 호문클로스..." 셰리카는 혼란한 눈을 들어 호문클로스를 보았다. "난, 이제 그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잊어버렸어. 그 세계가 '좋았다'는 것 만 남아있을 뿐.. 난 기억들을 하루하루 잊어버리고 있어." 셰리카가 이렇게 괴롭게 말하는 데, 호문클로스가 작은 손으로 그녀의 볼 을 쓰다듬었다. 셰리카는 호문클로스를 보며 미소지었다. "하하.. 아냐. 괜찮아. 호문클로스.. 난 티토우의 딸이야. 그 애를.. 아니 시 나를 찾았으니 이제 괜찮아. 너도 같이 우리 세계로 가자. 그 애가 있으면 가능할거야. 그러니까 빨리 그 애 옆으로 가야 해. 그 애가 존재했다는 것 과 그 애가 이야기했던 것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 그 애가 말했 던 것..." 문득 셰리카는 마치 끊어진 영화의 필름과 같은 기억을 떠올렸다. 너무나 생생했다. 창백한 달빛 가운데 시나는 빛나고 있었다. 산 속인 듯 주위엔 송진 냄새와 풀들의 냄새가 났다. 검은 눈동자 가운데 빛나는 은빛의 불 길. 시나는 차갑게 웃었다. -이 세계를 마음에 들어한다니, 무척 기쁘군. 나도 이 세계를 좋아해. 하 지만 이 세계는... ... 무언가 듣기 싫은 말이 들려와 셰리카의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아냐-!!! 듣기 싫어!! 그건 거짓말이야! 너 따윈 진짜 시나도 아니니까 --!!" 셰리카가 격렬하게 소리치자, '시나'가 웃었다. -하하하... 엘야시온 인들은... 하하. "아냐!! 그 세계는 분명히 존재해!!!" 그때 필름이 뚝 끊겼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창백한 달이 떠있던 것도, 풀들도 냄새도, 조소 어린 목소리도 다 사라졌다. 셰리카의 어깨가 축 늘 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 느 낌... 무언가를 또 잊어버렸다. 또 하나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조금 후 면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 자체도 기억을 못할 것이다. 그토록 애를 썼는 데...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울었다. 시나...!!! 나는 어떡하지..!! 도와줘. 엘야시온 세계의 뒷골목은 지저분했고, 썩은 냄새로 차 있었으며 몹시 추 웠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52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26 23:14 읽음:272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5회, 제 32막. 엘야시온 가디엘이 생각하는 것들.(1)>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은 티 룸에 서서 멍하니 궁전 바깥을 보고 있었다. 넓디넓은 정원엔 정원사가 깎아 놓은 듯 얼음으로 만든 각종 조형물이 서 있었다. 안 쪽으론 네모 낳게 깎고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마치 미로라도 만들 듯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한 가운데 있는 높다랗고 커 다란 분수대엔 지하 깊숙한 곳에서 나와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이 흐 르고 있었는데, 가끔 그 물을 먹으러 새들이라든지, 정원에 놔두고 키우는 사슴 떼가 분수대 사이의 계단과 아치를 거니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이 다가가도 태연한 모습의 그들은 역시 인간에게 길들여진 생물들이었다. 루드랫도 저 생물들과 같이 순순히 말을 들어준다면... 엘야시온 가디엘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격자 무늬의 창에서 물러섰다. 오전에 접견실에 서 있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접견실엔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다. 지금까지 대화가 오고 갔지만 진전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가디엘은 설득에 지쳐 분노하고 있었고, 드래마 는 묵묵했다. '마노테온 시나마와 결혼하겠다. 그래서 오랜 동안의 죄를 씻겠다.' 이것이 요지였다. 웃기지도 않는 결론이었고, 지나간 세월을 한 순간에 웃 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은 결단이었다. 단지 그 말을 하는 당사자 만이 이 선언이 얼마나 괴상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도 가디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과 같은 눈을 한 자는 한 번 결정이 나면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마음 을 조종하는 법.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는 루이티온 계급인 것이다. 설득을 하는 순간에도 가디엘은 내내 이런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더 할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 가디엘은 무언가를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흥!!! 옛날 사이너스가 너와 같은 식으로 끝내 내 명령을 거부했지!" 그 말에 드래마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이름은 드래마도 알고 있 는 이름이었다. 카이러스 파이오니온 사이너스... 비록 그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으나 모르려고 해야 모를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스온 아피네 스의 아버지였다. 엘야시온은 날카롭게 말했다. "사이너스도 너 같은 식으로, 나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움 직였어!! 내가 아피네스를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애를 굳이 성역으로 데리고 들어갔지!! 감히 나, 엘의 대제사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루드랫! 너는 사이너스의 운명이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 것이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자기 딸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쳤지! 흥!! 그 아이는 자 기 아버지 목숨을 희생하여 스피릿 심벌을 갖게 된 거야!! 그리고 나의 아들... 세렌시스..." 여기까지 오자 엘야시온 가디엘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내 아들... 아피네스는 세렌시스까지도 죽였어. 아무리 아피네스가 당 시 회색의 스아디온이었다고 해도... 자기 아버지를 희생시켜 얻은 스피릿 심벌을 가진 아이 따위완... 세렌시스를... 그 아이를 애초에 아피네스와 연 결시킬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렌시스를 은의 엘야시온으로 만 들겠다는 욕심에..." 드래마는 알고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언제나 전대의 클로니아 파이 오니온 세렌시스의 이름이 나오면 마음 깊숙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 다. '내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자.. 분명 드래 마 자신도 그의 모습을 보았을 터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아름답고 총명했다고 하는 빛의 왕. 그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엘야시 온 가디엘이 말했다. "루드랫!! 네가 이제 아피네스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에서 벗어나게 됐다 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 애만큼 여러 사람의 운명을 엉망으로 만든 애도 없었으니까!! 그 앤 엘의 실패작이었으니까!!!" 그 말에 드래마는 마음에 찌르는 듯한 통증과 거부감을 느꼈지만 결코 내 색은 할 수 없었다. 단지 엘야시온 가디엘을 외면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이 순간에 또 다른 어리석은 결정으로 네 인생을 낭비하겠다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마노테오나에서 살더니 생각마저도 마노테온이 된 것이냐? 내가 20년 전 너를 이곳 마노 테오나에 가도록 허락한 것은 양 틈에 섞여 사는 양치기 개가 절대로 양 으로 변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한 것이었다!! 헌데 네가 지금 이 모든 지위를 버리고 영원히 마노테온으로 살겠다고?!! 마노테온을 '사랑'한다 고?! 너, 루이티온 루드랫이?!!!" "엘야시온님.." "너는 왜 이토록 네 인생을 함부로 굴리는 것이냐? 루이티온 루드랫? 엘 께서 네게 주신 모든 사명을 뿌리치고..." 그러나 드래마는 슬픈 눈을 했다. "엘야시온님... 제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 엘야시온은 화를 냈다. "시끄럽다! 네게 이런 어리석은 결정까지 하도록 은혜를 허락한 기억은 없다!!" 드래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엘야시온 가디엘님. 엘야시온님은 제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 셨습니다. 모든 선택의 권리를 빼앗긴 가운데... 엘야시온님은 제게 선택의 권리가 있을 때 선택했을 것 이상의 것들을 제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래서 저는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의 권리. 오직 하나의 자유를 엘야시온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데에 써야 한다는 것... 하지만, 저는 이 하나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것 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야시온님 저는... 저의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구속을 선택하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엘께서 정해주신 저의 운명 같습니다. 저는 마노테온 시나마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맙소사..!! 루이티온 계급이 어떻게 이렇게 말로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 게 표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 기가 막히구나. 앞으로 루이트 중의 누구 하나를 달변가로 만들고 싶다면, 머리를 자르고 마노테온이 되라고 권유해야겠구나. 하하.." 어이가 없다는 듯 바닥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가디엘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드래마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의 엘 아이즈에서 사파이어 같은 푸 른빛이 나는 것 같았다. "좋다!!! 말해 봐라! 루드랫! 네가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 가디엘은 수정구를 통해서 보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자신이 엘야시온이라 고 하는데도 놀라지도 않던 그 모습. 가디엘은 비웃듯이 말했다. "혹 머리가 모자란 여자는 아닌가! 너는 바보천치와 결혼하며 스스로의 동정심에 도취되어 있는 것인가?!!" 드래마는 눈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놀랄만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때가 있습니다." 흥!!! 엘야시온은 코웃음쳤다. "통찰력이라고? 마노테가? 넌 혹 수다스러운 여자를 그렇게 착각하는 것 아닌가? 많은 말 가운데 어쩌다가 들어맞는 말도 있었겠지!" 드래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고 조리 있게 말 할 줄 아는..." "하아-! 생각이 분명? 고집이 센가 보군!!!" 고집이 세다..라. 여기엔 도저히 반박을 못하겠다. 시나에겐 그런 점이 있 었다. 하지만 여기서, 사실은 그랬었다고 엘야시온과 시나의 험담이나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강할 뿐입니다." "저런-!! 그거 안 됐군!! 루드랫! 너는 여자를 잘못 골랐다! 호기심 많은 여자는 평생동안 남자의 뒤를 의심하며, 동네방네 다니며 지저분한 뒷소 문이나 캐는 여자로 전락하고 말지!!! 변하지 않을 일상이라고?!! 하하하 -!!! 그야 말로 네 뜻대로 되겠구나!!! 네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너의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무덤과 같이 되겠으니! 네 원대로 변지 않을 일상을 누 릴 수 있을 것이다!!!!" "엘야시온님..." 그때 엘야시온 가디엘은 분노를 터뜨렸다. "닥쳐라!!! 그 어리석은 혀 놀리는 것을 도저히 참고 들어주지 못하겠다!!! 네가 지금 마노테오나에서 20년 동안 네 혓바닥 갈고 닦은 것을 내게 자 랑하는 것이냐?!!" 엘야시온 가디엘은 방안에 시종들이 없는 연고로 큰 소리로 시종들을 소 리쳐 불렀다. "거기 누구 없느냐-!!!" 그 노기 등등한 목소리에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에, 엘야시온님... 부르셨습니까?" 가디엘은 여기서 잠시 망설였다. 어디가 좋을 것인가? 하지만 그의 분노 한 마음은 그 고민을 결코 길지 않게 만들었다. "마노테온 드래마를 당장 여기서 데리고 나가라! 그리고 그를 이제부터 두 달간 루온 루파르테 휘하의 기사단에 두어 잡역부로서 시중 들게 하 라!!!!" 그 명령이 떨어진 순간 드래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고, 시종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드래마와 엘야시온 을 번갈아 봤다. "에, 엘야시온님... 루, 루온 루파르테님께서 마, 마노테온은 아, 안 받아들 이실지도... 다른 신분도 아니고 마노테온을.. 아무리 잡역부 라지만..." "시끄럽다! 엘야시온의 명령이다!! 당장 이 꼴 보기 싫은 녀석을 끌고 나 가라-!!!" ...이것이 아침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티타임이다. 조금 있으면 궁 정의 공식 퇴궁 시간이 될 것이다. 가디엘은 둥그런 테이블에 앉으며 불 만 어린 투로 중얼거렸다. "조금.. 아침엔 조금, 심했는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본 것인데.. 하지만.. 그 녀석, 정신나간 말만 골라서 하니... 어떻게 참을 수 있냔 말이다." 그때 문에서 시종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야시온님.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 루온 루파르테님이십니다." 엘야시온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그러자 곧 백 앤 브레스트와 그리브(Greave), 건틀릿 그리고 망토를 걸친 젊은 루이트가 들어왔다. 엘야시온은 잠시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가슴과 손, 정강이를 감싼 갑옷은 검은 가죽과 붉은 청동을 섞어 만든 것 으로 그의 진한 색의 눈에 빛을 반사해 주고 있었다. 붉은 긴 망토 사이 로 그의 허리에 달린 힐라토 소드가 눈에 들어왔다. 엘야시온 가디엘 자 신이 직접 자이온의 대 성전에서 수여한 것이다. 다른 한 손에는 입고 있 는 갑옷과 똑같은 재질로 만든 오픈 헬름(Helm)이 들려 있었다. 마악 정 규 훈련을 마치고 들어온 듯, 그의 흰 얼굴은 붉고 젖어 있으나 번들거리 지는 않았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세수를 하고 왔을 것이다. 잘 짜인 근육 질의 몸매. 희미하게 풍기는 땀 냄새. 젊음. 생동감 있게 내딛는 발걸음...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런 그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겉으로 만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그런 실체(實體)는 언제나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언제부터일까... 그는 어느 새인가 루온 루파르테 또래의 젊은이들을 보면 문득 끝없는 상실감과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다. 신에게 영원한 젊음을 받은 그가... 타인의 젊음을 보며 자신의 젊음 때문에 상실감을 느낀다. 이상하게도. "엘야시온 가디엘님, 거룩하신 엘의 대제사장의 부름을 받고, 저 힐라토의 프레미어 루이트 루온 루파르테 이렇게 당신 앞에 왔습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자신 앞에 숙인 갈색의 머리칼을 보았다. "아아... 그래. ...종자들을 훈련시키느라 힘들었을 텐데... 쉴 틈도 주지 않 고 불러서 미안하네." 루파르테는 고개를 들더니 침착한 얼굴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엘야시온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루파르테의 눈이 루 드랫의 눈 색과 같군. 하긴 둘은 외사촌간이니... 닮은 곳이 한 두 군데쯤 있더라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 가디엘은 루파르테에게 자리를 권했다. "거기 앉게." 루파르테는 엘야시온 가디엘에게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엘야시온 앞에 앉았다. 시종들이 루파르테의 오픈 헬름을 가져가고 분주하게, 그러나 익숙한 솜씨로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 왔다. 그리고 수 분 후... 엘야시온 가디엘은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모욕으로 생각했나? 내가 오늘 한 일에 대해?" 순간 루이티온 계급답게 별 표정을 담고 있지 않던 루파르테의 눈이 가늘 어지며 훗 웃음을 띠었다. "...아니오. ...오히려 엘야시온님께 감사드립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오랜만에 아는 자를 만나니 새로운 즐거움이었 습니다. 우리 기사단 어느 곳에 배치해야 할 지 처치가 조금 곤란하긴 했 지만, 엘야시온님의 명령이므로 최선을 다해 수행했습니다." 엘야시온은 차를 홀짝 들이켰다. "...그런가. 그거 고맙군." 그러더니 엘야시온은 그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래 위치는?" 루파르테의 얼굴이 한층 더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 며 대답했다. "뭐... 마구간으로 보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노테온 따윈 있어봤자 오히 려 사람들의 기분만 나쁘게 만드니까." 그 대답에 엘야시온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 그 후로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그들은 마노테온의 일을 이런 자리에서 계 속 화제로 올린다는 것은 품위나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이 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자들은 어떤가? 쓸만하던가? 자네 기사단은 이번 해만도 많은 가문 에서 지원자가 있었지? 아참, 그러고 보니 루온... 루카나안? 그 아이가 자 네 기사단에 있더군? 그 힐라토 명문의 아이 말이야. 왕족들이 많이 탐을 내던데.. 그 아인 원래 루온 루사벨라 쪽에 내정되어 있던 아이 아닌가? 그래서 난 시종일관 그 아이가 루사벨라 쪽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줄 알 았는데, 어제야 자네 기사단에서 훈련받는 것을 보았지." 루파르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했지만, 루카나안은 루온 루사벨라 파의 훈련방식 보다는 정통파 의 훈련을 받고 싶어하더군요. 정식으로 루온 루사벨라 쪽의 입문을 해지 하고 올만큼 의지가 강해 보이길래 종자의 모집 시기는 지났지만, 예외로 인정하고 이쪽으로 입문 시켰습니다." "흐응.. 그랬나?" 루사벨라 쪽의 방식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고..? 과연...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엘야시온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예외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정도였다니? 루카나안은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던가? 내년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만 하던가?" 루파르테는 조금 미소를 띠었다. "좋은 검기를 가진 아이입니다. 왕족들이 벌써부터 탐을 내는 것도 무리 가 아닙니다." "그래. 좋은 재목을 가르친다는 것은 즐거움이지." 그리고 또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엘야시온은 갑자기 두서없이 화제를 바 꿨다. "자네 영지에서는 예비병에 대한 무기 보급이 몇 퍼센트 정도인가?" 루파르테는 엘야시온이 갑자기 왜 이렇게 질문을 중구난방으로 하는 것인 지 이상했지만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마도... 처음 나눈 대화에 정신이 푹 빠져 있다가, 화젯거리를 찾아 느닷없이 나온 질문들이리라. 루파르테 는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약 44퍼센트 정도입니다. 최근, 보고 받은 수치이죠." 엘야시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너무 적군. 더 끌어올릴 순 없나?" 순간 루파르테의 굵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적다고? 겨우 예비병 따위 가 무기로 무장한 비율이 44퍼센트나 되는데? 엘야시온 가디엘님은 뭘 착 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정도 수치면 다른 영지와 비교해도 뒤질 것 없는 수치였다. 그나마 프레미어 루이트인 루파르테 자신 소유의 영지.. 비옥한 평원을 끼고 있어 풍요롭고 부유한 영지라 이 정도의 수치를 유지하고 있 는 것이다. 하지만 루파르테는 별다른 반박의 말없이 그냥 조용히 대답했 다. "기사단 휘하의 정규병이라면 몰라도, 마을 자위대로 구성된 예비병들은... 무기를 사는 데 돈을 아끼려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마물들의 출 현이 잦아진 덕분에 경각심을 갖고 무기구입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뿐이죠. 몇몇 녀석들은 아직도 무기 구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 다. 곡괭이나 삽, 도끼 같은 걸 구입하는 데만도 힘이 부치는 녀석들이 있 으니까요. 또, 무기라면 평소 때 손질하기도 힘든 짐밖에 안 되니까... 무 기를 구입할 바엔 차라리 농사기구를 하나라도 더 구입해서, 그것을 유사 시에도 써먹겠다는 자가 많습니다." "그런가?" "네. 별로 비난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엘야시온은 침묵했다. 루파르테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평범 한 농사꾼들이 자신들의 필수품을 제쳐두고 칼이나 갑옷 같은 사치품 구 입에 열을 올릴 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비병들의 훈련 정도는..?" 어지간히 화제가 없으신 것 같군. 본론을 너무 일찍 끝내신 건가? 루파르 테는 속으로 고소했다. "매주 세 번씩, 기사단에서 나가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 번 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마물 때문인지 요즘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더 군요. 덕분에 교육세 수입이 늘었습니다." 엘야시온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요즘은 몬스터들이 극성이란 말이야..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기사단에서 몬스터를 토벌하면 자위대는 거의 움직일 것도 없었는 데. 이젠 자위대의 큰 활약을 바래야 하는 때이니.. 게다가 이건 어느 세 계나 공통된 현상이야. 아마도.. 내 탓이겠지. 내 힘이 약해져서. 훗... 벨루 카 시기의 엘야시온이라니... 역사 이래로도 몇 번 없었지. 엘께서 내게 선 의를 베푸시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네들에게 짐으로 다가가는 것이니... 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루파르테는 거의 손대지 않은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스온 마리스님이 내후년에 은의 엘야시온이 되실 예정이니, 그다지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없이 쓸 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테지. 그럴거야..." 마리스가 엘야시온이 된다...라. 엘이시여... 그때 마리스와 세렌시스를 그 대로 내버려두었더라면... 가디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울하게 말했다. "...미안하네. 이야기 도중에 일어나다니. 갑자기 몹시 피곤하구만. 오늘 아 침엔 너무 일찍 일어나서... 난 좀 쉬고 싶네만.." 루파르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엘야시온님. 부디 편안히 쉬십시오. 당신의 쉼에 엘께서 함 께 하시기를..." 그 뒤에 이어진 인사는 서로간에 지루하고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라도 자꾸 되풀이하지 않으면 백 번 중에 한 번... 어쩌면 통 할지도 모르는 의미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엘야시온은 루파르테가 티 룸에서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옆으로 시종이 다가왔다. "침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잠깐 혼자 있고 싶네.. 여기 조금 있다가 침실로 가지." "네." 시종이 조용히 물러나자 가디엘은 다시 창으로 다가가 그 밖을 보았다.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수 십 번 수 백 번 생각을 되풀이하더 라도, 그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바로잡 으려 노력하는 것뿐. 이제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뿐. 엘 야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래서! 루온 루드랫!!" 그는 두 손으로 창틀을 꽉 잡았다. "루드랫... 네가 필요한 거다. 아피네스 때라면 도저히 어쩔 수 없었지만... 하...!! 마노테온...? 안돼! 절대로 널 그 마노테온과 맺어지도록 두지는 않 겠다!! 나 엘야시온 가디엘의 이름을 걸고!! 이제 곧, 하늘과 땅이 흔들리 는 일들... 전쟁... 성전(聖戰)이 일어날 테니까...! 거기엔 네가 꼭 필요하니 까...!!" 엘야시온 가디엘의 음성은 낮고, 단호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빠아아앙--- 여기저기서 퇴궁 시간을 알리는 쇼파르(양각나팔)의 소리가 들렸다. 이 시 간이 되면, 궁전에 거주하지 않는 자들과, 궁전에 출입이 자유롭지 않는 낮은 신분의 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 궁전에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유리궁전은 많은 손님을 맞아(그리고 앞으로 더 몰아닥칠 다른 세 계의 왕족들을 맞을 준비로) 사람들이 북적대고 몹시 분주해서, 이 쇼파 르의 소리는 일종의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유리궁전에 식료품이라든가 땔감, 기타 잡다한 것들을 대는 일일 잡역부라든지 드래 마 같은 '절대로' 궁전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마노테온에게는 유리궁전의 분주함과는 하등 상관이 없이 역시 당장 궁전을 떠나야하는 시간이다. 다 음 쇼파르가 울릴 때까지 남아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왕실 수비대에게 험 한 꼴을 당하게 될게 분명했다. "후우..." 드래마는 쇼파르 소리가 들리자 건초더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헛간 바깥의 우물로 나갔다. 거기엔 먼저 와 있는 마 구간 지기들이 있었는데 드래마를 보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피해버렸다. 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라, 드래마는 희미한 쓴웃음을 짓고 묵묵히 우물에 다가갔다. 그리고서 물을 길어 손과 얼굴의 먼지를 씻었다. 하루종일 건초더미를 날라서 얼굴과 손은 상당히 더러웠다. 다 씻고 났을 때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얼굴 닦을 것을 건네주면서 드래마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래마는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깊게 패인 주름살 사이로 드래마처 럼 마구간에서 일한 먼지가 박혀 있는 남자였는데 상당히 무뚝뚝한 얼굴 을 갖고 있는 자였다. 드래마는 수건을 받아들며 말했다. "...고맙군요. 호른." 아주 어린 나이서부터 루파르테의 집에서 말을 시중들었고, 지금은 젊음 을 다 바쳐 일한 그 실력을 인정받아 루파르테 집의 마구간지기장이 된 중년의 남자, 호른은 드래마가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는 것을 힐끗 바 라보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여기까지 와서, 이런 식으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드래마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자 이것.. 잘 썼습니다." 호른은 아무 말도 없이 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닌데다 사실 솔직히 뭐라고 할 말도 없었기 때문에 할 말이 있는 듯 입 을 벌리다가도 그냥 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물을 것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내일도 오시는 겁니까?" "네. 아마도." 그 말에 이맛살을 찌푸린 호른은 겉옷을 입으러 가는 드래마의 뒤를 묵묵 히 쫓아가다가 불쑥 말했다. "...마구간에서 건초더미 나르고, 말들의 오물을 청소하는 일들이 그리우셨 습니까?" 아마 호른을 잘 몰랐다면 그의 이 말이 하도 평이해서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드래마는 피식 웃음 짓고 대답했다. "글세.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하루종일 일하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호른은 드래마가 농담으로 그의 말을 받아넘기자 뭐라고 혼자서 중얼댔 다. 드래마는 옷을 다 갖춰 입고 뒤로 돌아섰다. "자. 내일 뵙겠습니다. 호른. 엘야시온님께서 두 달간이라고 하셨으니 아 마도 당신이 여기 있는 내내 같이 일하게 될 것 같군요." 그 때 갑자기 호른이 말했다. "루온 루사... 아니, 도련님! 가서, 제발 엘야시온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당신의 말 한마디면...! 제기럴... 좋습니다.. 주제넘지 않다면 한마디하겠습 니다. 전 지겹단 말입니다. 당신과 같이 일하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고민을 해야 한다니!!! 20년이나 지났는데...! 아니 그 보단...!! 제기럴! 어 릴 적 내게 와서 말을 내놓으라고 호령하던 도련님은 도대체 어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52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26 23:15 읽음:271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6회, 제 32막. 엘야시온 가디엘이 생각하는 것들.(2)> "호른! 네가 마노테온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지 잊었다니, 놀랍구나!" 호른은 그 목소리에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드래마 또한 인상을 쓰며 창고의 입구를 보았다. 거기엔 한 남자가 검은 색과 붉은 색조의 갑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루, 루온 루파르테님...!!" 루파르테는 옆에 있는 다른 마구간 지기에게 명령했다. "채찍을 가져와라!!" "네, 넷!!" 험악한 분위기에 질린 그 마구간 지기는 잽싸게 채찍을 가져왔고, 가져온 채찍을 받아든 루파르테는 천천히 그것을 펴더니 세차게 호른을 후려갈겼 다. "아악--!!!!" 비명과 철썩거리는 소리가 대 여섯 번 가량 건초 창고 안에서 울리고, 마 침내 루파르테가 흥, 웃으며 채찍을 거둬들였다. "알았나? 이것이 마노테온을 다루는 법이다. 쓸데없는 고민이 떠오르거든 앞으로는 이 순간을 떠올리도록. 앞으로 다시 한 번 더 이 마노테온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난 네가 나이가 너무 들어 말 다루 는 것까지 잊었을 것이라 간주해 널 당장 내 집에서 쫓아내겠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린 덕분에 얼굴엔 처음의 채찍 자국 외엔 그다지 상처 가 없었지만, 손에는 뱀이 지나간 것처럼 빨갛게 흔적이 남아 피가 흐르 는 호른은 몸을 떨었다. 옷에 솔기가 터진 것을 봐서 몸에 채찍 자국이 남았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아, 아, 알겠습니다. 루, 루온 루파르테님.. 요, 용서를..." "당장, 여기서 나가 내 말을 끌고 와라! 오후 산책을 가겠다!" "네, 넷!!!" 그러더니 호른은 피 흐르는 것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창고에서 뛰어나갔 다. 다른 마구간 지기들도 호른을 도울 생각인지 쫓아 나갔다. 그래서 창 고 안에는 오직 드래마와 루파르테만이 남았다. 그러자, 루파르테는 비웃 음을 띠더니 길게 늘어진 채찍을 말아 쥐고 드래마에게로 뚜벅뚜벅 다가 왔다. 드래마는 호른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그냥 외 면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 다. 루파르테는 다가와 채찍으로 그런 드래마의 턱을 들어올렸다. "...오늘 일은 어땠나? 적성에 맞던가?" "..." 드래마가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자 비위가 상했는지 루파르테 는 채찍으로 드래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윽..!!!" "건방진 자식. 감히 루이티온이 말하는 데 눈을 내리깔아? 20년 동안 간 덩이가 커졌나 보지? 마노테오나에서만 살더니, 상류계급에 대한 예의를 잊은 건가?" 굉장한 힘... 채찍으로 후려치는데 잠시 멍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바리스 에서 그 마부에게 맞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래서 그런지 드래마 는 자신과 똑같은 색의 눈으로 적의에 불타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이 이상 하게 낯설었다. 디트마에게 가끔 이야길 듣고, 20년 전의 기억이 있긴 했 지만... 그리고 오전에도 잠깐 봤지만, 그의 얼굴이 이랬었나...하고 감탄까 지 하는 수준이었다. 뭐랄까, 기억과 눈에 보이는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다고 할까... 드래마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루온 루파르테'라고 쓰여진 부분의 책장이 사락 거리면서 넘어가는 소릴 들은 것 같았다. 순간 드래 마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이상하군. 왜 내게 이렇게 적의를 불태우는 것이지? 파르테? 난 이제 더 이상 너의 적수가 되지 못.." 여기까지 말했을 때 드래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맙 소사!!! 루파르테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드래마는 자 기 자신을 욕했다. 이런..!! 바보 같은...!! 잠깐 어떻게 된 것일까..? 드래마 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져서 말을 못하고 서 있는데, 루파르테의 얼굴 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는 손을 들어 드래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철썩--!!! 그 파동으로 드래마가 비틀거리는데 루파르테가 소리쳤다. "무릎을 꿇어라! 마노테온 드래마! 상류계급에 대한 엘의 명령을 읊어 라!!!" 하는 수 없이 드래마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 채 피 맛이 느껴지는 입으로 띄엄띄엄 그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계급은 계급 위에 있고, 엘의 명령은 지고한 질서 가운데 순환합니다." "그 다음은?!" "당신들이 우리를 엘의 선의와 은혜로써 돌보시는 것처럼, 우리는 당신들 을 엘을 섬기는 것처럼 섬깁니다... 그것이 엘의 원칙입니다." "그 다음!!!" "그러므로... 신의 명령에 따라 분부대로 저, 제6계급 마노테온 드래마는 제4계급 루이티온께 절대 복종합니다..." 철썩-!!! 또 한 번의 채찍질이 날아왔다. 이번의 것은 아까 것보다 여파가 커서 드 래마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땅을 집었다. 그걸 보며 루파르테가 이 를 갈더니 말했다. "방금, 그 법칙을 잊지 말아라. 마노테온 드래마.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는 거야. 주제넘게 굴지마." 아마도 이 법칙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드래마가 마노테온이 된 후 로 이 법칙을 처음 읊은 것은 루파르테 앞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결코 쉽 게 잊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드래마가 '마노테온'이 라는 신분에 따른 모멸을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잘 알 고 있었다. 루파르테가 말했다. "흥!! 여기가 자이온이나 힐라토가 아니라는 게 아쉽구나. 드래마. 널 이 렇게 편한 자리에 둬야 하다니.. 넌 오물과 잘 어울려. 2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너를 또 돼지치기로 돌리면 어떨까? 그때는 돼지들과 진창에서 같이 뒹구느라, 네가 돼지를 치는 사람인지, 돼지가 너를 친척으로 받아들 인 것인지 구분이 안 가더군? 쿡.. 어때? 지금은 잘 할 수 있을 거 같나?" "...!" 드래마가 그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본 루파르테는 웃음을 흘렸 다. "...아니지. 그러고 보면 네가 있던 마노테오나 자체가 돼지우리와 다를 바 없잖아..? 지금 너를 돼지치기로 보내면 예전보다 돼지들이 한 층 더 널 반겨 주겠군..! 그때 그 돼지들이 호른처럼 널 기억하고 있을 것 같나? 응? 드래마? 푸하하하...!!" 루파르테의 말에 드래마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돼지들의 수명은 20년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 ...썰렁함이 건초 막사 안에 감돌았다.(이것은 바깥날씨가 특별히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루파르테는 말문이 막혔다. 비꼬는 말도 아니고, 특 별히 화가 나고 분해서 하는 말이 아닌, 그냥 담담히 사실을 말하는 톤... 그래서 루파르테는 더더욱 할 말을 잊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반항하거 나 비굴하게 굴었다면, 더욱 철저히 밟아 줬겠지만.. 이런 말엔 어떻게 대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선 것이다. '지금 나랑 돼지 수명 따지자는 거야? 내 가 널 비웃고 있다는 것도 몰라?!'라고 또 채찍으로 내리친다는 것도 왠 지 자존심이 상하고... 비꼬는 게 아닌 줄 아는데도 '네가 지금 나를 비웃 는 거야?!'라고 말하며 억지까지 쓰며 채찍으로 내리치고 싶은 마음도 들 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 돼지 수명이 그렇게 짧았나..?'라고 말하며 다 른 화제로 넘어간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때 문득 루파르테는 왜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드래마 놈하고 이러니 저 러니 말을 주고받는 것인가 회의가 들었다. 드래마의 말대로 이제 그는 더 이상 루파르테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클로니아로 오면서 자신 의 옛 사촌이 지금이라면, 그야말로 그다운 한심한 짓을 그만두고 자기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올 것인가.. 궁금하긴 했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앞에 선 옛 사촌은 지금도 마노테온의 모습이었 다. 허탈했다. 뭐, 예전에 그가 했던 행동들이라든가, 힐라토 레이서스님에 게 했던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분노가 복받치는 건 사실이지만... 드래마는 그 대가를 처절하게 받았다. 거기다, 집요한 건 루파르테의 취향 이 아니니까... "흥!! 상대할 가치도 없는 녀석!" 루파르테는 이렇게 코웃음 치며 채찍을 창고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 고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마노테온 드래마! 같잖은 착각은 하지 말아라... 내가 널 '적수'로 생각해 서 널 상대한 게 아니다. 내가 적의를 불태운다고? 그렇다면 그건 아마 네가 했던 과거의 행동들 때문일 것이다. 일어서!" 드래마가 일어서자, 루파르테는 그의 앞에 다가가 그야말로 '적의로 불타 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 찌 르며 말했다. "드래마, 넌 아주 운이 좋은 놈이다. 그 추잡한 기억을 모조리 다 잊어버 렸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너 같은 놈 뇌리에 힐라토 레이서스님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 자체가 모욕이니까.. 난 그 분을 위해서 네 머리통 떨 구는 일 따윈 눈 깜짝도 안하고 해치웠을 테니까..!" [힐라토 레이서스님..? 스온 아피네스님의 동생이자, 힐라토의 파이오니 온..] 드래마는 그의 이름이 자신과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것을 몇 번들은 적이 있었다. 당연했다. 드래마는 원래 그의 개인 루이트.. 그러니까 힐라토, 다 음 대의 프레미어 루이트로 내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스온 아피 네스님에게 더욱 더 강한 영혼의 공명을 느꼈기에... 그런데 추잡한 기억 이라니..? 드래마의 얼굴이 점점 의혹의 빛을 띠는데 그것을 모르는 루파 르테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적의에 불탄다고? 하... 웃기고 있군! 과거, 복수와 질투 같은 것들 로 완전히 미쳐버린 쪽이 누구였는데-!!" "...네? 복수... 질투...?" 드래마는 마침내 그렇게 물었다. 그런 소리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너무 생소한 말들... 마치, 루온 루파르테의 얼굴과 같은... 드래마가 이상 하다는 눈으로 루파르테를 보는데, 그걸 본 루파르테의 눈이 일순 주춤했 다. 자신이 너무 쓸데없는 말까지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 런 루파르테의 기색까지 감지한 드래마가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루온 루파르테님..?" 루파르테는 입을 꽉 다물었다. 제길...! 내가 무슨 소리를...!! 외면하고 싶 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서로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그때 그들 뒤에서 호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 루온 루파르테님, 마, 말을... 레드스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말에 긴장됐던 분위기 쨍하고 깨지고 말았다. 드래마는 실망했고, 루파 르테는 어느 정도 안도감을 느꼈다. 루파르테는 건틀릿 속에 손을 넣어 거기서 네모난 패를 꺼내 드래마의 발치에 내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루이 티온다운 무표정으로 돌아가 억누른 소리로 말했다. "가져가라. 엘야시온님의 시종이 내게 건네주더군. 흥! 도서관 출입증이라 니! 머리가 정말 완전히 돌아버리기라도 한 모양이군! 책 따위에 파묻혀 세상을 잊어버릴 생각인가? 멍청한 녀석!!" 드래마는 입술을 깨물고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창고를 나가는 루파 르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온 루파르테님,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방금 한 말씀은..?" 이런... 나도 시나를 닮아 가는 것인가.. 끈질기군. ..이라고 생각하며 스스 로 웃은 드래마였지만, 역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 대한 정 보는 어떤 것보다 큰 유혹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도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낱말들의 조합임에야, 궁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파르 테는 그의 말에 잠시 멈춰 섰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할 듯 했지 만 드래마의 눈길에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어. 다름 아닌 내 주군의 명예에 관련된 일 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지금 당하고 있 는 고통은 다 네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라는 것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루파르테는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사라져 버렸다. 루파르 테는 드래마를 싫어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붉은 망토만큼 분명했다. 하 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드래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것을 들어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눌렀다. [아니, 하지만 그는 힐라토의 프레미어 루이트이다. 증오할 이유는 다 사 라졌다. 그가 이겼다. 그런데 왜..?] 그때 드래마는 사실을 한 가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까지도 루파르테가 왜 자길 싫어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모르 고 있었다. "좀처럼 안 돌아오네. 언니." "쳇. 이 내가 모처럼 이렇게 수고해가며 기다리고 있는데..." 샤일라테는 거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불만 어린 소리를 했다. 아마사 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샤일라테에게로 향했다. "근데, 언니 이 사람들, 너무 조용하네. 정말 그냥 잠든 것 맞아?" 아마사의 그 말에 샤일라테는 자신들 옆에 앉혀 놓은 남자와 여자를 흘끗 보았다. 얼굴 색.. 정상. 샤일라테는 손을 들어 여자의 코앞에 대었다. 호 흡... 정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으로 여자의 목덜미를 만졌다. 맥박도...정 상. 샤일라테는 손을 거두고 간단하게 말했다. "약효 잘 듣네. 정상이야. 이 내가 만든 것인데 잘못되는 게 이상한 거 지." 그들 앞의 탁자에는 찻잔이 네 개 놓여 있었다. 마침 티타임을 시간에 샤 일라테와 아마사는 이곳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 친절한 부부는 샤일라테 와 아마사에게도 차를 대접해 주었다. 맨 처음 샤일라테가 라단의 하스피 틀을 찾았을 땐 샤일라테와 아마사의 방문에 여자가 나왔었다. 샤일라테 는 방긋 웃었고, 질문은 간단했다. '저어.. 죄송합니다만... 혹시, 이곳에 회색 눈과 검은머리를 가진 마노테 소녀가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자가 대답하자, 샤일라테는 교묘한 손놀림으로 준비해둔 환각제 를 슬쩍 여자의 코앞에 뿌렸다. 여자는 당연히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샤일 라테와 아마사가 과장스럽게 여자를 부축하는 소리에 그녀의 남편이 현관 으로 나오자 그에게까지 부인과 똑같은 환각제를 뿌려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이렇게 어지러운지 이상해 하며 손님을 거실로 안내했을 때, 그들이 잠들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이나 이렇게 기다린 것이다. 샤일라테는 혀를 쯧 찼다. 그리고 벌떡 일어 났다. "도저히 안되겠군. 조금만 있으면 마지막 쇼파르가 울릴 거야. 응급처치를 했다지만 왕녀의 상태도 한 번 더 봐야하고... 게다가 오늘밤에도 파티가 있을 테니. 아쉽지만 할 수 없지." 하지만 아마사는 머뭇거렸다. "왜..? 특별히 허락 받고 나온 거니까. 갈리킬리움의 시간 전까지만 들어 가도 되지 않을까? 이왕 온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언니. 나는 몹 시 궁금하거든. 우리 보호물의 종속자가 어떤 여자일지. 결혼까지 할 지도 모른다고 해서 무척이나 놀랐거든. 사실인가 확인도 해 보고 싶고. 시장에 갔다고 하니까 금방 돌아 올 거야. 여기 이 아저씨도 그랬잖아. 마노테온 이라 혼자서 시장을 보는 건 무리일테니, 길만 헤매지 않는다면 금방 돌 아올 거라고.." 샤일라테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아마사를 내려다보았다. "쯧쯧.. 정말 넌 못 말리겠구나. 갈리킬리움의 시간? 바보같이... 쇼파르가 울릴 시간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궁전에 갔던 우리 보호물 이 이곳으로 돌아올 시간이잖아. ...뭐 네가 보호물을 만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지만, 아버지의 명령도 없는데 보호물과 함부로 접촉한 것에 대해선 너 스스로 변명거리를 생각해 놓도록 해." "아... 그런가..?" 아... 그런가..? 참.. 나. 샤일라테는 또 한 번 혀를 차고, 자신의 진한 남색 후드를 걸쳤다. "어차피, 이 게임은 내가 이긴 거야. 보호물의 종속자는 내가 가져야지. 가는 길에 도비온에게 들려서 조금 약올려 주고 갈까? 너도 같이 갈래?" 아마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도바 오빠에게 가는 거야? 응. 나도 갈래. 아주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보고싶어." [끼리끼리 논다는 속담은 절대 틀리지 않는 말이란 것을 여기서 알 수 있 지.] 이렇게 심술궂은 생각을 한 샤일라테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아마사를 재촉했다. "자, 어서 일어나! 우나 일루테오난지 뭔지, 교통도 불편해서, 마차 길까지 걸어가려면 또 진창을 헤치고 나가야 할 것 같으니까." 자신의 후드를 집어 있던 아마사가 그때 깜박 잊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언니..! 우리 갈 때는 마차 불러서 타고 가자. 진창길은 이제 지겨워." 샤일라테는 인상을 썼다. "뭐? 마차? 무슨 마차?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 못 봤어? 너무 좁아서 마차 따윈 들어오지도 못 한다고." "으응.. 하지만 아까 나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앞 쪽 길을 보니까, 마 차가 왔다 갔다 하던데..?" 샤일라테는 아무 말 없이 또박또박 앞 문 쪽으로 걸어서 직접 자신의 눈 으로 아마사의 말을 확인했다. 과연... 그랬다. 앞 문 쪽의 길 위로 마차 한 대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거기까지는 별다른 불만 없었다. 하지 만... 샤일라테는 서서히 자신의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마사. 이런 길이 있는데 그럼 아까 우리가 궁정에서부터 타고 온 마 차가 왜 우릴 그따위 진창길에 집어던지고 갔는지 네가 한 번 말해 볼래? 마차를 잡은 게 너고, 행선지를 말한 게 너니까 무슨 할 말이 있겠지?" 그랬다. 샤일라테는 나오기 전에 스온 아피네스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주위를 정리하면서... 하도 아마사가 같이 가자고 졸라서 짜증이 나, 그럼 여기서 내 옆에 붙어 앉아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가서 마차나 잡으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아마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세 모르겠어. 나는 단지 우나 일루테오나로 가는 가장 빠른 길... 그러 니까 지름길로 데려다 달라고 했을 뿐인걸. 아저씨가 그 길로 우릴 데려 다 준 걸 어쩌겠어? 샤일라테 언니 너무 그 아저씨에게 화내지마. 아마 그 아저씨 뭘 잘 몰랐나봐." 글세 화를 내고 안 내고야 내가 판단할 문제고.. "아마사... 그러니까 지름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고?" "응. 언니가 빨리 다녀와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말이야, 너 솔직히 말해봐. 거기서, 너 '우나 일루테오나 힐러 라단 의 집'이라는 말은 꺼내기나 했니?" 아마사는 잠시 앉아 있다가, '아!'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빼먹었네. ...어떡하지?" "..." 샤일라테로선 더 이상 화낼 기운도 없었다. 아마사, 이 맹한 애가 말했다 고 진짜 지름길로 데려다 준 마차꾼도 그렇고 아마사도 한없이 짜증나는 존재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어쩔 것인가? 마차꾼은 이미 없어졌고, 아마사 는 언제까지나 저렇게 살 것인데? 어떻게든 참고 견디는 수밖에. 문득 샤 일라테는 앞으로 아마사와 헤어질 날이 무척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흑흑... 어떡하지...] 시나는 돈을 잊어버리고, 어떡할까 고민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산 것이라고는 겨우 식료품과 비스킷 뿐. 약초 같은 것은 하나도 구입하 지 못했다. 그 여자 소매치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혹시나 잡을 수 있을까 해서 시장바닥을 샅샅이 돌아다녔지만 전문으로 하는 꾼 같던 데 시나가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짐을 든 팔만 무거웠다. [흑... 정말 너무해. 어떻게 나한테서 돈을 털 생각을 하지? 그것도 쿠키까 지 홀랑 훔쳐가다니. 정말 이 놈의 세계는 소매치기도 하나같이 맘에 안 들어. 흑흑...] 심부름을 제대로 못하고 돈까지 잊어 버렸다고 생각하니, 라단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어졌다. 그래서 우나 일루테오나 쪽으로 갈수록 점점 발 걸음이 느려졌다. [하아.. 어떡하지. 하아... 하아...] 시나가 이렇게 한숨을 푹푹 쉬면서 걷는데, 옆으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갔 다.