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6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프롤로그-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5 20:57 읽음:469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프롤로그-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널 증오하게 될 것이다.] [헉-!] 깜짝 놀란 시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헉....” 손가락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떨리는 손으로 지끈거리는 데다 부서질 듯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거기엔 언제나 모호하고 그래서 더욱더 불쾌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아....” 둥그런 모양을 거의 다 갖춘 달이 창을 통하여 들여다보고 있었다. 창에 커튼이 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달은 그 시리도록 눈부신 빛을 시나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 빛은 그녀 주위의 사물에다 음과 양을 뚜렷이 만들 어 주고 있었다. 빛이 있는 곳은 푸르스름한 색으로 빛이 미치지 못한 곳은 더욱더 짙은 어둠으로...그렇게 물들어 있었다. 그 하얀 달빛 속에서 시나는 자신도 알지 못할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볼을 따라 흐르는 간지러운 감촉에 무심코 손을 대자 빛의 결정체 같은 눈물이 그녀의 손가락으로 툭 떨어졌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 으음, 프롤로그를 클릭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1편까지...(퍼억 --!! 뻔뻔한 말은 하지도 마!!!) 으음... --;;;;;;;;;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6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5 21:33 읽음:437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 1회, 제 1막. 시나.> 세수하고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닦은 시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휴우...” 거기엔 17살 소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약간은 부시시한 검은 숏커트 의 머리. 눈두덩이 얇은 속 쌍꺼풀의 눈. 평소에 그 두 눈은 반짝반짝 윤 기가 돌았는데 지금은 흰자위가 좀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언 제나 그렇듯 투명하고 맑았다. 이마에서부터 뻗은 콧잔등 위엔 희미하게 주근깨가 나 있었다. 그 밑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입술이 자리잡고 있다. 턱은 약간 갸름하면서도 둥글어 균형을 잘 잡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보 아 이국적인 생김새였다. 그녀의 흰 피부라든지 얼굴 윤곽 때문에 이국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있지 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얼굴의 윤곽이야 그냥 [한 국인 치곤 꽤 뚜렷한 편이네]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보통의 한 국인과는 뚜렷이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그녀의 눈 동자. 바로 시나가 혼혈이라는 것을 뚜렷이 나타내는 회색의 눈동자였다. 시나는 그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이- 빨개졌잖아.” 어제 저녁 잠결에 뭔가 괴로운 꿈을 꿨는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린 기 억이 난다. 비몽사몽간이라 뭐가 뭔지 기억은 잘 안 났지만 다 커 가지고 꿈 때문에 눈물이나 질질 흘리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음... 눈이 좀 빨간 거야 오후쯤엔 괜찮아 지겠지?” 시나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 보았다. 오늘은 시나에게 아주 중요한 날 이었던 것이다. 그 중요한 일을 머리에 떠올린 시나는 긴장되면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음-음..” 콧노래를 부르며 시나는 앞에 놔 둔 콘택트렌즈 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한 쌍의 콘택트렌즈를 꺼내 차례차례 조심스럽게 두 눈에 끼웠 다. 손을 떼자 그녀의 눈은 이제 회색에서 검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검은 색 콘택트렌즈를 끼우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회색 눈에 특별히 거부감을 갖 고 있진 않지만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들은 꽤 많이 시나를 귀찮게 했다. 머리카락을 염색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잦은 염색으로 인해 머리카 락이 상당히 부시시했지만 이렇게 한 덕분에 시나는 그냥 평범한 한국인 으로 보일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사는 거지만 뭐 어떠랴 싶었다. [나 편한 대로하고 살면 되는 거지 뭐.] 시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방긋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침을 차리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음. 잘 잤냐?” 푸른색의 세로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시나의 아버지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 며 뒷머리를 벅벅 긁은 뒤 아침인사를 했다. 더 자고 싶었지 만 좋은 냄 새에 끌려 나온 것 같았다. 그는 배고프면 한 밤중에라도 벌떡 일어나는 스타일이었다. 하늘로 향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있는 머리모양을 하 고 그는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킁, 킁, 냄새 조오타∼ 북어국이냐?” 시나의 아버지는 헤벌쭉 웃었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정신없이 골아 떨어진 뒤, 아침에 맡는 북어국 냄새는 언제나 환상적이다. “네. 여기 갈아만든 애플도 사 놨으니 드세요.” 시나의 아버지는 이 주스의 애용자였다. 꿀물이라든지 잡다한 숙취제거제 보단 효과가 차라리 더 낫다고 언제나 술 마신 뒤에는 꼭 이 주스를 마셨 다. “고맙다 시나야. 오늘은 내가 식사당번이었는데..” 시나의 아버지는 감격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을 지었다. “고맙긴요.... 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시나는 상냥하고 순진하게 웃었다. 단정하게 짙은 감색의 교복을 입고 그 위에 분홍색 에이프런을 걸친 그녀는 귀엽고 효성스런 여고생의 표본과도 같았다. “시, 시나야...” 시나의 아버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시나를 꼬옥 껴안았다. “이런 젠장! 난 정말 행복한 놈이구나! 이렇게 좋은 딸을 갖고 있다니!” 그는 울먹울먹하며 말했다. [정말.. 아빠는... 언제나 쉽게 흥분을 하시는 게 문제라니까....] 시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저도 너무 행복해요 아빠. 너무나 훌륭하신 아빠 덕분에 이제 장 장 2 달 동안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게 됐지 않아요?” 시나의 아버지는 불이라도 만진 듯 시나를 떼 놓고 후닥닥 뒤로 물러섰 다. “그, 그게 무슨 뜻이냐?!” 그는 이제 역력히 경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시나는 어디까지나 순진한 미소를 고수했다. 그 미소에 시나 아버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갑자기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렇지!!! “시, 시나야......?” 시나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방긋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노력했다. “잠깐 내 말을... 어제는... 그러니까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하지만 시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엔 코방귀도 안 뀌고 이제 그 가식 적 인 상냥한 표정마저도 집어치웠다. 그리고 노골적인 화난 표정으로 손을 쭉 뻗어 냉장고 앞의 쪽지를 가리켰다. 수박모양의 자석으로 고정되어 있 는 쪽지 안에 쓰여진 내용은 이러했다. “-시나의 아버님 윤정운 씨와 윤시나양의 가족생활 지침서 및 계획서 및 법칙서- 제1항과 제2항은 넘어가고, 제3항 2조! [귀가시간은 꼭 지킬 것. 부득이한 경우는 상대방에게 꼭 알린다. 그렇지 못할 시 2주일동안 전 가사활동을 맡게 된다] 제4항 5조! [시나의 아버님 윤정운 씨께서는 술을 끊는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시 2주일동안 전 가사활동을 맡게 된다]!” [허억!] 자신의 딸 시나가 그 [가족생활 지침서 및 기타 등등]을 또박또박 읽을 때 시나의 아버님 윤정운 씨는 뒷골로 엄습하는 충격을 느꼈다. [저것을 만든 것은 분명 일주일전... 좀 더 사람답게 살아보고 이 험악한 세상, 딸내미 좀 잘 키워보려고 만들었었지... 크흑..!] 일주일 전 만해도 자유롭게 사는데 아무지장이 없었건만 이제 그것이 그 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저걸 왜 만들었을꼬... 아니, 아냐. 저걸 만든 건 잘 한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활도 너무 나태해지고... 시나 보기도 민망 해서......그래... 저 쪽지 자체는 괜찮아. 그래. 그때 1차만 가고 그만 뒀어 야하는데.... 박사장의 꼬임에 넘어가 흥청망청 놀다가... 흑, 흑.... 저것 때 문에 이제 2달 동안... 응?! 2달?] 잡다한 생각 가운데 시나의 아버님 윤정운 씨는 뭔가 논리적이지 못한 것 을 찾아내었다. [갑자기 힘이 난다아--!!!] 시나의 아버지는 기사회생하였다. “크험! 시나야..? 내 부정은 않으마. 이곳은 법치국가에 속한 가정! 벌받 을 것은 받아야지..! 하지만 내가 가사일 을 할 기간은 2주, 2주 합쳐서 1 달인데 무슨 2달이란 말이냐...!?” “호호호홋! 아빠!” 시나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친절히(!) 설명해 드렸다. “제5항 1조! [식사당번을 어길 시 그 두 배의 기간동안 봉사한다.] 라는 약관을 보셔야죠. 오늘 아침은 벌칙을 받는 그 첫날. 첫날 아침을 제가 대 신 해드렸으니 제5항 1조의 벌칙에 따라 기간을 2배로 해야하지 않겠어 요?” 시나의 아버님 윤정운 씨는 주먹을 꾸욱 쥐고 입술을 부들 떨었다. 기간 에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이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무, 무서운 것. 내 딸이지만, 등골이 서늘하구나. 어쩐지.. 자기 차례도 아 닌데 아침을 해 준다고 했지.] “나의 패배다...”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아버지를 보며 시나는 시원스레 미소지었 다. 그리고는 분홍색 에이프런을 휙 벗어 제자리에 걸어 놓았다. “안녕. 에이프런아. 앞으로 2달 동안 네가 무척 그리울 꺼야.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 시나의 아버지가 신음을 흘렸다. “끄응...” 시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드세요. 아빠. 북어국 아주 맛있게 끓여졌어요.” 시나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우거지상으로 다시 자리에 않았고 시나도 자신 의 밥을 차려서 앉았다. “......네 엄마라면 좀 더 동정심을 발휘했을 거다.” 시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아빠 기억 속의 엄마는 제 기억 속의 엄마완 좀 틀린 것 같네요.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아빤 새벽 2시에 들어올 엄두도 못 내셨을 걸요.” “끄응...” 시나의 아버지도 그 말엔 묵묵히 침묵했다. 3년 전 돌아가신 엄마는 자기 가 생각해서 아니다 싶고 도리에 맞지 않다 싶으면 용서가 없었다. 그 파 워는 시나의 아버지도 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깐깐하긴 했지만 자기의 의 견이 분명하고 활달했던 엄마.... [엄마....] 엄마의 기억이 떠오르자 밥 먹는 입안이 깔깔해졌다. 맨 처음 엄마 가 돌 아가셨을 땐 슬픔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때는 아버지의 고향마 을에 살 때였는데 살던 집에 불이 났었다.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시나와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와 그럭저럭 생활에 적응해 가는 참이 다. 이제는 대화 속에 엄마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자연스럽게 추억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에 대한 세부적인 기억들이 지워지는 건 슬펐지만 가슴이 찢어 질 듯한 슬픔을 감당하며 기억을 갖고 있기에 인간은 너무나 약했다. 그러므로 시간과 망각이라는 위대한 두 치유자는 시나와 시나아 버지 양쪽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는 셈이다. 시나의 아버지가 갑자기 쿡 웃었다. “하긴... 네 말이 맞다. 네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난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도 못했겠지... 그래. 후후.... 내가 술맛이고 들어와서... 그래....은선인 화낼 때도 참 예뻤지...." 귀화인이었던 시나의 어머니는 [민은선]이란 이름이었다. 시나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빠의 눈가가 좀 붉어진 듯 했다. “아빠?” “크흠!. 크흠! 어, 이 북어국 참 맛있네. 꼭 니 엄마가 끓인 맛있구나. 흠, 흠, 아, 참! 그래! 넌 지금도 엄마의 목걸이를 계속 하고 다니니?” 시나의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헛기침을 계속 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 렸다. 시나는 빙긋 웃었다. “네” “잊어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물어보았다. “조심해야죠. 저도 잊어버릴까봐 놔두고 다니려고 했는데 그럴 수 가 없 었어요. 왠지 몸에서 떼 놓을 수가 없어서요...” 시나는 목덜미 부근을 더듬어 금으로 도금한 줄을 잠아 꺼냈다. 불 과 같 이 새빨간 루비가 딸려 나왔다. 어린아이 새끼손톱만큼 작은 타원형의 루 비 주위를 금으로 둘러놓았는데 그것은 웨이브 문양으로 물결치듯 루비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네 엄마도 그랬지. 그것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어. 하긴 네 엄마도 네 가 그걸 언제나 지니고 있는 걸 좋아할게다.” “후후. 네. 게다가 내가 이걸 안 걸고 있으면 숨 넘어가는 친구가 하나 있어서요-” “뭐라고?” “아니에요... 아무 말도..” 시나는 다 먹은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이제는 학교 갈 시간이었다. “잘먹었습니다.” 식사를 만든 것도, 차린 것도 시나 자신이었지만 시나는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그렇게 인사한다. 누구에게 랄 것 없는 인사였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빠, 오늘 어디 나가실 거예요?” “아니. 오늘은 전에 써 둔 초고 읽고 보고 수정하는 작업 하려고. 왜?” 시나의 아버지는 꽤 이름 있는 소설가였다. 시나는 싱크대 위 에 놔둔 도 시락을 집어들었다. “음- 그럼 잘 됐네요. 오늘 햇빛이 좋을 거 같으니까요, 장롱 안에 있는 겨울 이불 빨아서 말리시라구요, 이런 건 힘 좋은 아빠가 가사 당번일 때 해치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뭐니뭐니해도 빨래를 제일 싫어했던 것 이다. 그것도 세탁기에도 안 들어가는 겨울이불이라니! “......꼭, 오늘 해야.... 하냐?” “올해 겨울을 지난겨울처럼 곰팡이 난 이불로 지내고 싶으세요?” 그는 고개를 푹 떨궜다. 지난여름에도 하루하루 겨울이불 빠는 걸 미루다 가 겨울을 비참하게 난 기억이 있는 것이다. “알았다...” 시나는 방긋 웃었다. “훗. 그럼 수고하시고요-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내미 시나는 학교에 다녀 올께요. 아빠 알라뷰!”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7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5 21:38 읽음:3530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RF) - 제 2회, 제 1막. 시나(2)> 시나는 상쾌하게 아파트의 문을 탕 닫고 나갔다. 시나의 아버지 윤정운 씨는 이제 앞으로 2달 동안 해야할 집안 일을 생각하고 한숨을 푸욱 쉬었 다. [제길.. 1차 이후로 필름만 안 끊겼어도 시나에게 전화라도 했으면, 2주... 아니, 1달은 기간이 줄었을 텐데... 제기럴..] 시나는 골목을 걸어가면서 즐겁게 웃었다. 시나의 아버지는 어제 낮에 나 가 새벽 2시까지 아무 소식도 없이 안 들어 온 것이다. 그 덕분에 잠도 못 자고 초조하게 걱정하며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어딘 가에서 사고라 도 당한 것은 아닌지 별의별 불길한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런데 겨우 들 어왔다 싶은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오자마자 문간에 픽 쓰러진 것이다.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쓰러진 그를 침대로 데려다 눕히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흥. 내가 무서운 꿈꾸고 잠까지 설친 건 그것 때문일 거야.. 잠도 3시간 정 도밖에 못 잤구. 하여튼 아빠는 참!] 하지만 걱정하며 속썩이던 것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빠가 무사히 들어오셨으니 됐고, 심술이 나서 2달 동안이라고는 했지만 역시 1달 정도 가 무난할 것이다. 그래도 그거야 이따가 집에 들어가서 할 이야기고.. 후 훗. 지금쯤 아빠는 아마 2달 동안 가사 일을 할 생각을 하며, 그러잖아도 숙취로 아픈 머리를 더 지끈거리며 고민하고 계실 것이다. 훗훗... “시나야---!” 웬 여자 애의 목소리가 시나의 등뒤에서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동그랗고 귀여운 눈을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다 가왔다. 165센티인 시나보다 10센티 정도 작은 키라 눈이 아래로 향하게 된다. “어? 보경아. 안녕” “안녕?... 이힛! 너, 오늘도 그거 하고 나왔니? 하고 왔지?” “임보경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아침부터 만나자마자 그 타령이냐?” 시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우으으응... 시나야아. 보여줘잉---” 보경은 애교를 떨며 시나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으이구! 자, 봐라 봐” 시나는 목걸이 꺼내어 보경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보경이는 이상 한 소리를 내며 그것을 슬쩍 쓰다듬어 보았다. “히야아아아... 오늘도 너무 너무 이쁘다아. 하아.... 멋져....” 시나는 피식 웃었다. “..이걸 만지니 또 새 힘이 솟냐?” “응, 응,” 시나는 다시 그것을 교복 속으로 집어넣었다. 보경의 눈빛이 몹시 아쉬운 듯 했다. 보경은 이 목걸이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너무나 맘에 들어했다. 시나가 서울에 막 올라와 낯선 중학교로 전학했을 무렵이었는데 보경은 그때 맨 처음 짝이 되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명랑하고 활달했던 보 경은 엄마를 잃고 상심해 있던 시나에게 학교 생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뒤로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도 많이 겪 었다. 잘된 건지 안된 건지 모르지만 고등학교도 보경과 같은 곳으로 배 정 받았다. 2학년 올라와서는 같은 반까지 되었다. 짝은 틀렸지만... 어쨌든 처음 본 순간부터 보경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이 목걸이를 보고싶 어 했다. 보고 나면 그냥 기분이 즐거워진 다나.... 어쩔 땐 보경이가 이 목걸이 때문에 자신과 사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물건에 집착이 없는 시나 같은 경우 그냥 선물로 줘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머니의 유품을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대신 시나는 보경의 지난 생일 때 보경을 위해 자신의 것과 똑같은 이미 테이션을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물론 루비는 그냥 비슷한 가넷이었고 그 주위를 두른 금도 그냥 금도금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치곤 꽤 큰돈을 들여 선물을 한 것이다. 예상대로 보경은 굉장히 좋아했다. “내가 선물 해준 건 걸고 왔니?” “응. 당연하지!” 보경은 자신의 옷깃에서 금도금 줄을 슬쩍 들어올려 보였다. 거기엔 시나 의 것과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가 있었다. “이게 있어서 좋긴 하지만, 역시 하루에 한 번 진짜를 보지 않으면...” “열성이다. 열성.” 시나는 킥, 킥 웃었다. 하여튼 보경은 보통아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 다. 보통 그 또래의 아이들은 연예인이라든가 운동선수한테 열 올리기 일 쑤인데 보경은 보석 매니아였다. 보석 상점을 지나가다 멋진 보석 같은 것이 있으면 침을 질질 흘리고 서서 멍하니 보기도 했다. “하여튼 너처럼 보석을 좋아하는 애는 처음 봤다니까....쿡.” 시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 보경아? 내가 보석 잔뜩 모을 수 있는 방법 알려 줄까?” “뭐, 그게 뭔데?” 보경이 흥미를 갖고 시나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외모를 열심히 가꾸어봐. 그래서 나중에 미인계로 아주 부잣 집 남자를 낚는 거야. 아, 물론 돈을 보고 결혼하는 거니까 외모나 성격은 제2지 망으로 제쳐둬야겠지. 그것까지 따라 주면야 금상첨화지만 어디 그 런 게 쉽니? 아, 김중배 같은 타입은 어떨까?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이아 몬드 반지를 팍 팍 앵겨주잖아?” “김중배? 그게 누군진 모르지만... 다이아몬드 반지를 팍팍 앵겨준다니 생각 해볼 만 하네...” 보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시나는 보경을 놀리려다 오히려 자신 이 황당해졌다. “야, 야! 농담이야. 농담!” “왜? 괜찮은 생각인데?” “야, 야!” 시나는 식은땀을 흘렀다. [이 애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겠구만. 내가 이 보석 광을 과대(?)평가했어.] 시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보경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보경아, 내 충고 한마디하마.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 야-” 보경은 시원스럽게 깔깔 웃었다. “깔깔! 걱정 없어. 난 김중배 같은 타입이라면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될 거니까!” [.....;] [이 세대, 수일씨 같은 남자가 가야 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이런 매정한 순애(?)같으니라구.] 시나는 보경을 자기 맘대로 순애로 바꾸고 혀를 끌끌 찼다. 포기다 포기. “그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시나는 고개를 흔들며, 보경은 앞날의 김중배를 생각하는 지 히죽히죽 웃 으며, 그렇게 다시 길을 갔다. 주위엔 같은 학교 학생들이 몇몇 걷고 있었 다. “시나야? 그건 그렇고 오늘 정말 고백하는 거야?” 보경이 느닷없이 물었다.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니 시나의 미래 도 새삼 궁금해 진 것 같았다. 시나는 빙긋 웃었다. “그래. 이 언니의 건투를 빌어주렴.” “그러지 뭐. 와- 그러나 저러나 오늘까지 차이면 몇 번째가 되는 거지? 7번째인가? 행운의 숫자네? 행운의 딱지인가?” 시나는 하마터면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미소짓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 져 썩소가 됐다. [이것이..!] 시나의 이마에 우물정자 마크가 새겨졌다. “임...보경...?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꼭 차이라고 악담하는 거냐!?” “악담? 악담이라니이-!” 보경이 소리쳤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한 냉철한 판단이라고 해 줘.” “그 냉철하신 판단 덕분에 네 목숨이 위험해 질 걸 몰랐더냐?!” 시나는 보경의 목을 팔뚝으로 졸랐다. 보경보다 키가 커서 쉬웠다. “이것이! 언니님이 고백을 한 다는데 소금을 뿌려!!” “캑캑, 너무해! 사실은 사실이지 뭘 그래?!” 시나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보경은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비명 을 질렀다. “꺄아--- 알았어 시나야! 미안해!” [흥, 역시 실력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니까.] 그리고 보경의 목을 놔주려는데 갑자기 띵 하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눈앞 에 하얀 잔상이 어리더니 점점 주위가 시커매졌다. [....?.... 뭐, 뭐지? 이 어둠은...?]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었다. 보경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흡사 가위에 눌린 느낌이었다. 깨어있는데 가위에 눌릴 수 있는지 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때 그 어둠을 찢듯 보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캑캑, 시나야-! 윤시낫!!!! 미안하다구 했잖아!!! 고만해! 진짜 죽일 셈이 야?!!!”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시나는 보경의 목을 조르던 손을 확 풀었다. “앗, 미, 미안해..” 식은땀이 흘렀다. 너무 기분 나쁜 어둠이었다. “아웅.. 콜록, 콜록, 계집애. 힘도 디게 쎄네. 장난 좀 쳤다고 그러는 거 야? 화났어?” “아, 아니..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져서... 나도 모르게....”그때 시나의 얼 굴이 새파래졌다. 뭔가가 머리 속에 스치며 짐작되는 게 있었다. “아, 나 서, 설마... 아냐 그럴 리 없어...” “뭐야? 왜?” 보경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시나는 심각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보경아.... 나, 나... 혹시... 혹시 말야. 그, 여, 영양실조 아닐까?” 그 말을 들은 보경은 눈을 내리깔고 웃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됐네요. 이 사람아. 댁 같이 잘 먹는 사람은 주위에서 한 명도 본적이 없는 데 무슨 영양실조는....” [......너무 하는군...] 모처럼 심각하게 얘기했는데 무안했다. 하지만 보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나는 몬도가네류의 심한 음식만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 가리고 마음껏 먹는 타입이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유전 같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렇게 먹어도 전혀 살이 안 찐다는 것이다. 165센티에 43킬 로그램. 아무리 많이 먹어도, 여기서 절대로 벗어나질 않았다. 보통 여학 생들이 들으면 맞아죽을 소리겠지만 그래서 고민도 많은 시나였다. 그렇 게 마르다보니 몸에 볼륨이 전혀 없어서, 가슴? 있는 둥 마는 둥으로 이 것이 절벽인지 널빤지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고 엉덩이도 살이 없었다. 한마디로 쫙 빠진 일자형 몸매였는데 그나마 허리가 잘록해 봐줄 정도였 다. 그런 실정이니 아무리 쫙 달라붙는 쫄 티를 입어도 보통 티가 돼버리고 바지는 보통 바지라도 힙합 바지가 돼버린다. 때문에 시나의 장래 희망은 [글래머 미인]이었다. 비웃을까봐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지만 그랬다. 옛날에 분홍색 잡지를 한번 본적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시나 의 눈앞엔 별이 왔다갔다했다. 쫙 늘어선 글래머 미인들---! 인생의 목표 를 눈으로 보고 한없이 황홀한 시나였다. 놀릴 목적으로 잡지를 보여준 같은 반 남자애들은 시나가 침을 질질 흘리며 책을 보자 오히려 당황해 했다. 그 때문에 며칠동안 변태소리를 좀 듣긴 했지만 시나의 목표는 그 거로서 정해졌다. 분홍색 잡지 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옷을 입었을 때 여 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몸매가 되는 것! 이것이 시나의 목표였 다. 그것을 위해서 자라탕이라도 먹어 볼까 했는데 관두었다. 비위가 상해 서. 몬도가네류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한가지 다행인 건 말랐 다고는 해도 강단이 있어서 어디가 아프다거나 하진 않는 것이다. 평소에 가사 노동을 열심히 해서 힘이 길러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엄청 건강하다는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병원신세 한번 변변히 진 적 없었다. 일년에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코피 한번 안 쏟는 완벽한 건강체.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보경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도 시나는 무안했다. [모처럼 가녀린 여학생의 기분을 느끼며 서 있는데... 쯧. 하여간 하나 있 는 친구라는 게 도통 호응할 줄 모른다니까.] 그때 시나는 자신들이 사람들의 주목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길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으니까 지나가던 사람과 학생들이 힐끗힐끗 바 라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어, 어쨌든 가자, 보경아.” 시나와 보경은 다시 학교를 향해 걸었다. [흥! 7번째 행운(?)의 딱지라고?] 왠지 분했다. [두고보자! 대 사악녀 임보경의 저주 따위 물리쳐주고 말겠다! 후후! 7번 째의 고백!.. 이거야말로 멋진 숫자지! 틀림없이 제준이를 남자친구로 만 들어 보이겠어...!] 시나의 거대한 야망은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계속)================================================== 이래봬도, 학원물이 아닌, 확실한 판타지입니다. 하하... --;;;;;;;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엔...^^> ps 극악이다...--;;; 글 올리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나우누리 웹프리... 넌, 강적이다..--;;;; 다시는 너랑 안 논다...--;;; ps2 탐그루를 사이에 끼게 되다니 영광이다...--;;; 프롤로그를 빼내는게 보기에 좋겠지만... 어떻게 올린 글인데... 그냥, 이렇게 살랜다..TT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쓴다.....TT(다른 분들이 신경쓰이겠지... 죄송TT) 흑흑... 난, 처음은 꼭 왜 이러지...TT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7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6 23:34 읽음:3390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3- <제 2막. 시나Ⅱ(1)> “윤시나, 편지다.” 반에 들어가니 문가에 있던 아이가 편지를 한 꾸러미 건네주었다. 시나가 오기 전 애들이 또 편지를 건네주고 간 것 같았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어, 고마워-” “와- 대단하다, 대단해. 오늘도 한 포대네.” 보경이가 옆에서 신난다는 듯이 얘기했다. 시나는 그런 보경을 무시하고 불규칙하게 쌓인 편지를 잘 그러모아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1분단 맨 끝자리였다. 보경은 자기 자리에 휙딱 가방을 던져 놓고 시나의 자리로 왔다. 임자 없는 시나의 옆자리에 철퍽 주저앉은 그녀는 시나가 책상 위 에 놔둔 편지들을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가져갔다. “안돼!!” “잠깐마안! 저리 좀 비켜봐” 보경은 이미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고 있었다. “선준미.. 이 애는 어제 보내고 또 보냈네. 응... 뭐야? 3학년 편지? 아, 이 언닌 시나시스터즈니까 괜찮아. 어?! 하경아? 얜 누구야? 또 새로운 팬이 생긴 건가? 야, 시나야 너 이 편지 읽고 얘, 몇 학년 몇 반인지 알려 줘. 시나 시스터즈에 들라고 권유해야지.” “야- 임보경-! 너 정말!!!” 시나는 보경이가 들고 있는 편지들을 홱 뺏었다. “왜 그래-? 널 좋아하는 애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하는 친 구의 이 따뜻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거니?” 시나의 골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보경이가 이렇게 막무가내일 땐 정말 황당하다. “그러니까-- 거기서 누가 서비스로 제공되는 건데? 누가? 여자 애들이 날 좋아하는 거야 자기들 맘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넌 도대체 왜 클럽까지 만들어 극성이냐?” 보경은 생긋 웃었다. “내가 원래 동정심이 많잖아-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애들에게 용 기를 주는 게 나의 보람이야.” [윽!] 위에서 설명한 시나의 외모 때문에 시나는 의외로, 혹은 당연히(?)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사실 시나의 깡마른 체구는 언뜻 보면 남자애들 의 사춘기 때 몸매와 비슷해 보였다. 급격히 성장하느라 팔다리가 기묘하 게 가늘고 뼈마디만 뚜렷한 몸매이니 말이다. 거기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눈매가 뚜렷한 얼굴을 가진 시나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뭐랄까 중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눈치 채이지 못하게 하고 있지 만(더 이상의 쓰잘데기 없는 관심은 딱 질색이었으므로) 혼혈인 시나의 동양적이면서 이국적인 외모도 중성적으로 보이는 데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치마를 입으면 그럭저럭 잘 어울렸지만 바지를 입으면 더 잘 어울렸고 한 술 더 떠 98%, 남자애로 보이는 시나.(츠츠...) 덕분에 시나는 중학교 때부 터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참으로 좋았다.(츠츠츠...) 아마도 그런 아픔(?) 때문에 더 ‘글래머의 미인’이 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너까지 나서서 그런 용기 안 불어 넣어줘도 돼. 지금도 주체 못할 정도 로 용기들이 넘쳐나니까. 게다가! 여자 애가 여자 애한테 인기 있어서 뭣 에 써?! 여자 애들 팬클럽 따위 있어봤자 하나도 안 기쁘다구!! 남자애들 팬클럽이라면 또 몰라!” 시나는 인상을 잔뜩 쓰고 보경은 눈을 멀뚱히 떴다. “그야- 그러면 나도 좋지만- 남자애들은 여자 애들만큼 널 안 좋아한다 구. 팬클럽 만들자고 하면 1, 2명밖에 안 들걸.” [크-] 시나의 두 눈으로 물줄기가 주룩 흘렀다. [남자애들이 날 안 좋아한다니... 저게 앞으로 남자에게 고백할 소녀에게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인간이 할 소리인가.. 저건 친구가 아니라 웬수야. 웬 수.] 하긴 보경은 시나가 고백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무슨 장난이나 연례행사 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중학교 때부터 6번의 고백들.... [으으으으-] 시나는 절규했다. 여자 애들의 팬클럽까지 있는 시나였지만 시나도 여자 다. 당연히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글래머의 미인]이 되어 좋아하는 남 자와 멋진 사랑을 하는 것. 청춘을 구가하며 남자친구 한 명쯤은 사귀고 싶었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됐다. 지금까지 좋아했던 남자들 6명..... 6명이라고는 하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 었다. 하나같이 짝사랑만 하다 고백마저도 흐지부지 돼 버린 비극의 전당 이라고나 할까. 고백 할 때마다 매번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되풀이 됐고 그때마다 실패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던 것이다. [쳇,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둔탱이 같은 녀석들!] 슬픈 과거가 뇌리를 스쳤다. [미안해. 윤시나. 넌 좋은 녀석이야... 하지만...] -녀석? [내가 좋아하는 여자 애가 널 좋아해... 내가 어떻게 라이벌의 고백을 받 아들일 수 있겠냐?] -황당했다. [난 호모로 보이기 싫은데...]-작게 속삭인 소리였지만 똑똑히 들렸다. [네가? 날? 하하하하하 농담이지? 넌 역시 재밌다니까!] -농담 아니다. 응?! 대체적으로 이런 경로였는데 그럴 때마다 시나는 각오를 새롭게 불태웠 다. 꼭 남보란 듯 훌륭한 남자친구를 사귀겠다고. “글쎄. 남자애는 포기하고 차라리 네 팬클럽을 키우라니까.” 보경은 시나가 과거회상을 하는데 눈치 없게 찬물을 끼얹었다. 하여, 시나 는 단호하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니 자리로 가주세요!” 보경이 투덜대며 자기자리로 돌아가자 시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나이보다 정신적으로 10년은 더 산것 같았다. 힐끗 편지들을 바라 보았다. 알록달록 예쁜 편지들.... 보경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 뒤 적당 히 즐기라지만 이런 종류의 편지는 아무리 받아도 당혹스럽기만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런 스타(?)따윈 전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시나의 외모와 나쁘지 않은 성격은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였다. 맨 처음 시나의 이상한 인기에 껄끄러 움을 느끼던 남자애들도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나와 친해졌다. 말하 기에 편하고 재밌다는 것을 안 것이다.(분홍색 잡지 사건이 한 예가 될 수 있을까?)덕분에 두루두루 인간관계가 좋았는데 그것에 대해 시나 본인 은 자신의 인덕이 뛰어난 탓이라고 평소에도 누누이 설명하고 있다. 옆에 서 보경이가 코웃음을 치던 말던. 하여튼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편지 같은 건 하루에 끽해봤 자 2통이 고작이었는데 보경이가 [시나 시스터즈(--;)] 만들고 나선 편지 쓰기 시합이라도 벌렸는지 장난이 아니게 편지들이 오고 있었다. 시나를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특별히 행동을 취하지 않던 아이들도 다른 애 들이 편지를 쓰니까 자극을 받아 덩달아 한 번씩 써보는 듯 했다. 이것도 유행을 타는 것 같다. 지금은 아침마다 많게는 5통에서 적게는 2-3통에 이르는 편지들을 받는다. 그 외 쉬는 시간에 편지들이 오기도 하고, 점심 시간에도 가끔 편지들이 왔다. 그래서 집에 돌아갈 무렵엔 간단한 쪽지 포함하여 그럭저럭 평균 10여 통 가량의 편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시나 는 편지를 한 장 한 장 살피며 생각했다. [쳇! 이 편지들을 읽어서 분철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라구! 하여간 그 시나시스터즈 때문에 여러 가지로 피해가 많구만. 어휴.] 시나 시스터즈의 생각을 하자 시나의 머리가 아파 왔다. 시나 시스터즈’ 라니... 중학교 때도 그럭저럭 인기가 좋긴 했지만 팬클럽까지 생긴 건 처 음이다. 맨 처음 보경이 이런 것을 만든다고 했을 때 시나는 질겁을 하며 미쳤냐고 반대했었다. 보경도 그때는 수긍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이런 이름의 클럽이 생겨 있었다. 보경이는 끝까지 잡아떼 고 있지만 분명 보경이의 짓이었다. [하여튼 웬수가 따로 없어요.. 으이구.] 맨 처음 결성식에 억지로 끌려갔을 땐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 감이 안 잡혔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한가 지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시나는 거기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다. 그저 시나는 ‘존재’해 주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아이들은 시나라는 존 재를 통하여 자기 만족을 느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모임은 사양하겠다고 해도 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거기 에서 가장 불필요한 건 시나의 의견이었다. 시나를 좋아한다면서 편지에 다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러했다. [언니, 언니의 고독하고 냉정해 보이는 모습은 흡사 한 송이의 오스칼님 같아요.. 라니, 나 참, 도대체 나의 어디가 그렇다는 거야? 진짜 오스칼이 들으면... 응? 그리고 얜 뭐야, 어제 운동장 벤치에 쓸쓸히 앉아 있던 나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구? 어제? 내가 언제 쓸쓸히 앉아 있었지..? ? 운동 장이면... 아! 체육시간 끝나고 배고파서 앉아 있을 때!] 시나는 웃겨서 고개를 푹 숙였다. [세상에...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의 우상이 되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고, 그 요구에 시나라는 인물이 딱 들어맞은 것이다. 우상은 우상일 뿐이고 그들 상상 속의 시나는 현실의 시나와는 틀리다. 자기의 외모가 조금만 그들의 기준 에 미치지 못했다면 이런 것들은 다 받지 못했을 애정들 아닌가? 시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우습다니까......] 배고파서 앉아있었던 것 가지고도 걱정을 해주고 다음날 편지를 써서 위 로해 준다. 사실은 이런 사랑 받는 느낌이 좋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느낌 이랄까.. 엄마가 없는 시나에게 이런 사랑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시나의 겉모습 만 보고 쏟아 붓는 애정일지라도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떠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우상들은 그리도 빨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거겠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기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남의 애 정을 받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기분이 좋은 일이기 때문일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애정이라도? 심지어 나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서 온 일방적인 애정일지라도? 자기의 마음이지만 자기도 알 수 없었다. 딩동댕-- 그때 수업종이 울렸다. 시나는 편지들을 모아 조심스럽게 가방 에 넣었다. [하아- ...어쨌든 평균을 내면 ‘괴로운 심정’이야... 흑-] “꺄아- 시나언니!” 운동장에서 같이 수업 받는 하급생 반에 시나의 팬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나네 반은 체력장 연습으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시나가 달 리자 애들이 아우성이었다. 이 시간엔 3개 반이 체육 수업을 받는다. 방금 언급한 1학년 여학생 반과 시나네 반, 그리고 2학년 남학생 반이다. 시나 는 죽어라 뛰었다. “20초 88!” 제일 꼴등으로 들어오며 세운 기록이었다. “으아- 언니, 심해요!!” “언니, 그래도 전 언니 편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리친 아이들은 그 쪽 선생님께 몇 대 얻어터졌다. 수업에 집중은 안하고 다른데 신경을 쓰고 있으니 당연했다. [헉헉.. 츠츠, 그럴 줄 알았다.] 그 쪽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데 선생님이 소리를 꽥 질렀다 “윤시나! 기록이 이게 뭐냐! 자식 키는 커 갖고 운동신경이 엉망이구만! 이거 나중에 체력장 통과하겠어? 네 팬들 보기 민망하지 않아?!” 아이들이 웃고 난리였다. 시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 쪽에서 수업 받고 있는 남학생 반을 힐끗 보 았다. 남자반도 반대쪽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음- 제준이가 내가 뛰는 거 봤을까?] 시나는 제발 그러지 않았길 간절히 빌었다. 제자리에 앉는데 보경이가 안 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경이는 의외로 운동신경이 좋아 100미터를 16초 5에 끊었다.(여자치고는 빠른 편) “...아깝다. 아까와. 네가 운동신경만 좋았어도 팬들이 두 배는 더 늘었을 텐데" “필요 없어-” 시나는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퉁명스럽게 보경의 헛소리를 무시했다. “멀리뛰기 1미터 30, 매달리기 15초, 던지기 10미터, 윗몸 일으키기 32 개?” 보경은 시나의 기록이 써진 쪽지를 뺏어서 읽었다. “야- 이리 내놔” 시나가 씩씩대며 쪽지를 다시 가져가자 보경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아- 이리도 운동을 못할 수 있다니. 한심해...” “사람이 너무 완벽해도 못 쓰는 법이야. 나처럼 지성과 미모가 뛰어난 사람이 운동신경까지 발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화감만 준다 구.” 보경은 그 말은 아예 들은 척도 안 했다. “야- 남자애들 참 자알 뛴다아. 어, 시나야 저 봐 네 낭군님이네.” [이것이- ! 어, 정말이잖아!] 시나는 눈이 번쩍 띄어 같이 구경했다. 남자애들은 전반적으로 여자 애들 보다 빠르다. 기록도 11초에서 15초 사 이로 골인하니까. 그런 남자애들 가운데서 제준은 맨 앞을 뛰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좋겠다. 정말 빠르지?” 보경이 물었다. “응. 저런 거 보면 나도 남자로 태어날 걸-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시나는 제준이 뛰는 것을 보고 멋있다고 감탄하며 흥분해서 말했다. 보경 은 희한한 물건 쳐다보는 눈길로 시나를 보았다. “시나야, 넌 그런 소리하면 안돼지이. 그런 말은 진짜 여자 애들이나 하 는 소리고, 넌 지금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남잔걸. 운동 지지리 못하는 남 자.” 죽어라-! 시나는 옆구리를 꺾기로 보경에게 원수를 갚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종이 울렸다. “종이 널 살렸다. 임보경!” 보경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아이들은 떠들고 웃으며 땅바닥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흙을 툭툭 털며 수 돗가로 향했다. 시나와 보경도 수돗가로 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시나의 어 깨를 툭 쳤다. “야- 윤시나! 너 정말 지지리 못 뛰더라!” 윽-! 시나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옆에서 가던 보경은 쿡쿡 웃으며 어느새 눈치채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시나야아 나 먼저 갈게.” “으응..” 대답을 한 시나는 제준을 보았다. 제준은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하하.. 김제준.....내가 뛰는 거... 봤구나.” [으 창피해.] “난 너 운동 잘 할 줄 알았는데, 저번에 발야구 할 때도 공 한 번 못 차 보고 그 날 삼진 아웃 당했었지?” “으응...” 시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진 않았다.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그, 그러는 넌 참 잘 뛰더라.” 제준은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하얀 치아와 거무스름한 살결이 청결하 다는 느낌을 주며 잘 어울렸다. “뭐, 보통이지..” 그는 시나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야, 야, 얼굴 풀어. 운동 좀 못한다고 뭘 그래. 대신 넌 잘하는 거 많잖 아. 음... 그래! 너 노래 잘하지?!” 위로해 주는 그의 모습에 시나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흑! 김제준! 역시 착한 애야! 난 역시 보는 눈이 좋다니까!] “고마와.” 시나는 방긋 웃었다. 이제 제준은 수돗물로 땀과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가을이라 해도 뛰면 더웠다. 제준의 반소매 운동복이 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왠지 그것마저 멋있어 보였다. 여기저기 수돗가에서 씻는 남자애들 중에서 제준이가 가장 특별해 보이는 건 역시 시나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가 제준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2달 전부터 이다. 남녀 합반으로 하는 태권도 특별 수업이었는데, 그때 제준은 이미 공인 2단이었으므로 선생님의 요청으로 앞에 나와 시범을 보였었다. 그때 그의 절도 있는 동작과 기합 소리에 완전히 반해 버린 시나였다. 시나는 원래 제준의 얼굴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 나는 학교의 합창부에 들었고 거기엔 제준이도 있었던 것이다. 특별수업 이 있을 때 까진 그냥 인사나 하던 사이었는데, 그 뒤 시나는 제준이와 많이 친해졌다. 제준도 시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사람이 사람 을 사귈 땐 어렴풋이 어떤 느낌이 전해지는 법이고 시나에게 전해지는 제 준의 느낌은 확실히 괜찮았다. 시나는 손만 씻으며 제준을 힐끔 보았다. [흐음-- 조용한 장소를 잡아 고백해야 할텐데. 오늘 고백하기로 한 이상 해치워야만... 음,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데. 제준이한테 조용히 얘기 좀 하자고 할까?] “안 가? 시나야?” 제준은 다 씻은 듯 다른 아이들이 씻도록 수돗가에서 물러났다. “어? 으응. 가야지.” 시나도 손을 털고 수돗가에서 물러나 제준과 나란히 건물의 현관으로 향 했다. 문득 1학년 말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고백을 한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장소 선정을 했었다. 그것이 학교 뒷부분 에 있는 사육장이었는데 겨울이라 아무도 안 오겠거니 하고 선택한 것이 었다. 그런데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분위기를 망치고 만 것이다. 시나네 학교에서 키우고 있는 공작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꽥, 꽥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시나는 공작이 정말 흉측하게 운다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는 얼마나 컸던지... 덕분에 우물쭈물 하다가 고백 사건은 완전히 흐지부지 돼 버리고 말았다. 어찌어찌 하여 그 남자애는 시나에게 관심 없다는 것을 밝히고 난 뒤였고 자신이 시나에 게 실연의 아픔을 남겨 준 것도 모르고 그녀가 장난 친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나와 그 남자애와의 관계는 지금도 돈독하다. 지난번엔 생일 파 티까지 초대했을 정도니까. [쳇, 그 녀석은 아직도 내가 자길 진짜로 좋아했던 걸 모를 거야.] 기분이 꿀꿀해졌다. 어쨌든 11달이 지난 지금은 새로운 남자애를 좋아하 고 있었고 예전의 남자 따윈 어찌 되도 좋았다. 행복을 비는 수밖에. 어찌 할 수 없는 과거는 관두고 미래를 바라보자! 이것이 시나의 좌우명이자 생활 태도였다. 그때 현관 옆 잔디밭에 둔 실내화로 갈아 신으면서 제준 이 말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7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6 23:36 읽음:324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4- <제 2막. 시나Ⅱ(2)> “자 그럼 시나야 이따가 음악실에서 보자.” 시나도 실내화를 신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악실? 어, 왜? 오늘은 연습 없잖아?” “엥? 연습이 없다니! 오늘 합창부 임시 연습 있잖아? 합창부는 보충 빠 지고 연습하러 오라고 했어. 추수감사제라고 이번 토요일 날 감사예배 때 노래 부른대.” [아하! 그렇군.] 요즘 시나는 합창부 연습 때 제준만 보고 딴 생각을 하기 때문에 광고 같 은 것은 잘 못 듣는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추수감사제였다. 시 나네 학교는 미션스쿨이었고 합창부는 학교에서 성가대의 역할도 하고 있 었다. 그때 시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 그러면 되겠다!!!] 그때 제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넌 요즘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는 거냐? 츠츠, 내가 아니었 으면 연습 빠질 뻔했잖아.” “그, 글쎄 말야. 하하. 고마워 제준아. 알려줘서.”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제준은 남학생 교실 쪽으로 가며 얘기했다. “응. 그래-” 시나는 웃는 얼굴로 제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준이 사라지자 손을 내리 며 시나는 씨익 웃었다. [그래! 결정했어!!!! 이런 좋은 기회라니!! 추수감사제 만세다!!! 하나님 감 사합니다!] 쿨, 쿨--- 애들의 3분의 1이 졸고 3분의 1이 자고 있었다. 가을날, 천고마비의 계 절... 열어 둔 창문에선 살랑살랑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고 창 밖 은행잎들 은 점점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체육 수업까지 마친 6교시 째의 이 런 오후는 가히 살인적인 졸음을 몰고 오는 법이다. 그것도 따분하기로 정평이 난 한문시간이라면 효과는 더더욱 배가된다. [하아아아아웅- 으- 졸리다-] 시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애써 졸음을 몰아냈다. 저쪽 앞에 보경은 벌써 널브러져 대 놓고 자고 있었다. 50대의 한문선생님은 사람은 좋았지만 생 기가 없다 고나 할까 언제나 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했다.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많이 졸게된다. 