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785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10/23 21:45 읽음:216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145회, * 엘야시온이 언제 출판 되냐고요? 1부가 끝나고 수개월 후에는 되지 않을까... 아무튼 저는 두 가지는 못하니까요. 한 번에 하나씩...^^ * 메일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1056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00/02/13 00:06 읽음:1846 관련자료 없음 -----------------------------------------------------------------------------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1- 관련자료:없음 [25541]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9:51 조회:1188 레이서스의 숙소를 나와 자신의 숙소로 가던 안딜로스는 피곤함을 느꼈다. 생각하던 말보다 더 감정적인 말들을 한 듯 싶다. 그래서 그 는 자신의 수행시종장을 데리고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기 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이럴 바엔 클로니아 세렌시스 생전에 그가 자주 찾곤 했던 궁도 찾을 겸. 그의 서재로 가보기로 했다. 이젠 적막 할 뿐인 궁이지만. 예전에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뜻밖에. 그곳에 들어갔을 때, 서재의 창가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안딜로스는 무척이나 놀랐다. 거기다 창문에서 비쳐드는 햇 빛에 빛나는 저 은빛 머리칼... "클로니아... 혹, 클로니아 세렌시스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 안딜로스는 이렇게 말했 다. 어제의 그 느낌. 당장이라도 클로니아 세렌시스가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은, 끝내 이런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창가에 서 있던 청년은 뒤를 돌아보고, 놀란 표정,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베르노크, 안딜로스 님." 청년의 얼굴에 안딜로스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온... 루 드랫." 그러고 보니, 짧은 머리칼이다. "허... 그런가? 난 자네가 이미 우리 세계로 오려고 마음먹고 있을 줄 알았는데? 결투에서 그런 훌륭한 솜씨라니! 라벤스 크라프트가 자 네에게 어울릴 검을 만들어 줄 거야." 수행 시종장에게 시켜 서재에 불을 지피게 한, 안딜로스는 그 불을 앞에 두고 청년 루이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까마귀 수장은, 인간을 위한 검 만드는 것엔 언제나 투덜대지만 그래도 프레미어 루이트의 검은, 아주 기쁘게 만들거든. 그 교활한 늙 은이... 하하..." 루드랫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우연히 서재에서 그를 만나, 왕족 의 서재에 있던 것에 어떤 지적을 들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안딜로스 는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기꺼워했다. 시나와의 소문을 들먹이며 '카이러스 소드'의 이야기까지 할 정도다. 조만간 자신의 세계로 오길 바란다고. 하지만 루드랫은 어쩐지, 이 안딜로스가 자신을 떠보려 한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전 날엔 어쨌든. 자신은 지금 왕족들 간에 별로 달가운 인물이 아니다. 예전 죄를 씻고 이 자리에 있다지만. 하 필이면 그 '죄 씻음'에 연루된 여자 또한 왕족이었으므로, 무슨 운명 의 장난인지 수군거리는 소리는 여기저기 있었다. 그러므로 루드랫은 안딜로스의 이런 친근한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기로 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완전히 정해진 것도 아닌데... 이런 이 야기는 지금의 제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훌륭한 루 이트도 많고." 안딜로스의 굵은 눈썹이, '호- 이것 봐라' 식으로 올라갔다. 계속 띄워줬는데, 이 단순한 루이티온 계급이 넘어가지 않다니 약간 놀란 듯. "게다가..." 루드랫은 쓴웃음 지었다. 설마, 이 늙은 파이오니온께 서 자신이 '카이러스 소드'에 관한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 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카이러스 소드는 행방불명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검신이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 핵이 없는 이상은..." 안딜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알고 있었군. 그래서 부추김에 도 넘어가지 않았나? "그래... 그 검은 루온 루바인 경의 아들인, 루온 루드리안이..." "루온 루드리안? 아니... 그 전에,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 안딜로스는 경악한 표정으로 루드랫을 보았다. "자 네...!!!" ".....?" 루드랫의 의아한 얼굴에, 안딜로스가 초조하게 옆을 보며 자기 수행 시종장에게 말했다. "자네, 잠깐 나가 있겠나?" 수행시종장이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가자, 안딜로스는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 도대체!!! 루온 루드리안이 사라지기 전부터, 카이러스 소드 가 행방불명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나?!!" 놀란 쪽은 오히려 루드랫이었다. "어디라니... 다 알고 있는 사 실..." "아냐!!! 카이러스 써클렛이 제자리에 없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 지만 카이러스 소드까지 그렇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 아냐!! 우리가 카이러스 소드에 대한 소재조차 모른다는 것이 알려지면 카이러스의 민심이 너무 흉흉해질까... 엘야시온께서, 루온 루드리안이 갖고 지금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말을 퍼뜨리도록 했어!!! 자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나?!! 설마, 엘야시온님이 말씀해 주신 건가?!!" 루드랫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루드랫은 자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들은 기 억은 없습니다. 그저 아는 사실일 뿐." "---!!" 안딜로스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다가, 루드랫이 불편을 느낄 무렵 마침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괴로운 한숨. "...어떻게 알고 있게 되었든. 자네도 입을 다물게. 그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냐. 카이러스 소드. 그건 말이야... 83년도에 루온 루 바인이 반환한 것을, 카이러스 사이너스가, 엘야시온님께... 그리고 엘야시온님께서, 잠깐 클로니아 세렌시스에게 맡겨 놓았네. 예전..." 안딜로스의 눈이 날카롭게 루드랫의 얼굴을 훑었다. "...그 분의 약 혼녀인 스온 아피네스... 그, 카이러스 스아디온을 지키는 루이트에게 내리도록." 루드랫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원래, 엘야시온 후계자들에겐 루이트가 잘 붙지 않는 법이지만. 당 시 스온 아피네스는 이상하게도 불안정해서... 아직, 14살이었으니 정 식으로 엘야시온의 배우자가 되는 날은 멀기도 했고... 결국, 루이트 를 하나 고르기로 했었는데. 그것을 위해 엘야시온님께서 카이러스 소 드를, 그녀의 종속주 되는 클로니아 세렌시스에게 맡겨 놓았지." 세렌시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그런데, '사건'이 일어나고..." 안딜로스는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가, 돌아오지 않게 되고. 결국 그 검도 행방불명되었어. 소문엔 판테온 놈 들을 치기 위해, 클로니아 세렌시스가 직접 그 검을 들고 갔다고 하는 데..." 안딜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 검에 대해선 말해서 안 되 는 거야. ...아니면 사람들은 더 없이 불안해 할 걸세. 지금 그 검은, '판테온'에 있다고. 마치, '블러디 루비'처럼. 그 무서운 무기들 이..." "---!!!" "다행히, 그 무기들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은 적은 없지만. 아무튼 사람들 마음이란 별 것 아닌 것에도 흔들리기 마련이니까. 그런 강력 한 것들이 자기들 적이 된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현재 카이러스엔 파이오니온도 없는 상태이고. 써클렛도..." "....판테온...!!" 루드랫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판테온...!" "...루온 루드랫?" 안딜로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나?"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야,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중요한 단어--어쩌면 키워드가 될지도 모르는 단어--를 찾았다고 생각하니, 쓸데없는 책을 뒤지던 수 고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하지만, 클로니아 세렌시스님이 그 검을 들고 나가셨을 리는 없 다고 생각합니다. 그 검은 에고 소드고. 적합한 주인이 아니라면 쥐는 것 자체가 힘드니까요. 그러므로 그 검은--" 하지만 거기서 루드랫은 말을 멈췄다. 안딜로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본 것이다. "그 검은--?"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루드랫은 조용히 말했다. 그 검은 --? 그 검이 어쨌다는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을 리도 없는 것을. 안딜로스는 루드랫과 헤어지고 나서 얼마 정도 걸은 뒤, 뒤를 돌아 루드랫의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키가 큰... 침착하게 걸어가는 모 습. 자신의 앞날도 상관하지 않고, 한가지를 추구하는 자라기에- 좀더 맹목적이고, 좀더 혈기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성적이고, 냉랭한 모습의... 안딜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돌아서서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자와 이야기 나누다 무슨 불미스런 일이라 도?" 주인의 슬픈 얼굴에 시종장이 물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네. 오늘은... 왜 이렇게 가슴이 아린지. 어제부터. 마치 시간이 그대로 돌아와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한 걸음만 디디면..." 내 친우가 인사를 나누며 다가올 것 같아. 그 냉랭함을 꾸짖으면 어 색한 표정으로, 미소지으려 노력하며. 방에 들어가니 하디트가 루드랫을 기다리고 있다 일어섰다. "루드랫! 아침부터 어디 가 있었던 거야!" "...왜?" "셰리카 양이 깨어났어! 알고 싶어할 것 같아, 알려 주는 거야." "---!!" 잠시 후. 루드랫과 하디트는 셰리카가 묵고 있는 여관에 있었다. 그 리고 셰리카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듣고, 루드랫은 그녀가 말하는 사실 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왕궁 안...? 그들이 왕궁 안엘 드나들었다고?" 아무래도 전에 만났을 때와는 신분이 틀려져 있음으로 말투가 어색 해 질 수밖에 없었지만, 셰리카나 루드랫이나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왕궁에서 어떤 루이트가 당신에게 결투 신청하는 것까지 봤어요. 당신이 정말 루이트였다는 것을 알아 놀랐어요. 그 힐러 아저씨가 농 담하는 줄 알았는데. 마노테 루이트라니!" "흠... 그들의 이름이라든지 하는 걸, 알 수 있는지?" 그러자 셰리카는 하디트를 힐끗 보았다. 하디트는 루드랫이 눈치 못 채게 고개를 저었다. "글세... 이름은 몰라요. 그냥... 이드넘... 도비온..." 루드랫은 생각에 잠겼다. "...들어본 것 같기도. 셰리카 양, 혹 '판 테온'이라는 말은 들은 적 있습니까?" 그러자 하디트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 루드랫을 보았다. 그걸 눈치챈 루드랫이 말했다. "...왜?" "아니... 파, 판테온이 뭔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루드랫이 '판테온'에 대해 눈치 못 채도록 말했 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루드랫을 위한 것'이라고 했으므로 하디 트는 그 명령을 지키고 있었다. "판테온이 뭐냐고? 글세. 나도 그걸 알고 싶어." 루드랫은 셰리카에 게 다시 물었다. "그런 말, 들어 본 적 있나요?" 하지만 이번에 셰리카는 순수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는데요. 흐응... 그런 거 보단. 이봐요, 힐러 씨." 몇 번이나 셰리카를 보러 왔기에, 셰리카는 하디트에게 익숙해져 있 었다. "시나에겐 별다른 말없었어요? 저번엔 안부 인사 전해 줘 놓고, 이 번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안부 인사?" 루드랫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하디트는 아무생각 없이 빙긋 웃었다. "아... 저번에 내가, 시나... 아니, 스아드 님을 만나러 갔다고 했잖아? 그때, 말하는 거야. 셰리카 양? 몇 번이나 말했듯, 이젠 '시나'가 아니라 '스아드 님'이고... 글 세. 그때 이후론 만나러 간 적이 없어서... 미안하군요. 전할 말은 없 습니다." 셰리카는 입술을 내밀었다. "...너무한 걸. '스아드 님'이고 뭐 고... 친구가 누워있는데 보러 오지도 않고. 시나는 배반자야." "글세... '시나'가 아니라..." 하지만 그때였다. 굳은 목소리의... "안부 인사라." "...루드랫?" 하디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루드랫은 창가 쪽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군. 적어도 그런 예의는 있었군. 사람을 잘 본 것 같아, 기 뻐. 아픈 친구에게 안부 인사라니. 자기를 꺼내 주느라 죽도록 고생한 사람에겐 아무 말도 없다는 것에... 역시 너무 바빠서 그런 걸까. 적 당히 바쁘면 좋을 텐데, 걱정을 했었지." "---!!" 하디트는 무엇이 문제인지, 민감하게 눈치챘다. 20년을 넘게 같이 살았으니까. "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시나... 아니, 스아드 님이 고맙 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너무 당연한 말이라. 미안해. 늦게 전해 줘 서." 하지만 그 방안에서 민감한 사람은 또 있던 듯. 갑자기 셰리카가 깔 깔대며 웃었다. "뭐예요--! 당신! 루이트 주제에, 질투하는 거예요!! 깔깔깔-- 시나 가 당신에게 아무 말도 안 전한 거야, 당연한 일이죠!! 이젠 종속주도 뭣도 아닌데!! 그런, 예전 종속주 따위!! 게다가, 당신처럼 차가운 남 자 따위!!! 시나도 힘들었을 거라고요!! 걔가 무슨 천사도 아니고!!! 지금쯤 안도의 한숨을...!!" '으윽!! 셰, 셰리카 양!!" 하디트는 속으로 신음했지만, 이미 늦었다. 루드랫의 어깨는 이미 굳어지고 있었다. '맙소사...' 하디트는 쩔쩔매다, 이 얼어붙은 공기를 녹이기 위해서 "하하... 말 했듯. 그러니까, 그건 오해예요. 셰리카 양. 시나는 루드랫에게도 안 부 인사를 전했어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고. 하하하..."라고 말 했다. 하지만 셰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에-- 그런 거짓말하지 마 세요. 하디트... 그럼 진작에 말씀하셨지, 왜 지금에야... 저분 마음, 위로하시려고 그런 거죠?" '으으윽---!!' 하디트는 이 황당한 아가씨의 입을 막고 싶어했다. 루드랫을 위해서 가 아니라, 셰리카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루드랫은 이미, 언제나의 그다운, 그 진지한 얼굴로 창가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셰리카 양." "...네?" "사냥터에서 받은 보석, 혹시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어..." 셰리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호수 밑에서 잊어버린 것 같아, 너무 아까운데..." "저런..." 루드랫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여관비는 어떻게 치를 생 각입니까?" "네...?" "...미안하게도. 난, 등골빠지게, '예전' 종속자, 친구, 여관비까지 댈 여력이 없군요. '차가운 남자'이기도 해서... 돈이 손에 얼어붙어 떨어지질 않을 지경입니다." 하디트는 천장을 보았다. 불쌍한 셰리카 양. 바리스에서도 저런 식 으로 사람들을 모두 다 쫓아냈다. 하지만 셰리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 락해서 소리쳤다. "뭐... 뭐예요!! 내가 당신 아플 때, 어떻게 해줬는데!!! 그럼 나보 고 지금 당장 여길 나가라는 거예요?!!!" 루드랫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설마. '예전'이라곤 해도, 인연은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 ...쉴 만큼 쉬고, 적당한 때가 되면 일어나길 바라는 겁니다. 하지만, 말했 듯 '차가운 남자'라. 차가운 남자로서 어떤 도리를 해야할까, 고민하 고 있을 뿐이죠. 인간은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현실을 똑바로 바 라봐야 한다는 말도 뇌리를 스치는군요." 잠시 후, 마차에 오르며 하디트는 안쓰러운 얼굴로 여관을 올려다보 았다. "너무 하잖아. 그래도 환자인데. 그리고 아직 어리고. 밤새 고 민할지도 모른다고. 여관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놓고 오긴 했지만. 그런 민감한 부분을..." 루드랫은 픽, 웃었다. "민감해? 저 셰리카 양이?" 그 말을 증명하듯, 갑자기 여관 문이 열리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 다. "내가 꼭 돈을 벌어서, 이런 것, 다 갚을 거야!! 엉엉--!! 아빠---" 하지만 하디트는 알고 있었다. 루드랫은 한번 단단히 마음먹으면, 여자가 울어대고 할머니가 넘어져도 꿈쩍을 안 한다. 뭐랄까, 여자든 뭐든, 혹독할 땐 혹독하다고 할까. 지금도 냉랭하게 내뱉기만 했다. "젠장. '돈을 번다'니. 여관주인에 게 줘야 할 돈이 더 많아지겠어. 손님들 손해 본 것 계산해 놓으라고 해야지. 괜히, 수비대에서 오라 가라 하면!!" 하디트는 중얼댔다. "...루드랫. ...여자 애가 울면, 가슴 아파하는 법 좀 제발, 배워." 루드랫은 웃었다. "하! 그 말 진심은 아니겠지? 그랬다간, 만성불치 병이 될텐데? 여자들이 지금의 반만큼만 울면, 생각해 보지." 하디트는 끄응, 소리를 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걸 잊 지 않았다. 루드랫이 혹독해 질 때. 그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증거 다. 사람들이 교묘하게 수를 써, 자신을 옭아매려 할 때 빼고는, 차라 리 무관심한 편인 그가... "너무해요, 엘야시온님!! 어떻게 그런--!!" 시나는 엘야시온과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서, '모든 것에 입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말했다. 레겜이 준 검까지 내왔는데. "레겜... 아니, 파이오니온 님이 이런 걸 줘도, 아무 말도 안하고 그만 있으라니!!! 받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 "받을 수 없어? 우습군. 왜 받을 수 없나. 그냥 넣어 둬." "여기 새겨진 글씨!! 이건 제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자 내내 불쾌한 표정이던 엘야시온 가디엘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런 건 나도 아네, 칼루스온 아가씨!!! 그건 자네 것이 아냐!! 하지 만 레이서스가 자네에게 줬으니, '당분간' 가지고 있어!!" "---!!" 당분간...! 기분 나쁜 표정으로 엘야시온이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레이서스 놈을 따돌리라고 했더니! 들여보내서 이런 걸 자네에게 건네주게 하다 니, 에잉!!!" 시나는 들고 있는 유리 검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엘야시온 님...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자이온으로, 가서... 거기서 전 우리 세계로 돌아가는 건가요?" "....? 맞네." "...그럼 그 '당분간' 동안. 저는 내내 이 방에만 있어야 하는 거예 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아는 사람들. 내 친구... 모두 만나지 못하고요?" 가디엘은 시나의 질린 표정에 묘한 낯을 지었지만 딱 잘라 말했다. "그게 뭐가 어떻다고 그런가? 고작 일주일 남짓인데. 이곳 사람들을 만난 지도 얼마 안됐다며? 아니, 만난 지 오래 됐다고 해도... 도대체 앞으로 이곳 사람들이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한 두 번 더 만난다고 뭐가 변할 리도 없고. 어차피 자네는 사라질 사람이니까, 더 이상 인 연을 만들어 두지 않는 게 나아.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말도 그런 거 아닌가? 자네는 곧 없어질 거니, 레이서스와 상관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런데, 자네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다고? 그럼 레이서 스가, 아~ 그렇군요, 라고 납득하고 물러날 것 같나? 오히려 문제만 커지지. 자네의 바람은 왜 이리 이중적인가?" 이중적? 시나는 슬픈 낯을 지었다. 그 말은 꼭, '이기적'이라는 말 로 들리는 것 같았다. 자기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그 목적하나로, 주위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모른 척하고... 그 앞에서만 웃는 낯으로...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남들의 필요 따위 모른 척 하면서...! 자기가 외롭고 슬플 때는 서슴없이 남을 찾고...!! 아 까만 해도. 레겜이 찾아 왔다고 했을 때, 얼마나 반가운 마음을 가졌 는가? 연관돼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제에...!!! 그러므로 시나는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이, 정말로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데도, 마치 불필요한 짐인 양, 벌써부터 존재하지 않는 걸로 취급당해야 한다는 것... 또 한 번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왜 남의 세계에서, 이런 이 방인이 되어 불필요한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지. 슬프고, 괴로운 눈을 감았다. 빨리, 하누카의 날이 지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자신의 추한 모습 이 드러나는 게 보기 싫다... 약하고, 남을 이용하는데 능숙한... 의 존적인 자기. 그래서, 밤에 그토록 악몽에 시달리는 거다. 스스로 나 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꾸짖기 위해. 시나는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무섭다. 엘야시온님은 엘야시온님이니까... 신의 제사장이라니까, 조금은 무언가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시나 는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엘야시온님? 약한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그렇담... 이건... 계속,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엘야시온님. 몸이 이상해서... 마치 제가, 제가 아닌 것처럼..." 하지만 엘야시온은 시나의 그런 상태에 대해서도 이미 결론을 내리 고 있었다. "아... 그것. 하온 하디트가 말해 줬네." 뜻밖의 말이었다. 루드랫에게 말을 전하고 엘야시온님에게까지 전해 준건가? 엘야시온은 말을 이었다. "글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그거야. 그런 건... 그냥 민감해 진 것일 뿐이야. 또 다른 인 격이 있는 것 같고, 자기가 한 일도 잘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럴 수도 있지. 어떤 인간이 자기가 한일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겠나?" "하....하지만! 전 제 친구조차 기억하지 못했어요! 제 친구 또한 칼루스온 인인데! 엘야시온님, 그 애를 한번 만나봐 주시겠어요? 그 애는 여관에 있는데..." "벌써 만났네." "...만났..." "그리고 그 소녀는 칼루스온이 아닌, 엘야시온 인이야." "----!!!!" 시나는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숨이 막힌 듯한 소리 를 냈다. "그런--!! 아니에요!!" "맞네. 믿지 않는 건 자유지만. 그 소녀까지 같이, 칼루스온으로 보 내달라는 둥,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그 소녀가 그런 소릴 하기에 그 런가보다, 무시하고 왔지만. 알겠나? 만약 무슨 '결계 조각'이 성역에 가까운 숲에서 자네 몸에 들어갔다면. 아마도 이런 부분에 영향을 미 치는 거야. 듣자 하니, 그 소녀도 성역에 가까운 숲에서 구조됐다고 하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런 결계의 조각들은, 시간과 공간에도 상관없이 이어져 있어서... 어쩜 그 소녀가 거기서 자네와 기억을 공 유했는지도 모르고... 아아... 알아. 알아... '학교'인지 하는 곳을 그 소녀와 함께 다녔다고? 하지만 결계의 조각은 인간의 기억도 변형 시켜. 자네는 스스로, 그 소녀와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합리화'를 한 거야. 그럴 듯한 기반을 만들고... 그 증거로, 그 소녀는 자네만큼 '칼루스온'에 뚜렷한 이미지가 없더군. 단어의 나열뿐. 거기다... 저 번에도 자네가 말했지 않나? 자네 세계엔, '셰리카'같은 식의 이름은 안 쓴다고? 솔직히 말해 보게. 지금의 '셰리카'는 '합리화'하지 않은 그대로의 '셰리카'지... 하지만 자네가 칼루스온에서 알았던 '셰리 카'-- 그 '합리화'했던 셰리카는, 과연 지금과 똑같은 인물인가? 잘 생각해 보게. 어쩌면... 이름조차 달랐을 것 같다고 짐작하는데? 자네 세계에선 그런 이름을 안 쓰니까?" 날카로운 말. 하지만 시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대답을 못했다. 그 걸 오해한 엘야시온 가디엘이 말했다. "...아닌가? 뭐, 그렇더라도 분명 어딘가 틀릴 게야... 분명히 그럴 거라 믿네. 그건 '가짜'고 '진짜'와 같을 순 없으니까.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성역에 가까운 숲에 대한 연구를 한 줄 아나? 하지만 그곳은 미스테리야. 알 수 없어. 실제로, 난 그런 보고도 들었어. 전 혀 다른 세계에 있는 자들. 하지만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성역에 가까 운 숲에 들어간 자들이 놀랍게도 '동일한' 기억을 갖게 된 거야. 마치 한 가족인 것처럼 한 장소, 한 시간에 대한 기억들. 하지만... 물 론... 그건 '거짓'이지. 듣자하니 그 소녀가 성역에 가까운 숲에 들어 갔던 때는 자네가 그 숲에 있던 때와 비슷하더군? 아무튼 따지자면 끝이 없고, 가정을 세우자면 한이 없어. 하지만 분 명한 것 하나. 그 소녀는 엘야시온이고 자네는 칼루스온이야. 이 엘야 시온에 유일한, 칼루스온. '존재하지 않는 자' ...어떤 느낌이 들더라 도. 그건 다, 자네의 환상일 뿐이야. 아무튼 자네는 이 엘야시온과는 아무 상관없어." 시나가 '믿을 수 없다'고, 그 말만을 계속 중얼거렸을 때. 엘야시온 은 마지막 말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내 말의 증거는 많아. 실제, 자네가 그 소녀를 까맣게 잊어버리 고 있던 것도. 그 기억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점차 '현실'을 접 하며... '가짜' 따윈 잊게 돼버린 거야. 이제 곧... 그 소녀는, '칼루 스온'에 대한 작은 기억마저. 자네는 아마도... 글세 모르겠군. 아마 칼루스온으로 돌아가면, 우리 엘야시온에 대한 아주 작은 기억마저 잊 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 서로간에, '안 보이는 세상'으로서, 안 보 이는 그 자체로 엘의 권능을 증거하며." 시나는 엘야시온이 떠난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점 차 몸이 떨려오고... 나중엔 마치 나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떨렸다. 셰리카와의 기억이... 가짜. 어쩌면, 엘야시온 가디엘은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말을 했는지-- 그 걸 모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나는 다시 일어나 엘야시온을 쫓아가, 제발 그런 말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 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두려움... 공포. 이건 바닥까지 드러난 공포였다. 가짜...!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짜'? 셰리카가 가짜라면... 그럼, 학교는...? 학교가 '합리화'라면...? 학교 자체는 '진짜'인 거야? 시나 시스터즈는 누가 결성한 거지? 누 가, 제준이에게 고백하는 순간을 망친 거야? 누가, 아침마다 엄마의 목걸이를 부러워한 거야? ...무엇이, 얼마만큼, '진짜'인 거야? "...스온... 아스나엘님? 아, 아니!! 스온 아스나엘님!!!" "...가짜라고..." 시나는 몸을 떨면서,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 다. 눈물이 마치 빗방울처럼, 볼을 적시고 손으로 떨어져, 옷자락을 물들였다. 받아들일 수 있는 이상의 공포. 그렇담... 아빠는, '진짜'인 거야? 만약...! 만약, 그것마저, [가짜]라면...! 그러면 내가 돌아갈 [칼루스온]은 도대체...? 도대체, 어떤 세상이야......? 내가 [존재하는] 그곳 은....? 너무나 무서워, 시나는 비통하게 흐느꼈다. 시녀들이 시나에게 왜 우냐고, 물으며 얼굴을 닦아주며 이유를 계속 물어도... 시나는 계속 눈물을 쏟았다. 끝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렇담, 차라리... 나를 사랑 받았던 가족이 있는 마노테온으로 내 버려둬요. 그, 바리스에서... 그때는 행복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누군가 나를 이 나쁜 꿈에서 깨워줬으면. 제 발 내가 나의 기억을 부정하지 않도록 해줘요... 하지만 위로는 들려오지 않았다. ....용기를 얻어, 살아가기를. 너는 그대로 시나이고 그 무엇도 아 냐. 과거를 모르더라도. 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도대체, '칼루스온'으로 돌아가... '엘야시온'에 대한 모든 것을 잊 고. 그리고 그 대가로 얻을 것은 무엇일까. 이 기억. 이 기억에서 '가 짜'를 뺀... '진짜'의 칼루스온은 어떤, 세상일까? 이 불확실성. 그대 로의 나. 정말 그것이 그토록 가치가 있을까? ...루드랫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모두에게 잊혀진다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정말로 몰랐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 바른 것을 하려고,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그가 널 믿어주니, 그 세상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마음속의 비웃음은 계속되고, 이젠 그만 하라고 할 여력도 없다. 도대체, 돌아갈, '칼루스온'은, '진짜', 그곳은... 어떤 곳일까. "스온 아스나엘님!!!" "제발... 제발... 그러면, 디트라도 불러줘요...!! 너무 아프니까!! 아프니까, 힐러를 불러줘요...!!" 아스테린은 쉬고 있다가, 방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냥터의 일도 있고 해서, 왕족과 귀족들은 지나친 오락을 피하고 있었다. 아스테린 또한 요 며칠 심하게 걱정을 하던 참이라 오늘은 느 긋하게, 되찾은 행복한 마음으로 자수나 놓고 있었다.(취미엔 안 맞지 만) "흐응... 루온 루파르테라...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웬일이 지?" 하지만 약간 후, 아스테린의 의아한 얼굴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뀌 어 있었다. "루온 루파르테! 정말 재미있는 걸 생각해냈네! 하지만 그대는, 루 온 루드랫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루파르테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원한은... 아닙니다. 그저, 힐라토 레이서스 님께서 그 자를 못마 땅해 하셔서, 게다가 스온 아피네스 공주님 건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거죠. ....하지만 아무리 스온 아피네스 공주님이라고 해 도. 저는 솔직히..." 여기서 루파르테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스테린 님이 아피네스 님을 싫어한다는 것이 확실한 말이겠다! "...스온 아스테린 님만큼은, 그분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팔은 안 으로 굽는다고. 루드랫 녀석 불쌍해서..." "흐응... 그랬어?" 아스테린은 미소지었다. 게다가 납득하는 표정. 루파르테는 빙긋 웃 었다. "그런데, 사촌이 모시는" 루파르테는 일부러 '사촌'을 강조했다. "그 카이러스 스아디온과..." 이번에도 또 왕족이라니. 재수가 좋다고 해야 좋을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멍청한 녀석. 루파르테는 코웃음치며 말을 계속했다. "힐라토 레이서스님의 혼인 설이 떠도니... 이거야. 저로는 기쁘다고 해야할지... 묘한 심정이 되어서. 결투 때, 본의 아 니게 험한 꼴도 보여줬고... 이왕 이렇게 된 것 화해를 하고 싶은 데... 역시, 스온 아스테린 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서..." 아스테린은 생긋 웃었다. "흐응... 그런데 그대의 그런 말은 못 믿 겠는걸. 그가 아직도 루사벨라를 생각하고 있다고?" 루사벨라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하면서까지 나누는 대화다. 정확한 근거 있는 이야기만이 필요하다. "그거, 직접 루온 루드랫이 한 말이야?" 의외로 날카로운(사실은 당연한 궁금증이다. 하지만 루파르테에게는 날카롭게 느껴졌다.) 질문에 루파르테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아스테린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뭐야. 진짜도 아니면서..." "아니, 그렇더라도! 루드랫 녀석, 지금 상심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되풀이되는, 우연이라니! 맘에 둔 여자가 또 왕족이었다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진전된 소문으론, 사실은 루온 루드랫이 원래부터 '스온 아스나엘'이 왕족인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엘야시온 가디엘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그녀를 보호해 성역에 가까운 숲에서 여기까지 온 건 데, 중간에 우연히 레이서스가 그녀를 보아, 그 둘이 사랑에 빠진 거 고... 그러니 삼각관계 따윈 없고, 원래부터 루온 루드랫은 객관적인 입장이었다고 하는 것이었는데(도대체 누가 이런 소문을 만드는지 모 를 일이다) 루파르테는 그런 건 그냥 무시하고 말했다. "하지만 루드랫은 이젠 모든 것에 지쳤는지. 예전처럼 그 소동 벌이 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그러니 예전 약혼녀와 자리를 마련해 주면... 아무튼--" 루파르테는 노인들에게 듣던 말을 떠올렸다. "남녀 관계니까요. 둘 이 만나게 해주면, 뭔가 인연이 있으면 나머지는 그들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요. 잘 되면, 당사자들끼리도 좋은 거고. 안 된다고 해도, 뭐... 나쁠 것 있습니까? 변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아마도 그 말이 아스테린의 마음을 움직인 듯. 아스테린은 그때까지 쥐고 자수 놓던 자수 바늘을 제자리에 꽂은 뒤, 웃었다. "...아아 그래. ...손해 볼 건 없지." 게다가 루파르테가 말을 하지 않았어도, 조만간 무슨 수를 취하긴 하려 했고. 여관에서 돌아온 뒤, 루드랫과 헤어져 자기 방에 있던 하디트는, 스 온 아스나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말에 서둘러 시나의 방으로 갔다. "이상하다니...?" "엘야시온님을 만나신 후, 갑자기 울어대시더니... 아프다고. 아무 튼 직접 보십시오." "스온 아스나엘 님...?" "디트...!" 아프다더니, 다행히도, 의식을 잃고 있다든지 그렇진 않았다. 하지 만 얼굴이 온통 빨간 것이 울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침대에 누우라는 것을 거절하고 있던 듯,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디트에게 걸어왔다. 그런데 발걸음이 흔 들려, 그걸 보고 하디트는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앉아 계세요! 내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시나는 그런 하디트의 말에 미소지었다. "...아니에요." 시나는 결국은 마주 다가와, 디트의 앞에 서서 작게 말했다. "사실 난 별로 아프지 않아요... 디트를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꾀병을 부 렸어요. 하하... 시녀들이 매우 놀라서... 역시 억지를 쓰니까, 되네 요... 이러면 안되지만..." 하지만 그 웃는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시나..!!" 눈물을 쏟은 데엔 자신도 놀랐는지, 눈물을 닦으려 하다가, 곧 포기 한 듯. 시나는 그대로 눈을 들었다. 이젠 웃음이라곤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디트... 디트, 들었어요? 셰리카가 우리 세계의 사람이 아니래요. 디트도 알았다면서요? 언제... 디트는, 그걸 언제 알았어요?" 하디트는 당황해서 말했다. "어제 밤, 알았습니다. 엘야시온님이 왔 다 가셨단 말을 들었는데... 그분이 말씀하셨군요." "맞아요..." 갑자기 시나는 서 있기 힘든지, 비틀거렸다. 하디트는 그녀를 부축 했다. "좀, 의자에 앉든지.. 아니, 침대에 누우세요. 힐러 라이트 를..." "아니에요. 난, 쉬고 싶지 않아요... 디트는 또 금방 가버릴 테고. 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시나는 하디트를 보았다. "디트, 물어보고 싶었어요... 루드랫에게 내 말을 전하지 않았어요? 아님, 전했는데, 루드랫이 날 보러 오지 않 는 거예요?" "....그건..." 하디트는 눈을 흐렸다. "루드랫은 지금..." 시나가 말했다. "디트...! 난, 무얼 어쩌려는 게 아니에요!! 디트도 알잖아요? 내가 한번이라도 억지로, 루드랫의 무언가가 되길 원한 적 이 있어요? 난, 그냥 누군가...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시나..." 시나는 시녀들이 보고 있건 말건, 하디트의 팔에 이마를 기댔다.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 건지. 한 번만 더 들려주었으면... 제 발... 약한 소리라는 것도 알고, 교활하다는 것도, 알고.... 이기적이 라는 것도 알고... 내가 잘못한다는 것도 알지만... 하지만..." 시나는 하디트의 팔에 기대고 울었다. "...난 그냥 무서울 뿐이에 요. 예전에 해줬던 말을 듣고 싶을 뿐." 시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엘야시온은 무언가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와 괜히 만났다는. 칼루스온의 눈빛. 맨 처음엔 잘 몰랐는데. 자 꾸 가슴 가운데 이상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다 기억해 낸다면, 더 없이 싫을... 엘야시온은 혀를 차고, 시종에게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디까 지 말하고 있다고?" 시종들이 왕궁 안에 떠도는 소문을 들려주자,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그가 시종들에게 적어서 준 그대로의 소문들이었다. 아무튼 요 며칠은 너무나 바쁜데... "에잉!!!!" "....? 엘야시온님?" "좋아!!! 루드랫을 만나게 해주면 될 것 아닌가?!! 도대체! 에 잉!!!" "...네?" "아무 것도 아냐!! 루온 루드랫에게 전할 명령서를 거기 앉아 써보 게!!" 엘야시온 가디엘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어쨌든 해 야할 일이었다. 이 기회에, 결단을 내리게 하는 거다. 잘된 일 아닌 가? 이걸 일석이조라는 거다. 그 놈의 회색 눈동자 때문에 집중도 잘 안되고. '엘야시온님... 부탁을... 그렇다면, 제발... 드랫을 보게 해주시겠 어요...?' 그 외에는 아무 데도 의지할 데 없다는 듯, 칼루스온 인은 너무나 절박한 표정으로 루온 루드랫을 보길 원했다. 이상한 일이다. '셰리카 '를 불러 엘야시온 자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길 원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루드랫? 매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엘야 시온 가디엘은 어쩌면 꽤 냉정하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왜, 그를? 이해를 못하는지 모르겠네만. 되도록 우리 엘야시온과 인연을 맺지 않는 게 좋다니까.' 그러자 그쪽은 엘야시온을 바라보았다. 어떤 절망을 눈에 담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또 한번 그 눈동자를 떠올리고 한숨을 푹푹, 쉬 었다. 만나게 해주면 되는 거겠지. 그거면 되는 거다. 이렇게까지 했 는데, 루드랫 쪽에서 혹시나 거절한다면. 그건 엘야시온 가디엘 탓이 아니니 조금 마음이 나아질 것이다. 아니면 루드랫이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그날 오후. 공식적인 명령이 내려왔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루온 루 드랫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모든 의관을 정제하고 연회에 나올 것. 스온 아스나엘의 개인 루이트로서 정식 오더를 내릴 것이니. 루드랫은 그 명령을 받아듣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갑작스러 움이라니. 그것도 왕족의 루이트를 고르면서. 공식적인 절차 없이 한 번에 오더를 내려...? 왕족의 루이트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절차와 기간, 행사를 거 쳐야 하는 지 모른다. 아무리 정식 맹세식이 아닌 오더 뿐이라고 하더 라도 결코 이런 식의 일방적인 오더는 없다. 먼저 여러 루이트가 왕족 에게 '프로포즈'하고... ('영혼의 공명'을 느끼든 아니든.) 왕족이 그 걸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개인 루이트를 지정하고. 그리고 나서, 오더. 다음으로 왕족의 직위에 따라 그 규모에 맞는 맹세식을 갖는다. 그런데 '스온 아스나엘'만큼 되는 왕족의 개인 루이트 오더를 이런 식으로? 소문으로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해도. 실제라면 상황은 달 라진다. 다른 루이트 가문... 예를 들어, 카이러스 루이트 가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을 계속 할 틈도 없이 명령서를 가져온 시종이 말 했다. "...그럼. 원하신다면, 왕궁 힐러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루이티 온 루드랫 님." "---!!" 루드랫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종은 담담하게 말했다. "엘야시온님께서, 확실히 명령을 전하라 하시더군요. 오더를 받을 의 향이 있다면, '의관 정제'. 즉 나실인의 표시를 얻어서 오라고 하셨습 니다. ...아니라면. 스온 아스나엘 님께 프로포즈하실 의향이 없으시 다면, 오늘 연회에 나오지 마시라고. 그렇게 엘야시온님께서 말씀하셨 습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물었다. "뭐라든가?" "너무 갑작스런 오더라... 생각해 보시겠다고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긋 웃었다. "생각?"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는 데 실망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역시나, 하는 기대가 맞았다는 마 음 때문인지 쓴웃음이 나왔다. 생각이라. 역시... 루드랫 놈. 스온 아피네스에게 아직도 마음이 있 던 게야. 하겐트가 그런 건 잘 보니까. 뭐? 마노테를 사랑해, 마노테 로 살아도 괜찮아? '후후... 됐어.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피네스에 대한 마음을 인정할 수 있겠나? 놈은 딜레마에 빠진 거고... 이렇든, 저렇든 루이티온으로 돌아오겠지. 놈이 스스로 루이티온으로 삶을 산다면, 좀 더 강해질 테 고, 일을 맡겨도 될 만큼 듬직해 지겠지. 그럼 본격적으로 판테온을 쳐 부시고... 아니, 그 전에... 판테온 놈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루드 랫을 주목하고 있는 건지. 그것만은 꼭 밝혀 내고 말아야지. 그러니 그때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해야지. 아무 것도 이상은 없는 상태로...' 그리고 칼루스온 인에 대한 문제도 마음 가볍게 되었다. '뭐... 내가 못 만나게 한 게 아니니까. 루드랫 놈이 거절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시종이 말했다. "에... 그래서, 스온 아스나엘 님께선 그렇게 알고 준비하고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뭐?" 시종은 엘야시온이 딴 생각하다가 못 들었구나, 하고 고개를 숙였 다. "스온 아스나엘 님께선 오늘 연회에, 당신에게 프로포즈하실 루이 트가 있다는 걸 아시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오겠다 하셨습니다." 이런 일엔 꽤 익숙한 상급시종이었다. 하지만 엘야시온이 고함을 버 럭 지르는 바람에 시종은 깜짝 놀랐다. "그, 그걸 왜 칼루... 아니, 아스나엘에게 알리나, 이 사람아--!!!" "왜냐니.. 다, 당연..." 당연한 일 아닌가? '오더식'이다. 엘야시온께서 오늘 연회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려는 작정인 줄 알고, 클로니아 세스틴에게도 알리고, 여 타 시종과 시녀들에게 알려 놓았다. 그리고 당사자인 왕족에게도 물 론. 하지만 그 당연한 일에 왜 엘야시온님이 역정을 내시는가? "루온 루드랫이 안 나오면 어떡할 거야--?!!!" 시종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에---?!! 안 나오실 리가 없잖습니 까?!! 엘야시온님의 명령으로 성역에 가까운 숲에서부터 공주님을 호 위하고 오신 분인데!! 당연히 그분이 개인 루이트가 된다고...!! 당연 한 오더식 아닙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내고 자네가 퍼뜨린 소문이잖나?!!라고 소리를 빽 지를 뻔했던 엘야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있겠나? 시종에게도 그럴 듯한(즉, 소문이 아닌 진짜라고) 말을 했으니!! 엘야시온은 씩씩대며 말했다. "루드랫이 '생각'해 본다고 했다면서!!! 그게 무슨 뜻인가? 그게 무 슨 뜻인지, 자네 정녕 모르겠던가?!!" "아, 아니... 그거야 당연한 겸양의 말로... 그 정도는, 해야지 갑 자기 선택받은 죄송함을..." 그것까지 생각한 시종이다. '으윽!!! ...미치겠구만...!' 다시 시나를 찾아가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되는 엘야시온이었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2- 관련자료:없음 [25542]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9:51 조회:1118 "루드랫!!!" 방문이 열리고 하디트가 들어왔다. 루드랫은 고개를 돌렸다. "스온 아스나엘 님의 방에 있다가 들었어--! 너, 너...! 오늘 그분 에게 프로포즈한다고...? 그럼, 머리카락을...!!" 하지만 루드랫은 오히려 하디트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스온 아스나엘 님의 방에 있다가...? 그 사실을 너까지 알았다고?" "아아...! 지금 온 왕궁이 술렁대고 있는데...! 너무나 갑작스런 오 더 식이라고...! 역시 사냥터의 몬스터 때문에 그런가! 이 기회에 자 신도 오더 식을 하고 싶다는 왕족들이 생겼대! 하긴...!! 열 두 세계 의 유망한 스콰이어가 한 자리에 모인 이런 기회도 없잖나? 그래서 상 당히 많은 스콰이어와 주인이 없는 루이트가 이 '오더식'에 참석할 거 라고...! 하지만 스온 아스나엘의 루이트로선, 네가 가장 유망하다는 소문이야!! 루드랫!! 그렇다면, 머리카락을...!!" 하지만 루드랫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 혼자만이 아닌..." "...뭐?" 하디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혼자?" 루드랫은 갑자기 웃었다. "하하... 아니. 난... 그래.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고 했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시종이 가져온 명령서 의 뉘앙스가 하도... 하하... 그렇군. '대규모'의 오더 식이었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디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보단, 스온 아스나엘 님이, 네가 나올 거란 소리에 많이 기운을 차렸 어!" "...기운을 차려? 왜, 어디가 아팠나?" "으응... 아, 아니. 너무 많은 교육과 훈련에 힘이 드셨나.. 열이 있었는데. 그 정도야 힐러 라이트를 쐬니, 좋아지셨지. 그 보단..." 하디트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결국은 말하기로 했다. 더 이상 그녀 의 말을 거부하는 건, 양심이 허락 안 한다. 게다가 이건 기회가 너무 좋다. 이 기회에 루드랫에게 나실인의 표징을 찾아 줄 수 있다 면...!!! "사실은 스온 아스나엘님께서, 널 많이 만나고 싶어하셨어. 할 말이 있다고. ...저어, 뭐라고 하셨더라...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가 있는 것 같다고. 나로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네게 말해 달라고." "....!!" 루드랫의 눈이 의심스럽게 빛났다. "...또 다른 자기?" "으응. 너라면 알 거라고. 계속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그 외에도 너 와 말 나누길 원하셨어. 그러니, 오늘 나갈 거지? 그럼 어서 서둘러 서...!! 사제들을 불러오겠어!! 그리고, 서기관과...!! 힐러는 내 가...!!" 하디트가 전해 주는 시나의 상태에, 심각한 표정을 짓던 루드랫이 었다. 하지만 하디트가 이렇게 흥분해서 말하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잠깐... 하디트..." "왜? 서둘러야 해!! 오더식엔 쟁쟁한 스콰이어들이 나올 거야...!! 그래 봤자, 시나... 아니, 스온 아스나엘 님은 널 선택하겠지만!!!" 하디트는 빙그레 웃었다. "하하... 내가 직접 들었어." 사실은 하디트가, 시나의 방에 온 시종이 하는 말을 듣고, 흥분해 그렇게 부탁했다. 놀란 표정이던 시나는, 점차 기쁜 표정을 짓더니 잘 됐다고 하며 꼭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서 얼굴이 무 척 붉어져 있었지만. "루온 루드랫!! 넌,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루이트가 되는 거야!! 사 람들이 다음 대 카이러스 파이오니온이라고 말하는 왕족의!!" 사실은 시나가 누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하디트였지만. 사 람들은 시나가 누구라는 걸 모르므로. 하디트는 너무나 기뻤다. 이로 서 그 옛날의 명예와, 영광...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시 루드랫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시나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이런 상황 을 만들어준 엘에게도!! 하지만 그 기쁨은 루드랫의 말 때문에 사그라졌다. 루드랫은 약간 슬픈 듯 말했다. "...안돼. 디트. 이것이 그런 공식적인 것... 대규모의 것이라면... 난... 난, 끝까지 그녀를 지켜줄 수 없으니까. 나보다는 다른 루이트 가 그녀에게 어울려. 진짜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진짜' 루이 트." "....무슨...!!" "...그러니까... 나실인의 표징은 나중에. 디트, 미안. 지금은 바빠 서... 책 좀 읽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책을 집어드는 그 모습에, 하디트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이건? "넌, 그녀를 좋아한다고 했어--!! 그건 뭐야?!! 좋아한다면, 지켜야 지!! 넌 루이티온이니까!! 그녀의 종속주가 되고 싶을 만큼, 좋아했다 면!! 그녀를 지켜줘야지!! 뭐야?!! 개인적인 소유욕이야?!! 그녀가 이 젠 네 소유가 아니라서?!! 하지만 마인드 컨트롤하면 되잖아!!! '주 인'으로서!! 그게 루이티온이잖아?!! 예전에, 그분께 그렇게 하지 못 했던 건 그분이 너를 남편으로서만 원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 시나는 틀려!!! 너를 '루이트'로서 원하고 있어!! 그럼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녀를 좋아했다는 것!! 마노테온으로 살만큼 좋아했다는 것 이 거짓말이었어?!!! 그녀를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거야?!!" 루드랫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뭔가 괴로운 듯. "...좋아 해."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한다. 드디어 하디트는 뭔가를 눈치챘다. 그에 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제기랄---!!! 뭐가 문제인지 알겠어...!! 설마...!!! 설마, 넌, 아 직도, 그분을--!! 그래서 그런 거지?!! 그래서 시나의 루이트가 될 수 없는 거야!! 아님 이유가 뭐겠어?!! 그게 아니라면 이유를 말해봐!!! 이 거짓말쟁이 자식!!!!" 루드랫은 그렇게 말하는 하디트를 슬픈 눈으로 보았다. 거짓말...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자신은 '스온 아피네스 때문에'... 결코, 시 나의 루이트 같은 건 될 수 없다. 자신은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을 할 것이다. 루드랫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걸 인정하기 싫었는 지도 모른다. "...모르겠어. 시나에게 내가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 건지. ...하지 만 분명한 건, '영혼의 공명'이 아니니까... 그래서 난, 그녀의 루이 트가 될 수 없어." 시나는 하도 울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하디트가 힐러 라이 트를 쐬어준 덕분에 꽤 침착한 기분으로 연회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 었다. 여러 가지 인사말을 떠올리려 노력하고 호칭이랑...(머리가 아 픈 건, 이 탓도 있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어제 연회처럼 많은 불빛 이 보였다. 하지만 어제 보단 덜 긴장된다. '아냐... 더 긴장되는 건가.' 루드랫을 만날 수 있다니 너무나 기뻤다. 잠깐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약간 울컥한 기분을 느끼 게 하는 말도 해주고... 결국엔, 믿어준다고 해주면... 시나는 웃었 다. '자기가 뭘 믿는지도 모르면서...' ...아주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이 답답한 방도 견딜 수 있을 것 같 다. 악몽에 대해서도 상담해 본다면 좋을 텐데. 셰리카에 대해서도. 시나는 슬픈 얼굴을 했다. ...아직은 용기가 없다. 셰리카를 만나기 전에... 무언가 완화될 만한 것이 필요해. 그러면 정말, 잔인한 사실과 부딪히더라도.... 창문에 비친 시나의 눈이 흐려졌다. 그 눈을 본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억지로 다 른 생각. 맞아... 그리고 하디트의 바람대로, 루드랫이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루이트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재산도 많아질 테니, 스온 아피 네스라는 공주님과 도피행을 할 때, 편하기도 하겠지. 시나는 가까스 로 다시 웃었다. '하하... 내가 정말 드랫에게 많은 걸 해줄 수 있는데.' 엘야시온은 스온 아스나엘과 그 외 다른 왕족들에게 프로포즈하겠다 고 신청한 스콰이어들 및 루이트들의 서류를 들여다보고 신음을 했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건가? 자기도 모르게 아까 그 시종을 찌릿, 보았다. 시종은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있다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전, 클 로니아 세스틴 님과 시종들에게, '오더식'이라고 했는데... 그만, '일 반적인' 오더식으로 받아들인 듯... 그리곤... 소문이란 참 무섭군요, 엘야시온님. 하긴, 이런 세계혼이나 큰 행사를 맞아선 오더식은 흔히 있었으니까요. 그들이 그런 걸로 착각한 듯."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 고, "아무튼 죄송합니다."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정말로 미안 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까요? 이제라도 사실을?" '...끄응.' 엘야시온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걸 건네주던 자들이, 일을 왜 이 리 급하게 하냐고 투덜댔다나? 그나마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왕족(루 이트)가 있기에 마련이지. 엘야시온님은 정말 너무 멋대로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해심 좋게도 재빨리 이 사태에 순응한 듯(이건 평 소에 엘야시온이 자기 멋대로 하는 일들이 많아 버릇이 된 탓도 있었 다.) 이 많은 서류라니... '하아... 이거야 원.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스온 아스나 엘을 위한 서류가 묵직하긴 하지만... 적어도 루드랫 놈 나오지 않아, 민망해지는 사태도 피할 수 있고. 스온 아스나엘이 나중에 없어져, 실 망한 자들은 또 실망한 대로... 루드랫 놈... 이로서 스온 아스나엘의 루이트에서 빠져나가게 되었는데(서류에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나 도 아니고. 