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갑자기 그 마차가 시나 앞에서 멈췄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그것을 쳐다보는데, 마차 문이 열리고 거기서 생각도 못 했던 드래마가 나왔다. "시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드래마!!" 시나의 얼굴이 반가움을 띠었다. 자신의 이 처량한 처지를 도와줄지도 모 르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시나는 드래마에게 달려갔다. 드래마는 시나 의 손에 들린 짐과 시나의 얼굴을 보았다. "왜, 너 혼자 바깥에 나와있는 거야? 그 짐은 뭐고?" 드래마는 조금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마노테온... 그것도 시나 같은 여자 마노테온이 남편이나 주인 없이 혼자 제일로트를 걷다가, 수도 경비대 같 은 자들에게 재수 없게 걸려 발각되면 어떤 일을 당할 지 모른다. 아무리 긴 모자를 푹 눌러써서 머리카락 길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가끔 경비대들은 검문이라며 그런 모자를 쓴 사람들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어보 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더구나, 마우르코트 같은 경우는 키르마 때문에 마 노테온 수색령까지 내려졌는데... 그 공문이 제일로트까지 적용될 확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위험한 것은 위험한 것이다. 최선이 경비대들의 희롱 을 받으며 조사를 받기 위해 끌려갔다가 풀려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도시의 빈민굴... 부랑아들과, 매춘부, 주정뱅이, 인간사냥꾼들의 소굴로 던 져질 수도 있다. 사람을 그런 곳에 팔아 넘기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어쨌든 마노테온에게까지 법이 적용되길 바라는 건 무리이다. 그러니 이 렇게 멋대로 돌아다니면 곤란하다. 한편 시나는 반가운 마음에 드래마에게 달려가다가 드래마의 얼굴에 화난 표정이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순간 머리에 스쳐지나간 생각은 '어떻게 드래마가 나 돈 잊어버린 줄 알고 화내는 거지?'였는데, 곧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렇다면 도대체 왜 화내는 것일까 쭈뼛거리며 그 에게 다가갔다. 드래마는 그런 시나를 보며 인상을 쓰더니, 마차에 다가가 마부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마차를 몰아 사라져버렸다. 마차가 사라지자 드래마는 이제 자신 앞에 서있는 시나를 보며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왜 너 혼자 길거리를 다니는 거야?" 시나는 죄 지은 표정을 짓고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라 단이 써준 종이까지 보여주며, 돈을 도둑맞아 정작 필요한 약초는 사지도 못했다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드래마의 얼굴은 기 묘한 표정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는 말했 다. "라단님이 네게 장을 봐오라고 했다고? 그것도 이런 종이 쪽지와 돈만 달 랑 주고?"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아... 뭐 그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시장에서 돈만 도둑맞 지 않았어도.. 이제 어떡하죠?" 드래마는 잠시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시나. 라단은 네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알아?" 시나는 눈을 찌푸렸다. "글세. 내가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아마 알고 있겠죠. 그러니까 심부름 시켰을 거 아니에요? 드래마가 말 안 했어요?" 당연히 말 안 했다. 헌데 도대체 라단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시나가 글을 읽는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이런 심부름을 시키다니..? 드래마는 시나가 건 네준 종이를 살폈다. 디트마 덕분에 눈에 익숙한 식물의 이름들이었다. 하 지만 약초를 사오는 심부름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약초 고르는 것은 힐 러의 큰 일 중 하나로, 절대로 이렇게 함부로 남에게 심부름 시켜 사오지 는 않는다. 약초는 직접 캐는 것이 가장 좋고, 정 그럴 형편이 안 된다면, 시장에서 사더라도 직접 가서 한 뿌리, 한 포기 신중하게 골라서 사야한 다. 뿌리나 잎사귀의 형태에 따라 약효가 여러 가지로 차이나는 것이다. 당연히 그건 상당한 눈썰미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 약초 고르는 것이 그 렇게 쉽게 된다면, 누구나 힐러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초기에 드래마가 얼음의 숲에서 기껏 힘들게 캐온 약초들을 거의 다 버리며 디트 마가 해 준 말이었다. 지금처럼 쓸만한 약초를 캘 수 있기까지 드래마도 많은 훈련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드래마는 그 종이들을 보다가 그것을 자신의 외투 호주머니에 넣었다. 라단이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 듯도 했다. 아마, 라단은 시나가 정말 장을 봐오길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자." "어딜요?" "시장으로, 약초들을 사러." "네에?"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52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26 23:15 읽음:282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7회, 제 32막. 엘야시온 가디엘이 생각하는 것들.(3)> 시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칠칠맞지 못하게 정신을 놓고 다니다가 돈을 잊 어버렸다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드, 드래마.." 이렇게 말하며 고마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드래마를 보는 데 그제야 시나 는 드래마의 얼굴에 상처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나는 깜짝 놀랐다. "앗! 드래마, 얼굴이 왜 그래요? 누구랑 싸웠어요?!" 드래마는 대답하기 싫은 것을 시나가 묻자, 대답을 안 했다. 그 대신 시나 옆으로 성큼 걸어나가며 말했다. "긁힌 거야. 빨리 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시장이 파할 거야." "드래마, 잠깐만요!!" 시나는 짐을 다른 손에 바꿔 쥐고 낑낑대며 드래마를 쫓았다. 그 모양을 보던 드래마는 뚜벅뚜벅 다가와 시나의 손에서 짐을 가로채 갔다. "정말, 데리고 다니기 뭐할 정도로, 느려서.. 쳇." 짐을 묶은 끈 때문에 손가락이 아프고 시리고 빨갰던 시나는 얼굴도 붉혔 다. [윽! 그래, 나 느려 터졌다! 그래서 소매치기한테도 당했다!! 윽윽..!! 분하 다!! 친구라고 해 놓고, 위로한마디는 해 주지 못할망정 너무하잖아!!!] 아무도, 소매치기 당한 것으로 시나에게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는데, 괜히 스스로 찔려서 그렇게 분해하는 시나였다. "아니, 아니! 호문클로스! 저것 좀 봐! 왜 또 시나가 시장으로 되돌아가 지? 그리고 저 남자는 누구야?" 셰리카는 건물 모퉁이에 뒤에 숨어서, 자기 옷 속에 있는 호문클로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특별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므로 호문클로스 가 대답을 안 했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대신 셰리카는 장갑으로 감 싸인 손을 입으로 가져가 물어뜯었다. "아후~! 또 시장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시장엔 이드넘들이 아직도 있 을지 모른다고~! 계속 숨어 있다가 겨우 시장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아 쫓 아 왔더니~~ 또 그리로 들어가네!!" 그랬다. 셰리카는 지금까지 호문클로스를 통하여 시나의 동정을 살피며, 뒷골목에 숨어있었다. 그렇게 음침한 곳에 있으니 괴로운 기억들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지만 일단 몸을 움직이니, 그런 괴로운 생각들 보단 시나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나가 있어야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셰리카가 지금 믿을 것은 그녀뿐이었다. 해서 그 녀는 심각하게 망설였다. 그냥 또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시장에서 나오면 쫓아갈까? 아냐... 그러기엔.. 셰리카는 아까 남자와 친한 듯 이야기하던 시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도 못했어. 시나도 이 세계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혹시.. 시나도 나처럼...] 셰리카의 머릿속에 갑자기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만약 시나가 자신처 럼 이제는 저쪽 세계에 대해 희미한 기억밖에 갖고 있지 않고, 자신이 시 나의 이름도 잊어버릴 뻔했던 것처럼, 셰리카 자신을 잊어버렸다면... 갑자 기 셰리카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그런 건 싫어!] 결국 너무 큰 불안감 때문에 셰리카는 시나를 쫓아가기로 결정했다. 위험 하긴 했지만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 이드넘들도 돌아갔을지 모른다. 설사 아직 돌아가지 않았더라도 아주 조심하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다. 그 렇게 결정이 나자, 셰리카는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시나와 남자의 뒤 를 미행했다. 주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걷는 폼이 목적지가 정해진 것 같았다. 계속 뒤를 쫓던 셰리카는 그들이 약초 골목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시나를 본 데가 이곳이었지.] 셰리카는 시나와 남자가 한 가게에 들어간 것을 보고 기다리며 그렇게 생 각했다. 도대체 시나가 이런 약초골목에 왜 온 것일까? 저 남자는 힐러일 까? 나는 이 세계에서 호문클로스 단의 후계자, 티토우의 딸이라는 신분 이었지. 나쁘진 않지만, 이곳의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어. 괴롭거든. 난 저 쪽 세계의 내가 훨씬 더 좋아. 그럼, 시나는 어떨까? 시나의 신분은 이 곳 에서 뭐...? ...여기까지 생각한 셰리카는 그제야 자신이 시나를 어떤 경로 로 찾아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자, 잠깐. 그러고 보니, 이드넘이... 마노테온... 마노테온이라고..!! 설마..!!!] 셰리카는 어이가 없어서, 지금 막 가게에서 나오는 시나를 쳐다보았다. [시나가 마노테온이라고?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런..!! 마노테온 따위는 저 주받은 족속이고, 형편없는...!] 사실, 셰리카는 지금까지 마노테온을 많이 본 적도 없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지만, 소문은 종종 들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마노테온은 어 쩜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 세계의 엘프와 같은 의사인종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네르세바의 작은 수호자로서 인간들과 계약을 맺 고, 왕족들과도 혼인을 하며 도움을 준다면, 마노테온은 그와는 달리 능력 이 너무 형편없고, 혐오감을 준다는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나가 그 런 마노테온이라니!! 절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드넘이 요구한 것은 마노테온 소녀이고, 호문클로스가 찾아낸 것은 시나가 아닌가..? 셰리카는 시나와 남자의 뒤를 쫓으며 혹시 시나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 지만 역시 긴 모자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셰리카는 급히 기억을 더듬었 다. [잠깐, 잠깐.. 저쪽 세계에서 시나의 머리색은 어땠지? 그리고 길이는...?] 기억을 짜내던 셰리카의 얼굴이 절망으로 덮였다. [아.. 기억이 나지 않아! 왜..?! 매일 보던 얼굴인데..] 이상했다. 저쪽 세계에서 자신의 외모는 그대로, 분홍색의 머리칼에 보라 색 눈이었던 것 같지만... 사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셰리카는 시나와 남자가 또 다른 가계에 들어가자 또 몸을 숨겼다. [이해가 안가. 정말로. 그러고 보면 이드넘은 왜 시나를 찾는 것이며..] 이드넘의 말투라든지 분위기를 기억해보면 절대 좋은 이유로 시나를 찾는 것 같진 않았다. 그 피투성이 옷이 그걸 증명해 준다. 그러니 이드넘이 찾 는 사람이 시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본능적이긴 했지만 그 길로 도망을 친 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잽싸게 임기응변한 덕분 에, 지금 시나 뒤에는 이드넘의 부하들 같은 건 보이지 않으니까... 이드넘 은 아마도 시나가 자신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넘어간 것 같았 다. 그렇다고 해도, 시나의 얼굴을 보고도 그대로 지나쳤다는 건, 이드넘 도 예전엔 한 번도 시나의 얼굴을 못 봤다는 이야기고.. 그런데, 왜 이드 넘은 그렇게 전혀 모르던 사람인 시나를 찾는 것인지..? 그것도 네르세바 인인 이드넘이 이 곳 클로니아까지 와서.. 응? 아니, 그러고 보면 셰리카 자신은 네르세바로 떨어졌는데, 왜 시나는 하필 이 클로니아에 떨어진 것 일까...? 그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또.. [아..!! 그러고 보면, 난 시나의 얼굴을 알아봤는데..!! 시나는 날 보고도 아 는 척을 안 했어!!!!! 그건 왜 그런 거지?! 서, 설마! 아까 불길한 예감대로 정말 날 잊어버린 건..? 설마, 설마, 설마..!!!] 거기까지 생각한 셰리카는 갑자기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윽!!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 으윽!! 아이고 머 리야!!! 티토우의 딸은 이런 골치 아픈 생각 따윈 안 하는 건데!! 으으.. 무리했다!!" 그렇게 잠시, 과도한 노동으로 과부하가 걸린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 던 셰리카는 좀 진정이 되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 주먹을 쥐고 굳 은 결단을 드러내며 말했다. "에익!! 몰라!! 내가 언제 생각하고 행동했나!! 일단은 시나를 쫓아가자!!!" 그리고 셰리카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아까 시나에게서 가져온 쿠키를 하나 꺼내 우물거리며 먹으며 시나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지!!"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셰리카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고 있었 다. [어휴~!! 약초 가게를 도대체 몇 군데나 가는 거야! 그냥 한군데서 다 사 면 될 것 같고!! 아이 참!!] 마침 그때, 셰리카의 짜증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남자와 시나가 약초골목 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약초냄새를 원래 안 좋아하는 셰리카는 약초냄새 진동하는 골목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그들을 쫓았 다. 과연 그들은 아까 들어왔던 시장 입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입구 근처 에 이드넘 부하가 있을지도 몰라, 셰리카는 주위를 경계했다. 그런데 문 득, 멀리서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시나에게 뭔가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시나의 고개가 갸우뚱한 것이 보이고, 남자는 조금 웃더니 그녀를 데리고 다시 시장 안으로 향했다. [엣?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아이, 정말 잘도 돌아다니네!! 이번엔 어디 람?] 셰리카는 또 한 개의 쿠키를 씹으며 투덜거렸다. 시나와 남자는 이번엔 직물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렇게 약초를 잔뜩 샀으면서 도대체 또 무엇을 사려는 것일까, 셰리카가 고개를 쭉 내밀고 쳐다보는 데, 그들은 놀랍게도 한 가게에 멈춰 서서 길다란 리본 같은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 것은 셰리카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여관에서 나올 때 보니까, 길거리 여 기저기 나무마다 리본이 휘날리고 있어서 도대체 저 지저분한 것이 무엇 이냐고 이드넘에게 물은 것이다. 이드넘의 설명으론 '하누카의 리본'이라 는 것인데... 뭐, 네르세바의 '꽃관 행사' 비슷한 것인 것 같았다. 네르세바 에서는 꽃나무라든지, 과일나무에서 아깝게 떨어진 꽃들을 모아 아름다운 화관을 만들어 하누카의 날 즈음하여 나무에 장식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 이다. 클로니아의 것은 네르세바의 것과 비교하여 참 초라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는데... 시나가 저기서 하누카의 리본을 고르고 있을 줄이야...! 그 런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저런 하누카의 리본은 직접 만들어야 하 는 것 아닌가? 나도 내 나무를 잘 돌보았다가, 거기서 꽃이나 나뭇잎이 떨어지면 하나도 안 버리고 장식해 줬는데... 아마, 이곳도 여자의 정성이 직접 들어가야 하는 것일 것이다. 뭐, 남편 될 남자가 직접 선물해 준다면 상관없.. [...응? 남편..? 남편?!?!! ...허어억!!!! 설마!!!!] 셰리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시나와 남자를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시나와 남자가 뭔가 이야길 나누는데, 남자가 인상을 쓰고 시나가 투덜대 는 것이 보였다. 리본 고르는데 뭔가 이견이 있는 것 같았다. "아냐, 아냐, 아냐, 아냐. 그래!!! 시나랑 저 남자, 이번에 하누카의 날을 맞을 사람들 치곤, 하나도 안 다정해 보여!! 절대 안 다정해 보여!!! 그렇 지? 호문클로스?" 하지만 호문클로스는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많은 일을 무리하게 했으니,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셰리카는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 며 애써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것이 잘 안돼서, 셰리카는 또 땅바 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억지로 다짐하기 시작했다. [아냐, 절대루 아냐~!] 그리고 그런 다짐의 과정에 정신이 몽땅 팔려있던 셰리카는 덕분에 그들 의 이야기 소리가 가깝게 들리고서야, 그들이 자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윽!!] 셰리카는 황급히 얼굴을 숨겼다. 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처럼 사는 건데, 예쁜 색으로 사면 좋잖아요. 이게 뭐예요? 회색이라 니." "글세, 하누카 리본은 여자의 눈 색에 맞춰 사는 거라니까. 주인 아주머니 도 그러시잖아." "가끔은 관습을 과감히 타파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세.. 별로. 난 회색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에너지 들 여 타파하고 싶은 맘 없어. 시나, 너도 쓸데없는데 에너지들이지 말라고. 네 눈은 분명히 회색인데, 분홍색이나 초록색을 사고 싶다니. 사람들은 아 마도 네가 네 눈에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걸." "아우~~ 정말이지! 리본 색 하나도 마음에 드는 걸 못 고르고 눈 색 같은 거에 맞춰서 사야 한다니. 너무해. 투덜.. 투덜.." 한편 셰리카는 쭈그리고 앉은 채로 그런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는 시나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옆얼굴을 힐끗 보니, 선이 분명한 남자답고 잘 생긴 얼굴이었다. 어쩐지 분했다. [흐흑!! 시, 시나...! 너야말로 너무해..!! 시나가 나 몰래 남자를 사귀다니!!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맨날 나한테 말해 줘 놓고! 김제준한테 차인지도 얼마 안 지났으면서!! 으앙~! 시나 바보야~!! 으앙~!] 왠지 외톨이가 된 것 같아, 그들을 째려보며 울먹이는 데, 셰리카의 눈에 남자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흑흑.. 응? 저게 뭐지? 지갑인가? 지갑...] 남자는 거스름돈인 듯한 것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가죽주머니에 넣고 있 었다. 그때 지갑 안에서, 번쩍- 하며 탈란금화의 기운이 뻗쳤다. 그 순간 셰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머리를 굴 려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깐, 나 그러고 보니 돈 별로 없어. 아까 시나에게 빌린 게 조금 있긴 하지만... 그걸론 앞날을 대비하기엔 택도 없다구. 흐음...] 셰리카의 눈이 묘한 광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흐음...] 여기까지 왔을 때 이미 셰리카의 몸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셰리카는 움직이고 나면 생각이 따라오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셰리카는 조심스럽게 주변 지형을 정탐하기 시작했다. 무릇,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지형을 잘 이용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셰리카의 아빠 티토우는 부하들에게 누누이 말했던 것이다. (계속)================================================== 요즘은 '나의 지구를 구해 줘' 테마 음악과 '후시기 유기' 음악들을 듣고 있습니다. 일본어라 역시나 못 알아듣는다는 약점이 있지만... 나의 지구... 같은 경우는 만화와 ova를 봤던 적이 있어서 상상이 가히 갑니다. 감동이 야...TT 나의 지구..는 Ring의 테마음악이 좋고, 후시기 유기는 유귀의 테 마음악이 좋은데... 중국풍의 음악이 가슴을 울립니다.TT 그러나 저러나... 후시기 유기 음악들 갱장히 멋있다고 말했더니 여동생이 만화 18권을 전 부 빌려와 하룻밤 새에 다 읽으라고 해서 황당했습니다. 남동생은 부르드 워와 스타크래프트를 깔아주며, 열심히 연습 정진하여 자기 방학 때 배틀 한판 뛰자고 하더군요...--; 유구무언이었습니다..(할말을 잃었다는 뜻..--;) 불타는 슬라임 옆엔 그 불을 차근차근 꺼주는 친절한 동생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덕분에 터질 염려가 줄어들어 좋습니다.) <다섯 편 올리는 인간승리 한 엔...> ps...그런데.. 아무리 죽어라 써도, 200자 원고지 350매 정도...--;;; 나, 6월 에 정말 1 부 끝낼 수 있을까? ... ... ... ... ... ...;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죽어라 써도 안되면 7월 이내에 끝내기로 하자.(으쓱.)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60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6/30 18:45 읽음:283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8회, 제 32막. 엘야시온 가디엘이 생각하는 것들.(4)> [음... 좋아, 지금 적(?)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길을 걷고 있다. 목적지 는, 또 다른 곳으로 갈 확률도 많지만... 이제 시장이 거의 파할 때이니, 시장입구로 갈 확률이 더 많아. 목적지가 시장입구일 경우, 저들이 아까 갔던 길로 안 간다는 것은... 음. 그래. 이 시장지리에 능숙하다는 말이다. 즉, 지름길 같은 것을 잘 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곤란하다. 난 이 시장 지리를 잘 모르는데.] 셰리카는 고민했다. [결국, 잽싸게 채서 잽싸게 도망가는 수밖에 없겠군. 딴 길은 막히거나 해 서 위험할 수 있으니까, 역시 왔던 길을 돌아와 아까 그 뒷골목으로 도망 가야지!! 거기다 지형에 이점이 없는 지금, 방어막을 잘 활용해야지! 그건 역시 사람이 몰려 있는 곳 뿐이야. 사람들이 남자가 뒤쫓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해 줄 거야.] 이드넘 때처럼 말이지. 후후... 탈란 금화가 들어있는 가죽주머니의 환영아 래 셰리카는 조금 전까지도 전혀 발휘하지 않던 탐구력과 논리력을 발휘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반짝반짝 생동감에 넘치고 눈은 줄곧 남자와 시나에게 향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으로 시나와 남자 가 다가간다. 셰리카도 아까보다 발걸음을 빨리 해서 점점 시나와 남자에 게 다가갔다. 저쪽에 모인 사람들은 마지막 흥정을 벌이고 있는 듯, 여기 까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셰리카는 남자의 옆구리를 보았다. 남자는 어지간히 멍청한지 가죽 주머니를 옷 속에 집어넣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 었다. 품속에 넣어놨다고 해도, 티토우의 딸은 눈 깜짝할 새에 채갈 수 있 지만, 저렇게 해 놓으니 마치 가죽 주머니가 '제발 날 데려가 줘, 티토우 의 딸 뷔기어 셰리카'라고 부르는 듯 해 손가락이 다 근질거렸다. 셰리카 는 남자와 시나가 눈치 못 채게 지면에 발바닥을 바짝 붙여 걸으며 그들 뒤로 찰싹 다가갔다. 남자가 절대 눈치 못 채게 가죽주머니를 '잘라'와야 했다. 남자가 눈치채고 소리라도 지르면, 살아있는 방어막은, 살아있는 방 해물로 돌변할 가능성이 컸다. 셰리카는 침을 삼켰다. 이제 셰리카는 남자 와 시나의 말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째든, 약초를 사갈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아.." [자아~ 지금이다, 셰리카..!] 셰리카는 스을쩍,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가죽주머니에 손이 닿으려는 찰 나, 남자가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 네 돈을 훔쳐간 생쥐를 잡을 수 있어서 그것도 다행이지." "네?" 시나가 드래마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묻고, 셰리카도 그것이 누구에 대한 말인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후에는 그것을 뼈저리도록 후회했다.) 그래서 셰리카의 손은 여전히 남자의 가죽주머니에 닿아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교묘한 손놀림으로 툭 잘라냈다. 매듭 같은 거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 때 남자가 휙 뒤돌아 섰다. 그리고 남자와 셰리카의 눈이 딱 마주쳤다. 셰 리카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윽!!!"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것이 뇌리에 스치고 셰리카는 반사적으로 몇 발자 국 뒤로 물러났다. 들켰고, 잡힐지도 모른다!! "에잇!" 이렇게 외마디를 뱉은 셰리카는 몸을 돌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갔 다. [도대체 어떻게 눈치챘지? 저 남자가 소리라도 치면, 빠져나가는 것이 곤 란해!!] "으앗, 아가씨, 조심해!!" 셰리카에게 발을 밟힌 어떤 남자가 소리질렀다. 하지만 셰리카는 멈추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이 웅성대며 뒤로 물러나고, 욕설이 들렸다. 셰리카는 그런 그들을 재빠르게 벗어나 약 30미터 정도를 죽어라 달렸다. 그러나 셰리카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불길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남자가 아무런 소리도 치지 않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잡아라! 소매치기다!' 같은...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아, 식은땀이 흐른다. 왜? 셰리카는 탁탁탁 달리며 뒤를 흘끗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말도 안돼!!! 저건..!!] 셰리카는 남자가 어떻게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가, 그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었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무수한 사람들 사이의 틈을 포착 하고, 동물과 같이 그곳에 파고들어, 몸을 굽히고 스프링 튀듯, 그대로 몸 을 구부렸다 피고, 다시 틈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로질러,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 나왔다! 덩치가 이드넘보다 작은 것도 아닌데...!! 민첩함과 스피드는 이드넘 따위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저런 몸 놀림을 보여주지 못한다. 맙소사! 그 순간 그의 눈이 셰리카와 또 한번 더 맞부딪쳤다. 그는 진한 색의 눈으로 말했다. ..넌 잡힌다. 셰리카의 눈 이 크게 떠졌다. 잡힐거야!!! 이윽고 남자가 달리는 것을 본 순간, 셰리카 는 뒤로 돌아 자기도 모르게 뛰었다. [시, 싫어~!! 으앙~!!!] 무서웠던 것이다!!! 기겁을 해서 달렸다. 하지만 어느새 남자의 가볍고 빠 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등뒤에서 남자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셰리카는 고개를 숙이고 마구 앞으로 뛰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꺄악!!" 턱!!! 하지만 잡히고야 말았다! 셰리카는 달리던 반동으로 하마터면 앞으 로 엎어질 뻔했지만, 남자가 목덜미를 낚아채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잡히는 순간 옴쭉달싹도 못할 만큼 강한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셰리카는 눈을 꼭 감고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흥!" 남자는 셰리카가 비명을 지르던 말던,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목덜 미를 더욱 꽈악 틀어쥐었다. "꺄악--!!! 아팟--!!!!" 머리카락까지 말려 들어가 눈물이 나오도록 아팠는데, 남자는 조금도 힘 을 늦추지 않았다. 덕분에 옷을 벗어 팽개치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남자 는 한쪽 손을 내밀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놔." 하지만 셰리카는 가죽 주머니를 건네 줄 생각도 않고, 오히려 사지를 펄 떡이며 소리쳤다. "으악~!! 싫어!! 이거나 놔!! 아파!!! 나쁜 놈아!! 놓으란 말야~!!!!" 남자는 셰리카가 계속 소리를 치며 반항하자, 한 손으로 덜미 째 셰리카 의 몸이 들어 올렸다. 덕분에 숨이 탁 막혔다. "캑캑!! 으앙~~ 이 나쁜 놈아!!!" 셰리카는 울먹이며 계속 비명을 질렀다. 한편 드래마는 그런 셰리카를 보 며 안 좋은 낯을 지었다. 일루티온 계급의 소매치기. 저쪽에서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한 드래마는 조금 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기로 생각했다. 괜히 주목을 끌어봤자 좋 을 것은 없는 것이다. 경비대라도 오면 당하는 쪽은 오히려 이쪽이 될 테 니까. 드래마는 소매치기의 목덜미를 더 단단히 붙잡고, 그가 기억하고 있 는 골목 쪽으로 끌고 갔다. "으익!! 놓으라니까!! 야앗!!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하지만 드래마는 대꾸도 안한 채 입을 꽉 다물고, 버튕기는 셰리카를 질 질 끌고 갔다. 그리고 셰리카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욕을 모두다 드래 마에게 퍼부었다. "야앗!!! 너!!! 티토우의 딸한테!! 감히!! 야이, 오크 코딱지 같은 놈아!!! 오 거가 먹다 맛이 없어 뱉을 놈아!! 슬라임 속에 100년 동안 갇혀 썩을 놈 아!!! &*%$@##$%@**!!!(18세 미만 읽는 것 불가...--;)" 셰리카가 그 난리를 부린 덕분에 한참이나 뒤에 드래마를 쫓아오던 시나 도 용케 그들을 찾아서 쫓아 올 수 있었다. "헉헉... 드, 드래.. 아니, 드랫. 발이 정말 빠르네요. 근데 도대체 이게 무 슨 일.. 누가 이렇게 소리를... 응? 아아아닛!!!!! 너는!!!" 아직도 드래마에게 목덜미를 잡혀 있던 셰리카는 시나의 목소리가 들리 자,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 시나!!! 흑흑!! 이 나쁜 놈이 날 괴롭히고 있어!!!(...말해 두지만, 셰리카의 통찰력과 논리력은 그 대상이 매우 편중된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통찰력과 논리력을 가진 시나는 나쁜 놈(?)과 마찬가지로 셰리카를 화난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넌, 아까 내 돈이랑, 쿠키를 훔쳐간 애 맞지?!!!" 이, 이럴 수가-!! 시나가 날 모른척한다-! 셰리카는 충격을 느꼈다. 하지 만 드래마는 자기한테 잡혀있는 소매치기가 충격으로 얼굴이 새파래지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주위를 살폈다. 막다른 골목이고 인적도 없었다. 그 제야 드래마는 셰리카를 땅에다 내팽개쳤다. "꺄아악!!!" 바닥에는 오물이 있었는데, 셰리카의 옷에 그것이 묻고 말았다. 하도 난폭 한 손길이라, 옆에서 보는 시나까지 눈을 찌푸렸을 정도였다. 욕을 얻어먹 어서 화가 난 건가..? 시나가 그를 힐끗 봤다. 하지만 드래마의 얼굴은 냉 정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침착한 말투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애에 게 말했다. "당장, 그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를 이리 내 놓고, 아까, 이 여자 애 에게 훔쳐간 돈들도 내 놔." 셰리카는 분노에 찬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웃기지마! 이 티토우의 딸이 너 따위의 말을 들을 것 같아?!" 드래마는 셰리카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티토우의 딸? 지금 자존심 이야길 하는 건가? 소매치기로서의 자존심? 그렇다면 그건 이미 박살났어. 왜냐하면 넌 내게 잡혔고, 넌 실패했으니 까. 어서 돈주머니나 내놔. 몸을 직접 뒤져서 가져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자애로서의 네 자존심은 지켜주려는 거니까, 조각난 자존심이라도 지키 고 싶다면, 지금 당장 꺼내는 게 좋을 거야."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말투였다. 거기다 틀린 말도 아니라, 셰리카는 고개 를 푹 떨구었다. 소, 소매치기로의 자존심이 박살났다고? 하, 하지만 난 아르코나 숲의 자랑스런 도적 티토우의... 셰리카는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흑흑..." 시나는 여자애가 땅바닥에서 울자 당황했다. 저 애 덕분에 시장을 빙빙 돌며 고생을 무척 했지만, 서럽게 우는 것을 보니 안 됐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에.. 저기, 얘. 그 가죽 주머니는, 드래.. 드랫 거니까 돌려주고.. 그리고, 아까 나한테서 가져간 돈만 돌려주면 돼. 저어.. 그 돈 내 것이 아니거든. 저어? 얘?" 시나의 목소리를 듣자 한층 더 눈물이 쏟아지는 셰리카였다. 셰리카는 얼 굴을 들어 시나를 보았다. "시, 시나야... 너, 나 모르겠니?" 시나는 생판 모르는 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당황했다. 드래마도 놀란 표정을 짓고, 다시 한 번 더 셰리카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시나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어떻게 내 이름을?" 셰리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내 얼굴을 몰라. 이, 이럴 바엔 차라 리..! 셰리카는 벌떡 일어섰다. "얘? 어떻게 내 이름을..?" 셰리카는 화가 나서 묵묵히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약간의 돈을 꺼냈 다. "자-! 아까 너한테서 가져갔던 거야. 쿠키는 내가 먹었어." "응?" 시나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셰리카는 입을 삐죽이며 말 했다. "흥! 난 네 쿠키 먹은 거 하나도 안 미안해. 난 배가 고팠거든. 흥. 쳇! 자 기도 배고플 때 내 용돈으로 간식 잔뜩 먹었으니까 뭐!" "뭐?" 시나가 어리둥절해서 말하는데, 셰리카가 한 쪽 구석을 보더니 인상을 쓰 며 소리질렀다. "꺄악-!! 저게 뭐야?!!!" "에엑!! 뭐, 뭐?!!" 시나는 놀라서 셰리카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셰리카는 시 나를 확 밀쳤다. "아앗!!!" 갑작스런 행동에 시나가 비틀거리는데, 셰리카는 골목의 입구 쪽으로 뛰 었다. 하지만 채 입구로 다가가기도 전에 그녀는 또 한번 더 드래마의 손 에 잡혔다. 드래마는 셰리카가 뭐라고 하건 말건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래마는 셰리카의 깜찍한 속임수에 화가 나서, 셰리카의 손을 비틀었다. 시나의 돈은 받아냈고, 미끼가 됐던 자신의 돈주머니만 돌 려 받으면 이 귀찮은 여자 애를 잔뜩 겁주어 쫓아버리기로 했다. '시나'라 는 이름을 들먹거렸을 때는 인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바짝 긴장했지만, 지금 보니, 아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것에서 도망가기 위해 머리를 쓴 것 같았다. 하는 짓이 너무 어이없었던 것이다. 인딜에 있던 놈들이 가 죽 주머니에 이런 집착을 보이며, 이렇게 욕을 퍼붓는 쪼그만 생쥐와 일 을 할 것 같진 않다. 지겨워... 드래마는 손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꺄악!!!" 마구 바둥거리던 셰리카는 팔목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팔목에 온통 힘이 빠지고, 마악 가죽 주머니를 놓칠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분해...!!! 셰리카는 이를 악물었다. 싫어!! 뺏기지 않아!! 갑자기 셰리카가 크게 소리쳤다. "호문클로스!!!" 그때 무언가가 셰리카의 목덜미에서 솟아올랐다. 푸른색의 그것은 망설이 지도 않고, 곧바로 드래마의 손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로 드래 마의 손을 물어뜯었다. "윽!" 드래마는 날카로운 아픔에 신음을 뱉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드래마의 손아귀에서 손을 잡아 뺀 셰리카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잽싸 게 몸을 돌려 골목입구 쪽으로 타다닥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까지 뛰자, 거기에 우뚝 서더니 갑자기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메~롱!!! 누가 너 따위한테 잡힐 줄 알아?!! 흥!! 두고봐~!!! 시나~!! 넌 바 보야~!!! 그런 남자 편만 들구~!!! 두고봐-!!!" 도망가려면, 도망에만 신경 쓰는 것이 좋을 텐데... 이런 소리를 주절거리 면서 가죽 주머니를 든 한쪽 주먹을 치켜들고 빙빙 돌리며 도망가는 셰리 카였다. 게다가... 드래마는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거기엔 아직도 쪼그만 푸른색의 인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드래마도 시나도 어이가 없었 다. 드래마는 죽어라 결사적으로 물어대는 그것의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 로 툭 쳤다. 그러자 어지간히 약한 몸인 듯 호문클로스는 '캑'소리도 내지 못하고 축 늘어져 버렸다. 드래마는 호문클로스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 다. 그리고, 호문클로스가 물어뜯었던 상처를 살폈다. 날카로운 이빨자국 두 개... 이상할 정도로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역시... "...호문클로스. ...이런 희귀한 요정을 데리고 다니는 소매치기라니." 옆에서 시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요정? 그게 요정이에요?" '와앗-!!! 이것이 요정-!! 믿을 수 없어-!! 거짓말-!!! 요정 같은 건 세상에 없어!!'...라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달은 시나였으 므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시나는 훗- 웃었다. [이상하기로 치면 아까 그 소매치기가 더 희한했지. '요정'정도야... 훗훗... 그래, 이런 세계.. 뭐, 지금쯤이면 요정 하나 정도는 나올 때도 되었지. 후...] 어쩐지 회한이 섞인 혼잣말이 따르고 시나는 나름대로 그 요정을 보며 논 평했다. "이상하네요. 요정이라면, 조금 더 예쁘고 투명한 날개도 있고, 빛도 나는 거 아니에요? 이곳의 요정은 이렇게 빈약해요?" 디즈니 만화 시작하는 순간에 나오는 팅커벨 요정에 영향을 받은 소견이 었다. 하지만 뜻밖에 드래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호문클로스라고 아티스트 중에도 연금술에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 만들어 낸 인공의... ..?" 드래마가 시나를 돌아보았다. "..너, 어떻게 페어리들에 대해서 알지? 위테리드인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종족인데?" 시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베레니크 인인데다, 성직자의 시중을 들면서, 거울도 만들었고, 가끔 정 원에서 날아다니는 요정들을 관찰했거든요." 그 말에 드래마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시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당히 근거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시나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 시나를 내려다보던 드래마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좋아. 돌아가자. 뭐, 네가 페어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다지 변하는 것 도 없고... ...단지 재미있을 뿐.." "네?" 드래마는 쿡 웃으며 뒤돌아 섰다. 그리고 기절한 호문클로스를 조심스럽 게 품속에 넣고, 시나가 들고 온 짐들을 들었다.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베레니크가 아니라, '베르노크'야. 시나. 그리고, 베르노크엔 페어리들이 안 살아." ...드래마가 그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다. 시나로서도 그 이상 자신의 프로필을 작성할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취향에 맞을 거 라 생각해서 이야기해줬더니, 저렇게 웃을 것은 뭐람. 쳇. 시나는 비웃음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이래도 비웃음, 저래도 비웃음이라니. 하지만. 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웃는 것을 보니, 내가 현실세계 이야기를 하면 이제는 조금 믿어줄지도...라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찾아 왔다. [그래 어쩌면...] 어쨌든 그는 과거에, '그 세계는 네 안에서만은 진실이겠지', '그건 아마 어떤 의미론 네겐 진실일거야'라고 말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인 것이다. (계속)================================================== 탐구력과 논리력 발군의 셰리카... 하지만, 그녀는 '주의력'이 부족했다. 시안상, 무리데스요.(콸콸... 눈물 흘림... TT) 여모님... 유학 가신다니, 축 하...^^ 뭐, 8월까지 1부 정도는 가뿐히 끝나고, 잘하면 2부도 끝나 있겠지 요.(설마..--;) 그리고, 쪽지랑 메일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끊은 부분이 별로 궁금증이 일만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님의 글을 보고, 그 냥 또 올렸습니다.^^(뛰어가서 무모하게 대쉬 했다가 그냥, 잡힌다는 이야 긴데요.. 뭐.--;) 에 또, ...님 14회서부터 보셨다니. ..... ^^; 유니는 멋진 곳이지요. 개인적으로, 4대 통신망 중 첨단이라고 생각합니 다. 이런저런 일들로 최근, 유니에 대한 애정 급상승 중. 개인방 지정해줄 때부터 점점 맘에 들더니... 풋.(정체불명의 웃음.) 아.. 흑태자비, 이올린 님.^^ 방명록에 써주신 거 봤어요.^^ 감사..^^ <방 가꾸기도 하나도 안 하면서, 그저 좋아하는 엔..^^;> ps...으악! 용태님! 무슨 짓입니까아!! 제 경험상(게임 할 때) 보면 슬라임 은 아이스 월에도 터진단 말입니다아!!! TT(괜히 몬스터가 아니라구 요..TT) ...그래도... 신경 써주셔서 감사..^^ ps2...오늘로서 파란만장한 유월도 가고... 훗.(혹시, 저에게 옛 공약을 물으 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하아.. 여러분! 도대체 슬라임한테 뭘 기대하시는 겁니까?!!!! ..잘 기억 안납니다!!! 퍽!!! 퍽!!! 으악!! 사람들이 나한테 화이 어 월과 아이스 월을 시전한다!!!) ...훗..난 정치에 재능이 있는 슬라임인 가봐... 퍽!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65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03 23:40 읽음:283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89회, 제 33막. 幻覺. (1)> "정말이요? 전혀 몰랐어요." 시나는 드래마가 해준 설명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제 우 나 일루테오나 쪽으로 걷고 있었다. 길가에는 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 람들이 많았고, 길 가운데에는 마차나 말이 다니고 있었다. "와... 그 여자 애, 정말 이상한 소매치기네요? 범인들이 범죄를 저지른 장 소에 한 번 더 가본다는 말을 들었어도, 소매치기가 돈 훔친 사람 쫓아다 닌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 드래마는, '범인들이'서부터, '한 번 더 가본다'까지... 도대체 시나가 어디 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몹시 궁금했지만 어쩐지 또 엉뚱한 이야 기가 나올 것 같아서 그냥 모르는 척 했다. "...이상하게 시장에 들어올 무렵부터 계속 쫓아다녀서, 왜 그럴까 생각했 지. 그런데 너한테 인상착의 들은 것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 애라... 한 번 시험해 본 거야. 하지만 나도, 그렇게 쉽게 미끼를 물 줄은 생각 못했어. 돈주머니를 흔들자 말자, 뛰쳐나오다니... 소매치기라도, 풋내기 같아." 이렇게 말한 드래마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여기까지 생각을 못했지만...] 드래마는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시나? 정말 그 여자 애, 예전에 본 적 없어? 널 상당히 친근하게 부르던데?"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처음 보는 애예요.." "하지만, 시나. 넌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걸려있어. 확신하는 건 무리야. 혹, 너를 아는 사람일수도..." 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예전부터 전, 일루젼이나 기억상실은..!! 어휴! 믿을 리도 없으 니, 관두고. 하여튼 전 모르는 애예요." 드래마가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장담할 수 있어?" 이 대목에서 시나는 조금 망설였다. "아니.. ...음. 아까 그 애... 말하는 식이, 어쩐지.. 음.. 내가 알던 누군가와 조금 닮은 것도 같지만... 그냥 조금 닮았다는 것 뿐." 시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 분홍색 머리칼이라니, 분명 이쪽 세계 사람인 데, 시나 자신이 그런 사람을 하나라도 알 리 없잖은가? "정말이에요. 정말, 정말, 전혀 모르는 애예요." 마침내 드래마는 싱긋 웃었다. "알았어. 네가 그렇다니 믿지. 하지만 네 기억이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될지 도 몰랐는데.. 나한테 디트마가 있어서 도움이 됐던 것처럼 말이지.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글세, 돌아올 기억 같은 것도 없다니까, 그러네... 참. 시나는 입술을 내밀 고 말했다. "체.. 내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훔쳐갔는데... 돈을 훔쳐가 줘서, 고마웠어. ..라고 이야기라도 나누라는 거예요? 할 말 같은 거 없다고요. 맨 처음 드 래마가 이야기했던 대로, 그 앤 우리 대화를 듣고 내 이름을 알았을 거예 요. 그나저나, 돈을 용케 돌려준다 싶었더니 이번엔 드래마 주머니를 훔쳐 가고... 훌쩍이고 울 때는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완전히 속았어." 시나는 분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드래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드래마는 왜 아까 그 앨 안 쫓아갔어요? 아까 보니까 무지 빠르 던데? 잡으려고 했으면 잡았을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드래마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호문클로스가 있는 이상, 그런 건 별로 걱정 할 것 없어." "네? 호문..클로스가 있는 한이요? 이 요정 말이에요?" "음. 세상에는 이런 호문클로스 같은 것에 흥미를 갖는 아티스트들도 많 거든. 그들에게 이것을 팔면 그 가죽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탈란 금화정도 는 충분히 받을 수 있어." "에? 호문클로스를 팔 생각이에요?" "설마. 내 말은 단지 그런 사실을 아까 그 소매치기 여자 애도 알고 있을 거란 말이지. 도둑이란 직업을 갖고 있는 주제에, 자기가 가진 더 좋은 것 을 내 놓고, 내 가죽주머니를 훔쳐 간 거야. 아까 끈질겼던 것을 봐서 뭐, 한 번 더 찾아 올 것 같기도 하고... 안 찾아오더라도 상관없지. 말했듯이 우리는 손해 볼게 없거든. 여차하면 힐러들에게 팔아도 되고.. 호문클로스 는 꽤 훌륭한 약 재료도 되거든." 으웩-! 인간형의 생물에게 약재료라니...! 애완용 강아지를 잡아먹는다는 말 같아서, 시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드래마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그냥 말했고, 시나도 남의 세계 취향에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 웃 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거리를 조금 더 걷고... 시나는 드래마의 가슴부근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의 옷깃 사 이로 아직도 눈을 꼬옥 감고 있는 요정이 보였다. 작고 푸른 머리가 온통 쭈글쭈글 한 것이 괴로운 것 같았다. [흐음..] 시나는 드래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요정이 물어뜯었던 왼손. 놀랍 게도 지금은 그런 자국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신기하네요. 아까는 그렇게 피가 많이 났는데... 이젠 물린 자국도 안 보 여요." 드래마는 시나가 자신의 손을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 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호문클로스가 내는 타액은 맨 처음엔 피가 많이 나도록 유도하지만, 일 정한 시간이 지나면 변화를 일으켜서 그 후엔 상처를 아물도록 한다더군. 그래서 힐러들이 그 몸을 잘 말리고 갈아서, 그것을 베이스로 삼고 다른 약을 첨가하여, 최고급 지혈제나, 항응고제로 만든다고 읽었어. 디트마의 책에 그렇게 써 있던데... 실제로 당해보니, 정말이군." 몸을 말리고 가는 것... 통과. 시나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것 참. 모기랑 아주 조금 비슷하네. 그 후유증은 완전히 틀리지만, 참으로 신 기한 생물... 시나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하하.. 드래마, 있잖아요? 우리 세계에 있는 모기라는 벌레도 그래요. 피 를 빨아먹으려고, 글세 자기 침으로 피가 굳지 않게 한대요. 침에 섞인 병 균 때문에 나중엔 엄청 간지러운데... 하하.. 재밌죠? 여기는 모기 같은 거 없죠? 앵앵거리면서 날아다니는 건데..." 드래마는 이상하다는 낯으로 시나를 보았다. "병균이 침에 섞였다고? 병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기는... 모스키토를 말하는 건가? 그걸 보고 벌레라니.. 나도 몇 번인가 본적이 있지. 팔뚝만 한 무서운 흡혈 몬스터야. 죽을 때쯤,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한 번 빨고, 그걸 영양으로 해서 알을 낳는 몬스터. 가끔 성역 근처의 늪이나 숲에 나 타나지. 그 유충이 늪에 사는 데, 그걸 벌레라고 하긴 해. 장구벌레.." ...이 세계는 정말 적성에 안 맞아. 팔뚝만한 모기? 왜 모기 같은 게 그런 큼지막한 사이즈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거기다 유충이 장구벌레라니.. 도 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다. 한편 드래마는 걷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나, 뭘 얼굴이 새파래져서 거기 서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빨 리 와. 어쨌든, 모스키토 같은 몬스터라면 얼마든지 있다구. 말했잖아? 사 람을 잡아먹는 몬스터는 꽤 많다고. 그러니 피를 빠는 것 정도야... 이 호 문클로스만 해도 인간의 피가 식량이고..." "뭐라구욧?!!" 시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 그럼 그건 요정이 아니라, 몬스터잖아요?!! 으윽! 저렇게 조그마한 것 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니!!!!!" 드래마는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 피 좀 빠는 것 가지고, 몬스터라니... 호문클로스가 섭섭해하겠 군. 