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란01-116.txt 엘란 1장 다르넨영지 그해 가을은 지옥 같았다.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가뭄은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농작물은 타들어 갔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특히, 별다른 강이 없는 다르넨영지는 가뭄이 극심했다. 가을은 보통 풍요롭기 마련 이다. 그러나 이 해는 달랐다. 본격적인 굶주림의 시작이었다. 도처에서 아사자와 병사자가 속출했다. 자 영농은 농노로 전락하고 고아원은 고아로 넘쳐 났다.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엘란이 동전10개에 영지로 팔려간 것도 그해였다. "빨리빨리 걸어라! 오늘 안에 성으로 들어가야 된다." 말 위에 앉아있던 뚱뚱한 사내가 몸이 불편한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소리쳤다. 톰이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30대 장한으로 하인들을 감독하는 관리인이라 했다. 말의 뒤에는 누더기를 걸친 십여명의 아이들 이 걷고 있었다. 모두들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얼굴은 못 먹어서 부옇게 떳고, 빼빼마른 몸에 배만 올 챙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발걸음에 힘이 없었고 눈이 휑했다. 생기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둘 뿐이었 다. 엘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엘란은 산에서 화전을 일구는 가난한 집에서 태 어났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결혼한 누나집에 얹 혀 살았는데 구박이 어찌나 심한지 어린나이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종거리며 일해야 했다. 그 해의 가 뭄은 산에도 여지없이 들이 닥쳤고, 제자식 먹여살리기 바쁜 매형이 영주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냐?" 옆에서 걷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 덮수록한 머리에는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아이들 중에는 상당히 나이가 든 축에 들었다. 팔린 아이들의 사정은 얼추 비슷해서 잘 못 먹었을게 뻔한데 기골이 장대했다. "밖으로 나오는건 처음이라서요." 엘란이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순 촌놈이군, 난 파보야." 이를 드러내고 미소짓는게 순박해 보였다. "전 엘란이에요." 잠시후 엘란이 물었다. "다 와 가나요?" "아니 한 나절은 더 걸어야해. 이 속도로 가면 해질 때 쯤이나 되야 도착할걸." "예." 대화는 금새 끊어졌다. 모두들 지치고 배고파서 말할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바짝 마른 길은 아이들의 걸음에 흙먼지를 일으켰다. 길가의 풀들은 누렇게 떠있고, 나무까지 말라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워낙 기 운이 없어서 자주 쉬어줘야 했다. 쉬는 시간에 빵 한 덩이가 주어졌다. 모두들 허겁지겁 먹었다. 더러운 손에 쥐어진 빵에 시커먼 손자국이 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손까지 쪽쪽 빠는 아이들도 있었다. 휴식시간은 금새 끝나고 그들은 힘겹게 발을 놀려야 했다. 파보의 말대로 해가 질 때쯤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치고는 규모가 작아서 큰 마을같았다. 마을앞에는 관문이 있었는데, 병사 두 명이 서 있었다. "톰아저씨, 웬 애들입니까?" 병사하나가 말을 걸었다. 하루종일 관문을 지켰는지 지겨워 죽겠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다. "뻔하잖아 하인으로 부릴려고 사온 애들이야." 톰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말을 타고 다녔지만 톰도 어지간히 지쳐있었다. "요새 많이 사들이네요." "널린 게 애들이지." 병사는 곧 비켜섰다. 톰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던 것이다. 심심해서 말을 붙여 본거지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엘란 일행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져서 캄캄했다. 다른넨영주의 성은 성이 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건물이었다. 성벽이라고 있는 것이 높은것도 아니고 튼튼해 뵈지도 않았다. 차라 리 마을과 성을 구별하는 담장같았다. 해자도 없었고 군데군데 허물어지거나 금이 가 있었다. 성문은 나 무로 만들었는데 썩어들어가는 곳도 있다. 엘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성문을 들어섰다. 볼품없는 성 안은 의외로 상당히 넓었다. 일행은 성안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너희들이 살아갈 곳이다. 내일부터는 일해야 될테니 오늘은 푹 쉬거라." 톰은 대충 말하고는 얼른 돌아갔다. 돌아가서 침대에 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눈도 뻑뻑하고 목도 칼칼했다. 허리도 아프고 온 몸이 쑤셨다. 숙소는 커다란 창고였다. 창고를 개조해서 숙소를 만든 것으 로 보였다. 군데군데 나무로 만든 창이 있었다.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건물은 세채가 서 있는데, 엘란 일행의 숙소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창고였다. 끼이익! 문을 열자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났다. 창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침대에 앉아있었다. 두 무릎은 가지런히 모으고 두손은 얌전히 무릎위에 올려 놓았다. 상당히 경직된 자 세였다. 숙소 안에는 침대가 서른개정도 놓여있었다. 침대마다 작은 서랍장이 하나 딸려 있었다. 경직된 분위기에 아이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엉거주춤 섰다. 모두들 눈을 굴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안에 있던 사 람중 유일하게 서있던 사람은 나이가 꽤 들어보였다. 작은 눈이 가늘게 찢어져 있고 입술이 얇았다. 전 체적인 인상이 살기 오른 뱀같아 보였다. 엘란은 연신 눈을 굴렸다. 지쳐서 침대에 드러銜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여기 온걸 환영한다. 내가 니들을 감독할 방장 존이다. 내가 명령하면 니들은 무조건 따른다. 토다는 새 끼는 용서 안한다. 알겠나?" 존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작은 눈을 부릎뜨니 나름대로 무서워 보였다. 존은 같은 하인 중에서 동료를 감독하는 자였다. 하인이나 농노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하인들 중 하나에게 권한을 주는 경우는 많았다. 평상시 동료를 감 시하고 통제했다. 오늘도 신참을 길들이려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처음겪는 낯선 환경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 새끼들 대답안해?" 퍽! 엘란의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갑자기 날아온 주먹에 배를 얻어 맞고 나뒹굴었다. 아이들 눈에 공포가 어렸다. "예, 알겠습니다." 모두들 큰 소리로 대답했다. 존은 일일이 침대를 지정해주었다. 엘란에게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침대가 배정되었다. 침대에도 서열이 있는 듯 했다. 가장 높은자가 안 쪽의 침대를 사용했다. 엘란은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 한 벌이 고작이었다. 문쪽은 겨울에 춥고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라 잠자기도 불편했다. 엘 란은 쓰러지 듯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누우니 그렇게 편할 수 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엘란은 금세 곯아 떨어졌다. 화려한 방이다. 가구는 최고급인 아스가르드산이었고 촛대도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닥은 두꺼 운 양탄자가 깔렸는데, 훈족이 만든 최고급품이었다. 촛대에는 불이 하나만 켜 있어서 전체적으로 음침 했다. 무슨 음모라도 꾸미면 딱 알맞을 분위기였다. 흔들리는 촛불에 따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방에는 세명의 사람이 있었다. 한명은 파란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고 다른 두명은 청년과 장년인인데 부자관계 였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주시다니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장년인은 노인에게 머리 를 조아렸다. 말에서 황송하다는 투가 역력했다. "허허,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은연중 장중한 기도가 흘러서 방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삼황자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저희 다르넨 가문은 삼황자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장년인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장년인은 영지의 주인 카르마고 다르넨이다. 금발에 푸른눈을 가 진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으로 얼굴에는 보기 좋게 살이 올랐고 수염은 단정하게 깍았다.노인의 신분이 상당한 듯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삼황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의 인자한 미소를 띠며 노인이 말했다. 부드 러운 말투에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묘한 힘이 있었다. "저 이건 시드님께 드리는 약소한 선물입니다." 카르마고 다르넨이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향나무로 만 든 상자는 주위에 급박을 입히고 진주로 장식을 한 것이 상자의 가치만으로도 상당한 가격이 나갈 것 같았다. 상자의 수준에 안의 내용물을 맞췄다면 성의표시 수준을 뛰어넘어 뇌물에 가까웠다. "뭘 이런걸 다 주십니까?" 노인은 난처한 듯 웃으며 상자를 받았다. 슬쩍 열어 봤더니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노인은 상자를 얼 른 로브 안에 넣었다. 이제 까지의 인자하고 장중한 기도와는 다르게 다소 경망스러웠다. 이 노인이 엘 리오트왕국의 삼황자인 미카엘 드 까미엘 엘리오트의 스승으로 대륙에서 손 꼽히는 정령사였다. 세상에 서 가장 강한 십인중의 한명으로도 꼽혔는데 소문으로는 물의 상급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린다 했다. 왕 국에서 유일한 상급정령익스퍼터로서 물의 시드라 불렸다. 상급정령사는 시드외에 아스가르드국에 한 명이 더 있었다. 화염의 길라드로 불의 정령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천년전 제국이 망한 후 황제나 황자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었다. 아스가르드에서 아부에 능한 대신이 왕을 황제라 칭한 후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했다. 아부는 전염성이 강했다. 이 일은 다른 나라에도 번져서 힘이 강한 나라 들은 모두 황제라 칭했다. 국명에는 왕국이 들어가고 왕은 황제라 칭하는 다소 우스광스러운 일이 벌어 졌다. 귀족들과 다르게 일반 백성들은 되는데로 불렀다. 황제라 하기도 하고 왕이라고 하기도 했다. 왕궁에 있어야 할 삼황자의 스승이 변경인 다르넨 영지에 와 있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내일 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돈을 받고, 볼 일이 끝났다는 듯 노인이 일어서서 방을 나서자 영주와 아들은 얼른 따라 일어났다. 문밖 까지 따라나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총관이 나서서 안내를 했다. 극히 조심스런 태도였다. 시드의 뒤에는 제자로 보이는 사람 둘이 따랐다. 카르마고는 노인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이제 갔어요, 그만 일어나요." 카르마고의 아들 피터 다르넨은 다소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쏙 빼닮았는데 아버지보다 이마가 좁고 코가 뾰족했다. 허리를 펴는 카르마고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카르마고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중앙에 끈을 대는데 성공한 것이다. 카르마고는 꿈 이 컸다. 그는 중앙에 진출하고 싶어했다. 이런 지방이 아닌 중앙에서 노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흐뭇했 다. 그러나, 지방귀족이 중앙에 진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피터가 다 급하게 물었다. "아버지 삼황자한테 붙은게 잘한 일일까요?" "어쩔수 없는 일이다. 옆영지의 파르발백작이 이황자한테 붙었는데, 가만히 있다가는 영지를 그놈한테 뺏길지도 모른다." "그럼 차라리 황태자한테 붙는게 낫지 않을까요?" 피터는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아버지가 중앙에서 내려온 노인에게 쩔쩔매는게 기분이 좋치 않았다. 어쩔수 없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상했다. "황태자는 몸이 약하다. 몇 년이나 가겠느냐? 게다가 애도 못낳는다지 않느냐? 후사가 없으면 왕권은 약 해지기 마련이다. 수도의 모든 귀족도 이황자나 삼황자한테 줄을 댄다고 하더라. 너도 앞으로 영지를 물 려받아야 하니 이런 일은 잘 알아둬야 한다. 변두리에 있어도 항상 눈과 귀는 중앙을 향해 열어둬야 한 다. 내 대가 안되면 네 대에서라도 중앙으로 진출해야지. 꿈은 항상 크게 가져야되. 호랑이를 그리기 시 작해야 실패해도 고양이라도 되지, 처음부터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다가는 쥐새끼밖에 못 그린다. 알겠 느냐?" 영주는 열변을 토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피터는 중앙에 진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왕처럼 지내는게 낫지 중앙에 가서 굽실거릴 생각만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아버지의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설 교가 길어질 것 같자 말을 돌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황자와 삼황자간에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내전을 피하기 힘들거야. 그러니 이런 변경까지 시드님이 오신 것 아니냐?" "그런데, 아버님 내일 부탁드린게 뭡니까?" "내일 시드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부탁드렸다." 피터는 깜짝 놀랐다. "아니 시드님이 비도 내리게 하십니까? 그럼 진작에 부탁드렸으면 가뭄도 막을 수 있었겠네요." 카르마고는 하나뿐인 아들이 한심스러워 혀를 찼다. "쯧쯧쯧, 이런 멍청한 놈. 정령사가 무슨 신이냐? 가뭄을 해결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치더라고 이런 변 경까지 오시겠냐? 만약 온다고 쳐도 그렇다. 빈손으로 보낼수 있어? 뒤로 쥐어줄 돈을 생각하면 차라리 가뭄을 겪는게 낫다. 시드님은 물의 상급정령사니 비가 올 때를 알 수 있다. 들으니 내일 비가 온다더 군. 돈이야 이미 뇌물로 바쳤으니 뭐라도 건져야 되지 않겠냐? 그래서 부탁한거다." "그럼, 내일 비가 오는데 시드님이 비를 내린 것처럼 연극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래, 이제야 말귀를 알아 듣는군." 카르마고는 흐뭇하게 웃었지만 피터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연극을 뭐하러 하십니까?" "내가 내일 수도에서 사람을 불러 가뭄을 해결했다고 하면 영지민들의 충성이 높아질 것 아니냐?" "그런 천한 것들 충성은 뭐하시게요?"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내전이 벌어질거라고. 내전에대비하려면 성벽도 쌓 고 병사도 늘려야한다. 그럴려면 앞으로 영지민을 쥐어짜야 하는데 내가 니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 또 주민들의 충성을 확보해야 전쟁에서도 유리하다." "그래서, 하인이나 농노를 사들이는 군요?" "그렇지, 전쟁 때 칼받이로 사용할 수도 있고, 가뭄으로 자영농한테 싼 값에 사들인 토지를 경작하려면 노동력도 부족하고." 피터는 기분이 좋아졌다. "가뭄이 온게 잘됐군요?" "그래, 우리 가문이 피일려는 징조인가 보다. 내일 연극 할 때 표정관리 잘 하거라." "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피터는 싱글거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저런 사연을 품고 영지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일어나!" 누군가가 옆에서 거칠게 깨웠다. 엘란은 잠이 덜 깨서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못 먹은 상태에서 오 랜시간 걷다 보니 피곤해서 얼굴은 부어 있었고, 입술은 부르터 있었다.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려서 둘 러보니 모두 깨어 있었다. 어제처럼 존이 나섰다. "어제는 늦어서 그냥 잤는데, 자기소개라도 해봐." 한 명씩 쭈빗거리며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했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오랜가뭄과 굶주림으로 입하나 더는 셈치고 팔아치운 아이가 대부분이고, 고아나 부랑아들 중 잡혀 온 사람도 몇 있었다. 파보도 평범 한 농민의 자식이었다. 삼형제중 장남이었는데 영주에게 가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부모가 팔 았다고 했다. 소개가 대충 끝나자 존이 말했다. 한 바탕할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별 다른 일 없이 넘어갔다. "모두 일어나 밥 먹으러 간다." 존이 앞장서고 그 뒤를 30명이 따랐는데 그 모양이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들 같다. 십분 정도를 걸 어서 식당에 도착했다. 숙소와 비슷하게 생긴 창고였다. 식당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농노나 하인이었다. 높은 사람은 따로 식당이 있는 모양이었다. 엘란은 파보와 같이 식판을 들고 음식을 배급받았다. 멀건 야채스프에 빵 한 덩이가 전부였지만, 어제 먹은 것은 빵 한 개가 전부인지라 허겁지 겁 먹었다.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엘란은 식판까지 싹싹 핥아 먹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다. "주목." 언제 들어왔는지 톰이 식탁위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렀다. 톰은 빨간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멋을 낸다 고 머릿기름을 발라 중간가르마를 탄 것이 동글동글한 호박을 보는 것같아 어쩐지 우스광스럽게 보였 다. 오른손으로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톰이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모두 마을 앞 광장에 모여라! 영주님께서 특별히 청하여 오신 왕실정령사 시드님께서 비를 내리게 하실 것이다." 식당안이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비를 오게 한다고, 정말일까?" 엘란의 옆탁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말했다. "왕실정령사 정도 되면 비를 오게 할 수도 있겠지." 앞에 있던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쳇, 비가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 왜 상관이 없냐? 오늘 오후는 일 안해도 되잖아?" 옆에 있던 자가 기쁜 목소리 로 말했다. "그렇군."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엘란은 왕실정령사니 비를 내리게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정령사가 뭐에요?" 엘란이 파보에게 물었다. "너 정말 촌놈이구나, 정령사도 모르고, 잘들어 정령사는 정령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야." 파보 는 엘란에 질문에 대답한는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다에요?" "그렇치." 엘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정령은 뭐에요?" "뭐긴 뭐야 , 정령이 정령이지." 엘란은 파보를 빤히 보았다. "파보도 모르는군요." " ." 파보의 얼굴이 잘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식사후 모두 일터로 향했다. 엘란과 파보는 마굿간에 배치되었다. 마굿간에는 50마리정도의 말이 있었는 데 성주와 가족 기사들이 탈 말이었다. 성밖에는 목장이 따로 있어서 거기서도 말을 키운다 했다. 마굿 간지기는 60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허리는 온통 꼬부라졌고, 가는 귀를 먹었는데 갈라지는 목소리 로 고함을 잘 질렀다. 이마는 거의 다 벗거져 있고 하?게 센 수염이 아래턱에 듬성듬성 나 있어서 누가 뜯어 놓은 것 같았다. "게으름 피지 마라! 꾀부리는 놈은 위에다 일러서 혼구멍을 내줄테다. 너희 두 녀석은 마사안의 똥을 치 우고 새짚을 깔아라." 엘란과 파보는 종일 똥을 치우고 새짚을 깔았다. 마굿간에는 말을 닦는 사람도 있고, 말의 고삐를 쥐고 운동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해가 머리위에 왔을 때 쯤 성에서 나온 사람이 20마리 정도의 말을 끌고갔 다. 종일 허리 한 번 못 펴고 종종거렸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아이구! 힘들어라." 파보가 앓는 소리를 한다. 정오가 되자 종소리가 울렸다. "모두 일 그만두고 마을 광장으로 모여라!" 엘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 '잠시후면 정령이 뭔지 볼 수 있겠지.' 다른 하인들과 마을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든 영지민이 나온 듯 굉장히 혼잡스러웠다. 중앙에는 높다란 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몇 명이 단위에 서 있는데 하급관리들이나 마을 의 촌장으로 보였다. 마을사람들은 안면이 있는 사람끼리 모여 수군거렸다. 빰빠라밤~~ 갑자기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일 앞에는 깃발을 든 기수가 걸어왔다. 깃발에는 할베드 두 개가 교차한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다르넨가문의 문장이다. 뒤 에는 창을 든 경비대원들이 걸어왔다. 그 뒤를 말을 탄 기사들이 따랐다. 의전용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 쳤는데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멋지다!' 엘란은 감탄하며 기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르넨영주와 피터, 시드가 나타났다. "다르넨영주님과 왕실정령사 시드님이시다. 모두 예를 표하라!" 총관이 외쳤다. 성의 관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고, 영지민들은 모두 엎드렸다. 엘란은 슬쩍 고개를 들어 단상에 오르는 사람들을 훔쳐봤다. 갑옷을 입은 기사와 로브를 입은-정령사로 보이는-노인, 그리고 정장을 갖춘 영주, 모두 멋있게 보였다. "모두 일어나라!" 총관이 다시 외치자 모두 일어났다. "가뭄에 시달리는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영주님께서 특별히 왕실정령사를 초빙해 오셨다. 모두 감사히 생각해라!" "다르넨영주님 만세!" 미리 입을 맞춘 누군가가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외쳤다. "영주님 만세!" "시드님 만세!" 한동안 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소리가 가라앉자 파란 로브를 입은 노인이 나섰다. 두 손을 올려 뭐라고 중얼거렸다. 엘란은 뚫어져라 노인을 보았다. 흥분으로 움켜진 손안에 땀이 다 고였 다. 갑자기 노인의 두 손에서 물방울이 소용돌이 쳤다. 곧 물방울이 뭉치더니 성숙한 여인이 나타났다. 아주 투명하고 성결해 보였다. '엄마.' 엘란이 매일 상상하던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엘란은 가슴이 벅차올라 울음을 터트렸다. 물의상 급정령 운다인이다. 운다인은 사람들이 보기 좋게 광장 이쪽저쪽을 날았다. "오오!!" "우와!!" 여기저기서 감탄의 탄성이 울렸다. 엘란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 려왔다.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더니 종래에는 쏟아 부었다. 일년만에 내리는 단비였다. 사람들은 모 두 손을 들어 비를 맞으며 열광했다. 광기는 전염성이 강했다. 모두들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영주님만세! 시드님만세!" 엘란도 진심을 담아 외쳤다. "영주님 만세! 시드님 만세!"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단위에서 시드의 제자 카일은 냉소적인 얼굴로 이 희극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낫살이나 쳐먹어서 순진한 놈들 속이는 쇼나 하다니. 대륙에서 제일 강한 십존 중의 일인이 이따위 짓거리라니. 자기 입으로 은밀한 임무라면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게 생겼잖아. 또 뇌물많이 먹었겠네. 지방영주 귀합한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린 카일은 얼굴 표정을 고쳤다. 누가 봐서 좋을 것이 없다. '조만간 너하고 헤어질 날이 올거다' 카일은 품속에 넣어둔 양피지를 꼭 쥐었다. 시드는 흔들의자에 온몸을 맡긴 채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다르넨백작이 마련해준 귀빈실이다. "누가 남겠느냐?" 맥빠진 음성으로 시드가 말했다. "요새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나 힘이 없단 말이야." 지그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것이 정말 피곤해 보였다. 지금은 혼란기다. 왕실에서는 다음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충성을 맹세했다 고,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감시역으로 제자들 중 하나를 붙여 두려는 것이다. 그런 용도로 제자 들을 데리고 나왔고 이제 둘이 남았다. 다르넨영지는 마지막 목적지였다. 타오는 슬쩍 시드와 카일의 눈 치를 살폈다. 이런 궁벽한 영지에 남고 싶지 않았다. "제가 남겠습니다." 카일이 나섰다. 타오는 카일이 남겠다고 하자 대단히 기뻤다. "그래, 몇 년만 고생해라, 나중에 교대시켜주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시드는 제자에게 신경써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제자의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지 않은 한은. "예, 감사합니다." 카일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다음날 시드는 대대적인 환영속에 영지를 떠났다. 소기의 목적을-영주들의 충성맹세와 수많은 선물(?)- 달성하고. 카일은 영주의 동태를 감시하려고 홀로 남겨졌다. 원활한 연락과 영지에 도움을 준다는 명분 하에. 엘란과 파보는 쉴새없이 일해야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정오까지 마굿같에서 일하고 오후부터 밤까지는 성벽 쌓는 일을 했다. 영주는 시드가 떠나고 나자 성벽축조에 착수했다. 내전에도 대비를 해야 했고, 성 이라고 있는게 다 쓰러져가는 담으로 둘러쌓여서 볼 때마다 언찮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농노들과 하인 들은 죽을 지경이었고, 영지민들고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다. 정신없이 바쁜 일과가 계속되었다. 일어나 서 아침먹고 일하고 점심먹고 일하고 저녁먹고 일하다가 컴컴한 밤에 숙소로 돌아가 정신없이 잠들었다 눈을 뜨면 다시 아침이다. 다람쥐 쳇바퀴같은 일상이 계속 반복되었다. 엘란과 파보는 마굿간에서 일할 때 눈치것 쉬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견딜 수 없을 터였다. 마굿간지기는 늙어서 감독을 철저하게 하 지 못했다.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존은 심심하면 동료들을 괴롭혔다. 자기 맘에 안 들 면 게으름을 피운다고 위에다 일러서는 혼이 나게 만들었다. 벌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위에 보 고가 되면 한 끼 식사를 박탈당했다. 과중한 중노동과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먹는것의 위력은 대단했 다. 식사시간은 고된 삶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다르넨영주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에 제한을 가함으로서 영지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엘란과 파보는 가득 쌓인 건초더미에 기어들어가 쉬는 것을 좋아했다. 보이지도 않고 따듯해서 땡땡이 치기에는 그만이었다. "이거 너무 부려 먹는거 아냐?" 파보가 투덜거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정령생각하는 거냐?" 엘란이 반응이 없자 다시 한 번 물었다. "예." 엘란은 때때로 정령을 생각했다. 엄마생각이 날 때마다 기억에 없는 엄마대신 정령을 떠올렸다. "파보는 몇살이에요?" 파보는 한심하다는 듯이 머리를 손으로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서로 나이도 몰랐네. 난 16살이야, 넌?" "내일이면 11살이에요." 파보는 환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생일 축하한다." 엘란도 따라서 웃었다. 따뜻한 파보의 마음이 전해졌다. "축하는요, 파보는 어디서 살았어요?" "다보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살았다." "에이, 나보고 촌놈이라더니 파보도 촌놈이네요." "다보산 산골에서 산 사람하고 마을에서 산 사람하고는 급수가 다르다. 찢어지게 가난하기는 했지만." 엘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게 뭐에요?" "말 그대로야 찢어지게 가난하단거지. 가난한 집은 가을이라고 해봐야, 추수하고 몇일 뿐이지 먹을게 없 어. 소작료 내고 빚 갚고 내년에 파종할 종자 남겨두고 , 그러면 뭐가 남겠냐? 죽도록 일해봐야 배 곯기 는 마찬가지야. 우리집 뒷 산에는 감나무가 많이 있어. 산지기한테 걸리면 경을 치겠지만 어쩌겠냐? 배 고픈데 몰래 따먹어야지. 너 감에 대해서 아냐? 설사할 때 감먹으면 즉효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른들 말이 대변을 막는 성분이 있다더라. 먹은 건 없는데 감만 먹어댔으니, 똥이 나오냐? 심한 변비에 걸리게 되지. 한 열흘 똥 못누면 아랫배가 돌처럼 딱딱해지면서 살살 아프기 시작하는데 죽을지경이다. 그래서, 똥누러 변소가서 힘주면 뭐가 나오냐? 잘 안 나오지. 큰 맘먹고 있는 힘을 다주면 아주 딱딱하고 굵은 게 나오는데 이게 나오면 그냥 나오냐? 나오면서 구멍을 쫙 찢어버리지. 똥구멍 째지도록 가난했단 말 이 거기서 나온거야." 엘란은 멍하니 파보를 보았다. "아프겠다." "안 당해본 사람은 이 아픔 모른다." 파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엘란을 보던 파보가 말했다. "넌 어떻게 살았냐?" 엘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산에서의 생활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도록 일을 했다. 매형은 돈이 생기면 술을 마셔댔는데 술버릇이 고약했다. 술만 취하면 잠든 엘란을 깨워서는 두들겼다. 입에서 나는 역한 냄새를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뭐, 그냥 그랬어요." 파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 엘란 앞으로는 형이라고 부를래?" 엘란은 잠시 생각하다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게요, 형!" 둘은 서로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얼음도 녹일 듯한 훈훈한 미소였다. "파보! 엘란! 이 녀석들이 어딜 간거야, 틈만나면 사라진단 말이야!" 째지는 목소리를 보니 마굿간지기였다. 엘란과 파보는 후다닥 뛰어나왔다.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도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왔다. 힘든 일에도 적응 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을 넘기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엘란과 같이 들어온 아이들 중에서도 셋이나 죽어나갔다. 아이들이 죽으면 거적에 둘둘 말아서 산에다가 버렸다. 맘착한 일꾼은 묻어도 줬지 만, 그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여서 보통은 들짐승이나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봄바람이 불면서 파보의 가슴에도 봄이 찾아왔다. 하인들이 씻는 곳의 우물은 하녀들이 허드렛일에 필 요한 물을 긷는 곳이었다. 파보는 눈을 힐끔힐끔 거렸다. "저 여자 끝내주지." 파보는 노란머리를 길게 길러서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를 가리켰다. 엘란이 보기에는 엉덩이만 컷지 이쁜 것같지 않았다. 그러나, 파보의 마음을 생각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응, 아주 이쁜데." "내일은 말을 걸어 볼거다." 파보는 기대에 차 있었다.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다음날 엘란도 기대를 가지고 파보를 보았다. 파 보는 두 손을 비비며 우물쭈물하고 있기만 할 뿐 말을 걸지 못했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도 있는데 내일은 꼭 말을 걸어 봐야지." 파보는 내일도 말을 걸지 못 했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엘란까지 답답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할 것 같았다. 엘란은 주위를 서성거리는 파보를 아가씨에게 밀쳤다. "형, 무거워 보이는데 좀 들어주지 그래." 노란머리 아가씨는 물동이에 물을 담고 있다 자기 앞으로 뛰어든 파보를 빤히 쳐다 보았다. 무안해진 파보는 그 자리에서 꿔다논 보리자루처럼 가만히 있었다. "후!"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한 파보는 평생의 용기를 쥐어짜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파보는 온통 얼굴이 붉어진 채 쭈삣거리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파보가 물동 이를 드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파보가 물동이를 들자 여자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물동이를 든 파 보가 여자를 따라갔다. 잠시후, 입이 쩨지도록 웃으며 파보가 왔다. "레베카래." "뭐가?" "그 아가씨 이름말야, 이름도 예쁘지. 레베카, 레베카 ." 파보는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엘란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다음날부터 파보는 물동이를 들어다 주었고, 하루종일 레베카를 입에 달고 다녔다. 첫사랑의 열정은 소년을 들뜨게 만들었다. 엘란이 보기에도 둘이 꽤 친해진 것 같았다. 그 런 모습을 존이 비웃음을 띠고 바라 보았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엘란은 잠이 깼다. 파보가 살금살금 나가고 있었다. 흥미를 느낀 엘란은 몰래 따라 가 보기로 했다. 파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물가로 갔다. 엘란은 조심스럽게 움직여 나무 뒤에 숨어 서는 둘을 훔쳐 보았다. 우물가에는 레베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밤에 불러내고 그래?" 파보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파보는 입을 열었다. "우리 크면 결혼하자!" 파보는 더듬거렸다. 마음이 격하게 떨려서 레베카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엘란은 일이 잘못 돌아 간다고 느꼈다. 엘란이 숨어있는 나무는 파보를 등지고 레베카를 마주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파보는 보지 못 했지만 엘란은 레베카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팔짱을 끼고 눈을 착 아래로 내려 깐 것이 무척이나 깔 보는 것 같았다. 레베카는 파보를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 보았다.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럴 생각 전혀 없어!" 생각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 차갑고도 단호한 말이었다. 목소리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것이 엘란의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파보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엘란은 보지 못했지만 얼굴이 하?게 질려 있었다. "뭐?" "난 하인과 결혼할 생각없어. 말이 좋아 하인이지 농노랑 다를게 뭐가 있어? 내가 왜 구질구질하게 너같 은 사람과 결혼을 하니. 불쌍해서 몇 번 만나줬더니 , 다시는 나 아는척 하지마." 레베카는 속사포같이 퍼붓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돌아섰다. 파보는 넋이라도 나간 듯 우물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형' 엘란은 나무 뒤에서 울음을 삼켰다.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엘란이 숙소로 돌아오고도 한 참이 지났지만 파보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란은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일 어나서 보니 파보는 돌아와 있었다. 한 숨도 못 잤는지 눈 밑이 검게 죽어 있었다. 엘란은 아는 척을 하 지 않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파보는 말이 없었다. 하인들과 농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을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것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무의미한 시간들이 느리게 흘렀다. 성벽을 쌓기 시작한지도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엘란은 자기 몸무게 보다 더 무거운 벽돌을 부지런히 날랐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요령이 생기면서 곧잘 지고 날랐다. 벽돌을 지고 가던 엘란이 바닥에 떨어 져 있던 돌을 밟았다. 콰다당! 엘란은 균형을 잃고 벽돌과 함께 나뒹굴었다. 얼마나 세게 넘어졌는지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고 눈 앞이 노랗게 보였다. 누워서 끙끙거리는데 어느새 다가온 존이 채찍을 휘둘렀다. 존은 같이 지내는 처지임에 도 불구하고 더욱 못되게 괴롭혔다. 쫘악! 채찍이 엘란의 등에 작렬했다. "아악!" 극심한 통증이 뒤따랐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꾀를 부리고 있어, 일어나!" 존이 다시 채찍을 들었다. 내려치려는데 누가 팔목을 움켜 잡았다. 파보였다. 파보는 잘 먹지도 못하는 데 어떻게 그렇게 키가 크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일미터 팔십이 넘는 키에 어깨는 떡 벌어졌고, 목은 웬 만한 처녀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그만해! 꾀를 부리려는게 아니라 넘어져서 그런 거잖아!" 파보가 눈을 부라리자 존은 은근히 겁이 났다. 그것이 존의 심사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반항이야! 이거 못놔?" 팔목이 잡혀서 화가 치밀어 오른 존은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존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힘을 썼지 만 손목을 떨치진 못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 나는지 꼼짝도 못했다. "무슨 일이야?"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의 아들 피터였다. 피터의 뒤에는 수도에서 온 정 령사 카일과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일을 안하고 꾀를 부리길래 훈계를 좀 했더니 반항을 해서 ." 존은 눈치를 보면서 말을 흐렸다. 파보는 존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풀려난 존의 팔목은 붉게 부풀 어 올랐다. 피터는 요즈음 기분이 좋치 않았다. 수도에서 내려온 정령사는 피터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항상 싱글벙글 웃는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미끈하게 생긴 놈은 질색이었다. 아버지가 카일에게 굽 실거리는 것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드가 갈 때 같이 가버리지 않고' 피터는 파보를 힐끗 보았다. 그놈을 보자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 았다. 버러지 같은 하인놈한테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 피터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피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자 주위는 고요히 가라앉았다. 주위에 있던 농노들과 하인들이 슬금슬금 피터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피터의 얼굴이 펴지며 미소가 떠올랐다. 피터의 미소에 따라 주변의 긴장은 서서 히 풀렸다. '아! 그렇군 이놈도 카일같은 갈색눈에 갈색머리잖아. 가뜩이나 성질나는데 잘됐군.' 원인은 이놈이 카일을 연상시키는데 있었다. 매끈하게 잘 생긴 카일과 약간 우락부락한 파보는 전혀 닮 지 않았다. 다만 같은 눈색깔과 머리색깔이 묘하게 카일을 떠올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원인을 알게 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피터는 파보에게 다가가며 씩 웃었다. 긴장하고 있던 파보는 피터의 웃음에 긴 장이 풀렸다. 파보는 피터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이 놈 보게 재수없는 웃음도 똑같은데.' 피터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천천히 파보 앞에 다가간 피터는 갑자기 검을 뽑았다. 쇄액! 노말소드가 허공을 갈랐다. 팟! 웃는 얼굴 그대로 파보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엘란은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은빛 광채가 번쩍이는 것이 보이고 뭔가가 엘란에게 날 아왔다. 툭! 파보의 머리가 엘란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데굴데굴 구르더니 엘란의 앞에서 멈추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파보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몸도 쓰러지며 목에서 뜨거운 피가 쏟구쳤다. 따뜻한 피와 차가운 공기와 만나자 허연 김이 올라왔다. 엘란에게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고개를 들자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붉은 피와 파란 하늘이 강렬하게 대비 되며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으아악! 짐승같은 소리가 엘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폐부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파보는 엘란 이 살아온 동안 잘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형이었고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엘란은 정신없이 피터에게 달려들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고 코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이 한 마리의 작은 귀신 같았다. 펑! 피터는 달려드는 엘란을 간단하게 걷어차 버렸다. 엘란은 거칠게 나뒹굴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 다. 피터는 카일을 보고 씩 웃었다. '이제 좀 개운하네.' ***** 2장.정령사카일 언 듯 뜨여진 눈에 얼룩덜룩한 천장이 보였다. 칠이 온통 벗겨져서 보기 흉했다. 엘란은 무슨 큰 사명이 라도 받은 듯이 온 신경을 집중해 천장의 얼룩을 살폈다. 한 곳만 뚫어지게 쳐다보자 천장이 빙빙돌며 어지러워 졌다. 눈꺼풀이 닫치자 친숙한 어둠이 반겨주었다. 엘란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마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엘란은 정신을 차렸다. 이마에는 차가운 물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컴컴한 방에는 등잔이 하나 놓여 있고, 앞에는 로브를 입은 이십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카일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이 드느냐?" "음!" 배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련한 놈, 검사에게 빈손으로 달려들어서 어쩌려고, 죽고싶어서 그런거냐?" 말의 내용은 질책이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방안을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엘란의 마음을 차분히 안정시켜 주었다. 엘란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컴컴한 방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무척이나 검박한 방 이다. "여기가 어딥니까?" 카일은 싱글벙글 웃고 있다. "내 방이다." "누구십니까?" "카일, 수도에서 내려온 정령사다." 엘란은 카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제가 왜 여기 ." 카일이 말을 끊었다. "내가 널 데려왔다. 돈을 주고 샀으니 이제 영지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 넌 이제부터 다르넨영지의 주 민이 아니다." 엘란은 의아스러웠다. "왜 저를 사신겁니까?" 카일은 사람좋은 미소를 띄었다. "글쎄, 피터에게 달려드는 게 맘에 들었다고나 할까?" 엘란은 이렇게 미소가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때까지 고생 많았으니 푹 쉬거라! 남은 얘기는 내일 하자." 카일은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웃어주고는 방을 나섰다. 컴컴한 방안에서 엘란은 숨죽여 울었다. 파보가 죽은게 슬퍼서 울었고, 자신이 살아 남은게 기뻐서 울었 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싫어서 울었다.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아침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인 탓이 다. 엘란은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영지에서 일할 필요가 없다는 카일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카일은 어디서 잔걸까?' 한 참을 누워있는데 카일이 들어왔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카일은 대단히 잘생겼다. 갈색머 리가 어깨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고 갈색눈은 밝게 빛났다. 눈섭은 짙었고, 얼굴은 갸름했다. 코가 오똑 하고 입술은 두툼했는데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잘 잤니?" 카일이 쾌활하게 물었다. 상대방까지 기분좋게 만드는 음성이다. "예." 엘란은 짧게 대답했다. 카일이 불쑥 종이 하나를 내 밀었다. "자 받아라." 엘란은 의문이 들어서 종이를 빤히 쳐다 보았다. "저.... 이게 뭡니까?" "글을 모르니?" 산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던 평민이 글을 알 리가 없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 다. 엘란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예, 모릅니다." "하긴, 글을 알 리가 없지. 이건 네 매매문서다." 엘란이 반문했다. "매매문서요?" "그래, 니가 팔려오면서 작성한 매매문서. 기간이 삼십년이구나." 엘란은 놀라서 외쳤다. "삼십년이요! 전 십년으로 알았는데." 카일이 혀를 찼다. "쯧쯧, 속았구나. 평생 부려먹을 속셈이었나 보다. 한 삼십년 뼈빠지게 일하다 보면 빨리 늙어서 그때 쯤 되면 꼬부랑 노인이 될거다. 그럼 더 이상 필요가 없겠지." 분기가 치밀어 오른 엘란은 울컥했다. "이런 나쁜 놈들!" 치가 떨렸다. 자신은 죽도록 일만 하다가 버려질 운명이었다. 아마 같이 팔려온 아이들도 사실을 모를 것이다. 파보도 십년으로 알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엘란은 카일에게 물었다. "왜 이걸 절 주십니까." "어제 말하지 않았니 내가 널 샀다고, 이제부터는 내가 네 주인이다. 이런,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삼 십년동안 부려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카일은 서류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금새 타버렸다. "앞으로 내 시중이나 들거라. 원한다면 글도 가르쳐 주마." "왜 저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카일은 빙긋 웃었다. "어제도 말했는데." 잠시 말은 끊은 카일은 엘란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니가 마음에 들었다고." 그날부터 엘란은 카일의 시중을 들었다. 시중이라고 할 일도 없었다. 식사와 빨래 청소는 성의 하녀들이 모두 도맡아 했다. 엘란은 그저 카일의 심부름을 하거나 바쁠 때 식사를 가져다 주는 정도의 일만 했다. 평생을 이렇게 한가하고 편안하기는 처음이었다. 바짝 마른 엘란의 몸에 살이 붙었고 마른버짐 가득하 던 얼굴에는 기름기가 돌았다. 너무 편안한 생활에 가끔은 겁이 날 정도였다. 아침으로는 글을 배웠고, 한가한 시간에는 산을 올랐다. 주방에서 나무통 하나를 얻어서는 허리에 차고 작데기 하나를 들고서였 다. 엘란은 열심히 수풀을 헤쳤다. 산을 헤매고 다닌지도 한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숲은 더욱 푸르게 보였다. 바스락!휙! 갑자기 수풀을 헤치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어이쿠!" 엘란은 깜짝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토끼였다. 커다란 눈을 디룩거리며 노려보는 것이 자 신도 놀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취익! "으악!" 엘란은 엉덩방아를 찧을 채로 두 다리를 맹렬히 밀어서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넘어진 자리 옆에는 푸른 뱀이 머리를 꽂꽂히 세우고 있었다. 뱀의 붉은눈이 엘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줌을 지릴뻔 했다. 엘란은 조심스레 나뭇가지를 들었다. 찾 던 것을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 뱀이 허리를 굽히더니 몸을 날렸다. 황급히 옆으로 피한 엘란은 나뭇가지로 떨어져내리는 뱀목을 꾹 눌렀다. 칙! 목이 눌린 뱀은 온몸을 배배꼬며 몸부림쳤다. "후, 큰일날뻔 했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한 동안 숨을 돌린 엘란은 뱀을 들어 나무통에다 입을 대고, 힘껏 눌렀다. 노 란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독을 뺀 후 뱀은 놓아주었다. 산에서 살 때 이 뱀은 자주 잡으러 다녔다. 위 험했지만 매형의 강요에 어쩔수 없었다. 이 뱀은 약재상이 사 갔는데, 칼이나 화살에 맞아서 살이 찢어 졌을 때 이 독을 바르면 신경이 마비되어서 통증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외과적인 수술을 할 때 마취 제로 많이 사용되는 독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 뱀의 쓸개를 바르면 마비가 풀린다고 들었다. 그대로 방 치하면 살이 썩어서 위험했다. 다음날 아침 아무일 없다는 듯 카일에게 글을 배운 후 예전의 숙소로 갔다. 숙소에는 일을 나가고 아무 도 없었다. 엘란은 존의 침대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지루한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 다. 이윽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하나 둘 들어섰다. 잠이 들기 전 의례이 존의 구타가 따랐다. 모두 침대에 누운 후 한 참을 기다린 끝에 엘란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모두들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엘란은 살며시 다가가 존의 오른쪽 발가락 끝 마디에 독을 조심스레 발랐다. 다음날 아침 존은 발가락이 이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젠슨! 요새 재미가 좋은가 보지." 존이 잠자리에 들려는 젠슨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젠슨은 존이 다정하게 말하자 오히려 불안해졌다. '이놈이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낮에 톰과 무슨 얘길 했지?" "별 얘기 없었습니다." 젠슨을 깜짝 놀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톰에게 내 흉을 본 것은 아니겠지? 그렇치?" 존은 다정하게 물었다. 그럴수록 젠슨의 불안은 점점 심해 졌다. "예, 그런적은 절대 없습니다." 퍽! 존의 주먹이 젠슨의 주걱턱에 작렬했다. "아이구!" 턱을 움켜쥔 젠슨은 죽는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그런 젠슨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존이 움켜쥐었다. "이 새꺄! 들은 사람이 있는데 어디서 오리발이야! 내가 매일 동료들을 두들겨 팬다고 니가 고자질 했잖 아." 젠슨의 얼굴이 하?게 질렸다. '어떤 죽을 놈이 밀고한 거야.' 젠슨은 잡아떼야할지 엎드려 빌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그게 존의 심사를 자극한 모 양이다. "이 자식이!" 젠슨의 머리를 놓아주고 벌떡 일어선 존은 오른발로 젠슨의 얼굴을 세게 걷어찼다. "아이구." "악!" 괴상하게도 두 군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존의 발에 정통으로 걷어차인 젠슨의 입은 피투성이가 되어 괴성을 질러댔고, 존도 걷어찬 발을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불안한 얼굴로 둘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무 슨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렸다. "?!" 젠슨은 입안에 있는 딱딱한 이물질을 뱉어냈다. 누런이가 네개나 바닥을 굴렀다. "아아아!" 존은 바닥을 뒹굴며 죽는다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놀란 누군가가 잽싸게 움직여 하인들 을 관리하는 톰을 데리고 왔다. "이봐 왜이래?" "발이 발이....." 존은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거렸다.. 톰은 거칠게 존의 신발을 벗겼다. "악!" 신발이 벗겨지며 발을 건드렸는지 다시 비명이 터졌다. "이런!" 존의 발은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존슨의 발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하인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해 줄 리가 없었다. 결국 존은 오른쪽 발을 잃었다. 의족을 대고 뒤뚱거리며 걷게 되자 방장의 지위는 박탈되었다. 아무도 존을 도와주지 않았다. 존은 너무 인심을 잃었던 것이다. 존의 후임으로는 젠슨이 임명되었다. 젠슨은 의족을 끼고 뒤뚱거리며 걷는 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앞니가 네 개나 빠진 채. "책 재미 있니?" 카일이 물었다. 엘란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 독서에 재미를 붙여서 카일이 가지고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제국의 역사>였다. "예, 아주 재밌습니다." 이 책은 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씩은 읽어보는 책이다. 제국은 대륙 최초의 통일국가이자 마지 막 통일국가였다. 발칸대제 사후 누구도 대륙을 통일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제국이라 불리었다. 조그만 공국에서 태어난 발칸대제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의 정복전쟁으로 대륙을 통일했다. 그는 놀 랍게도, 신과도 맞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드래곤을 부렸다. 초기의 정복전쟁에는 많은 난관이 따랐고 목 숨이 위태로운 적도 많았다. 드래곤을 부리게 되자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광룡 캇셀프레임은 공포 그 자체였다. 대제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는 부와 권력을 주었고 자신에 반대하는 자에게는 고통과 죽 음을 선사했다. 문자와 언어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많은 저수지와 제방을 쌓았다.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이용되는 도로를 닦은 것도 대제였다. 현재의 모든 문화 신분제도 경제제도는 그 때를 기반으로 한 것 이 많았다. 대제는 50년동안 나라를 통치하고 100세에 사망했다. 대제의 무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 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맺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대제사후 제국은 2년만에 멸망해 버렸다. 그것 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역사상 그토록 강대한 나라가 불과 2년만에 망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다.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요?" 책에는 대제사후 이년만에 나라가 망했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현자들이 연구했지만, 누구나 납득할만한 학설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신들의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드래곤의 개입이 있었다는 설이 한때 유행하기는 했었지. 그건 그 렇고, 이렇게 화창한 날에 골방에만 쳐박혀 있어서야 쓰겠니? 바람이나 쐬고 오자!" 카일이 일어나자 엘 란도 따라서 일어섰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고, 시원한 바람은 옷자락을 흔들었다. 엘란과 카일은 성을 나와서 걸었다. 성벽축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선 엘란은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살펴보 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느껴졌다. 세금이 점점 과중해지고 있었던 탓이다. 시드 가 비를 내린 이후 잠깐의 칭송이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영지민을 너무 쥐어 짠 탓이다. 길을 따 라 걷던 엘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보았다. 사냥을 갔다오는지 등에는 활과 화살 을 메었고 안장에는 여우가 매달려 있다. 기사들 사이에는 거만하게 웃고 있는 피터 다르넨의 얼굴이 보였다. 파보가 죽은 후 첫 대면이다. 엘란의 뇌리에 굴러가던 파보의 머리가 떠올랐다. 참을수 없는 격 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후끈한 열기가 전신을 달궜다.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먹이 쥐어졌다. 달려들려 는데 카일이 뒷덜미를 움켜 쥐었다. 호리호리한 몸이 믿기지 않는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엘란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피터 일행은 엘란을 스치듯 지나서 멀리 사라져갔다. 카일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따라와라." 그들은 한 참을 걸어서 마을의 뒷 산으로 올라갔다. 카일을 따라가던 엘란은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들었 다. 한적한 곳에 이르러 카일이 바위위에 앉았다. 주눅이 든 엘란은 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섰다. "힘도 없는 놈이 복수를 하려는 것은 만용에 불과하다. 힘이 없으면 힘을 기르던가 머리를 써야 지, 그 때 존을 상대하던 것처럼." 엘란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카일이 알고 있었구나!! 섬뜩한 기운이 일어 전신이 떨려왔다. "맨주먹으로 달려들어서 어쩌려고? 죽고 싶으면 손목을 긋던가 목이라도 매지 그러냐?" 엘란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카일의 말은 모두 옳았다. 게다가 카일이 존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 실에 몸이 얼어 붙었다. "아무래도 너는 성을 나와야 겠다. 다시 피터를 보고 달려들었다가는 나까지 곤란해질테니, 산속에 집을 한 채 얻어줄테니 거기서 살아라! 나는 스승님의 명 때문에 성을 벗어날 수 없다." 더 이상의 책망이 없자 다소 안심한 엘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집을 얻으면 너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마." 엘란은 놀라서 되물었다. "예?" "왜 싫으냐?" 엘란은 카일의 얼굴을 살폈다. 진지한 태도를 보니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저같은 놈에게." "내가 쓸데가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니 넌 신경쓰지 마라." 엘란은 뛸 듯이 기뻣다. 꿈인지 생신지 알 수가 없었다. 엘란은 허벅지를 피멍이 들도록 힘껏 꼬집었다. "악!" 꿈은 아니었다. 다음날 엘란은 집을 얻어 성을 나섰다. 산은 작고 경치가 좋은 것도 아니지만 오밀조밀한 것이 마음에 딱 들었다. 집은 마을과 떨어진 산 속의 오두막이다. 사냥꾼들이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임시 숙소였다. 간단한 아궁이와 방하나가 전부였다. 엘란은 볼품은 없지만 성에서 살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피터와 떨어져 산다는게 기뻤다. 피터 의 얼굴을 보면 다시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카일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그날부터 엘 란은 정령술을 배웠다. "세상은 인간계, 신계, 정령계, 마계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계의 모든 자연현상은 신계, 정령계, 마계와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정령술은 정령을 불러내서 부리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서 마법을 행 하는 것을 신성마법이라고 하고, 마신의 힘을 빌리는 것을 흑마법, 자연계의 마나를 조종함으로써 행하 는 마법을 백마법이라 한다. 그리고, 마계의 마물을 소환하는 것은 소환마법이라 칭한다. 정령술은 정령 을 소환해서 부리는 마법의 한 종류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보통 흑마법사는 소환마법도 같이 배운다. 백 마법사가 정령술을 익히기도하고. 그러나, 높은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하나만 파고 드는게 유리하다. 한 평생 노력해도 하나를 대성하기 힘든데 이것 저것 익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이다. 나의 스승 시드 도 오직 정령술 하나에만 매달렸고 나도 정령술만 익혔다. 재미삼아 마법 한 두가지 익혀 보는 거야 상 관이 없다만, 되도록이면 마법은 익히지 마라. 다만 라이트마법같은 것은 생활에 상당히 유용하니 나중 에 한 번 익혀 보아라." 카일은 기초적인 상황부터 설명해 나갔다. 엘란은 눈을 빛내며 열중했다. "정령술을 비롯한 모든 마법은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배 울 수 없다. 검술마저도 상승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마나를 느끼고 익혀야 한다. 마나는 자연을 구성 하는 근본요소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이건 차차 설명하고 궁금한게 있거든 물어봐라." 엘란은 머뭇거리더니 질문했다. "정령술을 배우면 저도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나요?" 카일은 빙그레 웃었다. "시드가 비를 내리는 걸 보고 하는 말이구나?" "예."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정령사의 수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시드가 저번에 연극한 것과 같은 비는 절대 불가능하다." 엘란은 놀라서 물었다. "연극이라니요?" "당연히 연극이지. 뛰어난 정령사는 좁은 지역에 짧은 시간 동안 비를 뿌릴수는 있다. 그러나, 장시간 넓 은 지역에 비를 뿌리는 것은 정령왕을 부린다 해도 불가능하다. 정령을 부릴려면 계속 마나를 대줘야 하는데 그런 막대한 마나를 동원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에이션트드래곤이 정령왕을 부린다면 가능하 겠지." 엘란은 의문이 생겼다. "그럼 시드님은 어떻게 비를 내렸습니까?" "시드는 물의 상급정령익스퍼터다. 당연히 비가 올 때를 알 수 있지. 비가 내릴 때를 맞춘 것 뿐이다." 엘란은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왜 그런 연극을 한 겁니까?" "영지민을 더 쥐어짜기 위해서다. 너희들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니 너희들도 나에게 충성을 바쳐라! 이런 뜻이지. 실제로 영지민보호를 명분으로 성벽축조에 나섰고 세금도 두배로 올리지 않았느냐?" 엘란은 울화가 치밀었다. 자기도 시드가 비를 내릴 때 감격해서 목이 터져라 영주님 만세를 외치지 않 았던가? "나쁜 놈들!" 카일은 엘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원래 그런거다. 믿을 놈 한 놈도 없지." 카일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엘란은 카일의 그런 표정에 상당히 놀랐다. 항상 웃는 얼굴의 카일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설명을 계속하마. 정령사는 하급, 중급, 상급정령사로 크게 나뉜다. 각각의 수준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다. 대부분의 정령사가 평생 하급의 벽을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급수는 부리는 정령의 등급에 따라 나눈 것이다. 하급정령을 부리면 하급정령사, 중급정령을 부리면 중급정령사로 불린다. 같은 급이라도 수준 차이가 큰데 처음 정령을 불러 계약을 하고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되면 비기너라고 부르고 능숙하게 정 령을 부리면 익스퍼터 정령을 완전히 지배하는 단계를 마스터라한다. 그러니까 정령사의 수준은 아홉단 계로 나눈다고 할 수 있다. 하급정령비기너부터 상급정령마스터까지." 엘란이 말을 끊고 질문을 했다. "아까 정령왕을 부린다고 하셨는데 그런 단계는 없는 건가요?" "이때까지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인간은 없다. 그래서 그런 단계는 필요가 없지. 역사적으로 드래곤들이 정령왕들을 부리긴 했지, 아! 엘프중에도 부리던 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요새는 드래곤들이 드래곤의 섬 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엘프들도 엘프의 숲에서 나오지 않아서 정령왕을 본 사람도 없다. 인간에게는 다행한 일이지." 잠시 숨을 고른 카일은 말을 이었다. "정령술을 익히기는 쉽지않다. 무엇보다도 정령과의 친화력도 있어야 하고 거기다가 엄청난 노력을 필요 로 한다. 평생을 노력해도 하급정령비기너에 머무는 자도 많다. 시드 정도 되는 정령사는 대륙에도 둘밖 에 없다." 엘란은 갑자기 불안해 졌다. "친화력이 없으면 어쩌죠?" "그럼 정령술은 익힐 수 없다." 카일은 단호히 말했다. "우선 마나를 느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나를 느낄 수 없어도 정령술은 못 배운다. 내앞에 앉거 라." 엘란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두 다리를 쭉 폈다. "아니, 그렇게 앉지 말고 이렇게 앉아야 한다." 카일은 시범을 보여 주었다. "먼저 오른쪽 발바닥을 왼쪽 허벅지에 대고,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윗 부분에 놓아라." 엘란은 잘 되지 않았다. 다리가 땡기고 잘 접히지 않았다. 카일은 엘란의 다리를 잡아서 강제로 꼬아 버렸다. "악!" 엘란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나중에는 편안해 질거다." 엘란은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허리를 쭉펴라, 그래 그렇게. 그리고, 턱은 당기고 눈은 자연스럽게 감아라. 지금은 감지말고 내 자세를 보고 따라해야지. 두손은 자연스럽게 다리위에 올리는데 약지와 중지는 말아서 엄지와 맞대고 검지와 새끼손가락은 전방을 향해 뻣어라." 엘란은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어색하고 힘들었다. 카일은 엘란의 아랫배에 손을 올려 놓았다. 갑자기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뭔가요?" 질문을 하자 아랫배에 들어온 기운이 흩어졌다. "이게 마나다. 너는 앞으로 이걸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마나수련중에는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말아야 한 다. 입을 열면 마나가 흩어진다. 마법사나 정령사가 되려면 마나를 느끼고 저장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흘려줄테니 가만히 느껴보거라." 카일은 다시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는 엘란의 몸안을 이리 저리 떠나니다 흩어졌다. 마나가 돌아다닐 때 는 온 몸에서 청량감이 느껴졌다. 흩어지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마나는 한 곳에 비정상적으로 모이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어서 곧잘 흩어진다. 앞으로 매일 아침에 이 자세로 명상을 하면서 마나를 느껴보아라. 느끼지 못하면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 카일은 이 말을 끝으로 산을 내려갔다. 엘란은 다리를 풀었다. "아이고!" 신음이 절로 났다. 다리는 쥐가 나서 뻣뻣하게 굳었다. 엘란은 이러저리 버둥거리면서 다리를 주물렀다. 그날부터 엘란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경치좋은 바위위에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다리 꼬기 도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세에는 익숙해 졌지만 마나는 느낄 수 없었다. 마나는 대기중에 넓게 퍼져 있지만 물고기가 물을 못느끼 듯 공기와 구별해서 느끼기는 어렵다.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자꾸 지나가자 엘란은 점점 초조해졌다. 카일은 이틀에 한 번씩와서 엘란을 체크했다. 카일은 엘란뒤에 서서 엘란이 명상에 들어있는걸 지켜 보았다. 시간이 헛되이 흘러가자 카일이 가끔씩 들르는게 부담스러워 졌다. 카일이 뒤에 서 있으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괜히 헛수고 하는거 아닌지 몰라.' 카일도 회의가 들었다. 엘란은 오늘도 새벽같이 바위위에 올랐다. 심호흡을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아직 별들이 빛을 뽐내고 있 다. 정신을 집중하고 공기를 폐부 깊숙히 빨아 당겼다. 휘이잉! 바람이 전신을 휘감고 스러진다. 엘란의 정신은 바람을 따라 다녔다. '어 이게뭐지.' 갑자기 주위를 도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어떻게 느껴지는 줄도 모르게 자연스러 웠다. "마나구나!" 엘란은 너무 기뻐서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렇게 고생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꼈다! 느꼈어!" 엘란은 미친놈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나무 위에서 다람쥐가 까만 눈을 빛내며 엘란을 내려다 보았다. ***** 3장.수련 다음날 아침 일찍 카일이 올라왔다. "마나를 느꼈어요!" 엘란은 자랑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카일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뿌듯한 감정이 일었다. 카일도 속으로 기뻐했다. '깡통은 아니었군.' "앞으로 갈 길도 멀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디딘셈이야." 엘란이 자만할까 염려가 된 카일은 엄하게 말했 다. 다음 단계로 배운 것은 마나를 몸속에 저장하는 방법이었다. 정령을 부리거나 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몸 속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를 공명시켜 행하는 일이다. 당연히 몸 속에 마나를 많이 저장할수록 수준 높 은 마법을 부리거나 고위의 정령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나는 자연에 비정상적으로 모여있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몸속에 저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쌓았다 싶으면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마나를 몸속에 저장하는 것을 마나축적이라고 한다. 중요한 수련의 하나이다. 저장된 마나가 많을수록 강대한 마법을 시전하거나 높은 수준의 정령을 부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깨달음이나 속 련도도 아주 중요하다. 마나 축적의 방법은 호흡과 명상으로 한다. 주변의 마나를 들이마셔서 몸속에 저 장하는 것이다. 정령사나 마법사에 따라 저장하는 장소가 다르기도 하나 보통 마나홀이나 심장에 저장 한다. 네가 배울 호흡법은 마나홀에 마나를 쌓는 방법이다. 숨을 깊고 길게 들이 마시고 짧고 가볍게 내 뱉어라. 그러면서 마나를 마나홀에 저장한다고 생각하라. 이때 마나가 쌓인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굳 게 믿는다면 저장할수 있다. 마나는 한 곳에 모이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어서 처음에는 쌓는 즉시 빠져 나갈 것이다.그러나 꾸준히 노력해서 일정 단계가 지나면 몸속에 쌓이는 것을 느낄수 있을 것이 다." 카일은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들려서 배운 것을 확인하고 가르쳤다. 엘란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마나 축적을 시도했다. 마나를 느끼고 뛸 듯이 기뻐한 것이 엊그제인데 만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고 까다로웠다. '후,정말 어렵군 마나를 느끼면 다 될줄 알았는데, 마나 쌓는 것은 더 어렵네.' 엘란은 혼자 중얼거렸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성과가 보이지 않으니 힘이 배로 들었다. 겨울내내 수련을 했지만 마나는 모이지 않았다. 모으면 흩어지고 모으면 흩어지고 해서 포기해 버릴까하는 마음 도 들었다. 그때마다 죽은 파보와 자기를 정성껏 가르치는 카일을 생각해서 더욱 마나축적에 박차를 가 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엘란은 따뜻한 봄날 마당에 앉아 마나축적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마나를 들여마시고 아랫배로 유도해 마나홀에 가둔다고 생각하고 숨을 쉬었다. '마시고 축적하고 내뱉고, 마시고 축적하고 내뱉고.' 엘란은 마나를 깊숙히 들이 마시고 몸속의 탁기를 내뱉었다. 마나는 들여마셔서 가두었다 싶으면 흩어졌다. 엘란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가 축적된 다고 생각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시고 가둔다. 마시고 가둔다. 마시고 가둔다 ' 한가지 일념으로 계속 집중하자 어느 순간 자기를 잊고 몸을 주변에 맡겼다. 갑자기 마나가 마나홀로 모여 들더니 흩어지지 않았다. 엘란은 계속 호흡법을 수련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느 순간 주변을 인식하고 눈을 뜨자 마나홀에 마나가 충만하게 쌓여 있었다. "해냈다." 엘란은 기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시간은 벌써 한 밤중이 되어 있었다. 잠깐동안 마나축적을 한 것 같은데 벌써 하루가 지난 것이다. 엘란은 다음날도 계속 마나축적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마나가 모이지는 않았다. 그 이상의 마나는 쌓이는 즉시 흩어졌다. 그래도 엘란은 명상을 계속 했다. 삼일후 카일이 다시 왔다. "축하한다. 마나를 저장할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정령사가 된거나 다름없다." "그럼 정령을 불러낼수 있나요?" 엘란은 들떠서 말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래, 한 번 불러보거라. 어떤 정령을 불러내고 싶으냐?" 그때 강한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요!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고 싶어요." 엘란은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라. 몸안의 마나와 주변의 마나를 공명시켜라! 그리고, 전에 가르 쳐준 주문을 외워보아라." 엘란은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바람을 느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바람이 웃자락을 흔들고 자나갔다. "바람의 정령이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 하니 내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한 줄기 바람이 휑하니 불더니 엘란의 앞에 투명한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등에 작은 날개를 달고 두손 을 가슴앞에 모으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성결해 보였다. 엘란은 자기가 불러낸 정령이 신기한지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말고 계약을 맺어야지." 카일이 부드럽게 말했다. 엘란은 정신을 집중하고 조용히 말했다. "실프여 나와 계약을 해다오." 실프가 다가와 엘란의 손에 입맞추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엘란은 계약이 맺어진 걸 느낄수 있었다. 가슴 이 벅차올랐다. "실프." 엘란이 조용히 말하자 바람의 정령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란은 실프를 불러서 손안에 올려놓고 신 기한지 계속 보고 있었다. 카일이 지켜보는 것도 잊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한참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카일은 엘란에게 조용히 말했다. "배울게 많으니 실프는 그만 보내도록 해라." 엘란은 실프를 돌려 보냈다. "겨우 실프하나 불러낸 것 가지고 너무 좋아하지 마라 아직 갈길이 멀다. 넌 이제 하급정령 하나를 겨우 불러낸 것에 불과하다. 내앞에 앉거라." 엘란이 앞에 앉자 카일은 등에 손을 대고 처음 마나에 대해 배울때처럼 엘란의 몸에 마나를 넣었다. "지금 가르치는 것은 마나운용법이다. 마나를 몸안에서 돌리는 기술이지. 이것은 마나축적만큼이나 중요 하다. 상위 정령사로 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마나를 운용하면 몸에 생명력이 충만해지고 정신 이 맑아진다. 힘도 세지고 쉽게 지치지도 않으며 피로도 쉽게 풀린다. 무었보다 중요한 것은 정령을 쉽 게 부릴 수 있게 만들고 마나소비도 줄인다는 것이다. 마나축적과 마나운용을 합쳐서 마나수련이라고 부른다. 호흡 명상 축적 운용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면 상위의 정령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나수련 중에는 위험하니 말은 하지 말거라." 카일은 엘란의 몸에 넣은 마나를 마나홀에 밀어 넣었다. 이질적인 마나가 들어오자 마나홀의 마나가 거 칠게 밀어냈다. 마나홀에 들어온 카일의 마나는 곧 앞 쪽으로 흘러나와 배꼽을 지나 가슴에 이르렀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한 마나는 다시 마나홀로 돌아왔다. 잠시후, 이번에는 뒤로 흘러서 등쪽으로 움직였 다. 조금 움직이더니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카일은 자신의 마나를 도로 뽑아내고 일어났다. "기억했느냐?" "예." 카일의 얼굴은 창백했다. 남의 몸에 마나를 넣어서 움직이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잘못되면 상대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매일 운용해라! 물론 길은 이게 다가 아니다. 마나를 앞에서 뒤로 완전히 관통해서 돌릴수 있게 되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정령사가 될 수 있을거다." "나머지 길은 어떻게 됩니까?" 엘란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카일은 엘란에게 책을 한 권 주었다. "이 책에는 나머지 길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걸 보고 수련해라." "예." 엘란은 카일이 주는 책을 공손히 받았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다." 카일이 느닷없이 말했다. 엘란은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헤어진다니 어디 가십니까?" "교대할 후배가 와서 나는 롬바르드시로 간다." 롬바르드는 엘리오트왕국의 수도이다. 엘란은 슬픈 얼굴로 카일을 보았다. 부지불식간에 닥친 일이라 뭐 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섭섭해 할 것 없다. 어차피 헤어져야 할 인연인 것을 지금수준에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익혀라! 땅,물, 흙의 정령도 불러내서 계약해 보고 바람의 정령도 더 많은 수와 계약을 해보아라. 지금은 안 되겠지만 나중에 능력이 된다면 상위정령도 불러내서 계약을 해보고. 한가지 명심할 것은 너무성급하게 하지 말 고 차분하게 해야한다는 점이다. 마나수련은 대단히 위험해서 잘못되면 폭주가 일어나서 심하면 죽고 가벼워도 폐인이 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잘 불러낼 수 없거나 부리기가 힘든 정령이 있을거다. 그건 너 와 맞지 않는 정령이니 무리하게 익히지 말고 그 부분은 포기해라. 물과 불같은 상반되는 정령은 높은 수준까지 같이 익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하나를 주로 익히고 다른건 아예 익히지 않거나 하급 정령 정도만 부리는게 좋을거다. 책에는 수련법과 정령술이 자세히 써 있으니 보고 익히거라. 이해되지 않거든 거기서 중단하고 더 이상 수련하지 마라. 혼자서 정령술을 익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니까. 알겠 느냐.?" "예." "책에는 간단한 마법도 약간 적혀 있으니 관심이 있거든 익혀보거라." "마법도 쓸수 있나요?" "마나를 느끼고 저장하고 공명시킬수 있으면 마법도 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약간 정도 익히는 수준이 지 같이 수련하지는 않는다. 수련의 길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천재라도 두 개를 동시에 마스터하 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 다 익히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검사와는 길이 아예 다르니 검을 익힐 생각은 아예 말고." 카일은 그 외에도 많은 주의사항을 밤늦도록 가르쳤다. 시간이 없다보니 간단히 설명하는데도 한 밤중 이 되었다. "혹시나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정령을 좀 부린다고 복수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아무리 시골영주 라도 휘하에는 수많은 기사와 병력이 있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평민이 귀족을 죽이는 것은 자살행위다. 나라에서 잡아 죽이려고 수많은 사람이 파견될거다. 높은 현상금이 붙어서 현상범사냥꾼도 따라붙을 테 고. 평생 쫓겨다녀야 된다. 내 입장도 곤란해지고." "예, 알겠습니다." 엘란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피터는 꼭 내손으로 죽일 겁니다.' 카일은 흡족하게 웃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가르쳤는데 가르치다 보니 재미가 쏠쏠했다. '다행이다. 정령을 다룰수 있어서.' "이제 그만 자거라." 엘란은 카일과 마지막 밤이다 보니 더 대화하고 싶어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카일의 말대로 침대속으로 들어갔다. '못다한 이야기는 내일 일어나서 하지 뭐.' 엘란은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아직도 정령을 불러냈을 때의 감동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누웠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 자 살짝 눈을 떠 카일을 보았다. 카일은 의자에 앉아 무엇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엘란은 갑자기 장난기가 들었다. 원래 엘란은 장난은 치지 않는 편이다. 장난을 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는 매형의 갖은 구박을 받으며 눈치를 살폈고, 10살에 팔려와 거의 노예 비슷한 생활을 했다. 유일한 친 구이자 형인 파보는 자신을 보호하려다 죽었고, 카일은 그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여서 어려운 마음이 들 었다. 아마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이 아니라면 장난칠 생각이 들지도 않았으리라. 살그머니 일어난 엘란 은 카일이 보던 양피지를 확 뺏어 들었다. 카일은 양피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다가오는 기척 을 느낄 수 없었다. "카일님 이게 뭐에요?" 엘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양피지를 흔들었다. 퍽! 카일의 주먹이 엘란의 얼굴을 후려쳤다.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엘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카일 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양피지를 줏어 들고 엘란을 노려보았다. 순간적으로 살기마저 보였다. 얼굴은 붉 게 달아올랐고 숨은 거칠었다. 엘란은 평생을 통틀어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처음이었다. 등에 소름이 오 싹 끼쳤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카일은 하급정령익스퍼터다. 카일이 살기를 일으키자 기세에 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다. 카일의 얼굴이 무섭기도 했지만 무슨 큰 잘못을 한게 아닌지 겁이 덜 컥 났다. "무슨 장난이냐! 어서 자거라." 흥분이 가라 앉았는지 의외로 차분한 음성이었다. 카일은 살기를 지우고 의자에 앉았다. 멍한 얼굴로 카 일의 뒷모습을 보던 엘란은 카일의 말대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 안오던 잠도 싹 달아나 버렸다. 침대에 누워서 엘란은 카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왜 카일은 노예와 다름없던 자신을 구해주고 여러 가지를 가르쳤을까? 무슨 목적으로? 한번 든 의문은 꼬리를 이었다. 엘란은 예전에 카일이 자신을 가르 치면서 했던 말, 쓸데가 있어서 가르친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를 이용하려는 건가? 그러나 자신을 어디 다 이용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엘란은 카일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갈색머리와 미 소를 머금은 입. 미소를 떠올리자 카일을 의심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쨌든 카일은 은인이었다. 자 신을 구해주고 정령술도 가르쳐주었다. 세상지식이 별로 없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 정 도는 느낄 수 있다. 카일이 아니라면 아직도 영주에게 매여서 죽도록 일만하고 있을 것이다. 엘란은 의 심을 지웠다. 자신이 쓸데가 있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목숨을 구해주고 여러가지를 가르쳐 준데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엘란은 의심을 지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 다. 그러나, 한번 든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마음에 벽이 생기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카일은 가고 없었다. 카일이 가고 없는 걸 알게 되자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평상시같이 편한 얼굴로 카일을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책상위에는 메모가 하나 있었다. 엘란은 메모를 들고 읽 었다. <어제는 내가 신경이 날카로워서 실수를 했나 보구나.미안하다. 여기서 수련하고 있거라! 나중에 자리가 잡히거든 데리러 오마. 그럼 나중에 보자.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엘란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종이의 옆에는 갈색 가죽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가 하나 놓여 있다. 풀어보니 5실버가 들어 있다. 엘란은 카일의 말대로 여기서 계속 수련하기로 했다. 딱히 갈 데도 없는 것이다. 간 단히 아침을 먹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언제나 수련하던 바위 위에 앉았다. 어젯밤의 일을 머리에서 떨 쳐버리려는 듯 수련에 매달렸다. 마나축적을 두시간하고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운용에 들어갔다. 마나홀 에서 마나를 뽑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잘 안되네 다시 한 번' 꿈틀거리는 것 같기는 한데 앞쪽으로 올라오지는 않았다. 수련은 만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녁때까 지 용을 써도 안 되자 일단 포기하고 내려왔다. 집에와서 카일이 준 책을 펴들었다. 앞에는 주의사항이 죽 적혀 있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다. 몇장넘기자 인체의 그림과 마나길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자기몸 과 비교해 가면서 한 참을 보다 뒷장으로 넘겼다. 뒤에는 정령을 운용해서 공격과 방어를 하는 걸 정령 별로 서술해 놓았다. 마지막에는 간단한 마법주문과 해설이 있었다. 엘란의 일과는 모두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오전 내내 마나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정령을 불러내어 계약 을 시도하거나 정령 부리는 것을 연습했다. 정령을 부리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다. 마나수련은 지루하고 힘이 들었다. 수련의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고 성과가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점 점 발전한다고 굳게 믿고 수련에 임했다. 밤에는 책을 보거나 정령을 불러서 같이 놀았다. 엘란은 정령과 놀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살자니 외롭고 무서웠 다. 그때마다 정령은 큰 힘이 되었다. 하늘아래 친구라고는 정령뿐이었다. 정령과 침대에서 뒹굴다 잠이 들었다. 엘란은 몰랐지만 정령과의 놀이가 친화력을 높여서 빠른 성취를 가능케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엄 격한 사승관계로 정령을 진지하게 대했으며 같이 논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아무래도 친 화력이 떨어졌다. 몇 달을 노력한 후에야 겨우 마나길을 뚫을 수 있었다. '움직여라!움직여라!' 엘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마나홀의 마나도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었 다. 마나가 점점 활발해지는 것이 느껴지며 앞쪽으로 움직였다. 미약한 거리였지만 분명히 나아갔다. 엘 란은 너무 기뻐서 고함을 쳤다. "됐다!됐어!" 흥분해서 외치자 마나가 돌아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를 운용했다. 조금씩 유동하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오후에는 딴 정령과의 계약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가서 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몸 속의 마나를 돌린다고 생각하면서 주위의 마나와 공명시켰다. 그리고는 조 용히 주문을 영창했다. "물의 정령이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한 참을 눈을 빛내며 기다 렸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한번 해볼까'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되지 않았다. '정령과의 친화력이란 이것을 말하는구나 자신과 맞지 않으면 익히기가 힘들다더니' 엘란은 물의 정령과 친화력이 낮았다. 밤 늦게까지 운디네를 불러 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해 도 안되자 아쉽지만 포기해 버렸다. 다음날은 불을 피워 놓고 불의 정령을 불러 보았다. 주문을 외우고 불을 노려보자 조그만 도마뱀같이 생긴 것이 기어나왔다. 몸주위에는 불꽃이 넘실거렸다. 상당히 신기했 다.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게 아주 귀여웠다. 엘란은 한 참을 지켜 보았다. 샐라멘더도 엘란은 쳐다 보았 다. 마치 말을 하라는 것 같았다. "샐라멘더여 나와 계약을 해다오!" 샐라멘더는 조용히 앞으로 오더니 잎에서 작은 불꽃을 토해내고 사라졌다. 엘란은 계약이 체결된 것을 느꼈다. "샐라멘더." 불꽃의 정령이 나타났다. 엘란은 정령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엉겹결에 자기 머리위에 띄웠다가 머리카락이 다 타버렸다. "아이구!" 엘란은 깜짝 놀랐다. "대머리 될 뻔했네." 아닌게 아니라 머리 중앙의 머리가 반 쯤 타들어가서 대머리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샐라멘더의 크기를 조정해 보았다. 엘란이 명령을 내리자 샐라멘더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금새 수박만해 지더니 이윽고 호 박만해졌다. 마나가 급속하게 빨려 나갔다. 엘란은 마나를 더욱 끌어 올렸다. 정령의 주위가 불꽃으로 넘실거렸다. 일순간 정령의 배가 똥똥해졌다. 아주 우스광스러웠다. 펑! 마나가 끊기자 정령이 돌아가 버렸다. 엘란은 지쳐서 잠시 주저 앉았다. 처음 부려보는 불의 정령이라 힘이 많이 들었다. 마나축적을 다시 한 후 이번에는 흙의 정령을 불러 보기로 마음 먹었다. 엘란은 주위 의 흙을 쥐고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흙의 정령을 불렀다. 흙의 하급정령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엘란은 바람의 정령과 가장 친화력이 높았다. 그 다음은 불의 정령과 친화력이 높았다. 불의 정령은 바람의 정 령보다는 마나소모도 심하고 제어도 잘되지 않았다. 물과는 친화력이 약했고 흙의 정령은 전무하다시피 친화력이 낮았다. 엘란은 수련에만 열중했다. 다른 할 일도 없었고 주변에는 사람도 없었다. 마나축적은 아무리해도 그 이상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했다. 한 단계를 넘어서면 될 것도 같 은데 그 한단계 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이년이 지나자 실프는 다섯과 계약을 하고 부릴수 있게 되었 고, 샐라멘더는 둘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물의 정령은 노력해서 겨우 하나와 계약을 했지만 제어는 서 툴렀다. 흙의 정령은 겨우 불러낼수는 있었으나 계약에는 실패했다. 흙의 정령은 포기해 버렸다. 물의 정령도 더 이상 계약은 시도하지 않고 하나의 운용에만 몰두했다. 마나운용은 진전이 있었다. 가슴까지 마나가 움직였던 것이다. 뒤쪽으로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사람은 뒤보다 앞이 발달했는지 마나를 뒤로 보내기가 배는 힘들었다. 15살이 되었을 때 책에 적힌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간단한 마법이지만 익혀 두면 쓸모가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마법은 단 두가지 만 익혔다. 주위를 환하게 하는 라이트마법과 슬립마법. 비가 숲을 적시고 있다. 봄을 재촉하는 봄비였다. 엘란은 빗속에서 실프를 부렸다. 빗속을 날아 다니는 실프는 봄의 여신 같았다. 엘란은 실프를 강렬하게 움직였다. 주위를 온통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펑!펑! 엘란은 실프로 나무를 후려쳤다.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채 흔들렸다. 엘란은 쉴 새없이 나무를 가 격했다.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지끈! 나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무가 쓰러지자 엘란은 실프 셋으로 주위에 베리어를 쳤다. 그리고 실프 둘로 바위를 들어올려서는 자기 머리위에 떨어뜨렸다. 윙! 바위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바위와 실프가 충돌했다. 바위는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휴!" 엘란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베리어의 강도를 실험해 본 것이다. 엘란은 더 큰 바위를 들어 올렸다. 머리 위에 놓고는 다시 놓았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바위가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대신 실프도 돌아가 버렸다. 울컥! 엘란은 피를 토했다. 이번에는 베리어가 완전히 견디지 못했다. 바위와 실프의 충돌에 몸속에 충 격이 가해진 것이다. 부상을 입은 엘란은 연습을 그만 두었다. 이틀을 쉬자 몸이 나았다. 이번에는 실프 가 얼마나 타격을 가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실프." 엘란은 부릴수 있는 실프 다섯을 모두 불렀다.엘란은 저번에 머리위에 떨어뜨렸던 바위를 실프 로 쳤다. 쾅! 돌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윽!" 튀어나온 돌하나가 배를 쳤다. 엄청난 통증에 엘란은 주저 앉았다. 그 바람에 마나가 끊겨서 실프 는 돌아가 버렸다. 한 참을 엎드려 있자 통증이 가셨다. 엘란은 좋은 교훈 하나를 얻었다. 무조건 공격 을 해서는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기 몸주위를 지키는 정령을 두고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 은 것이다. 다시 정령을 불러서는 하나는 자기 몸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바위를 때렸다. 쾅!쾅! 돌들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엘란 주위의 실프에 막혀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계속해서 때리자 큰 바위 두 개가 갈라졌다. 엘란은 완전히 기진맥진 했다. 엘란은 외로움을 수련으로 달랬다. 가혹할 정도 로 몸을 움직였다. 산도 열심히 탔다. 하루에도 몇 개의 산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마을 근 처에는 가지 않았다. 다음날은 샐라멘더를 불렀다. "앗 뜨거!" 몸 주위에 둘렀다가 옷에 불이 붙어 버렸다. 엘란은 이리저리 뒹굴었다. 불은 쉽게 꺼지지 않 았다. 엘란은 퍼뜩 운디네 생각이 났다. "운디네!" 물의 정령이 나타났다. 엘란은 정령을 껴안았다. 치이익!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꺼졌다. 옷이 꺼멓게 그을리고 곳곳에 구멍이 생겼다. "이거 어쩌지." 엘란은 울상이 되었다. 가뜩이나 낡은 옷이 엉망이 되었다. 어려서 입던 옷은 작아서 모두 버렸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근처 마을에서 몰래 가져온 옷이다. 밤에 내려가서 옷을 가져오고는 1실버를 놓고 온 것이다. 엘란은 샐라멘 더와 자기의 거리를 재 보았다. "가만, 책에는 샐라멘더를 정령사가 만진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왜 뜨겁지?" 엘란은 의문이 들었다. 가 만히 샐라멘더에 손을 가져갔다. "아 뜨거! 이거 뜨겁잖아!" 엘란은 얼굴을 찌푸리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생각과 관련이 있는 듯 했다. 엘란은 무지 뜨거운 샐라멘더를 상상하고 있었다. 엘란은 정신을 가다듬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나한테는 뜨겁지 않다,나한테는 뜨겁지 않다 .' 엘란은 조심스럽게 정령에게 손을 뻣었다.신기하게도 뜨 겁지 않았다. 두 손에 정령을 올려 보았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정령이 전혀 뜨겁지 않았다. 풀밭에 올려 놓았는데도 불이 붙지 않았다. "타올라라." 엘란이 신이나서 외치자 샐라멘더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엘란은 샐라멘더가 풀위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화르륵! 건조한 날씨에 풀밭은 금방 불이 붙었다. "이런." 운디네를 불러낸 엘란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건조한 봄날에 대형 산불이 날뻔했던 것이다. 엘 란은 그만 시커멓게 변했다. 옷은 아예 누더기가 되어 있었고 얼굴은 검탱이 투성이었다. 씻으러 냇가에 갔다가 자기 꼴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하는 수련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엘란은 어떻 게 하면 정령을 효율적으로 부릴까 매일 생각에 잠겼다. 스승이 닦아놓은 길을 답습하는 정령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사색과 정령과의 놀이가 엘란의 실력을 일취월장하게 만들었다. 끝없는 노력도 빠 른 성취의 원동력이 되었다. "샐라멘더!" 엘란은 샐라멘더로 베리어를 치고 실프로 충돌시켰다. 펑! 실프와 샐라멘더가 부딪히면서 불꽃이 터져 올랐다. 바람은 주위를 미친 듯이 휘몰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부딪쳐 보았다. 펑! 확실히 샐라멘더가 실프에 밀렸다. 실프의 조정이 더욱 능숙한 탓이다. 나중에는 실프와 샐라멘더를 편을 갈라 싸움을 붙여 보기도 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엘란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어른으로 자라고 있었다 16세 생일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날은 왠지 울적해서 수련을 쉬고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날 카일이 찾아왔다. 예의 그 환한 미소와 함께! ***** 4장 가스통의 무덤 "엘란 잘 있었니?" 카일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예, 오랫만입니다." 엘란은 환한 미소로 카일을 반겼다. 한참을 말없이 보던 카일이 엘란을 안았다. 등을 두 번 두드리고 포 옹을 푼 카일은 엘란에게 물었다. "어느정도 수련했니?" 엘란은 말없이 정령을 불렀다. "실프." 실프다섯이 나타나 허공을 수 놓았다. 엘란은 실프를 자유자재로 부렸다. 실프가 사방을 누비자 강렬한 바람이 두 사람의 주변을 휩싸고 돌았다. 순간적으로 카일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정령을 부리 던 엘란은 볼 수 없었다. "대단하구나! 하급정령익스퍼터의 단계를 넘어선 것 같은데?" 엘란은 정령을 돌려보내고 환하게 웃었다. "카일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물끄러미 얼굴을 응시하던 카일은 말했다. "나랑같이 산을 내려가자!" "롬브르드시로 가는 겁니까?" "아니다. 먼저 들를 데가 있다." 엘란은 카일을 따라서 산을 내려갔다. 짐이라고는 옷 한 벌이 다였다.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순백색의 눈은 마음을 차분히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걸어서 마을 로 들어간 엘란과 카일은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한 후 바로 떠났다. 영지를 벗어나는 엘란의 마음은 담 담했다. 미래의 불안이나 걱정도 없었고, 흥분된 감정도 없었다. 피터를 두고 떠나는 것이 섭섭할 뿐이 었다. 영지를 떠난 일행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차가운 겨울은 여행을 떠나기 적합한 시기는 아니었 다. 엘란은 추위를 몰아내려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나가 한 바퀴 돌자 차가운 한기가 몸에서 떠나갔 다. 그들은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두 줄기 발자국이 설원 위에 찍혔다. "목적지는 어디죠?" 입에서 나온 숨은 차가운 공기와 만나 하얀 김으로 바뀌었다. "엄리쳐지방으로 간다." 엄리쳐는 엘리오트왕국과 피요르드왕국사이의 접경지방이다. "멀군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입을 다문 엘란은 묵묵히 걸었다. 왜 그 먼 지방까지 가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낙조가 하얀 설원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붉은 카펫이 깔리는 것 같았다. 해가 지평선 아 래로 자취를 감추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발을 멈춘 둘은 모닥불을 피운 후 저녁을 들었다. 빵은 금세 얼어붙어 딱딱했다. 칼바람이 전신을 어루만졌다. 물을 끓여서 한 잔 마시자 온 몸에 훈기가 돌았 다. 그는 엘란에게 담요를 하나 내주었다. 아스가르드산 양모로 만든 두꺼운 담요였다. 엘란은 망토를 여미고 담요로 몸을 둘렀다. 타지에서의 첫 번째 밤이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엘란이 물었다. 카일은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냥 저량 지냈다." 카일은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다르넨지방에 내려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었는데, 삶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지낸 오년간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령술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여전히 하급정령익스퍼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에 비해 자기 나이의 반밖에 되지 않는 엘란은 그 단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속에서 질투가 끓어올랐다. 시드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는 데는 진절머리가 쳐졌다. 게다가 시드의 망나니 자식들 뒤치닥거리 하는 데도 학을 뗄 지경이었다. 아판사판 의 심정으로 시드가 저술해 놓은 정령술책도 몰래 훔쳤다. 들키는 날에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이다. '꼭 찾아야 한다.' 카일은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했다. 성공만 한다면 정령술은 때려치우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살아갈 작정이었다. 엘란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한 겨울의 노숙에 뼈까지 얼어붙 는 것 같았다. 온 몸에 한기가 박힌 것 같았다. 모닥불은 어느새 꺼져 있었다. 엘란은 샐라멘더로 다시 불을 붙이고 나뭇가지를 넣었다. 금새 불길이 솟았다. 불에 몸이 어느 정도 녹자 좌정한 후 마나수련에 들어갔다. 한기가 서서히 물러나면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수련을 끝내고 보자 카일이 일어나 있었다. 카일은 모닥불을 쬐었다.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둘은 말없이 아침을 먹고 바로 일어섰다. 갈 길이 멀었다. 다르넨은 엘리오트왕국의 서쪽변경이고 엄리쳐는 동쪽변경이다. 엄리쳐까지 갈려면 왕국을 완전히 가로질러야 했다. 엘란과 카일은 쉬지 않고 걸었다. 이틀을 더 움직인 후에 보르노스시에서 하루 묶어가기로 했다. 한겨울의 첫 여행이 엘란에게는 무리였다. 필요한 물품도 많았고, 그래서 쉬어가기로 한 것이다. 보르노스시는 발칸대제 때 건설된 도시였다. 남부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지방중심도시로 계획 된 시였다. 엘란에게 이렇게 큰 도시는 처음이었다. 시장을 지날 때는 붐비는 사람으로 어지러울 정도였 다. 시장을 지나자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여행자신 모양이죠? 안락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준비된 여관을 알고 있는데 제가 그리로 모시겠습 니다." 더벅머리 소년이 카일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것이 상당히 익살맞게 생겼다. 옷은 남루했지만 깨끗이 세탁되어 있었다. 호객행위를 하려면 청결해야만 했다. "앞장서라." 엘란과 카일은 소년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중심부는 계획에 의한 건축이라 모양도 반듯하고 유서 깊은 건물도 많았지만 주변은 나중에 무계획적으로 들어선 것이라 어수선하고 복잡했다. 소년의 안내를 받은 그들은 양의 창자같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고 돌아 아담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관은 아담한 이층목조 건물이다. 나무로 된 간판에는 정자로 '여행자의 친구'란 글자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낡 았지만 청소는 잘 되어 있어서 깨끗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여행자 두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소년이 큰 소리로 외치자 카운터 안에서 뚱뚱한 여자가 나왔다. 앞 치마로 손을 닫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겹게 보였다. "어서오세요 손님." 아줌마는 친절한 미소를 띄웠다. "하루만 자고 갈 거요." 카일이 말했다. 카일은 숙박부를 쓰고 열쇠를 받아 들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식사는 이층으로 가져다주시오." 아줌마는 소년에게 동전 두 개를 건넸다. 소년은 동전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넣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질 소중한 돈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엘란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침대는 푹신했다. 산에서 쓰던 침대는 나무침대라 상당히 딱딱했었다. 너무 푹신해서 오히려 불편한 감마저 들었다. 잠시후 식사가 들어왔다. 스프는 그저그랬지만 빵과 닭고기는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식사를 하고 대충 씻은 후 그대로 골아 떨 어졌다. 한 참을 자던 엘란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한 밤중이었다. 가만히 일어나 마나수련을 했다. 온 몸에 기운이 충만해졌다. 엘란은 창가로가 창문을 열었다. 온 도시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유 난히 검은 밤이다. 농노의 앞날만큼이나 캄캄해 보였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엘란은 이상하게 마 음이 차분해졌다. 침대 위에 앉은 엘란은 명상에 들었다. 마나를 들이마시자 마나홀이 충만해졌다. 뿌듯 한 느낌에 터질 것 같았다. 수련 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터질 것 같은 충만감에 수련을 멈추었다.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여름날의 소나기 같은 청량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잠시 그런 감각을 즐기던 엘란은 다시 잠이 들었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에 비추자 저절로 잠이 깨었다. 겨울이 된 후 처음 느끼는 눈부신 햇살이다. 오늘은 오랜만의 따뜻한 날씨였다. 마나수련을 하고 있던 카일은 잠시 후 눈을 떴다. "내려가서 아침먹자." 엘란은 씻고 내려갔다. 벌써 음식이 나오고 있었다. 야채스프와 계란후라이 빵 베이컨이 나왔다.건물은 낡았지만 소년의 말대로 맛 하나는 좋았다. "아무래도 걸어가기는 무리일 것 같다.말을 타고 가자." "저는 말 못 탑니다." 엘란이 당황해서 말했다. "타고 가면서 배우면 된다. 이런 겨울에 걸어서 엄리처까지 가는 건 무리다." 식사가 끝나고 짐을 챙겨든 일행은 숙박비를 지불하고 여관을 나섰다. 그들은 말을 사려고 복잡한 골목 을 이리저리 돌았다. 물어물어 도착한 마시장은 시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마시장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었다. 크기도 천차만별이고 색깔도 다양해서 질흙같이 검은 말부터 갈색말 흰말까지 없는 게 없었다. "헤헤 말을 사러 오셨습니까?" 말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은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왕가와 같은 머리색깔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사람 좋아 보이기도하 고 어찌 보면 간사해 보이기도 하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말만 하십시오 전설의 명마부터 짐말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붉은 머리 사내는 너스레를 떨었다. "순한 말로 두 마리 골라주게. 전설의 명마는 필요 없고 먼 여행을 할 수 있는 튼튼한 말이면 되네." 밀고당기는 약간의 실랑이 끝에 5골덴에 말을 샀다. 엘란이 조심스럽게 고삐를 당기자 말이 순순히 따 라왔다. 말들을 끌고 공터로 가서는 말타기를 배웠다. 말을 타려니 약간 겁이 났다. "겁먹지 마라! 왼발을 겸자에 끼우고, 안장을 꼭 잡은 후 단숨에 올라라." 엘란은 말을 타다 실수로 엉덩이를 찼다. 말이 두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엘란은 뒤로 나뒹 굴었다. 엘란은 말과 한 참을 씨름해야 했다.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공터를 벗어나 시장으로 향했다. 시 장에서 엘란의 침랑과 두터운 솜옷을 산 일행은 시를 떠났다. 시를 벗어나자 엘란과 카일은 말에 올랐 다. 연습에도 불구하고 엘란의 자세는 어색했다. 고삐를 잡은 손에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고, 말의 몸 통을 감싼 다리에도 힘을 너무 많이 주었다. 그 덕에 말과 엘란 둘 다 불편했다. 그에 비해 카일은 능숙 한 솜씨로 말을 조종했다. 둘은 동부대로로 향했다. 동부대로는 많은 다른 것들이 그렇듯 발칸대제의 유 산이었다. 피요르드접경까지 뻗어있는 엘리오트왕국 교통의 한 축이다. "천년전에 만든 도로같지 않군요." 엘란은 저으기 감탄했다.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도로야 코끼리 다리만큼이나 튼튼하지." "드래곤이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사실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대제는 드래곤도 부렸으니까." "왜 드래곤같이 강대한 존재가 발칸대제의 명령에 따랐을까요?" "친구로 사귀었다는 말도 있고 힘으로 굴복시켰다는 말도 있다. 신의 선의에 힘입었다는 말도 있었고, 아무도 정확한 건 모른다. 맹약의 검에 드래곤이 복종한다는 것밖에 알려진 건 없으니까. 하나 확실한 것은 광룡캇셀프레임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륙의 통일도 60년간의 통치와 무수한 업적도 불가능했을 거 라는 점이야." 카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드래곤을 본적이 있나요?" "없다, 요새는 드래곤의 섬에서 나오는 드래곤이 거의 없으니까. 기록에 의하면 300년 전에 블루드래곤 한 마리가 아스가르드에서 행패를 부린 이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더군." "캇셀프레임은 살아 있을까요?" "살아있겠지 드래곤은 수명이 기니까. 왜 보고싶냐?" 엘란의 눈이 반짝였다. "예, 한번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어요." "평생 안 보는 게 좋을거다. 보는 순간 황천길 가기 십상이니." 그들은 하루종일 동부대로를 달렸다. 한 밤이 되어서야 야영에 들어갔다. 엘란은 허리 엉덩이 허벅지 할 것 없이 모두 쑤시고 아팠다. 안 아픈 데가 없을 정도였다. "계속 타다보면 익숙해 질거다." 카일은 힘들어하는 엘란에게 말했다. 그들은 샐라멘더를 불러서 모닥불을 피운 후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침낭에 들어가서 담 요로 몸을 두르자 따뜻해 졌다. 엘란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자신의 몸 을 뽐내 듯 반짝거렸다. 엘란은 별을 헤아리다 잠이 들었다. 여행은 상당히 지루했다. 계속 말을 달리다 말이 지치면 말에서 내려 쉬거나 걸었고, 밤이 되면 적당한 곳에서 노숙을 했다. 가끔씩 식량을 조달하 러 마을에 들르는 것 이외에는 사람이 사는 곳은 들르지 않았다. 카일은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가끔 씩 흥분해서 주먹을 쥐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는 것이 엘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엘란이 보기에 대 단히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궁금해진 엘란이 물으면 카일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길을 가는 도 중에 엘란은 카일에게 수련하면서 느꼈던 의문을 물었다. 카일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엘란은 카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카일은 속이 끓어 올랐다. 이 녀석은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자 질투 가 불타올랐다. 카일은 엘란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몰랐다. 그저 재능을 타고 났다고만 생각했다. 카일 이 대답을 못하자 엘란은 질문을 그만 두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엘란은 카일의 불편한 심사를 눈치채자 같이 여행하기가 곤혹스러웠다. 대화는 점점 줄어들어서, 말 한 마디 안하는 날도 있었 다. 침묵속에서 계속된 여행은 엘란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노숙에는 점차 익숙해 졌지만 정신적으로 는 더욱 더 피곤해 졌다. 엘란은 여행이 어서 끝나기를 빌었다. 카일이 원하는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달성되면 떠나기로 마음을 굳쳤다. 엘란은 일이 잘되기를 빌었고 자신이 도움이 되기를 소망했다. 이렇 게라도 신세를 갚으면 부담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이미 카일을 떠났다. 카일과의 마지막 밤 도 생각이 났다. 엘란은 안 좋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엘란은 밤마다 기원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다음날도 강행군이었다. 엘란은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아침마다 수련을 했다. 마나축적을 하고 운용을 하면 피곤이 풀리고 힘이 났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하루라도 마나수련을 건너뛰면 몸이 찌뿌둥해 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말도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되었다. 엄리처지방에 도착한 것은 말을 달린지 두달만의 일이었다. 엄리처지방은 엘리오트와 피요르드의 접경지역으로 피레넨산맥이 자연스럽게 국경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지방이다. 동부대로는 피레넨산맥에서 끝이났다. 도시로 들어가 말을 팔아 식량과 물품을 구입한 일행은 바로 피 레넨산맥으로 들어섰다. 목표가 산맥의 어디인 모양이다. 겨울철의 산은 낮이 짧았다. 봄이 다가오고 있 었지만 해는 금방 졌다. 피레넨산맥은 밖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산 위에 산이 있고 골 아 래 골이 있었다. 중첩된 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히 우거져 하늘까지 닿을 듯했고, 들어오는 빛은 나무들이 모두 먹어치웠다. 이 산맥에는 고대 용신전쟁때 드래곤들이 몰살한 지역이라는 전설이 내려오 고 있었다. 가장 높은 주봉 카르자나는 드래곤로드 카르자나의 시체라고 전해졌다. 카르자나가 그 거대 한 몸을 바닥에 뉘었을 때 하늘에서는 별이 떨어져 내렸고 삼일동안 피비가 뿌렸다고 했다. 그외 산들 도 모두 드래곤들의 시체라 했다. 피레넨산맥은 신의 힘에 맞선 용들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곳으로 알려졌고, 그 당시 삼일 밤낮을 벌겋게 물들였다고 전설은 노래했다.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드래곤들의 고통에 찬 비명은 지옥의 유부까지 들렸다고 했다. 흐르는 피가 강물이 되었고 살은 썩어서 몬스터가 되었다는 전설은 음유시인들이 즐겨 노래하는 소재였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보았 다. 드래곤들이 강대하다고 하나 감히 신들에게 대항할 만큼의 힘이 있다라고는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란은 피레넨산맥의 위용에 압도당했다. 위대한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고생하며 달 려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산맥은 아름다웠다. 엘란은 잠을 자기 전에 마나수련을 했다. 피 레넨산맥은 특히 공기가 맑고 마나가 많았다. 정말 드래곤들의 마지막 숨결이 닿아 있는 곳일지도 모른 다. 엘란은 차분한 마음으로 호흡했다. 깊고 길게 마나를 마시고 가늘고 짧게 탁한 기운을 내 뱉았다. 마나홀이 뜨거워지며 충만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다시 뿌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보르노스시 이후에 처음 으로 찾아오는 감각이었다. 이번에는 호흡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수련했다. 어느 순간 감각이 몸밖으로 확장을 시작했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들이 느껴지고 몸을 살랑이는 바람과 나무의 숨소리가 들렸다. 카일의 고른 호흡도 들렸고,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노래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기듯 맡겼다. 엘란의 정신은 드높은 창공을 누볐다. 바람의 정령들이 손짓을 한다. 정령과 함께 엘란 은 날아다녔다. 정령들은 엘란을 간지럽히기도 하고 공중의 띄우기도 했다. 엘란은 즐거운 마음에 공중 에서 제비처럼 돌았다. "콜록,콜록!" 카일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요새 안색이 안 좋더니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그 바람에 엘란은 정신이 들 었다. 엘란은 몰랐지만 중요한 기회가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왔다 사라졌다. 카일이 기침만 안했어도 더 높은 성취를 얻었으리라. 자연에 감탄하는 마음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산맥이 심어준 호연지기 가 엘란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고 있었다. 그 동안의 끈질긴 노력도 밑받침이 되었다. 그 동안의 노력이 없었다면 새로운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서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수련을 한 모양이다. 엘란은 몸을 점검하다가 깜짝 놀랐다. 마나홀이 두배는 커져 있었고 마나도 가득차 있었다. 하루만에 마 나량이 두배도 넘게 늘었다. 다시한번 마나축적을 했다. 두배를 넘어선 단계에서도 마나가 계속 쌓였다. 주변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면서 엘란의 몸으로 빨려들었다. 계속 빨려들던 마나가 잠시 후 엘란의 몸 밖 으로 분수처럼 뿜어졌다. 엘란은 마나축적을 멈추었다. 마나는 어제에 비해 네배는 늘어나 있었다. 엘란 은 자기가 한 단계를 넘어섰다고 느꼈다. 급격한 마나의 요동에 카일은 잠에서 깨어났다. 카일은 엘란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더니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심사가 복잡한 모양이다. 눈가에 살기가 맺혔 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엘란은 카일이 항상 열망하던 경지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질투와 살기가 가 슴속에서 용솟음쳤다. 참을 수 없는 살의가 가슴을 달궜다. 엘란은 수련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낌새 를 느꼈다. 그러나, 무시해 버렸다. 카일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일은 엘란곁에 남은 유일한 친인이다. 카일의 이상한 낌새에도 엘란은 수련을 계속했다. 마나를 끌어올려서 전신으로 운용을 했다. 마나는 성난 망아지처럼 개척된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거침없이 내달리던 마 나는 가슴에서 막혔다. 가슴에서 막힌 마나는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마구 날뛰던 마나는 어느 순간 막힌 둑이 터지듯 길을 뚫었다. 엘란은 희열감에 몸을 떨었다. 거침없이 길을 뚫던 마나는 인중에서 힘 이 다했다. 마나를 회수한 엘란은 이번에는 뒤로 마나를 보냈다. 다시 힘을 얻은 마나가 날뛰었다. 한참 을 더 운용해서 뒤통수까지 길을 뚫었다. 나머지는 아무리해도 뚫리지 않았다. 어질어질한게 머리가 터 질 것 같아 거기에서 운용을 멈추었다. 엘란은 새로운 실프를 불렀다. 실프 다섯, 샐라멘더 셋과 계약을 했다. 땅의 정령과도 계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카일이 볼일보고 뒤를 안 딱은 것 같은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자." 카일이 냉랭하게 말했다. 말에서 찬바람이 풀풀 날렸다. 엘란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카일을 따랐다. 정신없이 수련에 몰두한 사이 하루가 더 지나 있었다. 카일은 웬지 서두르는 것 같았다.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자 환한 빈터가 나타났다. 빈터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쌓여 있었다. 카일은 빈터를 가로지르고 나아가 한 바위 앞에 멈추었다. 몇 번 와보기라도 한 것처럼 거 침없는 행동이다. 바위는 카일의 키보다 약간 더 컸다. 카일은 품에서 양피지 조각을 꺼내 이리저리 살 펴보더니 바위를 군데군데 만졌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엘란의 눈이 반짝였다. '저, 양피지는 우리가 헤어지던 밤에 몰래 보던 그 양피지네.' 엘란으로서는 그날 밤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 낡아서 하늘거리는 양피지는 그때의 양피지가 분명 했다. 그그그긍!! 별안간 바위가 옆으로 밀려났다. 엘란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바위가 밀려나리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 었다. '어떻게 만든거지?' 엘란은 신기한 마음이 들어 바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갈색의 바위는 산에서 자 주 보이는 평범한 것으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기긱!! 바위가 열리다가 멈추었다. 겨우 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생겼다. '열리다 만거야 원래 이만큼만 열리게 된거야.' 엘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일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엘란도 얼른 따라 들어갔다. 안은 캄캄했다. "라이트." 카일이 마법을 시전했다. 밝은 빛덩어리가 앞을 비추었다. 안을 둘러보자 장방형 모양의 석실이 보였다. 석실의 안쪽에는 아치형의 입구가 보였는데 위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자 어린애 낙 서같은 글이 써 있었다. 글을 잘 못쓰는 엘란이 보기에도 대단한 악필이었다. <들어오면 죽는다!!> " ." 엘란은 황당해져서 멍하니 입구를 보았다. 무슨 대단한 문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단 순했다. 글씨체나 내용이나 열살먹은 어린이가 쓴 글 같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글쓴이의 의사가 확실히 전해지는 말이기는 했다. 카일은 동요가 전혀 없었다. 오직 가벼운 흥분만이 느껴졌다. 수 년간의 노고 를 보상받는다고 생각하니 기쁜 마음에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앞장서라." 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엘란은 내키지 않았지만 앞장섰다. 앞장을 서자니 유치한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주변은 카일이 시전한 마법으로 밝았지만 안 쪽은 지옥의 입구처럼 컴컴했다. "실프." 엘란은 실프 다섯을 불러 몸을 보호하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바닥에는 자갈들이 박혀 있어서 걸 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을 찔렀다. 한발 두발 걸을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빨리 가라!" 엘란의 조심스런 발걸음에 답답해진 카일이 재촉을 했다. 파파팟.....!! 갑자기 주변에서 표창이 벌떼처럼 날아들었다. 엘란은 실프로 베리어를 쳤다. 표창은 실프를 뚫지 못하 고 튕겨져 나가 발치에 수북히 쌓였다. 잠시후 표창의 비가 그쳤다. 엘란은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유치한 경고 뒤에 흉험한 위험이 따랐다. 바닥에 깔린 자갈과 기관이 연결된 모양이었다. 바닥을 자세히 살펴 봐도 어떤 것이 기관을 발동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자 멀리 떨어져서 앞을 살 피고 있는 카일이 보였다. 소리를 들은 순간 뒤로 몸을 뺀 모양이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보자 울컥 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피터가 느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멀 찍이 떨어진 카일이 재촉하듯 손짓을 보내자 엘란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슈슉...!! 표창뒤에는 화살이었다. 엘란은 실프로 몸을 보호하면서 황급히 달렸다. 덜컹! 오른발로 바닥을 박차는데 갑자기 밑이 꺼졌다. "헉! 실프." 엘란은 찬바람을 들이키며 다급하게 실프를 불렀다. 실프 둘이 나타나 밑을 받쳤다. 실프를 부려서 몸을 띄운 엘란은 함정을 지나쳤다. 함정을 지나며 푹 꺼진 바닥을 슬쩍 쳐다보니 날카로운 칼 날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모양새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엘란이 파해한 함정을 카일이 유유히 따랐다. 흡사 유람이라도 나온 것 같은 편안한 모양새였다. 한 번 발동된 기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표 창이나 화살은 처음 발사한 것이 전부인 모양이었다. 통로에서의 마지막 함정은 화염이었다. 별안간 천 장에서 쏟아진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화끈거렸다. 머리카락이 그을려 꼬불꼬불해 졌다. 실프로 화염을 밀어내면서 운디네를 소환해서 열기를 식혔다. 통로가 끝나자 다시 장방형의 석실이 나타났다. 이번 석 실은 상당히 넓었다. 엘란은 무슨 또 다른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위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잔뜩 긴장한 채 석실에 들어서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 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스톤골렘 다섯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3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 는 거대한 골뎀이 머리통 두배는 될만한 주먹을 휘둘렀다. 휘잉!! 엄청난 풍압과 함께 주먹이 날라들었다. 머리카락은 공중으로 산발하고 옷자락은 거칠게 나부꼈다. 엘란 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계약한 모든 실프를 소환했다. 실프다섯은 엘란주위에 베리어를 쳤고 나머지 다 섯은 골렘에게 날아들었다. 실프 다섯이 골렘의 다리밑을 교묘히 파고 들어 오른발을 강타했다. 쿵!! 다리를 가격당한 골렘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네 대는 쓰러졌지만 한 대는 실프의 공격을 뚫고 다 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엄청난 힘이었다. 한 대만 맞았도 온 몸이 가루가 될 것 같았다. 펑! 골렘의 주먹이 베리어를 갈기자 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뒤로 죽 밀려났다. 베리어 덕분에 큰 타격 을 입지는 않았다. 엘란은 자신을 보호하던 실프 다섯을 모두 골렘에게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몸이 지 치는 자신이 불리할 게 뻔했다. 힘이 넘치는 지금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베리어가 사라진 지금 얻 어맞게 된다면 뼈도 못 추리게 될 것이다. 퍼펑!! 자신을 가격했던 골렘이 실프들에게 얻어 맞고 뒹굴었다. 바닥에 나뒹굴며 흩어졌던 돌들이 금세 모였 다. 엘란은 골렘 한 대당 실프 둘을 보냈다. 하나는 골렘이 움직이지 못하게 묶었고 하나는 골렘의 전신 을 후려쳤다. 핵이 되는 돌을 파괴해야만 된다. 엘란이 실프 열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은 오늘 아침의 일 이어서 능숙하게 다루기가 힘이 들었다. 게다가 실전의 경험이 없어서 마나소모도 심했고 체력안배에도 미흡한 점이 많았다. 계속해서 두들겨도 별 성과는 보이지 않고 골렘들이 계속 버둥거리자 진이 빠져서 점점 지쳐갔다. "도와줘요." 엘란은 카일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카일이 나서 준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카일이 석 실로 뛰어들었다. 공을 물러 달려가는 개처럼 민첩하게 뛰어서는 엘란과 골렘을 지나쳐 석실깊숙이 들 어갔다. " ." 카일이 뛰어들자 안도하던 엘란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그그긍!! 카일이 안쪽 벽을 이리저리 만지다 석실의 안 쪽이 열리더니 카일의 몸이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그긍! 문이 다시 닫혔다. "같이가요." 엘란이 다급한 외침이 석실안은 웅웅 울렸다. "잘하고 있는데 왜그래 능력껏 골렘을 파괴해봐." 안 쪽에서 카일이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배배꼬인 말투였다. "도대체 왜 이래요?" 엘란은 다급했다. 골렘이 버둥거릴수록 마나가 급속도로 고갈되었다. "원래 니 용도가 이런거야!" 카일은 차가운 목소리가 정수리로 떨어지며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런데 이용하려고 날 가르쳤군요."힘없는 목소리로 엘란이 말했다. "혼자서 함정을 파괴하기는 무리라서 말이야. 대단했어. 엘란! 내가 가르치기는 잘 가르쳤지. 청출어람이 라더니 니 성취가 그 정도에 이를 줄이야. 30이 넘어서는 나도 하급정령익스퍼터에서 허덕거리는데 16 살에 중급정령사에 들어서다니." 확실히 엘란은 오늘 아침 중급의 벽을 넘었다. 이 벽을 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게 현실 이었다. 카일이 질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정을 갖고 정식으로 제자를 삼았다면 기쁘게 축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일에게 엘란은 단순한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다. 엘란의 성취는 오히려 분노만 자극했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 멈추었으면 이런 배신감 없이 죽었을 것 아냐. 내 실체를 보여주는 것도 유쾌한건 아니거든. 하긴 벌써 죽었으면 나 혼자 힘으로 함정 통과 하기는 힘들었겠지. 특히 마지막의 골렘 다섯 은 예상밖이야." "제발, 같이 골렘을 파괴해요.... 둘이 힘을 합치면 쉽게 이길 수 있어요. 살려줘요 카일!" 엘란은 간절하 게 말했다. 이런 컴컴한 석실에서 몸이 박살나서 죽기는 싫었다. 이렇게 개죽음하려고 매일 밤낮 뼈를 깍는 고련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하자 생존의 욕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살려주면 귀찮잖아,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내가 곤란해지지. 게다가 다음에 니가 어떻게 나 올지도 모르잖아. 니가 보물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 너하고 싸우면 내가 질텐데, 질투도 나고 말이야. 잡소리 그만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지 그래. 니가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도 없잖아. 안 그래?" "대단하군요, 어떻게 오년을 기다렸어요?" 카일과 만난지 어느새 오년이 지나 있었다. "죽는 마당에 뜬금없는 질문이군. 뭐 대답해주지. 이 양피지에 기록된 게 수수께끼와 암호투성이라서 말 이지 애 좀 먹었어." "들어갈때는 그렇다고 치고 나갈때는 어쩔거죠?" 엘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필요성을 어떻게든 납득시켜야 카일이 구해줄 것 같았다. "안에 골렘을 멈추게하는 해제 주문이 있어, 정령을 부리면서 말까지 하는걸 보니 확실히 중급정령사에 들어섰군 그래. 그럼, 이만 안녕!" "카일." 엘란이 절규가 석실안을 메아리 쳤다. 엘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채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골렘을 후려치고 있었다. 쩍! 골렘한대가 부서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수십번의 격타 끝에 핵이 파괴된 것이다. 운 좋게 부서진 골렘 은 발바닥에 핵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엘란이 다른 골렘의 발바닥을 후려쳤지만 핵이 아니었다. 저 마다 다른 위치에 핵이 있는 모양이다. 골렘을 제작하는 마법사들이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 핵을 교묘히 숨기는 방법이니 골렘마다 핵의 위치가 다른 것은 당연했다. 마나가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예전 다른넨영지에서 땡볕을 맞으며 벽돌을 나르던 때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린 엘란은 샐러맨더 다섯을 소환했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 려는 것이다. 팟! 코에서 피가 터졌다. 분수처럼 뿜어진 피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이얍." 거센 기합과 함께 모든 정령들이 사방에서 골렘을 후려졌다. 쾅쾅쾅!!!!!!!!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굉음이 석실안에 울려 퍼졌다. 수많은 돌들이 허공 으로 비산했다. 엘란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잔뜩 긴장된 시선으로 돌무더기를 주시했다. 일초 이초 시간은 느릿느릿 흘 렀다. 또르륵! 굵은 땀방울이 미간과 콧날을 따라 내려오다 콧방울에 걸려서 달랑거렸다. "헉헉!" 폐가 답답해지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우르르! 툭!툭! 뭉쳐있던 돌무더기들이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안도감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돌이 모 이더니 골렘 하나가 일어섰다. 천천히 일어서는 골렘은 타격을 입었는지 팔이 하나뿐이다. 쿵쿵! 골렘이 서서히 다가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옮기는 것이 사신의 발걸음 같았다. 엘란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마나를 끌어올렸지만 마나홀이 텅 빈 듯 했다. 공허감만이 마 나홀을 맴돌았다. 휭!! 가까이 다가온 골렘이 주먹을 휘둘렀다. 엘란의 머리가 박살날 순간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으면서 쓰러졌다. 엘란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골렘의 주먹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먹을 회수한 골렘은 발을 들어 올렸다. 골렘의 발이 엘란의 머리를 노리고 천천히 내려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에 퍼득 정신이 들었다. 발을 치켜들었던 골렘이 뒤로 넘어져 나뒹굴었다. 멀쩡해 보 였지만 핵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골렘을 보며 안도감이 든 엘란은 다시 정신을 놓았 다. 엘란은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 참 동안을 누워있던 엘란이 눈을 떴다. 차가운 바 닥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잤는지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앞으로 넘어졌으면 경을 칠뻔 했네.' 골렘의 잔해를 슬쩍 본 엘란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물통을 커내 물을 들이카자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물통을 옆구리에 끼고 고개를 돌려 골렘을 자세히 살펴보았 다. 핵이 파괴된 골렘은 평범한 돌무더기였다.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은 후 마 나를 끌어올렸다. 저 멀리 달아난 것 같던 힘이 서서히 돌아왔다. "이런 멍청한!" 엘란은 자신의 손으로 꿀밤을 먹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골렘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자기가 보 물을 찾으려는 이 위험한 곳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골렘들이 산밑까지 쫓아 올리도 없지 않은가? 그 냥 뒤돌아서서 도망치면 되었다. 쓸데없이 목숨을 걸고 싸운 꼴이었다. 엘란은 한 참 동안 머리를 때렸 다. 살아남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개죽음 할 뻔한 것이다.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자 주위는 밝아졌지만 마음은 더욱 어두워 졌다. 심각한 얼굴로 카일이 들어간 입구를 살 펴보던 엘란은 생각에 잠겼다. '들어가서 카일과 만날까? 만난후 어떻게 하지? 싸워야 되나? 카일은 어떻게 나올까?' 안색을 찌푸린 채 생각에 골몰했다. 지금 엘란의 표정은 꼭 더러운 냄새를 맡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보물을 찾아 여기로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돌아가자.' 엘란은 그냥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카일이 자기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 했지만 자기의 목숨을 구해주 고 가르침을 베푼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은혜와 원한을 상쇄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냥 돌아가자. 카일과 나는 이제 남남이다.' 엘란은 뒤돌아 서서 나왔다.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가쁜했다. 나오는 길에 위험은 전혀 없었다. 함정 은 들어올 때 모두 해체되었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컴컴한 곳에서 갑자기 밝 은 곳으로 나오자 눈이 부셔서 한 참을 껌뻑거려야 했다. 우뚝! 엘란의 발걸음이 멎었다. '왜 아직 카일이 나오지 않지?' 태양의 위치를 보건데 최소한 하루는 지났다. 탈진해서 쓰러진 후 이삼일의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나오지는 않았을 거야. 나왔다면 날 그냥 뒀을리는 없을테니까.' 안에서 카일은 엘란을 죽이기로 작심한 듯 보였다. 나오다가 쓰러진 엘란을 봤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 을 것이 분명했다. 불현듯 호기심이 인 엘란은 빈터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위 뒤에 숨었다. 카일이 아 직도 안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이유는 혹시라도 카일이 나오면 마주치기가 싫 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앉아서 산아래 마을에서 산 육포를 씹으며 하루종일 기다렸지만 카일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식량보따리는 엘란이 등에 메고 다녔다. 당연히 카일의 수중에 먹을 것은 없었다. '안에 먹을 것도 없을텐데.' 뚫어지게 입구를 주시하던 엘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함정과 골렘의 잔해를 지나쳐 카 일이 들어간 석문 앞에 섰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문에는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화강암은 단단해서 이렇게 매끄러운 구멍을 뚫을려면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흠짓! 엘란은 구멍에다 손가락을 넣어보려다 멈추었다. 이때까지의 흉험한 기관을 미루어 짐작컨대 무슨 함정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조심해야지 조심! 구멍 안에 위험한 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변을 둘러보다 알맞은 걸 찾을 수 없자 밖으로 나왔다. '뭐 마려운 똥개처럼 왔다 갔다 하는구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나뭇가지를 모아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앞에 다시 서서 조용히 실프 를 불렀다. 소녀의 모양을 한 실프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엘란은 자신의 주위에다 실프로 베리어를 쳤 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나뭇가지 하나를 구멍에 넣어보았다. 삭둑! 나무가지가 매끄럽게 잘려 나갔다. 손가락을 넣었다간 금새 잘려 나갔을 것이다. '휴! 잘못했으면 구손이 될 뻔 했네.' 엘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옆의 구멍에다 나뭇가지를 넣었다. 화르륵! 머리위에서 화염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쏟아지던 화염은 실프들에 막혀 주변으로 튀었다. 사방 으로 불꽃이 튀면서 기이한 문양을 이루었다. 아이들이 봤으면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으리라. 다른 구멍 을 찌르자 곳곳에서 암기가 튀어 나왔다. 엘란은 여러 가지 위험을 감수하며 여러군데를 찔러 보았다. 그그긍!!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밀어 들여다 본 석문의 안은 컴컴했다. 왠지 소름 이 오싹 끼쳤다. "어!" 그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들어가다 멈춰 섰다. 안에서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엘란은 책을 보 고 라이트마법과 슬립마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수준이 낮았다. 지금시전하고 있는 라이트마법으로는 안 을 완전히 밝힐 수 없었다. '안에 함정이라도 있나' 엘란은 카일이 이제 다 왔다고 방심하다 당했다고 생각했다. 피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카일이라고 생각 되었다. 카일의 실력을 감안했을 때 함부로 들어가기 곤란했다. 호기심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러면 되겠군.' 엘란은 샐라멘더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명령하자 샐라멘더가 안으로 들어갔다. 불의 정령이 들어가자 안의 어둠이 서서히 물러났다. 카 일은 석실의 중앙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엘란은 실프의 호위를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사 방의 벽과 바닥에는 회색의 벽돌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잔뜩 긴장했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카일 의 몸에는 다섯대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박혔는지 완전히 관통하고 있었다. 아름답던 카 일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흡사 지옥 의 사자라도 본 것 같았다. 다시는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짓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충 사고가 생겼다고 예감은 했지만 죽어서 나뒹군 모습을 보게 되자 기분이 묘해졌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잘 죽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순된 감정이 엘란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카 일의 사인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 '왜 죽었지' 아무리 둘러봐도 위험한 것은 없었다. 바닥을 힘껏 굴러보기도 하고 벽을 두들겨 보기도 했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와 카일의 몸을 관통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위험 이 없는 것 같자 정령들을 돌려보냈다. 다시 천천히 둘러 본 안은 네모반듯한 석실이었다. 벽은 수수한 벽돌로 이루어졌고 중앙에는 일미터정도의 단이 있고, 단 위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관이 하나 있었다. 관 뚜껑은 산산이 깨어져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카일이 한 짓 같았다. 그 외에는 탁자 하나가 다였다. 엘 란은 이상한 부조화를 느꼈다. 분명히 이상한 게 있는데 머리속에서 맴돌며 떠오르지 않았다. 시체를 한 번보고 관을 한 번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뭐지? 이상한 게 뭐지?' 답답한 마음에 주변을 서성거렸다.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두들기고 바닥을 굴러보아도 이상한 점이 떠 오르지 않았다. "아-!! 보물이 없다!" 엘란은 탄성을 터트렸다. 드디어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속이 후련해졌다. 십년 묵 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보물이 없었던 것이다. 카일이 아무런 언급 도 주지 않았지만 엘란은 이 안에 보물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당연히 보물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여기 들어온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장소를 만든 사람도 수많은 함정과 골렘으로 여길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엘란은 카일에게 속아 목숨까지 걸지 않았던가? '누가 털어갔나?' 엘란은 골똘히 생각했다. 누가 먼저 다녀갔을 수도 있었다. '아니야!' 엘란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먼저 다녀갔다면 함정과 골렘은 파괴되었어야 되잖아.' 엘란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겨우 관하나 지키자고 여기를 만든 건 아니겠지.' 그러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엘란 은 무엇이든지 단서를 찾고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엘란은 카일에게 다가갔다. 카일을 자세히 보자 발치에 떨어져 있는 종이가 한 장 보였다. 아까는 카일의 시체에 놀라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집어들어 보니 어린아이 같은 글씨체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석실 입구의 경고문구와 글 씨체가 비슷했다. <나는 가스통이다.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부였지. 지도를 구해서 여기에 들어왔다면 이미 알고 있겠군. 일단 축하한다! 수수께끼를 풀었나보군. 나보다 똑똑한 모양이야. 그런데, 이걸 어쩌나. 뭘 기대하고 들 어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보물은 없어! 아무것도 없지! 나는 평생을 살면서 도둑놈을 경멸했다. 고대유적 탐사니 신전발굴이니 고분발굴이니 고상하게 말하지만 결국은 도둑질 아닌가? 아무리 둘러대도 자기욕 심 때문에 하는 짓거리지. 도둑질을 하면서 그따위 이유를 붙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동이야. 무덤에 돈 쳐바르는 것도 웃기기는 매한가지지만. 죽으면 끝이야. 한 평생 잘 살았으면 됐지 죽은 후 까 지 잘살려고 지랄떠는 것도 한심한 짓이다. 보물을 묻고 어떤 미친놈들은 순장까지 하더군. 그런 놈들은 똥물에 튀겨서 한 번 더 죽어야돼. 넌 나한테 따지고 싶겠지. 그럼 넌 왜 이런 무덤을 지었냐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돈을 쓰려고 만든 거 야. 이런 산속에 동굴을 찾고 수많은 기관장치와 함정을 만들고 골렘까지 세우려면 돈이 많이 들지. 돈 을 낭비하려고 만든 곳이 이곳이야. 난 자식이 없거든. 호적상 자식이야 있지만 친자식은 아니야. 부끄 럽지만 난 씨 없는 수박이거든.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지. 근데 자식은 15이나 돼. 이 얼마나 아이러닌 가? 셋째 마누라가 아들을 낳자 나머지들도 줄줄이 낳더군. 재산을 물려받으려는 속셈이겠지. 죄의 씨앗 을 안고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라니, 가관이었지. 자식 안 낳는 아내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했더니 안 낳는 여자가 없더군. 그래서 재산을 낭비했다. 물 쓰듯 썼지. 얼마나 많은지 쓰기도 힘들더군. 무수히 기 부했지. 신전도 세우고 고아원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마지막 남은 재산으로 이 무덤을 만들고 지도를 남겼다. 내 모든 재산을 남긴 곳이라는 유언과 함께. 아마 지도 차지하려고 피 터지게 싸웠을걸. 지도 차지한 놈도 수수께끼는 못 풀었을 거야. 모두들 지에미 닮아서 욕심은 많은데 머리는 비었거든. 내 자 식놈 중에(누구 새낀지는 모르겠다만) 여기 왔다면 사과하지. 여기 찾아올 놈이면 멍청이는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하지 "이놈아 부자가 되고 싶거든 일을 해라!!!" > "...." "하하하하..... " 엘란은 배를 잡고 웃었다. 요근래에 이렇게 통쾌하게 웃은 것은 처음이다. 아니 이때까지 살면서 처음이었다. 눈물이 나고 배까지 땡겨 왔다. 미친놈처럼 땅을 구르며 웃었다. 별로 웃을 일도 아 닌데 웃고 있었다. 웃고 있자니 괜히 서글퍼졌다. 한 참을 웃은 후 엘란은 일어났다. "당신도 참 잔인한 사람이군요. 부인에게나 자식에게나." "카일만 불쌍하군." 카일은 아무래도 이걸 읽고 흥분해서 가스통의 관에 달려들었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다. 카일이 얼마나 분노하고 황당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죽음으로 굳어진 카일의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허탈한데 카일이야 오죽했겠는가? 여길 찾아내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 노고가 안 봐도 눈에 선했 다. 관 안을 보니 백골이 한 구 놓여 있었다. 구멍도 뚫려 있는 것이 여기서 화살이 날라간 모양이었다. 관안에도 종이가 한 장 있었다. <화 난다고 남의 시체에 화풀이 하면 되나> " ." 멍하니 쪽지를 보던 엘란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가스통이란 사람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한 참을 멍 하니 서 있다 카일의 시체로 가서는 물끄러미 얼굴을 보았다. 죽어있는 카일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엘란은 카일에게 다가갔다. 내키지는 않지만 하는 수 없었다. 엘란은 빈털터리였다. 이때까지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카일이 떠나면서 줬던 돈은 예전에 모두 썼다. 정령사라고 공기만 먹고 살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 살려면 돈이 필요한 것이다. 엘란은 농사짓는 법도 모르고 옷을 지을 줄도 모른다. 평생 산에서 사냥으로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죽은 사람이 돈은 필요 없겠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카일의 품을 뒤졌다. 유리병이 하나 잡혔다. 꺼내보니 포션이었다. "준비많이 했네." 엘란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포션은 질에 따라 다르지만 싼 것도 5골덴은 줘야 한다.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죽었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속 뒤졌다. 4골덴 8실버가 나왔다. 무엇보다 중요 한 것은 정령술책이 나온 거였다. 엘란은 오랜 가뭄 뒤 비를 맞는 농부의 마음보다 기뻤다. 중급정령사 의 길에 접어든 엘란은 더 이상 배울 데가 없었다. 엘란은 카르자나산에서 중급정령사로 들어섰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카일이 예전에 준 책도 다 익혔고 주변에 가르침을 청할 데도 없었다. 이제 목마름을 해 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령술에 미련이 남은 카일이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몰래 훔쳐낸 책이다. 카 일은 불쌍하게도 수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기쁜 마음으로 책을 챙긴 엘란은 무덤을 나섰다. 힘차게 산을 내려가던 엘란의 발걸음이 무거워지더니 결국은 멈춰 섰다. '어디로 가지?' 엘란은 한동안 서있었다. 갈데가 없었다. 다르넨영지로 다시 가기는 싫었다. 싫은 기억이 가득한 곳이다. 세상천지에 반겨줄 사람이 없었고 이 넓은 대륙에서 혼자 따로 떨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외로움이 몰 려왔다. 뼈에 사무치도록 사람들이 그리웠다. 혼자 살던 게 몇 년이던가? 예상외로 카일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일과 여행을 하면서 마음으로는 거부하고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배신을 예 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의 배신에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이런 기분이 엘란 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엘란은 카일의 시체를 꺼내왔다. 나무를 쌓고 시체를 올린 다음 정령을 불러 불을 붙었다. 처음에는 매운 연기만 피우다가 시간이 지나자 기세 좋게 타올랐다. 고기 타는 냄새가 코 를 찔렀고 매캐한 연기에 눈이 매워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란은 가까이서 타는 모습을 지켜봤다. 웬지 눈물이 났다. '연기가 매워서 우는거야.' 엘란은 속으로 뇌까렸다. 완전히 태운 후 유골은 주머니에 담았다. 유골이 담긴 주머니를 가스통의 관안 에 같이 넣은 후 입구를 닫았다. 엘란은 입구의 위에다 글을 새겨 넣었다. 함정은 모두 해체됐지만 모르 는 일이다. 사람들이 들어와서 다칠 수도 있었다. <안에 보물 없음!> 엘란은 골렘의 잔해가 있는 곳에 거처를 만들었다. 여기서 수련을 계속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카르자 나산은 공기도 맑고 마나도 풍부했다. 근처에 성가시게 굴 사람도 없었다.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사는 게 껄끄럽게 느껴져서 여기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외로우면서도 함께 어울리기 싫은 이 중적인 감정이 엘란을 싸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엘란은 카일의 품에서 얻은 책을 펼쳤다. 책에는 중급 과 고급의 정령술이 서술되어 있었다. 저자는 카일의 스승 시드였다. 정령사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책이 었다. 사실은 카일이 훔쳐낸 책이었다. 보물을 찾아내면 피레넨산맥을 넘어 피요르드국으로 가서 살 생 각이었다. "실피드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주변의 공기가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일렁거리더니 투명한 여인이 나타났다. 실프와 다르게 성숙한 처 녀의 모습이었다. 엘란은 실피드가 자신에게 미소짓는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카일의 미소만 큼이나. "실피드여 태초의 맹약에 따라 나와 계약을 해다오?" 실피드는 조용히 다가오자 주변이 울렁거렸다. 하늘거리는 투명커튼이 쳐진 것 같았다. 실피드는 엘란의 이마에 조용히 입맞추고는 사라졌다. 실피드를 하나 더 소환해서 계약을 맺었다. 지금으로서는 둘이 한 계였다. 불의 정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은 중급정령비기너의 단계인 것이다. "실피드." 엘란은 방금 계약한 정령들을 소환했다. 실피드 둘이 나타나 엘란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실피드가 쏟아 져 내리는 태양빛을 사방으로 산란시키자 비온 뒤의 무지개처럼 색색의 빛깔들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정령들을 양쪽에 세워 부축하게 하고는 말했다. "위로 날아가요." 휭!! 강력한 바람과 함께 몸이 위로 떠올랐다. 땅이 멀어지자 기분이 좋아진 엘란은 더욱 더 속도를 빨리 했 다. 공터를 한 바퀴 돌던 엘란은 앞으로 쭉 날아갔다. "어어어!" 쾅!! 나무로 돌진한 엘란은 그대로 충돌했다. 아직 조종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같이 움직이자니 마나의 소비 가 극심했다. 실피드는 돌아가 버렸다. 마나가 끊긴 것이다. 이마로 나무를 받는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하며 고개가 격하게 꺽여 졌다. 잘못하면 목이 부러질 뻔했다. 엘란은 사지를 허우적거리면서 떨어져 내 렸다. 실피드를 잡고 날 때보다 두배는 빠른 속도였다. "실프!" 엘란은 황망간에 실프의 소환을 시도했다. 엉덩이가 땅과 조우할 그 순간에 실프가 그 사이에 나타났다. 실프가 엉덩이를 받치는 것과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다. 쿵! 엘란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엉덩이가 얼얼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떨어져 나갈 것 같더니 이내 자기 살이 아닌 것처럼 감각이 없어졌다. 실프를 부르지 않았다면 엉덩이가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골반이 부 서지는 것은 물론 척추까지 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격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동안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실프가 충격완화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일어나려던 엘란은 그대로 누워버렸다. 흙냄새 풀냄새 나무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앞으로 다 잘될 거야."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날부터 주변탄색을 시작했다.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둬야 했다. 주변에 사람이 사는 곳은 없었다. 가끔씩 사냥꾼이나 산을 넘는 보따리장사꾼이 보일 뿐이었다. 엘란은 산에 머 물면서 실피드의 조종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노력의 대가는 분명해서 점점 능숙해져 갔다. 자신감이 붙은 엘란은 불의 중급정령 카사를 불러 보기로 했다. 엘란은 샐라멘더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바싹 마 른 장작은 금세 타올랐다. 엘란은 불에 시선을 집중했다. 탁탁! 불은 가끔씩 불티를 날리면서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카사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일순간 불꽃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엘란의 머리 위까지 치솟아 오른 불꽃 속에서 불의 정령이 날아올랐 다. 독수리모양을 한 중급정령 카사였다. 날개르 쫙 펼친 카사는 족히 이미터는 되어 보였다. 카사가 펼 친 날개에는 깃털모양의 불꽃이 타올랐다. 카사는 엘란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후끈한 열기가 뜨겁게 느 껴졌다. "카사여 태초의 맹약에 따라 나와 계약을 해다오." 불의 독수리가 엘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열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전혀 뜨겁지 않았다. 카사는 엘란의 어깨를 박차고 올라 불 속으로 들어갔다. 계약은 체결되었다. "카사!" 불의 정령이 다시 나타났다. 카사는 엘란의 주위를 맴돌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칠수록 불꽃은 더 욱 거세졌다. 엘란은 실피드도 불렀다. 실피드를 잡고 엘란은 카사의 뒤를 따라 날았다. 엉성한 솜씨로 카사의 뒤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엘란의 마음은 후련했다. 유난히도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 5장.천하제일 마법사. "롬바르디시 앞으로 포강은 흐르고 연인들의 사랑도 흐른다. 강은 달빛에 빛나고 연인들은 어두운 곳을 찾아 떠나네............" 한 청년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머리는 덥수룩했고 검은 눈동자는 신비한 빛을 품고 반짝거렸다. 눈섭은 짙었고 코는 오똑했다. 볼은 황금색으로 광택이 흘렀다. 다 떨어진 면바 지와 셔츠를 걸쳤고 양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오른쪽 신은 구멍이 나서 발가락이 나올 지경 이었다. 키는 작아서 170이 채 안될 것 같았다. 그는 산을 내려오는 엘란이었다. 어느새 건장한 청년으 로 자라있었다. 산을 다 내려온 엘란은 산을 향해 돌아섰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서 입 옆에다 대더니 소 리를 질렀다. "잘있어! 그 동안 고마웠다! 나중에 다시 올게!" 카르자나 산에게 작별인사를 한 엘란은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은 점점 느려지더니 나중에는 산책 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려졌다.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움직였다. 수련도 하고 사냥 도 하면서. 가끔씩은 도시에도 들러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광장에 앉아 있다보면 수많은 사람 들이 지나갔다. 연인들도 있었고 노점상들도 있었다. 젊음을 주체못한 청년들도 건들거리면서 돌아다녔 고 팔자 좋은 아이들은 모여서 놀았다. 대부분은 삶에 찌든 사람들이었다. 힘겨운 표정으로 지나가는 농 노와 하인들도 많았고 구걸하는 고아나 장애인도 많았다. 평민들도 힘겨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멋지 게 차려입은 기사나 병사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도시에 들를 때는 여관에서 하룻밤 묵고 갔다. 푹신한 침대는 그만이었다. 일단 여행의 목표는 롬바르드시였다. 천천히 세상 구경을 하고 다르넨으로 향할 생 각이었다. 엘란은 파보를 잊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엘란은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산길의 주변에는 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 내고 있었다. 그는 웬지 센치한 감정이 들어서 꽃을 꺽어 향기를 맡아보기도 했다. 앵! "이런!" 엘란은 기겁을 했다. 아무렇게나 꺽어든 꽃속에서 벌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하하하!" "껄껄걸! 사내자식이 꿀불견이구만. 꽃을 꺽어서 향기를 맡는 것하며, 그깟 조그만 벌이 무서워서 계집 애처럼 흐들갑 떠는 꼴이라니." 산길 주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사내들이 엘란을 비웃으며 한 마디씩 했다. 엘란의 얼굴에 귀찮게 되었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저마다 도끼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무를 하러 온 사람인줄 알았더니 분 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말로만 듣던 산적인 모양이다. 어떻게 하나 생각을 굴리는 엘란의 모습을 겁에 질린 것으로 판단한 산적들이 시시덕거렸다. "이봐! 너무 겁먹지마! 가진 것만 내놓으면 곱게 보내 줄 테니까." 계집애 같다고 비웃던 산적이 크게 인심쓴다는 투로 말했다. 왼쪽 눈은 칼이라도 맞았는지 시커먼 안대 로 가려져 있었고, 귀밑에서 시작된 구렛나루는 턱을 거쳐 반대편 귀까지 이어져 있었다. 얼굴의 사분의 삼정도는 털로 뒤덮혀 있었다. 털복숭이에 왼쪽 눈에는 검은 안대를 찬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엘란이 눈에는 이 털보가 두목으로 보였다. '이 녀석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겁을 먹고 도망가려나.' 두목이 상하면 겁을 먹고 도망칠 수도 있고, 부하들이 악에 받쳐서 더욱 사납게 덤벼들 수도 있었다. 엘 란이 판단을 못 내리고 주저하자 불쌍하게 보였는지 귀에 요란한 귀걸이를 단 계집애처럼 생긴 사내가 역성을 들어주었다. "두목! 꼴을 보아 하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것 같은데 그냥 보내 줍시다." 아닌게 아니라 엘란의 모습은 거지를 방불케 했다. 작아서 꽉 끼는 윗도리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 고, 면바지도 찢어지고 헤어진 것이 이십년은 족히 입은 것 같았는데 허리띠도 없어서 다 헤친 천으로 대충 묶어놓았다. 신발은 한 쪽이 구멍이 나서 엄지발가락이 밖으로 튀어나왔고, 울러 매고 있는 푸른색 배낭도 물이 빠져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겁집도 없이 옆구리에 달랑거리는 단검은 날이 빠져서 작은 톱 같아 보이는 데다 녹까지 쓸어 있었다. 게다가 중간에서 뚝 부러져 있었다. 털보는 엘란을 유심히 살 폈다. 수중에 돈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개신데 그냥 보낼 수야 있나!" "손님! 꼴을 보니 거지같은데 우리랑 식구가 되는 건 어때?" 귀걸이를 한 사내가 다정하게 권유를 해왔다. 살기 팍팍할 때는 산적으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저...산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요." "우리도 너같이 비실비실 한 놈 동료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털보가 빈정대듯이 말하자 주위에 편하게 앉아 있던 산적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럼, 그럼!" "저런 약골을 어디다 쓰겠어." "너 같은 놈은 돈을 싸가지고 와도 싫다." 자신이 싫다고 거절은 했지만 산적들이 쓸모 없는 놈이라고 하자 화도 나고 내가 그렇게 형편없이 보이 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엘란은 자신을 한 번 내려다 본 후 산적들을 살피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냥 보내주실래요, 제 꼴을 봐서 알겠지만 돈이라고는 먹고 죽을래도 없습니다." "에이! 첫 손님부터 재수없게......잠깐 기다려 다음 손님보고 수입이 짭잘하면 그냥 보내주고 아니면." 털보는 커다란 도끼를 들어 자신의 목에 대고 자르는 시늉을 냈다. 엘란은 이들과 싸우기도 싫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옆으로 비켜나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그 빛을 나누어주었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 꽃을 부드럽게 흔들 뿐 산길에는 개미새끼 한 마 리 없었다. 평온한 기운에 휩싸인 엘란은 어느새 바닥에 드러누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저 놈 보게, 살지 죽을지 모르는 놈이 편안하게 낮잠을 잔다." 손님이 없어서 슬슬 열이 받는데 엘란이 편안하게 낮잠에 빠지자 저 놈 때문에 재수가 없다는 생각에 살심이 솟구쳤다. "고마 죽여 버릴까?" 무료하던 산적들이 열렬하게 찬성하고 나섰다. "한 번에 죽이지 말고 사지를 토막내서 죽이는 건 어떨까요?" "아냐! 그 보다는 손목을 베어서 출혈과다로 죽이는게 훨씬 재미있어." 여기저기서 흉악한 의견들이 난무했다. 귀걸이를 단 산적이 말리려다 말았다. 이미 분위기는 달아올라서 자신이 말린다고 될 것이 아니었다. 좋은 수가 없나하고 이리저리 굴리던 귀걸이의 눈에 멀리서 올라오 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손님이 온다!" 귀걸이가 한 마디 외치자 분위기는 금새 가라앉았다. 산적들은 나름대로 질서도 있었고, 규율도 엄정했 다. 지금은 일할 때지 놀 때가 아닌 것이다. "이번에는 짭잘한 놈이 걸려야 할 텐데." 털보가 중얼거렸다. 엘란도 어느새 일어나 앉았다. 난무하는 살기와 흉악한 고함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쯤 잠든 귀에 별별 끔찍한 소리가 다 들렸었다. 살기가 어려워서 산적이 된 것뿐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판단은 여지없이 틀렸다. 처음 산적이 된 동기는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은 대 악당들 이었다. 엘란은 지금 산길을 올라오는 사람을 위해서 이들을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 겼다. 엘란이 자신들의 목숨을 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산적들은 저마다 희희덕거리기 바빴다. "예감이 좋아! 이번에 오는 놈은 돈이 좀 있겠어." "에이, 두목도 참, 아까 저 거지새끼 올라올 때도 그랬잖아요." "험험, 내가 그랬나." 산적들이 잡소리를 나누는 동안 말을 탄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봐라! 내 예감이 맞았지." 털보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산길을 올라오는 사람은 한 눈에 봐도 짭잘하게 보이긴 했다. 하얀 백마를 탄 흰 갑옷의 기사였다. 엘란이 보기에는 보통 기사가 아니었다. 이런 산적들은 무더기로 덤벼도 한 손 으로 눌러 버릴 정도의 기백이 보였다. "관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는 대단한 기사로 보여요." "요놈이 살려줬더니 별 소리를 다하네. 그냥 보내 줄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 손수 네 목을 따줄 테니." 털보가 엘란을 겁주는 동안 기사는 산적의 코앞에다 말을 멈추었다. 가까이서 본 기사의 모습은 더욱 눈부셨다. 보통 말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백마는 잡티하나 섞이지 않았다. 어깨는 두터운 근육이 감싸고 있었고, 종아리는 매끈하게 빠졌는데 발목은 튼튼하게 보였다. 말발굽도 넓적하고 큰 것이 보통말의 두 배는 넘어 보였다. 목은 길었는데 기다란 갈기가 시선을 모았다. 귀는 하늘을 향해 꽂꽂하게 섰고 코에 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목을 빳빳히 세우고 발을 높이 올려 걷는 것이 위풍당당했다. 말에 대해서 문 외한인 엘란의 눈에도 대단한 명마로 보였다. 말 등을 덮은 안장도 말에 못지 않게 훌륭해 보였다. 은으 로 만든 안장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안장이 말의 옆구리를 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기다 란 마상용 창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가사의 복장도 예사롭지 않았다. 가로 세로 5센지 정도의 작 은 금속조각을 일일이 꿰매서 하나로 연결한 갑옷은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모든 기사들이 욕심을 낼만큼 훌륭한 갑옷이었다. 은색으로 번들거리는 갑옷의 가슴부위에는 십자가를 지키는 독수리 가 그려져 있었다. "성기사 십니까?" 엘란이 질문을 던졌다. 십자가를 지키는 독수리문양은 바룬신을 섬기는 성기사들의 표식이었다. 언젠가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기사는 거지꼴을 한 청년이 바룬신의 성기사 표식을 알아보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 바룬신의 종이라네." "이 새끼가 온데를 다 끼네. 진작에 죽여버리는 건데." 엘란이 손님에게 말을 걸자 털보가 으르렁거렸다. 멀리서부터 이들의 대화를 들었던 기사가 얼굴을 찌 푸렸다. 낮잠을 자는데 앵앵거리며 나는 파리 때문에 성가시다는 표정 같았다. "산적질은 그만 하고, 신을 섬기는 것이 어떠냐? 회개를 하고 바룬을 섬기겠다면 내 수도원에 넣어주 마." "하하하!" "껄껄걸!" "어째 오늘은 정신병자만 걸리는 것 같은데." 산적들은 무슨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산적질을 하며 계속 살겠다면 그렇게 살아라. 바룬신을 섬기는 신자가 되라고 강요는 않겠다만 신을 비 웃는 짓은 당장 그만두어라." 성기사가 근엄하게 일갈했다. 기사의 얼굴에 살짝 살얼음이 끼는 것 같았다. 엘란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 고 눈치를 살폈다. "계속 비웃으면 어쩔 건데?" 털보가 도끼를 땅바닥에다 꽂아 놓고는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기사의 눈을 노려보았다. "신의 분노를 살 것이다." "카악! ?! 신을 팔면 내가 무서워서 그냥 보내 줄줄 알았어? 천만에, 난 그런 겁쟁이가 아니다. 신! 웃기 고 있네, 그런게 있을 턱이 없어." 털보는 누런 가래를 기사의 갑옷에다 뱉어내며 오만하게 지껄였다. "무신론자들인가 보군. 신을 믿으라는 강요는 않겠다. 한 가지 물어보자 혹시 하겐사형제가 어디에 있는 지 알고 있나?" 털보는 성기사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쓸데없는 질문이나 던지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개소리 하지 말고 가진 것 모두 놓고 꺼져버려." 털보는 신이 없다고 큰 소리 탕탕 쳤지만 신을 섬기는 기사를 죽이기는 께름직했다. 그래서 짐만 털고 목숨은 살려줄 생각이었다. "이 갑옷과 말, 무구는 모두 바룬신전의 소유이다. 내가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털보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살려 줄랬더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 구나. 애들아 쳐라!" "잠깐!" 기사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음성이 얼마나 우렁차던지 달려들던 산적들이 모두 멈추어 섰다. "그대들은 잘 생각해 보라. 바룬신을 섬기겠다면 내가 살길을 열어주겠다." "니미! 별 헛소리 다 듣겠네."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하하하! 바룬신을 믿을 바에야 지고를 믿겠다." 털보가 비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한 겹 서리가 내려 있던 기사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엘란은 그 표정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서리가 끼어 있던 얼굴보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 굴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당신들의 생각도 모두 같은가?" "두목과 우리는 일심동체다." "지고 만세!" 여러 산적들이 분분히 외치는 가운데 경망스러운 자는 만세까지 부르고 있었다. "악마의 추종자들에게 돌아갈 것은 죽음밖에 없다. 지옥에서 스스로의 삶을 반성해 보거라." 기사는 말에 앉은 채로 창을 꺼내 들었다. "죽여!" 두목의 명령이 떨어지자 산적들이 달려들었다. "와!" 산적들은 기운을 돋구는 함성을 질렀다.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휘둘렀다. 윙윙! 창을 휘두르자 주변의 공기가 미친 듯 요동쳤다. 퍽! 길게 뻗은 창에 산적하나가 걸렸다. 창을 맞은 산적은 얼굴이 온통 날아간 채 쓰러졌다. 기사는 창을 옆 으로 휘둘렀다. 퍽! 뭉뚝한 창대에 맞은 산적이 반으로 동강나 쓰러졌다. 상체에서 쏟아진 창자가 바닥을 질펀하게 적셨다. 엄청난 공격에 얼이 빠진 산적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슉슉슉! 산적들이 멈춰 서자 기사가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겼다. 그 자리에서 찌르는 창에서 막대한 기운이 발해졌다. 퍽퍽퍽! 창을 앞으로 찌를 때마다 거리에 관계없이 산적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 갑자기 조용한 정적이 주변을 감샀다. 엘란의 눈이 쩨질 듯 부릎떠졌다. '저게 무슨 수법이지?' 마스터처럼 오러를 발하는 것도 아닌데 창에서 쏟아진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산적들을 으깨어 놓았다. 신 성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신기였다.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이 있 었던 엘란은 세상밖에 하늘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엘란은 다시 한 번 곰곰히 기사의 얼굴을 살폈 다. 밤색머리에 푸른 눈, 약간 평평한 코, 굵은 입술의 남자답게 생긴 중년인의 얼굴이다. '누구지?' 실력으로 봤을 때는 이름난 자가 분명한데 엘란의 짧은 견문으로는 도저히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털보가 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 당당하던 기세는 멀리 사라지고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초라한 사내가 엘란의 눈에 들어왔다. 엘란은 옆에 비켜서서 국외자의 입장에서 그 광경을 구경했 다. 사방에 널려진 시체는 별로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성기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악마의 종자를 살려 줄 수는 없다."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 같은 여상한 말투는 표정만큼이나 무감각했다. 그 말투에 엘란까지 겁에 질릴 정도였다. 산적들의 심장은 공포로 물들었다. 누가 손을 넣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담량이 큰 두목이 일어서서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뒤돌아 서서 미친 듯이 달렸다. 기사는 가만히 털보의 등에다 창을 겨루었다. 펑! 털보의 몸이 갈갈이 터져 나갔다. 투두둑! 산산조각 난 살점들이 떨어져 내렸다. 나머지 산적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대부분 의 산적들이 오줌을 샀고, 개중에는 큰 것까지 줄줄 싸는 자도 있었다. 기사는 조용히 말 위에 올랐다. 엘란은 그가 그냥 떠날 줄 알았다. 겁에 질려 덜덜 떠는 산적들에게 신을 섬기는 성기사가 이렇듯 잔혹 하게 손을 쓸 줄은 몰랐다. 기사는 특유의 소름끼치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날렸다. 슈앙! 창이 날아다니며 벌벌 떠는 산적의 몸을 가르고 지나쳤다.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창은 수많은 산적의 생명을 빨아들였다. 엘란의 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신의 무구가 악마의 무구로 비췄다. 턱! 마지막 산적의 숨을 끊은 창이 기사의 손에 빨려들 듯 들어왔다. 검을 날려서 조정한다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창을 이렇듯 자유자재로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창을 살피던 엘란 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많은 사람의 피를 빨아들인 창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처음의 순백색 그대로였다. 기사는 수많은 주검을 남겨놓고 떠나갔다. 엘란은 피비리내가 풍기는 산길에서 한 참을 서 있었다. 뭔가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어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저 사람과는 우연으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엘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산적들을 박살내던 성기사와는 다시 만나기 싫었고, 만날 일도 없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만남을 갈구하는 사람과는 평생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었고,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수시로 마주칠 수도 있었다. 엘란은 날이 점점 더워질 때쯤 카르펜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카르텐은 질 좋은 철광석과 석탄이 많이 났다. 당연히 각종 철기로 유명했다. 엘리오트왕국 최대의 무기 산지였다. 무기외에도 금속으로 만든 것 은 무엇이든지 명성이 높았다. 카르텐산 검과 방패 갑옷의 우수성은 자부심 강한 아스가르드 사람들까 지도 인정할 정도였다. 엘란은 숏소드를 하나 사기로 했다. 숏소드는 여러 가지 잡다한 용도로 사용하기 편리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자를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가지고 있던 것은 날이 다 빠져 서 못 쓰게 되었다. 도시 전체는 활기로 넘쳐 났다. 도시 구경을 하면서 느긋하게 걷던 엘란은 무기점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리로 갔다. 200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거리전체가 무기점 이었다. 엘란은 도시에 처음 온 촌놈처럼 두리번거렸다. 사실 촌놈이 맞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가장 크고 화려 해 보이는 무기점에 들어섰다. 꼭 사겠다기 보다는 구경의 목적이 컸다. 비싼 물건을 살 형편도 아니지 만 좋은 숏소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베는 정도의 일에 좋은 검이 필요할 리 가 없는 것이다. 무기점안에서 이리저리 구경하고 다녔지만 점원은 다가오지 않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돈 없는 티가 팍팍 났다.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원, 어디서 거지같은 놈이 들어왔네.' 주먹코의 점원이 엘란을 보고 생각했다. 엘란은 무기점 안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화려해 보이는 무기 들 앞에 섰다. '비싸보이네.' 엘란은 속으로 말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과 검자루에 박혀 있는 보석들을 보건 데 상당한 값이 나갈 것 같았다. "헤헤 손님 여기 물건은 비쌉니다." 주먹코가 다가와서 헤실거리며 말했다. '니가 올 곳이 아니다 저리 꺼져 이 자식아. 진열된 상품이 너 때문에 빛이 바래잖아.' 속마음과는 다르게 오랜 점원생활의 노하우로 말은 부드럽게 나갔다. 물정 모르는 엘란은 점원의 깊은 속뜻을 몰랐다. "구경 좀 하려고요." '여기가 무슨 써커슨 줄 아나 구경은, 저리 안가 이 자식아!' 이번에도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은 부드럽게 나갔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됩니다만." "그냥 구경만 하는데 방해될 게 뭐 있나요." 점원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점원은 조용히 다가와 엘란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였다. "저리 꺼지라고 이 새끼야! 좋은 말로 하면 알아들어야지." 말의 내용보다는 역한 입냄새에 엘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역겨운 냄새는 처음이었다. 발냄새와 양파냄새 마늘냄새가 한꺼번에 섞인 것도 같았고, 동물의 시체가 썩는 냄새 같기도 했다. '우웩! 아침 먹은 거 다 올리겠다.' 엘란의 표정을 오해한 점원은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자식이 한 번 해보자 이거야, 가뜩이나 토끼라고 마누라한테 수모 당해서 열 받는데. 오냐 잘 걸렸 다. 오늘이 니 제삿날이다.' 주먹코는 엘란의 멱살을 가만히 잡아갔다. "이 소드는 얼만가?" 얄미운 거지의 면상을 막 갈기려는 데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먹코의 얼굴이 놀랄만한 변화를 보 였다. 올라가던 눈꼬리가 내려오고 비틀리던 입매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야! 대단한데.' 주먹코의 표정 변화에 엘란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이구! 기사나리 눈이 대단히 높으시군요. 그 소드로 말하자면 카르텐시가 자랑하는 드워프의 제자, 천재장인 밀레의 작품으로 훌륭한 모양과 날카로움이 온 시내에 유명한 작품으로서......" 주먹코는 혼자서 20분을 떠들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날이 샐 것 같아서 기사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얼마란 말인가?" 약간은 싸늘한 기사의 말에 점원은 정신을 차렸다 '험험, 오늘 내가 왜 이러지? 이게 다 이 거지세끼 때문이야!' 엘란을 한 번 노려본 점원은 예의 그 표정변화를 보이며 기사에게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굽실거리며 말 했다. "30골덴입니다. 성능에 비하면 저렴한 가격입죠." 기사는 별다른 흥정없이 검을 받아서 허리에 찼다. 상당히 어울려 보였다. 기사는 지금 수련여행 중이었 다. 검이 부러지는 바람에 대충 하나 장만을 한 것이다. 엘란(13) 큰 돈이었다. 1골덴이면 한 가정이 한 달간은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엘란은 기사를 살펴보았 다. 짧은 금발이 눈썹 위에서 고슬거렸다. 동그란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두 줄 나 있었다. 푸른 눈은 날 카롭게 빛나고 있었고 약간 뭉쳐진 코는 남성다운 야성미를 풍기고 있다. 튼튼한 턱은 양쪽으로 살짝 갈라져서 강인하게 보였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약간 길었으며 목은 굵고 짧았다. 쇠사슬로 된 긴 셔츠인 호버크를 입었고 그위에 브레스트플레이트를 걸쳐 가슴을 보호하고 있었다. 평상시 기사들이 간편하게 입고 다니는 대표적인 복장이었다. 일견하기에도 신분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평생 남을 부린 자의 자연스러운 위엄이 전신에서 흘렀다. 기사도 엘란의 시선을 느꼈는지 엘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치자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이는 듯했다. 엘란은 기 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은 아주 격렬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감정이 들지, 30골덴이나 하는 소드를 아무렇게나 사는데 대한 반감인가? 아니야! 그 것 때문은 아니야!' 엘란은 기사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질투로군.'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엄청난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가진 자에 대한 질투. 보 통 보아온 평범한 귀족이나 영주였다면 이런 감정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그 런 부류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갈고 딱은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자신감이 은연중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잘 갈린 보석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엘란을 마주보는 기사의 기분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적대감에 마음이 편치 않을 정도였다. 기사는 혹독한 수련을 통해 쌓은 인내심으로 적대감을 억눌렀다. '이놈이 왜 빤히 쳐다보지.' 그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실 자신들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하 지 못했다. 엘란은 단순히 질투 때문이라고, 기사는 엘란의 도발적인 시선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고 간단 히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이러한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힐 리는 없었다. 엘란은 아무 귀족에게나 악감정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고, 기사도 기분 나쁜 시선으로 자신을 본 다고 화를 낼만큼 수양이 얕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명확히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옭아매고 있는 운명의 손길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풀어지지 않은 감정은 점점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팽팽한 긴장감 이 주변을 휩싸고 돌았다. 엘란의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전신을 감쌌다. 기사는 오 른발을 반 발자국 뒤로 빼며 그립을 움켜쥐었고, 엘란은 정령을 소환할 준비를 했다. 기사는 엘란이 만 만치 않다고 느꼈으나 자신이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별다른 이유없이 상대의 몸에 검을 들이 대자니 갈등이 일었다. '이런 거리가 너무 가깝다.'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우면 기사가 유리하다. 엘란은 기사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거리를 벌리려 고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기사에게서 피어오르는 심상찮은 기세가 그러한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 금이라도 물러서면 바로 검이 날아들 것 같았다. 주변을 감싼 팽팽한 긴장감이 더욱 끓어올라 정령을 소환하려 할 때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변하고 말았다. 빡! 갑자기 주먹코가 엘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서 꺼져 이 자식아! 어디 존귀한 기사분을 째려보고 그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 둔한 점원은 지금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정령을 불러서 점원을 갈가리 찢어놓을 뻔했다. 화살을 머금고 잔뜩 휘어진 활처럼 팽팽히 긴장된 엘란의 육체 가 자동적으로 반응할 뻔한 것이다. 점원은 자신의 목숨이 유부의 문까지 갔다 온 것을 몰랐다. 대치상 태는 어이가 없을 만큼 묘하게 풀렸다. 엘란은 전신의 맥이 탁 풀려버렸고, 기사도 허탈한 웃음을 삼켜 야 했다. 기사는 등을 돌려 가게를 나갔고, 살려고 했던 숏소드를 포기한 엘란도 무기점을 나섰다. 무기 점의 무기는 너무 비싸서 엘란의 형편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상하게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야.' 엘란은 그 기사를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세차 게 흔들었다. 무기점을 나선 엘란은 노점에서 숏소드를 하나 샀다. 카르덴시는 노점에서 파는 검도 훌륭 했다. 숏소드는 3실버 짜리였다. 숏소드 하나를 사고 돌아서는데 멀리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둥둥!! 빰빠밤!! 갑자기 들리는 음악소리에 호기심이 일어난 엘란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인파를 헤치며 다 가가자 저 앞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선 선두의 사람부터 시선을 확 잡아 당겼다. 선 두의 장한은 엄청난 덩치였다. 이렇게 큰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다. 오거를 실제로 보지는 못 했지만 만 약 봤다면 저 장한과 비슷할 것 같았다. 아무리 안 되도 2미터50은 족히 넘어 보였다. 보통 키가 너무 크면 몸이 약해서 비리비리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사람은 엄청난 키에도 불구하고 몸은 튼튼해 보였다. 허벅지가 웬만한 처녀 허리보다 굵었다. 두껍게 부풀어 오른 팔뚝에는 퍼런 힘줄이 꿈틀거렸다. 목도 굵 어서 엘란의 허벅지보다 더 굵은 것 같았다. 금발머리는 땀으로 젖어서 저려놓은 양배추같이 축축 늘어 졌고, 주름이 크게 잡힌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어찌나 땀을 많이 흘리는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두터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깊은 것은 청년이 들고 있는 커다란 봉이었다. 금 속으로 만든 굵은 봉은 10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봉에는 뭘 발랐는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봉 에는 깃발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무식할 정도로 컸다. 아주 촌스러운 빨간색 천 위에 노란색 글자가 선 명하게 눈에 잡혔다. <천하제일 마법사> 깃발에는 이런 글귀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장한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깃발을 들고 다녔다. 청년의 뒤에는 북을 치고 나발을 부는 사람들이 움직였고, 그 뒤를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 뒤를 교자 가 따랐는데, 거대한 가마의 귀퉁이에는 네 명의 장한이 있어서 교자를 메고 있었다. 다음에는 70여명의 사람들이 뒤를 이었다. 교자위에는 거만한 표정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 왔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나 있었다. 얼굴은 굵고 가는 주름으로 온통 자글자글 했고, 뺨에는 큰 점 이 하나 나있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회색빛 눈은 아래로 침잠해 있었고, 몸은 깡말라 있었다. 해골같 은 몰골의 늙은이는 붉은 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런대로 어울려 보였다. 자세히 보니 노인은 검 은 띠를 둘렀는데 띠에도 황금색실로 <천하제일 마법사>라고 적혀 있었다. "아! 광법사로군." 엘란은 감탄성을 발했다. 확실히 그는 광법사 일레이저가 맞았다. 예전에 카일이 대륙의 강자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들은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륙에서 유명한 강자로 십존이 있는데 그 십존중의 일인이 었다. 보통 사법사, 사마스터, 이정령사를 대륙에서 가장 강한자로 꼽았다. 일레이저는 사법사중 광법사 로 불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십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레이저의 부모는 피요르드왕국 사 람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유명한 마법사 집안인 레조 집안의 노예였다. 일레이저의 아버지는 마법에 천 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그러나 노예가 마법을 배울수는 없었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고 자신이 마법 에 재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우연히 레조집안의 제자 하나가 마나를 축적하는 걸 보게 되면서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된게 일의 발단이었다. 천부적으로 마나를 느끼고 활용할 수 있었던 일레이저의 아버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몰래 마법을 익혀 나갔다.가히 천재적인 자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어 깨너머로 마법을 훔쳐배웠지만 한계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는걸 보고 마법을 배우기는 힘 들었다. 그즈음 일레이저가 태어났다. 자기 자식까지 노예의 삶을 물려 줄 수는 없었다. 그는 노예의 삶 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무려 오년동안 기회를 노린 끝에 레조집안의 사람들과 제자들이 집을 비운 틈을 이용 남아 있던 제자들을 쳐죽이고, 마법서를 훔쳐 도망쳤다. 레조의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노예가 제자를 죽이고 마법서를 탈취해서 사라진 것이다. 한낱 노예가 어깨너머로 마법을 익힌 것도 충격이었 다. 대대적으로 추적대를 편성해서 쫓았다. 마법서에는 추적마법이 걸려있었다. 일정범위 안에 들어서면 신호가 오게 되어 있었다. 일레이저의 아버지는 장장 오년을 도망다닌 끝에 잡혀서 죽었다. 품에는 마법 서가 나왔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레조가는 이 일을 잊었다. 그러나 40년후 레조가는 또 한 번의 홍역을 겪었다. 일레이저가 나타난 것이다. 강대한 마법을 익힌 일레이저는 레조가를 피로 물들이려 했 다. 그 사이 레조가의 가주는 바뀌어 있었다. 피요르드왕국최고의 마법사로 불리는 적법사 레조가 현재 의 가주였다. 둘은 하루를 꼬박 싸웠다. 승패는 가릴수 없었다. 세상은 경악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 도 없는 마법사가 대륙최강의 마법사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인 것이다. 이때부터 구존은 십존이 되었 고, 일레이저는 사법사의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적법사레조에게는 많은 제자들과 귀족이라는 배경이 있 었다. 게다가 왕궁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일레이저는 혈혈단신이었다. 둘이 지쳐서 쓰러질 때 쯤 다른 사람들이 개입했다. 일레이저는 저주를 남기고 도주했다. 모국에서 살 수 없어진 일레이저는 피요르드왕국과 앙숙인 엘리오트왕국으로 넘어와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복수는 포기 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오트왕국에서 제자를 기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엘리오트왕국 입장에서는 대환영이 었다. 그 당시 적법사레조에 대적할 만한 마법사가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레조는 붉은 로브를 상징으로 걸치고 다녔다. 그래서 일레이저도 항상 붉은 로브를 입고 다녔다.일레 이저는 다른 사람의 개입이 없었다면 레조는 이미 지옥의 손님이 되어 있을 거라면서, 자신이야말로 진 정한 적법사라고 떨벌리고 다녔다. 그러나, 누구도 적법사 일레이저라고 칭하지 않았다. 일레이저는 희 로애락의 감정변화가 무쌍했고 맘에 안드는 사람 찢어죽이기를 좋아했다. 성격도 편협하고 의심과 욕심 이 많았다. 그래서,누구나 할 것 없이 광법사라고 불렀다. 광법사는 무수한 사고를 치고 돌아 다녔다. 엘 리오트왕국 입장에서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 살짝 돌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도 적법사라고 불 러 주지 않자 오기가 치민 일레이저는 천하제일마법사란 깃발을 만들어 앞장세우고 머리에는 띠를 둘렀 다. 원래 마법사들은 근엄하기 마련이다. 어떤 마법사가 이런 짓을 하고 다니겠는가? 사람들의 세평은 엉터리인 것 같으면서도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면이 있다. 확실히 일레이저는 적법사보다는 광법사가 어울렸다. 엘란은 말은 많이 들었지만 보기는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광법사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엘란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도시를 나왔다. 카르덴시는 대도시 답게 물가가 비쌌다. 여관에 묶을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동부대로를 따라 롬바르드로 향했다. 엘란은 오늘도 노숙을 했다.돈이 거의 떨어져 가 고 있었다. 대로를 벗어나 적당한 공터를 찾아 불을 피우고, 준비한 육포를 씹었다. 직접 사냥해서 만든 것이다. 돌처럼 딱딱해서 한참을 입에 물고 있어야 했다. 빵도 돌처럼 딱딱했다. 식사를 한후 엘란은 심 상훈련을 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정령을 불러 수련하기가 어려워 시작한 것이 지금은 매일 하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머리속으로 정령 부리는 것을 연습했다. 잠시후 실제로 정령을 불렀다. 계약한 하급 정령을 모두 불러 두편으로 나눠서 전투를 벌였다. 서로 다른 속성의 정령을 불러 편을 나눠 부리는 것 은 쉬운 것이 아니다. 엘란은 미흡하기는 하지만 중급정령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바람, 불, 물의 하급정령을 한꺼번에 불러 한 편이 아닌 서로 다른 편을 나눠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프 다섯, 샐라멘더 둘, 운디네 둘이 한 편이 되고 실프 다섯, 샐라멘더 셋, 운디네 하나가 한 편이 되었다. 먼저 실프 둘이 운디네 하나에 달려들었다. 그러자 샐라멘더가 막아섰다. 바람이 불고 불 꽃이 날렸다. 운디네 둘이 샐라멘더에게 달려들자 실프가 막아선다.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운디네 하나가 샐라멘더 둘과 부딪혀 사라졌다. 샐라멘더 둘이 사라진 팀이 불리해졌다. 실프가 운디네 를 흩어버리자 승부는 기울었다. 수련을 끝내고 정령을 돌러보낸 엘란은 땀을 딱았다. 상당한 심력이 소 모되는 수련이었다. 정령을 미세하게 조정하기가 힘들었다. 마나운용을 한 후 실피드를 부르려던 엘란은 멈추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높은 수준으로 마나 수련을 한 사람들은 오감이 발달한다. 예감이나 육감도 잘 들어맞는 경우가많았다. 마나의 변화에도 민감했고, 사람들의 기척도 잘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모닥불을 향해 다가왔다. 전에 봤던 사람들이었다. 광법사일레이저 일행이었다.선 두에는 여전히 깃발을 든 청년이 있었다. 그때처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힘들어 보 였다. 엘란은 멍하니 깃발을 보았다. 깃발이 달라져 있었다. '세상에 깃대에 다이아몬드를 박았네?' 깃발에는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박혀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밤하늘의 별이 깃대에 내려온 것 같았다. 일레이저가 광법사라고 불리는 이유가 느껴졌다. 우수광스 러운 깃발을 드는 걸로 모자라 다이아몬드로 장식까지 하다니. '금강석을 깃발에 장식하려고 카르덴시에 들렀군.' 청년이 깃발을 모닥불 앞에 꽂았다. "여기는 제가 먼저 온 장소입니다." 엘란은 청년에게 공손히 말했다. 상당히 안되 보였다. 매일 들고 다 닐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엘란이 넓은 공터의 주인은 아니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노숙을 할 때는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는게 예의였다.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엘란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졸지에 잠자리를 뺏기게 생긴 것이다. 엘란(14) 엘란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엘란은 기분이 점점 더러워 졌다. 광법사뿐 아니라 아랫 사람들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말도 없이 모닥불가로 모인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큰 천막이 세워지기는 잠깐이었다. 어어하는 사이에 엘란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작 은 천막들도 여기 저기 세워 졌다. 순식간에 훌륭한 야영지가 갖춰졌다. 누구하나 엘란에게 말을 걸거나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 삽시간에 잠자리를 뺏긴 엘란은 부아가 치밀었다. 두뺨이 개구리처럼 부풀어 올 랐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괴팍하기로 유명한 광법사 일행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조용히 짐을 챙겨 들고 떠나기로 했다. 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막 떠나려는데 광법사가 교 자를 타고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광법사앞에 도열을 했다. 광법사의 시선이 엘란에게 향했다. "어디 가나 소형제." 부드러운 목소리로 광법사가 말했다.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엘란은 한 기가 돌았다. "위대하신 대마법사 일레이저님이 계신 곳에 저 같이 미천한 자가 머물수 있겠습니까?" 엘란은 고개를 숙이며 아부를 떨었다. 이 미치광이 마법사는 아부에 약하다고 카일에게 들은 것 같았다. 최대한 머리를 숙일 것이다. 그만큼 광법사의 악명은 높았다. 여기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외딴 곳이다. 여기서 죽는 다고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웃는 얼굴에 침 뱉겠어.' "정령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일레이저가 말 끝을 흐렸다. 엘란은 고개를 들어 광법사를 보았다. 낮에 는 우스광스럽게 보이더니 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를 주시해서 그런지 왠지 섬뜩했다. "정령술을 약간 익혔습니다." 엘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일레이저는 기분이 나쁘면 꼬투리를 잡아서 사람 을 죽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일레이저는 한 참을 가만히 있었다. 일레이저가 말이 없자 엘란은 불안했 다.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속옷은 이미 흠뻑 적어 있었다. 일레이저의 강함은 뼛속깊이 느 껴졌다. 싸움이 벌어지면 몇 초안에 목이 떨어질 것은 아침에 태양이 뜨듯 명확했다. 일레이저는 엘란을 앞에 두고 서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일레이저의 주위에 강력한 기운이 일었다. 그 기세에 엘란은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엘란에게는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엘란은 마나를 끌어올려 저항했다.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강대한 기세에 눌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실 일레이저는 기세 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엘란을 실험해 보는 것이다. 광법사의 사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죽음의 시험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건장한 사람이라도 심장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버틴것만 해도 엘란의 나이를 감안하면 기적같은 일이었다. 덜덜덜!! 엘란의 몸이 격류에 휘말린 듯 떨렸다. 일레이저는 자신의 기운을 밀었다 땡겼다 하면서 엘란 을 흔들었다. 엘란은 정령을 소환해 공격하려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사마귀가 수레에 달려드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게 뻔했다. 순간적으로 핍박하던 기운이 사라졌다. 털썩! 엘란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코에서 피가 흘렀다. 일레이저는 엘란을 다시 한 번 훌어보고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 마마를 앓았는지 얼굴이 얽어진 곰보가 천막에다 대고 말했다. "스승님, 먹을게 변변치 않으니 멧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오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긍 정으로 해석했는지 사내는 돌아서서 엘란에게 말했다. "위대한 마법사께 음식을 바칠수 있는 영광을 줄테니 나와 함께 가자." "예, 알겠습니다." 엘란은 공손하게 대답하면서 일어났다. 따라갔다 도망갈 심산이었다. 일레이저곁에 잠 시라도 머물러 있다가는 수명대로 못 살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곰보사내가 앞장을 서자 엘란은 뒤를 따랐다. 따라가면서 사내를 관찰했다. 자신과 사내의 실력을 저울질해 보았다. '이길수 있을까?' 사내의 등은 강인해 보였다. 최고의 마법사를 스승으로 두었으니 보통실력은 아닐 것 이다.중년의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경지의 마법사일 것이다. 그러나, 엘란은 자신이 지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재능이 뛰어난 카일도 30에 하급정령익스퍼터였다. 중급정령마스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상급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자는 대륙에서도 엘리오트왕국이황자의 스승으로 있는 물의 시드와 아스 가르드국의 화염의길라드 둘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십존에 들어갔다. 물론 중급정령사와 상급정령사는 하늘과 땅차이다. 중급정령사에서 상급정령사로 가는데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하급에서 중급으로 가는 것과는 수준차이가 달랐다. 엘란도 아무리 용을 써도 진전이 없자 산을 내려 온 터였다. 그래도 엘란의 나이에 비한다면 대단한 성취였다. 엘란은 기회를 살폈다.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지기를 빌었다. '도망가면 붸아 올까.' 엘란은 도망갈 시기를 저울질 했다. 지금 못 떠나면 발목이 잡힐 것 같았다. 일레 이저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엘란은 곰보의 등을 노려 보았다. '한 대 먹일까' 생각하던 엘란은 그냥 떠나기로 했다. 막 떠나려는 찰라 곰보가 갑자기 뒤를 돌아 보았 다. "헉!" 엘란은 깜짝 놀라서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심장이 급격히 뛰었다. "튀자!" "예?" 멍한 얼굴로 엘란이 물었다. 왠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곰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헤이스트!" 자기 발에 마법을 건 곱보는 냅다 뛰었다. 엘란도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엘란도 곰보를 따 라서 냅다 뛰었다. 광법사 밑의 제자가 못 견디고 도망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미친놈하고 살기가 어디 쉽겠는가. 곰보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헤이스트마법을 건 곰보는 굉장히 빨랐다. "실피드." 엘란은 정령을 불러 뒤에서 밀게 했다. 엘란의 발은 가끔씩 지면을 박찰 뿐이다. 대부분은 지 면위를 날았다. 굉장한 바람이 뒤에서 밀자 빠른 속도로 앞으로 쏘아져 갔다. 이 기술을 익히다 얼마나 많이 바닥에 쳐박혔는지 몰랐다. 익혀두니 쓸모가 많았다. 어느새 곰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중급정령사였나? 그 나이에 대단하군." 옆에 붙은 엘란을 감탄한 얼굴로 보며 곰보는 말했다. "일레이저가 욕심낼만도 하군." "욕심을 내다뇨?" 엘란이 물었다. "일레이저는 재능이 있어 보이거나 강한 자들은 자신의 제자로 만든다. 제자라기 보다는 부하에 가깝지. 그 사이코 손에 죽은 제자가 30은 넘어. 명령을 안 따르거나 나처럼 도망가다 죽은 자들이지. 제자가 안 되겠다고 거부해도 죽이지. 광법사는 뛰어난 젊은이를 두고 보지 못해." 엘란은 왜 도망가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자기라도 일레이저 밑에 있었으면 도망쳤을 것이다. "절, 제자로 삼으려고 했단 말입니까? 아까는 죽일 듯이 핍박하던데." 엘란은 뚱한 얼굴로 말했다. "능력을 시험한거야. 시험은 합격이고, 떨어졌으면 그냥 죽는 거야. 자네 능력이 좋은가봐? 그렇게 오래 버틴 사람은 없었거든." "제자가 그렇게 많은데 또 들입니까?" "제자라기 보다는 부하라니까. 적법사레조와 붙으려면 세력이 커야지." "아직 복수할 생각이랍니까?" 곰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독한 놈이지! 은혜를 입으면 금방 잊고, 원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 잊는 법이 없어. 아버 지의 원수를 그냥 둘 사람이 아냐!" 곰보는 말을 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말은 그만하고 속도를 높이세." 곰보가 속도를 높였다. 엘란도 바람의 강도를 조절해서 속도를 높였다. "윽!!!" 갑자기 곰보가 멈춰섰다. 그러더니 앞으로 콱 고꾸라 졌다. "등! 등!" 곰보는 바닥을 구르며 외쳤다. 엘란은 정령을 돌려 보내고 곰보의 옷을 벗겼다. "세상에!" 곰보의 등은 피투성이였다. 등에는 도형과 룬문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등에서 희미한 빛 이 나더니 피가 뿜어졌다. 파앗!! 엘란은 피를 뒤집어썼다. 쿨럭!! 이제는 피까지 토하고 있었다. 엘란은 심각한 얼굴로 곰보를 보더니 품에 손을 넣었다. 품에서 나온 손에는 유리병이 들려있었다. 카일 의 품에서 얻은 포션이었다. 곰보를 앉혀서 머리를 제치고는 포션을 먹였다. 두 모금을 먹인 엘란은 등 에다 남은 포션을 모두 발랐다. 포션의 약효는 대단했다. 등이 벌써 아물어 왔다. '대단한 고급 포션이네. 이 정도 포션이면 적어도 100골덴은 나갈텐데 카일은 어디서 얻었지.' 엘란은 몰랐지만 이 포션은 카일의 전 재산이 들어간 것이다. 가스통의 무덤에서 혹시 있을 부상에 대비해서 마련한 것이다. 카일은 값비싼 포션을 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가스통의 무덤에서 보물이 쏟아질텐데 그런 푼돈을 아끼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는 써보지도 못하고 이런 광야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쓰 여진 걸 알면 지하에서 눈도 감지 못하리라. 아깝다는 생각이 든 엘란은 머리를 둘레둘레 흔들어서 생 각을 지웠다. 곰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광법사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은원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도움에 대한 보답은 한 건가.' "으음!" 곰보가 깨어났다. 창백한 얼굴이다. 지금 죽는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다. "최대한 멀어져야돼 그 미친놈 한테서." 한 마디 하고는 허옇게 눈이 돌아 갔다. 어두운 밤에 흰자만 들 어난 동공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엘란은 사내를 안았다. "실피드." 실피드 둘을 소환한 엘란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휭! 엘란은 바람을 가르며 질풍처럼 달렸다. 한 시간을 그렇게 달리자 마나가 고갈되기 시작했다. 스윽! 마나가 끊기자 정령이 사라졌다. 엘란은 녹초가 되었다. 혀를 빼물고는 오뉴월 개처럼 헐떡거렸다. 잠시 마나운용을한 엘란은 기운을 차리고 곰보를 들쳐 업고 뛰었다.정령을 부를 힘은 없었다. 뛰다가 걷 다가 하면서 밤새도록 이동했다. 해가 밝아올 때쯤 어슴프레하게 마을이 보였다. 마을에 들어간 엘란은 마지막 남은 돈을 탈탈 털고 사내의 품에서 나온 돈을 합쳐 짐마차를 하나 샀다.이 상태로는 멀리 이동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지만 정신을 차릴 때마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 고 간절한 얼굴로 말하는 통에 쉴 수가 없었다. 곰보의 삶에 대한 의지는 강렬했다. 짐마차는 참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위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한 눈에 보기 에도 살날이 몇일 안 남은 것 같은 말이 두 마리 매여 있었다. 마차에 사내를 태우고는 바로 출발을 했 다. 마차를 모는 것은 처음이지만 말들은 경험이 많았다. 자기들이 알아서 길을 따라 움직였다. 워낙 늙 은 말이라 속도는 형편없었지만. 곰보가 온전한 정신을 차린 것은 삼일 후였다. 그도안 엘란은 눈 코 뜰새 없이 바빳다. 하루종일 마차를 몰고 곰보를 간호하고 사냥을해서 식량을 조달하고 혹시나 일레이저가 잡으러 올까봐 잠 한 숨 못자고 경계를 해야 했다. "고맙네,여기가 어디쯤인가?" 힘겨운 목소리로 사내가 물었다. 눈이 휑한 것이 불쌍해 보였다. 며칠사이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캔버쳐지방일 겁니다." 엘란도 지친 기색으로 대답했다. 사일동안 한 숨도 못잤었다. 눈이 모래라도 들 어간 것처럼 뻑뻑했다. "이제 됐네, 도망치는데 성공했어!" "저는 왜 데리고 나온 겁니까? 혼자 나와도 될텐데." "아까운 젊은이가 미친놈 밑에서 고생할게 불쌍해서, 결국 그 때문에 내 한목숨 구했잖나?" "일레이저는 정말 미친 겁니까?" 엘란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예전부터 광법사라고 불렸지만 미친건 아니었어, 하긴 별차이는 없지만. 요새는 확실히 이상해지긴 했 어.이틀 전에도 별 이유없이 제자 한 명을 찢어 죽였어, 내생각에는 마법을 무리하게 익히다가 머리에 탈이 생긴 것 같기도 해." 둘은 길을 벗어나 사람의 눈에 잘 띄이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하루를 쉬었다. "그 등은 어떻게 된 겁니까?" 곰보의 등을 닦던 엘란이 물었다. "광법사 작품이야, 자신을 배신할까봐 모든 제자 등에다 그려 넣었어. 고대부터 내려 오던 저주라던데 자네도 봤다시피 효과 하나는 끝내주지." 엘란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도망을 시도한 겁니까? 그 저주라면 확실히 죽을 것 같던데..." "저주에 한계가 있어, 일정범위를 넘어서면 효력을 상실한다네, 그래서 죽어라고 달린거지." 엘란은 등을 다시 한 번 꼼꼼이 살폈다. "선이 흐려져 있고 지워진 곳도 있는데 저주가 풀린 것 아닐까요?" "그럴거야." 잠시후 곰보가 툭 내뱉듯 말했다. "난 이스마엘 단테스야." "전 엘란입니다,귀족 이십니까?" 성은 귀족들만이 가지게 되어 있었다. "귀족은 아니야." "귀족이 아닌 자가 성을 쓰다가 들키면 치도곤을 당할텐데요." "우리 교에서는 성을 쓰든 안 쓰든 자유네." "그런 종교도 있습니까?" 엘란은 머리를 굴리면서 물었다. "제가 종교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런 종교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모든 종교가 신분제를 찬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내는 한참을 고민하다 말했다. 눈매를 찡그리는게 말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만인은 지고 앞에 평등하다." 엘란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상당히 놀란 것이다. "악마교도 셨습니까???" 엘란(15)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란은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흠 , 지고교도 라고 불러주게." 지고교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종교였다. 지금 세력을 떨치고 있는 종교 들이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 했던 그 까마득한 옛날에도 체계적인 교리와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가장 긴 종교이며, 다른 신을 믿는 종파들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다른 신을 믿는 종교들은 지고교의 교리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해 썼다. 창조주이신 주신 지고를 받들었고, 사 랑, 평등, 자유를 추구했다. 지고교는 그 특유의 교리상 수많은 탄압을 받았다. 주기적인 탄압은 지하로 스며들게 만들었고, 교세를 급격히 위축시켰다. '지고앞에 만물은 평등하다!' 가장 문제가된 교리였다. 엄격한 신분제 하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사상은 왕이나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도 농노가 기반인 경제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만한 위험요소였다. 타 신전에서도 지 고교의 교리는 받아들일수 없었다. '지고앞에 만물은 평등하다'의 만물에는 그들이 섬기는 신들도 포함 되 있다. 모든 신들도 창조주 지고가 만든 피조물에 불과하며 지고 앞에 인간과 동등하다는 사상은 그 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이 종교를 체계적으로 정비할 때 많은 부분을 지고교에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자부심 강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배층과 타 신전에서 지고교를 탄압할 명분은 많고도 많았다. 결정적인 사 실은 지고교도를 말살하라는 신탁이 주기적으로 내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신탁에 따라 아무런 의심 이나 죄책감 없이 지고교도를 학살했다. 다른 신을 믿는 신자를 학살하기는 아무래도 저어하는 바가 컷 다. 신의 분노를 살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확한 증거가 없는한 신전을 탄압하지는 못한다. 그러 나 지고교탄압은 달랐다. 모든 성직자들이 지고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없다. 그 이유는 타당하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타 종교가 가지는 이적과 기적을 지고는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쉽게 드는 예가 신성마법이 다. 신을 믿고 신전에서 수련을 받은 성직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신성마법을 사용했다. 때때로 내리는 신탁도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지고교는 성직자도 신성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고, 알려진 바로는 그 오랜 세월동안 신탁도 내린적이 없다고 했다. 지고교가 신의 사자라고 믿고 있는 드래곤들이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무 반응이 없는 점도 그들의 생각이 맞다는 증거로 인식되었다. 지고교는 세간에 악마교로 불리고 있었고 마왕의 추종자며 사람의 피를 먹고 생간을 씹는다고 알려졌 다. 엘란은 이런 것은 믿지 않았고, 그들의 교리에 충분히 공감했으며 탄압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그도 지고의 존재는 회의적이었다. 높은 수준까지 정령술을 익히고 라이트같은 간단한 마법을 익 히고 있는 엘란이 신성마법을 쓸 수 없는 지고교를 믿을 수는 없었다. 지고교를 한 혁신적인 천재가 만 든 사회사상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지고교도 한 때는 세력을 떨친 때가 있었다. 역사의 불가사의 라고도 불리는 데 발칸대제가 대륙을 통 일하고 10년간 국교로서 교세를 넓혔다. 그러나,그것도 잠깐, 이후 50년간 지고교는 발칸대제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왜 대제는 지고교를 국교로 삼았다가 탄압했을까? 이스마엘과 도움을 주고 받고, 같이 여행하는 동안 친해지지 않았다면 엘란도 꺼리는 바가 컸을 것이다. 세간의 평은 그만큼이나 지독했다. "지고교도가 왜 광법사 밑에 들어갔습니까?" "난 호교법사네, 교도들이 죽어가는데 지킬 힘이 없었어! 알다시피 우리는 신성마법을 쓸 수 없네, 마법 이나 정령술도 수 천년의 탄압에 거의 유실됐지. 강한 자들은 후손을 키울 시간도 없이 교를 지키다가 분사했지. 이름만 호교법사지 힘은 없었어. 그래서, 일레이저가 제자를 뽑는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서 달려갔지.제자로 뽑히고 마법도 익혔지만, 금제를 당하고 지금까지 매여 있었어." "교로 돌아가실 생각 이십니까?" "돌아가야지." "돌아가시면 위험할텐데요?" "나한테 교를 배신하라는 건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스마엘이 화를 벌컥 냈다. 엘란은 이스마엘 이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당황한 얼굴로 손을 이리저리 만졌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이었습니나." 이스마엘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위험해도 가야해 딸아이도 있으니." "따님도 계셨습니까?" "못본지 20년이야! 망할놈의 미치광이!" 이스마엘은 광법사일레이저를 욕했다. 새삼스럽게 분기가 솟구 치는 모양이었다. 이스마엘이 엘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로 봐도 안되. 같은 신자가 아니면 딸은 줄 수 없어!" 이스마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엘란의 입이 헤 벌어졌다. '따님 준대도 싫습니다.' "자네 몇살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음에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스물하납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안 되겠군." " ." 엘란은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이스마엘은 어쩌면 딸을 이교도에게 보내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 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딸을 염려하는 모든 아버지의 마음같이. "이제 헤어져야겠지. 고마웠네." 이스마엘의 얼굴에 정이 가득했다. 얼굴에 얽혀있는 곰보가 정답게 느껴 졌다. "저도 고마웠습니다." 헤어지기가 아쉬웠는지 엘란을 쳐다보던 이스마엘은 바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난,이만 가보겠네." 엘란은 어둠속에서 사라져가는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멀어져가는 그 등이 왠지 모르게 시리게 마음에 와 닿았다. 파보와 카일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사귄 사람이다. 앞으로 볼일이 없을 것이다. 상당히 서운했다. 엘란은 이스마엘과 지고교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었다. 지고교의 앞날은 언제 나 어두웠다. 그 혹심한 탄압에도 교를 이어오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지고교도들에게 행운은 꼭 필 요할 것이다. 엘란은 하루를 더 쉬고는 길을 나섰다. 롬바르드는 이제 지척이다. '이런, 마차는 아저씨 줄걸.' 아저씨가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마차생각을 못했다. 마차에 올라타고는 길을 떠났다. 늙은 말은 조종도 안 하는데 알아서 길을 따라 나아갔다. "어서 걸어 이 년아!" 앞에서 농부로 보이는 사람이 여자아이를 끌고 가고 있었다. 손은 노끈으로 꽁꽁 묶여 있고 목에는 가 죽 끈이 둘려져 있다. 너무 지쳤는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고 있다. 엘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예로 팔릴 모양이었다. 엘란은 모르면 몰라도 보면서 그냥 지나 칠 수는 없었다. 그 아이의 눈에서 다 르넨영지로 팔려가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아이는 뭡니까?" "악마의 종자라네." "악마의 종자라뇨?" "악마교 신자야." " ." 엘란은 그 보기 어렵다는 지고교도를 요사이 두명이나 보았다. 지고교도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숨겼다. "우린 그런 사람 아냐!" 어린 소녀의 눈에서 독기가 흘렀다. "이런 지독한 년, 눈빛보게! 화형시키려다 어린 나이에 불쌍해서 살려줬더니 ." "살려줄려고 한거야! 돈 받고 팔거면서." 소녀가 악을 썼다. "아니 이년이!" 농부는 손을 들어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왜! 때려 왜!" 악을 쓰던 소녀는 서러웠는지 '엉엉' 울었다. "시끄러, 뚝 안그쳐." 다시 농부의 손이 올라가자 엘란이 말했다. "팔거면 나한테 파시죠." 농부가 눈을 데록데록 굴리는게 회가 동하는 모양이다. 아주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얼마 줄거요?" "이 마차랑 바꿉시다." 이리저리 마차와 말을 보던 농부는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말이 너무 늙었는데 . 까짓거 그럽시다. 내가 인심한 번 쓰지." 어차피 노예상인에게 팔아 봐야 얼마 받을 수 없다. 팔려고 내놓는 아이들은 넘치고 있었다. 말이 죽어 도 고기로 파는게 노예상인에게 파는 것보다 이문이 나았다. 농부는 마차에 올라타더니 방향을 바꿔 사 라졌다. 엘란은 아이를 풀어주었다. "앙앙!"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폭발했다. "갈데는 있니? 부모님은?" "우리 엄마 태웠어! 그 나쁜놈들이 우리엄마 ." 아이는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휴." 엘란은 아이를 업었다. 아이는 비쩍 곯아 있었다. 업었는데 업은 느낌이 없을 정도였다. 지고교를 믿는 아이에게 잘 대해줄 사람은 없다. 엘란은 수도로 향했다. 엘리오트왕국의 수도 롬바르드는 왕국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다른 많은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대제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아스가르드와 국경을 이루는 융커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아갈리아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앞에는 융커산맥에서 발원한 포강이 흐르고 있다. 포강은 왕국의 젓줄이었다. 포강의 하 류에는 비옥한 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왕국의 식량창고 역할을 했다. 가을이면 하류에서 롬바르드로 올 라오는 식량선이 장관을 이루었다. 뒤로는 아갈리아산이 방벽이 되어 적을 막았고 앞으로는 포강이 방 어선 역할을 했다. 도시로서는 천혜의 입지였다. 그 큰 도시를 웅장한 성벽이 막고 있었다. 성안에는 왕 성과 귀족들의 대저택이 있었고 돈이 많은 평민이나 상인의 저택도 있었다. 좁은 의미의 롬바르드시였 다. 대부분의 평민이나 하인들은 성밖에서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고 그런 집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천막에서 생활하거나 산에서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산에도 명확한 구분이 있어서 경치가 빼어나게 아 름답거나 성에 가까운 산은 귀족들의 별장이 있었고 볼품없고 평민이나 하층민 구역의 산에는 빽빽하게 판자촌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 산도 주인은 모두 귀족이어서 하루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 어갔다. 엘란이 검문소를 통과한 것은 석양이 포강을 붉게 물들일 때였다. 검문소는 형식적이었고, 신분증검사도 대충했다.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시를 일일이 검문하기는 불가능 했다. 또 성안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엄한 검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란에게는 카일이 만들어준 신분증이 있었다. 성으로 들어갈때는 심문이 까다롭다. 귀족이 말하는 롬바르드는 사실상 성안을 의미했고 평민들이나 농노들이 말하는 롬바르드는 검문소와 성의 사이를 의미했다. 엘란(16)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엘란은 거리에 오두커니 서 있었다. '돈이 없는데 어떻하지.' 자신이야 아무데서나 자면 되지만 아이는 노숙을 시킬수 없었다. 게다가 아주 약해 보였다. '숏소드라도 팔아야겠군.' 엘란은 무기점에 찾아갔다. 3실버에 산 검을 2실버를 받고 팔았다. '사고 돌아서면 바로 중고네.' 엘란은 허름한 여관을 찾았다. "하루 숙박에 1실버고 요금은 선불입니다." 엘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찾은 허름한 여관인데 도 살인적인 물가였다. 수도에 온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식사는 제공됩니까?" "아침 저녁은 제공되고 점심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틀 머물죠." 엘란은 요금을 지불하고 숙박계를 작성한 후 방으로 갔다. 방은 이층에 있었다. 방에는 침대와 책상 의 자가 하나씩 있었고, 작은 세면실도 하나 딸려 있었다. 아이를 보니 너무 지저분했다. 묶였던 손목과 목 에는 피까지 굳어 있었다. 옷을 벗기고 씻기는데 아이가 눈을 떳다. "까아악!!!" 소녀가 괴성을 질렀다. 당황한 엘란은 허겁지겁 아이의 입을 막았다. "헤치려는거 아니니까 놀라지 마라." 아이는 계속 버둥거렸다. 엘란은 실프를 불러 주위의 소리를 차단 했다. 그리고,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까아악! 이 변태 무슨짓이야???" " ." "이 추잡한 놈!" 몸을 웅크리고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엘란은 귀청이 따가왔다. "나 나쁜사람 아냐! 더러워서 씻길려고 그런 것 뿐이야." 아이는 소리지르는건 멈췄지만 의심스런 눈초 리로 노려 보았다. 아이는 잡혀 있는 동안 험한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늙은 변태에게 팔려서 온갖 수모를 받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당당하려 노력해도 소녀는 사실 겁에 질 려 있었다. "하하하 .깨어났으니까 혼자 씻어라." 엘란은 겸연쩍게 웃어주고는 세면실을 나왔다. 엘란은 여자아이와 같이 있는게 처음이다.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어쩐다, 고아원에 보낼 수도 없고.' 고아원은 만원상태였고 처우도 나빳다. 고아원에서 아이를 팔아 치 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빈털터리 처지게 키울 입장도 아니고.' 한 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아이가 나왔다. 몸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변태오빠 내 옷 어쨋어." " ." "내 말 안들려?" "나 변태 아니다." "미친놈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거 봤어?" 엘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앞으로 살일이 꿈만같았다. "옷은 저기 침대 위에 있다." 엘란은 말을 돌렸다. "잠깐, 옷은 더러우니까 내 ." 아이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 벗고 있어라 이거야?" "아니! 빨아 줄려고." 아이는 또 다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저거 진짜 변태아냐? 아~대륙최고의 미녀는 변태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구나.' 소녀는 스스로 비감한 심정이 되었다. "운디네." 물방울로 된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아이는 눈이 똥그랗게 변해서 지켜보았다. 공포도 멀리 사라져 갔다. "어어, 그거 뭐야."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야." 엘란은 소녀의 옷을 들었다. 운디네가 왔다갔다 하면서 불순물을 제거했다. "샐라멘더." 운디네를 보내고 샐라멘더를 소환했다. 엘란은 소녀의 옷을 말렸다. 스르륵! 샐라멘더에 놀란 소녀가 수건을 떨어뜨렸다. 엘란의 시선이 본의 아니게 소녀의 몸에 닿았다. "까아악!!!" 