지금은 이게 가장 좋은 것 같군. 역시 엘의 뜻인가...' 그리고 서류를 들고 벌떡 일어선 엘야시온은 시종의 어깨를 툭툭 두 드려 주었다. "...잘 했네." 그리고 분연한 표정으로 연회장으로 가는 엘야시온. 시종은 뜻밖에 칭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오오-- 정말 엘야시온님에겐,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이런 오 더식이 있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포고를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 니까?" "아아... 거, 소문으론 사냥터 일 때문에 그런답디다. 그런데 무슨 일주일 포고요.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세계혼이고... 그러니, 흙의 날인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겠죠." "맞아요. 하긴. 급하지 않은 왕족들도 있을 테니, 그런 분들은 나중 에 하시지요." 그러자 투덜대던 왕족들이 말했다. "아니... 그렇더라도 어쩌겠습니 까? 남들 할 때 하는 게 낫지." 왕족들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 스콰이어들도 많고." 연회장엔 이젠, 어린 스콰이어들이 웅성웅성 들어오고 있는 참이었 다. 젊디젊은 얼굴엔 흥분이 가득했다. 어린 나이라 어른들의 연회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연회였다. 전부다 '프로포즈'를 위해 들어온 건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동료가 하는 프로포즈나 어른 들의 프로포즈를 보기 위해, 참관이 허락된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 하나. 눈에 띄는 시무룩한 얼굴이 있었다. "...루카나안! 힘내! 오늘만 잘해내면 되잖아...!" 동료들이 이렇게 격려를 해도 루카나안은 어디까지나 우울한 얼굴이 었다. 불의 날. 그 운명적인 결투의 날에. 자신이 바로 그 '대신하는 자'를 칼로 벴다. '마노테'인줄 알고 벴다 하나... 실은 왕족. 왕족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자신. 루이티온 루카나안이. 그것에 얼마나 충격 을 먹었는지. 그래서 결투에도 지고 말았다. (물론, 결투할 당시야 그 마노테가 실은 자기들 마스터의 주인인, 힐라토의 레이서스님의 여자였다는 것 에 충격을 받아, 제대로 싸우지 못한 거지만) 당시 마스터의 얼굴이 얼마나 푸르락붉으락 했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것에 신경이 쓰여서... 지고 나서, 불려간 뒤에도 굉장한 기합을 먹었다. 루이트 주제에 결투에나 신경을 쓸 것이지, 잔머리를 쓰니까, 졌다는 둥... 파의 수치라는 둥. 헌데, 다음날. 실은 그 마노테가 '왕족'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루 카나안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어떻게 자신이 '왕족'을!! 하지 만 지금에 와서는. 실은 '왕족'인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결투에서도 마음이 흔들려 진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상 급 루이트로서의 자존심이랄까... 하는 거였지만. 루카나안은 진심으 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어쩐지 그 회색 눈이 예사롭지 않았어... 기 타 등등.) 그러나 마음먹는 거야 개인 사정이고. '왕족을 벴다'는 오명은 계속 루카나안 뒤를 따라다녀. 이제 곧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을 어떻게 뵈어야 할지. 자신은 도대체 앞으로 왕족을 모실 수나 있는 건지. 어 린 마음에 앞날이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희망이라면... 루카나안은 한숨을, 길게 쉬며 연회장 앞에 있는 왕족들의 좌석을 보았다. 아직은 비어 있었지만... 저기에 앉을 그분. 그분에게 '프로포즈'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분 이 받아들여 준다면. 그에게도 희망은 있다. 마스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가라, 루온 루카나안. 네 희망은 그것 하나다!' 루카나안은 중얼거렸다. 가슴이 떨려 견딜 수 없었다. '영혼의 공 명'도 이보단 심하지 않을 것 같다. '엘이시여... 제발.' 헌데 그런 그를(두 손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를) 누군가 지나 가다가 툭 건드렸다. "....?" "....?" 그쪽도 실수인 듯 했는데 서로 의아한 얼굴로 보고, 곧바로 서로간 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상대가 먼저 쏘아붙였다. "쳇!! 왕족인 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어쩐지 가슴이 떨려 졌다고? 뻥쟁이, 녀석!!" 루카나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꺼져. 루유다! 너 따위 시골 루이트 따위가 상급 루이트의 감을 어떻게 알아?!!" "그놈의 감, 두 번만 좋았다간 반역죄로 멸문 당해도 할말없겠네!!" "이게--!!" 하지만 그때, 엘야시온의 입장을 고하는 문지기의 말이 있었다. 연 회장은 절을 하는 사람들로 잠시, 조용해졌고 두 명의 스콰이어도 마 찬가지였다. 루이티온들의 프로포즈는 계속되었다. 우선은 마이레스의 공주인 스 온 자스민에 대해 프로포즈하는 루이트들. 스온 자스민은 연회장 가운데 서 있었고, 루이트들은 한 사람 씩 나 와 스온 자스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스웰디온 자스민. 도미니온즈의 영광이신 당신에게 저, 파워즈 이 렇게 프로포즈하오니, 부디 이것을 받아들여주시길. 제 생명과 제 영 혼을 다해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자스민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용기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키스는 없었다. 그 여성 루이트는 실망한 얼굴로 일어섰다. 하지만 나중에 어쩌면 또 한번의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왕족들은 자리에 앉아 그런 모양을 보며 수군거렸다. "스온 자스민 이 꽤 눈이 높군요. 지금까지 루이트들을 다 거절하게." 마이레스 가리테스가 허허, 웃었다. "저 아이가 나를 닮아, 사람을 꽤 가립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자스민이 모든 루이트를 거절하고(게다가 마지막 선택의 말까지도 거절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당황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 자스민? 얘야! 여긴 아주 훌륭한 루이트들이 많은데...! 그들 을 다 거절하면..." "하지만 싫어요 아버지. 내가 원하는 루이트는 안 나왔어요." "...그게 누군데?" "힐라토의 루온 루카나안이나..." 마이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나중에 주선해 보마. 하 지만 남자 아니냐. 남자는 별로 안 좋아. 다른..." "힐라토의 루온 루드랫..." "..........뭐?" "응... 뭐니뭐니 해도, 루이트는 덩치 좋고, 잘 생긴 게 제일이거든 요." 마이레스는, 자스민을 빤히 보았다. 그는 자신의 딸이 이렇게 커갈 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어져 간다는 것에, 뭐라 말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뷰겐트 제로미스는 아쉬운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내 딸, 이라스다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려 자이온, '루세'에 있었다. "그래도 세계혼이니까... 왕족들도 뵈게 할 겸, 이번에 불러올걸. 내년에 토너 먼트도 있고 하니 왕족들은 그때 뵙고, 공부나 하라고 그곳에 있게 했 지만. 참 아쉽군요." "좋은 기회가 있겠지요. 아... 저기! 드디어 스온 아스나엘...!! 오...!!" 왕족들은 감탄을 했다. 스온 아스나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굉장히 많은 루이트들이 참관하던 데서 한발자국 씩 앞으로 나왔다. 다들 '프로포즈'의 의사를 밝힌 것이다. 여성 루이티온이 당연히 압도 적으로 많았고, 남성 루이티온도 적지 않았다. 한 왕족이 엘야시온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저 대신하는 자는 인기가 좋지 않습니까? 역시 엘야시온의 배우자로..." 엘야시온은 비꼬았다. "그런가? 그럼 저들 다 들어가라고 할까? 엘 야시온의 배우자가, 무슨 루이티온인가?" 그래서 그 왕족은 입을 다물었다. 스온 아스나엘에게 프로포즈하는 루이트들 중, 우선권은 카이러스에게 있었다. 문지기가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청(請)으로 뽑았다. "스아디온 아스나엘. 도미니온즈의 영광이신 당신에게 저, 파워즈 이렇게 프로포즈하오니, 부디 이것을 받아들여주시길. 제 생명과 제 영혼을 다해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시나는 자기 앞에 무릎 꿇은 키 큰, 여성 루이트를 당황한 미소로 보았다. 처음이라 떨렸다. 하지만 확실하게 거절해야 한다. "어... 당신의 용기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여성 루이트는 아쉬운 얼굴로 일어났지만, 시나를 향해 예의바르게 절하고 물러갔다. 그런 사람들이 거의 30명 정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자들 이 그 배는 되는 듯 싶었다. 다들 시나에게 '영혼의 공명'이라든지 그 런 걸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야 선택만 된다면 마인드 컨트롤 할 수도 있는 문제고. 시나의 신분이라는 것과, 앞으로 그녀가 상속받을 명예와 영광은 어마어마했다. 거기다 보통 때면 당연히 제한을 두는 '쥬인 급'이라든지, '오더 급'같은 제한 조건도 없는... 스콰이어들도 할 수 있는 프로포즈라 다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녀 앞에 나선 것이다. 엘스제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옆자리의 마리스를 보았 다. 며칠동안 심정적으로 꽤 파란을 겪은 그이지만, 이젠 쾌활함을 되 찾고 있었다. "스온 아스나엘이 꽤 잘하지요, 마리스?" 엘스제는 시나를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같은 카이러스 스아디온... 어제 연회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어쩐지 누나 같기도 하고... 헤헤.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은데.... 엘야시온님이 도저히 허락을 안 하시네요. 마리스, 어떨까요? 우리 같이 졸라볼까요? 마리스라 면... 그럼 허락해 주실 지도 몰라요." 하지만 마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예의 그 희미한 미소를 머금 을 뿐이었다. "글쎄요... 엘야시온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무리한 일은 청하지 않은 것이 좋아요..." "에... 그런가요.." 엘스제는 수긍을 하고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지, 시나를 빤히 보았다. 마리스는 그런 엘스제를 보고 미소 지은 뒤, 시나에게로 시선을 돌 렸다. 카이러스 스아디온... 마리스의 입술이 올라갔다. '꼭... 그때 같네. 이 상황들은... 하지 만 그때와는 아주 같지 않은...' 마리스의 눈은 약간 차가워졌다. 루온 루바인은 연회장 구석에서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이글대는 눈 으로 시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더식... 결국은 그런 건가? 엘야시온 가디엘이, 저 소녀를 카이러 스 파이오니온으로? 그리고 저들은, 재빠르게 그 '카이러스 파이오니 온'에 빌붙어 뭔가를 얻어먹으려는 자들이고? 그렇다면, 엘야시온 가디엘의 '약속' 따윈 이제 믿을게 못되겠군. 갑자기 루바인의 입 속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그는 포도주 잔 의 포도주를 한꺼번에 다 마시고 잔을 가까운데 있는 시종에게 넘겨주 었다. 그리고 몸을 휙 돌려 연회장을 떠났다. 차라리 떠나는 것이 낫 다. 구역질이 날 정도니까. '스온 아스나엘'의 과거와 배경을 조사해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루온 루드랫과 바리스 마노테오나뿐. 하지만 결국, 루온 루바인에게 필요한 건 스온 아스나엘의 과거나 배경이 아니니까 별 상관없었다. 연회장 바깥의 어두운 복도로 돌아갈 때, 루온 루바인의 눈 또한 어둡게 빛났다. "약속... 이쪽에서 지키게 해주지요. 엘야시온 가디엘 님..." 겐트온은, 연회장 가운데 서 있는 시나를 음미하듯 아래위로 훑었 다. "멋진 걸. 과연... 옷이 날개라더니. 훨씬 미인이 되었어." "오빠... 저 소녀가... 그..." 옆에 있던 아마사가 속삭였다. 원래는 이런 사람 많은 연회에 나오 면 안되지만 꼭 시나를 보고 싶다고 해 데리고 온 것이다. 겐트온이 말했다. "그래. 저 소녀가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 아니, 종속자였던 스온 아스나엘이다. 후후... 지금은 힐라토 레이서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데. 복도 많은 아가씨지. 하지만, 뭐... 앞으로 더 많은 복을 누리게 될 거야. 우리 쪽으로 오게 될 테니." 아마사는 흐린 눈을 했다. "오빠... 나... 저 여자 애... 한 번 본 적 있어. 언니와 함께. 그런데... 언니가 저 여자 애, 마음에 들어했 어." "---!!" 겐트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난... 저 여자 애 싫어. 너무나... 정말로 싫어... 왜 굳 이..." 아마사는 흐린 청회색 눈으로 겐트온을 보았다. "왜 굳이, 저 여자 애가 필요해?" 겐트온은 가만히 아마사를 보다가, 다시 시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묘하구나. 네가 그렇게 뚜렷이 '싫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역시," 미소가 그 입술에 걸렸다. "샤일라테가 저 여자 애를 좋다고 했기 때문?" "---!!" "샤일라테가 '좋다'고 한 여자 애는 처음 봤으니까." 겐트온의 미소짓는 푸른 눈은 시나가 난처하게 절하는 모습을 쫓고 있었다. "넌, 샤일라테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 싫어하지? 그래서 넌, 세상 대부분의 사람을 좋아하고, 극소수의 사람을 미워하지." 아마사는 인상을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 아...!!" 하지만 겐트온은 한가롭게 말을 이었다. "그래? 하지만, 이건 어때? 샤일라테는 널 무척 미워하거든. 그럼 넌, 너 자신을 아주 사랑하겠구 나?" "......!!!" 아마사의 입술이 떨리는 걸 흘끗, 본 겐트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왜 굳이, 저 여자애가 필요한지. 그런 것, 묻지 마라, 아 마사. 신경 거슬리게 하지마. 모든 건 내가 결정하니까. 넌 그냥 따르 기만 해. 연회에 데려다 줬으니, 감사하게 즐기라고. 그리고..." 겐트온의 눈은 냉랭하게 빛났다. "...혹, 저 여자 애에게 손대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 안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나는 또 한 번의 거절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루드랫은 언제 오는 걸까. 시녀들이 의젓하게 하라고 그렇게 교육을 했지만, 그래도 시나는 살짝 연회장 주변을 둘러보았 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파이오니온... 레겜만이 미소짓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을 뿐. 그가 시나의 눈길을 알아채고 더욱 깊은 미소를 보내 왔다. 시나도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 가 시나를 불렀다. "...스온 아스나엘님? 스온...?" "...예?" 한 여성 루이트가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윽!! 실수!!' 어느새 다른 루이트가 프로포즈 한 것이다. "에... 당신의 용기에 감사합니다." 시나는 역시 절을 하고,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왕족들은 방금, 그런 시나의 모습을 보고 서로간에 의미 있는 눈길 을 주고받았다. "확실히 그렇군요." "네... 난, 엘야시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저 스온 아스나엘도 역시..." "그럼 역시 엘야시온 배우자 건은?" "...물 건너 간 거죠." 흐음... 왕족들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어쩌죠?" "...우린들 알겠습니까? 힐라토에서 알아서 할 일이겠죠. 그 정도야 생각해 놨을 것 아닙니까? 대신하는 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왕족들은 어쩐지 약간 심술궂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시나는 새롭게 나오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는 약간 긴장한 마음에서, 어느 정도 반복적인 일로... 이젠 어쩌면 지루하다 고도 생각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시종이 고했다. "힐라토의 루이티온 루카나안!! 카이러스 스아디온 아스나엘께 프로 포즈합니다!!" 사람들이 탄성을 냈다. "저, 루온 루카나안이!!" "속죄의 의미인가?!" 결투 사건과, 왕족을 벤 일로 상당히 명성에 먹칠을 한 루카나안이 지만, 그래도 명백한 상급 루이트의 자질을 가진 자로서 왕족들이 탐 내는 자가. 카이러스의 인간도 아니면서, 일부러 프로포즈한 건 스온 아스나엘에게도 상당한 명예였다. 힐라토의 왕족들이 안 좋아할 만도 하지만, 글세... 힐라토 레이서스야 오히려 흐뭇해하는 얼굴이고. 루 온 루파르테는 그 옆에서 뭐라고, 뭐라고,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속삭 이는 모습으로 봐서... 힐라토 레이서스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 고, 루파르테에게 미소. 아무래도 이건 힐라토들의 지시를 받은 일인 듯. 왕족 중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칼리안이 문제가 아니라, 힐라토가 문제로군." 루카나안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아디온 아스나엘. 도미니온 즈의 영광이신 당신에게 저, 파워즈 이렇게 프로포즈하오니, 부디 이 것을 받아들여주시길. 제 생명과 제 영혼을 다해 당신을 섬기겠습니 다. 시나는 놀랐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말했다. 그때의 잔인했던 눈이, 저런 눈도 되는구나. "다, 당신의 용기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절을 하고, 약간 뒤로 물러났다. 그 거절의 표시에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루카나안을 거절하다니!(아깝다!) 역시, 루온 루드 랫을 루이트로 맞는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인가? 그럼 루카나안은 전 시(?)용? 힐라토 레이서스는 도대체...!! 하지만 이런 속삭임이 가라앉기도 전, 루카나안이 그대로 무릎꿇은 채로 말했다. "...왜 입니까?" 그 자존심 상한 목소리. 연회장이 일시에 조용해 졌다. 루카나안은 붉게 보이기까지 하는 눈을 들고 시나를 보았다. "역시, 제가 당신을 상하게 해서? 용서해 주십시오!! 무척 후회했습 니다!! 그러니, 저를 받아들여주십시오!! 그걸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제 생명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시나는 물론 당황했다. 그냥, '당신의 용기에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된다고 했잖은가? 그런데, 이 어린 소년이 이렇게 나오니, 어떻게 해 야 할지? 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에서도 역시, 어이없 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루카나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스온 아스나엘 님?!" 시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제야 시종이 말했다. "루이티온 루 카나안 님!! 뒤로!! 나중에 다시 한번 선택의 때를 기다리시고...!!! 이런 무례를 행하시다니!!" 하지만 그때, 루카나안이 무릎꿇은 채로 소리쳤다. "무례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거절당한 것이, 혹 그때의 일 때문이라면, 죄송하다 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내 생명을 바쳐서 지키 겠다고...!! 평생이라도 말입니다!!" "그, 글세 마음은 알겠으나..." 시나는 시종과 루카나안의 이런 대화에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사 람들이 온통 시나와 루카나안을 주목하고... 시나는 열심히 머리를 짜 냈다. 그러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난 약속한 루이트가 있어서 안 된다는 말을, 왕궁 식으로 하려면... 하지만, '파워즈, 그대의 호의는 고맙지만...'으로 시작되는 그 긴 말은, 무심코 연회장 입구로 눈을 돌렸을 때, 그만 머릿속에서 다 날 아가 버리고 말았다. 키가 큰... 은발... 그 기둥 뒤에서 보이는 그것 은 분명!! 루드랫...!!! 시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루온 루카나안?" 시종과 말씨름하던 루카나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갑자기 시나 는 허리를 굽혀, 그의 어깨를 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 게 올바른 행동인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매우 무례한 행동인 데... 이 소년은 남동생 뻘이니까... "루카나안? 내가 그대를 선택하지 않은 건... 용서하지 않아서가 아 니니까. 루카나안을 이미 용서했어요. 베였던 상처는 다 나았으니까. 후회하고 있다니, 무척 안심했어요...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베는 건 별로 좋은 소년이 할 짓이 아니니까." 루카나안의 얼굴이 멍해졌다. 하지만 시나는 서둘러 말했다. 루드랫 은 왠지 연회장을 떠나려는 듯 했고, 지금은 멈춰서 있는 듯 하지만, ...급했다. "아무튼!! 자존심 상해하지 말아요!! 루카나안은 나보다 훨씬 훌륭 한 왕족을.... 그럼, 이만..." "스, 스온 아스나엘 님...?!!" 시나가 몸을 움직여 그 옆을 빠져나가자, 루카나안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스온 아스나엘 님!!" 하지만 시나는 이미 긴 로브 자락을 움켜쥐고, 연회장 입구로 달리 고 있었다. "루드랫!!!" 엘야시온을 비롯한 왕족들이 다 일어나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스온 아스나엘이 부르는 자...!! 루이티온 루드랫? "루드랫!! 왜, 그냥 가는 거예요?!!" 루드랫은, 황당한 얼굴로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시나를 보고 있었 다. 전에 봤을 때보다, 몸에 잘 맞는 드레스에... 아름다운 보석... 무척 예뻐졌다. 몰라볼 정도로. 그래서 잠시, 루이트들에게 프로포즈 받는 걸, 보고있었다. 상태가 나쁘다고 하기에 어떤가 했더니, 미소짓는 모습이 여전해 보 여. 굳이 계속 지켜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 될 테니까... 지금은 서재에나... 그런데... 시나는 달려와, 루드랫의 손을 잡았다. "루드랫!!" 이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의... 루드랫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나..." 시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활짝 웃었다. "하하... 그래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말했다. "드랫? 디트가 한 말 들 었죠! 디트가 나한테 부탁했어요!! 자아, 그럼 이제 내가 프로포즈를 받아들일게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말 그대로 프로포즈를 받 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는 거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드랫은 시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놀라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깐...!!" 하지만 늦었다. 시나가 말을 했다. 몹시 어렵게 외운 듯. 고심을 하 며... "루이티온 루드랫. 나, 스아디온 아스나엘은-- 그대를 내 루이트로 맞아, 얼마나 기쁜지-- 그대가 나를 위해, 그대의 생명과 영혼을 걸었 으니, 나 또한 신의로-- 그대의 충성을 받아, 그대를 평생 나의 루이 트로. 이 황금의 맹세를 받습니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경악했다. 루이티온이 맹세의 말, 프로포즈도 안 했는데, 왕족 쪽에서 저런 말을---!!! 그것도 이런 공개적인 '오더식'에서!!!! 더구나, 제대로 된 루이티 온도 아닌 자한테!!!! 루온 루드랫은 척 보기에도, 루이티온들의 의장용 갑옷이 아닌, 그 냥 평범한 옷차림이었고... 아마, 머리카락도.... 그런데, 저런 말 을?!! 이 수치, 이 모욕!! 왕족들은 다들 턱이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완전히 굳어져 있었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연회장, 상 석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엘이시여-----!!'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괴로운 일이었다. 누가 이 '오더식'을 하자 고 했는지!! 그 시종은 당장 파면이었다. 그 시종, 사돈의 팔촌까 지!!! 대대로!! 파면이었다!!! 이건 스아디온 아스나엘에게도 부끄러움이고, 루이티온 루드랫에게 도 부끄러움이 되는 일이었다. 의관도 정제하지 않은 채, 이런 프로포 즈에...!!!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엘야시온 가디엘은 신음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엘이시여 --!!' 루드랫은 창백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하디트가 바라는 대로해서 기쁜 시나였지만. 루드랫이 어둡고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시 나의 미소 띈 얼굴은 점차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시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시나는 루드랫을 보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거예요?" 그러자 루드랫이 괴롭고,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온 아스나엘 님... 저는..." "-------!!!" 시나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깨달았다. 그의 가라 앉은 남색 눈동자... 무언(無言)의 그 말. '...저는, 당신의 루이트가 될 수 없습니다.' "....." 시나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때야 명료하게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착각도. 하긴... 이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구한 것도 싫어했는데. 왜, '당 연히' 루이트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을 한 걸까. 하디트가 말하는 건, 결코 이 사람이 원하는 게 아닌데.(언제나 그랬지 않나?) 그런데 왜, '당연히' 무슨 관계를 맺어 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어쩌 면... 매우 당연하게도,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외롭다고 투정을 부리 고... 그를 원망하고...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게 아니다... 루드랫은 이제 자신에게 어떤 '책 임'도 없는 것이다. 시나가 아무리 '은혜'를 베풀 듯, 말해도. 결국 이 사람은 아피네스 공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마노테오나에 살 정도로-- 결국은, 이런 '은혜'는 전혀 개의치 않으니까... 자신이 가진 이런 작은 힘으 론 안 되는 것이다. 시나는 중얼거렸다. "...실수를... 실수를 했네요."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 다. 입술이 떨렸다. 부끄럽고 슬프고, 하는 감정 보단. 마치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듯한 충격만이 있었다. ...이게 이런 거였나...? 사실은, 아주 잠깐만 루이트로 있어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고 작 일주일 정도. 그러면 될 테니... 그 후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 그러면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루이트로서, 얼마든지... 아피네스 공주님에게 더 잘해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그런 것마 저 요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지도 모르니까. ...시나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시나의 힘이 많고, 적어서가 아닌... 설사, 시나 자신이 온 우주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원하지 않 기 때문에. 또한 마찬가지로... 시나 자신이 만약 무언가 그의 도움을 얻고 싶 다면... 그가 스스로. 그녀에게 해주어야 한다. 어떤 걸 가지고도 그 의 도움을 '살수'는 없다. 어느새, 자신은 자못 무엇이라도 된 듯--이 어리석은 마음--그에게 좋은 조건을 내걸고 있었지만. 사실은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처음부터 그는... 시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등을 꼿꼿이 하고, 예의바르게 인사 했다. 시녀들에게 배운 대로, 다리를 살짝 굽혀서. "...미안해요, 멋대로. 루온 루드랫... 죄송합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 고집불통!!! 루드랫--!!!' 엘야시온 가디엘은 계속 신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맨 처음, 이게 무슨 상황인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루온 루드랫이 연회장에서 나 가버리고 나서야 이 상황을 깨닫고, 마치 폭풍우처럼 웅성대기 시작했 다. 왕족이 루이티온에게 먼저 맹세의 말을 했는데--그걸 루이티온 쪽에 서 거절했다---!!! 이건 그야말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사건이었다. 당연히 누군가, 스온 아스나엘의 명예를 위해서 나섰다. "제가-- 스온 아스나엘 님을 위해서, 결투하겠습니다!! 이번에야말 로!!" 루온 루카나안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당사자인 아스나엘에 의해 취하되었다. 아스나엘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당신이, 나를 위해 싸우나요?" 시나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도대체, 저 '대신하는 자'는 왕족으로서-- 결국 엘야시온은 현명하게도, 그날의 연회--오더식을 거기서 마치기 로 했다. "...스온 아스나엘을 내 방으로...!" 가디엘은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고개를 들고, 신경질 적으로 시나 를 쏘아보곤--시나의 고개를 푹 숙인 모습. 그 새파란 얼굴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다시 왔다갔다 걸었다. 하지만 조금 걷다가 다시 한 번 시나를 쏘아보고... 시나가 한 일 때문에, 시나 자신의 평판은 물론이고, 루온 루드랫의 평판까지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그 동안 엘야시온 가디엘 자신이 쌓 아온- 하지만 다시 한 번 시나를 보았을 때--시나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 고. 가디엘은 결국 한숨을 길게, 쉬고 말았다. "...하긴... 내 잘못이지... 왜 애꿎은 여자 애를 놓고... 뭘 아는 게 있다고... 하아--- 애초에, 시종을 꾸짖고 말았어야 하는데... 왜 이리 일이 꼬이기만 하는지. 나 참--" 그리고 엘야시온 가디엘은 시나 앞에 가, 시나의 어깨를 손으로 두 드리며 말했다. "하아... 됐네, 칼루스온인. 이젠 그만 방으로 돌아가 자게... 너무 무리한 일을 시켜 미안했네. 연회에도, 당분간 안 나와도 돼." 사람들에겐, 여러 가지 교육 때문에 바쁘다고 하면 된다. "그냥, 푹 쉬게. 마음 편히... 알겠나? 아, 그렇지...! 자네의 친구라는 셰리카 도 왕궁으로 불러 들여서... 편안히 지내게. 알겠지?" 시나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모습에 가디엘은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루드랫은 나중에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스스로도 몹시 피곤했다. 하디트는 방금들은 소식에 말문이 막혀 있다가 결국 "맙소사!"라는 말을 뱉고 루드랫의 숙소로 향했다. 다행히 그는 거기에 있었다.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채로. 하지만 그는, 하디트가 들어가자 하디트를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나가-!!" 그 기세에 놀란 하디트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갈 수가...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시나에게 그런 망신을 주다니... 넌..." 하지만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하디트는 루드랫에게 멱살을 잡혔 다. "닥쳐!! 어떻게 그런 망신을 줄 수 있었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 는지-- 그 심정을-- 지금 이 자리에서 네게 말해야 한다고?!!" "루...드랫!!" 루드랫의 눈에서 빛나는 어두운 것들. 그건 하디트가 전혀 기대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하디트가, 당연히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좀 더 차갑고, 좀 더 무뚝뚝한, 속이 뒤집어 질 정도로, 맹목적인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 그러나 이건...! 루드랫은 진심으로, 살기를 삼아 말했다. "당장, 이방에서 꺼져!!! 하온 하디트!!! 아니면 목을 부러뜨려 버리겠어!! 시나에게 나를 선택 하라는 말 따위 한 널!!! 아니면---!!!" "---!!" 루드랫은 물러났다. 하디트를 노려보던 눈에 빛을 잃고. "아니 면...! ...제기랄...! 왜 내가, 널 원망을!! 그곳엘 아예 발 들여놓지 말았어야 하는 건 난데!! 네 말을 듣고도,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채 천치처럼 그곳에 간 건 바로 난데!!" 하디트는 핏기 잃은 얼굴로 바닥을 보았다. 멱살을 잡혔던 덕에 말 하기 힘들었지만. "....넌 갔어야... 했어. 네가 잘못한 건 그녀의 프 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뿐이야!" 루드랫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하디트를 보았다. "....닥쳐." "루드랫!! 시나는 널 기다렸을 거야!! 내가 그런 말 안 했어도, 시 종이 와서 이야길 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안 갔다면 역시 상처받 았을 거라고!!" "그런 건, 차라리 괜찮아!! 그러니--!!" "똑같아-!! 시나는 너와 이야길 나누고 싶어했어!! 아까 물었지?!! 어디가 아픈 거냐고?!! 요즘의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 보여서--!! 아까 도 눈물을 끝없이 흘리며!! 전혀 예전의 그녀 같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연회에 온다니까 다시 예전처럼...!!" "---!!!" "네게 무슨 말인가를 듣길 원했어!! 제발 가서 그게 무언지 물어봐 줘!! 연회장에서 네가, 내가 들은 그대로 했다면--!!" 하디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칼루스온 인이라고 해도....!! 눈 물을 흘리는 건 똑같은데...! 상처를 받았을 거다. 자신의 잘못. 시나 가 자신의 위로하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것처럼 시나가 필요로 할 때 도와줬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나는 강한 아가씨니까, 괜찮을 거라 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끼어 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받은 모욕... 진심으로... 하디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발... 가서, 봐줘. 시나의 방을 알려 줄 테니... 일층이니까... 창문 쪽으로... 아니면, 나하고라도 같이... 가 줘. 제발."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3- 관련자료:없음 [25543]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9:52 조회:1110 "아스나... 편히 쉬도록." 헤어지기 전 레이서스가 시나의 이마에 입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시나는 망설이며 말했다. "레겜... '아스나'가 아닌... 시나라고 해주시겠어요? 언제나 그 이 름으로만." 레이서스는 약간 놀라면서도 기쁜 눈으로 시나를 보았다. 사실은 아 까. 레이서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 쾌한 마음... 이 불쾌한 마음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루드랫이, 왜 시 나를 거절했는지--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레이서스였으므로 어쩌면, 루드랫의 그런 행동에 믿음을 가져야 할 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의 불쾌한 마음은. 자신에게 미소짓던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환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달려가던 시나의 모습. 그리고 그 환한 얼굴이 바로 루이티온 루드랫에게 향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실은 너무나 불쾌해서 견딜 수 없었다. 오랫동안 헤어진 무언가가 만나듯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모습이. 하지만 지금 시나는 여기에 있다. 레이서스는 어쩌면 안도한 마음으 로, 시나를 끌어 당겨 살짝 안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마음이 상했을 테지만. 그대도 나도, 왜 루드랫이 그랬는지 알 고 있으니까. 대신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 있겠어. 괜찮을 거야, 시나." 시나는 아까보다 훨씬 망설이면서 레이서스의 가슴에 기댔다. 편하 다... 이렇게 언제까지나, 편하게. 차라리 이런 식으로 계속 있을 수 있다면. 사실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이젠 아빠의 모습, 음성마저도 희 미해져서. 마음이 너무 괴로워. 시나는 웃었다. '아빠는... 딸을 시집보낸 셈치고... 왕이라니 얼마나 좋담... 아빠 는 왕을 사위로 둔 거야...' 그렇지. 그렇게 해도 너무나 좋을 거야. 하지만... 시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젠 어떤 한계 상황이다. 그녀로서는 이게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 굉장한 시간이 흐른 지도 모르고, 아님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건 지도 모른다. 또다시 시나는 천개를 보며 누워 있었다. 방안엔 희미한 촛불. 반복되는 일들. 수많은 밤들을 이렇게 똑같이 반복하며 누워있게 될 것이다... 시나는 손을 들어 허공의 뭔가를 잡으려는 듯 펼쳤다. 이렇게 있으니,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 나는 것 같다. 혼자 있을 때 는. 아주 외롭고 쓸쓸할 때는 이런 식의 놀이를 했다. 허공... 까맣고 그,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성냥불을 키듯 손을 벌려, 간절히 소원을 빌면... 작은 빛. 그 안에 빛나는 것을 들여다보면. 따뜻한 가족. 큰 웃음. 즐거운 식탁... 시나는 미소지었다. 지금도 이렇게... 가장 바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면. 허공이... 일그러졌다. 루드랫은 서재로 가서, 촛불을 들고 책들을 아래에서 위까지 훑어보 고 있었다. 스스로도 이게 도피에 가까운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이것이 전부였다. 어떻게 그가 하디트의 말 대로 시나를 보러 갈 수 있겠는가? 이제 와서? 지금에야 그녀를 보러 가면...? 시녀들에게 들키지 않게 갈 수 있다 고? 밤에 숨어들어 갈 수 있다고? 앞으로 그녀의 평판이 어디까지 떨어 지도록, 그가 그런 역할을 해야한단 말인가? "제기랄!!" 루드랫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찾고 있는 책이 없었다. '판테온' 이것에 관한 책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히 어떤 확신이 들었다. 확실히 '여기에' 있 다. 루드랫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가... 따로 놔둔 것일까? 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하지만 바로 그때. 불기 없어 춥고, 메마른 양피지 냄새만 나는 그 곳에... 어떤 인기척이 들렸다. 불빛이 새어 나갈까봐 촛불 하나만 들 고 있었는데. 방금까지도 없던...? 루드랫은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으로, 촛불을 인기척이 들렸다고 생각한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지만 저 실루엣... 설마....?!!! 루드랫은 숨을 멈췄다, 뱉으며 천천히 말했다. "....시...나...?" 시나는 똑같은 어둠이지만, 그것이 순식간에, 뭔가 질이 다른 걸로 변해 이상한 느낌으로 있었다. 누워있는 곳도, 더 좁고 불편한...? 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어디지?" 훨씬 더 캄캄한 곳. 생소한 냄새... 아니, 언젠가 한번 맡기는 했지 만. 그것이 언제였더라? 그 생각을 더듬는데. 헌데 바로 그때, 방 한 구석에서 촛불이 비치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 는 소리. 시나는 눈을 돌리고, 그의 모습을 보았다. "드랫..." 루드랫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어쩌면 이쪽을 유령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나는 이것을 분명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일 들. 그렇게 해서 본 환상은 시나의 상상력이 풍부해 지어낸 이야기들 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했고. 그래서 말도 못했던 그 이야기 들은, 실제로도 다 꿈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잊어버린 이야기들. 하지 만... 어릴 때도 그랬듯. 지금도 이 꿈은, 시나의 어떤 간절한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므로. 시나는 일어나서, 뜻밖의 이 만남에,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기뻤다. "신기한 꿈이네요." "...꿈?" 루드랫은 의심스럽게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하긴. 뭔가 공기가 이상하게 변해 있긴 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니면 경직된 듯. 손 에 들고 있는 촛불마저도 깜빡임 없이 이상할 정도로 활활 타오르고. 그래서 이것 외엔 특별한 빛이 없는 데도 아까보다 훨씬 잘, 방안의 사 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나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으니까. 이상한 공기. 가라앉은... 무겁고 묵직한 공기로, 루드랫 자신조차도 이것이 마치 꿈의 연장인 듯 그렇게 느껴질 정도였다. 경계심을 풀고, 온몸의 신경을 나른하게 하는... 시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잠자리에 있었던 듯, 잠옷 차림이었다. "드랫... 잠깐, 이야기를 들어주겠어요? 꿈이니까... 맘놓고 이야기 를 해도 되죠? 내가 칼루스온 인이라는 것을 말해도 되죠?" 루드랫은 너무나 몸에 힘이 빠져, 촛불을 더 이상 들고 있을 수 없 어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 했다. "드랫...?" 루드랫은 시나를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를 온 거 지?" 말을 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짙은 공기. 시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 더니 말했다. "몰라요. 꿈인데... 아마 잠이 든 것 같아요." "시녀들은..." "그들도 자고 있겠죠." 루드랫은 그런 시나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바깥에 귀기울였다. 하 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인기척은 물론이고. 정말로, '아무 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들릴법한 바람소리조차도... 공기는 한층 더 무겁게. 자꾸만 더 무겁게 가라앉고만 있었다. 그래서 루드랫 은, 이젠 이것이 언제나 있어왔던 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예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한 밤중, 홀로 있을 때, 가끔 찾아오고 했던... 시나는 이 제 점차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꿈이지만, 자기 스스 로도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확실히... 이건 꿈이라도 너무한 일이다. 꿈이라도 어떤 예의가 있 어야 법이다. 하지만 어떻겠는가? 언제나 이런 식이었는데. 갑자기 나 타나는... 루드랫은 결국은, 미소 지었다. 꿈이든, 아니든. 이젠 상관없다는 기분이었다. 시나 쪽에서 찾아 왔으니. "...이야기라..." 루드랫은 진지하게 말했다. "밤이 늦은 것 같지 만... 하지만 잠깐이라면. 칼루스온이 뭐지?" 시나는 안심한 듯 웃었다. "정말이죠?" "아..." 루드랫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칼루스온이라면!! 이런 교육 따윈 받지 않아도 괜찮은 거잖아 요! 하루종일 방안에 가둬두고...! 돌아갈 때까지, 사람들도 만나지 못 한 채, 이런 교육만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땐... 아무래도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요. 엘야시온님은 정말 너무해요...!" 루드랫은 맞장구쳤다. "흐음... 맞아. 좋은 분이긴 한데. 너무 주관 이 뚜렷해서. 가끔은 옆에 있기 피곤할 정도지... 곤란해 정말." "하하... 알고 있네요!"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나가 칼루스온이라는 것... 엘야시온님이 루드랫 때문에, 시나에게 요구한 것. 기타 등등, 엘야시온님, 흉보기. 시나 쪽은 루드랫에게 모두 다 이 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로 좋았다. "으으... 거기다 춤 수업까지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땐! 끔찍해 요..!!" 루드랫이 웃었다. "왜 네가? 너를 가르치는 선생 쪽이 끔찍하다면 몰라도..." ".....그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태도예요?" "...아.. 그래. 좀더 편파적인 태도를 유지하도록 할게." 꿈이라서 그런가 루드랫은 꽤 상냥해져 있었다. 그래서 시나는 방금 그가 약간 이상한 단어(편...)를 사용한 걸 알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루드랫은 춤 수업을 받아야 했던 시나에게, 착실하게, 동정까지 해주었다. "춤출 때, 너무 몸을 굳히는 경향이 있어. 일일이 스텝에 신경 쓰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음악을 몸에 익히면 좋을 텐데." 충고도 해주려 노력하고. "글세. 일일이, 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사실은 별로 신경 쓸 스텝도 없어요. 춤출 땐 머릿속이 하얘져서 스텝 도 그다지 생각나지 않으니까." "...유감이군." 아쉬워도 해주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꽤 홀가분해 있었다고 할까. 루드 랫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기분이 좋아진 시나는 갑자기 말했다. "...음... 드랫이 정말로 내 오빠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드랫이랑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어요." 그 말에 루드랫이 시나를 보았다. 몹시 의아한 눈으로. 시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왜요?" "...언젠가, 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어? 오빠가 되면 좋을 것 같 다고?" "에... 아니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여동생'이니, '오빠'니 했었지만 이런 소리를 한 건 처음이다. 하지만 루드랫은 계속 말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루드랫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 어쩐지 궁금해진 시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드랫이 뭐라고 했 는데요?" "아니... 기억이..." 루드랫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손으로 눌렀 다. 그리고 천천히 말하길. "아... 맞아. 아마 내가... 거절했었지. 난 원래 혼자 자랐으니까. 여동생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시나는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요?" 루드랫은 약간 미소지었다. "...갑자기 울상을 지으면서. 나를 설득 하려고 했지. 한가족이 되면, 언제나 만날 수 있다고. 한가족이 되 면..." 그가 기억을 더듬는 모습에,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드랫이 오빠라면. 언제나 볼 수 있으니까... 가끔 불쑥, 방으로 찾아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죠. 힘들 때 기대도 되고, 약간은, 떼를 써도. 그런 것, 다 '어리광'이 될 수 있으니까.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니까... 약간, 실수해도. 다퉈도... 역시, '한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이, 저녁엔 다시 봐야하고... 아침엔, 어쩔 수 없이 얼굴 마주쳐 인사해야 하고. 동네 아이들하고 다툴 때, 무조건 편을 들어주고. ... 오빠는 여동생에게 그렇게 하는 거죠...? 아이들이 하는 걸 봤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내 오빠가 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 시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맞아요. 언젠가 그런 말했던 것 같아요. 드랫이 말하니까 기억나네요. 그러니까 드랫이 말했잖아요..." 루드랫은 묘한 눈을 그 뒤를 이었다. "...'오빠'라는 게, 그런 것이 라니... '오빠'란 건 그럼 아무 것도 좋은 게 없지 않냐고..." 시나는 웃었다. "그래서 내가 '오빠'는 여동생한테, 생일선물을 받 는 거라고 했어요... 동네 애들이, 자기 오빠 생일선물 사는 걸 부럽게 봤거든요... 하하... 그랬더니, 드랫이 일년에 한번 있는 생일선물을 위해, '여동생'쪽이 떼를 쓰는 것도, 실수하는 것도, 그걸 아침저녁으 로, 다 마주쳐 견뎌야 하냐고... 하하... 진심으로, 질려하는 표정으 로... 드랫이야말로 우스웠어요." "...정말, 질렸으니까.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많을 당시였는데... 돌볼 '여동생'까지 생긴다니..." 시나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의견을 굽히지 않았어요. 오빠는 정말 좋은 거라고... 여동생한테 언제나 칭찬을 들을 수 있다고--동네 애들 이 얼마나 자기 오빠 자랑을 많이 했는지!" "...맹목적인 칭찬 보단, 진실만을 바란다고 했지." "하하... 드랫은, 정말 이상했어요.. 쓸데없이 진지하고. 내가 드랫 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물론, '여동생'도 가 끔... 아니, 언제나." 시나는 마치 그때처럼, 말을 정정했다. "'오빠'가 힘들어할 때, 이 야기도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맞아요. '오빠'도 실수할 수 있고, 억지를 부릴 때도 있지만... '여동생'은 그걸 꽤 관대하게 봐줄 수 있 다고. 그러니까, 그때야 드랫은 '생각해보겠다'고 했죠. 심각하게... 하지만 결국은 거절을 해서...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이들에게 당신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우리 오빠라고..." 시나의 그 실망한 말투에 루드랫이 중얼거렸다. "...난... 그때 어 렸어... 그리고 막 교육을 시작한 참이라... 주위에 또래 여자 애들이 많았으니까. 굳이 여동생 같은 거 필요하지 않았어. 게다가... 난, 어 렸을 때부터... 여동생보다는... 내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자라서... 그래서..." 시나가 고개를 들었다. 루드랫은 그 눈동자를 보고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말했지? 기억이 나는지?" 그러자 갑자기 시나의 눈에 슬픔이 감돌았다. "...기억이 나요." 기억...? 하지만 이 말을 하면서도 루드랫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 다. 기억이라니. 이게 도대체, '언제의' 기억이지...? 이 짙은 공기가 약간만 맑아졌으면... 그렇다면... 이건 마치 안개 와 같은...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 종속자가 되기를..." 루드랫은 그렇게 말한 뒤, 손을 들어, 마치 그때처럼 시나의 머리카 락에 손을 댔다. "...난, 어차피 너희 왕족 가운데... 종속자를 맞아야 하니... 그게 나을 것 같다..." ...그게 나을 것 같다, 아덴시엘. 여동생이라니... 괜찮긴 하지만. 다 자라면, 그렇게 정성을 들여 다른 남자한테 보내야 하고. 네가 다른 남자한테 간다면, 아주 분할 것 같아. 힘들었던 건 나인데. 그건 참으로 논리적이었다... 시나가 말했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고... '종속주'는, '오 빠'보다 훨씬 좋은 거지만... 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난... 아무래도, '오빠'가 좋다고... 컸을 때 일보다는, 지금 당장 동네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었으니까. 마음대로 안돼서, 난 섭섭해 서..."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넌 아주 오랫동안... 안 왔지. 몇 년이 지나도록." "...아니에요. 몇 년이 아니라, 고작 몇 개월... 일년. 한데, 당신 이 훌쩍 커버려서, 너무나 이상했어요. 그 소년... 내 또래의 소년이 어디로 갔을까..." 시나는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루드랫이 슬픈 듯, 말했다. "그래서 더욱, 너를..." 그녀를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몇 년이 지나도록, 어린 그의 아덴시엘. 그의 외로움이 만들어낸 환상... "한가족이 되면,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그 렇지도 않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봐요. 그때 내 말이 맞았죠? '여동생'이라면 좋았을 거예요. ...컸을 때의 일. 마음이 변하면 그만 이니까. 내가 그랬잖아요. 역시 당신은 마음이 변해 버려서..." "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맨 처음엔, 놀랐어요. 모습이 많이 변해 있어 서. 어쩌면 성격도... 하지만 난, 당신 안에서 그를, 보고 당신 옆을 떠날 수 없었어요. 당신의 은빛 머리칼..." 시나는 미소를 짓고, 루드랫의 머리칼에 손을 댔다. "하지만 당신은 숲에서, 되풀이해 '아피네스.', '아피네스.'라고... 그 이름만을 불러서... 당신이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건가, 계속 의아 했었죠. 새로운 사람이 생긴 건가. 그런데 왜 숲에 와서, 그 이름을 부 르는 걸까... 계속 궁금해했어요. 하지만, 어느 날, '아덴시엘'이라고 해주어서...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걸보고." "----!!" "사실은... 그때까지 당신이 정말, '그 사람'인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 당신 같은 식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나는 일어나 천천히, 루드랫의 목을 안았다. "드랫... '아피네스' 를 사랑해요?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뜻대로... 내가 너무나 여 러 번 방해를 해서... 드랫... 하지만, 너무 슬퍼요. 당신은 아주 예전 에, 나를 좋아한다고 해주었는데. 이젠 그게 다 지나간 것 같아서. ... 하지만 사실은. 그것조차도, 마인드 컨트롤... 당신이, 내게 상냥했던 것이...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잘해주었던 것이... 하지만 이 제 당신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눈물이 흘러, 루드랫의 목덜미를 적셨다. "내 말이 맞았죠... 그렇 죠? 여동생이라면, 좋았을 거예요." 루드랫은 시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자 기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이윽고 떨린 목소리로, 말했 다. "...아냐..." 도대체, 누구이야길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이토록 이완되고, 모 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공기 안에서는, 저 바닥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것까지 살아나는 법이다. 