비록 사람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호문클로스는 요정이야. 한인간과 계 약을 맺고, 그 한사람만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그 사람만의 피를 빨아. 그 러니까, 이 호문클로스가 아까 그 소매치기의 명령을 들은 것은... 아마, 그 여자 애가 이 호문클로스에게 피를 주기 상대이기 때문 일거야. 주인 에게 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피를 빠는 거니까. 이런 건 몬스터 축에도 안 끼어. 그러니, 빨리 걷기나 해. 시나." 드래마가 그렇게 말하고 걷자, 시나도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걸으며 말 했다. "그래도, 인간의 피를 빤다니 너무.." "진짜, 인간의 피만을 무차별로 빠는 몬스터는 더 끔찍하지. ...흡혈귀들... 이곳 클로니아엔 별로 없지만, 힐라토에는 그런 흡혈귀만 해도 수십 종이 야. 힐라토는 밤의 세계고, 이상하게도 흡혈귀들은 밤을 좋아하거든. 뭐, 낮에도 종종 나타나긴 하지만... 밤이 취향에 더 맞는 거 같애. 하긴, 대부 분의 몬스터들이 그러니까." 하하.. 이런. 이 세계는 드라큘라도 전천후로 능력을 갖고 있어서, 낮에도 돌아다닌다고 하는군. 시나는 당분간 드래마에게 몬스터에 대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물어보다가는 밤에 무서워서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시나의 얼굴이 질린 것을 보고 드래마가 빙긋 웃었다. "시나, 예전에도 말했듯, 그런 몬스터들은 흔하게 나타나지는 않아. 더구 나 이렇게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는 잘 안 나타나지. 뭐랄까. 인간을 잡아 먹으면서도 인간을 두려워한다고 할까. 예전에 난, 오크와 싸우면서 이런 말도 들었거든. 밉다. 인간. 싫고, 무섭다. 꿀꿀.. 그러니까 다 죽이고, 먹어 치울테다... 꿀꿀..이라고.." 시나는 드래마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요?" 드래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몬스터들은 이상하지. 이오시아님의 말씀대로... 그러니까, 그들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흐음.. 그런가?] 시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늘엔 서서히 푸른 기운이 깔리고 있었다.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낮이 끝나는 시간. 멀리 흰 산 뒤로, 가라앉은 공 기가 이제는 긴 시간을 마쳤으니, 편안한 휴식을 준비하라는 듯, 짙게 내 려와 거리에도 깔리고 있었다. 도비온은 차가운 얼굴로 힐러 라단의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이 집 을 찾게 된 것은 그야말로 간단했다. [젠장. 너무 간단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지.]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도비온이 식당에서 나와 맨 처음 간 곳은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관장하는 동문이었다. 관청의 장부에 기록돼지 않 은 것을 보아,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루사트와 계집애가 아직 제일로트에 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을 문득 생각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인딜 마노 테오나에 부하들을 보내서 조사해 본 바로도, 어제 아침 무렵에 그곳을 출발했다고 하니까 루사트 놈이 갑자기 어디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제 일로트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비온은 슬 쩍 지나가는 말로 문지기들에게 사실을 떠보아야했다. (평소, 도비온은 문 지기들이 인간의 정체나, 능력을 꿰뚫어본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밥맛 없어했다. 뭐, 자신이 가진 능력은 상당한 디바인 파워를 가진 성직자에게 만 감지되는 것이니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기 분이 나쁘긴 나빴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분 나쁜 것도 꾹 참고 문지 기들에게 접근한 대가를 기대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도비온이 '아아.. 이런 축제기간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피곤하겠군. 그러니 쓸모 없는 놈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마노테온이라든지, 범죄자, 연고 없는 떠돌이 같은 녀석들은 제발 이 기간만이라도 제일로트의 출입 을 자제해 주면 좋을텐데...? 어때? 요즘은 그런 녀석들이 많이 들어오나? 어제는 어땠어?'...라고 묻자, 문지기들은 뜻밖에 '아아. 그렇죠. 정말. 그렇 게까지 말해주시는 귀족 분은 하바트님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그런 거야 희망사항이고.. 그런 악다귀 같은 녀석들은 요즘 같은 때 더 악착같이 도 시로 달려드니까요. 사실은 어제도 한 몫 보기 위해, 유랑극단이며, 떠돌 이로 추정되는 놈들이 몇 들어왔는데요.. 그것들 추려내느라... 게다가, 더 놀랐던 것은.. 마노테온 한 쌍이 들어 왔는데.. 헛 참. 그런 경험은 처음이 었죠. 후스야 장로님이 대신 입문서류를 작성해 주실 정도로...'...라는 말을 뱉어놓았다. 물론 일에 대해서 떠벌리는 것은 문지기들의 금기사항이었으 므로, 그 문지기는 옆 동료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맞고 말을 그쳤지만... 도 비온은 다음 순간 화가 잔뜩 나서, 관청엘 다시 가 특별장부를 요구했을 정도로 모든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비온은 거기서 문지기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특별장부에 나와있는 두 마노테에 관한 단 몇 줄의 입문보고에서 생각도 못했던 뜻밖의 사실까지 알 수 있어서, 화를 참느라 보통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문지기들의 장로, 후스야의 보증으로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청 의 엘야시온 106년 말케스완월 15일 물의 날, 쇼파르 제 3경에 제일로트 로 입문함. 거주지와, 기간 기입 무. 입문세(稅) 받지 않음. 엘 아이즈의 패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모든 것은 엘의 뜻대로. 그 소유주의 이름으로 인해 그에게 특권을 부여함.] 그 문장에서 도비온이 주목한 것은, '엘 아이즈의 패'였다. 기가 막혔다. 설마, 루사트 놈이 '엘 아이즈'의 패를 갖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는데! 큰집이 루사트를 총애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비온이 관 찰한 바에 의하면, 그것 때문에 루사트가 살고 있던 바리스 마노테오나는 다른 마노테오나와 다르게 많은 혜택과 면책들을 알게 모르게 부여받고 있었다. 루사트가 살던 초기 때는 오히려 다른 마노테오나보다 훨씬 더 혹독한 노동을 요구받았지만, 요즘은 다른 마을에 비하면 거의 천국이라 고 부를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야, 큰집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 란 건 눈을 감고도 알아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황당한 늙은이가, 설마 엘 아이즈의 패까지 준걸 누가 알았겠 나!!? 제기랄!!] 엘 아이즈의 패는, 특별한 공을 세운 최고 귀족만이 지닐 수 있는 패로 누구나 탐내는 엘야시온의 총애를 나타내는 패이다. 물론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한다든지 하면 저절로 떨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루사트놈은 마노 테온으로 강등 당했지 않냔 말이다!! 그런데 그대로 그 패를 지니고 있게 하다니, 맙소사...! 큰집이 어느 정도로 루사트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도비온은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제길.. 그 멍청한 영주녀석은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며... 루온 루사트.. 이 교활한 녀석. 지난 20년간 제일로트를 방문할 때, 전혀 그 패를 쓰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쓰다니. 도대체가...! 제길!!!" 그때 옆에 앉아 있던 겐트온이 도비온의 혼잣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뭐야? 아직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뭘 붉으락푸르락해서 앉아 있나 했더니. 후후.. 과거 일을 자꾸 곱씹으며 분해하는 버릇, 너 아 직도 못 고쳤냐?" 도비온은 그를 흘끗 보았다. 의기양양한 얼굴... [쳇.] 도비온은 그의 꼴을 보기 싫어서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그러자 겐트온이 웃는 낯으로 혀를 쯧쯧 찼다. "이런.. 전혀 귀엽지 않은 녀석. 네 형이 모처럼 도와줬는데... 뭘 그렇게 부루퉁하게 있는 거냐, 도바? 내 덕분이 아니었다면 오늘이 다 가도 보호 물의 종속자는 못 찾아냈을 거 아냐?" 도비온은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알겠어.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건가? 제발 입 좀 다물어. 젠장. 너 때문에 하던 생각도 다 달아나고 있잖아? 쳇.. 그깟, 마구간을 중심으로 찾으라고 조언 좀 했다고 계속 느글대며 웃는 꼴이라니!" 겐트온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깟이라고? 하하... 넌 정말... 웃기는 녀석이야. 이봐. 네 이야기에서 보 호물이 말을 타고 있었다는 대목을 잡아낸 것은 나였다. 넌 지금까지 보 호물을 찾으면서, 보호물과 그 종속자만 생각했지, 말은 염두에 두지도 않 았어. 하루 이틀 제일로트에 있을 것도 아니니, 노숙은 당연히 안되겠고... 여관은... 풋...! 도비온... 도비온... 넌 진심으로, 우리의 보호물이 여관에 묵 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것도 두 달 동안이나? 하루나 이틀도 아 니고... 어느 제정신 박힌 여관이 마노테온을 묵게 해 주겠나? 그것도 손 님이 미어터지는 이런 시기에? 속임수? 네 이야기에서 보호물이 일루테 오나에서 보여준 기지는 나도 감탄하는 바이지만, 이번엔 속임수가 통하 지 않아. 알겠나? '시간'과 '사람들의 눈'을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야. 이상 의 것으로 유추해 볼 때, 필연적으로 우리 보호물은 '민박' 아니면, '아는 사람의 집'이다. 이곳에 보호물이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친다면... 뭐, '민박'정도 되겠지. '민박'까지 하게 되면 그야말로 비참한 거지만... 그래도 우리 위대한 보호물께서 큰집에게 고개를 굽히고 들어갈 리는 절대 만무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자~ 그럼, 최하층 일루테오나의 어느 구 석, 돈만 주면 설사 마노테온이라도 아무 말 않고 묵게 해 줄, 그런 민박 집을 용케 찾아냈어. 지저분하고, 위험하고, 악취 나겠지만... 아까 말했듯 어쩔 수 없지. 큰집의 명령을 무시하고 바리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 니까, 두 달간 묵을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지. 하지만.." 겐트온은 아직도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옆자리의 라단과 카탈리를 보며 히 죽 웃었다. 방안의 어두움에 물들어 마치 죽어버린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 만, 그 부부는 분명히 '자고'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 라도 민박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말'은 어떻게 해야 할 까? 최하층 일루테오나에 마구간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길거리에 풀어놓을 수도 없고, 팔아치우는 것도 안되지. 말 한 마리를 가 지고 여행하려면 돈이 상당히 많이 든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대강 혼자 서 두 사람 몫의 여행 경비는 챙겨야 하니까. 하물며, 축제 기간인 두 달 동안은 여행자에게 있어 말이란 귀리나 먹어치우는 귀찮은 짐승일 뿐이 야. 도시 내에서의 이동은 상업마차를 이용하면 되니까. 그런데도 여행자 들은 말을 안 팔지. 왜냐하면..." 도비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살 먹은 어린애도 알 수 있는 것 좀 설명하지 마! 지금 팔면 원래 수준 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을 받게되고, 나중에 길을 떠날 무렵에는 말의 가격이 20배는 오르기 때문이잖아! 잘난 척 하기는!" 겐트온은 투덜대면서 거실을 왔다갔다 거니는 도비온을 보고 느긋한 표정 을 지었다. "그렇지. 그건 3살 먹은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눈앞에... 이름이 뭐더라..? 이름, 앞 자가 '도'고 뒤 자가 '온'인 누구는 그런 뻔한 사실도 깨닫지 못해서 문제지만 말이야." 그 말에 도비온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겐트온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하던 식으로 장난을 치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재수 없는 자식!! 도비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말발에서라면 그 자신이 마음먹고 입을 다물지 않는 이상, 겐트온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제길.] 헌데 겐트온은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도비온을 보며 계속 약올리듯 말하고 있었다. 아마 별로 입을 다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맘대로 지껄여라. 맘대로 지껄여. 도비온은 코웃음을 치 며 그를 무시했다. "뭐, 네 말대로 3살 먹은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우리 영특한 보호 물께서 모를 리는 없을 테니까... 여관의 마구간이라든지, 마치소(馬置所) 같은 데에다 말을 맡겼겠지. 두 달이나 맡기는 거니, 마구간 임대료가 만 만치 않게 나가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지. 나중을 생각하면 말이야. 그리고, 그 여관이나 마치소에서는 평소 때라면 몰라도, 이런 축제기간엔 말 주인의 신분과 주거를 굉장히 철저히 확인하 지. 떠돌이들이 잔뜩 흘러들어 온데다, 축제가 끝난 후엔 말을 훔쳐서 달 아나 버리는 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올바른 타겟이 정해지면, 실행이야 쉽지. 너도 어제 이후로 제일로트에 들어온 말들 중, 두 달을 기한으로 마치소에 맡겨진 말들만을 찾는 것이, 새로 들어온 사 람을 찾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이젠 알았겠지?" [흥!] 도비온은 또 한번 더 코웃음 치고, 그의 말을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겐트 온은 도비온이 그러건 말건 낮게 웃음을 웃으며 쓱 일어섰다. "알겠어, 도바? 사람을 찾을 때는 그런 식으로 찾는 거다. 무식하게 무조 건 뒤진다고 능사가 아니지. 넌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겐트온은 거실을 왔다갔다 거리는 도비온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 다. 그리고 얼굴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넌 분명 나와 많이 닮았어. 그렇지만 넌, 아무래도 이렇게 머리 돌리는 부분은 나보다 떨어지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라던가, 실력은 좋은데 사 건을 종합하는 통찰력은 부족하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까짓'? 웃기지 좀 말아라. 도바. 네 머리론 이 '그까짓' 생각 같은 것은 절대로 못 해내. 죽 었다 깨어나도 안되지. 그래서 다크 스타즈의 리더가 네가 아닌, 나인 거 다. 이상하지? 기억력은 나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네가 훨씬 더 좋은데... 아버지는 네 능력보다는 나의 능력을 높게 사셨단 말이야." 겐트온의 이 말에 도비온의 눈에서 불이 확 올랐다. 하지만 겐트온은 그 런 도비온을 보면서도 풋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반항은 그만하고... 도움 받았으면, 도움 받은 대로 솔 직히 인정하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 그는 한 쪽 손바닥으로 도비온의 뺨을 툭툭 쳤다. "훨씬 더 귀엽다. 내 친애하는 동생, 도바." "닥쳐!! 이 개자식아-!!!" 도비온은 욕설을 뱉으며, 겐트온의 손을 팍 쳐냈다. "도와 달라는 소리 같은 거 한마디도 안 했어! 식당에 가만히 쳐 박혀 있 지, 멋대로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와서 네 멋대로 조언이라고 했고, 난 그 조언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누가 네게 조언을 하래?! 또 네가 조언을 했 더라도, 내 부하들이 없었으면 여길 찾아냈을 것 같애?!! 아버지께서 네 능력을 더 높게 사신다고?! 재수 없는 자식!!! 다크 스타즈 중에서, 널 상 관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단지, 너와 난 하는 일이 틀릴 뿐이 야!! 그러니 다시 한 번만 더, 아버지가 나보다 너의 능력을 높게 사네 어 쩌고 하면서, 잘난 척 지껄이면, 그땐 정말 널 죽여버리겠어!" 도비온은 화가 날 대로 나서 눈이 험악해져 있었고, 겐트온은 그런 자신 의 동생을 냉랭한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린 뒤, 씁 쓸한 미소를 띄었다. "'단지' 너와 내가 하는 일이 틀릴 뿐이라고..? 하하... 그래?" 겐트온은 눈을 내리깔고 여전히 쓴웃음을 지은 뒤, 다시 눈을 들어 도비 온을 쳐다보았다. 굉장히 푸르고, 아름다운 색의 눈이나, 탁한 무언가가 섞인 눈이었다. "훗... 그러고 보니, 재밌군. 날 죽인다..라. 그래, 도비온. 날 어떻게 죽일 생각이냐? 네 스스로 너의 심장에 칼이라도 꽂아 넣을 생각이냐?" 그 말에 도비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겐트온은 빙긋 웃었다. 그리 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되지도 못할 헛소리 같은 걸로는 상대를 협박하는 법이 아니다. 도바. 이 왕 협박을 할 바에는 확실히 하는 것이 너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괜히 어설프게 상대방 감정만 긁을 바에는 때려 치는 게 나아." 그러더니 그는 라단과 카탈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그들의 목덜미 에 댔다. "...이렇게 말이지. 흥. 샤일라테는 표독스러운 것 같아도, 모질지 못한 구 석이 있어. 어리석게... 이런 자취를 남겨 놓다니. 확실하게 처리를 하던지 하지... 겨우 잠만 재워놓고 내빼? 환각제로 기억을 몽롱하게 처리해 놓은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위험하잖아." 겐트온의 차가운 말에 할 말을 잃고 있던 도비온은 샤일라테 이야기가 나 오자, 고개를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 "쳇! 그 계집애! 이 힐러 놈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 렇게 빨리 찾을 수가 없지! 그런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다니. 속으로는 날 비웃었겠지? 이 자식은 또, 왜 아직도 제일로트에서 지분대고 있는 거 고. 힐라토인인 주제에. 뭐? 우나 일루테오나의 힐러 라단께서 어제부터 두 달간 맡기신 말입니다? 쓸모 없는 일루트 자식!!! 진작에 힐라토로 돌 아간 줄 알았더니!! 덕분에 여관... 아니, 민박만 죽도록 찾았잖아. 하여간, 그 루사트 자식이 이번에 제일로트로 오면서 20년간 한 번도 안 했던 짓 들을 해대니까, 일이 이런 식으로 꼬이잖아?! 젠장!" 겐트온은 픽 웃었다. 흥미로운 녀석... "...넌 아직도 보호물을 '루사트'라고 부르고 있군... 뭐야? 그건... 과거, 가 장 좋아했던 동료에 대한 애정이야?" (계속)================================================== 모기, 모스키토... 불가사의하다. 엘야시온어는 한국어와 영어까지도 포함 하는 언어인가? --; (설마..) 엘야시온은 도대체, 작가 편의대로 영어와 한 글,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섞어서 쓴다.(가끔 라틴어도 나옴.--;) 이것은 엔의 겉멋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아주 쪼금..^^;) 어쩔 수 없이 원어를 차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 헌데 문제는 이런 단어를 한 번 쓰고 나면 잊어버린다는 것. 기본 용량이 딸리면 슬프다. <매일, 업그레이드의 험한 길을 가는 엔...> ps...전 회인가에 갈리키니움을 갈리킬리움이라고 쓴 것 같더군요.--; 갈리 키니움입니다.--; (갈리키니움은 로마 경비대의 나팔이름이죠...) 엘야시온 에선 밤 시간대 전부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기로 결정하고 쓰는데... 갈리 키니움 1경은 6시에서 9시. 갈리키니움 2경은 9시에서 12시. ..이런 식으로 새벽 여섯 시까지 모두, 4경이 있습니다. 종종 저 자신도 헷갈리지만... 한 번 결정한 것.. 이렇게 써야죠.^^ 외전도 이렇게 통일할 생각...^^ ps2...90회까지 올릴까 했는데... 생각할 문제가 있어서. 으음. --; 아.. 그리 고 ratri님... 유니에서 제방은 나이를 잊은 사람들, 33번지 '엘야시온'입니 다.^^ 근데 또 새로운 방이 생겨버려서... 음... 좋아하고 있습니다.^^(방만 늘어간다.--; 복부인이라도 할까.--;) ps3...토룽이님.^^ 명언입니다. '시나야.. 하누카의 날을 지내서라도 글래머 가 되라.'... 푸하핫.. (근데, 누구랑 지내지... --;) ps4...이제부터 재고 싶습니다.^^ 혹... 메일을 받았을 때, 혹 게시판에 쓰여 진 엘야시온에 대한 글 중... 글 가운데, 제가 생각했던 '어떤 낱말' 혹은 '어떤 문장'을 '맨 처음' 쓰신 분이 있다면... 그 분께는 제멋대로 1부가 끝 난 후 일러스트를 드리고 싶습니다.^^(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문장이 나왔다면... 그 시간부터 이 게임은(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어 서..--;) 끝나고... 그 분께는 제멋대로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정답 발표는 1부 끝난 후에 하겠습니다.^^ 문제없는 문제죠. 하하..^^ 인생은 미 스테리.^^ ps5...어쨌든, 메일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꾸벅^^)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69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05 22:58 읽음:2831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0회, 제 33막. 幻覺. (2)> 겐트온의 말에 도비온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도비온의 주먹 쥔 손이 부들 흔들리고, 그는 이를 갈며 겐트온에게 말했다. "..너.. 뭐..라고 주절대는 거야? 닥쳐! 당장 닥치지 않으면....!!" 하지만 겐트온은 유들 거리며 할 말을 끝까지 다했다. "하긴, 증오는 또 다른 애정이라던가. 아까 너도 그런 식으로 말했지? 그 마노테의 마음을 놀랄 만큼 잘 알더군. 네가 그런 걸 경험해서 그런가? 그래.. 그럼 앞으로 그 마노테와 둘이서 보호물의 팬클럽이라도 만들면 되 겠군." "겐트온--!!!!!" 도비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뭐, 이따위 자식이 다 있 어?!!! 도비온은 너무 열 받아서, 피가 머리끝까지 오르고, 심장이 벌떡벌 떡 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건 아마 겐트온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깝게 붙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겐트온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유유히 벽으로 다가가 거기 놓인 등잔을 살피며 말했다. "내 귀는 아직 쌩쌩해. 조용히 말해. 네 버럭 거리는 목청에 우리의 사랑 스러운 샤일라테가 모처럼 애써서 재워 논 놈들이 깨기라도 하면, 손에 피를 묻혀야 할지도 모르고... 귀찮아. 오늘은 파티에도 나가봐야 할 것 같 은데." 이...! 정말로 죽여 버리고 싶다! 이런 자식 따윈... 하지만 도비온은 동시 에 겐트온의 침착한 마음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뭐라고 하든, 그는 언 제나 침착하다.(그래서 그를 더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때 등잔불이 제대 로 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겐트온이 고개를 돌려 도비온을 보았다. "쓸데없이 거기 서서 열내지 말고, 쳐 놓은 결계나 확인해. 이 내가 옆에 붙어있으니, 실패는 안 하리라 생각한다. 아까도 말했듯, 더 이상의 실패 는 용납 못해." "...!!!" '실패'라는 말에 또 한번 할말을 잃은 도비온이었다. 그 마노테 계집애만 확실하게 처리했어도, 겐트온 놈한테 이런 식으로 당하지 않아도 됐는데!! 그 계집애 정말, 가만 두지 않겠어!! 그렇게 속으로 울분에 찬 말을 뱉은 도비온은 휙 뒤로 돌아서서 방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부하들에게 걸어갔다. 지금은 겐트온 자식이 뭐라고 떠들던, 그냥 무시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한 번 실패했고, 그건 큰 약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있는 부하는 이 중에서 가장 최고의 염동력을 갖고 있는 자로, 안의 기운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결계의 살아있는 지침석, 다섯 명중에 하나였다. [흥. 제대로 움직이고 있군.] 도비온은 부하의 딱딱하게 굳은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가장 취약하기 쉬운 지점에 있는 부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으니, 다른 네 명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일정한 사이를 두고, 다섯 명이 떨어져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가운데 도비온이 닭을 태워 만든 재로 그려 놓은 진으로 인해 모두 정신이 하나로 집중된 상태였다. 그들은 자 신의 염동력을 모아, 지금 방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환술을 보호하고, 환술 의 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막고 있는 동안에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돌'과 같은 상태이니... 환술을 시술하고 있는 자가, 각각 의 정신에 충격을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해서 지침석들에 충격을 줘서 균형이 무너져, 약간의 기운이라도 빠져나가면, 아티스트나, 성직자들, 심지어는 문지기들에게까지 감지 당할 위험이 있었다. 더구나 이곳엔 '큰집'이 있으니... 조심에 조심을 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보통 때라면 셋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두 명이나 더 늘리지 않았는가? 도비온 은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일단 환술이 펼쳐지면, 도비온 자신에게 육체 적 충격이 없는 이상 지침석들이 동요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 리해 놓는 게 좋다. 겐트온은 그냥 이 자리에 없다고 생각하자. 한편 겐트온은 도비온이 일하는 것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의자에 돌아가 거기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금발을 쓸어 올리며 천장을 보았다. 완전히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도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어서, 이치대로라면 방에는 아직 밝은 기운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방은 이상하게 어두웠다. 벽에서 타고 있는 등잔불만이 조명이 되어 주고 있었는데, 그 등잔 밑에 서 그의 금발은 붉은 황금색으로 번쩍거렸다. "...그나저나 보호물이 늦는군. 갈리키니움이 시작된 지도 꽤 지난 것 같은 데 왕궁에서 이미 이곳으로 돌아왔을 시간 아닌가? 종속자라는 마노테 계 집애도 안 보이고." 하지만 도비온은 대꾸도 안 했다. 겐트온은 그가 일에 열중한 것을 보고 당분간 그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보호물과, 그의 종속자라는 계집 애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생 각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엔 쟁반 두 개가 놓여있다. 그 위엔 각각 두 개의 찻잔이 놓여있고. 한 쟁반은 바닥에 차가 지저분하게 흘려져 있고 찻잔에는 차가 가득 차 있다. 나머지 한 쟁반은 바닥이 깨끗하고, 찻잔도 깨끗이 비워져 있다. [...그렇다면 샤일라테가 온 시간은 확실히 티타임 시간 정도. 찻잔 네 개 에 환각제에 당한 사람은 여기 두 명. 나머지 두 명은 이미 사라졌다. 한 명은 샤일라테.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샤일라테가 여기 혼자 왔다면, 쟁 반 하나엔 찻잔 하나만 있어야 하겠지. 그러니, 분명 샤일라테가 데려온 사람이야. 샤일라테가 여기까지 데려 올 사람이면...] 겐트온은 손을 뻗어 찻잔을 만져 보았다. [..아마사뿐이군.] 샤일라테는 수행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더구나 부하니 뭐니 거 치적거리는 것도 싫어해서, 마멜록의 수장이라 해도, 마멜록의 힘을 받아 힐러의 힘을 가진 것은 그 자신 혼자 뿐이다. 군대를 가지고 있는 헬리옷 이나, 자체적으로 부하를 만든 도비온, 각 세계에서 도둑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이드넘, 그리고 부하는 아니지만, 각계 각층의 귀족과 인맥이 닿아 있는 자신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마사라. 겐트온은 잠시 생각에 잠 겼다. 일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오후 무렵에 다시 아버지에게 연락 이 온 바에 의하면 그 믿을 수 없는 정보는 아마사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마사 자신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샤일라테를 따라나섰을 것 이란 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겐트온 또한 아버지의 명령으로 일을 해결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만 솔직히 굉장한 궁금증이 드는 게 사실이니까. 겐트온은 갑자기 훗 웃었다. 샤일라테가 아마사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면... 샤일라테 그 성격에 꽤나 짜증을 내며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 그 짜증을 풀기 위해 서라도, 먼저 이 집을 찾아낸 것에 대해 도비온에게 와서 자랑을 했을 텐 데.(더구나 그 문제로 경쟁까지 붙었다고 하니.) 하지만 샤일라테는 그들 이 식당에 있을 때까지도 식당에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겐트온 은 피식 웃었다. "어이. 이봐, 도바. 샤일라테가 이 집을 먼저 찾았을 지는 몰라도, 그녀는 아직 마노테 계집을 손에 넣지 못했을 확률이 많아." 도비온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그의 온 신경이 겐트온에게 집중됐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사실을 겐트온이 방금 말한 것이다. 보호물과 마노테 계집이 어디 간 것인지 궁금했던 것은 도비온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혹시 샤일라테가 마노테 계집을 끌고 간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걸 생각하면 불편한 기분이다. 샤일라테가 잘난 척 할 것을 생각한다면... 겐트온 놈이 하는 짓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될 것이다. 헌데 저 놈은 어떤 근거로 저렇게 단언하는 거지? 겐트온 놈을 없는 것으 로 치기는 했지만. 도비온은 주위점검을 그만두고 가만히 서서 겐트온의 상황설명을 기다렸다. 한편 겐트온은 그런 도비온을 보며 소리 없이 큭 웃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도비온이 서 있는 것을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지나고... 나오지 않는 겐트온의 말을 기 다리며 도비온의 속이 점차 부글거리며 끓을 무렵... 겐트온이 그의 등에 대고 야유하듯이 말했다. "이봐, 도바. 뭐하냐 너?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거냐? 보호물이 언 제 돌아올지 모른다니까. 계집애도 계집애지만, 아버지의 새로운 명령도 중요해. 점검은 다 끝난 거야?" "이익!! 이 자식이 그런데 정말!!" 도비온은 뒤로 돌아, 쌍심지를 돋구며 소리질렀다. "관 둬! 자식아!! 별~!!" 같잖지도 않은 녀석 다 보겠네! 상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얼굴이 벌개진 도비온은 화를 내며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이 완 성되어 저 자식의 얼굴을 안 보는 게 심신에 좋을 것 같았다. [제길... 샤일라테가 그 계집을 잡는데 실패했다면 그걸로 된 거야. 마노테 계집이 어떻게 됐는지는 나중에 따지고 일이나 마치기로 하자. 이 쪽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니 이 곳도 점검을..] 그때 겐트온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좋아. 알겠어. 하여간 내 형제들은 이야길 나눠보면 왜 이렇게 재밌는지. 샤일라테도 그렇고 너도. 하하... 오랜만에 웃어보는군. 그래, 그 래. 오랜만에 만난 친동생에게 박정하게 대할 수야 있나? 왜 그런 결론에 다다랐는가 이야기 해주지. 비록, 내 '그까짓' 생각이긴 하지만, 네가 원하 는 것 같으니까." "...!!!" 도비온은 사람을 갖고 노는 겐트온의 태도에 비위가 확 상했다. 그래서 '됐어! 이 자식아.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는 궁금했던 것이다.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혼자서 히죽대다 가 갑자기 한마디 툭 던져 놓았는데, 그런 결론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관두라고 말하는 대신, 뒤로 돌아 비판적인 태도 로 자신의 형을 내려다보았다. 말을 잘 듣고 있다가 헛소리라는 판단이 들면 겐트온이 했던 대로 완전히 뭉개줄 심산이었다. 겐트온은 그런 도비 온을 확인한 뒤,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훗.. 잘 생각해 봐. 도바. 샤일라테가 힐러의 집에 온 것은 티타임 정도. 그런데도 그녀는 우리가 식당에서 나오는 시간까지 거기에 오지 않았어. 식당은 마차로 겨우 20분 정도면 갈 거리에 있는데 말이야. 샤일라테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지. 마멜록의 샤일 라테가, 엠벨루스의 도비온을 약올릴 기회를 그냥 둔다는 것 말이야." "그래서? 본론만 말해." 도비온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겐트온은 여전히 자신의 페이스대로 한 가롭게 말했다. "보채지 좀 말아라. 그게 무슨 말인지 추측해봐. 왜 샤일라테가 네 식당에 오지 못했는지." 도비온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쳇. 뭘 추측하라는 거야? 그 계집애 하는 일이 뻔하지. 뭐가 또 잘 안 돼 서 그런 거 아냐? 네 말대로 일이 성공했다면, 그 계집앤 절대 나한테 와 서 잘난척해. 흥. 고작 계집애 주제에.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지. 비 위에 안 맞아." "훗. 너나 나도 여자를 우습게 알고 있으니 그 문제는 피장파장이야. 어쨌 든.." 도비온이 자신의 말에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겐트온은 손을 들어 막았다. "네 말대로야. 샤일라테는 어떤 일이 제대로 안 풀려서 네 식당에 못 왔 지. 그렇다면 그게 도대체 어떤 일이었을까? 이렇게 찻잔으로 보다시피, 그녀는 거실에 들어와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찻잔 안을 봐. 도비온. 두 찻 잔은 비워져 있는 데, 두 개는 거의 손을 안 댔어. 싸늘하게 식은 차... 이 걸 보면 뭐 이상한 생각 안 들어?" "몰라." 도비온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이상한 생각이 안 든다니 유감이군. 이봐. 네가 만약 남의 저택에 가서 차를 대접받았다면, 넌 아무리 차가 마음에 안 들어도 적어도 반 이 상은 마셔야 돼. 그게 어느 세계나 존재하는 예법이지. 안 그래?" 도비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다른 음식이라면 몰라도 차라면 반 이상을 마셔야 하는데... 그 찻잔 샤일라테 건가? 하여튼 그 계집애는 자기 멋대로 라니 까. 쯧. 예의라고는..." "글세. 샤일라테 예의는 나중에 따지고... 문제는 이 차가, 바레인 차로... 아, 클로니아의 바레인 천을 만드는 식물은 차로도 만들어 먹을 수 있거 든. 어쨌든, 이 바레인 차는 일루티온이 마시는 차 중에서도 가장 하급인 차라는 거야. 이걸 보면 조금 안심이지. 샤일라테가 자신이 하바티온이라 는 것을 잘 숨겼다는 이야기니까. 하여튼... 샤일라테는 이런 싸구려 차를 굉장히 싫어해. 그러니, 예의를 안 따져도 될 상황이라면, 되도록 이런 차 는 안 마시겠지. 이 두 남녀가 환각제에 당한 건 알고있지? 샤일라테는 아마 들어오면서, 정보를 빼낸 뒤, 마노테 계집애를 쉽게 데려가기 위해, 그리고 기억을 희미하게 하기 위해 이 둘에게 환각제를 썼을 거야. 그래 서 차받침에, 차가 쏟아져 있는 것이지. 설마, 예의는 몰라도 예절은 완벽 한 샤일라테가 차를 쏟았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여자가 티타임에 온 손 님에게 차를 내오다가, 환각제 때문에 어지러워 쏟았겠지." 흥. 신빙성 있군. 하지만 그대로 설명만 듣고 있기도 분해서, 도비온은 한 마디 꼬투리를 잡았다. "쳇! 넌 아까부터 티타임, 티타임 하는데, 도대체 샤일라테가 티타임에 여 기 왔다는 증거는 어딨어? 그냥 아무 때나 와서 손님으로서 차를 얻어 마 셨을 수도 있잖아?" 겐트온이 혀를 쯧 찼다. "이런, 도비온. 찻잔을 봐. 두 개가 비워 있잖아. 말했잖아. 샤일라테는 이 런 차 싫어한다고. 그러니 이 차는 누가 마셨겠어? 이 두 명이겠지. 환각 제로 골아 떨어졌을 텐데... 깨끗이 비워 있다는 것. 이건 그들이 환각제에 당하기 전부터 차를 마시고 있다가 샤일라테를 맞았다는 말이야. 두 명이 일을 쉬고, 거실에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티타임 시간밖에 더 있어? 만약 손님을 맞느라 차를 내온 것이었다면, 찻잔 네 개가 다 가 득 차있거나... 이 자들이 차를 너무 좋아해서 뜨거운 것을 꿀꺽꿀꺽 삼켰 다고 치더라도, 차받침엔 샤일라테의 것과 똑같이 차가 흘려 있어야겠지. 그땐 이미 환각제에 당한 상태니까 말이야." 도비온은 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자... 이제, 시간은 티타임. 주인은 푹 자고 있고. 샤일라테는 마노테 계집 애를 데리고 가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었지. 그런데도 그녀는 그렇게 오 랫동안 자신의 성공을 알리러 식당으로 오지 않았어. 그건 바로 샤일라테 가 여기서 오랫동안 시간을 지체했다는 말이야. 뭣 때문에 시간을 그렇게 지체했겠어? 아마,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그랬겠지. 기다렸다는 것...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그건 마노테 계집애가 샤일라테가 왔을 당시, 이 집에 없었다는 말이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계속 기다리다가... 시간이 됐겠지. 보호물이 돌아올 시간이. 보호물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 을 어길 정도로 어리석은 샤일라테는 아니니... 아마, 기다릴 때까지 기다 리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을 거야. 그래서 일의 성공에도 불구 하고 식당에 우리가 있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우리는 갈리키니 움이 시작하는 직전에 여기 왔으니까.. 아마 길이 엇갈렸을 수도 있겠군. 지금쯤 그녀는 식당에 있지 않을까? 이 집을 찾았다는 것을 말해주러." 도비온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뭐야? 샤일라테가 아니라면 그 마노테 계집애는 도대체 어디간 거 야? 분명히 이 집엔 없잖아?" 겐트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세. 그건 모르지. 이렇게 오래 집에 없다니..." 그리고 그는 또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차를 마시는 데, 이 정도 되는 집에서는 간단한 다과도 곁들일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게 없는 것을 보면, 그걸 사오라고 심부름이라도 간 건지. 하지만 이곳에 처음 온 마노테를 심부름 보냈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으 니.. 원한다면, 어떻게 된 건지 집을 살펴보고 대답해 줄 수 있어. 어디든 흔적은 남아있으니까." 갑자기 도비온이 킥 웃었다. "큭큭... 어쨌든 샤일라테가 그 계집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말이지?" 겐트온이 정정해 주었다. "그럴 확률이 많다고." "하여튼. 큭.. 그거 참.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거 아주 재밌게 되었군. 좋 아.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쪽에서 반격할 기회를 준 셈이야. 샤일 라테로서는 분하겠지만, 이쪽은 보호물에 대한 아버지의 명령까지 있으 니... 그런 걸 갖고 있는 이상, 이쪽의 승리지.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마노테 계집애를 데려가면 샤일라테의 얼굴이 어떻게 될 지 기대 되는군.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정말 승리자지. 큭큭." 도비온의 말에 겐트온의 얼굴에 잠시 뜻 모를 웃음이 스쳐지나갔지만 도 비온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드래마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 됐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거실은 바깥의 기운에 따라 약간 어둑했고, 벽난로에서는 굉장히 큰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타고 있었고, 장작의 불 꽃은 굴뚝 속으로 깜빡깜빡 거리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굴뚝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웽웽거리며 역류하는 소리. 걸을 때마다 나무판자를 깐 바 닥이 울리는 소리. 따뜻한 불빛. 그리고 거기에, 전혀 그러리라고 예상 못 했던 그 장소, 거실의 의자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드래마는 아무리 억제 해도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들고 있던 짐을 뒷문 옆 마룻 바닥에 놓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런 드래마의 행동을 조용한 눈길로 쳐 다보고 있었다. 드래마는 그것을 모르는 척 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 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위험해. 드래마 는 눈을 돌려 옆에 있으리라 생각되는 시나를 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없다. 같이 들어온 여자 아이. 여자... 그때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윽..." "제대로 걸려든 것 같군." 뒷문으로 들어온 드래마를 보며 도비온은 그렇게 말했다. 드래마는 실내 에 막 들어왔을 때는 굉장히 경계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제는 점차 혼란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비온은 훗 웃고, 바로 그 옆을 보았다. 과 연... 그런 드래마 옆에는 겐트온이 말했던 대로 마노테 계집아이가 있었 다. 그가 제사의 제물로 썼던 여자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여자. 당연한 이 야기지만, 계집애의 눈도 상당히 흐려져 있었다. 흐흐. 들어와서 뭔가 이 상하다고 느꼈겠지만 그게 뭔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악하기 힘들어질 것 이다. 도비온은 뒤를 보았다. 거실 한 가운데 있는 둥그런 진에서는 이제 푸르스름한 빛이 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부하들은 거의 무생물처럼 눈을 감고 굳어 있었고, 그런 그들을 벽에 있는 등잔불만이 비춰주고 있 었다. 그 가운데서 겐트온은 미소 짓고 있었다. 손에 턱을 괴고 드래마와 시나를 찬찬히 관찰한 그는 일어나며 말했다. "흠. 저 마노테 계집애가 보호물의 종속자인가? 언뜻 봐서는 남자애 같은 느낌이군. 보호물의 취향이 20년 동안 많이 변질됐어." "한가롭게 떠들 시간 없어. 어서 일이나 시작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위험하니까." 도비온은 그렇게 말하며 파란빛을 뿜는 진 가운데로 가서 섰다. 진은 재 로 그린 것이라 발길에 따라 흩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견 고했다. 도비온은 거기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한 손을 진의 정 중앙에 갖다댔다. 그러자 동굴에서처럼 엄청난 양의 마나가 뭉클거리 며 그 속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빛의 엠벨루스의 마나. 그것을 받으며 도비온은 언제나 그렇듯, 잠시 격한 감정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라져 버리고. 도비온은 평소보다 더 딱딱하고 무거우며 정체가 모호한 목소리로 겐트온에게 말했다. <...겐트온. 이젠 네 차례다. 정보를 얻도록.> 동굴에서처럼 보는 이를 홀리기 위한 쇼는 할 필요가 없으니, 도비온은 예의 그 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리고 우울하고 지친 음색으로 고대어를 읊었다. 등잔불이 깜빡이고, 거실엔 온통 인간의 심연을 쥐어짜는 기운이 감돌았 다. 겐트온은 그 가운데서 자신의 동생을 힐끗 보고, 역시나 도비온과 비 슷한 목소리로 드래마에게 말을 걸었다. <루드랫. 반갑군. 오랜만이다.> 폐부를 할퀴어 내리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로 그는 웃었다. 여.자.아.이.라... 그런 게 실재로 존재했었나? 드래마는 왠지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 같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현실'적으로, 자신 옆에 어떤 여자아이가 서 있을 수 있을까... 점차 의심이 들고 우스워졌다. 어쨌 든 자신은 이미 한번 맹약을 맺은 몸인데. 그녀 외에 누구를 걱정하고 누 구를 보호하려고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단 말인가? 더구나... 드래마는 눈을 들어 슬픈 눈으로 자신의 눈앞을 보았다. 까맣게 빛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검게 내려앉은 검은 머리칼. 하얗고 곧게 뻗은 목덜미엔 언제나 그가 기억하고 있던 붉은 보석의 목걸이가 핏방울처럼 놓여 있었다. 그녀 는 손을 들어서 드래마의 뺨을 만졌다. 맙소사. 꼭 진짜 같구나. 붉은 입 술이 열리고, 그녀가 웃었다. "루드랫.. 반가워. 오랜만이야." 이상한 느낌. 음성은 분명 그녀의 것이나, 말소리는 그녀에게서가 아닌 다 른 곳에서 나고 있는 듯 했다. 겐트온은 혼란스러워하는 드래마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현실로는 꼼 짝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느끼기로는 자신이 많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도비온은 아직도 낮게 기도문을 읊고 있었고, 인간 에게 환각... 그것도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방식의 환각을 보게 하는 주술의 기운은 이 방에 충만하게 감돌고 있었다. "루드랫. 왜 그래? 날 잊었어? 난 오랫동안 루드랫만을 기다렸는데. 날 잊 었어?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아?" "스온... 아피네스님." 드래마는 떨리는 손으로 역시 그녀의 창백한 볼에 손을 댔다. 차가운 뺨. 역시 이것은 환각이다. 이상한 일들. 이곳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들이다. 그러나... 드래마는 이제 잔잔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 것이 환각이라면... 그렇다면.... 드래마는 두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리고 꽉 끌어안았다. "루드랫.." 그리운 나의... 드래마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괴롭게 속삭였 다. "아피네스. 나의... 하나뿐인 나의 아내." 똑똑히 들었다. 겐트온은 드래마의 미약하지만, 진실한 감정이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씨익 웃었다. [후후.. 아직도, '나의.. 하나뿐인 아내'인가? 쿡쿡.. 저 말을 잘나신 큰집이 하 귀족들이 들었더라면... 하하하...] 겐트온은 생전 처음 장난감을 받은 어린애처럼 흥분되는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흥분을 억누르고 아버지가 요구한 것들을 기억해 냈다. 도비온이 이토록 완벽하게 뒷받침을 하고 있는 데 나도 나의 일을 제대로 해내야지. 후후.. <루드랫, 이상한 소릴 들었다. 네가 스온 아피네스님을 배신하고, 다른 여 자를 종속자로 맞았다고? 결혼할 생각인가?> 아피네스는 드래마를 마주 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더 니 말했다. "나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들었어.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어. 루드랫. 나의 종속주... 나의 마스터(Master)... 나의 남편. 사람들이, 당신 이 이제는 너무 지쳐버려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한 다고 말했어." 드래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그렇게 아픈 마음 을 억누르고 있던 그는 아피네스를 몸에서 떼어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 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아피네스... "아피네스, 나의 심장은 당신의 것이야.(My heart is yours.) 어제도 그랬 고, 오늘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아피네스의 눈이 기쁜 빛을 띠었다. "루드랫.." 그리고 다시 두 팔로 그를 껴안으려고 하는데, 드래마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괴롭게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나... 언제나 그럴 거야. 하지만 난 이 말을 '정말' 당신 앞에서는 못 하겠지. 이것은 내 죄의 증거 외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나는... 당신이 환 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거야. 나의 아내. 나의 아피네 스. 영원히 지우지 못할 내 영혼의 화인(火印)... 하지만, 아피네스..." 그는 눈을 들어 아피네스를 보았다. "당신은, 현실에선 한 번도 나를 '남편'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 (계속)================================================== 에.. 지난 문제가 너무 광범위했습니까? 당연히 '짧은 문장'은 엘야시온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고로.. 오늘은 더웠다. 시험 짱 났다. ...이런 문장은 아니죠. 감명 깊은 문장이긴 하지만.) 범위를 더욱 좁히자면, 엘야시온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코멘트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이렇게 낸 이유는... 여러분이, 제가 글 중에 드린 힌트를 가지고 얼마나 인물을 파악 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그럽니다.(글 쓸 때, 의도가 제대로 드러 나고 있는 것일까, 굉장히 궁금해 질 때가 있어서.) 힌트는 벌써 예전부터 나가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문장은 언제 '딱' 나올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일찍 나와도 기운 빠졌겠지만, 지금 정도면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실제로 나온다면 굉장히 기쁠 것 같고...^^ 그 럼, 일러스트라도 드려서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미리 선언한 것입 니다. 하지만, 부담 갖지 마세요. 이런 걸 위해 일부러 멜 보내 주실 필욘 없지요.^^ 그냥 마음 내킬 때.. 멜 보내셔서 '드래마는 남자 주인공이 아 니라 웬수다.' 같은 ...간단한 코멘트..(흑흑..TT 아울님..TT)를 ...해 주시면 됩니다. 하하!! <가끔은 내 글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고 싶은... 엔.^^> ps1...에 또... 저를 '앤'이라고 하시는 분들은 이제 없는데... '엘'이라고 하 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엘은 아닙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데... 혹, 그렇다면 저를 '엠'이라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군요. '엠'도 아닙 니다.(차인표 손가락.. 까딱까딱..) ps2...My heart is yours... 멋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 크래프트의 프로토스 중에... 에 또.. 누구더라? --;;(으..기억력.).. 하여튼 누군가가 이 말을 하더군요. 찌잉~ 이것은 나중에, 루이티온들이 자신의 주인과 계약을 나눌 때 쓰일 말이기도 합니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78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10 23:53 읽음:284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1회, 제 33막. 