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0- 관련자료:없음 [25460]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2 23:56 조회:1521 <전기...--;> 안녕하세요^^ 엘야시온 1부를 방금 끝냈습니다.(아아... TT) 그래서 약속대로, 이렇게 올립니다. 글을 끝낼 때까지 메일 확인만 하고 게시판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3월 30일의 결심이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지켜서 기쁩니다.. 아아, 이제 다른 작가 님들의 글을 읽어야죠...TT) 그 동안 메일 보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욕멜만 보내라고 했 더니, 정말 욕멜을 보내 주신 분들께도... (하하...;) 하지만 욕멜을 읽으면서도, 네 뜻대로 하라는 짧은 투의 차가운 멜을 읽으면서도, 아님 위로해 주시는 멜을 읽으면서도^^ 느낀 것은 거기 담 긴 진심이었기 때문에 참 감사했습니다....(하지만 여기서 솔직해져야 하는 것은, 그 동안 정말 신경질 나는 메일도 있었습니다. 쯧... --+) 제가 후기(?)에 애원멜도, 격려멜도...라는 시건방진 말씀을 드렸던 것은,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이런 일 저런 일 아무 상관없이, 통신에 올라온 글, 보다가, 재미있으면 날짜 맞춰서 기다리고, 안 올라오면, 이 작가 게으름 피우는 건 아닐까, 용서 못함이야....라고 두 주먹 불 끈 쥐고, 올라오면, 헉.. 이 사람이 웬일로 올렸지...라고 말씀하시며 즐겁게(?) 읽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 다....^^ 그런 분들이라면 어쩌면 힘든 시간 들여서, 힘들게, 안 보내 주셔도 되는데... 격려멜이라든지 애원멜(건방졌죠? ^^;)을 보낼 주실 것 같아 (아무튼 저도 다른 작가 분의 열렬한 애독자니까 잘 압니다) 말씀드렸 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내주시고... 읽고 나서, 가슴이 찡해졌습니 다...(TT) 못 보던 분들의 메일까지... 그렇지만 답장이니 뭐니 쓰는 것보단... 그 파워로 글이나 열심히 쓰자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답 장도 못 드리게 되었습니다. ...몇몇 작가님들께도... 정말, 죄송합니 다. 이 자리를 빌어,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또.. 에... 아닙니다. 나머지는, 끝내놓고 후기로, 말씀드리 겠습니다.^^(지금쯤, 도대체 190편 글은 언제 나오는 거야~라고 외치시 는 분들이 계실 듯...^^) 음... 오늘은 우선, 한편만 올리고... 월요일 아침에, 다섯편, 저녁 에 다섯편, 화요일 아침에 다섯편, 저녁에 다섯편 씩으로 올리겠습니 다... 아무튼... 490키로바이트나 되어서...^^; 40키로바이트 씩 끊는 다고 해도, 꽤 되니까요... 유니텔은, 제 개인 게시판이니, 그냥 능력 닿는 대로 한꺼번에 올리 겠습니다. 올리는 장소는, 하이텔은 여전히 그곳인데... 나우누리에... 제가, 잘못을 해서, 그만 환동에서 짤리는 바람에... (공지를 안 읽고 지웠습니다. 바부팅이..--;) 그런데, 제가, 이젠 통신 두 개씩이나(유니텔은 공짜입니다... ^^) 운영할 처지가 안되어서... (전화선도 끊길둥 말둥... --;;;) 나우누리 는 잠시, 유보할 셈입니다. 그러므로 번거롭게 다시 환동에 가입하는 것보단... 그냥, 에스에프란에 올리겠습니다... (조각조각의 진수를 맛 보여 주는 군요...--; 참고로, 나우누리에서 엘야시온은, 환동, 장편란 (처음과 중간)과... 자료실(중간과 외전)과... 이제, 에스에프란(189편 부터 끝)에... 나뉘어 올라가게 되겠습니다. ...무책임한 말 같지만.. 알아서 봐주세요... 흑흑흑흑.... TT) 아무튼, 제 컴퓨터가 요즘 바이러스에 걸려서(그 악명 높은 win95 cih, 체르노빌.)... 방향키가 다, 6자로 찍히고... 글자체가 날아가 고... 화살표는 8자로 찍히고... 치료한다고 치료했는데... 후유증인지 뭔지... 자고 일어나면, 몰래 바뀌어 있습니다. 포맷을 해야하는 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결국은.. 빅토리.. 제가, 체르노빌 따위에 질 수는 없죠.. 디스켓 두 장에, 쓴 것, 두 번 백업을 해놨습니다..(이걸 다시 써야한다면, 난 죽을껴...) 후하하---- (혹시, v3+ neo V 11165 백신도 못 찾아내는... 이 바이러스 증상... 보드 오른쪽 구석에 있는, 확대하기, 축소하기, 가위표가 숫자로 바뀌 는... 그것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몰래몰래 하나씩 바뀌어 있는 이 증상에 대해서... 경험이 있는 분은.. 조언을 좀... ...그냥, 포맷할까 요? --;;; ...하루 일어날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컴퓨터가 켜진다는 것에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26일이 온다는 것이 어쩐지 두려워 요...) - - - - - - - - - - - - - - -(자르시오) - - - - - - - - - - - - - - 이드넘은 따끈하고 걸쭉한 수프를 먹고 있음에도 몸서리를 치며 말했 다. "이 놈의 얼음 안개는 가라앉을 줄 모르는군. 그런데도 오늘밤엔 왕 궁엘 가야한다니. 지긋지긋한 이놈의 세계." 도비온이 말했다. "이젠 많이 가라앉았는데 무슨 불평이야." "가라앉아? 여기까지 오는데, 동사하는 줄 알았다. 그 동안 벽난로 앞에서만 붙어살았는데, 얼음이 골수까지 박힌 느낌이야." 이드넘은 계속 투덜댔지만, 도비온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이곳에 서 꽤 오랫동안 산 도비온으로선 이드넘이 느끼는 만큼 추위가 끔찍하 지 않았다. 도비온이 말했다. "추위 타령은 그만 하고. 밥도 먹여 줬으니, 한가지만 묻자." 이드넘은 옆에 선 하인에게 말했다. "수프 한 그릇 더 가져와. ... 뭘?" 도비온은 식사를 다 끝마쳤기에, 식탁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저 여자앤 왜 데려온 거야." "누구?" "...네가 데려온 여자애가 한 명밖에 더 있냐? 능청떨지 말고, 똑바 로 말해." "아... 셰리카. 그냥 데려온 거지 뭐." "그냥, 이라." 도비온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네가 가져온 저 커다란 옷 가방도 그 냥 가져온 거냐? 여자 옷이 꽤 들었던데. 네가 입게? 정보에 따르면 궁 전 가장 무도회는 흙의 날로 끝난 것 같던데. 몰랐냐? 하지만 뭐. 변태 가 되든 광대가 되든 그거야 네 취향이고. 재밌긴 하다. 네가 그렇게 사람들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어하는 줄은 미쳐 몰랐거든." "...함부로 남의 물건 들춰보지 말라고 했지. 도비온." 낮게 깔린 불쾌한 목소리에, 결국 도비온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은 집 어치웠다. "자식이, 훔쳐보긴 뭘 훔쳐봐! 네 부하 놈이 지고 가다 엎는 바람에, 그 개뼉다귀 같은 것들이 홀에 날려 물어 본 건데!!! 보는 내 눈이 의 심스러웠다!! 잔말 말고 여자 드레스를 왜 저렇게 잔뜩 가져왔는지 말 해봐!" 하지만 이드넘은 인상을 쓴 뒤, 어깨를 구부정하게 할 뿐, 뭐라 대답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도비온은 생각보다 께름칙한 것이 있음을 직 감하고 으르렁댔다. "이드넘!!" 이드넘은 뭐라고 작게 투덜댔다. 하지만 어차피 할 이야기였다. 게다 가 시킨 수프가 나와, 결국 고개를 들어야 했다. 도비온이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이드넘!!!" "귀 안 먹었어, 자식아. 소리 좀 고만 질러! 그러잖아도 설명해 주려 고 했으니, 딱딱대지 말라고!" 그리고 숟가락으로 수프를 신경질적으로 저으며 말했다. "말해 두지 만, 아무리 일이라도 내가 하는 분야에 대해선 네가 손 못 대!" "웃기고 있네! 저 여자 애가 네 분야의 일이냐?! 엄밀히 따지면, 내 분야의 일이겠다!! 저 여자 애, 왜 데려왔냐고!!" "에잇!!! 무도회에 참석하게 하려고 데리고 왔다!! 어쩔 거야!!!" "뭐얏?!!!" 도비온은 우려했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소리 를 버럭 질렀다. "어쩔 거냐고!! 정신이 나간 자식!! 지금 그걸 말이라 고 해?! 숲 구석탱이에서 굴러먹던 도둑고양이 계집앨 데리고 왕궁 무 도회엘 참석해?!! 얼음이 골수에 박혔다더니, 머리에도 박힌 거 아 냐?!" "그렇게 사람이 많은 무도회인데, 뭐 어때?!! 아무도 알아 볼 사람 없으니까, 데려온 거야!! 이건 겐트온이 여자들이랑 노는 거와 같다 고!!" "아버지가 아시면...!!" "너만 입다물고 있으면, 돼!" "내가 미쳤냐! 입을 다물고 있게!!" "오호, 그러셔?! 네가 네 부하들을 어떻게 도왔는지 아버지께 말씀드 릴 일이 기대되는군! 슬라이의 말이 아주 흥미롭던데!!" "...!!"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씩씩대며 노려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잠시 후 도비온이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꼴을 보아하니, 다이아몬드 더스트 가 닥칠 기세였는데. ...실제로도 그랬잖아. 내가 여기 1, 2년 사나. ...시간도 없는데, 뒷골목 녀석들이 몽땅 몰려나와서... 그 놈들 몇몇 이 어떻게 그 많은 놈들을 상대 하냐?" "쳇... 그래서, 능력까지 발휘해서 부하들을 구해주셨군. 그것도 제 일로트 안에서. 슬라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더군. 아버 지한테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아? 부하 놈들이 자기 스스로 못해내면,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둘지언정..." 도비온은 벌떡 일어났다.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그리고..." 그 는 무서운 눈으로 이드넘을 노려보았다. "이제야, 네 속셈을 알았다. 교활한 자식. 웬일로 떼거리로 몰려와 내 집에서 식사를 하나 했더 니... 왕궁에서 가까운 거리니, 뭐니 한 건 변명이고, 그 계집애 때문 에 그런 거지?!" 이드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만 도와주면 돼. 난 무도회 같은 건 딱 질색이야. 겐트온이 아니면, 여자 근처에도 못 가고... 혼자만 등신처럼 춤 못 추고 있는 것도 싫어. 그 계집애랑 춤을 추겠다는 말이 아냐. 귀족들의 댄스라는 게 아무나 출 수 있는 시골 장터 춤도 아니 고, 하루 이틀, 교육받아서 될 게 아니니까. 그냥 내 옆에 여자, 비슷 한 것만 서 있으면 돼. 지금은 샤일라테도, 아마사도 없으니까... 그래 서 대용품으로 데려온 것일 뿐이야." "제기랄...!" 도비온은 게이드와 이가르를 보러 가는데, 슬라이를 데려갔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정말로, 등신 같은 놈! 혼자 있는 게 뭐가 어떻다고! 난 편하기만 하던데. 젠장...! 너, 분명히 약속해야 해! 내가 입다물면 너도 입다무 는 거야!!" 이드넘의 인면피가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부자연스러 운 웃음이었지만 이때만은 충분히 기뻐 보였다. "당연하지." 연회장으로 가기 전, 약간 더 이른 시간에 자신을 찾아 온 레이서스 를 맞으며 칼리스나는 기쁜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레이서스는 다른 때와 다르게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심지어 칼리스나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해도 일어나서 돌아다닐 정도로 무언가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 활달한 모습은 칼리스나로서도 보기 좋은 모습이라 칼리스나는 미소지으며 자연스럽게 농담을 건넸고, 놀랍게도 레이서스는 별 것 아 닌 농담인데도 쾌활하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어린 시절, 루세에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사실 그 시절의 그는 개구쟁이라 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활달한 소년이었다--칼리스나는 가슴까지 두근거 렸다. 헌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니. 레이서스는 웃던 것을 멈추고, 칼리스나 앞에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 았다. 칼리스나가 웬일일까,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데, 그가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칼리스. 내내 생각해 봤는데. 우리, 하누카의 날을 내년으로 정하면 어떨까? 토너먼트 때문에 복잡한 한 해가 될 것 같긴 하지만..." "하, 하누카의 날?" 칼리스나는 침을 삼킨다든지, 눈을 깜빡이는 방 법들을 잠시 잊어버렸다. "나, 나야 당연히 좋-" ...지, 라고 흥분해서 말할 뻔한 칼리스나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으응? 그래? 좀 급박하긴 하지만. 뭐, 일, 이년 준비해온 것도 아니니. 그 정도면 괜찮아. 네 말대로 토 너먼트 전이 끼어 있어 불만스럽긴 하지만."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응. 미안해. 갑작스럽게 말해서." "호호... 미, 미안 하기는. 저어... 잠깐. 레이. 실례 좀 할게..." "응." 그리고 옆방으로 달려간 칼리스나는 시녀장이 쫓아 들어오자, 몸을 휙 돌렸다. "들었지?!" 시녀장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경하 드립니다. 스온 칼리스 나..." 시녀장의 그 말은 칼리스나가 그녀를 갑자기 껴안는 바람에 끝을 맺 지 못했다. "스, 스온..." "꺄아--!" 칼리스나는 시녀장을 안고 펄쩍펄쩍 뛰더니, 다음으론 방안을 휙휙 돌고, 침대 기둥을 끌어안고 거기에 입을 맞추고, 다시 한 번 더 펄쩍 펄쩍 뛰었다. 시녀장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게 되었 다. 칼리스나는 사랑 받으며 자라난 소녀답게 밝고 활달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어느 정도는 힐라토 레이서스 님 앞에서 보여주어도 좋을 텐데, 뭐랄까... 힐라토 레이서스 님 앞에선 지나치게 자신을 꾸미느라(한 마디로 내숭을 떠느라) 이렇게 기쁜 기색이 있어 도, 방으로 들어와 기쁨을 표현하는... 침대 위의 베개에까지, 키스를 하던 칼리스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 다. 레이서스가 아직도 밖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칼리스나는 옷 매무새를 툭툭 털더니 시녀장에게 말했다. "나, 어때?" "아름다우십니다." "좋아. 이젠 나가야지."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간, 칼리스나는 궁중 부인네들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호호호... 아... 미안. 레이. 호호... 하지만 말이야. 네가 아무 말 도 없이 일찍 찾아오는 바람에.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 짓느라..." 시녀장은 고개를 숙이고 픽 웃었다. 하던 일이라고는 힐라토 레이서 스 님이 요즘 왜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녀,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것일 까, 불평하던 일이었는데.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다음엔 미리 말하고 올게." "응? 아, 아냐. 우리 사이에 뭐. 괜찮아. 이젠 하누카 날도 치르게 되었는데. 호호호..." 시녀장은 고개를 저었다. 루드랫은 읽던 문서들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잠시 눈을 쉬었다. 이것들 은 모두 다 왕궁의 서재에서 가져온 것들--다시 말해 함부로 열람이 금 지된 문서--이지만, 힐라토 레이서스의 말로는 클로니아 세스틴의 허락 을 얻어 서재를 마음대로 쓰도록 분명한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괜찮으 리라는 생각을 했다. 괜찮지 않다고 해도, 어차피 이런 문서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 도 없는 것 같았다. 문서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읽는 사람이 없 어, 먼지를 잔뜩 먹고 있었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가장자리가 부스러 졌다. 프로텍트 아트가 걸리지 않은 문서라 그런 것일 테다. 루드랫은 문서의 내용이 아닌, 문서의 글자 모양을 들여다보았다. 질 서 정연하고 알아보기 쉽게 쓴, 일면 아름답기까지 한 글자체들. 전대의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의 필적이다. 필적은 창조신화 에 대해 다루고 있고, 여러 가지 전쟁들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 었다. 루드랫의 얼굴은 잠깐 심각해졌다. 그는 전날 밤에, 레이서스, 시나와 함께 그를 찾아온 아피네스에 대 해 생각했다. 아직도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단 하루 새에 이런 반전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에. 그는 아직도 이런 운명에 대해 못 믿어 하고 있었다. 루드랫은 자신의 양손을 보았다. 이 손으로, 스온 아피네스를 다시 만질 수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 지 난 동안 수없이 보았던 또 하나의 환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이. 믿 을 수 없었다. 그는 레이서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젯밤 바로 이 자리에서. 힐라토 레이서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누이동생의 가장 나은 미래 에 대해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 미래는... 명예를 버리더라도, 차라리 누이동생 자신에게 행복한 쪽으로. 그제야 루드랫은 레이서스가 힐러 라단의 집으로 몸소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서스의 오해도. 그는, '사실은 널 용 서할 수 없어, 죽이려는 생각까지도 했다. 네가 새로운 종속자를 얻었 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지. 내 누이는 아직도 저 모양인데 말이다.' 라고 말했다. 루드랫이 '헌데 왜?'라고 말하자, 레이서스는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 을 하고, '시나'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시나라니. 루드랫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힐라토 레이서스 님과 시나라고...' 의외라면 의외랄 수 있고, 어떤 부분은 납득이 가기도 했다. 힐라토 레이서스의 여러 가지 언동들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고 할까. 하지만 그 런 이해를 대하는 느낌이라면... 루드랫은 복잡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어 느새 이런, 말로는 설명 못할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바삭... 바로 그때 읽고 있던 문서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루드랫은 잠시 문서들을 보다가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집어들다가, 테이블 가에 있던 책까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바람에 책장이 날려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밖으로 빠져 나왔다. 루드랫은 한숨을 쉬고 책과 문서를 한꺼번에 그러모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한 무더기의 쪽지들을 발견했다. 책 사이에 있다가 빠져 나온 것 같은 쪽지들은 자줏빛 양피지 조각들로 양 피지 자체는 이상한 것이 없는데, 쓰여있는 글들마다 내용이 독특했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생명나무의 이름으로. 사유(思惟)는 자아(自我)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자아보다, 뛰어난 자를 의지하여 그에게 손을 드니. 첫째는 네 번째 사람에게 바친다. 둘째는 다섯 번째 사람과 첫 번째 사람에게 바치니 일어나 걸으라. 너 필멸자여. 네 무릎을 꿇고 거룩한 제단 앞에 엎드려 네 운명을 생각 하라. 그러나 네가 생명을 원할진대, 그곳에서 이름을 부르라. -클로니아 세렌시스. 청의 엘야시온 가디엘 80년. "....?" 루드랫은 그 희한한 내용에 눈을 찌푸렸다. '클로니아 세렌시스.' 그의 필적이고, 서명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 로 보아, 이 글은 분명 그가 쓴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매우 이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궁금해진 그는 다른 양피지에 있는 것들 을 보았다. 하지만 거기서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었고(그러므로 무슨 말 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주목할만한 점이라면, 끝 부분의 서 명이 다른 이로 되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베르노크 안딜로스.'라든 지, '칼리안 에그리스'. 그 외 당시 파이오니온의 이름을 적은 것들이 다수 있었다. 자줏빛 양피지라면 최고급 양피지니까, 어떤 외교문서의 일부분으로 서명을 교환한 것일까 생각했지만 그런 서명이 되어 있는 것마저도, 필 적은 분명 세렌시스의 것이었고, 게다가 외교문서라기엔 내용이 너무나 뚱딴지같았다. 루드랫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것을 한 장 한 장 들춰보다가, 곧 쓴 웃음 짓고 말았다. 왕족의 어떤 고급스런 취향일 게다. 그로서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어쩌면 누군가를 향한 시를 적은 것일 수도 있 고... 아무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의미불명의 글들이 아니라 사 람을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고, 알지 못할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에 관한 것이다. 끈질기게 그것에 관해 생각한 결과, 그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분명 그 것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고... 아마도 그건 '나뉨의 때' 이전의 일 을 기록해 놓은 책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골라 온 것인데. ('상고역사') 뚜렷이 쓸만한 구절은 없고, 쓰여진 거라곤 대부분, 엘의 창조역사 뿐이었다. 그는 책의 표지를 보며, 역시 예전에 자이온에서 잠깐 봤던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일까, 생각했다. 그는 그렇다면 역시 이것에 대해선 힐라토 레이서스에게 말하고 도움 을 청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라면 루드랫 자신이 할 수 있 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더 확실하게 그들의 정체를 밝 혀 낼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앞으로 있을 위험도 막아낼 수 있을 것 이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위험'이 있을 건지. 시나의 말대로, 왕궁의 이런 방에 앉아 있는 순간 그건 쓸데없는 기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자신은 시나를 보호하겠다고 했 고, 그렇게 누군가를 보호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단 하나의 나쁜 가 능성이라도 지나칠 순 없었다. 그러니 그런 면에서... 어쩌면 힐라토 레이서스가 시나를 원하고 있 다는 것은. "매우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시나를 원할만한 상류계급의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한 것이 엊그 제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원만히 모든 일을 해결해 줄줄은 꿈에도 몰 랐다. 만약 힐라토 레이서스의 마음이,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진심 이라면, 시나는 아마도 평생, 그의 강력한 보호를 받게 될 거고... 자 신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은, 오직 루드랫 그 자신을 위한 것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루드랫은 문서들을 날카롭게 내려다보았다. 그렇더라도. 이젠 그 표적이 자신 혼자일 뿐이더라도. 자신은 이제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르는 적(이상하도록, 그가 확신하고 있는)에게 한 치도 그의 몫을 양보할 수는 없다. 그에겐 지켜야할 다른 새로운 사람 이 생겼으니까. 게다가, 만약 그들이 시나에게 했던 식으로 아피네스를 노리려 한다 면. 루드랫의 눈은 사납게 빛났다. 루드랫은 결심에 찬 어조로, 말을 뱉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찾아내겠다. 너희들이 누군지... 단순한 인간사냥꾼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의 '적'인지. '때'가 오기 전에 찾아내서 반드시, 없애겠다. 이번 에야말로. 시나는 디트를 궁전에서 만난 것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엘야시온이 불러서 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디트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 신분이 바뀌었다니 이거야말로, 축하할만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시나는 엘야 시온 앞인데도 불구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하디트 님이네요. 굉장해요!" 하디트는 빙긋 웃었다. "하바티온의 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본래는 일루티온이니까.... 그냥 '디트'로 불러주세요. 시나." "음, 그래요?" 시나는 그가 자신을 친근하게 여겨주는 것 같아 기뻤 다. "그런데 예전부터 느낀 건데... 디트는 언제나 저한테 경어를 쓰시 네요. 그냥 평범하게 말하셔도 돼요. 저야말로" 시나도 빙긋 웃었다. "아무 신분도 아닌데요." 그러자 하디트는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아... 이건." 엘야시온 가디엘이 껄껄 웃었다. "안 될걸. 하온 하젠드의 유파는 그 래 봬도 꽤 엄격하니까. 그들은 자기 문하들이 사람들에게 철저히 경어 를 쓰도록 교육하지. 위테리드 성가(聖家)와는 천양지차인데... 나로서 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뷰겐트 유파.... 아니, 이젠. 뷰겐트 성가(聖家)라고 하는 것이 낫겠군." 엘야시온 가디엘은 하디트를 부드러운 눈으로 보았다. "아무튼, 그쪽 이 엘야시온에 공헌한 바는 아주 크니까." 시나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 도리 없었다. 알아두어야 할 일도 없으므 로, 굳이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직업상, 디트는 경어를 쓴다는 이야기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디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니더라도, 시 나. 당신에겐 경어를 써야지요. 난 놀랐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세계가 정말로 있다니...." 디트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엘야시온 가디엘을 보았다. 가디 엘은 씩 웃었다. 디트는 다시 시나를 보고 말했다. "그렇담, 말도 없이 달리는 쇠로 된 마차 이야기도 사실이겠군요." "네." 시나는 디트가, 드디어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이해해 주자 기 뻤다. "정말로 그런 게 있어요." 엘야시온이 말했다. "흠, 흠.... 말도 없이 달리는 마차라. 하긴... 나도 몇 년 전에 그런 보고를 신년 발표회 때, 들은 것 같은데. 루세에 있는 베르노크 아티스트들이 말 없이도 달리는 마차인가.... 그걸 만들 어 본다고 했었지." 시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세상에서 자동차를?!! "그래서 어 떻게 하셨어요?" 엘야시온 가디엘은, 핫핫 웃었다. "어떻게 하긴. 말 있이 달리는 마 차도 잘만 달리니, 쓸데없는 것 만들지 말고 차라리, 여물을 안 먹어도 몇 날 며칠 달리는 말을 만들어 보라고 했지. 말이라면 단독으로 탈수 도 있잖나? 마차는 그게 안되지만. 그랬더니 알겠다고 하더군. 핫 핫..." '헉... 유전공학까지!!!' 진짜로 이 사람들이 유전공학인지 뭔지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시 나는 루드랫이 오크들에게 던졌던 불덩어리를 생각했다. '신빙성이 있어. 폭탄도 만드는데... 이 사람들, 의외로 첨단과학의 길을 걷고 있는 지도 몰라...' 시나가 말했다. "말없이 달리는 마차도 괜찮지만.... 하긴. 편하긴 해도 그만큼 공해가 심해지니까요. 전 이 세계 와서 공기가 이렇게 깨 끗하다는 것과, 그리고 경치를 이렇게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에 놀랐 어요." 그 후로 잠시, 공해가 무엇인가에 대한 열띤 대화가 오고갔다. 엘야 시온이 놀란 소리를 냈다. "석유라는 마나를 태우면 힘과 함께, 공해도 나온다는 말인가! 공해 때문에 힐러들도 못 고치는 병이 생기고? 오! 칼루스온 인들은 묘하군! 거기 있는 아티스트들이 왜 그런 식으로 아트를 행하게 놔두는 거지?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포이즌 아트까지도 감수하다니! 어떤 사악한 세력이 아티스트들을 장악하고 있는 건가? 자네 세계의 엘야시온... 아 니, 거기선 다른 이름이겠군. 자네 세계의 칼루스온은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쯧쯧... 말없이 달리는 마차를 개발 못하게 한 건 잘한 일이로 군. 내 후세에도 글을 남겨, 이런 마차는 개발 못하게 해야겠어. 그걸 달리게 하기 위해, 포이즌 아트라니! 원!! 듣다듣다 별 소리를 다 듣겠 군. 아무래도 다음 해 신년 초엔 베르노크 아티스트들에 대한 특별 감 사를 실시해야겠어." 엘야시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디트도 진지하게 말했다. "힐러들도 못 고칠 정도로 포이즌 아트를 행사하는 마차라니... 저도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석유라는 마나 아티팩트엔 문제가 있군요. 엘야 시온님." 시나는, 석유는 '마나 아티팩트'가 아닌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 지만 사실 스스로도 '마나'가 무엇인지 몰랐다. 어쩜 이 세계에선 석유 를 '마나'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건 패스. 자동차 만드는데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면... 그것도 좋겠지. 이 세계라도 공해 없는 자동차를...' 이렇게 약간은 무책임한 생각을 하는데 하디트가 말했다. "시나에게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잠깐 양해를 구합니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디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 가 궁금한 것은, 시나. 당신의 신분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러면 당신의 친구라는 셰리카 양은 도대체 어디서 만난 겁니까? 그녀도 당신처럼 '칼루스온인'입니까?" "예?" 디트는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라단의 집에서 당신이 찾아야 한다고 했던 사람 있지 않습니까. 드 랫이 말하길, 자기 세계로 돌아가 버렸다고. 하지만 당신은 꼭 찾아야 한다고 해서 무척 인상이 깊었는데. 그 후로 찾았나요?" "찾아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라단 아저씨 네 집에서, 내가 누굴 찾는다고 했어요?" 디트는 눈을 찌푸렸다. "...설마. 기억이 안 납니까? 내 기억으론 '셰리카' 양이라고 했는데." "셰리카요?"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은 몰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우 리 세계, 우리 나라에선 '셰리카'라는 식의 이름은 안 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그 애가 셰리카라는 이름이라면, 그 앤 우리 세계 사람 이 아니에요." 시나는 생각하는 듯한 눈매를 했다. 그리고 조금 미소지 었다. "그건 아마도 엘야시온 인일 거예요. 전 그런 이름의, 칼루스온 친구는 없어요." 어딘 가에서 만난. 개성이 너무나 뚜렷한... 귀여운 여자 아이. 분홍 색 머리칼을 팔랑거리는 보라색 눈의 소녀. "친구? 칼루스온인 친구라고? 자네와 같이 이쪽으로 넘어온?" 엘야시 온 가디엘이 말했다. "자네가 이곳에 온 후로, 어제가 세 번째 날이었 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렇다면 현재 엘야시온에 있는 칼루스온 인은 자네 외엔 아무도 없 네. 또 다른 칼루스온 인이 있다면.... 휘프리엘이..." 그 이름을 말할 때 가디엘은 쓴웃음 지었다. "세 번째 엘의 날이 지나기까지 내게 아무 인연도 주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 일'이 아니거든." '내 일'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일까 했지만, 시나는 그냥 납득했다. 하디트는 좀 이상하다는 얼굴로 시나와 엘야시온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게. 하온 하디트." 엘야시온 가디엘은 왠 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 트론즈가, 내게 말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내가 자네에게 칼루스온 시나에 대해 말한 것 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니, 그것이나 잘 신경 써주게." 하디트는 가디엘의 매몰찬 말투에 당황해 이상한 눈을 지었지만, '휘 프리엘'이 '트론즈'라니. 엘야시온의 지고한 세계에 감히 무어라 말하 겠는가? "예, 죄송합니다." 하디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역정낸 것이 무안한 듯 시나의 드레스에 대해 언급했 다. "드레스 좋구먼. 왕궁 의상실에서 찾아낸 건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려던 시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면, 누가 줬는지 말해야 하고, 그러면 파이오니온 님과의 일을 말해야 하니 까. '일 복잡해지게 그런 말까진 할 필요 없지. 어차피 돌아갈 건데....' "음... 네... 아무튼 왕궁 안에서 생겼어요. 하하.." 시나가 어색하게 말하자, 가디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무안함이 가셨으므로 시나가 걸고 있는 목걸이에 대해선 안 물어봤다. 그리고 본 론으로 돌아가 생기에 찬 얼굴로 말했다. "자,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잘 알겠지? 우리의 목표는 루드랫 을 제 신분으로 돌아오게 하는 거네. 그 마노테온으로 사니, 뭐니 하는 우습지도 않은 이야긴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입수한 정보와, 내 능 력에 따르면. 22년 전 클로니아 세렌시스의 행방불명에 관련한 사건에, 그 주동자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아직도 루드랫 주변을 배회하고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생각해 볼만한 문제거든. 루드랫이 암흑의 숲에 들어갔다 나와 기억만 잃지 않았어도, 세렌시스에 관련한 사건이 벌써 명명백백히 밝혀졌을 테지만. 아니면, 옐로우 라이트의 힐러만 있 었더라도 좋았겠지만. 위테리드의 성가에선 아직도 옐로우 라이트의 힐 러가 나왔다는 소문은 없어. 아무튼, 내가 정말로 내 본심을 털어놓는 자들은 자네들뿐이네." 그리고 가디엘은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이들은 믿을게 못 돼. 특히 내 계획에 있어. 모든 걸 밝힌다는 것은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우 어리석은 일이지. 그걸 자네들도 명심하게. 칼루스온 인 이여. 자넨 여기서 들은 말을 아무에게도 해선 안되네. 협박하는 건 아 니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긋 웃었다. "자네가 자네 세계로 돌아갈 수 있 는 건, 오직 내 힘으로만 가능하니까." "말하지 않을 거예요." "자네도 마찬가지야. 하디트. 어느 것이 자네 주인을 위하는 길인가 생각하게. 내가 하려는 일은, 근본적으로 자네 주인을 위하는 길이야. 자네 주인은 내일에 주역이 될 걸세. 바로, 저 저주받은 판테온의 무리 들을 그 근본부터 뿌리 뽑아버리는 일." '판테온'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엘야시온의 눈에, 이제까지의 장난스 러운 기색이 지워지고 사납고 어두운 표정이 서렸다. "....그 놈들을 왜 그냥 놔두는 건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그 범죄자들의 집단은 언제나 있어왔지. 난 엘을 이해할 수 없어. 저 피의 아두스갈다 때도, 사가들은 그가 판테온에 관계되어 그런 일을 저질렀 다고 하지. 내 인생 가운데도, 그 놈들 때문에 많은 손해가 있었어. 그 놈들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고, 그 놈들 때문에 내 아내." 엘야시온 가디엘은 심술궂게 웃었다. "내 친애하는 아내. 그녀도 잃 었지. 또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그의 눈에 슬픔이 어렸다. "내 아들, 세렌시스. 그를 잃었다... 내가 좀더 부지런히, 그들을 처단 했더라면. 감히 그들이 다음 대의 엘야시온이 될 자를 어떻게 할 순 없 었을 텐데. 내 마지막 희망은... 이제 단 하나야. 내 힘이 닿는 한, 모 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복수를 하겠다. 세렌시스가 그렇게 돌아 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후로 몇 년간은, 세렌시스가 어딘가에 살아있 을 것 같아, 미친 듯이, 내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서 그를 찾았지만. 아무 데도 그는 없었고. 이제 나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겠어." 가디엘은 의자 팔걸이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판테온 놈들은 모 두 찾아 죽이고야 만다. 향후 10년 동안. 판테온의 이름은 온 엘야시 온, 원한다면 다른 게이트를 열고, 펼쳐진 땅을 부숴서라도. 그들이 숨 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 다 처단하고,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엔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디트나, 시나, 모두 다 엘야시온의 이런 분노를 직접적으로 느낄 순 없었다. 하디트는 단지 자기 주인을 염려하는 자였고, 시나는 이방 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런 말에 단지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엘야시온은 씩 웃었다. 아마도 그래서 엘야시온 가디엘은 이 자들에게 자기의 본심을 말할 수 있었다. "...엘은 이런 나에게 감사해야 할 걸. 역대 이래로. 자기를 섬기지 않은 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나와 같은 엘야시온도 없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명심하게. '판테온'에 관련한 내 의지는 아무에 게도 말하지마. 특히, 자네." 엘야시온 가디엘은 시나를 생각하는 눈으로 보았다. "...루드랫이 아 까, 내게 말하더군. 그 말을 듣고 자네를 꼭 한 번 만나야겠다고 생각 했는데.... 자네, 이곳 제일로트로 오던 도중 납치 당했을 때. 어떤 제 사... 진 속에 들어가, 어떤 제사를 위한 희생물이 될 뻔했다고? 거기 다 제일로트 안으로 들어와서 똑같은 사람들에게 끌려 갈 뻔했고?" "네." "그래?" 가디엘은 웃었다. "...왜 루드랫이 내게 그 말을 하지 않았 는지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볼 문제고. 어차피 나도 루드랫에게 그 일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로써, 루드랫 주변에 아 직도 판테온들이 날뛰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졌군. 하지만 이것 우스운 일인걸. 왜 그들은 굳이 자네를 데려다가 그런 제사를 벌이려 했던 걸 까. 루드랫의 종속자기 때문에 노렸을 가능성이 십중팔구이지만.... 자 네가 칼루스온 인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들도 생각을 다시 먹었을 텐 데. 자네는 엘야시온에 '없는' 자이므로... 근본적으로 이곳에서 자네 의 죽음은 불가능해. 칼루스온으로 돌아가는 '소멸'이라면 몰라도... '죽음'은 안되지." 하디트는 물론이고 시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나가 말했다. "제가.... 죽을 수 없다고요?" "하하...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인가? 왜? 죽고 싶나? 하하... 하지만 안 될걸. 자네는 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자라 불리는 칼루스온이니 까, 죽고 싶어도 말이야. 하하하... 난 옛날 아주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지. 가상으로 배경을 꾸미고, 한 인간이 나와--이 자는 글을 쓴 자가 꾸며낸 자였지--주변인물들과 함께 여러 세계를 넘나들며 각종 몬 스터를 처치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자가 '루이트'라는 신분을 갖고 있음에도 왕족들에게 충성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며 제 사리사 욕을 채운 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은 그 자가 아무리 해도 죽지를 않는다는 거였다네. 아무리 무시무시한 몬스터와 싸워도... 심지어는 혼자서 싸워 치명상을 입고, 당장 죽을 목숨이라도... 어디선가 힐러가 나타나 구해주든지... 그런 장소에 왜 힐러가 지나가야 했던 건지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네만. 어쨌든. 아무 리 해도 죽지를 않더군. 하하... 자네는 마치 그 식이야. 아무리 위험 해도,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엘께서 자네를 보호할 테니, 자네는 절 대 죽지 않아. 자네 세계인 칼루스온에서야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곳 엘야시온에선 그래. 어쩌면 자넨 나보다 더, '불멸의 이름'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군. 칼루스온 인이여." 시나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아무리 즐겁고 행복할 때라도. 언제나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마음 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시간이 가는 것을 기본적으로는 아쉬워했는데. 그러한 걱정의 기반이 없어지다니. 알 수 없는 기분이었 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빠지며, 무거운 돌을 내려놓은 기분...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꼭 제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요..." "맞아. 자넨 인간이 아니네. 이곳 엘야시온에서는. 그러니 안심하고 목숨 함부로 굴려도 좋네. 하하하... 아, 이건 농담이었어. 흠... 그나 저나, 자네는 자네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의 얼굴을 혹, 기억하고 있나? 다시 본다면 알아 볼 수 있겠어?" 시나는 제사를 주관하던 남자인, '도바'라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 생 기 없는 푸른색 눈의... "네. 아마도." "그래? 그렇담, 혹시 이 왕궁 안에서 그 자를 만나더라도 놀라거나 아는 척 하지 말게." "네?" "왕궁에서 그를 보더라도 알아본 척 하지 말란 말이야. 단지 나중에 내게만 이야기해 줘. 자네가 본 사람이 누군지." "왕궁... 이곳에 그 사람이 있다고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 낌이었다. 도바라는 사람과 키르마가 이곳에 있다고? "그렇게 무서워하는 표정 지을 것 없어. 우리 엘야시온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은 건, 유감이네만. 칼루스온 인이여. 말했듯, 자네는 죽지 않 아. 별별 우스운 인연이 생겨서라도 자네는 살아날 거야." '죽진 않더라도, 죽도록 아플 수는 있는 거잖아! 죽도록 무서울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시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어, 어떻게 그런 사람 들이 왕궁 안엘..." "글세. 그거야 자네가 알 바는 아니네. 아무튼 이건 우리 세계에 관 련한 문제니까." 상당히 매몰찬 대답이었지만, 엘야시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라 시나도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단지, 생각하는 것은. '...빨리 우리 세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비인 간적(?)인 취급을 받아 보기도 처음이고.... 이렇게 죽도록 고생한 것 도 처음이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엘이라는 신은 병 주 고 약주나. 죽지 않게 하는 엄청난 능력대신 아예 이곳엘 보내지 않았 으면 될 거 아냐...? 이해 안가. 내 존재가 엘을 증거 하는 거고 뭐고. 나도 모르게 엘이 날 증거로 삼다니... 우선 말이나 해주고 증거를 삼 든지 말든지 하지. ...어휴.' 그리고 시나는 루드랫을 루이티온으로 만드는 엘야시온의 계획을 생 각하고 루드랫과 파이오니온 님이 꾸미는 모종의 계획의 생각했다. 시 나가 엘야시온 인이 아니라도, 이 두 계획이 서로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골치가 아픈 일이다. '모르겠다. 난 그냥 조용히 있다 우리 세계로 돌아가야지. 모두들 잘 알아서 하실 거야. 내가 낀다고 풀릴 문제들도 아닌 것 같고. 몰라...' 시나는 계속 이런 무책임한 생각을 했다.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1- 관련자료:없음 [25522]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1:19 조회:1194 <전기: 재미가 들렸군요: 하지만 조금만 참으시길...^^> 우웃... 저번에 말씀드린, 바이러스(?) 증상이 바이러스 증상이 아 니랍니다..TT 기쁘다.. 윈도우 상의 이상으로... 한글 글자체가 깨지 거나, 시스템이 불안한 프로그램을 돌리면, 레지스트리(뭔지 잘 모 름..)가 망가져 그렇다고 해주셨는데... 확실히. 체르노빌 고칠 때, 한글 파일 중 하나를 아예 지워야 한다고 해서, 지우게 한 다음부터 이런 현상이 생겼죠.(^^) 그래서 이걸 어떻게 새로 갈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떤 분이 또 다른 방법을 알려 주셔서... 부팅할 때, f8를 열심히 눌러, '안전모 드'로 재부팅해주면, 고쳐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해봤는데, 정말로 고쳐졌네요... 오오-- 부활, 컴퓨터~!! ^^ 이것에 대해 알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동변상련의 아픔을 느끼 시는 분도...^^; '안전모드'로 재부팅을 해보시길... 재미있습니 다...^^ 추신: 4월초에 메일 33통을 받고... 폭메인가? 봤더니... 메일이 없 다고... 그래서 듣도 보도 못한 '하이메일'에 갔더니, 작년 9월경부 터, 편지가 쌓여있더군요... 생일 카드 두 통에...(수희님, 정말, 감 사합니다...TT 장롱군을 부여잡고, 보고, 보고, 또 봤습니다...TT) 서현고의 모님에게도... 본의 아니게 대답 없는 너, 가 되어.... --; 어쩐지, 그 동안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주소 적어놓은 사이트에서 편지가 하나도 안 오더라..... 하이텔... 내 너를 그렇게 믿고, 주소 적으면, 꼭 네 이름 썼건만..........TT;;;;;;;;;;;;; .......그래... 통맹인 내 죄다..라고 슬픔(?)을 삭이고... 그냥, 묵묵히 읽었는데... 그런데 다음날도, 33통이라기에... 헉, 진짜 폭 메다...라고 펼쳐보니... 읽은 편지도, '왔다'로 기록해서 들어오면 띄워주더군요...(--; 하이텔이, 예전의 잘못을 지나치게 보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저장 받고, 하나하나 지우고... 생노가다를 시켜 주어, 하이텔에 대한 미운정이 매우 깊게 박혔습니다. ....뭐랄까. 통신사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훗... (달관) (나중에 통신사 기행문이나 쓸까...) - - - - - - - - - - - - - - -(자르시오) - - - - - - - - - - - - - - 그날 저녁, 연회 중간에 일어난 일은 후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연회가 무르익자, 그 분위기를 기다렸다는 듯 엘야시온 가디엘은 지 난 주, 가장 무도회의 승자에게, 상을 내리길 원했고 그 승자는 사람 들이 다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홀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쉴 새없이 울리던 음악은 그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멎었다. 사 람들은 행운아의 목 부근을 힐끗거렸지만 루드랫은 쓸데없는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클로니아 특유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평범한 루이티온처럼 보였다. 정해진 대로 엘야시온은 루드랫에게 물었다. 그리고 루드랫은 정해 진 대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어떤 이들은 놀람의 소리를 뱉었고, 어 떤 이들은 재밌다는 웃음을, 어떤 이들은 더 놀라운 것을 구하지 않 은 그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그들 중,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 스의 개인 루이트이며, 프레미어 루이트인 루파르테는, 루드랫의 청 에 강렬한 적의와 불쾌감을 나타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칼리스나와 이야기 나누던 레이서스가, 누구에게 들으랄 것도 없이 혼잣말로, '어이없음'을 이야기했을 때,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루파르테가 당장 나선 것은. "...무례라니요, 힐라토님." 무언가를 씹어뱉는 듯한, 그 딱딱 끊어지는 말투에 레이서스는 루파 르테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루파르테? 난 저 자의 과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만약 이것이 내 연회장이었다면... 마노테는 마노테답게, 절대 이 연회장에도 못 들어오게 했을 텐데. 헌데 저 자가 이 연회장에 들 어올 수 있었던 사정을 들으니 불쾌하기 그지없더군. 여섯 증인도 모 자라 이번엔 성혼의 증인까지?" 레이서스는 코웃음 소리를 냈다. "불쾌하기 짝이 없어! 아스테린의 결혼에, 저런 자를 오게 한다는 것도 불쾌하지만, 저 자가 성혼의 증인이 된다는 것도 불쾌해." 옆에 있던 칼리스나는 레이서스의 이런 말에 흥분해서 말했다. "어 머! 힐라토님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죠! 마노테 온이면서, 루이티온의 신분이라니! 말도 안돼요!" 레이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표정으로 말했 다. "한 마디로 저건, 오물과 황금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꼴이야. 그 황 금이 아무리 찬연하다고 해도, 손에 오물이 있는 이상 더러운 건, 더 러운 거야. 그런 자가, 흙의 날 내 손을 잡고 자기 이름을 댔을 때, 내가 도대체 어떤 기분을 느꼈을 것 같나? 게다가, 영혼의 공명이란 건.... ....아냐. 아무 것도 아닐세." 레이서스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루파르테는 '영혼의 공명'이라는 말에 초조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아냐. 이건 하도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문제라... 말하기도 좀 그 렇군." 그리고 레이서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요즘 일들에 내 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만 말해 두겠네." 하지만, '모욕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루파르테의 눈에선 불꽃이 확 타올랐다. 거기다 '영혼의 공명!'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 각한 루파르테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힐라토님. 말씀해 주십시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명예를 제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당신을 위해서만 검을 듭니다. 전 당 신의 루이트입니다. 부디... 사실대로."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그렇군. 역시. 자네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네." 다음으로, 레이서스는 정해져 있던 나머지 말을 했다. '루온 루드랫'이라는 자를 믿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절대 자신에게 '영혼의 공명'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 거다. 그렇담 도대체 자신을 어 떻게 찾아 낸 걸까, 뭔가 정당하지 못한 수라도 쓴 건 아닐까, 자신 이 왜 이런 허접한 게임에 이용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네가 날 찾아냈더라면 이것이 훨씬 더 즐거운 게임이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한탄하며 말했고, 그러므로 그 후 일어난 일들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파르테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루드랫에게 공식적인 결투신청을 했다. 루파르테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엘야시온 앞에서 물러 나와 사 람들의 주목을 받은 채 음료수 테이블로 걸어가고 있던, 루드랫의 얼 굴에 집어던졌다. 후에, 루파르테는 이 행동을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당시엔 앞뒤 가 릴 정도로 흥분해 있었기에 아무튼 만인이 보는 앞에 루파르테의 장 갑은 루드랫의 얼굴을 치고, 떨어졌다. 루드랫은 그 장갑을 보고, 자신의 사촌을 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루파르테는 살기가 등등해서 말했다. "무슨 뜻이냐고?!! 네 놈이, 한 때나마 루이티온의 이름을 가진 적이 있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내 주인인 힐라토 파이오니온 레이서스의 이름 으로. 네가 내 주인을 찾아낸 것에, 부정이 있었음을 고발한다!! 내 주인의 명예를 위하여, 도저히 이것을 묵과할 수 없다!!" 그 말에 루드랫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고, 이미 놀란 표정을 짓고 있 던 홀 안의 사람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홀 안에 한 바탕 '부 정?'이라는 말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때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 엘야시온 가디엘이 나섰다. "이것 참... 경사스러운 혼인의 연회에 결투라니. 게다가 '부정'? 내가 주최한 게임에 부정이라고?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인 자네의 말이니, 파워즈의 가호아래 '자네들' 방식대로 이것이 진실인지, 거 짓인지 판단할 일이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레이서스를 보았다. "힐라토 레이서스. 자네의 루이트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자네의 의지일 테지. 그럼 자네는 정말로 저 '루온 루드랫'이 부정을 행했다 고 보나?" 사람들과 함께 서 있던 레이서스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는 루드랫과 자신의 루이트를 보고, 엘야시온 가디엘에게 말했다. "제 가문은 아무래도 저 자에게 유감이 많습니다. 헌데 저는 저 자 가 이번 게임에 정당하게 임하지 않았다는 확증을 갖고 있고--도대체 저 자가 제게 '영혼의 공명'을 느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군요. 모 욕입니다.--그것은 엘야시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증거를 제시할 순 없지만--영혼의 공명이라고 해도, 제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니까요-- 어느 정도는 확실한 것입니다. 저는 저 자가 제게 영혼을 공명을 느 끼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무언가, 불법한 일로... 저 자가, 저 자의 과거에도 종종, 우리들의 일을 어지럽힌 것처럼, 엘야시온 가디엘 님의 이 게임을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 다. "엘야시온님. 그러니 이런 애매한 경우에는 파워즈의 가호아래, 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람들 사이에 한 번 더 술렁임이 일었다. 레이서스가 묘하게, 강력 하게 나선다고 느낀 것이다.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사람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의견을 교환했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흙의 날 베란다에서 말이야. 힐라토 레이서스가 웬일로 가만히 있나했더니. 그가 그렇게 순순히 손을 내 밀 리가 없지." "하긴, 저 자의 원래 죄는, 힐라토의 가문을 모욕한 것 아니었습니 까?" "과연... 이대로 은근슬쩍 넘어간다는 건 말도 안되죠. 아무리 저 자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해도." "타당한 결투 아닙니까?" "어머나... 하지만... 저런 몸으로..."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세게 나오는데요. 저 자를 죽일 생각인가 보 군요. 꽤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다고 알고 있는데. 의외로 냉정해요." 사람들이 귓속말로 수군거리는 가운데, 엘야시온 가디엘은 눈을 내 리깔고 말했다. "그런가? 레이서스? 자네는 루온 루드랫이 이 게임에서 '부정'을 행 해, 내 게임을 모욕하고, 더불어 그 게임에 참석한, 귀족과, 왕족과, 나를 모욕했다고 보는군. 그렇다면 '루온 루드랫',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부정을 행했나?" 루드랫은 침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 따윈 없었습 니다." 루드랫은 고개를 돌렸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프레 미어 루이트여." 그러자 사람들의 눈이 루파르테에게 돌아갔다. 루파르테는 잔뜩 불 쾌해서 말했다. "오해?!! 언제부터 루이트가 말로서 오해를 따졌나?! 엘에게 판단을 맡기자!! 네가 받은 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는, 하늘이 판가름해 줄 것이다!! 아니면!!!" 루파르테는 이죽댔다. "그 심판이 자신 없다면,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자신의 부정을 자백해라! 네겐 힐라토 파이오니 온의 고발을, 틀리다고 말할 능력이 없을 테니!!" 사람들의 시선이 루드랫에게 갔다. 하지만 루드랫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발 밑에 떨어진 장갑을 보고 있었다. 그 고개 숙인 모습에, 루파르테는 코웃음쳤다. 제까짓 놈이 감히 그 장갑을 집어들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루드랫이 정말로 결투를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단지, 주인인 레이서스의 말대로, 자신이 이런 결투하나도 못 하는 천한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제를 알게 하고, 게임 이 이겨 자신이 뭐라도 된 듯, 으스대는 꼴을 완전히 깔아뭉개고자 하는 제스처였을 뿐이다. 아무리 원래 루이트였다고 해도, 마노테의 몸으로 싸운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므로 부정이 있다는 고발에, 옴짝 달싹못하고 자신이 받은 상을 내놓아야 할 테고,(부정이 정말 있었 든, 아님 없었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 결과로 놈의 이름은 아예 바닥에 짓이겨지고 말 것이다, 라는 생각은 루드랫이 허리를 굽히는 순간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루파르테는 입을 쩍 벌렸다. 루드랫은 떨어진 장갑을 줍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조금 도 겁먹거나,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는. 그래서 루파르테는 잠시, 루드랫이 지금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줍는 것은,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헌 데... "도대체, 무슨..." 루파르테가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나서는데, 장갑을 쥔 채 루드랫이 말했다. "결투를 받아들입니다." 루파르테를 비롯한, 홀 안의 사람들이 루드랫의 이 말에 놀라움에 찬 소리를 냈다. '루온 루드랫'이라 불리는 저 루이티온이 실은 마노 테온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온 홀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미쳤군!" "죽으려는 거야!" 하지만 몇몇 호기로운 남자들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흥! 아무 렴! 자기가 결백하다는 생각이 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 신념을 고수해야지! 결백한 자는 엘이 보호하시니, 그 자에게 승리가 돌아갈 진저!" 하지만 루파르테는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있었 다. 바로 그때 엘야시온 가디엘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루이티온 루드랫이 방금, 힐라토 루이트 루파르테의 고발을 부인했으니, 이 경우 결투가 가장 합당하겠군. 난 엘의 대제사장, 엘 야시온으로서 이 결투를 허락하네." '오오-', '파워즈의 결투다!'라는 말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결국 이런 식으로, 최고 계급자인 엘야시온의 허락이 떨어졌고 이제 결투는 무를 수도 없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흥분과 긴장 이 섞인 표정으로 이 사태를 주목했고, 루파르테는 황당한 표정으로 엘야시온 가디엘을 보고 있었다. 루드랫은 내내 심각한 얼굴이었다. 엘야시온이 말했다. "결투의 승리는 엘께서 주관하시니, 어느 쪽의 주장이든 정당한 주장을 한 자에게 승리가 돌아갈 것이네. 두 사람 다, 힐라토 인이니 결투의 증인으론,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힐라토의 수네드리온 의원, 하바티온 하겐트." 사람들 사이에서 하겐트가 나왔다. "예. 여기 있습니다. 엘야시온 가디엘 님." "그리고...." 바로 그때 율르스가 나섰다.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엘야시온 님?" 