그리고... "....넌.... ....숲에서..." 하지만 루드랫은 도대체 그녀가 어떤 숲을 말하는지, 자신이 어떤 숲을 말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숲이라고...? 차갑고, 캄캄한, 숲. 대낮에도 음습한 기운만이 감도는. 느닷없이 울리는 동물의 소리와 새 소리만이, 들리는. 그 위험하고 슬픈 곳.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계속 방에만 있어야 한다고 해서... 왜 드랫을 만날 수 없는 건지, 궁금했지만. 이젠 됐어요. 꿈이라도... 이 야기 나눌 수 있었으니." 시나는 몸을 떼고 빙긋 웃었다. "내가-- 드랫에게만은 다 이야기하 고 간다고 했잖아요? 약속을 지켰죠?" 그리고 약간 흐린 낯으로 말했 다. "드랫... 레겜... 파이오니온 님에게. 그분에게 내 말을 부탁해요. 나는 말할 수 없더라도... 드랫이라면." 그때야, 루드랫은 목이 메인 듯, 말을 하기 힘들어하며 겨우, 말했 다.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니다. 어떻게 이게 꿈이 될 수가 있나...? 단 하나. 숲에서 바라왔던 것-- 그토록, 간절하게. 아니, 사실은... 온 생애 를 걸쳐. "넌... 넌, 누구지?" 시나는 빙그레 웃었다. "시나요. 정식이름은, 윤시나. ...우리 세계에서는, '성'이라는 게, 있다고요." 시나라고? "....아냐.... 계속, 아덴시엘의...." 그 이름을 부르는 넌. 시나가 루드랫의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을 보고 말했다. "맞아요. 내 가 이름이 두 개인 게 이상해요...? 하지만 난 현실에선, 그런 이름인 데... 내가 설명했잖아요? 그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까닭을..." 시나는 약간 멋쩍은 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덴시엘이 라는 이름, 그래서 좋아했어요." 루드랫은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아냐... 그가 알고 싶은 건. 정확 히 그런 것이... 도대체, '그녀'가 누구인지. 그렇다면... 그가, 계속 '사랑'해온 사람. 여기 이렇게 있는 사람이, '아덴시엘'이라면. 그러 면, 계속 그가 마음 아프게 사랑해온 사람... "...이름이 두 개라고? 그런 것 따윈... 이미, 알고 있었어. 하지 만, 네 원래 이름... 그건..." 루드랫은 시나의 얼굴을 마치, 처음 본다는 듯 보았다. "...난... 차라리, 네가... 그대로, 환상이기를... 내 손으로, 너를 죽이려고까지..." 그 말에 시나는 놀란 눈을 지었다. 그리고 난처한 미소. "아... 맞 아요. 무서웠어요. 내가 검은머리가 아니면 구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 하..." "----!!!" 또 한 번의 격심한 혼란이 일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 고 있는 것인가? 어떤 장소의, 어떤 시간의 이야기를? 혼란, 하나 하나 가 물질적으로 화해, 붉게 달아오른 바늘이 되어 그의 머리를 쑤시는 듯. 그 잔혹한 통증... 가슴에서부터 시작한 통증이, 온통 머리로. 루드랫은 그만 정신을 잃을 듯한, 이 아찔함, 온 세상이 하얗게 변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아픔에, 고통의 소리를 내고 앞으로 무너졌 다. 그러자 시나가 그의 그런 상태를 눈치채고 놀라서 말했다. "드랫--!!! 왜 그래요?!! 머리, 아파요?!! 힐러---! 디트를, 불러올 까요?!" '...아냐...' 루드랫은 말하고 싶었다. 힐러 따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은...! 시나가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요!" "......제발..." 루드랫은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 시나의 손목을 잡았다. "...드...드랫?!" "...난...." 시나는 드랫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놀라서 보고 있었다. 루드랫 은, 한마디, 한마디 정확하게 말해야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모 든 것--심지어는 말하는 법이라도--이 고통에 침식당할 것 같다. 어둠. 정신을 잃을 것 같다. 하지만 절대로 그건, 안 된다. 루드랫은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로... 지금, 정신을 잃으면. 그러면... 루드랫은, 고통 으로 흐려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다시 뜨고 시나를 보았다. 말보다도, 더 간절하게. "...제발..." 옆에, 있어주길. "드랫? 아프잖아요? 힐러를..." "...아프지, 않아... 그보다... 계속... 이야기, 해... 제발... 예 전... 이야기..." "드랫! 말도 못하잖아요!! 역시, 힐러를--!!" 시나가 다시 한 번 일어나려는 기색에, 루드랫은 팔을 뻗었다. 그녀 를 붙잡아 두려는 듯, 루드랫은 그녀를 안고,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 "...드, 드랫...!!" "시나... 제발... 괜찮아... 제발... 이야기 해..." "무슨... 무슨 이야기를..." 시나는 루드랫의 몸이 급격히 차가워지 고, 호흡은 거칠고, 얼굴에 온통 땀 투성이인 것을 느끼고 말했다. 하 지만 자신을 안은 팔의 힘만은 세서, 시나는 루드랫이 얼마나 간절하게 이야기를 원하는 지 알게 되었다. 시나는 어쩔 수도 없는 이 상황에,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왜 힐러를 불러오지 말라는 거지? 무슨 이야 기...? "무슨 이야기를 해요...?" 루드랫은 시나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아무 이야기나... 시나... 우리가 맨 처음 만난..." "...싯딤나무... 그렇죠?" 루드랫은, 눈을 감았다. 신이여... 지극한 아픔에도, 목이 메여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널..." "...드랫은, 날 보고, 이건 내 장소니까, 이곳에 오지 말라고... 심 술궂은, 소년..." "...아냐... 난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셔, 울 장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 소녀 가 그 기억을? 왜 자신이 이 기억을? 하지만 그 근원을 찾으려는 찰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한번 거대한 압력이 덮쳤다. 가까이 오는 것 을 원치 않는. 그 높고 절대적인 장벽... 루드랫은 어쩌면 잠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나는 눈물을 흘리며, 루드랫을 보고 있었다. "드랫!! 왜 그래요?!! 네?!!" 루드랫은 다른 무엇보다 시나가 곁에 있다는 것에 안심했다. 아마 도, 그녀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힐러에게로 갔을 지도 모른다. "...괜찮..." 절대 포기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예전이라면, 이쯤에서 물러났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장벽을 넘어야 할 간절한 이유.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아픔이 덮치고.--도저히 견디기, 힘든. 다른 어느 때보다 강한, 그가 당했던 아픔 가운데 가장 괴로운 고통--마치 그 아픔을 자신이 당 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면 자신이 비명을 지른 것인가? 루드랫은 다시 한번 시나의 어깨에 매달렸다. 검은.. 아득 한... "세렌시스---!!!" 시나가 그의 이름을, 울음 섞인 소리로 외쳤다. "세렌시스--!!! 죽지 마요!!!!" 시나... 루드랫은 희미하게,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리고 약간의 미소 도. 이런 정도로 죽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시나는 그의 몸이 차가워지는 걸 오해한 듯, 정신없이 울며 소리쳤다. "세렌시스!!!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 방해 같은 거 안 할게요!! 함부로 찾아오지도 않고!!! 그 말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방해'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다. 모든 건, 그의 잘못. 제발...!!! 제발, 힐러를 불러오게 해요!! 내가, 불러올게요!! 시나...!! 루드랫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시나..." "세, 세렌시스...?" 그의 목소리에, 시나는 정신없이 말하던 것을 그치고 그의 상태에 주목했다. "세렌시스...?" 루드랫은 가까스로 시나의 몸을 자신에게서 떼고 그녀를 보았다. 시 나는 그가 눈물 흘리고 있다는 것에, 놀란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 다. 그 모습에,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그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제야 그녀의 정체를 알고... 계속 힐라토에서만 그녀를 찾았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그래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 자신의 마음이 차가웠던 것을 비통하도록 후회하 며... 자신이 마리스를 선택했음. 그 찢어지는 마음에, 차라리... 하지만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길. 루드랫은 시나에게 말했다. "...방해가, 아냐... 너를... 한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아 니... 오히려 언제나, 너를 기다렸어... 너만을 계속... 평생, 다른 어 느 누구도 아닌, 바로 너를... 너만을 계속 사랑했으니까, 아피네 스..." "-----!!!!" 루드랫은 시나의 얼굴이 하얗게 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점점 고개가 무거워졌다. 이젠 한계였다. "...떠나지 마. ...제발.... 네가 떠나면... 난, 또, 너를 찾아야 해. 그, 지독한 세월... 어디든... '칼루스온'이라도 널 찾아가겠지 만... 그 동안이 너무나 힘들어. 그러니... 아피네스..." 루드랫은 시나의 어깨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어쩌면 안도한 목소리로. 아니면 그래서 더욱 불안한 목소리로. "...이젠. 함 께 있어 줘... 아피네스.... 나의, 아내..." 루드랫이 말했다. 시나는 루드랫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나의 입술에서 목 소리가 새어나왔다. 흐느낌의... "...멍청이... 멍청이 같으니라고..." 깊고, 깊은 곳에서, 회한과 고통이... 그리고, 슬픔이... 왜 이렇 게, 끝까지 루드랫은... 마음 깊은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조롱하는 음성. 그리고 울음. 하지만 시나는 허공을 보았다.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변했다고, 이렇게 울음을? ...참, 바보 같이... 멍 청이 같이... 시나는 자기 어깨에 기댄, 아픔 때문에 파리해진, 루드랫의 얼굴을 보았다... 왜, 모습이 이렇게 변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래도 알 수 없었지만. 이 차가운 몸... 숨을 거의 안 쉬는... 이런 건 견딜 수 없다. 다른 사람하고 있어도, 살아만 있어주면 괜찮아. 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시나는 그의 목을 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간절한 소망. 이렇게 간절히 소망한다. 신이여,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 다... 제 무엇을 바쳐도 괜찮습니다. "...루드랫... ...아프지 말아요... 다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다음 순간, 시나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너 따위, 죽여버릴 거야!! 그 비명이, 또 한 번. 시나는 눈을 떴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 었다. 시나는 천개의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 리고 몸을 옆으로 돌려 허리를 둥글게 말고, 억지로 참는 듯한 흐느낌 을. 바로 그때, 누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아니, 스온 아스나엘님?" "---!" 시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넬리는 시나의 눈물에 놀란 표정이다가, 시나가 자신을 멍하니 보는 걸보고,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듯, 꾸벅 절을 했다. "스온 아스나엘님, 일루티온 넬리... 상급 시녀의 명을 받고, 스온 아스나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넬리는 고개를 들고 미소지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걱정 스런 미소. "...아침입니다, 스온 아스나엘님. 그런데... 어디가 아프 세요?" 그날 낮엔, 베쓰-엘 카할에서 클로니아와 힐라토의 약혼을 파하는 의식이 있었다. 오랜 약혼--15년 동안--의 약혼이 드디어 깨어지고, 하 누카의 날을 위한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약혼을 깨는 그 자리엔 애초 에 말한 대로 '여섯 증인'이라는 사람들--각 계급에서 남녀 한 쌍씩 나 와 들러리를 서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원래의 그 멤버는 아니었다. 제 2계급, 파이오니온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그리고 제 6계급, 마 노테온의 자리에, 다른 이들이 각각 서 있었다. 파이오니온 세스틴이 클로니아의 써클렛, 은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그 휘황한 써클렛을 쓰고 성전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옆 엔 검은 색의 베일을 쓴 그의 어린 신부가 길게 끌리는 옷자락을 뒤로 한 채, 또한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 앞에는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의, 이 의식을 주관하고 있었다. 클 로니아 세스틴에게, 과연 이 여인을 아는지, 이 여인이 자신의 신부인 지를 묻고, 스아디온 아스테린에게, 과연 이 남성을 아는지, 이 남성이 자신의 신랑 될 자인지 물었다. 두 사람은 맹세의 말을 했고, 여섯 증인들이 그 말을 기억했다. 그러자 제단에선 신비로운 불꽃이 일어났고--그 은색의 불꽃--그 너 머에서 엘야시온이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먼저 세스틴이. 그가 그 불꽃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옷자락은 모두 말끔히 태워 없어졌다. 그 중에 오직, 클로니아 써클렛과 그의 은빛 머 리칼, 그의 은빛 눈만이 빛났다. 온몸을 훑고 있는 은색의 불꽃에 알몸 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불에 태워지면서도, 세스틴은 별 로 아픈 기색은 없었다. 대신 그는 그 안에서 자기 신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스테린은 망 설임 없이 일어나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 순간 그녀의 검은 베일과, 검은 옷--힐라토를 상징하는 모든 것--이 불살라 없어졌다. 아스테린은 자신의 육체를 간질이는 그 불꽃 안에서, 세스틴을 올려 다 보았다. 상기된 얼굴-- 그러자 세스틴은, 그녀를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보았다--어쩌면 처 음으로--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나의, 신부, 힐라토, 스아디온, 아스테린, 엘께서, 당신을, 내게, 주셨으니, 내, 살 중의, 살, 내 뼈 중의, 뼈. 당신의, 이름을, 내, 심 장에, 가장, 깊은 곳, 내, 목숨이, 파, 하는, 날, 까지, 이, 맹세를, 엘께, 바치오니. 천지의 주재여, 제, 맹세를, 받으소서.>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그 자리에 모여선 사람들--열 두 세계의 파이오니온과 왕족과 귀족 들이 모두 다, 그 말을 듣고, 여섯 증인은 그 말을 기억했음을, 손에 든 붉은 포도주 잔을 땅에 부어 증명했다.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이 선언했다.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스틴과 힐라토 스아디온 아스테린의 약혼을 파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누카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함성과 나팔소리가 베쓰-엘 카할의 안뜰에부터 시작되어, 바깥뜰로, 베쓰-엘 카할밖에 늘어서 있던 나팔수들에게까지 울렸다. 바깥쪽에 있 던 나팔수들이 그 나팔소리를 받아, 또한 길게 나팔을 불자, 각 구역 안에 있던 사제들--기다리고 있던 그들 또한, 긴 나팔을 불었다. 그래서, 온 제일로트--그 아름다운 은의 도시에 울렸다. 쇼파르의 길고도, 아름다운 소리. 이젠 아무도, 아스테린을 '힐라토'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또한 클로니아 세스틴도 그 순간 이름을 잃었다. 그와 그녀는 이름이 없는 자였다. 5일 전, 동의 약속과, 3일 전, 은의 약속, 하루 전, 황금의 약 속이 지켜지고, 한밤중, 세스틴이, 무수한 처녀들 가운데 있는 그녀를 탈취해 갈 때. 비로서야 그때, 두 사람은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아스테린의 남편,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스틴으로서. 세스틴의 아 내, 클로니아 아스테린으로서. 점심을 들던, 시나는 가히, 온 땅을 진동시킬만한 나팔 소리에 잠시 숟가락 들던 손을 멈추었다. 그건, 어디서나 들리는 크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멀리, 가까이, 가 까운데 있던 나팔소리가 그치면, 멀리서. 멀리 있던 소리가 그치면 가 까운데서...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소리. 한데로 어우러져... 시나는 중얼거렸다. "넬리... 저게 뭐예요...?" 넬리는 어쩐지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누카... 하누카 나팔 이네요... 온 세계의 신랑과 신부들이, 카할에서 이 소리를 듣고 있을 거예요... 약혼을 파하고... 이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길었던 기다림을 끝내고..." 예식과 함께 된, 예배는 다른 어떤 때보다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 가운데서 레이서스는 시나를 생각했다. 몸이 아파서, 오늘 예배에는 못 나오게 되었다는 공식적인 말이긴 했지만... 다른 왕족들은 그 사정을 각기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창피해서 어떻게 나올 수 있겠 냐는 둥... 아무리 '대신하는 자'라도, 이건 교육이 필요한 일이라는 둥... 그런 말들에 불쾌한 레이서스였다. 어제 본 바로 시나는 정말 몸이 안 좋아 보였으므로. 오늘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상급시녀들이 자꾸 핑계를 대며 시나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결코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레이서스는 심각한 얼굴을 지었다. 그는, 다른 어떤 때보다 아름다 워 보이는 아스테린--이제 시녀들이 양쪽에서 다가와 옷과 함께, 클로 니아 왕족의 모피로 덮어주고 있었다--에게서 눈을 떼고, 카할 안을 둘 러보았다. '...루온 루드랫...' 역시, 그가 안 보였다. 어제 왕족에게 그런 모욕을 줬으니, 나왔어 도 눈총을 받을 일이었지만(어쩌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건지도 모르 고) 그래도 예배에 아무 말도 없이 불참하다니. 하카단에게 명해, 루드 랫에 대해 알아보도록 시켰지만, 어젯밤 이후로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 다는 말로. 레이서스는 그 말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어쩐지 기분 나쁜 느낌... 왕궁 안이니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 고, 마음대로 자기 숙소를 이탈하여 어디를 갈 수도 없을 텐데. 하룻밤 이 지나도록 모습을 안 보이다니? 레이서스는 아무래도, 루드랫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불쾌한 표정은, 아스테린이 단에서 내려와 세스틴 과 함께 자기 앞에 섰을 때, 어쩔 수 없이 미소어린 것으로 바뀌었다.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이 모두에게 축복의 말을 하는 가운데, 레이서스 는 자신의 어린 누이동생--친누이는 아니지만 스아디온이라, 어릴 때부 터 왕궁에서 자란 그의 고귀한 누이동생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그녀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진심으로. 예배가 끝나, 가까스로 왕궁으로 돌아온 하디트는 황급히 루드랫의 방으로 향했다. 아침에도 보이지 않고, 예배에도 불참하다니? 설마, 해 서 돌아오는 길에, 셰리카가 묵고 있는 여관, 그리고 라단의 집까지 다 녀왔으나 그곳에도 오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라단은 무슨 일이 생겼냐 고, 걱정스럽게 물었는데... 하디트는 그냥 얼버무리고 서둘러 궁으로 돌아왔다. '루드랫...! 도대체...!' 하지만 다행이었다. 하디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루드랫의 방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방금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하디트는 '하지만--'이라고 말을 길게 끄는 시종의 말을 무시하고 서둘 러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루드랫!!" 하지만 다음 순간,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았다. 루드랫은 바 로 어제 그 자리.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루, 루드랫....?!" 하디트의 경악한 목소리에, 루드랫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생소한 눈빛. 덕분에 뭐라고 말할 듯 입을 벌리던 하디트는, 새롭게 놀라,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하디트를 처음 본다는 듯 가만 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느릿 하게 말했다. 불분명한 발음.... 완전히 쉬어버린, 낮은 목소리로. "...하온... 하디트... 인가..." "---!!" 하디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마치 이건... 그가 처음으로 바리스를 찾아갔던 때.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그러자 루드랫 은, 하디트의 그런 눈초리를 오해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닌가... 그럼... 그대 이름은..." 무슨 소리? 하디트는 루드랫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놀라서 바 라보았다. 루드랫은 자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었고, 그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카락을 문득, 생소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루드랫..." "...머리카락..." 루드랫은 하디트를 보았다. "...아침에 일어났더 니, 이 모양이어서 무척 놀랐다... 원래, 이것과는 틀렸다고 기억했기 에..."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디트'. ...아 닌가? 내 기억이... 틀린 건가?" "아냐... 네 기억... 맞아..." 그 말에 루드랫은 희미한 미소지었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한 듯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쳐 보이고, 슬퍼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하디트는 중얼거렸다. "기억은... 맞지만...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생술을? 루이티온 루드랫. 한 왕족의 아가씨를 사랑해서, 마노테온의 형을 받았던 그는.... 이제,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긴, 은빛 머리칼 을 한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한... 정말, 루드랫의 머 리카락이 이 정도로 아름다웠나, 생각할 정도로, 완전한, 그런 은색의 머리칼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루드랫은 한층 안정을 찾게 되었다. 어쩐지 지 쳐 보이는 모습에, 몇 번이나 하디트가 힐러 라이트를 쐬어준 탓도 있 지만... 빠르게 그는 명료한 눈빛을 되찾아 갔다. 얼굴에 서린 슬픔 같 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하디트의 질문에, 빙긋 웃으며. "글세..."라고 말을 회피할 정도로... 어쩌면 '평소의' 그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래... 벌써, 예배가... 그러면, 이따가 저녁에 잠깐, 찾아가 예배를 드려야겠군." 예배에 왜 빠졌냐는 말에는 단지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하디트는 답답해, 계속 추궁을 해보고 싶었지만. 시종이 와서 말했다. "루온 루드랫 님? 엘야시온님의 부름이 계십니다." 차를 마시며 아픈 머리를 한쪽 손으로 누르고 있던 엘야시온은, 들 어오는 남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다가, 하마터면 찻물을 뿜어낼 뻔했 다. "루, 루드랫--?!" 루드랫은 고개를 숙였다. "엘야시온 가디엘 님. 부름을 받아 이렇게 왔습니다." "뭐, 뭔가? 뭔가, 도대체?" 가디엘은 손수건으로 입 주위를 더듬으 며 말했다. "자, 자네, 머리칼!! 머리칼이!!" 그러다가 가디엘은 무언 가를 떠올린 듯. "호, 혹시, 그렇다면!! 자, 자네 어제부터!!?" 가디엘의 목소리엔 흥분이 어리기 시작했다. "자네 어제 이미, 이 모양이었던 거지? 그, 그러니까-- 칼루....가 아니고, 스온 아스나엘의 루이트가 되기 위하여--- 멀리서 봤을 땐, 아닌 것 같았는데... 게다가 어떤 소생술의 의식도 있었단 이야길 못 들어서...!! 하지만-- 아-핫핫 핫핫핫-- 아무려면 어떤가? 그렇다면, 내 괜한 걱정을--- 성전에도 있 지 않고 돌아온 보람이 있구먼!!!" 루드랫은 가디엘이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미소 지었다. 그런 루드랫의 모습에, 가디엘은 또 한번 핫핫핫, 웃고 말했 다. "잘했어!!! 잘 결정한 거야!!! 자, 거기 앉게, 루이티온, 루드랫!! 내일 당장, 오더식을 해서-- 카이러스 프레미어 루이트로---" 가디엘은 갑자기 일이 잘 풀리는 것에 기뻐서 말했다. 멋진 엘의 날 이 아닌가?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쉽게도. 루드랫이, 그 멋진 엘의 날에 초를 치고 말았다. 루드랫은, 가디엘의 기뻐하는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더니 말했 다. "저는 스온 아스나엘 님의 루이트가 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엘야시온 가디엘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싫다는 거야?!! 당장, 가서 스온 아스나엘에게 사과를 하고, 개인 루이트가 되겠다고 하는 거 네!! 그것만이 자네의 명예를 되살릴 길이야!!" 하지만 루드랫이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에, 가디엘은 중얼중얼 불평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뭔가, 이건? 평소와 약간 틀린 것도 같다. 어쩐지 더 침착한 것도 같고, 뭔가 침 울해 보이는 것도 같고. 하지만 어제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자기도 날 아갈 것 같은 기분은 아니리라 짐작하며.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를 다시 금 설득했다. "...지금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런데 갑자기 그때 루드랫이 눈을 들었다. "....엘야시온님. 스온 아스나엘 님을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뭐?" 루드랫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천천히 말했다. "...사냥터... 예. 사냥터에서 본 후로... 한번도 가까이 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기 에... 꼭 한번 보고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제, 봤잖나!!!!" "...어제..." 루드랫이 말했다. "어제는..." "자네가 그 망신을 줬는데, 자네는 염치도 없나?!!" "...엘야시온님... 어제는... ...어제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라 도..." 엘야시온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그 말하고 있잖은 가?!!! 자네가---" 루드랫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사과'가 아니라..." 그는 되풀이해 말했다. "저는, 그분의 루이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까... 그런, 사과가 아니라..." "그것 외에 무슨 사과?!! 그 말이 아니면, 둘이 앉아 날씨 이야기라 도 할 참인가?!!" 그러자 루드랫은 잠시, 당황한 눈으로 엘야시온을 보았다. "...날씨... 이야기...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덕분에 응접실에는 잠시, 굳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가디엘이 겨우 말했다. "지금 자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자네... 나하고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건가?" 루드랫은 이마를 찡그렸다. "아닙니다." "....그러면 기회를 주지. 왜 루이트가 못되겠다는 건지. 그런 설명 같은 건 듣고 싶지도 않아." 뻔할 뻔 자니까. "그래. 이쪽에서 양보를 하지. 스온 아스나엘은 꽤 여러 번 생명의 위협에 처했었고, 그러니까... 딱, 이 주일!! 이 주일만, 자네가 루이 트를... 아니, 루이트인척 하는 거야.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그후론 아 무소리 안 하겠네. 그 후론 자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 어떤가?" 그러자 그의 눈이 심각해졌다. "....생명의 위협. ...맞습니다. 참 으로 그랬죠. ...루이트가, 필요합니다." 엘야시온의 눈이 희망으로 불탔다. "그럼...!!" "누가 좋을까요... ...생각해 두신, 루이트라도?" "..............." 가디엘은, 자신은 바라보는 남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루온 루드랫이 정말로 자신과 농담 따먹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처절하게 고민했다. 이윽고 고민을 끝내고, 말했다. 이런 심각 한 분위기에서 농담 따먹기 할 성격의 루드랫은 아니다. "....자네는, 자네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지금까지 하고 있던 말들은...?" "....!!" 루드랫은, 인상을 썼다. "......아." '아'라고? 가디엘은 빙긋 웃었다. "...자네. 아침에도 숙소에 없다 고 하더니.. 어젯밤 안 돌아왔었다고? ...그렇군. 그걸 먼저 물었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렇지. '소생술'... 그건 왜 받은 건지. 개인 루 이트가 될 마음도 없었으면서. 그래... 그것부터 말해보는 게 좋겠군." ...아무래도, 어디서 잤는지, 잠이 모자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 니.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4- 관련자료:없음 [25544]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9:53 조회:1107 엘야시온 가디엘을 만나기 위해 왕궁, 그의 숙소로 가던 겐트온은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그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맙소....사....!!!' 루드랫은 생각에 잠겨 걷다가 반대편에서 오던 남자가 자신을 보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자, 그를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지 었다. 겐트온은 한발자국씩 루드랫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은 인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모른척하 기엔 너무 늦었고, 모른척할 생각도 없었다. 겐트온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저러고도, 멀쩡하다니! 제기랄...!" 도대체, 어느 틈에, 소생술을 받은 건가!!! "루온 루드랫...?" 겐트온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어느 틈에... 축하드립니다. 면천하신 것을. 이제야 진정한 나실인으로서... 그런데, 참으로 빠른... 어제 연회에서만 하더라도 짧은 머리이셨던 걸로..." "네."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아, 겐트온은 계속 말했다. "헌데, 어느틈에?" "...글쎄요." "...하하... 그럼, 아무래도 스온 아스나엘님의 그... 그걸 뭐라고 해야할까. 프로포즈... 그걸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딱 부러지는 말이었다. "....그럼?" "글쎄요." "..........." 너무나 독특한 투로 뱉는 말이라 더 이상 묻기도 곤란할 정도였다. 아무리 겐트온이라도 다시 묻지 못할 정도의. 그래서 겐트온은 그를 노 려보았다. ....굉장히 기분 나쁜 느낌. 이런 식의 대응은... 너무나 기 분이 나쁘다. "....혹시, 소생술을 받으실 때... 특별히 몸에 불편한 점이라 도...?" 그때서야 루드랫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잠시지만 겐트온을 날카 롭게 노려보았다. "글세. 몸이 불편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겐트온은 미소를 유지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나실인의 표징을 잃은 채 계셨으니까. 그냥 호기심입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지라.... 요 즘 하고 있는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나실인과 언약, 그리고 능력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조금,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기분이 어땠는지?" "...도움이야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다." 겐트온은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루드랫이 말했다. "우선 머리를 자르시고, 20년 동안, 마노테오나에 사시길. 그리고 암흑의 숲에도 한번. 다음으로 소생술을 받으시면, 그 기분을 확실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몸의 상태 같은 것도." 루드랫은 빙긋 웃었다. "연구에 참으로 열심이군요. 도움이 되었다 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히고 그 자리를 떠났다. 겐트온은 고개를 숙인 그 자세 그대로 있다가, 휙, 뒤돌아보았다. 루드랫은 이쪽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 는 겐트온의 낯빛은 무섭도록 창백해져 있었다. 루드랫은 왕궁 한곳, 나무들 사이, 고즈넉한 곳에 서서 건물의 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엘야시온님은 시나와 만나는 것을 허락 하지 않았고- 그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이곳으로 왔다. 저 건물은 이쪽 에서 가장 잘 드러나 보인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루드랫은 슬픈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제, 하디트가 가르쳐 준 곳이었지만. 낮인데도 불구하고 커튼이 반쯤 드리워져 있어 안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커튼이 없다고 해도, 수많은 수목으로 가리 워 있어... 저 나무들은 그의 기억엔 없는 것들이었다. 기억에 있던 것들은 없 어지고, 기억에 없던 것들은 존재한다. 이것을 하나, 하나 대조하는 작 업들... 루드랫은 중얼거렸다. "...루이트 같은 것... 될 수 없어." 이 의혹. 이 기억들을 모두 확인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불분명한 가운데... 모든 것이 분명해 질 때까지는. 방금도... 루드랫은 쥐고 있던 나뭇가지에 힘을 주었다. .....'적'을 하나, 찾아냈다. '뚝'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루드랫은 차갑게 눈을 빛냈 다. "...판테온." 시나는 바람도 쐴 겸, 창문 바깥을 내다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지만 그때, 넬리가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오셨음을 알려왔다. 또, 상기 된 얼굴로. "저는... 루이트 님과 스온 아스나엘 님이 정말로 다정하게 보여서, 설마 힐라토님과 스온 아스나엘 님의 관계가 그렇게 깊을 줄은... 그 보석과 옷들을 주셨을 때부터 알았어야 하는데... 역시, 왕족들의 일이 라 전혀 눈치를 못 챘어요. 그래서 그분이 병 문안 오셨을 때는 제가 스온 아스나엘 님께 무례한 꼴을... 용서해 주세요." 넬리는 레이서스에 대해 호들갑 떨며 말했던 일을 그렇게 사과했었 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엔 붉어진 얼굴이긴 했지만, 생긋 웃은 채 침착 하게 말했다. "상급 시녀 님이, 스온 아스나엘님은 주무시고 계신다고... 그래서 그냥 보내시려는 것을, 깨어 계신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참 잘 됐죠? 그때 마침 나가보길 잘했어요. 특히나, '오늘'은 특별한 행사도 있으니... 의논하셔야 할텐데. 상급 시녀 님이 착각을 하셨나봐요." "...응." 시나는 넬리에게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넬리라도 있어서 조금은 마 음이 편해진 시나였다. ...파이오니온 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젠 완전 히 부담이 되고 말았지만. 루드랫이 숙소로 돌아오니 전갈이 와 있었다. "...루온 루파르테...?" "네. 꼭 확답을 바란다 하셨습니다." ".....?" 루드랫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저께의 일이다. 그와 서재 밖에서 몹시 다투었던 것이. 그런데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루드랫 의 의아함과 망설임은 시종의 다음말로 사라지고 말았다. "듣기론, '처녀들의 모임'에서 가디언의 직무를 수행해 달라고..." 루파르테는 루드랫에게 전갈을 보내놓고 씩 웃고 있었다. 어제. 루파르테는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고 있었다. 힐라토 레이서스님... 그분이, 마음을 두신 분... 그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루온 루드랫에게 그런 식으로 먼저 '프로포즈'를 하다니. 역시, 옆에서 모시던 자라 애정이 각별해 그런 것인가... '운도 더 럽게 좋은 놈 루드랫', '저런 놈에게 카이러스 스아디온을 맡기다니! 엘야시온 가디엘, 아주 총애를 쏟아 붓는군! 빽 없는 놈은 서러워 서....!! 제길!'이라고, 그 장면을 보며 욕을 퍼붓던 루파르테는 하마 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루드랫이 놈이 뭘 잘못 먹었는지, 그 '프로 포즈'를 거절하고 연회장을 나간 것이다. 루파르테에겐, 박장대소하여 루드랫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좋아한 것은 잠시. 루드랫 놈이란 원체 교활하기가 독사 같은 놈이니까, 여기엔 뭔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카이러 스 스아디온이 그 모욕을 당하고도 끝까지 루드랫을 두둔하는 거 하며 (루카나안의 결투마저 말릴 정도였으니.) 엘야시온 가디엘이 그후 재빨 리 연회를 폐회한 것하며... 실제로 스온 아스나엘에게 프로포즈하기 위해 남아있는 루이티온은 아직도 많았는데. 이 연회에는 아무래도 구린 냄새가 느껴졌다. 저번에 '게임'과 마찬 가지로, 뭔가 엘야시온 가디엘이 '쇼'를 하려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하면, 이제 루온 루드랫의 이름은 열 두 세계에 모르 는 사람들이 없게 되고 말았다. 아무리 과거에 토너먼트에 우승했던 자 라 하나, 근 20년간을 유배생활을 한 자이고 보면, 루드랫은 명예도 지 위도 없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자이다. 또다시 예전의 명성을 얻으 려면 얼마만한 공을 쌓아야 할까. 오명을 씻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자면 다시 한 번 토너먼트에 우승하는 것 가지고도 모자랄 것이다(할 수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가만, 상황을 보아하면... 요즘의 연회는, 마치 루드랫이 주인공이라도 된 듯... '게임'에, '결투'에... 이번 '프로포즈' 사건까지... 이게 '세계혼'의 자리인지, 루온 루드랫 띄우기 자리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다. 도대체 요즘, 카이 러스 스아디온 빼놓고 루온 루드랫만큼 유명한 자가 어디 있을까? 어찌 나 이들의 행적이 이슈가 되는지. 신랑과 신부 되는 세스틴, 아스테린 의 존재감마저 희미할 정도다. 그러므로... '젠장. 어제도, 쇼를 한 거야!! 두고 보라지!! 곧, 루온 루드랫 놈,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는 소리가 나오고 말 테 니!!! 그게 아니라면, 왜 어제 갑자기 연회를 그만 뒀냐고?' 원래 카이러스 스아디온 루이트를 뽑기로 한 자리 아닌가?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모욕 받은 것 때문에? '웃기는 이야기지!' 루파르테는 코웃음쳤다. 스온 아스나엘이, 자신이 진정 모욕을 받았 다고 생각했으면 루카나안이 자기를 위하여 결투하도록 했을 것이다. 물론. 루파르테라고 스온 아스나엘의 창백한 얼굴을 못 본 것은 아니지 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루파르테에게는 그것이 '모 욕'을 당해서라기보다는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표정'으로 보였 다. 그 굳은 표정. 루드랫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루카나안 그대가, 루드랫에게 결투를 신청 하냐고 오히려 비꼬듯 묻던 그 모습. 그렇다면 여기서 그, '비꼬는' 상대가 누구이겠는가? 루파르테는 이글거리는 눈 을 지었다. '....엘야시온 가디엘...' 처음부터, 모든 것은 엘야시온 가디엘 안에 있었다. '대신하는 자' 가 성역에서 나타났을 때. 루드랫을 그곳에 보내 데려오도록 한 것. 처 음에 그녀를 루드랫의 종속자로 소문낸 것. 그녀의 정체를 숨긴 것(루 파르테는 엘야시온 가디엘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했으면서, 왜 스온 아스나엘의 정체를 그런 식으로 숨긴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드랫과 그녀를 이런 식으로 부지런히 엮어주는 것.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단 하나 아닌가? 엘야시온 가디엘이 루온 루드랫을 철저하게 띄워주려 한다는 것. ...물론. 이것은 억측이 될 수도 있다. 이건 마치 일개 루이트를 위 해 왕족을 이용하다시피 하는 형상이지 않은가? 아무리 총애한다고 해 도 이것은 지나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식으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 며칠 루파 르테는 사태를 면밀히 분석하고 있었다. 처음, 엘야시온 가디엘이 루드 랫을 자신에게 보내놓고, 자신을 불러 루드랫의 상태에 대해 묻던 때. 그때 뜬금 없이 묻던 힐라토의 군사 상황. 일반 일루티온의 무장 상태 를 묻던 말. 그리고 루카나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파르테는, 루드랫이 정통 루이트와 확연히 다른 점을 한 가지 떠올렸다. 바로, '무술'... 정통 루이트라면, 검기를 실은 검으로 몬스터를 베어내기만 하면 되 니, 그런 잔재주 따위 익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놈은 다르다. 어떤 과 정을 거쳤는지 모르지만, 일루티온의 '무술'을... 그것도 인정하긴 싫 지만 상당한 경지로 익히고 있다. 요전에 루드랫과 루카나안과의 싸움 을 보고, 루카나안 쪽의 마인드 컨트롤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나, 루드 랫이 검기도 사용하지 않은 채 상대를 눕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무술'을 익히고 있는 루드랫. 어릴 때부터 상급 루이트의 자 질이라 하던, 그 루카나안이 루사벨라의 파에 있지 않다는 것에 약간은 불쾌감을 보이던 엘야시온. 사냥터에서 '파워즈'를 보아 불편한 심정에 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꼬던 엘야시온. --파워즈? 똑같은 이름의 스피릿 소환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루이 티온'이 필요한 이유가 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결국은 뭐야? 이 런 상황에선, 차라리 일루티온의 잘 훈련된 군대가 훨씬 더 낫겠군!! 파워즈에게 내줬던 땅 정도라면, 일루티온 군대를 십 년은 훈련시킬 수 있을 테니!! 일루티온... '무술'을 익힌 일루티온이라면, 이런 때 어중 간한 루이트보다 훨씬 쓸모가 있겠지!! 하지만 그런 비난은 온당하지 않았다. 루이티온은 자기 주인을 지킨 다. 왕족들 몇몇이 위험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그건 절 대 루이티온의 탓이 아니다. 헌데도 이걸 루이티온의 탓으로 돌리는 것... 그건 바로... 루파르테의 눈은 위험하게 빛났다. ...토너먼트. 토너먼트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몇 이상의 일루티온 군대는 필히, 루이티온 계급에게 영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영지의 일루티온 훈련병들을 이끄느라 했던 고생. 타, 하바티온의 영지에 가서 했던 고생. 스콰이어들에게 시키긴 했지 만, 정기적인 시찰을 하느라 시간 조정을 해야했던 걸 생각하면... 하 마터면 힐라토 레이서스님을 옆에서 모시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에브 리나에 있어야 하는데, 한 달에 한번은 꼬박 영지로 가야 했으니. 그러므로 이건 엘야시온 가디엘의 치밀하게 조작된 음모였다. '무 술'을 강조하고 '일루티온 훈련'을 강조하는 것. 루이티온에게 그들 본 연의 것도 아닌 많은 임무와 책임을 떠맡기는 것. ....그렇다!!! 그건 바로 내년 토너먼트에서 루드랫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려 는 엘야시온 가디엘의 음모가 아니고 무엇인가!!!!! "제기랄!!!!" 분기탱천한 말투로 루파르테는 이를 갈았다. 어쩌면 20년 동안, 엘 야시온 가디엘은 오래도 칼을 갈았다. 각 세계의 루이티온은 '무술'에 신경 쓰고, '일루티온 훈련'에 신경을 쓰느라, 또한 그들의 것도 아닌 의무를 책임지느라... '중요한' 토너먼트에서 신경을 돌리게 되었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마저 뺏기게 되었다.(그래서 7년 전, 급기야 루사 벨라가 우승까지 하지 않았는가!) 엘야시온 가디엘의 음모. 이런 식으 로 루드랫의 정적들을 제거하려는...! 루파르테는 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절대, 뜻대로는 안될 겁니 다, 엘야시온님..."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파르테는 다시 생각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증거는 모두 한데로 모이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루온 루드랫 개인을 위하여 '대신하는 자'라는, 그런 어마어마한 왕 족까지 희생하는 건 너무나 무리한 일이므로,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토너먼트 때문이다--루온 루드랫을 우승시키기 위해서--라는 말은 분명 허점이 있었지만(종이에 써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겠지만) 그걸 눈치채기에 루파르테는, 너무나 내년 토너먼트와 루드랫 한 개 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루드랫에 대한 엘야시온의 편애에 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가서, '루드랫을 토너먼트에 우승 시키려 하다니, 뜻대로 안될 겁니다'라고 말을 하면, 엘야시온은 루파 르테의 날카로움(?)에 놀라겠지만.(....이것도 '비약사고력'의 한 종류 이리라...) 루파르테는 루드랫이 자신이 찾아왔다는 말에 일어나 미소를 지었 다. '후후... 제 놈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신나게 찾아왔군.' 하지만 안 찾아 올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놈... 어차 피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루이트 자리를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 이로 서 또 한번 확실히 증명이 된 거야.' 코웃음... 이제 그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스온 아스나엘의 그 표 정. 엘야시온님에게 이용당해 불쾌해 하던 그 표정을 이용하는 거다. 힐라토 레이서스님의 배우자 될 분...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루이트 가 되어(궁 안에 그런 소문이 돌 때부터 피가 거꾸로 솟는 같았다) 힐 라토 레이서스 님의 심기를 그토록 가까운데서 어지럽히고, 또한 자신 의 눈앞에서 거치적거릴 모습. 절대 그 꼴은 못 본다. 실례로, 갑자기 레이서스가 루드랫을 가까이 했던 것(그토록 증오하던 상대를) 그건 자 신의 배우자, 루이트 감이라고 생각해 싫어도 만나야 했던 것 아닌가? (이 생각을 뒷받침한 증거, 루파르테 나름으론 많이 있었다.) 그래서 루카나안에게 강력히,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루이트 되기를 사주한 것이 지만... 아무튼 좋다. 이대로, 잠자코 가만히 있다가는 울화통이 터져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스온 아스나엘의 표정을 부러 곡해하여, 루드랫과 그 사이에 무언가 이상한 감정이 있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 그것도 루드랫 놈이 일방적으로 스온 아스나엘을... '이로서, 놈은 힐라토님께 완전한 미움을 받게 되는 거다.' 루파르테는 자신의 계략에 만족하여 웃었다. 이 하나로, 루사벨라까 지 걸고넘어질 수 있는 데야. 루파르테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루드랫 보았다. '이번에 싹을 잘라,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리겠다...' 겐트온은 가디엘과의 만남을 끝내고 나오며, 굳은 얼굴을 했다. 기 분 나쁜 예감... 이젠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원래 며칠 뒤 로 예정한 일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모든 일들이 조금씩 빨라지기도 했 고, 도비온이 저 꼴이니 시간 여유라도 넉넉한 것이 좋을 것 같다. 아 무튼, 어떤 불리한 조건이 방해한다 해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그런 식...' 머리를 자르고, 20년 동안 마노테오나에 살아봐? 그런 식으로, 속 뒤집히는 말을 웃으며 할 수 있는 자는... '그 자' 하나뿐이다. 혹 자 신이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제길... 엘야시온조차, 놈에게서 소생술을 어떻게, 왜 받았는지 알 아낼 수 없었다고 하니.' 겐트온은 도비온의 저택에 들어서며, 거기에 있던 이드넘에게 명령 했다. "예정한 것을 오늘, 결행한다. 좀 사태가 급박한 것 같지만. 가디스 는 저번 사냥터 사건으로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않았을 테고..." 바라던 대로. "무엇보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계속 뭔 가 꿍꿍이를 꾸미고 사람들을 만나는 눈치야. 그러니 딱 좋은 기회인지 도 모른다." 그러자 이드넘은 긴장한 듯, 딱딱하게 대답했다. "...응" 저번에 호수에 빠진 뒤로, 약간 나사가 풀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 만. 저런 긴장한 것은 좋다. 왜 오늘 갑자기 한다는 건지, 이유를 묻지 않는 것도, 귀찮지 않아 좋다. 게다가 이번엔 겐트온 자신이 직접 나설 것이니. 겐트온은 이드넘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그가 해야할 일에 대해 설명 해 주었다. 그 시간, 루바인은 자기 숙소에서 몇몇 남자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 었다. "....하지만...!" "이야기한대로만 하면 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루바인을 찾은 남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루바인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도 같은 일이다." 그들은 망설이듯 말했다. "...하지만, 경비가 철통같을 겁니다..." "너희들이 언제 그런 것 신경 썼나?" 루바인은 피식, 쓴웃음 지었 다. "그리고 걱정 마. ...오늘부터, '처녀들의 모임'이 있다. 왕족이니 참가하겠지. 더구나, 힐라토 레이서스 님과 말이 오가고 있으니, 분명 히 참석한다... 어쩌면, 그녀도. 그러므로, 차라리 이 기회에... 다..." 루바인은 냉혹한 말투로 여운을 남겼다. 그런 루바인을 보며, 슬라 이는 생각하는 눈을 지었다. "....처녀들의... 모임이요?" 넬리도 그렇게 말했는데? 그게 뭘까? 엘야시온님은 모든 행사에 참 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시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고, 레이서스는 시나의 그런 얼굴에 빙그레 웃었다. "아스테린이 특별히 그대를 지목했으니... 꼭 참석해야 할거야." 처음에, 당연히 시나가 참석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거기까지 동행할 것에 들떠있던 레이서스였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 낮 그것에 대해 묻 자 엘야시온은 카이러스 스아디온은 그곳에 참석 안 할 거라고. 칼리안 과의 불미스러운 일과 어제 일 때문에, 그런 공식적인 행사엔 당분간 참석하지 않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뭐... 어제 일 때문에 확실히 깨 달았으니, 하누카의 날이 지나자마자 자이온으로 끌고 가 루세에서 특 별히 교육시킬 작정이라나. 그래서 레이서스는 내심 못마땅했다. 하누 카의 날이 끝나면 시나에게 힐라토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이 틀어 져서 못마땅하기도 했고... 아니, 다른 무엇보다... '처녀들의 모임'엘 못나가게 된다니...! 처녀로서. 그것도 미래를 약속한 자가 있는 처녀로서. 이것은 그야 말로 처녀를 위한 명예이며 즐거움이다. 하누카의 날 일주일 전... 바 로, 오늘부터, 신부와 함께 아름답게 꾸며진, '신부의 방'에 기거하며 신부를 시중들고, 신부의 말벗이 되며, 마치 자신이 결혼하는 것처럼 신부를 축복해 주는 것. 그리고 더불어 마지막 처녀의 날들을 아쉬워 해주는 것. 이것은 온 엘야시온의 전통이었고, 지금 이 시간 아무리 낮 은 계급이라도 여력만 있다면 이런 '처녀들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재력이 있는 집안의 딸일수록, 많은 처녀들을 끌어 모아 동무로 삼 아 그런 마지막 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레이서스는 아스테린을 위하 여, 모든 왕족 처녀들을 초청하도록 했었다. 그런데, 모든 왕족처녀들이 초청되는 가운데, 시나만이 빠져야 한다 니. 게다가 이런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이... 고 작, 어제의 그 작은 실수와... 자신의... 하지만, 이 부분에서 레이서스의 얼굴은 흐려졌다. 아무리해도, 이 것에 대해선 양심의 가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여기엔 칼리 스나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신부와 매우 가까운 사람 중 하나로. 그것을 못하게 된 건, 바로 자신 탓이고... 그러므로, 확실히.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씀도 당연하다. 그건 일리 가 있는 말이었다. 그의 말이 너무나 당연했으므로, 이렇게 시나와 만 나는 걸, 삼가야 하고 가까스로 만나더라도 시녀들의 눈치를 봐야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시녀들이 은근히 자신을 따돌리는 것... 이 것도 아마 엘야시온님의 명령 때문이리라... 짐작하고, 이해를 하고 있 는 레이서스였다(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하지만.... 이건...' 그 모든 문제를 떠나서, 시나 개인의 명예 문제였다. 모든 왕족 처 녀들이 초청되었는데, 혼자만 빠진다는 것은, 미래, 카이러스 파이오니 온으로서의 명예에도 걸맞지 않는다. 이건 결코, 자신과의 관계를 가지 고 참석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행사인 것이다. 그래서 레이서스는 무리를 해서라도, 꼭 시나를 참석시키기로 마음 먹었고, 그것을 아스테린에게도 말했다. 그랬더니 아스테린은 생긋 웃 으며, '그런 건 당연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레이서스는 아스테린의 그 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스테린은 아무래도, 칼리스나 빼고는 자기를 따르는 여자들을 싫어했으니까. 그 래서 골탕먹이기 일쑤였고. 하지만 의외로, 아스테린은, '칼리스나 언 니에게는 너무나 미안해... 하지만, 그 카이러스 스아디온이라면 뭐...'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여동생이 사랑스러워진 레이서스다. 레이서스가 말했다. "음... 오늘 저녁... 가마가 올 거야. 그대는 그걸 타고... 내가 옆에서 호위를 하겠어." 그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시나였다. 아무래도 이것에 대해 잘 모르는 듯. 