幻覺. (3)> <으윽-!!!!> 드래마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겐트온은 가슴에 세찬 충격을 느끼고 가 슴을 움켜쥐었다. 그건 도비온도 마찬가지인 듯, 진안에서 몸을 굽히는 그 의 모습이 보였다. 겐트온은 인상을 썼다. 환술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설 마... 이토록 빨리?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환술'을 이용하기로 한 것은 그 래도 될 만큼 보호물의 모든 날개가 꺾였기 때문이다. 22년 전에는 당연 히 미친 짓으로, 절대 시도해서는 안돼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 리다. 하지만, 방금 그가 느낀 것은 분명히 미약하긴 해도 '카운터 어택'이 었다. 설마..! 겐트온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리고 사태를 파악하 기 위해 노력했다. '루이티온' 계급에게 환술을 행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 하다. 자칫하다가는 그 환술에 역으로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 럼..! 입안에 비릿하고 뜨거운 내음이 감돌았다. 환술의 마나는 하이에나. 그것도 추잡하고 냄새나며 교활한 하이에나다. 먹이를 집어삼키지 못하면, 울부짖으며 화풀이를 위해 그 근원으로 되돌아온다. 겐트온의 등에 희미 한 카운터 어택의 기운이 스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 기분 나쁜 느 낌은 피부를 아프게 만들었다. 아마 진 가운데 있는 도비온이라면 그것을 더 심하게 겪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겐트온은 믿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어쩌면 이것이 그의 '최대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걸음만 더 딛 으면 끝이 나는데, 겨우 이런 정도로 허둥지둥 짐 싸들고 도망간다는 것 은... 분명히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그럴 만한 근거'가 충분한 일이었다고 해 도, 그 위대하신 다크 스타즈의 수장님들 자존심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겨우 그 흔적만 보고 '꼬리말고 도망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 다. 더도 말고 딱 두 가지 질문만 하면 된다. 그거라면 몇 초 걸리지도 않 겠지. 그리고 재빠르게 물러가면 된다. 이렇게 판단을 내린 겐트온은 이제 는 진지한 얼굴로, 크게 한 번 심호흡한 뒤 침착하고 분명한 말투로 말했 다.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였다. <...좋아. 루드랫. 진정해. 네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것만 대답해. 넌 네 종속자에게 들은 이야기들, 특히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엘야시 온에게 이야기했나?> '아피네스'는 드래마의 말에 슬픈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왜 그래? 루드랫. 내게 그런 차가운 눈을 짓지마. 난 그저.. 그래. 루드랫. 당신은 당신의 종속자에게서 들은 이야기...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엘야시 온님께 말했어?" 가짜라도... 거기엔 진짜의 형상이 있다. 그래서 더욱 분노하고, 그러나 마 음 흔들려 한다! "...내 일을 엘야시온님께 이야기할 이유는 없어." 드래마가 한 말에, 겐트온은 의기양양한 미소지었다. 판단은 올바른 것이 었던 듯. 그는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긴 하지만, 적당히 스릴 있고 좋은 기분이다. 큭큭. 과연 우리 옛 동료...라고 불러도 좋을 정 도다. 루드랫. 말을 안 했다니 칭찬해 주지. 그렇게 생각한 겐트온은 드디 어 마지막 질문을 물었다. 그와 동시에 '아피네스'도 말했다. "그럼 동굴에서는? 동굴에서는, 루드랫이 사람들을 죽인거야? 이제 검기 를 사용할 수 있어?" 드래마는 아피네스에게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고통과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것을 묻는군. ...동굴. 인딜산의? 알겠어." 그의 눈이 더욱더 차가워졌다. "그럼, 넌 필시 이예티의 주술을 펼쳤던 자구나." 콰앙-!! 어디선가 진원을 알 수 없는 폭음이 울렸다. "...?" 드래마는 그와 동시에 자기 몸을 억누르고 있던 기운들이 조금 약해졌다 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몸에는 이런 종류의 주술에 대한 '면역', 혹은 '저항력'이 있다. 이것은 내가 마노테온인 것과 도 관계없이 존재한다. 왜...? 이미 한 번 일루젼을 앓았기 때문일까...? 드 래마는 얼핏 그렇게 추측하며 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 다. 한편 겐트온은, 아까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통에 잠시 숨을 멈 추고 있었다. 그 뒤 가까스로 숨을 헉헉대며 진 쪽을 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에선 하얀 연기가 솟고 있었다. 진 자체에까지 영향을 주다니!!! 그때 겐트온 이상의 고통을 맛 본 도비온이 겐트온에게 소리쳤다. <겐트온-! 지, 질...문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너, 넌 주,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 우윽...!!>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너도 알텐데 도비온. 겐트온은 신음이 나오 는 것을 참으며 도비온을 외면했다. 그리고 쓸개라도 씹은 얼굴로 말을 뱉었다. <...헉헉.. 젠장. 심장이 파열하는 것 같군. ...질문은 더 이상 필요 없어. 솔 직히, 동굴에서 보호물이 검기를 썼다는 말은 쉽게 믿을 수 없었지. 정보 대로라면, 고스트몬스터에게도 고전을 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거든. 혹시 뭔가 제 3의 세력이 끼여든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쉽 게 환술을 눈치채는 것하며... 카운터 어택도 상당하군. 하는 수 없지. 여 기까지만 하자. 더 이상은 우리들도.. 그리고 보호물도 위험하다. 보통사람 이라면 이 정도 되는 환술에선 완전히 먹혀 버렸을 텐데.. 흥...! 과연...!! 스온 아피네스 건도 그렇고 22년 동안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낄 정도 다. 이걸로 '검기'를 사용했을 지 모른다는 것은 신빙성 있는 이야기가 됐 지. 이 정도로 강한 정신력이라면..> 그때 도비온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웃기고 앉아 있네!! 제길!! 저 자식에게 이 정도로 인사를 받았으면, 이 번엔 우리가 힘을 보여줄 차례지!!! 이 정도 카운터 어택은 아무 것도 아 냐!! 이왕 한 것 끝장을 본다!!!> <도비온!> 겐트온은 도비온이 또 그 특유의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을 보고 눈을 찌푸 렸다. 하지만 도비온은 드래마를 증오에 찬 눈으로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하-!! 저 자식이 22년 전과 비교해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한 번 해 볼만하지!! 22년 동안 나는 계속 강해졌으니까! 마나를 더 끌어내어 보 조할 테니, 이번엔 질문이나 제대로 해! 어물쩍 하지 말고 확실히 하라 고!!! '검기'를 사용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대처방안은 완전히 틀려진다! 아버지에 관계 된 일이라고! 게다가 네 말대로 제 3세력인지 뭔지가 있으면 어쩔 거야?!!!> 지금의 행동에 대하여 자신의 복수심대신 다른 합당한 이유를 끌어댄 도 비온은 겐트온이 말리기도 전에 방안이 온통 푸르게 물들어 버릴만한 마 나를 진에서 끌어냈다. <그만 두라니까-!!! 도비온!!!>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도비온은 강력한 마나들을 끌어내고 있었고, 그것을 제어하느라, 겐트온에게 대답할 여력은 없었다. 겐트온은 욕설을 뱉었다. 다른 때라면 침착한 그도 이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이 일을 끝내버리는 게 덜 위험할 것 같았다. "헉헉..." 이상했다. 숨쉬기가 편해진 것도 잠시... 드래마는 다시금 환상 속에서 괴 로워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찌부러트리는 혐오스러운 힘이었다. 아피네스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강 한 그 힘은 몸과 정신을 콱 움켜쥐고 있어서, 압사할 것 같은 기분 속에 서 상처라든가, 분노, 경멸 같은 것을 온통 용해시켜 회색으로 만들어 버 렸다. 그때 아피네스가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루드랫. 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가? ...능력이 어느 만큼 돌아왔는가? 몬스터를 퇴치할 때는 분명 옛 능력을 쓰지 않았지? 동굴의 사람들을 죽 인 것은 네가 한 짓인가?" 그녀의 입술과 말의 내용이 따로 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성은 이미 듣 기 거북한 남성의 음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환각. 이것은 환각이다. 하지만.. 환각이라고 하더라도, 드래마는 자신이 마음을 쥐고 흔들며, 정신 을 차릴 수 없도록 만드는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이 세계는 온통 상대가 원하는 질문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야 한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온통 회색. 회색이 물결친다. 회색, 미칠 것만 같은!! 그러 나 그 가운데엔.. "인딜..산. 내가 거기에 간 것은. ..누군가를 구하러 간 것이었어. 그건..." 드래마의 말에 겐트온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나를 늘렸는데도 이렇다 니!!! 그는 '맙소사'라는 말을 뱉은 뒤 다급하게 말했다. <아냐!!! 루드랫!!! 네가 거기에 '왜' 갔는지는 생각할 필요 없다.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만 말해라. 넌 거기에 갔다. 그리고, 동굴에서...> 드래마는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파서 뒤로 더 물러나 벽에 기댔다. 아냐. '그건' 중요하다. 내가 '왜' 거기에 갔는가.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래, ...누군가가 거기 있었다. 아피네스의 회색 입술이 기괴하게 빛나며 열렸다 닫혔다. <루드랫. 아냐. 아니야. 네가 무엇을 했는가만 말해봐.. 거기에서.> 내가 무엇을 했냐고? 아무 것도. 난 그저 마음이 아팠을 뿐이야. 누군가를 지켜줘야 할 것 같았는데...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아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했지. 내가 약속을 했던 사람... 그건... 지직- 치지지지지직-!!! 진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회색 눈동자... 드래마는 숨을 토해냈다. "...시..나." 그래 시나.. 난 너와 약속을 했었지. 시나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맨 처음엔 이해 를 하지 못했다. 방은 네모나고 작고 어두웠다. 창문은 하도 높은 곳에 있 어서 시나의 키가 닿지 않았고, 거기서 들어오는 빛은 너무 적었다. 어느 만큼 이곳에 있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 왜 다시 이곳에 돌아온 건지도. 나 는 분명 드래마와 시장엘 들르고, 약초를 사고, 석양 속을 걸어서 이곳으 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 아니, 문을 연 것이 아닌가. 나 는.. 하긴.... 이 작은 방의 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최초로 이 문을 연 사람. 그곳에서 그렇게 역광을 받고 서 있는 그 사람은. 아주 그립고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사람. 시나는 전혀 뜻밖의 일로 멍해져서 그를 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기억하고 있던 대로 아주 다정한 목소리 로 그녀를 불렀다. "..시나야... 거기 있었구나. 나와 같이 가자." 아무도, 이 작은 방 속에 있는 자신을 찾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헌데, 그 가 내민 손은 크고 따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아빠는 그녀를 찾 아낸 것이다... 그녀의 아빠가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나야. 늦었구나. 학교에 다녀왔으면 인사해야지? 왜 그렇게 멍하게 서 있는 거냐?" 시나는 목이 메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아니, 왜 그렇게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냐? 하하하. 왜 아침에 보고 지 금 보니, 내가 굉장히 멋져 보이냐? 훗.. 그래. 내가 미중년이기는 하지. 핫핫핫... 아, 이거 나의 매력이란..." 그러더니, 그는 조금 죄지은 표정으로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저기, 그런데, 음... 시나야? 오늘 저녁은 라면이걸랑? 글세, 한참 이야기 구상하다가, 밥할 시간을 놓쳐서... 하하!!! 반찬도 없고... 오늘은 쌈빡하게 라면탕이다. 하하하.. 어떠냐? 미중년인 아버지가 하는 말이니, 용서할 거 지? 핫핫핫..." 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가족생활 지침서에 어긋나잖아요. 아빠는 식사당번을 하면 맨날 라면만 하고... 이번엔 용서할 수 없어요. 더구나 '미중년'이라니.. 그런 말 까지 들으면 더 용서할 수 없다고요. 아빠는 정말..." "으엥?!! 너, 너무하구나!!! 난 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이토록 머리 부셔져 라 일하고 있는데..!!" 아빠... "아빠, 저어... 제가 낮에 어딜 갔다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디? 좋은 데 다녀왔니?" "..이상한 곳엘 다녀왔어요. 하지만 전 알았어요. 난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 와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이, 이렇게..." 시나는 웃었다. 볼에 차갑고 축축한 것이 느껴졌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와 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었다. "돌아오니까... 너무 기뻐요." "아아.. 그래. 너무 기뻐. 오랫동안 이곳으로 돌아오길 바랬어." "?" 시나는 눈을 들어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거기엔 또 다른 자신, 바로 '시나'가 서 있었다. 그 '시나'는 시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눈 은 싸늘했고, 번뜩이는 차가운 은색이었다. 마치 얼음처럼 차다. 시나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 시나는 아무 것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는... "그래. 이건 아주 멋진 환각이야. 하지만, 쓸모 있어. 기억해 둬. 너와 내 가 돌아갈 미래가 바로 이곳이다. 후후." 그리고 나서 그녀는 조금 빈정댔다. "환상..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은 너도 그리고 나도, 알고 있지. 흥...! 하지 만 거짓이라도 지속되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법이야. 그 거짓을 진실로 만들고 나면... 그때쯤 되면 널 죽여야지... 왜냐하면." 시나는 깊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질투였다. "..저건 내 아빠지, 네 아빠가 아니니까!! 누구라도 방해하는 자는 죽인다. 그게 너라도! 쳇!! 더 이상 네가 나서는 것은 못 봐주겠어!!! 하지만..." 시나가 그녀를 멍하게 보는데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깜박였다. "이건 정말 ...좋은 환상이니까. 부수지 않겠어. 누가 베풀어 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조금 더 즐기자. 이 곳, '엘야시온'에서 너와 내가 찾 아야 할 사람을 찾을 때까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 전에... 짧은 휴식. 아아.. 나는... 피곤해. 자고 싶다.. 어느 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상 관없을 정도로..." 네가...네가.. 목걸이를...목걸이를.. 잊지 않았으면...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바보같이...바보같이... 이 환상의...이 환상의... 마지막을...마지막을... 바꾸자..바꾸자... ...우리가... 그런 뒤, '시나'의 어깨는 점차 앞으로 스러졌고...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 다. 그렇게 해서 시나는 홀로 남았다. 되풀이되는 지독한 환상 속에. <크악.....!!!!> <우윽...!!!> 겐트온과 도비온은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심한 카운터 어택이 었다. 드래마가 중얼거린 '시나'라는 단 한마디에 모든 주술이 역으로 저 주가 되어, 도비온과 겐트온 자신을 덮치고 있었다. 겐트온은 속을 뒤집 고 흔드는 그 괴로움 속에서 도비온을 끝까지 막았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 꼈다.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22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 얼토 당토않은 너무나 큰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세월이 과거의 그 기억을 많이 희석시키고 미화시켰던 듯.. 하마터면 루드랫에게 죽을 뻔했던 그 끔찍한 기억들이 이젠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뭉클거리며, 그 놈의 지겨 운 자기 보호본능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생명유지. 죽음. 폭주. 끊임없는 지겨움. 지겨움.. 이제 카운터 어택에 당한 몸 그 자체가 고통으로서 그때, 바로 이러했다고 이 현상을 증거하고 있었다. 겐트온은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 속에서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도비온... 안돼... 크와아아아---!!!! 거실은 바람으로 화해 이리저리 날뛰는 마나로 인해 난장판이 되고 있었 다. 도비온은 느꼈다. 지금은 '22년 전' 이었다. 뿌연 회색의 공기가 바람 이 되어, 드래마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목표를 파고드는 것에 실패하자, 그를 휘돌아 다시 도비온 자신을 공격했다. 그리고... <크아아악--!!!!!> 진에서 푸르게 섬멸하는 전기장이 올라왔다. 엠벨루스의 손...!!! 크츠츠츠 츳.... 날카로운 송곳 같은 그 빛의 무리들은 도비온의 육체를 유린했다. 강력한 스파크가 도비온의 몸을 훑고 지나가, 다시 진 속으로 박혔다. 도 비온은 괴로움에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 피를 주르륵 쏟아냈다. 겐트온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도비온에게 다가갔다. 도비온....!! <도비온-!!! 정신차려!!! 정신을 집중하고 환술을 걷어내!!! 그만 하라 고!!!> 하지만 이미 도비온은 감전으로 인해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뻗치며 이를 갈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가닥가닥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에서도 푸른 불꽃이 나는 듯 했다. 그의 이가 날카롭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겐 트온은 그것을 보며 절망했다. 도비온--!!!! 그는 이미 '엠벨루스'의 영향 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비온의 눈이 증오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생명 의 위협. 위험.. 폭주... 지겨움.. 지겨움... 생에 대한, 이 미칠 것 같은 생명 에 대한 지겨움... 살고, 살고, 살고... 폭주하고,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 겨움. 도비온은 진안에서 푸른색의 전기장에 둘러싸여 지극한 증오와 굶 주림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 눈과 황금색의 머리카락 또한 빛을 발했다. 이제야 그는 자신이 쌍둥이형과 똑같은 외모...즉, 원래의 외모를 갖게 되 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적합하지 않군. <크크.. 이번엔..> <도바---!!!> 겐트온은 악을 썼다. 그러나 벌써 도비온의 손은 철거덕 소리를 내며 칼 날로 변하고 있었다. 흐흐흐... 그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 홍채가 세로 로 갈라져 기묘하게 번뜩이는 '엠벨루스'의 눈이었다. 크르르. 배고프다. 너무나. 심한 배고픔. 뭐라도 먹을 것이 없을까? 그의 뇌리에서 주문처럼 같은 생각이 되풀이 됐다. 모든 것. 생... 삶... 지겨움... 지겨움. 이것을 끝 낼만한 공복. 다시 돌아가는 포만. 만족하지 못하는 지겨움... 공포, 파괴.. 그러나, 지겨움.. 지겨움... 온 세상에 충만한 지겨움.. 그래. 난 '엠벨루스'. 우웅... 푸르스름한 마나가 계속해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집에 가벼운 진동 이 일기 시작하고 도비온의 부하들은 의식 없는 상태에서도 얼굴이 파리 해 지며 말라가고 있었다. '엠벨루스'는 굶주림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진안 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거기에 없었다. 크으... 왜...? 그는, 진 밖으로 한발을 턱 딛었다. {크크...소.. 환...하다니. ..엔나..에서.. 그런데... 제..물은...? ..는. ..고 싶다. 인.. ...인.... 피는... 간... 크으...} 겐트온은 그 모양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게, 게엔나가 열 리다니...!!! 도비온-!!!! 이 미친 자식!!! 저주를 막을 제물도 없는 상태에 서 이렇게 될 만한 양의 마나를 끌어내다니!! 이 앞 뒤 잴 줄 모르는 천 치 같은 녀석!!! 하지만 어쩌면 겐트온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도비온 도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생각 못했을 것이다. 보호물이 환술의 마나를 조 금만 흡수해 줬더라도..!! 그랬더라면 이렇게 강력한 카운터 어택은 일어 나지 않을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겐트온은 주위를 희번덕거 리는 눈으로 둘러보았다. 도비온이 빌어먹게도 결계를 완벽하게 쳐 놓은 덕분에, 부하들은 말라가고, 산채로 미라가 돼가면서도 이 기운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덕분에 집안은 완전히 살아있는 지옥 자체였다. 들끓는 유황냄새가 진 가운데서 올라와 숨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무리 겐트온 그라도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는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차라리 도비온과 같이 미쳐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그 가 그 푸르디, 푸른... 그러나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진에 가장 가깝게 서 있 는 겐트온을 발견했다. 그는 발걸음 옮겼다. 턱... {크으.. 너.. 제..물... 크윽.. ..?} 겐트온은 이를 갈면서도 공포에 떨었다. 이 더러운 괴물자식!! 다행히 게 엔나가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닌 듯, 엠벨루스의 말은 띄엄띄엄했고, 그 소 리는 멀어졌다, 가까이 오며 불규칙했다. 겐트온은 온 몸을 꼼짝할 수 없 는 없었다. 그는 떨리는... 그러나 혐오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정신없이 외 쳤다. <엠벨루스!!! 가루타넬에게 바쳐진 자로서 명한다!!! 당장 게엔나로 돌아 가라!! 아직은 네 때가 아니다!!!! 빨리 돌아가라!!!> {키엑... 카카칵...} 엠벨루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칼날의 손이 겐트온의 눈앞에서 번뜩였다. {...제에.. 카악... 카악.. 이 자, 도..온...은 내 것. 카카칵... 내가 원할 때.. 카 악... 삼키고.. 나온다. ...지만... 크으.. ..리..단...님의 명령..} 그러더니, 그는 크크큭 웃으며 겐트온에게서 몸을 돌려 다른 인간을 찾기 시작했다. 유황이 목을 태워버릴 것 같은 속에 겐트온은 소리 질렀다. <안돼!!!! 엠벨루스-!!! 돌아가라-!!!!!> {킥킥... ...간아... 내... ..령.. ...지 마라.. 큭...} 엠벨루스는 겐트온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다른 인간을 찾았다. 심한 굶주림은 이곳에 온 뒤로 더 심해져서 무언가를 집어 삼켜야 했다. 그 탐 욕스러운 눈은 그리고 마침내 이번엔 드래마에게로 향했다. 그는 거기로 터벅, 터벅 걸었다. {크.. 제물...} 그런데, 그렇게 기괴한 말소리를 내며 드래마의 목을 칼날로 움켜쥐려던 그가 찰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멈칫했다. 그러더니 뒤로 물러서서 아직 도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드래마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크윽.. 뭐..? 너, 너.. 혹...? 크으으...?} 겐트온은 소리질렀다. <안돼!!!! 엠벨루스!! 그건 네가 삼키기엔 너무 큰 제물이다..!! 안돼!!! 이 멍청한 다크 스피릿아-!!!! 차라리 나를 먹어치워라!!!!> 그런데 그 순간 드래마를 보며 의아해 하던 엠벨루스가 갑자기 미친 듯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카카카칵... ..미... 재미.. 카칵.. 키마..라의.. ..굳이.. ..지 않아도.. 이미.. 카 카칵... 아. 좋..아. 다른 ...간.. 카카칵.. 별...} 그러더니 그는 뭐가 좋은지 계속 킬킬 웃으며 다른 인간을 찾았다. 다른 인간.. 남자의 옆을 본 엠벨루스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크크큭... 여자. 신선한..} 거기엔 그가 바라는 것이 있었다. "..시나야.. 세상은 하나도 멈추어 있는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자꾸자꾸 흘러가 버린단다. 그래도 마음 아파하지 마렴.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것 은 없으니까. 정말로 그렇단다. 너는 내 안에 있었고, 나는 네 안에서 언 제나 있을 테니까. 슬퍼할 것은 없는 거란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 면서도 웃고 있었다. "시나야... 이 세상에선 슬픔마저도 자꾸 되풀이되는구나. 그래도,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더욱 많고... 그 중에 가장 보석 같고 귀한 존재가 너란다. 그래.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 지금은... 네가 이 세상에 있기에 이 세상 이 더욱 사랑스럽다. 그걸로 충분해. 이 세상이 아무리 많은 슬픔을 되풀 이할지 라도.. 너도.. 살아가라. 시나야. 이 세상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아 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아빠.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전 그런 슬픔을 되풀이하는 세상 같 은 것은 싫어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 에요.. 시나는 아빠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이 힘겨운 듯, 시나의 머리 에서 미끄러져 내렸기 때문이다. 아빠.. 가장 원하는 것이 세상에 없다면,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다 내 것이라고 해도, 그런 세상이 제게 무슨 가치가 있어요..? 이 세상이 미치도록 아름답다고 해도, 그 세상은 이제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 는데...! 저는 무엇을 보며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킬킬..} 낮은 웃음이 들렸다. 음산한 기분 나쁜 숨결이 섞인 웃음. 그것이 시나의 환각을 억지로 잡아 찢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현실'로 이끌어 들였 다. 온갖 것들이 회색으로 소용돌이치는, 몸서리쳐지도록 살아가야 할 이 곳...!!!! 그 앞에, 불길하고 이질적인 모양을 한 것, 자신의 존재를 말살시 킬 듯한 푸른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시나는 그것을 본 순간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아아아아----!!!! 아빠...!" ..이것은 모두다 나의 살아있는 악몽이다. 꿈 중의 꿈.. 그것은 바로 지독 한 현실. 현실은 너무나 잔혹해서 오히려 꿈과 같다... 누가 이것을 내게 보게 하는가.. 그리고 눈물이 계속 흘렀다. (계속)================================================== ...실은 더운걸 몹시 싫어해서..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짧게 1부를 끝내고 한 달 정도 팍 쉬면서 통신에 신경 안 쓰고 천천히 쓰려고 했는데... 보시 다시피, 망했습니다.(폭삭) 애초 생각해 뒀던 데까지 죽으나 사나 나가는 게 낫겠습니다. 이왕 하는 김에 꾀부리지 말아야죠. --;; 1부를 일찍 끝낸 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쓸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마침 장마 도 시작됐겠다... 이번 여름, 소망이 있다면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그다지 안 덥기를. 비가 내리더라도 적당히 내려서 올해는 내 방 천장이 빗물에 안 새기를.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를 아들로 둔 것 같이 처량한 엔.> ps - 울님, 세준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 아버님의 아뒤를 빌리시는 유니 텔의 이 모님(길다..--;)..멜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 고맙습니다.^^ 에.. 또, 이벤트에 대한 멜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답은 없었지만.. 모두 다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군요. 아주 의외의 '코멘트'도 있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하하... 감사..^^ ps2 - 우엥..TT 사실은 일찌감치 쓰고, 딩가딩가 놀면서 책 보다가 10시 에 올릴려구 했는데..TT 올리고 나니 전편과 안 이어져서(바부팅이..TT) 지금까지 죽어라 수정했죠... 혹, 틀린 글자, 황당한 표현이 있더라도 용서 를... TT 나중에 이 글을 어떻게 보려고.. 내가.. 엉엉... TT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88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17 17:44 읽음:273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2회, 제 33막. 幻覺. (4)> 드래마는 온통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당장이라 도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그것을 깨는 것은 누군가가 지르는 비통한 소리였다. 드래마는 사방이 뿌연 가운데에서 고개를 들어, 그것이 어디서 들리는가 귀를 기울였다. 드래마는 예전에 그런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모든 희망을 잃은 자의 울음. ..그가 그랬었지. '아아아아!!!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제발. 나를 도와주시오...' 그것을 이해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건 그의 '능 력' 밖이었던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의 종족이란... 그렇게 차가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드래마는 힘들게 손을 들어, 그 짙은 안개의 견 고함을 재어보았다. 휘몰아치는 그것은 드래마의 손을 물어뜯을 듯 달려 들었으나, 몽롱한 가운데서도 드래마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지금은 조금 힘들지만, 결국 이런 것은 자신을 삼키지 못한다. 가만 히 있으면, 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정신을 잃어도 좋을 텐데. 저, 울음. 아아아...! 저, 울음소리... 저 밖에서 부르짖는 저 소 리는 드래마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저것은 무언가 오래된 것을 일깨우고, 드래마는 저 소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가슴 을 아프게 할 사람이란 몇 없다... 그런데... 드래마는 점차 초조한 마음이 되는 것을 느꼈다. 울음이 점차 절실해지고, 드래마는 그것을 견딜 수 없 었다. 뭔가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이 환술을 깨 지 않으면, 마지막... 누군가가 다친다. 하지만, 이 안개, 이 환술.. 이것을 부수자면 지금의 그로선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드래마는 자 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꽉 쥐었다. 미친 짓이란 건 충 분히 알고 있다. 이걸로 나중에 디트마에게 뭐라고 따질 말도 없게되었다 는 것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본성과 본능을 일깨우는 환각 속에서, 이렇게 쓰게 웃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 결국 그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근육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미세한 떨림, 그 작고 전율하는 신호, 그것을 붉디붉은 생명의 가닥을 통하여 모은다. 그리고 그 덩어리를 신께서 허락하신 대로, 파워즈의 힘으로서 증폭시킨다. 온 몸을 불태우도록...! 드래마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을 느꼈다. '기억하는 한' 한 번도 행해본 적 없는 나의 본능이자, 내 계급의 상징. 그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영창이 흘러나왔 다. <멸(滅). 마. 인. 드. 컨. 트. 롤. 멸(滅). 파(波)..> 겐트온은 엠벨루스가 보호물을 포기하고 그 옆에 있는 마노테 계집에게로 손을 뻗쳤을 때는 어느 정도 안도라고 할까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저 생물이 소중한 보호물을 다치게라도 한다 면, 계획은 모두 다 끝장이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그 옆에 있 는 마노테 계집 따위야, 열이 죽던 스물이 죽던 그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 었다. 더구나, 저 계집앤 원래 엠벨루스의 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겐 트온은 어차피 그대로 돌아가지 않을 바에야, 그의 뜻대로 그 계집애를 물어뜯던지 먹어치우던지 하고 되도록 빨리 사라지기를 바랬다. 비록, 아 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되겠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젠장!! 좋아-! 그 계집을 네게 바친다!! 엠벨루스, 그 계집을 먹어치우고 다시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엠벨루스는 겐트온 따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판단할 힘이 있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계집의 옷깃을 제쳤다. 그리고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자 입 을 크게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이고... 엠벨루스의 이빨이 마노테 계집의 살갗을 꿰뚫고 생명의 근원인 그 붉고 뜨거운 액체를 들이키려는 찰나, 계집은 갑자기 깊고 회한에 찬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 아빠...!!!!" 그 소리가 어찌나 슬프고, 괴롭게 들렸던지 엠벨루스마저도 잠시 멈칫하 고 악의에 찬 미소를 지었을 정도였다. 아니... 겐트온은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는 가운데, 눈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잠시'가 아닌가? 엠벨루스 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뭐, 뭐지? 크르르르.... 시나의 비명을 들은 엠벨루스는 사냥감이라도 본 사냥개 마냥 으르렁댔 다. 그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카칵, 이라든지 크으응... 같은 신음소 리를 흘렸다.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시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껏 얼 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크르르... ...보자. 날... 탕... 골탕... 크르르... 크르르... 여자... 크르... 핏. 스 피릿... 도...니온즈... 크르르.. 체.. 본체만... 있다면... ...크르..} "?!" 겐트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엠벨루스의 마나로 충만했던 공기가 급속 도로 약화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유황연기 때문에 콜록거리며 겐트 온은 엠벨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에 주목하려고 했다. 말들이 띄엄띄엄 이어져서 도저히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도...니온즈? 겐트온은 인상을 썼다. 이런 말들의 조합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말은 '도미니온즈' 하나였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그때 갑자기 엠벨루스가 깜짝 놀랄 만큼 크고 뚜렷한 소리로 포효하며 시나에게 달려들었다. {너, 도미니온즈여- 크아아악!!!! 나의 종의 힘으로 네가 머무르고 있는 그 육체를 죽여주마!!! 이 인간들이 날 약올린 것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치러 주겠지만...!!! 그 전에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이 아니다!!!! 크아악!!!} "?!!!" 겐트온이 저 다크 스피릿이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경악을 해서 쳐다보는데, 그 와중에도 시나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세상의 모든 위험이 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차라리 그 것이 나을 것이라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엠벨 루스는 길길이 날뛰며 칼날의 손을 들어 시나를 후려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거대한 폭음이 들리며 엠벨루스가 옆으로 나가 굴러 떨어졌다. 그의 몸이 탁자에 콰앙 박히고.. 엠벨루스는 놀라서 자신 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육체적인 아픔'? 아, 아프다...!!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원한에 찬 눈을 들어 거실 안에 있는 인간들을 둘 러보았다. <크윽..큭...크...큭.. 파..즈..? 파워즈까지..!! 분...다. 두..보자...큭...!!> 그의 이 말이 끝나자, 도비온의 머리칼과 눈이 급격히 칙칙하게 변했다. 엠벨루스가 허겁지겁 '게엔나'로 물러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도비온은 테 이블에 몸을 부딪치며, 그 밑으로 푹 고꾸라져 버렸다. 겐트온은 그것을 보다가 질린 얼굴을 하고 드래마를 휙 돌아보았다. 그가 잘못 보지 않았 다면, 방금 도비온, 아니 엠벨루스가 당한 그것은...!!! 진이 끓어 넘치고 하얀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휘몰아쳐 '벽'을 제외한 거실 안에 모 든 세간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먼지구름과 광풍 가운데 서 있는 그것은, 바로 '그'..! '루온 루드랫'이 손을 은색의 광채로 물들이며 겐 트온, 그 앞에 서 있었다. 헉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쿨렁대는 피는 오직 내부에서만 들끓고 있었 다. 눈과 귀와 코와 입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고, 피는 순리를 거슬려 거꾸로 돌고, 심장은 넘치는 에너지에 터져 버릴 듯 박동 쳤지만, 그것은 '내부'의 일이었다. 가까스로 손 쪽으로 집중시킨 검기, 그 광기의 에너지 는 오히려 드래마 자신의 손을 우선 불태우고 있었다. 칼.. 아니면, 아무 쇠붙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드래마는 몸을 반으로 쪼개는 듯한 아찔함과 현기증에 맞서 싸우며 신음을 뱉었다. 마.인.드.컨.트.럴... 전투명 령어. 존재의 반은 죽음에 방불하는 고통을 겪으며 몸부림치고 있는 데, 다른 반쪽은 무표정하며 냉랭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판단 내리고 있었다. 라단의 집. 사람은 모두 자신을 포함하여 11 명. 환술. 환술은 깨졌다. 하지만 환술을 시전한 적은...? 그리고 지킬 자 는? 드래마는 최초의 일격으로 거실 한 구석에 나가떨어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 맨 처음에 봤을 때는 금발인 것 같았는데, 지금은 머리카락이 칙 칙한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혹시 그 옆에 있는 자가(금발의) '지킬 자' 앞에 있던 '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니었다. 분명 저기서 정 신을 잃고 있는 자였다. 그때 금발의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루드랫!! 넌, 역시 검기를 사용할 수 있구나!! 마노테의 몸으로도!!! 그 동 굴에서의 일이 역시 네 짓이었구나!!!!" 흥. 드래마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었다. 전투에 있어 잡소리는 필요 없 다. 판단은 정확하고 행동은 빠르게. 드래마 자신으로서도 다행이었다. 육 체가 이토록 빨리 움직인다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녹여버릴 듯한 이런 거대한 에너지는 그가 갖고 있기엔 무리였다. 드래마는 오른손에 둥 글게 맺힌 검기를 쓰러진 자와 금발의 남자에게 휘둘렀다. 금발의 남자가 소리쳤다. "안돼!!!!!" 콰앙--!!! 우지직--!!!! 그 일격으로 테이블이 파편이 되어 날았고, 벽에 걸린 액자들은 박살이 나버렸다. 용케 그 파편들은 의자에 길게 누워 잠 에 취한 라단 부부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검기가 목표물을 제대로 부수 지 못하고 퉁겨나가자, 애꿎은 주위 물건이 작살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크으..] 드래마는 마지막 검기를 쏘아내고, 위에서부터 역류하는 핏물을 받기 위 해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적'들을 죽이지 못했다. '적' 중에 하나가 쓰러진 자를 막아서서 검기를 받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자는... 검기를 등에 정통 으로 받고도, 입고 있는 옷만 좀 너덜너덜할 뿐 몸은 멀쩡해 보였다. 역 시... 마노테의 몸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드래마는 곧이어 천근처 럼 덮치는 피곤함을 견디며, 억지로 눈을 뜨려 노력했다. 시뻘건 것이 눈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보니 어쩌면 눈 안에서도 피가 나는지 몰랐다. 잠깐 정신을 잃고 있던 도비온은 묵직하게 느껴지는 감촉에 눈을 떴다. 온 몸이 다 욱신거렸지만, 엠벨루스의 힘이 있을 때 검기에 맞은지라, 치 명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엠벨루스는 어설프게 소환이 돼서 그런 건 지 어쩐 건지, 검기 한 방으로 게엔나로 다시 돌아가 버린 듯 했다. 하 긴... 그는 파워즈(Powers)의 힘을 겪으면서 까지, 위험을 인간과 같이 하 지는 않는다. 그러니 두 번째 검기가 발현되는 순간, 그대로 사라질 수밖 에...? 이런 생각을 하며 도비온은 자기 무릎 위에 쓰러진 겐트온을 멍하 니 내려다보았다. 순간이나마 그와 공유하던 감각이 끊어진 듯해서, 도비 온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축 늘어진 겐트온의 몸을 똑바로 뒤 집었다. "...게, 겐트.. 주, 죽은 거냐?" 그때 겐트온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 푸른 눈에 비웃음을 띠며 말했 다. "썩을... 하여간, 머리라고는 안 돌아가는 녀석. 네가 살아있는 데, 내가 죽 었을 것 같냐...!" 도비온은 그 말에 그를 확 걷어차 버렸다. 격한 움직임으로 뼈가 우두둑 소리나고, 통증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엎어지려면 다른 데 가서 엎어질 것이지, 하필이면 내 무릎 위에서 쇼를 하고 난리야!! 젠장할." 겐트온은 그런 그를 보더니 큭 웃고, 아까보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가 네 대신 보호물 검기를 막아줬는데, 조금은 감사하는 마음이 라도 가져라. 응..?" 도비온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웃기지 마! 자식아!! 하여간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돕고 나중 에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놈들이 제일 밥맛없어!!! 누가 너더러 내 앞 을 막으래?!! 이 골 빈 자식아!" 그 말에 겐트온이 낄낄 웃었다. "좋은 근성이다. 도비온. 쿡쿡. 하긴.. 나도 뭐 굳이 네 앞을 막아서고 싶 지는 않았어. 단지 네가 검기에 당해 완전히 나가떨어지면 돌아가는 데 애를 먹을 테고, 그럼 내가 곤란하니까 그런 거였지. 나야 뭐, 검기 한 번 정도는. 흥. 이봐, 철수한다. ...알고 싶은 것은 다 알았고, 네 부하들..." 그는 눈을 힐끗 돌렸다. 도비온의 부하들은 엎어져서 괴로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엠벨루스가 사라짐과 동시에 마나의 움직임도 사라져, 처참한 거 실 안이 더욱 뚜렷이 보였다. "..네 부하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으니.." 도비온도 겐트온처럼 자기 부하들을 보더니,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그래. 철수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지." 도비온은 이를 갈며 드래마와 시나를 바라보았다. 드래마는 이쪽을 향해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눈에 이상이 생겼는지 자꾸 눈을 깜빡이 고 있었다. 안 그랬으면, 지금쯤 더 이상 검기는 불가능하더라도 맨 손으 로라도 공격은 이어졌을 것이다. 제기랄... 도비온이 어떤 식으로 이 분함 을 풀 것인가 생각하는데 겐트온이 소리쳤다. "관두라니까!" 그는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드래마!!!! 알았다!!! 전투 명령어를 해제해라!!! 더 이상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아라!!! 우리는 이제 물러간다!!! 더 이상 너희를 건드리지 않는 다!!!" 그 말에 드래마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드래마는 속으로 웃었다. 전투 명령어 따위는... 마지막 검기와 함께 저절로 해제되었다. 번개가 저 하늘 에서 이 하늘로 가로지르는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마노테의 몸으 론 그것이상은 무리다. 하지만, 버린 만큼 대가도 많이 얻었다. 스온 아피 네스를 일깨우는 가증스러운 저 환술을 깨고, 드디어 그렇게 궁금했던 어 떠한 '세력'앞에... 그리고, 무언가를 지켜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은 이 지독 한 통증을 훨씬 상쇄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눈이 잘 안 보인다. 드래마 는 욕설을 뱉으며 손으로 눈가를 만졌다. 끈적한 액체... 피인가? 그때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왜 그래? 루사트? 무슨 문제가 생겼나? 저번 동굴에서처럼은 잘 안되나 보지? 흥! 주제를 모르고, 전투 명령어 따위를 발한 결과가 꼴 좋구나!" 동굴...? 저들은 아까부터 '동굴' 이야기를 한다... 그때 자신을 '루사트'라 부른 남자가 다시 한 번 더 소리쳤다. "흥!!! 겨우 저따위 마노테 계집을 위하여 두 번이나 전투 명령어를 쓰다 니..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지!!! 좋아! 루사트! 우리는 철수한다! 네 빌 어먹을 활약 덕분에 이쪽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으니까! 젠장! 하지 만 저 계집은 이 손으로...!!!" 드래마는 그의 음성에서 무언가 불길한 것을 감지하고 자기도 모르게 좀 더 옆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가볍게 몸과 몸이 부딪히는 감촉이 일 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바에 의하면, 시나는 아직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드래마는 그녀를 몸으로 가리듯이 하며 남자들 쪽을 향 해 소리쳤다. "당장, 여기서 꺼져라!! 비록 눈은 잘 안 보이지만, 원한다면 맨 손으로라 도 너희를 상대해 줄 수 있다!!! 나한테 원한을 가졌다면, 내가 직접 싸워 주지!!!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은 끌어들이지 말아라!!!" "감동적이군. 과연 모범적인 종속주와 종속자 아닌가?" 남자가 빈정댔다. 드래마의 경고에도 그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할 말을 잃었어. 그래도 기억은 루이티온일텐데. 고귀한 생명을 지키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루이티온이, 정말로 그런 하찮은 목숨을 구하려 들 줄이야.. 뭐, 화풀이하는 보람은 있겠군. 그 계집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서 네 앞에 버리고 간다면 말이야? 아... 넌 그때도 눈이 보이지 않아 그 꼴을 못 보겠군. 하하... 뭐 그래도 피비린내는 맡을 수 있겠지. 아니면, 끌 고 가서 실컷 재미를 본 다음에 사창가에다가 팔아버릴까?"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88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17 17:45 읽음:273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3회, 제 33막. 幻覺. (5)> 드래마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이제 모든 움직임은 '본능'에만 따르고 있 었다. 생각이라든가, 계산 따위 할 여력은 없었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일루트 에일더크에게 배운 것을 네 녀석에게도 흡족할 만큼 보여주마! 드 래마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다른 남자가 말했다. "가자. 됐다니까..!!" "방해하지마!! 샤일..! 아니, 그 계집애에게도 본 때를 보일 겸, 저 마노테 계집애는 꼭 끌고 가고야 말겠어!!" "하여간에, 쯧!!!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라는 말 뒤로는 귓속말을 하는 듯,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야!!? 그걸 왜 이제서야!!" "쉿!!" 다른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드래마를 의식하고 또 목소리를 낮춘 채 격렬하게 말다툼하기 시작했다. 도비온은 겐트온이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대자,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그러나 그 가운데 들어있는 감정은 충분히 나타내며, 겐트온을 씹어버릴 듯이 말했다. "이 자식아-!! 왜 그걸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하루종일 고생하고, 지 금에서야 분풀이 좀 하려는데!!! 뭐? 아버지가 저 마노테 계집애를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고?!! 그럼 오후에 식당에 왔을 때 그렇게 말했어야 할 것 아냐?!!! 마구간이니, 뭐니 온갖 똥 구정물을 다 헤치고 다니게 만들어 놓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나불거리는 거야?!!!" 겐트온은 느긋하면서도 웃음기가 어린... 그러나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녀석. 넌 그럼 내가, 중요한 정보를 가르쳐 줬어도 불손한 대접을 받고, 몸 바쳐서 방패막이가 된 후 발에 채이고.. 그런 꼴을 당하고 나서 도 너를 골탕먹이지 않을 줄 알았냐?" 도비온은 지금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자기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것 이 루사트에게 얻어맞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겐트온의 저 후려치고 싶 은 면상 때문에 열이 받아서 그런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너 정말 이따위로 할거야?!!! 루사트의 심중만 떠봐도 되는 거였다면, 뭣 하러 그 진창을 헤매고 미친놈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녀?!! 그냥 왕궁만 지키고 있다가 오늘이든, 내일이든 미행하면 되는 것을?!!! 저 마노테 계 집애를 죽여 없애자는 일념 하에...!!" 겐트온이 큭 웃었다. "글세, 도비온. 넌 처세술이 너무 떨어져. 네가 나한테 하는 정도로 누군 가를 대한다면... 상대방은 틀림없이 나처럼 한다니까? 하하.. 