선생님은 조는 아이들은 조는 대로 내버려두고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편 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도 평소라면 깨워 가며 수업을 했지만 오늘은 어 쩐지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 그래서 장자는 일어나 생각했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 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흐음...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건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건지 몰랐 다고? 음... 나른한 오후에 잘 어울리는 나른한 이야기네...] “여기서... 뒷부분은 之는 관형적 용법으로...” [아이유 졸려...] 시나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려 무심코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운동장 옆으 로 길을 따라 한 여선생님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나의 눈이 순간 번쩍 띄 었다. [와- 양호선생님이닷!!] 하늘거리는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분홍색의 펠트천 가방을 들었는데 그것 은 길게 웨이브 져 반짝거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청순하고 우아한 분위기 를 자아내고 있었다. 양호선생님은 상냥한 데다 미모도 뛰어나 온 학교 남학생들의 마돈나로 불렸다. 1년 전 선생님이 막 오셨을 당시 양호실엔 넘어져 무릎 까진 녀석부터 하루에 세 끼를 먹고도 배고픈데 불치의 병 같다는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하는 녀석들까지 아이들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다 작년 가을에 결혼하여 지금은 임신 중이신 선생님이셨는데 그래도 인기는 여전했으며 여자아이들도 고민 같은 것이 있으면 종종 상담하러 가곤 했다. 시나도 양호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 엄마가 없는 시나에게 양 호선생님은 자상한 상담역이었으며 닮고 싶은 여성상이었다. [우와- 입덧이 너무 심해서 며칠 동안 못 나오신다더니 나오셨네. 종례 끝나면 뵈러가야지!] 시나는 결심했다. 제준이에게 고백하기 전 선생님을 볼 수 있다면 더 용 기가 날 것이다. 딩동댕- 마치는 종이 울리고 한문선생님이 나가자 종례 를 위해 담임이 들어왔다. 그는 아이들이 자는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아이구- 잘한다! 잘해! 잠이나 퍼 질러 자구! 이노무 불량감자 같은 녀 석들!!! 추우면 추워서 공부 못하고 더우면 더워서 공부 못 하구 가을이랑 봄엔 몸이 나른해서 자느라 공부 못하지?! 아, 일어들 나!!!” 그제야 아이들은 부스스 일어났다. “어, 벌써 종 쳤냐?” “몰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 눈감았다 뜨니 한시간이 후딱 지나갔네.” 여기 저기서 신선 놀음하다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자, 자, 한심한 얘기들은 그만 두고 주목해 봐-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까. 너희들 중에 요 근래 들어 불량배한테 돈 뺏긴 사람 있어? 손 들어봐!” 아이들이 웅성 웅성거렸지만 아무도 손드는 아이는 없었다. “없나? 흠, 그래... 자, 잘 들어 . 요즘 돌산 근처 놀이터를 포함해서 이 동네에 불량배가 나타난다는 소문이다. 2학년 1반 한 남학생이 그 녀석들 한테 걸려 돈을 뺏기고 맞기까지 했다. 많이 다쳐서 오늘 학교에도 못 나 온다고 연락이 왔고.” 그러잖아도 그런 소문이 있기는 했다. 열 댓 명 정도의 남자애들이 무리 를 지어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푼돈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학교에서 그것을 알아차린 것 같다. 한 아이가 수군거렸다. “치, 그게 언젯적부터 시작된 일인데- 하여튼 뒷북치는데 뭐 있다니까 -” “그 녀석들 잘 나타나는 데가 돌 산 근처 하니까 너희들도 조심해. 특히 놀이터 근처는 가지 말고 혼자서도 다니지 마. 학교 끝나면 곧바로 집으 로 돌아가고. 학교에서도 그 녀석들 잡을 때까지 당분간은 야간자율학습 안 하기로 했으니까. 알았나?” “와아--” “꺄아--” 아이들이 좋아서 난리를 쳤다. “자식들! 뭐가 그렇게 좋아? 그저 공부 안 한다면 좋지?” 그 “선생님! 보충도 안 해요?!” 담임은 점잖게 한마디했다. “니들이 초등학생이냐? 6교시 끝내고 집에 갈 생각을 하게? 오늘 보충 은 당연히 3시간 있다. “우---” 담임은 아이들의 야유를 무시한 채 밖으로 나가면서 말하였다. “일찍 끝났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보충 끝나면 집으로 잽싸게 들어가 공 부해. 괜히 돌아다니다가 깡패한테 걸려 얻어터지지 말고. 자, 청소당번 빨리 청소하고 준비해라”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며 일어나 책상걸상을 옮겼다. 어찌 !든 집에 일 찍 들어간다는 건 즐거운 것 같았다. 시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재빨리 일 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 합창부 연습하려면 아직 1시간이나 남았잖아?” 보경이 말했다. 청소당번이었기 때문에 대걸레를 하나 들고 있었다. “아까 창 밖으로 양호선생님 오신 것 봤어. 뵈러가게. 잠깐 오신 것 같았 거든.” “야! 안돼! 곧 시나 시스터즈 애들 오기로 했단 말야! 오늘 잠깐 애들하 고 만나기로 했잖아!” “다음에 만날게. 다음에! 아이참, 벌써 가 버리셨으면 안 되는데... 내일 보자, 보경아! 청소 잘하고 보충도 잘 받아!!!” “시나야!!!” 소리치는 보경을 내버려두고 시나는 서둘러 양호실로 갔다. “하아, 하아-” 계단을 뛰어 내려와 숨이 찼다. 다행히 양호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요 며칠간 계속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시나는 양호실의 문을 노크했다. “선생님--” 양호선생님은 의자에 않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녀를 보았다. “어머, 시나야. 어떻게 내가 있는 줄 알고 왔니?” 반가운 표정이었다. “헤헤-- 수업 받는데 창 밖으로 걸어가시는 게 보이더라구요. 몸은 괜찮 으세요?” “응. 이젠 견딜 만 해. 아직도 아침엔 괴롭지만 처음 보단 좋아졌어. 몸 의 컨디션이 좋은 김에 일도 처리할 겸 운동도 할 겸 나왔지” 양호선생님은 방긋 웃었다. 언제나 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 “헤헤-- 그러세요?” 시나는 신기한 눈으로 선생님의 배를 보았다. 아직 티는 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생명이 선생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 티도 나지 않는 생명은 벌 써부터 자신의 엄마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빨리 이쁜 아기가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훗. 그렇지? 엄마 고생 좀 그만 시키고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양호선생님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보 던 그녀는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근데 시나야.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건데.... 너... 아직도 그거 안 하고 있니?” 갑작스런 질문에 시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뜻인지 직감적으로 알아 들은 것이다. 이 문제로 옛날 선생님과 상담한 적이 있는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것 같았다. “어, 사실은 음... .....네.” 시나는 빨개져서 약간 더듬으며 얘기했다. “흠.. 그래?” 양호선생님은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생리문제로 상담하러 온 게 벌써 작년 일인데 아직도 안하고 있다 니...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면 어떨까?” 그 말에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선생님이 늦을 수도 있는 거 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푹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늦는 거-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너무 늦지요? 병일 까요?” “응? 아, 그건 아냐- 전에도 말했지만 늦게까지 안 하는 애들도 있어. 드물지만 19살이 될 때까지 안 하는 애들도 있대. 여자들이 생리를 시작 하는 건 몸 안의 지방량에 많이 좌우된다는 설이거든. 근데 넌 마른 편이 라 지방이 적으니 늦게 시작할 수도 있지. 그래도 확실한 걸 알기 위해 검사 받아 보라는 거야. 병원은 꼭 아플 때만 가는 건 아니지. 예방이나 검사의 목적으로도 가니까.” “네에..” “알았지. 시나야? 꼭 검사 받아봐. 혼자 가기 뭣하면 내가 같이 가 줄 수 도 있고.” 시나가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양호선생님은 그렇게 말 했다. “예- 언제쯤이 좋을지 생각해 볼께요- 그땐 같이 가 주세요.” 양호 선생님은 생긋 웃었다. “그래 좋아. 약속했다?” “네.” “그래. 음, 아, 참 그렇지! 이 과자 먹을래? 친척이 사다 준건데 맛있더 라. 넌 좀 쪄야지.” “헤헤- 네-” 과자를 거절할 시나가 아니었다. 시나는 과자를 먹으며 제준에 대한 이야 기를 양호선생님에게 했다. 그러자 양호선생님은 즐거워하며 시나의 고백 이 꼭 성공하기를 빌어줬다. 보통 다른 선생님이라면 무슨 고백이냐고 공 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을 테지만 양호선생님은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 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나는 양호선생님이 좋았다. 이렇게 과자랑 우유까지 얻어먹고 격려를 받은 뒤 양호실을 나오는데 바깥에서 보경이랑 딱 부딪혔다. 시나는 깜짝 놀랐다. “어, 보경아! 여기서 뭐해?”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설마 시나시스터즈 애들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아니. 쳇! 지지배. 잠깐만 만나고 가라니까! 내가 얼마나 욕 얻어먹은 줄 알아? 걔네들 지금까지 나랑 있다가 보충 받으러 자기네 교실로 돌아 갔지 뭐.” “흐응. 그래? 좀 미안하네.” 시나와 보경은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왜? 나 찾아 온 거야?” “응. 합창부에 가 봤더니 너 안 왔다고 해서 이리로 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보경이 자신을 찾아다녔다니.. 별로 예감이 안 좋 았다. 뭔가 이상한 일을 시키려는 걸까? “왜 그러는데?” 보경은 배시시 웃었다. “음. 그냥. 근데 아까 너 한문시간 전에 아직 제준이한테 고백 안 했다고 했지?" “응.” “헤에- 그래?” 시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까 까지만 해도 시나가 고백한다고 하니까 ‘그래? 그럼 잘되길 빌게’하는 정도의 호기심만을 보였는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다니 뭔가 이상했다. “너, 또 7번째 행운의 딱지니 뭐니 하려면 아예 입도 벙긋 마.” 보경은 계속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가 그럴 리 있니? 아침엔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지. 내가 보기에도 제준이 꽤 괜찮던데, 잘 되길 바랄 뿐이야.” 시나는 보경을 빤히 바라보고 아랫입술을 내민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드디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구나. 축하한다.” “고마워.” 보경이 차분한 표정으로 겸손하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그럼 너 고백, 합창부 연습 끝나고 음악실에서 하려고 하 는 거니?” 시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보경을 보았다. “그렇다면?” 보경은 활짝 웃었다. “으응, 아니 내가 생각하기도 거기가 제일 적당한 것 같아서. 거기라면 학교 구석이니까 아이들 가고 나면 소문 날 염려도 없지.” 시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나라면 운동장 한 가운데서 고백을 해도 소문이 안 날걸.”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시나가 무심코 돌을 던지면 다음 날엔 시나 의 팬(?)들 사이에 시나가 바위를 굴렸다더라..하는 정도로 말이 퍼진다. 헌데 이상하게 금까지 남자애들과 소문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쿡- 그, 그러냐? 쿡, 쿡.. 자 그럼 시나야, 합창부 연습 잘하고, 고백한 거 어떻게 됐는지 꼭 알려줘야 돼? 나중에 보자- 전화할게.” 보경이 뛰어가 버리자 시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쟤, 도대체 뭐 하러 온 거람?” 그때 시작종이 쳤다. “왓,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시나는 서둘러 별관에 있는 4층 음악실로 향했다. 지금은 보경이의 희한 한 행동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음악실에 도착한 시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들어갔다. 아이들이 와글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음악선생 님은 벌써 악보를 나눠주고 있었다. 시나도 그것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아, 있다!] 제준이가 옆 분단 앞자리에 않아 있었다. 나눠준 악보를 들썩이던 제준은 시나가 온 것을 보고 빙긋 웃으며 아는 척 했다. “여어, 왔네.” “응.” 시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잘 될 것 같은 느낌.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8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6 23:37 읽음:321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5- <제 3막, 시나Ⅲ(1)> 합창연습도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간 음악실은 고즈넉한 기운이 감돌고 있 었다. 단풍과도 같은 붉은 노을이 창문을 통해서 교실을 물들이고 있었다. 전교생은 3교시 째의 보충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별관 구석에 있는 이 음악실은 더 고요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운동하는 소리만이 희미 하게 들렸다. 이 가운데서 시나는 당황스럽고 슬픈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건 어떠냐는 말 따윈 하긴 싫었다. 제준 은 이미 분명한 대답을 한 것이다. 시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한 번도 이성 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고. 자신은 이미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며 그건 같 은 합창부에 있는 시나도 아는 여학생이었다. 평범한 얼굴의 애였는데 제 준이 그런 타입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애가 너무 부러웠다. 약간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것이었다. 제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시나의 눈길을 피해 바닥만 보고 있 었다. 시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 다. 시나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보경이 말대로 7번째 딱지를 맞았네. 이번에는 꼭 잘 될 것 같았는데. 난 착각의 여왕인가 봐. 아니 딱지의 여왕인가? 쳇. 어쨌든 한심하다. 윤시나. 이게 무슨 꼴 이람. 일곱 번이나 당한 일이지만 기분이 안 좋은 건 여전 하네. 에휴-] 그때 제준이 말했다. “시나야 정말 미안해.” 제준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고백을 하는 시나보다 고백을 받는 그가 더 떨고 있었다. 시나는 무척 민망해지고 말았다. 왠지 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하... 제준아. 그렇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오히려 미안해진다. 그 냥 난... 네게 내 마음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날 좋아한다면 그것 처럼 기쁜 일이 없겠지. 하지만 네가 날 싫다고 해도 별 할 말은 없어. 그 것이 네 마음인걸. 내가 어떻게 네게 내 마음을 강요할 수 있겠니? 난 네 가 솔직히 말해 줘서 오히려 기뻐.” 기쁠 리가 없지만 시나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제준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다. “어... 그래...” 제준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려는 찰나였다. 그때 갑자기 문이 뜯어졌다. 그리고 뒤를 이어 여자아이들의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꺄아아아아악!” “으아! 나 깔렸어어어!!!!!!!” “그러니까 차례, 차례 보자구 했잖아!!!” 뜯어진 문짝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그 문짝 위로 여자아이들도 같이 굴렀다. 시나는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도대체 무 슨 일이란 말인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문짝 위엔 여자아 이들 대 여섯 명이 엎어져 있었는데 치마가 뒤집힌 모습들은 참으로 가관 이었다. 게다가 제일 밑에 깔려 있는 저 아이는....? 시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임...임보경...!!!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이렇게 소리치는데 갑자기 모든 상황이 번개처럼 이해 정리되었다. “그, 그럼, 아까 날 찾아왔던 건!!!! 내가 고백하는 장면을 엿보기 위해 ?!” 시나는 기가 막혀서 보경이를 쏘아보았다. “임. 보. 경.!!!!” 오! 이렇게 화가 나는데도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다니?. 시나는 자기 자신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하하하하하.. 야아... 시나야... 고백이 실패로 돌아가서 정말 유감...” 시나는 그냥 보경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부스스 일어나는 아이들을 쏘 아보았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온 거야!!!!” 하지만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이 갔다. 보경이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아이들을 끌고 왔겠는가? 그런데 이 애들은 시나의 황당함을 아 는 건지 모르는 건지 갑자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싫어요 시나 선배! 남자 따위에게 고백 같은 거 하지 마요!” “맞아요! 시나 선배는 우리만의 시나 선배 라구요!” “아앙! 선배를 차 버린 남자 따위, 머저리 천치니까 상대하지 마요!!” 머저리 천치 제준 군은 입을 쩌억 벌렸다. “선배!! 우리 [시나 시스터즈]를 버리시면 안돼요오!!!” “시나선배!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 여자들끼리 행복하게 살아요오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야!!!” 누굴 레즈 만들 일 있나?! 정말 황당했다. 아무리 시나 자신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시나가 한마디 더 뭐라고 하려는 데 눈알을 위로 쳐들고 모른 척하며 뻔뻔하게 서 있던 보경이가 갑자기 손뼉 을 짝짝 쳤다.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자는 뜻인 것 같았다. “자, 자, 진정들 해... 너희들 이러면 안 돼지. 정신을 차려. 우린 잠깐 나 가 있자구. 시나랑 제준이, 말은 마쳐야 할 것 아냐?” 보경이가 말하자 몇 명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의 말에 줄줄 이 다시 문 밖으로 나갔다. 시나는 울고 싶었다. 늬들 지금 분위기 다 망 쳐 놓고 이제 와서 나가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때 한 아이가 한 아이에게 울상을 지으며 속삭였다. “으휴! 내기로 2주 치 용돈을 다 날렸으니 이제 어떡하냐?” “야! 조용히 해!!” [잉?] 시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아이들의 말에 교실 안은 삽시간에 조 용해졌다. 보경은 으이구! 라는 표정으로 그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나가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알자 무척 찔리는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곳 으로 피했다. [서, 설마.. 임보경! 저것이!!?] 순간 시나의 뇌리에 과거 보경이 저질렀던 죄악들이 좌악 떠올랐다. 시나 몰래 시나의 사진을 찍어다 파는 건 기본이다. 어쩔 땐 시나의 헌 손수건 헌 지갑 같은 것도 가져다 판다. 그런 거야 정말 애교로 봐 줄 수도 있는 문제지만, 어떻게 이런 일까지!!!!!! 화가 났다. 도대체 저것이 날 뭐로 생 각하기에..!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화를 못 참고 소리치려는 데 갑자기 제준이가 손바닥을 탁 쳤다. “아아! 그런 거구나?!” 지금까지 이 모든 사건을 놀란 눈초리로 쳐다보던 제준은 나름대로 뭔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희색이 돌고 있었다. “하하...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지. 시나가 날 좋아한다니... 너희들 날 두 고 서로 짜고 내기 한 거지!! 너네 시나 시스터즌가 뭔가 하는 애들이잖 아. 그렇지?”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이제 제준은 평소의 얼굴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깜짝 놀랬네. 윤시나. 너 장난 좀 어지간히 쳐라. 난 또 진짠 줄 알았잖아. 연기 끝내 주는데?” 시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이봐?! 김제준? 내가 왜 이 황당한 내기의 주 모자가 되야 하는 거지? 나도 피해자라구!...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예 의 그 시나시스터즈가 또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에엑? 그런 거였어요!!? 시나 선배! 이 내기, 선배가 주동자였어요? 시 나 선배가 고백 할거라고 보경선배가 말씀하기에 우리는...! 와아! 너무해 요 선배! 우리들까지 속이시다니!” “어? 시나선배가 제준선배한테 장난 친 거야? 우리도 속이고!?” “뭐, 어쨌다구?!” 어딜 가나 이해력이 딸리는 사람은 하나씩 있는 모양이다. “시나선배가 보경선배랑 짜고 장난 친 거라구!!” “정말?!!! 우와 말도 안돼!! 감쪽같이 속았잖아!!!” 이 소리에 보경은 뭔가 당황한 듯 했다. “야- 너, 너희들..” 그러나 시나의 표정을 본 보경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뭔가 소태를 씹은 얼굴이었다. “하하! 그렇구나! 어쩐지.. 시나 선배가 남자한테 고백할 리가 없지! 하하 하” 주위는 왁자지껄한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17세 소녀의 꽃 분홍 순정은 이렇게 쓰레기통의 구겨진 신문조각처럼 구겨져 버렸다. 이 운명 의 장난에 시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여기서 아니라고 해 봤 자 더 우스운 상황만 될 뿐이었다. [하-! 정말 비약하는 기술도 대단하군. 김제준은. 어떻게 날 얘네들과 같 은 레벨로 보는 건지 참. ...아니, 차라리 잘 된 건가? 어차피 제준인 날 안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장난으로 처리하면 더 이상 어색해지지도 않고...] ...좋은 일이었지만, 가슴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자 애들이 떠드는 가운데 제준은 시나의 어깨를 툭 치며 나갔다. “내일 연습 때 보자! 하하.. 그러고 보니 2반에 성진이가 그랬었지. 하도 리얼한 연기라 깜빡 잊고 있었네. 걔가 넌 종종 장난을 치니까 속지 말라 고 했거든.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속았네. 아, 이거 참. 하하.. 그럼 나갈 게.” 2반의 성진은 앞서도 나왔던 시나와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는 남학생이 다. 시나는 요전에 그의 생일파티까지 다녀왔었다. 어쨌든 2학년 3반의 김 제준, 태권도 공인 2단이기도 하며, 자신이 내기의 주인공이 되었다는(제 준의 생각대로 라면) 몹시 기분 나쁜 상황에서도 침착할 줄 아는 부드러 운 성격의 소유자인 그 김제준은 이렇게 시장 터를 떠났다. 떨어져 버린 문짝도 다시 끼워 주고.. 친절하기도 하지. [그래..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었지...] 틀린 점은 단 하나 뿐이었다. 시나 옆에서 꽥꽥대는 게 저번엔 멍청한 공 작들이고 이번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자칭 시나의 팬 클럽애들 이라는 것. 도대체 시나의 고백은 왜 맨날 이렇게 실패하는 것일까? 남자애들은 시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외모가 남자 같다고 속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캬하하! 선배, 우리들도 가 볼게요.” “뭐야! 선배가 고백한다기에 보충도 팽개치고 왔더니!” “선배, 다음엔 우리도 만만히 속지 않겠어요.” “보경선배? 우리가 눈치 챈 이상 내기 건은 취소되는 거죠?” “이 복수(?)는 나중에 꼭 할게요” 이런 얼토당토않은 인사말을 남기고 시나 시스터즈도 떠났다. 이제 교실 에는 시나와 보경만이 남았다. 보경은 시나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시나야.. 화났어?” “너라면 화 안 나겠냐?!” 시나는 인상을 썼다. “하하.. 미, 미안해! 시나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루!” “나 참 기가 막혀서! 임보경! 너 너무 장난이 심한 거 아냐?! 어떻게 이 럴 수가 있니? 내가 고백하는 걸 갖고 내기를 해?! 도대체 뭐야? 내가 차 일지 아닐지를 놓고 한 거야?!!” 보경이 황급히 부인했다. “아, 아냐! 설마 그럴 리 있니? 우리가 내기한 것은 네가 과연 남자 애 한테 고백을 하는가 안 하는가 그거였어.” “뭐?! 내가 남자한테 고백을 하는가 안 하는 가를 놓고 했다구?”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8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6 23:39 읽음:319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6- <제 3막, 시나Ⅲ(2)> “으응. 아까 청소 시간에 잠깐 애들이 왔었잖아. 그때 어쩌다가 시나 네 가 남자와 사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나왔거든.” “뭐시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살다, 살다 이렇게 기분 나쁜 소리는 처음이었다. “그, 그래서 내가 말했지. 시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구. 그런데 애들이 안 믿잖아. 뭐... 오스칼.. 뭐라더라... 여하튼 한 송이 장 민지 뭔지 자기들 마음대로 떠들더라구. 웬만큼 하는 거면 팬 서비스 차 원으로 참겠는데 들을수록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너무 자기들 멋대로 떠 들잖아. 그래서 난 시나가 남자애한테 고백하면 어쩔 거냐고 말했지. 그랬 더니 그러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나? 그래서 난 장은 지질 필요 없으 니까.. 이주일치 용돈이나 내 놓으라고 했지. 그리고 보다시피... 헤헤...” 보경의 설명을 들은 시나는 집으로 돌아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울 고 싶었다. “그때 그만뒀어야 하는데 어떡하다 보니 내기까지 걸게 되어서.. 헤헤... 시나야 정말 미안해. 내가 물질에 많이 약하잖아. 그러니까 뭐냐, 난 정말 네가 잘 되길 바랬거든? 화 풀어. 내기 사건도 흐지부지 됐고... 호호.. 요, 용서해줄 거지?” 시나는 이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제 마지막 빛을 남기고 밤 속 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왠지 허탈하다고 할까.. “..보경아.. 네가 보기에도 나 정말 남자 같니? 내가 남자애를 좋아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보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남자 같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까지 시나의 남자다움(?)을 가지고 많은 일을 벌 린 보경이었지만 시나를 놓고 정말 남자 같은지 아닌지 고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경은 푸르스름한 빛 속에 서 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새 하얀 얼굴은 주근깨 외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옅은 주근깨는 시나 의 약점이라기 보단 시나의 매력을 부추켜 주는 요소였다. 그리고 가느다 란 팔 다리와 가느다란 몸매... [확실히.. 여자라기엔 어딘가 덜 나온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보경은 지금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 다. 보경은 시나의 우울한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냐. 시나야. 너 여자 같애. ...응... 가슴이 없는 건 신경 쓰지마. 어른이 되면 더 커지겠지.” 이 말에 시나가 위로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나는 단지 창문 밖으 로 돌린 시선을 거두어 보경을 보며 웃으려고 노력하며 한마디했을 뿐이 다. “보경아? 그걸 위로라고 하냐? 너 죽고 나살까? 응?!” 보경으로선 최선을 다한 위로였는데... 시나가 인상을 팍 쓰는 걸 보니 아 닌 것 같았다. 보경은 다시 한 번 더 머리를 짜냈다. “시, 시나야.. 그러니까..!” “됐다, 됐어! 너한테 위로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가자!” 보경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 어딜? 집에?” “아니. 네게 사과할 기회를 줘야지!” 그후 시나는 보경을 분식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마음놓고 먹어댔다. 실 연 당한 스트레스에 하나도 위로가 안 되는 말을 들은 스트레스, 이것, 저 것의 스트레스로 실컷 먹었다. 그래서 계산을 하고 나올 때쯤 보경의 얼 굴은 더할 나위 없이 처량했다. 아마 거의 1주일 치 용돈을 날렸을 것이 다. 분식집을 나왔을 때 밖은 벌써 깜깜했다. 보경이 뒤따라 나오면 한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으, 아깝다. 문짝만 안 떨어졌어도... 몇 주일 치 용돈을 확보하는 건 데!” “뭐? 너 아직도 거기에 미련을 못 버리고...” “아, 아, 알았어. 알았다구. 칫.” “니가 시나 시스터즌지 시나 수녀단인지를 만들 때부터 네 의도를 알아 차려야 했어.” “뭐가- 난 재화를 이용해서 수요에 따른 공급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의 도밖엔 없었다구.” 보경이가 재화니, 수요니 하며 대화를 하는 건 놀라웠다. 낮에 정치경제 시간에 수업을 열심히 들은 것 같았다. 하여튼 보경은 정치경제 시간... 아 니 경제 시간엔 가히 천부적인 재질을 보였다. “어련하시겠어.” 시나는 빈정댔다. “단지 그 재화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는데 좀 더 중점을 두는 게 어 떻겠니?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라는 애가 친구가 고백하는 순간을 그렇게 묵사발로 만들 수 있어?” 보경은 민망한 듯 히히 웃었다. “그래,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애들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흥분해 서 그만... 미안해 반성할게. 그러나 저러나 시나야 난 네가 이번엔 잘 될 줄 알았는데... 제준이랑은 다른때완 다르게 더 친하다고 봤거든. 제준이도 널 좋아하는 걸로 알았는데... 역시, 너의 남자 운은 최악...” “임보경!? 너 지금 확인 사살하는 거지?” 시나의 열 받은 목소리에 그제야 보경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 다. “오효효. 내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미안, 미안” [넌 맨날 그랬어. 오늘따라는 무슨... 날 놓고 내기까지 한 주제에.] 시나는 부루퉁하게 생각했다. 이런 앨 친구라고... 어렸을 땐 그래도 정도 가 약 했는데... 그래도 시나는 뭔가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기를 놓고 멋대로 떠들 때 보경은 자신을 위해 얘기해 준 것이다. 어쩌 면 보경은 자기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속을 바라봐 주는 진정한 친구 일지도 몰랐다. 단 하나의 친구.. 왠지 가슴이 뿌듯했다. 해서 시나는 보경 을 쫙 째려보며 말했다. [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친구에게 답례를 해야지.] “내일 점심도 네가 사!” “에엑!!! 뭐라구? 너무해! 넌 보통사람의 두 배는 먹잖아!!! 한 달 용돈 다 깨진다구!!!” “흥, 니가 시나 시스터즈한테 클럽 비용이라고 한 달에 10000원씩 걷는 거 모를 줄 알아?” “윽..... 그, 그걸 어떻게!!!” 사랑스러운(?) 보경의 행각들은 점점 비리를 들어내고 있었다. “모인다면 분식집일테니 그 정도 돈 모으는 거야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 데, 오늘 내기 어쩌구 하는 거 보구 완전히 두 손 다 들었다. 시나 시스터 즌지 뭔지도 한심하구. 정 그런 클럽 운영하고 싶거든 난 빼고 늬들끼리 해. 그리고 애들한테도 돈 같은 거 내지 말라고 말해 둘 거야.” “아앙.. 너무해.. 시나야... 이건 나의 가장 큰 사업이라구우...”보경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시나에게 애원했다. “이젠 정말 다시는, 내기 같은 거 안 할께에--” 그때 어디선가 한 남자의 느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그 꼬맹이 수단이 좋은가 보네? 한 달에 10000원씩 걷는데다가 내기까지 하신다고? 그럼 부자겠네에-. 우리에게 조금만 적선해 주셔?” 지나가던 놀이터의 어둠침침한 그늘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 리를 시작으로 그늘에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시나의 머리 속에 한 가지 기억 이 퍼뜩 떠올랐다. [아차! 담임이 요 근래 들어 불량배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지! 그래서 그 쪽에 사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다른 길을 이용하고 빨리 집에 들어가 라고....!] 이 소동의 와중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 시나야...” 보경이 와들와들 떨었다. 저쪽은 어림잡아도 10명 이상은 되 보였고 이쪽 은 여자 단 둘이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이미 등뒤에까지 에워싸고 있었다. “야, 야, 떨지마. 떨지마. 누가 니네 잡아먹는데? 그냥 있는 대로 주면 얌 전히 물러갈게“ 식은땀이 흘렀다. 이럴 땐 그냥 얌전히 건네주는 게 상책이다. 시나는 억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정,, 정말이죠?” “정말이지..! 우리같이 착한 불량배들이 거짓말을 하겠니?” 착한 불량배라니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지만 거기에 의의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잘못하다간 몸수색을 당할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엄마의 목걸이는 그냥 뺏기고 말 것이다. 돈 뺏기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시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꼭 이런 녀석들은 돈이 많을 때만 덤빈다니까..] 가방 속에 넣어 둔 비상금 20000원과 책 사려고 모아 둔 돈 30000원이 몽 창 털리는 순간이었다. 50000원을 받아 든 불량배들은 싱글거렸다. “좋아, 좋아, 말을 잘 듣는군. 니네도 우리처럼 착한 애들이구나, 어, 거 기꼬맹이! 넌 뭐하고 있어? 너도 이 언니처럼 털어놔 봐.” 보경은 시나의 등뒤에 숨어서 가방을 꼭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지? “보경아, 빨리 줘 버려. 돈만 주면 보내 준다 잖아!” 그때 보경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싫어! 이 나쁜 놈들아. 이건 죽어도 못 넘겨줘. 이 내가 도둑들에게 돈 을 넘겨 줄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으잉? 시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보경을 쳐다보았다. 얘가 왜 이런 대? 좀 덜렁대고 돈을 밝히긴 하지만 지나가는 쥐를 보고도 겁을 먹는 보 경이가? 쥐약이라도 먹었나? 아니면 허파에 바람이 들었..... 아니, 아니, 이 속담은 여기에 쓰는 게 아니지....! 하여튼 시나는 놀라고 황당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불량배들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이 쪼만한게! 뭐 나쁜 놈? 우리처럼 착한 불량배 있으면 나와 보라 그 래!!!” 아무래도 이 불량배들은 [착한]이라는 형용사를 참으로 좋아하는 불량배 들 같았다. 가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인가... 이런 복잡 미묘한 생각 을 하는데 상황은 점점 험악하게 돌아갔다. 불량배 한 명이 시나의 등뒤 에 있던 보경을 거칠게 잡아 끌어낸 것이다. “꺄-악!!!” “그 애에게 손대지 말아요!!!” 시나가 저도 모르게 외치자, 아까부터 [착한]을 열심히 외치던 녀석이 험 상궂게 한 마디 뱉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리더인 것 같았다. “너한텐 이젠 볼 일 없어! 꺼져! 우린 이 애 버릇 좀 고칠 테니, 5초안에 안 꺼지면 너도 이 애 꼴 될 줄 알아!!!!” 보경은 그 지경이 되도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도 눈물 을 펑펑 쏟으면서.... 맙소사. 남자들은 보경을 으슥한 놀이터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이 놀이터는 작고 야트막한 산과도 닿아 있어서 이대로 끌려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그 애에게 손대지 말라니까!!!!!” 후에 시나는 이 일을 생각하면서 그때 이성을 갖고 못 이기는 척 빨리 도 망가서 경찰에 신고하면 어땠을까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런 이성 적인 생각 따윈 한 개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른 건 신 문과 뉴스를 장식하는 여학생 폭행- 뭐 이런 따위의 끔찍한 사건들이었 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이 들어보니 이미 시나는 그 불량배 리더의 뒤통수를 가방으로 세차게 후려치고 있었다. “으와악----” 가방엔 보통 평범한 학생이 갖고 다니는 물품이 들어 있었다. 즉, 교과서 외 엄청난 분량의 참고서, 공책, 기타 등등, 한 마디로 가방은 족히 3Kg 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 걸로 맞았으니 리더 놈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기 분일 거다. 하지만 바램과는 달리 불량배 리더는 기절 같은 것은 하지 않 았다. 칫!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뒤통수를 살짝만 때려도 기절만 잘하 더구만!!! 현실과 영화는 다른 법이고 설사 기절했다 처도 그들이 그대로 순순히 [와- 얘네들 진짜 무섭당] 거리면서 리더를 끌고 사라져 줄 리도 만무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시나의 행동은 잘 타고 있는 불에다 휘발유 를 왕창 들이붓는 상황이었다. 불량배 리더는 얻어맞은 목덜미를 주물럭 거리며 이마에 힘줄을 세웠다. 눈에선 살벌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년도 잡아!!!! 씨8!! 생긴 것도 남잔지 여잔지 헷갈리게 생겨 갖고 뭐 하자는 거야!!! 이 XXX야!!!” 한 녀석이 시나의 뺨을 갈겼다. 쫘악---! 날카로운 소리가 놀이터 안을 울렸다. “캬악-!!! 시나야!!!!” 뺨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픔 보단 이 따위 녀석들에게 맞았다는 생각이 더욱더 시나를 굴욕스럽게 했다. [질이 나쁜 녀석들이라더니 정말이네.] 시나와 보경은 이제 야산으로 질, 질 끌려가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크게 소릴 질렀다가 주위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주먹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 다. 놀이터에 녀석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알면 방범대원이라도 배치 할 것이지... 시나는 화가 났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보 경도 비명을 지르다가 몇 대 맞더니 끅끅거리며 울기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야산 중턱에 다다른 그들은 시나와 보경을 땅 바닥에 패대기쳤다. 서늘한 풀 가운데 뒹굴면서 시나는 최악이 상황이 닥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갑자기 보경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이년이!!!!” 비명을 지른 대가로 보경이가 불량배들에게 맞는 것을 보다 못한 시나는 다시 한 번 보경을 때리는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만두라니까!!!!” “이것이 죽으려고!!!!” 뭔가 둔탁한 아픔이 목덜미에 느껴지고 시나는 의식을 잃었다. 어? 정말 기절하네! 역시 치는 방식이 문제인가...? 이것이 마지막으로 시나가 생각 한 것이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8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6 23:40 읽음:319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7- <제 4막. 시나, 부서지는 하늘을 보다.(1)> 하얗게 눈이 부심을 느끼며 시나는 눈을 떴다. “으음...?” 엎어져 있던 몸을 무심코 움직이는데 뒤 목덜미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아악!!!! 아후...!” 시나는 눈물을 삼키며 목덜미를 슬슬 문질렀다. 목덜미 있는데 보다 조금 덜하다 뿐이지 온 몸 중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아후... 그 자식들 정말 무 식하게시리.....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한쪽 팔로는 눈을 가렸다. 눈물과 함께 뭔가가 시나의 눈에서 떨어져 나왔다. 다른 쪽 눈의 것도 빼었다. 콘 택트렌즈를 끼고 정신을 잃었기에 눈이 좀 시큰거렸다. 떨어뜨리지 않도 록 조심스럽게 쥐고 그것을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콘택트렌즈 집에 넣었 다. “휴우--” 시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까지 집밖에서 콘택트렌즈를 뺀 일은 거의 없었는데 눈이 아파서 하는 수 없었다. 시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나무 둥치에 기대앉았다. 언뜻 보니 상당히 커다란 나 무였다. 거기에 기대앉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 도대체...여긴....? 산 속에서 밤을 꼬박 샌 건가?” 시내를 볼 순 없었지만 어디선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빛이 비치고 있었는데 해가 떠 있는지는 확인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위에 눈 앞 1m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푸르스름한 안개가 빽빽이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보경과 함께 끌려왔던 산 속인 것 같은데 뭔가 이상 했다. [우리 동네 야산에 아침마다 이런 안개가 꼈었나..? ...모르지... 산 속에서 밤을 샌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근데... 여기가 산 속이라면 그 건달 놈들이 우리를 이곳에 버리고 간 건가?...” “보경아!!! 보경아!!!! 너 거기 있니?” 시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 보았다.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 조용----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대답도 없자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호, 혹시 이 자식들 보경이를 끌고 간 거 아냐?] 자기도 모르게 시나는 벌떡 일어섰다. 온 몸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으윽! 보, 보경아----!”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주위는 너무 조용했다. 시나의 목소리마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제야 시나는 또 하나의 이상 한 점을 발견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랬다. 평범한 야산에 있어야 할 새 지저귀는 소리라든지 벌레 소리, 심 지어는 바람소리마저도 없었다. 주위엔 하늘에 있던 구름들이 모조리 하 강한 듯 엄청난 안개와 정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들리는 오 직 하나의 물소리는 오히려 기괴하게 들렸다. 더구나 이제 보니 바닥엔 야산에 흔히 나 있는 크기와 모양이 제멋대로인 수풀이 아닌 학교 화단에 서나 볼 수 있는 고운 잔디가 깔려 있었다. “뭐야 도대체...?” 좌우를 살펴보던 시나는 무심코 위를 보았다. “...?... !?” 시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기대앉았던 나무에 은 빛의 잎사귀들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무수한 은빛의 잎사귀들. 너무 많고 너무 반짝여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잎사귀들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 럼 비치는 햇빛도 없는데 계속 반짝반짝 빛났다. 하늘의 별들이 떨어져 잎사귀가 되 달린 것 같았다. 계속 위로 뻗은 나무는 끝도 안 보일 정도 였다. 그 위에 겹겹이 쌓인 가지들엔 똑같이 무성한 은빛 잎사귀들이 달 려 있었다. 이제 보니 나무의 둥치도 엄청 굵었다. 어른들이 5명은 있어야 손에 손잡고 빙 둘러설 수 있는 굵기였다. [와-- 미, 믿을 수가 없어..] 시나는 직접 보면서도 이런 탄성을 질렀다. [내..내가... 산에서 노숙을 해서.... 눈이 어떻게 된 걸까... 예쁘긴 하지만, ....하하...도대체가 은색의 나뭇잎이라니..?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아?!!!]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비고 집중을 하고 뚫어져라 정신을 차리고 봐도 그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시나는 그것을 직접 만져 보기로 했다. [꿀꺽.] 시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망설이다가 모둠발을 하여 손을 힘껏 뻗쳐 가까스로 나뭇잎을 건드렸다. 그 순간, 시나가 건드린 나뭇잎이 팟 부스러 졌다. 약하디 약한 눈의 결정체처럼 그렇게 부서진 것이다. 그리고 그 부 스러진 은빛의 가루들이 그 밑에 있던 시나에게로 날렸다. “풋! 우와...!!!” 가루가 코에 들어가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시나는 뒤로 물러섰다. 아직 도 휘날리는 은빛의 가루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시나는 눈을 찡그렸 다. 눈에도 들어간 것이다. “으... 뭐야... 도대체..” 시나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나뭇잎이...” 그리고 시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맙소사... 나무... 어디 갔어..?”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짙고 빽빽하게 들어찼던 안개가 깨 끗이 사라져 버리고 거기엔 허허벌판만 있었다. 시나가 눈을 감았다 뜬 잠깐 몇 초 사이에 이렇게 바뀐 것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 거 기 보이는 풍경은... 온통 새하얀 눈, 눈이었다! 그 외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하! 하!” 시나는 어이가 없었다. 끝없는 흰 눈의 벌판 가운데 오직 하나의 점으로 시나가 서 있었다. 하늘 은 구름 한 점 없는 깨질 듯한 새파란 색이었다. 이상하도록 푸른 색, 계 속 보고 있으면 모든 정신과 육체가 거기로 흡수되어 버릴 것 같은, 부서 질 것 같은 하늘.... 꿈에 나올 것 같은 이상한 광경이었다. “맙소사....” 시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시나 주위로 하얀 눈가 루들이 파르르 날렸다. 멍하니 앉아서 시나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 기 시작했다. [....맛이 간 거야 틀림없어. 근데... 정말 맛이 간 사람들은 자기가 맛이 간 줄 모른다던데 어떻게 난 내가 맛이 간줄 아는 거지...?] 시나는 자신의 허벅지를 세차게 꼬집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라면 이건 분명히 꿈일 것이다.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윤시나, 제발 꿈에서 깨어라...에---취, 으, 추 워, 깨어라....에췻..!” 아무리 꼬집어도 차가운 기운에 재채기만 나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얀 입김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믿을 수 없지만 아무래도 이 상황에 적응해 야 할 것 같았다. “아냐! 적응할 수 없어! 이건 정말 말도 안돼. 하룻밤 사이에 핵전쟁이라 도 일어난 건가?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휘잉--- 갑자기 시나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사 람이나 동물의 발자국조차 나지 않은 새하얀 눈밭에서 밀가루보다도 더 고운 것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같이 몰아쳤다. 햇빛이 비치고는 있지만 정말로 추웠다. 교복은 긴소매이긴 했지만 조끼 만 걸친 춘추복 차림이라 이런 추위 가운데 아무런 도움도 안됐다. [가을로 들어섰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름에 가까운데 이런 눈밭이라 니....] 시나는 황당하고도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난거 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파악이 안됐다. 눈을 들어 뭔가 보이는 게 있을까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멀리 뭔가 희미하게 새까만 것이 보였다. 하도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무슨 숲인 것 같았다. 시 나는 그것을 보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 그래! 이렇게 눈밭에 앉아 있어 봤자 아무 도움도 안돼] 시나는 벌떡 일어섰다. 다리와 치마에 묻어 있던 눈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저기까지 가보면- 어쩌면, 무슨 일인가 알 수 있을지도...] 마침내 시나는 그 쪽까지 걸어 가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냥 앉아 있는 것 보다 걷는 편이 몸도 더 따뜻해 질 것이다. 숲으로 가면(실제로 숲인지 어쩐지 모른다. 그냥 그렇게 추측할 뿐) 뭐 어떻게 된다는 확신은 없었지 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은 자살하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시나는 얼어죽고 싶진 않았다. 걷기 시작한 시나는 간간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분명 히 매우 춥긴 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 했다... [견딜 만? 견딜 만하다구..?] 시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얀 입김이 빨갛게 변한 코끝에서 맴돌았다. 참 묘한 일이었다. 이런 얇은 교복을 입고 이런 추위를 견딜 만하다고 생 각하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정도의 추위라면 온 몸이 얼어붙어 야 하는 거 아닌가?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정상일 것이다. 시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머리로는 [아 되게 춥네-]라고 알고 있는데 몸은 [뭐, 이 정도야 거뜬 하구만!]이라고 태연한 꼴이었다. “...? 내가 이 정도로 추위에 강했나? ...아닌데...? 지난겨울에도 엄청 추 위를 타서 집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했는데...? ? 혹시... 아빠 보약을 다 리면서 좀 맛본 것 때문..? ...아니면... 여름 사이에 교복에 무슨 특별한 추 위 방지용 먼지(?)라도 내려앉았나...?” 그때 눈 구덩이에 발이 푹 빠졌다. 거기서 빠져 나오느라 왜 심하게 안 추운 건지에 대한 의문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아우 젠장, 이런 바보 같은 눈 구덩이가!! 에취~! 뭐가 어찌됐든,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니 잘 된 거지 뭐! 이 상황에서 추위까지 느낀다면 최악이 지. 이런 정체도 모르는 곳에서 얼어죽긴 싫다구!] 시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다. 눈은 평균 10센티 가량 쌓여 있었 지만 어느 곳은 50센티도 더 깊게 쌓여 있어 무릎이 퍽퍽 빠졌다. 힘이 들어서 숨이 저절로 헉헉 나오는 형편이었다. [헉, 헉..] 시계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시나의 시간 감각으로 한참, 그러니까 1시간 은 넘게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숲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다. 시나가 지나 온 길 위엔 까마득히 멀리 길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으.. 저거, 뭐 신기루 같은 거 아냐?] 점차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목표물은-부지런히 걷는 걸음에 따라 이제 점차 뚜렷한 윤곽을 들어내어 숲이란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느릿하긴 하지만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거대한 숲인 것 같았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38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16 23:42 읽음:327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8- <제 4막. 시나, 부서지는 하늘을 보다.(2)> “한국에 저런 숲이 있다니... 하하.. 앞으로 백년간은 목재 걱정 할 일없 겠다..... 하, 그래.. 