레이서스는 그래서 그녀에게 '처녀들의 모임'에 대해 설명 해 줄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아무튼, 그걸 설명할 동안만은 상 급 시녀도 자신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루드랫은 루파르테가 자신에게 전혀 뜻밖의 권유를 해주는 데 잠시 그를 빤히 보았다. "...가디언." "그래, 가디언이오. 루온 루드랫. 힐라토의 프레미어 루이트로서, 가디언을 선출할 임무가 있거든." "가디언이라 하면, 역시..." 루드랫은 말을 멈추고 잠시 기억을 더 듬었다. "...'처녀들의 모임'에서." "그렇지." 아까부터, '가디언'의 의미만 다짐받고 있다. 마치 처음 듣는 낱말 인 것처럼. 22년 전에도 가디언의 임무를 했으면서. "아무튼 경험자이고 하니, 자네를..." "...경험자... 아... 그렇군요." 이번에도 생각하는 듯... 그러다가 겨우, 수긍을 한다. 하지만 뭐 어떠랴. 옛날 일이니 까맣게 잊고 있다,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지. "그래. 그래서 우리 힐라토에선 자네도 뽑히게 되었어." 그러자 루드랫은 맑은 남색의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흐음..." "......!" 루파르테는 그 눈에 잠깐 당황했지만--이 놈이 설마 무슨 낌새를? 왜 이렇게 빤히?--그래서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뭐요?!!! '흐음'이라니!!! 그게 무슨 태도요?!!! 상사의 명령에 그 런 불손한 태도라니!!!" 루드랫은 루파르테의 불쾌한 빛에 좀 놀란 눈을 했다. "아... 죄송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저는..." 루드랫은 빙긋 웃었다. "서 재 밖에서 다툼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왜 이런 제의를 해주시나... 가디언이란 아주 명예로운 직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처녀들의 모임', '신부의 방' 바깥을 호위하는 남성들을 '가디언' 이라고 한다. 주로 신랑의 친구들로 구성되어, 신랑이 올 때까지 처녀 들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왕족의 결혼에서는 신랑의 친구보다 는, 루이티온 계급의 특별히 성분이 훌륭한 자를 뽑아 그런 의식의 가 디언이 되게 한다. 파워즈의 수호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혼에 서는 아마도, 한 세계 당 열 명 남짓. 백 명 안팎의 루이티온이 가디언 이 된다. 성분이 훌륭한 자를 뽑는다고 했으니, 역으로 생각하면 가디 언에 뽑히는 자는 그 세계 안에서 십 위안에 들 정도로 성분이 훌륭한 자라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루드랫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루파르테가, 루드랫에게 그런 훈장을 순순히 달아주려 하다니? 그것도, '--오'체로 말투까지 바 꾸어? 그 뜻을 눈치챈 루파르테는, 주면 순순히 받을 것이지, 역시 교활한 놈이라 별 쓸데없는 데까지 신경 쓴다, 라고 생각하며 미리 준비한 설 명을 해주었다. "흥! 나라고 너를 뽑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스온 아스테 린 님이, 너를 가디언으로 특별히 지목하셨지!!" "...왜, 저를...?" 에잇... 따지기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루파르테는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쳤다. "할건가, 안 할건가?!!" 그러자 루드랫은 루파르테가 걱정할 정도로,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 을 지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승낙의 말을 했다. "네... 저 같은 자에게, 영광스런 가디언의 임무를 주셔서, 감사합 니다.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 "천만에. 말했듯 내 뜻이 아니니까." 그리고 루파르테는 그를 노려보았다. 흥!! 이것 보라!! 재깍 가디언 의 임무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프로포즈도 거절한 척 한 주제에...!!! 아무튼, 이 놈은 지금, 예전 명예를 찾기 위해 노 력하고 있는 거다!! "아스테린, 잘 생각해 보거라. 일주일 동안 카이러스 스아디온하고 있는 다면, 오히려 네가 스온 아스나엘의 시중을 들어주어야 할 게다." "괜찮아요, 엘야시온님. 시중을 들만하면, 시중을 들면 되죠." 이렇게 당차게 대답하는 소녀--아니, 이젠 약간은 어른 티가 나는 아스테린의 말에, 가디엘은 한숨을 쉬었다. "...어제 일 봤지, 않느냐?" "음... 네. 재미있었어요." "재, 재미?" "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멋지지 않습니까? 왕족이 무슨 앉아서 먹이 주기를 기다리는 개도 아닌데. 루이티온만 사람들 앞에서 프로포즈해야 한다니!! 왕족도 가끔은 맘에 드는 루이트에게 그런 식으 로 해야죠! 뭐, 나라면, 루사벨라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아스테린이 이리 이해심이 있던가? "...내가 말하는 건, '프로포즈' 자체가... 아니, 그 자체도 문제지 만. 루이티온을 찍고 싶다면, 낙점도 있으니까. ...아무튼 그 결과가 더 비참하지 않느냐? 맙소사. 사람들 앞에서 그 망신이라니. 왕족들의 권위와 위엄이..." "흐음... 그게 문제이긴 했죠." 아스테린 자신이라면, 루사벨라가 그런 식으로 오더를 거절했다면 무척 불쾌하고 분해서 견디질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 앞에서!! 아니, 사람들 앞에서든 사람들 뒤에서 든 루사벨라가 자기 게 안 된다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낫겠...지만. '하지만, 루사벨라는 나한테 영혼의 공명을 느껴주었거든.' 아스테린은 무척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불쌍하잖습니까? 그러니까 더욱 잘해주어야죠. 굉장히 창피했을 텐 데... '처녀들의 모임'에도 빠져야 한다면... 다른 왕족들이 어떻게 생 각하겠습니까? 불쌍하잖아요." 그 말에 가디엘은 인상을 썼다. 하긴... 아스테린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자신은, 그 칼루스온 인이 또 다른 말썽을 부를까 절대, 안 보이 는 곳에 감춰놓고 싶었지만. 대외적으로 그녀는, 일단 '카이러스 스아 디온'의 지위에 있다. 그러므로 이건 그녀 혼자만의 일이기 보단, 그녀 의 이름에 부여된 '왕족'의 성에 관련한... 카이러스 파이오니온에까지 올라갈 자가, '처녀들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은, 루이티온 에게 프로포즈해서 퇴짜맞았다는 것만큼... 지위와 순리를 흐리는 일이 다. 게다가, 아스테린까지 이렇게 말을 하니... 아스테린이 그녀에 대해 차가운 태도를 보인다면, 지위를 흐리든 순리를 흐리든 절대 내보내서 는 안되지만... "아스테린. 정말 약속하겠느냐? 그녀를 옆에서 잘 보아야 한다. 이 상한 말을 하더라도 그러려니..." "네?" "아니다." 이것에 대해선 칼루스온 인에게 교육을 단단히 시켜놓고. "아무튼, 잘해 주어야 한다." "네. 물론입니다. 엘야시온님." 아스테린은 활짝 웃었다. "미래, 카 이러스 파이오니온께서 제 모임에 참가해 주신다면, 저로서도 영광이니 까요." 아스테린과 만나고 오면서, 엘야시온 가디엘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는 루드랫을 '가디언'으로 추천할 셈이었다. 가디언에 대한 추천이야 각 세계 프레미어 루이트의 소관이므로 그가 뭐라고 할 문제는 못되지 만... 레이서스를 이용하면, 그런 것쯤이야. 하지만, 이젠 다 글렀다. 저토록 칼루스온 인의 루이트가 되길 거부 하는데. 지금 상태에선, 가디언이 된다고 해도 문제다. 다른 루이트들 의 경시. 왕족들의 배척. 그리고 이런 자가 가디언이 되었다는 데 대한 사람들의 불만. 그것까지 책임질 만큼, 가디엘은 에너지가 충만하지는 않았다. 파워 즈를 소환한 것부터 시작해서... 가디엘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 '피곤하군...' 힐러들에게 계속 힐러 라이트를 쐬고는 있지만. '능력'에 관한 피곤 함은, 시간이 지나기 전 까진 회복되지 않는다... "가디언! 가디언이라고? 저 루온 루파르테 님에게 그런 제의를 받았 다고?" "응..." 루드랫은 가디언 의상의 소맷부리 끈을 묶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까 도착해서 입었는데, 잘 맞았다. 하얀, 긴 깃털로 장식한 투구도 그렇 다. 하지만 하디트는 그 희디흰 패턴트 레더 갑옷을 입은 루드랫의 모습 을 뭐라, 설득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루드랫이 갑옷에다 하얀 비단으로 된 겉옷까지 걸쳐 입는 것을 보고, 마침내 말 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루온 루파르테 님의 말대로 할거야? 정말로?" "프레미어 루이트가 하는 말이니, 거절할 수가 없거든." 그러자 하디트가 불쾌해서 말했다. "왜, 거절을 못해?! 엘야시온님 께 말씀드려서!!!" 루드랫은 싱긋 웃고 하디트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굳이 거절하고 싶지 않아. 명예롭잖아. 다른 때는, 내가 이런 자리에 나갈 것 같다고 하면 좋아하더니, 왜 그러지 하디트?" "명예?" 하디트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스온 아스나엘 님의 개인 루이트 자리는 명예롭지 않아서, 거절한 거야? 도대체 꿍꿍이가 뭐..." 그러다가 하디트는 뭔가를 눈치채고 루드랫을 노려보았다. "너..." 이제 루드랫은 옷자락을 밑으로 내리며, 가슴 한가운데의 주름을 똑 바로 펴서, 거기 은빛으로 새겨진 에스메랄다(클로니아의 상징 꽃)가 잘 드러나도록 하고 있었다. "너...!!" "...왜?" "...'처녀들의 모임'에, '그분'이 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않 아?" "----!" 그 말에, 의장용 칼과 의대를 집어들던 루드랫의 손이 멈칫했다. 그 래서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한 하디트가 말했다. "설사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가디언이 된다고--!" 하지만 그때쯤. 하디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루드랫이었다. 잠시지만. '그분'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네가 가디언이 된다고, 그분을 가까이 보거나--" "...아냐." "---!" 루드랫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냐, 하디트. 내가 가디언의 직무를 수행하기로 한 건, 스온 아피네스..." 루드랫은, 가라앉은 눈동자를 했다. 저 힐라토 레이서스의 여동 생... "그분 때문이 아냐." "이렇게 하얀데다 은색인 옷을 입나요? 신부도 아닌데?" 시녀들의 도움으로 긴 로브자락이 끌리는 옷을 입던 시나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 러자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네? 신부가 아니라니...? 이건, 클로니아를 상징하는 색인데요?" 그제야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가... 이건 특별히 웨딩 드 레스같이 결혼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클로니아 상징의... 흐 음... 신부가 클로니아로 시집을 와서 그러는 건가. 그런데, 그 들러리 까지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니 특이하다. 또 다른 시녀가 가슴 바로 밑 에서 띠를 매어, 그 매듭을 길게, 풍성한 바지에까지 내려주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 이 매듭의 꽃들은 에스메랄다.... 이제 곧 실물을 보실 테지 만, 우리 세계의 에스메랄다랍니다." 시나 또한 미소지었다. "참 예쁘네요. 예쁜 꽃이에요." 마치 팬지같이 수수하면서도, 은색의 꽃잎... 조화(造花), 그 은으 로 만든 꽃잎은 아름답게 빛이나, 수수한 것이 오히려 아름다웠다. 기슬러월 18일. 그 엘의 날에, 날씨는 아침부터 다시 추워졌다. 그 러면서 늦은 오후로 갈수록, 하늘은 지나치게 새파래지기 시작했고, 곧 클로니아 특유의 '깨질 것 같은 하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차갑고 청 명한 공기. 입김만으로도 김이 서릴 것 같은 투명한 하늘. 그런 크고 아름다운 하늘에 하얀 구름 하나가 긴 꼬리를 끌며 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이라, 시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하얗게 입김이 나왔다. 왕궁 뜰 안엔, 왕족 아가씨들을 위한 가마가 몇 개나 즐비했다. 정교한 에스메랄다 꽃의 장식이 된, 하얗고 아름다운 가마였 다. 시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가마의 문을 걷고 안으로 들어갈 때, 시나 는 엘야시온 가디엘 님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부터 잠깐 카할에 들렸다가, 그 후로 7일 동안 '왕가의 숲', 가 운데에 있는 '신부의 방'이라는 데로 가서 묵게 된다. 칼루스온 인인 시나까지 거기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많은 거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시중드는 시녀들(다행히 넬리도 보내준다고 했다) 의 말대로 따르고, 왕족 처녀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아스테린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했다. 시나는 가마 안에 마련된 푹신한 의자에 깊게 앉았다. 확실히, 이런 것도... 좋은 경험이라면, 좋은 경험이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화려하 고 아름다운 옷에, 꽃가마까지 타보는 경험을 할 것인가. 시나는 등받 이에 고개를 기대고,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그때, 나팔소리(쇼파르라고 했다)가 울리고, 마차가 흔들, 움 직였다. 그래서 시나는 아까 레겜이 시킨 대로, 가마의 작은 창을 열 고, 바깥을 보았다. 무수한 가마들이, 각각 네 명의 몸집 좋은 가마꾼 들에 의해 차례로 행렬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고, 앞에선 프리커서가 큰소리로 "왕족의 행렬이다-- 신부의 행렬이다--"라고 호령하고 있었 다. 그리고 주위엔 어느새, 말을 탄 루이티온들이. 모두다 새파란 하늘 아래, 눈이 부실 것 같은 흰 갑옷을 입고, 흰말 을 탄 채 가마에서 조금 떨어져 행렬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가디언'이다... '왕가의 숲', '신부의 방'을 지키는... 하지만 시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가까운데 있을 한 남자를 찾 았다. 물론 그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 흰옷을 입은 무리 중에, 오 직 검은 옷에, 써클렛을 쓰고 검은 말을 탄 채, 거기에 있었다. 그도 시나를 찾고 있었는지, 시나를 발견하자, 말을 몰아 가마 쪽으로 와서 내려다보았다. "시나..." 그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사심 없이 웃었다. "클로니아 의 예복이 잘 어울리는군." "레겜." 시나도 미소지었다. 아마도 그가 입고 있는 건,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예복.' 머리엔 검은 색의 커다란 보석이 박힌 금색의 써 클렛을 이마에 내려오게 쓰고... 긴 검은 색의 망토는 발을 덮을 만큼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입을 거라고, 레겜은 긴 시간을 들여, 매 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시나는, 정말 그대로 입은 레겜을 한참 바라 보았다. "레겜도, 잘 어울려요." "고마워." 레이서스는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다시 한 번 쇼파 르 소리가 들렸고, 레이서스는 말의 고삐를 조정해 가마에서 물러났다. "추우니까, 이젠 문을 닫는 게 좋아."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겜은 이제 물러나, 가디언의 의복을 입 은 한 루이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레겜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때문이었다. 시나도 아는 루이트... '루온 루파르테...' 루드랫에게 결투를 신청한 그 루이트이다. 그는 시나가 자신을 쳐다 본다는 것을 알자, 무척 친절한 얼굴로 시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나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하기는 했지만. 저런 친절한 얼굴엔 역시 어 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때 연회에서는 무척 화가 난 얼굴이었기 때문 에, 저것이 같은 사람인가 할 정도이다. 후에 루드랫의 말을 듣기로 '사촌'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눈동자라든지 입매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사촌'인데 왜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였는 지... 시나는 쪽문을 닫으라는 레겜의 말도 잊고, 이야기 나누는 레겜과 루파르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찌르는 듯한 시 선이 느껴져, 시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만, 너무도 놀 라서... '루드랫......!'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5- 관련자료:없음 [25545]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9:53 조회:1140 루드랫이... 바로 그가 거기에 있었다. 한참 뒤쪽에 있기 때문에, 먼 모습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였고, 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서 시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헌데 그때, 루드랫이 시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시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멀리였지만...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시나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소를 지은 건 가?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하지만 그때 다른 루이티온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고, 루드랫의 모습 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그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가마의 천 장은 낮아서... 시나는 답답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드랫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그는 흰말을 타고 있었고, 가디언의 복장이었다. 이젠 웃지 않았지만 계속 시나를 보고 있었다. 별다르게, 기분 나쁘다거나 불쾌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그 냥 침착한 눈길이었고... 너무나 흔들림이 없어서. 시나는, 드디어 그가 자신에게 별다른 감정(어제의 일에 대해)을 갖 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주제넘다거나, 신분이 바뀐 것 같고, 사 람을 함부로 움직이려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은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들자, 시나는 기쁜 나머지... 그래서 아까 루드랫의 인사를 받았다는 뜻으로--한편으론 시험삼아--한 손을 들고, 그에게 조 금 흔들어 보였다. 그것을 눈치챈 듯 루드랫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역시!!' 시나는 희망어린 눈을 지었다. 멀리 있었지만. 그의 분명한 미소를 보았다. 친절한 얼굴. 그렇다면... 사실은 어쩌면 그도, 어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금 은 시나를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렇게, 아직도... 줄곧, 자 신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하....' 시나는 루드랫을 보며, 기쁜 모습으로 웃음 지었다. '확실히, 어제 그건 내 실수였지만... 루드랫의 마음을 잘 알면서, 그렇게 말했으니. 하지만... 그 전에 조금만 이야기 나눴으면, 그게 아 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그래도, 드랫이 오해하지 않은 것 같아, 기 쁘네...' 게다가 이제 보니, 루드랫도 가디언이었다. 옛날에 토너먼트 우승자 였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 부터 계속, 7일간이나 왕가의 숲에 있을 테니, 7일 동안은 절대로, 해 명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을. 시나는 추운 것도 잊고, 가만히 그를 보았다. 사실은 어제 꿈에 서... 루드랫을 보았다. 루드랫은 꿈인데도, 계속, '아피네스'라고... 시나는 미소지었다. '아무튼. 이제 곧 이네요, 드랫. 하누카의 날이 겨우 7일이 남았으 니까... 그렇죠... 아피네스 공주님을 데리고 이곳을 떠날 날도...' 꿈에서나마, 작별인사를 했으니까. 이젠 굳이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까 그래도 역시, 무척 반갑다. 그때 사냥터 이후로는 못 봤고, 어제 연회에서는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해 서... 시나는 '후후' 웃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 앉았다. 루드 랫은 이제 동료인 듯한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나를 보고 있 지 않았다. 역시 바쁜 듯... 가디언과, 이런 시나가 맡은 역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 르니까, 나중에 루드랫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 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 잠깐 본 걸로도 괜찮다. 괜히 무리해 서 어제처럼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 시나는 천장을 보았다. '에... 그러고 보니, 하디트한테도 인사를 해야 하는데... 셰리카 는...' 시나는 여기서, 조금 어두운 표정을 했다. '그래도... 꼭 한번 봐야지. 환상이든, 아니든. 아무튼 그 애는 내 친구야. 내가 생각한 사 람하고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애는 내 생명까지 구해주려 했는데...' 거기다. 아무리 자신이 '합리화'를 했다고 해도. 자신은 이렇게 '존 재'한다. '존재'하는데도 자신을 의심했던 아티스트... 그 사람의 이야 길 듣고, 어쩌면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는가? ...그렇다. 모든 건 다 생각하기 나름.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 정할 필요 없다. 자신에게 아빠가 없다면, 자신이 어떻게 학교를 다녔 을 것인가? ...소녀 가장일리는 절대 없고. 어쩌면 현실 세계에, 셰리 카같이 친한 친구가 있어서... 그 애는 정말로 이름이, '보경이'인지도 모르고... 그 기억을, 결계조각인지 뭔지로, '셰리카'와 공유한 건지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는 짓 같은 건 안 하기로... 시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시나는 빙긋 웃었다. '역시.. 고민하다보니, 나 스스로도, 지쳤는지 이런 결론을...' 게다가 침침한 실내에만 있다 나오니, 기분이 밝아져 그런 것도 있 을 테고. 어제 연회에서 창피했던 것도, '어쩔 수 없었지'라고 체념하 게 된 듯. '훗훗훗... 뭐, 영원히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사실, 나를 위해서 결투까지 해주겠다는 소년도 있었는데...' 현실세계에서 누가 그런 식으로 해주겠는가? '남자'가 자신을 위하 여 '결투'를 해준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엄청난 사건인데. 진짜로 공주님이 된 기분이야. 그러니까, 이런 환경도 나쁜 게 아니잖아? 이런 좋은 드레스에... 시녀 들이 굽실대는 데다, 그 거만했던 귀족들이 존댓말...!! 음식도 엄청나 게 맛있는 거만 먹었고, 침대도 엄청 푹신했지, 가마도 타고...!! 와... 하하... 이건 정말 멋져. 에에... 그러고 보면, 진작 원래 머리 칼로... 아니! 염색만 안하고 이 세계로 왔어도...!! 으윽!! 드랫이 날 무시 못하는 건데!! 그럼, 처음부터 드랫한테 명령도 하고, 그 잘난 척 하는 꼴도 안보고...!! 아아... 너무 아깝다!!! 원수를 갚을 기회 를...!! 아아...' 생각을 하다보니, 점차... 이제야 이런 사실을 깨닫고... 무척, 괴 로워하는 시나였다. 동료들이라고 해야할까. 가디언들은 결코 루드랫을 고운 눈으로 보 지 않았다. 왕족들도 루드랫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긴 마찬가지였지만, 동료들의 멸시는 너무나 뚜렷했다. 그중, 어제 스온 아스나엘에게 프로 포즈했던 루이트들은 매우 생생한 적의의 눈길로 루드랫을 노려보았다. 어떤 자는 일부러, 루드랫을 팔을 치고 가며, "스온 아스나엘 님이 아 니었으면, 넌 올해 최다 결투 기록 보유자가 됐을 거다!"라고 쏘아붙였 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로이카라 프레미어 루이트 루다민이(그 역시 가디언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괴로운 낯으로 설명해 주었다. 어제 루드랫이 나가고 나서, 있었던 일을. "하아... 어떻게 자네가 가디언으로 참가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딱하단 말일세. '대신하는 자'의 개인 루이트를 거절해놓고 이런데 참 가하면... 필시 루온 루파르테의 명령이겠지? 그자는 예전부터 자네를 밉게 보았으니... 아무튼... 아... 내 주인이 나오시는군. 그럼, 나는 가보겠네." 하지만 루드랫은 루다민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한 채, 말을 몰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안장 위의 고삐가 팽팽히 당겨 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이제 나오는 왕족 아가씨들을 보았다. 눈부시도록 하얗게 차려 입은 소 녀들... 하지만 그 가운데, 그녀는 없었다. 어쩌면 먼저 나와 가마에 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너무나 가마가 많아 누가누구의 가마 인지는, 바로 옆에서 호위하는 루이트들 얼굴로나 판별할 수 있었다. 각 세계 루이트는 자기 주인이나 자기 세계의 처녀들을 호위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리고 맨 앞쪽으론 왕족들이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고... 몇몇 왕족들만이 자기들 세계의 상징 색을 띈 옷을 입고 말을 탄 채 가 마 옆에서 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쭈욱 훑다가 루드랫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힐라토 레이서스... 혹시, 그가 다 가가는 쪽의 저 가마가... 그리고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레이서스는 가마를 향해 고개를 숙여 웃었고. 가마의 쪽문엔 한 소녀의 얼굴이 나타나, 역시 레이서스 에게 미소지었다. '시나....!' 아니. 이젠 '스온 아스나엘'이라고 불리는...! 역시 그랬다. 그녀 또한 행사의 복장을 한 채 왕가의 숲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뭐라고 말했고,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 르겠지만... 힐라토 레이서스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시나 에게 무슨 말인가 하고 말머리를 돌려 가까운데 있던 루파르테에게로 갔다. 원래는 자신도 저 부근에 있어야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뒤에 쳐져 있는 것이었는데... 루드랫은 시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다보니, 시나가 레이서스만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 을 보게 되었다. 그 장면을 찬찬히 보다가, 루드랫은 서서히 눈을 찌푸 렸다. 갑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이 생각났다. 또한, 예전에 했던 말 중 에... '...뭐라고 했더라... ....시나가, 저 힐라토 레이서스를 좋아한다 고.....? 그래서...' 그걸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두통이 이는 듯... 했다. 하지만 다음순간. 루드 랫은 인상을 썼다. '아닌가...?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머리는 괜찮은데. 가슴 쪽이 아픈 것 같은데...? 이건... 도대체... 놀랍군. 두통이 가슴에까지 영 향을...' 이건, 또 하나의 새로운 증상일까 생각했다. 과거, 새로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상당한 고통을 겪었으니까. 하지만.... 이거야, '이후' 의 기억... 그것도 최근의 기억인데. 왜 떠올리는데, '아픔'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이상하군?' 루드랫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어, 시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로 선, '감정'이 '육체'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시나가 이쪽의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가슴'쪽이 아픈 것 같아... '두통'과 '흉곽'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루드랫은 잠시. 그대로 생 각을 멈추고 말았다. 시나는 멀리서, 보기에도 저렇게 뚜렷한 회색 눈 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창문은 너무 작아서... 곧바로 그 녀는 안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 전, 루드랫은 뭔가, 그 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리고 고개를 들고... 시나가 아직도 거기 있음에 안도하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시나는 계속 굳은 얼굴이었다. 왜 그런 걸까... 생각하다가, 루드랫은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루다민의 말도. 그제야 루드랫은, 그녀가 굳은 얼굴을 짓고 있는 것이, 어쩌면 자신 을 원망하고 있는 탓이라는 걸 알았다. 순간, 두통이... 아니, 흉곽의 아픔이 심해져서, 루드랫은 인상을 쓰고 자기 가슴을 보았다. 이건 도 대체 뭔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에 가려 시나가 보이지 않았다. 루드랫은 그래서 말을 몰 아, 빈 공간으로 나아갔고, 다행히 아직도 시나는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역시, 원망을...' 사과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으면, 그녀가 느꼈을 모욕과 수치를 자신이 당했을 거라고... 하지만, 정말로, 루이트는 될 수 없다. 루드랫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루드랫은 깜짝 놀랐으나, 시나가 그렇게 손을 흔들고, 멋쩍은 듯 미소짓자....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미소짓게 되고 말았다. '...화가 난 게, 아니었나!' 그 생각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시나는 그녀다운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루드랫도 시나를 보며... 루드랫은 무척 기뻤다. 어쩌면 시나가 자 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중에, 정말로 말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날씨 이야기라든지... '아니... 날씨 이야기는 조금 곤란한지도.' 엘야시온님이 어이없다 는 눈으로 보았다. '요즘'엔 날씨 이야기는 별로 좋은 화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흠... 아무튼... 시나와 이야길 하면, 꽤 재미가 있으니까.' 다른 이들처럼, 자신이 무슨 말을 한마디하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보는 것이 아니라... 웃어준다든지, 핀잔을 준다든지... 아니면, 매우 획기적이라고 할까...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를 해서, 이쪽에 선 아무래도,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가디언과, '처녀'들의 스케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 는지 잘 모르니까. 만날 기회는 역시, 일부러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른 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생각을 하는데, 동료 가디언이 와서 말을 걸었다. "이봐. 누군가 전해달라고 하더군." 그러면서 편지를 건네주었다. 갑자기 편지라니. 루드랫은 의아한 얼 굴로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편지를 펼쳐든 루드랫은 놀란 눈을 했 다. '이건--!' 루드랫은 고개를 들고, 시나를 보았다. 하지만, 시나의 모습은 사라 진 뒤였다. "어떻습니까, 힐라토님? 이래도 제 말이 근거 없는 것이라 하시겠습 니까?" 루파르테는 하늘이 내려주신 이 장면에,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힐 라토님께 상황을 설명하는 자리에, 이런 배경 연출이라니...!! 사건의 발단은, 루파르테가 루드랫의 본색을 폭로하기 위해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말을 걸었을 때이다. 가디언으로 '왕가의 숲'에 있어야 하므로 힐라토 레이서스님을 당분간 모실 수 없으니, 기회가 있을 때마 다 이런 식으로 말해야 했다. 그러나 레이서스는 루파르테의 말을 믿으 려 하지 않았다. "하하... 뭐? 루온 루드랫이, 시나를? 말도 안돼는 소리... 그건 그 대의 오해야, 루파르테." 루파르테가 아무리 여러 번 강조를 해도, "글세, 그럴 리 있나? 내 가 루온 루드랫을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루온 루드랫은... 아니... 글세. 아무튼. 그건 아냐."라고 그놈을 두둔해 주기까지 하는 모습이었 다. 벌써 상당히 놈의 술수에 넘어가신 듯...! 하지만 거기서 물러날 루파르테가 아니었다. 말로만 모함을 하려 했 다면,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건 증거가 있어야 확실 해 진다는 걸 루파르테는 잘 알았다. 그래서 준비한 것에 대해 말을 꺼 내려는 찰나, 루파르테는 시나를 힐끗 보았다. 그녀에 대한 말을 꺼내 는 참이라,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아까 언뜻 보니 이쪽을 열심히 보고 있던데,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다면 점수를 따기 위해서라도 다시 인사 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기회 있을 때마다 안면을 열심히 익혀둬야 한다. 헌데 바로 그때 뜻밖의 장면을 본 것이다. 스온 아스나엘이 아직 도 창문을 열고 있긴 한데, 이쪽이 아닌 다른 곳을 보는 것을. 루파르 테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재빨리 눈을 돌렸고 뜻밖에 그곳에 루드랫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그 둘은 우연히 눈이 마주친 듯, 하지만 루파르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저것을 보십시오-!! 힐라토님 저것을--!! 이래도 제 말이 틀리 다고 하실 셈입니까?!! 저놈, 루온 루드랫이 스온 아스나엘님을 바라보 는 저 시선을 보십시오!!!" "---!!" 힐라토는 루파르테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실소하고 있다가, 그의 말 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서스가 맨 처음 본 것은 루드랫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부드 럽게 미소짓는 모습이었다. "저게 뭐? 인사하는 거잖나? 오래 못 만났으니까." "오래 못 만나기는요!! 어제 그 난리를 쳤는데!! 어제 그 일을 해놓 고 저런 상판이라니!! 저게 제 정신인 놈입니까?!! 부끄럽고 창피하여 얼굴도 못들 자가?!" "아...." 하긴, 루파르테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까... 시나가 이미 루드랫을 이해했다는 걸 모른다. 루드랫 또한 시나에게 감정이 있어 시나의 제안 을 거절했던 게 아니다. 루드랫을 어젯밤 이후 따로 만난 적은 없지 만... 잘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루드랫도 미안한 마음에 저런 식으로 인사하는 것일 거다. 그건 시나의 작은 실수였을 뿐... 그래서 레이서 스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글세... 루파르테. 자네 말은 억지가 너무 심해. 루온 루드랫이, 시나에게 개인적으로 마음이 있어, 개인 루이트 자리를 거절했다는 것 도 그렇고." 그리고 루파르테가 입을 다물도록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옛날 그 일을 겪은 자가... 또 왕족을 넘볼 리가 없는 거야." 글세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루파르테는 더욱 강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놈이라면, 능히 그럴 만 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전과가 있는 놈이기에 더욱 쉬이 재발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개인 루이트 자리를 거절했겠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스온 아스나엘님은 지금 많은 루이트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신 분이 고... 그러므로 그 자리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이 되는 자리인데!! 저 놈이, 혼자서 애 타는 마음에...!! 자신이 스온 아스나엘님의 개인 루 이트가 된다면, 마인드 컨트롤로 더 이상 스온 아스나엘님을 넘볼 수 없게 될까봐!! 그래서 거절을 한 것입니다!! 스온 아스나엘님에겐, 전 혀 그런 마음이 없는데!!! 혼자서, 흑심을 품고 말입니다!!" "하하... 자네, 상상력 하난 풍부하군... 고작 인사한 것 갖고... 그나마, 시나는 거기서 빼 줘 고마운데." "당연합니다!! 스온 아스나엘 님이야, 힐라토님만을 일편단심 흠모 하고 계시는데!!!" "그러니까--" 레이서스는 웃음을 참고 말했다. "이제 그만 하라고. 루온 루드랫은 아니니까. 시나도 물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시나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레이서스의 얼굴 에선 웃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하도 갑작스런 변화라, 왜 그런가 하 여, 루파르테는 레이서스가 보는 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인 상을 썼다. 별다른 광경 없는데? 스온 아스나엘님이 루드랫을 보고 있 는 광경이다. 그런데 레이서스는 아까와 비교하여 눈에 띄게 굳은 표정 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는데 레이서스가 낮게 말했다. "...루파르테." "네?" "이제 됐어.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선 이야기 꺼내지 마. 안 그럼 정 말로 화낼 테니. 알겠나?" "...어..... 네..." 하도 서늘한 어조라, 루파르테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증거'를 붙잡 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도 못 드린 채. "...하지만..." 그래도 한번 말해 보려 하는데, 레이서스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 말머리를 휙 돌려 스온 아스나엘의 가마 쪽으로 가버 렸다. 하필이면, 마침 루드랫이 '편지'를 받아들고 있는 이때에, 루드랫 쪽은 보지도 않고. '크으... 이런!! 이런, 젠장!!!' 이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 짜증이 나는 루파르테였다. 화 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냉랭해 진 건지도 모르겠고. '젠장...!!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증거니까!!!' '증거'만 들이대면 힐라토님도 믿으실 것이다. '증거를 만드는 장 면'은 못 보여 드렸지만, '증거'는 꼭...!!! 필히 보여드리고 말리 라!!! 루파르테는, 손에 편지를 쥔 채 스온 아스나엘의 가마를 놀란 얼 굴로 보고 있는 루드랫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한 스콰이어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람을 거치다니 잘 했어. 이제, 입 다물고 있어. 누가 물어도... 아까 내가 내린 명령은 없는 거야. 알겠나?" 가디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가고 있던 스콰이어는 활기 있게, 그러나 루파르테가 말하는 식으로, 은밀하게 대답했다. "네!" 레이서스는 시나가 탄 가마로 다가가며 방금 자신이 본 시나의 얼굴 을 떠올렸다. 환한 표정으로 정말 기쁜 듯 미소짓던... 약간 몸이 불편한 건가 싶을 정도로 침울한 얼굴이었는데. 어제는 물론이고 요 며칠 만나러 갈 때마다 계속. 오늘 오후엔 어제와 같은 일 이 있어 더욱 더 그랬다. 거의 웃지를 않던... 레이서스는 먼 하늘을 보았다. 이제 슬슬 해가 넘어가려는 시간. 아 직도 하늘은 차가운 푸른색이었지만... 곧 불타는 듯한 노을을 남기고, 해는 완전히 넘어갈 것이다. 그전에 이런 식으로 베쓰-엘 카할로 가서, 그곳에서 날이 완전히 캄캄해 질 때를 기다려, 시가지를 지나 왕가의 숲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절차들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 좋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 당장, 시나와 몇 마디 말 을 나눌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이 사라질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 욱 이런 행사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루파르테의 말을 떠올렸다. --스온 아스나엘 님이야, 힐라토님만을 일편단심 흠모하고 계시는 데!! 모든 것은 루온 루드랫의 일방적이고 주제넘은, 흑심... 하지만, 루온 루드랫은 아니다. 그는 아피네스를... 그러므로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스온 아스나엘'은 '정말'일 까... 레이서스는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물론 먼저 고백을 한 것은 시나 쪽이지만. 그러나, 요즘 그녀의 태도... 시녀들은 그렇다고 해도, 요즘 그녀의 태도는 뭔가를 망설이며, 레이서스의 눈을 피하기 일쑤였다. 오 히려 예전 '레겜'으로 있을 때, 그 갈등 많던 시기가 더 자연스러운 사 이로 느껴질 정도로. 거기다 어제는... 레이서스의 잠시, 굳어 있다가. 루드랫을 보았다. 대열에서 이탈해 멀리 갈 수는 없으니 지금 당장 그 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레이서스의 얼굴이 더욱 안 좋게 변했다. 이따가 베쓰-엘 카할에 가 서. 왜 도대체 저런 식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건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루드랫은 레이서스가 볼 때까지 계속 이쪽을 보고 있던 듯, 레이서스가 자신을 보자 멀리서, 약식의 인사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베쓰-엘 카할에 가서는 루드랫에게 아무 것도 묻지 못 했다. 루드랫은 동료들에게서 떨어져 성전식을 배급받아 먹고 있었고, 그 외에도 줄곧 혼자였는데 레이서스 또한 왕족들과 간단한 식사를 하 며(이제부터 칠일간은 어느 누구라도 절대 금식을 하지 않는다.)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 마침내 레이서스는 결심하 고 그에게로 갔다. "힐라토님." 루드랫은 힐라토 레이서스가 오자 일어나며 말했다. 레이서스는 그 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도 가디언으로 뽑혔을 줄은 몰랐는데." "네." "흐음... 역시 루파르테가?" "아니오. 프레미어 루이트의 말씀으론 스온 아스테린 님께서 지목하 셨다 합니다." "아스테린이?" 놀란 눈을 한 레이서스였다. "묘하군..." 나중에 물 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자네도 불편하겠군. 어제 그 사건으로..." "아... 네." 말을 얼버무리는 루드랫. 그런 그를 레이서스는 가만히 보았다. 그다지 달라진 것 없다. 단지 말수가 좀 적어진 것뿐. 그런데 왜 이런 생소한 느낌이? 마치 처음 대하는 낯선 사람 같은... 그때, 루드랫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힐라토님께서도 불편하실텐데요? 지금 제게 이런 식으로..." "응?" 레이서스는 그 말에 주변을 보았다. 과연 몇몇 왕족들과 귀족 들이 이상하단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당연히 레이서스가 루온 루드랫에게 유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까. 또 저번에 자신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래도 그대 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늘은 하루종일... 그러니까 아침엔 왕 궁에 없더군. 오후에도." "네. 부르시는 분들이 계셔서." "흠... 그래." 아침에 없던 것도, '부르시는 분'들 때문이었다는 걸 로 받아들인 레이서스는, 물었다. "엘야시온님이나 그런?" "네." "그렇군. 어디를 갔었나 했지." 약간 안심한 표정을 짓고(왜 안심이 되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자네한테 할말이란, 다른 게 아니네. 아피네스 때문에..." "---!!"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가디언으로 뽑힌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군. 사실 자네가 가 디언이 된다면 편해지는 게 한둘이 아니거든. 하지만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자네가 너무 힘들까봐, 그냥 뒀지." "왜, 저를 가디언으로...? 스온 아피네스님 때문이라면, 설마..." "응. 실은 어머니께서 강력히 말씀하셨거든. 원래 클로니아에 오기 전부터... 저번에도 잠깐 자네에게 말한 것 같은데? 아피네스는 연회나 그런 자잘한 건 다 빼고라도... 중요한 행사에는 다 참석할 거야. 어머 니의 요구가 그랬거든. 여동생의 결혼식에 언니가 소외되는 건 견디기 힘드셨던 것 같아." "그럼..." "그래. 지금 '처녀들'하고 같이 있지. 물론 시중드는 사람들을 붙여 서. 힐러 란사드크가 안타까운 일을 당해서," 결혼식의 자리라 '죽음' 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새로운 힐러를 뽑는데 힘이 들었지. 그래도 시중들 사람엔 마냐가 있어 괜찮았어. 흠... 어쨌든. 자네를 아피네스 쪽으로 배치하겠어. 부탁해." "스온 아피네스님의 쪽..." 루드랫은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 럼... 힐라토 쪽이군요." "응. 왜?" "...아닙니다." 레이서스는 그렇게 말하는 루드랫의 얼굴을 주의 깊게 보며 말했다. "나도, 이젠 더 이상 카이러스 쪽에 있지 못하고 힐라토 쪽으로 가야할 텐데... 그럼, '왕가의 숲'까지는 자네와 동행하게 되겠군. 실은 자네 가 이쪽으로 올 때, 자네 옆에 따라가던 가마가 아피네스의 것이거든." "...그렇군요." 그러다가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스온 아스나엘 님을 호위하는 사람들은?" "...루온 루카나안. 임시로라도 그렇게 하기를. 내가 루파르테에게 명령했어. 아직 나이가 어려서, 가디언으로 뽑는 건 무리가 있었지만. 난 그의 자질을 높게 평가하거든. 정식 가디언은 비록 아니지만. 이게 인연이 돼서, 앞으로 그가 스온 아스나엘의 루이트가 되어주길 바라니 까." 루드랫은 빙긋 웃었다. "네. 싸워 본 바로도. 그는 좋은 루이트입니 다." 그것이 너무 기쁜 표정이라... 순간,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렸다. 뭔 가, 또...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다. "루온 루드랫." "네." "...그러고 보니, 전부터 묻고 싶던 것이 있는데. 자네, 저 펼쳐진 숲의 호숫가에서 시나가 위험에 처한 걸, 보지도 않고 알았었지? 난 그 후로 줄곧 그것에 대해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건 '영혼의 공명'? 그래 서 성역에 가까운 숲에서도 그녀를 구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렇지 않 은가?" ".....!" 루드랫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그때는 어떤 불길 한 느낌... 위험 같은 것이 시나에게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라고 해 도 좋을 정도로 느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건 '영혼의 공명'이 아 니다. 절대로...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기도 전에(아니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스 스로도 망설이고 있는 사이) 레이서스가 빙긋 웃더니 말했다. "하하... 아니. 내가 뭘 묻는 건지, 모르겠군. 그게 아니라면 자네 가 시나의 위험을 어떻게 알아챘다고. 하하... 자네는 역시 상급 루이 트니까. 난 어릴 때부터,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참 즐겁게 보았거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네가 내 루이트가 되어주었으면 했고..." 루드랫은 그렇게 말하는 레이서스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오랜 기억 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단지, 느낌만이 남아 있을 뿐. "죄송합니다." 루드랫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응? 아니, 지금 자네의 사과를 들을 건 없지. 뭐...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리고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자네가 미 안해하고 있다니 하는 말인데. 내가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 "무슨...?" "사실, 시나가 어제 자네에게 프로포즈했던 건, 자네가 앞으로 계 속, 자신의 루이트가 되어주었으면 해서 한 건 아니었어. 그저 단지, 자네가 아피네스를 데리고 떠나기 전 동안만... 그녀는 그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난 자네가 이런 식으로 배척받는 건 원하지 않아. 아피네스를 위해서라도. 이런 걸로 이미지가 상하지 않길 바라네. 그러니까... 어떨까? 단, 삼 주... 아니, 이 주라 도 좋아. 자네가 스온 아스나엘의 루이트가 되어 줬으면 해. 그러면 내 년엔 루온 루카나안이 있으니까." 루드랫은, 레이서스가 계속, 시나를 '시나'라 친근하게 부르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처음엔 레이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나도 자네가 루이트가 되어준다고 하면 좋아할 거야. 어떤가?" 하지만 그가 두 번째 물었을 때는... "힐라토 레이서스님..." 루드랫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루 드랫의 난처한 표정을 보았을 때. 레이서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러지?" 루드랫은 인상을 찌푸렸다. "...루이트로서 마인드 컨트롤한다면. 역시 평생을 곁에서 지키겠다 서약하는 것이라...." "...두 당사자가, 계약을 파기하면 되므로 그런 건 상관없을 텐데? 시나는 후에 기꺼이 계약을 파기해 줄 테고." "....." 하지만 그래도 루드랫은 묵묵부답이었고, 결국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계약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도..." "....아니." 레이서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피네스를 무척 아 껴주는 것 같아... 오히려 이쪽이 고맙군.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건지 도 모르지. 뭐랄까... 나도,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아피네스를 아끼고 있으니... 일면 기쁘기도 해." 하지만 루드랫은 아피네스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레이서스가 루드랫과 헤어져, 자기 자리로 왔을 때. 루파르테가 와 서 몹시 분노한 표정. 그러나 그걸 억누른 표정으로 레이서스에게 할 말이 있음을 고했다.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 굳은 얼굴이었다.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던 데다, 방금 있던 대화를, 혼자서 생각해 보고 싶어 레이서스는 루파르테의 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아니.. 제발, 들어주십시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 이 듭니다. 놈 때문이 아니라, 힐라토님을 위하여, 이 사실만은 밝히지 않고 참고 있었으나... 그리고 그런 밝히기 수치스러운 일... 우리 가 문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일은, 이렇게 모든 일이 끝난 지금. 차라리 덮어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말씀을 드리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힐 라토님은 충분히 장성하셨으므로. 게다가 또 한번, 놈이 교활한 술수를 부리려고 하는 때이라... 모든 걸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힐라토 레 이서스님, 제발 들어주십시오. 이건 진실입니다." "....진실...? 교활함...? 누구의....?" "루온 루드랫이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그가, 스온 아피네스님에게 접근했던 이유... 그리고, 스온 아스나엘 님께 접근하는 이유입니 다..." 땅거미가 완전히 지자 홰가 밝혀졌고, 가디언들은 다들 말에 올라 그 횃불을 손에 들었다. 기마 술이야 루이티온으로 익혀야할 기본 과정 이니, 그렇게 횃불을 들고도 말을 다루는 솜씨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성전 안뜰에 있던 왕족 아가씨들도 모두 가마에 올랐고, 이제 행렬은 시가지를 지나, 혼 강 상류에 있는 왕가의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캄 캄해지니 더욱 추워져서, 바람 한 번만 불어도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였 지만, 그 행렬을 맞기 위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손을 흔들었고, 여전히 '호우샤나아'를 외쳐댔다. 대로를 온통 차지하며 행렬은, 눈부신 횃불의 보호를 양쪽으로 하여 느릿느릿 계속되었다. 프리커서들의 호령소리는 크게 메아리쳤다. 시나는 마차를 놔두고 왜 가마를 이용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느리게(라고 해도 마차꾼들은 꽤 빨리, 뛰다시피 하고 있었지 만) 간 덕분에 옆으로 보이는 혼 강의 정경이라든지, 건너편에 늘어선 집들의 굴뚝에서 아직도 새어나오고 있는 하얀 연기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쪽문을 계속 열어놓고 있어 무척 추웠지만... 무슨 장치를 한 건지 가마 바닥은 따뜻했고... 또, 따뜻하지 않더라도 언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현실세계로 돌아가면 이런 멋진 광경, 전혀 못 볼텐데... 시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아까 성전에서 본 공주님들의 모습과, 그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한 시녀에게 시중 받던 아피네스의 모습을 떠 올렸다. 시나 자신도 공주님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해, 그리고 그쪽에 서도 껄끄러워 하는 표정들이라, 주로 넬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만... 저번에 아피네스가 자신을 보고 좋아하던 모습이 떠올라, 가서 인사라도 할까 하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아스테린...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 왕족 아가씨들을 잔뜩 거느리고 나타나 시나 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시나에게 몸을 바짝 들이대고, '저번엔 미안했다'고... 시나 는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아스테린은 그리고 생긋 웃었다. 덕분에, 시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고... 기분도 많이 명랑해져 있을 때라, 아 스테린에 대한 감정을 풀게 되었다. 감정이라고 해봤자, '어리둥절함' 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쨌든 아스테린이 중재한 덕분에(어제 일로 누군가 뭐라 할라치면, 아스테린... 그 대가 센 소녀가 뭐라고, 핀잔을 주어서... 오히려 그 말을 한 소녀 쪽이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다른 공주님들하고 그럭저 럭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이럴 바엔 차라리 아피네스 공주님하고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는 순간, 갑자기 아 스테린이 화를 발칵 내서... 매우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야, 아피네스가 저렇게 혼자 있는 게, 아스테린의 탓도 있다는 걸 알았다. 공주님들 자체도 아피네스를 피하는 눈치이긴 했지 만, 피하지 않는 공주님이 있다 하더라도, 아스테린이, 사람들이 아피 네스에게 가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신부(新婦)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굳이 아피네스와 어울리지 않으려 했다. 자매인데, 왜 이러는 걸까, 어이가 없어서 있었는데 그 순간, 출발 할 시간이 되었다고 해 이렇게 가마를 타고나올 수밖에 없었다. '웅... 그래도 한번 찾아가 봐야지.' 아마 루드랫은, 아피네스님이 저렇게 혼자서 있다는 걸 알면 안 좋 아할 거다. 