더구나 난 모욕을 받고 꾹 눌러 참는 타입은, 너도 알다시피 절대 아니지." 그리고 그는 가슴이 아픈지 조금 숨을 헐떡이면서, 그래도 의연한 자세로 그 미소를 고수하며 도비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사냥개처럼 시키는 대로 잘도 하더구나. 도비온. 냄새도 잘 맡고 다니고. 수고했다. 재밌었어." 퍼억--!!!! 급기야 도비온은 겐트온에게 주먹을 날리고야 말았다. 엠벨루 스의 마나가 조금만 남아있었더라면 그 주먹은 칼날이 됐을 텐데, 천추 (千秋)의 한(恨)이었다. "넌 꼭 내가 죽이고 싶다. 겐트온!!" 학습능력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녀석. 글세, 되지도 않는 협박은 하는 게 아니라니까.. 쯧쯧... 솜방망이 같은 주먹하고는...이라는 말을 중얼거린 겐 트온은 더 이상 도비온의 성질을 돋구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야 할 것 아 닌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지금 겐트온은 자신의 뱃속에 있는 내장이 반으로 찢어졌든지 녹아버렸든지 둘 중에 하나 일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 고 있었다. ...샤일라테의 그 사랑스러운 손길 좀 의지해야겠군. 가슴 뛰는 걸? 겐트온은 씩 웃고 도비온에게 말했다. "...날 네 손으로 죽이고 싶으면, 우선 날 살려놔야겠지. 빨리 가자. 네가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난 지금 당장 네 후드에다 피를 뱉어놓고 기절할 거니까. 그럼 너만 힘들어지겠지. 저 부하들 데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겐트온이 상당히 창백한 얼굴로 이 말을 했기 때문에 도비온은 흥!하고 코웃음 쳤다. 그는 지금, '인생에 있어 꼭 처단하고 싶은 자 블랙리스트'라 는 목록에서 베스트 원 '루사트'를 지우고 지금까지 '3위'였던 '겐트온'을 그 자리에 써놓고 있기 때문에 그의 그런 말 따윈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후드에다 피를 뱉어놓겠다는 말에는 기분이 나빴으므로, 빨리 돌 아가기로 했다. "멍청한 녀석. 머리 좋은 척은 혼자 다하면서, 웃기는 짓은 골라하는군." 이런 말을 씨부렁대면서 도비온은 숨을 콜록거리는 부하들을 끌어 모았 다. "도, 도바님.." "도바님..흐흑.. 괴, 괴롭습니다.." "...조금만 참아. 수고했다." 도비온은 그들이 죽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수고했다'는 말을 해 주었다. 다섯 개의 보석을 잃었다. 이 손실에 대한 보상은 꼭 하 겠다. 도비온은 그렇게 다짐하고 이젠 창백하다 못해 새파란 안색의 겐트 온까지 부하들과 함께 한 자리에 모았다. 닭을 태워 만든 재로 그린 진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이제 그들이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부서 진 테이블과, 깨져서 떨어진 액자들, 이리저리 옮겨져 있는 의자들, 그리 고 흉하게 책장이 찢겨져 바닥에 있는 책들뿐이었다. 드래마는 희미하게 보이는 눈을 깜박이며 숨을 몰아쉬며 그들의 이런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 다. 조금만 힘이 더 남아 있었더라면 그들을 때려 눕혀서라도 정체와 목 적을 밝혔을 텐데, 그럴 힘은 전혀 없었다. 쓰러지지 않고 이렇게 서 있는 것만도 기적이었다. 그때 갈색머리의 남자 드래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비 웃는 표정을 얼굴 가득 띠고 말했다. "...흥. 이 순간만은 널 루이티온 루사트라고 부르지. 루이티온 루사트. 싸 움은 재미있었다. 비록 끝을 못 내고 가는 것이 아쉽지만..." 드래마는 숨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와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기꺼이 빈 정대어주었다. "..흥. 끝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환영한다. 여자를 습격할 생각 따윌 하는 녀석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지만!!" 도비온의 눈에 잠깐 화난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 혓바닥은 여전하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는 녀석. 고작 마노테 주제에.." 드래마는 눈가로 귀찮게 흐르는 핏자국을 닦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날 '루이티온 루사트'라고 부를 생각도 말아라! 그리 고 귀찮게 앵앵거리며 주변을 탐색하지 말고 죽이던지 말던지 당장 결판 을 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명을 원한다면 마음대로 가져가!" 그는 진한 남색의 눈으로 그들을 조소했다. "뭘 알고 싶나? 내가 과거에 얼마나 얽매여 있는가를 알고 싶나..? 그래? 그래서, 원하던 것은 얻었나? 웃기는 군!! 고작 '마노테' 따위를 상대하면 서 이런 식으로 시간낭비를 하다니!!!" 그러면서 드래마는 차갑게 웃었다. "하찮은 녀석들!! 충고하나 해줄까? '나'라면, 마노테 따윈 한 칼에 해치운 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단시간에 제거하도록!! 그 게 아니라면, 들락 달락 거리면서 귀찮게 하지 말아라!! 이 경멸할 가치도 없는 판테온 자식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거실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겐트온이 고개를 들 고 인상을 썼고, 도비온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드래마조차도 자신이 말 한 내용에 잠시 멈칫했다. 판테온..? 드래마는 눈을 크게 떴다. 판테온...!!! 그 한 마디 말에, 마치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기억들이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이 떠올랐다. ...생명을 다하여.. "으윽.." 드래마는 급격한 기억에 고개를 숙였다. 크고 작은 하얀 점들이 머릿속에 서 점멸했다. 그리고 깨질 듯한 통증이 머릿속에 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우윽..!!!" 이제 하얀 점들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온통 섞여 들려 오고 있었다. 당신을, 나의 생명을 다하여... 그러니.. 아냐. 조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까. 하하.. 마인드 컨트롤. 기한은... 22년이다. 최대한 늦게.. 그런가. 너는.. ...선택. 아깝다. 하지만... "으으윽...!!!!" 드래마는 숨을 헐떡이며, 그들 겐트온과 도비온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나'를 안다. 그렇지? 이 미칠 것 같은 기억들.. 너희들은 날 알아. 아직, 아직도...? 헉헉.." "...젠장." 겐트온이 어두운 눈으로 그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도비온 또한 제기랄 이라는 말을 뱉으며 드래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드래마의 피로 얼룩 진 두 눈을 쳐다보며 화난다는 듯 말했다. "...과연 대단하군. 얼마나 대단한지 온갖 솜씨를 부려놔도, 틈만 있으면 주술이란 주술을 다 깨 부실 정도이니. 지겨운 마인드 컨트롤의 족속!!" 그때 겐트온이 지쳤다는 듯 말했다. "봉인해. 도비온.. 쓸데없는 말 말고.. 역시 '환술'은 무리였어. 젠장. 이미 걸려있으니, 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억만 되돌려 줬군. 쳇." 드래마는 억지로 등을 피고 어깨로 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결코 너희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판테온.. 너희 아버지.." 드래마는 고통 중에서도 그들을 비웃었다. "'웨스로드'에게 전해라. 내게 시간은 아무 상관없다고.. 직접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그때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어리석은 웨스로드." "닥쳐!!!" 도비온은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리고 분노한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모욕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누가 승리할지는 두고보시 지!!!! 너희야말로 아버지 앞에 무릎꿇게 될 거다!!" 드래마는 고개를 숙였다. "하하.. 마음대로 해보시지. 흥.. 덕분에... 오랜 시간... 지독할 정도로, 절실 한, 그리고 말 그대로의 세계의 확장을 겪고 있다. 후후.." 겐트온이 냉랭하게 말했다. "봉인해! 도비온!!" 도비온이 말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언제나 그렇듯 넌 우릴 기억 못할 것이다. 그것이 애 초 네게 걸린 주술이었지. 그걸 위해서 22년 전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하 지만.. 이제, 우리의 실체와 네가 다음 만나는 순간이 너의 '마지막'이다. 그걸 기대하마." <이 짧은 순간의 기억들, 너에게 영원한 잊음을 부여한다. 엠벨루스의 이 름으로!> 그의 말에 따라 드래마의 기억이 또 한 번 더 공백으로 돌아갔다. 그 멍 한 기운 속에서, 그리고 그 온전한 혼돈 속에서 드래마가 그렇게 서 있는 데 도비온이 즐겁다는 듯, 잔인하게 말했다. "네 종속자는..." 도비온은 시나를 쳐다보았다. 그녀 또한 드래마처럼 몸을 떨면서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환각의 후유증인지도... 엠벨루스에 의해 급격하게 깨어 나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저대로 폐인이 되도 좋고.. 아니라면, 또 그것 으로 좋다. 어차피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테니. "..네 운명이 끝장날 때 같이 끝장내주지. ...넌, 네 운명에 아무도 끌어들 이지 말아야 했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넌 혼자이고 홀로 살았어야 했 다. 마인드 컨트롤이 깨진 것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면서 마노테 계집 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척 하다니..!! 아직도 스온 아피네스를 잊지 못하면 서!! 네 웃기는 마음이야 알 바 없지만... 저 마노테 계집으로서는 널 만나 는 순간이 바로 계집의 인생, 최대의 불운이었다. 흥.. 그럼 다음 순간까지 평안하기를.. 그리고 엘의 은혜가 온종일 너에게 미쳤던 것처럼, 이 밤에 도 그러하기를... 마젤토브." 이런 비웃음을 남기고, 거실에서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드래마 는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말한 '시나'를 생각했 다. 하아.. ...그들이 옳다. 그저, 모든 것을 그냥 감수하면 되었을 것을, 나 는 왜 굳이 시나를 끌어들인 것일까? 어떤 마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냥.. 혼자인 것이 나았을 텐데... 왜, 이것을 깨뜨릴 생각을 한 것이지? 왜 애초부터 나는 얼음의 숲에서 시나를 구했던 것일까? 모른 척.. 모른 척했더라면... 그랬으면 나았을 텐데. 드래마는 오랫동안 생각하기 회피해 왔던 것을 계속 되풀이하며 시나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시나..." "흑흑흑..." 시나는 아무대답 없이 눈을 가리고 울기만 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몸이 구나. 드래마가 슬픈 듯이 말했다. "미안해.. ..한때는 괜찮다고, 옳은 일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 너를 데리고 가라는 디트마의 말을 끝까지 거부했어야 하는데.. 그 런데 난 어쩌면,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던 지도.. 지치고, 힘들었어. 여길 다시 온다면, 제정신일 수 있을까 무서웠지. 디트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네가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미안해. 아무리 두려웠어도.. 나는, 너를 이용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미안.." 드래마는 시나를 끌어안고 이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시나는 계속 몸을 웅 크리고 있었다. "흑흑..." 드래마는 그런 그녀를 놓고 바로 뒤의 벽에 기댔다. 이제 눈은 거의 보이 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조금 힘들어서.. 어쩐지 네 모습도 잘 안 보이는군. 하아.. 조금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뜨면, 사람을 시켜서라도 널 되돌려 보내야 겠다. 넌 괜찮을 거야.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해. 넌 그냥 평범한 마노테 소녀일 뿐인걸...걱정하지마...." 그렇게 말한 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후, 시나는 눈을 들었다. 그녀 는 드래마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드래마의 얼굴은 아주 창백했 다. 시나는 그런 그를 보며 더욱 눈물을 흘렸다. "..흑흑.. 드, 드래마.. 아니에요. 나를 돌려보낼 필요 없어요.. 그 애가 내가 여기 있기를 원해요. 하, 하지만... 내가 당신하고 있는 것은 싫어하고 있 는데.. 그런데, 왜 여기 있기를 원하는 건지를... 흑흑.. 아니, 모르겠어요. 그 애가 정말 누구인지를.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요..흑.. 미안해요. 흑흑.. 드, 드래마, 눈에 피가 나요? 어떡하죠?" 그렇게 말한 시나는, 깊게 잠든 그에게 엉금엉금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난 핏자국을 보며 눈물을 흘린 뒤, 그것을 닦아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뒤 한숨을 쉬었다. "..흑흑.. 미안해요. 너무 두려워서.. 나도... 미안해요.. 난 아무 것도 못했지 만, 드래마가 깨어날 때까지 여기 있다가... 같이 잠들었다가 깨어날게요. 그러면 무섭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깨어나면 또 다 잊을 수 있겠죠. ... 드래마. 같이 잠들어 줄게요..." 그리고 시나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그녀를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으나, 시나는 깨어나고 나면 이번에도 그것마저 다 잊어버렸을 것이라 확신했다. 언제나 처럼. (계속)================================================== 이벤트에 대한 답은 아직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꼼꼼하게 기 록은 하고 있지요. 지금쯤 되니 무리였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냥 100회 기념 이벤트로 마무리짓는 것이 나을까요? 그렇다면 1부 기념 이벤 트는 100문 100답이라도 할까..(할 일도 되게 없네..--;) 카인님께 감사를.. ^^ 생각을 많이 해주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나의 엄마 가...^^; 이나시엔님과 승훈님 멜 보내 주셔서 감사..^^ 시골남자님께도..(앞으로는 삼가도록 하지요...^^; 동생 분께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푸르나리님, 개인 홈이랑, 멜 감사했습니다. 하하..^^ 언젠가 아피네스도 그릴게요.^^ 맞 아요. 맨 첫 부분의 멘트는 아주 중요합니다.^^;; 알아채 주셔서 감사..^^ ... 수희님, 레이서스는 다음 막에 나옵니다.^^ 그럼, 월요일 날에도 또 올릴게요.(꾸벅) <언제나 봐주시는 분들에게 고마워하는 엔.^^> ps...sky님.. 도비온이 '초사이어인' 비스무리하게 됐으니, 저도 해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하..^^ 드래곤볼이라...^^ ps2...언니, 멜 감사했어요.^^ ps3...꿍이님, 비록 7연참(--;;)은 아니지만, 뭐 일찍 올렸으니까...^^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93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19 23:13 읽음:274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4회, 제 34막. 밤을 기다리는 것들. (1)> 라단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거실의 풍경과 그 가운데 쓰러져 있는 주인, 그리고 마노테 계집애였다. 마노테 계집애 옆에는 웬 여자애가 하나 앉아 있었는데, 라단의 눈에는 오직 드래마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라단 은 피가 흐르는 드래마의 얼굴에 질겁하며 일어나 소리쳤다. "루온 루드랫님-!!!!" 그 말에 시나 옆에서 눈물을 훌쩍이고 있던 소녀가 말했다. "훌쩍, 훌쩍... ...? 루온? 뭐예요? 당신 미쳤어요? 여기 '루온'이 어디 있어 요?" 라단은 여자 애를 보았다. 분홍색 머리칼에 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 "넌 누구냐?!!!" "훌쩍... 나요..? 난, 아르코나 숲, 티토우의 딸 뷔기어 셰리.." "아냐!!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루온 루드랫님--!!!!!" 그렇게 소리지르며 라단은 엎어질 듯이, 드래마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셰 리카는 그런 라단을 보며 눈물 흘리던 것도 잊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우쒸!! 저 사람 뭐야?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잖아? 남이 자기 소갤 하는데 느닷없이, '그딴 거'? 뷔기어 셰리카의 이름이 그딴 거야?] 셰리카가 불만스럽게 라단을 보는데, 라단은 피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드 래마의 상태를 살피며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아, 아니..!! 루온 루드랫님!! 갑자기 왜 이런 상처들이..!!! 루온 루드랫 님!!" 라단의 그런 모습을 보고 셰리카도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 맘에 안 드는 아저씨와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다. 호문클로스의 흔적을 추적해 와서 이곳으로 살짝 들어와 보니, 집은 정말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호문클로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 인하고... 난잡한 거실 한 구석에서 시나를 발견했을 때는 굉장히 놀랐다. 셰리카는 라단처럼 울먹이며 소리쳤다. "흑흑... 시나야!!! 눈 좀 떠봐!! 도대체 이게 왠일이람!!" 라단은 반대쪽에서 소리쳤다. "루온 루드랫니임!! 누군가 루드랫님을 습격한 겁니까?!! 네?!" 셰리카도 같이 소리쳤다. "흑흑!! 시나야!! 죽으면 안돼!!!" "루온 루드랫니임-!!" "시나야아---!!!!!" 여기까지 오자 라단은 눈을 들어 셰리카를 보았다. 셰리카도 라단을 보았 다. 서로간에 상대가 몹시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라단 같은 경우는 왜 이 여자애가 자기 집에서 이렇게 소리를 치는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이거고 저거고 다 귀찮아져서 눈에 힘을 팍 주고 '조용히 해라. 응?' 이라는 메시지를 여자 애에게 보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훌쩍이며 멀뚱멀뚱 라단을 볼뿐이었다. 그 모양에 라단은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리고 다시 드래마의 상태를 살피며 아까보다 더 큰 목소 리로 애통하게 소리쳤다. "루온 루드랫님!!!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이 힐러 라단이 모시 고 있는 중에--!!! 눈 좀 떠보십시오!! 루온 루드랫니임--!!!" 라단의 화이팅에, 셰리카는 자신도 분발하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라단의 외침에 자기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신경 쓰면서, 또한 더더욱 큰 목소리 로 소리쳤다. "시나야--!!! 으앙~~~!!! 눈 좀 떠봐!! 이게 웬 날벼락이야?!! 으앙!!! 날 버 림 안돼--!!" 여기까지 오자, 드디어 라단은 못 참고 분연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집게손 가락으로 셰리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도대체 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여기서 뭐하는 거야?!!" 셰리카도 쌓인 감정이 많았던 지라, 인상을 쓰며 벌떡 일어섰다. "난, 아르코나 숲의 자랑스러운 티토우의 딸 뷔기어 셰리카! 그런 아저씨 는 누구예요?!! 시나와 무슨 관계죠?!" "마노테와 관계는 무슨 관계?!! 난 이분의 힐러 라단이다!!!" "뭐요? 힐러면서, 왜 남자만 갖고 슬퍼하고 시나는 안 봐줘요?!!!" "내가 지금 주인을 내버려두고 마노테 따위를 돌보게 생겼냐?!!" 셰리카가 분해서 말했다. "이익!! 시나는 마노테 따위가 아니에요!!" "참나! 뭐가 아니야?! 눈이 있으면 똑똑히 봐라! 저게 마노테지!!" 그는 시나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하지만 셰리카도 지지 않고 드래마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그러는 아저씨는요?!! 저 남자는 머리카락 길어요? 아저씨가 마노테한테 루이티온이라고 그랬다고 수비대에게 확 고발해 버릴 거예요?!!" 라단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뭐? 고, 고발?!! "아니- 이런 황당한 경우를 보았나!! 내 집에서 이렇게 소리치는 도대체 넌 누구냐?!!" "뷔기어 셰리카!!" "글세 뷔기어 셰리카가 뉘 집 딸이냐고?!!" "아르코나 숲의 티토우의 딸이라니까요!!!" "아르코나 숲의 티토우가 누구야?!!" "누구긴 누구예요?!! 우리 아빠죠!!!" 라단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뭐야?! 그러니까 그 아빠가 누구냐고?!" "아빠가 아빠지 누구긴 누구예요?!! 참 나!! 그럼 아저씨는 뉘 집 아들이 에요?!!" 으아악-!! 뭐야? 이 여자 애는?!!! 라단의 속은 위의 몇 줄 사이에 터져 버렸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싸우는데, 그 와중에 카탈 리가 깨어났다. 깨어나서 어렴풋한 눈으로 그녀가 맨 처음 본 것은 쓰레 기장을 방불케 하는 거실 풍경과,(얼마나 공들여 가꾼 거실인데.. 여기서 카탈리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라단의 주인과 그의 종속자가 바닥에 쓰 러져 있는 모습...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 한 여자아이와 싸우는 남편이 었다. 카탈리는 이 모든 모습들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꿈이라고 하고 싶지만... 라단의 모습이 현실의 모습과 너무 똑같은 걸..] 머리가 띵- 했다. 하지만 카탈리는 언제나 그렇듯 좌절하지 않고, 어지러 운 것도 참고,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도 참고... 라단이 자신의 고조 할아버 지 이름까지 불러대는 것을 들으며... 남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라단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여, 여보..?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아, 카탈리? 글세 들어봐! 우리 집 증조할아버님 성함이...?!" "..여보. 당신의 '뉘집 아들'인지 밝히고 싶어하는 열의와, 증조할아버님 성 함은 저도 존경하는 바이지만.. 제발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당신의 주 인, 치료 좀 해드리면 어떨까요?" "엉?" 카탈리는 자기만이라도 침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생긋 웃었 다. "글세 당신이 쇼크상태라는 것은 알겠는데.. 주인님 치료 좀 하자고요. 더 불어 우리 거실도 치우고요?" 아마, 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탈리가 침착하며 상냥하게 윙크한 것이 효 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제 정신을 차린 라단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드래 마를 붙들고 늘어졌다. "어허헝- 루온 루드랫님!! 이런 불충한 힐러가 다 있다니!! 주인이 다쳤는 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도토리 같은 계집애와 싸우고 있었다니 --!!" 셰리카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으앙~!!! 시나야-!! 죽으면 안돼!! 이 아저씨한테서 내가 널 지켜줄게!!! 으앙~~!!" 카탈리는 현 상황으로 보아 그들의 패닉 상태가 한참 갈 것 같다는 결론 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은 잠시 내버려두고, 진짜로 아껴두었던 하이 포션 이나 꺼내오기로 했다. 저 분홍색 머리칼의 여자아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궁금했지만 그것도 나중에 밝히기로 했다. 시나마도 시나마지만 라단의 주인님은 이 거실과 비교해서 만만치 않게 엉망진창으로 보였고... 어쨌든 다섯 사람 중에 하나 정도는 사태를 수습하는 기지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 는가? 도비온은 주문을 외어 힐러 라단의 집을 빠져 나왔다. 더 이상 주절대고 있기에 겐트온이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던 것이다. 멍청한 녀석. 이렇게 짜증 어린 말투로 중얼거린 도비온은 드디어 식당에 도착하자, 놀란 외마디를 지르며 달려드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 녀석들은 잘 묻어주고.." 텔레포트의 힘이 바깥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결계를 마지막으 로, 다섯 명의 부하들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 "겐트온은 마차에 싣도록. 아, 그전에 힐러 한 명을 데려 오고..." 부하들이 바삐 움직이는데, 도비온은 들 것 위로 옮겨지는 겐트온을 보며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찌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겐트온이 도비온 을 보고 싱긋 웃었다. "왜 인상을 쓰고 있냐? 혹시, 내가 걱정돼서..?" "잡소리는 집어치워! ...겐트온. 너 솔직히 말해봐. 내가 네 정보를 우습게 안 것도 사실이고 널 걷어찬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 니, 넌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 오후에 식당으로 왔단 말이야. ...그러니 말이야... 넌 내가 제대로 행동했더라도..." 여기서 도비온은 한껏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으며, 말을 망설였다. "...넌 분명, 아까 같이 행동했을 거야... ...솔직히 말해봐. 아까 나한테 '처 세술'이니 뭐니 한 건 또 네가 그럴 듯하게 둘러 댄 거지? 그렇지..?" 겐트온이 놀랍다는 듯, 빙긋 웃었다. "호오~? 검기에 한 방 맞아서 그런가? 영특해 졌구나, 도바. 그래, 사람은 그런 식으로 파악하는 거다. 상대가 뭐라고 주절거리든... 그의 행동과 성 격으로, 그리고 사건의 전후문맥을 보아 파악하는 거지!! 하하하!! 역시, 내 동생...!! 자랑스럽다..!" 여기서 도비온의 부하들이 들것을 '끙차'하고 들더니 식당 밖으로 나갔다. 겐트온은 들 것 위에서 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그 영특함 잊지 말도록 하고- 이따가 파티에서 보자고-!! 꽃단장하 고 나오도록. 하하하!!!! 하여간 놀리는 보람이 있는 녀석...!!!! 하하하...!!!" 그 때 화석처럼 굳어있는 도비온 뒤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도바님? 부르셨습니까? 아! 킬의 치료는 그럭저럭 끝났습니다. 상처는 대강 아물었으니, 몇 주 요양하면... 그런데 시키실 일이란..? 아!! 저 분의 상태를 보라고 부르신 겁니까? 헤헤..." 브리드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칭찬을 기대하며, 이렇게 넘겨짚어서 자신 의 유능함을 또한 자랑하고 싶어하는데, 도비온의 뭐 씹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브리드!!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식당 바닥 이나 닦아!!!" "..예?" "같잖은 참견할 생각 말고, 네 일이나 하라고!!!! 젠장!! 저 썩을 놈의 자 식!!! 파티?!! 마차로 옮겨지는 중에 내장이나 터져 버려라!!" 그런 말을 하는 도비온의 표정은 아침 무렵 한 부하를 계단 밑으로 날렸 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아서, 브리드는 대걸레나 빠는 게 아무래도 낫겠 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도비온은 바깥 에서 마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생각했다. 겐 트온...!! 너 같은 자식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이나 함께 있었던 게 내 인생의 수치고, 저주였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네 목을 졸라줬어 야 하는 건데!!! 젠장!!! 도비온은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를 뒤따라가, 뒤집 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있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살벌하게 이를 박박 갈면서, 블랙 리스트를 펼치고, 맨 꼭대 기... 그 영예스런 0번의 자리에 하바티온 하겐트를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 했다. '두고보자'라는 말과 함께. 유리궁전의 정원에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대낮과 같이 환한 전기구가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정원에 있는 얼음 동상들을 비추고 반사하여 마 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낙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그 정 원이 잘 보이는 곳... 천장이 높다랗고 커다란 한 의상실에는 힐라토 파이 오니온 레이서스가 조금 있으면 있을 연회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촛 불이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어 바깥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환하며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레이서스는 시종들이 푸른 사파이어가 점점이 박 힌 힐라토의 문장이 새겨진 금장식품을 어깨에서부터 팔목까지 장착할 수 있도록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금실로 수놓아진 깃이 높 고 소매가 긴 까만 색의 로브와 상당히 잘 어울려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 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보석의 아름다움에 취하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시종장이 보고하는 내용에 눈을 찌푸리고 있었 다. "그래..? 드디어 칼리스가 왔군.." 시종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전갈을 보내셨지요. 도착하자마자 힐라토님을 만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은 알지만, 조금 피곤하니 오늘밤의 연회에서 만나 뵙자고 하시더군요. 그러니 힐라토님께서도 스온 칼리스나님을 보시는 것은 오늘 저녁으로 하 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별..." ...상관없어. 라고 무관심한 목소리로 말하려던 레이서스는 그냥 입을 다물 었다. 미래의 부인에 대한 실제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그런 무관심한 발언 은 칼리스를 위해서 좋지 않다. 그것도 아랫사람 앞에서는... 미래 힐라토 의 여왕이 될 여자의 명예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때 보석 늘어트리 는 소리가 가볍게 차르륵 나며 레이서스의 의상을 담당한 시종들 중 하나 가, 레이서스를 바라보며 잘되어서 기쁘다는 듯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파이오니온님." 그 말에 레이서스는 한 쪽 벽면을 온통 차지한 커다란 거울을 보았다. 검 은 색의 머리칼이 흘러내린 이마에선 검은 색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써클 렛이 빛나고, 힐라토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들은 검은 우단 옷을 바탕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힐라토의 파이오니온다운 모습이 었다. "그래. 잘됐군. 수고했네." 시종은 눈에 즐거운 기색을 담고 고개를 숙였다. "...저의 영광이었습니다. 파이오니온이시여." 이렇게 의상을 담당하는 시종에게까지 인사하시는 왕족은 드물다. 하물며 파이오니온임에야... 확실히 이런 것이 그토록 많은 시종들이 힐라토 파이 오니온을 모시고 싶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인지도 모른다. 레이서스는 고 개 숙인 그들을 지나쳐 자신의 침실에 딸린 응접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오직 시종장 하카단만이 따라가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피 곤하다는 듯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흐음. 이젠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지. 그래... 하카단? 낮에 시킨 일은 알아보았나?" 그 말에 문득 하카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즐거운 시간을 앞두고 굳이 이런 일을 기억하여 집착하는 주인의 마음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하카단?" 하카단은 또 한번 경의를 담아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네. 알아보았습니다. 저어.. 그는.. 이곳 제일로트 노웬아도 대시장 옆 에 있는 우나 일루테오나의 힐러, 라단이라는 자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리고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 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식 웃으며 하카단에게 손짓했다. "수고했네. 이젠 나가봐도 좋아. 이따 연회에 갈 때까지 자네도 좀 쉬는 게 좋겠지." 그때였다. 응접실의 바깥문 쪽이 시끌벅적하더니,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 렸다. "아이고~! 칼리안님! 제발, 격식을... 힐라토님께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아아.. 시끄러-!" "칼리안님-!!" 그와 동시에 문에 있던 시종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에... 카,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리시스님이 듭십니다!!!" 그리고 그 말에 레이서스가 어떤 의견을 피력하기도 전에 응접실 안쪽 문 에서 시끄러운, 그러나 매력적이고 밝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하하-! 귀찮아, 형식은 나중에 따지라고! 형! 레이!! 그 안에 있어?" 레이서스는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금 까지 피로한 얼굴이었던 그 얼굴에 난처하면서도,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쾅 열렸다. "아이고~! 칼리안님!! 문은 시종들이 열도록..!!" "시끄러! 시끄러!! 시종들은 손이 너무 느려-!! 그리고 자네도 너무 시끄 러! 하노크!! 저쪽으로 썩 가있으라고!! 귀찮게 하지마!!" 칼리안의 불쌍한 늙은 시종장 하노크는 주인의 그러한 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로 말하면 전대의 칼리안 에그리스 때서부터 있는 고생 없는 고 생 다하며 파이오니온을 섬긴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청출어람이라고 했던 가... 칼리안 에그리스님의 아들인 칼리안 율르스님은 그 어머니를 능히 뛰어넘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베테랑인 그도, 이런 경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레이서스 앞에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율르스 의 눈치를 슬슬 살피고 있었다. "사, 삼가 힐라토 파이오니온 앞에 인사드립니다. 카, 칼리안 율르스.. 아 니, 율리시스님입니다." 칼리안 인들은 모두다 자신들의 파이오니온을 정식 이름인 '율리시스'라고 부르기보다는 '율르스'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레이서스도 또한 '율르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여전하구나. 율르스. 잘 있었니?" 그 말에 율르스가 자신의 시종장을 마구 째려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 었다. 짙은 붉은 색으로 깊게 빛나는 눈, 그리고 화려하고 붉게 물결치는 긴 고수머리를 가진 아주 젊디젊은 파이오니온이었다. 갈색 피부의 얼굴 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고, 음성은 아주 씩씩했다. 레이서스보다 조금 작 지만, 그래도 큰 키, 넓은 어깨와 함께 어렸을 때 계집아이같이 숨막히도 록 예뻤던 얼굴은 이제 어느 정도 남자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으나, 아 직도 약간씩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활짝 웃으며 큰 걸음으로 레이서스에게 다가왔다. 칼리안 특유의 하늘거리고 시원한 튜닉 에 발엔 아직도 샌들을 신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 반가워!! 굉장히 보고 싶었어 형--!!" 그리고 그는 격렬한 칼리안의 기질대로 두 팔을 벌리고 거리낌없이 레이 서스를 꽉 끌어안았다. "형도 내가 보고싶었으리라 믿어!!! 하하하!!!" 그의 밝은 태도에 레이서스는 웃음을 짓고 역시 친근감 있는 목소리로 말 했다. "후후.. 율르스..." 헌데 그렇게 레이서스의 등을 펑펑 두드린 그는, 다시 몸을 떼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레이서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런-! 근데, 얼굴이 이게 뭐야?! 계집애들처럼 얼굴에 분이라도 칠한 거 야? 무슨 얼굴이 이렇게 하얘? 이 손도 그렇고!! 이렇게 창백한 걸 보니, 밴시(Banshee) 요정이 울고 가겠군!! 쯧쯧쯧!! 그러니까, 내가 일년에 세 달 정도는 우리 세계에 와서 살 좀 태우라고 했잖아!! 형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지!! 재수 없는 마이레스 놈하곤 질이 틀리다고!!" 그 말에 옆에 있던 율르스의 시종장 하노크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말했다. "...칼리안님.. 마이레스님을 모욕하는 말을 힐라토님 앞에서 공식적으로 하시면..." "저쪽으로 안가면 걷어차 버릴 꺼야?! 하노크!!" 물론, 하노크는 하카단의 측은한 눈길을 받으며 율르스의 발길이 닫지 않 을 만한 곳으로 자리를 슬슬 옮겼다. 레이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앉아라. 율르스. 아직도 마이레스 가리테스님하곤 사이가 나쁜 거냐? 2대 에 걸쳐서..." "쳇. 어머니 말씀은 별로 틀린 게 없거든. 그 늙은이는 능글맞다고. 이번 에 곡식을 수입하는 건에서 골머리를 앓고 나니, 내년엔 칼리안 스피릿을 그쪽에서 부리는 일에 좀 튕겨 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다니까." 레이서스가 보는 가리테스는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었지만, 묘하게 칼 리안과 마이레스는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조금 짓궂게 웃고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 세계의 파이오니온에 대해 투덜대는 건 안 좋아. 아, 그렇지. 혹 스온 자스민하고는 요즘도 만나니?" 그 말에 율르스의 얼굴에 끔찍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맙소사!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형! 요즘도? 마치 내가 그 계집애를 일 삼아서 만나고 있던 것처럼 말하지마!! 겨우 그 악몽을 잊고 사는데!! 내 가 마이레스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계집애야!! 그야말로 그 늙은이의 딸답게 매우 지겹지!! 어휴~~ 루세를 그 계집애와 함께 다녔다 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하기 싫은 일 중 하나야!!! 얼마나 끈 질긴지!! 끔찍해! 끔찍해!! 요전에도 하는 수 없이 마이레스를 방문했는데, 날이면 날마다 내 방문 앞에 죽치고 앉아서는..." 여기서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아? 용케 요 몇 달간 어느 세계에서든 그 계집애를 피해 다녔는데, 결 국 이 클로니아에서 그 계집애를 만날 생각을 하면, 살기가 싫어질 정도 야. 계집애는 어머니와 누나 빼놓고 누구나 다 질색이지만, 특히 그 계집 애는 내가 계집애들에게서 가장 싫어하는 점만 모아놓은 표본 박물관이 지. 맙소사.. 생긴 것도 박물관처럼 딱딱하고 희멀건 해서는!!" 그러더니 그는 레이서스가 권해주는 의자를 본척만척하고 벽난로 앞에가 그 위의 융단 위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거기 에 팔을 세워 턱을 기대고 말했다. "아, 미안해 형. 좀 추워서 말이야. 모피 같은 건 무거워서, 입기 귀찮아서 안 입고 왔더니, 확실히 춥군. 몸을 활발히 움직이면 괜찮아 질 줄 알았는 데, 어림도 없어. 내 세계의 오아시스에나 갔으면... 결혼식 장소가 자이온 만 돼도 좋은데. 세계혼씩이나 되니, 일부러 클로니아까지 와야 하고. 귀 찮아. 사실 난 이 클로니아라는 세계를 안 좋아하거든. 뭐랄까.. 너무.. 음... 그 왜 있잖아. 등에 오싹하고 소름이 끼치는 거. 그런 기분 나쁜 느 낌이 내내 있는 곳이란 말이지. 그런 걸 보면, 하하하.. 역시 내 세계가 최 고야!!!" 그 옆에서 하카단이, '칼리안님의 말씀엔 동감이지만, 세계로 따지면 역시 우리 힐라토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왕족들의 말에 끼어 들었다는 시종장의 불명예스러운 실수를 굳이 타박주지 않았다. 세계의 환경에 대한 장단점 이야기가 나오면 성직자라도 침을 튀기며, 그것도 안 되면 팔까지 걷어붙이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울 만큼 엘야시온 인들이 자기의 세계에 대해 가진 애정은 각별했다. 그러니, 세계에 대한 취향에 관한 한 절대적인 진리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레이서스는 방금 율르스가 울분에 차서 내뱉은 말을 되새기며 쿡 웃었다. 누구나 율르스의 말만 듣고는 마이레스의 공주 스온 자스민이 천하에 둘도 없는 추녀라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단지 하필이면 그녀가 마음에 둔 상대가 이 괄괄하고 다혈질이며 태양과 같이 밝아서 이 런 무례한 행동을 해도 그다지 주위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는(정확하게 말하면 사랑 받는)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였다는 데 문제가 있을 뿐이 다. 더구나.. 레이서스는 굉장히 춥다는 듯 몸을 떨며 두 손을 난롯불에 쬐고있는 율르스를 보며 입을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이 젊은 왕이 이 세 상 모든 여자의 기준을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에게 맞춰놓고 있는 데야... 레이서스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율르스. 에그리스님과 나데스님은 잘 지내시니?"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593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19 23:13 읽음:275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5회, 제 34막. 밤을 기다리는 것들. (2)> "응. 여전하셔. 칼리안 남부의 오아시스에서 아직도 단둘이 지내시지. 어 머니 말씀으론, 뭐 당신들은 항상 밀월이라나? 한 번 방문할라치면 어찌 나 뭐라 그러시는지. 오죽하시겠어? 두 분이 더 가깝게 지내기 위해, 왕위 까지 내게 물려주신 분인데? 그 분들에겐 관심 끊는 게 나아. 훌쩍. 아 이 런.. 콧물이 나오는 군. 쳇!! 이봐, 하노크!! 아까 그 모피 가져와 봐! 젠장. 어느 세계든 웬만하면 이 튜닉으로 견딜 수 있는데, 이 클로니아는 그것 도 안 되는군!!" 하노크가 재빨리 다가와서, 표범 무늬의 두껍고 풍성한 외투를 건네주며 투덜댔다. "그러니까, 제가 모피를 꼭 입으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여간 이 늙은이의 말이라면 물고기가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고 해도 안 믿으시니!! 어이구.. 내가 빨리 죽던지 해야지.." "뭐야, 뭐야? 누구 맘대로 죽는다는 거야? 그 모피나 빨리 이리 주고 절 로 가! 그리고 내 허락 없이 죽으면 절대로 용서 못해 알겠어? 그 늙은이 소리도 거슬린다고! 아직도 쌩쌩하게 맨날 잔소리만 하잖아!!" 하노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또 구석으로 가버렸다. 율르스는 모피 를 입혀 주러온 다른 시종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모피를 어깨에 걸치며 진지한 표정으로 한탄했다. "휴~ 형. 나도 힘들다고. 세계를 운영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야. 굉장한 스트레스지. 하여간, 하노크만 하더라도 저 엄살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 고... 잔소리는 더더욱 심해지고 있지. 이거 하면 안 된다. 저거 하면 안 된다. ..정말이지 나 같은 마음씨 너그러운 파이오니온이 아니라면 누가 하노크를 시종장으로 데리고 있겠어? 안 그래? 형?" 이 말에 하노크가 한숨을 푹 쉬었고, 다른 이들은 잔뜩 웃음을 참는 표정 이었지만 누구도 노골적으로 웃지는 않았다. 레이서스는 하노크의 기분을 생각해서 율르스의 말에 맞장구 치는 것은 관두었다. 율르스도 굳이 레이 서스의 동의를 바란 건 아니었던 듯, 모피를 걸친 채 벌떡 일어났다. 그는 굉장히 활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몸도 어느 정도 따뜻해졌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형 얼굴도 보고,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하노크! 내가 가지고 온 것 좀 이리 갖고 와 봐!" 그 말에 늙은 하노크는 문 밖에 있는 시종들에게 명해 붉은 천에 감싸인 길다란 물건을 갖고 들어오게 했다. 율르스는 시종이 갖고 들어오는 물건 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저게 뭔지 짐작하겠어, 형?" 그걸 보는 레이서스의 얼굴에 희미한 흥미가 감돌았다. 저 크기에 저 모 양이라면 짐작되는 것은 한가지뿐이었다. 게다가 율르스의 이런 의기양양 한 표정을 본다면... "...혹시 네가 일전에 말하던 것이냐? 설마.. 완성됐다는 것은 아니겠지?" "후후.." 율르스는 레이서스의 말에 웃음 지으며 시종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들었 다. 그리고 그것을 레이서스에게 건네며 자랑스러운 기가 역력한 말투로 말했다. "자, 살펴봐." 레이서스는 몸을 똑바로 일으키고 그의 말에 따라, 그것을 받아 붉은 천 을 벗겼다. 그리고 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찬찬히 물건을 살피며 중 얼거렸다. "..아름다운 칼집이군." 붉은 색으로 염색한 단단한 가죽을 바탕으로, 맨 끝과 중간, 그리고 손잡 이 가까운 부분에 화려하고 섬세한 금세공이 되어있었다. 칼의 손잡이는 끝이 약간 구부러져서 조각된 상아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베르노크, 드워 프들의 수장이 보더라도 칭찬할 만한 솜씨였다. 하지만 무릇 검의 가치란, 이런 칼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칼집이 비록 하루종일 두고 보더라도 질 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더라도... 레이서스는 칼의 손잡이를 잡고 그것을 서서히 칼집에서 빼보았다. 스각... 이런 미세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오는 그것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레이서스는 그렇게 자신의 거처에서 뽑혀 나온 칼날을 눈앞에 똑바로 들었다. 약 30센티 정도 되는 길이의 그 것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과연... 그 옆에 있 던 율르스는 검과 레이서스의 표정을 번갈아 보며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 했다. 흥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어때? 멋지지? 뭐라고 말 좀 해봐. 이건 지난주에 이스파한(칼리안의 수 도)의 공장에서 나온 거야. 어떻게 생각해? 응?" 하지만 레이서스는 침착한 눈으로 칼날을 손으로 쓸어볼 뿐이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빛이란 빛은 모두 흡수하여 보는 이의 눈에 그 빛을 공격적으로 되쏘아내는 매혹적인 것... 정원에 있는 얼음 동상보다도 아름 다워, 피를 묻히는 것이 아까울 정도의 것, 그리고 그 날카로움과 서늘한 감촉에 지금 당장이라도 피를 묻혀보고 싶어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율르스는 레이서스가 그 검을 바라보며 잠시 가만히 있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도 이것을 맨 처음 봤을 때, 너무 가슴이 벅차서 잠시 말문을 잊을 정도였던 것이다. 레이서스의 표정에 서린 감탄... 이것 하나로도 율르스는 기뻤다. "봐.. 이 투명함을. 이건 베르노크의 왕족 피가 섞인 하바티온 녀석이 만 들어낸 거야. 베르노크의 드워프를 스승으로 삼았던 녀석인데.. 그 까다로 운 드워프도 인정할 정도로 솜씨 있는 녀석이지. 후후..." 투명함.. 보통 칼에는 이런 명칭이 쓰이지 않지만.. 이 검은 그 말에 걸 맞 는 검신을 지니고 있었다. 놀랍게도 검신 자체가 철체(鐵體)가 아니었던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투명한 얼음, 투명한 금강석 같다고 할까... 덕분에 레이서스는 검신 너머로 반짝반짝 빛나는 율르스의 눈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적당한 무게라니... "형? 그 정도 봤으니, 이젠 뭐라고 말 좀 해봐. 이걸 형에게 보여주고 싶 어서 얼마나 혼났는데!" 레이서스가 미소지었다. "..강도는 얼마나 되지? 이걸 정말로 쓸 수 있는 건가? 저번처럼 검기 한 방에 파열 돼버리는 것은 아냐?" 율르스는 조금 투덜댔다. "하여간에 철저하기는... 내가 저번 것 같은 것을 또 형에게 가져왔을 것 같아? 원한다면 시험해 봐도 좋아. 내 루이트, 루오란에게 이미 시험해 보 라고 했지만." 그 말에 레이서스는 훗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검 을 한 번 붕 휘둘러보았다. 공기를 가르는 검의 파성음은 듣기에도 경쾌 했다. "소리가 좋구나." 율르스가 웃고 팔짱을 끼었다. "파성음 뿐만이 아니지. 검기가 실렸을 때 소리는 오싹할 정도거든. 해 봐." 그리고 율르스는 얼굴 가득 숨기지 못할 기대를 갖고 레이서스가 들고 있 는 검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아 놓고, 툭툭 건드리 면서 움직이기를 바라는 그런 표정이라 레이서스는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 렸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검을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율르스는 그 걸 보자 실망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 왜 그래, 형? 한 번 해봐! 검기를 실어보라고!!!" '검기'라는 말에 하카단이 인상을 조금 썼으나, 율르스가 데려온 시종들은 레이서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슬쩍 훔쳐보았다. 그랬다. 그들이 알기로 도 이 눈앞에 있는 흑발의 남자는 파이오니온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루이 티온 계급과 같이 검기를 끌어낼 수 있다. 이것은 상류층 가운데 알게 모 르게 떠도는 소문이었다. '힐라토의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는 그 아버지였던 카이러스 사이너스의 유전을 받아, 칼에 검기를 실어낼 수 있다.'라는... "형?" 율르스가 다시 한 번 더 독촉하자, 레이서스는 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안돼. 율르스. 나도 해보고는 싶지만, 곧 있으면 연회가 시작되고 그건 꽤 피곤할거야. 너도 알다시피 나처럼 마인드 컨트롤을 익히지 못한 자가 억지로 끌어내는 검기는 그것을 시전한 자를 몹시 피곤하게 만들어. 그 원시적인 힘을 억지로 다스리려면 다른 이들보다 네 배, 다섯 배는 힘 이 든다는 이야기지." 그런 뒤 레이서스는 율르스에게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시험은 나중에 해보도록 할게. 좋은 것을 구경시켜주어 고맙다. 율르스." 자신의 뜻대로 안되어 부루퉁해진 율르스를 보며 레이서스는 웃은 뒤, 또 한마디 덧붙였다.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루세'에서 마지막 일년을 너와 보낸 건 내게 아 주 큰 축복이었지.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진다는 것도. 고맙다." 율르스가 쳇 이라는 소릴 내며 레이서스의 손을 거부했다. "쳇... 그랬지. 하필이면... 됐어. 검은 그냥 형이 갖고 있어. 이건 형에게 줄려고 생각하던 거니까." "아니... 하지만..."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마. 시험해보면 알겠지만, 그건 정말 멋진 놈이야. 우리가 최종적으로 생산하려는 것은 그것보다 더 긴 놈이지만, 그것도 그 것 자체로 완벽하지.." 그러더니 율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아.. 그러나 저러나, 어딜 가도 귀찮은 일뿐이라니까. 난 남성 클럽이 나, 이스파한의 공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은데... 여자들이 쓸데없 는 괴성이나 꺅꺅 질러대는 연회라니... 도대체, 여자들하고 무슨 심도 있 고 쓸모 있는 대화라는 게 가능하겠어? 아.. 여성 루이티온은 조금 말이 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남자들에게는 못 미치지." 율르스는 짜증난다는 듯, 응접실을 왔다갔다 거렸다. "하아- 연회라, 연회...