여기가 확실한 [한국]이라면 말이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자신의 말에 시나는 흠칫 놀라 딱 멈췄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아냐-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기가 [한국]이 아닐 리 없잖아? 그렇지?” 하지만 그 중얼거림은 하얀 대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벌판은 눈을 시리게 하는 하얀 색으로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한국]이 아 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점차 온통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건 일종의 직감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 특유의 직 감. [한국]이라는, 시나가 속해 있던 그 익숙한 세계와는 뭔가 다른 분위기. 그런 낯선 분위기를 시나는 피부로 흠뻑 느끼고 있었다. 이(異)세계의 공기가 이곳엔 충만해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뚝 떨어졌다.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안 믿을 수도 없 었다. [사람들이 4차원의 세계니, 다른 세계니 떠들었는데, 그럼 그게 단순한 상 상이 아니었다는 거야 뭐야?] 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동안 읽고 보았던 책들이 떠올랐다. 시나가 좋아하는 것은 현실을 토대로 한 소설이었다. 영화도 현실적인 소재로 만 든 것만 보았다. [이, 이럴 줄 알았으면 판타스틱한 내용의 것도 열심히 읽었을 텐데!!]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일축하며 거들 떠도 안 보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런 것들을 읽었더라면 이렇게 된 원인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 데... 지금에 와서 아무리 후회해 봤자 이미 떠난 버스였고 둘째 시간에 이미 다 먹어 치운 점심 도시락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바로 [현실]로서 닥친 것이다. 시나는 눈을 꼭 감았다. “말도 안돼...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한 발 잘못 딛어 4차원의 세계로 떨어지고... 그리고... 여기서 죽는 건가?..” 두렵고 마음이 혼란했다. [..걷자.. 저기까지만... 그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고...] 시나는 주먹을 꽉 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걷는 일 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한 3시간은 걸었을 것이다. 계속되는 단조 로운 풍경에 이젠 무서움도 사라졌다. 시나의 머리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 르지 않았다.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헉 헉, 으-- 힘들어 죽겠어--- 너무 추워! 배고파아!!! 헉헉!”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라는 미래지향적인 생각은 이미 시나에겐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던 것이다. 오직 현실의 필요만이 떠올랐다. 약 5시간 정도 걸었다고 생각하자 몸의 감각이 서서히 무뎌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뎌진 것이 아니라 고통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어 특별히 찌르는 듯 느끼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몽롱한 기분이었다. 연결되지 않은 생각들이 산발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빠... 지금쯤 걱정하고 계실텐데...] [보경인 어떻게 됐지] [이 눈, 정말 지긋 지긋하군..] [발에 아무 느낌이 없네.. 아깐 젖어서 축축해 기분이 나빴는데..] 온 힘을 다 쏟았다고 생각되는 매 순간이었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배도 고프고 장난이 아니었다. 어제 저녁 보경이에게 얻어먹은 떡볶이가 꿈만 같았다. 깡패들에게 맞은 상처 같은 건 이미 마비가 되 버린 듯 쓰리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당장 어딘가에 쓰러져 자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솟 아났다. 이 지경이니 이 눈들이 다 새하얀 솜이불처럼 보였다. [헉헉....아... 숲.... 숲가다..... 도착한 거야...?...] 한 숨자고 다시 움직일까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나는 숲 가장자리에 와 있 었다. 몇 년 동안은 걸은 것 같았다. [하- 크, 크다아...] 30분만 더 걸었어도 쓰러지고 말았을 텐데 새로운 것을 보니 정신적으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오래된 나무의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찌를 듯했다. 시나 는 약간 질린 눈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수 백년은 됐음직한 침엽수가 커 튼 같은 잎들을 드리우고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그 위엔 하얀 눈들이 소 복이 쌓여 있었다. 숲은- 대단히 새까맸는데 마치 숲 안에만 영원한 밤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짙은 초록색이라 까맣게 보이는 침엽수림들.... 너무 시커멓고 캄캄해 들어가기가 망설여 질 정도였다. 안 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휘이이잉- 그때 세찬 바람이 시나를 독촉하듯 불어제쳤다. [하는 수 없지... 설마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려고... 잘하면 나무 열 매라도 따먹을 수 있을지 몰라] 추운데다 지쳐 있는 시나에겐 겨울엔 나무 열매 같은 거 없다는 사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과감히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서 시나 는 숲에 들어온걸 곧바로 후회했다. 아무리 찾아도 나무 열매 따윈 당연 히 하나도 없었다. 빈 도토리 껍질 같은 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숲 안도 눈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좀 실망되는 부분이긴 했지만 시나가 후회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시 나가 뼈저리게 그리고 절절히 후회한 건 시나 앞에 그 설마, 했던 더 나 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 [도, 도대체 저건 뭐라는 생물일까?]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별로 이름 따윈 알고 싶지도 않은 생물이었다. 단지 머리가 쭈뼛 서는 공포만을 느낄 뿐이었다. 시나 앞의 괴물은 온통 시꺼맸다. 그리고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었다. 무 릎까지 내려오는 팔 중 한쪽엔 무식하게 생긴 몽둥이가 하나 들려 있었 다. 털이 듬성듬성 나고 손톱이 길게 자라 끔찍했다. [저, 저걸로 한 대 맞으면 피부가 빨래판처럼 갈라지겠다...] 시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키는 시나만 했는데 정말 무서운 것은 그 머리였다. 그 머리는 TV, 동물 의 왕국에서 본 하이에나의 머리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거칠게 삐쭉한 지저분한 털들. 들창코, 붉게 번득이는 눈은 적의를 갖고 시나를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그 괴물은 아무래도 시나를 점심(점심인지 어쩐지도 모르겠다. 하여튼)거 리로 점찍은 듯 혀로 입가를 쓰윽 핥더니 입맛을 다셨다. 시나의 무릎은 덜덜 떨렸다. “크르르 인... 간.....? 크르르... 재...수... 좋다... 인간... 이...런... 곳?” 힘들게 띄엄띄엄 잇사이로 얘기하는 것이라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분명히 언어였으므로 시나는 경악을 하고 말았다. [으악! 저건 말도 하는 괴물이잖아!!!!!] 그 괴물과의 거리는 70미터 남짓, 얼이 빠져 꼼짝 못하던 시나는 이제 뒤 를 돌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크아아아아앙-” 무서운 포효 소리가 나고 그 괴물이 뒤쫓아오는지 뒤에서 무섭게 나뭇가 지 꺾어지는 소리, 수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무서 워서 그럴 수 없었다. 오직 죽어라 뛰는 수밖에... 자신의 발이 칼 루이스 의 그것이 아닌 것이 안타까웠다.. 아니 칼 루이스까지는 바라지도 않았 다. 자신의 기록20초 88이 떠올랐다. 정신이 아찔했다. [꺄아아악 평소에 체력장 연습 열심히 하는건데에에에! 미모도 인덕도 살 아남지 못하면 다 무슨 소용이냐구우!!!! 으아-!] 시나는 목숨이 걸린 이 순간 체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도 대체 그 괴물은 어디까지 쫓아왔지..? 참지 못하고 드디어 뒤를 돌아보는 찰나 앞의 풀뿌리에 걸려 퍽 나동그라졌다. “꺄악-!!!” 눈에 젖어 무거웠던 가죽 단화가 벗겨지며 맨 발이 드러났다. 더 이상 도망갈 기력을 잃었다. 이런 곳에서 사망해야 하다니!!! 이 젊은 나이에!!!! 무서운 공포와 함께 이것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 리고 엄청난 량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크아아아아앙-!” 괴물이 포효했다. “으아아아악------!!!!!!” 시나는 소리질렀다. 퍽------!!!!!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시나에게 뭔가가 확 튀겼다. 얼이 빠져 두 다리를 벌린 볼품없는 모습으로 땅에 널브러져 있 던 시나는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파악이 안됐다. 눈앞에 서 왠 사람이 그 괴물을 칼로 내리치고 있었다. 괴물은 이미 첫 번째의 일격으로 한 쪽 팔이 날아가 있었다. 괴물은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했는지 몇 번 공격도 못해 보고 그 사람의 손에 무참히 무너졌다. “뭐해?! 멍청하게!! 빨리 일어낫!!! 놀(Gnoll)들이 동족의 피 냄새를 맡고 새까맣게 모여 들거라구!!!” 남자가 시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척척 늘어지는 옷을 입고 거기에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써 남자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거친 목소리는 입을 가린 천 때문에 막혀서 들렸다. “어... 으....” 시나는 손을 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손등엔 붉은 반점이 떨어져있었다. 그제야 시나는 아까 자신에게 튄 것이 피라는 것을 알았다. 피는 인간의 것처럼 시뻘갰고, 인간의 것보다는 더 역하고 비린 냄새를 풍겼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시나는 얼굴 이 새파래져 있었다. 구역질과 함께 그나마 있던 기운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암흑... [흑, 아빠- 먼저 가는 불효녀를 용서하세요--] 시나는 기절을 해 버리고 말았다. (계속)================================================== 흑흑... 도배를 해서 죄송합니다..TT 하지만, 제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일 주일치를 한꺼번에 올리다보니... TT (부디, 하루에 하나 씩 읽어주셔요... 퍼억-!!! --;;;) 글을 올리다보니, 이 글을 맨 처음 쓸 때의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 때처럼 무척 어색하지만... 그래도, 메일이랑 쪽지를 보내 주신 분들이 있어 무척이나 기뻤습니다..TT (잉잉.. 기쁘다...) 그리고, 에스에프란이란 곳에 가보니 추천 글도 있어서, 내심 놀라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쨌든, 많이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글 올려놓고, 답장을 쓰겠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올린다는 약속을 하루 앞당겨 지켰으니,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했던,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3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3 21:39 읽음:308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9- <제 5막. 시나, 사형 당할 뻔하다.(1)> 시나는 한 쪽 얼굴에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방의 천장이 보였 다. 시나에게 익숙한 푸른색 아가일 무늬 벽지로 도배된 천장이 아니었다. 굵은 나무 사이로 욋가지와 붉은 진흙 섞인 것을 채우고 그 아래엔 서까래 가 가로지르는 아주 생소한 식의 천장이었다. 이상한 천장. [오늘 하루 동안 이상하다는 단어 참 많이 쓰는구만...]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기절도 숱하게 하고...] ...이건 별로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니었다... 시나는 정신이 든 후 잠시 눈을 감고 이곳이 제발 자신에게 익숙한 원래의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 지만 여긴 아무래도 아까 그 세계의 연장인 것 같았다. “우... 차라리 영원히 기절해 있고 싶어..” 실망의 한숨 소리와 함께 시나는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방안에선 뭔가 메 마르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한 쪽 벽에 있는 벽난로에선 서늘한 공기 가 운데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벽난로의 불 때문에 그 쪽으로 닿은 볼만 따뜻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창엔 나무로 된 문이 닫혀 있어 덕분에 안은 어둑어둑했다. 그래도 그 사이로 비치는 빛으로 보아 아직은 날이 어두워 지지 않은 것 같았다. 방안엔 간단한 선반이 있었고 서랍장과 옷장 같은 것도 있었다. 작은 탁자와 의자도 하나 있었는데 그것들은 자신이 누워 있 는 침대와 같이 진흙이 그대로 다 보이는 맨 바닥에 놓여 있었다. “끄응...” 온 몸이 쑤셨다. 덮고 있는 낡은 이불을 가까스로 제쳤다. 벽난로에도 불구 하고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누군가 교복을 벗기고 털로 만든 가죽옷을 입 혀놓았다. 아랫도리도 치마 대신 가죽으로 만든 듯한 바지가 입혀져 있었 다. 하긴 교복은 형편없이 젖어 있었으니 하는 수 없었을 것이다. 시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누가 입힌 걸까? 설마 날 구해 준 그 남자? 에이.. 설마. 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의 옷을 직접 벗겼을라구... 누군가 여자가 갈아 입혀 줬겠 지....] 괴물에게 당할 뻔했던 순간이 떠오르자 오싹해졌다. 아무래도 여긴 시나에 겐 별로(사실은 심하게!) 맞지 않는 세계인 것 같다. 다행히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잠깐!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그건...그건... 한국어가 아니었는 데!!!!!] 새로운 사실이었다. 시나 자신이 괴상한 외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니. 멋 지군! 시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역시 판타스틱 소설이나 영화를 좀 더 봐 둘걸 그랬어. 현실 세계의 인간 이 이런 이상한 차원의 공간으로 빠져서 그 차원 사람들의 말을 자연스럽 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어떤 원리인지 나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였다. “꾸르르르륵-” 차원을 넘나드는 생각을 하는데 배가 무언가 하소연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맛살을 찌푸린 시나는 잠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슥 슥 문지르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언제나 시나는 배의 요구에 약했다. “웅.... 뭔가 먹을 거 없을까? 아우.... 배고파... 4차원의 세계에 떨어져도 배고픈 건 여전하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4차원이 아닌 3차원의 세계였지만 시나는 멋대로 4 차원의 세계라고 부르고 있었다. 시나는 방안 이곳 저곳을 찾아보기 시작 했다. 하지만 먹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찾은 거라곤 가죽으로 된 한 켤레 의 신뿐이었다. 시나의 신발은 안 보였다. 숲에서 벗겨진 기억이 난다. 그 대로 숲에 놔두고 온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발을 신어 보았다. 남자용인 듯 많이 컸지만 안에 털이 있어 의외로 따뜻했다. 신발을 신은 시나는 통 나무로 만든 문을 살며시 밀어 보았다. 문은 스르르 열렸다. 바깥엔 한 층 더 큰 탁자가 있었고 여러 가지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거실 겸 부엌인 것 같았다. 화덕같이 보이는 것과 그릇들이 차곡차 곡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살펴보던 시나는 한 그릇에 고구마 비 슷한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작은 것을 하나 집어든 시나는 그것을 맛보았다. [흠, 괜찮네. 배고프니까 별것이 다 맛있네. 딱 하나만 실례하자. 그 이상 먹는 것은 뻔뻔스러운 짓이겠지?...] 주인도 없는데 함부로 음식을 찾아 먹는 것은 이미 뻔뻔스러운 짓이다. 어쨌든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곤 해도 지금 시나가 처한 입장에는 전혀- 어 울리지 않는 참으로- 긴장감 없는 행동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럴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먹을 것 따위 생각하지 않을텐데 어쨌든 배짱도 좋은 시나였다. 하긴 시나는 평소 한끼만 굶어도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타입이 었는데 벌써 어림잡아 두 끼 이상이나 그냥 지나쳤으니 아무 것도 눈에 뵈 는 게 없을 법했다. 짭짭거리며 순식간에 고구마를 다 먹어 치운 시나는 속이 더 동하는 것을 느꼈지만 그냥 두 눈을 딱 감고 이 집의 주인을 찾아 보기로 했다. [주인을 찾아서 더 먹어도 되냐고 허락 받자!!!] 이런 원시적인 욕구로 시나는 다른 곳의 문을 열어 보았다. 그 방에선 뭔 가 알싸한 냄새가 났다. 벽에 길게 난 선반 위엔 작은 약병들이 줄지어 있 었다. 천장에는 여러 가지 풀 잎사귀들이 끈에 묶여 잘 정돈 되 있었다. 시 나는 자신의 왼손을 힐끗 보았다. 넘어질 때 다친 듯한 상처엔 가볍게 붕 대가 감겨 있었고 그 사이로 초록색 즙이 언뜻 보였다. 아마도 약초 같았 다. [그럼 여긴 사람들을 치료하는 곳인가? 날 구한 사람은 의사?] 그때 치료실(?) 저쪽 문 바깥으로 왁자하게 즐겁게 떠들며 아이들이 지나 가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들어보면 바깥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아주 희미 하게들려 왔다. 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집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확실하고...(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결국 시나는 밖으로 나가 보기 로 결정했다. 사람 소리가 들리자 불현듯 사람이 그리워진 것이다. 치료실에 있는 문은 아까 침실에 있던 문과 같이 통나무로 만든 것이지만 바깥의 찬 기운을 막기 위해서인지 문 사이사이마다 검은 색의 고무 같은 것이 발라져 있었다. 덕분에 안은 난방이 잘되어 비교적 따뜻했는데 그것 은 시나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확 덮친 차가운 기운에 확실히 증명 되었다. 바깥은 몸서리 처질 정도로 추웠던 것이다. 하지만 시나는 문가에 서서 그 추위도 잊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는데 시나가 집안에서 느꼈던 바깥의 적막은 눈이 내릴 때 그 특유의 적막이었던 것 같았다. 시나는 바깥으로 걸어나와 집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길거리로 나가 보았 다. 시나가 나온 집이 면해 있는 꽤 넓은 길은-아마도 이 마을의 대로인 듯했 다- 전혀 포장이 안돼서 온통 눈과 흙으로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진창 길 위를 통나무와 그 밖의 포대를 실은 짐마차들이 다가닥 거리며 오락가 락하고 있었다. 챙이 넓은 털모자를 쓴 마부들은 태평한 모습으로 그다지 바쁘지 않은 듯 말을 재촉하지도 않고 편하게 몰고 있었다. 길 양옆으론 통나무집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곳의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 상식으로 여긴... 아마 북극이나 남극 근처의 에스키모 마을인 것 같애. 이글루 대신 통나무집들이 즐비하긴 하지만 별로 뚱딴지같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 저 하얗고 높은 산하며 저 애들이 입은 저 털 옷 좀 봐. 엄청나 다. 털모자도 그렇고...] 한 떼의 아이들이 와- 웃으며 시나의 앞을 뛰어갔다. 시나가 바라보고 있 는 아이들은 그 진창길에서 온 몸을 두꺼운 털옷으로 감싸고 유연하게 마 차들을 피하여 용케도 잘 놀고 있었다. [휴우- 이 세계의 주민은 일단 인간이군..] 숲에서 그 무서운 괴물을 겪은 시나는 혹시 이 세계의 인간들은 모두 그런 얼굴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을 했던 것이다. 자신을 구 해준 남자는 복면을 하고 있었으니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시나의 상상은 어 찌보면 타당했다. 그 괴물은 말까지 했던 것이다. 시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만족하게 웃었다. [정말 다행이야. 흠,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아줌마가 시나를 무슨 괴물 보듯 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그 아줌마는 시나의 머리를 가리키고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아, 모자!! 모자를 안 써서 그러는 구나..]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있었다. 옛날 이순신 장군이 썼던 투구와 같이 옆에 날개가 달리고 챙까지 달려 있는 모자라 대부분의 사람들 얼굴엔 입만 보였다. 이 세계에 선 바깥에 나올 때 그런 엄청난 모자를 써야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떡 인 시나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시나가 막 발걸음을 떼는데 길 저쪽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콰과과...-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였 다.- 시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거칠고 무식하게 소리를 지르며 말을 모는 마부 때문이었다. “야아아-! 비켜라 이 마노테들아! 이 더러운 녀석들아- 빨리 비켯!” 그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하, 하바티온의 마차다!” “빨리 피해!”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왕좌왕 당황하여 길가로 피하기 시작했다. 시나에게 모자를 쓰라고 가르쳐 주었던 아줌마도 벽 쪽으로 바싹 붙었다. 느긋하게 마차를 몰던 마부들도 서둘러 마차를 길가로 갖다 세웠다. 길 저 쪽에서 달려오는 마차는 밀폐형으로 온통 하얀 색이었다. 옛날 프랑스 귀 족들이 타던 것 같은 마차였다. 그 앞에 매어진 2마리의 말들은 지금 전속 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콰과과과- 다그닥, 다그닥... “야아아- 비켜어! 이 멍청한 녀석들! 앞길을 가로막지 말아랏!!!” 실제로 말을 보긴 처음이라 놀랬다. 말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은 상당 히 위협적이었다. 그 파괴스러운 모습에 시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저 마부는-! 왜 저렇게 욕을 하고 난리지? 어디 아픈 거 아냐? 거 기다 저것 좀 봐! 혼자서 온 거리를 다 휘젓고 다니는 구만- 쯧!] 현실 세계로 치자면 난폭 운전이었다. [저런 녀석들은 유치장에 당장 잡아넣어야 한다구!] 현실세계인다운 시나의 생각이었다. 그때 그야말로 째지는 비명 소리가 났 다. "까아아아악---! 티스----! 티스맛----!” 여자의 비명에 길 가운데를 보니 거기엔 5살 정도 된 한 아이가 서 있었 다. 같이 뛰놀던 제 동무들은 고함소리에 놀라 도망쳐서 모두 통나무 벽에 바싹 붙어 있었는데 그 애는 너무 어려서 그런지 갑작스런 일이라 그런지 도망도 못 가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마차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주위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고개를 설래 설래 저었다. 포기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마차와는 30m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 사람들이! 애가 마차에 치이게 생겼는데!!!! 지금이라면 구할 수 있잖 아!!!] 순간 시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길 가운데 아직도 멍 하게 있는 아이를 휙 낚아챈 시나는 그 반동으로 길 저쪽으로 아이와 함께 뒹굴었다. 얼굴에 진창이 다 튀었다. 입으로도 들어간 것 같았다. “에퉤퉷!!” 순간 눈 앞 20센티 앞에 말의 dung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고 시나의 머리 엔 자신의 입으로 조금 들어간 이 진창의 원재료가 눈과 진흙 외에 말의 dung도 섞인 것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생각 때문 에 오래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가 시나 뒤에서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 자식은!!!! 마노테 주제에 제 4계급 하바티온의 마차를 가로막 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뭐야!!” 마부는 시나를 남자애로 착각한 것 같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무식하게 질 주했으면 볼일이나 보러 계속 달려갈 것이지 그는 이제 마차를 세우고 인 상을 험악하게 북북 구기며 시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급하게 세워진 말들은 달리던 흥분 때문인지 푸,푸,거리고 있었다. 시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저 사람 지금 자기가 어린애를 칠 뻔한걸 모르는 걸까? 그렇게나 눈이 나쁜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마부가 됐지? 여기는 운전 면허(?) 시험 때 시력검사도 안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 마부는 시나 앞에 딱 와서 섰다. 역시 머리엔 모자를 쓰고 있었고 털가죽 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두꺼운 털가죽 아래서도 그가 근육질의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반면 시 나는 아직도 진창에 엎어져 있었고 아이는 으앵- 울음을 터뜨렸다. 모자 챙 밑으로 파란 눈을 번득인 남자는 채찍을 든 손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보아하니 모자도 쓰지 않고 좀 덜 떨어진 마노테 같은데 그 아이를 내놓 으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 아일 이리 내놔!” “이, 이 아일 왜?” 이제 보니 아이가 안 보였던 것도 아니잖아. “왜냐구?” 마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험상궂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노테 주제에 이유를 묻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아무래도 너도 같이 끌 고 가 처치해야겠다. 하바티온의 마차를 가로막는 마노테는 이유를 불문하 고 사형이얏!” 멀리 아이의 어머니가 기절하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사색 이 되어 있었다. 시나는 이 웃기지도 않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 섰다. “뭐라고욧! 이 사람이 정말!!! 아이를 칠 뻔한 것도 모자라서 사형이라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주위 사람들의 얼굴은 이제 사색을 넘어서 5색 6색 7색으로 시시각각 변하 고 있었다. 마부도 기가 막힌지 말도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집에서 기르 는 강아지가 말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기가 막히는 표정은 안 지었을 것이 다. “이, 이게....” 마부의 얼굴은 불그락, 푸르락 변했다. “너, 너, 네 가족은 누구냐? 네 부모나, 네 형제.. 당장 대! 그 가족도 함께 몰살이닷!” 주위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맙소사.. 누구네 집 자식인지. 왜 쓸데없이 나서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에 더욱 기고만장해진 마부는 소리를 빽빽 질렀다. “빨리 대라니까!!!”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그 말에 이번엔 시나가 말 을 잇지 못할 차례였다. 그때였다. 조용한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봐-! 드래마!!! 네 '아내'잖아!!!!” 잉? 이 소리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고 그 중 시나를 제일 놀라게 했다. 뭐가 어쩌고 저째? 그 소리가 난 곳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털모자를 쓰고 털옷을 입고 있었고 한 명은 회색의 후드에 입까지 가린 차림으로 서 있었 다. 분명 시나를 구해 준 그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심해졌다. “드래마님과 디트마님이다....” “디트마님이 하신 말씀 들었어...?” “드래마님의 아내라구?...” “저게? 남자애같이 보이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회색 두건의 남자는 털모자 쓴 남자를 노려보 았다. 코나 입밖에 안 보였지만 분위기로 보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로 보아 아까 [아내] 어쩌고 하는 말은 털모자 쓴 남자가 한 것 같았다. “니들은 뭐야?! 이 녀석, 아니, 아내라고 했으니 여잔가?” 마부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잇, 어찌됐든 네 녀석들도 사형이닷!” 털모자 쓴 남자가 회색 두건의 남자를 툭 쳤다. 그리고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회색 두건의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입 부분의 천이 들썩하고 솟아올랐기 때문에 한숨을 쉰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린 천을 내리고 마부 앞으로 가서 섰다. 그는 키가 꽤 큰 편이었고 마부보다도 5센티 정도는 큰 것 같았다. 시나는 그걸 보면서 어제 괴물을 처치하던 그의 실력이 생각났다. 내심 시나는 그가 그 마부를 한 대 쳐주 길 원했다. [저 마부 녀석, 억지쓰는 것도 한도가 있지!] 그러나 그런 시나의 바램과는 달리 회색 두건의 남자는 그 진창길이 더럽 지도 않은지 한 쪽 무릎을 털퍽 꿇고 앉았다. 시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행 동이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루트님. .....제 소유인 이 여자는...” 이 소리를 하는데 그의 입안에서 뭔가 [으드득] 소리가 났다. 아마 이가는 소리 같다고 시나는 추측했다. 그 남자는 계속해서 비굴할 정도로 사과 말 을 했다. “어제 얼음의 숲에서 막 구조된 참입니다. 그래서 제 정신도 아니고.. 원 래도 좀 멍청했던 편이라..” 뭐라고? 시나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자기 생명의 은인이긴 했지만, 이 남자는 말을 몹시도 밉살스럽게 하고 있었다. 소유? 내가 무슨 물건이냐! 게다가 용서를 해 달라니? 내가 뭘 잘못했다구?! (계속)================================================== 으음... 정말 못 봐 주겠는 부분만 조금씩 고쳤습니다... 시간이 많다면, 더 많이 고칠 수 있었을 텐데... --;;; 이것도, 인생이려니... TT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31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3 21:40 읽음:303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0- <제 5막. 시나, 사형 당할 뻔하다.(2)> “일루트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은혜로운 용서 를 바랍...” 철썩--!!! 마부가 채찍을 후려갈겼다. 덕분에 두건이 벗겨지며 남자의 고개 가 저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짧은 머리카락이 드러나 얼굴 주위에 흩어졌 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마부는 그런 것도 아랑 곳하지 않고 소리질렀다. “니 아내가 그렇게 멍청했으면 애초에 교육을 잘 시켰어야 할 것 아냐!!! 게다가 넌 뭐야! 건방지게 이예티(Yeti)의 털로 짠 후드를 입고 있다니!!” 꽤 세찬 채찍질이었는데도 두건은 찢어지지 않고 그냥 벗겨지기만 했다. 덕분에 그 두건 속에 가려 있던 약간 노란빛이 도는 은빛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시나는 감탄을 했다. [와아- 머리카락 색 되게 예쁘다아-! 멋진데! 이 세계 사람들은 머리색이 랑 눈 색이 가지가지인가 보지?] 시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 남자는 그 굴욕적인 채찍질에도 여전히 진창 길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렸고 그 위로 흰 눈이 쌓였다. 은은한 플라티나 블론드라 쌓이면 무엇이 눈인지 머 리카락인지 구분이 안 갔다. “이 자식 건방지게 말야..!!” “잠깐-! 카링거!” 그때 마차 안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 쳤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웬 중늙은이 한 사람이 내렸다. 언뜻 보아 매우 부유한 차림이었는데 지금 까지 자신의 마부가 하는 짓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걸로 보아 그도 그다 지 멋진 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듯 했다. 점점 가까이 오는 그는 갈색의 머 리 위에 쪽을 지은 차림이었다. 옛날 한국의 여자들이 시집갈 때 쓰는 작 은 화관 같은 것을 쓰고 있었는데, 멋있었다.... 화관만...(;) 엄밀히 말해서 전체적으로 그렇게 잘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지만(똥배 나온 아저씨가 꽃관 을 머리에 달랑 올리고 아기자기 색동옷 입은 모습은 와- 멋있다-라고 하 는 기분을 들게 하진 않는다) 어쨌든 화려하긴 했다. 긴 로브와 화려하게 수놓아진 금실의 문양은 그가 높은 신분의 사람이란 것을 나타내 주고 있 었다. 그런 그가 그 더러운 진창길을 힘들게 낑낑 걸어오더니 회색후드의 남자에게 말했다. “너! 고개를 들어봐라!” 푸른 눈을 번뜩이며 꽃관 아저씨는 회색후드의 남자에게 말했고 남자는 그 의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와-! 꽃미남인데---!] 시나는 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이렇게 감탄했다. 마부에게 사람들 앞 에서 굴욕적으로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별다른 분한 표정도 짓지 않 고 있었다. 내리는 눈처럼 차가운 표정의 그는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 은 채 높은 분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들고 있었다. 20대 초반이나 20대 중 반으로 보이는 외모... 희지도 검지도 않은 피부색... 날카로운 윤곽의 눈 속 에 담긴 짙은 남색의 눈빛... 슬쩍 봤으면 검은 색으로 착각했겠지만 환한 공기 속에 비친 그의 눈은 분명 깊은 곳이 푸르게 빛나는 남색이었다. 밤 하늘의 달빛과 같은 머리칼... 밤의 색을 닮은 눈... 그냥 단순히 '잘생겼다' 라고 말하기엔, 사람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생김 새 이상의 무엇... 시나는 조금 눈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 게 뭔가가... 그때, 시나는 그의 입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마부가 채찍을 휘두를 때 찢어진 입술에서 흘린 피 같았다. 저런! 이라고 생각하는데 꽃관 아저씨가 말했다. “오오- 이거, 이런 귀한 마노테를 이런 천한 마노테 마을에서 보게 되다 니.. 최상급의 마노테구만. 분명 공공의 마노테가 틀림없겠다? 수지 맞았구 만.. 응?” 꽃관 아저씨는 입을 헤벌쭉하게 벌려서 웃고 있었다. 입가로 침이라도 흐 르지 않나 싶었다. “자, 마차에 타거라!” 그 명령에 따르려는 건지 어쩐건지 남자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꼼짝도 안하고 그저 진창길에 서 있자, 꽃관 아저씨 의 표정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큰 회색후드의 남자 에게 다시 한 번 더 명령했다. “마차에 타라니깐! 난 바쁘다! 너를 얻는 것으로 네 아내와 네 아들 녀석, 모두 다 용서해 주지!” 아무래도 그 꽃관 아저씨는 시나가 아이를 구한 것이 자신의 아들이기 때 문이어서 그런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험 악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는지 시나 다리 뒤에 몸을 꼭 붙이고 숨어 있었 다. 어린아이지만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이..!! 시나는 신경질이 났다. 겨우 17살에 애 딸린 유부녀로 오인 받다니..! 그때, 이 상황을 뒤로 물러나 보고 있던 마부가 주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남자에게 빽 소리 질렀다 “이 자식아! 주인님이 타라시잖아!” 그때 회색후드 남자의 얼굴에 뭔가 경멸 어린 표정이 빠르게 스쳐지나갔 다. 서 있고 두건이 벗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굉 장히 냉소적인 표정이었다. 저것이 정말 아까 그 굴욕적인 사과를 했던 사 람의 얼굴일까? 사과를 하는 사람 치고 무표정한 얼굴이라 아까부터 그렇 게 느끼긴 했는데 이제는 더욱더 그가 정말 방금 전의 그 사과를 했던 사 람인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그 표정은 정말 잠깐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그 최초의 표정을 보았을 때, 혹시나 이것으로 꽃관 아저씨라던가 마부가 더 길길이 날뛰는 건 아닐까 하여 황급히 꽃관 아저씨와 마부를 쳐다보았지 만... 그들은 전혀 그것을 느끼지도 못한 듯 했다. 너무 짧은 순간의 표정. 그후에 회색후드의 남자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고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후드 가슴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색의 끈이 달려있 는 황금색으로 칠해진 패였다. “하바트님. 전 공용이 아닙니다. 이걸 보시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 것입 니다.” 꽃관 아저씨는 '귀찮군. 뭐야-?'라는 표정으로 회색후드의 남자가 주는 패 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헉! 이, 이것은!!!” 꽃관 아저씨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뒤덮였다. 모자를 쓴 다른 사람과 달리 가벼운 꽃관만 올리고 있기에 얼굴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회색후드의 남자는 꽃관 아저씨가 놀라는 것도 별 상관 안 하고 계속 말했 다. “그리고 이 옆의 이 여자는...” 회색후드의 남자는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시나를 쏘아보았다. 차갑게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 그것이 마노테온 드래마가 시나를 처음으로 본 순간이었다. 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나 자신보다 20센티 정도나 더 큰 키... 그는 참으로 위압적이었다. 순간적으로 시끄럽게 딱딱거리는 마부 보다 저 사람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지기 싫다...라는 생 각이 들었다. 시나는 도대체 왜 다짜고짜 쏘아보는 거람? ..이라고 말하듯 이를 꽉 악문 뒤, 턱을 좀 들었다. 그런 시나를 보는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볼을 붉히고 이 모든 가운데 의연하게 서 있는 여자아이... 젠장..! 이 라고 그가 말한 듯 했다. 시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순간 회 색후드의 남자는 고개를 싹 돌려 버렸다. 시나는 그의 그런 태도에 몹시 당황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누군가가 쏘아보고 무시하는 것은 처음이었 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시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회색 후드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뭔가, 아주 하기 싫은 일을 하 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때 털모자를 쓴 그의 친구(?)가 격려하듯 고개 끄떡이는 모습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남자는.. 격려(?)를 받아 용기를 얻었다기 보다는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마 침내 눈을 감고 단숨에 말을 해치웠다. “이 여잔- 제 소유이므로 마찬가지로 제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 아, 그리고 이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든 어쨌든 시나는 그가 자신을 보고 자꾸 소유라고 하는 것이 거슬렸다. 그러나 눈치로 보아 이 불한당 같은 사람들에게서 자 신과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드래마의 손에 들린 패를 보고 드래마의 말을 들은 꽃관 아저씨는 실망과 두려움, 그리고 경외심(?)으로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형님께 말씀은 들었지만.... 그랬나? 그게 너였나?” 꽃관 아저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손에 낀 장갑을 벗어 마부의 뺨 을 철썩 후려갈겼다. “카링거! 이 멍청한 녀석아!!! 너 때문에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제기랄! 가자!!” 맞은 뺨을 감싸쥔 마부는 다시 장갑을 끼는 주인에게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하지만 하기르님! 아무리 개인 마노테라도 하바티온의 마차를 가로막 은 죄는 용서할 수가..! 사형으로 다스려야만 합니다!!” 얻어맞고도 마부는 사형이란 끔찍한 소리를 술술 내뱉었다. 아무래도 그는 끔찍하게 눈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꽃관 아저씨는 마부에게 신경질을 버 럭 냈다. “이 멍청한 녀석! 이 놈은 나보다 높으신 분의 마노테라구!! 내버려두고 그냥 가자니깐!!!!” 그 소리를 들은 마부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왜 그런 놈이 이 런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드래마를 쫘악 째려보고 마차에 신경 질적으로 올랐다. 사형을 못 시킨 게 못내 아쉬운 것 같았다. 마부가 마차 에 오르는 동안 뒤에 남아 있던 꽃관 아저씨는 쭈빗쭈빗 하더니 결심한 듯 드래마의 귀에 대고 뭔가 소근소근 속삭였다. 순간 드래마의 얼굴엔 아주 잠깐 씁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꽃관 아저씨가 말을 마치고 떨어 지자 그의 얼굴엔 언제 그랬냐는 듯 얼음장같은 무뚝뚝하고도 의무적인 표 정만이 남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흡사 시조를 읊조리듯 허리를 숙이고 이야기했다. “신의 명령에 따라 분부대로 저, 제6계급 마노테 드래마는 제4계급 하바 트님께 절대 복종합니다.” 꽃관 아저씨의 얼굴엔 뭔가 안심한 듯한 표정이 서렸다. “그럼 부탁하네.. 흠흠. 그리고 이건...” 그는 소매 부분을 뒤적뒤적하여 뭔가를 찾더니 그것을 드래마의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별거 아닐세. 그.. 새 옷이나 사 입게.” 더렵혀진 드래마의 옷을 가리키며 말한 그는 주위 사람들의 벙찐 표정에 무안한 듯 괜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뭘 보냐! 이 더러운 녀석들아! 에잇~ 이 녀석들 마을은 길도 요 모양 요 꼴이야! 그래서 내가 이 마을엔 오기가 싫다구! 다음엔 촌장을 내 집으로 오라 그러던지 해야지 원! 에잉!” 사람들은 겁먹었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꽃관 아저씨는 진창길에 옷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마차로 돌아갔다. “가자 카링거, 네 녀석 때문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네-하기르님. 비켜라-!!! 이 멍청한 마노테들아!!!” 마부는 여전히 씩씩한(?) 목소리였다. 채찍으로 말들을 내리치자 마차는 쏜 살같이 달려가 버렸다. 주위엔 와---하는 함성이 올랐다. “드래마님!” “드래마님! 감사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넘어질 듯 달려와 아이를 품에 안으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 했다. “우앵----” 아이는 엄마 품에 안기자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 다. 아이 우는소리에다 사람들의 소란으로 길거리는 어느새 복작복작하게 되어 있었다. 시나의 가슴이 찡해졌다. 역시 구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누군가 다행이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적이구만, 기적. 하바티온의 마차를 가로막고도 살다니.. 드래마님이 높 으신 분의 개인 마노테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 했잖은가...” 하바티온? 시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누구기에 아이 가 살아난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걸까? 시나는 이해가 안 갔다. 누구였든 사 람의 생명을 그렇게 우습게 여긴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데 누군가 시나의 팔꿈치를 거칠게 잡아챘다. “아얏!” 드래마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후드의 두건을 다시 둘러쓰고 있었다. “미친 거야 뭐야?! 어제는 하루종일 잠만 자더니, 모자도 안 쓰고 이런 곳 엘 나와 있어?! 게다가 하바티온의 마차에 달려들다니!!!” “으, 저 그러니까...” 그는 외모와 다르게 힘이 셌다. 팔꿈치가 아파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 졌다. 그 남자의 말에 따르면 시나는 만 하루를 잔 것 같았다. 어쩐지 몸이 가뿐 하고, 배는 되게 고프더라니... 뭔가 변명을 말하려고 하는데 드래마가 옆에 있던 털모자 쓴 사람에게 말했다. “디트마, 네 모자 좀 주지 않겠어?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 “알겠어.” 디트마는 자신의 모자를 벗어 드래마에게 주었다. 드래마는 그것을 시나에 게 씌웠다. 너무 커서 앞 챙이 시나의 코까지 내려왔다. “웃!!! 뭐, 뭐예요!!” “그거라도 둘러쓰고 있어!” 셋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말을 하는 건 디트마 하나였다. 사람 들은 드래마를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함부로 말을 걸진 못했다. 드래마는 디트마가 사람들을 진정시키길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그때 누 군가가 물었다. 눈앞을 가리는 모자 때문에 누구인지는 볼 수 없었다. “디트마님- 아까 저 소녀를 보고 드래마님의 아내라고 한 것이 사실입니 까?” 순간 드래마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으악-] 눈물이 나올 정도로 팔꿈치가 아팠다. 그 디트마라는 사람이 대답했다. “하하- 글쎄요. 그건 두고봐야겠군요. 하지만 드래마와 이 소녀는 ‘은혜 의 법’ 관계니까 아주 가능성 없는 말도 아닙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 웅성대기 시작했다. “은혜의 법!” “저 드래마님과?” “은혜의 법이라구!”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엔 뭔가 부러움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세상에... 드래마님이 얼음의 숲에서 어떤 멍청한 작자를 구해 오셨다더 니.. 그게 그럼 저 소녀였어?” “어쩐지 모자도 안 쓰고 있다고 했지.. 얼음의 숲에 들어갔다 와서 그런 건가?” 사람들은 제각기 수군거렸지만 곧 그 중 일부는 축하한다는 듯 표정을 밝 게 지었다. “추, 축하해요. 아가씨. 얼음의 숲에 들어간건 그야말로 정신나간 짓이었 지만 그 고생한 대한 대가는 충분하구만. 드래마님에게 구조를 받았으니 행운이야...” 그들은 시나와 드래마의 떨떠름한 표정도 보이지 않는 듯 벙글벙글 웃었 다. [도대체 뭐가 축하고 행운이라는 거야! 아욱 팔이야! 그냥 팔을 부셔라! 부 셔!] 시나는 속으로 툴툴댔다. “티스- 티스마 이리 와. 드래마님이 널 구해 주셨으니 인사드려야지.” 아까 아이의 엄마였던 여자가 자신의 아들을 불러 드래마 앞에 세웠다. 아 이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혀 짧은소리를 하며 말했다. “고맘슴니다. 드래마님.” 아이의 소리에 드래마는 조금 미소지었다. “괜찮아.” 그의 대답에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했다. “디트마, 이제 들어가자구.”드래마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알았어.” “정말 고맙습니다. 드래마님.” 아이 엄마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떡인 드래마는 시나를 질질 끌고 진창 길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자신이 원래 하던 일을 찾아 흩어지 기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던 디트마는 짓궂게 말했다. “어이, 어이, 드래마! 네 ‘아내’팔 부러지겠다. 이제 고만 좀 놔” 그때 시나는 옆의 남자가 자신을 함부로 질질 끌고 가는 것에 화가 나 있 었다. 그래서 디트마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난 이 사람 아내가 아니에요!!!” 드래마도 시나랑 거의 똑같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자앤 내 아내가 아냐!!!” 묘하게 들어맞은 타이밍에 둘은 고개를 휙 돌려 서로 인상을 쓰며 노려보 았다. 눈앞에 모자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였지만 어쨌든 노려보는 시늉이 라도 했다. 그러자 드래마는 시나의 팔을 거칠게 홱 뿌리쳤고 시나는 손자 국난 팔을 쓱쓱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디트마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으니까 어서 집으로 가자구. 네 ‘아내’아닌 여자는 추워서 지금 입술이 새파래져 있잖아. 코트도 안 입고 나오다니..” [윽! 이 디트마인지 뭔지 하는 남자는 왜 꼭 저 ‘아내’라는 소리를 붙이 는 거야. 난 이제 겨우 17살인데!] 모자를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시나는 혀를 쯧 찼다. 하늘에선 아직도 눈이 하늘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질퍽질퍽한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 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32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3 21:41 읽음:2976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1- <제 6막. 시나, 드래마의 종속자가 되다. (1)> 뒤에 따라오면서 계속 투덜거리는 드래마 때문에 시나는 불편하기 짝이 없 었다. “...젠장, 남자아이인줄 알고 구했는데... 여자인줄 알았다면 절대 구하지 않았을 거야. 제기랄. 아냐! 설사 남자였다고 하더라도 구하는 게 아니었어. 얼음의 숲에 들어간 골 빈 녀석 같은 건 그냥 내버려뒀어야 하는 건데...” 시나는 드래마의 바로 앞에서 걷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이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드래마는 시나가 들을까봐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들 리면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나는 자기도 모르게, '화나는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예요? 내가 원해서 이 세 계로 온 것도 아닌데?! 나도 불안해 죽겠다구요!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도 안가고! 근데 신경질만 내다니! 아까 마부도 그렇고 이 세계의 사람들은 정말 성질이 더럽군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시나는 아까 마부와 같은 눈치, 코치 없는 무대포는 아니었다. 여기서 대들 다가 이 추위에 쫓겨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배도 고프고... 다행히 이 사 람들은 시나를 동료로 여기고 같이 집에 들어가자고 해주었다. 의지할 곳 없는 시나에게 이 사람들은 두 개의 지푸라기(?)였다. 그들은 아까 시나가 나왔던 곳이 아닌 다른 쪽 입구로 들어갔다. 곧바로 거실과 이어진 문이었다. 문을 탁 닫자마자 드래마는 또 투덜거리기 시작 했다. “...젠장! 골만 비었으면 괜찮지! 심장은 좀비 심장이라도 단 거야 뭐야!” 좀비 심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표정으로 보아 별로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디트마는 쿡쿡 웃고있었다. [좀비 심장은 이 세계의 욕일 꺼야. 분명해. 잇! 저 사람이 아무리 지푸라 기(?)라도 못 참는다!] 더 이상 견디질 못하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디트마가 화기애애하게 말했다. “자, 자, 드래마! 이 아가씨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아무 것도 못 먹었으니 배고플 거야. 우리도 저녁을 먹어야 하니 이제 싸움은 그만두라구.” [싸움이라뇨? 전 한마디도 못했다구요!] 분한 마음으로 생각했지만 저녁을 먹는다는 말에 곧 행복한 기분이 들었 다. [핫!!! 해, 행복?] 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말도 안돼는 상황에서 밥 먹는다는 소리 하나에 행복을 느끼다니 정말 말도 안돼는 일이었다. [어, 어떻게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지?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해도 그렇지! 고작 먹는다는 소리하나에 모든 분노와 슬픔(?)이 사라지다니..? 