레겜도 마찬가지... 자신의 여동생을 무척 아끼는 것 같던 데. 아까도 자신에게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아피네스를 잘 부탁한 다고. 아스테린의 비위를 거슬린다면, 7일 동안 매우 불편함을 겪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차피 자신은 아스테린보다 아피네스와 더 친했다. '게다가... 친절하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킥킥대 는 사람들 틈에서는 도저히...'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차라리 아피네스님하고 있는 것 이 더 즐거울 것 같다. '흐음... 그런데... 드랫은 이제 전혀 안보이네?' 시나는 쪽문 바깥을 훑어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시 바쁜 건 가...' 레겜이야 아까 낮에, 카할에 갈 동안만 옆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왕가의 숲'으로 가는 동안엔, 스온 아피네스 공주님 옆에서 호위를 한다던가... '아.....!' 시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 지금, 카이러스 쪽인 가... 하는 데에 섞여서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드랫 도 레겜처럼 스온 아피네스 공주님 쪽에...'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까와 같은 위치에 없다는 것은 힐라토는 훨씬 멀리 떨어진 쪽에 있다는 건가. '그렇군...' 시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때 갑자기 매우 세찬 바람이 쌔앵 몰아쳐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 바람에 날린 머리칼을 바로 할 겸, 머리를 긁적거린 시나는 잠시 생각 해 본 후. 역시, 문은 닫기로 했다. 구경은 충분히 했고... 아무리 이 곳에 와서 추위에 강해졌다지만, 감기라도 걸려 콧물을 줄줄 흘리고... 아니, 힐러가 있으니 그럴 염려는 없겠지만. 아무튼. ...춥다. 어디까지 계속 가는 걸까, 생각하며 등받이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갑자기 긴 나팔소리와 함께 가마가 덜컥, 내려앉았다. "....?" 시나가 의아해 하는데, 가마의 문이 걷혔다. "도착했습니다, 스온 아스나엘 님! 내리십시오!" 그 목소리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로, 루온 루카나안이었다. 뭐라드 라... 임시로 호위를 맡게 되었다나. 아까 와서 인사를 했다. 시나는 이제 더욱 친절해진 루카나안의 손을 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시나가 내 리자 루카나안은 신이 나서 말했다. "이곳이 '신부의 방'인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하지만 시나는 그 말도 못 들었을 정도로, 눈앞에 나타난 가건물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가죽으로 만든 천 막이었지만, 천막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것이 중간, 중간 빛나는 유리 로 천막을 장식했고 뾰족한 천막 꼭대기 부분은 온통 유리로 마감되어 있어 안쪽에서 환한 불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이 크기라 니...!! 높이는 주위에 있는 어떤 나무들보다 높았고, 넓이는 한꺼번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은 것 같았다. 숲 가운데에 이런 공터가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루카나안이 재촉해, 안으로 들어 가고 나서야, 이 천막은 '공터'에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천막 자체가, 숲의 나무들을 그대로 포용하며 세워진 것으로... '와....!!!! 세상에...!!!' 안쪽은, 완전한 별세계... 마치 그곳만 봄의 세계인양. 공기가 포근 하고 따뜻했다. 나무들은 푸르렀고, 땅엔 온통 푸른 잔디와 꽃들이, 나 무 사이사이엔 '하누카 리본'으로 보이는 것들이 매여져 있었다. 어느 나무에는 그네들도 매여져 있고... 밤이라 조명이 밝지 않아 그 이상은 알 수 없었지만... 횃불들이 타올라 드러나는 부분 부분은 너무나 아름 다웠다. 뒤를 따라와 있던 상급 시녀가 시나에게 말했다. "스온 아스나엘님, 저것이... 스온 아스나엘 님의 나무입니다. 가셔 서 가지고 오신 것을 걸어두세요."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넬리가 생긋 웃으며, 유리 검을 내놓았다. 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급 시녀가 가리킨 나무쪽으로 갔다. 커다란 나무... 그 나무 가지마다, 회색의 꽃들이 걸려 있었다. '와... 이게 [샤무타]! 회색 꽃이라기에 칙칙할 거라고 생각했는 데...!! 굉장히 예쁘네!!' 시녀들에게, 카이러스의 꽃인 '샤무타'에 대해 이야기 들었을 때, '회색'의 꽃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자연계에 그런 꽃이 있을 수 있다 는 것이... 그런데, 실제로 보니, 여러 겹의 꽃잎으로 되어 있으면서, 안쪽은 진한 회색이고 바깥은 옅은 회색... 봉오리 없는 술은 꽃잎들 사이로 길게 뻗어 있고... 무엇보다, 향기가 너무나 달콤했다... 마치, 천상에서 떠도는 것 같은, 아름다운 향기... 그래서 시나는 잠시, 그 향기에 취해 나무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단번에, 이 '샤무 타'라는 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넬리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역시, 스온 아스나엘님은 카이러스 분이라... 샤무타에 반하셨나봐 요... 그래도, 어서 이걸 걸어놓으세요. 침대로 가보셔 야죠." "어... 응." 시나는 넬리에게서 유리 검을 받아, 손잡이에 달린 매듭을 나뭇가지 에 걸어 놓았다. 이렇게, 신부의 방에선, 남자에게 받은 물건을 걸어놓 고 아가씨들과 어울리게 된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나중에 그 남자하고 이루어지게 되니까. 누가 준건지 밝히지 않아도 되니 부끄럼 많은 아가씨들이라도 아무 거리낌없이 걸어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음..." 시나로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남자 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남자가 생기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는 하누카 리본을 걸어놓기도 한다고 하니... 시나도 이렇게 유리 검을 걸고... (넬리가 절대 이게 좋다고 추천했다. 이것만큼, '뭔가'를 암시하는 물 건도 없다고.) '뭔가...라니. 넬리도 참. 그래봤자, 나는 소용없는데...' "왜 그러세요? 이젠 됐으니, 이쪽으로..." "아니, 잠깐만..." "....?" 시나는 넬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소매에 가지고 있던 리본 을 꺼내서, 나뭇가지에 묶어 놓았다. "어머! 하누카 리본이네요!! 그것도, 회색의...! 예뻐라!! 언제 이 런 것을?" "으응..." 시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아주 옛날에 루드랫에게 받은 건데... 그후, 하도 여러 가지 일이 많아, 나무에 묶어놓을 사이도 없었다. 모처럼 하는 건데... 이대로 잊 혀진다면 리본도 불쌍하니까. 어차피 유리 검도, 리본도... 소용없는 거니까... 이렇게 걸어놓는다면, 리본으로서도 사용되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넬리는 괜히 흥분해서 말하고 있었다. "스온 아스나엘님? 이것도? 이것도 그 분이 주신 건가 보죠?"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여기에 걸어놓은 것은, 누가 준건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죠? 그러니까 나도 안 말할 거예요." "어머...! 스아드님, 너무해요!" 시나는 웃었고, 넬리도 밝게 웃었다. '침대'라는 곳은 뜻밖에 야외에 마련된 풀잎 침상이었다. 보라색 꽃 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와 나무들 사이에, 푸르고 싱싱한 풀잎들 을 모아 침대 모양으로 하고, 그 위에 비단으로 된 하얀 천을 깔아 놓 았는데, 그 사이 사이에 꽃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모두다 '아트'가 걸 린 것들이라... 7일 동안은 절대 시들지 않는다고 한다. 앉아보니, 왕 궁의 침대만큼 푹신하고... 또, 향기가 좋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 엔, 개울이 흐르고 있고.. "하아... 이게, '신부의 방'이에요? 너무 멋지네요..." "그렇죠? 저도 스아드 님 때문에... 이런 왕족의 방은 처음 봤어 요... 역시, 차원이 틀려요. 제 친구들은 그냥 작은 방을 꾸며서 했거 든요... 그런데, 이런 '아트'가 잔뜩 걸린... 아, 공기가 너무 향기로 워요. 아, 저곳이 '식탁'이에요...!! 상급 시녀 님이 부르시네요...!! 이리로!!" 그곳도 역시, 자연 그대로 꾸민 곳이었다. 커다란 통나무 테이블과, 통나무 걸상... 테이블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가득 놓 여있었다.. 잘 요리된 고기들... 가득 쌓인 과일... 하얀 케이크와 과 자들... 각색의 음료수들... '와-- [신부의 방]이란, 어쩜 [천국]이랑 동의어인지도 몰라!' 시나는 정말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신부의 방'에 자리를 잡은 왕족 아가씨들이 다시 나오는 것이 보였 다.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하.. 좋다고? 마음에 들더냐? 클로니아 세스틴과, 힐라토 레이서 스가 애를 많이 썼구나. 네 마음을 흡족하게 하다니." 한 왕족 아버지가 딸의 키스를 볼에 받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이로 서 딸이 7일 동안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거란 걸 확인한 것이다. 시나는 먼저 엘야시온님과 만나고(그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 며, 자신의 걱정을 드러내었다) 엘야시온님의 키스를 이마에 받고, 다 음으론 레이서스에게로 안내를 받아 갔다. 그는 한 막사에 있는데, 그 곳은 앞으로 가디언들의 숙소가 될 곳이라고 했다. 그쪽으로 가는데, 맞은 편에서 아피네스가 오고 있었다. 벌써 자신의 오빠를 만나고 오는 듯... 시나를 보더니, 생긋 웃으며 아는 척 했다. "시나..." 그리고 다가와 껴안으려 했는데... 아피네스를 모셨던 시녀가 그녀 를 잡아끌었다. "안됩니다." "...왜?" "...지금, 스온 아스나엘님은 힐라토님을 만나러 가시는 거니까. 여 기서 방해하시면 안됩니다. 나중에, 저쪽의 방에서 실컷 만나실 수 있 을 테니까." "...꽃이 있는 방?" "네." "응..." 아피네스는 쉽게 수긍하고 시나에게 미소지었다. "기다릴 게." 시나는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아파서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 다. "네. 꼭 갈게요. 스온 아피네스님." "응." 아피네스는 천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시나가 자신을 떠나는 순간, 그 표정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 주 인의 모습을 마냐는 안타깝게 보았다. 스온 아스나엘님의 반만큼이라도 생기가 있으시다면....! 딱딱한 표정의 아피네스는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마냐의 부축 을 받아, '신부의 방'으로 가며, 중얼거렸다. "...기다릴게..."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6- 관련자료:없음 [25547]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12:06 조회:1101 막사는 '신부의 방'과 비교해 간소하고 삭막했다. 횃불이 하나 타고 있었는데... 레이서스는 그곳,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시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바닥엔 두꺼운 나무판자가 깔려 있어 땅의 냉기를 막고 있었 는데 양탄자가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밟으니 삐꺽거리는 소리가 났 다. 그런데도 레이서스는 화덕의 불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매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래서 시나는 바로 그의 앞에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레겜." 밝은 목소리였다. 레이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시나를 보더니, 곧 미 소지었다. "시나... 즐거워 보이는 군... '신부의 방'은 마음에 드는 지?"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전 그런 건 태어 나서 처음 봤거든요!! 엄청난 꽃들에, 나무에...! 동화에 나올 것 같은 개울까지...! 아, 그리고 저 안은 전혀 춥지 않아요...!! '아트'때문이 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아트'가 보통 힘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 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히터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건 줄 은...!!" "히터...?" "에... 그런 것이 있어요." 시나는 또 실수했구나 싶어서, 헤헤, 웃 었다. "음...! 아무튼, 레겜도 봤으면 참 좋을 텐데...! 굉장했어 요...!" "그래... 보고 싶긴 하지만. 남자는 못 들어가니까." "음... 참 아깝네요." "...나중에..." "....?" "나중에, 그대와 내가 혼인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신부의 방'을 꾸미게 하겠어... 모든 왕족 처녀들이, 감탄할만한... 그대의 종속주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만한... 그대는 아 버지가 없으니까 더욱 더..." 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다음으론 얼굴을 붉혔다. "에... 그렇군 요... 보고 싶네요..." 그때, 갑자기 레이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그를 올려다보 게 되었는데... 시나는, 그렇게 일어 난 레이서스가 어두운 얼굴인 것 에 깜짝 놀랐다. "....레겜?" 그때, 그가 손을 내밀어 시나를 끌어안았다. ".....!" 시나는 그에게 안긴 채 당황해서 말했다. "레, 레겜? ...왜 그러세 요?" "....그대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겠지? 그때, 베란다에서 했던 말이 진심이겠지?" 어쩐지 괴로움이 섞인 목소리... 하지만 시나는 왜 그가 이런 걸 물 어보는지, 그리고 왜 이토록 이상한 목소리인지 알 수 없어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때 했던 말이 진심이냐고... 그 말은, 언제나 '진심'이다. "네... 정말로..." 시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 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참으로, 좋아해요." 그러자 레이서스의 눈에 어떤 안도랄까, 그런 것이 서리고...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걸 본 시나는 얼굴을 붉히고, 골똘히 생각했다. 역시, 레겜은 멋있어... 음...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좋아하 는 건, 좋아하는 거고... 레겜은 날 좋아하면 안되니까... "에... 그래서... 저는, 레겜이 날 좋아한다고 했을 때, 무척 놀랐어 요. 누구라도 놀랄 거예요. 레겜도 아시다시피, 나와 레겜은 별로 안 어울려서..." "어째서?" "레겜은... 그러니까... 왕이니까.. 거기다 굉장히 멋있고... 상냥하 고..." "고맙군.." 레겜이 웃었다. "하지만 전 그렇지 못하거든요. 굉장히, 평범하고... 에... 앞으로, 미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은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그렇지 못하 고..." "그렇지 않아..." "아니에요. 그건, 레겜이 몰라서 그래요. 이런 건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견을 들어봐야 해요. 레겜이 생각하는 건... 뭐랄까. 그러니까... 그 래! '편협'한 거예요." "편협해도 별로 상관없어." "아...! 그러면 안돼요! 왕이라면, 편협하지 않은 정신으로..." "그럼..." 레이서스의 눈이 깊어졌다. "그대가 날 도와줘... 옆에서. 편협하지 않도록..." "에? 하지만, 그러니까... 그전에, 레겜은 저를 선택한 걸로 이미 편 협해져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때 레이서스가 고개를 숙였다. "시나... 오랫동안... 그대 를 못 볼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시나는 맨 처음, 그가 언제나 했던 대로, 이마에 키스하는가 보다, 이걸로 작별인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하지만, 레겜은 그 동안 '편협'이라는 문제에 대해 서...."라고 말하는데, 레이서스가 이마를 지나쳐 더 고개를 숙여 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시나..." 그의 속삭임이 바로 가깝게 들리는 순간. "............!!!" 시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레겜....!!! 시나는 이거고 저 거고 생각할 틈도 없이 레겜의 가슴을 밀쳐 내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 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화제를 꺼냈다. "레, 레겜...? 나, 날씨가...!!! 날씨가 오늘은 참 추웠죠?!!"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렸다. "...날씨?" 하지만 아직도 서늘하고 진지한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어서, 시나는 하하, 웃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여, 역시...!! 여기는 너 무 추워요!! 저 안은 아직도 따뜻한데....!!!" "......." 그런 시나를 레이서스는 인상을 쓰고 보았다. "시나. 이리와." "......!!!" "...날씨 같은 건, 내 알 바 아냐." 그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와." 하지만 시나는 한층 더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어쩐지, 저런 차가운 검은 눈은, 평소의 레겜 같지가 않다. "....에... 하지만, 난..." "시나." "....시, 싫어요." "-----!!" 잠시, 막사에 무거운... 그리고 참기 어려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레 이서스는 겨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시나는 그의 눈을 여전히 피하며 말했다. "좋아해요. 정말로... 하, 하지만..." ...모르겠다. 좋아한다면... 소설에도 나와있다. 좋아한다면... 그런 데, 왜...? 시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자기가 '떠날'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레겜에게 가까 이 가지 않으려는... 그런 생각 아닌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른 다. 시나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이제야 겨우,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시나는 말했다.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싫어요. 더 이상은... 레겜... 왜냐하 면, 난..." 어쩌면. 지금... 말해야 한다. 모든 사실을. 헌데, 그때. 레겜이 말 했다. "됐어." ".....?"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어." 굳은 목소리였다. "레겜...? 하지만, 들어줘요... 난... 실은...." "시나...!" 레겜은 마치, 시나가 더 이상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라 도 하듯... '실은'이라는 말 다음에 나올 말을 두려워하는 듯... 시나 의 말을 막았다. 레겜이 시나를 보았다. "...됐어.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해. 대신... 그대에게 전해 줄게 있 어..." "전해 줄 거요?" 레이서스의 저 굳은 표정이 너무나 신경이 쓰였지만. 시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레이서스는 시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루온 루드랫. 그가 그대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더군." "......" 시나는 맨 처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다가 말했다. "저한테... 드랫 이... 정말요...?" 시나의 눈에 천천히 스며드는 기쁨에, 레이서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시나." "...네?" 루드랫의 편지라는 말에, 기뻐서 있는데, 레이서스가 말했 다. "그런 건... 예의에 어긋나." "뭐가요?" "이젠, 루온 루드랫을, '드랫'이라고 부르지 마. 그는 더 이상 그대 의 무엇도 아니니까." 시나는 한참 후,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친구'니까..." "친구?" 레이서스가 훗, 웃었다. "말도 안돼는 소리. 난 내 종속자를 루이티온 계급과 친구가 되게 두지 않아." ".....!!" "자." 어쩌면 꽤 차가운 말투로 말한 레이서스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 다. "직접, 여기까지 받으러 와." 하는 수 없었다. 그것을 받기 위해, 레이서스에게 가까이 가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 레이서스가 시나의 몸을 잡았다. ".....!!" 깜짝 놀라 그를 보는데, 레이서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는, 너무 순진하군. ...편지를 받기 위해 이렇게 오다니. 만 약 내가 속임수를 썼으면 어떡할 거지?" "소, 속임수라니?" "예를 들어." 레이서스는 시나를 조롱하듯 웃고, 고개를 숙였다. "아 까, 못 다한 일을 하기 위해..." "....레겜!!!" 시나가 뒤로 물러나려는데, 레겜이 그런 그녀를 더욱 꽉 붙잡고 말했 다. "이번엔, 도망 못 가..." "레, 레겜....!!!" 그 말 대로였다. 레겜이 너무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시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레겜....!!" 시나의 눈에 눈물이 서렸다. 그리고 공포가. "......!" 그걸 본 레이서스는, 그제야 자기가 하려던 일을 깨달았 다. 그가... 힐라토의 파이오니온인 자신이...!! 레이서스는 순간, 무척이나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나의 몸 을 밀어냈다. "...미안. 그냥 장난이었을 뿐... ...진심이 아니었어." 그리고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시나에게 건네주었다. 몹시 피곤 한 목소리로. "루온 루드랫의 편지야... 그대에게 전해주길 간절히 원 하더군. 펴보진 않았지만... 한 번 봐줘. ...아마... 사과편지겠지. 어 제 있었던 일의..." 막사에서 나온 시나는, 편지를 움켜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넬리에게 갔다. 기다리고 있던 넬리는 시나의 표정을 보고, 그 표정을 오해해서 말했다. "스온 아스나엘님! 그 동안 힐라토님을 만나지 못해, 아쉽더라도 참 으세요...! 일주일은 금방 이니까!" "응..." 시나는 불분명하게 말했다. 어쩐지... 미칠 것 같이 가슴이 아팠다. 레겜의 저 모습...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거 였다... 시나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거'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이런 것'? 이렇게 가슴아파할 것을 왜, 애초에 고백을 했던 걸까? 그냥, 그대 로... 고백을 하지 않고 있어도 좋았을 텐데. 왜 그토록 고백해야한다 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던 걸까... 알 수 없다. 무엇도... 다, 불분명할 뿐. 하지만 시나는 지금, 이 미치도록 아픈 가슴 때문에. 칠일 후. 엘야 시온님이 뭐라 말하시더라도--설마 이것 때문에 자신이 현실로 못 돌아 가게 되더라도--레겜에게 사실 그대로를 말하기로 결심했다. 결코...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는 걸. "절대... 이런 걸 원하지 않았어... 레겜에게만은... 절대..." "...스온 아스나엘님?" 넬리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시나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칠 일 후... 모든 것을 말하자. 그럼 틀림없이 레겜은 이해해 주실 거야. 상냥한 분이니까... 시나는 미소지었다. "넬리... ...편지를 받았는데. 이걸 읽을만한 데가 있을까요?" 레이서스는 시나가 나가고 난 후, 한참 동안을 그 문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가슴 가운데... 이토록 격렬하게 싸우는 두 마음. 지금 당장 달려나가, 그 편지를 돌려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 끝까지... '모든 것'을 밝혀내야 한다는 마음. 하지만 결국 레이서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뚫어져라 문을 보며. 그는 '힐라토 파이오니온'이었으므로. 아니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아, 조금만 움직이면, 모든 것이 부서져버릴 듯 해서... 루드랫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이 차갑게 말했다. "원하는 것? 네 놈이 지금, 뭐라도 있어서 그걸 묻는 거야?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주게?" "그렇게 이해를 잘 해주니..." 루드랫은 둘러선 너 댓 명의 사람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럼 이 만남은 끝이군. 우리 가운데 오고 갈 것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럼, 이만." "이 자식이----!!!" 퍼억!!!! 불시에, 옆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루드랫을 친 루이트가 루드랫의 머 리카락을 움켜쥐고 말했다. "네놈은 처음부터 재수가 없었어!!!! 범죄 자 주제에, 힐라토님을 용케 찾아내 주목을 받을 때부터!!! 한번 마노 테로 산 놈은 그 근성이 없어지지 않는데!!! 이렇게 소생술만 받는다고 루이트야?!!" "맞아!!! 이 자식!! 아직도 이렇게 마노테 냄새를 풍겨대며...!! 재 수 없어!!" "도대체 이놈, 무슨 빽을 쓰는 거야, 엉?!! 아까 가디언으로 오는 모 습을 보고, 속이 뒤집혀서 죽는 줄 알았어!!!" 한 대치고, 주위에선 질세라 한마디씩하고 있었다. '젠장...!' 루드랫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처음 당해보는 이런 집단 린치... 루이트인 주제에, 결투할 생각도 못 하고, 이렇게 패거리로 시비라니. 머릿속으론 상대방이 하는 행동들이 너무나 유치해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그라면, 진심으로 상대조차 안 해, 이들에게 화조차 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화가 났다. '신부의 방' 입구에서 시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그가 받은 편 지... 그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절대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이런 놈들에게...!!! "흥!!! 빽이라고 하면, 역시 엘야시온님과 스온 아스나엘 님의 빽이 겠지!!! 어떻게 그분들과 운 좋게 이어져서!!! 뭐야? 도대체!!! 그런 정도 사랑을 얻으려면, 네 놈처럼 얼굴이 반반해야 하는 거야?!! 그럼, 얼굴 좀 뜯어고쳐, 세상 매운맛을 보여줄까?!!" "젠장!! 이봐!! 얼굴은 놔둬!! 저 얼굴 밑천 하나로, 예전에 스온 아 피네스까지 꼬신..... 으악!!!" 그런 말을 한 루이트의 얼굴이 삽시간에 반대편 나무둥치로 날아가 박혔다. 루드랫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를 꼼짝도 못하게 하고 있던 루이트는 이미 땅에 쳐 박힌 뒤였다. 꼬시고 어쩌고 한 루이트의 얼굴 을 날려버린, 루드랫은 이를 갈며, 낮게 말했다. "....왕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 남은 두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드랫은, '왕족'을 모욕한 자신들 에 대해 벌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쏘아붙였 다. 이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 "...네 놈의 자식들은, '마노테'조차 입에 올릴 가치도 없는 놈들이 니까. 적어도 마노테온은, '인간'이야." "뭐야---?!!!" 순식간에 루이트 두 명을 때려눕히는 루드랫의 실력에, 움찔거리며 감히 덤빌 생각을 못했던 그들이었지만. 이 모욕엔 눈에서 불을 일으키 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몇 번의 주먹질 끝에 앞에 서 있는 나무에 날아가 박히고 말았다. 나뭇가지에서 우수수, 소리가 나며 눈 더미들이 쏟아져 컴컴한 숲의 정적을 깼다. 루드랫은 땅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루이트들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튼. '세다'는 것은 이런데서 좋다. 그래도 '유치한' 놈들하고 끝까지, 그것도 일부러 도발까지 해서 상대했다는 불쾌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불빛 밑에서, 편지를 읽던 시나는 편지의 내용에 너무나 어이가 없 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이...이걸... 이걸, 드랫이 썼다고?' 시나는 레이서스와 만났던 막사를 보고--다시 한번 가서 이게 정말 루드랫이 쓴 것인지 묻고 싶었다--편지에 눈을 돌렸다. '스온 아스나엘님... 어제 일에 대해 사과를 구하고자,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어제 일에 대해선 정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 로... 스온 아스나엘님께 사죄를 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어쩌면 또 한 번의 사과를 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스온 아스나엘님의 개인 루이트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제가 스온 아스나엘님의 개인 루이트가 되지 못하는 이유... 그건... ...부탁드립니다. 이 말은 도저히 편지로는 못하겠습니다. ...나중 에,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힐라토 레이서스님이 계시는 막사는 제 막 사로. 원래는 2인 1실이지만, 저는 혼자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 말을 받아들여 주실 거라면.... 아아, 그렇다면...! 이곳으 로 와주시는 걸, 그 뜻으로 알겠습니다. 밤에... 매일 밤,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충실한, 루이티온 루드랫.' '웅... 드랫이 참, 묘하네.' 어쩐지 절대 루드랫답지 않은 말투에... 시나는 레겜과 만나 슬펐던 마음조차 잊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편 지투와 말투가 틀린 사람도 있으니까... '아니... 그런데 그나저나... 스온 아피네스님에 대해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속이 탔나? 밤중에 와서 이야기를 들어달라니... 나 참...' 그러다가 문득, '이해'한 시나... '아... 그렇군. 스온 아피네스님이 걱정이 돼서... 나한테, 잘 보고 그분의 근황을 일러달라는...... 나 참.....!!' 시나는 벌떡 일어나, 땅에 편지를 팽개치고 발로 몇 번 지근지근 밟 아 주었다. 옆에 있던 넬리가 그런 시나를 놀라서 보았다. "쳇-----!!!!!!! 열부 났네!!!!!" 그냥, 확 하누카 리본을 떼 내 버릴까 보다!!! 이건, 원, 옆에서 보 기에 닭살이 돋아 견딜 수 없을 정도니!!! 보는 사람 심정이랑 형편을 생각해줘야지!!! 밤중에 나와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지 않나!!! 누굴 호구로 아나!!! 자기들 연애 사업에 사람을 오라 가라!!! '루드랫, 몰랐는데, 정말 염치가 없어!!!' 자신도 지금 레겜과의 문제 때문에 고민이 되어 죽겠는데!!!! 한밤중 에 남의 연애사 듣게 생겼나?!! 그 시간에 잠을 한숨 더 자겠다!!! 시 나는 몹시 불쾌해서,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때까지 계속 당황하고 있던 넬리는 시나와 편지를 번갈아 보고, 편 지를 주워들어 묻은 먼지를 탈탈 털고, 시나를 쫓아갔다. "스, 스온 아스나엘님? 펴, 편지는?" "어휴!!!" 시나는 넬리의 손에서 편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확 찢어 버릴까 하다가... 그래. '얼마나 답답하면 그러겠어. 으이구... 아마 스온 아피네스님이랑 제 대로 만나지도 못할 테고... 그래서 이런 소리까지 하는 거겠지. 으 휴... 착한 내가 참자...' 시나는 꾹 참고, 편지를 차곡차곡 접어 소매에 넣었다. 아무튼 준 편 지이니 받아두기는 하자. 시나 시스터즈 덕분에, 아무리 우스운 편지라 도 모아두는 버릇이 생겨서 이렇게 챙기는 것일 뿐... 아, 그래! 나중 에 스온 아피네스님한테 보여줘야지. 루드랫이 이 정도로 스온 아피네 스님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때에도 틀림없이 이 편지를 비웃어 주리라... 루드랫이 겨우, 막사와 '신부의 방'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땐, '처 녀들'이 모두다 '신부의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였다. 루드랫은 화가 난 눈으로 아까의 네 명을 생각했다. 더욱 패줄 것을. 잘못했다. 엘야시온님의 명령이라고 끌고 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잡아 먹게 하고...!!! "....젠장." 루드랫은 소매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내, 다시 그것을 보았다. '루온 루드랫. 그대를, 보고 싶습니다. 어제. 무례했던 그대를 용서한다는 말을 전 하기 위해. 하지만 부탁할 것도 있고... 직접 만날 수 있나요? 그대를 위하여, 그대가 혼자서 막사를 쓰도록 했습니다. 날 만나길 원한다면 밑에 지정하는 막사로 가도록. 밤에, 찾아가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스아디온 아스나엘.' ...이라는 것으로. 불쾌한 내용... 도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이걸 정말 시나가 보냈다면, 루드랫은 지금 당장 자신의 두 눈을 내놓을 것 이다. 사람 볼 줄 모르는 눈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이건 절대 시나의 말투가 아니다. 그리고, 필적... 옛날, 시나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에 놀라서 글을 써보도록 한 적이 있기에, 잘 알 수 있다. 시나의 글 씨체는 이런 유려한 글씨체가 아니다.. 약간은 불안한 글씨체... 그러 면서도, 용케도 이어나가는...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자꾸 읽게 만 드는 글씨체라고 할까.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이렇게 뚜렷한 엉터리 편지라니. 낮에 이 편지를 전해줬던 루이트 말 로는 전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모르는 시종이 와서 자신에게 전해줬 다고. 어디 속해있는 시종인지도 모르고, 무심코 받은 것이라, 기억해 보라고 해봤자, 별로 기억 날 것도 없다는 대꾸를 했다. 루드랫은 힐끗, 편지에 쓰여진 막사가 있는 쪽을 보았다. 여기선 보 이지 않지만, 꽤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막사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배정 받은 막사는, 그 반대쪽... 한번 자리를 잡으면 이리저리 움직이 는 것도 불가능하므로. 루드랫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쩌면 이건, '판테온'의 음모인지도 모르고... 만약, 그들이 또 시 나를 걸고넘어지려 한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므로 시나가 '신부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한번 봤어야 하 는데.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도. 그런데... 그놈들... 정말이 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면 다시 찾아가 패주고 싶을 정도다. "뭐야---!!! '중요하다'라고 그렇게 말했으니!!!! 당장, 전해줬어야 지!!! 그런데 아직도 안 전해줬다고---?!!!!" 루파르테는, 루드랫이 회의장소로 들어오자, 너무 놀라서, 수하의 스 콰이어를 밖으로 불러 낮의 일을 물었다. 그리고 뜻밖의 사실을 알고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젠장!!! 그럼, 낮에 그건 뭐야?!!!" "낮.... 낮에라뇨?" 스콰이어는 마스터가 화를 내자, 정신이 없는 듯 말을 더듬었다. 그게 답답해 루파르테는 더욱 소리를 질렀다. "낮에, 마상에서 전해 주던 문서-!!!" "...저, 전해드린 적 없는데요." "----!!!" "떠나기 전 명령 내리신 거론 마상에서 전해주라는 걸로 알고... 그 래서 전해드리려 했는데. 갑자기 마스터께서, 명령은 잊어버리라고... 그, 그래서..." "제기랄----!!!!" 이런 실수가!! 자기 눈으로 봤다고 생각해 그런 말을 한 것이 어리석 었다!!!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그래서 루드랫, 저놈이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막사로 기어 들어온 것이다!!! 지금쯤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하 는데!!! 제기랄!!! 하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낮에, 내가 준 편지 어디다 뒀어!!!" "....잊어버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루파르테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공터에 퍽, 소리가 울렸다.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가, 주먹으로 수 하의 스콰이어 얼굴을 날리는 소리였다. "어디 갔다, 이제야 오셨는지 모르겠어. 이거야 원... 프레미어 루이 트보다, 더 거만하신 모습에... 우리 같은 미천한 것들은 몸둘 바를 모 르겠다니까." 누군가 빈정대자, 한쪽에서 말했다. "흥... 어련하겠어? 왕족의 프로포즈도 거절할 정도로 잘나신 몸인 데?" 하지만 루드랫은 꾹 참고, 구석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막사에서 나 가고 싶어도, '명령서'를 받은 후 나가야 한다. 루파르테의 꽤 널찍한 막사엔 힐라토 가디언들이 모여 있었다. 앞으 로 임무 분담과, 보초를 설 시간대를 의논하기 위하여. '왕가의 숲'이니 위험한 몬스터라든지 그런 건 절대 없고, 있어봤자 여우나 늑대정도겠지만, 그래도 관습상 보초는 필요했다. 헌데, 벌써 그것이 대강 끝난 듯 가디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하누카의 날까지 일 들이 무사히 끝나기를 축원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루드랫이 들어서자, 모두들 못마땅한 얼굴로 루 드랫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루드랫은 고개만 꾸벅 숙이고, 구석으로 가 거기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런 식의 빈정거리 는 말들이 툭툭 터져 나왔다.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고, 어쩌면 피곤이 더욱 가중되는 듯했다. 아침부터,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육체적으론 괜찮다고 해도, 정 신적으론 너무나 피곤했다. 며칠 동안 잠만 자라고 누군가 명령해 준다 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도대체, 왕족의 개인 루이트도 거절한다면... 누가 저 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건가?" "뭐... 아주, 특이하신...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니까... 마노테 나..." 탁---!!!! "-----!!!!" 루드랫은 부츠를 신은 발로 기대고 있던 나무의 밑동을 세게 차며, 일어나 몸을 똑바로 했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막사 안이 조용해 졌는 데, 루드랫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명령서'를 얻을 수 있습니까? 제 임 무에 관련한." 그러자, 가디언들은 인상을 썼다. 깜짝 놀랐던 것이 분한 듯... 누군 가 한 명이 말했다. "웃기고 있네. 웬 명령서! 회의할 때, 그 자리에 없었다면, 네 놈이 알아서 허드렛일을 하든지, 날밤을 새든지 해!" "황당한 놈 아냐?! 우리가 언제, '문서'로 만들어 명령 수행했나?!! 네가 정말 무슨 상관이라도 되는 줄 알아?! 문서를 갖다 바치길 원하 게?!" "풋. 관둬. 루이트가 안되니, 하바트 흉내를 내고 싶었나 보지!!" "----!!" 그랬다. 이들은, 임무에 관련하여 문서를 주고받기 보단 주로 구두로 처리한다. 글을 모르는 루이티온도 있고, 대부분의 루이티온들이 글 읽 는 걸 싫어하니까. 그러므로 회의에 관한 건.... 루드랫은 한쪽에 마련 된 기록사의 책상을 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실수로군. 이럴 줄 알았다면, 나중에 들어와 기록사에게 묻던지...' "그렇군요. 그럼..." 그리고 막사를 나가려 하는데, 들어오던 루파르테와 딱 마주쳤다. 루드랫이 들어오는 걸보고,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바깥으로 나가버린 그였다. 루파르테는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고 말했다. "어딜 가나?!! 명령도 제대로 안 듣고!" 하지만 안을 들여다본 루파르테는, 사람의 눈이 너무 많음을 알았다. '젠장.' "따라와-!!" 루드랫은 루파르테가 건네준 문서를 펼쳤다. 과연... 문서는 명확하 고 꾸밈이 없었다. 루드랫은 빙긋 웃었다. 이런 게 바로 '진짜' 문서라 는 것. 얼마나 명확하게. 사람이 가장 피곤한 시간대에만 보초라든지 임무를 수행하도록 짜놓았는지. 그리고 말미엔 이런 소리도. '최대한 단독행동을 하도록 짰으니. 가디언들의 모임엔 제발 나오지 말아주길 바란다, 루온 루드랫.' 의심할 바 없다. '너무나... 루파르테다운 문서이군.' '진짜' 문서를 받아서 별로 좋아진 거라곤 없지만, 그러나 어쩌겠는 가? "...명령대로 수행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잠깐!" 루파르테가 불러 세웠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는데... "오늘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군..." 루파르테가 날씨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나는 울컥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아피네스와 가까이한 뒤로 고의적으로 따돌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대화에서 철저히 제외되 지를 않나, 따뜻한 개울물로 씻을 때에도 주변엔 한 명의 왕족 처녀들 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아피네스와 단둘이, 이런 구석진 자리에 있는 침대를 배정 받게 되었 다. 그것도... 침대가 모자라다나. 둘이서 같이 쓰라고 해놨는데. 한 왕족 아가씨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 늦게 오니까 그렇죠, 스온 아스나엘. 어쩔 수 없죠... 따로 자게 돼서 아쉽지만... 하지만 스온 아스나엘이야, 원래 갑자기 나타나 신 거라. 시녀들이 하나둘, 준비를 빼먹었나봐요. 너그럽게 용서해 줘 요." "맞아. '대신하는 자'니까. 자기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억도 없 다고 하니까... 뭐, 굳이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대신 하는 자'는 엘과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뭔가 성스러운 거니까... 같 이 있으면 서로간에 불편하잖아. 우리가 있으면, 역시 방해가 되죠? 그 렇죠?" 정말, 따돌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성스러워서' 따돌린다니. 하 지만 같이 있으면 서로간에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시나는 미소 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안녕히 주무시라고 말하고 아피네스와 함께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리고 나서 시녀들이 이곳으로 안내해 주었는데, 안내를 하는 시녀 들의 태도가 몹시 어색하고 얼굴에 죄책감이 어려있는 걸로 보아... 그 리고, 저쪽에 늘어져 있는 풀잎들의 흔적을 보아. 아무래도 안쪽에 있 던 따뜻한 침대, 한 개인가 두 개인가를 급하게 치운 것 같았다. 아까 개울가에서 씻을 때 옮겼는지도 모른다. 아스테린이 시녀들을 불러 뭔 가 호통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무척 분했다. 꽃이 잔뜩 피어 있고, 반딧불 같은 불 들이 주변에 떠있는 저곳에서 자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지 만... 그래도, 이런 대우까지 받으며 붙어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 다. '신부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아피네스를 찾아가 인사를 나눴고... 그런 시나의 모습을 눈치 챈 아스테린이, 그쪽에서 쓸데없는 시간 보내 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기에... 아피네스까지 데 리고, 그쪽으로 갔더니... 아스테린이, "스온 아피네스는 지금 졸린 것 같은데. 마냐에게 말해서 침대로 가서 자라고 해요."라고 말했다. 그런 데 그때... "별로 안 졸려. 여기에 있겠어."라고 아피네스가 고집스럽게 말해서. 아스테린이 쌍심지를 돋구며, 날카롭게 말했다. "가서 자라고 하면, 자는 게 좋아. 그대와 있는 사람이 피곤한 걸 생 각해줘야지!!! 정말이지, 바보 같은...!!" 아피네스는 더욱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싫어! 네가 더 바보인 주제 에!!!" ...그래서 이 모양이 되었다. 아피네스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던 아스테린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모두들, 이야기는 관두고 우선 개울에 가서 씻자고. 그러더니 시나에게 말했다. "스온 아피네스는 여기가 좋은 것 같으니, 여기에 놔두고 와요!! 스 온 아스나엘!!!!" 의미는 분명했다. 자기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아피네스와 어울리는 건 포기하라는. 하지만 시나는 결국, 그들을 쫓아갈 수는 없었다. 아피 네스가 시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양심의 가책에... 아피 네스의 시중을 들던 나이 많은 시녀가, "괜찮으니, 가시지요..."라고 권해 주었지만.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레겜과, 루드랫을 봐서라도...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약속했는데요. 스온 아피네스님을 돌봐드리겠다고." "스온 아스나엘님..." 마냐는 말은 안 하지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잠잘 준비를 하기 위해 약간 나중에 아피네스와 함께 개울가로 가니, 그곳에서 물장 구 치고 놀던 아가씨들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 그 자리를 떴다. 그리 고 나서 침대 있는 곳으로 오니... 침대가 없다...고. 시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녀들이 말리는데도, 베개 싸움을 하고, 즐겁게 노는 공주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 마냐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어... 아무래도 이곳의 주인은, 스 온 아스테린 님이니까... 지금이라도, 가셔서 어울리시면." "아니. 괜찮아요!!!" 시나는 분연하게 말했다. 누가 질줄 알고? 둘만 이라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정말이지, 공주님들 이 뭐 저렇게 치사하지?!!! 시나는 아피네스의 손을 잡고 기운차게 말 했다. "스온 아피네스님!! 우리 즐겁게 지내요!! 알았죠?!! 아, 그렇지!! 내가 드랫 편지도 갖고 있으니까요!!" 아피네스는 빙긋 웃었다. "응." 그 미소에 시나는 또 한번 기운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즐겁 게 지낼 수 있다! 비록 축축하고, 눅눅하고, 어둡고, 약간은 추운 곳에 서 자게 되었지만...!! "넬리! 보따리를 줘봐요!!" 스온 아스나엘이 다른 공주님들에게 따돌림받는 것에 어쩔 줄 모르던 넬리는, 시나가 그렇게 말하자 들고 있던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시나는 침대에 풀썩 앉아, 그것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안쪽에서 꿈틀거리며 한 무리의 소인들이 기어 나왔다. "푸... 배고파서 혼났어... 잠은 너무 많이 잤어... 시나 인간, 왜 이제야 꺼내 줘?" 기어 나온 예라우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툴툴대며 말했다. 시나 는 예라우니의 작은 멱살을 움켜잡고 말했다. "예라우니!! 여기다 불 좀 피워줘요!! 그리고 쾌적한 환경을...!!" 예라우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나를 보았다. "...밥은..." "일을 잘하면!!" "자, 이젠 막사로 돌아가야지? 새벽에 일어나 보초를 서려면? 아무래 도 왕궁이 아니라... 잡것들이 꾈지도 모르니, 철저하게 지켜야 함은 말 안 해도 알 거야. 절대 명령받은 곳을 이탈해서는 안돼. 알겠나?" 한참 날씨가 어떠니, 역시 이런 밤엔 마음이 편해진다느니 말하던 루 파르테가 마침내 루드랫의 어깨를 툭 치며, 이야기했다. 거기다 앞장서 서, 막사까지 같이 갈 기세를 보였다. 막사로 돌아가기 전, '가짜 문 서'에 적힌 막사를 슬쩍 둘러보려던 루드랫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자? 안가?" 하는 수 없었다. 루파르테가 가고 나면 둘러보든지, 조금 일찍 일어 나는 수밖에. 배정 받은 막사로 들어가니, 뜻밖에 거기엔 루온 루카나안이 있었다. 루파르테가 흐뭇하게 말했다. "이쪽은 루온 루카나안. 굳이 소개 안 해도 알겠지만. 결투까지 한 사이니 말이야. 스콰이어로 자네 시중도 들어주고... 아무튼 친하게 지 내." 시중을 들어준다는 루카나안은, 루드랫을 경멸어린 눈으로 보고, 고 개를 끄덕 숙이고, "힐라토의 루온 루카나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전혀 잘 부탁하는 말투가 아닌 말투로 말했다. 루드랫은 얼굴을 찡그릴 뿐. 감시 역이란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루파르테는 떠나기 전, 루카나안을 불러내 말했다. "편지는? 확실히 갖다 놓았나?" "네." "읽는지 안 읽는지 꼭 확인해." "네." "좋아, 루온 루카나안. 이 일을 잘해내면 스온 아스나엘 님의 명예도 다시 세우고, 루온 루드랫 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거다. 명심해 라. 알겠나?" "네!" 두 사람은 굳은 표정을 짓고, 헤어졌다. 필경사에게 편지를 새로 쓰 게 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긴 했지만. 그래서 추운 바깥에서 되지도 않은 날씨 이야기나 해야 했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내일 새벽... '네 놈은, 끝장 나는 거다. 루드랫.' 루파르테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안으로 들어간 루카나안은 루드랫이 편지 읽는 것을 보고, 미소를 흘 렸다. '흥...! 읽고 있군.' 보지 않고 있다면, 후드 자락을 뒤져보도록 은근히 유도할 셈이었지 만... 이젠 됐다. 저것이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의 명령 이다. 분명히 스온 아스나엘 님의 원수를 풀어주실 것이다. 내일 새 벽... 루카나안은 자기 물건을 정리하고, 루드랫의 물건도 정리한 뒤, 말했 다.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십니까?" 편지를 읽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루드랫이 고개를 돌렸다. "아... 갈리키니움 4경 무렵에." "그렇습니까? 그럼 그때 사람이 오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의장용이 아닌, 본격적으로 갑옷이라든지, 하는 것을 입어야 하니까.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아무래도 같이 일어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피곤할 테니 먼저 자도록." 루카나안은 눈을 찌푸렸다. "...상관이 아직 주무시지도 않는데, 잘 수야 없죠." "....그런가." 루드랫은 한숨을 쉰 뒤, 소매에 편지를 넣고, 간이침대에 앉았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자두는 게 좋겠군." 한참 후. 루카나안이 고른 숨소리를 내자, 루드랫은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리고 벽에 걸린 후드를 집어들고, 몰래, 막사를 빠져나갔다. 루 드랫이 빠져나가고, 얼마 후. 루카나안은 한쪽 눈을 떴다. 마스터가 말씀하신 대로였다. 편지를 받은 루드랫이 밤중에 빠져나갈 거라고. 그럴 땐, 그냥 모른 척하라고 했지만... 루카나안은 윗몸을 일 으키고 머리를 긁적였다. "흥... 편지를 보고, 어디서 온 거냐는 둥, 물을 줄 알았는데... 안 묻네?" 물어보면 모른다고 딱 잡아뗄 참이었는데. "흐응..." 뭐, 좋겠지. 루카나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바깥에 횃 불을 하나 더 세워두었다. 루드랫이 예상대로의 행동을 했을 때, 세워 두겠다고 한 횃불이었다. 그것이 활활 잘 타는 것을 확인한 루카나안은 침대 앞으로 와, 어릴 적 했던 대로 기도를 드린 후(제발, 제가 스온 아스나엘님의 루이트가 되게 해주세요)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하루 다. 조금 후엔 일어나야 하니, 잠시 눈을 붙여 두는 게 좋다. 루카나안 은 곧, 곤한 잠에 빠졌다. 그가 필경사에게 받아와, 루드랫의 후드 소매 자락에 넣어놓은 편지 는, 뜯겨지지도 않은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7- 관련자료:없음 [25548]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12:07 조회:1072 루드랫의 막사에 횃불이 오른 것을 확인한 루파르테는 회심의 미소 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숲 구석에 떨어져 있는 막사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말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힐라토님. 하지만 드 디어... 놈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앉아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레이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레이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디, 자네 말이 정말인 가, 확인해 보지." 아까 왕족들이, 자신의 딸들이 무사히 신부의 방에 들어간 것을 확 인하고 돌아갈 때, 레이서스 또한 같이 돌아가는 척하다가 중간에 돌아 와 이 막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레이서스는 빙그레 웃었다. "...내 개인 루이트의 말이니까, 말이야..." "네!" 루파르테는 신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뻐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레이서스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 차 가운 눈동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스테린은, 자기가 쫓아내 버린 시나들이 있는 곳을 흘끗 보았다. 잠자리 들기 전 들떠서 꺄악, 꺄악 대며 떠들던 아가씨들은 이제 하나 둘,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기 시작했다. 시녀들 또한 멀지 않은 자기 들 잠자리에서 잠이 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쪽엔 희미한 불빛이 있 었다. "칫....!!" 아스테린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서 잠자던 자스민이 웅얼거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어디 가요?" "잠이나 자세요, 스온 자스민." "...으음... 그러죠... 아아.. 칼리안 님..." 꿈결에서 율르스를 만 나고 있던 듯, 자스민은 한숨을 쉬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자스민을 짜증나는 눈으로 본 아스테린은, 시나들이 있는 쪽으 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시녀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아스테린이 가는 쪽을 보고 웃음을 짓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스테린 님이 먼저 아스나엘께 사과를 한다거나 말을 걸어준다면... 자기들로서도 편한 일 이다. 아직도 이곳에 있어야 할 날이 많이 남았는데... 아까는 하도, 스온 아스테린이 화를 내며 말을 쏘아붙여, 결국 저런 곳에 잠자리를 만들어, 스온 아스나엘을 그쪽으로 보냈지만... 엘야시온님이나 다른 왕족들이 안다면, 경을 칠 일이다. 그러니, 아스테린 님이 냉정을 찾 고, 저렇게 먼저 가 주신다면... 괜히 문제가 커지지도 않고 매우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시나는 브라우니들이 솜씨 좋게, 피워놓은 모닥불을 쬐며 아피네스 와 이불을 같이 둘러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브라우니들은 물론이고, 시녀들은 다 잠이 들어 있었다. 브라우니들 이, 시나와 아피네스의 잠자리는 물론이고, 시녀들의 잠자리까지 포근 하고 건조하게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마냐는 '브라우니'가 시나와 함께 있다는 놀라워했고, 넬리는, 저번 에 설명을 들어서 많이 놀라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여기까지 그들이 따라왔냐고 꽤 신기해했다. 