율르스는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명예라곤 해도, 저도 수네드리온 의원입니다. 힐라토 수네드리온은 아니지만. 뭐 어 떻습니까? 칼리안 수네드리온 의원은 결투에 관해서라면 언제 어디서 든 기꺼이 증인이 될 겁니다. 그건 저도 예외가 아니죠." 가디엘은 율르스의 뜻밖에 신청에 눈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을 증인 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가디엘이 원래 지목하려던 사람의 얼굴이, 군중 가운데 문득 눈에 들어왔고, 아직은 젊고 아직 은 궁정에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엘야시온은 곧 생각 을 달리 먹었다. '흠... 하긴. 어쩌면 이 경우엔 율르스가 훨씬 나을 수도 있겠군. 칼리안 파이오니온이 증인이라... 게다가 하디트에 관해선 차라리 이 것보다 일반적인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이 나을 지도...' 엘야시온 가디엘은 말했다. "좋다.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르스를 또 다른 증인으로 하여, 그 시간과, 장소와, 무기는..." 사람들은 엘야시온을 주목했다. 결투를 위한 시합장과 시간과 무기 는 결투를 허락한 자가 있다면, 그의 소관이 되므로 엘야시온은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하려 했다. "결투 시간은 내일. 원래 내일은 스콰이어들의 소 토너먼트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우선은 이 께름직한 일을 마무리짓는 것이 낫겠지. 장 소는, 스콰이어의 시합장에서. 무기는...." 엘야시온 가디엘은 사람들을 둘러보고 미소지었다. 끝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게 나았겠지만, 사실 이건 그의 천성이므로 어쩔 수 없 었다. "무기는... 그래.... 그렇지." 엘야시온은 루드랫을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저자는, 현재 마노테의 몸이니, 검을 지닐 수 없지. 그러니 무기는 철제가 아닌 것으로 한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홀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철제가 아 닌 무기'가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정확한 감이 오지 않았다. 맨 손으로 싸우란 말인가?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 다. 하지만 철제가 아닌 무기로 싸울 경우, 어떤 결과가 도출되는지 다른 사람들 보단 훨씬 빨리 알아챈 루파르테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 그러뜨렸다. 철제가 아닌 무기! 엘야시온 가디엘이 이어 말했다. 매우 사무적인 목소리였으나, 이제 그는 역력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나 엘의 대제사장의 주관 아래, 결투를 할 것이 다. 그때까지 루이티온 루드랫에게 허락된 '상'은 보류하며, 내일 엘 이 이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 지에 따라, '상'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을 하겠다.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루이티온 루파르테에게 눈을 돌렸다. "힐라토 프 레미어 루이트, 루파르테. 자네는 샥크 루이트이네. 헌데 아무런 오 더도 받지 못한 자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그러니 뭐... 자네가 자 네의 명예를 위하여, 자네 스콰이어 중, 저 자와 동일한 오더를 갖고 있는 자에게 결투를 대신 명한다면, 그것 또한 합법적이라 말해 두겠 네. 그것이 결투의 법칙이니까. 아무튼.... 샥크 루이트와 오더가 싸 운다는 건... 자네의 명예엔 아무 도움도 못 되니까." ".......!!!" 루파르테는 이렇게 해서 자신의 성급함과 어리석음을 처절하게 깨달 았다. 샥크 루이트에게 있어 이런 식의 결투는 아무 도움이 못 된다 고? 당연한 말이다. 샥크가 이기고 오더가 패할 것이 뻔하니까. 사람 들은 어떤 찬탄도 보내지 않는다. 헌데, 이 경우.... 엘야시온 가디엘은 빙긋 웃었다. "아, 물론... 자네가 지명하는 자 도, 철제가 아닌 무기를 들어야 하네." 저 빌어먹을 늙은이---!!! 입밖에 냈더라면 신성모독이라고 고발될 말로, 루파르테는 이를 갈 았다. 왜냐하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싸움은, 더더욱 자신의 명예에 도움이 못 된다. 아니 그 것뿐만이 아니라.... 루파르테는, 자신의 사촌이었던 자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 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조건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단 한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다! 루온 루드랫인지, 되다만 루이트인지 하는 놈은, 철제가 아닌 무기 를 들고도 싸울 수 있다. 바로 '무술'로. 그러므로 엘야시온 가디엘 의 의도는 명백히, 한쪽에게만, '무기'를 쥐어주는 꼴이다. 덕분에, 루이티온 루파르테, 힐라토의 프레미어 루이트인 자신이, 엘야시온의 말대로 '오더도 받지 않은' 루이트에게 패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그 렇게 됨으로서 마노테온이었던 루이티온 루드랫의 명성이 얼마나 크 게 올라갈 것인가,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었다. 그것도 누구나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결투'라는 방법으로. 이것을 깨달은 루파르테는 이를 갈았다. 저 늙은이가, 루드랫을 편 애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런 수를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루파 르테는 무섭게 엘야시온을 노려보았다. 만약 눈에서도 '검기'가 나갈 수 있다면, 이미 루파르테는 엘야시온 시해 죄로 체포되었을 것이다. 셰리카는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에 놀라서, 하마터면 손에 들 고 있는 부채와, 예의범절 티켓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홀 한가 운데에서 '결투'니 뭐니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사람은 분 명, 시나의 종속주라는 사람이었다. '저,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지금까지 사람들 목이나 손가락, 귀나 옷에 달린 보석감상을 하는데 여념이 없던 셰리카는 처음으로, 보석이 아닌 '사람'을 뚫어져라 바 라보았다. 이드넘이 갑자기 왕궁에 간다고 했을 때엔, 보석을 많이 구경할 수 있는 기회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보석을 많이 구경했다. 헌데 뜻밖에도 저 사람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셰리카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이드넘을 보았다. 계속 셰리카에게 신경 쓰며 이거 해라, 저 거 하지 말아라 귀찮게 굴며 잔소리하던 그가, 웬일로 저 사람을 보 는 데에 완전한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셰리카는 재빨리, 잔뜩 늘어선 사람들을 휙 둘러보았다. 여 기에 저 사람이 있다는 건, 어쩜 시나도 이곳에 있다는 말인지 모른 다.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특별히 탈출하지 않고도, 드디어 시나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냈다 는 것이다. 루드랫이라는 남자는 작은 소동이 일어난 후, 이제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고 셰리카는 흥분한 눈으로 그를 주목했다. 시나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놀라서 서 있었다. 키가 큰 어떤 남자 가 갑자기 루드랫 얼굴에 장갑을 집어던졌을 땐, 저 사람이 웬 시비 인가, 별일이 다 있다고, 엘야시온님께서 말씀하셨을 땐, 싸운다고 꾸짖는 줄 알았는데 이것이 이런 '싸움판'으로 번질 줄은 꿈에도 몰 랐다. 시나는 자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루드랫을 보고, '무슨 오해가 있었다면 말로 푸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 고민 어린 얼굴의 시나를 내려다 본 루드랫은 시나의 팔을 잡 더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갑작스런 그 말에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 하지만 옆에 서 있던 하디트 또한 루드랫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게 낫겠군." 그들은 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얼굴에 이쪽 을 보고 있었는데, 특히 시나에게 쏟아지는 눈길이 만만치 않았다. 그걸 눈치 챈 시나는 루드랫과 하디트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지금 현재, 수녀들이 쓰는 것 같은 긴 모자--하지만 망사와 스팽글로 장식된 멋진 것--을 쓰고 있어 머리 짧은 것은 드러나지 않고 있지 만, 이젠 그런 건 상관없게 되었다. 아스테린이 말했다. "루온 루드랫- 저 사람이 루사벨라 약혼자로군. 맞아, 루사벨라? 저 사람이야?" 루사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뚫어져라 자신의 옛 약혼자 모습 을 바라볼 뿐. 그 동안 쌓였던 많은 감정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확 실히 이건 루이트로서는 드문 일이라 루사벨라는 그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답도 평소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맞지만." 루사벨라는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 계 속 말씀드렸듯, 저 사람은 제 약혼자가 아닙니다..." 마지막 말은 자기가 듣기에도 확신 없는 목소리로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힐라토, 시골 집. 그 아름답고 작은 장원에. 자신의 집에 나타나 그 건방진 말투와 태도로 마당에 서서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도 된 듯, 사람들을 호 령했을 때부터, 저 사람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가 자신의 약 혼자라며 다짜고짜 함부로 명령을 내릴 때도. '사람을 우습게 취급하는 것도. 너무 자신만만한 것도. 툭하면 무시 하는 투로 말하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었어. 그렇게 출세욕에 불 타 있었으면서, 멋대로 왕족을 사랑하여 몰락한 채, 마노테온으로 살 기를 자처한 것도. 그러니까 지금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야. '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어떻게 저렇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년 전 자이온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 다. 그렇담 저 사람은 저 20년 내내 저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헌데, 왜...' 루사벨라는 루드랫 옆에 같이 걷고 있는 소녀를 보았 다. '차라리 계속, 스온 아피네스님을 사랑했으면 좋았잖아. 왜 이제 와 서, 마노테를... 아니, 네가 어떻게 살건 나한텐 아무 상관없어. 내 가 바라는 것은 네 모습을 보지 않는 것 뿐이야. 그러니 마노테와 살 든 어떻게 살든... 이곳에 아예, 모습을 보이지 말 것이지. 왜 이제 야...' 루사벨라는 가라앉은 눈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런 식의 뜻밖의 재회는, 루사벨라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본심을 드러나게 했고 아스테린은 내내, 자신의 루이트가 어떤 행동 을 보이는 지, 그것만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본심을 매우 잘 읽 을 수 있었다. 아스테린은 생긋 웃었다. '걱정 마. 루사벨라. 내가 다 잘되게 해 줄게.' 레이서스는 루드랫이 시나를 연회장에서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루온 루파르테가 하는 말의 첫마디를 못 듣고 말았다. 레이서스는 루드랫들이 연회장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모 습을 확인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잘, 못 들었어.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않겠나?" 루파르테는 자기 주인의 시선을 쫓고, 그 시선이 어디로 가 있었는 지 알고 시무룩한 얼굴을 지었다. 몹시 불쾌해서, 시선을 뗄 수 없으 신 거다. 루파르테는 '결투'건을 제대로 못해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죄송합니다. 힐라토님. 제가 너무 경솔하게... 하지만, 무슨 일 이 있더라도, 내일, 꼭 힐라토님의 명예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 보이겠습니다." "아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필요까지는..." "네?" 루파르테의 질문에 레이서스는 잠시,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아 니...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루파르테는 자신의 개인 루이트다. 이런 식으로 그를 대한다는 것이 레이서스는 미안했다. "...내 말은 말이야. 자네가 직접 저 자와 싸우는 것은, 결투를 신 청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라는 말이지. 엘야시온님께서도 말씀한 것처럼. 저런 오더도 없는 자와... 오더는커녕 루이티온의 형상도 아 예 갖추지 못한 자 아닌가? 그러니까, 난..." 레이서스는 최대한 설득력 있는 어조, 그러나 명령이라는 것을 분명 히 하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직접, 저 자와 싸우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엘야시온 가디엘 님의 말씀대로, 자네 스콰이어 중 한 사람 과 싸우게 하게. 자네가 저 자와 싸운다는 것 자체가 불쾌해."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아무튼, 자네는 '내' 루이트거든." '내'를 강조한 말에 루파르테는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모르는 듯 가 만히 있었다. 하지만 곧, 감격한 눈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힐라 토님. 힐라토님의 명령이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겠습니다." 레이서스는 그 진지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자네 같은 자가, 내 루이트여서, 엘에게 감사한다네." 한편, 칼리스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질투어린 눈으로 보다가, 속 으로 투덜댔다. 아스테린이나 다른 많은 왕족들이 자신의 루이트를 가지고 있는데. 평소엔 그런 거친 루이트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 만. 가끔 이런 식의 광경을 보면 자신도 루이트를 가지고 있으면 얼 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칼리스나는 레이서스의 옆모습을 보 았다. 그녀의 약혼자인 레이서스는 '검기'를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론, 레이서스도 파워즈. 칼리스나는 미소지었다. '파워즈인 레이서스야말로 내 루이트야... 그러니까 특별히 루이트 같은 거 없어도 돼.' 그날 저녁. 연회에서 있던 소동도 가라앉고, 늦게까지 계속되었던 연회가 끝날 무렵. 아스테린은 또 한번의 '특별한 만남'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스테린은, 자신의 루이트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 이었고, 더불어 인내심이 많은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얻어내는 타입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잔뜩 머리를 굴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무척 심 사숙고하여 세운 계획으로 생각하고 보니 꽤 쓸만한 계획이라, 자기 자신이 대견했을 정도였다. '후후... 이걸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지. 진작 이렇게 할걸. 이게 잘 만 되면 내 결혼에서 그 꼴 보기 싫은 마노테를 안 볼 수 있고. 루사 벨라도 잘 되는 거고.' 아스테린은 외출하기 위해 아까 연회 전처럼 후드를 썼다. 시녀장 따윈 얼마든지 속여넘길 수 있으니까, 어떻게 빠져나갈 지는 걱정하 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것은, 그 후드를 썼을 때, 낮에 있던 일이 한꺼번에 생 각나, 기분조차도 야릇하게 되고 말았다. 발목이 다시 아픈 듯도 하 고, 머리가 다시 아픈 듯도 했다. 그리고 가물가물하게 뭔가 근지러 운 기분이었다. 억지로 말을 만든다면 기억이, 간지럽다 고나 할까. 자리에 앉아 이것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이상한 기분도 시원해 질 것 같지만. 지금은 몹시 바빴고, 아스테린은 그것에 대해 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기억 따위가 아니었으 니까. 정말 오랜만에 루드랫과 하디트와 시나는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간단한 다과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함께 한 자리이 니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겠지만, 대화는 전처럼 활기 있지 못하고 중간, 중간 끊어졌다. 게다가, 두 남자는 시나에게만 말을 거는 편이 었는데, 이들이 이렇게 서로간에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것도 시나입 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갖고 있으니... 쯧쯧...' 사실 두 사람은 아까도, 각각, 시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하디트는 시나가, '루드랫을 도와주고, 그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루드랫은, '이렇게 될 수 있기까지, 네 마음과 행동에 고맙다고 했 다' 하지만 그런 인사를 받으면서도 민망하기만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 도 이들과는 다른 목적,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여기 있을 시간은 얼마 남지도 않 았는데. 괜히 끼었다가 일만 더 복잡하게 만들 테고.' 덕분에 시나도, 남자들의 말을 썩 유쾌한 답변으로 받을 순 없었다. 그래서 이 늦은 다과회는 더할 수 없이 어색했고, 어찌나 서먹했는지 차라리 그 옛날 바리스에서, 아무한테도 환영받지 못하던 불청객 시 절의 식탁이 더 활기 있게 여겨졌을 정도였다. "아무튼. 네가 엘야시온님과 관련이 있었다니 놀랐어. 하긴.... 그 걸 생각해 봤어야 하는데. 누군가 알려 준 사람이 없다면 네가 바리 스까지 날 찾아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충성심이 넘쳤다고 해 도. 결국은, 어떤 종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건가. 흐 음... 그래도, 너무 감쪽같이 속아 분한데." 그 말에 뭐라고 말할 듯 하던 하디트는, 결국은, 다른 이야기를 했 다. "...그래. 그런 거지. 그 보다는 내일 결투 건 말인데... 물론 네가 당연히 이기겠지? 넌 누구보다 뛰어난 루이트였어. 옛날, 힐라토 프 레미어 루이트조차도 네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까. 넌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하디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난, 기억하거든. 넌 내일, 이길 거야. 그렇지?" 루드랫은 그 말에 뭐라고 말할 듯 하다가, 결국 그도 입을 다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건 잘 모르지..." "드랫!" "세월이 지났으니까. 이건 기억 문제가 아니라, 실력 문제야. 그는 뭐니뭐니 해도 프레미어 루이트니까." "하지만...!!" "결투를 받은 이상 최선을 다해 싸울 거야. 그래서 네 말대로 이긴 다면 좋지. 나도 이기는 걸 원해." 그 말에, 불만이 있던 하디트의 얼굴에 만족이 서렸다. "...그래. 그거라면 됐어.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히 네가 이길 테니까." 하지만 시나는 루드랫의 '최선'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래서 루드랫을 걱정스럽게 보았고, 그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 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하디트가 말했다. "후후... 재미있지 않아?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가 마노테에게 지 다니. 이건 그 동안 마노테로서 쌓인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라고. 정 말 프레미어 루이트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그의 파에 있 는 오더가 나올 테지만 말이야. 그렇더라도 루이트가 마노테에게 진 다는 건, 꽤 속시원한 일이야." "...넌 이제 하바티온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네 동료야." 하디트는 씩 웃었다. "그거야, 너도 마찬가지지. 그들은 네 동료야. 내가 말하는 건, 마노테로서 겪었던 한은 신분이 변한다고 해서 풀리 는 것이 아니니, 통쾌하단 말이지." "...난 그들의 동료가 되지 못할 수 있어. 시나는 일루티온일지도 모르니까." "아... 그거야... 그렇지만." 하디트는 루드랫의 말에 난처한 표정 을 지은 뒤, 시나를 보았다. 그는 시나를 향하여, 의미 있는 쓴웃음 을 지어 보였다. 시나도 같이 웃어주긴 했는데.... '하아--' 드는 생각이라곤, 말 한마디하고 나면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쓴웃음을 짓는 건, 제발 고만 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몹시 난처하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2- 관련자료:없음 [25523]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1:19 조회:1128 루드랫과 하디트가 돌아가고 나서 얼마 후, 넬리가 잔뜩 겁먹은 얼 굴로 시나에게 왔다. 왕족이 찾아왔다는 놀라운 말을 했는데. 힐라토 의 왕족 님이라고 해서, 처음엔 파이오니온 님인가 했다. 하지만 오늘 또 그분을 만날 일은 없었고 넬리도 찾아온 왕족이 '여자'라고 했다. 여자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했지만, 넬리는 어서 나가보라는 말만 할뿐, 몹시 허둥지둥하는 기색이라 시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그러나 긴장한 마음으로 나가보았다. '여자' 왕족이라곤 파이오니온 님의 약 혼녀 외에는 대면한 적이 없으니까, 혹 그분이 찾아 온 건 아닐까 하 는 걱정이 언뜻 들었다. 넬리는 시나를 한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로 안내했다. 연회장에 있는 유리정원과 이어진 장소인 듯, 푸르고 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이었 고, 나무들 사이로는, 작은 벤치와 작은 분수가 있었다. 바닥은 돌로 포장되어 있고 나무 가지엔 작은 전기구들이 둥둥 떠있어 어떻게 보면 매우 아름다운 장소였지만... 넬리가 자신을 바래다주고 걱정스런 모습으로 그곳을 떠나는 모습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시나는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랐다. 상대는 낮에 만났던 소녀. 시녀인척 하지만 분명 왕족이거나 귀족이라 고 생각했던 소녀였다. 실제로 왕족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 소녀가 자신을 왜 보자고 했는지, 이 시간에 불러낸 것도 놀랐다. 시나는 조 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핀...?" 뭔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아스테린은 기다리 던 루드랫의 종속자가 이런 식의 말을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 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눈을 찌푸렸다. "뭐야... 네가 왜 여길 왔어? 난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를 불러오라 고 명령했는데." 그리고 아스테린은 투덜투덜 욕을 했다. "종속자를 불러오라고 했더니!! 직접 섬기는 시녀라고 하더니, 또 자기 상급자를 불러와?!! 뭐 그런 게 다 있지? 안 된다고, 주제넘게 말할 때부터 알 아봤는데, 맹세코 그 시녀를 짤라 버려야지!! 넬리라고 했겠다!!" 시나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데, 소녀는 시나의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생긋 웃었다. "응? 아... 뭐, 너한테 한 말은 아니야. 이왕 이렇게 된 것. 너도 이젠 내가 시녀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겠지만. 하 지만 네가 나한테 무례했던 사과는 나중에 받을 테니, 빨리 가서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를 이리로 데려와. 그 건방진 마노테를, 지금 당장. 나 스온 아스테린, 이곳의 여왕 될 자가 말하는 거니까!!" 시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할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소녀 가 '여왕이 될 자'라니... 그럼, 이번 결혼식... 그 세계혼인가, 뭔가 의 주역... 생각보다 대단한 신분의 소녀라, 시나는 잠시, 옛날 엘야시온이 가 르쳐 주었던 인사를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하도 갑작스러워 그런 긴 인사말은 떠오르지도 않았고 결국 넬리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왕족 님. 넬리는 실수하지 않았으니... 넬리는 용서해 주세요. 넬리는 가족도 많아서, 짤리면..." 아스테린은 시나의 이런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했 다. "글세. 그거야 내 맘이고. 빨리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나 데려 와..."라고 말하던 아스테린은 시나가 점차 민망한 미소를 짓는걸 보 고,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그 표정은...! 서, 설마..." 시나는 약간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은 저도 시녀가 아니에요, 스온 아스테린 님..." "마, 말도... 뭐, 뭐가...! 하, 하나도 미인이 아니잖아!!! 마노테 주제에 루이티온을 홀렸다 길래, 엄청나게 예쁠 줄 알았는데!!!" 시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 말에 아스테린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짓더니, 잠시 시나를 뚫어져 라 보았다. 그리고 졸졸,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을 보 고 전기구들을 보고, 마지막으로 벤치를 본 뒤, 약간 실망한 투로 말 했다. "...믿을 수 없어. 그게 너였다니." 뭐라고 말할까, 하던 시나는 말했다.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 다." "죄송하다고?"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아스테린이 갑자기 생긋 웃 었다. "죄송할 필요 없어. 어쩌면 나야말로 미안한 건지도 모르지..." "네?" 아스테린은 이미, 실망한 얼굴을 거두고 있었다. "네가 루온 루드랫 의 종속자라고 해도, 결론은 하나야. 난 루사벨라를 좋아하니까." "....루사벨라..." 그 이름이 루이티온의 이름이니 '님' 자를 붙여야 한다든지, 아님 '루온'이라도 붙여야 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루사벨라'라는 이름은 시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엘야시온인의 이름이 기억 속에 있다니 흔치 않는 일이었으므로, 시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 게 누구였나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고, 그 이름 은 꽤 중요한 사람의... '아...! 알았다!' 시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드랫의 약혼녀!! 디트가 말해준, 드랫의 약혼녀다!! 드랫이 원래 자신의 약혼녀도 내버 려두고 한 고귀한 신분의 여자를 좋아했다고 해서, 그 약혼녀에 대한 인상이 깊었지!! 맙소사! 그 약혼녀 분은 힐라토 인이라고 했는데, 여 기 와 있단 말이야? 드랫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느라 시나는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피네 스가 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꺼내, 옷소매를 걷고 드러난 자기 팔뚝을 길게 그었을 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소녀가 이 런 짓을 하는 건지. 그렇게 하는 것을 말리지도 못하고 멀뚱히 보고 있었다. 겨우, 소녀의 팔에서 붉은 피가 방울방울 솟아올라 뚝뚝 떨어 질 때에야 시나는 말했다. "무, 무슨 짓을...! 자기 팔을 왜 그러는 거예요?" 아피네스가 거만하게 말했다. "...무슨 짓인지는 곧 알게되겠지." 그리고 갑자기 울상을 짓더니, 분수대 건너편의 벤치로 후다닥 달려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루사벨라!!! 루사벨라!!! 살려줘!!!" 시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런 그녀를 보았다. 혹시 저 여자애 가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과연 그렇다면 이 세계의 앞날은 어 떻게 되는 걸까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아무튼- 일단 저 상처 는 치료해야 했으므로, 시나는 그녀에게 걸어갔다. 너무나 당황한 나 머지 하는 행동이었는데, 정말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뒤로 물러나 사람을 불러오든지 잠시 지켜본 후에 행동을 했을 것이다. "스온 아스테린 님? 왜 그러시는... 상처는...." 미래의 여왕 님은 계속 비명을 질러대지, 보니, 팔에서 피는 뚝뚝 떨어지지. 게다가 시나가 다가가려고 하면 아스테린은 다른 쪽 벤치로 도망가 더욱 괴롭게 비명을 질러댔다. 한 두세 번 그러다가 시나는 마 침내 쫓아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아-? 도대체 뭐야, 이거?'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분수대 있는 곳으로 오는 자갈길을 밟는 누군 가의 발소리가 났다. 상당히 가볍고, 빠르게 달리는 소리였고, 시나는 이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여 사람이 달려왔다는 사실에 어쩐지 반가워 뒤를 돌아보았다. 달려온 사람이 소리쳤다. "스온 아스테린 님!!" 그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시나에겐 눈길도 안 주고, 아스테린에게 로 걸어갔는데, 아스테린은 그녀가 오자 비로소 두 팔을 벌리고 그녀 에게 매달렸다. "루사벨라!!!" 루사벨라?!! 시나는 이 여자가 '루사벨라'라는 사실에, 새삼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키가 상당히 컸다. 한 175센티 되는 키에 이 세계 대 부분의 여자들처럼 하얗고 통통한 것이 아니라 꽉 짜여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 다소 얇은 재질의 옷감에 깃은 높게, 굵은 허리띠를 매는 스 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고 있어서 굉장히 날렵해 보이는 데다, 멋진 실루엣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진한 초록색 머리칼에... 자기 주인의 말을 듣고, 이쪽으로 험악하게 돌리는 눈동 자는--화가 나 있는데도 예쁜, 연두색의 눈동자였다. "네가 감히,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이런 짓을 한 거냐!!" "....예?" 아스테린이 뒤에서 소리쳤다. "말할 필요 없어, 루사벨라!! 죽여버 려!! 몬스터야!! 마노테라고!!" 시나는 깜짝 놀라 아스테린을 보았다. 몬스터라니!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더욱 황당했다. "루사벨라! 저게 내 팔에 상처를 입혔어!! 너무 아파!! 흑흑..." 아스테린은 이제 거짓으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참 으로 말도 안돼는 누명이었다. 시나는 어이가 없어서, '루사벨라'를 보았다. '설마 이런 말도 안돼는 소리를 믿는 건 아니시겠죠?'라는 눈빛으로 루사벨라를 보았는데, 시나는 루사벨라가 그 말도 안돼는 소리를 그대 로 믿는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시나를 쏘아보는 눈길이 너무나 험악했고, 살기가 돌았던 것이다. 헌데 아니나 다를까... 루사벨라는 허리띠 왼쪽에 차고 있던 검 같은 것을 빼들었다. "네가 이렇게 했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소년!" 검 빼는 모습이 같은 여자지만, 참 멋있다...라고 생각한 건 잠시. 시나는 자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루사벨라를 보고 그 기세에 뒤 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니... 잠깐. 루사... 아니, 루온 루사벨라 님. 오해하신 거예 요... 전..." 그러자 아스테린이 새되게 소리질렀다. "죽여버려, 루사벨라!!" 덕분에 시나는 뭐라고 할말을 잊고 말았다. 다시 한번 변명을 해보 려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스테린이 비명 지르듯, '죽이라'고 소리 를 질러대서 시나는 차라리, 도망을 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까, 루 사벨라가 얼마나 날렵하게 뛰었는지. 100미터 21.22초 자리는 두세 걸 음만에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시나는, 상대방이 검을 크게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휘두 르자 검에 희미하게 빛나는 초록색의 빛이 맺혔는데. 그에 따라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겁먹고 말았다. 루사벨라 는 그 빛보다도 더 차가운 연두색 눈으로 말했다. "...단칼에 죽일 테니, 고통은 없을 거다. 소년." 그 무시무시한 말에 시나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건 말도 안돼!! 정말 나, 이 세계에서 안 죽는 거 맞아?!' 초록색으로 발광하는 빛이 시나의 눈 바로 앞까지 휘둘러 내려왔나 싶은, 찰나였다. 시나는 두 손을 들어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고, 엘야 시온을 원망하고 있었다. '엘야시온님, 거짓말쟁이!!' 하지만 바로 그때,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윽!!!" 익숙한 음성이라, 시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기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루드랫!!" 루드랫은 손을 들어 빛의 검 손잡이 부분을 막고 있었다. 초록색으 로 빛나는 빛은 이제 검신을 떠나 그런 루드랫의 손을 환하게 태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상당히 아픈 듯, 루드랫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 러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 종속자에게, 무슨 일입니까, 루이트여?" 그런 루드랫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루사벨라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 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손을 마주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후, 그 표정을 사라졌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손을 휙 뺐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는 검에선 빛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러자 루드랫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며 루 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옷소매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는데, 손 또한 화 상을 당한 듯 빨개져 있었다. 어쩌면 그 빛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 그 런지도 몰랐다. 루드랫은 잔뜩 놀란 표정의 시나를 보고 인상을 쓴 뒤, 루사벨라에게 또한 번 말했다. "뭔가... 시나가 당신에게 무례라도 행했습니까?" 하지만 루사벨라는 뭐라고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하고 싶 지만 말을 할 수 없는 듯, 단지 시나를, 그제야 처음 본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이, 이게 여자 애? 당신의 종속자라고... 난, 난, 남자애 인줄 알고..." 그 말투에 루드랫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그때였다. "루온, 루드랫!" 아스테린이었다. 시나와 루드랫,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을 보았다. 아스테린은 잔뜩 화 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대는 무례하군!! 내 루이트가, 마노테를 죽이려는 걸 막다니!! 그것도 내게 해를 끼치려 했던 마노테를!! 왕족의 피를 보게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대라도 어서, 그 마노테를 죽여!!" 루드랫은 그 말을 듣고, 아스테린의 팔을 보았다. 말 그대로 아스테 린의 팔뚝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루드랫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시나를 보았다. 그 묻는 듯한 눈길에 시나는, 억울 한 표정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루드랫은 입술을 깨물고, 아스테린을 보았다. 그녀의 외모를 보고 그녀가 누구란 걸 눈 치챈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스온 아스테린 님. 제 종속자는 너무 미천해 당신께 그런 해를 끼칠만한 능력 자체가 없으니..." "뭐야?!!! 그럼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말이야?!!" 루드랫은 아스테린의 앙칼진 말투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왕 족 소녀가 이 밤중에 왜 이러는 지는 신만이 아시리라. 시나가 이 왕 족 소녀에게 해를 끼쳤을 리는 절대 없고... 그렇다고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 하라'고 말하고 시나를 데리고 갈 수도 없다. 고민하던 루 드랫은 할 수 없이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도미니온즈의 왕족께서 거짓을 말할 리 없습니다. 제 종속자가 틀림없이 스온 아스테린 님께 해를 끼친 것 같군요." '뭐?!!' 구원자가 나타나 안심하고 있던 시나는 황당했고 아스테린은 의기양 양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그럼, 어서 그대의 종속자를 죽여!" 하지만 루드랫은 고개를 숙이고 한층 더 정중하게 말했다. "죽이겠 습니다." '에엥!!!' 시나는 놀라서 고개 숙인 루드랫을 보았다. "드, 드랫... 이, 이건 무언가 오해를..." 하지만 루드랫은 눈을 찌푸려, 시나의 말을 막았다. 그의 눈은, 시 나에게 조용히 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나는 입을 다물었다. 루드랫은 시나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스온 아스테린 님. 시나는 제 종속자니까. 제 종속자가 저 지른 죄에 대한 벌은, 마땅히 제가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선 저를 처단해 주십시오." "--!!!" 이 말에 아스테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루사벨라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루사벨라는 이미, 아스테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 치챘다. 비록 아스테린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 고, 분노해서 앞 뒤 잴 겨를도 없이, 마노테인지 몬스터인지 죽일 결 심이었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루드랫의 종속자가 스온 아스테린 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비록, 단 한가지밖에 생 각하지 않는 루이트일지라도 이런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왕족의 말이니, 루드랫이 어떻게 해결할까 했는데. 의외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비참하다고 해야할까,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스테린은 루드랫의 이런 말에 씩씩대며, 불쾌한 눈으로 루 드랫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뭐야! 어떻게 내게 감히 그런 말을! 내가 죽이라고 했으 면, 죽일 것이지...!!" 루사벨라는 자기가 나설 때인 것을 느꼈다. "스온 아스테린 님... 제발."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를 보았다. "너무 화 나!! 저 자가 하는 말 들었어?! 저런 미천한 제 종속자를 옹호하 며...!!" "스온 아스테린 님... 그것이 저들로선 당연한 일입니다. 클로니아 세스틴 님도 스온 아스테린 님을 위해서라면 동일하게 하실 겁니다. 게다가, 저들은... 직접 자신들의 입으로 말했듯, 미천하기 짝이 없어 서... 스온 아스테린 님 같은 분들의 자비와 은혜로만 살 수 있습니 다. 그러니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아스테린은 당황한 눈으로 루사벨라를 보았다. 아무리 흥분해 있다 지만, 자신의 루이트가 슬퍼 보이는 모습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게 다가 '클로니아 세스틴'의 이름이 나오니, 끝까지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루드랫까지 달려왔으니... 이 문제는 커질 수도 있다. 그전에 저 마노테를 죽여버렸다면, 아무리 문제가 커져도 미안하다고, 실수였 다고, 사과만 하면 끝인데.(마노테 하나 죽인 걸로, 누가 왕족에게 뭐 라고 따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열심히 사과하고, 보상품까지 내리 는데?) 하지만 그 계획은 모두 다 물 건너갔고 여기서 계속 트집을 잡 다간, 자신이 이일을 고의로 꾸몄다는 걸, 더욱 철저히 알리는 꼴이 다. 아스테린은 얼굴을 붉히고 투덜댔다. "쳇... 하는 수 없지. 좋아. 용서하겠어! 하지만 다음부턴 절대 용 서 못해! 루온 루드랫, 그대의 종속자, 잘 간수하라고! 쳇. 불쾌해. 가, 루사벨라!" 이렇게 하여 이 짧은 해프닝은 끝났다. 하지만 아스테린은, 돌아가는 길 내내 루사벨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침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루사벨라. 루온 루드랫과 루사벨라를 이런 식으로 만나 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무척 밤중이니까... 아무도 없을 테고. 그 종 속자만 불러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사람을 보내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하신 것도, 이것 때문 이었습니까?" 그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스테린이 말했다. "루사벨라를 위해서 그런 거야. 약간의 시간만 있었더라도, 그 마노테를 죽일 수 있었는데... 그럼 방해꾼이 제거되는 거니..." "스온 아스테린 님!" 강한 목소리였다. 아스테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루사벨라는 괴로운 눈으로 아스테린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팔까지 그런 꼴로 만들다니!! 왜 그런 일을 하신 겁니까?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 전 정말 그 여자애가 몬스터라도 되어, 당신을 습격한 줄 알았습니다!! 왕궁이니,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지만...!! 그런 생각 따윈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 랐는 줄 아세요?" 아스테린은 그 화난 말투에, 당황해서 말했다. "그랬어...? 하지만 이건 살짝 긁은 건데. 봐... 이젠 피도 그쳤잖아. 힐러에게 고치라고 하면 금방 이야. 그러니까 이건 괜찮아... 그 보단 루온 루드랫 말이 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제발!" 루사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자신의 주인과 눈을 맞췄다. "스온 아스테린 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그 자에게 어떤 감정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저를 위한 것이었 다면, 이젠 그만둬 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팔까지..."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 팔뚝엔 15센티 가량의 피가 말라붙기 시작한 흉터가 있었다. "제발. 당신이 어떤 몸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일개 루이트를 위하 여 이런 일까지 하지 마세요... 당신이 명령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전 결혼할 수 있습니다. 제 신분과 명성은 지금이라도 당장, 제게 맞는 남편을 찾을 수 있게 해 줄 테니까요." 하지만 아스테린은 루사벨라의 눈이 괴로움을 담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이런 식으로 언제나 올려다보던 자신의 루이트 눈을 가깝게 들여 다 볼 수 있으니 더 그랬다. "루사벨라..." 아스테린은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스온 아스테린 님..." 루사벨라는 슬픈 듯한 미소를 짓고, 아스테린의 등에 손을 돌려 마 주 껴안아 주었다. 그래서 아스테린은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마음이 통한다는 건, 아주 작은 순간이기도 하고 아주 큰 순간이기도 하다. '나도 루온 루드랫을 용서할 수 없어. 루사벨라... 어떻게 그는 루 사벨라를 못 알아 볼 수 있을까. 이렇게 루사벨라는 아직도 그를 좋아 하는데...' 루드랫은 잠시, 할말을 잊은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그 이름 을 발음했다. "루온, 루사벨라." 그리고 약간 뒤, 덧붙였다. "...그랬군.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 이 들었지. ...그 말투도." 시나와 루드랫은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시나는 루드랫에 게 상황을 설명하다가 초록빛 머리칼 여자의 이름을 말했다. 루드랫 이, 그녀가 자신의 옛 약혼녀라는 것을 아직도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아 말해 봤는데, 설마 정말로 눈치 못 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상해... 약혼녀가 아니었나?' 하지만 루드랫이 말했다. "그럼, 이건... 스온 아스테린 님이 자신 의 루이트 때문에 꾸민 일인가... 그 분께서 낮에 날 만나려고 했다 니." 그러다가 루드랫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나를 보았다. "...사 실, 그 루이트는 예전에 내 약혼녀였어." 시나가 놀란 눈을 지었다. 루드랫은 약간 우울하게 말했다. "맞아. 나도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생각중이야. 아무리 세월이 지났 다고 해도, 약혼까지 했던 여자라면 못 알아보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아직도 정신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하긴... 한 번도 그 여자의 얼굴 을 제대로 떠올려 본 적이 없지만. 디트가 그 동안 줄곧 말해 주지 않 았다면, 아마 그 이름조차도 잊었을 지 모르지... ...얼마나 많은 것 이 이런 식일까."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말투에 시나는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던 대로 스온 아피네스라는 공주님을 얻게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런 부분까지 낫게 해주지는 않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 손은, 디트에게 치료해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아 요?" 루드랫은 자기 손을 보았다. 벌써 빨갛게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엉 겁결에 검기가 실린 검을 손으로 잡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루사벨라가 검에, 아까보다 조금만 더 많은 검기를 냈더라 면 손에 그대로 불이 옮겨 붙거나, 아님 그녀가 전투 마인드 컨트롤이 었다면(마노테 하나 살해하는 데, 그런 수고 까진 필요하지 않지만) 매우 위험했을 것이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 게 검기라니. 처음 봤어요. 웅... 그러고 보면, 검 자체는... 뭐랄까...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검은 아니었지만. 날이 하나도 서 있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그분이 그걸 빼 들었을 땐, 그걸로 날 때리려는 줄 알았는데. 설마 손에서 그런 빛이 나올 줄이야... 그걸로 베면, 정말로 물건이 베여요?" 루드랫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안에선, 누구나 빼서 무기로 사용 할 수 있는 날이 선 검은 휴대하지 못한다. 단지 루이트들만이, 자신 이 섬기는 왕족을 위해, 그리고 의장용으로 그런 식의 날이 서지 않는 검을 휴대하고 다니는데... 무슨 일이 있어, 그 검에 검기를 실으면 아무튼 사람 목 같은 건 간단히 날아간다는 설명이었다. "그럼 정말로 죽을 뻔했네." 시나는 자기 목을 만졌다. "그 공주 님... 낮에 만났을 땐,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왕족이라 그런 가... 사람 죽이는 일을 그렇게 간단히 말하고..." 루드랫은 생각하는 눈을 짓더니 말했다. "그 공주님은, 힐라토 레이서스님의 여동생이야. ...만약 네가 처한 상황을 알았다면 조금은 다른 대우를 보여주셨을 거야. 아무래도 이번 일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 같으니까." "여동생이요?" 그렇담 두 명중에, 나머지 한 명이 그 공주님? "아... 하긴. 힐라토의 공주님이니까... 하하... 그렇구나. 하지만, 조금은 다른 대우라니... 그분이 사실을 알았다면, 난 정말 죽을 지도 몰라요. 그렇게 작아도 굉장히 거만하던데. 자기 오빠한테 안 어울린 다고..." 루드랫은 말했다. "힐라토 레이서스님이 계시는 한 스온 아스테린 님은, 네게 아까 같은 일은 못해. 그분이 널 지키실 거야." 그리고 루 드랫은 미소지었다. "...나보단 훨씬 더 잘." 루드랫은 시나를 보았다. "넬리가 내게 와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큰 일 날 뻔했지만. 다음부터도, 그런 식의 부름이 있다면 넬리 편에든 지, 누구 편에라도 내게 연락하게 해.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난 힐라토 레이서스 님으로부터 널 지키도록 명령받았으니까." "에... 네." 루드랫은 빙긋 웃고 다시 활기 있게 걸었다. "...잘된 일이라고 생 각해. 너 때문에 걱정을 했었는데. 힐라토 레이서스님은 좋은 분이시 지. 너도 그분을 좋아한다고 했고. 그러니 너는 앞으로 정말 행복하겠 군. 일이 이렇게 잘 풀려서, 두려울 정도지만. 하하... 그래도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야지." 시나는 루드랫이 밝게 웃자, 미소를 지었다. 루드랫이야말로 행복해 보인다. "음... 앞으로 스온 아피네스님이랑, 어디서 살지 정했어요? 이곳 클로니아라든지... ...아. 말하기 싫다면 말 안 해도 돼요." 하지만 루드랫은 말해 주었다. "글세. 이번 하누카의 날이 끝나면, 루이티온으로 돌아갈 거니까... 일단은 성전의 게이트가 열리게 돼. 그러면 차원이동을 해서... 힐라토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저번에 말했 던 대로 스온 아피네스님을 데리고..." 루드랫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어느 산 속이나, 아님 숲 속이라 도... 힐라토 레이서스 님이 계시니까, 힐라토 안에서 우릴 귀찮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루드랫의 목소리는 기쁘게 들렸다. 시나는 그런 목소 리를 들으며 말했다. "휴... 아무튼 엘야시온님이 실망하시겠네요." 루드랫이 말했다. "왜, 그분이 실망을? 그분은 이미 너와의 관계를 허락하셨어. 그 말은, 나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포기하셨다는 말이 지. 아님..." 루드랫은 시나를 돌아보았다. "뭔가, 내가 모르는 계획이 엘야시온 님께 있는 건가? 너와의 관계를 허락한 건, 허식일 뿐이고?" 그는 시나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분은 좋은 분이지만. 어떻게 보면 독단적이고 자신이 목적으로 한 걸, 쉽게 포기 못하는 분이시지. 요즘에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결투 건과, 성혼의 증인이 되도록 요구하시는 것까지. 그건 저번에도 말했듯, 내게 있는 적을 없애주려는 움직임이 고... 엘야시온님이 날 포기했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여기 엔 분명 무언가가 있단 느낌이지. 거기에 네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 고.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넌 힐라토님을 좋아해. 그러니 넌,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 일을 엘야시온님께 말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아?" 시나는 뭐라 말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루드랫은 상냥한 눈으로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는 어제와 오늘 상당히 밝아져 있었고, 표정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건 분명히 그 아피네스라는 공주님의 영향이다. 그걸 생각한 시나는 마침내 말했다. "드랫... 저어, 스온 아피네스 님과의 일은... 그러니까... 디트에겐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요... 난 이 이상은 말할 수 없지만." 시나는 안타까운 눈을 했다. "...말 할 수가 없어요." 그 말에 루드랫은 눈을 가늘게 떴고. 잠시 후, 미소 지었다. "...알 았어. 고마워." 하디트는 손을 다쳐 찾아온 루드랫에게서 방금 전 일어났던 사건을 전해 듣고 멍하니 말했다. "루온... 루사벨라 님? 그녀를 만났다고?" 루드랫이 말했다. "맞아. 그녀는 스온 아스테린 님의 루이트가 되었 더군. 네 말대로 라면 시골의 이름 없는 루이트 가문에서. 대단한 출 세야." 하디트가 우물우물 말했다. "아니... 대단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 루온 루사벨라 님은 어렸을 때부터, 상급 루이트의 자질을 지니셨으니 까. 그 아버지 되는 분도. 뜻이 있어 시골로 물러나 계셨던 거지, 결 코 실력이 없어선 아니었어." 디트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루드랫의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루드 랫의 상처를 치료하던 힐러 라이트의 색은 어느새 초록색이 되어 있었 다. 그 빛이 다시 붉은 색으로 바뀌는 사이, 하디트가 말했다. "...하지만 루온 루사벨라 님은 아직도 시골에 계실 줄 알았는데. 내가 힐라토를 떠나던 당시만 해도..." 그러더니 하디트는 망설이듯 말했다. "여기 계시다니 놀랐어. 그것 도 스온 아스테린 님의 루이트라니... 그래, 지금은 어떠셔?" 루드랫은 어깨를 으쓱한 뒤, 시큰둥하면서도 관조적인 미소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모르지. 맨 처음엔 그녀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시나를 방 에 바래다주면서, 시나와 이야길 나누다가 그녀가 루온 루사벨라라는 것을 알았지." 상처를 치료하던 힐러 라이트가 완전히 사그라졌다. "...뭐라고?" 이번에도 이상한 목소리였고, 루드랫은 이번엔 하디트의 얼굴을 주 의 깊게 살폈다. "알아보지 못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분은 네 약혼녀였어! 말도 안돼!"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글세. 나도 충격이었어. 네 말대로 라면, 난 그녀를 무척 좋아했던 건데. 기억이 전혀 안 나서. 그런걸 보면... 내 가, 네 입으로 듣는 과거의 날 그렇게 생소하게 여기는 것도 전혀 무 리가 아니지. 실제로, 자기 약혼녀조차도 몰라볼 정도니. 뭐... 그녀 가 그 사건이후 내 앞에 나타났다면, 기억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 은, 무리였던 것 같아." 그러나 하디트는 그 말에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 건... 말도 안돼! 과거의 넌, 그분께만은..." 그러더니 그는 벌떡 일 어났다. "내가 그분께 말씀드리겠어! 지금 네 상태를...! 결코, 마음 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루드랫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허둥지둥 나가려는 하디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디트." 하디트가 돌아보았다. "멀리는 못 가셨겠지?" 루드랫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멀리 갔어. 내가 여기 오고 나서 도 꽤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러니," 루드랫은 자기 손을 보였다. "괜 찮다면, 상처나 마저 치료해 줘." 그 말에 하디트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한동안 방안 엔 침묵이 감돌았지만 루드랫의 상처가 말끔히 나았을 무렵 하디트는 우울하게 말했다. "...너 그녀를 알아보아야 했어. 그분은 어쩌면 실망했을 거야. 본 심을 잘 내색 안 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널 진심으로 좋아한 것이 바 로 그분이었어." 루드랫은 아무 말도 안하고 단지 애매한 감탄사만 뱉었다. "흠..." 그러자 하디트는 분노한 눈으로 루드랫을 보았다. "네가 제 정신이 기만, 했다면...!" 루드랫은 주먹을 쥐었다 펴보고 다 나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자리 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역시...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라 그런지. 빠르고 쾌적하 군." "루드랫!" "...하지만 루온 루사벨라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어. 네 말대로 내가 무슨 딴 마음을 먹고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은, 어 쩔 수 없지. 네가 그녀에게 내 상태에 대해서 말해주겠다면 그것도 고 맙지만. 더불어 도대체 왜 그녀의 주인이 시나를 죽이려 했던 건지. 그것도 알아내 올 수 있다면 더욱 고맙겠지만. ...혹시 나한테 아직도 무슨 원한이 있어 그랬던 거라면. 괜히 애꿎은 시나한테 그러지 말고 내게 직접 오라고 전해 줘. 그럼..." 두 번째 막간. 시나는 가끔은 잠자기 전 어둠을 지그시 보며 그 어 둠을 그런 식으로 불렀다. 지금은 막간이다. 잠들면 또 하나의 세상으 로 들어가게 되고. 지금은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 연극배우로 친다면, 분장을 하고 역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 아침에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아마도 아침에 맞는 '첫 번째 막간'을 거쳐 잠을 깨 는(혹은 그쪽에선, 잠에 드는) 것일 테다. 사실은, 그 꿈 쪽에서도 자 신이 잠드는 그 순간을 두 번째 막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지 만 그렇다면. 첫 번째 막간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일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첫 번째 막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까... 그리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 첫 번째 막간을 거쳐 들어가는 꿈 의 세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런 생각은 잠들기 전 한동안 계속 되었고, 그런 반복적인 생각은 (그리고 어떻게 보면 아무 의미 없고 근거 없는 생각은) 깊은 잠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들 수 없을 때. 밤의 어둠을 보며, 또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해 잠시 쉬고 있을 뿐이라고. 피곤한 몸을 누이 자고 생각하면. 하지만 이 어둠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시나는 유독 낯설게 느껴지 는 침대 위에 누워 어둠을 보고 있었다. 초가 하나 켜 있긴 했지만 어 둠은 여전했다. 온 몸은 미지근한 물에 가라앉은 듯, 의식조차도 느슨 했다. 그 가운데 시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꿈을 꾼 적이 없다는 걸 기 억했다. 뿐만이 아니다. '꿈을 꾼 적이 없기' 때문에 때론 현실조차도 몽롱해져서, 요 며칠간은 기억과 생활이, 마치 군데군데 하얗게 남아 있는 지도 같이 불완전하고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 지도를 채우는 땅과 강과 산이 존재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하 얗게 지워져,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휴우..."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누웠다. "잘 모르겠네... 이젠 생각은 그만 하자. 자야지. 그럼 또 하루가 시작되 고, 돌아갈 날이 더 가까이 오는 거겠지..." 시나는 눈을 감았다. 두 번째 막간을 통하여 들어가는 일이 이제 더 이상 안전한 일도 아련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쩜 이리 도 잠들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두 번째 막간이라. 