그런 하찮은 것 때문에 이런 중요한 일을 미루어야 한다는 현실이 난 너무 슬퍼. 휴우-!! 아..! 그렇지, 형!!" 율르스는 이제 의자에 앉으려는 레이서스를 보며 희망 어린 목소리를 냈 다. "우리, 오늘밤 연회에서 빠질까? 루세에서 곧잘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칼리안 파이오니온의 그 말에, 응접실 한 구석에서 갑자기 풀무에서 바람 빼낼 때 나는 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뒤 그의 목에 대량 의 먼지라도 날린 듯, 세찬 기침소리가 '콜록, 콜록!!!'나기 시작했다. 칼리 안 파이오니온이 소리쳤다. "하노크!! 시끄러!! 그렇게 기침이 나면, 옷이나 한 겹 더 껴입고, 가서 탕 파 끼고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그 말에 하노크는 이번엔 개가 낑낑대는 것 같은, '끄응, 끄응' 소리를 냈 다. 하지만 이미 율르스는 자신의 시종장이 무슨 소리를 내던 개의치 않 고, 눈을 빛내며 레이서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리고 우리 이 검이나 시험해 보자고!" 레이서스는 칼집에 검을 다시 끼워 넣으며 하하 웃고 나서 말했다. "네 말대로 따분한 연회 보단 그것이 더 재밌겠지만... 그래도 그건 안돼. 율르스." "왜?" "...율르스." 레이서스는 검을 탁자 위에 놓고 율르스를 올려다보았다. 고집이 센 율르 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레이서스의 눈엔 따뜻함이 감돌고 있었다. "너도, 그리고 나도.. 이젠 '루세'의 그 학생이 아니야. 시간은 지나갔고... 너와 난 한 세계를 다스리는 파이오니온이지. 그만큼 우리에게 지워진 책 임은 막중해. 그 책임이 때로는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하도록 요구할 때 라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레이서스의 이 진지한 말에 하노크는 몹시 감격한 눈으로,(너무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눈으로) 레이서스를 쳐다보았다. 하카단의 얼굴에 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빛이 떠올랐지만, 그도 하노크의 심정을 생각해서 지나치게 자랑스러운 표정은 삼가 했다. 그때 율르스가 말했다. "맙소사!! 겨우 연회하나 빠지는 것 같고, 파이오니온의 책임까지 들먹이 다니! 난 내 세계에서 연회 정도는 내 마음대로 빠진다고! 그게 바로 파 이오니온의 권리라는 거지!!" 하카단은 아까보다 한 층 더 측은한 눈길로 하노크를 보았고, 하노크는 아까보다 한 층 더 슬픈 눈빛을 짓고 조그맣게 '그저 내가 죽어야지..'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레이서스는 웃음 지었다. "하지만, 여기는 '네' 세계가 아니지. 그리고 타 세계에 왔으면 그 첫날의 연회에서 그 주인을 만나고... 더구나 여기엔 엘야시온님까지 계시다는 걸 기억하렴. 율르스. 다른 왕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형제 세계와 친하게 지내기 위한 파이오니온의 '책임'이야." "흐음... 형은 어쩐지 말이야... 흐음.." 이제 율르스는 레이서스를 관찰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힐라토 레이서스는 지금, 율르스를 보고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침착 하고 유능하며 친절한 힐라토의 왕. 그러나... 율르스는 드디어 얼굴을 찡 그렸다. "...이상하군. 뭐가 문제지? 형은 나날이 생기를 잃어가. '책임'이라니.. 같 은 말을 하더라도, 왜 그런 단어를 선택하지? 예전의 형이라면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야." "...뭐?" "글세.. 형은 말이야.. 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무언가 이상해. 얼굴이 너 무 창백해서 그런가? 왠지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는 느낌 있잖아? 만날 때마다 그게 더 심해져. 오늘은 아예 검을 봐도 조금 웃다가 말뿐이고. 요 즘 잠을 잘 못 자는 건가? 형은? 여자들이 또 귀찮게 쫓아다녀? 그럼, 그 냥 걷어차 버림 되잖아?"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고? 레이서스는 억지로 웃음 지었다. "...난 미소라면 언제나 짓고 있어. 그리고 관심이라면 모든 것에 있지. ... 여자들은... 그다지 귀찮은 것도 아니야. 날 좋아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거지. 검은... 글세. 난 그것에 충분히 감탄했다고 생각한다." 율르스는 레이서스의 말에 난처한 태도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긴 하지만. 아, 여자들 건은 빼고. 형, 여자들 좀 그만 받아 줘. 누나 가 보통 신경질이 아닌 게 아냐. 누나도 여자라고. 여자들은 다 그래. 뭐 가 진실인줄 모르지. 나야 형이 진심으로 여자들을 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흐음.. 어쨌든... 글세...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군.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니? 흐음... 어쩌면 그것이 문제일 수도..." 레이서스의 미소가 점점 굳어 가는 것도 모르고, 율르스는 아직도 골똘히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그게 문제인 것 같아! 생각해 봐, 형! 난 세계를 운영하고, 이 '이 스파한의 유리 검' 하나를 만드는데도 정신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 형은 '모든 것'에 관심을 두려니... 그래!! 그러니 형이 기운 없는 것도 당연하 지!!! 너무 이것저것에 기운을 뺏긴 거라고!! 그러니, '책임'같은 무미건조 한 말이나 하게 되고!! 형! 나처럼 검 하나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어때?" 오랜만에 만난 루세의 후배... 미래의 처형이 될 자, 이제까지 어리다고 생 각했던 자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하나'에만 관심을 가지라고..? 레 이서스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 표정을 그다지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좋은 충고 고맙다. 율르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러기가 쉽지 않아서." 율르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 같은 경우?' 아! 그러고 보니..!! "그렇지. 형. 힐라토 헤르가스님은 어떠셔? 많이 좋아지셨어?" "아아.. ...괜찮으셔." 레이서스는 칼집을 들고 난로가로 갔다. 그리고 칼집의 문양을 불빛에 살 펴보는 척 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많이 좋아지셨지. 괜찮아." "그래? 다행이군." 스피릿을 갖고 있지 않는 왕족은 미이라와 같고, 어떤 경우든 '좋다'라는 말로는 형용될 수 없는 것임을, 루세에서 배우긴 했지만 한 번도 당해본 적 없고, 깊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율르스는 레이서스의 말을 그대로 믿 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러면 스온 아피네스님은? 저번에 청혼자가 나타났잖아? 힐라토 왕 족이라고? 잘 해결되고 있어?" 칼집을 잡은 레이서스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율르스가 말하는 자는 이미 한 번 결혼식을 치른... 올해로 하누카 30살인자로, 순전히 가문을 일 으키고 레이서스 자신과 친분관계를 맺고자 아피네스에게 청혼을 한 자였 다. 하긴, 그것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누이 같은 경우, 그런 자리가 아니라면 아무리 현역 파이오니온의 누이라고 하더라도 평생 결혼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자는 그 사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 추 잡한 욕심만을 채우고자 했던 뻔뻔한 남자였다. 가식적인 미소조차도 지 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웠던 자. 레이서스는 그답지 않은 냉랭한 말투로 말 했다. "...아니. 그 건은 내가 거절했어." "흐음? 그래? 별로 안 좋은 자리였나 보군." 율르스는 레이서스의 말을 그대로 납득하고 별다른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즘, 형 세계엔 흡혈귀들이 극성이라고?" "정보가 빠르구나." "흐음.. 과연. 형도 나 못지 않게 바쁘겠군. 아니...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바쁠지도... 아스테린, 그 계집애가 형을 귀찮게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테니... 뭐, 이번에 클로니아 세스틴에게 그 애를 떠넘긴 건 잘한 짓이야!! 하하! 문제는 그렇게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거지." 하노크는 구석에서 또 한번 '끄으으응'하는 긴 신음소리를 냈다. 세계혼을 축하해 주러 와서 '떠넘긴다'라는 표현을 쓰다니... 하노크의 늙은 복장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율르스는 여전히 기운차게 말했다. "하하!! 그러니 기운 내. 형! 형답지 않다고! 나는 이만 가볼게. 형 말대로, 책임이니 뭐니 하는 것도 있고... 나중에 엘야시온님께 잔소리들을 일도 끔찍하니까.. 가서, 연회 준비나 해야지. 그럼 나중에 봐." 레이서스는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래." "아, 그렇지!" 율르스는 또 손 느리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허겁지겁 문을 여는 시종들 사 이를 빠져나가며 레이서스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그 검을 시험해 볼 땐, 혼자서 하면 안돼?! 나도 불러야 돼! 형 이 부르면, 설사 엘야시온님과 면담이 있더라도 제치고 달려올 테니, 알았 지?" 레이서스는 마침내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알았어. 율르스." "좋아! 약속은 지켜. 그럼 나중에 봐!" 그리고 율르스는 레이서스의 응접실을 나와 발을 성큼성큼, 자신의 거처 로 옮겼다. 그 뒤를 하노크가 힘겹게, 그러나 달리다 시피 쫓아가며 투덜 댔다. "칼리안님! 힐라토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하필 이면, 힐라토의 여인들에 대해서 묻다니요...!" 너무 노골적인 걱정거리나 흠은,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묻지 않는 것이 상류계층의 예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율르스는 무슨 헛소리를 하 냐는 눈으로 하노크를 흘끗 보았다. "무슨, 헛소리야?! 하노크! 형 걱정거리가 그것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그 럼 그냥 지나쳐?! 난 다른 사람들처럼 간지럽게 여기저기 긁으며 눈치를 슬슬 살피고 때려 맞추고 하는 짓은 딱 질색이야!" "아아~! 엘이시여~ 우리의 파이오니온을 보호하소서~!" 율르스는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코웃음 쳤다. "시끄러-! 시끄러-! 뻑 하면 엘만 찾는군! 누군 엘님을 못 부를 줄 알아?! 아아-!! 엘이시여-!! 이 시끄러운 하노크가 제발 입 좀 다물고 좀 더 제 뒤나 빨리빨리 쫓아다니게 해주십시오-!!" 뒤따르는 몇몇의 시종들이 킥킥 웃었지만, 하노크의 매서운 째려봄으로 웃음을 그쳤다. 하노크는 투덜댔다. "칼리안님. 저도 이제 예전 같지 않단 말씀입니다. 정 그러시다면, 젊은 시종장을 쓰시지요! 하온 하조르단의 가문에서 그 아들을 시종장으로 추 천하려 벼르고 있던데..." 하노크에겐 아주 늦은 나이에 본 어린 아들밖에 없어서, 또 다른 시종장 의 가문을 추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율르스는 하노크의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걸음을 멈췄다. "에에엑?! 하조르단의 아들?!! 그, 그, 남자녀석 주제에 계집애처럼 괴상한 취미의 레이스나 걸치고,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삐삐 마른 그 녀석 말이야?!! 맙소사!!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런 녀석이라면, 내가 열 걸음 걸을 때마다 엎어져서 거치적거릴 게 틀림없어! 그 레이스에 걸 리거나, 그 나무막대기 같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말이야!! 자네도 뻔뻔하 군! 하노크!! 어떻게 내게 그런 짐 덩어리를 맡기고 도망칠 생각을 하는 거지?!! 용서 못해!! 빨리 빨리 따라올 궁리나 하라고!!!"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리시스는 자신의 맘에 든 사람에겐 한없이 관대하지 만, 마음에 안 든 사람은 사정없이 깎아 내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 계집애 같은 레이스나 걸치고, 나무막대기 같은 다리를 가진 하조르단의 아들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닌데... 하여튼 율르스는 그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율르스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리고 또다시 걸으며 말했다. "어쨌든, 난 그 녀석 말고도 신경 쓸 문제가 많아! 시종장 문제까지 골치 아프게 말라고. 아무튼 문제 아니냔 말이야? 레이형이, 맙소사... 저렇게 훌륭한 검을 들고, 난로가 앞에 가서 그 칼집이나 만지작거리며 칼집 감 상이나 하고 있다니... 문제야. 문제.. 누나에게 주의 좀 줘야지. 도대체가 오자마자 무슨~ 몸단장인지. 쯧쯧.. 레이형이나 좀 보러 올 것이지... 그까 짓 먼지랑 진흙 좀 묻었다고 호들갑이라니... 하여간 여자들이란. 쯧." 남편 될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 섬세 한 마음을 율르스가 이해할 리는 만무였다. 그리고 늙은 시종장의 터져 버린 복장을 이해할 리도 또한 만무했던 칼리안 파이오니온이었기에... 그 는 오늘도 무심한 태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귀찮은 연회를 준비하 러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는 상당히 느려진 걸음이었다.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는 하여튼 간에 시종장 문제로 골치 썩이긴 싫 었던 것이다. 한편 레이서스는 이제 검집을 살펴보던 척 하던 것도 관두고, 뚫어지게 벽난로의 불빛만을 보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오직 자신의 시종장, 하카단 만 있을 뿐이라 아까 율르스가 들어와 떠들썩하던 것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막했다. 그때 문득 레이서스가 말했다. "하카단." "네, 힐라토님." "..내일, 오후에 무슨 스케줄이 있지?" "이제까지 도착하신 왕족들과 함께 왕가의 숲으로 토끼 사냥을 나가기로 하셨지요." "그래? 그렇다면 그것에 불참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준비해 놔줘." "네?" "내일, 하루종일... 밤의 연회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날 찾더라도, 댈 수 있을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놓으라고." "아, 네..." 그리고 레이서스는 칼집에서 다시 한 번 더 칼을 빼들고 그것을 살폈다. 아름다운 유리 검... "그래. 이건 정말 아름다운 검이야. 검이 이토록 아름답다면 오히려 불길 하지. 자꾸 무언가를 보고 싶은 감정을 들게 하거든... 안 그래? 이것만해 도... 피를 흡수하면, 어쩌면... 붉은 보석과 같이 빛날 지도 모르겠군." 레이서스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 '블러디 루비'처럼 말이야. 흥.." 그리고 레이서스는 칼을 거꾸로 들고, 그것을 난로가 앞에 쌓아둔 어린애 몸통 만한 장작에 쾅 날렸다. 레이서스의 손을 떠난 그것은 파편하나도 날리지 않고, 장작을 정확하게 반으로 쩍 갈라놓았다. 그것만으로도 모자 라 칼은 그 밑의 장작에 몸체가 반쯤 꽂혀 손잡이를 부르르 떨고 있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약간의 미세 한 굴곡들이 더욱 그러한 빛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레이서스는 그것 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나에만 신경을 집중한다면.. 견디지 못해. 하지만 문제는 하나하나 해 결하는 것이라고 한 네 말은... 마음에 와 닿는구나. 율르스. 하하.. 바보같 이.." 하카단은 눈을 찌푸리고 그런 주인의 모습을 지켜 볼 뿐이었다. (계속)================================================== 음, 역시 이벤트는 100회로 마감하겠습니다. 후후.. 100회라..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요?^^ <엔..^^> ps...주연님, 멜 주셔서 감사..^^ ps2...휴우~ 후덥지근... 이번 주 토요일엔 '용가리'나 보러 가려고요.. 후후.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03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24 20:54 읽음:278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6회, 제 34막. 밤을 기다리는 것들. (3)> 시나는 지금 침대에 누워서, 자기 눈앞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며 의아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여자 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그 어깨 위엔 낮에 시장에서 보았던 '호문클로스'라는 것이 얹 혀 있었다. "랄라~ 아르코나 숲에는 멋진 도적이 12명 있었네~! 으싸~! 우리는 솜씨 좋고, 발 빠르며, 무적인 숲의 친구들~! 이런 우리를 당할 자 누구냐? 으싸~! 우리가 원하는 행운은, 왕족의 홀과, 황금의 투구, 가죽 상자에 가득 찬 번쩍거리는 금화들~! 그 외엔, 아무나 가지라고~! 우린 작은 행운은 취급 안 하지~! 으하하하~!! 하지만, 마누라들은 아이고~ 이런 천하에 쓸모 없는 게으름뱅이 양반들! 댁들의 귀엔 솜이라도 틀어박힌 게지! 아우성치는 꼬르륵 소리가 안 들린단 말야? 썩 나가서 부잣집 마나님들 모자챙이라도 가져오라고! 당신 같은 사람들을 믿고 살 바엔 차라리, 저 지저분한 오크를 데려다가 낭군님으로 믿고 살겠어. 얘야, 저것이 네 새 아버지란다! 저것은 적어도, 허풍은 떨지 않으니, 믿고 살만은 할거란다. 물어뜯기를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네 아버지 보단 다정한 신사지. 원, 네미랄~ 마누라들이 하는 짓거리라고는~ 퉷~! (여기서 여자 애는 정말 바닥에 침을 뱉는 시늉까지 해서 시나는 간담이 서늘했다. 으아-!! 방안에다 침을 뱉다니~!!)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왔을 때, 아이놈들이 오크 놈을 아빠, 아빠라 부르며 마누라가 그 놈들 목을 껴안고 있을 거라면 우리가 뭣하러 뼈빠지게 고생하겠나? 하지만 마누라들이 부르는 소란은 솜 마차 열두대가 와도 막지를 못하지! 자아~! 철철 흐르는 세 번째 거른 포도주나 가져와! 아르코나 숲의 아이들에게 지저분한 오크 놈들을 아빠로 줄 수야 없지~! 못생긴 마누라라도, 하누카의 날을 보낸 건 저 여자인걸~! 오~! 네미랄~!! 하누카의 날 따윈 뒈지는 게 낫다고 한 아버지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작은 행운 따윈 거들 떠도 안 보는 우리들이지만, 어쩔 수 없지! 부잣집 마나님들의 담배쌈지라도 훔치러 가볼까~? 우리는 아르코나 숲의 12도적들~! 으싸~!! 큰 행운 외엔 취급 안 하는 멋진 친구들이지~!!! 으하하하~!!" 그렇게, 어딘지 뭔가 몹시 불건전한 노래를 부른 여자 애는 제풀에 겨워 '으하하하~!!'라고 말하며 웃어 제쳤다. 그런 여자 애를 보며 시나는 시 큰둥하게 생각했다. [...상당히 유쾌해 보이는 군.] 결코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눈으로 여자 애를 잠시 쳐다 본 시나는, 곧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현 상황이 과연 저 여자 애가 저렇 게 유쾌해해 할 만한 상황인가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분명 자 신이 어제 잤던 방인데... 우선 시나 자신으로서는 아쉽게도 라단의 집, 뒷문을 열고 들어선 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의 기억이 없다. 또 쓰러진 것일까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오늘 하루만도 벌써 몇 번을 쓰러지 는 것인가... 오전 내내 굶은 여파가 그렇게 클 수가 있단 말인가... 굶 는 데 이렇게 민감하다니, 나는 왜 이렇게 원초적인가... 하는 생각들이 물결쳐서... 하여간, 저 여자 애도 그렇고 자기 자신에의 불신도 그렇고 해서 시나는 인상을 쓰고 그야말로 고뇌에 가까운 고민을 했다. 그런 데 갑자기 유쾌하게 웃으며 노래부르던 여자애가 고개를 휙 돌렸다. "엇?!!" 여자 애의 놀란 외마디 소리에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 여자 애가 기쁜 듯이 소리쳤다. "와아~ 시나야 깨어났구나!!! 하하하~!! 그 심술쟁이 아저씨한테 제대로 치료하라고 소리친 보람이 있네!!" 그러더니 그 애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웃음을 지었다. "헤헤헷!! 그런데 왜 그렇게 처음 본다는 것처럼 날 보는 거야? 어딘가 머리라도 아픈 거야?" 머리가 조금 아픈 거야 사실이지만, 시나가 이 여자 애를 처음 보는 것처 럼 쳐다보는 것은 실제로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 낮에 시장에서 본 것 외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시나 자신의 기억 이 틀리지 않은 한 그 과정은 서로 간에 몹시 불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여자 애는 왜 자신에게 이리도 친한 척을 하고 그런 다는 말인 가? 시나는 여자 애를 보며 이러한 의문점들을 토로했다. "넌, 낮에 시장에 있던 그 소매치기 아이 맞지?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드래마의 지갑을 훔쳐갔으면서... 또 뭐라도 훔치러 온 건 아니겠지? 그 러면 정말 용서 못해. 여긴 나도 신세 지고 있는 거니까." 셰리카는 놀란 눈을 지었다. 시나는 상당히 차갑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 시나를 보며 셰리카는 조금 염려스럽다는 눈을 했다. "흐음, 역시 나를 못 알아보는구나. 역시 그래. 하아~!! 시나 너도 자꾸 저 세계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거지? 쯧쯧. 그렇지 않은가 했지. 낮에 는 네가 나를 못 알아봐서 아주 조금 충격이었지만... 뭐, 이젠 이해해. 걱정 마. 헤헤헷!!!" 여자애는 과장스럽다 싶을 정도로 밝게 웃더니 말했다. "나는 아르코나 숲, 티토우의 딸 뷔기어 셰리카. 에... 저쪽 세계에서의 이름은.. 음... 에, 또... 에잇, 모르겠다! 하하하!! 아까 그 노래 부르 기 전엔 기억하고 있었는데 까먹었어! 그냥, 나를 셰리카라고 부르도록 해. 하하하!! 나야 뭐, 이름 정도 까먹은 거 갖고는 실망 안 하거든. 드 디어 너를 만났으니까, 이젠 다시 저쪽 세계로 돌아가는 길만 남은 거지. 후후후!!!" '저쪽 세계'라니? 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어기, 셰리카? 있잖아.. 나는 잃어버리는 기억 같은 거 하나도 없거 든? 왜 이 세계 사람들은 나만 보면, 일루젼이니 기억상실이니 하는 건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는데.. 나는 정말, 정말로 너를 모르는 거야. 기억 따위를 잃어서 그런 것이 아냐. 그러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솔직히 털어놔 봐." 셰리카는 표정이 순간 이상하게 변했지만,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또 웃기 시작했다. "하하... 그래? 쯧쯧. 역시 사람들이 너한테도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걸렸 다고 뭐라 그랬구나. 나도 그것 때문에 고생 좀 했어. 정말 말도 안되지 뭐야? 저쪽 세계가 거짓말이라니? 헤헤헤... 내가 '시나 시스터즈'를 이 끄느라 고민한 생각을 하면..!! 그게 어떻게 일루젼일 수 있냐고 안 그 래?" 그 말에 시나는 깜짝 놀랐다. "뭐?!!!! 너 지금 뭐라고?!!!" 셰리카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헤헤, 이제 기억나? '시나 시스터즈'라고.. 그거 내가 만들었잖아. 헤헤 헤... 시나야 널 보니 너무 좋다. 저기, 네 '엄마의 목걸이'는 잘 있니? 이거 봐, 난 네가 준 목걸이 잘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셰리카는 자신의 목덜미에서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그걸 본 순 간 시나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뒤에서 한 대 세게 내려친 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 이, 이건, 분명히 내, 내, 내가...!!!!" 시나가 뭐라고 말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셰리카가 시나에게 몸을 착 붙이며 또 한 번 과장스럽게 아양을 떨었다. "으음.. 나 착하지? 기억을 잊으면서도 너는 잊지 않았다고. 헤헤헤! 널 찾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저기, 그러니까 네가 걸고 있는 목걸이도 좀 보여 주라? 응? 난 너만큼 그 목걸이도 좋아해..!! 헤헤..!! 기억하고 있 는 그대로인지 보고 싶어~!" 시나는 아직도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선 이 여자 애가 하는 행동과 말과, 주는 느낌을 종합하여, 이 애가 과연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 었다. "어, 어, 엄마의 목걸이...? 그, 그건 잊어버렸는데..?" "뭐얏-?!!!!!!" 방금 까지 헤헤거리며 웃더니, 목걸이를 잊었다는 말에 완전히 사람이 변 한 것 같이 여자 애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맙소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 목걸이를 잊어버렸다고?!! 세상에-!!! 이 티토우의 딸이, 이 뷔기어 셰리카가 말이야, 탐내던 물건 을 훔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은 그게 네 것이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내 가 그렇게 아끼던 물건을 잊어버렸다고? 아앙~~!!! 이럴 수가!! 그래서 아빠가 맨날 그랬구나!!! 점찍은 물건은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재깍 덮치 라고~!!! 아앙~~!! 너무 아까워~!! 어떡해!!!!! 도대체 어떡하다가 잊어 버린거야?!!!! 그 목걸이의 보석은 '호문클로스의 반지'와 비슷해서 너무 좋아했는데! 아아악!!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났다!! 아유~~!! 이드넘 녀석 에게 그 반지를 맡겨둔 채 탈출을 하다니!! 그 반지도 미리미리 훔쳐 뒀 어야 하는건데에~~!!! 난 몰라~!!" 황당하다. 시나는 남이 물건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 (?)해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또 뭐? 뭐의 반지? 이제 시나 는 이 모든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여,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결론에 도 달하고 있었다. 이 셰리카라는 아이.. 절대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 지만.. 정말 그렇지만... "저, 저기... 너, 너... 혹시.. 혹시... ...보, 보경이니?" 그때 천장을 우러러 절규하던 셰리카가 말을 뚝 그치고 시나를 보았다. 눈을 반짝 빛내는 것이 뭔가 희망에 찬 얼굴이었다. "보경이라고? 보경? 맞아! 그 이름이었어! 하하..!! 너 나를 기억하고 있 었잖아? 정말 기억하는 거지?!! 그런데 시치미를 뚝 떼다니, 하하하! 너 무했다아-!" 오.. 엘이시여-!! 시나는 침대 위로 풀석 엎어졌다. 이성은 말도 안 된다 고 소리치고 있지만, 감성이라든지 느낌, 하여튼 이성을 제외한 모든 것 들은 저 여자애가 '보경'이일지도 모른다고 수긍하고 있었다. 시나로서 도, 보석이라든지 돈에 이렇게까지 집착을 보이는 인간은 이쪽 세계 저쪽 세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인간이 결코 둘은 있을 수 없 다. 하지만.. 하지만...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제쳐두고 이성만으로 생각해보자. 쟤가 보경이라고? 쟤가? 분홍색 머리칼에 보라색 눈을 가진 쟤가? 시장에서 드래마의 지갑 을 훔쳐서 도망간 쟤가? 맙소사... 시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도, 도대체... 이, 이 세계는 어떻게 돼먹은 세계야? 내가 꿈을 꾸고 있 나? 너무 현실을 그리워해서, 이 말도 안돼는 여자아이를 '보경'이라고 생각까지 하게 되는.. 내가 미친 건가? 아님, 아님... 이 여자아이가 정 말 '보경'이라면, 도대체 저 외모는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셰리카가 시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어... 왜 돼지 쓸개 씹은 얼굴을 하고 있니 시나야?" 그래!!! 이해가 안 간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자!!!! 시나는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는 아직도 그 아찔한 분홍색 머리칼을 한 '보 경'이가 있었다. "너!!!" "응?" [아아~ 저 분홍색 머리칼에, 보라색 눈-!! 이렇게 보니 얼굴이라든지 목 소리는 분명 전의 보경이와 닮은 것 같지만...!!! 이해 안가! 절대로!!] "너, 너, 네가 분명 '임보경'이라면...!" 셰리카는 시나가 자신을 '임보경'이라고 부르자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 었다. "응, 맞아. 내가 임보경이야. 헤헤헤.. 시나야 반가워~!!" "으악~~!!!!! 살랑거리지 좀 마!! 확실히 너다운 짓이긴 하지만~!! 그런 데, 너 왜 외모가 그렇게 된 거야? 무슨 큰 일이라도 겪었어? 아님, 염 색? 눈 색은 또 왜 그래? 무엇보다, 네 얼굴...!!" 그 말에 셰리카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내.. 외모.. 이상하니?" "이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틀려-! 틀리다고! 전의 세계에서 보던 외모와 완전히 틀린걸!! 보경이는 검은 색의 단발머리...!!" 그 말에 셰리카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졌다. "정말이야? 나, 난 그걸 기억 못해.. 그럼, 나 어떡하지? 큰일난 거잖아? 외모가 완전히 틀려졌다니!! 나, 나.. 정신차려보니, 성역이었는데!!! 거 기서 나쁜 아트에 걸린 걸까? 그래서 기억도 자꾸 잊어버리는 거고? 그 럼, 어떡하지? 나쁜 아트에 걸린 거라면?!! 고칠 수 있을까?" "아, 아트?" "흑흑.. 응. '깊은, 초록의 숲 중의 숲'은 온갖 이상한 힘들이 가득 들어 찬 곳이거든. 그런데 난 거길 들어갔었단 말이야.. 흑흑..!! 시나야 내 외모, 혹시 괴물같이 변했니?" 그렇진 않다. 오히려 전의 세계에서보다 더 뭐랄까.. 보경에게 잘 '어울 리는' 외모라고 할까. 예쁘고 아니고를 떠나서, 딱 '맞는' 외모라는 느 낌...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보다, 너...! 성역이라니! 그럼, 너도 거기서 이 이상한 세계로 들어온 거구나!!" "응. 그런 것 같아." 그렇다면 조금 이해가 간다.(아주 조금) 깡패들에게 당하고, 눈을 떠보니 이상한 곳, 이상한 숲... 시나도 그랬던 것이다. 거기다 바리스에서 여자 애들도 그곳엔 이상한 '힘'이 가득하다고 했다. 보경이의 외모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은 정말 경악할 정도지만... 사실은 사실. 일단은 그럴 수 있 다고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 괴물도 있는 데, 친구의 머리칼과 눈이 파스텔이라도 칠해 놓은 것처럼 변한 것 정도야!!!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것 한가지...! "그렇다면, 외, 외모라든가 그런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보경아..!!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행동이 이렇게 변했지? 왜 너의 단점만 몽땅 부각 시킨 성격을 갖게 된 거냐고? 그 거친 말투는 또 뭐고?!!" 셰리카가 조금 인상을 썼다. "...'단점'만 부각을 시킨 성격이라니... 그거, 욕이지?" "욕이고, 뭐고!! 너 어떻게 된 거야?!! 드래마의 지갑까지 훔치다니?!!!" 셰리카가 부루퉁한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더니 투 덜거렸다. "드래마? 그 나쁜 놈 이름이 드래마야? 어느 게 맞는 건지 모르겠네? 아 까 그 심술쟁이 아저씨는 루온 루드랫이니 뭐니, 해서 웃긴다고 생각했는 데, 머리칼이 짧은 것을 보면, '드래마'쪽이 맞겠군. 쳇! 건방지게시리, 마노테 주제에 일루티온인 나를 겁 줘?!! 흥!!! 두고보자!!" 시나는 마침내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와- 이 앤... 완전히 이쪽 세계사 람 같잖아? 겨우 이 주만에 이렇게 능숙하게 이쪽 세계사람들이 마노테온 을 대할 때 내뱉는 대사를 하다니!!!! 정말 굉장한 적응력...!!!..이라고 감탄하기엔 굉장한 혼란이 우선적으로 온다. 해서 시나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아아...! 어쩜 그런 소리를!! 너, 정말 보경이 맞니? 믿어지지 않아. 무 언가 잘못된 것일 수도.. 그래! 어쩌면.. 어쩌면 넌 내 친구 보경이를 구 하고.. 그리고, 그 애에게 내 이야기를 들은 것 아냐? 그리고 그 애의 가 넷 목걸이.. 그것은 혹시 훔친 것일 수도..." 하지만 다음 순간 시나는 자신이 그 말을 내뱉은 걸 후회해야 했다. 웃 고, 떠들고, 눈물짓고, 갑자기 화를 내곤 하는 모습은 모두다 그 애가 불 안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 그 불안한 모습 이 시나의 한 마디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셰리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 지기 시작했다. 셰리카는 안색이 파리해져서 말했다. "내가 목걸이를 훔쳤다고...?!! 시나, 너는..!!" 그 말만 하고 한참 씨근덕거리던 셰리카가 소리쳤다. "너는 바보야!!!" 찰싹!!! 느닷없이 셰리카가 시나의 얼굴을 때렸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시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 얻어맞은 건지 이해가 안가, 따지려고 하는 데 셰리카가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또 소리쳤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너를 한번에 알아봤는데..! 넌 계속 나한테 이상하다고 말하기만 하고! 나는 이 세계로 온 뒤로, 이 목 걸이만 보고 너를 계속, 계속 기억했는데!! 내가 '보경'이 아니라고? 그, 그럼 난 누구야?!!! 난 절대 이 목걸이 훔치지 않았어-!!! 난 보경이란 말이야-!!!" 시나는 완전히 당황했다. 맞아서 아픈 건 시나인데, 때린 셰리카 쪽이 엉 엉 울기 시작했다. "저, 저기..." "싫어!!! 엉엉-!!! 왜 나를 보고 보경이가 아니라고 하는 거야? 너는 나 쁜 놈 편만 들고~!! 그럼 난 어떡해?!!!" 그러더니 셰리카는 침대에 엎드려서 펑펑 울었다. "엉엉...!! 제발... 제발, 그렇게 말하지마... 겨우 만났는데!! 모든 것 이 사람들 말대로 환상이라고 생각 돼서, 그래서 얼마나 무서웠는데!!! 이드넘도 마르코 할아범도 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너무 무서웠다 고!! 네가 나한테 보경이가 아니라고 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엉엉... 난 ...사실은 기억 같은 거 하나도 안 나는데.... 이젠 점점 잊 어버리고 있는데.. 엉엉엉... 그런데, 너마저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는 어떡해, 응? 난, 네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네 가 나한테 이 목걸이를 훔쳤다고 하면, 정말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 다고!!! 하지만, 아니야.. 이 목걸이는 원래 갖고 있던 거라고.. 정말이 야. 응? 시나야.. 흑흑.. 제발... 미안해. 때려서.. 미안해. 그러니까 그 런 말은 하지마. 흑흑.." 시나는 셰리카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혼란했 다. 말하는 거라든지, 행동을 보면, 보경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 지만 이런 외모에, 물건을 훔치면서도 그다지 양심에 걸려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하지만, 이 애가 정말 보경이라면... 그렇다면 이 앤, 그럼.. 그 산 속에서 이 세계에 떨어져서... 지금까지 쭈욱... 혼자였던 것일까? 분명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내 옆에는 여러 사람들, 드래마라든 지, 디트마가 있었는데.. 쭉 혼자였다면... 이 세계에서 도와주는 이도 없이 혼자여야 했다면... 무서웠다고? 아아.. 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나 보다 이 아이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없을 것이다. 보경아...!!! 어찌되든 좋다. 이 아이는 지금 울고 있고, 나는 가슴이 아파. 이 아이가 보경이라면, 나는 이 아이를 지켜줘야 한 다. 만약 이 아이가 보경이가 아니라도... 그때 셰리카가 젖은 눈을 문지 르며 시나를 보며 말했다. "흑흑.. 시나야. 전부는 아니어도, 나는 기억해. 노을 속에서... 내가 너 한테 기운 내라고 했잖아. 가슴 같은 것은 어른이 되면 커진다고. 흑흑.. 그래서 네가 내 용돈으로 밥 먹었잖아. 얼마나 아까웠는데.. 그러나, 저 러나 여기서도 넌 전혀 변하지 않아서, 여기서도 팬클럽 같은 거 만들면 통할지 몰라. 돈도 궁하고 하니, 우리 한 번 해볼까?" "...." ...보경이가 아닐 수가 없겠군. 시나는 하마터면 신파극 찍을 뻔했던 분 위기가 일순간에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대신 해묵은 증오(?)의 감정이 무럭무럭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보경을 대하면 언제나 베이스로 깔려있던 감정이었다. "후후... 팬클럽... 그래.. 말해 줄게. 확실해. 확실히 넌 '임보경'이 야." 시나의 그 느닷없는 말에 셰리카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엉? 저, 정말?!! 그렇지?! 내가 보경이지?" 그럼. 사건이야 얼마든지, 듣고서 말할 수 있다고 쳐도, 그 상황을 '아까 웠다'로 말할 수 있는 인간, 그리고 이 상황에서 '팬클럽' 어쩌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이 애 '임보경' 하나뿐이다. 아.. 피곤해. 시나는 갑작스럽게 피곤이 몰려와서 미소짓는 것도 힘들어하며 셰리카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이 애가 보경이가 확실하다면, 우선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 다. "보경아!! 어쩌다 네가 이 세계에 와서 불량청소년의 길을 걷고 있는 건 지 모르겠다!!! 나도 널 만나서 반가워!! 하지만, 드래마의 지갑은 지금 당장 내놔!!! 네가 내 친구라는 것이 부끄럽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세계 에 와서 온갖 구박이란 구박은 다 받고 있는데, 자기 지갑을 훔쳐간 애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면, 난 지금 보다 두 세배는 더 구박받으며 살게 될 거야!!!" "에엥? 지갑?" 보경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얼굴을 단박에 찡그렸다. 그리고 말했 다. "너무하잖아!! 난 이 세계에 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고!! 그러다가 겨우 한 건 한건데, 그걸 내 놓으라니!! 그럼 앞으로 나는 뭘로 살라고?" "누군 고생 안 했는 줄 알아?!! 난, 웬 사이비 종교, 정신나간 교주의 제 물까지 될 뻔했다!! 너어~!! 당장 드래마 지갑 이리 내놔!! 도대체 어떻 게 된거야? 아무리 이쪽 세계 라지만, 도둑이 되다니!! 그 웃기지도 않은 노래하며!! 학생주임이 알면 넌 당장 정학 아니면, 퇴학이라고~!!!!" "우씨~!! 뭐야?!! 도둑이 된 게, 아니라 난 이쪽 세계에서 원래 직업이 도둑이야~!!!" "직업이 도둑이라고?!! 그런 게 어딨어?!! 세상천지에 도둑을 직업으로 삼는 다는 데는 살다, 살다 처음 들어봤다!!! 정신나간 소리 그만하고, 당장 내놓지 못해?!!" "싫어-!! 시나 너야말로, 이쪽 세계에 와서, 완전히 쫀쫀한 사람이 됐 어!! 그 나쁜 놈 편이나 들구~!! 나는 기억도 못하면서!!" "임보경!!" 시나는 소리를 꽥질렀다. 이제 신파극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분위기만으 로는 현실세계를 방불케 할 정도의 향수 어린 보경과의 말다툼이었다. 으 윽!!! 정말 저런 걸 친구라고!! 이쪽 세계에서까지 와서 이 말다툼을 해 야 하다니!!!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것도 의지할 곳 하 나 없어서 막막했을 때... 보통은 서로 부여잡고 펑펑 울고 기뻐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던 이산가족이 몇 십 년만에 만났다고 해도 이보다 기뻐할 수는 없을 텐데...!! 그런데,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상황이 람? 나 혼자 살기도 벅찬데, 친구까지 선도해야 한다니!!! "너, 도대체 여기서 두 주 동안 무슨 일을 겪은 거야? 어디 가서 최면술 이라도 받았니? 남의 것을 훔치고도 그런 소릴 하다니!!" 시나는 몹시 화가 나서 말했고 셰리카로서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셰 리카는 벌떡 일어났다. "씨이~!!! 뭐야! 그럼,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거야?!!" 황당하다. "당연하잖아! 그럼 남의 물건 훔치는 사람이 천사라도 되냐?!!!" "뭐야?!! 나한테 나쁜 사람이라니!! 시나~!! 너어~!! 두고봐~!! 쳇~~!!!!" 그러더니, 셰리카는 후다닥 창문 쪽으로 뛰어가, 창문턱으로 훌쩍 뛰어올 랐다. 체조선수 뺨칠 만큼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거기서 셰리카는 고양이 처럼 등을 구부리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쳇!! 누가 주머니 같은 거 돌려줄 줄 알고?!! 티토우의 딸은 그런 짓 절 대루~ 안 해!!!" "임보경!!!!" "너하곤 절교야!! 나쁜 놈 편만 들구~!! 꼴 좋~다!! 나쁜 놈은 지금 피가 많이 나서, 죽을지도 모르지~!! 캬~!! 너무 속 시원해!! 잘 있어!! 흥!!! 가자, 호문클로스!!" 그러더니, 셰리카는 창의 덧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그 어둠 속으로 풀썩 뛰어내렸다. "으아악!! 보경아!!!" 시나는 셰리카가 내뱉은 그 모든 얄미운 말에도 불구하고 쟤가 혹시 자살 하려는 건가 하는 착각을 해서 허겁지겁 창문 앞으로 달려갔다. "보경아-!!!" "메~롱!!!!" 하지만 시나의 절규에 돌아온 것은 일층 덧 지붕에 당당하게 서 있는 셰 리카의 '메롱'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인상적인 멘트를 남긴 셰리카는 또 한 번 몸을 빙글빙글 돌려 길거리로 척 내려섰다. 길거리로 내려선 충격 을 완화하기 위해 몸을 납작하게 길바닥에 붙이는 모습을 보니 체조선수 뺨을 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체조선수였다. 시나는 그런 보경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헉! 쟤가 어디서 저런 걸 배웠대?!!] 하지만 보경은 이미 발걸음도 경쾌하게 길거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 려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아무도 해 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계속)================================================== 하이템플러의 대사가 'my heart is yours'가 아니고, 'you're my heart' 더군요... 뜻이 미묘하게 틀리죠? ...이거나 저거나 괜찮아서 두 개다 쓸 예정이니까.. ...으음, 그러니까... 힘내십시오!!(꾸벅) <교묘하게 사태를 무마한 엔.> ps...'신주영의 스타크래프트, 무작정 따라하기'에 감사...(하지만, 실시 간 전략 시뮬레이션은 아무래도 취향이 아니다. 할 때마다 자꾸 '심시티 '가 생각나서.) ps2...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추천해 주신 것 도요.^^ 'you're my pleasure'입니다. 헤헤...^^ ps3...토룽이님.. 커플링에 대한 각계 각층의 반응을 말씀드리겠습니 다... 셰리카: 후후.. 괜찮지! 괜찮고 말고! 시나는 돈이 되거든! 호호호..!! (의외로 좋아한다. '커플'의 의미를 잘 모른다.--;) 샤일라테: 호호홋!!!! 뭐? 나한테 반해서? 나를 추종하는 남자애들이야 너무 많지만...!!! 뭐, 거둬주지!!! 하여간 이쁜 게 죄라니까!!! 호호호 홋!! (시나를 남자앤 줄 알고 있다.--;) 레이서스: ...시나? 그게 누구지? (그는 어리둥절해 할 뿐. 아직 만난 적 없으므로..^^;) 시나: .... (젤 심각... --; 말을 안 한다. 한숨을 푹푹 쉬며 얼굴에 사 선을 긋고 있다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난데없이 음침하게 씨익 웃 고... 그러다가 주위에 도깨비불을 펑펑 띄운다. 생을 포기한 사람 같다. ...본 작가, 무섭다.. 잉잉...TT) <작가의 논평> 그후, 골방에 틀어박혀서 안나오는 주인공을 억지로 끌어내서, 그래도 레 이서스는 남자라고 겨우 달래어 이야기 진행 중... 아무튼 이번 일은 시 나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정식적 데미지'를 입은 사건, 베스트 텐,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덧붙여 작가가 입은 정신적 데미지도 만만치 않았다. ..너무 데미지를 입어서, 집안이 떠나가라 웃었 음..(내가 웃고 있다고, 시나에게 알리지 마세요.--; 주인공, 폐인 됩니 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22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31 22:36 읽음:263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7회, 제 35막. The Night. (1)> 유리궁전의 대 연회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형편이 허락 하는 한 최대로 화려하게 꾸민 모습들이었다. 여기 저기서 들리는 웃음소 리. 장식용 부채를 펄럭이는 여인들의 모습. 거드름을 피우며 삼삼오오 모 여 담소를 나누는 남자들의 모습... 홀의 중앙에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그 룹으로 춤을 추는 남녀들이 있었다. 클로니아 인들은 남자나 여자나 바지 만 입지만, 상류층으로 올라갈수록 다른 세계의 복식 습관도 받아들여, 여 인들 사이에서는 요즘 바레인 천으로 만든 바지를 입고, 모피로 만든 자 락이 넉넉한 겉옷을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반면 남자들은 일반인들이 입 는 바지보다 더 타이트한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대님을 덧댔는데, 덕분에 춤을 출 때마다, 여인들의 풍성한 옷자락과 남자들의 날씬한 다리들이 엉 키며,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하하... 좋은 말씀입니다. 올해 하누카의 날은 클로니아에서 만도 좋이 수십만에 이르는 성인들을 배출해 내겠지요. 부디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 들이어야 할텐데요." "호호호... 공의 혜안에 감탄합니다. '세계혼'을 위해 엘야시온님께서 이 클 로니아에 계시니,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많은 왕족들까지 이 곳에 계시니... 공은 오늘 그 행렬을 보셨나요? 칼리안 파이오니온 님의 행렬이 베쓰엘 카할서부터 이곳 유리궁전까지 오던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 더군요. '낙타'라는 것도 새삼 신기했고요." "하하!! 부인, 멋진 말씀입니다. 클로니아가 자이온의 비호아래, 세계의 중 심으로 우뚝 설 징조라 생각합니다. 우리 스온 마리스 님이 다음 대의 엘 야시온이 되시면 더욱 그렇게 되겠지요. 거기다 힐라토는 요 몇 년간 강 대한 세력과 주권으로 부상하고 있죠. '세계혼'으로 지금쯤 그들과의 연결 을 공고히 한다면, 매우 이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하하..." "호호... 공의 달변이 저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군요. 확실히 요즘은 힐라토 의 복식이 새로운 유행이지요.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님의 옷맵시를 남몰래 흠모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호호호..." "하하.. 부인은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통찰력도 뛰어나군요. 그런데, 내 일 있을 왕족들의 토끼사냥에 제 아들놈이 수행원으로 끼게 되었는데.. 아~ 이거 참... 하하~! 그 녀석이 능력이 있거든요? 하하.." "어~머나! 그렇군요! 제 딸도 이번에 왕족들의 시녀로 추천을 받아서.. 호 호호!!" "하하하!!"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가 바르나, 어딘가 잘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하며 그래도 좋다고 즐겁게 웃었다. 입으로는 '아름다우신', '지혜로우신'을 구두점인양 달고 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정작 관심은 다른데 있었던 것 이다. 클로니아 세스틴과 그의 아내가 될 힐라토의 어린 공주, 혹은 한 발 앞서 나아가 다음대의 엘야시온이 될 스온 마리스와 어떻게 하면 한 마디 말이라도 더 나눌 수 있을까 슬슬 눈치를 보느라 무척 바빴던 것이다. 그 들 마음 가운데엔 '이번 기회 잘 잡아, 신세 한 번 활짝 펴보세'라는 표어 가 번뜩이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클로니아 온 세계의 귀족들을 하 나라도 빠짐없이 초대하는 이런 유리궁전의 연회는 100년에 한 번 가야 있을까 말까 하다. 그것도 평범한 연회가 아니라 타 세계의 파이오니온들 과 엘야시온까지 참석하는 연회라는 것은 차라리 꿈을 통하여 참석하는 것이 더 빠를 정도인 하급 귀족이 이 자리엔 많이 모여있었다. 난생 처음 이런 곳에 참석한 그들은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 밤에 있을 거 라 생각한 모든 상상과 나름대로의 계획들이 언제쯤 펼쳐질지 주위를 두 리번대고 있었다. 연회야 하누카의 날 일주일 전까지 매일 밤마다 열리지만... 클로니아 내 의 모든 귀족들이 한꺼번에 연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각각 날을 나누어 참석하고 있었고... 지정한 날짜에만 연회에 참석하도록 초대 장을 받은 그들에게는 오늘밤이 지나면 다른 기회란 없었던 것이다. 연회 에 참석하는 것으로 새로운 여주인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 여주인에게 인 사를 올리고, 엘야시온과 파이오니온, 왕족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충성과 복종을 나타내고, 맹세하는 모든 의식은 이것으로 끝났다. 헌데 파티의 주인으로서 처음부터 연회장에 자리 잡고 나와 있는 클로니 아 세스틴과, 힐라토의 스온 아스테린, 그리고 지금까지 비어있는 클로니 아의 여주인 자리를 대신해서 지키고 있었던 스온 마리스는 연회장에 새 로운 귀족이 들어왔을 때마다, 그 소속을 보고 받고 충성의 말을 듣고, 길 고 긴 인사의 말을 듣고, 선물을 받는 것만 제외하고는 별로 하급 귀족과 어울릴 생각이 없는 듯... 왕족들에 둘러싸여 자신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다. 클로니아 세스틴은 홀의 한 쪽 면에 놓여 있는 세 개의 보좌 중에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스온 마리스는 왼쪽 보좌에 앉아 있었다.(아 직은 그녀가 클로니아의 여주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리스의 발치에 스온 아스테린이 앉아서 미소지은 얼굴로 마리스를 보며 이야기하 고 있었는데, 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귀족들은 여기저기서 한숨을 쉬었다. 저기에 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꿈의 실현이지만... 무작정 다가 가서 말을 건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일이다. 자신보다 계급이나 지위가 높은 쪽에게 말을 거는 것은, 궁정예절에 처절하게 어긋나는 일인데다가, 왕족들 가까운 곳에는 그들의 개인 루이트들이 서 있어서, 괜히 섣불리 예쁘게 찍혀보자고 다가갔다가는 개망신만 당하고 정말로 찍히는 수가 있 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왕족들은 포기하고 대신 상급귀족이나 사귀어 보기 위해 눈을 사방으로 움직이며, '아름다우신'과 '지혜로우신'을 후렴 삼아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이나 딸이 타 세계에서 온 왕족들의 단기간 수행원 이 됐다고 해도, 뭔가 궁극적인 신분상승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그놈의 상급귀족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상 급귀족들이야 내키는 대로 이런 연회에 참석할 수 있지만, 하급귀족과 어 울리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평소 때도 만날 하는 거... 특별히 연회에 목 매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충성을 맹세하도록 지정한 날짜 외에는 연회 느지막이 나와서 왕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는 게 관습이었다. 하급 귀족들처럼 촌스럽게 일찍 나와서 매일 뿌리를 뽑다간, 아마 체력이 견디 질 못할 것이다. 어쨌든 하급귀족들은 그런 사실 알 바가 아니었고, 괜히 상급 귀족들 흉내내다가 단 하룻밤의 기회를 날릴 순 없었으므로, 초저녁 부터 나와 옷자락을 휘날리며 온갖 객실이란 객실, 춤판이란 춤판, 이야기 판이란 이야기판은 다 섭렵하고 다니는 것이다. 멀리 그런 하급 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아스테린은 낄낄 웃더니, 스 온 마리스에게 말했다. "풋! 보세요! 스온 마리스 님! 저기 저, 하급 귀족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셨지요? 쿡쿡... 스온 마리스님? 저는요, 개 한 마리를 키운 적이 있어요. 그 개를 한 며칠 굶기고 고기조각 냄새를 맡게 하면 꼭 저런 눈 빛을 짓지요. 설사 그게 사람이 먹을 것이라고 해도, 아주 탐욕스런 눈빛 을 짓거든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낄낄..." 입을 가리고 재밌다는 듯 웃은 소녀는 주위 왕족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온 마리스 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생각 하세요? 아랫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되도록 이야기를 많이 하고, 그 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나누어주라고요...?" 