자기가 알기로, 그들은 '지역'에 따른 요정 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을 따라다닌다니, 희한하다는 이야기였다. 아 무튼... 브라우니들 덕분에, 밤 시간은 꽤 즐거웠고(저쪽에 있는 시녀 들은 몰래 다가와, 시트라든지 베개를 더 갖다주고, 여러 가지로 돌봐 주었다) 마냐와 넬리는 시나와 아피네스 옆에서 끝까지 시중들고 싶어 했는데... 시나는 그들이 하품을 참는 것을 보고 가라고 내쫓았다. 엘 의 날인데,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따라와 있는 것이다. '흐음... 하지만 뭐, 사실은...' 시나는 자기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는 아피네스에게 빙긋 웃었다. '내가, 현실 세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현실 세계 이야기를 듣고 전혀 놀라지 않고, 퍼뜨리지도 않을 사람 에게 현실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 좀 더 확신을 갖고, 하누카 날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피네스 공주님, 그래서... 학교라는 곳은, 오후에 늦게 끝나 고... 가끔은 일찍 끝나기도 하지만.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빠 가 계세요. 우리 아빠는, 소설가인데....." 아피네스가 빙긋 웃었다. "아빠. 수염이 난?" "네. 공주님 아버님도 수염이 나셨나 봐요?" "....." 아피네스는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신비로워서... 시나는 턱에 손을 괴고 쳐다보았다. 아까도 이런 모습으로, 내내 앞을 보고 웃고 있었다. 그게 꼭, 브라우니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웃고 있 는 것 같아서... 시나는 조심스럽게, 혹시 브라우니들이 보이냐고 물었 지만, 아피네스는 묘한 눈으로 시나를 보기만 할뿐. 거기에 대해선 말 을 하지 않았다. '흐음... 그런데, 브라우니들도 꽤 사람을 가리는 편이었지?' 저번에 힐러 란사드크도 굉장히 싫어해서, 그가 가고 난 뒤 흥분해 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뜻밖에 오늘도, 이 공주님을 경계하며 가 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계속, '기분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피네스 공주님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우웅... 브라우니들은, 정말 이상해... 말도 멋대로, 행동도 멋대 로... 그러니까... 이번에도, 뭔가 자기들 멋대로의 이유로 싫다고 하 는 거겠지.' 아까는 예라우니가, 공주님을 보고, '마녀'라고 욕을 해대서... '무 슨 말버릇'이냐고 손으로 예라우니를 퉁겨 버렸다. '으악-' 소리를 내 며 날아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은, 곧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기 때문인데. 예상대로 예라우니는 멀쩡하게 돌아와, 씩씩대며 시나에게 혀를 내밀어 대고, 엉덩이를 돌려대고, 그러다가 한번 더 퉁겨진 후, 제자리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하여간.. 소 악마라는 게 딱 맞는 말이라니까. 넬리에게도, [야, 이 계집애야! 좀 더 맛있는 걸로 가져와!!]라고 욕을 하니까... 으휴.' 넬리나 마냐가 브라우니가 말하는 걸 못 듣고, 못 본다는 게 다행이 다. 그리고 아피네스 공주님도. 그때, 아피네스가 중얼거렸다. "편지를 읽어 줘." "편지요?" 아까 드랫의 편지를 읽어주니까, 아피네스는 활짝 웃었다. 꽤 좋아 하는 눈치인데... 시나는 훗, 웃고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공주님 도, 좋아하는 마음만은 보통 사람과 똑같은 것 같다... 헌데 편지를 꺼내려 하는 때. "...화기애애하시군." "---!!" 시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린이 입술을 내밀 고,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온 아스테린 님..." 아스테린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도 대단하다니까, 스 온 아스나엘. 아피네스 같은 거랑 즐겁게 이야길 나누다니... 대단해." "가, 같은 거라니..." 시나가 놀라서 말하는 데, 밑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꺼져버려!!" 시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밑을 보았다. 그리고 더 놀라고 말았다. '----아니!!' 아피네스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아스테린을 노려보고 있었 다. 어찌나 험악한 눈인지, 아까 웃는 얼굴이 상상이 안될 정도였다. "...멍청한, 계집애!! 귀찮게 하지마!! 꺼져!!" 시나가 입을 딱 벌리는데, 아스테린이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정말이지. 재수 없어. 사람들 있는 데선, 멍청한 척 하다가, 단둘 이 있다고 생각하면, 욕설을 퍼붓고. 여기서 또 저런 본색을 드러내는 군. 지겨워!" 본색!? 시나가 너무 놀라,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아스테린이 말했다. "흥!! 정말, 저런 거하고 한자리에 있기 싫지만, 그대에게 해야할 말도 있고... 좀 앉을게." 그리고 자리에 앉은 아스테린은, 아피네스를 경멸어린 눈으로 보며 말했다--아피네스도, 아스테린을 미움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긴... 저게 싫어하는 게, 나 한사람만은 아니지만. 그래서 매우 놀랐어. 저게, 그대를 좋아하는 걸보고." 시나는 아스테린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아스테린의 말보다는, 아피 네스의 모습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시나를 보고 아스테린은 씨 익 웃었다. "...뭐야? 정말, 아피네스가 저렇게 하는 걸 지금까지 한번도 못 봤 어? 아피네스는 단둘이 있으면 누구한테나 저래. 가끔은 오빠한테도 저 러는 데. 예외가 있다면... 으음... 하온 하아마사랑... 힐러 란사드 크... 그리고 내 루이트..." 아스테린은 여기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 었다. "그래, 맞아. 저게, 내 루이트 루사벨라한테는 아양을 떨지. 정 말, 재수 없어." 아피네스가 차갑게 뱉었다. "네가, 더 재수 없어. 이 계집애야." "어휴... 저런 상스러운 소리에. 어떻게 저런 게 왕족이라는 건지!! 오빠가 아니었음, 예전에 죽었을 게!! 저건, 선을 보러간 자리에서도, 상대방 귀를 물어뜯어서, 아주 피투성이가 되어 왕궁으로 돌아왔지!! 내가 10살 무렵, 힐라토 왕궁에 돌아와 있을 땐데...!! 죽어도 잊지 못 해!! 그 눈빛이라니!! 피를 입가에 묻혀 가지곤, 아주 기분이 좋은 듯 웃고 있었다니까!! 저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야!!" 시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시나를 보고 아스테린은 픽, 웃었 다. "흥!! 하긴...! 내 말은 별로 믿기지 않겠지? 내가 저번에, 그대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 했잖아?" "......!!" "...뭐... 그때 일, 정말 제대로 됐으면, 난 그대를 죽였을 거야. 그리고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을 테고." 아스테린은 시나의 질린 표정을 보고 빙긋, 웃었다. "낄낄... 뭐야, 그 표정은? 내가, 무서워? 내가, 아피네스와 오십 보 백 보 같애? 낄 낄..." 아스테린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낄낄... 하긴. 나도 그렇 게 생각하지만..." "----!!" 아스테린은 눈을 들었다. 까만 눈이 반짝였다. "난... 어렸을 때, 아피네스를 처음 보고... 너무 하얗고, 예쁘다고 생각해서... 아피네스 같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피네스는..." 아스테린은 눈을 찡그렸다. "...미친 여자야. 내가 이상형을 잘못 택했어. 정말, 나 자신에게 질리겠다니까. 하지만, 어떡하겠어? 오빠는 아피네스를 좋아하고..." 아스테린의 눈에 그때야 처음으로 침울함이 어렸다. "...어머니도... 아피네스만 좋아하지." "스온 아스테린..." "어휴!! 아까도 말했잖아!! '아스테'라고 부르라고!!! 오빠 부인이 될 거라면, 그렇게 불러! 나도 그대를, '아스나'라고 부를 테니! 경어 따윈 집어치우고!! 좋지?" 시나는 그 기세에 압도당해 말했다. "어... 응..." "휴우. 아무튼, 좋아. 그대와 난 왠지 비슷한 구석이 있어. 그대가, '대신하는 자'라서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기억을 못한다는 것과, 나는 '스아디온'이라 친 부모님에게서 떨어져 왕궁에서 자라야 했던 것." "....떠, 떨어져서? 그럼, 친 부모님은...? 한번도 뵌 적이 없어?" "뵌 적이 없긴. 옛날에, 한 번, 시골에 있는 부모님께 간 적이 있는 데... 말도 안 통하고. 나보다 지위도 낮은 사람들인데... 기분이 나빠 서. 그쪽도 그런 것 같고. 그래서 다시는 안 갔어." "---!" "아무튼, 시종장의 말이 맞았어. 그런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나 올 수 있게 그저 몸만 빌려준 사람들이라는 걸... 그런데, 그런 주제에 옛날에, 오빠에게, 나를 근거로 해서 유세를 하기에, 그걸 따끔하게 말 해 줬지. 난 당신들 자식이기 이전에, 힐라토 스아디온이라고. ...난, 오빠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부모라도 용서 못해, 흥...!!" "....그, 그런...!!"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부모 자식관계가 있을 수 있다니! 이것도, 왕 족의 세계, 아니... 다른 세계라 그런 건가? 하지만 시나의 놀란 눈에, 아스테린이 눈을 찡그렸다. "....뭐야? 왜 그래?" "아니... 아냐... 그냥..." 그런 시나를, 아스테린은 약간 눈을 찌푸리고 보았다. "어쨌든, 난 지금, 그대와 동질감도 느끼고... 그대가 오빠의 부인 이 된다고 하니, 세계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거 야. 과거에 불미스러웠던 일은 잊고. ...그리고, 아까 내가 그대에게 심하게 했던 것. 이곳으로 쫓아내 자게 했던 것도... 미안해. 눈치 챘 겠지? 내가 시킨 일이라는 것? 실은, 아피네스가 미워서 그런 건데. 그 대까지 말려들게 할 셈은 아니었어." 아직 어린데도, 왕족이라 그런가, 이런 말을 하는 아스테린의 눈은 솔직하고, 그러면서도 냉랭했다. 만약 시나의 지위가 낮다고 생각했으 면, 절대 이런 식으로 사과하지 않았을 거다. 이건, '미래'를 생각하는 말이었다. 시나가, '파이오니온'이 될지도 모르는 자이기 때문에... 무 시할 수 없는 거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닌... 하지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아스테린은 시나가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고, 미소지었다. "좋아. 그 대도 뒤끝이 없는 편이군. 마음에 들어. 언젠가, 루사벨라와 만나게 해 주고 싶어." 루사벨라... 루드랫의 예전 약혼녀. "후후... 하지만 그거야 나중 일이고... 이렇게 자기도 뭐한데. 화 해한 마당에 말이야... 뭔가 기념할 거라도... 아, 그래...! 이제 우린 '친구'지? 그런 의미로, 우리, 밤 산책이라도 할까?" "산책...? 이 밤중에?" "훗훗... 응. 뭐, 어때? 별이나 보자고. 뜻대로, 즐겁게 즐기라고 있는 일주일이니까... 나, 지금 별을 보고 싶어..." 아스테린은 기분 좋게 웃었다. '....루이티온 루드랫.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이엔 해야할 말이 아직도 많지요? 왕궁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전... 제가 그 동안 혼자였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이 말을 읽고, 제발 피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겁쟁이가 아니리라 믿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오실 때까지 매일 밤, 기다리겠습니다. 루이티온 루사벨라' "그리고, 루온 루드랫이 오늘, 비밀리에 왕족들의 사냥막에서 루온 루사벨라와 만난다는 사실을 입수했습니다. 이 편지를 우연히 발견한 이후로... 그러니까, 이건 왕궁에서 만남을 약속했던 편지 같은데... 그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왕가의 숲'에서도 만날 약속을 한 것입니 다. 그러니까, 놈은..." 루파르테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부터, 제 약혼녀인 루온 루사벨라를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던 겁니다. 그런 데, 낮에 말씀드린 그와 같은 이유로... 일부러 스온 아피네스님께 접 근하여..." 레이서스는 루파르테와 함께, 말을 타고 숲을 지나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루온 루드랫도 대단하군. 복수심 때문에, 평생을 망 치다니?" 루파르테는 레이서스의 말뜻을 알아듣고 말했다. "아... 그것에 대 해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놈이 멍청하게... 아님, 엘의 분노로... 도대체 그런 짓거리를 엘께서 용서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암흑의 숲' 에 들어가 기억을 잃은 덕분에... 그래서, 그 모양이 된 겁니다. 실제, 놈이었다면, 아무리 스온 아피네스님께서 매달리셔도...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셨어도, 발뺌을 했을 겁니다. ...뭐,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습 니까? 22년 전, 아피네스님은 강력하게... 음... 아무튼, 그러셨는 데... 루온 루드랫 놈은 멍하니... 도대체 뭘, 증언할 상태도 아닌 채 로.. 스온 아피네스님 말에만 맞장구 칠 뿐이었죠. ...바보 같은 놈." "........그래서..." "네... 놈의 기억이 슬슬 돌아오는 듯. 이렇게 제일로트에 올라와, 자기 명예를 찾기 위해, 엘야시온님을 분주히 찾아다니는 모습만 봐 도.... 확실합니다. 그놈을 줄곧 관찰했는데.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습 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피네스가 아닌, 원래 좋아했던...." "네. 루온 루사벨라를 찾아다니고 있는 거죠... 루온 루사벨라도, 지금까지 염문 하나도 없이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닐테 고요... 낮에 보여드린 편지까지 쓴걸 보면... 어쩌면 그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덕에 루온 루드랫 놈의 기억이 돌아온 건지도 모릅니다." ".........." "그런 주제에....!! 도대체, 스온 아스나엘 님까지...!!!" "...이제, 그 이야긴 그만해. 직접 눈으로 보겠다." "아... 네." 루파르테는, 레이서스의 굳은 목소리에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 계획 과, 줄거리를 자신이 짰다니,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얼 마나 완벽한 계획인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현 재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거의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계략 아닌가? 루파르테는 자신의 머리가 이토록 좋다는 것 에, 신께 감사했다. "오... 저기!! 사냥막입니다!! 왕족의 사냥막에서 만난다는 소릴 들 었을 땐, 저도 맨 처음 긴가 민가 했는데...! 설마 진짜였을 줄이 야...!! 힐라토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렇군요. 스온 아스테린 님께서 저곳을...!! 하긴, 그분은 자신의 루이트를 정말로 총애하시니 까요!!" 하지만 레이서스는 이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단지, 표정이 더욱 일그러질 뿐. ...루파르테의 말을 듣고, 세스틴에게 확인을 했다. 분명. 아스테린 의 요청으로 사냥막을 빌려주었다고. 그리고, 아스테린을 만나 확인했 다. "어머...? 그걸, 어떻게 오빠가? 뭐? 세스틴이...? 휴우... 하는 수 없지. 모르는 척 해, 오빠. 루사벨라는 오랫동안 힘들어했거든. 그걸 이제야 보상받는 거야. 잘된 일이지. 루사벨라는 이제 클로니아 인이 될 테고... 옛, 약혼자가, 이렇게 클로니아에 오래 살고 있었으니... 도움이 될 거야. ...아, 이건 내 생각인데... 루온 루드랫... 아마, 그 래서 스온 아스나엘의 루이트 자리를 거절한 걸 거야. 루사벨라, 때문 에." 레이서스는 웃었다. 그렇다면, 정말... 루온 루드랫은, 욕심도 많은 자 아닌가? 스온 아피네스... 그의 여동생에. 루온 루사벨라. 게다 가... '아니... 스온 아스나엘은... 그녀 혼자만의 생각인가? 아니면... 그것도, [복수]의 일환?' 찬바람이, 레이서스의 후드자락을 날렸고, 이윽고... 사냥막이 모습 을 드러냈다. 그가, 시나의 상처를 치료하려 애썼던, 그곳이었다... 아스테린은 낮의 일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레이서스가 묻기에, 루온 루드랫이 루사벨라를 '사랑'하여 요즘 만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건 통쾌했다. 루사벨라를 위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아피네스에 대한 복수심리도 있었다. 게다가, 레이서스의 질문--어젯밤, 루사벨라 가 곁에 있었냐는 질문--에...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글세... 안 보 였던 것 같은데. 말했듯, 요즘 들어 난, 밤에는 루사벨라를 터치 안 하 거든...'이라고 말해 주었다. '호호... 그러고 보니, 루온 루드랫이 오늘 아침 예배에 없었다고 했지? 멋지다니까...' 자기 자신에게 흐뭇해진 아스테린은 골똘히 생각 했다. '그나저나... 루온 루파르테. 지금쯤 제대로 하고 있겠지. 저번 에 말한 대로만 하면, 완벽하.....' "아앗- 스온 아피네스님! 발 밑을 조심하세요...!" '....긴 한데. 쳇!!! 저것 때문에, 정말 신경 거슬리는군!!!' 아스테린과 시나와 아피네스--굳이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죽 어도 시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는 '신부의 방'을 나와, 두꺼운 모 피 옷을 입고, 공터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추웠지만 하늘에 보이 는 별은 정말 아름다웠고, 곳곳에 쌓인 눈들은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 게 빛나고 있었다. 조용하게 발 밑으로 스러지는 사박거리는 소리에... '신부의 방' 안은 따뜻하긴 했지만, 약간 숨막히는 공기였던 데 비해, 이곳의 공기는 방금 태어난 그대로의 공기... 정말로, 깨질 듯 맑고 신 선했다. 마치, 저 메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눈꽃들처럼, 투명하고, 깨끗 했다.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눈의 세계... 아스테린은, 이제 정말로 이곳, 클로니아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러므로 비록, 애초에 딴뜻이 있어 나온 산책이긴 했지만, 지금은 진심 으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앞으로 계속, 이 시간에, 정기적으로 산책 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분위기를, 억지로 따라오고 있는, 저 아피네 스가 다 망치고 있는 것이다. 애초 절대 데려오질 말았어야 하는데. 소 리를 지르건 말건. 온 왕족 아가씨들과 시녀들을 다 깨우건 말건. 하지만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이고... 아스테린은, 시나가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무언가에 걸려 넘 어지는 아피네스를 미운 눈으로 보았다. '...흥. 자기가 쫓아 나온다고 한 거니까. 매운 맛 좀 보라지.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니까!' 그리고 아스테린은 그런 마음을 숨기고, 시나에게 다가갔다. "웃겨. 웬일로 아피네스가 그대를 졸졸 쫓아오고 있는 걸까? 산책이라도 할라 치면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만 뚫어져라 보기 일쑤인데. 그리고 그건, 절대 같이 가는 사람은 아니고 말이야. 아피네스가 보통, 관심을 갖는 것은 돌멩이나, 땅에 떨어진 나뭇잎이지. 아니면 연못에 떠 있는 연꽃 잎이나." "하하..." 뭔가... 지구과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네, 라고 말하려다, '지구과 학'이 무언지 모를 테니, 관두었다. "뭐... 아피네스가 얌전하면, 나야 좋지만. 으음... 어디, 저쪽으로 가볼까? 모처럼 이렇게 나온 건데... 시녀들 반대도 무릎 쓰고...." 아피네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 시녀들이 뒤를 쫓고 있었다. "이 기회에 아스나가 가고 싶은 곳은 없어?" "...가고 싶은 곳..." 문득, 낮에 받은 루드랫의 편지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갈 수 없 다. 아스테린도 있고... 아피네스야 데리고 간다면 그쪽에서 좋아하겠 지만. 시녀들이 저렇게 많으니, 말 꺼내기도 전에 반대 당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맞아. 그대가 원했던, 루온 루드랫도, 여기에 가디언으로 온 것 같 아. 만나러 간다든지?" "---!!" 아스테린은 고개를 돌리더니 심술궂게 웃었다. "...아, 그렇지. 혹 시, 아피네스하고 루온 루드랫에 얽힌 이야기 알아? 아피네스가, 이런 주제에 말이야... 루온 루드랫을 엄청 열심히 꼬셨거든." "아스테--!!" 시나는 상대가 누구라는 것도 잊고, 화난 표정을 지었 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너무 심해!!" 아스테린은 시나의 말엔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시나의 반응을 예측했던 듯. 대신 더욱 심술궂게 웃었다. "왜? 낄낄... 내가 그대에게 더 좋은 것, 가르쳐 줄까? 아피네스가, 누군가를 꼬셨다고 해도... 그게 정말 '사랑'일리는 없지." "----!!!" "내가 아까 말했잖아? 아피네스가 관심 있는 건, 돌멩이나 썩은 나 뭇잎 같은 거라고. 사람은 절대 아냐. ...뭐, 그래서 난, 아스나도 그 런 종류가 아닌가 심각하게 의심해 보고 있는데?" "아스테...!!" "농담이야!!" 아스테린은 즐겁게 웃었다. "...흠... 아무튼 그 덕분 에.. 그대가 지금 루온 루드랫을 만나고 싶다고 해도, 안되긴 하겠다. 아피네스 때문에. 두 사람은 절대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거든. 아쉽겠 네? 그러니까, 아피네스는 떼어놓고 오라니까." "...별로. 이 밤중에 만나서 뭐하겠어. 거기다 왕궁에선 다른 사람 들이 절대 못 만나게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일거야." 그런데 빠져 나와달라고 하다니, 루드랫도 참... 내가 무슨 힘이 있 다고. "헤에? 절대 못 만나게 해? 누가? 시녀들이? 하하... 아스나도 참! 그런건 그냥 무시하면 돼!! 시녀들은 우리를 귀찮게 하려고 세상에 태 어난 존재들이니까!" "하하... 그런 건, 심해..." "심하지 않아! 정말이야! 음... 그래! 이제부터 매일 밤, 이렇게 같 이 산책하자! 뭐, 이 근처야 가디언들이 있으니까, 무척 안전하고... 매일 밤이라곤 해도, 불의 날이랑, 나무의 날, 흙의 날은, 내가 안되니 까.... 고작, 3일이겠네. 흠... 그때만 잠깐 아피네스 떼어놓고 온다 면, 같이 만나러 가자고. 마음에 드는 루이트이지?" "어.... ....정말? 그래... 그렇게 된다면..." "응." 아스테린은 생긋 웃었다. 이걸로, 매일 밤 아스나를 데리고 산책 다녀달라는, 오빠의 부탁은 들어주었어. 다음으로, 루온 루드랫을 만나러 갈지 아닐지는 아스나가 결정할 문 제. 간다고 해도 루온 루드랫은 없을 테니, 별 소득은 없겠지만. '후후... 오빠가 모처럼 아스나를 생각해, 루온 루드랫을 만나게 해 주려 했겠지만...' 루온 루드랫을 아스나의 바람대로, 그녀의 개인 루이트로 삼고 싶어 서--그러니 직접 설득을 하도록---이라고 레이서스는 말해 주었다. 자 기 루이트를 너무나 좋아하는 아스테린이었으므로, 이런 오빠의 말--왕 족이 한밤중에 루이트를 만나 설득까지 해야 한다는 상황에 대해선 별 로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자기라도, 루사벨라를 위해선 그렇게 했을 테니... 오빠의 설명을 듣고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뿐. '흥... 하지만, 오빠에겐 미안하지만. 루온 루드랫은 내가 빼돌렸으 니, 아스나는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튼, 난, 루온 루드랫이 아 스나 루이트가 되는 건 절대 반대거든. 그 자는 루사벨라와 여기서 살 아야 하니까. 아스나야, 더 좋은 루이트...' 그러다가 시나를 빤히 보았다. 그 시선에 시나가 어색한 표정을 지 었다. "...왜?" "...미안해." "응?" 이걸로 사과도 했다. 아무리 좋은 루이트가 쌓였다고 해도, 자기가 원하는 루이트가 아니면 소용없다는 건... 누구보다 아스테린이 잘 알 고 있으니까. "미안." "...뭐가?" "그냥..." 아스테린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예전에도 그랬듯... 누군가 선택을 해야한다면, 자신은 망설임 없이 루사벨라를 위한 길을 택할 것이다. 정말로... 그걸 모르는 시나가 물었다. "갑자기 웬 사과를? 뭐가, 미안해 아스 테?" "후후... 그냥... 그냥, 들어둬, 아스나. 앞으로 있을 일에 대 한...." 그런데, 그때. 숲의 한쪽 방면... 아니, 여러 방면에서 동물의 울부 짖는 괴성이 들렸다. 시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고개를 들었고, 아스테 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시작했네. 루사벨라는, 명령을 받고 저녁 내내 사냥막에 앉아 있었다. '왕가의 숲에 있는 사냥막으로 가서 그곳을 지키고 있는 막지기에 게, 무언가 중요한 물건을 받아 오라'는 아스테린의 명령이었다. 루사 벨라는 막지기가 차려준 음식은 거들 떠도 안보고 꼿꼿이 앉아 생각했 다. '중요한 물건이라... 클로니아 님께서 스온 아스테린 님에게 뭔가를 드리려는 걸까?' 무엇이 됐든. 꽤 오래 걸린다. 슬슬 짜증이 나려한다. 마침 막지기 가 분주하게 앞으로 지나가는 참에... "...아직도 멀었나? 기다리라고 한 게, 얼마인가?" 막지기는 허리를 굽혔다. "네. 사실은 '물건'을 가지고 오기로 한 사람이 있는 데... 도저히 도착하지를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어쩌겠는가? 막지기의 과실도 아닌데. 루사벨라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의자에 기댔다. 왕족의 사냥막이라 청결하고 깔끔한데... 벽난로 불은 활활 타고... 평소라면, 왕족 없인 들어오지도 못할텐데. 그래서 그런 지 더욱 불편한 자리이다. '...덕분에, 오늘 저녁엔, 스온 아스테린 님도 못 보고...' 그러므로. ...'물건'을 가지고 올 자가 누가 되었든. 이렇게 늦는 것에 대핸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벌써,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있는 가? "...늦는군."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레 이서스가 냉랭하게 뱉은 말이었다. "아니면... 안 오는 거든지." 그렇지 않아도,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루파르테는 깜짝 놀라 말했 다. "아, 안 올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나갔다고--!! 같이 묵고 있 는 스콰이어가!!" "...그럼, 어디를 들려서 오는 거든지.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다고 했으면서. 그럼 막사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오더라도, 한번은 왕복할 시간이겠군." "하, 하지만!!!" "됐어." 레이서스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일어났다. "더 이상,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힐라토님!! 조금만 더!!" "루파르테!!!" 루파르테는 깜짝 놀랐다. 몹시 노한 음성이었다. 거기다 레이서스는 등골이 서릴 정도로, 무서운 눈으로 루파르테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자네!!!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확실치 않은 정보만으로, 밑의 계급에게 휘둘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불쾌한 데!!! 그러니, 이제 그만두지 않으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하지 않겠 네!!" "히, 힐라토님!!" 레이서스는 세워둔 말에 올라탔다. "그렇게 기다리고 싶으면, 자네 나 여기서 기다려!!! 날, 따라올 필요 없어!!" 그리고 말을 몰아 사라져 버렸다. "힐라토님-!!!" 루파르테의 외침을 뒤로하고. 루파르테는 레이서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다가, 모닥불을 발로 찼다. "제기랄---!!!!!" 불꽃이 거칠게 날렸다. 쉬운 것 하나도 없다더니...!!! 도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건가?!!! 그의 완벽했던 계획이 이런데서 무너지다니!!! 이래서야 자신이 오히려 힐라토님께 미움을 받게 되고 말았다...!! 루파르테는 이를 뿌드득 갈고, 사냥막 쪽으로 갔다. 루드랫 놈이 음모를 알아채고 안 올리는 절대 없고... 편지는 완벽 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이 써주신 편지. 대강 내용이 이러했다. '루온 루드랫.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냥막'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편지가 발각될까, 제 신분을 밝힐 수는... 그리고 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왕족의 사냥막'에서 당신을 기다릴 정도의 신분 입니다. 오랫동안, 당신만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제 탓에, 그리 되신 것 같아... 오늘도, 많은 가디언들에게 당하셨죠...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 할 겸... 제발 와주세요. 오실 때까지 기다 리겠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는...' 얼마나 완벽한가?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편지! 그러나, 은근히, 이 편지는 '왕족'이 보낸 거라는 인상을 풍기며...!! '오랫동안'이라는 말은, 스온 아피네스님이 이 편지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제 탓'과, '오늘도'라는 말은 스온 아스나엘 님 이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욱 교묘했지만...!! 그놈의 빌어먹을 스콰이어 놈이 버리는 통에!! 루파르테는 겨우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필경사에 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확신하기를...!! 루드랫 놈은, 이 함정에서 절대 비켜갈 수 없다!! 호기심에서라도 틀림없이 온다!!!...였는데!!! '제기랄!!' 오지를 않았다. 오기만 했으면 끝장 나는 건데!!! 놈을 잡아서 쳐 넣고...!! 루사벨라와 어떻게든지 한데 묶어...!! 그럼 놈은 어쩔 수 없이, 루사벨라와 관계를 맺게 되고, 루사벨라를 책임져야 한다!! 그 럼, 놈은 이곳 클로니아에서 영원히-- 루사벨라와 '영원히' 살게 되고, 힐라토님이라든지, 스온 아스나엘 님 앞엔 더불어, '영원히' 나타나지 못하게 되는 거다. 옵션으로, 놈이 스온 아스나엘께 찝쩍댄다고 모함까지 해 놓았으 니... 힐라토님은 행여라도 절대, 놈을 스온 아스나엘 님의 루이트로 하려는 생각은 품지 않으실 거고...!! (완벽하다!) 루사벨라 쪽은, 임신이라도 한다면-- (제발, 그렇게 되길--) 내년 토너먼트엔 나오지 못하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하여튼, 둘 다 신혼 의 단꿈에 젖어, 토너먼트만 준비하고 있는 자신관 비교도 안될 정도의 형편없는 성적을, 내년 토너먼트에 거두게 되는 것이다--!!! ...라는 훌륭한 계획인데...!! "제기랄!!! 제기랄!!!" 루파르테는 씩씩대며 주변의 나뭇가지들을 거칠게 부러뜨리며 걸었 다. 스온 아스테린께서도 좋다고 해주신 계획이---!!! (물론, '토너먼 트' 이야기는 빼놓고 이야기했지만) 그래서, '편지'까지 써주시고...!! 곧 있을 소동... 그 소동까지 몸소 계획해 주었다. 그, 뭐라더라... '몬스터'를 불러들여, 자신과 아스나엘이 위험에 처할 뻔한 상황을 조작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시간, '사냥막'에 있는 루사벨라와 루드랫은, 전혀 그들을 구하러 뛰어오지 않고... 막사 에 있다 분명히, 뛰어 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건... 책임 부 실로, 루드랫은 거기서 이제, 확실히 아스나엘의 루이트가 되는 자격을 박탈당하는 거고... 루사벨라 쪽은 자신이 '용서'할 테니, 괜찮다나. 루파르테는 계획이 너무 대담해 지는 것 같아(왕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다니, 말도 안 된다) 반대를 했지만... 아스테린은 끝까지 그 계획을 밀고 나간다 주장했고, 그래서 루파르테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하긴... 주변에 가디언들이 잔뜩 있으니, 오크 몇 마리 정도야... 그냥, 전시효과일 뿐이란 스온 아스테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진 지금. "젠장... 막지기한테 이야기해서, 루온 루사벨라를 돌려보내라고 해 야지!!" 밤새 앉혀 놓아봤자 무슨 소용인가? 가서, 스온 아스테린 님이나 지 키라고 해야지. 그리고 또, 내일 시도를 해보든지... 아무튼, 왕족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다. 그것도 이런 중요한 행사의 때에...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제 다시는 힐라토님에게,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장면 을 목격시켜드릴 수 없다는 거였다. '중요한 임무를 맡고도, 한 밤중에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놈의 무 책임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직접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젠장...!!' 루파르테는 사냥막의 입구 쪽으로 돌아가며, 또 한번, 이렇게 분개 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뒤통수에 불이 번쩍, 하더 니... "으윽... 웬 놈..." 루파르테는 그대로, 눈밭에 뻗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자, 주변에서 긴장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맞지? 이 루이트 분이? 이런 어려운 일을 시키다니...!! 자칫 잘못해서, 한번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죽어나는 건 우리가 될텐데!!" "아아- 그래서 특별히 내가 했잖아! 내가, 도살을 일 이년 했나!! 어딜 치면, 단번에-- 파워즈라도, 단번에 가는 질 잘 알지..!!" "아이고, 알았어--!! 잘난 척 그만하고!! 빨리 옮겨!! 높으신 분의 명령이야!! 실수 없이 하라는!!" "휴우-- 그래, 그래! 이 추위에 하도 오래 기다려 손이 다 곱았어!! 빨리 끝내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고!!" 그들은 어둠가운데 고개를 끄덕이고, 더욱 긴장한 얼굴로, 루파르테 의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사냥막으로 날랐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 켜보며, 막지기는... 이제야 자러 갈 수 있겠구나...하고 한숨을 쉬었 다. 안쪽에서 기다리는 여성 루이트의 눈초리가 사납기도 했고... 이제 야 일이 끝난다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도대체, 요즘, 위쪽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명령한대로 하는 수밖에. 그것도-- 클로니아의 여왕이 되실, 스온 아스테린 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명령이니, 더욱 그렇다. 루사벨라는 손에 들어온 장문의 편지를 읽으며, 입을 딱 벌리고 있 었다. 막지기가 '됐다'고 말하기에... 누가 들어오나 했더니... 들어오 는 게 아니라, 침실로 가보라고. 왜 왕족의 침실로 가라는 건가, 의아해서 가보았더니... 침대 위에, '루온 루파르테'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채, 정신을 잃어 쓰러져 있 고... 그 옆에는 스온 아스테린의 편지가.... '친애하는 루사벨라. 놀랐겠지? 지금 보는 남자야말로, 내가 루사벨라에게 주는 '물 건'... '선물'이야. 이제부터 7일 동안... 하누카의 날까지 긴 휴가를 주겠으니. 루사벨 라는, 그 남자를 데리고 마음대로 해. 후후... 내가 루사벨라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고 했잖아? 아, 그렇지.. 루온 루드랫은 지금, '미약(媚藥)'에 취해 있으니 까... 꽤 협조적일 거야. 그거 꽤 강력한 거라고. 7일 내내 갈 정도 로... 내가 특별히, 만들게 했으니까... 뭐, '미약'이 아니라도... 루사벨라가, 보석으로 치장하고 나타나면, 그는 견디지 못하겠지 만...(이왕 이렇게 된 것, 강하게 나가라고 루사벨라!) 아, 그렇지...! 원래 이 계획은....! --(그리고 루파르테와 아스테린이 어떻게 함께 계획을 짰는지, 소상 한 연유가 나와 있었다)-- 후후... 루온 루파르테가, 자기 말대로 정말, 자기 사촌을 생각해서 이런 계획을 짠 거라곤 믿기 어렵지만.(그것보다는 차라리, 그를 이곳 에 묶어두어 힐라토에 다시는 발 들여놓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 같지 않 아?) 하지만 나야 상관없지. 루사벨라에게 이익이 되는 계획이라면. 게다가 루온 루파르테가 분명히 그랬거든... 루온 루드랫은, 이제 무척 쓸쓸해하고 있고...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종속자를 맞아들여야 할텐데... 차라리 이럴 바엔, 옛 약혼녀가 어떨까, 하는 말을 했대. 호 호... 그걸 보면, 루온 루드랫도 꽤 정상이지? 난, 한동안 그 자가 정 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좋아. 루온 루파르테는 루온 루드랫이 그렇게 말하는 걸 우 연히 듣고, 아마도 그 이야기가 자기 야심과 맞아 떨어졌으니까 내게 와서 이야기한 거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되풀이해 말하지만, 이건 우 리에게 '이익'이 되니까. 아무튼... 즐거운, '하누카의 날' 보내. 미리, 루사벨라의 옷이랑, 보석... 모든 걸 준비해 놓았어. 음식도 좋은 것으로...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을 거야. 그대를 아끼는 주인, 아스테린. 추신: 이 편지, 꽤 길었지? 막지기가 그 동안 문단속 잘해놨을 거 야. 그러니 '신부의 방'으로 돌아올 생각 같은 건 절대 포기해. 무슨 말인지 알아? '왕가의 사냥막'은 그대들을 위해 특별히 빌린 것이니...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세스틴이 날 미워할 거야. 그는 그곳 을 꽤 아끼니까. '유리창' 하나라도 깨지마!' "----!!!" 편지를 와그작, 움켜쥐고 나가보니... 과연. 그 동안 막지기는 분주 하고 총총하게 모든 문을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그리고 이중 빗장까지 치고 있는 막지기였는데, 창문을 사이에 두고 루사벨라와 눈이 마주치 자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걸 보고 루사벨라가 소리 질렀다. "이봐--!! 이 문 당장 열어!!! 착각이야!! 잘못 됐다고!!!!" 그러자 막지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떤 말을 해도 열어드리지 말라고..." "남자가 잘못 됐다고!!!!" "글세... 안됩니다. 그럼... 즐겁게 보내시길." "막지기!!! 안 열면, 네 놈 목을 당장 쳐버리겠다!! 막지기---!!!" 하지만 막지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맙소사!!!" 루사벨라는, 평생을 지내며 가장 어이없는 순간을, 바로 지금, 당하 고 있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떻게 스온 아스테린 님은 이런 계획 을 생각해 낸 것인가? 더욱이, 도대체 저게 어디가 '루온 루드랫'이라는 건지... 어쩌다 남자가 바뀐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것이 실제 '루온 루드랫'이라고 하 더라도... "말도 안돼!!" 루사벨라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건 '강간'이 다!!! 미약을 먹여놓고, 하누카의 날을 치르라니!!! 자신! 루이티온 루 사벨라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런 건 말도 안 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우자를 구할 수 있는데...!! '강간'하다 시피 해서, 남자를 얻어야 한다고? 이건... 이쪽의 수치다. 루사벨라는 얼굴을 붉히고 문을 노려보았 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문은 저렇게 단단히, 잠겨있고... 아스테린이 편지에 써놓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감히, 왕가의 건물 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루사벨라는 냉정을 찾으려 노력하 며 뒤로 돌아섰다. 정말로 7일 동안, 저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와 지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유리창 하나'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깨고... 나가, 용서를 구한다면 되겠지. 무엇보다... "...남자가 틀려." 자기 소지품을 챙겨 나가기 위해, 소파 쪽으로 다가가던 루사벨라는 머리가 아파 와, 이마에 손을 댔다. ....정말 피곤한 하루다. 하루종일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분 주하게 뛰어다녀야 했고... 그래서 온몸이 녹초가 되어, 이 일만 끝나 면 무엇이라도 먹고, 좀 자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당돌하게도 이런 계획을 꾸미시다니... 정말, 못 말리겠다고 해야할지. 이렇게 저돌적인 건, 분명 아스테린 님 답지만... 루사벨라는, 소파 앞,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잠시 망설였 다. 지독하게 배가 고프다. 기왕 차려진 음식... 좀 먹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루사벨라는 얼굴을 붉힌 채, 손에 쥔 편지를 보았다. '옛 약혼녀가 어떨까'라고? 루온 루드랫이? "...웃기고 있군. '어떨까'라고 말하면, 누가 받아들여 준다나... 나 참..." 루사벨라는 어이가 없어서... 포도주나 한잔 마시기로 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빵도. 그리고 고기도... 고기를 씹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저기... 저 침실에, 루온 루파르테가 누워있다는 것이 웃겼던 것이다. 스온 아스테린 님이 아시면, 뭐라 하실까? 정말 이건... '존경하는 프레미어 루이트'께서 저런 하늘하늘한 옷만 걸친 채, 미약에 취해 쓰러져 있다는 건... 왕궁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 십 년은 가십으로 씹을 수 있는 좋은 소재다. 평소, 루파르테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는 걸 잘 알고 있 던 루사벨라는 코웃음쳤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자업자득이군요. [미약]이라... 즐 거운, 하누카의 날 보내시길. 프레미어 루이트여.' 그리고 루사벨라는, 마지막 고기를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게 정말, 루드랫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건 이쯤에서 관두기로 했다. 우선은 여기서 나가서... 헌데, 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루파르테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 다. 목이 아픈 듯 뒷목을 주물거리고 있었는데, 소파에 루사벨라가 있 는 걸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루사벨 라는 그런 그의 모습에 눈을 찌푸렸지만, 반사적으로, 예의바르게 인사 했다. "...안 좋을 때, 뵙게되어, 프레미어 루이트여..." 그런데, 루파르테가 침을 삼키고 천천히 말했다. "아니... 괜찮소. 식사를 하던 참인가... 천천히 드시오." "......?" 루사벨라는 인상을 썼다. 루파르테가 자신을 무척이나 이상한 눈으 로 보고 있었다. 루사벨라에게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생각하는 듯, 천 천히, "...머리가 아프지만... 음... 뭐가 잘못된 건지 알 것 같아. 놈 들이, 날 루드랫으로 착각하고... 하지만..." 루파르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루사벨라의 모습이 눈부셔 견딜 수 없다는 듯. 그걸 보고, 루사벨라는 흠칫 놀랐다. 설마?! 루파르테는, 경계하는 표정의 루사벨라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정말...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리고 생각하기를. 루드랫 놈에게 저 여자까지 뺏겨야 했다면, 자 신은 인생에 있어 그 놈에게 좋은 것 다 뺏기는 셈이 되는 것 아닌가. 루사벨라에 대한 감탄과 함께... 루사벨라가 이토록 아름다웠는지, 왜 평소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루파르테는 진심으로, 그것을 놀 라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8- 관련자료:없음 [25549]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12:07 조회:1064 루드랫은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꽤 한참 동안, '편지'에 쓰여진 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었고... 몹시 조용했 다. 바깥문 쪽에 횃불이 하나 타고 있을 뿐... 인기척은 전혀 없어서, 무어라 뚜렷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기분 나쁜 정적.' 무언가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전의... 마치, 맹수가 먹이를 노리 는, '사이'와 같은 긴장되고, 신경을 잔뜩 곤두서게 하는 정적이다. 루 드랫은 잠시 생각하다가... 역시, 다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기로 결정 했다. 섣부르게 저, 막사로 다가갔다가, 어떤 함정에 빠질 지도 모르는 거 고... 내일 낮. 다시... 되도록, 사람들과 함께 찾아오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혼자라면 몰라 도 시나까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 같은 건, 질색이었다. 그래 서 조용히...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후드로 몸을 감싸고, 조용 히... 뽀드득거리는 소리도 안 날만큼 조심스럽게 숲으로 우회해서, 자 기 막사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루드랫은 눈을 크게 뜨고, 저쪽 편을 보았다. "맙소사...!" 불이... 주변을 환히 밝힐 만큼, 밝게...!! '신부의 방'에 불이, 나 고 있었다!!! 거기다, 이 포악하게 들리는 괴성은, 몬스터들...!! 그것 도 오크 같은 하급 몬스터가 아닌, 오거나, 트롤 떼...!! 어쩌면, 저 '사냥터'와 같은--!! 루드랫은 신음처럼 뱉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시나---!!!" 루드랫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거추장스런 후 드를 벗어버렸다. 검은 이미 가져왔다!! 그리고 달리려 하는데...!!! "으윽!!!" 그만 발을 내딛다가 땅에 구르고 말았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날아 와, 그의 다리에 박힌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날카로운 바람소리!! "---!!" 다른 쪽, 다리에도 먼저와 똑같은 비수가 박혔다. 움직임을 봉쇄하는 그 공격에, 루드랫은 함부로 움직였던 자기의 실수를 통탄하며, 고개를 들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둠 가운데 다가오고 있었다. 맨 앞에 있 는 자의 손에, 몇 개의 단도가 들려 있는 걸로 보아 그가 비수를 던진 듯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막사의 문이 열리고... "----!!!" 루드랫은 막사에서 나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놀란 눈, 그러나 곧이어 증오의 눈으로 보았다. 남자는 그런 루드랫의 눈길을 받으며, 빙그레 웃더니, 루드랫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갑소. ...아무래도, 낮의 대답이 불충분해... 더 자세한 답을 듣 기 위해, 이렇게 모신 건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를 않아... 바깥에 서 계셨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왜? 오셨으면, 들어오시지. ...당신을 기다리는, 제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 부하녀석들만은 잘 알고 있기 에... 부득불, 이런 거친 방법으로 초대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용서 를, 루이티온 루드랫." 루드랫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온... 하겐트....!" 조용하던 밤의 분위기는 이제 흔적도 없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 고 있었다. 맨 처음, '신부의 방'에 불이 오르자, 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왕족 아가씨들은 매캐한 연기에 투덜대며 시녀들에게 불평했다. 하지만 시녀 들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으므로, "가디언들이 알아서 할거예요, 안심하세요. 스아드 님."이라는 말만 연발할 뿐, 불안한 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괴상한 짐승들의 함성이 들려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꺄아---!! 저쪽에 불이 났잖아!! 꼭대기까지 타오르고 있어!!" "아냐!! 저쪽이!!" 왕족 아가씨들과, 시녀들은 이제 잠에서 확 깨어 놀란 눈을 하고 있 었다. '신부의 방' 곳곳이, 불에 타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 자연 그대 로의 바깥 찬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두꺼운 장막이 타며 나는 매캐한 연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콜록...!! 콜록!! 어떻게 된 거야!! '신부의 방'이 왜!!!"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가디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자신들의 주인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루이샤!!! 나 여깄어--!! 루이샤!!!" 어쩔 줄 모르고, 한데 엉켜 있던 왕족 아가씨들 가운데, 한 아가씨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지르며 일어났다. 그러자 연기를 뚫고 한 여성 루 이트가 뛰어들어왔다. "오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모피를 입으세요!! 지금 바깥엔, 온통 몬스터 투성이입니다!! 저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서 여기서 대피 해야 합니다!!!" 그러자, 왕족 아가씨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자기들 루이트 이름을 외 쳐 부르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그런 그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울상을 짓긴 마찬가지였다. 사냥터에서의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곧, 하나 둘, 가디언들이 들어와 자기 주인들을 호위해 나가 기 시작했고, 그게 아니라도, 프리랜스 가디언들이 뛰어들어와 무차별 로 왕족 처녀들을 보호해 신부의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왕족 아가씨들의 소지품을 있는 힘껏 챙겨서, 그들과 같이 나갔다. 헌 데 그때, 두 명의 시녀가 정신이 나간 듯,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뛰어와 시녀들에게 물었다. "스온 아피네스님과, 스온 아스나엘 님을 보지 못하셨어요?!! 아무 데도 안 보여요!!" 한 시녀가 바깥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까, 스온 아스테린 님과 산책 을 나간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당신들도 빨리 바깥으로 나와요!! 여 긴, 곧 불에 타 무너질 거예요!!" 마냐와 넬리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산책?!!! 바깥에 저토록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데?!! "가, 가디언들에게 부탁해야 해요!!!" "응, 맞아, 넬리!!!" 마냐와 넬리는 다른 시녀들처럼, 주인의 소지품을 챙길 생각도 못한 채 가디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누군가 스온 아스나엘 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스온 아스나엘 님---!!! 스온 아스나엘 님, 안 계십니까---!!!" 넬리가 소리질렀다. "가디언 님---!!!! 여기예요!!!" 그러자 연기 속에서 한 가디언이 뛰쳐나왔다. 검을 들고 있는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넬리를 보고 그녀가 시녀인 걸 눈치채고 말했다. "어디냐?!!!" "바깥에----!!!! 제발, 도와주세요!! 아까 산책을 가신다고 나가셨어 요!!! 제발---!!" 투구 속에서 회색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신부의 방에 있을 줄 알았 더니, 바깥에 있다고...?!!! '...젠장!! 운이 좋은 왕녀 군!!!' 넬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발!! 지금 가디언들은 이곳에만 공주님 들이 있는 줄 알아요!! 바깥으로 가주세요!!!" 마냐도 말했다. "우리, 스온 아피네스님도!!! 제발, 다른 가디언들께 부탁드려 주세요!!" '스온 아피네스까지?' 회색 눈동자가 냉랭하게 빛났다. "...좋아. 꼭 구하겠다... 너희들은 빨리 바깥으로 나가라." "네!! 감사합니다!!" 루바인은, 두 시녀의 감사를 뒤로하고, 바깥의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 다. 자신이 풀어놓은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미, 믿을 수 없어!! 그냥... 오크 두 세 마리라고 했는데...!!! 이, 이런 몬스터 떼라니!! 이건 마치, 저번 사냥터 때와 똑같잖아! 그 멍청 이들이, 명령을 제대로 이해 못한 건가?!" "아스테...!" 아까 급하게 도망가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친 아피네스를 돌보고 있던 시나는 아스테린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오크 두 세 마리...! 그럼, 저 밖에 벌어지고 있는 난리에 대해, 뭔 가 알고 있는 거야?!" 아스테린이 시나를 보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몰 라! 저런 건!! 저건.... 내가 시킨 게 아냐!" "아스테!" 아피네스는 이제 눈물 흘리는 걸 멈추고, 멍하니 앉아 있었으므로, 시나는 아스테린에게 다가갔다. 아스테린은 떨고 있었다. 그녀는 질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저건, 꼭 사냥터 때와 똑같아! 그때...!! 루사벨라가 있었는데 도, 만티코라스가 덮쳐서...!! 칼리스 언니가 다쳤어!! 그, 그때... 나...!" "아스테...!" 왕족이고 곧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아직은 어리다. 시나는 비로소, 아스테린이 무척이나 겁먹고 있다는 것... 어쩌면 정신 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겁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꺄아아아악---!!"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처절한 비명 뒤엔, 몬스터들의 으르렁대는 소리뿐... "루, 루사벨라...!!" 아스테린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지켜주던 그녀의 루이트 가 곁에 없어, 더욱 그런 듯 하다. 시나는 아스테린을 안아주었다. 무 섭긴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렇게 안아주는 것은 자신에게도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시나는 떨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테...! 괜찮아! 곧 루이트가 올 거야!" "흐흑....!!" 하지만 아스테린은 더욱 겁먹은 채, 시나를 마주 껴안 고 울뿐이었다. 시나는, 아스테린을 따라 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변 을 돌아보았다. 아까... 산책을 하는 도중, 갑자기 숲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시나도 익숙하게 아는 몬스터. 오크였다. 뒤따라오던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고, 시나도 비명을 지르자... 금세, 한 무리의 루이트들이 달려왔 는데... 그때까지도 아스테린은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시나가, 당황해서 허둥댔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그런 걸 눈 치챈 아스테린은, 의기양양하게, 뭘 이 정도를 가지고 그러냐고. 자신 은 약간 손을 다쳤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와 준 루이트들을 치하하고... 이제 '신부의 방'으로 돌아가자고... 루이티온들은, 서로 호위하겠다고 나서고... 그러면서도 여기저기서, '루사벨라는 어디 갔 냐고' 묻는 모습들이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루이트들이, 시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 온 듯 했다. 루카나안인가... 그 소년은, 같이 자던 루드랫이 어디로 가버렸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 함부로 무단이탈을 하 다니, 믿을 수 없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시나는... '같이 잤 다'니... 