놀랐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시나는 어둠 속, 침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라 너무나 놀랐다. 그것도 이렇게 익숙한 목소리라 니...? 시나는 공포에 질렸다. "...누구...?" 그러자 그 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일시에 방이 환해졌다. 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침대 옆에 있는 사람은 한 손을 반쯤 들어올리고 있 었고, 바로 그 손에서 하얀, 은빛의 빛이 빛나고 있었다. 처음엔 어떤 형광등을 들고 있는 것인가 했지만, 빛은 그렇게 밝으면서도 국부적이 었고 비추는 빛은 그래서 단지 침대 주변만을 밝히고 있었다. 절대로 형광등이 아니었다. 이 빛은. 하얗게,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빛은 바로 손가락과 손바닥, 손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이 너무나 놀라워 시나는, 약간 뒤에야 그 불꽃을 손에서 타 오르게 하고 있는 여자 애(목소리가 여자 애였다)의 얼굴을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공포에 질려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 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여자 애의 얼굴은 바로 시나 자신의 얼굴이었 다. 비웃는 미소가 입가와 눈에 감돌고 있고, 눈 색은 이상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저 짧은 검은 머리칼과 저 서 있는 모습. 이런 두려운 일이 있을까? 한 밤 중, 잠에서 깨어나 자기 자신의 모 습을 봐야한다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바로 눈앞에 거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지만. 자신은 공포에 질려 몸이 빳빳하게 굳어 누워 있는 중이었고, 상대는 한쪽 발에 체중 을 실은 채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 경우, 생각나는 가능성이라 곤 단 하나였다. '귀, 귀신이다...!!!!' 아님,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리는 중이거나. 하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가위 특유의 느낌은 없었으므로, 귀신이었다. 하도 무서운 마음에 브 라우니들이 누워 있는 머리맡을 힐끗 보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 다. 잠들기 전까지 코를 골아대서, 불면증의 한 원인이 되었던 그들이 없었다. 시나는 얼굴이 창백해 져서, 이렇게 무서운데 왜 기절도 안 하고 있 는 걸까(기절을 안 해서 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기절 할 가능성 없다는 걸 알려주듯 정신이 계속 또렷또렷해지니,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은 이것도 엘이 멋대로 자기를 증거자로 삼아서 일어난 일인가 했지만. 그런 생각 지금에 와서 해보았자 별 소득 없고 아무튼 결론은 '무섭 다'였다. 그래서 시나는 인간이 그 상황에 닥쳤을 경우, 할 수 있는 최대의 행동을 했다. 시나는 그냥, 눈을 꼭 감았다. 죽어도 눈을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은 '이렇게 하고 있으면 귀신이, 나를 잠자는 걸로 알고 자기 볼 일 보고 나갈지도 모른다'였다. 하지만 이런 타조 같은 생각은 곧, 허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마. 나도 네가 무서워. 이렇게 뚜렷한 개 별자로 널 볼 수 있다는 것이. 언제나 너, 아니면 내가 존재할 뿐이었 는데. 정말 바보 같아. 그러니 눈을 떠. 나도 네가 섬뜩하지만 이야기 는 끝마쳐야 해. 어제 이후로 모처럼 찾아 온 기회야..." 시나는 결론 내렸다. '상당히 친근하게 말하지만. 그래도 눈을 뜨진 말자. 눈을 뜨는 순간, 괴물 같은 걸로 변하면 난 너무 무서워서 미치 고 말 거야. 제발, 빨리 사라져 주길. 아님, 이게 꿈이라면 빨리 깨 길.' 하지만 그 순간 뭔가 뜨겁고도, 차가운 것(어떻게 이 느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 시나는 믿을 수 없었다) 시나의 얼굴에 확 다가왔 다. "앗, 뜨거... 아니, 앗 차거워!!" 어찌되었든 고통스러운 감각이라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 며, 그것을 피해 고개를 숙이다, 그러다 그만 침대에서 밀려나 바닥에 떨어졌다. 쿵, 소리가 너무나 현실감 있게 들려 불길한데, 갑자기 방 안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정말, 바보 같아. 뭐야, 그 꼴이!! 하하하... 꼴불견 이야!! 하하..." 이것 또한 너무나 현실감 있게 들렸다. 덕분에 시나는 이번엔 불길 하긴 보단, 울컥한 기분을 느꼈다. '상당히 무례한 귀신이군!! 잠자던 사람한테 갑자기 찾아와 도깨비 불을 들이대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지!! 꼴불견이라니!!' 시나가 이렇게 침대 밑에서 화를 내는 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그치 고 목소리가 말했다. "어...? ...아아... 알았다...! 네가 화를 낸 덕분에, 약간 기분이 느껴져! 너 지금 날, 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정말로? 하하하-- 이 거야말로, 웃긴다!! 내가 귀신이면, 넌 뭔데!! 허깨비? 하하하...." 시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귀신이라면... 독심술도 있겠거니... 하지만 그때, 갑자기 침대 밑에 있는 시나 바로 위로 고개가 쑥 나 왔다. 하도 놀라서 또 비명을 지를 뻔했는데, 그녀는 빈정대며 말했 다. "바보 짓 하지마. 윤시나. 모처럼 그런 뚜렷한 의식을 갖고 있으니, 처음으로... 우리, 이야기 좀 하자고." 그녀는 생긋 웃었지만 친절한 웃음이기 보단 차가운 웃음이었고. 그 래서 그건 '인간다워' 보였다. 그녀는 그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네, 잘나신 파이오니온 님에 대해서. ...이 부분에 대해선 우리 의 견이 맞는 것 같으니. 기꺼이 네 의견을 존중해 내가 양보할 수도 있 어. 그 마녀를 죽이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만. 루드랫에 대해서라 면."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식었다. "네 뜻 대론 안돼. 날 방해하면 너 라도 죽일 테니. 이 멍청한 칼루스온아." 시나는 그 무섭도록 차가운 눈빛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파이 오니온 님? 마녀?" 루드랫이라니? 하지만 이 모든 알 수 없는 일보다. 왜, 이 여자 애... '자신'의 분노가 이렇게 뚜렷하게 느껴지는지. 시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시나는 얼마 후, 너무나 뚜렷하게, 너무나 직접적으로 느껴 지는 의견. '도저히 잘못 해석할 수 없는' 의견을 듣고, 믿을 수 없어 하고 있었다. 시나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그쪽 시나도 그랬다. 주위 는 아직도 고요했다. 하지만 어느 상황이든, 이 요구에 대한 결론은 하나였다. "...안 돼!" 시나는 이젠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가셔서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드랫은 자유로워 질 거야!! 난 드랫이 얼 마나 아피네스 공주님을 사랑하는지 알아!! 내가 그 옆에 있을 이유는 없어!!" 그러자 상대는 더욱 낮게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쟁이!!! 옆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어째서? 거절 받는 게 두려워서?!! 상처 받을 까봐?!!" "무슨 소리를... 무슨 상처? 그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야! 난 드랫 을 좋아하지만, 남의 사랑하는 사이를 갈라놓을 만큼 그... 뭐야... 남편이니 뭐니로 삼을 생각 없어!!" "닥쳐!!! 누가 누굴 사랑해?!!!" 상대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 사람은 내 거야!!" 시나는 혼란한 얼굴을 했다. 이 마음... 이 마음이 왜 이토록, 한순 간에 가슴을 꽂는 걸까? "...아니야..." 시나는 힘들게 말했다. "난, 드랫을 꼭 남편으로 할 만큼... 그를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 내 가 아까운 사람은, 파이오니온 님... 상황만 되었더라면... 그랬더라 면, 난... 파이오니온 님과..." "정말로 그랬다간, 그 마녀는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그리고 상대는 시나를 밀쳐, 침대에 눌러 붙이고 시나의 숨통을 죄 었다. 중량감은 없었지만, 무서운 스피드라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너도 죽여버릴 거야!! 내가 못할 줄 알아?!! 그러니까, 내 명령을 들어--!!" 밀쳐져서 한동안 정신이 없던 시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그 눈을 통하여. 마치, 두 개의 마주본 거울 사이에 선 것처 럼... 시나는 반복되는 무한한 영상. 자기 자신의 모습. 한없이 되풀 이되는 그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냐... 예전엔 어땠을 지 몰라도. 지금 넌... 내 동의 없이는 그런 일을 못해. 이런 두 번째 막간을 통해 들 어와 있는 순간이라도... 이 힘을 준 건 너야. 그러니까, 난 이 힘으 로..." 시나는 한 손을 들어올려 상대--바로 자기 자신의 볼을 감싸고, 슬 픈 목소리를 냈다. "내가 지킬만한 사람들을 지킬 거야. 파이오니온 님도. 드랫도... 그리고, 어쩌면 너. 바로 나 자신도." 상대의 눈에 분노가 불타올랐고, 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넌, 할 수 없어! 그렇지 않다면...!" 시나는 목이 졸려 괴로운 나 머지,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네가 날 찾아와 말을 할 리 없 으니까!! 그러니 제발 사라져!!! 이게 내 의지야--!!!" 갑자기 손에 힘이 풀렸다. 시나는 눈을 떴다. 눈물 어린 눈으로 보 기에도 상대는 창백한 얼굴에, 절망한 표정이었다. 그 애도 울고 있었 다. "왜..." 그 애는 고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안 돼? 제발. 무엇 을 두려워 해? 내가 애원할게. 내 부탁을 들어줘. 루드랫에게 찾아가 서, 약속을 지키라는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그 사람은 책임감이 강하 니까, 그럼 언제나 네 옆에 있어 줄 거야... 바로 내 곁에. 이렇게 애 원할게. 부탁이야... 제발... 제발... 난 사과를 해야 돼. 그리고 보 상도 하고 싶어.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시나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보상을 한다는 건지, 무슨 사과를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독한 악몽이다. 아니면 지독한 현실. "...사과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모르는 게 당연해! 하지만 난 알아! 그러니 지금은 내 말을 들어!!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바로 그 사람이 세렌시스니까!!!" 세렌시스... 시나는 그 이름이 무거운 추처럼, 마음속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세렌시스... 그게 누군데. 난 그런 사람 몰라." 시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아... 엘야시온님이 말씀하 신... 하지만 난 모르는 사람이야. 그 사람도 엘야시온 인인데.. 당연 한 일이지." "안돼. 제발..." 상대의 눈물이 뚝뚝 얼굴로 떨어졌다. 시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떻 게든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모르겠어. ...이 세계는 정말로 지독해. 파이오니온 님을 만난 건 좋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 마음이 둘로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상대는 젖은 목소리로 시나의 귀에 속삭였다. "너를 증오한다. 윤시 나. 내가 할 수 있던 과거의 일들 중에. 너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일 을 가장 후회한다... 이런 애원... 이런 내 한탄... 이걸 무시한 대가 를 맛보게 해주겠어. ...네 말대로, 네 소중한 것들을 잘 지켜. ...아 주 소중한 마음으로. ...그럴수록 그것이 파괴되었을 때, 네 괴로움은 더욱 커지겠지. 내 어리석음... 그 증거인 너. 언젠가는 네 피를 내 손에 묻히고 말 거야..." 시나는 눈을 감았다. 그건 시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었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3- 관련자료:없음 [25524]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1:20 조회:1131 다음날 아침 시나가 눈을 떴을 때, 시나 베개 주변엔 브라우니들이 흩어져서 시끄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모든 광경은 여전했다.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도 여전했다.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만졌다. 머리가 지끈거릴 줄 알았는 데, 그렇지도 않고 머리는 맑고 깨끗했다. 그래서 기억도 뚜렷했다. 이해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똑같은 자기 자신이라니?) 꿈 인 걸로 여기기로 했지만. 기억은 아침 무렵 식사할 때까지 여전하게 남아 있어, 시나는 인상을 쓰고, 넬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일에 대해 이미 넬리에게 감 사인사를 한 뒤였다. "저어... 넬리. 혹시 이곳엔... 자기 자신이랑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 나는 귀신같은 것, 출몰하지 않아요...? 뱀파이어도 있고... 오크에... 별별 괴물들이 다 있으니까." 시나의 이런 말에 넬리는 방긋 웃었다. "예에. 있어요. 이런 제일로 트엔 없지만 성역 근처의 숲이랑... 펼쳐진 땅, 깊숙한 곳엔 도펠갱어 라고...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어 나타나는 몬스터가 있어요. 하지만 일 부에선 그걸 몬스터가 아닌, 사신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도펠갱어가 그 렇게 자기 자신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은 얼마 후 틀림없이 죽게 되니까요... 그 몬스터가 모습을 훔쳐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데. 그래서 그런지 도펠갱어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신은 금방 썩거나 문드러져 버린다고 해요... 호호... 아가씨도 그런 말 듣지 않았어요? 할머니들이 그러시잖아요. 그 중 신기한 이야기가... 도펠갱어란 먼 숲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인간 사회에서, 인간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열 명 중 한 사람은 바로 인간의 모습을 훔친 도펠갱어이다. 그 도펠갱어들은 인간과 너무나 동화되어 자기들조차도 자신들이 도펠 갱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문지기들도 그들의 정체를 알 아 볼 수 없대요... 무시무시하죠? 도펠갱어조차도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으며 인간 가운데 섞여 생활하다니... 몬스터들은 자아가 없기 때문 이라든가... 아무튼. 그래서 오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들은 습관 적으로 성전에가 금식을 하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죠. 자신이 과연, 진짜 주인의 모습을 빼앗아 그 사람인 척하는 도펠갱어인지 아닌지...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쩐지 이상해서... 할머니는 그러니까, 착한 아이가 되라고. 도펠갱어는 악마니까 나쁜 아이만 찾아간다고 했을 때 말이에요... 무섭긴 하지만 묘한 느낌이 들었죠..." 시나가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 그럼 그렇게.. 혹시 성전에 가서 기도를 하고 나서요. 자신이 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도펠 갱어는 어떻게 되나요?" "호호... 글쎄요. 그거야 모르죠.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건 그 모습을 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니까... 인간을 살해한 죄로 엘 에게 벌을 받아 죽겠죠. 그냥 사라진다던가. 아무튼 몬스터에 악마, 사 신이니까요. 그런 거에 대해선 아이들 버릇 길들일 때나 말하면 되요. 건전한 성인이라면 그런 건 생각 안 하는 게 낫죠. 나쁜 생각과, 나쁜 말은, 나쁜 일을 불러들이거든요." 도펠갱어라... 시나는 오후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기억은 시간이 지 남에 따라, 흔히 그렇듯 생생하긴 보단 윤색이 되고 모호해 지고 있었 지만... 시나는 혹시 그렇다면 어제 자신이 만났던 '자기'가 도펠갱어 라는 몬스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왕궁엔 그런 몬스터들이 출입하기 어렵다고 했고. 브라우니들에게 물어도, 자기들은 잠자느라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럼 역시 꿈이었나... 어제 스온 아스테린 공주님을 만나고 상당히 충격적이었으니까. 헌데 드랫을 차지하라느니, 어쩌니 하니 그런 낯부 끄러운 꿈이라니...'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꿈은 반대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다. 난 엘야시온에서 절대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죽이겠다 는 협박까지 듣고. 후유... 알 수가 없어.' 힐라토 프레미어 루이트의 결투 사건에 대해선 어린 루이트들 간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지금. 루카나안은 존경하는 마스터인 루온 루파르테의 방에 불려와 명령을 듣고 있었다. "네가 내 파에서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으니, 너에게 명령하는 거다. 루온 루카나안. 내가 직접 그놈을 박살내고 싶지만, 내가 그놈과 싸우는 건 내 주인의 명예에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니. 알겠나?" 루카나안은 마스터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지만 그에 앞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서 이겨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철제가 아닌 무기라니... 마스터. 철제가 아닌 무기 말고 그럼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 까? 철제로 된 것 외에, 검기를 실을 수 있는 무기가 또 있습니까?" 자기 스콰이어의 질문에 루파르테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당연히 그런 무기는 없다. 그래서 루카나안을 특별히 지목한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루파르테는 불 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루온 루카나안. 넌 루온 루사벨라의 파에서 교육을 받았지?" "네." "그럼 거기서 받은 교육 중에, '무술'에 관련한 것도 있겠군." "무술이요?" "그래. 무술. 그것이 비록 천박한 것이긴 하지만. 네가 싸울 자는 그 천박함을 주무기로 하는 자다. 그러니 오늘만은... 알겠나? 너도 그 무 술이라는 것을 이용해 싸워라.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지. ...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우선은 이겨야 하니." 루카나안은 마스터의 이런 말에 잠시, 뭐라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내 말에 토달지 말아라, 스콰이어!" 루파르테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제가 아닌 무기로 검기를 낼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다룰 줄도 모 르는 일루티온들의 활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아트가 걸린 목검이 지급될텐데. 기본 훈련에서 너도 봤듯이, 목검은 검기를 실을 수 없다 뿐이지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다. 더구나 그 자가 사용하 는 무술이라면..." 루파르테는 속으로 다시 한번 더 투덜댔다. 그놈이 완전히 루이티온 의 몸이 되었을 때, 결투를 신청하는 거였는데.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일 줄이야. 자신의 경솔함이 천추의 한이었다. 하지만 루파르테의 생각으로 이 결투는 아예 승산이 없는 것만은 아 니었다. 무술이라면 이쪽도 그걸 익혔고(루파르테는 당연히 루카나안이 루사벨라에게서 그걸 얻었으리라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무술'은 오랜 시간을 통하여 힘들게 익히는 개념이 아닌, 이미 존재하여 얻는--검기 와 같은 식으로--개념이었다.) 더구나 저쪽은 20년 동안 마노테오나에서만 살았으므로 루이티온다운 훈련이라든지 싸움법 같은 건 연습도 안하고 빈둥빈둥 지냈을 것이다. 그래서 루파르테는 일어나 자기 스콰이어에게 '믿는다'는 눈빛을 보내 며 말했다. "루온 루카나안. 네가 배운 무술로 놈에게 제 주제를 깨닫게 해줘라. 놈이 그토록 자신하던 무술. 이쪽도 심심풀이로 그 정도는 익히고 있다 는 걸 보여줘." 그 말에 루카나안은 당황했다. 자신이 '무술'을 익히고 있었나하는 생각이었지만 루사벨라의 연병장에서 훈련하던 스콰이어들을 떠올렸다. 달리기. 끝없이 계속되던 푸쉬업. 무거운 물체 들어올리기... 하지만 그런 '무술'을 하는 놈들이라도, 실전에선 루카나안에게 상대 가 못됐다. 그것이 검기를 전혀 내지 못했던 목검싸움이었을지라도. 루 이트는 훈련이 아닌 파워즈의 수호를 받아 태어나는 존재이고, 자신은 최고의 혈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길 수 있을 거다. 그런 반쪽 루이트 따위. 이런 자신감으로 무장한 루카나안은 힘차게 대답했다. "네. 마스터. 저, 힐라토의 루이티온 루카나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 다! 마스터의 명대로 꼭 그를 이기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루카나안은 자기와 결투할 상대를 보고 그가 생각보다 그럴 듯한 모 습이라는 것에 놀랐다. 반쪽만 루이티온이고 나머지는 마노테라기에, 생각하기를, 키도 작고 볼품없는 남자일 줄 알았는데, 모습만은 보통 루이트들과 같았던 것이다. 거기다 그 눈빛이라니. 최소한도의 무장을 하고 나온 그는 결투하기 전 먼저, 루카나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에? 저 사람이 힐라토 인이라면, 상급 루이트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잖아? 우리 마스터와 비슷하네. 하지만 뭐...' 루카나안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가 이길텐데. 그것 도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루이티온의 결투를 참관하기 위한 구경꾼은 굉장히 많았다. 기슬러월 14일.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거의 가시고, 다이아몬드 더스트 후의 짧은 화 창한 날씨가 시작되려는 기미가 보이며, 어떻게 보면 소토너먼트전 때 보다도 많은 구경꾼이 모인 듯 했다. 거기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나와 있었다. 결투의 증인들도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힐라토의 하온 하겐트와 칼리안 파이오니온 율리시스가 그들이었는 데, 그들은 엘야시온 가디엘 양옆에 있었다. 루카나안과 루드랫은 자기들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들 앞으로 나섰 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두 사람을 보며, 루카나안이 과연 루파르테를 대신하여 싸울 것인지 확인하고, 양측의 주장이 아직도 그대로인지 확 인했다. 루파르테나 루드랫, 모두 다 자신의 주장의 철회하지 않았으므 로, 결투는 이루어지게 되었다. 무기는, 예상대로 목검이었다. 루카나안과 루드랫은 주어진 목검 외의 암기나, 무기는 사용하지 않 을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아트라든지 속임수를 사용하여 결투에 임하 지 않을 것도 맹세했다. 거기까지는 언제나 있는 결투절차였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정작, 문 제는, 결투에 들어가고 나서야 밝혀졌다. 루카나안은 루드랫이라는 자 와 싸우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맙소사! 마노테의 몸이라고 했으니,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지 않 을 텐데, 이렇게 빠르다니! 게다가 이 힘!!' 루카나안은 검기를 쓰지 않고 싸우는 것이니, 그냥 가벼운 마인드 컨 트롤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야 한다는 후회 가 절실히 들었다. 상대의 내리치는 속도는 루카나안보다 두 배정도 빨랐다. 그 말은 즉, 내리쳐 오는 검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순간, 또 동일한 속도로 다른 곳에서 공격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상대와 싸우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으나, 루카나안은 잘 알 수 있었다. 움직임이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에너지 낭비를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섬뜩할 만큼, 상대의 약점을 찔러온다. 게다가 이 모든 동 작에는 어떤 절도와 순서가 있었다. 전에는 한번도 이런 상대와 싸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루카나안은 충격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인 것은, 몇 합이 오고가고 나서야 희미하게 느낀 것으로, 상대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다 끌 어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건 같이 싸우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얼핏 상대도, 힘겹 게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검을 내리치면 끝 날 상황에서 검을 회수하여 뒤로 물러나거나, 잠시 옆으로 비켜나는 일 을, 교묘하게,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이제 겨우, 루이트의 피에 눈을 뜬 스콰이어를 가르치는 검술훈련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얼마나 차이나는 실력이기에, 이런 식으로 연극을 하며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루카나안은 더할 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들고 있는 것이 보통 검 이기만 했더라도, 자신도 자신의 최대 힘을 끌어낼 수 있을 텐데. 관중들은 감탄을 하며 이 '막상막하'의 싸움을 보고 있었지만... 루 카나안은 마침내, 모욕을 견디다 못해 검이 다시 맞부딪칠 때, 씹어 뱉 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제기랄! 이런 식으로, 날 모욕하는 겁니까!!!" 자기도 모르게 경어가 나왔으나, 어쨌든 상대방의 눈엔 놀라움이 스 며들었다. 어쨌든 루카나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듯 했다. 다음 번 검을 부딪칠 때, 상대가 빙긋 웃으며 말한 것이다. "난 이 상황에 맞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소, 오더." 그 말에 루카나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제 온몸에 땀이 흐르 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는데 상대는 지금 막 침대에서 일어난 듯, 평 안한 얼굴이었다. 싸운 지 겨우 십 분이 넘었을까. 이런 식으로 부지런 히 몸을 놀려야 했던 적은 없다. 루사벨라의 연병장에서 죽어라 달리기를 했을 때도, 이 정도로 호흡 이 거칠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말은 상대의 다음 말이었다.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오. 평소와 같이 싸웠다면, 난 그대의 검기에 무사하지 못했겠지." 다음으로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이 정도가 정당한 것 아니겠 소? 거기다..." 다음 번 합에 상대는 빙그레 웃었다. "그대는 나완 달리, 중요한 앞 날이 있으니까." 루카나안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오랫동안 몸을 쉬어서 그런가. 아슬아슬하군." 엘야시온이 그렇게 혼잣말하자 율르스가 말했다. "몸을 쉬다니요?" "응? 아니, 아무 것도 아닐세." 루드랫이 뒤로 밀리는 모습을 보며 엘야시온 가디엘은 눈을 찌푸렸다. 루드랫의 실력을 믿고 있었는데. 설 마, 여기서 지는 건 아닐 테지만. 재차 루드랫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 며 불안해 졌다. 관중들은 그들의 계속되는 싸움에 탄성을 지르고 있었 다. "...끄응. 결투가 상당히 오래가는군." 율르스는 못마땅한 듯한 엘야시온 가디엘의 말에 빙긋 웃었다. "그렇죠? 한쪽의 실력이 월등히 좋은 데도 저렇게 시간 끄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월등히?" 가디엘이 투덜대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비슷한 것 같네 만. 루온 루드랫 쪽은 저런 몸인데. 그래도 잘 싸우는 편이라고 생각하 네." "하하... 그렇습니까?" 엘야시온 가디엘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지만 율르스로선 아무래도 좋 았다. '흐음... 저것이 [무술]이라는 건가. 칼리안 일루티온 전사들의 무술 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괜찮은걸. 하지만 저래서야.' 율르스도 어느 면에선 못마땅했다. '왜 저런 식으로 연극을 하는 거지? 싸울 마음이 없었다면 루온 루파 르테가 고발했을 때, 그걸 시인하든지 할 것이지.' 루드랫이 결투를 받아들였을 땐 자기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뿌 듯하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상대가 성에 차지 않아 갖고 놀다, 이길 속셈인가? 관중들을 위한 재주 부리기?' 그렇더라도 저런 설렁설렁한 모습이라니. 싸움을 좋아하는 율르스로 선 불쾌했다. 그걸 모르는 엘야시온 가디엘은 겐트온에게 말을 걸었다. "칼리안 파이오니온이 이렇게 말하는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루 온 루드랫도 꽤 잘 싸우고 있지 않나?" 하지만 겐트온은 앞만 뚫어져라 볼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온 하겐트? 이보게, 하겐트!" 겐트온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엘야시온 님." "원 사람두. 무슨 구경을 그렇게 열중해서 하나. 그래. 그토록 열심 히 봤으니. 자네는 어떤가? 어느 쪽 실력이 나은 것 같아?" 엘야시온 가디엘은 겐트온의 얼굴이 이상하게 푸르스름하다고 생각하 며 물었다. "어느 쪽 실력이요? 저는... 글세.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둘 다, 무 척 빠르다는 것밖에는." 겐트온은 마른침을 삼키고 힘들게 웃었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정 의가 승리하겠죠." 가디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 경우, 정의는 아무래도 상관없네. 이기는 건, 루드랫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에잉...'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뜻밖에도 루드랫이 루카나안의 검에 밀 려 뒤로 넘어졌을 때. 엘야시온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릴 수밖에 없 었다. 그건 결정적인 광경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정의는 루파르테 쪽에 있었 다고, 환호성을 올렸다. 루카나안은 검을 들어올리고 있었고, 쓰러져 있는 루드랫에게 다가가 그 검을 루드랫의 목에 겨눴다. "헉헉... 제길.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루카나안을 보던 루드랫은 자기 목에 겨눠진 날카로운 목검을 보았 다. 그는 미소지었다. "글세. 어쨌든 죽기는 싫으니. 당신에게 자비를 구합니다." 루드랫은 자기 가슴에 꽂힌 흰 손수건을 뽑았다. 그걸 건네는 건 자 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는데. 루카나안이 그 흰 손수건을 보며, 집어치우라고, 어서 빨리 일어서서 검을 집으라고 말할 찰나--루카나안 은 너무나 자존심이 상해서, 자신이 마스터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증인 석에서 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인정할 수 없어!" 땀을 줄줄 흘리던 루카나안은 깜짝 놀라 증인 석을 보았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벌떡 일어나, 말하고 있었다. "무슨 결투가 이따위인가?! 다시 싸우게!!! 돌에 걸려 넘어진 상대에 게 검을 겨누다니!! 그러고도 루이트인가?!!" 루카나안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잖아도, 너무 실력 차가 나 자존 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엘야시온이 그걸 지적하니, 혹 그가 그 의 능력으로 이 상황을 꿰뚫어 봤나, 지레 걱정이 되고 부끄러움이 밀 려왔다. 하지만 루온 루파르테 쪽에선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야 시온님... 돌에 걸려 넘어졌든 뭐에 걸려 넘어졌든, 그것도 실력인 데... 저 자도, 그걸 인정하고 흰 손수건을 건네려고..." "닥치게!! 나, 엘야시온 가디엘은 이런 식의 결투는 절대 인정할 수 없어!!" 엄밀히 따지면, 루온 루파르테의 말이 백 번 옳았다. 하지만 엘야시 온 가디엘이 하도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니, 루온 루파르테는 입을 다 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이젠, 앉은 자세에서 보던 루드랫은 곤란한 눈으로 힐라토 레이서스 쪽을 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레이서 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야시온 가디엘 님. 제 루이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 니다만..." "힐라토 레이서스!! 자넨 거기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잘 보지 못한 거 야!! 이 명백한 부정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나? 나, 엘의 대제사장 이?!! 신성재판이라도 해야할까?!!" 이런 일로 신성재판까지 소집한다는 건, 너무 과한 일이었지만 엘야 시온은 하도 분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굽힐 생각이 없는 듯, 꿋꿋이 말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루이티온의 결투입니다. 이미 결판이 난 사실은 이제 아무도 번복할 수 없습니다." "--!!!" 엘야시온은 허를 찔린 기분으로 힐라토 레이서스를 보았다. '저 놈이!!! 아무 원한 없다고 해놓고!!! 그렇담 루드랫에게 결투를 신청하도록 한 건, 저 녀석의 본심이었단 말인가!! 이럴 수가!! 저놈이 어떻게 이럴 수가!! 누가 사이너스와 헤르가스의 아들이 아니랄까봐!!" 시나는 관중들 사이에 섞여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 굉장한 대립이다. 드랫의 결투보다 이쪽이 더 쟁쟁한데... 거 기다 디트는...' "제길! 엘야시온님의 말씀이 백 번 옳아요!! 제대로 싸웠다면, 루온 루드랫 님... 아니, 루드랫은 절대지지 않았을 겁니다!! 시나!! 당신은 그 옛날 토너먼트 전을 봤어야 해요!! 이 따위 싸움! 제길!! 거의 이겨 가고 있었는데!! 당신도 봤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 네..." 시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여기저기 갈등이 하도 첨예하게 대립하 고 있어서, 시나로서도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의 해결책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증인 석에서 갑자기, 다른 외침이 터져나왔다. "나 또한. 지금 결과에 대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다시 싸워 야 합니다!" 칼리안 율리시스였다. 힐라토 레이서스와 루드랫은 놀라서 그를 보았 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뜻밖의 원군에 기뻐하며 말했다. "오-! 율르스!! 역시 자네는 제대로 보았군! 역시 자리가 좋아야 해!!" 레이서스가 말했다. "칼리안 율리시스! 그대는 정당한 결투에, 정당 한 결판을 부정하는 겁니까?!" "힐라토 레이서스. 엘야시온 가디엘 님의 말씀대로, 그대는 그쪽 자 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결과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겁니다." 율르스가 이렇게 대답하자,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렸고, 레이서스 옆 자리에 있던 칼리스나는 당황했다. '칼리안이 왜 저러지? 평소엔, 레이 말이라면... 정말 정당한 결판이 아니었나... 아이 참. 어찌되었든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이지. 레이가 이 렇게까지 말하는데!' 루파르테는 루드랫을 몰락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의 모습에 감동 했으나, 그만큼 엘야시온 가디엘에 대한 분노는 컸다. '젠장. 눈에 보이는군. 눈에 보여. 뻔한 결판에 저렇게 까지 노골적 이라니. 이거 원 더러워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증인 셋 중에, 증인 둘이, 결과에 대해 부정 하고 나섰으므로 결투는 다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연기하겠 냐는 질문에 두 명 다 지금 싸우겠다는 말을 했음으로 결투는 곧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첫 번째 결투의 여파가 있긴 했지만, 힐러에게 치료 받으면 되므로 상관없었다. 첫 번째 결투와 틀린 것이 있다면, 그건 무기였다. 프로텍트 아트가 걸린 검이었는데도 목검은 목검이라 힘껏 부딪치는 와중에 검에 손상이 가, 어쩌면 두 번째 싸움에선 완전히 부서질 수도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결투를 위해 무기를 바꿔야 했다. 그리고 무기를 바꾸는 과정에서, 엘야시온 가디엘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하도 흐뭇해 무기 선택권을 달라는 율르스의 청을 들어주었 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힐러에게 치료를 받은 루드랫과 루카나안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율르 스가 내온 것은 놀랍게도 '유리 검'이었던 것이다. "율르스!! 어떻게...!! 내 허락도 없이, 유리 검을!" 율르스는 빙그레 웃었다. "허락은 이미 해주셨지 않습니까? 철제만 아니면 어떤 것이든 괜찮은 것이지요? 무기 선택권을 제게 주셨으니. 전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당한 무기를 가져오도록 한 것입니다." '유리 검'이 무언지, 루드랫과 루카나안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 다. 왜 엘야시온 가디엘이 이렇게 흥분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안 파이오니온이 손수 검 집에서 빼어주는 검을 받는 순간, '유리 검'은 말 그대로 유리 검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드랫과 루카나안, 둘 다 놀란 눈으로 그 투명한 검을 보았다. 이것 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철제 검보다도 날카롭게 보였다. 하지만 다음으 로 이어진 칼리안 파이오니온의 말이 더욱 놀라웠다. "...이 검엔, 검기를 실을 수 있다. 그러니 루이티온답게 싸우도록." "칼리안 율리시스!" 엘야시온 가디엘은 당장 무기를 거둬들이도록 명령하려 했지만, 그렇 게 할 뚜렷한 근거를 찾을 순 없었다. 이 무기는 아직 미발표의 것이니 공개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하고 다시 거둬들일 수도 있었지만. 이미 각 좌석에서 파이오니온들이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씩하고 있었다. "오-! 저것이 유리 검! 이것 재미있겠는 걸!" "소문으로만 듣던 걸 보게 되다니!" "검기를 실을 수 있다니!! 하하... 이거, 목검으로 싸우는 것 보단 훨씬 합당한 결투가 되겠는걸!" '합당한' 결투라는 데에는 가디엘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일부러 목검을 사용하도록 해, 루카나안 쪽에 핸디캡을 두었지만. 자기 자신도, 이것이 불공평한 결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칼리안 율리시스!! 두고 보자!! 이놈...!!' 엘야시온 가디엘은 분노한 눈으로 율르스를 쏘아보고, 주의 점을 알 려주는 자리에서 루드랫에게 넌지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속삭였 다. "되도록 빨리 해치우게. 그렇지 않으면..."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이 넌지시 말한 것 치고, 율르스는 매우 노골 적으로 말했다. "...이번엔 어디까지, 재주를 부리나 보겠어." "--!" 그리고 율르스는 씨익 웃고, 루카나안을 가까이 불러들여 뭐라고 귓 속말했다. 힐러에게 치료 받았다곤 하나, 아직도 싸움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붉어진 볼을 하고 있던 소년은, 율르스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은 넓은 경기장을 헤매는 듯 싶 었지만, 곧, 목적했던 것을 발견하고, 굳은 표정으로 율르스에게 고개 를 숙여 보였다. 멀리서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서스는 쓴웃음 짓고 있었다. 율르 스의 행동에 당황하긴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 다. "유리 검이라. 저 루온 루드랫은, 이젠 말 그대로 파워즈다운 싸움을 하겠군. 그리고 철저히 깨지겠고." "호호... 칼리안이 저런 생각이었을 줄이야. 역시... 힐라토님? 칼리 안은 힐라토님에게 반대하는 생각은 잘 안 하죠." 동생이 하도 유리 검에 대해 읊고 다녀서 유리 검에 대해, 잘은 아니 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칼리스나는 이렇게 말했다. 루파르테는 레이서스와 칼리스나가 하는 말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 했지만, 그는 아직 '유리 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힐라토님. 저 '유리 검'이라는 것은 도대체... 목검과 저것이 틀린 점은..." 레이서스가 말했다. "저건, 철제는 아니지만 검기를 실을 수 있는 검 이야. 아주... 아름답지." 루드랫은 자기 손에 들린 가볍고도 아름다운, 투명한 검을 감탄한 눈 으로 보았다. 스스로 무사였으므로 이런 검에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 다. 게다가 여기엔 검기까지 실을 수 있다니? 내리치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데. 보석이 섞이기라도 한 건지. 희한했다. 검기가 가장 잘 통하는 물체는 높은 순도를 가진 보석이라고 하니까. 어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강하고. 이런 물건으로 '질 수' 있 다니. '괜찮은 걸.' 비록 칼리안 율르스가 뭔가 눈치챈 듯한 말을 했지만. 그래도 변할 것은 없다. 자신은 이 결투에서 질 것이다. 루드랫은 힐라토 레이서스 쪽을 힐끔 보았다. 레이서스는 루드랫이 자기를 보다는 것을 알고 가볍 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야시온 가디엘에겐 무척이나 미안했지만. 이것만이, 그가 자신에게 가진 이상하도록 높은 기대와 관심을 무산시킬 방법이었다. 게다가 첫 번째 싸움에선, 상대의 실력이 너무나 낮아 연극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틀리다. 저 소년이 싸우는 모습은 유리 궁전에 온 첫날 보았고. 이 검이 정말 검기를 실을 수 있다면, 두 번째 싸움에선 어쩌면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루드랫은 굳은 결심을 하고, 그 아름다운 유리 검을 한번 붕, 휘두르고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 결투 내내 통틀어, 최악의 뜻밖의 일은 바로 그때 일어났 다.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듯 싶던, 루카나안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경기장 바깥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가, 의아한 마음으로 그를 주시하던 루드랫은, 루카나안이 디트와 시나 쪽으로 간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때는 루카나안이 디트와 시나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후에 생각하고 나서야, 자신이 디트에게 치료받을 때, 그가 디트와 시나의 위치를 눈 여겨 보아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 지만. 이 순간만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바로 시나 앞에 섰을 때까지.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보는데. 시나 앞에 선 그는 검을 치켜들고 갑자기 그것을 내리 그었다. "아아악!!" 비명이 들리고, 루드랫의 눈에 팔과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시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드랫은 눈을 크게 떴다. 루카나안의 검에선 검은 검기가 긴, 잔상을 그리고 있었다. 맙소사!! 라고 생각한 것은 순간. 어느새 거기까지 달려간 자신은, 거칠게 소년 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무슨 짓이야!!" 어디선가 크게, 시나의 이름이 울렸지만 루드랫의 눈에는 싱긋 웃는 루카나안의 얼굴만이 들어왔다. "아... 검 참, 잘 드네. 베는 느낌이 아주 좋은걸. 후후... 자... 이 젠, 싸워 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젠 아까처럼, 날 모욕하도록 두진 않 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정식으로. 당신을 박살낼 테니까요." "---!!!" 그 말과, 소년의 눈빛으로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시나를 베었 다는 걸 눈치챈 루드랫은 그를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제기랄!!" 이를 갈며, 루드랫은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진 시나를 보고, 하디 트에게 물었다. "어때?" 이미 응급조치를 하고 있던 하디트는 루카나안 쪽을 쏘아보고 말했 다. "...괜찮아." 하디트는 눈을 루드랫에게로 돌렸다. 그의 눈 또한, 루드랫처럼 분노 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네 [최선]을 다해!" 사람들은 크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힐라토 스콰이어가 웬 여자 애를 갑자기 검으로 벤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엘야시온 가디엘, 힐라토 레이서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 탓이었다. "맙소사!!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시나--!!" "저런 제정신이 아닌 짓을 하다니!!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 는 철부지가!!" 엘야시온 가디엘의 이런 외침에 더불어, 더욱 뜻밖의 행동을 보여 준 것은 힐라토 파이오니온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보는 것도 눈치 못 챈 듯, 힐라토 파이오니온은 멀리서 보기에도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해서, 관람석에서 나올 자세를 취했다. 놀란 칼리스나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레, 레이...?" 하지만 레이서스는 정신이 없는 듯, 고개를 젓고 그녀의 손을 떨쳐냈 다. "미안해, 칼리스. 잠깐만..." 칼리스나는 레이서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하 다니? 뭐가 미안하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칼리스나는 자신의 약혼자가 피를 쏟으며 쓰러진 소녀--루온 루드랫의 종속자--에 게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하디트는, 너무나 뜻밖의 사람이 와 시나의 상태를 묻자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괜찮...습니다만. 힐라토 파이오니온이여..." 뒤이어, 다가온 엘야시온 가디엘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 디엘은 레이서스가 있는데도, 너무나 흥분해서 말했다. "하디트! 시나는 괜찮나? 저, 멍청한 스콰이어 놈이!!!" 엘야시온에게도 똑같은 답을 들려준, 하디트는 다른 힐러들이 몰려오 자, 시나를 나르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며 애매하게 말했다. "저어... 엘야시온님? 힐라토 레이서스 님도...?" "뭐?" 그제야 이 자리에 레이서스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엘야시온은 레이 서스를 새삼, 놀란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런 눈길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들것에 실려 가는 시나에겐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 고 나서, 다음으로는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길로 자기 세계의 스콰이어 를 쏘아보았다. "아무 힘도 없는 여자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레이서스?" 레이서스는 엘야시온 가디엘의 목소리에 그를 주목했다. 가디엘은 황 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아무리해도 이해가... 자네. 저 소녀... 그러니까, '시나'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아니,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도대체, 왜... 그러니까, 왜 자네가 흥분해서..." 그 말에 레이서스는 잠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새기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놀란 눈길, 루드랫의 찌푸린 얼굴, 최종적으로 바닥에 고인 붉은 피를 보았다. "레이서스? 묻고 있잖나? 왜 자네가... 설마 진짜로 시나에 대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레이서스는 그 질문을 오해하고,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얼굴을 들었다. "네. 맞습니다. 시나를 걱정했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거, 걱정? 자네가? 왜?" 레이서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시나는 제것이니까요. 엘야시온님." 하지만 본인의 담담함과는 상관없이, 이 말이 던진 파장은 꽤 큰 것 이라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소란이 일어났다. 엘야시온은 너무나 뜻밖 의 말을 들어 입만 뻐끔거리다 말했다. "자, 자네 것이라니? 시나가 도대체 누군 줄 알고... 그, 그럼 자네 가 루드랫에게 한 행동은 도대체..." 레이서스는 루드랫을 보았다. 루드랫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천천히 생각하듯 말했다. 아무튼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다. "그거야-" 레이서스는 엘야시온을 보고 말했다. "제가 시나를 원했으 니까. 그 종속주라는 루온 루드랫은 죽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개 인적으로 저자에게 원한도 있고." 율르스는 한숨을 쉬며 펑펑 울어대는 칼리스나를 보고 있었다. 방안 엔 남매만 있었고, 시간은 저녁이었다. "그러니까, 누님. 레이형은 원래 각 세계마다 약속한 여자들도 많잖 아. 이번엔 아주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레이형은 다 좋은 데, 여자 취향은 어째 날이 갈수록... 음... 아무튼 고만 좀 하라고. 그것 때문에 삐져서 연회에도 안 나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누님 은 평소에 맨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해놓고..." "시끄러워요, 율르스! 이건 다 율르스 탓이야!! 거기서 유리 검을 가 져오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엄한 불똥이 자신에게로 튀자 율르스는 항의했다. "에?! 그게 왜 내 탓이야?! 난 루이트들이 그런 식으로 싸우는 건 절 대로 못 보니까..." 하지만 자기가 했던 일을 생각하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율르스 는 아까, 루온 루카나안에게 루드랫이 제대로 싸우지 않으려 하거든 그 를 자극해 보라고 했고, 그 방법으론. 루드랫이 힐러에게 치료받을 때 그의 종속자가 그 옆에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므로, 가서 그의 종속 자를 베어버리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칼리스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누군가 원망할 대상 을 찾지 못해 자기 남동생을 원망하고 있었다. "율르스, 바보!! 멍청이!!" "누, 누님!! 나, 난 칼리안 파이오니온이라고!!" "몰라!! 내가 무례를 행했다면, 벌을 내리던지 말던지 맘대로 해! 사 형을 시키든지 하라고!! 엉엉... 이런 모욕이라니!! 차라리 죽는 게 낫 겠어!" "누, 누님... 그렇다고 사형은 안 시켜..." "엉엉.... 그깟 결투...!! 그래! 루온 루드랫인지 뭔지 하는 루이트 가 이기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든지!! 뭐라고? 그 계집애를 원하니까, 그 종속주는 죽어줘야 한다고?! 엉엉... 율르스!!" 침대에 엎드려 울던 칼리스나는 벌떡 일어나 율르스에게 매달렸다. "너무, 분해!! 차라리 루온 루카나안이, 그 계집애를 죽여버렸더라 면!! '높은 마음'으로 그랬다고 선서했으니까...!!" 율르스는 입맛을 다셨다. 그건 자신이 일러준 방법이다. "아예, 그 계집애를 죽여버렸으면!! 율르스, 그대가 그 계집앨 죽일 수는 없어? 그대는 파이오니온이고 그 계집앤 마노테잖아, 응?" 율르스는 한숨을 푹, 푹 내쉬었다. 여자들이 울면 짜증이 난다. 더구 나 어머니와 누나가 이러면 가슴에 뭔가가 푹, 푹, 꽂히는 느낌이라 더 짜증이 난다. "하지만 누님... 이번엔 나도 어쩔 수 없어. 평소라면 그깟 마노테 당장 처치할 수 있지만." 그 정도야, 가슴이 푹푹 찔리지 않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싸다. "하지만 엘야시온님이 그러셨잖아. 여섯 증인을 위한 사람들에게 손 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자가 있다면, 그 세계는 앞으로 각오하라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누님? 엘야시온님이 우리 세계엘 오지 않으시 겠단 말이야. 그럼 우리 세계는 무척... 아무튼, 이해해 줘, 누님." "흑흑... 분해, 율르스!! 어떻게 레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보는 앞에서?" "...글세. 그건 레이형이 그냥 해본 말이라니까. 레이형은 여자가 많 아서... 그 왜, 바람둥이니까..." "아냐!!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더라도, 레이는...!!" 하지만 칼리스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해 다음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서 말할 수 없었다. 레이서스는 오는 여자들을 거부하지 못하긴 하지만, 또한 그런 만큼 가는 여자들을 붙잡지도 않는다. 헌데, 이번엔 얼굴 색까지 변해서..! 그런 집착이라니!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바로 내가 보는 앞에서...! 그것도 나한테 청혼을 한 바로 그 날에...!"라고 말하던 칼리스나는 거기서, 울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하소연하듯 말하던 그녀는 스스로, 자기가 한 말에 무언가를 깨닫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누나가 갑자기 울음을 그치자, 율르스는 초조하게 말했다. "누님? 왜 그래?" 칼리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응? 왜?" "설마...! 설마...!!! 레이가 나한테 청혼을 한 건--!! 그럼!" "누님?" 이제 칼리스나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새파란 얼굴이 되어서, 율르 스의 가슴에 매달렸다. "말도 안돼! 율르스! 나, 난 무서워...! 아닐 거야... 그렇지? 레이 가, 레이가... 그저 날, 하누카의 날을 거치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는 건... 그건 내 지나친 생각이야. 너무 울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야... 생각이 비극적으로만 흘러서... 아아... 율르스...!!" 남동생을 끌어안은 칼리스나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싫어-!! 만약, 그렇다면 난 절대로 레이를 용서 못해!! 그 계집애 도!!" 연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또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레이서 스를 불러다 놓고 진지한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소녀는 '마노테'라네." "압니다." "...자네는 파이오니온이야." "압니다." 가디엘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자네, 최근 무슨 충격 먹은 일이라도 있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천지가 개벽할 말만 골라서 하는 건가,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끄응... 이것도 이 녀석이, 사이너스와 헤르가스의 아들이어서 그런 가... 예전에 그 둘이서, 결혼 문제 갖고 무던히도 내 속을 썩이더만.' 엘야시온은 레이서스의 굳은 얼굴을 보고, 투덜댔다.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그 칼루스온인 때문에 힐라토 파이오니온이 루드랫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다니. 그래서 원한이 없다고 해놓고, 그리 꼬투리를 잡은 건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언제 만나서, 언제 반 한 거야? 칼루스온 인을 좀 더 철저히 단속할 걸. 오늘은 루드랫이 결 투에서 이겨 좋았지만. 앞날이 걱정이구만. 으이구. 왜 이리 일이 꼬이 는 건지.' "...그렇다고 해서 말이야." 가디엘은 목을 가다듬었다. "루온 루드 랫에게 악감정을 갖는 건... 엘의 공의에 어긋난다네. 남의 아내를 탐 하다니..." 그 말에 얼굴을 붉힌 레이서스였으나, 그래도 진지하게. 그러나 약간 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글세... 엘의 공의 중엔, 이엔 이로, 눈엔 눈으로라는 법도 있으니 까요. 그 자가 내 여동생을 강탈하다시피 해놓고, 또 새로운 종속자라 니. 저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엘야시온은 놀랐다. '아니, 이 놈이? 이리 막 나가는 말을 하다니!' "그, 그러니까. 자네 말은 정말 루드랫의 종속자가 욕심나서 그런 것 이 아니라, 루드랫에게 복수하는 심리로...? 여보게..." 레이서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건- 아닙니다. 그 종속자를 정말로 좋 아합니다... 제 아내로 하고 싶습니다." "...레이서스." "...엘야시온님이야말로 이상하시군요. 제가 누구를 제 아내로 맞 든... 물론 '첩'이야기입니다. 그거야 왕족들의 고유 권한입니다. 설 사, 그녀가 마노테라도. 어차피 그녀는 제 궁에만 있을 겁니다. 사람들 이 내게 뭐라고 하든 그건 제가 들을 이야기고요. 왜 이 문제로 저를 이렇게 부르신 겁니까?" 그 딱 부러지는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마노테'라니. 너무나 특이 하긴 했지만. 능력이 있다면 첩을 몇을 두건, 그건 엘야시온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보게. 자네는 그... 시나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모르겠 지만 그 소녀는 안돼. 그런 소녀가 자네 취향이라면, 내가 얼마든 지..." "취향 같은 건, 잘 모릅니다. 아니... 취향이라면, 전 오히려 풍만한 타입을 좋아합니다." 레이서스는 생각하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안을 때, 느낌이 좋습니다. 더 따뜻하고..." 분명히, 여자에 대해서라기보다 쿠션에 대해 말하는 듯. 순진한 느낌 이라 엘야시온은 레이서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겉은 멀쩡한데. 사이너스와 헤르가스 아들이어서 그런 가. 이런 말을 음흉하지 않는 눈빛으로 하는 녀석은 처음 봤네. 참 나...' 아스테린은 뜻밖의 사건을 목격하고, 좋아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들었지? 루사벨라? 오빠가 한 말을? 오빠가 그 마노테를 첩을 삼겠 대!!" 만약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았다면, 무척 불쾌해 했을만 한 사건이지만, 지금 아스테린은 불쾌하기 보단 재미있어 견딜 수 없었 다. "그럼 루온 루드랫은 자기 종속자를 완전히 뺏기는 거지? 하하 하...." 루사벨라는 아스테린처럼 무조건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힐라토 파이 오니온의 그 선언이 떨어지자, 묘하게 일그러지던 루드랫의 표정을 떠 올렸다. 루드랫... 그녀의 옛 약혼자는 참, 고난이 많은 사랑을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어찌될 수 있단 말인가? 상류 계급이 그런 식으로, 한 여자를 자기가 갖겠다고 선언했을 경 우.(보통은 더 은밀한 방법으로 선언하지만) 어느 하류 계급이 그 의지 를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대개 서로가 예의를 차려, 결혼은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보호해 주지 만. 루드랫은 아직도 자기 종속자와 하누카의 날을 치르지 않았으니, 앞으로 고생할 것이다. 십중팔구, 종속자를 뺏길 건 분명하고. '이걸, 통쾌하다고 해야하나...' 