나, 나란 인간은 자존심 따윈 하나도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아, 안돼! 난 최소한의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배고파도...!] “거기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차라도 따르라구! 모자 좀 벗고!!” 드래마가 소리쳤다. “에? 네, 네!” 시나는 무거운 털모자를 후닥닥 벗었다. 탁자 위엔 어느새 맛있게 보이는 빵과 아까의 고구마 같은 음식이 놓여있었다. 그걸 본 시나는 자존심이란 녀석을 하늘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 날려버렸다. [자존심아 미안하다! 굶어죽겠는데 그럼 어떡하겠니? 그 넓은 눈벌판과 괴 물을 만나고도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굶어 죽을 순 없어!] 시나는 싹싹한 태도로 시키는 대로 뜨거운 주전자를 날라서 탁자 위에 놓 여진 세 개의 컵에 따랐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고구마 비슷한 음식은 맛 이 꽤 괜찮았다. 빵도 맛있었다. 밥을 먹고 싶었지만 그런 호강에 겨운 생 각은 관두었다.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감사했다. 시나는 빵을 씹 고 앞에 있는 알지 못할 누리끼리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보리차와 비슷 한 맛이 나는 차였는데 보리차에 비해 더 쌉싸름한 맛이 났다. “나글로, 한 잔 더 마시겠어요?” 차의 이름이 나글로인 듯 했다. “네.” 디트마는 미소를 띄운 얼굴로 컵에 차를 따라주었다. “미안하군요. 아가씨. 기절했던 사람한테 이런 걸 내놓아서. 지금은 식료 품이랑 생필품이 떨어져서. 고기라도 대접하면 좋을 텐데...” “아, 아니에요.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이것만으로도 감사해요.” “흥! 기절했던 사람은 무슨! 아까 일루트와 싸우는 모습을 보니 팔팔하기 만하더라!” 드래마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시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디트마가 웃었 다. “하핫, 하긴- 아가씨, 정말 좀비 심장이라도 단 거예요? 어떻게 하바티온 의 마차에 뛰어들 생각을 했지요?” 시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이가 치일 뻔했잖아요? 하바티온이 아니라 하바티온 할아버지 라도 사람은 구하고 봐야죠?” 드래마와 디트마는 그 말에 진짜로 놀란 듯 했다. 둘은 먹던 손을 잠시 멈 추고 시나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디트마가 말했다. “얼음의 숲에 들어갔다 나온 이상 무슨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 지만... 생각보다 심한데?” 드래마는 신경질을 냈다. “젠장! 역시 구하는 게 아니었어!” [휴, 후유증? 갑자기 웬 후유증?] 시나는 어리둥절하여 두 남자를 보았다. 디트마는 긴장한 표정으로 시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자신의 이름이 뭔지 기억 나요?” [이름? 당연히 기억나지!] 그러고 보니 시나는 아직 자신의 이름도 말을 안 했다. “시나라고 해요. 윤시나.” “시나?, 윤시나? 어느 쪽이 진짜예요?” “에? 그러니까 시나가 이름이고 윤은 제 성이죠.” [아아, 이 사람들은 성을 뒤에다 쓰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시나는 친절하게 이름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까- 시나- 윤이요. 시나가 이름이고 윤이 제 성이에요.” “성이라구요? 마노테에게?” 디트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드래마를 보았다. 하지만 드래마는 불쾌한 표정 을 지을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어,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흠, 흠, ...그러니까 부모님이 부르던 이름 이 시나라는 거지요?” [? 이 사람들이 왜 날 이렇게 괴물 보듯 보지? 성이 있다는 게 나쁜가?] “네.” “자, 그럼 시나마” 시나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차를 뱉어 낼 뻔했다. “예?” 시나마? 저 남잔 드래마고 난 시나마? 드라마와 시네마? 여기 무슨 연예계 프로덕션인가? “[시나마]가 아니라, [시나]라고 해 주세요.” 디트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난 아가씨의 가족이 아니니까... 시나마 쪽이 좋겠군요.” “얼음의 숲이 무섭긴 무섭군. 언제 봤다고 외간 남자한테 함부로 자신의 애칭을 부르라고 하는 거지?... 한심하기는.” 드래마가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욱!] 자신을 무시하는 그 어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속을 가다듬고 침착하 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선 이름 뒤에 [마]를 붙이나 보다. 우리 나라의 [... 씨]같은 건가 보지? “호호, 네 그럼 ‘시나마’라고 해주세요...” [정말, 운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상한 어감의 이름이구먼. 으휴.] 그대 분위기를 자꾸 험악하게 만드는 드래마를 보고 디트마가 한마디했다. “그만해. 드래마. 이제 이 소녀보고 네 '아내'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신 경을 좀 다스려. 음..... 요즘은 자유스러워 졌다고 해야할지 어떨지 모르겠 지만‘은혜의 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어. 변칙적이라고 나 할까... 꼭 '아내'로 삼진 않는단 말이지. 정 아내가 싫다면 대신 어머니 나, 여동생, 누나, 혹은 딸- 어느 쪽으로 삼을 건지 결정하라구.” 드래마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맙소사.. ...평소에 안 하던 짓 한 번 했다가 된통 덮어쓰는구만!” 시나는 이들의 대화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름 얘기를 하다가 왜 또 ‘아내’ 얘기가 나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 디트마는 '아내'라 는 단어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드래마 라는 남자와 결혼서약을 맺었을 리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는 게 있으면 묻는 게 최고다. 그래서 시나는 물었다. “저, 저기요? 저도 이 분과 관계 맺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거든 요? 아내 아니면 엄마나 여동생, 누나, 딸이라고요? 왜 꼭 제가 이분과 가 족관계를 맺어야 하죠? 아, 물론 생명을 구해준 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전 싫어요.” [그래. 정말 싫어. 우리 아빠가 들으면 기절하실 걸. 딸내미가 생판 모르는 남자랑 그런 관계를 맺는다면. 게다가 저 남자는 날 무척 싫어하는 것 같 은데?] 그 말에 두 남자는 시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드래마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굴에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디트마도 놀란 표정을 짓 고는 드래마를 바라보았다. 드래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포즈였다. 그러자 디트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세상에. '은혜의 법'을 거부하는 여자는 처음 봤군요. 남자가 그런다면 또 몰라도. 여자가, 그것도 저 드래마를?...”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3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3 21:43 읽음:299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2- <제 6막. 시나, 드래마의 종속자가 되다. (2)> 드래마는 이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디트마. 나 왠지 얼음의 숲이 사랑스럽게 여겨지는군. 여자가 탐욕스러운 생물이란 걸 잠시나마 잊게 해주어서. ....이 여자 애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 긴 하지만... 그래도 대단해.” 디트마는 그런 드래마의 말을 묵살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역시 얼음의 숲에서 기억상실을 일으켰군요. 정말‘은혜의 법'에 대해서 뭔가 기억나는 게 없나요?” “없는데요?”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모르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디 트마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휴- 황당하구만.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자, 잘 들으세요. 이것은 당신 과 드래마의 의지를 넘어선 신성한 엘의 법칙입니다. 드래마가 당신의 생 명을 보존했으니 앞으로 당신은 평생 그에게 종속되는 거죠. 드래마와 당 신, 둘 다 결혼을 안 했으니- 당신,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죠? 아마 결 혼 같은 거 안 했을 거예요. 그렇게 됐으니 '은혜의 법'에 따라 당신은 드 래마의 아내가 되야 해요.” [마, 말도 안돼...!!!]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 온 것도 억울한데 평생 저 신경질적인 남자의 '종'('아내'라는 허울 좋은 말이었지만 시나에겐 '종'으로 들렸다.)이 되어서 살아야 한다니!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꼭 ‘아내’가 아니라도 되요. 오늘날에 와선 사 제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으니까. 율법의 새로운 해석이죠. '아내’가 아닌 다른 가족관계를 맺어도‘은혜의 법’은 인정돼요.” “디트마- 나와 관계 같은 거 맺기 싫다잖아. 내버려두라고. 쌍방의 합의라 면‘은혜의 법’을 폐기하는 걸 사제도 허락하겠지.” 디트마가 얼굴을 찌푸렸다. “드래마-! 시나마는 지금 기억상실이라고!” [으휴- 저 기억상실 아니에요...! 단지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를 뿐이라구요! 그러나저러나 정말 이상한 법이네. ‘은혜의 법’?] 그때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아까 그 남자아이는? 그 남자아이의 평생도 이... 사람에게 종 속되는 거예요?” 디트마는 빙긋 웃었다. “남자들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켜야죠. 그러니 그 운명은 엘 외엔 아무 에게도 종속될 수 없어요. 하지만 여자들은 다르죠. 여자들은 스스로 자신 의 몸을 지킬 수 없으니까 누군가에게 종속돼야 하고 만약 자신의 생명을 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종속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맙소사! 이 세계! 아직 여권운동이 안 일어난 세계구나! 아이구!] 시나의 머리에 국사시간에 배운 3부종사의 법이 떠올랐다. 어릴 땐 아버지 께 의탁하고 시집가선 남편에게 의탁하고 늙어선 아들에게 의탁하는 법이 던가? 시나는 아찔했다. [그, 그러니까 한마디로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평생을 다 바쳐 갚으란 말 이잖아! 게다가 여자한테만 통용되는 얘기고?! 이렇게 후진적인 세상이라 니! 여자들의 주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거야?!] “젠장! 남잔 줄 알고 구했는데!” 이제서야 아까부터 드래마가 투덜거린 여자가 어떻고 남자가 어떻고 한 말 이 이해가 됐다. 디트마가 냉정하게 말했다. “드래마, 그만해. 시나마가 이 법을 잘 몰라서 널 거부한 건 법의 폐기사 유가 안돼. 그러니 이제 시나마는 너의 종속자(從俗者)야. 종속주(從俗主)로 서 예의를 지켜.” 드래마는 찌푸둥해서 고개를 휙 돌렸다. [디, 디트마 고, 고마워요. 흑-] 종속자니, 종속주니 기분 나쁜 이야기였지만 종속주가 종속자에게 무조건 압력을 행사하진 못하는 모양이다. [예의]를 지키라는 것을 보면. 어쨌든 지금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있는 드래마만큼 시나도 기분이 나빴 다. 종속되는 상태란 결국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없는 답답한 상 태란 말아닌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자유가 이렇게 제한 될 수 있다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나는 자신을 존중해서 말해준 디트 마가 고마웠다. [어쨌든 난 저 사람의 종속자 같은 거 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난 이 세 계의 사람도 아닌데 뭐. 엘의 의지라고는 해도 나완 상관없겠지.] 그렇게 말하려는데 디트마가 다시 말했다. “자- 시나마, 이제 알겠죠? 그럼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기억상 실이긴 하지만- 당신, 뭔가 기억나는 게 있어요? 어디에 살았는지? 도대체 왜 얼음의 숲에 들어갔는지?” [어휴-! 자꾸 자기들 멋대로 기억상실이라고 하네-! 나참! 원래 모르던 이 야기들이라구요! ....하지만-] 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은혜의 법]인지 뭔지 이상한 법에 대 한 설명을 듣느라 이야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드디어 자신의 일을 설명 할 기회가 왔으니 자세히 말한다면 이들의 오해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 지 모른 다. 시나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릴 수 있다면 이들도 자신을 이해할 것이다. 시나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전, 얼음의 숲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 르겠지만, 저는... 전, 원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우리 세계는 이 세계와 아주 다르거든요. 여기처럼 마차도 없고 차가 다녀요. 뭐랄까, 그러 니까 달리는 쇳덩이인데- 아,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짓지 말아요. 우리 세계 엔 쇠로 별의 별 일을 다하니까. 배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어요. 비행기 아세요? 이-렇게 하늘을 나는- 아니,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하여튼 학교에서 수업 받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불량배들에게 당하고서 눈을 떠보 니 어떻게 된 건지 이 세계로 들어와 있었다구요. 이상한 은빛 잎사귀가 잔뜩 달린 나무를 보고 온통 눈뿐인 허허벌판에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 까요. 말하는 괴물도 처음 보는 거였고. 음... 그래. 이런 털옷도 처음 입어 봐요.” 말을 마쳤다. 이해했을까? 하지만 설명이 너무 두서없었던 것 같다. [음, 좀 침착하게 설명할걸 그랬나? 두 사람의 표정이 영-] “......” 디트마는 침묵하고 있었다. “......기억상실뿐이 아닌데.” 그러다가 한 마디 했다. “......일루젼(Illusion)에 당했군.” 드래마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산 넘어 산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힐러(Healer)인 너로서도 흔치 않은 경우겠군. 일루젼에 중독 된 사람을 두 번이나 만나다니. 어때? 그 동안 일루젼 중독에 대한 연구 많이 했겠 지? 고칠 수 있겠어?” 디트마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를 보았다. 그는 그 답을 뻔히 알면서 저렇게 말한다. “드래마 장난치지마. 일루젼을 고칠 수 있는 힐러란 12개의 세계 어디에 도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랬다. 지난 22년간 노력했지만 결국 약간 호전시키는 정도지 완치는 불 가능했다. 디트마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휴..... 기억상실에다 일루젼이라니... 기억은 어찌어찌 되돌려 볼 수 있다 지만 일루젼은 사실과 환상이 뒤죽박죽 되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원래 같이 살던 사람이 있어서 사실을 알려 준다면 조금 상태가 호전되긴 하겠 지만.. 그래도... 음, 그래! 혹시 일루젼이 아니라 시나마가 정말 자신이 살 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아냐? 클로니아 사람 같지는 않거든. 이 근 처에 마노테마을은 여기 하나뿐인데 시나마는 여기 마노테는 아니니까. 게 다가 말하는 발음도 좀 이상하구.” “저 여자가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알기로 쇳덩이가 날아다니는 세계는 하나도 없어. 철의 세계 [베르노크]에도 그런 건 없다구. 일루젼이야.” 그들은 시나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그리고 전혀- 그들은 시나의 말을 믿고있지 않았다. “저, 저기! 그렇게 쉽게 믿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내가 말하는 건 사실이에요!!!!” 디트마는 그제야 시나를 보았다. “자, 자- 진정하고- 음...” 그는 시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음- 살던 곳부터 시작해 볼까요? 아가씨? 살던 곳의 이름을 말해 볼래 요?” 시나는 남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은 처 음 알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난, 일루젼인지 뭔지 그런 거에 중독 되지 않았다니까요! 난 정말 이 세 계의 사람이 아니라구요! 지구라는 행성,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윤시나라 는 고등학생이라구요!” 디트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드래마- [지구]라는 세계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일루젼이라니까! [지구]라는 세계는 없어. 12개의 세계 중 그런 이름은 있지도 않다구.” [뭐라구!? 없다구? 세계가 12개나 되는데 그 중에 하나도 없다구?!] 시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드래마가 말했다. “게다가- 기억을 상실하지 않았거나 일루젼에 중독 돼있지 않다고 해도 어차피 마노테야. 교육 따윈 받지 않았을 거라구. 그러니 자신의 세계 이름 이 뭔지나 알겠어? 이곳 마을 사람만 하더라도 그런 거에 상관없이 내일은 몇 개나 더 많은 나무를 벨 수 있는가 그런 것만 생각하며 사는데? 관둬. 디트마. 시간 낭비야. 이 여자가 어떤 말을 해도 우린 확인할 도리가 없다 구.” [교육을 받지 않았다니! 난 대한민국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구!] 시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이들은 어떻게 된 건지 시나가 일루젼-환상을 봤다고 굳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이 사람들 은 전혀 믿지 않을 것이다. 드래마는 시나의 갑갑한 표정을 힐끗 보고 혼 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제 옷차림까지 생각해 보면 이 여자 애가 이 곳 클로니아의 사람이 아 니란 건 확실한 얘기 같군. 초원의 세계 [마이레스], 아니면 사막의 세계 [칼리안]인이겠지. 그곳의 인간들은 웃기게 마노테한테도 성을 붙이는 모양 이지?”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데 디트마가 드래마를 보았다. “뭐라구? 옷이 어쨌다구?” “아, 아냐. 아무 것도. 어쨌든 이 여자가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면 아마 불 안정한 차원의 틈으로 빠졌을 거야. 숲에는 차원의 구멍이 생기곤 하니까. 특히 얼음의 숲은 성역과 닿아 있어 자주 그런다고. 그래서 몬스터도 많이 살구. 이 여잔 우연히 차원의 틈에 빠졌다가 클로니아로 옮겨지고 얼음의 숲에서 일루젼을 본 거야. 그리고 원래 살던 세계와 일상적인 상식을 깡그 리 까먹은 거고.” “흐음- 과연-” 디트마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나는 어이가 없 었다. 자신의 말이 바로 그것 아닌가?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어떤 차원의 틈에 빠진 것 같다는 것.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시나 가 말하는 것과 약간 핀트가 안 맞는 느낌이었다. [차원의 틈과 다른 세계? 그럼 여긴 종종 다른 세계의 사람이 빠진다는 얘 기야 뭐야? 그러면 왜 내가 우리 세계의 설명을 하는데 안 믿는 거지? 일 루젼이니, 기억상실이니, 난 제정신이라고!] 디트마는 동정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세계에서 흘러들어 온데다 하필이면 얼음의 숲으로 떨어져 일루젼 까지 보다니! 쯧. 쯧. 그러니까 하바티온의 마차에 뛰어들 수 있었던 거겠 지?” 시나의 머릿속은 엉망이 돼버렸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소릴 하는 건 지 이해가 안 갔다. 시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그런 시나를 똑바로 바라 보며 드래마는 이야기했다. “그래- 일루젼에 중독이 됐겠지만 어떻게든 적응해 가면 되는 문제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어디서 나타났느냐 하는 게 아냐. 그런 건 내게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하, 하지만 나한텐 돌아가는 게 제일 큰일인데..?] 시나는 당황했다. 좀 더 이 화제를 끌고 가고 싶었다. [지구]를 모른다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드래마는 그런 시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시나는 그의 손 에 들려있는 것을 보고 숨이 넘어갈 듯 놀랐다. “계속 이것에 대해 묻고 싶었어. 도대체 넌 이 물건을 어디서 훔쳤지?” “내 목걸이!!!” 그의 손엔 시나의 루비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 그제야 시나는 자신의 목덜 미에 목걸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돌려줘요! 훔쳤다니! 그건 우리 엄마의 유품이라구요!” 시나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드래마는 그것을 더 높이 들어올려 시나의 손이 닿지 못하게 했다.. “유품이라구? 너 따위 마노테에게? 이런 보석이?” 시나는 정말로 신경질 났다. 아까부터 마노테, 마노테하는 데 도대체 뭐 야?! “나 따위 마노테라뇨?! 그 마노테가 뭔진 모르겠지만 거짓말하는 거 아니 에요!” 순간 드래마는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노테가 뭔지 모른다고? 자신의 신분을?” 디트마가 한숨을 쉬었다. 디트마 자신도 드래마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보 고 놀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녀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드래마.. 네가 방금 그랬잖아. 일루젼에 중독 돼있는 사람한테 묻는 건 시간낭비라고... 게다가 기억상실 상태인데 네 말대로 뭘 물은 들 제대로 대답하겠어? 대답한다고 해도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 할 수 없는데.” “..그래. 그랬지... 계속 목걸이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드래마는 손을 내렸다. 무척 실망한 표정이었다. “돌려줘. 드래마. 그건 시나마의 과거와 연결 돼 있는 유일한 물건이라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찌됐든 그분의 물건이 이렇게 돌 아다닐 리 없다구. 보통 그런 물건엔 퍼제셜(Possessor) 아트(Art)가 걸려 있으니까.” “.....” 드래마는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있더니 말없이 목걸이를 시나에게 돌려주 었다. “사과도 해야지. 드래마. 마노테라도 대를 이으면 그런 목걸이 장만하는 거 꿈은 아니라구. 내가 보기엔 거짓말하는 거 같지 않아. 일루젼 때문인지 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건 시나마 탓이 아니잖아?” 드래마는 복잡미묘한 눈으로 디트마를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미안해.”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다인가?.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왔다. 깡패들한 테 맞을 때도 눈물 같은 거 흘리지 않았는데 의심을 당하니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거기다 처음 보는 이 사람은 자기가 뭐라고 시나에게 멋대로 반말 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시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긴 하지만 비슷한 연배 로 보이는 디트마라는 사람은 깍듯한 존댓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시나의 종속주 인지 주인인지 그런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사람을 아주 깔보는 것이 정말 불쾌했다. “.....필요 없어요.” “뭐?” 드래마가 얼굴을 찡그렸다. “말해두지만! 난 당신 같은 종속주는 필요 없다고요!” 시나는 젖은 눈으로 드래마를 노려보았다. 드래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그럼 여기서 어떻게 살 예정이지? 이 문밖으로 나가면 갈 곳이 있나?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시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건 그 빌어먹을 깡패 때문이다. 그 깡패들이 아니었다면 산에서 잘 일도 없고 이런 곳에 떨어지 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야...] 시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눈물을 툭 떨구었다. [정말 재수가 없게 이런 일 일어난 거니까- 길 가다가도 이 세계로 떨어질 가능성은 있지 뭐- 꼭 산에서 자서가 아니라...] 시나의 눈으로 눈물이 넘쳐흘렀다. 시나는 눈물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어느 편인가 하면 남들이 자연스럽게 눈물 흘리는 걸 부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눈물이 주체못할 정도로 흘렀다. 지금까지 겪은 일로 인해 쌓여있던 감정과 자신의 힘으론 이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 함에 대한 눈물이었다. “도대체- 정말! 드래마!” 디트마는 혀를 쯧쯧 차며 드래마를 나무랐다. “넌, 왜 그렇게 남의 가슴을 후비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야?!” “....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도 일루젼이나 기억상실이 어떤 건지 알잖아! 그러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위로는 못해줄 망정!!!” 드래마는 입술을 쑥 내밀고 벌떡 일어났다. “쳇! 맘대로 해. 이렇게 마음이 약한 녀석은 비위에 안 맞아! 힐러인 너나 많이 위로해 줘. 난 그럴 생각 손톱만큼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다른 쪽 침실의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탕 닫았다. “으휴... 정말이지... 자, 자, 시나마? 진정해요. 저 녀석,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 괜찮은 녀석이니까. 그 목걸이 때문에 심한 말 한 건 용서해요. 이 목 걸이가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목걸이와 많이 닮아 있어서 드래마의 신경이 날카로워 진 거예요.” 따뜻하고 다정한 디트마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자 시나는 겨우 울 음을 그칠 수 있었다. “훌쩍...전... 정말로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구요... 훌쩍.. 전 돌아가고 싶 어요... 우리 아빠도 걱정하실 거구요.” 디트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시나마... 한 번 차원의 구멍에 빠진 사람은 다시는 차원의 구멍으로 들 어갈 수 없어요. 안됐지만 당신은....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해요. 이곳 클로 니아에서.” 시나는 붉어진 눈을 들고 디트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 뭐라고요?” 오늘들은 말 중 가장 극적이고 가장 비극적인 말이었다. “도.... 돌아갈 수 없다고요?” 디트마는 그녀를 달래 듯 상냥하게 말했다. “차원이전자(Dimension Mover)가 아닌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게 뭔데요? 차원이전자라는 것이? 그들의 힘을 빌리면 차원을 넘을 수 있나요?” “아니에요. 시나마. 쓸데없는 희망을 품지 말아요. 우리 같은 마노테온은 차원이전자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해도 차원을 통과할 때 몸이 견디질 못 해요. 그들이 마노테에게 힘을 빌려줄 리도 만무하고요. 시나마... 그냥 엘 의 의지라고 생각하세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운명 안에서 더 선하게 이 루어지도록.” “그런 거 몰라요! 흑, 흑 아빠---!” 시나는 이제 디트마의 어깨의 기대어 눈물을 터뜨렸다. [아빠- 나 어떡해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죠? 아빠---] 디트마는 한숨을 쉬었다. 차원의 구멍으로 빠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가 끔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이라니... 아무런 방비도 못하고 당해서 그런 거겠 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슬픔과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 게 다가 일루젼까지... 예전에 드래마도 일루젼 증상을 보였기에 디트마는 더 동정이 갔다. 이 소녀는 지금 너무나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최악의 불운에 최고의 행운이 겹친거지. 드래마 같은 남자를 종속주로 얻었으니. 6계급부터 4계급의 모든 여자가 탐내는 남자를 말이 야...] 디트마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자신들- 비록 드래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에게도 엘은 최고의 축복을 내려준 건지 몰랐다. 드래 마는 오랫동안 그 일을 거부했다. 하지만 드래마가 자신의 말마따나‘평소 에 안 하던 짓’을 함으로서 그의 운명은 이 소녀의 운명처럼 이제부터 크 게 변할 것이다. 디트마는 싱긋 웃었다. [그래. 이 소녀- 시나마라고 했었지? 시나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에겐 이 상황이 참 잘 된 일이야. 불쌍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뭐 이 소녀도 지 금은 일루젼 때문에 이렇게 서럽게 울지만 드래마가 누구란 걸 확실하게 알면 오히려 자신에게 벌어진 일로 엘에게 감사를 할 걸...] 원래 살던 세계와 달라 당분간 불편한 점이 많겠지만 인간이란 어디서든 적응하기 마련이다. 로트라인이 칼리안에 떨어졌는데도 살아남았다는 얘기 를 들은 기억이 있다. 시나마가 한시라도 빨리 그렇게 되길 바랬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드래마와 디트마 자신을 위해서. 오늘 예배를 드릴 때 이 소녀를 위하여 기도 드렸으면 좋았을 걸하고 디트마는 생각했다. 지 금이라도 잠깐 기도할까? 그는 시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엘님... 이 소녀에게 축복과 가호를...]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3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3 21:46 읽음:295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3- <제 7막. 시나, 진짜 맛없는 아침을 먹다.(1)> ‘달의 날’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 특유의 싸늘하고 청량한 공기가 거실 을 채우고 있었다. 화덕 위엔 아침에 먹을 수프가 끓고 있었다. 화덕의 불 이 있는 데도 약간 추운 감이 있었다. 드래마와 디트마는 각각 자신의 회 색 후드와 털옷을 입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습관상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하루를 시작할 때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것에 대한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대표적인 것으로 불을 밝히는 기름을 굳이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쓸데없이 어두울 때 활동하여 기름을 낭비하다간 평생을 가난에 쪼들리며 살 것이다. 기름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그런 생활태도 때문에. 밤에 자고 밝을 때 활동하는 건 마노테온의 기본 생활 철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 침이라 해도 아직 어둑어둑해서 둘은 따뜻한 화덕의 불을 쬐며 나글로를 마시고 있었다. “아- 좋다. 역시 이른 아침에 식전에 먹는 나글로가 제일 맛있다니까.” 드래마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디트마,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어제 바닥에서 잔 것이 그렇게 좋았 나?” 비꼬는 말투였다. 어제 디트마는 자신의 방을 시나에게 내주고 자신은 드 래마의 방으로 자러 갔었다. 하나 뿐인 침대엔 드래마가 자고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디트마는 바닥에 털가죽을 깔고 자야했다. 클로니아 사람들 은 자신들의 땅을 얼음의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그 정도로 땅은 차가운 기 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건 털가죽 몇 장으로 막아질 것이 아니었다. 디 트마는 오들오들 떨고 잤을 게 뻔했다. 그러니 드래마의 말은 확실하게 디 트마를 비꼬는 말이었다. 하지만 디트마는 드래마의 그런 비꼼에도 태연하 게 대답했다. “뭐, 기분 나쁠 일은 없지. 우리 집에 묵고 있는 소녀의 불행엔 가슴이 아 프지만, 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아침에 특별히 심술부릴 까닥은 없어.” 드래마는 디트마를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분 노의 표정 같기도 했고 혹은 슬픔의 표정 같기도 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 다. “...디트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저 여자 애를 내 아내로 맞지 않아. 저 여자 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야. 그러 니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마..” 디트마는 그 말에 차 마시는 손을 딱 멈추었다. “난 그녀를 너의 [아내]로 맞으라고는 안 했는데? 어제도 말했지만 아내 가 싫다면 다른 가족관계가 있어. 시대의 개혁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 냐?” 냉정한 목소리였다. 드래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싫다는 거야. 율법의 새로운 해석이라지만 그게 뭐야? 말이 쉽지! 다른 남자와 [은혜의 법]을 맺고 있는 여자 애를 어떤 남자가 데려갈 것 같아? 잘 하다가는 평생을 내가 돌봐야 한다고.” 디트마는 남아있던 차를 한 번에 훌쩍 마셔버렸다. 입맛이 쓰다. 나글로는 천천히 마셔야 제 맛인데. “그럼 평생이라도 돌보면 되잖아. 그녀를 구해줄 땐 그런 생각도 있었을 것 아냐?” “제기랄!!! 남잔 줄 알았다고 했잖아!!! 디트마!! 자꾸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 솔직하게 말해 보라고! 넌 내가 저 여자 애를 아내로 맞길 바라는 거 지? 안 그래? [은혜의 법]상태로 '미혼남녀’가 1년 이상 같이 있으면 아무 리 다른 가족관계를 맺었더라도 저절로 결혼관계가 된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디트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드래마가 새로운 법 개정판을 읽었을 줄 이야! 나중에 슬슬 알려주려고 했었는데... 그의 계산 착오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정면으로 나서기로 했다. “저런-- 그랬단 말야?! 난 몰랐어!” 그의 정면(?)적인 대답에 드래마는 이를 갈았다.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 거짓말 마! 네가 몰랐을 리 없어.” 디트마는 입술을 쑥 내밀었다. “뭐, 어쨌든 그렇다면 결국 넌 저 소녀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겠구만? 축하하네. 이것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거잖아?” “뭐가 해결된다는 거야!? 디트마! 너 미친 거야?! 겨우 저런 여자앨 아내 로 맞으라고?!” 디트마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은혜의 법]을 파기할 다른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은 혜의 법]은 절대적이야. 거기다 네가 그녀를 구했다는 걸 아는 증인들도 많지” 드래마는 어두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넌... 내가...........루사벨라를 아내로 맞길 바라는 거야. 그렇지? 그럼 [은혜 의 법]안에서 저 여자 애와는 말 그대로 단순한 가족관계를 맺을 수 있으 니까.” 드래마는 결국 디트마가 듣고 싶어하던 이야길 내뱉었다. 디트마는 조용히 웃었다. 그 일 이후로 한 번도 드래마가 루온 루사벨라의 이름을 입에 올 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드래마.. 그 분은 네가 사랑했던 사람이야.” “디트마! 제발!!” 드래마는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그런 기억 따위 안 난다고. 루온 루사벨라건 저 여자애건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들이야. 그러니 제발 날 괴롭히지 마. 디트마. 네가 한마디만 해주면 돼. 네가 증인이 되어서 저 여자 애를 내가 구하지 않았다고 해.” “나보고 거짓증인이 되라는 건가? 사양하겠어.” “디트마...!” 드래마의 눈이 분노로 불탔다. 그는 주먹을 하얀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쥐 었다. 하지만 디트마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어쩔 건가? 난 너의 명령을 거부했어. 하지만 지금의 너로선 나 를 어쩔 수 없겠지. 우린 같은 마노테니까. 네가 다시 루온 루사트로 돌아 가지 않는 이상 날 어쩔 순 없을걸.” 하지만 겉의 그런 냉정함과는 달리 디트마는 속으로 떨고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제발- 드래마! 이 시건방진 일루트 딧이라고 말해! 루온 루사트의 이름으 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드래마는 그런 디트마를 외면했다. 그는 한없이 피곤한 표정으로 힘없이 이야기했다. “디트마. 네 말이 옳아. 난 네게 뭐라고 할 수 없어. 네게 거짓증인이 되 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하긴 네 말대로 너 말고 다른 증인들도 많으니까... 내가 어리석었어.” 디트마는 눈을 감아버렸다. 화가 났다. “루온 루사트!!! 왜 당신은--!!!” 드래마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름으로 날 부르지마 디트마. 난 드래마다. 마노테온 드래마. 엘야 시온의 소유인 드래마. 아직도 그 이름으로 날 생각하다니 이상하군 디트 마.” 아무런 틈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말투였다. 디트마는 절망을 느꼈다. 22 년의 세월이 드래마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의 안에 흐르는 시간의 모래들은 저 로트라의 무수한 모래들보다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나? 드래마 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겐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지만... 난 드래마야. 훗...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건 너 뿐이야. 디트마. 나의 친구.” 그는 자신을 자기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그는 자신 따위 와 친구가 될 만큼 하찮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더 높은 영광과 더 높은 찬사를 받아야 할 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트마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 다. “흥- 웃기는군. 나 같은 고귀한 힐러가 일개 벌목장이와 친구라니. 웃기는 말하지 말게 친구.” 드래마는 피식 웃었다. “..네 그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언젠가 한 번 손봐줄 날이 오면 좋겠군. 친구?” “기꺼이- 기대하겠네.” 씁쓸한 미소를 지은 뒤 디트마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단 이 렇게 물러서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루이티온이야. 뼛속까지도. 난 그걸 알아...] 그때 디트마의 방에서 자던 시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밖에서 뭔가 두런거 리는 소리에 눈을 뜬것이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 삼일 째 날이었다. 잠에 서 막 깨어 처음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다. “아... 아직도 이 바보같은 세계잖아.”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 솟는 느낌이었다. 시나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 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부어있는지 눈뜨기가 거북했다. 어제계속 울다 가 잠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이렇게 많이 운 것은 처음이다. 시나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잘 안 됐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침울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머리를 한 번도 안 빗었네. 여기 빗이라든지 거울 같은 거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시나는 문득 자신의 생각에 웃고 말았다. [빗이나 거울..? 나도 참 웃기네. 이런 상황에서 겨우 머리 빗을 걱정이나 하는 건가?] 하지만 이런 것이 보통 인간들에게 있는 일반적인 사고패턴 아닐까? 엄마 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 이 없었다. 애초부터 시나의 엄마와 세상은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 같았다. 세상은 그대로고 오직 시나와 시나의 아빠만이 미칠 듯한 슬픔과 싸워 이 겨야 했다. 결국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빠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디트마의 생각대로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결국 적응하여 살기 마 련인 것이다. 그 한 예로 평생을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절망스런 얘길 들 은 게 바로 어제인데 시나는 지금 이 순간 머리 빗을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죽지 않은 이상 살아야 하는 게 삶이지.... 머리 빗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인데 뭐...] 시나는 우울해졌다. 새삼 그녀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자기와 다른 세상에 서 삶을 갖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 가슴이 아팠다. [아빠는 지금쯤 식사하고 계실까?] 자신이 덮고 잔 털가죽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겨울 이불은 다 빠셨을까...?] 시나는 웃었다. 아빠는 겨울 이불 빠는 걸 싫어하신다. [내가... 실종된걸 아시고 얼마나 슬퍼하고 계실까....] [정말.. 다시는 아빠를 못 만나게 되는 걸까?] 시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얼굴을 천장으로 향했다. [아냐! 그런 건 말도 안돼!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 방법을 찾 을 때까지 포기해선 안돼. 좀더 이 세상에 대해 알아보고....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도 알아야 해!] 시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래서 난, 난... 꼭! 우리세계로 돌아가고야 말 거야!] 다시 뜬 그녀의 눈은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각오를 단단히 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다시는 울지 않을 것이다. 드래만가 뭔가 그 재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 마음이 약해 빠진 녀석이라 고 했었다. 그 말은 정말 비위가 상하는 말이었다. 자신은 약해 빠지지 않 았다. 엄마의 죽음도 극복하고 살아온 그녀였다. 시나는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눈을 비벼서 마지막 눈물을 닦아냈다. 결의에 찬 꿋꿋한 표정이 떠 올랐다. “자! 윤시나! 용기를 내자!” 목소리가 좀 쉬어있긴 했지만, 시나는 자신의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디트마는 원래 자신의 방이었던 곳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거기엔 갈 색 가죽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회색 눈이 빨갛게 된 것으로 보아 또 운 것 같았다. 디트마는 혀를 쯧쯧 찼다. [아무래도 상심에서 벗어나려면 한참 걸리겠구만. 뭐 당연한 거지만.] “더, 자지 왜 벌써 일어 났나요? 아침 먹을 때 깨우려고 했는데.” 시나는 방긋 웃었다. 저 디트마란 사람은 아주 친절하다. 마음에 들었다. “아...괜....” “더 자긴 뭘 더 자? 마노테 주제에 게을러빠진 건, 용서가 안 되. 다음부 터는 좀 더 일찍 일어나! 쯧, 저 얼굴 좀 봐. 살고 있던 데선 저렇게 해도 밥 먹을 수 있었을까? 빨리 세수나 하러 가라구.” 아침부터 꽤 긴 잔소리를 들으니 새삼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든다. 살아있는 인간이란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 중 분노란 감정은 가장 활기(?)스런 감정이다. [정말 성질 같아선 저 얄미운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3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3 21:48 읽음:298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4- <제 7막. 시나, 진짜 맛없는 아침을 먹다.(2)> 시나는 드래마를 째려보았다. 드래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글로인지 뭔 지 하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디트마가 차갑게 언 공기를 녹이려는 듯 어 색하게 하하- 웃었다. “자, 시나마 그러고 보니. 세수를 해야겠군요. 씻을 곳을 알려 드리지 요.” 그 말은 반가웠다. 눈물을 흘려서인지 얼굴이 끈적끈적했기 때문이었다. 머리도 감고 싶었다. 목욕까지 하고 싶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다. 디트마는 시나를 데리고 거실로 난 문을 통하여 뒷방으로 갔다. 그곳은 세면실인 것 같았다. 작은 세숫대야가 있었고 흰 수건이 걸려 있었다. 놀랍게도 비 누같이 보이는 물건도 있었다. 길다란 침상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의 용도는 알 수 없었다. 디트마는 거실의 화덕과 비슷한 화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화덕엔 솥이 올려져 있었다. “자 이 솥의 물을 사용하세요. 거실에서 계속 화덕을 사용했으니까 아직 물이 따뜻할 거예요.” “저, 저기 빗이라든가 거울 같은 것은 없나요?” 디트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빗이라면 이 선반 위에 있지만... 거울이라고요? 그런 것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요.” 아아, 역시 그런가... 당분간 자신의 얼굴을 보기란 틀린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지. 비누가 있다는 게 어디야.] “자, 그럼.” “네. 고맙습니다.” 디트마는 시나가 마음놓고 씻을 수 있도록 문을 닫고 나왔다. “정말 놀랬는데.” “뭐가?” 드래마는 수프를 젓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을 거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저 소녀 말야. 거울이 있냐고 묻던데?” 드래마의 수프 젓는 손이 잠시 멈추어졌다. “흥. 어디 상류계급에게 속해있던 마노테였나 보군.” “그래도... 희한해. 저렇게 익숙한 말투로 묻다니.” “아아... 베르노크인이었나 보지. 그 중 거울 만드는 곳에서 일한 거야. 그곳의 인간들은 유리에다 수은을 뒤집어 씌워 거울 만드는 일에 능하잖 아.” 드래마는 나름대로 추리를 하여 말했다. 디트마는 고개를 꺄우뚱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사치품이 이런 곳에 있을 것이라 생 각했을까? 마노테온에게 금지 물품인데?” “비누를 보고 여기가 마노테온의 집이 아니라고 착각했나 보지.” “비누야 소독하기 위해 있는 거고.... 또 내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있는 거니까... 그런데 말투로 보아 일루티온... 아니 하바티온이나 루이티온이라 고 해도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얘기는 못할 것 같아.” “그럼 일루젼 때문인가 보지. 귀찮아 디트마. 그냥 평범한 마노테야.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그래?” “하지만---” 그때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디트마는 수프를 보았다. 연한 갈색이었던 그것이 이젠 진한 갈색이 되어 있었다. “으악- 드래마, 타고 있잖아!!!!” 드래마가 젓는 걸 멈췄기 때문에 타고 있었다. 드래마가 짜증을 냈다. “이런! 디트마!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이렇잖아!!!” “계속 저어가며 말을 들었어야지!!” 두 남자는 서로를 탓하며 황급히 솥을 불 위에서 내려놓았다. 걸쭉한 수 프는 갈색으로 냄새와 함께 환상적으로 보였다. 디트마가 투덜거렸다. “으휴- 지겨워. 또 탄 것을 먹게되다니..” “끄응...” 드래마는 우울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탄 수프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다. 디트마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요리만은 20년이 지나도록 둘 다 에게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였다. 시나는 다 쓴 물을 움푹 패인 구석에 버렸다. 물은 도랑을 따라 빠르게 바깥으로 흘러갔다. 개운했다. 수건으로 닦았다. 비누는 아무 향기도 안 나고 거칠거칠했지만 쓸 만했다. 세면장은 거실로 통하는 문 말고도 뒤로 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시나는 호기심에 그 문을 밀어 보았다. 뒷마당이 나왔다. 뒷마당엔 텃밭과 함께 눈이 쌓여있었다. 놀랍게 눈 속을 뚫고 몇 몇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몸이 떨렸다. 아직 어스름이 완 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몸을 부르르 떤 시나는 하늘을 보았다. 동쪽하 늘이 짙푸른 색으로 번져있었다. [쳇, 뭐야 이런 새벽인데 늦게 일어났다고 뭐라 그러고] 시나는 투덜대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되게도 일찍 일어 나는 것 같았다. 시나가 안으로 들어가니 두 남자는 일그러진 표정을 하 고 앞에 놓인 수프그릇을 무슨 원수라도 진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런담? 그릇에 바퀴벌레라도 빠졌나?] 그때 디트마가 거실로 들어온 시나를 보고 말했다. “아, 다 씻었나요? 시나마 여기 앉아요. 어쨌든 식사를 합시다. 이게 음 식인지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 네.. 감사합니다.” 디트마의 말에 시나는 앉았다. 배가 고팠기에 냄새가 좀 이상했지만 감사 한마음으로 먹기로 했다. 맛이 좀 이상하더라도 배가 고프니 괜찮을 것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기분 나쁜 칙칙한 갈색의 죽(?)을 한 숟갈 가득 떠먹었다. 그리고 그것이 혀에 닿는 순간 뱉어내지 않기 위해 무진장 노력해야 했다. [욱! 이, 이게 뭐야? 미원을 한 푸대 쏟아 넣은 느끼한 맛에다 달짝지근하 고 쓰고 떨떠름하고....!!! 게다가 탄 맛까지?] 시나는 억지로 꿀떡 삼켰다. 그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이곳에선 이것을 아침식사라고 하는 걸까?! 미각이 틀린 거야 뭐 야?!어제 빵은 괜찮았는데?] 하지만 미각이 틀린 건 아닌 것 같았다. 드래마와 디트마 둘 다 그릇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둘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드래마- 솔직히 이야기 해봐. 너 여기다가 네가 좋아하는 칸자를 집어 넣었지? 그러니까 이런 달짝지근한 맛이 나잖아!” “쳇, 너는 어떻고! 네가 쿠냐냐를 잔뜩 집어넣은 바람에 느끼해서 먹지 도 못하겠다!” 그들은 또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누가 누굴 탓할 수 있는 입장 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곧 관두었다. “젠장! 오랜만에 끓인 아침 수프가 엉망이 되었군.” 디트마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딱하게 굳은 빵이 있겠지만 이것 보단 낫겠지. 이봐! 맛없으면 먹지 말라고! 뭘 그렇게 우거지상을 지으며 꾸역꾸역 먹고 있는 거야?!” 드래마가 시나에게 말했다. 여전히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였지만 수프를 안 먹어도 된다는 말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네!” 기운차게 대답한 시나는 하마터면 고맙다는 인사까지 할 뻔했다. 디트마 는 수프 접시를 치우고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빵을 꺼내왔다. 컵에다가는 나글로를 따랐다. 디트마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프를 못 먹게 된 것이 못 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시나는 자기 몫으로 주어진 빵을 뜯어 씹 었다. 꼭 판자를 씹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까 그 갈색 죽보다는 훨씬 맛있었다. 나머지도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묵묵히 빵을 씹었다. 그때 드래마가 시나에게 말했다. “이봐. 밥 먹고 나서 창고를 깨끗이 치우도록 해.” 디트마가 한 마디 참견했다. “드래마. 이봐가 아니라 시나마야. 뭐 네 종속자니까 그럴 마음이 있다면 ‘시나’라고 불러도 되고.” “‘시나마’!! 