비명소리가 여관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여관주인까지 올라왔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이리 저리 훑어보았다. "당신 애 데리고 뭐하는거야?" 엘란은 변명하느라고 진땀을 뺏다. 엘란은 이리저리 둘러댔다. "애가 바퀴벌레를 보고 놀라서 ." " ?"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다. "하하하, 오늘 날씨 좋죠." "변태." 주인은 한 마디 하고는 내려갔다. 엘란의 얼굴이 똥씹은 표정이 되었다. 간혹 이런 손님이 찾아 왔다. 주인은 이런 놈들을 경멸했지만 자기가 나서서 해결 할 수는 없었다. 주인이 노예에게 무슨 짓을 하건 제삼자가 개입할 수는 없었다. 소녀는 어느새 옷을 입고 있었다. 엘란은 소녀를 데리고 밑으로 내 려와 식탁에 앉았다.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아라." 탁 탁! 여급이 엘란의 저녁식사를 던지듯이 놓았다. 경멸의 표정을 띠면서. 소녀에게는 동정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소녀는 허겁지겁 먹었다. 한 사흘은 굶은 것 같다. '저런 변태새끼 밥도 안 먹이고 그 짓거리만 한 모양이네.' 다시 엘란에게 뜨거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그날,엘란은 체하고 말았다. "어디 갈데는 있니?" 방으로 돌아온 엘란이 물었다. "없어요." 아이는 이제 상당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가까운 친척도 없고?" "없어요." "고아원에 데려다 줄까?" "고아원은 싫어요." 아이는 어렸지만 고아원의 실상은 들은게 있는 모양이었다. "휴우." 엘란은 한숨을 쉬었다. "날 왜 샀어요?" 아이가 물었다. "나도 옛날에 팔린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이나서." "용케 도망쳐 나왔네요?" "도망친건 아니다. 누가 사서 풀어줬다." "저도 풀어줄 건가요?" "갈때만 있다면 풀어주마."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갈데가 없는 모양이다. "그만 자자." 엘란은 아이가 앉아있던 침대로 갔다. "어딜 들어와요?" 아이가 도끼 눈이 되었다. "침대는 하난데 그럼 나는 어디서 자냐?" 아이는 턱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아주 단호한 몸짓이다. "변태하고 같이 잘 수 없어요." 아이는 단호히 말했다. 앙다문 입에서 곧센 의지가 느껴졌다. "휴." 엘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한숨을 몇번이나 쉬는지 모른다. 엘란은 행랑을 베고 바닥에 누웠다. "이름이 뭐냐?" "나탈리, 아저씨는?" "엘란, 그런데 오빠라고 부르면 안될까." 아이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죠, 변!태!오!빠!" 나탈리는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휴,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라." 나탈리는 금방 잠이 들었다. 엘란은 한 참을 뒤척거리다가 새벽이 되어서나 잠이 들었다. 같이 살게 걱 정스럽기도 하고 저녁 먹은게 얹혀서 속이 불편 하기도 해서였다. "아저씨 일어나요." 나탈리가 엘란을 흔들어 깨웠다. 오랜만에 늦잠을 잔 모양이다. "아침먹으러 가요." 부시시한 얼굴로 엘란이 말했다. "나탈리, 네가 가져오면 안 될까?" 다시는 내려가서 경멸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알았어." 엘란이 한 참 마나수련을 하고 있는데, 나탈리가 식사를 가지고 왔다. 엘란은 스프를 떠서 먹었다. "엑!" 엘란은 수프를 뿜어냈다. "뭐야, 식사투정 하는거야?" 나탈리가 한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음식에 간이 하나도 안 맞았다. 주방 장 나름대로의 응징이었다.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야?" 나탈리는 엘란의 정체가 궁금했다. "여행자." "백수구나." 나탈리가 간단히 정의 내렸다. "아저씨 어제 그거뭐야." "뭐?" "그 이상한 아이랑 도마뱀이랑 ." 어제 정령이라고 말했는데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아마 신기해서 엘란 의 말을 안 들었을 것이다. "아 정령을 말하는구나." "우와! 그게 정령이야?" "응." "다시 불러봐." 엘란은 정령을 불러서 하루종일 아이와 놀았다. 처음에는 나탈리가 심심할까봐 놀아주기 시작했는데 나 중에는 스스로 즐기고 있었다. 엘란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아이와 노는게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 다. 나탈리는 잠들어 있다. 정령과 하루종일 노는게 피곤했나 보다. '뭘해서 돈을벌지?' 정령사라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책임져야 할 사람까지 하나 생겼는데 빈털터리는 곤란했다. 왕실이나 귀족가에 정령사로 들어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 다. 천성적으로 높은 사람들에 거부감도 있었고 카일이나 일레이저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다. '길에서 써커스라도 할까?' 엘란은 별의 별생각을 다했다. 길에서 정령을 부리고 돈을 걷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엘란은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용병이 되면 되겠군.' 엘란은 자기가 내린 결정이 흡족했다. 결정을 내린 엘란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엘란(17) 6장. 아에게용병대 여관을 나서는데 추적 추적 비가 내렸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우산 살 돈도 없었다. 나탈리 때문에 비를 맞고 가기가 뭐해서 남의 집 처마밑에서 비를 피했다. "아저씨, 어디 가는거야?" "일자리 구하러." "무슨일 할 건데?" "용병." 나탈리가 빤히 쳐다 보았다. 아이들은 드래곤이나, 기사,공주,용병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며 놀기 마련이다. 가끔씩 마을에 들르는 음유시인의 노래를 듣기도 했다. 나탈리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고 용 병의 상이 명확히 잡혀 있었다. 나탈리가 생각하는 용병은 거대한 체구에 근육은 터질 듯 하고, 얼굴은 험상궂으며 전신에 흉터가 가득했다. 몸에 문신을 세기고 하나라도 좋으니 얼굴에도 반드시 흉터가 있 어야 한다. 엘란은 키도 작은 데다가 근육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흉터가 하나도 없었다. "죽고싶어서 그래! 그런일 하지마! 위험해!" "내가 약하게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강해." 나탈리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그럼. 난 정령사거든." "정령사들은 싸움잘해?" "아주 잘 싸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나탈리는 크게 인심쓰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 그럼 용병해."비가 가늘어지자 엘란은 나탈리를 데리고 용병길드를 찾아갔다. 용병길드를 찾아가 는데 한참을 헤맸다. 초행인데다 도시가 워낙에 넓어서 찾아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나탈리는 엘란에게 엎혀서 잠들어 있었다. 나탈리는 어린 소녀라 많이 걸을 수 없었다. 용병길드는 도시의 서쪽변두리에 위 치해 있었다. 평범한 이층 건물이었다. 문 옆에는 대낮부터 술에 취한 남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서로에 게 토했는지 옷에는 오물이 잔뜩 묻어 있다. 엘란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에는 탁자와 의자가 몇 개 있고, 카운터가 있었다. 길드안에 사람이라고는 카운터 뒤에 있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카운터에 엎드려 서 잠들어 있는데 밑에는 흘린 침으로 홍건했다. "흠흠!" 엘란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잠자던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길드마스터님 저 절대로 잔게 아닙니 어! 너 뭐야? 깜짝 놀랐잖아. 왜 몰래 들어오고 그래?" "몰래 들어온거 아닌데요." 자고있던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용건이 뭐요?" 겸연쩍게 웃던 사내가 상냥하게 물었다. 사내는 팔에 여자나체를 새기고 있 었고,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나탈리가 생각하던 용병의 모습 그대로다. "음." 나탈리가 깨어났다. 나탈리는 사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와, 괴물이다."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애가 워낙 어려서, 나탈리 죄송하다 그래." 나탈리는 순순히 사과 했다. "죄송합니다." "됐다, 용건이나 말해!" 아직도 기분이 나쁜지 사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용병이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혼자 뛸거요?" "예." "등록비는 5실버요, 일을 알선해주면 보수의 20프로는 길드에 상납해야해." 엘란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저 등록비도 내야 하나요?" "당연하지 누군 흙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돈이 없는데." "돈 벌어서 다시와." 사내는 다시 카운터에 머리를 뉘였다. 엘란은 곤란한 얼굴로 서 있었다. 드륵! 문이 열리고 거대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엘란이 이때까지 본 사람중 두 번째로 큰 사람이었다. 가 장 큰사람은 아직도 천하제일마법사란 깃발을 들고 땀을 뻘뻘흘리고 있을 것이다. "어이 빌보 또 자고 있어? 길드마스터한테 걸리면 치도곤 나려고 그래." 방금 들어온 거대한 사내가 말 했다. "아에게 이제 그만와라! 지겨워 죽겠다. 니들한테 일을 의뢰할 정신나간 놈이 어디 있겠냐?" 빌보가 지 겹다는 얼굴로 말했다. "한번 맡겨봐 이제는 자신있다고, 부하들 훈련도 충실히 시켰단 말야." "어쨌든 일없어." "오거가 말을하네." 나탈리가 엘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소리가 커서 모두에게 들렸다. 아에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보가 껄껄웃었다. "나탈리 말조심해." 엘란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농담한거야." "다시 또 올게." 사내는 돌아서서 나갔다. "어이, 돈 없으면 저사람 따라가. 용병대 대장이야." 기분이 좋아 진 듯 빌보가 엘란에게 인심쓰 듯 말했 다. 급히 따라나간 엘란은 아에게의 뒤를 따랐다. 화가 난 듯 보여서 말걸기가 어려웠다. 아에게는 오늘,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는 비둘기가 머리에 똥을 싸더니 인제는 밤톨만한 것 까지 자신을 놀리고 있다. 아에게는 체이어에서 태어났다. 체이어는 별 볼일없는 지방이었다. 바닷가에 접해있어서 짠 바람에 농사 도 잘 안됐고, 토지질도 형편없었다. 카르덴처럼 철이나 석탄이 나는 것도 아니고 특용작물 재배도 거의 되지 않았다. 바다에 암초가 많아서 항구도 들어설수 없고 고기잡이도 영 시원치 않았다. 한 마디로 별 볼일 없는 지방이었다. 아에게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여서 영주의 경비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비대에서 편하게 빈둥거리던 아에게는 영주에게 말 실수를 하는 바람에 쫓겨났다. 아마 이맘때일 것이다. 영주가 세금을 더 걷어야겠 다고 말했을 때, '영주님 주민들 좀 그만 괴롭히세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천운이었다. 아에 게가 죽지 않고 경비대에서 쫓겨나는 것만으로 그친 것은. 영주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 었을 것이다. 좋은 날에 피 볼 수 없다고 영주가 살려준 것이다. 아에게는 더 이상 체이어에서 살 수 없 어서 롬바르드로 떠났다. 친형제처럼 지내던 그린, 핸슨샌슨쌍둥이형제와 함께. 그들도 좁은 지방에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우물안 개구리식으로 세상을 몰랐다. 그 황량한 변경지방에서 으스대던 힘을 믿고 올라와 5골덴이나 가입비를 주고 아에게용병대를 만들었다. 수도까지 올라 올 때 만났던 사 람들까지 용병대에 가입시켰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들만한 힘을 가진사람들은 많고도 많았다. 이들을 믿고 일을 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길드에 사정사정해서 첫 청부를 맏고 상인을 호위하고 떠났다가, 그 길로 산적들한테 걸렸다. 힘 한번 못 써보고 그대로 당했다. 무기까지 모두 뺏기고 무릎 꿇고 울고불고 매달려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들의 추태는 금방 소문이 났고, 더 이상 일을 맡을 수 없었다. 돈이 떨 어져 오갈데가 없어진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노가다를 나갔다. 의외로 노가다 일은 잘했다. 힘도 세 고 손재주도 좋은데다 성실했다. 준공에 쫓기는 사람들은 아에게를 불렀다. 그들은 그 계통에서 노가다 용병대로 유명해졌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아에게용병대 대신에 노가다 용병대로 불렀다. 아에게는 터덜터덜 걸었다. 도무지 용병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에게는 용병으로 멋지게 살고 싶지 노 가다로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에게용병대는 용병길드에서 대단히 멀었다. 오늘 따라 숙소까지는 왜 이렇게 먼지. 아에게는 오랫동안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대장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용병대에서 총무일을 맡아보는 그린이 물었다. 돌아보니 용병길드에서 자신을 놀린 계집아이를 업고 사내가 여기까지 따라와 있었다. "어, 당신 왜 따라왔어?" "용병대에 들려구요." "뭐야 신참이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 없어 딴데가서 알아봐." 아에게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오거라고 놀려서 삐졌구나. 미안해 사과할게." 나탈리가 말하자 주변에서 킥킥거렸다. "얘 사과할거 없다 오거를 오거라고하지 트롤이라고 하겠냐." 그린이 말하자 모두들 폭소를 터트렸다. 아에게가 그린에게 소리쳤다. "시끄러!" 주변에서 한마디 씩 하는 바람에 왁자해졌다. "받아들입시다." "그래 받아들여." 아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용병대가 시험도 없이 어중이 떠중이를 받아 들인 단 말인가. 용병들의 과거는 모른척 한다해도 실력은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의 생각은 달랐다. 대원들은 용병일을 거의 체념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에게처럼 용병일에 강한 미련이 없었다. 자기들이 의뢰인이라도 이런 용병대에 일거리를 맡기지는 않는다. 노가다에 신참 받아들이는데 까다롭게 굴 이유 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모두들 찬성하자 아에게도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받아들이면 되잖아." 엘란의 가입이 결정되었다. "좋았어. 새로운 대원도 생겼는데 그냥 넘어갈수 없지 파티다. 핸슨 샌슨 수레 끌고가서 술이랑 고기 좀 사와." 그린이 말했다. "알았어." 두사람이 나와서 대답하는데 쌍둥이였다. 핸슨 샌슨은 작은 수레를 끌고 내려갔다. 용병대는 산 속의 공터에 있었다. 오두막이 네채 있었고 천막도 여러개 있었다. 중간에는 공간이 있었는데 파티하 기 딱 알맞았다. 술과 고기가 오자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흥겹게 놀았다. 이들은 고달픈 일상사에서도 순간순간을 즐길줄 알았다. 이런 기쁨도 없으면 힘겨운 세상 살아 갈 힘이 나지 않을 것이다. 파티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나탈리는 아에게가 주는 술을 먹고 일찌감치 뻗어버렸다. 아에게는 덩치가 산만하긴 하지만 오거같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마가 좁고 턱이 넓었으며 코가 컷다. 눈은 왕방울 만해서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을 것 같았다. 그린은 용병대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용병답지 않게 곱상하게 생겼다. 인상이 가장 험악한 것은 핸슨샌슨 쌍둥이 형제였다. 눈이 옆 으로 쫙 째져서 상당히 차갑게 느껴졌다. 짝귀, 밤톨, 들창코는 별칭 그대로 재미있게 생겼다. 셋다 소매 치기 출신이라했다. 길드원중 누군가가 공작영애의 주머니를 털었다가 불벼락을 맞았다고 한다. 셋을 제 외한 나머지는 모두 잡혀서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렸다고 했다. 겁을 집어먹은 짝귀 밤톨 들창코는 그날 로 손을 씻었다. 마음편하게 일해서 먹고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들의 본명은 아무도 몰랐다. "모두 일어나." 새벽같이 일어난 그린은 동료들을 깨웠다. 한참을 실랑이 한 끝에 모두 일어났다. 모두들 연장을 챙겼다. 엘란은 이상했다. 연장을 챙긴다기에 소드나 방패 메일을 챙기는 줄 알았더니 망치 톱 대패 못 같은 것을 챙기고 있었다. 망치와 톱은 그렇다치고 대패하고 못은 어떻게 쓰겠다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 같은건 사용 안 합니까? 못은 어떻게 써요?" 엘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린 그런거 안 써." "모르고 들어왔나 본데 우린 용병일 못해. 청부가 들어와야 말이지." "우린 노가다 용병대야." 여기저기서 한 마디식 했다. 엘란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취합해서 결론을 내렸다. "용병대가 아니라 노가다 집단입니까?" 엘란이 다시 물었다. "바로 그거야." 그린이 답했다. "정답이다." 여기저기서 긍정의 소리가 들렸다. 아에게는 새벽부터 속이 상했다. '이 자식이 아침부터 속을 긁네.' 아에게는 용병대가 노가다 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들어온 일 없냐고 빌보에게 찾아갔던 것이다. 사실 엘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도 노가다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때문이었다. "얘는 어쩌지?" 샌슨이 나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데려가자, 어린애를 산속에 혼자 둘 수 없잖아." 핸슨이 바로 대답했다. 나탈리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나탈리를 엘란이 업었다. 노가다용병대는 새벽별을 보면서 일터로 갔 다. 엘란은 용병대에 들려다가 노가다로 취직하고 말았다. 엘란은 헛 웃음이 자꾸 나왔다. 어쩌면 위험 한 용병일 보다는 노가다가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엘란(18) 공사현장은 멀었다. 한 참을 걸어야 했다. 아침으로 가져온 빵을 먹으면서 걸었다. 나탈리도 엘란의 등 에서 빵을 우물거렸다. "힘 안들어?" 오랫동안 나탈리를 업고 있는 엘란이 신기했는지 그린이 물었다. "제가 이래뵈도 한 힘 합니다." "잘 됐네, 난 비리비리하게 보여서 노가다 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했거든. 이런 일은 처음인가?" "예." 그들이 빵을 먹으면서 걷는 동안 성벽에 도착했다. 일터가 시내에 있는 모양이었다. 롬바르드로 들 어가는 관문과는 달리 시내로 들어갈 때는 검문이 철저했다. 두명이 다가와 검문을 하는 동안 여섯명의 병사들이 지켜 보았고 뒤에는 말을 탄 기사가 감독을 하고 있었다. "못보던 얼굴인데?" 가슴에만 갑옷을 입은 병사가 물었다. "새로 들어온 대원입니다." "그래." 경비대는 엘란의 신분증을 꼼꼼히 검사했다. "저 애는 뭐야?" "제 동생입니다." 엘란이 대답했다. "통과." 성벽은 높았다. 성벽위에는 많은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시내 안은 별천지였다. 길에는 모두 청석이 깔 렸고, 집들은 커다란 석조 건물이었다. 상업지구마저도 고급스러웠다. 시장에는 노점이나 좌판이 없었고 모두 넓은 점포로 이루어졌다. 길에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길가에는 가로수를 심어놓았다. 플라 타너스가 시원하게 자라고 있었다. 엘란도 여행하는 동안 여러 도시를 방문해 봤지만 이렇게 호사스러 운 도시는 처음이었다. "근사하지, 나도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짝귀가 엘란에게 말했다. "꿈깨, 여기 살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노임받는대로 하나도 쓰지않고 1000년은 모아야 할거다." 들창코가 면박을 주었다. "꿈도 못꾸냐?" 짝귀가 말했다. 나탈리도 눈이 동그래져서 여기저기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부산스럽네?" 그린이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이 많은 것도 이상했지만 돌아 다니는 사람들의 신분도 범상치 않았다. 일견하기에 대단히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많았 다. 엘란은 이렇게 멋진 마차들은 처음보았다. 귀족이 타고 있는게 분명했다. 귀족들은 이렇게 이른 아 침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말을 탄 기사들도 많았다. 창을 든 병사들도 꽤 많이 이동하고 있었 다. "무슨 일 난거아냐?" 아에게가 말했다. "일은 난 것 같은데, 우리같은 사람들이 신경 쓸 것 없잖아." 밤톨이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왕이 바뀌든 말든 하층민의 삶은 언제나 같았다. 고달프고 배고프고. 시내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은 후 에 거대한 장원에 도착했다. 저택의 담이 성벽같았다. "이렇게 큰 집은 처음 봐요." 엘란이 그린에게 말했다. "프르덴틀 후작가야. 삼황자의 장인이라고 들었어. 말 한 마디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야." "여기서 무슨일을 하는데요?" "성벽보수." 담장은 성벽보수라 부를 만큼 훌륭했다. 다르넨이 쌓던 성벽보다도 더 크고 튼튼했다. 현장에는 아에게용병대 20명-나탈리까지 포함해서- 이외에도 80명가량의 인부가 있었다. "이 사람은 뭐야?" 공사감독관이 물었다. "새로온 대원인데 일은 곧잘 합니다." 아에게가 대답했다. "애는 왜 데리고 왔어?" "애 볼사람이 없어서, 얌전한 아이니 방해는 없을 겁니다." "성가시게 굴면 쫓아낼거야." 감독관은 얼굴을 찡그렸다. "예. 급료는 저희들과 똑같이 주실거죠?" 아에게가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똑같이 줄테니까 그런 표정 좀 짓지마! 원 참, 덩치는 산만해서 소름이 다 끼치네." '내 표정이 어떻다고 그래?' "알겠습니다." 생각과 다르게 공손히 대답했다. 확실히 저 놈이 들어온 후 속상한 일이 많아졌다. 일은 곧 시작되었다. 엘란은 성벽으로 벽돌을 져 날랐다. 다르넨영지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돌을 져나르다가 넘어졌고, 그래서, 파보가 죽었다. 엘란은 언제고 영지에 가서 피터를 손 볼 것이다. 우두두두두! 말을 탄 기사들이 장원을 나섰다. 그중에 엘란이 아는 사람도 있었다. "저사람 누굽니까?" 엘란이 그린에게 물었다. "누구?" "선두에서 말타고 달리던 기사 말입니다." "아~ 그사람, 막스 데 프르덴틀이야. 후작의 둘째 아들, 삼황자비의 동생이야. 듣기로는 대단한 검사래. 철혈기사단 부단장이야." '대단한 집안 아들이었군.' 막스는 엘란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카르덴의 무기점에서 봤던, 이상하 게 적대감이 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30골덴짜리 검을 아무렇게나 사던 사람. 나탈리는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감독관은 엘란이 일하는 것을 보고 흡족해 했다. 검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마나수련을 한 엘란에게 벽돌 나르는 것 쯤은 쉬운 일이다. 엘란은 지치지 않고 벽돌을 져 날 랐다. 동료들도 엘란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 "황태자가 위독한게 확실하오?" 타는듯한 붉은 머리의 장년인이 물었다. 불타는 것 같은 붉은머리는 엘 리오트왕가의 특징이었다. 말을 하는 장년인은 미카엘 드 카미엘 엘리오트삼황자다. "헬레나신전의 고위 성직자가 확인해 준 사실입니다. 오늘을 넘기지 못 할거랍니다." 왕실정령사 시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들이 모여있는 장소는 삼황자궁의 지하 밀실이었다. 밀실에는 삼황자의 측근들이 모여 있었다. 상급정령익스퍼터 시드, 유력귀족이자 삼황자의 장인인 프르덴틀후작, 후작의 아들인 철혈 기사단 부단장 막스 데 프르덴틀, 황제의 동생 메테르니히 드 패리시 엘리오트공작, 철혈기사단 단장 가 빈백작, 궁정대신 욀무트백작이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드릴 지경이었 다. "후작 어떻게 하는게 좋겠소?" 삼황자가 프르덴틀에게 물었다. "기다려야죠, 다른 수는 없습니다." "마르시앙이 어떻게 나올까?" 메테르니히공작이 물었다. 마르시앙은 이황자의 이름이다. "그 쪽도 별수 없을 겁니다." 시드가 답했다. "황태자도 불쌍하군, 그냥 편하게 내버려 두면 좋았을텐데." 공작이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가 가 장 사랑한 아들은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건강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선천 적으로 건강이 나빴다. 후사도 못 남기고 병석에 눕자 사태가 심각해졌다. 귀족들과 권력자들이 차기 황 권을 놓고 양분되 버린 것이다. 황제가 사태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누구를 차기로 지정하 던 피바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누군가의 양보를 종용하며 이때까지 끌고 온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는 쉽게 죽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내전에 불을 당길 것이다. 마지막 10년간 황태자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의 죽음을 막고자 고위사제와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었다. 회복은 기대할 수 없는 고통의 연 장이 계속 되었다. 1년전부터는 제발 죽게 내버려두라고 간청까지 하였다. 오늘 드디어 황태자는 지옥같 은 고통에서 해방이 될 것이다. 공작같은 잔인한자가 황태자를 측은하게 여겼다는 것은 그의 고통이 얼 마나 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황자도 대책회의를 하겠군." 미카엘이 말했다. "감시자를 붙여두었습니다. 참석자들은 곧 파악될겁니다." 욀무트백작이 말했다. "내전이 붙으면 카를후작은 어떻게 나올까?" "그때도 중립을 지킬겁니다." "그자만 넘어오면 끝날텐데." 마카엘이 아쉬운 소리를 했다. 카를후작은 왕국의 유일한 마스터이다. 십존의일인이며 국왕친위대인 붉은도끼단을 이끌고 있었다. 붉은 도끼단은 촌스런 이름과는 달리 왕국제일의 무력 집단이었다. 왕국국방력의 20퍼센트를 담당하고 있었 다. 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기사단으로도 유명했다. 지금의 황제는 우유부단했다. 누구든 한 명을 지명해서 피를 흘릴지라도 수습을 해야했다. 그게 피해를 줄이는 첩경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러지 않 았다.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이기 싫었던 것이다. 카를후작은 두 세력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추였다. 사실상 내전 방지의 안전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안전판도 효용을 다해가고 있었다. "황제의 건강은?" "좋지 않습니다. 1년은 넘기지 못할 겁니다." "확인된거요.?" "이것도 헬레나신전의 고위사제가 확인해준 겁니다." 빛과 풍요의 여신 헬레나를 섬기는 신전은 엘리오 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교단이었다. 특히 치료술이 뛰어나서, 왕실의 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빈백작 기사단을 수도 주위에 주둔시키시오." 푸르덴틀후작이 말했다. "어디다가 주둔시킬까요?" 가빈백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 영지가 어떨까?" 공작이 말했다. 공작의 영지는 수도와 붙어있었다. "그게 좋겠군." 삼황자가 말했다. 수도에는 붉은도끼단을 제외한 기사단이 주둔 할 수 없었다. 반란을 방 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측 귀족들의 영지에 전령을 보내시오. 명령이 떨어지면 모든 군사력을 몰아서 수도로 향하라고. 후 작은 용병들을 모으시오, 공작도 가병을 준비하고. 욀무트백작은 아버지의 동태를 살피고 특이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시오, 중립적인 대신들도 포섭하고. 가빈백작과 처남은 철혈기사단을 단단히 준비하시오, 가장 큰 전력이 될테니. 시드님도 모든 제자를 불러 들이세요, 곧 일이 터질테니. 모두들 정신 바짝차리 시오, 한 발만 잘못 삐끗해도 천길 낭떨러지로 떨어질테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했다. "참, 광법사를 포섭하러 간 것은 어떻게 됐나?" "잘 안됐습니다." 시드가 대답했다. "혹시 형님께 붙은거 아냐?" 두 세력이 팽팽한 상태에서 광법사가 가담하면 균형이 기울어질 것이다. 광 법사휘하에는 많은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제자들 말로는 발칸대제의 유산을 찾아헤맨 답니다." "허, 그자 정말 미친거아냐? 천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헤매고도 못 찾았는데 이제 와서 찾을 수 있 을 것 같아?" "혹시나 해서 제자를 붙여놨습니다." 대제는 사후 아무도 모르게 옮겨졌다.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덤에는 드레곤이 저술한 마법서와 드래곤이 만든 마법검, 수많은 금은 보화들이 있다고했다. 대제사후 마법검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대제의 유산을 믿었다. 최초의 통일제국 황제가 잠든 무덤에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대제의 검이 들어있다는 소문이었다. 그검은 광룡캇셀프레임의 맹약이 담겨 있다했 다. 그 검만 있다면 대륙은 다시 통일될 수 있을 것이다. 백년간 대제의 무덤을 찾을려는 노력은 어마어 마했다. 모든 산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산들이 수난을 당했고, 산을 보금자리로 삼는 수 많은 동물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그 바람에 몬스터들도 피해가 컸다. 그러나, 어디에도 무덤은 없었다. 200년이 지나자 시들해졌고, 500년이 지나자 찾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1000년이 흐른 지금 무 덤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광법사는 대제의유산으로 복수를 이루려고 하였다. 유산만 얻으면 복수는 어 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똑똑! 누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중년기사가 들어와서 공손히 인사하고는 말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방금 숨을 거두셨습니다." 방안에서 서서히 흥분이 고조되었다. 엘란(19) "폐하, 고정하십시오." 카를후작이 울부짖고 있는 황제를 달랬다. "으흐흐흑 . 내 잘못이다! 편하게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 울부짖던 황제가 결국 정신을 잃었다. "시종장! 주치의를 불러라." 카를이 명령했다. 잠시 후 왕실의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신중하게 황제를 진찰하던 의사가 말했다. "탈진해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그냥 주무시게 두시는게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라! 얼마나 사시겠나?" 의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길어야 일년입니다." "음!" 카를이 침음성을 발했다. "잘 지켜보게." 의사에게 명령을 한 카를은 왕의 침전을 나와 기사단장실로 향했다. "부관들은 불러라!" 카를이 비서에서 명령했다. 부관들은 모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피클백작, 아테보로자작,니기어남작이 들어왔다. "소식은 들었겠지?" "예." "황제도 일년은 못넘긴다는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카를후작은 대답없이 한 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황자가 대통을 잇는게 낫지 않을까요?" 니기어남작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니기어남작 그게 무슨 망발인가? 대통을 잇는다면 인품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삼황자께서 적임이야." 피클백작이 당장 반박하고 나섰다. "피클백작 모르는 소리하지 마시오 삼황자는 어릴 때부터 성격에 문제가 많았소, 장난삼아 말목도 베지 않았소." "음흉하게 뒤로 호박씨 까는 이황자보단 낫소." 피클백작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두분다 그만 두십시오. 단장님 아무래도 무슨 수를 내야 겠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전을 피할 수 없 습니다." 아테보로자작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너무 늦었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결정할건 한가지다. 둘중 누굴 미느냐, 아니면 끝까지 중립 을 지키는가." 카를후작이 말했다. "삼황자가 낫습니다." 피클백작이 말하자 얼른 니기어남작이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이황자가 났습니다." "모두 조용하라! 아테보로 그대가 말해보라." "중립을 지키는게 낫겠습니다." 아테보로는 단호히 말했다. "이유는?" "우리 붉은도끼단은 엘리오트왕국의 주춧돌입니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방지하려면 내전에서 발을 빼고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 기사단은 한 번도 권력다툼에 끼어든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끼어들면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됩니다." 카를이 아테보로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피클백작 자네는 삼황자를 맡아서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라! 니기어남작은 이황자 에게 전하고, 줄을서는 행동은 하지말게, 아테보로 자네는 성의 수비를 강화하라! 특히 황궁과 이황자궁 삼황자궁의 수비에 만전을 기하라!" "예, 알겠습니다." ********************************* 엘란이 황태자의 죽음을 알게 된건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서였다. 성을 나서는데 성앞의 광장에 많 은 사람들이 모여있는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천성적으로 참견하고 다른데 끼이기 좋아하는 아에게가 얼른 그리로 갔다. 나머지는 피 곤해서 다른데 관심이 없었으므로 계속걸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에게가 알려줄 것이다. 나탈리는 올 때와 마찬가지고 엘란의 등에 엎혀있었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어린아이를 걸릴수가 없었다. "아저씨 우리도 가보자." "대장이 갔으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거야. 나중에 오거든 들어." "싫어, 지금 알고 싶어. 가자, 응?" "안돼." "잉. 궁금한데." 아에게가 돌아온 것은 저녁을 먹을려고 할 때였다. "하여간에 먹을 복은 있다니깐, 뭐 먹을려고 하면 귀신같이 온다니깐."짝귀가 말했다. "저리 비켜봐." 그린의 옆자리로 파고들면서 아에게가 말했다. "황태자가 죽었다나봐." "황태자가 죽었대?" 그린이 되물었다. "오늘 낮에 죽었다는군, 그래서 아침에 그렇게 부산스러웠어." "다음 황태자는 누가된데요?" 엘란이 물었다. "아무나 되겠지." 그린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아에게가 말했다. 엘란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무슨 일이 있건. 민초의 삶은 그대로인 법이다. 착취하는 자가 바뀌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상관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엘란에게는 더욱더. 황태자의 죽음은 일주일 후 효력이 바로 나타났다. 빌보가 찾아온 것이다. "자네가 웬일인가?" 아에게가 용병길드원 빌보를 살갑게 반겼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산적도 아니고 무슨 용병대가 산속에 있냐?" "돈이 없는데 별수 있냐? 여기서 지내는데도 집세를 얼마나 많이 드는데, 그건 그렇고 웬일이야?" 아에 게가 은근하게 물었다. "대원들 훈련 많이 시킨거 확실해?" "그럼, 이제 산적쯤은 문제없어." 아에게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소상인들이 융커산맥까지 가는데, 용병이 필요해서, 할텐가?" "당연히 하고말고." 아에게는 기뻐서 소리쳤다. 이게 얼마만의 기회인가. "내일 아침 목로주점 앞으로 나와, 의뢰비는 수수료를 제하고 8골덴이야." "알았어." "그럼 내일봐." "어이 빌보 잠깐!" 내려가는 빌보를 그린이 불렀다. "뭐야, 빨리 말해! 요새 바쁘단 말야." "무슨 속셈이야, 노가다용병대에 일거리가 들어올리 없잖아?" "노가다용병대로 부르지 말라니깐." 아에게가 정색을 한다. 그린은 아에게를 무시하고 빌보를 빤히 보았다. "황태자가 죽은거 다들 알지?" "그거야 들었어, 근데 그거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지금 귀족들이 용병들을 마구잡이로 고용하고 있어. 그것 때문에 상인들이 용병을 못구해서 난리들이 야, 그래서 여기까지 온거고, 어쨌든 내일 늦지마. 그럼 난 그만 간다." 빌보는 자기 말마따나 무지하게 바쁜지 휑하니 사라졌다. "귀족들이 용병들은 왜 구한데?" 핸슨이 모두에게 물었다. "다음 황태자가 누가 됐죠?" 엘란이 도로 물었다. "아직 못 정한 모양이던데." 아에게가 대답했다. 이런 소식은 아에게가 빨랐다. 황태자의 죽음에 뒤따르 는 용병의 고용. 뻔한 일이었다. "왕권 싸움이군. 잘뭇하면 피보겠는데요." 엘란이 핸슨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다음 왕위를 두고 싸움이 벌어져서 용병을 구한다. 이거야?" "아마 그럴거예요."엘란이 답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에게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했다. "꿈도 꾸지마요. 우리같은 삼류용병단이 그런데 발들였다간 목 떨어지기 여사니까." 엘란이 나직히 경고 했다. 어쨌든 아에게에게는 신나는 날이었다. 대원들도 모두 8골덴에 혹해 있었다. **************** 다음날 목로주점에 당도했을 때 상인들은 이미 떠날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자경단이나 큰 용병대를 구 할수 없는 소상인들이 연합해서 용병을 고용한 모양이었다. "당신들 정말 일 제대로 할 수 있오?" 상인대표가 불안한지 물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우리만 믿으십시오. 옛날의 용병대가 아닙니다. 산적이면 산적 용병이면 용병 문제 없습니다." 아에게가 호기롭게 외쳤다. "어머, 저자식이 여기 웬일이야."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젊은여자가 엘란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 다. 엘란은 의아했다. 아는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보고서야 엘란은 생각이 났다. '이런,젠장!' 나탈리와 묵었던 여관에서 일하던 아가씨였다. 엘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자가 큰 소리 로 떠들어댔다. 들어볼 것도 없이 뻔한 내용이다. 모두의 시선이 엘란에게 꽂혔다. "오햅니다. 오해." 엘란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흥, 그러니까 노예로 팔리는 걸 불쌍하게 생각해서 동생 삼을려고 샀다, 이거죠?" 아가씨가 엘란에게 말했다. 엘란은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예, 그겁니다." "얘, 사실대로 말해봐 이 아저씨랑 밤에 뭐해?" 처녀가 말하기 뭐한 내용이라 얼굴을 붉히면서 물었다. "아저씨랑 밤에 같이자." 나탈리가 순진한 얼굴로 답했다. 모두의 경멸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용병대마저 슬슬 피했다. 엘란은 괴로웠지만 여정은 순조로웠다. 아갈리아산맥을 넘는 것은 안전했다.수도근처라서 치안이 좋았던 것이다. 문제는 융커산맥이었다. 워낙 넓고 험준한 산맥인데다가 아스가르드와의 국경이 있어서 산적토벌에 어려움이 많았다. 엘리오트가 산적토벌에 나서면 아스가르드로 숨고 반대고 아스가 르드가 토벌에 나서면 엘리오트에서 숨었다. 합동토벌에 나서도 워낙 산세가 험해서 구석에 숨으면 찾 기가 어려웠다. 두나라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합동토벌도 어렵긴 했지만. 용커산맥에 다가가자 모두들 조 심스러웠다. 나탈리는 아가씨와 한 마차를 썼다. 아가씨는 쥬디라고 했는데 집에 다녀오려고 상인틈에 끼었다. "이런 젠장!" 마지막 고개만 넘으면 지척인데, 수상한 사람들이 고개를 막고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저번에 살려 달라고 울고불며 매달리던 오거아냐?" " ." "어떻게 좀 해보시오." 아에게가 가만히 있자 불안했는지 상인대표가 채근했다. "좋은 말 할 때 비켜 라." 아에게가 더듬거렸다. "오늘은 울어도 그냥 안 보내준다." "하하하하~~." 산적들이 모두 비웃었다. 산적들은 대충봐도 40명은 넘었는데 모닝스타 할버드 배틀엑스 바스타드소드등 한 눈에 보기에도 무시 무시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용병단은 모두 노말소드를 들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겁에 질 려 있는게 보였다. "휴." 엘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나서길래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완전히 오합지졸이었 다. 시골경비대 소매치기 농부출신들이 싸움을 잘 할 리가 없었다. 실력도 딸리는 데다가 기세에서도 밀 리고 있어서 싸움이 붙으면 일방적으로 도살당할게 분명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고 살인도 해 본 사람이 잘하기 마련이다. 엘란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에게는 도대체 어쩌자고 용병이 되었단 말인가. "슬립." 엘란은 나탈리를 재웠다. 엘란은 조용히 아에게 앞으로 나섰다. "그냥 돌아 가세요." "이건 또 뭐야. 울보애인인가?" 다시 산적들이 웃었다. "실프." 엘란은 정령을 소환해서 두목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보냈다. 실프가 산적에게 다가갔다. 바람이 산적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비틀었다. 으드득! 산적의 목뼈가 돌아갔다. 완전한 즉사였다. 모두들 한 참을 멍해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어, 두목이 죽었다! 모두 쓸어버려." 두목의 뒤에 있던 쥐상으로 생긴 사내가 말했다. "이야!" 함성은 용기를 돋궈주기 마련이다. 산적들이 엘란에게 달려들었다. "실프." 실프넷을 더 소환한 엘란은 정령을 칼날같이 바꿔서 보냈다. 스엉스엉!!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산적 다섯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온몸이 잘려진 채 쓰러졌다. 끔 찍한 장면이었다. 모두들 멈춰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후다닥! 뒤에 있던 산적이 도망가자 썰물이 빠지듯 모두 도망쳤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웩!" "웩." 여기저기서 구역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란은 첫 살인을 했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어쨌든 아 에게용병대는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아에게용병대에게 일거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엘란은 유명해 졌다. 노가다용병대의 변태정령사로. 엘란(20) 엘란이 변태가 아닌 것은 용병대 모두가 알게 되었다.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밖에는 여전히 변태정령사로 알려졌다. 용병대모두가 엘란을 농담삼아 변태정령사라고 불렀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진담 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같아 다녔던 상인들의 증언도 한 몫을 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 아다니면서 변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에게용병대는 번 돈으로 석궁을 샀다. 익히기가 쉬웠고 타격력이 컸다. 실력이 변변치 않은 용병들에 게는 최상의 무기였다. 떨어져서 공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아에게용병대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 다. 유명한 용병대는 모두 이황자나 삼황자측 귀족들에게 고용되었다. 값이 싼 노가다용병대에는 의뢰가 밀려들었다. "망치가 뭐야 망치가! 차라리 도끼로 하자 응?" 아에게가 투덜거렸다. 어느정도 용병대접을 받게된 아에 게는 유명용병들처럼 문장을 만들어서 표시하자고 주장했다. 엘란은 천하제일마법사(?)의 깃대가 생각나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용병들은 좋아했다. 그래서, 결정된게 망치였다. 노가다용병대에 망치만 큼 어울리는게 없다는 의견이다. 아에게는 영 내키지 않았다. 잘 나가는 지금 수치스런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망치를 상징으로 삼는게 마음에 안 들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노가다용병대로 불렀다. 그래서 망치 를 결사반대했다. 아에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석궁과 갑옷의 가슴부분에는 망치가 그려졌다. 깃발도 하 나 만들었다. 깃발을 들고 갑옷을 입고 석궁을 둘러매자 제법 용병티가 났다. ***************** 탁탁!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엘란은 장작을 하나 더 넣었다. 불침번을 서고 있다. 중소상인연합의 의뢰를 받아 상단을 보호하고 있는 중이다. 나탈리는 엘렌의 앞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탈리는 언제나 따 라다녔다. 아에게용병대의 마스코트였다. 모든 용병들이 나탈리에게는 꼼짝을 못했다.냉막해 보이는 핸 슨샌슨형제도 나탈리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용병들은 모두 엘란보다 나이가 많았다. 보통 삼십대 초반에서 후반이었다. 사는게 팍팍해서 그 나이 먹도록 장가도 못가고 노총각으로 늙고 있었다. 나탈리 는 그들에게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귀엽겠는가. 나탈리는 용병들과 함께 매일 재미있게 놀았다. 신나는 날의 연속이었다. "실피드." 엘란은 가만히 정령을 불렀다. 엘란은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중급정령은 말을 할 수 없다. 상 급정령이상만이 가능했다. 엘란은 불가능한걸 알면서도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만의 유희였다. 외롭 게 혼자 살면서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정령들이 꼭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펑펑! 정령이 먼 곳의 소리를 실어왔다.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냥 무시할까 하는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 였다. 호기심이 치민 엘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린." 엘란은 그린을 조용히 깨웠다. "벌써 시간됐어?" 다음번 불침번은 그린이었다. "아뇨, 볼일 좀 볼려고 일찍 깨웠어요." "그래." 그린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불침번을 섰다. 그린이 일어나서 불침번 서는걸 보고 엘란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상당히 멀었다. 조심조심 다가가서 보자 한명의 마법사를 수십명의 병사들이 공 격하고 있었다. 마법사 뒤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주변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파이어 볼." 불덩어리가 병사들에게 작렬했다. "악!" 불이 붙은 병사가 이리 저리 뒹굴었다. 뒤에서 구경만하고 있던 기사들이 바스타드소드를 빼들었 다. 기사는 다섯이었다. 기사들은 곧장 싸움에 가세하지 않았다. 검을 뽑아들고는 외쳤다. "석궁준비." 기사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다 당황했다. 만만찮은 상대였다. 병사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 다. 피융! 피슝! 상방에서 쿼렐이 날아들었다. "실드!" 마법사가 실드를 쳤다. 쿼렐이 실드에 부딪쳐 떨어져 내렸다. 마법사는 서서히 지쳐 갔다.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기사들이 신경을 분산시켰다. 병사들이 다시 쿼렐을 장전하고 있었다. 쿼렐을 자꾸 날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파이어 버스터!" 병사들 사이에서 불의 폭발이 일어났다. "으악!" 직통으로 맞은 병사들의 사지가 떨어져 나갔다. "악!" 불이 붙은 병사들이 뒹굴었다. 그 틈을 기사가 놓치지 않았다. 기사가 가세하자 전세가 역전되었 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거리를 허용한 마법사는 기사의 상대가 아니었다. 기사들의 검이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소서러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에어실드!" 마법사가 보호막을 쳤다. 검이 에어실드를 두들겼다. 팡팡! 압축된 공기와 마나를 머금은 검이 충돌했다. 두명이 검을 후려치고 나머지 셋은 주위에 둘러서 있다. 두들기다 지치면 교대를 했다. 차륜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엘란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파이어 버스터를 시전될 때 얼핏 본 얼굴이 이스마엘 단테스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엘란은 잠시 고 민하다 실피드를 소환했다. 달이 구름 사이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스마엘의 얼굴이 들어났다. 이스마엘 이 맞았다. 엘란은 조용히 접근했다. 마법사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기사들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바람의 칼날." 실피드 둘이 희미해지더니 희긋희긋한 칼날이 되어 날라갔다. 그냥 보기에는 흰선이 여 러게 죽죽 그려지는 것 같았다. 불시의 기습이었다. 지잉! 세명의 기사가 잘려 나갔다. 엘란은 휘몰아쳤다. 나머지 둘을 들어올려서 몸을 뒤틀어 버렸다. 으드득! 몸이 움직일수 없는 각도로 꺽였다. "매직애로우." 실드를 푼 이스마엘이 나머지 병사들을 공격했다. 엘란이 가세하자 병사들은 금방 처치되 었다. "헉헉 , 고맙네 또 목숨을 빚졌군." 이스마엘은 대단히 지쳐 있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 올라 있었고 식은 땀을 흘렸다. "왝왝!" 뒤에 있던 사람이 토했다. 긴장이 가시자 주변의 참혹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주변은 참혹했다. 찢기고 불탄 시체들이 즐비했다. 엘란은 정령을 불러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묻었다. 어느새 달이 기울 어지기 시작했다. "인사하게 내 딸이야." 쪼그려 앉아 토하던 여자는 진정이 되었는지 일어났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망토를 벗고는 인사를 했다. 엘란은 멍해졌다. 여자는 아름다웠다. 갈색머리는 짧게 잘랐는데 부드럽게 물결쳤고 눈섭은 반달 모양으 로 생겼다. 눈은 갈색으로 빛났고 볼은 붉었다. 입술은 작고 도톱했는데 잘 익은 사과처럼 붉었다.코는 오똑했고 치아는 가지런했다. 엘란은 이스마엘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이쁜 딸이 나왔을까 생각에 잠겼다. 엘란이 말도없이 딸을 쳐다보고 있자 이스마엘이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교도에게 딸은 줄 수 없네." "실례했습니다." 여자을 쳐다보며 딴 생각을 하던 엘란은 얼굴을 붉히고 사과했다. "어때 끝내주지, 어머니를 닮아서 인물하나는 끝내 준다니까." "아버지!"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무슨 일입니까?" 엘란이 물었다. "병사들을 인솔하고 길을 가던 기사들이 우연히 딸아이 얼굴을 보고 혹한 모양이야. 몰래 따라와서는 납 치하려 하잖아." "기사들 실력이 심상찮아 보이던데 자기 신분은 밝히던가요?" "철혈기사단에 있다더군." "큰 일 날 뻔하셨군요.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영광의 검을 찾아서 왔어." "아버지!" 여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교의 비밀을 외인에게 밝히는 것은 위험하다. "괜찮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중급정령사로 엘란이야. 전에 말했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라고. 엘란 이쪽은 내딸 에쉴리야! 성녀를 모시고 있어." 아버지의 은인이란 말에 에쉴리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그 런나, 여전히 불만스런 얼굴이었다. 교의 비밀을 외인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영광의 검이 뭡니까?" "그건 교의 비밀이라네." 이스마엘은 말하려다가 딸의 눈치를 보고는 말하지 않았다. "바쁘십니까?" "바쁘긴 하지만, 왜, 볼일있나?" "부모를 잃은 지고교도를 제가 돌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키우기가 뭐해서요,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데려오죠." 아무래도 용병들 틈에서 크는 것 보다는 같은 신자들과 사는 것이 나으리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하게." 이스마엘이 선선히 대답했다. 엘란은 급히 나탈리를 데려와서 깨웠다. "나탈리 이제부터 이 사람들하고 살게 될거다. 가서 말 잘 들어야해."잠에서 막 깬 나탈리는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엘란은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이야기 했다. "싫어! 나 아저씨랑 살거야." 나탈리가 완강히 반대했다. "안돼 좋은 사람들이니까 따라가." 엘란은 엄하게 말했다. 나탈리가 울기 시작했다. "앙앙앙! 나 버릴려고 그런거지. 말 잘들을게 버리지마! 밥도 조금먹고 오빠라고도 부를게." 나탈리는 바 닥에 주저 앉아서 계속 울었다. 눈이 금세 빨겨졌다. 엘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 졌다. "안되겠는데. 그냥 자네가 키우게, 교를 따라다니면 위험할 수도 있어." 이스마엘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확실히 교를 따라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할수없네요, 울지마 나탈리, 오빠랑 계속 살자." "엉엉!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할거지?" "그래 나탈리가 싫다고 할 때까지 평생 같이 살자." 나탈리가 울음을 그치고 안겨왔다. 엘란은 부드럽게 안았다. 마음이 훈훈해졌다. 엘란도 마음 깊은 곳에 서는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헤어지기 아쉽지만 일이 있어서." 이스마엘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 저도 가봐야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세." "몸조심 하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헤어져서 일행들에게 돌아가는데 에쉴리 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만나봤으면 좋겠네." *********************** 7장 위험한 의뢰 어느새 아침이 선선해졌다. 산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울긋불긋한 단풍은 마음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엘 란은 마나수련을 하고 있었다. 산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운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름모를 새들이 여기저기서 지저겼다. '아침부터 빌보가 웬일이지.' 저 아래에서 빌보가 땀을 뻘뻘흘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헥헥 어이! 아에게 어딨어? 돈 벌었거든 집좀 바꿔 힘들어 죽겠네." "아침부터 웬일이야?" "큰 건수가 들어왔어." 빌보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일인당 10골덴짜리 일이야." "10골덴 정말이야? 전체가 아니고 일인당?" 아에게가 재차 확인을 한다. "정말이라니깐! 할거지?" 빌보가 은근하게 물었다. "물론해야지." 아에게가 힘주어 말했다. "오늘 저녁까지 목로주점 앞으로 나와. 아이구 젠장, 내려갈일이 또 태산이네." 빌보가 내려가자 엘란이 다가왔다. "대장 이 일 하지 맙시다." 엘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얼마나 큰 건순데, 이런 일은 놓칠수 없어." 엘란이 단호한 말투로 반대했다. "모두 깨워서 물어봅시다." "모두 다 찬성 할거야! 10골덴이라구 10골덴 전체가 아니라 일인당." 아에게는 얼른 동료들을 깨웠다. 흥 분한 얼굴로 침까지 튀겨가며 설명했다. "언제까지 산속에서 살거야? 이번일 끝내면 모아둔 돈과 합쳐서 시에 집이라도 얻자. 어때 좋치?" "위험한 일일게 뻔합니다. 보수가 높으면 위험부담도 커요. 이때까지는 쉬운 일만 해서 상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죽는 사람도 생길거고." 엘란이 반대하고 나섰다. 죽는 사람이 생길거란 말에 모두들 찔끔한 표정이었다. "요는 작게먹고 작게 쌀거냐, 많이 먹고 많이 쌀거냐네." 짝귀가 눈을 훼훼 돌 리면서 말했다. "이 자식은 비유를 해도 꼭 더럽게 해." 핸슨이 면박을 주었다. "이번 한 번만 해보자! 응? 별로 안 위험한 일일거야, 위험한 일은 엘란이 다 막아줬잖아?" 아에게가 재 차 설득했다. 모두들 귀가 솔깃한 표정이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하루종일 힘겹게 노가다 하는 것보다 는 용병일이 백배 나았다. 유람하듯 다니면은 노가다 수입의 10배는 벌었다. 처음에는 겁도 났지만 엘란 이 모두 처리하자 마음도 든든해졌다. 일인당 10골덴이면 고향의 가족들은 일년동안 걱정없이 살 수 있 다. 엘란은 일이 난감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엘란은 같이 살면서 이들의 사정을 많이 들었다. 아에 게 등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부양해야하는 가족이 고향에 있었다. 돈이 모이는 즉시 고향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대로는 돈을 모아서 가게를 산다든가 하는 꿈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요하고 있었다. 병든 노 모와 동생들이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엘란은 더 이상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그린의 말에 결정이 지어졌다. "가늘고 길게 살기보다 굵고 짧게 살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엘란을 제외하고. "이봐, 그린도 더럽게 말하는데 왜 아무말 안해?" 짝귀는 상당히 억울한 모양이다. 핸슨이 다시 면박을 주었다. "이 무식한 놈아 그거랑 같냐." 짝귀는 입이 댓발이나 튀어 나왔다. "다를게 뭐야?" 아무래도 억울했다. 모두들 석궁을 살피고 갑옷과 검을 손질했다. 갑옷은 체인사슬위에 철판을 덧된 것이었는데 가슴과 배 만 가리게 되어 있었다. 팔꿈치 무릎에는 가죽을 덧되어 놓았다. 엘란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엘란(21) 목로주점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용병대도 있었다. 카르덴에서 온 시릴로용 병대였다. 카르덴 시에서는 꽤 유명한 용병대라 했다. 롬바르드에서 적당한 용병대가 없자 카르덴용병길 드에 부탁을 해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다른 용병들도 많은데, 의뢰인이 돈이 많은가봐?" 그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위험이 많은 거겠죠." 엘란은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자네들이 그 유명한 노가다용병댄가 이거 만나서 영광인데, 오! 깃발 좀 보게 잘 어울리는데," 한 남자 가 느물거리면서 다가왔다. 구렛나루를 턱까지 길렀는데 아주 느끼해 보였다. "킥킥킥~."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인원수는 50명이 넘어 보였다. 대부분 인상이 험악했다. 웃통을 벗은 자도 많았다. 대부분 문신을 세겼고 흉터 한 두 개쯤은 달고 있었다. 아에게용병대는 기가 팍 죽었다. 마당은 북새통이다. 용병들이 복장을 갖추고 무기를 챙기고 있었고 마차 두 대가 길 떠날 채 비를 하고 있다. 주점의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가 걸어나왔다. 뒷 짐을 지고 느릿느릿 걷는 것이 꼭 노 인 같았다. 머리는 벗겨져서 듬성듬성했다. 벗겨진 이마를 가릴려고 옆머리를 넘겼는데 오히려 얍삽한 인상을 풍겼다. 고급스런 비단옷을 걸쳤는데 반질거리는 광택이 얍삽한 인상을 증폭시켰다. 반지와 목걸 이를 요란하게 착용했는데 품위보다는 천박함이 짙게 풍겼다. 의뢰인인 모양이었다. 엘란은 의뢰인의 첫 인상을 상당히 나쁘게 보았다.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의뢰인의 뒤에는 빌보와 길드마스터 후안이 따르고 있었다. 길드마스터는 상당히 개을러서 이런 자리는 잘나오지 않았다. 돈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요새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저런 허접한 용병밖에 없군요. 나머지는 다 계약이 되어 서 ." 마스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듣고 있던 아에게용병대의 얼굴도 흐려졌다. "뭐 어쩌겠습니까? 할 수 없죠." 의뢰인은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맘에 드는 용병을 구할 수 없었던 것 이다. 말도 자연히 퉁명스럽게 나왔다. 구렛나루가 의뢰인에게 갔다. "맥그루님 지금 출발할까요?" "예 갈 길이 바빠서, 지금 출발합시다." 의뢰인 맥그루가 부드럽게 말했다. "니들도 준비해!" 아에게용병대에는 함부로 말했다. 말투에서부터 차별의 티가 팍팍났다. 아에게의 얼굴 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엘란도 얼굴이 굳어졌고, 그린도 인상을 썼다. 그러나, 계약이 이루어진 이상 함 부로 화를 낼수도 없었다. 구렛나루는 용병대대장 시릴로였다. 어릴때부터 전장을 전전한 백전노장이었 다. 용병들사이에서 떠도는 실전검술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했다. 맥그루가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화려 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견고해 보였다. 목재마차의 밖은 철판으로 덧되어 놓았다. 창문도 마부석쪽의 작은 창을 제외하고는 철판으로 모두 막아놓았다. 마차바퀴는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려고 여섯개를 달았 다.마차 하나를 여덟마리의 말이 끌었다. 출발하려는데,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겼다. 아에게용병대에 말이 없었다. 게다가 탈줄아는 사람도 엘란과 아에게 그린을 제외하고는 없다. "뭐 이런 용병이 다 있어." 맥그루가 짜증을 냈다. 아에게 용병대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용병길드의 실수 였다. 전원 말을 타야 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후안이 빌보를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이 자식을 그냥 콱 밟아 버려!' 빌보는 자라목이 되었다. 아에게는 부끄럽고 무안하기도 하고 화도 났 다. 아에게용병대는 말이 필요 없었다. 보통 소상인 연합을 호위했기 때문에 도보로 충분했다. 마차는 많은 짐을지고 천천히 움직였고 나머지 상인도 등짐을 지고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대규모 상단과는 일해 본 적이 없었다. 부랴부랴 말을 준비해서 출발했을때는 한 밤 중이었다. 아에게용병대는 맥그루의 짜증과 시릴로를 비롯한 용병대의 비웃음을 견뎌내야했다. 그만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계약해지시 위약금을 물어줄 돈이 없었다. 수모보다는 10골덴이 아 에게용병대에는 더욱 절박했다. 맥그루도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해고하지는 않았다. 엘란은 내심 의뢰인 이 해고해주기를 바랐다. 의뢰인이 해고하면 위약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 쥐같이 얍삽하게 생긴 맥그루 도 싫었고 느물거리는 구렛나루 시릴로도 보기 싫었다.무엇보다도 이번 임무는 등에서 스물거리며 올라 오는 위험신호가 있었다. 덜커덕!덜커덕! 마차가 드디어 출발했다. 마스터는 하루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기를 권했지만 맥그루는 마스터의 의견을 묵살했다. 엘란은 마차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살폈다. 마차에 철판을 덧된것도 수상했고 마차바퀴가 파이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철판무게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마차바퀴자국은 아주 깊 게 파였다. 마차는 무거운 물건을 많이 싣고 있는게 분명했다. 한밤에 활극이 펼쳐졌다. 아에게용병대의 용병들이 모두 말의 목을 잡고 늘어졌다.말위에서 꼼짝도 못했 다. 목을 쭉 빼고 손으로는 말의 목을 다리로는 말의 몸통을 꽉 조였다. 아에게용병대도 불편했지만 말 도 불편했다. 말도 기수의 자세에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이다. 몸이 불편한 말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말을 조정하느라고 아주 애를 먹었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흩어지는 용병대를 수습해야 했던 엘란은 덩 달아 피곤해졌다. 시릴로용병대와 맥그루의 마차는 아에게용병대를 신경쓰지 않고 달렸다. 엘란과 아에 게는 힘겹게 용병들을 수습해서 뒤를 따랐다. 말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많았다. 별 다른 부상을 입지 않 은 것은 천운이었다. 말에서 잘못 떨어져 평생 침대에서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 앞선 일행을 따라잡았을 때 그들은 불침번을 세우고 잠들어 있었다. 잠든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서 휴식을 취했다. 그 러나, 소리가 안 날수 없고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아에게용병대는 기가 팍 죽었다. 눈을 잠시 붙였을까 앞선 일행들이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깨었다. 아에게용병대 용병들 은 하루만에 똑바로 앉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세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허리는 뻣뻣했고 고개는 앞으로 뺀 상태에서 다리와 팔에 무리한 힘을 주었다. "자지 마세요, 자다가 말에서 떨어지면 목이 부러지거나 척추를 다쳐서 평생 침대에서 지내야 될지도 몰 라요." 엘란은 돌아다니면서 경고를 하고 잠을 깨웠다. 제대로 자지 못한 대원들 중에 조는 사람이 많았 던 것이다. 엘란은 무슨 일이 생길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났다. 일은 그날밤에 벌어졌다. 엘란은 이틀이나 한 숨도 못자고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무척이나 피곤했다. 잠을 못 잔 것 보다는 용병들의 안전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몸보다 마음이 지쳐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정령을 불러 계속 주위를 살폈던 것이다. 땅에 머리를 대는 즉시 잠이 들었다. 언제나 처럼 나탈리와 함께였다.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을 제외하고는 주위는 깜깜했다. 달도 구름에 가려 나오지 않았다. "저 자식들 보게! 완전히 뻗었는데." 불침번을 서고 있던 시릴로용병대의 한 명이 말했다. 시릴로용병대 는 두명이 한조로 불침번을 섰다. 다른 한명이 말을 받았다. "저 놈들 말 타는 것 봤나? 우스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의뢰인은 뭐하러 저런 놈들을 고용했대?" 기분이 안 좋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사시에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동료들이 저런 꼴이라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성질 더러운건 참아도 실력 없는건 못 참는게 용병사회의 속성이었다. 저런 동료에게 목숨을 맡길 수는 없다. 시릴로용병대의 용병 들이 아에게용병대를 못잡아 먹어서 으르렁 거리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남아 있는 용병대라고는 저 놈들 뿐인데 할 수 없잖아? 게다가 저기 저놈." "누구 말이야?" 목을 길게 빼서 살펴봐도 누구를 가르키는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애 팔베개 해주고 자는 곱상하게 생긴 놈 있잖아?" "아! 저놈, 근데 저놈이 왜?" "보기엔 저래도 실력있는 정령사래. 저놈 때문에 계약했다더군." "에이 설마 농담이겠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냐, 대장이랑, 의뢰인, 길드마스터가 하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어. 너도 생각해 봐! 아니면 저런 놈들 을 한 명당 10골덴이나 주면서 고용할 이유가 없잖아?" "하긴 그렇군."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저 애는 뭐야?" 상대방이 가까이 다가와 속닥였다. "저 놈 애인이래." "뭐! 몇살인데?" 용병은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열두살정도 되 보이지." 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네." 용병들은 엘란의 변태짓에 놀라긴 했지만 멸시한다든가 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남 자들만 사는 용병들은 드물긴 했지만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한 용병대에는 한 명 정도 있었다. 게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용병들은 이상한 쪽으로 긴장을 푸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변태도 종종 있었 다. 그래서, 심하지만 않으면 서로의 성적 취항에 대해서는 모른 척 넘아가 주었다. 용병들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과 직결되는 실력이었다. "그건 그렇고 수당이 너무 센거 아냐? 전쟁터도 아니고 일인당 30골덴이라니." 시릴로용병대는 일인당 30골덴이라는 액수를 제의 받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건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은 무료한지 일어나서 몸을 비틀었다. 이들 은 아에게용병대를 믿지 못해 자기들 만으로 불침번을 섰다. 한 명이 무심코 돌을 집어서 마차 쪽으로 던졌다. 무료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쩡! 철판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 서로 얼굴을 쳐다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적이다!!" "적이다!!" 히히힝!! 말들이 놀라서 깨었다. 사람들도 일어났다. 두 용병대의 수준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시릴로 용병대는 잠을 잘때도 무기를 안고 자거나 언제나 쥘수있게 손 닿는 곳에 두었지만 아에게용병대는 그 러지 못했다. 시릴로용병대가 무기를 들고 벌떡 일어나는 동안 아에게용병대는 허둥대고 있었다. "마차를 보호해!" 시릴로가 명령했다. 용병들이 마차를 에워쌀 때였다. 윽! 용병 한 명이 다리를 붙들고 쓰러졌다. "마차밑에 있다." 마차 밑에서 시커면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어느새 마차밑까지 파고 든 것이다. 마차바 닥에는 철판을 대지 않았다. 그쪽으로 침투를 하려 한 모양이었다. 쨍쨍쩽! 금새 싸움이 붙었다. "샐라멘더." 엘란이 정령 다섯을 불러 주위를 밝혔다. 주위가 환해지자 적들이 드러났다. 모두 다섯명이 었는데 전신에 검은칠을한 갑주를 입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게 보이는 눈동자와 가끔 드러나 는 치아 뿐이었다. "가만히 구경만 하지말고 석궁을 장전해요." 엘란이 침착하게 말했다. 석궁에 쿼렐을 장전했지만 혼전 중이라 쏠 수가 없었다. "모두 물러나!" 시릴로가 명령하자 모두들 물러났다. 아에게가 외쳤다. "쏴라!" 쇄액! 쿼렐이 밤의 정적을 갈랐다. 윽! 가까이서 쏘아진 쿼렐은 파괴력이 상당했다. 한 명은 등까지 삐져 나왔고 다른 한명은 목을 관통당 했다. 시릴로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시릴로는 소문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시릴로가 검을 뽑아 들었다. 바스타드소드였다. 시릴로는 괴한을 향해 힘차게 검을 그어 내렸다. 쨍! 한 명이 시미터로 막아냈다. 휭청! 시릴로의 힘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괴한의 동료가 등 뒤에서 칼을 찔러왔다. 시 릴로는 재빨리 옆으로 물러났다. 상대를 잃은 칼이 허공을 갈랐다. 시릴로는 팔을 회수하는 적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싹둑! 괴한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나머지 둘이 시릴로에게 동시에 덤비자 켄트가 한 팔 거들었다. 시릴 로가 한 명을 제압하고 켄트가 나머지 하나를 제압했다. "이런! 독을 삼켰어." 지독한 독이었다. 귀와 코 입등 구멍이란 구멍으로는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용병대도 한 명이 죽었다. 처음에 다리를 베인 사람이었다. 칼에 독이 있었던 것이다. 큰 싸움이 벌어졌 는데 마차 안에서는 기척도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시릴로가 물었다. 문이 빠꼼히 열리고 맥그루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괜찮습니다. 어떤 놈들이 공격한 겁니까?" 놀랐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얼굴을 찌푸리고 생각을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뭐하는 놈들같아?" 시릴로가 부대장 켄트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놈들입니다." 켄트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밤의그림잡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짝귀가 말했다. "뭐? 밤의 그림자! 확실해?" 아에게가 놀라서 물었다. "이런 무기는 밤의 그림자가 즐겨 사용합니다. 이들이 쓰는 독도 그렇고. 아마 확실할 겁니다." 짝귀옆에 있던 들창코가 적이 쓰던 무기를 들고 말했다. 이들은 도둑길드 출신이다보니 밤의그림자에 대해 주워 들은 말이 많았다. 어찌보면 시미터같기도 하고 셤셔같기도 했다. 칼은 이상하게 휘어있었는데 앞에는 뾰족한 부분이 있어서 찌르기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밤의그림자는 유명한 살인청부단체였다. 원래 는 엄리쳐지방 도둑길드의 한 갈래였는데 잠입술 은잠술등이 발달하면서 살인청부업체로 변신한 길드였 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잡히면 모두 독을 삼키고 죽는 지독함으로 더욱 유명했다. 비밀보장이 잘 되서 청부도 많이 몰렸고 요금도 비쌌다. "어디 원한 맺은데라도 있습니까" 시릴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밤의그림자라면 무시할 수 없는 단체였 다. "원한 맺은데는 없습니다." 맥그루는 질린 표정이었다. 그도 밤의그림자에 대한 악명은 들은 모양이었다. 엘란은 맥그루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게 보였다. '뭔가 숨기는게 있어.' "모두 정리해." 시릴로가 명령하자 용병이 달려들어 시체를 묻었다. 시체는 이미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 서 썩어가고 있었다. "정말 지독한 독이네." 아에게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맥그루도 마차로 들어가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지만 분위기는 무거웠다. 밤의 그림자는 무시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니었다. 아에게는 의뢰를 받아 들인 것이 점점 후회되었다. ************************** 컴컴한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실패했다고?" 스산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음성이다. "예, 운이 나빴습니다. 우연히 발각되는 바람에." 어둠속에서 누군가 대답을 했다. "운이란 없다. 실력이 모자랐을 뿐이야. 청부자의 신원은 밝혀졌나?" "예, 상당히 은밀한 청부라 밝히는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청부자는 셩혈기사단단장 가빈백작입니다." "철혈기사단단장이란 자가 왜 청부를 하지? 명령 한 마디면 우리와는 비교도 안되는 날고기는 실력자들 이 줄줄이 나설텐데." "은밀하게 사람을 죽이는데야 저희들이 낫지요."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다. "비밀리에 죽여야 한다 . 이유는 알아냈나?" "아무래도 시중에 은밀히 나도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정말인가?" 목소리가 떨렸다. 밤의그림자 길드마스터는 대단히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다. 목소리가 떨 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만큼 마스터의 놀라움은 컸다.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마차쪽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청부를 중단하고 이 일에 전념한다. 모든 전력을 투입해! 맥그루는 죽이지 말고 반드시 생포 해와라!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완수하도록!" 마스터는 흥분된 목소리로 빠르게 명령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까지 흘렀다. 엘란(22) 휘이잉! 바람이 풀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엘란일행은 관도를 벗어나 피르보나초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피르보나초지대는 융커산맥과 아갈리아산맥 사이의 낮은 구릉지대로 땅이 평탄하고 풀들이 많이 자라서 말이나 양, 소의 방목이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여기서 자란 말들은 북방의 훈족이 키운 말 들에 비해 체격이나 스피드 힘은 떨어지지만 지구력은 우수해서 군대용 보다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양치기 개들이 양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평화적이고 목가 적인 분위기였다. 일만 없다면 한 며칠 놀다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쪽 길로 들어선 겁니까?" 엘란이 시릴로에게 물었다. "적의 예상대로 움직일 수야 없지, 길을 벗어나면 적들이 당황할테고 그 사이에 빠져나간다는 것이 우리 의 계획이다." 어제의 습격이후로 시릴로는 느물거리는 태도를 바꿨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잠 시 엘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우리 용병단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지금 있는데가 마음에 듭니다." 엘란은 단호히 말했다. "그것 참! 자네도 독특하군, 보통용병들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강한 용병대를 선호하기 마련인 데 ." 시릴로는 말을 흐리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용병생활 오래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고, 돈이 좀 모이면 각자 하고싶은 일을 찾 아 떠날 겁니다." "그게 마음먹은대로 될까? 일단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으면 떠나기가 힘들어." "아뇨 떠날겁니다. 이 사람들은 용병에 안 어울려요." "자네 말대로 되기를 빌지, 그건 그렇고 자네 바람의 정령을 부린다고 했지? 정찰좀 해주게." 엘란은 실 프를 불러 전방으로 보냈다. 잠시후 실프가 돌아왔다. 실프는 엘란의 주위를 휘돌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주위에 물결쳤다. "실프와 말도 하나?" 시릴로는 궁금한 걸 물었다. "정령과 대화를 하려면 상급정령은 되어야 합니다. 말을 하는게 아니라 간단한 명령에 반응하는 겁니다. 앞에 사람이 있는지 알아 보라고 명령했고 앞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시릴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앞에 사람이 있다고, 숫자는?" 엘란은 곰곰히 생각한 후 말했다. "30명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고." "아까도 말했듯이 그런 정밀한 명령과 대답은 할 수 없습니다. 실프가 숫자를 정확히 세아릴 수 있는지 도 모르고. 보통 이런 반응이면 30명정도 됩니다. 아마 맞을 거에요." 시릴로는 앞에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하자 기분이 불길했다. 이런 방목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이유가 없다. 목동이 떼로 몰려 다닌다는 소리는 들은적이 없다. "혹시 상인이 지나가는 건 아닐까요?" 켄트가 끼어들었다. "상인이었으면 좋겠군." 시릴로는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얕을 구릉을 넘어서자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 다. 엘란의 말대로 30명내외였다. "전원 전투준비!" 제일 앞을 방패를 든 시릴로용병대가 섰다. 그 뒤를 다양한 무기를 든 용병들이 서고, 제일 뒤는 석궁을 든 아에게용병대가 따랐다. 마차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랐다. "길을 비켜라!" 켄트가 거칠게 말했다. 앞을 막고 있던 사람들이 깔고 앉아 있던 것을 들었다. 커다란 방 패였다. 앞에는 뾰족한 창날을 여러개 박아 놓았다. 그들은 말도 없이 방패를 들고 전진했다. 오른손에 는 어젯밤의 그 무기를 들었다. 시미터같기도 하고 셤셔같기도 한 이상하게 휘어진 곡도를. "쏴라." 아에게가 명령을 내렸다. "이 멍청아! 쏘지마." 시릴로가 소리쳤다. 그러나, 늦었다. 잔득 긴장하고 있던 용병대는 쿼렐을 날렸다. 따다다당! 쿼럴은 방패를 뚫지 못했다. 특수하게 제작된 방패인 모양이다. 쿼럴은 근거리의 파괴력이 우수하고, 쏘 기도 쉽고, 익히기도 쉬운 반면에 재장전까지의 시간이 길고 먼거리의 경우 파괴력이 떨어지며 직선 공 격밖에 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었다. 먼거리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곡선사격이 안되서 앞을 방패로 막 으면 대처가 곤란했다. 밤의 그림자는 쿼렐을 막아내고 달려들었다. "실피드." 바람의 중급정령이 밤의그림자를 후려갈겼다. 쾅!! 열명의 적들이 나뒹굴었다. 나머지는 계속달려들었다. 엘란은 싸움의 경험이 많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공격했다면 쉽게 처리 할수도 있었을텐데 너무 늦게 공격에 나서는 바람에 혼전이 벌어졌다. 혼전 상태라 정령을 함부로 부리기가 힘들었다. 가장 많은 인원이 엘란에게 달려들었다.엘란은 실프 다섯을 불러 베리어를 쳤다. 나탈리는 엘란의 뒤에 있었다. 펑! 적들이 방패로 엘란을 밀었다. 엘란은 실피드를 공격자의 머리 위에다 내리 꽂았다. 으득! 두명이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쏴라!" 적이 소리 질렸다. 팟! 방패에 붙은 창날이 날아왔다. 으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엘란은 다급해졌다. 자기 한 목숨 지키는거야 쉬웠지만 아에게용병대 가 죽어가고 있었다. 엘란과 맞붙은 적들도 창날을 발사했다. 엘란에게 달려든 적들의 방패에 달린 창날 에는 미스릴로 특별처리를 해서 마법사의 방어마법이나 정령으로 만든 베리어를 파괴하는 힘이 있었다. 밤의그리자가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베리어에 대고 쏘아진 창날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베리어를 뚫고 엘란에게 날아 들었다. "실프." 급히 정령을 소환해 창날과 자기 사이를 막았다. "휘잉!" 좁은 공간에 실프가 소환되면서 엘란의 옷과 머리가 위로 부풀어 올랐다. 베리어를 뚫어서 힘이 약해진 창날은 실프에 막혀 떨어져 내렸다. "카사!" 싸움에 불의 중급정령을 부른건 처음이다. 카사가 주위를 휩쓸었다. 멀리까지 열기가 느껴졌다. 카사가 엘란을 공격하던 네명을 휘감았다. 카사는 불로 만든 긴 줄같이 변하더니 휘감은 사람을 조였다. 치이익! 적의 갑옷이 붉게 달아오르며 살타는 냄새를 풍겼다. 엘란은 마나를 더욱 끌어올렸다. 툭! 불의 줄이 사람의 몸속으로 파고들더니 동강을 내버렸다. 살이 벌겋게 타들어갔다. 으악! 옆에 있던 용병의 머리가 쪼개졌다. 엘란은 실피드를 조정해 주위에 있던 아에게용병대와 적들을 함께 들어올렸다. "어어어!" 여기저기서 당혹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실피드로 사람들을 들어올린 엘란은 카사를 한명 한명 에게 날려 보냈다. 카사는 독수리 모양으로 적에게 날아갔다. 펑! 복면을 한 적들의 머리가 날아갔다. 한방에 한 놈씩 확실하게 저승으로 보냈다. 나머지는 시릴로와 켄트등에게 맡겼다. 슥! 갑자기 땅이 뒤집어지더니 스무명이 뛰어나왔다. 열명은 엘란에게 달려들었고 나머지는 맥그루의 마 차로 달렸다. 엘란은 당황했다. 땅밑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엘란은 하늘에 뛰웠 던 사람들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부드럽게 내려놓을 여유가 없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적들은 엘란 을 둘러싸고 베리어에다 대고 창날을 날렸다. 창날이 베리어를 찢고 날라들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다. "실피드." 엘란은 부릴수 있는 중급정령은 모두 불렀다. 실피드 하나가 엘란의 앞에 나타났다. 실피드가 엘란과 나탈리를 감싸고 돌았다.창날은 힘을 잃고 떨어졌다. 엘란은 실피드 둘과 카사 하나와 계약을 맺 고 있었다. "바람의 칼날." 용병들을 내려놓은 실피드가 히긋히긋한 칼날이 되어 적에게 쏘아졌다. 스엉!!스엉!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갈라졌다. 지독한 놈들이었다. 죽어가면서 비명을 지르는 놈 이 없었다. 실피드 하나는 엘란과 나탈리를 보호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적들을 다지고 있었다. 실프는 모두 돌려보냈다. 다 같이 조정할 수가 없었다. "카사." 엘란은 불의정령을 마차로 날렸다. 적들은 이미 마부를 죽이고 마차를 탈취했다. 여기서 멀어지 면 잡을 수 없다. 엘란은 온 몸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불의 독수리가 광포하게 마차를 덮쳤다. 히히힝! 말들이 구슬픈 울음을 터트렸다. 카사는 마차 주위를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엘란은 마차에 덧 된 철판의 견고함을 믿었다. 철판에 룬문자가 새겨져 있는게 방어력이 있는 듯했다. 말들은 시커멓게 타 죽었다. 적들도 모두 저승의 강을 건넜다. 마차의 철판이 뜨겁게 달아 오르더니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 은 나무로 되어있어 뜨거운 열기에 불이 붙은 것이다. 털컹! 마차문이 열리고 맥그루가 뛰어내렸다.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을 흘리는게 낭패한 모습이다. 엘란 은 탈진해서 주저 앉았다. 이런 흉험한 격전은 가스통의 무덤에서 골렘과 싸운이후 처음이었다. 온 몸이 노곤했다. 나탈리는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것을 보고 기절해버렸다. 너무 다급해서 슬립마법으로 재우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엘란은 나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음이 차분 하게 가라 앉았다. "엉엉엉, 마르보, 티토 ,파머, 케이, 아슬란, 노르발." 아에게가 죽은 동료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린도 울먹이고 있었다. 피해는 컷다. 초기에 방패에서 날라간 창날들이 많은 피해를 입혔다. 아에게용병대는 여섯명이 죽었고, 시릴로용병대는 반수가 죽어나갔다. 실력에 비해 아에게용병대는 많이 살아 남았다. 엘란에게 공격이 집중되고, 엘란이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그만 우세요."엘란이 위로를 했다. 아에게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얼마나 구슬프게 우는지 엘란마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엘란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엘란은 용병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의뢰를 받자고 우기는 바람에 ."엘란은 아에게의 손을 잡았다. "아에게 때문이 아니에요, 회의에서 모두 찬성했잖아요." 아에게는 어린아이처럼 구슬프게 울었다. "미안해 우리 때문이야."짝귀 밤톨 들창코가 울먹거렸다. 짝귀 밤톨 들창코는 항상 같이 붙어다녔다. 이 들은 모두 고아로 태어나 도둑길드에서 컸다. 동료들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이름이 없기 때문 이었다. 그저 별명으로만 불렸다. 천성적으로 겁이 많아서 길드에서도 따돌림을 받았다. 길드원들이 모 두 잡혀 죽었을 때 겁을 먹은 이들은 도둑질을 관두었다. 아에게용병대에 와서도 용병일보다 노가다가 오히려 마음에 편했다. 싸움에 벌어지자 이들은 겁에 질려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동료가 죽는 걸 지켜 보면서. 그들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에게용병대는 모두들 울고만 있었다. 엘 란은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 또다시 공격 받을지 모르는 것이다. 엘란은 땅을 파고 동료를 묻었다. 그제서야 모두 정신을 차리고 흙을 덮었다. 시릴로용병대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더군, 자네같이 뛰어난 정령사는 처음보네." 시릴로가 다가와서 말했다. "저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엘란은 망연자실 마차를 바라보는 맥그루를 가리켰다. "나도 잘 모른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용병이 의뢰인에게 꼬치꼬치 물을 수는 없잖나. 아는건 일인당 30 골덴에 메디치항구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 것 뿐이야." 시릴로는 이 의뢰를 받아들인걸 후회했다. 용병의 반수가 죽은 것이다. "뭔가 이상합니다. 처음에 밤의 그림자는 맥그루를 암살할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납치를 하려고 해 요." "확실히 이상하군. 가서 물어보세?" 시릴로는 성큼성큼 맥그루에 다가갔다. "의뢰인 양반 뭔가 숨기는게 있으면 털어 놓으시오." 자뭇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의뢰인에 대한 예의 같 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숨기는 건 없소. 정말이오. 아마 내 재산을 노린걸거요." 맥그루는 마차로 들어가서 상자를 가지고 내렸 다. 마차는 거의 타서 강철뼈대만 남아 있었다. 맥그루는 상자를 열었다. "음." 시릴로가 침음성을 삼켰다. 안에는 금화가 가득들어 있었다. 새로찍은 엘리오트왕국의 금화였다. 얼핏 보니 마차 안에는 그런 상자가 가득했다. 확실히 욕심을 낼만한 액수였다. "이런 공격을 받은건 정말 예상못했오, 내 미안한 뜻에서 보수를 세 배로 올리리다. 죽은 사람도 세배로 쳐주겠오." 엄청난 액수였다. "그렇게 합시다." 시릴로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여기서 계약을 파기하기에는 아까웠다. 죽은 용병들 가족도 보살펴야했던 것이다. "저 철판은 내게 주시오."엘란이 맥그루에게 요구했다.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이도 어린 엘란에게 굽실거렸다. 엘란의 실력에 놀란 눈치였다. 어차피 마차 한 대는 쓸모없게 되었다. 엘란은 아에게용병대에게로 갔다. "맥그루가 보수를 세배로 올렸어요. 죽은 사람 몫도 함께 쳐준답니다. 계속하시겠어요?" 아에게는 망설 였다. 용병을 관두려고 한다면 계약을 파기해도 위약금은 안 물어도 된다. 길드에서 쫓겨나고 통문이 돌 아서 다시는 용병길드에 발을 못 붙이게 될 뿐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이 걸렸다. 모두들 고향에 가족 이 살아 있었다. 힘들게 일해서 번돈을 꼬박꼬박 부치고 있다. 이 일을 무사히 마치면 모두들 큰 돈을 만진다. 30골덴이면 큰 돈이다. 죽은 동료들 가족도 형편이 피일수 있다. 카악, ?! 핸슨이 침을 빼었다. "까짓거 사내자식이 칼을 뽑았으면 오렌지라도 썰어야지, 계속합시다." 샌슨이 말을 받았다. "자식이 오렌지 구경도 못한놈이." 오렌지는 남쪽지방의 특산물이다. 가격이 비싸서 평민은 평생가야 맛 한 번 보기 힘들다. 모두들 아에게의 고민을 읽고 있었다. 일을 관두면 노동일이라도 해서 살면 된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들이 걸린 것이다. "계속합시다. 일 끝나거든 오렌지 맛이나 봅시다." 그린이 환하게 웃었다. 모두들 아에게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주었다. 엘란은 이들의 이런 점이 좋았다. 그래서 시릴로의 청도 거절한 것이다. 가능한 한 이들을 지켜주고 싶 었다. 뒷정리를 하는데 급격한 마나의 요동이 느껴졌다. 땅을 파고 숨어 있던 것은 밤의그림자만이 아니 었다. 땅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마법을 시전했다. "아이스 스톰!" 날카로운 얼음 조각의 폭풍이 엘란에게 휘몰아 쳤다. 가장 방해가 되는 엘란을 먼저 죽 이려 들었다. 엘란은 이미 마나의 급격한 변동을 느끼고 실피드를 소환해 두었다. 얼음의 폭풍이 매섭게 휘몰아 쳤다. 엘란은 실피드 하나로 베리어를 쳐서 얼음조각을 막았다. 쩌정 쩡 쩌어엉! 마법과 정령이 부딪치며 소음을 발했다. 엘란은 카사를 소환해 마법사에게 날렸다. 무 서운 속도로 카사가 날아 들었다. 시커먼 로브로 온 전신을 가린 마법사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실드!" 마법사의 주위를 하얀 막이 감샀다. 카사가 무서운 속도로 부딪쳤다. "쾅!" 엄청난 굉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상당한 실력자 였다. 4써클은 마스터하고 5써클에 들어선 마법 사로 보였다. 엘란은 실피드 둘까지 보냈다. 다른 누가 또 달려들지 몰랐다. 빨리 끝내야 했다. 엘란은 방어는 도외시하고 공격일변도로 나갔다. 실피드와 카사가 번갈아 가며 실드를 후려쳤다. 마법사는 엄청 난 충격에 신음을 흘렸다. 싸움은 점점 누가 오래 버티냐의 싸움으로 변해갔다. 엘란은 몰랐지만 싸우고 있는 사람은 아스가르드에서 꽤 유명한 마법사였다. 상대는 하급정령사로 알려진 엘란이 중급정령을 자 유자재로 부리는데다 방어는 도외시하고 미친 듯이 달려들자 당황해 버렸다. 상승의 마법사답지않은 치 명적 실수였다. 당황한 마법사의 실드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 순간을 실피드가 놓치지 않았다. 콰아앙! 실피드와 부딪친 실드가 터져 나갔다. 그 사이를 카사가 파고 들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마법사는 카사와 부딪쳐 전신이 터져 나갔다. 엘란(23) 밤의그림자는 두 번째 공격이후 별다른 도발이 없었다. 땅을 뚫고 나와 공격한 마법사같은 사람도 없었 다. 엘란은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는 밤의그림자 일원이 아니다. 상상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맥그루의 재산을 노릴지 모른다. 드넓은 초원이 시원스럽다. 엘란 일행은 이틀째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컹컹! 양치기 개가 처음 보는 사람들을 향해 짖어댔다. "우리 일 마치거든 니즈로 놀러가자." 짝귀가 쾌활하게 말했다. 니즈는 엘리오트 최남단의 휴양도시였다. 귀족들이 즐겨찾는 천혜의 관광지로 맑은 바다와 깨끗한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식이 놀 생각만 한다니까?" 밤톨이 금새 면박을 준다. "너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유명한 격언도 모르냐?" 들창코가 짝귀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게 격언이냐? 어떤 미친놈이 매일 시장에 말타고 나가서 양손을 벌리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고 하던 헛소리잖아! 그놈 지금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 짝귀는 겸연쩍게 말했다. "그러냐?" 이들은 분위기를 바꾸려고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전환시키지는 못했다. 주변의 분위기 는 아주 무거웠다. 모두들 새로운 공격이 있을까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들이 피르보나초지대를 지나고 있을 때 롬바르드는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프르덴틀후작가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과 긴장감이 저택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삼황자를 제외한 핵심멤버들이 모여 연일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맥그루는 처치했나?" 프르덴틀은 요새 심기가 편치 않았다. 일이 잘 풀린다 싶으면 항상 꼬였다. 카를 후작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황제가 죽기 전에는 내전을 먼저 도발하는 쪽과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을 한 것이다. 권력다툼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고 있었다. "밤의 그림자가 딴 마음을 품은 것 같습니다." 가빈백작이 대답했다. "그 놈들이 왜?" "대륙전체에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 놈들도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죽이려고 했으면 성공했을텐데 사로잡자고 하다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프르덴틀이 언성을 높였다. "보안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어디서 흘러간거야?" "이황자측에서 흘린 것 같습니다." 프르덴틀은 깜짝 놀랐다.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맥그루가 처음에 접촉한 것은 이황자측이었답니다. 너무 황당한 얘기라 무시했는데 저희의 움직임을 감 시하다 낌새를 챈 듯 합니다. 우리 일을 방해 할려고 여지저기 조직적으로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죽일 놈들! 나라 생각을 해야지 자기 이득을 위해서 나라의 대사를 방해해." '지들은 나라 생각하나? 다 똑같은 놈들끼리 욕은.' 욀무트백작은 속으로 욕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은거한 전대의 마법사들과 정령사 떠돌이용병 수련검사 할 것 없이 모두 맥그루를 뒤쫓고 있습니다." "젠장 일이 꼬이는군."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아스가르드와 피요르드에서도 사람을 파견한겁니다." 프르덴틀은 언성을 높였다. "불가침 조약을 한게 언젠데 사람을 파견해, 내 언제고 그 놈들한테 쓴 맛을 보여줄테다." 20년전 세나라는 국경에서 가벼운 마찰이 있었다. 엘리오트와 피요르드는 적법사레조와 한 바탕 싸우고 도망쳐 나온 광법사의 문제를 두고 긴장이 높았고, 아스가르드는 니즈로 놀러간 귀족이 지방영주의 딸 을 건드리다 복상사하는 바람에 시끄러웠다. 서로들 본격적인 전쟁은 꺼렸으므로 국경에서의 소란은 불 가침조약으로 해결되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 나라들도 가만히 있기는 곤란했겠지요." 메테르니히공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작은 사회의 혼란이 즐거웠다. 공작은 사 태의 진전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행동의 반경이 넓어지기 마련이지' "그래 누가 넘어왔답니까?" "피요르드에서는 적법사레조가 제자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욀무트가 탄성을 발했다. "오!! 적법사레조가 왔답니까? 제자는 얼마나 데리고 왔습니까?" "소수정예로 10명내외랍니다."가빈이 대답했다. 가빈의 역할은 대단히 컷다. 철혈기사단단장으로 무력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국가정보 조직인 검은 독수리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다. 후작은 삼황자의 아들과 가빈백작딸의 혼인을 추진해 백작을 끌어들였다. 일이 잘되면 왕위를 이을 후작의 외손자와 가빈의 딸 이 결혼을 할 것이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다음 대에서는 왕권을 두고 싸울 일이 없었다. 후작과 백작 이 버틴 지지기반은 확고했다. 잘 못되면 둘다 목이 달아나겠지만. "하긴 전쟁을 하겠다면 모를까, 남의 나라에 많은 인원을 끌고 올수야 없었겠지." 공작이 부드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이런 일에는 소수정예들이 나서는게 낫다.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이었다. "그래 아스가르드에서는 누가 왔답니까? 보통 인물은 아닐 것같은데." "화염의 길라드가 직접 움직였습니다." 모두들 놀랐다. 길라드는 나라의 일에는 잘 끼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일은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강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작은 이번 일이 개인적으로 흥미진진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 구만." 프르덴틀후작은 속에서 불덩이가 치쏟았다. '이런 망할놈의 영감탱구 같이니 재미있게 돌아간다구, 무슨 불구경 왔나.' 엘리오트왕실의 역사는 골육 상쟁의 역사였다. 왕권이 바뀔 때 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항상 마찰이 있었다. 장자승계의 전통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 컷다. 메테르니히공작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국왕은 누이둘과 동생 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가 메테르니히였다. 우유부단한 국왕의 솜씨라기 보다는 국왕을 옹립한 귀족들의 힘이었다. 장남은 메테르니히공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실이 아닌 몰락귀족을 어머니 로 뒀다. 공작은 동생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았다. 귀족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면 동생은 보호해 줄 수 없 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잔인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자기는 뒤에 숨어서 남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다. 공작은 살기 위해서 자기를 숨기고 낮춰야했다. 권력을 멀리하고 귀족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 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살아남았고 이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해 있었다. 엘리 오트는 전통적으로 귀족의 세가 강했다. 내전이 빈발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귀족은 새로운 국왕의 옹립과정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싸웠고, 기득권층에서는 권력을 놓치 않기 위해 대항했다. "뭐가 재미 있으십니까?" 욀무트백작이 물었다. "십존이 서로 붙은적은 20년전에 적법사레조와 광법사일레이저가 하루를 꼬박 싸운 것을 빼고는 없지. 모두 궁금하지 않소? 십존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지금 십존의 넷이 모이고 있오. 이미 파견되어 있는 물의 시드, 화염의 길라드, 적법사레조, 광법사일레이저. 한 판 붙으면 대단하지 않겠소? 적법사와 광법 사는 만나면 죽기 살기로 싸울테고." "과연 그렇군요." 욀무트가 맞장구를 쳤다가 찔끔했다. 후작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눈 찢어지겠네, 왜 째려보고 지랄이야!' "앞으로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가빈백작이 끼어들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공작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황자를 끌어들입시다. 위치를 흘려서 이황자측을 유인한 후 일거에 세력을 꺽어버립시다. 어차피 모 두다 알게 된 마당에 쉬쉬해서 뭐 할거요? 우리가 먼저 도발한 것도 아니니 카를후작도 별 수 없을거 요." "좋은 생각인데요." 가빈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파견되 있는 사람들이 위험할텐데." 욀무트백작이 후작을 슬쩍보며 말했다. 책임자로 시드와 후작 의 아들 막스가 나가 있었다. ?질거리면서 도망치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시드야 다급하면 몸을 빼겠지 만 혈기왕성한 막스는 끝까지 싸울지도 모른다. 위치를 흘려서 사람이 모이면 대단히 위험했다. "그만한 미끼가 있어야, 이황자측도 믿고 움직일거요. 십존중의 일인인 시드가 제자 50을 이끌고 있고 막스가 철혈기사100명을 움직이고 있소, 거기 딸린 마법사도 있고. 병사들도 있잖소. 시드와 막스가 몸 을 빼자면 잡지는 못할거요. 듣자하니 막스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다던데?" 후작은 막스의 얘기만 나오면 흐뭇했다. 프르덴틀후작가는 전통적으로 문관의 전통이 강했다. 막스같은 뛰어나 기사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막스는 30에 마스터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조만간 십존의 인물 이 바뀔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 십존중 몇 명이 죽을 지도 모른다. 후작은 결단을 내렸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럼 어떻게 유인할거요?" "우리측 지방영주에 그리로 집결하라고 명령을 내리는게 어떻겠습니까? 지방영주들이 움직이면 자연스 럽게 모두들 눈치 챌테고. 이황자측도 자기들 영주들과 병력을 움직일테니 그 뒤를 공작님의 가병과 가 빈님의 철혈기사단 모아놓은 용병들이 들이치면 이길수 있을 겁니다." 욀무트백작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결정합시다. 반대하는 사람은 말씀하십시오?" 모두들 찬성을 했다. 오랜 기다림 이 지긋지긋 했다. 여기서 끝장을 내고 싶었다. 후작은 문을 열고 명령했다. 완벽한 방음이 되어 있어서 문을 열지 않으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 "통신 마법사를 불러라!" 통신마법사가 수정구를 가지고 들어섰다. 탁자위에 수정구를 올려놓고 공손하 게 예를 올렸다. "막스와 통신을 연결하라!" 마법사는 마나를 끌어올려 통신을 열었다. 수정구가 밝은 빛이 나더니 상대 편 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막스를 불러라!" 후작은 흥분해 있었다. 이제 십년간의 암투가 종막을 향해 치 달리고 있었다. 막스는 한참을 지나서야 나타났다. 온통 먼지투성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후작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계획을 얘기했다. 막스 가 생각하기에도 좋은 생각같았다. 걸리는게 없지는 않았지만 막스도 싸우고 싶었다. "입구는 열었느냐?" 막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은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후작이 단호히 말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통신마법이 끊어지고 후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어쩌지?"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물건은 없습니다." 메테르니히 공작은 단호히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가빈백작이 물었다. "내가 소싯적에 바보짓하고 다닐 때 그것만 연구했지. 걱정할 것 전혀없어." "그럼 왜 처음에 맥그루얘기를 믿었습니까?" 모두들 무시한 맥그루의 얘기를 확신하고 밀어 붙인 것은 공작이었다.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공작은 그것은 걱정할 것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원한거야, 그럴 가치는 충분히 있는 물건이지."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그 것 말고도 소중한 것은 많았다. 그것이 다른 물건 모두 보다 가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모두들 공작이 너무 단호히 말하자 믿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급합니다. 세부계획을 짭시다." 프르덴틀후작가의 통신마법사들은 바빠졌다. 몇 시간후 엘리오트 전 영지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황자측도 연일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황자궁의 비밀회의실에는 마르시앙 드 슈나이드 엘리오트이 황자와 왕실마법사 듀마, 이황자의 장인인 포템킨후작 , 왕국삼대기사단의 하나인 레드드래곤의 단장 스 톨킨백작, 재무대신 니벨백작이 모여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이황자가 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맥그루의 뒤를 따라 붙었습니다.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곧 밝혀질 겁니다." 스톨킨백작이 빠르게 말했다. "모두들 준비해 두시오. 곧 일이 벌어질테니." 듀마의 로브속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듀마는 로브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수정구에서 나타났다. "듀마님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중년인은 알려지지 않은 듀마의 제자였다. 듀마가 프르덴틀후작가에 첩자로 파견한 제자였다. 그들은 서로서로 첩자를 파견해 두고 있었다. 방안에 가벼운 긴장이 흘렀다. "무슨 일이냐?" "후작가에서 영주들에게 삼황자의 명의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최대한 빨리 병력을 이끌고 말라야산으로 집결하라는 명입니다." "알았다. 다른 소식이 있으면 연락해라." 통신을 끊고 모두들 침묵했다. "말라야 산이었군." 이제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제 끝을 볼 시기인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 이황자는 이를 악물었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말라야산이군, 듀마는 휘하의 마법사를 모두 동원하라! 스톨킨백작도 레드드래곤단과 병사들을 준비하 고, 후작님도 가병들을 모두 집결시키세요. 기밀이 샐 우려가 있으니 핵심영주에게만 알려서 병력을 동 원하고. 니벨백작께서는 자금을 준비하셔서 용병들을 대기시키세요. 일거에 병력을 몰아서 들이치는 겁 니다. 시드와 정령사들 막스와 철혈기사들을 몰살시키고 이황자측 지방영주를 격파하면 일은 끝납니다. 수도로 올라오면서 우리측 영주의 병력을 집결시키면 적들은 가빈백작과 공작,후작의 가병만 남을 겁니 다. 왕궁은 붉은 기사단이 중립을 지키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고. 이의 있는 분은 말씀하세요." 모두들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포템킨후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내 손자가 왕위를 잇게 된다.' 영광스런 미래가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이들은 지리한 권력 다툼에 너무 지쳐 있었다. 더 자세히 주위를 살필 생각보다는 이제 끝을 보고 싶었 다. 오래 참는자가 이긴다는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황자는 결의를 다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엘란(24) 맥그루의 행렬에는 전 대륙의 이목이 쏠려 있었다. 덩달아서 엘란도 주목을 받았다. 밤의그림자와의 싸 움에서 엘란은 자신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모르고 있었지만 엘란은 유명해졌다. 변태정령사로 알려질 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복면을 쓴 사내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어서 맥그루를 납치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밤의그림자 부대장 맥스였 다. "적법사 레조, 광법사 일레이저,화염의 길라드외에 주목할 사람들은 누군가?" 밤의그림자 마스터는 맥스에게 바짝 다가섰다. "우선 그들의 제자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레조는 딸도 동행했습니다. 하이론 사형제가 있고 마법사로 는 해로드, 킬트, 퉁가가 있고 정령사로는 예이트, 엘레나, 바이글이 있습니다. 용병 사이고와 소드익스퍼 터 코르도바, 바이싱거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마스터는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구석에서 거미가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었다. "젠장, 피르보나에서 해결을 봤어야 했는데. 그놈에 대해서는 조사해 봤나?" 마스터의 언성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 맥스는 말끝을 흐렸다. "부하를 몰살시킨 그 정령사말이다." "엘란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21세고 어린 나이에 변태로 유명합니다. 하급정령사로 알려졌는데 실력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중급정령마스터의 실력자입니다. 확인한 바로는 실피드 둘 카사 하나 실프 열을 조 종합니다. 같이 일하는 용병대는 시골 자경단 수준으로 엘란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으로 먹고 살았답 니다. 어린애를 대단히(?) 좋아한답니다. 여자를 붙여주면 회유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스가르드의 마 법사 다르손도 그 놈 손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밤의그림자마스터는 상당히 놀랐다. 다르손은 5써클마법사였다. 맥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 었다. "피르보나에서 일이 실패한 것은 어찌보면 잘 된 일입니다. 납치에 성공한다 해도 수많은 실력자들이 모 이는데 우리 힘으로는 맥그루를 지킬수 없습니다. 그때도 땅속에 다르손이 숨어 있었습니다. 일을 지켜 보다가 나중에 낚아채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도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은 너무 커져 있었다. "우리가 직접 나서야 겠군. 모든 대원들을 모아라! 특히 데미를 준비시켜라. 엘란이란 놈 변태라고? 어 쩌면 우리 밤의그림자에 끌어들일 수도 있겠군."마스터는 희미하게 웃었다. 복면안의 맥스도 웃고 있었다. ********************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서 주변을 살펴보게 했다. "왜? 무슨 일인가?" 시릴로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엘란이 처음에는 실프를 불렀다가 주변을 돌아보게 한 후 실피드를 불렀다. 시릴로는 일이 잘못된게 아닐까 초조했다. 엘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실프가 파악을 못했어요. 숫자가 너무 많거나 너무 강한 사람들이라 인식을 못했을 겁니다." "둘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 얼마후 실피드가 돌아왔다. "숫자가 많답니다.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고." "정확한 숫자는?" "그냥 많다는 데요." "휴." 시릴로는 한 숨을 푹 쉬었다. 엘란의 일행은 피르보나초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이제부터는 산을 끼고 돌아야 한다. 숲도 통 과해야 하고. 습격하기 딱 좋은 곳이다. "돌파하자." 시릴로는 결심을 굳혔다. 모두들 긴장된 시선을 숲으로 던지고 있었다. 숲은 길도 크게 나 있었고 경사도 급하지 않아서 말을 달 리기 좋았다. 그러나 주변에서 어떤 공격이 있을지 몰랐다. 용병대는 대오를 갖추었다. 출발때의 반 정도되는 인원이다. "출발, 전속전진!" 시릴로가 크게 외쳤다. 히히힝! 말의 배를 가볍게 차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말들의 발길에 돌들이 튀어올랐다. 숲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어!" 모두들 멈춰섰다. 누가 길을 막고 있었다. 모두들 황당해서 말을 잃었다.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데 웬 여자 한 명이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아주 짧은 가죽치마를 입고 있었다. 위에도 가죽으로 만든 브레지어만 걸쳤는데, 가슴이 터질 듯 했다. 왼손으로는 밧줄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들었다. 여자가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냈다. 혀로 붉게 칠한 입술을 핥았다. "꿀꺽." 용병들이 모두 침을 삼켰다. "저 아줌마 뭐해?" 나탈리가 느닷없이 물었다. 여자의 목에서 핏대가 섯다. '조런 앙큼한 계집애, 누구보고 아줌마래! 저 얘하고 있는게 그 변태인 모양이군.' 휙! 여자가 채찍을 엘란에게 던졌다. 엘란은 엉겹결에 채찍을 받았다. '저 여자 왜 저래?' 엘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비볐다. 나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보았다. "슬립." 엘란은 나탈리를 재웠다. 여자가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나하고 저 숲속에 들어가서 좀 놀래요?" 노골적인 추파였다. 시릴로와 켄트는 당황해서 식은 땀을 흘렸다. '큰일이다. 어쩌지.' 그들은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하나 고민에 빠졌다. 적들이 엘란의 약점을 교묘하게 공 격한다고 보았다. 치명적 유혹이었다. 엘란은 전력의 핵심이다. 엘란이 없었으면 이 일은 일찌감치 접었 을 것이다. 시릴로와 켄트도 용병길드에서 엘란의 소문을 들었다. 임무에 여자애까지 끼고 다니는 걸로 봐서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떻하죠?" 켄트가 나직히 속삭였다. "넘어갈 것 같은데." 여자는 아주 뇌쇄적이었다. 엘란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밧줄로 스스로를 묶었다. 대 단한 기술이었다. 스스로 묶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바닥에 엎드리더니 신음을 흘렸다. "아흑! 동생 누나랑 떠나자?" 아에게, 그린 ,핸슨, 샌슨도 눈을 떼지 못했다.엘란은 저 여자가 자신에게 왜 저러는지 몰라서 당황했다. 엘란은 실프를 불었다. 실프 다섯이 나타나 주위를 휘돌았다. "어머 낭만적이다. 그래 좋았어. 실프에 둘러쌓여서 재미 좀 보자!" 휘익! 실프가 달려들어 여자를 들어올렸다. "어머!" 엘란은 여자를 멀리 날려 버렸다. "가죠?" 일행이 출발해서 가는데 시릴로와 켄트가 다가왔다. 둘은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암, 일할 때와 놀때는 확실히 구분해야지." 시릴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엘란을 빤히 보며 말했다. "자네는 진정한 변태네!" 힘있는 음성이었다. 사뭇 경건하기까지 했다. " ." 옆에서 켄트가 거들었다. "내 일 끝나거든 화끈한 곳으로 안내하지." 찡긋! 켄트가 엘란에게 윙크를 했다. " ." 엘란은 할말이 없었다. 맥스는 마스터에게 데미의 실패를 보고했다. "그 놈은 아무래도 성숙한 여자는 관심이 없나 봅니다." 입맛을 다신 맥스는 다시 말했다. "어린애 만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마스터가 혀를 찼다. "사회가 어쩌려고 이러는지, 말세다 말세야." "그여자 가슴 끝내 주더라." 짝귀 밤톨 들창코는 여전히 붙어다니면서 떠들어 댔다. "그렇치, 근데 채찍은 왜 준거냐?" 짝귀가 아는 척을 한다. "그 여자 변태가 분명해, 맞는 걸 좋아할거야." 밤톨이 반박했다. "세상에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냐?" "왜 없냐? 변태가 얼마나 많은데." "근데 많은 사람중에서 하필이면 엘란한테 채찍을 준거지?" 짝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엘란은 변태정령사로 유명하잖아." "아~~." 들창코가 공감의 감탄사를 발했다. 그 얘기를 듣고서야 엘란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 었다. 이게 다 그 여관의 여급때문이었다. 엘란은 한 동안 시릴로용병대에게 해명을 하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잘 믿지 않았다. 반신반의 하는 표정이었다. "서요!" 엘란이 다급하게 외쳤다.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있는게 느껴졌다. 엘란이 큰 소리로 말했다. "볼일있는 분은 나오시죠." 불쑥! 숲에서 네명의 대머리가 나왔다. "어! 쌍둥이네." 아에게가 신기한 듯 말했다. 나탈리가 봤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나탈리는 아직 자고 있 었다. 아무래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서 깨우지 않았다. 저번의 흉험한 격전을 보고 놀라서 밥도 잘 먹 지 못했던 것이다. 나타난 사람들은 네 쌍둥이였다. "이런, 큰일이다." 시릴로는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견문은 시릴로가 제일 넓었다. 엘란은 시릴로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면식이 있는 사이는 아니고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위험한 인물인가요?" 시릴로가 고개를 숙였다. "아주 위험한 인물이야." 그들은 하겐사형제였다. 바룬신전과 앙숙인 헬레나신자들은 이들을 바룬의 사생아, 바룬의 개들이라고 불렀고, 보통사람들은 인간백정이라고 불렀다.이들은 아스가르드의 독실한 바룬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스가르드에서 처음 태어난 네 쌍둥이들이라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떠들썩했다. 독실한 신자인 부모들은 이들을 신전에 바쳤고, 신전은 신의 은총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기쁨은 곧 악몽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천성이 흉폭하고 거칠어서 신앙생활과는 맞지 않았다. 믿음이라고 는 눈꼽만치도 없으니 신성마법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신암심이 없는자가 신전에서 천덕꾸러기가 되 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들은 신전에서 잊혀졌다. 냉대와 무시 망각속에서 이들은 흉폭함을 더욱 키웠 다. 이들이 우연히 신전이 압수한, 마왕의 추종자들이 저술한 책을 보는 순간 바룬신관들의 악몽이 시작 되었다. 하겐사형제는 마왕의 힘을 빌리는 흑마법을 익히고는 강도, 강간, 살인을 예사로 하고 돌아 다녔다. 항상 바룬신관복을 입고 저지르는 해악에 신전은 온갖 비 난을 들어야 했다. 워낙 실력이 좋아 잡기도 어렵고, 토벌대를 파견하면 눈치가 빨라서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통에 대주교가 홧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들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홧병으로 죽 었고 어머니는 목을 맺다. 친척들도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이사를 가야 했다. 하겐사형제는 시릴로가 설명하는 동안 흐뭇한 얼굴로 시릴로의 말을 들었다. 가끔 끼어들어 수정도 하 면서. "이봐, 친구 그때 죽인건 열둘이 아니라 열다섯이었다고." "그때 정말 재밌었지." 큰형이 말했다. "자 이제 문디 반상회는 끝내고 일을 해볼까?" 막내가 나섰다. "맥그루를 내놓아라!" 엘란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둘 정도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넷은 벅차 보 였다. 엘란은 정령을 불러 휘몰아쳤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지.' 실피드 둘과 카사가 어울어져서 쌍둥이에게 날아갔다. 주변을 맹렬한 바람이 휘감았고 불꽃이 날렸다. "실드!" 하겐 사형제는 급히 실드를 쳤다. 주변의 공기가 하겐형제 주위에 밀집했다. 강력한 에어실드였다. 쾅! 굉음이 귓전을 뒤흔들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하겐형제의 얼굴이 붉으락 프르락했다. 네 명이 겹겹이 싼 실드를 정령들이 뒤흔들었다. 둘째가 투덜거렸다. "그러길래 폼잡지 말고 기습을 하자니깐." 한 번 뺏긴 기선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쾅!쾅! 실피드와 카사가 계속해서 실드를 두들겼다. 엘란은 선공의 묘를 살리고 있었다. 넷이 흩 어져서 공격했다면 용병들을 보호해야 하는 엘란은 곤란했을 것이다. 하겐형제는 곤란했다. 공격을 하자면 실드를 풀어야 되는데 실드를 풀자니 무서운 속도로 주위를 도는 정령들이 무서웠다. 정령을 부려서 베리어를 치는 것과 마법으로 실드를 치는 것은 장 단점 이 있었다. 실드는 방어력이 우수한 대신에 공격을 하자면 실드를 풀어야 되는 단점이 있었다. 정령으로 베리어를 치는 것은 방어력이 약한 단점이 있는 대신에 다른 정령으로 공격이 가능했다. 하겐형제는 성질이 나서 얼굴이 흉악하게 변했다. 이들은 모두 4써클 흑마법사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엘 란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경험이 부족한 엘란에게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은 상대하기 곤란한 면이 많았다. 게다가 흑마법사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 콩알같은 자식, 몸을 갈기갈기 찢어 줄테다." 첫째가 이를 갈았다. 첫째가 바닥에 기괴한 도형을 그 리기 시작했다. 첫째가 빠지자 동생들은 힘겹게 실드를 유지했다. 첫째가 그린 마법진은 마물소환진이었 다. 엘란(25) 세명은 실드를 겹겹히 둘러싸서 몸을 보호하고, 첫째는 마물소환에 들어갔다. 첫째가 주문을 외우자 진 에서 검은 기운이 뻗쳐 올랐다. 엘란은 실드가 풀리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크르릉! 울부짓는 소리와 함께 마물이 진에서 튀어 나왔다. 하겐삼형제는 얼른 실드를 풀었다. 실피드가 비호 같이 달려들었다. "파이어 블래스트!" 둘째가 마법을 시전했다. 거대한 불덩이가 실피드를 맞았다. 쾅! 불덩이와 실피드가 충돌하면서 천둥치는 소리가 울렸다.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튀어나온 마물이 엘란에게 달려들었다. 소환된 마물은 만티코어 세마리였다. 사자의 몸에 호랑이의 얼굴 을하고 꼬리에는 독침이 달려있다. 벌어진 입으로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였다. 발에는 칼날같은 발톱이 길에 나있다. 하겐사형제는 재빨리 흩어졌다. 엘란은 카사로 만티코어를 상대했다. 카사가 달려들자 만 티코어가 주춤했다. 카사가 날개를 펴서 마물 하나를 감쌌다. 크아앙! 카사에 잡힌 만티코어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만티코어는 무섭게 타들어갔다. "파이어 볼!" "파이어 블래스트!" "어스 웨이브!" 엘란에게 마법이 난사되었다. 엘란주위의 땅이 뒤집어졌다. 엘란은 중심을 잃고 휘청 거 렸다. 시차를 두고 파이어 볼과 파이어 블래스트가 날아 들었다. 엘란히 급히 실피드로 베리어를 쳤다. 그 바람에 만티코어 두 마리가 용병대에 달려들었다. "쏴라." 아에게가 명령을 내리자, 쿼렐이 날아들었다. 푹푹! 쿼렐이 만티코어에 틀어 박혔다. 크아앙! 만티코어가 성난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쿼렐로는 만티코 어를 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성질만 돋군 결과를 가져왔다. 한 마리는 시릴로와 켄트가 용병들과 함께 물고 늘어졌다. 한 마리는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엘란에은 하겐 사형제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었다. 으아악! 비명소리가 꼬리를 이었다. 만티코어가 앞발을 들어 용병의 머리를 후려졌다. 펑! 머리가 터저나가면서 용병은 즉사했다. 비명을 지를 여가도 없다. 만티코어는 용병을 입에 물었다.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새로운 희생물을 찾아 주위를 쉴새없이 두리번 거렸다. 삼형제는 엘란이 정신을 못차리게 몰아쳤다. 다양한 마법이 쏟아졌다. 엘란은 실피드로 몸을 보호하고 카사로 하겐삼형제를 공격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첫째가 돌연 마차를 공격했다. "록 블래스트!" 돌덩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마차를 가격했다. 쾅! 마차가 심하게 우그러 들었다. 충격약화 주문이 걸려 있어 찢어지지는 않았다. 만티코어가 시릴로에게 달려들었다. 시릴로는 옆으로 피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마나를 머금은 검에 만티 코어의 옆구리가 길게 찢어졌다. 옆구리의 고통에 만티코어는 울부짖었다. 시릴로를 향해 몸을 트는데 켄트가 검을 내질렀다. 한 쪽 눈이 베이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다른 쪽에서는 아에게가 용병을 지휘 하고 있었다. "눈을 향해 쏴." 아에게는 검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걸리더라고 쿼렐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쿼렐이 날아 들었다. 몸에는 열 개의 쿼렐이 박혀 있었다. 크앙! 쿼렐이 만티코어의 양 눈에 박혔다. 핸슨 샌슨의 솜씨였다. 아에게 용병대는 멀찍히 물러섰다. 눈 을 잃은 마물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다른 만티코어는 시릴로 용병대가 묶어 두고 있었다. 몸에 수많은 칼자국을 달고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발광하고 있었다. "록 블래스트!" 여러번의 가격에 마차의 문이 부셔졌다. 엘란은 다급해 졌다. "으하하하." 첫째는 음산하게 웃으며 마차로 뛰어들었다. "아이스 볼!" 칼날같은 얼음덩이가 첫째에게 날아들었다. "실드." 실드와 부딪힌 아이스 볼은 산산히 흩어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받게 되자 하겐사형제는 열통이 터졌다. "어떤 놈이냐." 첫째가 이를 갈아 부쳤다.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겐삼형제와 엘란은 서로 견 제하고 있었디. 시릴로와 켄트는 만티코어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눈을 잃은 한 마리만이 미쳐 날뛰 고 있다. "바람의 칼날!" 실피드가 칼날이 되어 미쳐 날뛰는 만티코어를 다졌다. 소강상태를 이용한 엘란의 솜씨 였다. 숲속에서 네명이 걸어나왔다. 묘하게도 하겐사형제와 닮았다. 모두 대머리였고 네명이 같은 복장을 입고 있다. 하겐사형제는 신관복을 입었다면 이들은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었고, 하겐사형제는 쌍둥이인 반 면에 이들은 닮긴 했지만 쌍둥이는 아니었다. "하이론 죽고 싶으냐?" 둘째가 음산하게 내뱉었다. "어이, 오랜만이야?" 하이론이 유들거렸다. 그러나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다. 하이론사형제는 이들과 앙 숙이었다. 사형제로 뭉쳐서 돌아다녔고, 고강한 마법사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거렸다. 하이론은 이놈들이 싫었다. 사형제가 몰려다니면서 온갖 못된 짓을 하는게 못마땅했다. 하겐사 형제로 오인을 받아 공격을 받은 이후에는 더욱 싫어졌다. 하겐사형제도 이들이 싫었다. 자기들도 못된 짓을 일삼고 돌아다니면서 고상하게 구는게 아니꼽고 배알이 뒤틀렸다. 사실 하이론사형제가 규칙을 지 키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겐사형제같은 인간 말종도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살인도 자제했고 특 히 여자를 겁탈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십년 전부터는 개과천선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도 하 고, 병자를 고쳐주기도 하는 등 착한 일도 많이 했다. 하겐사형제는 어느새 모여 있었다. 사형제들은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엘란은 슬그머니 몸을 뺏다. 전장은 참혹했다. 시릴로용병대는 거의 전멸했다. 만티코어의 피해도 컷지만 첫째가 장난처럼 구사하는 마법에 많은 용병들이 죽은 탓이다. 아에게용병대 도 아에게, 그린, 핸슨, 샌슨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던 짝귀, 밤톨. 들창코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엘란은 마차로 갔다. 하겐이 부순 문으로 들어가서는 맥그루를 끌어냈다. 엘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들이 금화를 노리고 왔다고 말했다가는 입을 찢어주겠다." 맥그루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 순간 을 모면하려고 머리를 굴리는게 한 눈에 보였다. 엘란은 짜증이 솟구쳤다. 단검을 꺼내 맥그루의 목을 눌렀다. 주루룩! 목이 베이며 피가 흘렀다. 맥그루는 혼비백산 했다. "왜 이러십니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들이 원하는게 뭐냐?" 엘란이 이를 갈아 부쳤다. 대답은 뒤에서 나왔다. 하이론은 입을 열었다. "그놈은 앤더피가의 마지막 후손이다." "그래서?" 엘란이 반문했다. "이봐, 자네 나보다 한 참 아래잖아! 우리는 잘못 한것도 없는데 초면에 반말이나 찍찍 하면 되겠나?" 하이론이 점잖게 훈계를 했다. 대머리에 엄숙한 표정으로 훈계를 하는 것이 익살맞아 보였다. 엘란은 피 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요?" 하이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도 공부좀하게, 지식인이라면 이런 정도야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지. 맥더피가가 뭐냐면 말이지 대 제의 무덤에 기관장치를 한 장인의 집안이야." "대제의 유산!" 엘란은 깜짝놀라 소리를 질렀다.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엘란은 맥그루를 보았다. 여전 히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해서 이 위기를 벗어날지 생각하고 있을게 뻔했다. 이런 위인이 대제의 무덤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나. "그러니까 대제의 무덤 때문에 이 사단이 벌어졌단 말이군요." 대제의 무덤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도 남았다. 살아 남은 용병들도 모두 충격을 받았다. 하이론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맥더피 집안은 말이지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명장의 집안이야.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드워프에게서 배웠다더군, 중요한 건 이들이 대제 사후 사라졌다는 점이야. 아마 비밀을 지키려는 대제측에서 모두 죽였겠지. 그런데, 한 명이 도망쳐서 후손을 낳았다더군. 그 피를 물려받은게 저놈이야!" 하이론은 맥그루를 가리켰다. 자신을 지목하자 맥그루가 깜짝 놀랐다. 하이론은 잠시 하겐사형제를 노려본 후 말을 이었다. "후손들은 대제의 무덤에 대해 몰랐다더군. 살아남은 사람이 이름도 바꾸고 무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을 안한 탓이지. 현명한 판단이야. 지금 보다시피 그건 피를 부르는 물건이거든. 그런데, 저놈이 무덤 의 지도를 발견한 모양이야! 당연히 욕심이 났지만 능력이 안되니 어쩌겠나? 그래서, 지도를 이황자에게 팔았지. 파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접촉을 했고 소문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천년만 에 나타난 무덤지도라니! 믿기 힘들지 않았겠나? 근데 삼황자측의 막스와 시드가 몰래 사라졌어.누가 퍼 트렸는지는 모르지만 소문이 은밀하게 돌았어. 무덤을 발굴하고 있다고, 그 후부터는 자네가 보다시피 야." 하이론은 미소를 띠었다. "내 충고 한 마디 하겠는데,저 놈을 지키는 건 포기하게!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간다 해도 적법사, 광법사, 화염의 길라드를 상대할 수야 없지. 그놈들은 괴물이거든." "댁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그 쪽들도 광법사같은 사람에게는 상대가 안 될텐데." "그거야 그렇지, 싸우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어부지리를 노리는 건가?" "이놈보게, 말이 점점 짧아진다!" 엘란이 반말을 하자 하이론이 발끈했다. "어부지리를 노리시는 겁니까?" 하이론이 다시 웃었다. "여기 숨어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렇지." 용병들은 숨을 죽이고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하겐형제들도 별다른 반응없이 얘기를 들었다. 정적이 숲속을 맴돌았다. 처량한 산새소리만이 들리고 있다. 불쑥! 불쑥!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엘란은 아무리 생 각해도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한 주먹으로 열주먹 백주먹을 막을 수는 없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모두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이얍!"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사람이 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잠깐!" 엘란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검을 뽑아 들고 덤비던 사람이 휘청했다. 전신의 힘을 끌어 올렸 다가 갑작스런 방해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뭐냐?" "우리한테 덤빌 필요 없소. 우리는 이 일에서 빠지겠소." 엘란은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맥그루를 지켜 줄 능력도 안 될뿐더러 이대로 싸웠다간 용병들이 모두 죽을게 뻔했다. "잘 생각했다." 하겐이 음산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맥그루는 사색이 되었다. "우리는 할만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다." 엘란은 냉정히 말을 이었다. "내 손에 죽지 않은 것만도 감사히 생각해라." "당신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 이상 용병일은 할 수 없어." 맥그루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책임은 임무를 속인 당신에게 있다." 입을 열려던 맥그루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주변은 사람들 로 꽉찼고, 껄끄러웠던 엘란이 물러나자 맥그루를 서로 차지 할려고 혼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비켜라!" "웃기지마라! 맥그루는 내 차지다." "파이어 볼!" "운디네." 사방으로 마법이 난사되고 정령이 휘몰아쳤다. 암기, 쿼렐이 난무하고 바스타드소드, 할버드, 트라이던트, 노말소드, 레이피어, 메이스, 베틀엑스, 모닝스타가 사방에서 번뜩였다.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하겐사형제와 하이론사형제도 격돌 했다. 적과 아군이 없었다. 모르는 상대의 등에 검을 꽂아 넣기 일쑤였고, 비겁한 암습도 서슴치 않았다. 대제의 무덤은 모든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피가 피를 불렀다. 피에 도취된 이들은 목적도 잊고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광분했다. 한 폭의 지옥도가 벌 어졌다. 이 중에서도 연륜이 있거나, 실력이 뛰어난 자는 난전에 말려들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갑자기 마차옆의 공간이 울렁거렸다. 하얀빛이 퍼지더니 로브를 입은 노인이 하나 나타났다. "광법사 일레이저!" 엘란이 놀라 외쳤다. 일레이저는 맥그루의 목을 쥐었다. "멈춰." 하겐형제가 외쳤다. 그러나 공간이 다시 일렁거리더니 일레이저는 맥그루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퉈! 하겐형제의 첫째가 침을 뱉었다.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꼴이다. 잔뜩 헛힘만 쓴 셈이었다. "저기다!" 숲속에서 외침이 터져나왔다. 산의 정상에 희미한 빛이 번뜩였다. 텔레포트는 6써클 고위마법 이다. 마나소모도 컷고 거리상의 제한도 심했다. 7써클 마스터 일레이저도 눈에 보이는 거리 이상으로는 공간이동을 할 수 없었다. 마법진을 이용하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만 출발지와 도착지 모두에 마법진 이 그려져 있어야 한다. 만약 마법진을 이용해 공간이동을 하는데 목적지의 마법진에 이상이 생기면 공 간 속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함부로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숲이 이동하고 있었다. 엘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였다. 하겐형제도 사라졌다. 엘란은 예상밖의 결과에 허탈했다. "당신들은 가지 않나요?" 엘란이 여전히 남아있는 하이론에게 물었다. "따라잡는다고 우리가 광법사의 상대가 되나. 천천히 가도 상관없어." 말 그대로 그들은 유람이라도 하 는 것처럼 어슬렁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이리 오세요." 엘란은 짝귀 등을 불렀다. 그들은 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였다. 그들은 부끄 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또 동료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괜찮아요 오세요. 살아 남아서 다행이에요." 엘란은 따뜻하게 말했다. "엉엉엉!" 짝귀가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면 동료들이나 모으세요." 밤톨과 들창코는 울면서 동료들의 시체를 모았다. 머리가 터져 죽은 자도 있었고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동료도 있었다. 아에게와 그린 핸슨 샌슨도 도왔다. 시릴로도 정신을 차리고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엘란은 마차로 들어갔다. 안에는 나탈리가 잠들어 있었다. 나탈리는 이상한 여자가 앞을 막은 후 마차에 태워졌다. 엘란은 카사를 불렀다. 한 명 한 명 정성들어 화장을 했다. 아에게는 유해를 주머니에 정성들여 쌌다. 손 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들은 숲속에서 밤을 맞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엘란은 마차에서 상 자를 집어냈다. 마차안에는 상자가 가득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겁니까?" 모닥불을 지켜보며 엘란이 입을 열었다. "용병일은 이제 끝이다.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지만." 시릴로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엘란은 아에게를 보았다. "나도 관둘거야." 아에게는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엘란은 어쩔거야?" 그린이 물었다. "전 손 볼 사람이 있어서 그리로 갈까해요." "헤어져야 겠군." 핸슨은 헤어지는게 너무나 섭섭했다. 엘란은 상자를 모두들 보는 앞에서 열었다. 노란 금화가 불빛을 받아 빛났다. 시릴로용병대는 시릴로 켄 트를 포함해 다섯이 남았고 아에게용병대는 나탈리를 제외하고 여덟이 살아 남았다. 엘란이 상자를 보며 말했다. "상자를 나누죠, 우린 할만큼 했으니까."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릴로용병대는 20개의 상 자를 가졌다. 아에게용병대도 20개를 가졌다. 날이 밝아오자 그들은 헤어졌다. 먼저 시릴로가 피르보나 초지대로 향했다. "고맙네, 자네 아니었으면 우린 모두 죽었을거야." 시릴로가 진정을 담아 말했다. "행복하게 사세요." 엘란은 덕담을 건넸다. 아에게는 시릴로용병대가 사라지는 걸 지켜 보았다. 어깨가 축 처져 있는게 안쓰러워 보였다. "전 다르넨 지방으로 갈거에요." 아에게가 물었다. "다르넨이 어디야?" "말해줘도 잘 모를거에요. 별로 특색있는 지방도 아니고." "언제 한 번 놀러갈게." 그린이 말했다. "아니 오지 마세요. 거기서 안 살거에요." 샌슨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럼 뭐하러 가는데?" "원수 갚으러요." 엘란은 간단히 말했다. 엘란은 아에게를 보고 말했다. "아에게는 영주한테 밉보여서 고향으로 못 갈거고 롬바르드로 갈 건가요?" "아니, 이제 수도는 지긋지긋해 바닷가에서 살거야. 이왕 나선 김에 목적지인 메디치항구까지 가볼거야." "우린 고향으로 갈거야." 핸슨 샌슨이 동시에 말했다. 아에게, 그린, 핸슨,샌슨은 같은 고향 출신이다. 그 린은 아에게와 같이 갈거라 했다. 고향에는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핸슨과 샌슨은 부모와 동생 들을 돌봐야 했다. 헤어지기 섭섭하지만 돌아가야 했다. 엘란은 핸슨, 샌슨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할게요. 고향가는 길에 동료들 유골도 돌려주고 돈도 나눠주세요." "부탁은, 당연히 할 일인데." 아쉬운 듯 한 참을 머뭇거린 끝에 핸슨 샌슨은 고향으로 떠났다. 상자 14개를 가지고. 나머지 인원들은 상자 하나씩을 차지했다. 짝귀, 밤톨, 들창코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면서 아에 게와 같이 가겠다고 했다. 동료들을 볼 낯이 없어 조용히 사라지려 했지만 아에게가 같이 가자고 잡았 다. 일단은 길이 같아서 동쪽으로 같이 움직였다. 엘란은 맥그루를 쫓는 사람들과 마주칠까봐 일부러 천 천히 이동했다. 일주일이 지나 숲을 나섰다. 숲의 밖에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 자꾸 재우면 나 화 낼거다." 나탈리가 새침하게 말했다. 엘란이 투덜거렸다. "어쩔수 없잖아. 너 저번때처럼 밥도 못 먹고 매일 악몽에 시달릴텐데 ." 나탈리는 겁먹은 눈치였다. 그래도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꾸 재우지마. 밤에 잠 안 온단 말이야." 슬립마법으로 한 참을 자게되면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은 당연했다. "웬만하면 안 재울게." "약속." 나탈리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엘란은 손가락을 걸어 흔들었다. "약속." 나탈리가 환하게 웃었다. 웃는 것도 잠시 표정이 다시 뽀루퉁해지더니 투덜거렸다. "나는 왜 정령이 안나와?" 나탈리는 정령을 본 후부터 엘란을 졸라대서 정령술을 배웠다. 그러나. 정령 술을 익힐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탈리는 마나를 느끼지 못했고 당연히 정령을 불러낼 수 없었다. 나탈리가 재능도 없었지만 엘란의 교습법도 문제가 많았다. 공부를 잘한다고 아이들을 잘 가 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많이 아는 사람이 잘 가르치기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열 개를 알아도 세 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다섯 개를 알아도 다섯 개 모두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후자가 더 훌륭한 선생님이다. 엘란은 불행히도 전자였다. 카일에게 기초를 닦기는 했지만 혼자서 배운터라 체계적으로 교습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처음이라 어색했다. 엘란은 나 탈리의 시선을 피해서 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반짝였다. "재능이 없는 사람도 있단다." "뭐야, 그럼 나는 재능이 없다 이거야." "사람이 똑같은 재능을 타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 없겠냐? 나탈리는 예쁘고 똑똑해서 ." 엘란은 한 참을 떠들었다. " 그래서, 사람마다." 아에게가 말을 끊었다. "그만해 잠들었어." 잠든 얼굴이 천사같았다. "잠잘 땐 이렇게 예쁜데 ." 엘란이 말끝을 흐렸다. ************* 이틀이 지나자 인가가 드문드문 보였다. 작은 개천도 흐르고 밀밭도 펼쳐져 있다. 두두두두! 멀리서 일단의 말들이 달리는게 보였다. 햇빛을 받아 갑옷이 번쩍였다. 전쟁때나 갖추는 복장 이다. 보병은 없고 전부 기병이다. 지켜보던 엘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선두를 달리는 기병이 든 깃발이 보였다. 할버드 두 개가 교차하고 있었다. 다르넨가문의 문장이었다. 엘란(26) 8장. 대제의 유산 피터도 보였다. 엘란은 기사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노려 보았다. 엘란의 표정이 심상찮아 보 이자 아에게가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엘란이 차갑게 웃었다.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다르넨까지 갈 필요 없겠어요." 아에게는 그린과 마주 보았다. "저 기사들 중에 손 볼 사람이 있냐?" "예." 엘란은 아에게, 그린, 짝귀,밤톨,들창코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이제 헤어져야 겠네요." 아에게는 서운했다. "그냥 헤어지자니 섭섭한데 ." 엘란도 섭섭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할 일이다. "서운해 할 것 없어요. 일 끝나거든 찾아 갈게요." 엘란은 나탈리를 보았다. 위험한 일에 나탈리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슬립." "우씨, 또 ." 나탈리는 잠이 들어 쓰러졌다. 엘란이 안아 들었다. "부탁 좀 할게요. 내 대신 좀 돌봐주세요. 일 끝나면 데리러 갈게요." 짝귀가 가슴을 탕탕 쳤다. "내가 책임지고 잘 돌볼게." 밤톨과 들창코도 끼어들었다. "나도." "나도." 아에게는 엘란이 걱정스러웠다. 저 많은 기사들과 싸우다가는 다치기 십상이다. "어디에서 만날까?" 엘란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메디치 항구로 가신다고 그랬죠. 거기로 찾아갈게요." 그린도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요새는 세상이 뒤숭숭했다. "떠돌이 용병한테 들은 얘긴데, 메디치 항구에 '숲의 요정'이란 주점이 있는데 맥주 맛이 기가 막히데. 매달 말일에 거기서 기다릴게." "그렇게 해요." 아에게가 나처한 듯 뒷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나탈리가 깨면은 난리도 아니겠는데." "아이구! 큰 일이다." 짝귀의 얼굴이 하애졌다. 짝귀는 나탈리에게 꼼짝도 못했다. 엘란은 일행에게 일일이 포옹했다. "몸조심 하세요." 아에게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너야말로 몸 조심해." "먼저 가세요." "아냐 니가 먼저가." 그린이 아에게의 팔을 잡아 끈다. "우리가 먼저 가자." 모두들 떠나갔다. 엘란은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가족같은 사람들이다. 코가 찡해지고 눈물 이 날 것 같았다. '파보형 조금만 기다리세요. 조만간 피터를 보내줄께요.' 엘란은 말발굽의 흔적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길에는 갈 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멀리에서 불 빛이 보였다. 어떤 여행자가 노숙을 할 모양이다. 엘란은 불빛을 향해 걸었다. 말의 흔적이 그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의외로 안면이 있는 사람이 다. "이런데서 뭐하세요?" 엘란이 물었다. 이들은 하이론사형제였다.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었다. 유유자적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었다. "자네야 말로 이런데서 뭐하나? 혹덩이들은 어쨌나?" 확실히 다른 용병들은 혹덩이였다. 엘란은 땅바닥 을 가리켰다. "말발굽 자국을 따라왔어요." "자네도 대제의 유산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 엘란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대제의 유산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하이론도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다. "대제의 유산에 관심도 없으면서 뭐하러 기사들 꽁무니는 따라다니나?" "기사들 중에 원수가 있어서 따라온 겁니다." 하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만." 하이론은 엘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원수는 나중에 갚는게 어떤가? 지금 따라갔다간 소동에 휘말릴거야." 엘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피터를 본 순간 잊고있던 원한이 끓어 올랐다. 아무래도 그냥 넘기기에는 마음 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대제의 유산 때문에 영지를 떠나왔다면 일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원수는 자기 손으로 갚아야 한다. "아무래도 따라가야 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대제의 유산은 비밀이었잖아요? 비밀을 지킬려 고 밤의그림자까지 동원했는데, 이렇게 지방영주의 병력까지 동원하면 모두가 알게 되잖아요?" "어쩔수 없었을거야. 이런 일에 비밀이 잘 지켜지겠나? 이미 소문은 다 나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드는데 지켜야지. 그래서 병력을 동원한 걸거야. 자세한 사정이야 어떻게 알겠나?"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있는 의견이다. "그러저나 광법사도 헛수고만 한 셈이네요." 지방영주들의 뒤를 따르면 무덤의 위치는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광법사도 분통꽤나 터질걸." 엘란과 하이론은 몰랐지만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쳐오른 광법사는 맥그루를 갈가리 찢어죽였다. "다른 분들은 원래 말들이 없으십니까." 엘란은 하이론의 형제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들 은 말이 없었다. 엘란과 하이론의 얘기를 관심있게 듣기만 했다. 하이론이 한 숨을 푹 쉬었다. "그게 말이야 모두들 성대를 다쳐서 말을 할 수 없어." 엘란은 괜한걸 물었다고 후회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엘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천적인 장애로 보이지는 않았다. 말은 못해도 듣는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 다. "어쩌다가?" "스승이 만든 시약을 잘못 먹었어." 하이론은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하이론의 스승은 발작 크라는 자로 마법보다는 포션제조나 스크롤같은 마법물품 제작에 능했다. 마법사마다 대대로 전해 내려 오는 포션의 제조법이 있다. 이것은 안전성이 입증되어 있는 약이다. 그러나, 새로운 약을 만들려면 실 험을 해봐야만 한다. 보통 동물을 사용하거나 오크를 이용해서 실험을 한다.이렇게 해서 포션이나 약들 이 점점 발전하는 것이다. 하이론의 스승은 사악하게도 사람을 이용했다. 고아를 잡아오거나 노예 가난 한 집안의 아이를 사서 실험에 이용했다. 하이론형제도 이렇게 팔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발자 크가 만든 시약의 실험재료가 되었다. 수많은 포션을 먹고 발랐다. 그 과정에 성대가 상한 것이다. 발자 크는 이들에게 마법도 가르쳤다. 포션을 마셨을 때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간의 차이를 알 아보기 위해서였다. 실험중 사고로 발자크가 죽지 않았다면 하이론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험대사 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이들은 발자크의 사악함을 숨겼다. 발자크는 성능좋은 포션을 만들기로 유명했고, 귀족들의 목숨을 다수 구해줬다. 그래서, 성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성자의 제자가 사 악한 마법사의 제자보다 나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이론사형제는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법을 어긴 일이 많았다. 어릴 때 잡혀와 온갖 실험에 시달려서 세상물정도 어두웠고 성격도 이상한 면 이 많았다.그래서, 스승이 죽고 마법을 익혀 세상에 나왔을 때 사고를 곧잘 쳤다. 그러나, 스승의 명성 때문에 슬쩍 넘어간 일이 많았다. 형제들의 판단이 자신들에게는 유리했던 셈이다. 희생자들은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지라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들도 철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철이 들어서 탈이었지 만.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기도 하고 사회악 척결의 기치를 걸고 하겐사형제와도 싸웠 다. 하겐사형제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하이론사형제는 발자크에 비해 의술이나 포션제조술이 떨어 졌다. 그러나, 공격마법이나 방어마법은 발자크를 뛰어넘는 바가 있었다. 그래도 치료마법이 가장 뛰어 났다. "하이론께서도 기사들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꼭 따라갈 필요는 없어. 대충 목적지는 아니까." "목적지가 어딥니까?" 하이론은 간단히 대답했다. "말라야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가만히 떨어져서 움직임을 살펴보면 알 수 있어." 말라야산은 융커산맥에 있는 산이다. 그리 높은 산도 아니고 경치가 좋은 산도 아니다. 아스가르드와의 국경에서도 꽤 떨어져 있었다. 주위에 특출한 생산물도 없고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별볼일 없는 산이었다. 그 산이 지금은 온 대륙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의외군요. 대제의 무덤이라면 카르자나산 정도는 되야 격이 맞을텐데." 하이론은 씩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대제라도 평범한 산에 무덤을 만들거다. 유명한 산에 만들어봐 도굴되기 십상이 지."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이렇게 한가하게 움직여도 되나요?" 확실히 이들은 유유자적했다. 경치구경도 해가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제의 유산을 노리는 강자들은 많다. 십존도 끼어들었고. 우리는 별 욕심 없다. 떡고물이라도 챙기면 다행이고, 아니면 미련을 끊으면 그만이다. 단지 맹약의 검은 멀리서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군." 맹약의 검은 발칸대제가 광룡 캇셀프레임을 부릴 때 휘두른 검이다. 드래곤의 맹약이 담겨있어서 이 검 을 얻는자가 천하를 얻는다라는 말이 천년동안 떠돌았다. 삼황자가 찾는 것도 이것이고, 이황자가 결사 적으로 막으려는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엘란은 믿지 않았다. "저는 맹약의 검이 있다고는 믿지 않아요. 만약 이 검이 있었다면 제국이 대제 사후 5년만에 망했을 리 가 없잖아요?" 하이론은 금세 반박을 했다. "그래서 더 확실한거야. 생각을 해보게 대제의 검이 후손에게 이어졌다면, 제국이 망할 리가 있겠나? 제 국은 오년만에 망했어. 결론은 검이 후손에게 없었다는 건데, 그럼 어디에 있겠나?" 엘란은 소리쳤다. "대제의 무덤!" 하이론은 빙그레 웃었다. "모든 현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검이 없다고 오년만에 망한건 여전히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사실 검이 없어도 제국은 천하무적이었거든." 엘란은 생각에 잠겼다. 제국을 생각하고 대제를 생각하고 캇셀프레임을 생각했다. "이제 그만 자세." "예." 엘란은 하이론형제와 같이 잠이 들었다. "자네 뭐하나?" 하이론은 일어나자 마자 엘란이 수련하는 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엘란은 실프를 불러서 이리저리 부리고 있었다. 실프가 작게 축소되어서 쐐기 모양이 되었다. 순간 나선형으로 무섭게 회전을 하면서 쏘아졌다. 쐐액! 실프가 아침 공기를 뒤흔들었다. 엘란이 말을 씹자 하이론은 화가 났다. "이놈아!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할 것 아냐?" 엘란이 찔금할 정도의 고함이었다. 엘란은 실프를 돌려보냈다. "실피드를 크게 움직이면 마나소모가 심해서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실프를 그렇게 부리는 놈은 처음 보겠네." 하이론은 감탄했다. 하이론이 빤히 쳐다보고 있자 수련을 계 속하기가 뭐했다. 엘란은 짐에서 철판을 꺼냈다. 아무래도 하이론은 심심한 모양이었다. 엘란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것 저것 물었다. 사실 하이론은 입 이 심심했다. 형제들은 모두 벙어리들이다. 그들은 벙어리에 적응을 했지만 하이론은 아니었다. 하루종 일 말 할 사람이 없어서 입에서 곰팡이가 쓸 정도였다. "그건 또 뭐 할려고?" "앞으로 위험해질 것 같아서 호신갑을 만들려구요." 엘란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었다. 철판에는 충격 완화 주문이 새겨져 있다. 하이론이 철판을 자세히 살폈다. "아, 이거 마차를 감싸던 철판이로군. 마법이 새겨져 있었어. 어쩐지 하겐의 마법에 오래 견딘다 했다." 카사를 불러 철판을 달구고 실피드로 작은 구멍을 뚫었다. 운디네로 철판을 식혀서는 두장을 맞대서 구 멍을 끈으로 묶었다. "정령을 이런데다 써먹는 놈은 또 처음보겠군." 엘란은 옷을 벗고 속옷위에다 철판을 입고 끈을 조였다. 가슴에서 배꼽까지 철판으로 덮였다. 그위에다 셔츠를 입고 망토를 걸쳤다. "자네 포션은 있나? 내가 만든게 있는데 하나 살텐가?" 호신갑을 착용하는 것을 보고 하이론이 물었다. 엘란은 이스마엘이 생각났다. 이스마엘이 죽어갈 때 카일의 포션으로 살릴 수 있었다. "그러죠, 하나 주세요." 하이론은 품에서 손바닥만한 병을 꺼냈다. 병에는 푸른액체가 들어있다. "50골덴." "예?" 엘란은 놀라서 반문했다. "이봐 우리 스승인 발자크가 만든 포션은 한 병에 100골덴씩 했어. 비싼면 다 비싼 이유가 있는거야." 카일이 가지고 있던 포션도 발자크가 만든 포션이었다. 엘란은 미심쩍었다. "그래도 그렇치 50골덴은 너무 비싸잖아요." 웬지 하이론이 만든 포션은 질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이론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50골덴이 비싸다고! 여기에 뭐가 들어가는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 할거다. 가고일의 심장에 오거의 눈 알 ." 하이론은 한 참을 떠들었다. 엘란은 들어가는 내용물을 듣고 속이 느글거렸고, 하이론이 떠드는 소 리에는 귀가 따가왔다. "알았어요. 알았어. 살게요. 됐죠?" 엘란은 베낭에서 상자를 꺼내 50골덴을 주고는 얼른 포션을 받았다. 하이론이 상자 안을 보더니 은근히 말했다. "자네 부자구만, 한 병 더사지 그러나?" 엘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요." 사실 내용물을 듣고는 웬만해선 먹고 싶지 않았다. 엘란은 아침을 먹고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목적지를 알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발자국을 놓쳐도 말 라야산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엘란에게 원치않는 불청객이 따라 붙었다. 유유자적한 태도와 하 겐형제와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결과적으로 도움을 준 일로 가지게 된 호감이 싹 달아났다. 하이론은 끊 임없이 떠들었다. '참자 참어, 참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 걸어서 말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결국은 말라야산까지 가야만 했다. 어쩌면 대제의 무덤을 구경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산이 가까워 지자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잡혔다. 같이 여행한지도 여러날이 흘 렀다. 하이론은 여전히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말이야 맹약의 검을 차지할 생각은 없어. 십존이 있는데 감히 그런 생각을 품겠나? 그저 마법서나 한 권 줍거나 마법검을 하나 차지하면 대만족이야. 아니면 십존이 싸우는 걸 볼수만 있어도 대만족이야. 벌써 몇 년째야? 언제적 십존이 아직도 십존이야? 어쩌면 이번에 새로운 십존이 탄생할지도 몰라 그렇 지?" 십존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지도 20년이다. 광법사를 제외한다면 벌써 30년째였다. 그중에 누가 제일 강한가는 음유시인들도 즐겨 노래하는 내용이었다. 엘란도 여기에는 흥미가 동했다. "광법사와 적법사는 구원이 있으니 한 판 붙겠죠?"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거야. 꼭 봤으면 좋겠네." 세상에 싸움구경만큼 신나는 것도 없다. 게다가 대륙최고 강자의 싸움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엘란과 하이론형제들은 산의 초입까지 다다랐다. 말라야산을 넘으면 본격적으로 융커산맥이 시작된다. 말라야산은 황무지와 맞닿아 있었다. 산의 주위는 수많은 병사들이 막고 있었다. 그러나, 큰 산을 모두 지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몰려든 사람들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서 완벽하게 지키기는 애초부터 불가능 했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산에 들어가 있었다. **************************** 말라야산의 심처에 수많은 천막이 쳐져 있었다. 천막 안에는 시드와 막스가 수정구를 들여다 보고 있었 다. 수정구 안에는 프르덴틀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잠을 못잤는지 눈은 충혈되어 있고 얼굴은 푸석푸석 했다. "무덤은 열었느냐?" 후작이 물었다. "오늘 중으로 열수 있습니다. 그보다 몰려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모두 무덤안으로 들어가게 해라." 시드가 말했다. "그러다 맹약의 검을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후작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공작의 말로는 맹약의 검은 안에 없다. 공작이 확신하는 일이니 맞을거다." "맹약의 검은 없다해도 다른 물건들을 적들이 차지하면 어쩌실겁니까?" "안에는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희생이 클거야. 우리가 들어가서 희생할 필요 없다. 다른놈들이 길을 닦아 놓으면 그때 들어가면 된다. 아니면, 살아서 나온놈들을 털든가? 아마 성한 몸으로 나오는 놈 들은 몇 안 될걸? 그건 상황을 봐가면서 그쪽에서 알아서 해라. 대제의 무덤보다는 이황자의 군대를 막 아내는데 최선을 다해라!" "예, 알겠습니다." 막스가 공손히 대답했다. 막스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안에 맹약의 검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진다면 큰 일이었다. 막스는 무덤 안으로 직접 들어갈 결심을 굳쳤 다. 통신마법이 끊기고 막스가 말했다. "혹시 모르니 안에는 제가 기사들을 이끌고 들어가겠습니다. 밖은 시드님이 감시하십시오. 살아서 나오 는 자는 모두 이렇게." 막스는 손으로 목을 그어보였다. 시드의 얼굴에 잔혹한 웃음이 맺혔다. "그러지." 엘란(27) 말라야산에는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숨막히는 기운에 산의 주인들인 짐승들은 모두 떠나거나 굴에서 몸을 사렸다. 산을 지키는 병사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나무위에 복면을 쓴 두남자가 있다. 밤의그림자 마스터와 맥스였다. "부하들은 모두 대기시켰나?" 마스터가 물었다. "약한 자들은 빼고 정예로만 30명 추려서 대기시켜 뒀습니다." "잘 했다. 그건 그렇고 이놈들은 지도를 얻은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입구하나 못 열고 있지?" 마스터는 입구가 열리기를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맥스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열리겠죠." "데미는 어떤가?" 맥스가 복면안에서 인상을 썼다. "상처는 다 낳았습니다. 오지말랬는데 부득불 우겨서 따라왔습니다." "충격이 컸나보군." 대화는 금세 끊겼다. 지리한 기다림이 반복되었다. 어차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닌가? ******************************* 시드가 이끌고 온 마법사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로브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법사들은 동굴의 안 에 있었다. 무덤을 열려면 동굴을 열고 동굴안의 마법진을 해체시켜야 했다. 동굴을 여는데만도 일주일 이 걸렸고, 마법진을 해체시키는 데는 근 한달이 걸렸다. 5서클마법사 키데아는 마법진의 중앙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조그만 더 견뎌라 다 되었다." 키데가가 독려했다. 키데아 주위에는 4서클마법사 열명이 마법진이 가장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 사이로 마나가 폭풍처럼 일렁였다. "안 되겠습니다. 마나가 모자랍니다." 키데아가 막스를 보며 외쳤다. 막스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진의 해제는 거의 다 되었지?" "예." 키데아가 헐떡거렸다. "그럼 마나를 공급해주거나. 지금상태를 폭주시키면 되겠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면 저희들이 위험합니다."막스는 말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마나가 검에서 일렁거렸다. "무슨 짓입니까?" 키데아가 놀라 외쳤다. "가족들은 내가 책임지고 돌봐주겠네." 힘을 쓰고 있던 마법사들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안돼!" 키데아가 절규했다. 그러나 막스는 무표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주방장이 무를 채 썰면서 칼질을 연습하 듯 아무런 주저가 없었다. 마나에서 시퍼런 광채가 키데아에게 쏘아졌다. 서걱! 키데아의 목이 떨어졌다. 막스는 얼른 동굴 밖으로 나왔다. 마력을 조정하던 키데아의 목이 떨어 지자 마나가 무섭게 폭주했다. 쿠아앙!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마나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마법진에 서있던 마법사들은 이리저리 잘려 서 흩어졌다. 쾅! 마법진이 터져 나갔다. 드디어 마법진이 해체되었다. 쿠르르릉! 온 산이 뒤흔들렸다. 엘란은 피터의 막사를 노려보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깜짝 놀랐다. 하이론이 어느새 옆에 와서는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오줌 누다가 다 튀었네, 옷에도 다 묵고 에이 척척해, 근데 뭔 일이야?" 엘란은 눈도 돌리지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살면서 이렇게 놀라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산을 돌아가면서 여기저기서 문이 솟아 올랐다. 대제의 무덤은 상상을 초월했다. 산 전체가 대제의 무덤이었다. 이러니 누가 대제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이렇게나 많이 숨어있었나? 놀랄 지경 이었다. "막아라!" 사람들이 입구로 뛰어들자 기사들이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그러나, 달려드는 사람의 숫자도 많은 데다가 하나하나 범상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지라 막아내지를 못했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 들었다. "우리도 가세!" 하이론이 신이 나서 외쳤다. 지금은 혼란했다. 피터를 죽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엘란 은 피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터 다르넨은 정신이 없었다.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데 땅이 흔들렸다. 땅이 온통 흔들리고 갈라져서 막 사가 무너져 버렸다. "아이구 지진이다." 피터는 엉금엉금 기어서 막사를 빠져 나왔다. 나와서 보니 밖은 난리도 아니었다. 수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검과 창을 휘둘렀고, 매직 미사일, 파이어 볼등 온갖 마법이 휘몰아쳤다. 입구 하나가 피터막사 주위에서 열린 것이다. 피터는 싸움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전을 엄청난 소리가 때렸 다. 음성증폭마법이 걸려 있는 음성이다. "들어가려는 자는 막지마라!!" 앞을 막아서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피터에게 오늘은 운 수 더러운 날이었다. 하필 막사주위에 입구가 열리는 바람에, 게다가 입구앞에 멍하니 서 있던 바람에 인파에 휩쓸려 버렸다. 사람들은 막아서던 자들이 빠지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덕분 에 피터도 입구로 들어서 버렸다. 피터는 이런데 오고 싶은 맘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바라는게 있다면 평생 영지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공을 세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성화에 기사들을 이끌 고 달려오긴 했지만 관심이 없었다.'맹약의 검따윈 개한테나 줘버려라.' 이것이 피터의 생각이었다. 대충 개기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이다. 그 바람에 엘란의 일까지 꼬여 버렸다. 달려 들던 엘란은 멈춰섰다. 피터가 무덤입구에서 멍청하게 알짱거리다 인파에 휩쓸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옆에서 하이론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봐 우리도 들어가야지?" "먼저 들어가세요." 엘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참에 하이론을 떨구고 싶었다. 그러나, 하이론은 먼 저 들어가지 않고 재촉만 해댔다. "빨리 가자, 빨리 가자~~." 엘란은 일이 이상하게 꼬인다고 생각했다. 영 내키지 않았다. 가스통의 무덤에서 학을 뗀 이후에 남의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다. 괴팍한 사람이긴 했지만 가스통의 말은 일리가 있다. 대제의 유산이니 맹약의 검이니해도 결국은 무덤도굴 아닌가? 게다가 드래곤을 부리고 온 대륙의 힘을 동원하던 대제가 남긴 무덤이다. 좀 위험하겠는가? 그러나, 엘란은 들어가야만 했다. 피터는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엘란은 철판을 하나 더 가슴에 댔다. 입구는 여기저기 솟아나 있었다. 사람을 유혹하는 저승사자의 손짓 같았다. 엘란은 피터가 들어간 입구로 들어섰다. 뒤에는 하이론형제가 따라 붙었다. 안은 컴컴했다. 가스 통의 무덤이 생각나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하이론이 마법등을 꺼내 마나 를 주입한 것이다. "별걸 다 가지고 다니시네요?" 엘란이 말하자 하이론이 우쭐거렸다. "하하하, 원래 우리가 한 준비성 한다." 통로는 보통의 동굴이었다.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나아가자 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엘 란이 계단을 요리조리 살펴보자 답답했던지 하이론이 나섰다. "무슨 젊은 놈이 늙은이처럼 앞뒤를 재냐? 패기있게 나가야지." 하이론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위험한게 있으면 먼저 들어간 놈들 시체라도 있을거 아니냐? 헉!!" 하이론은 깜짝 놀랐다. 앞에 갑자기 시체가 나타났다. 가만히 보니 통로를 막고 있는 문앞에 창으로 꿰여 있다. "시체가 있네요." 엘란이 조용히 말했다. "험험." 하이론이 헛기침을 했다. "꺽꺽!" 하이론의 형제들이 웃었다. 상한 성대 때문에 귀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리였다. "형제분들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그게 말이야." 하이론이 겸연쩍게 웃었다."아버지가 무식해서 이름을 못지었어. 그래서, 둘째가 하일론 이, 이고 다음부터 쭉 하이론삼 하이론사야." "하이론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으신 겁니까?" "촌장한테 돈주고 지었어, 동생들이 태어났을 때는 워낙에 가난하던 때라 이름을 못 지었어." "그렇게 된거군요. 그럼 하이론이 하이론삼 하일론사 이렇게 부르면 됩니까?" "할 수 있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데." '의외로 부모님 말씀은 잘 듣는 모양이네.' 엘란은 속으로 말했다. "왜 이 사람만 죽어 있을까요?" 엘란이 물었다. "재수가 없었겠지." 하이론이 간단히 대꾸했다. 엘란은 기가 찼다.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될건 또 뭔가?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지 않나?" "재수없어서 넘어졌는데 창이 날라와서 박혔다. 무슨 말도 안되는 ." 둘이 계속 티격태격하자 하이론이 가 조용히 문을 밀었다. 문이 아주 쉽게 열렸다. 하이론과 엘란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뭐 이래?" 문을 열려면 애 좀 먹을 줄 알았는데 쉽게 열린 것이다. 안은 어두웠다. 왠지 으스스했다. "안 들어가?" 하이론이 나섰다. 엘란은 통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죽음의 함정같이 느껴졌다. "자식이 또 영감처럼 군다." 엘란은 상대를 안하기로 작정했다. 엘란이 가만히 있자 하이론은 혼자 떠들 다가 조용해졌다. "실피드!" 엘란이 정령을 소환해서 주위를 보호했다. 한 참을 있어도 아무일이 없었다. 무슨일이 있나 싶 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이론이 말했다. "아무일 없잖아, 빨리 들어가자." 쾅! 갑자기 문이 닫혔다. 모두들 움찔했다. 슉슉! 사방에서 창이 날아왔다. 창은 실피드에 막혀 튕겨졌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혼자 죽어 있었군." "그러니까, 혼자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죽었다는 건데 혼자서 뭘하고 있었을까?"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겠죠, 누가 문을 막으면 곤란해 지잖아요."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하 려는데 이상한게 느껴졌다. "이게 뭐야?"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오고 있었다. "포이즌버그같은데요." "확실해?" "그거야 모르죠, 한 번도 본적은 없으니까." 하이론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화이어버스터." 벌레주변에서 불의 폭발이 일어났다. 타닥타닥!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벌레들이 타들어갔다.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포이즌벌레가 타 들어가면서 독연기가 피어 올랐다. 보통 불은 독의 상극이다. 이상하게 포이즌버그의 독은 불을 만나도 독기가 그대로였다. 한 모금 들이마신 것 뿐인데 머리가 띵해졌다. "독무다! 문으로 들어가요." 엘란이 외쳤다. 엘란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하이론형제들이 따랐다. 하이론 은 얼른 문을 닫았다. 연기와 벌레는 들어오지 못했다. 엘란은 감탄했다. "대단하지 않아요. 천년전에 만든 무덤인데 벌레는 그렇다 치고 연기하나 들어오지 않아요." 안의 공기 는 맑았다. 하이론형제들도 고개를 끄덕여서 동감을 표시했다. "먹게." 하이론이 품에서 알약을 꺼내 하나를 먹고는 엘란과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약을 먹자 머리 가 맑아졌다. "효과가 대단한데요." 엘란이 말하자 하이론이 흐뭇하게 웃었다. "끙." 엘란이 문을 당겨보았지만 꼼짝을 안했다.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다 이건가?" 하이론이 미간을 모았다. 걱정이 될 때의 버릇이다. "실피드." 정령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문에 부딪쳤다. 쾅! 문에 약간의 금이 갔다. 엘란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어렵긴해도 나갈 때 부수고 나가면 되겠어요." "들어가 보자." 하이론이 말하고는 앞장을 섰다. 엘란은 하이론이 갑자기 진지해지자 어색해졌다. 하겐형 제와 대치할 때도 지금처럼 진지했다. "성격변화가 상당히 심하군요 어떤게 본 모습이죠?" 엘란이 물었다. 하이론은 씩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이상하게 커서 그럴거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너도 꽤 성격이 이상해. 너도 비정상적으로 컸을걸." 엘란은 하이론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먹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자신의 성격에 이상한 면이 있었다. 아무 죄책감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는 면도 그렇고, 혼자 있는게 오히려 편할 때도 많았다. '보통 다른 사람들도 이렇지 않나?' 그러나, 엘란은 확신할 수 없었다. 엘란은 가다가 하이론의 등에 부 딪쳤다. 생각에 빠져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와서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무슨 일이죠?" 엘란이 물었다. 하이론은 대답없이 앞을 가리켰다. 갈림길이 나왔다. 여섯 개의 길이 나 있다. 안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어서 환했다. 엘란은 실프여섯을 소환해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시후 실프 가 돌아왔다. "뭐라나?" "안에 사람의 흔적이 모두 있답니다." "여기서 흩어졌나 보구만, 어디로 갈까?" "제일 오른쪽으로 들어가죠." 이번에는 엘란이 앞장을 섰다. 엘란은 등불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석유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불꽃을 댕기는 마법이 걸려 있었나 보군." 뒤에서 하이론이 말했다. "서비스 좋은데요." 엘란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잠깐, 서요."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꽤 많았다. 엘란은 시체 한 구를 들어서 멀리 집어 던졌다. 파아앗! 통로의 사방에서 강침이 튀어나왔다. 시체는 고슴도치가 되었다. "거봐! 자네도 성격 이상한거 맞잖아." 하이론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엘란은 흠칫했다. 하이론삼이 다 가와 엘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상한 눈빛이었다. 눈빛은 신경쓰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엘란은 인사를 하고 실피드를 불렀다. "베리어." 실피드가 엘란의 주위에 장벽을 쳤다. 하이론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봐 우리도 보호해야지." "알아서 하세요." "성격 이상하다고 말했다고 이러는 거지? 젊은 놈이 영감에다 속까지 좁구만." 계속 투덜거리더니 실드 를 쳤다. 일행은 천천히 나아갔다. 파파팟! 사방에서 강침이 날라왔다. 강침은 바닥을 누르면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강 침세례가 멈추었다. 앞에는 또 시체들이 즐비했다. "다음 단계는 뭘까~요?" 하이론이 희희덕 거렸다. 엘란은 하이론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나이값 좀 하세요." "시체 한 번 더 던져보지 그러나?" 엘란은 대꾸없이 앞으로 나섰다. 기긱! 복도의 옆에서 문이 열리더니 허연 뼈다귀들이 걸어 나왔다. "스켈레톤이군." 척척! 열을 맞춰 걸어왔다. "스켈레톤은 약점이 뭐에요?"엘란이 물었다. "머리를 부셔." 하이론이 간단히 대꾸했다. 엘란은 실피드를 불렀다. "바람의 칼날." 실피드가 희긋희긋한 칼날이 되어 날아들었다. 투둑!투둑! 스켈레톤은 쉽게 부셔졌다. 부서진 뼈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스켈레톤은 끝도 없이 몰려 나왔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요. 달려요!" 엘란은 실피드를 하나 더 불러 몸을 보호하고 앞을 막은 스켈레톤은 다른 실피드로 박살을 냈다. 뒤에는 실드를 친 하이론형제가 따랐다. 스켈레톤이 나오는 통로를 지나자 문이 다시 보였다. 엘란은 문을 밀었다. 이 문도 쉽게 열렸다. 문을 닫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크앙! 갑자기 괴성이 울렸다. 마계의 수문장 켈베로스였다. 안은 제법 넓은 원형의 공동이었다. "산너머 산이네." 안에는 켈베로스가 사람들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켈베로스가 엘란에게 달려들었 다. 생김새는 꼭 개같이 생겼는데 덩치는 황소보다 더 컸다. 발에는 칼날같은 발톱이 달렸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두눈은 푸른 광채를 뿜어냈고, 침을 질질 흘렸다. "바람의 칼날." 실피드가 매섭게 날았다. 한 마리를 토막내자 다른 놈들의 광기가 폭발했다. 두려움을 모 르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켈베로스가 달려들었다. "실프!" 엘란은 동시에 실프열을 불렀다. 실프가 형체가 희미해지면서 작게 축소되었다. 송곳처럼 변하더 니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날라갔다. 실프가 켈베로스를 꿔뚫었다. 켈베로스의 몸에는 나선 모양의 구멍이 생겼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컹! 여기저기서 켈베로스들이 쓰러졌다. "이놈들 꼭 개같이 생겨서는 소리도 개같이내내." 하이론은 입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지팡이도 부지런히 놀렸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30센지미터짜리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의 머리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화염이 일었다. 나머지 하이론 형제는 대조적으로 아이스 에로우를 날 렸다. 여기저기 켈베로스의 시체들이 쌓였다. 엘란이 싸우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붉은색의 광채 가 피어 올랐다. 광채가 걷치고 켈베로스들이 나타났다. "젠장! 마물소환진이 설치되 있었어." 새로 나타난 켈베로스들은 피냄새에 쉽게 흥분했다. 눈은 금새 광 기로 물들어 번들거렸다.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소환진부터 파괴해야 될 것 같아요." "개들은 우리가 맡을테니 자네가 해." 하이론은 켈베로스를 개라 불렀다. 엘란은 실피드 둘로 베리어를 치고 실프로 켈베로스를 처치하면서 소환진으로 달렸다. 하이론형제가 엄호를 섰다. 엘란의 주위로 아이 스미사일이 날았다. 소환진 앞에 선 엘란은 베리어를 풀어서 실피드 둘을 날렸다. 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뒤집어졌다. "됐어." 그때 뒤에서 켈베로스가 달려들었다. 황소보다 큰 덩치에 몸놀림은 호랑이보다 빨랐다. "카사!" 엘란과 켈베로스의 사이에 카사가 나타났다. 불길에 이글거리는 독수리가 켈베로스를 감샀다. 컹! 매캐한 냄새와 함께 켈베로스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어느새 하이론형제가 엘란의 곁으로 왔다. "화이어 스톰." 불의 폭풍이 앞으로 쏟아져서 주위를 무섭게 휘돌았다. 하이론이 물러나자 둘째가 나섰 다. "카아아 끄어카(아이스 스톰)." 날카로운 얼음의 결정이 주변을 휩 쓸었다. 다음에는 셋째가 나섰다. "끄아 까칵(라이트링 볼트)." 빠지지직! 앞쪽으로 스파크가 튀었다. 켈베로스들이 터져 나갔다. 넷째는 나설 필요가 없었다. 주위는 태 풍이 휩쓸고 간 것 같았다. 엘란과 하이론형제들은 지쳐서 그 자리에 앉았다. "쉬었다 가자." 하이론은 말을 한마디 하고는 엘란이 구워놓은 켈베로스에게 갔다. "뭐하십니까?" "맛이나 좀 볼려고." " ." 하이론은 단검을 꺼내 넙적다리를 베어 물었다. "퉤퉤! 무슨 맛이 이래." "무슨 맛인데요?" 엘란은 궁금했다. "그게 말이야, 시고 떫어." "희한한 맛이네요." "자네도 맛 한 번 볼텐가?" 엘란은 손을 휘휘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잠시후 엘란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만 가죠. 어디로 갈까요?" 여기는 넓이 만큼이나 통로도 많았다. 통로는 열두개나 나 있었다. "아까처럼 제일 오른쪽으로 가자." 이번에는 하이론과 형제들이 앞장을 섰다. 엘란은 마음이 푸근해졌다. 카일과 가스통의 무덤에 갔을 때는 자기만 앞장을 섰다. 등을 보이며 걷는 자에게서 묘한 신뢰가 느껴 졌 엘란(28) "이젠 뭐가 나올지 기대가 되는 걸." 하이론이 쾌활하게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자 바닥에서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젤리로 만든 것 같았다. 물컹물컹한 푸른빛 액체가 꾸물거렸다. "뭐 같습니까?" 엘란이 물었다. "아메바야." 하이론이 답했다. 바닥에는 온통 아메바 천지였다. 벽에도 아메바가 꿈틀거렸고 천장에서도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카사를 불러내는데 하이론이 말렸다. "아메바는 불에 잘 안타." "그럼 어떻게 하죠?" "신관이 있으면 딱인데... 눈감고 손으로 눈을 막아." 엘란은 시키는대로 눈을 감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하이론의 낭랑한 외침이 들렸다. "메가 라이트!" 사방을 하얀 섬광이 작렬했다. 눈부신 빛이었다. 보통사람이 쳐다봤다간 실명할 수도 있 는 밝기였다. 하이론이 숨을 헐떡였다. "아이구!힘들어라." 엘란은 슬며시 눈을 떴다. 아메바가 사방 벽쪽으로 붙어서 굳어 이었다. 통로에는 반 쯤 녹아가는 사람들의 시체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냄새 한 번 지독하네. 빨리가세." 하이론이 코를 막고 나아갔다. 반쯤 녹은 시체가 보기 흉했다. 아메바 를 지나자 다시 문이 나타났다. 하이론이 문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자 엘란이 물었다. "안 들어가고 뭐하세요?" 하이론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문이 안 열려." 문이 안 열리기는 처음이었다. 엘란도 가서 문을 힘껏 밀었다. 문은 꿈쩍도 안했다. "비켜보세요." 하이론이 비키자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문을 후려쳤다. 펑!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란은 다시 한 번 후려쳤다. 평! 여전히 멀쩡했다. 처음 입구의 문과 달리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미스릴을 입힌데다가 여 러문형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보는 문자였다. "마법이 새겨져 있어서 충격을 안 받나봐요." "그래 보이는 군." 하이론은 도형과 문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시는 마법입니까?" 하이론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보는 마법이다." "다른 사람들이 돌아나오지 않은 걸 보면 분명히 들어갔고, 그럼 여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잘 생 각해 보세요." "모르겠어." 하이론은 말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문을 두들겼다. 털컹! 열리라는 문은 열리지 않고 바닥이 꺼졌다. "어어!" 엘란과 하이론형제들은 순식간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까지의 길은 오르막이었는데 이제 내리막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레비테이션!" "실피드!" 부지불식간에 하이론은 마법을 걸었고 엘란은 정령을 불렀다. 그러나, 위에서 갑자기 물이 쏟 아졌다. 쏴아아! 엘란과 일행들은 물에 휩쓸렸다.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휘말리다 보니 마법도 풀리고 정령도 돌아가 버렸다. 일행은 정신없이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넓은 공간으로 떨어졌다. 밑에는 푸른 물이 얼 핏 보였다. 엘란은 실피드 둘을 불러 일행을 받쳤다. 아래는 넓은 지하광장이었다. 밑에는 작은 연못이 보이고 주위에는 사람들이 보였다. 자기들 말고도 떨어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엘란은 하이론형제와 함께 연못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렸다. "이거 꽤 재밌는데, 이봐,엘란 나중에 이런거 하나 만들어서 놀면 재밌겠지?" "영감님이나 만들어서 노세요. 전 사양하겠습니다." 엘란은 연못을 살펴 보았다. 아무래도 함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풍덩! 물이 튀어 올랐다. "으악!" 연못에 빠진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니 끓는게 아니라 튀어 오르 고 있었다. 파다다닥! 손바닥만한 물고기가 튀어올랐다. 사람은 금세 ?겨져서 뼈만 남더니 이윽고 뼈까지 없어 졌 다. "이거 피라니아 맞죠?" 엘란이 물었다. 하이론형제의 넷째가 손짓을 했다. "피라니아변종이라는데, 옛날에 어떤 마법사가 개량한 피라니아라는군." 하이론이 넷째의 손짓을 보고 말했다. 엘란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십니까?" "그래, 이런 방법을 고안하는데 10년이 걸렸어. 매번 글로 쓰려니 불편해서 말이지. 어떤가 대단하지 않 나?" 하이론은 아주 뿌듯한 얼굴이다. 엘란은 순순히 동의했다. "예, 대단합니다." 청각 장애인들이 익히면 상당히 유용할 것 같았다. 엘란과 하이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저들은 어디로 들어왔을까요?" 엘란이 물었다. 주위의 사람들 모두 위에서 떨어진 것 같진 않았다. 그 러기에는 실력이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어보면 알겠지." 하이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사에게 접근했다. "어디로 들어왔나?" 기사는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엘란이 가보자 문이 보였다.벽에는 문들이 많았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들어온 듯 보였다. "여기로 모두 모이게 설계됐을까요?" 엘란이 물었다. "아닌 것 같은데. 들어온 사람 수에 비해서는 숫자가 너무 작은 것 같지 않아? 게다가 광법사같은 강자 들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도 함정을 넘어왔는데 그런 강자들이 중도에 죽었을리도 없고." "그도 그렇군요. 그럼 여러군데로 모이게 건설했다는 뜻이네요?" "그런 것 같지." "모아서 한 번에 죽이자는 뜻일까요?" "글쎄." 하이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엘란은 여기저기 둘러 보았다. "뭐하나?" 하이론이 물었다. "원수를 찾아요." 엘란이 이를 갈아 붙였다. 피터도 들어왔으니 죽지 않았다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엘란도 처음에는 알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던 탓이다. 갑옷의 문장으로 겨우 알아차렸다. "일어서!" 엘란이 으스스하게 내뱉었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피터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안광이 아주 매서웠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피트는 엉겹결에 떠밀 려 들어왔다. 밟혀 죽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정도 주위가 정돈되고 나가려고 문을 밀자 문이 열리지 않았다. 들어올 땐 쉽게 열렸는데 나갈때는 열리지 않았다. 할 수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강해 보이는 사람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운이 좋았는지 여기까지 무사히 왔는데, 웬 놈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피터는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영지에서 하녀나 건드리면서 편안하게 있어야 할 이몸이. 가뜩이나 성질이 나는 판에 잘 됐다 싶었다. 피터는 성질을 참 는 사람이 아니다. 피터는 앉아서 조느라고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엘란을 보지 못했다. 실피드 부리는 걸 봤다면 이렇게 나오지는 못했으리라. 피터는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바스타드 소드였다. 파 보의 목을 날렸던 바로 그 검이다. "하하하하!" 엘란은 웃음을 날렸다.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웃음이다. 사뭇 처절함이 서려 있었다. 피 터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이제 보니 이놈 이거 미친거 아냐? 왜 웃고 지랄이야.' 엘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덩어리를 지그시 삼켰다. 살기가 치밀어 올라 머리까지 아득했다. 엘란에게 서 폭풍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피터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기세였다. 피터는 두다리가 덜덜 떨렸다. 오 줌까지 지릴뻔 했다. "내가 기억나나?" 피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엘란은 피터를 노려보았다. "하긴, 기억할 리가 없지. 그럼 파보는 기억하나." 피터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이 들에게 쏠렸다. 다른 기사들이 엘란과 피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만한 목소리다. 엘란은 목소리만 들어도 이들이 귀족임을 눈치챘 다. 같은 귀족이 당하고 있는 듯하자 끼어든 것이다. 이들도 엘란이 떨어져 내리는 걸 못 본 모양이다. "꺼져." 엘란이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발했다. 기사들은 당황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상황이 너무 달랐 다. 주위 공간을 엘란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기사들도 온 몸이 떨려왔다. 털썩! 기사들이 주저 앉았다. 피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금더 있다가는 힘 한번 못 써보고 당할 것 같았다. 피터는 최후의 기력을 짜내어 검을 휘둘렀다. 휭이잉! 거센 바람과 함께 실피드가 나타났다. 실피드는 피터의 온 몸을 결박했다. 피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자 자네 왜 이러나?" 어느새 용기는 사그라들고 공포가 밀려들었다. 엘란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피 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엘란은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엘란의 얼굴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저승에 가거든 엘란이 보냈다고 그래라!" 엘란은 단검을 힘껏 찔러넣었다. "아악!" 피터는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피터의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으하하하!"엘란은 광소를 터트렸다. 피터의 꿈틀거림이 멈추었다. 엘란은 피터의 시체를 연못에 집어 던 졌다. 피라니아변종들이 날뛰었다. 피터가 뼈까지 없어지는 것은 잠깐이었다. 엘란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가슴 속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하이론은 동생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저놈 정상 아니라 그랬지?" 엘란은 맞은 편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이론형제가 여전히 따라왔다. 하이 론은 엘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저 놈이 원수야? 별 볼일 없는 놈인 것 같은데." "11세 소년에게는 충분히 무서운 놈이죠."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나갈텐가?" 엘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가고야 싶지만 무덤이 안 내보내 줄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군. 시도는 한 번 해보지." 하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들었다. 나머지 형제들도 일어났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문으로 갔 다. "파이어 볼!" 하이론이 파이어 볼을 날렸다. 소용이 없자 파이어 스톰도 시전했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 고 지켜 보았다. 문이 열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이론이 파이어스톰을 시전하면 동생들은 아이스 스톰 을 시전했다.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면서 균열이 가기를 기대했다. 엘란도 가세했다. 실피드가 무서운 힘으로 문과 충돌했다. 수십번을 충돌시킨 후 모두들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문은 말짱했다. 약간 의 흠집이 다였다. 엘란은 기운이 쭉 빠졌다. 이 문도 위에서 떨어져 내리기 전에 열려했던 문과 같았 다. 미스릴로 덮였고 표면에는 마법문자가 세겨져 있었다. "소용없는 일이야! 그만 두게."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이스마엘!" 엘란은 반갑게 소리쳤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엘란과 이스마엘은 사 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갔다. "여기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지." 이스마엘은 안색이 좋치 않았다. 눈이 뻐끔하게 들어간데다가 누렇게 떠 있었다. "어디 다쳤습니까?" "지치긴 했지만 다친건 아니네. 다시는 하늘을 못 보는게 아닌가 걱정이 되서." 확실히 무덤안은 흉험했 다. 수많은 피를 마시고도 여전히 요구하고 있었다. "자네는 맥그루와 함께 있을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네." "이스마엘도 저희를 따라다니셨군요. 찾는다는게 여기 있습니까?" 이스마엘은 엘란에게 바짝 다가서서 속삭였다. "맹약의 검을 우리 교도들은 영광의 검이라 부른다네. 지고로 가는 영광된 길을 열어준다는 뜻이지." "정말 그 검이 있는 겁니까?" 이스마엘은 한 숨을 푹 쉬었다. "여기말고 어디에 있겠나? 우리들은 천년동안이나 찾아 헤맸네. 여기에 없다면 찾아 볼때가 없지 않나?" 엘란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도 그렇군요. 그런데, 혼자 들어오셨습니까?" 이스마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교에는 싸울만한 사람이 없어. 같이 들어왔다간 모두들 죽을거야. 나도 5써클 마 법사 뒤를 따라와서 그렇지 아니면 무사하지 못했을거야." "교에 강한 사람이 그렇게 없습니까?" "내가 광법사에게 찾아간 후 좌호법사도 교를 떠났다더군." 이스마엘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다. "가족이 모두 화형을 당해서 충격이 컸나봐." "그럼 우호법사는?" "내가 우호법사네." 주위에서는 하이론이 기웃거렸다. 가까이 다가가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분위기가 너무 무거 워서 다가서기가 힘들었다. "저사람들은 누군가?" 이스마엘이 물었다. "하이론 사형젭니다." 이스마엘은 하이론형제를 훑어 보았다. "유명한 동행을 얻었군." 이스마엘도 하이론형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마법도 능통했지만 여러 가 지 용도의 약으로 더욱 유명했다. 엘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못참겠는지 하이론이 형제를 끌고 다가왔다. "누구야?"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이 없자 엘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엘란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생각하고 있었다. 지고교도라고는 밝힐 수 없다. 광법사는 평판이 아주 안 좋은데다가 도망쳐 나온 입장이어서 광법사 제자라고 밝히기에도 껄끄러운 점이 많았다. 엘란이 머뭇거리자 하이론이 화를 벌컥 냈다. "야! 이놈아!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말을 씹어?" 하이론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스마엘이 나섰 다. "이스마엘 단테스입니다. 예전에 서로 도와준적이 있습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훌륭한 마법사에 위 대한 의사시라고, 만나서 대단한 영광입니다." 이스마엘은 광법사밑에서 20년을 지내는 동안 마법보다는 아부에 휠씬 능통해져 있었다. 마법은 입문이 너무 늦어서 노력에 비해 진도가 느렸지만 아부는 눈부시 게 발전했다. 하이론은 금세 흐물흐물 해졌다. "으허허! 내가 그런 편이지." 엘란은 어이가 없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뻔한데 거기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자네 안색이 안 좋구만, 눈에 황달기도 있고. 좋은 약이 있는데 한 번 써볼텐가? 그리고 얼굴에 곰보 말일세, 깨끗하게는 못 고쳐도 완화는 시킬수 있는데, 피부박피 한 번 받아 볼텐가?" "아까 소용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엘란은 하이론의 말을 무시하고 이스마엘에게 물었다. "5써클 마법사가 두시간 동안 마법을 퍼부었는데도 열리지 않더군." 희희낙낙하던 하이론이 금세 침울해 졌다. "여기에 갇친건가?" 엘란과 이스마엘 하이론형제는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맞은 편에는 지방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과 기사 병사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이스마엘이 따라온 마법사 무리들이 있었다. 가만히 앉자 있자니 배가 고파왔다. 엘란은 메고 다니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나도 좀 줘!" 하이론이 끼어들었다. 엘란은 하이론형제와 이스마엘에게 육포를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뎐젼탐험대로는 실격이었다. 식량을 준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엘란은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었 고, 이스마엘은 마음이 급해서 너무 서둘렀다. 하이론형제도 반은 구경이 목적인지라 크게 신경쓰지 않 은 탓이다. 하이론은 육포를 먹고 입맛을 다셨다. "더 없나?" "없습니다." "큰 일이군 얼마나 있어야 할지 모르는데." 이스마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엘란도 걱정이 됐지만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죠." 무덤안이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지만, 감각으로는 한밤중이 된 것 같았다. 모두들 그 자리에 누웠다. 엘란은 파보의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죽더라도 아쉬울게 없었다. 나탈리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아에게, 그린, 짝귀등이 잘 보살필 것이다. 엘란은 여기서 무 사히 나가면 나탈리와 니즈로 놀러가기로 결심했다. 앞으로는 최대한 재밌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두들 금새 잠이 들었다. 여러 가지 함정을 막아내느라 몹시 피곤한 탓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엘란은 먹을 것을 찾아 보았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 그러나 무덤안에 먹을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이리저리 돌 아다니던 엘란의 눈에 연못이 보였다. 엘란은 연못 앞에 서서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는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이다. 보통 바람이나 불의 정령만 불렀었다. 운디네가 연못으로 들어가더니 물과 함께 떠올 랐다. 떠오른 물에는 수많은 피라니아가 돌아다녔다. 이빨이 무시무시했다. 엘란은 연못 밖으로 물을 끌 어내서는 운디네를 돌려 보냈다. 쏴아! 운디네를 돌려보내자 물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피라니아들이 펄떡거렸다. 엘란은 실피드를 불 러 일일이 물고기의 목을 땄다. 피라니아가 한 가득 모였다. 엘란은 몇번 더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리 고는 자리로 돌아와 피라니아를 다듬었다. 어느새 일어난 하이론이 참견을 했다. "그거 먹으려고?" "예." "너 식인종이냐?" "제가 왜 식인종입니까?" "사람고기먹은 피라니아를 먹으면 그게 식인종이지, 식인종 아니냐?" "할 수 없잖아요. 그럼 이대로 굶어 죽어요? 내장을 훑어내면 괜찮을 거에요." 하이론은 ? 소리를 질렀다. "너나 먹어라 이 성격 이상한 놈아!" 엘란은 부지런히 피라니아를 다듬었다. 내장을 꺼내고 뼈를 발라서 운디네로 씻었다. 엘란은 오랜만에 부른 운디네를 생선이나 씻는 일을 시키는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못에다 씻기에는 영 께름직했던 것이다. 엘란은 하이론에게 말했다. "소금 좀 있습니까?" 생선을 간 맞추기에는 갖고 있던 소금이 부족했던 것이다. 모든 여행자들은 소금을 휴대하고 다닌다. 간만 맞으면 모든 음식은 먹을만 하다. 더위에 탈진했을 때도 소금은 유용하게 쓰인 다. 이스마엘은 갖고 있던 소금을 모두 주었다. 그래도, 모자라서 엘란은 하이론형제의 소금도 얻었다. 하이론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자기 소금은 주지 않았다. 엘란은 피라니아에 소금에 절인 후 샐라멘더 를 불러서 구웠다. 구수한 냄새가 풍겨 나갔다. 엘란과 이스마엘 하이론형제는 둘러 앉아 피라니아를 먹 었다. 솔직히 맛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주린 배를 채워주기에는 그만 이었다. 하이론은 옆에서 침 을 삼켰다. '이 자식들이 먹어보라는 말도 안하네' 하이론은 굽기시작할 때부터 회가 동했다. 권하면 못이기는 척 먹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성질이 나서 점점 머리가 붉어졌다. 대머리에 땀이 서서히 맺 혔다. 이스마엘은 하이론이 재밌게 느껴졌다. 성격변화가 아주 극심했다. "좀, 드시죠?" 더 이상 있다가는 큰 일이 날 것같아 이스마엘은 웃으며 권했다. "음, 그럴까?" 하이론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혼자서 열마리나 먹어치웠다. 식인종이니 뭐니 떠들더니 가장 많은 수를 먹은 것이다. 엘란은 남은 피라니아도 모두 구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식사를 하고나서 모두들 흩어져서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나갈 길을 찾는 것이다. 주위의 벽은 매끈하게 깍여 있었고 여러 가지 기하학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저 쪽의 마법사들도 벽의 문양을 보고 있었다. "문을 열려면 이 문양을 건드려 봐야 겠네요."엘란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마법사들의 음성이 들렸다. "문양을 눌러 볼테니 모두들 조심하시오." 저 쪽의 마법사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디를 어떻 게 눌렀는지 벽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실드." 하이론형제가 방어막을 쳤다. 다행히 화살은 튕겨져 나갔다. 마법사와 엘란의 일행은 피해가 없 었지만 병사들은 여럿이 죽어 나갔다. 금새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란 두시오! 가만히 있으면 막스님이 구해주실거요." 기사들 중 하나가 외쳤다.그러나,엘란은 가만있지 않았다. 귀족을 믿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귀족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번엔 제가 눌러 보죠." 엘란은 삼각형의 중앙을 실프로 눌렀다. 그그긍! 갑자기 천장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하광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엘란(29) 여기저기서 욕설과 고함이 난무했다. "어떤 개자식이 한 짓이야?" "어떻게 좀 해봐!" 엘란도 당황했다. 이렇게 넓은 곳의 천장이 내려오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기껏해야 암기가 튀어나오는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거나 눌러봐." 하이론이 다급하게 말했다. 일행은 기하학적인 문양의 여러곳을 마구잡이로 눌렀다. 피핑!푸슉!쌩! 천장이 내려오는 가운데 오만가지 암기가 날아왔다. "으악." 놀라서 날뛰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졌다. 천장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침착하게 있던 하이론의 형제와 이스마엘도 얼굴에 곤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장은 이제 키에 닿을 듯 했다. "천장을 봐!" 이스마엘이 외쳤다. 이때까지 천장을 살펴볼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눈 앞까지 내려오자 시선이 갔다. 천장에도 여러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일행은 문양을 향해 마법과 정령 을 날렸다. 하이론이 별모양을 파이어애로우로 때리자 천장이 더 빨리 내려왔다. "큰일이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엘란은 실프열과 샐라멘더 다섯을 모두 불러서 마구잡이로 문양을 눌 러 나갔다. 그그긍! 그중에 하나가 맞았는지 반대편의 문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젠장! 미는 문이 아니라 올리는 문이 잖아, 그러니 아무리 밀어도 안 열리지." 하이론이 외쳤다. 여기까 지 온 모든 사람들이 상대한 문은 미는 문이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올리는 문이다. 따라서, 아무도 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엘란일행은 도로 나가려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문을 열려고 노력하 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편 문이 열린 것이다. 일행은 문이 열려서 기쁜 동시에 곤혹스러웠다. 반대편의 문만 열리는 것이다. 엘란이 열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들어온 문을 열리지 않았다. 무덤은 사람들이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뛰어! 헤이스트!" 이스마엘이 한 마디 외치고는 마법을 걸어서 뛰쳐나갔다. 헤이스트마법이 걸리면 수 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두배에서 다섯배까지 스피드가 빠라진다. 무리하게 움직이면 부작용이 심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형편이 아니다. "헤이스트!" 하이론도 최대한 마법을 걸어서 문으로 뛰었다. 뛰면서 고개를 숙여야했다. 천장이 많이 내 려 온 것이다. "컥컥!" 하이론형제들이 마법을 시전하는 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성대가 상해서 괴상한 괴성을 발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소리로도 마법이 시전된다는 것이다. 엘란도 실프와 샐라멘더를 돌려보내고 실피드 둘을 불러 뒤에서 밀게하며 달렸다. 천장은 너무 빨리 떨 어지고 있었다. 하이론, 이스마엘이 문으로 들어설때는 두팔과 두다리로 기어야 했다. 엘란도 기었다. 하 이론형제가 문으로 들어가고 엘란만 남았다. 이제 천장이 너무 내려과 기기도 힘들었다. "빨리와!" 이스마엘과 하이론이 외쳤다. 엘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는 실피드로 강력하게 밀어 버렸다. 엘란은 바닥에 배를 깔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가각! 몸에 두른 호신갑과 바닥이 마찰을 일으 키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발했다. 쾅! 문이 떨어져 내렸다. 간발의 차로 엘란은 들어섰다. 아슬아슬 했다. 무릎과 팔꿈치가 온통 까져서 쓰 라렸다. "얼마나 빠져 나왔을까요?" "삼분의 일정도는 빠져 나왔다. 삼분의 일은 암기에 당했고 나머지는 문과 너무 멀어서 깔렸을거야." 이 스마엘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네는 그런거 볼 정신이 있었나?" 하이론은 저으기 감탄했다. 그런 위급한 순간에 이스마엘은 주위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살피는 버릇이 들어서." 이스마엘은 겸연쩍게 말했다. 광법사와의 이십년은 수많은 버릇을 만 들어 주었다. 살아 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모두들 기진맥진해 있었다. "좀 쉬죠." 엘란이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엘란은 가부좌를 틀고 마나수련에 들어갔다. 이스마 엘은 등을 벽에 대고 눈을 감았다. 하이론은 바닥에 누워버렸다. 하이론형제도 명상에 빠졌다. 엘란은 이즈음 정령을 한계상황까지 부렸다. 상황이 녹록치 않았던 탓이다. 한계까지 마나를 쓰고나면 온몸이 노곤한게 힘이 쭉 빠진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탈진한 상태에서의 노곤함은 묘하게 심신 을 편안하게 했다. 손 끝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피곤함속에서 묘한 쾌감이 있었다. 탈진할 때 까지 움직일 때마다 마나의 움직임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 같았다. "그만 가자!" 하이론이 일어나며 말했다. 모두들 축 쳐져서 움직였다. 엘란은 제일 앞에서 걸었다.실피드 를 불러서 앞을 막았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묵묵히 걸어가는데 불을 밝히고 있던 등잔이 어두 워졌다. 하이론이 다가갔다. "기름이 다 떨어졌어." "지금까지 켜져 있던게 다행이죠." 천년전에 지어진 무덤의 장치들이 여전히 정밀하게 움직이는 것은 대 단한 일이었다. 잠시후 불이 모두 꺼졌다. 불빛이 모두 사라지자 으스스하게 보였다. "라이트." 하이론이 마법을 시전했다. 주먹만한 광구가 주위를 밝혔다. 엘란이 사용하던 라이트마법보다 세배는 밝았다. "저게 뭐야?" 전면을 거대한 무엇인가가 막아서고 있었다. 하이론은 광구를 앞으로 보냈다. "골렘이군." "옛날 생각 나네!" 엘란이 말하자 하이론이 바로 물었다. "젊은 놈이 옛날 타령은, 왜 옛날에 골렘하고 사궜냐?" "예, 아주 진하게 사궜죠. 맞아 죽을정도로." 엘란은 실피드를 하나 더 불러서 골렘에게 다가갔다. 땀방 울이 코 끝에 맺혔다. 엘란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쿵! 골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렘은 모두 다섯대였는데 돌로 만든 스톤골렘이었다. 키는 사미터가 넘 어 보였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단히 빨랐다. 가스통의 무덤에서 싸운 골렘보다는 최소한 세배는 빨랐다. 휭! 주먹을 휘두르자 공기가 요동쳤다. 엘란은 실피드로 막았다. 팡! 북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엘란은 실 피드로 맨 앞의 골렘을 때렸다. 쾅! 골렘이 넘어졌다. 실피드로 찍어 누르는데 뒤의 골렘이 다가왔다. 싸 우기에는 공간이 좁았다. 다행스럽게 골렘은 덩치가 커서 둘이 동시에 덤비지는 못했다. 엘란은 넘어진 골렘을 넘어오는 골렘에게 카사를 날렸다. 거대한 불꽃의 독수리가 골렘을 덮쳤다. 펑! 카사와 골렘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골렘은 뒤로 나뒹굴었다. 골렘두대가 서로 뒤엉켰다. 그 위를 실피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후려갈겼다. 쾅! 쾅!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골고루 격타했다. 골렘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핵을 부수는 것이다. 핵은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보통 핵에서는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지는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잘만들어진 골렘이다. 그래서 엘란은 하나 하나 부셔나갔다. 팔, 다리, 머리 차례로 떨어져나가자 허벅지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다. "허벅지였군!" 엘란은 카사로 허벅지를 날려버렸다. 골렘하나가 작동불능이 되었다. 다른 골렘의 허벅지 를 후려쳤다. 그러나, 계속 버둥거렸다. 각각의 핵이 모두 다른 모양이다.이스마엘은 뒤에서 걱정스런 표 정으로 지켜보았다.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마엘이 묻자 눈을 빛내며 지켜보던 하이론이 말했다. "좁아서 혼자 싸우는게 편할거야." 하이론은 엘란이 싸우는 걸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싸움 구경은 언제 해도 재미있다. '이놈이거, 많이 늘었어.' 숲에서 하겐사형제와 싸울때와는 달리 아주 능숙했다. 이스마엘이 걱정 이 많 이 되는지 다시 말했다. "도와줄 방법이 없습니까?" 이때 엘란은 두 번째 골렘을 해체시키고 있었다. 여전히 무식한 방법으로 골 렘의 온 전신을 부수었다. 짝! 하이론이 손뼉을 쳤다. "도와줄 방법이 생각났다." 하이론은 두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꿀꺽." 침을 삼키며 이스마엘은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하이론이 치켜든 손을 마주쳤다. "힘내라! 힘! 힘내라! 힘! ." 하이론은 박수를 치며 외쳤다. " ." 이스마엘은 멍해졌다. '이놈의 영감탱이가 미쳤나?' 엘란은 점점 힘이 빠졌다. 두 대를 부수자 두 대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공 간이 좁아서 둘이 나란히 서자 통로가 꽉 찼다. 카사가 기다란 불꽃의 채찍으로 변했다. 엘란은 불꽃의 채찍으로 하나를 감싸고는, 마나를 끌어올려 골렘을 조였다. 카사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붉은색의 불꽃 이 노랗게 변하더니 골렘이 쪼겨졌다. 이번에는 머리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엘란은 실피드로 머리를 내려쳤다. 쾅! 머리가 터져나가고 골렘이 멈추었다. 그 사이에 골렘하나가 다가왔다. 엘란은 실프열을 불러 베리어 를 쳤다. 골렘의 주먹이 베리어와 충돌했다. 팡! 무시무시한 충격이 실프에 가해졌다. 실프반이 돌아가 버렸다. 마나가 고갈되고 있었다. 다른 또 하 나가 달려오자 실피드와 카사로 다리를 쳤다. 쿠앙! 골렘 둘이 넘어졌다. 골렘이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엘란은 정령으로 내리 눌렀다. "헉!헉!" 거친 숨이 터져나왔다.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마나가 고갈되면서 노곤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정령이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다. 골렘이 일어서자 엘란은 뒤로 뛰었다. "처리해요!" 엘란의 외침에 하이론 형제가 나섰다. "컥 크억 깍~." 아이스 에로우가 날아들었다. 여전히 주문은 귀에 거슬렸다. 쿵! 골렘이 주춤거렸다. 하이론도 나서고 이스마엘도 거들었다. 그들도 엘란처럼 하나하나 부셔보는 수 밖에 없었다. 30분간을 씨름한 뒤에야 골렘은 고물이 되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바닥에 주저 앉았 다. 하이론은 엉금엉금 기어서 골렘의 잔해로 갔다. 부셔진 돌을 들어서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부서진 핵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자세가 아주 경건했다. '저 영감 어떤게 본 모습이야?' 엘란이 했던 생각을 이스마엘도 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골렘은 처음 보겠어." 하이론은 감탄했다. 엘란은 주머니에서 피라니아변종 말린 것을 꺼냈다. 어느새 하이론이 바짝 다가와 있다. 엘란은 물고기를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물고기를 먹 자 목이 말라왔다. "물 없나?" 하이론이 물었다. 제대로 준비해서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물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할 수 없이 엘란은 운디네를 불렀다. 너무 지쳐서 불러내기도 힘들었다. 운디네에게 명령을 내리자 주변의 수분이 모여들었다. 엘란은 물통을 꺼내 물을 담았다. 하이론은 얼른 물통을 낚아챘다. 한 모금 마시고 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맛이 이래?" "운디네가 모은 물은 원래 맛 없어요." 맛이 없다면서 하이론은 반통이나 마셨다. 엘란은 운디네를 한 번더 불러야 했다. "언제쯤 무덤이 끝이 날까?" 이스마엘은 걱정스러웠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이 들었다. 딸이 몹시 보고 싶었다. 이스마엘은 따뜻한 시선으로 엘란을 보았다. "미안하지만 부탁 좀 들어주게!" 엘란이 머리를 끄덕이자 다시 말했다."내가 죽거든 시체는 태워서 딸아 이에게 좀 가져다 주게." 엘란은 흠칫 했다. 이런 부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부탁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꼭!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네, 꼭 좀 들어주게." 엘란은 이스마엘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져가면 됩니까?" "롬바르디의 빈민촌에 가면 '엘프의 숲'이라는 주점이 있네. 거기서 콜드를 찾게. 찾아서 숲의 친구가 보 내서 왔다고 하면 딸아이에게 데려다 줄걸세." "알겠습니다." "내가 죽거 ." 퍽! 갑자기 하이론이 이스마엘의 뒤통수를 쳤다. "재수없게 왜 자꾸 죽는다 그래!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몰라?" 하이론은 눈을 부라렸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 봐?" 이스마엘이 묘한 눈빛으로 하이론을 쳐다 봤다. "아는 사람 생각이 나서." "끽끽 ." 엘란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스마엘이 말하는 아는 사람이란 광법사 일레이저를 말하 는 것이리라. 결국 하이론도 이스마엘처럼 미친 놈 같아 보인다는 말이었다. 하이론은 엘란이 왜 웃는지 몰랐지만 기분이 더러워져서 빽하고 소리쳤다. "그만 웃어!" 모두들 체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앞으로 어떤 것이 덤벼들지 모르는 것이다. 엘란은 특유의 호흡법 으로 마나를 들이마셨다. 마나홀로 유도한 후 전신으로 퍼트렸다.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는게 느껴졌 다. 엘란은 숨을 내쉬며 마나수련을 끝냈다. 하이론이나 이스마엘 모두 마나를 호흡하고 있었다. 이스마 엘이 일어나고 마지막으로 하이론이 일어섰다. "가자!" 하이론이 말하자 엘란은 다시 앞장을 섰다. 이상하게 뭔가와 싸우고 싶었다. 가슴속에서 혈기가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와 한바탕 실력을 겨루고 싶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앞에 문이 보였다. 실피드를 불러서 후려쳐 보았다. "역시 안되네." 문은 튼튼했다. 엘란은 실피드를 하나 더 불러 문에 밀착시킨 후 문을 들어올렸다. 엘란 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끼끼끽! 듣기 거북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이론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문이 허리까지 올라오자 엘란 이 말했다. "들어가요!" 문을 열기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스마엘이 고개를 숙이고 안으 로 들어가자 하이론 형제가 따랐다. 하이론형제와 이스마엘은 엘란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바인딩 마법으 로 문을 묶었다. "헉!" 이스마엘은 마른 숨을 뱉었다.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엘란은 재빨리 문안으로 들어섰다. 쾅! 마법을 풀자 문은 무서운 속도로 내려왔다. "이야! 이거 멋진데." 하이론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안은 장방형의 넓은 석실인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중 앙에는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이 폭포를 이루었고 색색의 꽃들이 지천으로 펴있다. 벽에는 아름다 운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벽에는 대제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청년기 까지의 모습이었다. 모두들 벽의 부조를 바라 보았다. 처음 조각은 대제의 탄생이었다. 연대순으로 대제의 역사를 조각해 놓은 것 같았 다. 다음은 대제가 교육받는 모습이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엘란이 들어온 것과 다른 방향에서 문 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검은 복면을 하고 특유의 호신갑을 입었다. 엘란은 한 눈에 누군지 알아봤다. 밤의 그림자였다. 밤의 그림자도 흠칫 했다. 안에 누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다. 엘란은 정령을 불렀다. "그만 두게 싸울생각은 없으니까, 청부는 취소되었어.대상도 광법사가 납치해 버렸잖아." 맥스가 말했다. 그때 엘란에게 단검이 날아들었다. "데미!" 맥스는 강하게 질책했다. 쨍그랑! 단검은 실피드에 막혀 떨어졌다. 단검을 날린 사람이 복면을 벗었다. " ." 아는 얼굴이었다. 피르보나초지대를 지나 숲으로 들어갔을 때 앞길을 막고 이상한 몸짓을 하던 그 여자였다. 하이론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데미를 훑어 보았다. 그때 숲속에는 하이론형제들도 있었었다. 데미는 자기의 미모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날의 일로 자존심이 상했다. "이해하게 안에서 험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러네." 맥스는 얼른 변명했다. 엘란도 그렇지만 나머지 인사 들도 만만찮아 보였다. 싸우면 불리했다. 삼십세명이 들어왔는데 인원은 어느새 열명으로 줄어있었다. 밤의 그림자안에 기관이나 도둑질에 정통한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힘으로 밀어 붙였으면 여기까지 오지 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싸울수 없는 큰 이유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엘란은 다시 벽의 부조를 보았다. 청년이 된 발칸대제가 전쟁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리고, 여러 가지 정복전쟁이 조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캇셀프레임과의 만남이 있었다. 드넓 은 광야에 대제와 캇셀프레임 뿐이다. 드래곤은 공중에서 대제를 내려보고 있었고 대제는 두다리로 땅 을 굳건히 디디면서 드래곤을 오만하게 올려보고 있다. 두손은 모아서 위로 치켜들었는데 이상하게 손 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밤의 그림자도 모두 조각을 보고 있다. "왜 손에 아무것도 없지?" 마스터가 맥스에게 물었다. 맥스는 대답이 없었다. 어딘가 홀린 사람같았다. 여기에 들어온 후 맥스가 이상해졌다. 마스터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무슨 일이야?"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 맥스는 말을 흐렸다. 마스터는 다시 물었다. "왜 손에 아무것도 없지?" 맥스가 알 리가 없다. "이상하네요 조각의 내용상 맹약의 검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 맥스는 말을 흐렸다. 모두들 대제의 손 을 보고 있을 때 엘란은 드래곤을 보고 있었다. 피빛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은 하늘의 제왕같았다. 어찌보 면 위압스럽게도 보였고 어찌보면 미소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그긍!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기사들이 들어왔다. 막스 프르덴틀의 뒤를 스무명의 기사가 따르고 있었다. 엘란은 일행을 끌고 벽에서 물러났다. "누구야?" 하이론이 물었다. "막스 데 프르덴틀, 철혈기사단 부단장에 삼황자 처남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소드익스퍼터랍니다." "호! 대단한 놈이네." 하이론은 폭포로 가서 엘란을 불렀다. "물 좀 먹어보게!" 물은 달고 시원했다. "맛 있는데요." "이상한 건 없고?" "예." "애들아 이상없대, 니들도 마셔라!" " ." 벽의 부조는 기사들만이 보고 있었다. 그들도 대제의 손을 살폈다. "여기도 검이 없는건가?" 막스는 중얼거렸다. 막스와 기사들은 맹약의 검을 찾고자 들어왔다. 찾지 못한 다면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한 쪽은 국가의 정규기사단이 고 다른 한 쪽은 살인청부길드이다. 원래는 한 곳에 머무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청부인과 피청부 인의 관계도 되었고, 엘란은 청부대상의 하나였다. 가빈백작의 청부는 맥그루는 물론 용병들의 몰살이었 다. 얽히고 설킨 관계이다. 그들은 세무리로 갈렸다. 그그긍! 다시 문이 열렸다. "많이도 들어오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둘 뿐이다. 둘 다 브레스드 플레이트를 걸쳤는데 꼴이 엉망이 었다. 팔 다리의 옷은 너덜거렸고, 플레이트도 여기저기 구멍이 ?려 있었다. 한 명은 이십대 초반으로 아직 앳되게 보였고, 다른 한명은 상당히 잘생겼는데 콧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있었다. 막 들어온 청년은 주변을 둘러보다 막스를 발견하고는 희색이 되었다. "각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칼 위긴남작의 아들 빈센트 위긴입니다." 빈센트도 삼황자의 명령을 받고 달려온 귀족의 하나였다. 잘생긴 사내도 인사를 했다. "저는 쟝 주르입니다." 막스가 인상을 그렸다. 쟝의 평판은 막스도 들은적이 있었다. "당신은 저리가 계시오!" 빈센트가 쟝에게 면박을 주었다. "이거 왜 이러나?"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혼자서 숨은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끼어드는 것이오?" 빈센트가 핏대 를 세웠다. "내가 있어봐야 방해만 되니까 그런 것 아닌가?" 쟝이 천연덕서럽게 말했다. "그래서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다닌 거요?" " ." 쟝은 당황스러웠다. 쟝과 들어온 일행은 모두 팔십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도망다니고 숨은 덕에 쟝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도 엄청좋았다. 화살이 다리사이를 지나가기도 하고 골렘에 쫓겨서 넘어졌는데 그게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강운과 비굴의 조화가 쟝의 목숨을 살 린 것이다. 다른 사람도 모두 죽고 이제 내 운도 여기가 끝이구나 탄식하는데 철혈기사단을 만난 것이 다. 왕국제이의 기사단을 보자 이젠 살겠구나하고 희열에 들떳는데 왠 얼빵한 놈이 초를 쳤다. 엘란(30) 원래는 쟝도 피터처럼 여기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했다. 여기로 들어가지 않으 면 영지는 물론 유산도 한 푼 남겨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쟝의 가문은 권력에 접근한 고위 귀족 은 아니지만 재산이 많아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꿈이 컷던 쟝의 아버지는 쟝을 엄격히 교유시켰다. 쟝은 몸을 단련하고 공부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다. 이 좋은 세상, 한 번 뿐인 인생을 왜 그런 식으로 낭비한단 말인가! 쟝은 수도로 유학을 와서 아버지의 품에서 멀어지자 행복하게 살았다. 여기저기 무도 회에 기웃거리면서 여러 귀족가의 아가씨와 염문을 뿌렸다. 게다가 수많은 유부녀와도 놀아났다. 미끈하 게 생긴 쟝은 유한마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추문은 점점 퍼져 나갔고, 엘리오트왕립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게다가 마르셀백작부인과의 만남은 쟝의 명성을 바닥까지 추락시켰고 가문에 먹칠을 했다. 마르 셀부인은 성적 편력이 화려했다. 어린애부터 동성애까지 가리는게 없었고 새디스트에 마조히스트의 성 향까지 농후했다. 쟝이 마르셀을 묶어놓고 채찍으로 치고 있을 때 남편이 들어왔다. 마르셀부인은 목이 잘렸고 쟝의 아버지는 거액을 뿌려야 했다. 집으로 끌려온 쟝은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버 지의 요구로 대제의 무덤에 들어온 것이다. 쟝은 몰랐지만 아버지는 다른 뜻이 있었다. 가문은 둘째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가문의 명성을 되살리려면 쟝이 삼황자를 위해 일하다 죽는게 나았다. 아버지는 쟝 을 추문속에서 죽기 보다는 대제의 무덤에서 죽기를 원했다. 기사단의 매서운 눈초리가 쟝에게 틀어 박혔다. 검에 손을 대는 자까지 생기자 쟝은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일행에게서 떨어졌다. 혼자서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던 쟝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무리에 끼 일려는 것이다. 시커먼 복면을 쓴 무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꺼림직했다. 쟝은 엘란의 일행에게 다가갔다. 여기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특히 대머리 노인 넷이 마음에 걸렸다. 나머지 둘은 평범해 보였다. 하 이론은 아까부터 쟝과 빈센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반짝거리는게 어지간히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너 변태라매?" 하이론의 한 마디에 쟝은 얼어붙었다. 이런 노인까지 자기 소문을 들은 것이다. "아닙니다." 쟝은 단호히 부인했다. "이 자식이 뻥치네, 연상의 여자 묶어놓고 채찍으로 후려 갈기는게 변태지 그럼 아냐?" " ." 그 뒤로도 하이론은 쟝의 추문을 열심히 줏어 넘겼다. '망할 영감탱구! 자세히도 아네.' "엘란 이 녀석이 말이야 ." 쟝이 말을 끊고 나섰다. "당신이 엘란이요?" 아주 반가운 음성이다. 엘란은 의아했다. '이 변태가 나를 어찌 알지?'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쟝은 다정하게 엘란의 옆에 앉았다. 엘란이 인상 을 쓰며 말했다. "저리 떨어지시오." 쟝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바싹 붙었다. 은근한 목소리가 엘란의 귀로 파고들었다. "같은 변태끼리 돕고 삽시다!" " ." "푸히히히히!" 하이론이 미친 듯이 웃었다.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큭큭!" 이스마엘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참으려고 하는데 이 사이로 새면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컥 컥." 하이론의 동생들도 기괴한 소리를 발했다. 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쟝은 엘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마르셀부인에게서 였다. 부인은 엘란을 불러 엘란의 소녀와 자신 쟝이 같이 질펀하게 놀 생각이었다. 그 행사는 쟝도 꽤 고대하고 있었다. 부인의 목이 떨어지면서 무산 되기는 했지만. 엘란은 소리를 질렀다. "누구보고 변태라는 거야!" "선수끼리 왜 이러나? 나도 척보면 안다고." 쟝이 능글거렸다. 엘란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석실안에 있 는 사람들은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엘란은 한 참 동안, 해명을 했다. 하이론은 엘란에 대해서 조사를 많 이 했고, 변태정령사라는 얘기는 근거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이스마엘도 엘란을 믿었다. "그래 너, 정상해라!" 쟝이 비꼬았다. 쟝은 믿지 않았다. 미친놈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 것 본적이 있는 가? "저리 가!" 엘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쟝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엘란은 수도에서 변태정령사 로 꽤 유명했고, 밤의 그림자와의 싸움이나 하겐사형제와의 대결로 많이 알려졌다. 대륙의 떠오르는 신 흥강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쟝은 꼭 엘란에게 들러붙을 생각이었다. 