루사벨라는 쓴웃음 지었다. '어찌되 었든. 자기 옛 약혼녀도 기억 못하는, 그런 자에겐, 이 정도가...' 아스테린이 크게 웃었다. "엘에게 벌받은 거라고. 고소하다. 하 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제부터 있을 일에도 왠지 기대가 되는 아스테 린이었다. 오후 무렵부터 점점 뚜렷해지는 영상. 긴 은발에 은빛 눈동자의 사람을 힐러 란사드크의 방에서 보았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4- 관련자료:없음 [25525]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1:21 조회:1127 조용한 방안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클로니아 파이오 니온 세스틴. 다른 사람은 란사드크, 나머지 사람은 겐트온이었다. 세스틴은 불안한 눈빛으로 란사드크와 겐트온을 훑어보고 역시 눈빛 만큼이나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왜 날 부른 거요. 우, 우리 일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선 에서..." 란사드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글세.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 한 순간엔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란사드크는 자신에게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아시고 약속대로 해주십시오." "하, 하지만 오늘밤부터라니..? 원래는 다음 주에나..." "그럴 사정이 생겼습니다.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약혼녀 덕분에..." 란사드크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자, 세스틴은 땀이 스며 나온 이마 를 옷자락으로 닦았다. "아스테린이... 그, 그녀는 아직 어리니까. 설마..." 세스틴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일로 그녀에게 무슨 위해라도 끼치는 건... 그녀를 용서하길..."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란사드크는 시원하게 웃었다. "당신의 약혼녀에겐 손끝 하나 안 댑니다. 우리가 무슨 왕족들 못살게 구는 집 단인 줄 아십니까?" "그렇담 다행이지만..." "확실히 그렇죠. 비근한 예를 들어. 우린 그 동안 당신이, 이 쪽지 에 대한 무슨 근거하나 밝혀 내지 못했어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 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이거 찾아낸 것 하나로 꽤 오래 생색을 냈지 만, 이런 걸 찾아내면 뭐합니까? 밝히질 못하는데?" "그, 그건...!" 란사드크가 들이대는 자줏빛 양피지에 세스틴은 아까보다 창백한 얼 굴을 했다. 이걸 세렌시스의 서재에서 찾아내고 생색을 낸 적은 없다. 언제나 느끼는 것은 단 하나였다. 하지만 세스틴은 고개를 숙였다. "세, 세렌시스가 쓴 것이라... 그는 수수께끼를 즐기곤 했으니까... 자기만의 암호를 만들어..." "헌데 사촌 동생이라면서, 그런 암호에 대한 단서 하나 못 알아냅니 까? 20년 동안이나?" 그 경멸 어린 어조에, 세스틴은 얼굴을 붉혔다. "흥... 하긴 뭐. 당신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닙니다. 클 로니아 세스틴이여. 우리가 당신의 기대를 훌륭하게 충족시켜 주었음 에도... 당신은 우리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것이 심히 섭섭하지 만... 어쨌든 이걸로 좋아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까. 그렇지 않냐, 아들아?" 겐트온이 낮게 말했다. "네." "후후... 제 아들, 듬직하죠? 그러니 클로니아여." 란사드크는 냉랭 한 눈으로 세스틴을 쏘아보았다. "...혹 내가 잠든 사이, 날 배신할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십시오. 과거에 벌어졌던 일에 대한, 꽤 쓸 만한 정보와 증거를 내 아들에게 맡겨놓을 것이니. 그건- 당신이 잊었 을까봐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면-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자리를 위하 여, 당신은 당신의 사촌형을 우리에게 팔아 넘겼다는 것--" "---!!!" 세스틴의 얼굴이 자기 눈동자만큼이나 하얗게 질리는데, 란사드크는 흐흐 웃었다. "그 도움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 왔는지. 당신이 아니었다면 파이오니온을 잡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세스틴은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자 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만 하시오. 제발...!" 란사드크는 세스틴의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일어나서 잠긴 문 을 열고 나가보니, 마냐였다. "란사드크 님! 스온 아스테린 님께서... 스온 아피네스님을 뵙겠다 고...!" 아스테린이 아피네스에게 악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은근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므로 힐라토 레이서스를 설득해, 아스테린의 방문을 거절할 권리를 얻어 놓았는데. "너무나 당당한 기세시라... 제 힘으론 도저히..." 란사드크의 눈에 짜증이 스쳤다. '그 계집애가 상당히 신경 거슬리게 하는 군.' 하지만 곧이어 그의 뇌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흠... 그러고 보면. 그 계집이 이 저 녁에 찾아 와 준 것이 오히려 잘 됐군.' "스온 아스테린 님." 란사드크가 들어가자, 루사벨라와 와 있던 아스테린은 몸을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란사드크는 뭔가를 찾는 듯한 그녀의 눈치를 모른 척 하고 공손히 말했다. "스온 아피네스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며칠 앓고 일어나신 뒤에, 요즘은 몸의 상태가 좋아진 듯해 저로선 기쁩니다만..." "아피네스? 그것 따윈 내 알 바 아냐. 여왕 어머니께서 왜 아피네스 같은 걸 내 결혼식에 보낸 건지, 지금도 불만이니까. 내가 할 일 없 어? 아피네스 같은 걸 보러 오게?" 루사벨라가 말했다. "스온 아스테린 님...!" "뭐가? 바로 자기 앞에서 자기 욕하는데 듣지도 못하잖아? 그럼 욕 같은 건해도 괜찮아." 아스테린 말대로, 아피네스는 누가 들어왔는지 눈치도 못 챈 채 벽 난로의 불꽃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란사드크는 고개를 숙인 채 빙긋 웃었다. 아스테린은 아피네스에게 언제나 이런 식이었으므로 새삼 놀 랄 일도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 저녁에 오신 건지? 어디라도 편찮 으십니까?" "편찮냐고?" 아피네스는 란사드크를 찬찬히 살폈다. "흐응... 편찮 기야 하지. 아까부터 머리가 쿡쿡 쑤셔서 말이야." "그럼 힐러 라이트를..." "아냐, 됐어. 이건 궁금증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거니까. 그러니까 그 대가 내 질문에 답하기만 하면, 머리 아픈 건 나을 거야." "...무슨 질문에 답을?" 아스테린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생긋 웃었다. "힐러, 란사드크. 어제 말이야... 너무나 이상하게도, 여기 있어서는 안될 사람을 여기 서 본 것 같은데... 그것이 환상도 아닌 것 같은 것이. 기억이 너무나 뚜렷해서." "...누구를 보셨기에..." 아스테린은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발음했다. "스온, 테일러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란사드크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은발에 은색의 눈을 가진, 클로니아의 왕족. 왜 그가 여기 있는 건 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잠시, 가만히 있던 란사드크는 고개를 들었다. "...스온 아스테린 님. 어제 방에는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당신께선 들어오시다, 미끄 러져서 머리를 부딪히고 환각을 보신 거죠. 어제도 말씀드렸지 않습니 까? 무엇보다 '스온 테일러스'님이라니... 그분이 누군지 도대체 전 모르겠습니다. 클로니아에 그런 왕족이 계셨던가요?" 아스테린은 인상을 썼다. "스아디온 테일러스!! 청의 엘야시온 59년 도에 그의 약혼녀 스온 레스티엘과 함께 자이온에서 행방불명된 클로 니아의 왕족!" "59년이요? 지금이 106년이니까. 자그마치 47년 전의 이야기이군요. 글세... 전 모르겠습니다. 스온 아스테린 님이 기절하며, 왜 하필 그 분의 환영을 본 건지도 이상하군요." "--!!" 그런 천연덕스러운 말에 잠시 씨근덕거리던 아스테린은 명령했다. "그 가면을 벗어봐!" "하지만..." "벗어!" 란사드크는 어깨를 으쓱하고,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흉터 있는 중년의 모습이었다. 아스테린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스테린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긴... 초상화는 47년 전의 모습이었는데.' 아스테린은 여기 오기 전 초상화의 복도에 가서, 스온 테일러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니, 어제처럼 초상화와 똑같은 모습이라는 건 말도 안 돼지. 하지만 난 분명히 봤는데. 그것이 환상이라고?' 아스테린은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인정하기 힘들었다. 요 몇 년간, 달빛 요정의 왕에 대해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으므로 그리움 때문에 봤다는 건 말도 안되고... 아무튼 그, '느닷없다'는 것이 어쩔 수 없 는 현실성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아스테린은 란사드크를 쏘아보았다. '...혹시. 저것이... 어떤 변장 이라면? 저 흉터랑 모든 것이 다... 난 어제 분명히 봤으니까. 그러고 보면 저 은발도 심상치 않고... 저렇게 식은땀 흘리는 모습하며...' 확실히 그랬다. 란사드크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고, 지나치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보는데, 바로 그 순간, 란사드 크의 몸이, 흔들 움직였다. 뒤에 서 있던 마냐가 속삭였다. "...란사드크 님?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란사드크는 힘들게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아니...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네?" 란사드크는 고개를 젓고, 힘없는 목소리로 아스테린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전..." 그리고 란사드크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란사드크 님!!!" 마냐가 소리지르는데, 아스테린은 깜짝 놀라서 그 광경을 보고만 있 었다. '뭐, 뭐야?!' 역시 놀란 표정으로 란사드크에게 다가간 루사벨라는 그의 호흡을 확인하고, 맥을 재어 본 뒤,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놀라서 안절부절못하는 마냐에게 루사벨라가 날카롭게 말 했다. "...어서 궁정 힐러를 부르도록! 이 자는 지금, 맥이 뛰지 않 아!!" "끙... 이젠 괜찮아요. 아깐 하도 놀라서 아찔했던 거지... 실제론 많이 안 베였나봐요. 옷이 두꺼워서." 시나는 피를 쏟았던 팔을 조심스레 움직이며 말했다. 맨 처음엔 치 료를 받아도 아프더니, 이젠 쓰리지도 않고, 괜찮은 것 같다. 그래서 음식이 날라져 오는 걸 보니, 한결 식욕이 돋았다. "그런 것도 있고... 시나, 이번엔 힐러 라이트가 듣더군요? 라단이 예전에, 당신은 힐러 라이트가 듣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 어떻게 될까 걱정했는데. 잘 됐어요." "이 경우는, 디트 네가 오렌지 라이트의 힐러여서 그런 걸까?" 연회에 나가기란 어차피 틀린 일이고. 오후처럼 셋이서 식사하기 위 해, 이쪽으로 식사를 날라 오도록 한 루드랫이 말했다. "흠... 그게 힐러 급수하고 상관 있는 건가? 서적을 찾아봐야겠 군..." 디트 생각하기에, 시나는 '칼루스온인'이니까 뭔가 특별하기도 할 테고 그러니 그런 서적에서도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찾아보고, 없으면 자신이 기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셋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는데, 어느 정도 먹기 시작했을 때 디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드랫. 시나 상처가 깊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힐라토 레이서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말에 시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고, 루드랫은 잠시 할말을 잊 은 듯 했다. 시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던 것이 아니니까, 파이오니온 님이 한 행동과 말을 일부분이나마 목격할 수 있었고, 루드랫은 전부 다 목격할 수 있었다. "시나? 도대체 언제 힐라토 파이오니온 님을 만난 거죠? 드랫, 넌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어?" "...으음. ...글세. 아니.... 사실은 잘은." 시나가 말했다. "사실은, 라단 아저씨네 집에... 파이오니온 님이 찾아 오셨는데요. 드랫을 보러요. 예전 부하니까, 만나러 오셨나봐요. 그런데 그때 드랫이 몸이 안 좋아서 대신 도서관에도 데려다 주시고. 그때는 파이오니온 님인 줄 까맣게 몰랐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났을 땐, 놀랐어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 이야길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디트, 아시잖아요. 어차피..." 시나의 눈빛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었고 그걸 읽은 하디트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역시 힐라토 파이오니온께서, 시나 당신을 보 고... 혼자서. 이런...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르겠군요." '그건 아닌데...'라고 말하려던 시나는 드랫의 눈빛을 보고 그냥 입 을 다물어야 했다. 하긴. 여기서 '그건 아니고, 나도 파이오니온 님을 무척 좋아하는데. 너무 아까워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디트는 곤란한 표정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장난스럽 게 씨익 웃었다. "하긴. 이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루온, 루드랫. 시나의 종속 주인 네가 걱정할 일이지. 이젠 어떻게 할거지, 드랫? 결투에서 이겨 그 힐라토 스콰이어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 그건 무척 통쾌했지만. 힐 라토 레이서스님을 적으로 돌리게 됐으니." 루드랫은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결투에서 이겨야 했던 건 사실, 레이서스의 불타는 눈길이 그렇게 요구하기도 해서였지만. 그걸 말할 순 없었다. '결투에 이겼다'고 쉽게 말하지만, 전투 마인드 컨트롤인 상대의 스피드와 힘은 몇 배나 올라가 있었고, 상대하는 데 애 먹었 다. 그 검기 실린 검을 피하랴, 공격하랴. 결국 몸통을 걷어차 쓰러뜨려 승리를 얻어내긴 했지만.(그때 레이서 스가 보여준 통쾌한 표정은, 지금 디트가 보여준 통쾌한 표정 못지 않 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말했듯 나는 하누카의 날이 지나면, 시나를 데리고 이곳을 나갈 거니까." "흥. 힐라토 레이서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나저나, 넌 그다 지 질투도 하지 않는 것 같군." "질투?" 루드랫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언제 디트에게 시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나,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그렇 게 보였을 수도 있고, 이 경우는 질투를 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았다. "질투... 당연히, 질투- 하지. 아무리 파이오니온이라고 하지만, 어 떻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는지. 남의 종속자를. 무척 불쾌했지. 거기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느닷없이 그런 선언을 하다니 말이다. 힐라토 레이서스도, 이 상황 이 말이 되게 꾸미느라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루드랫은 고개를 저으 며, 쓴웃음 지었다. '시나를 좋아하니까, 그 종속주 되는 자는 죽어줘야 하지 않겠습니 까'라니. 대단한 말이었다. "...그런데, 뭐가 웃겨?" "으응?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앞날이 걱정이 돼서." 시나는 그런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왜 웃냐고? 시나 자신도 이 상황엔 허탈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서 로간에 이렇게 속셈을 감추고 하는 대화라니. 시나 자신이, '하누카의 날이 지나' 사라지면 그때 이들은 어떻게 할까? 그리고 파이오니온 님은? 시나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어떻게 하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까지 하시다니...' "어떻게 됐어?" 연회장에 있던 이드넘과 도비온은 다가오는 겐트온에게 불안하면서 도 초조하게 물었다. 겐트온은 짧게 대답했다. "됐어." 이드넘과 도비온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겐트온을 경계의 눈으로 보 았다. "그럼..." "그래.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제부터 명령한다. 도비온, 판테 온의 신전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고, 그곳에 준비한 여자들을 옮겨 놔. 이드넘, 자금을 풀어서 제일로트 안,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일거리 를 맡겨. 하누카의 날이 끝나는 즉시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물 론 의뢰자는 각각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 특히 주목할 만한 아티 스트에 대해선 도비온이 명단을 건네줄 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오늘 부터 하루도 빠지지 말고 연회에 나오도록." "좀 빠르긴 하지만... 이제부터" 겐트온은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 은 냉랭하게 보였다. "하누카의 날을 맞이하여, 이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 중, 제거되어야 할 자들의 목록을 줄 테니. 아무튼..." 약간 눈을 찌푸린 듯, 가만히 있던 겐트온은 빙그레 웃었다. "...레이서스의 고백 건도, 재미있었고. 일이 이렇게 빨라지게 된 건, 어쩜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이드넘과 도비온은 그의 눈을 피해, 대답했다. "어... 네." 셰리카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드넘을 포함한 세 남자가 이야기 나 누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 따위, 귀찮아서 안하고 있었지만, 생각하면 묘한 일이 다. 지금까지 셰리카는 이드넘을 네르세바에 흔한, 도적 가운데 하나 로 알고 있었다. 그것도, 숲에 사람에겐 없는 아주 드문 능력이 있어, 요 몇 년 동안 네르세바의 일파들을 모두 한데로 모아, 자기 휘하에 둔 사람. 본래 네르세바의 도적들은, 야망이라든지 팽창 의욕 같은 건 없다. 그저 주어진 범위 안에서 자신들의 본능을 따라 살아갈 뿐. 있으면 있 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엘프처럼 숲에 묻혀서 나무와 하나가 되 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인 것이다. 그래서 셰리카는 숲의 사람답지 않은 이드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탁한 눈은 언제나, 무언가를 꾸미는 듯 번들거리고, 그럴 때마다 셰리 카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저 자는, 항상 무언가, 숲의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미래를 꿈꾸는 자다. 아르코나 숲의 호탕한 티토우와는 뼈 속 깊은 곳부터, 틀린 패턴을 지니고 있는 자들. 그러므로 셰리카는 그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숲의 사람들만이 가진 천부적인 느낌이었다. 숲의 사람들은 태 어날 때부터, 오직 한 종류의 사람들만을 친구로 받아들인다. 바로, 숲과 같이 자연스러운 자들. 하지만 이드넘과 있는 자들은, 모두 뭔가가 부자연스러웠고. 심지어 그건, 그리운 고향집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질적인 공기에 그곳은 이미 오염돼 셰리카는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그곳은 더 이상, '숲'이 아니었다. 어째서 '숲'이 아닌 건지.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그건 사실이 었다. 그리고 셰리카는 아빠도 없고, 숲도 아닌 곳에서, 저런 자들과 친구가 되어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시나... 셰리카는 불안한 눈으로 넓디넓은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뿐이고, 시나는 보이지 않는다. 시나의 종속주라는 사람도. 오늘 또 연회에 나오기 위해, 이드넘에게 얼마나 알랑방귀를 뀌었는 지. 지금 생각해도 넘어올 것 같지만 셰리카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심 산이었다. 레이서스가 돌아가고 나서 현 상황에 대해 골치를 썩이고 있던 엘야 시온은 시종이 가져온 소식에 몹시 놀라고 말았다. "아피네스의 힐러가 죽어!?" "네. 신병(神病)인 듯.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뒀습니다. 왕궁 힐러 들의 응급조치도 소용이 없었죠. 클로니아 님께서 엘야시온님께 이일 에 대해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클로니아 관습으로 그 정도 신분인 자 에겐 21일장 정도가 합당하다고 하나, 그는 힐라토 인이고... 또 시기 와 장소가 적당치 않아, 어떻게 할지 처분을 들어 오라 하셨습니다." 그럴 것이다. 세계혼이 열리는 와중이고 왕궁이라는 장소이니. "하지만... 이건... 믿어지지 않는군. 너무나 뜻밖이야." 엘야시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잠깐. 혹시 그 자리에 하 온 하겐트가 와 있었나?" "하온 하겐트 님이요?" "그래. 그가 바로 힐라토 헤르가스에게 힐러 란사드크를 천거한 자 야. 힐러 란사드크는 원래 하온 하겐트의 힐러였지."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분이 거기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하는 수 없군. 직접 가 봐야지.' 엘야시온 가디엘은 힐러 란사드크란 자를 판테온에서도 상당히 중요 한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느닷없는 사망소식은 믿기 어려웠다. 놈들이 뭔가 또 새로운 일을 꾸미는 거라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아무튼 이 새로운 뉴스 덕분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레이서스의 일은 그냥 가볍게 여기자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젊은 놈이 잠시 호기심이 동한 걸 테지. 그 놈은 어렸을 때부터 몬 스터 같은 특이한 걸 좋아했으니까.' 나중에 칼루스온 시나가 사라지면. 이런 모든 복잡한 상황은 자연히 해결된다. 괜히 사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아가씨! 정말로 힐라토 파이오니온 님을 그렇게 가까이 볼 수 있었다니! 저는 장미 궁에 있으니까 기회가 없으리라 생 각했는데!! 아아- 그 멋진 음성에다, 그 멋진 미소라니- 이건 다 아가 씨 덕분이에요!" 흥분한 넬리의 모습을 보며 시나는 자신이 그에 못지 않게 흥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파이오니온 님이 이 방까지 병 문안 왔다는 사실에, 시나도 넬리만큼 놀라고 가슴이 떨렸던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랐던 것은... 이건 넬리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시나는 자기 이마를 만졌다. 파이오니온 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그가 웃어서 왜 그러냐 고 물었더니. 아무래도 '파이오니온 님'은 너무 길고 어색하다고. 예 전처럼 자신을 짧은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파이오니온 님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레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그 이름의 뜻은, '레겜'이라는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는 설명이었다. 바로, '친구'라는. 그러면서 파이오니온 님은 시나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고, 방을 떠 났다. '친구라니...' 마음속으론, 언제나 '레겜'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 마음을 들 킨 건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기뻤다. '가까운 사람'들은 애칭으로 부른다지 않는가... 너무 좋다. 그러다 시나는, 퍼뜩 놀랐다. '엥...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너무 좋다]니!! 말도 안돼!! 이러면 안 돼!! 윤시나!!' 아까도, 됐다고, 그런 이름 안 부른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 미소 에 그만... '레겜'이라고 부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엔 입맞춤. 그리 고 다음엔 이 모양. '으윽... 큰일났다. 내 단점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래선 안돼!! 미 소에 정신이 팔려서!! 으윽, 망했다...' 시나는 침대에 엎드려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했고, 넬리는 시나가 왜 이러나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이해했다. 자기라도, 힐라토님과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고 나면 제정신이 아닐 것 같다... 시나가 자신을 다시, '레겜'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너무나 기뻐서, 레이서스는 시종일관 미소 띈 얼굴로 자기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진작 그렇게 부르라고 했으면 좋았겠지만. '파이오니온'을 발음할 때 마다, 신중한 얼굴로 눈을 찌푸리며 발음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레겜'은 참으로 듣기가 좋다. "후후..." 뒤를 쫓아가던 하카단은 주인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낮에도 너 무나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하긴 했지만. 지금도 그에 못지 않다. 언제나 시무룩한 얼굴이던 그의 주인이, 이런 식으로 혼자 웃다니? 이게 그 '마노테' 때문이란 말인가? 하카단은 어이가 없다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 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그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힐라토님... 그, 그..." 하카단은 마노테 소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몰라, 그냥 무난한 호칭을 택했다. "...아가씨가. 그러니까 그 아 가씨를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시다니. 무례인줄은 알지만. 어디가 그렇 게 좋으신 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건 확실한 무례였으므로, 레이서스가 대답을 안 해도 그만이었지 만 하도 궁금하고 이해가 안가, 하카단은 한번 물어보기라도 했다. 하 지만 레이서스가 대답을 안 할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하카단의 착각이 었다. '어디가 좋냐'는 질문에 레이서스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무척 이나 심각해져서,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그 화제를 끝내지 않았다. '예뻐서'라든지, '착해서', '상냥해서'같은, 듣는 사람을 상당히 헷 갈리게 만드는 의견들로, 착한지 상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노테 를, 잠깐이지만 직접 본 하카단은 도대체 그게, 어디가 '예쁜' 건지 아무리해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생긴 얼굴도 아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어. 그 럼 어제 낮에 보석들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재봉사를 부른 건 그 아가 씨 때문이었나. 이런...' 하카단은 걱정스러웠다. '이런 걸, 스온 칼리스나 님이 아시면...' 하카단의 이 걱정은 매우 빠르게 현실로 드러났다. 그들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거기엔 그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남녀가 있었다. 굳은 표정의 스온 칼리스나와, 난처한 얼굴의 칼리안 율르스였다. "왜 대답을 못하지, 레이?!!" 탁자에 기대어 있던 레이서스는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칼리스나는 날카롭게 다그치고 있었지만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문득, 율르스를 보니 율르스는 레이서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 내게 하누카 날을 청하기로 결심한 건, 언제냐고 묻고 있잖 아! 넌 몇 주일 전만 해도, 그런 말 할 낌새 안 보였어!!" 마침내 율르스가 말했다. "하아... 누님. 그게 언제였든 무슨 상관 이야. 하누카 날을 치른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게다가 레이형은 누님 외의 여자하곤 하누카 날 같은 거 절대 안 치른다고, 옛날부터 그랬다 며. 그거면 됐지, 도대체 그런 사소한 것까지 따지고 들면 어떡해? 안 그래, 레이형?" 율르스로서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싶어 한 말이었다. 누님이 너무 흥분을 하고 있기에 여기까지 좇아 왔는데, 내일은 또 대규모의 사냥 회가 있을 예정이라 빨리 가서 그것을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말에도 레이서스가 머뭇거리는 걸보고, 율르스는 눈을 크 게 떴다. "레이형?" 칼리스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대답해, 레이. 제 발... 넌, 그 더러운 마노테하고... 설마..." 레이서스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더럽지 않아, 칼리스. 그런 말은 관둬." "뭘, 관둬?!" 칼리스나는 눈에 눈물이 고여 외쳤다. "약속했잖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나, 칼리안 파이오니온의 딸이... 그 누 나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인 거야?!" "널 만만하게 본 적 없어. 넌 힐라토의 여왕이 될 거야. 그런데 어 떻게..." "너야말로 관둬!! 여왕 같은 것--!!" 무척 참으로 했지만 칼리스나 의 눈에선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여왕 같은 것!!" "칼리스?" 레이서스는 놀랐다. 하지만 칼리스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그는, 칼리스나가 이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나 생각했다. "칼리스... 내가 마노테를 맞는다고 해서 그래? 하지만 그녀는 내 궁에만 있을 거야. 그... 시골에, 우리 가문의 영지 말이야. 절대 에 브리나엔 오지 않아. 그녀가 에브리나에 나타나, 네 자존심을 상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넌 여왕이고, 네 자녀만이..." 칼리스나는 코웃음쳤다. "내 자녀? 내 자녀만이 네 이름을 잇는다 고? 그럼 그 마노테는? 그 마노테가 나을 자식은 그럼, 사생아가 되겠 군!! 그런 거지?!" 레이서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약속을 일방적 으로 깬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칼리스에게 미안했다. "미안해. 하지만... 그들은 마노테의 자식이니까. 칼리스? 시골에서 만 살도록 할게. 네 지위와 네 자녀들의 지위는 확고해. 내 모든 재산 과 명예는 네 자녀에게 갈 거야." "레이서스!! 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 그럼 넌 어디서 살 건데?!! 네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마치 남남인 것처럼, 우리도 그 렇게 따로 따로 사는 거야?!! 난 에브리나에, 넌 시골 네 영지에?!!" "--!!"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해?! 솔직히 말해봐! 넌 내가 도미니 온즈가 아니었어도, 나와 혼인을 했을까?!" 레이서스는 이제, 어쩔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칼리스나. 넌 줄곧 여왕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러는 너야말로 내가 힐라토 파이오 니온이 아니었어도 나와 혼인했을까? 아니... 그렇지도 않군. 넌 원래 내가 아닌 뷰겐트의 스아디온과 한동안 말이 오갔으니. 그럼, 넌 '안 정'과 '부'를 더 좋아하는 건가?" "뭐라...고?"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건강을 상하셨을 때. 그때 오 갔던 파혼의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칼리스나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레이서스? 그건 ...어머니가." "맞아. 네 어머님은 내게도 말씀하셨으니까. 그래서 잘 알아. 내 딸 은, 하찮은 부보다는, 명예를 더 좋아하므로 날 택한 거라고 말씀해 주시더군. 하지만 내가 이런 도움을 얻고도 내 세계를 단기간에 안정 시키지 못할 경우... 이 경우엔, 내 명예도 같이 날아가니까. 당장 파 혼시키겠다고 말씀해 주셨지." 레이서스는 웃었다. "덕분에... 힐라토를 안정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어, 칼리스. 네가 나와 약혼해 준 덕분에 나보다 나이도 많고 훨 씬 뛰어난, 몇몇 쟁쟁한 힐라토 왕위 계승자들을 물리치고 왕좌를 지 킬 수 있었으니까. 칼리안의 도움에 감사해. 하지만... 네 말대로. 난 우리 부모님처럼..." 레이서스의 눈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글세. 뭐라고 해야할까.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우리 부모님이 남남인 것처럼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 으니까. 매우 많은 왕족들이 그런 식으로 살고 있잖아? 그게 뭐가 불 만인지 모르겠군." "레이서스!" 칼리스나가 당황한 눈을 했다. 그 눈을 본 레이서스는 불현듯, 자이 온에서 엿들었던 부모님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짜증이 물 밀 듯이 밀려왔다. 이건 꼭 그런 복사판이다. 괴롭고, 불쾌하다. "...나가 줘. 칼리스나. 밤이 늦었으니까. ...율르스 미안하다. 칼 리스나를 바래다주겠어?" 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율르스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어... 그래. 알겠어." "레이...!" "누님? 나가자고." 하지만 칼리스나가 반대할 기미를 보일 듯 하자, 율르스는 그녀의 귀에 대고 스치듯, 조용히 말했다. "...누님은 말을 실수했어. 그러니 나머지는 나중에 이야기해." "율르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레이서스가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응? 따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도 안돼...!" 그리고 자신에게 매달려 엉엉 우는 누나를 다독여 주며 율르스는 한 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왜 레이형, 부모님 이야길 꺼내? 형은 그 이야기 싫어하 잖아. 게다가 형 말이 틀리지도 않잖아. 우리 부모님들같이 사는 분이 흔한 줄 알아?" "필요 없어! 이건 다 그 마노테 계집애 때문이야!! 그 베란다에서 둘이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 율르스는 '끄응' 소리를 냈다. 솔직히 율르스로서는,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마노테 때문에 파혼 된 것도 아니고. 마노테는 마노 테일 뿐이다. 스아디온 칼리스나의 지위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엔 너무 나 하찮은 미물. 율르스는 엘의 날 아침에 보았던, 그 문제 많은 마노테를 떠올려 보 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벌써 기억도 희미하다. 그런 마노테에게 빠진 레이형의 취향이 희한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만. 그만큼 율르스는 뭔가 안도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형은 물위에 뜬 기름처럼 상황과 대화에서 부유하기 마련이었고, 요즘 들어 서는 그것이 더욱 심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든, 그런 식으로 생생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괜찮다. 오늘 낮에 마노테의 붉은 피가 뿌려질 때, 형이 일어나 달려 가던 모습은 어느 정도는 율르스 자신에게 놀라움과 함께 기쁨을 주었 다. 권태로운 사람만큼, 상대에게 권태로움을 안겨주는 사람도 없음으 로. 형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기쁠 것 같았다. '하아... 그렇다고 형이 의무를 저버릴 사람도 아니고. 누님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그런 마노테 따윈 이쪽에서 이용해 주면 될 것 아냐. 정 안되면 나중엔 죽여버리더라도. 그러니 좀더, 냉정하게 처신 할 것이지. 누님도 참...' 하지만 이런, 율르스의 어느 정도 느긋한 생각은, 다음날 완전히 깨 지고 말았다. 다음 날. 날은 말끔히 개었고, 거의 대부분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떼를 지어, '펼쳐진 숲'으로 공간이동 했다. 말로 달리면 며칠은 가야 닿을 거리 에 있는 '펼쳐진 숲'은 다른 세계에서도 그렇듯, 검고 어둡고 사람이 손이 닿지 않음으로 황량했다. 특히 클로니아의 숲은, 키가 큰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닥엔 얼음이 깔려 있어 무척 춥다. 주로 왕족들의 사냥터가 되는 곳은, 거 기서 좀 떨어진 곳에 큰 호수가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면 수려하지만, 역시 인적이 없어 태고의 기괴함이 감돌긴 마찬가지였다. 가끔, 이름 모를 새들이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호수 가운데의 수면을 스치며 날아 다니지만, 호수 가에는 광범위하게 얼음이 얼어붙어 있어 배를 띄운다 는 건, 한여름에나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크고 넓은 풍경 속에서, 왕족과 귀족들은 오랜만에 해 방감을 느끼며 들떠 있었다. '펼쳐진 숲' 가에 늘어서 있는 오두막 사이, 사이마다 사냥개들이 짖고있고, 궁정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은 이미 도착하여 차비를 갖추고 있었다. '유리 검'이 꽤 유명해져서, 몇몇 왕족은 율르스에게 혹시, 그걸 재 료로 창도 만들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물론 그런 건 없었으므로 대부 분의 왕족과 귀족의 종자들은 죽창을 들고, 자기 주인이 탈 말의 고삐 를 쥔 채 시립해 있었다. 말들은 수많은 사람이 떠드는 소리와 개들이 짖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실내에만 갇혀 있다 나와서 그런지 웃음소리는 한층 더 컸고, 요 며 칠, 답답함을 느끼던 왕족과 귀족 여성들 역시, 무척이나 많이 이 사 냥을 구경하러와 더욱 그런 듯했다. 그래서 사냥은 한층 더 격렬했다. 아티스트들이 환의 불꽃을 뿌려 숲 멀리에서부터 몬스터나 동물들을 몰아오면, 기다리고 있던 왕족들이 박차를 가해, 말을 달려 창으로 그 목을 꿰뚫었다. 이번엔 두 세계가 한 팀을 이뤄 승자를 가르는 경기를 했는데, 단연 칼리안이 섞인 팀 쪽이 뛰어났다. 그 팀에 배당된 커다란 우리엔, 질 좋은 가죽을 얻을 수 있는 동물 들을 비롯한 흉폭한 몬스터들이, 죽어서 입을 크게 벌리고 피를 쏟는 모습으로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 칼리안의 루이티온들은 뛰어난 전사 였고, 칼리안 파이오니온 이하 왕족과 귀족들 또한 이런 사냥을 좋아 했기에,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론 힐라토가 섞인 팀 쪽이 우세했는데, 사람들은 힐라토 레이 서스를 위시한 원래 멤버들은 물론이고, 이제 그 팀에 섞여서 같이 사 냥을 시작한 '루온 루드랫'이 상당히 뛰어난 사냥꾼이라는데 입을 모 았다. 창에 꿰뚫어, 날라 온 동물만 해도 벌써 수 차례였고, 몬스터들 은 더 많은 수였다. 이번부터 클로니아 쪽에서 뛰는 루온 루사벨라의 공백은, 덕분에 거의 가려질 수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사냥꾼들의 몸은 온통 땀과 피로 범벅이 되었고, 목 이 마른 사람들은 사과주라든지 포도주를 들이키고 다시 사냥을 나갔 다. 사냥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피 냄새와 땀 냄새에 진저리를 치면 서도 즐거운 모습으로 웃고 있었고, 자기 세계의 사냥꾼들을 위하여 술잔과 손수건을 건넸다. 몇몇 어린 왕족들은 살해된 동물과 몬스터를 보기 위해 우리 가를 서성거렸는데, 어떤 것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놈도 있었으므로, 경비병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해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온 숲에, 소음이 가득했다. 비명과 환호성, 나팔 소리와 개 짖는 소 리, 말발굽은 숲 사이로 난 공터를 가로지르며 울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와있던 시나는 이 끔찍한 도살극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냥, 사냥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들이었다. 그래서 루드랫이 온몸에 피와 먼지를 묻혀 포도주를 들이키기 위해 왔 을 때, 그에게 다른 여자들처럼 잔과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윽... 냄새! 웬만큼 목욕해선 지워지지도 않겠어요! 무슨 피를 뒤 집어 쓴 거예요?" "오거." 루드랫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도 즐거운 것 같았다. 하긴... 그로서야 지금 상황이 꽤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는 편이니, 안 즐거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뭔가. '사냥'이라는 그 행 동 자체가 즐거운 듯. 그는 말에 타 죽창을 꼬나든 채, 손을 흔들어 보이고 떠났다. "아티스트가 블랙 이예티를 몰아 올지도 몰라. 잘되면 가죽을 선물 해 줄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웅... 이예티 가죽을 왜 나한테 선물한담. 아피네스 공주님에게 드 려야지.' 아무튼, 선물로 준다고 하니 기쁘지만. 잘 되면 좋을 것 같다... 하디트가 말했다. 그는 줄곧 시나 옆에 있었다. "후후... 루드랫이 즐거워 보이죠? 역시 저 사람은 이런 것이 어울 려요." "디트는 참가 안 하세요?" "윽..." 하디트는 두 팔을 들어 엑스 자를 그었다. "저는 피를 싫어 합니다." "에? 하지만 디트는 힐러잖아요? 저번에, 피를 보고도..." "그거야... 내 손으로 낸 피가 아니니까요." 그러더니 하디트는 장 난스럽게 웃었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당신에게만 알려 드리죠. 그러 니까 이런 겁니다. 저는 피를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계속 봐야한다 면, 차라리 기절하고 말 겁니다--그 피를 안 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 상대방을 치료하는 거죠. 아주 빨-리." '빨-리'라고 발음하는, 하디트의 심각한 얼굴이 웃겨서, 시나는 웃 었다. "하하하... 그럼 아까 루드랫 얼굴을 보곤..." "네. 손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주고 싶어서 혼났습니다. 이런 환경은 도저히, 저 같은 섬세한 사람에겐 맞지 않아요." "하하하..." 아침 무렵엔, 엘야시온님이 이런 행사에 왜 자신을 굳이 나오도록 한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 시선을 받을 생각을 하니, 시무룩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무척 즐겁다. 이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추웠지만 하늘은 파랗고, 공기도 좋았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5- 관련자료:없음 [25526]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1:21 조회:1140 "...고마워." 가볍게 무장을 한 차림이었지만, 다른 이들처럼 피범벅이 된 레이서 스는 칼리스나가 전해준 술잔의 술을 들이키고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있던 칼리스나는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흥. 오랫동안 이런 행사엔 나오지도 않았지? 그래서 그런지, 네 성 적 참, 형편없다." 레이서스는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토라진 투로 말하는 칼리스나였 지만, 이런 상쾌한 야외라 그런지 지금은 그것도 괜찮아 보였다. 어제 다툰 것도 미안했고. "칼리스. 그런 소릴 하면, 블랙 이예티라든지 자이언트 담비를 잡아 도 네 몫은 없을 거야." 그 말에 샐쭉해져 있던 칼리스나는 약간 고개를 돌렸다. "...흥. 잡 을 수나 있나." 레이서스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말에 올랐다. "우리 쪽 아티스트가, 그 놈들을 몰아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어. 틀림없이 잡겠어. 그럼 그건 네 몫이야, 칼리스. 게다가 그걸로 칼리안 놈들을 추적할 수도 있겠지." 칼리스나는 그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떠나려고 하는 레이 서스에게 달려가, 말했다. "레이...! 아니, 힐라토님! 조심해요! 아무튼 오랫동안 이런 행사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블랙 이예티라니! 위험할 것 같으면, 재빨리 아티 스트에게 신호해야 해요!" 레이서스는 크게 웃고, 허리를 굽혀 칼리스나의 입술에 키스하고 떠 났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칼리스나는 멍하니 있다가, 뒤로 돌아섰 다. 주위 왕족 여인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걸 느끼고, 허리를 쭉 펴고 말했다. "피 범벅이 됐으면서 키스라니. 마음에 드는 드레스인데, 이 얼룩을 어떻게 지우지. 아이 참...!" 그러자 마이레스 가리테스의 딸인 스온 자스민이 말했다. 그녀는 약 간 처진 눈을 하고 있었지만, 하얗고 통통한데다 아름다운 금발을 갖고 있어, 왕족 청년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흐응... 나라면, 내 약혼자가 그런 식이라면, 가장 아끼는 드레스 라도 당장 내놓을 텐데... 스온 칼리스나 님은, 힐라토님을 별로 안 좋 아 하시나봐요?" "...네?" "묘하네요. 힐라토님이 얼마나 인기인데. 어제도 말이에요. 비록 마 노테를 상대로 한 말이지만, 딱 부러지잖아요. 자신이 그 마노테가 되 었음, 하는 여자들, 어제 아주 많았을 걸요..." "스온.. 자스민..." 모처럼 좋은 기분이었는데 칼리스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 꼈다. 하지만 칼리스나는 턱을 들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스온 자스민도, 어제 그 마노테가 되고 싶었나 보죠?" 자스민의 몽롱한 푸른 눈이 커다래졌다. "에!? 어떻게 아셨어요? 스온 칼리스나 님은, 역시 날카로우시네요! 그런데, 스온 칼리스나 님은 그 마노테가 되고 싶지 않으셨어요?" "내가 미쳤어요?!!! 남자 때문에 마노테가 되게!!!" "어머, 어머, 어머--- 나라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흐응... 하지 만 사람마다 다 틀린 거니까... 그렇군요, 역시. 스온 칼리스나 님은 힐라토님을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어제도 마노테 같은 거 되고 싶지 않 으셨고.... 그러니까, 어제 힐라토님이 다른 여자 애를 자기 것이라는 둥--아이, 그 마노테는 얼마나 좋았을까--그렇게 말해도 별로 속상하지 않으셨겠네요..." '이게, 그런데, 날 약올리는 거야, 뭐야?!' 자스민과 대화를 나누면 언제나 이런 식이다. 화가 나지 않고 끝나 는 때를 손꼽을 정도로, 짜증나는 대화를 나누게 되는 데. 문제는 상대 가 악의가 없이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차라리 악의를 갖고 이런 말을 해주길 얼마나 원했던가!) 진지하게 화를 내면 이쪽이 우스워지고, 그 렇다고 참고 넘기면 속에서 뭔가가 쌓이는 느낌이 들어, 칼리스나로서 는 스온 자스민 같은 타입은 딱 질색이었다. 뭔가 근본부터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 그러므로 칼리스나는 칼리안과 마이레스가 한 조가 되어 사냥하게 된 것을, 신에 맹세코 재 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묘하게도, 요즘은 무슨 행사가 있든, 이 놈의 마이레스와 붙어하게 되어... 원래 자신이야 힐라토-로 이카라 조에서 레이서스를 위한 술잔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지만. 마노 테와 같은 천막에(엄밀히 말하면 같은 천막은 아니지만-시나는 왕족들 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자존 심 상했고. 레이서스를 시험하는 의미에서도 여기에 있었다. 레이서스 에게, 힐라토-로이카라의 천막으로 가지 말고 이리로 와서 잔을 받으라 고 했더니, 레이서스는 순순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덕분에 레이서스는 오늘, 그 마노테가 있는 곳 반경, 100m 이내엔 얼씬도 못하고 있다. 어 떤 의미론 '승리'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놈의 스온 자스민이 옆에 서 줄곧 이런 소리를 해대니, 이쪽엔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마노테고 뭐고 당장, 힐라토-로이카라 쪽으로 가고 싶을 정도였다. 레이서스가 올 때마다 괜히 눈웃음치는 스온 자스민의 모습도 더 이상 보아주기 힘 들었다. "어머, 어머-- 스온 칼리스나 님!! 저기! 우리 아버지와 칼리안 님 이 오시네요!! 어머, 너무나도 씩씩하셔라!!" 과연 멀리서, 두 명의 남자가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타는 듯한 붉 은 머리칼의 젊은 파이오니온과, 뚱뚱한 금발 머리의 파이오니온이었 다. "허허허- 율르스! 자네를 보면 꼭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감 회가 새롭네! 허허허-- 이번에도 자네 세계와 한 팀이 되어, 우리 세계 는 어부지리로 우승하게 될 것 같아, 그것도 뿌듯하기 그지없네!" 스온 자스민은 그들이 천막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한 손으로 치마 자락을 부여잡고 술잔을 든 채 조르르 달려나갔다. "하아, 하아...! 카, 칼리안 님? 여기 잔을 받으세요!" "...스온... 자스민..." 율르스는 속으로 '끄응' 신음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이레스 가리테 스가 옆에 붙어 다니며 '자기 젊은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둥', '창은 그렇게 잡는 게 아니라는 둥', '젊은 혈기만 믿지 말고 위험도 살피라는 둥' 잔소리를 해대서 정신이 없는데 이렇게 그 딸까지 합세를 하니, 즐거워야 할 사냥터에서 비참한 마음까지 들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팀을 짜기에 꼭 칼리안과 마이레스를 함께 집어 넣는 거야! 이번엔 꼭 밝혀내서, 요절을 내고 말아야지! 제기랄!' 하지만 그때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율르스, 뭐하 나? 내 딸이 제 아비도 제치고 자네에게 잔을 주지 않나? 아비로서 괘 씸하지만 어쩌겠나? 과년한 딸이 이러는 걸 탓할 수도 없고... 헛헛 헛... 율르스, 자스민 팔 떨어지겠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마이레스 가리테스는 어디까지나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스온 자스 민은 볼을 붉히며 잔을 치켜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칼리안 율르스 를 어느 면에선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거 안됐군요. 하지만 난..." 율르스는 잔을 힐끗 보았다. "사과 주를 별로 안 좋아해서." 그 냉랭한 말에, 자스민이 말했다. "어머! 그럼 포도주를 가져올게 요, 기다리세요 칼리안 님!" "난 목마른 건 못 기다리는 성격이라. 그럼." 그리고 떠나려던 율르스는 혹, 이 자스민이 다음 번엔 포도주를 준 비해서 기다리고 있을까봐, 딱 부러지게 말했다. "스온 자스민. 날 위해서 팔 떨어지지 마시길. 난 그런 거에 책임 못 지니까." 자스민이 그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율르스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난 내 누님이 주는 술잔만 받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 오!!" 그리고 말 옆구리를 차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당연히 마이레스 가리테스는 열이 나서 말했다. "아, 아니! 저런 무례한--!!! 내가 말을 했는데도, 잔을 거절해?!!! 저런 새파란 놈이!! 역시 삶은 달걀 자식놈이라!! 에잉!! 자스민, 아무 리 네 부탁이라도 안 된다!! 저런 놈은 당장 포기해라!!" 자스민은 시무룩해서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저 분처럼 절 걱정 해주는 분도 없는 걸요." "걱정? 저 놈이? 하늘이 뒤집히면, 가능할 게다! 어디를 봐서 저 놈 이 널 걱정하고 있냐!?" "'날 위해서, 팔 떨어지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게 절 위 한 거죠..." "...뭐?" 자스민은 몽롱한 눈으로, 율르스가 칼리스나에게서 술잔 받아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아... 너무 멋지죠, 아버지? 하지만 누님이 주는 술잔만 받는다 니. 다음엔 스온 칼리스나 님께, 잔을 받아서 건네 드려야겠어요. 그럼 답례로, 자이언트 담비라도 잡아 주시지 않을까요? 아니.. 뭐, 꼭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요. 자요, 아버지." 자스민은 들고 있는 술잔을 가리테스에게 건넸다. "전, 가서 수건이 라도 건네 드려야겠어요... 아, 그렇지. 아버지! 저분을 '저 놈'이라 부르시면 안돼요! 파이오니온인데... 누군가 아버지를 '저 놈'이라 부 르면 기분 나쁘실 거잖아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 자스민은 가리테스의 볼에 키스를 하고 천막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멀리, 칼리안 율르스가 질색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리테스는 이윽고 술잔을 내려다보고, 거기에 담긴 것을 꿀꺽 꿀꺽, 들이킨 뒤 청명한 하늘을 보았다. '...넌 강한 아이다. 자스민.' 힐라토 쪽에서 포도주를 마시던 겐트온은 말을 타고 떠나는 루드랫 을 보며 미소지었다. "모처럼 활기 있어 보이는 모습이니, 보기가 좋군." 이드넘이 말했다. "어... 예. 우리도 사냥에 참가할 걸 그랬습니 다." 그 말에 겐트온이 차갑게 말했다. "...그나저나. 넌, 어제부터 말투 가 변했군. 왜 그런 거지? 그러고 보면, 너 뿐만이 아닌 도비온도." 이드넘과 도비온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더니 이드넘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도비온이 말했다. "네게 존대를 하는 거, 아냐. 우린, 아버지에 게...!" 겐트온의 푸른 눈이 번뜩 빛났다. 그 눈으로 도비온을 쏘아보자, 도 비온은 잠시 맞받아 보는 듯 했으나, 곧 눈을 돌리고 말았다. 겐트온이 말했다. "그렇다면, 존댓말 같은 거 집어치워!! 난, 겐트 온이야!! 사람 앞에 두고, 안 보인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 걸지 마!! 난--!!" 하지만 바로 그때, 가슴 깊은 곳에서, 쿡쿡 웃는 한숨 소리가 들렸 다. 과연, 그럴까...? '네'가, 과연 '너'냐? 그 한숨소리는 너무나 미약했고, 힘이 없었지만 겐트온은 일시에 얼 굴이 창백해 졌다. 힘들고 지쳐, 지금은 잠들어 있으니 이 모든 말을 듣고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겐트온을 비웃고 있었다. "으윽....!" 그 악몽 같은 한숨 소리가 들리자, 겐트온은 이를 악물고 테이블에 엎드렸다. 테이블에 있던 포도주가 엎질러졌다. "게, 겐트?" 이건 일그러진 자기,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타인이다. 하지만... 형상 속에 스며있는 타인의 흔적은 이토록 쓴 고통을 주지만, 동시 에 그건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자기이기에... 떨쳐버릴 수 없는. 언제 까지나 끝나지 않을 궤적... 겐트온이 몸을 떨자, 이드넘이 말했다. "왜 그래? 힐러를 불러올 까?" "됐어! 불러오지 마!" 이런 만신창이 몸을 보이라고? 점차, 겐트온은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 을 느꼈다. 이 몸은, 마치 저 '보호물'과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루드랫 놈은 스스로 이 몸이 되길 소망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 놈은 미친놈이었다. 자기 몸을 그릇으로 내놓을 때, 이 런 고통과 괴로움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런... "아냐... 아니다." 겐트온은 엎드려서 쿡쿡 웃었다. "하긴. 그게 아니지. 그 놈은, 적어도 공존하진 않으니까... 제 영 혼이 파열하는 것 같은, 이런 고통 따윈 겪지 않아도..." 겐트온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부분은 더없이 차갑고 딱딱했다. 겐트온은 그 느낌에 닿을 때마다, 그 크고 붉은 보석을 떠올린다. 잠들어 있는 영혼... 차라리 그는 얼마나 평안해 보였는가... 될 수만 있다면, 자신도 그 렇게 되고 싶었다. 천사의 피에 잠겨.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붉은 방 가운데, 아무 것도 모른 채. 계속, 잠만 자는... "...죽여버려!"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겐트온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드넘이 말했다. "...겐트?" 겐트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놈들은... 준비 됐겠지?" "노, 놈들?" 옆에 있던 도비온이,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 "준비.. 됐어." 그러자 겐트온은 낮게 미소지었다. "...좋아. 모처럼 왕궁을 벗어난 자리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그리고 겐트온은 눈을 들어 건너편을 보았다. 차갑고 무언가를 노리 는 눈빛이었다. "...그때에, 보호물 놈의 종속자는 꼭 데려오도록. 생각보다 이용가 치가 높아져서...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탐이나, 밤중에라도 벌떡 일어날 정도니까. 그리고 몇몇 여자들... 아니, 굳이 그런 건 필요 없지. 맞아, 이드넘. 네 말대로 우리도 사냥을 나갈 걸 그랬다. 이 피 냄새라니. 게다가..." 겐트온은 싱긋 웃으며, 이드넘에게 친절한 얼굴을 했다. "네가 모셔 온 아가씨를 위해, 너도 뭔가를 바치려면 아무래도 사냥이 필요했을 텐 데." "--!!" 겐트온은 뒤쪽에 있는 셰리카를 감상하는 눈으로 보았다. "...건강 해 보이는 아가씨야. 저런 아가씨를 보면, 왠지 모르게 즐거워지거 든..." "게, 겐트...!!" 겐트온은 눈을 들었다. "왜?" "난 저 여자 애를 그냥, 심심풀이 삼아 데려온 거야!!" 겐트온은 빙그레 웃었다. "누가 뭐래?" "그, 그러니까, 셰리카는 그냥 내버려 둬!" 겐트온은 갑자기 웃어젖혔다. "하하.. 웃기는 녀석. 이봐, 이드넘. 네 말대로. 내 안에는 네가 무시할 수 없는 분이 계시다. 그렇다면, 그 분이 저 도둑 계집앨 원한다면 어떻게 할거지?" "--!!" 이드넘이 질린 얼굴을 하는데, 겐트온은 그런 그의 모습을 즐겁다는 듯 보았다. "하하... 이 질린 얼굴이라니. 정말 재미있군. 좋아... 그럼, 이드 넘, 네게 약속하마. 보호물의 종속자를 데려와라. 그럼 저 도둑고양이 는 네가 가지고 놀도록 내버려두지. '난 그렇게 자비심이 없진 않거 든... 그리고, 도비온?" "왜... 왜?" "너도 마찬가지야. 보호물의 종속자를 데려와. 안 그러면, 그, 할렘 녀석은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도비온은 눈을 크게 떴다. 이드넘은 여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겐트 온은 고개를 모로 하고 그런 그들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이젠 가봐. 너희들의 일을 해라..." 도비온과 이드넘이 겐트온을 떠나자, 겐트온은 숨을 거칠게 쉬며, 테이블 위의 손을 꽉 쥐었다. 얼굴에선 경련이 일었다. 자기 형제들의 놀라고 당황한 얼굴을 생각할 때, 그의 입술에서 괴 로운 음성이 스며 나왔다. "도비온... 이드넘...! 이 멍청한 녀석들...! 그러니까, 그에게 너 희들을 이용할 근거를 보이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선, 그 낮은 비웃음만이 계속되었다. "젠장..." 이드넘은 뒤쪽을 흘긋 돌아보았다. "저건, 완전히 아버지 로군..." 하지만 도비온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웃기지 마! 아버지라면, 훨씬 더 다정하게 말씀하셨어! 저건 겐트온이야!" 그 말에 이드넘은 씁쓸하게 웃었다. 눈에 익은 사람들이 몰래, 숲으 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보며, 이드넘은 언뜻 두려운 눈을 지 었다. 아버지라면, 좀 더 '다정'하셨다고? 말은 달리다가 관목을 뛰어넘었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 사냥개 지기 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힐라토와 로이카라 아티스트들의 뿔피 리 소리도 들리고 있었는데, '큰 놈'이 이곳에 있다는 암호 표시로, 아 마도 이예티나 자이언트 담비, 금빛 여우 몬스터일 가능성이 많았다. 잡는다면 가장 점수를 많이 받는 동물이나 몬스터가 이들이다. 