알았지?” 드래마는 디트마를 무시하고 시나를 보며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어.. 예.” 왜 치우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얻어 먹는 처지에 아무 일이라도 해야했다. 치사하고 더럽다고 이 집을 나가버 리면 그만이지만 나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나는 현실 을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왜요...?” 그래도 궁금하니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드래마는 짜증스러운 눈길로 그 녀를 보았다. “그럼 언제까지 디트마의 방에서 잘 꺼야? 오전 중에 창고를 비우면 오 후엔 벽난로를 설치하고 내일쯤이면 침대까지 들여놓을 수 있을 꺼야. 나 도 오전에만 일하고 들어올 거니까 빨리 빨리 움직여서 오전 중에 다 치 워놔. 알겠어?” 고맙다고 해야할지 어떨지 기묘한 심정이 되었다. 최신식 아파트에서 수 도꼭지에서 나오는 온수로 씻고 아침이면 가스레인지로 밥을 해 먹고 학 교를 가던 생활이 꿈만 같았다. [겨우 3일밖에 안됐는데...] 자신의 방을 마련한다는 소리에 자기가 살던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 다. 완전히 이 세계의 사람이 돼버린 느낌이었다. 드래마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 시나는 대답을 하기 싫었다. 이 세계에다 ‘자신의 것’을 만든다는 건 이 세계를 인정하고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한다는 소리 같아 우울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미적거리다가 어떤 소리를 들을 지 몰랐다. “...네... 알겠어요. 창고를 치울게요.” 시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 드래마는 만족한 듯 대답하고 벌떡 일어섰다. 빵을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 너무 딱딱해 비위에 안 맞는 듯했다. “뭘 어떻게 치워야 할지는 디트마가 가르쳐 줄 거야.” “어, 벌써 나가는 거야?” 디트마는 참을성 있게 빵을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응. 오늘은 서쪽 숲의 나무를 베기로 했거든. 다들 기다릴 거야. 가 볼 게.” “잘 갖다와.” 어느새 벗어 놓은 회색의 후드를 다시 걸친 드래마는 두건을 쓰고 앞부분 까지 천으로 막았다. 그리고 출입문 옆에 세워져 있던 도끼를 들고 밖으 로 나갔다. 등엔 하얀 천으로 싼 길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달고 있었는데 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다녀올게.” 드래마가 나가고 나자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휴..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구만." 디트마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시나도 일어섰다. 배고프긴 했지만 더 이상 빵을 씹다간 이가 부러질 것 같았다. 디트마는 빙긋 웃었다. “이따가 점심은 제시마가 뭐라도 가져 올 테니 배고파도 참아요. 자, 이 리로-이 곳이 창고예요. 일단 안에 있는 짐들을 모두 거실로 옮겨 놓는 것이 좋을 거예요. 공사를 하려면 넓은 게 좋으니까-” 디트마가 문을 연 곳은 말 그대로 창고였다. 온갖 짐들이 여기저기 멋대 로 늘어져 있었고 그 위엔 먼지가 가득 앉아있었다. 시나는 한숨을 쉬었 다. [도대체 난 어쩌다가 남의 집 창고나 치우는 신세가 된 거지? 하아---] 디트마는 시나의 손에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걸레를 건네주었다. “자, 열심히 하세요. 시나마. 도와주고 싶지만 오전 무렵엔 저도 아주 바 쁘거든요. 혼자서 할 수 있겠죠?” 참으로 친근감 있는 미소를 짓는 그였지만 시나는 별로 웃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시무룩한 얼굴로 ‘네’라고만 대답하고 말았다. 디 트마가 시나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고 자신의 진료실로 가버리자 시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창고로 들어섰다. 아까 침실에서 각오를 단단히 하긴 했는데, 그때 단단히 한 각오는 드래마의 차가운 태도를 대하는 데 다 써서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세계에서 살자면 아무래도 하루에 골백 번은 각오를 단단히 해 놓아야 할 것 같다. 시나는 드래마와 비교해 조금 도 꿀릴 것 없는 상대인 먼지들을 바라보았다. “안녕? 얘들아? 난 윤시나라고 해. 아 뭐, 내가 성을 갖고 있는 게 맘에 들지 않으면 시나마라고 부르고. 지금부터 너희들은 내 손에 깨끗이 치워 질거니 각오해라.” 인사를 하고 나니 기분이 괜찮아 진 것도 같았다. 시나는 맨 앞의 짐에 덤벼들었다. 무거웠지만 그럭저럭 옮길만했다. 진료실로 가던 디트마는 시 나의 인사말을 듣고 큭하고 웃고 말았다. 창고 안에선 뭔가 쿵당거리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짐을 떨어뜨린 듯 했다. 창고 안에는 안 깨지는 물건 만 있으니 괜찮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생각했다. [맙소사. 저 아가씨, 이제 보니 상당히 침착하잖아? 어젠 그렇게 울더니... 하하... 이거 재밌는 걸.. 큭큭... 어쩌면 드래마와 의외로 ‘상대성’이 좋 을지도....] 디트마는 강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시나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후후...] (계속)================================================== 이번에도 6개를 한꺼번에 올립니다...^^;;; 그런데 올리다보니, 이런 방식이 더 힘들군요... --;;; 차라리 이틀에 한 번 두 개씩 올리는 게 낫겠습니다. --;;; 으흠.. 그러나, 저러나.. 글을 올리기 위해 글을 읽다보니, 나 참... 챙피해 서... TT 지금 심정으론, 이런 글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입니 다... (얼마나 챙피한 지 아시겠지요? TT) 어쨌든, 이런 글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TT 정말루요... 어색하고 모자라는 부분이 있어도, 관대하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네? 필요없다고요? 그냥 p 누르겠다고요? 흑흑...... TT TT) 그럼, 글 올리는 방식을 바꾼 엔은, 다음 주 월요일 날, 15, 16편을 올리겠 습니다... <자기 글 읽느라 괴로운 엔... TT>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68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6 18:56 읽음:289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5- <제 8막, 창고 치우기와 교복의 운명(1)> 좁은 창고 안은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듯 먼지로 자욱했다. “콜록! 콜록!” 먼지 속에 있다보니 기침이 자꾸 나왔다. 몸을 힘들게 한 덕분에 잡생각 이 안 들어 좋긴 했지만 이러다 천식환자가 되어 돌아가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 안에 있던 물건들을 거실로 옮기는데도 먼지 한 바가지는 먹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쯤 안 치워야 이 정도로 먼지가 쌓일까? 한숨을 푹 쉰 시나는 입을 막은 천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먼지 구름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이왕 버린 몸 청소나 빨리 끝내기로 한 것 이다. “켈록! 켈록! 켈록! 켈----록!” 기침이 나오건 말건 벽의 먼지를 박박 긁어내리는데 디트마가 시나를 불 렀다. “시나마- 이리 나와서 차라도 마시고 잠깐 쉬었다 해요-” 귀가 쫑긋 섰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렇지 않아도 목이 칼칼했는데... 시나는 기쁜 마음으로 거실로 재깍 나갔다. 탁자에 앉아있던 디트마는 먼 지를 잔뜩 뒤집어 쓴 시나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먼지가 굉장하죠? 우리가 살기 시작한 뒤로 한 번도 안 치웠거든요.” 한 번도 안 치웠다는 말에 시나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랬군요... 어쩐지.. 여기서 한 백 년은 사셨나봐요?” 이렇게 말하고 먼지를 씻기 위해 세면실로 가는데 디트마가 시나의 농담 (?)을 알아듣고 웃었다. “하하하.. 백년이요? 먼지가 그 정도로 많았나요? 하하하... 여기서 오래 살긴 했지만 백년까지는 아니에요. 여기서 산 건 올해까지 합쳐 20년밖엔 안되니까..” 말을 마친 디트마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말이 우스웠던 것이다. '밖에’ 라니... 그는 하루하루를 100년 보다 더 길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시나는 손을 씻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디트마의 나이는 많아 봐야 25살을 안 넘어 보인다. 그건 드래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둘은 아 주 어릴 적부터 여기서 살았다는 말인데... 다른 가족들은 어디 가고 젊은 남자 둘이서만 살고 있는 걸까? 거실로 와 탁자에 앉으며 시나는 물었다. “디트마? 궁금한 것이 한가지 있는데요? 드래마와는 형제이신 가요?” 디트마는 시나의 그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와 내가 형제처럼 보입니까?” 시나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글쎄요.. 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아니거든요? 두 분, 전혀 닮지 않 았어요. 헌데 같이 사는 것을 보고 어떤 관계인가 해서 그냥..” 디트마는 씁쓸하게 웃었다. “관계라... 드래마와 나의 관계 말입니까?.. 뭐, 일단은... ‘친구’ 관계라 고 해둘까요....?. ....전 별로 바라지 않는 관계입니다만.” “네? 뭐라고요 디트마?” 디트마의 마지막 말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디트마가 일어서서 차를 가지러 가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무 것도. 차가 끓는군요. 차나 마십시다.” 시나는 디트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흐응, 그러니까 친구인 두 사람이 한 집에 산다는 거군. 평범하진 않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진료실 쪽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들어왔다. “디트마님, 약 병 다 정리했고요, 집에 들려서 아침에 부탁하신 빵도 가 져왔어요.” 고운 목소리의 소녀였다. 디트마는 그녀가 가져온 바구니를 받아들며 행 복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요. 제시마. 헤리마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줘요.” “감사하긴요. 수고비랑 재료비 일일이 다 주시면서요. 할머니랑 제가 더 감사하죠. 언제나 하는 일보다 더 후하게 주시잖아요?” “후후... 그렇진 않아요. 적당한 품삯이죠.” 디트마는 시나를 돌아보았다. “시나마? 제시마랑 인사해요. 제시마는 우리 바로 옆집에 사는 소녀예요. 가끔 나를 돕기도 하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갖고 오기도 하죠.” 시나는 방긋 웃었다. 또래의 소녀를 보니 왠지 친근감이 들었다. “안녕? 제시마? 난 시나... 아니, 시나마라고 해.” 로마에 갔을 땐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 시나는 자신의 이름을 ‘시나 마’로 소개했다. 시나의 말에 제시마는 생긋 웃었다. 그냥 보면 평범한 인상인데 웃으니 참 예뻤다. “안녕. 시나마? 이제 몸은 괜찮니? 어제 오후까지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 는데..” “으응. 괜찮아.” “제시마가 당신의 간호를 했거든요.” 디트마는 바구니 속의 빵을 그릇에 담으며 시나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제시마.” “고맙긴.. 건강해 보여 잘 됐다. 시나마.” 그러더니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근데, 너 회색 눈을 갖고 있구나? 눈감고 있을 땐 몰랐는데...” “응? 으응...” 갑자기 눈 색깔 이야기는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시마는 지금 무척 호 감 어린 눈초리로 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디트마는 그런 제시마를 보고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시마? 잠깐 놀다가요. 시나마랑 얘기도 할 겸.” “어, 전, 길쌈을 해야 하는데...” 디트마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놀다가요. 시나마의 친구가 돼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의 미소에 얼굴을 붉힌 제시마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탁자에 앉았다. 체 구보다 큰 털모자를 쓰고 끄떡이니 귀여웠다. 시나는 제시마란 소녀가 마 음에 들었다. 셋은 탁자에 자리 잡고 앉아 찻잔을 앞에 놓았다. 디트마가 빵을 먹으며 말했다. “이 빵 맛있죠, 시나마? 제시마의 할머니인 헤리마 할머니는 음식 솜씨 가 아주 뛰어나시죠.” 시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말대로 빵은 아주 맛이 있었다. 디트마는 차만 마시고 있는 제시마에게 말했다. “제시마? 제시마도 좀 먹어요.” “아니에요. 전 먹고 왔는걸요. 어서 드세요. 디트마님.” 그렇게 말하는 제시마의 얼굴은 계속 붉어져 있었다. 시나는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보았다. [흐응- 혹시....?] 시나는 디트마를 자세히 보았다. 덧문에서 들어오는 빛에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밀 빛의 머리에 청회색 빛의 눈동자가 늦은 오전의 빛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드래마만큼 강 한 인상은 아니지만 깨끗하고 친절한 인상이었다. [헤에- 디트마도 꽤 잘 생겼네?] 흐흥. 흐흥, 하며 시나는 웃었다. 이 옆집 소녀의 붉은 얼굴로 보아 아무 래도 그녀는 디트마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 갑자기 제시마가 말했다. “저기... 시나마-?” 그녀는 줄곧 궁금했다는 표정이다. “어제는 어떻게 하바티온의 마차에 뛰어들 생각을 한 거야? 드래마님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잖아. 안 무서웠어?” [하하- 얘야... 아직도 난 하바티온이 뭔지 모른단다. 그러니 뭐가 무서웠 겠니? 아이 목숨을 구해놓고 보자는 생각으로 그냥 뛴 거지..] 시나와 같은 경우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지 금까지 들은 말을 종합해 보면 ‘하바티온’이란 이 세계의 ‘범’같은 존재인 것 같다. 하지만 시나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사람목숨이 어떻고 하는 말은 어제 일로 보아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냥 적당히 대답하기로 했다. “으응... 얼음의 숲에 있다 왔더니 어떻게 됐었나봐.” 사교상의 말이었는데 디트마는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시나마! 일루젼과 기억상실의 치료는 정상이 아닌 것을 인정하 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멋지군요!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그렇게 심 하게 걸린 건 아닌가 보군요?! 시나마?”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긴 했지만, 정상이 아닌 것을 인정하라니... --;더 이상의 칭찬은 사양하기로 했다. 제시마는 쯧쯧 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 다. “도대체 애초에 얼음의 숲 같은 데는 왜 들어간 거야? 거긴 하바티온보 다 더 무서운 곳인데? 좀비심장이라도 가졌나 보지?” [윽!] 또 좀비심장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좀비심장이란 말은 시나 세 계의‘간덩이가 부었다’라는 말과 동의어 같다. 디트마가 하하, 웃었다. “제시마. 시나마는 우리 세계의 사람의 아니에요. 얼음의 숲도 차원의 틈 에 빠져서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디트마의 말을 들은 제시마의 눈이 커졌다. “차원의 틈이요? 그럼 시나마가 세계의 벽을 통과했다는 말이에요? 마 노테온은 세계의 벽을 통과하지 못하잖아요?!” “한 번 정도는 마노테온도 가능해요.” “정말이요?! 와-! 나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얘기로 들었지만...” 시나는 그들의 말을 흥미롭게 들었다. [차원의 벽? 어제도 디트마가 차원의 벽, 어쩌고 했었지? 난 마노테온이 아니니(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또다시 통과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한 일 아닐까? 그럼 우리 세계로 돌아갈 수도...] 그때 제시마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굉장해! 시나마!” “나, 세계의 벽을 통과한 사람 보는 건 네가 처음이야! 네가 살던 곳은 어디였지? 세계의 벽을 통과할 땐 어떤 기분이 들었어? 우리와 다른 세 계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로 들었는데! 그곳은 어때? 우리 세계와 비슷한 곳이야? 어쩐지- 아주 신기하게 생긴 속옷을 입고 있다고 했지! 너무너무 하얗고 너무너무 이뻤는데-!!!!” 디트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시나의 몸과 제시마를 번갈아 보았다. 시 나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신기하게 생긴 속옷? 아, 그러고 보니 제시마가 내 옷을 갈아 입혔구나. 디트마의 조수 노릇도 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때 봤나보지?] 시나는 자신의 옷을 갈아 입혀 준 친절한 소녀에게 생긋 웃었다. “어- 저... 난... 지구라는 세계에 있었는데... 여기보다 문명이 발달한... 아, 지역에 따라 틀리지만..” 제시마는 시나의 말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문명’이 뭔데?” 문명이 뭐냐고? 시나는 골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니까 문명은 말이지.. “문명은... 물질적으로 더 풍부하고 살기도 더 편리하다는.. 음, 맞아. 그 런 말이야. 여기보다 모든 것이 더 편리하지.” 디트마는 문명에 대해 설명하는 시나를 감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호오? 이 소녀는 어쩌면 베르노크인으로, 거울 만드는 집에 살면서, 학자 의 시중을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또래 소녀들은 잘 안 쓰는 용어를....] 시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음... 그래, 맞아! 여기만 하더라도 거울이 없더라고. 우리 세계엔 거울 없는 집은 하나도 없거든?” 이 말을 들은 디트마는 입을 꾹 다물고 창백한 표정으로 시나를 보았다. 이미 감탄한 표정은 온데 간데 없었다. [거울 없는 집이 하나도 없다고? 아아.. 엘이시여...!] 슬프게 엘을 부른 디트마는 속으로 아까 생각했던 것을 수정했다. [시나마는 가벼운 일루젼과 기억상실이 아니구나.., 아주 심한 정신장애 야..불쌍하게시리..] 디트마가 슬픈 표정으로 시나를 보는데 그 옆에 앉아 있는 제시마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아, 정말? 거울 없는 집은 하나도 없다고? 굉장한데?! ..근데? 그 ‘거울’이란 게 뭔데?” 거울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감탄부터 하는 제시마였다. 시나는 하하 웃었다. “거울을 모르니? 제시마? 얼굴 보는 거 말야. 한 번도 본적 없니? 여기 선 그걸 거울이라고 안 하나보지?” “얼굴 보는 거? 아아-! 그게 뭔지 알았다! 네가 말하는 게 샘물 맞지?! 호호.. 여기선 얼굴 비춰보는 걸 ‘샘물’이라고 해! 샘물이 각 가정마다 하나씩 있다니 대단하다 시나마! 엄청나게 좋은 세계네?” 엥? 샘물? 시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웬 샘물? 이 세계엔 거울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건가? 하지만 아 까 디트마는 아무 소리 안 했는데?] 그 디트마는 지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제시마, 거울이란 건 샘물이 아니에요. 그건 5계급 이상만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에요. 게다가 무척 비싸서 우리 마노테온은 평생가도 구경 못하는 물건이죠. 그러니 아예 관심 가질 필요 없어요.” 그의 말을 들은 시나는 깜짝 놀랐다. 뭐라구? 평생가도 구경을 못해? 그 흔한 거울을? 제시마는 혼란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 하지만, 시나마는 봤다잖아요? 전에 세계엔 집집마다 있었다고...” 디트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시마? 시나마의 말을 전부다 믿어선 안돼요. 시나마는 얼음의 숲에 들어간 후유증으로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걸려 있으니까. 그래서 전의 세 계에 대한 기억이 환상과 뒤섞여 있어요. 잊은 기억이야 차차 돌아오겠지 만 환상과 섞인 기억은 평생동안 헷갈릴 거예요.” 그의 말을 들은 시나도 한숨 지었다. [쳇! 또 저 소리네! 우리 세계가 진짜로 있다는 것을 알면 어쩌려고!] 제시마는 놀람과 동정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 맞아 그랬지! 시나마가 있던 곳이 얼음의 숲이었지... 다른 세계 사 람인데 놀라 까먹었네. 우음... 아, 그래! 잘됐다! 시나마? 넌 괜찮아.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마을 안에 다른 세계인이 들어오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법이랬어. 그게 관습이래. 마을 사람들이 이 사 실을 알면 널 도와주려고 할거야. 얼음의 숲에 들어갔다고 널 멍청한 계 집애라고 욕한 사람들도 사정을 알면 틀림없이... 아, 아차. 미, 미안.. 시나 마...? 멍청한 계집애라고 한 건.. 그러니까... 어른들이..” “괜찮아.” 시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그렇군 이곳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소문이 나 있 었군. 디트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나마, 얼음의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누구라도 멍청이라는 말을 듣게 되요. 하지만 제시마의 말대로 당신의 사정을 알면 사람들도 당신을 이해 하겠죠.” 제시마가 기운을 얻어 외쳤다. “그, 그래..! 더구나 넌 드래마님의 아내가 될 거잖아!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널 좋아하게 될 거야. 걱정 마, 시나마.” 제시마의 말에 디트마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고 시나는 인상을 찡그렸 다. “난 그 사람의 아내가 될 생각 없어!” 시나가 약간 화를 내며 이야기하자 제시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그 [은혜의 법] 이야긴 하지도 마. 꼭 그걸 지켜야 한다면 여동생 정도로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 ‘은혜의 법’인지 뭔지 이젠 아주 지긋지긋하다. 제시마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 하지만 넌 드래마님한테 맨몸도 보였잖아!!!” 제시마의 새된 소리에 디트마는 빵이 목에 걸려 캑, 캑 숨막히는 소리를 질렀고 시나는 나글로 차에 사레 들릴 뻔했다. “뭐, 뭐?!!” “뭐라고요?!” 디트마와 시나마가 동시에 소리쳤다. 제시마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냐.. 이 말은 하면 안돼요. 우리 할머니한테도 안 했어요. 드래마 님이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디트마가 상냥+교활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제시마. 얘기하세요. 당신이 그 이야길 해도 드래마는 괜찮다 고 할 거예요. 알다시피 난 드래마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6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6-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6 18:57 읽음:2905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6- <제 8막, 창고 치우기와 교복의 운명(2)> 제시마는 심한 갈등 가운데 끙끙댔다. 하지만 디트마를 좋아하는 상태였 으므로 금방 그 갈등을 끝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무엇을 부탁하는 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문 법이니까. “웅.. 하긴... 디트마님은‘남’이 아니니까... 드래마님이 이 이야긴 ‘남’에겐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디트마는 활짝 웃었다. “후후후. 그래요. 전 ‘남’이 아니지요. 아까 그 속옷얘기부터 해보세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인데.. 도대체 어떻게 당신이 시나마의 속옷 을 볼 수 있었던 거죠?” 시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디트마를 보았다. 어떻게 내 속옷을 봤냐고? 그 럼 디트마가 제시마한테 내 옷 갈아 입히라고 시킨 거 아니란 말이야? 그 럼 누가 시켰지? 드래마가? 시나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인데 제시마는 디 트마의 미소에 혼미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그, 그저께, 집에 있는데 드래마님이 와서, 도와줄 수 있겠냐고 하셨어 요... 그리고 제 옷도 한 벌 가져오라고 하시고요. 드래마님의 얼굴 표정이 보통이 아니어서 난 무슨 큰 일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이 집에 와보니 디트마님은 안 계시고 시나마가 드래마님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죠. 드래 마님이 말씀하시길 얼음의 숲에 들어간 골빈 녀석이라고....” 그 ‘골빈 녀석’은 얼굴을 찡그렸다. 디트마는 무척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시마는 시나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녀석’이라구 하시기에 전 남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드래마님이 저 한테 시나의 젖은 옷을 내 옷으로 갈아 입히라고 했을 때는 무척 놀랐어 요. 왜 남자애한테 여자 옷을 입히냐고요.... 그랬더니 드래마님이...” “그랬더니, 드래마가요?” 디트마가 생긋 웃으며 제시마의 말을 재촉했다. “저, 저기, 시나는 여자라고... 무척 화가 나서 말씀하셨는데.. 저, 저, 그 래서... 시나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쳤더니... 윗도리만 벗겨져 있는 게... 드래마님은 남잔줄 알고 옷을 벗긴 거니까, 남들한테는 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전, 그냥 시나의 젖은 옷을 마저 갈아 입히고.. 그냥 우리 집으 로 돌아왔어요. 드래마님은 무척 화를 내고 계셔서 곁에 있는 게 좀 무서 워서.......” 제시마의 설명이 끝나고 시나의 얼굴은 시뻘개져 있었다. 교복 속에는 브 래지어와 얇은 러닝만 입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드래마가 그것을 다 봤다 는 얘기였다. 디트마는 웃음을 참는 기묘한 표정으로 시나를 힐끔힐끔 보 았다. “그러니까.. 시나마는 원래 이 옷을 입고 있었던 게 아니었단 말이죠? 하 핫!! 하.. 아, 음, 음.. 하, 하긴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죠. 계속 남잔 줄 알았다고 말한 주제에 어디서부터 여잔 줄 알았을까.. 하고... 게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데 옷차림은 영락없이 클로니아 인이었고......” 시나는 빨간 얼굴로 부루퉁해서 제시마에게 말했다. “치마를 입고있는 거 봤으면 여잔 줄 알았을 거 아니야!!!! 드래마도 너 무 이상하다!!” 시나의 말에 제시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치, 치마? 치마가 뭔데?” 제시마의 말에 이번엔 시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치마도 모른단 말야?! 킥킥거리며 웃고 있던 디트마는 제시마에게 치마에 대하여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오늘 제시마는 꽤 여러 가지를 배우고있었다. “쿡쿡쿡.. 제시마? 치마라는 건... 하체를 천 하나로 빙 둘러서 감싼 것을 말하는 거예요.” 디트마의 말에 제시마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거요! 그게 치마군요! 그거 알아요! 그저께 시나마가 입고있던 이상한 옷이 ‘치마’란 거군요. 맨다리가 그대로 다 보이던데...” 제시마가 시나를 보았다. “....근데? 그걸 봤는데 왜 여잔줄 알아야 하는 거지? 이상하...” 그렇게 말하던 제시마의 얼굴이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듯 점차 붉어지 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마 말하기 어렵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시나마...? 그, 그러니까.. 그건 다리를 감싸주지 않으니까.. 미, 밑에 서 보면... .... 밑에서 보면.... 그, 그러니까... 나, 남잔지 여, 여잔지 아, 알 수 있는 거야..?” “푸왓핫하하하하-----” 디트마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밑으로 보면 알 수 있다고요? 푸와하하핫!!!” 으악!!!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떻게 된 거야?!!!! 시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생각했다. 거울이 없는 거 까지는 이해한다! 치마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 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또 무슨 변태 같은 소리란 말인가!!? 시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디트마는 말하랴 웃으랴 엄청 힘을 쏟으며 이야기했다. “아하하하.... 미, 밑으로 보면 알 수 있냐고요? 하하.. 아니에요. 아마도 그건 아닐껍니다. 하하하... 아마, 시나마의 세계에선 치마를 입는 건 여자 뿐이었나 보죠. 세계마다 입는 옷 모양이 조금씩 틀리거든요? 와하하하핫 ---! 하하하핫” 제시마는 몹시 민망한 표정으로 ‘그런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시나는 별 해괴망측한 소리를 다 들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나 보이는 건 디트마 혼자였다. 시나마는 정말 이 사람들이 안 보이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드래마가 남자인줄 알고 자신의 옷을 벗겼다 는 것도 기가 막혔다. 바지를 입으면 그렇다고 쳐도 치마, 그것도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남자로 오인 당하기는 처음이다. “와하하하하... 세상에.... 드래마.. 이 이야길 숨기고 있었다니.. 세상에... 그럼 시나마의 옷은.... 옷은.... 옷.... 옷?” 갑자기 디트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는 신음소리를 뱉었다. “끄응... 그럼 그게 시나마의 옷이었단 말인가....” 시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디트마가 왜 이러는 거지? “디트마...? 제 옷이 왜요? 아, 그러고 보니 제 옷 못 보셨어요? 저기... 치마는 진한 청색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거 고요 블라우스는 분홍색 체크 무늬가 있는 건데, 제가 자던 방에는 없었거든요..?” 디트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시나를 보았다. “저기.. 그게....” “예..?” “디트마님!!!!” 진료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한 남자가 씩씩대며 들 어왔다. 사실 이 때 남자가 들어온 것은 무슨 짜고 한 것처럼 참, 기가 막 힌 타이밍이었다. 디트마의 특별한 설명 없이도 시나는 자신의 교복이 어 떻게 운명을 달리했는지 똑똑히 자신의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이 붕대 좀 다시 매 주세요!! 자꾸 흘러내리기에 마누라한테 매보라고 했더니 저 바보가 글쎄 오히려 더 풀어놨지 뭡니까!!! 에잉 젠장!!!” 남자는 시나의 교복 블라우스를 붕대라고 부르며 신경질적으로 붙잡고 있 었다. 디트마는 남자를 무시하고 시나를 슬쩍 보았다. “그러니까... 어젯밤 자리를 까는데 드래마의 침대 근처에 저게 떨어져있 는 걸보고... 드래마가 또 붕대감을 가져왔구나 생각해서... 설마 그게 당신 옷이라곤 생각 안 했죠.. 마침 붕대도 모자라고 해서...” “....” 어쩐지 어젯밤 시나는 잠이 막 들기 전 디트마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뭔가를 솥에다 삶고 처덕, 처덕 두드려 빠는 소리였는 데 아마 그게 시나의 교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전 중에 천을 부욱, 부욱 찢은 소리는 내 교복을 붕대로 만드 는 소리였겠지?] 정말 잽싼 행동력을 갖고 있는 디트마였다. 하룻밤 사이에 교복 한 벌을 완벽한 붕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종종 드래마가 면으로 만든 옷을 가져왔기 때문에... 아, 당신 옷은 면 치곤 좀 질겼지만... 특이한 종류라고 생각했죠... 그, 치마하고 조끼는 우 그러들어서 그냥 버렸는데.... 그래서 웃옷만 붕대로 만들었어요... “ [...흑..흑... 면이 아니니까 그렇죠... 그거 합성섬유라고요... 블라우스는 거 의 면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한다고 붕대가 교복으로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슬픈 마음은 어쩔 수 없었 다. [그거 비싼 돈주고 맞춘 거였는데..... 우리 학년 밑에서는 디자인 바뀌어 서 이제 그런 디자인으론 나오지도 않고... 흑.... 마음에 드는 옷이었는데] “디트마님!!!” 그때까지 완전히 무시당하며 서 있던 사내가 자신을 봐달라는 듯 소리쳤 다. 디트마는 짜증을 냈다. “루치마! 가만히 좀 있어봐요!! 진료실에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루치마라고 불린 남자는 덩치나 어투에 비해 성질은 순한지 네-하고 말 하더니 진료실로 쫄쫄쫄 들어갔다. 아마도 디트마가 화를 내어 놀란 것 같았다. 디트마가 쩔쩔매는 것을 보고 위축되어 있던 제시마도 우물쭈물 하더니 말했다. “저... 시나마? 내 옷 너 가져. 네 옷이 그렇게 됐으니까...” 디트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시마는 자기도 옷이 몇 벌 없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제시마. 당신의 옷은 돌려 드려야죠. 시나마의 옷은 내가 마 련하겠어요. 마침 내일은 사흘 장이 열리는 날이니까.. 가서 옷을 몇 벌 사올게요.” 하지만 시나는 아직도 도깨비 불 같은 것을 펄펄 날리고 있었다. 디트마 는 입맛을 다셨다. [소중한 옷을 그렇게 처리했으니 속상한 것도 당연하겠지..] 그때 시나는 억지로 웃으며 억지로 말했다. “괜찮아요.... .... 찢어지고 더러웠을 텐데 붕대로라도 재활용됐으니 교복 의 종말 치곤 괜찮네요.. 교복도 고마워했을 거예요.” 디트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재활용? 교복?] 이 소녀는 발음도 희한한데다 가끔 이상한 단어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 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시나마. 내가 좀 더 잘 생각했더라면...” “괜찮아요.”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억지로 웃었다. 디트마에게는 아무 원한이 없었다. 원한이 있다면 드래마에게 있을 뿐이다. [드래만지 도롱뇽인지!!!! 도대체 남의 교복은 왜 바닥에 팽개쳐 둔 거야 --?!!] “시나마?” 디트마와 제시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나를 보고 있었다. 시나는 아 깝고 허탈한 마음을 감추고 그들이 안심하도록 웃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옷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니까. ...전 창고 나 마저 치울게요.” 디트마는 일어서는 시나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 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요. 정말 미안해요.” 시나는 괜찮다는 표정을 디트마에게 지어 보인 뒤 제시마에게 말했다. “제시마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봐.” “으응. 그래. 나중에 보자. 시나마.” 시나가 창고로 들어가자 제시마도 쭈뼛쭈뼛 일어섰다. “저기... 저도 가 볼게요. 디트마님. 이제 오전 중에 시키실 일은 다 끝났 죠?” “네. 약병 정리도 끝났고 내일 장에 가서 팔 약초도 다 분류해 놨으니까, 오늘 일은 없어요. 잘 가요. 제시마. 오늘 수고했어요. 할머님께 음식 맛있 었다고 전해 드리고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제시마까지 나가버리자 디트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창고 쪽을 힐 끔 보았다. [다행히 많이 화난 거 같지는 않네. 여자들은 옷에 많이 집착하는 걸로 아는데.... 착한 소녀군...] 디트마는 얼굴을 좀 찡그렸다. [음. 근데.. 드래마는.... 도대체 왜 시나마의 옷을 그렇게 떨어 뜨려놓은 걸까...? ...? 그 참? 이상한걸..?]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옷이야 다시 사줘야 할 것 같고....]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쿡쿡 웃기 시작했다. [하아.. ...이것참.. 요근래 들어 이렇게 웃는 건 정말 처음이라니까... 쿡 쿡... 뭐? 남에겐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드래마... 그런 일이 언제까지나 숨겨질 거라고 생각했나? 시나마의 맨몸을 봤다고? ...이거야.. 완벽하구 만.. 후후.. 넌 피할 수 없을 거야. 난 시나마로 널 끝까지 몰아붙일 생각 이거든? 후후.. 불쌍한 드래마.] 디트마는 그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가지고, 묵념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음. 그래.. 이걸로 협박해서 옷값은 전부 다 드래마한테 물게 하자. 음.] 활짝 웃은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 진료실로 갔다. 아마 루치 마는 그 급한 성격에 초조해서 죽으려고 할 것이다. “휴-” 시나는 창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왠지 허탈했다. 자신이 현실세계의 사람이란 증거가 이렇게 하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옷감이라도 한 조각 달라고 할 걸 그랬나....] 힘없이 웃은 그녀는 품속에서 엄마의 목걸이를 꺼냈다. 덧문에서 들어온 빛에 붉은 색 루비가 아름답게 빛났다. 어제 이것을 보고 어디에서 훔친 거냐고 묻던 드래마 생각이 났다. [쳇! 그 사람은 이걸 보고 내가 훔쳤다고 의심했었지? 뭐 그렇게 삐뚤어 진 사람이 다 있지? 내 옷도 바닥에다 팽개쳐 놓고. 으휴- 분명해! 성장 과정이 아주 불우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생기기는 멀쩡하게 생겨 갖고... 쯧. 그러고 보면 제시마란 아이는 아주 탁월한 선택을 한 셈 이군. 그래, 그래. 드래마 보단 디트마가 훨 낫지. 나도 둘 중에 누군가를 선택하라면 당연 디트마다!!] 하지만 시나보고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나 자 신도 특별히 무슨 선택 같은 것 할 기분 아니었다. 김제준에게 깨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남자를 좋아 할 여력 같은 건 없었던 것이 다. 이것은 그저 드래마가 별로인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생 각이었다. 시나는 흥! 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생각의 결론은 ‘드래마는 밥맛이 떨어지는 사람이다’로 내렸다. 앞으로 되도록 상종 안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밥맛이 떨어지는 사람이 자신의 속옷차 림을 봤다니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떡하랴. 시나는 그냥 이것도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난 가슴도 절벽인데.. 뭐.. 창피할 것 없어.. 그래. 볼 것도 없는데 뭐.] 사실은 절벽이든 아니든 가슴을 보였다는 게 부끄러운 거지만 시나는 잊 기 위해 애써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럼! 괜찮고 말고!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아아아...! 어? 저게 뭐지?] 계속 자기 최면을 걸던 중 시나는 방구석 먼지더미 속에서 책 같은 것을 발견했다. 아까는 해의 길이가 짧아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는데 해가 길게 들어와 구석까지 비추자 눈에 띈 것이다. “와- 이 세계에도 책 같은 게 있네!” 너무 신기했다. 먼지가 날리지 않게 조심스레 들어 그것을 덧문 바깥에 대고 탁탁 털었다. 표지는 다 낡아서 너덜너덜했는데 글씨는 그래도 선명 했다. 거기 써진 글씨는 당연히 한국어가 아니었는데 영어처럼 구불구불 하게 생긴 처음 보는 글자였다. 놀라운 것은 시나가 그것을 읽었다는 것 이다. [‘일루트 렌의 클로니아 궁정기사 이야기’...라... 신기하네. 내가 어떻게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거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글자를?] 그러고 보니 자신은 말도 자연스럽게 하고 듣기도 한다. 그 동안 진지하 게 생각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새삼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까지 시나는 자신의 머리 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면 자연스레 같이 떠 오르는 발음들을 선택하여 말을 엮었다. 그것은 시나가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럼 그것들은 신기하게도 언어 가 되었고, 단어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졌다. 시 나는 자기가 어떻게 이 세계의 언어를 듣고, 말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한국어로 이야기해보았다. “나는 윤시나입니다.” 이 세계의 언어로 얘기해 보았다. 그 발음을 옮기자면 이렇다. “라크노 이엠 윤시나르.” 시나는 이 말을 자연스럽게 ‘나는 윤시나입니다’로 알아듣는 것이다. [끄응--- 내가 천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배우지도 않은 언어까지 말 하다니...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서 물(?)이 들은 걸까? 도대체 뭐가 뭔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풀 수 있는 길이란 없었으므로 시나는 그 냥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말이 통하고 글자까지 읽을 수 있다니 잘 된 거지 뭐.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데 말까지 안 통하면 오죽 하겠어?” 그녀는 참으로 낙천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경쾌하게 생각한 시나는 책을 휘리릭 들쳐 보았다. 소설인 것 같았다. [잘됐네. 소설이면 이 세계의 문화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겠는걸.] 기쁜 마음으로 책을 자신의 옷 속에다 쑤셔 넣었다. 창고에 버려 둔 것을 보니 별로 귀중한 책 같지는 않았다. 갖다가 읽는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 다. 그리고 나서 바닥과 벽을 노려보았다. 바닥은 물론이거니와 굴곡이 진 벽 에도 먼지가 잔뜩 있었다. 오전도 다 끝나가니 빨리 치우기로 마음먹었다. [드래마한테 잔소리 듣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이왕 빌붙어 사는 집 욕 얻 어먹고 살진 말자!] 낙천적인데다 삶의 지혜(?)도 무척이나 발달한 시나였다. ^_^ (계속)================================================== 음.. 요즘 키우는 병아리들이 먹이를 잘 먹어 굉장히 기쁩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럼, 내일 모레 수요일에 또 올리겠습니다...^^ 열심히.. <어쨌든, 병아리들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83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7-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8 21:01 읽음:288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7- <제 9막. 시나, 춤을 추다.(1)>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광장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시끄러웠다. 사람들 은 저마다 옹기종기 모여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촌장은 헛기침을 하고 광장 앞에 있는 단상에 올라섰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한 젊은 남자가 손에 든 징을 뎅-하고 울렸다. 징 소리에 웅성거리며 이야기하던 소리가 딱 그쳤다. “에헴- 바리스 마노테오나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우리 마을에 새로운 거주민이 된 한 소녀를 환영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시나마양 이리로 올라오세요.” 촌장 뒤에 서 있던 시나마는 단상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모두 시나를 향해 주목하고 있었다. 합창부에서 단체로서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단독으로 주목받는 것은 처음이다. 학생이 단상에서는 경우라면 주로 상을 받을 때인데 시나는 그런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었기 때문이 다. 약 5, 600명의 사람들이 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떨리네.] “시나마양을 소개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엔 소문은 들어 이미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 소녀는 얼음의 숲에서 구조되어 우리 마을로 왔습니 다.” 사람들 가운데 놀람의 소리가 퍼졌다. 얼음의 숲이란 곳은 확실히 사람들 에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인 것 같았다. 시나는 둘레둘레 사람들을 돌아다 보았다.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털옷에다 가죽바지를 입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마을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털가죽으로 만든 바지를 즐겨 입었다. 아마도 추위 때문인 것 같 았다. 밖에 나갈 땐 꼭 모자를 썼는데 그건 지위 고하를 막론한 클로니아 의 관습이라고 디트마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시나도 그와 똑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디트마가 제시마에게 챙겨주도록 부탁한 것 이다. “에... 그리하여 일루젼과 기억상실에 빠지게 되었는데.. 어제 하바티온 의 마차에 덤벼든 건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일루젼이니 기억상실이니 하는 이야기다. 시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자기를 분명히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주 제에 시나가 현실세계의 일을 얘기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시나를 괴물 보듯 보았기 때문이다. 촌장의 말에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얼음의 숲에 들어갔다 온 ‘좀비심 장’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표정들이었다. “얼음의 숲에 들어가는 건 타고난 멍청이나 천치가 아니면 하지 않을 일 이지만, 우리는 시나마양을 그렇게 부를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나마양 은세계의 벽을 통과하여 얼음의 숲으로 떨어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 어 린 표정으로 시나를 바라 봤는데 그런 사람들은 이미 소문을 들어 시나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오늘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시나를 소개하기 위해 특별히 모든 일을 일찍 끝내게 했었다. 그래서 광장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시나는 자신 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사람들을 또한 흥미롭게 보았다. 친근하고 순박한 표정들의 사람이었다. 동양인과 서양인을 섞어 놓은 듯한 생김 들이었는 데, 모자 밑에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머리색이라든지 눈 색이 참으로 다양한 것 같았다. [흐응... 정말 가지가지 색이 많네. 특히 저 앞의 여자는 무슨 눈이 토끼 눈 같이 빨갛... 빨갛? 빨간 눈?!] 시나는 기겁을 하고 놀랐다. [으악----!!! 눈이 빨개!!] 40살 정도 되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쳐들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빨간 눈을 번뜩이며 시나를 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시나는 사람들의 눈을 더욱더 자세히 보았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갈색이 거나 연 푸른색의 평범한 눈동자였다. 하지만 아주 소수긴 하지만 분명 별의 별 색의 눈동자가 다 있었다. 노란 색, 초록색, 파란색, 빨간 색, 주황색, 보라색, 분홍색!!! 흡사 물감을 풀어 논 팔레트를 보고 있는 느 낌이었다. 게다가 그 위에 자리잡고 있는 눈썹 색들도 만만치 않게 다양 했다. 파란색, 갈색, 붉은 색, 노란 색, 주황색!!! 모자를 쓰고 있어 알 순 없었지만 그걸로 보아 그들의 머리색도 역시 다양할 것 같았다. [마, 맙소사... 여, 여기.. 정상이 아냐!!!] 너무 기괴했기 때문에 추웠는데도 불구하고 시나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 다. “자! 시나마! 이제 한 마디 하도록 해요.” 촌장은 시나에 대한 긴 소개를 마치고 이제서야 시나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시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무.....물감 님들!!! 안녕하세요?!” 큰 소리로 말을 하고 나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벙찐 표정으로 시나를 쳐 다보았다. 그래서 시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맙소사! 웬 물감!!! 단상 밑 에 있는 디트마의 미소 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그 옆의 드래마 얼굴도 만만치 않다. 하긴 그는 처음부터 시큰둥한 얼굴이었으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는데 얼굴 근육을 조금만 사용해도 더 리얼하게 얼굴을 일그러 뜨리고 있었다. 촌장은 벙찐 얼굴로 시나를 보았다. “물감? 물감이 뭡니까?” [이 세계 사람은 모르는 것도 참 많네!] 하지만 이 세계 사람들의 무식을 나무랄 때가 아니었다. 5, 600명의 사람 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감이 뭘까 무척 궁금해하는 표정들이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니 더욱 물감같이 보였다. “어.. 저 그러니까 물감은...” 하지만 차마 당신들의 눈이 물감 풀어 논 팔레트로 보였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여기 멀거니 서서 물감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 다. 그들이 알아듣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제시마처럼 거울을 설명하는데 샘 물? 하고 나오는 수준일지도 몰랐다. [쳇! 물감도 무슨 5계급 이상만 쓰는 물건인가?] 하는 수 없었다. 이럴 땐 차라리 그냥... 시나는 눈물을 머금었다. “어, 저기... 제, 제가 얼음에 숲엘 갔다왔더니 제정신이 아닌가봐요. 물감이 뭔지 저도 모르겠네요.” 촌장이 벙긋 웃었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였는데 친근감 있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아, 그랬군요. 무슨 소린가 했죠. 이해합니다. 시나마. 그럼 아직 인사 하기엔 무리인 듯 하니 저의 환영의 인사말로 마치죠.” 그럼 결국 촌장 혼자 다 말한 셈이었다. 도대체 자신을 왜 올라오라고 한 건지 시나는 이해가 안 갔다. [실물을 놓고 설명회를 갖은 건가?] 촌장이 말했다. “고아와 과부를 돕길 좋아하고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가 먹을 음식과 입 을 의복을 제공하는 엘의 이름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시나마! 당신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부터 우리마을의 일원으로서, 또 존경하는 드래마님 의 종속자로서 우리마을 사람들의 무한한 도움과 가르침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예에. 가, 감사합니다.” 와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곧 여기저기서 부인들이 음식을 날라 왔다.. 광장에 커다란 불이 피워지고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촌장과 시 나가 내려가자 단상은 치워졌다. 점점 어둑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횃불 을 밝혔다. 몇몇 사람이 거칠지만 흥겨운 음색이 나는 악기로 음악을 연 주하기 시작했다. 기묘한 가락이었는데 차갑고 청명한 공기에 잘 어울리 는 음악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촌장이 무한한 도움과 가르침이라고 했었는데 시나는 이미 그 무한한 도움과 가르침 중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 솜씨 좋은 남자 몇 명이 드래마를 대신하여 창고(지금은 시나의 방이 되었다.)에 벽난로를 달아주고 침대까지 만들어 준 것이었다. 드래마는 그렇게 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극구 사양했는데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새삼 오후의 일이 떠올랐다. “다녀왔어-” 드래마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고 있던 도끼는 제 자리에 놓았다. 거실 엔 여러 가지잡동사니가 쌓인 외엔 아무도 없었다. 드래마는 창고를 들여 다보았다. 거기도 아무도 없긴 했는데 치워놓아서 깨끗했다. 드래마는 혼 자서 중얼거렸다. “좋아. 오늘 안에 설치하려면 빨리 움직여야겠군” 그때 디트마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여어. 드래마 왔군.” “응. 시나마는 어디간 거지?” “세면실에서 먼지를 씻고 있어.” “그래.” 