취향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자 웬지 가족처럼 느껴졌다. 하이론이 쟝을 두둔하고 나섰다. "여기서 떨어지라면 혼자 죽으라는 소리잖아!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게." 하이론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 놈과 같이 다니면 꽤나 재밌을 듯 했다. 하이론이 거들어주자 쟝은 아예 드러누웠다. "허." 엘란은 기가 찼다. 아무래도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쫓아다닌다는 이유로 멀쩡한 사람을 두들겨 팰수도 없고. "자네 뭐 먹을 것 좀 없나?" 쟝은 말없이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에는 꽤 많은 햄, 소세지, 빵이들어 있었다. 하이론과 형제들은 신나 게 먹었고, 이스마엘도 먹었다. 엘란도 끼어들었다. 엘란은 쫓아내는 걸 포기해 버렸다. 자기도 살길을 찾아 들러 붙는데 쫓아내기가 곤란했다. 오랜만에 먹는 음식다운 음식이다. 만든지 오래 되서 굳기는 했 지만 피라니아구운거에 비하면 별미였다. 이제는 쟝을 쫓아내기가 더 곤란해졌다. 음식까지 얻어먹고는 모른척하기 곤란한 것이다. "따라 다니는 것 까지 막지는 않겠지만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할거요."엘란이 단호히 말했다.안은 남의 목숨을 챙겨줄 정도로 녹록한 곳이 아니다. 이즈음 밖에서는 황위를 둘러싼 운명의 결전이 시작되 고 있었다. 시드는 병사들을 지휘해서 임시 목책을 쌓고 있었다. 원군이 올때까지 시간만 끌면 되는 것이다. "무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없나?" 시드가 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막스의 부관이 대답했다. 무덤이 열린지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드는 상당히 신 경이 쓰였다. 막스는 후작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며 삼황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막스의 신상에 일이 생기면 상당히 곤란했다. "통신마법은 아직 안되나?" "예, 아직 통신이 안되고 있습니다." 무덤안으로 통신마법이 듣지 않고 있었다. 멀리서 척후병이 달려오 는게 보였다. 척후병은 기사에게 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은 기사는 시드에게 다가왔다. "적들이 한 시간 거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쇠뇌는 모두 깔았느냐?" "예." "전투준비를 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시드는 수도로 통신마법을 걸었다. 수정구가 밝아지면서 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빨리 삼황자님을 불러라." 잠시후 삼황자의 얼굴이 보였다. "적들이 한시간거리 안으로 다가왔습니다." 삼황자의 얼굴에 긴장이 스쳐갔다. "전투준비는 모두 됐나?" "모두 준비 됐습니다." "안에 들어간 막스와 기사들은 소식이 있나?" "무덤안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신마법이 안 먹히는지라 안의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삼황자는 막스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소식이 있으면 연락하고, 내일까지 견뎌내라! 곧 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그대의 어깨에 걸려있음을 잊지마라!" 삼황자의 얼굴이 멀어지고 프르덴틀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하루만 견디게." 후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걱정마십시오." ***************** 이황자의 군대는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선두는 레드드래곤기사단이 달리고 있다. "멈춰라!" 기사단장 스톨킨백작이 외치자 옆에서 고동을 불었다. 부~~ 모든 군대가 멈춰섰다. "여기서 잠깐 휴식한다." 모두들 부옇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대단한 강행군 이었다. 이상태로 전투을 벌 이는 것은 자살 행위다.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주저앉았다. 그 가운데서도 엄정한 군기가 잡혀 있었다. "척후병을 보내라." 척후병을 보낸후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스톨킨백작, 왕실마법사 듀마, 마이클남작, 고르골자작이 머리를 맞댔다. "뒤에 가빈백작과 철혈기사단이 따라붙었습니다. 이대로 앞을 칠건지 뒤를 먼저 칠건지 의견을 말해 주 십시오?" 스톨킨백작이 말했다. "어쩔수 없습니다. 무덤을 먼저 쳐야지. 잘못하면 포위당합니다."듀마가 대답했다. "각개격파가 최선입니다." 마이클남작이 거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르골자작도 찬성하자 스톨킨백작은 결정을 내렸다. "먼저 무덤을 칩니다. 그뒤에 가빈백작을 처리합시다." 백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시간을 끌다간 중간에서 포위당합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 다. 잠시후 척후병이 왔다. "적들이 산에 목책을 치고 농성중입니다. 앞에는 쇠뇌를 깔았습니다." "큰일이군요. 쇠뇌를 치울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듀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산이라 기병의 운용은 무립니다." "화공을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마이클남작이 말했다. "그게 좋겠군, 병사들을 충분히 휴식시켜라! 두시간 후 전투에 들어간다." "예." 그 시간 가빈백작은 철혈기사단과 프르덴틀후작의 가병, 공작의 가병과 용병들을 이끌고 질주하고 있었다. "단장님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조금 쉬었다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없다. 빨리 이황자군의 뒤를 쳐야한다." "이대로는 뒤를 따라잡는다 해도 지쳐서 싸우지 못합니다." "우리만 지치는게 아니다. 그들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지금쯤 우리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지쳐도 우리보다 더 지칠 것이다. 최대한 빨리 가서 뒤를 쳐야한다." 가빈백작과 부관들은 말을 달리면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보병들은 모두 뒤에 쳐져있고, 가사들과 중 갑기병 경장기병과 말을 탄 용병만이 따라오고 있었다. 보병과의 거리는 이틀이나 벌어져 있었다. ********************* 이스마엘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하이론은 아예 포기해버리고 다른 사람이 방법 을 찾아내기를 기다렸다. 이왕 여기까지 온거 끝까지 가 볼 생각이었다. 엘란도 입구를 열 방법을 열심 히 찾아 보았다. 여기는 이상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벽의 조각과 관계있는 것 같죠?" 엘란이 물었다. "현재로서는 그게 제일 유력해 보여." 이스마엘은 여기저기 조각을 만졌다. 아주 생생한 조각이다. 안에 서 사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폭포옆에 앉아있던 하이론이 불렀다. "이리와봐!" 이스마엘과 엘란은 무슨 방법을 찾았나하고 급히 뛰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그냥 좀 쉬라고." " ?" "지금 농담하십니까?" 엘란이 한 자 한자 끊어서 말했다. 책망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또 어떤 괴물이 덤빌지 모르니 쉬면서 대비를 하라는 말이야." 하이론은 턱으 로 밤의그림자를 가리키고 말을 이었다. "이런 일에는 저들이 전문가야. 자네들은 함정이 작동되거든 그 거나 대비하게." 타당한 의견이라 생각한 엘란과 이스마엘은 하이론의 옆에 편안히 앉았다. 밤의그림자 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벽을 두들기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스터는 기사들을 힐끗 거렸다. 아무래도 막스가 신경을 자극했다. 막스는 차갑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평민에게도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영지민도 잘 대해줬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평이 돌았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적에게는 가혹했다. 자신들의 직업상 막스가 껄끄러웠다. "빨리 길을 찾아라!" 마스터는 부하들을 독려했다. 어서 기사들과 떨어지고 싶었다. "길은 여러개를 열어라!" 마스터는 막스와 다른 길로 가기로 작정했다. "여기다!" 부하 하나가 유모의 젖을 빠는 대제의 머리를 눌렀다. 그그긍! 대제와 유모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작은 벽이 드러났다. 쇠로 만든 손잡이가 네 개 있었다. 모두 의 눈이 손잡이에 집중되었다. 막스가 기사들과 함께 다가왔다. "이제부턴 우리가 맞지." 막스의 부관 엥겔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말을 붙여볼 생각을 달아나게 하는 건 조한 말투였다. 맥스는 마스터의 옷깃을 잡았다. '여기서 싸우면 죽습니다.' 맥스는 마스터에게 속삭였다. 마스터는 막스 프르덴틀을 쳐다 보았다. 막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밤의 그림자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리 가지는 않고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서 기사들을 지켜 보았다. 엘란일행도 밤의 그림자 옆에 붙었다. "어떤걸 당길까요?" 엥겔스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몇 개는 함정과 직결된게 분명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당겨라." 엥겔스는 제일 위의 고리를 잡았다. 숨을 들이키고는 단숨에 당겼다. " ." " ."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이론이 목을 쭉 빼고 지켜보았다. "뭐야, 왜 아무일도 안 일어나지?" 하이론이 목을 뺀 채로 말했다. 드드득! 엘란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벽화가 움직였다. 모두들 긴장된 기색으로 석실의 변화를 주시했다. "저 저것!" "뭐! 뭐야!"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소리가 튀어나왔다. 드래곤을 오만하게 올려보던 대제의 손에서 날카 로운 검날이 서서히 튀어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이론과 이스마엘은 눈을 부릎 떴다. 이윽 고 완전한 검이 나타났다. 천년전의 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예기를 발했다. 손잡이에는 붉은 색의 구 슬이 빛나고 있었다. "맹약의 검이다!" 쟝이 부르짖었다. 쟝의 외침에 소강상태가 끝이 났다. 기사들은 검의 주위를 에워샀다. 밤의그림자는 당황했다. 여기서 맹약의 검이 튀어나올줄은 몰랐다. 검을 차지하기에는 실력이 딸렸다. 이스마엘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스마엘은 엘란일행중에서 맹약의 검을 희구하는 유일한 사람이 었다. 지고교도는 영광의 검을 천년동안 찾아 다녔다. 반드시 얻어야 했다. 엘란은 소귀의 목적을 달성 했고, 하이론형제는 검을 구경하는게 목적이지-차지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반드시 차지할 생각은 없 었다. 혹으로 따라붙은 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엘란은 이스마엘에게 나직히 속삭였다. "초조해 하지 마세요. 저게 맹약의 검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아요.게다가 가지고 나가기도 쉽지 않 을 겁니다. 이 안에는 십존도 들어와 있고, 무시무시한 함정도 많아요, 가만히 기회를 기다리세요. 어부 지리를 노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적절한 충고였다. 확실이 맹약의 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 람은 없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데 막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웅! 검이 울음을 토했다. "호! 명검을 주인을 알아 본 다더니!" 하이론이 감탄성을 발했다. 맹약의 검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좋 은 검인 것은 확실했다. 천년동안 방치된 검이 녹하나 없이 예기를 발했다. 금석이라도 자를 듯이 보였 다. 막스는 이리저리 검을 휘둘렀다. 소리도 없이 바람을 갈랐다. 막스는 마음에 꼭 들었다. 삼황자에게 바치기 아까울 정도였다. 맹약의 검이 맞다면 황자에게 바쳐야 한다. 검을 든 채로 막스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자기가 검을- 맹약의 검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차지했다고 알려져서는 곤란하다. 십존 의 셋이 무덤안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막스는 아직 십존의 상대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십존도 내 앞에 무릎을 꿇리리라!' 막스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막스는 나직히 명령하며 앞으 로 나섰다. "죽여라!" 나직한 한 마디가 석실을 뒤흔들었다. 막스는 엘란을 노려 보았다. "또, 보는군." 막스가 엘란에게 다가들었다. "이얍!" 기사단은 밤의 그림자와 하이론형제에게 달려들었다. 엘란의 몸에서 폭풍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엘란의 망토가 부풀어 올랐다.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막스는 열 발자국 앞 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실력있는 기사라면 한 호흡에 목을 딸 수 있는 거리였다. 엘란의 이마에 땀이 맺 혔다. 또르륵! 흘러내린 땀은 눈섭에 막혔다. 주변의 싸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막스에게만 신 경을 집중했다. 아니 집중해야만 했다. 눈길 한 번 돌렸다가는 당장 목이 떨어질 것 같은 압박감이 온 몸을 짓눌렀다. 엘란은 막스가 카르덴의 무기점에서 자기 실력을 다 보이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그때 엘란은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엘란은 그때를 동수로 판단했고,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발전 한 이상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막스를 물리치고 이스마엘에게 검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엘란은 심정적으로 눌리고 있었다. 싸움에서 기세를 차지하거나 공간을 장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거기에서 승패가 갈리는 것이다. 실력자에게 공간의 지배권을 뺏긴다는 것은 목숨을 뺏기는 것과 같았 다. 검을 뽑아 휘두르는 것이나 마법, 정령을 부리는 것은 결과의 확인해 불과했다. 싸움의 승패는 그 전에 이미 끝나있는 경우가 많았다. 엘란은 공간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에서 밀리고 있었다. 막스 에게서 강철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주위의 공기가 무섭게 요동쳤다. 어느새 전투는 중단되어 있었다. 모두의 피부를 둘의 기세가 자극하고 있었다. 기사는 둘이 쓰러져 있는 반면에 밤의 그림자는 여섯이나 죽었다. 하이론의 둘째 동생도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철혈기사단의 정예는 과연 무시무시했다. 그 들은 엘란과 막스에게서 떨어졌다. 공간도 마련해 주면서 자신들의 피해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들 긴장된 시선을 던졌다. 떠오르는 신성들의 결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죽은자는 쓸쓸히 잊혀질 것이고, 승자는 명성이 더욱 빛날 것이다. 엘란은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눈이 감기는 순간 막스의 검이 자신 의 심장에 틀어 박힐 것 같았다. '이대로는 진다.' 엘란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실피드." 엘란은 조용히 정령을 불렀다. 실피드 둘이 엘란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변화를 구하려는 것이 다. 막스는 엘란이 정령을 부르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오직 태산같이 서있을 뿐이다. 갑자기 막스의 검에서 오러가 피어올랐다. "오러블레이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하이론은 일이 재미없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소드익스퍼터 로 알려진 막스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십존의 경우와 비교해도 십년은 빠른 성취였다. 막스의 안색은 평온한 반면 엘란은 눈에 띄게 땀을 흘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엘란의 목이 떨어지는 것 이 분명해 보였다. 하이론은 엘란이 마음에 들었다. 당당히 하겐사형제와 대결하던 모습이 좋았고, 뛰어 난 실력이 돋보였다. 이대로 성장하면 십존의 자리를 차지할게 분명해 보였다. 놀리는 재미도 좋았고, 변태정령사라는 명칭도 맘에 들었다.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이런 자리에서 개죽음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이론은 형제들에게 수화를 보냈다. 하이론의 손짓에 형제들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이다. 엘란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저앉 아 버릴 것 같았다. '피터의 심정이 이랬겠군.' 밤의그림자 마스터도 이 싸움을 주시했다. 막스는 놀랍게도 소드마스터의 경 지에 들어서 있었다. 엘란이 죽으면 다음은 그들 차례였다. 마스터는 은밀히 움직였다. 이십년전에 마지 막으로 담을 넘은 이후 처음하는 몸놀림이다. 최고 도둑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싸움에 신경쓰는 기사 들을 피해 조심조심 순잡이로 이동했다. 막스는 대결이 즐거웠다. 이런 강자는 흔치 않다. 기분좋은 긴 장이 몸을 감싸고 돌았다. 슥! 막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엘란은 더 이상의 거리를 줄 수 없었다. "실피드!" 엘란의 외침에 실피드가 날아들었다. 휭! 강렬한 바람이 주위를 맴돌았다. 막스는 위에서 아래 로 가볍게 검을 그었다. 오라가 2미터가량 길어졌다. 검이 실피드를 갈랐다. 파파팟!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실피드가 반으로 쪼개졌다. 쪼개진 실피드가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이런 식의 강제소환은 시전자나 정령에게 타격이 컸다. 당분간 이 실피드는 불러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울컥! 엘란은 피를 토했다. 팟! 막스가 땅을 박차고 뛰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눈앞에 나타났다. 엘란(31) 엘란은 실피드로 베리어를 치고 카사를 불렀다. 실피드가 투명한 막이 되어 엘란을 감샀다. 오러가 더욱 짙어졌다. 막스의 검에 베리어는 허무하게 베여졌다. 실피드와 함께 엘란의 마음도 ?어졌다. 정령의 고 통이 고스란히 엘란에게 전해졌다. 울컥 울컥! 엘란은 계속적으로 피를 토했다. 카사가 막스의 머리위에 떨어져 내렸다. 막스는 검을 들어올려 부드럽게 원을 그렸다. 오러블레이드를 따라 은색의 막이 생겼다. "마나막!" 누군가 탄성을 발했다. 마나막은 소드마스터의 대표적인 방어법이었다. 카사가 마나막에 뛰어 들었다. 쾅!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카사는 마나막을 뚫지 못했다. 엘란은 카사의 전신에 상처가 생긴 것을 느 꼈다. 엘란은 실프열을 모두 불렀다. 실프들이 송곳처럼 변해서 막스에게 날아들었다. 탓! 막스는 가볍게 뛰어올랐다. 검을 후두르자 오러가 무섭게 피어올랐다. 삼미터도 넘었다. 카사는 피하 지 못하고 날개를 잘렸다. 카사가 강제 소환당하고 엘란은 다시 피를 토했다. 막스는 다시 오러블레이드 로 마나막을 쳤다. 끼기긱! 실프가 마나막을 뚫으려 무섭게 회전했다. 철판 긁어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막스는 실프들 이 마나막을 뚫을 수 있는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강자의 여유였다. 엘란은 전신의 마나 를 끌어올렸다. 실프의 끝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끼이잉! 실프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돌아가 버렸다. 엘 란은 털썩 주저 앉았다. "즐거운 대결이었다." 막스는 가볍게 검을 휘들렀다. 검에서 오러가 떨어져 나오면서 무서운 속도로 엘 란에게 날아들었다. 갑자기 하이론형제와 이스마엘이 달려들었다. "끄어억!컥(프로덱션 오브 에어)!" "꽉 키어억!(프로덱션 오브 아이스)!" 하이론의 동생이 엘란에게 보호 마법을 걸었다. 엘란의 앞에 압축 공기와 얼음의 장벽이 생겼다. 퍽! 오러탄은 가볍게 공기를 찢고 나아갔다. 얼음마저 가볍게 관통하고는 엘란에게 날아 들었다. 이스마 엘은 팔로 오러를 막았다. 서걱! 가볍게 팔이 잘려 나갔다. 팔을 자른 오러는 여전히 날아들어 엘란의 심장에 닿았다. 땅!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엘란은 다시 피를 토했다. 엘란은 자신 앞에 떨어지는 팔을 보았고 고통스런 이스마엘의 비명을 들었다. 자기를 보호하다 죽은 파보 생각이 났다. 그때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었고 앞에서 피를 뿌리며 파보의 머리가 떨어졌었다. "익스플로젼!" 막스의 주변이 폭발했다. "카앙악! 칵(파이어 버스터)" 막스의 주변에서 다시 불이 폭발했다. 엘란은 사력을 다해 일어서서 이스마 엘을 안았다. "이런 비겁한 놈들!" 기사들이 분기에 찬 고함을 질렀다. 하이론은 이런 일은 신경쓰지 않는다. 싸움에 정정당당한 것이 어디 있는가? 정정당당히 싸우다 엘란이 죽는다고 이들이 자신들을 살려줄 것인가? 아 니었다. 만약 엘란이 이긴다 하더라고 이들이 무사히 보내줄까?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기사도 아니다. 거듭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막스는 무사했다. 머리가 약간 그을린 정도가 피해의 다였다. 막스는 다시 명령했다. "모두 죽여라!" 그때 마스터가 두 번째 고리를 잡아당겼다. 어느새 거기까지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그그그긍! 여러군데서 조각이 밀려 내려가면서 문이 나타났고 서서히 문이 올라갔다. 엘란과 이스마엘은 서로 부축한 채 뒤의 통로로 뛰어들었다. 먼저 하이론의 동생들이 쟝의 목덜미를 쥐고 뛰어들었다. 그 뒤를 하이론이 따랐다. 엘란과 이스마엘도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달렸다. 쟝은 뛰어오는 엘란을 보면 서 불이 꺼져 있는 등잔을 깨트렸다. 문이 서서히 내려왔다. 휙! 막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왔다. 엘란이 들어서자 뒤에서 하이론이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 볼!" 불덩이는 막스가 휘두른 검에 맞고 흩어졌다. 막스는 어느새 입구까지와서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오러가 솟구쳐 올랐다. 하이론과 형제들은 사력을 다해 실드를 쳤다. 쾅! 실드는 하나씩 하나씩 깨져 나갔다. 마지막 하나가 깨져 나가자 이스마엘은 팔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실드르 쳤다. 실드를 깨느라 약해진 오러가 엘란의 가슴을 쳤다. 쾅! 엘란은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하이론은 다시 실드를 쳤다. 서서히 문이 닫혔다. 안은 캄캄했다. 등잔은 예전에 연료가 떨어졌고, 있어도 쟝이 깨트려 버려서 쓸모가 없다. 쾅! 무서운 힘이 문을 두들겼다. 문이 흔들렸다. "허! 마스터가 대단하긴 대단하군!" 하이론이 허탈하게 말했다. "움직여! 문을 뚫을 것 같다." 하이론의 동생이 엘란과 이스마엘을 안아 들었다. 엘란은 기색이 엄연했다. 이스마엘도 피를 많이 흘린 데다가 무 리하게 친 실드가 막스의 검에 찢겨 지면서 심한 내상을 입었다. 하이론형제의 사정도 좋치 않았다. 이 스마엘만큼은 아니지만 실드가 찢어지면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엇! 부지런히 걷는데 갑자기 발밑이 꺼졌다. 모두들 떨어져 내렸다. '젠장! 마법도 못 쓰는데 그때처럼 밑에 피라니아변종이라도 있으면 끝장이군.' 하이론은 밑에 아무것도 없기를 진정으로 빌었다. # 쿵! 제일 먼저 쟝이 떨어졌다. 그위를 엘란과 이스마엘을 안은 하이론의 동생이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 은 하이론이었다. "아이고 죽겠다!" 밑에 깔린 쟝이 비명을 질렀다. "자식이 엄살은." 하이론이 말하자 쟝이 금새 소리쳤다.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부딪친 엉덩이도 아프고, 온몸이 쑤신단 말예요. 내 얼굴 밟고 있는 발이나 치 워요." 하이론은 얼른 일어났다. 쟝의 말 때문이 아니라 엘란과 이스마엘때문이었다. 동생들은 이스마엘의 상처 를 살폈고 하이론은 엘란의 상처를 살폈다. 하이론은 엘란의 옷을 벗겼다. "이래서 살았군." 엘란은 가슴에는 철판이 쪼개져 있었다. 철판은 심장 부근에 구멍이 나있었고 반은 예 리하게 잘려 있었다. 두 조각난 철판을 들어내자 갈라진 상처가 보였다. 목아래부터 배꼽까지 길게 찢어 져 있었다. 두겹으로 덧된 철판이 아니었다면 엘란은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철판에 충격완화주문이 걸 려 있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하이론은 엘란에게 포션을 먹였다. 엘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던 그 포션이 다. 그리고 포션을 상처에 부었다. 치이익! 상처에서 거품이 일면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이론은 바늘과 실을 꺼내 상처를 꼬맸다. 옆에 서 쟝이 투덜거렸다. "나도 포션 한 병 줘요!" 하이론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조디 안 닥치면 입을 꿔매 버린다." 쟝은 삐져서 멀리 떨어졌다. 정성스럽게 엘란의 상처를 꿔맨 하이 론은 다시 포션을 붓고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힐링!" 엘란의 상처에서 희미한 빛이 나더니 상처가 아물어 갔다. 신기했는지 어느새 쟝이 옆에 와 있 었다. "이야 영감 재주 좋은데?" 하이론형제는 공격마법이나 방어마법보다 치료마법에 뛰어난 바가 있었다. "으음!" 엘란이 신음성을 흘렸다. "살아날까요?" 쟝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하이론은 이 변태가 의외로 정이 깊다고 생각했다. "왜 걱정되냐?" "예, 웬지 가족같아서." "너 엘란 깨어나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잘못하면 맞아 죽는다." 쟝은 샐쭉해져서 말했다. "자기의 정체성을 거부한는건 옳지 않아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해롭습니다." " ." 하이론은 생각했다. '이놈 강적이다!' 하이론은 이스마엘에게로 갔다. 수화로 동생들에게 물었다. ( 상태는 어때?) (치료는 잘 됐어요.) 둘째가 대답했다. "휴!" 하이론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자식이 재수없는 소리만 해대더니 결국 이렇게됐군." ************************ 이황자군은 무덤의 코 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병사들 상태는?" "많이 지쳐 있습니다." 레드드래곤 기사단장 스톨킨백작이 묻자 마이클남작이 대답했다. "병사들을 쉬게 하고 쇠뇌를 치워라!" 명령이 떨어지자 마이클 남작이 병사들과 마법사들을 이끌고 나갔 다. 병사들이 쉬는 시간에 쇠뇌를 제거 하기로 한 것이다. 마이클 남작은 병사들로 쇠뇌를 치우고 많이 깔린 곳은 마법으로 땅을 뒤집어 버렸다. 병사들이 한 숨 돌리자 스톨킨백작은 진군을 명령했다. 고르골 자작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목책 너머에서 삼황자군과 지방영주들의 군대가 지켜 보았다. 삼황 자군은 시드와 오십명의 정령사, 그리고 약간의 마법사가 있었고, 막스가 무덤으로 데리고 들어간 기사 를 제외한 스무명의 철혈기사들이 있었다. 처음에 중앙에서 데리고 온 오백명의 병사와 지방영주에게서 끌어모은 만명의 병력과 삼백의 기사도 힘이 되었다. 이에 비해 이황자군은 레드드래곤기사단 천명전원 과 기사단 휘하의 기병 오천 왕실마법사 듀마와 백명의마법사 포뎀킨후작의 가병 삼천, 중앙귀족의 기 사 삼백과 삼천의 병력, 지방귀족의 기사 삼백과 오천의 병력, 용병대의 병력 이천으로 이루어졌다. 양 으로나 질로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둥둥둥! 이황자군이 북을 울렸다. 전장의 북소리는 사람을 묘하게 흥분시키는 힘이 있었다. "전원돌격!" 마법으로 증폭된 음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우와!" "공격!" "모두 죽여라." 온갖 괴성과 함께 이황자군이 질풍처럼 내달렸다. 야트막한 산이 시작되고 그위에 삼황 자군의 목책이 있었다. 병사들이 다각가자 목책위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아이스 스톰!" 듀마가 시전한 얼음의 폭풍이 냉기를 머금고 불덩이와 부딪쳤다. 펑! 얼음이 파이어볼을 뭉개고 목책으로 날아들었다. "와!" 이황자군에서 함성이 터졌다. 얼음은 거대한 여인의 옷자락에 막혔다. 시드가 물의 상급정령 운다 인을 부른 것이다. "와!" 이번에는 목책 위에서 함성이 터졌다. 듀마를 위시한 백명이 마법사는 마법을 난사했다. 운다인과 시드의 제자들이 부리는 정령이 마법공격을 막아냈다. 쾅쾅 우르릉 쾅 쾅 ."굉음이 하늘을 찢어발겼다. 온 천지에 불꽃과 냉기와 얼음, 바람과 물방울이 비산했 다. 스파크도 튀어 올랐고,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시드는 십존의 일인다웠다. 왕실마법사 듀마를 시종 압도했다. 옆에서 백명의 마법사가 보조를 맞추지 않았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스톨킨백작은 마법사 가 정령사에 막히자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돌격하는 병사들과 목책위의 삼황자군은 마법사와 정 령사의 대결에 말려들어 죽는자가 속출했다. 휘리리링! 이황자군의 머리위에 화살이 떨어져 내렸다. "방패를 들어라!" 화살은 기사들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그러나, 질이 떨어지는 방패로 무장한 일반병사 의 방패는 달랐다. 비스듬히 맞은 방패는 화살을 튕겨냈지만 정통으로 떨어진 화살에는 뚫려 나갔다. "으악!" "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듀마는 피해를 감수하고 목책밑으로 어스 왜이크를 시전했다. 목책밑의 땅이 뒤집어지면서, 중앙의 목책이 무너져 내렸다. 그 대가로 스무명의 마법사가 운다인에 말려 찢겨졌 다. 회전하는 물살은 무시무시했다. 살을 닿는 족족 찢어놓았다. 열린 구멍으로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그 뒤를 래드드래곤 기사들이 따라 붙었다. 기사들이 목책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시드는 마지막 승부수 를 던졌다. 들어오는 래드드래곤기시단앞에다 운다인을 폭발시켰다. 효과는 대단했다. 흩어진 물방울이 무서운 속도로 기사들을 덮쳤다. 방패와 갑옷을 찢고 들어간 물방울은 부드러운 살을 유린했다. "크억!" "으윽!" 수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스톨킨백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왕국 최강의 기사들이 삼 백명도 넘게 몰살 당했다. "돌격! 모두들 찢어 죽여라!" 백작은 고함을 질렀다. 동료들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기사들은 죽기 살기 로 덤벼들었다. "으악!" 삼황자군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반병사가 기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상대는 레드드래 곤기사단의 기사이다. 이때 철혈 기사단이 나섰다.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독려해서 상대를 막았다. 양쪽의 마법사와 정령사도 죽는 자가 속출했다. 이황자군의 마법사는 반이 죽어 나갔고 정령사 도 거의 반이 죽었다. 마법사와 정령사는 거의 2:1의 비율로 죽은 것이다.모두 시드의 위력이었다. 시드 는 운다인을 부르지 못하고 물의 중급정령 엔다이론을 부렸다. 운다인은 당분간 부를 수 없다. 운다인 폭발 공격은 시전한 후 최소한 세시간은 있어야 운다인을 다시 부릴수 있다. 시드는 엔다이론 다섯을 능숙하게 부렸다. 전투는 점점 소모전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전투는 서 서히 이황자측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 숨어있던 삼황자의 마법사가 등장했다. "파이어볼!" "매직 미사일!" "라이트링 볼트!" 그들은 철저히 레드드래곤기사들을 노렸다. "윽!"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접근을 허용한 마법사는 분노한 기사들의 검에 목이 떨어졌다. 철혈기사단도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지방귀족의 기 사들과 병력들이 간간히 반격을 가했지만 힘의 차이가 명확했다. 용병들도 기세를 올렸다. "우와!" 갑자기 함성이 울렸다. 삼황자군의 뒤를 고르골자작이 병사들을 이끌고 습격했다. 몰래 뒤를 돌 아서 습격한 것이다. 이게 마지막 결정타가 되었다. 악에 받친 이황자군은 항복을 권유할 생각도 없이 무조건 죽였다. 죽어가는 삼황자군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그들은 배에 꽂힌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면 옆에 있던 동료가 상대의 목을 날렸다. 그들은 아무런 주저없이 서로에게 검을 날리고 칼을 휘둘렀다. 삼황자군은 거의 전멸해 가고 있었다. 시드가 다시 운다인을 불렀다. 목책안은 이황자군의 가사들과 병 력으로 가득했다. 고르골자작의 머리위에서 운다인이 폭발했다. 무시무시한 물방울이 주위를 휩쓸었다. 고르골자작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죽었다. 그 틈을 노려 듀마와 마법사는 시드와 정령사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시드는 엔다이론을 타고 날아 올랐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받아칠 수 없었다. 정령사들은 마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열명의 정령사가 그 자리에서 찢겨지고 태워지 고 구멍이 뚫린채 죽었다. "저런 개자식! 제자를 버리고 혼자 도망가다니!" 듀마는 이를 갈았다. 휘하의 마법사가 팔십명이나 죽었 다. 마법사 하나 양성하는데는 그 몸무게 만큼의 금이 소모될 정도로 대단히 힘들었다. 그런 마법사들이 내전에서 무더기로 죽어자빠진 것이다. 듀마는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허망한 심정이 들었다. 나라를 지키다 죽었으면 이런 감정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듀마는 시드에 대해 이를 갈았다. 도망가기로 결심한 시드를 잡을 능력이 듀마에게는 없었다. 듀마는 갑자기 권력에 환멸이 들었다. '내가 이럴려고 마법을 익혔던가?' 죽고 죽이는 데는 진절머리가 처졌다. 듀마는 조용히 산을 넘어 사라졌다. 검은 구름이 달을 가렸다. "우르릉! 쾅!"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이윽고 비가 쏟아졌다.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모두들 지쳐서 축 늘어졌다. "으악!" 갑자기 비명이 울렸다. 가빈백작이 철혈기사단과 귀족의 사병 용병대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극심 한 피로와 병력의 소모를 겪은 이황자군은 여기저기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들이닥쳤지?" 삼황자군은 최소한 자기들보다 이틀거리는 뒤에 처져 있었다. 스톨킨 은 이들이 보병은 버리고 기병으로만 달린걸 알지 못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 대권은 삼황 자측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랫만이다 백작!" 가빈백작인 차가운 웃음을 뿌렸다. 스톨킨은 검을 뽑아들었다. "삼황자의 개!" 스톨킨은 이를 갈았다. "누가 할 소리!" 가빈은 여유가 넘쳤다. 승자의 여유였다. 스톨킨은 가빈의 입을 찢어 놓고 싶었다. 스톨 킨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는 저승에 꼭 데려가야 겠다.' 가빈과 스톨킨은 일생의 라이벌이다.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진을 했고 기사의 정점까지 올라섰다. "이얍!" 기합과 함께 스톨킨이 달려들었다. 마나를 머금은 검이 가빈의 머리로 떨어지자 가빈은 옆으로 흘렸다. 챙챙! 불똥이 튀었다. 마나로 반짝이는 검들이 빗속을 누볐다.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힘차고 절제있는 동작이 이어졌다. 스톨킨의 검에서 마나가 흘러나왔다. 오러는 아니지만 강력한 위력을 가졌 다. 가빈의 검에서도 마나가 흘러나왔다. 검에 처음 입문을 하고 기본검술을 익히면 소드 비기너라 불렀다. 마나를 느끼고 마나를 검에 주 입 할 수 있으면 소드소서러라 부르고, 마나를 밖으로 끄집어 낼수 있는 단계를 소드익스퍼터라 하고, 마나를 유형화해서 오러를 만드는 자를 소드마스터라했다. 이들은 둘다 소드익스퍼터의 단계에 있었다. 둘의 실 력은 막상막하였다. 주변에서 비명이 계속 울렸다. 무덤을 지키던 삼황자군이 몰살하던 것과 같이 이황 자군도 그냥 죽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죽일려고 기를 섰다. 모두들 악에 바쳐 있었다. 그 덕분에 삼황 자군도 피해가 속출했다. 스톨킨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스톨킨은 마지막 일격 을 가했다. 검에서 마나가 일렁였다. 쾅! 검이 충돌하며 천둥치는 소리가 울렸다. 둘은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스톨킨이 밀어 붙 였다. 휘청! 가빈의 몸이 뒤로 눌러졌다. 가빈은 한 발을 빼며 흙을 차올렸다. 흙이 스톨킨의 눈에 들어 갔다. 스톨킨이 주춤하는 사이 검을 빗겨낸 가빈이 검을 휘둘렀다. 가빈의 검이 아름답게 곡선을 그렸 다. 서걱! 스톨킨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싸움은 이제 종장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무덤을 지키던 삼황자군과 그들을 공격한 이황자군은 모두 죽었다. 시드와 듀마, 무덤에 들어간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빈백작은 입 맛이 썼다. 피해가 너무 극심했다. 자기가 데리고 온 병력도 반이나 죽었다. 가빈은 병력을 수습하고 멀 리 떨어진 곳에 막사를 설치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여기에서는 도저히 주둔지를 설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톨킨이 막사에 들어서는데 시드가 나타났다. "살아 계셨군요." 가빈은 기쁜음성으로 말했다. "혼자만 살아서 부끄럽네." 시드는 약간 겸연쩍었다. "막스는 어떻게 됐습니까?" "무덤으로 들어간 사람중 나온 사람은 없네. 그것보다 수도로 연락을 하게. 눈이 빠지게 기다릴테니." 가 빈은 마법사를 불러 통신을 열었다. 수정구에 나타난 미카엘삼황자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반쪽이 되어 있었고, 눈밑은 거멓게 죽어 있었다. 삼황자는 가빈과 시드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이겼구나!" 삼황자의 음성이 떨려왔다. "피해가 너무 극심합니다." 가빈은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보고가 거듭될수록 삼황자의 안색이 찌푸려졌 다. "되었다. 이긴 것으로 된거다." 미카엘의 얼굴 옆으로 프르덴틀후작의 얼굴이 나타났다. "병력을 몰아서 수도로 귀환하시오. 오는 길에 반대파 귀족의 충성서약을 받고 볼모도 잡아오시오." 후 작이 단호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무덤을 지키겠습니다." 시드가 나섰다. "그렇게 하시오." 삼황자가 허락을 했다. 사실상 게임을 끝났다. 시드는 무덤에서 나오는 자를 덮칠 생각 이었다.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나올까?' 시드는 기대가 컸다. 통신이 끊기자 가빈백작은 부관을 불러 명령 을 내렸다. "병사들을 쉬게 하라. 네시간후 귀환한다." "예." 삼황자궁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황자의 목을 빨리 치는게 중요합니다. 이황자가 도망가면 내전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후작은 만 의 하나를 걱정했다. 후작이 말하자 미카엘이 전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미카엘에게 형제는 권력의 걸 림돌일 뿐 정이가는 대상이 아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후작은 병력을 이끌고 직접 움직였다. 먼저 붉은도끼단으로 향했다. 롬바르드시 안에 서 붉은 도끼단은 무적이었다. 그 외의 병력은 주둔이 허락되지 않았다. 수도는 붉은도끼단과 수도수비 대가 방어했다. 붉은도끼단은 황권수호의 핵심이었다. 붉은도끼단의 앞에는 경계가 삼엄했다. "누구냐!" 붉은도끼단의 당직기사가 고항을 질렀다. "프를덴틀 후작님이 오셨다. 길을 열어라!" "안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무장은 해제하고 후작님 혼자만 오십시오." 기사가 오만하게 말했다. "이런 건방진 ." 부하가 화를 내자 후작이 말을 끊었다. "신경전을 벌일 시간이 없다. 물러나라." 후작은 묵묵히 무장을 해제하고 기사의 뒤를 따라 기사단장실 로 향했다. 기사단장실 안에는 카를후작과 부관들이 모여 있었다. "이황자궁의 경비를 풀어주시오. 내전은 끝났오." 후작은 단호히 말했다. 이황자측의 병력이 모두 괴멸한 이상 내전은 끝이었다. 이황자궁의 보호는 붉은도끼단이 전담하고 있었다. 이황자는 모든 병력을 대제의 무덤으로 보냈던 것이다. "알고 있소. 기사들은 지금 철수하고 있으니 하고 싶은데로 하시오." 카를후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알고 있군. 우리측에 첩자를 심어놓은 모양이야.' 후작은 붉은도끼단의 저력에 감탄했다. 이제 이 들이 삼황자의 가장 강한 힘이 될 것이다. 붉은도끼단은 전통적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다. 후작은 급 하게 일어났다. 어서 이황자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카를후작도 내전이 어서 끝나기를 빌었다. 피해가 너무 극심했다. 엘란(32) 마르시앙 드 슈나이드 엘리오트이황자는 패배를 직감했다. 궁을 경비하던 붉은도끼단이 떠나고 있었다. 군대와의 통신마법도 열리지 않았다. 엘리오트는 조용히 아내와 아이들을 불렀다. 아내도 귀족가에서 잔 뼈가 굵었다. 일이 잘못 된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물이 아내의 뺨을 적셨다. 가문은 이제 끝장이었다. 이황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삼황자에게 붙으면 된다. 세는 약해지고 재물은 들겠지만, 살 아남아서 대를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핵심지지자들에게는 죽음만이 남았다. "따라오시오!" 마르시앙은 아들을 안아 들었다. 밖에는 듀마의 제자 델피로가 대기하고 있었다. 군대와의 통신을 위해 남겨 놓은 자였다. 마지막 패이기도 했다. 마르시앙이 앞장을 서자 아내와 델피로가 따랐 다. 마르시앙은 지하로 내려갔다. 아래에는 여러개의 책장이 있었고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마르시 앙이 책을 한 권 뽑아내자 벽이 열렸다. 마르시앙은 아래로 내려가 불을 밝혔다. 바닥에는 마법진이 그 려져 있었다. 유사시를 대비한 이동 마법진이다. 마르시앙과 가족은 마법진의 가운데 섰다. 델피로는 마 법진이 밖에서 팔짱을 끼고 쳐다 보았다. 아주 건방진 자세였다. 자신들의 패배로 정신이 없던 이황자는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없었다. "어서 안오고 뭐하나? 시간이 없다. 언제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빨리 마법을 시전하라!" 델피로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황자비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마르시앙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뭐하는 짓이냐?" 델피로가 건들거렸다. "아직 황잔줄 아냐? 좀 있으면 목이 떨어질 놈이!" 델피로는 능글거리며 황자비의 전신을 훑었다. 아랫 도리가 뿌듯해졌다. 얼마나 많은 밤을 상상했던가. 이제 내 밑에서 신음을 흘릴 것이다. 황자비는 델피 로의 시선에 온 몸에서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삼황자의 편이었나?" 마르시앙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누구 편이라기 보다는 이기는 사람 편이지." 델피로는 삼황자측의 첩자 짓을 했다. 나름대로의 보험이 었다. 델피로는 즐거웠다. 보험은 맞아 떨어졌고 이제 황자비의 속살을 맛 볼 것이다. 마르시앙은 아이를 내려놓고 엎드렸다. 얼핏 보면 자포자기한 모습같았다. 델피로는 황자비와의 황홀한 밤을 상상하느라고 마르시앙이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마르시앙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에서 컸다. 제삼 제사의 계획이 항상 있었다. 마법사의 배신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지 이 런 꼴이 되는 것이 서글프고 화가 났다. 마르시앙은 스크롤을 힘껏 찢었다. 듀마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 한 스크롤이다. 하얀 광채가 피어 올랐다. 델피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황자 일행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젠장!" 델피로는 다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버스터!" 불꽃의 폭발은 허무하게 허공을 쳤다. 델피로는 급히 마법진 위에 섰다. 이황자가 출구 의 마법진을 파괴하기 전에 따라잡아야 한다. 잘못하면 양 공간에 끼여 몸이 터져 나갈지도 모른다. "어 뭐야!" 델피로는 놈람의 신음을 발했다. 마법진이 저절로 파괴되고 있었다. "젠장!" 델피로는 허탈한 심정에 빠졌다. 닭 붸던 개 지붕쳐다 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델피로는 힘없이 위로 올라갔다. 궁에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이황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멀리 사라진 이황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 "으음." 엘란은 신음성을 발했다. "정신이 드나?" 하이론은 엘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이스마엘은?" "무사하다. 외팔이가 되긴 했지만." "음." 엘란은 마음이 아팠다. 이스마엘의 팔이 떨어져 나간 것이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깨자마자 이스마엘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모두 다 현실이었다. "그런 표정할 것 없다. 아직 살아 있잖아." 이스마엘이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엘란은 이스마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죠?" "정확히는 모르지만 하루쯤 됐을거야." 이들이 무덤에 들어와 있는 동안 세상은 뒤집어지고 있었다. 숙 청의 피바람이 귀족사회에 몰아쳤다. 출세하는 자와 몰락하는 자가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모두 무사합니까?" 하이론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변태까지 모두 무사하다." " 젠장! 거 변태라는 말 안할 수 없오."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변태를 변태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냐?" "개새끼보고 자꾸 개새끼 개새끼하면 강아지가 기분이 좋겠어요." "나뿔건 또 뭐야?" "그럼 엘란은 왜 변태라고 안 불러요?" "엘란은 변태가 아니다." 이스마엘이 끼어들었다. "피피." 쟝은 콧방귀를 뀌었다. 엘란은 배를 내려 보았다.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통증은 심했지만 갈린 배가 거의 아물어 있는 것 같았다. 가슴뼈가 갈리고 배가 찢어져 내장까지 보이는 상처치고는 대 단히 멀쩡해 보였다. 하이론이 눈치를 채고 뻐겼다. "다 이 위대한 마법사님의 솜씨다. 포션도 세병이나 들었고, 여기 실 보이지. 우리 사문 전승의 비법이 지. 특수제작한 실로 꿔매고 힐링마법을 시전하면 아주 빠르게 낫지. 가슴에는 뼈가 잘 붙는 비전의 고 약을 붙였다." 붕대에 가려서 실은 보이지 않았다. 엘란은 솔직히 감탄했다. 이렇게 뛰어난 의사일줄은 몰랐다. "고맙습니다." 엘란은 진정을 담아서 인사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게도 인사했다. "말로만?" 하이론이 물었다. 엘란은 웃으며 주머니를 들었다.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주었다. "필요한 만큼 가져 가세요." 하이론은 상자에서 10골덴을 꺼냈다. 엘란은 의아했다. 포션하나에 50골덴을 받으면서 왜 10골덴만 꺼냈지? 의문은 금세 풀렸다. 하이론은 10골덴을 주머니에 넣고는 상자하나를 모 두 챙겼다. " ." "그런 표정할 거 없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이것도 싸게 먹힌거야. 미래의 십존 목숨값이 이정도면 너무 싼거 아니냐?" 하이론은 당당하게 말했다. 엘란은 다시 한 번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재물보다야 목숨이 중요한 법이다. "영감님도 상당히 괴팍하십니다." 이스마엘이 말했다. "어릴 때 팔려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 봐라! 성격이 이만한 것도 다행이야!" "생체실험이라뇨?" 엘란이 반문했다. 하이론은 당황했다. "그게 그러니까 ." "거짓말 하려면 아무 소리 마세요." "슬립!" 하이론이 쟝에게 마법을 걸었다. 엘란과 이스마엘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료로서 얘기를 해주기 로 결심했다. 게다가 입도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쟝은 아니다. 이 변태는 깊게 사귈 인물이 아닌 것이 다. 무덤에 나가면 멀리 쫓아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쟝도 좋아라 떠나갈 것이다. 하이론은 살아온 얘기 를 죽 해주었다. 하이론은 입담이 좋았다. 엘란과 이스마엘은 하이론의 얘기에 빠져 들었다. " 그래서, 이렇게 된거야." 하이론은 긴 이야기를 마쳤다. 엘란과 이스마엘은 하이론의 페이스에 말려 들 었다. 하이론은 이 두녀석의 살아온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 이다. "우리들 얘기는 여기까지다." 하이론은 엘란에게 눈길을 보냈다. "너는 어떻게 살았냐? 거짓말하려면 아 무 소리도 마라!" 하이론은 엘란의 말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엘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집을 나선 것은 다르넨영주에게 팔려 ." 엘란은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 했다. 검에 맞은 부위 가 아파와서 오래 말하기가 힘들었다. 엘란의 이야기가 대충 끝이 났다. "힐링." 하이론이 치료마법을 걸었다. 엘란은 고통이 사라지느걸 느꼈다. "오러에 당한 상처는 잘 낫지 않는다. 네가 수준 높은 정령사라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고 내 치료가 훌륭 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났지, 아니었으면 상당히 고생했을 거다. 그래도 한동안 정양해야 한다." 하이 론은 고개를 이스마엘에 돌렸다. "이제 니 얘기를 해봐." 이스마엘은 곤란했다. 보통사람들의 지고교에 대한 편견은 극심했다. 함부로 말 할 수가 없었다. 하이론이 재촉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 얘기해 봐라." 잠시 망설이던 이스마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지고교돕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 ." " ." 하이론의 두눈이 커졌다. 하이론뿐 아니라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동생들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 다. 그러나,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정도일이 계속 놀라고 있기에는 이들의 삶도 녹녹치 않았다. " 그래서, 교도들을 지킬 힘을 기르기 위해 광법사 일레이저의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이십년동안 잡혀있 다. 겨우 동망쳤소. 그러다 엘란을 알게 됐고 영광의 검을 찾아 여기로 들어왔소." 이스마엘은 간단히 얘 기했다. 교의 사정을 시시콜콜 말할 수는 없다. "영광의 검?" 하이론이 반문했다. "우리 교에서는 맹약의 검을 영광의 검이라 부릅니다."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주 변을 휘돌았다. "내가 이럴줄 알았다. 여기 정상적인 삶을 산 놈은 없군. 저기 자고있는 변태까지도 말야." 하이론은 상 당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좋겠소, 이상한 놈들끼리 모여서, 그런 눈으로 보시 마요. 나는 정상이니까." "호, 그래?" 하이론이 말끝을 묘하게 올렸다. "관둡시다." 엘란은 돌아 누웠다. 다시 상처가 쓰려왔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엘란은 금세 잠이 들 었다. 혼몽한 잠이었다. "괜찮을까요?" 이스마엘은 엘란의 상처가 걱정스러웠다. 잘려진 상처보다 내상이 심했다. "고생 좀 할거다." 하이론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이 든 엘란에게 하이론과 동생들은 차례로 치료마법을 걸었다. 엘란은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물 좀 주세요?" 엘란이 깨자 모두들 기뻐했다. 하이론은 엘란에게 물병을 주었다. 엘란은 옆으로 누워 물을 마셨다. " ." 물 맛이 형편없었다. 쟝이 웃음을 터트렸다. "히히히, 나도 물먹고 올릴뻔 했다." "아이스 볼을 녹여서 만든 물이야. 운디네가 만든 물보다 더 맛없더군." 이스마엘이 설명했다. "윽!"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가슴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파왔다. "무리하지마!" 하이론이 말했다. "부축 좀 해주세요." 하이론삼이 엘란을 조심스럽게 앉혔다. "윽!" 가부좌를 틀려하자 격심한 통증이 온 몸을 삼켰다. 정신마저 혼미해 졌다. 혼미한 가운데 엘란은 마나를 들이 마셨다. 마나가 마나홀로 모이지 않았다. 엘란은 결사적으로 마나를 모았다. 이대로는 모두 에게 짐이 될 뿐이다. 식량도 없이 여기서 무한정 죽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몸을 추스러야 했다. 엘란 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쟝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 지독한 놈이네." 쟝은 놀람 반 감탄 반의 심정으로 말했다. 한 줄기 마나가 마나홀로 스며들었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다. 엘란은 비몽사몽간에 그 줄을 움켜 잡았 다. 엘란은 생명의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줄에 집중했다. 엘란은 줄을 이리저리 변형시켰다. 그러다 그 줄을 마나홀에서 뭉쳤다. 작은 실은 동그란 공으로 뭉쳐졌다. 콩알보다 작은 공이다. 엘란은 그 공에 의념을 집중했다. 공이 서서히 회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지리한 시간이 흘러갔 다. 이윽고 공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공은 맹렬히 돌았다. 서서히 마나가 공 주위에 뭉쳐졌다. 주변의 마 나가 몸으로 빨려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공이 커져갔다. 엘란은 마나홀이 꽉 찰때까지 공을 키웠다. 공 의 일부를 떼어 운용을 시작했다. 떨어져 나온 마나는 마나길을 타고 내달렸다. 내상으로 여기저기 끊어 진 길을 잇고 더러운 탁기를 태우면서 마나는 치달렸다. 엘란의 온 몸이 활력으로 충만했다. 엘란의 몸 에서 노란 광채가 피어 올랐다. "어!" 쟝이 놀람의 탄성을 발했다. 쟝은 신기했다.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닌데 사람의 몸에서 노란 광채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쟝의 손이 엘란에게 뻗었다. 하이론은 기겁했다. 엘란은 한 눈에 보기에도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하이론은 재빨리 움직여 쟝을 움켜 잡았다. "왜 ." 쟝이 뭐라 말하려 하자 입을 틀어 막고는 구석으로 끌고가 슬립마법으로 재워 버렸다. 하이론은 속으로 뇌까렸다. '이런 무식한 놈. 배웠다는 놈이, 하기야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느라고 공부나 했겠어?' 마나는 인중에서 멈춰섰다. 엘란이 개척해놓은 길의 종착점이다. 엘란은 마나로 만든 공에서 마나를 떼 내 계속 올려 보냈다. 쾅! 마나가 계속 인중에서 충돌했다. 멈춰서있던 마나를 뒤에서 올라온 마나가 계속해서 부딪쳤다. 쾅! 코피가 터져 나왔다. 엘란은 코피가 터진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최후의 마나까지 부딪쳐왔다. 쾅! 머리 에서 천둥이 울렸다. 아득해져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 드디어 인중이 뚫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뚫을 려고 노력했던가. 인중을 돌파한 마나는 다시 정수리에서 막혔다. 엘란은 마나를 다시 마나홀로 보내서 공으로 뭉쳤다. 엘란은 마나를 계속 흡수했다. 공이 점점 더 커져 마나홀 전체에 가득했다. 엘란은 공에 더욱 집중했다. 공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공이 마나홀을 압박했다. 견디지 못한 마나홀이 커져갔다. 엘 란은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마나홀이 두배는 더 커졌다. 엘란은 커진 마나홀에 마나를 채워나갔다. 주변 의 마나가 무섭게 빨려들었다. 주변의 마나가 모자라 무덤안의 마나까지 빨아당겼다. 하이론형제와 이스 마엘은 숨도 못쉬고 지켜보았다. 일생에 다시 보기 힘든 진기한 광경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엘란은 마 나를 뒤로 보냈다. 마나가 노도와 같이 흘러 나갔다. 거칠 것이 없었다. 쾅! 거센 소리와 함께 마나는 뒤통수를 뚫고 정수리로 몰려갔다. 쾅! 마나가 거세게 정수리에 부딪쳤다. 엘란은 다시 아득한 감정을 느꼈다. 엘란은 다시 없는 기회가 자 신에게 찾아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한 엘란은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정수리를 때렸다. 쾅! 정수리에 바늘구멍같은 마나길이 열렸다. 그 열린 길로 하늘의 별들이 내려 앉았다. 그 길을 따라 엘란의 정신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엘란의 정신은 무덤을 뚫고 산위로 떠올랐다. 지금은 밤이었다. 하 늘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란은 북극성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호연지기가 솟구쳤다. 엘란 은 정신은 고함을 질렀다. 몸도 따라서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 광음이 석실을 뒤흔들었다. 하이론이 실드를 쳐야할 정도의 괴성이었다. 그 소리는 엘란의 귀도 뒤흔들었다. 엘란의 정신이 급속히 몸으로 빨려들었다. 번쩍! 엘란의 눈이 떠졌다.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오다 눈으로 빨려들었다. 이윽고 보통의 눈으로 돌아왔 다. 아니 눈빛이 변했다. 영혼마저 빨려들것같은 유현한 눈빛이었다. 그러다 점점 보통의 눈으로 돌아왔 다. 엘란은 몸을 일으켰다. 몸에는 힘이 넘쳐흘렀다. 자신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축하한다!" "대공을 성취했구나!" "커억 컥(축하한다.)!" 일행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런 광경은 처음보겠구나!" 하이론이 입맛을 다셨다. 평생에 이런 구경은 처음이었다. "무슨?" "네 몸에서 노란색의 광채가 뻗어 나왔다. 얼마나 황홀하던지. 그렇게 아름다운 빛은 내 평생 처음이다." 하이론은 엘란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엘란은 이런데 설명하는 재주가 없 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아는 것을 설명하는 요령이 부족했다. "그게 어떻게 하다보니 마나가 모였고, 마나홀이 두배로 커져서 마나를 네배나 더 축적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마나로 길을 뚫었더니." 하이론이 말을 끊고 고함을 빽 질렀다. "아이고 답답해라 무슨 놈의 설명이 그래!" "저 그게." 엘란은 오른손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예." 하이론이 말하자 엘란은 머리를 끄덕였다. "마나를 어떻게 모았어?" "공모양으로 모았어요." "그러니까 마나를 공처럼 뭉쳐서 키웠다. 맞아?" "예." "그걸 키워서 마나홀을 늘리고?" "예." "그래서 마나를 네배나 더 축적하게 됐다. 그래서 그걸로 마나를 운용했다.맞아?" 엘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길은 어디까지 뚫었어?" "다 뚫긴했는데 ." 말을 흐리자 하이론이 다시 물었다. "길을 다 뚫기는 했는데 완전히 뚫린건 아니다. 맞아?" "예." "어디에서 덜 뚫린거냐?" "정수리에 바늘구멍만한 조그만 구멍이 뚫렸어요." "정수리빼고는 다 뚫었다. 정수리의 길은 바늘구멍만 하다." "예." 하이론은 감탄했다. "너 드디어 최고 수준에 올랐구나! 그래 정수리 뚫을 때 무슨 일 없디?" "그 구멍으로 정신이 빠져 나와서 하늘을 비상했어요." "진짜야? 어떻게 정신이 몸에서 빠져나오지. 죽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느낀게 아닐까요?" 이스마엘이 끼어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엘란이 말을 받았다. 꼬르륵! 배에서 신호가 왔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먹은 것이다. "먹을거 없어." 하이론이 말했다. "어서 나가죠." 엘란은 서둘렀다. 엘란은 처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석실은 네모 반듯했는데 아주 좁았다. 중앙에는 하이론이 만든 광구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문처럼 생긴것은 하나뿐이었다. 이때까지와의 문과 는 다른 생김새였다. 직사각형의 금이 벽에 나있었다. "이게 문일까요?" "문처럼 생긴 것은 그것 뿐이다." 하이론이 대답했다. 엘란은 실피드둘을 불렀다. 엘란은 아주 반가웠다. 막스에게 당한 정령들이 걱정스러웠었다. 쾅!쾅! 쾅! 실피드가 문을 거세게 강타했다. 벽이 흔들렸다. 이때까지 보다 두배 이상은 강한 힘이었다. 엘란은 새삼 놀라웠다. 자신감을 얻은 엘란은 계속 문을 두드렸다. 쾅쾅! 굉음이 석실안을 휘돌았다. 그 바람에 쟝이 깨어났다. "젠장! 슬립마법 좀 걸지 마시오. 밤에 잠이 안 오잖소." 엘란은 나탈리가 생각나 웃었다. 갑자기 나탈리 가 몹시 보고 싶었다. "안에서 낮과 밤이 언젠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안에서 할 일이라도 있냐? 자는게 남는거다." "흥흥!" 하이론의 말에 쟝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식이 어른 말씀하시는데 걸핏하면 콧방귀네." 엘란은 정령을 돌려 보냈다. 실피드로는 역부족일 것 같았다. 엘란은 자세를 바로했다. "뭐하려고?" 이스마엘이 물었다. "상급정령과 계약을 시도해 볼려구요." 말이 끝나자 하이론이 눈을 반짝였다.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이야! 이거 잘하면 멋진 구경하겠는데, 대륙에서도 상급정령과 계약하는걸 본놈은 손에 꼽힐걸." "안 될지도 몰라요." 엘란은 겸연쩍게 웃었다. "될지도 몰라." 이스마엘이 단호히 말했다. "커어억 컥(그래 될거야)" 엘란은 못알아 들었지만 하이론사도 거들었다. 쟝도 흥미가 동하는지 옆으로 다가왔다. 하이론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슬립!" 쟝은 다시 잠에 빠졌다. "어른한테 콧방귀 뀌면 벌을 받는 법이다." 하이론은 잊는 법이 없었다. 엘란은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나가 불같이 일었다. 엘란은 마나를 주위와 공명시켰다. "나 엘란은 슈리엘과 벗하고자 하니 내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슈리엘은 상급정령의 명칭이다. 휘이잉! 석실안을 바람이 휘돌았다. 아주 부드러운 바람이다. 엘란의 앞에 바람이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바람이 엘란의 앞에 뭉쳐졌다. 이윽고 슈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숙한 처녀의 모습이다.오른손에는 창같이 생긴 막대를 들었다. 투명하면서도 묘하게 반짝거렸다. "이야 이거 얼마만이야!" 슈리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가 이렇게 좁아!" 슈리엘은 주변을 휘돌았다. 슈리엘을 따라 거센 바람이 일었다. "이 영감은 또 뭐야?" 슈리엘은 하이론 사형제를 보았다."뭐야! 요새 는 대머리가 유행인가?" 하이론은 입을 딱 벌렸다. 상급정령이 말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수다는 뭐란 말인가? 엘란도 당황스러웠다. "야! 뭐해 계약안해?" 슈리엘이 엘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해야죠." 엘란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빨라해, 할건 해야지." "슈리엘이여 나 엘란과 계약을 해다오!" 슈리엘의 얼굴이 엄숙해졌다. "나 슈리엘은 태초의 맹약에 따라 엘란과 계약을 맺는다." 금새 표정이 바뀌더니 엘란의 입에 입맞췄다. 엘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슈리엘은 투명하게 변하더니 사라졌다. "그 정령 대단한데." 이스마엘이 감탄했다. "자식 좋겠다. 정령과 키스한 기분이 어때?" 하이론이 느물거렸다. 엘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구석에 는 쟝이 처량하게 잠들어있다. 새우같이 등을 구부리고. 엘란(33) "슈리엘!" 엘란은 다시 정령을 불러냈다. 슈리엘은 정신없이 주위를 날았다. 좁은 방안에 바람이 휘몰아 쳤다. "인간계에 나온게 700년만이야. 그동안 무지 심심했어." 슈리엘은 엘란을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무슨 일이야?" "저 문 좀 부셔주세요." 슈리엘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튼튼하게 생겼네, 좀 힘들겠는데." 엘란은 실망하고 말았다. "못 열어요?" "그건 네게 달렸지, 계약자의 능력에 따라 정령의 힘도 달라지기 마련이거든." "어쨌든 한 번 해봐요." 엘란은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옷이 부풀어 오르고 머리가 공중으로 뻗쳐 올랐다. 슈리엘의 몸에 갑옷이 입혀지는 것 같았다. 바람의 갑옷이다. 슈리엘은 바람의 창을 들었다. 바 람의 창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엘란의 몸에서 급속도로 마나가 빠져 나갔다. 슈리엘은 창을 힘껏 내 질렀다. 쿠아앙~~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문에 금이 갔다. 슈리엘은 다시 창을 휘둘렀다. 쿠아앙! 연 이어 폭음이 울렸다. "뭐야!" 쟝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슈리엘은 보더니 입을 헤 벌렸다. "뭐 뭐 뭡니까?" 말까지 떨려왔다. 이스마엘이 짤막히 대답했다. "바람의 상급정령 슈리엘이다." 쟝은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 모습에 하이론의 눈섭이 찌푸려졌다. 슈리엘 은 창을 던졌다. 콰아앙! 문이 터져 나갔다. 그와 함께 슈리엘도 사라졌다. 아직은 이게 한계였다. 슈리엘을 부리고 엘란 은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괜찮아?" 하이론이 물었다. "지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쟝이 갑자기 뛰어왔다. 엘란은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처음 보았다. 얼굴은 붉게 달아 올랐고, 흥분으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여자 다시 불러봐!" "처녀의 모습으로 보여도 정령은 암수 구별이 없습니다. 무성이에요. 슈리엘이나 상급정령으로 부르세 요." "그래도 처녀모습 아닌가?" 잠깐 뜸을 들이던 쟝은 구석으로 엘란을 데려갔다."그 여자하고 말일세 ." 쟝은 말끝을 흐렸다. "그 여자하고 뭐요?" "할 수도 있냐?" "예?" 엘란은 반문했다. "거 왜 있잖아. 잘 알면서 선수끼리 왜이러냐? 나중에 불러서 나랑 재미 좀 보게 해줄래?" 엘란의 눈이 커졌다. 기가 콱 막혔다. 엘란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경험을 많이 했고 괴상한 사람도 많이 만났다. 그러나, 맹세코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있어.' 정령을 데리고 이런 상상을 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슈리엘은 처녀의 모습이라도 본질은 바람이다. 샐라멘더가 도마뱀의 모양을 했지만 본질은 불인 것과 마찬가지다. 정령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은 아닌 것이다. 엘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냥 넘어갔다가는 두고두고 귀찮을게 뻔했 다. 하이론의 표정도 가관이었다. 뻔뻔한 하이론도 두손 두발 다 들 지경이었다. 꽤 수준높은 마법사가 쟝의 속삭임을 듣고자 한다면 못들을 것도 없다. 쟝이 무슨 소리를 하나 귀를 기울이던 이스마엘과 하 이론의 동생들도 모두 들었다. 그들도 벌레씹은 얼굴이었다. 쟝은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얼굴에는 기대 가 가득했다. "자네가 먼저하게 순서는 내가 양보하지." "에라이 이 미친놈아." 하이론이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석실 안에서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하이론은 예전 의 성질이 나왔다. 양손을 번갈아 가면서 후려쳤다. "아이고 나 죽는다." 근력증강마법을 건 하이론의 손은 매서웠다. 때린데 또 때리고 때린데 또 때리고, 쟝은 죽을 지경이었다. 쟝은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은 때리지 마요!" 쟝이 소리쳤다. 얼굴은 쟝의 두 번째 재산이다. "관두시죠." 이스마엘이 말렸다. 엉덩이를 한 대 차준 하이론은 분이 풀리는지 손을 멈추었다. "아이고 아이고!" 쟝은 신음을 흘렸다. 이스마엘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려 있는 쟝에게 다가갔다. "정령은 피와 살이 있는 생물이 아니다. 당연히 " 이스마엘이 얼굴을 붉혔다."그 짓도 할 수 없다." 쟝은 굉장히 실망한 표정이다. 맞아서 아픈 것 보다는 그 일이 더 애석한 모양이다. 엘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가죠." 문은 슈리엘이 부셔놓았다. "이야 이거 멋진데." 하이론이 감탄성을 발했다. 석실은 대단히 넓었다. 동그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지 름이 50미터도 넘을 것 같았다. 앞에는 천정에서 떨어져 내린 물이 연못을 이루었고 벽에는 조각 대신 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대단히 화려한 채색으로 생동감이 넘쳤다. 벽에는 빛을 발하는 발광석이 여기 저기 박혀 있었다. 폭포의 뒤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단이 놓여있었고, 단위에 황금으로 만든 관이 놓여 있었다. 관에는 거대한 다이아몬드들이 주위를 둘러가며 박혀 있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관의 주위에는 열 개의 검들이 관을 보호하듯이 박혀 있다. 드디어 대제의 관까지 들어온 것이 다. 일행들은 감개 무량했다. "너 좀 가만히 못 있겠냐?" 쟝이 발광석을 뽑으려다가 하이론에게 들켰다. "발광석 이거 무지 비싼거에요. 이거 뽑아다가 팝시다!" 발광석은 어둠을 밝히는 암석으로 대단히 고가 에 거래되는 물건이다. "누가 비싼지 몰라? 이때까지 뭘 경험한거냐? 그거 뽑다가 함정이라도 발동하면 어떻게 할래?" "에이 쪼잔하게 뭘 그런걸 걱정해요." 쟝은 턱으로 엘란을 가리켰다."상급정령사도 있는데." "슬립!" 쟝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너는 자는게 돕는거다." 일행들은 우선 벽화를 살폈다. 수많은 발광석이 주위를 밝히고 있어서 석실 안 은 아주 밝았다. 그림은 대제가 드래곤을 타고 정복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막스와 싸우던 석 실의 조각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드래곤을 부리는 대제에게 거칠것은 없었다. 수많은 나라를 굴복시키고 모든 나라의 왕들을 모아 충성맹세를 받는 그림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제는 찬란한 왕관을 썼고 수많은 나라의 왕들이 대제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지는 그림들은 대제의 수많은 업적을 찬양하는 그림이다. 마지막 그림은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다.신들의 사자라 불리는 유니콘 이 대제를 인도하고 드래곤들이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대제는 신이 되고 싶었나 보군요?" 엘란이 마지막 그림을 보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스마엘이 말했다. "여기에는 맹약의 검이 안 보이는 구나. 막스가 가진 검이 맹약의 검이 맞을까?" 하이론이 묻자 이스마 엘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엘란은 관 주위의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있는 검 중에서 하나 일지도 모르죠." 모두의 시선이 관을 둘러싸고 꼽혀있는 검에게 쏠렸다. 검 들의 형태는 다양했다. 노말소드가 가장 많았고, 바스타드소드, 세이버,레이피어,브로드소드도 있었다. 엘 란은 대제의 관으로 걸어갔다. 황금의 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휘황한 광채를 뿌리고 있다. 팅! 관으로 다가서던 엘란이 밀려났다. "결계가 쳐져 있어요!" 하이론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섰다. 텅! 하이론도 결계에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하이론은 여러가지 주문을 외웠다. 동생들까지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했다. 잠시후 하이론은 두 손을 들었다. "대단한 결계구나! 우리 능력밖이야. 힘을 써서 강제로 여는 수밖에 없겠다." "파이어 버스터!" "아이스 브링어!" 하이론과 이스마엘은 마법을 난사했다. 효과가 없자 하이론의 동생들도 끼어들었다. "크어어 컥컥(라이트링 볼트)." "커억 커거 꺽(매직 미사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엘란은 마나수련에 들어갔다. 지친 몸을 추스려서 슈리엘을 부를 예정이었다. 한참 마나운용을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연못에서 바 위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쟝의 짓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모두들 딴데 정신을 파는 틈 을 타서 발광석을 꺼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거야?" 하이론이 고함을 빽 질렀다. 쟝이 콧방귀를 꼈다. "흥흥! 이것봐요 아무일 없잖아요." 쟝은 발광석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니 눈에는 저거 안 보여."하이론이 연못에 솟아오른 바위를 가리켰다. 쟝은 바위를 보았다. "바위하나 올라온거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이 자식이!" 하이론이 소매를 걷어 올리자 찔끔했다.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앞으로는 가만히 있을께요." 쟝은 사정조로 말했다. 하이론이 바위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발광석을 재빨 리 품속에 넣었다. '이거면 한동안 재밌게 놀수 있겠다.' 쟝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에게 잡혀 있었던 영지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도망치자니 수중에 한 푼도 없었다. 결국 돈 때문에 이런 사지까지 들어온 것 아닌 가. 하이론은 바위로 다가갔다. 무슨 함정이 없나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상한데요?" 마나운용을 마친 엘란이 다가왔다. "뭐가?" 엘란은 바위를 가리켰다. "바위가 물에 떴잖아요?" "아 그렇군!" 사람들은 종종 당연한 것을 잊곤한다.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실프를 불러 바위를 끌어냈다. 바위는 가벼웠다. 실프가 아주 쉽게 들어올렸다. 엘란은 조심스럽게 바위를 내려 놓았다. "바위를 열테니 조심하세요." 일행은 모여서 실드를 쳤다. 실프가 칼날같이 변해 바위에 부딪쳤다. 쫘악! " ." " ." 바위는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흐물흐물해졌다. 서로들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실드를 풀면서 하이론이 말했다. "대단한 환영마법이군. 감쪽같이 속았어." 바위가 아니라 천에다가 환영마법을 걸어놓은 것이다. 엘란은 천을 걷어냈다. 안에는 작은 상자가 나왔다. 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보물이 나오면 공평하게 가릅시다." 이번에는 하이론이 콧방귀를 꼈다. "흥흥! 니가 뭐 한거 있다고 공평하게 나눠." 쟝이 당장 반박했다. "이거 왜 이래요. 내가 발광석을 빼서 나타난 거잖아요." "좋아. 니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 고려해 보지."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상자 주위에 베리어를 치고는 실 프로 상자를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상자에 모였다. "이거 뭐야!" " ." 안에는 녹이 잔뜩 쓴 단검이 하나 나왔다. 막스가 가진 검과는 비교가 안됐다. 평범한 단검인데 녹 이 쓴데다가 이도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쟝의 실망이 가장 컸다. 환락가를 누비려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다. "내 몫은 포기하죠."쟝이 큰 인심 쓰는 듯 말했다. "너 가져라." 하이론이 엘란에게 말하고는 대제의 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관심없네." 이스마엘이 말했다. 모두의 관심이 관으로 쏠렸다. 쟝은 하이론 몰래 발광석을 빼내려 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쟝도 위험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발광석 하나로 만족하려 했다. 그러나 잔뜩 기대했던 상자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단검이 나오자 갑자기 욕심이 동했던 것이다. 엘란은 단검을 들어 보았다. 일반적인 숏소드보다 작았다.날은 한뼘도 되지 않았고 자루도 수수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엘란은 단검을 바위로 위장했던 천으로 싸서 품속에 집어넣었다. 쾅! 벽이 통째로 날아갔다. 하이론이 쟝에게 인상을 썼다. "이자식이!" 쟝은 발광석에 손을 댔다가 화들짝 놀랐다. "제가 안그랬어요." 그때 터진 입구로 붉은 로브를 입은 노인이 들어섰다. 그 뒤를 작은 깃발을 든 거대 한 체구의 사나이가 따르고 뒤이어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적법사 일레이저!" 이스마엘이 탄식을 터트렸다. "모두 물러나요!" 엘란은 자신들이 들어섰던 석실쪽으로 물러났다. 모두들 엘란을 따랐다. 광법사의 악명 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서."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탁한 음성이다. 모두들 멈춰섰다. 광법사의 뒤에는 제자들 20명이 늘 어서 있었다. 많은 제자들이 함정에 희생되었다. 광법사가 직접 나섰으면 아무런 희생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광법사는 그러지 않았다. 적법사레조나 화염의 길라드를 의식해서 힘을 아낀 것이다. 광법사에게 제자들이란 소모품에 불과했다. "이게 누구야 배신자구만." 광법사가 이스마엘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얼굴이 희극적으로 일그러 졌다. 이스마엘은 식은 땀을 흘렸다. "잡아와라." 광법사의 제자들이 나섰다. "오랜만이다 이스마엘 이런데서 볼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광법사와 닮은 자였 다. 깡마른 몸에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말을 할 때마다 누런이가 번쩍거렸다. 광법사의 제자 중에 는 강한축에 드는 자로 5써클에 막 들어선 마법사였다. 이스마엘은 4써클마스터였고 하이론과 형제들도 4써클 마스터였다. "루이 잘." 이스마엘이 루이를 노려 보았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힘을 합해 광법사와 대항하자. 언제까지 노예로 있을건가 저주는 풀수 있다." 이 스마엘이 루이를 비롯한 제자 모두에게 호소했다. 하이론은 이스마엘이 도망쳤을 때의 상황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이론은 악전고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광법사는 조그만한 원한도 절대 잊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미치광이로 유명했다. 이스마엘의 일행이라면 일단 때려 죽이고 볼 자였다. 게다가 여기 는 대제의 무덤이다. 관의 주위에는 보기에도 훌륭한 검이 꽂혀 있다. 그 중에 맹약의 검이 있을지도 모 른다. 막스처럼 나올게 뻔했다. "나는 하이론이다. 꽤 유명한 의사지. 책임지고 살려줄테니 함께 싸우자." 이스마엘과 하이론의 설득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 이십년동안 광법사에게 육체적 심정적으로 묶여 있었던 제자들이 동조 하기는 힘들었다. 광법사는 벽화와 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들 정도는 제자들이 충분히 감당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엘란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광법사가 방심한 지금이 적기였다. '기회는 한 번 뿐이다.' 엘란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의념을 집중했다. 엘란은 상급정령비기너에 막 들어 섰다. 아직은 정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다. 슈리엘이 나타나서 수다를 떤다면 경계심을 가진 광법사 에게 당할 것이다. 엘란은 슈리엘을 부르며 간절히 소망했다. 갑자기 마나가 요동쳤다. 엘란의 염원이 통했는지 앞에 나타난 슈리엘이 번개같이 광법사에게 덮쳐갔다. 광법사같은 고위의 마법사는 마나의 움 직임에 민감했다. 갑자기 나타난 슈리엘에 놀라긴 했지만 여유있게 대처했다. "텔레포트." 푸른 빛에 휩싸인 광법사가 사라졌다가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 나타났다. 강력한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피하지 못했다.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재앙이 떨어 졌다. 제자들 위로 슈리엘이 떨어져 내렸다. 서걱! 슉! 펑! 슈리엘의 옷자락과 창에 스친 마법사들의 살이 갈라지고 터져 나갔다. 제자들은 재빨리 물러나며 실드를 쳤다. 이미 십여명이 죽은 뒤였다. 상급정령의 위력은 놀라웠다. 그러나 천하의 광법사 를 당할 수는 없었다. 광법사는 무서운 안광으로 엘란을 노려 보았다. 이스마엘과 대제의 관에 정신이 팔려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대단한 정령사였다. 엔젠가 잡아다가 제자로 부릴려던 놈이다. '이스마엘과 같이 달아났던 놈이군.' 일레이저는 젊은 강자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기존의 십존은 이 미 한계에 다다른 자들이다. 자신만해도 인간의 한계라는 7써클 마스터다. 십존에 속하는 다른 마법사도 7써클 마스터였다.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신뿐 아니라 적법사도 30년째 같은 써클에 머물러 있다. 일레이저가 노린 것은 맹약의 검이 아니었다. 광법사는 엘리오트왕국의 메테르니히공작과 같은 이유로 맹약의 검을 믿지 않았다. 혹시 광룡캇셀프레임의 마법서라도 찾을까 해서 들어온 것이다. 광법사는 싹수가 보이는 젊은이는 잡아다가 제자로 만들거나 죽여버렸다. 혹시나 자신에게 대항할까 봐 서였다. 광법사는 성격이 편협한데다가 편집증적인데가 많았다. 그래서 미쳤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 았다. 광법사는 미친 것이 아니다. 미친자가 7써클마서터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일레이저의 눈길 이 더욱 사나와 졌고 코를 씰룩씰룩 거렸다. 이스마엘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광법사가 코를 씰 룩거릴 때 마다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엘란도 살기를 느꼈다. 모두 찰라지간에 벌어진 일이다. 슈리엘은 조금의 틈도 없이 광법사에게 덮쳐갔다. "절대방어." 광법사의 입에서 7써클마법이 시전됐다. 인간의 마법사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방어 마법이었다. 푸른색의 구가 광법사의 몸을 감샀다. 콰아앙~~. 엄청난 광음이 지하공동을 뒤흔들었다. 엘란의 마나가 급속히 소모되었다. 적법사의 살의가 더욱 굳어졌다. 저놈은 벌써 상급정령사에 발을 디뎠다. 물의 시드나 화염의 길라드보다 이,삼십년은 빨 랐다. 광법사는 주문을 영창했다. 슈리엘은 끊임 없이 푸른구를 두들겼다. 쾅!쾅!쾅! 하이론과 이스마엘은 구석으로 붙어서 일행들의 주위에 실드를 쳤다. 광법사의 제자들도 마찬 가지였다. 칼날같이 휘몰아치는 강풍과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굉음에서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오직 엘란만이 광법사의 앞에 오연히 버티고 있었다. "드래곤 파이어!" 푸른구가 서서히 ?어졌다. 공격을 할려면 방어주문을 풀어야 했다. 광법사의 손끝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화염이 솟구쳤다. 붉다 못해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푸른 불길은 하나의 거대한 드래곤이 되어서 덮쳐들던 슈리엘과 부딪혔다. 7써클 공격마법이다. 쾅!!!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폭음과 함께 주변의 마나가 뒤틀렸다. 엄청난 충격에 이스마엘과 하이론 이 친 실드가 깨져나갔다. 내상을 방비하기 위해 하이론과 이스마엘은 실드가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었 다. 하이론이, 삼, 사가 차례로 실드를 쳤다. 모여있던 광법사의 제자도 마찬가지였다. 슈리엘은 푸른기 가 도는 붉은 드래곤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밀렸다. 엘란은 온 몸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나홀이 텅빌 때까지. 그러나, 얼마버티지 못했다. 화염의 드래곤에 다리가 물린 슈리엘은 정령계로 강제소환 당 했다. 마지막 힘으로 드래곤의 머리를 창으로 후려친 채였다. 슈리엘을 물리친 드래곤은 엘란에게 날아 들었다. 엘란은 급히 주변의 마나를 호흡해서 마나홀로 유도했다. 엘란은 정신없이 정령을 소환했다. 엘 란의 입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내렸다. 처음으로 드래곤을 맞이한 정령은 실피드였다. 실피드 둘이 강 제로 되돌아 갔다. 엘란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카사하나,실프열, 샐라멘더다섯,운디네까지. 엘란과 계약 한 모든 정령이 타격을 입고 정령계로 강제소환 당했다. 엘란은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 연이은 충격으로 드래곤도 많은 타격을 받았다. 엘란은 편안한 심정으로 날아오는 드래곤을 보았다. 모두가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엘란에게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매 순간순간이 생생했다. 끊임없는 격전이 엘란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하이론형제와 이스마엘이 엘란의 뒤에 섰다. 엘란의 앞에서 방 어마법이 펼쳐졌다. "프로덱션 오브 아이스." "프로덱션 오브 에어." "끄아아~악(프로덱션 오브 파이어)." "캬아아! 캭 캭(프로덱션 오브 워터)." "칵칵~크어어억(파이어 월)." 드래곤은 하나하나 무력화 시키며 날아왔다. 이스마엘은 급히 엘란앞에 나 서며 실드를 쳤다. 드래곤은 힘이 떨어지고 있었다. 확연하게 희미해진 화염의 드래곤은 부드럽게 실드 를 찢었다. 이스마엘은 피를 토했다. 펑! 이스마엘은 몸으로 드래곤을 받았다. 이스마엘은 엘란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방어마법이 걸려 있 던 로브도 걸레로 변했다. 화염의 드래곤은 소멸했지만 이스마엘의 상체는 거의 터저 나가며 피범벅이 되었다. 엘란은 이스마엘을 뒤에서 안았다. 하이론이 급히 다가와 포션을 먹이고 상처에 뿌렸다. 내상에 도 불구하고 하이론형제는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힐링!" 환한 빛이 환부에서 피어 올랐다. 하이론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망이 없었다. 광법사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때 광법사가 들어왔던 통로로 세명이 들어섰다. 밤의그림자였다. 한명은 죽었는지 숫자는 셋으로 줄어있었다. 광법사는 슬쩍 밤의그림자를 보았다. '니들은 나중에 손봐주마.' 광법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밤의그림자는 몰랐지만 그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스마엘!" 엘란이 부르짖었다.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묻어났다. 이스마엘은 뒤돌아 보며 엘란의 옷자락 을 움켜쥐었다. "내 부탁 잊지 않았지." 엘란은 꼭 끌어 안았다. 하이론도 울먹였다. "썩을 놈! 재수 없는 소리만 해대더니." 이스마엘은 힘겹게 숨을 몰아 쉬었다. 강력한 염원이 떠나가는 영혼을 붙들고 있었다. "들어주는김에 하나만 더 들어다오." 엘란은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거절해도 상관없다. 무리한 부탁인줄 아니까." 엘란은 단호히 말했다. "살아난다면 반드시 들어드리죠. 그런데 살기가 힘들 것 같아요." 엘란은 처량한 표정이 되었다. 광법사 가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 끝장이었다. 이스마엘은 숨이 넘어가고 이었다. "이년만 이년 동안만 좌호법사로 교를 보호해다오." 죽어가면서 까지 이스마엘은 교를 걱정했다. 자신마 저 죽으면 싸울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에쉴리가 걱정스러웠다. 너무 미안한 부탁이라 이스마엘은 이년동안의 시간을 한정했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얘기가 다 끝났나 모르겠군, 이제 지옥에 갈 시간이다." 광법사는 음산하게 말했다. "살려주세요." 쟝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광법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쟝은 다급해졌다. 창백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중요한 정보가 있어요. 맹약의 검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광법사의 코가 실룩겨렸다. "관심없다." 광법사는 이놈들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생각해 보았다. "이걸 어쩌나 나는 관심이 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쭈글쭈글한 광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염의 길라드!" 하이론이 소리쳤다. 하이론은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 우연히 아스가르드의 수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광법사고 알아 보았다. 십존은 서로 꺼리는 바가 있어서 피히기는 해지만 안면은 있었 다. "계속 얘기해 보지." 길라드가 능글맞게 웃었다. 길라드는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이마는 시원하게 벗겨졌는데 뒷머리에 하?게 센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졌다. 코는 컷고 눈은 부리부리했다. 특히 젊은이 못지 않은 탄탄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딱붙는 면바지와 부라우스를 걸쳤는데 옷안에서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광법사가 적법사레조와 함께 가장 재수없어하는 자였다. 무엇보다도 서로의 몸이 뚜렷히 대 비되었다. 광법사는 깡 말라서 살이라고는 없었는데 길라드는 근육이 우람했다. 광법사가 싫어하기에는 충분한 이유다. 자기를 싫어하는데 상대를 좋아할 성격좋은 사람이 많을리 없다.당연히 길라드도 광법사 를 싫어했다. 쟝은 생명줄을 잡았다고 확신했다. 십존의 일인인 길라드라면 저 미치광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쟝은 착각하고 있었다. 길라드가 광법사를 싫어한다고 목숨을 걸고 싸울리가 없다. 둘이 싫어하기는 하지만 원수는 아닌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쟝의 입에서 나올 정보에 달렸다. 정보를 얻고 모른척 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엘란(34) 쟝이 입을 열려하자 하이론이 막았다.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다. "정보를 주면 우리를 도와 주겠오?" 하이론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정보에 따라서." 길라드는 느물거렸다. 호탕하게 생긴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이론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칼자루는 길라드가 쥐고 있었다. 길라드 뒤에는 세명의 제자가 시립해 있었다. "끼어들거냐?" 광법사가 음산하게 말했다. 길라드는 대답없이 느끼한 미소만 날리고 있다. 광법사는 승산을 재어 보았다. 자신과 길라드는 막상막 하다. 승부는 제자들에게서 갈릴 것이다. 광법사가 데려온 제자는 열명만 남았다. 살아남은 제자 중에서 5써클마법사는 루이뿐이다. 광법사는 의심이 많아서 제자들에게 고위마법은 전수하지 않았다. 5써클까지 만 가르쳤다. 그래서 다른 십존에 비해 제자들이 약했다. 수는 많았지만 아무래도 길라드의 제자들에 비 해 약해 보였다. 일레이저는 물러섰다. 기회를 봐서 죽이면 된다. 화염의 길라드가 평생 저들을 돌봐주 지는 못할 것이다. "에쉴리!에쉴리!" 이스마엘이 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딸의 얼굴이라도 보이는 듯 눈을 쉴새없이 깜빡 거렸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이스마엘!"엘란이 조용히 흐느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이스마엘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 다. 엘란은 이스마엘을 꼭 안았다. 툭! 이스마엘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쉴리를 봤는지 입가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엘란은 고개 를 숙였다. 한 방울 두 방울, 이스마엘의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엘란의 눈물이었다. 광법사를 생각하며 엘란은 이를 갈았다. '일레이저! 살아 난다면 이 빚은 반드시 갚는다.' 길라드가 무언의 시선으로 쟝을 재촉했다. 쟝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맹약의 검은 철혈기사단 부단장 막스가 가졌습니다." 쟝은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길라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검이 맹약의 검이 맞다면 큰 일이었다. 엘리오트왕국이 두 번째로 대륙을 통일할지 도 모른다. 게다가 막스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정체된 대륙에 새로운 바람이 서 서히 불어오고 있었다. 광법사일레이저의 충격은 더 대단했다. 맹약의 검 때문에 받은 충격은 아니었다. 길라드는 몰랐지만 엘란이 상급정령사라는 것을 광법사는 알고 있다. 젊은 나이에 최상승의 경지에 든 자를 둘이나 발견한 것이다. 거기에는 오해도 한 몫을 했다. 막스와 싸울 때 엘란의 성취가 중급정령마 스터라는 것을 광법사는 몰랐다. 막스는 소드마스터의 초입에 들어서 있었다. 광법사는 막스의 실력을 오해했다. 쟝에게서 들은 막스가 엘란을 일패도지 시키는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막스의 성취는 자신에 비해 손색은 있었지만 큰 차이는 아니다. 막스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충격적인 일이었다. 광법사는 막스 를 해치우지는 못한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삼황자의 처남에 프르덴틀후작의 아들이라는 배경 때문이었 다. 독한 맘 먹는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만 그러면 엘리오트왕국을 떠나야 한다. 피요르드왕국과는 원 수관계를 맺었고, 아스가르드왕국과도 껄끄러웠다. 광법사는 엘란이라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간섭할텐가?" 길라드는 머리를 저었다. 대단히 유용한 정보-막스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맹약의 검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광법사와 손속을 겨루기는 싫었다. 맹약의 검이나 드 래곤의 마법서가 걸렸다면 몰라도. 쟝의 얼굴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하이론의 마지막 기대도 사라졌다. 엘란은 여전히 이스마엘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십존이라는 작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목숨을 파리목숨보다 쉽게 생각하고, 말 뒤집기를 예사로 하는 구나.' 하이론은 속으로 탄식했다. 엘란은 고개를 숙인채 필사적으로 마나를 모았다. 그러나, 일레 이저와의 대결에서 극심한 내상을 입은 엘란은 마나를 모으지 못했다. 엘란은 하이론에게서 산 포션을 마셨다. 속이 조금 편해지기는 했지만 마나는 모이지 않았다. 길라드는 엘란일행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길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주변은 대결의 여파로 엉망이었다. 그 아름답던 벽화는 군대군데 파괴되었고 바닥도 뒤집어져 있었다. 오직 결계로 보호되고 있는 관만 무사했다. 길라 드가 관으로 움직이자 광법사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귀중한 물건이 있다면 관 속에 있을 확률이 가 장 농후했다. 길라드가 먼저 차지해 내뺀다면 잡을 수 없다. 십존이 도망가겠다고 결심했는데 누가 잡을 것인가. 텅! 길라드도 결계에 막혔다. 길라드가 일레이저에게 물었다. "이거 파괴할 방법이 있나?" 아무래도 결계에는 정령사보다 마법사들이 뛰어났다. "내가 왜 결계를 열어야 하지?" 광법사가 반문했다. "자네 일에 간섭하지 않았잖아?" "겨우 그걸로 결계를 열 수는 없다." 광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음 조건을 말해보게." "자네는 맹약의 검에 관심이 많겠지. 안 그런가?" 확실히 길라드는 아스가르드국왕에게서 부탁을 받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 대제의 무덤에 드래곤의 마법서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아닐 확률이 높았다. 만 에 하나 있다 하더라도 길라드는 정령사지 마법사가 아니다. 아무래도 마법서에는 욕심이 덜 났다. 길라 드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법사는 말을 이었다. "나는 맹약의 검에는 흥미가 없다. 내 목표는 마법서다." "드래곤의 마법서는 뜬 소문에 불과할 확률이 높다." "그건 나도 안다. 그러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있다고 확신하는 편이야." "그러니까 맹약의 검이 있으면 내가 차지하고, 마법서가 나오면 자네가 차지한다." "그래." 길라드는 손을 들어 엘란일행을 가리켰다. "덤으로 저놈들 일에는 간섭 말고." "그렇치." "만약 맹약의 검과 마법서 둘 다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 광법사는 검과 관을 보았다. "관은 물론 관에 박힌 다이아몬드도 보통 물건은 아니다. 관안에 대단한 물건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특히 저 결계를 이루는 검들은 마법검일 가능성이 다분해." 길라드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물건은 반으로 가르세. 결계를 푸는 대가로 선택권은 내가 먼저 행사하지." "좋은 생각이야." 곰곰히 생각하던 길라드는 찬성을 표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강제로 결계를 풀려면 자신이라도 땀 깨나 흘려야 했다. 이것으로 엘란일행의 운명은 결정지어졌다. 쟝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아직 안고 싶은 여자가 백사장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았다. 마르셀백 작부인에게서 배운 체위도 다 써보지 못했다. 죽어도 여자의 품속에서 죽고 싶지 이런 무덤에서 대머리 영감들과-그중 셋은 말도 못한다-상체가 피로 물든 마법사와 죽기는 싫었다. 오직 위안이라면 같은 부 류-쟝은 엘란이 변태가 분명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인 엘란의 존재였다. 쟝은 이제 이판 사판 이었다. 마침 그들은 광법사와 밤의그림자, 화염의 길라드가 들어온 입구에 거의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광법사가 손을 쓸게 뻔한지라 거기서 주저앉아 있었다. 당연히 벽에도 가까웠다. 쟝은 조심스럽게 발광석으로 접근했다. 광법사는 길라드를 견제하는 동시에-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결계의 해제를 시도하고 있었다. 일레이저는 결계에 손을 갖다 댔다. 엄청난 반탄력이 밀려왔다. 광법사는 주문을 영창 했다. 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펑! 갑자기 푸른 색의 섬광이 터져나왔다. 길라드는 손을 밀어 넣었다.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결계는 사 라진 것이다. 둘은 서로를 견제하며 나아갔다. 숨길수 없는 탐욕과 흥분이 일어났다. 밤의그림자는 숨도 못쉬고 있었다. 연이은 괴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광법사가 자신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게 뻔했다. 욕심의 대가는 컸다. 대제의 무덤에 들어온 밤의그림자정예가 모두 몰살 당했다. 특히 맥스의 동요가 눈 에 띄게 심했다. 마스터는 맥스가 이렇게 동요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데미도 맥스의 동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광법사와 길라드가 검 주위에 왔을 때 쟝은 발광석을 떼어냈다. 파아앗! 갑자기 검의 뒤에서 푸른빛의 섬광이 타올랐다. 소환마법이 시전되고 있었다. 광법사와 길라드 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덤안의 함정에 다른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지만 이들에게는 별 위협이 되 지 못했다. 다만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진작에 죽여 버릴걸. 귀찮게 한 대가로 네놈들은 쉽게 죽을 수 없을거다.' 엘란과 하이론은 쟝이 대견 했다. 변태도 쓸모가 있었다. 그들은 도망칠 준비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것은 밤의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사태를 광법사와 길라드는 너무 우습게 보았다. 서서히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마계의 제왕 발록이었다. 그것도 열마리나 되었다. 광법사와 길라드는 경악하고 말았다. 마물치고 덩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소환마물 중에서는 최강으로 꼽히는 마물이었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에는 살기가 넘쳐흘렀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달려 있다. 머리는 철판처럼 매끄럽고 금강석처럼 단 단하다. 송곳니는 입밖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왔고 팔과 다리에는 무시무시한 날들이 박혀 있었다. 온 몸 은 검은색의 비늘로 덮여 있었는데 마법과 정령에 내성이 강해서 웬만한 타격에는 눈섭도 깜박이지 않 는다. 두팔에는 날개가 달려서 짧은 거리는 빠르게 날아다녔고 강력한 꼬리에는 독을 품고 있다. 아무리 십존이라도 발록은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다. 세,네마리면 몰라도 열마리라면 상대하기 곤란했다. 길라드 와 광법사는 자연스럽게 다섯씩 맏았다.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발록은 숨돌릴 틈도 없이 달려들었다. 천성적으로 발록은 주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광법사는 이를 갈았다. 발록을 앞에 두고 엘란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러나, 이대로 보내기에는 내키지 않았다. 설명은 길었지만 쟝이 발광석을 꺼내고 발록이 소환된 것은 잠깐이었다. 밤의그림자가 먼저 입구로 뛰 었다. 그 뒤를 하이론형제와 쟝이 따랐다. 엘란은 이스마엘의 시체를 안고 뛰었다. 그 바람에 가장 뒤쳐 졌다. 모두들 근력의 힘으로 뛰어야 했다. 마법을 시전하거나 정령을 소환할 힘이 없었다. 발록과 싸우 면서 광법사는 뒤로 파이어 에로우를 날렸다. 길라드는 광법사의 악독한 집념에 저으기 감탄했다. 그 다 급한 와중에도 엘란을 죽이려고 손을 쓴 것이다. 발록이 달려들지 않았다면 강대한 마법으로 엘란 뿐 아니라 주위의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보통의 마법사와 십존의 일인이 시전한 파이어에로우는 확실히 달랐다. 직선으로 날아가는 파이어에로우가 곡선으로 휘어지며 엘란을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어떻게 떨 쳐낼 방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통로를 돌아서 달리는데 용케도 따라 붙었다. 파이어에로우가 엘란의 뒤 를 바짝 붙었다. 그때, 맥스가 엘란의 뒤를 막아 섰다. 파이어에로우는 맥스의 호신갑을 뚫고 몸을 관통 한 뒤에도 엘란이 업고 있던 이스마엘의 시체에 박혀서야 소멸이 되었다. 엘란은 어리둥절 했다. 이젠 죽었구나 싶었는데 맥스가 몸으로 마법을 받아낸 것이다. '이 사람이 왜?' 맥스는 맥그루를 죽이려던 밤의그림자의 일원이다. 암살을 저지하려던 엘란은 밤의그림 자 수십명을 죽였다. 청부는 무산됐지만 원수나 마찬가지다. 마스터도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 나 이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언제 광법사가 달려들지 모른다. 마스터는 배에 구멍이 난 맥스를 업 었다. "으윽!" 맥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나는 모양이다. 지치고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이들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밤의그림자는 길을 잘알았다. 데미가 제일 앞서 달렸는데 들어왔던 길을 따라 질풍처럼 내달 렸다. 광법사와 길라드는 발록에게 발목이 잡혀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 둘의 제자들은 발록에게 잡혀 찢어지고 있었다. 광법사의 깃발을 들도 다니던 청년은 죽어가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광법사에게서 해 방 된 것이다. 데미는 안전한 길로 달렸다. 모두들 지쳐서 점점 느려질때 하이론이 포션을 하나씩 던져 주었다. 하이론이 만든 포션은 기가 막히게 효과가 좋았다. 모두들 새로운 힘이 솟구쳤다. 하이론은 맥 스에게 포션을 먹이고 배에 발라 주었다. 그러나, 피가 잘 멈추지 않았다. 확실히 광법사의 마법은 남다 른 바가 있었다. 포션의 효과가 미약했다. 이럴때는 치료마법을 병행해서 행해야 했다. 그러나 하이론은 마법을 시전할 형편이 아니었다. 기운을 차린 일행들은 다시 뛰었다. 지칠만하면 하이론이 포션을 주었 다. 모두들 포션을 다섯개씩 먹자 포션이 떨어졌다. 다음에는 하이론의 둘째동생 하이론이가 알약을 나 누어 주었다. 식량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상식품이다. 만들기가 워낙 어려워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 약이었다. 알약이 떨어지자 하이론삼이 냄새고약한 시커먼 알약을 내놓았다. 피로회복제였다. 효과는 탁 월했다. 그들은 약에 의존해 미친듯이 달렸다. 하이론동생들에게서 영약이 끊임없이 나왔다. 하이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약들이 체력회복에 쓰였다. 하이론은 약들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얼마나 달렸 는지 모른다. 드디어 환한 입구가 보였다. 일행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렸다. 그들은 무덤을 나와 주위 에 널부러졌다.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반기고 있다. 밖의 공기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 난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밖에는 물의 시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제야 나왔냐? 한 참 기다렸잖아." 시드는 무척이나 반겼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자를 반기는 할 아버지 같았다. 막스는 검을 얻고 바로 무덤을 나왔다. 내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몹시 걱정이 된 것이다. 사실 막스는 밖에서 지휘를 맏아야 했다. 시드가 십존의 일인이지만 병사들을 지휘하는 능력은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막스에 비해 떨어졌다. 그래서, 맹약의 검으로 생각되는 검을 얻자 급히 밖으로 나온 것이다. 밖으 로 나왔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나고 가빈백작이 수도로 급히 떠난 후였다. 막스는 급히 그 뒤를 따라갔 고, 재물에 욕심이 많은 시드는 혼자서 남았다. 혹시하는 생각에 막스도 찬성을 했다. 다른 놈이 검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든 막아야 했다. 시드는 무덤 안에 들어가기가 께름직했다. 안에 들어간 사람은 강 물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나오는 놈이 없었다. 그래서 죽치고 기다렸다. 시드는 즐거웠다. 안에 있던 놈 들이 모두 죽었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하던 참인데 마침내 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이제 오랜 기다림의 보상을 받을 때가 되었다. 1,000년의 신비를 간직한 대제의 무덤에서 얼마나 많은 보물이 쏟아질 까 생 각을 하니 은근히 떨려왔다. "벗어." 시드가 인자하게 말했다. 엘란은 시드를 알아 보았다. 어떻게 잊겠는가? 어린 시절 다르넨영지에서 운다인을 부리던 시드의 모습 은 뇌리에 박혀 있었다. 허연 수염을 늘어뜨리고 여신같은 운다인을 부리던 시드는 성자를 방불케 했다. 게다가 시드의 제자 카일에 의해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다음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엄밀히 말한다 면 시드는 몰랐지만 시드는 엘란의 사조였다. 그러나, 엘란은 아는척을 하지 않았다. 아는척을 했다가는 맞아죽기 십상이다. 엘란은 시드의 허락도 없이 시드가 저술한 정령책으로 정령술을 익혔다. 카일에게 배운 정령술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상승의 정령술이다. 사승관계는 엄격했다. 몰래 배운게 들통나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광법사의 아버지가 적법사레조의 가문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도 다 같은 이유였다. 게다가 엘란은 시드를 멸시했다. 카일에게서 시드의 진면목을 들은 후 부터였다. 영웅으로 생 각하다 실체를 알게 된 배신감이 더 감정을 부채질 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를 숙여야 할 때다. 하이 론의 성질이 폭발하려 했다. 무덤 안에서 당하고 당했던 울분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 에 살아서 나왔는데 웬 늙은이가 시비를 거는 것이다. 엘란은 얼른 나섰다. 여기까지와서 허무하게 죽기 는 싫었다. 이스마엘과의 약속도 지켜야하고 나탈리도 돌봐야 한다. "위대하신 십존의 일인 시드님이시여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란은 모두에게 들으라고 시드의 신분을 강 조했다. 나이가 들면 아부에 약하기 마련이다. 시드도 마찬가지다. "무덤 안에서 얻은 것 모두 내놔!" 시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나왔다. 변태기사 쟝은 기가 막혔다. 십존이라 는 자들에게서 환멸이 느껴졌다. 광법사, 길라드, 시드 하나같이 인간같지 않았다. '이런 인간쓰레기들 같으니!' 변태기사 쟝에게서 이런 욕을 들은 걸 안다면 모두들 입에서 거품을 물리 라. 엘란은 품 속의 것을 모두 꺼내 놓았다. 엘란은 값진 것이 거의 없었다. 하이론이 치료비라며 상자 의 금은 거의 다 가져갔다. 10골덴이 다였다.그리고 무덤에서 얻은 녹슬은 단검.그에비해 하이론은 값진 것이 많았다. 우선 엘란에게서 받은 금화가 가득한 상자가 있었고 가지고 있던 돈도 적지 않았다. 돈을 뺏기면서도 하이론은 기뻣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재산은 여라가지 약이었다. 50골덴짜리 포션에서부 터 기사회생의 묘약, 피로회복제, 체력촉진제 등등 무궁무진했다. 그것들은 무덤에서 나오느라 모두 먹 어버렸다. 동생들이 가지고 있던 영약들도 마찬가지다. 값으로 따지면 성하나를 사고도 남았다. 하이론 은 여러사람들을 치료하면서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건강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정 력제와 여자들의 피부를 보호하는 포션이 특히 인기였다. 만약 품속에서 나온 약을 보고 시드가 하이론 형제의 정체를 눈치챘다면 이들은 시드에게 잡혀서 지하감옥 같은데서 평생 약이나 만들어야 했을 것이 다. 무덤안에서 약을 먹으면서 하이론은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무덤안에서의 울분이 단숨에 날아갔다. 엘란은 불안한 심정으로 하이론을 지켜 보았다. 그 성질에 발작이라도 일으켰다간 끝장이다. 그러나, 하이론은 의외로 즐거운 표정이다. 히죽히죽 웃는게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아서 미친 것 같기도 했다. 하이론의 동생은 나오는 것이 없었다. 돈은 하이론이 관 리했고 약은 모두 안에서 먹었다. 오직 쟝만이 거세게 저항했다. 갖은 설음과 구박, 위험속에서 가져온 발광석이다. 그걸 이런 늙은이에게 고스란히 뺏기게 생겼다. 하이론과 동생이 달려들어 발광석을 빼앗아 내놓았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수는 없다. 쟝의 저향을 하이론은 주먹으로 눌렀다. 밤의마스터나 맥스 데미에게서 나온 것은 별게 없었다. 재물을 바라는 시드로서는 하등 도움될게 없었다. 독이묻은 시퍼런 단검이나 표창 암기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특히 여자가 꺼내놓은 밧줄, 채찍, 가죽끈은 천지에 쓸데가 없었다. 상자안의 금화나 발광석이 없었다면 화가 치밀어 이들을 단박에 때려 죽였을 것이다. 보통 때였 다면 너그럽게 보냈을 것이다. 시드는 의심스러웠다. 무덤에서 처음 나온 놈들이 보물하나 없이 나왔다 는 것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시드의 안색을 살피던 엘란이 먼저 치고 나왔다. "저희들은 초장에 함정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다가 겨우 나온 겁니다." 시드가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벗어!" 처음 한 말이 다시 나왔다. 가장 곤란하게 된 것은 데미였고, 가장 신난 것은 쟝이었다. 쟝은 데미의 전 신을 훑었다. 복면을 했지만 여자가 분명했다. 여자는 냄새부터가 다르다. 남자에게서는 역겨운 꼬랑내 가 나지만 여자에게서는 향기가 흐른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 마르셀부인의 하녀중에 하나는 냄새가 대단했지. 입에서 시궁창냄새가 나더라 니까. 그 집 하녀 중에 못 건드린건 그 여자가 유일하지' 쟝은 감회에 젖었다. 화려하던 옛날이 못견디 게 그리웠다. 엘란은 두말없이 벗었다. 하이론형제도 괴팍한면이 있어서 옷 벗는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마스터도 벗었다. 십존의 일인이 벗으라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아무리 체면이 중요해도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혼자 벗으라면 차라리 죽겠다고 버틸수도 있지만 다 같이 벗는데 혼자서 튈 이유 는 없는 것이다. 마스터는 옷을 벗고 맥스의 옷을 벗겼다. 엘란도 이스마엘의 옷을 벗겼다. 시드는 데미 를 노려보았다. "넌 드래곤 통뼈냐? 왜 안 벗어?" 데미도 옷을 벗어 던졌다.데미도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다. 옷 하나 못 벗을 이유는 없다. 데미의 풍만한 몸이 들어났다. 시드는 입맛을 다셨다. '고것 참 이십년만 젊었어도.' 시드의 남성은 시든지 십년이 넘었다. 그건 아무리 마나를 수련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쟝의 눈이 쉴새없이 돌아갔다. 확실히 데미는 보통여자와 달랐다. 옷 벗는걸 꺼린 기색은 완전히 없어지고 남성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겼다. 시드는 속옷까지 벗겼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없는 보물이 뒤진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귀중품을 챙긴 시드는 손을 저었다. "가!" 일행은 옷을 입고 시드가 남겨준 물건을 챙겼다. 모두 가치없는 물건이다. 엘란은 단검을 품안에 넣었다. 이스마엘에게 옷을 입히던 엘란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마엘의 손가락에 구리반지가 있었 다. 만약 금반지 였다면 욕심많은 시드가 챙겼을 것이다. 그들은 서둘러 내려갔다. 십존들은 인간같지 않았다. 언제 마음이 변해 목을 딸지 모른다.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시드는 이들을 죽일 생각이었 다. 사회적 체면이 있는데 무덤입구에서 사람이나 털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곤란하다. 시드는 다 죽어 가는 엘란일행의 행색을 보고 오해를 한 것이다. 아무 실력없는 놈이라고. 이런 놈들은 정령을 풀어서 금방 찾을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을 그냥 보낸 것은 무덤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란일행을 죽이는 기척에 이들이 놀라서 도로 들어가면 곤란하다. 잠시후 안에서 네 명이 나왔다. 머리 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대머리에 빛나는 하겐사형제였다. 척 보기에도 만만찮아 보였다. 얼굴 에 가득한 흉터하며 험악한 인상하며. 시드는 다시 한 번 대사를 내뱉었다. "벗어!" 불행히도 하겐사형제는 시드를 본 적이 없었다. 돼지잡는 소리가 산을 울려 퍼졌다. 산을 내려가던 엘란 은 그 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모두의 발이 빨라졌다. 일행은 산맥 깊숙한 곳으로 달렸다. 평야로 나가다간 마음이 변한 시드나, 광법사에게 잡힐 확률이 농후했다. 아무래도 숨기에는 산이 좋았다. 게다 가 융커산맥은 대단히 넓고 험준해서 숨을 데도 많았다. 하겐사형제는 발가벗겨졌다. 시드는 마음에 차 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흡족했다. 하겐형제의 품에서 귀중품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겐사형제도 시드 같이 돈 안드는 장사를(?) 즐겨했고 항상 풍족하게 살았다. 시드의 눈빛이 악독해 졌다. 이 대머리들을 쳐죽이고 엘란일행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계획은 어긋나는 데에 인생의 묘미가 있는 법이다. 시드의 계 획도 어긋났다. 무덤안의 상황때문이었다. 광법사와 길라드는 죽을 고생 끝에 발록을 처치했다. 십존의 위대함이 여지없이 들어난 싸움이었다. 주변에는 갈가리 찢겨진 시체가 즐비했다. 광법사와 길라드의 제 자들이었다. 여기저기 터진 내장이 흩어져있고 발록의 찢겨지고 태워지고 얼어붙은 사체도 보였다. 광법 사는 울화가 치밀었다. 엘란을 놓친데다가 제자마저 모두 죽었다. 길라드도 울화가 치밀기는 마찬가지 다. 같이 들어온 제자가 모두 죽은 것이다. 하나같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제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길라드도 엘란일행을 보면 반드시 찢어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엘란은 십존의 둘과 원한을 맺었다. 광법사와 길라드는 몰랐지만 그들도 엘란의 명부에 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피를 부르는 죽음의 명부였다. 광법사는 무덤에 다가갔다. 그리고 관을 열었다. 슈아악! 관안에서 눈부신 광채가 솟아 올랐다. 그리고 굉음이 메아리쳤다. "나의 영면을 방해하는자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삽시간에 빛이 가셨다. 길라드와 광법사는 무 덤안에 시선을 집중했다. 안에는 한 구의 백골이 다였다. 맹약의 검도 없고 마법서도 없었다. 그러나, 그 들은 울분을 터트릴 시간도 없었다. 우르릉! 무덤이 무너지고 있었다. 광법사와 길라드는 혼비백산했다. 길라드는 불의 상급정령 샐라임을 불러 자신을 보호하고 질풍처럼 내달렸다. 광법사는 순간이동 마법을 계속해서 시전했다. 나중에는 헤이 스트마법을 극한으로 사용했다. 시드는 막 손을 쓰려다가 휘청했다. 땅이 뒤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 이 통채로 흔들렸다. 그 틈을 하겐형제는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벌거벗은채 내달렸다. 무덤에 신경이 쓰인 시드는 엘란일행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리고, 도망가는 하겐형제도. 우르릉 쾅~ 쾅~. 천지를 진동하는 광음과 함께 산이 무너져 내렸다. 천둥같은 굉음이 지축을 뒤 흔들었 다. 쾅! 갑자기 무덤이 터져나가며 네명의 사람이 위로 치솟았다. 광법사일레이저 화염의 길라드. 그리고, 적 법사레조와 그의 딸이었다. 안 그래도 울분에 쌓여있던 광법사일레이저는 이성을 잃었다. 무덤에서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화가 치민 광법사는 그대로 적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적법사도 안에서 헤매다 제자 들을 잃고 기분이 얹잖았다. 안 그래도 기분 풀 곳을 찾았는데 때마침 필생의 적수가 달려 들었다. 적법 사와 광법사는 무섭게 격돌했다.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솟구쳐 올랐다. 광법사는 점점 밀렸다. 무덤속에 서 도망나오며 지친건 마찬가지지만 일레이저는 발록과의 싸움으로 더욱 지쳐 있었던 것이다. 무덤속에 서 생사를 같이하며 정이라도 들었는지 길라드가 슬쩍 광법사 편을 들었다. 길라드는 아스가르드왕궁과 관계가 깊었다. 피요르드의 왕실과 밀접한 레조가문의 적법사레조가 광법사를 죽이는 걸 원치 않았다. 단번에 적법사는 밀렸다. 길라드가 발록과의 대결에서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적법사는 이미 죽었을 것 이다. 적법사가 밀리자 딸이 끼어 들었다. 시드는 고민에 잠겼다. 길라드와 적법사는 적국의 왕실과 유 대가 친밀했다. 이 기회에 둘을 제거하고 싶었다. 모두들 움직임이 정상이 아니었다. 평상시와 같은 사 람은 시드가 유일했다. 광법사도 맘에 안들기는 마찬가지다. 이놈은 엘리오트왕국을 다니면서 심심찮게 사고를 쳤다. 시드는 결심을 굳쳤다. 이 기회에 십존을 칠존으로 줄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느 편을 들던지 결정을 하고 상대편을 몰살시키는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시드는 기회를 봐서 운다인을 부렸다가 셋의 대대적인 반격에 말려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아무리 정상이 아 니라도 혼자서 십존의 셋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셋은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시드에게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시드는 십존의 명성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건 발 아래에서 끊임 없이 일 어나는 지진 때문일 것이다. 대제의 무덤을 품은 산은 완전히 주저 앉았다. 그 여파로 대륙에 백년만의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물들이 놀라 날뛰었고 산맥이 뒤흔들렸다. 천년 고목도 갈라진 땅속으로 떨 어져 내렸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황무지라서 거대한 지진의 규모에 비해 인명피해가 적었 다. 지진의 여파는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엘리오트왕국민 삼만명이 죽었고 아스가르드국의 주민 만오 천명이 죽었다. 저 멀리 훈족과 피요르드국만이 지진의 피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시드는 심한 부상을 입고 도망쳤다. 시드로서는 재물 좀 챙기려다 재수 옴붙은 경우고 다른 십존도 마찬가지였다. 견디지 못 한 적법사가 딸과 함께 도망침으로 해서 싸움은 끝이났다. 완전히 지쳐버린 광법사와 길라드는 적법사 를 쫓지 못했다. 밑에서는 여전히 지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라드는 북으로 향했고 광법사는 남으로 향 했다. 엘란일행과 벌거벗은 하겐사형제는 지진을 피해 꼬리에 불붙은 황소마냥 뛰어 다녔다. 엘란(35) 엘란과 일행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떨어지는 바위들과 갈라지는 땅을 피해 이리저리 뛰었다. "안 되겠다. 평지로 나가자!" 하이론이 말했다. 지진에서는 아무래도 평지가 안전해 보였다. 몸을 돌리려는데 지진이 멎었다. 쟝은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젠장! 장가도 못가보고 죽을 뻔 했네." "이놈아! 너는 혼자 사는게 여러 사람 도와주는 거다." 하이론도 기운이 나는지 쟝에게 툴툴거렸다. 하이 론의 동생들은 맥스를 돌보고 있었다. 하이론삼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살릴 수 없겠나?" 마스터는 간절하게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광법사의 마법이 너무 지독했어." 잠시동안 맥스를 진찰하던 하이론도 고개 를 흔들었다. "헉~헉~"맥스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맥스는 오십대 장한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스산한 삶을 살았는 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왜 저를 도와준 겁니까?" 엘란이 복잡한 시선으로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좌호법사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 "자네가 그것과 무슨 상관인가?" 마스터가 물었다. 밤의그림자마스터의 얼굴은 의외였다. 아주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반백의 머리와 가늘게 잡힌 주름이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촌장같아 보였다. 얼굴 만 본다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밤의그림자마스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맥스는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려 엘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지고교의 우호법사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들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30년 전의 대탄 압 이후 시중에서 지고도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지고교의 좌호법사와 우호법사를 동시에 만난 데다가 밤의그림자에 속한 맥스가 우호법사였다는 사실은 경악 그 자체였다. 맥스는 힘겹 게 말을 이었다. "아니 우호법사였다고 하는게 정확하겠지. 20년 전 이스마엘이 강해지겠다며 교를 나선 이후 나는 회의 에 빠졌다. 아내와 자식은 악마의 종자로 몰려 화형 당하고 마음을 의지하던 친구 이스마엘은 소식이 없었다. 솔직히 지고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이 들었다. 교도들의 고통을 몰라라 하는 신은 받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났다. 지긋지긋한 교를 벗어나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밤 의그림자에 몸 담았다. 그러다 무덤안에서 이스마엘을 보았다. 여전하더군. 죽어가면서도 교를 걱정하더 구나.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교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엘란을 잡은 맥스의 손 에 힘이 들어갔다. "교단에 찾아가는 방법은 아는가?" "롬바르드빈민촌에 있는 엘프의숲이란 주점에서 콜드를 찾으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맥스의 손을 잡은 엘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이제 교에도 강력한 호교법사가 탄생했구나." 맥스의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아련해진 눈으로 엘란을 쳐다보았다. "교도들을…지켜…주게." 맥스의 눈이 급격하게 흐려지더니 이내 빛을 잃었다. 남겨진 미련이 많은지 눈 을 치켜 뜬 채였다. 엘란은 맥스의 부릎 뜬 눈을 감겨 주었다. "휴~" 하이론이 한숨을 쉬었다. 지고교도들에 대한 안쓰런 마음이 생겼다. 엘란은 멍하니 이스마엘과 맥 스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이봐! 그만 가자! 여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쟝이 엘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넌 좀 가만있어!" "하이론은 왜 나한테만 지랄이에요?" "이녀석 말버릇 좀 보게. 배웠다는 놈이 어른한테 그따위로 말해." "흥, 하이론은 뭐 말버릇이 좋아요? 평상시였다면 귀족한테 불경하게 대한 죄로 목이 떨어졌을 겁니다." "호오~ 그러셔.. 어디 한 번 해보지 그래." 하이론이 주먹을 쥐고 쟝에게 다가갔다. 쟝은 금새 기가 죽었 다. "말로해요 말로, 걸핏하면 주먹질이야." 쟝은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막았다. 그때 엘란이 일어섰다. "어디가냐?" "나뭇가지 주으러 갑니다." 엘란이 나무를 줍자 하이론형제도 거들었다. 금새 두 무더기의 나무가 쌓였 다. 그 위에다 이스마엘과 맥스를 銜혔다. "누구 불 피울 것 있습니까?" 엘란이 물었다. 평상시라면 필요없는 물건이다. 불 피울 일이 있으면 정령 을 불렀었다. 마스터가 품에서 돌조각과 작은 병을 꺼냈다. 나무더미 아래에 풀을 깔고 돌을 튀겼다. 팟! 불똥이 건조한 풀에 튀었다. 활! 불은 금새 붙었다. 나무에다 병에 들어있는 액체를 뿌리자 불길이 거세게 일었다. 모두들 주변에 모 여 화장하는 걸 지켜 보았다. 살타는 냄새와 나무가 타면서 나는 독한 연기가 밀려 들었다. 눈이 따갑고 목이 아파왔다. 이스마엘과 맥스는 한 줌의 유골을 남기고 사라졌다. 엘란은 주머니에다 둘의 유골을 조 심스레 담았다. 묵묵이 지켜보던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만 떠나야 겠네. 맥스의 유골은 자네가 교단에 돌려주게. 맥스도 그걸 바랄걸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 십년은 늙은 것 같았다. "그만 가자!" 마스터가 데미에게 말했다. 데미는 머뭇머뭇 거렸다. "여행 좀 하고 돌아가면 안돼요." 마스터의 눈이 엄해졌다. "빨리 본부로 귀환해야 한다. 조직을 재정비하지 않으면 곤란해 질거다." "그건 마스터가 알아서 하면 되잖아요?" "이제부터는 데미 네가 마스터다." "예?" 데미가 놀라서 반문했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난 너무 지쳤다. 더군다나 내 욕심으로 많은 조직원들이 죽었다. 계속 마스터를 맡을 수는 없다." 지쳐 늘어지는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심이 들어 있었다. 마스터는 무덤속에서의 경험과 맥스의 죽음으로 자신 이 늙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더 이상 죽고 죽이는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시골에 파ane혀서 자연과 벗하며 살고 싶었다. 데미는 눈섭을 모으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내가 기반을 잡을 때까지 도와주마." 데미는 두 손을 맞잡고 손바닥을 비볐다. "좋아요. 제가 마스터를 맡죠." 마스터와 데미는 산을 내려갔다. 그 뒤를 쟝이 쫄래쫄래 따랐다. 데미를 어떻게 해 볼 속셈인 모양이다. 엘란은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했다. 광법사를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 았다. 하이론은 쟝이 따라 붙을까봐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데미의 뒤를 따라가자 마음이 놓였다. 어 찌보면 섭섭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었던 것이다. "하이론은 어쩔 겁니까?" 엘란이 물었다. 하이론은 지고교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이 그런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만드는 지 알고 싶었다. 가장 오래된 역사의 기록에도 지고교탄압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그 오랜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이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80년 넘게 살면서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관심 있는 일도 없었다. 모든 일이 심드렁했다. 그래서 대제의 유 산에도 관심을 가진 것이다. 처자식은 물론 친척도 없었다.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은 없었다. 하이론은 동생들을 둘러 보았다. 동생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음으로 뜻이 통했다. "자네는 좌호법사가 되기 위해 지고교단으로 갈거지?" 엘란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도 같이 가자!" 엘란은 하이론의 제의가 부담스러웠다. 지고교에 가까이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위험할 겁니다." "괜찮다. 내일 죽더라도 여한은 없으니까." 엘란과 하이론은 더욱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몸을 추슬여야 했고, 혹시 모를 광법사의 추적도 피해야 했다. 계약을 체결한 슈리엘과도 수련을 해야 했다. 우르르! 가끔씩 여진이 산을 뒤흔들었다. 하늘이 점점 어둑해 지더니 이내 눈발이 날렸다. 첫 눈이었다. "이야 눈이다!" 하이론이 애처럼 좋아했다. 깊숙한 곳에 들어간 일행은 동굴하나에 거처를 정하고 몸을 회복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엘란은 마나수련에 매달렸고, 하이론형제들은 약을 만든다면서 온 산을 뒤지 고 다녔다. 하이론의 약은 부상치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도 몸을 추슬리는데 근 한달이 걸렸다. "슈리엘!" 거대한 정령이 나타나더니 이내 작아져서 엘란만해 졌다. "그동안 뭘하고 이제야 부른거냐?" 나타나자마자 슈리엘은 불만을 토했다. "그동안 부를 수 없었습니다.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놈한테 많이 당한 모양이지?" "예, 죽을 뻔 했습니다." "그놈 무지막지하게 보이던데 용케 도망친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죽었습니다." 엘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웬지 우울한 날이었다. "슈리엘 나를 안고 하늘로 날아요." 슈리엘은 말없이 엘란을 안고 하늘로 솟구쳤다. 찬바람이 얼굴에 부 딪쳤다. "더 빨리!" 슈아앙! 슈리엘이 무섭게 내달렸다. "더 높이!" 파아앙! 엘란과 슈리엘이 직각으로 꺽이며 드높은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아래로 날카로운 산들이 보 였다. 산들은 얼룩덜룩한 음영을 이루고 있었다. 슈리엘은 계속 올라갔다. 마나가 급속도로 빨려 나갔다.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슈리엘이 멈춰섰다. "계속 올라가요. 저 구름까지 갑시다." 엘란이 재촉을 했다. "몸에 무리가 갈거다." 슈리엘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정 원한다면." 슈앙! 슈리엘과 엘란은 더 높이 날아 올랐다. 산들이 점점 작아졌다. 얼굴에 차가운 물방울이 부딪쳤다. 구름에 닿은 것이다. 밑에서 보던 구름과는 달랐다. 밑에서 볼 때는 솜사탕같아 보였는데 올라와서 보니 짙은 안개와 비슷했다. 온 몸이 축축히 젖어 들었다. 구름 속에서 엘란은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 축축 한 물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슈우웅! 말도 없이 슈리엘은 엘란을 안고 밑으로 내려 갔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던 것이다. 상급정령 은 자기 판단으로 움직이기도 했고 아직 엘란의 성취가 명령을 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땅에 내려섰을 때 엘란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나가 끊기고 슈리엘이 사라졌다. 엘란은 땅에 들어누웠다. 구름은 한가 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은 이스마엘이 되었다가 파보가 되었다가 맥스가 되었다. 그리고, 에쉴리가 되었다.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에쉴리 얼굴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에 엘란 스스로가 놀랐다. 다음날부터 엘란은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슈리엘을 불러서 녹초가 될 때까지 연습했다. 슈리엘과 엘란 의 관계는 다른 정령사들과는 달랐다. 아주 독특한 면이 많았다. 어찌보면 모자관계같기도 하고 어찌보 면 남매사이같기도 했다. 슈리엘은 엘란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700년전에 자기를 부리 던 정령사의 기술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하이론형제들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융커산맥은 약재들이 많았다. *********************************************** 9장. 새로운 좌호법사 휘이잉!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바싹 마른 맨땅에서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겨울은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힘겨운 겨절이다. 빈민촌의 겨울은 더욱 추 웠다. 모든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걸었다. 옷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끼이익!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주점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머리는 바람에 날려 온통 산발이 되었고 옷 에는 구멍이 쑹쑹 뚫려 있었다. 그 큰 어깨를 온통 우그리고 들어서는 폼이 한 마리의 곰 같았다. "니미럴, 더럽게 춥네. 무슨 날씨가 이따위야!" 곰 같은 사내는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자리는 온통 만원이었다. 특히 난로가 놓인 중앙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드글그렸다. 사내는 난로의 옆으로 다가 갔다. "뭐야!" "왜 이래!" 사내가 난로 옆으로 다가가자 조금씩 밀린 사람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곰 같은 사 내가 왕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자 모두의 불만이 쏙 들어갔다. 사내는 난로 옆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많 은 사람들이 밀폐된 장소에 모인 관계로 공기는 나빴다. 카운터 뒤에는 갈색머리의 장년인이 잔에다 맥 주를 채우고 있었다. 점원은 한 명 뿐 이었다. 모든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음식과 술을 나르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점원은 십대의 소년으로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해서 무척이나 장난스럽게 보였 다. 소년은 손님들 사이를 용케도 파고 들었다. 감탄할 만한 재주였다. "뭘 드시겠습니까?" 점원이 곰같은 사내에게 물었다. "포이즌 큰 잔으로 하나. 안주는 필요없다." 술집에서 파는 포이즌은 독이 아니라 아주 독한 위스키의 일종이었다. 가격이 저렴해서 주머니가 가볍 고 세상사를 잊고 싶어하는 주당들에게는 제격이었다. 주로 서민들이 마시는 술이었다. 질은 만드는 곳 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는데 저질품을 먹으면 눈이 멀거나 심한 경우 죽기도 했다. 소년은 주문을 받고 도 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술값은 2브롤입니다. 저희 잡은 선불입니다." 빈민촌의 주점에는 음식을 먹고 도망가는 사람이 부지기 수 였다. 도망가지도 않고 배쩨라고 드러눕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보통은 선불을 받았다. 곰 같은 사 내는 바지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소년의 손에 놓았다. 소년의 묘기가 다시 발휘되었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가는 소년의 기술은 대단했다. 소년이 맥주잔에 담긴 포이즌을 내려놓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 끼이익! 경첩이 듣기 거북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문으로 다섯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모두 두꺼운 망 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고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그들은 한 동안 입구에서 두리번 거렸다. 앉을 만한 자리를 찾는 모양이다. 주점 안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에이! 추워 죽겠네! 거기 얼간이들 문 빨리 안 닫아!"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열린 문으로 칼 날같은 바람이 몰아쳤던 것이다. 다섯명 중 한명이 나서서 재빨리 문을 닫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들 은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난로가 멀어서 앉은 사람이 없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점원 로이가 다가왔다. "뭘 드시겠습니까?" "맥주다섯잔, 닭도 한 마리 튀겨 주게." 다섯명중 한 명이 말을 했다. "5브롤, 요금은 선불입니다." 대륙의 화폐체계는 모두 같았다. 1골덴이 10실버였고, 1실버가 10브롤이었다. 이 단위는 모두 대제 때 만들어진 것이다. 나라마다 동전을 찍었지만 문양만 틀릴 뿐 성분이나 단위는 모두 같았다. 엘리오트나 아스가르드 피요르드에서 찍은 동전은 대륙에서 자유로이 통용되었다. 다섯명은 이리저리 주머니를 뒤 졌다. 겨우겨우 동전 다섯 개를 모을 수 있었다. 5브롤을 건네자 로이는 재빨리 사라졌다. 잠시후 로이 는 맥주와 닭을 가져았다. 닭고기는 형편 없었다. 뼈에는 가느다란 살만 붙어있는 것이 한 열흘 굶긴 닭 을 잡은 것 같았다. 생긴 것 만큼이나 맛도 형편없었다. "음!"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던 사람이 신음을 토했다. "이거 정말 맛 없는데." 맥주는 독하기만 할 뿐 맛이 이상했다. 씹은 듯 하면서 떫었다. "정말 맛 없네요." 다른 한 명이 말을 받았다. 빈민촌의 주점은 고달픈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와서 술을 마셨다. 그래서 맛보다는 독한 술을 선호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빨리 취하고 싶어했고, 당연 히 술은 독해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무런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시간이 갈수록 손님들은 점점 더 늘 어났다. 주점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석에 앉은 다섯명이 일어설 줄 몰랐던 것이다. 가끔씩 눈치를 주는데도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망토에 달린 모자를 계속 눌러 쓰고 있 어서 마음에 더욱 안 들었다. 로이는 다섯명에게 다가갔다. "손님, 더 시키실거라도 있습니까?" 시킬게 없다면 그만 나가달라는 소리였다. "없어!" 손님중 한 명이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로이는 옆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나가라는 무언의 시위 였다. 그러나, 손님들은 반응이 없었다. '이 놈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아니면 눈치가 없는거야.' 로이는 속으로 불만을 삭였다. 로이의 생각 은 모두 맞았다. 한 명은 눈치가 없었고 한 명은 뻔뻔한 자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들이다. 로이가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말을 하려는데 다른 손님들이 로이를 불렀다. "점원! 여기 맥주 한 통 가져다주게." "예," 로이는 다섯명을 한 번 쩨려보고 재빨리 돌아섰다. 그들은 밤이 점점 깊어지는데도 일어설 줄 몰 랐다. 모두들 돌아갈 때까지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주방장도 집으로 돌아가고 주점에는 이 다섯명 과 로이 카운터 뒤에 앉은 갈색머리 장한이 다였다. "손님, 문 닫을 시간입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수년간의 점원생활로 몸에 베인 말투는 부드럽게 흘러 나왔다. "콜드 좀 불러주게." "예?" 로이는 놀라서 반문했다. 눈을 동그렇게 뜨고 입을 벌린 것이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다. "숲의 친구가 보내서 왔다고 전해주게." 손님은 로이가 말이 없자 덧붙여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로이는 놀라서 허둥거렸다. 로이는 갈색머리 사내를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서 나온 사내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콜드는 왜 찾소?" "뭐가 이렇게 복잡해! 이스마엘이 보내서 왔다. 이제 됐지?" 사내는 심각한 눈초리로 손님들의 전신을 훑었다. 모두들 망토를 깊숙히 눌러쓰고 있어서 의심이 갔다. "당신들은 누구요?" 다섯명중 한 명이 머리에 쓰고 있던 망토에 달린 모자를 벗었다. 검은 머리를 한 청년의 모습이다. 융커 산맥을 나온 엘란이었다. 산에서 3개월을 보내고 급해 내려오는 길이었다. "저는 엘란이라고 합니다. 이스마엘과 같이 대제의 무덤에 있었습니다. 콜드를 안다면 불러 주십시오." 엘란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콜드요." 잠시 생각하던 사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스마엘이 오지 않고 그가 사람을 보냈 다면 그의 신변에 변이 생긴게 분명했다. 사내는 이 주점의 주인으로 시온이라고 알려진 자였다. 지고교 와 외부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콜드라는 본명은 신자들만이 아는 이름이었다. 처음 보는 자가 자신 을 찾자 굉장히 긴장했었다. 아직도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교도들이 살아 남는 길은 첫째도 조심 둘째 도 조심이다. "나를 따라 오시오." 콜드는 몸을 돌려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엘란과 하이론형제들은 그 뒤를 따랐다. 로이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문을 꼭 닫아걸고 창문을 굳게 닫았다. 그 뒤에 엘란일행을 감시하 듯 따 랐다. 카운터 뒤에는 주방이 있었고 주방에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술과 식재료를 준비한 작은 창고 가 보였다. 한 쪽 구석에는 술통과 궤짝이 쌓여있었다. 콜드가 로이와 함께 술통과 궤짝을 치웠다. 엘란 은 한 쪽에서 묵묵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술통을 치우자 밑에는 나무문이 나타났다. 끼이익! 로이가 나무문을 들어 올렸다. 아래는 깜깜했다. "들어가서 기다리시오!" 굳은 얼굴로 콜드가 말했다. "아니 무슨… ." 하이론이 금새 불만을 터트리려 했다. 이스마엘의 부탁을 받고 먼 길을 달려 왔더니 대 접이 형편없었다. 하이론 성격에 많이 참은 편이다. 엘란이 하이론의 소매를 잡아 끌며 머리를 흔들었 다. 참으라는 표시였다. 엘란은 시커먼 입구로 들어갔다. 상급정령사가 된 이후에는 웬만한 어둠속에서 도 사물이 보였다. 아래는 나무로 만든 계단이 있었다. 엘란이 내려가자 하이론형제도 그 뒤를 따랐다. 쾅! 엘란일행이 내려가자 콜드는 얼른 문을 닫았다. 쇠사슬과 자물통을 꺼내더니 문에 자물통을 채웠다. 그 위에다 다시 술통을 쌓았다. "잘 감시하고 있거라. 신전에 가서 보고하고 오마." 콜드는 황급히 창고를 나섰다. 로이는 술통위에 걸터 앉아 발을 건들거렸다. 하이론은 마법을 시전했다. "라이트!" 빛의 광구가 어둠을 몰아냈다. 안은 작은 방이었다. 한 구석에 침대가 하나 있고 벽장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엘란은 벽장을 열었다. 안에는 잡다한 옷가지들이 있었다. 엘란은 벽장안을 이리저 리 더듬었다. "왜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있냐?" 하이론이 다가와 물었다. "벽장 안쪽으로 통로가 있는 것 같은데 여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하이론도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금새 흥미를 잃었다. 통로가 있든 말든 별로 상관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하이론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엘란은 여전히 벽장속을 살피고 있다. "그만두고 이리와서 불 좀 피워라. 하루종일 추운 곳에 있었더니 뼈마디가 다 쑤신다." "태울만한 게 없습니다. 있다해도 연기 빠져나갈 데가 없어서 곤란합니다." 하이론이 괴상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게 무슨 걱정이냐. 상급정령사가 여기 있는데." "하여튼 별일을 다 시킨다니깐." 엘란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정령을 불렀다. 카사 둘이 나타나 바닥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고개를 숙이 고 있는 것이 부리로 날개를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좁은 지하실은 금새 훈훈해졌다. "드르릉. 드르릉~" 언제 잠이 들었는지 하이론이 나직하게 코를 골았다. 한 참을 기다렸지만 콜드는 돌 아오지 않았다. 하이론이,삼,사가 바닥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지루하던 엘란도 그옆에 자리를 잡았다. 좁은 지하실 안에 나지막한 숨소리가 떠돌았다. 주점을 나선 콜드는 미로같은 빈민가의 골목을 이리저리 돌았다. 골목 구석에 숨어 누가 따라오는지도 살폈다. 최대한 조심을 해야만 했다. 한 참을 조심한 끝에 산을 올랐다. 빈민가의 뒤에는 가르가산이 있 어서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가르가산은 아갈리아 산으로 이어졌다. 콜드는 가파른 산을 올랐 다. 이리저리 꼬인 산길을 올라가자 나트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당깊은 집이 나타났다. 흙으로 벽을 세우고 판자로 지붕을 만든 전형적인 서민가옥이었다. 콜드는 마당을 가로질러 판자집으로 다가섰다. 똑똑! 콜드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콜드입니다." 삐걱! 문의 윗 부분에 있는 작은 창이 열리며 누군가가 밖을 살폈다. 콜드를 확인한 인형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성녀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을 연 사람은 몸을 돌려 앞장을 섰다. 문의 너머에는 작은 응접실이 있었고 응접실에 달린 문을 열자 넓직한 방이 나타났다. 판자집은 거의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은 오동나무로 만들었고 안 쪽에는 야트막한 제단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가구가 없었다. 안에는 다섯명의 남녀가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콜드는 머리를 숙여 간단히 인사하고는 급히 용건을 꺼냈다. "이스마엘이 보냈다는 사람이 주점을 찾아왔습니다. 어딘지 의심스러운 데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지침을 내려 주십시오." 주변에 가벼운 긴장이 떠돌았다. 젊은 여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에쉴리였다. "일단 제가 가서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문을 열어주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지고교의 우호법사 조 르주였다. 교의 안전을 책임진 자로서 의심스런 사람은 조르주의 면담을 거쳤다.조르주의 머리카락은 특 이하게도 푸른 빛이 돌았다.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있었다. 코는 약간 튀어나온 매 부리코였고, 꽉 다문 입매가 꽤나 고집스레 보였다. "저도 같이 가요!" 에쉴리가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에쉴리는 실종된 아버지가 걱정스러워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새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대제의 유산을 찾아 떠난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들려오는 소문은 흉흉 하기 그지 없었다. 막스와 철혈기사단을 제외한다면 무덤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십 존의 몇몇과 운이 좋은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 게다가 지진까지 더해지자 교에서는 이스마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오직 에쉴리만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아버지의 생존을 믿었다. 에쉴리는 아직 도 아버지가 떠나던 이십여년 전의 전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안아주던 따뜻한 품과 물기 머금은 눈, 아쉬움에 머뭇거리던 발길과 연신 뒤돌아보던 눈길. 이십년만에 돌아온 아버지가 얼마나 반 가웠는지 몰랐다. 같이 산지도 고작 일년, 아버지는 다시 실종이 된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소식을 가지 고 사람이 찾아왔다. 에쉴리는 흥분된 마음을 겨우 추스렸다. "안됩니다.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제가 가서 확인을 하겠습니다." 조르주는 단호했다. 대제의 무덤 이 무너진지도 네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따뜻한 손이 에쉴리의 손을 감샀다. 성녀의 손이었다. 에쉴리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녀는 지고교의 가장 어른으로 교를 대표하고 신과의 소통을 담당하고 있었다. 성녀는 곱게 늙어가는 중년 부 인이었다. 둥근 얼굴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고, 은발이 신비롭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성녀는 두손으 로 에쉴리의 손을 감싸며 입을 열었다. "일은 조르주에게 맡기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세요." 에쉴리에게 차분히 말한 성녀는 고개를 돌려 조 르주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확인을 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이리로 모셔오세요."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요사이 주변의 공기가 심상치않습니다." 머리와 수염이 하?게 센 노인이 말했다. 지고교의 대사제 파올이었다. 교의 얼굴은 성녀였지만 교의 대소사는 파올이 알아서 처리를 했다. 파올 은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요사이 엘리오트왕국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거듭된 흉년과 내전의 상처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나라의 사정이 어려워질수록 평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그런 분위기는 곧잘 지고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파올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걱정이 많았고, 매사 에 소심해졌다. 조르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걱정마십시오. 심사숙고하겠습니다." 콜드와 조르주가 문을 나서자 방안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 끼이익!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하실의 입구가 열렸다. 등불을 든 콜드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조심스런 발길로 조르주가 따랐다. "드르릉~ 쿨, 푸~ 파, 빠각 빠아악~" 하이론이 신나게 코를 골고 이를 갈았다. "……." "……." 콜드와 조르주는 기가 막혔다. 긴장에 긴장을 거듭하고 지하실을 내려왔건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코를 고는 것도 모자라 이까지 갈고 있다. 긴장하고 있던 콜드와 조르주는 자신들 이 한심스러워 질 정도였다. 갑자기 조르주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조르주는 굉장히 놀랐다. 처음에는 무심코 넘어 갔는데 자세 히 보니 방의 중앙에 불꽃의 독수리가 있었다. 불의중급정령 카사가 분명했다. 카사를 둘이나 불러놓고 잠을 자는 사람이라면 중급정령마스터의 경지에 든 자가 분명했다. 조르주의 콧등에 땀이 맺혔고, 긴장 으로 굳어진 손바닥에도 땀이 홍건했다. 엘란은 조용히 일어섰다. 엘란은 문이 열릴 때부터 깨어 있었 다. 무섭게 예민해진 감각은 주변의 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했다. 흠칫! 갑자기 일어난 엘란 때문에 조르주는 깜짝 놀랐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조르주는 선수를 빼았겼다. 엘란이 갑자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잠시 주춤하던 조 르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엘란." 엘란은 간단히 대꾸했다. "???" '젠장 그냥 엘란이라면 내가 어떻게 알아.' 조르주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조르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나 가기로 했다. "이스마엘과는 무슨 사이고, 어떻게 여길 찾아 왔는지 말하시오." "이스마엘은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입니다. 이스마엘의 부탁을 받고 여길 찾아왔습니다." 엘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이스마엘의 유골도 가지고 왔습니다." "음." "으으." 콜드와 조르주는 신음성을 토했다.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일이지만 확실하게 죽음을 확인하니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주변은 침묵에 휩쌓였고, 하이론의 코고는 소리만이 주 변을 울렸다. "교로 갑시다. 성녀에게 용건도 있고, 에쉴리도 만나야 합니다." "에쉴리는 어떻게 알고 있나?" "뻔하잖습니까. 이스마엘이 말을 해줬으니까 알죠. 한 번 만난적도 있습니다." 조르주는 이리저리 엘란을 살폈다. 의심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조르주는 콜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콜 드의 생각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콜드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따라오시오." 조르주가 계단을 올랐다. 엘란은 하이론형제를 깨웠다. 이들이 아무 대책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 것은 엘란의 실력을 믿어서였다. 그들 뿐이었다면 소란스런 소리에 벌써 깨어났을 것 이다. "무슨 일이야?" 하이론의 목소리에는 잠에 취한 기운이 역력히 묻어나고 있었다. "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엘란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조르주의 뒤를 따랐다. 조르주와 콜드는 엘란의 일행을 데리고 구불구불한 빈민촌의 골목을 이리저리 돌았다. 하이론이 가만히 보니 교로 바로가지 않 고 빙빙도는 것이 아직도 자신들을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한 소리 하려다가 지고교의 입장 을 생각해서 참았다. 1시간을 더 돌아다닌 후에 일행은 가르가산으로 올랐다. 산의 아랫부분은 빈민가가 밀집한 데다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내서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조르주는 산을 삼분의 이쯤 올라가다 작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샛길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자 나트막한 돌담으로 쌓인 집이 보였다. 똑똑! 조르주가 문을 두드리자 작은 창이 열리며 누군가가 밖을 내다 보았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지고교의 사제 산티아고가 얼굴을 내밀었다. 눈을 쉴새없이 깜빡거리고 손을 이리 저리 만지는 것이 무척 소심하게 보이는 노인이었다. 입은 합죽하니 앞으로 튀어나왔고, 무척이나 낮은 코가 인상적이었다. 일행은 말없이 가구나 장식이 하나도 없는 방으로 들어섰다. "엘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이고 있던 에쉴리가 엘란을 보고 놀라서 외쳤다. "휴! 아는 자 였군."조르주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아버지와 같이 있었나요?" 에쉴리가 다급히 물었다. "예,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엘란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돌아가셨습니다." 휘청! 하얗게 창백해진 얼굴로 에쉴리가 뒤로 넘어가자 성녀와 대사제 파올이 뒤에서 부축했다. 에쉴리 에 커다란 눈에 이내 이슬이 맺히고 창백해진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인물이 별론데 딸은 대단한 미인이야! 엄마가 예쁜가보지." 하이론은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을 건넸는데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져 버렸다. 엘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은 실없는 농담이나 할 기분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소?" 대사제 파올이 침착하게 말했다. 엘란은 무덤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말재주가 없는 엘란이다보니 중간중간 하이론이 끼어들어 보충설명을 해야 만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침묵이 주위를 떠돌았다. 에쉴리는 말없이 울기만했는데 조금의 흐느낌도 없 이 흐르는 눈물은 주위의 사람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성녀와 파올은 에쉴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 아주었고, 콜드는 애꿎은 나무바닥만 비벼대고 있었다. 엘란은 말없이 품을 뒤져 작은 목곽 하나를 꺼내 에쉴리에게 내밀었다. "이스마엘의 유골입니다." 조르주가 목곽을 받아 에쉴리에게 건넸다. 목곽을 받는 에쉴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목곽위로 에 쉴리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목곽하나를 더 내밀었다. "우호법사 맥스의 유골입니다." "우호법사 맥스의 유골이라니 무슨 소린가? 우호법사는 저기 서있는 저 사람이야?" 사제 산티아고가 조 르주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엘란의 입으로 쏠렸다. 맥스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대 답은 하이론의 입에서 나왔다. 하이론은 간략하게 맥스와의 일을 이야기 했다.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나 왔다. "그는 전대의 우호법사 페이즈에요.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서 잘 살길 바랬는데 그렇게 살다가 지고의 품 으로 갔군요." 성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슬픈 기운이 방안 가득 내 려앉았다. 성녀는 두 개의 목곽을 가지고 에쉴리를 부축한 채 밖으로 나갔다. 유골을 뿌릴 모양이었다. 엘란의 일행은 말없이 성녀를 기다렸다. 아직 용건이 하나 남아있었던 것이다. 잠시후 성녀가 에쉴리를 부축한 채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교를 위해 수고를 해주셨는데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군요. 저는 교의 성녀입니 다. 이쪽은 대사제 파올이고 저쪽에 서계신 분들이 사제 산티아고와 마쟈르입니다. 여러분을 안내한 분 은 우호법사 조르주고 여기 있는 숙녀분은 이스마엘의 딸 에쉴리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성녀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이론과 엘란은 마주 허리를 숙였다. 성녀라면 교의 가장 어른이 다. 가만히 인사를 받고 있을 수는 없다.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푹 쉬시고 못다한 얘기는 내일 다시 합시다." 파올이 말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다. 이스말엘이 죽으면서 저에게 좌호법사의 지위를 부탁했고, 저는 승낙했습니 다." 주변에 놀람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조르주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불가합니다! 외인에게 좌호법사의 지위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성녀와 대사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대사제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후임자의 선정은 전적으로 전임자의 의무이자 권리네." 지고교에서 후대는 현재의 직책을 가진 자가 전 적으로 양성해서 임명했다. 성녀와 대사제의 추인을 받아야만 했지만 보통은 전임자의 의사를 존중해서 그 뜻을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교도를 좌호법사에 앉힐 수는 없습니다." 조르주는 단호히 반대했다. "전혀 없던 일도 아니지요." 성녀가 입을 열었다. "1.50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이스마엘의 안목을 믿어요." 성녀는 엘란의 눈을 빤히 쳐다 보았다. 엘란의 검은 눈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자신들 과 이어지는 운명의 끈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성녀는 지고의 말씀을 듣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 다. 대대로 성녀들은 모두 지고와의 접촉에 일생을 바쳤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탁이 내리는데 지고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성녀의 가장 큰 임무가 교도들과 지고를 이어주는 것인데, 그 임무를 해낸 성녀가 한 명도 없었다. 성녀는 엘란의 눈에서 이상한 끌림을 받았고, 그것이 지고의 뜻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찬성을 한 것이다. 성녀는 간절히 염원했다. 지고가 만년의 침묵을 깨고 교도들을 이끌어 주기를.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했고, 성녀와 나 대사제가 찬성을 했으니 이 일은 그렇게 결정된 것으로 하겠습 니다." 대사제는 조르주가 더 이상 반대를 못하도록 못을 박아 버렸다. 대사제가 엘란을 좌호법사에 앉 히려고 한 것은 성녀와는 달리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파올은 이스마엘에게서 엘란에 대해 들은 적 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중급정령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어쩌면 십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 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대사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지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대사제가 자 기가 받드는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대사제는 그저 순박한 교도들이 평안히 한 평생 살다 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지고교도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소망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살벌한 요 즘의 분위기에서 언제 지고탄압이 시작될지 모른다. 대사제는 강한 좌호법사를 간절히 바랬다. 이런 기 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은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하이론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했다. "댁이 성녀고 댁이 대사제라면 여기는 지고교의 신전이 분명한데……뭐가 이래? 크기만 좀 컷지 빈민촌 의 집이랑 다를바가 하나도 없잖아! 장식품은 고사하고 신상이나 성화같은 것도 하나도 없고, 이게 무슨 신전이야 거지소굴이지. 게다가 좌호법사를 새로 뽑았으면 거창하진 못해도 임명식은 해야지, 그냥 말로 끝내는거야!" 안그래도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조르주의 울화가 폭발을 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말조심하시오!!! 어디서 감히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그부분은 모든 신도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 이었다. 가난한 형편도 형편이지만 수천년을 이어온 탄압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려면 신상이나 성화같 은 것을 둘 수 없었다. 다른 자들의 눈에 띄였다가는 피바람이 불게 분명했다. 그게 더욱 조르주의 마음 을 아프게 했다. "내가 틀린 말했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왜 지랄이야!" 하이론도 하이론대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왔건만 지고교의 현실은 비참해 보였다. "그만들 진정하세요." 성녀는 둘을 말리며 하이론을 쳐다 보았다. "우리 교의 현실이 그렇답니다." 성녀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하이론은 괜히 미안해서 밖으로 휑하 니 나가버렸다. "저를 따라오세요.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녀가 손수 안내를 했다. 성녀는 누구에게나 존대를 했다. 원래 그런 것인지 천성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엘란(36) 태양은 빈민촌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밝은 햇살이 어둠을 몰아낸다. 엘란이 새벽같이 산으로 오르자 하 이론형제도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 왔다. "혼자 좀 있게 내버려두면 안 되나요?" "안돼." "더 주무시지 그래요." "늙으니까 잠이 없어져서 말이야." 하이론은 엘란이 수련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의외로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엘란의 수련은 화끈 해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하이론의 동생들도 재미있어 했다. 엘란은 수련하는걸 누가 지켜 보는게 고역이었다. 혼자서만 수련하던 버릇때문이기도 했고, 남의 수련을 훔쳐 보는 것은 금기였다. 하 이론은 대놓고 구경을 했다. 엘란은 점점 깊숙히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산정을 넘어가자 넓은 바위가 나타났다. 아래는 깍아지른 절벽이었다. "여기서 하지 그래." 더 움직이기 귀찮아진 하이론이 권유를 했다. 엘란은 슈리엘을 불렀다. 슈아앙! 슈리엘이 나타났다. 하이론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잘 있었어, 오랫만이야?" "오랫만은 무슨, 어제도 봐놓고." 하이론이 헛기침을 했다. "험험,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이론이,삼,사도 수화로 인사를 건넸다. 엘란은 말없이 실피드와 카사를 불 렀다. 엘란은 심호흡을 하고 실피드를 왼손으로 카사를 오른손으로 조정했다. "스피릿 컴파운드!" 실피드가 길쭉하게 변하더니 회오리를 이루며 날아갔는데 그 회오리의 사이에서 카 사가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웅웅! 주변의 공기가 진동을 했다. 카사가 실피드 안에서 날아가고 실피드는 카사를 감싸고 회전을 했 다. 쾅! 카사와 실피드가 중간에서 충돌하며 굉음이 울렸다. 실패한 것이다. "제대로 좀 못해? 그렇게 오래 연습하고도 그게 뭐야?" 슈리엘이 핀잔을 주었다. "이게 쉬운줄 알아요?" 엘란이 볼멘소리를 했다. "내 전 계약자는 아주 쉽게 했다." 슈리엘이 엘란에게 가르쳐준 대표적인 기술이 스피릿 컴파운드였다. 서로 다른 속성의 정령을 조합해서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슈리엘은 기술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자기가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전 계약자가 사용하는걸 본 기억을 떠올려서 엘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정령이 사람 의 신체구조나 마나의 축적 운용에 대해 알리가 없으니, 당연히 마나의 운용이나 정령의 제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엘란은 슈리엘이 기억한 기술을 자기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 없었고, 시행착오의 연속 일 수밖에 없었다. 슈리엘은 전 계약자와 비교해서 수시로 구박을 했다. "전 계약자도 처음에는 어설펐잖아요?" "아니, 처음부터 아주 능숙했다. 나하고 계약할 때도 상급정령마스터였다." 엘란은 깜짝 놀랐다. 여러 가 지 상급정령을 동시에 부린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시드도 운다인만 부렸고, 길라드도 샐라임과만 계 약을 했다. "어떻게 상급정령마스터로 계약을 합니까? 처음에는 누구나 비기너의 단계에서 시작을 하잖아요?" "그는 샐라임, 운다인의 마스터인 상태에서 나와 계약을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엘란의 눈이 더 이상 커질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하이론형제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했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다른 속성의 상급정령 셋을 마스터했다니."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제대로 연습해!" 슈리엘은 못을 박았다. 엘란은 쉴새없이 수련에 전념했다. 슈리 엘의 잔소리와 하이론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엘란에게 잔소리를 안할 때는 무슨 얘기거리가 그렇게 많은지 서로 수다를 떨었다. 하이론은 말 못하는 동생들과만 살다가 대화의 상대가 생겨서 신이 났고 하이론의 동생들도 수화로 대화를 나눌수 있어서 즐거웠다. 엘란은 해가 머리 꼭대기까지 떠오를 때 쯤 수련을 멈추었다. 특유의 호흡법으로 숨을 고른 후 산을 내려왔다. 하이론이 어슬렁어슬렁 그 뒤 를 따랐다. 엘란이 교단으로 내려왔을 때 교단의 마당에는 40,50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새벽부터 어딜 갔다 온 건가?" 조르주가 엘란을 보자마자 화를 벌컥 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엘란은 정중하게 물었다. "교도들하고 상견례를 하려는데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하게." "알겟습니다." 대주교가 엘란을 불렀다. "이리와서 인사하게.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제 산티아고와 마쟈르일세, 어제 본적이 있지." "잘 부탁드립니다." 엘란은 정중히 인사를 건넸지만 분위기는 아주 썰렁했다. 지고를 믿지 않은 자가 좌호법사가 된데다가 처음 만남부터 오전내내 기다리게 만들었다. 교도들은 가난했다. 철저한 신분제하에서 뛰어난 사람도 능 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게다가 거듭된 탄압으로 정상적인 생업을 영위할 수 없었으니 대부분이 사회의 최하층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오늘은 엘란이 늦는 바람에 오전을 공치고 말았다. 저녁은 굶어야 할 판이다.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그러한 사정을 하이 론이 알 수가 없었다. "거 참 분위기 더럽네!" 하이론이 툴툴거리자 주위의 공기가 더욱 더 흉흉해졌다. 에쉴리가 엘란과 하이론을 불렀다. 에쉴리는 침착하게 지고교도들의 생활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이론은 멋적어져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엘란은 첫 대면부터 교도들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 후로도 엘란과 교도들의 상견례는 근 한달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주변의 눈을 피해 새벽과 밤중에만 만난데다가 한꺼번에 모두 만나지 못하고 나눠서 만난 결과였다. 지고교는 거의 명맥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에 8000명, 피요르드에 7000명 롬바 르드에 있는 15000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빈민촌에서 배타적으로 모여 살았다. 대도시의 빈민촌에 숨는 것이 정체를 감추기도 쉬웠고 일용직이나마 일자리를 얻기도 쉬웠다. 지방은 영주들의 통제력이 큰 데다가 주민들과도 서로 잘 알아서 정체가 탄로나는 경우도 많았다. 나탈리도 그런 경우였다. 요즘에 는 탄압으로 죽는 사람보다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살기 어려운 시기였다. 요 몇 년 작황이 좋지 않은데다가 권력다툼에 따른 부담이 가중된 까닭이었다. 귀족의 횡포는 점점 심해져갔다. 영주들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갔고, 빈민들은 굶어죽어서 시체가 썩어갔다. 지고교도 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지고교는 한 달에 한 번 예배를 올렸다. 성녀는 교단에 올라 설교를 하고 있다. "상태르가 다리를 다쳐서 일주일 동안 일을 못나갔습니다. 가족들이 굶고 있습니다. 모두들 조금씩 성의 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신전에 울려퍼졌다. 주점 '엘프의숲'의 점원 로이가 이가 다 빠진 대접을 들고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교도들 사이를 누 볐다. 대접이 한바퀴 돌았을 때 접시에는 3브롤이 들어있었다. "문을 잠그세요. 충분한 돈이 모이기 전에는 아무도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모두 형제를 위해 기도합시 다." 성녀는 제단앞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았다. 아주 경건해 보였다. 조르주가 문을 잠그자 로이가 다 시 한 바퀴 돌았다. 한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돈을 내면 자기 가족은 하루를 굶어야 하다. 자기는 몰라도 못 먹어서 얼굴이 누렇게 뜬 아이들마저 굶길 수는 없었다. 지고교는 어려 운 가운데서도 서로 도왔다. 빈민가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도 다 그 이유였다. 교도들은 울 면서 동전을 하나씩 내놓았다. 부끄럽고도 참담한 심정이었다. 하이론도 울상이 되었다. "그 사람 집이 어딥니까?" 하이론이 대주교에게 물었다. "외인은 참견하지 마시오." 조르주도 안색이 좋지않았다. "하이론은 유능한 의삽니다. 도움이 될겁니다." 엘란이 조용히 나섰다. 미사가 끝나고 하이론과 엘란은 상태르의 집을 향했다. 집은 전형적인 빈민촌 가옥이었다. 대충 나무로 벽을 세우고 천장에는 천을 덮었 다. 아내는 일을 나가고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집안에는 상태르와 아이들이 누워 있었는데 집안은 엉망이었다. 도처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고 음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이론의 주름이 깊어졌다. 상태르의 다리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름이었으면 잘라내야 했을거다." 하이론은 썩은 살을 도려내고 푸른빛이 도는 약을 정성스레 발랐다. "힐링!" 상처에서 하얀 빛이 쏟아올랐다. 하이론치료술의 특징은 약과 마법을 병행해서 시행하는데 있었 다. 치료마법을 시전한 후에 정성스레 붕대를 감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주일만 정양하면 털고 일어날 수 있을거다." 조르주는 새삼스런 눈으로 하이론을 보았다. 말을 함부로 하는 괴팍한 늙은이인줄만 알았는데 대단한 치료마법사였다. 그날 이후 하이론형제들은 바빠졌다. 가난해서 의원이나 마법사 한 번 찾아가지 못하고 약도 써보지 못한 신도들이 하이론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고신의 신전은 병원으로 변해갔다. 하이 론은 교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엘란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엘란은 모임에 잘 나오지도 않았고, 예배에도 불참했다.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에만 열중했다. 엘란은 혼자였다. 하이론은 너무 바빠져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스피릿 컴파운드." 실피드가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며 무서운 속도로 날았고 그 사이를 카사가 송곳처럼 변해 날아갔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앞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위력에 비해서는 소리가 작 았다. 엘란이 실피드로 주위의 소음을 줄였기 때문이다. "겨우 성공했다." 스피릿 컴파운드의 위력은 가공했다. 단점이 있다면 마나의 소모가 너무 심하다는 점이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은 계속해서 시전을 했다. 익숙하게 숙달도 시켜야 하고 연속해서 몇 번을 시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여섯 번 시전을 하고 엘란은 녹초가 되어 버렸다. 엘란은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부쳤다. 힘이없어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땀이 비오듯 이 흘러 내렸다. 엘란은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햇볕이 따사로이 내려 쬐고 있다. 잠시후 일어난 엘란이 마나를 수련하자 전신에 활력이 돌아왔다. 엘란은 불을 피웠다. 긴장된 기운이 전신에 넘쳤다. "샐라임이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펑! 갑자기 불이 무섭게 피어 올랐다. 거의 20미터는 솟구쳤다. 불길이 서서히 갈라지며 거대한 불의 남 자가 걸어 나왔다. 5미터는 넘어 보였다. "그대가 나를 불렀나?" 거대한 열기가 주변을 넘실거렸다. "샐라임이여 나와 계약을 해다오." 샐라임을 가만히 엘란을 쳐다보았다. 엘란의 표정에 긴장과 흥분이 스쳐갔다. "거부한다. 그대는 이미 슈리엘과 계약을 맺었다. 둘다 부리기에는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펑! 샐라임이 폭발하듯 터지며 사라지자 실망한 엘란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마나를 운용해도 몸이 회복 되지 않았다. 너무 지친 까닭이다. 엘란은 잠이 들었다. 추위에 깨어났을 때는 한 밤중이었다. 보통 사람 이라면 얼어 죽었을 것이다. 엘란은 마나를 한 번 운용한 후에 산을 내려왔다. "이 따위거 배워서 뭐해!" 엘란이 신전의 마당에 들어서는데 고성이 들렸다. 로이였다. 에쉴리와 사제들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 을 하는 아이들은 밤중에라도 교육을 시켰다. 아무리 어렵더라고 아이들의 교육을 포기 할 수는 없다. "최소한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해요." 에쉴리가 나직히 타일렀다. "이 따위거 배워서 뭐해요. 배워봐야 빈민으로 사는건 마찬가집니다. 차라리 잠이나 자게 해주세요."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하루종일 힘겹게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게다가 어디 쓸데가 있 는 것도 아니다. 신분제하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거니와 지고신자가 남의 이목을 끄는 지위를 가질 수도 없었다. "글을 읽어야 성전을 읽을 수 있다." 산티아고사제가 온화하게 타일렀다. "성전정도는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관둘래요."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대문을 나서려는데 누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엘란이다. "이거 놔!" 로이가 발버둥을 쳤다. 그런나, 엘란의 손아귀는 강철같다. 아무리 용을 써도 벗어날 수 없었 다. "니가 뭔데 이래, 이거 놔!" "나는 좌호법사다." "좌호법사면 다야! 매일 산에서 빈둥대는 주제에." 로이는 놀고먹는 사람을 경멸했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고 새벽부터 밤까지 종 종거리고도 굶기가 다반사였다. 귀족들은 하는일 없이 주민들을 착취하며 떵떵거리고 살았다. 로이는 그 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로이의 눈에는 엘란도 놀고 먹는 것으로 보였다. 하루종일 산에 틀어 박혀서 빈둥거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로이는 엘란이 한계까지 자신을 단련하는 것을 몰랐다. "앉아서 마저 들어라." 엘란의 눈이 강렬해졌다. 로이는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이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압도하는 무서 운 힘이 서려 있었다. "놔주세요. 강제로 붙들고 있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에쉴리가 차분히 말했다. 엘란은 로이를 놓아주었다. 자존심이 강한 로이는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걸 인정할 수 없었다. 배가 고파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고 결론을 내렸다. 로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 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레 다시 만나요." 아이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엘란과 에쉴리는 함께 걸었다. 에쉴리는 신전 뒤의 작은 집에서 성녀와 함 께 살았다. 그 옆에는 작은 집을 하나 지어서 엘란과 하이론형제들이 생활했다. 신전에는 대사제와 사제 가 있었고, 우호법사 조르주도 함께 생활하며 신전을 지켰다. 성녀의 보호는 엘란의 몫이었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저 ." "저 ." 엘란과 에쉴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 하세요." "먼저 말씀 하십시오." "저기 ." "저기 ." "풋훗." "하하."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먼저 말씀 하십시오." 엘란이 말했다. "산에서 뭐하시는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산에서는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예."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에쉴리가 질문을 던졌다. "아까 하시려던 말이 뭐였죠?" "그게 잊어 버렸어요." 엘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은 이스마엘에 대해 물으려 하다가 에쉴리의 상처 를 건드리는 것 같아 얼버무린 것이다. 그들은 금방 집에 도착했다. 에쉴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으 로 들어갔다. 엘란은 멍하니 뒷 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엘란은 몸을 돌려 숙소로 들어섰다. 흙으로 벽 을 세우고 판자로 지붕을 덮은 집이다. 빈민촌에서는 대단히 좋은 집에 속했다. 하이론에 대한 고마움의 포시로 신도들이 힘을 합해 지은 집이었다. 엘란이 들어서자 하이론이 빙글거렸다. "분위기 좋던데." 하이론이 오랫만에 느물거렸다. 하이론이,삼,사도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눈빛이 예사 롭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아요." 엘란이 아예 못을 박았다. 그러나, 하이론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 간거야?" "오늘 처음 이야기 한 거에요." "호오! 그~~래." "이상한 상상하지 마세요." "키스는 해봤나?"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무일도 없었어?" "예." "이런 멍청한 놈. 그 동안 뭐했어?" "뭐 하다뇨, 다 알면서. 산에서 수련했잖아요." "이놈아, 신도들은 그 바쁜 와중에서도 애도 낳고 할건 다한다." 하이론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너 그여자 좋아하는건 맞지." 엘란은 부인을 못했다. 하이론의 말이 맞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끌렸다. 이스마엘의 유골을 전했을 때 말없이 울던 그 얼굴은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너 그러다 놓친다. 용감한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도 모르냐?" "나이차도 많이 나는데 ."엘란이 말을 흐렸다. "임마, 그런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가만, 그러고보니 니가 22살이고 에쉴리가 27이니까 다섯 살 차 이구나." 하이론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놈이 이제 보니 성적취향이 괴상한네, 어린소녀 아니면 연상녀를 좋아하네." 하이론이 농을했다. "관둬요." 엘란이 침대로 가서 돌아 누웠다. 하이론삼이 엘란의 어깨를 두들겼다. 엘란은 하이론인줄 알 고 한마디 쏘아붙이려했다. "귀찮게 ." 하이론삼이었다. 하이론삼은 수화로 엘란에게 말을 했다. (여자는 한 번 꾹 눌러주면 끝난다.) 주위가 썰렁해졌다. 하이론삼이 이런 농을 건넬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이론삼은 사뭇 진지했다. 농담 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이론삼까지 왜이래요." 엘란은 하이론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동생들까지 망쳐 놓는군요." 하이론은 억울했다. "내가 뭘 어?다고 그래." "하이론이 아니면 점잖은 동생들이 이렇게 될리 없잖아요." "그래, 잘못된건 전부 내탓이다." 하이론이 돌아 누웠다. 엘란은 몰랐지만 하이론동생들은 지고교의 신전에 머무는 동안 변했다. 많이 밝아지고 활기가 넘쳤으며 농담도 곧잘 건넸다. 동생들은 어릴 때 참혹한 경험을 많이 한 데다가 말도 못해서 서로들과만 의사소 통을 했다. 자연 성격이 어두워져갔고 자기 속으로만 침잠했다. 지고교의 신전에서 사람과 어울리고 정 을 나누다 보니 자연히 인간다운 감정이 싹텄다. 신자들은 힘겨운 삶속에서도 하이론형제를 위해 수화 를 배웠다. 동생들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엘란과 슈리엘을 제외하고-의사소통을 나누었다. 그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런 변화를 하이론이 가장 먼저 알아챘다. 하이론은 동생들을 즐겁게 하려고 오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버를 자꾸하다보니 나중에는 버릇으로 굳어졌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팍하게도 보이고 체신머리 없게도 보였다. 그런 하이론에게 동생들의 변화는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신전을 떠나지 않았다. 하이론사도 엘란에게 수화로 말했다. (내일 한 번 대쉬해봐.) "알았어요. 알았어. 이젠 잠 좀 자게 내버려둬요." 엘란은 다시 돌아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귓전에는 하이론의 코고는 소리 이빨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엘란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에쉴리생각에 잠 을 설친데다가 계속되는 수련으로 지쳐 있었다. "늘어지게 자는구만." 로이가 엘란을 보고 빈정거렸다. 그 소리에 엘란은 깨어났다. "무슨 일이냐?" "당신에게 볼 일 없어." 로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때 하이론과 동생들이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빌이 다리가 잘렸습니다.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아주 공손한 태도였다. 엘란과 하이론은 재빨리 뛰어 갔다. 신전의 마당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중년인이 누워있었다. 하이론은 안색을 찌푸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 살아 날지 모르겠다." "아이고! 마법사님 살려 주십시오." 옆에 있던 아낙이 하이론의 로브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내인 모양이 다. 엘란이 말렸다. "놓으세요. 빨라치료해야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커집니다." 너무 침착해서 냉정하게 보였다. 여자는 울먹 이며 손을 놓았다. 하이론이 세밀히 진찰을 했다. "상처부위가 독이 올랐어. 감염의 우려도 있고 좀 더 잘라내야 겠는데." 엘란이 실피드를 부르자 주위에 서 탄성이 일었다. 정령을 처음보는 모양이다. "얼마나 잘라내면 됩니까?" "1센지." 엘란은 실피드로 상처부위를 잘랐다. 아주 매끈하게 잘렸다. "운디네!" 엘란은 운디네로 상처부위를 깨끗이 씻었다. 운디네가 만드는 물은 아주 순수한 물이라서 맛 은 형편없지만 상처부위를 소독하는데는 그만이었다. 하이론은 바늘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상처부위를 꿰맸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였다. 하이론삼이 재빨리 약을 발랐다. 하이론사는 붕대를 감았다. "확률은 반반이다. 피를 많이 흘린데다 평소 영양상태도 안좋았다." 하이론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다 놓고 가. 상태를 봐야겠다."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졌다. "어떻게 된거냐?" 엘란이 로이에게 물었다. "길가다가 바닥에 침을 뱉었는데, 지나가던 기사가 본 모양이야. 기분나쁘다고 ." 로이는 엘란에게 반말 을 했다. 정령부리는걸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이때까지 툴툴 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기에는 자존심이 허 락하지 않았다. 별데 다 자존심을 세웠다. "가서 손 좀 보고 오지 그래." 하이론이 말했다. 로이의 눈이 기대로 반짝거렸다. 신도들은 온갖 멸시를 받고 살았다. 시원하게 복수하는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모든 아이들의 꿈이었다. 이 사람은 강하다. 정령을 수족처럼 부리지 않던가. "그만 두세요." 어느새 나왔는지 성녀가 말렸다. "주목을 끌면 우리에게는 불리합니다." 로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을 삐죽거리고 씩씩거리더니 성녀에게 인사도 안하고 휑하니 사라졌 다. 엘란은 한 참을 서 있었다. 찜찜한 마음을 안고 엘란은 산으로 올랐다. 지고신자들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늘 수련하 던 곳에 도착해서는 답답한 울화를 풀려는 듯 정령을 불러 온 산을 후려갈겼다. 누가 본다면 발광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두 시간동안 격렬하게 움직이자 속이 후련해졌다. 슈리엘은 부르지 않았다. 엘란의 행동은 본다면 지랄떤다고 수다를 떨어댈게 뻔했다. 엘란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가부좌를 틀고 마나수련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오늘은 수련을 하고싶지 않았다. 일어나 서성거리던 엘란은 신전으로 향 했다. 헐벗은 나무에는 새로운 잎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엇고 길을 따라서 듬성듬성 꽃들이 보였다. 이상 하게 마음이 동한 엘란은 가다가 노란 꽃 한 송이를 꺽었다. 짐승들이 다니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참을 걷자 멀리서 신전의 지붕이 보였다. 신전으로 향한 길의 모퉁이를 돌자 웅크리고 앉아서 밭을 매 고 있는 에쉴리의 모습이 보였다. 엘란은 한 참을 망설이다 에쉴리의 곁으로 향했다. "도와들리까요?" 엘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쉴리의 목선이 눈부셨다. 고개를 숙이고 김을 매고 있던 에쉴리는 위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놀라셨습니까?" "아니, 괜찮아요. 조금 전에 뭐라고 하셨죠?" "놀라셨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요." "아!" 엘란은 바보스럽게 웃었다. 하이론이 봤으면 일주일간은 놀려 댔을 것이다. "도와드릴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세요." "네?" "도와다라구요." "아, 예." 엘란은 에쉴리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속으로 책망했다. '으이구 바보같으놈!' 엘란은 에쉴리에게 호미를 하나 받아서는 풀들을 뽑았다. "저....." "예?" "그건 잡초가 아니에요, 이 쪽이 잡초고, 그건 먹는 채소에요." 김을 맨다는 것이 멀쩡한 채소를 뽑은 모양이다. 무안해진 엘란의 볼이 붉어졌다. 엘란은 조심스레 에쉴 리가 하는대로 따라 했다. 한 동안 잡초를 뽑은 후 에쉴리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당연히 엘란도 따라 서 일어섰다. 둘은 일어서서는 한 동안 서로를 쳐다 보았다. 당황스런 마음이 든 엘란은 손을 이리저리 놀리다 주머니에 든 꽃을 만졌다. 부지불식간에 꽃을 꺼낸 엘란은 에쉴리에게 내밀었다. 에쉴리는 귓볼 까지 붉어진 채 꽃을 받았다. "이 꽃의 꽃말을 아나요?" 무슨 꽃인지도 모르는데 꽃말을 알 턱이 없다. "어...그게...." 한 참을 더듬거리는데 에쉴리의 음성이 들렸다. "짝사랑! 이 꽃의 꽃말은 짝사랑이에요." "……." 말을 한 에쉴리는 급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엘란은 에쉴리가 떠나 후에도 한 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이후로 엘란과 에쉴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산책을 같이하기도 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 엘란은 가끔씩 밭농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런 모습을 하이론형제들은 흐뭇하게 바라 보았고, 우호법사 조르주는 묘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 예배가 끝나고 교의 중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엘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신전을 한 두 달 비웠으면 합니다." 엘란은 나탈리를 데려올 작정이었다. 조르주가 반대하고 나섰다. "좌호법사가 교를 보호하지 않고 어딜 나다닌다는 겐가?" "데려올 사람이 있습니다." "좌호법사의 최우선 임무는 교도를 보호하는 것이다." 지고교는 신상이나 사제들 보다는 신자들 보호가 우선이었다. "제가 데려오려는 사람도 교돕니다." 이럴 때 끼지 않으면 하이론이 아니다. "이스마엘은 20년도 떠나있었잖아! 맥스란 놈도 마찬가지고." 에쉴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조르주는 발끈하려다가 참았다. 하이론은 지고교입장에서는 보물같은 존재였다. 하이론은 수많은 신자들의 목숨을 구했다. 말대답을 하다가 화가 나서 떠나겠다고 하면 큰 일이었다. 하이론은 좌호법사보다 교에 필요한 존재였다. 지켜보던 성녀의 허 락이 떨어졌다. "그렇게 하세요." 엘란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이론은 따라 갈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읽고 엘란이 하이론에게 말했다. "제 대신 남아서 교도들 좀 보호해 주세요." 동생들이 대신 대답을 했다. (그럴게.) 엘란은 산을 내려갔다. 그 뒤를 에쉴리가 따라왔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기다려 주실거죠." 뜬금없는 말이었다. 말을 한 엘란도 아차했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당황해 버렸 다. 에쉬리가 빙그레 웃자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기다릴게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엘란과 에쉴리는 한 참을 마주보며 서 있었다. 묘한 교감이 둘의 사이에서 흘렀다. 잠시후 몸을 돌린 엘란은 빠르게 걸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 올라있었다. ************************* 거대하고 화려한 대전이다. 수많은 돈과 노력을 들이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건립한 대전이다. 중간에 기둥도 없이 이 거대한 대전을 건립하려고 얼마나 많은 땀과 피가 흘렀을지는 쉽게 상상이 갔 다. 높다른 천장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수많은 신들의 그림이다. 벽화의 밑에 커다란 샹들 리에가 낮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벽에는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에리오트왕국의 건국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단상에는 호화스러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놀랍게도 전부가 금으로 만들어졌 다. 그 위에 하얀색의 호랑이가죽이 덮고 있었다. 호랑이가죽위에는삼황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된 미카 엘이 머리에 휘황한 왕관을 쓰고 아래를 오만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 옆으로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붉은 도끼단 기사단장 카를후작이 보였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변화가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지 못했다. 카를후작의 옆에는 굳은 얼굴로 붉은도끼단 부단장 피클백작이 서 있었다. 붉은도끼단 안에 서 삼황자의 편을 든 대가로 승진을 한 것이다. 단상의 아래에는 이십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황제의 백부 메테르니히공작, 황제의 장인프르덴틀후작, 새로운 레드드fp곤단장이 된 가빈백작, 욀무트백작, 철 혈기사단단장이 된 막스, 듀마의 수제자로 이황자를 배신하고 삼황자측에 붙은 델피로, 그리고 여러명의 궁전대신들의 얼굴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중에서는 니벨백작의 얼굴도 보였다. 이황자의 핵심세력 중 살아남은 것은 그가 유일했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자리까지 보전하고 있었다. 천문학적 뇌물과 탁월 한 능력의 합작품이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재정을 복구하려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내전의 결과 군 사력의 핵심인 레드드레곤단이 전멸하고 철혈기사단도 반이 죽었다. 특히 마법사들은 타격이 커서 회복 하려면 수십년은 걸릴 지경이었다. 델피로가 왕실수석마법사의 지위에 있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였다. 델피로는 5써클마법사다. 아스가르드나 피요르드는 6써클마법사가 왕실마법사를 맏고 있었다. 모두가 격 심한 내전의 결과였다. 내전 수습은 모두가 돈이었다. 마법사 양성에도 막대한 돈이 들고, 레드드레곤기 사단 재건에도 천문학적 돈이 들었다. 가빈백작이 철혈기사단 반을 이끌고 레드드레곤기사단장이 되어 서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죽은 정예병 육성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내전에서 죽은 병사들은 중장보 병,경장기병,중장기병 등 모두 정예였다. 새로이 양성을 하자면 2,3년은 족히 걸린다. 죽은 부하들의 가 족도 보살펴야했으니 재정이 거덜나는 것은 당연했다. 이황자측 핵심귀족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고도 모자라 니벨백작같이 많은 돈을 바치는 자에게는 과오도 용서를 했다.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귀족들이 바친 재산이 아니었다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 대가는 모두 국민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귀족들 은 자신의 호사스러운 삶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바친 것 만큼 아래에서 긁어내려 했고, 하층 민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작황도 좋지 않아서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다. 흉흉한 소문이 나돌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따위 소문이 나도는 거요." 황제가 소리를 질렀다. 소문은 흉흉했다. 삼황자가 왕권을 차지하려고 아버지를 죽이고 죄없는 형님까지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성격이 포악해 사람 목숨을 파리목슴처럼 여긴다는 소문도 돌았다. 백년만에 일어난 지진도 소문의 악화를 부채질했으니 지진은 삼황자의 패륜행위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게 미카엘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엘란(37) 미카엘은 분통이 터졌다.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죽인게 아니었다. 잘 죽었다는 생각은 했지만. 병색이 짙던데다 황태자의 죽음과 내전의 발발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병이 악화되어 죽은 것이다. 형도 마 찬가지였다. 죽일려고 병력을 보내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지금도 죽일려고 사람들을 풀고 있었지 만. 지진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패륜아에다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리까지 듣자 속에서 울분이 솟아 올랐다. 황제가 울분을 참을 이유가 없다. 미카엘은 아래 사람에게 화를 퍼붓고 있었다. "마르시앙은 왜 못잡아 들이나?" 도망간 이황자는 행방이 묘연했다. 싹은 철저히 잘라야 한다. 만약 마르시앙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면 반대 세력이 준동할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내전이 터졌다가는 에리오트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할 것이 다. "델피로 그대가 말해보라! 마르시앙이 어디로 텔레포트했나?" 델피로는 난처했다. "그것이 모두 듀마가 만든 마법진이라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먼거리는 아닐 겁니다." "젠장! 마음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군." 미카엘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짜증을 부렸다. 욀무트백작은 속이 편치 않았다. 기분이 상한 황제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신료들이 회피하는 상 황 일조였다. 자리를 오래 보존하려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 곤란하다. 서로 미루다 제비뽑기에 걸린 것이다. 재수 옴붙은 날이었다. 보고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지방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보 고를 미루었다가는 목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후작이 눈치를 주었다. 어서 보고하란 뜻이다. '젠장.' 욀무트백작은 내키지 않은 입을 떼었다. "폐하, 보고할게 있습니다."최대한 심기를 거슬리지 않도록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뭔가?" 미카엘이 퉁명스레 물었다. 욀무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다르넨영지에서 반란이 일어 났습니다." 황제의 눈섭이 치켜 올라갔다. "자세히 보고해 보라!" 반란사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고금의 모든 나라가 주민의 반란부터 시작해서 나 라가 기울어졌다. "농노들과 하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르넨영주와 조카들의 목이 떨어졌다 합니다. 주위의 영주들이 급히 진압을 해서 가담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습니다." "어쩌다가 반란이 일어났답니까?" 카를후작이 물었다. 카를 후작이 회의 시작후 입을 연 것은 처음이었 다. 반란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게 ." 욀무트는 말을 흐렸다. "솔직하게 말하라!" 황제가 재촉을 했다. "다르넨영주의 외동아들이 대제의 무덤에 들어갔다 죽었습니다. 슬픔에 쌓인 다르넨이 영지를 잘 돌보지 못한데다, 영지를 노리고 찾아온 조카들이 서로 싸워대는 통에 영지민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더 이상 참 지 못하고 들고 일어난 모양입니다." "병사들은 뭘하고?" "정예병사들은 대제의 무덤으로 갔다. 이황자군에 몰살당한 모양입니다." "젠장!" 미카엘이 쌍소리를 내 뱉었다.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수가 없었다. 아 무리 사소한 반란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게 시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가빈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작은 레드드래곤기사단의 새로운 단장과 정보기관 검은독수리의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당연히 엘리오트의 모든 정보는 가빈백작에게 쏠렸다. "무슨 일인가?" 공작이 대신 물었다. "여러 영지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워낙 귀족들의 수탈이 심한데다 요 몇 년 작황이 아주 안 좋았 습니다." 가빈은 내전의 영향도 심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황제에게는 할말과 못 할말이 있는 법이 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귀족들의 영지를 간섭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엘리오트의 왕권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백성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지요. 올 봄만 넘기면 가을에는 작황이 좋을 겁니다. 나라의 복구도 어느 정도 되서 세금도 감면해줄 수 있고." 황제가 반색을 했다. "좋은 수가 있나?" "지고교." 후작의 안색이 환해졌다. "무슨 소린가 쉽게 말해라!" 황제가 안색을 찌푸렸다. 욀무트는 입맛이 ?다. '멍청한 놈, 황제라는 작자가 그것도 못 알아 듣나?' 욀무트는 머리를 숙이고 공작에게 욕을 퍼부었다. '더러운 늙은이 같으니, 죄도 없는 지고신자들을 희생시키려고.' "지고교에게 상황을 떠넘기면 됩니다. 사악한 악마의 추종자들이 이황자를 홀려서 황제를 죽이고 나라를 탈취하려는 걸 영명하신 삼황자가 알아채고 막아냈다. 그 와중에 이황자는 악마교교도에게 간을 파먹혀 서 죽었다. 그들이 마왕을 강림시키려 시도하다 잘못되서 지진이 일어났다. 요근래의 흉년도 모두 악마 교의 수작이다. 어떻습니까?" 황제는 무릎을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백성들 분도 풀리겠군. 다른 사람 생각은?" 황제가 좋은 생각이라는데 누가 토를 달겠는가? 욀무트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전대의 황제는 우유부단하고 현재의 황제는 무식한 놈이 냉혹하기까지 하네.' 욀무트를 제외한 모두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지고교도는 아무 죄책감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다. 일년간만 백성들의 관심을 다른데 돌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막스가 입을 열었다. "마르시앙은 필히 죽여야 겠군요." 악마교도에게 죽었다고 말해놓고 마르시앙이 살아서 나온다면 곤란하 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책임지고 처리하라!"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막스가 구해온 검을 끼고 살았다. 맹약의 검 은 아닌 것으로 판가름이 났지만 별 상관이 없었다. 지금도 허리에는 그 검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내전 이 끝난 후 공작은 맹약의 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공작이 황실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양피지에 의 하면 맹약은 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제가 지고교를 말살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마법사의 실 험결과도 검에 드래곤의 맹약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났다. 그러나, 황제는 그 검을 후두르며 자기가 대제 가 된 착각에 빠졌다. 그 덕에 황제의 총애가 막스에게 쏠렸다. 황제의 총애에다 황태자의 외삼촌, 후작 의 둘째아들이라는 배경, 거기다 실력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있고, 새로운 셩혈기사단의 단장이다. 막 스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지고교에 또 한 번의 탄압이 몰아치려 하고 있었다. 그것 도 혹심한. ******************************* 날은 서서히 풀리고 있었고 성질 급한 개구리는 벌써 깨어났다. 엘란은 길이 아닌 곳을 슈리엘을 타고 날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피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상하게 맘에 걸리는게 많았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갔다올 생각이었다. 엘란은 한 참을 날아가다 슈리엘을 돌려 보냈다. 힘이 떨어진 것이다. 쌀쌀한 날에도 불구하고 땀이 비오 듯 흘렀다. 엘란은 우나리시로 들어섰다. 간단한 요기를 할 생각이었다. 우 나리시는 롬바르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곤 했다. 엘란은 허름한 주점 으로 갔다. 파리를 날리고 있던 주인이 반갑게 다가왔다. "뭘 드시겠습니까." "야채스프와 빵하나 주시오." 주인의 입이 튀어나오고 안색이 변하는게 실망한 티가 역력했다. "더 시키실 거라도........." 주문을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해 말을 길게 끌었다. "그거면 됩니다." 돈도 없었지만 교도들은 굶는데 혼자서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다. '젠장! 오늘도 장사 공치는 구나! 처음 온 손님이 야채스프에 빵하나라니.' 주인의 어깨가 쳐졌다. 장사 가 안 되도 너무 안됐다. 그만큼 나라 사정이 엉망이었다. 요즘은 아주 비싸게 파는 지배계급을 대상으 로 하는 가게와 하층계급을 대상으로 아주 싸게 파는 가게만 장사가 되었다. 어정쩡한 가게는 모두 파 리를 날렸다. 주인의 성급한 예상은 틀렸다.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모두 등짐을 지고 있는 걸 로 봐서 보따리 장사꾼들 같았다. 주인의 얼굴에 혈색이 돌며 입은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이게 얼마만의 손님이냐?' 주인은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뭘 드시겠습니까?" "이 집은 뭘 잘하나?" "돼지고기 통구이를 잘 합니다." "그거 한 마리하고 맥주 한 잔씩 주게." 주인의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주인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 졌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인은 주방으로 들어가 재빨리 빵 한덩이와 스프를 가지고 나오더니 엘란의 탁 자에 던지듯이 놓았다. 갈 길이 먼 엘란은 급히 식사를 했다. 갑자기 엘란의 동작이 멈추었다. 심상찮은 소리가 들려왔다. "더러운 마왕의 종자들." 보통 마왕의 종자들이란 말은 지고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엘란은 귀를 기 울였다. "그런 더러운 놈들은 씨를 말려야돼."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금발머리가 말을 받았다. "이봐 무슨 소리야?" 짐을 정리하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하?게 세어 있 었다. "자네 소식 못 들었나?" "무슨 소식?" "아 글세, 그 더러운 종자들이 말일세, 이황자를 유혹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반란을 사주했다는 구만. 융 커산맥에서 일어났던 대지진도 그 놈들이 마왕을 소환하려다 일어난 거고, 요근래의 가뭄도 그 놈들 짓 이라는 구만." 금발머리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정말인가?" "정말이구 말구." 처음 말을 꺼낸 자가 맞장구를 치고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면서 끼어들었다. 머리가 하?게 센 사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알고 있었다. 나중에는 별 얘기까지 다 나왔다. 다르넨 지방의 반란을 사주한 것도 지고교도이고, 세금이 오른 것도 모두 지고교도의 농간이란 말도 나왔다. 잘못된 일은 모두 지고교가 뒤에서 음모를 꾸민 결과였다. 모두가 그런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고 말하자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 이야기의 초점은 지고교도는 모두 찢어 죽어야 된다, 아니다 태 워 죽여야 된다로 변했다. 모두 다 거품을 물어대고 있었다. 엘란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게 분명했다. 누군가의 조직적 개입이 없었다면 갑 자기 이런 소문이 돌 리가 없다. 요즈음 지고교는 서서히 사멸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포교는 꿈도 못꿨 다. 사람들의 인식이 워낙에 나쁜데다 포교하는 과정에서 교도들이 탄로날 위험을 무릎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신자는 대를 이어가며 신자가 되었다. 힘겨운 삶속에서 신도들의 인구는 꾸준히 줄어 갔고 당연히 교도들의 숫자도 줄어 갔다. 살아 남기도 급급한 사람들이 음모를 꾸밀 리가 없다. 다른 신 전이나 중앙귀족 지방영주 모두 지고교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지교 말살책이 나오지 않는 것도 모두 그 이유였다. 흔적도 잘 띄지 않는 지고교를 애써서 찾아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엘란 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상급정령사로 들어선 이후에는 기억력과 함께 분석력도 좋아졌다. 대충 그 림이 그려졌다. 내전의 상처는 극심해서 국민의 불만은 폭발직전이다. 다르넨지방에서는 반란까지 일어 났다. 황제는 근친살해의 비난을 받고 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모두 괜찮았고, 다른 종교와의 갈등도 없었다. 엘란은 결론을 내렸다. 엘리오트왕국이 조직적으로 벌이는 일이 분명했다. 국민의 불만과 관심 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엘란은 쌀쌀한 날씨 때문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 라오는 한기 때문에 몸을 떨었다. 엘란은 급히 일어섰다. 시간이 없었다. 급히 밖으로 나서는데 찢어지 는 소리가 주점을 울렸다. "도둑놈 잡아라! 음식을 먹고 도망간다!" 주인은 황급히 주점을 나섰다. " ." 주점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달리면서 대책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머리속이 깜깜한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 으나 차근차근 하나씩 문제를 정리해 나가자 대책이 세워졌다. '어쩌지? 나라에서 칼을 뽑았다면 더 이상 엘리오트에서는 살 수 없다. 이런 더러운 소문이 퍼지면 주민 들도 불을 켜고 교도들 색출에 나설게 분명하다. 병사들의 눈은 피해도 같이 사는 주민들의 눈은 피하 기 어렵다. 결국은 모두 다른 나라로 넘어가야 한다. 어떻게? 육로로 그 많은 사람을 옮길 수는 없다. 오랜 굶주림과 노동으로 많은 거리를 걸을 수도 없다. 결론은 하나다. 배! 배로 이동한다. 배로 포강을 따라 내려간 후 바다를 통해 피요르드나 아스가르드로 넘어간다. 배는 어떻게 구하지? 교단은 돈이 없 다. 신자들도 모두 가난하다. 훔쳐야 겠군. 일단 돈을 훔치고 그 돈으로 배와 식량을 산 후 교도들을 배 로 옮긴다.' 엘란은 계획을 모두 세운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저녁에는 롬바르드시의 검문소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서 해가 완전히 지기를 기다렸다. 엘란은 빈민가의 으쓱한 골목에 몸을 숨기고 마나를 운용했다. 달이 높게 떠오르자 엘란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내로 들어가는 성벽으로 다가가 위를 올려 보자 높고 튼튼한 성벽이 보였다. 높이는 15미터나 됐는데 평지에 쌓은 성치고는 대단한 높이였다. 엘란은 슈 리엘을 불렀다. "안 보이게 몸을 감싸줘." 슈리엘이 엘란의 몸을 감샀 안았다. 주변의 공기가 어른거리더니 투명해지며 엘란의 윤곽이 희미해 졌 다. 달빛 아래서는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기 어려웠다. 엘란은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혹시 성 벽위에 있던 수비대에 발견될까 꺼려했기 때문이다. 높은 공중에서 담을 넘은 후에도 내려오지 않고 계 속 앞으로 나갔다. 아래로 거대한 저택들이 즐비했다. 엘란은 적당한 상대를 물색했다. '귀족이나 권력자보다는 상인이 낫겠지.' 귀족이 털리면 병사들이 철저히 수색할게 뻔했다. 아에게용병데에 있었던 짝귀의 도둑길드도 공작영애 의 주머니를 털었다가 세명을 빼고는 모두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렸다. 상인들도 귀족들에게 줄을 대고 있으니 수사가 있겠지만 권력자보다는 강도가 약할 것이다. 엘란은 최고 부자의 집을 털 생각이었다. 다 른데 정착하자면 돈이 많이 드니 이왕 나선 김에 가난한 신도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최대한 훔 칠 생각이다. 빈부의 차는 극심했다. 수도의 큰 부자는 돈이 너무 많아 웬만큼 훔치고는 표도 안 날 것이 다. 엘란은 도둑 맞은자가 늦게 알아채기를 바랬다. 엘란은 상인들이 주로 사는 지구로 방향을 잡았다. 아무래도 귀족들은 천한 상인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 생각이 없었고, 자연히 상인만의 거주지가 발생했 다. 거리에는 병사들이 순찰을 자주 돌아서 곳곳에서 병사들이 보였다. 빈민가에서 병사들이 순찰을 도 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엘란은 가장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섰다. 공중에서 저택을 내려다 보던 엘란은 일순간 당황해 버렸다. 집이 원체 넓은 데다가 호사스러운 저택이 많아서 어디를 털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엘란은 가장 안쪽의 건물을 털기로 했다. 재산은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겼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없으면 다른 건물을 털지.' 엘란은 그 건물의 지붕으로 내려섰다. "건물 전체를 덮어서 소리를 차단할 수 있어?" 건물은 거대했다. "뭐 할 생각이야?" 슈리엘이 물었다. 컴컴한 밤에 남의 집 지붕위에 서있는게 수상쩍어 보인 모양이다. "돈 좀 빌릴려고." "갚을 생각은 있어?" "아니, 없어." "도둑질하러 왔구나." 엘란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자 잘 못 만나서 내가 별일을 다 한다." 사뭇 한탄조의 음성이었다. "시간이 없어 할 수 있어 없어?" 엘란으로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이런 종류의 수련은 해 본적이 없 었다. 슈우욱! 갑자기 마나가 맹렬히 빠져 나갔다. "견딜만 해?" "한 시간 정도는." 슈리엘은 하늘로 떠올라 옷자락을 넓게 펼쳤다. 웃자락이 거대해 지더니 투명한 막을 저택의 둘레에 씌웠다. "이제 됐어. 작업해도 돼." 익살맞은 음성이 엘란의 귓속을 울렸다. "안에 사람 있어?" "없어." 엘란은 실피드와 카사를 불렀다. 마나가 빠져 나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엘란은 실프를 불러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은 격타지점을 최대한 좁혔다. 실피드와 카사가 합쳐져서 지붕을 강타했다. 쿠아앙! 굉음이 엘란의 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슈리엘이 소리를 차단한 덕분에 주위는 조용했다. 지붕 에는 지름 일미터의 구멍이 뚫렸다. 스피릿 컴파운드는 이제 능숙해져서 격타지점의 조절이 가능해진 것이다. 뼈를 깍는 수련의 결과였다. 엘란은 실프와 함께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시간이 없었다. 라이트!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운이 좋았는지 안은 금고의 속이었다. 제대로 짚은 것이다. 엘란은 입 을 딱 벌렸다. 그 넓은 금고안을 보석과 금화가 꽉 채우고 있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금화가 모 두 이런데 모여 있으니 지고신자들이 평생 만져보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엘란은 망토를 벗어서 금화를 퍼 담은 후 가지고 다니던 침낭을 꺼내 그 안에도 금화를 가득 담았다. 보석이 비싸기는 하지만 환금성 은 금화가 월등히 높았다. 망토와 침낭을 금화로 채운 후 단단히 여미고는 메고 있던 주머니에도 금화 를 가득 담았다. 옷에 달린 주머니에도 금화를 채운 후 선반에 올려진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눈동 자만한 다이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엘란은 바지 주머니를 비우고 다이아몬드를 채워 넣었다. 주머니를 목뒤로 묶고 망토와 침낭을 옆구리에 낀 채 실프를 이용해 위로 떠올랐다. 지붕위에 올라선 엘란은 실 프를 돌려보낸 후 슈리엘을 불렀다. "이만 가자!" 슈리엘은 엘란을 감싸고 높이 떠올랐다. 성벽을 넘은 엘란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 중앙에 등불 하나만 밝혀져 있는 방은 어두웠다.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너울 거렸다. "공식적으로 방이 붙었습니다." 목소리에는 불편한 기색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만둬 쟝 지금 일하잖아." 여성특유의 카랑한 목소리, 데미였다. 방에는 세명의 남,녀가 모여있었다. 새롭게 밤의그림자마스터가 된 데미와 그 옆에 착 달라 붙어서 다리를 이리저리 더듬고 있는 쟝, 맥스의 지위를 이어받은 프랑크였다. 프랑크의 표정은 좋치 않았다. 중요한 보고를 하는데 변태새끼가 아까부터 계속 데미의 전신을 주무르 고 있었다. 진정한 변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프랑크는 데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제의 무 덤에서 겨우 돌아온 마스터는 난데없이 데미에게 마스터의 지위를 넘겼다. 프랑크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프랑크는 맥스가 없으면 당연히 다음 마스터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제의 유산에 휘말려 정예를 잃은 밤의그림자는 다급한 상태였다. 맥그루의 청부를 포기한 때문에 기사단의 추적까지 받고 있었다. 정예의 몰살과 정부의 토벌, 이 중요한 시기에 마스터라는 년이 변태새끼나 끼고 있으니 열통이 터졌다. 마스터는 무덤에서 돌아온지 며칠 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그 때문에 데미의 지위를 확고히 하지는 못했다. 밑에서부터 불온한 기운이 떠올랐지만, 조직을 관리해보지 못한 데미는 눈치채지 못했다. 프랑크는 다시 한 번 결심을 굳쳤다. '실컷 즐겨둬라! 조만간 다시는 즐기지 못할테니.' "방, 무슨 방이 붙었는데?" 쟝이 물었다. "요즘 나도는 소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요즘 무슨 소문이 나도는데?" 쟝이 다시 물었다. 쟝은 하루종일 데미에게 붙어서 지분거리거나 돈을 타 서는 변장을 하고 환락가를 누비고 다녔다. 당연히 소문은 듣지 못했다. 프랑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마스터의 정부에게까지 보고를 해야하는 자기 신세가 처량했다. 프랑크는 차근차근 소문과 방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했다. 쟝은 깜짝 놀랐다. "큰일이다. 엘란하고 하이론형제들이 지고교단에 있는데." 프랑크의 눈이 매서운 빛을 발했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겠다.' "도와야겠죠?" 데미가 물었다. "글쎄… ." 쟝이 말을 흐렸다. 엘란과 하이론형제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들은 대제의 무덤에 뼈를 묻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정리 때문이라도 도와야 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이미 지고척결령이 내린 상태 다. 약간의 연루만 드러나도 극심한 고통속에 죽을 것이 분명했다. 데미는 결단을 내렸다. 직접 돕기 보 다는 한 발 떨어져서 도울 생각이었다. 양심과 현실의 조화였다. "지고교단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모릅니다. 워낙에 비밀스런 집단이라서, 총단의 위치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 엘프의 숲!" 쟝이 무릎을 쳤다. "그게 뭐야?" "엘란이 찾아간다고 한 곳이야. 롬바르드시의 빈민촌에 있는 엘프의 숲이란 주점에 간다고 했어." 데미 의 표정이 묘해졌다. 프랑크가 위치를 모른다고 했을 때 실망과 함께 안도감도 들었다. 죄책감 없이 발 을 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쟝이 쓸데없는 걸 기억해 냈다. "휴~" 데미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보내서 경고해 주고 도울일이 있으면 도우세요." 데미가 명령을 내리자 프랑크는 조용히 물러났 다. 쟝이 데미의 가슴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데미가 쌀쌀맞게 손을 쳤다. "지금 그런 거 할 기분이 나요?" "기분이 나쁠수록 할건 해야지. 기분전환도 되고." "저질." 데미의 손이 쟝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음~" 쟝이 기분좋은 신음을 흘렸다. 쾅! 갑자기 문이 열리며 밤의그림자 특유의 칼을 든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무슨 짓이냐?" "짐승도 아니고 이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 짓거리구만." 사람을 헤치고 프랑크가 나타났다. "반역이냐?" 데미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입술은 분기가 올라 파들파들 떨렸다. 시퍼렇게 독을 묻힌 칼 이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자 쟝은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이 상태에서 지고교를 돕겠다니, 정신이 나갔구나." 프랑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하들을 설득하는데 시간이 좀더 걸릴줄 알았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린 것이다. 마스터의 유언을 지키려는 충성스런 부하도 많았지만 지고교를 도우라는 데미의 말은 결 정타가 되어서 모두들 등을 돌렸다. 데미는 부하들의 면면을 보고 포기했다.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자들 까지 나섰으니 사태를 뒤집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줘." 데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쟝은 자신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시면, 시키는대로 다 할게요." 프랑크의 이가 드러났다. 묘한 웃음이었다. "너는 살려주지. 대신 ." 프랑크가 말을 끊자 쟝은 침을 꿀떡 삼켰다. "대신 네 물건은 잘라내야겠다." 프랑크의 시선이 쟝의 다리사이에 머물렀다. 쟝은 사색이 되었다. "이건, 이건." 물건은 쟝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으로 죽으면 죽었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쟝은 무릎을 꿇 고 애원했다. "딴걸 자르면 안 되나요? 팔도 좋고 다리도 좋습니다." "좋다." 쟝의 안색이 금새 환해졌다. "대신 머리를 자르지." 프랑크가 빙글빙글 웃었다. 이제서야 쟝은 자신을 놀렸다는 걸 알았다. "이런 호로새끼, 니 에미는 ." 쟝이 욕설을 퍼붓는데 갑자기 데미가 탁자를 걷어찼다. 쾅! 탁자위에 있던 등불이 날아가고 주위가 컴컴해졌다. 탁자가 떠오르며 데미와 쟝의 몸을 가렸다. "죽여!" 프랑크가 다급하게 명령했다. 앞에 있던 자들이 칼을 집어 던지고 달려 들었다. 탁탁탁! 탁자에 칼들이 박혔다. 누가 등불을 켰는지 주위가 환해졌다. 방에는 프랑크와 밤의그림자뿐이 었다. 쟝과 데미는 사라지고 없었다. "뒤져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 데미는 밤의그림자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꼭 죽여야 했다. 쟝과 데미는 죽어라 암도를 달리고 있 다. 전대의 마스터가 가르쳐준 비밀통로였다. 밤의그림자는 길드의 특성상 비밀통로가 꼭 필요했다. 언 제 누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것이다. "핵~핵~, 옛날 핵, 생각난다." 쟝이 뛰느라 헐떡거리며 말했다. 대제의 무덤에서 죽어라고 뛰던 때가 떠 올랐던 것이다. 그때는 하이론의 약 덕분에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약이 없었다면 무덤에 깔려서 떡이 됐을 것이다. "입 닥치고,핵~핵~ 뛰기나 해." 그들은 죽어라고 뛰었다. 밤의그림자가 따라붙을게 뻔했다. *************************** 해운조합 사무실 앞에 화려한 마차가 멈춰 서자 마부가 얼른 내려와 공손히 문을 열었다. 화려하게 치 장을 한 젊은이가 거만한 걸음으로 내려왔다. 바지와 셔츠는 최고급비단으로 만든 것이었고, 신발은 소 가죽으로 만든 구두였다. 겉에는 담비로 만든 외투를 걸쳤는데 허리에는 멋을 부리기 위해서 찬 숏소드 가 반짝였다. 검집에 보석이 박힌 것이 실전용이라기 보다는 멋을 부리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기사들이 가장 멸시하는 행동중의 하나였다. 엘란은 거만하게 해운조합의 문으로 들어섰다. 피터와 맥그루의 밤걸 음이 반반쯤 섞였다.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책상 뒤에 앉아 머리를 푹 수그리고 정 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조합은 직원들은 혹시시키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관두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은 넘쳐나고 일자리는 없으니 직장에 목을 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풍채좋은 중년인이 사람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해운조합장 데그우드였다. 데그우드 는 엘란이 들어서는 순간 본능적으로 돈 냄새를 맡았다. 아니면 조합장이 직접 나설리 만무했다. "배를 몇 척 사려고 왔다." 엘란은 거만하게 내뱉었다. 데그우드는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척 보기에 애송이가 분명했다. 너무 놀다가 무료해져서 장사나 한 번 해보자고 나선게 분명했다. 장사는 만 만한게 아니어서 이런 자들은 재산을 떨어먹기 일쑤였다. 평생을 방탕하게 놀다가 정신차리고 장사에 매달린다고 성공할리없다. 게다가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았다. 가을에 포강하류에서 올라온 곡식은 창고 에 가득차 있었다. 굶어 죽는 사람은 많아도 살 사람은 없는 묘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기상들만 돈을 만졌지 그 외는 모두 죽을 쒔다. 요즘은 비수기이기도 해서 급매물로 나온 배 도 많았고 해운 경기가 바닥이어서 데그우드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데그우드는 반드시 배를 팔아야 한 다고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데그우드는 조합장의 집무실로 공손히 엘란을 모셨다. 돈은 죽은자 도 부리는 법이다. 자신 나이의 반도 안되는 엘란에게 데그우드는 굽실거렸다. "어떤 배를?" 데그우드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 왜 큰 배있잖아! 바다도 항해하는 큰 배." 엘란은 멍청한 표정으로 양팔을 힘껏 펼쳤다. "이렇게 큰 배." 데그우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돈은 있으십니까?" 엘란이 분한 듯 씩씩거렸다.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이래." 엘란은 주머니를 집어 던졌다. 양가죽으로 만든 주머니가 벌어지며 금화 가 쏟아졌다. 데그우드의 눈에 탐욕이 스쳤다.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아무리 돈에 욕심이 나도 확인할 건 해야한다. "엄리처의 엡손이다." 엄리처의 엡손은 망나니로 유명했다. 부자인 아버지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데그우드도 그 얘기를 들었다. 데그우드는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았다. 엡손은 화가 난 표정이어서 신분 증까지 보여 달랬다가는 당장 일어설 기세였다. 데그우드는 현금이 급했다. 받은 어음은 회수가 안됐고 줄 어음의 기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솔직히 돈만 많이 쳐준다면마누라까지 팔고 싶은 심정이 었다. "바다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는 가격이 비쌉니다. 최소한 10,000골덴은 주셔야 합니다." "돈은 걱정말고 최대한 튼튼한 배로 알아봐 주시오." "적당한 배가 있는데, 가격이 ." 데그우드가 말을 끊었다. 조급증을 유발해 상담을 유리하게 이끌자는 수 작이었다. 엘란은 수작에 걸려드는 척 했다. 바가지를 쓰더라고 시간이 급한 것이다. "돈은 걱정말래도." 엘란은 자뭇 불쾌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데그우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20,000골덴 짜리 배가 강에 다섯척 정박해 있습니다. 아주 좋은 뱁니다. 내전에 휘말린 구말리아 상단에 서 나온 배로 튼튼하기가 ." 엘란은 배를 보지고 않고 결정을 지었다. "그걸로 하지." 데그우드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떠올랐다. 20,000골덴짜리 배가 다섯척이면 총 100,000골덴짜리 거래였다. 자기한테 떨어지는 수수료만 10,000골덴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이 서서히 찢어졌다. 이놈은 배값을 깍지도 않았다. 구말리아상단에 생색을 내기도 좋았다. "배는 바로 가져갈 수 있나?" "물론입죠, 선원만 뽑으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안에 식량좀 채워주게. 밀가루를 위주로 싣고, 치즈,버터,고기,과일, 신선한 채소도 넉넉하게 싣게." "뭐하시게요?" "배를 샀으니 장사를 나가야지." 데그우드는 속으로 엡손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이렇게 멍청한 아들을 뒀으니 집안 떨어먹기는 금방이다. 최대소비지인 롬바르드에서 식량을 싣고 어디가서 판단 말인가? 지 방영지에서 먹고 남은걸-귀족이 먹고 남은걸 의미한다-수도로 가져왔는데 도로 싣고 내려간다니, 누가 살 것인가? 게다가 밀가루는 그렇다 치고, 고기,과일,채소는 뭔가? 날은 점점 더워 오는데 썩어나갈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꽃샘추위는 가셨다지만 채소가 나올철은 아니다. 마법을 이용해 재배한 채소는 값이 엄청나다. 그걸 사다가 썩히겠다니, 데그우드는 기가차서 한동안 말도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이 야기 하지는 않았다. 