그들의 가죽이 아주 인기가 좋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냥개들을 앞세운 사냥꾼들은 전속력으로 그곳을 향해 말 을 달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곳으로 달리던 루드랫은 힐끗 옆을 보 았다. 힐라토 레이서스가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같은 곳을 목표로 하게 된 듯 싶었다. 짧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빙긋 미소지 었고, 루드랫도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러자, 레이서스는 채찍으로, 말을 재촉해 그를 앞질러 갔다. "하--!!" 루드랫도 질 수는 없었으므로, 낮게 뻗은 나뭇가지를 피해 몸을 엎 드리며 말에 채찍을 가했다. 궁지에 몰린 두 마리의 은백색 자이언트 담비는 이를 드러내며, 괴 성을 질렀다. "캬아아악--!!" 하지만 사람들은, 함부로 창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놈들은 암놈 과 수놈인 듯, 한 놈이 다른 놈보다 약간 작았는데 그 둘 모두 다, 모 처럼 보는 상급의 모피를 갖고 있는 놈들이었다. 그러니 괜히 창을 난 사했다가 가죽을 다치면 점수도 깎이고 가죽을 못쓰게 만들 우려가 있 는 것이다. 하지만 곰만큼 큰 몸집에 곰보다 더 길다란 발톱과 이를 가 진, 맹수의 몸부림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주었다. 한 아티스트 가 말했다. 처음으로 사냥대회를 나왔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추, 충격을 주어, 얌전하게 만들까요?" 그러자 주위에서 욕설이 나왔다. 주로 루이티온 계급이었다. "어떤 멍청한 놈이야?!! 사냥대회에서 몰이용도 외에 아트를 쓰면, 점수가 깎인다는 것을 몰라?!!" 그 자리에 있던 루파르테가 피가 배인 창을 거머쥐며 말했다. "내가 처리하겠어!" 그러잖아도 어제 일 때문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는데, 오늘 그 는 동물과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잡아죽이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곳에 막 도착한 힐라토 레이서스가 흥분해서 날뛰는 말 을 달래며 말했다. "아냐, 루파르테. 내가 잡겠네!" "히, 힐라토님? 하, 하지만 위험..." "위험할 것 같으면, 자네가 도와주게. 하지만 난 저걸 내 손으로 잡 고 싶거든!" 그 말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었다. 루파르테의 스콰이어가, 몰랐다 고는 하나 불손하게도 힐라토 레이서스가 찍은 여자를 건드린 걸 용서 한다는 의미. 그리고 최고로 위험한 사냥감을 잡는, 매우 아슬아슬하 며,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극치의 기쁨을 주는 이 상황에서 믿을 만한 상대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 루파르테는 크게 외쳤다. "저, 루이티온 루파르테, 힐라토님을 목숨을 걸고, 돕겠습니다!!" 맹수의 찢어지는 울부짖음이 숲을 넘어 메아리치자, 그 반대편 공터 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은 공중을 보았다. 곧이어 들려오는, 길게 이 어지는 뿔피리 소리. 끊어지고, 짧게 이어지고, 다시 길게 울렸다. 그 뿔피리 소리는 주눅 들었던 사람들의 사기를 일시에 올려 주었다. 공터에 있는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팀이, 1급 사냥감을 잡았군!! 좋았어!!" 로이카라 파이오니온 제스던은 크게 웃었다. 그는 나이가 들었으므 로, 작은 사냥감 같은 걸 잡으며 즐기고 있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사 냥감엔 역시 흥분이 되는 듯, 자기 개인 루이트에게 말하고 있었다. "루다민! 들었나? 힐라토 레이서스 쪽이, 1급을 잡았네! 우리도 질 수 없지!! 로이카라가 힐라토 때문에 우승했다는 소릴 들어선 안돼!! 저 놈들을 꼭 잡아야 해!!" 로이카라 프레미어 루이트, 루다민은 빙그레 웃었다. "명을 받들겠 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루드랫에게 말했다. "이건, 정말 오랜 만 아닌가? 23년 만이지? 그 토너먼트 이후로 말이야. 키마이라를 죽이 던 때의 솜씨가 녹슬지 않았나 볼까? 하하하... 어제 루온 루카나안을 상대하던 솜씨라면 충분하리라 보네!! 저건 고작 블랙 이예티와 금빛 여우 몬스터니까!" 루드랫은 미소지었다. 로이카라 프레미어 루이트, 루다민. 그가 말 하는 과거 일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사건 이후, 자이온에서, 엘야시온 님을 빼면, 그는 유일하다시피 루드랫 편이 되어 주었다. 루드랫을 여러 번 찾아와 충고해 주고, 루드랫이 자이온을 떠나는 날 배웅을 한 것도 그였다. 어제도 그는 루드랫의 숙소로 찾아와 진심 으로, 그가 이겼음을 축하해 주었다. 루드랫이 말했다. "로이카라 프레미어 루이트여, 미천한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블랙 이예티는 단 한 마리였지만 인딜에서 싸웠던 하얀 이예티들하 고는 차원이 틀린 생물이었다. 이것이 정말 같은 종류일까 할 정도로, 그것은 몸집이 더 큰데다, 더 빠르고, 더 난폭했다. 평소엔 길고 검은 털 속에 묻혀 있던 발톱은 있는 대로 드러나 있었고, 이도 마찬가지였 다. 거기다 금빛 여우 몬스터. 그것은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몬스터였 다. 머리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좋아, 말도 할 수 있는 그것은, 힘은 좋지만 이성은 없는 이예티를 이용하여, 인간들과 싸울 정도였다. 하지만 마침내, 로이카라 프레미어 루이트의 손에 맺힌 검기를, 벌 린 입 속에 품고 이예티가 쓰러져 버리자, 여우 몬스터는 이를 드러내 며 외쳤다. <저주를 받아라, 인간!> 그리고 갑자기 불이 뿜어져 왔는데, 그것을 피하며 루다민이 말했 다. "난 이제 한계인데. 더 이상 검기는 못내." "그럼, 이것을 사용하겠습니까?" 루드랫은 어제 결투 이후로, 엘야시온께 받은 유리 검을 내밀었다. 하지만 루다민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안돼. 사냥에서 루이티 온이, 그런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는 건 금지야. 마인드 컨트롤도 안 되 는데." "그렇습니까?" "후후... 자 그러니, 이젠 자네가 저 놈을 잡아보게. 사실은 이예티 도 거의 자네가 잡은 것인데. 난 마지막 마무리만 한 거지." 루드랫은 빙그레 웃었다.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그날, 사냥의 우승팀은 힐라토-로이카라 조였다. 칼리안-마이 레스 님이 근소한 차로 뒤쫓긴 했지만. 사냥이 끝나고, 힐라토-로이카 라가 주최가 된 바비큐 파티가 이어졌다. 잡아온 동물들을 요리하고, 술을 진탕 마시는 파티로, 거기서 힐라토-로이카라의 아티스트, 그리고 그 조에 배당된 사냥개(마구간) 지기들은 힐라토 레이서스와 로이카라 제스던이 내리는 금과 보석, 상품을 잔뜩 받았다. 다 끝내지 못했던 스콰이어들의 결승전도 거기서 열렸는데, 승리는 한 칼리안 스콰이어에게 돌아갔다. 그는 힐라토의 루카나안이 불참한 관계로 부전승으로 올라가 힐라토의 루유다에게서 승리를 거머쥐었는 데, 이로서 파티는 더욱 흥이 나게 되었다. 사냥에 우승하지 못해 섭섭 해하던 칼리안 쪽에서도, 힐라토-로이카라에 질세라, 그 소 토너먼트에 참가한 모든 스콰이어들에게 많은 금과, 보석을 내린 것이다. 또한, 사 냥엔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나와 있던 엘야시온 가디엘과, 여타 나이가 지긋한 파이오니온들도 이런 유쾌한 행사에 마음이 흡족했는지,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석과 금을 돌렸다. 모두가 만족한 가운 데, 끝없는 웃음소리는 저 멀리 하얗게 펼쳐진 호수에까지 달했다. 펼쳐진 숲, 사냥막이 늘어선 넓은 공터 가운데엔 그날, 힐라토-로이 카라가 승리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쐐기 역할을 한, 블랙 이예티와, 황 금빛 여우 몬스터, 자이언트 담비 두 마리의 시신이 있었는데, 그것들 은 모두다, 모피가 상하지 않도록 프로텍트 아트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모피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모두들 그 색에 감탄했고, 그 모피를 지니게 될 여인들을 부러워했다. 그 당사자가 될 칼리안의 스온 칼리스나는 약혼자와 남동생에게서 동시에 승리의 영광을 받아, 그날의 주역이 되었다. 암놈 은백색 자이 언트 담비를 약혼자에게 받고, 남동생에게선 토너먼트 우승한 자에게 승리의 꽃관을 씌워주도록 요청 받은 것이다. 클로니아-뷰겐트 조에 있다가, 힐라토 쪽으로 놀러 온 아스테린은 재미있어하며 말했다. 그녀 또한 자신의 루이트인 루사벨라에게서 질 좋은 모피를 선물로 받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클로니아의 여왕이 되는 게 아니라, 언 니가 여왕이 되는 줄 알겠어." 칼리스나는 웃었다. "호호호- 요, 질투쟁이 아가씨. 이런 야외행사 에서 잠깐 주목받는 거라고요. 누가뭐래도, 요즘 연회의 주역은 스온 아스테린이니까 걱정하지 말아." 아스테린도 따라 웃었다. "누가 뭐래? 으응... 그나저나, 주욱 칼리 안 쪽에 있더니, 다시 힐라토 쪽으로 왔네?" "아아... 그 놈의 스온 자스민 때문에. 아스테, 난 정말 그녀와 이 야기하고 나면 속이 다 새카맣게 타는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하긴 하지 만, 그쪽 일은 율르스에게 떠넘기고 도망 왔지 뭐. 음..." 칼리스나는 칼리안 쪽의 천막을 흘긋 보았다. "율르스도, 파이오니온이라고 고생한 다니까." "낄낄... 하지만 율르스 오빠는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아무튼 난, 스온 자스민이 그토록 구박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오빠가 자기에게 마음 이 있다고 믿는 게 신기해. 덕분에 오빠도 마음껏 구박하는 것 같고... 누가 그걸 여자 왕족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겠어? 하노크도 그것보단 나 은 대우를 받던데!" "어머! 율르스는 하노크를 좋아해! 그러니 거기에 비하는 건 실례 지!" 그리고 두 여자는 즐겁게 웃었다. 아스테린이 말했다. "...흐음. 그나저나, 어때? 그냥 태연한 모습으로 오빠를 대하니까, 오빠도 언니를 그렇게 대해주지?" 뭐에 대한 이야기인지 눈치 챈 칼리스나는 생긋 웃었다. "으응. 정 말 그렇더라, 아스테. 네 말대로야. 넌 나보다 훨씬 더 가까운데서 그 를 보아와서 그런가봐. 별다른 사과도 안 했는데... 그냥 웃어주더라." 아침나절 일찍이, 사냥터로 오기 전에 칼리스나는 아스테린을 찾아 가 호소했고 아스테린은 칼리스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었다. "마노테는? 그냥 무시하니까, 마음이 편하지?" "으응..." 하지만 칼리스나의 얼굴은 이 부분에선, 말만큼 편하지 않았다. "무시할 수밖에 없으니까 무시하는 거지. 마음 같아선... 하지 만 오늘은 레이서스가 그 쪽엔 눈길도 안 주니까." "글세,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내가 우연히 만나본 바에 의하 면, 그 마노테 꽤 괜찮아. 언니도 심심할 때, 가지고 놀면 재미있을 거 야. 반응이 웃기거든. 아무튼 마노테잖아? 언니와 감히 비교나 할 수 있냐고? 오늘도 봐. 저런 뒷자리에 앉아서... 같이 있는 루온 루드랫이 불쌍할 정도군. 저게 뭐람. 오늘 힐라토-로이카라가 우승할 수 있던 건, 저 자의 탓도 큰데... 저렇게 사람들과도 떨어져서. 잠깐 들은 말 로는 엘야시온님이 마노테를 나오도록 명했다는데. 도대체 왜 나오도록 한 건지." 안 그랬으면, 루온 루드랫을 루사벨라와 이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칼리스나가 말했다. "글세 말이야. 엘야시온님이 하는 일은 가끔, 너무 엉뚱해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 "흥... 아무튼, 저 루온 루드랫은 어제, 오늘로 고생이지? 레이 오 빠가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말을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힐라토에서 버 틸까 몰라. 차라리 여기서 그냥 계속 사는 게 나을텐데." 루사벨라랑. "오늘도 봐. 저기 있는 황금빛 여우 몬스터. 루사벨라가 그러는 데, 저건 원래 루온 루드랫이 잡은 거래." "뭐?" 칼리스나는 뜻밖의 사실에 놀랐다. "몰랐어? 그러니까, 레이서스 오빠가 잡은 건 자이언트 담비 두 마 리. 오빠가, 자기가 잡은 수놈 자이언트 담비와 여우 몬스터를 바꾸도 록 한 거지. 뭐라더라... 자이언트 담비라고 해도 수놈은 별로 가치가 없으니까... 여우 몬스터의 모피가 훨씬 더 귀중하니까 그런 거래. 루 온 루드랫이야,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바꿀 수밖에 없었겠지. 그나저나 오빠가 언니에게 은빛 담비를 줬지? 그럼 황금빛 여우 몬스터는 누구에 게 준대?" 칼리스나는 중얼거렸다. "어... 스온 아피네스님에게..." "뭐야?!!!?" 아스테린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아피네스에게 그 런 게 왜 필요해?! 그 계집앤 이제 곧 힐라토로 돌아갈텐데! 이런 추운 곳에서 살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이건 정말 너무해!! 오빠에게 가서 말해 봐야겠어!!" "아, 아스테!! 자, 잠깐!!" 아스테린은 자기 손목을 잡은 칼리스나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인 것을 보고, 흥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아해서 물었다. "왜?" "방금 한 말, 사실이야?" "사실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어쩜 오빠가 저 황금색 여우를 나 한테 줄지도 모른다고 해서 왔는데...! 이건 정말 불쾌해! 결혼을 하는 건 나라고!" "아니, 그것 말고... 레이서스가 몬스터들을 바꾸도록 했다고?" "그렇다니까." "그럼... 그럼... 아스테? 그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잖아... 레이 서스가 잡은 자이언트 담비는, 그 마노테에게... 그리고 루온 루드랫이 잡은 건, 스온 아피네스님에게..." "아이 참! 누가 아피네스에게 그것이 가도록 둔대?!" "아무튼! 상황은 그렇잖아!" 이 당황한 어조에 칼리스나가 생각하는 것을 눈치채고, 아스테린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팔짱을 끼었다. "...그럴 리가 없어, 언니. 그 게 말이 돼? 그렇담 언니는 지금, 레이 오빠가, 루온 루드랫과 아피네 스를 이어주려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 "그건 말도 안돼. 오빠는 단지, 모피의 값어치 때문에 바꾼 거라고. 루온 루드랫을 미워하니까, 그가 그런 값진 것을 갖지 못하도록. 그래 도 오빠나 되니까, 무조건 뺐지 않고 그런 식으로 교환한 거지. 안 그 래?" 그 지적에 칼리스나는 말문이 막혔다. 딴은 그렇다. 다른 것 모두 제치고라도. 그 황금 색 모피를 아피네스에게 주겠다고 하는 말을, 레 이서스에게 직접 들었으므로. 이런 우려는 말도 안 된다. 모피를... 왕 족들에게나 어울릴 저런 모피를 마노테에게 주기 위해... 즉, 마노테를 스온 칼리스나 자신과 동급으로 여겨, 이런 왕족들 모임의 획득물인 모 피를 마노테에게 헌사하기 위해 일부러 바꾸도록 했다는 건 말도 안 된 다. 그런 의도였다면, 루온 루드랫의 모피는 아스테린에게나, 아님 자 신에게 주도록 했을 것이다. 칼리스나는 아스테린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어제 상황이 또, 그림같이 떠올라 칼리스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안하다'고 했던 그 말. 칼리스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싫어. 이런 건. 그래. 아스테린. 나도 같이 가. 난... 레이서스에게 말하겠어. 루온 루드랫에게 주었던 그 자이언트 담비를 갖고 싶다고. 그것을 사들이라고 말하겠어. 만약 레이서스가 그걸 거절 한다면..." 칼리스나의 눈은 분노로 빛났다. "그럼 내가 직접 루온 루드랫에게 가서 말하겠어! 내 약혼자가 잡은 모피를 내게 팔라고! 내 약혼자가 무 언가를 잡았다면, 그건 다 내게로 와야해! 어떤 경유든. 무엇하나라도 그 마노테가 갖게 되는 건, 절대 싫어!" 셰리카는 금반지와 은팔찌, 또 다른 작은 보석 팔찌를 받아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로서 한 재산 생긴 거고, 이제 활동 의 자유도 어느 정도 생겼다. 호문클로스를 데리고 있는 탓이다. "...흐흐. 이드넘에게 알랑거린 보람이 있어..." 요 며칠, 아주 다소곳하게 입으라는 옷 입고, 받으라는 교육 다 받 고, 말씨도 공손하게 쓰고... 이드넘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요즘 왜 그 러냐고 물었을 때, '이제야 현실감각이 들어서, 자기가 믿을 사람은 이 드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하자. 이드넘은 바로 오늘 아침, 셰 리카의 호문클로스를 풀어주었다. "흐흐.. 호문클로스. 힘들었지?" 약간 수척해진 듯한 호문클로스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 동안 먹이(?) 줄 때 외에는 호문클로스를 보지 못했는데. 밝은 데서 보니 더 빼빼 말라 보인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루라도 빨리 크게 키워서, 보석을 만들게 해야하는데! 이드 넘 놈 때문에...! 셰리카는 눈을 번쩍 빛냈다.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탈출하 면 절대 붙잡히지 말자. 저기, 사람들 사이에 시나가 있는 것도 확인했 으니까. 시나 목걸이만 훔치면, 이젠 이드넘하곤 인연 끝이야. 훗 훗..." 이렇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호문클로스를 이용해서 시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까 생각하던 참이었다(이곳엔 아티스트라 든지 능력자가 많아서 아주 조심해서 호문클로스를 부려야 했던 것이 다). 그런데 그때. 어디론가 사라졌던 이드넘이 돌아와 셰리카의 손을 잡 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 오늘은 이만하고, 여길 뜰 테니!" 셰리카는 얌전해지기로 했던 것도 잊고, 짜증을 냈다. "뭐라고? 아 니, 아직 시... 아니... 아무튼! 얼음 구름인지 먼지 구름인지 때문에 안에만 갇혀 있다, 모처럼 즐기고 있는데!! 시, 싫어! 조금 더 있을 거 야!" "닥쳐!" 이드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죽기 싫으면 빨리 따라와!" 뭔가 초조한 목소리라고 생각해, 이상하게 여겼다. 죽기 싫으면? 이 평화롭고 떠들썩한 연회에, 갑자기 무슨 죽음...? 바로 그때, 숲 가장자리가 떠들썩해지더니, 어디선가 불길한 외침이 들려왔다. 단발마로 끊어지기도 하고, 길게 계속 되기도 하는 소음. 그 외침에 땅마저 진동하는 듯 했다. 셰리카는 이런 소음을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네르세바 인이므 로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외침은, 저주받은 생명체들. 바로 그들이 나 타날 것을 알리는 전조이다... 하지만 소음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커서, 셰리카는 자기 귀를 의심 하고 있었다. 이런 소음이라니? 이건 거의... 스스로도 믿지 못하며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셰리카는 하마터면 이 드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못 들을 뻔했다. "맙소사!! 너무 빠르군! 도비온 녀석! 아티팩트를 만들어도, 꼭!! 왜 게이트를 이렇게 일찍 연 거야!! 멍청한 자식!!" "...뭐?" 그 말에 셰리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드넘은 짜증을 벌컥 냈다. "말할 시간 없어!! 빨리 따라와!! 안 그러면, 정말 내버리고 갈 테 니!!!" 너무 험악한 기세이기도 했고, '전조'가 기분 나빠, 셰리카는 결국 이드넘을 따라가기로 했다. 눈으로, 시나가 있는 곳을 쫓았다. 시나는 웬 남자와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시나에게 이걸 알 릴 수만 있다면...! 셰리카는 안타까웠다. 호문클로스를 부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어디론가, 한적한 곳으로 가기만 한다 면! 셰리카는 이드넘을 쫓아 죽어라 달렸다. 아까 이드넘이 한 말이 마 음에 걸렸지만, 자기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시나 에 대한 신경을 써야한다! 셰리카는 시나가, 이 '전조'를 제발 빨리 알 아차리고 피하길 빌었다. 시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루드랫은, 한참 전에, 한 시종이 와서 왕족이 부른다고 해 가버렸 고, 하디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사람들을 주욱 관찰하다 문득 떠오른 사실을 농담 삼아 말했는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 다. "하, 하지만...! 겨우 그 정도 갖고...!" 시나는 허둥지둥하다가 자기 접시의 과일까지 떨어뜨렸는데 하디트 는 그것을 몹시 아까운 눈으로 보았다. 클로니아에서 산다면(더구나 마 노테오나에서 살았다면) 과일이란 건 몇 년 가야 한 번 볼까말까한 음 식이다. "왕족에 대한 설명이 뭔가 이상합니까? 그쪽 세계에서는 왕족들이 어떤데요?" "어떠냐고요...?" 왕족이야,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만 있고... 한국을 포함한 대 부분의 나라는 예전엔 왕족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시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족인지, 아닌지를 그냥 혈통으로 만 따진다고요!!' 고대 신라에서, 성골 진골 따졌다는 것도 특이했는데.... 이건 정말 희한하다! 만약 디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디트? 만약 디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 아요? 우리 세계의 동양인들... 아니, 우선은 나부터도..." "네...?" "디트? 내 진짜 머리색깔이 무언지..." 하지만 시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땅이 울리고...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짐승들 짖는 소리와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 른 것이다. "으아아악!! 몬스터--!! 오크다--!!" 오크?!! 시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일로트로 올 때 보았던 그 지저 분한 녀석들!! 하지만 오크의 형상을 찾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비명이 올렸다. "꺄아악!! 트롤이--!!" 트롤?!! '하라쇼'라고 한다는, 그 몬스터? "오거다!!! 우아악 도망쳐!!" 오, 오거?!!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지만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굳이 기억을 들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바로 이 순간, 생 생히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수 백... 마리. "아냐..." 시나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천 마리도 넘겠어-!" 숲 가장자리에서부터 개미떼처럼, 포효하며 달려들고 있는 생물은, 전에 시나가 직접 눈으로 본 생물이며, 아님 책으로, 아님 이야기로만 듣던 생물이었다. 오크를 뺀 다른 괴물들은, 모두 2,5 미터는 넘을 듯한 장신이었다. 하지만 그 세 종류다, 무슨 트레이닝을 했는지, 근육이 울퉁불퉁한 몸 을 가지고, 그러므로 그 주먹만으로도 위협적일 것 같은데, 손에는 잘 다듬어진 몽둥이--손에 쥐고 있으니까 몽둥이지, 크기로 봐선 통나무-- 까지 들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과 이를 드러내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 광포한 눈빛 등은 전혀 지성이 없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 손에 든 다 듬어진 몽둥이로 인해, 시나는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는' 생물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그런지... 숲가에 서 있던 몇몇 경비병들과 싸우는 모습은 마치 인간들의 전투 장면 같았다. 시나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경비병들은, 그만 무참하게 몽둥이에 맞아서 쓰러지고 있었다. 시나 는 숲가에서 훨씬 떨어진 장소에 있었지만 그 장면을 똑똑히 볼 수 있 었다. 인간의 피가 뿌려지자, 사람들은 한층 더 당황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이젠 몬스터들의 외침조차도, 가까이 들린다. 트롤처럼 보이는 생물이 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몽둥이를 휘둘러, 테이블을 박살내며 괴성을 질렀다. "우끄아아악!! 죽여버려--! 인간은 죽인다---!!" "으아악!! 아티스트!! 아티스트들은 뭘 하는 거야!!" 바로 그때, 인간들이 있는 쪽에서 한 불꽃의 공이 떠올랐다. 30센티 정도 반경에, 3미터쯤 지면에서 솟은 그것은, 공중에서 작은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쐐액 소리를 내며 몬스터들을 직격 했다. 하도 수가 많아 어디로 피하지도 못하고 그걸 맞은 몬스터들 쪽에선 비명이 난무했다. 살 타는 역겨운 냄새는 삽시간에 주변에 퍼졌다. 이것이 그, '화이어 볼'인 듯 했다. 창백하게 질린 시나는 이걸로 저들이 물러가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하디트가 당황한 채 말했 다. "이런!!! 너무 가까워! 저 멍청한 아티스트가!! 우선은 뒤로 물러날 것이지--!! 제길...! 시나, 안되겠군요! 우리도 뒤쪽으로 물러납시다!" "어... 네!" 하지만 시나는 하디트의 손에 끌려 도망가기 전에, 뒤를 흘끗 보았 다. 그리고 너무나 처참한 장면에 고개 돌린 것을 후회했다. 하디트의 말 대로였다. 말을 할 수 있어 그런지, 몬스터들은 불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트의 불로 자기편이 몇 마리 죽자, 그것에 더욱 길길이 날뛰 며 분노의 함성을 질러댔다. "크아아악!!! 죽여버려!! 불꽃 내는 인간, 먼저--!!" 그리고 그들은 정확히, 아까 불꽃을 냈던 아티스트에게로 몰려들었 다. 곧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피가 뿌려졌다. 이런 장면은 머리칼을 쭈뼛 서게 할 정도였다. 경비병도 그렇고, 아티스트도... 하지만, 이곳엔 이렇게도 많은 '무인' 계급이 있는데...! 그들 중, 아무도 경비병이나 아티스트를 도와주지 않았다. 한 사람도, 그들을 위 해 나서지 않았다...! 왜?!! 하지만, 그런 '왜'냐는 물음은, 곧 해소되었다. 하디트가 소리친 때 문이었다. "서둘러요! 우리가 뒤쪽으로 가야, 루이티온이 싸우기 쉬울 겁니다! 되도록, 왕족 쪽으로! 그쪽으로 가요!! 루이트들은 왕족만을 지키니까! 하지만, 루이트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해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몬스터 떼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 람들은 호수 쪽으로 몰려갔는데, 어느 정도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루이 티온은 호수 쪽을 막아서서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한 마인드 컨트 롤을 한 채,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펼쳐진 숲이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있는 곳은 왕족들이나 귀족들이 사냥터로 자주 사용하는 곳이었으므로 아티스트들에 의해 관리가 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루이티온들이, 사냥을 위한 복장만 한 채, 의장용 검도 갖고 오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하는 수 없이, 맨손으 로 검기를 다루고, 그것에 한계가 다다랐다 생각했을 때 죽창으로 몬스 터들을 상대해야했다. 하지만 몬스터에 비해 월등한 전투력을 갖고 있는 루이티온이었으므 로 죽창만으로도, 몬스터들은 확실히 죽어 엎어졌다. 눈으로 쫓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며, 인정사정 두지 않는 무자비 한 그 몸놀림은, 오직 상대의 생명을 뺏기 위한 것들로, 사냥할 때도 같은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보는 쪽이 전율할 정도였다. 저들에겐 아까 의 '사냥'같은 놀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마음만 먹으면 저렇게 쉽게 상대를 죽여 없앨 수 있는데. 무엇 때문 에 그렇게 힘을 빼며, 사냥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가? 저들에겐 어떤 '기술'도 필요 없었다. 그 군더더기 없는, 여백을 두 지 않는 살해 기술은, 루이티온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나는 것들로, 그 빠름과 힘에 있어 그들을 당해낼 자들이 없었다. 그들은 단칼에 한 마 리나 두 마리의 몬스터를 베어 넘기고, 그들 몬스터가 죽었는지도 확인 하지 않은 채 다른 몬스터를 베어 넘겼다. 그런 그들의 등뒤에선 방금 베어버린 몬스터가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 아니면 아무 것도 움켜쥐지 못한 채--즉사했으므로--무너지고 있었 다. 거기다 호수 쪽으로 물러난 아티스트들이 이 싸움에 합세하기 시작 했다. 빠르고 강력하긴 하지만, 지엽적이었던 루이티온들의 공격에 뒤쪽까 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공격이 지원된 것이다. 공중엔 붉은 불꽃의 공들과, 푸르게 지지직거리는 번개의 공들이 몇 개씩이나 뜨기 시작했고, 그 공들은, 갑작스럽게, 몸이 둔해지거나 아 예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린 몬스터들을 덮쳐 불사르기 시작했다. 호 수로의 진로를 확실히 막고 있던 루이티온들 덕분에 더 이상 나오지 못 하고 뒤쪽에 몰려 있던 몬스터들은 이런 아트의 불꽃 때문에 한꺼번에 도 수 십 마리씩 몰살당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몬스터들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매캐한 냄새, 공격 아트가 시 전 되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천 오 백 마리 정도 되었던 몬스터 군단은 이렇게 해서, 수백 명 남짓했던 루이티온과 수백 명 남짓 됐던 아티스트에게 단 몇 십 분 만에 거의 백 여 마리 남짓만 남게 되었다. 그들마저도, 타오르고 있는 동료들의 산더미 같은 시신과 그야말로 기계와 같이 상대를 베어 넘기는 수백의 인간 사이에 갇혀 몇 분 사이 에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승리에 기뻐하기 보단 초조하게 숲 쪽을 힐끗거 렸다. "...갑자기 이런 몬스터 놈들이라니... 설마..." 이런, 대규모의 몬스터들... 거기다 종족이 다른 혼성의 군단들. 그 것이 너무나 불길했다. 인간 쪽에서 보면 다 같은 몬스터지만, 몬스터들 끼린 또 틀리니까. 그들은 다른 종족끼리 합세하여 인간을 공격하는 법은 별로 없다. 그들 이 이런 식으로 합세하는 경우는 단 하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가 있을 경우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의 경우는 대부분... '피어(fear)'를 사 용할 수 있는... "...맙소사." 누군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기대하고 있던 진짜 실체. 이들을 자신 의 '전조'이자 '전령'으로 보내 선전포고를 한 이들의 지도자가 나타났 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6- 관련자료:없음 [25531]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7:44 조회:1115 공기가 방금까지 뿌려진 몬스터의 피를 머금고 있어서 일까. 희게 일렁거리는 모습은 공중 가운데 확실히 드러났다. 세 개의 머리--머리 는 사자이며, 옆구리엔 산양의 머리가 붙어 있고, 꼬리는 뱀의 형상-- 를 한 그것은 환상처럼 투명해, 자기 몸 너머로 숲과 하늘을 비추고 있 었지만, 분명 실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것이, 너 다섯 마리- 사람들은 맨 처음 그것이 무언지 알지 못했지만, 곧 하나 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타났다. "...키마이라--!!! 몬스터들의 상급 지배자!!!" 하지만 다른 곳에선 또 다른 몬스터들의 지도자 이름을 부르는 사람 이 있었다. "도, 도철!!! 도철이다!!" 그것의 무리는 숲에서 나타났다. 검은 색이라고 하지만 색을 따질 수 없는 그것. 추악한 공허의 색을 가진 그것은, 키가 작지만 입은 귀 에서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아래위로 길게 엇갈린 이빨과 툭 튀어나온 이마와 높은 광대뼈로, 울퉁불퉁한 험상궂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것 은 끝없는 탐욕과 식욕으로 유명한 괴물이었다. 벌리면 끝없이 벌어지 는 입은 어떤 생물이라도. 심지어는 휠마즈의 코끼리라도 삼켜버릴 정 도다. 그리고 그 뱃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생물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끝 없는 게엔나의 세계--그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영원토록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끝없이 먹어대고, 먹을 것이 없으면 자신들의 동료, 혹은 자 기 자신이라도 먹어치우는데. 도철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단 하나였다. <먹어... 뱃속, 텅 비어... 먹어...> 소름끼치는 단조로운, 소리였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관목을 하나 뽑아, 우걱 우걱 씹으며 붉게 된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 눈길 을 받은 사람들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건 자신을 단 하나의 물체--먹이--로만 보는 눈길이었고, 그런 눈 길을 받는 순간, 어떤 인간이든 그도 그 도철과 동일한 눈으로 자신을 깨닫게 된다. 아무 가치도 없는, 자신.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 무의미함과, 그 철저한 허무. 그것을 느끼는 순간, 왜 사람들은 도철에게 먹힌 사람들이나 동물이 영원히 어둠의 세계를 방황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먹고 먹히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닌 세상. 그건 공허이고 '무(無)'였다. 모든 것의 무가치. 그래서 그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도철이 오기까지 기다리게 되는데. 그런 몇몇 사람들이 나오자, 주위에서 누군가 소리 질렀다. "도철의 눈을 보지마!! 피어(Fear)다!!!" 상급 몬스터라면 가지고 있는 피어(fear)였다. 이런 피어 라면, 루이티온밖에 상대할 수 없다. 아티스트들은 황급 히 자신을 둘러싸는 보호막을 칠 뿐, 이젠 공격 아트를 시전하지 않았 다. 아마도, 키마이라는 미러 미믹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이런 상급 몬스터들이 어떻게 이렇게 떼를 지어 나타났는지, 그것도 평생가야 자연 상태에선 단 한 마리라도 보기가 어려운 이런 몬스터들이-!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가 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났으니. 숲 전 체를 울릴 만큼, 커다랗게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마치 백 마리의 개가 한꺼번에 으르렁대며, 짖는 듯한 소리였는데, 그건 깊은 우물 가운데서 들리는 듯 반향이 길었다. 그 반향이 큰 소리에, 사냥개들--사람들과 같이 피하지 못하고, 오 두막 앞에 묶여 있던, 오거나 오크를 향해 컹컹 짖어대며 싸움에 끼어 들지 못해 안달하던 그들--이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고 낑낑대기 시작 했다. 그런 개들을 더욱 겁주듯, 으르렁대고, 짖으며,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 큰 집단의 소리가 숲 속을 지나 점점 가까워졌다. "설마...!" 사람들은 신음했다. 그들이 상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곳이 아무 리 '펼쳐진 숲'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은 현실로 드러났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커지더니, 갑자기 한 무리의 짐승들이 번개같은 속도로, 숲에서 뛰쳐나왔다. 그 체구가 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숨을 집 어 삼켰다. "케, 케르베로스---!! 맙소사!!!" 지옥의 사냥개라 불리는 그것. 침을 흘리며 붉은 눈을 번뜩이는 그 것은 열 마리...? 숲이 부스럭거렸다. 그리고 다시 튀어나오는 괴물들. ...열 다섯 마리 정도가...!! 사람들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공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길다란 세 개의 목에 세 개의 머리를 갖고 있으며 각각의 머리에 네 개의 눈이 달린 케르베로스는, 개라고 불리기엔 다리가 지나치게 길어, 키가 거의 2미터나 되었다. 꼬리는, 키마이라처럼 독을 가진 뱀으로 되 어있었는데, 그 뱀은 끊임없이 케르베로스의 잔등을 물어뜯어, 케르베 로스를 고통으로 떨게 하고, 그 이에 있는 독은 케르베로스로 하여금 세상을 증오의 눈으로 보게 한다. 하지만 케르베로스는 자신의 꼬리를 잡아 없앨 수 없고, 혹 꼬리를 잡아챌 수 있다고 해도, 그 꼬리가 떨어 지는 순간 독이 온몸에 퍼져 죽기에. 이건 케르베로스의 딜레마였다. 증오와 고통 속에 살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자살을 할 것인가. 구제 받을 길 없는 지옥의 딜레마. 그래서 이, 지옥의 사냥개는 자기가 당한 대로, 항시 누군가를 물어 뜯으려 하며, 이를 드러냈다. 언제나 광폭하며 얌전해지지 않는 지옥의 생명체가 바로 그였다. 레이서스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시나 있는 쪽을 보았다. 그곳은 키마 이라가 나타난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시나 쪽에는 왕족이 한 사 람도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루이티온이 그쪽은 절대로 안 지킨다는 말 이다. 우선은 케르베로스나 도철을 처치하고 다음으로 키마이라를 처치할 것이다. 그것도, 몬스터들이 자신의 주인을 공격할 시에만!! 레이서스의 눈에, 루이티온들이 철수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거나, 오크, 트롤은 이미 거의 다 없앴고, 루이티온들은 이제 각각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고 있었다. 괜히 저 괴물들을 없앤다고 나섰다가 그 동안 자기 주인이 위험에 빠지면 곤란한 것이다. 레이서스는 루파르테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면서도, 얼굴을 굳힌 채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테린?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 여기 있으면 안전할 거야. 루파르테와 루온 루사벨라가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레이서스에게, 모피를 달라고 조르다가 이 사태를 만난 아스테린은 레이서스와 함께 대피했었다. 아스테린은 약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 했다. "오, 오빠? 어디가게? 위험해!" "걱정하지마. 너도 아다시피, 난 내 몸 하나정도는 지킬 수 있어." 게다가 지금은 내 몸이 문제가 아니라, 시나를 구해야 해. "오빠!" 아스테린이 부르는 것을 무시하고, 레이서스는 시나 쪽으로 움직였 다. 시나를 위험에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 주변, 그러니까 왕족들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밀집되어 있어 움직이기 힘들었다. 비키라는 명령을 내리고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는데, 하지만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그만 칼리스나와 율르스 일행에게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레이!! 아아.. 겨우 이쪽으로 올 수 있었어!! 너무 무서워, 레 이!!" "칼리스나..." 칼리스나는 모피 건으로 레이서스와 다투고, 칼리안으로 물러가 있 었다. 레이서스가 허락하지 않아도 루드랫을 직접 불러, 그쪽으로 간 모피를 사겠다고 을러대더니 정말로 루드랫을 불렀던 듯, 루드랫도 그 들과 함께 왔다. 하지만 루드랫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레이서스에게 꾸벅 인사를 하 더니, 초조한 얼굴로 시나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기다려! 나도 같이 가겠다!" 레이서스가 말하자 루드랫은 놀란 얼굴을 지었다. 칼리스나 또한 마 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를 같이 간다는 것인지 물으려 하다가, 루드랫 이 갈 곳은 단 한군데라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레, 레이? 미쳤어...? 네... 네 약혼녀는 나야!! 그, 그런데...!!" 레이서스의 말을 듣고 또한 놀란 표정을 짓던 율르스는 자신의 누나 가 한 말에 상황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하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 말투엔 불쾌한 기운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레이형. 형은 여기 있어야 해. 누님 말이 맞아." "율르스. 네 누님을 지키고 여기 있어라. 내 루이트와 아스테린의 루이트, 그리고 네 루이트가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이곳은 안전해." 그 말에 칼리스나는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네가 없으면 안돼!!" 레이서스는 이를 악물었다. 한시가 급한데...! "칼리스나, 제발! 넌 괜찮아! 이곳엔, 루이티온이 있어! 하지만 그 곳은...! 아아...! 그렇게 무섭다면, 개인 루이트를 만들 것이지, 왜...!!" "레이형--!!" 율르스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레, 레이서스!!" 칼리스나는 마침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런 거... 정말로 무섭지 않아!" 정말로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 "내, 내가 루이트를 만들지 않은 건...!" 율르스는 험한 소리를 하며 레이서스의 팔을 잡아챘다. "레이형!!! 정말 용서할 수 없군!! 누님 말대로야, 이곳에 루이티온 이 설사 몇 백이 있더라도--! 누님이 루이티온을 군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형은 여기 있어야 해!! 형이, 만약 지금 간다면 난 형을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형이 누님을 이렇게 대할 수 있어?!! 형의 약혼녀는 누님이야!! 난, 칼리안 파이오니온으로서--!!" 율르스는 분노한 눈으로 레이서스를 보았다. "내 세계의 왕족, 내 피붙이가 이런 대우를 당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형은, 지금 내 누님 의 가치를... 고작... 그..." 율르스는 차마 말을 뱉지 못했다. 왕족과 마노테를 비한다는 것 자 체가 어불 성실이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어둡고 진한 눈으로 율르스를 보았다. 레이서스 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율르스. 하지만 제발 그렇게 이걸 네 세계에 대한 모욕이 라고 생각하지마... 이건... 알겠어? 그쪽엔 왕족이 한 사람도 없단 말 이야. 만약, 내가 지금 가지 않아, 그녀가 죽는다면... 난, 율르스..." 환수들은 사람들을 비웃으며, 포효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주 변은 비명으로 소란했고, 서로 밀쳐대고 밀어내느라 소음이 끊이지 않 아 이런 대화들조차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서스는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난 차라리, 내 세계 전부 다를 잃는 것이 나을 거야... 미안해." 이 말은 그 지독한 소음과 혼란가운데에서도, 율르스와 칼리스나, 아스테린에게만은 똑똑히 들렸다. "...가자, 루드랫. 급하다. 저쪽은 키마이라가 있는 쪽이야." 루드랫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이서스를 본 뒤, 한숨을 쉬었다. 어 쩔 수 있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칼리스나는 그런 레이서스의 뒷모습에, 비틀거리며 율르스의 팔에 매달렸다. "율르스... 유, 율르스..." 헐떡거리며 비통하게 흘리는 눈물로 인해 칼리스나의 말은 차마 이 어지지 못했다. 율르스는 그런 칼리스나를 부축하며 격렬하게 화난 얼 굴로, 그러나 너무 화가 나서 억제된 음성으로 말했다. "...힐라토 레이서스. 네 놈이... 네 놈이, 우리를 이따위로...!" 아스테린은, 율르스의 이런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코 우습게 넘어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잔뜩 걱정스 러운 눈을 지었다. 아스테린은 레이서스가 사라진 쪽을 보았다. '오빠... 오빠, 바보! 그 마노테가 걱정이라고 하더라도...!! 그럼 다른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거나, 이리로 불러오게 할 것이지!!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시나는 두 번째로 덮쳐온 흉악한 몬스터들의 기세에 눌려 덜덜 떨고 있었다. 왕족 옆에 있으라고 하디트가 말했지만, 왕족 같이 보이는 사람은 주변에 한 명도 없었다. 하디트가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왕족은 외 모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으니. 그런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그런데요, 디트? 루, 루이트들이 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오는 거예요? 더, 더 이상 싸우지 않아요? 아까보다 훨씬 더 무서워 보이는 괴물들인데...!" "저들이 상급 몬스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디트는 질린 얼굴로 말했 다. "...키마이라. 도철, 케르베로스까지... 그것도 떼로 몰려오다니!! 제기랄!! 게엔나의 입구가 터지기라도 한 건가!! 시나!! 안돼요!! 그쪽 이 아닙니다!!좀 더 안쪽으로! 왕족이 있는 곳은..." "안 돼요...! 그쪽은 사람들이 너무 많...!" "으아아악---!!!!"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의 공포를 즐기며 다가오던 케 르베로스 한 마리가 갑자기 몸을 솟구쳐 뛰어올랐나 싶은 순간, 시종 한 명이 케르베로스의 앞발에 짓눌려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케르베로스는 이 사이로 침을 흘리며 말했다. <살려줘? 고통스러운가 보지?> 다른 쪽의 머리들이 킬킬대고 웃었다. <물어뜯어 버려!> <아냐! 좀 더 살려두고 어떻게 하나 봐!> <닥쳐! 인간들은 많아!> <많다고?> 케르베로스의 머리하나가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으응? 오! 그렇군! 정말 많군!> 하지만 그 동안, 다른 머리 하나가 고개를 숙여 시종의 목을 물어뜯 어 버렸다. "으아아아악--!" 사람들을 둘러보던 케르베로스는 계속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보고 있 었다. <정말- 많아! 저들을 다,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 ...으 윽...?!!!> 바로 그때 뱀의 꼬리가 키이익-! 소리를 내며 그의 등을 물어뜯었 다. 그러자, 사람들을 둘러보던 머리는 네 개의 눈을 광폭하게 빛냈다. <크으으... 크윽!! 저 놈---!! 다 죽여버리겠어!! 가자!!!> 하지만, 고통에 질린 두 개의 머리들은 우선은, 시종의 사지를 난폭 하게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크아아악!!!> 끈적한 침이 피와 섞여 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기괴한 장면을 보며, 구역질을 하기도 했고 패닉상태에 빠져 비명을 질러댔다. 도철이나 키마이라가 있는 쪽도 다르지 않았다. 도철은 사람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고 있었고, 키마이라는 인간들을 가지 고 놀고 있었으며, 케르베로스들은 크게 도약하며 뛰어와 사람들의 목 을 물어뜯어 삽시간에 그들의 숨을 끊어버렸다. 우연히 왕족을 친 환수 만이 거센 반항에 부딪혔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무방비의 하급 귀족이나 시종들이 대부분 가장 먼저 환수 들에게 당했다. 비명과 피가 난무했다. 우리에 던져놓은 수많은 사냥감들과, 오거와 오크, 트롤의 피에 인간의 피가 섞여 흐르기 시작했다... 서로 밀치고, 밀어대는 사람들 틈에 정신없이 부대끼던 시나는 누군 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드, 드랫--!!" "무사하군!!" "사람들 때문에 디트와 헤어졌어요!! 디트는 저쪽에!!" 그리고 시나는 루드랫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파이 오니온 님--!!" 레이서스는 다가와 시나를 꽉 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루드랫이 말했다. "이젠 어서 뒤쪽으로 피하십시오!" "하지만-!! 나도 같이 싸우겠다!! 나도...!" "안됩니다! 저런 키마이라는..." 그 아름다운 울음이 하늘에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무자비한 살인자들인지 잘 아는 루드랫 은 말했다. "저런 피어를 쓰는 상급 몬스터들은,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 않고는 상대하지 못합니다! 아티스트들이 거의 텔레포트의 진을 완성한 것 같 으니까!! 어서 그쪽으로 가십시오!!" "하지만, 자넨--!" "전 괜찮습니다!!" "드, 드랫...!" "빨리 가!! 파이오니온께서 함께 계시니까, 루이트들이 지킬 거야!! 디트는 내가 찾겠어!!"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헤어져,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시나는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드랫은 괜찮겠죠?" 레이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야지! 우선 너를 왕궁으로 돌 려 보내고...! 내가 그를 살피겠다! 뭐라고 해도, 그는," 레이서스는 시나를 보고, 약간 웃었다. "내 누이동생의 남편이 될 자니까!" 하지만 그렇게 얼마 안가, 레이서스와 시나는 진로를 막는 몇몇의 방해꾼들과 부딪혔다. 평범한 시종들의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 "힐라토 레이서스님! 여기 계셨군요! 아...! 우린 그 여자 분을 찾 고 있었습니다. 엘야시온님께서 그 여자 분을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이 와중에 왜 시나를?" "글세... 필요하다고 하셔서..." "지금은 안 된다! 곧, 시나를 왕궁으로 보낼 거다! 그러니 거기 가 서 봬도 늦지 않다!" "하지만..." "나, 힐라토 레이서스가 책임진다! 물러가라!" 시나가 말했다. "아니오, 파이오니온 님! 전, 엘야시온님께 가볼게 요...!" "뭐라고? 그런..." "필요하다고 하시니까...! 파이오니온 님, 엘야시온님과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지금 오라고 하시는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예 요!" "중요한 이야기?"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요. 꼭 가야해요. 무슨 이야기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레겜?" 레이서스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나를 안았다 놓아주 고 말했다. "좋아... 조심해야 한다. 너희들, 이 여자 분을 잘 모시도록." 시종들은 빙그레 웃었다. "네, 힐라토님. 그럼..." 시나와 시종들이 떠나는 모습을 레이서스는 눈에 새겨두었다. 나중 에 생각했을 때... 어떻게 해서든, 그때,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 하기도 했지만. 뒤를 돌아본 레이서스는 루드랫이 키마이라 한 마리와 대치하는 모 습을 보고 그리고 뛰었다. 저 자는 꼭, 살려야 한다! 마인드 컨트롤이 안 돼, 싸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저곳에 있으면, 아무 루이트 든 도우러 올 것이다! 키마이라는 유리 검을 뽑아든 루드랫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 중, 뱀의 목이 길게 늘어나 루드랫을 보았다. <흐음...> 염소 목이 말했다. <신기한데.> 사자의 목이 말했다. <하지만 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 데.> "--?" 루드랫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마 인드 컨트롤을 해 피어에 당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건 완벽한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었기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것이었다. 아피네스를 위해, 스스로 마음을 파열했을 때, 마인드 컨트롤의 구성에 상당한 피해를 입 었고 그것이 아직 복구되지 않고 있었다. 정신의 상처란- 낫는데 아주 오래 걸리는 법이다. 육체의 상처는 힐 러의 힘으로 금방 나을 수도 있지만. 정신의 상처는... 현재 상황에선 고칠 수 있는 힐러가 없다. 아피네스를 만나, 마음이 점차 회복되고 있 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전투를 위한 마인드 컨트롤은 아무래도 무리였 는지 모른다. 저 키마이라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듯 느껴진다. 말도 안돼는 일!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루드랫은 죽창을 들어 그것을 힘껏 던졌다. 그러자 키마이라는 펄쩍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이런- 갑자기 창을 던지다니! 역시 인간이란!> 뱀의 머리가 말했다. <공격을 하다니, 죽여 버리지?> 염소의 머리가 말했다. <맞아! 아무리 껍데기라도! 죽여버려!> 하지만 사자 머리 쪽이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잠깐... 이봐, 우 리 손에 피를 묻히면 안돼. 이건 계약이니까-> 계약? 껍데기? 루드랫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 간, 키마이라들이 킬킬대며 루드랫 쪽으로 급강하했다. "----!!" 방심한 자신을 탓하며, 루드랫이 유리 검을 드는 데, 갑자기 그들은 루드랫에게 닥쳐왔다. 눈을 감는 것이 본능이겠지만, 마인드 컨트롤 중 이라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지 않은 걸을 죽도록 후회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가 본 것... 키마이라의 몸이 루드랫의 몸을 통과할 때, 키마이라의 차갑고도 축 축한 몸이 스쳐지나갔을 때, 그 연기 같은 몸 안에서 루드랫은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 그때 루드랫은 길고도 긴 순간을 살았다. 과거, 혹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 키마이라 안에 있었다. 그, '존재하지 않는 생물' 가운데에. 그 허상 가운데에. 그 환상... 그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실체와 자기 자신의 현 재 모습이 바로 그 가운데 있었다. 그건 한 인간이 태어나, 자라, 늙어서, 마침내 죽어 없어지는 과정 이었다... 그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이라곤,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수고와 열매. 그러나 열매는 중간에 떨어지고, 노력은 종종 아무 대가를 받을 수 없고, 아무런 죄도 없는데 억울한 비난을 받아야 하고, 어떤 희망들은 무참하게 땅에 짓밟히며, 어떤 자들은 이유 없이 살해당한다. 좋았던 것은 너무나 쉽게 변질되어, 시간의 단련을 견디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곳곳에 소중한 것들을 도둑맞은 사람들이 있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바다만큼 많은 숫자로 바다를 채울 만큼 울음 짓고 있다. 이별은 너무나 이르며, 체념은 일상화되어 있고, 싸움과 분쟁이 일 어나고 오해와 증오는 세상 끝날 까지 있을 것이며, 낙망은 인간의 친 구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을 살해하고, 어머니는 딸을 팔 것이다. 모든 자연이 인간에게 등을 돌리는 그날까지. 결국에 있는 것, 모든 길이 통하는 마지막에 있는 것. 죽음이 그들 을 맞으러 오는 날까지. 그때까지 무엇도 타인과 나누는 일은 없이, 오 직 혼자서만- 그 고독가운데에, 걷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절망의 쓴 뿌리를 영원히 씹으리라. 키마이라의 몸이 스칠 때, 그가 키마이라 안에서 본 것은, 바로 그 런 것이었다. 죽음의 신이 검게 루드랫에게 덮쳐들었다. ...그 순간, 불안전한 마인드 컨트롤 따윈 깨져버렸다. 아아... 이 고통...! 자신이 저주받았음을 일깨우는... 절망과 슬 픔. 희망이 없는, 미래... 그가 사랑하는 아피네스... 그녀 또한 희디 흰 해골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빛나는 마음, 이토록 기쁜 마 음은, 영영토록 흙으로 돌아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되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름이 되어. 허무하 게 스러질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그래왔고, 그렇고,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태어나야 했을까? 너희, 저주받은 족속이여? 벌레와 같은 인간들아? 방황하는 자들아. 온 우주가 너희 때문에 더럽힘을 받고 신음을 한 다. 너희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타락한 왕들아? 너흰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 나오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너희, 사망을 불러온 자들아. 루드랫은, 눈을 감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건, 거짓이었 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너무나도 강력한 진실이었기에- 루드랫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붉은 방... 잠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선고된 죽음.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시간을 견디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결국은 허무하게, 허무하게, 돌아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태어나야 했을까.... 차라리 이것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루드랫은 무릎을 꿇고 자리에 엎드렸다.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 떨 어졌고, 그 주위에만 빈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은, 힐라토 레이서스가 루드랫을 건드린 그 순간에도 견고했 다. "루온, 루드랫...? 도대체, 무슨? 키마이라가 그대를 건드리는 걸 봤네. 난 그놈이 자네를 덮치는 줄 알고... 그런데 그대로 사라져 버리 더군! 자네가 쓰러져서 놀랐네! 왜 그러지? 무슨 일이야?" "힐라토님..." 루드랫은 눈을 감고, 눈물을 떨쳤다. 이 걱정스런 음성. 맞다. '그들'의 말은 진실하다... 정말로 진실하다. 인간의 적이며, 고발자. 그 말들이 얼마나 진실한지. 그러나 또한 그것은 지독한 거짓 말이기에.. 루드랫은 눈을 들었다. 이 거짓말을 부술 만한 것은 더 큰 진실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래 기도했나? 아아... 그러니, 제발... 당신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옵기는, 내 게 선의를 베푸사... 나의 영혼에 새겨진 이 각인, 나의 이 운명을 바 꿀 수 있도록... 이 고독함, 이 공허함을 벗어나... 그것이, 비록 죽음 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루드랫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 다. 그는 기도했었다. "루드랫...?" 루드랫은 메마르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힐라토... 레이서스 님. ....시나를 어디로 데려가신 겁니까? 지금 안 좋은 상태에 있습니다." "...뭐라고?" 루드랫은 레이서스의 손에 손을 얹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지금 만큼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방금 겪은 일들에 마음이 몹시 탈진해, 무언가 부축 받을 것이 필요했다. 따뜻한 인간의 손... "호수...쪽입니다." "휴... 이거야 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간들이 몬스터에 당하는 장면을 바라보던 겐 트온은 싱긋 웃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건, 그럭저럭 괜찮은 장면들이었다. 최근의 스트레스 가 날아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불만이 하나 있다면. "쳇. 상급 몬스터들이라 피어만으로도 강력하긴 한데, 머리가 좋아 서 그런가... 먹이 감을 놓고도 이러니 저러니 따지는 저런 경향은 아 무래도 ... 쯧쯧. 도철, 저 놈들, 우왕좌왕 하는 저 꼴이라니! 뭘 먹어 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군!! '풍요가 배고픔을 아사(餓死)시킨다'인 가! 이런, 이런!! 재미있긴 하지만 늑장 부리지 말고 빨리, 빨리 해치 워라... 그래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고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겐트온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겐트 온은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붉은 눈. 엘야시온 가디엘이었다. 겐트온은 그를 잠시, 보다가 억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늙은이... 그렇게 보지만 말고, 능력을 쓰란 말이다. 사람들을 다 죽일 셈인가? 응?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겐트온은 히죽 웃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너무 내 즐거움만 추구해서야... 자아, 빨리 움직여라. 안 그러면...' 겐트온은 숲 쪽으로 눈을 돌렸다. 긴 트럼펫 소리... 엘야시온 가디엘은 분노한 눈으로 겐트온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이런 상급 몬스터들이라니. 우연이라기엔 너무 이상하다. 키마이라가 내는 불꽃으로 사람이 타 죽고, 그 유황의 냄새가 엘야 시온 가디엘이 있는 곳까지 퍼지자 엘야시온 가디엘은 가까운 데 있는 세스틴을 불렀다. 비명...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루이티온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기랄!! 저놈의 멍청한 자식들!!! 저놈의 멍청한 계급들!! 제 주 인만 지키면, 정녕 그만 이란 말인가!! 내, 저 놈들을 꼭, 군대로 만들 겠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놈들로--!! 