드래마는 원래 창고에 있었지만 지금은 거실로 나와 있는 연장 중 망치와 톱을 집어들었다. 디트마는 그런 드래마를 싱글싱글 웃으며 쳐다보았다. “드래마? 난 내일 장에 갈 예정이야. 마노테온 시장이 아리움 마노테오 나에서 열리거든.” “그래? 잘 갔다와. 새삼스럽게 뭘 그런걸 나한테 얘기하고 그래?” 드래마는 벽을 부수면서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정확하게 벽난로를 설치할 만큼만 부술 것이다. 조금 있다가 마을에서 벽난로를 가장 잘 만들기로 소문난 마노마가 와서 도와준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 면 될 것이다. 하지만 드래마의 그런 무관심 속에서도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디트마는 얘기했다. “근데 내일 장에서 시나마의 옷을 몇 벌 사야할 것 같아. 지금 입고있는 옷 하나만 갖고는 역시 안되잖아.” 디트마의 말에 망치를 휘두르던 드래마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아아- 그래..? 그렇군. 맘대로 해.” 드래마의 목소리는 좀 이상했다. 디트마는 씨익 웃었다. “그런데 말야 드래마?” 디트마의 말은 은근하고 다정했다. “도대체 시나마의 옷은 왜 그렇게 바닥에 팽개쳐 둔 거야?” 퍽-! 망치는 원래 떨어지려던 곳이 아닌 그 옆으로 떨어졌다. 쓸데없는 곳에 구멍을 낸 것이다. 그것을 본 드래마는 뭐라고 투덜댔다. “드래마?” 뭔가 웃음을 참는 디트마의 목소리였다. 드래마는 여전히 투덜대며 망치 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디트마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 방 바닥에다 팽개쳐 두었었지... 그걸..” 얼굴을 찌푸린 드래마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시나마를 데리고 왔을 때 내 침대에 눕혔었거든. 그리고... 그... 제시마를 데리고 와서 옷을 갈아 입히게 하고 네 방으로 옮겼고. 시나마 목에 건 목걸이 때문에 옷은 까맣게 잊고 있었군. 어제 자러 들어 갈 때는 캄캄해서 보지 못했고. ...이상하다? 오늘 아침 방을 나올 무렵 엔 그 옷이 눈에 안 띄었던 것 같아. 네가 말할 때까지 그 부분에 대해선 잊고 있었어.” 디트마는 양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목걸 이 때문에 시나의 옷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단 드래마의 말은 거짓말 이 아닐 것이다. 디트마는 드래마가 그 일에 대해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간절히 바랬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엔 디트마가 건드릴 수 없는 어떤 부분 이 있었다. 디트마는 목걸이에 대해선 침묵하기로 했다. “음... 그래? 그랬었군. 네가 왜 맨 처음 시나마를 네 방 침대에 눕혔다 내 방으로 옮겼는지는 묻지 않겠어. 알만하니까. 맞춰볼까?” 디트마는 피식 웃었다. “시나마의 맨 몸을 보고 여자라는 걸 알고 기겁을 해서 내 방으로 옮긴 거지?” 드래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제시마가 이야기한 거야?! 하여간 여자들이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랬 더니!!” 디트마는 웃었다. “어이, 어이, 그렇다고 제시마를 미워하진 말라고. 네가 제시마에게 비 밀을 지키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어. 입이 가볍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소녀는 날 좋아하니까, 나한테만은 못 견디고 털어놓거든.” 드래마는 그를 노려보았다. “디트마. 넌 역겨운 녀석이야.” “고마워. 드래마. 그 말, 주위상황을 이용하여 정보수집에 능한 사람을 칭찬하는 말이지?” “보통 그 말은 그런 뜻으로 안 써. 말을 다시 배워야겠군? 디트마?” 그들은 말로 싸우고 있었다. [디트마는 역시 드래마의 친구구나....] 얼굴과 손을 씻고 나온 시나는 창고 문간에 서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왜 자신의 옷이 바닥에 떨어져있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건지 이해했고 디트마가 생각보다 능구렁이라는 사실도 알 았다.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눈치 못 챘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뭐랄 까...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 왠지 제시마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시나는 헛기침을 했다. “저기..” “오, 시나마. 다 씻었어요? 방금 드래마와 당신의 옷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죠. 그렇지 드래마?” 그는 신경질적으로 디트마를 바라보았다. “그래.” 드래마가 신경질적으로 보건 말건 디트마는 말했다. “시나마. 기뻐해요. 내가 당신의 옷을 망친 죄로 옷을 몇 벌 사야 할 것 같다니까 드래마가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고 자기가 사 주겠대요.” 드래마가 소릴 질렀다. “뭐라고?! 옷이 왜 망쳐져?” 디트마는 빙긋 웃었다. “내가 그 옷으로 붕대를 만들었거든.” “뭐? 붕대?” 드래마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나는 그냥 웃었다. [둘이 참 잘 노는구만.] 그리고 갑자기 사람들이 쳐들어 왔다. 촌장이 시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준 비했단다. 드래마는 인상을 마음껏 쓰며 자신은 벽난로를 설치해야 하니 까 못 간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까짓 것 우리가 해준다고 하며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벽난로를 설치해버렸다. 그러자 더 이상 댈 핑 계가 없어진 드래마는, 환영회라는 말에 재밌어하는 디트마와 다른 사람 들을 만난다는 소리에 긴장한 시나와 함께 옷을 든든히 입고 광장으로 나 올 수밖에 없었다. 밤까지 파티 비슷한 것이 열릴 것이라 했었다. 그리고 방금 시나는 물감 어쩌고 하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잘했어요. 시나마.” 디트마가 웃으며 다가왔다. “잘 하긴요. 한 말도 별로 없었는데요.” 한 마디 한 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고... 아무리 사람들의 눈동자 색에 놀랐다고 해도 그렇지 물감 님들, 안녕하세요? 라니 최악의 인사말 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좀 모자란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말았다.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드래마가 그런 시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물었 다. “....물감이라고 했었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다 양한 일루젼을 본 것 같군. 내가 구하기 전에 꽤 오래 숲에 있었던 거야. 그렇지?”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물감이 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드래 마와 디트마는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촌장이하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는 것 같고. 둘 다 이렇게 젊은데 희한하군 이 라고 생각하며 시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별로 그렇게 오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갑자기 뭔가 이상한 게 떠올랐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 얼음의 숲에 가는 게 그렇게 멍청한 일이라면 드래마는 어떻게 숲 에 들어와 있었던 거죠? 그럼 드래마도 좀비심장이잖아요!!!” 시나는‘간덩이가 부은 거잖아요!!!’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 드래마는 하! 라는 표정을 짓더니 시나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디 트마가 웃더니 설명을 해 주었다. “드래마는 괜찮아요. 마을에서 유일하게 숲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죠. 그는 이예티의 후드를 입고 있으니까 몬스터들의 눈에 뜨이지 않거든요. 시나마, 이예티의 후드가 뭔지 알아요?” 모른다는 시나의 표정을 본 디트마는 친절히 설명을 했다. “이예티는 눈 덮인 높은 산에 살고 있는 몬스터예요. 이곳 클로니아에만 있는 몬스터죠. 추위에 강하고 몸을 숨기는 재주를 갖고 있는 몬스턴데 그 털로 만든 옷은 동일한 효과를 갖죠. 클로니아에서 나는 특산품 중 12 개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품목이죠.” 추위에 강하다고? 어쩐지 꽤 얇아 보이는 옷인데도 그다지 추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디트마는 드래마가 입고 있는 옷을 툭툭 쳤다. “드래마가 숲에 들어가면 놀들도 헷갈릴걸요. 냄새는 나는데 형체가 안 보이니까. 덕분에 얼음의 숲에서 나는 무진장한 약초를 마음껏 캘 수가 있는 거죠. 거기엔 다른 곳에서는 캘 수 없는 희귀한 약초도 많은데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하하하.” 디트마는 기분이 좋다는 듯 웃었다. 드래마가 중얼거렸다. “덕분에 나도 약초 보는데는 도사가 됐지..” “하, 하지만 지금 드래마는 보이잖아요? 인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 거죠?” 드래마는 두건과 입 가리개는 벗고 있었지만 후드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 “보통 이예티의 후드를 만들 때는 아트(Art)를 걸어주죠. 인간의 눈에는 보이도록. 인간이 입을 건데 인간의 눈에도 안 보이면 곤란하죠. 안 그래 요? 하하...”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옷에다 아트? 예술을 걸어주다니? 그리고 입으면 몬스터들의 눈에 안 보인다고? 도깨비감투인가? 이 순간 시나는 이 세계 사람들의 무지를 진하게 공감했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라도 이 세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 사람 들에게는 상식인 것이라도 시나는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 아트가 도대체 뭐...” 아트에 대해 물으려고 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드래마님, 디트마님? 이리 와서 춤을 추세요. 모두 다 드래마님과 드래마님의 종속자가 춤을 추길 기다립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8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8 21:02 읽음:286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8- <제 9막. 시나, 춤을 추다.(2)> [헉! 뭐라고?!] 시나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 놀랐다. 그러고 보니 흥겹고 신나는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발을 까딱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쳇. 이래서 내가 이곳에 안 오려고 했는데!” 드래마의 불쾌하다는 말투에 디트마가 상냥하게 말했다. “자, 어서 춤을 춰야지? 드래마? 오늘은 네 종속자가 주인공이야. 너와 시나마가 춤추기까지 아무도 춤을 못 춘다고.” [으악!!] 시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광장에 오기 전 드래마는 촌장 집으로 가 자신은 시나를 종속자로 맞긴 할건데 아내로 맞을 생각은 전혀 없으며 여동생으로 맞을 생각이라 고 말했다. 촌장은 ‘은혜의 법’을 따르는 건데 그럴 수 있냐고 눈이 휘 둥그래졌지만 그래도 된다고 드래마가 강력하게 이야기하자 납득을 했다. 이번 엘의 날에 카할에 가 사제 앞에서 종속주와 종속자로서 맹세를 한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나는 여기까지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해서 사람 들은 더 이상 시나를 보고 드래마의 아내라든가 그딴 이야기는 안 한다. 그것은 잘 된 일이었다. [윽...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위기였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은혜의 법’이란 것에 집착 하는지 모르겠다. 같이 춤을 춰야 한다고?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얼굴 이 창백해졌다. 여기서 잠시 시나가 현실세계에서 학교 다닐 때 받은 중 간고사무용실기 점수를 공개하자면 그것은 C+였다. 제일 잘했을 때도 B- 를 안 넘었다. 한마디로 무용이라든가 춤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시나였 다. [모, 몰랐어. 체육이라든지 무용이 내 인생에 있어 이렇게 절실해 지리라 고는!] “자, 이리와. 빨리 춰 버리고 말자고.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잖아.” 드래마가 손을 내밀었다. 시나는 이 순간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시나는 재빨리 잔머리를 굴렸다. “저, 저기. 드래마, 전, 춤추는 법을 얼음의 숲에서 다 잊어버린 것 같 아요. 그러니까...” 디트마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드래마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젠장!! 내가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시간에 그 숲으로 약초를 캐러 들어간 건지!” 드래마가 말했다. “그래도 이리와! 쉬운 스텝으로 할 테니! 지금 우리가 춤을 안 추면 저 들은 내내 춤을 못 춘다고! 남은 시간을 썰렁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되고 싶진 않아!" 드래마의 표정이 하도 살벌했기에 시나는 하는 수 없이 드래마의 손을 마 주 잡았다.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은 따뜻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긴장한 시나는 그런 걸 느낄 틈 따윈 없었다. “저 가운데로 걸어가면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 드래마가 속삭였다. 위가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웃음거리가 될 게 확실할 때는 별개의 문제다. 드래마와 시나마는 가운데 커다랗게 피어 논 모닥불 앞에까지 걸어갔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기에 시나도 엉겁결에 같이 인사했다. 음악이 시 작되었다.. “시나마, 팔을 오른쪽으로. 좋아.” 시나가 팔을 내밀고 그가 리드했다. 시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다행히 춤 은 수업시간에 배운 유럽 어딘가의 민속춤과 비슷한 스텝이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발은 왼발, 오른발, 턴-하고, 좋아... 그런 식으로 반복... 윽!” 발을 밟힌 그가 신음소리를 뱉었다. 뭐라고 신경질을 내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꾹 참고 무시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드는 시나였다. “오른발, 왼발, 윽! 외, 왼발, 시나마! 몸에 긴장 좀 풀어!” 드래마와 시나마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던 촌장은 짧게 한마디 논평했다. “남자와 여자가 저렇게 춤추는 모습은 내 평생에 처음이구만.” 드래마는 줄곧 사정없이 발을 밟히고 있었고 시나는 자신의 발을 보느라 땅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게다가 너무 긴장을 해서 온 몸이 딱딱하 게 굳어 있었다. 로봇이 춤을 춘다고 해도 시나보단 더 부드럽게 추었을 것이다. 옆에서 디트마가 동정 어린 표정을 가득 짓고 말했다. “얼음의 숲에서 춤추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하더군요.” “저런... 츠츠.. 참으로 불쌍한 소녀로구먼... 드래마님도... 참... 안 되셨구.” 디트마는 동감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주 위에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으로 보아 다들 비슷비슷한 의견인 것 같았다. 마침내 드래마가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2-3분간이었지만 기운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자, 팔짱을 끼고 서로 엇갈려 돌고 마주보고 인사하면 끝이야.” 시나는 그 말대로 팔짱을 끼고 등뒤로 드래마와 돌았는데 드래마와 부딪 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드래마는 약간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어쨌 든 춤은 끝났다. 둘은 손을 잡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예의상 열심 히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나서 자기들도 나와서 남녀 짝지어 춤을 추 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가 더더욱 높이 올라갔다. 춤추는 사람들 바깥으 로 나온 드래마는 시나의 손을 획 뿌리쳤다. “이렇게 바보같이 춘 적은 처음이야!” “그러니까 춤추는 법 다 잊어버렸다고 했잖아요! 누가 추쟀어요!!” 창피함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도 화를 냈다. 그때 디트마가 나타났다. “자, 자, 그만들 두라고. 둘 다 최선을 다 한 거잖아?” 드래마와 시나도 그 말에는 공감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최선을 다 했다. “춤추는 법을 잊어 버렸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자, 그러니 시나마, 내일부터는 마을의 유리마 부인에게 부탁해서 춤을 배우도록 해요. 여자 들이나 남자들이나 춤을 못 춘다면 사교생활에 지장이 있죠. 아, 뭐 그렇 게 일그러진 표정 지을 필요는 없어요. 잘한다면야 좋은 거지만 그렇게 잘할 필요는 없고 스텝만 익혀두라는 거니까. 배우다보면 기억이 되돌아 와 능숙하게 추게 될 거예요.” 춤을 능숙하게 추도록 되돌아올 기억 같은 건 없었다. 시나는 속으로 눈 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 현실세계에서도 별로 안 좋아했던 무용을 배우게 되다니...] 하지만 시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현실세계에 돌아가면 이걸로 내 무용점수도 좀 좋아질지 모르 지... 흑..] 드래마는 후드의 두건을 올려 썼다. “이제 난 그만 가보겠어.” 디트마가 그를 보았다. “사람들이 찾을 텐데?” “그러니까 가려는 거야.” “하아- 참.. 맘대로 하라고. 아, 너의 시나마는 내가 잘 돌보지.” “아아- 너도 네 맘대로 해.” 드래마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휙 돌아섰다. 그리고 그는 시나에겐 눈길한 번 안주고 가버렸다. 무시당한 것 같아 좀 섭섭했다. 디트마는 미소지으 며 말했다. “시나마 여기 서 있어요. 고기와 음식을 좀 갖다주지요. 드래마는 어리 석은 짓을 한 거예요. 지금 집에 가 봤자, 먹을 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후후. 우린 마음껏 먹고 즐기다가 들어갑시다.” 그는 윙크를 하고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쪽으로 갔다. [과연... 멋진 사람이야... 음.] 시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드래마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안됐다는 진한동 정심으로 바뀌었다. 그때 등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마, 춤추는 법을 얼음의 숲에서 잊어 버렸다고?” 제시마의 목소리였다. 시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엔 제시마 외에도 그 또래의 소녀 몇몇이 서 있었다. “너무 안됐다, 시나마. 하지만 안심해. 유리마부인이 널 보시더니 너무 안타까워하시면서 꼭 널 가르치고 싶다고 하시더라.” 시나는 제시마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아까 시나를 무척이나 놀라게 했 던 붉은 눈의 부인이 시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하고 웃었다. 뭔가 결심 이 확고하게 서린 표정이랄까 시나도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웃었다. [아이구...] “제시마, 우리를 시나마에게도 소개시켜 줘.” “아, 그래. 시나마 이쪽은 슈마, 다이마, 이네마라고 해 내 친구들이지. 너와 얘기를 하고 싶대.” 진한 분홍색의 눈을 가진 소녀가 웃었다. “시나마,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아깝다. 얼음의 숲에만 안 떨어졌어도 다른 세계의 일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이야기해 줘도 안 믿을 거면서..] 시나는 떨떠름하게 웃고 입을 열었다. “왜 다들 얼음의 숲에 떨어지면 기억상실에 걸리게 된다고 믿는 거지?” [나 같이 멀쩡한 애도 있는데?] 보라색 눈의 소녀가 이상하다는 듯 시나를 보았다. “믿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 그곳은 성역과 닿아있는 숲인걸. 이상하고 무서운 힘들이 가득 들어차 있지. 게다가 몬스터들도 많이 살고. 그 숲은 사람을 거부하는 숲이야. 그래서 들어간 사람들은 환상이나 기억상실에 걸리게 되지.”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곳에 몬스터가 많다는 것은 알겠는데. 거기에 들어가더라도 환상이나 기억상실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 아냐?” [예를 들면 나 같은.] 주황색 눈의 소녀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냐. 거기 들어가면 100이면 100 모두 다 환상이나 기억상실에 걸리게 돼. 너만 해도 그렇잖아. 거기에 들어가서 그런 거에 안 걸릴 수 있는 사 람은 한 번 그것을 경험해서 면역이 생긴 사람뿐이라고. 하긴 넌 한 번 들어갔다 와서 면역이 생겼을 테니 또다시 들어가도 걱정은 없겠다. 몬스 터들은 조심해야 하겠지만.” [또 들어가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절대 없고... 100이면 100? 100이면 99 아냐? 난 멀쩡하니까.] 이렇게 주황색 눈이 하는 말을 열심히 듣던 시나는 그 말에서 한가지 이 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 이상하네? 근데 드래마는... 마음대로 들어가잖아? 이예티의 후드 는 환상과 기억상실도 막아주는 거야? 아니면...?” 네 소녀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보라색 눈이 말했다. “잘 모르겠지만... 에이,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드래마님은 훌륭하신 분이니까 얼음의 숲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럼, 그럼. 드래마님은 멋져.” “슈마, 오늘 드래마님 춤추는 것 봤지?” “응. 시나마 같은 상대를 데리고도 너무너무 우아한 모습이었어.” 분홍색 눈이 대답했다. 뭔가 황홀한 눈빛이었다. “근데 그냥 가셔서 너무 섭섭해... 같이 있으면 춤이라도 신청할 수 있 는데.” 보라색 눈이 말하자 주황색 눈이 대답했다. “하는 수 없지. 뭐. 드래마님은 이런 행사 같은 거 되게 싫어하시잖아. 오늘도 자신의 종속자를 환영하는 행산데 그냥 가버리시구..." “아마 아직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게 아니어서 그럴 거야.” “아직 이라고 해도 확실한 거잖아? ‘은혜의 법’으로 맺어지는 건데?” “그렇긴 하지... 하아- 시나마? 넌 너무 좋겠다. 드래마님이 종속주라 니... 너무 부러워.” “응. 드래마님의 종속자가 될 수 있다면 얼음의 숲 같은 거 골백번이라 도 왕복할텐데..! 드래마님이 구해주시기만 한다면!!!” “맞아. 맞아.” 시나는 좀 당황했다. [어이, 어이... 이봐들..!] 드래마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소녀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소녀들은 드래마의 왕 팬인 것 같았다. 오로지 제시마만이 수줍은 듯 미소를 띠고 자신의 친구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이 말했다. “시나마 넌 잘 모를 거야. 우리 마을 여자들이 널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드래마님이 우리 같은 평범한 소녀들을 종속자로 맞을 거란 생각은 안 했 는데...이럴 줄 알았으면...” 뭐가 이럴 줄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보라색 눈은 아쉬움과 부 러움, 시나에 대한 질투 비슷한 것이 담겨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드래마 는 그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마을여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한 것 같았다. 그 때디트마가 왔다. “자, 시나마 여기... 어, 안녕하세요. 슈마, 다이마, 이네마. 제시마?” 네 명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디, 디트마님 안녕하세요?” 방금 드래마님 어쩌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던 여자 애들이 디트마가 오자 수줍음을 타며 몸을 모로 꼬았다. [디트마도 한 인기 하는 모양이군.] 시나는 그에게서 접시를 받아들며 생각했다. 보라색 눈의 소녀가 말했다. “저, 저기.. 디트마님? 춤 안 추시겠어요? 선약 없으시죠?” 옆에 있던 다른 두 명의 소녀가 보라색 눈을 노려보았다. 한 발 늦었다는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디트마가 빙긋 웃었다. “기꺼이. 숙녀 분이 권하시는데 거절하면 도리가 아니죠. 갈까요. 이네 마?” 둘은 광장 한가운데로 갔고 열을 지어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끼었다. “쳇! 이네마 계집애! 언제나 행동이 빠르다니까. 자긴 약혼자도 있는 주 제에!!” 분홍색 눈이 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주황색 눈이 말했다. “나도 나중에 꼭 디트마님께 춤을 신청할거야!” 제시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흐응.. 여자들의 지위가 낮은 걸로 아는데 여자가 먼저 춤을 신청하 네?” 시나는 접시 위의 저며 논 베이컨을 씹으며 말했다. 맛이 좋았다. 세 소 녀가 시나를 보았다. 그 중에 한 명이 말했다. “지위가 낮다니?” “응? 아, 아니. 여자들이 춤을 먼저 신청해도 되냐고.” “뭐, 처음으로 추는 춤이라면 괜찮아. 가장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 출 수 있지. 그 다음엔 남자들이 신청해줘야 하지만.” 그때 두어 명의 소년이 시나 있는 쪽으로 왔다. “슈마, 다이마, 춤추지 않겠어?” 슈마와 다이마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우린...” “어이, 어이, 디트마님을 노리는 거라면 포기하라고. 디트마님은 경쟁자 가 너무 많을걸? 그러다가 춤 한 번 못 추고 행사가 끝날 거야.” 슈마와 다이마는 그 소리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 참 갈등하는 듯 했다. 마침내 슈마가 말했다. “하는 수 없지.. 디트마님이 좋긴 하지만 춤을 못 추는 건 싫으니까.” 슈마는 약간 새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뒤 한 소년의 손을 잡고 중앙, 춤추는 곳으로 나갔다. “다이마, 넌?” 다이마는 아직도 갈등되는지 춤을 추는 디트마를 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죽 둘러서서 침을 꿀꺽 꿀꺽 삼키며 디트마를 노리는 소녀들을 보았다. 그 옆에는 소년들이 붙어 서서 열심히 소녀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아마 아까 그 소년이 했던 말로 설득 중일 것이다. 경쟁자는 너무 많고 밤은 너무 짧았다. 조금 후면 행사는 끝날 것이다. 다이마는 결정을 내렸다. “하는 수 없지.” 소년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무리에 섞였다. 시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중앙에는 이제 결혼한 커플과 더불어 소 년소녀의 커플도 많이 나와 있었다. 소년들의 설득이 많이 성공한 것 같 았다. “저 아이들 너무 끈기가 없네. 그렇게 디트마가 좋으면 끝까지 기다려서 디트마와 출 일이지 쯧, 쯧...” 그때 제시마가 말했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48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8.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28 21:05 읽음:290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8.5- <제 9막. 시나, 춤을 추다.(3)> “그렇게 하다간 행사 끝날 때까지 못 추게 돼. 음악을 세 번이나 네 번 밖에 연주하지 않거든. 그리고 행사에서 춤 한 번 못 춘 여자 애는 마을 의 웃음거리가 되구.” 시나는 놀랐다. 그런 심오한 뜻이? “헤에? 정말? 제시마 너도 춤을 못 췄지? 그럼 빨리 가서 남자애들에게 춤을 신청해야겠다.” 제시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 였다. “나, 난... 별로 예쁘지도 않고 가난하기 때문에 남자애들이 날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려.” “뭐?” “여자 애들의 신청을 받으면 특별한 선약이 없는 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으니까 아예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구.. 슈마나 이네마, 다이마는 예쁘 니까 남자애들이 오히려 신청을 하는 편이지만..” 시나는 기가 막혔다. 제시마는 빼빼 마르긴 했지만, 남자애들이 피할 정 도로 추한 외모는 아니었다.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여기도 그런 것에 따 라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하는 곳이란 말인가? “제시마...” “뭐, 괜찮아.” 제시마는 밝게 웃었다. 하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마을의 웃음거리가 된 다고 한 건 바로 제시마 자신이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사람에게 그렇게 잔인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웬 남자가 다가왔다. “제시마!” “어머.. 키르마.” 갈색 눈의 잘생긴 남자였다. 시나의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 [제시마한테 춤을 신청하러 왔나봐.] 하지만 그것은 잘못 된 생각이었다. “제시마! 이네마 못 봤어? 사람들이 너와 같이 있다고 하던데?” “이네마? 이네마는 디트마님이랑 춤추러 중앙으로 나갔는데..” 소년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졌다. “이런, 그 바보 같은 게! 자신의 약혼자를 내버려두고 다른 남자랑 첫 춤을 춰?! 두고보자!” 그는 씩씩대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제시마는 여전히 혼자였다. [으, 뭐야 저 놈은!! 이왕 온 김에 제시마한테 춤 신청 좀 하지!] 시나는 인상을 썼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근처에는 젊은 남자라곤 한 명 도 없었다. [정말이지 뭐 이런...!]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제시마? 시나마를 내게 소개해 주겠어요?” 제시마의 옆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 다. 제시마는 그를 보고 입술을 깨물더니 이윽고 공손히 인사했다. “세일마.. 안녕하세요. 시나마 인사드려. 이분은 세일마라고 촌장님의 아드님이셔.” “안녕하세요?” 시나와 같은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부드럽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시나마. 당신을 환영합니다. 즐기시길 바래요.” “네, 감사합니다.” 세일마는 시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떡이더니 얼굴을 조금 붉히며 말했다. “에... 음... 에.. 또.. 아!... 그렇지! 그, 그 베이컨 맛있나요?” [응? 베이컨? 갑자기 웬 베이컨? 맛있냐고? 직접 먹어보면 될 텐데... 좀 나눠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겠고...] 이상했지만 일단 대답했다. “네. 맛있네요.” “그, 그래요? 그건 요전에 숲에서 잡은 멧돼지로 만든 것이죠. 우리 어 머니께서 훈제하신 건데 맛있다니, 어머니가 좋아하시겠군요. 하하하. ..” 그는 시나에게 멧돼지 베이컨의 유래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시나는 감 사하게 들었다. 이, 얼마나 친절한 사람인가..? 촌장 아드님이면 꽤 높은 분일텐데... 이방의 소녀를 위하여 먹는 음식 설명까지 해주다니..! “네에. 이게 멧돼지 베이컨이군요.” 시나는 성의를 갖고 베이컨의 맛을 좀 더 음미했다. [흐응. 멧돼지는 이런 맛이 나네? 그냥 보통의 돼지고기랑 비슷한데?] 그때 세일마가 머뭇거리며 시나에게 말했다. “시, 시나마?” “네?” “이, 이제 춤은 안 추나요?” “네에?” 춤? 시나는 춤이란 소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으윽! 서, 설마 이 사람 나 한테 춤 신청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사람 제 정신인가? 아까 내가 추 는 걸보고도 나한테 춤을 신청해? 촌장 아드님으로서의 의무감인가? 윽! 그런 의무감 안 가져도 되는데! 위기에 부닥친 시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하하... 저, 저는 배, 배가 고파서.. 이 음식이나 좀 다 먹고...” 그렇게 말한 시나는 속으로, 접시 위 음식을 최대한 천천히 먹기로 결심 했다. 그런데 거절을 당한 남자의 얼굴은 더욱더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 는 이제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시선을 자기 발끝에 박은 채 말했다. “그, 그럼.. 저.. 저기, 저... 제, 제, 제시마?” 지금까지 그들의 일행이 아닌 듯, 딴 데를 보던 제시마가 그를 보았다. “네?” 세일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하아-!!! 아- 힘들다-!" 그때 춤이 다 끝나고 디트마가 다가 왔다. “아, 참- 오랜만에 춤을 추니 정말 힘들구만. 어? 그런데, 세일마 아니 에요?” “...디.. 디트마님..” 무언가를 말하려던 세일마는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한편 시나 는 디트마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아깝다는 눈으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 보는 여자들... 디트마는 몇몇 여자들의 춤 신청을 거절하고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시나가 말했다. “디트마. 여자들이 춤 신청하는 것은 거절할 수 없다던데 용케도 거절하 고 왔네요?” 그 말에 디트마는 지친 표정을 지었다. “아아.. 네. 먼저 약속한 숙녀가 있다고 했죠... 시나마? 어때요. 추겠 어요?” 시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햄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 남자들이 도대체 왜 이러나? 그러나 시나는 그의 얼굴 표정이 그다지 진지하지 않 다는 것을 용케 알아차렸다. 진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디트마... 농담하신 거죠?” 디트마가 웃었다. “눈치가 빠르군요. 드래마의 종속자에게 춤 한 번 신청 안 하면 도리가 아니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시나도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럼 거절할게요. 이렇게 거절하는 거 실례되는 거 아니죠?” “그럼요. 승낙할거란 생각도 안 했습니다. 자, 그럼 제시마. 춤추시겠어 요?” 제시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네!” [와- 디트마! 멋져요!!] 이 순간 시나는 디트마에게 무한한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 던 세일마의 표정은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고 개를 숙였다. 그래서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나는 흐뭇한 얼 굴로 생각했다. [디트마..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긴 해도 확실히 좋은 사람이야.] 한편 디트마와 제시마가 손을 잡고 중앙으로 나가자 아직도 끈기 있게 디 트마를 노리며 남아있던 주위의 여자들은 아잇! 분해! 라는 표정으로 각 기 다른 남자들을 찾아 춤을 추러 나갔다. 어쨌든, 이런 데에도 재빠른 선택과, 포기, 결단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밤은 짧으니까... [킥, 킥... 이 세계도 나름대로 재미있네..] 시나는 그 상황에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얼굴 그대로 옆에 있는 세일마 를 보며 말했다. “세일마? 세일마는 춤 안 추세요?” 멍하니 디트마와 제시마 커플을 보던 세일마는 시나의 말에 깜짝 놀란 듯 말을 추스르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네? 아.... 네. 나, 나야 뭐.. 그냥...” 그러더니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왠지 배가 고프네요. 베이컨이나 먹을까..?” 그리고 그는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가버렸다. [흐응.. 저 아저씨,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베이컨 맛있냐고 물어보러 온 건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본 시나는 그가 사라지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 았다. 차가운 밤하늘엔 어느새 하나 둘 별이 뜨고 있었다. 공기가 깨끗한 만큼 별들도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때 누군가가 또 말을 걸었다. “시나마? 즐기고 있습니까?” 그 목소리에 시나는 옆을 보았다. 촌장과 함께 몇 명의 남자, 그리고 여 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시나에게 친밀감이 담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 고있었다. [즐기고 있냐고?] 시나는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즐기고 있냐고? [난, 즐기고 있는 건가?] 대답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해야했다. 자신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세계로 떨어져 한 번도 보지 못 한 사람들 틈에서 추위에 떨며 음식을 먹 고 있다. 정말 싫은 춤도 추어야했다. 드래마의 신경질은 아직도 못마땅 하다. 하지만... 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즐겁 게 웃는 사람들, 춤추는 사람들... 디트마와 제시마가 웃고 있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하늘은 자신이 곱게 숨겨온 아름다운 별 빛을 검은 장막을 펼친 채 사람들에게 뿌려주고 있었다. 즐기고 있냐고...? 아빠 생각이 났다. 시나는 웃었다. 아빠가 너무 그리웠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시나는 조용히 말했다. “네. 촌장님.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네요. 정말 즐거워요. 환영에 감사드 립니다.” 긴 침묵 후에 나온 시나의 대답에 촌장은 기쁜 듯 웃었다. “하하... 다행입니다. 시나마. 아무도 당신에게 춤을 신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일부터 여기 유리마 부인이 열심히 가르쳐주 신다고 하니까. 춤을 배우고 나면 많은 소년들이 당신에게 춤을 신청할겁 니다.” [윽!] 그들은 시나의 침묵을 춤 신청을 받지 못해 우울한 탓으로 해석한 것 같 았다. 유리마부인이란 분은 얼굴에 ‘필승!’이란 글을 써놓고 자신 있는 태도로 시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 시나마, 앞으로 언제, 언제 우리 집에 올 건지 계획을 세워 볼까 요?” “예에... 하하 하하..(;).” 아름답지만 고달픈, 이세계(異世界)에서의 또 하나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 다. (계속)================================================== 아아.. 원래는 글 끝머리에 막강 '잡담'이 붙곤 했는데...^^;;; 이곳에서 조차 그런 과거를 되풀이 할 수는 없다는 생각아래..(인간은 세월이 지나 면 뭔가 발전해야 한다는 모토아래..^^;;;) '잡담' 떼고 쌈박하게 올립니 다..^^ 잡담이 없으니, 쓰잘데기 없는 엔의 수다를 안 들어도 되고 참 좋지요? 하하...^^ (으음.. 이 잡담도 잡담인데.. 이것도 길다..--;;;) <엔^^> ps 그럼, 금요일 날 뵐게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514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19-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30 06:36 읽음:2873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19- <제 10막. 시나, 제시마와 대화하며 경악하다.(1)> “휴---” 시나는 탁자에 턱을 괴고 머리를 긁적였다. 침실은 너무 어두워 책을 읽 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화덕엔 주전자가 빨갛게 달아 있었다. 벌써 이 세계에 온 지 4일이 지나갔다. 4일이 지났다는 것은 세 번의 밤 과 낮이 지나갔다는 말이다. 이곳의 시간은 시나의 세계와 비슷한 것 같 았다. 하루는 24시간정도? 사람들은 3끼 식사를 한다. 그래봤자 시계라든 지 그런 정확한 것으로 잰 게 아니니까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 어쨌든 하루 밤, 하루 밤 자면서 다음 날 눈을 뜨면 다시 현실세계로 돌 아가 있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나날들이었다. 어젯밤 행사는 즐겁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순 없었다. 지금까지 들은 드래마의 말과 디트마의 말,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의 말을 놓고 시나는 곰곰이 추리해보았다. 부지깽이로 바닥에다가 글을 써 보았다. <온통 눈뿐인 벌판> <얼음의 숲> <몬스터> <세계의 벽, 혹은 차원의 구멍?> <12개의 세계.....> 시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적였다. 비누로만 감았는데도 머릿결이 부드 러운 것은 이곳의 물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음... 이 12개의 세계란 게 이상해. 사람들이 차원의 구멍이라든가 세계의 벽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구.. 계속 듣다보면 12개의‘세 계’가 아니라 꼭 12개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기분이라 니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토록 아무 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까? 또... 음..]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이곳의 신분체계는...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철저한 계급 사회였어.. 에휴...] 시나는 책의 붉은 표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제는 시나도 하바티온이 뭔 지 안다. 책에서 읽은 것이다. 책의 내용은 클로니아(디트마가 어제 말해 준 것으로 클로니아는 이 세계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족들 간의 사랑과 음모와 비극(?)을 다룬 것이었다. 분량이 적은데다 시나의 세계에 대한 힌트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실망하긴 했지만 일단 하바티온 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쳇, 삼류애정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 정보를 얻은 게 어디야... 그러나 저러나 이런 세계에도 이런 책이 있다니...” 원래 남녀간의 사랑얘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지라 시나는 시큰둥한 목소리 로 시니컬한 [독후감]을 토로했다. 언제나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고, 남자 친구를 사귀고 싶어했으면서 이런 건 시나의 모순적인 부분이었다. 시나는 남녀가 나와 애정 신을 벌이는 장면은 차마 눈뜨고 못 보는 체질 이었던 것이다. 시나는 읽다만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시나가 펼친 책의 왼쪽 면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제 4계급 루온 루즈크는 그의 용맹스러움을 일찍이 빛내주었던 그의 저 위대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 윌링을 들고 제 4계급 왕의 서 기관하온 하글리스를 위협했다.... “하온 하글리스, 네가 나의 연인 레이디 셰링을 모욕하는 건 도저히 참 을 수 없다. 그녀야말로 나의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분. 인간을 6계 급으로 나누시고 세계를 12개로 나누신 엘의 이름을 걸고 단정코 너의 죄 를 단죄하겠다. 자 선택해라. 사과를 할건지, 아니면 나의 도전을 받아들 일 것인지?” 하온 하글리스의 이마엔 저 로트라에서 나는 최상급의 진주와 같은 땀방 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의 형제여, 진정하게나. 난 그녀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결단코 없었다 네... 내가 어떻게 기사에게 도전 받을 수 있겠나?” 하지만 저 사악한 하온 하글리스의 마음엔 이미 용감한 루온 루즈크를 향 한 증오의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두고보자. 루온 루즈크. 이 모욕은 꼭 갚아주마. 네가 아무리 궁정 기사 단장 이었다 해도 우리 궁정의 서기관장의 우두머리인 나 하온 하글리스 에게 이다지도 모진 고통을 준 원한은 꼭 되돌려주고 말겠다. 그리하 여......] 애정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읽기엔 좀 닭살스런 내용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이 책에 따르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6계급으로 나뉘어 있었 다. 하지만 계급에 대한 설명만 중점적으로 해 놓은 게 아니라 불명확하고 이 해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세계가 12개로 나뉘어 있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 하기 힘들었다. [무슨 소린지....] 단지 알 수 있는 건 책의 주인공들이 4계급이었고, (그 꽃관 아저씨와 같 은 계급이다) 그들은 복수로는 하바티온, 루이티온, 단수로는 하바트, 루 이트라고 불린다는 것이었다. 루온과 하온은 이름 앞에 붙어 그들의 신분 을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으- 복잡해!) 왜 귀족들을 지칭하는데 두 가지 명칭이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시나 가 생각하기에 하바티온이란 문인귀족을 지칭하는 경우이고 루이티온이란 무인귀족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귀족과... 기사라.... 멋진 일이군. 이런 중세 풍의 세계라니...” 하지만 시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다지 멋진 기분이 들진 않았다. 좋아하 는 형식의 소설이 아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거기엔 마노테(복수로는 마노테온)가 이 세계의 최하위 계급-이란, 아무래도 노예나, 농노가 아닐 까?-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시나는 책을 집어던졌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것도 서 러운데 농노라니... 이제서야 그 마부와 꽃관 아저씨의 고압적인 태도가 이해됐다. 그 마부와 꽃관 아저씨가 굉장히 놀랐을 것이다. 지렁이를 밟았 는데 꿈틀하며 아프다고 소리를 빽빽 지르면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겠는 가? 역사시간에 배운 농노와 지주의 관계가 떠올랐다. “하아- 하필이면 이런 세계라니...! 내가 어딜 봐서 마노테지? 마노테 마 을 가까이 에서 구조된 것 때문에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처럼 귀족적인 생김이 어딨다구. 쳇! 이왕 다른 세계라면 [공주] 정도는 될 것 이지--- 나도 우리 아빠한텐 공주대접 받는데-!” 라고 장난처럼 생각해 보았자 변하는 사실은 없었다. “휴- 어떡한다... 나 정말 죽을 때까지 우리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 기서농노로 살아야 하는 걸까.....” 마을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괜찮았지만 계급사회라는 것엔 마음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 마부녀석도... 삐뚤어진 권위의식을 가지고 아이를 치어 죽이려 했었다. 상류계급 인간이 자기보다 낮은 계급에게 행하는 횡포란 역사적으로도 잔인하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었다. 자유나 신분에 대해 걱 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누려온 시나로서는 이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여 자들의 지위가 낮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시나는 다시 부지깽이로 바닥에 직직 글씨를 썼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무엇 때문에 원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 오게 됐는가?> <나는 언제까지 이 세계에 있어야 하는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순 없 는가?> 첫 번째는 궁금하긴 했지만 몰라도 별 상관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시나의 평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답은 안나왔다. 바닥에는 오직 물음만이 존재 할뿐이었다. “으이구!!! 모르겠다!!! 모르겠어!!!” 시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쨌든 지금 시나의 힘으로 어쩔 수 있 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시나는 환경에 크게 휘둘리거나 환경을 불 평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녀는 분명히 깊게 생각하는 편이긴 했지만 언제나 결론은 단순하게 내렸다. 게다가 나쁜 일에 대한 회복도 빨랐다. “좋아! 일단은 앞에 닥친 일부터 해치우자. 그러면 뭔가 방도가 있겠지. 세계가 12개나 된다고 했으니까 분명히 내가 사는 세계도 거기에 끼어 있 을 거야. 그곳으로 갈 방법만 찾으면 되는 거 아냐? 흥, 간단하구만!” 시나는 씩씩하게 생각했다. 바닥의 글자는 지워버렸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됐기 때문이다. 그것 보단 다른 정보를 더 얻고 싶었다. 이 세계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음. 그래. 세계에 대해 설명해 놓은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응. 디트마네 집에 있는 책은 별 소용이 없으니까... 다른 집엘 가볼까..?” 온 집안에 있는 책을 다 살펴보았지만 20여권의 책은 모두 다 약학, 약초 학, 의학에 관련된 것으로 세계를 아는데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러 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시나마? 안에 있니?” 제시마였다. “아, 제시마 어서 와.” 제시마는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손엔 뭔가 음식 같은 게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모자대신 스카프를 두른 것 같았다. “이건 오늘 분의 식사재료인 우유랑 밀가루야.” “어, 고마워...” 팬케이크라도 만들어 먹을 수 있겠네. 팬케이크 정도는 만들 수 있으므로 이번엔 시나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제는 행사 덕분에 맛있 게 먹을 수 있었지만 오늘 아침엔 역시 또 맛이 그저 그런 정체불명의 것 을 먹어야 했다. 아무래도 드래마와 디트마는 요리에 대해선 형편없는 솜 씨를 가진 것 같다. 디트마는 투덜대면서 드래마가 조금만 덜 까다로웠어도 이 고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 했다. 추측하기에 마을의 많은 여자들이 드래마와 디트마 를 돕고 싶어하지만(왜 아니겠는가?) 드래마는 그것을 전부 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제시마에게만은 음식재료를 사온다든지 음식 을 만든 다든지 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일정한 급료를 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제시마가 와서 직접 부엌일을 하는 건 못하게 하고 있 는 눈치다. 드래마의 말로는 여자들에게 쓸데없는 기대를 갖게 만드느니 차라리 나글 로 한잔으로 우아하게 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디트마는 굶어죽게 생겼는데 무슨 우아냐고 핀잔주며 이야기했었다. 어쨌든 결론이 안 나는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제시마를 불러다 부엌일을 부탁하라고 드래마가 말했더니 이번엔 디트마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기 때 문이다. 웬일인지 그들은 집안에 여자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듯 했다. 시나의 춤 솜씨에 감명(?)받은 그들은 시나가 아무 것도 못할 것이 라 지레 짐작하여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어쨌든 아침마다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게 끔찍해진 시나는 속으로 자기가 음식을 만들기로 결심 했다. 뭘 만들든 이들이 만든 것 보단 맛있을 것이다. “디트마님은 어디 가셨니?” “응. 시장에 가셨어.” “아 맞아. 어제 시장에 가신다고 하셨지.” 제시마는 좀 실망한 듯 했다. 디트마는 약초들을 팔아 생필품을 사온다고 하고 나갔는데 얼음의 숲에서 나는 약초들이라 상당히 비싸게 팔 수 있다고 했다. 드래마는 벌목을 하 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갔는데 그의 호리호리하면 서도 단단한 체격은 매일 벌목 일을 한 덕분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커다랗고 남자다 운 손은 잔 상처가 많았다. 나무에 쓸리거나 톱질이나 도끼질을 하다가 베인 상처들 같았다. 시나가 나글로를 한 잔 따라 제시마 앞에 놓는데 그 녀가 킥, 킥 웃었다. “시나마 넌 지금 이 마을에서 화제의 중심이 돼 있어.” “왜?” “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도 그렇고... 얼음의 숲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라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몇 년 동 안 여자들은 전혀 발붙일 수 없던 집에 네가 사니까, 온 마을 여자들이 널 부러워해. 어제 슈마나 이네마, 다이마를 봤지? 드래마님이 너 같은 타 입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자기들도 살을 빼볼 걸 그랬다나?” 하마터면 화덕위로 엎어질 뻔한 시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하, 하... 드래마....