막사를 혼자 쓴다고 했는데. 혹시 그럼 루드랫은 루카나안과 막사를 같이 쓰다가, 밤중에 몰래 빠져 나와 아까, 레겜이 있던 그 막 사에 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어떻게 그를 옹호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 시나는 멀리서, 또 한번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자, 아스테린을 껴안 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스테린도 시나 품에 더욱 파고들어 눈물을 흘 렸다. ...'신부의 방'에 불이 올랐다... 그리고 사방... 아니, 방향도 없이, 모든 방향에서, 괴물들의 함성 과, 울부짖음이... 시나는 아까 상황을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더 몸을 떨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루이트들--위험을 퇴치했다는 마음에 득 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보았 다. 아스테린 말대로, 사냥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끔찍한 몬스 터들의 함성... 그런데, 지금은 밤중에, 아티스트들도 없고, 왕족 처녀 들이 있는 곳은 불에 타고 있고... 루이트들은 허둥대다가, 결국은, '신부의 방'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중에 몇몇 루이트들은, 시나 와 아스테린, 아피네스를 호위하여, 이 막사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시나들에게 막사 안쪽에서 빗장을 질러 놓으라고 당부하고. 이곳은 안 전할 테니, 꼼짝 말고 계시라고.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고 뛰어 갔다. 시나는 그들 중에 한 명이 이곳에 있어주길 바랬지만, '신부의 방'에 불이 오르고 있으므로, 그들은 한 명의 손이라도 더 필요한 듯 했다. 그래서 결국은, 시녀들과, 여기 있고 싶어하는 루카나안까지도 데리고 가버렸다. 이곳은, '안전'하다고 말하며. 하지만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 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멀리, 그리고 가깝게 들리는 비명. 조금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은 몬스터들의 괴상한 외침. 왕족 아가씨들은 무사 한지. 넬리와 마냐는 어떤지. 그리고 브라우니들은...? 불은 무사히 피 했을까? 언제, 데리러 오는 걸까? ...정말, 이곳은, 안전할까...? 시나는 어지럽게 흩어진 실내--잠자다 그대로 뛰쳐나가, 몹시 어수선 한 침대와 바닥--을 둘러보고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흑흑... 루사벨라..." 그건 아스테린도 마찬가지인 듯. 아스테린은 더욱 울먹이며 울었다. 그러고 보니, 이해가 안가는 것이 있다. "아스테? 그러고 보니 네 루이트는 어디 갔지? 아까 그 루이트들은 자기 주인을 지키러 뛰어가 버리고... 네 루이트... 네 루이트, 루온 루사벨라라면... 스온 아피네스님과, 나라면 몰라도, 널 지키기 위해선 어디도 가지 않을 텐데...!" "내 실수... 내 실수야... 루사벨라... 흑흑... 무서워. 돌아와 줘...! 또, 그런 괴물들 만나는 건, 싫어! 아까의 몬스터라면 괜찮지 만...!! 상급 몬스터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 "아스테...!" '상급 몬스터'라는 말에는, 시나까지도 겁이 났다. "설마, 그런 게 또...? 아까 나타난 것들은..." "상급 몬스터들은, 저런 걸 앞세워서 나타나니까...!!" "---!!" 이것처럼 불길한 말도 없겠지만, 그 순간, 다행히, 세차게 문을 두들 기는 소리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기 계신 겁니까?!!" 시나와 아스테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났다. 아스테린은 눈 물을 닦고 말했다. "여기 있어!!" "다행입니다!! 무척 찾았습니다!!!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 겠습니다!!! 마차를 대기해 놓았습니다!! 아... 문이 잘 안 열리는군 요!! 안에서 빗장을 걸으셨다면, 열어주십시오!!" "응--!!!" 아스테린은 놀라울 정도로 금새, 침착함을 찾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표정을 굳게 하고, 문에 걸어놓은 빗장과, 보조로 놓아둔 의자와 간이침대들까지 치웠다. 그 사이에 시나는 아피네스를 데리러 갔다. 아 피네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긴 머리칼이 얼굴 양옆으로 늘 어져 있는데-- "공주님? 자, 일어나세요. 무서웠죠? 이제, 이곳에서 빨리 나가요." "후후... 별로..." 아피네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시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고개를 든 아피네스. 아피네스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거 의, 달콤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나는 아피네스가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루드랫과 있을 때만 들어보았다. 아피네스는, 루드랫에 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별로- 별로... 안 무서웠어." 너무나 달콤한 목소리... "---!!" 섬뜩할 정도였다. 아피네스는 시나의 팔을 잡았다. "정말로... 별로 안 무서웠어." "...아, 안 무서웠다니..." 시나는 억지로 웃었다. "다, 다행이에요. 어서... 나가요." 너무나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아피네스의 손을 떨쳐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아피네스를 부축했다. 아피네스는 일어나고 나선, 다시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시나는 약간 질린 얼굴로 아피네 스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웃고 있다니... 정말, 이 공주님은... 하지만 시나는, 이 막사를 나가게 되어 기쁜 나머지, 아피네스가 그 런 식으로 웃었던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걸 자기가... 잘못 본 것 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잠시나마 섬뜩해 했던 것이 미안해서, 시나는 좀더 아피네스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공주님... 발 밑을 조심해서... 바닥이 어지러우니까요."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문간으로 갔다. 아스테린은 문 을 열고, 데리러 온 루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응? 그래? 그럼, 어서 가자고! 아스나!! 어서 와!!" 아스테린은 이제 완전히,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했다. 약간은 명령조로, 거만하게. "아이 참!! 그러니까, 아피네스 같은 건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더니!!" "잠깐만--" ....기다려 줘...라고 말을 하려,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아스테린을 보고, 그리고 나서 시선을 문간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돌렸다. "...기다려..." 하지만 시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몸이 그대로 굳은 것이다. 더욱 최악의 것은... 그쪽도, 고개를 돌리고... 시나의 눈을 정면으로 보았다는 것. 상대방은 웃었다. 시나라는 것을 확실히,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 웃 는 모습이었다. 저 잔인한 웃음... 시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을 벌렸지만... 그가, 손에 든, 칼 을 치켜드는 모습을 보고.... "아스테---!!!!!!" 깜짝 놀란 아스테린은, 시나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있음을 보고 시 나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꺄아아악---!!" 검이---!! 루이티온--!! 루이트가 왕족을 치려 하다니!!! 경악을 한 아스테린은 피할 생각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때, 몸이 기 우뚱하고...! "아스테---!!!" 시나가 달려와 아스테린의 몸을 감싸안은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 몸을 감싸안은 시나의 등뒤로, 날카로운 검이 지나갔다....!! "아스낫----!!!" 그 찢어지는 목소리에, 시나는 아스테린을 안심시키려는 듯 중얼거렸 다. 알지 못할... "난.... 죽지 않으니까...." 그리고, 키르마가, 이러는 건, 바로 자신 탓이니까... 아스테린은, 자기 몸 위로 무겁게 쓰러져 정신을 잃는 시나, 그런 그 녀의 등에 커다랗게 벌어진 상처, 그 위로 무섭게 쏟아지는 피를 보고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안돼--!!!! 아스나!!!!! 안돼--!!!" "-----!!!" 루파르테를 떼어내고, 창문을 부수려던 루사벨라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루사벨라는 얼굴이 창백해져 서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 그때, 루파르테가 루사벨라의 팔을 잡았다. "루사벨라...? 내가 루사벨라라고 해도 되겠지? 왜 간다는 거요? 제 발, 여기 있어줘요... 난 진심으로 당신을..." 짝---!!! 갑자기 방안에 따귀 소리가 울렸다. 따귀를 얻어맞은 루파르테가 어 안이 벙벙해 서있는데, 루사벨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루온 루파르테!!!! 루이트 주제에 미약 같은 걸로 헤롱대지 말고!!! 마인드 컨트롤하란 말입니다!!!!" "하, 하지만... 난... 진심으로...." 루파르테는 울듯, 말했다. 마인 드 컨트롤이라니? 진심으로 루사벨라에게 매혹되었다. 그런데 왜 마인 드 컨트롤을 한단 말인가? 이토록... 이렇게 따귀를 맞은 것마저, 기쁠 정도로 그녀에게 반해서... 하지만 루사벨라는 전혀 아닌 듯, 거칠게 창문을 부수며 말했다. "진심이고 개나발이고, 닥치고 빨리 쫓아와요!!! 저쪽에 무슨 일인가 생긴 것 같습니다!!! 만약---!!" 루사벨라는 창문으로 빠져나가며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에게 무 슨 일이 생겼다면---!! 스온 아스테린 님에게 쓸데없는 소릴 한 당신을 죽어도 용서 안 할겁니다!!!" 루파르테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루사벨라는 벌써, 사냥막의 앞뜰 을 달려가고 있었고... "....죽어도 용서 안 한다니..." 루파르테는 충격을 받아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신부의 방'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레이서스는, 바로 옆으로 허둥지둥 도망가는 시녀를 붙잡고 물었다. "시나-! 아스나엘 어딨나!!!? 아피네스와 아스테린은?!!" 시녀는 여기에 왜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있나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곧, 더듬더듬 말했다. "자, 잘 모르겠-" 레이서스는 이미 다른 곳으로 뛰고 있었다. "시나!! 아핀!!! 아스테 --!"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들에 걸리지 않게 뛰는 것만도 고역이 었다. "후후후..." 하겐트는 맞은편 의자에 앉은 루드랫을 보고 웃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함성, 그대를 위해 준비한 여흥인데... 소감이 어떠 신가?" "--미친놈!!" "...점잖은 자리에서 욕설은 삼가는 게 좋지 않겠소? 그대나 나나, 그런 정도의 교양은 있는 자들이니." 하지만 루드랫은 무서운 눈으로 하겐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흐음. 낯가림이 심하시군. 뭐, 어쩔 수 없지. 이곳엔 모르는 사람뿐 이니, 어색해서 그러나 보지?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시길. 곧, 그대가 아는 사람들이 올 테니, 그땐 우리 좀 더 나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 고."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 루드랫. "--아는 사람?!!!" 하겐트는 그런 루드랫의 태도에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스온 아스나엘. 그대가 '시나'라고 불렀던. 그리고 스온 아피네 스...." "네 놈---!!!!!" 루드랫이 앉아 있는 의자가 덜컥거렸다. "기쁜가 보지?" "닥쳐!!!" 루드랫은 의자등뒤로 묶인 손목을 풀기 위해 한층 더 몸부 림치며 말했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후후... 이런 반응이라니. 기쁘군. 대화의 시작인가? 하지만 쉽게 대답하면 재미없지. 무슨 짓을 꾸미냐고? ...어디, 알아 맞춰보시지?" "----!!!" 루드랫은 또 한 번 그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상당히 교활하게 나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붙어 앉아, 자신에게 어떻게든 말을 시켜보려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걸까? 무엇을? 루드랫이 말했다. "...아까. 내가 소생술을 받은 것에 관심을 보이던데. ...아직도 관 심이 있나?" 겐트온의 눈이 번쩍 빛났다. 흥미가 없는 척 눈을 돌렸지만. 이미 드 러난 눈빛이었다. "아아... 그렇지. 그대가 또 다시, 나실인의 표징을 갖게 된 걸 축하 했어야 하는데." 겐트온은 눈을 돌리고 빙긋 웃었다. "어떤가? 오늘 하 루 소감이? 22년 만이지? 주위 사람들이 많이 축하해 주던가?" 마지막 말은 천천히. "...뭔가... 특별히, 달라진 일... 기억이라든지... 능력 이 돌아온 일은?" 루드랫은 빙그레 웃었다. "...대화의 시작인가? 알아 맞춰보시지?" "-----!!!!" 겐트온은 처음으로, 웃음을 지운 눈으로 루드랫을 보았다. 하지만 루 드랫은 씩 웃을 뿐이었다. 겐트온은 그런 루드랫의 남색 눈을 보며 말 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나쁘군. 그런 그대의 말투... 그댄 모를지 모르 지만... 내게는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든. 하지만, 그대는 그런 말투 를 써서는 안 되는데." 루드랫은 빈정댔다. "말투가 맘에 안 든다니, 미안하군. 독창적인 게 아니었다는 말엔, 유감이지만." 겐트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루드랫의 턱을 들어올렸다. "용감한 건 좋은데, 그대의 처지 좀 자각해 주면 어떨까? 지나치게 편해 보여 이쪽이 불편할 정도군." 그리고 겐트온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루드랫의 따귀를 몇 번 날렸다. 루드랫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그렇게 맞을 때마다, 불완전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고, 그럴수록 루드랫은 더욱- 이쪽에서 먼저 속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방의 눈에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 초조한 빛. 상대가 자신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며 흥분해서 무언가 결정적인 말을 쏟아놓기까지는- 하지만 그때. 루드랫은 몹시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저, 사냥터에 서와 같은, 기분 나쁜 느낌. 그래서 루드랫은 인내해야 한다는 것도 잊 고 말했다. "너희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시나 는!" 겐트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뭔가, 안도한 듯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오.. 뭐야? '시나'인가? ...후후... ...루이트 주제에. 왕족의 이름 을 함부로 부르다니? 이거야... 그럼 어제 그녀의 프로포즈를 거절했던 건, 역시?" 겐트온은 그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역시, 넌 그녀에게 마음이 있던 건가? 넌, 언제나 왕족 아가씨만을 상대하니까... 하하..." "손 치워!! 그리고 스온 아스나엘님을 왜 여기로 데려오고 있는 지, 그것이나 말해!! 왜 그녀를 그토록 노리는 건지!!!" "하하... 원. 이거야. 재미있군. 네가 걱정해야 하는 아가씨는 스온 아피네스다." "----!!!" 루드랫은 이 말엔 답하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런 그의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든 듯, 겐트온은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하... 그렇다고 그렇게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사람 마음은--" 겐 트온은 히죽 웃었다. "변하니까."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루드랫을 가리켰다. "너도, 마찬가지지. 마 인드 컨트롤의 루이트. 황금의 맹세를 자랑하는 자들이라도. ...긴 세 월 앞에선 마음이 변해. 그래서... 그 부드러워진, 마음. 그것은 조종 하기 더욱 쉬워지고... 하하... 좋아. 네 연인. 스온 아스나엘을 왜 그 렇게 노리냐고 물었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네가 22년만에 처음 으로 관심을 보인 여자. 네 마음을 부드럽게 한 여자인데? 우리가 조금 가지고 놀아준다면, 네 마음은 더욱 인간다워 지겠지. 안 그런가? 더, 흉폭하고-- 더, 난폭하게-- 더, 조정하기 쉽게-- 하지만, 알고 있나? 네가 다시 빠진 아가씨는 놀랍게도-" '그만두세요! 이제 이 이상의 말은 위험합니다!'라는 목소리가 머릿 속에 들리고 있는데도, 겐트온은 말을 계속했다. "...'네이머'" "----!!" "...잠깐이지만. 22년 전의 스온 아피네스도 그런 능력을 보인 일이 있는데.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이상하지? 도대체 뭐야. 넌 그런 능력 을 가진 왕족을 골라내는 천부적인 능력이라도 가졌나? 너도..." '아버지--!' 결국 겐트온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이 말은 좀... 저렇게 루드랫 의 눈이 빛나고 있는데. 루드랫은 빛나는 눈으로, 겐트온을 응시하며 조용히 그가 한말을 되풀이했다. "....네이머. 그녀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모습에 겐트온은 갑자기 웃었다. "하하하... 정말이지. 난 네가 귀여워 못 견디겠다. 예전부터 그랬 지. 어릴 적 네 모습이 얼마나--" "......뭐?" 겐트온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선 거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리 고, 야단이었지만. 루드랫의 눈이 확대되는 걸 보니, 충분히 말한 가치 는 있었다. 이 얼마나 재미있나? 어차피, 이 놈은 다 잡았다. 이제 그 귀여운 아가씨와, 스온 아피네스만 데려오면 끝. 그러니 그 동안, 즐거 움을 약간만 당긴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래서 결국, 겐트온 은 머릿속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자꾸만, 무언가 '루이트...'라고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후후... 네 눈빛이 정말 마음에 든다, 루드랫. 아니, 우리 친해볼 까? 난 너를 드랫이라 부를 테니, 너는 나를 겐트온이라 불러라. 아니 면, 겐트." "미친 자식!! 닥치고, 네이머인줄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라고!!!" "호오, 이거야 너무 서두르는군. 드랫...? 모름지기, 대가없이 주어 지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는데? 정보의 대가로 그럼 너를 무엇을 주겠 나?" 루드랫은 이를 갈며 웃었다. "무엇을 원하나?" 겐트온이 말했다. "네, 육체-는 어떨까?" 잠시, 방안에 침묵이 돌았다. 그들을 지켜보던 부하들까지도 한발자 국 물러선 느낌이었다. 부하들 역시, 자세한 상황은 모르므로, 겐트온 을 경악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데- 루드랫은, 급한 상황이긴 하지만,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말했 다. 어쩐지, 이 자식 느글대더라니. "너- '파괴하는 자'인가? 생명을 끊는 자? 하누카의 날은 제대로 치 렀나?" "하하하-- 뭐? 파괴하는 자? 아니, 이런--!!!" 겐트온은 폭소를 터뜨 렸다.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맙소사...!! 하지만, 어쩔 수 없 지. 지금은 '육체'라고 역시 그런 쪽으로 들리는 거겠지? 하하하하-- 이건, 정말 마음에 드는군!! 소생술, 멋지게 받은 걸, 축하한다!!! 하 하하...!! 하지만, 넌, 예전에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해서-- 하하하... 그렇군!!! 역시, 무의식인가?!! 하하하.... 하지만, 안심하길. 난 그런 구역질 나는 놈들은 아니니까. 난 그런 더러운 놈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루드랫은 겐트온이 웃어대는 와중에 흘리는 말을 민감하게 받 아들이고 있었다. '예전?', '똑같은 말?' 루드랫이 말했다. "...웃기는 말은, 하지도 마시지. 성적인 범죄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범죄보다 무겁거나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 자는 범죄자. 성적인 이상을 그럴듯하게 옹호하는 것도 웃기지만, 네 놈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더 웃겨. 네 놈이, 그들을 구역질 난다고 할 자격이 있는가?" 겐트온은 눈을 들었다. 약간 웃음이 가신 기색이었다. "네가, 날- 하 급 창부들을 심판할 자격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건 자유이지만. 아쉽게 도 난, 수네드리온 의원이라 싫어도 심판을 해야하지... 이 자리에서, 네 고견을 가지고 토론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이 놈은 이렇게도 예전과 똑같은 말을 하는가? 무의식이 든, 의식이든, 점차 기분이 나빠지는 겐트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의식이 완전하지 않다는 증거. 어 쩌면 이것이야말로, 겐트온 자신이 가장 바라는, 루드랫의 상태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젠 대화는 끝이다. 아쉽게 되었군." 그러자 루드랫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쪽에선 이미 이쪽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건가? 이제 겐트온은 테이블에서 떠나, 부하들에게 다가가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시나가 '네이머'인 것을 이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알아내기 위해, 이 자 리에 끝까지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슴이, 이토록, 아프다... "그래? 찾아낸 것 같다고...? 셋이 한꺼번에 같이 있었다고? 그것, 엘의 보우하심이군? 그런데, 뭐?!! 사고!? 뭐야?!! 멍청한--!! 아스테 린을 죽여 없애라고 했더니!!! 왜, '시나'를!!! 젠장!! 역시, 근본 마 노테 놈이라, 실수가 잦군!!" '시나'의 얼굴을 확실히 아는 자는 그 자 뿐이므로, 불러들였건만! "당장, 힐러를 불러--!! 아니, 이 난장판을 지금 빠져나간다!!! 마차는 확실히 대기해 놨겠지?!!" 예전이었다면, 그깟 상처 자신이 치료했겠지만. 지금은 틀리다. 불편 한 몸... 어서 하루라도 빨리.... 하지만 그때였다. "게, 게, 겐트온 님---!!!" 이야기 나누고 있던 부하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겐트온은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냈 다. "맙소사...!!" 루드랫은 '죽음의 미소'를 지으며, 팔목에 묶여있던 밧줄을 집어던지 고 있었다. <내.가.루.이.트.인.걸.잊.었.군.무.얼.로.착.각.했.지.... -왕. 족.?> 목표로 하는 것을 찾아냈다고, 겐트온에게 부하 한 놈을 보내, 마차 를 대기하도록 한 이드넘은, 현재 벌어진 상황에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멍청한 자식!! 멋대로, 칼을 놀리다니!!! 놀리려고 했으면 --!!" 이드넘은, 시나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자기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는 아스테린을 보았다. '왕족'이라 그런가, 저렇게 어린데도 눈에 박력이 있다. 훨씬 어른인 이드넘이 눈을 피할 정도로. '제기랄!! 하려 했으면, 한번에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지!!' 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 맨 처음, 겐트온이 '신부의 방'에서 스온 아 스테린을 죽여 없애라고 했을 때에는 경악해서 말문을 떼지 못했다. 왜 느닷없이 스온 아스테린을? 하지만 겐트온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 다. 아버지가 스온 아스테린을 미워한다는... 그러니 이드넘으로서는 따를 수밖에. 하지만 아무래도 왕족이라, 자 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건 께름직했다. 22년 전에도, 그토록 께름직했 다. 지금 이 여자 애-- 천만 뜻밖에 '왕족'이라는 것이 밝혀진, '시나' 만도 견딜 수 없을 정도다. 그러므로, 이드넘은... 킬을 돌아보았다. "...네가 벌인 일. 네가 끝까지 처리해." 이놈은 무서운 게 없는 놈이다. 어쩌면 도비온과 가장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도비온의 수하. 왕족을 치는 데도, 전혀 양심에 꺼려하지 않는 다. 그리고, 확실히. 이드넘의 예상대로 킬은, 실수를 해서 쩔쩔매고 있 다가, 약간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드넘이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피묻은 검을 닦을 생각도 안하고 걸어가는 저 모습이라니. 그 검에 희미하게 빛나는 검기-- 왕족을 친다든지, 살인이라든지, 그런 것 은 전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킬은 어쩌면, 그 검기만으로- 그 검기 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 몰랐다. 이드넘은 속 으로 욕설을 뱉었다. 미친놈이야, 도비온 놈은!!! 저 놈에게 저런 능력 을 심어준--!! 미친 놈!! 그리고 저, 킬이라는 놈도 미쳤다! 또한, 어쩌면, 자기 자신-- 자신조차도 미쳐 있는지 모른다. 이 지독 하도록, 피비린내 나는 상황-- 이 비정상적인 상황-- 이 가운데 미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는 정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세 왕족 소녀... 한 명은 치명상을 입어 누워있고, 한 명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한 명은... 이드넘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상황을 제일 미치도록 만드는 것 은, 바로 저, 스온 아피네스... 스온 아피네스라, 지난 22년 동안 불렸던 그, 소녀는 그를 보며, 미 소짓고 있었다. 소름끼칠 정도의 냉랭한 웃음. 그 미소를 대할 때, 이 드넘은,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저 소녀를 두고, 말했다. 우리들의 여왕이여-- 우리들의 젖줄, 풍요로움의 상징. 우리들의 여신이여... 우리들의 아 스다롯(Astarte)... 평안할지어다. 경배를 받으소서... 하하하... 마치, 여신과 같이. '스온 아피네스'는 이드넘을 보며, 미소지었다. 언제나, 이드넘을 전율케 하던 그 미소를... "물러나--!!!" 이드넘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테린이 킬에게 날카롭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미천한 상것 주 제에, 감히 도미니온즈를 치고!! 또다시 검을 들어?!! 네가, 그러고도 루이트냐!!! 물러나지 않으면, 너를 당장 죽여버리겠다!!!" 그리고, 몸 주위에 일어나는 검은, 오라---!!!! 눈의 흰자위마저 덮 을 정도의 강력한, 스피릿의 기운!!! '맙소사--!!' 저, 아스테린--!! 저, 아가씨는 '루세'에서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 고, 저렇게 스피릿을 소환하려 한다!!! 마인드 컨트롤을 받았을 텐 데!!! 자이온도 아닌, 이런 무방비의 자연에서 소환하면, 거의 삼, 사 일은 이 근처가 밤으로만 뒤덮인다는 걸, 그래서 자연계의 균형이 깨진 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므로, 왕족을 치면서도 걱정이 되었 던 건, '스피릿 소환'이 아니라, '루이트의 출현'이었다. 단 한칼에 죽 여야, 루이트가 찾아서 뛰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릿 소환'이라니!!! 옛날,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 를 자이온에서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꼭 저만할 때의 소년--!! 그도, 스피릿 소환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이건 으름장이 아닌, 진짜다--!! 저 불길한 검은 오라!!! 지 금, 아스테린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저, 멍청한 킬이라는 놈은, 그런 것도 모르고 아스테린을 이죽대고 있 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킬--!! 이, 멍청한 자식!! 물러나--!!" 이드넘은 반사적으로, 품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내들며 외쳤다. 아스테 린은 어쩌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나'와, '스온 아 피네스'만 데려간다!! 아스테린은 나중에 암살하면 되니까--!!! 이드넘은, 아스테린이 지금 '하누카의 날을 치르는' 중이기 때문 에... 어쩌면 지금, 스피릿 소환을 하는 것이 불완전할 수 있다고도 생 각했지만 그래도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기엔, 저 검은 오라가 무서웠다. "킬---!!" 여차하면, 킬도 내버려두고 가기 위해 마음먹은 찰나, 갑자기 뒤쪽에 서 고함이 들렸다. "무슨 짓인가--!!!"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멀리, 한 루이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왕족의 검은 오라에도 굽히지 않았던 킬은, 루이트를 보고야 뒤로 물러났다. 아스테린은 반가운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날 듯, 소리질렀다. "이 자들을 죽여버려--!!! 스온 아스나엘을 이 꼴로 만든 놈들!!!! 난, 스온 아스테린이다!!!" "----!!!" 이드넘 및, 킬과, 거기 있던 부하들은 긴장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이드넘은 아티팩트를 꺼내들고 있었 다. "스온 아스테린은 포기한다!!!" 이 상태론 데려간다고 해도, 모든 루이트를 끌어들이는 결과가 된다. "나머지 여자들을 붙잡고, 이쪽으로 붙어--!!!" 부하들은 낯선 루이트의 출현에 기가 질려 있었지만, 마스터의 명령 을 재빨리 수행했다. 우선은 스온 아피네스를...!!! 하지만 그때, 회색 의 검기가 스온 아피네스의 팔을 잡아끄는, 남자의 등을 강타했다. "끄윽---!!" 아피네스를 납치하려던 남자는 즉사했다. 그리고, 킬은, 발악하는 아 스테린에게서 '시나'를 빼내려 하는 순간이었는데, 그 장면을 본, 루이 트가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자식들!!! 그 분들을 놔라!!!!" 그리고 동일한 회색의 검기가 파성음을 내며 날아와, 킬의 팔을 날려 버렸다. "아아악---!!" "-----!!!" 이드넘은 그 장면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실패다!!! 벌 써 루이트는 들이닥치고 있었다! 아스테린이 저토록 분노하고 있으니, 이제와 들이닥친 게 이상할 정도다!! 루사벨라인가?!!! 하필, 이 셋이 같이 있었다는 것도 불운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아깝다면---!! 아니, 목숨이 아깝지 않더라도, 여기서 붙잡힌다면, 끝장이다!! "젠장---!!! 철수한다!!! 내게로 붙어!!" 떨어진 팔에 정신을 못 차리던 킬도, 용케, 이드넘에게로 왔다. 가까 운데 있기도 했지만-- 이드넘은, 문득, 킬이 너무나 못마땅해, 이놈을 여기서 떨구고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놈도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죽이더라도 데려가서 직접 손으로 죽여야했다. '제길--!!' 이드넘은 쇳소리를 내며, 아티팩트의 주문을 외웠다. <엠벨루스--! 미천한 내게 능력을---!! teleport!!!> 그리고... 그곳에 있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회색의 검기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로 그 자리, 허공을 갈랐다. "젠장-!!" 루이트는 그들을 놓쳤음을 아쉬워하며, 아스테린에게 갔 다. "괜찮으십니까? 명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아스테린은 눈물을 흘릴 듯, 그가 반가워 말했다. "응!!! 아슬아슬할 때 와주었어... 나는...!!!" 하지만 아스테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하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역시, 마인드 컨트롤을 어기고, 무리하게 스피릿을 소환하려 해서 그렇다... 게다가, '이름이 지워진 자'로서... 이제, 힐라토 스피릿하고는 인연을 끊어야 하는 때에... "스온 아스테린 님...?" "아냐... 괜찮아... 난... 괜찮아... 그보다는 스온 아스나엘... 그 녀를... 그녀를 돌봐 줘... 힐러에게..." "스온 아스테린 님!! 제게 기대십시오!!" "응... 고마워..." 아래 계급에겐 절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 던, 아스테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스테린은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잃기 전... "그런데... 그대의 이름과, 직급은?" 루이트는 투구를 벗어들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카이러스의 루 이티온 루바인. 스온 아스테린 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스테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지었다. "응... 그래서, 이리로 왔 구나. 아스나를 돌봐 줘. 테트라아크, 루바인 경..." 루바인은 미소지었다. "당연하지요, 안심하십시오." 그 말에 다시 한 번 미소지은 아스테린은 마침내 정신을 잃었다. 그런 아스테린을 안아 들며, 루바인은 중얼거렸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당연히, 잘 돌봐 드려야지요." 루바인은 쓰러진 시나를 보고, 냉혹한 눈으로 미소지었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9- 관련자료:없음 [25550]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12:08 조회:1147 가까스로 지정된 막사로 도망친 이드넘은, 정신 없어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막사로 뛰어들어갔다. "겐트온!! 어서, '보호물'만 데리고 빠 져나가자!!! 일이---!!!" 하지만 그 순간, 안의 상황을 확인도 안 하고 들어온 자신의 어리석 음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처절한, 피비린내---!!! 안쪽, 밝혀두었던 횃불도 꺼져 캄캄한 그곳에, 한 남자-- 그가 들고 있는 검에 은색의 검기만이 빛나며---- '훅---!!' 이드넘은 숨을 들이쉬었다. 루드랫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마인드 텔, 전투의 마인드 컨트롤 상태일 때 내는, 그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동.료.인.가.> "--젠장---!!!" 뒤로 물러나는 데, 누군가 이드넘의 발을 잡았다. "...이드..." "겐트온---!!!" 사지가 상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도 나중에,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목숨만은 붙여둔 듯... "젠장!!" 상황 볼 것 없었다. 이드넘은 피 투성이가 된 겐트온을 부여잡고, 또 한번 텔레포트의 주문을 외웠다. 제일로트 안-- 이걸로 온 능력자란 능력자는, '판테온'의 기를 감지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파... 아프다...' 시나는 너무나 아파,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와주지 않을까... 이 아픔을 그치게 해 줄, 누군가... 하지만, 차가운 땅바닥. 클로니아 인들이 '얼음의 피조물'이라 부르는... 뼈 속까지 얼리는 이 차가운 냉 기.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등이 아프다. 불에 덴 듯... 욱신거리는. 하지만, 등은 저번에 말끔히 낫지 않았나? 역시... '칼루스온'이라 다시 상처가 도진 건가? "....아빠..." 시나의 입술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로 눈앞엔, 붉게 물들은 눈이... 왜, 눈이 붉은 걸까, 생각했지만. 그때, 누군가의 목소 리가 들렸다. <...인간...이군...따뜻하다...붉고...따뜻한...> 시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옆을 보았다. 작은 소인들이 있었다. "....브라...우니?" 그러자 그 아가씨들은 놀란 눈을 지었다. <...우리...말을...들을.. 수, 있어?> 온 몸이 푸르스름한, 그 아가씨들은, 머리카락이 투명했고, 눈의 결 정체 모양의 왕관을 쓰고 있었다. 파아란 볼을 가진 아가씨들은, 은색 의 눈을 반짝였다. <....재미있군... 히어러...?> <...흐응... 그것 외에도... 아무리... 안겨 있어도... 따뜻함.. 잃 지 않는....> <...능력자군....> <도와줄까... 응...?> 하지만 친절하게 말하던 그들은 갑자기 깔깔 웃었다. <안돼... 싫 어... 마음이 바뀌었어... 귀찮아...> <...브라...우니...라니...마음..상했어...> <...대신...우리...가운데...더...안겨... 따뜻함.... 친구가...> <친구가...되어...주지...> 하지만 시나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팔에 힘을 주었다. 등에 불이 붙 은 것 같고, 옆구리로 무언가가 쏟아지는데, 후들거리는 팔로, 가까스 로 일어나, 아파하며,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필요...없어." <......?!> 시나는 격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목소리. <들어라... 나, 히어러HEARER.... 신이 너희들에게 부여한 이름을 들으며.... *시.로.히.메.白姬-- 너희들을 수하에 두니, 그럼으로 개체 의 이름을 부여한다... 히어러이자, 네이머NAMER 나, 시나가...> 그 목소리에 얼음 정령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네이머---!!> 하지만, 시나는 피묻은 손으로, 눈을 가리는 은발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차가운 은빛 눈으로, 얼음의 정령들을 주시했다. "너희 같은 것들, 친구 필요 없어... .......너희들의 마스터가, 명 령한다... 상처의 피를... 잠시만, 멎게... 의식을 맑게..." 그리고 시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억누르며, 그들에게 개체의 이름을 부여했다. "뭐라고....?!" 스온 아스테린을 안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와중에 세 명의 왕족 아가씨들을 찾아다니던 힐라토 레이서스와 만났다. 루바인은, 왜 그가 이런 곳에 있는 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냥터에서 힌트를 얻어 몬 스터들만 동원했을 뿐인데, 뜻밖에 불까지 나서 자신까지도 정신이 없 는 때에, 카이러스 사이너스 님의 아들이--!! 루바인은 다급하게 말했다. "힐라토님--!! 왜, 이런 위험한 곳 에!!!" "괜찮아!! 그 보단 시나- 스온 아스나엘과, 아피네스는 어디 있 나?!! 시녀들에게 물으니, 셋이서 산책을 나갔다고 하던데--!!" 그 말에 루바인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미리 생각해둔 거 짓말을 했다. "네. 저도, 그런 말을 듣고, 바깥으로 뛰어나와... 세 분이 계시다 는 막사로 갔습니다. 마차가 준비되었으니, 대피하자고 말씀 드리려 고..." "그래서?!! 왜 아스테린의 옷이 이렇게 피에 흠뻑 젖었나?! 어디 다 친 건가?! 그리고 나머지 둘은?!" "아닙니다. 스온 아스테린 님은 무사하시고... 이건..." 루바인은 잠시 생각했다. "...제가 괴한들을 물리칠 때... 그때 그들의 피입니 다." "괴한---?!!" 루바인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거의 있는 그대로의 설명 이었지만, 두 왕족 처녀 또한 아스테린처럼, 지금, 기절해 있다는 말만 은 틀렸다. "기절이라니--!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고 왔다고?!" "아무리 저라도 세분을 모두 안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 심하십시오.. 시녀 하나를 거기에 붙여두고 왔습니다. 저는, 우선 스온 아스테린 님을 옮기고, 다시 돌아가 두 분을 옮기기 위해..." "그런---!!" 고작 시녀 하나만 붙여두고 왔다고?!! 그런데 어떻게 안심할 수 있나!? 그 말에, 레이서스는 혼 강에서 일어났던 일이 생각 나, 정신이 아 찔해질 정도였다. 루드랫이 해준 말도 떠올랐다. 실은, 시나는 몇 번이 나 죽을 고비가 있었다고. 특별히 노리는 놈들이 있는 것 같으니, 자신 이 그들에 대해 조사할 동안, 놈들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그녀를 잘 부탁드린다고... 그런데, 괴한이라니!! 놈들이 또 나타난다 면!! 자신의 실수다!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밤중에 끌고 나오게 한, 자신의 잘못....!!! 레이서스가 말했다. "그 둘은 혼자 놔두면 안돼!! 지금, 당장 가보 겠어-!! 어딘가, 그 장소가?!!" 루바인은 눈을 찌푸렸다. "...먼저, 스온 아스테린 님을 마차에 옮 기고... 불이 곧, 이곳까지 번질 텐데..." "---!!" 레이서스는 초조한 얼굴빛을 했다. 하필이면, 루파르테도 없다. 루 사벨라야 사냥막에 있다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두 사람이 너무나 못마땅해지는 그였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제 거의 모든 왕족 처녀들이 마차에 탔고, 마차는 무서운 속도로 숲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곤 몇몇 시녀들과, 루이트들뿐. 루 이트들은 아직도 잔존하는 몬스터들을 찾아 뛰어다니며, 살해하고 있었 다. 하는 수 없었다. 레이서스는 가까운데 뛰어가는 루이트를 불렀다. 그리고 루바인이 안고 있는 아스테린을 그에게 건네주며 마차로 옮기도 록 했다. "그리고 곧바로, 왕궁으로!! 잘 보호하도록!! 스온 아스테린이다!" "네--!!" 어느 세계인인지는 모르지만, 스콰이어인 듯, 앳된 얼굴의 그는, 뜻 밖에 이런 높은 왕족을 모시게 되어 놀랐는지, 긴장한 채 대답했다. 스콰이어가 떠나기 전, 레이서스는 아스테린의 볼에 묻은 진흙을 닦 아주었다. 창백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신부의 방'에 이런 재난이라 니. 불쌍한 그의, 어린 누이였다. 레이서스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이 마에 키스했다. '...아스테... 괜찮아. 내가 다시...' 그리고 몸을 일으킨 그는, 루바인에게 명령했다. "안내해!" 하지만... 루바인의 안내로, 세 왕족 아가씨들이 있었다는 막사로 간 레이서스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있는 것 이라곤, 시녀의 시체뿐. 그걸 본 레이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루온 루바인, 여긴 아무 것도 없잖나? 그 두 사람은, 도대체?" 루바인은 눈을 찌푸렸다. 이상한 일이다. 시녀의 시체야... 나중에 아스테린이 깨어났을 경우, 의심받지 않도록, 이미 죽은 것을 날라다 놓은 것이고... 아피네스는 그냥 내버리시다시피 하고 왔으니, 몬스터 에게 잡혀갔다고 해도, 아님 자기 발로 걸어서 어딘 가로 없어졌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지만. ...스온 아스나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부상으로 땅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 직도 저 눈밭에 피가 흥건하지 않은가? 숲의 한쪽이 활활 타고 있어, 열기와 함께 밝은 데다, 활활 타고 있지 않다고 해도, 보름달이 떠 무 척이나 차갑고 밝은 밤이었다. 그런데, 저기에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되어 드러누워 있어야 할 스온 아스나엘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몬스터가 시신까지 끌고 갔을 리는... 오크나, 트롤은 인간을 먹지 않 는다. 오거라면... 하지만 눈밭에 질질 끌려간 흔적은 없고... 단지... 루바인은 눈밭의 흔적을 눈으로 쫓으며, 미리 준비해둔 말을 기계적 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맞습니다. 공주님들은.... 설마... 그 후에 또, 괴한들이 닥쳐서... 저, 시녀를 죽이고..." "말도 안돼!!" 갑자기 레이서스가 소리 질렀다. "시나...!! 아핀...!!! 저, 저 눈 밭의 피는 무엇인가?!! 누구의 피이지?!!!" "...스온, 아스나엘 님의... 별로 심한 상처가 아니었는데, 부상이 심해지신 듯..." "부상자를 놔두고, 아스테를 먼저 옮겼다고!!!" 루바인은 그 말에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때 는 누구를 먼저 옮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 하긴, 루바인을 탓할 것이 아니다. 이 막사는 상급 루이트의 막사인 듯. 다른 어떤 막사보다 튼튼하게 지어져 있고, 빗장도 단단했다. 거기 다 막사들 한가운데에 있어, 몬스터들이 침범하지 못할만한 곳이었고. 그래서 루이트들이 세 소녀를 이곳에 데려다 놨을 것이다. 그리고 루이 트들은, 저쪽, 떨어진 곳에 있는 '신부의 방'... 몰려드는 몬스터에게 서 왕족 처녀들을 구하고, 불을 진압하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을 테 고... 덕분에 이곳은 '안전'한 만큼, 사람이 지키지 않은 곳이 되어... 하지만, 괴한이라고? 레이서스는 또 한번 자신을 질책했다. 그 세 소녀가, 밤중에, 이런 곳까지 나와야 했던 것은 자기 탓... 차라리, '신부의 방'에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다른 왕족 처녀들처럼 지금쯤 마차를 타고 숲을 빠져나가 고 있었을 텐데...!! 레이서스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이곳.... 왕가의 숲을 전부 뒤져서라도...!!! 아니, 제일로트 전체--! 클로니아 전체를 뒤져 서라도 찾아내겠어!! 필요하다면, 엘야시온 전체를 뒤져서라도!!" 그리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돌아가려는 찰나, 루바인이 말했다. "잠깐... 레이서스님... 여기, 발자국이... 그리고 핏자국이 이어져 있습니다..." "----!!!" 시나는 맨 처음, 저토록 활활 불타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 바깥에만 서있었다. 서서히, 악몽이 살아와, 견딜 수가 없었 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이토록 크게 타는 불... 아무리 절망해 도, 아무리 눈물 흘려도... 불은 모든 것을 태우며, 가장 사랑하는 것, 가장 아름다운 추억까지도 태운다. 하지만... "하지만... 들어가야 해..." 그래야 지만, '위로'받을 수 있다... 세렌시스... 그에게. '차라리 죽는다면 좋을 것 같은 이 슬픔'.... 이걸 위로해 줄 사람은 그 사람밖 에 없다. 그가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말해준다면... '아덴시엘... 슬픔은 점점 엷어져... 그래서, 언제간은... 나는 그 사람을 만나서 아주 행복했다, 라고...' 시나의 더러워진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시나는 불에 대한 공포... 모든 것을 태우는 그 공포를 극 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에 타는 '신부의 방'으로. 그리고, 자신의 나무로 걸어가... 불씨가 날릴 때마다, 얼음의 정령들이 그녀를 수호했 다.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는 그들의 목소리. <마스터...> 하지만, 시나는 그들의 목소리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시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지독하게 아픈 등... 끝까지, 걸어가. 거 기 걸린, '유리 검'을 손에 쥐고. 회색의 리본을 떼어내어, 거기에 눈 물 흘렸다. "루드랫..." 시나는 하지만, 다시, 멈추지 않고 걸었다. 옷이 너무 더러워져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붉은 드레스... '신부의 방'에서 지내기 위해... 아마도 모든 아름다운 옷을 싸 가지고 왔다. 그것을 가지러... 시나가 루드랫을 위해,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옷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무수한 얼음 정령들을 희생하고, 불에 타는, 자 리... 원래, 아피네스와 있던 곳에 도착하자. 그곳엔 브라우니들이 놀 라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시나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라우니가 눈물이 글썽해 서 시나를 보았다. "...넌, 히어러일 뿐 아니라..." 시나는 미소지었다. 그녀 등뒤로 보이는 나무들은 모두다 불에 타고 있었다. "그래, 난 네 마스터다, 브라우니. 내 상처를 고쳐라... 너무 아프 니까... 너무 아파서, 여기까지 오는 것이 힘들었어... 너희들은, 약재 가 되기도 하지... 그러니, 내 상처를 고쳐...." 예라우니가 코를 훌쩍이더니, 말했다. "어디까지, 마스터? 어디까지 힘이 필요합니까?" "...너희들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레이 오빠--!! 아스나--!! 아핀---!! 레이 오빠--!!" 아스테린은, 소리지르며 난장판이 된 신부의 방 근처를 여기저기 뛰 어다니고 있었다. 맨 처음, 마차 안에서 깨어났을 때, 웬 낯선 스콰이 어 외엔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하지만 스콰이어가 하는 말을 듣고는 더욱 놀랐다. 레이 오빠가 여기 와 있다니!! 그리고 루바 인이 아스나와 아핀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왔다니!! 특히, 아스나는 부 상으로, 상처가 크게 벌어져, 안고 있는 자신의 손과 옷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였는데!! 왜 루바인이, 부상당한 아스나가 아닌 멀쩡한 자신을 먼저 날랐는지 는 모르겠지만--!! 아스테린은 그들이 올 때까지 마차를 출발시키지 못 하게 했고. 결국,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리자, 이렇게 직접 마차에서 내려 신부의 방이 있는 곳으로 달려 온 것이다. 아스테린은, 자기가 생 각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있는 모습을 그냥 앉아서 보고 있을 만큼 마음 편한 소녀는 아니었다. 설혹, 아무런 도움이 못 되더라도--!! 레이 오빠를 찾아 상황을 설 명해 주어야 한다!! 그놈들!! 그 무례하고 건방진 루이트들의 인상착의 를 말해주고!! 용케 도망갔으니까, 찾아서 단번에 죽일 수 있도록!!! 그래서 아스테린은 레이서스를 찾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 아스 테린을 아까 그 스콰이어가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으나.... 하지만, 그 스콰이어를 쫓아와 무언가를 지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스콰 이어는 아스테린 쪽을 보고, 고개를 흔들고 다시 마차 있는 쪽으로 돌 아갔다. 그래서 결국, 아스테린의 뒤를 쫓는 사람은 스콰이어를 돌려보 낸 그 사람 한 명뿐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스테린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레이서스를 찾는데 온통 정 신을 팔고 있었다. 시나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이... 푸르게...' 그 어느 때보다 푸르스름한 달이었다. 땅은... 군데군데 발자국과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지만... 눈으로, 하얗고. 대기는 차갑고, 공명 을 일으킬 만큼 투명했다. 별은 눈부시도록 밝았지만, 달의 광휘에 그 빛을 잃을 정도로... 달은, 모든 것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지금 온 세상을 밝히며 타고 있는 불꽃조차도, 푸르게, 그 상태로 얼려버릴 것 같은, 달빛이었다... 시나는 중얼거렸다. "깨질 것... 같은... 하늘..." "아스나---!!!" 시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자신도 아는 소녀가 서 있었 다. 스온 아스테린... 그 검은머리의 소녀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서 시나에게 달려왔다. "아스나!! 괜찮아?!! 괜찮은 거야? 아까, 맞은 등은 괜찮아?" 참 귀여운 소녀였다. 시나는 아스테린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괜찮아..." 아스테린은 그 대답에 안심한 듯,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다 행이다!! 난, 멀리서, 아스나가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는 걸보고 온 몸 이 피투성이가 된 건가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내려앉 았는데...." 그러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아스테린. "아스나...? 눈이... 그리고, 머리색이.... 어떻게 된 거야? 모두 다, 은색...?" 시나는 더욱 깊게 미소지었다. "...아스나...? ...아스나가, 클로니아의 왕족이야...? 하... 하지 만..." "아스테... 조금, 춥지...?" "응?" 아스테린은 시나가 입고 있는 모양을 보았다. "그거야... 그 렇게 얇게 입고... 예쁘긴 하지만..." "안아줄래...?" 아스테린은 묘한 눈을 지었지만, 결국은 손을 벌렸다. "응. 아까 아 스나가 날 안아줬으니까, 이번에 내 차례지." 두 사람은 서로 안았다. 시나는 아스테린을 꼬옥 끌어안고 중얼거렸 다. "참, 따뜻하다. ...귀여운, 아스테린..." 아스테린은 볼을 붉혔다. 레이 오빠 외에 자신을 이렇게 귀엽다고 한사람이 없는데. 약간 기분이 나쁜 것 같았지만... 참기로 했다. 그리 고 새침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곤란해. 귀엽다니. 실례야. 하지만... 뭐... 특별히, 그 대만은 그렇게 말하는 걸 용서하기로 하지. 으음... 레이 오빠의 부인 이 될 거니까. 뭐 괜찮겠지. 레이 오빠도 날 귀엽다고 하니까." 그러자 시나의 몸이 움찔했다. "아스나?" 시나가 왜 그러나 고개를 들려던 아스테린은, 시나가 자신을 더욱 꼬옥 안자, 다시 그 품에 안겼다. "응? 왜 그래?" 그러자, 귓가에 흐르는 낮고 불길한 목소리.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넌, 그 '마녀'의 동생이구나. '마 녀'를 처치할 순 없지만... 육체적으로 그를 해칠 순 없지만... 하지 만, '마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 아스나-?! 도대체 무슨---" 하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나의 손에서, 빛나는 회색의 검기는, 길게 선을 그으며. 아스테린의 작은 가슴을 등에서부터 관통했다. 그 이물질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올 때... 아스테린은 미약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시나를 보고. 아스테 린은, 끝까지... 영문을 알 수 없어했다. "아...스나... 왜.... 왜....?" 왜....? 아까는, 날 구해주기까지 했잖아...? 그런데, 왜...? 아스테린은, 눈을 감고, 입가에 피를 머금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 다. 그런 아스테린을 내려다보며, 시나는 조용히 서 있었다. 손에 든, 유리 검에선, 하얀 검기가 타오르며 핏방울을 산화시켰다. 천치를 진동할 만큼 달은 푸르게 타오르고. 숲은 타고, 하늘은 검으 며, 땅은 붉었다. 마치, 이것도 꿈인 양... 시나는 미소지었다. 그 눈 에선 비통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단지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때.....? ......이제, 시작이다.... 윤시나. 네게는... 지옥 이... 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림자는, 낮게 숨을 들이켰다. 말을 타고, 숲을 달려, 거의 '신부의 방'이 있는 곳까지 간 루사벨 라는, 말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가슴을 관통하는 쇳덩이 같은 느낌 에, 그만 비명을 지르며 땅에 굴렀다. "아아아악!!!" 루사벨라는, 땅에서 기다시피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공포로 질린 눈에는 눈물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아, 안돼---!!!" 믿을 수 없었다. "안돼---!!! 제발, 제발!!! 아스테린 님!!! 안돼---!!!" 가까스로 일어난, 루사벨라는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다 시 쓰러졌다. 아아아아악---!! 눈물이 흘러 넘치고, 숲엔, 그녀의 비명이 울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그의 어린 공주님을 대신하듯이. 루사벨라는 땅을 짚으며 절규했다. 진실로, 믿을 수 없었다. "안돼----!!!" 셰리카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 잠에서 깨었다. 방안에 누군가 있었 다. "웅... 누구...?" "셰리카." "어...? 시, 시나...? 시나야?" 어둠 가운데 확실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시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왜 시나가 지금 이 시간, 이 방에? 하지만 그걸 물어볼 틈도 없이, 시 나가 다가와 자신의 침대에 앉았다. "시...나?" "...응, 맞아. 나야, 셰리카... 내 친구." "와--!! 정말, 시나구나!! 너무 반갑다!! 