이야기 했다가 사실을 깨닫고 배를 사지 않겠다고 하면 큰 일이다. 데그우드는 계 약을 서둘렀다. "식량은 얼마나?" "다섯척의 배에 골고루 나눠서 화물칸에 반반씩만 실게." 이게 또 무슨 자다가 봉창두들기는 소리냐? 배 에 화물을 가득채우는 것은 상식이다. 반만 채울거면 두척이나 세척을 사면되지 않는가. 데그우드는 이 런 멍청이를 보내주신 하늘에 감사했다. 이런 놈의 돈을 뜯는 것은 사회정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숭 고한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올라오던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을 속인다는 죄책감은 멀리 달아 났다. "오늘 중으로 모두 준비하겠습니다. 대금은." "지금 오분의 일을 주고 일이 빨리 끝나면 나머지를 주지.대신 ."엘란이 말을 끊었다. 데그우드가 써먹던 수법이다. 데그우드가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등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오늘 저녁까지 일을 마쳐야 한다. 아니면 계약은 무효다." 엘란은 주머니에 시선을 주었다. "20,000골덴 이다. 저녁때 선착장에서 보자." 계약서를 작성하고 엘란이 나가자 데그우드는 똥줄이 탔다. 급하게 된 것이다. 해운조합사무실에 비상이 걸렸다. 직원들은 죽어라고 뛰어다녔다. 엘란(38) 오늘도 여전히 엘프의 숲은 붐비고 있다. 엘프의 숲은 빈민가에 있는 주점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망토를 깊숙히 눌러 쓴 두명의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은 엘란이 앉았던 구석진 탁자에 몸 을 숨겼다. 로이가 재빠르게 달려갔다. "손님, 뭘 드릴까요." "맥주 두잔!" "안주는?" "필요없다." 사무적인 짤막한 대화가 이어졌다. 로이가 몸을 돌리려는데 손님 중 한 명이 손을 잡았다. "???." 손님은 재빨리 로이의 손에 1실버와 종이쪽지를 건넸다. "콜드에게 줘!" 로이의 안색이 급변했다. 콜드는 교의 인물만이 아는 이름이다. 모든 교도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교도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로이는 급히 콜드를 끌고 술창고로 들어갔다. 로이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무슨 일이야?" 콜드의 얼굴도 심상치 않았다. 정부가 발표한 지고척살령의 공고문은 지고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신도 들은 일도 못나가고 집에서 떨었다.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교도들은 모두 친척중에 한 두명은 화형당 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성녀와 대사제, 사제, 우호법사, 하이론형제들은 다같이 모여서 대책을 상의하고 있었다. 교의 중책을 맡은 신자들도 함께 있었다. 뽀족한 수도 없이 회의는 길어지고 있었다. 지고신을 믿는 신자들은 빈민가에 뭉쳐 살았다. 엘리오트에 있는 지고신자 15,000명은 대부분 롬바르드의 빈민가 에 살았다. 먹고 살만한 데가 여기밖에 없었다. 힘들었지만 일자리는 많았다. 게다가 사람이 많은 곳이 숨기도 좋았다. 빈민촌에는 병사들이 얼씬도 안했다. 뜯어먹을 것도 없이 위험하기만 한 곳이기 때문이 다. 지방영지는 영주의 통제력이 강해서 숨기가 힘들다. 다른 나라의 교도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수도의 빈민촌이나 대도시, 항구도시에 모여 살았다. 나탈리의 어머니도 빈민촌에 살다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소중한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콜드는 주점에서 주변의 공기를 살폈다. 사정이 아주 나빴다. 주점에 들른 손님들은 모두 지고교를 욕했다. 온갖 저주가 퍼부어졌다. 들통이 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런 와중에 로이가 하?게 질려서 안으로 끌고온 것이다. 로이는 쪽지를 건넸다. <엘란에게 안내 좀 해줘> 종이에는 짤막한 글씨가 써 있다. 콜드의 안색이 급속히 어두워졌다. 여기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 서는 곤란하다. 콜드는 교로 데리고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콜드는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나?" "우린 엘란의 친구야, 신분은 확실하니까 의심하지 말아." 쟝도 은밀하게 속삭였다. 잠시 고민하던 콜드는 데리고 가기로 결심을 굳쳤다. 콜드는 급히 카운터로 가서는 크게 소리쳤다.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 장사는 끝이다." "뭐야! 이제 술발 받기 시작하는데."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미안한 뜻에서 요금은 반만 받겠다." 불만이 금방 들어갔다. 반값이면 내일 하루 더 죽칠 수 있는 것이 다. 손님들은 썰물처럼 빠졌다. 쪽지를 건넨 사람들을 제외하고. 콜드는 문을 닫아 걸었다. 사람들이 모 두 나가고도 한 참을 기다렸다. "따라 오시오." 콜드는 손님을 술창고로 데리고 갔다. 로이가 술병을 치워 놓았다. 로이가 문을 들어 올리자 컴컴한 지 하실이 나타났다. 콜드와 로이 손님은 조심스레 내려갔다.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 이 주위를 내리 눌렀다. 마지막에 내려온 로이가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벽장 앞에선 콜드는 벽장문을 열었다. 콜드는 안의 옷을 꺼내더니 벽장 속을 뜯었다. 엘란이 여는 방법을 못 찾은 것도 당연했다. 아 예 막아놨던 것이다. 콜드가 벽장을 뜯어내자 안에 구멍이 나타났다. "따라오시오!" 콜드가 먼저 기어들어갔다. 한 명이 내키지 않는 듯 머뭇거리자 다른 한 명이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으악."컴컴한 지하실에 비명이 울렸다. 로이가 인상을 썼다. "조용해요!" 손님이 좁은 굴을 기어가자 로이는 뒷정리를 했다. 옷을 개어서 침대위에 놓고, 벽장에서 뜯어낸 나무는 술창고에 버렸다. 다시 지하실로 들어온 로이는 나무무늬가 들어간 종이를 구석에서 끄집어 냈다. 종이 의 위에만 풀을 바른 로이는 뚫린 구멍위에다 붙였다. 감쪽 같았다. 옷을 조심스레 벽장안에 넣고는 종 이를 들어올려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의 밖에서는 프랑크가 부하 다섯명을 이끌고 감시하고 있었다. 손 님 둘은 데미와 쟝이었다. 프랑크는 데미의 뒤를 쫓지 않고 여기서 기다렸다. 이리로 올 것이라고 예상 을 한 것이다. 예상은 정확했다. 콜드가 서둘러 손님을 쫓아낸 것이다. 프랑크가 한 참을 기다려도 데미 는 나오지 않았다. 프랑크는 조용히 주점으로 들어섰다. 밤의그림자에게 잠긴 문을 여는 것은 애들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프랑크와 부하들은 수색에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 정밀수색이 뒤 따랐다. 밤의그림자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곧 지하실이 발견되고 로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땅굴이 발견되었다. 프랑크는 서슴없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굴은 빈민가의 뒷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프랑 크는 흔적을 귀신같이 찾아내서는 침착하게 데미의 뒤를 추적했다. 그즈음 데미는 신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신전의 마당에는 스무명의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초조한 감정이 그대로 들어나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콜드가 급히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로이가 데미와 쟝을 감시했다. "뭐가 이래! 꼭 거지소굴 같구만!" 쟝이 하이론과 똑같은 말을 내뱉자 화가 치민 로이의 눈꼬리가 올라 갔다. 잠시 후 콜드가 나타났다. "따라오시오." 데미와 쟝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안은 괜찮겠지 하고 기대하던 쟝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바닥은 흙인데다 아름다운 신상이나 조각 성화도 없었다. 단지 야트막한 제단이 있을 뿐이다. "뭐 이래?" 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미의 낭랑한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하이론!" 하이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나 했는데 변태일행이 맞는 모양이다. 엘란의 행방을 아는 외부사람은 마스터와 데미 쟝이 유일했다. 별로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자연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웬 일이야?" 쟝은 하이론의 퉁명스런 말투에 망토를 벗고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도와주러 왔는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 따위로 말을 해!" 하이론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부하들은 데리고 왔나?" 밤의그림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쟝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이다. "아니." "그럼 둘이 온거야?" "응." 하이론은 데미를 보았다. 마스터가 호위도 없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어느 조직의 장이라도 마찬가 지다. "너 쫓겨났구나." 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하이론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았다. "너를 죽이려고 부하들이 쫓겠네?" 데미의 머리가 다시 끄덕여졌다. "니들도 참 웬만하다. 악마교척살령이 내렸는데 여기로 피신한거냐?" "갈데도 없어서." 하이론은 쟝을 가리켰다. "저놈 영지로 가면 되잖아. 아무리 변태라도 장남인데 거기 숨으면 되잖아." 쟝의 얼굴이 비참해졌다. "내가 가면 아버지가 직접 죽이려 들거야." 어깨가 축 늘어지고 목소리에는 울음기 마저 섞였다. 쟝은 데미와 재미를 충분히 본 후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밤의그림자가 파악한 사정은 경악할만 했 다. 아버지는 아예 장례까지 치뤄버린 것이다. 삼황자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문을 온데 퍼트리면서. 혹시나 살아 돌아올까 싶어서 부하들에게 은밀한 명령까지 내려 놓았다. 쟝이 오거든 죽여 버리라고. 쟝은 천지에 갈 데가 없었다. 하이론은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왔다. "쯧쯧쯧." "어떻게 된 사입니까?" 우호법사 조르주가 다가와 물었다. 새로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는 것은 교의 안 전을 책임진 호교법사의 책무였다. 하이론은 대충 이들을 소개했다. "이놈은 쟝이라고 한다. 대제의 무덤에서 알게 된 놈이다. 비겁한 데다가 변태니까 여신도들에게도 주의 를 주게. 아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남자신도에게도 주의를 주게. 운은 좋아서 명은 기니 생사의 갈 림길에 처하면 이 놈을 위험에 밀어넣게. 그 뒤를 따라가면 될거야." "무슨 소개가 그따윕니까?" 쟝이 분개해서 소리쳤다. "변태를 변태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 "전에도 말했잖아요. 개새끼를 개새끼라고하면 개새끼가 기분 좋겠어요?" 하이론은 쟝을 무시했다. 말을 섞어서 하등 도움될게 없는 놈이다. 정령을 보면 재미 볼 생각부터 하는 놈이니 말해 뭐하겠는가. "이 여자도 무덤에서 알게 됐다. 새로운 밤의그림자마스턴데 쫓겨났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따라붙었을거 다. 이 여자도 변태다. 저 변태새끼랑 그렇고 그런 사이다. 그렇게 나쁜년놈들은 아니니 당분간 같이 살 아도 괜찮을거다. 남녀교도들에게 변태라는 소리는 꼭 해주고 애들 곁에는 절대 못가게 해라!" 데미는 하이론의 소개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밤의그림자에서 잔뼈가 굵은 데미는 포시랍게 큰 쟝과는 확실히 달랐다. "기분나빠서 더 이상 못 있겠다." 쟝이 단호히 돌아섰다. 문앞까지 씩씩하게 걸어가서는 머뭇거렸다. '이쯤에서 잡아야 되는데.' 야속하게도 아무도 잡지 않았다. 하이론과 지고신자들에게는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무도 잡지않자 쟝은 슬그머니 안으로 끼어들었다. 평소의 하이론이라면 한 참을 놀려 댔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론도 그런 정신은 없었다. 무의미한 말들이 반복되었다. 날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프랑크와 밤의그림자는 신전에 바싹 다가갔다. "안에 들어가서 처리하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안에 어떤 놈이 있을지 모른다." 지고교는 소문이 아주 안 좋아서 다가가기가 께름직했다. 혹시 마왕이라도 소환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수도경비대에 밀고하는 건 어때요?" 프랑크의 속이 시원해졌다. "좋은 생각이다."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었다. 프랑크는 흡족하게 웃으며 산을 내려갔다. '변태들, 니들은 이제 끝이다.' ****************** 성문을 지키고 있던 야거는 속이 편치 않았다. 야거는 줄 한 번 잘못 선 대가로 수문장으로 강등당했다. 수문장이라면 거창해 보이지만 단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선임자 정도였다. 귀족의 작위도 박탈당했 다. 알고 지내던 믹은 성문의 책임자로 내려와 있었다. 은근히 못살게 구는데 속에서 불덩이가 불끈불끈 치솟았다. 아주 야비하게 애를 먹였다. 꼭 밤근무를 시킨다던가, 근무를 설때 비상을 걸어서 훈련을 시 켰다. 더러워서 때려치자는 마음이 매일 들었지만, 이황자 편을 들었다가 집안이 몰락해서 이런 자리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아내는 임신까지 하고 있다. 속으로 울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믹은 관사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까지 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속이 상했다. 속이 상한 야거는 성안으로 들어서려는 자를 거칠게 검문했다. 물론 사람을 가려가면서 야료를 부렸다. 귀족들에 대해서는 특히 조심을 했다. 자기도 귀족이었지만 이제는 처지가 달랐다. 평민이 되고 보니 귀족들의 횡포가 보통이 아니었다. 몰락귀족을 누가 대접해 줄 것인가. 귀족에서 평민으로 몰락한 자는 일반 평민보다 비참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알고지내던 귀족들의 조롱과 평민들의 멸시를 견뎌야 했다. 평소에 사이가 나쁜 귀족이라도 있었다가는 그걸로 끝이었다. 귀족이 평민의 목을 치는 것은 법으 로 허용되어 있었다. 물론 나중에 나라에 보고를 해야 했다.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지만 형식적이다. 일례로 기분나쁘게 쳐다봐서 죽였다고 보고를 해도 그대로 통과되었다. 야거는 어떻게든 공을 세워 다 시 재기하고 싶었다. 밤이 되면 성문은 닫히고, 특별허가증을 소지한 사람만이 출입가능했다. 이때가 수 문장들에게 부수입이 생기는 때였다. 몰래 돈을 찔러주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많았다. 더럽고 아니 꼬와도 야거가 때려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지금도 한 명이 은밀하게 접근했다. "멈춰라! 허가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야거는 거만하게 말했다. 행색을 보니 무시해도 될만했다. 모 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다가왔다. "나으리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내가 은밀히 속삭였다. 야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럴때 는 보통 큰 돈이 생긴다. 야거는 사내를 끌고 으쓱한 곳으로 들어섰다. "뭐냐?" 어서 돈을 달라는 말이었다. 사내는 작은 꾸러미를 주더니 사라져버렸다. 꾸러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야거는 사내가 사라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봐 거기서!" 급히 불렀지만 늦었다. 어둠속에 녹아든 사내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야거는 꾸러미를 조 심스레 열었다. 야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에는 10골덴과 쪽지가 나왔다. <빈민촌의 뒤에 있는 가르가산을 올라가다보면 중턱쯤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입구 의 나무위에 빨간 리본을 매달아 놓을테니 그리로 오십시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커다란 판자집이 나 옵니다. 거기에서 악마교신자들이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글을 읽던 야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를 꽉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됐다. 기회가 온거다. 두고보자 믹. 넌 내손에 죽었다." 야거는 격한 흥분에 몸을 떨었다. 공을 세울 기 회가 나타난 것이다. 이번 일만 잘 된다면 다시 수비대 장교로 복귀할 수 있다. 귀족의 작위도 다시 받 을 수 있다. 악마교척살령이 내린 이후 자신이 처음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이다. 예배를 보고 있다면 고위 사제도 있을 것이다. 너무 흥분한 야거는 정보를 준 사람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악마교관련 사항이라면 당당히 고발하고 상을 받아야 한다. 몰래 제보를 하는 것은 어색했다. 게다가 10 골덴이라는 거금까지 주면서. 야거는 급히 서둘렀다. 믹이 없는 사이에 공을 세워야 한다. 성문으로 간 야거는 성문 수비대를 불렀다. 스무명을 급히 모은 야거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수상한 놈들을 찾았다." 야거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지고교얘기가 나오면 보고하는 놈이 나올지도 모른다. 병사들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수문장이 자기들 보다 높긴 하지만 오십보 백보 다. 게다가 이놈은 귀족출신이다. 평소에도 보기 싫은 놈이다. 야거는 급해졌다. '이 새끼들, 나중에 두고보자.' 속으로 이를 갈면서 말은 은근하게 했다. "공을 세우면 2실버씩 주지." 야거는 금화를 슬쩍 보여줬다. 병사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선 상급자에게 보고부터 했을 것이다. 정부는 기사단 재건에 심혈을 쏟았다. 고 참병과 쓸만한 병사는 모두 기사단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모두 새로 뽑은 신병들이었다. 아직 훈련도 제 대로 되지 않았고, 군기도 빠져 있었다. 믹도 형편없는 지휘관이라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모두 들 야거를 따라 희희덕 거리며 빈민촌으로 몰려갔다. 야거와 병사들은 빈민촌의 복잡한 길을 헤집고 나 갔다. 믹은 초저녁부터 관사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야거의 생각대로 여자까지 끼고 있었다. "언제까지 가야돼?" 수비대 병사들이 야거에게 투덜거렸다. 병사들은 가르가산을 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곧 악마교도들이 나올거야." "뭐!" 병사들이 놀라 멈추었다. 수상한 자들이 지고교도들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우리는 오늘 큰 공을 세우는 거다. 이게 모두 내 덕이다. 고맙게 생각해." 병사들은 신이 났다. 사교토 벌에는 상이 따를 것이다. "이봐 야거 출세했다고 우리 모른척하면 안된다." 야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물론, 일만 잘 된다면야!" 야거는 속으로 결심했다. '모른척 할 리가 있나? 니들은 내 손에 죽었다.' 귀족출신이 평민병사들의 반말을 들어야 했다. 겉으로 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었다. "여기다." 야거는 나무위에 묵인 리본을 발견했다. 달빛에 의지해서 겨우 발견한 것이다. 야거는 급히 서 둘렀다. 그 뒤를 병사들이 따랐다. 나무위에는 프랑크가 있었다. 야거가 리본을 발견한 것도 프랑크가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왜 이것밖에 안되지?" 병사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적어도 500명은 와야 한다. 사교토벌에 나선 놈이 겨우 21명이라니. "공을 세울려고 직접나선 모양입니다." "이런 멍청한 새끼. 저런 놈들을 믿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주민들이 불쌍하다." 야거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보고도 없이 공을 세우겠다고 설치는 놈은 능지처참으로 다스렸다. 귀족으로 거들먹거리던 야거는 이런 기초적인 것도 알지 못했다. 새로 신병이 된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성 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은밀히 뒤를 따른다. 병사들이 지고교도를 공격하는 혼란한 틈을 타서 데미를 죽인다. 쟝은 몰라도 데 미는 꼭 죽여라." 새로이 마스터가 된 프랑크가 몸을 날리자 그 뒤를 밤의그림자 30명이 달렸다. 마지막 남은 정예였다. 앞으로 나가던 프랑크의 목덜미가 서늘해 졌다. 갑작스런 오한이 일었다. 프랑크가 오른 손을 가볍게 올려 손짓을 했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손을 돌리면서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떼었다. 모두 모이라는 신호다. " ." 숫자가 줄어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10명이나 없어졌다. 프랑크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누구냐?" 프랑크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나무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작은키에 신비롭게 빛나 는 검은 눈. 엘란이었다. 엘란은 항구에 배를 준비하고 급히 산으로 올랐다. 한시가 급했다. 그러다 은밀 한 움직임을 감지해서 내려와 보니 검은그림자였다. 처음에는 데미와 쟝이 찾아 온줄 알았다. 밤의그림 자는 은밀한 죽음의 기운을 풍겼다. 엘란의 감각은 예민했다. 살기를 지운 밤의그림자에게서도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신전으로 살기를 품고 접근하는 밤의그림자. 엘란은 뒤를 따르며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프랑크는 엘란의 기척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육감이 고도로 발달된 자였다. 이상한 낌새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뭣 때문에 지고신의 신전으로 향하지." 엘란은 조용히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죽여라." 프랑크가 나직히 말했다. 특유의 칼을 빼든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실프." 실프 스물이 나타나 밤의그림자를 결박했다. 상급정령사가 부리는 실프는 무시무시했다. 찰나의 시간에 모든 밤의그림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부딪쳤던 경험을 떠올리며 엘란은 자결을 못 하도록 입을 못 움직이게 했다. 알아내야 할게 있었다. 프랑크는 실피드를 불러서 결박했다. 투명한 끈 이 프랑크를 조이고 있었다. 엘란은 프랑크의 입을 벌려 이빨을 뽑았다. 프랑크는 생이빨이 뽑혀 나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밤의그림자를 제외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정령이 소리를 차단한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여기로 왔나? 데미와 쟝은 어떻게 됐지?" "차라리 주겨라!" 이빨이 모두 빠진 프랑크는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원한다면." 엘란은 프랑크를 최대한 잔인하게 죽였다. 입을 열 사람은 스무명이나 남아 있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엘란도 괴로웠지만 많은 사람을 고문 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프랑크를 최대한 잔인하게 손봤다. 복면을 써서 표정은 못 봤지만 사색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입을 여는 자는 살려준다, 아니면 모두 이 꼴이 된다." 엘란은 최대한 으스스하게 말을 하며 걸레같이 변한 프랑크를 가리켰다. "생각이 있는 자는 손가락을 움직여라." 실프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힘을 조정했다. 망설이던 한 명의 손이 움직였다. "말해라!" "으." 엘란은 급히 입을 막았다. 자백을 하는 것처럼 하며 자결하려 한 것이다. 엘란은 그 놈을 고문했 다. 이번에는 더욱 처절했다. "사람은 많아!" 한 사람의 손이 급히 움직였다. 엘란은 한 명을 지목해 풀었다. 또 자살을 시도 할까봐 조심해서 살폈다. 그 사람은 겁에 질려 황급히 말을 했다. 데미와 쟝의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병사들의 얘기까지 나왔다. 엘란은 별 걱정하지 않았다. 교에는 하이론형제가 있다. 그런 오합지졸은 금방 처리할 것이다. 엘란은 실프로 밤의그림자 목을 비틀었다. 으드득! 으드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너는 나랑 같이 간다. 적당한 시간에 풀어 주겠다." "윽!" 동료를 배신하고 입을 열었다는 자책감에 자백한 사람은 독단을 깨물었다. 죽음이 두려워서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죽는건 쉽지만 고통은 무서웠다. 밤의그림자는 더 이상 청부를 받지 못할 것이다. 모 든 정예가 죽었으니 후예를 양성할 사람이 더 이상 없어졌다. 이런 일은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밤 의그림자는 처음 출발과 같이 도둑길드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 엘란은 슈리엘을 타고 날아 올랐다. "뭐가 저렇게 많아!" 병사가 야거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판자집의 마당에는 사람이 북적거렸고, 집의 안 에도 많은 듯 했다. 오합지졸의 사기가 금새 떨어졌다. 야거는 일을 급히 진행시키기로 했다. "돌아가고 싶은 놈은 돌아가! 적을 앞에 두고 도망갔다고 치도곤을 당할걸." 적을 두고 도망쳤다가는 나 중에 치도곤을 당할게 뻔했다.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돌격!"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야거가 돌진했다. 공에 눈이 뒤집힌 것이다. 엉거주춤 일어난 병사가 뒤를 따랐다. 마당에 있는 노인과 여자를 보고 용기를 낸 것이다. "우와!"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돌진했다. 교도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대책을 논의 하느라 경비하나 준비하 지 않은 탓이었다. 함성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신전 밖으로 뒤쳐 나왔다. "병사들이 어떻게 알고 왔지?" 하이론이 데미와 쟝에게 눈치를 주었다. "우리가 달고 온거 아냐!" 쟝이 급히 부인을 했다. 하이론은 일단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부터 처리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면 된다. "파이어애로우." "크악 칵타 (아이스애로우)." "칵카 쿠아카(에어미사일)." 야거와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난데없이 마법이 날아온 것이다. 마법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으아악!" "악." "켁!" "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야거는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 혼자 살아남아 있 었다. 야거는 급히 앞에 있는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움직이면 이 여자는 죽는다!" 야거는 여자의 팔을 움켜쥐고 소드를 여자의 목에 갖다댔다. "모두 꼼짝마!" 야거가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겁이 덜컥나서 다리가 덜덜 떨렸다. 하이론은 속이 탔다. 이대로 병사를 보냈다가는 기사단이 달려들 것이다. 죽이자니 여자의 목숨이 걱정이었다. 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무너져 내렸다. 하이론이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서 사람이 내려오고 있 었다. "엘란!" 하이론이 반갑게 외쳤다. 야거는 머리가 뚫려 즉사했다. 쐐기형으로 변한 실프에 당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오다가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로잡힌 여자의 옆에 있던 로이는 감탄했다. 머리에는 나선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주 깔끔한 솜씨였다. "교도들은 모두 집에 있나요?" 엘란이 급하게 물었다. "모두 집에서 떨고 있다." "모두 모으세요. 조금씩, 천천히. 롬바르드를 떠납니다." "어떻게?" 조르주가 반문했다. "배를 구했어요."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머리를 두드리던 하이론이 급히 물었다. "돈은 어디서 구했냐?" 엘란은 웃었다. "빌렸어요." "빌리다니, 어디서?" "더이상 묻지 마세요." 엘란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움직여요." 빈민가에 은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은밀히 움직이는데 지교신 자만큼 능숙한 사람도 없다. 엘란은 정령을 이용해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하고 위험요소는 제거했다. 선 착장은 빈민가에서 가까웠다. 롬바르드시를 끼고 있는 선착장은 강에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강이 깊고 규모가 거대해서 항구로 불리기도 했다. 선착장은 선원과 짐꾼을 대량으로 필요로 했고, 빈민들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선착장주위에 빈민가가 생긴 이유였다. 선주들은 더러운 빈민가를 피해 모두 성안이 나 부유한 평민거주지역에서 살았다. 포구에는 거대한 범선이 다섯척 정박해 있었다. 포강을 오르내리며 막대한 화물을 나르고 멀리 아스가르드나 피요르드까지 무역을 다니던 대형범선이었다. 엘란은 은밀히 교도들은 배에 나눠 태웠다. 일을 끝마쳤을 때는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15,000명의 소개가 성공적 으로 끝났다. 하이론은 선원으로 일한 교도를 골라 노를 젖게 배밑으로 내려 보냈다. 배는 대단히 크고 튼튼했다. 이물에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헬레나여신이 조각되어 있었다. 배 밑에는 노가 달렸고 배 위 에는 커다란 돛이 펄럭였다. 강이 꽉차는 느낌이다. 교도들은 짐칸에 숨었다. 워낙 승선인원이 많아서 그 큰 배가 비좁게 느껴졌다. 교도들은 숨소리마저 작게 내려 애썼다. 이미 확인한 바와같이 배의 상태 는 완벽했다. 이제 서류만 받으면 끝난다. 날이 완전히 새기를 기다린 엘란은 해운조합으로 향했다. 해 운조합안에는 구말리아상단의 대표와 데그우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데그우드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졌다. "반갑습니다." 구말리아상단대표가 반갑게 엘란의 손을 잡았다. "서류는?" 엘란의 태도는 여전히 거만했다. 그러나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상단대표와 데그우드는 봉을 잡은 것이다. 15,000골덴짜리 배를 20,000골덴에 팔아먹었다. 그것도 다섯척이나. 엘란은 25,000골덴 의 바가지를 썼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계약이 틀어질까 안절부절 못했다. 엘란은 모든 서류를 넘겨받고 훔쳐 왔던 보석을 모두 넘겼다. 엘란은 그만한 현찰이 없었다. 이미 다이아몬드로 지불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표나 데그우드도 불만이 없었다. 요즘은 뇌물수요가 많기 때문에 보석이 인기가 많았다. 조합을 나서려는 엘란을 데그우드가 잡았다. "선원들을 원하시면 제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선원은 이미 구했다." 엘란은 거만하게 조합을 나섰다. 구말리아상단대표와 데그우드는 자신 들에게 닥친 행운을 감사하며 엘란을 씹었다. 천하에 멍청한 놈이라고. 엘란(39)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쳐라!" 하이론은 신이 나서 외쳤다. 배는 서서히 선착장을 떠났다. 선수가 시원스럽게 물살을 갈랐다. 엘란은 선장실에서 수로의 지도를 펼쳤다. 포강은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했다. 그래서 거대한 배가 바다에서 안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500년 동안의 대공사가 가능케 했다. 공사는 대제 때부터 시작 되었다. ?은 곳은 마법과 정령술을 이용해 파냈다. 수많은 호수의 물을 포강으로 흘려 보내 고 군데군데 저수지를 쌓아서 유량을 일정하게 통제했다. 융커산맥이나 아갈리아산맥의 만년설에서 흘 러 내리는 물도 수위의 유지에 큰 몫을 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교역선도 포강을 따라 롬바르드까지 왔고, 주위의 물품도 롬바르드시에 모여서 다른 지역으로 나갔다. 당연히 물동량도 엄청 났다. 하류에는 비옥한 삼각주가 펼쳐져서 엘리오트의 식량창고 역할을 수행했다. 포강은 엘리오트의 생명선과도 같았 다. 엘리오트에 사는 지고교도는 모두 배에 올랐다. 지고교도는 특성상 선원생활을 해도 멀리 나가지는 않 았다.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불똥이 튈까봐 조심하느라고 아예 배를 타지도 않았다. 포구에서 짐꾼노 릇만 했다. 그래서 모두 배를 타고 나올 수 있었다. 더러운 소문을 듣고 모두 집에서 숨어 있었던 이유 도 컸다. 엘란으로서느 다행스런 일이었다. 엘란은 수로를 열심히 살폈다. 급한 일이 대충 마무리 되자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피콜라니협곡을 지나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넓은 강폭은 피콜라니협곡에서 급격하게 좁아졌다. 배 두척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 밖에는 되지 않았다. 엘란이 산 거대한 범선은 한 척밖에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주위가 단단한 암반으로 되어있지 않았다면 거센 물 살에 주변이 씻겨 내려가 강폭이 넓어 졌을 것이다. 엘란의 코에 은은한 향내가 풍겨왔다. "뭘 그렇게 내려다 보세요?" 에쉴리다. "수로를 보고 있어요. 성녀, 대사제, 우호법사, 하이론 좀 불러주세요." 심각하게 지도를 살펴 보던 엘란 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예." 에쉴리는 엘란이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하자 섭섭해졌다. 에쉴리가 말없이 나가고, 엘란은 고민에 빠졌다. 어서 빨리 피콜라니협곡을 지나야 한다. 그 때까지는 배 댈대도 마땅치 않다. 협곡에는 거대한 관문이 있었다. 거기에서 철저한 검문이 이루어졌다. 외국이 포강을 따라올라와서 롬바르드를 공격할 수 없는 이유도 피콜라니협곡 때문이었다. 협곡의 위에는 거대한 투석기가 설치되어서 수상한 배는 안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정선을 무시하고 통과하려다가는 고기밥이 되기 일쑤였다. 배는 보통 속도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하이론이 입을 우물거리면서 들어왔다. 밑에서 노를 젖거나 돛을 살피고 배를 조정하는 조타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식량은 풍족한데다가 없는게 없었다. 가난한 신자중에 는 과일을 처음 먹어보는 자도 많았다. 단점이 있다면 장소가 너무 협소했다. 배 한척에 거진 3,000명의 사람이 탓다. 앉을 자리도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타서 배가 깊숙히 가라 앉았다. 갑판에 서 있으 면 배가 침몰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사실 아주 위태로웠다. 신도들은 가난하게 살았던지라 풍 족한 음식을 아낄 생각만 했다. 배부르게 먹으라는 성녀의 명을 듣고서야 양에 차게 먹었다. 하이론이 시킨 것이다. 어차피 치즈나 과일 채소는 며칠 보관하지 못한다. 훈제하거나 말리지 않은 고기도 마찬가 지다. 게다가 배의 속력을 높여서 빨리 도망쳐야 한다. 식량을 먹어치우면 교도들이 쉴 공간도 생길 것 이고 배도 가벼워져서 침몰의 위험도 줄고 속도도 빨라진다. 일석삼조의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하이론 의 뒤를 따라 성녀와 대사제, 우호법사, 하이론의 동생들 에쉴리가 차례로 들어왔다. 그 뒤를 쫄랑쫄랑 쟝이 따랐다. 쟝의 시선은 에쉴리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에쉴리는 계속 쟝이 따라다니자 상당히 불편했다. 에쉴리에 관심이 많은데다 이목이 고도로 발달한 엘란이 그것을 모를리없다. "쟝, 따라다니지 마라!" "뭘?" 쟝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다. 엘란의 몸에서 폭풍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쟝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다리가 덜덜 떨리며 오줌까지 찔끔 지렸다. 조금전에 소변을 보지 않았다면 줄줄 쌀 뻔했다. "에쉴리 근처에 얼씬거렸다간 가만 안 두겠다." 겁에 질린 쟝은 엉금엉금 기어서 선실을 나갔다. 쟝의 뒤통수로 하이론의 음성이 꽂혔다. "그러길래 내가 경고했잖아, 에쉴리는 엘란이 찍었으니까 추근대지 말라고." 당황한 엘란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화장실이 급한 것도 같고, 추위를 타는 듯도 한 괴상한 표정이 다. 에쉴리의 표정도 어색하게 변했다. "내가 틀린 말 했냐?" " ." 할 말이 없어진 엘란은 말을 돌렸다. "수로를 보세요!" 모두의 시선이 탁자위에 놓인 지도에 모였다. 엘란은 내심 한숨을 쉬며 협곡을 가리켰다. "여기서 검문이 있을 겁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타고 있으면 의심을 합니다.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씀 해 보십시오." 전쟁이 터져서 피난을 가는 것도 아니고 15,000명의 사람을 무슨 수로 변명한단 말인가. 귀족이나 권력 자여서 신분으로 찍어 누룰 수도 없었다. 엘란의 신분증도 배의 매매서류와 맞지 않았다. 해운조합에서 엘란은 엡손의 행세를 했고 당연히 서류상의 주인은 엡손이다. 기쁨에 들떠서 먹고 마시던 일행의 안색 이 일순간에 어두워졌다. "데미를 부르자!" 하이론이 의견을 냈다. 쫓겨나긴 했지만 밤의그림자마스터로서 무슨 좋은 생각이 있을 지도 모른다. 좋은 의견은 없더라도 신분증은 위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론삼이 데미를 데리러 선실을 나섰다. 하이론삼은 갑판을 가로지르다 쟝을 보았다. 쟝은 주위의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같은 변태끼리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먼저 찍었다고 죽일 듯이 군다니까요." 쟝은 지나는 사람마다 붙 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신도들은 슬슬 피했다. 하이론의 경고는 신도들 모두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졌 고 당연히 상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바퀴벌레보듯 슬슬 피하자 너무나 외로웠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위로해 주나? 내가 만약 서러울 ." 쟝은 바다를 향해 푸념을 늘어 놓았다. 데미는 망루에 올라가 있었다. 말을 할 수 없는 하이론삼은 데미를 부르러 망루를 올랐다. 데미는 가슴 을 쭉피고 바다를 바라 보았다. 속이 탁이며 시원해졌다. 망루에 오른 하이론삼이 데미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하이론삼이 여기 웬일이야? 여기서 재미 좀 볼까? 좁긴해도 재밌겠지?" (그런건 쟝이랑 해라! 하이론이 부른다 선실로 들어가자.) 당연히 데미는 하이론삼의 수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이론삼은 신도들이랑 살면서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럼없 이 데미를 부르러 나와서 수화를 한 것이다. 하이론삼은 수화대신 데미의 옷을 잡아 끌었다. "따라오라고?" 데미가 알아 들었다. 하이론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론삼이 먼저 내려가고 데미가 위 에서 내려왔다. "올려다 봐도 괜찮아." 짧은 치마를 입고 있던 데미가 내려 오며 말했다. "나는 속옷은 안 입고 다녀." 하이론삼이 휘청했다. 발을 잘못 디딘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래로 떨 어질 뻔 했다. "히히히." 하이론삼의 반응에 데미가 시시덕거렸다. "목석인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한 번 보라니까?" 데미는 생글생글 웃으며 선실로 들어섰다. 짧은 치마가 아주 도발적이었다. 데미의 옷차림에 놀란 조르 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데미는 조르주에게 살짝 윙크했다. 조르주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획하 고 고개를 돌렸다. "왜 불렀어?" 데미는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하이론은 조르주의 반응을 살폈다. 아주 재미 있었다. "신분증 위조할 수 있나?" 엘란의 물음에 데미는 생글생글 웃었다. 데미가 손이 엘란의 허벅지를 쓸었 다. "만들 수 있어." 하이론은 에쉴리의 표정을 슬쩍 보았다. 못마땅해 하는 기척이 역력했다. 하이론은 좋은 생각이 났다. "만들어줘, 신분은 엡손으로 하고." 엘란은 데미의 손을 쳐냈다. "엡손? 엄리쳐의 망나니?" 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왜 하필 엡손이야?" "배를 살 때 신분을 묻는데, 아는 부자는 엡손뿐이라서." "엡손은 어떻게 알았어?" "엄리쳐지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댓가는 뭐야?" "뭘 원하는데?" "한 번 하자." "무슨 소리에요?" 에쉴리가 목청을 높였다. 에쉴리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 같았다. 대사제는 난처해서 헛기침을 했고 성녀도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조르주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하는게 한 마 리의 칠면조 같았다. 하이론동생들의 표정도 묘해졌다. 하이론만 신이 나서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 다. "내가 하면 안 될까?" 하이론이 나섰다. "당신이? 복상사 하려고 그래?" 하이론은 씩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다. "일단 두고봐." 하이론은 데미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데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이지?"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는 환하게 웃었다. 티없이 맑은 싱그러운 웃음이다. 데미는 하이론의 팔 짱을 꼈다. 둘은 다정하게 웃으며 선실을 나갔다. " ." 침묵이 선실을 덮었다. "험험험." 괜히 무안한 대사제 파올이 헛기침을 했다. 엘란은 에쉴리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성녀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피콜라니협곡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엘란은 깍지를 끼어 뒷머리에 대었다. 조르주 는 팔짱을 끼고 간간이 검지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들겼고, 대사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성녀와 에쉴리는 단정히 손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겼다. 한 동안 생각에 잠겼지만 별 뽀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엘란 은 점점 다급해졌다. 도둑질한 것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수배령이 언제 떨어질지 몰랐다.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다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따를게 뻔했다. 조용한 가운데 답답 한 시간이 흘러갔다. "답답한 선실에 있을게 아니라 일단 나가죠." 엘란은 말을 하며 선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니 시원한 강바람이 옷을 흔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자 다급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갑판에는 고기굽는 냄 새가 진동을 했다. 문득 엘란은 허기가 졌다. 음식이 있는 곳을 향해 가던 엘란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여기서 뭐 합니까?" 선실의 입구에서 쟝이 상가집 개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쟝은 바닥에 털 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세워서 머리를 다리 사이에 넣고는 손으로 감샀다. 어딘가 눌린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말일세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네." "그래서요?" 돌연 쟝의 고개가 들어올려졌다. 눈을 반짝반짝거리며 힘있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누가 변태라고 욕을 하던 말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 그 방면에서는 내가 최고다. 나를 따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는 권력을 누구는 부를 누구는 힘을 자랑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야! 남자에게는 그 게 최고야. 정력 그거야말로 남자를 남자답게 하는 진정한 힘이지." 힘이 넘치던 쟝의 얼굴에서 일순간 에 힘이 빠졌다. 급격한 표정변화가 무슨 묘기를 부리는 것 같았다. "근데 80노인이 나보다 낫다니, 벌써 3시간째야. 세시간." 데미와 팔짱을 끼고 선실로 들어간 하이론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했다. 쟝의 마지막 말은 차라리 절규같 았다. 엘란은 기가 찼다. 세상에 이런 인간은 처음이다. 엘란은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만난 사람들은 모두 정상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흉하고 욕심많은 다르넨영주, 냉혹하고 무식한 피터, 파보 와 자기를 괴롭혔던 존, 똑똑하고 집념이 강했지만 사악한 면이 있었던 카일, 광법사 일레이저, 물의 시 드는 물론 화염의 길라드까지 모두가 정상이 아니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하이론사형제도 이상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쟝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는가? 변태라는 데미도 이놈에 비하면 정상같았다. 엘란은 한심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쟝을 내려다 보았다. 엘란의 감정은 기막힘에서 시작해서 혐오로 그리고 감탄으로 바뀌었다. '졌다.졌어.' 엘란은 식탁이 차려진 곳으로 가서 음식을 한 무더기 안고 쟝의 곁으로 왔다. "식사는 했어요?" 엘란의 입에서 존댓말이 나왔다. 한 방면에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사람에 대한 대우였다. 존대를 하고 엘란은 빙그레 웃었다. '한 방면의 대가라?' 쟝이 고개를 들었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나보다 열살은 많지 않습니까?" "자네 몇 살인데?" "스물 셋입니다." "난 스물 여덟이야." 쟝은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보여서 중후한 맛이 풍겼다. 콧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나이 들어 보인 지도 몰랐다. 엘란은 쟝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어제 저녁부터 먹은 것 이 없어서 배가 무척 고팠다. 새로구워낸 빵이 향긋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빵다운 빵이었다. 입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햄은 짭짤한 것이 입맛에 딱 맞았다. 포도주는 병채로 마셨다. 처음먹어 보는 것이었 다. 달달한게 색다른 맛이 났다. 스테이크를 먹고 커다란 빵을 하나 더 먹자 배가 불러왔다. 입가심으로 오이와 사과를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쟝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 주 고 배를 한 바퀴 돌고 왔을 때도 쟝은 그 자리에 있었다. "아직까지 있었습니까?" "얼마나 걸리나 보는거다." 목소리에는 오기같기도하고 분노같기도하고 독기같기도한 묘한 기운이 서렸 다. "그래서요?" "나도 도전을 해 봐야지?" 쟝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 쟝은 포기만하고 있지는 않았다.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모양이다. "이 시간동안 계속 그 짓만 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쟝은 금세 반박하고 나섰다. "자네가 데미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데미가 남자하고 방안에 단 둘이 있을 때는 그 짓을 할 때 뿐이야. 평상시에는 혼자만 지내. 밤에도 따로따로 잔단 말이다." "험험," 엘란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게 꼭 그것말고도 딴 방법으로 재미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나도 다른 방법 동원해 봤는데 3시간을 못 넘겼다. 데미는 싫증을 잘내는 여자야." 엘란은 별안간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이 바쁜 시기에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 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돌연 호기심이 들었다. 하이론은 데미와 이토록 오랜시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엘란은 망루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조용히 슈리엘을 불렀다. "하이론이 선실에서 데미와 뭐하고 있는지 보고, 좀 말해줘." 슈리엘의 안색이 묘해지는 것 같았다. 엘란 이 정령술이 발전할수록 슈리엘의 표정도 풍부해졌다. "너 변태냐?" " ." "남의 선실은 왜 훔쳐봐? 그것도 남녀가 있는 방을." "그냥 궁금해서 그래." 슈리엘은 묘한 눈으로 엘란을 보았다. "부탁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계약자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데야 안 들어줄 수가 없다. 슈리엘은 점차로 투명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날아가는 슈리엘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침대위에 데미가 누워있다.) 마음으로 슈리엘의 소리가 전해졌다. 엘란의 경지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하이론은?) (데미를 만지고 있다.) 엘란은 잔뜩 긴장했다. 묘한 흥분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별안간 쟝하고 같이 있다 물이 들은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자세히 말해봐.) (데미의 몸에 뭘 바르는데.) (뭘?) (몸에는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약초를 바르고 있다.) 엘란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맛사지 하고 있었군." 엘란은 그제서야 하이론이 귀부인들에게 노화방지제같이 얼굴에 바르는 포션을 비싸게 팔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 얘기를 하면서 아주 짧잘했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었다. "'예쁘나'였었지" 포션의 이름은 예쁘나였다. 노화도 방지하고 주름살도 방지하면서 피부를 탱탱하고 윤 기있게 만들었다. 유사품이 나돌 지경이라 했다. 귀부인들 사이에는 인기만점이라고 자랑을 늘어 놓았었 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데미도 예쁘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봐야돼?) (그만 됐어. 이상한 부탁해서 미안해.) (괜찮아) 슈리엘이 웃는 것 같았다. 엘란은 슈리엘을 돌려 보내고 망루를 내려왔다. 엘란은 쟝에게 사정을 설명하려다 말았다. 어떻게 알았 냐고 물으면 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남의 방을 몰래 훔쳐 봤다고 하기는 곤란했다. 잠시후 하이론과 데미가 나왔다. 포션이 효과가 있었는지 데미의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햇살을 받은 데미의 얼 굴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때까지 흐르던 색기와는 다른 탈속한 기품이 느껴질 정도였다. 엘란은 하이론 의 실력에 감탄했다. "이야!" 쟝은 엘란의 감탄을 오해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힘없이 일어나서는 휘적휘적 걸어서 사라졌다. "저놈 왜 저래?" 하이론이 물었다. "몰라요." 엘란은 시치미를 뗐다. 데미는 하이론에게 고마움의 윙크를 해주고는 쟝을 따라갔다. 하이론과 엘란은 난간에 기대어 섰다. 둘의 안색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속도가 느리군요." 죽어라 노를 젖는 선원들의 노고에 비하면 느린 속도였다. "배를 능숙하게 모는 사람도 없고. 모두 노만 젖던 사람들이라 돛을 조정하는 선원이나 조타수나 모두 어설퍼. 배가 너무 무거워서 속도를 낼수도 없지만." 하이론은 강을 가리켰다. 배가 깊숙이 들어가 있었 다. "침몰할까 겁난다니까." "짐을 버리면 어떨까요?" "교도들의 짐은 거의 없다. 버릴거나 있나. 시간이 가다보면 가벼워 질거다. 밥들을 많이 먹으라고 했거 든."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가면서 배는 가벼워 질 것이다. "피콜라니협곡의 관문에 대해서 아는게 있습니까?" "소문은 대충들었다. 협곡의 양쪽에 투석기가 20대씩 있고, 각각40명의 기사와 200명의 병사들이 붙어 있다고 들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마법사들도 상당수가 있다고 하더라. 아래에도 병사들이 바글바 글 할거다." "수준은 어떻답니까?" "소문에 기사들은 익스퍼터가 다섯이고 나머지는 소서러라고 했다. 병사들도 훈련이 잘되서 웬만한 기사 보다 낫다고 한다." "상당하군요, 그래도 몰래 들어가서 처리하면 어떨까요?" "포기해라! 전임 왕실수석마법사 듀마가 경계마법을 깔아 놓았다고 했다. 그 외에도 수백년동안 설치한 기관과 마법이 많아. 조용히 처리하기는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4써클 마법사가 매일 두명씩 밤에도 상주 한다고 한다." 엘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뇌물을 주고 통과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그것도 힘들거다. 관문의 책임자는 알센백작으로 뇌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만, 실질적으로 관 문을 관리하는 사람은 샤피로남작이다. 소드익스퍼터의 경지에 다다른 실력자로 성품이 강직하고 융통 성이 없어서 곧이곧대로 검문을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는 이황자의 배도 검문했다는군." "용케 무사하군요." "이황자배포가 큰 모양이더라. 껄껄 웃고 말았다더군. 이황자가 권력다툼에서 이겼다면 이렇게 도망다니 지 않아도 될텐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엘란은 강물을 바라보았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다. "샤피로남작을 처리하고 알센백작에게 뇌물을 먹이면 어떨까요?" 하이론은 말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해 결하기는 싫었다. "내키지 않습니까?" "샤피로남작은 좋은 사람이다. 영지에서 세금도 거의 안 걷는다고 하고, 강직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엘 란은 답답해졌다. 그런 사람을 살리니 죽이니 하는 자신이 싫어질 지경이었다. "일단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직접 보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르죠." "협곡근처에는 가지 마라. 경계마법이 발동해서 경각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 "뭐가?" "지고척결령까지 내렸는데 교를 도와줘서요." "살만큼 살았다. 교도들에게 정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동생들이 행복해하는 것 같아서 떠날 수가 없 다. 나 이외에 동생들이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처음이다. 세명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수화를 배울 줄은 몰랐다." "좋은 사람들이죠." 하이론은 품에서 작은 책자를 하나 끄집어내서는 엘란에게 건넸다. "지고교의 교리를 담은 책이다. 믿든 안 믿든 한 번 읽어 봐라. 명색이 좌호법산데 경전은 읽어 봐야지." 엘란은 책을 받아 품에 넣었다. 강을 바라보던 엘란은 말도 없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물이 튀어 올랐다. 하이론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심각하게 바라 보았다. "조심해라!" "이놈의 영감탱이 나를 속여!" 갑자기 괴성이 들렸다. 쟝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두주먹을 불 끈쥐고 하이론에게 달려들었다. 데미에게 사정을 들은 모양이다. 하이론은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생각 했다. 쟝은 혼자 오해하고 혼자 화내고 있었다. 하이론에게 달려들던 쟝은 금방 바닥으로 패대기 쳐졌 다. 수련은 뒷전이고 방탕하게 놀던 쟝은 4써클마법사의 상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울적하던 하이론은 잘 걸렸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사람살려!" 갑자기 돼지 목따는 듯한 쟝의 비명이 갑판위에 울려 퍼졌다. 엘란은 운디네를 불러 물 속에 숨쉴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흐르는 물살에다 운디네가 힘을 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은 맑았다. 움직이는 물고기들이 그대로 보였다. 작은 물고기떼가 엘란을 보고 놀 라서 흩어졌다. 물 밖으로 나가 슈리엘을 타고 움직이려다 생각을 바꿨다. 물의중급정령과 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상당기간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데 엔다이론과 계약을 맺어두면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 았다. "나 엘란은 엔다이론과 벗 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강물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물고기들은 놀라서 흩어졌다. 일렁거리던 물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었다. 성인여성의 모습을 한 엔다이론 이 엘란의 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엔다이론이여 나와 계약을 해다오." 엔다이론이 머리를 숙이더니 사라졌다. "엔다이론!" 물의 정령이 엘란의 앞에 나타나 하늘거렸다. 물 속에서 하늘거리는 엔다이론은 색다른 정취를 가져다 주었다. 엘란은 운다인을 불러보기로 했다. 계약이 실패할 것은 예상하고 있다. 샐라임과의 계약도 실패 했는데 그보다 친화력이 떨어지는 운다인과 계약이 될리가 없다. 강물 속에서 엔다이론과 있다보니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나 엘란은 운다인과 벗 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슈아앙! 엘란의 앞에서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가 생겼다. "헉." 주변의 마나가 진동을 하면서 막대한 마나가 빨려 나갔다. 하마트면 운디네와 엔다이론이 돌아갈 뻔 했다. 친화력이 떨어지는 정령을 부르자 소환에 막대한 마나가 들었다. 엘란은 부담을 줄이려고 엔다 이론을 돌려 보냈다. 소용돌이가 잦아들더니 다르넨에서 본적이 있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동안 정령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나온 물의 정령은 시드가 부리던 운다인은 아니다. 정령사와 계약을 맺은 정령은 다른 정령사의 소환에는 응하지 않는다. 소환에 응하는 정령은 계 약자가 없는 정령이다. 계약을 맺지 않은 정령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소환에 응해야 했다. 슈리엘 의 말에 의하면 태고때부터 내려오는 법칙이라 했다. "그대가 나를 불렀느냐?" "여기에 아무도 없으니 내가 불렀겠죠." "너는 슈리엘과 계약을 맺었구나." "저번에 샐라임도 그러던데 어떻게 아는 겁니까?" "정령의 냄새가 났다. 인간은 맏을 수 없는 그런 냄새지." 운다인은 엘란을 물끄러미 보았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구나. 벌써 슈리엘과 계약을 맺었다니. 그래도 다른 정령과 계약을 할 능력은 안되 어 보이는데 나는 왜 불렀느냐?" "700년전의 정령사는 상급정령 셋과 계약을 맺었다는데 내가 못 할 것도 없죠." "비르발을 말하는 구나." "비르발을 아십니까?" "비르발은 정령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지. 대단히 강했다. 내가 사는 동안 인간중에서 그렇게 강한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사셨습니까?" "5000년! 그동안 상급정령과 둘이상 계약을 한 사람은 없다. " "비르발이 한 일을 제가 못 할 리가 없죠." 엘란은 오기가 나서 말했다. "광오한 아이로구나, 너는 이제 막 비기너의 단계를 벗어나려 하는구나. 비르발은 니 나이때 이미 상급 정령익스퍼터였다.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상급정령마스터와 익스퍼터의 단계는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중급정령사에서 상급정령사로 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렵다. 5,000년 동안 그 벽을 넘은 사람은 그 뿐이다. 내가 아는 한 그 전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역사상 유일한 사람이다." "그가 한 일을 제가 못 할리 없습니다." 엘란은 힘주어 말했다. 꽉다문 입술이 그의 굳은 의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느냐? 지금도 너를 대적할 만한 자는 손가락으로 꼽힐텐데." "강해져야 합니다. 지켜줄 사람이 많거든요." 엘란은 운다인이 웃는다고 생각했다. "기대하고 있으마." 운다인은 점점 엷어 지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엘란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운다인 의 소환과 유지에는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었다. 친화력이 떨어지는 정령과는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엘 란은 서서히 물밖으로 튀어 올랐다. "슈리엘!" 정령을 부른 엘란은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그리고는 일직선으로 협곡으로 향했다. 강은 구불 거리며 흘렀다. 직선으로 나르면 거리가 단축이 된다. 근처에서 상선이 한 척 롬바르드로 향하고 있었 다. "이봐 저거 봤어?" "뭐?" "강물 속에서 사람이 튀어 나오더니 하늘을 날아갔어." "이 사람 대낮부터 잠꼬대 하는거야 뭐야!" "정말 봤다니까." 사내는 말을 한 사람의 입에 코를 갖다 댔다. "너 또 술 쳐먹었구나. 일할 때 술먹은거 들키면 치도곤 당하는거 알면서 왜 자꾸 마셔." "나 취한거 아냐! 분명히 봤다니까."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일이나 열심히 해." 할 일이 많았던 사내는 신경을 끊었다. 술주정을 받아줄 시간은 없다. "분명히 봤는데. 허, 참 헛것을 봤나." 엘란을 봤던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엘란(40) 성벽경비대장 믹은 골이 지끈거렸다. "이 개자식들이 어디 처박혀 있는거야?" 성벽뒤에 위치한 경비대본부에서 믹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야거와 경비대원 20명이 없어진 것이다. 이들이 없어진지 만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처음에는 어디 처박혀서 술이라도 푸는 줄 알았다. 보 기 싫은 야거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은연중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이다. 요즘은 불시에 붉은도끼단에서 점검을 자주 나왔는데, 내전으로 흐트러진 군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성벽경비대와 롬바르드수비대는 모두 붉은도끼단의 관할하에 있었다. 한,두명 이 빠지면 둘러댈 수도 있으련만, 스무명이나 빠지니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 사이에 찾아야 한다. 정밀감사라도 나오면 그날 근무도 안 서고 여자를 끼고 본부에서 잔게 들통이 날 것이다. 그러면 끝장 이다. 믹은 부하들을 풀었다. 오늘 중으로 꼭 찾아야 한다. 엘란은 슈리엘과 함께 날고 있었다. 아래로 산과 들이 펼쳐졌다. 엘란은 품속에서 경전을 꺼내 들었다. 파라락! 바람에 책장이 날렸다. 왼손으로 꽉 움켜쥐고 책장을 펼쳤다. 처음에는 교도들이 지켜야 할 7계명이 굵 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1. 살인하지 마라. '나는 못 지키겠군.'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계율이 나왔다. 교를 수호하는 좌호법사로서 불가능한 계율 이다. 지금처럼 말살령이 내려진 상태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2.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 첫 번째 계율과 일맥상통했다. 엘란은 기분이 언잖아졌다. 지킬 수 없는 계율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 다. 엘란은 이때까지 자기가 죽인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용병시절에 앞을 막았던 산적들과 밤의그림 자, 교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던 수비대원, 그리고 피터. 후회는 하지 않는다. 엘란은 마음을 가 다듬었다.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는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3. 나의 이득을 위해 남을 속이지 마라. 4. 도둑질 하지 마라. '이것도 이미 어겼군.' 지고교도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도둑질도 했고, 해운조합장과 구말리아상단도 속 였다. 배를 판 대금이 훔친 돈이란 것이 들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계명에 신경을 쓰지 않으 려 했지만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5. 간음하지 마라. 엘란은 빙그레 웃었다. "쟝하고 데미는 절대 못 지키겠다." 그 뒤부터는 지배계급과 타신전과의 불화를 야기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6.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정당한 이유없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된다. 귀족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계율이다. 자신들의 모든 부는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한 결과 이다. 지고교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7. 만물은 지고앞에 평등하다. 신분제의 근간을 흔들만한 내용이다. 6계명과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이 이를 가는 계율이었다. 타 신전도 지고를 탄압하는 이유가 되는 계율이었다. 교도가 지켜야할 계명은 모두 일곱가지였다. 엘란은 책장을 넘겼다. 그 뒤부터는 지고가 세상을 창조한 과정을 적어 놓았다. 지고가 만물을 창조했으며 신도 만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교리를 적어 놓았다. 마지막은 지고교의 역사 를 죽 적어놓았다. 피의 역사였다. 글자 하나하나에 교도들의 피가 맺혀 있었다. 학살의 역사였다. 역사 는 교도들이 롬바르드에 정착을 하면서 끝나 있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쓰여져서 뒷 부분에 첨가될 것이다. 엘란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7계명의 4가지를 벌써 어겼던 것이다. 지고가 있다면 지옥에 떨어 질 것 같았다. '지고가 없기를 바래야 하나?' 엘란은 아이러니를 느끼며 허탈하게 웃었다. 지고의 역사도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간략하게 씌여진 지고교의 역사는 극심한 탄압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선대의 한이 그대로 느껴졌다. 엘란은 속도를 높였 다. 칼날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 피콜라니협곡의 지형은 여러모로 이상했다. 험준한 융커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아갈리아산맥은 점점 낮아져서 롬바르드라는 구릉지대와 대분지를 이 루었다. 그 이후 조금씩 높아지다 급격하게 산세가 낮아져서 낮은 구릉가 넓은 들을 이루었다. 협곡은 갑작스럽게 튀어 나온 지형이다. 주변은 거의 평야였다. 도저히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지형같지 않았다. 누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아득한 옛날 용신전쟁의 잔재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 누가 알 겠는가. 용신전쟁도 반신반의 하는 판국에. 그때는 문자도 없던 까마득한 옛날이라 구전에 의존할 수밖 에 없었다. 이때까지 그런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다는 것만해도 신기한 일이다. 엘란은 힘이 떨어 지면 물속으로 들어가 운디네로 감싸고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맏기며 잠이 들었다. 의외로 아주 편안했다. 쉬지 않고 달려서 이틀만에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고교도들은 운이 좋았다. 아직 들통이 나지 않 고 있었다. 엘란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콰콰콰콰! 강물이 좁은 협곡을 맹렬히 지나가며 굉음을 울리고 있다. 엘란은 양 협곡을 주의깊게 살폈다. 이상하게 뭉쳐진 마나가 느껴졌다. 많은 마법트랩이 걸려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엘란은 마법을 해체할 자신이 없 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나 실력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협곡의 왼쪽은 꽤 넓은 지대가 있어서 수많 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피콜라니검문소였다. 이 부근은 황제의 직영지다. 드나드는 배에 대해 관문세 를 받아서 재정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요충지이자 재정수입의 보고였다. 당연히 엄선된 기사와 병사 마법사들이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었다. 협곡은 붉은도끼단과 그 휘하병력과 함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슈리엘을 부린다면 배 한 척 정도는 책임지고 통과하게 할 수 있지만 다섯 척은 무리였다. 직접 와보니 더욱 암담했다. 엘란은 제일 높은 건물의 지붕에 내려섰다. 지붕에 드러누 워 하늘을 보았다. 시간은 벌써 한 밤이다. 별들이 고개를 빠꼼히 내밀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엘란이 누워있는 건물로 다섯명의 사람이 다가서고 있었다. 한 명은 이들을 안내하는 기사였고, 네명은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신관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네명은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체형이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서 마주친 자들이 분명했다. 엘란은 은밀히 슈리엘을 불러 소리를 차단하고 지붕을 뜯은 후 은밀하게 아래로 내려가 대들보에 몸을 숨겼다. 기사는 건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네명이 조용히 모 자를 벗었다. 하겐사형제였다. 대머리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놈들이 여기는 웬일이지.' 음모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하겐사형제가 협곡경비대에 은밀히 들어올 일이 뭐가 있는가. 싸움을 한다면 몰라도. "어서오게." 책상 뒤에 거만하게 앉아있던 중년사내가 반갑게 맞았다. "알센백작. 무슨 일인가?" 하겐이 음산하게 물었다. 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엘란은 상당히 놀랐단 하겐사형제같은 인간 말종과 협곡경비대장 알센백작이 은밀한 만남을 갖고 있다. "처리해 줄 놈이 하나 있다." 중년사내가 흉악하게 웃었다. 누런이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누구를?" 별다른 대화가 없는 걸로 봐서 한 두해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샤피로 남작!" 알센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어지간히 감정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놈을 처리하려면 힘 좀 들텐데." 하겐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샤피로는 소드익스퍼터였다. 무시할 수 있는 기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는 적의 안마당이다. 일거에 격살하지 못하면 소리를 듣고 기사들 이 몰려 올게 뻔했다. 하겐사형제가 죽기살기로 같이 덤비면 승산은 있겠지만 반 정도는 무사하지 못 할게 뻔했다. 알센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에는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알센은 주머니를 건넸다. "이게 뭔가?" "마각초!" 하겐은 깜짝놀랐다. "이 귀한걸 어떻게 구했나?" 마각초는 태우면 사람의 몸을 마비시키는 독성이 있었다. 연기가 무색 무취해서 암살에 많이 이용되었 다. 몸은 마비되어도 정신은 말짱해서 원한이 있는 자가 복수를 하려고 많이 이용했다. 복수하는 자가 누군지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워낙에 귀한 풀이라 구하기가 어려웠다. 알센백작은 대답없이 작은 상자 를 하나 건넸다. "안에는 이백골덴이 들었다. 오늘 밤 안으로 처리해 주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자연사로 위장해야 한다 는 점이다." 하겐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처리하지." 하겐형제는 일어났다. 알센백작에게 샤피로남작은 눈의 가시였다. 이 물좋은 곳에서 생기는 것이 전혀 없었다. 샤피로 남작이 원리원칙대로 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다. 위에서는 뭐 없냐고 은근히 눈치를 주는 데 받은게 있어야 줄 것 아닌가. 뇌물을 줘도 변하는게 없자 협곡을 통과하는 상선도 더 이상 답례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쫓아내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워낙 청렴해서 꼬투리를 잡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부하들은 샤피로남작이 꽉 쥐고 있었다. 자기 말은 잘 먹히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부하는 수도에서 직접 데리고 온 부관 둘 밖에 없었다. 위에다 부하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보고도 할 수 없었다. 자기 무능을 과시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알센백작은 손을 꽉 쥐었다. "그러길래 진작 말을 들었으면 내가 이렇게 까지 할 리가 있나. 이게 다 자업자득이다." 엘란은 뚫고 내려온 지붕을 다시 막고 하겐형제를 미행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잘 된 일인가?' 남작이 죽으면 알센백작에게 뇌물을 먹이고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엘란은 뒤를 따르며 이런저런 생각 에 빠졌다. 안내는 올 때와 마찬가지고 그 기사가 맏았다. 기사는 순찰시간과 지역을 잘 알았는지 순찰 한 번 걸리지 않고 은밀히 움직였다. 경비는 아주 삼엄했다. 엘란은 높은 하늘에서 몸을 가리고 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 했다. 이윽고 하겐형제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었다. 남 작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암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건물은 작은 목조건물인데 부대장의 거처로 는 대단히 검소해 보였다. 유일한 호사라면 곳곳에 있는 유리창이었다. 유리는 귀한 건축재료였다. "한 시간 동안은 순찰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 처리해야 합니다. 저는 이제 근무지로 가야 합니다. 일이 끝나거든 저 쪽 길을 따라 가세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기사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군기가 대단히 엄 해서 근무지를 벗어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사일런스." 하겐이 침묵마법을 걸었다. 동생들이 조심조심 나무벽을 뜯어냈다. 작은 구멍이 생기자 마각초를 피워서 구멍으로 연기를 집어 넣었다. 마법으로 조종된 바람이 연기를 싣고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연기를 넣은 지 십분 후 하겐이 일어섰다. "들어가자!" 그들은 당당히 문으로 들어섰다. 4써클마법사에게 나무문은 장애물이 되지 못 한다. 형제들 은 쉽게 안으로 들어서서 창문을 활짝 열고는 환기를 시켰다. 샤피로는 전신이 마비된 채 눈만 꿈뻑거 렸다. "흐흐흐흐." 하겐이 음산하게 웃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자연사처럼 보여야 하기 때 문에 고통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형 내가 처리하죠." 둘째가 나섰다. "그래라." 하겐은 순순히 물러났다. 살인을 마다 할 하겐이 아니지만 흔적없이 죽이는 것은 둘째가 전문이었다. 둘 째는 마법으로 샤피로의 심장을 서서히 압박했다. 심장마비로 위장하려는 것이다. 쩌엉! 갑자기 날카로운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조용해라 시끄럽잖아." 하겐이 주의를 주었다. 쩌엉! 날카로운 소음이 다시 들렸다. 하겐은 짜증이 밀려왔다. "이 자식들이!" 하겐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쿵! 하겐의 몸이 무너졌다. "으악." 하겐은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하겐은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이상한 잔해들이 보였다. "으으악!" 동생들의 시체였다. 하겐은 바닥을 기었다.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하겐의 머리가 서서히 올라 갔다. "너 너는?" 아는 얼굴이다. 무엇이 마음에 안드는지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여전히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 군요." 엘란은 나직히 말했다. 자기가 해 놓은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닥에는 하겐형제의 시체가 굴러 다녔다. "실프!" 실프가 하겐의 몸을 뚫었다. 원독에 찬 시선으로 엘란을 노려보던 하겐의 눈이 감겼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던 하겐형제는 허무하게 죽었다. 하겐이라면 이를 갈던 바룬의 신관들이 이 일을 알면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샤피로는 몸을 움직이려고 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기 마늘 있습니까?" " ." 마각초에 중독된 샤피로가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엘란은 밖으로 나왔다. 마늘은 건물의 벽에 걸려 있었다. "마늘을 좋아하나 보군요. 보통 냄새 난다고 잘 안 먹는데." 엘란은 마늘을 갖고 샤피로에게로 다가갔다. 엘란은 샤피로의 옆에서 마늘을 깠다. 샤피로의 가슴속으로 공포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자기는 몸이 마비되서 꼼짝도 못하는데 사람들을 아무 주저없이 토막내던 자가 옆에 앉아서 말도 없이 마늘을 까고 있다. 평소 담이 크다고 자부하던 샤피로도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놈이 나를 요리해서 먹으려나 보다.' 샤피로는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면 서슴없이 목숨을 줄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던 마늘 과 함께 정신병자의 입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꿈에서라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엘란은 마 늘을 곱게 빻았다. 엘란이 마늘을 갖고 서서히 다가오자 샤피로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엘란은 샤피로의 입을 벌리고 마늘을 밀어 넣었다. 잘 넘어가지 않아서 정령까지 동원해야 했다. 코 밑에도 마늘을 발랐 다. "이게 무슨 짓이냐?" 고함이 방안을 뒤 흔들었다. "엉!" 샤피로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갑자기 마비가 풀린 것이다. 샤피로는 벌떡 일어났다. 마비가 완전 히 풀린 것은 아니라서 몸동작이 어색했다. 마각초에는 마늘이 특효약이었다. 하이론에게서 배운 지식이 었다. "경비병! 경비병!"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소리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생명의 은인이죠." "음." 샤피로가 신음성을 흘렸다. "어떻게 된거요?" 샤피로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엘란은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알센 이 자가." 샤피로는 이를 갈았다. 자기를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숨까지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란은 죽게 내버려 두려다 마음을 돌렸다. 하이론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영주가 바뀌면 영지민들이 힘들어 질 지도 모른다. 요구를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자기 손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고, 목 숨을 노린 하겐형제도 처리해주었으니 죄책감도 덜했다. "원하는게 뭔가?" 샤피로의 머리가 평소 상태로 돌아와 민활하게 움직였다. "내일 쯤 내가 상단을 몰고 내려올텐데 검문없이 보내 주시오." "거부한다면." "당신은 죽소." 엘란은 단호히 말했다. 굳센의지가 묻어 나왔다. 샤피로는 한 눈에 엘란이 자기 말대로 할 것을 느꼈다. 샤피로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좋다, 대신 내 부탁도 한가지 들어줘야 한다." "말 하시오!" 엘란의 즉각적인 대답에 샤피로는 말은 않고 엘란을 살폈다. "내 말을 믿나? 약속을 어기고 상단을 막을 수도 있는데." "당신은 정직한 기사라고 들었습니다. 명예를 아는 자라면 목숨을 살려준 은인을 속이지는 않을 겁니 다." 샤피로의 얼굴이 엘란의 얼굴에 바짝 다가왔다. "검문은 생략해 주겠다. 대신 협곡을 지나면 두 사람을 태워주기 바란다. 검은색 망토로 전신을 감싼 남 녀다. 다르단선착장에 잠시 서 있으면 두 사람이 접근할 것이다. 한가지 분명히 말해 둘 것은 대단히 위 험한 일이다. 싫다면 나를 죽이고 떠나라." 샤피로의 음성도 단호했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말투였다. "좋소. 당신은 나를 믿소? 협곡을 통과하고 약속을 어긴다면 당신은 방법이 없잖소?" "나도 자네를 믿는다." "나는 기사도 아니고, 의심스러운데가 많은 사람이데도?" 샤피로가 엘란의 눈을 빤히 보았다. "나도 사람보는 눈이 있다. 자네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약속은 꼭 지킨다." "부탁이 있습니다." "뭐요?" "냄새나니 좀 떨어져 주십시오." 샤피로의 입에서 마늘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험험." 샤피로의 얼굴이 무안으로 붉어졌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엘란은 정령을 불러서 하겐형제의 시체를 싣고 날아 올랐다. "후~" 샤피로는 한숨을 쉬었다. 한 바탕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바닥의 핏자국이 없었다면 꿈이라 생각했 을 것이다. 엘란은 하겐형제의 시체를 묻은 후 강을 거슬러 올랐다. 어서 빨리 배로 돌아가야 했다. 하 루가 지난 후 엘란은 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서 뭐하십니까?" "어머!" 갑자기 나타난 얼굴에 에쉴리가 깜짝 놀랐다. "놀라게 해 드렸나요?" "아뇨, 괜찮아요." 에쉴리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났다. 아름다운 여신 같았다. 엘란은 자신도 모르게 에쉴리 에게 입맞춤을 했다. 에쉴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피할 새도 없었다. 엘란의 심장이 급격히 뛰었다. 둘 사이에서 묘한 공기가 흘렀다. 엘란이 뭐라 말하려는데 하이론이 산통을 깼 다. "엘란! 언제 온거냐?" "방금요." 엘란의 얼굴에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어떻게 됐어?" 하이론은 다급하게 물었다. 평상시였다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다. 요사이 걱 정이 많아서 신경을 많이 쓴 탓으로 감이 떨어져 있었다. "잘 됐어요." 교의 중추인물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엘란은 이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했다. "샤피로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제 산티아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샤피로는 믿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거요. 그 보다 샤피로가 부탁 한 두 사람이 신경쓰입니다. 자기 입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면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할텐데 ." 하이 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직감적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어쩔수 없었습니다. 교도들이 탄 배가 무사히 협곡을 지나는 길을 그 뿐입니다." 엘란이 조용히 말했다. 엘란의 말이 맞았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 일은 그렇게 결정합시다. 샤피로는 그렇게 해결한다 해도 알센백작은 어떻게 하죠? 협곡을 맡고 있 는 책임자는 알센백작이 아닙니까?" 성녀가 말했다. "그 사람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뇌물을 받으려고 샤피로마저 죽이려는 잔데 말해 뭐하겠습니까. 돈으로 쉽게 해결이 될 겁니다."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한시름 놓은 표정이다.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자 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나가고 엘란과 하이론만이 남았다. "나는 아무래도 샤피로의 부탁이 마음에 걸려. 남작은 자기 목숨을 구해줬다고 그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 이 아냐, 뭔가 있어." 하이론이 미간을 모았다. 걱정이 있을 때의 버릇이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죠." 엘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지 어딜가나?" "지금쯤 들통날 때가 됐어요. 속도를 높여야 합니다." 엘란은 실피드 다섯을 불렀다. 실피드는 다섯 척의 배에 바람을 불어 주었다. 거센 바람을 받은 돛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갑자기 배의 속도가 높아졌 다. 엘란은 신경을 집중해서 실피드를 조정했다.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 배는 물살을 가르면 쏜살같이 질주했다. ************************** "이놈들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수비대가 실종한지 나흘이 지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 몰려가 서 술이라도 쳐먹고 나가떨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 집으로 사람을 보내도 아무도 없었다. 가족들은 대 원들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자 대원들을 찾아 하나 둘 경비대로 몰려 들었다. 믹은 특별훈련중이라고 둘 러댔다. 다급새진 믹은 똥줄이 탔다. 슬금슬금 불길한 생각이 올라왔다. "대장님 대원들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듀푠이 집무실로 들어서며 외쳤다. 의기양양한 얼굴에는 한 건 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어디에 있어?" 믹이 황급히 소리쳤다.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찾았다면서!" 믹은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목에 시퍼런 핏대가 섰다. "그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았다는 말인데 ." 듀푠이 믹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거라도 어서 말해!" "대원들이 없어진 그날 밤에 경비대원들이 빈민촌의 뒷 산을 오르는걸 봤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친놈들, 한 밤중에 빈민촌에는 왜 간거야?" 믹은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빈민촌에 뭐 뜯어먹을게 있다고 기기까지 기어들어갔는가. "그거야 모르죠." 듀푠의 멍청한 얼굴은 불에다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열이 뻐쳐 오른 믹은 듀푠의 얼굴에 컵을 집어 던 졌다. 퍽!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빈민촌으로 대원들을 보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 컵과 인사를 나눈 듀푠의 코가 터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듀푠의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찼다. '개자식! 내가 대원들 찾느라고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돌아서는 듀푠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듀푠의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서 엉망이었다. 대원들을 찾아 죽 기살기로 돌아다닌 결과였다. 빈민촌에서 정보를 얻어 온 것도 듀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빈민촌에 들 어갈 생각도 안 했다. 그래서 그들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성벽경비대가 뜯어먹을 것도 없는 빈민촌으로 갔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얻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상 은 커녕 돌아온 것이라고는 컵이 다였다. '두고 보자!' 독한 마음을 품은 듀푠은 그 길로 붉은도끼단을 찾아서 요근래 있었던 일을 자세히 까발렸다. 믹의 무 능이 최대한 들어나는 쪽으로. 붉은도끼단에 비상이 걸렸다. 경비대원 21명의 실종은 보통 일이 아니다. 불순분자들이 준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황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경비대원 의 실종은 일급으로 분류되 재빨리 정보망을 따라 흘러갔다. 붉은도끼단에서 아테보로자작이 직접 나섰 다.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하게 본 증거였다. ******************************* 칸토나백작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은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너무 일이 잘 풀려 불안할 지경이었다. 칸토나백작은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칸토나는 평범한 평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머리가 비상했 다. 부모들은 칸토나에게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들은 하루도 쉬지않고 개미처럼 일했다. 하루 종일 쉴새없이 일해도 칸토나 학비 대기가 벅찼다. 물려받은 재산은 한 여름의 얼음처럼 서서히 없어졌 지만 밥은 굶어도 칸토나의 학비는 빼먹지 않았다. 친척들은 그런 두 사람을 비웃었다. 아무리 배운다 하더라도 귀족세상에서 출세하기는 틀렸다고 뒤에서 수근거렸다. 두 사람을 만나면 혹시나 돈이라도 빌 려달라고 할까봐 피하기 바빳다. 칸토나는 엘리오트왕립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엘리오트왕립 학교는 왕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기사와 관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마법사와 정령사는 따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 대부분 귀족의 자제이거나 부유한 평민의 자제였다. 가난한 평민은 칸토나가 유일했다. 그 즈음 칸토나의 집안은 엉망이었다. 엄청난 학비 부담에 가족은 빈민촌으로 들어가야 했다. 부모의 기 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칸토나는 죽어라 공부했다. 그러나,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엄격한 사회체제 하 에서는 출세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하급관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칸토나는 진로를 수정했 다. 돈을 벌기로 결심한 것이다. 학교에서 귀족들에게 받는 멸시도 한 몫을 했다. 칸토나는 학교를 때려 치우고 상단에서 사환으로 출발했다. 특유의 총명과 학교에서 닦은 지식, 근면성으로 금새 두각을 나타 내더니 25세에 자신의 이름으로 상사를 차리고 독립했다. 부를 쌓아가던 칸토나는 25년전 전대국왕의 권력쟁탈전에 뛰어들어 뒷 돈을 대고 그 대가로 생선의 독점판매권을 얻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 이후 사업을 확대해 카르덴의 무기산업과 아갈리아산맥의 보석산업, 포강유역의 목화농장을 장악함으로 서 엘리오트 최고의 거부로 떠올랐다.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는 식량의 생산을 제외한 전 산업에서 두각 을 나타냈다. 모든 거부가 그렇듯이 칸토나도 귀족의 작위를 샀다. 거부들은 모두 그랬다. 보통 자작이 나 남작의 작위를 샀다. 그 이상의 작위를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돈이 모자라는 사람은 종남작이나 종 자작을 샀다. 종자가 붙은 작위는 세습권이 없었다. 세습을 하려면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 때마 다 돈이 들었다. 칸토나도 자작이었다. 미카엘삼황자와 마르시앙이황자의 내전에서 재빨리 삼황자편에 가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백작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나라의 건국시를 제외하고 평민이 백작의 작 위를 얻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칸토나는 야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더 부자가 되기를 원했 다. 엘리오트제일을 넘어서 대륙최고의 부자가 되고 싶었다. 대륙최고의 부자는 항상 아스가르드에 있었 다. 아스가르드는 땅이 비옥하고 강이 많아서 국토 전체에서 식량이 풍족하게 나왔다. 포강 유역은 단일 지역으로서는 최고의 밀산지였고 생산량도 대륙최고였지만 포강의 상태에 따라 영향이 심했다. 포강유 역에 홍수나 가뭄이 닥치면 생산량이 확 줄었다. 나머지 땅은 척박하기도 하거니와 물이 모자랐다. 이에 반해 아스가르드는 전 국토에 물이 풍부했고 땅도 비옥했다. 한 두 군데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산출이 일정했다. 포강의 영향을 크게 받는 엘리오트보다 안정적이었다. 아스가르드에는 금이나 발광석같은 고 가의 금속이 많이 났고 마법금속 미스릴도 풍부하게 묻혀 있었다. 일찍부터 문화와 산업도 발달했다. 나 라의 부는 아스가르드가 훨씬 많았고 최고부자도 모두 아스가르드에서 나왔다. 만약에 훈족이 아스가르 드북부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아스가르드는 엘리오트를 침략했을 것이다. 칸토나 는 그것을 뒤집고 싶었다. 소학교때 자신을 괴롭혔던 급우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 당시에도 학교에서 평범한 평민은 칸토나가 유일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유행하던 놀이는 얇은 철판에 금박을 입힌 금속딱 지치기 였다. 칸토나는 일년 동안 모아두었던 비상금을 털어서 금속딱지를 샀다. 딱지치기를 하다가 잃 어버릴까봐 소중히 간직하던 딱지였다. 그걸 본 귀족의 아이가 칸토나의 딱지를 뺐었다. 칸토나는 울면 서 매달렸다 '너는 딱지가 99장이나 있지만 나는 이것 하나다, 제발 돌려줘' 귀족의 아이는 그런 칸토나를 비웃었다. '나는 100장을 채우고 싶어.' 울며 매달리는 칸토나를 걷어차고는 가버렸다. 칸토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99장이나 가지고 있는 자가 하나밖에 없는 딱지를 빼앗아 거버리는지. 지금 칸토나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도 100개를 채 우고 싶었다. 누가 가지고 있다면 뺏어서라도 대륙 최고의 부자가 되고 싶었다. 칸토나는 한달간의 지사 감사를 마치고 금고는 가는 중이다. 품에는 대지와 풍요 빛의 여신 헬레나의 신상이 있었다. 특별히 비 싼값에 사들인 보물이다. 헬레나여신은 특성상 상인의 수호신으로 불렸고 칸토나도 독실한 신자였다. 이 여신상이 재물을 불러모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칸토나는 금고에 들어섰다. 거대한 건물 전체 가 보물창고였다. 바닥과 벽 천장은 단단한 석재로 만들고 그위에다 충격완화 마법까지 쳐져 있었다. 마 법을 걸어준 마법사들이 절대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한 건물이었다. "으아!" 칸토나의 비명이 금고안에 울려퍼졌다. 바닥에는 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그렇게 자 랑하던 천장은 뻥 뚫려있었다. "감히 어떤 자식이 내 금고를 털어!" 칸토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없어진 물건을 확인한 칸토나는 자신의 줄을 움직였다. 칸토나의 힘은 막강했다. 성벽경비대, 수도수비대, 치안대는 물론 철혈기사단, 레드드래곤기사단에까지 영향력이 미쳤 다. 검은독수리까지 이 일에 매달렸다. 그 무렵 지고교도를 태운 배는 협곡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아테보 로자작은 경비대를 뒤집어 엎고 있었다. 엘란(41) 롬바르드성 경비대에는 폭풍같은 긴장이 몰아치고 있었다. 최고의 정예인 붉은도끼단의 기사들이 경비 대본부를 완전 장악하고 있어서 군기가 반쯤 빠져있던 경비대원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아테 보로자작은 부관의 보고를 받고 있었고, 그 옆에는 사색이 된 경비대장 믹자작이 앉아 있었다. 다리를 이리 저고 꼬고 눈을 쉴새없이 굴리며 손을 비비는 것이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빈민들의 말로는 그날 밤 스무명 정도의 경비대원들이 완전 무장을 갖추고 산을 올랐답니다. 산으로 병 사들을 보내 확인해 본 결과 대원들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빈민촌 수색결과는?"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테보로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의 눈이다. "빈민촌에 빈집이 많았습니다. 빈 집에는 황급히 떠난 듯 남아있는 세간살이들이 많았습니다. 별 볼일 없는 것이긴 하지만 빈민들한테는 소중한 물건들입니다." 아테보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라에서는 빈민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얼마의 인원이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전염병이 돌때마다 사람들을 쫓아내고 불을 질러 집을 태울 뿐이었다. "얼마나?" "빈민촌 주민들을 심문해 본 결과 최소한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아테보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러 가지 가정을 떠올리는 아테보로의 귀로 부관의 낭랑한 음성이 계속 들렸다. "그리고, 경비대의 군기가 엉망입니다. 수시로 근무지를 이탈하는 자가 많고 뒷돈을 받고 성문을 통과시 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믹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 졌다. "그날 밤에도 21명의 대원이 사라졌는데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효율적인 지휘체계가 전혀 잡혀있지 않 습니다." "그날 당직은 누군가?" "믹자작이 직접 당직을 서고 있었습니다. 근무는 서지 않고 본부에서 잤다고 합니다." 부관의 음성이 차 가워졌다. "여자까지 있었답니다." 아테보로가 믹의 얼굴을 노려 보았다.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 았다. "자작 변명을 해보시오. 마지막 기회요." "모함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믹이 발작적으로 외치자 부관은 믹에게 멸시의 시선을 던졌 다. 짝짝! 부관이 박수를 치자 열명의 경비대원들이 들어섰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차례차례 믹의 비리가 쏟 아졌다. 상관을 속일수는 있어도 같이 일하는 동료를 속이기는 힘들다. 믹의 비리는 부하들이 가장 잘 알았다. 믹은 무너져 내렸다. 조사는 완벽했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믹이 할 수 있는 일은 꿇 어 엎드려 선처를 비는 것 뿐이었다. "구금하라!" 아테보로가 차가운 얼굴로 냉정하게 말하자, 믹은 기사들에게 끌려나갔다. 일주일 후 가문에 피해를 주 지 않는 조건으로 목이 잘렸다. 아테보로는 조용히 부관에게 말했다. "사라진 빈민과 경비대원들의 실종에 무슨 관계가 있어 보이나?" "분명히 관계가 있습니다." 부관은 확신하는 음성이다. 아테보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도 같았 다. "이황자와는 관계가 없어서 다행이군. 빈민들이 이황자의 비밀세력일리도 없고...." 아테보로는 중얼거렸 다.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지고!" 아테보로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사교말살령이 떨어지고 만명이 넘는 빈민이 사라졌다. 지고교도들 이 분명했다.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검문검색을 강화하라!" 수도의 병사들이 분주해 졌다. 인접영지로 붉은도끼단명의의 공문이 날아 갔다. ************************ 보석은 행방은 금방 드러났다. 돈이 급한 구말리아상단에서 급히 처분을 한 것이다. 대규모로 풀린 다이 아몬드가 검은독수리의 정보망에 걸렸다. 정보는 기사단을 거쳐 칸토나에게 흘러 들었고 병사들이 파견 되었다. 불똥은 구말리아 상단을 거쳐 해운조합에게 떨어졌다. 보석을 회수 할 방법은 없었다. 보석의 구매자가 모두 귀족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대귀족도 있어서 칸토나가 돌려달라고 하기 곤란했다. 구 말리아 상단에도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구말리아상단도 나름대로 끈이 있었고 피해자이기도 했다. 상태 가 좋치 못한 구말리아상단은 배도 잃고, 돈도 물어주면 파산에 처할 게 분명했다. 다른 상인들도 구말 리아상단의 편을 들어주었으니 너무 잘나가는 칸토나에 대한 질시요 경계였다. 개중에는 고소하게 생각 하는 상인도 많았다. 분노를 터트릴 곳을 찾지 못한 칸토나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 올랐고, 그 불벼락을 해운조합이 뒤집어썼다. 데그우드는 조합의 운영권을 뺏긴 것은 물론 수수료로 받은 10,000골덴까지 물 어줘야 했다. 데그우드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구말리아상단은 손해 본 것이 없었다. 척당 15,000골 덴짜리 배를 20,000골덴에 팔아서 짭잘한 이득을 올렸다. 칸토나에게 25,000골덴을 배상하고도 이득이었 다. 원래는 급매물이라 척당 12,000골덴 정도면 팔 생각이었고 게다가 다섯척을 한 꺼번에 사면 5,000골 덴정도는 할인을 해 줄 수도 있었다. 더우기 대금은 다음날 모두 받았다. 보석을 110,000골덴에 팔아 10%의 추가이득까지 얻었다. 25,000골덴을 배상하고도 엄청난 이문을 남긴 것이다. 데그우드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엡손을 저주했다. 엡손이 아닌게 드러났지만 정체를 알수가 없었으므로 엡손에게 이를 갈았다. 아무 죄없는 엡손은 자다가 가끔씩 귀가 가려워졌다. 아마 데그우드가 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일도 정보라인을 따라 위로 보고 되었다. 칸토나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고소하게 생각할 경쟁 자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정부는 다섯척의 배에 수배령을 내렸다. ************************* 배는 협곡의 출구에 일렬로 늘어섰다. 알센백작은 속이 편치 않았다. 샤피로남작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몸이 불편한지 관사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문병을 핑계삼아 가 본 바로는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개같은 놈들, 돈만 받아 쳐먹고 사라져!' 알센백작은 계속 욕을 해댔다.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었다. 마각초를 구하는데 100골덴이 들었고 하겐 형제에게 200골덴을 줬으니 모두 300골덴을 날린 셈이었다.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백작은 마음을 다 잡았다. 샤피로남작이 아파서 몸져 누운 지금이 기회였다. 알센백작은 직접 배에 올랐다. 부하들을 이끌 고 배에 오른 백작은 공연한 트집을 잡아 야료를 부렸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배를 뒤지지는 않았 고, 서류를 검사하지도 않았다. 돈을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돛은 왜 이렇게 높게 달았나? 규정보다 높잖아!" 알센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젖히고 거만하게 말했다. "백작님 잠시 보시죠." 헤헤거리며 하이론이 백작의 소매를 끌었다. "험험." 헛기침과 함께 백작이 선실로 들어섰다. '얼마나 줄라나?' 백작은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조용히 보내 주신다면 성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돌아올 때는 두배를 드리죠." 하이론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속으로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마 다시 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말년에 별 짓을 다하는구나!' 알센은 흠족했다. 상자안에는 1,000골덴이 들어있었다. 통과료로는 과했다. 게다가 올 때는 두배를 준다 고 했다. 입이 저절로 찢어졌다. 갑자기 샤피로남작에 대한 증오가 맹렬하게 솟구쳤다. '나쁜놈! 그 놈만 없으면 이렇게 짭잘한데 .' 알센은 샤피로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신의 이름을 걸고 맹 세했다. "알았다." 알센백작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철수. 아무 이상 없으니 그대로 통과시킨다." 알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반발이 튀어 나왔다. "안 됩니다. 검문에 예외는 없습니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샤피로남작의 심복 포츠나종남작이다.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는 거냐?" 알센이 핏대를 세웠다. 얼마만의 수입인데 포츠나가 초를 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상부로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센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백작이 발작을 일으키려 할 때 밖에서 고함이 들렸다. "포츠나종남작님 남작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검문을 하고 가겠다고 말씀드려라!" "안 됩니다. 검문은 그만두고 급히 오시랍니다. 대단히 급한 일이랍니다." 포츠나는 상당히 놀랐다. 이런 식으로 급히 부른적은 한 번도 없었다. 포츠나가 부하들을 데리고 급히 배를 떠나자 알센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고, 교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알센까지 배에서 떠나자 지 고교도들을 가득 실은 배는 급히 협곡을 벗어났다. 교도들은 심장이 터져라 노를 저었다. 엘란은 협곡위 의 진지에 있는 마법사들이 눈치를 챌까봐 정령을 부르지 못했다. 배들은 한 척씩 좁은 협곡을 빠져 나 가고 있었다. ******************* "지고교도들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메테르니히공작이 입을 열었다. 공작은 사교척결의 책임자였다. 막 스는 이황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빈민촌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지고교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누구의 판단인가?" "붉은도끼단의 아테보로자작입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보로자작의 판단이라면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공작은 뭔가 개운치가 않았 다. 공작의 예민한 신경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 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나?" "길을 차단하고 검문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방영주들에게도 공문을 띄웠습니다. 곧 잡힐 겁니다." 이상하게 신경이 예민하게 곧두섰다. 공작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의도적으로 즐거운 상상을 했다. 지고교 도들을 잡아다가 직접 고문을 할 생각이다. 손톱을 뽑고 인두로 지져서 비명을 지르는걸 감상 할 생각 이다. 곧두선 신경이 가라앉으며 기분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배도 갈라서 창자도 꺼내야지 , 배, 배? 이런! 배다!!!' 공작은 서류를 뒤졌다. 구말리아상단에서 판 배 의 수배서가 눈에 띄었다. 일선에 수배가 떨어지기 전이었다. "이런 멍청한, 수로를 따라서 대지급으로 명령을 내려라 다섯 척의 배가 보이거든 무조건 묽어 두라고, 수상한 배도 마찬가지다. 도주하는 배는 침몰시켜라! 내가 책임진다. 놓치는 자는 목을 자른다고 해라!" 공작의 명령서가 도처로 날아갔다. 마법사들은 통신을 열었고, 수많은 명령이 하달됐다. 공작부에서 만 든 정보보고서가 검은독수리를 거쳐 도처로 흩어졌다. 공작의 명령은 최우선으로 처리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포츠나종남작과 기사들은 샤피로의 거처로 몰려 들었다. 병사들마저 따라왔다. 샤피로는 굳은 얼굴로 간 밤에 자객이 들었음을 설명했다. 전례에 없던 일이라 어떻게 배를 통과시킬까 고민했는데 간밤의 일은 훌륭한 핑계거리가 되었다. 알센백작에 대한 고마운 마음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포츠나가 이를 갈았다. "알센백작의 짓이 분명합니다." 그때 본부와 협곡위의 진지로 통신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오른쪽진지의 책임자 4써클마법사 라울이 수정구를 들여다 보고 물었다. "구말리아상단이 매각한 배 다섯척이 들어오거든 무조건 묶어두라. 엡손이란 자의 명의로 되어 있을 것 이다. 악마교도가 타고 있다. 불응하거든 무조건 침몰시켜라!" "이런 젠장!" 라울이 뛰쳐나갔다. 아래에서 보고한 바로는 협곡을 통과하는 다섯 척의 배가 구말리아상단에서 팔린 배라고 했다. "투석기를 발사하라! 협곡을 지나는 다섯척의 배는 무조건 침몰시켜라. 명중시키는 자에게 큰 포상이 내 릴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투석기의 줄이 끊기며 거대한 돌덩이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젠장! 들통났다."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식은 땀을 흘리며 협곡위의 진지를 바라보던 하이론이 앓는 소리를 냈다.엘란은 슈리엘을 불러 급히 마지막 배로 갔다. 마지막 배가 막 협곡을 통과하고 있었고, 그 위를 거대한 바위들 이 덮치고 있었다. "베리어!" 엘란은 슈리엘로 마지막 배에 베리어를 쳤다. 슈리엘이 커지더니 거대한 날개를 펼쳐 배를 감 싸 안았다. 쾅! 쾅! 쿠앙! 펑! 퍼어엉! 배위로 쏟아지던 돌덩이들은 베리어에 막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표적을 빗나간 바위는 강물에 떨어 지며 무시무시하 물기둥을 만들었다. 장관이었다. 많은 교도들이 갑판으로 올라 마지막 배를 걱정스럽게 바라 보았고 병사들도 입을 벌리고 배를 보았다. 거대한 슈리엘이 옷자락으로 배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마치 거대한 여신을 보는 것 갔았다. "세상에!" 로이도 ?을 잃고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상급정령은 로이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다섯 척의 배를 밀었다. 들통난 이상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나가야 했다. 배가 속도 를 높일 때 다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반대편 협곡의 진지도 명령에 따라 바위를 발사했다. 크고 작은 다양한 바위와 돌들이 우박이 쏟아지듯 떨어져 내렸다. 다섯번 째 배에 타고 있던 교도들은 겁에 질려 두 다리사이에 머리를 묻고 벌벌 떨었다. 쾅! 쾅! 무서운 굉음이 하늘을 찢었다. 울컥! 엘란은 검붉은 피를 토했다. 요즈음 엘란은 쉴새 없이 움직였다. 소문을 듣고 전속력으로 롬바르드로 돌 아와 칸토나의 집을 털고 배를 산 후 밤새 교도들을 옮겼고, 그 후에도 쉬지를 못해서 협곡으로 날아갔 다가 하겐형제를 죽이고 다시 죽을 힘을 다해 배로 돌아왔다. 그리고, 협곡으로 배를 몰고 오느라 반나 절 동안 실피드를 부린 엘란은 지쳐 있었다. 계속된 무리가 몸에 조금씩 쌓여서 마나의 움직임이 불순 했고 은은하게 마나홀이 저려왔다. 지친 상태에서 실피드 다섯을 부리고 슈리엘로 베리어를 치느라 몸 에 부담이 많이 갔다. 거대한 바위가 베리어에 계속 부딪쳐 오자 너무 지친 나머지 충격이 그대로 몸에 전달 되었다. 지금의 마나로는 슈리엘이 모든 충격을 흡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울컥! 울컥! 피가 셔츠를 붉게 물들였다. 실피드가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다 정신을 두고 있나? 빨리 재장전 하라!" 진지의 병사들도 슈리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라울과 병사들은 급히 투석기에 재장전을 했다. 갑자기 들리는 굉음에 샤피로남작의 거처에 몰려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놀랐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나가는 배에 지고교도들이 타고 있습니다." 본부에서 통신을 한 마법사가 창백하 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포츠나는 경악했다. "모두 출동하라!" 기사들과 병사들은 정신없이 뛰쳐 나갔다. 선착장에는 하?게 질린 얼굴로 알센백작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더러운 놈!" 포츠나는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평상시였다면 백작에 대한 무례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백작은 정신이 없었다. 돈을 받고 지고교도들이 탄 배를 통과 시킨 것이다. 배가 침몰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세상에!" "맙소사!" "우와!" 방금 선착장에 도착한 기사들과 병사들은 감탄성을 터트렸다. 슈리엘의 모습에 경탄이 저절로 터졌다. "슈리엘!" 포츠나는 경악했다. 두 번째 경악이었다. 슈리엘을 부리는 상급정령사는 들어본적이 없었다. 세상에 새 로운 상급정령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지고교에서. 샤피로도 침대에 누워 경악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고교도였다니!" 사교말살령이 내린 것은 알았으나 그들이 지고교도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샤피로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한 동안 머리가 멍한 것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계속 울리는 광음이 정신을 차 리게 만들었다. 샤피로는 묘한 입장에 빠졌다. 무사히 빠져 나가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고 모두 잡아야 한다는 마음도 들었다. 샤피로는 침대밖으로 나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자신은 이 일에서 발을 뺄 생각이 었다. 핑계는 충분했다. 어제는 멀쩡한 것 같더니 자고 일어나니 몸이 납덩이었다. 여독이 있었던 것이 다. 아마 한달은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샤피로는 다시 한 번 알센백작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병사들은 재빨랐다. 협곡을 지나 떠나는 배위로 다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쾅! 쾅! 쾅! 베리어 위를 바위가 두들겼다. 반대편 진지에서도 바위가 쏟아졌다. 슈리엘이 점점 희미해졌 다. 엘란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팟! 슈리엘이 사라졌다. 슈우웅! 슈리엘이 사라지는 동시에 마지막 투석기가 바위를 발사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거대한 바위 가 배위로 떨어져 내렸다. "실피드! 카사!"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쌔액! 붉은선과 푸른선이 나선형으로 꼬이며 바위로 날아들었다. 쿠아앙! 거대한 바위가 잘게 부서져 나갔다. 무서운 위력이었다. 쿵! 엘란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피가 홍건했다. "좌호법사님!" 울먹이는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엘란은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배를 쫓아라! 배를 쫓아!" 알센백작이 정신없이 외쳤다.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백작의 간절한 바램 에도 불구하고 배는 투석기의 사정권을 벗어나 멀어지고 있었다. 엘란이 쓰러진 걸 알지 못하는 포츠나 는 내키지 않았다. 배에서 상급정령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배가 침몰하고 몰살하는 것은 금방이다. 포 츠나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책임을 추궁하느라 감사가 내려 올 것이 분명한데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배를 내려라! 사교의 배를 쫓는다." "예!"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훈련이 잘 된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배에 올라 닻을 올리고 돛을 폈 다. "출발!" 두척의 배가 협곡으로 향했다. 협곡에는 조심조심 접근해야 한다. 물살이 세서 잘못 접근하다가는 물살 에 말려 침몰할 위험이 컷기 때문이다. 천천히 협곡을 지나고 배를 쫓았을 때는 너무 멀어져 있어서 추 격이 곤란했다. 포츠나는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상급정령사를 상대할 수 없다. 배 는 선수를 돌렸다. 선착장에는 망연자실한 알센백작이 주저 앉아 있었다. 한 숨 돌려서 상황을 살필 여 유가 생기자, 포츠나는 알센을 연민에 찬 눈으로 바라 보았다. 생각해 보나 마나 이 자는 뇌물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샤피로남작마저 죽이려 했으니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그 덕에 자신은 책임추궁 에서 한 발짝 멀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포츠나는 샤피로 남작과 마찬가지로 멸시하던 백작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꿈에서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엘리오트왕국은 경악했다. 쉽게 생각한 사교말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쉽게 생각했던 지고 교에 상급정령사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분명히 슈리엘이 맞습니까?" 시드가 굳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상급정령사가 나온 것이다. 상당히 께름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일입니다. 확실합니다." 가빈백작이 말했다. 백작은 검은독수리의 수장으로 정 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놈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욀무트백작이 물었다. 욀무트백작은 일을 이쯤에서 덮었으면 하고 생각 하고 있었다. 엘리오트를 떠난다면 가게 내버려 두자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처리하긴 뭘 어떻게 처리해, 모두 죽여야지!" 공작이 단호히 말했다. 방에는 메테르니히공작과 가빈백작, 욀무트백작, 왕실정령사 시드가 모여 있었다. 발을 빼자는 입장은 욀무트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쫓아서 죽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럼 누굴 보낼 생각이십니까?" "내가 가지." 시드가 나섰다. 새로운 상급정령사의 출현에 호기심이 인 것이다. 실력을 한 번 시험해 보 고 싶었다. "일단 포강하구는 해군이 군함으로 막고, 위에서는 수군을 보내서 동시에 압박합시다." 가빈백작이 말했 다. "수군이라면?" 욀무트백작이 말 끝을 올렸다. "피콜라니협곡의 수군을 동원할 수밖에."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진으로 갈 생각이십니까?" 욀무트가 말했다. 거리를 따라잡는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죠." 시드가 방을 나섰다. 협곡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왕궁과 협곡에는 이동마법진이 설치되어 있 었다. 시드가 나가고 가빈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황자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가벼운 흥분이 방안을 맴돌았다. "막스가 일을 잘하고 있군."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엘란은 광야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몰아치자 누런 흙먼지가 공중으로 비산했고 높이 자란 잡초들이 거센 바람에 날려 뿌리 까지 뽑힐 듯 몸부림 쳤다. "왜 내가 여기 있지? 여기가 어디지?"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엘란은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머리가 띵하고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협곡을 지나며 투석기의 공격을 받던 기억이 떠 올 랐다. 엘란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꺼풀 들어 올리기가 슈리엘 부리는 것 보다 더 힘들었다. "아!" 황무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사막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이 무섭게 내리 쬐고 있다. 갑자 기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 왔다. 목은 바짝 말라왔고, 어느새 입술은 터져서 갈라져 있다. "엘란, 목이 마른가?" 엘란은 벌떡 일어섰다. 눈앞에 카일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 죽었을 텐데?" 카일이 특유의 미소를 띠었다. 치아가 강렬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도 죽은건가?" 멍한 얼굴로 엘란이 물었다. "곧 죽을 거야." 카일이 속삭였다. 영혼마저 끌어 당길 듯한 은근한 말투였다. "꺼져! 내 앞에서 사라져."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엘란은 목청껏 소리 질렀다. 그러나,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미약했다. 엘란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카일을 밀치고 걸었다. 뜨거운 열기가 발바닥을 타고 전신 을 휘감았다. "이건 꿈이다." 엘란은 꿈이라고 확신했다. 죽은게 아니라면. 정신없이 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짭잘한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개자식! 니가 그랬지, 너 때문에 한 발을 잃고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갑자기 존이 엘란의 앞에 나타났다. "넌 대가를 받은거야." 엘란이 힘겹게 말했다. "웃기지마! 난 아무 죄없이 당한거다." 존은 원독에 찬 시선으로 엘란을 노려 보았다. "비켜! 난 할 일이 많아!" "무슨 일? 사람 죽이는 일? 여기서 나가면 또 사람을 죽이겠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엘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난 죄없는 사람 죽인적 없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존이 엘란의 귀에 계속적으로 속삭였다. "그만해!" 엘란이 존의 목을 조였다. 다 죽어가던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몰랐다. "끄어억!" 존의 눈이 허옇게 돌아가며 혀를 빼물었다. 얼굴의 혈관이 툭툭 불거지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또 사람을 죽였구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너희들이냐?" 앞에는 다섯명의 산적이 서 있었다. 용병일을 할 때 죽였던 자들이다. "우리는 왜 죽였느냐?" "우리를 먼저 공격한 건 너희들이다." "너 정도 되면 그냥 살려 보낼 수도 있었잖아." "그때는 싸움의 경험이 없어서, 힘을 능숙하게 조절할 수 없었다. 혼전이라도 벌어지면 동료들이 다칠 수도 있었다." 산적들이 비웃었다. "하하하! 동료들이 다칠까봐 우리를 잔인하게 죽인거냐?" "내가 너희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동료들이 죽었을 거다. 너희들이 살아났다면 다른 사람들을 털며 그들 의 목숨을 뺐었겠지. 산적을 한다면 그런 위험 부담은 감수를 해야지. 너희들은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털지 않았느냐?" "그게 네 죄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엘란은 단호히 외쳤다. "될 수 있다!!" "그럼 또 한 번 죽여보시지." 산적들이 엘란을 붙들고 늘어졌다. "놔!" 엘란이 고함을 질렀다. 산적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엘란은 깊은 산속에 서 있었다. "여기는?" 빈민촌의 뒷산이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수많은 복면인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밤의 그림자?" "그래 우리들이다." 엘란은 어서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 할 늪에 빠진 것 같았 다. "우리는 왜 죽였지." "교도들을 죽일려고 했잖나?" "우리는 지고신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거짓말!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호!" 마스터는 묘한 표정으로 엘란을 보았다. "살기를 흘리면 모두 죽여야 하나? 모든 평범한 사람들도 순간적으로 살의는 품는다. 그렇다고 모두 살 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너도 죽이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아니잖나?" "당신들은 지고의 교단을 고발함으로서 교도들을 죽음의 위험에 빠뜨렸다." "이런, 이런." 마스터는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나라의 명이었다. 국민된 도리로 국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잖은가?" "순수한 뜻은 아니었지. 데미를 죽이기 위해 신자들 15.000명을 죽음의 함정에 빠뜨린 것 아닌가?" "그게 죽을 죄인가?" "죽어 마땅한 죄다. 살아있다면 아직도 청부살인이나 하고 있을테지." "우리가 죽인 자 중에는 악독한 자도 많다. 힘이 없어 복수를 갚지 못하는 자를 도와준 것 뿐이다." "괴변이다. 돈만 주면 아무나 죽였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이도 안다." "죄를 늬우치고 손을 씻을 수도 있다. 전대의 마스터도 그랬다. 네가 신인가 니가 우리들의 죄를 응징할 자격이 있나?" "내가 자격이 있던 없던 너희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다." "그럼 나는 왜 죽였나?" 갑자기 처음 보는 자가 튀어나왔다. 어디에서 이런 자들이 튀어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넌 누구냐?" "죽인 사람의 얼굴도 기억 못하나? 최소한 기억을 해 주는 것이 살해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당신은 기억에 없다." "난 야거다. 지고의 교단에서 너에게 목숨을 잃었지." "기억이 난다. 교도를 인질로 잡던 자로군." "난 군인으로서 국가의 명에 따랐을 뿐이다. 아내가 다음 달이면 해산을 한다. 넌 한 가정을 파괴한 셈 이다." "전쟁상태에서의 살인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 "우리가 전쟁상태였나?" "전쟁상태다. 국가가 사교말살령을 내린 순간부터. 우리를 죽일려는 자는 모두 적이다." "넌 살인마일 뿐이다." 야거가 냉혹하게 말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누워있던 자들이 벌떡 일어나 엘란에게 달려 들었다. 목이 베어져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린 자도 있고, 전신에 검은 피를 흘리는 자도 있다. 잘린 팔을 붙잡고 무기처럼 휘두르며 다가오는 자도 있었다. "윽!" 마스터가 엘란의 목을 졸랐다. 엘란은 마스터의 손을 풀기위해 몸부림쳤다. "죽어라!" "죽어라!" 밤의그림자가 엘란의 팔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마스터의 얼굴이 존의 얼굴이 됐다가 카일의 얼굴로 변했다. "나랑같이 가자!" "으으!" 엘란은 신음을 흘렸다. 숨이막혀 왔다. 엘란은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눈이 서서히 감겼다. "엘란! 엘란!" 신비로운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엘란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붙잡았다. 번쩍! 엘란은 눈을 떳다. 걱정스러운 에쉴리의 얼굴이 보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깨어났군요." 에쉴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또르륵! 눈에 맺힌 이슬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란은 에쉴리를 안았다. 에쉴리의 향기에 정신이 아 득해지며 마음이 안정되었다. "깨어났다고 모두에게 알릴게요. 걱정들이 대단했어요." 일어나려는 에쉴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팔에 힘 이 들어갔다. 이대로 놓아 준다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지 말아요.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요." 에쉴리는 애처로운 눈길로 엘란을 바라 보며 가만히 있 었다. 엘란의 전신은 후끈 달아올랐다. 에쉴리를 이대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엘란은 에쉴리를 침대에 銜히고 그 위에 올랐다. 엘란의 눈과 에쉴리의 눈이 마주쳤다. 엘란의 눈이 달아올랐다. 에쉴리는 겁이 덜컥 났다. 뿌리치고 일어나려는 데 전신에 힘이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 다. 엘란은 떨리는 손으로 에쉴리의 옷을 벗겼다. 눈부신 나체가 들어났다. 에쉴리는 부끄러움에 몸을 돌렸다. 돌아누운 에쉴리의 곡선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엘란은 옷을 벗고 에쉴리를 뒤에서 안았다. 가 슴이 손에 잡혔다. "아!" 엘란이 가슴을 움켜쥐자 에쉴리가 신음을 흘렸다. 엘란은 에쉴리의 몸을 돌렸다. 에쉴리가 눈을 감았다. 길다란 속눈섭이 파르르 떨었다. 엘란은 입을 맞추었다. 길고 깊게. 엘란은 가슴을 만졌다. 뽀얀 살결이 묻어날 것 같았다. 엘란은 에쉴리에게 몸을 실었다. 배는 포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갔다. 하늘에는 만월이 떳다. 유난히 둥근 보름달이다. 보름달은 연인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엘란(42) 10장. 피의 강 엘란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에쉴리는 가고 없었다. 불현듯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탁자에 있는 주 전자를 들어 입에 대고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정신을 일깨웠다. 나가서 에쉴 리를 찾아 볼까 고민하던 엘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서서히 마나를 일으켰다. 마나홀은 공허하게 텅 비어 있었다. 너무 과도한 운용으로 마나가 전신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엘란이 인내심을 가지고 서서 히 유도하자 미약하나마 조금씩 마나가 모여 들었다. 텅빈 마나홀에 한 방울 두 방울 마나가 스며들더 니 이내 냇물이 되어 모였고, 냇물은 금새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다에 모이듯 마나홀에 모여들었다. 마 나홀이 뿌듯해지자 모여든 마나를 전신으로 돌렸다. 아직도 전신에 흩어져 있던 마나가 함께 휩쓸리며 온 몸을 휘돌았다. 정수리의 병목현상은 여전해서 거세게 흐르던 마나는 정수리에서 주춤했다. 길이 너 무 가늘었다. 엘란이 마나수련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는 한 무리의 사람들로 방이 가득차 있었다. "괜찮으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이론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엘란의 대답에 모두 안심한 표정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이틀." 조르주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쫓아오는 사람이나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아직까지는 없어요." 성녀가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포기한 건지도 모르지." 하이론이 반쯤은 희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엘란도 간절한 바램을 담아서 말했다. "조금만 더가면 다르단 선착장입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우호법사 조르주가 모두에게 의견을 물 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일이 심상찮은 일이라는 것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지고교는 남을 속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대사제 파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올의 속마음은 말과는 달라서 그냥 지나치기를 원하고 있었다. "약속은 지켜야합니다. 우리를 도와준 사람인데." 성녀가 단호히 말했다. "꼭 그럴 필요 있나? 위험해 질게 뻔한데......" 하이론이 말을 흐렸다. 하이론은 선착장을 그냥 지나치기 를 바랬다. 위험하다는 신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기어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두 그러 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은 약속을 지키기로 결론을 내려요."성녀가 다시 한 번 단정적으로 말했다. 성녀는 대부분 아랫사 람들의 의견을 존중했으나, 한 번 결정한 사항은 웬만해서는 번복하지 않았다. 모두들 꿀먹은 벙어지처 럼 입을 다문 가운데 일은 그렇게 매듭이 지어졌다. 성녀를 필두로 한 명씩 엘란에게 몸조리 잘하라는 당부를 하고 선실을 빠져나갔다. 선실에는 에쉴리와 엘란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엘란은 에쉴리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바지만 매만지 고 있었다. 뭐라 말을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죄송합니다." 엘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가요?" 에쉴리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어...그게...." 엘란은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러내렸다. 엘란이 당황해서 허둥 거리자 가만히 지켜보던 에쉴리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후회하나요?" "아니!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때 일은 진심입니다." 엘란은 단호히 소리쳤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둘은 한 동안 조용히 있었다. 엘란은 땀으로 젖은 손을 바지에 닦고 살며시 에쉴리의 손을 잡았다. 에쉴 리의 손도 긴장으로 축축히 젖어있었다. 따뜻하 정감이 손을 타고 흘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껴지며 가슴이 훈훈해졌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이 마음을 달구었다. 엘란은 에쉴리를 힘주어 안았다.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 뭐라 말을 하려는데 이상해서 에쉴리를 보니 잠이 들어있었다. 에쉴리는 엘란을 간호하고 돌보느라 전 혀 자지 못한 데다가 어젯밤의 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샌 결과 무척 지쳐 있었다. 순간의 욕정을 이기 지 못해 일어난 일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엘란은 침대에 에쉴리를 銜히고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쿠당탕! 엘란이 문을 열자 하이론과 쟝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엘란은 화가 치밀어 올라 둘을 노려 보았지 만 에쉴리가 깰까봐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이론과 쟝은 겸연쩍게 웃었다. 둘은 에쉴리와 엘란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쟝은 그런 방면으로는 대가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평생을 말 못하 는 동생들과 보낸 하이론도 눈치 하나는 비상했다.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아 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데 갑자기 엘란이 문을 열어 상당히 당황했다. 엘란은 에쉴리와의 사이에 정신이 팔려 주위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하이론이 여전히 겸연적게 웃는 반면에 쟝은 뻔뻔했다. "깨워서 재미 좀 보지그래." 기대를 담아서 아주 은근하게 권유를 한다. 쟝으로서는 배에만 묶여있자 좀 이 쑤셔 미칠지경인데다. 데미가 곁을 주지 않자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 밖으로 둘을 몰아낸 엘란은 아예 무시하고 갑판위로 올라 갔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는 늦은 오후였 다. 물은 잔잔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야트막한 구릉으로 연결 된 주변의 경치는 한 폭의 그림같았다. 난 간에 기대어 강변을 바라보는데 하이론이 다가와 빵과 딸기를 내밀었다. "먹어라, 마지막 딸기다." 딸기는 약간씩 물러 있었다. 딸기를 입에 넣고 씹자 달콤한 과즙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맛있네요." 엘란은 빵을 베어 물었다. 빵에는 햄과 치즈, 양배추, 오이가 들어 있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 해서 배가 무척 고팠다. "몸 상태는 어떠냐?"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엘란은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하이론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기가 다르단 선착장이다." 서서히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선착장이 보이고 그 뒤를 평화로운 마을이 둘러싸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꽤 큰 범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고, 여러척의 고기배와 작은 돛단배들이 그 범선의 주위를 호위하듯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엘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냐?" 그 기척을 느낀 하이론이 급하게 물었다.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 같습니다." "기사가?" 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가볼테니 배는 전속력으로 모십시오."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배에서 조심스레 뛰어내렸다. 선착장에는 햇빛이 서서 히 사라져가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배들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노들이 급히 저어지고 하이론형제 들이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엘란은 은밀하게 선착장으로 스며들었다. 범선은 승객을 태우고 포강을 오르내리는 여객선으로 보였는데 갑판에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주변의 풍광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부분 장사치들이나 여행객으로 보였다. 돛단배는 단순히 강을 건너게 해주고 삵을 받는 것으로 보였 는데 사람들을 부지런히 태우고 있었다. 고깃배에서도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부리고 어구를 손질하는 등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포구의 모습이었다. "빨리 타세요! 오픈호수로 가는 마지막 배편입니다." 선착장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갈색머리를 더부룩하게 기른 작은 소년이 소리쳤다.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 가 더욱 가까워졌다. 마음이 급해진 엘란의 눈은 부지런히 주위를 훑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녀는 보이 지 않았다. 두두두두!! 멀리서 10여기의 말이 선착장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의 귀에도 소리가 들릴 정도 로 가까워지자 엘란은 돛단배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는 승객들 틈에 끼어들었다. "멈춰라!! 모두 움직이지 마라!" 제일 먼저 도착한 기수가 우아한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뒤를 줄줄이 다른 기사들이 따랐는데 모두들 아주 능숙하게 말들을 부렸다. 말들을 급정거시키는 것은 힘든 일임에도 불 구하고 아주 쉽게 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아주 훈련이 잘된 기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참을 숨 고르는 것이, 먼 길을 쉴새없이 달려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기사는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여기를 떠나려는 자는 검문을 받아야 한다. 무단으로 이탈하는 자는 죽는다." 기사 는 단호화게 소리쳤다. 왁자하던 선착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기사의 차가운 기세에 눌려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은 숨도 조심스 레 쉬었다. 두두두두! 말들이 기사를 태우고 속속 도착하자 기사들의 수는 무섭게 불어났다. 가사 한 명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앞으로 힘차게 내뻗자 기사들이 선착장의 주위를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기사들이 선착장을 완벽하게 포 위하는 것은 잠깐이었다. "배를 한 곳으로 모아라!" 기사가 소리치자 호객행위를 하던 더벅머리 소년이 쭈삣쭈삣 기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선장의 명에 따 라 다가오는 것으로 보였다. "저기...." 더벅머리 소년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리가 떨리고 식은 땀을 흘리는 것이 겁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출발할 시간인데....." 가사는 소년의 말을 다 듣지도 않았다. 기사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소년은 말을 더 이상 이을 수 없었 다. 서걱! 소년의 머리는 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 듯 간단하게 바닥으로 떨어져서 굴렀다. 기사가 시범케이스로 소년을 죽인 것이다. 주위에 소름끼치는 공포가 내려앉았다. 소년을 뒤에서 종용하던 선장 은 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공포와 죄책감이 선장의 마음을 아프게 쿡쿡 찔렀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신분증을 지참하고 모두 내려라!" "으음." 엘란은 신음을 삼켰다. 기사들의 갑옷에는 노말소드를 타고오르는 장미덩굴이 그려져 있었다. 대제의 무덤에서 보았던 철혈기 사단의 장식이 분명했다. 수도 주위에 주둔하고 있는 철혈기사단이 다르단포구까지 올 일이 뭐가 있겠 는가?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큰 일에 휘말려든 게 분명했다. '막스!!!' 엘란의 눈에 막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말위에 탄 채로 주변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데 당당하고 오연한 태도가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막스의 매서운 눈은 가끔씩 소름끼치도록 번뜩였다. 엘란의 주먹이 쥐 어지며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막스의 오러탄에 맞아 이스마엘의 팔이 떨어져 나간 장면이 선연히 눈에 떠오르며 불같은 기운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엘란은 솟구치는 불덩이를 필사적으로 누 르며 은밀히 주위를 살폈다. 여기서 막스와 충돌할 수는 없다. 교도들이 무사히 엘리오트를 빠져 나갈 때까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엘리오트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과의 충돌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그러 나,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공산이 컸다. 엘란이 배에 태우려는 사람과 막스가 찾는 사람은 동일인 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선착장 주위를 기사들이 빙 둘러 막았고, 다섯명의 기사가 검문을 했는데 두명은 신분증을 확인하고 세 명은 검문받는 자의 얼굴이나 모습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기사들은 어부들부터 한 명 한 명 검문을 했 는데 얼마나 철저하게 하는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검문을 끝낸 자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선착 장주위에서 쫓겨났다. 사람들은 숨막히는 기세에 눌려 불평 한 마디 토로하지 못했다. 어부들은 고기를 배에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떠나야만 했다. 물고기들은 잘 상해서 잡은 즉시 손질을 해야 했는데, 그런 말을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다. 어부들의 검문이 끝나고, 여행객이나 상인, 배의 주인, 선원, 선 착장 주위에 있던 마을 주민까지 모두 일렬로 늘어서 검문을 받아야 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이나 승 객까지 모두 끌려나와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승객중 한 명이 노성을 터트렸다. 풍채좋은 장년인으로 팔자좋은 지방귀족쯤으로 보였다. 평생을 거들먹 거리며 살았을테니 이런 대접을 받아 본적은 없었을 것이다. 보통때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테지 만 오늘은 달랐다. 눈치없는 지방귀족은 날벼락을 맞았다. "윽!" 기사의 오른 주먹이 장년인의 배에 파고들자 사내는 바닥에 주저앉아 오늘 먹은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왝왝!" 장년인은 처참하게 쭈그려 앉아 계속 토하고 있었고, 검문은 계속 되었다. 그 이후로 불만을 토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엘란이 전신의 감각을 조심스레 열자 주변을 흐르는 긴장이 생생히 느껴졌다. 엘란 은 자신의 감각을 바람에 실어 뒤에 몰려 있는 사람에게로 보냈다. 구석에 몰려 있는 두 사람에게서 색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공포와 긴장 주저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데다가 한 명에게서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때 이상한 기척을 막스도 느꼈는지 막스의 시선도 그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막스가 옆 의 기사에게 조용히 명령하자 그 기사가 다른 두명을 데리고 구석의 두 사람에게로 은밀하게 다가갔다. "놔라!" 구석에 있던 사람이 당황과 분노 두려움을 담아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새 다가간 기사들이 두명을 뒤에 서 붙잡은 것이다. 강철같은 손아귀에 잡힌 두사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른 남자는 격렬히 몸부림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포기했는지 가만히 있었다. 묘한 기운을 풍기던 사람이었다. 막스의 명령을 받았던 기사가 둘의 망토를 벗겼다. "우와!" "오우!" "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망토가 벗겨지자 두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여자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를 덮었고 푸른 눈은 가을의 맑은 하늘보다 더욱 푸르렀다. 얼굴은 계 란형으로 갸름한데 눈은 크고 코는 오똑한 것이 엘리오트의 전형적인 미인상이다. 한 밤의 달빛을 받은 여인은 여신을 방불케 했는데 이상하게도 표정이 없었다. 멍한 것이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안색은 놀랍도록 창백해서 밀가루를 얼굴에 한 겹 씌워놓은 것 같았다. 혈색이 없는 얼굴과 멍한 눈동 자에는 묘한 백치미가 감돌았다. 남자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꽉다문 입술에서 굳센 의지와 오만이 보였다. 억지로 배운다고 익힐 수 없는 자연스런 기품이 전신에 서려 있었는데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기품을 갉아 먹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꺼져라!" 막스의 입에서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나를 실었는지 낮은 음성이 멀리 퍼져 나갔다. 그 둘을 잡으려고 검문을 한 것이었다. 막스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성취감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두 사람에 대해 불같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썰물처럼 자리를 떠야만 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인 법이다. 쓸데없이 호기심을 충족하려다 죽음의 강을 건널 수도 있는 것이다. "데려와라!" 막스가 냉막하게 명령하자 기사들이 두사람을 붙잡고 막스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붉은 머리 남자의 눈이 증오와 분노를 담고 불타올랐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막스의 얼굴이 있었다. 눈 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막스는 벌써 열 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여자의 눈은 여전히 멍했다. 그들은 서서히 엘란의 앞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엘란은 샤피로남작이 부탁 한 사람들이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은 색의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해 보였다. 파아-앗! 두 사람을 잡고 가던 기사들은 섬뜩한 기운에 아래를 내려보았다. 푸우! 갑옷에 미세한 금이 가더니 그 금을 따라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앗!"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막스가 몸을 날렸다. 그 먼거리를 어느새 세 걸음으로 줄여 버렸는데 언제 빼들 었는지 손에는 싯푸런 장검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번뜩였다. "오러 블레이드!" 기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막스의 검에는 찬란한 오러가 피어 올랐다. 기사들에게 잡혀 있던 두 사람의 신형이 당겨진 고무줄이 도로 돌아가 듯 뒤로 죽 밀렸다. 막스의 검에서 오러가 떨어져 나와 남자에게 날아갔다. 대제의 무덤에서 한 번 당한적이 있던 오러탄이다. 엘란이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무 섭게 오러탄을 노려 보았다. "스피릿 컴파운드!" 실피드와 카사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뒤엉켜서는 오러탄을 맞았다. 쾅! 천둥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며 주변의 공기가 진동을 했다. 가까이 있던 기사들 중 실력이 떨어지는 자 들은 그 충격파에 뒤로 밀려 나둥굴었다. 오러탄과 충돌했던 스피릿 컴파운드는 오러탄을 소멸시키고 분리된 채로 주변의 기사들을 덮쳤다. "막아!"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오며 굉음이 지축을 울렸다. 쾅! 기사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소드익스퍼터들이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들의 앞을 막아 방패와 노말소드로 정령들의 공격을 막았다. 실피드와 카사는 주변을 날아다니며 기사들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너는?"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던 막스의 얼굴에 놀람의 기척이 스쳐갔다. 무덤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만난 것이다. 게다가 오러탄을 쉽게 막아낸 걸로 봐서 실력이 일취월장한게 분명했다. '그때 확실히 죽였어야 했어.'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자주 만나는군." 엘란의 눈은 절제된 분노를 안은 채 막스를 노려 보았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그때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막스는 약간의 후회를 담아서 말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엘란이 냉정하게 말했다. 막스는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피식 웃었다. 하얀이가 싱그럽게 보였다. "오늘 죽이면 되지, 후회라고 할거야 있나?" "당신 맘대로 될까?" 엘란도 마주 웃어 주었다. 폭풍같은 기운이 두 사람에게서 일었다. 주변의 공기가 위로 빨려 올라가며 두사람의 옷이 부풀어 올렸다. "실력이 조금 늘었다고, 기고만장 했구나." "언제까지 떠들거냐? 계집애처럼 입으로 싸울 모양이지." 엘란의 도발에 막스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빨리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스의 몸이 빛살처럼 움직였다.막스의 검에 서 오러가 쭈욱 늘어났다. "슈리엘!" 슈아앙! 막스와 엘란의 사이에 바람이 몰리더니 슈리엘이 나타났다. 차아앙!!! 오러블레이드가 슈리엘이 든 바람의 창에 막혔다. 형태도 없는 창은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여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치이익! 오러블레이드와 바람의 창이 맞닿은 곳에서 소리가 끓어 올랐다. 막스는 이를 악물며 마나를 더 욱 더 끌어 올렸다. 오러가 서서히 바람의 창을 갈라왔다. "실프!" 실프 스물이 나타나 쐐기 모양으로 날아갔다. 쌔엑! 실프가 날아들자 막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번개같은 몸놀림이다. 막스의 검이 원형을 그리자 마나막이 둥굴게 형성되며 몸을 보호했다. 막스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든 지가 얼마되지 않아서 미흡한 면이 있었다. 소드마스터는 보통 보호막으로 오러막을 둘렀는데 막스는 오러막을 치지는 못하고 마나로 방어막을 쳤다. 팡팡! 팡! 무섭게 날아간 실프가 마나막에 부딪치며 공기를 찢어발겼다. "슈리엘." 엘란이 나직히 속삭이자 슈리엘이 바람의 창을 던졌다. 쌔에엑!! 창이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실프를 상대하고 있던 막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엘란은 상상이상으로 강해져 있었다. 막스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야 했다. 심장이 급격하게 뛰며 전신이 땀 으로 젖어들었다. 소드를 쥔 손이 땀으로 축축해지며 혈관이 팽창했다. 화아악! 마나막이 붉게 달아오르며 확장을 시작했다. 펑펑펑! 마나막과 부딪친 실프들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쾅아앙!!! 그 때 바람의 창이 마나막을 두들겼다. 강물이 솟구쳐 올라 뒤집어지고 주변의 배들이 날아갔 다. 창이 회전을 시작하자 마나막이 견디지 못하고 깨어져 나갔다. 막스의 검이 오러를 피어 올리며 창 을 맞아갔다. 막스는 검을 들어올려 무겁게 내리그었다. 간단한 동작에 만근의 거력이 실렸다. 콰아앙!! 천둥같은 굉음이 다시 지축을 울렸다. 강물이 다시 솟구쳐 올랐고, 주변의 바람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엘란도 끝장을 볼 생각으로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막스의 허리가 서서히 굽혀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맹렬히 뛰었고 마나의 흐름이 불순해졌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막스는 검을 빗겨 쳐냈다. "으악!!" 뒤에서 싸움을 관전하던 기사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기사들의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퍼졌고, 찢 겨진 살들이 주변을 비상하며 피비를 뿌렸다. 슈리엘의 창을 견뎌낼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빠드득!" 막스가 이를 갈아 부쳤다. 기품있고 오만하게 보이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눈은 실핏줄이 터져 빨갛 게 충혈된데다 얼굴의 혈관까지 툭툭 불거져 흉신악살을 보는 듯 했다. 창을 버티지 못하고 빗겨낸 대 가로 부하들이 죽어나갔다. 처음 맛보는 치욕이요 패배였다. 쑤앙! 힘을 잃고 늘어져 있던 실프가 다시 날아 올라 막스에게 덤벼들었다. 막스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일일이 쳐내며 간간히 오러탄을 날렸다. 펑펑펑!! 오러탄에 맞은 실프는 큰 타격을 받고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오러탄을 맞은 실프를 되돌려 보 냈다. 더 이상 두들겨 맞으면 정령에게나 자신에게나 타격이 온다. 핏! 막스의 얼굴에서 길게 혈선이 그어지며 피가 튀었다. 실프 하나를 막지 못한 대가였다. 슈리엘이 다시 바람의 창을 만들어 던지려 하자 막스가 땅을 박찼다. "저놈들을 죽여라!" 막스가 엘란과의 거리를 좁히며 명령을 내렸다.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한 것 이다. "쏴라!" 한 발 떨어져 상황을 주시하던 엥겔스남작이 화살을 시위에 걸어 쏠 준비를 마치고 있던 궁수에게 명령 을 내렸다. 실력있는 기사들이 날린 화살은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쌔에엑! 마나를 머금은 화살이 엘란과 두 사람에게로 날아들었다. 슈리엘이 세사람을 감싸 안았다. 먼저 도착한 것은 막스의 오러블레이드였다. 쾅! 다시 한 번 굉음이 천지를 찢어 발겼다. 그 뒤를 화살이 따랐다. 펑! 펑! 퍼어엉! 화살이 슈리엘에 부딪쳐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엘란과 막스는 가까운 거리에서 서 로를 노려보았다. 눈의 실핏줄까지 보이는 거리였다. 둘은 비오듯이 땀을 쏟았다. "우와!!" 함성과 함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엘란은 점점 마나의 흐름이 꼬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평상시 때에 비하면 90퍼센트의 힘밖에 내지 못하는 데다 부상까지 도지려하고 있었다. 엘란은 두 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뒤로 날아 올랐다. "서라!!" 고함을 지른 막스는 온 힘을 모아 오러블레이드를 날렸다. 검이 생명이라도 머금은 듯 엘란을 향해 번 개같이 날아들었다. "스피릿 컴파운드!" 쿠아앙!! 검과 정령은 부딪치며 눈부신 섬광을 피어올렸다. 검이 시피릿컴파운드를 뚫고 여전이 날아왔 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은 연속으로 정령들을 날렸다. 콰아앙! 정령과 부딪친 오러블레이드가 공중에서 산산히 터져나갔다. 엘란은 두 사람을 옆구리에 낀 채 슈리엘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 사라져갔다. "으아아!!" 막스의 고함만이 적막한 선착장에 울려 퍼졌다. "단장님 피가...." 부관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막스의 눈을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엄청난 살기에 압도되어 말 을 이어가지 못했다. 막스는 뺨을 어루만졌다. 크게 벌어진 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막스는 필사적으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통신을 열어라." 평정을 회복한 막스가 차갑게 말했다. 기사단을 따라다니던 마법사가 수정구를 가져와 통신을 연결했다. 수정구가 서서히 밝아지며 프르덴틀후작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황자는?" "놓쳤습니다." 막스가 이를 갈아 부쳤다. "어쩌다가?"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황자는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한다. "방해를 받았습니다. 상대는 슈리엘을 부리는 상급정령사였습니다." "젠장!!" 후작이 욕설을 내뱉었다. 대륙에서 상급정령사는 30년동안 물의 시드와 화염의 길라드 둘 뿐이었다. 상 급정령사가 갑자기 쏟아져 나올리가 없으니 그 놈이 여기저기서 일을 방해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슈리엘을 부리던 자가 이십대 초반의 검은머리 청년이냐?" "아시던 자입니까?" "지고교도다." "지고!!!" 막스는 불에 덴것처럼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 놈이 지고교도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악마교도 중에 그런 강자가 있을리 없지 않습니까?" 지고교도들 중에서 그런 강자가 나온 것은 근 천년만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후작은 수도에 서 있었던 도난사건과 경비대원들의 실종, 만명이 넘는 빈민들의 실종과 구말리아상단의 배에 얽힌 소 동, 협곡에서의 충돌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공작부와 철혈기사단 검은독수리의 정보보고서도 읽어 주었 다. 상황은 명백했다. 막스는 이황자를 추격하느라 이런 상황을 보고 받지 못했다. 그만큼 정신없이 몰 아쳐 왔던 것이다. "이황자가 지고와 손을 잡았을까요?" "그건 아닐거다. 손을 잡고 싶어도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손을 잡지. 게다가 지고와 접촉한게 드러나면 전 대륙의 신전과 귀족들의 비난이 쏟아질텐데 그런 자살행위를 할 리가 있겠느냐? 손을 잡았다면 모든 것을 잃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요즘의 일일거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군요." "묘하다니?" "우리가 낸 소문대로 일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구나." 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엘란(43) "알센백작 이 자식부터 주리를 틀어야겠다." 후작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알센백작은 왜?" 막스가 의문을 표했다. 후작은 협곡에서의 상황을 간략하게 말해 줬을 뿐 자세한 상황은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 자식이 뇌물을 먹고 배를 통과시켰다. 샤피로남작을 죽이려고 자객까지 보냈다고 하더라." 후작의 말에 생각에 잠겼던 막스가 감탄성을 발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샤피로남작을 잡아들이세요." "남작은 왜 잡아들이라는 거냐?" "이황자의 뒤를 쫓느라 지지세력을 족쳤는데 그 끈이 샤피로남작에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남작은 원래 모함을 많이 받아서 믿지를 않았는데 이제 보니 사실인 모양입니다. 남작은 강직한 자이고 그 부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작의 묵인이 없었다면 알센백작 혼자서는 배를 통과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우연이 겹쳤구나! 남작은 배를 통과시키는 대가로 두 사람의 승선을 부탁했고, 멍청한 백작놈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중간에서 놀아난 것이군." 후작은 모든 상황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남작이 그들의 정체를 알았을까요?" "심문해 보면 알게되겠지." 막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공작이 심문을 합니까?" "사교말살의 책임자는 공작이다." 막스는 공작의 취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센백작과 샤피로남작에 대한 측은한 감정마저 들 정도였 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반드시 잡아야지. 이황자까지 타고 있으니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 "대책은 세웠습니까?" "시드가 정령사와 마법사를 대동하고 마법진을 통해 협곡으로 이동했다. 협곡의 병력과 합세해서 군함을 몰고 내려오는 중이고, 하류에서는 해군이 올라오고 있다. 독안에 든 쥐다. 너도 거기서 시드를 기다려 라. 그게 훨씬 빠를 거다." "너무 멀어지기 전에 잡아야 할겁니다. 하류 쪽은 지류가 복잡하게 얽힌 데다 호수도 많아서 숨을 곳이 많습니다." 후작의 얼굴에 잔주름이 잡히며 따뜻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래서 지방영주들에게 명을 내려놓았다. 중간에서 차단하며 시간을 벌어줄게다." 후작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며 걱정스런 음성이 나왔다. "다쳤구나?" 막스는 볼을 매만졌다. "걱정 마십시오. 별거 아닙니다. 이 빚은 꼭 갚을 겁니다." 막스의 굳센 결의가 수정구를 타고 롬바르드 까지 흘러들었다. ********************************************** 저벅, 저벅! 무거운 발소리가 음산한 통로를 맴돌았다. 벽돌로 이루어진 통로는 무척이나 낡은 듯 군데군데 금이 가 거나 깨어져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통로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는데 가끔 씩 나타나는 횃불 몇 개만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띄엄띄엄 창살이 보이는 걸로 봐서 감옥으로 쓰 이는 건물이 분명해 보였는데 창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 음침해서 오래 갇혀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감옥이었다. 간혹 보이는 병사들이 통로를 따라 걷고 있는 사람을 향해 머리를 조아 렸다. 감옥 안에는 오래 쓰지 않은 건물 특유의 매캐한 먼지냄새와 함께 어딘지 고약한 냄새가 함께 났 는데 통로를 지나는 사람은 냄새가 익숙한 듯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자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의 반은 하얗게 새어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얼굴에는 주 름이 보기 좋게 잡혀있고 눈매는 부드러웠다. 코는 밑 부분이 튀어나온 매부리코고 입술은 얇았다. 붉고 흰머리가 워낙에 강렬해서 다른 특징들은 적당히 묻히는 얼굴이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끊겼다. 노인은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붉은 머리 노인은 바지주머니에서 열쇠가 70-80개쯤 들어있는 열쇠꾸러미를 하나 끄집어낸 후 능숙하게 열쇠 하나를 골라 철문의 열쇠구멍에다 밀어 넣었다. 끼이익! 문은 열리면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음침한 지하감옥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지옥의 문을 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저 좀 살려주십시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노인이 가볍게 미소를 띠자 강렬한 인상이 사라지고 인자함이 떠올랐다. 표정의 변화만으로 인상을 바꾸는 놀랄만한 재주였다. 당연히 감옥 은 컴컴했다. 노인은 자주 다녀본 듯 능숙한 동작으로 벽에 걸린 횃불에다 불을 붙였다. 치익! 횃불은 금새 타오르며 주위를 밝혔다. 안에는 두 사람이 사지가 쇠사슬에 결박된 채 벽에 매달려 있었다. 쇠사슬은 굵은 데다가 녹이 잔뜩 쓸어 있었다. 중앙에는 큰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보기에 도 섬뜩한 각종 기구들이 그 큰 탁자를 가득 매우며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쇠사슬과는 다르게 기름 을 정성스레 먹이고 관리를 잘해서 새로 만든 물건 같았다. 못이나 칼, 톱, 망치 등의 평범한 도구부터 쇠꼬챙이나 나선형의 칼날 같은 용도를 알 수 없는 희한한 물건까지 없는 게 없었다. 갇혀 있던 자들 중 하나가 노인을 보고 반색을 했다. "메테르니히공작님! 저 알센백작입니다. 저번에 한 번 인사를 드렸죠.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묶여 있던 자는 피콜라니협곡의 책임자로 있던 알센백작과 샤피로남작이었다. 알센백작의 살집 좋은 풍 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꾀죄죄한 중년인이 되어 공작에게 애원의 시선을 보냈다. 반쪽이 된 얼 굴에는 기미가 잔뜩 끼었는데 왼쪽 눈은 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누구한테 쥐어 박혔는지 터진 입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우 후후후후~~" 공작은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공작님 살려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감옥 안의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공포에 질린 백작 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불안하게 돌아가는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백작이 몸을 흔들 때마다 쇠사슬 에서 소름끼치는 소음이 울렸다. "관두십시오. 공작의 더러운 취미에 대한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옆에 매달려 있던 남작이 침착 한 음성으로 백작을 말렸다. 샤피로남작도 침착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너나 입 닥쳐! 너 때문이다. 니 놈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더니 결국 이 꼴이 된 것 아니냐!" 백작은 울 음 섞인 음성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알센백작 조용하시오." 공작은 백작을 향해 다가서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철그렁! 메테르니히공작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려던 백작은 묶여 있던 쇠사슬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 성하지 못하고 시끄러운 소음만 만들어냈다. 공작이 오른손은 뒷짐을 진 채 백작의 왼손을 따뜻하게 잡 아가자 백작의 눈이 희망으로 가득 차 올랐다. "얼마를 받고 배를 통과 시킨 겁니까?" "헬레나여신께 맹세코 돈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백작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공작의 웃는 얼굴 을 보니 기가 살아난 것이다. "쯧쯧쯧." 공작은 나직이 혀를 찼다. "으아악!!!!" 갑자기 백작의 비명이 감옥 안을 울려 퍼졌다.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손이 작은 집게를 가 지고 앞으로 나와서 백작 왼손의 새끼손톱을 뽑았던 것이다. 공작은 다시 한 번 사람 좋은 미소를 띠자 옆에서 보고있던 남작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백작 다음이 자기 차례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득 해지며 소변이 마려워졌다. "얼마를 받았다고?" "받은 저.... 아악!!!" 약지의 손톱도 뜯겨져 나가자 백작의 정신은 반쯤 밖으로 나갔다. "얼마라고?" "1,000골덴 1,000골덴 받았습니다." "그들이 악마교도들이란 것은 알았나?" "전혀 몰랐습니다. 아아악!! 으허헝~ 정....정말...입니다." 중지의 손톱마저 뜯겨 나가자 백작은 오줌을 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백작의 얼굴은 귀신을 본 듯 하 얗게 질려 있었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침까지 질질 흘려서 엉망이었다. "알센백작은 어떻게 죽이려 했지?" "마각초를 줘서 하겐사형제를 통해서 죽이려 했습니다." "하겐사형제는 지진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한데..." 공작이 말끝을 흐리자 백작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정말입니다!!! 그 놈들이 돈만 받아먹고 튄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악을 쓰는지 감옥안 이 웅웅 울렸 다. "쯧쯧쯧, 그러게 일을 제대로 했어야지. 최소한 샤피로남작만이라도 죽였더라면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 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아아악!!" 공작이 다시 손톱을 뽑았다. "어어엉~ 모두 사실입니다." "일단 왼손에 남은 건 마저 뽑고 보세." "아아악!!!" 비명과 함께 백작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한 것이다. 공작은 백작 의 뺨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이런, 이래서 귀족은 안된 다니까. 재미 좀 볼만하면 기절을 한단 말이야." 공작은 집게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남작에게로 다가갔다. "자네는 강단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니 내게 실망을 시키지는 않겠지. 이런! 개자식!!" 공작의 고함이 감 옥을 뒤흔들었다. 뚝뚝뚝! 샤피로남작의 입에서 흘러내린 피는 목을 타고 내려와 전신을 적신 후 발끝에서 그 여행의 종착점을 맞 이해 음산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독한 고통 끝에 걸레가 되어 죽느니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그 것이 공작의 광기를 자극했다. 입가에 걸려 있던 인자한 웃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벌려진 입에는 흡사 사자의 이빨 같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고, 뻣뻣한 반백의 머리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볼은 푸르 르 경련을 일으켰고 코와 귀를 동시에 실룩거렸다. 어찌 보면 길에서 죽어 귀신이 된 객귀의 모양과 비 슷했다. "으하하하하!" 공작은 미친 듯한 광소와 함께 탁자에서 폭이 대단히 좁고 끝이 날카로운 칼을 하나 쥐고 는 벽에 묶여있는 샤리로남작의 전신을 다져나갔다. 푹푹! 퍽!썩!! 온갖 소름끼치는 소리가 주위를 떠돌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으아악!" 알센백작이 죽어라고 비명을 질렀다. 마침 정신을 차린 알센백작이 본 것은 공작의 광기에 찬 칼놀림에 다진 고기로 변해가는 남작의 모습이 었다. 비명을 질러대던 알센백작이 축 늘어졌다. 벌어진 백작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고, 눈은 허 옇게 돌아간 것이 제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한 참을 분풀이를 한 공작은 칼을 내려놓고 백작에게로 다 가갔다. "이런, 젠장!" 광기에 찬 공작의 고함이 다시 한 번 감옥에서 울려퍼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백작의 심 장이 그 임무를 다하고 멈추어버린 것이다. 푹푹!! 서걱서걱! 툭! 또 다시 공작의 미친듯한 칼질이 시작되었다. ************************************************ 달도 얼굴을 숨긴 어두운 밤에 돛을 접은 범선들이 컴컴한 강위를 달리고 있었다. 충돌을 막기 위해 선 수와 선미에 달아놓은 등불들만이 어두운 강물을 비추고 있었다. 조르주는 갑판위를 서성거리는 에쉴리 를 보며 거의 벗겨진 머리 중앙을 벅벅 긁었다. 에쉴리는 엘란이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평 생을 아버지 걱정으로 보내더니 이제는 엘란 때문에 걱정을 하는 모습에 조르주는 기분이 나빠졌다. "젠장!" 머리를 긁는 손에 빠진 머리가 몇가닥 잡히자 조르주는 기분은 아예 바닥을 기었다. 언제부터인 가 조르주의 눈에 에쉴리의 모습이 자주 잡혔다. 아니, 의도적으로 에쉬릴의 모습을 찾아 눈이 움직인 것이다. 조르주가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것은 에쉴리가 화사한 꽃같이 피어나던 10여년 전 부터였다. 그 러나, 조르주는 에쉴리의 곁으로 다가설 수 없었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난쟁이 똥자루만한 키와 그때 부터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에다 슬슬 나오는 아랫배 때문에 자격지심이 들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쉴리의 곁에 서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미녀옆의 오크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마음을 돌렸는데 교도도 아닌자가 좌호법사가 된 것도 모자라 거기에다 에쉴리까지 차지하자 원통한 마 음과 질투가 끌어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나중에는 상급정령사에다 젊은 엘란과 자신를 비교하자 자괴감 마저 들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머리를 감을 때마다 한 웅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은 더욱더 조르주의 기분 을 끌어 내렸다. 엘란을 기다리며 에쉴리는 갑판위를 서성거렸다. 난간 밑의 강물을 쳐다보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맞은편으로 걸었다 다시 돌아오는 초조한 발걸음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에쉴리의 일생은 기다림의 연속 이었다. 어릴 때 떠난 아버지를 기다렸고, 돌아온 아버지가 다시 실종이 된 후 다시 기다림은 시작되었 다. 아버지의 죽음으로도 기다림은 끝나지 않아서 이제는 엘란의 안위를 걱정하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탁,턱! 갑판위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엘란인가요?" 듣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드는 에쉴리의 나직한 음성이 갑판위를 매끄럽게 흘렀다. 어둠을 뚫고 세명의 사람들이 에쉴리에게 다가갔다. "왜 여기 나와있습니까?" 반가운 마음에 엘란이 물었다. "잠이 안 와서요." 어둠 속에서 활짝 웃는 에쉴리의 얼굴이 엘란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그 사람들이 남작이 부탁한 사람인가?" 조르주가 다가서며 물었다. "예." 엘란이 짧게 대답하자 조르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와 대사제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밖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선장실은 회의실로 쓰였는데 안에는 성녀와 대사제 그리고 사제들과 하이 론이 초조한 안색으로 기다리고 있었고, 뜻밖에도 데미와 쟝마저 같이 있었다. "그 분들인가?" 엘란이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자, 성녀가 반갑게 맞이했다. "예." 엘란은 슈리엘과 함께 돌아오는 동안 간단하게 확인을 했다. 샤리로남작이 부탁한 승객이 맞았다. "어!!!!" 옆에 있던 데미를 지분거리던 쟝은 여러사람에게 가려 있던 여자의 창백한 얼굴이 나타나자 탄성을 터 트렸다. 상당히 많이 놀란 듯 입은 헤 벌어졌고 눈이 약간 풀려 있다. "코리나 데 포템킨!" 쟝이 이황자비의 처녀적 이름을 외쳤다. "아는 여자야?" 남작의 부탁을 받을 때부터 이 일이 찜찜했던 하이론은 급히 쟝의 옆구리를 찔렀다. "코리나 드 멜리사 엘리오트. 이황자의 아내입니다." 쾅!!!! 모두의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주위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둘을 데리고 온 엘란은 얼이 빠져 입을 헤 벌렸고, 하이론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조르주는 무의식중에 그 소중한 머리카락을 뽑고 있었다. 쟝은 롬바르드로 유학을 와서 제일 노력한 것이 엘리오트 제일의 미인으로 소문난 코리나의 모습을 보 는 일이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경비되는 황궁속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황자궁에 있는 코리 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이년전 친정에서 벌어지는 무도회에 잠깐 다녀간 것을 먼 발치에서 본 것 이 다였다. 그 우아한 동작과 아름다움에 한 달동안 밤잠을 설쳤었다. 그 얼굴을 쟝이 잊을 리가 없다. 가까이서 보니 창백한 안색과 멍한 표정이 아름다움을 갉아먹기는 했지만 자기가 본 여자들 중에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에쉴리도 코리나에 비한다면 한 수 처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럼 저 사람은......." 모두의 시선이 코리나를 감싸안 듯 안고있는 남자에게로 쏠렸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좌중의 시선을 붙들어 맺다. "마르시앙 이황자!!!" 신음하듯 하이론이 말했다. 눈돌아가는 소리도 들릴정도의 깊은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그 침묵을 깨고 성녀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당신들이 이황자부부가 맞습니까?" "맞소." 마르시앙의 굳센 턱이 움직이며 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산넘어 산이로군." 조르주가 말했다. "쫓아 냅시다." 여전히 멍한 시선을 코리나에게 던진 채 쟝이 말을 했다. 마르시앙의 검미가 무섭게 꿈틀거렸다. 어쩌다 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코리나만 없었다면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하이론이 쟝의 시선을 따라서 코 리나의 얼굴을 보고 다시 쟝의 얼굴을 살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여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남자만?" 하이론의 말에 쟝이 얼른 반색을 했다. "그렇쵸!" 쩍!!! 하이론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며 쟝의 뒷통수에 작렬해서는 잘 익은 수박이 갈라지는 소리를 만들었 다. "왜 때려요?" "야이, 호랑말코같은 자식아! 저 정신나간 여자를 보고도 그런 마음이 동하니! 저 남자를 쫓아내면 여자 는 니가 차지하고!!" "그게 제일 좋잖아요. 이황자를 데리고 다니면 나라에서 죽을동 살동 쫓아올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려 고 그래요." 모두가 속으로 걱정하던 사항을 쟝이 끄집어냈다. 안 그래도 쫓기는 입장에서 이황자까지 태웠다간 위 험한 처지에 빠질게 불보듯 훤했다. "그럼 여자도 같이 보내야지 왜 남자만 보내냐?" "저 여자봐요, 정신이 반쯤 나가있잖아요. 불쌍해서 어떻게 쫓아내요." "남자는 안 불쌍하고." "샤뮤엘대현자 촛대뼈 까는 소리 하고 있네, 언제부터 그렇게 인간적인 사람이 됐수?" 샤뮤엘대현자는 높은 학식과 도덕성 고아한 인품으로 대륙의 성자로 칭송받는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이 자식을 그냥 두면 성을 간다." "천한 평민이 무슨 성이 있다고 간다 만다 그래. 이름도 못지어서 하이론일, 이, 삼, 사로 지은 주제에." 하이론은 성이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코리나를 보고 너무 흥분했는지 오늘은 쟝도 물러서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사나운 주변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소동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슬립!" 둘의 소동은 엘란이 나서서 하이론을 말리고 쟝을 재우는 것으로 결말이 났는데 분이 덜 풀린 하이론은 그 뒤로도 한 참을 씩씩거렸다. "죄송합니다." 마르시앙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며 파올대사제가 둘을 대신해서 사과를 했다. 황궁에서 좇겨나 목숨을 위헙받고 있다지만 일국의 이황자에게 이만저만한 결례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떠나라면 떠나겠다." 이황자의 심정은 참담했다. 사자가 힘을 잃고 쫓겨나니 길바닥의 쥐새끼마저 물려고 달려 들었다. "일단 선실에서 쉬십시오. 에쉴리가 적당한 선실로 안내를 해주세요." 성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분위기 를 전환시켰다. 이황자부부는 에쉴리를 따라 선장실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둘을 적당한 곳에 내려줍시다." 성녀가 묻자 씩씩거리던 하이론이 의견을 말했다. "우리가 이황자부부를 쫓아내도 나라에서는 믿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소?" 엘란이 말하자 산티아고가 안절부절 못하며 물었다. "기사들을 죽이고 그들을 구출해서 데려왔는데 떠났다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지고교돕니 다. 우리의 말을 믿어줄리 없지요." "그렇다면 둘을 잡아서 직접 바쳐야겠군." 굳은 얼굴로 조르주가 말했다. 그를 잡아 바친다면 지고교에 대한 말살령이 거두어 질지도 모른다. 동감의 기운이 주위에 퍼질 때 쯤 성녀가 벌컥 화를 냈다. "지고의 품안으로 피한 어린 양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성녀는 화가 나서 외쳤다. 하이론과 엘란은 성녀가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 "……." "휴우~~" 대사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일단 바다로 나가서 생각해 봅시다." 성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바다에 가서 생각하겠다는 말은 원하는 데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말과 상통했다. 일단 바다로 접어들면 엘리오트에서도 잡기는 힘들 것이다. 대사제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 어졌고, 저마다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좀더 좀더.......좋아.....아......" 하이론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쟝의 괴상한 잠꼬대만이 선실을 울렸다. 다음날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물안개가 새벽부터 피어 올랐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모 든 것이 침묵 속에 묵혀 있는 고요한 새벽이다. 다른 배들이나 암초와의 충돌을 염려한 엘란은 새벽같 이 일어나 정령들을 불러 앞을 살펴야 했다. 슈리엘이 앞서서 날으며 앞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 동이 서 서히 터오는 데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짙어지는 감마저 들었다. 새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안개속을 헤쳐가자니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으며 원초적인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랐 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그래 어떻게 결정이 났나?"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황자가 오연한 자세로 말했다. "원하시는 곳에 데려다 드리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의외로군."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말 속에는 안도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내전에 패하고 나자 믿었던 모 든 세력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샤피로남작같이 마지막까지 충성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중에-지금 샤피로남작은 갈기갈기 찢어져 시체마저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채 죽었지만- 도움의 손길을 건넨 사람은 남작이 유일했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 신 속에서 아들은 막스의 손에 참담하게 죽었고 거듭되는 험한 생활에 심신이 불안하던 아내는 가족들 의 처형과 아들의 죽음으로 거의 정신을 놓았다. 자신도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은 더 들었다. "당신들 정체가 뭔가? 처음에 샤피로남작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단순한 밀수선이라고 생각 했는데 의심 스러운 데가 많아! 특히 자네, 그때 부리던 정령은 바람의 상급정령인 것 같던데 맞나?" "맞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지고교돕니다." 엘란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황자의 처지를 봤을 때 숨 길 이유는 없었다. "지고!!" 지고라는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이황자도 깜짝 놀랐다. 눈이 커지고 입이 약간 벌어졌다. 자 기도 이스마엘의 말을 들었을 때 저런 표정이었을리라. 잠시 놀라던 마르시앙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피 식 웃었다. "지금 내 처지에 상관할 일은 아니지." "가실데는 있으십니까?" "아스가르드로 넘어갈 생각이네. 거기서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아야겠지." "왕위를 도모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쫓겨다니면서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보니 국민들의 삶이 엉망이더군. 왕위를 찾는 답시고 전쟁을 일으 켜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히고 싶진 않아." 이황자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발칸대제도 왕권을 잃었다가 나중에 되찾아서 대륙까지 통일하지 않았습니까?" 이황자는 안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큰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솔직하지 못했군.... 사실대로 말하자면 주민들의 고통이야 어떻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시도해 보고 싶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해.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빌 것 아닌가? 이미 삼황자가, 아니 이젠 황제지. 어?든 권력은 이미 확고해 졌고, 내 지지세력은 모두 뿌리가 뽑히거나 변절했다. 황 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야."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황자님........" 마르시앙이 엘란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더이상 그렇게 부르지 말게. 이제는 아무 것도 아니니. 오히려 그렇게 부르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 "그럼 뭐라 불러 드릴까요?" 아무리 줄 끊어진 연 신세라 해도 일국의 황자가 아닌가. 엘란은 여전히 조 심스러웠다. "그냥 마르시앙이라고 부르게.... 아저씨도 좋고, 삼촌도 좋고, 형도 좋고. 자네 내키는 대로 부르게." "그럼 형이라고 부르죠." 잠시 생각하던 엘란이 말을 하자 이황자가 환하게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제 외하고는 처음으로 웃는 것이다. "형수님은 어쩌다가 저렇게 되신 겁니까?" 엘란은 형수님이라는 말을 하고는 어쩐지 멋적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형수라는 말이 정겹게 들 린 마르시앙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었다. "귀족가의 영애와 황자비로 한 평생 편안히 살다가 쫓기는 생활에 심신이 지친데다 가족들의 처형 과......." 마르시앙은 괴로운지 잠시 말을 흐렸다. "자식까지 죽고 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 다." 마르시앙의 미세한 감정의 편린들이 엘란의 마음에 아프게 젖어 들었다. 아들을 먼저 앞세운 아비의 처 참한 심정이 담담한 말투 속에 무겁게 침잠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걸 물었군요." 엘란은 괜한 걸 물었다고 속으로 자책했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자네 대단하군.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상급정령사라니, 자네 올해 몇인가?" 마르시앙은 짐짓 쾌활하게 물었다. 그게 더 엘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스물 셋입니다." "좋을 때군." 둘은 말없이 안개 낀 강을 바라보았다. 마르시앙은 예전의 단란했던 한 때를 생각하며 회한에 잠겼다. 어디에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을 던져주는 사람은 없다. 배는 순탄하게 앞으 로 나갔다. 안개가 짙게 끼어서 그런지 강을 내려가는 배는 지고교도들을 태운 다섯척이 전부였다. 엘란(44) "아침부터 고생이 많다." 하이론이 물통을 내밀며 말했다. 물통에는 파르미나고원에서 나는 값비싼 녹차가 담겨 있었다. 격식을 갖추고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봤다면 무식한 놈들이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데그우드가 신경 써서 준비 한 덕분에 하이론의 입이 호사를 누렸다. 특유의 씁쓸한 맛 때문에 먹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한 번 맛보 고는 더 이상 입에 대지 않았다. 엘란의 입에도 맞지가 않았다. 그냥 물을 먹는 게 훨씬 맛있었다. 왜 비싼 돈을 주고 맛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란은 한 모금 마시고 마르시앙 에게 건네주었다. 마르시앙은 한 모금 마시고는 감회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파르미나고원산이로군." 한 모금 마시고 물통을 내려다보고 한 모금 마시고 물통을 내려다보고, 하는 짓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이황자의 청승맞은 모습을 보자 엘란까지 침울해졌다. "거기 서라!" "야 잡아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십 여명의 아이들은 갑판 위를 온통 휘젓고 다녔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배를 타고 가장 신이 난 것은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앞날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몸은 편안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먹을 것이 풍부해 서 난생 처음으로 배를 곯지 않았고, 힘든 일도 하지 않게 된 아이들은 신이 나서 하루종일 몰려 다녔 다. "위험하니 들어가서 놀아라." 하이론이 자상하게 말했다. "야! 대머리 할배다!" "어디 어디?" "저기 있다." 이상하게 하이론형제들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갑판 위를 요지조리 달려서는 하이론에게로 향했다. 콰당! 한 아이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울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으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뱃전을 울리자 하이론이 얼른 달려갔다. "어디 보자. 이런 무릎이 까졌구나." "앙앙! 피나요." 하이론이 가서 살펴주자 아이는 더욱 크게 울었다. "야! 엄살 좀 부리지마." 옆에 있던 아이가 면박을 주었다. "엄살 아냐 정말 아프단 말야!" 넘어진 아이는 금방 뽀로통해져서 입이 튀어나왔다. 울음이 그친 걸로 봐서 엄살이 맞는 모양이다. "선실로 가자 내가 약을 발라 줄게." 하이론이 아이를 안고 선실로 향하자 나머지 아이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 터커는 난간에 기대에 서서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차려입은 갑옷위로 물방울이 맺혔고, 머리와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다. 지랄 맞은 안개였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딱으며 강을 향해 침을 뱉었다. "퉤! 젠장!" 잘못 뱉어진 침은 강으로 떨어지지 않고 턱을 타고 갑옷위로 떨어졌다. 손수건으로 침을 딱으며 터커는 연신 군시렁거렸다. "며칠째 이게 무슨 꼴이야!" 포강을 끼고 있는 영주들에게 대지급으로 명령이 떨어진 것은 삼일전의 일이었다. 무조건 배를 이끌고 악마교신자놈들이 탄 배를 격침시키라는 명령에 영주들은 바쁘게 뛰어 다녀야 했다. 터커는 낙마사고로 허리를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병사들을 이끌고 배를 탔다. 특별한 군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화물선에 다 간단한 투석기를 싣고 급히 포강을 거슬러 올랐다. 한 참 신혼재미에 빠져 있는데 내려온 명령이 마 음에 안 드는데다 번듯한 군함을 몰고 참가한 다른 영주들의 은근한 놀림에 화가 치밀었다. 새벽같이 짙게 낀 안개를 바라보며 지고교에 있다는 상급정령사를 상대할 방법을 고민하던 터커의 생각은 이내 딴 길로 새서 아내의 하얀 엉덩이를 떠올렸다. '어서 일을 끝내고 영지로 돌아가야 할텐데....' ********************************************** '앞에 배들이 있다.' 슈리엘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귀에 닿았다. 엘란의 얼굴이 가벼운 긴장으로 굳어졌다. "무슨 뱁니까?" "군선같다. 무장을 한 병사들이 보인다." "배는 몇척이나 됩니까? 거리는?" "스무척은 넘는 것 같다. 한시간정도 앞으로 나가면 부딪칠거다." "강변으로 배를 몰아서 비켜갈수는 없을까요?" 엘란은 안개를 둘러보며 말했다. "글쎄 잘 될까?" "잘 되길 빌어야죠." 엘란은 슈리엘에게 다른 배와의 연락을 부탁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상의를 하려고 뱃전을 급히 떠났다. 팽팽한 긴장이 회의실안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어떻게 하죠?" 소심한 산티아고가 안절부절 못하며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뚫고 나가야지." 하이론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강변으로 배를 몰아서 비껴갈 수 있는지 시도를 해보고 안되면 뚫고 나갑시다. 안개가 짙으니 운 이 좋다면 충돌없이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엘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강변으로 배를 몰아서 빠져나가 보고 들키면 싸웁시다." 조용하던 쟝이 입을 열었다. "……." "……." "얼빠진 놈 같으니 똑같은 소리잖아!" 하이론이 쟝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똑같긴 뭐가 똑같아요. 몇 글자 틀리구만." 쟝이 능글거렸다. "이 자식이 어제부터 뭘 잘못 먹었나! 왼쪽 궁디나 왼쪽 엉덩이나 뭐가 달라?" "다르지 뭐가 같아요." "그게 어떻게 다르냐?" 하이론이 성이 나서 씩씩거렸다. 이렇게 중차대한 시기에 이 변태놈은 말장난이 나 하고 있다. "어떻게 다른데?" 옆에 있던 데미가 흥미가 동하는지 쟝의 팔짱을 끼며 특유의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물 었다. "유부녀 히프는 남편한테 응한다고 엉덩이고, 과부는 남자가 궁해서 궁디야." "……." "……." "……." "에라이 미친놈아!" 하이론의 외침과 함께 모두들 회의실을 나섰다. 쟝의 말에 모두들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이 풀리기도 했다. "어 방디하고의 차이점도 있는데......" 쟝이 입을 열었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미만이 남아서 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갑판위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활이나 석궁 창을 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침마저 조심스럽게 삼켜야 했다. 들키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것이다. 선실과 화물칸에 모여 있던 신도들은 아이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단속하면서 지고에게 기도를 올렸다. 배들은 위험하다 싶을 만큼 오른쪽강변 으로 붙어서 내려갔다. 기분을 축축 늘어지게 만들었던 안개는 천혜의 위장막이 되어 주었다. 영주연합군은 느긋했다. 사교에 있다는 상급정령사는 긴장을 하게 하려고, 중앙에서 부풀린 것이라고 굳 게 믿었다. 그래서, 분위기는 반쯤 풀려 있었고, 특별히 경계를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두 세력의 배는 점점 가까워 졌다. 터커는 계속해서 배 위에만 있자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서 사교놈들을 만나 한바탕 몸이라도 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찌푸둥한데다 축축한 안개 가 신경을 거슬르는 바람에 저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사이! 어딨나?" 기분이 가라앉은 터커는 거칠게 말했다. "예! 여기 있습니다." 터커의 상태를 살피던 시종장 사이는 날벼락이라도 맞을세라 재빨리 대답했다. 출 전을 하면서 시종장이나 끼고 다니는 것만 봐도 지고교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 전 쟁터에서는 견습기사나 가문의 기사가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배를 내려라! 네이터시에 가서 몸좀 풀어야 겠다." 출렁거리는 배 위에만 있자니 여자생각이 간절해 졌다. 네이터시에는 고급살롱들이 즐비했다. 돈만 있다 면 아름다운 여자들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세월이 험난할수록 그런 장소들은 여자들로 넘쳐 났다. "예,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사이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구명선을 내렸다. 구명선은 작은 나 룻배로 양쪽으로 노가 세개씩 장착되어 있었다. 터커는 사이와 함께 배에 올랐다. 병사들 여섯명이 나누 어 앉아 힘껏 배를 저었다. 배는 서서히 강변으로 향했다. 터커는 느긋하게 고물에다 몸을 기대었다. 쾅! 구명정의 앞부분인 이물이 무언가에 부딪치며 굉음을 울리더니 이내 배의 옆부분이 충돌해서 뒤집 어질 듯 흔들거렸다. "뭐야!" 부딪치는 충격에 강물로 튕겨져 나갈 뻔한 터커는 혼비백산해서 소리쳤다. "범선입니다." 배에 납작 엎드리고 있던 사이가 대답했다. "어떤 미친놈들이 등불도 켜지 않고 안개 속을 다니..... 가만! 잡았다!" 터커는 너무 흥분해서 벌떡 일어 나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사이 비상용 폭죽을 쏘아 올려라!" 사이는 구명선에 비치되어 있던 조난시 올리는 폭죽에다 불을 붙여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펑! 안개 속을 뚫고 불꽃이 산산히 비산했다. "사교놈들이다!" "여기에 악마교도들이 있다!" "여기다!" 병사들은 터커의 명에 따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고요한 강을 따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주 연합군은 급히 배의 속력을 줄이며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들켰다. 전속력으로!" 대사제의 명이 떨어지자 노를 잡고 있던 교도들은 죽어라 노를 저었다. 각각의 배 에 흩어져 있던 하이론형제는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갖추었고, 엘란은 슈리엘과 실피드를 불러 주변을 경계했다. "뭐하는거야 여기라니까!" 적을 잡아내지 못하자 답답해진 터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터커의 구명 선이 부딪친 배는 하이론사가 타고 있던 배였다. 하이론사는 밑에서 들리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려서 파 이어 볼을 날려보냈다. 휭! 커다란 불덩이가 터커의 배로 날아 들었다. "젠장!" 그래도 기사수련을 받은 덕분에 몸이 날랜 터커는 재빨리 강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이는 횡액을 면치 못했다. 쾅! 파이어볼과 부딪친 배는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 "으악!" "악!" 불덩이와 부딪쳐 타격을 입은 사이와 병사들은 불이 붙어서 강으로 추락했다. 불은 이내 꺼졌지만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물을 먹어야 했다. 강에 뛰어든 터커는 온 몸에 납덩이를 단 듯 마음대로 움직 일 수 없었다. 배를 타면서 별 생각없이 갖춰 입은 풀 플레이트 메일이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터커는 갑옷을 풀고자 허우적거렸다. 매일 시종의 시중을 받으며 입고 벗었던 갑옷을 다급한 순간에 벗으려 하 자 잘 되지 않았다. 꿀떡 꿀떡! 숨이 막힌 터커는 엄청난 물을 들이키며 정신을 놓았다. 사지가 풀린 터커의 몸이 바닥을 향 해 떨어져 내렸다. "저기다 저기를 향해 투석기와 강궁을 날려라!" 배에 있던 영주들이 굉음이 들린 곳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배에는 공격무기로 투석기와 강궁이 장착되어 있었다. 영주를 따라온 영지의 마법사들도 파이어 볼이 시전된 곳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풍덩! ?! 강물에 떨어져 내린 바위들이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었다. 휭! 쎄액! 몇 안되는 숫자지만 돌들과 거대한 화살이 지고교도들이 탄배를 향해 날아갔다. 안개 속에서 마구잡이 로 쏘아대는 바위와 화살은 명중률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쏘아 올리다 보면 명중하는 것도 나오 기 마련이다. 쾅! 바위하나가 돛대와 부딪치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돛대가 부러져 갑판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악!!" 돛대에 깔린 교도들의 비참한 비명이 안개 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쾅! 거대한 강궁이 배의 옆구리에 틀어 박혔다. 그 충격으로 배는 휘청거렸다. "크아 컥컥(파이어 버스터)" 하이론사는 바위와 강궁이 날아온 곳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펑! 파이어 버스터가 날아든 포마남작이 탄 배가 난간이 부서지며 불이 붙었다. "불을 꺼라!" 포마남작은 당황해서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구 외쳤다. "물!물!" 콰아앙!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배에 전해지며 배가 기우뚱 기울었다. 슈리엘이 배의 밑부 분을 강타한 것이다. 콸콸!! 배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차가운 강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창 밑바닥에서 발목에 족쇄 찬 채 노를 젓던 노예들은 혼비백산했다. "살려줘!" 노예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노예들은 발목의 살갖이 벗겨지도록 필사적으로 몸부림쳤 지만 쇠사슬은 풀리지 않았다. 위급한 순간에 노예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제발!" 비명과 울먹임으로 배 안은 금새 아비귀환의 지옥을 방불케 했다. "배가 침몰한다! 뛰어 내려라!" 풍덩,풍덩!! 기사들과 병사,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 내렸다. 포마남작은 터커와는 달리 갑옷 을 능숙하게 벗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황자와 삼황자의 내전에 참가했다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남 작은 갑옷을 입고 물에 뛰어드는 것이 자살행위란 것을 알고 있었다. 배는 급속하게 가라앉으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침몰하는 배는 주변에 있던 것을 빨아 들였다. "으으!" 갑옷을 벗은 보람도 없이 포마남작은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강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쾅!쾅! 수많은 마법과 바위 강궁들이 난무하며 배에 부딪쳐 왔다. 화살을 매기고 있던 교도들은 전방을 향해 시위를 날렸다. "으악!" 간혹 눈먼 화살에 맞은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활을 배운지 얼마 안되어 실력도 보 잘 것 없는데다 앞도 보이지 않아 무작정 날린 화살에 맞은 병사들은 재수가 옴붙은 경우라 할 수 있었 다. 엘란은 슈리엘로 자신이 탄 범선을 감싸 안으며 다른 배의 옆을 막아 섰다. 쾅! 쾅! 바위와 강궁이 연신 슈리엘을 때렸다. 쾅! 엘란이 탄 배를 넘은 바위가 하이론사가 타고 있던 배의 옆구리를 직격했다. 처음부터 사격이 집중 된 하이론사의 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기울어졌다. "배가 침몰한다!" 교도들의 비명이 강위로 울려 퍼졌다. 다급해진 엘란은 급히 슈리엘에게 명령을 했다. "슈리엘! 막아줘요." 슈리엘이 급히 침몰하는 배로 날아가 밑을 받쳤다. "음!" 급속한 마나의 유출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엘란은 이를 악물며 전신의 감각을 열었다. 배로 날아 드는 바위와 강궁 마법이 느껴졌다. "실피드! 카사!" 엘란은 실피드와 카사를 불러 위험스럽게 날아드는 공격은 튕겨내거나 방향을 살짝살짝 바꾸었다. 한 번의 공격이 휘몰아치고 나면 바위와 거대한 화살을 다시 매기느라 약간의 틈이 생겼다. 한 숨 돌린 엘란은 반격에 나섰다. "스피릿 컴파운드!" 붉고 푸른 정령들의 회오라가 가장 가까운 영주의 배로 날아들었다. 콰아앙! 연약한 나무가 스피릿컴파운드에 견딜 수는 없다. 나무가 산산히 비산하며 배의 밑부분에 거대 한 구멍이 뚫렸다. 강물은 구멍을 따라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은 이를 악물며 공격에 나섰다. 쾅! 엘란의 정령술에 버텨낼 배는 없었다. 스피릿컴파운드에 직격당한 배는 여지없이 침몰했다.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군함에서 바위와 화살이 날아들었다. 엘란 혼자서 그 많은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쾅! "으악!" 갑판위에 떨어진 바위에 깔린 신도들의 비명이 배위에 울려 퍼졌다. 하이론과 동생들이 다급히 뛰어다니며 실드를 쳤지만, 안개속을 뚫고 날아드는 바위와 거대한 화살을 모두 막아낼 순 없었다. "윽." "크억." 적의 병사들이 날린 화살도 메뚜기떼처럼 배위로 날아들었다. "깍 깍 큭큭( 빨리 빨리)." 침몰하는 배의 사람들을 구출하던 하이론삼은 너무 다급해서 자신이 말을 못 한다는 사실도 잊고 괴성을 질러대며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엘란은 서서히 지쳐 갔다. "하이론 배를 빨리 몰아요. 조만간 힘을 쓸 수 없어요." 하이론사가 탄 배가 서서히 가라앉자 나머지 배 들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 주위에 몰려들어 있었다. "알았다." 하이론은 얼른 대답하며 동생들과 연락을 취했다. 하이론삼의 배만 남아서 교도들을 구출하고 나머지는 배의 속력을 높였다. 엘란은 실피드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실프." 슈리엘과 실피드 실프를 동시에 부리자 마나홀이 은근히 저려왔다. 실프는 쐐기모양으로 납작하 게 변하더니 무섭게 회전하며 적선으로 날아들었다. 타다다닥! 실프가 사방으로 튀며 이리저리 부딪쳐가자 콩볶는 소리가 전선의 뱃전에 올려 퍼졌다. 실프 는 적병들의 몸을 뚫으며 정신없이 휘몰아 쳤다. 한 번 휘몰아 친 후에 다음 배로 넘어가서는 적의 몸 을 꿰뚫었다. 실프와 스치가만해도 구멍이 나거나 살이 갈라져 나갔다. "뭐야!" 영주들과 마법사는 혼비백산했다. "실프같은데, 이런 공격은 처음입니다." 다급한 와중에도 영주의 앞에 실드를 치며 마법사가 외쳤다. "젠장!" "으악!" "살려 줘!" 병사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겁에 질린 병사들은 몸을 웅크리고 구석진 곳에 숨었다. 슝, 쎄엑, 퓽! 묘한 소리와 함께 뱃전의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렸다. "공격하라!" 실드의 뒤에 안전하게 숨어있던 영주가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전의를 사실한 병사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실프들이 이배 저배 옮겨다니며 공격을 하자 적의 공격이 뜸해졌다. 성 녀가 탄배와 나머지 두척이 적들을 지나쳐 하류로 내려가자 엘란은 하이론삼의 배로 내려섰다. 배의 갚 판에는 옮겨온 교도들로 가득했다. 물에 빠졌다 건져진 교도들은 찬물에 젖은 옷을 짜며 온 몸을 떨었 다. 배의 구멍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자 엘란은 더욱 힘이 들었다. "빨리 하세요!" 엘란의 독려에 사람들의 손이 더욱 바빠졌다. 쾅!! 바위하나가 갑판위에 떨어져내렸다. "으악!" 밑에 깔린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실피드를 불러 바위를 들어 올리던 엘란의 얼굴이 일그러 졌다. 마나의 움직임이 점점 불순해지더니 슈리엘이 사라졌다. 슈리엘이 사라지자 배는 급속도로 가라앉 았다. 바위를 치운 엘란은 들끓는 내부를 가라 앉혔다. "슈리엘!" 슈리엘을 불러 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몸상태가 좋지 않아 슈리엘을 부르기에는 역부족이 었다. "스피릿컴파운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다. 쿠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적선이 기우뚱했다. "쏴라!!" 겁도 나고 악도 바친 영주들이 몸이 굳은 병사들을 독려했다. "숨어있는 자들은 모두 죽일 것이다." 써걱!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몸을 숨긴 병사들을 베어내자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며 투석기와 강궁을 쏘 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쿠쿠쿵! 침몰하는 배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빨리 떠나자!" 조타를 하던 교도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소용돌이에 잘못 휘말리면 배가 침몰하기도 했다. 노를 젖던 교도들의 팔뚝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물에 빠진 교도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밑으로 가라앉았다. 교도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찢어졌다. 엘란은 실피드 다섯을 불러 날아드는 공격을 방비했다. 배로 떨어지는 바위와 거대한 화살만 쳐낼 뿐 쏟아지는 화살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으악!" 여기저기 비명이 울리자 정신을 차린 교도들도 맞서서 화살을 날렸다. 슈슈슝! 수많은 화살들이 강물위를 비산했다. '이대로 있으면 교도들의 피해가 커진다.' 주먹을 꽉 움켜진 엘란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렸다. 휘잉! 실피드 둘이 돛에다 거센 바람을 불어 넣었다. 돛의 반은 찢어져 있었다. 멀쩡한 돛은 거센 바람 을 받고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바람을 받은 배는 쏜살같이 움직였다. 실피드 둘은 배의 옆을 받쳐 배가 넘어가지 않도록 방비했고 나머지 실피드는 날아오는 바위를 쳐냈다. "커어 억 컥(체인라이트닝)" 하이론삼이 엘란의 옆에 붙어서서 마법을 난사했다. 배는 서서히 멀어져 갔 다. 엘란은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았다. "스피릿컴파운드!" 엘란의 마지막 정령공격이 적의 배를 직격했다. 콰아앙! 선수가 완전히 박살난 적선은 여지없이 침몰했다. 실피드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헉 헉." 거센 숨을 쉬며 엘란은 갑판위에 드러누웠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전신에 감각은 하 나도 없었는데 묘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온 몸이 저릿저릿했다. "음!" 괴상한 쾌감에 저절로 신음이 났다. 엘란은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하이론삼이 보기에는 발작을 일 으키는 것 같았다. 당황한 하이론삼은 엘란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컥엉(힐링)" 하얀 빛이 엘란의 몸에서 나는 것 같더니 이내 없어졌다. 괴이하게도 치료마법을 엘란의 몸이 튕겨내고 있었다. 더욱 당황한 하이론삼은 안절부절 못했다. 다시 한 번 마법을 시전하려는데 엘란 의 손이 막았다. 감각이 돌아오자 전신의 떨림이 멈추었다. 엘란은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좀 쉴게요. 배를 부탁합니다." 하이론삼은 안심하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가우치자작은 서서히 옅어지는 안개를 보며 몸을 떨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배를 몰고 왔는데 싸움은 예 상외로 흉험했다. 사교에 속한 정령사의 위력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정령을 쏘아댈 때마다 배가 하나 씩 침몰했다. 나중에 갑판위를 휩쓸던 괴상한 정령공격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파공음 과 함께 걸리는 족족 구멍을 뚫어 놓는 바람에 겁에 질린 병사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 옆에 있던 기사도 배를 뚫렸는데 나선형의 거대한 구멍은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안개가 걷히며 나타난 강은 참혹 했다. 도처에 시체들과 조각난 나무들이 널려 있었다. 가끔씩 가라앉았던 시체가 떠올랐는데 물에 퉁퉁 부은 얼굴은 꿈에 볼까 무서웠다. 가우치자작은 배의 피해를 보고 받았다. 죽은 사람은 25명이었고, 중 상자가 10명이 넘었다. 전사자 중에는 자작이 아끼는 기사도 끼어 있었다. 자작은 다른 배로 시선을 돌 렸다. 25척의 배가 15척으로 줄어 있었다. 그 짧은 교전으로 열 척이나 침몰한 것이다. 스물다섯척의 군 함으로 다섯척의 적선과 싸워 겨우 한 대를 격침시키고 열대나 침몰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패였 다. 게다가 다섯척의 배는 화물선이었으니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시드님께 통신을 넣어라!" 자작은 마법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형편없는 전과를 보고하려니 뒷골이 당겼지만 일단 보고는 해야 했 다. 수정구가 빛을 발하며 상대편 마법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우치자작가의 마법사 파라입니다. 시드님께 급히 보고할게 있습니다." 파라는 공손히 입을 열었다. "피콜라니협곡의 부경비대장 라울입니다. 저한테 보고하십시오." 협곡의 진지를 담당하고 있던 라울이 군선을 지휘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파라의 얼굴이 비켜나며 낭패한 몰골의 가우치자작이 나타났다. 자작은 시드의 얼 굴을 보지 않아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이터시 근처의 강에서 사교도들과 교전이 벌어졌다. 적들이 예상외로 강해서 피해가 컸다. 적도들의 배도 한 척 침몰했다. 이상이다." 자작은 자신들의 피해를 얼버무리며 금방 통신을 마쳤다. "휴~" 자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번 출전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올 때 걱정말라 고 큰 소리 탕탕치고 나왔는데 결과가 형편없었다. 침몰한 배나, 죽어간 병사들과 선원은 상관이 없었으 나, 실종되거나 사망한 영주들과 자식들 문제로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위험하리라곤 아무도 생각 을 하지 않아서 유람나오 듯 나온 영주들이나 영주의 자식들이 갑작스레 죽었기 때문에 영지는 상속문 제로 시끄러울 게 뻔했다. 참패의 책임을 물어 중앙에서 문책이라도 내려온다면 큰 일이었다. "출발하라!" 자작은 배를 천천히 몰았다. 빨리 따라붙어서 싸우기에는 겁이 났다. 천천히 가면서 내려오 는 시드의 일행과 합류할 속셈이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태양이 따뜻하게 내리 쪼였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완연한 봄이었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꿉꿉한 날은 질색이었다. 선실에서 불을 쬐다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나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온 시드는 이물에 기대어 서서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짙푸른 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봄날 의 따듯한 햇살에 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를 띠었다. 이번 일을 끝마치면 니즈의 별장에 내려가서 한동안 쉴 생각이었다. 요사이 바쁘게 뛰어다녔더니 관절이 아프고 삭신이 쑤셨다. 시드의 나이는 어느 새 90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나를 깊이 있게 수련해서 사십대 장한보다 더 건강이 좋았지만 몸을 움직 이기가 귀찮은 걸 보면 늙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시드는 봄날의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시드님, 가우치자작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라울이 시드에게로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만사가 귀찮아진 시드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의사표시를 했다. 보고를 하라는 몸짓이다. "네이터근처의 강에서 악마교와 싸움이 붙었답니다." "그래서?" 나른하게 풀려 있던 시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배를 한 척 침몰시키고 나머지는 놓쳤다고 합니다." "아군의 피해는?" "그게...." 라울은 말을 흐렸다. 피해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가우치자작의 눈치 를 보아하니 영주연합군의 피해가 극심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종남작의 신분으로 자작에게 꼬치꼬치 따지고 들기가 뭐해서 그냥 통신을 끊었는데 시드가 정색을 하고 물어오자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시드 가 매섭게 노려보자 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십존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전신에서 땀을 쏟던 라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실대로 보고했다. "보고를 얼버무리는 게 피해가 극심한가 봅니다." 고개를 돌린 시드는 생각에 잠겼다. "얼뜨기들이 모여서 상급정령사를 상대하기는 무리지. 가서 막스에게 보고해라. 막스는 깐깐하니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게 좋을거다. 얼버무리다가는 경을 칠거야." 막스와 철혈기사들은 다르단선착장에서 승선했다. 라울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시드의 곁을 떠났다. 라울 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기세를 일으키자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 다. 시드는 난간에 기대어 지고교에 있다는 상급정령사를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 로 나왔다. 자기 자식들과 비교를 하게 되자 욕설이 튀어 나왔다. 시드는 카르덴의 시장통에서 태어났 다. 부모는 평범한 사람들로 시장의 조그만 점포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시드의 인생이 바뀐 것은 일곱살의 가을이었다. 그 해 가을 카르덴후작이 죽고 그의 아들이 새로운 영주가 되면서 일주일간 잔치가 벌어졌다. 카르덴은 엘리오트 제이의 도시로 영주의 영향력은 중앙에서도 강력했다. 수많은 축하 사절이 몰려 왔는데 그 중에서 카펜터도 있었다. 카펜터는 왕실정령사로서 축하사절과 같이 내려왔다.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 카펜터는 축하를 겸해서 정령을 부렸다. 허공을 수놓는 실피드는 시드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정령에 빠진 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단위에 올라 실피드와 함께 뛰어 다녔다. 밑에서 보던 어머니가 놀라서 얼굴이 하dig게 질렸지만, 영주는 즐거운 듯 껄껄 웃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시드는 카 펜터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 당시에 시드는 단위에 오른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 어져 정령술을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독한 수련에 힘이 든 시드는 매일 눈물을 흘리며 잠 이 들었다. 그런 시드도 십년 쯤 지나서 어느정도 성취를 얻자 정령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정령술에 깊 이 몰입한 시드는 융커산맥 깊숙히 들어가 자연에 파묻혀 수련에 열중했다. 정령술은 익히면 익힐수록 새롭고 즐거웠다. 그런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련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이는 어느새 쉰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바탕 꿈이라도 꾸고 난 것 같았다. 문득 삶에 회의가 들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인생을 보내기는 싫었다. 그 날로 산을 내려온 시드는 부모님을 찾아갔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동생부부가 가게를 이어받아 점포를 운영하고 있었다. 쓸쓸한 발길을 돌려 카펜터가 있는 왕궁으로 가서보니 스승은 이미 늙어서 정신을 놓았다. 벽에 똥칠한다는 말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몸으 로 보여 주었다. 카펜터의 재산은 사제가 물려받아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무시하며 적선하듯 던 져 놓는 돈에 격분한 시드는 운다인을 불러 떡을 만들어 놓았다. 그때 시드는 상급정령사의 경지에 들 어서 있었다. 소문은 날개를 달고 퍼져서 롬바르드전역에 시드의 명성이 울려 퍼졌다. 한달 후 왕실에서 사람이 나와 공손히 시드를 모셨다. 그날로 시드는 왕실의 수석정령사가 되었다. 오랜 기간의 수도생활 이 끝나자 시드는 세속의 향락에 깊이 탐닉했다. 여자와 음식 술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 느새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고, 허리에는 혹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마누라가 셋이었고, 첩이 일곱이었 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열여덟이나 되었다. 처음의 사근사근하고 나긋나긋했던 아내들은 이내 곰 이 되어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시드를 볼 때마다 보석타령 돈타령이었다. 시드가 돈을 밝히기 시작한 것 도 이즈음이었다. 어릴 때 너무나도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던 아이들은 자라면서 진절머리를 치게 만 들었다. 배우라는 정령술은 배우지 않고 풍족한 생활에 빠져서는 매일 빈둥거리면서 사고나 치고 다녔 다. 아버지의 지위를 믿고 부리는 사고를 수습하려고 시드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사고수습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시드의 발목을 잡았다. 지금은 자신이 일을 수습해 준다 하 더라도 사후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시드는 삼황자의 뒤에 서서 굳은 일을 처리했다. 그 대가로 백작의 작위도 받았고, 작으나마 영지도 하사 받았다. 영지에 마누라와 자식들을 몰아넣고 나자 속이 다 후련해졌다. 프르덴틀후작과 가빈백작은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아 준다고 굳게 약속했다. 걱정거리들이 없어지자 화가 치밀었다. 열여덟이나 되는 자식 중에 자신의 정령술을 이어받은 자식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멍청한 놈들뿐이었다. 그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자식들과 지고교의 젊은 정령사를 비교하자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엘란(45) "엘란!" 엘란이 성녀가 탄 배로 돌아오자 바람같이 달려온 에쉴리가 안겨 들었다. 엘란은 안심하라는 듯 꼭 껴 안아 주었다. 풍성한 갈색머리가 기분 좋게 코를 간질였다. "어이! 그림 좋다." 옆에 있던 쟝이 부러운 듯 이죽거렸다. 얼굴이 붉어진 에쉴리는 얼른 떨어져 나왔다. "교도들의 피해는 얼마나 됩니까?" 초조한 듯 갑판위를 서성거리던 성녀가 급히 물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목소리는 떨려왔다. "침몰한 배에 탔던 교도들 중에서 이천명은 족히 죽었을 겁니다." 침통한 목소리로 엘란이 대답했다. 다 른 배에 타고 있던 교도들까지 합치면 희생자는 2400명가량 되었다. 성녀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떨리는 음성으로 교도들의 명복을 빌었다. 에쉴리와 사제들도 같이 꿇어 앉아 죽은 신도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 다. 마음이 답답해진 엘란은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숙소에 들어온 엘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나수련 에 들어갔다. 왜 갑자기 전신이 저릿저릿했는지 마나를 운용하며 생각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잡념을 지운 엘란은 서서히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마나는 서서히 전신을 맴돌았다. 격전의 뒤끝이라 그런지 다른 때의 온유한 마나가 아니라 어쩐지 격한 느낌이 드는 마나였다. 연이은 격전과 교도들의 죽음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격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격하게 치달린 마나는 정수리에 부딪쳐 주춤했 다. 계속해서 정수리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하자 일순간 짜증이 인 엘란은 정신을 가다듬어 전신의 마나 를 몰아 거세게 부딪쳤다. 쾅!! 마나가 정수리를 거세게 두드리자 감고 있는 눈에 오색의 영롱한 무늬가 번쩍거렸다. 가끔씩 별도 떠올 랐다 사라지며 정신이 혼미해 졌다. 마나의 운용에는 무엇보다 안정된 마음이 중요했다. 일순간의 흥분 한 감정으로 무리하게 운용하다가는 몸이 크게 상하는 것은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정신이 번쩍 든 엘란은 정수리에 부딪쳐 흩어진 마나를 서서히 마나홀로 유도하며 마나수련을 끝마쳤다. "슈리엘!" 그 자리에서 엘란은 슈리엘을 불렀다. 앞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엘란의 의사가 전해지자 슈리엘은 선실을 벗어나 푸르른 창공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내 려오고 있었다. 슈리엘은 멀리까지 날아갔다. 안개가 걷친 강에는 물놀이하는 배부터 시작해서 상선과 여객선까지 온갖 종류의 배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슈리엘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유출되는 마 나의 양은 급증했다. '엘란! 군함이 강을 거슬러 오고 있다.' 슈리엘의 음성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700년전과 지금의 군함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엘란이 피콜라니해협에 정박해 있던 군함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군함을 식별할 수 있었다. 슈리엘은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서 한 번 본 것은 거의 잊어버리지 않았다. '우리를 쫓는 것 같아요?' '확실하게 알 수야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안전하겠지.' '몇 척이나 됩니까?' '스무척!' '특이한 상황은 없습니까?'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우리 배의 두배는 될 것 같은데.' 엘란의 얼굴이 긴장으로 가볍게 굳어졌다. '음, 해군의 배로군.' 신음성이 저절로 났다. 그렇게 빠른 군함은 포강하구에 정박하고 있는 해군의 배밖 에는 없다. 해군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은 전쟁이나 내전, 반란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이 황자나 지고교를 공격하기 위해 올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포강하구의 해군은 수전에서는 최강이었다. 어 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영주연합군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산넘어 산이다. 전신의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 다. 엘란은 흐트러지는 마음을 굳게 다 잡았다. '돌아와요.' 잠시후 슈리엘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강의 상류로 보냈다. 슈리엘은 무서운 속력으로 날아갔다. 시간이 지리하게 흐른 후 슈리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피콜라니협곡에서 봤던 군함들이 내려오고 있다. 한 번 싸웠던 배들도 합류해 있어.' 엘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양쪽으로 포위가 된 형세였다. '고마워요.' 가벼운 감사의 말과 함께 슈리엘을 돌려보낸 엘란은 다급히 일어섰다. 엘란은 회의실로 사 람들을 급히 불러 들였다. 사람들은 회의실에 모이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이 철렁했다. 또 무슨 일이 터 진 게 아닌가하는 걱정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의실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엘란의 굳은 얼굴을 보고 또 위험이 닥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엘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밑에서는 포리버의 해군이 올라오고 있고, 위에서는 피콜라니협곡의 수군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르단 선착장에서 충돌한 막스와 철혈기사단도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음!" "......"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신음성을 터트렸다. 이대로 가자니 앞 길은 아갈리아산맥이 막고 있고 되돌아가자 니 뒤에는 융커산맥이 막고 있는 형세였다. 한마디로 진퇴유곡의 상황에 처한 셈이다. 심약한 산티아고 사제는 몰락 귀족이 씨나락 만지 듯 우물쭈물하며 어쩔줄 몰라 했고, 항상 침착하던 파올대사제마저 안 절부절 못한 채 손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성녀는 손을 맞잡고 눈을 감은 것이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보 였고, 에쉴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이론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 려 해결책을 생각해봤지만 아무 대책도 떠오르지 않자 애꿎은 대머리만 벅벅 긁어 댔다. "앞 길을 뚫는 게 낫지 않을까요? 퇴로가 없는 뒤로 돌아갈 수는 없겠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엘란은 조심스레 말을 했다. "포강하구의 해군이면 최정예군대로 물에서는 단연 최곤데 뚫을 수 있을까요?" 마쟈르사제가 희망을 담아 말했다. "한 척 정도라면." "......" 