그러자 클로니아의 왕족들은 이 당찬 소녀의 질문에 이런 저런 의견을 내 기 시작했다. 한편 마리스는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 스온 아스테린이 자기 시녀의 뺨을 세게 때리고 몸치장도 제대로 못한다 고 꾸짖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스온 아스테린. 아무리 아랫사람이라 고 하더라도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건 안 좋아요. 무언가 화나는 게 있다 면 우선 말로 풀도록 하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아래계 급들에게서 우리보다 못한 점을 발견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어주 고 많이 참는 수밖에 없어요."라고 넌지시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얌 전하게 '네'라고 대답한 아스테린이 여기서 이런 화제를 꺼낼 줄이야... 주 위 왕족들은 마리스가 말했다는 내용을 토론하고 있는 지라, 간간이 그녀 쪽을 쳐다보며 웃음 지었다. 특별히 불손한 눈초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하얀 볼은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아직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는 것이 익 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스테린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 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 생긋 웃더니, 이번엔 세스틴을 보고 말했다. "저어? 그럼 세스틴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온 마리스 님이 말씀하신 것 에 대해서요." "으응? ...스온 마리스 님이 말씀하신 거?" 사람들 틈에 끼지 않고 지금까지 혼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스온 마리스를 쳐다보았다. 클로니아의 왕족들은 보통 스피릿 심벌이 나 타나면 무척이나 차갑게 보이는 데, 스온 마리스는 '따뜻한 눈의 공주'라 는 별명답게 반짝이는 은발이라든지 눈길이 오히려 따뜻함을 연상시키 고... 방금 붉어진 볼 때문에 더욱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따뜻함'이 라... 세스틴은 가끔 거울을 보면서 차갑고 무감각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 에 스온 마리스의 얼굴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똑같은 스피릿 심벌을 지 녔는데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문득 세스틴은 연회장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30미터는 될 듯한 높이의 천장은 유리로 섬세하게 이어 붙어 져 있었고, 그 한 가운데 천장에는 빛을 흩뿌리고 있는 전기구가 둥둥 떠 있었다. 기술과 아트의 결합체인 전기구는 몇 해전서부터 한 획기적인 발 상으로 건물 내에서도 쓰이게 되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았지만, 이렇게 대 연회를 벌일 때는 수 천 개의 초를 밝히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 고 밝았다. 덕분에 유리천장 너머, 거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별빛을 못 보게 되었지만... 별빛이야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연회는 화려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렇지. 별로 아쉬워하지 않 아. 전기구가 더 밝거든. 그런 생각을 하며 세스틴은 씨익 웃었다. 그러나 곧 미간을 찌푸리고 눈알을 불안스럽게 이리저리 굴렸다. 똑같은 것... 그 러나 틀린 것. 대치물과 사라진 것... 못한 것과 나은 것... 영원히 잊어버 린 것과 숨겨진 것.. ..그런가? 그때 그는 아스테린의 조금 큰 말소리에 깜 짝 놀랐다. "세스틴! 세스틴은 어떻게 생각하시냐고요? 아랫사람들을 힘들여 대우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끼세요?" "어...?" 아스테린의 날카로운 말소리에 그는 정말 놀랐다는 듯, 얼굴이 창백해져 서 아스테린을 보았다. 어리디 어린 검은머리와 검은 눈의 소녀가 눈을 찌푸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질문을 했는데, 세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생 각에 잠겨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금 미소지었다. 어쩐 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어.. 그, 그래. ...잘 모르겠지만... 스온 마리스님은 엘야시온의 교육을 받 고 있는 분이니까.. 아마, 스온 마리스님의 말씀이 옳지 않을까?" 세스틴의 그 말에 아스테린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더니 말했다. "...아아. 그래요? 헤헤.. 역시 그런 건가? 스온 마리스님?" 아스테린은 마리스의 발치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마 리스는 뜻밖에 아스테린의 행동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후후... 나의 존경하는 종속주께서 그렇다고 말씀하는군요. 스온 마리스님 이 옳대요. 알겠어요. 스온 마리스님. 이제부터 스온 마리스님의 말씀대로 할게요." 그러더니 아스테린은 아직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스에게 더욱 상 냥하게 웃었다. "아이~ 참. 저 때문에 불쾌하신 건 아니죠? 안 그러기 위해서 노력은 하 는데... 레이 오빠는 나한테 건방진 면이 많이 있대요. 혹시 저한테서 그런 면을 보셨더라도 용서해 주세요... 네? 저는 어느 땐 생각하고 있는 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버릇이 있어서.. 정말 나쁜 버릇이죠? 네?" 마리스는 놀란 마음을 풀고 웃음 지었다. "아니에요. 궁금한 걸 묻는 것은 나쁜 버릇이 아닌 걸요.. 그렇게 해서 자 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행동을 하나 하나 고쳐 가는 것도 좋은 면이고요. 스온 아스테린... 아주 좋은 아가씨군요." 그 말에 아스테린은 기쁘다는 듯 마리스의 목을 꼭 껴안았다. "아이, 좋아라~!! 역시 스온 마리스 님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예쁘고,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스온 마리스님이 엘야시온님이 된다면, 옛 날 은의 엘야시온 타미스엘 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진 엘야시온이 만들어지겠죠? 기뻐라~! 나 스온 마리스님이 태어난 이런 좋은 세계에 시 집오고, 이제 곧 스온 마리스님처럼 은발에 은색 눈을 갖게 될 것이 너무 기뻐요! 마리스님! 저를 부디 '아스테린'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한순간, '엘야시온'이라는 말에 마리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색을 지우고 억지로 웃었다. "호호... 고, 고마와요. 스온... 아니, 아스테린. 그래... 아스테린은 지금도 예쁘니까, 은발과 은색 눈을 갖게 된다면 그때도 여전히 예쁠 거예요." 주위 사람들은 마리스와 아스테린의 이런 모양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 맞게 되는 여왕은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지나치게 활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클로니아를 좋아하니 매우 기뻤던 것이다. 아스테린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여겨보고, "잠깐 실례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약혼자인 세스틴과 마리스, 왕족 들이 있는 곳을 빠져 나왔다. 금새 시녀가 따라붙었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그녀는 자신의 개인 루이트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큰 여성 루이트를 보고 말했다. "루사벨라! 나 휴게실에 갈 건데, 따라와!"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루사벨라는 그 말에 아무런 의문도 달지 않 고, 동료에게 목례한 뒤, 아스테린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저런 표정을 짓 고 있는 스온 아스테린님은...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이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회장 주변엔, 작은 댄스 플로어가 마련되어 있는 소규모의 볼 룸, 다과가 마련 된 다과 룸, 간단한 게임을 위해 마련 된 게임 룸들이 활짝 열려진 문들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 깊숙한 곳에 아스테린의 휴게실이 있었다. 아스테린은 루 사벨라가 휴게실의 문을 닫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비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흥... 이제야 살 것 같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비위를 맞추려니... 참 나." "음료수를 드시겠습니까? 스온 아스테린님?" 아스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원한 걸로 줘. 알코올은 절대 넣지 말고." 아스테린은 술을 너무 싫어해서 음료수를 부탁할 때면 아스테린의 기호를 훤히 알고 있는 루사벨라에게도, 이 말은 꼭 빼놓지 않고 했다. 그녀는 루 사벨라가 음료수를 만들어서 가져오자, 자기 옆으로 오라고 루사벨라에게 손짓했다. 아스테린이 이야기 들어 줄 사람을 원한다는 것을 아는 루사벨 라는 왕족들의 휴게실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실랑이를 벌이기보다는 그 냥 소파 옆에 가서 섰다. 주인의 명령과 기분 쪽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아스테린은 자신의 명령대로 하는 루사벨라를 만족스럽게 보며 음료수를 마셨다. "휴우~ 시원하다. ...아까, 클로니아 왕족들하고 이야기하는데.. 속에서 열 이 나서 혼났다니까. 스온 마리스? 쳇... 그런 멍청한 여자가 엘야시온이 된다면 역대 사상 가장 한심한 엘야시온으로 기록될거야! 안 그래?" "스온 아스테린님..." 루사벨라는 연두색 눈에 걱정스러운 빛을 담았다.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아스테린의 말은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아스테린이 손을 저었다. "아아.. 알아. 스온 마리스에 대한 불평은 여기서, 그리고 네 앞에서, 이 순간으로 '뚝'이라고. 다른 데 가서는 절대 이런 말 안 해. 낄낄... 내가 말 한다고 해도 누가 믿기나 하겠어? 스온 마리스가 헛소리나 하는 여자란 걸 말이야.. 낄낄... 뭐, 그 여자랑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아까처럼 참아 넘기면 되겠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음 대의 엘야시온이니, 잘 보일 필 요도 있고... 낄낄... 정말 웃기지?" 아스테린은 웃으며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낄낄... 루사벨라. 그 여자의 말은 정말 웃겼다고. 도대체 아랫사람 비위 맞추라는 것이 말이나 돼? 윗사람 비위 맞추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우스운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그 여자 신경은 도대체 어떻게 된 신경이 야? 하지만 뭐... 세스틴이 그 여자 편을 들었으니... 그렇다고 해 두지. 뭐. 그렇게 살라고 하라고. 하하.." 그리고 아스테린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루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음.. 난, 말이야. 루사벨라... 지금으로선 최고로 행복해. 세스틴과 결혼하 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야. 루사벨라, 손을 이리 줘봐. 후후.." 루사벨라가 손을 내밀자 아스테린은 거기에 얼굴을 기댔다. "...예전에 내가 꾸었던 꿈들을 기억하지 루사벨라? 내가 언제나 이야기 해줬잖아?" "그럼요. 스온 아스테린님." 루사벨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린 공주님을 내려다보았다. 루사벨라가 99년도의 토너먼트를 찾은 것은 괴로움과 일종의 보상심리 때 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서 8살의 아스테린과 처음으로 만났다. 검 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던 공주님. 왕족의 교육을 받기 위해 그 해 '루세'에 입학한 어린 공주님. 루사벨라는 처음 본 순간부터 이런 아스테린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꼈고, 그건 아스테린도 마찬가지인 듯... 시종일관 루사벨라를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가 루사벨라를 아스테린의 개인 루이트로 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에야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이마에 작은 키스와 함께 '절대로 약속이 야! 그대는 내 개인 루이트가 되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결국 루사벨라의 계속 아팠던 마음은 이 공주님으로 인해 많은 치유를 받았다. 궁극적인 상처야 무엇으로도 보상하기 힘들다고 하더라 도... 토너먼트에 출전해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 최초로 긍정적인 마음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99년도의 토너먼트에서 모든 대가를 다 바쳐 우 승하고... 시상식 장에서 아스테린의 작은 손에 들린 '실버하트'를 받아썼 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못할 정도였다. 그 후로는 스온 아스테린과 떨어져 있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까지 주욱 자이 온에만 있었고 특별한 일을 위해서만 힐라토에 돌아갔었다. 자신의 고향 집에조차도 거의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스테린의 성장을 지켜 본 루사벨라는 그래서 그녀의 고민이라든지, 그 녀가 좋아하는 것, 심지어는 어린 시절 시시콜콜한 그녀의 작은 꿈까지도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루사벨라는 빙긋 웃었다. 초록색 머리칼이 흔들리 고 연두색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럼요.. 스온 아스테린님. 스온 아스테린님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클로 니아님을 좋아하셨지요. 그 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맞아. 루사벨라. 그런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약간의 기분 나쁜 것 정도야 참을 수 있거든. 나는 이제 성인이 되는 거잖아? 후후.." 아스테린이 즐거운 기분으로 이야기하자, 덩달아 즐거워진 루사벨라는 조 금 짓궂게 말했다. "그런데, 스온 아스테린님? 스온 아스테린님은 어렸을 적 힐라토의 왕궁 에서 봤다는, 그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 분을 잊지 못하시는 것 아닌가 요? 달빛 아래서 신비하게 빛나는 은색의 머리칼과 은빛의 눈동자... 달빛 요정의 왕... 그래서 루세 따위엔 있기도 싫고 어서 빨리 힐라토로 돌아가 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스온 아스테린님을 처음 만 났을 때부터 매일 매일 듣던 이야기였는데...? 그럼 그 분은 이제 스온 아 스테린님께 버림받은 건가요?" "어머, 루사벨라!"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손을 찰싹 때렸다. "지금, 그대는 그대의 주인을 놀리는 건가?! 불손하기 짝이 없네? 응?" 루사벨라의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커졌다. 하지만 아스테린은 검지 손 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흐응, 흐응! 루사벨라! 그렇게 하다간 훌~륭한 루이티온이 못된다고. 알 아? 그래도 좋은 거야?" "스온 아스테린님.. 호호.." 루사벨라는 마침내 소리내어 웃었다. 스온 아스테린의 말투는 루세에서 그녀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학생주임의 말투와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 스테린은 루사벨라가 웃는 것을 보더니, 생긋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흐음... 난, 아직도 내가 '루세'를 졸업했다는 것이 안 믿겨져. 영원히 그 지겨운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 같았는데.. 휴우. 달빛 요정의 왕이라.."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눈을 쳐다봤다. "후후.. 필시 그건 아주 어렸을 적의 환상 같은 거겠지.. 왜, 어렸을 적엔 외로움 같은 것을 잘 타잖아..?" 루사벨라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옳은 생각입니다." "후후.. 루사벨라.." 그녀는 손을 들어 다시 루사벨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생긋 웃더니 말 했다. "그대가 아주 좋아. 그러니 가끔은 아까처럼 웃도록 해. 다른 사람들이야 웃던 말던 내 알 바 아니지만, 딱 두 사람만은 아주 많이 웃었으면 좋겠 어.. 그럼 내 기분이 좋아지거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레이 서스 오빠... 그리고 그대야. 난 세상에 싫어하는 사람이 아주 잔뜩 이지 만... 둘 만은 아주 좋아해. ..뭐, 두 사람이 잘 웃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스온 아스테린님. 루이티온 계급은 표정이 풍부한 계급은 아니랍니다." 아스테린은 까만 눈을 치켜 떴다. "나도 그런 건 알아. 오빠의 개인 루이트인 루온 루파르테를 보면 알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거야. 무슨 뜻인지 알텐데?" 그 까만 눈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는데, 왕족 몇 명이 휴게실 로 들어왔다. 왕족들은 휴게실에 있는 루사벨라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 다. 그래서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휴게실을 나와야 했다. 문을 닫는 데 뒤에서 왕족들과 이야기 나누는 아 스테린의 음성이 들렸다. 루사벨라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가 아 스테린 만할 때에 토너먼트에서 그토록 우승하기를 바라고, 열심히 훈련 에만 몰두했던 것은... '실버 하트'를 얻기 위해서였다. 마음을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그 기적의 유물... 그 강대한 힘에 혹자는 그것을 클로니아 스피릿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돼는 일이다. 스피릿들은 생명이 없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 이 말은 모든 언약 이란 언약은 남김없이 파괴해버린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신빙성은 없 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다. 진정으로 스피릿이 만들었다고 하는 '블러디 루비'는 사라져 버렸고,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자는 기억 속에 언 제까지나 태연한 얼굴로 서 있을 뿐. 루사벨라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격자 창 너머를 보았다. 멀리 흰 산이 보 였다. 온통 눈뿐인 냉기의 세계... 밤의 공기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 다. "...정말 정떨어지는 세계야..." 루사벨라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뒤,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주인을 따 라 자신도 이곳에서 살게 되겠지만... 이 따위 은색투성이 세계는 죽어도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상급 루이티온 남성들의 전용 휴게실엔 루이티온 남성 몇몇이 모여서 한 가롭게 다리를 뻗고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클로니아 왕족의 루이 트였지만, 타 세계의 루이트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그 중, 검은 예장용 갑옷을 걸친 훤칠한 키의 루이트가 옆에 있는 훨씬 큰 루이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 헬리옷, 헬리옷. 얼굴 좀 피라고. 어차피 한가지 표정만으로 이 밤을 보낼 거라면, 조금 더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하는 것이 어때?" 벽난로의 맨틀피스에 한 팔을 걸치고, 술잔의 술을 마시고 있던 루헬리옷 은, 그렇게 떠드는 루파르테를 힐끗 보았다. 사촌은 이 밤에 어울리는 자 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루헬리옷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그의 운명은 지금까지 엘께서 작정이라도 한 듯, 운과 복의 탄탄대로를 달려오 고 있는 것이다. 12세계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칭송 받는 파이오니온의 프 레미어 루이트, 배우자도 에브리나에서 손꼽히는 가문의 아가씨들 가운데 서 누구를 고를지 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에게 있는 고민거 리라고는 고작 주군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하누카의 날을 치를 수 없다는 충정이 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고민 정도나 될 까? 루헬리옷으로서는 가소로운 일이라, 그렇게 친했던 사촌의 얼굴도 왠 지 보기가 싫어져서, 그냥 묵묵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걸 보고 루파르테 가 한숨을 지었다. "쯧쯧... 문제군." 루파르테는 주위의 귀를 생각해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파티도 슬슬 무르익어 가는 참인데.. 말해 봐.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이 런데 틀어박혀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거... 형 약혼녀 때문이지? 그 여자, 또 자기 오라버니 에스코트로 연회장에 들어오더군. 형을 놔두고 도대체 무슨 짓이야? 그거, 형이 허락한 거 아니지?" 루헬리옷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허락한 거야. ...하온 하겐트가 아파서 떨어질 수 없다고 하기에 맘대로 하라고 했어." 루파르테는 고개를 저었다. "하온 하겐트가 아파? 쯧쯧... 혈색만 좋던걸? 설사,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 렇지. 그게 그 여자랑 무슨 상관이라고 종속주까지 있는 여자가 다른 이 의 에스코트를 받아? 나 참... 하여간 그 여잔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자기 오라버니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 형을 무시하는 거야, 뭐야? 불쾌하게시리... 하필 왜 그런 여자를 골랐어? 아름답긴 하지만 지나치게 도도하잖아? 출신도 분명치 않은 하바티온 주제에... 그러니, 예절도 모르 고 그따위로 굴지. 누구의 개인 루이트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마음을 갖 고 있는 형이 선택해 줬으면, 좀 더 고분고분한 것이 좋은데... 너무 건방 져." 그리고 루파르테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으흠... 그래. 그... '사랑'같은 거야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은 그냥 감 정일 뿐이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형? 내가 형에게 관심 있는 좋 은 가문의 아가씨를 알고 있는데..." 그 목소리에 진심 어린 걱정이 없었다면, 루헬리옷은 '입 닥치고 네 할 바 나 하라!'는 말을 뱉었을 것이다. 루헬리옷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지금이 라도 늦지 않았다고? 아냐. 이미 모든 것은 늦었어! '사랑'..? 웃기는 군. 그 따위 여자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낀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차라리, 그 빌어먹을 낯간지러운 음유시인들이 떠들어대는 '사랑'에 빠진 척하는 것이 내 자존심엔 훨씬 더 자비로운 일 이지. 사촌에게 이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말이야! 젠장.. 루헬리옷은 얼굴 을 구기며, 들고 있는 유리컵의 황금색 액체를 훌쩍 마셨다. 기도를 불태 우는 뜨거운 것이 넘실대며 넘어갔다. "...흥! 됐어. 그녀도 몇 주 후면, 내 아내가 될 터이니. 그땐 날 무시하는 짓거리 따윈 더 이상 못하게 되겠지." 그 목소리에 실린 절절한 비장감에 루파르테가 쿡 웃었다. "...이거야. 원. 하누카의 날을 이런 이 가는 소리로 기대하는 신랑을 보다 보다 처음 보는군. 쿡쿡... 하긴 그런 여자는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좋겠 지. 결혼하면 그 여자에 대한 권리는 완전히 형에게로 넘어오니까... 지금 처럼 친정식구들한테 기대려고 하면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쳐 놓으라고. 시건방진 여자들은 다루는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하는 복수도 통쾌하지. 그리고 나서 형은 형 나름대로 정말 괜찮은 여자를 찾으라고... 형 정도면, 여자들은 알아서 몸을 바치지..!!! 하누카의 날도 치렀겠다... 후계자에 대 한 걱정이 사라지는 만큼, 제한은 없는 거잖아? 하하하하!!!"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22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31 22:37 읽음:254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8회, 제 35막. The Night. (2)> 루헬리옷은 피식 웃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나한테 신경 쓰는 것은 관두고, 왕족들의 휴게실로나 돌아가 봐. 힐라 토님이 들어오실 시간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형이 걱정 돼서 말이야. 큰어머님께서 형을 잘 돌봐주라 고 하셨거든." "그래? 숙모님은 나한테 너를 잘 돌보라고 하셨는데?" "하하.. 그래? 하여튼 어머니들이란... 그럼, 여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이 따가 나와서 춤으로 기분이라도 풀어. 지겨운 연회지만 이왕 있을 거 즐 겁게 지내야지. 고작 여자 때문에 밤을 망치는 건 사내의 수치라고. 후 후..." 루헬리옷은 이번엔 술잔의 술을 다 마셔버리고, 급사를 불러 다른 술을 시키며 말했다. "..알겠어. 마음 내키면 가지." 루파르테는 그의 어깨를 한 두 번 툭툭 치고 휴게실을 나왔다.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것 같지만, 자제심이 강한 헬리옷이니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아마사, 정말 이런 데 혼자 있어도 괜찮겠니?" 겐트온의 상냥한 말에 아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음을 짓고 말 했다. "괜찮아. 오빠. 오빠는 오빠 일을 보도록 해." 겐트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뜻하고 환한 연회장에 비해, 궁전의 로비 로 이어지는 통로는 어두운 편이고 추웠다. 귀족들이 드나들며 그들을 시 중드는 시종이라든가 급사들도 보였지만, 역시 젊은 여자 애를 혼자 세워 둔다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그때 아마사가 재빨리 말했다. "글세. 괜찮아. 샤일라테 언니가 올 때까지 만이라고. 오빠 고쳐주느라 언 니의 준비가 늦어서..." 여기서 아마사는 또 생긋 웃더니, 아까는 몹시 걱정했다는 표정으로 겐트 온의 팔을 잡았다. "아까는 정말 놀랐어. 오빠.. 몸을 조심해. 샤일라테 언니도 조심하라고 그 랬잖아?" 겐트온이 웃었다. 샤일라테가 말한 '그런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하 는 수 없이 고쳐주기는 하는데, 하필이면 몸단장하는 순간에 들어와서 귀 찮게 하다니... 개인적으로는 상처가 꼭 덧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여자들을 찝쩍대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테니, 무척이나 기쁘 다.'..라는 말이 아마사의 말처럼 '조심하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가 생각 한 때문이었다. "오빠, 난 정말로 언니가 오면 곧바로 연회장으로 들어갈게. 오빠는 오늘 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야 하잖아. ..엘야시온님과도.. 그렇지? 그러니, 난 신경 쓰지마." 겐트온은 자신의 팔 위에 놓인 아마사의 손을 들어올려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마사, 넌 우리들의 희망이야.." 그리고 그는 그녀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은 뒤 말했다. "그럼 난 들어갈게. 하지만 샤일라테가 너무 늦는 것 같으면, 그냥 곧바로 들어와. 샤일라테야 이드넘이 에스코트하고 올 테니까... 너무 늦으면 도비 온에게 말해서 네게 가보라고 할거야." 그는 미소지었다. "너도 알지? 오늘 밤 도비온은 내가 말만 걸면 한 대 치려고 덤벼든다고. 그러니 내가 도비온에게 말을 걸지 않도록 줘.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응." "좋아. 착한 애다." 그는 아마사에게 다시 한 번 더 미소지어 보이고, 그녀를 남겨 놓은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 헬리옷의 표정을 생각했다. 아마사가 아 픈 자기와 떨어질 수 없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서 하는 수 없이 그녀와 같 이 연회장엘 왔지만... 아무래도 헬리옷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니 그의 기분을 풀어줄 겸, 아마사가 헬리옷에게 가서 첫 춤을 신청하도록 시킬 참이었다. 아마사가 그런 것을 질색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샤일 라테가 와서 안정이 되면, 그럭저럭 명령을 잘 들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마사가 자기 뜻대로 샤일라테를 기다리도록 하는 편이 좋다. 겐트온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때였다. 한 시종이 소리쳤다. "물러서십시오!! 엘야시온님이 파이오니온들과 함께 가십니다!!!" 그 외침에 통로에 있던 왕족들 이하, 귀족들이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 났다. 겐트온 또한 허리를 숙이고 벽 쪽으로 붙어 섰다. 복도 한 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시종단과 루이티온들을 대동한 엘야시온, 파이 오니온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지나감에 따라 사람들은 더욱더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이윽고, 엘야시온 가디엘이 파이오니온들과 대화하는 소리가 겐트온에게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율르스, 너도 이젠 좀 품위 있는 몸가짐을 갖도록... 레이서스를 꼬셔서 놀러가자고 하는 따위의..." 그 말에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가 놀란 소리를 냈다. "엣?! 아까 내가 형에게 그렇게 말한 것을 엘야시온님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하, 하노크가 말한 겁니까?" 이 말을 하며 씩씩거린 칼리안 파이오니온은 뒤쪽에 길게 따라오는 시종 단을 바라보며 소리를 꽥질렀다. "하노크!! 나중에 두고 봐!!" "...." 잠시 이상한 침묵이 지나가고, 엘야시온이 말했다. "...율르스...? 혹시.. 그럼 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레이서스를 찾아가서 놀러가자고 꼬셨느냐?" "그렇죠!! 이스파한의 유리... 아니, 검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눌까 하고요!! 에잇, 정말이지! 주인의 행동이나 꼬치꼬치 고해 바치는 시종장이라니!!" 엘야시온 가디엘이 매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율르스. 하노크는 내게 아무런 말도 안 했다." "...엣? 그럴 리가? 그런데 어떻게 엘야시온님이 그 사실을...??" 그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우- 율르스? 방금 그대가 말했잖아요. 정말.. 왜 그러는 건지." 율르스의 누이인 스온 칼리스나의 말이었다. 덕분에 주위엔 또 한번의 침 묵이 지나갔다. 아무리 복도가 넓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인원이 지나가는 데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들 나름대 로 폐부에서 치미는 어떤 종류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었다. 왕족들은 자기 발 밑을 보며, 찌그러지는 표정을 바로 펴기 위해 애썼고, 뒤따르는 시종 단들은 갑자기 왜 왕족들이 저렇 게 썰렁한 표정을 짓고 칼리안 파이오니온을 일제히 외면하고 있는 것인 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쿡-!'하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주변에서 그 소리를 낸 사람을 쯧쯧...이라 는 혀를 차며 노려보았다. 지금도 충분히 민망할 텐데, 웃기까지 하다니, 형제 세계의 파이오니온에게 너무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노려보는 사 람들도 다들 웃음보가 터지기 직전이라, 너무하기는 오십보 백보로 마찬 가지였다. 그래서 하여튼 별로 안 우스운 생각만 드는 엘야시온이 무뚝뚝 하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율르스. 나중에 보자. 몇몇...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파이오니온의 몸가 짐에 대해서. 지금의 너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되는구나. 알 겠느냐?" 그 뒤에 나온 시무룩한 칼리안 파이오니온의 대답은 그들이 연회장에 들 어갔을 때 울린 팡파르와 시종들이 외치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그리고 왕족들이 사라지자 복도 여기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둘 몸을 일으켰 다. 그때 기둥하나를 사이에 두고, 겐트온 옆에 있던 여자들도 몸을 일으 키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둥 건너편에 누군가 있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여자들 의 대화라면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주의 깊게 듣는 겐트온은 본능적으 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음... 저기, 있지.. 내가 왕족만 됐어도.. 아니, 우리 아버지가 상당히 영 향력 있는 지위만 있었더라도... 지금 당장, 저 연회장으로 들어가 첫 춤을 신청하고 싶어." 다른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구에게..?" "킥.. 누구긴 누구야. 리에...! 정말 모르는 척 하는 거니? 저어기, 여자처럼 예쁜 외모에다가... 방금 참을 수 없도록 귀여운 행동을 하신, 붉은 머리칼 의 고귀한 남자 분을?" 웃음이 잔뜩 서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리에라 불린 여자는 걱정스 럽다는 듯 말했다. "어머! 남들이 들으면! 파이오니온 님에게 귀엽다니..!! 조심해서 말하라 고!!" "조심은 무슨! 다들 자기 일하기 바쁜걸? 누가 우리 같은 하급귀족의 말 에 신경을 써? 게다가 우리 주위에서 우리 같이 운 좋게 왕족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 좀 봐. 그들도 킥킥거리고 웃느라 정신이 없잖아? 깔깔깔.." 과연 그녀의 말대로 겐트온 주위에서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 었다. "후훗. 난 왕족들이 그렇게 재미있는 줄은 처음 알았는걸? 스피릿을 다루 는 분들이니까, 엄청난 분들 일거라 생각했는데... 뭐랄까.. 그냥 우리랑 똑 같은 인간 같아. 깔깔깔.. 그러나, 저러나 리에! 넌 너무 어두워! 이렇게 재밌는 일에도 웃지를 않으니..!!! 그러니 남자들이 널 안 좋아하는 거야. 내 덕으로 이런데 왔으면, 좀 더 인상을 피는 게 좋아, 사촌. 못생겼다면, 인상이라도 환해야지? 후훗.. 그러나 저러나... 누가 또 알아? 우리 아버진 지위가 형편없어서, 이제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유리궁전의 연회에 초대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난 자신 있거든.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은 화술 과 춤, 그리고 내 미모.. 어때? 칼리안 파이오니온님이 날 보시면, 내 지위 따윈 거의 문제삼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지? 우리 클로니아 세스틴 님은 마인드 컨트롤인지 뭔지 때문에 꼬시기가 어려울 거야. 아까도 봤지만 차 가워 보이잖아? 그런데 칼리안 님은 저 엄청난 붉은 머리칼과 붉은 색의 눈이... 저런 분과 사랑에 빠진다면 어떨 것 같아?" 리에는 시무룩해서 말했다. "...넌 아까, 힐라토님을 잠깐 보고, 그 분이야말로 네 이상형이라고 했잖 아." "호호.. 얘는! 상황판단 좀 제대로 해라! 방금 못 봤어? 힐라토님 옆에 계 시던 분말이야. 그분이 아마 칼리안의 스온 칼리스나님 일거야! 힐라토님 의 약혼녀라는 분이지! 그런 분 앞에서 힐라토님을 유혹한다니! 왕족에게 도전했다가 한밤중에 비명횡사할 일 있니? 그러니 아무리 이상형이어도, 힐라토님은 상황종료야. 끝났다고. 누구도 못 건드려. 후후.. 그러나.. 빨리 들어가자. 리에! 칼리안 님이라면 아무도 임자가 없으니까..!! 어서 칼리안 님의 눈에 띄어야지! 내가 그 분에게 첫 눈에 반한 것처럼, 그 분도 나에 게 첫눈에 반할지 몰라!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거지! 아..! 그나저나 넌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돼! 그래야 남자들의 눈길이라도 한 번 더 받지 않겠 니? 호호.." 그들은 이렇게 소곤거리며 연회장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고, 겐트온은 기둥 뒤에서 나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랑이야 물 론 모든 여인들이 바라는 멋진 꿈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므로, 그 황홀경이 현실로 침투하려 할 때는 굉장히 많은 여과 장치를 거쳐야 한다. 처음엔 순수하기만 하던 그 불타는 에너지 덩어리가, 개인의 욕망이라는 너무나도 강렬한 그 욕구... 너무 강렬해서 과연 '남'을 위한 사랑 같은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 건가 의심하게 만드는 그것과 현실 그 자체에, 얼마나 잘게, 잘게 조각나 걸러져 나가 버리는가? 그렇게 해서 껍데기만 남은 가증스런 사랑의 파편은 마침내 시간이라는 채에까지 걸러 지면, 결국 권태와 경멸이라는 큼지막한 덩어리로 남아서 추하게 굴러다 니는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러니... 겐트온은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꿈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최상의 꿈과 최상의 순수성은 가장 짧은 시간동안만 존재하니까. 그것을 안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텐데...? 더구나, 저렇게 애초부터 사랑의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있는 야망정도야... 겐트온은 목소리가 비웃음을 띠지 않고 나오도록, 그것을 진지하고 매혹 적으로 가다듬었다. "...저어, 레이디들, 잠깐 실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두 명의 여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그들의 대화대로, 한 명은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저 그런 수준의(더불어, 자신을 주눅들게 하는 여자 옆에서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 초라해 보이기 까지 하는..) 여자였다. 충분히 그들을 관찰한 겐트온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과연.. 아름다우신 분들이군요." "어머..!! 갑자기 이게 무슨...! 저를 희롱하시는 건가요? 무례한 분이군 요!!!" 미인은 무슨 소리냐는 듯,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며 화를 내는 척 했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에 상당히 흐뭇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촌, 하리에는 미인처럼 세련된 행동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인은 부채를 조금 내리고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 부채살 사이로 겐트온을 관찰했고, 마음에 든 것이다. "흥... 제게 무슨 용건이신가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연회장에 들어 가봐 야 하는데.." 미인은 계속, 자신의 사촌이 없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겐트온은 그녀의 행동에 완전히 미소짓고 말았다. 그는 완벽한 궁정 식의 제스처로 고개를 숙이고, 완벽한 궁정 식의 말투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를 했군요. 다짜고짜 저의 감탄부터 말하다 니..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주시길... 격식대로 아가씨들을 다른 분에게 소개받는 게 도리이겠으나... 그때까지 는 도저히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서... 파렴치한..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정당한 특성인 매혹된 마음을 가지고, 레이디들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저는 힐라토의 벌츄즈 하바티온 하겐트. 엘의 넘칠 듯한 축복하 심으로, 힐라토의 수네드리온에서 서기관(書記官)을 맡고 있는 자이지요. ...이 밤, 특별히 에스코트할 신사 분이 없으시다면.. 제가 레이디들의 에스 코트를 맡아도 될까 청합니다." "어머, 어머, 어머..!!" 이제 미녀 쪽의 말소리는 간드러짐으로 넘어갈 듯 했다. 눈앞에 있는 남 자는 화려한 금발과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밝지 않은 불빛에서 보기에 도 잘생긴 남자였다. 거기다가 힐라토의 수네드리온 서기관!!! 미녀 옆에 서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하리에의 눈도 휘둥그래져 있었다. 이렇게 젊 어 보이는 데 그런 지위를 갖고 있다니 못 믿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기관은 왕궁을 포함한 모든 기관에서 기록관 및 비서 의 일을 하며 아가트 법을 연구, 거기에 비추어 하위 법들을 제정하는 직 업이다. 머리가 좋은 하바티온이라도 오랜 세월을 바쳐서 학문에 종사해 야 얻을 수 있는 직업으로(그 긴 아가트 성문법전과 하위 법들을 달달 외 워야 하니.) '타고난 능력으로 잘먹고 잘 살아보세'를 모토로 삼고있는 하 바티온에게는 당연히 아티스트 버금가는 까다로운 직업이다. 그래서 하바 티온 가운데 이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고, 있 더라도 그 질이 거의 일루티온 계급의 서기관들 수준으로 낮아지고 있어 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서기관이라는 것은 아티스 트 이상으로 몹시 존경받는 직업이다. 그들은 '라브(Rab: 선생님)'라 불리 면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갖고 있는 유일한 자들인 것이 다. (사제들도 사람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그들은 정식 선생이 아닌 일종 의 보조교사 같은 의미이다.) 더구나, '수네드리온'의 서기관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각 세계의 수네 드리온은 자이온의 이드렘나에서 파생된 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법률기 관이자, 법원, 공회(公會), 행정부이다. 한 세계의 수네드리온 회원은 겨우 70명.(신관 급의 왕족 20명, 페이스 힐러의 능력을 포함한 능력자와 서기 관과 신관 급의 하바티온, 파(派)를 이끄는 마스터 급의 루이티온 계급 30 명, 일루티온의 모든 능력자 중, 장로 급과 마스터 급의 20명) 그런 쟁쟁 한 집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남을 제압할 정도의 특출 난 능력을 가지고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는 가문을 가진 인간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수네드리온의 서기관'이라는 말은 가문, 재력, 능력을 모두 상급 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증명어이며 상징어이다. 명칭 자체도, 수네드리온 의 서기관들은 일반 서기관들과 틀리게 '라브'에서 '랍오니(Rabboni: 대 선생님)'로 불린다. 인간이 노력하여 쌓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한 경지 를 이룬 자라는 뜻이다. 미녀의 가슴은 뛰었다. 그런 위대한 '랍오니'에게 헌팅을 당하다니!!! 이것이 혹시 꿈은 아닐까? 거기다 수네드리온 의원들 은 모두 똥배 나온 아저씨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토록 젊고 잘생겼다 니!!! 칼리안 파이오니온을 꼬신다는 거의 불가능한 일보다야, 평생가야 있을까 말까한 확실한 수확 아닌가?!!! 호호홋-! 역시, 유리궁전의 연회야! 시골 영주끼리 벌이는 연회와는 차원이 틀리다고!!! 미녀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멍청하게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사촌을 팔꿈치로 확 밀어 제치며 나아가, 겐트온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호-호호!!! 랍오니여-! 저 같이 미천한 것을 아는 척 해주시다니 영광입 니다!! 오늘 밤, 당신으로 인해 평생동안 새길 아름다운 추억이 또 하나 늘었군요!" 겐트온 역시 친근감 있게 웃으며 또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천만예요. 이토록 아름다운 분들을 모실 수 있다니, 저야말로 영광입니 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고, 한 처녀에게만 은밀한 눈길을 주며 웃었다. "...아가씨를 만나, 분명 멋진 밤이 될 것 같습니다. 후후..." 미녀가 웃었다. "호호호!!! 감사합니다..!! 저도 기뻐요!!" 한편, 미인 사촌에 언제나 가려져 있던 아가씨는 이 놀랍도록 매력적이고 대단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방금 자신을 향해 웃은 것 같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어이없는 착각에 웃어버 리고 말았다. [설마.. 그럴 리가 있어?] 그녀는 방금 탄생한 눈앞의 커플을 바라보았다. 저이가 지금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하여 연회장으로 이끌고 있는 여자는 내 아름다운 사촌인걸.. 장 미대신, 그 발 밑에 있는 쓸모 없는 잡초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다... 가 슴이 쓰라렸지만, 체념할 수밖에 없는 사실... 그녀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한숨을 쉰 뒤,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 겼다. 고아인 하리에의 패트런(patron)은 바로 저 아름다운 사촌의 아버지 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늙고 나이가 많아 얼마 후면 무도회에서 떠나고 싶어하실 것이다. 그럼 특별히 에스코트 받을 남자도 없는 그녀는, 좋든 싫든 같이 연회장을 떠나야 할 테니.. 그 동안 단 한 곡의 댄스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도비온은 연회장을 벗어나, 정원으로 가는 통로에 접한 베란다에서 남자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귀족이 었고, 다른 한 명은 보석과 자수로 수놓인 작은 모자를 쓴 남자였다. 그 중 심약한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동생도 당신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자 도비온은 화를 냈다. "흥..!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말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이라고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무엇이든 보고해 달라고 했었는데...! 게다가 '엘 아이즈'의 패 같은 것이 사소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 무슨 한 마디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직 그것하나 만을 위하여, 내가 얼마만한 출혈을 하며 당신을 원조하고 있는지,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저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주위에 깔린 어둠처럼, 낮고 질책하는 음성이었다. 더구나 말투에 묻어있 는 경멸과, '원조'와 '실망'이라는 단어... 덕분에 남자의 심약한 인상은 더 욱 하얗게 되어 어둠 속에서 희뜩희뜩, 유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꽃관을 쓴 남자도 도비온이 어떤 존재인지, 파산하고 형에게 와 있는 단 몇 주 동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므로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 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온 하도바님! 오해를 푸시지요..!! 요즘엔 저도 바빠서 바리스로 직접 나가지 못했고, 동생은 최근에 저의 영지에 온지라... 우리 둘 다, 실수를 많이 해서, 불쾌하게 여기셨다면.." "실수냐, 오해냐,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루온 루사.. 아 니, 루온 루드랫의 오랜 친구로서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하루라 도 빨리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원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그가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고자! 당신이 주색잡기나 노름에 빠 져 진 빚을 갚아주고, 허술하게 경영하여 황폐해진 장원과 영지를 사들인 겁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누가 성역 근처의 불안한 영지를 그만한 가 격으로 후하게 쳐주었겠습니까?" 그 말에 영주와 꽃관은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허리를 굽실 수그렸다. "네.. 그, 그렇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헌데...! 당신은 아직도 변한 것이 없군요! 이럴 바엔 애초에 엘야시온님 께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하, 하온 하도바님!" "엘야시온님께서 당신을 대리인으로 삼아, 루온 루드랫을 돌보도록 하고, 그 대가로 많은 재물을 하사하셨건만... 당신은 그마저도 다 탕진해 버리 고...! 이제 길거리로 나앉게 된 당신을 구해준 은인의 하찮은 부탁마저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할 정도라니..! 당신은 엘야시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 했던 것처럼 제 기대에도 못 미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는 한없이 비참한 얼굴로 계속 고개를 굽실거렸고, 꽃관도 마찬가지 였다. 어찌 보면 이상할 정도였다. 같은 귀족끼리 이런 정도의 굴종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하지만 너무 오랜 동안의 관계라, 누구도 이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알겠습니까? 저는 선한 일을 했다고 내가 했네~ 하고 나서는 것을 딱 싫 어하는 타입이란 말입니다! 그 증거로 제가 언제 당신에게 은인으로서 특 별한 보답을 바랬습니까? 오히려, 그 영지를 대대로 다스린 당신의 조상 을 생각해서... 당신을 영지의 관리인으로,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영 주로 해서 당신의 체면까지도 생각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여 전히 루온 루드랫의 보호자로서 매년 엘야시온님께 막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요! 사실, 그 보상들은 원래 영주인 저한테 있어야 할 것인데, 전 당신들의 생활수준까지 생각해서 눈감아 주었지요. 같은 하바티온으로 서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요!" "아, 네에, 그, 그러셨죠. 네에..." "하지만 당신의 낭비벽은 도가 넘쳤지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게다가 당 신의 영지는 너무 비효율적인 영지라... 다른 사업에서 운영되는 자금까지 당신의 영지에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에 대해, 저 자신 을 내세운 적도 없었죠. 아무리 돈이 밑 빠진 그릇에 물 붓는 식으로 펑 펑 빠져나간다 해도요! 벌써 그 사실들을 잊으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 분입니다. 하온 하도바님."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일 주일에 한 번은 듣는 말이니, 잊을래야 잊을 수 가 없다. 