는 나 같은 말라깽이 타입, 별로 안 좋아할걸?”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시나만 보면 못마땅해서 째려보고 난리니까. 시나는 자신 앞에도 나글로를 따라놓았다. 시나는 이 차가 꽤 마음에 들 었다. 보리차를 닮은 차의 맛도 맛이지만 추위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디트 마 말로는 값도 싸서 바리스 마노테오나 사람들이 제일 즐겨 마시는 차라 고 했다. 제시마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시나마. 넌 이상해. 여자 애들은 다들 드래마님이나 디트마님을 보면 좋 아해. 그런데 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해도 넌 참 특이해... 시나마, 드래마님....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시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것을 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긴... 생기기는 잘 생겼지. 나도 맨 처음 그 외모를 보고 감탄했으니까. 하지만... 내 타입은 아냐. 남자란 그렇게 꿀꿀하게 무게잡고 신경질이나 버럭버럭 내기 보단 자고로 상큼하고 깔끔하면서 명랑한 맛이 있어야 하 는 거라고.] 그 동안 많은 남자들을 섭렵(?)했던 시나는 나름대로 확고한 남자선택의 기준이 있었다. 외모도 중요하긴 했지만 단연 성격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시나의 지론이다. “글세... 그다지..” 시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제시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럼... 역시...! 너, 디트마님께 더 끌리는 거구나..?” 시나는 하하 웃고 말았다. 지지배.. 자기가 좋아한다고 남도 자신처럼 생 각하다니.. “아니. 어째서 내가 그 두 사람 중 하나에게 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지? 난 그저....” 현실세계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 다. 또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그저... 그래.. 그 둘에게 고마울 뿐이야. 어쨌든 아무도 돌봐줄 사람 없는 나를 돌봐주고 있으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드래마와 별로 안 맞는 것은 있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 운 것이었다. “그래.. 너, 그럼 디트마님께도 별로 마음이 없다 이거지? 하아-” 제시마는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시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감정 표 현이 솔직한 애네? “시나마, 저 시나라고 불러도 돼?” “물론이지.” [그게 원래 내 이름이란다 얘야.] “고마워. 너도 나를 제시라고 불러. 저, 시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대한 비밀 지킬 수 있어?” “응? 으응..” “진짜지?” “그래. 뭐하면 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어.” 아까 책에 나온 이 세계 신의 이름을 들먹여 보았다. [신의 이름이 맞겠지? 어느 세계나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니까. 아까 책에서도 6개의 어쩌고 12개의 어쩌고 하면서 맹세했잖아?] “엘? 엘님의 이름? 맙소사! 시나! 너 너무 경솔하구나! 함부로 엘님의 이 름으로 맹세 같은 거 하면 벌받는다고!!!” 시나의 귓가에 대고 조용하게 속삭이던 제시마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 으므로 시나는 고막이 터질뻔 했다. “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는 사제님 앞에서나 기사의 맹세 때 뿐이 야!” [하, 하, 그런 건가?] 괜히 이 세계 사람인척 했다가 시나는 잔뜩 무안만 당했다. “모, 몰랐어! 정말! 진지하게 맹세하는 의미로 그런 건대..” 진지하게 사과하는 시나를 보고 제시마는 기분을 풀었다. “맙소사. 그런 중요한 것도 모르다니, 너 정말 많은 걸 잊어버렸구나. 흠..이리와.” “왜?” “회개를 해야지. 그리고 나서 내 비밀얘기 해 줄게.” “그래.” 복잡하기도 하다. 시나는 제시마가 가르쳐주는 대로 두 손을 모으고 턱 밑에 대었다. “엘님.. 시나는 잘 몰라서 엘님의 이름으로 사소한 일에 맹세를 했대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달라고 말씀드려 시나.” “..용, 용서해 주세요... 엘님...” “좋아." “간단한 회개구나.” “응. 간단하더라도 진심으로 기도 드렸으니까... 사제님같이 어려운 기도 가 아니어도 진심으로 솔직하게 기도를 드리면 그걸로 좋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 엘님은 좋은 분이니까.” “흐응. 그래...” “자, 이리와 봐 시나. 비밀을 얘기해 줄게.” 다시 제시마가 소곤거렸다. [어차피 두 사람밖에 없으니 크게 말해도 될텐데..] 그래도 시나는 다시 귀를 갖다댔다. 제시마가 말했다. “사실 말야,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시나는 알고 있지만 예의상 모르는 척했다. “그래? 누군데?” 제시마가 숨을 죽이고 얘기했다. “디트마님.” 제시마의 숨죽인 목소리에 시나는 역시 그렇군 하는 표정으로 차를 한 모 금 마셨다. 제시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시나, 안 놀라는 거니?” “응?” [놀라야 하는 건가?] “노, 놀랐어. 제시! 너 디트마를 좋아했구나!!!” 시나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이 귀여운 소녀에 대한 예의일 것 이다. 제시마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응. 계속 좋아했어. 디트마님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20년 전부터 좋아 했거든” 푸아아아악-!!!! 시나는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모두 다 뱉어놓았다. 이번 엔 진짜로 놀란 것이다. “시나! 더럽게!!!” “뭐, 뭐라고?”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51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0-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4/30 06:38 읽음:289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20- <제 10막. 시나, 제시마와 대화하며 경악하다.(2)> 시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제시마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이, 이십 년?! 제시마? 네 나이가 몇인데?” 제시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 엘의 시기 35년. 왜? 너는 그 정도 되지 않았어?” 시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엘의 시기는 둘째 치고라도 35년? 시나의 상식으 로 이 새파란 소녀가 35살이라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잠깐! 이 세계에서 일년은 우리 세계의 반년 아닐까? 그러면 계산이 맞 는데..] “저, 제시? 이 세계에서 1년은 몇 달이지?” “12달.” [어? 우리 세계와 같네?] “그, 그럼 한 달은?” “대략 29일에서 30일정도?” 그것도 같았다. 같다니까 더더욱 이상한 생각이 드는 시나였다. [그럼 이 세계에서 1년은 우리 세계의 1년과 똑같은 개념인데.. 설마...] 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시? 이 세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얼마나 되지?” 제시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평균수명?” “한 사람이 몇 년 정도 사냐고.” “응... 우리 동네에선 빵 집의 바초마 할아버지가 가장 오래 사셨는데.. 할아버진 엘의 시기를 45년 사셨고 하누카의 시기를 100년, 그리고 벨루 카의 시기를 47년째인가 살고 계셔.” [헉!!! 하, 합치면 어림잡아 200년 가까이 되잖아?!] 시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이 백년이나 살다니!!! 제, 제시마 그 엘, 하누카, 벨루카에 대해 설 명해줄 수 있니?” 제시마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잊어버렸구나... 불쌍한 시나... 그래. 설명해 줄게. 응... 먼저 엘 의 시기는 아직 성인이 아닌 시기야. 이 시기엔 가정에서 부모님께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시기이지. 태어나서 15년 이상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결혼을 해서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 하지만 나처럼 15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엘의 시기에 남아 있는 애들도 많아. 그런 경우는 대부분 자 신의 배우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것도 45년이 한계지. 45년이 될 때까지는 배우자를 꼭 찾아야해. ‘하누카의 법’에 따라 배우자를 찾게 되면... 응... ‘하누카의 법’은 결 혼의 법이야. 하여튼 그때부터 하누카의 시기가 시작돼. 하누카의 시기가 30년이 지나면 벨루카의 시기로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는데 마을 의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꼭 벨루카의 날을 거쳐야해. 음.. 그게 아니라면 하누카의 시기는 100년 정도 누릴 수 있고... 벨루카의 시기는 엘의 뜻에 따라 하루에서 최대 50년 정도? 그렇게 살게 되지 보통 이렇게 일생을 보내게 돼... 어때? 시나? 이해했니? 너도 엘의 시기 35년은 안 넘어 보인다 얘.” 17살 자리에겐 너무나 복잡한 이야기였지만 대강 이해했다. 도표로 그려 보면 이랬다. <엘의 시기- 태어나서 45년까지. 15년이 지나면 성인식을 치를 수 있다? 하누카의 시기- 성인식을 치른 순간부터 100년까지. 30년이 지나면 노년 식(?)을 치를 수 있다? 벨루카의 시기- 하루에서 최대 50년 정도까지 산다.> [엘의 시기란 유년기를 말하고 하누카의 시기란 청년기와 장년기?, 벨루 카의 시기란 노년기를 말하는 건가?] 복잡한 나이 계산법이었다. 왜 그렇게 하는 건 지 모르겠지만 결론은 하 나였다. 이 세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무지막지하게 길다는 것! “...하, 하긴... 공해도 없고 하니까 그, 그럴 수도 있겠다. 하하...” “응? 뭐가?” “아, 아냐. 아무 것도. 아, 그렇지! 그러니까 이 세계 사람들은 결혼할 상 대자가 없으면 성인이 못된다는 거야?” “응.” “그래.. 그럼. 45년이 지나도 상대를 찾지 못하면? 평생을 혼자 지내는 거야?” 제시는 약간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넌 별걸 다 잊었구나... 평생을 혼자 산다고? 아냐.. 시나.. 엘의 시기가 끝날 때까지 상대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게 되. 성인식을 치를 수 없으니까.” 시나는 충격을 받았다. “마, 맙소사.. 성인식을 치르지 않는다고 사형을 시킨단 말이야?!” “사형? 아냐. 시나.” 제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몸이 변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죽는 거지. 메뚜 기가 커가면서 껍질을 못 벗으면 죽는 것처럼. 그냥 죽는 거야.” “뭐라고?!!!” 시나는 경악을 했다. “몸이 변한다니?!” 제시마가 얼굴을 붉혔다. “좀 더 성숙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으로. 배우자와 하룻밤을 보내 면 그렇게 돼. 어떤 사람들은 하누카의 날, 외모나 머리카락의 색이 변하 기도 해. 대부분은 전의 외모와 다를 것 없지만.” 시나는 기절할 것 같았다. “커,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게 아니라 남자랑 하룻밤 보낸 후 변태(變態)를 한다고?!!!” “변태? 변태가 뭐야?” “아, 아냐... 아무 것도..” 시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확실했다. 이곳은 확실한 이 세계(異 世界)였다. 이 세계 사람들은 외모만 인간과 비슷했지 사실은 시나가 생 각하는 인간하고는 다른 생태계(?)를 갖고 있었다. [아빠!] 아빠를 한 번 부른 시나는 신기한 눈으로 제시마를 보았다. “그, 그럼... 결혼을 안 한 사람들은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거네? 내가 제대로 이해 한 거니? 드래마나 디트마도 아직 성인이 아닌 거야?” 제시마는 배시시 웃었다. “응.” [아이고!! 겉보기엔 20대 초반이나 중반인데 아직 애(?)라니!! 이럴 수가!!] 무언가 속은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드래마나 디트마는 몇 살 정도인지 아니?”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두 분 다 아마 적어도 40살은 넘으셨을걸?” [나이만 놓고 보면 초(超) 아저씨군. 하긴 나이만 놓고 보면 난 제시마에 게도 존댓말을 써야 하는데...] 그러다 시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그럼 두 명 다 목숨이 위험하겠다... 빨리 배우자를 맞지 않으면... 하하...” 시나는 실없이 웃으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종합하여 말해 보았다. 실없이 그냥 한 번 해본 시나의 말에 제시마가 생각보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응? 얘가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이러지?] “저... 시나..?” “응?” “너, 날 도와줄 수 있겠니?” “무, 무슨 일인데?” 또 무슨 놀라운 말이 나올까 두려운 시나는 긴장하여 제시마를 보았다. 제시마는 몹시 말하기가 힘들다는 듯, 그러나 말해야 한다는 표정으로 시 나를 바라보았다. “.... 난, 이번 기슬러월 하누카의 날에 디트마님을 유혹할 작정이야.” [캑!!!! 뭣?!!!!] 이번엔 차를 머금고 있지 않아 사레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시나는 마구 커지는 눈과 벌어지는 입을 바로 관리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써야 했 다. 제시마가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녀라고 생각했던 시나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유, 유혹? 기뭐뭐월 뭐날에 디트마를 유혹한다고?!!!” 제시마는 뭔가 결심이 서린 얼굴로 얼굴도 붉히지 않고 담담히 얘기하고 있었다. “응. 기뭐뭐월 뭐날이 아니라, 기슬러월 하누카의 날에.” [으와아아-!! 되게 대담하다!!!! 으와...!!] 시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한마디 얘기했다. “하하... 아아..! 그, 그러니? 그, 그래 추, 축하한다.” 뭘 축하한다는 건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시나의 대답이었다. [흑! 난 당황하면 왜 이렇게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하게 되는 거지?] 제시마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해한 것 같았다. 제시마는 다시 간절한 표정을 짓고 시나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러니까 시나! 날 도와줘!!” “뭐, 뭘? 내가 도와줄게 있어?” 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유혹할 때 망을 봐달라는 얘긴가 아니면...] “내게 네 목걸이를 빌려줄 수 있겠니?” 다행히 망 봐달라는 얘긴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 못했던 뚱딴지같은 요구 에 시나는 더 놀랐다. “내 목걸이는 왜?” 옷 갈아 입힐 때 시나의 목걸이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시나.. 역시 잊어버렸구나. 하누카의 날 아름다운 장신구를 한 여자아이 는 그 보석처럼 아름답게 변할 수 있어.” 시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제시! 배우자가 없으면 변신 할 수 없다며?!” “보석의 힘으로 엘께서 내려주시는 성스러운 빛을 모을 수 있어. 그럼 하루동안은.. 하루동안은 배우자 없이도 변신할 수 있어. 그럼 난 아름다 운 모습으로 디트마님을 유혹할 거야. 날 아내로 삼아 달라고 하면서. 아 름다울 수만 있다면... 그러면 디트마님도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 [하하...] 디트마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지만 시나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이세계(異世界)의 일인데 어떻게 확신 할 수 있겠는가? 보석의 힘으로 하루동안 성인으로 변신? [참 대단한 세계다....] 그러다가 이상한 말을 발견했다. “제시. 잠깐! ‘하루동안은’이라고? 그럼 그 다음 날은 어떻게 되는데? 디트마가 널 받아들인다면 완전한 성인이 된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만약 디트마가 널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 그, 뭐냐.. 애(?)가 되는 거야?” 시나의 말에 제시마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루가 지나면 어떻게 되냐고? 하루....하루가 지나도 배우자를 찾지 못 하면...그땐...” 왠지 제시마의 표정이 공허해 보였다. “그땐 나는... 난... 죽게 돼...” “뭣?! 뭐라고?!” 맙소사!! 그렇다면 지금 이 소녀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시나는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돼! 제시! 제, 제시... 그런 건... 차라리 확실한 배우자를 찾는 게.. 그런 것 때문에 목숨을 버리다니..?”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목숨까지 걸면서 하는 건, 좀 심하잖아?!] 제시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넌 몰라! 시나!” 왠지 그녀의 표정은 절망한 듯 했다. “넌... 넌, 다른 세계에 왔으면서... 드래마님 같은 종속주가 있으니까.. 성 년식이 다가올수록 초조해 할 필요도 없을 거야... 널 아내로 데려가려는 사람이 없더라도 드래마님이 책임져 주실 테니까!” [하하... 무, 무슨 책임? 제, 제시? 난 그런 성년식은 안 치러도 되거든.. ?] 속으로 생각하는데 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난 안 그래! 난 부모가 없이 할머니 밑에서 컸어. 내겐 종속주 가 없어. 그러니까 아무도 날 데려가려 하지 않아! 난 너무 가난하고... 외 모도 그렇게 예쁘지 않으니까... 10년을 더 살아도 마찬가지 일거야... 시간 이 지날수록 배우자를 찾긴 더 어려워지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디트마 님께... 안 되면... 죽는 게 나아... 흐흑...!” “제시...” 제시마는 흐느끼고 있었다. 시나는 가슴이 아팠다. 잘은 모르지만 이 세계 의 관습이라든가 법칙은 제시마 같은 소녀에게 가혹한 짐밖에 안돼는 것 같았다. “시나... 도와줘... 제발...” “제시... 난 네가 죽는 건 싫어.” 제시마는 눈을 들었다. 결심에 찬 눈빛이었다. “난 죽지 않아. 난 살고 싶어.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야. 아마 이게 마 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이대로라면 아무도 내게 청혼을 안 해..” [태어나서 45년이 지나도록 성인식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그들의 수명은 길었지만 그 수명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세계 사람인 시나는 제시마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제시마가 절박한 심정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시...” “시나.. 제발..” 제시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아였다는 말에 가슴이 저렸다. 자 신에게도 엄마가 없었기에 그것이 어떤 것인 줄 어렴풋이 알았다. 부모가 없는 서러움... 시나는 자신의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 디트마는 제시마에게 춤을 신 청하러 일부러 오지 않았는가? 제시마의 말대로 제시마가 아름다워진다면 그 희망은 더 커질 수도 있다. 한낱 보석이 어떻게 더 아름답게 변신시켜 준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제시가 그렇다니 시나는 그렇게 믿었다. 시나 는 이 순간 디트마가 아름다운 여자에게 약한 타입이길 빌었다. 그래서 제시마가 자신의 뜻을 이루도록... “제시.. 알았어. 네게 목걸이를 빌려줄게.” “시, 시나!” 제시마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넘쳤다. “고, 고마워! 고마워! 시나!!!” 제시마는 시나의 목을 꼭 끌어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바람 에 시나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제시, 제시.. 진정해! 와아! 나 넘어지겠다.. 그, 그래 언제부터 빌려주면 되는 거야? 응?” 제시마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웃었다. “으응... 성인식에 쓸 보석은 기슬러월 한 달 전부터는 몸에 지니고 있어 야해. 오늘로서 한 달하고도 3일 남았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지금 끌러서 빌려줄게. 그럼 되는 거지?” “응... 정말 고마워. 시나. 이런 뻔뻔한 부탁을 들어주다니... 이걸 내 목숨 보다 소중히 지킬게. 정말 고마워 시나.” “하하.. 응. 이래봬도 어머니의 유품이니까 그래주면 고맙지.” “어머니의 유품? 그, 그렇구나. 나 정말 이걸 소중히 여길게.” 시나는 목걸이를 풀어주며 제시마의 손을 꼭 잡았다. “제시.. 정말이지? 너 죽을 거 아니지?” “그럼. 난 최선을 다 할거야.” 시나는 웃었다. “난 디트마랑 같이 사니까 틈날 때마다 디트마에게 네 자랑 많이 해야겠 다. 꼭 네가 디트마의 아내가 되었으면 좋겠어.” 제시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 시나. 내 회색 눈의 친구.” 그녀의 진지하고 다정한 말을 듣자 갑자기 보경이 생각이 났다. 그 애도 이 목걸이를 좋아했는데... 문득 보경이의 음성이 듣고 싶었다. 그 노랭이 의 시끄러운 음성이 듣고 싶다니 의외였다. 제시마가 웃었다. “회색 눈의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다고 옛이야기에 나와있대. 할머니가 그러셨지.. 그래서 난 네가 처음부터 좋았어....” 계집애.. 목걸이 빌려줬다고 아부는... 하지만 제시마의 눈은 진심을 담은 눈빛이었고 때문에 시나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 그래? 그거 멋진 옛 이야기네?” 그때 문간에서 드래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색 눈의 사람은 마음씨가 좋다고...? 그거 재미있군. 그건 내가 모르는 클로니아의 옛이야기인가?” (계속)================================================== 에... 또, 아침에 일찌감치 올리고 갑니다.. 하하...^^ 좋은 날 되세요...^^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569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1-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5/03 21:21 읽음:2828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21- <제 11막. 시나, 드래마와 디트마를 놀라게 하다.(1)> “드, 드래마!” 회색 두건을 쓰고 후드를 입은 드래마가 문간에 서 있었다. 시나는 그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건가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마지막 몇 마디만 들은 것 같았다. 제시마는 그를 보고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그, 그럼 난 이만.” 제시마는 후다닥 문간으로 갔다. 드래마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녀가 자기 옆을 지나가도록 몸을 비켰다. 제시마는 드래마를 지나쳐가 며 인사했다. “참 좋은 날씨죠? 드래마님? 후후훗 안녕히 계세요.” 드래마는 하늘을 보았다. 눈이 또 올 듯 구름이 낮게 끼어 있었다. 그다지 좋은 날씨는 아닌 것 같았지만 기분 좋게 말하는데 아니라고 하기도 뭐해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마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며 기운차 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래마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찬 기운이 사 라지고 다시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제시마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자신의 친구인 디트마를 놓고 시나와 제시마 둘이서 모종의 음모를 벌인 걸 알면 이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하.. 예에.. 그렇죠?.. 음..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어쨌든 언제까지 그와 서먹하게 지낼 수는 없었으므로 시나는 최대한 그 에게 상냥하게 대하기로 했다. 제시마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이왕 하는 김에 인사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시나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잠시 시나를 이상한 물건 쳐다보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사람이 다녀왔냐고 인사를 하면 대답을 해야 할거 아냐? 응?] 시나의 웃는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데 그제야 그는 후드를 벗어 걸며 시큰 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 .....디트마는 아직도 안 온 건가...?” “네.” 그의 시원치 않은 대답에 시나는 마음이 좀 상해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외모는 젊지만 행동은 나이 40먹은 아저씨답게 확실히 굼뜨군. 대답 하 나 하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거람! 쳇!] 이렇게 속으로 툴툴거린 시나는 탁자에 앉은 드래마에게 퉁명스럽게 물었 다. “차 드려요?” 추운데 있다 와서 그런지 드래마의 귀는 빨개져 있었다. 드래마는 눈썹을 찡그리고 시나를 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응.” [으휴! 끓는다! 끓어!] 생각대로라면 차고 뭐고 없었지만, 시나는 꾹 참고 잔에다 차를 주르륵 따랐다. 그때 드래마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이건... 뭐지? 아침에 디트마가 읽던 책인가? 이런 책을 읽다니? 취미 한번 괴상하게 변했군.” 드래마는 얼굴을 찌푸리고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시나는 그걸 보고 아는 척했다. “어, 그건 내가 읽던 책인데...” 순간 드래마는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맨날 화난 표정만 지어서 몰랐 는데 저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니 조금은 귀여운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런 생각은 다음 말에 산산이 박살났다. “거짓말하지마. 거짓말하는 버릇까지 있군.” 속에서 뭔가 솟구치며 머리 위에 연기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거, 거짓말? 거짓말하는 버릇 '까아지'? 도대체 이 사람은 날 뭐로 생각 하는 거야!!] 한 마디 말도 안하고 시나는 막 따른 잔을 들고 드래마의 앞에 거칠게 탕 놓았다. “존경하는 종속주씨?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이 정말 도가 지나치군요!!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떡할 거예요?!!!!! 사람을 함부로 거짓말쟁이로 몰 다니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요? 이 바보! 멍충이! 좀비심장아아!!!” 욕을 얻어먹은 드래마는 어이가 없는지 시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나 가 컵을 세게 놓아 튄 차가 뜨거웠을 텐데 놀라서 그런 것도 못 느끼는 듯 했다. “흥...어때요? 이런 욕 들으니까 기분 나쁘죠? 이젠, 내가 얼마나 기분 나 쁜 줄 알겠어요?!” “시나마...!!!” 드래마가 화난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웃음 터지는 소리가 났다. “크와핫핫핫핫핫핫!!!!!! 세상에!!! 쿠핫핫핫핫!!! 믿을수가아.... 푸핫핫핫... 없어어어!!!!” 문간에서 디트마가 외출복 차림에 포대를 지고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디트마!” 드래마가 그를 보고 소리쳤다. “디, 디트마...” 시나는 좀 당황했다. “헉헉...쿡, 쿡.. 드, 드래마, 세상에... 네게 그런 말을 한 여자는 전 6계급 을 통틀어 시나마 하나 뿐이지? 핫핫, 큭큭큭...!” 그는 이제 너무 웃어 허리가 아픈지 손으로 옆구리를 쥐고 괴로워하고 있 었다. “당장, 문닫고 들어와! 얼어 죽일 참이야?!” 드래마가 못마땅해서 말했다. “큭큭, 알았어! 알았어!” 디트마는 문을 닫고 들어와 포대와 외투를 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아직도 키들거리며 웃고 있었고, 시나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쳇! 이 사람들은 집에 들어올 때 남의 말 엿들으며 들어오는 버릇이 있 는 건가?] “하하하핫... 도대체 뭐 때문에 시나마가 네게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드래마는 아직도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책을 가리켰다. “시나마가 책을 읽을 수 있대.” 그때까지 웃던 디트마의 얼굴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뭐? 믿, 믿을 수가.... 정말로.. 시나마가 책을 읽을 줄 안다는 말이야?” “나도 그걸 알고 싶어. 시나마?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지?” 드래마는 책을 펼쳤다. “자, 읽어봐. .....어차피 거짓말이겠지만.... 시험해보는 거야 어렵지 않 지.” 그 말에 시나는 또 화가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꾹 눌러 참았다. 대부분의 나쁜 일들은 참지 못하고 화를 성급하게 내는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정말, 남을 화나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구만. 쯧!!!!] 시나는 책을 집어들고 드래마가 가리킨 부분을 딱딱한 목소리로 읽었다. “.....저 영광과 용맹의 상징이었던 루온 루즈크는 레이디 셰링의 초 여름 밤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내는 장미보다 더 고운 가슴에 안겨 천사와도 같 은 숨결을 내뿜으며 힘들게 말을 이었다...아- 그대여... 나이팅게일의 지 저귀는 목소리보다 아름답고 한 여름밤의 환상보다 아름다운 그대여-- -” 읽는 이도 물론이지만 듣는 이들도 과히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시나가 책을 정말 읽는 다는 것에 놀란 탓도 있지만 닭으로 폴리모프 시킬 것 같 은 내용에 식용유 다섯 병은 삼킨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 그만! 시나마 제발 그만해요. 윽.. 닭살이야!...드래마! 잘 좀 골라서 읽으라고 하지....!” 디트마가 팔을 득득 긁으며 말했다. 드래마는 그런 디트마를 무시하고 느 끼한 속을 꾹 참으며 시나를 이제사 처음 본 것처럼 자세히 보았다. 책을 든 시나는 이제 많이 어둑해진 거실에서 담담히 서 있었다. 놀라운 소녀였다. 누구나 추는 춤도 못 추면서 글씨를 읽을 줄 알다니 방 금 들었지만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남이 마노테 소녀가 글씨를 읽는다고 했다면 드래마는 그 사람을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드래마는 고 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글을 읽는군... 4계급 루이티온이나 하바티온 여자들 가운데서 도 글을 읽는 여자는 거의 못 봤는데....” “..희한한 일이야.” 디트마도 이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팔을 긁다말고 시나를 보았다. 그들 의 감탄한 시선에 시나는 좀 쑥스러워졌다. [글자를 읽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우리 세계에선 거의 다 글자를 읽 는데... 저렇게 놀라다니 내가 더 민망하네.] 디트마가 말했다. “시나마. 정말 아쉬워요. 당신이 얼음의 숲에만 안 떨어졌어도.. 당신의 배경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놀란 건 20년만에 처음인 것 같아요.” “하하.. 그, 그래요?” 이것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면 자신의 말이 먹힐지 도 몰랐다. “저, 그러니까.. 드래마, 디트마? 이상하지 않아요? 저 같은 사람이 글을 읽는 게? 그러니까.. 전 이 세계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 세계 에선 이런 건 보통이거든요. 대부분 모든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상 하귀천 따지지 않고요. 뭐, 이것도 나라에 따라 틀리긴 하지만.. 그러니까.. 저기 그 12개의 세계 중 하나에 제가 말하는 세계 없나요? 모든 사람들이 책을 읽고 학교에도 다니고..” 드래마가 피식 웃었다. “그런 세계는 없어. 시나마. 분명 너의 경우는 이상하긴 하지만.. 12개의 세계 모두 엘이 다스리시고 6계급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지. 모두가 책을 읽는다고? 참으로 엄청난 일루젼이군. 마노테가 책 을 읽으면 일은 도대체 언제 한단 말이야?” [윽!] 시나는 절망했다. “저, 그러니까 제 말은.. 사회체계가 완전히 다른...” 드래마가 시나의 말을 잘랐다. “됐어. 시나마. 분명히 넌 베르노크인으로 거울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학자 의 시중을 들고, 음.. 머리가 좀 좋아서 글씨를 익히게 된 경우일거야. 아 니면 학자가 아닌 성직자의 시중을 들었던지.” 디트마가 탁자에서 일어서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납득할만한 설명이군.” [도대체 뭐가 납득할만하다는 거야! 뭐가?! 아윽!!! 정말!!!] 시나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시나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 지만 이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화나는 일이긴 하지만 이들이 몰라서 그런 거라면 이들만 탓할 순 없었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우리 세계로 돌아갈 만한 정보!!] 시나는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었다. [이렇게 흥분만 해서는 아무 것도 안되지...] 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하하... 여, 역시 그런 건가요? 기억상실에 일루젼이라 그런지 헷갈려 서... ...저 드래마? 그 12개의 세계에 대해 써 놓은 책 없을까요? 그걸 읽 다보면 진짜 우리 세계에 대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아, 저.. 책을 읽더라도 시키는 일은 열심히 할게요. 오늘 춤 수업도 받았고 집안 청소도 했거든요? 그 밖에 어떤 일이라도 할 테니까..” 디트마는 제시마가 가져온 바구니에서 밀가루와 우유를 꺼내다가 책을 요 구하는 시나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의외로,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던 드래마는 몹시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나를 바라보았 다. 아마 그가 이렇게 시나를 정면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 본 것은 처 음일 것이다.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570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2-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5/03 21:23 읽음:2832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22- <제 11막. 시나, 드래마와 디트마를 놀라게 하다.(2)> [음.. 꽤 부드러운 눈빛인데? 그럼 읽게 해줄 건가?] 그때 뜻밖에 드래마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미소짓는 건 처음 본지라 시 나는 정말 놀라고 말았다. 진한 블랙 사파이어의 눈이 화덕의 불빛 때문 에 투명한 남색으로 반짝였다. 그는 상냥하게 말했다. “...정말... 순수한 회색 눈이군.” “예?”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갑작스런 그의 말에 시나는 당황했다. [책을 읽게 해달라는데 웬 순수한 회색눈?] 드래마는 시나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표정을 보아 자기도 모르게 하는 말 같았다. “아니.. 그냥.... 순간 검은 색이 아닌가 해서...”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디트마가 인상을 쓰고 드래마를 노려보았다. “드래마...!” 디트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드래마의 부드러운 표정이 확 깨졌다. 그리 고 곧이어 창백해졌다.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지는 것도 같았는데 어 두워서 확실하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얼버무리듯 말했다. “아.. 아, 배고파. 디트마? 오늘은 네가 식사 당번이지? 빨리 만들어 줘. 난 내 방에 있을 게.” “드래마!” 디트마는 다시 한 번 더 화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드래 마는 그의 부름을 무시한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디트마의 표 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제기랄...!!! 아직도! 아직도 그렇군!!” 시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가, 갑자기 왜들 이러지?] 그러다 시나는 디트마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으악! 세상에!] 디트마의 무서운 표정 때문에 말을 걸기 힘들었지만 시나는 그래도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저어기... 디트마? 그 밀가루 반죽 제가하면 안돼요? 오늘 식사는 제가 만들게요...” 분위기가 안 좋긴 했지만 저녁식사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밀가루를 앞에 두고 또 그 쿠냐냔지 미원인지 하는 조미료 병을 들고 있었던 것이 다. 밀가루를 두고 팬케이크를 상상했던 시나는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하지만 디트마는 시나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나를 보았다. 마치 딴 세상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시나는 참을성 있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디트마?” “아, 시나마...”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린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생각에서 겨우 풀려난 표정이었다. “오늘 식사 제가 만들게요.” 그의 눈이 놀란 듯 했다. “요리 할 줄 알아요?” “그럼요. 드래마나 디트마보다 잘 할걸요.” 디트마는 씁쓸하게 웃었다. [잘 됐군... 지금은 요리고 뭐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럼 부탁할게요..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도 잠깐 내방에 있고 싶은데..” “그러세요.” 여러 가지 조미료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제정신이 아 닌 듯해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쿠냐냐 병을 탁자 위에 놓은 그는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흐응? 왜 저러지? 드래마가 내 눈을 검은색으로 본 게 뭐 어쨌다고? 어 두우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러고 보면 나도 현실세계에선 콘택트렌즈로... 아!!! 내 콘택트렌즈!!] 시나는 자신의 콘택트렌즈 생각이 났다. 거울을 볼일이 없으니 눈 색깔 따위 생각할 일없었고 콘택트렌즈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당 장이라도 디트마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교복을 붕대로 만들면서 작은 케 이스 보지 못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관두었다. 아까 그의 표정으로 보아 나중에 천천히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나는 디트마의 방문과 드 래마의 방문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왜들 그런 건지. 참.] 그들이 지금 방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심히 궁금했지만 한 집에 살게 해 주었다고 그들의 사생활까지 참견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었다. [하는 수 없지.. 콘택트렌즈도 그렇고 책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묻는 수 밖에. 지금은 일단 팬케이크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하자.] 시나는 자신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조미료 병들을 하나하나 열고 맛보았 다. [웅.. 이건 ‘칸자’인가? 달짝지근... 이건 필요하고...] 한편 디트마의 질책하는 음성에 쫓기듯 방에 들어온 드래마는 문을 닫고 거기에 기대섰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스온.. 아피네스님...]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아마 그가 죽 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감히 입 밖으로 내어 불러 볼 수조차 없 는 이름. 22년 동안 내내 그의 가슴 속 가장 깊은 저 밑바닥에서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쿡쿡.... 디트마가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난 정말 멍청한 자식이 야.” 아까 시나마가 자신에게 멍청이라고 욕했던 것이 생각났다. 책을 읽고 싶다고 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의 기억 속의 그녀도 책을 읽길 좋아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검은 눈의... “제기랄!!!”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엘이시여.. 제발 이 기억을 가져가 주십시오. 저를 괴롭히는 이 생각들 을.. 일루젼과 기억상실에라도 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거의 매일 얼음의 숲을 찾지만.. 저 저주받을 과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제 발..] 그러다가 그는 두 손을 스르르 내렸다. 그의 눈은 회한과 어쩌지 못할 애 정으로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이 기억은... 기억 만이라면.. 죄가 되지 않겠지요? 이 생 각 때문에 제가 끝내 파멸하고 만다 하더라도.. 엘이시여 이 기억이 언제 까지나 남아 있도록...]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서 해방되고 싶지만 또한 해방되기 싫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큭.. 큭.. 제기랄......” 그는 침대에 앉았다. 그의 나이는 42살이었다. 앞으로 3년 후까지도 배우 자를 맞지 않으면 그는 목숨을 잃게 된다. 디트마도 그것을 알기에 그를 다그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여자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 일 수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내를 맞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 가 없었다. 마치 어떤 병에 걸린 것과도 같았다. 그 병의 독은 언제까지나 드래마의 몸에 영향력을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힘없이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1년 이상 미혼남녀가 ‘은혜의 법’에 묶여 있으면 결혼관계가 된다라...] 디트마는 그가 시나마 같은 마노테와 결혼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그전에 루온 루사벨라와 결혼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 했다. 하지만 사 실 드래마에겐 신분 따윈 아무 상관이 없었다. 디트마 앞에선 저런 여자 어쩌고 말했었지만 그건 단순히 ‘아내’로 삼으라는데 질색해서 한 말이 었다. 스온 아피네스가 아니라면 그에겐 귀족이든 하층민이든 마찬가지였 다. 설사 그것이 예전의 약혼녀였더라도... [그래.. 시나마와 결혼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가? 성인식을 치를 수 있고.. 나의 신분도 돌아오는 거고..?]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드래마의 의식 한쪽에선 다른 생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은혜의 법'을 거부할 순 없을까? 시나마를 데려갈 만한 다른 남자는...? 글씨를 읽을 줄 아니까 성직자로서 훈련을 받게 해달라고 카할에 맡기 면..? 역시 마노테라서 그런 건 불가능할까? 아니야. 어디선가 성직자는 신분과 상관없이 될 수 있다고 읽었는데... 그래서 나도... 아, 이런.] 그는 자신의 두 가지 생각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디트마가 들으면 길길이 날뛰겠구만. 내가 성직자가 된다고 하면 말이 야.. 훗.” 하지만 그것은 드래마가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었다. 성직자가 되는 서약 을 하면 배우자를 맞지 않더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식을 치 르지 않은 채 성직자가 되면 평생 아내를 맞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괜찮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여 평생을 사느니 성직자로서 혼자 사는 것이 나았다. 마노테 출신의 성직자라 별 대우는 못 받겠지만 그래도 그 편이 나았다. 그는 쓸쓸한 눈빛을 지었다. 성직자가 된다는 건 율법 상 허 락돼 있다고 해도 마노테 같은 하층민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했고 상당히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드래마 는 괜찮지만 시나마는 지식부분에서 걸렸다. 기본적인 상식도 모를 정도 니까. 하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 될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시나마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녀까지 성직 자로 보내는 건 너무한 일이었다. 그녀는 배우자를 맞고 성인식을 치르고 아이를 낳아 키울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 [1년 이내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시나마의 남편감을 찾기로 했다. 시나마를 성직자로 만드는 건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구한 종속주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벌써 머리에 몇몇 소년 들이 떠오른다. 드래마는 결심을 단단히 굳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일단 디트마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다. 자신의 본심을 안다면 난리를 피울 것이 틀림없었다. 디트마의 나이는 40세로 적은 편이 아니었는데 그도 역시 하루빨리 배우 자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드래마가 배우자를 구할 때까지 자신도 구하지 않겠다고 은근히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시마 정도라면... 신분은 낮지만 착한 소녀였다. 20년 동안 봐왔 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쿡.. 나도 디트마에게 제시마 자랑을 많이 해야 하겠군.. 보석으로 성인 식을 치른 뒤 디트마를 유혹할 생각을 하다니 보통이 아니야. 성인식을 치른‘여성’을 거부하기란 디트마도 쉽지 않을걸.. 후후..” 드래마는 싱긋 웃었다. 아까 시나마와 제시마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 생 각난 때문이었다. 원래 일루티온이었던 디트마에겐 평생 마노테온으로서 살아가야 할 짐이 지워진 것이지만 드래마는 알았다. 일루티온으로서의 20년보다 마노테온으로서 살았던 20년간을 그가 더 좋아한다는 것을. 일 루트였다지만 디트마는 고아로서 가정 있는 마노테온보다 더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사정을 알았기에 드래마는 똑같이 고아인 제시마에게 더 동정 심을 갖고 그녀에게 집안에서 필요한 매일의 식료품을 사오도록 일정한 급료를 주고 시킨 것이었다. 빙그레 웃던 드래마의 기억 속에 예의 그 목걸이가 떠올랐다. 붉은 색의 루비.. 그거라면 제시마도 최고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 다. 그것과 비슷한 목걸이를 하고 있던 그의 아름다운 소녀처럼...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밤은 그녀의 생각이 주체할 수 없 이 떠오르고 있었다. 괴롭고 슬프고 달콤한 기억들... 그는 스르르 눈을 감 았다. “스온...아피네스님..”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드래마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뇌리에 어떤 느낌이 벼락치듯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그 느낌에 드래마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20년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느낌이었다. 느낌의 여운에 가슴이 저렸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설마.. 아냐... 이럴 수가...! 이건...!” 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설마!” 그때 그의 벽장 속에서 뭔가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웅- 공기를 희미하게 진동하는 그 소리는 드래마의 귀에 각인을 새기듯 똑똑히 들렸다. “이..럴수가..!”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 엘야시온님..?” (계속)================================================== 음음.. 겁먹었던 것보다 많은 분들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 다.(안도의 한숨... 휴우...^^;;;) 그럼, 안도감을 가지고... 어린이 날 뵙겠습 니다. 하하...^^ <엔...^^>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605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3-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5/05 02:31 읽음:2864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23- <제 12막. 마노테온, 희망의 이름.(1)> 시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솥에 있는 수프를 저었다. 솥에선 슬슬 맛있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려도 될 것 같은데 좀 더 은근한 맛 을 내기 위해 제시가 가르쳐 준 대로 더 끓이기로 했다. 어젯밤 시나의 팬케이크는 대 호평을 받았었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나온 디트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팬케이크에 입을 댔다 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래마도 놀란 표정이었는데 그게 너무 지 나치게 놀라는 표정들이라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그만큼 그들은 그 동안 시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고 있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그런 시 나의 기묘한 기분은 디트마가 계속 음식에 대한 칭찬을 해주자 많이 좋아 졌다. 디트마는 얼굴을 풀고 웃기까지 했다.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나 아진 것 같았다. 드래마는 굼벵이도 어쩌고 하면서 시큰둥하게 먹었는데 맛있다는 소리는 안 했어도 몇 장씩이나 먹은 걸로 보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지 금까지 시나는 드래마가 아주 조금씩 먹는 사람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 건 음식이 비위에 안 맞아서 그랬던 것이지 맛만 있으면 그도 많이 먹는 타입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디트마와는 달리 어쩐지 계속 어두운 표 정이었다. 디트마는 그런 그를 그냥 못 본척하며 시나에게만 말을 걸었다. 수프가 끓어 튀자 그것을 피하며 시나는 한숨을 지었다. [도대체 드래마라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니까.. 쯧.. 같이 사는 사람 불편 하게시리...] 식사가 끝난 후 시나는 앞으로는 자신이 음식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조 심스레 물었다. 이들이 만드는 것은 예의 상이라도 도저히 음식이라 부를 수 없었다. 시나의 아빠도 음식 만드는데 솜씨가 없기는 했지만 이들 정 도는 아니었다. 시나는 살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디트마는 시나의 그 말에 무척이나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마 는 이제서야 주어온 보람.. 어쩌고 하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디트마는 그런 그를 한 번 째려보고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감동 어린 표정으 로 그날 그가 사온 식료품들을 보여주고, 매일 제시마가 어떤 음식들을 갖고 오는 지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것으로 안심했다. 굶어죽을 염려가 없어진 것이다. 시나는 수프를 불에서 내려놓았다. 적당한 재료를 물에 넣고 끓이다가 적 당한 조미료만 넣으면 맛있는 음식이 완성되는데 디트마와 드래마가 만드 는 것처럼 맛없게 만들기도 힘들 것이다. 자기들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조 미료만 듬뿍듬뿍 넣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맛있는 것을 만들 기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음식을 다 만든 시나는 테이블에 앉았다. 