다시 한 번 침묵이 주위를 감샀다. "그건 안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합니다." 성녀의 슬픈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배를 내려서 흩어져서 도주하는 건 어떨까?" "모두들 잡혀서 죽을 겁니다. 차라리 배를 타고 가는 게 낫습니다." 하이론의 의견에 파올대사제가 반대하고 나섰다. "데미나 쟝한테 한번 물어보죠. 혹시 좋은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에쉴리가 말하자 좋은 생각이라도 되는 듯 산티아고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산티아고사제는 지푸라기라 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후 들어온 둘에게 엘란은 조용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쟝의 얼굴은 금 새 울상이 되었으나, 의외로 데미는 침착했다. "앞에는 해군이 올라오고 뒤에는 수군이 내려온다 이거지." "예." 데미가 묻자 엘란이 대답했다. "몇 척이나 되?" "양쪽 다 스무척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배는 막스나 철혈기사단이 동승할 확률이 높습니다." "마르시앙이황자 때문이겠지." 엘란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길래 내가 그놈은 쫓아내야 된다니까요." 가만히 눈을 굴리던 쟝이 갑자기 핏대를 세웠다. "너 무슨 좋은 생각 없냐?" 하이론이 쟝을 보며 물었다. "없어요." 쟝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런 쟝을 하이론이 한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그래도 부유한 영주가문의 장남으로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나중에는 롬바르드에 유학까지 가서 기사수업을 받았는데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냐? 병법이라든가 그런 것 배웠을 것 아니 냐?" 하이론의 말에 부끄러운 듯 쟝은 얼굴을 붉혔다. 여자들 뒤나 쫓아다니느라고 공부는 뒷전이었으니 생 각나는 바가 전혀 없었다. "쯧쯧쯧.... 이놈은 정말 그 짓 말고는 쓸데가 없다. 쓸데가." "데미는 좋은 생각이 없습니까?" 엘란은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데미의 의견을 물었다.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밤의그림자였어. 소수의 인원이 도망다니는거야 자신있다만 이렇게 대규모의 인원을 거대한 범선에 태우고 탈출하는 데는 아무래도....." 데미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이봐! 엘란, 자네 상급정령사잖아! 배 한 척 정도는 지킬 수 있잖아?" "그거야 그렇죠." "그럼 무슨 걱정이야! 자 어서 도망가자!" 쟝은 신이나서 외쳤다. "나머지 사람들은 고깃밥이 되게 내버려두고?" 하이론이 쟝에게 눈을 부라렸다. "또 샤뮤엘대현자 촛대뼈 까는 소리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성인군자가 됐수?" "이 자식을 그냥...." "이황자한테 한 번 물어 봅시다. 그래도 일국의 후계자였는데, 제왕수업을 받았으니 좋은 의견이 있을지 도 모릅니다." 둘이 으르렁거리자 파올대사제가 하이론의 말을 끊었다. 에쉴리가 마르시앙을 부르러가자 쟝이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갈거면 나하고 데미는 내려주슈, 우리는 신도가 아니니 따로 살 길을 찾아야 겠소." "그렇게 하세요!" 계속되는 쟝의 언변에 화가 치민 엘란이 차갑게 쏘아 붙였다. 요즘 엘란의 모습을 보고 어쩐지 무서운 마음이 든 쟝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마르사앙이 들어서자 엘란은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이 어렵군요....." "쳇, 이황자도 별 수 없군." 이래저래 심사가 꼬인 쟝이 빈정거렸다. "허허, 참 나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흉보는 꼴이구만." 왼팔을 오른팔에 끼고 오른손으로 턱을 가린 채 한 참을 생각하던 마르시앙은 엘란을 보고 말했다. "지도 갖고 있나?" 엘란은 마르시앙에게 지도를 내밀었다. 마르시앙은 지도를 펴더니 포강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가 있는게 여기 쯤이지. 맞나?" 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쫓는자들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엘란은 대충위치를 짚었다. "이리로 도망가세!" 마르시앙의 손가락이 강의 지류를 따라 옆으로 돌았다. "이곳은 포강의 지류 델라웨이강이야. 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오픈호수가 나오고 오픈호수에는 수많은 지류가 갈라지니까 운이 좋다면 적들을 따돌리고 바다로 나갈 수 있다." 오픈호수는 대륙에서 가 장 큰 담수호였다. 이름 그대로 수없이 많은 작은 시내와 강이 모여서 거대한 호수를 이루었고, 이물은 다시 여러갈래로 갈라져 포강으로 흘러들었다. 모여있던 모두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하이론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대륙경영을 공부한 마르시앙은 이런 쪽으 로는 사고가 열려있었다. "안전한 계획은 아닙니다. 적들이 지류를 모두 틀어막으면 강이 좁아서 빠져나가기가 힘듭니다. 추격자 들의 포위망이 완성되면 한 척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물 안에 든 물고기 신세가 될 겁니다." 마 르시앙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다시 긴장에 빠졌다. 델라웨이강은 수심이 깊은 대신에 강폭이 대단히 좁았다. 오픈호수에서 포강으로 흐르는 모든 강들은 다 대동소이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史書) 에 의하면 발칸대제 재위시 큰 배가 다닐 수 있도록 강을 준설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좋겠습니다.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죠." 엘란이 의견을 개진하자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나는 찬성이네." 하이론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럼 나도 찬성합니다." 줏대없는 산티아고가 깍두기처럼 끼어 들었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성녀가 모두의 의견을 물었다. "찬성입니다." "그렇게 합시다." 쟝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을 했다. "그럼..." 엘란이 회의실을 재빨리 나서자 모두들 급하게 밖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던 것이다. 적막한 회의실 안 에는 쟝만이 남아있었다. 쟝은 어딘가 꼬여있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었지만 감정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자작가의 장남으로 대영지의 후계자였던 자신이 이렇듯 험한 지경에 처하고 보니 화도 나고 서 글프기도 했다. 평생을 목에 힘주고 살았고, 앞날도 한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쨍쨍했는데 이런 지경에 처 하리라고는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대제의 무덤에서 죽을 고생을 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는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고, 거기다 보이면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려놓았다. 밤의그림자에서도 쫓겨나 목숨 을 위협받았고, 몸을 피한 여기에서 마저 생명을 계속 위협받자 감정이 뒤틀려 있었다. 이기적인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한 참을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간 엘란은 정령을 불러 거센 바람을 일으켰고 노를 젓는 자들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죽 어라 노를 저었다. 엘란이 지치면 하이론형제들이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힘 입어 배는 쏜살같이 아래로 달렸다. 빠르게 달리는 배에 부딪친 강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빠르게 달린 배는 포강의 지류 델라웨이강이 포강과 합류하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델라웨이강은 좁은 강폭 을 따라 세차게 포강으로 흘러들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은 색깔이 뚜렸이 대비되었다. 포강의 강물은 맑아서 은은한 비취빛을 품었는데 델라웨이강은 흙탕물이 섞여서 누렇게 보였다. 그 동안 배를 몰면서 조종에 꽤 능숙해진 신도들이 조타와 돛을 조종해서 두 강이 맞닿은 지점으로 조심스레 배를 몰았다. 콰콰콰콰! 가까이 다가가자 거센 굉음이 귓가를 두들겼다. "조심해라!" 마법으로 증폭된 하이론의 경고가 시끄러운 굉음을 뚫고 멀리 울려 퍼졌다. 신산스런 삶으로 굵은 주름 살이 잡힌 조타수의 이마위로 커다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배는 아슬아슬하게 좁은 강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엘란이 탄 첫 번째 배가 무사히 지류로 들어섰다. 그 뒤를 나머지 배들이 따랐다. 드드드! 세 번째 배의 옆구리가 강변에 있는 암초에 긁히며 비명을 질러댔다. "슈리엘!" 슈리엘이 바람처럼 나타나 배의 옆구리를 밀었다. 그 큰배가 옆으로 휘청거리며 암초를 피했다. "휴!" 지켜보던 하이론이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 이후부터는 평탄했다. 배들은 일직선으로 늘어서서 강을 거슬러 올랐다. "배가 내려온다." 돛대 꼭대기에 매달린 망루에 올라서 망을 보던 교도가 고함을 질렀다. 엘란이 고개를 들어 전방을 보 자 작은 범선이 천천히 내려오는 게 보였다. 배는 돛을 모두 접은 채로 물살에 몸을 맏기고 있었다. 골 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엘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교도들을 태운 배는 빠르게 나아갔으므 로 배들은 금방 가까워졌다. 배들이 가까워지자 작은 범선을 타고 내려오던 사람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 였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배 위에는 여러개의 술상이 차려져 있고 남자들은 술이 적당히 올라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오른 채 희희덕거렸다. 남자들은 모두 여자들을 하나씩 끼고 있었는데 여자들의 옷은 반 쯤 벗겨져 있어서 속살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귀족들의 자제이거나 부유한 상인들의 자제인 것 같았는 데 날이 따뜻해지자 물놀이를 나온 걸로 보였다. 양 쪽의 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로 마주보 고 서 있었다.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어이! 배 치워." 술병을 들고서 반쯤 꼬부라진 목소리로 한 사내가 소리쳤다. 엘란은 난감했다. 비켜설 려면 포강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추격자들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족 의 자제들이 평민이 탄 배 때문에 배를 돌릴리도 없었다. "어쩌죠?" 엘란은 옆에있던 마르시앙에게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 수 없다. 뚫고 가야지." "야 빨리 배 안 치워!" 배들이 비켜서지 않자 얼큰하게 취해있던 티터스는 열이 받아서 빽 소리를 질렀 다. "그 쪽배는 작은데다 한 척이니 그쪽이 비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르주가 공손하게 말했다. 배가 비 키지 않자 상대방의 신분이 높은 것이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된 티터스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 다. "그 쪽에 타고 계신분의 가문은 어떻게 됩니까?" "……." 조르주는 평민이라고 말하기가 뭐했다. 조르주가 우물거리자 별 것 아니라고 판단을 한 티터스의 기세 가 단번에 치솟았다. 들고 있던 술병으로 난간을 탕탕 두드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이 새끼들 빨랑 안 비켜!" 짐짓 눈까지 부라리는 게 배를 돌릴 것 같지 않았다. "5000골덴을 드릴테니 배를 돌려주십시오." 노련한 하이론이 돈으로 회유를 했다. "음!" 소리를 지르려던 티터스는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5,000골덴이면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기세좋게 나가다가 배를 돌리려니 친구들의 반응이 신경쓰이기는 하지만 배만 돌리면 5,000골덴의 거금이 공짜로 굴러들어오니 고민을 안 할 수 없었다. 무게는 점점 5,000골덴으로 기우는데 옆에서 맥콜이 옆구리를 아 프게 찔렀다. "뭐야?" 갑자기 옆구리를 찔려서 놀란 티터스는 짜증을 부렸다. "저기, 저기 봐!" "??." '이 놈이 미쳤나? 왜 이래!' 손가락을 전방으로 들어 올린 채 맥콜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들어왔다. 갈색의 풍성한 머리 는 어깨를 덮었고 맑고 큰 눈은 길 잃은 사슴을 연상케 했다. 볼록한 볼과 붉은 입술 갸름한 얼굴 절묘 한 목선은 티터스를 달뜨게 만들었다. 티터스의 눈도 맥콜처럼 반쯤 풀어져 버렸다. 티터스가 술이 너무 취해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닌지 고민하게 할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티터스는 눈을 비볐다. 꿈이 아니 었다. 티터스는 옆에서 가슴을 반쯤 내놓은 여자들을 둘러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봉황과 참새의 차이였 다. 이런 여자들한테 빠져 해롱거렸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티터스는 들고 있던 술 병을 거칠게 팽개졌다. 쨍! 애꿎은 술병만 깨어지며 노란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티터스는 누가 책임잔지 두리번거리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조르주를 향해 말했다. "어이 대머리 좋아, 그렇게 하지." 조르주의 이마에 시퍼런 혈관이 불끈 치솟았다. 대머리라는 소리는 조르주의 역린이었다. 배를 돌린다는 티터스의 말에 억지로 화를 가라앉쳤다. 그때 티터스가 토를 달았다. "대신에 저 여자는 나한테 주게!" "티터스 자네 다음에 나도 맛 좀 보세!" 옆에서 맥콜이 간사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지." 말과는 달리 저런 미인을 남과 같이 공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미쳤냐! 저런 미인을 돌리게, 첩으로라도 들여야겠다.' 티터스가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배 위에서는 의미심장한 눈짓이 교환되고 있었다. '안 되겠죠.' '안 되겠다.' '뚫고 나가자.' 서로의 의견이 일치를 하자 하이론이 명령을 내렸다. "출발!" 하이론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작은 범선에 타고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놀라서 굳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티터스와 그 일당들은 여전히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작은 범선은 포강을 오르내릴만큼 튼튼하기는 했지만 바다까지 항해하도록 만들어진 엘란일행들의 배에는 비할바가 못되었다. 쾅!! 선두에 있던 성녀의 배가 티터스의 배를 들이받으며 나갔다. "어어" 쿠당탕! 꿈속을 헤매던 사내들이 뱃전을 거칠게 나뒹굴었다. 술상과 그 위에 차려진 음식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금새 난장판이 되었다. "야 죽고싶어!" 바닥을 기면서도 호기를 잃지않은 티터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 번 죽여봐라!" 언제 나타났는지 쟝이 혀를 내밀며 약을 올렸다. 자기도 엘란 때문에 접근을 못하는데 저런 무식한 놈 들이 에쉴리를 넘본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쯧쯧쯧, 대낮부터 여자들 끼고 술판이나 벌이고, 니 부모도 무지하게 불쌍하다. 그래도 니들 낳았을 때 는 귀한 자식 낳았다고 미역국도 먹었겠지. 에이! 미역국이 아깝다. 이 망나니들아." 티터스와 맥콜을 위시한 모든 사내들이 화가 나서 일어서다 다시 한 번 거칠게 나뒹굴었다. 배가 지나 며 일으킨 물결에 배가 뒤집힐 듯 흔들렸다. "이이!" 티터스는 화를 풀 길이 없자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쾅! 두 번째 배가 옆구리를 받고 지나가자 강변으로 밀린 배는 암초를 들이받았다. "물이 샌다." 선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배에 구멍이 나자 당황한 티터스도 발을 동동 굴렀다. "나 수영 못 해." 맥콜도 울상이 되어 외쳤다. 모두들 뱃전에 나와 소리를 질렀다. "살려줘!" "살려줘요!" 갑자기 처녀의 모습을 한 정령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안아들었다. 엘란이 실피드를 부른 것이다. 실피드 는 선원들과 여자들을 하나씩 강변으로 날랐다. 배위에서 거만을 떨던 사내들은 옮겨주지 않았다. "이봐 우리도 옮겨줘야지!" "도와줘!" 배위에 자신들만 남겨지자 겁이 덜컥 난 사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무정한 배는 그들을 지 나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젠장!" 티터스는 세차게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오르기에는 물살이 너무 거셌다. "이봐 나 수영 못 해!" 맥콜은 하?게 질린 얼굴로 무슨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티터스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티터스는 그만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맥콜을 걷어차려는데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상들이 보였다. "할 수 없다. 이봐!" 티터스는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친구들을 불렀다. "이대로 있다가 배가 가라앉으면 모두 죽는다. 상을 강에 던지고 그 위에 올라타자." 티터스가 침착하게 의견을 내자 좌중은 서서히 진정이 되었다. "그럼 나부터!" 상을 하나 집어든 티터스는 상을 부여잡고 강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티터스를 삼킨 강이 물기둥을 만들었다. 티터스는 상위에 올라타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모두 봤지! 따라서 해!" 티터스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낸 한 명이 상을 들고 뛰어들자 모두들 강으로 뛰었다. 인원에 비해 상이 모자라 둘 셋이 함께 뛰어든 경우도 있었다. 결국은 맥콜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맥콜은 상을 든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모두들 점점 멀어져가고 물이 갑판까지 차오자 맥콜은 겁이나 죽을 것 같았다. 얼마나 무서운지 오줌까지 지릴 정도였다. "어!" 갑자기 맥콜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지켜보던 엘란이 정령을 불러 도와준 것이다. 먼저 옮겨졌던 사 람들은 모두 떠나고 혼자만 남겨진 맥콜은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았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상을 꼭 품은 채로. 20여척의 배가 드넓은 포강을 가득 메운 채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엘란일행을 쫓는 배였다. 엘란의 예상대로 막스와 철혈기사단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피콜라니협곡의 함선이 위풍당당하게 움직 이고 있었고 그 뒤를 나머지 배들이 기러기대형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움직여서 이 들과 합류한 가우치자작의 영주연합군은 이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만큼 협 곡의 배들은 빨랐다. 시드는 의자에 단정히 앉은 채로 운다인과의 연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진 따라잡 은 것 같자 정령을 불러 지고교도들이 탄 배를 찾았다. 그 옆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막스가 서 있었다. 갑자가 시드가 벌떡 일어섰다. 잔뜩 찌푸린 표정을 보니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포강에는 배들이 없다." "배들이 없다니 무슨 뜻입니까?" 엥겔스남작이 시드에게 물었다. "말 그대로다. 하류에는 급하게 올라오는 해군의 배만 보일 뿐 사교들이 탄 배는 보이지 않는다." "지류로 빠졌군." 막스가 금방 핵심을 짚었다. "귀찮게 됐군요." "귀찮을 것 없다. 어차피 독안에 든 쥐니까!" 막스는 자신만만했다. "어디서 빠졌을까요?" 라울이 질문을 던지자 엥겔스가 지도를 잠시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영주연합군과 충돌한 것이 여기고, 그 때쯤 해군이 여기에 있었으니까...." 시드가 말을 끊으며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델라웨이강으로 빠졌군. 도로 거슬러 올라가야 겠는데" "오픈호수로 연결된 강입니다. 적도들은 오픈호수로 간 게 분명합니다." 뒤를 이어 엥겔스가 말했다. "저건 뭐야?" 뒤짐을 지고 강을 바라보던 시드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같습니다." 강에서는 다섯명정도가 떠내려 오고 있었는데, 모두들 상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이 상당히 희극적으로 비췄다. "엔다이론!" 물의 중급정령이 강에서 솟아 올랐다. "저 놈들 좀 데려고 와라!" 시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엔다이론은 바람같이 움직여 상다리를 죽어라 붙들 고 있는 사람들을 들어 올려 배에다 실었다. "캑캑!" "퉤퉤!" 물을 많이 먹은 듯 연신 물을 뱉어내는 모양새가 물에 빠진 새앙쥐 같았다. "이런!" 뱉어낸 물이 튀어 시드의 로브에 묻자 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깔끔한 성격의 시드는 지저분한 물이 로브에 묻자 기분이 나빠졌다. 퍽! 시드의 반응을 보던 기사 하나가 바닥에 엎드려 숨을 고르던 사내를 걷어찼다. "아이고!" 걷어 차인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 가뜩이나 열이 받아 있던 티터스는 호통을 치러 일어나다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주변은 살벌 그 자 체였다. 도처에 갑옷을 번쩍이는 기사들이 즐비했고,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도 득시글 거렸다. 티터스는 금새 기가 죽어 꼬리를 내렸다. 강한자에게는 약하고 약한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구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티터스의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구부러졌다. "무슨 일이냐?" "예?" 티터스는 경황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구! 심심해서 강에 뛰어든 것은 아닐 것 아닌가?" "그게 말입니다. 날도 따뜻하고 해서 물놀이를 나왔더니, 죽일 놈들이 강을 막고는 비켜주지 않는 겁니 다. 비키라고 했더니, 말도 없이 배를 들이 받아서는 이 꼴이 된 겁니다." 티터스는 입에 거품을 물고 떠 들었다. 엥겔스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어떻게 생긴 배냐?" "에...그게... 하여간에 무지하게 컸습니다. 네척이나 올라오던데 강이 꽉차더라니까요." 술이 반쯤 취했고, 나중에는 에쉴리에 취해서 제대로 배를 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불명확한 설 명도 확신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라울! 통신을 열어서 연락을 취하라. 먼저 해군에게 연락을 취해 상류로 올라오지 말고 지류의 입구를 굳게 막으라고 명령하라. 이 시간 이후부터 오픈호수와 포강으로 연결된 모든 지류에 배를 띄우는 것을 금한다. 인근 영주들은 모든 병력을 동원 호수와 강을 다니는 배를 검문하고 뭍으로 도망칠 때를 대비 주요 길목을 차단, 검문 검색을 강화할 것을 명령하라! 이를 어기는 자는 반역으로 다스릴 것이다." 막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라울은 휘하의 마법사를 동원 바쁘게 움직였다. '조만간 만나겠군.' 막스는 곧 있을 엘란과의 대결을 기대했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티터스일행만이 꿔다놓은 보릿자 루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개중에는 보물이라도 되는 듯 상을 움켜쥔 자까지 있었다. "저 저희들은 어디에....." 티터스에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니들 갈데로 가라!" 시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엔다이론!" 물의 중급정령이 나타나 티터스일행을 들어 올렸다. "어어!" 티터스는 정령에 의해 들어올려지며 버둥거렸다. 퍽, 쿵, 쿵!! "악!" "으악!" 놈들을 밉게 본 시드가 부드럽게 대할리 없었다. 강변으로 거칠게 팽개쳐진 티터스는 비명을 질렀다. 그 들은 허리라도 다친 듯 한 참을 누워서 끙끙거렸다. "출발!" 엥겔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배들은 급하게 델라웨이강으로 향했다. ********************************** 에단은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격자형무늬가 들어간 유리창으로 햇살이 따 뜻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손에 총채를 들고 먼지를 털어 내던 하녀들이 에단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가 에단이 지나가자 서로들 뭐라고 쑤근거렸다. 에단은 아랫사람들이 자신의 뒤에서 쑤근거리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했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는 아치형의 입구가 나타났다. 앞에는 창을 든 두명의 기 사가 지키고 있었다. 에단은 손을 흔들어 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에단은 고풍스런 회랑을 천천히 걸었 다. 회랑과 어어진 건물은 후작가가 세워질 초기에 만들어진 건물이라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무척이 나 낡아서 군데군데 금이 가기는 했지만 유서깊은 가문의 격조를 보여주려고 헐지 않고 보존하고 있었 다. 벽에는 가문의 역사을 말해주는 초상화들이 죽 걸려 있었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미술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에단은 여길 지날때마다 질식할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후손을 감시하는 듯한 초상화는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릴때부터 여길 데려와 가문의 역사와 영 광 후손의 의무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아버지의 영향때문일 것이다. 동생의 뛰어남에 미치지 못하는 자 신의 능력에 대한 열등감도 그것을 부채질했다. 약간은 어두운 회랑을 지나자 주위가 밝아졌다. 안에는 수많은 책장이 있었고, 그 안에는 장서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후작가에서 서재겸 도서관으로 사 용하는 곳으로 왕실도서관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곳이다. 벽의 곳곳에는 값비싼 발광석 들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화재가 날까 염려하여 등불이나 촛불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초로 의 신사 한 명이 여기저기 책을 쌓아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 막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막스의 얘기가 나오자 프르덴틀후작의 고개가 급히 들려졌다. "뭐라더냐?" 프르덴틀후작가의 장남 에단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아버지의 신경은 언제나 막스에게 쏠려 있었다. 크면서 능력의 우열이 명백히 드러나자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막스를 편애했다. 가문의 후계자가 막스로 정해진 것은 확정적이었다. 명백하게 천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이나 방계의 친척들은 물론 후작가의 기사들이나 고용인들 영지민들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프르덴틀후작 가는 유산을 공평히 분배하지 않고 가문의 계승자에게 모두 몰아 주었다. 귀족의 힘을 드넓은 영지를 바탕으로 한 경제력에서 나왔다. 영지를 쪼개다 보면 점점 세력이 줄어드는 것은 막을 수 없게 된다. 일 인 계승은 대대로 재산이나 영향력을 유지할 목적의 상속제도라 할 수 있었다. 후계자는 혈통을 우선시 하기는 했지만 철저히 능력을 따졌다. 장남이라고 득을 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능력이 비슷하면 우선권 을 주는 정도의 매리트가 전부였다. 계승자의 직계가 무능하면 가장 가까운 친척의 직계후손 중에서 계 승자가 나올 정도였다. 그 경쟁에서 에단은 일찌감치 탈락했다. 그만큼 막스의 능력은 발군이었다. "이황자가 탄 배가 델라웨이강을 따라 오픈호수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에단은 상황을 설명하고 막스 의 명령도 자세하게 보고했다. 후작은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듯 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다른 일은?" 에단은 영지의 사소한 일과 귀족가의 동향에 대해 몇가지 보고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후작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단은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단이 머뭇거리자 후작이 책을 덮으며 물 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엘란(46) "꼭 그래야만 합니까?" 한 참 뜸을 들이던 에단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뭘 말이냐?" "죄가 없는 지고신자들을 꼭 죽여야 합니까?" 후작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그런 식으로 희생양을 만들어서 어쩌자는 겁니까? 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귀족들의 학정때문이지 불쌍 한 그 사람들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지 그런 미봉책이 얼마나 간다고 보십니 까?" 에단은 주먹을 불끈 쥐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눈빛은 아련하게 젖어든 채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악마의 종자들이 죄가 왜 없느냐? 대륙의 모든 신전들이 그들을 사교로 지정했고, 예전부터 말살의 명 을 각 나라에 전하지 않았느냐! 죽어 마땅한 놈들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나라도 점차 안정이 될 거다." 후작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아들을 조용히 타일렀다. "그럼 반란이나 지진같은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가려집니까? 설사 그들이 모두 죽는다고 나라가 안정된다고 보십니까? 천만에요, 귀족들의 학정이 계속 되는 한 나라는 오래 못 갑니다. 우리나라가 살길은 근본적으로 사회를 개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고 교가 없어지면 다음에는 어디를 희생양으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에단은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자신의 얘기에 심취되어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손을 들어 불끈 쥐 었다. 에단의 말을 듣는 후작의 얼굴도 점점 달아올랐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게 터지는 열화를 억지로 눌 러 참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지금 제도는 천년 전에 대제가 확립한 최고의 제도이다. 무슨 개혁을 한다는 말 이냐!" 후작의 입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세상의 모든 영화를 누리는 귀족의 입장에서 기득권을 포 기하고 사회를 개혁할 뜻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에단의 생각은 달랐다. 후계자경쟁 에서 밀려나 주변에서 돌던 에단은 사회의 모순을 실감하고 있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천년전의 제돕니다. 사람도 크면서 옷을 바꿔 입는데 고리타분하던 시대의 제도가 지 금 상황과 맞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인구와 생산력도 증대되고 마법도 발전한 이 시대에 그 틀을 운용 하는 제도만 천년전과 그대로라면 문제 아닙니까?" 화가 극도로 치민 후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책을 꼭 움켜준 손은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하얗게 변했 다.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된 에단은 아버지의 분노한 기색을 느끼지 못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왕권을 강력히 만들어서 귀족들의 권력을 감소시키는 겁니다." 에단은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귀족이라는 신분의 틀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에단이 말하는 개혁은 왕의 권력을 강화해서 귀족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정도 의 견도 중앙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후작의 동의를 얻을 수는 없었다. 에단이 다시 열변을 토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후작이 책을 집어 던졌다. 퍽! 두꺼운 장정을 입힌 책이 에단의 이마를 강타했다. 이마는 금새 찢어지며 붉은 피를 토해냈다. 후작은 분노가 너무 심해지자, 오히려 감정이 가라앉았다. "나가라! 지방에 작은 영지를 떼 줄 테니 거기서 나오지 마라!" 후작은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혹한 음성이었다. 아버지의 냉정한 음성이 에단의 가슴을 헤 집어 놓았다. 분노에 떨리는 고함이 아니라 감정을 삭이고 이성적으로 내뱉은 말이 에단의 심장을 저몄 다. 에단은 피가 흐르는 이마를 누르며 비틀거리며 걸었다. 후작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바닥에 나뒹구는 책을 줏어 의자에 앉았다. 고요한 침묵이 서재 안을 맴돌았다. 간혹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하게 들 렸다. *********************************** 노를 젖는 도수들의 팔뚝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고, 키를 움직이는 조타수의 얼굴에는 비오듯 땀이 흘렀 다. 지고신자들을 태운 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배는 오픈호수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오!" 오픈호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수는 거대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넓 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호수는 넓었다. 엘란은 에쉴리의 손을 꼭 쥐고 황 혼으로 붉게 물든 호수를 쳐다보았다. 해가 점점 가라앉으며 피빛 낙조를 드리웠다. 앞으로의 일을 암시 하듯 피처럼 붉은 석양이었다. 그 넓은 호수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에쉴리는 나쁜 예감에 엘란의 손을 힘껏 쥐었다. "이상한 점 없냐?" 하이론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그게....이상한 게 있기는 한데....꼭 집어서 말을 못하겠다." "석양이 너무 붉은 게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상하다고 할 것까지야...." "그렇지, 배! 배가 없다!" 짝하고 손뼉을 치며 하이론이 외쳤다. "그게 이상한 겁니까?" "당연히 이상하지. 오픈호수는 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터전이고, 모르긴 몰 라도 물동량도 엄청날 거다." 하이론은 팔을 쭉 뻗어 호수를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봐! 배가 한 척도 없잖아!" "그럼..." 하이론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잡으려고 배들을 소개시킨 게 분명할 거다." "음!" 엘란이 침음성을 발할 때 돛대에 달린 망루에 올라 망을 보던 교도가 소리쳤다. "배가 다가온다!" "어떻게 생긴 배냐?" 하이론은 눈이 밝은 엘란에게 물었다. "배의 앞부분은 뽀족하게 튀어나왔고 돛은 없습니다. 배의 폭은 넓어봐야 5미터는 안될 것 같고, 무장을 갖춘 병사들 이삼십명이 양옆으로 앉아서 노를 젖고 있습니다." "젠장, 영주들의 경비정이다." 오픈호수는 포강과 달리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지는 않았다. 호수를 면한 영지를 가진 영주들이 각자 경 비정을 이용해 관리를 했다. 여러 영주들이 나서다 보니 체계가 없고 분쟁도 잦은 편이었다. 이놈저놈 달려들어서 뜯어가다 보니 주민들의 원성이 심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대대로 호수를 관리해온 영주들의 권리를 빼았을 수는 없었다. "몇 척이냐?" "주위에 수십척이 있는데 다가오는 배는 두척입니다." "곤란하게 됐군!" 양측이 빠르게 배를 몰자 거리는 금새 가까워졌다. 경비정에는 움직이기 편한 체인메일만을 걸친 기사 두명과 병사들이 있었다. 노를 젓던 병사들은 가까워지자 노를 놓고 트라이던트를 들었다. "배를 멈추고 검문을 받아라!" 평소와는 다르게 엄정한 군기가 잡혀 있었다. 보통때라면 뭐 뜯어먹을 거 없나, 기웃거릴텐데 그런 기척 이 전혀 없었다. 위에서 엄정한 명령이 떨어진 때문이었다.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처형당한 믹이 나 샤피로남작 알센백작때문에 영주들이 바짝 얼어붙은 영향이 컸다. "침몰시킬까요?" "관둬라! 멀리 있는 배들이 벌써 연락을 취했을 거다." 고개를 끄덕인 엘란이 명령을 내렸다. "무시하고 달려라!" 배가 출발하자 범선이 일으키는 물살에 휩쓸릴까봐 경비정들이 얼른 비켜섰다. 배는 광활한 호수로 미 끄러져 들어갔다. "또 회의를 해야 겠군요." 몸을 돌리며 엘란이 말하자 하이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회의라면 진절머리가 쳐진다." 마르시앙은 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 앞에는 코리나가 베개를 끌어안고 헤프게 웃고 있었다. "아가 밥먹어야지." 코리나가 베개에게 다정하게 말하자 마르시앙의 검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미안하오, 나에게는 더 이상 정신나간 당신을 지켜볼 용기가 없구료. 우리 그만 편하게 쉽시다.' 검이 서서히 위로 치켜졌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코리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똑똑! 마르시앙은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놀라 검을 멈추었다. "무슨 일 입니까?" "좌호법사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회의실로 잠깐 나오시랍니다." "좀 있다 가겠습니다." 마르시앙은 빛나는 검신을 어루만졌다. 어릴 때 처음으로 검을 받던 날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 검으로 자신과 아내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걸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졌다. 마르시앙은 검을 잠시 응시하다 몸을 돌려 선실을 나섰다. 또르륵! 바보처럼 웃던 코리나의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마르시앙이 들어서자 하이론이 입을 열었다. "경비정이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지금쯤 우리 행방은 모두 알려졌을 겁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입니다." "결정이라면....."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습니다. 흩어져서 가야 조금이나마 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냥 흩어졌다가는 딴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겁니다." 성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결정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 거렸다. 하이론은 쟝을 힐끔거렸다. 쟝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인정머리 없 는 발언을 하면 자신이 거기에 동조해 흩어져서 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개똥도 약 에 쓸려면 없다더니, 쟝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콱 다물고 있었다. "내가 미끼가 되죠. 내가 계속 타고 있으면 죽자살자 추적할게 뻔합니다." 마르시앙이 핵심을 찌르고 나섰다. 마르시앙이 있는 한 저들은 마지막 한 척까지 따라붙을게 분명했다. 하이론은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한시름 놓은 쟝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히죽거렸 다. 성녀가 반대하려 하자 엘란이 성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모두 죽습니다.' 엘란은 눈빛으로 성녀에게 나서지 말 것을 강요했다. "그럼 어느 배에 타실 생각이십니까?" 하이론이 묻자 회의실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마르시앙이 미끼가 되려면 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그 배는 표적이 될게 분명했다. 그 배에 탄 교도는 십중팔구 죽을 것이다. "마르시앙만으로는 안될 거다. 지교척결령이 내렸으니 어느 정도의 성과를 봐야 추적을 멈출 거다. 막대 한 피해를 입고 그냥 물러섰다가는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테니." 데미가 모두 잊고 있던 문제를 끄집어냈다. 엘리오트는 사교척결령을 내렸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대륙의 모든 나라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물러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은 만들어 줘야 한다. "게다가 엘란! 네가 박살낸 영주의 배들도 열 척이 넘잖아. 게다가 상급정령사를 적으로 돌리면 여러모 로 피곤해지니까 아직 성취가 부족한 너를 이 기회에 꼭 죽이려들걸." "그러니까 이황자님만으론 부족하니까 다른 미끼도 있어야 된다는 말이군요." 엘란이 굳은 얼굴로 말했 다. "빙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엘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형님, 목숨을 버릴 생각이십니까?" "한 번이라도 백성을 위해 죽고 싶다. 개처럼 쫓겨다니다 사냥 당하고 싶지는 않아." 마르시앙은 호탕하 게 웃었다. "하하하하! 평소에 악마의 교도라고 믿던 지고신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이상하긴 하군." "성녀의 얼굴을 외부인은 아무도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군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배는 흩어져서 바다로 향합니다. 한 척에는 마르시앙과 나 교도들이 타고 성녀의 역할을 할 신도와 함께 적들을 유인합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 그 사이에 바다로 탈출하십시오." "안돼요!" 에쉴리가 비명을 질렀다. "제발! 엘란 그러지 마세요. 더 이상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싫어요." 하?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에쉴리의 얼굴은 애처로웠다.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흘러내렸다. "엘란!" "이 길 뿐입니다." "그렇게 합시다." 파올대사제가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흑흑흑!" 마음약한 산티아고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시간이 없어요. 저희와 함께 탈 신도를 뽑아야 합니다. 대부분 죽을 테니 가능한 한 자원자로 뽑았으면 합니다." 엘란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엘란! 엘란!" 그 뒤를 에쉴리가 따랐다. "뭘 하는 거야 시간이 없다잖아!" 하이론이 울음섞인 고함이 회의실을 뒤흔들었다. "자원자를 받겠습니다!" 파올대사제는 침통한 표정으로 외쳤다. 괴로운 듯 일그러진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적들을 유인하려면 노를 빨리 저을 도수와 조타를 할 타수 돛을 만질 선원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주저주저 눈치만 볼 뿐 나서는 교도는 없었다. 목숨을 버리는 일에 쉽게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이론의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는 한 쪽 다리가 잘린 빌이 뒤뚱거리며 걸어 나왔다. "안돼요, 여보." 아내가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어차피 교가 구해준 목숨, 교를 위해 바치는 것도..." "애들은 어떻게 키우라고..." 아내는 울먹거리며 말을 마치지 못했다. "어차피 이런 상태로는 제 구실하기 어려워." 빌은 자조적으로 말했다. "여보, 상관없어요. 당신은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아요." "여보!" 둘은 갑판 위에서 꼭 끌어안았다. "휴!"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저절로 한탄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검은 먹구름 이 몰려왔다. 후두둑!후두둑! 검은 먹구름은 기어이 비를 뿌렸다. 가뜩이나 심난한 교도들의 마음은 더욱 가라앉았다. 우르릉,쾅! 하늘이 번쩍하더니 뇌성벽력이 울렸다. 천둥치는 소리는 온 하늘을 찢어발겼다. 서서히 바람이 거칠어지 며 물결이 사나워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옆에서 하이론이 재촉을 했다. "제비뽑기라도 합시다." "어쩔 수 없지요." 네척의 배에서 죽음의 제비뽑기가 시작되었다. 배에 달린 노는 팔십개였다. 교대로 밤낮없이저을려면 최 소한 이백사십명은 필요했다. 결국 삼백명을 가리기 위한 제비뽑기가 시작되었다. "꿀꺽!" 제비를 뽑는 신도들의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통 안에는 검은 종이와 흰 종이가 들어 있었는데 검 은 종이를 뽑은 신도는 죽음의 초대장을 받게 될 것이다. "아!" 검은 종이를 뽑은 신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대신 가겠소!" 머리가 허연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검은 종이를 뽑은 신도의 눈에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이 흘렀다. 아들이 죽음의 초대장을 뽑자 아 버지가 대신 나선 것이다. "여보!" "흑흑흑!" 여기저기서 비통한 울음과 울부짖음이 어두운 하늘 높이 퍼져 나갔다. "하이론, 부탁하나 합시다." 마르시앙이황자는 하이론의 손을 꼭 쥐었다.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적을 유인하는 미끼가 되려하는 이황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었다. "내 아내를 잘 돌봐주시오. 이대로 정신을 못 찾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죽여 주시오!" "그런...." 하이론은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이런 부탁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내를 잘 살피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이론이 짝을 지워 주시구려." "음!" "참 잊을 뻔했는데 그 변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마르시앙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알았습니다." 하이론은 알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엘란은 에쉴리를 꼭 안았다. 다시는 보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에쉴리는 머리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엘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꼭! 살아서 오겠다고 약속해요!" "......" 함부로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에쉴리의 성격을 보건 데 약속을 한다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 기다릴게 뻔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없었다. "엘란, 제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엘란은 말없이 에쉴리를 안았다. 그들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서글픈 육체의 언어를 나누었다. 밖에는 여전히 푹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거대한 오픈호수는 한 번 성을 내자 무섭게 몰아쳤다. 거센 바람에 돛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자 배의 통제가 쉽지 않았다. "돛을 내려라!" 폭풍우 속에서 돛을 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소란 속에서 서서히 제비뽑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오! 빌." 결국 빌은 검은 종이를 뽑았다. "지고가 나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이렇듯 일찍 부르나 보오." 빌은 짐짓 환하게 웃었다. 거센 폭풍우가 교도들의 울음을 삼켜주었다. 쟝은 선실에서 두문분출했다. 어 쩐지 다른 사람들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에쉴리의 하얀 어깨가 움찔했다. 일어서는 엘란을 에쉴리가 부둥켜안았다. "약속하지 않으면 갈 수 없어요." 목소리에는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강한 집념이 어려 있었다. 얼마나 세 게 움켜잡았는지 엘란의 등에 피가 맺혔다.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장담은 못합니다. 다만, 최대한 노력은 할게요." 엘란은 에쉴리에게 입을 맞추었다. 깊고도 긴 키스였다. 마르시앙은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꽂꽂하게 버티고 섰다. 그 옆에 에쉴리의 손을 꼭 잡은 엘란이 있었 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엘란이 물었다. "별로....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네." 엘란을 힐끗 넘겨다 본 마르시앙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꼭 살아야 겠구만." "형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글쎄...어떨지...내가 없으면 아내가 새출발하기 편할지도 모른다. 괴로운 기억도 잊기 쉬울테고...고위귀 족들이 흔히 그렇듯 우리 부부도 애정으로 출발한 관계는 아니었거든. 그 여자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나는 알면서도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을 한거고. 사실 찍기는 잘 찍었지. 자네도 보다시피 대단 한 미인아닌가!" "하긴, 그렇게 이쁜 미인은 처음 봤습니다." "하하, 자네 조심하게. 애인을 옆에다 두고 그런 소리하는 사람이 어딨나? 이크, 저것 보게 에쉴리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지 않나?" "제가 언제 그랬어요?" 객쩍은 농담이 오가는데 침통한 얼굴을 한 하이론이 다가왔다. "옮겨 탈 교도들이 다 뽑혔다." 번쩍! 하얀 섬광이 작렬하며 에쉴리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콰콰쾅! 천둥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앞으로 나가는 엘란의 팔을 에쉴리가 낚아챘다. "위험하면 몸을 피하세요." "그렇게 해라! 마음만 먹는다면 몸을 빼는 것은 여반장일거다. 10-52-32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하이 론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대륙의 어느 지방이나, 바다는 모두 고유한 식별번호가 붙어 있었다. 전국을 이동마법진으로 묶으려는 야심찬 계획의 일환이었다.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번호는 살아 남아 모든 지도에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걱정마세요." 엘란은 짐짓 환하게 웃었다. "엘란, 이거 받아라." 하이론은 품속에서 기름종이로 꼼꼼하게 싼 물건을 꺼내더니 엘란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텔레포트 스크롤이다. 비싼 값에 사기는 했다만 공간에 갖힐 지도 모르고 잘 못 떨어지면 목숨이 위험 할 수도 있어서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한 건데 이렇게 쓰이는 구나, 될 수 있으면 사용은 하지 말고, 죽 을 것 같거든 그 때 사용해라." 꽉 잡은 손으로 하이론의 진정이 전해졌다. "고맙습니다." 엘란도 하이론의 손을 꽉 잡아준 다음, 몸을 돌려 다른 배로 향했다. 엘란, 마르시앙, 성녀와 사제들의 대역들, 배를 몰 선원들은 미끼가 될 배에 올라탔다. "하이론, 교도들과 에쉴리를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위험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나가세요." 정령 이 엘란의 소리를 전해왔다. 하이론은 굳은 얼굴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연신 얼굴을 때렸다. 엘란을 태운 배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엘란!!!!" 에쉴리의 절규가 허무하게 메아리쳤다. 엘란(47) 오픈후수에 면한 하이디스영지의 순찰대장 버나드종남작은 하늘을 쳐다보며 우비을 여몄다. "쏟아 붓는구나." 시커먼 먹구름은 비를 쏟아 붓고 있었다. 버나드는 기분이 나쁜 듯 신경질적인 손길로 연신 우비를 매 만졌다. "젠장맞을 새끼들 왜 이리로 오고 지랄이야!" 한심스런 눈길이 순찰선을 훑었다. 배는 세척이었다. 버나드가 탄 대장선은 이물이 날카롭게 들려 있는 작은 범선이었고, 나머지 두척은 돛이 없고 노가 이십개 달린 전형적인 호픈호수의 순찰선이다.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야!" 버나드는 손으로 난간을 후려쳤다. 악마교는 영주연합군의 군함을 열척이나 격침시켰다고 들었다. 오픈호수의 상선에게 돈이나 뜯어내고 밀수선이나 단속하던 이런 배로는 상대도 못될게 뻔하다. 상급정령사 엘란은 버나드에게 막대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처음 그들이 포강으로 도주했다고 들었을 때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이리로 들어오면 공을 세워 종남작 의 꼬리표를 떼고 싶었다. 그러나, 이후에 들어온 소식은 그런 망상을 멀리 날려버렸다. 제발 이리로 오 지 말아달라고 신에게 그렇게 빌었건만. "대장님 영주님의 전언입닌다." 버나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공을 세우려 안달하는 영주의 말은 안 들어 봐도 뻔한 내용이다. 버나드가 말도 없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영지의 마법사 그리핀은 그냥 영주의 전언을 보고 하기 시작했다. "버나드종남작은 사악한 악마교의 종자들을 잡아서 황제와 본 영주에게 충성을 증명하라." 근엄하게 영 주의 명령을 전달한 그리핀은 쑥스러운 듯 입술을 핥았다. "제발, 그들이 이리로 안 왔으면 좋겠군." "나도 마찬가지야." 버나드의 말에 그리핀은 동감을 표했다. "이십년만인가?" "뭐가?" "상급정령사가 탄생한 것 말이야." "삼십년이 넘었어." "아깝군. 그런 사람이 사교에 빠지다니...." 쾅! 갑자기 들리는 굉음에 이들은 혼비백산했다.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며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뭐야?"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옆에 있던 순찰선이 기울어지더니 금새 가라앉았다. 별안간에 닥친 횡액에 손 쓸 틈도 없었다. "저거!" 시커먼 어둠을 헤치고 거대한 범선이 다가들었다. 지옥에서 온 초대장 같았다. "지고!" 입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번쩍! 번개가 하늘을 가르자 범선이 똑똑히 보였다. 뱃머리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버티고 서서 오만하게 내 려다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파란색의 신관복을 차려 입은 인자하게 생긴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젊은 청년 하나가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냉혹하게 말했다. 음산한 목소리는 갑판을 시끄럽게 두들기는 빗소리 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게 들렸다. "죽여 버립시다." "헉!" 그 냉혹한 목소리라니, 버나드와 그리핀은 심장은 멎는 것 같았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안 되요!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요." 신관복을 입은 여자가 말리자 둘의 가슴에 작은 희망이 싹텄다. "성녀님 저런 놈들은 씨를 말려야 합니다." '성녀?' 버나드와 그리핀은 서로의 눈을 보았다. "성녀로서 명령합니다. 그냥 지나가세요." 젊은 청년이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황자님 성녀님 좀 말려주십시오. 이들을 살려두면 위험해집니다." '이황자?' 둘은 얼마나 놀랐는지 진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이황자는 지고교에서 죽였다고 했는데....설마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 성녀가 단단히 못을 박자, 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았다.' 악마같은 상급정령사의 손에서 살아 남은 것이다. "가자!" 붉은 머리 남자가 오만하게 외치자 범선은 순찰선을 비켜서 서서히 움직였다. 배가 멀어지고 안심하는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쾅!! 옆에 있던 순찰선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그 놈이 성녀의 명을 거역하고 손을 쓴 모양이다. 안심하고 있던 버나드는 기절초풍해서 소리쳤다. "배를 저어라!" 쾅! 또다시 굉음이 들리고 돛대가 부러져 쓰러졌다. "으악!" 쓰러지는 돛대밑에 깔린 자가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핀! 뭐하나? 어서 보고해." 정신이 나가 멍하니 있던 그리핀이 선실로 뛰어 들었다. "잘 됐을까요?" 엘란이 마르시앙에게 물었다. "계획대로 될거다. 자네, 연기 잘 하는데." 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길로 나갈까요?" "그 것도 좋은 생각이네, 우리 둘이 대륙을 떠돌며 연극이나 할 까?" "여기서 빠져나가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죠." 둘은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어쩐지 서글픈 미소였다. *************************** "지고교의 성녀와 상급정령사를 찾았습니다." 라울이 시드에게 공손히 보고했다. "어디서?" "오픈호수의 남쪽 하이디스 부근이랍니다." "그쪽으로 출발해!"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울이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뭔가?" 무표정하게 검을 손질하고 있던 막스가 물었다. "그것이....이황자를 봤다고 보고를 하는데...." 갑자기 막스의 검에서 푸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좋아! 나가보게." "예." 라울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조심스레 걸어서 선실을 나섰다. 마법등으로 환하게 밝혀진 선실에 가벼운 긴장이 어렸다. "이제 끝을 볼 때군." 시드의 나직한 음성이 선실에 퍼졌다. ******************************** "어디쯤 와 있나?" 마르시앙이 물었다. 엘란과 마르시앙은 이물에 버티고 서서 우비도 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엘란은 정령들을 풀어 주변을 감시하며 말했다. "근처에는 호수의 순시선들 뿐입니다. 어!" "무슨 일인가?" 엘란이 감탄사를 터트리자 마르시앙이 다급하게 물었다. "거대한 정령이 다가옵니다." "어떤?" "상급정령 같습니다." "그럼?" 엘란과 마르시앙의 얼굴이 급격히 흐려졌다. 엘란은 고물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시드가 같이 오나 봅니다." "막스와 철혈기사에다 시드라! 힘들겠지?" "호수라서 더 힘들 겁니다." "하긴.....물의 정령사에겐 안마당 같겠군. 그런데 지금 어디 가나?" "환영인사는 해 줘야죠. 전에 빚진 것도 있고." "만난 적이 있나보지?" 엘란의 뒤를 따르며 마르시앙이 물었다. 빗줄기가 갑판 바닥을 튀며 퉁퉁거렸다. "대제의 무덤 앞에서 본 적이 있죠. 하이론과 쟝은 상당히 많이 뜯겼죠." "뜯기다니?" "그 양반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는 데가 있어요. 그 정도 지위에 있으면서 뭐가 부족한지 밑천 안드는 장사를 하던데요." "밑천 안드는 장사라니?" 마르시앙은 좀 어리둥절 했다. 엘란은 오른 손을 품속에 넣어 주머니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마르시앙은 상당히 놀란 눈치다. "도둑질을 했단 말인가?" "도둑질보다는 강도에 가깝죠." "허허!" 마르시앙은 실소를 흘렸다. 황궁에서 볼 때마다 근엄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더니 뒷구멍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그러는 사이에 둘은 고물에 도착했다. "어쩔건가?" 마르시앙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슈리엘!" 슈리엘이 엘란의 앞에 나타났다. "혹시 시드가 부리는 운다인 압니까?" "그 년은 왜? 아! 이리로 오고 있구나." "하하하!" 마르시앙은 슈리엘의 직설적인 욕설에 유쾌한 기분이 들어 통쾌하게 웃었다. "미친놈! 왜 비는 쫄딱 맞으면서 쪼개고 있냐?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발 딱고 잠이나 자!"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까?" 엘란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거야 부리는 너한테 달렸지." "적은 상급정령익스퍼터입니다." "그럼 지겠네." 슈리엘은 엘란의 속도 모르고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지금은요?" "지금이라니?" "적은 정령과 멀리 떨어져 있고, 저는 가깝죠. 지금 타격을 주면 나중에 유리하지 않을까요?" 슈리엘은 엘란의 말에 씨익 웃었다. "점점 영감이 다 되가는구나. 갑자기 기습해야 할거다. 눈치를 채면 금방 불러드릴 거다." "그럼. 제가 부르면 바로 나와서 한 대 갈겨요." "좋치! 안그래도 그 년들 맘에 안들었어." 슈리엘은 금방 사라졌다. "정령들 사이가 원래 안 좋은 거냐?" 마르시앙이 엘란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도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데요. 물의 정령과 불의 정령이 특성상 사이가 안 좋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바람의 정령이 물의 정령과 사이가 나쁘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혹시 니가 부리는 슈리엘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냐?" 엘란은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정령도 미칠까요?" "글쎄다. 상급정령사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나중에 살게되면 그 때 한 번 물어보려무나." "옵니다!" 엘란은 정령이 다가오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슈리엘!" 바람의 상급정령이 나타남과 동시에 하늘을 향해 거대한 창을 날렸다. 비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한 줄기 은빛광선이 갈랐다. 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굉음이 터지며 호수가 거세게 들썩거렸다. 충격파는 멀리 퍼져 호수물 을 요동치게 만들었고, 범선이 뒤집힐 듯 흔들렸다. "어떻게 됐냐?" 마르시앙이 다급하게 물었다. "정령계로 돌아갔어요." "강제소환 당한 거냐?" 마르시앙이 들 뜬 음성으로 물었다. 시드만 타격을 입혀서 뒤로 물러나게 한다면 희망은 생긴다. 호수의 특성상 막스와 철혈기사들은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충격을 받아 버티지 못하고 강제소환 당하면 정령사와 정령은 타격을 받아서 운용에 제약이 따른다. 심한 경우 몇 달간 소환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 다. 엘란은 고개를 저었다. "타격을 받은 건 확실한데 강제소환 당한건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정령사가 정령을 보호하려고 돌려보낸 걸 겁니다. 슈리엘 맞죠?" "그래." 엘란과 마르시앙은 걱정스런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고, 슈리엘은 운다인에게 한 방 먹인 것이 기분 좋 은지 빗줄기가 쏟아지는 하늘을 날아다녔다. "젠장맞을 새끼!" 시드가 가슴을 움켜쥐고 쌍소리를 내뱉었다. 막스가 급히 부축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둘은 여러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엘란과 마찬가지로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지고교의 그 상급정령사라는 놈한테 한 방 먹었다." 자존심이 상한 듯 막스의 팔을 뿌리치며 이를 갈았다. "괜찮습니까?" "타격은 좀 받았지만 괜찮다. 그 놈은 꼭 죽여야겠다." 시드가 냉혹하게 말했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보며 결의를 다졌다. "40분 거리다. 서남쪽으로." 시드가 차갑게 내뱉자 주위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명령을 전하러 선장실로 뛰었다. 잠시 가늘어지던 비 는 다시 거세지며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스피릿 컴파운드!" 쾅! 비를 가르며 날아간 정령은 선두(船頭)를 부드럽게 찢고 들어가 내부를 온통 뒤흔들었다. 격벽들이 종이 장처럼 찢겨 나가며 차가운 호수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배가 가라앉는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지며 병사들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운이 좋은 자는 판대기라도 붙들었지만 대부분 의 병사들이 거센 호수속으로 가라앉았다. 주변은 온통 부서진 배의 잔해로 가득했고, 살려달라는 흐느 낌과 비통한 신음성이 컴컴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의 입에서 외침이 터질 때마다 배가 부셔져 나갔다. "쏴라!" 피리릿! 수백대의 화살이 엘란의 배로 쏟아졌다. 티디팅! 슈리엘이 나래를 펼쳐 배를 감싸자 화살은 허무하게 호수로 떨어졌다. 슈우우! 이번에는 투석기가 발사되며 바위가 날았다. 쾅쾅! 바위가 계속적으로 슈리엘을 두들겼다. "엘란! 괜찮나?" 걱정이 된 듯 굳은 얼굴로 마르시앙이 물었다. 엘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투석기를 발사한 배를 노려 보았다. "슈리엘!" 슈리엘이 분풀이라도 하는 듯 그 배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바람의 칼날!" 슈리엘이 희미해지더니 희긋희긋하게 변하며 배를 강타했다. 콰아앙! 슈리엘은 배를 수직방향으로 쪼개져 지나갔다. 펑! 좌우로 양단된 배가 서서히 쓰러지며 호수에 부딪쳤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적들은 한 척이다 겁먹지 말고 공격하라!" 호수연합군의 책임자 제이콥슨종남작은 공포를 떨쳐내려 필사적으로 외쳤다. 최대한 앞을 막으라는 국 왕의 명령이 떨어진 지금 등을 보이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개새끼들!" 제이콥슨은 저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괴물같은 사교의 정령사는 물론 이런 놈을 막으라고 명령을 내 린 상부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이디스백작의 순찰대는 사교의 정령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박살이 나버렸다. 적의 진정한 실력을 알게 되자 겁에 질린 귀족들은 모두 배에서 내리고 얼떨결에 제이콥슨종 남작이 급조된 호수연합군의 총 책임자가 되어 버렸다. 제이콥슨은 공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적의 발목을 잡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왕국의 군대가 구하러 올 것이다." 제이콥슨은 갑판 위에 버티고 서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점점 더 거세지는 폭풍우에 소리가 얼마나 들릴지는 미지수였다. "젠장!" 벌떼같이 달려드는 순찰선들을 하나하나 무력화시킨 적의 범선은 서서히 대장선에 다가들었다. 제이콥 슨의 전신은 흠뻑 젖어들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온 몸이 젖었으리라. 피리리리링! 뇌를 갉아먹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배 위에 자욱한 피보라가 끼었다. 피의 안개가 소리없 이 다가서는 것 같은 비현실감에 제이콥슨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이게 무슨 공격이란 말인가? 적은 악마의 화신이라더니 정말인가? 제이콥슨은 한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윽!" 그는 발에서 척추를 따라 올라오며 뇌를 하?게 태워버리는 엄청난 고통에 몸서리쳤다. 제이콥슨이 다리 를 내려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정강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사이로 갚판의 나무결이 보였다. 이제는 고통보다는 그 모양이 제이콥 슨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으아!" 제이콥슨의 정신은 반쯤 나가버린 채 적에 대한 적개심이 뭉클뭉클 치밀어 올랐다. 고통과 공포가 극에 달하자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한 듯 종남작은 정신없이 흔들리는 갑판위를 한 쪽 발로 뛰 었다. "개새끼들!" 누구에게랄 것 없는 적개심이 가슴을 채우며 전신을 달궜다. 사수들이 죽어 널부러진 사이로 바위가 장 전된 투석기가 보이자 검을 들어 끈을 끊어 버렸다. "뒈져라!!' 제이콥슨의 저주를 담은 바위가 힘차가 날아올랐다. 쾅! 사방을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엘란의 감각을 뚫고 바위가 배위로 떨어졌다. "으악!" 바위는 조타와 타수를 그대로 깔아 뭉갰다. 배를 지휘하던 마르시앙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돌을 치워!" 여러명의 교도들이 달려 들었지만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슈리엘!" 슈리엘이 나서자 바위는 쉽게 처리되었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타수와 조타는 완전히 망가져 떡이 되어 있었다. "엘란! 조타가 망가졌다." 마르시앙의 고함이 엘란을 힘들게 만들었다.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이대로는 다른 배들이 위험하다.' "노를 젖는 교도들에게 더 빨리 저으라고 해주세요. 배는 제가 조정하죠." 엘란의 부담이 점점 가중되었다. 밑창에 있는 도수들은 가슴이 터져라 노를 저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나가떨어지는 자는 옆에 있던 대기조가 대신 노를 잡았다. 쾅! 엘란의 배가 대장선을 들이 받았다. "한 방 먹었지 개자식들아!" 바위를 명중시킨 제이콥슨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잃었다. 다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물기 가득 한 갑판위에 퍼져나갔다. 지고교의 배가 대장선을 밀어내며 포위망을 뚫었다. 앞에는 드릭스버그강이 입 을 벌리고 있었다. 오픈호수에서 포강으로 흐르는 지류의 하나였다. 드릭스버그강이 포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은 연락을 받은 엘리오트의 해군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엘란의 배에 추적자들이 몰릴수록 다른 배들은 안전해 질 것이다. 엄청난 기운이 몰려드는 것을 느낀 엘란의 고개가 급격하게 돌아갔다. 높이가 30미터는 넘을 것 같은 투명한 막이 배를 덮쳐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 막에 튕겨져 나가는 물방울 뿐이었다. "슈리엘!"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귀까지 멍멍할 정도의 굉음이었다. "운다인!" 마르시앙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졌다. '좋치않아!' 마르시앙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드와 막스를 태운 피콜라니협곡의 배들이 뒤통수까지 따라 붙 었다. 하늘에서는 두 정령이 맞붙고 있었다. 슈리엘이 이리저리 창을 휘두를 때마다 호수의 물이 솟구쳐 올라 창의 진로를 막았다. 조타가 부서지고 방향을 잡아주던 슈리엘까지 발이 묶이자 배는 호수위를 뱅뱅 맴 돌았다. "엘란! 강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르시앙이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헉헉!" 엘란은 격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공중에서는 슈리엘과 운다인이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슈리엘이 창 을 휘드르면 운다인이 호수물을 끌어 올려 막아냈다. 장소가 아무래도 슈리엘에게 불리했다. 운다인의 양손이 무섭게 회전하자 호수물이 빨려 올라오며 가닥가닥 갈라져서 슈리엘을 덮쳤다. "어딜!" 슈리엘의 몸도 운다인의 양손처럼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취리리리릭! 슈리엘의 주위로 거센 회오리가 일면서 물을 튕겨냈다. 팟!팟! 빛의 광구가 여기저기 떠오르며 배 쥐위를 대낮처럼 밝혔다. 라울을 위시한 마법사들이 라이트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저기다!" 쟝에게 면박을 주며 대제의 무덤에서부터 막스를 따르던 빈센트 위긴이 붉은 머리를 보며 소리쳤다. 빈 센트는 이황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오직 붉은 머리를 보고 외칠 뿐이다. 엘란을 죽일 듯 노려보던 막스의 눈이 마르시앙에게 닿았다. 입가에 잔혹한 웃음을 머금고. 막스는 엘란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국왕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복수보다는 임무가 우선이었다. 마르시앙도 오연히 버티고 서서 마주 노려보았다. '아들의 원수!' 피가 거꾸로 쏟는 것 같았다. 자기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 본 아버지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졌 다. 막스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휘두른 것 같았지만 그 한 수에는 막스의 고련이 녹아있었다. 쇄엑! 막스의 검에서 떨어져 나온 오러가 빗살처럼 날았다. 마르시앙은 아름답게 빛나는 오러탄을 멍하니 보 았다. "피해요!" 엘란이 마르시앙의 몸을 붙들고 갑판을 굴렀다. 쾅! 오러탄이 갑판을 뚫고 아래로 사라졌다. "으악!" 밑창에서 노를 젖던 교도의 몸을 관통하고도 힘을 잃지 않고 기어이 배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구멍에 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노를 젓던 도수들은 기겁을 했다. "구멍을 막아." 손에 자신의 옷을 말아 쥐고 구멍을 틀어막으며 한 쪽 다리가 잘린 빌이 외쳤다. 누군가 판자를 가져와 덧 되고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여러 교도들의 손이 흔들리는 판자를 꽉 움켜쥐었다. "정신차려요!" 쿵! 엘란이 마르시앙을 구하러 몸을 날린 사이 슈리엘은 운다인에게 크게 밀렸다. 전에 시드에게 타격을 입 혀놓지 않았다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엘란은 시드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스피릿 컴파운드!" 슈앙! 엘란의 필살기가 시드의 배로 날아들었다. "뭐야! 엔다이론!" 시드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엘란이 별안간 이런 공격을 날릴지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쾅! 엘란의 정령들이 엔다이론의 베리어를 뚫고 배에 부딪쳤다. "배에 구멍이 뚫렸다." 기사들의 경악성이 갑판위를 달구었다. "마르시앙을 확인했나?" 시드가 다급하게 물었다. "예!" 막스의 대답이 나오자 시드는 바로 공격에 나섰다. "배를 침몰시키면 되겠군." "운다인! 엔다이론!" 운다인과 엔다이론들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슈리엘!" 슈리엘은 엘란의 배 바로 앞에서 당당히 버티고 서서 이들을 맞았다. 쿠아아앙! 또다시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호수물이 온통 뒤집어져 치솟아 올랐다. "이런!" 시드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쥐새끼 같은 놈들!" 엘란의 배는 그 충돌의 여파를 이용 뒤로 쏜살같이 물러났다. 승산이 없음을 직감한 엘란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척 하면서 그 힘을 이용 배를 뒤로 민 것이다. 슈리엘과 실피드들이 달려들어 배를 조정하며 쏜살같이 달렸다. 막스는 침몰하는 배위에서 이를 갈았다. "이얍!' 막스가 기합성을 발하며 검을 던졌다. 파란 오러가 피어오르는 막스의 검이 엘란의 배로 날아왔다. 번쩍! 그 때 번개가 쳤다. 막스의 검은 번개보다 더욱 빠른 듯 보였다. "막아!" 엘란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상태론 막을 수 없다. 막는다면 강제소환 당해서 하루는 소환할 수 없다." 슈리엘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만큼 엘란은 지쳐 있었다. "헉헉! 그럼 방향은 틀 수 있어?" "해보지!" 슈리엘이 이제는 희미해진 창을 날아오는 검을 향해 던졌다. 쾅! 또다시 폭음 터졌다. 막스의 검은 창을 터트리며 그대로 날아왔다. "방향은 틀었다." 팟! 희미해지던 슈리엘이 이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다. "실피드!" 엘란은 실피드로 검을 막아나갔다. 퓽! 퓽! 검은 여지없이 실피드를 뚫었다. 쾅! 우지끈! 검은 기어이 돛대를 자르고 날아가 호수로 빠졌다. "피해라! 돛대가 무너진다." 쿵! 길다란 돛대가 갑판 위에 떨어져 내렸다. 조타가 부셔지고 돛이 두동강 난 엘란의 배는 망신창이가 되 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배는 드릭스버그강으로 접어들었다. "가자!" 시드와 마법사들은 하늘을 날아 딴 배로 건너갔고 막스와 철혈기사들은 가볍게 발을 굴러 가까이 다가 온 다른 배로 건너갔다. 중요하거나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들은 시드가 정령을 이용 딴 배로 옮겼 다. 그러나, 평범한 병사나 노를 젖는 사람들은 그대로 배에 남겨졌다. 그들을 구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소한(?)일에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서 쫓아라!" 막스의 입에서 냉혹한 일갈이 터졌다. 한기가 풀풀 날리는 것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서늘하게 만들었 다. "살려줘!" "구해줘요!" 침몰하는 배에 탄 사람들의 절규를 뒤로하고 추적자들을 태운 배는 빠르게 나아갔다. "괜찮나?" 마르시앙이 걱정스런 눈으로 엘란을 보았다. "헉헉헉! 괜...헉...찮...습니...헉...헉...다." 엘란은 숨이 차서 거칠게 헐떡거렸다. "전혀 괜찮게 안 보이는데?" 엘란은 대답없이 갑판에 드러누웠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실피드 하나는 여전히 배 옆에 붙어 배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 덕에 엘란은 쉬지도 못했다. 조타가 부셔져 나간 대가였다. 그래도 이 정도 피해만 입고 추적을 따돌린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완전히 따돌린 것은 아니지만. 엘란(48) 드릭스버그강은 휘어졌다 감기는 것이 무척이나 구불구불했다. 그 덕에 배를 조종하는 엘란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노를 젓는 교도들 상태 좀 봐주시겠어요." 엘란은 실피드로 배를 밀면서 마르시앙에게 부탁했다. 돛이 부러져 바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노의 힘 만으로 움직이자면 도수들의 상태를 알아야 했다. 마르시앙은 여전히 걱정스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 었다. "엘란, 정말 괜찮니?" "괜찮다니까요." 엘란은 짐짓 환하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마르시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아래로 내려갔다. 밑창에는 교도들이 죽어라 노를 젖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기계적으로 움직이 는 두 팔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탈진해서 널부러진 자도 부지기수였다. '이래서는 곧 잡히겠다.' 상황은 마르시앙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노를 젖는 자들도 곧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엘란이 적과도 싸우면서 혼자의 힘으로 이 큰배를 움직이는 것은 무리다. 마르시앙은 자신의 명이 끝나감을 직감했다. 저승사자의 손길이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이 바짝 다가서자 이상하게 편안 해졌다. 죽자사자 노를 젓는 이들의 희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왜 전에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던가? 진작 그랬다면 왕위를 양보했을 것이고, 당연히 내전도 없고, 지고교가 덤테기를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 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뒤를 돌아보면 남는 것은 언제나 후회였다. "수고들 하십시오." 마르시앙은 진정을 담아 정성껏 허리를 굽혔다. 감히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이황자가 천대받는 지고 교인들에게 허리를 굽힌 것이다. 노를 젓던 교도들은 마르시앙을 보며 순박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마르 시앙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마르시앙은 급히 엘란에게로 갔다. "교도들 상태가 좋지 않다. 조금 있으면 모두 지쳐서 쓰러질 거다." "휴!"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 마르시앙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해를 보며 그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인가! 미련을 끊자 자유로운 영혼에 주변의 경관이 새롭게 다가왔다. 해를 따라서 어둠이 밀려나자 굽이치는 강물과 골짜기 구석구석이 뚜렷히 보였다. 가벼운 물안개와 어우러진 강변의 나무들. 다양한 모양으로 강을 내려다보는 기암괴석들. 시원한 물소리와 살랑이는 바람. 왜 예전에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했던가? 엘란은 주변의 경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마르시앙처럼 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 란은 살고 싶었다. 에쉴리와 가정을 꾸며 아이들을 낳고 생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마르시앙은 주위가 어두워 질 때까지 엘란의 옆에 서서 주변의 경치를 즐겼다. 그런 모습을 십분 이해하고 동정심이 생기 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화도 치밀어 올랐다. '지배계급은 다 저런 것인가?' 자신 같으면 아래로 내려가 죽도록 노를 저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킬 것이 있는 자와 지킬 것이 없는 자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엘란은 머리를 흔들어서 상념을 떨구었다. 아래로 계속 내려가자 드릭스버그강 은 점점 곧아졌다. 그제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엘란은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 던 것이다. "삼십분 후에 깨워주세요." 다시 싸우려면 몸을 추슬러야 했다. 마르시앙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엘란!" 삼십분이 지난 후 마르시앙이 엘란을 흔들었다. 엘란은 겨우 일어나 앉았다. 몸이 천근은 나가는 듯 했 다. 혼몽한 가운데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마르시앙은 안쓰런 표 정으로 잠시 보더니 물을 가지고 와서 머리에다 부었다. 쏴아! 차가운 물이 정수리로 떨어지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엘란은 얼른 마나운용 에 들어갔다. 마나가 한 바퀴 돌자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왔다. 배는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르시앙 이 엘란의 어깨를 짚고 손짓했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어느새 추적자들이 바짝 따라 붙어 있었다. 독이 바짝 오른 시드와 막스가 부하들을 무섭게 독려한 결과였다. "슈리엘!" 슈리엘이 나타나 배를 밀었다. 배는 물살을 헤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시드는 엘란과의 대결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라울은 마법사들을 독려해서 돛에다 바람을 불었다. 철혈기사단의 엥겔스남작은 도수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양쪽의 배는 조금씩 거리가 줄어들었다. 시간의 흐를수록 점점 가까워졌다. "쏴라!" 엥겔스의 명에 따라 투석기가 발사되었다. 쐐애액! 바위와 쇳조각들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 왔다. 달빛을 받은 쇳조각들이 반짝거렸다. 한 떼의 벌들이 시커멓게 몰려드는 것 같았다. 사제복을 입고 갑판 위에 당당하게 서있던 교도들이 의연한 척 고개를 빳빳이 세웠지만, 다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슈리엘!" 바람의 정령이 배를 감쌌다. 후두둑! 튕! 퉁! 펑! 큰 바위부터 작은 자갈까지 다양한 크기의 암석들과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슈리엘 위로 떨어져 내렸다. 슈앙! 갑자기 강물 속에서 솟구친 운다인이 슈리엘을 덮쳤다. "막아요!" 운다인과 슈리엘의 힘겨루기가 공중에서 벌어졌다. 슈리엘이 창으로 운다인을 찌르자 운다인은 물로 만 든 옷자락으로 창을 휘감았다. 휘리릭! 쩌어엉! 슈리엘은 창을 밀었다 당겼다 해가며 힘을 썼지만 폭음만 터질 뿐 창을 뽑지는 못했다. 핑핑! 창을 사이에 두고 둘의 팽팽한 대치상태가 시작되었다. 배를 밀던 슈리엘이 싸우러 나가자 배들의 거리 는 더욱 가까워졌다. "핫!" 슈리엘의 발이 묶인 것을 확인한 막스가 한줄기 기합과 함께 난간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이 그것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붉고 푸른 기운이 맞물려 돌아가며 막스의 앞을 막아 나갔다. "이얍!" 막스는 기합을 넣으며 검을 그어 내렸다. 쾅! 막스의 검이 붉고 푸른 기운의 가운데를 쪼개고 지나가자 폭음과 함께 물이 뒤집어지며 사방으로 물보 라를 튀었다. 막스는 엘란의 정령공격을 차단할 수는 있었으나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엥겔스가 방패를 날렸다. 방패는 정확한 타이밍으로 날아왔다. 탁! 막스는 방패를 박차고 다시 날아올랐다. 엘란이 정신을 다른데 팔자 슈리엘이 크게 밀렸다. 거기에다 엔 다이론까지 달려들고 라울은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 볼, 에어 버스터가 작렬하며 난간을 부수고 배의 옆구리를 찢었다. 쾅쾅펑펑! 여기저기서 폭음이 터지며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엘란은 손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슈리엘을 부려 운 다인을 막고 실피드로 엔다인론을 상대했다. 불의 중급정령 카사로는 라울의 마법을 막았다. 그 사이에 막스가 배를 건넸다. 턱! 뱃전에 내려선 막스는 바로 몸을 날렸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이황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막 스의 검에서 푸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안돼!" 엘란의 외침이 강위를 뒤흔들었다. 마르시앙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막스의 검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 다. 어두운 가운데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오러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마르시앙은 빛살처럼 쏘아져 오는 오러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의 목에 틀어박힐 때까지. 서걱! 오러가 스치고 지나자 마르시앙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엘리오트의 왕권을 두고 십년도 넘게 암투를 벌였던 이황자의 허무한 최후였다. "젠장!"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임무를 완수한 막스의 입에서 쌍소리가 나왔다.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르시앙의 눈길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차라리 살려달라고 울부짖거나, 저주를 퍼붓거나, 원한에 사무친 눈으로 노려보았다면, 이렇듯 기분이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고도 개운한 기분이 들기는 커녕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 분풀이라도 하듯 마르시앙의 머리통을 차고 목 없는 시체를 검으로 꿰어 던졌다. 이황자의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 날아서 이제는 바짝 붙어있는 군함으로 건너갔다. 시드가 엔 다이론으로 부드럽게 받아냈다. "시체를 잘 보관하라!" 시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위의 기사들이 움직여 시체를 수습했다. 시체를 걷어차고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막스의 검이 거칠게 주변을 휩쓸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던 교도들의 몸이 갈가리 찢어지며 갑판 위를 벌겋게 물들었다. 막스의 실력이면 깨끗하게 저승으로 보내 줄 수 있었건만 엘란이 보라는 듯 전 신을 찢어버렸다. "이놈!" 엘란의 비통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시드와 마법사들에 막혀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었다. 쾅! 군함이 엘란일행이 탄 배를 거칠게 들이받았다. 배가 침몰할 것처럼 휘청거렸다. 어느새 부목이 대어지 더니 기사들이 달려들어 배를 건넸다. 기사들이 엘란에게 몰려들었다. 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엘란이 실피드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기사들이 건너오고 일방적 학살이 시 작되었다. 기사들이 배 안으로 산개하자 막스는 오직 엘란만을 노려보았다. "단장님!" 한 기사가 사제의 복장을 한 중년여성을 끌고 왔다. "그대가 성녀인가?" 여자는 당당하게 막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인원이 이것뿐인가?" "운이 없었어요. 중요인물들은 이 배를 타고 빠져나가려 했는데.....교도들을 버린 대가를 받는 모양이에 요." 여자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막스는 여자의 여상한 말투에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귀부인과 대 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는 평범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듯 느껴졌다. "사제들을 모두 끌어내라!" 막스의 명이 떨어지자 죽지 않고 숨어있던 사제들의 대역들이 끌려나왔다. "성녀님!" 끌려나온 사제들은 성녀의 대역을 보고 흐느꼈다. 일부러 연극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들이 곧 처형된 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 저절로 감정이 격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막스와 주변의 사람들은 속아 넘어 갔다. "엘란!" 막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엘란을 올려다보았다. 쾅쾅! 엘란 주위에는 계속해서 폭음이 일었다. 엘란은 지친 몸을 이끌고 용케도 시드의 맹공격을 버티고 있었 다. 시드는 자존심이 상했다. 조금만 더 몰아 부치면 끝장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적은 위태위태하면서 도 곧잘 위기를 넘겼다. 자신은 늙어가고, 저 놈은 더욱 발전한다고 생각하자 분노와 함께 두려움이 몰 려 왔다. 그러한 감정이 더욱 시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엔다이론!" 또 다른 엔다이론이 나타나 엘란을 양쪽에서 핍박했다. 엘란은 실피드로 베리어를 치며 아래쪽의 상황 을 살폈다. 배는 이미 멈추어 있었고, 갑판위에는 성녀와 사제, 교도들이 줄줄이 꿇어앉아 있었다. "죽여라!" 막스의 냉혹한 일갈이 떨어지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 동안의 고생을 분풀이하듯 검을 휘둘렀다. "으악!" "악!" "아악!" "아!" 교도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별들마저 질린 듯 자취를 감춘 밤하늘은 무섭도록 어두웠다. 일격에 목을 자르는 자는 드물었고, 즐기듯 고통을 주며 죽이는 자가 대다수였다. 귀가 떨어 지고 팔이 떨어지고 내장이 딸려나오고 눈이 도려내지고 다리가 잘려져 나갔다. 갑판은 온통 피칠을 한 채 검붉게 변했다. 흩어진 살점과 창자들이 갑판을 뒹굴었다. 밤이 되어 어두운 가운데서도 엘란의 눈에 는 핏방울 하나까지 똑똑히 보였다. 엘란은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분하고 억울해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치가 떨렸다. 귀가 멍멍해지는 머리가 쑤셔왔다. 누가 꼬챙이로 심장을 쑤시는 듯한 고통이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일장의 도살극은 삼십분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교도들은 끊임없이 비명을 질 렀고, 엘란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막스는 경련을 일으키는 엘란의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았다.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으나, 자신의 임무는 끝난 데다가 시드가 손을 쓰는 이상 참견하기가 곤란했다. 이제 미끼가 된 배에 탄 사람들 중에는 성녀의 대역과 엘란만이 살아 남았다. 엘란은 지쳐서 까무러치 기 일보직전이었다. 교도들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분노가 이때까지 엘란을 지탱한 원동력이었다. 그러한 힘도 곧 한계에 부딪쳤다. 정신력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시드는 그런 기척은 민감하게 파악 했다. "폭(暴)!" 운다인이 작은 물방울로 흩어졌다. 30미터도 넘는 거대한 운다인이 일순간에 작은 물방울로 갈라지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칼날 같은 물방울들이 무서운 속도로 폭사되었다. 슈리엘이 엘란을 감싸안았 다. 엘란은 귀가 먹먹해지고 주변의 풍경이 아득하게 보였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물방울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아래를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자 기에게 다가오는 물방울은 머리에서 사라졌다. 들끓는 복수심만이 영혼을 달구었다. "실프!" 실프 스물이 일시에 나타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이를 갈아 부쳤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핑!핑! 쐐기모양으로 변한 실프가 무섭게 회전하며 갑판으로 쏟아졌다. 퓽퓽퓽퓽퓽! 물방울들이 먼저 슈리엘을 두들겼다. 엘란을 감싼 슈리엘의 몸에는 뻐끔뻐금한 구멍이 뚫렸다. '아!' 억제하는 슈리엘의 비명이 엘란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슈리엘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령계로 강 제소환 당하자 엘란은 피를 토했다. 그런 몸을 물방울이 후려쳤다. 엘란의 몸은 금새 피범벅이 되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슈리엘이 그 힘을 대다수 받아낸 결과였다. 그때 실프들이 아래를 휩쓸었다. 타다다다닥! 사방에서 콩 볶는 소리가 요란했다. 멍하니 싸움구경을 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몸에 구멍이 뚫린 채 픽픽 널부러졌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막스가 검을 집어 던졌다. 쐐액! 오러를 머금은 검이 어둠을 가르며 날았다. 엘란의 눈에는 한 줄기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실피드!실피드!실피드!" 엘란은 계속적으로 정령들을 불러서 앞을 막았다. 쾅! 쾅!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엘란이 소환한 정령은 힘이 없었다. 검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베리어를 뚫고 전진했다. 실프들까지 앞을 막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엘란의 몸을 받치던 실피드를 제외하고는 모 든 정령들이 타격을 입고 사라졌다. 그 실피드마저 검을 막아내지 못하자 엘란은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 았다. 손이 베여지며 피가 흘렀다. 치이익! 피는 오러와 부딪쳐 증발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손이 타들어 갔다. 끔찍한 고통이 뇌를 뒤흔들었 다. 검은 살갖을 벗겨내며 계속 다가왔다. 푹! 소림끼치는 소리가 엘란의 귀전을 울렸다. 공기를 타고 귀로 전해지는 소리가 아니라 검이 박힌 배에서 척추를 차고 뇌에 직접 전해지는 소리였다. 뇌가 하얗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검은 배에 틀어박힌 채 그 힘을 다하지 않고 엘란을 밀어냈다. 화끈한 통증이 배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엘란은 필사적으로 손 아귀에 힘을 주었다. 검이 그 힘을 다하자 중력이 엘란을 아래로 잡아 당겼다. 풍덩! 강물이 입을 벌려 엘란을 삼켰다. 엘란은 멀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품속을 더듬었다. 학질 이라도 걸린 듯 떨리는 손에는 스크롤이 쥐어 있었다. 엘란은 양손으로 스크롤을 꼭 움켜잡았다. 엘란의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찌익! 스크롤이 찢어지며 환한 빛이 엘란을 감쌌다. 펑어엉! 때 늦은 정령과 마법들이 애꿎은 물만 뒤흔들었다. "죽었을까요?" 라울이 시드에게 물었다. "죽었을 거다." 시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엘란(49) 11장. 안식처를 찾아서 떡갈나무의 키는 10미터가 조금 넘었는데 중단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찍찍찍! 황갈색의 털을 가진 다람쥐 한 마리가 그 구멍에서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다람쥐는 조심성이 대단해서 머리를 내밀었다 금새 집어넣고 다시 내밀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안심이 된 듯 조 심스레 구멍에서 나왔다. 몸길이는 15센지 가량 되고 꼬리 길이는 10센지 쯤 되어 보였는데 황갈색의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등에는 다섯 개의 검은 줄무늬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쪼르르! 나온 것도 잠시, 다람쥐는 또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찍찍! 다시 나오는 다람쥐의 앞발에는 잘 익은 도토리가 쥐어져 있었다. 지금은 도토리나무가 한 창 꽃이 피 는 시기이니 지난가을에 따서 저장해 둔 것이 분명했다. 찍찍! 다람쥐는 나뭇가지에 앉아 도토리를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쉴새없이 주변을 살폈다. 밖에 나와 서 도토리를 먹는 것이, 오랜만에 일광욕을 하고 싶었나 보다. 찌이익! 별안간 다람쥐가 비명을 질렀다. 조심성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리에는 못 미친 듯 수리의 단단한 발에 는 다람쥐가 잡혀 있었다. 다람쥐가 식사를 하던 나뭇가지는 이제 수리의 식탁이 되었다. 파아앗! 갑자기 떡갈나무 아래가 눈부시게 빛났다. 퍼런 섬광에 눈이 부신 수리가 날개를 펄럭거렸다. 그 바람에 다람쥐는 수리의 발에서 벗어나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다람쥐는 금방 일어나 근처의 굴로 도 망쳐 들어갔다. 먹이도 놓치고, 갑자기 일어나 섬광에 놀란 수리가 급히 자리를 떠났다. 섬광은 이내 가 라앉았다. 섬광이 가시자 배에 검을 박고 모로 쓰러져 있는 엘란의 모습이 보였다. 컴컴한 숲 속에 전신 에 피칠을 한 엘란의 모습은 마계의 생물 같았다. 하이론이 준 스크롤은 다행히 제대로 작동했다. "으음!" 미약한 신음만이 주변의 정적을 몰아냈다. "으악!" 모로 누워있던 엘란은 몸을 돌리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배에 꽂혀 있는 검이 몸을 돌리자 바닥에 눌리며 상처를 헤집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몸을 약간 움질일 때마다 뼈까지 아릿해지는 통증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안돼." 엘란은 미약하게 중얼거렸다. 귀를 갖다댄다 하더라도 듣기 어려울 만큼 소리가 작았다. 그 미약한 음성 에 생의 의지가 묻어 났다. 이대로 죽기는 억울했다. '반드시 살아날 거다.' 엘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 그는 다시 신음성을 흘렸다. 온 몸은 불덩어리에 빠진 것처럼 뜨거웠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그래도 조금 씩 움직였다. 몸은 움직일 때마다 뜨거운 통증을 유발했다. 천천히 품속으로 손이 들어갔고, 나올 때에 는 포션이 몇 병 잡혀 있었다. 포션을 마시는 데도 끝없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 는 손을 억지로 입으로 가져가 포션을 들이부었다. 반은 입 밖으로 흘러 내렸다. 한 병을 마시고 조심스 레 마나를 일으켜 보았다. 다행히도 마나홀에서 약간의 마나가 유동했다. "으악!" 엘란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마나홀에 모인 마나가 상처부위를 지나면서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머리를 뒤흔들었다. 통증을 참으려는 듯 앙다문 이사이로 신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엘란 은 마나운용을 포기했다. 포션 한 병을 더 마신 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간단한 동작에 삼십 분도 넘게 걸렸다. 하얀가루와 포션 두 병을 다리 사이에 놓고 몸에 꽂혀있는 막스의 검을 잡아갔다. 만 약 검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면 피를 많이 흘려서 벌써 죽었을 것이다. 꽂혀있는 검이 상처를 틀어 막아 목숨을 구한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었다. 엘란은 그립을 움켜쥐고 한 동안 가만히 있었다. 앞으 로 찾아올 끔찍한 고통을 떠 돌리자 전신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후!" 한 줄기 숨을 내쉬고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검을 잡아 당겼다. 서억! 소름끼치는 소리가 함께 검이 서서히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엘란은 죽어라 비명을 지르면서도 검을 계속 당겼다. 너무 통증이 심해지자 아프다는 느낌은 없어지고 눌리는 듯한 느낌만이 들었다. 툭! 검이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상처를 막던 검이 빠지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엘란이 급히 하얀가루를 뿌 리자 피와 가루가 엉키며 굳어졌다. 엘란은 통제가 되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포션을 마시고는 정 신을 잃었다. 부엉! 부엉이 한 마리가 엘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르르르! 심한 상처 속에서도 엘란의 초감각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살갗을 찌르는 매서운 살기를 느낀 엘란은 정신을 차렸다. 날은 이미 환해져 있었고, 십 미터 앞에는 늙은 호랑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 렸다. 산중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호랑이도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가 없었던지 황갈색 털은 누렇게 뜬 채 군데군데 빠져 있었고 날카로운 송곳니도 중간에서 뚝 부러져 있었다. 검은 색 줄무늬도 거의 빠져 서 호랑이의 위엄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엘란을 노려보는 늙은 호랑이는 근육에서 힘이 빠지자 날랜 짐승을 사냥할 수 없었고 오히려 늑대 같은 다른 육식동물을 피해 다녀 할 지경이었다. 늙 고 지친 배고픈 호랑이는 독오른 눈으로 엘란을 쏘아보았다. 늙은 호랑이의 눈에도 엘란은 손쉬운 사냥 감으로 보였다. 호랑이는 이 사냥감을 잡지 못한다면 굶어 죽어야 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 다. 으으릉! 호랑이의 입에서 침이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말없이 호랑이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움직인다면 호랑이가 덮칠 것이 분명했다. 엘란은 옆에 나뒹굴어 있는 막스의 검을 슬쩍 보았다. '호랑이가 덮치는 게 먼저일까 내가 잡는 게 먼저일까?' 무엇보다도 몸이 제대로 움직일까 하는 점이 걱정되었다. 엘란은 호랑이의 눈을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말은 동물에게도 통하는 모양이다. 엘란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의 눈 이 훨씬 더 정직할 수도 있다는 것은 느꼈다. 호랑이의 의사가 눈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크앙! 한껏 구부려졌던 호랑이의 등이 활처럼 펴지며 단단한 뒷발이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엘란의 몸도 앞으로 쏘아져 검을 치켜들었다. 크앙! 호랑이의 포효가 산을 뒤흔들었다. 놀란 짐승들이 숨을 죽이고, 굴에 몸을 숨겼다. 그림자가 먼저 엘란 을 덮치고 곧이어 집채만한 호랑이가 덮쳐왔다. 엘란은 검을 들어 자신의 앞에 꽂꽂하게 세웠다. 크아앙! 고통스런 호랑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치켜세운 검은 부드러운 입천장을 뚫고 골을 부순후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철혈기사단장이 쓰는 검답게 놀랄 만큼 날카로운 검이었다. 엘란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생 사의 갈림길에서 격하게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긴장이 풀리자 온 몸이 부셔질 듯 아파 왔다. 거기에다- 못 먹어서 평소 몸무게의 반도 안되고, 털도 거의 다 빠졌지만-집채만한 호랑이가 몸을 짓누르자 숨이 턱턱 막혔다. 엘란은 겨우 몸을 움직여 옆으로 빠져 나왔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검을 빼들고 호랑이의 배를 갈랐다. 시퍼런 예기를 발하는 검 앞에 호랑이의 가죽은 쉽게 굴복했다. 배를 가른 엘란은 간을 찾 아 입에 넣고 씹었다. 주루룩! 핏물이 입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노린내와 피 냄새가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살려면 먹어야만 했 다. 간을 먹고 심장을 먹고 호랑이의 피를 빨았다. 노린내와 피 냄새가 친숙해지자 구수한 맛까지 났다. 배가 불러오자 잠이 쏟아졌다. 엘란은 억지로 잠을 쫓았다. 피냄새를 맡고 다른 맹수가 달려들지도 모른 다. 나무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생각 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엘란은 억지로 가부 좌를 틀고 앉아서 마나를 깊숙히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마나는 몸 속으로 들어오며 가닥가닥 끊어졌다. 한 참을 씨름한 끝에 실낱같은 마나를 마나홀에 모을 수 있었다. 모은 마나를 천천히 상처부위로 유도 하자 송곳으로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엘란은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마나운용을 그만두지 않았다. 마나가 지나가면 세포가 살아나며 생명력이 충만해진다. 상처를 치유하는데는 이것보다 좋은 방 법이 없었다. 계속되는 부상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었다. ************************************ 갈매기는 회색머리를 흔들며 부지런히 날개를 놀렸다. 날개를 쫙 펼치며 바람을 타자 힘 안들이고 창공 을 누빌 수 있었다. 바닷가에 사는 갈매기가 내륙 깊숙이 들어 온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갈매기는 고개 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포강의 절경이 아스라이 보였다. 조금 더 날자 수백 척의 배들이 묶여 있 는 거대한 포구가 보였다. 갈매기는 더 자세히 보기를 원하는 듯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선착장 주위를 두 바퀴 돈 갈매기는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 위를 지나 롬바르드의 시내로 접어들었다. 끼욱! 성벽을 지나던 갈매기가 놀라서 날아올랐다. 성벽 위에 세워진 장대에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자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따뜻한 날씨에 부패가 시작되어 구더기가 들끓었는데 까마귀가 눈알이라도 파먹은 듯 눈은 움푹 패여 있었다. 놀란 갈매기가 복수라도 하듯 머리 위에다 똥을 내갈겼다. 칙!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머리 위에 회색 빛 똥이 떨어져 내렸다. "하하하!" "하하하!" 즐거운 웃음소리가 성벽 위에 퍼졌다. 경비병들은 재미있는 듯 창대로 머리 위의 똥을 툭툭 두들겼다. 퉁퉁퉁! 병사는 북이라도 치는 것처럼 신이 나서 머리를 두들겼다. 갈매기의 똥과 구더기가 뭉그러져서 함께 뒤 섞였다. "이 년! 악마교의 사악한 마녀야! 똥 맛이 어떠냐?" "이봐! 그만둬, 저주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병사가 께름직한 목소리로 말리고 나섰다. 지고교의 성녀였다는 이 여자의 머리는 볼 때마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여자는 광장에 묶여서 일주일간이나 주민들의 돌팔매에 시달 려야 했다. 침을 뱉는 자는 점잖은 편이고, 똥을 던지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자가 부지기 수였다. 지고교라면 이를 가는 병사들까지 안쓰런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의연하게 고 통을 참아내는 성녀라는 여자의 모습은 감탄을 넘어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선임병이 말리거나 말거나, 코밑에 솜털이 보송한 것이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병사는 창대를 계속 놀렸다. "저주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만두라고 했잖아!" 선임병이 기어이 화를 터트리고 나섰다. 젊은 놈들은 도대체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른다. "에이, 씨! 알았어요 알았어." 머리를 두들기던 병사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야! 임마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선임병이 인상을 쓰자 옆에 있던 병사가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다툼을 말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선 임병은 못 이기는 척 물러섰다. 이런 애송이와 다투어 봤자 자신의 위신만 깍이는 것이다. 둘 사이에 끼 어든 병사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거참 희한한 일이네! 갈매기가 왜 여기까지 날아왔지?" "미쳤나 보죠!" 어린 병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갈매기는 아래의 소란을 지켜보다 다시 날개를 펄럭였다. 성벽을 넘자 넓다란 도로와 거대한 저택들이 갈매기를 반겼다. 갈매기는 대저택을 훑어보며 가장 큰 건물로 날아갔다. 그 건물의 앞에는 높다란 성벽 이 막고 있었다. 갈매기는 쉽게 벽을 넘어 안으로 날아갔다. 곳곳에 창을 번뜩이는 병사들과 종종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챙챙! 날카로운 소음이 갈매기의 관심을 끌었다. 갈매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넓다란 공터 에 두 사람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 주위를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멀리 떨어져서 둘러싸고 있었다. 쾅!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자 쇳소리가 아니라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스와 카를후작은 검을 맞대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상대방의 거친 숨소리가 귀에 잡힐 듯이 똑똑히 들렸다. 가가각! 후작의 검이 막스의 검을 훑어 내리며 불똥을 튀겼다. 막스는 검을 기울여 카를의 가슴으로 밀어 붙였 다. 아래로 내려온 카를의 검이 가드를 때리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막스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 며 검을 풀었다. 슉! 숨돌릴 틈도 없이 오러를 머금은 검이 날아들었다. 막스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앙다문 입에서 는 단내가 흘렀다. 막스는 심장을 노리고 떨어져 내리는 검을 밑에서 쳐 올리며 막아갔다. 쩡! 폭음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갈매기는 재미있는 듯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팔뚝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며 푸른 혈관들이 툭툭 불거졌다. 이마위로 땀이 비오 듯 쏟아지며 굵게 잡힌 주름살을 지나 아래로 흘렀다. 아무래도 위에서 내리 누르는 것이 밑에서 받치는 것 보다 쉬웠다. 막스의 팔이 부 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눈에서는 뜨거운 투지가 이글거렸다. 도전적 눈빛이 카를의 가슴을 뜨겁게 지폈 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후 이런 대련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검을 이만큼 받아내는 자가 없었던 것 이다. "이얍!" 한 줄기 기합성과 함께 막스의 오러가 30센지는 더 늘어났다. 대견한 마음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카 를도 이 때만큼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카를은 몸을 틀어 오러를 피하고는 막스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 었다. 카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트면 망신을 당할 뻔했구나.' "졌습니다." 막스가 분한 듯 말했다. 카를은 그런 막스를 환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실망할 것 없다. 너 만한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가 대륙에 얼마나 되겠느냐? 마지막 공격은 나도 낭패를 볼 뻔했다." 카를은 검을 치우고 다정한 손길로 막스를 일으켜 세웠다. "우와!" "최고다!" 우렁찬 함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마스터끼리의 대결에 눈도 한 번 깜빡거리지 못하 던 기사들의 환호성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카를이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 전이었다. "다시 한 번 대련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막스가 굳은 얼굴로 부탁하자 카를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대련은 카를로서도 대환영이었다. 격한 대련은 카를의 웅지를 일깨워주었다. 막스가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자신의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의 실력에 큰 자부심을 가졌던 막스에게 엘란과의 대결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돌아온 직후부터 수련에 온 힘을 다했다. 카를과의 대련도 그 수련의 일부였다. 확실히 마스터와의 대련이 혼자 하는 수 련보다 효과가 좋았다. 막스는 아직도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얼마든지." "아!" 잠잠해지던 주위에서 다시 탄성이 일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은 검에서 오러가 떨어져 나오며 하 늘로 솟구쳤다. 퍽! 호기심 때문에 강을 거슬러 오르던 갈매기는 오러를 맞고 산산이 터져 나갔다. 갈매기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죽음의 강을 건너 버렸다. 주변을 날리는 깃털만이 갈매기의 존재를 대변하고 있었다. ************************************** "엘란은 살아 있을 거예요! 그렇죠?" 에쉴리는 코리나에게 스프를 떠 먹이며 다짐하듯 물었다. 말속에는 불안과 함께 큰 갈망이 들어 있었다. 어찌 보면 스스로의 불안을 희석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같았다. 기계적으로 스프를 받아먹는 코리 나의 눈동자는 여전히 멍했다. 에쉴리에게는 그런 코리나가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불안이 없어지며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에쉴리는 코리나가 스 프를 다 먹자 입가에 묻은 스프를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우리 밖으로 나가요. 날씨가 무척 좋아요." 에쉴리가 손을 잡아끌자 코리나는 별 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따라 나왔다. 밖은 날씨가 좋다기 보다는 더웠다. 둘은 선실과 난간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바다를 살폈다. 엘란이 오는 것을 살피려는 것이다. 끝 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에는 뭉개구름이 보였다. 마치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에쉴리는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엘란일행을 기다리는 배들은 떠나지 못하고 만나기로 한 지점을 계속해서 맴돌 았다. "어!" 통로를 지나던 쟝이 둘을 보고 멈칫했다. 잠시 서 있던 쟝은 마음을 굳게 먹고 코리나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코리나양." 길가다 잘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난 듯한 어조였다. 에쉴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쟝은 바다로 나온 이 후부터 긴장이 풀렸는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코리나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엘란의 걱정에 속이 타는 에쉴리로서는 그런 쟝을 고운 눈으로 바라 볼 수 없었다. 남편을 사지로 보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한테 수작을 부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리가요!" 에쉴리가 독하게 쏘아붙였다. 쟝은 상당히 놀랐다. 항상 상냥하던 에쉴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면 쟝이 아니다. "바다바람이 시원하죠? 저는 바다만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게 호연지기가 막 솟아오릅니다. 코리나는 어떤가요?" 쟝은 오른 눈을 찡끗거리며 윙크를 날렸다. 수도의 귀부인들을 껌뻑 넘어가 게 만들었던 쟝의 필살기였 다. 쟝을 쏘아보는 에쉴리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자꾸 이러면 하이론을 부르겠어요." '젠장, 망할 놈의 영감탱이!' 쟝은 속으로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았다. 교도들의 안전과 엘란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하이론에게 쟝의 무분별한 행동은 불타는 장작에 기름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보통 때였다면 웃고 넘어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나 지금은 그런 마음의 여 유가 없었다. 쟝은 하루걸러 얻어맞았다. 그러나, 그 때 뿐 효과는 별로 없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하 이론이 쟝을 바다에 처박고 나서야 쟝의 행동은 수그러들었다. 수영을 못하는 쟝은 바닷물을 한 바가지 나 들이키고 정신을 잃었다. 그 뒤로는 하이론을 보기만 하면 슬슬 피했다. 쟝의 입장에서도 불만은 많았다. 배를 탄 삼 개월 동안 여자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데미는 꿀 바른 빵에 들러붙는 개미처럼 성녀의 옆에 착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뻔뻔한 쟝이라 해도 한 종 교의 최고수장인 성녀 옆에 있는 데미에게 지분거릴 수는 없었다. 주위를 배회하며 기회를 노리다 혼자 있는 데미에게 다가갈라치면 데미가 슬슬 피했다.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쟝은 미칠 것 같았다. 주위의 여자들은 쟝을 벌레 보 듯 했다. 타락한 귀부인들에게 크게 어필하던 쟝의 느끼함은 순박한 여교도들에 게는 징그럽게 보였다. 게다가 사제들과 하이론의 경고는 여자들을 더욱 피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희망 을 품고 접근하는 코리나에게는 에쉴리가 붙어서 으르렁거렸다. "에이!" 쟝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다시는 바다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망할 놈의 영감탱이!' 그저 하이론을 욕할 뿐이었다. 에쉴리는 난간을 잡고 사라져 가는 쟝을 계속 노려보았다. "엘란!" 놀란 에쉴리의 고개가 급하게 회전했다. 코리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말의 내용은 귀에서 흘러 나갔다. "코리나! 정신이 들어요?" 에쉴리가 크게 소리쳤다. "엘란!" 코리나가 다시 말했다. 이제서야 말의 내용이 파악된 에쉴리의 눈이 바다를 향했다. 한 개의 점이 점점 커지더니 가까워졌다. 에쉴리는 최대한 난간 밖으로 몸을 빼며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몸을 내밀었는지 떨어지지 않을까 걱 정이 될 정도였다. 초조한 안색에 희열이 돌더니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 윙!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사람은 엘란이었다. 고생이 심했는지 반쪽이 된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덮였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에쉴리는 두 손을 입 앞에 모으고 크게 소리쳤다. "엘란!" 이때까지의 근심이 고함과 함께 날아갔다. "흑흑!" 가족을 잃은 신도들의 조용한 흐느낌이 계속되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죽음이 확정된 것은 다른 법이다. 신도들이 비통함에 젖어서 울음을 터트리자, 자기만 살아서 돌아 온 것에 대한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에쉴리는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바짝 붙어 있었다. 엘란이 살아 돌아 온 것을 무엇보다 반긴 것은 하이론사형제였다. 그들에게 엘란은 형제와 같았다. 그들은 엘란이 우울한 얼굴로 서 있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소매를 끌었다. "여기서 이러 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에쉴리도 오랜만에 만난 엘란의 슬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요." 하이론형제와 에쉴리, 엘란이 선실로 들어가자 그 뒤를 쟝이 쫄래쫄래 따랐다. "한 잔씩 하자!" 하이론은 포도주를 따서 모두에게 돌렸다. 엘란에게 배를 중개했던 해운조합장 데그우드가 신경 써서 준비한 아스가르드산 포도주였다.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시자 분위기가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슬픈 앙금이 깔려있었다. 하이론이 익살을 떨어댔지만 그 때뿐 분위기는 이내 침울해졌다. 아무런 말없이 눈만 굴리던 쟝이 엘란의 귀에다 조용히 속삭였다. "마르시앙 죽은 거 확실해?" "예." 엘란의 대답을 들은 쟝은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거렸다. 하이론과 에쉴리는 그런 쟝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 됩니다." 엘란의 갑작스런 말에 쟝이 반문했다. "안 되다니 뭐가?" "이황자가 죽었다고, 코리나한테 집적대지 마세요." 사뭇 단호한 어투다. 쟝은 자신의 속셈을 찌르는 말에 속이 뜨끔하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올랐다. "코리나도 새로운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쟝은 신이 자신에게 그러한 사명이라도 부여한 듯 굳센 결의를 나타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내는 것이 여간해서는 그 결심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마르시앙의 유언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 게 도와주라고....." 쟝은 엘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여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내가 전문이지! 암, 전문이고 말고."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끝까지 들으세요. 쟝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의기양양하던 쟝의 얼굴이 금방 흙빛으로 변했다. "내가 어때서?" 쟝은 분한 듯 씩씩거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너 같은 놈한테 코리나를 맡길 수야 없지 암." 하이론이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즐거운 듯 말했다. 쟝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하이론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상처받은 흔적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가라앉은 분위기가 땅을 뚫고 지하로까지 내려갔다. 쟝은 벌떡 일어나더니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엘란이 급히 일어서는데 하이론이 잡았다. "혼자 있게 내버려 둬." 하이론의 표정도 엉망이었다. 쟝의 표정이 얼마나 슬퍼 보였는지 바다에 집어던지고 구박을 한 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들은 조용히 포도주만 비웠다. 다음날은 남국의 태양이 뜨겁게 바다를 비추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곳은 파랗기만 한 것이 하나로 보였다. 뜨거운 햇살이 몸을 달구자 우울한 기분이 멀리 사라져 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엘란이 하이론에게 물었다. 일단 엘리오트의 손에서는 벗어났으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정착해서 살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 대한 견문이나 학식이 떨어지는 엘란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바다에 나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런 식으로 떠돌아다닐 수는 없어. 다른 나라로 간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또다시 벌어질 수 있으니, 오랜 시간 편안히 살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야 해."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찾아보자." "그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요?" 엘란은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다. 말 그대로 무인도라는 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말이니, 그만큼 살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그곳에서 계속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배에서 생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일단 그리로 갔다가 사람들을 내려놓고 살만한 곳을 찾아보자는 말이다. 만약 쓸만한 섬이 있다면 정착하는 것도 좋고." "그렇게 합시다." 파올대사제가 찬성하고 나섰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가볼까요?" "드래곤의 섬쪽으로 가보자!" "드래곤의 섬!" 산티아고가 경악해서 외쳤다. 드래곤의 섬은 대륙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해서 대륙의 절반 정도나 되는 거대한 땅이었다. 드래곤뿐만 아니라 수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려서 사람들은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섬이었다. 드래곤들은 대륙에 잘 나오지 않는 대신 섬에 들어오는 인간들은 살려두지 않았다. 자연히 그 쪽으로 가는 배들은 없었다. "드래곤의 섬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쪽 방면의 섬을 찾아보자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왕래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일 일도 없고, 쓸만한 섬이 있을 확률도 높을 겁니다." "내 생각에는 좋은 생각 같은데...." 하이론의 말을 경청하던 파올이 긍정적으로 나왔다. 엘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 같았다. 계속 배 위에 머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 들어가기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녀의 말로 결정이 났다. 엘란은 정령을 불러 돛에다 바람을 불어넣었다. 선수를 서쪽으로 돌린 배들이 시원스럽게 물살을 갈랐다. "물이 떨어져 간다." 하이론이 걱정스럽게 엘란에게 말했다. 포강을 달릴 때는 물 걱정이 없었는데 바다로 나오고 부터는 물이 부족했다. 날이 점점 뜨거워지자 물 부족이 심각해 졌고, 식량도 서서히 떨어져 갔다. "엔다이론!" 엘란은 바다를 보고 정령을 불렀다. 바다 속에서 조그만 물기둥이 솟아오르더니 두 개의 가지가 뻗어 나와 손이 되고 손 사이에서 머리가 나왔다. "우와!"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어른들도 하나 둘 모여들었다. "바닷물 좀 들어올려 주세요!" 엔다이론이 바다 속으로 스며들 듯 들어가더니 커다란 사각형 모양으로 바닷물을 들어올렸다. "슈리엘!" "무슨 일이야?" 슈리엘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빠르게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바닷물 속에 있는 염분 좀 없애 주세요." "너 참 희한한 놈이다. 도둑질을 시키지 않나 남의 사생활 엿보기를 시키지 않나...." 당황한 엘란이 얼른 말을 끊었다. "할 수 있죠?" "할 수야 있지." 슈리엘은 엔다이론이 들고 있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 때마다 물에서 하얀 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엘란은 마나를 더욱 끌어 올려야 했다. 이런 일은 예상외로 마나를 많이 잡아먹었다. 다른 정령사들이 이런 장면을 봤다면 분명히 놀랐을 것이다. 이런 쪽으로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이런 일을 쉽게 처리하는 실력에 감탄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이론도 저으기 놀라는 눈치였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말했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야!" 주변에서도 탄성이 터졌다. 엔다이론이 바닷물을 들고 있고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슈리엘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멋지다!" 쟝도 눈을 떼지 못하고 슈리엘을 보았다. 쟝의 내심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달랐다. 저렇게 미끈한 정령이 피와 살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유감천만이었다. "다 됐다!" "고마워요. 물통을 여세요!" 엘란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몰려가 여기저기 널려 있던 물통의 뚜껑을 열었다. 쏴아! 엔다이론이 들고 있던 물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물통으로 떨어져 내렸다. 같은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하자 세척의 배에 있는 모든 물통들이 가득해 졌다. 이런 식의 정령술은 상상외로 힘이 들어서 엘란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 이후의 여정은 순탄했다. 엘란은 정령을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제외하고는 늘 에쉴리와 붙어 있었다. 그런 둘을 불만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자신은 코리나주위에 얼씬도 못하게 하면서 혼자만 재미 본다고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쟝과 남 모르게 에쉴리를 연모하던 우호법사 조르주였다. 한 달이 지나자 배는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해역으로 접어들었다. 엘란은 긴장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째 으스스 하다." 날이 아주 더운데도 불구하고 쟝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웬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에쉴리도 불안한지 엘란의 손을 꼭 쥐었다. 촤악! 갑자기 바닷물이 요동치더니 거대한 물체가 솟아올랐다. "서펜터!" 하이론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서펜터는 해룡이라고도 불리우는 바다 최강의 몸스터이다. 한낱 몬스터에 불과한 서펜터가 용이라 불릴 정도면 그 위력은 겪어보자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거친 바다 사나이들도 서펜터를 만나면 오금이 저려와 벌벌 떨었다. 우워어! 고개를 빳빳이 세운 서펜터가 괴성을 질렀다. 벌어진 입 사이로 시뻘건 혀와 20센지도 넘을 것 같은 날카로운 이가 똑똑히 보였다. 입은 앞으로 돌출이 되어 있고, 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눈은 가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는데 노란색의 눈동자가 살기를 띠고 번들거렸고, 이마에는 작은 뿔 두 개가 솟아 있었다. 원형의 몸통은 지름이 삼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는데 하얀 비늘이 뜨거운 빛을 받아 매섭게 반짝거렸다. 배에는 발같이 생긴 작은 기관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몸에 비해 너무 작아서 우스광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슈리엘!" 주변의 공기가 일렁거리더니 투명한 여자가 나타났다. 투명하던 슈리엘은 서서히 질감을 갖추며 또렷해졌다. "서펜터네." "파이어버스터!" 서펜터가 다가오자 하이론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펑! 서펜터의 머리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불길이 솟았다. "와!" 배위에 있던 교도들은 함성을 질렀다. 서펜터의 머리가 바다로 떨어졌던 것이다. 함성은 곧 잦아들었다. 서펜터가 멀쩡한 모양으로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불을 끄려고 바다로 들어간 것일 뿐 타격은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흉성만 자극한 듯 괴성을 지르며 물을 뿜어냈다. 촤악! 수많은 배를 침몰시키던 거센 물줄기가 선체의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그대로 맞았다간 구멍이 뚫리던가 배가 넘어질 것이다. "막아요!" 슈리엘이 물줄기를 막아섰다. 쾅! 물이 부딪쳐 만들어낸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번엔 우리 차례다. 바람의 칼날!" 지잉지잉! 슈리엘이 투명해져서 보이지 않게 되더니 허공에서 희긋희긋한 번뜩임이 보였다. 쩡! 쩡어엉! 석! 살과 부딪치는 소리가 꼭 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서펜터의 비늘은 미스릴로 만든 갑옷보다 더 튼튼한지 바람의 칼날은 튼튼한 서펜터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그러나, 고통은 심한 듯 서펜터가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우워어! 서펜터의 괴성이 구름 한 점 없는 바다를 뒤흔들었다. 물 속의 물고기들은 혼비백산해서 주변을 벗어났다. 갑자기 서펜터의 머리가 고무줄이 당겨지듯 쭈욱 늘어났다. 슈리엘로 시전한 바람의 칼날이 효과가 없을 줄 예상치 못했던 엘란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했다. "슈리엘!" 슈리엘이 서펜터의 앞을 막아서더니, 옷자락으로 머리를 후려갈겼다. 쾅! 이번에는 충격이 심한 듯 서펜터의 머리가 바다로 고꾸라졌다. 갑작스럽게 적막이 찾아왔다. "죽었을까?" 쟝이 불안한 시선을 엘란에게 맞추며 물었다. 겁 많은 산티아고사제는 서펜터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사시나무 떨 듯이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정도로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엔다이론!" 바닷물에서 물의 중급정령이 솟아올랐다. "서펜터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봐 줘요." 엔다이론이 바다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런! 밑이다. 슈리엘 배 좀 밀어요." 슈리엘이 급히 배를 밀었다. 쏴아아! 배가 움직인 즉시 배가 있던 바닷물이 솟구치며 서펜터의 머리가 나타났다. 그 파동에 말려 배가 휘청 기울었다. "실피드!" 실피드 다섯이 나타나 서펜터의 배 밑에 있는 돌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다시 잠수를 하면 상대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꾸어어! 서펜터는 실피드를 떨쳐버리려고 몸부림을 쳤다. 촤촤착! 잔잔한 바다가 뒤집어 질 듯 요동치며 사방으로 물방울이 비산했다. "실프!" 실프가 나타나 납작해지더니 해룡의 눈을 향해 무섭게 날아갔다. 모든 생물에 있어서 눈은 약점이었다. 깜짝 놀란 서펜터는 눈을 급히 감았다. 깡! 눈꺼풀과 부딪친 실프가 튕겨져 올랐다. 눈꺼풀에도 두꺼운 비늘이 붙어 있었다. "슈리엘!" 엘란이 슈리엘을 외치자 바람의 상급정령은 창을 던졌다. 쐐애엑!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기며 바람의 창이 날았다. 흉폭한 서펜터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이 창을 맞으면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서펜터의 몸부림이 더욱 격해졌다. 실피드 둘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갈 때쯤 창이 날아들었다. 쾅! 창은 괴물의 배를 직격했다. 꾸어억! 서펜터의 괴성과 함께 배가 터져 나가며 붉은 피가 푹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놀랍게도 창자가 밖으로 흘러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서펜터는 움직였다. "아!" 하이론이 그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성을 터트렸다. 엘란은 감탄만 하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서펜터가 더욱 가깝게 접근한 것이다. "스피릿 컴파운드!" 실프드와 카사가 서로 나선형으로 꼬이며 서펜터에게 날아갔다. 창자가 바다로 흘러내리는 와중에서도 서펜터는 몸통을 슬쩍 흔들어 정령들을 피했다. 그러나, 정령들은 허공에서 선회하더니 다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몬스터가 바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정령들이 입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꾸어억! 부드러운 목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정령이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서펜터의 몸이 중간에서 끊어지며 온갖 오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몸이 절단된 상태에서는 그 대단하던 서펜터도 죽음의 강을 건너야만 했다. 위풍당당하게 날뛰던 서펜터의 몸이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잠겼다. "잘했다." 하이론이 흐뭇하게 웃었다. "엘란 만세!" "좌호법사 만세!" 교도들의 함성이 잔잔한 바다를 달굴 때 하이론이 바다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엘란!" 뽀그르르! 바닷물이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었다. 슈리엘이 급히 배들을 밀었다. 촤아아! 물이 솟구치며 갈라지더니 또 다른 서펜터가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슈리엘!" 바람처럼 날아간 슈리엘이 서텐터의 몸에 올라타서 목을 졸랐다. 쿠억! 숨이 막힌 몬서터가 입을 딱 벌렸다. "스피릿 컴파운드!" 쐐에액! 붉고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서펜터의 입으로 들어갔다. 퍼어엉! 이번에는 입안에서 폭발해 버렸다. 뜨거워진 공기가 급격히 팽창하며 서펜터의 머리를 찢어 발겼다. 투두둑! 머리가 터져 나가며 잔해가 사방으로 튀는 바람에 슈리엘은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 섰다. 파바밧! 슈리엘이 오물을 털어 내려는 듯 몸을 회전시키자 서펜터의 잔해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죠!" 엘란이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더 이상 징그러운 서펜터를 보기 싫었다. "그게 좋겠다." 하이론도 동감이었다. 이번에는 엘란을 대신해 하이론형제들이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배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별들이 떴다. 촘촘하게 박힌 것이 빈 공간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바다에서 보는 하늘은 더욱 높았고 별들은 더욱 선명했다. 하늘의 중간에는 엘란과 에쉴리가 첫 밤을 보낸 그 날처럼 휘영청 보름달이 떴다. 둘은 꼭 끌어안고 뱃전에 기대서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괜히 심통이 난 쟝이 분위기를 깨고 나섰다. "개떡같은 날씨지?" 계절은 한 여름을 지나고 있어서 후덥지근하기는 했지만 밤이 되자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게 쾌적한 밤이었다. 심통이 나다보니 선선한 바람까지 신경을 건드렸다. 쟝은 욕구불만으로 폭발직전이었다. 에쉴리는 쟝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지자 도끼눈을 떴다. 그러나, 그런데 신경 쓸 정도로 쟝의 얼굴은 얇지 않았다. 에쉴리에게 언제나 예의를 차리던 쟝은 자기 손을 떠났다고 느꼈는지 느물거렸다. "눈에 뭐 들어갔습니까?" "어디 봐요?" 엘란이 화들짝 놀라 에쉴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됐어요!" 그녀는 매몰찬 말과 함께 찬바람이 휙 불도록 몸을 돌리더니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쟝에 대한 멸시의 표현이다. 엘란은 이유를 알지 못했으므로 멍하니 서서 그녀가 닫고 들어간 문만 바라보았다. "왜 저러죠?" "여자들은 원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거다. 그렇게 안 봤는데 에쉴리도 꽤 성깔 있는 걸.... 너도 이제 고생문이 훤하다." 쟝은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엘란의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에쉴리는 그런 여자 아닙니다." "어쭈! 이거 완전히 푹 빠졌네. 너도 조금 더 지내보면 알게 될 거다. 생긴 것만 다를 뿐 여자들은 모두 비슷해. 아! 속옷도 다르긴 하지." "관둬요. 쟝하고 말을 섞는 내가 바보지." "그런 놈하고 말 해봐야 니 입만 아프다." 언제 나왔는지 하이론이 옆으로 다가왔다. "흥!" 쟝은 기분이 나빠져서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돌렸다. 하이론도 얼굴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쯤에서 쉴만한 섬이 나타나야 할텐데, 더 이상 다가가면 드래곤들의 분노를 살수도 있다." 자신의 제안에 따라 시작된 항해에 살만한 섬이 나타나지 않자 하이론은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럼, 더 이상 다가가지 말고 북쪽으로 선수를 돌리죠." "그래야 되겠다." "어디든 뭍으로 갑시다. 매일 흔들리는 배위에 있었더니 골까지 다 흔들려요." 쟝이 참견을 하고 나섰다.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듯 이제 물이라면 지긋지긋 했다. 바다 특유의 짠 내도 속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 때부터 배들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섬이다!" 돛대 꼭대기에 설치된 망루에서 주변을 살피던 교도가 목이 터져라 외치자 수많은 교도들이 난간을 붙들고 앞을 살폈다. 작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니 서서히 커졌다. 그 점이 수박만해지자 주변에 있던 깨만한 점들도 커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찾아 헤맨 끝에 작은 군도를 발견한 것이다. "야호!" "이야!" 기쁨의 함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녹음이 우거진 작은 섬과 그 섬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바위섬이 보였다. "배 댈 대가 없습니다." 이물에서 앞을 살피던, 항해사의 직책을 맏고 있던 교도가 소리쳤다. 섬은 작은 데다 수심이 뒮아서 배를 댈만한 장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바위섬과 주섬 사이에다 닻을 내리고 나룻배로 짐과 사람들을 날랐다. 작은 백사장에는 굵은 모래가 깔려 있었다. 밀물이 들어 올 때를 대비해서 높은 곳에다 천막을 치고 짐을 옮기자 어둠이 깔려왔다. "여기다 임시 거처를 만듭시다." 파올대사제가 말했다. 모두들 긴 항해에 지쳐 있었으므로 대찬성이었다. 백사장에 모닥불을 피우고 파티가 벌어졌다. 술이 없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땅을 디디고 섰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맨발에 밟히는 굵은 모래의 감촉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하하하!" "호호호!" 즐거운 웃음소리가 일렁이는 불꽃을 따라 하늘높이 올라갔다. 섬의 중앙에 있는 야트막한 산 위에서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노란 눈이 있었다. 크르르! 괴물체는 기분 좋은 흉소를 발했다. 지고교도를 내려다보는 것은 키가 4미터도 넘었고, 파란 피부에는 억센 털이 수북히 덮여 있었다. 노랗게 번뜩이는 눈과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폭급한 성질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트롤이었다. 트롤은 먹이가 한꺼번에 굴러 들어오자 즐거워서 미칠 것 같았다. 원래는 드래곤섬에 살았으나, 난데없는 회오리에 휘말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닷가에 엎어져 있었다. 그 때부터 트롤은 이 섬의 제왕이 되었다. 섬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트롤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기를 몇 년, 더 이상 잡아먹을 짐승들이 없게되자 할 수 없이 개미 같은 곤충이나 조개를 먹고살았다. 오랜만에 신선한 살 냄새를 맞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트롤은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왔다. 살 냄새가 조금밖에 없는 지능을 마비시켰다. 쿵쿵! 트롤이 육중한 몸을 움직이자 발자국소리에 땅이 울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엘란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흥을 깨기 싫어서 조용히 일어나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발을 옮겼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해결할 생각이었다. 워낙에 섬이 좁다 보니 조금 후에 둘은 마주치게 되었다. 트롤은 자신을 맞이하는 엘란을 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엘란에게는 괴성으로 들렸지만. 트롤은 저 조그만 놈이 뭘 믿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람의 칼날!" 엘란이 조용히 말하자 공중에서 희긋희긋한 선이 죽죽 그어지며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엉스엉! 시끄러운 소리에 흉성이 폭발한 트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엘란에게 달려들려 했다. 쿠악! 트롤은 갑작스러운 통증이 전신을 옭아매자 비명을 질렀다. 트롤의 몸이 조각조각 나뉘어져서 바닥으로 쏟아졌다.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섬의 제왕은 사라져 갔다. 트롤의 비명을 들었는지 하이론이 다가왔다. "웬 트롤이냐?" 하이론은 의아했다. 대륙이나 드래곤의 섬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트롤이 이런 작은 섬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 엘란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한 동안 트롤을 내려보던 하이론은 로브에서 주머니를 꺼내 트롤의 잔해를 담았다. "뭐 하십니까?" "보면 모르냐? 트롤의 살과 피는 재생력이 엄청나게 좋아서, 약재로 쓰면 기가 막히다." "왜 여기에 트롤이 있을까요?" 하이론이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엘란이 던졌다. 하이론은 엘란처럼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쿵쿵!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당분간 살집을 마련하기 위해 벌목을 시작한 것이다. 나무를 내려치는 장정들의 팔뚝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엘란과 에쉴리는 섬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어제의 일로 위험한 몬스터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요사이 엘란의 옆에는 항상 에쉴리가 있었다. 둘은 바늘에 실 가듯이 항상 붙어 다녔고, 그 덕에 쟝과 조르주의 눈만 가재미 눈이 되었다. 긴장한 채 사방을 살피는 엘란과는 달리 그녀는 즐거운 산책이라도 하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에쉴리로서는 엘란만 옆에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위험한 몬스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몬스터는 커녕 동물들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가 보죠." 엘란이 앞장을 서자 에쉴리가 뒤를 따랐다. "아!" 에쉴리가 발목을 움켜쥐고 주저앉자 깜짝 놀란 엘란이 황급히 다가왔다. "왜 그래요?" "발목을 삐었어요." 돌을 잘못 디딘 모양이었다. 발목은 어느새 퉁퉁 부어 올랐다. "업혀요." 엘란은 얼른 에쉴리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에쉴리를 업고 아래로 내려가는 엘란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이 잡았다. "계속 올라가요." 그녀는 단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내려가서 하이론에게 치료를 받아야 해요." 엘란이 거절하자 입을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계속가요." 뜨거운 숨결이 귀를 간지르자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가빠졌다. 그는 어디에 홀린 것처럼 에쉴리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하이론이 봤다면 한 참을 놀려댔을 것이다. 좁은 산길을 올라가자 아주 작은 분지가 보이고 그 안에 작은 폭포와 연못이 있었다. "아!" 웅장하거나 화려한 풍경은 아니지만 그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에 감탄성이 절로 나왔다. "내려가요." 엘란은 급히 내려가 연못가에 에쉴리를 내려주었다. "아! 차가워." 뜨거운 태양도 계곡물을 덥히지는 못했다. 시원한 물이 등골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에쉴리는 옷을 훌훌 벗고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연못의 깊이는 뒮아서 물이 가슴에서 찰랑거렸다. 에쉴리가 바닥을 밟고 떠올랐다 가라앉자 차가운 물에 꽂꽂이 일어선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엘란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젖히자 머리카락에 묻은 물이 공중으로 튕겨지며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엘란이 보기에는 한 마리의 인어 같았다. 엘란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옷을 벗고 연못에 들어갔다. 그녀의 매력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촤아! 에쉴리가 물을 뿌리며 장난을 걸었다. 엘란도 마주 물을 튀겼다. 그녀에게 다가간 엘란은 팔을 잡고 물 속에 집어넣었다. 뿌그르르! 입에서 나온 공기가 거품을 만들었다. 물 속에서 하늘거리는 그녀의 자태가 엘란을 숨막히게 했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아래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랐다. 둘은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잠시 후 연못을 나온 둘은 가장자리에 벌거벗은 채 누워 뜨거운 햇살을 맞고 있었다. 에쉴리는 엘란의 팔을 베고 누웠고, 엘란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전신을 더듬었다. 다시 한 번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한 차례의 열풍이 분 이후 엘란은 에쉴리 위에 올라탄 채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해요."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에쉴리는 행복했다. 마음이 이처럼 기쁨으로 충만했던 적이 없었다. "예, 결혼해요!" 둘은 길게 입을 맞추었다. 이글거리는 태양만이 둘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산을 내려오자 아이들이 졸졸 따라왔다. 엘란이 에쉴리를 업고 가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그들은 하이론에게로 갔다. 하이론은 어제 획득한 트롤의 잔해를 분리하고 있었다. 요사이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귀족으로서의 편안한 삶이 몸에 배인 쟝은 교도들을 도와 노동을 하기가 싫어서 하이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엑!" "으앙!" 괴상망측한 냄새와 처참한 모습에 놀란 아이들이 흩어졌다. 개중에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도 있었다. "무슨 일이냐?" 둘을 본 하이론이 급히 다가왔다. "산을 오르다 다리를 삐었어요." 에쉴리를 내려 놓으며 엘란이 말했다. "어디 보자." 잠시 살펴보던 하이론이 치료마법을 걸었다. "힐링!" 흰빛이 잠시 머물더니 사라지자 욱신거리던 발목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은 발목은 금새 가라앉았다. "무슨 좋은 일 있냐?" 발목을 다친 사람이 아픈 기색도 없이 웃음을 흘리고 있고, 평소 에쉴리라면 껌뻑 넘어가던 엘란도 바보처럼 실실 웃고 있지 이상한 생각이 든 쟝이 물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엘란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이론은 금새 반색을 하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축하한다! 이거 잔치라도 벌여야겠는데." 오랜 기간 여자 곁에 얼씬도 못해서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쟝은 금방 퉁퉁 부은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할짓 안 할짓 다하두만 새삼스럽게 결혼은 무슨!" "넌 좀 빠져." 하이론이 퉁명스레 말하자 안 그래도 심통이 난 쟝의 심사가 더욱 꼬였다. "에이!" 트롤의 피가 담긴 통을 걷어차더니 냅다 뛰었다. "너 거기 안서!" "너 같으면 서겠냐! 이 대머리 얼간아!" 길길이 날뛰며 쟝의 뒤를 쫓아가려는 하이론을 엘란이 말렸다. 쟝의 심시를 대충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두세요." "저 놈이 갈수록 기어오른단 말이야." 그는 바닥에 쏟아진 피를 담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대로 두다간 큰 사고라도 칠 것 같은데...." 저러다 여신도라도 덮치면 큰 일이었다. 엘란의 말을 들은 하이론도 심각해 졌다. 그렇다고 무슨 뽀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쟝을 순박한 지고교도와 짝지어 줄 수도 없었고, 쟝이 꿈속에서마저 열렬히 열망하는 코리나와 엮어 줄 수도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주변이 대충 정리된 일주일 후 선남선녀들이 모여서 합동결혼식을 열었다. 꽃으로 장식된 연단 위에는 성녀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그 옆에는 파올대사제가 푸른 사제복을 입고 경건하게 서 있었다. 엘란과 에쉴리를 포함한 삼십 쌍의 연인들이 성녀의 앞에 섰다. 신부들의 머리에는 꽃으로 만든 화관을 섰고 남자들은 목에 흰 타이를 맺다. 연인들은 모두 팔짱을 꼈는데 사랑과 신뢰가 팔을 따라 서로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식은 간단했다. 서로의 의사를 묻고 혼인서약서를 낭독한 후 성녀가 축복을 빌어 주었다. 파올은 연인들의 머리에 성수를 뿌려주었다. 다른 신전의 성수와는 달리 별 효과는 없었지만 모두들 행복해 했다. "파티다!" 롬바르드의 빈민촌에서 주점을 운영하던 콜드가 우렁찬 목청으로 소리치자 섬이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새 모닥불이 지펴지고, 악기를 하나씩 집어든 교도들이 흥겹게 연주를 시작했다. 신혼부부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모닥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엘란은 한 번도 춰보지 못한 듯 에쉴리의 발을 밟기 일쑤였다. 그래도 즐거운 듯 에쉴리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삐리리리! 음악소리가 점점 흥겨워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코를 찔찔 흘리는 꼬맹이들도 서로 얼싸안고 모닥불 주위를 돌았다. 성녀와 사제들마저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이론형제마저 춤판에 뛰어들었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흥겨운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조르주는 에쉴리에 대한 감정을 접고 진정으로 행복을 빌어 주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뚱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모든 여자들이 피하는 쟝이었다. 쟝은 하이론처럼 남자들과 춤을 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춤판에 끼어들 수 없었고 뚱한 얼굴이 되었다. 자리를 피한 쟝은 워어울프처럼 달을 보고 울부짖었다. "우워어!"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에쉴리를 안고 있던 엘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파티에 잠을 자지도 못했는데 아침부터 누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 집은 목수의 도움을 받아 엘란이 직접 지은 집이다. 형편없기는 하지만 자기 손으로 만든 집이라 애정이 갔다. 똑똑똑! 엘란을 재촉하듯 다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휴!" 한숨을 푹 내쉰 엘란은 더 자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에쉴리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대충 만든 나무문을 밀자 쟝의 얼굴이 보였는데 한 숨도 자지 못한 듯 눈은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동안 바닥을 툭툭 치던 쟝이 쓸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표정이 얼마나 불쌍하던지 안쓰런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데미도 성녀에게 푹 빠져서 피해 다니고, 다른 여자들은 날 징그러운 벌레 보듯 하니 여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 "데미에게 얘기는 해 봤나요?" 둘은 사실상의 부부관계였었다. 데미에 대해 묻자 쟝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검게 탄 목덜미가 어쩐지 서글프게 보였다. "바다 위에 있을 때 얘기해 봤는데....그만 만나자고 그러더라. 젠장! 사제가 될 거란다. 그게 말이 되냐?" 말을 하면서 감정이 격앙된 쟝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쟝의 말에는 엘란도 놀랐다. 성녀를 따라다니며 경전도 읽고,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사제가 되려고 할 줄은 상상을 못했다. 피르보나초지대를 지나 들어간 숲에서 데미의 행동을 직접 경험한 엘란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채찍을 휘두르며 묘하게 몸을 비틀던 모습이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정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자 저절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쟝은 말도 하기 싫다는 듯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대륙으로 나가실 생각입니까?" "그래." "목에 걸린 현상금은 어쩌실 겁니까?" "나쁜 새끼! 내가 지를 얼마나 이뻐했는데!" 쟝은 이를 부드득 갈아 부쳤다. 아버지가 죽고 동생이 가문을 물려받아 처음으로 한 일이 쟝의 목에 현상금을 건 일이었다. 그것도 자그만치 1000골덴이나 되었다. 평소에 살랑거리며 아부를 떨어대던 동생이 이렇게 나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쟝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면도 있었다. 모든 귀족가는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서 영지를 한 명에게 물려주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리는 귀족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자식들에게 영지를 쪼개다 보면 대를 이어 내려갈수록 점점 세력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보통 장자를 중심으로 상속이 이루어지는지라 동생들의 입장에서는 형이 가문을 물려받고 알몸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부를 떨어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장자에 대한 살인청부도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왕가와 마찬가지로 귀족가의 형제들도 서로간에 정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쟝의 동생도 갖은 아양을 떨었었다. 그러한 수모가 앙금으로 깔린 데다 영웅으로 죽은-공식적으로는 대제의 무덤에서 황제의 명을 따르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쟝을 본 사람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자 살아 돌아와서 상속권을 주장하면 골치가 아파지는지라 목에 현상금을 걸었던 것이다. 동생을 생각하자 열이 받은 쟝은 한 참을 씩씩거렸다. 코와 귀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갈 거다. 이런 섬에서 독수공방하기는 싫다." 쟝은 단호히 말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굳센 의지가 묻어 났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하고 같이 대륙으로 나갑시다." "안돼요!" 문의 안쪽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울렸다. 높아진 쟝의 음성에 잠에서 깨어난 에쉴리가 둘의 대화를 듣다 놀라서 소리친 것이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뛰어나왔다. "나는 이만 갈게." 자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자 무안해진 쟝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 에쉴리 몸매가 죽여주는구나!' 그 와중에 볼 건 다 보는 쟝이었다. 엘란은 급히 그녀를 잡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에쉴리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다.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엘란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떨고 있는 아내가 상처 입은 작은 새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파 왔다. "여기서 계속 살수는 없어요." "왜 안되요?" 어느새 떨림이 그친 에쉴리가 도발적인 시선을 던졌다. "섬이 너무 작아서, 인구가 늘어나면 살 데가 없어요. 농사지을 땅도 없고. 이대로 고립된 채 살아간다면 점점 쇠퇴해져서 사회가 붕괴될 겁니다." 에쉴리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놓고 가슴 졸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싫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싫다는 말만 반복했다. 엘란은 그저 꼭 끌어안아 주기만 할 뿐 입을 열 수 없었다. 둘은 한 달 내내 집안에서만 붙어 있었다. 둘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집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쟝만이 가끔씩 방문할 뿐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서서히 찬바람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엘란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태어날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편안히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가세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괴로운 듯 몸을 돌린 채로 에쉴리가 말했다. 엘란은 말없이 뒤에서 안아 주었다. "흑흑흑!" 그녀의 숨죽인 울음소리만이 작은 집안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다음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맑았다. 마치 엘란의 장도를 축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 다녀와요!" "몸조심하세요!" 백사장에 몰려 있던 교도들이 하나같이 무사한 귀환을 빌어주었다. 에쉴리는 집에서 작별인사만 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 엘란이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데미가 엘란을 꼭 안아주었다. "꼭 돌아와야 한다. 에쉴리 울렸다간 알지?" 주먹을 들어 엘란의 코앞에 들이대는 모습이 웬지 정감이 갔다. 데미의 몸에서 흐르던 묘한 색기는 어느 샌가 모두 사라지고 푸근한 정만이 넘쳐 났다. 불현듯 데미가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환하게 웃어주었다. "에쉴리 좀 보살펴 주세요." 데미는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걱정마!" "나도 좀 안아줘!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본단 말이야!" 옆에서 쟝이 끼어 들었다.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쟝을 꼭 안아주었다. 쟝은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에 안던 때와는 다르게 욕망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륙에 나가거든 현상금사냥꾼 조심하고, 잘 지내." "응!" 쟝은 왠지 콧날이 시큰해졌다. 데미만 허락한다면 결혼해서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겼다. 데미의 확고한 마음을 알고 있던 쟝은 그러한 생각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쟝도 엘란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훌륭한 사제가 될 지도 모르겠다.' 데미는 예쁘장하게 생긴 수많은 고아들이 그렇듯 어린 나이에 늙은 영감에게 팔려가서 성적으로 학대를 받았다. 철이 들면서 자기 처지를 깨닫자 영감에 대한 증오감이 무섭게 일어 났다. 영감을 죽이고 도망친 데미는 밤의 그림자에 들어가 마스터에게 몸을 주며 되는대로 살았었다. 성녀와 같이 지내며 배움을 얻은 데미는 세상을 다시 보았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 같았다. 데미는 모든 원망과 욕망을 떨쳐버리고 신의 대리인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경건한 신앙생활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는 오직 성녀만이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던 엘란과 쟝이 자세히 살펴보자 처음으로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자연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 데미의 옆에는 코리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에쉴리가 엘란과 결혼한 이후부터는 데미와 같이 살았다. 코리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멍하던 눈동자에는 언제부터인가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잘 지내세요." 엘란이 말을 건네자 쟝도 얼른 말을 붙였다. "나하고 같이 가실래요?" 코리나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지고의 가호가 있기를." 성녀를 필두로 파올대사제와 산티아고사제등 여러 사제들이 축복을 내려주었다. "이제 가야지!" 하이론이 재촉을 했다. "저....." 빈민촌의 주점에서 일하던 로이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뭐냐?" 로이는 안 떨어지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꼭! 돌아오세요." 이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운 듯 로이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고맙다." 엘란, 쟝, 하이론이 배를 타자 두 척의 배가 서서히 떠나갔다. 배들은 엘란등을 내려주고 식량을 싣고 돌아올 것이다. 배는 어두워지는 바다를 향해 서서히 나아갔고, 침대 위에 엎드린 에쉴리는 서럽게 울었다. ***** 12장. 나탈리를 찾아서. 이른 아침부터 주점 앞을 맴도는 작은 사람이 있었다. 작달막한 키는 160도 안될 것 같았고, 짧은 머리카락은 온통 하늘로 치솟아 삐죽삐죽했다. 때는 늦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라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작은 사내는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반팔의 셔츠는 때에 절어서 검게 보이는 데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고, 얇은 면바지도 곳곳이 찢겨져 있었다. 동냥그릇이라도 하나 들면은 영락없는 거렁뱅이 차림새였다. 몹시 추운 듯 손을 호호 불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작달막한 사내는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입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지꼴을 한 사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 달도 넘게 이러고 있는 것이다. 덜컹!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뚱뚱한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야! 일어나." 뚱뚱한 사내는 작은 사람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채 눈을 부라렸다.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일견하기에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자 올려다보던 사내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다리를 떨면서 주춤주춤 일어나는 모양이 겁에 질린 것이 분명했다. "왜 그러십니까?" "왜 긴 왜 겠냐! 이 거지새끼야! 하루종일 가게 앞을 죽치고 있으면 장사는 어떻게 하냐? 어! 딴 가게도 많은데 왜 우리집 앞에서 이러고 있냐?" 욕설을 늘어놓으며 팔을 걷어 부치자, 드래곤인지 도마뱀인지 분간이 어려운 문신을 새긴 굵은 팔뚝이 드러났다. "저...거지...아닙...니다." 겁에 질린 작은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야!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니 꼬라지를 봐라 그게 거지가 아니면 거지 할애비냐?" 안 그래도 겁이 많은 사내는 머리통 만한 주먹이 눈앞을 왔다 갔다 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 저 거지 맞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주먹을 흔들던 사내는 흡족한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온갖 오물이 낀 누런 이빨이 작은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꺼져!" "예?" "꺼지라고, 다시 한 번만 우리 가게 주위를 얼쩡거렸다간 다리몽둥이를 뚝 분질러 버리겠다.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잘 새겨들어."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는데...." 작은 사내가 여전히 머뭇거리자 뚱뚱한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디 한 군데 부러져야 정신을 차릴 놈이군." 뚝뚝! 뚱뚱한 사내가 손가락을 꺾어 소음을 만들자 작은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후다닥! 작은 사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 사내의 뒤통수로 뚱뚱한 사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다시 얼씬거리면 죽을 줄 알아!" 메디치는 엘리오트왕국 제이의 항구도시였다. 포강 하구의 포리버시티에 그 지위를 뺏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흥청거렸다. 전성기 때는 전 대륙의 물동량을 도맡다시피 하던 도시였다. 메디치가 쇠퇴한 결정적인 이유는 자유무역항의 지위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제가 엄격한 엘리오트에서 유일한 자유도시였던 이 곳은 온갖 불온한 사상의 온상지가 되었고, 자유를 찾아 들어오는 평민과 농노로 넘쳐 났다. 자연히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 같은 도시였으나, 왕실에 엄청난 재정수입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자유무역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지위도 250년 전의 시위로 끝장이 나버렸다.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었던 시위였다. 광장에서 겨우 100명이 모여 소란을 떤 것에 불과했으나 그 주장 중 하나가 신분제폐지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태풍을 몰고 와 버렸다. 광풍이 몰아치고 남은 것은 5000구의 시체와 자유무역항의 철폐였다. 그러나, 다른 도시와는 달리 귀족들의 지배와 통제가 심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제이의 항구도시로서 서북지방의 상권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귀족들의 지배가 심하지 않은 이유는 한 귀족이 먹어치우기에는 메디치라는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했고, 대대로 메디치에 자리를 잡은 상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한 엄청난 저력 때문이기도 했다. 메디치는 서너개의 유력한 귀족가문과 상인연합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그런 이유로 여전히 도망자들이 많았고, 온갖 사상과 밀수품들이 들끓었다. 엘란 일행이 대규모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이리로 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메디치에는 아에게에게 맡긴 나탈리가 있었다. 엘란은 나탈리를 찾아서 돌아가는 배편에 섬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식량의 조달은 하이론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하이론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이런 일에는 소질이 있었다. 능숙하게 가격조정을 하는 것이 엘란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다. 무슨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흥정을 했다면 바가지를 썼을 것이 분명했다. 엘란과 하이론은 좁은 길을 따라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있었다. 항구에서 많이 올라왔는데도 바다특유의 짠내와 비린내가 코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들은 섬과의 연락을 위해 통신구를 구할 생각이었다. 마법사들이 제작한 통신구는 군수품으로 나라에서 엄격하게 통제하기는 했지만 구하고자 한다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기 마련이다. "알맞은 물건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엘란이 질문했다. 알맞은 거처를 찾아 대륙을 헤매다 보면 섬과의 거리가 엄청나게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연락을 하자면 아주 성능이 좋은 통신구를 사야했다. 그런 통신구는 통제가 심해서 구하기가 힘들었다. "구할 수 있을 거다. 메디치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다른 데서도 구하기 힘들어." "여기 와 본적 있어요?" "대여섯 번 정도. 불법적인 물건을 구하는데는 여기 만한 데도 없지. 그건 그렇고 무슨 걱정이라도 있냐? 아침부터 꽤 초조해 보인다." "나탈리 때문에 그래요. 일년만에 찾아가자니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꿈자리도 뒤숭숭한 것이 마음이 불안합니다." 나탈리와 헤어진지도 어느새 일년이다. 피터 다르넨을 죽이러 쫓아갈 때만 해도 여정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대제의 무덤에서 아스마엘을 만나고 자신이 지고교의 좌호법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여서 일년동안의 숨가빴던 여정을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부지기수였다. 엘란은 불안을 털어 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서 가죠. 오늘이 말일이니 숲의 요정에 가면 아에게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엘란은 아에게용병대와 헤어지면서 매달 말일에 숲의 요정이란 주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둘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골목을 돌고 돌자 나지막한 단층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 나타났다. "여기다." 하이론은 파란칠이 되어 있는 건물 앞에 서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 낡아빠진 문은 소음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건물은 자그마한데 안은 대단히 넓었다. 옆 건물들을 터서 공간을 넓힌 것으로 보였다. 네 칸으로 구분 지어진 선반에는 온갖 물건들이 즐비했다. 엘란이 촌뜨기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눈은 뎅그라니 크고 몸은 빼빼 말라서 어쩐지 해골처럼 보이는 점원이 조용히 다가왔다. 엘란이 보기에는 스켈레톤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뭘 찾으십니까?" "에릭 좀 불러주게." "죄송합니다만, 어떤 사이십니까?" "하이론이 왔다고 전해주게." 잠시 후 엘란과 하이론은 작은 밀실로 안내가 되었다. 온통 검은 벽지가 발려진 방은 작은 탁자와 의자 몇 개뿐이었다. 음산한 것이 꼭 미친 마법사의 연구실 같았다. "에릭이 누굽니까?" 음산한 방으로 안내되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 가게주인이다. 큰 거래를 몇 번해서 내 이름은 기억하고 있을 거다." 하이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덜컹 열리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들어왔다. 이 노인도 점원같이 빼빼 마른 데다 흰머리가 산발하듯 제 멋대로 자라서 해골 같아 보였다. 노인을 보고 있자니 우연히 뽑은 종업원들이 모두 빼빼 마른 사람들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뽑아 놓은 것인지 궁금해졌다. '가게 이름을 해골들의 안식처라고 하면 딱 맞겠네.' 엘란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해골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군.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오셨나?" "통신구 좀 구해주게. 대륙 어느 곳에서도 통신이 가능하도록 성능 좋은 것으로." 하이론은 인사말 같은 것은 생략하고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거래는 하더라도 해골 노인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2,000골덴." 노인이 짤막하게 가격을 말하자 엘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칸토나에게서 훔친 보석들과 돈은 섬으로 운반할 식량을 사고 나자 거의 없어졌다. 수중에 있는 돈은 1,000골덴이 다였다. 이 정도 돈도 엄청난 거금이기는 했지만 최고 성능의 통신구를 사기에는 모자랐다.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100골덴 짜리도 있네." 노회한 장사꾼답게 금새 돈이 모자란 기색을 눈치채고 주인장이 말했다. "1,000골덴짜리는 어떤가?" "엘리오트 내에서만 쓴다면 무난하네만 융커산맥이나 피레넨산맥을 넘어 통신하기는 어려울 거네." "허! 곤란하게 됐는데." "돈이 모자라면 약으로 대신할 수도 있네." 하이론이 노인의 말에 반색했다. "포션 하나에 얼마를 쳐 줄 건가?" "포션말고 다른 건 없나?" "다른 거라니?" "불끈이 말일세." "아! 불끈이," 불끈이란 말에 엘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불끈이는 하이론이 만드는 정력제 이름이었다. 한 병만 마시면 죽은 시체도 서게 만든다고 자랑이 대단했었다. 쟝이 한 병 얻어 마셨다가 쓸데가(?) 없어요 이틀동안 바깥출입을 못하고 선실에 갖혀 지낸 적이 있었다. "한 병 당 천골덴 쳐주지." 해골노인의 말에 엘란의 입이 쩍 벌어졌다. 펑펑 낭비만 하지 않는다면 일골덴은 평민가정의 한 달 생활비로 충분했다. 1,000골덴이라면 100년 동안은 편안히 살 수 있었다. 생명을 구해주는 희대의 명약도 아니고 기껏 정력제 한 병에 천골덴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게주인은 하이론이 세 병을 주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더 없나?" "이게 다야." "나중에 더 만들거든 꼭 와주게." 노인은 신신당부를 하더니 불끈이를 조심스럽게 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바빠서 이만 가겠네. 통신구와 천골덴은 점원이 가져다 줄 거야. 그럼, 조심해서 가게." 노인이 나가자 엘란이 말했다. "불끈이가 그렇게 비쌉니까?" "예전에 팔 때는 한 병에 100골덴 했는데 언제 이렇게 올랐지!" 백골덴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엘란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귀족들 입장에서야 널린 게 돈인데 쾌락에 그만한 돈 들이는 거야 우습지." "하긴 그렇네요." 삑이익! 문이 열리고 처음에 말을 걸던 점원이 한쌍의 통신구와 천골덴이 든 주머니를 가지고 들어왔다. "자네 에릭이랑 무슨 사인가?" "제 할아버지 되십니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같은 생김새는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볼일을 다 본 엘란과 하이론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 그들의 배가 정박되어 있는 항구로 향했다. "이 통신구를 내 동생들에게 주게. 그럼 연락이 될 거다. 조심해서 돌아가게." 하이론은 통신구를 콜드에게 전해주었다. 그들이 작별인사를 하고 배에서 내려오자 해가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황혼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배를 출발하라!" 콜드의 우렁찬 함성이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지자 닻을 올린 배가 서서히 항구를 벗어났다. 하이론과 엘란은 그러한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배가 작은 점으로 변해 사라지자 하이론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쟝! 이 자식은 왜 안 오고 지랄이야!" 메디치항구에 도착한 직후 쟝은 볼일이 있다면서 엘란에게 50골덴을 받아서 어디론가 황급히 사라졌었다. 저녁에는 온다더니 감감 무소식이다. "자기 갈길 찾아간 거 아닐까?" 씩씩거리던 하이론이 은근한 바램을 담아서 말했다. 교도들의 거처를 마련하려면 온 대륙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데 쟝은 짐이 될게 분명했다. 정이 많이 들어서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엘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쟝은 우리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겁니다." "왜? 쟝이 같이 다니겠다고 그러던?" 하이론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이마에서 시작된 주름이 대머리를 타고 뒷덜미까지 연결되었다. 그런 모습이 엘란이 눈에는 상당히 희극적으로 보였다. "별다른 얘기는 없었지만 뻔하잖아요." "뻔하다니 뭐가?" "제가 카르자나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오면서 제일 곤란했던 게 뭔 줄 아십니까?" 하이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데?" "돈이었습니다. 정령사라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만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죠. 평생 돈이라고는 벌어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막막했습니다. 그때는 마법사가 부럽던데요. 포션이나 통신구 등 돈 벌 방법이 많잖아요. 귀족가나 왕실에 들어가기는 싫고 할 수없이 용병이 됐죠. 나중에는 노가다까지 했습니다." "하하하! 자네 들어간 용병대 이름이 노가다용병대였지!" 하이론은 유쾌한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에게가 들으면 난리 납니다. 어디까지나 공식명칭은 아에게용병대에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게 쟝하고 무슨 상관인가?" "귀족이 일하는 것 봤습니까?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하는 거라고는 평민들 목을 치거나 사람 죽이는 기술 닦는 게 다죠. 기사들의 본분이라는 떠들어대는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천한다는 귀족은 본 적이 없어요. 정력제 한 병에 이천골덴하는 거 보세요.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농노나 평민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결과물을 대가없이 뺏은 덕분이죠. 쟝도 귀족입니다. 평생 일하거나 돈을 벌어 본 적은 없을 겁니다. 여자들 꽁무니나 쫓아다녔을 테니 실력도 형편없어서, 용병일도 못 할거고..." "뭐야! 그럼 그 놈이 우리들한테 빈대 붙을 속셈이란 거야?" "아마도..."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그때 쟝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재미나게 놀았는지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너 어디 갔다 오는 거냐?" "그냥 볼일 좀 보고 왔어요." "너 사창가 갔다 오는 거지." "아니에요." 말로는 부인을 하면서도 찔끔하는 표정이 하이론의 예상이 맞는 모양이다. '귀신같은 영감탱이 그건 어떻게 알았대.' 가문에서 쫓겨나서 비참하게 몰락했다지만 귀족체면에 사창가나 들락거렸다고 말하기는 죽기 보다 싫었다. 그래서 뻗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는 절대로 다니지 않아요!" 어느새 표정을 수습한 쟝이 강력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그냥 순순히 물러나면 하이론이 아니다. "야이! 호랑말코같은 놈아..." 엘란은 그런 둘 사이를 얼른 끼어 들었다.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세요. 해가 졌으니 나탈리를 찾으러 가야 합니다." 엘란의 말에 쟝이 반색을 했다. '고맙다, 그래도 엘란 너밖에 없구나! 암, 변태들끼리 똘똘 뭉쳐서 험한 세상 잘 살아 봐야지.' 쟝은 여전히 엘란을 오해하고 있었다. 항구로 오는 내내 엘란의 걱정을 들었으므로 하이론은 이쯤에서 참기로 했다. "쟝, 너 앞으로 조심해." 하이론이 눈을 희번덕거리자 찔끔한 쟝이 고개를 돌렸다. "가죠!" 마음이 급해진 엘란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쟝이 쫄래쫄래 따랐다. 하이론은 쟝의 등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이 놈이 여행의 걸림돌이 되겠어.' 쟝이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에게와 만나기로 한 주점은 항구와 가까웠다. 큰길을 따라 죽 올라가자 옹기종기 모여있는 여관들이 보였고, 조금 더 올라가자 '숲의요정'이란 간판을 단 주점이 보였다. 주점의 입구에는 여러명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한 번만 더 어슬렁거리면 다리 뭉둥이를 부러뜨려 버린다고." 쌀쌀한 날씨에도 반팔셔츠를 입은 장한이 조그만 사내를 패대기치고 있었다. "아이고! 나 죽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내가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죽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반팔셔츠의 장한은 손에 침을 퉤 뱉더니 문간에 기대놓은 나무몽둥이를 움켜쥐고 쓰러져 낑낑거리는 사내의 몸통을 후려갈겼다. 퍽!퍽! 매타작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잘한다. 그 새끼 아주 죽여버려!" "낄낄낄, 머리에 구멍을 뚫어버려!" 주위에 둘러싸고 있던 선원들이 재미있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을 헤치고 주점으로 향하던 엘란은 무차별적인 구타에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는 깨어져서 피가 낭자했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엘란이 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만하지." 폭력은 행사하면 할수록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반팔셔츠 장한은 한 참 신이 나서 몽둥이를 놀리다가 방해를 받게 되자 열이 뻗쳤다. "넌 또 뭐야?" 엘란은 말없이 장한을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안광이 장한의 흥분한 눈동자로 줄기줄기 쏟아졌다. 장한은 엘란의 사나운 눈길을 받게 되자 눈이 아파오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몽둥이를 움켜진 손에는 땀이 홍건하게 고였다. 겁에 질린 사내는 몽둥이를 내리고 황급히 주점안으로 사라졌다. 엘란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작달막한 사내에게 다가가서 몸을 흔들었다. "정신차리세요!" "음." 쓰러진 사내는 신음성만 발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엘란은 손수건으로 피로 범벅이 된 사내의 얼굴을 닦았다. 피가 닦이자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밤톨!" 엘란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에게와 함께 떠난 밤톨이 거지꼴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엘란은 황급히 밤톨을 안고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하이론 방 좀 잡아요!" 급히 한마디 던지고는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빈방에다 밤톨을 銜혔다. 숙박계를 작성하고 대금을 지불한 하이론이 뛰어 올라왔다. "아는 사람이냐?" "주점에서 만나기로 한 용병대의 일원입니다." 하이론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꼴을 보아하니 일이 나도 크게 난 모양이었다. 쟝은 귀찮은 일에 말려들었다고 표정이 역력했다. 하이론은 밤톨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진찰을 시작했다. "머리상처는 거죽이 터진 것에 불과하니 별 것 아니고, 다리가 골절되고 갈비뼈가 네 대 나갔다. 우선 좀 씻겨야겠다." 밤톨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엘란은 욕실에 들어가서 수건에 물을 묻혀 와서는 밤톨의 전신을 닦아주었다. 수건은 금새 시커매졌다. 엘란이 대충 닦아주자 하이론은 부러진 다리와 갈비뼈를 맞추고 그 자리에 검은 색의 걸쭉한 액체를 발랐다. 머리에도 약을 바르고는 치료마법을 시전하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땀을 뻘뻘 흘리던 밤톨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쟝, 내려가서 따뜻한 스프랑 우유 좀 가지고 올라와요." "내가 왜?" 평생 남을 부리던 쟝에게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다. "쟝!" 엘란이 노려보자 찔끔해서는 방을 나섰다. 수많은 격전을 거치고 사선을 넘는 동안 엘란의 정령술은 일취월장했다. 엘란이 정색을 하고 쳐다보면 보통 사람들은 오금이 저렸다. 날라리 기사 쟝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깨워 주실래요." 엘란이 부탁을 했다. 원래는 푹 자게 내버려두는 것이 건강상으로는 당연했으나 나탈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밤톨이 푹 쉬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웨이크!" 하이론이 마법을 시전하자 밤톨이 눈을 번쩍 떴다. "으악! 살려줘요!" 밤톨이 두손으로 눈을 가리고 괴성을 질렀다. "진정해요, 저 엘란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엘란이 다급하게 물었다. "엘란!" 밤톨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엉엉! 왜 이제 왔어! 아에게랑 그린이랑 다 죽게 생겼단 말이야!" 밤톨은 엘란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한 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쟁반에다 스프와 우유를 담아 오던 쟝이 툴툴거렸다. "다 큰 놈이 울기는." "진정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나탈리는 어디 있습니까?"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울기만 하자 눈을 마주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딸꾹! 딸꾹!" 엘란의 눈빛을 받고 울음이 그치기는 했으나, 이내 딸꾹질을 시작했다. 하이론이 쟝에게서 쟁반을 건네 받아 우유를 권했다. "이거 한 잔 먹어보게." 꿀떡!꿀떡! 밤톨이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우유를 마시자 하이론은 스프도 권했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 마음이 안정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후루룩! 쩝쩝!" 밤톨은 걸신 걸린 것처럼 스프를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일동안 먹은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꺼억!" 밤톨이 스프를 다 먹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입니까?" 밤톨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짝귀를 구해야 되!" 밤톨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묻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엉뚱한 짓만 하는 밤톨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세하게 사정을 설명해 봐요!" 횡설수설하는 밤톨의 말을 하이론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이랬다. 아에게와 일행들이 메디치에 도착한 것은 엘란과 헤어진 후 두 달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일단 여관에다 여장을 푼 후 엘란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세 달이 지나도 엘란이 나타나지 않자 이들은 여기에다 뿌리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따뜻한 해류의 영향으로 날씨가 온화한 데다 낚시를 즐기기에도 그만이었다. 영주들의 통제가 느슨한 것도 정착의 이유가 되었다. 일행은 돈을 모아서 교외에 아담한 집을 한 채 샀다. 산 속 오두막이나 천막에서 지내다가 집이 생기자 메디치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한 달 보름 전의 일이었다. 옆집으로 머리가 완전히 까져서 뒤에만 듬성듬성 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얼굴이 누런 노인이 이사를 왔을 때만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노인은 메디치의 유력가인 마너크백작가의 집사라는 말도 흘려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백작가의 집사가 아니라 집사의 집사였다. 마너크가문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밑에 여러 명의 집사가 있었다. 거지에게는 문지기가 제일 무섭듯이 평민에게는 평생 대면하기 힘든 귀족보다는 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더욱 무서운 법이다. 어딘지 얌심스레 보이는 이 노인이 집을 팔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을 때 아에게는 코방귀를 뀌었다. 노가다용병대로 불릴망정 한 때는 용병대의 대장이었고, 맥그루의 의뢰를 받았다 대제의 유산 쟁탈전에 휘말려 들어 생사의 고비도 넘겼었다. 집 값만 제대로 쳐줬다면 귀찮은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집을 팔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1000골덴에 산 집을 50골덴에 팔라는 소리에는 열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말이 거칠어지고 욕설이 난무했다. 노인이 거만한 얼굴로 두고보자고 협박했을 때는 면전에다 침을 뱉어 주었다. 아에게는 마너크가문의 힘을 과소평가 했다. 게다가 때도 좋지 않았다. 귀족들을 견제하던 상인들은 점차 귀족의 작위를 사면서 특권계급화 했다. 귀족들의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에 물든 상인들은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고, 거기에다 메디치까지 파급된 사교말살의 기운은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엘리오트에 있던 지고교도는 엘란과 함께 있던 빈민촌의 교도들이 전부였다. 엘리오트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지고를 버린 배교자들이었다. 당연히 롬바르드의 밖에서 지고신자를 만날 수는 없다. 사교말살의 열풍에 말려들어 화형 당하는 자들은 모두 모함의 결과였다. 귀족들이 정적의 제거나, 평민들 재산을 노리고 모략을 한 것이 대분이었다. 귀족가에서 오랜 시간 일하다보면 주인의 권세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히기 마련이다. 이 노인도 그랬다. 위로 올라가는 문서에 자신의 고발장을 슬쩍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다음날 병사들이 몰려들어 아에게와 나탈리 그린, 짝귀, 들창코를 줄줄이 엮어갔다. 밖에 나가 있던 밤톨만이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엘란을 만나기 위해 주점 앞에서 서성거렸다.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마너크백작가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어."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어조로 밤톨이 말했다. 그래도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보니 많이 진정된 모양이었다. "움직일 수 있어요?" "다리가 부러져서 당분간은 움직이기 곤란하다." 하이론이 대신 대답을 했다. "쟝, 밤톨 좀 돌봐줘요. 하이론 같이 나가죠." 엘란이 급히 일어나자 쟝이 툴툴거렸다. "내가 애보기냐! 왜 이런 거지새끼를...." "쟝!" 엘란이 깊은 눈동자를 들어 물끄러미 쳐다보자 괜히 가슴이 졸였다. "알았다. 알았어, 보면 되잖아." 엘란과 하이론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해안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귀족들의 대저택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은 푸른 숲 사이에서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보였다. 돔형의 건물들은 무슨 신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결하게 보였다. 저 안에서 온갖 사치와 향락이 벌어질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백작가의 건물은 특히 크고 웅장했다. 롬바르드에서도 이만한 대저택은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메디치의 거대한 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여깁니다." 작달막한 꼬마아이가 교활한 눈을 빛내며 손을 비볐다. 시장통에서 굴러먹던 아이로 엘란이 3실버를 주기로 하고 백작가까지 길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아이는 돈을 건네 받고는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엘란의 표정이 좋지 않자 하이론이 물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냐?" "저 아이, 골목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어요." 시장통에서 악과 깡으로 살아가는 소년은 눈치가 빨랐다. 무슨 일이 터질 것을 짐작하고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엘란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거나 고발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고약한 놈이군." "슬립!" 눈을 번득이며 둘을 지켜보던 소년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슬립마법하나는 나보다 낫겠는데." 하이론이 감탄하며 말했다. "갑시다." 그들은 슈리엘을 불러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정문에 지키고선 네 명의 병사들을 넘어 안 쪽으로 들어가자 웅장한 건물들이 둘을 반겼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정원수와 곳곳에 조각된 드래곤들과 몬스터, 그리고 수 백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다양한 양식의 저택들, 구경할 만한 것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대원들을 구출하려 온 엘란의 입장에서는 넓기도 하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선 건물들도 많아서 어디가 감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 놈 잡아서 물어보자." 눈으로 훑어 봐서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자 하이론이 제의를 했다. 엘란은 적당한 건물 위에 자리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춥다!" 아래춤을 치켜세우며 걸어오는 병사가 보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모양이다. "억!" 병사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졌다. 엘란이 실피드로 들어올린 것이다. 엘란은 대제의 무덤에서 갖고 나온 녹 쓴 단검을 병사의 목에 들이댔다. 그 바람에 병사가 혼비백산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녹이 슨 단검은 날이 번뜩이는 날카로운 단검보다 더욱 무섭게 보였다. "감옥이 어디냐?" 엘란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올라오는 호곡성 마냥 으스스했다. 막 오줌을 갈기고 온 병사가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다. "저저저...저기!" 병사의 손을 따라가자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앞에는 화톳불이 피워져 있었고 네 명의 병사들이 그 옆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슬립!" 병사를 재워서 지붕 위에 두고는 다시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본 병사들은 군기가 엄정한 것이 한 눈을 팔거나 대화를 나누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재우기는 곤란하겠는데요."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모두 사라지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내가 맡지." 둘은 병사들의 머리위로 가까이 접근했다. "참!" 하이론이 매혹마법을 시전 하자 병사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내려가자!" 둘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려와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의 몽롱한 시선이 둘의 얼굴에 닿았다. 그들의 눈에는 하이론과 엘란이 자신들의 상관으로 보일 것이다. "수고해라!" 하이론은 천연덕스럽게 한 마디 하고는 그들의 사이를 통과해서 입구로 향했다. 붉은 색 벽돌로 이루어진 벽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 철창이 앞을 막고 있었고, 철장의 안에는 간수 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보통 깊이 잠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을 걸었다. "슬립!" 쿵! 간수들의 머리가 탁자 위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만들었다. 둘이 쓰러지자 슈리엘이 나서서 쇠창살을 잡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쇠창살은 종이장처럼 쉽게 벌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굵은 창살로 가로막힌 감옥들이 보였는데 감옥들 마다 사람들이 그득한 것이 누가 아에게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엘란은 주변을 슈리엘로 둘러서 소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고는 고함을 질렀다. 마나를 실은 음성이 좁은 감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탈리! 아에게! 그린! 짝귀! 들창코! 어디 있어요?" 죽은 듯이 구겨져 있던 죄수들이 하나 둘씩 일어났다. "살려줘!" "도와줘!" 일어선 죄수들은 앙상한 손으로 창살을 잡고 갸날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에게!" 엘란의 고함이 감옥 안을 뒤흔들었다. "엘란?" 친숙한 목소리가 엘란의 귀를 통해 들어왔다. 가장 안쪽의 감옥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엘란과 하이론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맙소사!" 당당한 체구의 아에게가 뼈만 남아서 해골 같아 보였다. 겨울로 들어서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는 것은 누더기가 된 바지 하나밖에는 없었다. 아에게의 손은 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덜덜 떨렸다. 해골 같은 얼굴로 안심하라는 듯 억지로 짓는 미소가 엘란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구해주러 올 줄 알았다. 이봐, 그린 내 말이 맞지. 너 나한테 10골덴 빚졌다." 엘란은 아에게에서 시선을 돌려 감옥 안을 살폈다. 나머지 대원들은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아에게는 엘란이 언제고 구해주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일년 넘게 소식이 없는 엘란이 대제의 무덤안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희망의 차이가 이들의 상태를 결정지었다. 죽을 것같이 빼빼 마른 아에게는 아직 힘이 남아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실피드!" 실피드 둘이 나타나 철창을 거칠게 뜯어내 버렸다. 엘란의 분노가 정령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결과였다. 하이론이 급히 들어가 쓰러진 사람들을 살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하이론은 그들에게 포션을 먹이고, 회복마법을 걸었다. "힐링!" 하얀빛이 어두운 감옥 안을 밝혔다. "아에게! 나탈리는 어딨어요?" 감옥 안에 나탈리는 없었다. 엘란의 심장은 불안으로 거세게 뛰었다. "나탈리는 그 새끼가 데려갔다." 아에게는 이를 북북 갈았다. 이 자리에 그 놈이 있었다면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 놈이라면?" "우리를 모함한 리치라는 늙은 집사 놈." 아에게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하이론은 아에게에게 포션을 건네며 물었다. "걸을 수 있겠나?" "물론이죠!" 벌떡 일어나던 아에게가 휘청거렸다. 마음과는 다르게 체력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엘란은 아에게를 부축해서 감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정령들이 하나씩 안아 들었다. "살려줘!" 미약한 음성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엘란이 움찔하자 하이론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다 구할 수는 없다." 엘란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급히 감옥을 벗어났다. 일행들을 데리고 하늘 높이 솟구치자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한 구석에는 납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나탈리에 대한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부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간 후 아래로 내려가 방을 두 개 더 잡았다. 모두들 씻기고 옷을 입히자 하나 둘씩 정신을 차렸다. "엘란." 용병대에서 침착하게 중심을 잡아 주던 그린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 동안의 고초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린이 눈물을 글썽이자 짝귀 등이 울기 시작했다. "흑흑!" "엉엉!" "시끄러워 죽겠네."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쟝은 소리를 빽 질렀다. 겁이 많은 짝귀, 들창코는 찔끔해서 눈치를 살폈다. "쟝, 저랑 같이 내려가요." 잠시 후 올라오는 쟝과 엘란의 손에는 쟁반 가득 음식이 담겼다.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속에 탈이 날까봐 고기스프나 야채스프같은 가벼운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후루룩, 쩝쩝!" "얌얌, 꿀떡!" 음식 먹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렀다.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식사를 하는 쟝의 안색이 불편해졌다. 거지처럼 먹어대는 꼴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젠장!" 쟝은 결국 스푼를 내려놓고 말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자 엘란이 재촉을 했다. "그 집사 놈의 집이 어딥니까?"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작살을 내놓을 기세였다. 하이론이 부드럽게 말렸다. "어두워지거든 가자." 하이론의 충고를 듣기로 한 엘란은 급한 마음에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겨우 진정시켰다. 마음이 급하자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십분이 한 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하이론과 쟝, 아에게 등은 인사를 나누었다. 엘란이 지고교의 좌호법사가 된 것에는 모두들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다. 특히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이야기 듣기를 즐기는 아에게의 놀람은 경악에 가까웠다. "포강과 오픈호수에서 기사들을 몰살시킨 악마교의 상급정령사가 너였구나!" 악마교의 상급정령사는 전국에 악명을 떨치고 있어서 요즘에는 광법사 일레이저보다 더욱 유명했다. 어떤 사람은 광술사라고도 불렀고, 어떤 사람은 마왕의 하수인이라고 불렀다. 아에게는 그 사람과 엘란이 동일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고교를 악마의 추종자라고 굳게 믿고 있던 짝귀는 벌벌 떨었다. "으악!" 그린이 짝귀의 등을 두들기자 간이 콩알만해진 짝귀가 비명을 질렀다. "겁내지 마라, 엘란이 악마의 종자일리가 있냐?" 그제서야 짝귀의 떨림은 멎었다. 아에게는 사교고 나발이고 관심이 없었다. 오직 엘란이 상급정령사가 된 것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모든 사람들이 노가다용병대라고 놀리던 자신의 용병대에서 대륙에서 둘 밖에 없는 상급정령사가 탄생한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물의 시드하고도 맞장을 떴다지 않던가?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소문에는 시드하고 싸워서 죽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냐?" "소문이란 게 믿을 게 못되죠. 제 입장에서는 그런 소문이 난 게 반가워요." 하이론은 아에게용병대 대원들에게 지고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엘란은 하이론의 그러한 모습에 놀랐다. 단순히 동생들 때문에 교에 머물러 있는 줄 알았는데 하이론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 자신이 열렬한 지고교의 신자가 되어 있었다. 엘란은 전혀 모르는 사실도 하이론은 척척 설명했다. 흡사 고위신관같은 모양새였다. 모두들 진지하게 듣는데 쟝만이 묘한 눈길로 하이론을 보았다. 쟝에게 하이론은 괴팍한 영감일 뿐이다. 저런 진지한 모습은 오히려 가식적으로 보였다. '체! 영감탱구 연습 많이 했네. 무식한 촌놈들을 완전히 홀리는 구만!' 주위가 어둑해지자 엘란이 황급히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쉬고 계세요. 아에게 안내 좀 해주세요." 아에게를 제외한 사람들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움직일 형편이 아니었다. 아에게도 될 수 있으면 정양을 해야지 돌아다닐 입장은 아니었지만 위치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이론도 일어서며 쟝에게 말했다. "넌 여기 남아 있어라." "싫습니다. 저도 따라갈 겁니다." 쟝은 이런 냄새나는 거렁뱅이들 시중이나 들어주면서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말릴까 싶어서 제일 먼저 방문을 나섰다. 엘란은 한적한 곳에 이르자 일행을 들어올렸다. 몸이 축난 아에게가 걷기를 힘들어해서 속도가 너무 떨어진 때문이었다. "이야!" 아에게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아래의 집들이 상자만하게 보이자 감옥속에서 당한 울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쟝도 정령을 타고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따라나서기를 잘했다고 내심 흐뭇해했다. 평소 슈리엘을 흠모하던-쟝은 괜찮게 생긴 모든 여자를 흠모한다. 정령은 살과 피로 만들어진 유기체가 아니라는 엘란의 말은 이미 머리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쟝은 슬금슬금 슈리엘의 가슴을 더듬었다. "악!" 갑자기 쟝의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엘란이 놀라서 살펴보니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대충 사태를 짐작한 엘란은 인상을 썼다. 슈리엘이 이 정도에서 그만둔 것도 많이 참아준 것이다. "어째, 니 주위에는 괴상한 놈들만 있는 것 같다." 슈리엘이 한마디하자 사태를 알아차린 하이론이 고소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아에게는 놀라서 기절초풍했다. "으아! 정령이 말도 한다." "......" "쯧쯧쯧! 사람 좀 가려서 사궈라. 덜 떨어진 놈 아니면 무식한 촌놈이구만. 다시는 이런 놈들 태우지 마라." 아에게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진 반면에 쟝은 자신을 이런 촌놈과 동급으로 놓고 비교하는 슈리엘의 말에 자존심이 팍 상했다. 좋던 기분이 카르자나산까지 날아가 버렸다. "아가씨..." 아에게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 보았다. "슈리엘이라고 불러라 멍청한 인간아." "예, 예, 슈리엘님 원래 그렇게 말을 잘하십니까?" "질문하는 것하고는. 너 다시는 나한테 말 걸지 마라. 한 번만 더 말 걸었다가는 땅과 인사를 시켜줄 테다." "......" 슈리엘의 구박에 아에게는 금새 풀이 죽었고, 덕분에 쟝의 기분은 다시 좋아졌다. "저기다." 아에게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가운데 유난히 도드라진 집이 보였다. 다른 집들의 네 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이야! 꼴에 좋은 집에 살았네." 쟝이 이죽거리자 아에게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어찌보면 화를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 우리 집은 저기 저곳이야. 아마 주변의 집들을 빼앗아 하나로 터서 저렇게 큰집을 만들었을 거야." 엘란은 기가 찼다. 집사의 집사가 저 정도면 집사는 어느 정도 해 놓고 산다는 말인가? 엘란과 일행은 노인의 정원에 내려섰다.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내려서자 고함이 터지며 여기저기서 창을 겨눈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감옥에서 탈옥이 발생하자 여기서 기다린 모양이다. 아에게만이 불안한 듯 눈을 굴릴 뿐 엘란의 실력을 익히 아는 하이론과 쟝은 느긋했다. 정면에는 하얀 색의 풀플레이트메일을 걸친 기사가 바스타드소드를 꺼내 시위하듯 흔들고 있었고, 그 뒤에는 머리가 벗겨진 데다 작은 눈이 쪽 찢어지고 귀가 올라붙어서 어딘지 얍삽한 인상을 풍기는 중늙은이가 턱을 치켜들고 엘란일행을 노려보았다. "집사의 집사라는 늙은이, 나탈리는 어디 있나?" 자신을 무시하고 노인에게 질문을 던지자 기사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너희들은 누구냐?" "나탈리는 어디있나?" 엘란은 기사의 질문을 무시하고 노인만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가 미쳤나?' 화려한 갑옷을 입고 나온 기사는 엘란이 계속해서 무시하자 머리에서 김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기사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배에 힘을 잔뜩 주고는 우렁차게 외쳤다. "나탈리는 어디 있나?"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씹자 격노한 기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기사를 비웃듯이 쳐다보던 쟝이 특유의 느끼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어이! 오크기사 넌 좀 빠져라!" 평소 돼지 같은 외모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던 리온의 화가 결국은 폭발하고 말았다. "이야!" 한 줄기 기합과 함께 엘란에게 달려들었다. "오! 오크씨 제법 재빠른데." 그 와중에도 쟝이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잠깐!" 갑자기 하이론이 소리치자 깜짝 놀란 리온이 멈춰섰다. 바스타드소드를 머리 위에 치켜올린 채로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희극스러웠다. "나탈리는 어딨나?" "그 년은 삶아 먹어 버렸다." 기사의 뒤에 숨어서 사태를 즐기던 노인이 계속된 질문에 짜증이 나서 한 마디 던진 것이 여기 모여있던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엘란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한 발 한 발 노인에게 다가가자 폭풍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츠츠츠! 바닥에 깔린 잔디들이 거센 바람에 뽑힐 듯 흔들렸다. 겁이 덜컥 난 노인이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서 있던 리온이 다가오는 엘란을 향해 바스타드소드를 그어 내렸다. 리온은 엘란이 손을 들어 소드를 막아 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깡! 살로 된 손을 내려 쳤는 데도 불구하고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실프가 엘란의 손을 감싸며 보호하고 있었다. 손이 잘려 나갈 줄 알았던 리온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엘란이 그 옆을 지나며 손을 휘저었다. 쩌억! 간단한 손짓에 리온의 몸이 갑옷 채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툭! 완전히 종으로 갈라진 시체는 잔디를 붉게 물들였다. 공포에 질려 정신이 반쯤 나간 노인이 괴성을 질렀다. "막아! 저 놈을 죽여라!" 어디를 가더라도 간이 부은 놈은 있게 마련이다. 주위를 포위한 병사중 한 명이 급히 달려들어 창을 내질렀다. 백 명이 넘는 인원에 용기가 생긴 다른 병사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이얍!"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창들이 날아들었다. "실피드!" 정령이 엘란의 주위에 베리어를 쳤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하이론은 쟝과 아에게 옆에 서서 실드를 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쩡!쩡! 창이 실피드에 부딪쳐서 튕겨지자 병사들은 손이 저려와 창을 떨어뜨릴 뻔했다. 일반병사들이 엘란의 베리어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슈리엘 정리해요!" 엘란의 차가운 한 마디가 떨어지자 공중에서 날아다니던 슈리엘이 정원으로 뛰어들었다. 슈리엘이 옷자락를 빳빳하게 만들어서 주변을 휘돌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병사들의 몸이 쩍쩍 갈라져 나가며 피보라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정성스레 다듬어진 잔디들이 피를 잔뜩 머금은 채 바람에 흔들렸다. "으악!" "살려줘!"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의 비명이 적막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으아!" 집사의 집사로 거들먹거리던 노인이 똥오줌을 지리며 벌벌 떨었다. 맹수의 앞에 선 초식동물같이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다. 엘란이 노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악마의 손길 같았다. "그 아이는 살아 있습니다." 노인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딨나?" "하이디스의 경매장에 팔아 넘겼습니다. 제발 살려주...." 으드득! 노인의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엘란이 몸을 돌렸을 때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잘려진 시체들과 겁에 질린 아에게의 얼굴이었다. 아에게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는 쟝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아에게용병대라는 것들이 주는 것 없이 미웠다. "가자!" 하이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창 돌아다닐 때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못할 짓도 많이 했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피를 보는 것이 언잖아 졌다. "하이디스경매장에 대해서 아는 것 있습니까?" "내가 아주 잘 안다." 쟝이 오랜만에 할 일이 생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쟝이 팔자걸음으로 안내를 시작하자 기분이 착 가라앉은 하이론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는 또 어떻게 아는 거냐?" "메디치의 암시장은 희한한 물건이 많이 나오기로 대륙에서 유명해요. 당연히 저도 꽤 뻔질나게 다녔죠. 게다가 거기 주인인 하이디스란 자는 하이디스백작가의 사생아에요." "뭘 사셨수?"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아에게가 물었다. 아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 많기로 유명했는데 덩치 값도 못하고 촐랑거린다고 그린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었다. 쟝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뭘 산 거냐?" 하이론도 호기심이 동해서 물었다. "에....그게...말이죠...." 쟝이 우물쭈물하자 하이론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뭘 샀는데?" 깜짝 놀란 쟝이 엉겹결에 대답을 했다. "하피." "하피? 그런 몬스터는 뭐하러 산거.....이런 미친새끼 그런 몬스터랑 그거 할 생각이 나냐?" 하피는 상반신은 여성의 모습이지만 날개가 달리고 하체가 독수리같이 생긴 몬스터이다. 하이론이 고함을 지르자 어리둥절해진 아에게가 물었다. "그거라뇨?" "에이, 씨! 사람 뭘로 보고이래? 하피는 먹을려고 산 거야." 하피 같이 반은 사람의 형상을 한 몬스터를 먹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쟝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자 하이론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너하고 말을 하면 성을 간다! 성을!" "성도 없는 평민주제에 꺼떡하면 성을 간다지, 성이 있었다면 열 번도 더 갈았겠다." 하이론은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대꾸를 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아에게가 하이론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입니까?" 하이론이 옳다구나 하고 한참동안 떠들어대자 쟝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아에게의 얼굴은 놀람으로 물들었다. 아에게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세상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뜬 밤이었다. 아에게의 묘한 시선을 받은 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경매장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서 당당하게 앞장서던 쟝의 걸음거리에 힘이 빠지더니 속도가 느려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왠지 불안해 보였다. 암시장을 갈 때는 항상 마차에 누워서 빈둥거린지라 혼자서 길을 찾으려니 쉽지가 않았다. "너 하이디스경매장이 어딘지 확실히 알고 있는 거냐?" 하이론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안다니깐." 쟝이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그는 하이론이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자 다리에 힘을 주고 씩씩하게 앞장섰다. 그러나 이내 속도가 느려지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는 엘란까지 미심쩍어져서 한 마디 하려는데 쟝이 손을 번쩍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기다!"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워낙 자신만만한 음성이다 보니 모두들 쟝을 따랐다. "헉헉!" 평소에 운동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던 쟝은 야트막한 산을 오르는데도 죽을 것처럼 헐떡거렸다. 반 시간동안 쉬지 않고 산을 오르자 어느새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후후!" 쟝은 심호흡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잔잔한 바닷물은 등대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경치 좋죠?" 쟝은 별안간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암시장이 어디냐?" 하이론이 묻자 쟝은 머리만 벅벅 긁었다. "여기가 아닌가 본데요." "....." "....."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열이 뻗쳐 오늘 하이론이 소매를 걷어부치고 나섰다. "아이고! 나 죽네!" 쟝의 비명이 인적없는 야산에 울려 퍼졌다. 엘란은 쟝이 도와달라고 보내는 애처러운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그도 화가 많이 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쟝의 말을 믿었던 대가로 밤새도록 헤매다녀야 했다. 여관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여관의 종업원들이 겁이 나서 슬슬 피할 정도였다. 코를 들이마시는 쟝의 얼굴도 가관이었다. 오른쪽 눈은 시퍼렇게 멍든 데다 양쪽 콧구멍은 천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하이론이 교훈을 내린 결과였다. "나탈리는 어딨냐?" 들어오자 마자 그린이 다그치듯 물었다. "하이디스경매장에 있대." "그게 어딘데?" "우리도 몰라." "짝귀는 뭐 아는 거 없습니까?" 엘란이 물었다. 도둑길드에서 자란 짝귀는 혹시 아는 게 있을까 싶어 물은 것이다. 짝귀는 물론 밤톨과 들창코까지 머리를 저었다. "어떻하죠?" 엘란은 나탈리에 대한 걱정으로 미칠 것 같았다. 자기를 버렸다는 나탈리의 원망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대충 식사를 한 하이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가 나가서 알아보마." 하이론은 급히 밖으로 나가고 하루를 꼬박 센 아에게와 쟝은 잠이 들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엘란은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하이론은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 동안 한 숨도 못 잔 엘란이 의자에서 꾸벅꾸벅 조는데 아래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펑! 격렬한 마나의 유동이 감지되었다. 누가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엘란은 한 걸음에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여관의 앞길에서 하이론이 병사들에 둘러싸인 채 파이어볼을 날리고 있었다. "실피드!" 바람의 정령이 나타나서 주변을 휩쓸자 강력한 바람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어어!" 병사들이 바람에 휘말려 나뒹굴었다. 혼란한 틈을 탄 하이론은 재빨리 주변을 벗어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돌아오는 길에 검문을 당했다. 감옥이 깨지고 그 노인 집에서 병사들이 몰살당했으니 시에서 그냥 있을 수 없었겠지." "경매장은 찾으셨습니까?" "찾았다. 경매장이라기 보다는 암시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게다. 경매는 한 달에 한 두 번씩하고 보통은 암시장의 역할을 한다는 구나."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통신구를 산 에릭에게 500골덴을 주고 알아냈다." "가시죠." 마음이 급한 엘란이 재촉했다. "여관에 있는 사람들부터 옮기자. 오면서 보니까 여관들을 일일이 검문하더라." 엘란과 하이론은 여관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쟝이 잘못 안내한 야산으로 옮겼다. 나탈리를 찾으러 간 사이에 잡혀갈까 저어한 때문이었다. 엘란과 하이론이 하이디스의 경매장으로 가려는데 쟝이 따라나섰다. 저번에 경매장에 갔었던 경험을 떠올려 생각해 보면 무슨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이런 야산에서 저런 거지같은 작자들과 추위에 떨면서 같이 있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에게는 감옥에서 워낙 고생을 해서 몸이 말이 아닌데다 어제 밤새도록 돌아다닌 결과 몸에 탈이 나버렸다. 따라간다고 우겼지만 도저히 움직일 상태가 아니었다. 하이론이 약을 먹여서 재워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넌 여기서 저 사람들이나 돌보고 있어라." 하이론은 쟝이랑 같이 다니고 싶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를 해 댈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이러지 말아요. 제가 따라가면 도움이 될 겁니다. 엘란이랑 하이론은 그 안에 들어가 본적이 없잖아요? 저는 들어가 봤는데 절차가 꽤 까다로워요." 결국 쟝은 둘을 따라 붙는데 성공했다. 쟝의 설명이 꽤 설득력 있었던 것이다. 경매장은 쟝이 안내하던 곳과는 완전히 반대방향이었다. 뻔뻔한 쟝으로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늘밤은 달이 완전히 가려진 덕분에 붉어진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쟝은 얼굴을 붉힌다든가 수줍어한다든가 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두꺼운 얼굴에 자부심이 많았었다.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얼굴에 철판을 까는 능력이야말로 남자에게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덕목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정력이었다. 쟝이 이런저런 같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란이 입을 열었다. "하이디스경매장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경매장이 왜?" "쟝의 말에 의하면 마법검이나 값비싼 보석, 마법도구, 기괴한 물건, 몬스터같은 것을 파는 곳에서 왜 나탈리같은 여자애를 샀을까요? 솔직히 나탈리가 이쁘기는 하지만 경매를 붙일 정도의 외모는 아니거든요." 확실히 이상했다. 고아나 팔려 가는 여자애들이 비일비재한 이 때 나탈리만한 외모의 아이들은 구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돈만 있다면 고아원이나 신전에서 사는 것도 쉬웠다. 