하지만 하온 하도바는 상당히 화가 난 듯, 평소라면 이 정도에서 멈출 말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엘야시온님을 직접 대면하고 비밀리에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시종이 된 영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급귀족이 었지만, 실제로는 그 높은 지위가 '파산'이라는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단 박에 박살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불쌍한 노인네일 뿐이었다. 도비온이 차갑 게 말했다. "자,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네?" 도비온은 인상을 썼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요? 당신들이라면, 내성적인 성품 때문에 굳이 숨 어서 친구를 돕겠다는 은인의 그 자그마한 부탁! 그것도 제대로 수행 못 하는, 배은망덕한 당신들 같은 사람에게 계속적인 은혜를 베풀고 싶겠습 니까?" 그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렇다'라고 말하기엔 너무 뻔뻔한 것 같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다. 그래 서 그들이 우물쭈물하면서 자기들의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도비온이 창문 밖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은 경기도 별로 안 좋은데. 더 편하게 루온 루드랫을 도울 수 있을 지도.. 정말이지... 누구, 더 유능한 대리인을 세워서라도... 뭐, 엘야시온님 도 이 사실을 아신다면 굳이..." 영주는 도비온이 '더 유능한 대리인'이라는 말을 하자, 울상을 짓고 말았 다. 그리고 뭐 다른 강력한 사과가 없을까 초조하게 생각하는데, 도비온이 짜증난다는 듯 말을 툭 던졌다. "말씀해 보세요. 당신, 아직도 비밀 클럽에 가서 수백 탈란 단위의 도박을 하고 있죠?" 영주의 얼굴이 순간 흠칫했으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거짓말 을 했다. "아닙니다! 어디요!! 전, 도, 돈도 없는 걸요..! 제, 제가 쓰는 돈은 모두 하 온 하도바 님에게 허락을 맡고...!!" 도비온은 비웃었다. "흥. 모를 줄 아십니까? 바리스 마노테오나에서는 최근 짭짤한 재미를 보 신 것 같더군요. 다른 마노테오나도 모자라서, 바리스에까지 손을 대다니.. 여자 마노테 한 명당 몇 탈란씩 받으셨습니까?" 덜컹.. 그 말에 복도에 창백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도비온은 계속 입술을 삐뚤게 하여 말했다. "마노테들을 인간사냥꾼에게 팔아 넘겨 수입 늘리기를 하는 거야, 최근 각 영지에서 암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저도 어느 정도 재량권을 당 신에게 주었으니, 마노테오나 일까지 시시콜콜히 뭐라고 따지는 것은 아 닙니다. 말씀드렸듯, 저는 그저 제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것만 궁금 할 뿐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엘야시온님의 명령도 무시할 정도가 된 겁니까? 그 분께서 분명 바리스만은 철저히 보호하라고 하셨다면서 요? 루온 루드랫을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들지 말게 하라고! 저는 지금까 지 바리스가 그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당신이 엘야시온님께 받은 그 많은 명령 탓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라니!!! 그래, 이 것도 '오해'고 '실수'라고 변명하실 참입니까?"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22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31 22:38 읽음:255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99회, 제 35막. The Night. (3)> 영주가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을 했다. "아니... 이, 인간 사, 사냥꾼들이... 그들이.. 다른 마노테오나에는 좋은 물 건이 다 떨어졌다고... 바리스는 한 번도 건들지 않았으니, 한 번이면 괜찮 을 거라고... 거기에 봐둔 몇몇 여자들만 팔아 넘기면 지금까지보다 몇 배 로 돈을 주겠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꽃관도 인간사냥꾼들을 거들어 형이 그 일을 하도록 만든 전과가 있는지 라, 무척 찔려서 같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댔다. "죄송합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도비온은 경멸에 찬 미소를 지었다. "...도박에 손을 끊으라고 그렇게 충고해도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이런 일까지 벌이시다니..! 저도 이젠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을 내보내고, 엘야시온님께 면담을 요청해서 지금까지의 경과를 말씀드리는 수밖에... 저는 하여튼간에 루온 루드랫의 안위가 제일 걱정이니까요." "하온 하도바님!! 안됩니다! 제발!! 제, 제 자식들은 아직도 제가 가문의 영지를 잃은 줄 모르고 있습니다!! 제발! 그저 저는 자식들에게 뭐 하나라 도 물려주고 싶어서..!! 뭐라도 조금 만들어 보고 싶어서!!!" 그 말에 도비온은 동정심에 찬 미소를 보였다. "그렇습니까? ...17년 전부터 계속 같은 말씀이군요. 하아.. 저도 마음이 많 이 약해서 당신의 아이들을 보면, 도저히 어떤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뭐... 조금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번에도 꾹 참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합니다만..." 영주가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다. "무, 무슨?" 도비온은 벽에 다가가 창문틀에 기댔다. 격자 창 너머로 붉은 황금 같은 달이 보였다. 그 달빛을 등지고 선 도비온의 얼굴 표정은 완전히 그림자 속에 있었다. 후후... "...아시다시피. 엘의 자비를 실현하는 우리 4계급은... 왕족들과 달리, 영지 를 갖고 있을 때, '마노테오나'를 필수적으로 끼고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 '마노테오나'의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영주들에게 손해라는 것은 당 신도 잘 알 것입니다." 영주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는 꽃관도 형에 뒤질세라 고 개를 끄덕였다. "마노테온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육체노동.. 그것도 일루티온 만큼 장시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소비하는 물자들은 일루 티온 계급의 몇 배나 됩니다. 그들 한 계급의 인구가 나머지 나실인들 전 부를 합친 것과 맞먹으니까요. 애 낳는 능력하나는 여섯 개의 계급가운데 최고죠. 생산력은 월등히 떨어지면서 소비하는 것은 그 머릿수 때문에 다 른 계급에 비해 월등히 많은 계급. 그런 녀석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일이죠. 우리 하바티온이 뼈빠지게 12세계를 돌아다녀, 얻을 수 있는 물자들이 그런 쓸모 없는 녀석들에게 쓰이는 것 을 보면, 정말 오크 놈들로 이루어진 마을을 운영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오크 놈들은 적어도, 자신의 식량은 자신이 조달하거 든요." "네, 네.." 이런 것은 엘야시온 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 일루티온 아티스트에게, 마노테오나에 들어가는 여섯 달 치의 물자를 주며 일을 부 탁하면, 그는 단 하루만에 마노테오나가 여섯 달 일한 몫을 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한 명의 일루티온 아티스트와 하나의 마노테오나, 그 두 존재가 천칭에 올라서면, 천칭은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 ...라든지, 우스갯소리 로, 마노테온들이 지금의 반 정도만 애를 생산해 내고, 그 나머지 정력으 로 일을 했으면 엘야시온 모든 사람들은 지금쯤 황금 말구유를 하나씩 가 지고 있을 거라고 하는 이야기... 같은 것은 모든 나실인들이 심심할 때면 꺼내는 주제인 것이다. 하지만 영주와 꽃관은 다 아는 이야기를 들어도, 하나도 짜증 안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라도 듣는다는 표정으로 잔뜩 긴장해서 도비온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도비온은 느긋하게 이 야기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생각하지요. 당신들의 영지에 있는 마노테오나 다섯 개중 하나만 없어져도... 영지를 운영하는 일이 얼마나 쉬울까.. 하고요." 도비온의 목소리는 복도 아주 구석진 곳에 숨어있던 어둠과 침묵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인 듯, 불분명하고 무거웠다. 그래서 영주는 도비온 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맨 처음엔 무슨 말인가 이해 가 가지 않아서였으나, 그 말의 의미를 깨 닿자 무언가가 다리를 밑으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옆에 있던 자신의 동생도 마찬가지인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도비온이 가볍게 재촉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영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마노테오나 하, 한 개라니.. 지금... 마, 마노테온 슬러터(Slaughter: 도살)를 지, 지시하는 겁니까?" '마노테온 슬러터'라는 말에 도비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고 영주의 동생 이 깜짝 놀랐다는 듯,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마노테온 슬러터... 그것은 전례에 없는 폭군으로 유명했던, 해(海: 로트라)의 엘야시온 아두스갈다 (혹은 피의 엘야시온이나 슬러터러(도살자) 아두스갈다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의 시대 때 맨 처음 일어났던 일이다. 엘야시온으로서의 지위는 이어받았지만, 엘과의 교통이 미미했던 그는, 자신의 때를 일찍이 없었던 혹독한 환경의 불균형과 마물의 출현으로 점철해야 했다. 그 결과로 식량 생산도 급격하게 감소하여... 급기야는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그는 마노테 온이라는 계급을 멸절 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분명 주위의 반대가 있었 을 것이지만, 누구도 엘야시온의 말에 끝까지 반대할 수 없었기에 아두스 갈다는 자신의 이름으로 그 명령을 통과시켰다. 잔혹한 일이었다. 사가(史 家)는 그 시대에 게엔나를 향해서만 들었던 루이티온의 검들이 일제히 자 신의 동족을 향했다고, 그래서 엘야시온 온 세계가 마노테온들의 비명과 피로 넘쳐흘러, 성산(聖山) 자이온마저도 핏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고 적 고 있다. 파워즈의 검은 철저히, 단 하나의 마노테온이라도 남기지 않고, 도살했다. 전투명령어 안에서, 어떤 루이티온도 그들을 동정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고, 그 나머지 계급들은 모두 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있었 다. 그것은 하나의 멸종(滅種)이었다. 마노테온이라는 종족의... 혹은, 인류 라는 종족의. 어쨌든, 3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길고 끔찍했던 마노테온 슬러터가 끝나 고... 그들은 남겨진 사람들로서, 살아남은 사람들로서, 그리고 도살을 주 도했던 사람들로서 전리품을 획득했다. 식량은 풍족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동안의 비축분이 있을 동안이었을 뿐... 그 다음해부터는 단 하나의 세계도 엘야시온 인을 위하여 곡식을 낸다거나, 꽃을 피운다거나, 물고기 를 먼바다에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네르세바의 수목은 말랐 고, 뷰겐트의 화산은 갈라져 내렸으며, 클로니아의 사람들은 차갑게 굳어 죽어나갔다. 스피릿들은 자신의 주인과 계약을 맺었으나, 그들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들을 경멸했다. 그리고 마침내 힐라토에서 별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어둠 속의 '작은 빛'이 떨어져 내렸을 때, 미티어 샤워 (Meteor Shower)... 그 유성들의 우박이 온 엘야시온을 강타했을 때, 사람 들은 희망을 버렸다. 누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결국, 그런 그들을 살린 것은 숲의 엘야시온 로티스엘이었다. 잔학한 슬러 터러 아두스갈다가 자신의 재임을 길게 하기 위해, 다음 대의 엘야시온이 될 네르세바의 왕족을 다 죽여 없애고, 카이러스의 왕족들을 관리했지만 고귀한 하이 엘프가 인간의 눈을 피해 숨겨놓은 어린 로티아스가 결국은 엘의 의지로 새로운 엘야시온이 된 것이다. 그에겐 그를 돕는 좋은 친구 들과 걸출한 영웅들의 힘이 있었고, 그래서 결국 슬러터러 아두스갈다는 로티아스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황금의 자이온, 성산 자이온에 로티아스 가 입성해 로티스엘의 이름을 받던 날... 엘야시온 전체에 신탁이 내려졌 다. [너희들이 3년이라는 기간을 학살에 몸 바쳤고, 이제 땅은 그 피로 저주 를 받았다. 엘야시온이여-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이제 내가 네게 준 것 을 네가 어디에서 찾겠느냐? 여섯 개의 고리가 다 같이 파멸되어, 그 피 가 땅과 하늘과 바다에서 내게 부르짖고, 네 형제의 피가 내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니, 내가 이제부터 3 세대 동안 그 피에 대한 보수(報 )를 하겠다.] ...그리하여 엘야시온의 모든 세계가, 그 전과 같은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숲의 엘야시온 로티스엘을 포함한 산(山)의 엘야시온 니베스엘과 천(天) 의 엘야시온 파세스엘의 때가 다 지난 황(黃)의 엘야시온 키레엘 때였다. 그 300여 년의 기간동안 엘야시온 인들은 굶주렸고, 헐벗었으며, 비천했 다. 그 가운데 아두스갈다의 때에 있던 모든 인류가 죽고, 그때가 끝났을 때, 멸절 되었던 마노테온은 다시 전과 똑같은 비율로 그들과 있었다. 그 들이 마노테온을 잉태했고, 마노테온은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유전과 유 전을 넘어서. 결국, 그 후로는 마노테온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세력은 없다. 아가트 성문 법전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자이온의 성전에 다음과 같은 말로 새겨진 것이다. [마노테온은 멸절 될 수 없다. 어느 세력이나, 어느 깊음이나, 어느 높음 이라도 그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죽음의 날이 곧, 우리, 죽음의 날이 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언제나 12개로써 완전하고 계급은 6개로써 완전하다. 이것을 파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영주가 다시 한 번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마노테온 스, 슬러터는 저주의 지름길입니다! 제가 아무리 타락한 인 간이라지만, 에, 엘에게 영혼마저 저주받긴 싫단 말입니다!! 다, 다른 영주 들도 마노테온을 귀찮아하긴 하지만.. 아.. 아..! 어, 어쨌든 그건 안됩니 다!! 사회적인 지탄도 문제이고, 자칫하면 파문까지 당할지도 모릅니다!" 도비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격자 창의 마름모꼴 그림자가 언뜻 그의 얼굴 을 스쳐지나갔다. "하아.. 이거 참..!!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노테온 슬러터라뇨? 이 드렘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제가 그런 일을 말할 리 없잖습니까?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영주가 땀을 흘렸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때 꽃관이 형의 얼떨떨한 모습에 혀를 차더니, 도비온의 기분을 맞추려 는 듯, 헤헤 웃고 말했다. "저기, 그렇다면 하온 하도바님? 마노테온 슬러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 떤 것을 원하시는지요..? 그것을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도비온은 그들이 죄책감이라든지, 부끄러움을 더욱 느끼도록 느릿느릿 고 개를 흔들었다. "하아... 정말이지, 모처럼 계책을 내놓아도 마노테온 슬러터라는 말씀이나 하시고... 도박 같은 것만 하니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만 떠오르는 것 아닙 니까?" 그 말에 영주가 얼굴을 붉혔다. 도비온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더니 말했 다. "어쨌든 뭐, 원하셨으니 확실히 말씀드리지요. '마노테온' 슬러터라니... 한 계급을 몰살시키는 그런 웅장한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알겠습니 까? 그 차이를..? 단지, 저는 '한 마을'만 없애달라는 겁니다. 결코, '한 계 급'이 아닙니다." 영주와 꽃관은 혼란해졌다. 한 계급? 한 마을? 확실히 규모 면으로는 틀 린 것 같지만... 아가트에서 금지했던 것은 어느 정도까지의 규모였더라? 그들이 이같이 고민하는데,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도비온은 품속에서 길이 20센티 정도의 작은 두루말이를 꺼내들었다. "당신들이 조금이라도 영지를 훌륭하게 일구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행 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자, 보십시오. 이 것은 헬 화이어(Hell Fire)의 의지가 담겨있는 스크롤(Scroll)입니다. 그러 니까, 칼리안...? 아니, 뷰겐트 계통의 아트가 담겨 있죠. 영주께서 진심으 로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면, 이것을 마노테오나 앞에서 펼치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회적인 지탄이나 파문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밤중 에 모든 이들이 다 잠든 밤중에 비밀스럽게 하면 되는 거니까요. 시동어 는 단 한마디, '엠벨루스의 의지로서 모든 것을 불태우라, 헬 화이어'...입 니다. 그럼 그 뒤는 화르륵-!" 갑자기 도비온은 얼이 빠져 있는 두 사람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활짝 흔들 며 펼쳐 보였다. 두 사람이 그 급작스런 제스처에 놀라자, 도비온은 빙긋 웃더니 더욱 상냥하게 말했다. "...정말 눈 깜빡할 새에 타버릴 겁니다. 마노테오나의 목조 건물 같은 것 은 말이죠. 후후.." 등골이 서늘할 만큼 차가운 기온인데도 땀이 흘렀다. 영주는 진득하게 배 어 나온 기분 나쁜 그것을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그답지 않 은 진지한 눈빛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한 영지를 다스리는 하바티온으로서의 눈빛이 한 순간이나마 돌아온 듯 했다. "...꿀꺽... 하, 한 마을... 한 마을 뿐입니까? 정말로요?" "단 한 마을입니다." 도비온도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꽃관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북돋우려는 듯, 형과 도비온을 보며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헤헤... 한 마을이라면 고작 천명이 될까 말까하니... 그, 그 정도는 마노 테온 슬러터의 축에도 못 끼지 않나?" 천명? 영주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어두 운 표정으로 말했다. "천 명... 꼭 한 마을을 없애야 한다면, 역시 인구가 적은 쪽으로... 그러니 까, 기안 마노테오나 정도로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도비온은 히죽 웃었다. "아니오. 없앨 마을은... 기안 마노테오나가 아닙니다." 영주의 표정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그럼 어디? 아리움은 마노테오나들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물자를 풀 어놓고, 장을 열기에 좋은 곳이라... 없앤다면 오히려 손해고.. 그 외 인구 가 적은 곳이라면... 에이첼 입니까?" 도비온은 창 밖의 붉은 달을 보았다. 달은 흉측한 분화구를 드러내며 슬 픈 노인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런 슬픔을 즐기듯 미소를 지은 도비온은 고개를 돌려 영주와 꽃관을 바라보았다. "...훗. 영주님. 우리가 뭣 때문에 마노테오나를 없애려 하는지 생각해 보 십시오. 가장.. 크고, 가장.. 풍요로운 마을. 인구도 제일 많은... 마노테오나 로서는 과분한 혜택을 지난 20년간 누려 온 마노테오나." 도비온은 들고있는 스크롤을 영주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없앨 마노테오나입니다..." [멋진 달이군.] 레이서스는 창 너머의 붉은 달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종일 희 디흰 하늘을 마감 짓고, 두려울 정도로 진한 밤의 기운을 뿌려대는 달이 었다. 그것을 보니 갑자기 그의 세계, 힐라토... 그 그리운 세계의 내음과 분위기,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생각이 났다. 환한 연회장의 불빛과, 빙글빙 글 돌아가는 사람들의 물결... 그것은 분명 이곳이 눈과 얼음의 세계 클로 니아라고 알려주고 있는데도... 그는 자신이 혹, 어머니인 헤르가스를 만나 뵈러 가는 그 길, 적막한 밤의 정령이 살아 숨쉬는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래서 일까? 그는 한참 뒤에야 누군 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레이! 도대체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몇 번씩이나 불러도 모른 척 하고, 정말 그러기야?" 잔뜩 토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상당히 오랫동안 자신을 불렀 던 것 같다. 그것이 미안해서 레이서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미안, 칼리스. 달을 보니, 갑자기 힐라토 생각이 나서..." "힐라토? 떠나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힐라토 타령이야? 그럼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도 못들은 거야?" "미안해. 못 들었어. 무슨 이야기인데?" "칫. 맨날 미안하다고만 하면 다인가. 정말이지,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 하게 만들고..." 하지만 레이가 멍하게 있는 거야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칼리스나 는 레이서스가 '이번엔 잘 들을게. 용서해 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곧 쾌활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후후... 있잖아 내가 요전에 휠마즈엘 갔잖아? 휠마즈 네오시아스 님께 서 '하누카 보석'으로 쓸만한 것들을 몇몇 모아놓았다고... 레이, 그것들 정 말 예쁘더라... 일이 바쁘지 않았다면 너도 같이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 까?" 주위의 걱정 어린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칼리스나는 레이서스와 루세에서 동문으로 지내던 시절처럼 격식을 가진 말투보다는 친근한 말투를 썼다. "이것 봐! 여기 내가 달고 있는 것이 구경한 것 중 가장 작은 보석이었어. 그런데 이것도 굉장히 예쁘지?" 그렇게 말하며 칼리스나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에 달린 루비 브로치를 보 여주었다. 그것은 성인의 엄지손톱 만한 것으로 칼리스나의 가슴부근에서 투명하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아.. 보석. 그래 그것 참 예쁘다." 생각보다 맥빠진 반응이다. 칼리스나는 실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서스 가 보석이라든지 의상 같은 것에는 본래 관심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냈 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사실,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브로치 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저렇게 자신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보고 덤덤한 표정을 짓는 것쯤이야... 그리고 또 꽤 깊게 파인 옷깃에도 별로 충격(?)을 안 받는 것쯤이야... 칼리스나는 억지로 웃었다. "그렇지, 예쁘지? 호호.. 저, 저기 그래서 말인데, 레이... 아무래도 '하누카 보석' 같은 것은 나 혼자서 고르는 건 그렇잖아? 저어... 언제쯤 시간이 나? 레이가 한가할 때 같이 휠마즈 네오시아스님께 가자. 응?" 하누카 보석? 레이서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무심코 말했다. "칼리스, 왜 벌써부터 '하누카 보석'을 골라야 하는 거지? 내 쪽의 사정이 너무 복잡해서... 우리 둘 다 엘의 시기를 넉넉하게 보내기로 했잖아? 하 누카의 날은 한 숨 돌리고 나서 한가로울 때 치르도록 말이야. 난 아직은 그런데 신경 쓰기 싫어. 그리고 '하누카 보석'같은 거야 하누카의 날, 한달 전에 골라도 되는 거잖아?"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칼리스나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 쪽에서 '하누카 보석'에 대한 이야 기를 꺼내는데 남자가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상황에 따 라서는 청혼을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 다. 보통 결혼을 약속한 연인들은 약속의 증표로 하누카의 날 착용할 보 석을 자신들 둘이서 손수 고른다.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하누카의 날이 올 때까지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보석은 신비로운 힘의 저장소 이므로 하누카의 날이 되면, 그것은 하누카의 신비로운 빛을 받아들여 두 사람 사이를 더욱 확실하게 맺어주는 것이다. 헌데 레이서스나 칼리스나 는 어릴 적에 약혼했고, 덕분에 많은 증표가 두 세계 사이에 오갔다고 하 더라도, 하누카 보석만은 적어도 15세가 넘어서 두 사람이 직접 골라야 했으므로 어떻게 어영부영하다보니 두 사람은 아직 뚜렷한 보석도 나누어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을 이렇게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말했으니, 칼 리스나의 눈에 저렇게 눈물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레이서스는 한숨을 쉬었다. 바보 같은 레이서스... 한 세계씩이나 다스리면 서 왜 아내가 될 여자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걸까? "칼리스..." "하누카 보석 같은 거... 누, 누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어 머니랑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이 자꾸 물어보니까 귀찮아서 그러는 거 야! 네르세바의 자스민도 순진한 척하면서 이것저것 다 물어보고, 뷰겐트 의 그 징글맞은 왕자 동생인 스온 이라스다도 얼마나 신경을 뒤집는데?! 자기가 파이오 스아디온이면 다야? 나이도 어린것이, 꼭 맞먹으려고 들 고...!" "칼리스... 저어, 미안해... 나는..." "너는 맨날 바쁘다고만 하고...! 이게 뭐야?! 날 뭘로 취급하는 거냐고? 누 가 너한테 당장 하누카의 날을 보내자고 졸랐어? 약혼자가 있다면, 그냥 평민들도 하누카 보석 같은 것은 몸에 지니고 있어! 그런데 난 이게 뭐 야?! 내가 일루티온보다 못한 존재야?" 의자에 앉아서 다정하게 잘 이야기 나누고 있던 왕족들에게서 큰 소리가 나자, 그러잖아도 주목받는 존재인 레이서스와 칼리스나는 그만 단박에 주위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레이서스는 난처해졌다. 확실히 칼리스나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누카'라는 말에 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 던 것 같다. 하지만 그로서는 지금 지고 있는 책임만도 너무 많고, 너무 무거웠으므로 새로 아내를 맞아 그녀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하누 카'라는 단어를 회피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만 칼리스나에게 상처를 주게 된 것 같았다. 칼리스나는 주위 사람들이 보건 말건 입술을 꼭 다물더니 눈물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흥! 그래... 나, 나 같은 건... 너한테는 어쩜 일루티온만큼의 가치도 없을 지도... 겨우 마노테온 정도의 가치나 있을까? 난 네가 밟고 다니는 땅의 흙보다도 못한 존재냐고? 흑...!" 레이서스는 다시 한번 더 한숨을 쉬었다. 자존심이 상했을 경우,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꽤 여러 가지이다. 그 많은 행동들 중 가운데, 레이서스가 만난 여자들은 대부분, 자존심이 상하면 한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눈물을 짓고, 한탄을 하며 투정을 부려댄다. 왜 이런 식으로 그런 감정을 표현하 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뿐 이다. 어쨌든 이럴 때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마디... 여자를 상대한 경험이 많은(--;) 레이서스는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칼리스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맘 편하게 만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좀 더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칼리스나..." 레이서스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눈물이 글썽 글썽한 눈을 들어 레이서스를 보았다. "칼리스나, 왜 그런 말을 하지? 넌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내가 말 을 실수했어. 네 말이 옳아. 이번 하누카의 날이 지나고... 신년도 지나, 봄 이 되면 우리 같이 휠마즈로 가자. 그리고 같이 하누카의 보석을 고르자. 응?" 칼리스나는 당장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관리하며 새침한 음성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흥! 뭐... 네가 굳이 원한다면, 하는 수 없지. ...좋아!" 레이서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흠... 괜찮아 보이는데요? 금방 화해한 것 같군요. 뭔가 투덕거리며 다투 는 것 같더니만... 역시 젊은 사람들이라, 감정싸움이 만만치 않군요?" 먹고 마시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몇몇 파이오니온들은 고개 를 끄덕였다. 춤이라든가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일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귀찮아서 자기들 자리에 앉아서 구경만 하며 앉아있는 나이 지긋한 파이 오니온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굉장히 뚱뚱한, 금발에 금빛 눈의 남자가 말 했다. "거, 솔직히 탁 털어놓고 말하자면.... 힐라토 파이오니온도 고생은 고생이 죠. 보리 이삭에서 보리가 나오고 밀 이삭에서 밀이 나오는 법. 전대 칼리 안 파이오니온 에그리스가 좀 드셌습니까? 그 딸인 스온 칼리스나도 아마 꽤 다루기 힘들 거예요." 다른 파이오니온들은 미소지었다. 그 중 보랏빛 머리칼에 보라색 눈을 가 진 로트라 파이오니온 베다이스가 말했다. "후후... 마이레스 가리테스여. 이 자리에 칼리안 율리시스가 없다고 그렇 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그 젊은이는 꽤 다혈질이거든요." 그러자 저쪽에서 앉아있던 오렌지색 머리칼에 오렌지색 눈을 가진 뷰겐트 제로미스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 외에도 마이레스 가리테스께서 칼리안 율리시스에게 함부로 대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스온 자스민이 오늘 연회에서 꽤 아 름답게 하고 나오셨던데..?"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즉시 알아들은 가리테스는 한탄을 했다. 오늘 스온 자스민은 눈에 띌 정도로 칼리안 율리시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 면 태양을 쫓는 노란 색 해바라기가 연회장 가운데 피었다고 생각했을 것 이다. 쯧쯧.. 바보 같은 것. 20명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본 부인에게서 얻 은 아이이건만... 그리 맹한 짓을 하다니. "하아... 하여간 자식 농사만큼 제 마음대로 안 되는 농사도 드물 겁니다. 내가 저 아이를 꼭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와 짝 지워주려 했건만... 에잉~! 칼리안 남매 둘이서 내 뜻을 이리도 확실히 가로막고 있다니! 쯧 쯧."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622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7/31 22:39 읽음:270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00회, 제 35막. The Night. (4)> 그 말에 제로미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자신의 아들을 칼리안의 스온 칼리스나와 짝 지워 주려 했던 전적이 있는 것이다. 마이 레스 가리테스가 질색을 하는 칼리안의 활달한 기질도 제로미스는 꽤 좋 게 보았고 그때 당시 뭔가 신기술 어쩌고 하면서 칼리안 에그리스와 모종 의 약속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과거의 일이 되어 버 렸다. 어쨌든 그렇게, 알게 모르게 여기 있는 자들은 저쪽에 있는 젊은이 들에게 뭔가 아쉬움을 갖고 있는 중이라 자연히 눈이 그쪽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지금 그들은 화해한 기념인지 뭔지 다시 플로어로 나가 원무 (圓舞)를 추는 무리들에 끼어 들고 있었다. 제로미스는 그런 그들을 보며 결국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저들은 행복하게 살 아야지... 마이레스 가리테스도 말로만 투덜거릴 뿐이지, 요즘은 칼리안 율 리시스를 꽤 따뜻(?)한 눈으로 보는 눈치다. 덕분에 칼리안 율리시스가 마이레스라면 치를 떠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스온 자스민은 본 부인에게 서 얻은 무남독녀인 것이다.(제로미스 자신도 후계자가 되는 이라스다를 늦은 나이에 얻고 보니, 딸을 사랑하는 심정은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딸의 절절한 소망이니 아마, 웬만한 괴물이 아니면 한번 쯤 생각해 볼만도 할 것이다. 게다가 칼리안 율리시스는 다혈질이어서 거 치는 데가 없긴 해도 악의가 없어서, 어른들에게 꽤 사랑을 받는 타입의 젊은이였다.(아까도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스온 자스민이 아니라면, 자신 의 후계자인 스온 이라스다와 칼리안 율리시스를 짝지어 보면 어떨까 생 각했는데, 아무래도 자기는 자식들 혼사에 있어서는 한 발작씩 늦는 타입 인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제로미스는 미소지으며 유리잔의 포도주 를 음미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저쪽에 계신 스 온 마리스처럼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 그러나 저러나 카이러스의 테트라아크(Tetrarch: 영토 4분의 1을 다스리는 分封王)들은 아직도 클로니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제로미스는 스온 마리스를 보다가, 문득 카이러스가 떠올라 질문을 던졌 다. "테트라아크 루바인경이 스온 엘스제의 종복(從僕)으로서 얼마나 잘 봉사 했는지 알고 싶군요. 그 아이만은 특별히 루세에서 이리로 오기로 했지 요? 그리고 그 외의 테트라아크들에게서 왕족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듣 고 싶어요." 베다이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아까 엘야시온님 말씀으로는 내일 오후 정도에 도착할 것 같다 고 하더군요." "흥.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우리들보다 늦게 이곳엘 오다니... 쯧...! 하여간에 하류계급들이란!" 가리테스의 지나치게 퉁명스러운 말에 제로미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요즘엔 카이러스 사정도 더욱 안 좋다고 하니... 하긴 좋을 수가 없겠죠. 카이러스의 주인이 없는 상태가 벌써 20년도 더 지났으니... 엘야 시온님께서 능력을 보여주시고 계신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 까? 네 명의 테트라아크들도 꽤 힘들 겁니다." 그랬다. 뷰겐트 파이오니온 제로미스의 말대로, 지금 카이러스는 상당히 환경이 불균형해져 있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바람이 휘몰아 카이러스의 세계 전체를 풍요롭게 감싸던 예전의 환경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대신 이 젠 시도 때도 없이 광풍이 불어닥치며 작은 회오리바람들이 출현하고, 다 른 세계에 비해 훨씬 많은 마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곳이 돼버린 것이다. 카이러스의 거대한 풍차들은 미친 듯한 바람에 어느 때는 부서질 듯이 돌아간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일 순간, 한 조각의 바람도 불지 않을 때였다. 그런 때 풍차들은 수 백년 동안 쉼 없이 돌아갔던 그 날개를 멈추고, 바람 한 점 없는 그 공포 속에서 움직임을 잃어버린 늙은 거인처럼 우두커니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카이러스 인들은 예전엔 자신들의 바람을 친구처럼 사랑하고, 자신들의 풍차를 가족과 같이 사랑 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자연력으로서 바람을 두려워하고, 바람이 그 렇게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풍차에 애써 시선 두기를 피하고 있 었다. 파이오니온 모두 다 그런 상태의 카이러스를 수십 번이나 보았고 그때마다 그것은 점점 심해지기만 해서, 이제는 잊어버리기도 힘든 이상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파이오니온이 없는 세계의 운명이었다. 분명 왕족들 은 개개인의 능력을 놓고 보면 어느 땐 일루티온 계급보다도 무능력할 때 가 많다. 하지만 엘야시온의 온 환경이 스피릿이라는 천사들에게 의해 운 영되고 있는 이상 그것을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인간, 천사들과 계약 을 맺는 상징인 왕족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가진 능력을 넘어서서, 제 3계 급의 위치를 가질 만한 존재들이다. '아트(Art)'만해도 그렇다. 왕족들로서 는 스피릿의 힘을 '변질'시킨 마나(Mana)로 행하는 아트 같은 것은 경멸 하는 쪽이지만, 어쨌든 듣기로는 카이러스 스피릿 마나 계열의 아트들은, 카이러스에 파이오니온이 없는 관계로 그 명맥이 거의 다 끊겼다고 들었 다. 다른 스피릿 계열의 아트가 그 자리를 대치하고 있긴 하지만... 아주 중요한 아트의 한 분야가, 사실상 멸종 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사실 을 곱씹는 테이블엔 연회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 다. 그 중 로트라 베다이스가 자신의 긴 보랏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곰곰 이 생각에 잠겼다. 로트라는 베르노크와 더불어 수염을 기르는 것이 관습 인 세계이다. [휴우...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하지만 좀처럼 카이러스에 스아디온 이 나타나지 않으니. 스아디온만 있더라도 성역에 들여보내서 어떻게든 해 볼텐데...] 그때 베다이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가리테스가 불쑥 말했다. "쳇... 무리도 아니죠. 엘야시온님이 그때 너무 상황을 무르게 대처하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스피릿 심벌이 있는 자였다지만... 카이러스 왕위 계승 권 10위안에 드는 능력자들을 다 살해한 사람을 그냥 놔두다니.. 엘에게서 온 천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상위 왕족들의 씨가 다 마른 거라고요!" 베다이스는 갑작스런 가리테스의 말에 당황했고, 제로미스는 오렌지색의 굵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마이레스여! 그 화제는 금지된 것으로...! 게다가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 다! 그때 '그'는 성역에 직접 들어가 엘에게 순결하다는 증표를 받았고, 엘야시온께서도 그때 분명 이 일에 불만을 표하는 자는 이후로 엄벌에 처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리테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뚱뚱한 몸을 의자 뒤로 기댔다. "쳇! 금지고 뭐고 어차피 다 수군거리고 있는 사실! 한심하고 답답해서 그럽니다! 그럼 카이러스가 지금 이 꼴이 된 것이 도대체 누구 탓입니까?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그놈의 알량한 딸 좀 살리고자 카이러스 써클렛까 지 쓰고 성역으로 들어가 행방불명 돼버린 그 무책임한 자! 성역이 무슨 자기 집 안방이라도 된답디까!? 덕분에 남아있는 카이러스 왕족들은 스피 릿도 변변히 제어 못하고, 그 비위나 겨우 맞추고 있을 뿐... 하지만, 누가 그들을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초대 카이러스 파이오니온 유스마릴이 다 시 현신 하지 않은 이상, 누가 다시 성역에 들어가 엘과 계약을 맺고 카 이러스의 써클렛을 받아오겠냐는 말입니다. 거기다 14년 전에 겨우 하나 태어났다는 스아디온은 그 스아디온대로 스온 마리스 님의 상대가 되어야 하고... 그 종복으로는 기껏 그 불순한 남자의 개인 루이트였던 루온 루바 인을 지정해 놓다니!" 제로미스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마이레스여. 테트라아크 루바인경입니다... ...그리고 그를 스온 엘스제의 종복으로 지명한 건, 테트라아크 중에서 그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테트라아크 중에 가장 세력 강대? 쯧쯧쯧!!! 그게 무슨 꼴입니까? 일찍이 테트라아크들에 의해 어느 한 세계가 이렇게 오랫동안 통치되던 적이 있 습니까? 일 이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20여 년간을!!! 우리가 루이티온이나 하바티온 계급과 국사를 논해야겠습니까? 참...나! 너무 괴이해서 도저히 입에 담지 않을 수가 없군요. 글쎄 엘의 저주가 틀림없다니까요. 쯧쯧...!" 다른 두 파이오니온들은 마이레스 파이오니온의 신랄한 비판에 할말을 잃 은 채 씁쓸하게 입맛만 다셨다. 가리테스는 곡식을 생산해도 카이러스의 환경이 안 좋아 그것을 빻는데 시간은 시간대로 들고 노력은 수십 배나 더 들어가는데, 손실은 예전보다 많자 지난 20년간 화가 쌓일 대로 쌓여 서 현재 카이러스의 상황에 매우 유감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니 괜히 마 이레스 가리테스 앞에서 카이러스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요즘의 가리테스는 카이러스 이야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그 누군가의 욕을 해대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거칠고, 지나치긴 해도 가리테 스의 지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고... 그들도 한 번씩은 그런 생각을 했 다. 그래서 좋지 않은 일들은 재빨리 잊자는 습성인 그들도, 카이러스의 문제가 있으니 자꾸 '그'에 대해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루이티온 계급이 면서도, 왕족의 피라고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으면서도, 날 때부터 스피릿 심벌을 갖고 태어났던 자... 최초의 엘야시온 후보였던 스온 테일 러스의 약혼녀 스온 레스티엘을 넘보던 자. ...그 이상한 출생으로, 왕족에 충성했던 부모들에게 날 때부터 버림을 받은 자... 그런 무서운 사건을 저 지르고도, 성역에 들어가 살아 나왔으면서... 딸을 위해 들어간 성역에선 엘의 심판을 받은 자. 그런 그가 사라진 이후로, 카이러스의 스피릿들은 언제나 구슬프게 울기만 한다. 제로미스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카이러스 파이오니온 사이너스... 그 자의 이름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군요." 그의 눈에 플로어에서 사람들과 원무를 추는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 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큰 키와 몸매, 그리고 얼굴... 마이레스 가리테스 는 뷰겐트 제로미스가 레이서스를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카이러스 사 이너스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쌓이는 가리테스였지만 레이서스 에겐 묘하게 관대한 그였다. "흥!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그런 자 따위의 아들이 아닙니다. 힐라토 레이 서스는 힐라토 헤르가스의 아들이죠. 우리 정통 왕족, 순수혈통의 아들이 란 말입니다. 그가 힐라토 파이오 스아디온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 죠. 하지만, 그..." 가리테스는 입에 담기도 더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노테온... 원래는 카이러스 계열의 아이였던... 그 애야말로 카이러스 사이너스의 본질을 잘 갖고 태어난 아이인데. ...정말이지, 왜 그것을 죽여 버리지 않은 건지...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힐라토 레이서스 를 말입니다." 베다이스와 제로미스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해가 안가기로 따진다면, 저 아름답고 고귀했던 빛의 왕 클로니 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를 아무리 카이러스 스피릿 심벌이 있고 성역에서 살아 나왔다지만, 결국은 마노테온 일뿐인 그따위 여자 애와 짝지어 주려 한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서부터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 그 이상으로 올라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토록 불가사의 한 것으로 만든 신부터 이해 할 수 없다. 세상을 '이해'라는 면으로 따지자면 한이 없는 것이다. 세상엔 이해할 일들보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제 와서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해를 하고 못하고 이런 문제가 아 니다. 비록 모든 것들이 이해 못하게 돌아가도 좋다. 그러니 그저 세상은 예전처럼, 그들의 젊었던 시절처럼 그렇게 제대로 돌아가 주기만 하면 된 다. 카이러스의 파이오니온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선은 전 엘야시온의 문제인 '엘야시온'부터... 도대체, 이렇게 다음 대의 엘야시온이 나오기가 힘들었던 적이 과거에도 또 있었을까? 스아디온 테일러스.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 그리고 따뜻한 눈의 공주, 스아디온 마리스까지. 그들은 한숨을 쉬고 마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2년 후면, 올해 14 살인 스온 엘스제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올해 42살의 나이인 그녀는 자 신의 남편이 될 자와 28년의 간격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이다. 어차피 세상은 이해하려고 들면 한이 없다. 중요 한 것은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스온 마리스와 스온 엘스제의 관계 를 '부부'라는 이름으로 보는 것보다 '엘야시온과 그의 배우자'로 보는 것 이 훨씬 더 일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다. 그들의 경험 많은 눈에는 스온 마리스가 가끔 창 밖을 보며 한숨 짓는 것이 보였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세상엔 '이해'라든가, '이해를 못한다던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다. (계속)================================================== 휴. 드디어 100회입니다. 거기다... 7월의 마지막 날... 기념하여... 1부 끝나면 말하려던 것을 그냥 말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_^ (기대하기 싫으시면 말구요..--;) 흠, 흠..! 사실, 6월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_^ 엘야에 대한 출판 이야기가 오갔습니다.(헤헤.. ^_^) 회사는... 첫 이미지와 좀 틀린 곳이라, 다니면서도 계속 실망을 했는데.. 마침 회사사정이 안 좋 게되어 그만 두게 되니 지금은 오히려 한시름 놓고 있습니다.(좋은 경험 했죠.. 하하...^^) 사실 그때는 한 세 달간... 잠도 잘 못 자고, 여러 가지 일 을 무리하게 해서 무척 지쳐있었기 때문에 글이고 뭐고 당분간 그만 두 고, 또 다른 회사에 들어가 편하게 살아볼까 아니면, 원래 하던 일에 정진 하여 꿈을 이룰까... 한참 고민을 했거든요. ^^;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모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기뻤지만, 황당했습니다. --; 덕분에 요즘은 글 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회사생활을 하며, 출판도 하라던데.. 경험상 죽어다 깨어나도 그것은 불가 능하고... (다른 분들은 두 가지 일도 잘만 하시던데... 난 아무리 시간을 바쳐도, 한 달에 네 편인가, 다섯 편인가.. 내용도 후지고... 이런 속도라면 5년 후에나 완결을 볼 수 있겠죠... TT) 어쨌든 이것으로 꿈을 조금이나 마 이루었다고 확신합니다...(^^;) 음... 하지만, 아직도 별로 자신은 없습니 다... ^^; 저 자신의 미숙함도 그렇고... 이것이 공개적인 인쇄물이 되자면 글을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어야 할텐데... 1부라도 끝났다면, 스스로도 좀 더 당당하게 출판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앞날이 걱정되는군요...) 더위 문제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렇게 6월말에 1부를 끝내려고 한 겁니 다.. 이런 사실을 당당하게(!) 말씀드리려고... ^^; (실패했지만...--;) 뭐, 한 달이 넘어가니 흥분도 가라앉고(--;) 어느 정도 사건이 정리가 되고, 8월 까지 이 사실 홀로 갖고 넘어가기 싫어서... 열심히 글을 써서 100회에 맞 추어 말씀드립니다.^^ 에, 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벤트'에 대해서입니다. 이건 정말 1부 끝난 기념으로 해야하는 거였죠. 그래서 맨 처음엔 정말로 느긋 하게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딱 한 분에게만 일러스트를 드리려고 했는데.. 몇몇 분,(탁 까놓고 다섯 분.)의 멜을 받다보니, 분명 답은 아니지만, '이벤 트 응모'라고 하면서 열심히 써주신 것에 너무 감사해서... 그냥 그분들 모 두에게 일러스트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00회로 한정지어야 했습 니다. 그 이상의 분들이 이벤트에 응모해주면, 저는 일러스트 그리느라 죽 습니다.--; 음.. 다음이 이름입니다.^^ * 장주연님(헤헤.. 저도 세렌시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 정재훈님(바라지도 않던 '인상깊은 장면'까지 써주셔서.. 감사.^^ 과연.. '사랑 받는 아들'의 길이란 의외로 험난하군요.. 하하..^^) * 박소연님(시나 엄마라.. 하하..^^ 분명한 것은, 헤르가스는 절대로! 아닙 니다!!!!) * 윤수희님(양성인간..^^; 시나야 힘내라.. 하하...) * 김병진님(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분들입니다.^^ 일러스트는 한 달이 걸리든 두 달이 걸리든 확실하게 그려서 드릴테니... 느긋하게 마음 잡수시고..(한 반년쯤으로.. 저란 인간은 정말 두 가지 일은 못합니다..--;;) 완성 될 때마다 연락을 드리겠으니, 주 소 좀 알려주세요.^^ 아.. 그리고 특별히 바라시는 캐릭터나, 장면이 있다 면 말씀해 주시고요... (능력이 안되면 물론 그 소망을 본의 아니게 무시 하고 제 멋대로 그리게 되겠지만... 가능한 노력은 하겠습니다...^^;;) 그런 데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이벤트 응모'라는 언급을 절대(!) 안 하시 고 그냥 담담히(^^) 엘야에 대하여 감상을 적어주신 분들입니다. 음.. KANA님과 토룽이님이요... 혹시, 이벤트에 응모하신 거였다면.. 연락을 주세요...^^; 그 외분들은..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 '인물에 대한 언급'이 들어간 멜은 못 본 것 같습니다. 휴우- 에 또... 이벤트를 마치면서, 저의 감상은... 이것도 통신마다 특성을 띠는가..입니다. 위의 다섯 분들은 모두다 하이텔 분들이고, 카나님과 토룽 이님은 유니텔 분... 하하.. 신기하죠..?^^ 음, 어쨌든 100회까지 오다니... 모든 걸 떠나 무척 기쁩니다.(짝짝짝.. 자 축.^^) 모자란 점이 많았을 텐데... 꾹 참고, 읽어주신 분들께도 마음으로부 터 감사드립니다.^^ 일기도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쓰는 제가...(이게 어디가 정기적이냐? --;) 이렇게 긴 글을 거의 1년 동안 쓴 것은 정말 여 러분들의 힘에 입은 바 컸습니다...(어쩐지 고별분위기가... ^^;;;) 그럼, 이 러니 저러니 하는 건 여기서 마치고... 정말로 1부의 마지막을 향해서.. 다 음 101회에서 뵙겠습니다.^^ 하하.. 저는 정말, 잡담이 많죠? ^^ 본문만으 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하는... '짜가' 작가인 것 같아요..^^ <엔..^^> ps...솔림님, 정규님... 그리고 스타시카님... 쪽지와 멜 주셔서 감사드립니 다.^^ 그리고 시골남자님의 동생님..(길다..--;) 그 그림 저 좀 보여주시 지...^^; 에.. 또, 형님이 부디 건강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