마인드 컨트롤이 없이 도 싸우는 놈들로!!' 하지만 지금은 어떤 수도 쓸 방도가 없었다. 이곳이 자이온만 되었 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일이 손쉬워졌을 텐데! 가디엘은 이를 갈며 말했다. "세스틴!! 자네 세계의 이 부분을 오늘부터, 백년 동안 포기할 수 있나?!!!" "--!!" 세스틴은 창백한 얼굴로, 가디엘을 보았다. "하, 하지만... 에, 엘 야시온 님! 차라리! 제가 제 도미니온즈를 불러내면...!" "이곳의 사람들을 다 얼려 죽일 셈인가!!! 왕족들은 괜찮다고 하더 라도--!! 그 뒤에 따라오는 얼음의 정령들은?!! 또 한번 다이아몬드 더 스트를 일으키겠나?!!" 세스틴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 잠깐이라면 몰라도... 도미니온 즈를 불러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이상. 이곳의 사람들은 몰살이다. 엘 야시온의 능력이 편만이 지배하고 있는 자이온이 아니니, 더욱 그러하 다. 그리고 뒤에 몰려든 얼음의 정령들은 클로니아 왕족 외의 왕족들까 지도 몰살시킬 것이다. 사냥터라, 어떤 왕족도 써클렛을 착용하지 않았다. 그것도 한이었 다. 철저히 관리되고, 점검되었던 사냥터에서... 한 번도 이런 일이 없 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예 짐작이 가 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스틴은 어두운 눈으로, 겐트온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세스틴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겐트온을 보았다. 그리고 공 포와 증오의 눈으로도. 겐트온 저 자 때문에 그의 세계, 그가 사랑한 은색의 클로니아가 피 로 물들고 있었다. 세스틴은 아름다운 하얀 산들을 보고, 푸른 호수를 보았다. 그 풍경이 말해 주는 것. 도미니온즈를 불러내면, 클로니아 왕족만 빼고 몰살이라고? 세스틴은 몸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 고통도 끝나리라. 하지 만 바로 그때. 세스틴이 입을 열어, 클로니아의 파이오니온으로 엘야시 온이 클로니아에 하려는 일을 반대한다고 말하려 했을 때- 그리고 차라 리 도미니온즈를 불러내겠다고 말하려 했을 때(왕족들은 어떻게 해서 든, 탈출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숲에서 트럼펫 소리가 울렸다. 빠아아아앙---- 이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눈치 챈 세스틴은 경악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숲을 보았다. 엘야시온 또한 그 광경을 보고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미친 녀석!! 미친 놈--!! 도저히--! 이건---! 용서하지 않겠다!! 내 꼭 이 일에 대해, 놈에게 책임을 물으리라!!!" 사십 마리는 될 듯, 한 무리의 만티코라스들이 숲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길고 아름다운, 천상에서 들리는 듯한 트럼펫 소리를 내며. 시나는 눈을 깜빡였다. 엘야시온에게 가자고 하며, 그녀를 데리러 왔던 시종들은 이상하게도, 중간에 방향을 틀어 호수 쪽으로 그녀를 인 도했다. 왜 그런 걸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몬스터들을 피해 이곳까지 왔다는 말에 그런가 보다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시나가 보고 있는 사 람은... "...도....바..." 그 사람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날 기억하고 있다니. 멋지군.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지, 아가씨? 아... 혹시 모를까봐, 말해 주는데. 저번 혼 강에서도 그대를 만났었 지." 시나는 뒤로 물러났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비켜요!!" 하지만 그토록 친절하던 시종들은 험한 소리를 하며, 도망가려는 시 나를 붙잡았다. "꺄아아악!!!" 시나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훑어본 도비온이 말했다. "저번에 어깨에 맞은 칼은 잘 빠졌나 보군. 멀쩡한 걸 보니. 흥! 하긴, 주변에 힐러들 이 많았을 테니. 어서 배에 태워!" "네!" 그들은 얼음이 두껍게 언 곳을 지나, 배를 대어둔 곳까지 갔다. 그 곳까지 가며 시나는 더 세차게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쳤지만 이곳은 너 무나 사람들과 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자신 말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 들은 너무나 많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시나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손쉽게, 시나를 배에 구겨 넣었다. 하지만 시나는 뱃전으로 후다닥 매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크게 말하면 누군가 와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였다. 배의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바지와 옷이 다 젖었 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도비온이 껄껄 웃었다. "목청 좋군!! 밖에서 들으니, 색다른데. 좋 아! 마음껏 소리 치라고! 이곳은 네 비명을 듣고 구원하러 올 자도 없 으니. 루드랫은 물론이고, 힐라토 레이서스도 이곳 까진 오지 못해!" 그 말을 증명하듯, 배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돛도 없고, 아무도 노를 젓지 않았는데, 얼음이 언 호수 가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아트 의 일종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 다. "어, 어떻게 그 이름들을...!" "하하... 너한테, 그런걸 말할 이유 없어." 이들이 왕궁까진 침범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떠올랐다. 시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왕족의 이름까지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이들은 어쩌면 정말로, 인간 사냥꾼이 아닌지도 모른다. 인간 사냥꾼이라면, 왕궁 안에도 인맥이 닿아있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집단...! "하지만 도대체,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나는 당신들에게 잘못한 게 전혀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러자 도비온은 시나를 안 됐다는 눈으로 보았다. "쯧쯧... 아가 씨. 그런 말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하필이면 왜, 내가 길을 가다 벼락을 맞았을까?', '하필이면 왜, 내가 숲 속에서 몬스터를 만났을까?', 그리고 아가씨라면... '하필이면 왜, 내가 마노테로 태어 났을까?'" "---!!" "그러니까, 이런 거지. 왜 아가씨한테 이러냐고? 아무 이유 없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했고, 그 어떤 일에 필요한 사람을 바로 그 자리 에 있던 아가씨로 고른 것뿐... 그런데 이유를 알고 싶다니? 왜? 누구 를 원망하고 싶나? ...흠, 그렇다면... 아, 그렇지! 그럼, 그대의 그 잘나신 종속주를 원망해. 그가 아가씨의 종속주가 아니었다면, 우린 아 가씨를 굳이 찍지 않았을 테니까! 아, 그렇지! '엘'도 있군! 아가씨에 게 이런 운명을 선사한 엘도, 마음껏 원망해! 하하하..." 그러자 선수 쪽에서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비온!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배나 잘 조종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아!!" 이드넘은, 도비온이 말을 저렇게 줄줄이 늘어놓는 게, 저쪽에서 벌 어지는 상황 때문에 불안해서 그런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 렇게 불안하니까... 안전한 곳으로 갈 때까진. 이드넘의 지적에 혀를 찬 도비온이었지만, 배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다는 말에 배의 앞쪽으로 갔다. "뭐가? 잘 가고 있잖아." "저쪽으로 가면, 더 빠를 것 아냐?" "관둬! 그렇게 후미진 곳은 안돼! 자칫하다 유빙 사이에 갇히면 골 치 아파!" 셰리카는, 머리 위에서 도비온과 이드넘이 나누는 대화와 뜻밖에 상 황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계속 시나 걱정을 했는데...! 설마 이들이 시나를 붙잡아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흘긋 보니, 시나는 놀라고 겁먹은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아 직 셰리카 자신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셰리카는 도비온과 이드넘을 슬쩍 보았다. 두 사람은 한시가 급하니 어쩌니 다투고 있었다. 아마도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올걸 두려워하고 있는 듯 했다. 다른 부하들은 배 중간과 고 물 쪽에 앉아 긴장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셰리카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셰리카는 그 틈을 타, 시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나---! 시나야! 나야! 내가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시나는 이젠, 두 다리를 모으고 뭔가를 중얼거리며, 바닥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덜덜 떨고 있었는데 옷이 젖어 서 추운 것 같았다. '어휴!' 셰리카는 답답한 나머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자기 볼에 닿는 차 가운 손을 느끼고 혀를 찼다. '참, 그렇지! 호문클로스가 있었지! 없이 생활한지 오래 되어서! 하 여튼, 이드넘 놈 때문에!' 셰리카는 이드넘을 한번 째려보고, 호문클로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 가서, 내가 여기 있는걸 알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7- 관련자료:없음 [25532]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7:44 조회:1129 너무나 무섭고, 온통 젖어서 시나는 덜덜 떨었다. 이를 딱딱 맞부딪 칠 정도로 추웠다. 시나는 이마를 무릎에 기댔다. '하, 하지만... 정말로 춥지는... 하하... 아, 아빠 보약을 맛 봐 서...' 하지만 시나는 곧 울상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웃기는 생각 이 떠오르는 게 한심했다. 얼마나 한심한지... 얼마나 한심했으면, 엘 야시온님이 부르신다는 말에 재깍 달려왔을까? 파이오니온 님의 말을 들을걸 그랬다. 아까 같은 혼란한 상황에서, 엘야시온님이 자신을 부를 리 없잖은가? 시나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 았다. 이제 곧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비온의 말대로 루드랫은 물론이고, 이런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인 '엘'을 실컷 욕했다. 하지만 이제, 시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흑흑... 제발. 도와주세요. 아까 욕한 건 취소할게요... 제발!' 바로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시나 볼에 닿아 시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까스로 진정하고 그것을 보니, 그건 작은 사람이었다. 순간 브라우니가 떠올랐으나, 그런 것이 여기 있을 리는 없고... 어 디선가 본... 그것은 둥실, 공중으로 떴다. 몸이 무척 가벼운 것 같았다. "어, 어디서 온거니? 호, 호수니까... 호수의 요정 같은 건가?" 이젠 요정이라든지, 하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느껴져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호수의 요정(?)'은 둥실, 둥실 떠서 선수 쪽으로 갔다. 그곳으 로 간 요정은 어떤 여자 애의 어깨에 앉았는데... 그 여자 애는 시나가 자신을 보는 걸 알자,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뭐라고, 뭐라고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굳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 애를 본 순간... 시나는 잠시 혼란을 느꼈다. 갑자기 발 밑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배가 흔들렸나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심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그 러다가 가까스로 정상적인 감각을 찾은 시나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여자 애는 아직도 계속, 용감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시나를 빛나 는 눈으로 보았다. 마치, 시나 자신을 아는 듯... '하지만...' 시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 눈을 찌푸렸다. '난 쟤가 누군지 모르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지만... 이 사람들 일행인가? 그때 혼 강에서 봤나? 그런데 왜 저렇게 친근한 표정이지?' 시나가 몹시 의아해할 때였다. 갑자기, 뭍에서 시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 시나-!!" 시나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루, 루드랫---!!!" 너무나 반가워, 시나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루드랫은 말을 타고 배를 따라오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간간이 나무들 사이에 가 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였다. "시나!!" "루드랫!!" "이런, 제기랄!!! 저 놈이 여길 어떻게 안 거야--!!! 일부러 사람들 이 없는 호수를 루트로 잡았더니!!!" 어느새 옆에 와 있던 도비온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드 넘이 뒤쪽에서 소리쳤다. "도비온!! 얼굴을 가려!!" 그러자 도비온은 욕설을 뱉으며 후드를 가져와 그걸 뒤집어썼다. 그 동안 시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루드랫을 찾았다. "루드랫!" 도비온은 그런 시나의 모습에 신경질이 난 듯, 시나의 손목을 거칠 게 잡아채 앉히려 했다. "앉아! 이 계집애야! 그래도 소용없어!! 저 놈이 날아서 여길 오지 않는 이상!! 넌, 끝장이야!" "놔--!! 놔요!!" 어쨌든, 희망을 찾은 시나는 아까보다 심하게 반항했다. 그러자, 당 연한 듯, 도비온은 시나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배는 한층 더 빨리, 호수 가운데로 나가고 있었지만 그건 일종의 화풀이였다. "정말 분해서 못 견디겠군! 이 놈의 계집애가 이토록 말썽이라 ---??" "야잇--!!! 시나를 때리지마!!! 이 나쁜 놈아---!!!" "으악!!" 누군가 갑자기 들이받는 바람에 도비온은 그만 옆으로 쿵 넘어졌다. "시, 시나야 괜찮아?!!" 정신없이 맞던 시나는 붉어진 볼을 붙잡고, 놀란 눈으로 여자 애를 보았다. 분홍색의 머리칼... 또 한번 혼란이 밀려왔다. 틀림없이 이 아 이를 어디선가 봤는데--! 그때 누군가 소리 질렀다. "셰리카--! 무슨 짓이야!" 시나의 몸이 굳어졌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 았다. 맞다... 이 아이는 바로, 셰리카....! "...뷔기어 셰리카... 내 친구... 내 친구 보경이...!!" 셰리카는 반가운 눈을 지었다. "응!!" 하지만 시나는 믿을 수 없어서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 었을 수가? 하디트가 묻던 기억이 떠올랐다. 셰리카... 그녀를 모른다고요? 시나는 웃었다. 하하.. 알 리가 없잖아요. 우리 세계 사람들은 그런 이름, 안 써 요... 난, 친구 같은 거 없어요... 맙소사...! "셰리카... 셰리카....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시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갑 자기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너를 증오한다.. 윤시나... 그 목소리는, 이 순간 살아 움직였다. 그렇담 그건... 그건, 혹시... 시나는 하늘을 보았다. 푸른 하늘... 저 하늘이 온통 깨져버리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믿 을 수 없는 일이...! ...꿈이 아니야? 모든 것이 사실이야? 현실...!? 그때, 도비온이 바르작 거리며 일어났다. 후드자락이 물에 젖어 엉 겨붙어 일어나기 힘든 것 같았다. "이, 이 놈의 계집애가!! 이드넘이 뭐라고 하든, 죽여 버리겠어 ---!! 호수 물이 얼마나 찼던 지는, 지옥에 가서 불평해라-!!" "꺄아아악--!! 이 나쁜 놈아, 놔!!!" 도비온은 셰리카를 들어, 호수에 빠뜨리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온 이드넘이 도비온을 막았다. "도비온!! 셰리카는 건들지 마!!" "닥쳐!! 멍청한 짓 그만해, 이 바보 녀석아! 난 이 여자 애를 꼭 죽 여버리겠어!" "누구 맘대로?!!" 두 남자는 거칠게 싸우기 시작했다. 배 안에 있던 부하들은 웅성대 기 시작했고, 배는 이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 있는 것이 힘들 정도로, 아래로, 위로... 그리고 바로 그때. 무 언가가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도비온이 셰리카를 배에서 밀어, 호수에 빠뜨리려 하고 이드넘이 그 걸 막느라, 그만 그 와중에 시나를 밀쳐냈고, 아무 힘도 없이 멍하게 있던 시나는 그대로 반항도 못하고 호수에 빠졌다. "꺄아아악!! 시나야---!! 시나!!" 도비온과 이드넘은 멍하니 호숫가를 보았다. 방금 한 여자 애를 집 어삼킨 호수는 큰 물결의 동심원을 일으켰다. 그것이, 너무나 고요 해... 다시는 아무 것도 뱉어놓지 않을 듯... 흔히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대며, 살려달라고 몇 번씩이나 가라앉 았다 떴다, 하는 현상은 전혀 보이지 않아... 방금, 이 자리에 있던 여 자애가 저 호수에 빠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까 지 옆에 있던 시나는 없었다. 이드넘이 도비온의 멱살을 놓고 뱃전에 매달려 소리쳤다. "제, 제길---!! 건져!! 도비온, 어서 건져 올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도비온은 고개를 들었다. "이, 이 계집애가 정말 말썽이군!!" 셰리카에 대한 원망이었는데, 하지만 도비온은 그녀를 빠뜨리느니 어쩌니 하는 협박(혹은 실행)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셰리카가 소리를 지르며, 호수에 첨벙 뛰어든 것이다. "시나 야!! 내가 구해줄게--!!!"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소리는... "꺄아악!! 물이 너무 차가워!!! 꺄아악!! 살려줘!! 나는 헤엄 못 쳐!!!" "셰, 셰리카..." 이드넘이 멍하니 말했고, 도비온은 이를 득득 갈았다. "뭐 하는 짓 이야, 저 멍청한 것이!!" 첨벙, 첨벙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꺄아악!! 살려 줘!!!" "...도, 도비온... 제발, 살려 줘..." "미쳤냐?!! 구하고 싶으면 네 놈이 뛰어들어 직접 구해!! 별, 그지 같은!!" 그리고 도비온은 마나를 불러 일으켜, 배 안에 있는 밧줄에 마 법을 걸었다. <네게 명령한다! 엠벨루스의 이름으로! 내 의지가 원하는 대로, 내 눈이 되어라! 그리고 찾아라!!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리고 도비온은 잠시, 의식을 그 무생물 가운데 옮겼는데, 순간 그 는 의식을 잃었다. 그의 몸은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건 매우 위험한 마법이라, 이제 이드넘은 도비온에게 강요해 그에 게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도 없었다. 그저, 셰리카가 가라앉는 것을 보고 있을 뿐. 그 동안 밧줄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뱃전에서 이동해 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이런 것을 구경했을 때, 당시 도비온의 능력으론 이건 고작, 눈 깜빡할 동안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시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동안 마법을 행할 수 있을까? 그럼...? "...제길!" 이드넘은 뱃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하기는 지금은 그 무엇도 상관 없다... 셰리카가. 방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드넘은 물결들로 어지러운 수면을 보았다. 곧... 이젠, 또... 무서운 고독... 그러니 이제와선, '시나'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뱃전에 이마를 짓찧은 이드넘은, 저주의 말을 뱉었다. "...도비온! 꼭, 실패해라! 그래야 네 놈 식당이 부서지는 꼴을 볼 수 있겠지!!" 시나는 계속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지독하게 차갑고 지독하게 온 몸을 짓누른다. 호수의 물은, 시나의 입과 코에서 생명의 호흡들을 빼 앗아 위로 보내고 있었다. 점점 숨쉬기가 가빠짐을 느끼며, 시나는 이것은 '현실'인지, 혹은 '꿈'인지를 궁금해했다. 이것도 눈만 깜빡이면 사라질 현실--혹은 생각 하기도 싫은 지독한 꿈--인 것 같아. 어떻게 셰리카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 무슨 이유 때문에? 도대체 기 억에 무슨 이상이 생긴 걸까? 현실과 다른 이런 환경에, 미치기라도 한 걸까? 여기서 만약 셰리카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은 영원히 셰리카를 잊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현실'로 돌아가서... 그러나 시나는 어제 그 여자애가 한 말을 떠올렸다. '무엇이, 현실이야?' 무엇이, 현실이지? 시나는 눈을 감았다. 입에서 더 많은 공기방울들 이 새어나왔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호오... 인간이다. 오랜만인데. 아직도 따뜻하다... 만져봐.> <으응... 그런걸. 이걸 우리가 갖게 돼?> <응. 곧...> <헤헤헤....> '누구...?'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웠지만 시나는 물었다. 죽을 때가 다가와 허 상을 보는 듯. 누군가 앞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물 속인데도 불 구하고. 하지만 시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제,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 게 되었으므로, 이것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누구야...?' <....?> '이런 물 속에서 뭘 하는 거지?' <에에...? 이거 봐! 말을 건다... 에에? 에에?> 갑자기 시나 몸 주변에 소용돌이가 쳤고, 덕분에 시나는 더 이상 가 라앉지 않았다. <에에? 이봐! 따뜻함! 우리한테 말을 건 거야? 정말이야? 우리와 말 을 할 수 있어?> 푸르고 투명한 머리칼--그건 꼭 물줄기 같이 보였다-을 풀어헤친, 역시 투명한 몸의 작은아이들이 시나를 들여다보고 놀라고 있었다. 그 들의 몸이 투명해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얼굴은 여기도, 저기도... 모든 곳에 있었다. 아니, 시나를 둘러싼 모든 물들 이 눈만 깜빡이면 그런 얼굴들로 변했다. 머리칼로, 손가락으로, 물고 기 같은 꼬리로... 하지만 시나는 눈을 감았다. 시나의 입과 코에서 커다란 물방울들이 방울져 떠올랐고, 시나는 더 이상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에에에---!! 이봐!! 눈을 떠--! 따뜻함--!!> <안 되겠다!! 내가 인간 마을을 지나다가 들은 말이 있는데--! 이런 따뜻함 들이, 바깥에서만 사는 건, 이런 것-> 투명한 입이 볼을 부풀려 뿜어냈다. 그러자 둥근 물방울들이 부글거 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헉헉... 이런 게 있기 때문이래!! 그러니까, 이봐, 이봐!! 그 코로 들어가지마! 그래! 너 말이야! 너! 아니, 이건 내 꼬리군! 자, 자... 내 꼬리도 너희들 손가락도... 치워봐!> 투명한 손바닥이 꼬리와, 손가락들을 철썩 철썩 때렸고, 그 손가락 들의 주인들은 깔깔대며 물러났다. <꺄아-- 꺄하하하--> 그러자 곧, 시나 몸 주변에 물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시나가 심한 기침을 하며, 눈을 떴을 때... 그때, 시나는 물 속에 있는 공기 캡슐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콜록, 콜록... 하아... 하아... 이... 이럴 수가...!!" 캡슐 안은 냉장고 안처럼, 무시무시하게 추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젠 공기가 있었다. 흠뻑 젖은 시나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주변을 보았 다. 주위에선 시끄럽게 떠들며, 시나에게 말을 걸어댔다. 투명한 얼굴 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방에서 시나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하고 앙 증맞은 그것들의 얼굴은 브라우니와 같이 너무 작았지만... 밝고 즐거 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봐-- 따뜻함! 말을 해! 아까처럼!> <우린, 심심해! 말을 해봐!> <아냐, 우리가 먼저 인사를 해야해! 따뜻함들은 그렇게 한다고! 안 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다른 따뜻함들은, 너 같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가 몸만 가졌 어!> 시나는 억지로 웃었다. 너무나 추워서 미칠 것 같다. "콜록... 하아... 아, 안녕... 만나서 반가워... 이런 상황이 아니 었다면, 더 반가웠을 것 같지만..." <꺄하하하-- 이것 봐!! 말을 한다!!> 하지만 시나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는 자체가 힘들었다. 옷을 보니, 벌써 딱딱하게 얼어붙고 있는데... 눈꺼 풀에도 얼음이 매달린 듯, 무거웠다. 이래선, 물에 빠져죽는 것이 아니 라 얼어죽는 것이다. --물 속에서. 그런데 또 사방에서 시끄러운 목소 리가 들렸다. <에에? 뭐? 또 다른 따뜻함? 그거 잘 됐다! 끌어들여! 그 따뜻함도 말할 수 있어? 말을 걸어봐! 에에에--- 뭐? 못 알아들어? 첨벙거리며, 괴롭힌다고? 쳇... 그럼 죽여버려. 따뜻함이나 가지자고> 시나는 이런 물줄기(?)들의 말에 놀라, 가까스로 눈을 떴다. 다른 따뜻함? 다른 인간을 말하나? 또 누군가 빠졌다고? 시나는 위쪽을 보았 다.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데... 수면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닌 듯,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익숙한 옷차림의 여자아이가 몇 번 첨벙 거리더니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나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셰, 셰리카...!!" 시나는 손이 곱아 펴지도 못할 지경이었지만, 그대로 물의 장벽에 손을 대고 말했다. "저건... 저건, 내 친구야...!! 구해 줘, 제발!!" <구해 줘? 하지만, 저건 우리말을 못 들어.> <응.. 그러니까, 죽여도 돼.> "안돼-!! 구해 줘!! 아님, 비켜! 내가 가겠어!" 셰리카는 벌써 시나가 있는 곳만큼이나 가라앉고 있었다. 시나는 허 둥대며 물의 장벽을 뚫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물은 콘크 리트나, 유리처럼 단단했다. "비켜--!! 이걸 치우라고--!!!" <...에에... 어떡하지? 따뜻함이 화를 내내?> 슬픈 목소리였다. 다른 목소리가 체념한 듯 말했다. <...하는 수 없지. 데려다 줘. 그럼, 따뜻함이 화를 안 낼 거야.> "셰리카--!" 시나는 셰리카의 젖은, 차가운 몸을 받아 안고 정신없이 소리쳤다. 셰리카의 입술은 새파랗고 머리카락에선 물들이 뚝뚝 떨어져 의식을 차 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 밑도 새파랬다. "셰리카!! 죽으면 안돼...!! 디트...!! 디트라면...!!" 시나는 물줄기들에게 말했다. "날 위로 보내 줘!! 힐러가 필요해!!" <위로? 위라니? 경계에서 노는 거야?> <아냐! 따뜻함이 말하는 건- '위'는, 인간 마을을 말하는 거야!> 인간에 대해 설명했던 목소리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소란이 일었다. <에에에-- 싫어-- 안돼-- 이 따뜻함은 우리 거야!! 우리랑 이야기하 며, 놀 거야!!> <못 가게 해!!> 시나는 당황했다. "곧, 곧... 돌아올게! 그리고 같이 놀면 되잖아!" <안돼! 따뜻함은 거짓말을 해! 내가 인간세상에서 들었어!> "제발! 그럼, 우선, 이 애만이라도 보내 줘!! 그러면...!!" <그, 따뜻함? 안돼. 그건 우리말을 못 들어. 그러니까, 죽어도 돼. 그게 법칙-이야.> 그 음성은 무자비하고, 심술궂었다. 그들이 차가운 생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안돼--!" 시나는 벌떡 일어났다. "살인자들!! 너희들이 어떻게 셰리카를 죽일 수 있어? 디트라면 살릴 수 있을 거야! 날 보내 줘!" <깔깔깔....> 하지만 그들은 웃기만 했다. <역시, 저 따뜻함을 가져다주니까, 말을 하는구나!! 계속 말을 하게 시켜! 재미있다!!> "콜록, 콜록...!!" 그때 셰리카가 눈을 떴다. "셰리카!!" "시, 시나... 구, 구하려고 뛰어들었는데... 나... 헤엄을 못 쳐 서... 하아... 너, 너무 춥다..." 셰리카는 몸을 떨더니, 눈을 감았다. "셰리카--!!!" 시나는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시나는 물의 장벽들을 보았다. "보내 줘!! 셰리카를, 제발!!" <흐응... 그럼, 넌 우리랑 약속을 해.> "무슨 약속?!!" <넌 계속 여기 있는 다고.> <그래, 그래... 넌, 우리랑 사는 거야. 우리 친구가 되는 거야.> "약속할게!!! 그러니, 이 애를 보내 줘!!" <깔깔... 약속했다. 약속했어!!> 동시에, 물의 장벽에서 투명한 손이 나와 셰리카의 몸을 가져갔다. "사, 사람 있는 곳에 데려다 줘!! 안전한 곳에!! 하지만... 그렇지! 호수 위에 떠있는 배는 아니야! 그곳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좋아! 우린 약속을 지켜,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 시나는 그들이 셰리카를 뭍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고 자리에 털썩 주 저앉았다. 바닥 또한 투명한 물이었고, 멀리 물고기들이 떼지어 노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무엇이 현실인지... 시나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몹시 추웠지만, 사실, 얼어서 죽지는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만약 죽는다면... 절망. 혼란... 몹시 지쳐서... 너무나 피곤했던 시나는 잠시, 잠을 자기로 했 다. 시나를 쫓던 루드랫은, 나무들 사이를 달리다 나오니, 배 위에 시나 가 안 보여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렸고, 그 사람은 비명을 질러댔다. '...셰리카 양?' 믿을 수 없었다. 셰리카 양이 왜 저기 있는 것인지...? 설마...? 그 녀가 정말로 스파이였단 말인가? 그런데, 왜 지금은 물에 빠져 있는 것 인가? 실수로 떨어졌다고 해도, 배에선 아무도 그녀를 구할 생각을 하 지 않는 듯. 셰리카가 첨벙대는 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 이로서 확실해 졌다. 어쩌면, 저 배에서 일부러 그녀를 밀어 떨어뜨 린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시나는? 루드랫은 배를 살폈다. 시나도 보 이지 않았다. 설마...!! 그렇다면, 이미 빠뜨린 것인가? 루드랫은 말에서 내려 정신없이, 얼음이 언 호수로 들어섰다. 하지 만 어느 정도까지 갔을 때, 발 밑에서 쩌저적, 소리가 들렸다. 하긴... 말이, '호수'지... 이곳의 물은 염분을 품고 있어, 최근의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물이 얼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드랫은 말 쪽으로 뛰어갔다. 아무튼, 셰리카 양이라도 구한다면. 그녀는 시나의 친구니까...! 배에 있는 자들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 었다. 셰리카 양이 떨어진 곳은, 호숫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까... 밧줄을 가져온 그는 그 끝을 근처의 나무에 묶고 서둘러 물가로 뛰 어갔다. 이미 셰리카 양은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보아야 했다. 그래서 옷을 벗어제치고, 허리에 밧줄을 감아, 물에 뛰 어들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이곳까지 올 필요 없어....! 우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나?> 루드랫은 눈을 크게 뜨고 얼음 주변에 철썩거리는 물결들을 보았다. 믿을 수 없지만, 그건 인간의 손가락들로 보였다. <깔깔... 잠깐 기다려!! 서둘지 말라고!! 우리 친구가 인간을 하나 보낼 거야... 네가 그를 돌봐 줘야해. 네가 가장 가까운데 있는 인간이 니까...> 루드랫은 뒤로 물러났다. "물의 정령... 나이어드?" 이것들이 인간에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걸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 그들이 말한 대로였다. 잠시 후, 물 이 더 세차게 철썩거리더니, 마치 이물질을 뱉어내듯, 물 속에서 셰리 카가 불쑥 올라왔던 것이다. "---!!" <돌봐 줘! 그게 우리 친구랑 약속이야... 깔깔...> 그리고 음성은 사라졌다.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구하려던 사람이 이렇게 물가로 나왔으므로, 루드랫은 더 이상 생각 하지 않고 젖은 셰리카의 옷을 벗기고 벗어놓은 자신의 옷가지로 셰리 카를 감쌌다. 직접 보지 못했다면, 안 믿으려 했을 것이다. 나이어드들이, 물에 빠진 인간을 구해주다니... 바로 그때 셰리카가 움찔, 눈을 떴다. "셰리카 양?" "...시나의 종속주..." 셰리카는 힘없이 호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시나를 구해 줘요... 시나... 아직도 저 물 밑에... 제발..." 그리고 셰리카는 정신을 잃었다. 시나는 주위, 물의 장벽을 보고 중얼거렸다. "뭐야, 이 상황은...?" 별별 일 다 당했지만, 이런 건 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게다가 지옥처럼 춥다. 온몸이 자기 것 같지 않은 느낌이라니... 시나는 물의 장벽에 의지해서 겨우 일어났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계속 사는 거야! 그렇지? 어때, 물고기를 잡아줄까? 먹을 래?> "...?" 그들은 계속 떠들었다. 이야기를 해보라는 둥, 어떻게 살았냐는 둥... 하지만 시나는 그들에겐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 독하게 춥고, 온몸은 젖어있고(아님 얼어붙어 있고) 물의 장벽은 견고 하다. 시나는 손을 이마에 댔다. ...뭔가가 이상하다. 어젯밤 이후로. 상대는 자신을 절대 내보지 않을 의지를 비추고 있 었고, 시나 자신도, 그녀의 의지가 실현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데, 이렇게...? 뭔가... 이런 일에 대한, '공통점'이 떠오를 듯도 하다. 시나는 얼 굴을 찡그리고, 이마에 손을 댔다. 맨 처음, 자신이 '완전한 의식을 회 복'했던 건... "...학교엘 다녀오다가. 그 더러운 놈들 때문에..." 그리고, 다음으론...? 바로 그때, 차가운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따뜻함! 왜 가만히 있어? 말을 해봐! 응?> "---!!" 시나는 분노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 한 생각이 떠오르려 하는데, 방해를 하다니!! 이들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시나 자신을 대해선 안 된다! 시나는 은색의 눈동자로 주변을 휙 보았다. 이 주문은 여기서도 들을 거다. 세렌시스가 알려 준 거니까. 브라우 니를 불렀을 때도, 듣지 않았는가? <따뜻함?> 이제 그쪽에서도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망설이는 투로 시나를 부르는데, 시나는 입을 열어 명령했다. <들어라--!! 요정들아!!> <---!!!> 그것은 고대의 언어... 그리고, 노래였다. <나, 히어러HEARER--! 신이 너희들에게 부여한 이름을 들으며--!> 시나의 머릿속에 이름이 떠올랐다. <나.이.어.드.Naiad-- 너희들을 수하에 두니, 그럼으로 개체의 이름 을 부여한다! 히어러이자, 네이머NAMER 나, 시나가!> 하지만 다른 때라면 즉각 순종했을 그들이... 놀라며 말했다. <느, 능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히어러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네이 머?! 그러나 네겐 증거가 없어!!> 시나는 빙그레 웃었다. 브라우니들도 이런 소리를 했다. 어쩔 수밖 에 복종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반항을 하려한다. 한 사코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물. 세렌시스는 이들은, 무척 다루기 힘들다고 했다. "흥... 별것도 아닌 것들이!" 시나는 그들을 일부러 무시하는 눈으 로 보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 마음이 아파서였다. 루드랫은, 이제 시 나가 검은머리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어드들은 소란스럽게, 시나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시나 의 명령권이 듣지 않은 저 바깥쪽의 나이어드들까지 몰려온 것 같았다. <뭘, 그런 말을 듣는 거야! 죽여버려! 인간이라고!> 그들은 매우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잘 다룰 수 없다면 차라리 건 드리지 않는 것이 나을 자들... 그들의 적대감은 시시각각 증폭되었다. 물의 장벽은 꿈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하지만 시나는 그 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증거... 너희들이 원하는 게, 그런 거야? 그렇다면, 너희들이 와서 직접 확인해!" 쏴아아아---!! 어디선가 폭포가 떨어지는 듯, 아니면 비가 쏟아지는 듯, 나이어드 들은 함성을 지르며 시나에게 달려들었다. "---!!" 시나는 몸을 움츠렸다. 숨이 막히진 않았다. 그들은 시나의 기도(氣 道)를 장악하진 않았다. 나이어드들이, 시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정말, 네이머일리 없어!> <정말 그렇다면---!!> 물방울들은, 기포를 만들며, 부글대며, 시나의 머리칼을 미친 듯이 훑었다. 그리고 시나는 눈을 감고, 하나의 꿈을 끝냈다. 그에 따라, 검 은 머리칼은 점점 빛을 발하며... 색이 엷어지고 있었다. 사실, 내 머리카락의 색은... 이것과 다르다. 그런데도 검은 색이었 던 것은, 아마도 그건... 시나의 머리카락은, 점차 회색으로... 그리고, 다음으로 찬연하게 빛을 내는 은발, 하나 하나의 머리칼이 진짜 은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빛을 내며, 나이어드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렸다. 잠시, 수중 가운 데 침묵이 돌고, 드디어 누군가 속삭였다. <...네, 네이머다!! 진짜로...!> 시나는 눈을 떴다. 그 눈동자 역시, 빛나는 은색이었다. "...그래. 난 너희들의, 네이머, 마스터다." ...아마도 그건, '염색' 때문이었겠지. 그건, 멋진 꿈이었다. <네이머!> <네이머...!> <네이머...!> 호수 가운데에, 나이어드들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맙소사! 저 계집애가 네이머라니! 왕족! 겐트온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 빌어먹을! 어떻게 이럴 수가...!> 시나는 휙, 눈을 들었다. 위에 뜬 배에서 나온, 길다란 '밧줄'이 고 개를 들고 시나를 보고 있었다. 시나는 으르렁거렸다. 누군지... 어렴 풋이 알 것 같았고, 이제야 분노를 발산할 상대를 찾았다. <...저 자를 죽여라, 나이어드!> 즉시, 개체들의 이름이 빛보다 빠르게, 정신과 정신으로 퍼져갔다. 그들이 속삭였다. <어디까지, 마스터? 우리의 힘이 어디까지 필요합니까?> <너희들의 죽음까지!!> 사방에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어드들은 시나를 위해, 죽음 에 이르기까지 싸웠다. 죽음... 아무에게도 말을 걸 수 없는, 그리고 아무의 말도 들을 수 없는. 그저 단지, 존재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아무에게도 보이지도, 감 지되지도 않은 채. 심지어는 동료들에게조차. 그렇게 거품처럼 허무하 게, 끝 날까지 존재할 것이다. 허무... 그것이 요정들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시나는 은색의 눈을 분노로 빛냈다. 이런 것들의 사정 따윈 봐줄 필요 없다! 의심 따위나 하는 버릇없는 것들!! 그보다는 이번에야말로, 저 미운 놈들을 꼭 죽여버리겠다! 그러나 그건, 시나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쩌면 시나는 경험이 없 었기에. 다음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시나의 명령권 안에 있던 나이어드들이 죽어 없어질 때, 그곳을 채우는 다른 나이어드들. <우리 자매를 죽인 자--!!> 찢어지는 날카로운 그 목소리. 그래서 시나는 다시 권능의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귀'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시 나 곁에 남아있던 나이어드들이, 시나에게 말했다. <마스터. '마을'로... 우리 죽음을 다해.> 그는 자기의 자매와 싸우며, 바로 눈앞에, 자기 죽음을 보고도 다정 하게 말했다. 어쨌든, 마스터--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어준 자 는, 네이머 시나였으므로. 셰리카의 말에, 루드랫은 잠시 몸이 굳어있었다. '물 속'에 있다니? 셰리카 양보다 더 오래? "루드랫!" 그때, 레이서스가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루드랫과 헤어져 호수 반 대편을 돌던 그는 시야가 트인 곳까지 갔다가 이쪽에 배가 떠 있는 것 을 보고 온 듯 싶었다. "루드랫? 도대체, 왜 옷은...!! 그리고 그 소녀는 누구지!?" 루드랫은 굳은 표정으로 셰리카를 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셰리카를 레이서스에게 맡겼다. "이 소녀를, 힐러에게... 시나의 친구입니다." 레이서스는 그녀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 "시나, 그녀는?" 루드랫은 호수 쪽을 보았다. "...찾아오겠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호수에 떠 있는 배 주변에 격랑이 일기 시 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마치 그곳에만 폭풍이 몰아치는 듯, 배는 위험하게 흔들렸다. 곧이어, 배는 거꾸로 뒤집혔다. 배에 탔던 사람들 은 비명을 지르며 구원을 요청했지만, 곧 아까의 셰리카처럼, 아니 그 녀보다 더 빠르게, 마치 누군가가 끌어당기는 듯, 호수로 가라앉아 버 렸다. 그리고 무섭게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거품들...! 레이서스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으윽!!" 호수 가운데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나더니, 한 마리 거대한 새가 날아올랐다. 멀리서 보기에도 흠뻑 젖은 그 새는 발톱에 한 인간을 데 리고 멀리, 사라져 버렸다. 풍덩---!! 공중을 보던 레이서스는 바로 옆에서 들린, 뭔가 빠지는 소리에 깜 짝 놀라 옆을 보았다. 루드랫이 호수 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가고 있었 다. "루드랫--!! 미쳤나?!!" 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운 물이다! 아무리 루이티온의 몸이라곤 하지 만!! 심장이 멈춰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드랫의 몸은, 곧 물 속 으로 사라졌다. "...맙소사!" 레이서스는 초조하게 호수 쪽을 보았다. 나쁜 예감이 든다... 시나에 대해 물었을 때,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설마!" 레이서스는 상상하기도 싫은 이 가정들을, 애써서 거부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는 절대 없다. 설마...!! 설마, 정말로 저 호수 속에 있 다고 하더라도...!! "...루드랫, 제발!!" 레이서스는 자신도 뛰어들고 싶은 것을 참으며, 정신없이 말했다. 루드랫은, 자신의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은--마치 천 근이나 되는 돌을 움직이는 것과 같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은 지독하게 찼고, 잠시 눈앞이 뿌옇게 느껴질 정도로 충격적이었 다.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아, 몸을 움직이기 힘들 때라도 이 정도는 아 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헤엄쳤고, 곧 물 속으로 들어갔다. 레이서스가 '미쳤냐'고 소리치는 걸 들었지만... 실제로도 미쳤는지 모 르지만, 하지만 루드랫은 어떤 희미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셰리카는 물 속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리고 나이어드들!!! '시나, 제발 살아있길!!'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루드랫은 놀란 얼굴로, 물 속, 저 앞을 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누군 가 이쪽으로 흘러오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시, 시나--?!!' 순식간에 다가온 시나의 몸은 루드랫에게 쿵 부딪혔다. '시나!' 귓가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우리 마스터를 네게 맡 긴다! 빨리 데리고 나가!!> 그리고 누군가 루드랫의 몸을 위로 떠밀었다. "--!!" 루드랫은 거의 헤엄칠 필요도 없었다. 시나의 몸을 꽉 안고... 정신 을 차렸을 땐, 이미 물 밖이었다. "루드랫!!!" 레이서스가 소리치며 루드랫이 떠오른 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루 드랫은 호수 쪽을 돌아보았다. 자기가 떠밀려 온 수면엔, 하얀 물거품 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루드랫은 자기가 안고 있는 시나를 내 려다보았다. "...맙소사." 물에 젖은 회색의 머리칼... 카이러스 스피릿 심벌. 카이러스의 왕 족이었다. 그날, 클로니아의 변방, '펼쳐진 숲'엔 파워즈가 강림했다. 거대한, 2.5미터 장신의 스피릿... 신의 철창으로 불리는, 무장을 한, 그 군신 들은, 손에 불타는 검을 들고 단 일격에 상급 몬스터들을 두 쪽으로 갈 라버렸다. 그들이 가진 검들이 내는 불꽃은, 닿는 모든 것을 태웠고-- 심지어는 바위라도 녹이는 그 강렬한 불꽃--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들은 엘야시온의 명령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웠지만, 그것 뿐. 파 워즈의 칼날에서 흘러나온 피를 받은 자연은, 황폐하여 이후로 아무 것 도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인간 또한, 그 땅에 거주한다면,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곳은 말 그대로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어떤 생물도, 그곳에 선 자신과 똑같은 형상의 자손을 퍼뜨리는, 그 황금의 써클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일그러지고 파괴된 고리... 허무와 공허의 이름. 약, 사십만 그루의, 다 자란 떡갈나무가 자랄 수 있는 땅이, 그로서 폐쇄되었다. 그것을 상징하는 불타는 불의 장막이, 불길하게 주변을 밝 히며 밤과 낮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피를 흘린 대가, 파워즈의 칼날에 피가 묻은 대가... 그것이 몬스터 의 피라도. 피는 저주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어차피, '펼쳐진 땅'이었고,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아니었다. 사냥터는 다른 곳에 만들면 된다. 단지, 사람들은 '파워즈'를 직접 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8- 관련자료:없음 [25533]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7:45 조회:1136 온 왕궁이 술렁이고 있었다. 사냥터에서 일어난 일들로 인해 왕궁은 경사스런 세계혼의 축제도 잊을 만큼 소란하게 되었다. 우선. 사냥터에서 돌아온 후, 칼리안 측의 태도가 상당히 많이 변했 다. 힐라토에 대한 심한 유감을 표하며, 세계혼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알려왔다. 그리고 즉시, 자기들 세계인 칼리안으로 돌아가 버렸는 데. 그 공식적 이유로는 스온 칼리스타가 만티코라스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해, 치료를 위해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도 고작 클 로니아에 알려왔을 뿐이고, 어디까지나 신부 측인 힐라토에 대해선 싹 무시하는 태도라, 사람들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어리둥절해 할뿐이었 다. 하지만 이런 형제 세계의 불화를 돌봐야하는 인물인 엘야시온은, 사 냥터에서 파워즈를 소환한 후로 격심한 소모감 때문에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은 계속 자리에만 누워있어야 했다. 힐러의 집중적인 치료를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이 될 때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는 데, 그날 오후 억지로 나마 일어났던 것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 기 때문이었다. 바로, 사냥터에... 카이러스의 스아디온이 나타났다는. 사실, 칼리안의 무례하다면 무례한 태도가 덜 주목받아, 무마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놀란 만한 사실 때문이었는데. "...카이러스의 스아디온!? 뭐라고? 누구? 루온 루드랫의 종속자? 무 슨 멍청한 소리인가! 내가 엘야시온에 재위한 후로, 이런 멍청한 이야 기는 듣다듣다 처음이군!!" 몰라볼 정도로 해쓱해진 그가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한 소리였다. 하지만 엘야시온의 발언이 어떠하든. 시간이 지날수록... 각 세계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번 세계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사냥터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 정도 되었을 때엔, 각 세계의 왕족과, 귀족들이 각자 자기들의 살롱에 모여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느 라 정신이 없었다. 무력하게, 몬스터들의 먹이가 될 뻔했다는, 사냥터 에서 입은 충격. 그것을 만회할만한 시간이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지 만, 그래서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앞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 다. "이번 사냥에서 밝혀졌듯이...!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몬스터 떼거리라니!! 현 엘야시온님의 능력은 많이 쇠퇴하셨습니다! 고 작 파워즈를 소환하고, 저렇게 누워 계신 것하며--!!" 귀족들의 말에, 한 힐라토의 귀족이 불쾌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논의 되는 말들은 그들을 불쾌하게 하기 충분했다. "고작? 파워즈를 소환한 일이, 고작이라고요?!! 은의 엘야시온 타미 스엘이 살아오셨다고 해도, 파워즈를 소환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게 다가 엘야시온님에 대한 말이 지나치군요!! 도대체 뜻하는 바가 무엇입 니까?!" "당장, 새로운 엘야시온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이번 하누카 날 에!! 그것이 아니라면, 내년이라도 말입니다!!" "하! 그래요? 스온 엘스제께서 아직 나이 안 되셨는데...!! 무슨 헛 소리입니까?!!" "...다른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나타난 지금...!" "뭐라고요?!!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마노테가---!!" 그러자 사방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같은 힐라토 쪽에서도 불편 한 낯빛이었다. 결국 '마노테'라고 했던 귀족은 사과를 해야 했다. "...실언했습니다. 아무튼!! 그대가 아무리 말해도, 다음 대의 엘야 시온은 스온 마리스 님입니다!! 내후년!! 서둘지 마시란 말입니다!!" "내 후년이라고요? 그때까지, 엘야시온이 남아있기나 하다면, 가능하 겠군요!! 아님, 정말 색다른 엘야시온이 되시겠죠!! 인간이라곤 하나도 없는, 몬스터 천지에서, 몬스터를 다스리는 엘야시온 말입니다!!" 사방에서 웅성대며, 서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상황을 과장합니까!?" "제가 듣기론,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우리 세계가 지금 어떤 줄 아십니까?! 지난해 내 영지에 출몰한 몬스터만 하 더라도-!" "힐라토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다른 것 다 관두고라도, 난 지금 상황만 해도, 참을 수 없소! 여기 와서, 내 시종들을 대부분 잃었소!! 그리고 내 루이트도!!" 그러자 사방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들도 마찬가지였 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인가! 세계혼의 자리에서, 송장을 치우는 일 을 해야하다니!" 누군가 쓰게 뱉었다. "...느닷없는 상급 몬스터들--! 자이온, 토너먼 트에서만 보던 그것들--! 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 혼인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지금 갑자기! 그것도 하필이면 몬 스터가 나타난 바로 그때에!! 그때,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나타난 것!! 그건 우선, 당장 엘야시온을 세우라는-- 그런, 엘의 의지가 나타난 것 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 말이 바로 그거요!" "닥치시오! 엘의 뜻을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 마시오!" 여기저기 더욱 소란해 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의 의지'쪽에 찬 성하고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굳이 힐라토 인이 아니라도,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난 '마노테 모양의' 스아디온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스온 엘스제의 종복... '루온 루바인'이 말 했을 때는 모두들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견들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면-" 루바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스온 엘스제께선,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누군가 우물쭈물 말했다. "...그러니까.. 카이러스엔 좋은 거지요. 그분께서, 다음대의 카이러스 파이오니온이 되시는 거니까." 그 말에 루바인은 차갑게, 정말로 차갑게 웃었다. "뭐라고요-? 카이 러스 파이오니온? 하하하..." 루바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났을 때, 사람 들은 그의 회색 눈동자가 강철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카이러스 파이오니온...?" 자신의 작은, 스온 엘스제가? 그분... 카이러스 사이너스 님을 대신 하여, 파이오니온이 된다고? 그는 입 속으로 혼잣말했다. "...우습군." "네?" "아닙니다." 루바인은 차가운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급한 일 이 생각나서.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미소가 상당히 묘한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루바 인이 자리를 뜨자 입맛을 다셨다. "모시는 분이 엘야시온의 배우자가 못된다면, 저 자로선 별로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건 사람들이 루바인을 오해한 것이었다. 자기 숙소로 돌아 온 루바인은 즉시, 몇몇 부하들을 불러,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냥터의 카이러스 스아디온에 대해, 모든 걸 조사해와! 어떤 배 경... 어디서 태어났는가 까지도!" 그들이 나가고 나자, 루바인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젠장! 하필이면, 이제 와서-!!" 엘야시온의 배우자가 누가 되건, 누가 엘야시온이 되건, 아무 상관없 다. 중요한 건, 카이러스의 파이오니온. 루바인은 눈을 어둡게 빛내며, 낮게 말했다. "...카이러스 사이너스 님 외의 파이오니온...? 정말, 웃기고 있 군... 어디, 맘대로 되는가, 두고 보시지..." 시나는 잠들어 있었으므로, 계속 생각할 수 있었다. 어느 때 '내'가 나올 수 있었지? 맨 처음, 완전한 의식을 회복한 건, 학교에 다녀오다가. 두 번째는, 동굴- 세 번째는?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나 간단했다.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 '죽을 정도로 위험에 처했을 때.' ...하하. 시나는 웃었다. 그렇구나... 정말로, 그렇구나! "그렇담, 윤시나- 모든 것이 네 뜻대로만 되진 않는다는 걸- 다음 번, 네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때 확실히 보여줄게. 하하하" "--!" 시나는 눈을 떴다. 식은땀이 흘렀다. "아- 깼습니다!" "--?" 시나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 있던 사람 들--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 놀란 음성을 냈다. "세상에- 정말이잖아!" "맙소사!" 그들 사이로 엘야시온 가디엘이 나타났다. 그는 초췌해 보였지만, 역 시 놀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한참이나 시나를 지그 시 보았고, 난처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자네, 머리색- 도대체 어떻게 된 건 가?"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원래 머리색은 '회색'이었다고? 진작 말하지 않은 건, 여러 가지 사 정이 있기 때문이었고, 이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과연... 그럴 것이다. '칼루스온'이 어떻게 '왕족'에 대해 알겠는가?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보면 맹한 아가씨다. 그 동안 연회에 참석했을 테니, 왕족들이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관찰했을 텐데...! 그런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차라리 그럼 끝까 지, 검은머리로 있던지. 갑자기 왜 머리색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인가? 그러나 그건 자신도 모르겠다는 말이었고, 이곳의 물은 염색한 것도 금방 빠지게 하는 거 아니냐는 둥... '염색'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천에 물을 들이듯, 머리에도 물을 들이 는 거란다. 어이가 없었다. 칼루스온들은, 왜 그렇게 황당한 일만 하는 지. 그 독한 것을 머리에 바른다고? 왜 아티팩트를 쓰지 않는지 이상했 지만, 그건 가디엘 자신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단지 화가 나는 일이라면, 아티팩트로 숨긴 거였다면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염색'인지 뭔지 흉악한 것 때문에, 일을 이 지경으로 크게 벌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칼루스온인 자체는 신경쓸 것도 없고(그쪽 세계에서 왕족이 아니었다 는 것에 놀라기는 했다) 예정대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이쪽 사람들이었다. "...끄응. 미치겠구만." 방금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현 상 황에 나타난 '엘의 뜻'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대책은 세워뒀 는지, 그것에 대해 묻고 돌아갔다. "에잉, 엘의 뜻은, 무슨 얼어죽을 엘의 뜻!!" 사정도 모르고 흥분하는 저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답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냥터에 나타난 대규모의 몬스터 건으로 하겐 트를 떠봐야 했고--상황에 따라선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납골당에 가매장 해놓은 힐러 란사드크, 그에 대해서도 하겐트의 심중을 떠봐야 한다. 그 일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가 소비될 텐데. 이런 헛소동까지 책임져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대체 율르스 그놈은 왜, 나도 안보고 그냥 떠난 것이며- 아, 그렇 지. 이건 레이서스에게 물어봐야겠군... 루드랫도 한 번 봐야 하고... 칼루스온 인은 자신이 왜 납치된 건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 니, 루드랫을 만나서 상황을... 젠장. 루이티온 놈들의 행태도 뜯어고 쳐야 하는 데...! 이건 천상, 하누카 날이 지나야 생각해 볼 수 있겠 군, 쳇...!' 하겐트, 율르스, 레이서스, 루드랫, 칼루스온인, 루이티온... 새로운 엘야시온 대두 설까지.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움직여야할지.. 하누카의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만약 이게 '엘의 뜻'이라면, 엘야시온으로선 괴로울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 라는 '엘의 뜻'인지... 이렇게 문제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지금. 뭔가 해결책이라도 있다면...! 하지만 바로 그때. 문제가 되는 이름들을 계속 나열하며, 골머리를 썩을 때. 그것들을 연관하는 해결책, 정말 기가 막힌 '해결책'이 엘야 시온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렇다! 왜 이 생각을 못했는지...!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만 한다면...! 