합법적으로 구할 방법이 널려 있는데 딱히 하이디스암시장같은 곳에서 몰래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엘란의 말을 들은 하이론도 심각해 졌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쟝은 금새 시무룩해 졌다. "나탈리가 별로 안 이쁘냐?" 다른 얘기는 모두 한 귀로 흘리고 나탈리만한 외모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만 들은 모양이었다. 쟝으로서는 에쉴리와 결혼한 엘란의 안목을 봤을 때 나탈리란 아이가 아주 뛰어난 미모일 거라고 판단했었다. 둘을 따라온 이유 중 하나도 나탈리를 어서 보려는 욕심때문이었다. 쟝의 말에는 둘 다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말을 섞어 봐야 자신만 피곤해진다. 모두들 이런저런 상념속에서 기계적으로 걸음만 옮겼다. 메디치시내를 관통해서 교외로 나오자 인적과 건물들이 뜸해졌다. 조금 더 가자 울타리가 쳐진 목장이 나왔다. "여기야!" 한 번 와본 기억이 떠오른 쟝이 외쳤다. 완전히 뒷북치는 격이었다. 엘란은 한적한 교외의 목장에 위치한 경매장을 산에서 찾은 쟝이 이상하게 보였다. 갑자기 쟝의 머리를 열어서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쨌든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울타리에 몸을 숨기고 안을 살폈다. "어떻게 들어갔었냐?" "저 건물 보이죠?" 야트막한 울타리가 쳐진 목장에는 삼십여개의 창고가 보였다. 목장의 규모를 감안했을 때 너무 많은 숫자였다. 거기에다 양이나 소같은 동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창고 안에도 가축은 없는 듯 보였다. 쟝이 가리킨 건물은 중앙의 창고였는데 주변의 건물과 별다를 것은 없는 평범한 창고였다. "헛간문을 두들기면 들창이 열리면서 암호를 물어요, 암호를 대면 문이 열리고 몸수색을 하고 참가비로 50골덴을 내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하이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암호가 뭐냐?"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옛날에 들어갔을 때는 암호를 댔을 것 아니냐?" 쟝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암호가 똑같으면 그게 암홉니까? 암호는 이삼일에 한 번씩 바꿨요." "하여간에 도움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안 되는 놈이라니까!" "쉿! 조용해요. 말발굽소리가 들립니다." 엘란이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후 사두마차가 어둠을 헤치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가 갈기를 휘날리며 새까만 마차를 끄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멋진 마찬 데요!" 엘란은 마차나 말의 모습에 감탄했다. "어떻게 생겼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쟝이 물었다. 하이론도 똑똑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밤에도 사물이 똑똑히 보이는 엘란만이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차는 전체가 새까만 검은색으로 되어 있는데, 바퀴는 양쪽에 두 개씩 네 개가 달렸습니다. 창은 유리로 되어 있고, 마차의 모서리는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말들은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백맙니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마차 타고 다녔는데...." 쟝이 지그시 눈을 감는 것이 아무래도 옛날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에 마차는 쟝이 가리킨 창고로 서서히 다가갔다. "슈리엘!" "무슨 일이냐?" "저기 가서 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좀 알려주세요." 슈리엘이 창고로 다가가자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생생하게 들렸다. 잠시 후 창고의 문이 열리자 마차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내리더니 그 안으로 사라졌다. 마차는 다른 창고로 옮겨졌다. 중앙의 창고는 경매장과 연결된 입구고, 나머지 창고는 마차를 숨기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도 갑시다." 슈리엘을 돌려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난 엘란과 하이론, wid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창고의 문 앞에 도달한 엘란은 문을 두드렸다. 쿵쿵!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육중한 소리를 만들었다. 드륵! 들창이 열리고 꺼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호!" "창밖에 태양이 빛난다." '암호 유치한 건 예전이나 똑같네.' 쟝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삐걱!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자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쿵! 들어서자 마자 문이 닫히고 몸수색이 시작되었다. 무기라고는 엘란이 가진 녹슨 단검밖에 없어서 문제될 건 없었다. 쟝은 실력도 없으면서 무기를 가지고 다니면 더 위험하다며 빈손으로 다녔고, 하이론은 짤막한 지팡이가 다였다. 신분확인은 데미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으로 쉽게 통과되었다. 기대를 가지고 들어간 창고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입장료를 주시오." 들창을 열어 암호를 확인하던 사내가 예의 꺼끌한 음성으로 말했다. 체구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나 굵은 목, 단단한 턱을 봤을 때 강단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의 뒤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는 메이스를 든 거한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들은 아에게만큼이나 체구가 컸다.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올라 위협적으로도 보였는데, 어찌보면 머리가 텅빈 얼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쟝이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하이론이 50골덴을 건네주자 꺼끌한 목소리의 사내가 두 손을 입속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덜컹! 휘파람소리가 끝나자 마자 짚으로 덮인 바닥이 열리며 사람 머리가 불쑥 올라 왔다. "따라오십시오." 바닥에서 열린 문으로 내려가자 오미터정도 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긴 통로가 나왔는데 넓이가 삼미터는 넘어서 마차가 지나다녀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바닥에는 붉은 색 융단이 깔려있고, 벽에는 군대군대 발광석이 박혀 있는 것이 대단히 호화로운 곳이었다. 암시장이나 경매장의 음습한 분위기를 연상하던 엘란과 하이론이 놀랄 정도였다. 웬만한 귀족의 저택보다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보였다. 푹신한 융단을 밟고 걸어가자 푸른색의 청동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두 마리의 드래곤들이 불을 뿜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어찌나 생생하게 보이는지 문에서 튀어나와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똑 또도 똑 똑! 안내한 사내가 이상한 박자를 타며 문을 두들겼다. 이상이 없다는 신호였다. 청동문은 평소 손질이 잘 되어 있었는지 소리도 없이 열렸다. 여기까지 안내를 한 사내는 엘란일행을 인계하고 돌아갔다. 청동문 안으로 들어가자 또다시 몸수색이 시작되었다. 몸수색이 끝나고 앞으로 나아가자 두 갈래의 갈림길이 보였다. 왼쪽 길로 들어서서 걷자 또 다시 문이 앞을 막았는데 이번에는 별다른 수색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오!" 안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구석구석 에는 발광석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사방벽에는 일일이 부조를 새겨 넣었는데 청동문을 조각한 사람이 조각을 했는지 생생한 것이 마치 실물 같았다. 중앙에는 원통의 카운터가 있었는데 점원이 이술 저술 섞어서 새로운 술을 만들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으로 온 몸을 휘감은 사내들은 거의 벌거벗은 것 같은 여자들을 주무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난삼아 여자를 벌거벗기는 자도 있었고, 구석에서는 여자를 엎드리게 하고는 성행위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귀족문화의 한 단면은 엘란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엘란의 일행과 같은 초라한 복장을 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다만 정체를 숨길려는지 두터운 로브로 전신을 감싼 사람들이 간혹 보일 뿐이었다. 부조가 새겨진 벽이 열리며 레이스가 달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금발머리 사내가 들어왔다. 틈이라고는 없는 벽이 소리없는 열리는 장면에서 장인의 세심한 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금발머리 사내는 손을 들어 벽에 걸린 종을 흔들었다. 땡! 맑고 은은한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경매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여자를 희롱하던 사람들이 옷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엘란의 일행도 금발머리 사내가 들어 온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섰다. 경매가 벌어지는 장소는 다른 곳의 화려함에 비한다면 의외로 소박했다. 전면에는 단상이 있고, 단상 앞에는 연단과 길쭉한 탁자가 있었다. 연단 뒤에는 정장을 멋있게 차려입은 초로의 노신사가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단상의 주위에는 십여명의 용병들이 언제든지 뽑아서 휘두를 수 있도록 검자루를 쥐고 있었고, 바닥에는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바닥이 점점 낮아져서 어디에 앉던지 단상이 잘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탕탕! 경매인으로 나선 초로의 신사가 나무방망이로 연단 위를 두들겼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이내 입을 다물고 시선을 앞으로 모았다. "오늘도 이렇게 많이 모여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초로의 신사가 손짓을 하자 일행을 안내한 금발머리사내가 작은 종을 흔들었다. 딸랑! 딸랑! 작은 종소리가 울리자 연단 옆의 문이 열리고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은 팔등신미녀가 은쟁반 위에다 일미터 가량의 막대를 담아서 등장했다. "오!" 여기저기서 감탄성이 들렸는데 그 중에는 하이론의 음성도 있었다. "아는 물건이야?" 쟝은 어제부터 반말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짤막하게 물었다. 하루걸러 한 번씩 맞다보니 악이 받친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하이론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엘란이 보기에는 완전히 포기한 것 같았다. 때려도 때려도 그대로니 질리기도 할 것이다. "몸체는 마법금속 미스릴로 만들어졌고, 윗 부분에 달린 수정을 봤을 때 전대의 육서클 마법사 파이어스톤이 쓰던 마법지팡이 같다." 하이론의 말은 정확했다. "이 지팡이는 위대한 마법사 파이어스톤이 쓰던 것입니다. 마법사들에게 대단히 유용한 물건이지만 그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여러 귀족분들의 높은 안목도 충족시켜드릴 것입니다. 호가는 1,000골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쟝이 하이론의 눈치를 보니 사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돈도 많은데 사지 그래요?" 하이론의 수중에는 1,450골덴이 있었다. 원래 있던 천골덴에 에릭의 가게에서 이천골덴짜리 통신구를 사고 불끈이 세병을 삼천골덴에 판 돈이었다. 나중에 오백골덴은 정보를 수집하려고 에릭에게 지불했고, 오십골덴은 여기들어오는 입장료로 지불했다. 보통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거액이지만 파이어스톤의 지팡이를 사기에는 태부족으로 보였다. 호가는 천골덴부터 시작을 했지만 아무도 그 가격에 지팡이를 수중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탈리가 경매에 나온다면-조그만 여자아이가 경매에 나올 이유는 없지만-사야했다. 수많은 귀족이 모인데서 소란을 피운다면 좋을 것이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경매에 나온 나탈리를 사서 조용히 메디치를 떠나는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경매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나탈리가 경매에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떠난 후에 경매장을 수색할 생각이었다. "이천골덴!" 앞자리의 누군가가 시작부터 거액을 부르기 시작했다. 쟝으로서는 파이어스톤이고 나발이고 저 따위 막대기에 거액을 쓰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쟝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질 때쯤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다. "오천골덴!" 온 몸에 시커먼 로브를 둘러서 나 마법사라고 티를 내는 사람이 오천골덴을 불렀다. "오천골덴 나왔습니다. 더 내실 분 없습니까? 셋까지 샐 동안 결정해 주십시오. 하나! 둘! 셋!" 탕탕탕! 경매인이 연단을 두들기며 외쳤다. "파이어스톤의 지팡이는 저 마법사분께 오천골덴에 팔렸습니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여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금을 지불하고 지팡이를 받을 것이다. 과연 잠시 후 나온 마법사의 손에는 파이어스톤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다음!" 다음으로 나온 것은 200년 전에 멸망한 루크공국의 기네비아왕비가 쓰던 왕관이었다. 금으로 만든 왕관은 진주를 두르고 중앙에는 밤톨만한 다이아몬드가 휘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경매장은 금새 열기가 달아올랐고, 탐욕과 광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은 여급을 노골적으로 지켜보던 쟝의 눈에 심각한 얼굴의 엘란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나탈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런 줄 알았으나 약간 이상했다. 구석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쟝은 탐욕에 가득 찬 사람들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고 있는 하이론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그리고는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엘란 좀 봐요, 이상한 거 같지 않아요? 지켜보는 사람이 누굽니까?] "엘란! 왜 그러냐?" "헉!" 비밀얘기처럼 은밀하게 속삭이는데 하이론이 큰 소리로 물어보자 깜짝 놀란 쟝이 헛 바람을 들이켰다. 쟝은 감각이 무섭게 발달한 엘란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못 들을 리 없다는 것은 자주 까먹었다. "저 사람 보이죠?" 하이론과 쟝은 목을 길게 빼고 망토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쟝이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파이어스톤의 지팡이를 낙찰 받은 사람처럼 로브를 두르거나 망토의 모자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시드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하이론은 깜짝 놀랐다. 시드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면 상급정령사 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30년동안 상급정령사는 물의 시드와 화염의 길라드가 유일했다. 만약 저 사람이 길라드가 아니라면 새로운 상급정령사가 출현한 것이다. "화염의 길라드냐?" "아닙니다. 분위기가 틀려요." "상급정령사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만약 정령사라면 상급의 경지에 든 사람이고, 마법사라면 7써클, 검사라면 마스터일 겁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 망토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린 사람에게는 십존에 버금가는 기운이 느껴졌다. 엘란은 대제의 무덤에서 수많은 강자와 부딪치고 싸웠다. 광법사일레이저, 물의 시드, 화염의 길라드, 소드마스터 막스, 하나같이 최상승의 경지에 든 사람이었다. 저 사람도 안으로 갈무리 된 기운이 이들에 버금갔다. 최상승의 경지에 든 사람들은 오히려 평범해 보여서 일반인들은 물론 높은 수준까지 실력을 닦은 사람들도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직 비슷한 경지에 든 사람만이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엘란도 카르덴의 무기점에서 막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자기 하수로 파악했었고 대제의 무덤에서 막스의 실력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상급정령사의 수준에 오른 지금에서야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도를 느낄 수 있었다. 엘란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치열한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로에게서 적대감을 느끼지 못하자 둘은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란도 되도록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긴장한 채 둘을 지켜보던 하이론은 아무 일이 없자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평상시 였다면 다가가서 물었을 것이다.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보석과 마법검이 나오고 희귀한 동물도 가끔씩 등장했다. 탕탕탕! 방망이를 휘둘러 주위를 환기시킨 경매인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시작했다. "자 여러분! 오늘은 특별히 귀한 물건이 나옵니다. 이십분이 지난 후에 놀라운 물건의 경매가 있을 예정이니 자리를 뜨지 마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낙찰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 테니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어떤 놀라운 물건이 나오는지 경매인의 자신만만한 음성이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경매에 별 흥미를 못 느끼던 엘란까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어떤 게 나올까?" 쟝도 궁금해서 죽겠다는 얼굴이다. "마법무구가 나오지 않을까?" 하이론이 입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 쪽 방면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에이! 그 따위 게 뭐 대단하다고 저렇게 떠들어대요. 제 생각에는 천하절색의 미인이 나올 겁니다." "쯧쯧쯧! 니 말마따라 기껏 여자하나 보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섰겠느냐? 밖에도 이쁜 여자들 천진데." "그러니까 최고의 미인이 나올 거리지 않습니까!" 쟝은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어떤 물건이 나올지 설왕설래가 대단했다. 상황을 봤을 때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쉬는 시간을 만든 것 같았다. 주최측의 의도는 적중했다. 모두들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단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딸랑딸랑! 종이 울리자 건장한 체격의 장한들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천으로 덮힌 커다란 물건을 운반해 들어왔다. 쿵! 물건이 단상에 올려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천으로 집중되었다. 경매인의 눈짓을 받은 금발머리 사내가 천을 벗겼다. "오!" "와!" "세상에!" 쟝의 의견이 하이론의 의견보다 훨씬 가깝게 적중했다. "엘프다!" "엘프?" 주변은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 졌다. 하이론도 놀라서 입을 딱 벌렸고, 쟝의 찢어져라 부릅뜬 눈에는 감동이 메아리쳤다.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흐르는 것이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확실히 구경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자랑할만했다. 300년전의 블루드래곤이 사람들의 눈에 띄인 마지막 드래곤이라면 엘프들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지가 500년은 족히 넘었다. 엘프들은 아스가르드북쪽의 엘프의 숲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각종 문헌이나 그림으로만 접하던 전설 속의 엘프가 여기에 있었다. 새장같은 곳에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모습은 뭇 사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크고 맑은 두 눈은 호수를 연상케 했고, 붉은 볼과 입술은 만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부드러운 금발은 단정하게 묶었고, 갸름한 얼굴은 완벽한 곡선을 이루었다. 생김새나 신체의 곡선이나 완벽한 절대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엘프 특유의 뽀족한 귀도 남자들의 넋을 빼놓았다. 거의 모든 사내들이 넋이 빠져 엘프를 보았다. 오직 엘란과 엘란이 주시하던 망토를 두른 사람만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탕탕탕! 경매인이 연단을 두들겨 주의를 환기시켰다. "험험!" 추태를 깨달은 남자들이 입에 묻은 침을 닦았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귀족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욕정이 이글거렸다. 전설의 엘프와 함께 밤을 보낸다는 생각을 하면 척추를 타고 찌릿한 열기가 치솟아 온 몸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아랫도리는 벌써부터 팽창을 시작했다. 많은 귀족들은 밤의 즐거움은 물론 후손을 생각해서라도 꼭 수중에 넣고 싶었다. 자신과 엘프의 피를 이어받으면 얼마나 뛰어난 후손이 태어날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모든 사내들의 눈이 욕망으로 불탈 때쯤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매는 이만골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봐 너무 비싸잖아!"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만골덴부터 시작한다면 입질도 못 해볼 사람이 태반이었다. 귀족도 이만골덴이면 부담이 많이 가는 액수였다. "절대 비싼 게 아닙니다. 여기 있는 엘프가 자신의 후대를 잇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최소한 상급정령사는 따 놓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엘프는 자연과의 친화력이 뛰어나서 위대한 정령사가 많기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엘프의 피를 이으면 모두 뛰어난 정령사가 되는 줄 알았다. 사실 인간사회보다 월등히 수가 많기는 하지만 엘프사회에서도 상급정령사는 드물었다. 경매인은 말을 계속 이었다. "이 엘프를 구경시켜주면서 일인당 100골덴만 받아도 며칠이면 본전을 뽑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전설의 엘프를 볼 수 있다면 100골덴 정도 낼 사람들은 엘리오트내에서만도 부지기수였다. "십만골덴!" 쟝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하이론은 경악해서 쟝의 오른팔을 붙잡았고, 엘란도 놀라서 왼팔을 붙잡았다. 십만골덴은 커녕 1실버도 없는 주제에 경매에 참가한 것이다. 그만큼 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 미쳤냐?" 경매인의 날카로운 눈이 쟝의 모습을 훑었다. 쟝의 행색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몰락 귀족이상은 아니었다. "한마디 경고를 하겠습니다. 만약 낙찰을 받고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나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경매인의 뒤에 도열해 있던 덩치들이 손가락을 꺾었다. 우드득 으드득! 쟝은 그 소리에 정신이 퍼득 들었다.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것 같은 한기가 돌았다. 그러다 엘란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여기에서 엘란을 당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십만골덴 나왔습니다. 더 부르실 분 없습니까?" "십일만골덴!" 앞쪽에 앉아 있던 뚱뚱한 중년사내가 출렁거리는 턱을 움직여 경매에 뛰어들었다. 하이론과 엘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낙찰이 된다면 한바탕 혈투를 피할 수 없었다. 쟝은 묘하게 실망한 눈치다. "엘란, 저 엘프가 귀족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수모가 크겠냐? 우리가 구해주자!" 쟝은 자신도 귀족이었던 예전의 일은 까맣게 잊고 귀족에 대해 의분에 휩싸여 말했다. 하이론과 엘란은 쟝의 심사를 눈치챘다. 돈이 없어서 낙찰은 불가능하니 엘란의 힘을 빌려 탈취한 후 수작을 걸어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일단은 나탈리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나탈리를 구한 후에 여력이 생기면 구해 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탈리의 행방이 먼저였다. 호가는 빠르게 올라갔다. 이십만골덴에서 주춤하던 호가는 이내 삼십만골덴을 넘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기한 가운데 후보는 두명으로 좁혀졌다. 메디치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너크백작가의 장남 빈스 마너크와 역시 백작가의 장남인 마크 길리건이었다. 빈스 마너크가 도끼눈을 뜨고 마크를 노려보았다. "마크! 이쯤에서 양보를 하지." "자네야말로 양보를 하는 게 어떤가?"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두 가문은 대대로 앙숙이었다. 메디치라는 탐나는 사슴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두 마리의 호랑이었다. 만약 두 가문이 협력을 하거나 한 가문이 머리를 숙였다면 메디치의 판도는 귀족들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일단 경매는 두 사람이 삼십만골덴을 부른 상태에서 멈추어 있었다. 이들에게도 삼십만골덴은 부담스런 액수였다. ***** 공지: 일부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꿉니다. 적법사레조-아만 클라이덴 광룡 카셀프레임-카나이폴런 ----- 13장. 시리우스 팽팽한 신경전이 둘 사이에서 벌어졌다. 낙찰을 포기한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오늘은 여러모로 구경거리가 많았다. 전설 속의 엘프를 본 데다가 양 백작가 후계자들이 맞서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쟝은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둘을 노려보았다. "빈스! 요새 복잡한 일도 많은데 이런 데나 다니고 그러면 되겠나?" 묘하게 비웃는 시선을 던지며 마크가 이죽거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 빈스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자네 가문의 감옥이 깨졌다며! 게다가 집사라는 사람의 집에서 병사들이 몰살했다지......" 묘한 말투로 말을 끄는데 빈스의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 사건으로 백작가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다.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사건을 저지른 원흉보다 얄밉게 이죽거리는 마크가 더욱 미웠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뭐야?" 열이 받은 빈스가 마크의 아킬러스건을 건드리고 나섰다. 그 바람에 마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마크의 어머니는 결혼한지 일곱 달만에 마크를 낳았다. 당연히 말들이 많았고, 그 때문에 마크가 영지를 상속하는 것을 반대하는 친척들이 많았다. 항상 그 점이 마음에 박혀있던 마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 마크의 손이 검자루를 잡아가자 거리를 벌린 빈스도 검을 뽑아들었다. 질식할 것 같은 긴장이 주위를 뒤덮었다. '그래! 서로 싸우다가 뒈져버려라!' 둘 중에 하나가 엘프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자 질투가 끓어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쟝은 둘의 상잔을 애타게 빌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쟝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빈스와 마크의 수행원들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때 엘란을 긴장시켰던, 망토로 전신을 가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경매가 마지막인가?" 엘란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상한 점 없습니까?" "말투가 어색한데." "그렇군요." 하이론이 대답하자 이질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말을 한 사내는 말투가 이상했다. 상당히 고풍스러운 것이 이삼백년전의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경매인은 주위의 분위기를 가라앉힐 겸 질문에 답했다. 게다가 망토로 전신을 가린 사람에게서 묘한 기세가 뻗어 나와 질문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경매인은 그의 기세에 밀려 순순히 대답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예, 마지막입니다." "이상하군. 여기서 바샤라의 돌을 경매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정보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바샤라의 돌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경매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정보길드에서 들었다." '어떤 놈이 정보를 흘렸는지 알아내서 죽여버려야겠군.' 망토를 두른 사람은 경매인이 속으로 딴 생각을 하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바샤라의 돌은 어떻게 됐나?" "그건 고객과의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것만 대답해 주게. 바샤라의 돌은 여기에 있나?" "그것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경매인에게 질문을 던진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묘하게 경매인을 압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엘란은 그에게서 꼭 알아내야 한다는 굳센 의지를 느꼈었다. '이상하네, 그냥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는데.' 흥미롭게 경매인과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일이 싱겁게 끝나자 다시 빈스와 마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빈스와 마크는 둘 사이에 수행원들을 둔 채 대치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둘 다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들이 살벌했다. 고요한 침묵이 경매장에 나래를 접고 내려앉았다. 주변이 조용해지면 조용해질수록 긴장은 증폭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보고 싶은 흥분에 휩싸였다. 쟝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자신이 못 가지는 것을 차지하는 자에 대한 분노와 질투였다.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둘 사이에서 곤란해진 경매인이 하이디스를 불렀다. 메디치의 밤을 지배하고 있는 하이디스는 경매장의 상황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둘이 싸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만약 한 명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대대로 쌓인 감정에 불을 당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언제고 일어날 일이지만 자신의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입장이 난처해 질 것이다. 하이디스는 육중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축 늘어진 뱃살이 출렁거렸다. 하이디스가 경매장에 몸을 나타냈을 때는 충돌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쟝으로서는 유감천만한 일이었다. "빈스님, 마크님 진정하십시오. 일을 벌이기 전에 뒷일도 생각을 하셔야죠." 하이디스가 노회하게 웃었다. 빈스와 마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들의 충돌의 여파는 가문전체로 번져갈 게 뻔했다. 이기든 지든 경솔한 행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공산이 컸다. 후계자가 결정될 중요한 시기에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행동이었다. 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교훈을 내려주는 것은 가문을 물려받은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쟝은 갑자기 끼어 들어 일을 망쳐놓은 하이디스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살이 쩠는지 턱이 삼겹으로 늘어져서 목이 보이지 않았고, 툭 불거져 나온 배가 만삭이 된 임신부의 배보다 컸다. 둘이 엉거주춤하고 섰자 물러설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 경매인이 나섰다. "잠시 식사나 하시면서 경매에 대한 일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지요." 그들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금발머리 사내가 경매장을 나가더니 여러 하녀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하녀들의 손에는 쟁반이 들렸는데, 쟁반위에는 뜨거운 김이 솟구치는 동그랗고 속이 깊은 그릇이 있었다. "하이디스경매장이 자랑하는 거트탕입니다." 하녀들은 고객들에게 음식을 돌렸다. 음식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 만족의 미소가 흘렀다. 엘란은 받은 음식을 젖어 보았다. 허연 국물 위에 점점이 고기가 보였다. "무슨 고깁니까?" 하이론이 옆사람에게 물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여기에 왔나!" 자뭇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거트탕은 어린 소녀를 푹 삶아다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만든......" 엘란의 머리가 윙하고 울렸다. 어제 들었던 집사의 집사라는 노인의 음성이 귓전에 때렸다. '그 년은 삶아먹어 버렸다. 그년은 삶아먹어 버렸다.......' 경매장이 왜 여자아이를 샀는지 의문이 풀리며 머리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란은 어릴 때부터 손윗 처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유일한 친인이라 할 만한 파보는 자신을 보호하다 죽었고, 믿고 따르던 카일은 자신을 배반하고 사지에 몰아넣었다. 인성이 형성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산 속에서 고독하게 보냈던 엘란은 정상적인 성정을 갖지 못했다. 거기다 이스마엘과 페이즈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12,000여명의 생명의 무게들과 에쉴리에 대한 책임감, 행복하게 살고 싶은 열망이 가슴속에 뒤섞이며 커다란 짐을 달아놓은 듯 힘겹게 만들었다. 그렇게 켜켜히 쌓인 감정들이 밖으로 돌출하려고 머리를 디밀고 있었다. 자신이 보호해야할 나탈리가 죽어서 한 그릇의 음식으로 변했다고 생각하자 모든 감정들이 일시에 폭발하며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나탈리!" 짐승같은 목소리가 엘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오빠라고 부르며 매달리던 그 앙증맞은 손과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며 변태라고 부르던 그 도발적인 모습이 눈가에 밟힐 듯 스쳐갔다. 다시는 재우지 말라고 떼쓰던 음성과 자신도 정령을 부리게 해 달라고 조르던 그 입술. 가슴이 통째로 찢겨지는 것 같았다. "나탈리!" 엘란은 다시 한 번 부르짖었다. 웅웅! 엘란의 몸에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기세가 피어오르며 엘란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가 말려 올라갔다. "어어!" 주변의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공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렸다. 드드드! 단단하게 땅바닥에 박혀 있던 의자들이 뽑혀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뭐야!" 놀람의 음성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이론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사방의 귀족들과 전면의 인간들을 죽일 듯 쏘아보았다. "짐승 같은 놈들!" 쟝이 분노의 외침을 터트릴 때, 엘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허공에 은빛의 투명한 막이 생기더니 점차 형태를 갖춰 슈리엘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엘란이 입을 열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분노에 공명해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야!" "오! 멋진대." 경매장의 고객들은 입장료 50골덴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전설의 엘프를 본 데다가 이런 기가 막힌 쇼를 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엘란의 모습과 슈리엘이 쇼의 일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엘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극에 달한 분노가 사람들 눈에는 평상시의 표정으로 보였다. 엘란의 분노를 파악한 것은 같이 분개하고 있던 하이론과 쟝, 그리고 망토를 두른 사람이 전부였다. "평상시에 다른 사람을 돕거나 착한 일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말해보라!" 엘란의 한가닥 이성이 살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하이디스의 경호원들이 검을 뽑아들고 고용인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파이어스톤의 지팡이를 낙찰받은 마법사 제이슨은 그제서야 슈리엘을 알아보고 혼비백산했다. 제이슨은 황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좋은 일, 아 지금 하는 행동도 좋은 일이지.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도 대접하는 주인과 요리를 열심히 한 주방장에 대한 최고의 찬사지." 고기를 건져서 씹던 중년인이 유쾌하게 대꾸했다. "하하하하! 그런가?" 엘란의 손에 들려있던 그릇이 중년인에게 쏘아졌다. 퍽! "억!"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제서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엘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는 산처럼 장중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하자 번개처럼 빨랐다. "으득!" 국물을 넘기다 엘란에게 목이 잡힌 사람이 혀를 빼문 채 고개가 뒤로 꺽여서 축 늘어졌다. "찻!" 경호원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휙! 엘란은 손에 잡힌 사람을 앞으로 던졌다. 퍽! 경호원이 검을 횡으로 움직여 시체를 가르며 짓쳐 들었다. 엘란은 고개를 돌린 채 가볍게 손을 저었다. 서걱! 은빛의 선이 부드럽게 쏘아져서 경호원의 목을 매끄럽게 날렸다. 데굴데굴! 머리가 굴러서 연단에 닿았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으악!" "살인이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문으로 몰려들었다. "실피드!" 실피드가 나타나 문을 막아섰다. 퉁퉁! 사람들은 죽어라 실피드를 두들겼으나 허망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나는 엘란이다! 나탈리를 만나거든 엘란이 보내서 왔다고 말해라!" 윙윙! 허공에서 은빛선이 나타나 엘란을 중심으로 바깥으로 폭사되었다. "으악!" 서걱! 툭!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은빛선에 걸리는 것은 사람이든 의자든 모조리 잘려졌다. "엘란!" 실드를 쳐서 은빛선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하이론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은빛선들이 사그라 들었다. 엘란은 여전히 허공에 뜬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경매장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반도 되지 않았다. 휙! 바람처럼 날아간 엘란은 경매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격렬한 심장의 몸부림, 툭툭 불거지는 혈관들이 생생히 느껴졌다. "끄...살려...줘...." 으드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이디스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엘란의 무표정한 얼굴과 서늘하게 가라앉은 차가운 눈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절로 오줌이 쏟아졌다. 빈스와 마크는 각각 오른팔이 잘린 채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살아난 것만 해도 천행이었다. 엘란이 손이 하이디스로 향하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쾅! 무엇인가 거센 기운이 엘란의 뒤를 강타했다. 진흙덩어리들이 엘란을 덮치고 있었다. "클레임!" 엘란이 진흙덩어리를 보고 소리쳤다. 엘란의 뒤를 덮친 것은 흙의 상급정령 클레임이었다. 이 정도의 정령을 부릴 자는 여기서 한 명밖에 없었다. 망토를 두르고 있던 정체불명의 그 남자였다. "방해할 텐가?" "나도 볼일이 있어서." 여전히 고풍스런 말투였다. "여자들은 나가라! 하이론 쟝도 나가세요." 다행히 하녀들은 별 탈이 없었다. 실피드가 암암리에 보호해 준 결과였다. "나도 나가게 해줘!" 살아남은 사람들이 절규했다. 사방에 질펀한 피와 내장 살점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문이 열리고 하이론과 쟝 하녀들이 밖으로 나가자 살아남은 사람들도 문으로 몰려들었다. 운 좋은 한 두명이 문을 통과했을 까 나머지는 모두 실피드에 튕겨졌다. 쩡쩡! 엘란과 정체불명 남자의 사이에서 기세가 충돌하며 스파크가 튀었다. 그 기세에 말린 사람들은 갈갈이 찢어져 나갔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여 벽에 붙어 섰다. 공격을 먼저 시작한 것은 망토를 두른 남자였다. 팟! 진흙덩어리들이 쫘악 펼쳐지더니 엘란에게 쏟아졌다. "베리어!" 슈리엘이 반투명한 웃자락을 펼쳐 진흙을 막아섰다. 쿵쿵쿵! 진흙이 끊임없이 슈리엘을 후려쳤다. "실프!" "흥!" 엘란이 하급정령 실프를 소환하자 망토를 두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클레임으로 슈리엘을 후려치며 노임을 소환했다. 개모양의 중급정령이 남자의 주변을, 지키듯 맴돌았다. 개 모양으로 생긴 흙의 중급정령은 주인을 지키려는 충견 같았다. 2미터는 넘을 것 같은 회색의 몸체는 흙으로 빚어낸 것처럼 보였다. "아!" 철창에 갇혀있던 엘프가 탄성을 터트렸다. 작게 뭉쳐져서 쐐기모양으로 변한 실프가 무섭게 회전하며 사방으로 튀었다. 타타타탁! 온 사방을 부딪치며 벽에 붙어선 사람들 몸에 구멍을 내더니 반은 하이디스에게 반은 망토를 두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처음 보는 공격에 당황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은 충분히 감당이 가능했으나 하이디스에게 날아가는 실프는 일시지간에 막아낼 수 없었다. 그만큼 엘란의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결과였다. 노임이 벌떡 일어나더니 실프를 물었다. 퍽! 실프를 무는 노임의 턱이 날아갔다. 그러나, 박살이 나 흩어진 턱은 다시 뭉쳤다. "엔다이론!" 하이디스의 앞에 물의 막이 나타나 실프를 막아섰다. 철창 안에 갇힌 엘프가 정령을 소환해 엘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엘란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을 경매에 부친 하이디스를 엘프가 보호하려 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하던 일이었다. 게다가 엔다인론을 자유자재로 부릴 정도라면 저런 철창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었다. 왜 순순히 갇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엘란이 잠시 머뭇거리자 그 틈을 노리고 노임이 달려들었다. 진흙덩어리 클레임에게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슈리엘을 붙들고 늘어졌다. 손이라고 해도 진흙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뒤를 돌아 달려드는 노임이 입을 딱 벌리는데 작은 돌이 이빨처럼 박혀 있었다. 생긴 거나 하는 행동이나 개와 흡사했다. 엘란은 대제의 무덤에서 흔히 지옥의 문지기라 불리우는 켈베로스를 상대하던 때가 떠올랐다. 하이론은 켈베로스가 죽을 때 개소리를 내는지 궁금해했고, 그 의문을 풀었었다. 켈베로스는 죽을 때 켕하고 개소리를 냈었다. "너도 개소리를 내는지 볼까! 실피드!" 실피드가 나타나 옷자락을 흔들자 투명한 끈이 날아가 노임의 목을 감싸고 조였다. "켕!" 노임이 소리를 지르며 목에 감긴 끈을 물어뜯었다. "하하하! 노임도 개소리를 내는군!" 엘란은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듯 미친듯이 웃었다. 이번에는 망토를 두른 남자가 어리둥절해졌다. 실프를 소환할 때는 슈리엘과 실피드를 같이 부릴 실력이 안 되는 줄 알고 비웃었는데 실피드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게다가 개소리라는 둥 헛소리를 하다가 미친듯이 웃지 않는가. "미친 놈이었군." "스피릿 컴파운드!" 망토를 입은 남자는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붉고 푸른 광채가 넘실거리더니 직선으로 쏘아졌다. "노임!" 다급한 음성이 터지며 노임이 일렬로 달려들었다. "켕켕켕켕!" 개소리가 연달아 터지며 노임이 산산이 퍮어져 사라졌다. 공기가 폭발하듯 요동치며 경매장의 벽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거센 바람에 망토에 달린 모자가 벗겨지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엘프!" 이번에는 엘란이 놀랄 차례였다. 오만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비정상적으로 생긴 뽀족한 귀, 비인간적인 아름다움. 얼굴이 드러난 자는 엘프였다. 클레임과 슈리엘이 떨어지며 침묵이 주변을 물들였다. 그 침묵을 깨고 철창에 갇힌 엘프가 입을 열었다.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대로 처음 만난 사이에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기를 먹지 않는 엘프가 거트탕이라는 사람고기를 먹을 일도 없다. 불필요하게 싸울 필요는 없었다. 단지 분노가 폭발해서 눈이 뒤집힌 엘란과 오만한 성정의 엘프가 서로 굽히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여성엘프가 남성엘프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남성엘프는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싸우기 싫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방심의 결과이지 결코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하이디스나 여동생이 다칠까 저어한 때문이었다. 또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오만한 성격을 억누르게 만들었다. "당신 볼일부터 보시오!" 엘란도 한 발 물러섰다. 이성이 돌아오자, 500년만에 인간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전설 속의 엘프와 다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엘프가 철창을 벌리며 나왔다. 하이디스는 놀라서 혼이 다 나갈 지경이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몇몇을 제외한다면 멀쩡하게 살아남은 사람은-엘란을 제외한다면-그가 유일했다. "바샤라의 돌은 어디에 있나요?" 엘프의 샹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하이디스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돌은...." 정신이 돌아온 하이디스가 교활한 눈을 굴리며 살길을 모색했다. "저를 보호해 준다면 돌의 행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이디스는 엘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군요... 좋아요 제 힘 닿는 데까지는 도와드리죠." 엘프는 순순하게 하이디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샤라의 돌은 광법사가 가져갔오." "광법사! 미친 새끼,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군." 엘란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는 잔가?" 엘프가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아주 잘 알지. 뼛속깊이 새겨 둔 이름이니까." "잘 됐군. 그 자의 행방을 아나?" "아주 독특한 자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하이디스 광법사는 어디로 갔나?" "아스가르드로 간다는 것 같았습니다." 하이디스는 엘란의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여성엘프가 구해준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사신(死神)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스가르드로 가보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그 사람이 떠난 지 얼마나 됐나요?" 여성엘프가 여전히 상냥한 음성으로 물었다. "일주일 됐습니다." "우리 볼일은 끝났다." 남성엘프는 몸을 돌렸다. 엘프의 등으로 엘란의 질문이 날아갔다. "돌을 찾으러 일부러 저 엘프를 들여보낸 건가?" 대답은 여성엘프가 했다. "그래요, 안에서 돌을 찾으려 했죠. 실패하긴 했지만."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고개를 끄덕인 엘란이 천천히 다가가자 공포에 질린 하이디스가 엘프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여성엘프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막을 수 있을까?" 그녀는 대답대신 엔다이론을 소환했다. 슈리엘이 엔다이론과 부딪쳤다. 쾅! 폭음이 울리며 엔다이론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중급정령이 상급정령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약속은 지켰습니다. 그럼 저희는 바빠서 이만." 엘프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하이디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하이디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보호해 준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약속대로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엘프들이 밖으로 나가자 겁에 질린 하이디스는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다. 두꺼운 살들이 출렁거렸다. 벌벌 떨던 하이디스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나탈리!" 엘란의 분노에 찬 시선이 하이디스에게 꽂혔다. "나탈리 때문에 이러는 거면 잘못 짚었습니다." 하이디스는 필사적이었다. 살 길을 찾아 회전하던 뇌가 엘란이 부르짖던 이름을 떠올렸다. "잘못 알다니?" "그 애는 살아 있습니다." 엘란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물들었다. "거짓말이라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정말입니다. 나탈리는 광법사가 데리고 갔습니다." "광법사! 광법사가 왜?" "그 미친놈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탈리외에도 애들을 스무명이나 데리고 갔습니다. 돈 한 푼 안주고." 하이디스는 바샤라의 돌과 아이들을 강탈하다시피 뺏긴지라 겁에 질린 가운데서도 분기가 치밀어 이를 갈았다. "광법사...광법사가 데려갔단 말이지..." 엘란은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하이디스가 슬금슬금 밖으로 움직였다. 죽음의 사자가 딴 데 정신이 팔린 사이에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쭉! "어어!" 쾅!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던 하이디스가 바닥에 널린 피를 밟고 미끄러져 의자의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머리가 깨져서 허연 뇌수가 보이는 것이 살기는 틀린 것 같았다. 눈은 허옇게 돌아갔고 손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엘란은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화려한 방을 지나 갈림길을 통과하자 초조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 하던 하이론과 쟝이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살아있었구나!" 하이론은 몰라도 쟝까지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은 정말로 의외였다. 그들은 엘란과 무섭게 대치하던 사람으로 확신되던 엘프가 무사히 지나가자 엘란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가슴조린 줄 몰랐다. 떨려서 안으로 들어가 확인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나갑시다." 엘란은 둘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들도 답례의 미소를 띄웠다. 메디치에서 괴변이 일어난 지도 열흘이 지났다. 엘리오트전역은 그 일로 충격에 휩싸였다. 사건의 주인공인 엘란의 신분은 쉽게 드러났다. 살아남은 하녀들이 진술한 것은 지고교의 상급정령사와 인상착의가 그대로 일치했다. 170이 채 안 되는 작은 키, 검은머리, 검은 눈을 가진 슈리엘을 부리는 정령사. 다른 누가 있겠는가? 엘란의 이름과 정확한 신분까지 알려졌다. 전직 노가다용병대의 변태정령사. 엘란이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기억한 하녀가 있었던 것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지고교의 정령사가 교도를 구하기 위해 옥을 깨트린 후, 복수를 위해 고발자인 마너크가의 집사와 백작가의 장남인 빈스 마너크를 죽이러 경매장에 잠입해서 칠십여명의 귀족들을 몰살시켰다고 알려진 일은 수많은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많은 귀족들이 지고교의 누명을 씌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엘란이 찾아와서 죄 값을 물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그 덕에 민간에서 부는 사교척결의 열풍은 수그러들었다. 엘란은 광술사로 불리며 광법사와 같은 미치광이 살인마로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아이들이 울 때마다 위협하는 대상도 광법사에서 엘란으로 바뀌었다. 엘란의 악명은 메디치를 드나드는 엄청난 수의 상인들과 선원을 통해 멀리 다른 나라까지 퍼져나갔다. 나라에서도 골치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녀와 사제들을 모두 척결해서 지고교의 뿌리를 뽑았다고 공고하고 여러 신전에서 신의 축복까지 받은 이 때 엘란이 날뛰면서 체면에 금이 간 것이다. 앙숙인 아스가르드나 피요르드는 내심 고소하게 생각했다. 지직! 막스가 소드를 휘두를 때마다 이미터가 넘는 오러가 피어올랐다. 휙휙휙! 막스가 상하좌우로 검을 휘두르자 반경 오미터안의 공간이 시퍼런 오러로 둘러싸였다.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아서, 물방울 하나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빈센트는 그런 막스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여성에게 보내는 열렬한 구애의 눈빛과 비슷했다. "후!" 숨을 고른 막스가 검을 집어넣자 수건을 든 빈센트가 쪼르르 달려갔다. 막스는 말없이 수건을 받아들고 땀이 홍건한 얼굴과 목덜미를 닦았다. 빈센트는 주인이 던진 공을 주워서 갖다주며 칭찬을 해 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엥겔스 남작은 막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막스는 엘란이란 자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강도 높은 수련을 시작했다. 엘란은 막스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든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묘한 열기가 치솟았다. 자기 손으로 그 자를 벨 수 있다고 생각하자 벅찬 희열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리하는 것으로 보이나?" "예." "자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 막스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빈센트는 자신에게 질문한 것이 영광이라도 되는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절대 아닙니다! 그 정도로 단장님 몸에 무리가 갈리 있겠습니까!" 엥겔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사이 막스의 주변에는 빈센트같이 열광적으로 숭배하는 기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엥겔스로서는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엥겔스가 생각하는 기사단장은 부하들에게 존경과 신뢰, 사랑을 받아야 하지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곤란했다. "엥겔스, 걱정하지 마라. 몸에 무리가 갈 만큼 수련하는 것은 아니다." 망망대해에 돛단배가 한 척 떠 있었다. 그리 작은 배는 아니지만 먼바다까지 나오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배였다. 돛은 일반적인 배보다 작았는데 선미쪽에는 판자로 대충 만든 선실이 있었다. 배 위에는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늘어져 있었다. 겨울의 바다는 거칠어서, 칼날 같은 바람이 옷을 헤집었다. 사람들의 중앙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의 독수리가 보였는데 나무로 만든 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엘리오트를 떠나온 엘란의 일행이었다. 경매장을 나온 직후 바로 아스가르드로 출발하려 했으나, 아에게등이 발목을 잡았다.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데다 차가운 산 위에서 있다보니 탈이 난 것이다. 하이론의 약으로도 몸을 추스르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쟝은 물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융커산맥을 통해 국경을 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일거에 묵살되었다. 아에게용병대의 몸이 아직 완전치 않은데다 국경수비대가 득실거리는 험한 산맥을 넘는 것보다는 바다를 통해서 가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엘란이 아에게에게 부드럽게 권유했다. 바다의 찬바람에 몸을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에게는 카사 앞에 손을 내밀어, 불을 쬐며 말했다. "선실 안에 있자니 답답해서, 여기도 따뜻해서 괜찮아." 신기한 듯 이리저리 카사를 살피더니 엘란에게 말했다. "엘프 얘기 좀 해봐!" 아에게는 엘프를 보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어렸을 때부터 멋진 모험을 꿈꾸던 아에게에게는 아쉬움 그 자체였다. 아에게의 목소리를 듣고 선실에 누워있던 밤톨과 그린도 밖으로 나왔다. 그들도 엘프에 대해서 알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엘프는 전설 속에서 갑자기 걸어 나온 셈이었다. 일행들은 카사가 모닥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주위에 퍼져서 앉았다. "엘프는 귀가 뽀족해요." "....." "....." "......" 그걸로 끝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엘란으로서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에게는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좀 자세히 설명해 봐." "내가 설명하지." 쟝이 끼어 들자 짝귀는 기분이 나쁜지 고개를 돌렸다. 짝귀와 밤톨 들창코는 어렸을 때부터 도둑길드에서 눈칫밥을 먹은 지라 눈치는 빠삭했다. 쟝이 자신들을 거지 보듯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짝귀도 귀족이었던 쟝이 꼴 보기 싫었고, 그린도 쟝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거기에는 쟝에 대한 하이론의 자세한 설명도 크게 한 몫 했다. 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15,000지고교도들에게도 무시를 받았는데 이 따위 거지같은 놈들이 무시한다고 기분 상할 일은 전혀 없었다. 아에게를 제외한 용병대의 대원들이-아에게는 여전히 자신들을 용병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개를 돌린 가운데 쟝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경매장에 들어가고 한 참이 지났을 까, 경매인이 대다한 물건이 나온다고 거품을 물었어. 거품을 물만했지. 글세 거기서 엘프가 나올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아! 그 엘프 정말 아름다웠어. 에쉴리나 코리나는 근처에도 못 갈 거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흉추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를 하나로 묶었는데 색이 얼마나 멋지던지 완전히 황금같더라니깐. 코리나의 금발은 거기에 비하며 돼지털이야. 암! 그렇고 말구. 얼굴은 갸름했는데 이마 코 턱이 정확히 삼등분 되어 있었다. 눈은 에메랄드 보다 더 푸르고, 잡티하나 없이 깨끗한 하얀 얼굴은, 오해는 하지 마라! 창백한 하얀색이 아니라 붉은 기가 약간 도는 건강한 안색이었어. 특히 분홍색 뺨이 일품이지. 코는 낮지도 높지도 않고 적당하게 솟았는데 도톰한 콧방울이 인상적이었어. 코밑으로 적당한 길이의 인중이 있고 거기서 이어지는 붉은 입술은 잘 익은 사과 같았는데 살짝 드러난 이는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에 쌓인 눈처럼 희고 투명해 보였어. 뽀족한 귀는 남자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눈, 코, 입, 얼굴형 하나라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 완벽한 크기와 비율이라니. 여신이라 해도 그렇게 아름답지는 못할 거야. 몸매는 어떻고? 36-23-36의 완벽한 몸매였어. 엉덩이도 탱탱하게 착 올라붙은 것이 북숭아 같았어. 가느다란 발목에는 앙증맞은 발이 붙어있고, 굳건해 보이는 무릎은 늘씬한 허벅지와 연결됐는데 군살하나 없더라. 손가락은 길고 손톱은 짭게 깍여 있었어....." 그 후로도 쟝의 설명은 그칠 줄 몰랐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의 각도부터 시작해서 입고 있는 옷의 무늬와 천에 대한 설명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얼마나 자세하게 설명하는지 직접 보고 있다는 착각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린 등도 쟝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쟝의 묘사는 생생했다. 아무리 엉터리 화가라도 쟝의 설명만으로도 정확한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엘란은 감탄했다. 상급정령사의 경지에 들어서고 무섭게 발달한 감각과 기억력으로도 엘프의 모습을 쟝보다 더 자세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하이론은 그저 기가 찬 모양이다. 오랜 설명이 끝나고 쟝이 숨을 돌리 때 아에게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남자엘프는 어땠어요?" "......" 열변을 토하던 쟝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쟝의 머리에 엘프든 뭐든 남자가 들어갈 공각은 아예 없었다. "어! 그게....음...그러니까....귀가 뽀족했어." "......" 그걸로 끝이었다. 한 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에게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답니까?" "응." 아에게는 멍한 눈으로 쟝을 보았다. 여자엘프에 대해서 한 시간동안이나 거품을 물면서 남자엘프에 대해서는 단 이초 만에 설명이 끝났다. 모두의 시선이 따갑자 쟝이 얼른 말을 돌렸다. "엘란, 경매장에서 나오면서 보석같은 거 좀 챙겨오지 그랬어. 파이어 뭔가 하는 마법사가 쓰던 지팡이도 그렇고, 너무 아깝잖아. 내가 있었으면 다 챙겨서 나오는 건데" "낙찰 받은 마법사는 먼저 나갔다." "이야! 그 놈 운 좋은데. 경매장에 온 사람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그 놈 한 놈이네." "하녀들도 있고, 엘프도 있잖아." "하녀들이야 경매하러 온 사람은 아니지. 그리고, 엘프는 사람이 아니잖아." 쟝이 계속 반말짓거리를 해대자 하이론이 조금씩 열이 받기 시작했다. "요새 말이 점점 짧아진다." "다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이거 왜 이래!" 하이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대머리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손에는 어느새 작달막한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교훈을 내려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어어! 왜 이래?" "내가 니 친구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몽둥이가 날았다. 마법사가 소중히 대하는 마법지팡이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하이론이 유일할 것이다. "악!" 조용한 바다에 개 잡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에게와 대원들은 질려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개 잡듯 두들겨 패는 하이론이나 맞으면서 악을 쓰는 쟝이나 그들의 눈에는 모두 인간같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하이론의 훈계는 별 효과가 없었다. 효과는 용병대에게서 나타났다. 그들이 둘을 슬금슬금 피했던 것이다. 해가 지자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아에게등은 모두 침낭속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엘란과 하이론은 이물에 앉아서 뜻 모를 상념에 빠져있었다. 휘이잉! 별안간 한 줄기 바람이 주변을 쓸더니 슈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거냐? 분명 부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슈리엘이 모습을 드러낸 거냐?" 하이론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제가 마음속으로 불렀습니다. 경매장에서 격한 분노에 사로잡혀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슈리엘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속으로 불러 본 건데..... 뭔가 제 감정과 이어진 끈이 공명을 일으킨 것 같기도 하고, 저로서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슈리엘이 엘란의 말을 듣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엘란의 정령술이 점점 발전한 때문일 거다. 그의 강렬한 의사가 나를 불렀으니. 이때까지의 소환보다 훨씬 강렬한 부름이었다." "비르발의 소환은 어땠습니까? 입을 열어 외쳤습니까? 아니면 속으로 불렀습니가?" "둘 다 아니다. 비르발의 소환은 정말 자연스러웠다. 소리쳐 부른 것도 아니고, 너처럼 격한 감정으로 공명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정령계를 돌아다니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오는 지도 모르게 너희들 세상으로 불려 나왔지." "그랬군요." 엘란은 슈리엘을 돌려보내며 다시 상념의 바다에 빠졌다. 조용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이론, 바샤르의 돌이 뭔지 아십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이론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치료마법이나 포션의 제조를 중심으로 연구를 했기 때문에 다른 마법적 지식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엘프들이 찾아다니고, 광법사가 강탈해 간 것을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니겠죠?" "그럴 거다. 광법사 그 미친놈은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구나." "광법사가 나탈리같은 어린애를 데려간 이유가 뭘까요?" "그 음흉한 놈 속을 누가 알겠느냐!"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었다. 광법사의 속셈이나 바샤라의 돌, 엘프들... 나탈리를 구하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았다. '나탈리 조금만 기다려라! 곧 구하러 간다.' "이제 좀 자지 그러냐?" "조금 있다가 잘 겁니다. 그보다 하이론, 대제의 무덤에서 했던 얘기 기억하십니까?" "어떤 얘기?" "저보고 성격 괴상하다고 하신 거 말입니다." "아! 그 얘기. 왜 신경 쓰이니?" "예, 그 이후로 늘 찜찜한 기분이 있었어요. 괴팍한 하이론 눈에 괴상하게 비칠 정도면 얼마나 이상한 성격일까 늘 생각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미치광이 광법사나 강도질이나 해대는 시드, 꽉 막힌 빌바오, 음흉한 길라드, 잔인한 막스에 비한다면 네 성격은 성자라고 할 수 있다." 하이론의 말을 듣는 엘란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제가 그 정도로 이상해 보입니까?" "내가 볼 때는 정상이다." 엘란은 내가 볼 때는 정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았다. 괴팍한 하이론의 기준으로는 정상이라는 말인지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정상성격이라는 말인지 그 뉘앙스가 알쏭달쏭 했다. 엘란이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하이론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건 아주 먼 이세계를 여행한 사람이 적은 책에 있던 이야기다. 그 쪽 세계에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아주 맛 좋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 그런데, 누가 독이라도 풀어 넣은 건지 아니면 신의 저주라도 받은 것인지 물이 이상해져 버렸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미쳐버린 거야. 그 물을 먹는 사람은 아주 많았지. 나중에는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고 미쳐버렸다. 오직 왕 하나만을 제외하고. 그때부터 왕은 괴로워졌어. 다른 미친놈들이 정상인 왕을 미치광이로 몰아서 괴롭힌 거야. 미친놈들 눈에는 왕이 미친 걸로 보였을 테니까. 왕이 미친 것은 악귀에 씌인 때문이라면서 부적 태운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불붙은 장작을 얼굴에 들이댄다거나 침을 전신에 꽂는 것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어. 왕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우물에 가서 그 물을 마시고 함께 미쳐버렸다. 그 후부터는 미친놈들끼리 오손도손 잘 살았단다." "......" 엘란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세상이 모두 미쳐 돌아가니 성격 괴상한 너로서도 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지, 차라리 미쳐버리라는 말인지, 성격을 고치라는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엘란을 고민에 빠뜨리고 하이론은 무책임하게 잠이 들어 버렸다. 엘란은 다시는 하이론에게 고민상담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카사가 부리를 들어 불꽃의 날개를 다듬었다. 날개에서 불티가 조용히 피어올랐다. 엘란일행이 아스가르드의 항구도시 마가렛시에 발을 디딘 것은 배를 탄지 이주일 만이었다. 아스가르드의 도시는 엘리오트의 도시보다 활기차고 밝았다. 여자들의 옷도 형형색색 아름다웠고, 노출도 심했다. 노출이 심한 여자들의 옷차림은 쟝을 흡족하게 했다. 쟝은 단번에 아스가르드가 마음에 들었다. 일행은 모두 세 무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세상경험이 가장 풍부한 하이론이 쟝과 함께 선두에서 걸었고, 그 뒤를 엘란이 따랐다. 아에게와 그린 짝귀 삼총사는 하이론과 쟝에게서 열 걸음 정도 뒤떨어져서 걸었다. 아에게용병대는 엘란과 함께 다니는 하이론과 쟝에게서 될 수 있으면 떨어지려 했다. 자신보다 50살도 더 되어 보이는 노인에게 반말을 찍찍 해대고, 하루종일 여자예기나 하는데 그 내용도 괴상망측한 쟝은 물론 쟝의 반말을 무리없이 들어주다 갑자기 몽둥이를-이 사람은 도저히 마법사라고 믿기지 않았다. 세상 어느 마법사가 마법의 지팡이로 남을 두들겨 팬단 말인가-꺼내 두들겨 패는 하이론도 인간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빡빡 衣은 것도 이들의 눈에는 불안하게 비쳤다. 아에게가 판단하는 둘은 미치광이 이인조였다. 엘란이 왜 이런 사람들과 같이 다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참을 걸어가던 하이론이 멈춰 섰다. "식사라도 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의견을 나눠보자." 모두들 배가 고팠으므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늦은 오후라 그런지 한산했다. 모두들 꼬치를 들고 거기에 꽂힌 덩어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굉장히 맛있는데요." 쟝은 상당히 만족스러운지 세 개째 꼬치를 해치우는 중이다. "마가렛시의 연어꼬치구이는 별미로 유명하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맛있게 먹는 음식이야." 하이론도 세 개째를 먹어치우며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입가에 벌건 양념을 묻히고 정신없이 꼬치를 뜯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오자 엘란이 아에게를 보며 말했다. "아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엘리오트에서는 살지 못 할 테니 여기서 사는 건 어때요? 제가 살집은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아에게는 꼬치를 양손에 들고 말했다. "난 너랑 같이 다닐 거다." 아에게 평생의 꿈이 멋진 모험이니 엘란과 함께 다니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엘프를 봤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에게의 마음에 불이 붙어 버렸다. 평소 신기한 것과 엘프, 드래곤, 기사, 공주, 멋진 로맨스에 푹 빠져있던 아에게는 엘란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저를 따라가면 광법사와 만나게 될 텐데 죽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내 하고 싶은 데로 살다 죽을 란다." 아에게의 뜻은 확고했다.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린은 어쩔 겁니까?" "아에게도 가는데 나도 따라 가야지." 그린도 단호하게 말했다. 엘란은 한숨을 쉬며 짝귀와 밤톨 들창코를 보았다. "아저씨들은 어쩔 겁니까?" "우리도 따라 갈 거야!" 엘란은 겁 많은 이들까지 따라간다고 나설 줄은 몰랐던지라 상당히 놀랐다. "저를 따라 다니면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따라 갈 거다." 셋이 동시에 외쳤다. 이들의 마음은 모험을 하고 싶은 아에게와는 달랐다. 메디치에서 조용히 살려고 했지만 세상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위험이 널린 것만 같았다. 전직 소매치기들은 차라리 엘란과 다니는 것이 편안했다. 그들은 엘란이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엘프 같은 전설 속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은 열망도 얼마쯤은 있었다. 엘란에게는 이래저래 짊어진 짐이 무거워졌다. 어떻게든 이들을 설득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데 문이 열리며 망토로 전신을 감싼 두 명이 들어왔다. 둘 다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엘란은 굳은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하이론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약간!" 엘란이 더 이상 언급하려 하지 않자 하이론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엘란은 그들을 한 동안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광법사는 어떻게 찾는 게 좋을 까요?" "일단 정보길드로 가보자." 식사를 마친 이들은 정보길드를 찾아서 움직였다. 미치광이의 손아귀에 나탈리를 오래 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정보길드 찾기는 쉬웠다. 복잡한 시장통을 지나자 이층 석조 건물이 나왔는데 거기에 정보길드가 있었다. "누가 쳐들어 왔나." 쟝이 건물을 보고 중얼거렸다. 쟝의 말대로 건물은 엉망이었다. 이층이 완전히 터져 나가서 안이 훤하게 보였고, 길에는 벽에서 떨어져 나온 잔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문도 반이 떨어져 나가서 덜렁거렸다. 쿵! 문을 밀치자 부서져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안은 밖보다 더 엉망이었다. 멀쩡한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젠장!" 덩치가 산만한 거한이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었다. 눈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마스터 좀 불러주겠나?" 거한은 대답은 않고 바닥만 치우고 있었다. "마스터가 안 되면 정보를 팔 수 있는 사람이라도 불러주게." 거한은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이론이 슬슬 발작을 일으키려는데 엘란이 나섰다. "일층도 터트려 줄까?" 쟝도 오싹할 만큼 으스스한 말투였다. 청소를 하던 거한도 놀라서 움찔했다.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한동안 눈치를 살피던 거한은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는지 빗자루를 던지고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마스터! 손님 찾아 왔습니다." "손님 안 받는다고 했잖아!" 거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위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잠시 후 후줄근한 50대 남자가 내려왔는데 청소하던 거한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데다 입술도 터져 있었다. "이 새끼가 그새 또 어디론 샌 거야?" 마스터로 보이는 사내는 거한이 보이지 않자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니 들은 뭐야?" 두들겨 맞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 자연히 마스터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거칠었다. "광법사는 어디에 있나?" 엘란은 세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편이 정보 얻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뭐야! 또 광법사야?" 마스터가 움찔했다. 슬슬 뒤로 물러나는 것이 꺼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누가 광법사의 행방을 물었군. 행방은 물은 사람은 전신을 망토로 감싼 말투가 고풍스런 사람 아닌가?" "아는 사람이요?" 마스터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평온한 마스터의 일상을 박살낸 것은 두 시간 전에 찾아온 정체불명의 괴인영들이었다. 다짜고짜 광법사의 행방을 묻더니 별다른 이유도 없이 행패를 부렸다. 길드원들이 얼굴을 가린 그들을 수상쩍게 보고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그건 의례이 있는 일로서 마스터의 머리 속에는 그들의 행동이 이유없는 행패로 비춰졌다. 또 다시 광법사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들어오자 불길한 예감에 한기가 들었다. 검은머리의 젊은 놈은 어른한테 반말이나 찍찍 갈기며 찬바람을 일으켰고, 그 옆에 서 있는 흉악한 인상의 대머리는 척 보기에는 성질이 더러워 보였다. 그 놈뿐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놈은 무슨 사고라도 생기길 바라는 것처럼 헤실헤실 웃는 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뒤에 서 있는 장대 같은 키를 가진 비쩍 마른 놈이나 신경질적으로 생긴 놈, 귀가 이상하게 생기거나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선 놈, 코가 뒤집어져서 비가 샐 것 같은 놈 등 하나같이 괴상망측하게 보였다. 마스터는 이놈들과 계속 대거리를 하다간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광법사는 코르도바습지대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냅다 소리를 지른 마스터는 바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 "......" 일행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마스터로 보이는 자가 칠면조처럼 안색을 이리저리 바꾸더니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줄행랑을 놓자 어안이 벙벙했다. 엘란만이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엘란, 너 뭐 아는 것 같은데, 저 사람 왜 저래?" 아에게가 물었다. "아마 전에 광법사의 행방을 물은 사람과 마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란은 형편없이 부서진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전의 일도 있고 해서 광법사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자 겁이 났겠지요." "우리 말고 누가 또 그 미치광이를 찾지, 그리고 엘란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아에게는 궁금한 게 많은지 계속 질문을 던졌다. "식당에 들어온 두 사람 그 사람들이 광법사의 행방을 물었을 겁니다." "그 사람들 누구야?" 식당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한 하이론이 다시 물었다. "하이론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이론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본 적이 없는데...." "사람은 아니죠!" 하이론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사람이 아니라니! "경매장에서 본 적이 있죠." 엘란은 하이론이 눈치를 못 채자 다시 말했다. 아에게는 엘란이 속시원하게 대답을 안하고 스무고개를 하는 것처럼 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이론은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녀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는데...가만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 그 엘프들이구나!" "빙고." "엘프라고!" 아에게가 고함을 질렀다. 엘란의 말에 의하면 식당에 들어온 둘이 경매장에서 만난 엘프라는 말이다.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아에게는 아쉬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엘프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밤마다 꿈에 등장할 지경이었다. "식당에서 말하기는 곤란했습니다. 엘프들이 꺼리는 기색이어서... 또 경매장에서 싸운 엘프의 성정을 짐작컨데 아는 척 했다가는 싸움이 벌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눈치를 줬어야지." 이번에는 그린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린이나 짝귀, 밤톨, 들창코도 엘프를 보고 싶은 열망은 컸다.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자 아쉬움을 넘어 허탈한 감정까지 일 정도였다. "너무 아쉬워 할 것 없습니다. 광법사를 쫓다보면 자연히 만나게 될 겁니다." 갑자기 아에게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왜?" "좀 전에 말했잖아요. 그 엘프들이 광법사의 행방을 물었다고." "엘프들이 왜 그들을 쫓지?" 그린이 묻자 이번에는 하이론이 대답했다.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들었잖아, 엘프들이 바샤라의 돌을 찾고 있고, 그 돌은 지금 광법사의 수중에 있으니 당연히 그 뒤를 쫓아가겠지." 말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하이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엘프들과 문제는 없을까?" "그들은 바샤라의 돌을 원하고 우리는 나탈리를 원하니 부딪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다마는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것 아니냐?" "그도 그렇네요. 엘프에 대해서는 뭐 아는 거 없습니까?" "마법사들이 상식적으로 가지는 지식정도지. 오만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인간을 멸시한다. 뭐 이런 단편적인 지식뿐이다. 엘프들이 인간 세상에 나온 지도 500년은 넘었고, 그 전에도 교류는 극히 꺼렸으니 알려진 게 거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지." 엘란과 일행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장사치로 보이는 두 명의 중년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어!" 두 사람은 엘란일행을 보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겨울의 차가운 날씨에다 문이 부서지고 이층이 벽 채 뜯겨져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정보길드 안에서 둘은 식은땀을 흘렸다. "튀어!" 둘은 청소하던 장한이나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엘란일행의 눈치를 살피다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았다. 황량한 건물 안에 남게된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엘란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들은 생사의 고비도 함께 넘긴 친한 사이로 매일 보는 얼굴이라 친밀감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도적떼거리로 보였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에 머리를 빡빡 밀어서 산도적의 두목쯤으로 보이는 하이론은 물론 평소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살이 올라 사람 좋게 보이던 아에게도 감옥에서의 고생으로 비쩍 말라 아주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약간 차가운 인상이었던 그린은 비쩍 마르자 냉혹하게 보여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마가 돌출하고 두 눈 사이가 먼데다 코가 뒤집어진 들창코는 오크의 용모를 방불케 했고, 160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달막한 키에 차돌같아 보이는 이마 온통 삐죽삐죽하게 일어선 머리카락은 밤톨의 인상을 무섭게 만들었다. 짝귀도 오른쪽 귀가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데다 비쩍 마르자 얍삭한 인상을 온 몸으로 풍겼다. 잘생긴 쟝도 이들과 함께 있자 특유의 느끼함이 부각되며 동료들의 등뒤에서 칼질이나 하는 야비한 배신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온통 부서진 건물 안에 서 있는 인상 더러운 남자들의 무리. 들어오는 사람들이 겁을 먹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만 나가죠." 광법사의 행방도 알아냈고 더 이상 부셔진 건물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저하고 아에게는 마시장에 들러서 말을 살 테니 나머지 분들은 시장에서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 오세요." 엘란이 말하자 짝귀가 쭈뼛거리며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말 타지 말고, 걸어가거나 정령 타고 날아가면 안될까?" 짝귀는 맥그루의 청부를 받았을 때 처음 말을 타보고는 학을 떼었다. 허벅지 허리 엉덩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게 좋겠다." 아에게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감옥에서 탈출할 때나 집사의 집에 갈 때는 워낙에 몸이 약해져서 제대로 느끼지를 못했다. 다시 한 번 정령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저 혼자도 아니고 일곱사람이나 데리고 장거리 비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가능하다 해도 광법사와 싸워서 나탈리를 구해야 하는 지금 입장에서는 몸을 지치게 만들 수 없어요. 말을 타고 쫓아가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엘란이 단호하게 말하자 하이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간이 없다. 아이는 미치광이 손에서 빨리 구해내야 한다." 그들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콜록, 콜록!" 작은 기침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한 겨울의 여행은 저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무리한 일이어서 감기에 시달리는 아이가 속출했다. 나탈리는 눈을 꼭 감고 담요를 움켜쥐었다. 소녀는 일년 전의 행복했던 때를 떠올렸다. 엘란과 함께 살던 때가 나탈리로서는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 작은 가슴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절은 천천히 흘러갔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던 행복은 여우비처럼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오빠!" 곧 온다고 떠났던 오빠는 소식이 없었다. 짝귀나 그린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엘란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탈리는 오빠가 오기를 매일 기다렸다. 시로 들어오는 성문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고, 혹시나 배를 타고 올까 해서 항구를 서성거린 적도 많았다. 오빠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매일 지고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엘란은 소식이 없었고, 소박하던 나탈리의 행복도 어느 날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수많은 병사들이 집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이들이 엄마를 화형시키던 것처럼 자신도 태울 것 같았다. 나탈리는 그들이 자신들을 악마의 추종자라고 불렀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전도 없었고, 지고신자라는 말은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는데 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의문만이 작은 가슴에 가득했다. 다행히 화형은 면했지만 팔려 간 곳은 감옥보다 더욱 끔찍했다. 돼지우리 같은 장소에 100명도 넘는 아이들이 우글거렸는데, 하루에 한 명씩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행복한 곳에 갔을 거리고 애써 마음을 다 잡는데 술에 취한 일꾼이 하는 소리는 나탈리를 벼랑으로 밀어버렸다. "흐흐흐, 고 것들 맛있게 생겼네. 곧 솥으로 들어가서 푹 삶겨지겠지."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그 소름끼치는 음성과 내용들. 나탈리는 지목을 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얼굴에 오물을 잔뜩 묻히고 구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지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시 팔린 곳은 더욱 무서웠다. 비쩍 말라서 해골처럼 생긴 무서운 노인이 자신들을 훑어 볼 때는 소름이 돋았다. 돼지우리로 끌려가 솥에 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 때 보다 더욱 무서웠다. 노인의 수하들도 그 노인을 무서워했다. 감히 눈을 맞추려는 자도 없었다. 나탈리는 잠에서 깰 때마다 극심한 공포에 떨었다. 처음 100명이 넘던 아이들이 자고 일어나면 줄어 있었다. 누가 말을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애들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이 사람도 아이들을 삶아 먹을려고 데리고 다니는 걸까? 깰 때마다 줄어드는 아이들, 악마처럼 보이는 무서운 노인. 나탈리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꼭 다문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나탈리는 속으로 엘란을 불렀다. 제발 여기서 구해달라고. 두두두두! 여덟 필의 말이 가도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말이 달릴 때마다 메마른 땅에서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좀 쉬었다 가자!" 하이론이 힘들어하는 일행들의 기척을 느끼고 말의 고삐를 채며 말했다. "저기까지 가서 쉬죠." 엘란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었다.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선 소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천하를 내려다보는 제왕의 풍모가 있었다. 주변에 작은 잡목들밖에 없는데 그런 큰 소나무가 어떻게 자랄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선객이 있었군." 높이가 5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 아래에는 망토로 전신을 가린 두 명의 사람이 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쟝이 그 사이를 슬쩍 끼어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 춥다. 댁들은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으아!" 두 손바닥을 펼쳐 모닥불을 쬐며 말을 걸던 쟝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서 날아갔다. "아이구! 나 죽네." 땅바닥에 거칠게 나뒹군 쟝이 허리를 움켜쥐고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같이 투닥거리며 정이 든 하이론이 지팡이를 움켜쥔 채 둘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하이론의 옷깃을 엘란이 잡았다. "놔두세요. 그 엘프들입니다." 엘란의 얘기를 들은 아에게가 기대에 가득 찬 시선을 엘프들에게 던졌다. 말릴 사이도 없이 아에게, 그린, 짝귀, 들창코, 밤톨이 다가가는데 땅바닥이 뒤집어지며 그들을 덮쳤다. 퍽! 다섯명이 흙더미를 뒤집어쓰고 뒤로 넘어갔다. 경고의 의미가 강했는지 별다른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누런 흙을 뒤집어써서 몰골은 엉망으로 변했다. 쟝이 다가오며 투덜거렸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자기들 땅이라도 되나 가까이 접근도 못하게 하네." "그냥 여기서 쉽시다." 뜨거운 태양 볕에 그늘이 필요한 여름도 아니어서 꼭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엘프들에게서 20,30미터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란이 카사 셋을 부르자 금세 따뜻한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아에게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서 엘프들을 힐끔거렸다. 그린은 쉬지 않고 말들에게 건초를 먹이고 있었다. "엘란, 한 방 먹여주지 그래." 쟝이 은근한 목소리로 권유를 했다. "싸우면 저희가 불리합니다." 엘란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던 밤톨이 깜짝 놀라 말했다. "저 엘프가 그렇게 강해?" 엘란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예, 아주 강합니다." "엘란이 싸우면 져?" "경매장에서 싸울 때를 생각해 보면 저하고 실력차이는 그리 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싸우게 되면 저 여자엘프도 참견을 할 테고, 그녀를 상대할 사람이 저희들한테는 없습니다." "저 인상 더러운 영감이 맡으면 안 될까?" 아에게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는 게 하이론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원체 아에게의 목청이 컸던 것이다. 하이론의 얼굴이 떫은 감 먹은 표정으로 변했다. 손이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몽둥이를 꺼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쟝은 좋은 구경하겠다 싶어서 싱글거렸다. "저 여자엘프 강합니다. 하이론은 상대가 안 될 겁니다." 그 소리에 하이론의 자존심이 더욱 구겨졌다. 아에게를 두들기겠다는 생각도 잊고, 엘프들을 노려보았다. "누가 이길까 한 번 해볼까?" 엘란이 얼른 하이론 옆으로 가서 소매를 붙잡고 말리는데 쟝이 입을 열었다. "거기 엘프 아가씨 이리 와서 이바구나 좀 합시다." 몸이 따뜻해지자 슬슬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다. 엘란이 얼굴을 찡그리며 쟝을 노려보는데 한 명의 엘프가 순순히 일어나서 다가왔다. "어어!" 엘프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자 놀란 아에게와 짝귀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오는 동안 엘프, 엘프 노래를 하더니 막상 다가오자 겁이 난 모양이다. 아에게와 명목만 용병대의 대원인 그린 등이 엘란의 등뒤로 가서 섰는데 눈은 잔뜩 호기심에 차서 엘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엘프는 천천히 망토에 달린 모자를 넘겼다. "헉!" "아!" 엘란과 하이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입을 벌리고 멍하니 엘프를 바라보았다. 아에게는 쟝의 엘프에 대한 묘사를 반쯤은 허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본 바로는 허풍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묘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쟝의 경망스러운 입이 열렸다. "아가씨, 인간남자랑 사귄 적 있소? 내가 이래 뵈도 인간사회에서는 최고의 풍류남으로 롬바르드에서 쟝이라면 모르는 아가씨가 없었....." "한 번만 더 나한테 말을 걸면 그 입을 찢어주겠다." 예쁜 입에서 등골이 서늘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말투도 차가워서 한 겨울의 북풍보다 더욱 싸늘했다. 쟝은 쫄아서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말투 뿐 아니라 엘프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세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한 마디만 더 말했다간 정말로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엘란의 뒤에서 엘프를 관찰하던 다섯 명도 같이 얼어붙었다. "왜 우리를 쫓아오는 거죠?" 엘란에게는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그는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당신들을 쫓는 게 아닙니다. 광법사를 쫓는 거지." "당신이 경매장에서 찾은 것은 나탈리라는 여자아이 아니었나요?" "그 아이를 광법사가 데리고 갔소." "그 이유뿐인가요?" 엘프가 의심스러운지 거듭 확인을 한다. "그 이유 뿐이요." 엘프는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엘프의 발목을 엘란의 음성이 붙들었다. "나도 질문하나 합시다. 바샤라의 돌이 뭐요?" 엘프가 엘란의 의도를 알아내겠다는 듯 물끄러미 눈을 들여다보았다. 엘란의 검은 눈은 깊숙히 가라앉아 있어서 의도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대답은 소나무아래에 앉아 있던 엘프에게서 나왔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바샤라의 돌에 대한 관심을 버리는 것이 좋을 거다." "나도 돌에는 관심이 없다. 광법사가 그 돌로 뭘 하려는 지와 그게 나탈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 될 뿐이다." "걱정할 것 없다. 돌은 우리가 곧 회수할 것이다." "회수? 원래 당신들 소유물이란 말인가?" "바샤라의 돌은 대대로 엘프의 소유물이다." "그럼 어떻게 인간세상으로 흘러 들어왔지? 엘프의 숲은 결계도 결계지만 당신들이 워낙 굳게 지키고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간이 부은 사람들은 없는 걸로 아는데."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하이론이 말했다. 이 일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많이 얽혀 있었다. 돌에 흥미가 일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광법사가 어떤 심각한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예감이 하이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랜 세월 세상을 살아 온 마법사의 경륜은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알 필요는 없다. 돌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당신들만으로 광법사에게 돌을 뺏을 수 있을까?" 엘란이 도발적으로 말하자 소나무아래에 앉아 있던 엘프의 몸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떨렸다. "내가 하찮은 인간따위에게 질 거로 보이나?" 엘프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광법사를 무시하지 마라! 그는 전체 인간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다. 당신이 나와 싸울 때의 실력이 최선을 다한 것이라면 광법사와의 승산은 많이 잡아도 반반이다. 내가 둘 다 싸워 본 바로는 당신과 광법사의 실력 차이는 비등하다." 여자엘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엘란의 실력은 경매장에서 익히 실감했다. 광법사의 실력이 그 정도라면 일을 처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게 뻔했다. "제가 가세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생각과는 다르게 말은 강하게 나왔다. "대제의 무덤에서 무더기로 죽기는 했지만 광법사 밑에는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실력이 아가씨, 아가씨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가씨 발목을 잡을 사람들은 넘칩니다." 엘란은 하이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대제의 무덤에서 얼마만큼의 제자들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삼십명은 넘을 겁니다. 하이론만한 마법사들 삼십명이 아가씨한테 덤빈다면 아가씨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엘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승산은 광법사 쪽에 있습니다." 이제 엘프의 안색은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눈치 없는 들창코까지 알아챌 정도였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전 반드시 나탈리를 구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광법사와 제자들이 버겁습니다." "힘을 합치자는 말입니까?" 엘란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서로의 목적이 다르니 힘을 합쳐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당신들은 바샤라의 돌을 가지고 저희는 나탈리를 구하는 겁니다." 엘프의 얼굴에 솔깃한 표정이 나타났다. 엘란의 제의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서 그녀는 제의에 대해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남성엘프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비천한 인간들과 힘을 합칠 생각은 없다." 그는 한 마디 던지고 일어서서 길을 따라 사라졌다. 여성엘프가 한 숨을 쉬었다. "합작은 안 되겠군요. 어쩌면 우연히 같이 싸울 수는 있겠지요." 엘프가 마지막 끈은 끊지 않았다. 엘란은 이 엘프가 자신의 제의를 호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제 이름은 엘란입니다." "제 이름은 아리아나에요. 그리고, 제 동행은 시리우스라고 합니다." 엘프는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시리우스의 뒤를 따라 사라져 갔다. "짵! 시리우스라는 놈 더럽게 건방지네." 아리아나의 차가운 거절에 마음이 상한 쟝이 바닥에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엘란, 인기 좋다." 아리아나가 자신을 제치고 엘란과 대화를 나눈 것도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화를 나눈다면 인품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당연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건수가 생길 수도 있고, 마음이 맞는다면....... 쟝이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말에 올라타서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가자!" 하이론은 쟝을 한심하게 한 번 보고는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말을 몰았다. 그 덕에 쟝은 먼지를 뒤집어 섰다. "같이 가요!" 쟝의 다급한 음성이 황량한 벌판을 떠돌았다. 급히 일행을 따라붙은 쟝은 엘란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아리아나에게 집적거렸다간 에쉴리에게 다 이를 거다." 엘란은 기가 차서 쟝을 보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투가 꼭 자기 애인에게 집적거리는 치한에게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하이론도 옆에서 말을 달리며 빙글거렸다. "엘란, 나도 에쉴리에게 이를 거다." "하이론까지 왜 이래요!" 엘란이 펄쩍 뛰는데 아에게와 그린등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나도 이를 거다. 엘프에게 빠져서 헬렐레 했다고." 용병대원들도 엘란 혼자서만 아름다운 엘프와 대화를 나눴다고 불만이 많았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엘란의 고함이 차가운 북풍에 날리는 말갈기를 휘감고 사라졌다. 엘프와 만난지도 이주일이 흘렀다. 소나무 아래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에는 더 이상 엘프를 만나지 못했다. 아에게는 막상 만나면 엘프들의 차가운 기세에 눌려 한 마디도 못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엘프들을 찾아 머리를 돌렸다. 계속되는 강행군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특히 참을성 없는 쟝의 불평이 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워낙에 고생들을 많이 하고 자라서 이런 고생은 충분히 참아낼 만했다. "헉헉! 좀 쉬었다 가자!" 쟝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쯧쯧쯧! 수십년 간 기사 수업 받은 놈이 체력은 소매치기 출신보다 더 형편없으니." 하이론은 한심하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조금만 더 가면 핀보그시가 나오니 거기서 묶으면서 광법사의 진로를 수소문해 봅시다." 엘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면서 말했다. 광법사의 진로가 코르도바습지대로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곳으로 샐 지도 모르는 지라 확인을 하면서 쫓아야 했다. "먼저 가! 난 도저히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광장에서 제일 가까운 여관에 묶을 테니 천천히 따라오세요." 엘란은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쟝은 금새 뒤떨어 졌다. 그는 말을 느릿느릿하게 몰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제법 잘 닦인 가로 위로 몇 대의 마차들이 지나쳐 갔다.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가 조용하게 퍼져나가는 무료한 오후였다. 날만 따뜻했다면 말 위에서 잠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으암!" 쟝은 두 팔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얼마나 크게 하품을 했는지 눈물을 찔끔 흘렸고, 입을 너무 크게 벌려서 턱이 아파왔다. 뭔가 자극적인 걸 찾아 두리번거리던 쟝의 눈에 강렬한 빛이 났다. 쟝은 앞에서 신관의 복장을 한 여성이 걷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쟝은 천천히 신관복장을 한 여자의 뒤를 쫓았다. 푸른색의 신관복은 허리와 밑단 소매에 흰줄을 둘렀는데 뒷모습만으로는 기가 막혔다. 걸을 때마다 실룩거리는 엉덩이가 쟝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쟝은 말의 속도를 약간 높여 여자를 앞질렀다. 안 보는 척하며 살펴본 여자의 외모는 꽤 쓸만했다. 약간 튀어나온 이마와 각진 턱이 상당히 고집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만하면 신녀 치고는 꽤 볼만한 외모였다. 특히 도도하게 보이는 갈색 눈이 에쉴리를 연상시켰다. 가슴에 금색 실로 수놓아져 있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볼 때 바룬신을 섬기는 신녀가 분명해 보였다. 쟝이 힐끔거리는 대상이 된 바룬신의 신녀 케이티 엘리는 기분이 나빴다. 한 눈에 보기에도 바람둥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내의 음흉한 시선이 느껴지자 온 몸에 징그러운 송충이가 스물 스물 기어가는 것 같았다. 가끔씩 쏘아주는 눈길에도 불구하고 축축한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아래위로 구석구석 전신을 쓸어 보는데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바룬신을 섬기는 신녀의 입장에서 겨우 참고 있는데 느끼남이 말을 걸어왔다. "추운데 어디를 가십니까?" '내가 어딜 가든 니가 무슨 상관이냐!' "부끄럼을 많이 타시는 군요." '그만 집적대로 꺼져줄래!' "그렇게 걸으시면 다리 아프시겠습니다.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그냥 가라는 눈치를 수 차례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남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신관복을입은 신녀에게 수작을 걸어오는 사람은 이 놈이 처음이었다. 어디서 이런 망종이 나타났나 싶었다. "저는 괜찮으니 가시던 길 가십시오." 케이티는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그러지 말고 타세요." 쟝은 말에서 내려와 케이티의 손목을 덥석 쥐며 말로 끌었다. 축축한 쟝의 손이 손목에 닿는 순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며 살심이 치솟았다. 이 더러운 놈이 잡은 부위를 끊어내고 싶었다. 파직! 갑자기 쟝이 잡은 손목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쟝은 저릿한 감각에 놀라 손을 떼었다. 한 순간 오른팔이 마비되며 감각이 없었다. 케이티가 가벼운 신성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젊은 여자가 신성마법을 사용할 지 몰랐던 쟝의 눈이 부릅떠졌다. '젠장! 요새는 되는 게 없다니까.' "더러운 놈! 어디 한 군데 부러지고 싶은 것이냐?" 그녀는 차가운 시선과 냉정한 말투는 엘프 아리아나를 연상시켰다. 케이티는 신전에 몸담기 전에 백작가의 영애였다. 그런 귀한 신분으로 쟝같은 무뢰한에게 손목이 잡혔으니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크게 참은 결과였다. 쟝에게는 운수 대통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케이티가 바룬신의 품으로 들어간 것은 아버지가 추진한 정략결혼 때문이었다. 귀족가에서 엄한 교육을 받은 그녀는 웬만하면 아버지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 귀족가에서 정략결혼은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랑 될 사람에 대한 예기를 듣는 순간 그런 마음은 삼천킬로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혼담이 오가는 드미트리후작가의 후계자 델로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흔히 시중에서 말하는 바보였다. 드미트리후작이 원하는 것은 델로의 씨를 받아줄 똑똑한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드미트리후작의 지원을 받고 싶었고, 자신의 외손자가 후작가를 잇기를 바랬다. 케이티는 평생 바보와 살면서 그 씨나 받아줄 그릇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신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케이티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사람들을 속였다. 케이티가 바룬신의 신전에서, 전날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꿈을 꾸며서 말하는 순간 꿈 그대로 하늘에서 유성이 쏟아져 내렸다. 이 일화는 세속화한 바룬신의 사제들에 의해서 부풀려져 스트빌라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케이티는 뜻을 쉽게 이룰 수 있었고, 신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케이티는 야망이 컸다. 신녀에서 머물기보다는 사제 대사제의 지위에 올라 수많은 성직자들의 정점에 서보고 싶었다. 백작가에서 화장이나 하고 예쁜 옷을 고르는 동안에는 자신에게 이런 야심이 감춰져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다니는 수행 중에 이런 망나니를 만날 줄이야! 쟝은 점점 차갑게 변하는 신녀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날벼락을 뒤집어쓸 것 같았다. 그는 잽싸게 말에 올라 말의 배를 힘껏 찼다. 히히힝! 말이 두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힘차게 뛰어 나갔다. 어느 정도 멀어져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야! 이년아!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어라!" 쟝은 괴상한 욕을 던져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버렸다. 그녀는 참고 참고 또 참아서 살려 보내 준 치한이 욕을 하며 달아나자 너무 화가 나서 귀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홀리 라이트링!" 쟝의 지나간 자리에 푸른색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쟝은 간발의 차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위험을 피하고 보자 괜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여러 번 격었지만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모면해 왔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쟝은 커다란 벌집을 쑤신 셈이었다. 쟝은 이 여자와 다시 만날 줄은, 그리고 이 날의 행동으로 죽도록 얻어맞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행동이 피를 부른다. 부지런히 말을 달린 결과 두 시간 후에는 핀보그시의 광장근처에 위치한 여관에서 일행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냐? 왜 그렇게 싱글벙글이냐?" 아까는 죽는소리를 늘어놓던 쟝이 기분이 좋아 보이자 하이론이 물었다. "영감은 몰라도 돼." 쟝은 싸가지 없는 말을 한 마디 내뱉고는 저녁을 주문했다. 하이론도 그다지 궁금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쟝의 버릇없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해서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엘란과 일행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코르도바습지대에 대해서 아는 것 없습니까?" 검은 빛깔이 도는 핀보그 특유의 흑맥주를 앞에 두고 엘란이 물었다. 그는 맥주를 마시지는 않고 두 손으로 잔을 만지작거리며 몽환적 시선으로 거품이 이는 맥주를 바라보았다. 맥주에서는 연신 기포가 올라오며 주당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스트빌라이에는 별로 와 본적이 없어서 대략적인 상황이외에는 모른다." 하이론도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아시는 거라도 설명해 주세요." "내가 아는 건 단편적이다. 파르미나고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지? 그 고원에서 여섯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데 세 개는 동쪽으로 흐르고 세 개는 서쪽으로 흐른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 중에서 둘은 멀리 바다까지 다다르는 데 반해 보르딕강은 중간에서 끊긴다. 그 강이 흘러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습지가 코르도바습지다." 아에게는 하이론의 말을 관심 있게 듣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생각나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거 이상하네요. 파르미나고원이라면 여기서 북쪽 아닙니까? 코르도바습지도 당연히 여기서 북쪽지방이고. 제가 듣기로 코르도바습지는 밀림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거기서 열대기후가 나타나는 거죠?"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엘프들의 숲이나 훈 초원 너머의 사막처럼 불가사의한 일이다. 마법사나 현자들도 예전에 포기한 사항이다." "내가 듣기로는 신들의 작품이라던데." 빵을 찢어 입에 넣으며 쟝이 말했다. "알 지 못하는 일은 뭐든지 신과 결부시키는데 그런 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체! 꼭 철학자처럼 말하네. 그보다 광법사는 왜 거기로 가는 거지?" "그 미친놈 속을 어떻게 알겠냐." 하이론도 이유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긴, 근데 코르도바습지대는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괜찮을까?" "위험해도 할 수 없습니다. 나탈리가 있는 한 반드시 가야합니다." 엘란의 단호한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끊어지고, 저마다 잔을 기울여 목을 적셨다. 흑맥주 특유의 씁쓸한 맛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엘란도 맥주와의 눈싸움을 끝내고 잔을 드는데 문이 열렸다. 끼이익! 외투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쓴 두 명이 찬바람을 피해 여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 헤져 너덜거리는 소매를 봤을 때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요새는 전신을 가리는 게 유행인가 보지." 쟝이 그들을 힐끗거리더니 한 마디 던졌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여 카운터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루 묶어 가는데 얼마나 듭니까?" 행주로 잔을 훔치던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식사제공까지 합해서 1실버요." "잠만 자고 갈 테니 좀 깍아 주십시오." "5브롤 더는 안 돼." 주인으로 보이는 카운터의 남자는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인정이 많았다. "감사합니다." "공짜로 묶는 것도 아니고, 고마울 것 없수다." 주인은 그들을 난로가로 안내하더니 따끈한 스프를 내왔다. "돈은 안 받을 테니 맛있게 드시오." 새로 들어온 두 명의 손님은 스프를 허겁지겁 먹었다. 한 눈에 봐도 많이 굶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쾅! 누가 발로 걷어찼는지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문이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요란하게 등장하는 것은 영주의 자치대뿐이었다. 말로만 자치대지 주민들에게는 도둑들 보다 더한 행패를 부렸다. 해가 떨어지자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십여명이 넘는 자치대의 병사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난로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 춥다. 이봐 저리 비켜." 아에게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병사가 난로 옆 탁자에 앉아 스프를 먹는 사람들을 밀쳤다. 쿠당탕! 스프를 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나뒹굴었다. 스프는 모두 먹어서 뒤집어쓰는 횡액은 면했지만 넘어지면서 충격을 받은 듯 바닥에서 한 동안 끙끙거렸다. "이거 뭐야." 또 다른 병사가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걷어차려 했다. "악!" 병사의 거센 발길에 채인 사람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전신을 가린 외투가 벗겨지며 외모가 드러났다. "곱추잖아!" 외추가 벗겨지며 드러난 남자는 등이 낙타의 혹처럼 부풀어 오른 곱추였다. "여보!" 다른 한 명의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남자를 붙들고 비명을 질렀다. "곱추를 보면 재수 없다던데...." 처음 둘을 밀친 덩치 큰 병사가 중얼거리자 남자를 걷어찬 병사가 두 팔을 걷어 부쳤다. "쫓아내 버리자." 병사는 남편을 부둥켜안고 우는 여자의 외투를 잡아 당겼다. "곱추 데리고 여기서 꺼져!" "어라!" 난로가에 모여서 두 명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던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누라도 꼽추잖아!" 부부는 둘 다 꼽추였다. 병사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주변에 몰려 부부의 등을 쿡쿡 찔러댔다. 여자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봐! 이런 여자하고 밤에 일은 어떻게 치를까?" "여자가 올라타면 되잖아." "안 돼! 둘 다 꼽추잖아." "그럼 어떻게 하지?" 병사들은 부부의 주변에 둘러서서 시시덕거렸다. "니들 밤에 일은 어떻게 치르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지 덩치 큰 병사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아에게가 일어서려는데 하이론이 소매를 붙들었다. "지고교의 교도나 엘란이나 더 이상 엘리오트에서는 살 수 없다. 스트빌라이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진다." 아에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요상하게 변했다. "끙!" 아에게는 거센 콧김을 뿜으며 자리에 앉았다. 수 차례 목숨을 구해준 엘란에게 해가 가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엘란은 여전히 술잔을 들고 맥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맥주에 한이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 병사의 의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쟝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땅에 등의 혹 만한 구덩이를 파고 여자를 눕히면 되잖아!" 쟝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의기양양해서 외쳤다. 수많은 체위를 연구하고 연습한 쟝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었다. 병사들도 감탄했다. "이야! 그런 수가 있었구만." "형씨 대단한데." 쟝이 의기양양해 할수록 일행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좀 있다 손 좀 봐줘야겠다.' 하이론이 점차 결심을 굳혀 가고 있을 때 병사들의 희롱이 더욱 심해졌다. "이 여자 배 좀 봐! 더럽게 볼록하다." 병사가 더러운 군화로 여자의 배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살이 찐게 아니라 임신한 거 아냐?" 병사의 말이 떨어지자 붉게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덩치 큰 병사가 공포에 질린 여자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렇구만! 도망자였군."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여자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울음 섞인 음성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저 여자 왜 저래요?" 밤톨이 하이론에게 물었다. "음!" 하이론은 침음성을 발했다. 대답은 쟝의 입에서 나왔다. "스트빌라이의 전대 황제가 발표한 법률 때문이다. 그 법에 의하면 꼽추같은 기형인이나 불구자, 전염병자, 하이론같이 얼굴이 특히 흉악한 자는 자식을 낳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무슨 그런 법이 있어요." 밤톨이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원래 스트빌라이 사람들이 외모를 중요시해서 그래." 말을 마친 쟝은 짝귀 밤톨 들창코를 차례로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하이론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여기도 자식 못 낳을 사람 넷이나 있네. 하이론이 스트빌라이에 몇 번 안온 이유가 있었구만." 쟝은 제 딴에는 농담이라고 던진 것이 일행들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스릉! 덩치 큰 병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꼽추가 애를 가졌으니 즉결처형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사내가 병사의 말을 듣고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저희들은 스트빌라이를 떠나는 길입니다." 병사는 검면으로 사내의 머리를 툭툭 쳤다. "맨입으로는 곤란하지." 남자는 바지춤에다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내더니 떨리는 손으로 병사에게 바쳤다. "더럽게 거기다 돈을 넣냐." 덩치 큰 병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꺼집어 냈다. ".....?"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에 들려진 것은 동전 열두 개가 다였다. "이 새끼! 내가 거지로 보여." 병사는 돈을 바닥에 뿌리며 사내의 이마를 걷어찼다. "억!" 바닥에 널부러진 사내가 감싼 이마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모두 죽여버려!" 덩치 큰 병사가 외치자 나머지 병사들도 검을 뽑아들고,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부부에게 향했다. 벌컥벌컥! 엘란은 맥주와의 눈싸움에서 이겼는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단숨에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꺼져!" ".....?" "......" "......" 여관의 일층에 마련된 식당 안에 일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보고 한 소리야?" 처음 남자를 걷어찼던 병사가 으르렁거렸다. "열까지 세겠다. 그 사이 꺼져라." "오늘 일진 왜 이래! 꼽추 다음에는 미친놈이야!" 병사가 한탄하듯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열, 아홉, 여덟......." 엘란은 속삭이듯 숫자를 세어나갔다. "아이구! 무서워 죽겠네." 덩치 큰 병사가 과장된 행동을 보이자 병사들 사이에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 사이 숫자는 일까지 내려왔다. "일!" 병사들은 엘란이 어떻게 나오나 싶어서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 사이에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엘란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가락을 쫘악 폈다. "실프!" 병사들의 앞이 투명하게 일렁거리더니 길쭉한 무엇인가가 튀어 나았다. "큭!" 비명도 크지 않았다. 억눌린 신음이 주변을 맴돌았다. 십여개의 실프들이 길쭉하게 늘어나 병사들의 목을 꼬치 꿰듯 꿰어 버렸다. 엘란의 손에서 튀어나온 하얀 실같은 것들이 실프와 연결되어 있었다. 슉! 쿵쿵! 실프들이 목에서 빠져 나와 사라지자 병사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이론, 저 사람 좀 봐주세요." 남편은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멍한 시선으로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이론은 사내의 이마를 꼬매주고 포션을 발라주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회복하는 물약을 먹였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훈족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엘란이 묻자 남편보다 먼저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아내가 조용하게 대꾸했다. "훈족! 그 야만족들의 땅으로 갔다간 위험할 텐데." 하이론은 이 부부가 걱정이 되었다. "여기보다는 났겠지요." "갑시다. 같이 갈 수 있는데 까지는 데려다 주리다." 하이론과 아에게가 부부를 부축하고 여관을 나섰다. 병사들을 죽여놓고 여기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엘란은 여관의 주인에게 10골덴을 건넸다. "귀찮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소, 내 평소에도 저 놈들 행패에는 진절머리를 치고 있었다오." 여관 주인은 호탕하게 말했다. 엘란과 아에게용병대가 나가자 여관에는 맥주잔을 든 쟝만이 남았다. "젠장! 오늘은 편하게 쉬어 보나 했는데." ----- 14장. 코르도바습지 코르도바습지대와 가까워지자 날이 점점 더워졌다. 겨울은 당연히 추워야 한다. 추위가 한 풀 꺽이기는 했으나 겨울이 지나려면 아직 멀었다. 날이 따뜻해지자 몸은 편안했지만 마음은 불안으로 물들었다. "여기서 헤어져야 겠군요." 두 갈래 갈림길 앞에서 엘란이 꼽추부부에게 말했다. 코르도바습지로 가려면 오른쪽 길로 움직여야 하고 훈대평원으로 가려면 왼쪽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남편은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의 마부석에 앉아 말을 조정하고 있었고, 아내는 뒤에서 누워 있었다. 빠른 여정과 임산부의 건강을 염려해 하이론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훗타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 부부의 이름은 남편은 훗타, 아내는 루시라 했다. "훈대평원에 가면 아시는 분은 있습니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생 땅만 파온 무지렁이가 그 먼 타향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럼 어째서 훈대평원으로 가시는 겁니까?"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아에게가 물었다. "훈족의 대족장이 스트빌라이에서 쫓겨난 우리 같은 기형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꼽추부부는 생명의 은인인 엘란의 일행들에게 지극한 공경으로 대했다. "훈족의 대족장이라면 십존의 일인인 백법사 타클마칸 아닙니까?" 아에게가 하이론에게 물었다. "백법사가 왜 이런 기형인들을.....미안합니다." 하이론이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다 훗타부부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면전에다 대고 기형인이라고 하는 것은 실례인 것이다. "괜찮습니다." 평생을 꼽추라고 멸시받으며 살았던 훗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엘란은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때까지 만난 십존들은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광법사 일레이저는 물론 길라드, 시드, 빌바도, 하나같이 괴상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높은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그러한 편집증적인 면이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선 막스나 시드와 당당히 맞섰던 자신도 일반인들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까지 십존과의 유쾌하지 못했던 만남을 떠올려 보면 타클마칸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불쌍한 꼽추부부가 백법사 타클마칸의 부족으로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엘란은 일단 만류해 보기로 했다.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훈족이나 타클마칸이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저도 불안하기는 합니다만......달리 갈 데가 없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을 환영할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훗타와 루시는 다시 한 번 엘란일행에게 감사를 표하고 왼쪽 길로 접어들어서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엘란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훗타부부의 품속에 50골덴을 넣어주는 것 밖에는. "백법사에 대해서 아시는 것 있습니까?" 엘란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이론에게 물었다. "흰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명칭을 봐서 알겠고. 작은 부족에서 태어나 훈대평원을 거의 통일한 인물로 훈족들 사이에서는 제이의 대제라고 불린다. 아직 몇몇 부족들이 저항을 한다마는 조만간 모든 부족들이 타클마칸의 수중에 떨어질 게다. 능력만큼이나 야심도 커서 스트빌라이가 전전긍긍한다고 하더라." "야심이 큰 인물이라......" "어쩌면 전쟁을 준비하는 지도 모르겠다." 엘란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는 가운데 말을 해나가며 생각을 정리하는 하이론의 얼굴도 점점 심각해졌다. "그렇구나! 어쩌면 침략을 위한 사전준비로 스트빌라이가 핍박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런 사람들을 어디다가 쓸려고요." 아에게가 의문을 표시하자 그린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게 볼 게 아닌 것 같다. 훗타부부같은 사람들이 몰려가면 전략적 요충지나 정확한 지형같은 스트빌라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아 낼 수 있으니 훈족의 입장에서는 손해가는 장사는 아닌 것 같아."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일행의 의문은 하나의 실체를 드러내며 명료해졌다. "훈족이 하나로 통일되는 날 전쟁이 터지겠군요." "아마 그럴 거다." 엘란이 한탄하듯 말하자 씁쓸한 하이론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훈족은 항상 풍요로운 스트빌라이의 땅을 동경해 왔으니 힘이 생긴다면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 가죠!" 대화의 내용이 쟝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듯 재촉을 한다. 하이론을 필두로 일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란은 선두에서 움직이는 하이론의 옆으로 말을 몰아 바짝 붙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교도들의 안식처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냐?" "훈족과 스트빌라이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참전하는 대가로 교도들이 살만한 땅을 떼어달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음!" 하이론은 말을 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함부로 대답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스트빌라이는 기존 종교의 입김이 강하니 막다른 궁지에 몰리지 않는 한 지고와 손을 잡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궁지에 몰려서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정상이 아닌 자국민들까지 핍박하는 걸로 봐서는 배신을 할 확률이 농후해 보인다. 훈족은 원시종교의 성격이 강해서 지고를 꺼리지는 않는 다만 워낙에 흉포한 자들이니 마찬가지로 약속을 지킬지는 의문이다." 하이론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뺀질뺀질한 스트빌라이인이나 흉포한 훈족이나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문제는 나중에 상황을 봐가면서 더 생각해 보죠." 엘란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교도들이 살만한 땅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대륙에서 사람이 살만한 곳은 모두 주인이 있었고, 당연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전쟁 같은 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훗타부부와 헤어진 후 일행들은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 덕분에 해가 자취를 감추기 전에 트레비시로 들어설 수 있었다. 트레비는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발전한 귀족들의 휴양지로 엘리오트의 니즈와 함께 이대휴양지로 손꼽히고 있었다. 이건 다 코르도바습지대의 특이한 기후와 관련이 있었다. 한 겨울에도 따스한 날씨로 인해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고, 곳곳에 화려한 별장들이 그 사치함을 뽐내고 있었다. 귀족들은 겨울에 트레비의 별장에서 지내고 봄이 오면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곤 했다. 트레비는 도로부터 달랐다. 바닥은 가로 세로 30센지 정도의 청석들이 깔렸는데 마차 넉 대가 동시에 다녀도 될 만큼 넓었다. 아직도 겨울옷을 입고 있던 일행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더워 죽겠네. 어디 여관이라도 들어가서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자." 소매를 들어 연신 이마를 훔치며 쟝이 말했다. "우선 용병길드에 들른 후에 숙소를 정하죠." 엘란이 용병길드에 먼저 들르자고 말하자 웃옷을 벗어 들고 땀에 전 속옷을 펄럭거리며 쟝이 말했다. "용병길드엔 무슨 일로?" "광법사의 행방도 물어보고 코르도바습지를 잘 아는 안내인도 구할까 해서요." "나탈리 별로 안 이쁘다며?" 쟝은 이때까지의 대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탈리가 왜 안 이뻐?" 나탈리를 끔직하게 여기는 짝귀가 반발하고 나섰다. "귀엽기는 해도 미인은 아니라면서?" "그렇긴 하지." 아에게가 긍정을 표시하자 쟝이 엘란에게 물었다. "미인도 아니고, 친동생도 아니라면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하며 찾아다닐 필요 있을까?" 쟝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엘란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고, 그 바람에 찔끔한 쟝은 고개를 숙였다. 엘란의 눈빛은 매서워서 옆에 있던 하이론마저 움찔하게 만들었다. "나탈리는 제 동생입니다." "미안하다. 내가 실언을 했다." 쟝은 엘란의 시선을 받고 안절부절못했다. 하이론은 엘란이 노려보기만 하면 꼬리를 내리는 쟝이 신기했다. 그는 엘란이 정색을 하고 노려보는 시선을 받아 보지 못해서 그 눈빛이 얼마나 사람을 쫄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엘란이 하이론을 노려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들유들하게 대들다가도 엘란이 한 마디 하면 순순히 물러서는 쟝이 신기하게 보였다. '눈빛에 약한가?' 하이론은 한 번 실험해 보기로 결심하고는 쟝의 얼굴에 머리를 디밀고 눈을 부릅떴다. "영감 노망났어? 왜 눈깔은 부라리고 지랄이야!" "......"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쟝의 왼눈에는 트레비시에 들어설 때만해도 없었던 시퍼런 멍이 생겨 있었다. "이야! 멋진데." 아에게는 용병길드 앞에 서서 탄성을 터트렸다. 트레비시는 최상류층들이 거주하는 곳이라 청석으로 덮인 넓은 도로, 길가에 늘어서 있는 이국적인 나무들, 높게 솟아 있는 고풍스런 석조건물들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병길드마저 이렇듯 멋들어지게 생겼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는 삼층석조건물의 외벽에는 붉은 벽돌들이 감싸고 있었고 그 위에는 고풍스러운 담쟁이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아에게가 생각하기로는 용병길드 건물이 삼층석조건물로 되어 있는 것은 트레비시가 유일할 것 같았다. 참나무로 만들어진 문에는 니스가 곱게 발려 있어 번들거렸는데 그 옆에는 흰색의 갑옷을 갖춰 입은 두명의 용병이 창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용병길드를 지키는 길드원들이 기사들처럼 풀 플레이트 메일을 갖춰 입는 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길드원들은 턱을 약간 당기고 있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에게는 그들에게 다가가 얼굴 앞에 손을 내밀고 손바닥을 펴서 흔들었다. 그들은 눈동자도 돌리지 않았다. "친구들, 대단한데 어떻게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지?" "......" "......"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는 사람들이 아에게의 물음에 대답을 할 리가 없다. "아에게, 자세히 봐라. 밀랍입형이다." 하이론의 말대로 경비를 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밀랍인형이었다. "정말 잘 만들었다. 깜빡 속았잖아!" 아에게는 멋적은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들어가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이론이 앞장을 섰다. 안에는 굉장한 수의 용병들이 모여 있었다. 십여개의 탁자에는 각각 대여섯명의 용병들이 붙어서 술을 마시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코르도바습지는 위험해서 야만인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왜 이런 많은 수의 용병들이 몰려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밖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 코르도바습지의 원주민들이 용병들을 고용할 리도 없고, 치안상태도 좋아서 귀족들이 용병을 고용할 이유도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아에게가 카운터로 쪼르르 달려가 질문을 던졌다. "친구, 여기에 왜 이렇게 용병들이 많지?" 아직도 자신은 용병대장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아에게는 용병들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히 살갑게 대했다. 그러나, 카운터의 용병은 덩치 큰 장한이 다가와 친구라고 친한 척을 하자 거부감이 들었다. '새끼가 언제 봤다고 친구야?' "일이 많으니까 많지." 용병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인 그렇게 많소?" 귀찮은 것은 질색하는 용병은 대거리를 안 하려다가 앞으로 다가오는 하이론의 흉악한 인상을 보고 생각을 돌렸다. "코르도바습지는 들어서 알겠지만 몬스터들도 종종 출현을 하는 위험한 곳으로 수련을 하는 기사나 모험을 원하는 귀족가의 철부지들이 자주 드나든다오. 자극과 위험을 즐기는 사람들도 꽤 많이 찾아오고. 거기다가 약재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소이다. 그래서 신변보호나 안내를 할 용병들이 많이 필요하오." 말을 놓다가 하이론의 인상에 쫄아서 말을 높이려니 어미가 이상해 졌다. 아에게가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이는데 엘란이 질문을 던졌다. "광법사의 행방에 대해 아시오?" 카운터의 용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이론이 용병의 손바닥 위에 금화를 하나 떨어뜨렸다. "삼일 전에 안내인을 고용해서 습지대로 떠났오." "안내인을 한 명 소개시켜 주시오." 하이론은 금화를 하나 더 떨어뜨렸다. 과외의 소득이 생기자 용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원주민을 소개시켜 줘도 되겠습니까?"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스트빌라이인지라 원주민이라도 괜찮은지 물은 것이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더니 부수입이 생기자 말도 공손해지고 없던 친절이 샘솟았다. 그래서 거절을 각오하고 가장 실력있는 안내인을 추천한 것이다. 엘란 일행은 그런 면에서는 전혀 꺼리는 것이 없었다. "상관없소." "잠시 기다리십시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용병은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원주민을 데리고 나타났다. "골고타라고 합니다. 요금은 일주일에 5실버이고, 수수료는 일골덴입니다." 안내인을 고용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소개료가 더 비쌌다. 완전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골고타는 엘란만한 키에, 흑인처럼 완전히 검은 것은 아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스트빌라이인과는 다르게 생겼다. 코는 넓적하고 평평했는데 은색의 금속으로 만든 코걸이를 하고 있었고, 귀에도 커다란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양 볼에는 마름모꼴의 문신을 새겼는데 그 안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일단 한 달 정도 고용하는 것으로 합시다." "돈부터 줘!" 하이론은 일골덴을 쥐어 주었다. "일이 끝나면 일골덴 더 주마. 내일 새벽 길드 앞에서 만나자." 골고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여관에 여장을 푼 일행들은 일단 몸부터 씻었다. 그 동안의 강행군으로 온 몸이 땀과 먼지로 절어 있었다. 시장에 들러 여름옷과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장만한-아에게와 대원들은 석궁과 숏소드같은 잡다한 무기와 보호구를 샀고, 쟝은 한동안 하이론에게 알랑거려 기어이 돈을 받아 내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일행들은 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한 잠자리였다. "으악!" 한 밤중에 돌아오는 쟝의 발에 면상이 밟힌 하이론이 고함을 질렀다. 다음날 일어난 쟝의 눈에는 멍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너 왜 밤에 들어와서 남의 얼굴은 뭉개고 그래?" 하이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지 용병길드로 향하면서 따지고 들었다. "쪼잔하게 왜 이래? 내 눈 이렇게 만들어 놨으면 됐지. 하여간에 밴뎅이 속이라니까!" 쟝은 두 손을 들어 푸르죽죽하게 죽어있는 양 눈을 가리켰다. "니가 맞을 짓을 하잖아! 그리고, 나갔으면 자고 들어올 일이지 왜 밤에 기어 들어와." "이게 다 영감 때문이야!" "그게 어째서 나 때문이냐?" "흥! 내가 영감 속 모를까봐, 내가 안 돌아오면 얼씨구나 하고 떠날 거 아냐?" 그 말이 맞는 모양인지 하이론은 쟝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 한마디하겠다. 너 왜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거냐?" 쟝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걸 몰라서 물어! 나 혼자 나다니다 현상금사냥꾼한테라도 걸리기라도 하면 당장 목이 떨어질 텐데. 게다가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겠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배운 게 있어 기술이 있어. 내 분명히 말하는데 죽을 때까지 영감 쫓아다닐 거다." 하이론은 기가 막혀서 멍하니 쟝의 얼굴을 보았다. 아에게와 대원들도 둘의 대화를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엘란만이 묵묵히 말을 몰았다. "거기! 조심해서 실어, 포도주 한 병에 얼만 줄 알아!" 쟝이 늦장을 부린 탓에 늦게 도착한 길드 앞에는 아침부터 여러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마차 세 대에 십여명의 짐꾼들이 잡다한 물품들을 싣고 있었고, 각종 병장기를 휴대한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말을 타고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워낙 부산스러워서 어제 고용한 골고타를 찾기도 힘들었다. 덜컹! 문이 열리며 십여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두의 사내는 스물전후의 청년으로 보였는데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이였다. 금발머리 청년을 따라서 나오는 사람은 옆머리와 뒤통수를 빡빡 밀어서 닭벼슬 같은 머리 모양을 가졌는데 왼쪽 팔뚝에 새겨진 공을 물고 있는 개가 인상적이었다. 그 뒤를 금발머리 청년 또래의 사내들과 젊은 처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여자들을 처다 보는 쟝의 눈에 힘이 실렸다. "이등급이다." "뭐가 이등급 입니까?" 아에게가 쟝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 말야, 내 미모 분류표에 의하면 저 여자들은 이등급이야. 촌구석에서는 보기 드문 미모라고 할 수 있지." 쟝은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면서 여자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쟝이 여자들을 보고 있을 때 그린은 닭벼슬 머리의 문신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맥클레이용병대다!" "뭐! 어디어디?" 아에게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저 문신, 공을 갖고 노는 개문신은 맥클레이용병대의 표식이야." "아!" 아에게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아에게 평생의 꿈이 맥클레이용병대의 용병이 되어서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것이었다. "완전한 철부지들은 아니군." 하이론이 한 마디 뱉었다. "무슨 말입니까?" "저 놈들 하는 꼴을 봐라! 보아하니 모험을 하려고 코르도바습지로 가는 것 같은데 마차를 끌고 수많은 짐꾼에다 여자들까지 데리고 왔다. 저게 유람을 떠나는 모습이지 모험을 떠나는 모습이냐! 그래도 맥클레이용병대의 용병들을 고용했으니 완전한 철부지는 아니란 소리다." "하긴 그렇군요." 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헉!"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골고타에 놀란 짝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늦잠을 잤습니다. 말은 있습니까?" 골고타는 대답없이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체구가 작달막한 말이 한 마리 서 있었다. "갑시다." 엘란의 말이 떨어지자 골고타가 앞장을 섰다. 그들은 여전히 부산스러운 길드를 떠나 코르도바습지를 향해 출발했다. 골고타가 탄 작은 말은 보기와는 다르게 힘이 좋았다. "너! 왜 계속 반말이야?" 골고타의 짧막한 말이 쟝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니들 말 잘 못해." "......" 쟝은 하이론에게 다가가 미심쩍은 눈길로 골고타를 가리켰다. "저 놈 일부러 반말하는 것 같지 않아?" 하이론은 쟝을 힐끗 보더니 별안간 뒤통수를 갈겼다. "너나 잘 해!" 그들은 하루 종일 말을 달려 별이 그들을 반길 때쯤 코르도바습지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파르미나고원 서남쪽에 위치한 코르도바습지대는 구조적으로 복잡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오목하게 파인 지형은 양쪽으로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고원에서 발원한 플라나강이 중앙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지는 지 중간에서 끊어져 버렸다. 플라나강을 습원으로 해서 무성한 열대식물들이 분지 안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일행들은 말은 그 자리에 풀어놓고 짐을 나누어 짊어졌다. "이상하네." "이상한데." 엘란과 하이론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뭐가 이상하냐?" "뭐가 이상합니까?" 둘은 잠시 서로를 보더니 엘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습지대가 이상하다는 말은 들었다만 직접 와서 보니 더하구나. 보통 기후에 따라서 수목한계선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위치에 따라 자라는 식물들이 위계를 이루기 마련인데 여기는 온대에서 바로 열대식물로 넘어가는 구나. 엘란 네가 느낀 이상한 점은 뭐냐?" 엘란은 식물종이 뚜렷이 경계를 이루는 곳을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쪽으로 들어가면 이상한 기운을 느낍니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끈끈한 것이 온 몸을 휘감아서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어떤 기운 같으냐?" 엘란은 대답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둘의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경청하던 골고타가 불안한 듯 왕방울만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두꺼운 입을 열었다. "여기는 악마가 산다. 아마 악마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너 악마의 추종자냐?" 뚝뚝 끊어지는 이상한 억양으로 악마를 입에 담자 아에게등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습지에 정말로 악마가 있습니까?" 엘란은 골고타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습지 안에 있는 신이 악마다." 골고타는 엘란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서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잘됐어! 신이든 악마든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볼 수 있겠군." 엘란은 시선을 돌려 아에게등과 쟝에게 차례차례 눈을 맞추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엘란의 눈에는 묘한 힘이 서려 있었다. "이 습지대에는 광법사를 제외하고도 위험이 많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등허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위험한 뭔가가 있어요. 안으로 들어가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돌아가셔서 트레비에서 기다리세요. 일을 마치면 데리러 가겠습니다." 쟝은 엘란의 부담스런 시선을 피해 하이론을 쳐다 보았다. "내가 안 따라가면 저 영감이 좋아라 하고 버리고 떠날 거다. 죽어도 나 혼자 떨어지지는 않을 거다." 쟝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에게는 자신의 대원들을 쭉 훑어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제의 무덤에 갈 때도 곧 온다고 해 놓고 일년도 넘게 연락이 없었지. 이번에는 우리도 따라가야 겠다." 아에게의 말에 그린과 짝귀, 밤톨, 들창코도 동감의 의미로 머리를 세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안에 들어가면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챙기세요." 모두 굳은 얼굴로 습지의 출발점을 알리는 점박이 베고니아가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곳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70센지 가량의 베고니아는 선명한 붉은 색의 꽃과 녹색바탕에 은백색의 점무늬가 군데군데 박혀있는 넓적한 잎사귀가 인상적이었다. 베고니아 군락지를 지나자 몬스테리아가 가지를 뻗고 있었다.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골고타가 갑자기 웃통을 벗었다. "어!" 골고타의 등과 가슴에는 거대한 거미가 털이 숭숭 난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그거 무슨 종인가?" 하이론이 거미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아라크네!" 골고타의 음성에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라크네는 일,이미터 정도의 크기를 가진 코르도바습지대에서만 서식하는 독거미의 일종으로 습지를 지배하는 몬스터였다. 골고타가 앞장서서 걸을 때마다 등에 그려진 거미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진저와 크로톤이 서식하는 곳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열대림이 시작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커다란 나무는 없었지만 약간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고 빽빽이 들어선 나무는 사람들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척척! 골고타가 폭이 넓고 짤막한 칼을 꺼내더니 앞을 가로막는 가지들을 연속적으로 쳐내기 시작했다. "잠시 쉬고 가자." 한 시간동안 길을 뚫던 골고타가 지쳤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그런 열기 속에서 한 시간동안 칼을 휘둘렀다는 것은 골고타의 강건한 체력을 웅변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골고타 옆에 대충 앉았다. "이 쪽으로 가면 광법사를 만날 수 있나?" "광법사가 길드에서 구한 길잡이에게 아구족의 신전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이 길로 똑바로 간다면 광법사를 만날 수 있다.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나는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쟝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밀림 속에서 안내인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쟝도 알고 있었다. "아구족의 신전에는 악마가 산다. 나는 절대로 거기로 가지 않을 것이다." 아에게와 짝귀등이 악마라는 소리에 찔끔하는데 반해 엘란은 재밌다는 표정이다. "잘 됐다. 악마니 신이니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하면 볼 수도 있겠군. 똑바로 가면 된단 말이지..." 마지막 말은 나직해서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엘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에나 실피드 둘을 불렀다. 밀림속에서 하늘거리는 정령은 색다른 정취를 안겨 주었다. 골고타는 갑자기 나타난 실피드를 보고도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골고타를 미개인 원숭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쟝은 그 태연한 신색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절초풍해서 벌벌 떨며 신이니 악마니 떠들어 댈 줄 알았던 것이다. 모두들 땀을 닦아내며 실피드를 쳐다보는 가운데 정령들의 형체가 투명해지며 하나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했다. 이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양쪽으로 늘어선 정령이 수직으로 서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앙! 썩!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실피드에 걸리는 것은 나무든 가지든 어떤 것이든 간에 잘려져 나가기 시작했다. "흠!" 이번에는 골고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훌륭한 통로가 밀림에 뚫린 것이다. 물론 무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식물들에 의해 얼마 후에는 예전처럼 돌아가겠지만. (59) "헉헉!" "학학!" 쟝과 들창코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지치게 만드는 밀림을 쉬지 않고 걸었으니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좀 쉬었다 가자." 쟝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면 쉴 만한 곳이 나온다." 골고타의 말대로 십분 정도를 더 걸어가자 넓직한 암반지대가 나타났다. 커다란 바위 위에는 이끼와 이름 모를 풀들만이 돋아나 있을 뿐 나무는 자라지 못했다. 털썩! 골고타를 필두로 모두들 주저앉아 물을 들이켰다. 차가웠던 물은 밀림의 뜨거운 열기에 의해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린이 짐 속에서 빵과 마른 고기를 꺼내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덮고 습한 기후에 입맛이 없어져서 고기 씹는 것이 꼭 모래 씹는 것처럼 입 속에서 거끌거렸다. "많이 먹어둬라. 이런 상황에서 체력을 유지하려면 영양공급이 충분히 되야 한다." 모두들 손에 고기를 들고 보고 있기만 하자 하이론이 충고를 하고 나섰다. 엘란은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한꺼번에 털어 넣고 씹었다. 맛으로 먹기보다는 그저 한 끼를 때운다는 식이었다. 엘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자신을 옭아매는 무엇인가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정말, 악마가 있는가?' 그는 골고타의 말을 생각하다 훗하고 웃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니 악마니 떠들어대지만 엘란은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 근래 지고교와 얽히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가끔씩 떠올리곤 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근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엘란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가 가슴속에 깊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신성마법이란 것도 성직자가 만들어 낸 특수마법일 것이라는 생각도 간혹 할 정도였다. 그도 신의 존재를 믿고 그 안에서 위안을 찾고 싶었다. 특히 지고교의 좌호법사가 되어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한 이상은 지고신을 믿어야 했다. 무신론자 좌호법사란 것은 웃기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악마라는 것을 한 번 만나보고도 싶었다.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만약 악마가 있다면 그와 대적하는 신도 있을 것이다. '악마를 만나면 위험할까?' 엘란은 여러 가지 상념을 떠올리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탈리에 대한 걱정과 함께 에쉴리와 교도들의 얼굴들이 차례로 떠오르며 그에 대한 상념이 끓어오르자 가만히 있기가 불편해졌다. 혼자서라도 광법사를 찾아 떠나고 싶었다. 잠시 후 해가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날씨는 변할 줄을 몰랐다. 여전히 후덥지근했고, 앵앵 거리는 파리가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만들었다. "왜 그러냐?" 엘란이 갑자기 일어서자 하이론이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누가 다가옵니다." 모두들 크게 긴장해서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광법사냐?" "아닙니다. 우리가 뚫어 놓은 길을 따라 오는 걸로 봐서 다른 사람들입니다." 저벅! 저벅! "철딱서니 도련님들이군." 긴장하고 있던 하이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숲을 헤치며 다가온 자들은 아침에 용병길드를 부산하게 만들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쉰다." 맥클레이용병단의 닭벼슬머리 용병이 일행들에게 외치고, 땀을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짐꾼들은 짐을 내려놓고 불을 피워서 식사준비를 하느라 바쁜데 한가하게 주변을 노닐던 귀족가의 영식들은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 툴툴거렸다. "체이스, 몬스터들은 어디에 있어? 내 검이 울고 있잖아!" 귀족중 한 명이 검집을 툭툭치며 불만을 터트리자 닭벼슬머리 용병 체이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얼간이 같으니. 몬스터가 나오면 넌 한 입 거리도 못되.' "보르딕님 잠시만 더 기다리십시오. 조금만 더 들어가면 고블린의 서식지가 나옵니다." 억지로 얼굴을 펴려니 묘한 표정이 된 체이스가 보르딕패거리에게 말했다. "보르딕, 고블린 가지고 되겠어, 하다 못해 트롤이나 오거는 잡아야지." 옆에 있던 친구가 충동질하고 나서자 보르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이 멀리까지 와서 겨우 고블린을 잡고 가면 루오백작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꼴이지." '트롤! 오거! 이거 웃기는 놈들이군. 오크도 겨우 당해내는 주제에....' 보르딕과 그를 추종하는 패거리들이 떠들썩하게 노는 동안 천막이 쳐지고 식사준비가 끝났다. 보글보글! 스튜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자 입이 까끌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쟝이 입맛을 다시며 슬쩍 끼어 들었다. "루오백작가의 영식을 이런 오지에서 만나다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평생 여자 뒷 꽁무니만 쫓아다닌 쟝이 타국의 귀족가문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스튜나 한 그릇 얻어먹을 심산으로 말을 붙인 것이다. 이런 오지까지 자기 가문에 대해 알아주는 자가 있자 기분이 좋아진 보르딕이 자리를 내주며 미소를 띄웠다. "자네는 누구인가?" "저 같은 무지렁이 이름을 존귀하신 보르딕님이 아실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세상을 떠도는 불쌍한 평민에 불과합니다." 쟝은 말을 하면서 슬쩍 스튜 한 그릇을 퍼들고 숟가락을 찔러 넣었다. '냄새 죽이는데.' "그래 너는 무슨 일로 이런 위험한 곳에 들어 온 것이냐?" 막 한 숟갈 뜨려는데 말을 걸어오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얻어먹는 처지에 대꾸를 안 할 수 없었다. "광법사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광법사!" 보르딕이 벌떡 일어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상기된 얼굴에는 어떤 결의가 넘실거렸다. 눈에도 어떤 열의가 쏟아지는 것이 대단히 흥분한 것 같았다. '이 새끼가 미쳤나?' 보르딕을 무슨 희한한 동물 보듯 쳐다보던 쟝은 얼른 스튜를 퍼먹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이 철부지 귀족들에게서 떨어질 생각이었다. "광법사가 어디에 있나?" 보르딕이 희열에 차서 부르짖었다. "아구족이 있는 방향으로 갔다고 하던데...." "체이스 그만 가자!" 보르딕은 쟝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어딜 가자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광법사를 잡으러 가야지." 체이스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동안 멍하니 보르딕의 얼굴을 보았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언제적 십존이 아직 십존이냐! 더 이상 그런 구닥다리한테 십존의 영예가 머무는 것을 나 보르딕 루오는 두고 볼 수 없다. 고인 물은 썩는 법. 나 루오에 의해 십존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십존종식! 세대교체만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보르딕은 검을 뽑아들어 앞으로 뻗으며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십존종식!" "십존종식!" "세대교체!" 그의 추종자들이 보르딕의 말을 받아서 두 손을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쟝이 수작 부리는 것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하이론도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쟝보다 더한 놈이 있을 줄이야.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 아냐!' 하이론의 어이없는 시선은 체이스의 일그러진 얼굴에 닿았다. '쯧쯧쯧! 자네 고생 좀 하겠네. 어쩌자구 저런 얼간이들 청부를 맡았나 그래.' 체이스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이 등에 울러 맨 할버드의 손잡이에 닿았다. 체이스는 할버드를 뽑아서 이 미친놈들의 골통을 쪼개서 그 뇌수를 구경하고 싶었다. 여자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상황은 그렇게 변했으리라. "오빠 광법사한테 이길 수 있어?"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체이스의 허리에 안겨들었다. "그런 늙은이는 한 손만으로도 충분하다." 검을 집어넣고 여자를 안으며 보르딕이 호기롭게 외쳤다. 쟝은 어느새 스튜를 두 그릇이나 퍼먹고는 주위의 여자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보르딕을 리더로 한 귀족가의 철부지들은 저마다 여자들을 하나씩 꿰차고 있었는데 눈을 번쩍하게 만드는 미모는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외모였다. 그 여자들도 남자들의 서열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는지 보르딕의 여자가 은연중 그녀들을 부리고 있었다. "백작나으리, 소개 좀 시켜주시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정식으로 가문을 물려받지 않았으니 백작은 아니었다. 쟝이 비위를 맞추려고 붙인 호칭이었다. "이들은 우리 가문에 대대로 충성을 받쳐 온 가신들의 자제들이다. 이쪽부터 마이클, 루안, 잭이다." "......" 쟝의 얼굴이 마늘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소개시켜 달라는 것은 당연히 여자들이었다. 쟝이 남자들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할 것인가. 재자 질문을 던지려는데 엘란이 불렀다. "쟝, 할 말이 있습니다." 쟝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왜 불렀어?" 미련이 남는지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조금 있으면 알 게 되요. 아에게, 그린, 짝귀, 밤톨, 들창코, 골고타 모두 이리 가까이 오세요." 엘란은 일행들을 자기 주위에 모았다. 잠시 기다려도 아무 일이 없자 쟝이 불만을 터트렸다.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괴성이 밀림을 뒤흔들었다. "꾸어!" "꽈아!" "고블린이다!" 달빛에 언뜻 언뜻 드러나는 1미터가 약간 넘는 작달막한 키, 커다랗게 펄럭이는 귀와 툭 튀어나온 눈두덩이, 길게 뻗친 송곳니, 불룩한 이마, 터질 듯한 가슴근육은 고블린이 분명했다. 보르딕은 그렇게도 자랑하던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건만 갑작스런 공격에 허둥대기만 할 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꾸룩꾸룩!" 고블린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짐꾼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버렸고, 용병들만이 몬스터와 맞서 나갔다. "일조 전투대형!" 어느새 할버드를 뽑아든 체이스가 지휘를 시작하자 용병들은 고용인과 여자들을 중심으로 원형의 대형을 갖추었다. 그들을 향해 고블린의 몽둥이가 달려들었다. 고블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윗 부분에 울퉁불퉁한 쇳조각들이 박혀 있어서 한 번 맞았다간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쿵! "끄악!" 고블린이 휘두른 몽둥이에 발이 박살난 용병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무슨 나무로 만들어 졌는지 단단하기가 강철같았다. 적은 인원으로 만든 방어진은 한 명이 빠지자 금새 구멍이 생겼다. 그 사이로 수많은 고블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퍽! 방어진 안으로 들어온 고블린의 머리위로 체이스의 할버드가 떨어져 내렸다. 고블린은 머리가 쪼개져 뇌수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이야!" 보르딕이 고함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언뜻 언뜻 마나가 보이는 것이 스킬러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는데 정신없이 휘두르다 보니 동료들의 등을 할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되자 안팎으로 신경을 분산해야 하는 용병들이 곤란해졌다. "멍청이!" 체이스가 한 줄기 고함과 함께 바닥을 걷어찼다. 뻑! 체이스의 발에 채인 돌이 허공을 날아서 보르딕의 머리에 작렬했다. 보르딕은 정신을 잃고 거칠게 나뒹굴었다. 보르딕의 동료들은 여자들을 부둥켜안고 벌벌 떨었다. 원래는 여자들이 위안을 찾으려 파고든 품이었건만 오히려 남자들을 다독거려 줘야 할 지경에 빠져 버렸다. 쩡! 쩡! 쨍! 검과 몽둥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죽어!" "꾸억!" 비명과 악다구니 속에서 살점들이 비산했다. 체이스는 신들린 것처럼 할버드를 휘둘렀다. 고블린들은 할버드에 스치기만 해도 몸통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대단한 위용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아에게의 눈에 감동이 물결쳤다. 퍽! 정강이를 맞은 용병이 고꾸러지자 뒤통수로 몽둥이가 떨어져 내렸다. 퍽! 잘 익은 수박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머리가 함몰되었다. 뒤통수를 박살낸 고블린의 살기 번들거리는 눈으로 반달형의 날카로운 칼날이 날아들었다. 퍽! 체이스의 할버드가 안면을 가르고 지나가자 고블린이 무너져 내렸다. 스걱! 엘란일행에게 다가오던 고블린이 깨끗하게 반으로 잘려 나갔다. 어두운 밤에는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선들이 엘란일행을 감싸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고블리는 걸리는 족족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그들의 앞에는 동강난 고블린의 잔해가 수북했다. "꾸룩!" 한 고블린이 소리치자 더 이상 엘란일행에게 덤벼드는 고블린은 없어졌다. "도와줘야 되는 거 아냐?" 자신들에게 고블린이 달려들지 않자 안정감이 생긴 아에게가 말했다. "귀족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엘란이 차갑게 내뱉었다. 하이론이나 쟝도 그들을 도울 생각은 전혀 없는지 아에게를 거들지 않았다. "용병들도 죽어 가는데......" "자신들의 일이니까." 하이론이 차갑게 끊었다. 아에게는 용병들에게 환상을 품고 있었지만 인생의 쓴맛을 많이 본 하이론은 달랐다. 배고픈 용병들은 종종 잔혹한 마적떼들로 변하기도 했고, 외딴 마을을 습격해서 살인, 약탈, 강간을 자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아에게용병대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집합체를 제외한다면 한 두 번쯤 약탈에 나서지 않은 용병은 없다고 봐야 했다. 약초를 채집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런 장면들을 자주 접했던 하이론은 용병들이 죽던 말던 상관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자신이 구해준 용병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주민들의 삶을 망쳐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용병이라면 의뢰 받은 일을 수행하다 죽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니 안타까울 일도 없었다. 쟝도 그들을 도와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은 집에서 버림받아 이렇듯 위험한 곳을 떠돌고 있는데 저 놈들은 여자들이나 끼고 한가하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상해서 남자들이 모두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린은 저들이 안되기는 했지만 딱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고블린이 나타났을 때부터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짝귀삼총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직 아에게만이 저 사이에 끼어 들어 새로 산 검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특히 저 닭벼슬머리 용병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체이스는 고블린 몸에 박힌 할버드를 뽑아내며 주위를 살폈다. 고블린 40여마리가 바닥에 작달막한 몸뚱이를 누이고 있었고 용병들은 10여명이 쓰러져 있었다. 용병 한 명 당 고블린 네 마리가 쓰러진 셈이니 산술적으로는 괜찮은 결과였지만 처음부터 워낙에 수가 차이 났던 지라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당할게 명약관화했다. "꾸엑! 꾹 꾸!"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동료들을 독려하는 고블린이 체이스의 시선에 잡혔다. "저 놈이 대장이군." 쐐엑! 체이스가 고블린은 향해 할버드를 날렸다. 길다란 할버드가 허공에서 길게 포물선을 그렸다. 퍼어억!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할버드가 고블린의 머리에 틀어 박혔다. 고블린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꾸억, 꾹." "꾹국꾹!" 머리에 할버드를 박고 고꾸라진 고블린이 대장이 맞는 듯 당황한 다른 고블린들이 우왕좌왕하더니 밀림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헉헉!" 체이스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부상당한 용병들을 살폈다. 고블린의 강렬한 뭉둥이에 맞은 용병들은 거의 즉사하거나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부상병은 한 명밖에 없었는데 가슴이 함몰된 것이 살아나기는 틀린 것 같았다. 눈이 허옇게 돌아가며 헐떡거리더니 체이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이 끊어졌다. "씨발!" 저절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이얏!" 체이스가 걷어 찬 돌에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던 보르딕이 일이 다 끝나자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휙휙!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보르딕이 컴컴한 밤에 혼자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죽은 용병들을 모으느라 보르딕이 달밤에 체조하는 것을 그냥 두었다. "흐익!" 보르딕을 말리러 다가가던 잭은 하마트면 검에 베일 뻔했다. "보르딕! 보르딕! 다 끝났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고블린의 사체에다 칼질을 시작했다. "더러운 몬스터!" 푹푹! 살점과 내장들이 검에 맞아 뭉그러졌다. 한 참 쇼를 하던 보르딕은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 앉았다. 용병들의 시체를 한 곳에 모은 체이스는 난감해졌다. 빽빽한 밀림에서 시체를 묻기도 곤란했고 태우기도 곤란했다. "체이스! 이 더러운 고블린 좀 치워라!" 가뜩이나 성질이 난 체이스에게 보르딕이 불을 붙였다.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목에다 바람구멍을 내 줄 테다. 알아들었어? 이 얼간아!" 체이스는 보르딕의 목에다 피와 살점이 묻어서 엉망이 된 할버드를 갖다대고 으르렁거렸다. 한 자루 할버드를 들고 피를 뒤집어쓰며 거칠게 살아온 체이스의 기세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체이스가 받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보르딕의 얼굴은 금새 사색이 되었다. "아가씨들! 뒤돌아서 도망가거나 나무위로 올라가세요." 엘란이 갑자기 소리치자 놀란 아에게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체이스도 보르딕을 내 팽개치고 주변을 살폈다. 엘란은 입을 달싹거려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엘란 주변의 공기가 일렁거리더니 일행들의 몸이 일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그들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일이 고약하게 돌아간다는 걸 직감했다. "모두 나무로 올라가라!" 체이스는 암반지대의 주변에 늘어서 있는 거대한 나무로 급히 달려가며 소리쳤다. 체이스가 움직이자 나머지 대원들도 주변의 나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우왕좌왕하던 귀족가의 자제들도 주변에 동화되어 나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악!" 한 여자가 돌에 걸려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이런." 쟝은 안타깝다는 듯 공중에서 발을 굴렀다. 휙휙! 여자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 시커먼 무엇인가가 암반지대로 달려드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 "저거 뭐야?" 아에게의 당황한 목소리가 공중에서 퍼질 때 여자들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꺅!" "까아악!" "아라크네!" 하이론이 바닥에서 움직이는 것들의 정체를 밝히자 짝귀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짝귀가 떨자 밤톨과 들창코도 떨기 시작했다. 쟝은 한심한 듯 혀를 찼다. "쯧쯧! 겁쟁이 같으니." 십존에 버금가는 대륙최고의 정령사 엘란이 곁에 있는데 무서워서 떠는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짝귀삼총사도 엘란이 곁에 있는 한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움직였다. 일미터도 넘는 몸통에 시커먼 털이 숭숭 난 다리를 보는 순간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였다. 개중에는 이미터가 넘는 놈도 있었다. "끄악!" 안 그래도 징그러운 거미들이 거대한 몸을 움직여 바닥에 널린 고블린과 인간의 잔해를 씹어 먹기 시작하자 여자들이 기절을 하고 축축 늘어졌다. "살려줘!" 나무 위로 올라가지 못한 용병 셋과 잭, 마이클, 루안이 아라크네에게 쫓기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라크네는 코르도바습지에서만 서식하는 독특한 거미의 일종으로 거대한 몸집에 독을 뿜어대는 무서운 몬스터였다. 다른 거미처럼 배에서 줄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뿜어내는 것이 독특했는데 몸집이 너무 커서 나무를 타거나 거미줄에 매달리는 행동은 하지 못했다. 특이하게도 모험가들이 잡아서 습지 밖으로 끌어내는 경우에는 며칠을 가지 못하고 죽었다. 슉슉! 아라크네가 뿜어낸 거미줄에 잭이 걸려들었다. "으악!" 거미줄에 친친 감긴 잭이 죽어라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치이익! 거미줄에 닿은 피부에서 노란 연기가 피어오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거미줄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몇 번 꿈틀거리던 잭의 몸이 정지했다. 여덟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다가간 아라크네는 머리를 통째로 씹었다. 뿌드득! 뿌드득! 뼈 채 씹어 먹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렸다.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아에게까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라크네가 발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끝마디가 마치 칼날 같았다. 퍽!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잭의 몸이 먹기 좋게 토막쳐졌다. "으악!" 잭 다음은 루안이었다. 아라크네의 다리가 루안의 등을 뚫고 가슴으로 삐죽이 튀어나왔다. 털썩! 거미가 다리를 빼내자 루안의 몸이 짚단 쓰러지듯 넘어졌다. 마이클은 용케도 아라크네의 마수를 피해 나무위로 올라 올 수 있었으나 용병 셋은 거미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 "우걱 우걱! "빠각!" "꾸걱!" 아라크네가 시체를 씹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 새나 벌레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온통 시커먼 거미들 천지였다. 쿵쿵! 먹이가 부족했던지 아라크네 한 마리가 마이클이 올라간 나무의 밑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다리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나무가 통채로 떨어져 나갔다. "어어!" 나무가 쓰러지듯 휘청거리자 마이클은 필사적으로 가지에 매달렸다. 아라크네가 밑둥을 절반 가량 파 들어가자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쿵! "뀌어억!" 나무에 깔린 아라크네가 괴성을 질러댔다. 열 마리 정도의 아라크네가 나무에 깔려 배가 터져 죽었다. 터진 배에서 흘러나온 노란 액체는 유황냄새를 풍겼다. 마이클도 나무에서 퉁겨져 목이 부러져 죽어 있었다. 마이클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져 아라크네의 뱃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라크네의 향연은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더니 일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식욕이 얼마나 왕성한지 동료의 시체까지 싹 먹이치우고 떠났다. 아라크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쇠붙이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엘란의 일행이 아래로 내려오자 눈치를 살피던 용병들과 보르딕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엘란은 일행의 중앙에 카사를 불렀다.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 그만 주무세요." "알았다." 하이론이 먼저 자리를 잡고 눕자 짝귀 삼총사가 차례로 고단한 몸을 뉘였다. 힘겹고 지옥 같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린과 아에게도 자리를 잡고 누웠는데 쟝은 잘 생각이 없는 듯 여자들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자 성욕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들끓었다. 체이스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용병 하나는 불을 피우고 여자들을 불 주위에 앉혔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짐승들을 쫓기 위해 피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브르딕은 체이스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그 자리에 끼어 들었다. "그르릉!" "쿨쿨!" 동료들의 코고는 소리가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엘란은 가부좌를 틀고 마나수련을 하고 있었다. "후!" 심호흡을 크게 한 쟝은 천천히 여자들 근처로 다가갔다. 여자들은 너무 놀라 후덥지근한 날씨와 활활 타오르는 불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쟝이 보르딕의 여자를 감싸안았다. 여자는 흠짓 하더니 이내 몸을 안겨왔다. 쟝의 품속에 있자니 떨림이 멎어지고 마음이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쟝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옷을 벗겼다. 쟝이 여자를 안자 체이스와 용병도 자연스럽게 주위의 여자를 안았다. 보르딕마저 가세하자 살육의 향연에 이어 육체의 향연이 벌어졌다. 그들은 모두 오늘 있었던 피와 광기에 얼룩져서 상처받은 영혼을 몸으로 정화시키려는 듯 필사적으로 서로를 더듬었다. 어쩌면 죽음과 성욕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도 몰랐다. 죽음의 위험이 종족번식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일까? 엘란은 조용히 실피드를 불러 소음으로부터 일행들을 감쌌다. 엘란의 눈에는 저들의 몸짓이 처절한 몸부림으로 느껴졌다. 추하다거나 구역질난다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엘란은 천천히 눈을 감고 마나수련을 계속했다. "자네, 대단하군! 이런 위험한 곳에서 마나수련이라니." 엘란은 마나를 마나홀로 유도한 후 천천히 눈을 뜨며 체이스를 노려본 후 눈을 감았다. 명백한 축객령의 의미였다. 그러나 체이스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엘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엘란!" 체이스가 나직한 음성으로 힘을 주어 속삭였다. 번쩍 뜨인 엘란의 눈에서 서늘한 광채가 쏟아졌다. 날카로운 엘란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한 체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나를 아시오." "대륙에서 광술사 엘란의 악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요." "내가 엘란이라고 믿는 이유는?" "나는 맥클레이용병단의 천인대장이오.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 용병단의 대장 맥클레이는 십존의 일원이오. 나름대로 정보통로를 가지고 있다오. 광법사를 쫓으면서 여러 차례 용병길드를 이용했더군.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게다가 정령을 능숙하게 부리는 검은 머리의 작은 청년, 특이한 용모의 일행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신들의 정체를 모를 리가 있겠소?" "진짜 이유를 말하라?" 어느새 엘란의 몸에서 폭풍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체이스는 엘란의 기세에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알았소. 사실대로 말할 테니 그 놈의 소름끼치는 기운 좀 없애 주시오."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체이스를 얽어매던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체이스는 자연스러운 기운의 수발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 소문이상으로 강하다. 어쩌면 십존에 버금갈지도 모른다.' 체이스는 더 이상 상념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엘란의 눈빛이 점점 강렬해 졌던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이 거짓은 아니오. 다만 당신의 행방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용병단이 전력을 기울여 당신의 행방을 추적한 때문이오." "나를 추적한 이유가 뭐요?" 체이스가 사실을 말한다고 판단한 엘란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체이스는 적대감을 버린 엘란의 말투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용병왕 맥클레이께서는 당신과 손을 잡고 싶어하십니다." 엘란은 체이스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말이 떨어지자 당혹한 마음에 미간을 모았다. 슬쩍 엘란의 표정을 살핀 체이스는 재차 입을 열었다. "광술사께서도 아에게용병대에 몸담았던 때가 있으니 우리와는 한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병생활을 해 보셔서 알겠지만 돈 몇 푼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비참한 현실을 타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꼭 설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지극히 공손한 말투였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소." "오늘의 일을 상기해 보십시오. 저 얼간이 때문에 피를 흘린 형제들이 14이나 됩니다." 체이스는 잘못 짚고 있었다. 엘란은 자신이 용병이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용병들이 고생을 하던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죽어 나자빠지던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잘 봐 주더라도 아에게와 그 동료들을 용병들의 범주에 넣는 것은 다른 용병대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 될 것이다. 아에게와 그 대원들과 같이 지낸 것은 그의 범주 안에 있는 인물들 다시 말하자면 엘란이 지켜야하는 가족의 개념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 같은 용병이었다는 유대감이 아니었다. 엘란은 아에게용병대에서 용병일을 하기보다는 노가다 다닐 때가 더욱 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체이스가 조금만 머리를 더 굴렸더라도 다른 쪽으로 설득을 했을 것이다. 만약 엘란이 용병들을 동료로서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면 14명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래서요?" 엘란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우리 용병왕께서는 큰 뜻을 품고 계십니다."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이오?" 체이스는 말없이 엘란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땀이 축축하게 배어있는 체이스의 손에서 뜨거운 열의가 느껴졌다.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한 마디 말보다 더욱더 확실하게 의사가 전해졌다. "아무리 맥클레이가 십존의 일원이고 휘하에 일만의 용병이 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오. 내전으로 상처를 입은 엘리오트만 하더라도 그대들이 이길 수는 없을 거요." "용병왕께서 깃발만 올리신다면 전 대륙의 용병들이 들고일어날 것입니다." 체이스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열의가 철철 넘쳐흘렀다. "그래도 나라를 세우기는 역부족일 텐데." "저희에게는 다른 패도 있습니다." "다른 패라면?" "한 배를 탄 동료도 아닌데 그런 극비사항까지 말씀드릴 수야 없지요. 동참을 하겠다는 언질만 주신다면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는 설명을 들을 것도 없이 그런 병정놀음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이대로 살겠소." 엘란은 단호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어설프게 대했다가는 미련을 가지고 계속 귀찮게 굴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십시오!" 체이스는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 말투가 아주 묘했다. 당신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어투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상급정령사가 된 이후 이런 느낌은 틀린 적이 없었다. "생각할 것도 없다." 불쾌해진 엘란이 냉랭하게 말했다. "교도들을 생각하셔야죠." 엘란의 몸에서 다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리가 풀려서 후들거리는 데도 불구하고 체이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체이스는 다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성녀도 죽고 사제들도 죽었는데 교도들을 어디로 이끄실 생각이십니까? 대륙의 나라들 중에서 지고를 환영할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떠돌아 다니셔도 교도들의 지친 몸을 뉘일 것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대륙의 현실입니다." 체이스는 엘란에게 손을 내밀며 열변을 토했다. "자! 이 손을 잡으십시오. 용병왕께서 나라를 세운다면 지고교도들을 위해 넓고 비옥한 대지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엘란은 체이스의 손을 쉽게 내치지 못했다. 그만큼 체이스의 제의는 엘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지금은 나탈리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훗날의 일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서는 무거운 짐이 되어 엘란을 짓누르고 있었다. 배로 실어 보낸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교도들의 안식처를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곧 반란이 일어나는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요." "시간을 주시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내 용병왕을 직접 찾아가겠소." 체이스는 흔들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았다. 더 이상 몰아치다가는 반발에 부딪칠 수가 있었다. 이런 섬세한 감각과 머리가 부족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를 천인대장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 15장. 광술사와 광법사 새벽공기가 파랗게 떠다니며 밀림에 깔리고 있었다. 엘란은 그 날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이런 저런 생각이 연속적으로 떠올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깨어난 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재빨리 남자들의 품에서 떨어져 옷을 입었다. 귀족들이 노리개로 데리고 온 여자들은 정조관념이 투철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간밤의 일은 그녀들이 생각해도 의아할 뿐이었다. "밤을 샌 거냐?" 어느새 일어난 하이론이 물었다. "생각할 게 있어서요." "보르딕님 그만 일어나시죠!" 체이스가 보르딕을 흔들어 깨웠다. 보르딕은 어제의 험난했던 하루일과가 힘들었는지 잘 일어나지 못했다. 체이스는 억지로 흔들어 깨우고는 급히 길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 이상 코르도바습지에서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르딕님 계속가시겠습니까?" 짐도 모두 잃어버린 데다 용병들이 거진 다 죽어버려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형편은 아니었지만 고용인의 의사는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만 돌아가자." 보르딕이 한 숨을 푹 내쉴 때, 편하게 누워서 눈곱을 떼고 있던 쟝이 벌떡 일어섰다. "보르딕백작님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어제의 그 패기는 어디에 갔습니까? 십존종식! 세대교체!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한 쪽 눈에는 눈곱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왼쪽 머리는 납작하게 눌려서 우스광스럽게 보이는 쟝이 열정적으로 소리치는 모습을 본 하이론이 의아한 목소리로 엘란에게 물었다. "저 놈! 왜 저러냐?" "여자들 때문이죠." 잠시의 생각도 없이 엘란의 입에서 곧장 해답이 튀어나왔다. 쟝의 눈물 섞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다가 살아난 보르딕은 이 지옥같은 습지에서 한 시라도 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보르딕이 암반지대를 떠날 때까지도 쟝의 매달림은 계속 되었다.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리는지 놀리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쟝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떠나갔다. 허탈감이 든 쟝이 보르딕을 욕하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뭐 세대교체가 어쩌고 어째.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광법사를 잡겠다고. 너 같은 놈은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 세대 더 맞아야돼. 니 네 가문 앞날이 걱정된다. 걱정 돼." "......" "......" 아에게와 그린은 쟝이 왜 보르딕의 바지를 붙들고 늘어졌는지 그리고, 지금은 욕을 퍼부어 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식사하고 출발하자." 하이론의 말대로 대충 아침을 때운 일행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새벽부터 계속되는 엘란의 고심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하이론이 질문을 던졌다. "어제 밤에 체이스가 용병왕의 전언이라면서 제의를 해왔습니다." 엘란은 체이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되뇌었다. 하이론과 엘란이 심각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아에게가 기뻐서 날뛰기 시작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서 그 제안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용병왕과 동료가 되다니...." 아에게는 벌써 결정이 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용병왕 맥클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에게의 우상이었다. 아무런 배경없이 검 하나로 몸을 일으켜 대륙에 우뚝 선 자. 전장에서 피를 딛고 스스로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한 자. 모든 용병들의 우상이자 희망. 아에게는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되어 시선이 몽롱해졌다. 한 자루 검으로 대륙을 질타하는 맥클레이 옆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아에게용병대의 대장 아에게! 상상만으로도 온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에게가 꿈을 꾸는 동안 하이론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네 생각은 어떠냐?" "께름직하기는 합니다만, 별 뾰족한 수가 없으니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교도들이 살 만한 땅을 대륙에 마련하는 것은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용병들과 손을 잡는 것은 찬성하고 싶지 않다." 하이론이 회의적으로 말하자 꿈을 꾸던 아에게가 현실로 돌아와 금새 반박에 나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용병왕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에게가 워낙 단호하게 나서자 엘란이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나 이유가 있습니까?" 교도들의 앞날을 결정할 문제를 함부로 결정지을 수 없었으니, 엘란의 입장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고 싶었다. 갑작스런 엘란의 질문에 당황한 아에게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애초에 아에게가 강력하게 찬성하고 나선 것은 용병왕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 때문이었으니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근거나 이유를 댈 수 없음이 당연했다. "음.....흠......그게....." 아에게가 당황한 가운데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 위해 머리를 무섭게 굴렸다. 그러나 별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느새 멈추어 선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얼굴에 꽂히자 무안한 심정에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휴!" 대충 아에게의 생각을 파악한 엘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하이론을 바라보았다. "반대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용병들은 돈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평초같은 사람들이다. 오늘은 이편을 위해 칼을 휘두르다가도 상대편에서 돈을 더 주면 그 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다. 신의나 의리보다는 물질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을 믿고 한 배를 탈수는 없다." "용병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에게가 벌게 진 얼굴로 소리쳤다. 씩씩거리는 것이 꽤나 분한 모양이었다. "아에게, 하이론의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교도들의 미래가 달린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에게의 의견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조용히 계세요. 하이론 계속 말씀하세요." 하이론은 약초채집을 다니면서 보았던 용병들의 행패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살인, 약탈, 강간 등 참혹한 일들이 하이론의 입에서 쏟아지자 아에게가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에게가 고함을 지르자 그린이 아에게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진정해!" 골고타가 왕방울 만한 눈을 데룩거리며 일행의 행동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식량을 실은 배가 섬에 도착했을까요?" 엘란이 화제를 돌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교도들에게 보고하고 의견을 물을 생각이었다. "글쎄다. 통신을 연결해 보면 알겠지." 하이론은 배낭에 들어있는 통신구를 꺼내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이상한데...." 하이론은 통신이 맘대로 되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신호가 가지 않아."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1,000골덴짜리 통신구다. 에릭이 장담했듯이 이 정도 거리에서는 통신이 되야 한다." "제가 한 번 해보죠. 마나를 주입하기만 하면 됩니까?" 하이론은 통신구를 돌려 엘란의 앞에다 가져다 놓고는 수정구를 받치고 있는 받침대의 오목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에다 마나를 주입하면 된다." 엘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통신구를 잡았다. 통신구에다 마나를 주입하자 수정구 안을 맴돌던 마나가 묘하게 변형되어 공중으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솟구치던 신호는 공중에서 발목이 잡혔다. 신호는 무언가가 붙들고 늘어져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음!" 엘란은 통신구에서 손을 떼고 벌떡 일어섰다. "어떤 기운이 신호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엘란은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잡고 생각에 빠졌다. "처음 코르도바습지대로 들어서면서 느꼈던 기운이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엘란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나를 끌어올린 채 감각을 서서히 확장해 나갔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감각에 나무의 숨소리와 수많은 벌레들, 인간들의 호흡소리가 생생히 잡혔다. 주변을 한 바퀴 휘돈 감각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쩡! 귀가 아닌 마음으로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하늘을 부유하던 감각이 어떤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졌다. 일 순간 엘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감각이 깨어져 흩어지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확실히 뭔가 있어요." 엘란은 우울한 시선을 들어 하늘을 살폈다. 무성한 가지와 잎에 가려 하늘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을 살펴보며 옭아매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 졌다. 모두들 불안한 얼굴로 엘란을 쳐다보는데 그는 더 이상 통신을 시도하거나, 코르도바습지를 떠도는 기운에 대해 알아내기를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골고타, 여기사는 원주민들 성향이 어떻습니까?" "호전적이고, 잔인하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갈가리 찢어 죽인다." 짝귀와 밤톨, 들창코가 골고타의 말에 겁을 집어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우호적인 부족은 없습니까?" "없다. 현재 코르도바에 사는 부족은 아구족 하나다." "이상하군. 코르도바습지에 사는 원주민은 50부족이 넘는 걸로 아는데...." 갑자기 골고타의 눈에서 불이 쏟아지며 전신을 가늘게 떠는 것이 무척이나 격동한 것 같았다. "아구족이 모두 죽였다!" 한 자 한 자 씹어 삼키듯 내뱉는 말에 모두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당신은 아구족이 아닌 것 같은데?" "가란족의 마지막 생존자다." "......" "......" 골고타의 말을 끝으로 주변은 침묵에 쌓였다. 그의 심각한 얼굴에 말을 건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부족의 생존자. 그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마음이 모두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슈리엘!"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주위를 감싸고돌았다. "이제 가죠!" 엘란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재촉을 하자 골고타가 다시 앞장을 섰다. "슈리엘은 왜 부른거냐?" "손님들이 방문할 것 같아서요." "손님이라면?" "골고타의 말 대로라면 아구족이겠죠." 하이론이 인상을 구겼다. 골고타의 말에 따르면 아구족은 자신들을 찢어 죽이려 들것이다. 엘란이 버티고 있으니 자신들이 피해 입을 거야 없겠지만 원주민들의 피를 보는 것도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핏핏! 삼십분을 전진하자 잎이 무성한 나무 위와 옆에서 바늘이 쏟아져 나왔다. 바늘은 일행을 감싼 슈리엘에 부딪쳐 퉁겨졌다. "독침이다!" 아귀족의 공격에 골고타가 이를 갈기 시작했다. 칼을 움켜쥐고 아귀족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눈동자는 붉게 충혈 된 채 살기로 번들거렸다. 한 동안 쏟아지던 독침은 효과가 없자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포기한 걸까?" 짝귀가 불안한지 고개를 홱홱 돌려 사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구족은 포기를 모른다." 골고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독침이 어떤 투명한 막에 막혀 튕겨져 나가자 화살을 날린 것이다. 쇄액! 팅팅! 그러나, 그런 화살로는 슈리엘이 친 베리어를 뚫을 수는 없었다. 화살들이 발치에 수북히 쌓일 때쯤 화살비가 그쳤다. "억!" 엘란이 일행들 모두를 공중으로 들어올리자 놀란 들창코가 억눌린 신음을 터트렸다. "그만 물러나라!" 엘란이 공중에서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으나 숲은 벌레들과 새소리만 들릴 뿐 사람이 내는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 수 없군. 실피드!" 허공에서 투명한 실루엣이 일렁거리더니 실피드 셋이 튀어나와 무서운 속도로 땅을 직격했다. 쾅! 굉음과 함께 땅이 뒤집혀 나갔다. "저거 뭐야?" 뒤집힌 땅에서 허리 아래를 나뭇잎으로 대충 가린 원주민들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칼을 든 원주민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며 엘란 일행을 쏘아보았다. "%$^&%&%&$#()."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단다." 독침이 날아들 때부터 살기를 피워 올리던 골고타가 씹어 삼키는 듯한 음성으로 통역을 해주었다. "여자아이 하나만 찾으면 조용히 나갈 테니 길을 열어달라고 말해주게." ":$^&@&H*(^GI#$+++-=||%^.|." 아구족에게 자신의 부족을 몰살당한 원한이 뼈에 사무친 골고타는 하이론의 말을 그대로 통역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멸시의 말을 던지며 당신들 부족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식으로 위협을 가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것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아구족의 사내가 골고타의 말에 크게 흥분해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 "와!" 그의 말이 떨어지자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아구족의 전사들이 일순간 멈춰섰다. 공중에 떠 있는 엘란일행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비켜라!" 엘란의 차가운 일갈이 터지자 밑에서 칼을 휘두르던 아구족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의 대치상태는 곧 끝이 났다. "바람의 칼날!" 하늘거리던 실피드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희긋희긋한 선이 죽죽 그어졌다. 스엉스엉!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소음과 함께 원주민들의 몸이 잘라져 나갔다. "*%@$!~*(_+." 잘 보이지도 않는 선이 주위를 휩쓸 때마다 나무와 함께 동료들이 쪼개져 나가자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과 함께 아구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이론! 아에게와 대원들 좀 지켜줘요!" 엘란은 한 마디 던지고는 슈리엘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라 질풍처럼 사라져 갔다. "엘란, 어디가?" 아에게가 엘란이 날아간 방향으로 뛰어가자 하이론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이봐 기다려!" 하이론도 어쩔 수 없이 뒤를 쫓아야만 했다. 엘란은 폭음이 들리는 쪽으로 정신없이 날아갔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그들의 땅을 무단으로 침범해 들어온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좋게 해결하려던 엘란은 멀리서 바람이 전해주는 폭음과 격렬한 마나의 유동에 급히 손을 쓰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 정도의 폭음을 일으킬 자는 광법사 뿐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때문이었다. '나탈리!' 엘란은 나탈리가 광법사의 옆에 있다 마법에 휘말려 다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쾅! 퍼어엉! 계속해서 들리는 폭음이 엘란의 급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슈리엘 저기다!" 숲의 한 쪽에서 붉고 푸른 섬광이 작렬하며 나무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군데군데 불길이 솟고, 숲이 타면서 내뿜는 연기가 길게 하늘로 올라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지름 1킬로가량의 둥근 공터가 형성 되 있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레이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이 마치 짐승의 포효소리 같았다. 엘란은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펑펑! 격렬하게 부딪친 후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둘과는 달리 다른 쪽에서는 광법사의 제자들이 한 명을 가운데 두고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아리아나!" 삼십여명이 차례로 마법을 난사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가운데서도 이를 침착하게 막아내는 자는 엘프 아리아나였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있는 자중 광법사와 대등히 맞설 자는 시리우스밖에 없었다. "나탈리!" 한 쪽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 중에서 신체가 작은아이들이 엘란의 눈에 잡혔다. 비호처럼 달려가는 엘란의 앞을 광법사의 제자들이 막아섰다. "비켜라! 막으면 죽는다."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슈리엘이 움직였다. 슈앙! 슈이엘의 손에 주변의 공기가 빨려 들더니 투명한 바람의 창이 만들어졌다. "가라!" 창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앞을 막아선 마법사들을 덮쳐갔다. "윌 오브 파이어!" "윌 오브 어스!" "에어 버스터! "파이어 버스터!" 대여섯명은 자신들의 앞에 불과 흙의 장벽을 만들었고, 네다섯명은 자신들을 향해 무섭게 날아드는 창에다 마법을 퍼부었다. 쾅! 사방으로 불꽃이 비산하는 가운데 장벽을 뚫은 창이 주변을 휩쓸었다. "으악!" "억!" 핑핑 도는 창에 얻어맞은 마법사들의 몸이 으스러지며 사방으로 퉁겨졌다. 머리를 맞은 자는 허연 뇌수를 흘렸고, 몸통을 맞은 자는 내부장기가 으스러져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팔다리를 맞은 자들은 뼈가 동강이 나서 살을 뚫고 허연 뼈가 드러나 있었다. 오직 한 명만이 창에게서 목숨을 건지고 아연실색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정신이 들었는지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놓았다. "실프!" 슈리엘이 바닥에 쓰러진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가운데 공중에서 실프가 나타나 아리아나를 핍박하는 광법사들의 제자에게로 날아갔다. 한 순간에 동료들을 떡으로 만들어 놓은 정령들이 자신들에게 날아들자 혼이 달아난 듯 놀란 마법사들의 손이 어지러워 졌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에엥! 날카롭게 변한 실프가 무시무시한 소음을 동반한 채 회전하며 날아들자 겁을 집어먹은 마법사들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핑핑! 퍽! 썩! 엉겹결에 친 실드를 뚫고 날아 든 실프가 마법사들의 몸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으악!" 배에 주먹크기 만한 나선형의 구멍이 생기자 숲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실피드!" 주변의 혼란을 아리아나는 놓치지 않았다. 엘란의 실프 공격으로 혼비백산한 마법사들 사이를 실피드가 누비고 다녔다. "으악!" 아리아나를 포위한 채 맹공을 퍼붓던 마법사들이 몰살한 것은 아주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나탈리!" 엘란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세 명에 불과했는데 전신이 붉게 달아 오른 채 몸이 점점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나탈린가요? 제가 나탈리를 돌볼 테니 당신은 제 오빠를 도와주세요." 엘란은 아리아나가 의외의 제의를 하고 나서자 그 진의를 몰라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매장에서 붙어 본 경험에 의하면 시리우스는 십존에 버금갈 만큼 강했다. 아리아나가 시리우스를 거든다면 상당히 유리하게 국면을 이끌 수가 있는데 왜 오만한 엘프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부탁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인간을 발의 때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시리우스의 허락도 없이 자신에게 제의를 한 것을 보면 상황이 다급하다는 얘긴 데 그런 낌새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엘란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이들의 몸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부풀어올랐다. 처음에는 눈이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코와 입까지 살 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의술이나 치료마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엘란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엘란은 형체도 모르게 부풀어 오른 나탈리의 얼굴에 입맞추고는 광법사와 시리우스가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급히 날아갔다. 둘의 마력이 부딪치는 세력권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압력이 몸을 압박해 왔다. "이건 뭐지?" 엘란의 입에서 당혹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밖에서 일견하기에는 광법사와 시리우스는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안의 실상은 완전히 달랐으니, 둘을 싸고 있는 공간은 완전히 광법사의 지배하에 있었다. 강자와의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을 지배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아도 대결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공간을 지배하려는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적을 감싼 공간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자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겼다. 한 동안의 대치 후 손을 쓰는 것은 마지막 확인에 불과할 뿐 그 전에 이미 승부는 나 있었다. 그런 만큼 강자와의 다툼에서 지배권 싸움은 둘 사이의 공간에서 스파크가 튈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엘란이 처음 둘의 세력권 속으로 들어 왔을 때 시리우스가 일부러 공간을 허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적에게 일부러 공간을 내줬다가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무섭게 일그러진 엘프의 얼굴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것은 시사하고 있었다. 생물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진 엘프가 얼굴을 일그러뜨려도 여전히 아름답기는 했지만. 마나를 잔뜩 끌어올린 엘란은 전신을 압박하는 광법사의 기운을 가닥가닥 풀어헤치며 한발 한발 시리우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광법사가 왜 마법을 쓰지 않지?' 엘란은 광법사가 왜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광법사같이 냉혹한 미치광이가 시리우스가 불쌍해서 봐 주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저 놈은 또 왜 저래?' 광법사의 강력한 압박에 저항하는 시리우스의 옷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고 머리는 허공으로 치솟아 산발한 가운데 눈이 붉게 충혈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볼 수는 없어도 자신의 모습도 점차 시리우스와 닮아갈 것이 뻔했다. 그러나, 뼈만 남은 광법사의 얼굴에 푸른 혈관이 툭툭 불거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갑자기 늘어난 광법사의 실력만큼이나 불가사의했다. 저런 모습은 시리우스의 핍박 때문이 아니라면 마나가 폭주할 때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시리우스가 자신을 지키기에도 힘겨워하는 지금 저러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광법사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슈리엘!" 엘란은 다시 슈리엘을 소환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광법사의 압박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슈리엘이 엘란을 감싸 안았다. "스피릿 컴파운드!" 일단 광법사가 지배한 공간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엘란은 변화를 구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했다. 쐐에액! 붉고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실피드와 카사가 맞물려 돌아가며 빛살같이 광법사에게 쏘아져 갔다. 광법사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휘젖기 시작하자 쏜살같이 날아가던 정령들이 어떤 기운에 얽매인 듯 속도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분리되어 버렸다. "젠장! 스피릿 컴파운드! 스피릿 컴파운드!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은 이대로 서 있다간 광법사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무리를 해서라도 상황을 역전시키고 싶었던 엘란은 연속적으로 스피릿 컴파운드를 시전했다. 슈아앙! 정령들이 줄줄이 날아가며 눈부신 빛이 주변을 휘황하게 밝혔다. 세 가닥의 눈부신 섬광이 일시에 쏘아지자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땅이 길게 파이기 시작했다. 팟! 갑자기 광법사의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드래곤 파이어!" 일레이저의 나직한 음성은 소름끼치도록 음산했다. 휘앙!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더니 시뻘건 불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잎을 벌려 포효를 시작했다. "우워어어!" 엘란 뿐 아니라 엘란의 가세로 광법사의 마력에서 풀려난 시리우스까지 놀라 입을 벌렸다. 7써클 마법 드래곤 파이어가 포효를 한다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제의 무덤에서 직접 맞서 봤던 엘란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를 흔들었다. 쾅! 스피릿 컴파운드와 드래곤이 부딪치며 귀청이 터질 것 같은 굉음이 울리며 땅바닥이 뒤집어졌다. 선두의 스피릿 컴파운드를 튕겨낸 드래곤이 이번에는 입에서 화염을 뿜어냈다. 콰아앙!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낸 화염과 정령들이 충돌한 순간 섬광이 작렬하며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세상에!" 드래곤이 포효를 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화염까지 뿜어낼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마치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어내는 것 같지 않은가. 쾅! 마지막 스피릿 컴파운드와 드래곤 파이어가 충돌하며 땅바닥을 헤집었다. "노임!" 정령들을 물리치고 날아오는 드래곤에게 시리우스가 소환한 노임이 달려들어 몸통을 물어뜯었다. "컹!" 드래곤의 몸에서 강렬한 불꽃이 피어오르며 요동치기 시작하자 개 모양의 흙들이 부서져 나갔다. "슈리엘!" 드래곤을 향해 슈리엘이 바람의 창을 날렸다. 슈아앙!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드래곤의 미간에 꽂혀들었다. 콰아아앙!!!! 이제까지와의 소음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굉음이 터지며 엄청난 기운이 사방으로 폭사되기 시작했다. 드래곤과 바람의 창이 부딪친 곳에서 시작된 기운은 원형으로 퍼져나가며 땅바닥을 뒤집고 나무들을 뽑아 올렸다. 미친듯이 요동치던 공기가 점차 가라앉고 허공으로 비산하던 흙들도 밑으로 떨어져 내리자 주변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름 1킬로의 빈터는 반 정도는 더 넓어져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엘란은 슈리엘에 둘러 쌓인 채 입에서 한 줄기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다리가 흙 속으로 무릎까지 들어가 있었다. 시리우스의 주위에는 진흙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시리우스, 저런 마법 본 적 있나?" 시리우스가 인간들을 멸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말 붙이기를 꺼리던 엘란이 질문을 던졌다. 도저히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통 때였다면 당연히 무시했을 엘란의 질문을 시리우스가 대답하고 나섰다. "8써클 마법사가 드래곤 파이어를 시전하면 저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시리우스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엘프들은 마법보다는 정령술에 능통해서 간혹 상급정령마스터가 나타나기는 해도 8써클 마법사가 나타나는 것은 거의 드물었다. "어떻게......" 엘란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코피를 흘리고 있는 해골같은 광법사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인간의 역사에 8써클 마법사가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하필 저런 미친놈이 전인미답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당신이 아직 살아있지?" 어찌 들으면 왜 죽지 않았냐는 소리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한 소리였다. 맞서 싸워본 8써클 마법사의 드래곤 파이어는 가공할 만 했다. 시리우스가 혼자서 8써클 마법사를 상대로 이제까지 버틴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당연히 불같은 의문이 일었고,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할 기분이 아니었던 엘란은 솔직하게 의문을 토로했다. 시리우스의 주변을 돌던 진흙이 뭉쳐지더니 사람 손의 모양이 되어서 광법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저 꼴을 보라! 내부의 마나가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아서 들끓고 있다. 만약 몸을 추스렸다면 너나 나나 이미 끝장이 낫겠지." 확실히 그랬다. 한 눈에 보기에도 광법사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원래 생긴 것이 해골 같았고 미친 짓을 곧 잘해서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8써클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몸에 무리가 간 것으로 판단한 엘란은 이를 악물었다. 이 기회에 광법사를 죽이지 못한다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같이 공격하자!" 엘란의 권유에 시리우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벌레같은 인간을 없애기 위해서 또 다른 벌레와 손을 잡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한심한 놈.' 시리우스의 내심을 짐작한 엘란이 비웃음을 띠었다. "바샤라의 돌을 찾으려면 광법사를 쓰러뜨려야 한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상급정령사가 열 명은 더 필요할 걸!" 엘란의 비웃음에 눈썹을 치켜올리던 시리우스는 할 수 없다는 듯 시선을 광법사에게 돌렸다. 승낙의 표시로 파악한 엘란은 실피드와 실프 카사를 동시에 소환하고 슈리엘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에 맞추어 시리우스도 흙의 상급정령 클레임을 땅속으로 감추고 노임과 엔다이론을 소환했다. "으으으하하하!" 갑자기 광법사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평소에 괴행을 일삼다가도 싸움에 임하면 칼날 같은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광법사가 지금은 완전히 돌은 것 같았다. '마법을 익히다 뇌가 상했다는 말이 정말인가?' 엘란은 예전에 얼핏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식으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자 오히려 불안한 예감이 가슴을 점령했다. "바람의 칼날!" 스엉스엉! 실피드들이 허공에 선을 죽죽 그리며 광법사를 난도질 할 것처럼 날아갔다. "압솔루트 실드!" 광법사가 절대방어마법을 시전하자 푸른색의 구가 그를 완전히 에워쌌다. 쩡쩡! 칼날로 변한 실피드가 계속 방어구를 후려갈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시리우스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광법사 아래의 흙이 뒤집어지며 날카로운 돌이 튀어나와 방어구를 두들겼다. 쾅쾅! 돌만 부스러질 뿐 방어구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의 입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지자 실피드와 카사가 맞물려 돌아가며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쾅! 엄청난 굉음에도 불구하고 스피릿 컴파운드에 직격당한 방어구에는 흠집하나 없었다. 다만 뒤로 일미터 가량 물러났을 뿐이었다. "클레임!" 시리우스의 냉정한 음성이 스피릿 컴파운드를 뒤따르자 바닥으로 스며들었던 흙의 상급정령이 방어구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푸른 구를 완전히 감싸 안은 후 조이기 시작했다. 일견하기에는 갈색의 흙으로 구은 거대한 구슬 같은 모양이었다. 저어엉! 둔탁한 소음이 계속해서 깔렸다. "슈리엘!" 바람의 상급정령이 방어구로 다가가 클레임을 감싸며 함께 조이기 시작했다. 쿵쿵쿵! 두 상급정령이 힘을 쓰자 주변의 공기가 요동을 치고 바닥이 들썩거렸다. 강한 회오리 바람이 방어구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드드드! 방어구가 허공으로 솟아오르자 주변의 흙과 바위들까지 딸려 올라갔다. 엘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급속한 마나의 유출에 마나홀이 서서히 아려오기 시작했다. 쾅! 갑자기 방어구가 폭발하듯 터져 나가며 클레임과 슈리엘을 찢어 발겼다. "음!" "......" 엘란은 억눌린 신음을 터트리며 선연한 붉은 피를 게워 올렸고, 시리우스의 꽉 다문 입 사이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흘러 내렸다. 충혈된 엘란의 눈에 여전히 코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내려오는 광법사의 모습이 비췄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은 마나홀의 마지막 마나까지 박박 긁어모았다. "월 오브 어스!" 