너무 반가워!! 왜 이 밤에 왔는지, 이상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은 게 더 괘씸한 거 니까, 용서해 줄게!! 웅... 너, 공주님이 됐다고, 날 잊어버린 건가... 굉장히 섭섭했는데...." "하하... 그럴 리가." "응... 그렇지?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아...! 그렇구나!! 혹시, 지 금...!! 지금, 돌아가자고 말하려 온 거야?!! 그렇지? 그때도 밤에, 이 쪽으로 넘어왔으니까, 넘어갈 때도 밤에 가는 거지?!!" "응. 그래. 우린 곧 갈 거야. 하지만... 그전에, 꼭 필요한 절차가 있는데..." "절차라니? 무슨 절차?" "저쪽 세상에서 가져온 물건은, 전부다 도로 가져가야 하는 거라고, 엘야시온님이 그러셔서... 나, 내 목걸이 잊어버렸잖아... 그래서 걱정 이야. 그러니까, 셰리카... 내 친구... 부탁이야." 시나는 몸을 숙이고, 셰리카의 이마에 키스했다. "내 목걸이, 찾아 다 줘. 네가, 있던 곳에서 봤다던 그 목걸이... 찾아 줘." 셰리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시나. 하, 하지만... 이젠, 위험 해서... 다시 이드넘에게 간다면... 그는 날 죽이려.... 그러니까 안 돼.... 차, 차라리.. 저어, 나 열심히 돈 모았거든? 내가 목걸이, 사 줄까? 아님, 내가 걸고 있는 이거... 네가 준 거, 줄게..." 셰리카는 시나가 이해해 주길 바라며 열심히 변명했다. 하지만 시나 는 그 순간 몸을 굳히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안돼?" 그 목소리가 너무 생소해, 셰리카는 깜짝 놀랐다. "시나....?" "...흥. 안 된다니. 유감이네?" 이런 차가운 목소리... 게다가 셰리카는 이제야, 시나의 몸에서 이 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나가 자신의 몸을 만질 때, 그때 묻은 차갑고 끈적거리는 이것은 무엇? 그런데, 그것에 대해 생각 하기도 전에, 시나가 말했다. "네가, 사줄 싸구려는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한 건, 내 목걸이야. 그 러니까 네가, 그 목걸이를 찾아 올 수 없다면, 난 널 안 데리고 갈 거 야." 그 말에 충격 받은 셰리카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시나!!! 너무..." "뭐? 너무하다고? 하지만, 친구라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안 그 래?" 시나는 차갑게 말하며 웃었다. "정말, 친구라면. ...티토우의 딸, 너 셰리카. 네가 정말, 내 친구라는 사실을 증명해 봐." 레이서스와 루바인은 핏자국을 쫓아갔지만, 그 핏자국이 중간에서 갑자기 끊기자 어리둥절해 했다. 마치 이곳에서, 허공으로 사라진 듯.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레이서스는, 무언가를 눈치채고 희망 어린 목소 리로 말했다. "....루온 루바인. 이건... 괴한이 아니라... 아니, 모르겠군. 어쩌 면..." 레이서스는 떨리는 가슴을 한 채, 바로 가까운데 있는 막사로 걸어 갔다. 그곳은 아까 자신이 있던 막사. 시나와 만나던 곳이었다. 만약, 시나와 아피네스가 구원을 청하기 위해, 저곳까지 간 거라 면...! 제발 저곳에 있어주길. 레이서스는 간절히 바랬다. 그런 희망적인 바람을 갖기에, 아까 죽어있던 시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이것이 아니라면, 정말 온 제일로트를 뒤져야 할 지도 모르니까...! 레이서스는 긴장을 한 채, 막사의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이 근처마 저 불이 번지고 있어, 정말 이 안에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데리고 나 가야 하므로...!! "...시나...? 아핀...?" 레이서스 뒤에선, 루온 루바인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그런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레이서스는 막사 안의 어둠을 둘러보며 간절한 목 소리로 말했다. "시나...? 아핀....?" 아무도 없는 건가... 결국은 쓰게 실망을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레이." 어둠 속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서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 갔다. "아핀--!! 정말로, 네가 여기 있다니!! 아아...!!" 그 뒤로, 루바인은 일그러진 얼굴을 해서 레이서스를 따라 막사로 들어왔다. 설마, 스온 아스나엘까지 여기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내부를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 다. 하지만 다행히, 스온 아스나엘까지 여기 있는 것은 아닌 듯. 레이서 스가 다시금, 긴장한 목소리로 아피네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핀!! 시나는?!!! 시나가 어디 있는지 몰라?!! 같이 있었잖아!!!" "몰....라. 난, ....루드랫... 있는 곳... 하지만, 너무 추워.... ...배고파..." 그렇게 말한 아피네스는 레이서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고 눈을 감았다. "아핀!!" "....아무래도 안되겠군요." "....?!" 레이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바인은 그림자 진, 얼굴로 말했다. "불이 점점 번지고 있는데... 다행히, 눈들이 잔뜩 쌓여있어 천천히 타오르고 있지만. 스온 아피네스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건, 스온 아스나 엘 님도 근처에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니, 서로 헤어져 찾아보는 것 이 나을 것 같습니다." 레이서스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아니..." 루바인은 딱딱하게 말했다. "스온 아피네스님이 정신을 잃으셨으니, 힐라토님은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루이트를 찾아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 그렇군...! 그럼, 빨리 사람을 보내 줘! 아피네스라도 찾아서 다행이야." 레이서스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하지만, 괴한에게 끌려 간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네 말대로, 틀림없이, 시나도 이 근처에 있을 거 야!" 루바인은 어둠가운데서 미소지었다. 네, 그렇죠. 카이러스 사이너스 님의 아드님.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찾아, 확실히 없애야 하는 겁니다. "...불을 붙여놓고 가겠습니다." "음..." 횃불을 붙이고, 루바인이 막사를 나갈 때, 레이서스가 그를 불렀다. 루바인이 뒤돌아보자 레이서스는 멋쩍게 말했다. "고마워... 역시, 자네는 아버지의 루이트다워. ...줄곧. 자네가 끝 까지 아버지의 루이트였다면...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셨을 거라 생 각했지..." 루온 루바인은 가까스로 미소지었다.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 았다. 목이 메이는 것 같은 느낌에 말조차도 하기 힘들었지만.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그런 말씀을 듣다니. ...기쁩니다. 카이 러스 님이, 보셨다면, 기뻐해 마지않았을 당신께서... 그 누구에게서 듣는 것보다, 기쁩니다." 루바인은 그리고,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존경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저 분. 힐라토님을 위해서라도, 꼭... 카이러스 님을 되찾고 말겠다. 막사 안에서 초조하게,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레이서스는, 아무래도 사람이 안 오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차라리 직접 루이트를 찾아, 아스테린과 마찬가지로, 아피네스를 넘겨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 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아스테린을 떠올리니... '잘 들어갔겠지...'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지금쯤, 왕궁의 문을 들어서고 있거나, 아 님, 목욕탕 속에 들어가, '신부의 방'이 망쳐진데 대해 시녀들에게 화 풀이하고 있을 것이다. 적당히 해주면 좋으련만... 좀 더 얌전하게... 이제 제멋 대로인 소녀인 채로, 어리광을 피워도 받아줄 사람은 이곳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일찍 시집보내는 것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뭐, 좋겠지. 클로니아 세스틴이 잘 알아서 할 것이다. 그는 이미 아 스테린을 위해 마인드 컨트롤했으니까... 한숨을 쉰 레이서스는 아피네스의 뺨에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뒤 로 넘겨주고, 그녀를 안아들고 일어섰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피네스의 몸이 너무 차가워졌다는 것도 있다. 그러니, 이런 불기 없는 곳에 오래 두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때... 막사의 문이, 삐꺽... 열렸다. 레이서스는 눈을 돌렸다. "늦었---" 하지만 그 말은, 끝내질 못하고 -- "시, 시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시나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듯, 레이서스를 보았다. 레이서스는 아피네스를 간이침대에 눕혀놓았다. 그리고 달릴 듯, 시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대가...! 아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어쩌면 몸조차 떨고 있 는 지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레이서스는 이 순간, 신이 살아 계 시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시나의 몸이 너무나 차다는 걸 눈치챈 레이서 스는 눈을 찌푸렸다. 레이서스 자신의 몸도 찼지만, 시나는 그보다 더 했다. 레이서스는 그제야 몸을 떼고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시나....?" 그리고 경악한 눈을 지었다. "맙소사...! 그대, 이런 모습으로 이 밤 내내 있었던 건가? 이런 얇 은 옷만 입은 채로? 몸은? 몸은 괜찮아?" 하지만 시나는 인상을 쓰며, 레이서스를 바라 볼 뿐이었다. 레이서 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 다친.....?!!!" 그 순간 레이서스는, 처음으로 시나의 눈빛과 머리칼을 보았다. 레 이서스는 놀라서 말했다. "그대의... 눈빛... 머리칼이....?" 시나는 그런 레이서스의 눈을 마주보며, 조용히 말했다. "또, 만나 게 되어, 반갑군. 저번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지? ....당신, 누군가, 찾고 있는 사람 있는 것 같은데." 시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그 사람이 아니라. 미안한데. 그러나 피장파장이지. 아깐 불이 꺼져 있어.... 그냥, 지나 갔는데... 지금은, 불이 켜져 있어, 반가운 마음에, 와 봤더니... 당신 이 있을 줄이야. ....나도, 실망했어." 레이서스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뭐라.....고....?" 목소리가 갈라져서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더욱 자신이 당하는 상황 같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당하 고 있는 것을 옆에서 보는 듯. 정신이 반으로 나누어질 것 같은, 이 극 심한 상황... 시나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그녀의 저 미소짓는 얼굴. 그 눈빛은 거짓말을 하거나,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서스는 멍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뭐라...고? 그대가.... 방금.... 뭘, 어떻게 했다고....? 누 굴....? 누굴.... 죽여....?" 시나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로 말 했다. "음.... 맞아. 당신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 증거.... 자.... 손을 펴봐요." 레이서스의 벌린 손위로, 후두둑.... 한 다발의 검은 머리칼이 쏟아 져 내렸다.... "....그리고, 이것도, 선물." 시나는 아스테린의 반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후.... 어쩐지, 당 신에겐 이런 식으로 선물을 많이 주는군. 이번 건, 희생이 많이 들어간 거니, 고맙게 받아줘요... 응?" 레이서스는 열린 눈동자로 손을 늘어뜨렸다. 아스테린의 머리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반지도... 하지만 레이서스는, 이런 식으로, 왕족의 머리칼이 이런 식으로 있다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 는지 알면서도, 바보처럼, 중얼거려야 했다. "....난.... 믿을 수.... 없어......" 시나가 웃었다. "믿을 수 없어? 하하하하...." 그리고 좀 더, 뒤로 물러났다. 바로, 아피네스가 차갑게 누워있는 간이 침대까지. "왜, 믿을 수 없을까? 하하하... 그럼, 좋아. 다른 증 거를 보여주지... 내가 어떻게 아스테를 죽였는지, 여기서 다시 한 번.... 자...." 맨 처음, 레이서스는, 시나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준.... 그녀를 위하여, 자신이 준, 유리 검. 그 검을, 들고... 시나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시나가 검 을 드는 모습은 천천히. 마치, 누군가 공간을 차례차례 조각 내어놓는 듯한. 그 뚜렷하면서도, 전혀 이어지지 않는 움직임. 그래서, 전혀--- 전혀--- 저, 움직임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 어---!!! 검이 내려올 때조차도!!! 그가, 혼 강에서, 그녀를 구한 유리 검이!!! 율르스와 칼리스나를 배신하면서까지, 그녀에게 바친 유리 검!! 그 손잡이와, 검신에 새겨 진, 말은 아직도 저렇게 생생한데...!! 그런데, 그녀는 그 유리 검을 들고,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그것을 내리쳤다!!!! "안돼----!!!" 피가 크게, 튀었다. 검에는 검기가 실려 있었으므로, 검은 정확히 누워있던 소녀의 몸을 꿰뚫었다. 소녀의 몸은 크게 요동치고, 그 순간 눈이 열려 시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피네스는 빙그레 웃었다. 시나는 레이서스에게 보이기 위해, 그녀를 찔렀지만, 잠시, 멍해져 서 그녀의 그런 미소를 보았다. 아피네스를 손을 들어올렸다. 웃는 모 습... 시나의 볼에 손을 대려다,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피네스----!!!" 레이서스는, 아피네스를 찌르고 넋이 나간 듯한 시나의 몸을 밀쳐냈 다. "아피네스!!!" 하지만, 아피네스의 창백한 얼굴은 옆으로 뉘여 있었고, 입에선 핏 자국이 길게 흘렀다. 숨은 끊겼다. "안돼!! 아피네스!! 아아!!" 레이서스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 도 상관없이, 아피네스의 가슴에 꽂힌 유리 검을 뽑아냈다. 그것을 뽑 아내면, 아피네스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할 듯... 하지만, 차가운 피가 뿜어져 나와, 레이서스의 얼굴을 적셨을 때... 레이서스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피와 눈물이 섞여, 그것은 흘렀 다. "....아피네...스...!" 레이서스는 유리 검을 들었다. 그 검에, 검기가 실렸다. 검은 색의, 넘칠 듯 웅웅거리는 검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나의 몸은 바닥으 로 쳐박혔다. 하지만 시나는 비명하나, 없이 마치 인형처럼, 아무 힘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레이서스가 말했다. "...널 죽여버리겠다."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던 시나가, 그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하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세요. 왕이여. 나를 죽이세요..." 레이서스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시나의 볼로 떨어지자, 시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시나는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았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오랫동안, 꿈을 꿨어요... 내 가, 어떻게 당신을 상처 입힐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나을 텐데...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지키겠다고 했는데.... 난, 대신, 당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을 빼앗았군요...." 레이서스는 그때야, 무엇이 틀린 지 깨달았다. "넌.... 나를, 사랑 했나....?" 진실한, 회색 눈동자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회색 눈에서 눈물 이 하염없이 흘렀다. "진심으로, 사랑해요." 레이서스가 웃었다. "사랑... 아냐.... 넌, 사랑이 뭔지 몰라... 그, 지독함... 그래. 어쩜 넌, 나를 위하여 죽어줄 수는 있겠지... 그 리고, 그걸 '사랑'으로 부를 거다. 그러나, 그렇게 죽을 때라도, 네 머 릿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네가 떠올리는 사람은?" 검에선 아직도 검기가 불타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물었다. 어쩜 애 원하듯... "이제... 묻겠다. 솔직하게 대답해.... 제발.... 네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네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누구지...? 그것도, 나인가?" "-----!!!"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사람. 모습이 달라지더라도, 끝까지 그 한사람만을 찾아. 비록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옆에 있고 싶 어... 그건 누구? 레이서스가 그것을 물었다. "....제발... 대답해..." 하지만 시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렸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 회색 눈에 서린 고통과, 절망에, 레이서스는 깨달았다. 순간, 레이서스의 눈동자가 검게 타올랐다. 그건 살기(殺氣)였다. 죽는다...! 시나는 그렇게 깨달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고, 예상대로 허공을 가 르는 파성음은 똑똑히 들렸다. 퍽---!!! 바로, 귓가를 스치며, 꽂히는 날카로운 검기-- 시나는 볼에,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검기의 소리는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시나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떴다. ".....레겜....!!" 하지만 레이서스는 미소짓는 듯, 입술을 삐뚤게 하며, 시나를 보았 다. "닥쳐.... 이 더러운 계집애." "----!!" 레이서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말 더러운 것을 보는 눈.... 차갑고, 점점 굳어져 들어가는 검은 눈으로 시나를 경멸하듯 보았다. "'레겜'이라고?" 그는 차갑게 미소짓더니, 목덜미에 손을 집어넣어 걸고 있던 목걸이 를 투두둑, 끊어내었다. 금줄이 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레이서스는 목각 펜던트를, 손아귀에 쥐어 부서뜨렸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그게 존재했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는 듯, 검기를 내어 태워버렸다. 그래 서 손을 벌렸을 땐, 재만이 남아 흩어졌다. 시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 물이 흐르는 눈으로 그걸 보았다. "...레, 레겜---!!" "닥쳐---!!" 레이서스는 소리질렀다. "다시 한번만 더, 나를 그 이 름으로 부르면, 그땐 너를 죽여버리고, 루드랫까지 죽여버리겠다-!!!" "---!!" "레겜은, 이제 없어!! 동시에, 한때나마, '레겜'으로, 네게 홀려 있 던, 나 자신.... 난, 그 자를 평생 저주할 거다...! 감히, 너희 같은 것들에게, 조롱 당해야 했던, 그 자는,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해." 레이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이 침대 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그의 누이. 이젠 완전히 차가워진 그의 쌍둥이 누이를 들어올렸다. 자신의 누이를 바라보며, 그는 이젠 완전히 차갑고, 굳어 버린 눈으로 웃었다. 자신을 비웃으며 흘리는, 눈물이었다. "...스아디온 아스나엘. 도망쳐라... 너, 살인자여. 평생, 네 뒤를 내 저주가 쫓아다닐 거다... 넌, '두 명'인가? 그런가? 하지만, 너희 둘 다는 근본적으로 같아... 아니, 어쩌면... 내 누이에게 직접 손을 댔던, 그녀가 더 자비로울 정도... '너희'를 저주한다. 또 다른 너는 내 누이를 죽이고--" 레이서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아... 아스테린...! 아피네 스!! 나를 저주해...!! 내 누이... 내 누이들...!! "넌, 나를... 죽였지... 그러니, 도망쳐라... 평생을. 잡히는 날엔,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맛보게 해주겠다. 내 누이들은 처녀인 채로 죽 었지. 하지만, 넌 윤간을 당하고, 더러움 가운데 죽을 것이다. 내 누이 들은, 내가...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하지만, 넌... 넌, 긴 세월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외로움 가운데, 늙고 추하게 미 쳐 죽을 것이다.... 그러니, 도망쳐라. 나, 힐라토 파이오니온의 저주 가 너를 쫓을 것이다. 영원히." 레이서스가, 막사를 떠나고 나자... 막사에는, 시나만이 홀로 남았 다. (계속)================================================== * 白姬: 클램프의 작품에 나오죠? ^^; 별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 만... 백희, 라고 하는 게 얼음요정들 이름에 어울릴 것 같아서... 그 런데. '시로히메'가 독음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시는 분은 좀... 만약 확실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냥, 얼음요정으로 이름을 하 든지... '잭 프로스트'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부 The End- 관련자료:없음 [25551]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12:09 조회:1395 루드랫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를 지나치게 흘린 듯... 마인드 컨트롤로 검기까지 썼으니, 피가 더 많이 빠져나갔을 것 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걸었다. 아까, 어떤 루이트가 다가와, 몬스 터들은 거의 다 소탕을 했으니, 루이트들도 물러갈 거라고... 이제 모 든 것은 끝났으니, 그에게도 돌아가자고 했지만, 루드랫은 그의 말을 거절했다. 멀리, 불을 진화하기 위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하지만, 아직도 '끝'은 아니었다. 루드랫은, 지금, 온몸을 가득 채운 불길함을 원동력으로 하여 한발, 한발, 걷고 있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대신, 그 자리에 불길함이 차곡차곡 쌓이는 듯. 다리에 무게를 더하 고, 걸음을 힘들게 한다. 루이트들에게 물었을 때. 힐라토 레이서스와, 루온 루바인... 그 외 에 '여러 사람들'이, 세 왕족 소녀를 찾았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하고 떠나라고 그에게 말했지만. 하지만, 왜, 그들이 마차를 타고 '떠났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는가? 찾는 사람만 있고, 아무도 돌아간 사람이 없는... 그러므로 루드랫은 막사를 하나, 하나, 뒤지며, 걸었다. 누군가... 그들이, 그녀가, 돌아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렇다면, 그도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서... 루드랫은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몸이 뜨거웠는데, 지금은 차가워 진 듯.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루드랫은 흐려진 눈을 맑게 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 앞으로 걸었 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때.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레이서스의 모습이 보였다. 팔에는 아피네스를 안고 있었는데, 레이서스는 물론이고 그녀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왜 저런 모습인가. 이건, 환각인가... 의심하는데. 레이서스 쪽에서도 루 드랫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루드랫이 입을 열었다. "...힐라토...님? 스온 아스나엘 님 은...?" 레이서스가 빙그레 웃더니, 다시 걸어 루드랫에게 가까이 왔다. 루 드랫은 그의 부자연스러운 미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그 미소와 레이서스가 피투성이가 된 것에, 맨 처음엔 시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서스가 품에 안고 있는 아피네스를 봤을 때, 눈을 크게 떴다. 레이서스가 낮고 웃음 어린 어조로 말했다. "스온 아스나엘이, 네 종속자를 죽였다. 루이티온 루드랫. 지금 저, 뒤의 막사에 있으니, 가 서 그녀에게 피의 복수를 해라." "-----!!!!"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놀란 루드랫의 눈을 찌를 듯 바라보며, 레이서스가 말했다. "그녀를 네 손으로 직접 죽여. ...아니면, 이대로 나와 함께, 아피네스... 불 쌍한 네 종속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떠나든지." 레이서스는 그의 곁을 지나쳤다. "선택은, 두 가지.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피네스를 위한 것이 되야 해."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귓가가 시끄러워, 잠시 몸이 굳어 서 있던 루드 랫은 뒤로 돌았다. 그리고 걸어가, 레이서스의 팔을 잡았다. "당신--" 레이서스가 뒤돌아보았다. 그 깊은 검은 눈빛을 보고, 루드랫은 레 이서스가 마음 깊은 곳이, 저 가슴이 피로 범벅이 된 것처럼, 온통 피 로 물들어 있음을 깨닫고, 그를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려던 걸 취소했다. 그건, '사실'이였다. 루드랫은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시선을 레이서스에게서 뗄 수 없었다. 루드 랫은 어쩌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힐라토 레이서스... 이대로는 안 된다. 레이서스야말로, 아마도 지금,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루드랫은 레이서스에 대한 슬픔을 느꼈다. 이 소년은, 어릴 때부터, 매우 다정다감하고 착해서... 자신은, 무 척이나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만약,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자신 과 그는, 어쩌면 같은 나무 아래에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 속에. 그러나... 루드랫은 레이서스가 시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랑했는지 떠올 렸다. 그러므로, 불쌍한, 소년이여. "당신은, 그녀를 떠나면 안됩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해서. "...지금 되돌아가, 그녀 곁에 있어주기를. 아무리 깊은 아픔이 있을 지라도. 아무리 큰 아픔이 있을 지라도. 그걸 낫게 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이야... 가 서-" 루드랫은 그에게 간절히 말했다. 루드랫은 슬픔을 느꼈다. 왜 이렇 게도 이곳엔 아픈, 어린 자들이 많은가? 루드랫은 레이서스의 눈에서, 그의 어린 아덴시엘을 보고, 차마 그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설마 아 덴시엘을 잃게 되더라도... "내가... 아피네스를 돌보겠으니... 하지만, 힐라토 레이서스... 당 신은 돌아가서, 스온 아스나엘... 시나를 돌봐주길 바랍니다.." 그로서, 그녀도 구원받고, 당신도 구원받을 수 있어. 하지만, 레이서스는 숨을 들이쉬고, 냉혹한 눈으로 루드랫을 보았 다. "건방지군. 내게, 충고하지 마라. 루이티온 루드랫. 난, 힐라토 파이오니온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의 시신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났 다. 한 번만, 더... 싯딤나무 밑에 앉을 수 있다면. 모두, 한꺼번에 모여 앉아... 아덴시엘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어머 니가 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다시 한번만, 더... 싯딤나무 밑에 앉을 수 있다면. 루드랫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 뒤, 막사로 발을 돌렸다. 그때, 레이서스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레이서스는 결국은 다시 걸었 고, 루드랫은 막사로 향했다. 한번만, 더... 싯딤나무 밑에, 앉아, 아름다운 눈동자의 웃음 짓는 소녀와, 다정다감하고 착한 소년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동화들을... 그러니, 시나... 제발, 떠나지 말아 줘. 모두에게, 널 소개해 주겠 어. 그럼, 넌... 행복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몇 발자국 걷던, 루드랫은, 막사에 다가왔을 무렵. 의식을 잃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불타는 숲은, 고요했고, 푸르른 달빛은 그런 그의 등위로 쏟아졌다. 시나는 창문 바깥을 보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갑자기 깨어난 후, 뜻 모를 눈물을 흘리고--아무래도 악몽을 꾸었던 듯--시나는 한숨을 쉬었 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달이, 참 둥글고 푸르네..." 시나는 싱긋, 웃었다. 이렇게 달이 푸르러 그런가.... 재미있는 말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날 증오하게 된다니..." 시나는 웃었다. "정말, 악몽이구나. 악몽 중에 악몽이야... 내일, 학교에 가서 고백해 야 하는데. 흐음... 하지만...." 시나는 고개를 들고, 천장을 보았다. "꿈은 반대라니까... 어쩌면 이게 길조가 되는 건지도 모르지. 훗훗..." 그런데, 갑자기 방문 방에서 덜컹,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 나는 그 소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었다. 무려, 새벽... 2시. "....훗... 일찍도 오셨어요, 아바마마. 내일은 각오하세요." 그리고 시나는 착한 딸답게 새벽 2시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마중하 러 나갔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현관에 엎드려 잠이 들어있었다. 벌써 잠꼬대까지 미래지향적으로. "우웅--- 시나야---!! 착한 내 딸네미!! 이건, 순전히 박사장--- 꼬 임에 넘어간 거야--!! 박사장-- 너도 알지? 우웅.... 쩝쩝.... 으드 득, 으드득...." 시나는 빙긋 웃었다. 박사장님은 이 시간, 자택에서, '윤 소설가'의 이름을 사모님께 팔고 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아무튼 어쩌겠는가? 주무시는 아버님을 깨워, 도리를 따지는 건, 동방예의지국에서 할 짓이 아니고... '내일'은 얼마든지, 길게, 남아있지 않은가? "훗..." 시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아버지를 들어올려--천근, 만근인 가... 너무 힘들었다. 보약 좀 해먹어야지--침대에 가까스로 뉘여 드 렸다. 양복이랑, 양말도 벗겨 드리고,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까지 꾸 벅하고. 방을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순간, 아버지의 몸에 불이 확, 올라... 시나는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누군가 말했다. '내일' 따윈... 없어... 시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 붉은 불 에 타고 있었다. 주방으로 가보니, 거기도... 하지만, 식탁엔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시나는 미소지었다. "하소라... 선생님..." 그녀는 시나를 가만히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시나는 고개를 갸웃, 했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시다니... 아기한테 안 좋아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별로... 괜찮아. 어차피, 이 애 이름은, 시나(Sinner)라고 지을 거 거든." 시나는 납득했다. "아... 그래요..." 하소라 선생님은, 시나가 납득한 것이 기쁘다는 듯, 친절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생전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예쁜 미소였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몸에선 불이 올랐고, 역시 아빠처럼 불에 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시나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하소라'가 아 닌... 다른 이름. 내일은 또 다른 이름을 붙이자. 그러면... 그런 이 름을 엄마한테 붙여준다면... 엄마도, 자신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지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야'한다... 두 번째 막간을 거쳐, 자는 거다. 시나는 조금 웃었다. 잠드는 것... 좋아한다. 악몽만 아니라면. 눈이 쌓인 숲으로 가... 은색 머리칼의 남자를 만나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눈치채 기 전에, 얼른 도망 오고. 가까이 간다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생긴 다. 틀림없이. 하지만, 그때... 거실 창문을 향하여, 푸른 달이 높게 떠 있는 모습 이 보였다. 둥그런 모양을 거의 다 갖춘 달... 이제 곧, 하누카의 날 을 맞아, 완전하게 둥그렇게 변할 달. 그 달이, 창을 통하여 들여다보 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빛이 미치는 곳은 이상할 정도로 파랗게... 그렇지 못한 곳은, 더욱 어둡게. 하지만, 달 자체는.... 저 진한 남색의 하늘-- 저것을 사랑했다. 저 진한 남색의 하늘 속에, 마치, 은빛 나비같이, 훨훨 날아... 온 우주를 유영하며... 시나는 달빛을 흠뻑 받으며,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달빛... 그 가 운데, 눈을 감았다. ....너는 내 안에 있었고, 나는 네 안에서 언제나 있을 테니까. 슬 퍼할 것은 없는 거란다. 이 세상이 아무리 많은 슬픔을 되풀이할지 라도.. 너도.. 살아가라. 시나야. 이 세상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강해져라... 아빠가, 비록, 이제는 네 곁에 없더라도... 그래도, 신께 너를 부탁 하니. 신이여, 이 아이에게 축복을... 제가 가장 사랑하는 딸입니다. 하얀 달빛 속에서 시나는 자신도 알지 못할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 는걸 느꼈다. 볼을 따라 흐르는 간지러운 감촉에 무심코 손을 대자 빛 의 결정체 같은 눈물이 그녀의 손가락으로 툭 떨어졌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야.시.온.스.토.리.제.1.부.끝.>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쓰고나서- 관련자료:없음 [25552]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12:09 조회:1662 **엘야시온 스토리** -1부를 끝내고: 후기- 흠... 막상, 끝내놓고 나니 할말이 별로 없습니다... 레이서스를 좋 아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 결말(?)에 가슴이 아프셨겠지만. 레이서스 는 원래,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안타고니스트는, '악역'이라는 뜻보다는 주인공에 적대하는 캐릭 터. 주인공이 나쁜 놈이면, 선한 사람이 안타고니스트...^^) 위의 장면을 쓰면서, 한숨이 푹푹 나오더군요. 아무리 만든 인물이 라지만... 왜 내가 이걸 쓰고 있나. 재미있어서, 라고 한마디로 그냥 말하기엔, 저도 등장인물에 상당한 애착을 갖는 타입이라...^^; 여기서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제 캐릭터들 에게 '매우, 매우'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쓴 것인데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 써 그런지... 엥? 내가 이 런 말을 썼나? 할 정도니까... 어느 땐 저도 독자가 되어, 즐겁게 캐릭터들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 개인적인 감정을 밝히자면--팔불출... 하 하...^^-- 루드랫... 그러니까 세렌시스는, 제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캐릭 터입니다. 이 사람하고 이야기한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시나는. 한 마디로, '강해지라'고 말하는 수밖에는... ^^; 하지만, 만약 옆에 있다면, 안아주고 싶어요.(단, 은빛 시나가 아니어 야 함. 옛날에 당한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음--성역에 가까운 숲에서) 으음... 레이서스는... 저로서는 참 부담이 가지만(뭐에 부담이? --;)... 으음... 그래도, 그만큼 순수한 남자도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슴이 아픈 캐릭터입니다. 에... 그리고, 제목에 대하여, 이 기회에 밝히자면. 어느 분이, 혹 시 그리스 신화의 '엘뤼시온'에서 따온 것이 아니냐고... 하하.. ^^; 아닙니다. '엘'과 '야'는 신의 이름이고, '시온(외전에선 '자이온'으로 나오 죠. 시온의 영어 발음이, 자이온(Zion)입니다.)'은 신의 '복지(福 池)'... 이스라엘의 성도(聖都)입니다. 그걸 또, 외전에서 그럴 듯하게 말을 붙여 놓았는데... 시온을, '아 들'의 뜻이 있는 걸로요..^^ 아무튼, 엘야시온은 거기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그리스 신화 읽은 여파가 남아 있어서... 한동안 어떤 이야기의 제목을 '엔디 미온'으로 하고, '세일러 문'에 엔디미온이 나오는 걸보고 깜짝 놀랐습 니다. 아니, 이, 마음에 드는 발음을 누군가 또 쓰다니!!! 내가 혼자 만든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엔디미온은, 달의 여신의 연인, 이름이더라고요.. 하 하..^^ 무의식에 남아 있다가, 사용한 듯... 아마, 그러니... 엘야시온 이라는 합성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엘야시온이, '야엘시온' 이 안된 이유도), 어쩌면, '엘뤼시온'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결국은 신의 복지이니... 낙원이라는 엘뤼시온과도 별로 틀리지 않고요.^^ 원래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 이상의 이야길 해보고 싶어서, 로맨틱 판타지라는 부제를 붙이고도, 그다지 내세우지 않았는데... 결국은, 남 녀간의 사랑이야기가 많이 나온 듯...^^; 하지만, 어디까지 목표를 달 성할 수 있을까.. 지켜봐 주세요..^^ 이야기를 적어오면서, 가끔, 엘야시온 스토리의 '완성된 이야기'는 이미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미래'라 도.^^ 그래서 전, 그 코드를 하나하나 판독하며, 미래를 읽는 겁니다. 쓰면서... 아, 이래서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구나~ 라고, '이해' 하기도 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땐 그게 잘 안되어서... 며칠 씩, 고민하기도 했고. 아, 이젠 한계야~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1부'라는 이름 하 에 이렇게 '끝'을 달게 되어 기쁩니다.^^ 사실은 출판제의를 받고, 당시에, 내용이 어찌되었든, 적당히 분위 기 꾸며서 당장 끝내려고 했죠. 그래서 완결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는 데... 적다보니, 어중간한데서 끊는 것이 힘들어져서... ('미래상'하고 잘 안 맞았어요. 하하... ^^) 결국은 생각하던 곳까지 오고 말았습니 다. 시간도 무척 많이 들었고...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맴돌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써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는 발판 을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쓰기라면 무슨 물질적인 이득이 없 더라도, 충분히 즐거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 '후기(^^;)'에 관해서...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참 감사하기도 했고... 약간은, 표현력 에 문제가 있던 걸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상처(하하...^^;)'같은 건 받지도 않았고, 단지 조금 화가 났을 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가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없었으니까요. 아직 출판된 글도 아닌데요.^^ 그래서 몇몇 분들이 제게 힘내라고 말씀하시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오히려 제가 미안해지고 말았습니다. 말씀 그대로 한강에서 뺨맞으니, 종로에서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사 실 한강에서 뺨 맞은 일도 없었죠...^^ 뺨 맞는걸 옆에서 보고와, 분개 했는데,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아서...^^;) 어렴풋이 그럴 것 같아서, 메일은 안 보내주셔도 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글만 써보자고 생각한 건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었고. 그 와중, 나우누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결국은, 통신 소설 이 무가치한 것(700원론.. 하하..^^)에 대해 떳떳하게, '가치 있음'을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번, 쓴다는 것에만 매달려, 잠시 통신을 중단하고 글을 써본 거였죠...^^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내가 열심히 썼 다면.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괜찮다, 그래도 나는 한 권당 700원(모 동네에서는 900원까지) 이상의 일을 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서요. 그때는 분위기가 참 이상했죠. 20일 동안 통신엘 안 들어와서, 요즘 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 전 가끔, 그 분위기라 불리는 사건들과, 인간--개개의 인간--은 전 혀 별개의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개개의 인간이 한 행동은 매우 자그마한데, 그 파급효과는... 그걸 뭐라드라... 카오 스 이론이라고 하던가요? 북경의 나비가 날면 캘리포니아에 폭풍이 온 다는....^^ 결국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나우누리 '분위기'였습니다. 음... 저는 통신연재를 아주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기 보단, 여기를 떠나서 어떻게 살지, 걱정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통신에서 또, 연재를 하겠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 통신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리고 글쓰기를 여기서 배우긴 했지 만... 통신생활을 하는 것과, 통신에서 '연재'를 하는 것은 매우 별개의 문제로서, 통신상에서 이런 식으로 연재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기 때문 에. 혹 만에 하나, 제가 통신에 또 글을 올린다면, 그건 몇 달이 걸리 든, 다 완성된 글을 가지고 올리게 될 겁니다. 1부는 대강 줄거리가 잡혀 있었다고 하나, 정말 모 분이 표현하신 대로, 건너편 경치가 보이는 데도, 건너갈 다리가 없어서(사건을 어떻 게 이어야 할 지 몰라서) 참 많이 헤매기도 하고, 전개가 안돼 며칠 씩 놀기도 했습니다.(아니면 놀아서, 전개가 안 되었나....--;) '통신'에서 '연재'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더군요. 다른 작가 님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다 쓰고 나서였다면 쉬웠을, 복선을 까 는 일도, 심하게 고민하며, 머릿속으로 전개상의 수 십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서, 그것에 위배되지 않았을 때만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다 쓰고 나서였다면, 앞으로 돌아가서 조금씩 고치기만 했으면 됐을 텐데... 그리고 필연적으로, 글이, 주먹구구식이 되어 가는 것 같았습 니다. 특별히, 글쓰기에 대단한 사명감을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좋든 싫든 계속 써야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이런 고민을 해보아야 했습니 다.(언제나 생각하는 것은. 이것보다 쉽게 쓰는 방법 없나... --;) 하지만, (어쩌면 짐작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통신에서 글 을 썼던 사람이라 아무래도, 통신을 떠나, 글을 쓴다고 했을 때는 고민 이 됩니다. 통신에서 글을 쓰기 전에는 아무도 '작가'라고 불러준 사람 이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전, 통신에서 글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떤 훌륭한 작문 선 생님도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요즘의 통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 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신을 통하여 글쓰기를 시도하고, 소설 을 써보려 하는지. 통신용어라고 해서, 언어를 파괴해서 쓴다고 해 통 신이 많은 비판을 받지만. 그와는 반대로 '글쓰기'에 대한 즐거움을 가 르쳐 주는 곳 또한 통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숙하고, 어리지만, 한 언 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적어도 고민만이라 도 해보게 만들어주고, 관심만이라도 갖게 만들어 주는 곳이죠. (아마 추어들의, 보금자리.. 하하..^^) 통신 작가의 존재가치는 '통신'에 있습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제게 있어,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따뜻한 곳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너무 따뜻하고, 너무 직접적이고, 너무 책임 감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쓸 때마다 어택이 떨어지고, 애정과 찬사가 쏟아지는 곳이 여기지요...^^) 정말로, 필요한 혼자가 되는 일이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가끔, 혼자서 생각해 보기를... 난 정말, 아무런 칭찬과 격려를 받 지 않고도 쓸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지난 번 후기를 보고 그렇게 메일을 주셨더군요. 독자들 의 가치를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두냐고요. 독자들의 격려와 독촉이 없 었다면, 과연 지금의 글을 쓸 수 있었겠냐고요. 아마도 생활에 밀려, 게으름에 밀려 포기하지 않았겠냐고. 그 말이 정말로 맞습니다.^^ 아마도 엘야시온 1부는 어쩌면 통신 독자들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만화로든 무엇으로든, 내 나이 몇 살 때든, 표현했을 이야기지만. 하지만, 바로 위의 이야기. 그것 또한 맞는 이야기이기 때 문에, 저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칭찬 없이 쓰지 못하 는 사람, 옆에서 독촉을 해주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요. 또, 어느 독자들은 이 부분을 꼬집어 말씀해 주시더군요. '네가 통 신에서 얻은 인기가지고, 다된 줄 아는데. 여기 떠나면 너 알아 줄 사 람 있을 줄 아냐?' 이것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 에.(도대체 통신이 아니라면, 통신 작가들을 알아주는 데가 어디 있습 니까?) 기존 문학계의 '온실 안의 꽃' 소리도, 그냥 참고들을 수밖에 없었 죠. 그래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야시온 끝 부분을. 아무 어택 도 받지 않고, 써서 올리고 싶었고요. 하지만 아무런 어택 받지 않고, 라고 말은 해도, 메일을 보내주셔서(그것도 감동적인...TT) 또, 그걸로 자양분을 삼아 썼기 때문에... 하하...^^; 통신은 아주 좋은 곳입니다. 작가가 될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사람 을, 작가로서 생명을 주고, 키워내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저는 여기 서 자랐습니다. 아마도 언제나 저는 통신작가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생 각할 겁니다. 아무튼... 뭔가 거창하게 말한 것 같은데. 결론은 그겁니다. 이제 더 이상, 완성되지도 않은 글로 통신에서 연재는 안 하겠습니다. (20일 동안 써보니, 역시 이쪽이 제 스타일에 맞는 것 같아서...^^) 단, 2부, 3부씩만이라도 뭉텅이로 완성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러면 적어도 몇 개월, 심하면 1년이 넘게 걸릴 테고. 그러면 아마도 전 그 동안, 통신을 떠나서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많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저 자신을 시험하는 계기도 되고요..^^ 제가 정말 글쓰는 걸 원해서 쓰는 건지... 아니면, 독자들의 독촉과 칭찬에 취해서, 그때그때 써 가는 건지... 아마도 그때, 확실히 알 수 있겠죠.^^ 혹시, 그렇게 해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 확실히... 통신에서 좋은 일이 많았고, 통신은 제게 좋은 가정이었 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제게 좋은 어머니였습니다. 혹시 저번에 쓴 후기에 섭섭한 분들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저 는 통신을 좋아합니다. (아, 그리고... 희망이 없다고 말한 것은, 내가 통신에서 글을 쓸 수 있는 희망을 말하는 거였습니다. ^^;) 흠... 아마도... 앞으로, 통신에선 또 다른 많은, '작가'라는 생명 을 잉태하고, 출산하겠죠. 그리고 그들을 훌륭하게 키워낼 겁니다. 하 지만 그 작가들이 성장하여, 모태를 떠나더라도... (그런 작가들은 없 지만, 매우, 매우 최악의 경우, [돈] 때문에....^^;) 너무 상처받지 마 시길.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게 해서, 자식을 길러내지요. 엘야시온 스토리를 여기까지 끝낼 수 있게 도와주어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어머니입니다. 따뜻하고, 상냥하고, 사랑 많고. 가끔 매 도 때려 주시고... 하하...^^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매 체도 이런 식으로 '작가'를 키워내지 못했을 겁니다. 어떤 글쓰기를 가 르치는 스승도, 이렇게 글쓰는 법을 가르치지는 못할 겁니다. 저도 백수이기 때문에. 700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 다. 굳이 1950년대의 물가가 아니라도^^; 700원이면, 버스를 한 번 탈 수 있죠.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을 수도 있고....(하하^^) 그래서 더욱, 제 글이 그런 '700원(모 동네에서는 900원까지^^;)'의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내 어머니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저 바깥 세상에서도. (이것이, 중요한 거겠죠..^^) 그런 글을 쓰지도 않았으면서, 글을 700원이나 내고 보라고 할 정도 로 비양심적이진 않으니까요. 아, 그렇죠... 어떤 분들은, 이번 일들을 보며. 왜 소수의 독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다수의 독자가 가진 마음을 무시 하냐고 하셨죠. 하지만, 전 모든 사건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가 일으키며, 모든 변 화 또한 다수가 아닌 소수가 이루어 내며, 나쁜 공기든, 좋은 공기 든.... '공기를 바꾸는 일'은 언제나, 다수가 아닌 소수가 해왔다고 생 각합니다. '다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아무리 명백한 불의가 저질러져도 아무 말이 없기 때문에 선하고, 동시에 악하며, 또 슬픈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어떤 인간도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섞여 있고, 슬프죠.) 또한 다수가, 가만히 있지 않고 나서서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이미 '소수'가 남긴 흔적은 깊어서(나쁜 것일수록 더하죠...^^;) 그 무엇으 로도 보상이 안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소수의 말을 듣고, 다수의 말을 무시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소수'는 강력합니다...^^ 사건을 일으킬 만큼. 그리고, 또 사건을 가라앉힐 만큼.(한 마리 나비가 불러일으킨 폭풍은, 또한 한 마리 나비 만이 가라앉힐 수 있다, 인지도. 하하...^^) 그리고 아직도 전,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전 식물을 독자들을 위해서 키우지 않습니다.(하하..^^ 이건, 식물을 왜 키우느냐 하는 문제가 되니까요.) 하지만 나누는 문제에 있어서라면. 언제나 즐겁게 나누어 보고 싶습 니다.^^ (물론, 보시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까지, 나누자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환경과,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소재와,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과, 나의 상상과, 나의 능력은, 모두 다, 내가 믿는 나의 신에게 공짜로 받은 것들이므로... 지금 마음 같아선. 저도 여러분께 이 글들을 공짜로 드리고 싶습니 다. ^^ 글세... 출판사와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선 이야기를 해보겠 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글을 지울지 안 지울지 공지를 띄우지요... 그 럼 이만. 좋은 날 되세요... 통신으로 끝낼 수 있어 기쁩니다. 이 엘야시온이 라는 열매가 여러 분들께 즐거운 읽을거리 되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 습니다.^^ (할말이 별로 없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길게 적다니. 할말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두렵습니다... 하하...^^) 2000.4.23. 추신1: 그림 보내드린다고 했던 분들.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주소 좀... 지금부터 열심히 그려서 드리겠습니다. 별로 대단한 건 못될 테 지만... 너무나 늦어 죄송합니다.--; 추신2: 저번에 카나 님이 보내주신 이벤트는, 이것저것 정리되면 패 러디 편으로라도 써서 올리겠습니다.(한 육 개월 걸릴랑가... ^^;) 추신3: 글 옮겨주시는 분들(물론 제게 허락 맞고. 무단으로 올렸으 면서 연락 주는 사람은, 욕 메일의 진수를 맛보여 주겠음.) 주소 좀 알 려 주세요. ^^ 만약, 책이 나온다면... 1권이라도...^^ 그리고, 지영 언니... 언니는 책 안 사주셔도 돼요...(--:) 언니한테 책 사라고 하겠 습니까...(--;) 아무튼... 책 안 사주셔도 되는 사람들이 책을 산다고 하셔 서...(--;) 추신4: 퇴고를 많이 못했습니다. 버그도 많을 겁니다... 심각한 것 은 다 잡았지만...^^; 조사가 이상한 부분과 몇몇 표현들은, 아무래도 일주일 후에나 다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머리가 지끈지 끈...^^ 하하... 그런데, 이런 저런 엔딩을 바라시는 의견들이 점점 올 라와... 그냥... 이런 줄거리라는 의미로라도. 한꺼번에 올립니다. 아 무튼... 귀찮아서, 아침, 저녁으로 다섯 편씩 착실하게 올리는 걸 못하 겠군요...^^; 추신5: 방진우 님, 괜찮습니다... 그리고 감사...^^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가르쳐 주셔서.. 용태님, 감사...^^ 아, 그렇지.. madhava님, 저번에 그 책, 제목 좀 알려 주세요. 찾아 서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