엘야시온은 화색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엘 의 뜻'인지도 모른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날 중으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우선 하겐트를 만났을 때. 하겐트는 실망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동생들이... 엘야시온 가디엘 님, 제 동생들이 사냥터에서 당했 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저주받을 몬스터 놈들...! 하루라도 빨리, 게엔나로의 통로를 열어 그놈들의 본 거지까지 뿌리 뽑아버릴 수 있도록...!" 동생들이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가디엘은 묘한 눈을 했다. 사냥터에 서 동생들이 당했다고? 그럼 이건 하겐트가 꾸민 일이 아니란 말인가? 현 상황에서 게엔나로 통로를 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자는, 자기가 알 기로, 온 엘야시온에서 엘야시온 가디엘 자신과 이 하겐트뿐이다. 그러 니 누군가 고의로 몬스터들을 불러들였다면 이 하겐트밖엔 할 자가 없 다. 뭔가? 가디엘은 픽 웃었다. 설마, 자신이 불러놓고 통제를 못해서? 아님, 동생들 건은 그냥 위장술? 가디엘은 좀 조사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 다. "저런... 안됐군, 하겐트. 쯧쯧... 이게 웬 날벼락인지. 우선은 가서 동생들 몸조리나 잘 시키게. 내 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힐러를 보내 주 겠네. 자네 가문의 힐러였던... 일루트 란사드크만 하진 않겠지만. 아, 그에 대해서도 조의를 표하네. 자네가 요즘 수난이로군. 자네도 몸 상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겐트는 생각하는 눈을 했다. 공식적으로 란사드크는 레드 라이트의 힐러다. 그런데 가장 좋은 힐러와 비겨? 왕족의 힐러였기 때문인가? 하 지만 하겐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야시온님의 은혜에 언제나 감읍할 따름입니 다." 다음으론 하디트를 만났다. "사냥터에서 돌아온 후로, 칼루스온 인을 만나보았나?" "아니오." 하디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러나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엘야시온을 보았다. "상급 시녀들이... 거기다 고위 사제들까지 몰려와서,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아아..." 아까 자신이 갔을 때도, 클로니아 수네드리온 의원들이 잔 뜩 몰려와 있었다. "하지만 엘야시온님, 그녀는... 아니, 그 분이 왕족입니까?" "이보게!" 엘야시온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칼루스온 인은, 우리 세계 사람이 아니란 말일세! 헌데 어떻게 그가 우리 세계 왕족이 되겠 나?!" "그럼..." "아무튼, 자네는 입다물고 있게. 칼루스온 인은 왕족은 아니야. 하지 만 몇몇 이유 때문에... 난, 그녀를 왕족으로 인정할 생각이네." "네...?" 그 놀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도움을 얻기 위해 서였다고는 해도 하디트에게 칼루스온에 대해 말한 것을 후회했다. 이 야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데. 원래는 엘야시온의 불문율로 아무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었다. 또, 하디트는 믿을만한 자니까. "자네를 이렇게 부른 것은... '칼루스온'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또 한번 다짐받기 위해서네." 그 말에 하디트는 뭔가 엘야시온 가디엘에게 말할 듯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뭔가? 내 말에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예전 이 문제에 대해 엘야시온에게 말했을 때, 엘 야시온의 불쾌했던 반응을 떠올렸다. 그러므로, 아직 아무런 근거도 없 는데 말한다는 건... 셰리카. 루드랫이 확인해준 시나의 친구. 단지 그는, "엘야시온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나를 납치했던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엘야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말했지? 판테온 같아... 루 드랫 주변에서 그 놈들은 도대체, 무얼 꾸미고 있는 걸까? 중간에 칼루 스온인 문제까지 터져 골치가 아픈데. 아무튼 한시라도 바삐 그놈들이 루드랫을 무엇 때문에 그토록 노리는 건지 밝혀내야지. 사실은 오늘 연 회에서 자네를 공식적으로 소개할 생각이었는데. 루드랫의 지위를 굳히 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 더 상황을 두고 봐야 겠어. 자네도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이게." "네." 다음으로 만난 자는 루드랫이었다. 그를 만날 때는 조금 마음이 편했 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싱글싱글 웃었다. "오... 루온 루드랫! 자네, 정말 대단하구만! 어떻게, 연관이 있는 처녀마다, 왕족인가? 하하..." 루드랫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가디엘을 보았다. 그 얼굴에 가디엘 은 조금 자중하기로 했다. 자신이, '아피네스'때 어떻게 했더라? 가디 엘은 억지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않겠지? 시나와 자네의 관계는... 절대 인정 할 수 없네. ...또 마노테의 형을 받으련가? 이미 마노테이니, 이번엔 사형일세." 루드랫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있다가 말했다. "엘야시온님... 그 동안, 시나... 아니, '그분'과 여러 번 이야기 나 누시는 것 같다고 눈치를 챘습니다." '눈치를 채? 괜한 의심받지 않으려고 몰래 불러서 만났는데? 에잉... 눈치 빠른 녀석!' "...뭔가... 두 분께서 숨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흠...' 엘야시온은 딴청을 피웠다. "그것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카이러스의 왕족이시라니... 왜, 굳이 숨기신 겁니까?" "...뭐?"라고 어리둥절한 대답을 하던 엘야시온은,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카이러스의 왕 족'인 걸 숨겼다... 루드랫의 의심도 지우고...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엘야시온님?" "하하하-- 이런! 사실은 그랬다네!!!" "....어디서부터, 그녀가 왕족이라는 걸 아셨습니까?" "어디서? 어디서냐니...? 어... 그렇지! 사실은, 이제야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자네가 제일로트로 올 때, 수정구로 그녀를 미리 봤거든!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래서 내가 자네가 묵는 곳까지 가지 않았나? 그때 확실히 알았지! 핫핫핫---" "그럼... 지금까지, 그녀와의 관계를 허락하신다고 하신 것은...?" '윽...! 그걸 생각해 뒀어야 하는데!' "그, 그건..." 열심히 머리를 짜던 가디엘은 결국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생각해둔 말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뭐라고 할까... 미안하네. 자네를 위해서였네. 자네가 루이트로 돌 아오길 바랬어. 하지만 예전처럼 성급하게 자네를 몰아붙였다가는... 루드랫? 알겠나? 자네는 이번에도 시나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낀 거 야. 그러니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하겠어. 그녀의 종속주가 되진 못하 더라도... 그녀를 위한 루이트가 되어 주게. 이게 내 바람일세. '시나' 는... 예전의 자네 주인처럼, 굳이 자네를 '남편'으로 요구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자네가 그녀를 굳이, '아내'로 삼겠다고 희생할 필요 없 어." 바로 이것이 가디엘이 아까 생각해 놓은 것이었다. 이 얼마나 자연스 러운가? 그 칼루스온 인은 절대, 아피네스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 것 이다. 루드랫도 그 부분에선 수긍하는 듯했다. 엘야시온이 아직도 자신이 루이티온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는 것. 그건, 결투 건이라든지.. 일 부러 자신을 띄워주려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나'가 무리 하게 자신을 '남편'으로 요구하지 않을 거란 것. 그것도 사실이다. 그 녀는 '아피네스'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그분의 신분을 숨기셨다고요? 그분은 죽을 뻔했습니다." 가디엘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왜... 그녀 는, 외모는 마노테의 형상이잖나. 그러면서도 스피릿 심벌이라니. 그렇 다면 도저히 움직일 수도 몸일텐데." '아피네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래서 완전한 스피릿 심벌이 드러나지 않도록 내버려 둔 걸세." 이 얼마나 그럴 듯 한가? 가디엘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죽을 뻔했다고? 나도 그것이 궁금하네. 사실 그녀는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이제 자네가 그녀에 대해 설명해 보겠나? 사냥터에서 정확히, 어땠는 지? 저번에도 말을 들었지만, 조금 더 정보가 있어야 판단을 내릴 수 있겠군. 도대체 어떤 불손한 세력들이 그녀를 자꾸 노리는 건지...! 엘 야시온으로서 참을 수가 없군!" 한참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간 후. 가디엘은 덧붙였다. "그렇군...! 전에 그 놈들인 것 같다...! 내 꼭 그 건에 대해 조사하지!! 그러니 자 네는 신경 쓸 필요 없네! 아, 그리고... 그걸 봐도 그녀에겐 정말, 루 이트가 필요해... 왜 놈들이, 굳이 그녀를 노리는 지도 모르는 상황에 서, 일단 그녀 신변의 안전을 지켜야지 않겠나? 그래야 자네가 궁금해 하는 대로, 그녀의 과거도 밝힐 것이며... 아무튼, 자네가 그녀의 루이 트가 되어준다면, 매우 좋을 걸세. 영혼의 공명까지 느꼈... 아, ...모 를까봐 말해주네만. 은혜의 법 관계는 이젠 당연히, 깨졌어." "......." "영혼의 공명까지 느꼈다니! 하하... 자네야말로, 새로운 카이러스 스아디온-- 그녀에게 어울리는 루이트야! 자네밖엔 없어! 설마,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한 주인을 위험에 빠뜨리진 않겠지?" 뭔가, 얼렁뚱땅 말도 안 되는 구석이 많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루드랫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디엘은 그가 떠나기 전까 지 계속 단 한가지만을 강조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당장... 알겠나? 당장, 힐러에게 소생술을 받 게. 가까운 데, 뛰어난 힐러가 있으니... 길게 생각할 필요 없네. 자네 는 왕족의 루이트가 되는 거야!" 다음으로 만난 것은 레이서스였다. 레이서스야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 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문제 아닌가? "...반대한 이유를 알겠나? 그녀는 카이러스 스아디온이야. 그것도, 현 상황에서는 매우 귀중한 스아디온이지. 그러니 왜 자네와 이어질 수 없는지... 흑의 엘야시온 건에 대해선 알겠지? 자네 부모들 때, 얼마만 한 파문이 있었는지도? 절대 2대에 걸쳐 허락할 순 없어." 이 정도면, 스스로 포기하고 다른 여자를 찾으리라 생각했다. 이건 레이서스를 위한 배려였다. 어차피 칼루스온 인은 제 세계로 돌아갈 테 니 괜한 집착을 하다간 나중엔 실망만 커진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딱 부러지게 이야기 해주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여기서 일어나고 말았다. 레이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중한 스아디온이요?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까?" "무슨 의미...? '카이러스' 스아디온이란 말이네!" 레이서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냉소 짓고 있었다. "그래서요? 엘야 시온님께서도 그녀를 클로니아 세스틴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 까?" "뭐... 뭐라고?" "예전 클로니아 세렌시스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번에도 문 제될게 없다고 하더군요?" 레이서스는 자신의 누이동생 아피네스와 클로니아 세렌시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노테이면서도 생기 있는, 살아있는, 카이러스 스아디온. 그래서 클로니아 세렌시스는 바로 그 해에 있어야 했던 스온 마리스 와의 혼인도 취소하고 엘야시온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과 같이. "엘야시온님께서도 그런 의미로 '귀중하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런 것 따윈 전혀 생각할 수 없었고, 생 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아니.. 그것보다! 내가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가디엘은 불쾌했다. 여기서 세렌시스의 일을 입에 담다니! 그건 자신 의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자네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자네는 그 칼.. 아니, 시나 에게 아무런 상관도 할 수 없단 말일세!! 원래부터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네!!" "---!" 그러자 레이서스는 뭐라고 말할 듯하다, 겨우 분노를 가라앉힌 다음 말했다. "...그럼, 이번에 희생되는 건, 제 또 다른 여동생... 아스테린이겠 군요?" "---!! 레이서스!! 내가 언제, 시나를 세스틴에게 준다고 했나?!! 아 스테린과 세스틴의 혼인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야!!" "--!" 레이서스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그러나 엘야시온 가디엘은 레이서스의 그 희망 어린 눈빛을 묵살했 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맘은 품지 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시나는 안돼!! 예전의 자네 여동생과, 루온 루드랫--- 그에 버금갈 정도로, 자 네가 품은 희망은 헛된 거야!!" "---!!!" "자네를 위한 말일세!! 그러니, 그렇게 알고, 물러가게!!" "엘야시온님!! 흑의 엘야시온 때문입니까?!" "글세--" 그러다가 가디엘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렇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냐!! 예정대로라면... 시나는 그러니까... 그렇 군. 아무 문제없다면, 카이러스의 파이오니온이 되겠지!" 레이서스의 안색이 변했다. "그런데, 자네가 그런 지존자를 '첩'으로 삼는다고?! 그게 말이 되 나? 자네 약혼녀 칼리스나는 어떡하고?!! 그녀와 파혼이라도 한단 말인 가?! 도대체 이런 말이 안 되는 걸 갖고--! 레이서스, 내 말 잘 듣게! 인간의 감정이란 건, 말이야- 아주 일순간이네!! 사랑, 애착--! 시간이 지나면, 그런 건 다, 권태와 한숨으로 변한다네! 긴 세월을 살면서 한 번도 그 예외를 본 적이 없어!" "그렇더라도--!" 레이서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더라도! 지금 현재, 이렇게 마음이 불타는 것 같은데, 그건 어떡해야 합니까? 죽을 것 같을 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 때는?!" "레이서스!" "칼리안과는--" 레이서스가 말했다. "사냥터에서 돌아온 그날, 율르 스와 말을 나눴습니다... 그가, 칼리스나가 다친 데 대한 책임을 묻기 에-- 나는 애초부터 그녀를 얻을만한 자격 따윈 없었노라고, 그렇게 말 했습니다." "뭐, 뭐야--?!!" 너무나 뜻밖의 말에 엘야시온 가디엘은 벌떡 일어났 다. "자네, 미쳤나?!! 그, 그래서 율르스가, 아무 말도 않고 자기 세계 로--!! 당연한 일 아닌가?!! 어느 파이오니온이 그런 모욕을 견디겠 나!! 이런 일방적인---!!" "...엘야시온님.." "자네는 힐라토 파이오니온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지금 칼리스나 와 파혼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칼리안의 비위를 거슬리면?!! 그 들 세력은 자네 세계보다 강성하단 말일세!! 은의 엘야시온 다음에, 적 의 엘야시온이야!!! 헌데 자네는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그런 말을 해?!! 왜 이렇게 경솔한가?!! 응?! 앞날에 어떡하려고?!!" 하지만 레이서스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 나야 한다. "설사... 그들의 비위를 거슬려, 파이오니온의 위를 내놓아야 하더라 도. 시나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미쳤군!! 흑의 엘야시온이 나오게 사람들이, 아니 내가, 내버려 둘 것 같나-?!!" 그러자 레이서스는 엘야시온을 보았다. "...흑의 엘야시온이 나오는 것은, 오로지 엘의 뜻에 달렸습니다. 엘께서, 지금 이 세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마음 먹으셨다면, 흑의 엘야시온은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처 럼. 하지만 엘께서 만약, 지금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으셨다면-- 그렇 군요." 레이서스는 창백하게 웃었다. "그럼, 이건 '운명' 아닙니까?" "뭐야?!!" "젠장!! 엘야시온님!! 왜, 흑의 엘야시온을 멸망의 엘야시온으로만 보십니까? 성전 어디에도 그런 말이, 정확히 적힌 곳은 없습니다!! 오 히려 구원자로 나와 있는 부분이 많다는 건--!!" "닥치게!! 자네, 그런 지식을 어디서 배웠나!!" "엘야시온님...!" 엘야시온은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예전에 이런 말을 하던 자 가 있었다. "너희 힐라토--!! 너희들은 예전부터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너희 힐라토에선 엘야시온이 나오지 않는 거야!! 죽음과 안식의 세계!! 그것 이 멸망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엘께서 선의를 베풀어-- 너희와는 어 떤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맺어져도, 엘야시온이 못나오는 것, 그것도 바 로 그 때문이야!! 구원자? 그렇다면 진작에 내려 주실 것이지--!! 닥쳐 라, 힐라토 레이서스!! 그러므로, 너희 힐라토는 스피릿 중의 스피릿을 가질 자격이 없다!! 너희는 처음부터 너무나 제멋대로야--!!" 그가 가장 사랑하던 친구... 흑의 엘야시온이 구원자라고? "힐라토 레이서스 물러가라!!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죄로 근신해라!! 아니면, 아무리 너라도 파문을 시키겠다!!" 천만에... 흑의 엘야시온. 그건 지독한 악몽이었다... 방안, 아스테린은 소파에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왕궁 가운데 떠도는 말들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엘야시온이 필요하다. 사냥터에 몰려왔던 몬스터들. 그건 세계를 지탱하는 엘야시온의 힘이 약해졌다는 한,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곧, 더 많은 몬스터들이 날뛸 것이다.-- 아스테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 "스온 아스테린 님..." 루사벨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곧, 그 계집애를 만나서-- 내 눈으로 확인하겠어. 정말 그 계집 애가 카이러스 스아디온인지!! 정말로, 그 계집애가--" 클로니아 님하고 맺어지게 되는 건지! 나를 대신해서--! 아스테린의 눈에서 분을 참지 못한 눈물이 떨어졌다. 스온 마리스와 함께 있는 엘스제는 방금 그녀를 찾아온지라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겨우 말했 다. "...말을, 들으셨죠?" 마리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들었습니다." 하지만 엘스제는 더욱 안타까운 눈을 들어 말했다. "마리스! 사람들 이 괜한 말을 하는 거겠죠? 고작 내후년인데!! 그걸 못 기다리다니!!" 마리스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 침착한 미소에 엘스제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마리스! 제발! 22년 전엔...!! 그땐 옛날이라, 그런 도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한 거잖아요!! 현재 클로니아 님은 일주일 후면, 스온 아스테린 과 맺어지게 되요!!" "...엘스제... 제가... 그때, 세렌시스님과 파혼한 건, 하누카의 날 을 5일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 엘스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마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 직, 결정된 건 없어요. 모든 건, 엘야시온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 지요. 안 그렇습니까?" "마리스!!" 엘스제는 마리스에게 안겼다. 주위엔 어떤 사람도 없었으므로,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내가 --!!"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마리스는 미소지었다. "엘스제..." 그녀의 약혼자는 정말로, 너무나 어리다. 시나는 깨어나자마자, 아는 사람들을 찾았지만, 매우 오랜 시간이 지 나기까지, 엘야시온님을 제외하곤 어떤 아는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하디트를 만나게 된 것 만해도 감사한 일이다. 그는 그 나마 힐러여서, 시나의 상태를 보기 위해 들여보내진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시나는 반가운 소리를 냈다. "디트...!" 방도, 전에 있던 방이 아니라--언제 옮겼는지 모르겠다--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거대한 가구들이 들어찬 곳이었는데, 시나로서는 낯설 기만 했고 그래서 더욱, 아는 사람을 만나 기뻤다. "디트! 반가워요! 이틀 만이죠? 네? 무사하셨네요?" 그저께 사냥터에서 보고 못 봤다. "황송합니다... 에... 스아드 님." "...네? 아니.. 왜, 디트까지 그래요..."라고 말하던 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급 시녀들. 이맛살을 찌푸린 시나는 그들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명령하는 법은 잘 몰랐지만, 그들이, 아무리 힐러 라지만 외간 남자와 단 둘이 둘 수 없다고 고집 피우자, 눈을 부라리고 강력하게 말 한 덕분에, 그럭저럭 내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이 나가고 나자, 시나는 기대감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그 '스아드'라는 명칭은 관두고, 제대로 이름을 불러줘요! 지 난 이틀 내내 그 단어만 들어서, 너무 답답해요...! 디트는 사실을 아 니까..!" "...시나." "와! 너무 좋아요!" 디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당신도 고생이군요. 하지 만 저들을 이해해 주세요. 저들은... 그러니까, '왕족'이 관련됐다고 하면... 아무리 타 세계의 왕족 일이라도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 까. 그것도, 하필이면 당신이 '카이러스'의 왕족 모양을 하고 있어 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내 머리칼은 여전히 짧다고요! 왕족이 될 수 없잖아요!!" "...하지만 15살이 넘었으니까." "15살...? 아, 맞아요...! 사람들도 내가 머리칼 이야길 하면, 꼭 그 이야길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예 전 방에서, 사람들이 짐을 날라다 주긴 했는데... 책엔 자세히는 나와 있지 않아서... 디트는 혹시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왕족 가운데에도 당신처럼... 아니, 당신처럼이 아니 라... 우리 세계의 마노테처럼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 래 살지는 못하죠." 시나는 놀란 목소리를 냈다. "...왜요?" "마노테의 몸이라곤 하나, 스피릿 심벌이 있기에, 스피릿들은 자꾸 그 몸에 거주하려 하는데-- 왕족들은 나실인의 증표가 없기 때문에... 머리가 길지 않기 때문에... 스피릿들의 막강한 파워를 견디지 못하 고... 대부분 유아 때 사망하거나... 아무튼, 하누카의 날을 치를 수 있는 연령인 15살이 넘기까지 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시 나..." 디트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외모 상으로 보기에도, 너끈히 15살 은 넘어 보이고... 이토록 건강하니... 충분히, 강건한 왕족입니다. 그 러니 저들은 당신이 스피릿 파워를 견딜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것 이 된다면, 존경받을만한 왕족입니다." "하, 하지만, 난 아무런 파워도..." 그러나 시나는 그 순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냐. 어쩜 그것 이 아닌지도.." "---?" 디트가 의아해서 보는데, 시나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있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디트? 디트 말이 사실이었어요. 사실은 내겐 같이 이 세계로 온 친 구가 있었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셰리카 양... 이야기군요." "셰리카는, 괜찮죠? 네? 아무도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서...! 당신들 능력이라면, 지금쯤 건강해졌을 테죠? 난 그 애보다 물 속에 더 오래 있었는데,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디트는 뭐라고 할까, 하다가 시나를 위하여 반쯤 진실을 말하기로 했 다. "괜찮습니다." 시나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틀동안 미칠 것 같았어요. 도저히 여기서 내보내 주지를 않고... 아무의 소식도 들 을 수 없어서. 영문 모를 소리들만 하고... 저어, 셰리카에게 내 안부 를 전해 주겠어요? 그 애도 답답해 할 테니까... 약간의 소동이 있긴 하지만, 원래 세계엔 꼭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나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한 듯 빙긋 웃었다. 하지만 곧, 어쩔 수 없 이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시나?"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스아드 님- 목욕하실 시간입 니다-" 그건 빨리 이 만남을 끝내라는 말이었다. "아아... 정말...!" 시나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왜 왕족이, 이렇 게 더 부자유스러운지!! 하는 수 없죠. 디트?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요. 내가 당신을 그토록 만나길 원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드랫도 보 고 싶어했는데... 시녀들 말이, 드랫은 절대 못 만난다고 해서..." 디트는 쓴웃음 지었다. 그럴 것이다. 누가 왕족을 '하급의 종속주'와 만나게 해주겠는가? "그래서 디트를 보기를 원해서, 겨우 만났는데... 디트? 이 말을... 제발, 드랫에게 전해 주세요. ...내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 고..." "....네?" "...그렇게 어이없는 표정 짓는 것, 당연해요. 하지만, 디트...! 나 한테 뭔가 집히는 게 있으니까, 제발 이 말을 드랫에게 전해줘요! 이건 드랫만이 알아들을 수 있어요!"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엘야시온님께..." "하지만 엘야시온님은 만날 수도 없는 걸요! 아침에도 갑자기 편지를 보내서, '스아디온'인척 해달라고 하시고...!! 맨 처음 날 보러 왔을 땐, 사람들이 이런 식인걸 어이없다는 태도이셨는데...!" "네에..." 방금 그에 대한 말을 듣고 왔던 하디트다. "거기다... 드랫만이, 요 몇 주간 내 옆에서 날 지켜봤어요! 그러니 드랫이라면 알 거예요! 엘야시온님께는 셰리카 문제와 함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니 디트는 드랫에게 꼭, 이 말을 전해 줘요...! 제발... 디트... 난, 나 자신이, 너무나 무서워요... 이걸 보겠어요?" 일어난 시나는 옷장에서 붉은 드레스--무척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 져왔고, 그걸 보여주며 시나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시녀들이 옷장 깊숙한 곳에서 찾았다고... 사실은, 브라우니들까 지도 이방으로 옮겨왔는데... 그들에게 이것에 대해 물으니... 그들은 이걸 '내'가 만들라고 했대요. 하지만 난 기억이 없어요. 이건 꼭, 셰 리카 때와 마찬가지예요...!" 레이서스와 루드랫은 한 자리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레이서스는 굳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엘야시온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그분은 끝까지 반대하지 못해. 예전, 내 부모님 때도 그러했으니까.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그 분의 치하는 이제 얼마 안가면 끝나니까. ...우리 힐라토 쪽은, 스온 마리스 님이 엘야시온이 되는 걸 강력하게 밀어붙일 생각이니까. ...클로니아 세스틴도, 만나본 적도 없는 여자 보단, 아스테린이 훨씬 더 익숙할 테 고. 방금 그런 입장을 클로니아에 알렸네. ...시나." 레이서스는 두 손을 모으고 거기에 이마를 댔다. "그녀가 아직도, 옛 날과 같은 생각이라면...! 카이러스 파이오니온이라고? 그렇다면, 카이 러스 쪽의 지지도 얻게 되는 거야...! 그러니, 절대로 가능성이 있 어...! 지금 시기만 넘기면 돼!" 레이서스는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루드랫은 그런 레이서스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지었다. 매우 이상하게 도. 서글픈 느낌이 들었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나... 아니, 스아드 님께선 그 능력으로 파이오니온이 되신다 해도 아무 경험도 없으시니까. 무척 힘들 겁니다. 하지만 만약 힐라토님께서 같이 계셔 주신다면..." 레이서스는 이토록 시나를 아낀다. 신분에 맞는 상대를 찾을 순 있어 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주는 상대를 만나기란 평생을 가도 힘든 일이 다. "스아드 님께서 힐라토님과 맺어지는 것. 그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합 니다. 아무리 엘야시온이 급하다고 해도... 무리입니다. 흑의 엘야시온 에 대한 염려는 너무나 오래되어서... 그것 때문에, 이 일을 망설일 필 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루드랫은 진지한 남색 눈을 들었다. "...만약 제가, 힐라토님이었다 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레이서스는 미소지었다. "고맙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곧 어두워졌 다. "하지만, 시나를 만날 수 없어...! 그녀를 만나보고 싶은데! 자네는 어떻지? 자네라면...?" "전 더욱 그녀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예전 관계 때문에." 레이서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젠장. 어디 묵고 있는 지만 알 수 있다면...! 최소한 그것 만이라면!" 루드랫도 마찬가지로 답답했다. 시나를 위한 '루이트'라고...? ...당 연히, '그녀를 위한' 루이트가 될 수 없다. 그녀도 그건 이해하고 있 다. 하지만, 마음속에 그치지 않는 찜찜함이 남는 것 같아, 루드랫은 괴 로웠다. 시나가 왕족이었다니... 그렇다면, 왜 그 얼음의 숲에 그런 식 으로 나타난 것인가? 무슨 일로? 지금까지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은 그녀 자체를 노린 것이었다니. 자신의 어이없는 착각에 웃음이 나올 정도다. 역시, 뭔가 강박관념이었 는 듯. 알 수도 없고, 근원도 캘 수 없는 검은, 강박관념. 하지만 그들이 시나를 노렸다고 해도 이유를 알 수 없긴 마찬가지. 카이러스에 그런 종류의 왕족이 있다는 소문을 못 들었으니까, 그럼 시나는 왕족으로서,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가 지금에야 나타난 것인 가? 시나를 노렸던 집단들은 그녀를 감금한 집단이고?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시나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 투성이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자랐기에, 엘야시온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자신에 대해서도 전혀 모를 수 있는가? 엘야시온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 얼렁뚱땅한 설명에 넘어갔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엘야시온만 하더라도. 그토록 중요한 '카이러스 스아디온'을, 왕궁에 서도 철저히 숨겨온 것이 이상하다. 숨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실마리는 단 하나... 셰리카 양이 깨어나길 기다 리는 수밖에 없다. 시나의 맨 처음, 그 알 수 없는 '다른 세계' 설명에 동일하게 맞장구쳐준 '시나의 친구'. 지금 여관(라단의 집이 좋았겠지 만 그 집은 이미, '그들'에게 노출된 적이 있으므로)에 묵도록 해놓았 는데 디트가 치료를 했는데도, 여전히 의식이 없다. 호문클로스라는 요 정도 그 옆에서 계속 잠만 자고... 엘야시온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시나의 루이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라도, 해줄 수밖엔... 루드랫은, 셰리카가 깨어나기 전,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모아봐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라토 레이서스님? 혼 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주 자세한 부분이라도."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9- 관련자료:없음 [25534]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7:45 조회:1126 그날 저녁. 연회가 열리기 전, 각 세계의 파이오니온이 모인 자리에 서(칼리안과, 힐라토는 불참했다) 엘야시온은 자신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사냥터에 나타난 '카이러스 스아디온'은 분명한 '엘의 뜻'이라는. 하 지만 가디엘은, 카이러스 스아디온의 과거에 대해 미친 듯이 궁금해하 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무척 불친절하고 애매한 대답을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엘이, 현 상황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성역으로부터 보내주셨다'고. 당연히, 모두다 그 설명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 이 설명을 이해하려 무척이 나 애썼고 결국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씀은, 그러니까- 엘야시온님... 저, 사냥터의 카이러스께선 성 역에서 사라진 자를 대신하는 자란 말입니까?" "대신하는 자?" 베르노크 파이오니온은 진지하게 말했다. "네. 대신하는 자... 과거, 역대의 모든 엘야시온께서 성역으로 걸어 들어가, 엘 가운데 계시고... 몇몇 왕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로부터 몇몇 왕족들은 성역 가운데 들어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는, 카이러스 사이너스와, 클로니아 세렌시스까지... 성역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뭐라고 판단할 순 없겠지만... 우리, 남아 있는 측에선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성전에 보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께선 언 제나 인간들을 위한 지도자-- 양치는 자들을 보내 준다고 하셨고... 예 를 들어... '모든 것이 황폐해 너희들에게 지도자가 없을 때, 내가 내 놀라운 손을 들어, 성스러운 곳을 통해서라도 목자를 보내리니, 내가 결코 너희를 홀로 버려 두지 않겠다.'라는 구절 말입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엘야시온 가디엘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신하는 자'라고? 그 성전의 구절은 분명, 엘야시온도 알고 있는 것 이지만 그 구절을 여기다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너무 나 뜻밖이라 엘야시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엘야시온님?" "응? 아니, ...하하... 그, 그렇지! 바로 그거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이로서 사람들의 호기심이 충족된다면. 어차피, 칼루스온 인은, 다시 성역으로 '사라지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엘야시온의 이 심중을 모르는 파이오니온들은 무척 감명 깊은 표정을 지었다. 엘께서 엘야시온을 보살피사, 직접 카이러스 스아디온 을 보내주시다니! "역시, 엘은 살아 계십니다!!" "오오--"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 감동적인 소식은 온 왕궁에 퍼졌다. 엘 에게서 직접 나온, '스아디온', '진실한 스아디온'이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건 약간 후에 일이고... 파이오니온들은 계속 이야기를 나 눴다. "허면, 이것은 곧! 당장 엘야시온을 세우라는...!" 가디엘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그 러니까... 카이러스 파이오니온이 될 게야." "네에-?!"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됩니다! 그분이 진정 엘께 서 보내주신 분이라면, 당연히 온 엘야시온을 위해 보내 주신 겁니다!! 그런 '성스러운 분'을 한 세계만을 위한 목자로 만드신다고요?!! 안 됩 니다, 엘야시온님!!" "맞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다니, 정말로 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냥터의 그 몬스터들...! 그리고 카이러스 스아디온...! 제가 비록 성 직자는 아니지만, 엘의 뜻을 뚜렷이 알 수 있겠습니다!!" 엘야시온은 당황했다. 사람들의 이토록 강하게, '새로운 엘야시온'을 바라는 줄은 몰랐다. 뭔가... 자신이 상황을 너무나 쉽게 생각한 듯... 너무 경솔하게, '대신하는 자'라는 의견을 받아들인 건지...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진 스아디온에 회의를 갖던 자라도, 이젠 '엘의 뜻', 이런, 일종의 '기적'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분은 절대로 엘야시온의 배우자가 되셔야 합니다!!" "오오...!! 클로니아 세스틴, 경하드립니다!!" 성질 급한 파이오니온들은 벌써 세스틴을 '엘야시온'으로 부르고, 이 제 그들은 막무가내가 되었다. "오오오-- 엘야시온님? 제가 그분의 손에 입맞춤 할 수 있도록!! 엘 의 궁정에서 직접 오신 분이라니--" '...미치겠구만..' 이 사람들이 이토록 신앙이 좋은 줄은, 엘야시온도 미처 몰랐다. 그 러나 엘야시온은 근엄하게 말했다. "글세, 엘야시온이 하루 이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음 대의 엘야시온은 마리스야!!!" "안됩니다--!!" "결단코 반대합니다!!!" "그분은 스피릿 중의 스피릿!! 말 그대로, 엘의 천사란 말입니다!!" "22년 전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카이러스를 편애하십니까?!!" "글세, 안 된다니까!!" 가디엘은 소리를 빽 질렀다. "도대체 왜...!!!" "난, 그녀를 힐라토 레이서스와 혼인시킬 생각이니까!!" 가디엘은 이 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갑자기 좌중은 물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9명의 파이오니온들은 어 이가 없어서 말했다. "...뭐라고요?" "귀가..." 하지만 가디엘은 그들의 귀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투 때, 레이서스가 선언한 말을 들었지? 두 사람은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거든." "....네?" "그러니까, 절대로 엘야시온은 안돼!!! 모든 것은 다 정상, 그대로 야!! 하나도 변하는 것 없네!! 자네!! 클로니아 세스틴!" "네..." 사람들 가운데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던 세스틴이 중얼거렸 다. "자네와 아스테린의 하누카의 날도 그대로야!!! 알아들었나? 자, 그 럼 이만!! 회의는 마치네!!" "에, 엘야시온님---!!!!" 의자들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고, 파이오니온들이 엘야시온을 애타 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가디엘은 회의장을 황급히 빠져 나오며 시 종에게 명했다. "레이서스를 불러들여! 지금 당장!" "...네? 뭐라고...?"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섭섭해하지 말게... 상황이... 그러니까..." 하지만 엘야시온 가디엘은 굳이 힘들게 변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갑 자기 레이서스가 다가와 그를 껴안은 것이다. "레, 레이서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서스! 숨막혀 죽겠네!!" 그러자 레이서스는 활짝 웃는 얼굴로 몸을 떼고, 무릎을 꿇었다. 엘 야시온의 손에 입을 맞춘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엘야시온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 모습에 엘야시온은 잠시 말을 잃었다. "레이서스... 일어나게..." 하지만 그가 일어나자, 엘야시온은 차마 그의 눈을 보지 못하고 안타 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한 녀석... "...너무... 너무, 그녀를 좋아하지는 말게나." "....?" "자네는 파이오니온이야... 알겠나?" 잠깐 어리둥절하던 레이서스는 그냥 웃었다. "네. 저는 힐라토의 파 이오니온입니다. 혹시, 흑의 엘야시온이 된다 해도--" 가디엘은 그를 보았다. 레이서스는 밝게 웃었다. "엘야시온님? 약속 드립니다... 저는, 이 세계를 너무 사랑합니다. 제가 이 세계에 살기 위해서라도.. 파괴나... 하하하... 그런 것은 절 대로 없을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가디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칼리안과의 일은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나중에 수습할 생각이고, 지금 여기에 칼리안도 없겠다... 잠시만 레이 서스에게 도움을 빌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모든 상황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 아가씨가 그냥 조용히 있다 자기 세계로 돌아갔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그날 연회만큼 사람들이 강도 높게 기대하고 고대한 연회는 근 래 백 여 년 동안 없었을 것이다.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연회장은 빽빽이 들어찼다. 소문은 벌써 파다하게 퍼졌다. 사냥터에서 나타난 카 이러스 스아디온, 그 '대신하는 자'가... 힐라토 레이서스를 사랑해서, 그와 혼인할 거라는...! 그러므로 당분간 엘야시온은 없을 거라는...! 힐라토 레이서스의 감정이야 굳이 말 안 해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였 고. 그래서 모든 것은 '예정한 대로 정상'이었다. 엘야시온의 말로는 22년 전의 사건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은 '순리'대 로 한다는 말이었는데. 흑의 엘야시온에 대한 우려, 사람들의 강도 높 은 비난에 대해선, 엘야시온은 딱 잘라 말했다. "흑의 엘야시온? 지금이 말세라고 보나? 아직은 살만하네. 그리고 '큰일'이 있기 전엔 엘께선 언제나 그 종에게 경고해 주시지. 그런 경 고 받은 적 없어. 알겠나? '내'가 괜찮다고 말했으니, 이젠 닥치게." 사이너스와 헤르가스 때의 재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닥치게' 되었지만, "믿을 수 없소... 세계의 일을, 고작... 고작... 연애 감정으로 처리 하다니... 이것이, 무슨 순리이며... 이번에 내 영지에서 몬스터가 출 몰한 횟수만 해도..." 장탄식 하는 소리는 여전했다. 시나는 연회에 참석하기 전, 위가 꽉 조여드는 느낌으로 거울 앞에 엎드리고 있었다. 시녀장이 '모두들, 카이러스 스아디온을 만나 뵙길 고대하고 계십니다'라는 말을 해주어서였다. 엘야시온 가디엘이 쪽지가 새삼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예전, 연 회에 나갈 때는 드랫이 옆에 있었는데... 이젠 엄한 표정의 낯선 시녀 들과 함께 연회엘 나가야 하다니. 넬리라도 있었으면... 하지만 넬리는 왕족을 모실만한 레벨이 안 된다고... "너무해... 왜, 내가 이런 일을... 겨우 머리칼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갖고, 이런 일이라니... 도대체 이 세계는 왜 이렇게 외모에 집착하는 걸까?" 그러잖아도, '붉은 드레스' 때문에 걱정이 되어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한 시녀가 은근하고도 의미 있는 미소를 지 으며 '종속주'에 대한 말을 했다. 시나는 맨 처음 그녀가 루드랫에 대 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힐라토 파이오니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 었다. "어머나, 그럼...! 제가 괜한 소리를 드렸군요! 나중에 직접 들으시 도록 가만히 있을 것을! 하지만 알고 싶어하실 것 같아서... 호호..." 시녀는 고개 숙인 채로 미소지었다. 이렇게 오래 왕궁 생활을 했다면 눈치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런 좋은 소식은 누구라도 한 시바삐 알고 싶어하는 법! 또 누구라도 그런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사 람은... 하지만 시녀의 예상을 뒤집고, 시나는 놀라고 어이없다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에.. 스아드 님?" "그, 그런 말도 안돼는...! 그게 사실이에요? 파혼? 파이오니온 님 파혼이라니...! 그 빨간 색의 세계 공주님과 파혼한 걸 말씀하시는 거 예요?" "네에... 스온 칼리스나 님입니다만... 하지만.." 시녀는 억지로 비 위를 맞추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호호.. 그러니까, 힐라토님은 어렸을 때 그분과 약혼하셔서... 그분과는 개인적으로는 정이 별로 없던 듯. 정말로 마음을 주시는 분은 스아드 님이신 것 같으니..." "말도 안돼요!!" "네에?" 시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이, 다 자기도 모르는데서 일어나는 것 같 아, 놀라고 불안한 눈으로 무릎 위에 두 손을 보았다. 파혼을 정식으로 엘야시온님이 허락? 엘야시온님이 왜 도대체 그런 일을?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신 것인가?!! 시나는 믿을 수 없었다. '파혼이라니!!! 말도 안돼!!! 왜 나 같은 것 때문에!!! 난, 진짜 '스 아드'도 아닌데?!!! 엘야시온님께 말씀드리고...! 만약, 이걸 철회시켜 주지 않는다면...! 레겜에게, 사실을 말해야 해!! 내가 누군지...!' 이 크고 휑뎅그렁한 방에 갇힌 지, 이틀. 차라리 '마노테'로서 바리 스에 있을 때가 훨씬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그날 끝까지, 시나는 개인적으로 엘야시온을 만날 수는 없었 다. 시나가 시녀들과 함께 연회장에 입장하자, 평소 때는 얼굴도 쳐다 보지 못했던 파이오니온들이 그녀를 맞았다. 여느 때처럼 긴 베일을 쓰 고 있었지만, 시나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에, 그들은 만족한 웃음을 띄 웠다. 시나가 떨리는 발걸음으로 엘야시온에게 가자, 엘야시온은 미안한 듯, 그러나 약간은 사무적인 미소를 짓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대신하는 자'... '성역'... 그러자 사람들은 놀란 음성을 냈고. 시나의 공식적인 엘야시온 식 이 름은, 이로서, '스아디온 아스나엘' 전대, 금의 엘야시온 아스나엘의 이름이었다. 엘야시온이 왜, 그 이름을 시나에게 주었는지 아무도 그 속을 모르겠 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만족해하며--역시 '대신하는 자'라면, 엘야시온 의 이름을 가질 만 하다--혹시 엘야시온 가디엘이 그녀를 엘야시온의 배우자로 하려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착각할 만한 이름이었지만. 그 가 능성을 차갑게 일축하면서도,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 이름을 시나에게 주었고, 쓴웃음 지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네, 칼루스온인. 그 이 름은 내가 존경하는 분의 이름이었고. 부디, 그 분처럼 강한 여성이 되 길 바래. ...혹 힘들더라도... 아니, 힘들 이유는 없을 거야. 그냥, 모 른 척.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그렇게 견뎌주게." 엘야시온 가디엘은 그 이름을 준 직후, 무엇을 예감한 것인지. 그 아 름다운 다이아몬드 모양의 눈으로, 시나의 눈을, 그 너머를 보고, 빙그 레 웃었다. 마치 이오시아처럼. 그리고 휘프리엘처럼. "...강해지게. ...알겠나? 아니.." 갑자기 그는 슬프게 웃었다. "...내가 왜, 자꾸 자 네에게 이런 소릴 하는 지 모르겠군..." 그리고 시나의 이마에 입맞췄다. 그렇게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하 면서. 시나는, 엘야시온의 말에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은 너무나 힘들었다.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엘야시온에게 전부다 말하고 싶었 다. 하지만 그는 곧, 뭔가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돌아 가버렸고, 시 나는 끝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잠시, 열렸던 엘야시온의 마음이 '닫혔다'... 그후, 잔뜩 만난 거라곤, 역시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 루드랫은 물 론이고 심지어는 '종속주'라는 레겜조차도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은 연 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나는 몇 번이나 엘야시온과 눈을 맞추려 했지 만, 그는 그후, 연회 중에도 쉴새없이 무언가를 지시하느라 바빠, 시나 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시나와 이야기 나누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시나 는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소문만 이 무성했다. 그 당사자들이 아닌, 타인의 입으로 듣는 자신에 관한 소 문. 시나 자신은, 카이러스의 파이오니온이 될 것이며...(카이러스가 어 딘지도 모르는데) 힐라토 레이서스 님이 자신의 약혼자가 되며... ...루온 루드랫... 그 자는, 자신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낀 것이므 로... 시나의 개인 루이트가 될 것이란다. 축하한다고, 하는 말들. '대신하는 자'라는 말들... 모두 다, 외국어 같은 말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말만 무성한지? 사람들은 어디 갔는 지? 괴롭고, 불안했다. 혼자만 벽에 몰려진 느낌이었다.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지, 다른 어느 때보다 장소와 시간에 대한 괴리감을 느꼈다. 바닥부터 균열이 일어나는 느낌... 마음이 불안해서 일까. 더없이 나쁜 예감이 들었다. 가까스로 일어나는 걸 막고 있는 어떤 재난이, 코앞에 닥친 느낌이었 다. 디트가 자신의 말을, 루드랫에게 전해 주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셰 리카에게는. '제발, 루드랫... 나한테 연락 좀 해줘요...!' 스온 아스나엘. 너무나 생소하고 맞지 않는 그 이름 가운데, 시나는 괴롭게 말했다. 자신은 모든 것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왜 하나도, 그렇게 되는 것이 없는지. 힘들고, 슬펐다. "...시나를... 아니, 스아드 님을 만나?" "음..." 하디트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루드랫은 보던 책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에게 물었다. 그들은 당분 간 연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엘야시온의 말에 따라 방에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건강해 보이던가?" "아아... 왕족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궁정 힐러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루드랫은 의심쩍게 물었다. "...힐러 라이트가 들었대?" "그랬다나 봐." "그래...?" 루드랫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렇담 그녀에게 힐러 라이트가 듣지 않 았던 건, 혼 강에서의 일 뿐인 건가? 뭔가... "...헌데 머리카락이 길어지지는 않아서." 루드랫은 고개를 들었다. 하디트는 루드랫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역시... 이건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들 말 하더군. "...그런가." 그리고 침묵. 루드랫은 고개를 흔들고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걸로 또 책을 읽나 했는데. 사실은 그 동안 하디트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듯, 무관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다른 말은?" "다른 말?" "....뭐, 여러 가지." 하디트는 잠시 생각하다 거짓말했다. "없는데." 그러자 루드랫은 가만히 있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 그리곤 뭔가 중얼거리더니, 책에 몰두했다. 무척 까다로운 책인 듯 얼굴을 찌푸리고. 하디트는 그런 루드랫의 모습을 생소한 눈으로 보았다. 과거의 그는 저런 식으로 몰두해서 책을 읽는다든지 하는 모습은 한번도 보인 일이 없는데... "그런데 너는 약간, 이상하군" "...뭐가?" 루드랫은 책에서 눈을 뗐다. 하디트는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별로 낙담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보다는 뭔가 바빠 보여. 왜 그렇지?" 낙담..? 루드랫은 놀란 눈을 했다. 낙담이라고? "왜 내가 낙담을..." ...모든 것은 이제 제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아까 엘야시온님이, 레이서스와 그녀의 관계를 허락했다는 말을 들었다. 더불어, 루드랫은 이제 엘야시온의 강권... 시나를 지키는 자가 되라는 말에 대해서도 한 결 부담 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에겐 레이서스가 있으니까... 하지만 루드랫은 하디트의 이상하다는 눈을 보고 조금 웃었다. 아, 그렇군... 하디트는 내가 시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있지. 그래서 그는 약간은 낙담한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니, 사실은 낙담하고 있는 것 같기도... 시 나가 왕족이라는 걸 알았을 때...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에, 왠지 기운 이 없어져서... 사실은... 계속, 무언가 몰두할 것을 찾아, 책을 읽은 것도..." 하지만 루드랫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루...드랫?" 갑자기 그가 말을 멈추자, 하디트는 조심스레 말했다. 루드랫이 갑자 기 얼굴을 일그러뜨린 것이다. "왜 그래?"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루드랫은 책을 덮었다. 뭔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책의 표지를 보고, 쓰게 뱉었다. "...'낙담'?..." 그의 표정이 하디트는 조금 웃었다. "...왜 그래? 설마... '낙담'한 걸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었단 이야길 하려는 거야? 방금 알았다고? 그 래서 충격인 거야?" 하지만 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루드랫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따위. 했을 리가 없지." "...에?' "내가 왜... 아냐, 관둬. 이 책은 재미가 없군. 다른 걸 가져오겠 어." "루, 루드랫? 책이라면..." 사이드 테이블에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하지만 루드랫은 문을 쾅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루드랫!" 하디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화를 내는 모습이라니. 불안한 느 낌... 하디트는 흐린 눈을 하고 닫힌 문을 보았다. 역시... 시나의 말 은 전해 주지 않는 것이 낫다. 지금 루드랫이 가진 감정이 무엇이든. 더 이상 그는 시나에게 상관하지 않는 것이 낫다. 무엇이 자기 주인을 위한 것인지, 어쩌면 하디트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시나의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하여--시종이 소식을 가져왔다. 왕궁밖에 계신 분이 의식을 차렸다고. "---!" 마침내, 라는 생각이 든 하디트는 우선은 그녀를 잠깐,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녀가 또 다른 칼루스온 인인지 확인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시간. 클로니아의 베쓰-엘 카할. 게이트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빠-" 여자는 이마에 상대의 입맞춤을 받으며 말했다. 남자는 금발로, 역시 금발인 여동생을 보고 말했다. "아마사. 건강해 보여 좋구나." "도비온 오빠와 이드넘 오빠는?" "...두 사람은 부상을 당해서." "부상?!!" "이드넘 쪽은 약간의 동상만 걸리고 말았지만, 도비온 쪽이 아직도 의식을 못 차리고 있지. 덕분에 내가 바빠지게 되었지만 전혀 뜻밖의 사실을 알게되어, 어쩌면 이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야." 겐트온의 말은 냉랭했다. 아마사는 겐트온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 르며 말했다. "뜻밖의 사실이라니?" 겐트온은 마차의 의자에 앉으며 쿡쿡, 웃었다. "지금 왕궁은 떠들썩하지. '대신하는 자'라든가. 명칭하곤... 어디서 찾아다 붙인 건지 짐작이 가지만. 아무튼 무슨 명칭이든... 카이러스 스아디온이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거든." "카이러스 스아디온?!" 아마사는 놀라서 말했다. "카이러스 스아디온 이라니...! 그럼!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겐트온은 의자에 기대 웃었다. "글세, 어떻게 될지. 하지만 우스운 건 말이야... 도비온이, 내게 와 의식을 잃기 전에 한 말이었는데... 그걸로 놈을 용서할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야. '네이머, 클로니아 스피 릿'이라고..." "그, 그게 무슨 의미야...?" "무슨 의밀까? 이드넘 말로는 보호물의 종속자께선--아, 아마사. 그 녀가 '대신하는 자'란다." 아마사가 숨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겐트온은 히죽대며 말했다. "그 종속자께선, '나이어드'라도 되시는 지, 물에 빠진 뒤 그곳에 상당히 오래 있었다는데... 그리고 갑자기 끓어오르는, 거품, 요동... '진짜' 나이어드들의 살기... 아주 오랜만에 듣는, 극적인 상황...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겠더군. 그래서 이드넘 놈도 용서하기로 했지." 겐트온은 푸른 눈으로 만족한 듯 웃었다. "가디엘 그 놈은, 이런 사 실을 모르는 것 같고. 아무리 떠봐도 그녀를 단순한 카이러스 스아디온 정도로 알고 있는데. 이 얼마나 다크 호스인가 말이야." 아마사는 그런 겐트온의 말투에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고 조심스 럽게 물었다. "겐트온- 오빠?" 겐트온은 힐끗 그녀를 보았다. "--왜?" "...아버지는?" 겐트온이 웃었다. "돌아가셨어." 그 섬뜩한 웃음에 아마사는 그의 눈 을 피했다. "...그럼, 시신은." "납골당에 있었지." '있었지'라는 말에, "그럼, 지금은?"이라고는 묻지 않았다. 아니, 물 을 수 없었다. 수정구를 통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조 금도 편안한 마음을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 불안했다. 드디어...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어렸을 때부터, 말로만 듣던 일 이...! "그럼... 그럼..." 아마사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속 마차의 바닥만 보았다. 마차 안에 달린 작은 등이 그녀의 볼에 창백한 빛을 주었다. "그럼..." "아마사. 눈을 들어봐." 아마사는 눈을 들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니?" 아버지가 보고 싶냐고? 아마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호오? 그래? 왜?"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마사는 겐트온이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 다. 그 익숙한 모습. 그 익숙한 태도. 아마사는 너무 두려워 눈물을 흘 렸다. "이런, 왜 우니, 아마사? 내 누이야?" 겐트온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무엇이 불안해?" 아마사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겐트온은 그런 그녀를 비 웃는 낯으로 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말만은 더없이 다정했다. "...내 사랑스러운 신부. 약혼기간이 지긋지긋하도록 길었지?" 아마사는 덜덜 떨며 말했다. "...아, 아버지...!" 겐트온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계속 키스를 하려는 찰나, 그는 갑 자기 신음을 뱉고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 겐트온은 가슴을 움켜쥐고, 의자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제 길... 아버지! 제발, 내 몸으로 아마사와는...!" 아마사는 그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아마사! 