바닥이 벌떡 일어서며 광법사의 앞에 벽을 만들었다. 엘란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치켜들자 정령들이 위로 떠오른 후 벽을 넘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쾅! 엄청난 충격파가 밖으로 퍼지며 흙의 장벽이 일시에 무너졌다. 기대를 가지고 앞을 살피던 엘란의 눈에 실망이 떠올랐다. "꾸어어!" 드래곤 파이어가 포효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엔다이론!" 시리우스가 물의 정령으로 불의 드래곤을 막아섰다. 치이익! 정령과 드래곤이 만난 자리에서 피어오른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며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그 사이를 뚫고 드래곤의 붉은 몸체가 드러났다. "카사!" 엘란의 지친 음성이 카사를 부르자 하늘을 선회하고 있던 불꽃의 독수리가 드래곤에게 내려 꽂혔다. 쾅! 카사의 불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타격을 받고 사라진 슈리엘과 실피드 카사는 더 이상 소환할 수 없었다. 엘란은 엔다이론을 불러 드래곤에게 보낸 후 더 이상 드래곤 파이어에 신경을 끊고 광법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실프!" 스무개의 실프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허공을 선회했다. "가라!" 쐐기 모양으로 변한 실프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광법사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들이댔다.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완벽한 대형을 갖춘 실프들이 광법사의 사방을 에워싸며 빗살처럼 쏘아졌다. "에어 실드!" 반쯤 미친 것 같은 모습인데도 공격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방어마법이 튀어나왔다. 압축된 공기가 광법사를 감싸자 실프들이 실드에 부딪쳐 갔다. 위이잉! 가가가각! 스무개의 실프가 방어막에 머리를 들이대고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하자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임! 엔다이론! 실피드!" 시리우스는 정신없이 정령들을 소환해서 드래곤의 앞을 막아섰다. 쾅! 쾅! 쾅! 쾅! 연속적으로 정령들이 부딪쳐 사라지자 시리우스의 입에서 흐르는 피가 더욱 많아지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실피드!" 시리우스는 자신과 계약한 마지막 중급정령을 불러서, 이제는 확연하게 색깔이 옅어진 드래곤의 앞을 막아갔다. 펑! 실피드가 옷자락으로 드래곤을 휘감았다. 화르르! 드래곤의 몸에서 불꽃이 치솟아 오르자 투명하던 실피드가 서서히 붉게 달라 올랐다. 팟! 잠시 버티던 실피드가 사라지자 머리를 앞으로 쭉 내민 드래곤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시리우스는 실프와 운디네로 앞을 막는 동시에 옆으로 몸을 날려 엘란을 안고 정신없이 굴렀다. 쾅아앙! 드래곤 파이어가 직격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지름 50미터의 구덩이가 파였다. 엘란은 정신이 혼몽한 가운데서도 살기를 끌어올리며 실프들에게 계속 마나를 보냈다. 하급정령일수록 감정의 전이가 빨라서, 계약자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이이잉! 실프들은 에어 실드를 후벼파고 있었다. 계속 윙윙거리는 실프들이 광법사의 신경을 자극하자 그는 성가시다는 듯 오른손을 저었다. 쾅! 에어 실드가 폭발적으로 확장을 시작하며 실프들을 날려 버렸다. 엘란은 재빨리 실프 하나에 마나와 의념을 집중해서 일레이저를 덮쳐갔다. "어어! 실드!" 실드가 실프들과 부딪쳐 사라진 가운데 갑자기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자, 당황한 일레이저가 새로운 실드를 완전히 펼치기도 전에 불완전한 실드를 뚫고 광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핑! "악!" 광법사의 오른팔이 붉은 피를 쏟으며 잘려져 나갔다. 팔을 자르고 지나간 실프가 허공을 선회해 다시 날아오자 광법사가 이를 갈았다. "드래곤 파이어!" 8써클 마법사가 부리는 7써클 궁극마법이 고작 실프 하나를 때려잡으려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을 부술 수도 있는 공성병기로 아이들이 장난으로 만든 흙집을 부수려 하는 것처럼 격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펑! 실프를 간단하게 정령계로 강제소환 시켜버린 드래곤이 그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밀림을 헤집어 버렸다. 카아앙! 나무들이 뿌리 채 뽑혀 날아가고, 바닥이 미친 듯 뒤집어 지며 화염이 주변을 휩쓰는 모습은 짙푸른 밀림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다. 얼마 전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있어서 제 정신이 아닌 광법사는 내부의 마력이 들끓어 장부를 헤집어 놓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코피를 흘린 데다 팔까지 잘려나가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이 며칠만에 온전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그 간의 행적이 주마등같이 뇌리를 스쳐가자 특히 엘란과 시리우스에 대한 살기가 들끓어 올랐다. "흐흐흐흐!" 광법사는 엉망으로 변한 내부를 추스르며 음산하게 웃었다. "힐링!" 왼손을 잘려진 오른손에 갖다대자 환한 빛이 생기며 피가 멎고 새 살이 돋았다. 안 그래도 해골 같던 얼굴이 피로 범벅되어 흉신악살 같아 보이는 광법사가 한발한발 다가오는 데도 불구하고 엘란과 시리우스는 손끝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이게 누구야? 너하고 나하고는 인연이 깊은 것 같구나." 광법사가 엘란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그날 끝장나는 걸 보지 못해서 뒷간 갔다 온 뒤, 뒤 안 딱은 것처럼 찝찝하더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이런 오지에서 보게 되자 정겨운 마음이 일었다. 광법사가 징그러운 미소를 띄었다. "정들자 이별이구나." 일레이저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그 꿈과 능력을 펼치지 못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주는 일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들끓는 내부를 억지로 누르며 이 놈들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이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희긋희긋한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아리아나가 실피드로 시전한 바람의 칼날이었다. "아이스 스톰!" 쩡쩡쩡! 실피드가 얼음의 폭풍과 만나자 고온 다습한 밀림에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삐죽삐죽한 얼음들이 몰아치는 공간에 길쭉한 줄들이 죽죽 그어졌다. "두고 보자!" 광법사 일레이저가 이를 갈며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리아나를 감당하기 버거웠던 것이다. 계속 손을 쓴다면 이들을 몰살시킬 자신은 있었으나 자신도 위험해질 것 같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들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도 있는데 모험을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광법사가 멀리 사라지자 아리아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뜻 보기에는 아리아나가 광법사를 몰아 부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광법사가 시전한 아이스 스톰은 보기만큼 지독해서 실피드를 강제소환 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충격을 받은 아리아나는 비세를 드러낼 수 없어서 억지로 버티고 있다 광법사가 사라지자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 "맙소사!" 가장 늦게 출발했으나 헤이스트 마법을 시전해 가장 먼저 현장에 당도한 하이론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린 밀림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잠시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하이론의 눈에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않는 엘란의 모습이 잡혔다. "어떻게 된 거냐?" "학....학! 광법사와... 싸웠습니다. 그보다, 나탈리..... 좀 살펴보십시오." "나탈리! 여기 있더냐? 알았다." 하이론은 엘란에게 포션을 한 병 건네주고는 즉시 나탈리에게로 달려갔다. 광법사를 쫓아 보낸 아리아나가 여자아이의 배와 가슴에 손을 얹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 아에게용병대가 맥그루의 의뢰를 받았을 때 같이 다니던 나탈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자아이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어서 오관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엘프의 치료를 지켜보다 다른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프가 치료를 하고 있는데 방해가 될까 저어한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리아나가 계속적으로 돌봐주는 있는 나탈리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대단히 양호한 편이었다. 정신을 잃은 가운데서도 고통스러운지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리는 아이들의 몸은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옷은 갈가리 찢어져서 작은 천 쪼가리들만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자 격렬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난생 처음 접하는 괴상한 증세에 하이론은 어떻게 손을 대야할 지 난감했다. "흠!" 하이론은 조심스레 아이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이의 몸 속에서 거대한 기운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나 스캔! 세상에!" 감은 눈 안이 온통 시뻘개졌다. 몸 속에 상상도 못할 만큼의 거대한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습니까?" 겨우 몸을 추스린 엘란이 황급히 다가와 초조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나탈리는 저 아이다." 하이론은 심각한 얼굴로 아리아나가 치료하는 아이를 가리켰다. "이 아이 몸 속에 엄청난 마나가 맴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 툭툭툭! 한탄과도 같은 하이론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이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살이 터지며 만들어 내는 소리는 엘란과 하이론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팟! 펑! 갈라진 살 사이로 피가 뿜어지더니, 몸이 산산이 터져 나가며 살점과 피가 온 천지를 물들이 듯 비산했다. 후두둑! 피할 사이도 없이 하이론과 엘란은 피비를 뒤집어썼다. 펑! 곧이어 또 다른 아이가 터져 나가자 나탈리만이 살아 남았다. 둘은 정신없이 아리아나에게 다가갔다. 도저히 본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 나탈리의 몸에 두 손을 대고 있는 아리아나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굳어진 얼굴에는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탈리의 몸에 대고 있던 아리아나의 두 손이 떨리지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떨림이 온 전신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듯 아리아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치료는 다 된 겁니까?" 나탈리의 몸은 여전히 부푼 상태로 치료가 다 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몰골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리아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엘란은 시리우스와 힘을 합쳐 광법사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 반면 그녀는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몸 속에 흐르는 마나가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다 뽑아낼 수 없었어요." "뽑아내다니 무슨 소리요?" 강대한 마나가 아이의 몸을 터트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하이론은 무슨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 다급하게 질문했다. "엘프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기술입니다. 엘프들은 마나를 뽑아내서 대지로 흘려 보낼 수 있어요." "그럼 계속 뽑아내면 되지 않습니까?" 내부를 휘젖는 마나가 나탈리의 몸을 터질 듯 부풀리는 원인이라면 그 마나만 뽑아내서 흘려버린다면 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엘란은 엄마를 조르는 아이같은 얼굴로 아리아나를 재촉했다.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통로로 마나를 흘린다면 내 동생은 죽는다." 창백한 얼굴로 다가온 시리우스가 엘란과 아리아나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아리아나가 나탈리의 치료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한다면 막겠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는 행동이었다. 엘란은 목숨이 위험하다는데 치료해 달라고 고집할 수도 없고 나탈리를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리아나, 당신이 뽑아낸 마나가 얼마나 됩니까?" 하이론의 침착한 음성이 다급한 엘란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혀 주었다. "삼분의 이 정도 됩니다." "그럼 삼분의 일만 뽑아내면 되겠군. 시리우스 당신도 엘프니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겠지요?" 엘란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이론은 싸움이 끝난 후에 당도해서 시리우스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같이 손을 잡고 싸운 엘란은 시리우스의 상태가 보기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안색만 창백한 것으로 보였지만 내부의 상처는 심각했다. 자신이 가세하기 전부터 상처를 입고 있었던 데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부상이 심해진 때문이었다. 하이론은 엘란이 고개를 흔들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엘란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없소?" "엘프 특유의 기술이라 인간은 익힐 수 없을 겁니다. 만의 하나 엘란의 몸이 특수해서 익힐 수 있다 하더라도 저 아이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이 기술을 배우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엘란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하는데 반해 하이론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치료법을 찾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뽑아내서 흘려버릴 수 없다면 저장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누가 저 거대한 마나를 감당할 수 있죠?" 아리아나가 회의적으로 반문하자 하이론의 시선이 엘란에게 멎었다. "할 수 있을까?" "해야죠!" 엘란은 단호하게 외쳤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나를 뽑아내죠?" 남의 몸 속에 들어있는 마나를 뽑아낸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당연히 엘란이 그러한 기술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아리아나가 할 수 있을 거다. 그렇지 않나요?" 하이론이 말끝을 묘하게 들어올림으로써 반드시 해야한다는 압박을 가했다. "마나가 내 몸 속을 관통하는 것은 아니니 가능은 합니다만 견딜 수 있을지..." "그럼 당장 시작합시다." 엘란은 급히 나탈리의 배에 양손을 얹었다. 아리아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탈리와 엘란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나탈리를 억지로 앉힌 후 등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엘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아나가 마나를 유도해 엘란의 손으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거대한 힘이 엘란의 두 손을 타고 몸으로 들어오자, 폭풍우에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온 몸을 떨었다. 그 힘은 너무나 뜨거워서 전신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칼로 쑤시는 것 같은 기운이 혈관을 헤집고 다니자 뇌를 부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이런 고통을 한 마디 비명없이 견뎌낸 아리아나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몸 속에 들어온 마나가 한 바퀴 두 바퀴 전신을 돌 때마다 새로 들어온 마나와 합쳐지며 고통을 배가시켰다. "으으!" 꽉 다문 입 사이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엘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나를 자신의 마나홀에 저장하는 것이 꺼림직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마나를 서서히 마나홀로 유도했다. "으!" 마나홀에 뜨거운 마나가 쏟아져 들어가자 불로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나홀로 들어온 마나는 얌전해지기는커녕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바람에 마나홀에 들어온 마나를 제어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엘란이 정신없이 마나를 유도하고 안정시키려 애쓰는 가운데 마나홀에 흘러 들어오는 마나의 양은 줄지 않았다. 나중에는 마나홀이 꽉 차서 더 이상 채워 넣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꼬챙이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전신을 치달렸다. "으으으!" 엘란은 신음을 계속해서 흘리며 터질 것 같은 마나홀에 마나를 쑤셔 넣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헉!"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란 하이론이 헛바람을 삼켰다. 엘란을 지켜보느라고 너무 긴장해서 쟝과 아에게, 짝귀, 들창코, 밤톨, 골고타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아에게와 대원들이 전신이 땀으로 젖은 채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떠는 하이론과 시뻘개진 얼굴로 몸을 떠는 엘란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쟝의 눈이 시리우스와 아리아나의 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뭐 하는 거냐?" 무의식적으로 쟝의 손이 아리아나를 향하자 하이론이 호통을 질렀다. 중요한 순간에 손이라도 댔다간 상황이 심각해 질 수도 있었다. "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쟝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게 얼마나 밉살스러운지 하이론이 마법의 지팡이를 꺼내 머리통를 후려갈겼다. 빡! 수박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쟝의 머리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아니 이 영감이..." 살기에 번들거리는 하이론의 눈에 놀란 쟝이 말을 삼켰다. 하이론이 쟝을 구박할 때도 인간적인 정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눈빛은 잘못 대들다간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그 기세에 눌려 아에게와 그린도 질문을 삼키고 말았다. 엘란은 죽느냐 사느냐의 중대한 고비에 도달해 있었다. 마나홀이 터져서 죽느냐 마나홀이 확장을 해서 마나를 받아들이느냐. 쿵쿵쿵! 엘란의 뇌리로 벽을 거칠게 부딪쳐 가는 마나의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광법사와 싸우느라 탈진해서 마나를 완전히 소진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약간의 마나라도 남아 있었다간 새로 들어온 마나와 충돌해서 심각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쿵쿵! 엘란의 정신이 하얗게 바래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나를 계속 집어넣으며 벽과 충돌시키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쾅!!!!! 어느 순간 머리로 벼락이 떨어져 내리며 마나홀이 확장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온 마나가 집을 짓기 시작했다. "휴!" 한 줄기 한 숨과 함께 아리아나가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엘란의 손도 나탈리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엘란이 눈을 뜨고 보자 나탈리의 얼굴에 부기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오관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다 나은 것 같았다. "다행이다!" 자신의 제안으로 엘란이 죽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던 하이론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일이 원만하게 풀리 것 같자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를 못하는 아에게가 급히 물었다. 하이론이 자신이 본 것을 말하자 나탈리를 품에 안던 엘란이 그 전의 일을 설명했다. 엘프들을 쳐다보느라 엘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쟝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8써클!!!" "광법사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광법사가 8써클의 경지에 들었다는 사실은 인간으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세계에 발을 들려놓은 것과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한 일을 축하하거나 즐거운 일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한탄과 경악만이 가득했다. 왜 그런 미친놈에 의해 역사의 새 장이 열려야 하는가? "어서 여기서 나가죠." 그 사이 밀림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아니면 8써클 미치광이가 돌아다닌다는 소리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들창코가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묶고 내일 떠납시다." 엘란은 여러 가지 일로 녹초가 된데다 마나홀에 또아리를 틀고 자리를 잡은 괴상한 마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심산이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지금 바로 출발하는 것은 무리야." "그래, 좋은 생각이다." 아에게와 쟝이 열렬하게 찬성하고 나섰다. 여러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엘프들을 자세히 관찰할 심산이었다. 엘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광법사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 덕분에 겨우 쫓아낼 수 있었으나 몸을 회복한다면 자신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에게와 쟝이 신나서 뭐라고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싸움의 여파로 커다란 공터가 생긴 곳 중 평평한 곳을 골라 자리를 펴고 나탈리를 눕혔다. 자신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이론이 다가와 불을 피우고 그 옆에 자리를 잡자 그린과 짝귀 삼총사도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엘프들마저 엘란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다른 사람들이 민망할 정도로 엘프들을 쳐다보던 쟝과 아에게도 할 수 없이 다가왔다.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시리우스가 바닥에 앉아 명상에 들자 오빠를 보호하려는 듯 아리아나가 그 옆에 섰다. 그들은 코르도바습지 밖에서 입었던 두꺼운 망토를 벗고 연두빛이 감도는 얇은 로브를 걸쳤는데 거기에도 모자가 달려 있었다. 엘프들이 모자를 덮어쓰자 아에게와 쟝이 실망한 소리가 밀림에 울려 퍼졌다. 엘란은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일단 마나홀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마나는 더 이상의 움직임 없이 잠잠했다. 다시 고이기 시작한 자신의 마나와 나탈리의 몸에서 들어온 마나는 물과 기름처럼 따로 따로 놀았다. 마나를 받아들이느라 크게 팽창한 마나홀의 바닥에는 새로 들어온 마나가 깔렸고 그 위에 자신의 마나가 둥둥 떠 있는 형세였다. 엘란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괴이한 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흘러 보낼 수도 없고 자신의 마나와 융합하지도 않은 채, 마나홀만 차지하고 있는 마나는 엘란의 입장에서 보자면 화근덩어리라고 할 수 있었다. 소중한 마나홀의 공간의 차지한 것은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유사시 둘이 충돌해 마나홀이 찢어 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두 마나가 충돌하는 날이 제삿날이 될 수도 있었다. 엘프들이 모자를 덮어쓴 채 미동도 하지 않자 흥미가 떨어진 쟝과 아에게는 침낭에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고, 나탈리의 주위에 둘러앉아 걱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그린과 짝귀 삼총사도 밤이 깊어지자 다가오는 수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나탈리의 옆에 자리를 만들어 잠에 빠져들었다. 골고타까지 잠이 들자 주변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오랜 시간동안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엘란이 눈을 뜨자 이때까지 잠자지 않고 기다리던 하이론이 질문을 던졌다. "괜찮으냐?" "새로 들어온 마나가 마나홀에 자리를 잡았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제 마나와 융합하지도 않고 서로 겉도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한데요." 엘란이 씩 웃으면서 말하자 하이론까지도 불안해졌다. 대륙최고의 치료마법사였던 발자크에게 의술을 배웠고, 자신도 나름대로 노력해서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하이론으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일인지라 어떠한 조언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두다가는 심복지환이 될 게 분명한데..." 하이론은 두 마나가 서로 배척하고 충돌이라도 일으킨다면 그 날이 세상 구경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려다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말을 삼켰다. "그 마나를 뽑아서 밖으로 흘리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몇 시간을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아리아나가 갑자기 끼어 들었다. 하이론의 얼굴이 환해지며 고맙다는 치사를 하려는 순간 엘란이 손을 저어 말렸다. "조건은?"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시리우스는 인간을 발가락의 때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그것보다는 열린 시선으로 사람들을 대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편견을 버리지 못한 아리아나가 엘프 고유의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광법사와의 대결과 나탈리의 치료와 같은 어떤 거래를 제의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이론의 다시 얼굴을 찌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아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처럼 광법사와 싸워주세요." "그건 안 된다!" 하이론은 엘란이 대답하기 전에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못을 박은 후, 아리아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사는 게 낫소." 엘란도 하이론과 생각이 같았다. 나중에 탈이 날 수는 있어도 빠른 시간 안에 두 마나가 충돌을 일으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법사와 싸우러 갔다간 시리우스와 합작한다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죽을 것이다. "지금 위험을 무릅쓰면 완전한 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의 위험을 피해 달아난다면 나중에는 확실히 죽을 겁니다." "나는 할 일이 많소. 나중에 죽을지언정 죽음이 뻔히 보이는 길로 걸어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휴! 할 수 없군요. 하지만 왜 꼭 죽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농담하는 거요! 아까 보지 않았습니까? 광법사는 내가 보기에 내부가 엉망인 상태에서도 나와 시리우스를 죽음직전까지 몰고 간 잡니다. 그가 부상을 회복했다면 우리 같은 자가 최소한 열 명은 더 있어야 할겁니다." "왜 그가 부상을 곧 회복한다고 판단하는 거죠?" "그는 8써클 마법사요. 부상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보다 더 빠를 것이 뻔하지 않소." 하이론이 대신 대답을 하자 아리아나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절대 빠른 시간 안에 부상을 회복할 수 없어요." "당신들이 그를 부상시켰군. 하지만 어떻게? 당신들의 실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텐데..." 하이론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다 번뜩 떠오르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나탈리와 아이들의 몸에서 들끓던 강대한 마나와 관련이 있군. 그래!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몸에서 마나를 뽑아낼 때 당신들이 기습했군. 그래야 당신들이 광법사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제대로 설명이 되. 그래서 광법사 몸이 엉망이 된 거고, 내부가 그렇게 망가졌으니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오래 걸리겠지." 아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광법사는 어떻게 그런 마나를 아이들 몸 속에 집어넣고 뽑아낼 수 있었지? 아니, 그것도 이상하군. 그런 기술이 있다면 자신이 직접 마나를 흡수하면 되지 아이들의 몸은 왜 거친 거지? 그리고, 이렇게 강대한 마나는 어디서 나온 거지?" 여전히 의문은 남아서 하이론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이론은 혼자서 자문자답하며 중얼거렸다. 유명한 마법사의 학구열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바샤라의 돌! 그렇지, 당신들이 찾아다니는 바샤라의 돌과 연관이 있어. 그래야 모든 일들이 제대로 설명이 된다." "버러지 같은 것들 중에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있군." 명상을 끝마쳤는지 시리우스의 냉혹한 음성이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이론과 엘란은 그러려니 생각하고 시리우스의 멸시적인 언사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도 최소한 자신들의 열 배는 될 테니 경로우대 한다는 마음으로 신경을 꺼버렸다. 만약 인간이 이런 말을 했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지도 모르나 상대가 엘프이다 보니 별로 대거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는 묘한 심리상태도 섞여 있었다. 시리우스가 자신들을 멸시했지만 엘란과 하이론도 절반쯤은 시리우스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이 묘해서 개가 짖고 새가 노래하고 돼지가 밥 달라고 꿀꿀거린다고 인간이 거기에다 화를 낼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엘프들이 사람보다 새나 개 따위의 짐승들을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엘란과 하이론이 자신을 그런 동물과 동급에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도 엘란처럼 가만히 참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바샤라의 돌이 뭐요?" "제 제의를 승낙하실 건가요?" 아리아나는 엘란의 질문을 무시하고 자신의 관심사항부터 물었다. "아니, 거부하겠오." 엘란의 단호한 거부를 끝으로 엘프와의 대화는 끝이 났다. ----- 16장. 바샤라의 돌 “바샤라의 돌이 뭘까요”“ 엘란이 물었다. 엘프들이 찾아다니는 바샤라의 돌과 광법사가 8써클에 발을 디딘 것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나탈리같은 아이들을 광법사가 데리고 다닌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쩐지 계속 부딪칠 것 같은 예감에 사실을 알고 싶었으나, 엘프들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그게 뭔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이론도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이용했을까요”“ 엘란은 식견이 풍부하고 인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하이론에게 궁금한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봤을 때 돌에 대단한 마력이 들끓고 있나 보다. 광법사도 그대로 흡수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겠지. 그래서 세상의 더러움이 덜 쌓인 아이들을 이용해서 마나를 뽑아냈을 거다.” 하이론의 예상은 정확했다. 바샤라의 돌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보통의 마법사들이 보기에도 평범한 돌이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마나가 들어 있었다. 광법사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 그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방법을 연구하다 찾은 것이 아이들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아이에게 돌을 들린 후 자신의 마력으로 돌을 자극해서 그들의 몸에 거대한 마나를 집어넣었다. 워낙에 거대한 마나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당연히 아이들 몸에 들어가는 마나량을 조절하지 못해서 많은 아이들이 죽어갔지만, 광법사로서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야 고아원에서 사들이거나 아니면 납치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돌을 아이의 손에서 떼 내는 방법이었다. 처음 몇 번은 떼어내지 못하고 아이들이 터져 나가거나, 팔을 잘랐다가 곧바로 터지는 바람에 피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방법을 찾아내고-한 번 떼어내는데 온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려야 했다-아이들의 몸속에 마나를 넣은 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순수하고 회복력이 빠른 아이들의 몸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온 마나를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에 맞게 구성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엘란조차도 삼분의 일을 받아들이는 데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을 아이들의 연약한 몸이 견뎌낼 수 없었다. 광법사가 노린 것은 아이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변화된 약간의 마나였다. 몸속에 들어온 마나의 천분의 일 정도도 되지 않는 마나였지만 여러 번 반복하자 새로운 경지를 열 정도의 마나를 모을 수 있었다. 이 일에 들어간 아이들의 목숨이 천명이 넘었으니 천인공노할 만행이라 할만 했다. 모든 일은 광법사의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으나 자신의 머리에서 일어나는 괴상망측한 일들은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엘프들의 기습이야 그냥 넘긴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이상한 일들은 반드시 규명해야만 했다. 엘란일행은 몰랐지만 광법사가 코르도바습지를 찾은 것은 그러한 일들과 관련이 있었다. 엘란은 예전부터 광법사 하면 미치 노 이라고 등식을 그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광법사를 여사로 보았지만 이것은 자신들과도 연관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의 해답이 나오지 않자 하이론이 엘란을 보고 말했다. “피곤할 테니 그만 자거라.” “두 시간 후에 깨워주세요.” 엘란이 잠들고, 엘프들 마저 잠든 것 같은 밀림의 밤. 하이론 혼자만이 깨어서 노랗게 일렁이는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꿈속에서 엘란은 한 번도 다녀보지 못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낮은 구릉들이 몸을 맞대고 이어지는 풍경이 상당히 목가적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도로는 잡티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서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했다. 대리석에다 얼굴을 가져다 대자 자신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이게 내 얼굴인가”“ 대리석에 비친 얼굴은 이상하게 늙어 보여서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엘란은 혹시 다른 사람의 얼굴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끝도 없는 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을 뿐 다른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긴 길을 내가 걸어왔다고 생각하자 피로가 엄습해왔다. 다시 쪼그려 앉아 바닥에 비친 모습을 박박 문대던 엘란은 쟝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아마 쟝이 여기 왔다면 바닥이 워낙 잘 비춰서 여자들 치마속이 훤히 보일 거라고 한참 너스레를 떨어댔을 것이다. 한 동안 웃어대던 엘란은 왠지 이 긴 길을 따라 걸어가야 꿈에서 깨어날 거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어서 일어나서 하이론 대신 불침번을 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꺼림칙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이 옷은!” 이상하게 해운조합에 들려서 배를 살 때의 그 화려했던 차림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불편한 마음이 들자 옷을 벗어 던지고 바지와 셔츠만 입은 채 걸음을 떼어놓았다. 낮은 산을 따라 구불거리는 길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에는 열대의 식물들이 가득한 데도 날씨는 선선한 것이 하나도 덮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밀림에 들어와서 잠이 들었다는 자각이 들자 찜찜한 기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피콜라니협곡을 지나다 공격을 받아 혼몽한 잠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꿈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깨어날 수 없었다. “에쉴리, 에쉴리,”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쉴리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어놓자 꿈이라는 것을 시위라도 하듯이 주위의 풍경이 달라졌다. 대리석길은 그대로였지만 열대식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길가를 뒤덮고 있었다. “자기 멋대로군.” 잠시 코스모스를 쳐다보던 엘란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풍경이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휙휙 밀려났다. 엘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령을 불러 보았다. “슈리엘!” “......” “하하, 꿈속에서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바보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머리를 콩콩 두드리고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고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숨이 가빠오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뭐야” 꿈속에서도 힘든 건 그대론가...” 한 동안 멈춰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한 엘란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쩡! 갑자기 귀청을 찢을 것 같은 소음과 함께 눈을 태울 것 같은 강렬한 빛이 작렬하고, 몸을 뜨겁게 달구는 바람이 몰아쳤다. 열기가 사그라들고 눈을 가리던 손을 떼어내자 주변의 풍경은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길을 제외한 모든 것이 암흑에 잠겨 있고 두 갈래 갈림길이 뱀의 혀처럼 불길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 쪽 길은 이때까지 왔던 것과 같은 백색의 대리석길이었고, 다른 쪽 길은 검은색의 돌로 만들어진 길이었는데 주변의 암흑과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어디로 가지”“ 오른발을 들었다 놓았다 결정을 못 하는데 별안간 바닥에서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도마뱀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데도 불구하고 힘든 기색하나 없었다. 턱! 도마뱀의 다리가 바닥에 내려서고 다른 다리들이 차례대로 바닥을 디뎠다. 턱! 턱! 턱! 턱! 턱! 턱! 턱! 소리는 여덟 번이나 울리고서 잠잠해졌다. 괴상한 도마뱀은 다리가 여덟 개였던 것이다. 머리 아래 몸통은 없고 머리에서 바로 이어지는 다리 여덟 개는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도마뱀이 노란 눈동자를 들어올려 엘란을 노려보더니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꿈속에 들어왔더니 도마뱀까지 나를 비웃고... 별 일을 다 당하는군.” “츗츗!” 위협이라도 하듯이 을러대던 도마뱀은 몸을 돌려 두 갈래 갈림길 중 흰색 대리석이 깔린 길로 들어서서 엘란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기분 나쁜 도마뱀을 쳐다보던 엘란은 검은색 길로 접어들었다. 괴상하게 생긴 도마뱀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지만 왠지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춧춧, 추우웃!” 일단 결정한 후 빠르게 달리는 엘란의 뒤로 도마뱀의 다급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검은색 길로 들어서자 온 천지가 깜깜한 것이 도저히 사물을 분간할 수 없었다. 상급정령사에 들어선 후 이렇게 깜깜한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도마뱀을 따라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자신이 어느 길로 갈까 망설이는데 마치 길 안내라도 하듯이 바닥에서 솟구친 도마뱀을 무시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엘란은 후회를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지 더욱 빠르게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환한 빛이 나는 출구가 보이자 암흑 속에 있던, 눈이 부셔왔다. 휙! 눈을 감고 빛나는 출구로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어차피 꿈이라는 생각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 바퀴 바닥을 구른 뒤 일어난 엘란은 상상외의 풍경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앞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엘리오트의 수도 롬바르드가였다. 항상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검문소 앞에 개미 한 마리보이지 않자, 분명히 롬바르드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는 새로운 도시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검문소를 통과해서 빈민과 가난한 평민들이 우글거리던 곳을 지나 아에게용병대가 있던 산길로 접어들었다. 왠지 모르게 이쪽으로 오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부지런히 걷자 곧 정다운 풍경이 엘란을 반겼다. 얼기설기 엉성하게 지어진 집과 곳곳에 쳐 놓은 천막들 사이로 둥그렇게 둘러않은 용병들이 보였다. 그 순간 너무 반가운 나머지 몇몇을 빼고는 모두 죽었다는 생각을 망각하고 빠르게 달려 내려갔다. “핸슨!” 쌍둥이 핸슨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일년도 더 전의 일이다. 툭! 엘란이 핸슨의 어깨를 짚는 순간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헉!” 구멍이 뻐끔하게 난 눈 사이로 징그러운 지네가 기어 나오고 멍하니 벌어진 입에서 주먹만한 거미가 튀어나왔다. “샌슨! 어떻게 된 거에요”“ 핸슨의 옆에 앉은 샌슨의 몸을 흔드는 순간 샌슨의 몸에서 악취와 함께 파리들이 날아올랐다. 어찌나 파리들이 많이 날아오르는지 벌통을 건드린 것 같았다. “아!” 이리저리 다니면 살펴본 용병들 모두가 죽은 채 썩어가고 있었다. “아에게! 그린! 짝귀!” 자신의 옆에서 누워 자는 사람들까지 죽은 지 오래된 듯 파리들에 뒤 덥혀서 썩어가고 있었다. “아냐, 아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 발 한 발 물러서던 엘란은 고함을 지르고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웨에엥! 썩은 고기는 이제 질렸는지 수만 마리의 파리들이 엘란의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웽웽웽! 신경을 자극하는 파리의 날개 짓 소리가 귀를 파먹어 댈 것만 같은 생각에 두 손으로 귀를 꼭 쥔 채 달려내려 가는 엘란의 등 뒤로 엄지손가락만한 시커먼 파리들이 따라붙었다. “악!” 파리에 따라잡힌 엘란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런 그의 몸 위로 시커먼 파리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파리의 입에서 징그러운 주둥이가 튀어나와 몸에다 작살을 꽂듯이 주둥이를 박아 넣었다. 엘란은 마치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고통에 몸을 떨었다. 쭉쭉! 자신의 체액을 빨아먹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수만 개의 더러운 주둥이가 자신의 몸에 박혀있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파리들은 엘란의 코와 입, 귀속으로까지도 파고 들어왔다. 귀로 들어온 파리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거인이 걷는 듯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귀속 솜털에 생생한 감촉이 느껴지자 미칠 것 같았다. 점점 안으로 파고든 파리가 고막을 건드리자 머리까지 울려왔다. “카사!”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크게 소리 질렀다. 입안 가득 들어찬 파리들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크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불의 독수리는 날아오지 않았다. 엘란의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 찰 때 휭하는 소리와 함께 엘란의 몸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타닥! 타닥! 진절머리를 치게 만들던 파리들이 엘란의 몸에서 피어나는 불꽃에 몸체가 빠르게 오그라들며 타들어 갔다. 엘란의 귀속에서 검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사그라드는 불꽃과 함께 파리떼들도 자취를 감추자 엘란도 정신을 차렸다. 언제 산을 내려왔는지 자신은 귀족들이 말하는 롬바르드로 들어가는 성벽 앞에 오두커니 서 있었다. 끼이익! 굳게 닫친 성문은 살짝 밀어도 쉽게 열렸다. 사람들만 없어졌을 뿐 안은 예전에 왔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거리와 웅장한 집들 사이로 아무도 보이지 않자 앞서 왔던 길보다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쿵!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데 갑자기 성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 퇴로가 막히는 것 같아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끙!” 쉽게 열리던 문은 안에서 당기자 꼼작도 하지 않았다. “슈리엘! 실피드! 카사! 엔다이론! 실프! 샐라멘더! 운디네!”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계약하고 있던 정령들을 모두 불러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던 엘란은 눈을 감고 자신에게 암시를 걸었다. “이건 꿈이다! 열을 헤아리면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하나, 둘, 셋......,열.” 힘차게 눈을 번쩍 떴지만 보이는 것은 커다란 저택들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무작정 걷는 엘란의 눈에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집이 들어왔다. “여기는...그래 보석과 금화를 훔쳤던 집이다.” 엘란의 앞에 있는 집은 롬바르드를 급히 떠나면서 들렸던 엘리오트 최고 갑부 칸토나의 집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특별히 갈 데도 없는 지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쉽게 열린 문안으로 수목들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이 보였다. 역시나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몰래 들어왔던 집을 그것도 보석과 금화를 털어 간 집에 환한 대낮에 들어오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엘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한 번 가본 적이 있던 칸토나의 금고로 향했다. 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금고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와! 대단한데.” 금고의 속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바닥 가득 금화와 보석들이 휘황한 빛을 뿌리고 있었고, 벽에는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검들이 죽 걸려있었다. 주먹만한 다이아가 박힌 왕관도 낙엽처럼 바닥에 구르고 있었고, 붉은 수정을 박은 황금막대기도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하이론 갖다주면 좋겠네. 이건 에쉴리 주고, 나탈리도 좋아하겠지.”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에 혀를 깨물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엘란의 손안에 거대한 자루가 들려 있었고, 목에는 각각의 크기가 콩알만한 진주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내가 언제...” 얼마나 많이 집어넣었는지 들 수도 없는 자루안에는 수많은 보석들이 가득했다. “이걸 언제 집어넣었지”“ 머리가 멍한 것이 자신이 어디에서 자루를 꺼내 이 많은 보석들을 집어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젠장!” 팍! 홧김에 자루를 걷어차다 교도들 생각이 떠올랐다. 섬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배에 실은 식량이 떨어지면 먹을 것이 없었다. 살만한 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이상 식량은 대륙에서 조달해야 했고, 그러자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엘란은 목걸이를 자루 속에 집어넣고, 자루에 들어 있는 보석들을 반쯤 덜어내고는 어깨에 울러 맺다. 휘청! 반이나 걷어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나 무거운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후, 후!” 가쁜 숨을 몰아쉬고 금고를 나서는데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롬바르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은 어느새 처음 눈을 떴던 장소에 서 있었다. 손에는 보석자루를 든 채로. 안의 보석까지 없어졌을까 불안해진 엘란이 황급히 자루를 열자 깜깜한 속에서도 찬연히 빛을 발하는 보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휴!” 안도의 한 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엘란의 눈에 사방에 피어 있는 열대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베고니아! 검은 하늘과 선연하게 대비되는 그 강렬한 색의 대비는 그에게 강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어떤 보석보다도 베고니아 한 송이가 아름답게 보였다. 넋을 잃은 채 베고니아를 보고 있자니 보석에 집착하는 자신이 추하게 느껴졌다. 엘란은 보석을 집어던지고 베고니아를 뽑아들었다. 배고니아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다리 여덟 개 달린 도마뱀들이 솟아올랐다. 스무 마리도 넘어 보이는 도마뱀들이 베고니아보다 더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에 비싼 보석을 버리고 그깟 베고니아 한 송이를 들었다고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멍청이! 얼간이! 덜 떨어진 인간!” 별안간 도마뱀들의 거끌한 음성이 귀청을 찢을 듯이 밀려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우르릉! 두 손으로 배고니아를 꼭 움켜쥐자 천지가 진동하며 바닥이 흔들렸다. “엘란! 엘란!” 친숙한 음성이 천둥처럼 들리자 번쩍 치켜 뜬 엘란의 눈에 하이론의 걱정스런 얼굴이 들어왔다. “드디어 잠에서 깼군요.” 땀을 뻘뻘 흘리길래 흔들어 깨웠더니 한다는 소리가 묘했다. 엘란은 두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현실의 바닥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악몽이라도 꾼 거냐”“ “예.” “오늘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그것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뭐 때문이냐”“ 하이론의 물음에 별달리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한참 인상을 찡그리던 엘란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론도 눈 좀 붙이셔야죠.” “그래야지.” 하이론의 음성에도 피곤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하이론도 어제 하루가 힘들었던 듯 바닥에 머리를 대는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나탈리는 밀림이 싫었다. 짜증을 유발하는 후덥지근한 날씨와 소스라치게 만드는 수많은 벌레, 벌레, 벌레들. 빽빽하게 들어선 온갖 열대 식물들. 징그러운 눈을 굴리는 도마뱀들과 가끔씩 튀어나와 주저앉게 만드는 뱀들. 광기에 번들거리는 해골 같은 마법사의 살벌한 눈빛, 매일 줄어가는 아이들의 숫자, 마법사의 눈치만 살피며 겁에 질려 있는 수많은 마법사의 제자들. 나탈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축축한 밀림에 방치된 채 썩어 들어가며 징그러운 벌레들이 온 몸을 뒤덮을 것이다. 나탈리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눈이 회색으로 죽어 들어갈 때 광법사의 음산한 음성이 밀림에 깔렸다. “여기서 잠시 쉰다.” 광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탈리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짧게 치켜 깍은 매부리코의 장한이 나탈리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싫어! 싫어!” 나탈리의 거친 몸부림은 조금의 소용도 없었고, 해골 같은 광법사의 앞에 얼굴을 디밀어야 했다. “흐흐흐!” 광법사의 징그러운 숨소리가 귀에 잡힐 듯이 들려오자 겁에 질린 나머지 다리를 타고 오줌이 흘러내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 울먹이는 나탈리의 손에 주먹 세 개를 포개놓은 크기의 붉은 색 돌이 놓여졌다. 빨간 돌에는 사선으로 길게 황금색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머지도 모두 데리고 와라!” “살려주세요!” “싫어요!” 광법사는 매부리코가 발버둥치는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아이들의 손을 포갠 후 그 위에다 돌을 놓았다. “숨겨진 힘이여 그 위대한 모습을 드러내라!” 광법사가 로브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막대기를 꺼낸 후 돌에다 올려놓고 소리를 질렀다. 깡마른 몸 어디에서 저러한 힘이 솟아나는지 쩌렁쩌렁한 음성이 밀림을 뒤흔들었다. 소리의 여운이 사라져갈 때쯤 막대기에서 푸른색의 빛이 밀려나왔다. “악!” 나탈리는 갑자기 붉은 돌이 달아오르자 손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 고통은 시작에 불과했다. 뜨거운 불길이 손을 타고 내부로 흘러들어오자 온 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오빠!” 고통으로 눈이 허옇게 돌아가는 가운데 환하게 웃는 엘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빠! 나 아파 죽겠어.” “악!” “엄마!” 다른 아이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사방으로 메아리쳤다. 나탈리의 몸이 격랑에라도 휘말린 듯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부를 헤집는 뜨거운 기운에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냥...죽여...줘요.” 힘겹게 들어올린 눈꺼풀 사이로 악마처럼 웃고 있는 광법사의 추악한 얼굴이 비췄다. “제...발...” 꺼져가는 나탈리의 눈에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갈색의 무언가가 비치는 순간 나탈리는 그토록 소원하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죽음과도 같은. “어!” 나탈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돌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을 뜨겁게 태우던 열기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 나탈리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 뺨을 힘껏 꼬집었다. 생생한 아픔이 뺨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어!” 나탈리는 다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울창하던 밀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마을에 돌아와 있었다. “엄마!” 그리움이 가득한 외침과 함께 집으로 달려가는 나탈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지저분한 거리를 달려서 집으로 도착한 나탈리는 왈칵!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리운 정경들이 눈으로 밀려들어왔다. 작은 부엌과 천으로 구분지어진 나탈리와 엄마의 보금자리. “엄마!” 급히 천을 걷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급변했다. 달과 별도 몸을 숨긴 캄캄한 밤에 마을의 공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사람들 틈을 힘겹게 헤치고 들어가자 한 여자가 나무기둥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 나탈리의 비명과도 같은 음성이 퍼질 때 사람들이 여자의 발치에다 굵은 통나무를 쌓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태우지 마!” 휙!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 나탈리의 몸이 장작을 쌓는 사람들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익익!” 아무리 용을 써도 장작을 쌓는 사내들의 팔을 잡을 수 없었다. “앙앙앙! 제발! 우리 엄마 태우지 마!”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인 나탈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엉!”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불붙은 장작을 나무에다 가져다 대는 촌장의 얼굴이 보였다. “사악한 마녀야! 그 동안 잘도 사람들을 속이고 살았구나! 마을에 몹쓸 일이 벌어진 것도 모두 니가 한 짓이지”“ 나무에다 무슨 기름이라도 뿌려두었는지 불을 가져다 대자 금방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불쌍한 아기 어딨니”“ 열기로 머리카락과 옷이 오그라드는 가운데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여자가 찢어진 입술을 벌려 나탈리를 애타게 찾았다. “엉엉! 엄마! 나 여기 있어. 제발 죽지 마!” 나탈리는 뜨거운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불로 달려 들어갔다. “하하하! 그 년 잘 탄다.” “퉷! 더러운 년.” 평상시 나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저주가 터져 나왔다. “아냐! 아냐!” 귀를 틀어막고 불 속으로 뛰어들자 뜨거운 불꽃이 손을 내밀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엄마!” 엄마의 얼굴에 굵은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안돼!” 엄마의 팔을 쥐는 나탈리의 손에도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탈리는 전신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엄마의 품속에 머리를 묻었다. 엄마의 품에 안기자 고통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밀려들었다. 그 순간 엄마의 손이 매몰차게 나탈리를 밀쳐냈다. “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탈리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자 엄마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나도 데리고 가!” 희미해지는 엄마의 옷자락을 잡는 순간 엄마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이 질흙처럼 까맣고 팔이 여덟 개 달린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를 만나고 싶니”“ 눈이 까만 여자가 입도 열지 않은 채, 마음을 잡아당기는 이상한 기운이 서려있는 음성으로 말하자 나탈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따라와라.” 여자는 나탈리를 보면서 여덟 개의 팔을 활짝 펼쳤다. 뒤돌아 선 채로 무릎도 굽히지 않았는데 여자의 몸이 공중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앞으로 쭉 밀려났다. 나탈리는 멍한 눈으로 여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부옇게 여명이 터오는 이른 새벽 나탈리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나탈리 정신 차렸구나! 오빠가 왔어.” 엘란이 반갑게 나탈리의 어깨를 잡았다. “나탈리!” 엘란에게 어깨를 잡힌 나탈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몽유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을 반개한 채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나탈리!” 마음이 불안해진 엘란이 나탈리의 몸을 잡고 흔들었으나 뼈 없는 인형처럼 흐느적거리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하이론!” 엘란의 놀란 고함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려 버렸다.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깊게 자지 못하는 짝귀였다. “하이론 좀 깨워요.” 하이론이 많이 피곤했는지 좀 체로 일어나지 못하자 짝귀가 몸을 세게 흔들었다. “하이론, 일어나세요!” “무슨 일이냐”“ 하이론은 잠이 잘 깨지 않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문대며 물었다. “나탈리가 이상합니다.” 심상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이론은 급히 일어나 엘란이 붙들고 있는 나탈리에게로 다가갔다. 나탈리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하이론의 얼굴이 심각했다. “왜 잠이 깨지 않지요”“ “모르겠다. 어떤 힘이 나탈리의 정신을 붙잡아 두고 있는 것 같은데...” 나탈리의 눈을 뒤집어 본 하이론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웨이크 업!” 지팡이를 꺼낸 그는 아주 신중하게 마법을 걸었다. 하이론이 마법을 세 번이나 걸고 나서야 나탈리의 눈에서 빛이 돌아왔다. “오빠!” 엘란의 얼굴을 본 나탈리가 눈물을 흘리며 품으로 안겨들었다. 탁탁! 갑자기 나탈리가 고사리 같은 주먹을 들어 엘란을 때리기 시작했다. “앙앙! 그 동안 얼마나 무서웠는데...곧 온다면서 소식도 없고...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엘란은 말없이 나탈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엉엉엉!” 나탈리는 삼십분 동안이나 서럽게 울어댔다. 물끄러미 둘을 보던 쟝이 한 마디 툭 내뱉듯이 던졌다. “별로 예쁘지도 않네.” “나탈리 그 사이 울보가 다 됐구나”“ 아에게가 웃으며 나탈리를 안아 들었다. “체! 자기는 빼빼 말라서 해골 같구만.” “하하! 그런가.” “나도 좀 안아 보자!” 들창코가 아에게를 붙들고 늘어졌다. “어딜, 숙녀 몸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그래.” 한 참을 울고 나자 마음이 안정되는지 아에게 등과 어울려 노는 모습이 엘란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나탈리, 광법사와 무슨 일이 있었니”“ 하이론이 마법사 특유의 지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깔깔거리던 나탈리가 겁에 질려서는 공포로 물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피자, 이런 모습이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파진 엘란이 나탈리를 꼭 안았다. “무서워하지 마라, 오빠가 꼭 지켜줄 테니까.” 품에 안겨서 파들파들 떠는 것이 날개 부러진 어린 새 같았다. “떨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줄래, 아주 중요한 일이야.” 무서워 떠는 아이에게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꾸었던 생생한 꿈과 몽유병자 같았던 나탈리의 행동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급히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디치항구에서...” “아니, 광법사하고 있었던 일만 말해줄래.” 나탈리는 해골마법사와 있었던 일들은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엘란은 겁에 질린 나탈리의 눈에 자기 눈을 맞추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 미치광이 늙은이는 겁낼 것 없다. 내가 멀리 쫓아버렸으니까. 다시 나타나면 내가 그놈의 면상을 밟아버릴 거다.” “진짜로”“ “진짜로.” “약속.” 나탈리는 엘란의 코앞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엘란이 손가락을 걸고 힘차게 흔들자 마음이 안정된 나탈리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의 설명이라 두서가 없고 상황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군데군데 끼어 든 하이론 때문에 광법사와 있었던 일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 그 돌 때문에 애들을 데리고 다닌 거군.” 하이론은 자기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자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엘란에게는 나탈리에게 확인할 것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어젯밤에 무슨 꿈 꿨니”“ “어젯밤에”“ “그래!” 나탈리는 앙증맞은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나탈리의 꿈 이야기는 한 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엄마가 나오는 대목에 이르자 아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고 마음이 여린 짝귀삼총사도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꿈 이야기가 끝나자 아에게는 자신의 모험담을 마구 부풀려서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하이론과 엘란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귀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꿈에 대해서는 왜 물은 거냐”“ “아침에 하는 행동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제 꿈도 묘한 데가 많아서...” 그가 자신의 꿈에 대해서 되도록 자세하게 이야기하자 하이론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꿈을 꾼 것 같으냐”“ “글쎄요, 제 생각에는 괴상한 밀림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밀림이라... 어쩌면 바샤라의 돌에서 나온 마나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나!” “바샤라의 돌 때문이란 말씀이십니까”“ 반문하는 엘란의 눈에 한 줄기 의혹이 서렸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돌이, 마음에 걸린다.” 찌푸린 얼굴을 펴며 한 번 피식 웃어준 하이론은 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별 일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탈리나 너나 어제 힘들었을 테니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엘란은 하이론의 말대로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조만간 밀림을 벗어날 테고 이런 음습한 기분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죠”“ 일단 나탈리를 구한 이상 교도들이 뿌리내릴 만한 땅을 찾아야만 했다. “훈족대평원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그 쪽도 요즘 시끄럽지 않나요”“ “그렇긴 하다만 엘리오트, 스트빌라이, 피요르드 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저는 그 쪽이 내키지 않습니다. 특히 백법사 타클마칸이 대족장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른 곳은 없을까요”“ 십존의 일인인 백법사 타클마칸은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훈대평원을 거의 통일해 가고 있었다. 엘란은 만나는 십존마다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다보니 십존의 인물들과는 되도록 엵기기 싫었다. “다른 곳이라...염두에 두는 곳이라도 있느냐”“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 명확한 대답을 못하고 말끝을 의문형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답답한 기분이 가슴을 점령해 나갔다. “오빠! 아침 먹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해가 중천에 뜨도록 식사도 못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모닥불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육포를 씹었다.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나탈리의 어조에 약간의 원망이 깔려있었다. “내가 대신 얘기해주마.” 말재주가 없는 엘란을 대신해서 하이론이 나섰다. 하이론은 대제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엘란을 만났던 때부터 시작해서 긴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충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던 아에게, 그린, 짝귀삼총사도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모든 일을 상세히 알고 있던 쟝은 무료한 기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엘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재네들이 왜 안가고 얼쩡거리지”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자 자꾸만 그 쪽으로 상상이 집중되었다. “부끄러워서 말을 못 거나. 내가 먼저 다가가 볼까”“ 쟝의 괴상한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오빠 결혼한 거야”“ 섬에서의 결혼식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나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란은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멋 적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됐어”“ “헤헤헤!” 나탈리가 엘란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에쉴리에 대한 정담이 한 동안 오고가고 하이론의 긴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쟝이 슬그머니 일어나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그대들의 빛나는 외모가 저의 눈을 사로잡는 군요. 축축하고 기분 나쁜 숲이기는 하지만 저와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껏 멋을 부린 말투에서 기름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꺼져라!” “예”“ 후덮지근한 날씨를 단번에 얼려버리는 차가운 말투에 놀란 쟝이 엉겹결에 반문했다. 드드득! 별안간 땅바닥이 뒤집어 지더니 쟝을 삼켜버렸다. “엘란!” 얼굴만 남기고 전신이 땅속에 파묵힌 쟝이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나탈리와 얘기를 나누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엘란이 바람처럼 달려서 쟝의 앞을 막아 섰다. 가만히 앉아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시리우스와 실피드를 불러 흙을 파내는 엘란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둘 사이의 허공에 보이지 벽이 생기며 바닥에 긴 줄이 파이기 시작했다. “어이쿠!” 실피드에 쌓인 쟝이 뒤로 나뒹굴었다. “엘란! 쓸데없이 힘 뺄 것 없다. 우린 그만 여기서 나가자.” 하이론은 쟝이 있는 장소를 보건 데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엘프들과 충돌해서 위험을 무릎 쓸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여기서 나가자고 권유를 한 것이다. 하이론의 말에 공감한 엘란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30미터쯤 물러나 몸을 돌리는 엘란의 덜미를 아리아나의 음성이 낚아챘다. “교도들이 살 땅이 필요하신 것 같던데 아닌가요”“ 엘란의 몸이 무섭게 돌았다. “무슨 뜻이냐”“ 이제까지의 경어체가 사라지고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가 밝은 시리우스와 아리아나는 하이론의 얘기를 빠짐없이 들었었다. 이제 아리아나가 마지막 패를 던지고 있었다. “저희는 그 돌이 꼭 필요해요. 그리고, 당신들은 살 땅이 필요하고. 어때요 협상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엘란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하이론이 소매를 끌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아리아나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끄덕였다. 쟝을 제외한-쓸데없는 행동으로 분란을 자초한 쟝은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 꽁꽁 묶여져 바닥에 팽개쳐져있었다-엘란의 일행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엘프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엘란이 서두를 꺼내자 하이론이 즉시 대답했다. “엘프들이 싸가지는 없다만, 인간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용병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훈대평원 쪽으로 가는 것 보다야 백배는 나은 것 같다만... 아무래도 광법사가 마음에 걸린다. 만약 광법사가 8써클을 마스터하고, 몸도 정상으로 회복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승산은 있겠어”“ 엘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한 순간에 몰살당하는 거죠. 아마 십존 전부가 덤벼도 승산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걸요.” “엘프들의 말대로 부상이 심각하다면”“ “해 볼만하죠.”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으나 지고교도의 앞날이 걸린 문제인지라 겨우 참고 있던 아에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빠르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엘프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엘프들의 숲에서 같이 살면 얼마나 멋지겠냐” 거기에는 강에서 꿀이 흐른다고 하더라! 아! 인간의 역사상 처음으로 두 집단이 우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일이 우리들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아에게의 눈은 벌써 먼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용병왕과 손을 잡자고, 거품을 물던 때를 어느새 잊어버렸는지 엘프와 협력하자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자네는 용병왕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거품을 물은 걸로 아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하이론이 지팡이를 꺼내 머리까지 두들기자 아에게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킥킥!” “우히히!” 나탈리와 짝귀가 서로 부둥켜안고 죽어라고 웃어댔다. “웁웁!” 쟝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뻐끔거리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저 사람 할말이 있는 것 같아요.” 하이론이 나탈리에게 자상하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라 저 놈 입에서 나올 소리는 뻔하니까.” 나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아세요”“ “저 놈 머리 속에 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 뿐이거든. 엘란, 너도 저놈이 무슨 소리할지 알고 있지”“ “뻔하죠.” 아마 쟝 입의 재갈을 풀어 준다면 당장 제안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 떠들어 댈 것이다. “니들 생각은 어떠냐”“ 하이론이 갑자기 물어보자 당황한 짝귀삼총사들이 우물쭈물 거렸다. “저는 찬성입니다.” 대신 그린이 대답하고 나섰다. “나도 찬성!” 아리아나가 모자를 벗었을 때부터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나탈리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려 외쳤다. “쟝은 물어보나 마나 찬성할 테고...그럼 모두 찬성하는 건가”“ “전 아직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엘란, 뭐 걸리는 거라도 있니”“ “광법사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엘프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약속을 이행한다 하더라도 인간을 벌레 보듯 하는 저들의 오만한 성정을 미루어 봤을 때 옆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만만찮을 겁니다.” “그래도 지고교도를 보면 태워 죽이려 하는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하이론이 태워 죽인다는 소리를 하자 나탈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하이론이 나탈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휴!” 엘란의 긴 한숨소리가 바닥을 뚫을 듯 무겁게 깔렸다. “다른 수는 없겠습니까”“ 일이 제대로 풀리더라도 시리우스의 차가운 성정을 봤을 때 이웃으로 사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이론이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엘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는 수 없죠.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아에게가 엘란의 등을 다정하게 두들겼다. “시간이 급합니다. 어서 출발하죠.” 아리아나는 엘란과 하이론이 다가가자, 이미 이렇게 결정날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광법사 뒤를 쫓기 전에 먼저 확실하게 해둘 것이 있소.” 앞서가는 아리아나에게 하이론이 제동을 걸었다. “먼저 당신들이 전체 엘프를 대신해서 우리와 약속을 할 지위에 있는 인물들인지 묻고 싶소.” “우리는 임무와 관련된 전권을 위임받았어요.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명확한 증거라도 있소”“ “인간들의 의심병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지 않는군. 고결한 엘프가 너희 버러지들을 속이지는 않는다.” 시리우스의 차가운 말이 주변의 공기를 급속히 냉각시켰다. 찔끔한 나탈리는 엘란의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 엘프들을 살폈다. “좋소, 당신들이 그런 권한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이제 계약서를 만듭시다.” “계약서라니”“ “협상내용을 문서로 만들고 서명을 하자는 말이오.” 시리우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주변의 냉랭한 공기가 갑자기 끓어오르며 팽팽한 긴장감이 숨 막히게 피어올랐다. “엘프의 약속은 곧 법이다. 그깟 종이쪼가리에 신성한 엘프의 약속을 담을 수는 없다.” 시리우스의 으스스한 말투에는 살기까지 실리기 시작했다. 하이론은 시리우스의 기세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는 인간들의 땅이요. 인간들의 땅에 발을 디뎠으면 인간의 법도 따르시오. 게다가 계약상대가 인간인 이상 우리의 법도 존중해 주시오.”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구나!” 폭풍처럼 피어오르는 기세에 버티지 못한 하이론이 뒤로 물러서는 순간 엘란이 한 걸음 나서며 기세를 차단했다. “쓸데 업는 소리하지 말고 당신들 입장이나 정리하시오. 우리와 손을 잡을 생각이 있다면 계약서를 쓰고 아니면 여기서 깨끗하게 찢어집시다.” 엘란은 하이론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아쉬울 게 없었다. 광법사를 상대하려니 꺼려지는 것도 많았고, 엘프와 사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광법사와는 깊은 원한이 있어서 이 기회에 숨을 끊어 놓고 싶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정까지 생긴 마당에 위험한 일에 몸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딸의 행복을 바라는 이스마엘도 자신의 복수를 원하기보다는 둘이 잘 살기를 바랄 것이다. 엘란의 말에 발작을 일으키려는 시리우스를 아리아나가 말렸다. “좋아요. 계약서를 쓰죠.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두세요. 계약서를 쓴다고 엘프들의 약속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아리아나의 말이 떨어지자 하이론이 펜과 종이를 꺼내 초안을 잡았다. 내용은 간단해서 엘프들이 바샤라의 돌을 얻게 되면 섬에 있는 지고교도들이 살만한 땅을 떼어준다는 것이었다. 협상안은 두 장이 만들어져서 엘란과 하이론이 지고교를 대표해서 서명을 했고, 시리우스와 아리아나가 엘프들을 대표해서 서명을 한 후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처음 보는 엘프들의 글자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어찌 보면 룬문자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되었나요”“ 아리아나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됐습니다.” “출발하지.” 엘란이 대답하자 시리우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아리아나가 따르고 엘란의 일행들이 따랐다. 할 일이 없어진 골고타는 제일 뒤에 처져서 뒤를 경계하며 걸음을 옮겼다. “왜 그러셨습니까”“ 엘란은 하이론이 왜 그렇게 문서에 집착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달랑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믿기는 엘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괜한 일을 한 게 아닌지.” “그래도 서명을 받아놨으니 딴 소리야 하지 않겠지.” 엘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프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나서면 이행을 강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이 따위 종이쪼가리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약속을 어겼다고 나라에 고발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교도들을 이끌고 쳐들어 갈 것인가” 엘란은 한 마디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하이론의 마음이 이해되었던 것이다. 하이론도 그들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서로 남길 것을 요구한 것은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엘프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닌 합의문을 품속에 넣음으로써 얻게 되는 확신을 위해서. 숲속에서 엘프들은 대단히 빨랐다. 나무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초원을 달리는 말과 같았다. 엘란은 선두에서 실피드로 길을 열고 나탈리는 슈리엘이 안고 이동하고 있었다. 하이론이 모두의 발에 헤이스트 마법을 걸기는 했지만 엘프들이 워낙에 빠르게 움직여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했다. “언니 힘세”“ 나탈리가 치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슈리엘 때문에 신이나 있었다. 힘겨운 상황에 처해서도 의지 굳건한 어른들 보다 더 의젖하게 참아내던 나탈리는 엘란과 아에게 등을 보자 용병대의 마스코트였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모습이 엘란과 아에게, 대원들에게는 기쁜 마음을 주었지만 쟝이 보기에는 어리광이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세!” 슈리엘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하늘만큼 땅만큼.” 슈리엘은 나탈리와 잘 놀아주었다. 그 동안의 고통으로 침울해 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엘란으로서는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마음이 전해졌는지 슈리엘이 엘란의 뒷등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으악!” 별안간 들창코가 비명을 지르며 껑충껑충 뛰었다. 그 바람에 옆에서 뛰던 짝귀와 밤톨은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뭐야! 왜 그래”“ “등! 등!” 들창코는 옷 속에다 오른손은 위에서 집어넣고 왼손은 밑에서 집어넣고서는 미친 듯이 뛰었다. “옷 속에 뭐가 들어간 거야”“ 그린이 묻자 들창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못한 아에게가 들창코의 옷을 아예 찢어버렸다. 찌익! 옷이 찢어지고 모두의 놀란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하이론이 옷을 조심스레 들췄다. “에게!” 나탈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야 이거 도마뱀이잖아.” 아에게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길길이 날뛰길래 독사나 독충이 들어간 줄 알았더니 옷 속에서 꿈틀거리던 것은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도마뱀이었다. “아유! 겁쟁이 같이 겨우 그걸로 그렇게 호들갑떤 거야.” 초록색의 작은 도마뱀이 너무 귀엽게 보여 별뜻없이 한 나탈리의 말이 들창코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들었다.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언제나 들창코와 짝귀, 밤톨을 따라다닌 말이었다. 어릴 때 소매치기 길드에서 살 때부터 들창코는 겁쟁이라 불리었다. 패거리들끼리 구역 싸움을 할 때 짝귀 삼총사는 늘 구석에 숨어있었고, 병사들만 보면 몸이 굳어서 꼼짝을 못했다. 소매치기 일도 제대로 못하고 망보는 일이나 바람 잡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세 사람은 길드에서 따돌림을 받았고, 겁쟁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살았다. 따돌리기는 했으나 자신들을 키워준 길드원들이 모두 목이 매달릴 때 이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구해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겁이 나서 그들의 시체마저 거두어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용병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원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갈 때도 이들 셋은 숨어서 떨기만 했다. 그런 일들을 항상 부끄러워하던 들창코는 별뜻없이 한 나탈리의 말에 가슴이 아파 왔다. 항상 어울려 다녀서 표정만 봐도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짝귀와 밤톨도 감정이 전염되어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 났나 해서 엘프들까지 다가오자 더욱 부끄러워 졌다. “무슨 일이죠”“ “아무 일 아닙니다. 멈춘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죠.” 아리아나가 묻자 엘란이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시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들 둘러앉아 마른 고기를 씹었다. “에이 맛없어!” 나탈리가 육포를 팽개치며 투정을 부렸다. 워낙 날씨가 더워서 상하기 쉬운 신선한 식품들은 가져올 수 없었다. 먹을 거라곤 육포와 말린 과일뿐이었으니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가 먹을 만한 걸 찾아보지.” 골고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성한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골고타의 존재를 자각한 하이론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 사람을 잊고 있었군.” “왜 그러십니까”“ 그린이 사과 말린 것을 녹여먹으며 물었다. “너무 부주의했어. 우리들의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 “그렇군요.” 엘란도 심각해졌다. 그는 비밀스러운 얘기들을 너무 많이 들었다. “마음에 걸리면 죽여 버리지.” 쟝이 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나탈리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 아저씨 나쁜 사람이야”“ 등에 흉악한 거미 문신을 하고 생긴 것도 자신들과 다르기는 하지만, 큰 눈을 껌뻑거릴 때면 순진하게 보여서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엘란은 아이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쟝에게 눈치를 주고는 나탈리를 보고 웃었다. “아니, 나쁜 사람 아니야.” “근데 저 버터 아저씨는 왜 저래”“ 나탈리의 눈에도 쟝이 느끼하게 보인 모양이다. “킥킥!” 우울해하던 짝귀삼총사까지 키득대기 시작하자 쟝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흠흠! 나는 버터아저씨가 아니라 잘생긴 오빠란다.” 쟝이 환한 미소를 띠자 기름기가 줄줄 흘렀다. “알았어! 기름아저씨.” “하하하!” “킥킥!” “킥!” 냉랭하던 아리아나까지 미소를 띄우자 쟝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냉랭하고 우울하던 분위기가 일시에 날아가 버리고 모두들 쟝을 보고 웃었다. “이거 먹어라.” 한 아름 과일을 안고 나온 골고타가 나탈리의 앞에다 노랗고 파란 색색의 과일들을 내려놓았다. 보통 이런 화려한 과일 중에는 독이 있는 것이 많았다. 하이론이 독이 없나하고 하나 씩 들어서 자세히 살피는데 골고타가 하나를 집어서 베어 물었다. “안전한 과일이다. 먹어도 된다.” 말릴 사이도 없이 나탈리가 먹기 시작했다. 입안에 넣고 씹자 달콤한 과즙이 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야! 맛있다. 고마워 원주민 오빠.” “망할 년! 누구는 버터아저씨고 누구는 오빠야!” 쟝은 인상을 쓰면서도 과일을 집어 들었다. “맛은 있네.” 과일을 먹고 원기를 회복한 일행들은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한 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고단한 다리를 쉬게 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나무위에다 잠자리를 마련했고, 엘란의 일행은 그 밑에다 쉴 자리를 마련했다. 모두들 잠에 빠진 가운데 엘란만이 깨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성한 잎 사이로 시커먼 하늘을 보는데 위에서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침번은 제가 설 테니 눈 좀 붙이세요”“ 엘란은 이 숲 속에서 잠이 들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잠자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엘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고 자리에 누웠다. 광법사와도 싸워야 하는데 계속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선잠이 든 엘란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발이 여덟 개 달린 괴상한 도마뱀들만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기겁을 해서 일어난 엘란은 주위를 둘러보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탈리! 하이론! 아에게! 그린! 짝귀! 밤톨! 들창코! 쟝!"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괴상한 도마뱀들만이 “꾸룩꾸룩”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낼뿐이었다. “모두 어딜 간 거야”“ 심각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란의 눈에 이상한 장면들이 잡혔다. 그 무성했던 밀림이 모두 사라지고 허허벌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꿈이었구나!” 모두들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불안이 몰려들었다. 다시 등장한 괴물 도마뱀들이 심상치 않았다. “너희들 정체가 뭐냐”“ 돌연 도마뱀들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든 엘란이 질문을 던졌다. 도마뱀들은 흉악한 눈만 굴려댈 뿐 대답이 없었다. “젠장! 아무리 꿈이라도 도마뱀한테 말을 걸다니...” 한심한 생각이 들어 한 동안 머뭇거리던 엘란은 정신을 집중하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 주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도마뱀들만 숫자가 늘어 있었다. 허탈한 마음에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나탈리에 대한 걱정이 끓어올랐다. 자신도 이런 꿈속에 빠졌다면 나탈리도 꿈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뻔했다. 다시 한 번 어머니가 불에 타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진 엘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 때 마치 엘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도마뱀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바다가 일시에 갈리지는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 엘란은 달리기 시작했다. 길의 끝에 다다른다면 꿈에서 깨어날 지도 모른다. 멈칫! 엘란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흉하게 생긴 도마뱀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갈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상이 험악한 하이론이나 차갑게 보이는 그린이나 마음은 모두 여리고 따뜻했다. 오히려 잘생긴 쟝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기사의 표상같이 생긴 막스는 아주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인자하게 생긴 시드와 길라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독심의 소유자였고, 성기사로 추앙 받는 빌바오도 자신의 종교에 반하는 자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외모로 어떤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흉하게 생긴 도마뱀들을 믿고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이 도마뱀들에게는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만약 길의 끝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영원히 길이 이어지고 있다면... 엘란이 멈추어 서자 길은 금방 메어지고 도마뱀들이 엘란을 노려보고 섰다. 번들거리는 도마뱀들의 눈들을 보자 뽑아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엘란의 적개심을 읽기라도 했는지 도매뱀들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슈리엘! 슈리엘!” 엘란은 목이 터져라 정령을 불렀다. 엘란의 외침은 무의미하게 허공을 맴돌 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도마뱀들의 흉성만 자극한 듯 털이 슝슝 난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여 빠르게 다가들었다. 달아날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거라곤 황량한 벌판의 갈대들과 징그러운 변종 도마뱀뿐이었다. 퍽퍽! 발을 들어 직경이 30센지 가량 되는 도마뱀을 밟자 녹색의 걸쭉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퍽퍽! 발로 밟아대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곧 도마뱀들이 다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부에 묻어있는 점액질 때문에 미끈미끈한 도마뱀의 몸통이 느껴지자 온 몸이 근질거리며 소름이 끼쳐왔다. 도마뱀들은 꾸역꾸역 기어올라서 이내 목을 지나 머리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다.”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촉감에 진절머리를 치며 속으로 꿈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윽!” 갑자기 도마뱀의 입에서 긴 대롱이 튀어나오더니 피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도저히 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들었다. “쪽쪽!” 피를 빨아먹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자 미칠 것 같았다. 엘란은 땅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찍! 몸에 깔린 도마뱀이 으스러지며 녹색의 액체를 뿜어댔다. 그 위를 다른 도마뱀들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슈리엘!” 엘란의 입에서 필사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간절한 염원이 슈리엘에게 닿았는지 반응이 나타났다. 허공이 일렁이더니 흰빛의 종선이 생기고 선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슈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퍽퍽! 슈리엘이 옷자락을 뻗어 엘란을 감싸자 몸에 붙은 변종들이 산산이 터져 나갔다. “떠올라요.” 휘잉! 슈리엘이 엘란을 안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계속!” 바닥이 아득해질 때까지 오르고 또 올랐다. 텅! 무언가 벽이 엘란의 진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뚫고 나가요.” “원한다면.” 아래로 삼십미터 쯤 내려간 슈리엘의 손에 바람의 창이 들려 있었다. 쐐액! 바람의 창이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기며 빛살처럼 쏘아졌다. 쾅! 주변의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운데 푸른색 섬광이 작렬하며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바람의 창과 부딪친 컴컴한 하늘에 작은 구멍이 뚫리더니 구멍 주위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기기 시작하고, 실금은 이내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쩌저억! 돌에 맞은 유리처럼 하늘에 온통 금이 가고, 결국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째에엥! 유리처럼 작은 조각으로 쪼개진 하늘이 그대로 무너졌다. 퍽퍽! 하늘 조각이 슈리엘에 부딪쳐 튕겨져 나갔다. “위로!” 슈리엘이 엘란을 안고 무너진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놀랍게도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보였다. 반짝거리는 별과 희미한 빛을 뿜는 달을 보며 엘란은 꿈에서 깨어났다. “아! 이런!” 현실에 돌아온 엘란은 놀람의 감탄성을 질렀다. 자신은 슈리엘에 안긴 채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다. 온통 나무로 뒤덮인 밀림이 아스라이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말이냐”“ 슈리엘은 엘란이 무엇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언제 슈리엘을 불렀나요” 그리고 왜 하늘에 떠 있는 겁니까”“ 슈리엘은 기가 찬지 엘란을 물끄러미 보았다. “너 어디 아프냐” 네가 불러서 여기에 나온 거고, 하늘로 올라가자 길래 올라 온 것뿐이다.” “설마! 꿈에서 불렀는데 소환이 되었다는 건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상기된 얼굴로 슈리엘을 살피던 엘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에 계약했던 비르발도 꿈에서 소환했던 적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비르발과 너를 비교하지 마라. 넌 비르발의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 엘란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제 정령술이 발전한 걸까요”“ “내가 보기에는 발전했다기 보다는 네가 미친 것 같다.” “......” 황당해진 엘란이 뺨을 긁었다. 잠시 슈리엘의 손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바람의 창을 던지신 겁니까”“ “내가 너처럼 맛이 간 줄 아느냐” 쓸데없이 허공에다 왜 창을 던지겠냐”“ “......” 엘란은 슈리엘과 진지하게 대화 나누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따라 슈리엘의 감정이 예민하게 느껴졌고, 연달아 개떡 같은 꿈을 꾸고 나니 자신의 심정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만 내려가죠.” 엘란이 아래로 내려가자 언제 일어났는지 모두들 깨어있었고, 의문을 품은 눈길들이 엘란의 몸에 집중되었다. “왜 모두들 일어난 거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가 깨워놓고서는.” 쟝이 황당한 어조로 말했다. 잘 자는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서 기겁을 하고 잠에서 깨었는데, 슈리엘을 타고 까마득한 하늘까지 날아가서는 한 참 있다 내려와서 한다는 소리가 “무슨 일이 있었냐니” 모두들 기가 막혀서 멍하니 보았다. 엘란이 쑥스러워 뒤통수를 긁는데 나탈리가 슈리엘과 똑같은 소리를 한다. “오빠, 어디 아파”“ 짐짓 걱정스럽다는 눈빛이라 더 쑥스러워 졌다. “갑자기 슈리엘은 왜 부른 거냐”“ 하이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엘란과 나탈리의 이상한 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던 하이론으로서는 한 밤 중의 소동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저...그게...” 슈리엘에게 미쳤냐는 말까지 듣자 사실대로 말하기가 곤란했다. 하이론이 엘란의 곤란한 기색을 보고 팔을 끌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가 갖춰지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냐”“ 엘란은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하이론의 표정도 점차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하이론이 생각하기에도 그렇죠”“ 하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림 때문이거나 나탈리에게서 흡수한 이상한 마나 때문일 거다.” “그렇겠죠.” 한 동안 둘 사이에서 침묵이 떠돌았다. “너와 나탈리만 괴상한 꿈을 꾸는 걸 보니 바샤라의 돌에서 나온 마나에 대한 혐의가 더 짙어지는 구나.” 엘란은 하이론의 의견이 타당하게 느껴졌다. “고민해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그만 자러 가자.” 둘이 잠자리로 돌아와 보자 어느새 일행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달리는 바람에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하이론도 잠을 청하고 혼자 깨어있게 된 엘란은 나탈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깨울 생각이었다. “바샤라의 돌에 대해 말해줄 수 있습니까”“ 엘란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유난히 귀가 밝은 엘프들은 깨어 있다면 당연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상급정령사인 시리우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엘란의 목소리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릴 것이다. “당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리아나의 영롱한 목소리였다. 말투가 깍듯하기는 했으나 내용은 단호한 거절을 담고 있었다. 깍듯하게 격식을 차린 어투가 또 다른 질문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시리우스, 당신도 같은 생각이오.” “......” 대답은 없었지만 거절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시리우스도 엘란 때문에 잠에서 깨어 있었다. 엘란은 며칠 전부터 느꼈던 온 몸을 끈끈히 휘감는 괴상한 기운과 연달아 꾼 특이한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엘프들이 정보를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괴상한 일이군. 당신이 느꼈던 기분 나쁜 기운은 나도 느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모른다. 그리고, 바샤라의 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을 털어놓아도 당신의 꿈에 대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 중에서 그 돌의 기운을 몸에 쌓은 엘프는 하나도 없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다.” 시리우스는 말해 줄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말해주었고 엘란도 그것을 느꼈다. 엘프들의 설명을 들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개대했던 엘란으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광법사도 이런 꿈을 꿀까요”“ 아리아나가 물었다. “꿈의 원인이 그 돌에 있다면 당연히 광법사도 꾸겠지요.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를 받아들었으니 어쩌면 굉장히 생생한 꿈을 꿀 지도 모르죠.” 대화는 끊어졌고 저마다의 상념에 사로잡힌 채 날은 서서히 밝아 왔다. 다행히도 나탈리가 악몽을 꾸는 기색은 없었다. “떼에떼에.” 귀를 따갑게 하는 곤충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었다. 끊임없이 땀이 흘러내렸고, 그에 따라 짜증도 흘러나왔다. 가도 가도 밀림은 끝이 없었고 가끔가다 나오는 독사와 거미들 개미들과 정체불명의 알록달록한 곤충들이 일행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온 천지가 식물과 벌레들 세상이었다. “아! 덮다.” 쟝이 한탄하듯 말하자 짝귀가 말을 받았다. “그래 무지 덮지”“ 서로 소 닭 보듯 하던 두 사람이 웬일로 말을 섞었다. 쟝이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대자 어느새 엘란을 제외한 모든 일행들이-나탈리까지-말을 놓았는데 쟝은 귀족의 삶을 완전히 포기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원한 물에 목욕이라도 했으면 원이 없겠다.” 쟝의 투덜거림이 끝나자마자 땅이 질척거리더니 본격적인 습지가 시작되었다. 조금 더 가자 누런 흙탕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하여간에 저 자식 때문에 되는 게 없다니깐.” 누런 흙탕물 위에 온갖 벌레들이 우글거리며 몰려들자 하이론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잘 못되면 뭐든지 내 탓이지.” “말이 씨가 된다고 니가 물타령을 하니까 숲이 이 모양 아니냐” 자 여기 물 나왔으니까 목욕이라도 하지 그러냐!” 하이론이 빈정거리는 중에도 물은 계속 깊어져서 허리까지 차 올랐고, 특히 키가 작은 밤톨은 물이 가슴까지 육박했다. 엘프들은 물 속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자란 나무들 사이를 손쉽게 헤집고 다니는 가운데 엘란이 입을 열었다. “물이 점점 깊어져서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엘란은 나탈리를 안고 날아다니는 슈리엘을 불러 자신과 하이론까지 공중으로 띄웠다. “실피드! 실프!” 실피드는 한 명씩 안고 하늘로 올라갔고, 실프는 셋이 한 명을 담당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땅은 온통 뿌연 흙탕물이었다. 흙탕물 사이로 띄엄띄엄 흩어진 거대한 수목들이 마치 푸르른 섬처럼 보였다. 물 속에 무슨 몬스터라도 사는지 가끔씩 기포가 올라오며 수면이 요동을 치기도 했다. 끝간데없이 펼쳐진 누런 물들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에 대한 공포를 일깨우고 있었다. 들창코는 높이 올라가자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지 눈을 뜨지 못하고 몸을 가늘게 떨었고, 이에 반해 아에게는 신이 나서 고함을 질렀다. “이야! 멋진데. 저 나무 좀 봐, 마치 말같이 생기지 않았냐”“ “말은 무슨 내가 보기엔 개 같은데.” 그린이 말을 받았다. “개라니 무슨 자세히 봐 다리가 길쭉길쭉 하잖아.” “다리 길쭉한 개들도 많아.” “그럼 저 긴 꼬리는 어떻게 설명할 거야”“ “꼬리 긴 개도 있어.” “그럼 저 길쭉한 얼굴은”“ “얼굴 길쭉한 사람도 있는데 개라고 얼굴 긴 품종이 없을 라고.”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둘이 한 동안 옥신각신하자 지겨워진 하이론이 고함을 빽 질렀다. “개라고 하고, 그만 입 다물어.” 그린의 얼굴에는 이겼다는 흐뭇한 미소가 어렸고, 아에게는 불만으로 입이 튀어 나왔다. 그런 아에게를 향해 쟝이 말했다. “저 영감 성질 더러우니 더 이상 토 안 다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쟝은 하이론을 힐끔거리더니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되는지 나직하게 속삭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쟝의 얘기를 들은 엘란이 빙그레 웃었다. “왜 웃는 거냐”“ 하이론이 묻자 그대로 대답하기 곤란해진 엘란이 말을 돌렸다. “저 엘프들은 용케도 광법사의 자취를 찾아가네요.” 평소 그 점을 궁금하게 여겼던 하이론이 굉장한 속도로 나무를 타고 다니는 엘프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추적하는지 알겠냐”“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모르는 독특한 정령술을 사용하나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고...직접 물어 보죠.” 엘란은 하이론과 대화하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엘란이 마치 무슨 말을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나탈리가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오빠, 무슨 소리 들려”“ “쉿!” 엘란이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나탈리의 입술을 막았다. 나탈리가 큰 눈을 또록또록 굴리는 것이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웠다. 하이론이 다정하게 나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엘란의 입이 열렸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랍니다. 처음에 추적을 할 때는 많은 제자들과 아이들이 있어서 흔적을 찾기가 쉬웠고, 지금은 이제까지의 경로를 따져 봤을 때 일직선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 선을 따라 뒤쫓고 있는 거랍니다. 간혼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는 걸로 봐서 이 쪽으로 간 것이 확실하답니다.” 무슨 특별한 방법을 기대하던 하이론은 대단히 실망했다. 특수한 추적마법이나 독특한 정령술을 사용해서 추적하는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나탈리,” 뒤늦게 나탈리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는데 아이는 어느 샌가 잠이 들어 있었다. 엘란은 나탈 리가 잠에 빠질 때마다 저으기 걱정스러웠다. 그 기색을 읽은 하이론이 일부러 느긋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아이 때는 원래 잠을 많이 자야 하는 법이다.” 습지는 정말 넓었다. 30분쯤 날아가는데 저 멀리 하늘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게 뭐죠”“ 엘란이 골고타에게 물었다. “원주민들의 연락방법이다.” “무슨 뜻입니까”“ “각 부족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잘 모르겠다.” “적들이 습격했다는 뜻 아닐까”“ 신이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에게가 시간이 지날수록 심드렁해져서 무슨 건수가 없을 까 싶어서는 머리를 굴리다 연기를 보고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다 싶어서 얼른 끼어들었다. 대제의 유산과 관련된 일에 휘말려 대부분의 대원들을 잃고 이런 일은 싫다면서 진절머리를 내던 아에게는 천성은 버릴 수 없는 모양인지 새로운 사건들이 생기기를 은근하게 바랬다. “다른 부족들은 모두 죽었다.” 골고타의 으스스한 말투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짝귀 삼총사가 찔끔해서 눈을 굴리는 가운데 연기는 서서히 흩어져서 자취를 감추었다. 두 시간이 더 지나자 끝이 없을 것 같던 습지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맨 땅이 군데군데 갈색 몸을 드러냈다. 엘란은 일행들을 내려놓고 정령들을 돌려보냈다. 몇 시간 동안 동료들을 이끌고 날아 왔더니 지쳐서 전신이 노곤해졌다. 엘란이 지친 기색이 완연하자 나탈리는 하이론이 업었다. “가자!” 일행들은 엘프를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게 뭐지”“ 아에게가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스러져가는 햇빛 속에서 밑둥이 30미터도 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가 중간중간 해골을 박은 채 일행들의 앞을 막고 있었다. 군데군데 박혀 있는 해골을 제외하더라고 어딘지 섬뜩한 데가 있는 나무였다. “더 이상 들어오면 죽인다는 아구족의 영역표시다.” 엘란은 위를 쳐다보았다. 아구족의 영역을 피해서 가고 싶었지만 일단 일행들을 이끄는 것이 엘프들인 이상 그들의 의사가 중요했다. “그냥 가요!” 광법사가 몸을 추스리기 전에 바샤라의 돌을 뺏어야하는 아리아나의 입장에서는 우회해서 지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일행들은 어쩔 수 없이 나무를 지나쳐 아구족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주가르는 아구족의 수호나무 꼭대기에서 밑을 지나가는 침입자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저 들 아니 검은머리의 사나이는 어떻게 알았는지 부족의 전사들이 숨어 있는 곳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그냥 물러가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미 멸망한 더러운 가란족의 생존자를 끌고 와서는 우리를 몰살시킨다고 건방지게 지껄여 대었다. 분하게도 저 더러운 대륙인은 큰 소리를 칠만한 실력이 있어서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동료들을 죽였었다. 그리고, 이제 부족의 심장부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복수할 방법을 찾는 주가르의 눈빛에 날카로운 빛이 떠돌다 사라졌다. 아구족 최고의 수색꾼 주가르의 몸이 밀림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주가르는 기회를 찾아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변에 녹아들어가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술래잡기를 할라치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사냥을 다니면서 자신의 뛰어난 점을 십분 개발할 수 있었다. 자연에 동화되는 재주를 타고났던 그는 나무 옆에 서면 그대로 나무가 되었고 바위 위에 올라서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 흙 속에 몸을 숨기면 흙이 되었고, 물 속에 있을라치면 물이 되었다. 새, 벌레, 짐승들도 자신을 구별해 낼 수 없었다. “나 좀 내려 줘.” 나탈리가 하이론의 귀를 잡아 당겼다. “위험하니 그냥 업혀 있어라.” 하이론의 자상한 말에도 불구하고 나탈리는 도리질을 쳤다. “나 급하단 말야.” “아!” 땅에 내려선 나탈리는 다리가 저린지 땅을 몇 번 굴렀다. 나탈리가 밀림 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눈치 없는 아에게가 위험할까 싶어 따라붙었다. “따라오지 마!” “밀림 속에 혼자 다니면 위험해.” “나한테는 오빠가 더 위험해.” 아에게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들창코가 나탈리 뒤를 따르며 말했다. “나탈리, 나도 급하니까 같이 가자.” “그래.” 나탈리는 크게 인심 쓰는 것처럼 말했다. 팟! 갑자기 바닥이 뒤집어지며 시커먼 사내가 덮쳐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안심하던 엘란이 경악해서 실프를 소환할 때 주가르의 뭉툭한 칼이 나탈리의 정수리를 쪼갤 듯이 짓쳐 들었다. 너무 놀란 나탈리는 오줌을 싸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나탈리!” 들창코가 나탈리를 끌어당기며 자신의 손으로 칼을 막아 나갔다. 서걱! 뭉툭하게 보이는 칼은 놀랍도록 날카로워서 들창코의 팔을 자르고도 힘을 잃지 않고 가슴을 반이나 갈라 버렸다. “으악!” 가슴을 지지는 통증이 사고를 마비시키더니, 떨어져 나간 팔에서 피가 뿜어지며 격심한 통증이 전신을 달구었다. 퓽! 실프가 칼을 그어 올리려는 주가르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버렸다. 주가르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곧바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이론이 들창코에게 급히 달려가 포션을 입에 들이붓고 온 전신에 발랐다. “힐링!” 흰빛이 들창코의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가슴과 팔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는 그쳤지만 들창코의 무섭도록 창백한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이론이 엘란의 슬픈 얼굴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으앙!” 나탈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라 나탈리.” 들창코가 곧 죽어갈 것 같은 얼굴로 나탈리를 불렀다. “오빠 용감했지, 이제 겁쟁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나탈리는 들창코의 손을 잡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앙앙앙! 그 때는 그냥 한 말이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겁쟁이라고 안 그럴 게, 제발 죽지마!” “나탈리 오빠들 말 잘 듣고 예쁘게 커야 한다.” “앙앙앙! 싫어, 오빠 죽지 마, 오빠 죽으면 나 말도 안 듣고 밉게 클 거야!” “쿨럭! 엘란...나...용감...했지.” 엘란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들창코의 전신을 머리에 새기기라도 하려는지 자세히 살폈다. “예, 용감했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최고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저도 사실 싸울 때는 겁이 나서 속으로 벌벌 떨어요.” “하이론...나...겁쟁이 아니죠.” “그래, 겁쟁이 아니다.” “쿨럭! 그럼...죽기 전에...이름이나...하나...지어줘요.” “이름”“ 들창코가 죽어 가면서 마지막 힘을 모아 진지하게 말하길래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고 있었다. “예, 이름. 짝귀, 밤톨, 들창코, 모두들...헉...헉... 별명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이게 저희들 이름이에요. 저희... 길드에서는 어릴 때 받아들인... 아이들을 “개똥이”... 이런 식으로 부르다가 나이가 들어...헉... 한 사람 몫을 하게... 되면 이름을 받아요. 모두들 소매치기에 성공해서 이름을... 받았는데 저희들 셋만 이름이 없었어요. 사실 어릴 때부터 겁이 많았거든요. 구박도 많이... 받았는데... 길드원들이 모두 죽어서 이제는 이름 받을 때도 없어요. 나 용감했거든 이름이나... 하나 지어 줘요. 저승에 가면 길드원들에게 나도 이름이 생겼다고 자랑할 겁니다.” 마지막 힘을 내는지 들창코의 목소리는 기이하게도 맑고 또렷했다. 그 음성과 내용이 엘란의 가슴을 저몄다. “앙앙앙!”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나탈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으앙!” “엉엉!” 기어이 짝귀와 밤톨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짝귀...밤톨...니들도 용감한... 일 해서 이름을... 받아라.” 짝귀와 밤톨이 머리를 끄덕였다. “킁킁!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먼저 이름을 받는구나. 난 내가 제일 먼저 이름을 가질 줄 알았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우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짝귀가 콧물을 들이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목이 매어오는 상태에서 쾌활한 척 하는 목소리가 더욱 슬프게 심금을 울렸다. “다음에는 내가 이름을 받을 게.” 밤톨이 들창코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하이론은 멋진 이름을 지으려고 머리를 쥐어짰으나 일시지간에 이름을 지어낼 수 없었다. 게다가 들창코가 죽기 전에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각을 방해했다. 모두의 기대에 찬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하자 더욱 부담을 느낀 하이론은 얼굴을 찌푸리고 속으로 여러 이름들을 주워 넘겼다. 그때 조용히 있던 쟝이 나섰다. “매일 밤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 폴라리스 어때요”“ “좋은 데.” 하이론이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폴라...리스...폴라...리스...” 들창코는 조용히 이름을 되뇌었다. “엉엉엉! 폴라리스오빠 제발 죽지 마!” 나탈리는 폴라리스의 폼에 안겨서 서럽게 울었다. 들창코는 나탈리가 자신을 폴라리스라고 부르자 환하게 웃었다. 엘란이 살면서 본 미소 중 최고의 미소였다. 카일의 가식적인 미소와는 질적으로 다른. “폴라리스 나중에 만나자.” 짝귀가 환하게 웃었다. “폴라리스 잘 가!” 밤톨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폴라리스 정말 용감했어.” 아에게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잘 지내, 폴라리스.” 그린이 폴라리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안녕히 가세요. 폴라리스.” 엘란이 고개를 숙였다. “폴라리스 미안합니다. 잘난 것도 없는 놈이 그 동안 당신들을 무시하고 있었어요.” 쟝이 한 쪽 무릎을 꿇고 귀족식의 정중한 예를 표했다. “잘 가게 폴라리스, 그 동안 즐거웠네.” 하이론이 마법지팡이를 꺼내 두 손으로 모아 쥐고 마법사의 예를 표했다. “앙앙앙!” 나탈리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들창코의 눈에서 빛이 꺼져갔다. “폴라리스!” 짝귀의 절규와 함께 폴라리스는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에게와 대원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다 조심스럽게 폴라리스를 올려놓았다. 엘란이 카사를 불러 불을 붙이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폴라리스를 태우기 시작했다.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모두들 마음속에서 폴라리스를 떠나보냈다. 폴라리스를 화장하는 내내 나탈리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고, 나중에는 꺽꺽거리는 것이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엘란은 나탈리를 품에 안았다. 처음에는 뭐라 중얼거리면서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나탈리는 잠들은 거냐”“ 하이론이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예.” “어린 나이에 못 볼 것을 많이 보는 구나.” “이제 출발했으면 합니다만...” 조용히 기다려 주던 아리아나가 재촉을 했다. 이 정도로 기다려준 것도 많이 배려해 준 것임을 아는 엘란은 힘이 빠져 축 늘어져 있는 일행들을 독려했다. “이제 그만 출발하죠.” 재를 일일이 뒤져 유골을 담던 짝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 됐다.” “가자!” 하이론의 힘 빠진 음성을 필두로 모두들 걸음을 옮겼다. “휘이익!” 한 시간 정도 걸었을 까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뭐지”“ 밤톨이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구족이다.” 골고타가 원한에 사무쳐 말을 씹어 뱉었다. 그가 아구족을 입에 담을 때면,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려 주변 사람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골고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넓적한 풀로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린, 거의 벌거벗은 아구족의 전사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은 아구족의 영토를 침범했다. 여기서 당장 물러나라!] 며칠 전 공격을 지휘하던 머리가 하얗게 센 아구족의 전사가 위협적으로 지팡이를 흔들었다. 엘란에게 워낙 혼이 난 터라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진로만 차단하고 있었다. 만약 만만한 상대였다면 몰래 기습을 해서 몰살을 시켰을 것이다. [흐흐흐! 물러날 사람은 너희들이다. 너희야말로 조상신의 대지를 더러운 이종족들의 신에게 팔아먹은 놈들이 아닌가”] [누군가 했더니, 멸종한 가란족의 떨거지로군. 이런! 이런, 쯧쯧쯧, 이종족의 신이라 비난하면서 자신도 신의 자식들을 몸에 새기고 있구나!] 아구족의 전사는 골고타의 몸을 뒤덮고 있는 거미문신을 보며 멸시의 시선을 던졌다. [나는 가란족을 재건할 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구족의 전사가 비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살고 싶어서 원수의 신을 받들기로 했다는 말인가”] 골고타의 안색이 수치로 붉게 달아올랐다.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부족을 재건할 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중압감에 아라크네를 문신하기는 했지만 종족들의 원수인 아구족 신의 상징을 몸에 새긴 것은 확실히 비겁한 짓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덤벼라! 오늘 너희들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골고타가 봤을 때 엘란이나 엘프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나서 준다면 아구족을 밀림에서 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골고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안내인으로서의 의무를 철저히 망각하고 엘란일행을 속이고 있었다. “이들이 우리들을 모두 죽인다고 한다.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감각이 남다른 엘란과 노회한 하이론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했다. 아구족은 다분히 엘란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다만 골고타를 비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위협하는 것은 골고타였다. 하이론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엘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골고타란 놈, 아무래도 우리를 속이는 것 같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자로 보이는 흰머리 전사에게 고함을 질렀다. “대륙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나”“ “제가 할 줄 압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 위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줄기를 타고 조그만 소년이 내려왔다. 난데없이 대륙어가 들리자 골고타의 표정이 급변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게 생겼구나!” 골고타는 오른 손에 움켜준 칼에 힘을 주었다. “당신들은 우리와 싸우려고 아구족의 영토로 들어 왔나요”“ 소년은 말을 하면서 엘란일행의 앞으로 다가와 5미터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그때 골고타의 칼이 소년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아!” 깜짝 놀란 소년이 땅바닥을 굴렀다. 퍽! 골고타의 칼이 땅바닥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골고타가 칼을 꺼내려 힘을 쓰는 사이 소년은 엉금엉금 기어서 위험한 자리를 벗어났다. [공격하라!] 기습을 당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흰머리 전사가 공격을 명령했다. 골고타의 공격은 소년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목적은 십분 발휘해서 양편을 싸움 붙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엘란이 정령들을 불러 골고타를 제외한 일행 모두를 하늘 높이 띄웠다. 팅팅팅! 힘들게 날린 화살과 암기들이 정령들에 부딪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더 이상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기묘한 대치상태가 계속 되었다. 엘란은 나탈리를 의식해서라도 피를 보지 않고 좋게 해결하고 싶었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소, 길만 열어 준다면 조용히 떠나겠소.” “저 사람과 말이 다르네요.” 소년은 자신의 목을 만지며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골고타를 노려보았다. “그가 뭐라고 했니”“ 하이론이 소년에게 물었다. “우리들 씨를 말려 버리려고 영토를 침범했다고 했어요.” “거짓말입니다.”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자 당황한 골고타가 고함을 질렀다. “어! 이놈 보게, 존댓말 할 줄 알잖아”“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쟝만이 골고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짚어 냈다. 다른 사람들은 골고타의 반말에 대해 원주민으로서 말에 익숙하지 못해서 라고 생각한 반면에 혼자서만 꽁하니 마음에 담아 두던 쟝은 골고타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말이란 게 묘해서 보통 때였다면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정색을 하고 짚어내자 골고타의 신용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난데없는 쟝의 지적에 골고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데 소년이 흰머리 전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 말로는 길만 열어주면 조용히 떠나겠답니다.] 엘란일행의 안색과 골고타를 자세히 관찰하던 지휘자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길은 열어줄 수 있지만, 저 놈은 우리 땅을 밟게 할 수 없다.] 소년이 말을 통역하자 모두의 시선이 하이론에게 쏠렸다. 궂은 일이나 싸울 일이 생기면 엘란이 나서서 해결을 하지만 중요한 결정은 하이론의 의중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엘란은 심장과 팔다리의 역할을 했고, 하이론은 머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더 이상 우리의 안내인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하이론은 5골덴을 던져주며 차갑게 내뱉었다. 골고타가 하늘에 떠 있는 일행들을 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들의 부탁으로 위험한 습지 깊숙이 들어 왔는데 이제 필요 없어졌다고 내치는 것입니까” 이게 당신네 대륙인들의 법이요”“ 골고타의 격앙된 외침에 아에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 말도 일리가 있는 것...” 아에게의 말은 짝귀의 발작적인 외침에 중단되었다. “무슨 헛소리야! 폴라리스가 죽은 게 누구 때문인데...” 짝귀의 가슴에 품은 폴라리스의 유골을 꼭 움켜쥐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폴라리스가 죽은 것도 모두 골고타의 농간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중간에서 이간질만 하지 않았다면 싸움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주가르가 몰래 암습을 가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폴라리스가 나탈리 대신에 칼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짝귀가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 졌다. [저 자를 죽여도 상관하지 않겠답니다.] 소년이 소리를 지르자 전사들이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지 마!] 골고타는 식을 땀을 뻘뻘 흘리며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챙챙! 전신에 거미 문신을 새긴 아구족의 전사가 골고타의 칼을 막아 나가자 불똥이 튀겼다. 칼을 잡은 팔에 힘줄이 솟고, 등과 가슴 근육이 떨리자 두 사람에 몸에 새겨진 거미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어찌 보면 거미들끼리 대결을 벌이는 것 같기도 했다. 휭! 다른 전사들이 다가오자 당황한 골고타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몸을 슬쩍 틀어 피한 아구족의 전사가 가슴을 향해 똑바로 칼을 디밀었다. “헉!” 깜짝 놀란 골고타가 땅바닥을 굴렀지만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아구족의 전사가 골고타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푹! 가볍게 귀를 잘라낸 칼이 땅바닥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윽!” 짧은 신음을 토한 골고타는 땅바닥에 박힌 칼을 빼려는 아구족의 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으악!” 칼을 잡은 팔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솟구쳤다. 서걱! 정신없이 팔을 움켜쥐던 아구족의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 처음 칼을 맞댄 사내의 칼이 코앞까지 쳐들어 왔다. 골고타는 급히 칼을 올려 인중을 막았다. 쨍! 거센 칼질에 부딪힌 골고타의 칼등이 콧잔등을 강타했다. 뜨거운 통증과 함께 코에서 피가 터졌다. 아픔을 삭일 틈도 없이 아구족의 발이 복부를 강타했다. “헉!” 복부를 매섭게 채인 골고타는 순간적으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켁켁!” 숨막히는 고통에 자동적으로 숙인 허리위로 아구족의 칼이 지나갔다. 슝! 허리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골고타는 허리를 숙인 김에 바닥을 구르며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으악!” 골고타를 포위한 채 싸움을 구경하던 재수 없는 아구족의 발목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골고타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처음 칼을 맞댄 전사의 얼굴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자신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바람에 벌써 두 명이나 상한 것이다. “으어어!” 짐승 같은 기합과 함께 아구족의 칼이 바닥을 쓸었다. 골고타는 정신없이 구르는 중에 다리에서 화끈한 고통이 느껴지자 얼굴을 찌푸렸다. 허벅지가 반이나 갈라져 있었다. 허벅지에서 시선을 돌리는 데, 칼이 심장을 겨누고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칼을 쥔 오른팔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자 아구족의 칼이 옆구리를 스치며 살을 한 움큼이나 베어내 버렸다. 골고타는 급히 왼팔을 오므려 적의 칼을 옆구리에 끼었다. 살이 베인 곳에서 뼈를 아리게 하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꾹 눌러 참고 오른팔을 휘둘렀다. 적은 땅에 박힌 칼을 빼려고 버둥거리던 풋내기가 아니었다. 칼이 골고타의 옆구리에 끼이는 순간 칼을 놓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서 버렸다. 골고타의 칼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퍽! 칼을 피한 아구족의 무쇠 같은 다리가 골고타의 몸통을 걷어찼다. “헉!” 골고타는 순간적으로 숨통이 콱 막혔다. 여유있게 칼을 주은 아구족의 발이 상처 입은 허벅지에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격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를 뒤흔들었다. 서걱! 아직도 칼을 움켜쥐고 있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서걱! 다른 쪽 허벅지가 베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살려줘! 나는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돼!] 골고타는 성한 팔로 바닥을 기었다.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일행들은 골고타의 처참한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살려줘...] 많은 피를 쏟은 골고타의 말에서 힘이 빠졌다. 푹! 심장을 관통한 아구족의 칼이 땅바닥까지 틀어 박혔다. 잠시 꿈틀거리던 골고타의 몸이 잠잠해졌다. 이로써 한때 코르도바습지대를 주름잡던 가란족은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가자!” 하이론의 말이 떨어지자 바닥에 내려선 엘란은 일행들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했다. “계속 정령 타고 날아다니면 안 될까”“ 달리기가 힘겨워진 쟝이 은근하게 물었다. 아에게도 힘들었는지 기대에 찬 눈으로 엘란을 쳐다보았다. “힘들어서 안 됩니다.” 엘란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혼자도 아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날아다니다가는 몸이 견뎌낼 수 없었다. 게다가 언제 광법사와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또 나탈리의 몸에서 뽑아낸 이상한 마나가 몸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상 함부로 힘을 쓰기가 꺼려졌다. 엘란일행의 뒤로 긴장한 아구족의 전사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우와!” 엘란에게 업혀 있던 나탈리가 입을 딱 벌렸다. 무성한 풀숲을 헤치고 나가자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면서 그림 같은 풍경이 주위를 압도했다. 50미터 정도 위쪽에 위치한 계곡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는 연못을 휘돌아 빠지면서 여러 웅덩이에 그 몸을 나누어 실었다. 비취빛이 감도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움푹 움푹 패여서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명장이 세공해서 만든 목욕탕 같았다. 웅덩이를 보고 있자니 그 안에 몸을 뉘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졸졸졸! 웅덩이를 거친 물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내를 이루어 아래로 흘러내렸고, 냇물을 사이에 둔 양쪽으로는 나무로 벽을 세우고, 열대우림의 넓적한 잎으로 지붕을 엮은 아담한 주택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정면에는 야트막한 절벽이 길을 막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뚫린 동굴에서 약한 연기가 빠져 나오고 있었다. “별천지로군!” “그렇네요.” 하이론이 말하자 아에게가 맞장구를 쳤다. “악!” 갑자기 아리아나가 위에서 떨어져 내리자 놀란 밤톨이 비명을 질렀다. “절벽을 넘어 갑시다.” [거기에는 우리의 신전이 있다. 절대 넘어갈 수 없다.] 소년이 아리아나의 말을 전해주자 순순히 일행의 뒤를 따라오던 아구족의 지휘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반대하고 나섰다. “어느 정도 떨어지면 되니”“ 하이론이 묻자 지휘자와 귀속말을 속삭이던 소년이 절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동굴에서 최소한 1키로는 떨어져야 해요.” 엘란이 눈빛으로 의사를 묻자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눈치가 빨라서 누가 말을 하기도 전에 지휘자에게 엘란일행의 의사를 전달했다. 당혹해하던 흰머리 전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마을로 내려가자 발가벗은 채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신기한 동물 구경하듯 몰려들었다. 젖을 다 내놓은 아낙들도 정신없이 불청객들을 쳐다보자 아에게와 용병대대원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고, 쟝은 눈이 바빠졌다. 왁자한 가운데 집들을 가로지르자 냇물이 앞을 막았다. “별 일이네.” 냇물을 가로지르는 튼튼한 돌다리를 앞에 두고 하이론이 중얼거렸다.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그린이 물었다. “스트빌라이 양식으로 만들었어.” 별로 깊지도 넓지도 않은 작은 냇물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양쪽에서 돌을 쌓아 올려 아치형을 이루었는데 전형적인 스트빌라이양식이었다. 난간에도 멋을 부린 티가 역력해서 발가벗은 원주민 남녀들이 춤을 추는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아에게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음란하게 보였다. “이상한 일이네.” 정신없이 조각을 살피던 쟝도 중얼거렸다. 대륙과 왕래가 전혀 없는 습지의 원주민들이 어떻게 스트빌라이양식의 다리를 만들었을까” 다리를 건너는 내내 머리를 갸우뚱하던 쟝이 소년에게 물었다. “이 다리는 누가 만든 거냐”“ “제사장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소년은 제사장을 입에 담는 것도 황송한지 얼굴 가득 존경의 염을 띄웠다. “혹시 제사장이 우리 같은 외부인이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론은 새로운 의문에 사로잡혔다. 자신들도 공격을 받아서 확인했듯이 아구족은 자신의 영토에 침범하는 자들은 무조건 공격하는 배타적인 종족이었다. 그런 종족들 사이에 섞여서 제사장의 위치까지 올랐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게다가 코르도바습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제사장은 부족장보다 더 권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외부인이 제사장의 지위까지 올랐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만나 볼 수 없겠니”“ 소년은 하이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렸다. “&&$%%.”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며 뒤를 따르던 모든 전사들도 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를 돌리는 하이론이 눈에 백발의 노인이 잡혔다. 원래는 제법 키가 컸을 것 같은데 지금은 허리가 꼬부라져서 밤톨보다 더 작아 보이는 노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치켜 뜬눈에는 백태가 허옇게 끼어 있었다. 노환으로 눈이 멀었는지 백태 낀 눈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장님임이 분명해 보이는 노인이 앙상한 손을 들어 정확하게 엘란을 가리키자 하이론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주변의 공경하는 태도를 봤을 때 제사장이 분명해 보이는 노인이 입을 열어 십 년은 삭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엘란의 등에도 소름이 돋았다. “등에 저주를 지고 다니는 너는 누구인가”“ “......”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는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주변을 휘감았다. 사그라드는 잔광을 배경으로 곧 죽을 것 같은 노인이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요망한 것, 죽음의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고 다니는 구나!” “당신은 누구요”“ 아에게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신의 대리인이다.” “신의 대리인”“ 엘란이 반문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신을 대리합니까”“ “신은 오직 하나다.” 지고교에 깊이 몰입해 있던 하이론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지고를 상위신으로 받드는 지고교 뿐 아니라 모든 종파에서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당신은 스트빌라이출신인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종교의 폭발력에 대해서 이해가 거의 없는 엘란은 하이론이 격렬하게 따지고 들자 상당히 의아스러웠다. 엘란은 신이니 악마니 하는 것들을 만나게 되면 세상이 왜 이렇게 엿 같은가 따지고 싶은 욕망은 강렬했지만 그들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날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었다. 지고교의 좌호법사라는 중요한 직위에 있으면서, 하이론이 준 경전을 한 번 읽고는 던져 버린 것만 봐도 종교에 대한 엘란의 태도는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나는 스트빌라이에 있을 때 바룬신의 사제였다. 언제나 바룬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 이 오지에서 나는 진정한 유일신을 만났다.” 십 년은 삭여서 입에서 나오는 즉시 부패할 것 같은 목소리에 힘이 실리자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으스스한 한기가 몸을 점령해 왔다. “당신 신의 이름은 뭔가”“ 뭐라 반박하려는 하이론을 제지한 엘란은 흥미진진한 어조로 물었다. 엘란으로서는 어떤 신이든 상관이 없었고, 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지고에 대한 신심도 거의 없었다. 엘란이 그들을 위해 뼈를 깎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의 어깨에 걸린 이스마엘과 페이즈의 목숨 값 때문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에쉴리와 자애로운 성녀, 그리고, 순박한 교도들의 인간미에 끌려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한 때문이기도 했다. 당당하던 노인이 머뭇거리자 엘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믿는 유일신에게 이름이 없는 건가”“ “신은 신 그대로 존재한다. 미천한 인간의 언어로 위대하신 분을 정의 내릴 수 없다.” “결국 이름 없다는 소리잖아...” 엘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예전에 읽은 책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정의에서 시작한다고 하더군. 나는 엘란이고 저기 대머리 노인은 하이론이다. 이름은 우리에 대한 정의지.” 엘란은 폭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저 폭포도 폭포라는 이름이 있지. 책의 마지막 장에 만약 이름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고 못 박고 있던데 당신 생각은 어때”“ “호!” 처음으로 보는 엘란의 학구적인 모습에 쟝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저주받은 자여! 너는 이 땅 밑에 무엇이 있는 줄 아는가” 저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별들의 이름을 아는가” 저기 날라 다니는 벌레의 이름을 아는가”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모르는 무수히 많은 사실들이 있고, 인지하지 못하는 일에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우리의 신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라 인간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지 못할 뿐이다. 헬레나니 바룬이니 킬트니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허상에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엘란의 얕은 학식은 금방 바닥을 들러냈다. 쟝은 엘란이 어떻게 반박하나 싶어서 관심 있게 지켜봤으나 아무 말도 못하는 걸로 봐서 한계에 부딪친 것 같았다. 대신 덩치에 걸맞지 않게 몸을 부르르 떤 아에게가 아직도 엎드려 있는 아구족의 등에 그려진 거미를 보고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신이라는 분이 거미요”“ “이런 불경스러운!” 엎드려 있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 아에게에게 삿대질을 했다. “거미는 신이 아니라 신의 사자다.” 노인이 침착하게 말하자 소년은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짝귀는 아라크네가 용병들을 먹어 치우던 모습이 떠올라 오금이 저려왔다. “젠장! 신의 사자한번 대단하네.” “아구족은 신은 사자가 아라크네고, 지고교는 사자가 드래곤이니 우리가 끗발이 더 센데.” 제사장과 엘란, 하이론의 대화를 들으면서, 입이 풀린 듯 쟝이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의 신이 지고다.” “아까는 이름이 없다고 했잖소.” 노인이 말하자 하이론이 반박했다. “아까부터 말하지 않았나, 신은 하나라고. 너희들이 지고라 부르는 신은 신의 한 쪽 면만을 보고 받드는 신의 허상일 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어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리아나의 눈빛도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관둡시다. 그 보다 눈이 먼 것 같은데 내 뒤를 따라오는 저주는 잘 보이오”“ “신께서 육체의 눈을 가져간 대신에 심안을 주셨다. 네 등에 짊어진 피 빛의 붉은 저주는 아주 똑똑히 보인다.” 엘란은 당혹해 하는 일행들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화를 더 나누고 싶지만 바빠서... 저희들은 그만 물러나야겠습니다.” 엘란은 공손히 인사하고 정령들을 불러 일행들을 하늘 높이 띄웠다. 소년이 가리킨 동굴을 우회한 엘란은 슈리엘에게 물었다. “내 뒤에 무슨 붉은 기운이 어려 있다는 데 슈리엘에게는 보여요”“ “무슨 소리냐”“ “아구족의 제사장이 말하기를 제가 저주를 지고 다닌다는 데요.” “내 눈에는 아무 곳도 안 보인다. 하긴 네 팔자가 더럽긴 하지.” “......” 엘란이 말문이 막혀 뒤통수만 긁어 대는데 하이론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신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본 적 없다.” 하이론은 적이 실망한 눈치다. “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신의 사자는 본 적이 있다.” “드래곤을 봤다는 소리야”“ 잠이 오는지 눈을 껌뻑거리던 나탈리가 신의 사자라는 소리가 나오자 눈을 반짝 떴다. “왜 거기서 드래곤이 나오지”“ “슈리엘은 그것도 몰라! 지고의 뜻을 드래곤이 전해 준데.” “웃기는 소리로군. 무슨 드래곤이 신의 사자라는 거야.” “그럼 아닌가”“ 하이론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나탈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가 드래곤들이 우리들을 지켜 준다고 그랬단 말이야.” “드래곤들이” 하긴 카나이폴런을 봤을 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너희들을 지켜 줄지는 몰라도 신의 사자라는 소리는 전부 헛소리다.” 슈리엘이 워낙 단정적으로 말하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나이폴런이 지고교도를 지켜준다는 소리는 뭡니까”“ 미련을 버릴 수 없는지 하이론이 물었다. “그 놈이 대륙을 누비며 미친 짓을 해 댈 때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지고교를 국교로 삼을 것.” 쾅! 모두의 머리에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역사의 수수께끼 중 하나가 슈리엘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대제가 드래곤과 맺었다는 맹약이 그거였소” 대륙을 통일시켜 주면 지고교를 국교로 삼으라는”“ “그랬지. 그 당시 정령계도 시끄러웠어. 그 미친놈이 일시에 정령왕 넷과 계약을 해버려서.” 새로이 드러나는 사실에 하이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정령왕 넷과 계약을 맺을 수가 있소”“ “에이션트드래곤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나”“ 아에게가 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션트드래곤은 몇 마리나 있습니까”“ “정확한 수는 나도 모른다.” “제가 알기로는 정령왕은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고룡들이 여러 마리라면 나머지 정령왕들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엘란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슈리엘이 혀를 찼다. “쯧쯧쯧! 상급정령사라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 “정령왕과는 계약을 맺을 생각도 없는데...” 엘란이 말을 흐리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슈리엘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네가 말했다시피 각 속성의 정령왕은 단 하나다. 그런데 드래곤들 중에는 정령왕을 소환해서 계약을 맺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예전에는 엘프들도 몇 있었지. 정령계를 조정하는 정령왕이 한 개의 개체에 얽매인다면 어떻게 되겠냐” 당연히 혼란이 생기겠지. 그래서 일단 계약이 형성되면 정령왕이 정령계에서 부리는 권한은 서서히 약해지고 상급정령 중에서 하나의 힘이 강해지며 그가 새로운 정령왕으로 탄생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고 묻지는 마라!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태초부터 그런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그럼 카나이폴런과 정령왕들이 계약을 했다고 정령계가 시끄러워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이론이 말했다. “한 둘이라면 상관이 없었겠지. 무슨 일이든 과도기라는 것이 있어서 신구교체의 시기에는 혼란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 미친놈이 한꺼번에 넷과 계약을 하는 바람에 정령계가 아주 쑥밭이 되어 버렸다. 미친 도마뱀 새끼!” 슈리엘은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지 한 참 동안 욕설을 늘어놓았다. 그 바람에 엘란은 나탈리의 귀를 막아야 했고, 성결하게 생긴 슈리엘이 거친 욕설을 내뱉자 실망한 짝귀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카나이폴런 이후에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드래곤이나 엘프가 있소”“ “드래곤 한 마리가 있지.” 하이론이 묻자 슈리엘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엘프들은”“ 일이 잘 풀리면 엘프들의 땅에서 같이 살아야 하는지라 그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 엘란이 물었다. “없다. 앞으로도 엘프들이 정령왕과 계약을 맺는 일은 없을 거다.” “어째서 그렇소”“ 하이론이 묻자 슈리엘이 다시 욕설을 늘어놓았다. “이게 다 그 미친 도마뱀 때문이다. 보통 자격이 되면 아니, 어느 정도 모자르더라도 싹수가 보이면 정령왕들은 계약에 응한다. 그런데 그 놈이 넷과 한꺼번에 계약하는 바람에 정령계가 뒤집어 졌고, 당연히 후대의 정령왕들은 계약을 꺼리게 되었지. 이제 정령왕과 계약을 하려면 그들을 완벽하게 눌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에이션트드래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제 엘프나 윔급 드래곤들이 정령왕과 계약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봐야지.” 상급정령이 계약자와 수다를 떨어대는 사태에 놀라 엘란일행을 유심히 주시하던 시리우스는 슈리엘의 말에 경악했다. “그럼, 엘프들은 영원히 정령왕과 계약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시리우스의 공손한 태도를 처음으로 보는 일행들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다고 봐야지.” 시리우스의 어깨가 실망으로 물들어 축 쳐졌다. “당신은 어째서 계약자에게 정령계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입니까”“ “비밀” 이게 무슨 비밀이야”“ “저와 계약한 클레임이나 다른 엘프와 계약한 상급정령들은 당신같이 계약자와 활발하게 대화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사실 상급정령들은 자아가 분명해서 부탁조라고 해도 인간이나 엘프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럼 당신은 어째서...” “나” 나야 좀 특별하지, 그리고 이 녀석, 네가 보기에는 어떤지 몰라도 너보다 친화력이 뛰어나, 게다가 맛이 살짝 간 이놈 성격도 마음에 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엘프보다 인간이 더 친화력이 높다는 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아리아나가 아미를 치켜세웠다. “말을 정정해야겠군. 이 놈하고 나하고 친화력이 높다고 해야겠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리아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엘란하고 슈리엘하고 성격이 비슷하긴 하지.” 하이론과 눈을 맞춘 쟝이 동시에 외쳤다. “약간 미친 것이.” “어떻게 자신과 친하력이 높은 정령과 계약할 수 있습니까”“ 둘의 말은 무시하고 시리우스가 슈리엘에게 물었다. “동전 던지기하고 똑같아.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지.” 슈리엘은 시리우스가 이해한 눈치가 아니자 다시 입을 열었다. “운에 달렸다는 소리다.” “허!” 잔뜩 기대했다 허탈해진 시리우스가 탄식했다. “그런 재미없는 소리 말고 카나이폴런에 대해서 말해 줘요. 그러니까 광룡은 지고교를 국교로 퍼트리는 조건으로 대제와 맹약을 맺었다는 말이죠”“ 아에게가 물었다. “그래.” “왜 그런 조건을 내 걸었죠”“ “아까도 말했듯이 그 미친 새끼 속을 누가 알겠냐”“ 슈리엘은 맺힌 것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럼 대제는 왜 지고교를 혹심하게 탄압했습니까”“ “자세한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어쨌건 카나이폴런은 드래곤로드들한테 무참하게 깨져서 죽었을 지도 모르니 맹약은 자연스럽게 깨어졌겠지.” “카나이폴런이 죽었습니까”“ 엘란이 놀라서 묻는 데 나탈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아냐! 카나이폴런은 안 죽었어!”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앙앙! 안 죽었단 말이야.” “안 죽었을 지도 모르지.” 나탈리를 달래려고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하이론이 한 참 머리를 굴리는 데 나탈리는 슈리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지 울음을 그치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 데 내가 위험해지면 드래곤이 와서 구해준데.” 휭! 슈리엘이 아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더 이상의 정보는 나오지 않았고, 왠지 기분이 상한 듯한 엘프들이 빠르게 하늘을 갈랐다. 밀림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숲 속에 들어오면 누구나 편안한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코르도바습지는 오히려 반대여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땅을 밟을 때마다 질척하게 올라오는 물기와 바짓단에 달라붙는 자잘한 벌레들은 신경을 긁어놓고 있었다. 해가 지고도 한 참이 흐른 후에야 비교적 마른땅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몸을 눕힐 수 있었다. “좀 자지 그러냐”“ 하이론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엘프들은 나무 위로 올라갔고, 일행들은 모두 잠에 빠져들었다. “잠이 안 옵니다.” 엘란도 일어나 앉았다. “혹시 야만족의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냐”“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기운을 발하던 제사장이 한 말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듣는 순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등 뒤로 흐르는 무거운 기운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는 했지만 하이론도 그의 불길한 말이 가슴에 걸려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이론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신경 쓰지 마라, 내가 보기에는 노망난 늙은이의 넋두리 같다.” “엄마...” 나탈리가 잠꼬대를 시작했다. 엘란은 일행들이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실프를 불러 후덥지근한 공기를 순환시켰다. “어!” 나탈리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마을 공터에 서 있었다. 수백 명이 모여서 엄마를 태우며 광소를 터트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낡아서 쓰러져 가는 퇴락한 집 사이에 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휘이이!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자 더러운 쓰레기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종이조각하나가 발목에 걸리자 깜짝 놀라 발을 흔들었다. “우이 씨 또 꿈이야.” 나탈리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이론과 엘란이 이상한 꿈을 꾸면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라고 한 말이 생각나자 겁이 덜컥 났다. “오빠!” 나탈리는 눈을 꼭 감고 엘란을 애타게 불렀다. 기대를 가지고 슬그머니 뜬 눈에 여전히 황량한 고향마을이 보였다. “잉!” 잔뜩 찌푸린 얼굴은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작렬하며 주변공간이 종이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번쩍! 일렁이는 공간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지며 사람의 형제가 어른거렸다. “아가 이리 온.” 빛이 사라지자 붉은 색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푸른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엄마!” 나탈리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하이론이나 엘란의 경고가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하이론!” 겨우 잠든 하이론의 귀에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힘겹게 눈을 뜬 하이론의 정수리에 찬물이 떨어진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탈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엘란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하이론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이상한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마법으로 잠 좀 깨워보세요.” 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하이론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팡이를 꺼내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웨이크 업.” 지팡이에 붙은 수정에서 붉은 빛이 반짝거렸다. 나탈리가 공중에 뜬 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또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웨이크 업.” 내리 다섯 번을 시전해도 효과가 없자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내 능력으로는 깨울 수 없다.” “젠장!” 엘란의 얼굴도 점차 하애지기 시작했다. 나탈리! 그에게는 친혈육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는 아이였다. 에쉴리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 전까지 이상하게 꼬인 채 안으로 침잠하던 자신과 세상을 이어준 다리였으며 보살핌의 기쁨을 알려준 등불이었다. 그 등불이 지금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탈리!” 절규 같은 외침이 멍한 나탈리의 작은 가슴을 두들겼다. “어!” 꿈속에서 나탈리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포근한 품에 안겨 빛을 잃어가던 눈에 징그러운 촉수들이 잡혔다. “악!” 나탈리가 꿈속에서 비명을 지르자 현실에서도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악악!” 공중에 떤 채 사지를 버둥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작은아이는 놀라서 깨어난 아에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뭐야”“ 그린의 입에서 비명 같은 물음이 터져 나왔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늘게 늘어진 하얀 촉수가 나탈리를 칭칭 휘 감고 조이기 시작했다. “으으!” 겁에 질린 나탈리의 눈에 검게 다가오는 동공이 보였다. “악!” 마지막 비명과 함께 나탈리의 몸이 검은 동공으로 사라져 갔다. 그 순간 공중에서 버둥거리던 아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나탈리!” 아에게가 껑충껑충 뛰더니 나탈리의 발을 붙잡고 땅으로 끌어내렸다. “헉!” 아에게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나탈리의 얼굴에는 푸른 줄들이 선연하게 떠오르더니 삽시간에 목을 타고 아래로 뻗어 내렸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일시에 가지를 뻗어나가는 모양새 같았다. 턱! 엘란이 나탈리를 안아드는 순간에도 또렷하게 떠오른 푸른 선들이 전신을 치달리며 손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아리아나!” 엘란의 다급한 외침이 밀림을 뒤흔들었고, 그와 동시에 나무 위에서 엘프가 떨어져 내렸다. 아리아나는 말없이 아이를 받아들더니 가슴에다 손을 올리고 엘프들의 언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확! 엘프의 손에서 노란빛이 영롱하게 뿜어졌다. “아!” 나탈리의 몸에서 무서운 반탄력이 솟구쳐 나와 노란빛을 밀어내자 아리아나가 신음을 흘렸다. “흐흐흐! 허튼 짓 하지 마라 이 아이는 나에게 바쳐질 것이다.” 나탈리의 입에서 으스스한 성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눈에 경악의 빛이 서렸다. 얼굴에 종횡으로 그어진 푸른 줄들과 붉게 변해 번뜩이는 눈은 마계의 마물을 방불케 했다. “넌 누구냐”“ 나탈리가 공중으로 뜬 순간부터 정신을 못 차리고 안절부절못하던 엘란은 아이의 입에서 다른 존재의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오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미지의 존재는 자신의 힘을 과시라도 하려는지 괜히 말을 끌었다. “신이다!” 쾅!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아리아나와 어느새 내려온 시리우스까지 멍하게 굳어졌다. “허!” 엘란의 냉소적인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무슨 신이 아이를 제물로 삼는 단 말이냐”“ 나탈리의 탈을 뒤집어 쓴 존재의 분노한 목소리가 밀림을 흔들었다. “신성모독이다.” “신성모독 좋아하네, 네가 신이든 나발이든 나탈리에게서 떨어져라!” 엘란의 냉담한 목소리에 한기가 풀풀 날리자 신이라는 대꾸가 나왔을 때부터 멍해있던 하이로도 차가운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빛내며 살펴본 나탈리의 모습은 신의 현신이라기보다는 마신의 꼭두각시 같았다. 얼굴과 손발을 온통 뒤덮은 푸른 선들과 붉게 타오르는 두 눈,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밤에 산발한 채 흩날리는 갈색머리카락. “넌 누구냐”“ 똑같은 질문이 하이론의 입에서도 나왔다. 아이의 모습은 절대로 신이 현신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것들! 뻔한 사실도 믿지 못하는 구나. 나는 지고이며 동시에 헬레나고 바룬이요 킬트다.” 짝귀와 밤톨은 꼭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었고 그린은 당혹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아에게는 나탈리의 얼굴이 변했을 때부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왔다갔다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쟝은 살아가면서 죄가 많았는지 가까이 오지 못하고 주변을 돌았다. 시리우스는 이 사태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좋다. 당신이 신이라고 치고 이제 나탈리에게서 물러나시오.” “똑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게 만드는구나. 이 아이는 나에게 바쳐졌다.” “누구 맘대로.” 격렬하게 반발하는 엘란의 얼굴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아이가 선택한 일이다.” 하이론의 머리는 대단히 복잡했다. “정말 신이 이 아이의 몸을 빌어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에 홀린 것인가”“ 빠르게 굴러가는 하이론의 뇌리에 바샤라의 돌이 떠올랐다. 엘란과 동시에 이상한 악몽에 시달린 나탈리, 어쩌면 그 돌이 사단의 원인일 것이다. “왜 엘란이 아니고 나탈리지”“ 하이론의 돌연한 질문에 나탈리의 눈이 치켜떠졌다. “무슨 소린가”“ “신이라면서 그것도 모르나”“ 어느새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하이론이 빈정거렸다. 일단 평정을 찾자 하이론 특유의 괴팍한 성격이 여지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신성모독이다.” “흥! 신이라면서 어휘력하고는...고작 아는 단어가 신성모독뿐인가”“ “......” 그의 말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미지의 존재는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멀리서 눈치를 살피던 쟝이 슬슬 다가왔다. “이거 아무 것도 아니네. 너 이 새끼 정체가 뭐냐”“ “나는 신이다.” “또 똑같은 소리. 이거 정말 바보 아냐!” 쟝 특유의 느끼한 빈정거림이 시작되자 나탈리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신성...” 미지의 존재는 신성모독이라는 소리를 지르려다 멈칫했다. 하이론의 말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 모습이 어찌나 희극적이던지 짝귀, 밤톨마자 평정을 회복했다. “마계에서 온 마물이냐”“ 점점 더 차가워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엘란이다. “불쌍한 자들,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고 가슴이 있어도 느끼질 못하는 구나.” 나탈리의 입에서 어린아이를 꾸짖는 것 같은 목소리가 발해졌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내 말에나 대답해라. 왜 엘란이 아니고 나탈리가 제물로 선택된 것이냐” 그리고 바샤라의 돌과는 무슨 관계냐”“ “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나를 불러들였다.” “아니, 거짓말! 이제야 알겠군. 넌 나도 잡으려했다. 강한 힘을 가진 내가 뿌리쳐서 성공하지 못하자 힘없는 아이의 꿈속에 들어가 나탈리를 사로잡았겠지.” “그렇게 된 거군.”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매서운 눈빛으로 나탈리의 붉은 눈을 노려보았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어서 나탈리의 몸에서 나가라!” “싫다면”“ 엘란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괴상한 존재가 나가지 않겠다면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럼 평생 살아라!” 쟝이 한 마디 툭 던지자 나탈리가 입을 벌리고 웃기 시작했다. 하얀 이와 붉은 혓바닥이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일으켰다. “하하하!” 가닥가닥 갈라지는 목소리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날 오해하는 구나! 내가 여기서 살려고 한다고 생각하나” 내 본체는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 들어온 것은 내 정신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엘란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더욱 짙어졌다. 시간이 흐르면 물러날 줄 알았는데, 만약 이 괴물의 말이 사실이라면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바샤라의 돌과 무슨 상관이냐”“ “바샤라의 돌이 뭐냐”“ 하이론의 물음에 나탈리의 탈을 쓴 존재가 되물었다. “신이 아닌 게 확실하군.”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것이냐”“ “무릇 신은 전지전능해야 한다. 엘프들까지 아는 사실을 모른다면 신의 자격이 없다.” 하이론이 도발적으로 외치자 온통 뒤덮힌 선들 때문에 표정을 분간하기 어려운 나탈리의 얼굴에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엘란은 놓치지 않았다. “신이 아닌 게 확실하군. 괴물 떠나지 않을 생각인가”“ 괴물이라고 까지 불리자 자칭 신의 분노한 음성이 귀청을 울렸다. “가만두지 않겠다.” 돌연 나탈리의 눈이 감겼다. 고른 숨을 내쉬는 것이 깊은 잠이라도 빠져든 것 같았는데, 괴상한 선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탈리!” 아무리 잡고 흔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웨이크 업!”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을 시전해 본 하이론이 머리를 흔들었다. “곤란하게 되었다.” “그냥 이대로 두면 물러나지 않을까요”“ 아에게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기세를 보아서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자신도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하이론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더욱 절망적인 생각이 든 엘란의 몸에서 거센 기운이 일어났다. “바샤라의 돌이 뭡니까”“ 만약 대답하지 않으면 힘으로 굴복시켜서라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굳센 결의가 한 글자 한 글자에 올올이 박혀 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 일은 바샤라의 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리우스의 고풍스러운 말이 차가운 기운을 품자 아주 오만하게 들렸다. 대답이 끝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인상을 쓰며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엘란이 발이 바닥으로 푹푹 꺼져 들어갔다. “바샤라의 돌이 뭐냐”“ 시리우스가 깍지 낀 손을 풀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어!” “물러서!” 둘 사이의 공간에서 격랑이 일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태풍이 부는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을 받고 뒤로 급히 물러났다. 바람이 파도처럼 거칠게 날뛰었다. 쩡쩡쩡! 하이론의 눈에는 둘 사이의 공간이 쪼개져서 부딪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틀렸어요. 오빠.” 나탈리가 노란빛을 밀어낼 때부터 아무런 말없이 냉정한 눈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아리아나가 뭔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리아나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둘 사이에서 숨 막히게 피어오르던 격한 기운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자유자재로 기운을 수발하는 둘의 모습에 감탄이 저절로 일었다. 진정한 강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엘란이 눈빛을 아리아나를 재촉했다. “원래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정상인데, 당신의 꿈이나 아이의 꿈, 그리고 저 괴물의 반응을 봤을 때 아무래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잠이 말을 끊은 아리아나는 말을 꺼내기가 힘든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절대로 다른 이에게 전하거나 입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약속 하시겠습니까”“ 모두들 급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샤라의 돌은...카르자나의 조각난 심장입니다.” 쾅! 모두의 머리 속에서 번쩍하고 우레가 울려 퍼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일순간 지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그...그...말이 사실이오.” 하이론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사실이다.” 시리우스의 차가운 음성이 들리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오만한 엘프가 자신이 멸시하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일은 태양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그 전설이 사실이었어.” 딱 벌어진 아에게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 내렸다. 그는 따라다니기를 잘 했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엘란을 따라다닌 덕에 엘프들도 만날 수 있었고, 대제와 카나이폴런에 얽힌 이야기와 정령왕들에 대해서도 미흡하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용신전쟁에서 드래곤들을 이끌고 신에 대항해 싸운 카르자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아에게는 귀를 활짝 열고 엘프들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용신전쟁에서 패한 카르자나의 심장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채 대륙 이곳저곳에 뿌려졌어요. 그걸 바샤라의 돌이라고 합니다.” “용신전쟁이 정말 있었던 일입니까”“ 여전히 하이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전설을 믿지 않았었다. 드래곤들의 힘이 강대하다고는 하나 감히 신에 맞설 정도는 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뿌리 채 흔들리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신전쟁은 분명히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 전쟁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도.” 충격이 지나가자 마법사 특유의 학구적인 열정으로 가슴이 들끓었다. 아리아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합니다. 엘프가 인간보다 열 배는 더 오래 산다 하나 워낙 까마득한 상고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서...그 당시에는 엘프들도 제대로 된 사회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문자도 없어서 구전에 의존했던지라 뭐가 진실이고 뭐가 전설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이론 뿐 아니라 아에게, 그린, 밤톨, 짝귀 그리고 여자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쟝까지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신전쟁이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고, 카르자나의 조각난 심장이 바샤라의 돌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들끓어 오른 호기심을 충족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때문이었다. 오직 엘란만이 나탈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아리아나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렸다. “바샤라의 돌이 카르자나의 조각난 심장이라면 왜 이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아리아나가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처음 바샤라의 돌과 악몽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을 때 말했다시피 그 돌이 어떻게 작용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저희로서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처음 겪어 보는 일입니다.” 엘란은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어본 것인데 돌의 정체만 알아냈을 뿐 나탈리에게 일어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는 틀린 것 같군. 차라리 광법사를 쫓아가는 것이 어떨까”“ 여전히 냉정한 시리우스의 말에 열이 뻗쳐올랐다. 하이론이 엘란의 팔을 지그시 눌러왔다. “그게 좋겠다.” 일행들을 잠자리를 거두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엘란의 등에는 끔찍한 몰골을 한 나탈리가 업혀 있었다. 붉은 태양이 밀림을 밝히며 어둠을 몰아낼 때까지도 나탈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끔씩 신음을 흐리며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 나탈리가 신음을 흘릴 때마다 엘란의 몸이 움찔거렸다. 돌연 엘란의 걸음이 멈추었다. “.....”“ 그는 하이론의 말없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나탈리를 넘기며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나탈리 잘 보고 계세요.” 슈앙! 슈리엘을 부른 엘란은 정령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 사라져 갔다. 슈웅! 빠르게 움직이는 엘란의 옆에 시리우스가 붙었다. “너도 느꼈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란의 얼굴이 돌멩이처럼 굳어 있었다. 이런 강력한 마나의 요동이라니. 수많은 강자와 싸우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엘란으로서도 멀리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광법사!!! 어쩌면 오늘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울창한 밀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쾅아앙! 격렬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우르릉! 그와 동시에 하늘도 울부짖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쏟을 모양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결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코르도바습지의 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 방울 한 방울이 콩알만 한데다 온 천지를 뒤덮을 듯 세차게 내려서 얼굴이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빈틈이라고는 없어서 포강에서 피어오르던 물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쾅쾅! “하하하하!” “광법사!” 폭음이 점점 가까워지자 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는 붉은 로브의 마법사가 보였다. 폐허가 된 지름 100미터 가량의 원안에 광법사가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시커먼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라크네!” 놀랄 일의 연속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거대한 거미들이 광법사를 에워싸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엘란과 시리우스는 잠시 떨어져서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츗츗!” 아라크네들은 무슨 의견이라도 나누는지 연신 괴상한 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흐흐흐흐!” 광법사는 몸통만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거미들에 둘러싸여서도 여유가 넘쳐흘렀다. “이건”“ 엘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진 폐허로 변한 밀림의 공동과 광법사의 괴소, 시선을 끄는 붉은 로브, 그리고 떼거지로 몰려 있는 거미 때문에 자세히 보지 못했던 광법사의 얼굴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벗겨졌던 머리에 소복이 돋아난 검은 머리칼 뿐 아니라 윤기 없이 푸석푸석 하게 늘어졌던 흰머리도 어느새 검어져 있었고, 홀쭉하니 움푹 패였던 볼은 도톰하니 올라와 아기의 통통한 볼을 연상시켰다. 그 뿐이 아니라 온통 자글자글하던 얼굴은 팽팽하니 펴져서 마치 다리미로 다려놓은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80노인이 한 순간 2,30대 청년으로 변한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으로 물든 얼굴에 의혹이 하나하나 맺힐 때 아라크네가 공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 여덟 개의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검게 밀려드는 거미의 바다는 한 떼의 야생마를 연상시켰다. “흐흐흐!” 광법사 일레이저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왼손으로 붉은 색 돌을 움켜쥔 채로 흐뭇한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저게 바샤라의 돌입니까”“ 붉은 색 돌은 주먹 세 개를 겹쳐 놓은 것 같이 길고 컸는데 사선으로 그어진 황금색 선이 빗속에서도 똑똑하게 보였다. “맞다.” 팟! 선발대로 다가간 아라크네가 입에서 거미줄을 뿜어냈다. 촤악! 길게 날아간 흰색 끈은 마지막 순간에 쫙 펼쳐져서 광법사를 덮어 갔다. 50여 마리가 일시에 뿜어낸 독 거미줄은 빈틈없이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졌다. 어디든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천라지망이었다. “엡솔루트 실드!” 푸른색이 일렁이는 원형의 구가 광법사를 완전히 에워쌌다. 펑! 허연 거미줄이 그 위를 덮었다. 계속해서 거미줄이 쏘아지자 푸른색 구는 그 모습을 감추고 하얀색 둥근 공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직! 흰색 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번개가 치듯 거미줄을 따라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계속 쏘아지는 거미줄을 따라 스파크가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았다. 펑펑펑! 스파크가 거미들에 닿는 순간 폭발음과 함께 거미들이 산산이 터져 나가며 푸른 체액과 징그러운 살들이 사방에 비산했다. “.....!” 경악의 연속이었다. 보통 실드를 치면 공격마법은 구사하지 못한다. 하물며 7써클 절대방어마법을 시전한 채로 저런 라이트닝 볼트를 시전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만약 광법사가 엡솔루트 실드를 건채로 공격마법을 난사한다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실드가 풀리자 오만한 광법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동료들이 산산이 조각난다면 겁이 날 만도 하건만 아라크네들은 겁도 없이 계속 달려들었다. “드래곤 파이어!” 치이익! 화염이 일렁거리는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비와 부딪쳐 허연 수증기를 뿜어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만하게 버티고 선 화염의 드래곤은 그 모습 자체에서 거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8써클 마법사가 시전하는 드래곤 파이어는 7써클 마법사가 시전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대제의 무덤에서 당했던 불의 드래곤이 웜급이라면 지금 목도하는 드래곤은 에이션트급 같았다. “크엉!” 드래곤이 포효하자 밀림이 뒤흔들렸다. 포효와 함께 날아오른 드래곤은 그대로 아라크네를 덮쳤다. 쾅쾅! 땅이 뒤집혀지고 공기가 찢겨져 나갔다. 산산이 흩어진 아라크네의 잔해가 빨아놓은 빨래처럼 폐허 위에 널려지기 시작했다. 팟팟팟! 아라크네는 필사적으로 거미줄을 발사했다. 어찌 보면 애처로운 마지막 몸부림 같아서,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치이익! 불의 드래곤을 감싼 거미줄이 타 들어가며 허연 연기를 피어 올렸다. “크앙!” 드래곤이 몸부림치자 거미줄은 자취를 감추었다. 드래곤이 입을 벌려 화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거센 빗줄기도 불의 드래곤이 뿜어내는 화염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불에 닿는 순간 아라크네는 비참한 소리를 지르며 타 들어갔다. 빗속을 휘젓고 있는 드래곤의 모습은 무법자 그 자체였다. 화르르르! 세 번의 화염을 더 토해내던 드래곤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네 번.” 엘란은 조용히 그 숫자를 세었다. “카카카! 더 이상 반항해도 소용없다.” 팽팽한 얼굴로 소리치는 광법사는 쭈글쭈글 할 때보다 훨씬 더 소름끼쳤다. “나는 신이다!” “.....”“ “.....”“ 하루를 엉망으로 망쳐버렸던 저 소리가 미친놈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습지에서 신이라 자처하는 미치광이를 벌써 둘이나 만난 것이다. 엘란과 시리우스는 의문에 쌓인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엘란은 피식 웃었다. 항상 오만하게 보이던 시리우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든 것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차가운 조소를 머금던 입은 멍하니 벌어져 있었고, 볼은 잔 경련을 일으켰으며 눈이 동그랗게 커진 것이 사슴을 연상시켰다. 엘란이 웃자 시리우스의 얼굴에 차가운 얼음이 한 꺼풀 덮여졌다.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느낀 것이다. “메가 라이트닝 볼트!” 지직! 스파크가 물을 따라 급속하게 확장하며 거미를 집어 삼켰다. “꾸어!” 처참한 비명이 물방울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갔다. “파이어 트위스터!” 광법사의 앞에 거대한 불의 회오리가 생기더니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치이익! 어느새 발목까지 물이 찬 밀림의 바닥을 불의 회오리가 누비자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마치 온천을 방문한 것 같았다. “쿠어억!” 아라크네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광법사는 실실 웃으며 장난치듯 거미들을 몰살시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거미들은 도망이라는 것을 몰랐다. 불을 향해 날아가는 부나비처럼 동족들의 시체를 밟으며 꾸역꾸역 광법사를 향해 몰려갔다. 엘란과 시리우스는 아라크네들이 최대한 광법사의 진을 빼놓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지치지 않는 이상 승산은 전혀 없었다. “아이스 존!” 쩌정! 광법사가 살짝 떠올라 물에 발을 대는 순간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광법사의 발밑에서 시작된 빙판은 폭발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땅을 딛고 선 아라크네의 다리가 물과 함께 얼어붙었다. 퍽퍽퍽!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버둥거리는 아라크네가 몸부림을 치자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아이스 에로우! 다리를 잃고 빙판 위를 버둥거리거나 얼음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아라크네의 머리 위에 얼음의 화살이 박혀 들었다. 쾅쾅쾅! 끊임없이 시전되는 광법사의 마법에 아라크네의 숫자가 빠르게 감소했다. “이길 수 있을 까”“ 자신 없는 엘란의 혼잣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없어. 지금 덤비는 것은 자살행위다.” 광법사를 봤을 때부터 가만히 굳어있던 슈리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치 사형선고 같았다. “그렇겠죠”“ “포기하지 마라! 인간. 저 놈은 아직 완전한 8써클 마법사가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깨달음이나 수련의 결과가 아니라 돌의 마력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서 불완전할 것이다. 내부의 상처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고, 정신상태도 정상이 아니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웬일로 시리우스가 길게 말을 늘어놓았는데 그 음성에는 차가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혼자서 광법사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엘란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의도였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엘란이 피식 웃었다. “이스마엘, 파보, 들창코, 도와주세요.” “슈리엘!” 엘란이 부르자 슈리엘이 마지막 거미를 처치하는 광법사를 향해 바람의 창을 날렸다. 쌔에엑! 폭우 속을 가르며 빛살같이 날아가는 바람의 창은 한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강렬했다. “드래곤 파이어!” 불의 드래곤이 창을 막아갔다. 콰아앙! 드래곤이 입을 벌려 브레스를 뿜어내 듯 화염을 쏟아내자 화염에 부딪친 바람의 창에서 터져 나온 폭음이 공기를 갈가리 찢어 발겼다. 새엑! 화염을 뚫고 바람의 창이 날아갔다. “크앙!” 다시 뿜어진 화염과 바람의 창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쳐 갔다. 쾅! 연속적인 폭음이 귀청을 뒤집어엎었다. 쩍쩍! 꽁꽁 얼어붙은 빙판이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쪼개져 나갔다. 그와 함께 얼음 조각이 썩인 물방울이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튀었다. 덥썩! 힘을 잃은 바람의 창을 드래곤이 무는 순간 희미해진 창이 그 힘을 다했다. “크앙!” 화염이 엘란과 시리우스를 향해 쏜살같이 쏘아져 왔다. “클레임!” 얼음 조각이 떠다니는 흙탕물에서 진흙으로 만들어진 손이 불쑥 솟아올라 화염을 움켜쥐었다. 펑! 손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화염도 흩어졌다. 실프! 드래곤을 시리우스가 묶어두는 사이에 엘란이 소환한 실프 스물이 일시에 몸을 드러냈다. 기이잉! 화살촉처럼 뾰족하게 변한 실프가 회전을 시작하자 빗방울이 잘게 부서져 나갔다. 핑! 방사형으로 쫘 펴진 실프들이 드래곤을 넘어 광법사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이스 실드!” 광법사가 귀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환한 빛이 폭사되는 동시에 발에서 시작된 얼음막이 전신을 가렸다. 쩡쩡쩡쩡! 실프 스물이 일시에 실드를 두들기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타!” 우렁찬 일레이저의 기합과 함께 실드가 터져 나가며 실프를 덮쳤다. 쾅! 얼음에 두들겨 맞은 실프들의 반이 강제소환 당하자 엘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엘란이 두 손을 허공으로 내밀어 휘 젖자 나머지 실프들이 광법사의 정수리와 가슴을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흐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 가득 웃음을 머금은 광법사는 손에 바샤라의 돌을 든 채로 앞으로 쭉 뻗었다. 휘이이! 뻗은 손을 중심으로 거친 회오리바람이 불어 나오더니 떨어져 내리는 실프들을 압박했다. 기이이잉! 핑핑 도는 회오리바람이 실프들을 일시에 끌어 당겼다. 지이이잉! 회오리에 말려든 실프들의 몸이 갈가리 찢겨지자 엘란의 정신도 같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울컥! 엘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쾅! 클레임이 드래곤과 부딪치는 순간 천지가 뒤흔들렸다. 드래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자 광법사가 돌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파이어 스톰!” 강력한 불의 폭풍이 둘에게로 휘몰아 쳤다. 엘란은 슈리엘을 타고 왼쪽으로 급히 피했고, 시리우스는 클레임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스 스톰!” 광법사는 반대 속성의 마법을 연이어 시전하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8써클 마법사가 시전한 아이스 스톰이 주변을 휩쓰는 순간 열대의 날씨는 영하로 떨어져서 차가운 냉기가 몸을 에이게 만들었다. “슈리엘!” 슈리엘이 엘란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하늘높이 떠올랐다. 쾅쾅! 폭풍에 섞여있는 얼음덩어리들이 연신 슈리엘을 두들겼다. 하늘 높이 떠오르자 주변을 온통 휩쓰는 얼음 폭풍의 중앙, 흡사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맑은 그 곳에 광법사의 정수리가 또렷하게 보였다. “바람의 창!” 쐐액! 다시 한 번 바람의 창이 광법사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엡솔루트 실드!” 콰아앙!!!! 푸른색의 구와 창이 부딪치는 순간 뇌리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무섭게 치솟아 오르며 내리는 장대비를 위로 되돌려 보냈다. 격한 기류에 빗방울이 휘말리자 일순간 비가 그쳤다. 쏴아아아! 다시 비가 쏟아지는 순간 바람의 창이 힘을 잃고 사라졌다. “하하하!” 한 줄기 낭랑한 비웃음과 함께 실드가 풀리는 순간 엘란이 조용히 속삭였다. “엔다이론.” 솨아! 광법사 발치의 물이 연꽃처럼 벌어지며 매섭게 솟구쳐 그의 발을 휘감으려는 순간 광법사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레비테이션!” 위로 떠오른 광법사가 비웃음을 날렸다. “파이어 링!” 그의 다리아래에서, 불꽃이 일렁거리는 손가락 두 마디만한 굵기의 줄이 나타나 아래로 쏘아졌다. 휙휙휙! 연이어 쏘아진 파이어 링이 헛손질을 한 엔다이론을 겹겹이 조였다. 펑! 산산이 터져 나가는 엔다이론과 함께 엘란의 입에서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피릿 컴파운드!” 꼬여서 아래를 직격하는 붉고 푸른 기운을 머금은 정령들이 광법사의 머리를 노렸다. “엡솔루트 실드!” 다시 발휘된 절대방어마법이 스피릿 컴파운드를 맞아갔다. 쾅! “하하하하!” 다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비산하는 물방울, 미친 듯이 진동하는 공기, 그리고 광법사의 괴소. “스피릿 컴파운드!” 연속되는 공격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쾅! 공중에 뜬 광법사의 신형이 아래로 약간씩 밀려나기만 할뿐 실드에는 흠집하나 생기지 않았다. “드래곤 파이어!” 광법사의 손으로 미친 듯이 몰려드는 마나의 격한 흐름은 공중에 떠 있는 엘란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가라!” “크엉!” 드래곤의 아가리에서 브레스처럼 쏘아지는 거대한 화염덩어리는 빗방울을 증발시키며 엘란을 향해 마수를 뻗었다. “스피릿 컴파운드!” 쾅! 화염과 부딪친 정령들이 힘을 잃고 사라지는 순간 엘란의 입에서 다시 피가 쏟아졌다. “슈리엘.” 슈리엘이 엘란을 떠나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촥! 거대하게 부푼 옷자락이 드래곤의 머리를 후려치자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드래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드래곤 파이어!” 새로운 드래곤이 그 몸을 드러내는 순간 바닥에 구른 드래곤도 하늘을 향해 포효를 시작했다. “크아앙!” 저 깊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섬뜩한 포효는 지친 엘란의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스피릿 컴파운드!” 두 마리의 카사가 강제송환 당한 이상 마지막으로 시전하는 스피릿 컴파운드가 될 지도 몰랐다. 카사와 실피드가 맞물려 회전하며 날아가자 쏟아지는 장대비가 거기에 휘말려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쾅! 드래곤이 나타나고 정령들이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었다. 아직 그 틀을 갖추지 못한 드래곤이 스피릿 컴파운드와 부딪쳐 그 힘을 잃고 쓰러지며 꼬리로 정령들을 휘감았다. 퍼엉! 드래곤이 터지며 정령들도 강제소환 당했다. 울컥! 또 다시 쏟아지는 핏줄기! 쾅! 슈리엘이 온 힘을 다해 광법사의 실드와 부딪쳐 갔다. 쾅! 실드는 흠집하나 생기지 않았지만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물이 홍건이 차 오른 땅바닥에 퉁퉁 부딪쳐 갔다. 엘란이 이를 악무는 순간 슈리엘의 입매도 무섭게 다물어졌다. 일미터 정도로 작게 축소된 슈리엘이 두 손을 모아 머리 위에 올리고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쐐애액!!!! 몸을 회전하며 빛살처럼 떨어져 내리자 주변의 공기가 온통 몸부림쳤다. 콰아앙!!!!! 지직! 다시 대기를 찢어발기는 폭음과 함께 절대방어마법에 가는 실금이 생겼다. 왜애앵! 거기다 손을 대고 몸을 회전시키는 슈리엘에 의해 실금이 점점 굵어질 때 광법사의 입이 조용히 벌어졌다. “워러 삭스!” 바닥을 홍건이 적신 물이 푸른색의 방어구를 타고 오르더니 섬광과 함께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슈리엘이 온 힘을 끌어 모아 방어구를 부수려는데 갈라진 물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거대한 상어의 아가리로 변했다. 연이은 이빨이 톱니바퀴처럼 보였다. 쾅! 상어의 아가리가 닫쳐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슈리엘의 허리를 다졌다. 쩍! 잘려진 슈리엘의 상체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으악!” 엘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통에 찬 비명이 빗방울을 뚫고 밀림 가득 퍼져나갔다. 엘란의 허리가 붉게 물들더니 다리를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슈리엘과 거의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다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광법사의 반격에 말려 심대한 타격을 입고 두 동강이 난 슈리엘이 강제소환 당하자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허리에 한 줄기 굵은 상처가 생겼다. 휭! 정신이 아찔해 지는 고통과 함께 폐를 타고 오르는 탁한 기운이 목을 타고 뇌리를 흔들자 실피드가 돌아가 버리고 속절없이 아래로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광법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엘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충혈 된 눈동자 속에 깊이 깔려 있는 광기와 혼돈은 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만약 광법사가 온전한 정신으로 그 힘을 발휘했다면 엘란은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 정신으로 장난치듯 발해지는 마법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여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나는 위대한 신이다!” “크아아앙!” 광법사가 미친 듯이 소리치는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드래곤이 하늘을 날며 포효를 터트렸다. 쫘악! 갑자기 광법사의 발치에서 흙이 뒤집어지며 그의 몸을 눌러왔다. 클레임, 땅 밑에서 기회를 노리던 시리우스가 날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진흙덩어리들이 실드를 빈틈없이 감싸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퍼어엉! 광법사를 완전히 덮고 조이던 진흙덩어리들의 표면에 가는 금이 생기고, 그 금을 따라 황금빛 광채가 어둠을 몰아내는 찬란한 태양광처럼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쾅! 산산이 터져 나가는 흙덩어리들, 그 사이를 가르며 튀어나온 광법사의 왼팔이 아래위로 흔들리자 땅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쾅! 쩍어억! 광법사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는 땅의 폭발이 천지를 뒤집어엎었다. 마치 땅이 하늘과 자리를 바꿀 것 같은 기세였다. 쿵! 땅이 입을 벌려 더러운 오물을 토해내는 것처럼 시리우스를 뱉어냈다. 아름다운 엘프의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서 엉망이었다. 엘란이 공중에서 광법사를 공격하다 반격에 말려 추락하고, 시리우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 휴지처럼 구겨져 땅바닥을 구를 때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일순간의 일이었다. 다른 누가 이 험악한 결전을 구경했다면 하늘을 찢어발기는 굉음과 순식간에 뒤집어 졌다, 제 자리를 찾는 땅, 눈을 아리게 만드는 섬광, 온통 휘몰아치는 물방울들, 그 이외에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운디네.” 땅에 떨어져 내리는, 피로 얼룩진 엘란의 입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나오자 이제는 무릎까지 차 오른 물 바닥에서 운디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풍! 운디네는 엘란을 받는 즉시 돌아가 버리고 그의 몸은 더러운 진창에 처박힌 채 굴렀다. 몸을 일으키려 겨우 움켜쥔 엘란의 손에 거미의 잔해들과 함께 더러운 진흙이 잡혔다. 번쩍! 쿠르릉! “우하하하!” 번개, 그 뒤를 따르는 천둥과 함께 광법사의 광소가 휘몰아치는 장대비와 함께 주변을 감싸고돌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엘란의 얼굴에 따가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따끔따끔한 감각은 엘란의 정신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엘란은 광법사의 동쪽 30미터 지점에 있었고, 시리우스는 남쪽 25미터 지점에 있었다. 광법사가 원한다면 기침만으로도 격살시킬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하늘을 쳐다보며 광소를 터트리던 광법사의 시선이 서서히 엘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달싹거리려던 순간 엘란이 고함을 질렀다. “잠깐!” “으흐흐!” 엘란을 쳐다보는 일레이저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당신은 누구요”“ 엘란은 시간을 끌어보려는 의도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이다.” “이 인간 정말 미쳤군.” “당신이 어떻게 신일 수 있는가” 당신은 인간이다.” “나는 이미 인간의 틀을 깨고 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여기 코르도바습지에서도 당신같이 신을 자처하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신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호! 너도 만났는가” 그 놈은 신을 자처하는 괴물일 뿐 신이 아니다. 감히 내 꿈속에 들어와 나를 지배하려 하다니. 내 그 놈을 찾아 신을 자처한 그 오만방자함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할 것이다.” “광법사도 꿈을 꾸었군. 확실히 바샤라의 돌이 이상한 현상의 원인인 게 분명해.” “나는 아직도 당신이 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어리석은 것!” 분노한 광법사가 손을 쓰려하자 엘란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신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시오.” “어떤 증거를 원하나”“ 엘란은 어쩌면 광법사의 정신상태를 이용해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느꼈다. “당신이 인간이었을 때 7써클 마스터였소. 신이 되었다는 지금은 8써클에 들어선 것 같은데 8써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소. 한 번 8써클 마법을 시전해 보시오.”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냉정한 머리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광법사의 몸은 너무 많은 마력을 일시에 받아들여 깨어지기 쉬운 유리잔 같은 상태였고, 유년시절부터 배배 꼬였던 정신은 폭주하는 마나가 뇌를 건드린 데다 밀림에 사는 미지의 존재가 꿈속에 들어와 휘저은 바람에 완전히 돌아 버렸다. 그런 상태를 머리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던 몸은 8써클 마법의 시전을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그런 광법사의 자존심과 호승심을 엘란이 부추기고 있었다. 엘란이 던지는 마지막 패였다. “왜 자신 없소” 그래 가지고서야 신은커녕 적법사 아만의 상대도 안 되겠소.” 적법사라는 소리가 나오자 기억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도 알 수 없는 적개심이 광법사의 가슴을 달구며 마지막 남은 이성을 흔들어 놓았다. “흐흐흐! 신의 권능을 보여주마!” 광법사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떨어지자 엘란이 시리우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금 엘란의 몸은 엉망이어서 도저히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었다. 탁, 탁! 바닥에 널부러져 최후의 기력을 짜내던 엘프는 우아한 몸짓으로 땅을 박차며 엘란에게 다가왔다. 광법사의 입에서 광기에 뒤덮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가 엘란을 안아들고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광법사는 엘란과 시리우스가 도망가던 말던 자신의 마법에만 열중했다. “세상을 떠도는 버림받은 영혼이여 대지를 뒤덮은 어둠의 손이여, 허공을 비상하는 이름 없는 존재여, 물 속을 헤매이는 저주의 망령이여, 나 일레이저가 그대들의 힘을 원하니, 여기 그 힘을 드러내어 나를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자들에게 죽음의 대가를 치르게 하라. 헬 파이어!” “......”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진공상태에 든 것과 같은 기묘한 정적이 주변을 휘감고 돌았다. 새나 벌레들은 물론 나무나 흙, 바람, 하늘까지도 정적에 쌓여 몸을 떨었다. 팟.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할 나지막한 소음이 울리더니 곧이어 폭음이 따랐다. 쾅!!!!!!!! 귀청을 찢어 버릴 것 같은 파열음이 충격파가 되어 멀리 멀리 퍼져 나가는 동시에 뜨거운 열이 주변을 태워버렸다. 불꽃도 화염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광법사의 몸을 중심으로 미친 듯이 확산되어 하얀 섬광이 다였다. 작열하는 흰색의 고온이 주변을 뒤덮자 밑에서 달구어진 공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대기의 흐름을 바뀌어 버렸다. 폭우를 쏟아내던 검은 먹구름은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고, 이제는 무릎 위에까지 차오르던 빗물이 일시에 사라지 듯 증발해 버렸다. 파파파! 맹렬한 속도로 확산되는 섬광은 주변의 밀림을 싹 밀어버렸다. 나무와 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바위는 쪼개져 자갈이, 자갈은 갈려져 모래가 되었다. 습기를 머금은 진흙은 푸석푸석 갈라져서 그 힘을 잃었고, 멀리 도망가던 엘프와 엘란은 주변을 후끈 달게 만드는 뜨거운 열기에 물에 젖은 옷이 말라가며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쏟아지던 폭우와 바닥을 질펀하게 적시던 빗물이 아니었다면 심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엘란은 시리우스의 품에 안긴 채 경악했다. 광법사가 천천히 주문을 영창하는 동안 도망쳐 나온 거리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키로는 되었다. 그런데도 뜨거운 열기에 몸이 익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8써클 마법이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마치 드래곤들이 부리는 마법같지 않은가” 엘란이 의문에 싸여 인상을 찌푸리는 동안에도 시리우스는 정령까지 불러 빛살같이 움직였다. 조금만 주춤했다가는 백색 섬광에 잡혀서 형체도 없이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파파파! 뒤를 쫓는 섬뜩한 섬광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시리우스의 입에서 계속적으로 피가 흘렀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정령을 부른 대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점점 뜨거운 기운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엘란은 시리우스에게 안긴 상태에서 고개를 내밀어 다가오는 백색의 추적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의 풍경을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것처럼 소멸시키며 다가오는 고온의 밝은 빛은 역설적으로 빛을 집어삼키며 내려오는 밤의 장막 같았다. 엘란은 다가오는 고온의 폭풍과 도망치는 시리우스의 속도를 비교해 보았다. 백색섬광의 확산속도가 점차 느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리우스 역시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만약 광법사의 마법이 계속 확산을 한다면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같았다. 엘란은 자신의 몸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허리는 뼈와 내장이 상한 것은 아니니 시간이 가면 자연히 낫겠지만 충격을 받은 내부 장기와 아릿한 아픔이 올라오는 마나홀은 빠른 시일 안에 나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마나를 모으려고 필사적으로 시도했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음!” 피가 검붉게 말라붙어 있는 입술이 열리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수련해서 쌓은 마나는 흔적도 없는 가운데, 나탈리의 몸에서 뽑아냈던 마나는 불안하게 웅크리고 있던 마나홀을 제 집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웅크리고 있을 때는 전혀 미동도 없더니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요동쳐다. 쿵쿵! 이리 저리 움직이며 벽을 두드려 대는 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려 시도했지만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몸 안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거대한 마나 덩어리가 자신을 구속하는 마나홀을 벗어나려는 듯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었고, 밖에서는 흰색 섬광이 여전히 마수를 뻗어오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감겨진 눈 사이로 눈물짓던 에쉴리의 얼굴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푸른 줄들로 온통 엉망이 된 나탈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이 있는가” 교도들이 잘못한 것은 무엇이 있는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갈 한 줌의 땅이 전부였다.” 삶에 대한 집착, 세상에 대한 분노, 광기, 그리고 천지를 파괴해 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뒤범벅된 채 충혈 된 눈을 부릅뜨자 마나홀을 부셔 버리듯 요동치던 마나가 마나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온 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내부는 마나가 달리면서 뿜어내는 열기로 들끓는 다면, 외부는 헬 파이어의 영향으로 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실피드! 운디네! 샐라멘더!” 엘란은 바샤라의 돌에서 나온 마나를 공명시켜 정령소환에 들어갔다. 벼랑 끝에 몰린 상태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어보는 도박사의 심정이 이럴 것이다. 슈앙! 도박은 성공했다. 광법사에게 당하지 않은 온전한 정령들이 몸을 드러내 엘란과 시리우스를 감싸고 다가오는 섬광을 막아나갔다. 콰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둘의 몸이 멀리 날아가 진창에 처 박혔다. “......” 정적! 죽음 같은 정적이 초토화 된 밀림에 내려앉았다. 탁! 결전의 현장에 가장먼저 도착한 것은 엘프 아리아나였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름 5키로 정도의 폐허와 진창에 쳐 박혀 있는 엘란과 시리우스의 비참한 몰골이었다. 폐허의 가장자리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둘의 피부는 벌겋게 익어 있었고, 섶에는 토해낸 피가 말라붙어 검붉게 변해 있었다. 엘란의 허리에는 허리띠를 두른 것 같은 빨간색 줄이 선명하게 나있었고, 시리우스의 왼팔은 부러진 듯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드득! “으!” 시리우스의 팔을 맞추자,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신음을 토했다. “)#%&*.” 이라아나가 엘프들의 언어로 외치자 연녹색 광채가 시리우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살아난 것인가”“ 곧 죽을 것 같은 힘겨운 음성이 아리아나의 귀에 들려왔다. 오른손은 배 밑에 깔린 채로 왼 손은 머리 위에 걸친 채로 엎드려 있던 엘란이 몸을 바로 눕혔다. “깨어났군요. 어떻게 된 건가요”“ “광법사와 싸웠고, 보다시피 이 꼴이요.” 아리아나는 초토화된 주변을 둘러본 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8써클 마법사라도 이렇게나...” “나도 동감이오.” 엘란은 겨우 일어서서 땅위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원의 중심에 시선을 집중했다. 깨끗했다. 나무는커녕 풀포기 하나 바위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광법사의 마지막 마법은 지금도 살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자신들이 살아 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헬 파이어가 확산을 멈추지 않았다면, 자신이 정령을 부르지 못했다면 흔적조차 없는 저 원안에 자신의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아리아나가 엘란의 가슴에 손을 얹고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따뜻한 기운이 안으로 들어와 온통 헤집어 진 내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어느 정도는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자 폐허가 된 원안에 발을 집어넣고 걸었다. 푹푹!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메마른 흙이 날리며 발이 빠졌다. 한 십년은 비가 내리지 않은 평원처럼 보였다. 갑자기 엘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천천히 걷는 엘란이 답답했던지 아리아나가 실피드를 불러 자신과 오빠 엘란을 한꺼번에 이동시켰던 것이다. “저기.” 평평한 동심원의 중앙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무언가가 보였다. “광법사!” 안도와 원한, 허탈감이 복잡하게 얽히고 섞인 복합적인 목소리가 엘란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사지를 벌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광법사의 몸은 팬케이크처럼 넓게 펴져 있었다. 치켜 뜬 눈은 실핏줄이 터져서 온통 붉었고, 목 아래쪽은 거대한 힘이 양쪽에서 누르는 바람에 쭉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얼마나 얇게 펼쳐져 있는지 몸길이가 10미터는 넘어서 넓은 평지에 머리만 툭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목만 내놓고 땅 속에 묻혀있는 모습 같았다. “헉!” 다급한 비명과 함께 엘란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광법사의 눈동자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온 몸이 쥐포처럼 눌린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는 붉은 눈동자는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퍽! 실피드가 움직이자 아직도 바샤라의 돌을 움켜쥐고 있던 광법사의 손이 날아가 버렸다. 그와 함께 광법사의 눈에서 빛이 꺼져갔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퍽! 실피드가 광법사의 머리를 짓이겨 버렸다. 완벽한 확인이었다. 엘란은 광법사의 몸을 밟고 지나쳐 바닥에 뒹구는 바샤라의 돌을 주워들었다. 뜨거운 기운이 팔을 타고 전신을 휘돌았다. 엘란은 돌을 아리아나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 쪽에서 약속을 지킬 차례요.” 돌을 받아서 자세히 살피는 아리아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휴!”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 숨과 함께 엘란의 마음도 덜컥 내려앉았다. “뭐가 잘못 된 겁니까”“ 아리아나는 돌을 내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정상적인 바샤라의 돌은 붉은 바탕에 황금색 선이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어요. 이 돌은 광법사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모르겠지만 황금색 선이 사라지고 없어요. 그 결과 순수한 마력은 사라지고 탁한 마력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게다가 남아 있는 마력의 양도 보잘 것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희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돌입니다.” 설명이 계속될수록 엘란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그런 우리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리아나는 말없이 머리를 저었다. 광법사가 죽었으니 원수를 갚은 셈이지만,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어쨌든 바샤라의 돌을 건넸으니 그 쪽도 약속을 지키시오.” 아리아나는 말없이 계약서를 내밀며 한 구절을 짚었다. 온전한 바샤라의 돌이란 구절이 눈에 아프게 틀어박혔다. 하이론이 우겨서 작성한 협상안이 거꾸로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고풍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시리우스의 음성이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는 마라.” 실망감과 허탈감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는 둘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죠”“ 아리아나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직 신이 남아있다.” “무슨 소립니까”“ 이번에는 엘란이 정색하고 물었다. “모르겠나”“ “......” “네 꿈, 그리고 나탈리의 꿈, 나탈리의 몸속으로 들어간 신이라는 미지의 존재, 광법사의 상태, 신이라 자처하는 어떤 자를 징벌하겠다는 그의 발언, 그를 공격하던 아라크네, 습지의 중앙으로 이어지는 여정, 밀림을 감싸는 알 수 없는 기운, 뭘 의미하는 것 같으냐”“ “.....”“ “.....!” 아리아나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 때 엘란의 얼굴에는 알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바샤라의 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이 밀림 안에 있다는 뜻이군요”“ 시리우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미소였다. “계약을 깰 생각이 없다면, 신이라는 존재를 한 번 만나 봐야겠지.” “몸이 회복되면 출발하죠.” 시리우스의 말에 엘란이 화답했다. “휴!” 이번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리아나가 몸을 돌려 밀림으로 향하자 엘란이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아에게 용병대라 그랬나요” 당신 동행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네요.” 두 시간이 지난 뒤 평온하던 동심원이 왁자하니 시끄러워 졌다. 숲을 헤치고 나오는 하이론의 대머리와 아에게의 큰 키가 보였다. “왜 내 잘못이야”“ 쟝이 소리치자 하이론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니가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맨 것 아니냐”“ “내가 확실하지 않다고 했는데 영감이 맞는 것 같다고 박박 우겼잖아. 이제 와서 이러면 돼!” “널 믿은 내가 바보지. 하이디스 경매장 안다고 지랄 떨어서, 밤새 헤매게 만들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왜 옛날 얘기는 들춰내고 이래”“ “이 자식이...” 품속에서 지팡이를 꺼내 휘두르려던 하이론이 주변의 풍경을 보고 행동을 멈추었다. 거대한 폐허가 말문까지 막아 버렸다. 하이론은 아리아나에게 엘란이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초토화된 동심원을 보는 순간 마음이 얼어붙었다. “엘란!” 하이론은 크게 부르짖고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는 쟝이 덩달아서 뛰자 아에게와 대원들까지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무사했구나!” 엘란은 동심원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얼굴을 보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떻게 된 거냐”“ 아리아나는 엘란과 시리우스가 광법사를 처치했다고 짤막하게 말했을 뿐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아리아나도 대결이 끝난 후에 도착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헥헥!” “아이구!” 하이론이 자리를 잡고 앉아 엘란의 입을 쳐다보고 있을 때 아에게와 그린이 도착했고, 잠시 후 밤톨과 짝귀까지 도착했다. 천천히 걷는 것처럼 보이는 데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원스럽게 다가오는 아리아나도 나탈리를 업고 도착했다. 나탈리는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저 멀리서 걷기, 뛰기를 반복하는 쟝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가까스로 도착한 쟝이 혀를 빼물고 바닥에 드러눕자 엘란의 입이 떨어졌다. 그의 얘기가 헬파이어에 이르렀을 때 하이론이 입을 딱 벌리고 질문했다. “그럼 이게 헬파이어 때문에 생긴 현상이냐”“ 하이론의 손이 초토화된 주변 풍경을 가리켰다. “예.” 하이론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아무리 헬 파이어라도...” 인간이 헬 파이어를 시전한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것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300년 전에 스트빌라이에서 난동을 부린 드래곤이 시전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때도 이런 위력을 보이지는 못했다. 지름 5키로의 위력이라니. 말이 5키로지 중심까지 오는 데도 달려서 육분 가까이 걸렸다. 게다가 바싹바싹 부스러지는 흙을 봤을 때 엄청난 고열이 퍼져 나갔음이 분명했다. 하이론은 흙을 한 움큼 쥐어서 흩날리며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샤라의 돌 때문에 일어난 현상 같습니다.” 엘란이 말을 하며 돌을 내밀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드디어 모든 소동의 원인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디!” 아에게가 얼른 손을 뻗어 돌을 낚아챘다. 주먹 세 개를 포개놓은 길이의 붉은 색 돌은 보기 보다 무거워서 팔이 휘청거렸다. “나도 좀 보자!” 쟝도 얼른 돌에 손을 걸쳤다. “뭐 이래”“ 쟝의 입에서 실망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카르자나의 조각난 심장이라고 기대를 잔뜩 했더니만 돌은 무겁기만 할 뿐 별다른 특색이 없었다. 차라리 뜨거운 열을 뿜어내거나 빛이라도 번뜩였다면 이렇게 실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은 아에게, 쟝, 그린, 짝귀, 밤톨의 손을 거쳐 하이론의 손에 건네졌다. 하이론은 눈을 감고 바샤라의 돌을 두 손을 꽉 쥐었다. “마나 스캔!” “악!” 하이론이 비명을 터트리며 돌을 떨어뜨렸다. 감은 눈 사이로 붉게 작렬하는 거대한 마나덩어리가 눈을 태워버릴 듯 맹렬하게 뿜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괜찮습니까”“ “괜찮다.” 하이론은 다시 돌을 주웠다. “그래서, 광법사가 헬 파이어를 시전한 후의 일은 어떻게 된 거냐”“ 엘란은 자신의 몸속에서 요동치던, 돌에서 나온 마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겨우 정령을 불러 베리어를 치는 순간 헬파이어가 기운을 다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아리아나와의 만남과 시리우스와의 대화를 이야기했다. “바샤라의 돌을 가진 채 신이라 자처하는 미지의 존재라!” 하이론은 턱을 괴고 앉아 깊은 상념에 빠졌고, 잠을 자러 가는지 엘프들은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저마다 생각에 잠긴 채 고단한 몸을 바닥에 눕힐 때 해가 떨어지고 삽시간에 어둠이 밀려들었다. 엘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를 관조했다. 몸이 회복되면서 마나가 서서히 몰려들자 돌에서 나왔던 마나는 마나홀에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나가 이질적 마나 위에 쌓여 나갔다. 그는 순간적으로 둘을 합쳐보려다 포기했다. 만약 둘을 융합할 수 있다면 광법사가 8써클에 들어갔듯이 자신도 상급정령마스터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몸을 태울 듯 뜨겁게 움직이던 그 때를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둘의 속성이 너무 다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수련했던 마나는 약간 냉한 성질이 있는 반면에 돌에서 나온 마나는 너무나도 뜨거워서 용암이 돌아다니는 줄 착각할 정도였다. 시도했다 잘못돼서 반발이라도 일어난다면 전신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후!” 수련을 마치고 탁한 기운을 내뿜는데 하이론이 다가와서 허리를 걷었다. “쯧쯧쯧! 에쉴리가 보면 또 눈물짓겠구나.” 