내일은 제시한테 수프 말고 다 른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오전 무렵 재료를 가져온 제시는 자세하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었다. 다 음에 재료를 사러 마을의 가게에 같이 가보자는 그녀의 말에 시나는 고개 를 끄덕였다. 디트마가 몇 일에 한 번씩 열리는 큰장에서 식료품을 사오 긴 했지만 그건 희귀한 향료라든지 차 뿌리, 고기, 옷 같은 종류일 뿐 매 일 먹는 밀가루라든지 우유는 마을 안에서 사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제시마는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섰다. 무슨 벌목장에 음식을 나르러 가야한다는 말이었다. 마을 의 부인과 소녀들이 차례대로 한 번씩 돌아가며 점심을 날라주는 것 같았 다. 시나로서는 제시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제시는 시나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 이따가 밤에 마을의 여자들이 모여 길 쌈하는 모임에 가면 많은 또래의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 말해 주었다. '길쌈’이라니... 도대체 그건 어떻게 하는거람? 등골이 오싹한 시나였는 데,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말에 그냥 어떻게 되겠지 하며 편하게 마음먹 었다. 모르면 배우면 되지 않는가? 춤처럼 아무리 배워도 잘 안돼는 것이 있긴 하지만 ‘길쌈’은 몸을 움직여서 하는 게 아닐 테니 그럭저럭 될 것이다. ‘춤‘이라... 그래 뭐든‘춤‘보단 나을 것이다... 어제 춤 수업이 떠오른 다.. 우... 괴롭다.. 유리마 부인은 시나의 딱딱한 몸을 억지로 펴주며 한숨 을 푹푹 쉬어댔었다. 흐이구.. 오늘 또 가야하는데 어떻게 안 갈 수는 없 을까.... 시나는 턱을 괴고 눈을 굴리며 머리를 짜내 보았다. 웅.. 웅... 여기 까지 생각하는데 진료실의 문이 열리고 디트마가 나왔다. 피곤한 표정으 로 뒷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시나마? 맛있는 냄새네요? 이 수프 지금 먹을 겁니까?” “예? 아, 네. 이제 사람들 치료는 끝나셨어요 디트마?” 시나는 점심도 못 먹고 오전 내내 사람들을 치료한 디트마를 위해 솥에 있는 수프를 떠서 내 놓았다. 제시마가 가져온 빵도 같이 내놓았다. “네. 당분간 한 숨 돌려도 될 것 같아요. 아, 이것 맛있군요.” 오전 무렵에 잠깐 디트마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는데 사람들의 상처라든지 병은 다양했다. 이 마을의 주된 일은 벌목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부 상당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찢긴 상처부터 어린아이의 감기와 노인들의 뼈울림병(류머티스나 신경통을 말하는 것 같았다.)에 이 르기까지 디트마 혼자서 그 모든 일을 다하고 있었다. 그 대가로 특별히 뭘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간간이 사람들이 음식이라든가 생필품 같은 것을 갖다놓는 것 같았는데 어차피 서로간에 풍족하게 사는 편은 아니니 까 디트마는 대부분 그것을 거절했다. 그가 사려 깊고 친절하게 마을 사 람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시나는 디트마와 드래마가 왜 그 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배가 고팠 는지 순식간에 수프를 다 먹었다. “수프 더 드릴까요?” “아, 아, 네.” 시나는 수프를 다시 그릇 가득 떠서 주었다. 하지만 디트마는 이번엔 수 프 그릇을 앞에 놓고도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젯 밤 저녁을 먹고 드래마가 디트마를 불러 이야기 할 게 있다고 하며 둘이 서 잠시 나갔다 왔는데 그때부터 줄곧 디트마의 표정은 근심이 서려있었 다. 게다가 아침에 드래마는 도끼를 갖고 나가지 않았다. 그것으로 보아 벌목장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도대체 어딜 가는 걸까 궁금했지 만 굳이 묻지 않았다. 드래마와 디트마의 표정이 둘 다 어두운 것을 보아 그냥 잠자코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때 디트마가 혼잣말로 뭐라고 중 얼거렸다. “...이제 와서... 젠장...” “네? 뭐라고요?” “아?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디트마는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수프를 떠먹었다. 수프 를 먹으며 디트마는 우울하게 말했다. “시나마...? 어쩌면 드래마와 나는 여행을 떠날지도 몰라요... 아니, 어쩌 면 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게... 두 달 정도 예정이 될 것 같으니까... 그럼 당신은 그 동안 제시마네 에서 같이...” “네?” 무슨 소린가 하여 시나가 물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거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디, 디트마.... 디트마님!!!! 빨리 좀 와 주세요!! 쇼마와 베리마 유크마가 죽을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팔마?!!” 디트마는 먹다말고 깜짝 놀라 일어섰다. 말하는 남자도 얼굴에서 피를 줄 줄 흘리는 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디트마는 남자를 제치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시나도 같이 일어나 뛰어 나갔다. [헉!!!] 시나는 바깥의 참혹한 광경에 숨을 삼켰다. 문 밖에는 나뭇가지로 엉성하 게 만든 들것에 실려온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었다. 팔이나 다리가 반정도 잘린 사람, 배가 길게 가로로 찢긴 사람, 어떤 사람은 눈을 다쳤는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게다가 다친 뒤 땅에 굴렀는지 상처엔 흙과 지푸라기 같은 것이 잔뜩 묻어 피와 살과 함께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욱!!! 이, 이럴 수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해 구역질이 나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디트마 또한 놀라긴 했지만 힐러다운 침착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살피며 물었다. “이 상처들은 칼에 베인 상처들.. 맞죠...?” 팔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설명했다. “이, 인간 사냥꾼들이었어요. 여자들을 노린 듯... 벌목장을 덮쳤어요. 필 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크흐흑... 여자들은 전부 다 붙잡혀가고 말았어요 ..” [버, 벌목장이라고?!!!] 시나의 얼굴의 새파랗게 질렸다. [제시마!!!!] “제시마는요?!!!” 시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치자 팔마는 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제, 제시마? 제시마는...” 그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됐다. 지금 막 제시마는 들것에 실려 도착 하고 있었다. 들것 위에 누운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온 몸이 피투 성이였다. “제시마!!” 그녀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던 시나는 제시마의 팔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 았다. 믿을 수 없었다. 시나는 비명이 새어나오는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 다. “제, 제시마!!!” 그때 그녀를 날라 온 남자가 디트마에게 달려들어 매달렸다. 행사에서 쭈 뼛거리며 시나와 제시마에게 말을 걸던 촌장의 아들이라던 남자였다. “디트마님!! 제시마를 구해주세요!!! 제발!!!” “세일마..” 다른 이들을 부상을 살펴보던 디트마는 세일마를 보았다. 그도 만만치 않 은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그는 제시마의 걱정만 하고 있었다. 팔마가 말 했다. “제시마는 목걸인가 뭔가를 뺏기지 않으려고 하다가 도적한테 팔 채로 베였어요. 그 자식들이 부상당한 제시마도 들쳐 엎고 가려고 했는데 세일 마가 죽기살기로 막았죠.” 부상당한 사람들은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마침내 디트마가 말했다. “쇼마, 베리마, 유크마, 제시마를 세면실로 옮겨요! 그리고 누군가 진료 실에 가서 지혈초를 가져와요. 하얀 색 반점이 있는 잎이에요! 하얀 색 병도 가져오고! 상처가 가벼운 사람들은 지혈초를 가져다가 입으로 씹어 붙이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 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제시마를 포함하여 4명의 부상자 를 세면실로 옮겼다. 그때서야 시나는 세면실에 있던 침상 비슷한 것이 어떤 용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위에 사람들을 눕히고 그것도 모자라 거실에 있는 탁자까지 가져왔는데 바닥에 피가 강을 이루는 것 같았다. 디트마는 도끼를 가져와 화덕 위의 솥에 펄펄 끓는 물 속으로 집어넣었 다. 뭘 하려고 그러는지 의아해서 쳐다보는데 디트마가 시나를 보고 소리 쳤다. “시나마! 눈을 가려요!” 엉겁결에 눈을 가린 시나는 둔탁하게 퍽 하고 내리꽂히는 도끼소리를 들 었다. [서, 설마..!] 디트마는 반정도만 붙어 덜렁거리는 팔 다리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아예 그들의 팔 다리를 깨끗이 제거해나가고 있었다. “왜, 왜 저런..!” 시나는 너무 놀라 말했다. 피, 뼈, 살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 다. 한 남자가 말했다. “보지 말고 나가 있어요! 아가씨! 저렇게 하지 않으면 상처가 곪아 썩는 다고!!” 하지만 시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 이 사람들 상처에 붙은 흙 좀 씻겨요!!” 도끼를 집어던진 디트마가 한 쪽 다리를 잃은 남자에게 달라붙어 지혈을 하다가 외쳤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시나는 덜 덜 떨리는 몸을 억누르고 제시마 쪽으로 갔다.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천에 적셔 제시마의 상처부위 를 닦았다. 아까 세일마라는 남자도 제시마의 곁에 오고 싶어했지만 그도 안정을 취해야 했으므로 그는 거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상처를 닦고 있 는데 제시마가 눈을 떴다. “시, 시나...” “제시..” 시나는 눈물이 글썽이며 천으로 그녀의 더럽혀진 얼굴을 닦았다. 분홍색 체크무늬 천은 제시마의 피 묻은 얼굴을 말끔히 닦아주었다. “미, 미안해... 나, 네 목걸이를 지키려고 했는데.. 네 어머니의 유품..” 제시마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미안해. 시나. 내가 쓸데없이 네게 졸라서.. 미안해..” “괜찮아, 제시! 바보같이! 도적 떼가 달라고 하면 후딱 줘버리면 됐잖 아!!!그까짓 목걸이는 없어도 된다고!!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거야?!!!” 시나에게 있어 목걸이는 그까짓 물건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도 사람의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시마는 눈물 어린 눈으 로 다시 한 번 더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로...”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고개를 툭 떨구었다. 피를 너무 쏟아 정신을 잃은 것이다. “제시!” “저리 비켜요 시나마.” 디트마였다. 디트마는 온 몸에 피를 튀기고 얼굴에선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제시마의 상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들고 있던 하얀 병을 기울여 그 안에 있던 가루를 상처에 뿌리자 거품 같은 것이 일어났 다. 소독약인 것 같았다. “붕대와 지혈초..... 제기랄! 지혈초가 모자라!!” 그는 욕설을 뱉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하는 수 없 다는 듯 제시마의 잘린 팔을 들더니 그냥 붕대로 감쌌다. 당연히 지혈이 안 되어 붕대는 삽시간에 피로 번지기 시작했다. 치료라든가 의술에 대해 선 잘 모르는 시나였지만 이렇게 피를 콸콸 쏟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있었다. [제, 제시!! 죽으면 안돼!!!] 하지만 디트마는 단호한 표정으로 피가 번지던 말던 무시하고 끝까지 붕 대를 감았다. 붕대를 다 감은 디트마는 창백한 얼굴로 제시마의 얼굴을 보았다. “디, 디트마! 제시를 살려줘요!” 시나의 말에 디트마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표 정으로 피범벅인 두 손을 들어 제시마의 잘린 팔 부위를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두 손 사이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면실에서 디트마를 돕던 몇몇 사람들이 신 음을 흘렸다. “마, 맙소사..! 저, 저게 뭐지?!!”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 라이트.. 히, 힐러(Healer) 라이트(Light)다..!! 페이스 힐러 (Faith-Healer)의 성스러운 빛!! 디트마님이 페이스 힐러란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뭔데? 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디트마는 지금 이 순간 아무 음성도 안 들리는 듯 제시마의 치료 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땀을 흘리는 그의 얼굴을 연초록색의 빛이 흔들리듯 비추고 있었다. 시나는 디트마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밝은 야광의 연 초록색이었고 그 빛에 물든 디트마의 얼굴은 진지했다. 왠지 마음이 떨렸 다. [너무... 아름다워...] 빛을 보고 한 말인지 디트마를 보고 한 말인지... 여하튼 아름다웠다. 피 냄새와 살점들, 뼈가 이 널린 아수라장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꺼내다 니 시나 자신도 자신의 생각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아름다 웠다. 초록빛을 내며 사람을 치료하는 디트마,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모습 보다 아름다웠다. 그 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시마의 상처에선 이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침내 디트마는 제 시마의 팔을 놓았다. “헉!!!” “디트마!” 그의 얼굴은 아까와 비교해서 무척이나 핼쓱했다. “헉, 헉... 하아.. 하아... 헉...” 디트마는 몸을 가늘게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몸 의 중심을 잡을 수 없는 듯 두 손으로 탁자를 집고 서 있었다. 안색이 너 무 창백해서 디트마의 얼굴에 비하면 제시마는 건강한 사람처럼 보일 정 도였다. “디, 디트마! 괜찮아요?” “헉, 헉... 아, 괘, 괜찮습니다... 이, 이제... 이 사람들은 됐으니... 다른 사 람들을...” 시나는 그가 쓰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하지만 그는 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치료를 하려고 했다. 그때 딱딱한 음성이 세면실 입구에서 들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사람들은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회색 후드 차림의 서늘한 모습으 로 드래마는 눈살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드래마님...” 드래마는 세면실을 천천히 둘러보고 이제 시선을 디트마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설명했다. “버, 벌목장을 인간 사냥꾼들이 덮쳤어요. 여자들이 끌려가고... “ 드래마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트마는 왜 저러는 겁니까?”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설명하려 했다. “디, 디트마님의 손에서 초록빛...” “말하지 마세요!!” 디트마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말을 들은 드래마의 표정은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너무나 무서운 그 표정에 시나는 질려버렸다. 드래 마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디트마는 힘이 드는 듯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드래마.. 이, 이건 아무 것도 아냐.. 그저.. 잠깐... 지혈을..” “..이 자식.. 너 죽고 싶은 거냐..?” 화를 억누른 듯 이사이로 말하는 목소리였다. 디트마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고.. 잠깐이었다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그의 새파란 안색과 떨리는 몸은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드래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디트마의 따귀를 세차 게 짝 갈겼다. “감히 내게 거짓말하지 마라!! 일루트 딧!! 그 시퍼런 낯짝으로 실실 웃 지도 말고!!! 죽고싶으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너 혼자 죽도록 해!!” 따귀를 맞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지만 그의 말에 디트마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하.. 이것 예상외의 효과인걸.. 그토록 기다려왔던 말을 이렇게 듣다니?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하핫... 루온 루사트님.. 당신이 하신 말을 알 고 계십니까...?]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606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4-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5/05 02:32 읽음:2829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24- <제 12막. 마노테온, 희망의 이름.(2)> 하지만 드래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의 눈은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살벌했다. 그 눈으로 축 쳐져 있는데도 왠지 미소 짓고있는 디트마를 쏘아보는데 그를 죽이려는 게 아닐까하고 걱정될 정도 였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디트마의 몸이 무너질 듯 비틀거리자 시나는 그를 가까스로 부축하며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이에요!!! 드래마!! 그러잖아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을!!!” 드래마는 시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에 시나는 흠칫 놀랐다. “..비켜.” 그 목소리에 시나는 디트마의 팔을 놓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디트마의 몸이 무너지자 드래마는 그를 어깨로 들었다. 꽤 무거울 텐데 몹시 화난 표정을 짓고 있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멍청한 자식! 죽으려고 정말 용을 쓰는 구만!! 제기랄!!” 그렇게 말한 그는 거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피해 디트마를 그의 방에다 날랐다. 말투와는 달리 드래마는 조심스럽게 그를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품속에서 진한 초록색의 병을 꺼내 그에게 마시게 했다. “마셔!!” “하, 하지만, 이것은..” “시끄러워! 이 자식아!! 네가 안 마시면 이 병을 바닥에다 깨뜨려 버릴 거야!!” “하아.. 성질머리하고는...” 깨뜨린다는 말에 억지로 그것을 마신 디트마는 침대로 푹 쓰러졌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내가 돌볼 테니 이 방에 처박혀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 젠장!!” 험악하게 쏘아붙인 그는 디트마 방의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사람들이 어 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있는데 그가 소리쳤다. “부상자들을 데려와! 세면실에 있는 녀석들은 디트마가 지 생명을 쏟아 살려놨으니 됐고 나머지 녀석들 말야!” 어쩐지 평소의 그와는 다른 고압적인 태도였다. 평소의 그는 딱딱하고 사 람들과 잘 안 어울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공손하다고 할까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고 할까 그런 것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이 느 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 같았다. 사 람들은 드래마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움직여 사람들을 데리러 갔 다. 드래마는 후드를 벗어 던지고 진료실에 앉아서 디트마에 뒤지지 않는 솜씨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진료실 밖에서 치료 받기 위해 차례로 기다리고 있었고 시나만이 그를 돕기 위해 옆에 서 있 었다. “..인간 사냥꾼이라고..?” 드래마는 한 남자의 팔에 나 있는 찢어진 상처를 꿰매며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드래마 앞에서 훌쩍거렸다. “네..네.. 드래마님이 계셨더라면.. 이렇게 까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드래마는 비웃는 표정으로 남자를 흘끗 보았다. 웃기지 말 라는 듯한 그의 경멸 어린 눈초리에 시나는 숨을 삼켰다. [고압적이고 거만한 표정... 그 꽃관 아저씨나 마부 같은...] 부상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지 믿을 수 없었 다. 디트마와는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드래마의 그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사라졌다. “...당분간 물에 닿지 않도록 해요.. 됐어요. 다음 사람.” 드래마는 다시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얼굴엔 가면 같은 무표정만이 있었 다. “고, 고맘슴니다. 드내마님..” 남자의 말은 좀 어눌했다. 아픔을 잃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나뭇잎 을 씹고 있어 혀가 저린 것 같았다. “시나마, 이 바늘 소독하고 새 걸로 가져와.” “네..네.” 시나는 끓여서 소독한 새 바늘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드래마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사람들의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사람의 살을 꿰 매는 것이 아니라 천을 가지고 바느질하는 듯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시 나는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의 상처보다 드래마에게 더 두려움을 느꼈다. [이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그냥 벌목꾼이라기엔 피에 너무 익숙해 보였다. 시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붕대며 바늘, 소독약을 갖다주는 동안 치료는 끝이 났다. 진료실에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자 드래마는 부스스 일어섰다. 지친 표정이었다. 자 신의 남편이나 아들이 무사히 치료받았다는 것을 안 여자들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으로 드래마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드래마는 몸을 움직 여 진료실의 문을 닫았다. 이미 너무 어두워서 부상자가 있더라도 치료하 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마을 어딘가 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이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자들의 비통한 울음 소리였다. 부상자를 집 으로 운반하던 사람들이 잠시 행동을 멈추고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쇼마가 죽었군... 그 집엔 여자들만 있는데... 쯧, 쯧...” 부상자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자신의 집으로 갔다. 이제 마을 여기저기에선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시나가 듣 기론 약 10여명 정도의 여자들이 끌려갔다고 한다. 드래마가 치료한 사람 만도 50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세면실에서 치료했던 사람들의 생명은 어떻게 될 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시나는 그들이 너무나 불쌍했다. 이 세계에 인간 사냥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시나 의 몸이 떨렸다. 문득 붙잡혀간 여자들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인, 인간 사냥꾼들은 왜 여자들을 데려 간 거죠?..” 드래마는 얼굴을 찡그리며 시나를 보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실로 들어가. 시나마. 여긴 추워.” 시나는 그의 말대로 거실로 들어갔다. 화덕의 불 때문에 거실은 따뜻했다. 거실로 들어간 그들은 탁자에 앉았다. 마을 사람들이 세면실과 거실을 깨 끗이 청소해주고 탁자까지 제자리에 놔주고 간 것 같았다. 찢어진 가죽옷 을 깔고 사람들을 눕혔기에 탁자엔 핏자국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탁자 다리엔 엄청난 피가 튀어 있었지만 시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여자들 의 운명이 궁금했다.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묻기로 했다. “여자들을 잡아가서 무엇에 쓰는 거죠?” 드래마는 별 이상한 것을 다 묻는다는 듯 시나를 보았다. “그것에 대해 기억을 잃었다면 그냥 모르는 채로 있는 게 나아. 별거에 다 호기심을 가지는군. 숲에는 혼자서 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만 기억해 둬. 언제 인간 사냥꾼이나 몬스터가 출현할지 모르니까. ...하긴 여럿이어 도마노테온이라면 인간사냥꾼들에게 속수무책이긴 하지..” 그는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드래마! 여자들을 데려가서 뭐에 쓰는 거예요?” “시나마! 좀!!” 마침내 드래마는 화가 난 듯 했다. 하지만 시나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집스러운 눈으로 드래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본 그 는 한숨을 쉬며 지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맙소사.. 이렇게 고집이 셀 수가... 엉덩이를 몇 대 때려주고 고만 하라 고 하고 싶지만.. 지금은 나도 피곤하니.... 휴.. 젠장!” 드래마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시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팔리는 거야.” “네? 뭘 어쩐다고요?” “팔린다고! 여기보다 더 벽촌에 있는 마노테온 마을이나 어느 정도 큰 도심지의 사창가로 팔리겠지!” 시나의 얼굴이 하얘졌다. [..여, 역시... 그렇구나...] 시나는 슬픈 눈으로 두 손을 꼭 잡았다. 아까 누군가 이네마가 잡혀갔다 고 하는 소리를 했었다. 그 보라색 눈의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은 자신의 딸과 자신의 부인이 끌려갔다는 소리에 비통하 게 울었었다. “....여, 여자들을 구하지 않는 거예요?” “뭐?” “이 마을엔 이렇게나 남자들이 많잖아요. 여자들을 구해야죠! 여자들은 보호받아야 한다면서요?! 그 여자들의 종속주가 있을 것 아니에요?!” 그가 말도 안돼는 소리 말라는 듯 피식 웃었다. “...마노테온은 마노테온 마을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어. 게다가.. 그 여자 들의 종속주는 자신의 종속자를 구하지 못해. 그들은 힘이 없으니까. 몰랐 어? 시나마? 그래서 여자들은 강한 종속주를 갖고 싶어하지.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아주 강한 종속주를 말이야. 약한 종속주는 이럴 때 있으 나마나한 존재야.” 시나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구하지 못한다니?! 강한 종속주가 필요하다 고? 그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그래! 당신은 어때요? 당신은 괴물도 이길 정도니까.. 당신은 강하 잖아요? 아까 어떤 사람도 당신이 있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잖아 요? 당신이 사람들을 끌고!!”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해! 시나마! 내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오합지졸 같은 마노테온을 데리고 4-50명은 될 인간 사냥꾼을 상대할 순 없어! 그 여자들은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의 말에 시나는 몸을 떨었다. “...그럼 이네마는.. 여자들은 어떻게 해요! 그들이 불쌍하지 않아요?” “불쌍?” 드래마는 차가운 눈으로 시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들의 운명이야. 더 강한 종속주를 갖지 못한 것을 탓해야지. 알 겠어? 시나마? 네가 끌려갔다고 하면 ‘은혜의 법’에 따라 정말 싫더라 도 난 널 구해야 돼. 그게 ‘법’이니까! 사냥꾼이 40이든 100이든 널 구 하러 가야하지. 하지만 그 외의 여자들은 내 알 바 아냐. 그들의 종속주도 나서서하지 않는 일을 왜 내가 나서서 해야 하지?” [그런...] 이 순간 시나는 종속주와 종속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약하니까 보호받아야 한다. 더욱 강한 남자에게... 철저 한 약육강식의 세계.... 결국 종속주와 종속자의 관계는 그 세계에서 여자 가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고 보호를 요 청하는 중세의 농노제도와 똑같은 축소된 모형이 여기 있었다. “..여, 영주님은, 영주님은 구해주질 않나요? 자기 마을에서 여자들이 잡 혀갔는데?” 그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마노테온을 위해서 출동시킬 군대 같은 것 없어...여자들이 100명 정도 잡혀갔다면 몰라도.. 10명 정도야.. 그러니까 인간 사냥꾼들도 한 마을에서 한꺼번에 여자들을 잡아가진 않아. ...앞으로 몇 년간 이 마을에서 여자가 붙잡혀 갈 일은 이제 없겠지.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과세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그는 이걸로 말을 마치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난 이제 자겠어. 시나마. 너도 사람들 때문에 피곤할 테니 일찍 자도록 해.” 그러나 시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드래마... 드래마 당신은 비겁해요!!!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자 신의 의무가 아니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당신의 종속자가 되는걸 포기할게요! 대신 이네마와 다른 여자들을 구해줘요! 나 대신 그 여자들 중 아무나 한 명을 종속자로 삼아요!!! 그리고 구하러 가면 되 진.....캬악!!” 갑자기 시나의 몸을 번쩍 들렸다. 드래마가 시나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무서운 힘이었다. “건방 떨지 마라! 시나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난 너의 종속주 가 돼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렸으니까! ‘은혜의 법’이 아니었다면 너 따윈 이 집에 있지도 못했어! 아니 그 전에 네가 ‘검은머리’가 아니 었다면 난 네가 놀(Gnoll)에게 잡아먹히든 말든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거 다!” 그는 시나를 의자에 도로 팽개쳤다. “아악!!” 몸이 의자에 세게 부딪혀 아팠다. “엘께서 너한테 검은머리를 갖게 해 준 것에 감사해! 네 그 하찮은 목숨 이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 냉정한 말이었다. 시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 다. [거, 검은머리? 하하... 이럴 수가. 하지만 난 검은머리가 아닌데?] 시나는 우스웠다. 염색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죽을 목숨이었단 말인가? 그 때였다. “...드래마!!!” 어느새 디트마가 나와 소리쳤다. 시끄러운 소리에 나온 것 같았다. 드래마 가 인상을 썼다. “왜?” “그랬었군! 그렇지 않을까 했었지! 시나마가 검은머리라서 구한 거야! 마 인드 컨트롤(Mind Control)로 사람들이 죽든 말든 전혀 상관 안 하는 네 가 왜 시나마를 구했는가 줄곧 궁금했어! 도대체 넌 언제까지 이럴 거 지?! 정신을 차려! 드래마!” 드래마는 빙긋 웃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디트마.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네가 가장 잘 알 잖아? 난 일루젼(Illusion)과 기억상실에 감염된 인간이야. 바로 여기 있는 나의 종속자처럼. 무엇을 잊어야 하고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겠어. 하하하.. 정말 웃기는 일 아냐? 난 네가 말해주는 나의 과거 따 위 하나도 몰라! 나의 과거는 오직 하나야! 바로 스온...” “그만해-!!! 드래마-!!” 그 외침에 드래마는 입을 다물었다. 디트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당신은... 미쳤어... 루온 루사트님... 제발 잊어버리세요-! 잊어 버리라고요-!” 드래마는 그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공허한 표정이었다. “난 루온 루사트라는 인간도 몰라... 난 드래마야. 마노테온 드래마.”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시나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그들의 대화를 들 었다. [루온? 루온이라니? 제4계급 루이티온의 준말이던 그 루온? 그럼 드래마 가 무인귀족이란 말이야? 그러고 보면 아까 드래마는 디트마를 보고 일루 트라고 했었어.. 그건 평민을 말하는 제5계급 일루티온을 말하는 건가?] 시나는 그 소설에서 말하는 계급을 외워뒀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대 화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디트마는 슬픈 표정이었다. “안돼... 아냐... 그건 당신이 아냐... 당신은 토너먼트의 승리자... 힐라토의 제 1기사.. 루온 루사... 욱!!!” 말을 하는 그의 입에서 갑자기 피가 쏟아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아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막았다. “디트마!” 드래마가 소리쳤다. “디트마!” 시나는 너무 놀랐다. “괘, 괜찮아... 한 곳에 뭉친 피가 풀어지려고 그러는 거야...” “이런.. 바보 같은 자식!!!” 드래마가 중얼거렸다. “들어가! 들어가서 누워있어!” “잠깐만... 말을...” “이제 그만 말해! 시나마 앞에서 다 말 할 작정이야!!!” 그제야 디트마는 시나를 보았다. “시나마...” 시나는 눈에 눈물이 맺혀 놀란 얼굴로 디트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슬픈 얼굴로 시나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군...” 그는 드래마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나중에 드래마...” 그때였다. 누군가 출입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드래마님!!! 디트마님!!!” 드래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지?” 드래마는 시나에게 고갯짓을 했다. 문을 열라는 표시인 것 같았다. 시나는 일어나서 출입문을 열었다. 밖에는 횃불을 든 열 대 여섯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맨 앞에는 촌장이 서 있었다. “초, 촌장님.” (계속)================================================== 『환타지아-장편란 (go FAN)』 4607번 제 목:**엘야시온 스토리** -25- 올린이:roadless(안소연 ) 99/05/05 02:34 읽음:2817 관련자료 없음 ----------------------------------------------------------------------------- **엘야시온 스토리** -25- <제 12막. 마노테온, 희망의 이름.(3)> 촌장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시나마, 드래마님과 디트마님 계신가요?” “네.. 저기.” “무슨 일입니까? 촌장님?” 드래마는 디트마를 침실에 밀어 넣고 나오며 물었다. “드래마님!!!” 그때 한 여자가 울부짖으며 달려나왔다. “디트마님께 베리마, 제 남편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제발...! 제시마를 기적의 힘으로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발!!” 베리마는 세면실에서 치료했던 사람 중 두 번째로 위독한 사람이었다. 내 장이 다 들어 나도록 배가 찢겨 있었다고 기억한다. 첫 번째로 위독한 사 람이었던 쇼마는 아까 죽었다. 하지만 드래마는 그 여자의 울부짖음에도 싸늘하게 말했다. “돌아가세요. 부인. 베리마가 자신의 힘으로 견딜 수 없다면 그는 죽는 겁니다. 디트마가 자신의 생명까지 내 놓고 그를 구해야 할 이유는 없어 요.” 여자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드래마를 보았다. 시나도 알았다. 그 초록빛을 쓰는 건 디트마에게 치명적인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드래마의 말투는 너 무 냉정했다. 그는 그 재수 없는 마부나 꽃관 아저씨를 방불케 할 정도로 고압적이었다. [좀 더 부드럽게 말해도 될텐데!! 너무해!] 드래마의 눈에는 동정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시나는 그 표정을 보며 멍 하니 생각했다.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죽어가도, 피를 봐도, 눈물로 호소하는 여자를 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마음을 조종하는 법? 그걸 말하는 건가? 저 무표정한 얼굴 은...? 그래서 저토록 냉정할 수 있는 걸까? 시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야만 해! 사람이라면 저럴 수 없어! 저것이 드래마 본연의 인간성이 라면 그는 얼음의 숲에서 보았던 그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격을 갖고 있는 거야!] 여자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드..드래마님.....! 제, 제발! 디트마님을!!!” 그때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낯이 익은 남 자였다. “아노마 부인! 아까부터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디트마님은 한 번 그것을 쓰시고 쓰러졌다고요!” 낯이 익은 그 남자는 슬픔과 분노로 흥분되어 있었다. “드래마님의 신경을 거슬리지 말라고요! 그보단.... 그보단... 드래마님!!!붙 잡혀간 여자들을 구해주세요! 우리도 힘을 합치겠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 아노마 부인에겐 너무나 잔인한 말이었다. 여자는 더욱 흐느껴 울었다. 촌 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키르마, 아노마 부인에게 무슨 말버릇인가! 좀 조용히 하게!” [키르마? 아! 이네마의 약혼자!!] 시나는 그제야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키르마라 불린 남자는 울부짖었 다. “제가 조용히 하게 생겼습니까? 이네마가 붙잡혀 갔다고요! 제 약혼녀 말입니다!” 드래마가 피식 웃었다. “키르마. 자네가 내 신경을 가장 거슬리고 있어. 자네 약혼녀가 어쨌단 말이야? 내가 그녀에게 신경 써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녀는 나의 종속 자가 아냐. 바로 자네의 종속자지. 자네가 구할 수 없거든 관둬. 포기하라 고. 새로운 종속자를 찾아!” 아까 시나에게 했던 그대로의 말이었다. 시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민 망해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드래마의 표정을 보고 그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들도 키르마처럼 여자들 을 구해달라고 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키르마는 드래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이 점점 크게 일그러졌다. “싫어요-!! 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남자들이 슬픈 표정 을 지으며 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한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만하게 키르마. 혹시나 해서 쫓아 왔지만. 자네도 알지 않나. 드래마 님의 말이 옳다는 것을. 우리 같은 자들은.. 여자들에게 미안할 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엔 언뜻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이네마--!!!” 키르마는 더욱 크게 울었다. 또 한 남자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세. 내일은 동쪽 벌목장으로 가야해. 머, 먼 곳이니까... 일찍 자두지 않으면... 영주 님께 바칠 나무들이 모자라. 더 베어야 한다고.” 그는 억지로 키르마를 끌었다. “이네마아-!! 드래마님! 디트마님이 페이스 힐러라는 소릴 들었어요. 당 신도 뭔가 높은 신분을 갖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우리 같은 빌어먹을 마 노테온을 도와줄 힘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울부짖는 키르마를 질질 끌고 갔다. 어느새 다시 나온 디트마는 창백한 얼굴로 침실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시나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행사에서 다정하게 대해주며 웃었던 사람들의 슬픈 모습은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그때 한 남자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촌장님, 끝났습니다. 혹시나 해서 와봤지만 드래마님이 거절하셨으니... 안 가시겠습니까?” “먼저 가게나. 난 잠깐 이분들께 드릴 말이 있어.” “네. 그럼.” 마지막 사람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자 거실엔 드래마와 시나마 디트마촌장 만이 남았다. 촌장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드래마님.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우리는...” 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이 일루티온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을 뿐입니다. 우리보다 뛰 어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두 분이 높은 분 의 개인 마노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분들이 이곳 마노 테온 마을에서 사시는지 의아했지만... 굳이 그것을 따져 묻지 않은 것은 두 분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 그 냥 모른 척 한 것이죠. 하지만.. 디트마님이 힐러 라이트를 썼다는 이야기 를 아들에게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드래마는 또 화가 나는 듯 디트마를 쏘아보고 촌장에 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전... 붙잡혀간 여자들을 구해올 어떤 희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잠깐 드래마! 내가 말하게 해줘!”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디트마가 말했다. 디트마의 말에 드래마는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쉰 디트마는 말했다. “그것을 쓴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제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이었죠. ...그 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쓸데없는 기대감을 준 것 같군요. ..촌장님? 우 리는 당신들을 돕지 못해요. 우리도 마노테온이니까요.” “디트마님..!” 촌장은 입술을 떨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들은 뭔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페이스 힐러입니다!! 거기다 드래마님이 몬스터를 물리치는 걸 몇 번이나 봤는데...! 여자들을 구해달라는 것이 그토록 무리한 일입니까? 마 노테온이라 하더라도 당신들의 능력은 그대로인데?” 드래마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능력!?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파워즈(Powers:능력)란 일격에 수 십 마리 이상의 몬스터를 물리치는 루이티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 요! 저도 몬스터 십여 마리 정도는 물리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능력 이 아니라, 힘이고 기술입니다! 디트마가 페이스힐러(Faith Healer)라고 요?! 그린 라이트(Green Light)만 냈는데도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저 자 식이요? 그건 능력이 아니라 저 자식의 생명이었어요!! 촌장님! 아시겠습 니까? 누군가 디트마에게 또 그런 것을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제가 먼저 그 자의 생명을 끊어주겠습니다! 아까 제시마의 생명이 제 손에 끊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십시오!” “드, 드래마님!!” “드래마!” 촌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나도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디트마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마! 진정해! 넌 지금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어!!” 하지만 드래마는 다시 말했다. “촌장님! 당신은 지금 과거의 허상을 보고 착각을 하시는 겁니다! 이 마 노테온 마을에 구원자가 강림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 없습니 다! 디트마와 저는 마노테온입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불가능한 것들 이예요!” 그의 말에 촌장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드, 드래마님...” “그 ‘님’이란 호칭도 관두십시오. 우리는 이 마을의 촌민일 뿐입니다. 촌장인 당신께 ‘님’이란 호칭을 들을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촌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우, 우리 같은 마노테온에겐 구원이 없다는 겁니까..?” 드래마는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엘께 기도하십시오.. 구원을 위해서. 하지만 그 구원의 도구가 되는 건 우리가 아닌 것 같군요... 우린 우리 자신조차 지탱하기 힘듭니다.. 미안합 니다. ...지금까지 쭉 감사하고 있었죠. 우리의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묻 지 않고 이 마을에서 살게 해 주신 것을...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 니다...” “촌장님.. 죄송합니다... 우리도 도와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드래마의 말이 옳습니다. 당신들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 한다면 우린 영주님께 허가를 받아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어요. 정든 마 을이긴 하지만.. 우리가 있으므로 해서 충족되지 않는 기대를 품게 된 당 신들은 오히려 더 괴로울 것입니다.” 디트마도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건강하기 그지없었 는데 그는 이제 병을 한 10년은 앓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디트마님! 그런!” 촌장이 고개를 들었다. “괴롭다니요! 아닙니다! 우린 그저!!” 촌장은 디트마의 단호한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짧은 밀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짧은 머리카락... 그 순간 촌장의 가슴은 내려앉은 듯 했다. 그래. 이 분들도 마.노.테.온.인 것이다. 마. 노. 테. 온. ‘희망’이라는 뜻의 말... 무엇을 위한 희망일까.. 그리고 누구를 위한..? 절망뿐인 그들에게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단어일까..?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일까? 마. 노. 테. 온... ‘희망을 바라며’ 사는 자들. 촌장은 눈을 감았다. “.....그래요... 맞습니다.. 우리의 욕심이 지나쳤군요.. 우리 같은 마노테온 은....” 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당신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어요. 여자들이 잡혀갔다는 소리에 정신이 나가서......” 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무 급하게 온 나머 지 모자도 쓰지 않고 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드래마가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십시오. ...피곤하군요.” 드래마의 말에 촌장은 힘이 다 빠진 발걸음으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현관문을 연 채로 다시 뒤돌아보았다. “디트마님.. 드래마님.. 그러고 보니 제 아들을 치료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드렸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디트마는 조용히 말했다. 드래마는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시나 자신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말과 일들이었다. “그럼...” 촌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드래마는 디트마를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들어가. 누워있으라니까 왜 나온 거야?” 추운 듯 몸을 떨고 있던 디트마가 말했다. “으응.. 그래. 피곤하군. 시나마, 당신도 들어가서 쉬어요.” “네에..” 디트마가 들어가자 드래마는 그의 방문을 닫아주었다. 문을 닫고 돌아서 는 드래마의 얼굴에 서린 표정은 매우 삭막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시나 는 문득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아, 드래마도... 상처를 받았구나...!!]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직감이었다. 사람들의 사고(思 考)를 돕는 어떤 종류의 불가사의한 직감. 이 생각이 든 순간 그의 냉정한 태도라든지 사람 같지 않은(^^;) 태도 같 은 게 스르르 용서되었다. 그도 상처받는 인간(!)이라는 데에 안심이 된 것이다. 그래서 시나는 저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드래마...? 저기, 괜찮아요?” 드래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시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그러니까.. 디트마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죠..? 괜찮아요?” 드래마는 그녀의 말에 인상을 쓰며 시나를 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의 화난 어조에 시나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직감이 틀렸나? “아, 아니면 말고요. 그냥, 전 힘내라고...” 드래마는 입을 꽉 다물고 자기 눈앞에 있는 여자 애를 보았다. 살다, 이런 여자 애는 처음 보았다. 차츰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 속을 들켜 기분이 좀 언짢기도 했다. 그는 그 언짢은 기분을 밀어내는 듯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시나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화를 버럭 낸 그는 자신의 방으로 문을 탕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니면, 말지. 화는 왜 낸담! 칫!!] 시나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역시 복잡한 과거를 가진 사람은 별 거 아닌 것 같고도 화를 내기 마련인가 보다. 게다가 아까 디트마의 한말 로 미루어 드래마의 과거는 그다지 밝지 못한 것 같다. 일루젼과 기억상 실...? 몰랐다. 그가 그랬으리라고는... 그래서 그는 얼음의 숲에 들어가도 괜찮은 것이었을까? [제1기사였다고 했나? 힐러? 힐라테? 뭐였지? 거기의 제1기사였다고 했 어. 그런데 무슨 일로 최하위 계급이 된 걸까?]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시나는 현실 세계가 너무나 그리웠다. 복잡한 일이란 별로 없고 생존 자체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물론 시나의 세계에도 힘 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시나가 그리워하는 것은‘시나가 속한 세계’였다. 아빠가 있고, 보경이가 있고, 하소라 선생 님과 친구들이 있는... 심지어 시나시스터즈가 그리울 정도였다. [훗.. 걔네들이 그리울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는데...] 아직도 마을 여기저기선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불 쌍해 가슴이 아팠다.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슬픈 일 인 줄 상상을 못했기에 더더욱 가슴이 저렸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범죄가 일어났다면 당장 경찰이 출동했을 것이다. 해 결을 하든 못하든 같이 흥분하며 슬퍼해 줬을 텐데... 신문이나 TV에도 며칠동안 톱뉴스로 실리고... 이 순간 현실세계가, 아침마다 학교에 가고 떠들며 아이들과 이야기하던 그곳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시나는 다시 한 번 더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래! 난 꼭! 꼭 현실세계로 돌아 갈 거야. 이런 비인간적인 세계를 벗어 나서 꼭!]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