당분간은 내 옆에 오지마! 이 빌어먹을 일이 끝나기 전 까 진!!" 겐트온의 어딘가 에서 광소가 들렸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런 상태로 되는 것. 이렇게 되는 것에, '네 아비에게 괴로움을 끼칠 생각 뿐이냐'고. 하지만 천만에. 이런 상태가, 몸서리 쳐지도록 싫은 것은 바로 겐트온 자신이었다. 세렌시스의 서재 안에서, 책들을 살피며 루드랫은 자조적인 웃음을 띄고 있었다. 확실히 이건 너무 뻔뻔하다. 마치 자기 서재라도 되는 것 처럼 이렇게 마음대로 책을 고르고, 보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에게 걸리면 한 두 마디 변명으론 끝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나의 흐린 머리카락을, 그 호수에서 봤을 때부 터. 루드랫은 뭔가 몰두할 것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오늘 오 전에 아피네스를 만나길 했지만(담당 힐러가 신병으로 갑자기 죽었음에 도 그녀는 건강한 모습이라, 루드랫은 안도했다) 그래도 묵직한 것이 계속 께름칙하게 그를 괴롭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두꺼운 책...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읽으면 분명히 잠이 잘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루한 궤변론자들의 책을 고르고, 루드랫은 촛 농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초를 들고, 서재를 나섰다. 왠지 한숨 이 나왔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듯... 하지만 바로 그때. "도둑놈...! 왕족의 서재에서 뭘 훔치는 거냐?!" 그 익숙한 목소리에 루드랫은 돌아섰다. 이맛살이 저절로 찌푸려졌 다. 최악의 상대에게 걸린 것 같다. "..루온, 루파르테..." 그는 자신을 미행한 듯, 바로 그 자리에 증오의 눈길을 불태우며 서 있었다. 셰리카를 잠시 만나고 난 후, 하디트는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왔다. 시나가 말한 것들과 뜻밖의 사실들을 엘야시온에게 고해야 했다. 엘야시온 가디엘은 하디트의 면담 요청에, 연회 끝나기 직전이라 몹 시 피곤하긴 했지만 그를 불러 만나기로 했다. 그는 엘야시온에게 자유 롭게 면담 요청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엘야시온은 사실, 일부러 시나를 따로 만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루 드랫은 물론이고 레이서스에게조차, 이번 하누카의 날이 끝날 때까지는 그녀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는데. 레이서스는, 아직 정식 으로 칼리스나와 파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새로운 약혼녀'와 공 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건 칼리안 측을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라는 이야기로 설득했다. 그 말에는 레이서스도 수긍하고 엘야시온 의 말에 따랐다. 이쪽의 모든 잘못. 그는 칼리스나에게는 어쨌든 저자 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루드랫이야, 두 말없이 명령에 따라야 할 입장 이고. 그래서 엘야시온은, 시나와 엘야시온인 간에, 정말로 직접적인 관계 를 맺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소문으로 족하다. 그 소문 들이 '공식적'이 되는 건, 하누카의 날 이후다. 시나는 칼루스온인. 그걸로 모든 것은 해결된다. 이것만이 엘야시온 의 뇌리에 박힌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하디트의 말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뭐? 몸 안에 다른 인격? 얼음의 숲에서, 결계의 조각인지도 모른다 고? 그래서 친구조차 잊었다고? 하..." 하디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말이라 생각합 니다... 제 주인도 그랬고. 성역에 가까운 숲은, 도미니온즈에겐 몰라 도 보통 인간들에겐... 칼루스온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 니다만... 게다가 시나는, 그런 인격이 됐을 때, 자신이 어떤 무서운 힘을 쓰는 것 같다고... 은빛의 검기와 같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힘?! 아냐... 아냐. 다른 것 다 제 쳐두고, 친구라니! 그럼,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네. 저번에도 말씀 드렸듯... '셰리카'라는 시나의 친구. 실제로 존 재합니다. 펼쳐진 숲의 호수에서, 시나를 돕다가 사고를 당해서 지금까 지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방금 만나고 왔습니다. 잠깐이지만 전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장소에 그녀가 있었는지도... 그러니, 시나가 '친구'에 대한 기억을 까맣게 잃고 있었다는 것은 진실한 이야기입니 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하디트는 조심스레 말했다. "엘야시온님... 그녀 또한 시녀와 동일한 말을 합니다. 시나만큼 구체적이진 않지만. 그... 칼루스온이라는 세계 에 대해.. 단편적으로, 말을 하더군요. 그리고 그 세계를 정말로 믿고 있었습니다. 시나와 함께, 돌아갈 거라고..." 엘야시온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몄다. "...말도... 안돼!" 또 한 번, "...말도..!!" 엘야시온 가디엘은,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어쩌면 무언가를 두려 워하는 눈으로 하디트를 쏘아보았다. "왜, 그런 이야길 진작 하지 않았나?!!!" "시나와 이야길 나눈 건, 엘야시온님과 만난 후였고... 셰리카양은 정신을 잃고 있었으므로, 이런 건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 밝혀지는 일이니... 괜한 이야기로, 엘야시온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엘야시온 인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디에 묵고 있나?!" "왕궁 밖, 가까운 여관에 비밀리에 묵도록 해놓았습니다." "루드랫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셰리카 양이, 깨어난 줄 알면 당장 보러 가려 할겁니다. 시나의 일 에 신경을 쓰는 눈치니까요." "...안내하게! 그녀를 보러 가겠어! 그리고 나서, 칼루스온 인과 이 야기 나누겠네." 실제로 본다면, 확실하게 밝혀진다. 초를 미리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양탄자를 그슬릴 뻔했다. 갑자기 루파르테가 멱살을 잡아 쥔 것이다. "네 놈...!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루드랫은, 책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 다. 이 자는 상대하기 곤란하다. 너무 열혈이라고 할까. "...꾸미다니요, 프레미어 루이트여?" "정보가 들어왔어!! 네놈, 힐라토님과 오늘 내내 같이 있었다고?!!" "...내내는 아닙니다만." "닥쳐!!" 루파르테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루드랫을 보았다. "네 놈 속 셈을 모를 줄 아나?!! 왜?! 왕궁엘 며칠 묵다보니, 옛날이 그리워지던 가? 그래서 또, 힐라토님을 이용하려는 거지?!! 누가 네 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줄 아나, 이 교활한 자식아?!! 엘야시온님까지 구워삶 은 네 놈 혓바닥이니, 오죽하겠나만, 나는 못 속여!!" "또..라니? 이상한 말이군요." 루드랫이 말했다. "나는, 그분을 속인 적 없습니다." 레이서스에 대해 기억도 못하고 있을 정도인데. 하지만 루파르테의 생각은 다른 듯. "이 거짓말쟁이, 악마의 사생아 놈!! 설마, 네 놈이 한 일을 다 잊었다는 거냐?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네가 한 말을 못 잊어!!" "...말이라니...?"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그 모습에, 루파르테는 잇소리를 내고, 그를 밀 어 부쳤다. "젠장! 기억을 잃은 놈은 편하기도 하군!!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똑똑히 알아둬!! 다시는 힐라토 레이서스 님께 접근하지마, 이 개자식 아!! 아님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목을 따 버릴 테니!! 엘야시온님이 네 놈을 아무리 감싸고돌아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널 꼭 죽여 없애고 말겠어!!" 순간 루드랫은 불쾌해졌다. 느닷없이 욕을 먹는 것도 불쾌하고... 그 러잖아도, 별로 마음이 좋은 상태도 아닌데.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온 다면. 루드랫은 차갑게 말했다. "도대체... 아무 근거 없는, 비난 따윈 관두길 바랍니다. 게다가 정 말, 그럴 작정이라면... 결투 때처럼 다른 녀석을 내보는 건 관두고, 직접 나와 해보란 말입니다. 프레미어 루이트, 이 개자식아." "---!!" 루파르테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루드랫도 그에 못지 않 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 눈을 본 루파르테가 실소를 터뜨렸다. "큭큭... 푸핫 핫..." 루드랫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놈이 정말로 미쳤나 생각했다. "직접 나와 해보라고? 이 내가? 네 놈 말처럼, 프레미어 루이트인 내 가? 푸하하핫....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내 친애하는 사촌? 이 이중인격자 녀석아." "---!" 루드랫은 짜증이 났다. "알 수 없는 말 따윈 집어치워. 그래 봤자, 못 알아듣는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나?!" "아, 아... 좋아! 내가 실수했어! 확실히, 그래. 내가 이 밤중에, 네 놈을 붙들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루파르테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말로 해도, 너는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니. 하지만 알고 있겠지?" 루파르테는 씨익, 웃고 그의 어 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네놈이 부인해도, 네가 저지른 짓은 끝까지 남아. 난 그걸 잊지 않아. 네놈 처치가 불쌍해, 모른척하고 있었지만. 네놈... 요즘 하는 짓을 보니. 이제야 말로, 그 대가를 돌려줄 때가 된 것 같다. 기대 해..." "---!!" '흥--!!' 루파르테는 루드랫이 자기 등을 쏘아보는 것을 느끼며, 얼굴에서 웃 음을 지웠다. 루사벨라 건으로, 잠시 이용하고 말려 했지만. 오늘 정보... 레이서 스가, 다른 이들을 다 물리치고 다시 그를 신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철저히, 왕궁에서 쫓아내 주마! 루파르테는, 2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자기 사촌의 말--그 힐라 토에서의 말을 떠올렸다. 죽어도 잊어버릴 수 없는. (계속)==================================================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0- 관련자료:없음 [25535] 보낸이:안소연 (로드리스) 2000-04-24 07:46 조회:1168 밸도 없는 자식--! 그의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루 파르테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확한 진상--어머니가 자신의 사 촌, 루사트에게 한일--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패해, 정말로 모시고 싶던 스온 레이서스님을 모시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드는 패배의식은 어쩔 수 없지만. 완고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면은 한번 깨지고 나니 아직은 약할 수밖에 본성을 그대 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토너먼트에서 싸우는 루사트. 그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그 실력. 그 태도. 같은 나이에, 같은 피를 이 은 사촌이지만... 결국 루파르테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 다. 게다가 그는 아직 어렸으므로. 19살의 소년.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때문이라도 그는 억지로 자신의 패배를 합리 화해야만 했다. 처음엔 밤잠을 못 이룰 정도였지만, 몇 개월이 지나 니... 겨우 체념이 된다. "괜찮아. 이로서 스온 레이서스 님에겐 나보다 훨씬 훌륭한 녀석 이... 그분을 위해선 잘된 일이지. 엘의 뜻이야." 결국 이상한 동료의식까지 싹튼다. 뭐니뭐니 해도 사촌이니, 루헬리 옷과 같은 관계가 또 하나 생긴다면 나쁠 것도 없다. 게다가-- 처음에 길에서 만났을 때, 루사트는, 정말, 반갑게- 루파 르테를 정말로 반갑게 아는 척 해주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자신도 레이서스님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 끼지만, 루파르테를 위해서 물러날 용의가 있다고. 그러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굳은 마음의 루이티온이지만, 이쪽이 미안할 정도 다. 그래서 오늘도, 여관으로 루사트를 찾아가는 중이고, 오늘에야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챈 그의 어머니는 불같이 노하여 화를 낸 것이다. '어머니는 괜히... 하여튼, 루헬리옷하고도 경쟁관계를 강조할 정도 니... 어머니는 지나쳐.' 루파르테는 고개를 저었다. 루사트는 나쁜 녀석이 아니다. 같이 자 랐다면 좋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회를 뺏은 어머니가 원망스 러울 정도다. '경쟁자의 배척'... 부모를 잃어, 아무런 힘도 없는, 어 린놈에게... 부끄럽다. 루파르테는 싱긋 웃었다. 갑자기 찾아가면 놀랄 것이다. 하지만 목 표로 하던 대상을 잃은 마음. 그 끝없이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을, 루사트가 찾아 주었다. 아름다운 하 티이라... 어쩌면 오늘 한 번 더 그녀를 찾아가 볼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날. 루파르테는 아무 연락도 없이, 그가 묵는 여관으로 찾아간 것을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루사트는 희한하게 내려주 는 저택도 거부하고 여관에 묵고 있었는데. 루사트가 묵는 방의 문을 두드리기 전 새어 나오는 말소리. "호호호-- 정말이죠? 루이트 님? 약속이에요?" '하티이라!' 루파르테는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문제 였다. "제가 잘해낸다면, 첩으로 삼아주신다는 거?" "---?!!" 그리고 이어지는 나른한 목소리. "...아아. 그래. 루파르테를 타락 시켜봐. 하누카 날 전에... 놈을 평생,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 만 들어 봐. 그럼 널, 첩으로 삼아주지. 이, 창녀 아가씨." "아잉... 자기는 내 몸에 손도 안 대면..." 하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루파르테가 들어온 것이다. 놀란 표정의 하티이라... 아니. 이젠 그 무엇도 아 닌... 그녀는 사태를 눈치채고 후다닥 도망갔다. "네 놈... 네 놈..." 루파르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서, 루사트 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처음엔 놀란 표정이던 루사트는 곧, 피식거리며 웃었다. "친애하는 사촌. 어머니께 예의범절 안 배웠나? 갑자기 들이닥치다 니?" 그 장난기 어린 말에, 루파르테는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루사 트...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지금, 장난하는 거... 맞지?" 밤새서 질펀하게 놀 때, 그런 식의 비꼬는 장난 같은 것은 많았다. 어딘가 가시를 내포한 듯 하나, 실상은 장난 일뿐... "그런 거지?" 루사트는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은색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생각하는 눈을 지었다. 곰곰이 생각한 다음, 얼 굴에 피어오른 미소. "당연하지... 이건 그냥 장난이야... 창을 통해서 네가 오는 것을 보았어..." "---!" 루파르테는 그때, 어쩌면 등신같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순간 창을 통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한 듯, 소란이 들렸 다. 마구가 쩔렁거리는 소리, 맑은 소년의 목소리. 그것이 무얼 의미하 나, 생각할 틈도 없었다. 단지, 루파르테는 똑똑히 보았다. 그런 소음이 창을 통하여, 들어왔 을 때, 그 소음이 창(槍)이라도 되어 그의 사고(思考)를 찌른 듯. 갑자 기 루사트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때에 그의 머릿속엔 무언가, 사악한 모티브가. 뇌리엔 수많은 계산이 소용돌이치며, 그 결론으로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번뜩인 것을. 그건, 거의- 잔인한 빛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떤 흉악한 몬스터를 놓고도 지을 수 없는 그런 잔인한 눈빛을 그는 지었다. "...루사트?" "...라고 하면 좋았겠지만." 갑자기 웃으며, 루사트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그의 옷매무새는 별로 모양이 좋지 않았는데... 그 모양 그대로 그는 일어났다. "미안하게도-- 이 몸이, 일부러 하신 일이라." "---!!" "아까워 죽겠어, 루파르테. 네 놈이 창녀에게 몸을 팔아, 자식도 못 낳는 병신이 되면, 네 어머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 지, 그걸 못 봐서--" 그리고 그는 말문이 막힌 루파르테를 놓고 말을 이었다. "왜 그리 놀란 표정이냐, 바보 같은 사촌 놈아? 그럼, 그토록 철저 하게 너희 모자에게 당한 내가 진심으로 널 걱정하고 있을 줄 알았냐? 힘이 없어, '경쟁자의 배척'을 당한 후로-- 하. 하. 인간 사냥꾼의 토 굴에서 얼마나 이를 갈았던지! 너희 모자에게 복수할 날만을 꿈꿨다! 네게 요전에 말한 대로, '엘의 뜻'으로! 내가 용케도 토너먼트에 우승 했으니! 이젠 그걸 이뤄봐야지? 내 오랜 꿈인데?" 그리고 또 한번 루사트는 히죽 웃었다. 루파르테가 말도 못하고 부 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즐거운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래 생각했는지 알겠어?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 래, 난 생각을 했지. 그러다, 아하! 네 어머니가 날 버린 이유를 마침 내 떠올린 거야! 그건-- 스온 레이서스님 때문이었어. 그렇지?" 그리고 그는 얼마나 사악하게 웃었는지. 루파르테는 지독한 예감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루, 루, 루사트--!!" "하. 하... 네 어머닌, 네가 스온 레이서스님의 루이트가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날 해치운 거야." 이젠, 열린 문을 통해서, 밑층에서 까불대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 고 있었다... "그, 그게 사실이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루사트! 네놈은 스온 레이서스 님에게 '영혼의 공명'을 느껴! 그러니까--" "뭐가? 그러니, 그분을 잘 섬기라고? 글세, 그거야 내가 결정할 일 이고... 우선 말했잖아? 난 '복수'를 한다고. 자, 이렇게 서 보겠어?" 그러더니, 그는 루파르테의 몸을 문간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그 문간을 등졌다. 루파르테는 바보같이, 그대로 서서... 그가, 귀에 속삭 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번에 자이온에선, 시루카 건으로 네 어머님 께 신세 좀 졌다. 오늘, 네 집에 돌아가서, 어머님께 내 안부 꼭 전해 드려라.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할지. 누가 이제 경쟁자의 배척을 베푸는 자가 될지. ...내가 알기로, 복수는 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뺏 는 거니까. 그렇지? 그리고 알아 맞춰 볼까? ...네게 가장 소중한 것 은... ...하, 티이라..." 루파르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너--!!!" 미소 띈 얼굴. "...는 물 건너갔고. 그럼, 누굴까? 오호라... 저기 올라오고 계시는, 스온 레이서..." 희미한 소년의 목소리가 계단에 이르렀다. 루파르테는 "너--! 너--! 닥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하하하.... 무슨 짓을 하긴. 이봐... 이렇게 즐겁다. 즐거워서 심 장이 두근거릴 정도다. 이거, 사랑에 빠진 것 보다 좋은 기분인데? 영 혼의 공명보다 더, 피를 뛰게 만드니." "이 자식! 루사트! 스온 레이서스님에게 상처 입힌다면 내가 용서 못해!!" "오, 그래? 어디 해보시지. 어떻게 용서를 못하나 볼까?" 그의 숨은 낮았다. "...이제부터, 상처를 입힐 테니, 상처를 입히는 건, 이렇게 입히는 거다. 이게 내가 너희에게 배운 것... 그대로 돌려주마." 루파르테는, 스온 레이서스가 거의 문간까지 다다른 걸 알았다. "스 온--!!" 하지만 루사트는, 그의 어깨를 억누르고 말했다. "아--! 루파르테, 잘 왔어!! 그래...! 너한테 의논하고 싶었지! 난, 정말 스온 레이서스님의 개인 루이트 같은 것-- 지긋지긋하다. 그분이 하도 달라붙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네가 어떻게 좀 해 줄 수 없냐? 이래서야, 괜히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는 생각까지 든다! 귀찮아 죽겠어!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하면 많은 것들이 일어나리라 생 각했는데- 예를 들어,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세렌시스님에게 프로포즈한 다든지 하는 거- 헌데 내게 떨어진 '부스러기'는 겨우 이런 것 뿐이야- 아아- 시시해- 죽을 고생을 하며 싸웠는데 말이야-!" "----!!" 루파르테는, 그 순간, 검은 머리칼이 문간에서 멈칫한 것을 보았다. 루파르테는 뭐라고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루사트의 말은 계속되었다. "난, 영혼의 공명이라기에 대단한 걸 줄 알았더니... 아니, 이게 이 렇게 시시한 건가? 아아- 지루해- 내가 내 계약주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란 지루함- 뿐이야..." 루파르테는, 그 검은 머리칼을 보며, 거의 애원하듯, 속삭였다. "루 사트... 미안하다. 우리 모자가 했던 일은... 그러니, 제발!!" 루사트는 창 너머로 난, 노을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왜? 솔직 하게 말해 보라며? 검은머리와, 검은 눈은... 이제, 꿈에서만 봐도 경 기를 일으킬 정도야.... 정말 지겨워.... 차라리 이건 아무 것도 느끼 지 못하는 타인이 낫겠어... 그러니, 네가 좀 어떻게 해줘..." 검은 머리칼은 조용히, 문간에서 사라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루사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가라. 루파르테. 말은 끝났다. 앞으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그래서, 스온 레이서스 님의 개인 루이트 자리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아라." 루파르테는 이를 갈며,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지금도 그 핏빛의 방안을 떠올리면, 루사트 놈-- 아니, 저 루드랫 놈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 가학적인 쾌감으로 가득 차 있던 목소리. 당시 놈은 복수에 모든 걸 건, 미친놈이었다. 그런 걸 모르는, 스온 레이서스님은... 그 자식의 비위를 맞추기 위 해... 바로 그날 저녁에도 온갖 마구에... 말과, 옷가지까지... 듣기론 왕족만이 걸칠만한 최고급의 것을 루사트에게 내리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놈은 그놈의 알량 한, '복수' 때문에, 끝내는 그분의 친 여동생까지 유혹해서 도망칠 정 도였으니---!!! 루파르테는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꼭, 네놈을 죽이겠다! 다시 돌아오다니! 그리고 또 제 이익을 위해 힐라토님에게 접근해?! 기억을 잃었다고?! 그렇더라도, 그 사악한 품성 이 어디로 갔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안 한다, 루사트--!!" 영혼의 공명을 느끼는 상대까지 해칠 수 있는 그, 간악함. 놈하곤 차라리 상대를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그 악함에 물들 것 같아--살 려둔 거다. 루파르테는 그것을 지금, 뼈저리게 후회했다. 루드랫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고. 잠시, 루파르테가 사라진 어두운 복도를 보았다. 언제나, 루파르테와 대화를 하고 나면, 울컥한 느낌이 들면서도... 이렇게, "알 수 없어." 루드랫은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슬픈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하고 욕을 얻어먹어도. 문득, 그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네놈이 부인해도, 네가 저지른 짓은 끝까지 남아. 난 그걸 잊지 않 아. 네놈 처치가 불쌍해, 모른척하고 있었지만. 네놈... 요즘 하는 짓 을 보니. 이제야 말로, 그 대가를 돌려줄 때가 된 것 같다. 기대해... 책의 표지를 보았다. 궤변론자들... 모든 합리적인 말은 다하지 만... 결국 아무런, 진실을 얻을 수 없는... 이리저리 회피하기만 하는 말들의 향연. 그러므로 어쩌면, 이 두꺼운 책이 다 담고 있는 진리는, 루파르테가 한 한마디의 말보다도 가치가 없는 것들. 그의 말은 사실이다. 아무리 기억에 없다고 해도. 행한 일은 끝까지 남아, 인간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고, 확산하며, 매듭짓고, 다시 시작한 다.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그래서, '행위'는 이토록 무섭다. 대와 대 를 이어 전해지는 유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도... 루드랫의 눈이 흐려졌다. 정말, 견딜 수 있겠나? 루드랫은 고개를 숙였고, 결국은 책을 서재에 다시 꽂아 놓기로 했 다. 뭔가, 힘든 일이 있다고 이런 식으로 도피해선 안돼. 그토록 원한 삶이지 않은가? 마음 어딘가에서 누군가, 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나... 지독하게, 외로울 지라도. 한 여관에서, 두 남자의 그림자가 나왔다. 바로 근처에 세워둔 마차 를 타고, 두 사람은 왕궁으로 향했다. "어떻습니까...?" 그러자 다른 한사람은 후드를 벗어내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에 놀랐네만. ...아냐." "그, 그러면?" 다이아몬드 아이즈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참, 뭘 그리 놀라서 달려온 건지. 저건 그냥 엘야시온이네. 뭔가... 칼 루스온 인과 어디선가 만나, 그 이야기에 영향받은 거겠지. 아무튼... 이렇게 된 것, 칼루스온 인이나 만나봐야겠군. 십중팔구... 그녀의 이 야기도 괜한 소리가 분명하겠지만." "...그렇습니까..." 하디트는 얼굴을 흐렸다. 괜한 소리라... 하지만 시나의 표정은 정 말 절박해 보였다. 셰리카 양은, 엘야시온 인일 수 있다하더라도... 시 나의 이야기만은, 엘야시온님이 진지하게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 다. 그렇지 않다면... '시나...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길 루드랫에게 전한다는 건... 역시, 안돼요...' 사냥터에서 돌아온 지 이틀... 그리고, 밤. 시나는 침대에 큰 대자 로 누워 천개의 화려한 천장 무늬를 보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 다. 처음으로 엘야시온에 떨어졌을 때만큼 외로워서. 마침내 잠자리에 들어선 이렇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도 와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잠드는 것마저도 무서워서,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눈만 감으 면, 저주를 실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자신의 정신이 정상인지... 아니면, 결계의 조각이 씌운 건지... 파이오니온 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셰리카... 넬리... 라단 아저씨, 카탈리 아줌마... 제시 마... 세일마... 촌장 님... 갑자기 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천개에, 그려졌다. 죽을 정도로 외로웠다. "루드랫은 멍청이... 왜 부르는데도, 와주지 않아요...? 종속주 든... 개인 루이트든... 뭐라도 좋으니까,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아님,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주면... 내가, '스온 아스나엘'이라고 불려서 얼마나 어색했는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느낌으로. 이건 그냥 피해의식으로, 자기연 민 같은 건 절대 질색이고, 딱 사양하고 싶지만. 어쩌면 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소리 죽여 울며, 루드랫의 원망이나 실컷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건 다 루드랫 탓이니까. 그리고... 엘의 탓... 신의 탓... "좋든... 싫든... 구하러 온다고 했던 건... 역시 책임감 때문이었 나..." 이젠, 종속주도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이걸 안, '그 애'는 그토록 루드랫을 옭아매려고 했던 걸 까? 자신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큰소리 친 주제에... 어쩌면 그 애는 얼마나, 솔직했는지... 시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외롭다... 너무 외로워서, 죽을 것 같다. 차라리, 억지로라도... 그게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더라 도... "아빠... 내가, 어떻게 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무서워 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그런가...? 벌써 잠자리에 들었나?" "네... 오늘 너무 피곤하시다고... 얼굴 색도 좋지 않으시고. 뭐니 뭐니 해도 요전번에 큰일을 겪으셨으니까." 시나를 만나야겠다고 하니까, 상급 시녀가 이렇게 가로막았다. 아무 리 엘야시온이라도, 잠든 처녀를 깨울 수는 없는 일. "끄응... 그럼 하는 수 없지. 내일 봐야겠군." 엘야시온은 발을 돌렸다. 그 뒤를 따라가며, 하디트는 자신들 뒤로 닫히는 문을 보았다. 무겁고, 큰, 육중한 문. 아름다운 조각이 장식되 어있지만.... 시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디트는 어쩐지 슬픈 마음이 들어, 시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 잠자리 복장을 하고도, 레이서스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엘야시 온의 명령으로 오늘 연회에도 나가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 문으론. '스온 아스나엘, 인가.' 레이서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아스나..." 앞으론 이 이름으로 그녀를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걱정 이 되어... 자신의 입에 담는 그녀의 이름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 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어 보고 있었다. 그 이름에 대답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잊고. 미래가 오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다. 잠에 들고, 일어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를 보러 갈 것이다. 공 식적인 만남이 아닌 비공식적인 만남으로. 만약, 현재가 멈추어야 한다 면... 그때가 좋겠지. 레이서스는 술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 기슬러월 17일. 흙의 날. 레이서스는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유리 검을 보고 있었다. 어제 루 드랫의 말을 듣고,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얼굴이 흐려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칼리안에 대한 미안함. 칼리스나가 레이서 스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어쩌면 진심으로--을 안 것은 율르스가 말해 준 덕분이었다. 만티코라스의 독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사냥터에서 일 은 모두 다 이미 잊었으니, 자신을 보길 원한다고. 하지만 레이서스는 그 말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서스는 유리 검을 두 손으로 들고 그것을 이마에 댔다. '미안해, 칼리스. 정말로...' 좀 더 빨리, 그녀가 자신에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면 뭔가 변했을 지도 모르지만. "아냐..." 시나의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랬어도 아무 것도 변하 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칼리스나에게 이런 식으로 혹독한 상처를 주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자신이 지 금 하려는 일은, 칼리안의 호의를 또, 배신하고... 미안해, 칼리스. 그 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하카단!" "네, 힐라토님!" "...스온 아스나엘에게 가겠어. 자네도 따라 오도록." "네..." 하카단은 레이서스의 뒤를 따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 며칠, 마치 폭풍우처럼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조차 모르 겠는데. 그 가운데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그의 주인이었다. '대신하는 자... 스온 아스나엘님이라고... 그러면, 스온 칼리스나 님은 결국...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그렇게 사이좋던 분들이... 하 지만 힐라토님의 마음이 이렇게 돌아섰으니, 화해는...' 당분간 바라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힐라토의 앞날도 걱정스럽기 그지없었다. 유수의 왕가들이 다시 한 번 들고일어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힐라토 레이서스에겐 힐라토 헤 르가스 외엔 '친척'이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힐라토 타 왕가들엔 '스아디온'이 없으니, 공식적으로 파이오니온의 자리를 요구하진 못하지만. 그들은 힐라토 레이서스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의심을 앞세워 왕궁의 요직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 하나 결정하는 데도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바로 지금의 클로니아 가 그러하지 않은가, 알게 모르게 쉬쉬하지만 클로니아 세스틴이 자기 친척들과 왕가들에게 상당히 좌지우지되는 약한 파이오니온이라는 건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이다--그런 식으로 분권된 권력은 필히, 국력의 약 화를 가져온다. 또한 집중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물자들. 카이러스와 같이 아예 없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있어도 약한 파 이오니온이라는 건, 그 세계에 치명적이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이것 이 문제가 아니다. 왕가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이 문제인데. 그 동안 그의 주인은 약화될 때로 약화된 그의 가문에도 불구하고 훌륭 히 해 내왔다. 루이티온과의 스캔들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여 동생과 유명무실한 헤르가스를 돌보면서도. 칼리안과의 파혼을 요구하 며, 자기 왕가의 딸들을 들이대는 권력을 견제하면서도. 하지만 그 이면에 칼리안의 지지가 있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칼리안에서 칼리안 에그리스를 위시한 칼리안 율르스의 가족들은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칼리안 세계는 거의 그 가족에 의해 운영되다시피 하고. 그런 집중된 권력으론, 다른 세계 하나쯤, 마치 자신들 세계인 것처럼 도움을 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레이서스는, 다른 세계의 파이오니온들처럼 엘야시온 가디엘과 타 세계의 파이오니온을 찾아다니며 줄기찬 로비와 협상을 하 지 않아도, 상당한 물자들을, 마치 힐라토의 전성기 때처럼 힐라토에 우선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몬스터의 출현이 급격 히 많아진 힐라토를 다스리느라 정신없던 레이서스에겐, 큰 도움이 되 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카단은 어쩌면 희망을 바라는 눈으로 레이서스의 장성한 어깨를 바라보았다. 맨 처음 파이오니온의 위에 오르던, 그 호리호리한 몸매의 작은 소년이, 이렇게 한 남자가 되어. '지금은 그때와 틀리다. 지금의 힐라토님은 역대 사상 가장 뛰어난 힐라토 파이오니온이라는 명성을 듣고 있는 분...' 그런 말이야 파이오니온의 재위 때마다, 당대의 파이오니온을 찬양 하기 위해 있어온 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카단은 알고 있었다. 그 공허한 표정의 소년. 그래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명철하기 그지없었고, 사람을 부리는 데도 한군데도 치우치지 않는 정확한 판단을 내려 주었다. 하카단은 그래서 힐라토 레 이서스가 가진 잠재력에 감탄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도미니온 즈의 능력'만 있는 파이오니온이 아니다. 진실로 정치적 감각과 운영기 술도 타고난 그이다. 아무리 칼리안의 도움이 있었다 해도, 가족의 도 움도 없이 힐라토를 이 정도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그걸 증명해 준다. 하카단은 힐라토 레이서스를 믿기로 했다. '그래. 우리 힐라토는 칼리안에게 속한 세계가 아니니까... 언제까 지나 그들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 칼리안의 대사들은 타 세계와 협상을 할 때마다, 마치 버릇처럼 힐 라토세계의 이익도 함께 요구해 주었다. 그것이 필요한 것이든... 필요 하지 않은 것이든. 그것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상 그래서 힐라토 는 20년이 넘도록, 무엇하나를 결정하더라도, 그들과 발맞추어야 했다. 공짜는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을 빌린 다면,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 물론 그들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파이오니온 율르스가 등극하고 나서, 그들은 어느 때엔, 자신들 칼리안의 이익을 희생하고서까지 힐라 토를 도왔다. 물러날 땐, 물러 날 줄도 알고. 쓸데없는 참견도 하지 않 았다. 그토록 이상적인 우방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이미 발 걸음은 내디뎌졌고 하카단은 자신의 주인이 부디 무사히, 이 길을 따라 나아가시길 바랄 뿐이었다. 언제나 공허한 표정의, 위태위태하던 주인이, 이렇게 소년처럼 생기 있는 모습인 것 하나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그렇게 힘들어 하시면서도 세계를 운영해 내 셨으니... 이렇게, 원하는 분을 가까이 두신다면... 이분은 이제 더 큰 능력을 끌어내실 수 있을 거야.' 하카단은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달랬 다. 시나는 파이오니온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기뻐서 일어났다. 기 뻐해서는 안되지만,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에 마치 구원이라도 받 은 느낌이었다. 역시, '종속주'라든가 그런 거라서, 원할 때 이렇게 찾 아 주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검이요?" 레이서스는 인사로, 시나의 이마에 입맞추고 검을 주었다. 고대부터 귀족이나 왕가의 사람들은 신부가 될 사람에게 검을 선물로 주는 풍습 이 있기도 했고, 시나가 당한 위험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레이서스는 호신용으로라도 검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쁘네요..." 투명한 검이라니. 루드랫이 결투에 들고 싸웠던 검이다. 하지만 이 런 걸 가까이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거기다 이토록 불길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역시, 이런 종류의 검에 한번 베인 적이 있기 때 문인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이... 시나는 그것을 들어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 마음에 들지 않은지?" "아니오. 참 예쁘지만..." 시나는 멋쩍게 웃었다. "난 운동신경이 둔해서. 이런 것 휘두르다간, 오히려 나를 찌르고 말 거예요." 레이서스는 웃더니, 이건 그냥 위협용이라고 했다. 어떤 위해를 가 하려했던 사람이라도 무기를 보면 한번쯤 생각을 달리 먹게 될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선 그 '한번쯤'이라는 것이 목숨을 좌지우지하기도 하니 까. "그대가, 호수 가운데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어. 물론... 루드랫 이 그대를 구해, 나왔을 때, 보고 있는 걸 더 믿을 수 없었지만. ...자 신이 왕족이라는 걸 몰랐다니. 도대체 어떤 삶을 산 거지?" "그냥... ...기억이 안 나네요." 레이서스는 빙긋 웃었다. "뭐든. 이젠 괜찮을 거야. 아무도 그대에 게 손을 못 대게 하겠어." 그 말에 시나는 고개를 들었다. "레... 레겜..." "---?" "저는, 저어-- 그러니까, 사실은--" 하지만 그때, 시녀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무슨 화술 시간이라든가, 댄스 시간이라든가. 이 '대신하는 자'가 왕족 처녀로서 소양이 전혀 없 다는 걸 눈치챈 사람들이 대폭, 교육의 시간을 늘린 것이다. 듣기론 어 쩌면 루세인지 뭔지에 입학해야 한다고. 레이서스는 빙그레 웃고 시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고. "...무슨 할말이라도?" ".....아니에요." 결국 시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역시, 엘야시온님을 먼저 만나고 나서 사실을 말하더라도 말해야 한다. 레이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 그래. 그럼 시간도 된 것 같고 하니. 아, 그렇지. 댄스 시간이라면 내가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 는데. 시나... 아스나엘은 꽤 춤을 잘 추는 편이니, 굳이 교육받을 필 요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시녀는 물론이고 시나도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춤을 잘 춰? 어제 연회에서 망신은... 하지만 시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엘야시 온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혹 힐라토 레이서스가 찾아오더라도, 핑계 를 대서 쫓아 버리라는.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명령을 듣는데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다. "화술 시간입니다. 왕족 간, 호칭과 인사를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르셔서. 긴히 필요한 시간이며, 집중력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레이서스가 돌아가고 나자, 시나는 검을 살피다 손잡이와 검신 부분 에 무언가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고 시녀에게 물었다. "이것- 무슨 뜻인지 알아요? 처음 보는 문양이네요..." 그것을 본 시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하지만 곧 웃음으로 변했다. "어머... 과연 '신부의 검'이군요. 메르-엔-멜렉크--- 고대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유명해서...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말이죠. '왕의 사랑하는 자'" "힐라토 레이서스!" "베르노크 안딜로스 님..." 시나를 만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역시 자신의 숙소로 오고 있 던 듯한 안딜로스와 부딪혔다. 안딜로스는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굵은 갈색의 눈썹 밑에 아직도 눈동자가 맑게 빛나는 노장(老壯)이었다. 수 염에 묻힌 얼굴은 자칫 엄하게 보이기 쉬웠으나, 사실은 매우 성품이 인자해 젊은 파이오니온들에게 의논상대가 될 때도 있었고, 인기가 좋 았다. "검에 새긴 축언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나... 찾아가 보려던 참이 었네. 이야기 나눌 것도 있고 해서." "감사합니다...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역시 베르노크 사람들의 솜씨 였습니다." "아니, 급하게 하느라 조잡하게 되어 미안했네." "제가 너무 급하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딜로스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짓는 레이서스를 보았다. 젊디젊은 파이오니온... 꼭 누군가를 되풀이해 보는 듯 하다. "어젠, 자네와 그, '대신하는 자'에 대한 엘야시온님의 말을 듣 고..." 레이서스는 고개를 들었다. "나 역시, 그 처녀가 '대신하는 자'가 틀림없다면 엘야시온의 배우 자가 되셔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척 놀라고 또 반대하는 마음까지 품 었네." "---!" "하지만..."하고 안딜로스는 말을 이었다. 덕분에 뭐라고 할 듯, 입 을 벌리던 레이서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어제, 그 처녀를 만나고 말이야... 마음이 조금 다르게 바뀌었네. 자네는, 아마 어제 연회에 없어서 몰랐을 거야. 난, 그 처녀 맨 처음에 보고 많이 놀랐네. 그 어색한 태도하며, 인사도 제대로 못해 쩔쩔매던 모습이... 놀랍게도, 너무나 자네 여동생을 빼다 박아서." "...아스테린을 말씀하십니까." "아니, 다른 쪽. 스온 아스테린이 어디 그렇던가? 다른 쪽... 스온 아피네스 말일세." 뜻밖의 말이었다. 활발한 시나와, 무뚝뚝한 아피네스가?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레이서스였다. 하지만 베르노크 안딜로스는 진지했 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2년 전에 말이야. 자네 아버지께서 사 고를 당하시고, 스온 아피네스가 새로운 카이러스 스아디온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맞아. 그때, 자네 여동생의 눈동자랑, 어제 그 처 녀 눈동자가 너무 똑같아, 마치 세월이 거꾸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까 지 느꼈네. .. 왜 이리 역사가 반복되는지. 그러고 보면, 그때나 지금 이나 상황도 너무나 똑같고." "베르노크 님...?" "조금은 섬뜩했을 정도라... 난 어제, 나도 모르게, 그 거꾸로 돌아 간 세월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네. 조금 후에야, 내가 도대 체 누구를 찾아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는 건지 깨달았을 정도로, 정신없 이. ...자네는 알겠나? 내가 어제 연회장에서 누굴 찾은 줄?" 레이서스는 대답이 없었고, 베르노크 안딜로스는 우울하게 말했다. "내 친우, 클로니아 세렌시스. 그를- 찾았네." ".....!" 두 사람은 레이서스의 숙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리석은 바람.... 어젯밤엔 내내 잠을 못 자고... 자네 에게 그 검의 축언을 부탁 받고, 아무래도 자네를 찾아보아야겠다고 마 음먹었지. 이르긴 하지만. 대작 좀 해주련가?" "...좋은 와인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프네. 이 늙은 가슴이. 그것만 생각하 면 떨려." 레이서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세렌시스는... 내 아들 뻘이었지만, 난 진심으로 그를 내 친구로 생각했네. 아마 그도 그랬을 거야. 그래서 내가, 그에게 강요했지. 스 온 아피네스를, 맞아 들여 그가 엘야시온이 되어야 한다고. 아니, 나뿐 만 아니라... 엘야시온님, 당시 모든 파이오니온들이 그렇게 그에게 말 했어. 하지만... 당시 그는, 이미 스온 마리스를 위한 마인드 컨트롤까 지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 레이서스의 놀란 얼굴에 베르노크 안딜로스는 빙그레 웃었다. "스온 마리스 님과 파혼한 것이, 하누카의 날을 5일 앞둔 때였으니까. 마인드 컨트롤은... 일주일 전에 한다네. 자네도 알겠지? 클로니아 세스틴은 아마도 내일, 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있겠나? 마인드 컨트롤 같은 것 이야, 다시 하면 그만 아닌가? 그런 마음- 진짜도 아니니까-" "그러나..." "...진짜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그런 말을 뱉고 계 속 살아오면서,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인 마음인가. 인간의 마음은 무 엇이든, 변하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야. 그런 인간의 마음을 놓고.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이 진짜가 아닌 마음이 라고 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후회하네. 내 친우는,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놀랍게도 몹시, 슬픈 표정을 지었네. 별로 그런 표정이라고는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아마 스스로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던 듯..." 클로니아 왕족들과 루이티온들의 마인드 컨트롤은 당사자가 아니고 서는, 사람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건 분명히 '만들어진 마음'이므로 어떤 의미론 진짜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 날수록 '자연스러운' 마음보다, 그것은 스스로의 '진실성'을 입증한 다.(아이러니 하게도) 단 한 여자나, 단 한 남자로, 혹은 단 한 주인만 으로 만족하여 평생동안 사는 사람들이 클로니아 왕족들, 그리고 루이 티온들이다. 그러나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마음의 기전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며, 그것을 '가짜'라 부른다. 왜? "왜일까? 나는 그때 이후로, 많이 혼란해져서... 그 후, 루이티온에 게 묻곤 했네. '마인드 컨트롤'을 스스로 깨본 적이 있냐고? 별로, 그 런 루이티온은 없었는데. 한번은, 어떤 루이트가 말하길. 자신들은 자 연스럽게 느끼는 마음이 드문 만큼, 마인드 컨트롤의 마음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므로, 왜 그런 걸 묻는지? 마음이 파열된 사람이 스스로 살 수 있는지? 누가 그 마음을 스스로 파열하겠는지? 잘못된 마 인드 컨트롤일지라도... 그 마음을 파괴하는 사람은, 아마도 지독한 용 기를 가진 사람이거나, 지독한 바보일 것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알 기 때문에, 그 껍질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만큼, 힘들 거라고 하더군. 실제 내가 말하는 것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마인드 컨트롤도 없이, 홀로 버려진 꿈을 꿨는데,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광경이라 한 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안딜로스는 미소지었다. "인간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루이티온이, 그렇게 말하더군." "......"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는. 그럼 내가 세렌시스에게 요구했던 건, 무 엇이었을까, 하는 거네. ...그는 매우 괴로워했어. 마인드 컨트롤을 파 열하고, 스온 아피네스를 받아들이고. 마치 두 가지 마음을 가진 사람 처럼, 침착을 찾지 못하고, 며칠 씩 왕궁에서 나오질 않고. 엘야시온님 은, 그걸-- 곧, 나을 병 같은 걸로 취급했는데... 하지만, 그 루이티온 의 말을 듣기로. 아마도 그때 세렌시스는 그의 마음을 파열하고, 어떻 게 해야할지 몰라했던 것 같아. ...그는 아마 무섭고, 두려웠을지도 모 르지. 그래서, 난 지금도 무척이나 미안해하고 있네. 그가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오르면. 엘야시온을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그런 식으로 잔 인하게 개인의 마음을 파괴하도록 요구할 권리는 없었을 텐데." 레이서스는 생각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때, 클로니아 세렌시스 님은 아피네스를 사랑했습니다." 베르노크 안딜로스가 웃었다. "어떻게 아나?" "제가 그분께 직접 물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지." "그러니, 그가 그렇게 대답하던가?" "네. 생명을 바쳐도 좋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그랬나." 안딜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슬픈 낯을 지었다. "...그랬군. 무엇 이 '진짜'인지." 안딜로스의 이, 알 수 없는 말을 뒤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레이서스는 당시 어렸다. 14살. 아버지를 막 잃었을 때였고, 여동생 이라고는 하지만 몇 번 볼 수도 없었고... 모두에게 잊혀진 것 같아, 어쩜 질투가 났는지도 모른다. 그가 좋아했던 클로니아 세렌시스까지 자신의 여동생만을 주목하고. 그래서 그런 말을 물었는데. 클로니아 세 렌시스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기 자신에 게 다짐하듯. 레이서스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사람들이 그렇게도 클로니아 세렌시스님만을 엘야시온으로 요구했나 하는 겁니다. 당시엔 성년이신, 스온 세스틴 님... 현재의 클로니아도 계셨는데." 안딜로스는 웃더니, 레이서스를 보았다. "자네는 모르네, 레이서스. 그건, 어떤 '분위기' 같은 거였네. 당시 그는, 거의 자네만큼, 아님 어 쩌면 자네보다 더 뛰어난 품성에, 재능... 그가 있는 것만으로, 그 자 리가 빛나곤 했으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어." 레이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당시, 클로니아 세렌시스의 이름은 너무나 유명했다. 자신도 그를 동경했을 정도였으니까. 레이서스는 은빛을 매 우 좋아했다. "그가 엘야시온이 되어 준다면... 클로니아의 파이오니온뿐만이 아 닌, 엘야시온 전체의 왕이...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서 우리 전 부가, 그에게 요구했네. 다들, 그를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매우 나쁜 짓을 한 거야. 그 약혼 파약의 시간, '약속의 시간'에 우리가, 멋대로 스온 마리스 대신 자네 여동생을 내보냈으니까." "......" 잘 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스온 마리스와의 결혼이 깨졌다. 하누 카의 날, 5일 전에. 안딜로스가 중얼거렸다. "...깨진 마음... 그 후로, 그가 얼마나 괴 로워했는지. 마치 피를 토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아." 그 흐트러진 모습의... 언제나 이성적인 표정이었던 그가, 일주일간 의 칩거 속에 있을 때, 안딜로스 자신이 찾아갔을 때, 온통 초췌해진 모습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도 믿지 못하 는 표정으로. 사방엔 찢어진 책들. 클로니아 세렌시스...! 세렌시스! 세렌시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베르노크, 안딜로스--!! 이것이 이런 것이란 건, 몰랐습니다!! 신이 여, 제발! 아무런 안식도 찾을 수가 없고... 이 지독한.... 하지만 내 가 이것을 바랬습니다! 무언지도 모르면서!! 아아... 차라리... 차라 리... 베르노크, 안딜로스!! 아피네스를 죽여버리십시오!! 그녀를 제 발, 내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해요!! 죽여버리고---!! 그리고, 마리스를, 제발---!! "그런데... '사랑'했다고. '사랑'이라..." 베르노크 안딜로스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그 사랑이라는 것도, 참으 로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베르노크는 더 이상 술잔을 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래... 힐라토, 레이서스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었네." 레이서스는 창 너머로, 맑게 개인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자네의 세계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정도 로? 그렇다면 그런 마음을 '굳게' 먹게. ...알겠나? '사랑'은 결코, 저 절로 자라는 것이 아냐. 불타는 듯 하기에, 쉽게 불살라 없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가장 사랑했던 상대가, 가장 증오하는 상대로 변하는 건, 너무 흔한 이야기라 입에 올릴 가치조차 없어. 그러니, '결심'을 하게. 마치, '마인드 컨트롤'처럼. 그 아가씨는 너무 자네 여동생과 비슷해. 그 눈은 무언가를 끊임없 이 찾는 눈이야. 찾다가, 찾다가 못 찾으면, 마침내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라도 원하는 것을 찾아내. 글세-- 내가 무슨 말을 하 고 있는 지 잘 모르겠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게. 자네는 어쩌면 세렌시스, 내 친우와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할거야. 난 그것이 너무나 걱정이네, 힐라토 레이서스. 자네 여동생이, 판테온들에게 납치 당하고--그 저주받을 놈들--클로 니아 세렌시스가 자신의 새로운 약혼녀를 구하기 위해 나섰을 때, 사람 들이 기뻐했지. 드디어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드디어 클로 니아 세렌시스가,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지만 그때 힐라토로 가며, 그가 보인 모습은 '전혀 다른' 무엇이 었네. 결국 돌아온 건, 자네의 여동생과 루온 루드랫, 자네의 루이트뿐 이었지만. 난 만약 클로니아 세렌시스가 그때 돌아왔다고 해도, 사람들 이 바라는 그 모습이었을까, 궁금할 때가 있어. 자네가 좋아하는 그 처녀는 어쩌면, 그런 종류의 인간이네. 찾는 것 이 너무나 절실해, 자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거야. 그리고 변화 를... 하지만 그건, 어쩌면 인간의 한계 이상... 인간으로선 절대 들어 줄 수 없는 것들이야. 그 처녀가 나쁘다, 좋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 냐. 엘께서는, 인간으로 인간을 시험하시기도 하고, 단련하시기도 하지. 그 처녀가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거야. 지독한 시험... 견딘다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거야. 그러나, 엘의 시험은 혹독해. 그러니 잘 생각하게...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네. 자네가 지금 품고 있는 '사랑'이 어떤 종류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마인드 컨트롤'과 같은 굳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그 처녀를 포기하는 게 낫네. 아니... 그녀가 엘야시온의 배우자가 될 것인가, 아닌가 때문에 자 네의 마음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냐. 어쩌면 이건 클로니아 세렌시스에 대한 속죄라고 해도 좋아. 시간이 지날 수록, 혹 내가 내 친우를 그런 시험에 홀로 버려 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그때 당 시는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그걸 이해만 했어도, 그런 식으로 무성 의한 태도,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말을 하진 않았을 텐데. 무언가, 약간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건 홀로 걸어야 할 길이기 에,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지만. 이해할 수 있겠나. 그의 눈은 가끔, 아주 먼 곳을 바라볼 때가 있어 서. 그래서 안타까웠네. 그가 나로선 닿지 못할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아... 나는 예전에 잊어버렸던 먼 곳. 그래서 그가 더욱, 엘야시온으로서 우리 곁에 있어주길 바랬던 거지만... 이제는 다 부질없는 짓. ...난, 자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길 바라네... 그러지 못할 바엔, 그 런 종류의 인간은 그냥 모르는 척 하길 바래. 그게 그 처녀에게도 좋 으니까. ...어쩌면 기우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거야... 뒤를 잇는, 젊은이. 자네들이, 좀 더 나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레이서스는 창에 손을 댔다.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거쳐 심장까지 전해졌다. 주먹을 쥐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이보다, 더 단단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먹고 있다. 모든 것 을 포기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을 하며. 그러므로 베르노크 안딜로스, 그 늙으며 지혜로운 파이오니온이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레이서스는 알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