엘란의 허리는 누가 물었다가 뱉어놓은 것처럼 살이 너덜너덜했고, 검붉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하이론은 딱지를 떼어내고 포션을 바른 다음 실로 꿰매고 다시 포션을 발라서 붕대로 칭칭 감았다. “흉터는 생길 거다.” “왜 그러신 겁니까”“ 엘란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뭐가 말이냐”“ “메디치항에서 나탈리를 구하러 하이디스경매장을 찾아다닐 때 위치를 안다고 쟝을 앞장세웠다 하루종일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길 찾기에는 영 재주가 없어 보이던데 왜 그를 앞장세우신 겁니까”“ 쟝은 평지에 있는 경매장의 위치를 안다면서 일행을 산으로 안내했었다. “아라크네라는 것들 무섭지 않더냐”“ “그래서요”“ “코르도바습지에는 위험한 게 많은 데 너도 가고 아리아나도 가고 나자 용병대라는 얼간이 놈들 안전을 책임질 수 있어야지. 그래서, 운 좋은 쟝을 앞장세운 거다.” “쟝이 운이 좋다뇨”“ “몰랐냐” 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놈만큼 운 좋은 놈도 없는 것 같더라. 거진 다 죽어 자빠진 대제의 무덤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왔고, 그 무섭다는 밤의 그림자 본부에서도 상처하나 없이 빠져 나와서는, 지고교의 총단에서도 살아났고, 엘리오트가 전력을 기울여 추적하는 와중에도 상처하나 없었다. 이 위험한 습지에서도 마찬가지고.” “제가 보기엔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나쁜 것 같은데요” 운이 좋다면 가문을 물려받아 편하게 살고 있어야 하잖아요” 대제의 무덤에 들어올 일도, 밤의 그림자에 목숨을 위협받을 일도 없어야죠.” “그건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만약 쟝이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운이 더러운 거겠지만, 저 놈 평소 행실을 생각해 봐라. 마르셀부인과의 행동이 들통 났을 때도 그 여자만 목이 떨어졌지 저 놈은 무사했어. 이 때까지 모든 고생이 자신이 자초한 거란 말이야. 수도에서 얌전히 있었으면 무덤에 들어갈 일도 없었고, 데미하고 그렇고 그런 일로 얽히지만 않았어도 밤의 그림자에 쫓길 일도 없었겠지. 평소 싸가지 없는 행동을 봤을 때는 죽어도 벌써 죽어야 했단 말이다.” 엘란이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악운에 강한 거로군요.” 엘란이 한 마디로 정리하자 하이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더럽게도 운 좋은 놈이다. 그 운이 얼마나 오래 갈까.” 투명한 햇살은 공평해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빛을 나누어주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맞이하는 햇살은 특히 눈부셨다. 엘란은 새벽부터 서두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나탈리의 상태가 점차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코르도바습지대를 벗어나던가 아니면 신이라 자처하는 존재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대충 아침을 떼우고 출발하려는 데 쟝이 머뭇거렸다. “나는 가 봐야 짐만 될 테니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될까”“ 안 그래도 마음이 급했던 엘란은 이들과 같이 다니면 시간만 많이 걸리는 지라 대뜸 허락하고 나섰다. “그러세요, 하이론하고 아에게도 여기서 기다리세요.” “무슨 소리야 내가 당연히 따라가야지!” 아에게가 정색하고 나섰다. 그런 가당찮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표정이다. 하이론은 쟝의 얼굴을 곰곰이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인지 마법을 걸었다. “슬립!” “어!” 아에게가 잠에 빠져 뒤로 넘어가는 걸 그린이 받쳤다. “어서 가거라, 나탈리는 내가 돌보고 있으마.” 엘란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겠다고 나설까봐 실피드를 불러 얼른 날아올랐다. 하이론은 엘란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쳐다보다 쟝에게 시선을 돌렸다. 움찔! 쟝은 하이론이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자 평상시 함부로 굴던 것이 찔리는지 찔끔해져서 목을 움츠렸다. “왜 안 따라가겠다고 한 거냐”“ 평소 하이론이 쟝에게 하는 말에는 장난기가 섞이거나 아니면 질책의 기색이 섞이기 마련인데 진지하게 물어오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쟝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나 빤히 쳐다보았다. “영감! 무섭게 왜 그래”“ “헛소리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왜 따라나서지 않은 거냐”“ 정색하고 물어오자 쟝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따라가면 꼭 죽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정말이냐”“ 하이론이 심상찮은 기색으로 다시 확인을 한다. 쟝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기분이 아주 더러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단 말이야.” 하이론은 쟝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탈리가 누운 자리 옆에 자리에 잡고 앉았다. “왜 그러는데”“ 쟝은 하이론이 왜 이러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 쟝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래.” “참, 나 내가 무슨 운이 좋아. 운이 좋다면 지금쯤 가문을 물려받아서 희희낙낙하고 있겠지 이런 오지에 들어와서 고생할 리가 있겠어”“ “내가 보기엔 너처럼 운 좋은 놈도 없는 것 같다. 엘리오트에 귀족이 얼마나 되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만 봐도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 “그런가.” 쟝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운이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이론이 워낙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자 분위기가 착 가라앉으며 짝귀와 밤톨의 신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린마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엘란은 실피드를 이용해서 빠르게 날고 있었고, 밑에서는 시리우스가 나무들 사이를 빠르게 누비고 있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같이 싸우려면 손을 잡은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동시에 부릴 수 있는 건 노임 둘에 엔다이론 하나가 전부다.” “상급정령은 부릴 수 없습니까”“ “불가능하다. 자네는”“ “저도 하급정령 몇을 제외한다면 실피드 둘에 카사 하나가 답니다.” 광법사와의 싸움은 처절해서 아직도 내부가 아려왔다. 몸 상태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슈리엘은 타격을 심하게 받아서 며칠은 소환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며칠 쉬면서, 몸을 회복시킨 후에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지치면 저들도 지친다. 게다가 시간도 별로 없고, 나탈리에게나 우리 엘프들에게나.” “저들이 지친 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점차 약해지는 나탈리 때문에 급하다는 것은 이해가 갔으나 저들이 지친다는 소리는 알 수가 없었다. “아라크네들이 광법사를 공격한 것이나, 그가 신이라 자처하는 존재를 손봐주겠다고 한 걸로 봐서 미지의 존재도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엘란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탈리 얘기가 나오자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거니와, 지긋지긋한 밀림을 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금세 끊어졌다. 둘은 광법사가 이동하던 경로를 따라 말없이 일직선으로 이동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리아나가 둘을 따라오고 있었다. 탁! 탁! 엘란이 정령을 돌려보내고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것과 시리우스가 나무에서 뛰어 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곳은 마나가 이리 저리 부자연스럽게 꼬여 있어 심상치 않았다. “여기로군.” 이상하게 수목이 자라지 못한 작은 빈터 앞에 자그마한 동산이 하나 서 있었다. 무슨 암석으로 이루어 졌는지 칙칙한 회색빛이 감도는 동산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작은 동산에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동굴이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이상한 일들의 진원지라는 직감이 강하게 일었다. 저벅 저벅! 시리우스가 앞장을 서며 노임을 불렀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개가 모습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는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유유자적하며 동굴로 향했다. 그러나, 엘란은 뻣뻣하게 굳어진 엘프의 등에서 숨 막히는 긴장을 읽어낼 수 있었다. 뒤를 따라가던 그가 멈칫했다. 동굴의 입구에 피어있는 빨간 베고니아가 시선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꿈이 떠오른 엘란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꽃을 꺾어서는 품속에 넣었다. “실피드!” 중급정령 둘이 나타나 엘란을 감싸고돌았다. 동굴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욱 거대했다. 넓이가 10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게다가 길이도 엄청나게 길어서 조그만 산에 비한다면 과한 동굴이라 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어두워졌다. “라이트!” 빛의 광구가 앞을 비추었다. “으르르르!” 노임이 발을 멈추고 이를 드러냈다. 작은 돌조각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이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팟! 갑자기 그물 같은 것이 천장에서 쏟아졌다. 천장에 숨어 있던 아라크네가 거미줄을 뿜어낸 것이다. “실피드!” 촥! 정령이 옷자락을 펼쳐 거미줄을 막았다. “왕!” 노임이 몸을 움츠렸다 펴며 땅을 박차자 빠른 속도로 천장으로 쏘아졌다. “꾸어어!” 배를 물린 아라크네가 비명을 질렀다. 노임이 계속 물고 늘어지자 배에서 노랗고 파란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툭! 거대한 거미가 바닥에 떨어지자 나머지 노임이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 버렸다. 버둥거리던 거미의 다리가 잠잠해졌다. 탁탁탁탁! 한 마리가 죽자 수십 마리의 거미들이 털이 슝슝 난 여덟 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차례로 들이닥쳤다. 엘란은 갑자기 광법사가 생각났다. 그가 수천마리의 거미들을 몰살시키는 바람에 일이 수월하게 된 것이다. “바람의 칼날!” 스엉스엉! 실피드 둘이 희긋희긋한 칼날이 되어 컴컴한 동굴 속으로 쏘아져 갔다. 퍽! 서걱! 푹! “꾸어억!” “크악!” 귀청을 갉아대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음이 울리고 연이어 괴성이 터져 나왔다. 엘란은 갈 수 있는 데까지 실피드를 쏘아 보냈다. 퍽! 퍽! 무언가를 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음!” 엘란이 침음성을 흘렸다. 거칠 것 없이 나아가던 정령들이 무언가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타격을 받기 전에 재빨리 정령들을 돌려보냈다. 실피드가 타격을 입고 강제소환 당한다면 부릴 정령들이 몇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릴 수 있는 정령들은 실피드를 제외한다면 기껏해야 카사 하나와 운디네 샐라멘더 두서넛이 다였다. 나머지는 모두 광법사와의 대결에서 큰 타격을 입어서 소환이 안 되었고, 엔다이론도 마지막에 헬 파이어에게서 둘을 보호하느라고 심한 타격을 받았었다. “갑시다.” 이번에는 엘란이 앞장을 섰다. 라이트마법을 해제한 그의 앞에는 불의 독수리가 나래를 펴고 있었다. 바닥에는 잘려진 아라크네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저벅 저벅!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미에게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체액들이 발에 들러붙어 징그러운 감각과 함께 더러운 기분을 선사했다. “이거였군.” 앞으로 나가자 통로전체를 덮고 있는 하얀 거미줄이 둘을 반겼다. 아마 실피드들은 여기에 걸려서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카사!” 불의 중급정령이 날개를 펴고 거미줄을 향해 부리를 내밀었다. 화르륵! 불에 붙은 거미줄은 쉽게 타올랐다. 찍!찍! 불이 붙은 거미줄이 똘똘 말린 채 오그라들며 타오르자 뒤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카사를 향해 날아왔다. 치이익! 액체와 부딪친 날개에 구멍이 생기며 독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를 한 모금 삼키자 머리가 띵해지는 것이 액체에 독이 든 것이 분명했다. 찍!찍! 연기를 마시고 휘청하는 사이 계속해서 날아든 액체가 카사를 두들겼다. 액체를 뒤집어 쓴 카사가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치더니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실피드!” 엘란의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 내렸다. 그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실피드를 불러 동굴 안의 공기를 뒤집어 버렸다. 탓! 뒤에 있던 시리우스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졌다. 그와 함께 노임도 땅을 박찼다. 쾅쾅! 동굴 안 쪽에서 연속적인 폭음이 울렸다. 포션을 한 병 마신 엘란도 실피드와 함께 안으로 내달렸다. 뒤집어져서 배를 내놓은 아라크네 몇 마리가 보이고 냄새 고약한 액체를 뿜어대는 거대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동굴 안의 어둠은 괴상한 데가 있어서 눈이 밝은 엘란에게도 명확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퍽! 거대한 존재에게서 촉수 같은 것이 튀어나와 노임을 옭아매었다. “컹!” 노임이 산산이 흩어질 때 다른 한 마리가 촉수를 물고 늘어졌다. “크앙!” 거대한 비명이 동굴을 울렸다. 잘려진 촉수가 푸른 체액을 뿌리며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라이트!” 빛의 광구가 동굴 안쪽으로 둥둥 떠서 날아갔다. “으음!” 동굴의 주인은 상상하던 것 보다 훨씬 거대했고, 흉악하게 생겼다. 아라크네를 미루어 대충 거미 모양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처럼 거대하고 괴상망측하게 생겼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괴물은 폭 십미터 높이 이십미터가 넘는 거대한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이십여 개가 넘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끝 부분이 뭉툭한 것이 둔탁하게 보였다. 턱 밑에서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촉수는 백여 개도 넘어 보였는데, 그 촉수 하나 하나에는 작은 눈과 함께 입이 있어서 자잘한 이빨들이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커다란 대가리에도 한 쌍의 눈이 달렸는데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눈 속에는 다시 여러 개의 눈들이 겹쳐져 겹눈을 이루었다. 눈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입에도 날카로운 이빨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세겹이 넘어서 상어의 이빨을 방불케 했다. 머리에서 바로 이어진 노란 색의 배에는 시커먼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여러 개의 다리는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가시같이 삐죽삐죽한 잔털들이 꽂꽂하게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미의 형세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찌 보면 전혀 달라 보이기도 했다. “네가 자칭 신이냐”“ 엘란은 시리우스와 함께 공격할 생각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너무 흉악하게 생긴지라 나탈리를 집어삼키고 신이라 자처하던 그 존재로 생각되지 않았다. 신은 아름답게 생겼으리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어서 신이라 자처했던 존재도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한 때문에 그 존재가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에 이 괴물이 그 존재가 아니라면 괜히 헛고생만 하는 셈이었다. 엘란은 질문을 하고 나서 피식 웃었다. 그 존재가 아니라면 아무리 거대하다고는 하나 한낱 곤충이 말을 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혀 쓸모없는 질문을 한 셈이었다. 앞에 있는 괴물은 꿈속을 장악하려한 그 놈이 맞았다. “나는 신이다!” 계속 반복되는 똑같은 어구. 이제는 질릴 지경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거미 같은데.” “어리석은 자들은 겉모습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우를 범하지.” 입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괴물의 목소리는 똑똑하게 들려왔다. “아직도 신이라 자처할 텐가”“ “나는 신이다.” “휴! 대사 좀 바꿔볼 수 없겠나” 이제는 지겨워서 신물이 올라올라 그런다.” “무례한 놈!” 괴물이 고함을 지르자 동굴이 웅웅 울렸다. “여기 오지 전에도 신이라는 사람을 만났지. 신이라면서 그 놈한테 꽤 당한 모양이던데...” 엘란은 말끝을 올리는 동시에 말을 흐리며 비꼬기 시작했다. “크아!” 엘란이 광법사를 거명하자 분노에 찬 동굴의 주인이 괴성을 질렀다. 광법사를 이 습지로 불러들인 존재는 이 동굴의 주인이었다. 수 만년을 이어오는 동안 똑똑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 것은 요 근래 몇 백년의 전부였다. 그 전에는 한 마리의 곤충이자 짐승에 불과했다. 어떻게 자아를 가지게 되고 또 신이라는 의식이 생기게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다만 신이라고 각성하게 된 데는 아구족의 제사장이라는 사람의 영향이 컸었다. 신이라는 자각이 들자 자신을 받드는 아구족을 보호하고 그들의 적들은 자신의 자식들인 아라크네를 시켜 모조리 죽여 버렸다. 아구족이 그를 위하여 제를 지내고 공물을 바치자 자신이 신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고, 나중에는 유일신을 자처하게 이르렀다. 그러던 중 자신의 뱃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 부름에 이끌린 존재가 이 습지로 들어왔을 때 신은 그를 자신의 수하로 삼으려 꿈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부름에 이끌린 존재는 배은망덕하게도 강하게 저항함으로서 자신의 정신에 큰 타격을 입혔고, 나중에는 자식들마저 대다수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칭 신은 겁이 났다. 자아가 없던 수천 년 전부터 밀림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그를 죽이러 강대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마저 떨게 만드는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어찌나 강렬한 열이 발산되던지 한 동안은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꿈속에서 저항하던 또 다른 존재가 자신의 앞에서 오만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크아!” 괴물은 다시 한 번 분노의 괴성을 터트렸다. “바람의 칼날!” 희긋희긋한 칼날이 허공에 죽죽 그려지며 날아가자 괴물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잽싸게 물러나며 입을 벌렸다. 촤아악! 원래 거미는 배의 아래쪽 끝 부분에 실을 뽑아내는 방적돌기를 갖고 있다. 방적돌기의 방적샘에서 만들어진 실은 항문 밑에 달린 특유의 기관에서 실을 뽑아내는데 이 괴물은 특이하게도 입에서 거미줄을 뿜어내고 있었다. 퍽! 거미줄을 가르며 날아간 칼날은 연이어 발사되는 거미줄에 묶여 버렸다. 찌직! 징그러운 촉수들이 입을 벌리자 푸른색의 걸쭉한 액체가 묶여 있는 실피드들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치이익! 거미줄까지 태운 독한 액체가 실피드를 덮어갔다. “끼악!” 실프드들이 지르는 비명이 엘란의 가슴속을 울리며 내부를 휘저어버렸다. 탁탓! 노임 둘이 독액이 닿아 녹은 거미줄 틈으로 빠져나가 괴물거미에게 달려들었다. “컹컹컹!” 연이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촉수에 말려들어 공중으로 올려진 개들이 고개를 돌려 촉수를 물어뜯었다. “크악!” 조각난 촉수에서 노란 체액이 뿜어져 나오자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창! 거대거미가 뭉툭한 다리를 들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길쭉한 발톱이 튀어 나왔다. 곤충에 발톱이라니, 상상치도 못했던 일격이 노임에게 떨어졌다. 쩍! 괴물의 몸놀림은 상상외로 날렵해서 여러 개의 다리를 동시에 움직이자 피하지 못한 노임이 두 동강이 나서 사라져 버렸다. 시리우스가 가슴을 부여잡고 물러서자 엘란이 부른 샐라멘더와 운디네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칙! 샐라멘더가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자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기 시작했다. “꾸억!” 거미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벽을 들이받자 동굴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운디네!” 거미가 요동치며 몸을 들자 매섭게 날아간 운디네가 노란 색 배에 붙어 있는 시커먼 딱지들을 그대로 직격했다. 퍽퍽! 검은 딱지가 터져 나가며 푸르죽죽한 체액들이 쏟아졌다. “내 아기!” 거미의 입에서 절규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배에 붙어 있던 검은 딱지는 부화하기 전의 아라크네 같았다. 전 대륙에서 오직 습지에만 자생하는 아라크네는 모두 이 괴물이 낳은 자식들인 모양이다. 휭! 운디네는 검은 딱지를 피해 부드러워 보이는 노란 색의 배에 부딪쳐갔다. 창날 같은 날카로움을 지닌 채. 퍽! 배에 구멍이 생기며 푸른 체액이 냇물처럼 흘러내렸다. 샐라멘더를 벽에 짓이겨서 강제소환 시켜버린 거미의 다리가 치고 빠지는 운디네의 머리에 떨어져 내렸다. 팍!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양단 되어 버린 운디네가 정령계로 사라지자 피를 토하던 엘란은 곤란해져 버렸다. 이제는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시리우스도 엔다이론 하나를 제외하고는 소환이 불가능했다. 찍찍! 촉수들이 길게 뻗쳐 나와 특유의 독액을 뿜어댔다. 슝! 엔다이론이 흥분해서 슉슉 거리는 거미의 앞을 막는 사이 엘란과 시리우스는 벽 쪽으로 붙었다. 바닥에 떨어져 튀는 독액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쩌어억! 몸이 벽에 착 달라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젠장!” 다급한 마음에 절로 욕설이 나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벽은 더욱 더 몸을 옥죄었다. 동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 동산이라 생각했던 것이 수 천년 동안 어쩌면 수 만년 동안 괴물이 줄을 뽑아서 만들어 놓은 일종의 거미집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먼지가 끼이고 흙이 묻어서 산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시리우스의 부름을 받은 엔다이론이 다급하게 날아와 둘을 붙들자 물기가 묻은 벽이 더욱 끈적끈적해 졌다. 촤악! 허공을 가르며 날아 온 허연 그물이 정령과 둘을 한꺼번에 묶어 버렸다. 거미줄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오자 둘은 정신을 잃었다. 시리우스가 정신을 잃자 엔다이론은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더러운 체액을 흘리며 거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챙챙챙챙! 괴물은 분노와 살기 고통이 뒤범벅되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 십 개의 촉수를 내밀어 그곳에 달린 입을 반복해서 벌렸다 다물자 이빨들이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렸다. 촉수들이 점점 다가와 엘란의 얼굴을 물어뜯으려 하였다. 팍! 천장에서 투명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리자 수십 개의 촉수가 일시에 잘려져 바닥을 뒹굴었다. “크아악!” 짐승 같은 비명이 동굴 안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의 눈에 시리우스에게 다가가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아나였다. 퍽! 거미의 다리가 실피드를 짓이기는 동시에 허연 거미줄이 아리아나를 덮쳐갔다. 거미줄을 덮어 쓴 아리아나가 벽에 붙은 채 정신을 잃어버렸다. 엘프를 무력화시킨 거미는 너무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생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처음이었다. 광법사의 꿈속에 들어갔다 타격을 받았을 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처음 겪는 육신의 고통에 한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거미는 그 자리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잠에서 깨어나면 말짱해질 것이다. 해가 저물도록 엘란이 돌아오지 않자 하이론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점점 말라 가는 나탈리도 그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아에게도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했다. 허기가 너무 져서 배가 등에 붙을 것 같은 쟝도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이론이 너무 무거운 표정을 짓자 아에게와 그린, 짝귀, 밤톨도 거기에 전염되어 심각해졌고, 또 나탈리가 아무 것도 못 먹고 있는데 자신들만 먹기도 미안한데다 무더운 날씨에 입맛도 떨어져서 아무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자 뻔뻔한 쟝도 식사를 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고 별들이 빛을 뿌리자 쟝도 엘란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무슨 수를 내야할 것 같았다. “으악!” 하이론에게 말을 붙이려 슬슬 다가가는데 그가 벌떡 일어서자 깜짝 놀란 쟝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 되겠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따라가 봐야겠다.” 급히 일어선 하이론은 나탈리를 가리키며 아에게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거든 애를 데리고 이 습지를 떠나라! 최대한 빨리!” 일방적으로 말을 한 하이론은 짐을 챙겨들고 횡 하니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한 동안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아에게도 무기들을 집어들고 숲 속으로 뛰며 외쳤다. “하이론 말 잘 들었지! 그대로 해!” 하이론이 뛰자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식으로 그린도 짐을 챙겨들고 뒤를 따랐다. 짝귀는 열정적인 눈으로 밤톨을 쳐다보았다. “우리도 이름 받을 일을 해야지”“ 그의 눈에서 투명한 물기가 반짝거렸다. “그래!” 울먹이며 대답하는 밤톨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모두 떠나 버리고 폐허에는 쟝과 나탈리 만이 남았다. 혼자 남은 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따라가자니 겁이 나는 데다가 나탈리를 업고 가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후덥지근한 밀림 속을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은 쟝의 체력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한 동안 서성이던 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탈리를 보호하며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젠장!” 나탈리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던 쟝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루종일 먹은 거라고는 새벽에 먹은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전인지라 너무 배가 고파 뭐라고 먹으려고 보니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식량은 아에게와 그린이 나누어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쁘게 떠나다 보니 식량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못했고, 급박하게 전개되는 사태의 진전에 당황한 쟝도 식량생각을 하지 못했다. 목숨이 위태로울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먹을 것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쟝은 자기 짐을 뒤져보았다. 부싯돌 몇 개와 냄비, 잡다한 그릇들과 잡동사니가 다였다. “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쟝은 나탈리를 들쳐 업고 쭐래쭐래 숲 속으로 향했다. 일행을 따라갈 생각은 아니었고, 먹을 것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엘란과 하이론이라는 든든한 벡이 있을 때는 힘은 들어도 마음은 편했는데 혼자서 빡빡하게 수풀이 우거진 밀림 속으로 들어가자니 목덜미가 선득선득 해지는 것이 겁이 나고 오금이 저려왔다. “흡!” 초토화 된 동심원을 지나 수풀이 우거진 곳의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한 쟝은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딛었다. “으악!” 한 걸음 크게 내딛은 순간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나무 위에서 커다란 뱀이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알록달록한 뱀을 보는 순간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뱀에게는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간이 콩알만하게 오그라든 쟝은 얼른 뒤 돌아서서 뛰었다. “그래, 일행들이 고생하는 데 나만 편안하게 밥 먹고 있으면 안 되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쟝이었다. 아에게와 대원들은 하이론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닐 때나 엘란이 길을 낼 때는 몰랐는데, 울창하게 우거진 밀림 속에서 길을 뚫으며 가자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린 탓이었다. 게다가 일직선으로 가야 하는 통에 수풀이 덜 우거진 수월한 곳으로 가지도 못했다. “니들 왜 따라와!” 가뜩이나 힘들어서 짜증이 치솟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놈들이 쫓아오자 열이 받아 소리를 빽 질렀다. “저희도 도울 겁니다.” 아에게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탈리는 어떻게 한 거냐”“ 하이론이 질렸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묻자 그제야 나탈리에게 생각이 미친 아에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 한심한 놈들아! 나탈리는 어딨냐”“ 하이론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에...쟝이 데리고 있나 본데요...” 짝귀가 잔뜩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하이론이 고개를 빼서 살펴보니 쟝과 나탈리가 보이지 않았다. 쟝에게 나탈리를 맡겨 두다니... 하이론은 한숨을 내쉬며 길을 뚫었다. 다시 돌아가기도 그렇고, 가라고 해도 이 바보들은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이들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번갈아 가면서 숲을 뚫자 한 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정이 지나고 한 참이 지나서야 커다란 동굴이 뚫린 작은 동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평지에 우뚝 솟아있는 작은 동산은 그 크기에 비해 훨씬 거대해 보이고 음산해 보였다. 휘이이! 한 줄기 후덥지근한 바람이 지나가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여기 같지”“ 하이론이 확인 차원에서 묻자 아에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커먼 동굴은 이들의 마음을 불안으로 물들였다. “꿀떡!”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가자!” 하이론이 앞장서자 아에게와 그린은 검을 뽑아들었고, 짝귀와 밤톨은 석궁을 들어 쿼렐을 장전했다. “라이트!” 하이론은 빛의 구를 앞세우고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웁!” 안에는 시체 썩는 냄새도 아니고 배설물 썩는 냄새도 아닌 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이론은 얼른 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도는 것이 독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포이즌 큐어!” 이렇게 넓은 지역의 독을 정화시켜 본 적은 없었지만 마음이 급한 하이론은 확인도 하지 않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라크네의 잔해들과 바닥에 질펀하게 깔린 노랗고 푸른 액체들, 사방 벽에 붙어 있는 거미줄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불이라도 붙었는지 그을린 자국투성이었다. 하이론의 뒤에는 긴장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아에게와 그린이 바짝 붙어 있었고, 짝귀와 밤톨은 엉덩이를 쭉 뺀 채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엉망이었다. 바닥을 적시고 있는 점액질은 자꾸 보고 있자니 익숙해 졌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는 견디기 힘들었다. 나중에는 코가 마비되어 쿡쿡 쑤시는 감각만 느껴지지 냄새는 맡을 수도 없었다. “엘란.” 하이론은 조용조용 엘란을 불렀다. “......” 동굴 속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엘란!” 이번에는 조금 큰 소리로 불러보았으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일행들의 발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앞만 보고 걷던 이들은 엘란과 엘프들이 친친 감겨 있는 곳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지라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 하이론의 눈에 거대한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절반쯤 잘린 촉수가 흔들거리는 것이 엘란이 보던 것 보다 훨씬 더 징그럽고 흉포하게 보였다. “이이!” 가만히 있던 아에게가 고함을 지르고 달려들어 검을 머리위로 들어올리더니 괴물의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 버렸다. “푹!” 원래 눈을 겨냥했으나 괴물의 머리가 워낙 큰 지라 팔이 닿지 않아 촉수들이 흔들거리는 한 복판에 검을 쑤셔 박았다. 찍! 노란색 체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괴물이 괴성을 질렀다. “꾸아악!” “엘란의 원수!” 엘란은 보이지 않고 상처 입은 괴물만 눈에 띄자 그가 당했다고 생각한 아에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으아아~” 그린의 검도 아에게의 검 옆에 틀어 박혔다. “꾸어!”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자 검을 잡고 있던 아에게와 그린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파이어 버스터!” “펑!” 괴물의 턱밑에서 불의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짝귀와 밤톨은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석궁을 들어올려 괴물을 향해 발사했다. 새액! 퀘렐이 괴물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거대 거미가 머리를 들자 퀘렐은 깊숙이 박혀 있는 검 밑에 박혀들었다. 찍! 분노한 거미가 독액을 방출하려다 실패해버렸다. 촉수가 모두 잘려나간 것을 잊어 버렸던 것이다. 독액은 쏘아지지 못하고 촉수를 타고 밑으로 질질 흘러내렸다. 직접적인 목적은 당성하지 못했지만 효과는 좋았다. 독기운이 동굴 안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포이즌 큐어!” 하이론은 필사적으로 정화 마법을 걸었다. 그러나, 독기운이 너무 강해서 완전히 정화시키는 데는 실패해 버렸다. 털썩! 털썩! 가장 앞에 서 있던 하이론을 필두고 모두들 쓰러져 버렸다. 중독을 면할 수는 없었으나, 하이론의 마법 덕에 모두들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르르!” 광법사의 꿈에 들어갔다 받은 치명적인 타격과 엘란, 시리우스, 아리아나의 정령에 의한 상처,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의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모든 타격들이 괴물의 심신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끄르르, 끄르르.” 고통과 분노로 미칠 것 같았던 자칭 신은 상처를 치료한 후 오랜 시간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최대한의 고통을 안기며 죽이기로 결심했다. 쩍! 거미가 입을 벌렸다. 상처를 치료하기 전에 조금의 고통이라도 맛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벌린 입 속에서 검은 색의 아주 가느다란 줄들이 천천히 쏟아져 나왔다. 바닥을 기던 줄들은 엘란과 엘프들은 물론 하이론과 아에게, 그린, 짝귀, 밤톨까지 칭칭 감아 나갔다. “음!” 짝귀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쟝은 컴컴한 벌판을 서성거리며 손톱을 뜯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일행들은 돌아오지 않고 나탈리는 점점 더 야위어 가고, 그 나름대로는 애가 닳아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배는 고프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턱, 콰다당! 서성거리던 쟝이 어디에 걸렸는지 사지를 쭉 펼친 채 넘어져 버렸다. “썅!” 무릎이 까졌는지 아려왔다. 열이 받은 쟝은 자기를 넘어뜨린 돌을 발로 짓이겨 버렸다. “엥”“ 이상했다. 이 폐허는 광법사의 헬파이어로 초토화되어서 이렇게 큰돌은 눈에 띄지 않았었다. “뭐야! 바샤라의 돌이잖아.” 가만히 들어 달빛에 비춰보니 바샤라의 돌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만, 이거 카르자나의 조각난 심장이라 그랬지.” 심장이라면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머리가 대견해졌다. 게다가 신과도 맞서 싸운 거물 드래곤의 심장이라면 몸에 얼마나 좋겠는가” 당연히 정력에도 좋을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내가 굶어 죽을 팔자는 아니지.” 딱! 한 입 베어 물던 쟝의 입에서 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구!” 턱을 움켜쥐며 주저 않는 쟝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잔뜩 찌푸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코는 고통으로 잡힌 잔주름이 가득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가는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쟝은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이를 살짝 만져보았다.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악!” 혀로 흐르는 피를 핥다 비명을 질렀다. 이가 너무 아파 몰랐는데, 돌을 씹다 너무 놀라서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피도 잇몸이 아니라 혀에서 나온 것이었다. 쟝은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라는 생각만 했지 현재는 딱딱하게 굳은돌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내가 너를 못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쟝은 엉뚱한 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잠시 씩씩거리던 그는 나탈리의 물수건을 갈아주고 숲 속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은 밀림이 가까워지자 점점 느려져서 나중에는 굼벵이가 기는 속도 보다 더 느린 것 같았다. “꿀떡!” 어찌나 긴장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귀에까지 울렸다. “에이!” 눈 딱 감고 안으로 들어간 쟝은 닥치는 대로 풀과 나뭇가지를 줍고 가지를 꺾었다. 한 동안 씨름한 끝에 한 무더기의 땔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땔감을 폐허의 안 쪽으로 옮겨 놓고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베어냈다. 요리용 칼을 사용하자니 힘든 점도 많았지만 기필코 바샤라의 돌을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해가 서서히 떠올라 동녘하늘을 벌겋게 물들일 때쯤 만족할 만큼의 양을 모을 수 있었다. “넌 이제 죽었어!” 밝은 햇살을 받는 쟝의 얼굴은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세 시간동안 땀을 흘린 결과 그 많은 땔감을 전부 옮길 수 있었다. 그는 나탈리의 얼굴과 손발을 닦아주고 물수건도 갈아주었다. 잠시 땀을 닦은 그는 땅을 파고, 그 주위에 준비한 돌 몇 개를 고은 다음 냄비에다 물을 붓고 바샤라의 돌을 담갔다. “하하하!”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통쾌하게 웃어젖힌 쟝은 구멍에다 풀을 밀어 넣고 불을 붙였다. “콜록, 콜록” 처음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아서, 매캐한 연기만 뿜어대더니 이내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올랐다. 쟝은 계속해서 풀과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입맛을 다시는 쟝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했다. “어쩌면 이걸 먹으면 엘란만큼 강해질 지도 몰라!”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 땔감을 죽어라고 때는 데도 물이 끓지 않았다. “이거 왜 이러지.” 손가락을 물 속에 담궈 봐도 미지근하기만 한 것이 아예 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함 해 보자.” 오기가 치민 쟝은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이제는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 문제였다. 그가 무언가에 열중해 본 것은 요 근래 들어서는 처음이었다. 사실 그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이런 일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일행 탓이 컸다. 쟝은 걱정과 불안을 잊기 위해 일부러 집착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땔감이 떨어져 가자 몇 번이나 더 왕복해야했다. 팔팔!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물은 끓기 시작했다. 강인한 의지가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쟝은 포크를 들어 돌을 쿡쿡 찔렀다. “젠장!” 물은 다 쫄아가는 데 돌은 여전히 딱딱했다. “이야! 이거 미치겠네.” 잠시 후 물은 다 증발해서 날아가 버리고, 이 망할 놈의 돌은 여전히 딱딱한 데다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했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쟝은 맛이 가서 돌과 대화까지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이대로 물러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고기는 삶아 먹는 것 보다 구워먹는 게 제격이야.” 그는 냄비를 치우고 구멍 양쪽에 대 놓은 돌의 간격을 좁힌 후 바샤라의 돌을 놓고 직접 불을 쬐게 했다. 신나게 풀과 나뭇가지를 넣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쟝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현실을 도피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다. 물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점점 말라가는 나탈리나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 자신이나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엘란의 뒤를 쫓던가 아니면 하이론의 말대로 이 지긋지긋한 밀림을 최대한 빨리 벗어 나야했다. 등을 돌리고 도망가자니 혼자서 비겁자가 되는 것 같은 데다 난데없이 떨어지는 뱀이나 주변을 앵앵거리며 도는 수많은 독충들, 무엇보다도 아라크네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쟝은 절대로 몸이 절단 난 채 그런 징그러운 거미들 입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나뭇가지를 넣으며 고민에 빠졌다. 일행들의 뒤를 쫓아 밀림으로 들어가자니,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위험신호가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의 상념은 손에 잡히는 땔감이 떨어지고 나서야 멈추었다. “.....!” 쟝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바샤라의 돌이 벌겋게 달아올라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빛깔이 얼마나 붉던지 피를 연상시켜서 아주 불길하게 보였다. 쿡! 포크로 찍어 보자 여전히 딱딱했다. “앗 뜨거!” 멍하니 포크를 대고 있었더니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손에 물집이 잡혔다. “젠장! 망할 놈의 돌 같으니.” 차라리 밀림 속에 들어갔을 때 도마뱀이나 잡아서 구워먹는 건데 하는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쟝은 불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기다린 후 바샤라의 돌 밑에 냄비를 대고 양옆에 고여 있는 돌을 빼버렸다. 텅! 돌이 냄비 속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어 뜨거!” 냄비는 금방 달아올랐다. “이 돌 정말 희한하네.”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 돌은 전혀 식지 않았고 빨간빛도 줄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자 냄비에 담긴 돌은 마치 등불 같았다. “좋았어!”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린 쟝이 벌떡 일어섰다. 베낭에 달린 끈을 끊고, 옷을 가늘게 찢어서 긴 줄을 만들어서는 냄비의 양손잡이에 꼭 묶었다. 나머지 짐들은 모두 내버려둔 채 나탈리만 등에 업고 자신과 한 묶음으로 꽉 묶은 후 냄비에 묶은 끈을 오른 손에 쥐고 밀림으로 향했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한 밤중을 지나 새벽으로 달려가는 밤하늘에 쟝의 호기에 찬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쿡쿡! 짝귀는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누가 꼬챙이로 쑤셔대는 것만 같았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바닥밖에는 없었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는 검은 바닥은 왠지 모를 공포를 심어주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꽉 눌려 대는 데 번쩍! 하는 빛이 눈 속으로 박혀들며 주변의 풍경이 일순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앞으로 길이 쭉 나더니 길 양쪽으로 집들이 솟아오르고 정면에는 분수가 생겼다. 아담한 분수 주위로 벽돌이 쭉 깔리더니 갑자기 우람한 성채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놀랄만한 변화에 겁이 덜컥 난 그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심스럽게 분수 쪽으로 향했다. 갈증이 너무 심해 목이라도 축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분수대로 다가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타고 난 조심성은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다. 한 동안 눈치를 살피다 안전한 것 같자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꿀떡! 꿀떡! 목젖이 크게 움직거리며 물을 식도로 인도했다. “컥!” 짝귀는 목을 움켜쥐었다. 물이 넘어가며 시원한 느낌은커녕 태울 것만 같은 뜨거운 감각이 목을 아리게 만들었다. 컥컥! 거리며 분수를 보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욱욱!” 검게 썩어들어 가는 물에는 죽은 쥐새끼들이 둥둥 떠다녔고, 벌렁 뒤집어진 바퀴벌레들도 징그러운 다리를 하늘로 뻗치고 있었다. 토하기라도 하면 시원하련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거품이 이는 침뿐이었다. “아!” 욱욱 거리다 고개를 드는 짝귀의 눈에 성벽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사람들의 시체가 들어왔다. “마스터!” 구더기가 하얗게 붙은 채 썩어들어 가는 시체는 자신이 몸담았던 소매치기 길드의 동료들이었다. 동료들을 버려두고 자신들만 살아났다는 죄책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짝귀의 팔을 누군가가 잡았다. “으악!” 툭 튀어 나와 볼에서 대롱거리는 눈알과 잘려 나간 코, 떨어져 나간 귀, 공작영애의 주머니를 터는 바람에 길드에 재앙을 몰고 왔던 빌리가 분명했다. 손을 떨쳐 내려고 팔을 돌리자 빌리의 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왔다. “으악!” 짝귀는 자기 팔뚝에 붙어있는 빌리의 팔을 보며 다시 비명을 질렀다. 들창코는 시커먼 복면을 쓰고, 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철그렁, 철그렁. 발을 옮길 때마다 발목에 매달린 쇠사슬이 듣기 거북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여기가 어디야” 왜 내가 여기에 있지” 아!” 생각을 하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 왔다. “음.” 갑자기 눈꺼풀 속이 밝아졌다. 복면이 벗겨진 것은 아니고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온 것 같았다. “아!” 누가 복면을 벗겨 버리자 눈부신 햇살이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한 참을 깜빡거린 후에야 주변의 풍경이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죽여라!” “우와!” 눈에 풍경이 보이는 순간 시끄러운 소음이 귀를 달구었다. 퍽! 누군가가 던진 토마토가 짝귀의 얼굴을 때렸다. 질척하게 터진 토마토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턱! 앞사람의 등에 부딪힌 짝귀의 발이 멈추어졌다. 목적지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끌려온 것이 어디인가 궁금해진 짝귀가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앞을 살폈다. “억!” 꽉 막힌 듯한 비명이 목을 비집고 올라왔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 앞에 있는 검은 구조물이 짙은 공포를 드리우고 있다. 검게 칠 한 나무로 만들어진 구조물의 윗부분에는 시퍼런 날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단두대! 메디치 주민들의 머리를 뎅강 뎅강 잘라내던 저주받을 물건. 짝귀의 다리가 풍 맞은 사람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죽여!” 사람들의 거친 함성과 저주의 악다구니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섬뜩하게 빛나는 대형 칼날뿐이었다. 공포에 질려 한 곳만 쳐다보자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단두대가 일렁거렸다. “싫어! 살려 줘!” 제일 앞에 있던 남자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퍽! 단두대에 대기하고 있던 간수의 몽둥이가 반항하는 죄수의 뒤통수에 떨어져 내리자 정신을 잃은 죄수가 축 늘어졌다. 간수가 죄수를 넘기자 단두대에 올라가 있던 집행인이 그의 머리를 오목한 홈에 끼우고 환하게 웃었다. 해맑은 웃음 뒤에 잔혹한 심성이 숨어 있다. 탁! 칼날과 연결된 고리를 풀자 죽음의 사신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싹둑! 잘려진 머리가 대굴대굴 굴러서 단상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 간단하게 잘려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리 내.” “내가 먼저 주웠어.” “무슨 소리야 내 손이 제일 먼저 닿았단 말이야.” 머리를 차지하려는 치열한 쟁탈전은 새로 추가된 머리로 더욱 가열되었다. 줄이 점점 짧아지자 미칠 것 같은 공포가 짝귀의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이건 현실이 아냐, 그래 꿈일 거야.” 짝귀는 두 눈을 꾹 감고 열까지 센 후 깨어나기를 빌며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으악!” 얼굴을 위로하고 눕혀진 짝귀의 눈에 떨어져 내리는 칼날이 보였다. 소년으로 보이는 하이론이 바닥을 닦고 있었다. 온갖 시약으로 얼룩진 바닥은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었다. 아무리 걸레질을 해도 깨끗해지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하이론.”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하이론에게는 죽음의 사자가 부르는 장송곡 같았다. “예.” 대답을 하며 달려가는 그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다정하게 부를 때마다 형제들은 고통스런 일을 당해야만 했다. 유리병을 흔들며 하이론을 보는 눈은 노란 황달기가 끼어 있어서 섬뜩한 기운은 풍겼다. “동생들을 불러와라!” “발자크님 동생들은 아파서...” “잔 말 말고 불러와라!” 하이론과 동생들은 발자크에게 시험동물과 같았다. 새로운 약을 만들 때마다 임상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고통은 동생들을 잘려진 꽃들처럼 시들게 만들었다. 지금도 어제 먹은 약 기운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발자크님, 제발!” 엎드려 사정하는 하이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퍽! 발자크의 발이 그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하이론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웅웅거리는 그의 귀로 발자크의 차가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데리고 오지 않겠다면 마음대로 해라. 내가 직접 가서 아예 죽여 버릴 테니.”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 귀를 울리자 하이론은 엉금엉금 기어서 동생들의 방으로 향했다. 이층침대에 누워있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한 머리칼, 푸르죽죽하게 변한 얼굴색, 썩어들어 가는 손가락. “욱욱!” 하이론은 기어이 눈물을 터트렸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하이론!” 발자크의 재촉하는 소리가 가슴을 마구 난도질했다. 동생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이론의 손길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형.” 일어나는 동생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동생들을 다독여 발자크 앞으로 데려가는 하이론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져 걸레짝 같이 변했다. 발자크의 앞에 선 동생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허공으로 멍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발자크의 억센 손이 첫째 동생의 팔을 움켜쥐었다. “꿀떡, 꿀떡!” 동생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발자크가 주는 유리병의 걸쭉한 액체를 마셨다. “휴.” 동생이 약을 마시고 아무런 반응도 없자 부작용이 없다고 판단한 하이론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언제나 마음을 졸여야 하는 그 잠시의 시간이 그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으악!” 멍하니 있던 동생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사지를 떠는 동생의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하이론이!” 그의 절규가 그치기도 전에 발자크가 둘째 동생의 팔을 움켜쥐었다. “안돼!” 하이론의 피 끓는 절규에는 증오와 고통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아에게는 거울 앞에서 옷을 매만지고 있었다. 처음 입어 보는 비단옷의 매끄러운 감촉은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튜닉을 입고 푸른색의 외투까지 걸치자 자신이 봐도 멋지게 보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똑똑하게 비치지 못하고 약간은 흐릿하게 보이는 거울이 옥의 티였다. 소녀 같은 감상에 빠져 한 바퀴 빙글 돈 아에게는 자신이 생각해도 쑥스러웠는지 헛기침을 하며 천막을 나섰다. 천막 앞에 길게 늘어선 병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자 다시 한 번 기쁨이 솟아올랐다. “히히힝!”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에 올라타고 병사들의 앞을 지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그를 반겼다. “아에게 만세!” “우와!” 우쭐해진 아에게는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오만하게 쳐들었다. 후두둑후두둑! “이런!” 좋은 일에 마가 낀다고 한껏 폼을 잡는 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술렁거리더니 등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봐! 어디 가”“ 평생을 바라마지 않던 그의 잔치가 갑자기 끝나는 것 같자 애가 닳은 아에게가 소리를 질렀다. 뚱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병사들의 눈에 경멸이 실렸다. “미친 놈!” “저거 좀 모자란 놈 아냐!” “비 오는 날에 왜 벌거벗고 날뛰지!” 놀라서 내려다본 그의 시야에 벌거벗은 몸이 잡혔다. 그 멋진 비단옷과 외투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봐! 정신병원에 한 번 가보지 그래”“ 병사들의 조롱을 들으며 아에게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린은 한적한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롬바르드의 길인 것 같기도 하고 메디치의 길인 것 같기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의 길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통통! 걸을 때마다 들리는 경쾌한 소리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트르륵. 갑자기 들려오는 괴상한 소음이 좋은 기분을 망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는 것이 불길한 예감을 심어주었다. 탁탁탁! 갑자기 그린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서 이 거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트득, 트드득. 그린의 발걸음에 따라 소음의 빈도도 짧아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그린은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어!”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큰 대로가 중간에 끊어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드득. 자신은 앞으로 갈 수 없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초조감이 그를 겁나게 만들었다. 무엇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을 하라는 머리의 명령은 원초적인 불안감에 쌓인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그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꽉 움켜진 주먹이 하얗게 변할 때쯤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검은 파도가 빠르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 가까이 오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린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왔다. “으악!” 엄지손가락 두 배만한 바퀴벌레가 그린을 목표로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의 바지사이로 노란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반쯤 풀린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릴 때쯤 그린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풀썩 주저앉은 그린은 암흑의 절벽으로 기어갔다. 차라리 뛰어내릴지언정 바퀴벌레와 조우하고 싶지는 않았다. “으악!”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그린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튀어 나왔다. 엘란은 눈을 뜨는 순간 다시 한번 고약한 꿈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번의 경험 때문인지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하게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변화하는 주변 풍경은 흥미롭기까지 했다. “다르넨 영지인가”“ 조용히 혼잣말을 뇌까리는 그의 눈에 성벽을 쌓는 농노들의 찌든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군.” 한쪽 다리를 잃었던 존은 멀쩡해진 두 다리를 가지고 여전히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대충 어떤 장면이 나올지 짐작한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서걱! 살을 잘라내는 소음이 들리는 순간 그는 눈을 떴다. 그의 예상대로 파보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서 그의 발치에 멈추었다. 엘란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리운 눈빛으로 파보의 얼굴을 살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의 얼굴을 단단히 기억하겠다는 듯 머리 모양까지 꼼꼼히 살피는 그의 눈에는 열기가 넘쳤다. 쿵! 그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던지 주변의 풍경이 일순간에 무너지며 죽어가는 이스마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번에도 이스마엘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또 다시 주변 풍경이 무너지고 이번에는 시커먼 암흑이 그를 감싸고돌았다. ****************** 쟝은 컴컴한 밀림을 빠르게 걸었다. 용기가 치솟아서 빨리 걷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은 겁이 나서 뛰다시피 하는 거였다. 컴컴한 숲을 혼자서-나탈리가 등에 매달려 있기는 했지만-걷자니 귀신이 나타나 목덜미를 낚아 챌 것만 같아서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쩌우, 쩌우!” 알지도 못하는 새가 괴상하게 우는 데다 벌레들의 날개 짓 소리가 웅웅거리자 간이 오그라 드는 것 같았다. 먼저 간 일행들이 고생해서 뚫어 놓은 길이 있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포기하고 뒤돌아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만큼 밀림은 무서웠다. 스르르! “으악!” 갑자기 뱀이 그의 발밑을 지나가자 겁에 질린 쟝은 오줌까지 지렸다. 탁탁탁! 그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져서 나중에는 날아가는 것 같았다. 툭! 손에 쥐고 있던 끈이 끊어지며 냄비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달리느라 돌을 잊고 있었는데 냄비 안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냄비가 너무 달아올라 끈이 타서 끊어진 것 같았다. 쟝은 다시 끈을 묶고 냄비 뚜껑을 열어 버렸다. 주변을 밝히기에는 미흡했지만 일단 빛이 생기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빛을 얻자 용기가 생긴 쟝은 냄비를 앞세워 걷기 시작했다. 미지의 존재와 싸우러 가면서 냄비를 앞세우는 쟝의 모습은 우스광스러움을 넘어 차라리 슬퍼 보였다. 그는 동이 터 올 때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동산에 뚫린 커다란 구멍은 어딘지 어색하고 불길하게 보였다. 쟝은 냄비를 들고 서성거렸다. 등덜미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예감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망할!” 끈이 다시 끊어졌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제는 묶을 끈도 남아있지 않았다. 돌은 점점 더 열을 내는지 냄비가 빨갛게 달아올라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쟝은 소매를 찢어 냄비를 묶었다. “가자!” 크게 외친 쟝은 동굴을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산 너머에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몰라.”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내는 예감 때문에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도 싫고, 여기까지 와서 꽁무니를 빼기도 싫어서 결심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괜히 산으로 오르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인지도. 산을 오르던 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게 산이 말랑말랑했다. “거 참 별일일세.” 발이 푹푹 꺼지는 데다 먼지까지 풀풀 날렸다. 쟝은 이 산이 사실은 괴물거미의 거미줄이 수천 년 동안 켜켜이 쌓여서 이루어 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색깔도 색깔이지만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들과 간간이 자라난 풀 때문에 감쪽같이 속고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사실 쟝의 체력으로 밤새도록 걸었으니 쓰러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배는 아예 등가죽에 붙을 지경이었다. “핵, 핵!” 태양이 떠올라 강렬한 햇살을 쏘아대자 땀이 비오 듯 흐르며 호흡하기도 가빠져서 저절로 혀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힘이 들어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허리를 펴는데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던 돌은 기어이 냄비바닥을 뚫어 버리고 아래로 떨어졌다. “억!” 쟝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돌이 산을 뚫고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든 쟝은 구르다시피 해서 후다닥 산을 내려가 동굴의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치이익! 바샤라의 돌은 거미의 집을 태우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신이라 주장하던 거대한 거미 괴물은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며 벅찬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의 상념은 올가미에 걸린 불쌍한 포로들의 정신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에 찬 비명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몸만 회복되면 감히 신에게 대항한 이들에게 어리석음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 것이다. 배 속 깊숙한 곳에서 화끈한 열기가 치솟아 오르며 갈라지고 잘린 신체에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잘려나간 촉수에 붉은 기운이 흐르자 절단면이 꿈틀거리며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갈라진 살들도 아물어가며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기긱 기기긱! 기운을 차린 거미의 다리가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홑눈이 모여 이루어진 겹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완전히 회복된 촉수에서 독액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괴물의 자식들인 아라크네들의 거미줄은 강력한 독을 품고 있었지만 어미의 거미줄은 독성이 약했다. 대신에 촉수에서 훨씬 강력한 독액을 직접 뿜어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쩡쩡쩡쩡! 촉수에 자라난 이빨을 부딪치자 듣기 거북한 소음이 동굴 안을 맴돌았다. 걸리기만 하면 뭐듣지 절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쫘악! 거미가 촉수를 길게 뻗어 침입자들의 미간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촉수에서 마치 침처럼 독액이 흘러내렸다. 치이이! 촉수로 침입자의 이마를 뭉개버리려는 순간, 불길한 소리가 둥굴주인의 이목을 끌었다. “무슨 소리지”“ 귀를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타는 냄새도 계속적으로 신경을 갉아대고 있었다. “위다.” 치켜드는 거미의 눈에 벌건 덩어리 하나가 잡혔다. “저게 뭐야”“ 작은 덩어리 하나. 자신의 몸집에 비한다면 발톱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주 하찮은 덩어리. 한때나마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는 것이 믿기 지 않을 정도로 하찮게 보이는 물건이었다. 자신이 불러들였던 인간-광법사-때문에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거미는 떨어지는 미지의 물건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촤악! 괴물은 새로 생긴 촉수도 시험해 볼 겸해서 떨어지는 덩어리를 향해 독액을 쏘아 올렸다. 치이익! 독액을 태워 버리며 바샤라의 돌이 떨어져 내렸다. 뼈까지 녹여내는 강력한 독도 고열을 뿜어대는 돌을 당해낼 순 없었다. 사태를 우습게봤던 거미는 돌이 지척까지 내려와서야 위험을 느꼈다. 오만은 종종 죽음을 부른다. 팟! 뒤로 다급히 물러나는 거미의 머리에 붉은 화염에 휩싸인 돌이 부딪쳐 왔다. 치이이!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타는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동굴을 통 채로 뒤집어지게 만드는 격한 비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칭 신은 단단한 각질을 뚫고 들어오며 살을 태우는 돌이 유발하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다였다. 살을 태우던 돌이 뇌까지 침범하자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된 괴물의 머리가 바닥에 떨구어 졌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전부터 알게 모르게 밀림을 지배하던 코르도바습지의 주인이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일어난 어이없는 일이었다. 굴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쟝은 갑자기 들려온 괴성에 놀라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다. 그는 위험이 닥치면 구멍에다 머리만 넣어 놓고 안전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는 머리 나쁜 새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었다. 자신 눈만 가리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두 눈을 꼭 가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치이이! 거미의 뇌를 태워버린 돌은 단단한 턱을 뚫고 바닥에 내려와서야 멈추어 섰다. 엘란은 자신의 몸을 뒤덮고 있던 바퀴벌레가 일시에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파보의 모습을 시작으로-단두대에 목이 잘리기도 하고, 성벽에 목이 매달리기도 하는 등-다양한 꿈 속 체험을 했던 엘란은 머리가 깨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내부를 헤집는 것 같은 괴상한 체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바퀴벌레가 살을 파먹는 그런 꿈과는 달리 육체적인 고통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의 정신 깊숙한 곳, 가장 어두운 욕망, 살기, 살육의 희열 같은 감추고 싶은 부정적인 면들을 헤집어대고 들여다보는 것 같은 꿈이 가장 견디기 힘든 꿈이었다. 꿈 때문인지 동굴 안을 메우고 있는 독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빨리 나가지 않는다면 거미는 둘째치고 머리가 아파서 죽을 거 같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려서 살펴보니 거미줄 이외에도 아주 가늘고 하얀 실이 전신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힘겹게 이리저리 버둥거리자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평생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벽에 붙은 채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도저히 마나를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누구 정신 차린 사람 없습니까”“ 자기 딴에는 크게 말한다고 소리쳤으나 미약하기 그지없어서 자신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했거나 정신을 차려도 자신처럼 말할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버둥거리는 엘란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마음이 급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쓰러져 있는 거미가 깨어나기 전에 결박을 풀어야 했다. “아!” 오른 손을 움직이려 버둥거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손이 젖꼭지 밑에 있으니 조금만 움직이면 품속의 단검을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녹슨 단검이라도 날이 있으니 줄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몇 센지 안 되는 거리를 움직이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삼십분 동안이나 씨름한 끝에 겨우 품속에 손을 넣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도 쟝은 동굴 밖에서 머리를 쳐 박고 있었다. 거미가 지른 비명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며칠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한데다 체력의 한계까지 몸을 움직인 덕분에 탈진해 있었던 쟝은 정신적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검을 쥐려던 손이 멈칫했다. 동굴 입구에서 뜯어왔던 베고니아가 잡혔던 것이다. 갑자기 전에 꾸었던 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그는 충동적으로 꽃을 끄집어냈다. 일시에 꽃을 꺼내느라 힘을 모두 소진해 버린 엘란은 기운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이런, 기껏 꽃을 꺼내서 어쩌자고.” 자책하는 마음과 함께 웃음이 솟았다. 엘란은 이왕 꺼낸 거 향기나 맡자는 심정에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베고니아 꽃내음이 향기로웠다. 그는 꽃향기를 더 깊이 느끼고 싶어서 코에 가져다 댔다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몇 센지 움직이는 것도 30분이나 용을 써야 했는데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베고니아가 독을 해독시키는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마비가 풀리고 사지가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엘란은 단검을 끄집어 내 거미줄을 잘랐다. “하이론!” 어쩐 일인지 쟝을 제외한 일행들 전원이 동굴 안에 잡혀 있었다. 엘란은 하이론과 짝귀의 코앞에 베고니아를 꽂아 두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베고니아 많이 필요했다. “쟝! 나탈리!” 놀랄 일의 연속이었다. 분명히 기다리라고 했건만 모두들 동굴까지 와 있었다. “나탈리!” 쟝을 깨우려 흔들던 손이 나탈리의 얼굴을 쓸었다. 얼굴은 흉칙하던 선들이 모두 사라지고 깨끗했다. 안색이 창백하기는 했지만. “쟝!" 쟝은 탈진해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깨우기를 포기한 엘란은 베고니아를 한 가득 꺾어서 품안에 안고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안이 더 급했던 것이다. “으음.” 하이론이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하이론, 정신이 들어요”“ 엘란은 거미가 깰까봐 나직이 속삭였다. 하이론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그렸다. “거미는”“ “자나 봅니다.” 엘란은 베고니아를 하이론의 손에 쥐어주고 빠르게 말했다. “베고니아가 거미의 독기를 해독시키는 모양입니다. 깊게 들이마시고 밖에 나가서 쟝이랑 나탈리 좀 돌봐주세요.” “쟝” 그놈이 왜 여기에 있냐”“ “그거야 저도 모르죠.” 하이론이 동굴 밖으로 나가자 꽃을 일행들의 코에 대어준 후 엘프들에게도 꽃향기를 맡게 했다. 시리우스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건가”“ “모릅니다.” “거미는”“ “자나 봅니다.” “끝장을 보자!” 이를 가는 엘프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싸울 때마저도 우아하게 움직이던 엘프가 이를 갈고, 붉게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리자 놀란 엘란은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리려는 데 이미 거미 곁에 다가선 시리우스가 품에서 묘하게 생긴 단검을 꺼내 거미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징그러운 눈을 추호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찔러 가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소름이 끼치며 몸이 떨려왔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뇌리를 점령하며 심장에서 출발한 불안감이 피를 타고 전신을 돌았다. 엘프가 꺼낸 칼은 매미날개처럼 얇은 날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기만큼이나 날카로워서 갖다 대기만 하면 살이 갈라지며 체액이 튀었다. 거대한 거미의 머리는 일순간에 해체되고 있었다. 퍽! 쩍!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거미를 난도질하는 엘프의 행동에는 어떤 광기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의 행동은 광법사가 연상될 정도로 격렬했다. “오빠!” 그의 광기는 지금에서야 깨어난 아리아나에 의해 저지되었다. 엘란은 이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엘프가 난도질을 하는 동안 거미가 전혀 깨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죽어있는 것 같았다. 시리우스가 엘란의 눈에 비친 의문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미 죽어 있었다.” 엘란은 더한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기가 찼다. 죽은 줄 알면서 시체에다 칼질을 했단 말인가” 자연과 동물을 사랑한다는 엘프가” “왜 죽었죠” 어떻게”“ 거미의 돌연한 죽음도 의문 투성이었다. 모두 잡혀 있었던 일행을 떠올리면 그들이 한 일은 아니다. 그럼 누가” 설마 쟝이” 그때 나탈리를 안고 들어오던 하이론이 소리를 질렀다. “해냈구나! 괴물을 처치했어!” “저희가 한 게 아닙니다. 이미 죽어 있었어요.” “그럼 누가” 설마 저 빈대가”“ 하이론의 경악에 찬 시선이 반쪽이 된 얼굴로 힘없이 걸어오는 쟝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배가 너무 고파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았던 쟝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이구, 배고파 죽겠네. 뭐 먹을 것 좀 없어요”“ “지금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다. 이 괴물 니가 죽였냐”“ “으악!” 이제서야 머리가 박살난 거미를 본 쟝이 비명을 질렀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쟝이 한 짓 같지는 않았다. “설마, 늙어서 죽은 건 아니겠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나가죠.” 엘란이 말했다. 일단 베고니아로 해독은 했지만 동굴 안은 독기로 가득 차 있어서 또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에게와 그린, 짝귀, 밤톨 때문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 동안 부산을 떤 덕분에 모두들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이론은 신선한 공기가 반가운지 숨을 깊게 들이켰고 엘란은 나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식량부터 챙긴 쟝은 마치 걸신이라도 걸린 것처럼 육포를 뜯어 먹고 있었다. “쟝, 분명히 습지를 떠나라고 했는데 왜 따라 온 거냐”“ “얌얌, 쩝쩝, 사람이 의리가 있지 어떻게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갈 수 있겠어.” 육포를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했다. 이 무시무시한 밀림을 혼자만의 힘으로 헤쳐 온 것이다. 나탈리까지 업고서. 하이론은 뽐내듯 턱을 들어올리는 그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꽤나 희한했다. “식량이 없어서 따라 온건 아니고”“ 묘하게 비꼬는 말투에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사람 뭘로 보고이래” 소식이 없길래 잘못 된 줄 알고 구하러 왔더니만......” 짐짓 억울하다는 듯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그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엉덩이만 치켜들고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이론은 모든 일이 잘 해결되자 기운이 나는지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 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엉덩이를 동굴로 향하고 있었는데” 방귀탄이라도 쏘려고 그런 거냐”“ 나탈리를 살피던 엘란이 멍청한 어조로 물었다. “방귀탄이라뇨” 무슨 새로운 마법입니까” 쟝이 언제부터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죠” 하이론이 가르쳤나요”“ 엘란은 아직 독기가 빠지지 않았나 보다. “하하하하!” 그의 말을 들은 하이론은 미친 듯이 웃었고, 쟝은 뭐라 대꾸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큭..큭...그래 내가 가르쳐준 비장의 기술이다. 적을 향해 무서운 독가스를 뿜는 새로운 마법이지.” 하이론은 말을 하면 할수록 우스운지 종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엘란이 얼굴을 붉혔다. “정말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입구 앞에서 엉덩이를 들고 기절해 있었던 겁니까”“ “그게 말이야......” 쟝은 말을 끌며 대답을 못했다. 괴성에 놀라서 기절했다고-그것도 멍청하게 엉덩이만 든 채로-말할 수는 없었다. 특히 아리아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한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괴물의 돌연한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아리아나가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질문을 던졌다. 효과는 대단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아리아나의 영롱한 음성에 혼이 나간 쟝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말은 두서가 없었으나,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이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그가 제정신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면 최대한 자신이 멋진 쪽으로 이야기를 꾸몄을 것이 불 보듯 뻔한 일.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행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쟝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쟝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 그래서 말이지 바샤라의 돌을 삶아 먹기로 결심한 거야......” “......” “.....!” 하이론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돌을 삶아 먹을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그 돌의 기운을 일부분만 받아들인 엘란도 감당을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고, 천하의 광법사 마저 그 기운을 다스리는 데 실패해서 폭사한 마당에. 엘란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직 쟝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고 그는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돌이 익지를 않는 거야! 나중에는 직접 굽기까지 했는데도 모두 허사였어, 어찌나 열이 받던지 더러워서 안 먹는다고 하고 포기하려는 데 아 글쎄! 돌이 뜨거운 열을 발산하더라고.” 아리아나가 놀란 눈빛으로 시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쟝이라는 괴상한 인간이 돌의 기운을 격발시킨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야! 빨리 말해!” 한 참을 떠들어 대던 쟝은 목이 아픈지 침을 삼키는데, 이야기에 깊이 몰입한 엘란과 하이론이 연이어 재촉했다. 아리아나를 슬쩍 곁눈질한 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냥 버리고 가려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등불로 쓰면 좋겠더라고, 그래서 냄비에다 돌을 담아서 나탈리를 업고 이 위험한 밀림을 헤쳐 나온 거야! 이게 다 아리아나를 구하기 위한 나의 깊은 애정의 발로이지.”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리아나를 슬쩍 끼어 넣은 쟝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느끼하던지 엘란과 하이론은 속이 다 울렁거렸다. 먹은 게 없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올릴 뻔 하지 않았나. 아리아나의 기분도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쟝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동굴 앞에 턱 서는데 예감이 이상하더란 말이야, 안으로 들어가면 꼭 죽을 것 같더라니깐, 그래서 산으로 올라갔지. 아 근데, 이 망할 놈의 돌이 어찌나 열을 내뿜던지 냄비까지 뚫어버리고, 나중에는 산까지 뚫고 내려가는 거....... 어! 다들 어디가”“ 쟝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벌떡 일어난 엘프들을 필두로 모두들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쟝만이 허탈한 심정으로 동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 조금만 더 얘기하면 아리아나가 넘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제일 먼저 달려간 아리아나가 갈가리 해체된 거대 거미의 잔해를 옆으로 치우자, 뻥하니 뚫린 구멍 사이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거미가 죽었군.” 하이론의 말에 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쟝의 기상천외한 행동이 몇 가지 행운과 겹치면서 놀랄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무슨 일이야”“ 악취 때문에 코를 틀어막고 다가온 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물었다. 하이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붉은 광채가 피어오르는 구멍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산, 아니 둥지를 뚫고 내려온 돌이 거미의 머리를 태워버린 모양이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그...그....럼...내가...이 괴물을 처치했다는 거야”“ “뭐, 그렇게 불수도 있겠지.” 하이론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눈 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는 동시에 눈동자에는 자부심이 어렸다. 그리고 비틀려 올라가는 입술과 점점 들려지는 턱에서 거만함이 한껏 묻어나고 있었다. “앞으로는 날 잘 모셔요!” “잘 모시라니”“ “생명의 은인한테 제대로 대접을 하라 이 말이죠. 특히 영감님, 툭하면 저를 쫓아버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데 앞으로도 그러면 곤란합니다.” 하이론이 땡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이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목숨까지 지켜줬더니 뭣이 어쩌고 저제” 꼴랑 한 번, 그것도 소발로 쥐 잡는 격으로 우연히 일어난 일 가지고 생색을 내겠다는 거냐”“ 쟝은 검지손가락을 하이론의 코앞에 대고 좌우로 흔들었다. “이봐! 영감 한 번이 아니지, 대제의 무덤에서도 내가 구해줬잖아!” “언제......” 하이론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우연과 행운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었다. 광법사가 죽이려는 위험한 순간에 쟝이 발광석을 떼어냈고, 그 바람에 발록이 소환되어 모두들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하이론이 반박의 말을 찾아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데 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엘란의 모습이 보였다. 기회라고 여긴 하이론이 화제를 돌렸다. “엘란! 뭐하고 있는 거냐”“ 그는 괴물의 시체를 치우면서 바닥과 벽, 나중에는 천장까지 살피며 힘없이 대꾸했다. “바샤라의 돌을 찾고 있습니다.”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 찾는 일에 가세하고, 그제서야 자신들의 임무를 자각한 엘프들마저 주변을 수색하자 지독한 악취에다 징그러운 괴물의 잔해들 때문에 더 있기 싫어진 쟝은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하이론, 나중에 생명의 은인과 보답에 대해서 이바구 좀 합시다.” 바닥을 헤집는 하이론의 얼굴에 퍼런 핏줄이 섰다. “젠장!” 불퉁하니 입이 나와 툴툴거리는 그를 향해 엘란이 물었다. “바샤라의 돌이 어디에 있을까요”“ “글쎄다.” 하이론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돌은 주먹 세 개를 겹쳐놓은 것만큼 크니 눈에 띨 만도 하건만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엘프들도 돌을 찾을 수 없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하이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쟝처럼 먹어버렸을 리도 없고.” 하이론의 혼잣말을 들은 엘란이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에이! 설마, 뭐 먹을 게 없어서, 덩치가 산만한 놈이 기껏 돌을 먹었겠냐” 쟝같은 괴상한 놈이나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지.” “그래도 혹시 압니까”“ “그럴까”“ 하이론은 반신반의 하는 표정이었으나 엘란은 한 번 해볼만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아리아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면 거미 배 좀 갈라 보십시오.” 엘란은 계속되는 타격으로 부상이 심해서 정령들을 소환할 형편이 아니었다. “바람의 칼날!” 퍽! 비교적 부상이 경미한 아리아나가 실피드를 불러 거미의 배를 난자해 버렸다. 배가 터지자 누런 고름 같은 액체가 악취를 내뿜으며 흘러내렸다. 놀랍게도 곤충에게서 가닥가닥 잘려진 창자가 보였다. “포이즌 큐어!” 혹시 독이 있을까 염려한 하이론이 지팡이를 꺼내 괴물거미의 배에다 대고 정화마법을 걸었다. “누가”“ 하이론은 저 더러운 거미의 뱃속을 누가 뒤져볼 것인가 짤막하게 질문했다. 자신은 도저히 저 속에다 손을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가며 온 몸에 좁쌀만한 소름이 돋았다. 아리아나와 시리우스도 배 속을 살펴볼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고개를 돌려 딴전을 피웠다. 평상시 고상을 떨어 대더니만-자신들의 일인데도 불구하고-더러운 일이 닥치자 손에 험한 것을 묻히기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피력하고 있었다. “쯧쯧쯧!” 엘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우습게 생각하던 인간사회로 나와서 죽을 고생을 거듭한 엘프들을 보자면,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능히 짐작이 가는데 고작 더러운 것을 만지기 싫어 일을 회피하는 그들을 보자니, 별로 없던 우호감정마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휴!” 그는 배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온 몸을 배 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고, 더러운 체액을 뒤집어 써야 했다. 물컹물컹 잡히는 창자와 소화되다 남은 뼈다귀들이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코를 잘라내 버리고 싶은 충돌을 일으키는 고약한 악취는 골까지 흔들어댔다. 그는 숨을 참고 손을 휘휘 저었다. 너무 머리가 아파와 포기하고 일어서려는데 손에 딱딱한 무엇인가가 걸렸다. 끄집어내자 온각 오물로 더럽혀진 커다란 덩어리가 보였다. “운디네!” 아리아나가 정령을 불러 깨끗이 씻어내자 붉은 바탕에 황금색 줄이 선연하게 그어진 바샤라의 돌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하이론의 희열에 찬 부르짖음을 필두로 모두의 눈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깨끗한 돌입니까”“ 엘란의 얼굴에서 희열에 찬 표정이 사라지고 긴장된 표정이 나타났다. 혹시 광법사가 가진 돌처럼 오염된 돌이면 헛고생만 한 셈이었다. “우리가 찾던 깨끗한 돌입니다.” 아리아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이제 교도들은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시리우스의 오만하고 재수 없는 말투가 이번에는 천상의 음악처럼 달콤하게 들렸다. “아리아나!” 시리우스가 이름만 불렀는데도 그 뜻을 알아들은 아리아나는 실피드와 운디네를 불러 괴물의 배를 하나하나 해체시키고, 깨끗하게 씻어나갔다. 엘프들은 상상외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거미의 배안에서 바샤라의 돌이 아홉 개나 더 쏟아져 나온 것이다. 거대 거미는 놀랍게도 뱃속에 총 열개의 돌을 품고 있었다. 하이론은 엘프들의 눈이 기쁨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묘하게 배가 아파왔다. 우리도 하나 달라고 요구하려는데 엘란이 팔을 잡고 흔들었다. “됐습니다. 우리는 살 땅만 얻으면 그만입니다.” 탁! 포기하지 못한 하이론이 여전히 아까운 눈빛으로 입맛을 다시는데 시리우스가 돌을 하나 던져버렸다. 하이론이 재빨리 주워 보니 황금색 선이 검게 변색된 것이 오염되거나 그 힘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하긴 욕심 많은 엘프들이 멀쩡한 돌을 버릴 리 없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실망한 하이론이 퉁명스레 반문했다. “광법사는 바샤라의 돌 일부만을 흡수하고도 8써클에 발을 디뎠고, 보아하니 괴물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는데, 어째서 저 괴물은 배속에 돌을 열개나 품고서도 겨우 이정도의 힘만을 보였을까요”“ 괴물의 힘은 대단해서 그와 시리우스, 아리아나까지 잡아둘 정도였지만, 그와 엘프들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고, 또 돌을 열개나 가진 것을 감안한다면 아주 미약한 힘이라 할만했다. “그건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닌 것 같다. 광법사야 지성을 가진 인간 중에서도 천재로 불릴만한 인물이었고, 이 괴물이야 본능만 있는 하찮은 거미였으니, 이 정도로 발전한 것만 해도 돌의 힘에 많은 도움을 받은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래도,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아마, 다른 데 힘을 낭비했겠지.” “다른 데라뇨”“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일이나, 자식들을 낳는 일, 이 거대한 둥지를 짓는 일, 특히 울창한 밀림을 만들고 자신의 지배권 아래에 둔일 같은 것 말이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밀림 안에서 자신을 얽매는 기운이나 통신을 불가능하게 만들던 하늘에 처져 있던 그물 같은 기운은 거미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이 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치 거미줄을 치듯이 이 거대한 밀림에 자신의 힘을 쏟아 부었고, 모든 현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불가사의한 기후와 우거진 수풀은 모두 바샤라의 돌에서 나온 거대한 힘을 사용한 결과였으리라. 기후와 밀림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도 하이론 같이 돌에 대한 욕심이 솟구쳤다. 잘만 이용하면 상급정령마스터는 물론 어쩌면 인류역사상 최초로 정령왕과 계약한 인간이 될 지도 모르는 일. 하이론이 들고 있던 돌을 건네받아 흥분된 눈으로 지켜보던 엘란은 자신의 욕심을 조심스레 접었다. 광법사의 최후가 떠오르자 그런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이제 그만 나가죠.” 그는 모든 일이 잘 풀린 가운데서도 왠지 모르게 허탈한 심정에 휩싸여 힘없이 말했다.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는 엘란의 뒤를 엘프들이 따랐다. 하이론은 웬일인지 바로 따라 나오지 않고 어정거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쟝이 얼굴을 디밀었다. “왜 이렇게 오래있었어”“ “돌을 찾았습니다.” 이상하게 힘이 빠진 엘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디 어디”“ 쟝이 껑충껑충 뛰며 묻자 엘프들의 손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자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줄이 그의 혼을 잡아끌었다. “우와!” 그가 경탄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데, 아에게와 그린을 필두로 정신을 잃었던 동료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엘란! 살아있었구나!” “엉엉엉! 죽은 줄 알았어.” 짝귀와 밤톨은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렸다. “어떻게 된 거냐”“ 그린이 침착하게 묻자 신이 난 쟝이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엘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자신의 추한 행동은 모조리 빼버리고 최대한 용감하고 멋있게 꾸며서 이야기 하는 그의 얼굴은 자랑스레 빛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기절해서 엉덩이를 들고 있던 부분은 빼버리고 돌의 효능을 직감적으로 알아채서, 괴물을 죽이기 위해 산을 올라가 머리를 조준하고 돌을 던져 넣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찌나 뻔뻔스레 거짓말을 해대는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거짓말은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론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다. 퍽! 언제 나왔는지 갑자기 나타난 하이론의 손이 신나게 떠들어대는 쟝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은인한테 무슨 짓거리요”“ 그의 반발을 부드럽게 무시해버린 하이론은 쟝이 떨어뜨렸던, 괴물을 작살내 버렸던 그 바샤라의 돌을 엘란에게 내밀었다. 동굴에서 나오지 않더니 돌을 파낸 모양이었다. 돌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뭐 망가진 것이라 해도 우리도 돌 두개쯤은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얼른 일어난 아에게가 돌을 잡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황금색 줄이 모두 사라지고 붉은 색만 남아있었고 하나는 기분 나쁜 검은 줄이 나 있는 것이 엘프들이 들고 있는 신비스런 돌과 비교하면 드래곤과 가고일 만큼이나 차이가 나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쟝의 말을 믿지 않던 그린이 하이론에게 다시 물었다. 하이론은 이때까지의 일을 아주 조리있게 그리고 최대한 쟝의 멍청한 행동을 부각시키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흥흥, 핏, 핏!”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쟝의 콧방귀는 점점 거세어졌고, 하이론의 음성도 높아져 갔다. 그로서는 분통터질 일이었는데 일행들은 그 보다는 하이론의 이야기를 더 믿는 눈치였다. “음!” 비쩍 말라 뼈만 남은 나탈리가 깨어났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신경을 못 쓴 엘란의 얼굴에 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탈리, 깨어났구나.” “엉엉!” 깨어난 나탈리는 엘란에게 안겨 울기부터 했다. “오빠! 나 너무 무서웠어, 암흑이 나를 감싸는데 얼마나 차갑고 소름끼치는 지 죽는 줄 알았어!” 서럽게 울어대던 나탈리가 돌연 엘란의 품에서 떨어졌다. “아유 더러워, 좀 씻고 다녀!” 그의 몸은 거미의 체액이 묻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파들파들 떨던 어린 양은 어느새 사라지고 앙팡진 고양이 같은 날카로운 음성이 계속해서 울렸다. 뼈만 남은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남자들은 왜 저렇게 더럽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오빠 깨끗하게 씻기 전에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주 더러워 죽겠어.” 그의 얼굴이 울상이 될 수록 아에게와 그린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져갔다. “킥킥킥!” 하이론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자, 밀림에 한 바탕 웃음꽃이 만발했다. *********************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며 기분 좋은 불티를 날리고 있었다. 동굴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엘란과 하이론은 조용히 밤의 정적을 음미하고 있었다. 거미의 앞마당이어서 그런지 어떤 곤충이나 새, 동물들도 다가오지 않아서 야영을 하기에는 그만이었다. 모두들 지치고 부상당해서 당분간 여기에서 몸을 추스를 예정이었다. “날이 차가워지고 있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엘프들마저 돌을 얻어서 기쁜지 나무로 올라가지 않고 일행들의 옆에서 잠자리를 펴고 잠들어있었다-가운데 하이론의 음성이 불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일이 끝나자 묘한 허탈감에 사로잡힌 둘은 잠들지 못하고 불을 살피고 있었다. “정말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이제 이 밀림도 끝이네요. 원주민들도 스트빌라이인들에게 학살당할 거고 열대식물과 곤충들, 동물들, 몬스터들도 수난을 당할게 뻔하고.......” 밀림을 형성하는 힘을 대주던 거미가 죽고 없으니, 불가사의한 기후는 사라지고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일 것이니, 열대의 기후와 빽빽한 밀림은 사라질 것이다. 그에 보호되고 있던 여러 생물들도 스트빌라이인들의 손아래 고통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아라크네마저 몰살한 마당에 인간들이 꺼릴 것은 없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자신들이 밀림을 파괴한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우리가 한 행동이 올바른 것일까요”“ 언제나 그렇듯 엘란의 생각을 읽어낸 하이론이 부드럽게 위로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밀림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니, 원래대로 돌려 놨다고 생각하거라.” “그래도 ....... 혹시 돌을 땅에 묻으면 기후가 다시 더워질까요”“ “정 마음이 불편하면 그렇게 해보자!” 하이론이 툭툭 털고 일어서자 그가 얼마나 돌을 연구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는 엘란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 잘 사는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너도 인간다워진 것 같아 반가운 마음도 들고.” 둘은 조용히 일어나 동굴, 아니 거미의 둥지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라이트!” 주변이 환해지자 완전히 해체되어 버려서 처음보다 더 징그러워 보이는 거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뭐죠”“ “뭐 말이냐”“ “저기 꾸물거리는 시꺼먼 것 말입니다.” 거미의 잘려진 다리가 널려있는 곳에는 수박만한 크기의 생물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거미구나.” “이 괴물 새낄까요”“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는 그런 것 같은데.” 하이론은 거미의 앞에다 바샤라의 돌 두개를 내려놓았다. “꾹, 꾸룩, 꾹꾹.” 작은 아라크네는 어미의 배에서 나온 돌에 착 달라붙어서 거미줄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돌과 함께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감싸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주인이 탄생하겠구나.” 하이론이 환하게 웃자 엘란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이제 나가죠.” 거미집을 나오는 엘란의 마음은 가벼웠다. 나탈리도 무사히 구했고, 교도들이 정착해서 살아갈 안전한 땅도 확보했다.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광법사도 죽었으니, 이스마엘도 기뻐할 것이다. 그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 다시는 인간들의 땅으로 나오지 않을 생각이니 손에 피를 묻힐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고난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고, 십존들과 얽히고 섞이며 수많은 피를 뿌려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처절하게. ----- 17장. 엘프의 숲 하늘과 땅이 겨우 자리를 잡던 그 까마득한 옛날에, 사람과 동물은커녕 드래곤들마저도 모습을 드러내기 한 참전에, 겨우 신들이 하나, 둘씩 눈을 뜨던 그 옛날에, 반죽 같던 땅에서 물이 갈라져 나오던 그 옛날에, 대륙을 떠돌던 거대한 신이 있었다. 눈을 뜬 신들이 몸을 일으켜 자신들의 신성을 겨우 깨닫던 까마득한 옛날에 이미 대륙을 떠돌던 신은 북쪽 끄트머리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막 생기기 시작하는 바다를 쳐다보던 거신(巨神)은 무슨 생각인지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가 몸을 뉘일 때의 충격으로 땅이 갈라지고 지축이 흔들렸으며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내렸다. 땅이 갈라진 자리에 강이 생겼고, 별이 떨어진 자리에 호수가 생겼다. 자리에 누운 거신은 영원히 깨지 않는 잠에 빠져들었고, 억겹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몸에서 거대한 숲이 형성되었다. 드래곤들이 자신들의 위대한 영혼을 뽐낼 때 쯤 숲 속에도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다. 티그리아는 그들에게 엘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축복을 내려주었다. ******************************* 펑! 펑! 땅의 하급정령 놈이 하늘을 향해 연신 종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성인남성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달막한 키의 놈이 주먹을 흔들 때마다 흑 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빳빳하게 일어선 수염과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콧김이 그의 울화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도그럴것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실프가 슬쩍슬쩍 내려와 등을 갈기는 바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놈이 너 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기를 쓰고 덤비는 데도 옷자락 한 번 건드리지 못하니, 정령 중에서 성질고약하기로 유명한 놈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휙! 퍽! 교묘하게 뒤를 돌아 다가온 실프가 슬쩍 등을 미는 바람에 다시 바닥에 고꾸라진 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 놈을 부리던 로이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벌떡 일어선 놈이 실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 로이를 향해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빡! 놈의 머리와 로이의 이마가 정면으로 충돌하자 청명한 가을하늘보다 훨씬 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렬한 충격을 받은 로이가 입에서 침을 흘리며 비틀거리자 의기양양하게 두 손을 탁탁 털고 있던 놈이 땅 속으로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깔깔깔깔!” 나탈리는 로이의 멍청한 눈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고, 엘란의 옆에서 한창 수다를 떨던 슈리엘은 황당한 눈으로 비틀거리다 털썩 주저앉는 로이를 보았다. “놈이 왜 저랬죠”“ 엘란이 물었다. “왜긴 왜야” 열 받아서 그런 거지.” “아무리 열이 받아도 그렇지 계약자를 들이받는 정령이 어디 있습니까”“ “정령도 사람들처럼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개 중에는 성질 더러운 놈도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저 로이라는 녀석은 실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통제를 못하고 있어. 계약을 맺은 것도 땅의 정령이 많이 봐준 거지.” “끙!” 겨우 정신을 차린 로이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이마를 만지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저, 좌호법사님... 정령술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정령술은 왜 배우려는 거지”“ “저도 좌호법사님처럼 교도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의 앞에 떡 하니 버티고선 나탈리가 로이와 엘란을 흉내 내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고 슈리엘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글거렸다. 얼굴을 붉히며 열정적으로 외치는 그의 모습을 흉내 내는 나탈리의 모습은 엘란마저 미소 짓게 만들었다. “요것이!” 로이가 딴에는 위협을 한다고 손을 치켜들었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 엘란의 뒤에 매미처럼 착 달라붙은 나탈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로이는 엘프의 숲에 정착을 한 후부터 엘란에게 정령술을 배우고 있었다. 수련할 때마다 용케 알고 찾아오는 나탈리는 엘란의 옆에 착 붙어서 계속해서 놀려댔다. 그 바람에 그는 열이 받아서 죽을 것 같았다. “너같이 멍청한 정령사는 처음 본다. 세상에 어떤 정령사가 자신과 계약한 정령에게 얻어맞아서 정신을 잃는 단 말이냐”“ 슈리엘이 엄하게 꾸짖는 모습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더욱 난처해진 로이가 몸둘바를 몰라 했다. 슈리엘이 만나본 정령사는 모두 상급정령사의 수준에 이른 자였으니 로이가 멍청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슈리엘은 로이를 꾸짖는 재미 때문에 수련 때마다 동참했으며 나탈리와 죽이 척척 맞아서 로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봐, 멍청이 오빠! 그래서 교도를 치킬 수 있겠어”“ “어휴, 저걸 그냥 콱!” 빈민가에서 잔뼈가 굵은 로이가 나탈리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선 엘란 때문이었다. 그는 어쩐지 엘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몇몇 교도를 제외한 모든 교도들의 느끼는 공통적인 심정이었다. 그는 믿음직하며 신뢰를 주지만 다정한 교류의 대상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엘란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나탈리가 부럽기 때문에 더욱 얄미웠다. “오늘은 그만 하자.” 엘란은 제자가 곤혹스러워 하자 오늘 수련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오빠, 무슨 소리야! 저런 학습부진아는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지.” “엘란, 내가 보기에는 네 교습방법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무슨 문제가”“ 엘란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슈리엘의 말이 반가웠다. 슈리엘이 좋은 학습방법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런, 멍청이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리는 법이지. 교육에는 몽둥이만한 약이 없다. 내가 좋은 몽둥이 하나 만들어 올까”“ “그럴까요”“ 엘란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로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사색이 된 로이의 얼굴을 보다 빙그레 웃으며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프의 숲은 대륙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코르도바습지와 판사막과 함께 대륙의 삼대 절지로 꼽히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광대한 숲에는 엘프의 결계가 쳐져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간혹 약해진 결계를 통과해서 들어 온 사람들도 엘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위험한 판사막을 넘어서 엘프의 숲까지 오는 사람은 없어졌고, 숲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지고교도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엘프들이 마지못해 교도들에게 떼어준 숲은 그들이 살기에는 너무 좁아서-하이론은 좀생이 같은 놈들이라고 한 달 동안이나 욕을 하고 다녔다-교도들은 숲을 벗어난 초원까지 집을 지어야 했다. 사막을 건너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었으니 결계로 보호되지 못하는 초원이라 할지라도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엘란은 숲에서 조금 떨어진 초원에서 슈리엘의 수다를 들으며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서 평생을 살 것이고, 자신의 자식들도 대대로 여기서 살 것이다. 그들이 왁자하니 떠드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속에서 그들을 주시하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간혹 중얼거리며 흥미롭게 관찰하던 괴인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톡,톡. 가지를 밟으며 박차오를 때마다 작은 소음이 그를 따랐다. 근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나무 위를 다람쥐보다 더 빠르게 달리던 그는 커다란 떡갈나무에 이르러 몸을 멈춘 후 무성한 나뭇잎에 자신의 몸을 감추며 다시 눈을 빛냈다. 아래에는 작은 빈터가 펼쳐져 있었는데 바지를 가슴까지 끌어 올려서는 멜빵으로 고정한 사내가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호랑말코 같은 자식아! 그 꽃 그대로 놔두지 못해.”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놀란 아이가 벌떡 일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엉!” 악을 써대듯 울어대는 소리에 조용한 숲의 정적이 깨어지고, 그 바람에 놀란 새들이 자리를 박차고 날았다. 아이가 울자 머리를 박박 깎은 흉악한 인상의 노인이 아이를 부드럽게 안았다. “울지 마라 아가야.” “쳇, 인상은 험악해 가지고, 목소리 봐라, 웩! 올라오겠네.” 노인이 아이를 부드럽게 달래자 사내가 빈정거렸다. "쟝! 왜 자꾸 애를 울리고 그러냐”“ “하이론도 좀 보세요! 저 자식이 매일 와서 제 화원을 망치고 있잖아요.” 아닌게아니라 코를 찔찔 흘리고 있는 폴의 손에는 빨간 꽃 한 송이가 무참하게 꺾여 있었다. “이깟 꽃 한 송이 가지고 더럽게 비싸게 구네.” “그깟 꽃 한 송이요” 그 꽃을 피우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약초를 제외하고는 꽃에 대해 문외한인 하이론이 알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심하다니요” 제가 손찌검을 했습니까” 위협을 했습니까” 그냥 조용히(“) 타일렀는데 지가 괜히 우는구만.” 하이론이 미심쩍게 보는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도대체 그런 모자라는 애는 왜 끼고 도는 겁니까” 제자를 키울 거면 엘란처럼 빠릿빠릿한 애를 찾던가, 양자를 들일 거면 정상적인 애를 찾지, 그런 코찔찔이는 뭐 하러 데리고 삽니까”“ “쯧쯧쯧, 벼락 맞을 소리 하지 마라! 애가 얼마나 귀여운데.” 하이론이 얘를 안고 비비자 로브에 온통 누런 콧물이 묻었다. “그럼 애나 잘 봐요. 괜히 남의 화원이나 망치지 말고.” 쟝은 엘프의 숲에 와서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여전히 따돌림 당하는 신세로 사는 낙이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사막이라는 장애물과 그의 목에 걸린 막대한 현상금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가 꽃에 매달리기 시작하더니 이렇듯 멋진 화원을 만들어 놓았다. 둥근 원형을 이루는 빈터에 울타리 역할을 하는 작은 낙엽관목이 빙 둘러서 있었고,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공간 여기저기에는 난초와 야생 들꽃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묘한 형상으로 깔린 돌들이 길의 역할을 했는데 색깔까지 신경을 써서 주위의 꽃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일론은 그가 마음을 잡고 조용히 사는 것이 보기 좋았으나, 야박한 소리로 속을 긁어 놓는 데에는 열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잇!” 심통이 난 하이론은 쟝의 화원을 떠나며 울타리 역할을 하는 작은 나무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야이, 못된 영감아!” 하이론은 쟝의 고함을 뒤로 하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눈은 다시 몸을 일으켜 하이론의 뒤를 쫓았다. 숲을 이러 저리 돌던 하이론은 작은 통나무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마을에 들어서서 발을 멈추었다. 쿵쿵! 마을을 넓히려는지 아니면 집지을 목재가 부족했던지 건장한 사내들이 나무를 찍어대고 있었다. 하이론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폴 이 녀석, 또 쟝의 화원에 가서 분탕질을 한 게로구나.” 나무를 찍어대던 40대 장한이 도끼를 멈추고 폴에게 짐짓 눈을 부라렸다. 땀이 범벅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이 혼을 내려는 의도는 아닌 모양이다. “훌쩍!” 하이론의 등에 업혀 있던 폴은 뚱한 눈빛으로 코를 들이마실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콜드, 잘되 가나”“ 하이론이 장한에게 물었다. “예, 겨울이 오기 전에는 모든 집들이 만들어질 겁니다.” 시원스레 대답하던 콜드가 조심스레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저.......근데 나무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막 베어내도 되는 겁니까” 엘프들은 나무를 목숨만큼 소중히 여긴다던데.......” “괜찮아, 여기 땅을 떼어줄 때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었어. 좀팽이 같은 놈들 바샤라의 돌을 아홉 개나 찾아줬는데 겨우 코딱지만한 땅을 떼어줘, 망할 놈의 자식들....... 하긴 풀만 쳐 먹는 놈들이 제정신이겠어.”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지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엘프들의 결계로 다기오지 말라며 떼어준 땅은 그들의 광대한 숲에 비한다면 정말 코딱지라고 부를 만큼이나 작았다. 오죽했으면 12,000명의 교도들이 머물 땅도 모자라서 초원에까지 집을 짓겠는가” “추수는 언제 할 건가”“ “다음주에 시작할 겁니다.” “작황은”“ “일년 먹을 식량은 나올 겁니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폴을 내려놓았다. “애 좀 집에 데려다 주게. 나는 볼일이 있어서.” 인사를 하고 숲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하이론의 뒤를 쫄래쫄래 따르던 폴은 콜드에게 덜미를 잡혀 달랑 들어올려 졌다. “엄마가 걱정하고 있다. 집으로 가야지.” 숲으로 들어간 하이론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야박하고 싸가지 없는 엘프들에 비한다면 이 숲은 정말 신의 축복이었다. 코르도바습지같이 축축하고 음습하지도 않았고,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걷기 힘들 정도도 아니었다. 장대하게 하늘로 올라간 커다란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신의 따뜻한 손길 같았다. “흡!” 그는 폐부 깊숙이 숲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나무 특유의 상쾌한 향이 심신을 가뿐하게 만들었다. 쨍쨍! 숲을 나오자 격렬한 금속음이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하이론을 본 사내가 살갑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한 쪽 귀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괴상하게 보이는 사내였다. “짝귀, 저 놈들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 거냐”“ “말도 마세요, 벌써 한 시간째 저러고 있어요.” 작달막한 사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저놈들 정말 열심이네. 그래 이번 겨울 지나면 스트빌라이로 떠난 다더냐”“ “예.” 아에게와 그린은 격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검이 부딪칠 때마다 공기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엘프의 숲을 떠날 예정이었다. 처음 엘프의 숲에 당도했을 때는 엘프와의 생활을 기대하며 들떠있었으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 엘프들은 인간들과 같이 생활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숲의 일부를 떼어준 후 즉시 결계를 쳐서 인간과의 접촉을 막아버렸다. 실망한 아에게는 즉시 맥클레이용병대로 떠나려 했지만 그런 실력으로는 용병대에 들기는커녕 개망신만 당할 거라는 충고가 먹혀들어서 떠나지 못하고 이렇듯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론은 걱정이 많았다. 목숨이 위험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덩치만 컸지 세상물정 모르고 매사를 낭만적으로 보는 저 철부지는 용병대에 들면 큰 상처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는 마음의 상처가 몸의 상처보다 사람을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조용히 같이 살았으면 좋으련만 기어이 떠나려는 모양이다. “너희들은 어쩔거냐”“ 항상 아에게와 그린을 쫓아다니는 짝귀와 들창코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들은 여기서 살 겁니다.” “잘 생각했다.” “실력이 형편없네.” “으악!” “악!” “윽!” 하이론과 짝귀 밤톨은 난데없이 들리는 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하이론을 집요하게 따라붙던 괴인형은 언제 다가왔는지 그의 옆에 서서 대련을 하는 아에게와 그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엘프!” 갑작스런 비명에 대련을 멈춘 아에게가 불청객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엘프의 숲에 정착한 이후로 엘프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교도들은 결계에 막혀 엘프들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엘프들도 인간들에게 전혀 다가오지 않았었다. 하이론은 돌연한 엘프의 출현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2미터에 가까운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온통 근육으로 뭉쳐진 팔다리가 전혀 엘프답지 않아서 뾰족한 귀가 없었다면 사람으로 오인했을 엘프가 싱그럽게 웃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드러운 금발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양새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당신 뭐야”“ 가까이 다가온 아에게가 검을 쭉 내밀어 위협적으로 으르렁 거렸다. “저 쪽 초원에 있던 정령사는 대단한 실력자 같던데, 당신의 검은 형편없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겠는 걸.” 빙글거리며 내뱉는 말이 비꼬는 것 같아서 아에게의 심사를 뒤틀어버렸다. “그래, 그럼 당신 실력한 번 보자.”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나간 아에게의 검이 엘프의 심장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휙! 아에게와 비슷한 체구의 엘프가 몸놀림은 번개처럼 빨랐다. 어디 꽂혀 있었는지 보이지도 않던 칼이, 언제 빼들었는지 모르게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작달막한 칼은 순식간에 아에게의 목에 대어졌다. 모두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에게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지자 검을 거둔 엘프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구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힘의 낭비가 너무 많아. 가만히 있을 때는 바위처럼 장중하게, 움직일 때는 이렇게.” 엘프는 어느새 멀리 물러나 있었다. “다리를 너무 벌렸다. 다리를 벌릴수록 안정감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힘의 낭비도 그만큼 커지고, 행동도 제약받기 마련이지.” 아에게는 엘프의 말에 빠져들어 엉거주춤 다리를 좁혔다. “그래, 그 정도가 적당하지. 그리고 눈은 자신의 검을 쫓지 말고 상대를 봐야지. 검은 노려봐서 뭐 할 거냐” 왜 검하고 연애라도 하게”“ “풋!” “킥!” 짝귀와 밤톨이 콱 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엘프는 이때까지 봤던 시리우스와 아리아나와는 전혀 달랐다. “특히 상대의 눈을 노려봐라. 자세히 보면 상대의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어. 그리고 자신의 감각을 믿어라. 피부를 따갑게 자극하는 기운이라던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예감이라든가......” 그린도 아에게의 옆에 버티고 서서 엘프의 말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프의 강론은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에게와 그린의 자세를 일일이 바로잡아주던 엘프가 돌연 하이론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 우두머리가...음...아! 성녀라 그랬지. 만나게 해 줄 수 있나”“ “무슨 일이요”“ 하이론은 똑같은 질문은 한 번 더 던졌다. 덩치가 산만한 괴짜 엘프가 얼음덩어리 같은 시리우스나, 새침한 아리아나보다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함부로 성녀 앞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당분간 신세 좀 지려고.” “......!” “......”“ “.......” *********************************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진 교도들이 열과 성을 다해 지은 신전에는 투박하나 신심이 깊이 깔린 조각상과 흑백의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진 벽화가 소박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다른 신을 모시는 대륙이 여타 신전에 비교한다면 형편없는 모양새였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교도들은 충분히 감격했다. 새로 만들어져 풋풋한 나무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신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속셈일까요”“ 산티아고가 눈살을 찌푸렸다. 숲에 정착한 이후 소 닭 보듯 전혀 왕래가 없었는데 느닷없이 엘프 한명이 다가와 같이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속셈인지는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대사제 파올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 “으!” 온통 바람에 날리던 금발머리를 흰 천으로 질끈 묶은 엘프가 특유의 날렵한 몸놀림으로 들어서자 긴장으로 굳어있던 신전에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큰 키와 근육질의 덩치는 전혀 엘프답지 않아서, 상당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당신 정말 엘프 맞소”“ “보다시피.” 엘프는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와 같이 살고 싶다고 한 것 맞습니까”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당신들과 접촉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들을 멸시하고 꺼린다고 하던데...” 우호법사 조르주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건 맞아. 엘프들은 인간들을 싫어하지.” “그런데, 왜 우리와 지내고 싶다고 한 겁니까”“ 엘란이 물었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해 두지.” “.......” “.......” 엘란이 한 걸음 다가서며 눈을 빛내자 조용한 침묵이 자욱이 깔렸다. 그의 몸짓에는 어떤 절박감이 들어있어서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했다. “진짜 이유가 뭡니까”“ 엘란의 말투가 차가워지자 엘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나” 무슨 음흉한 속셈이 있어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을 해꼬지 할 생각도 없고, 엘프의 신 티그리아를 걸고 맹세하지.” 신에 대한 맹세는 누구에게나 깊은 무게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특히 성직자에게는. 엘프가 신에 대해 맹세하자 대사제가 성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대사제의 의사를 파악한 성녀가 산티아고와 마쟈르의 얼굴을 보았고,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단 삼 개월만 같이 살아보기로 하지요. 특별히 염두에 두신 거처가 있나요”“ 그녀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뭔가 말하려고 나서던 조르주가 입을 닫았고, 엘란도 한발 뒤로 물러섰다. “모든 숲이 나의 거처요.” 엘란은 예의 싱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물러나는 엘프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인가”“ 그는 성직자도 아니었고, 당연히 신에 대한 맹세에 깊은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가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성녀와 사제들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엘프의 숲에 더부살이 하면서 그들의 의사를 반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모든 일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다. “이봐.......” 급히 뛰어들던 하이론은 조르주가 헛기침을 하자 뒷머리를 긁으며 지고에게 대충 예를 표한 후 다급하게 말했다. “어떻게 결정했어”“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그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수작들이지.” 혼잣말하는 하이론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아래로 베세요. 위로 베다가는 손을 다쳐요. 그리고 낫이 상하니까 그렇게 탁탁 치지 말고 부드럽게 당기세요.” 엘란은 낫으로 풀을 베다 손을 다칠 뻔하고는 에쉴리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공중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슈리엘이 가까이 다가와 떠들기 시작했다. “쯧쯧쯧, 너는 어째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냐” 끄떡하면 이상한 일이나 시키고.” “이상한 일이라뇨”“ 에슐리가 물었다. “도둑질을 시키지 않나, 그리고 저번에 포강에서는 아 글쎄 남의 방을 엿보......” 기겁을 한 엘란이 급히 슈리엘을 돌려보냈다. “왜 갑자기 돌려보낸 거죠”“ 에슐리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하, 너무 오래 소환했더니 힘이 들어서......” 대충 얼버무린 엘란은 급히 말을 돌렸다. “저 엘프는 왜 계속 따라다니나 모르겠네.” 카이어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프는 아침부터 엘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왜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그는 아내의 호기심어린 눈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글쎄.” “가서 물어봐요.” 그녀는 카이어스가 계속 지켜보고 있자 상당히 불편했다. 엘란은 초원을 가로질러, 카이어스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는 작은 둔턱으로 올라갔다. 엘프의 뒤에는 그의 목적을 의심하고 있는 하이론이 그와 비슷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왜 자꾸 따라다니는 겁니까”“ “자네한테 관심이 많아서.” “왜 저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죠”“ “상급정령사니까. 시리우스말로는 정령과 친화력이 대단히 강하다던데”“ “전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여기서 알짱거리는 진짜 이유가 뭔가”“ 하이론이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끼어들었다. “이미 말했는데.” “호기심”“ 하이론이 비꼬는 투로 물었다. “인간은 의심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군.” “그것도 시리우스의 말인가”“ “그래.” 둘 사이에서 무언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시리우스는 인간들을 멸시하던데 당신은 호기심을 가지는 이유가 뭡니까”“ 이번에는 엘란이 물었다. “이유라” 글쎄, 꼭 집어서 말하기는 뭐하구만. 저기 숲에서 꽃을 가꾸는 인간처럼 내 취미라고 해두지.” “취미”“ 하이론이 또 다시 비꼬는 투로 물었다. “취향이라고 해도 좋고, 버릇이라고 해도 좋고, 관심이라고 해도 좋겠군.” “인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 다른 엘프들은 모두 인간을 무시하는데”“ “사람들도 모두 성격이 다르지 않나” 엘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엘프도 있고 저런 엘프도 있지.” “이런 엘프, 저런 엘프, 하! 웃기는구만, 내가 알기로는 인간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지 않은 엘프는 당신이 유일한 것 같은데, 아닌가”“ “그건 사실이다.” “엘프들은 왜 인간을 싫어합니까”“ 대화를 듣고 있던 엘란은 둘 사이에서 점점 열기가 오르자, 무슨 사단이라도 벌어질까 급히 질문을 던졌다. “이유야 많지. 자연의 주인처럼 구는 그 오만과 무례, 게다가 숲에 대한 끝없는 파괴. 뭐, 그렇다고 상종 못할 존재로 멸시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발칸이라는 어릿광대와 카나이폴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광룡 카나이폴런”“ “대제”“ 놀란 엘란과 하이론은 동시에 격한 고함을 질러댔다. 왜 여기서 카나이폴런과 발칸대제의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그래, 미친 도마뱀과 그 얼간이.” “그들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하하하하하!” 엘프는 대답 없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한 천년 전의 일이다. 대륙을 통일한, 아니 이것도 웃기는 말이군. 국경선을 긋는 것은 인간들만이 하는 얼간이 짓이지.” 빙글빙글 웃던 카이어스는 말을 이었다. “인간들의 나라를 모두 정복한 대제는 엘프들도 정복하고 싶었는지 미친 도마뱀을 보내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했지.” “항복”“ “그래, 충성을 맹세하고, 충성의 표시로 천명의 노예를 보내라고 요구하더군. 특히 엘프들의 공주를 보내면 자신의 첩으로 삼겠다고 한 부분은 우리를 격분시켰다.” “이상하군, 역사서에는 그런 얘기가 하나도 없었는데.” 하이론이 못 믿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실패는 기록하지 않았나 보지. 이것도 인간들이 잘하는 짓 아닌가” 실패나 더러운 일은 감추고, 없는 일도 만들어서 자신을 미화하는 짓 말이다.” “어떻게 카나이폴런을 물리쳤습니까” 엘란이 물었다. 카나이폴런은 인간의 눈에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들 가운데 단연 최강의 능력을 가졌다고 일컬어졌다. 오죽하면 전설 속의 카르자나와 비견되겠는가” 엘란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엘프들이 강하다 하더라도 카나이폴런에게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가 물리친 건 아니다. 장로가 대제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 미친 도마뱀의 숲을 마구잡이로 불태웠지. 모든 엘프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분노와 공포에 떨 때 그 미치광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황당할 만큼 갑작스런 공격과 후퇴였지.” “왜 갑자기 사라진 겁니까”“ “그 미친 도마뱀 속을 누가 알겠나”“ 시리우스 뿐 아니라 카이어스까지 카나이폴런을 미친 도마뱀으로 부르는 걸 보면 모든 엘프들이 광룡을 미치광이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인간들도 그를 광룡이라 부르니까.” “시리우스는 카나이폴런이 죽었을 거라고 하던데”“ 하이론이 시리우스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런 소문이 돌았지. 드래곤로드들이 그를 협공 했다더군.”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은 겁니까”“ “정령왕에게 들었다고 하더군.” “정령왕”“ 엘란이 놀라 소리쳤다. “그래, 정령왕. 마지막으로 정령왕과 계약한 엘프가 전해준 말이다.” 엘란이 뭐라 물으려 하자 뭘 물으려 하는 지 짐작한 카이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은 정령왕과 계약한 엘프는 없다. 그가 마지막이었다. 너도 시리우스와 같이 들었잖은가”“ 엘란은 이제야 코르도바습지를 날며 슈리엘과 나누었던 대화기 떠올랐다. 광룡이 한꺼번에 모든 정령왕과 계약하는 바람에 정령계에 혼란이 생겼고 그 반작용으로 정령왕이 계약을 꺼리게 되었다는 말. “그러고 보니, 인간을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인간 덕분에 다시 정령왕과 계약을 맺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건 광룡이 한 짓이잖소”“ 카이어스가 중얼거리자 덤터기를 쓰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든 하이론이 격하게 반박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조용히 말한 카이어스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건 인간들 관용어지.” “카이어스는 광룡이 숲을 태운 것에 대해 화가 난 것 같지는 않군요.” 빙그레 웃는 엘프를 보고 엘란이 말했다. “다 옛날일이니까. 아니, 옛날일이 아닌가!” 그가 이랬다저랬다 하자 황당해진 하이론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카나이폴런이 숲을 태워버리자, 복구를 하려고 무리를 하게 됐고 그 바람에 엘프의 숲 전체가 위기에 빠졌으니까.” “위기라면”“ 엘란이 조심스럽게 묻자 알겠다는 듯 하이론이 소리쳤다. “바샤라의 돌! 그래, 그렇게 된 거야. 코르도바습지와 마찬가지로 엘프의 숲도 바샤라의 돌에서 나오는 마력에 기대고 있었던 거야. 광룡이 숲을 태우고 복구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뽑아 쓰는 바람에 천년이 지나자 탈이 생겼고, 그래서 새로운 돌을 찾아 숲 밖으로 나온 거야.” “맞아.” “이런!” 하이론이 아깝다는 듯 머리를 쳤다. “진작에 눈치 챘더라면 더한 요구를 해도 됐을 텐데.” 사실을 알고 보니 바샤라의 돌은 엘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새삼 분노가 솟구쳤다. 돌을 아홉 개나 얻었으면서 기껏 한다는 짓이 손톱만한 땅을 떼어준 것이라니. “좀팽이 같은 놈들.” 하이론이 동족을 욕하는 데도 카이어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시리우스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 엘프가 좀 모자라는 것이 아닌 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엘란이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데도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그냥.” “가만, 뭐가 좀 이상한데. 거미는 돌을 열개나 삼키고도 겨우...” 카이어스가 하이론의 말을 끊고 설명했다. “지성이 없는 거미와 칠팔백년, 오래 사는 자는 천년도 사는 엘프를 비교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는데.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돌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럼 왜 돌을 찾아 인간세상까지 나온 겁니까”“ 엘란이 물었다. “이건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는데 모든 돌이 한꺼번에 약해졌다. 그래서 싱싱한 돌이 필요했다.” 하이론이 다시 물으려 하자 카이어스는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다. 나도 아는 건 여기까지다.” 하이론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는데, 카이어스는 엘란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다정하게 어깨를 잡았다. “나도 이제 질문 좀 해도 되겠나”“ 엘프가 친한 척하자 속이 불편해진 엘란이 슬쩍 몸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공처간가”“ “......!” “......!”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질문에 기가 막힌 엘란이 입을 딱 벌렸고, 뭔가 생각하던 하이론마저 불의의 일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게 무슨......” 당황한 엘란이 말을 잇지 못하는데 카이어스가 연이어 충격탄을 날렸다. “아침부터 쭉 따라다니며 지켜본 결과, 자네 저 인간여성한테 꼼짝을 못하더군. 고양이 앞의 쥐 신세랄까. 인간들은 이런 경우 그런 남자를 공처가라고 한다던데 아닌가”“ “킥킥킥킥!” 하이론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엘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이론은 괴상한 엘프가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공처가 맞지. 다른 말로 벽처가라고도 하지.” “벽처가”“ “그래, 벽처가, 마누라가 한 마디 하면 무서워서 벽에 딱 달라붙지.” “벽처가, 벽처가, 벽처가........” 카이어스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은 것처럼 열심히 중얼거리며 벽처가를 외웠다. “우히히히!” 그가 계속 벽처가를 중얼거리자 하이론은 땅바닥을 구르며 웃어댔고, 엘란의 입은 댓발이나 튀어 나왔다. 하이론이 웃자 이들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에쉴리가 안심이 된 듯 치마를 살짝 쥐고 조용히 다가왔다. “하이론 뭐 재미있는 일 있나 봐요”“ “킥킥.... 있다마다.” “인간여자, 혹시 집에서 손찌검도 하나”“ “손찌검이라뇨”“ “공처가는 맞기도 한다던데.” “......”“ “......!” “우히히히!” 하이론은 침까지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엘란과 에쉴리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바람에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썰렁했다. 어느새 친해진 카이어스가 하이론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무슨 실수한 건가”“ “실수를 하기야 했지.” “무슨”“ “이건 쟝이 나한테 자주하던 말인데,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하면 기분이 좋겠나”“ “아! 공처가는 인간사회에서 욕이로군.” “욕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울 거야 없지.” “하이론 그만 하세요.” 에쉴리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었다. “오! 저래서 엘란이 꼼짝을 못하는 모양이로군.” 카이어스가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엘란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다음날부터 카이어스는 엘란대신 하이론을 따라다녔고, 그 덕에 부담스런 시선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 엘란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엘란은 정령을 부르지 않고 자신의 다리로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리를 맞아서 누렇게 변색한 풀을 밟고 지나가는 기분도 그런대로 상쾌했다. 초원은 곧 끝이 나고 인간과 엘프들을 인위적으로 차단하는 누런 바다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판사막은 마치 바다를 연상시켰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날리는 모래와 움직이는 바닥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슈리엘.” “사막이군.” 허공에서 몸을 드러낸 슈리엘은 바람이 몰아치는 사막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막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한기가 밀려들었다. “바샤라의 돌.” 그는 신음과도 같은 말을 토해냈다. 카르자나의 심장은 여기서도 놀랄만한 기적을 창출하고 있었다. 확장되는 사막을 막고 있는 것은 돌의 힘일 것이며 이 서늘한 바람을 막고 있는 것 또한 바샤라의 돌일 것이다. “슈리엘, 하늘로.” 엘란은 차가운 바람에 맞서 정령과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 100미터 쯤 떠오른 그는 사막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외쳤다. “가라!” 슈리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의 창을 던졌다. 쐐애액! 쾅! 모래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사막과 부딪치는 순간 굉음이 터지며 모래가 엘란의 발치까지 치솟아 올랐다. “다시!” 쐐애액! 또 다른 바람의 창이 공기를 가르며 사막을 뒤집어 놓았다. 쾅! 쾅! 쾅! 사막은 계속된 충격에 비명을 질러댔다. “학, 학.......”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고 간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거대한 웅덩이가 생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랜 수련으로 저장된 마나를 모두 소모한 그는 품에서 부싯돌과 나뭇잎을 꺼내더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바샤라의 돌에서 나온, 화근덩어리라 할 수 있는 마나를 이용해서 샐라임과 계약을 시도해볼 심산이었다. 돌에서 나온 마나가 내부를 돌며 가져다주는 뜨거운 고통을 미루어 보면 불의 정령과 계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끝에 아무도 없는 사막으로 나온 것이다. 작은 불씨는 금세 덩치를 치워 주먹만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불꽃에 정신을 집중하고 내부를 관조하자 본연의 마나에 눌려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마나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엘란은 샐라임과 벗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퍼엉! 나뭇잎이 일으킨 주먹만한 불이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서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 촤악! 양 옆으로 쩍 갈라진 불 사이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3미터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전신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는 샐라임이 손을 들어 엘란을 가리켰다. “의외로군, 어떻게 그런 몸으로 나를 불러낼 수 있었지”“ 샐라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몸은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마나는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리며 뜨거운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마나가 움직일 때마다 뇌리를 하얗게 태워버리는 고통이 그를 진저리치게 만든다. “대단한 마나이긴 하다만 통제가 되지 않는군.” 등을 돌리는 샐라임을 향해 엘란이 소리쳤다. “통제가 되든 말든 지금처럼 마나만 대주면 되잖습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무리하다간 몸이 버텨내지 못할 텐데”“ “그건 내 사정입니다.” 샐라임은 그의 불타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것도 그렇군. 그 보다 한 가지 물어보자. 이 마나 어디에서 얻은 건가” 자네가 수련해서 얻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카르자나의 조각난 심장에서 나온 마나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어쩐지.” 불의 상급정령은 기분이 좋은지 두 손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코와 입에서 끊임없이 불꽃이 튀어 나왔다. “정말 계약을 하고 싶은가”“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야 상관없다.” “어째서......”“ 보통의 정령들은 계약 맺는 것을 싫어한다는 슈리엘의 말을 떠올린 엘란은 이 정령도 슈리엘처럼 괴팍한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계약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나 말이야, 정말 기가 막히는 군. 이렇게 전신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마나는 정말이지 처음이다. 정령계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럴 수도 있겠군.” 엘란은 신과도 맞서 싸운 드래곤의 심장에서 나온 마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의 의사를 들은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불꽃을 피워 올리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면 계약을 맺을 자격이 부족하더라도 그의 도움으로 계약을 성립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샐라임이여 나 엘란과 계약을 해다오.” 번쩍! 눈을 뜬 정령의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 샐라임은 태초의 맹약에 따라 엘란과 계약을 맺는다.” “.......” 엘란은 특이하게 계약이 맺어졌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돌아가지 않지요” 모든 정령은 계약이 맺어지면 일단 정령계로 돌아가던데.”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고통스러워하는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대로 잠깐만 있으면 안 되겠나”“ 환하게 웃는다고 미소짓는 엘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 마나는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진정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는 이 마나가 움직이던 때를 떠올리며 정령이 아니면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샐라임은 삼십분 동안이나 불꽃을 피워대더니 마나가 서서히 마나홀로 돌아가자 손을 들어 작별인사까지 하고는 사라져갔다. 지쳐 쓰러진 엘란은 하늘에 별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커다란 구덩이에 누워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자 그를 기다리는 성녀와 에쉴리가 보였고 뜻밖에도 코리나와 데미의 모습까지 보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엘란이 묻자 성녀는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오늘도 예배에 나오지 않았군요.” 성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외면했다. “괜찮아요, 비난하러 온 건 아니니까요.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 내일은 꼭 나오세요.” “중요한 행사라면”“ “코리나와 데미가 정식으로 사제서품을 받을 겁니다.” “아!” 열심히 경전을 읽고 신을 섬기더니 드디어 서품을 받는 모양이었다. 데미는 물론이고, 후작가의 영애로 태어나서 헬레나를 깊이 섬기던 엘리오트의 황태자비까지 지냈던 코리나가 악마교로 탄압받던 지고교의 정식 사제가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의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슬픔을 신의 품안에서 위로받고 싶었던 듯 했다. “제가 꼭 데리고 가겠습니다.” 엘란이 데미와 코리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불편해진 에쉴리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코리나의 남편 마르시앙이황자를 생각하던 엘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들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내일은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굳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석하지 못 할 것이다. ********************************** “짹, 짹.” 이른 아침, 산새의 지저귐을 음악 삼아 하이론과 엘란, 그리고 카이어스가 위로 쭉쭉 뻗어있는 길쭉한 나무 사이에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꽤 쌀쌀한 날씨가 저절로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겨울이 오는 것도 잠깐일 것이다. “쟝에게는 왜 가는 겁니까”“ 아침부터 들이닥친 하이론은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끌고 왔다. 가는 길을 보니 쟝의 화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놈한테 뭐 좀 얻으려 하는데 내가 달라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뭘 얻으려는 겁니까”“ “겨우살이.” “겨우살이는 어디다 쓰려고 하십니까”“ “내가 쓸 데야 뻔한 것 아니냐” 약 만드는 데 쓸 거다. 겨우살이는 혈압을 낮추고, 신경통 관절염에 효과가 좋아. 지혈작용도 뛰어나고.” “꼭 쟝한테서 얻어야 합니까”“ 쟝이 어찌나 식물들을 애지중지 하는지 달라고 말을 꺼내기가 곤란했다. 엘란이 생각하기에는 욕구불만을 그런 쪽으로 삭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엘프의 숲에는 겨우살이 보기가 힘 드는구나. 내가 숲을 샅샅이 찾아 봤는데 그것이 있는 곳은 쟝의 화원뿐이었다.” “자기 화원에 손대는 걸 싫어할 텐데요.” “그래서 네가 필요한 것 아니냐!” “저를 왜...”“ 하이론은 무슨 음모라도 꾸미는 모사가처럼 음흉하게 웃으며 엘란의 옆구리를 찔렀다. “흐흐흐! 니가 한 번만 딱 째려보면 쟝이 쫄아서 알아서 줄 거다.” 엘란이 얼굴을 찡그리는 데 어느새 다 왔는지 쟝의 고함이 들려왔다. “너 또 왜왔어!” 보아하니 또 폴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코를 찔찔 흘리는 폴이 쟝의 고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철퍼덕 퍼질러 앉아 꽃을 뽑아대고 있었다. “꽃 뽑지 말라니까!” 완전히 소귀에 경 읽기였다. “오늘은 내 그냥 안 두겠다.” 팔을 걷어붙인 쟝이 모종삽으로 폴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일어나!” 그가 왼 주먹을 아이의 눈앞에 대고 짐짓 무섭게 인상을 썼으나 폴은 말없이 코를 쭉욱 들이마시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열이 머리꼭대기 까지 뻗쳐오른 그가 아이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리는 데 하이론의 굵직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어이! 쟝, 애한테 무슨 짓이냐”“ “버릇 좀 고쳐주려구.” “아무한테나 반말 찍찍 해대는 네 버릇이나 고치지 그러냐.” “왜 왔어”“ 어서 용건이나 말하고 가라는 말투가 하이론의 신경을 긁었다. “끄응!”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지라 억지로 참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솟구쳤다. “겨우살이 좀 얻으려 왔다.” “겨우살이” 어디 있는데”“ 쟝은 자신의 화원에 겨우살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저기.” 하이론이 참나무의 밑동을 가리켰다. “안돼!” 폴을 놔준 쟝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올렸다. 엘란은 쉽게 얻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구스를 까 궁리하고 있는데 하이론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야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이럴 거야”“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그리고, 목숨구해준 걸로 치면 나도 두 번이나 구해줬잖아.” 쟝은 코르도바습지의 일을 들먹이고 나섰다. “원하는 게 있어요”“ 서로 필요한 걸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엘란이 나섰다. “얼굴에 바르는 포션 하나만 만들어줘, 나이가 먹었더니 피부가 건조해져서 세수 할 때마다 얼굴 당겨 죽겠다니 깐.” “좋아!” 엘란은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던 하이론이 예상외로 혼쾌하게 나오자 내심 안도했다. 하이론은 따로 속셈이 있었다. 피부에 붉은 반점을 유발하는 포션을 만들어줄 생각인 것은 꿈에도 모른 쟝은 잘됐다고 얼굴을 두들겼다. 모두들 흡족해서 웃음을 머금고 카이어스가 눈을 빛내며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던 바로 그때. 암울한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었다. “악!” 퍽!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쟝과 하이론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어느 샌가 사라진 폴이 지른 비명임을 알아차린 쟝이 가장먼저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렸고, 그 뒤를 엘란과 하이론 카어어스가 따랐다. “악!” 쟝도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서자 그를 따르던 사람과 엘프도 줄줄이 멈춰서야 했다. “이런!” “맙소사!” “엘프가 왜......”“ 화원의 중앙에는 대충 구은 흙벽돌로 만든 작은 화단이 있었다. 그 너머에 폴이 기절해서 쓰러져 있었는데 폴의 앞쪽으로 전신이 조각난 엘프의 몸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엘프의 얼굴이 보였다. 전신이 찢겨진 몸 위에 곱게 모셔진 엘프의 머리는 광법사의 최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 입을 헤 벌리며 털썩 주저앉는 쟝에 의해 얼음같이 싸늘한 침묵은 일순간에 깨어졌다. “그루비어!” 카이어스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는 사람입니까”“ 카이어스는 대답 없이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잘려진 조각의 일부를 들어올렸다. “우웩!” 시체를 볼 때부터 얼굴이 노랗던 쟝은 기어이 속에 든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슬립!” 정신을 차린 하이론은 폴이 중간에 깨지 않도록 마법을 걸었다. “왜 엘프가 여기서 죽어 있는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왜 엘프가 여기서 죽어있나”“ 카이어스는 엘란의 질문을 반문으로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쟝에게 향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에 먹은 것을 확인하고 있던 쟝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목청을 높였다. “무슨 특별한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은 있나”“ 쟝은 목이 아플 정도로 힘껏 고개를 저음으로써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했다.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이론이 조심스레 운을 떼자 엘란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결계 때문에 들어갈 수 없으니, 카이어스가 연락하십시오.” 그가 대답 없이 인상을 그리자 엘프답지 않게 선 굵은 그의 이목구비가 잔뜩 구겨졌다. “곤란하게 되었다.” “뭐가 말이오”“ “내 나이 이제 400이다.” 카이어스의 나이를 처음으로 들은 하이론은 한 순간 토막 나서 죽은 엘프를 잊어버리고 흥미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그 동안 살인사건.......” 카이어스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죽은 동족의 시신을 살폈다. “......”“ 하이론은 말없이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이 상황에 적합한 말을 찾아낼 수 없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엘란이 물었다. “인간들은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행위를 살인이라고 하지.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에 필적하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적당한 말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게 무슨.......!” 말을 하던 하이론이 다급히 입을 다물고 경악한 표정으로 엘프를 보았다. “그럼 엘프들은 다른 엘프를 절대로 죽이지 않는단 말이요”“ 카이어스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회에서 타엘프를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단어도 없고.” “정말입니까”“ 엘란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느 사회에나 분쟁은 있다. 그러므로 그에 수반한 폭력이 없을 수 없으며, 그러자면 자연히 살인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기록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살던 400년 동안에도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이론이 물었다. “애초에 그런 행위를 입력하지 않는다.” “입력”“ 생소한 단어에 엘란이 반문했다. “그걸 설명하자면 엘프의 생태에 대해 말해야겠구나.” 그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설명할 까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한 동안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조각난 시체를 앞에 두고 일장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엘프가 조화를 이상으로 삼는 종족이란 건 모두 알겠지”“ 엘란과 하이론, 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조화를 최고선으로 삼고 사는 종족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모든 것과 조화를 시키면 자신을 잃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는 거지. 너희들도 한 번 생각해 봐라, 돌과 조화시키면 돌이 되고 나무와 조화시키면 그대로 나무가 된다면 생물체로서의 우리는 어떻게 되겠나”“ 좌중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생긴 게 방어기제야. 방어기제는 다른 것과 더 이상 동화하지 못하도록 마음에 벽을 치는 거다. 적을 막기 위해 성을 쌓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 할 수 있지.” “그게 살인, 아니 살엘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부터는 그냥 살인이라고 하자! 살엘프라고 하니 왠지 등골이 오싹해져서.” 그 큰 덩치가 부르르 떨자 다른 사람들의 몸에도 소름이 돋았다. “방어기제가 주변과 조화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인위적인 장막이라면 입력은 엘프의 고유한 특성과 품성을 주입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엘프는 처음 태어나면 이십년간 그야 말로 철저히 격리되어 주입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살육에 대한 욕구와 광기는 철저하게 제거되고 완벽한 사회인으로 탄생하는 것이지. 당연히 살인사건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거짓말!” 쟝이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어 소리쳤다. “엘프들 간에는 거짓말도 하지 못하게 입력된다. 정 곤란하면 회피는 할 수 있어도 거짓말은 원천적으로 할 수 없다.” “뭐 살육의 욕구와 광기가 제거 되” 그럼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리우스는 왜 그런 건데” 아 그 놈은 미친놈이라서 그런 거야”“ “시리우스는 전사로 키워졌다. 그러니 살기를 발산하는 거야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살인도.” “아니, 내 말을 이해 못하나 본데. 살인은 가능해도 살엘프....젠장!......그건 불가능하다. 전사는 타 종족은 죽일 수 있도록 주입이 되도 같은 엘프들은 절대로 해칠 수 없도록 입력된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사태의 심각성을 서서히 자각한 하이론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중에 살엘프......아니 살인을 주입할 수도......” 카이어스는 하이론의 말을 끊었다. “아니, 한 번 발동한 방어기제는 절대로 뚫을 수 없다.” 그의 대답을 들은 하이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나중에는 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안색변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엘란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럼 이 엘프는 우리 교도들 중 누군가가 죽였다는 뜻이요”“ 하이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장로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요.” 엘란은 이제야 하이론이 심중을 알게 되었다. 엘프가 살해당했다. 그것도 멸시하는 인간들의 터전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기도나 할 줄 알았지 약해빠진 신도들이 어떻게 엘프를 죽인단 말이냐”“ 자신의 화원에서 죽은 엘프가 발견되자 불안해진 쟝이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엘프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쓰임이 결정되어 그에 걸맞은 특성이 주입된다. 시리우스 같은 전사나 장로들 같은 지도자, 그리고 살해된 그루비어 같은 정원사 등등으로.” “그럼.......” “그래 그루비어는 정령술을 배우지 않았고 싸울 줄도 모른다. 건장한 성인남자라면 누구나 가능하단 소리지.” “.......” 죽은 같은 침묵이 주변을 감싸고돌았다. 생각보다 심각한 사태에 봉착한 사람들은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죽은 듯이 서 있었고, 엘프도 역사상 처음 접하는 경악할 만한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서 있는 가운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어느새 중천을 지난 태양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보고를 하러 가 봐야겠다. 가급적 현장은 훼손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해 줬으면 좋겠다.” 카이어스는 심각한 어조로 말한 후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누가 한 짓일까요”“ 엘란은 서품식에 참석하겠다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모르겠다. 설마”“ 쟝은 하이론의 시선이 자기 얼굴에 닿자 펄쩍 뛰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내가 죽였다고 의심하는 거야”“ “카이어스의 말을 믿습니까”“ 엘란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엘프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살인을 하지 않는 다는 말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또 거짓말은 하지 못하게 주입되었다지만 그것도 엘프들 사이의 일 아닌가. 게다가 카이어스가 오고 난 후 며칠 지나지도 않아 일어난 일이다 보니 그에게 의심이 쏠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 살인(“)사건. 정말 공교롭기 그지없는 일이 아닌가” “믿기 어려운 말이긴 하다만 거짓말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던데......” “체, 누구는 얼굴에 거짓말쟁이라고 써 붙이고 다닌답디까” 원래 그렇게 믿음직하게 생긴 사람이 사기도 잘치고, 사고를 쳐도 대형사고를 치는 법입니다.” 쟝은 그 놈 짓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 화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보니 누구에겐가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그가 특별한 임무를 띠고 여기에 파견된 건 아닐까요”“ 엘란이 물었다. 한 번 들기 시작한 의심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떤”“ “우리들을 쫓아내기 위한!” 하이론은 엘란의 말을 듣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싫어하는 엘프들은 마지못해 땅을 떼어주기는 했지만 자기들 앞마당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싫었을 테고, 좀생이 같은 그들이 음모를 꾸몄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교도들 중 누군가가 엘프를 죽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나쁜 놈들, 내 그놈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 쟝은 확신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이론이 물었다. 그는 범인을 추적하는 일을 일단 중지했다.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것보다는 엘프들이 자신들을 쫓아내려 할 때의 대처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더 시급할 것 같았다. 범인은 그 다음문제였다. 만약 덤터기를 씌우려 계획했다면 살엘프범을 찾는 일은 물 건너간 일일 것이다. “대책이라.......”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엘프들과 싸울만한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에이, 성질나는데 숲에다 불을 확 싸질러 버려!” 쟝은 자기 집 마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수 없으면 살인범으로 몰리기 딱 좋았다. “쟝, 신전으로 달려가서 성녀와 대사제에게 이번 일을 보고하고 오너라!” 보통 때였다면 네가 가라고 콧방귀를 꿔댔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쟝도 별말 없이 신전을 향해 달려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녀와 대사제가 현장에 당도한 동시에 엘프들도 들이닥쳤다. 카이어스가 딱딱한 얼굴로 앞장서고 있었고, 그 뒤를 아리아나와 시리우스-땅을 떼어주는 일은 이들 둘이 모두 처리했고 다른 엘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다-그리고, 처음 보는 엘프 둘이 따랐다. 마지막에 따라오는 엘프들은 연배가 꽤 되는지 백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했다. 그들의 꽉 다문 입술에서는 고집스런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하이론은 이들의 인상을 보는 순간 일이 잘 풀리기는 애초에 글러 먹었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에는 한 겨울의 찬바람보다 더 싸늘한 기운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누구 짓인가”“ “모릅니다.” 하이론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저는 지고교의 성녀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대사제의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성녀가 자신들을 소개하며 카이어스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처음 보는 엘프를 소개해 달라는 의미였다. “시리우스와 아리아나는 이미 알 거고......저 분들은 포르티걸장로님과 더르터크장로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당신 눈에는 안녕한 걸로 보이나”“ 윗도리와 바지가 일자로 연결되어 있는 파란 옷을 입은 포르티걸장로라는 엘프가 성녀의 말을 차갑게 쏘아붙였다. 처음부터 못마땅한 얼굴로 찬 바람을 날리던 그 엘프였다. 한 종교의 수장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오만한 태도였다. 어찌나 정나미 떨어지게 말하는지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쟝마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듣고 있는 하이론과 엘란의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왜 엘프가 여기에 나와 있는 겁니까”“ 대장로가 끼어들었다. 쟝에게 대충 상황을 들어보니 일이 곤란하게 돌아갈 것 같아 그의 무단침입으로 사태의 초점을 돌리려는 의도였다. “엘프의 숲에서 엘프가 어딜 가던 무슨 상관인가!” 색깔만 붉은 색으로 다를 뿐이지 포르티걸과 똑같이 생긴 옷을 입은 더르터크장로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에는 애시당초 그른 것 같았다. “여기는 우리 땅이니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이론이 파올대사제의 의사를 알아채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런 식으로 살.......” 포르티걸장로도 카이어스와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해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 생각에는 살인이라는 말을 차용해서 썼으면 합니다.” 카이어스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바를 말했다. “그래, 그게 좋겠군.” 좌중을 오만하게 쏘아본 포르티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인을 호도할 생각인 가 본데, 꿈 깨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묻겠다. 누가 한 짓이냐”“ “왜 꼭 우리 짓이라고 단정 짓습니까”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엘란이 말했다. “엘프는 살....인을 할 수 없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갑자기 같이 살자고 엘프가 다가오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엘프가 죽어 있고, 이제 장로들이 나서서 추궁을 한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군요.” “감히!” 인간이 자신들의 진실성에 의문을 표하자 더르터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엘란, 내 얘기는 모두 사실이다.” “엘프가 우리들의 터전에 발을 디딘 것은 이년만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공교롭기는 하다만 내가 나타난 것은.......” 카이어스는 곤혹스러운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이론과 엘란이 무언의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휴! 나는 변화 없는 엘프사회가 지겨워서 인간들의 삶이 보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왜 그루비어가 여기 나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나처럼 호기심이 일었는지도 모르지.” “당신 얘기는 호기심 때문에 나온 엘프를 인간들 중 누군가가 죽였다는 말입니까”“ 성녀가 슬픈 어조로 물었다. “내 생각은 그렇다.” “카이어스 더 이상 왈가왈부 할 것 없다. 여기 주인이 너냐”“ 포르티걸의 차가운 녹색 눈이 자신을 향하자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한기가 밀려와서 몸을 부르르 떤 쟝은 불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래.” 나는 아무 잘못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잡아라!” 더르터크의 입에서 냉혹한 일갈이 터지자 시리우스가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엘란!” 시리우스가 팔뚝을 꽉 움켜쥐자 울상이 된 쟝이 엘란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엘란은 쟝을 구원해줄 형편이 아니었다. 더르터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은유한 기운이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막스나 광법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억세고 강렬한 기운보다 이런 온화한 기운이 더욱 막아내기 힘들었다. 그의 이마에서 출발한 땀이 눈썹에 막혔다 꼬리를 타고 옆으로 길게 흘러 뺨과 턱을 지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강자다!” 그는 자신이나 시리우스보다 한 단계 위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슈리엘!” 무엇인가에 잔뜩 눌린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약하게 흘러나오자 바람의 상급정령이 그 도도한 자태를 드러냈다. “음!” 포르티걸이 놀란 신음을 발했다. 시리우스에게 상급정령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직접 보니 말로 듣던 것보다, 실력이 더 대단한 것 같았다. “대항할 건가”“ 더르터크의 나직한 음성에는 천지를 뒤집어엎을 강대한 기운이 서려있어서 인간들을 떨리게 만들었다. “쟝을 어떻게 할 겁니까”“ “엘프의 법대로 처리할 겁니다.” 아리아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분위기 한 번 더럽네.” 슈리엘이 엘란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더르터크와 포르티걸을 노려보았다. “호!” 더르터크가 탄성을 발했다. 그가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애석하게도 슈리엘을 향한 것이었다. “당신이 그 괴상한 상급정령이로군.” 슈리엘은 엘프들은 무시하고 엘란에게 물었다. “저 놈들하고 붙을 거야” 웬만하면 말로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시리우스와 아리아나를 제외한 엘프들은 놀라고 있었다. 계약자와 저토록 스스럼없는 정령은 정령사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왜요” 겁납니까”“ 슈리엘은 빙그레 웃으며 바람의 창을 툭툭 두들겼다. “내가 겁날 거야 없지. 지더라도 정령계로 돌아가서 몸조리만 며칠 하면 되니깐, 내가 걱정하는 건 너와 저 성녀라는 여자다.” 그녀(“)는 짓궂은 눈빛으로 쟝을 훑었다. “저 놈이야 죽어도 상관없다만, 성녀는 여기서 죽으면 곤란할 것 같은데.” 바람의 상급정령이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잔뜩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던 쟝은 슈리엘의 말을 듣고 울상으로 변했고, 하이론의 굳어 있던 표정도 더 할 수 없이 심각해졌다. “저 엘프들 강합니까”“ 하이론이 물었다. “시리우스가 상급정령사인건 이미 알 테고, 저 두 늙다리도 상급정령사인데다 저 덩어리도 상당할 것 같은데.” 아무리 수준이 뛰어난 상급정령사라도 마스터가 아닌 이상 한 명이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아리아나를 논외로 치더라도 카이어스의 실력도 상당하다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던 쟝은 기운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만약 시리우스가 팔을 움켜쥐고 있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쓰러졌을 것이다. 더구나 이어지는 대화는 희망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렸다. “게다가 저 놈, 상급정령의 냄새가 복합적으로 난다.” 정령은 더르터크를 가리켰다. “상급정령마스터같습니까”“ “아마도!” “아!” 이런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하이론은 순수한 감탄성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의 역사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못했던-엘란의 입을 통해 비르발의 존재를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상급정령마스터를 만나자 참을 수 없는 감흥이 솟구쳤다. 그것은 순수한 감탄과 동경이었다. “무의미한 저항은 하지 마라!” 슈리엘이 나타나자 엘란일행의 안전을 걱정하던 카이어스는 간절하게 충고했다. 그는 인간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땅에서 엘프가 죽었다는 이유로 그를 범인으로 모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만약 결계 안에서 인간이 죽는다면 그 땅에 사는 엘프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막무가내로 끌고 가도 되겠습니까”“ 하이론이 따지고 들었다. “마음대로.” 포르티걸이 냉정하게 잘랐다. 인간들은 절대로 결계 속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던 하이론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그..게 무슨...마...마....말도 안되는......” “엘프는 문명인으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군요.” 성녀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비난의 기운이 짙게 깔려있었는데 오랜 세월 성직에 종사한 관록 때문인지 아니면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굳센 힘이 서려 있었다. “말조심하라!” 시리우스가 차가운 어조로 경고했다. “재판도 하지 않을 건가요”“ “엘프의 법에 따라 재판을 할 겁니다.” 아리아나가 대꾸했다. “온통 적대적인 엘프들 사이에서 공정한 재판이 될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시간이 자꾸 지체되자 짜증이 치민 포르티걸이 여전히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희는 공정한 재판을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도 그 재판에 참여를 해야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이어스가 장로들을 보고 공손히 말했다. 그가 보기에는 장로들의 처사에 억지와 우격다짐이 너무 많았다. 더르터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당신들이 쟝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니 우리도 엘프들 중 범인이 없는지 수사를 해보고 싶습니다. 거기다 더해 만약 재판이 벌어진다면 변호인의 자격으로 우리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성녀의 요구는 타당한 요구였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사는 것은 당신들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거래에 따른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군요. 거기다 당신들의 처사는 바샤라의 돌을 아홉 개나 구해준 대가치고는 너무 형편없어서 엘프의 신 티그리아도 눈살을 찌푸릴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하겠어요.” 한 번 숨을 돌린 성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땅의 불청객이 아닌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땅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의 법대로!” 성녀의 나직한 음성에는 거역 못할 힘이 서려있었고 그녀의 얘기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엘프들은 분하지만 그녀의 말을 무시할 논리적 근거를 댈 수 없었다. “좋다. 수사관 겸 변호인으로 세 명의 인원을 허락할 테니 결계 속으로 들어올 인간을 뽑아라! 카이어스 네가 남아 있다가 그 세 명과 함께 오도록 해라.” 더르터크의 말을 끝으로 시리우스를 제외한 엘프들은 떠나갔다. 더 이상의 협상이나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몸짓으로. 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던 시리우스는 클레임을 불러 땅을 통째로 뜯어냄으로써 사건현장을 완벽하게 옮겨갔다. 털썩! 카이어스를 제외한 엘프들이 사라지자 힘이 풀린 성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급정령사 둘의 기세를 감당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탓이었다. 최고수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녀를 지탱시켰을 뿐 속으로는 무척 떨고 있었던 것이다. 엘란과 하이론은 성녀를 다시 보았다. 단순히 정 많고 인자한 여인으로 봤는데,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런 강한 기질이 숨어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일단 신전으로 가서 대책을 세워봅시다.” 파올의 말에 따라 신전으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신전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만약 유죄가 선고 된다면 이 일은 쟝의 선에서 끝나지 않고 후폭풍을 몰고 올 공산이 컸다. 어쩌면 이번 사건을 꼬투리 삼아 이 땅을 떠나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들의 성정을 보건데 충분한 가능한 일이었다. “대책이라고 할 것도 없네요. 누가 엘프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까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힘이 없는 자신들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 어떻게 하던지 무죄를 입증해야만 했다. 대사제는 오늘 따라 긴 수염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기른 수염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쓰다듬을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었는데, 지금은 성가신데다가 한 줌 밖에 안나가는 그것이 무겁기까지 했다. 상황의 무게가 그를 짓누른 탓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대사제가 나서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에서 파올 만큼 현명한 사람도 없었으니 그가 적임이었다. 무심결에 수염을 쓰다듬던 파올은 내일 면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엘란과 하이론을 데려갔으면 합니다.” 엘란은 무력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야 했고, 하이론은 의술에 조예가 깊고 여러 모로 견식이 넓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좋은 생각 같네요. 반대하거나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말씀하세요.”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성녀는 카이어스를 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파올대사제, 하이론, 엘란 이렇게 결정이 났습니다.” “내일 정오에 살.....살인 이 일어났던 쟝의 화원으로 나오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국외자의 입장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카이어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세 분만 남고 모두들 돌아가세요.” 성녀의 말이 끝나자 사제들과 우호법사 조루주가 무거운 발을 이끌고 조용히 퇴장했다. 언제나 머금고 있던 입가의 잔잔한 미소가 사라진 성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엘란은 “이런 사소한 변화가 사람의 인상을 이렇게나 바꿀 수 있구나” 하는 다소 한가한 생각을 하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을 밀어냈다. 성녀가 굳은 얼굴로 세 사람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숲에서의 생활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지만 배를 곯는 교도들은 없었으며 무엇보다 교도들의 안전을 위해 마음 졸일 일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처음 맛본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고 그런 절박한 심정은 떨리는 손을 따라 엘란의 가슴속으로 고요히 스며들었다. 즐거운 추수를 하루 앞두고 벌어진 사건은 교도들의 평안한 삶을 뿌리 채 흔들어대고 있었다. *********************************** 아무것도 모르는 교도들이 추수를 한다고 흥겹게 돌아가는 시간에 일단의 사람들이 쟝의 화원에 모여 있었다. “약속을 해놓고, 서품식에 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코리나와 데미의 얼굴을 보자 약속이 생각난 엘란은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코리나가 환하게 웃자, 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향기와 아름다움이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조르주가 얼굴을 붉히자 하이론이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이젠 에쉴리에서 코리나로 진로를 바꾼 거냐” 유부녀보다야 과부가 낫긴 하다만 노리는 놈들이 많아서 잘 될까 모르겠다.” 당황한 조르주가 허둥거리며, 그를 끌고 화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무슨 소립니까”“ 그가 정색 하자 하이론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헤실 거렸다. “자식이 부끄러워 하긴....네가 에쉴리 좋아했다가 지금은 코리나한테 마음이 가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억! 다...다다... 알다니, 어...어...어....떻게”“ 당황을 넘어 경악에 빠진 그가 말을 더듬자 하이론이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도 참 어지간하다. 느끼한 눈빛으로 괜히 주변을 맴도는데 모를 사람이 누가 있다고. 네가 에쉴리 짝사랑한 건 엘란 빼고는 모두 아는 사실이고, 지금은 코리나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모두들 눈치 채고 있어. 그 둔한 엘란까지도 다 안다. 나이를 먹었으면 적당한 짝을 찾아야지 어쩌자고 그런 미인들한테만 눈독을 들이는 거냐”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니까 적당한 짝을 찾아.” 하이론은 그의 벗겨진 머리와 불룩한 배를 가리키며 충고를 던졌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들켜 공황상태에 빠진 조르주의 귀는 어떤 소리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이!” 그의 눈앞에 손을 대고 휘휘 저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 하이론은 머리를 저으며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 형, 조르주 왜 저래”> 하이론삼이 수화로 물었다. “뭐 별거 아니다.” 하이론은 대충 얼버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쬐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에쉴리가 엘란의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럴게.” 마주 보는 눈 사이에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고 있었다. 엘란은 예전에 살 곳을 찾아 섬을 떠나 메디치항으로 떠나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 날도 이때처럼 불안과 초조가 안개처럼 떠다니고 있었었다. 해가 가장 높은 위치에 이르렀을 때 카이어스가 나타났다. “가자!” 엘란, 하이론, 파올이 카이어스의 뒤를 따라가자 남아있던 사람들의 불안한 눈초리가 그들의 등을 초조하게 쫓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아까부터 싱글벙글 하십니까”“ 파올과 자신은 앞날이 걱정되어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하이론 혼자서만 즐겁게 보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거지상 쓰고 있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게 좋게 생각할 일입니까”“ “인상 쓰는 것 보다야 낫지. 게다가 사건이 벌어진 덕에 엘프들의 삶을 구경할 수도 있지 않느냐” 어이! 카이어스, 당신들 마을에 인간이 방문한 것도 오랜만이지”“ “근 1,200년 만이니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지.” “1,200년이라.......” 파올의 음성에는 깊은 감회가 서려있었다. 만약 살인만 없었다면 하이론의 말마따나 기쁘고 흥분된 방문이 되었을 것인데... “카이어스 당신 얘기 좀 해 보세요. 엘프사회가 답답해서 인간들의 땅으로 나왔다는 얘기나 장로들 반응으로 살펴보면 당신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인 것 같은데, 그런 겁니까”“ 엘란이 물었다. 그들로서는 엘프들의 마을에서 안내인 겸 조언자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대답여하에 따라서 그는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였나”“ “살인이 일어나고 처음에는 당신을 의심했었는데.......장로들이나 시리우스의 반응을 보니 당신을 좋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 사실이다. 나는 사회에 적응 못한 부적격자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적응 못했지” 주입인가 뭔가를 했으면 당연히 적응을 했을 것 아닌가”“ 하이론은 엘프들에게 말을 놓기로 결심했다. 재판에 들어가면 동등한 입장에 서야했고, 그러자면 말투를 같게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입과정에서 사고가 있었다. 그 바람에 제대로 입력받지 못했고, 방어기제도 완전하지 못해서, 꽉 짜인 엘프사회가 못 견디게 답답했다. 당연히 윗분들과 마찰과 갈등이 생겼고.” “자네는 무슨 주입을 받았나” 정령사” 아니, 몸을 보니 검사 같은데, 맞나”“ “.......” 카이어스는 입을 조개처럼 꽉 다물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30분 정도 더 걸어가자 공기가 일렁거려서 안쪽의 공간이 조금씩 꺾여 보이는 이상한 곳에 당도했다. 결계였다. 호기심이 인 하이론이 팔을 불쑥 밀어 넣는 바람에 긴장하고 있던 파올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호!” 안 쪽으로 들어간 팔은 이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밖을 향하고 있었다. “재밌는데!” 그는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5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거꾸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착시현상입니까”“ 엘란이 물었다. “착시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다.” 쿵! “어이쿠!” 돌연 밖으로 튀어나온 하이론이 머리를 싸매고 바닥을 굴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자욱한 안개가 몸을 감싸는 통에 앞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들이마시는 공기도 축축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더니, 별안간 밑이 꺼지는 바람에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게다가 밑이 꺼지면 아래로 떨어져야 하건만 머리부터 떨어지는 통에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했다. “왜 위로 떨어진 거지.......” “그게 위가 아니라 밑입니다. 거꾸로 걷고 계셨어요.” 엘란은 결계 안으로 들어가며 대꾸했다. “뭐라고! 말도 안 되는.......”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딱 벌렸다. 엘란이 거꾸로 서서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나도 모른다. 결계를 치고 유지하는 엘프들은 따로 있다.” “왕따라서 그런가 모르는 것도 많네.” 하이론이 투덜거리자 카이어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왕따” 무슨 말인가”“ “따돌림 받는다는 소리다.” “왕따! 왕따!” 카이어스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머리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지 한 동안 되새김을 멈추지 않았다. “거참, 소도 아니고 되새김질은.” 탁! 엘란은 하이론처럼 거꾸로 쳐 박히지 않고 사뿐하게 내려섰다. “젠장!” 그는 그게 불만인지 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거꾸로 걸으면 거꾸로 걷고 있다고 경고를 해줬어야...” “그만 갑시다.” 이러다간 늦을 것 같은 생각이 든 파올이 말을 끊었다. 카이어스가 품속에서 면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꺼내 푸른 색 가루를 결계에다 뿌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크게 소리쳤다. “#&%*($#.” 푸시시! 푸른 가루와 만난 곳에서 노란 연기가 피어오르며 일렁이던 공간 사이에서 작은 틈이 생겼다. “따라 오라!” 파올은 행여나 그를 놓치면 결계 안에 평생 갇혀 지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열심히 그를 쫓았다. 엘란이 둘러 본 주변 풍경은 그야 말로 요상했다. 전과는 다르게 짙은 안개는 모조리 사라져 버렸고, 깜깜한 암흑이 자신들을 반기고 있었는데 공간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물 속에 잠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공기 없는 공간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휴!” 파올대사제는 결계를 나서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무릎을 두들겼다.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속옷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고, 무릎까지 아려오는 것이 신경통이 도지는 것 같았다. “이야! 대단한데.” 하이론은 순순한 감탄을 발했다. 안 쪽에서 본 결계는 밖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라서, 밖의 풍경이 세세하게 보이는 가운데 어떤 막이 두 공간을 구분지어주고 있어서 아주 투명한 유리를 쳐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10미터는 족히 걸었던 것 같은데 안에서 보니 겨우 10센지가 될까 말까했다. “늦었다.” 카이어스는 한 마디만 하고는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어이! 같이 가.” 하이론이 종종걸음으로 따라 붙었다. “아! 정말 대단한데요.” 이번에는 엘란이 감탄했다. 결계와 가까운 숲은 자신들이 살던 숲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는데 안 쪽으로 들어가자 나무가 드문드문 해지면서 형형색색의 꽃들과 초목들이 자신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폭이 2미터 쯤 되는 길에는 붉고, 푸르고, 노란 돌들이 서로 맞물려서 깔려 있었는데, 양 옆으로 반듯하게 구획 지어진 땅들에 일곱 가지 색들의 꽃들이 저마다의 향취를 뽐내고 있었다. 다른 색의 꽃들을 구분지어 주는 것은 희고, 검은 풀이었는데 푸른 색의 풀만 보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무채색 풀들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 참 오래살고 볼 일이다. 검은 색 풀에다 흰색 풀이라니!” 간간이 서 있는 나무들은 주변 나무의 방해를 받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하늘 높은 줄만 알고 땅 넓은 줄은 모르는 것인지, 위로만 쭉쭉 뻗어 있었는데, 그 길이가 어마어마해서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엘프들의 땅으로 들어온 이유를 잊을 정도로 이국적인 풍광에 흠뻑 취한 사람들의 얼굴에 따가운 시선들이 내려 꽂혔다. 살해된 그루비어와 같은 임무를 받은 정원사들 같았는데, 아름다운 꽃을 돌보던 엘프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망할!” 소름이 오싹 끼쳐지며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꽃을 돌보는 정원사들은 많아졌고, 그에 비례해 전신을 난도질 할 것 같은 냉랭한 시선들도 늘어났다. 그 바람에 아름다운 풍경들이 더욱 도드라졌고, 비현실적인 세상에 발을 디뎌놓은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턱! 엘란은 엘프들이 주는 무언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파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갔다. “떨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의 강한 어조가 파올 뿐 아니라 하이론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안정시켰다. 조금 더 걸어가자 돌길이 끝나고 잔디가 곱게 깔린 숲이 나타났는데 곳곳에 서 있는 밑동 넓은 나무가 시선을 끌었다. 길이에 비해 아랫부분이 너무 넓어서 양파를 연상케 하는 나무였다. “엘프가 사는 곳인가 보지”“ 밑동이 열리고 거기에서 엘프가 나오자 하이론이 물었다. 카이어스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엘란이 보기에는 그도 자신들 만큼이나-어떤 면에서 본다면 더욱 더-긴장한 것 같았다. 여기에서 만난 엘프들은 앞의 엘프들처럼 노골적으로 노려보지는 않았지만 힐끔거리는 시선 속에는 강렬한 적의가 불타고 있었다. 양파같이 생긴 나무들의 군락지를 지나자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무의 둘레는 적어도 백명 정도는 둘러서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길이도 하늘을 찌를 듯이 길어서, 지나쳐왔던 양파모양의 나무와 하늘 높은 줄만 알던 길쭉한 나무 두개를 동시에 포개 놓은 것 같았다. “여기는 엘프들이 없네.” 일생일대의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걷던 하이론은 주위에 엘프들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 중얼 거렸다. “위를 보세요.” 엘프들의 기척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던 엘란이 주위를 환기시켰다. “음!” 고개를 올려 쳐다본 하늘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어서 유령처럼 보였다. 나무들의 가지와 가지들은 마치 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는데 밑에서 보기에는 촘촘한 그물이 숲에 드리운 것 같았다. 엘프들의 훌륭한 교통로가 되어주는 가지들은 밑을 지나는 사람에게는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같이 느껴져서 또 다른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어째 으스스 하다.” 하이론은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카이어스는 어떤 나무 앞에 일행들을 안내해 놓고 별다른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들어가라는 건가.......” 하이론이 중얼거렸다. “그런 뜻 같습니다.” 똑똑똑! 나무로 다가간 파올은 문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다 입구를 찾아내지 못하자 집이 아니라 보통의 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비어있나 알아보기 위해 나무를 두들겼다. 드득! “억!” 틈도 보이지 않는 나무에서 벌컥! 문이 열리자 놀란 파올이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쟝”" “어!” 문이 열리고 나타난 얼굴은 쟝이었다. “구해 주러 왔구나!”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린 쟝은 감격한 얼굴로 하이론을 끌어안더니 서두르기 시작했다. “뭐해! 어서 도망가야지!” “구해주러 온 게 맞기는 한데... 몰래 도망가려고 온 건 아닙니다.” 엘란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럼 왜 온 거냐”“ “당연히 재판에 참여 하려고 왔지.” 하이론이 대답이 의외였는지 쟝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재판! 하, 미치겠네! 여기서 공정한 재판이 된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볼 밖에.” “니들이 사정을 잘 몰라서 그래. 엘프들 눈초리가 어찌나 살벌한지 오금이 저릴 정도라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도망가자! 응”“ 쟝은 다급한 마음에 엘란을 붙들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도망가면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쟝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도망치려 해도 결계부터 시작해서 사막까지 걸림돌이 한, 두 개가 아니었고, 엘프들과 이웃하며 계속 살아야하는 교도들의 입장도 감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마솥에 든 고기신세 마냥 옴짝 달싹 못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오뉴월 개처럼 낑낑거리는 데 나무 안으로 들어온 하이론은 감탄사까지 터트리며 집안 구경을 하자 열이 받은 쟝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한가하게 집 구경 할 때야”“ “너무 그렇게 열 내지 마라, 우리도 충분히 고심하고 있으니까.” “그게 고심하는 태도야”“ “너처럼 우거지상으로 있는 것 보다야, 사태를 즐겁게 맞이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흥, 자기 일 아니라고.” 쟝은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곧 울상이 되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망할 놈의 엘프같으니! 딴 자리 다 놔두고 하필이면 내 집에서.......” 파올은 하이론의 옆에 서서 벽을 관심 있게 둘러보았다. 허연 속살을 드러낸 자연 그대로의 나무에는 실핏줄 같은 가는 관이 전체를 뒤덮고 있었는데, 천천히 움직이는 수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하이론, 살아있는 나무속을 파내서 집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원래부터 속 안이 비었을 까요”“ “제 생각에는 원래부터 있던 나무안의 공동에 손을 약간 봐서 집을 만든 것 같습니다.” 엘란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나무 안에 만들어진 엘프들의 집을 둘러보았다. 지름이 9미터 가량 되는 원형의 내부에는 작은 의자와 탁자, 그리고 중앙에 놓여진 침대하나가 다였다. “감옥치고는 괜찮은데요.” “감옥이 아닙니다. 저희들한테 감옥은 없습니다.” 아리아나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감옥이 없다니” 그럼 엘프들은 죄도 짓지 않는 다는 말인가” 그럼 재판은 또 뭐고”“ 하이론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에 살인, 강도, 사기 같은 범죄는 없습니다. 그러니 감옥이 필요 없지요. 다만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장로들의 의견을 구하고, 거기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약식 재판이 벌어지기도 합니다만 정식으로 재판이 벌어지는 것은 근 500년 만의 일입니다.” “완벽한 세계라는 건가!” 파올이 순수하게 감탄한 반면, 하이론은 점점 재판에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럼 유죄판결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쟝은 감옥이 없는 공동체니 어쩌면 처벌이 약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질문했다. “당신 죄목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 영롱한 목소리가 죽음을 입에 담자 더할 수 없는 공포가 유령처럼 창백한 쟝의 얼굴을 떠돌았다. “재판은 어떻게 진행 됩니까”“ 엘란은 실무적인 일부터 진행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정식재판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발인이 되어 피고발인-줄여서 피고라고 합니다-인 쟝의 죄를 청하면, 여러분들은 쟝의 대리인이 되어 그를 변호합니다. 대장로이신 아주르갈님이 심판장이 되어 재판을 진행시키고, 배심원단이 유,무죄를 결정하면 그에 따라 심판장이 형량을 결정합니다.” 아리아나의 말대로 너무 간략한 설명인데다가 귀족 한 명이 재판관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대륙의 사법체계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아서 일순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당신이 쟝의 죄목을 적시해서 고발하면, 대장로가 유,무죄를.......” “아닙니다.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열명의 배심원단이 하는 일이고, 심판장은 재판의 진행과 형량만을 결정합니다.” “그럼 배심원단이 재판한다는 말입니까”“ 엘란이 물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배심원단은 누가 합니까”“ “보통은 일반인들이 돌아가면서 합니다만, 이번 경우 같이 중대한 경우는 두 분의 장로들이 배심원단에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열 명 중에서 두 명은 장로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일반인이라.......” 파올은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여덟 명은 어떻게 뽑습니까”“ “순번에 따라 정합니다.” “만약 재판 결과가 5:5 동수로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는 심판장의 결정에 따라 유, 무죄가 좌우됩니다.” 쟝은 모든 희망을 포기했는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기계적으로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배심원단의 구성이 공정한 엘프들로 이루어 질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만...” 눈을 뜬 파올이 말을 흐리며 의문을 표했다. “30명의 예비배심원단 중에서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고를 기회를 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우리가 그 중에서 배심원단을 고른단 말이오”“ 하이론이 끼어들었다.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발인과 대리인은 각각 열, 번의 거부권이 있어서 싫은 사람을 피토할 권리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둘이 이미 결정됐으니 여덟 번의 비토권이 있습니다.” “둘이라면”“ 엘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포르티걸과 더르터크장로님이십니다.” “......!” “.......” “젠장!” “난 이제 죽었구나!” 엘란과 파올은 침묵을 지켰고, 하이론은 욕설을 내뱉는 가운데 쟝은 허탈하게 두 손을 치켜 들었다. 화원에서의 행동을 보건데 그들의 판결은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재판은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정확하게 일주일 후부터 시작입니다. 그 기간 사이에 수사를 하거나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십시오.” “아무데나 돌아다니고 아무나 심문해도 괜찮은 겁니까”“ “아뇨,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도 있으니까요. 일단 저희측에서 안내인을 붙여 드릴 테니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십시오.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알려줄 겁니다.” “안내인이 누군데”“ 하이론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카이어스 입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도 인간들과 엮기기 싫어서 할 수 없이 그가 결정된 것 같았다. 아리아나가 돌아가자 심각한 말들이 방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공정한 재판이 될까”“ 하이론의 물음에는 회의와 희망이 절반씩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엘프들 눈빛을 보면, 모두 유죄라고 확신하는 것 같던데.......” 엘란이 쟝의 얼굴을 보며 말을 흐렸다. “하긴!” 들어오면서 본 엘프들의 얼굴과 시선에는 경멸과 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이미 결과는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았다. “쟝에게 동정적인 배심원을 뽑으면 무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파올의 말에는 힘이 없어서,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티가 점점이 묻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유죄를 확신하는 얼굴이던데.” “결론은 하나다!” 힘없이 쭈그러져 있던 쟝이 벌떡 일어서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많은 위험을 넘기며 이어온 목숨! 여기서 끝장낼 수는 없었다. “우리 손으로 범인을 잡는 수밖에 없어!” 그의 음성에서 열기가 넘실거렸다. “커어~.” 한 동안 의욕적으로 설치던 쟝은 곧 침대에 눕더니 잠이 들어 버렸다. 코고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자 파올은 한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허! 참, 이 친구 태평하구만, 목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달게도 자네.” “쟝이 원망스럽습니까”“ 그의 음성에서 약간의 원망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엘란이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네.” 대사제라는 파올의 입장에서 보면, 괜히 그 자리에 화원을 만들어서 분란을 자초한 쟝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쟝이 아니었더라도 교도들 중 누군가가 누명을 뒤집어썼을 테니 오히려 그가 그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이론이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꼭 쟝이라서 다행스러울 것까지야 있습니까”“ 엘란은 하이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누명을 쓰든 마찬가지 아닌가” “일반 교도 보다야 쟝이 뒤집어쓰는 게 나아. 가까이 있어서 잘 모르나 본데, 위급한 상황을 많이 넘긴 쟝이 순박한 교도보다 훨씬 의연하게 사태를 맞이할 수 있어. 게다가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놈은 운이 좋아서, 웬만해선 죽을 것 같지가 않아.” 엘란은 코르도바습지에서 하이론과 나누었던 대화-쟝은 악운에 강하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자신도 쟝에 대해서라면, 별다른 걱정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목숨이 걸렸다면 이렇듯 평온하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쟝이 들으면 화내겠는데요.” “하하하! 거품을 물겠지.” “영감!” “억!” 갑작스런 쟝의 외침에 놀란 하이론이 헛바람을 삼켰다. “쿨~.” “휴! 잠꼬대구만.” 대화에서 소외된 파올은 입맛을 다시며 편안하게 잠들어있는 쟝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이론과 엘란 말마따나 운이 좋아야 할 거요, 당신을 위해서나 우리 교도를 위해서나!” --- 18장. 재판 투명한 햇살이 천천히 내려와 일부는 나뭇잎에 나래를 접었고, 일부는 바닥에 닿아 곱게 깔린 잔디를 달군 후 짙푸른 녹음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가을날의 상쾌하고 알싸한 공기가 목구멍으로 들어와 기관지를 거쳐 허파꽈리에 닿자 청량한 감각이 뇌를 일깨우고 잠을 쫓아버렸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늦잠을 자버린 파올은 숲 특유의 신선한 공기로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냐 오냐 하니까, 이제 아주 기어오르는 구나!” 살인사건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그의 평온도 하이론이 고성에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내 재판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데 영감이 무슨 상관이야!” 쟝은 하이론의 고성에 질세라 악을 써댔다. “이게 너 혼자만의 문제라면 그렇게 하겠다만 누누이 말했듯이 다른 사람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네 마음대로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알겠냐”“ “알기는 쥐뿔이 알아! 어쨌든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영감은 신경 쓰지 마!” 둘의 이런 다툼을 자주 접했던 엘란은 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던 반면에, 기분 좋은 아침이 산산이 조각난 파올은 길길이 날뛰는 둘을 보며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큰일이 난 건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털컥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무슨 일 났습니까”“ 그의 음성에 불안과 근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 대사제 잘 왔습니다. 아니 글쎄 이 호랑말코 같은 놈이, 배심원을 전원 여성으로 구성하겠다지 뭡니까!” “여성이 어때서! 영감이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공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 당연히 배심원단은 모조리 여자로 구성해야 돼! 특히! 나 같은 미남이 재판을 받으면 여성들의 동정표가 쏟아질 거란 말야. 배심원을 남자로 구성했다고 생각해 봐 나를 질투한 놈들이 전원 유죄를 결정할 거야!” “미친 놈! 깎아 놓은 조각 같은 엘프들이 너를 미남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냐” 너 돌은 거 아니냐” 아리아나가 너를 보는 눈을 생각해 봐라! 꽤나 동정표 쏟아지겠다.” 숨도 쉬지 않고 한 호흡에 말을 쏟아 부은 하이론은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 보기는 부드러워 보여도 마음이 돌아서면 독하기가 가을에 독 오른 독사 저리 가라다. 오는 길에 엘프들 눈 봤잖아! 이번 경우는 여자보다 남자가 낫다.” “흥흥! 영감이 무슨 소리를 하던 난 여자들만으로 배심원을 구성할 테니 그렇게 알아.” 기르던 강아지에게 개밥 주듯 한 마디 툭 던지고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는 하이론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어른이 말하는 데 버르장머리 없이 콧방귀를 꿰.” 청명한 가을의 어느 아침. 파올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껴야했다. 둘은 카이어스가 나타날 때까지 입씨름을 계속하고 있었다. 똑같이 반복되는 얘기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어제는 잘 잤나 모르겠군.” 카이어스가 나타나는 바람에 지긋지긋한 대화가 끊어지자, 기꺼운 마음이 인 파올이 엘프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인사를 한다. “오랜만입니다. 좋은 아침이지요”“ “.......” 오랜만이라니” 어제 오후에 보고 오늘 아침에 만나는 것이니 만 하루도 안 지났다. 처음 인간들의 땅으로 갔을 때, 어떤 불순한 목적을 품고 나타난 것이 아닌 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파올이 다정한 눈길로 살갑게 반겨주자 당황한 카이어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카이어스, 엘프들은 손님대접을 이렇게 하나” 왜 먹을 것도 안 줘!” 쟝에게서 카이어스에게 시선을 돌린 하이론이 투덜거렸다. 처음 접하는 문물에 혹해서 저녁 먹을 생각도 못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파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카이어스는 나무 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면 열매를 따먹어라. 손님이라면 제대로 된 대접을 했겠지만, 당신들은 불청객에 가까우니 그런 기대는 버리는 게 나을 거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자 양파같이 밑동이 널찍한 나무의 윗부분에 무성한 가지와 잎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에 노랗게 반짝이는 어른 주먹만한 과일이 보였다. 밴댕이 같은 놈들이라는 둥, 재수 없는 놈들이라는 둥, 손님대접도 못하는 놈들이라는 둥, 한 참을 투덜거리던 하이론은 엘란이 과일을 따서 앞에다 내려놓자 과일을 껍질 채 깨물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퉤, 퉷! 무슨 맛이 이 따위야!” “영감, 이거 껍질 까먹는 거야.” 하이론이 과일을 먹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흥미로운 눈길만 보내던 쟝은 보란 듯이 껍질을 까서 노란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야! 언제 먹어도 맛있단 말이야.” “너, 일부러 나한테 말 안했지”“ “뭘”“ “껍질 까서 먹어야 된다는 것 말이다.” “아냐, 내가 막 말하려는 데 영감 행동이 너무 잽싸서 말할 새가 없었어.” 하이론은 껍질을 까며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쟝의 행동을 따라하자 껍질은 쉽게 까졌다. 빨간 꼭지가 붙은 윗부분에 양 엄지를 가져다 대고 밑으로 누르며 밖으로 당기자 껍질은 두 조각으로 쉽게 갈라졌고, 흰 줄이 쳐진 노란 속살이 햇살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한 입 깨물자 달콤한 과즙과 부드럽게 씹히는 질감이 입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거 무슨 과일인가”“ “사오라고 부른다.” “저 나무는 뭐라고 부르나”“ 집과 과일을 준다는 점에서 다른 유실수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보통의 나무와 달리 자르고 가공해서 건축할 필요가 없고 맛도 단연 뛰어나서, 자신들의 거처에 심고 싶은 욕심을 일게 만드는 나무였다. “세계수.” “이름도 멋진데. 묘목 좀 얻을 수 없을까”“ 하이론은 아주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된다. 세계수를 밖으로 반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어서 부탁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거, 참!” 하이론이 세계수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폼이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사오를 씹던 파올이 입에 든 과일을 꿀떡 삼키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살해당한 엘프의 집을 둘러보고 가까운 동료들과 이웃을 만나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안될 거야 없지.” “당장 가죠!” 엘란은 과일 서너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급히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고 쟝도 일어서는데 카이어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너는 가지 못한다.” “나는 왜...” “너는 죄수의 신분으로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자유스런 분위기로 자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쟝은 그의 싸늘한 말에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카이어스는 울상을 짓고 서 있는 그를 직접 집 안으로 데려다 놓고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일행을 안내 했다. 북쪽을 향해 방향을 잡자, 어제 지나쳤던, 잔디가 곱게 깔리고 길쭉한 나무가 위로 쭉쭉 뻗은 숲이 나타났다. “여기다.” “엥”“ 엘프의 발길이 멎자 하이론이 괴상하게 반문했다. 여기에 집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원사들은 저 나무위에 산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는 파올의 얼굴에 기막혀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목이 아플 정도로 높은 곳에 집을 만들었단 말인가! 가지가 나오고 잎이 우거진 곳은 40미터 쯤 올라가야 되는 곳이다. 단 하나의 가지도 없어 늘씬하게 뻗은 나무 위를 무슨 수로 올라가는가” 그의 의문을 해소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카이어스가 나무에 손과 발을 대더니 손쉽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평지를 기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빨판이라도 붙었나”“ “올라와라!” 어느새 40미터를 올라간 카이어스가 재촉을 한다. 엘란은 정령을 불러 하이론과 파올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그들이 다가오자 엘프는 잎이 우거진 가지 사이를 그대로 쑥! 들어가 버렸다. “히야!”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곳은 하이론에게 놀람을 안겨주었다. 못과 같은 인공적인 구조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의 성장을 교묘하게 유도해서 만들어진 집은 화려하거나 실용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사방으로 뻗어 위로 솟구친 가지는 벽을 만드는 통나무의 구실을 했고, 한 곳에 수북하게 돋아난 잎은 천연의 침대 구실을 했는데 부드럽고 푹신한데다 상쾌한 향까지 풍겨서 잠자기에는 최고의 침대로 보였다. 바닥의 평평한 가지 중에 간혹 위로 혹같이 솟구친 가지가 있어서 자연스레 탁자와 의자의 구실을 하고 있었고, 벽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가지는 옷걸이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하이론은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구를 가지의 생장을 조절해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모습에서 엘프정원사의 우수성을 절감하고 있는데 파올은 그와는 달리 당혹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당황하는 그를 보는 엘란의 음성에 긴장이 묻어나고 있었다. “곤란해.......아주 곤란해........” 그가 대답 없이 중얼거리기만 하자 하이론까지 긴장하기 시작했다. “뭐가........” 하이론의 말을 끊고 파올의 질문이 엘프에게 날아들었다. “정원사의 모든 집이 이런 구좁니까”“ “그렇다.” “개인적인 물품은 전혀 없습니까”“ “일부는 좋아하는 꽃을 키우기도 한다만 보통은 모두 같아. 옷가지나, 전지가위 같은 일에 필요한 도구들....뭐 대충 그런 거.” “옷가지나 도구들도 모두 같은 걸 소유합니까”“ “같은 거다.” “왜 그러십니까”“ 엘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보통 사람들의 소유물을 살펴보거나 거처에 가보면 그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데 여기는......”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푹 내쉰 그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휴! 살해된 엘프의 거처에 오면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모든 정원사의 집과 가구 소유물이 같다면 그의 특성이나 성격을 알 수 없고 또 살인의 동기도 파악하기 힘들다.” 결국 알아낸 것이 하나도 없고, 앞으로도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렇군요.” 엘란의 음성에도 기운이 빠졌다. “뭔가 있을 거다.”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듯한 중얼거림과 함께 하이론이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뒤질 것도 별로 없었다. 단순한 구조만큼이나 소유물도 단출하기 그지없어서 수색은 금세 끝나고 말았다. 만약 이 엘프가 사람이라면 극빈층이라 할만했다. “엘프들은 개인 소유가 금지되어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엘프가 가난한 건가”“ “개인소유가 금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처럼 쓰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이가 어린 탓이기도 하고.” “나이가 어리다니”“ “살.....해당한 엘프는 160살이다. 그래서 엘프들 감정이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잠깐,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엘프들 중에는 부자가 없습니까”“ 파올은 믿기 어렵다는 어조로 질문했다. “엘프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다. 당연히 부자도 없지.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소요가 되는 사람만이 소비한다.” “공동생산에 공동소비라! 쓸데없는 낭비도 없고, 완벽한 공동체로군.” 하이론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엘란은 셋의 대화를 경청하는 가운데 뭔가 부조화를 느꼈다. 분명히 귀에 거슬리는 뭔가가 있는데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고 머리 속을 뱅뱅 맴도는 것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잠시간의 침묵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 카이어스의 방관자적 눈이 잡히자 머릿속이 환해지며 이상한 점이 똑똑하게 부각되었다. “카이어스, 당신 정상적인 엘프가 맞습니까” 대화하는 투가 마치 엘프가 아니라 제삼자 같습니다.” 그는 어떤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우리라는 단어 대신에 항상 엘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것이 엘란에게 어떤 위화감을 안겨주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은 아니다. 너희들 말마따나 왕따이기도 하고.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면 이제 그루비어의 동료들을 만나러 가자.” “......!” “......”“ 휙!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저놈 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 안내인이라는 놈이 자신의 입으로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늘어놓자 하이론은 그가 미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완전히 접어버렸던 생각-혹시 카이어스가 범인이 아닌가 하는-까지 다시 떠올랐다. “자세히 관찰할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파올도 같은 생각인지 하이론의 눈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런 단서가 없자 여기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만 가시죠.” 엘란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정령을 불러 일행을 데리고 집을 내려갔다. 카이어스는 벌써 저 너머까지 멀어져 있었다. “가르모니, 이스루나!” 카이어스는 이미터 정도 크기의 이름모를 나무들이 자연적으로 벽을 만드는 화원 앞에 서서 살해된 엘프들의 동료를 불렀다. “그루비어와 같이 일하는 엘프들이다.” 그들이 나타나자 전과 다름없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그의 얼굴에는 방관자적 표정이 떠올랐다. 교도들의 거처에 나타났을 때 짓고 있던 풍부한 표정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딱딱한 표정만이 그의 얼굴을 맴돌았다. 갈색머리칼을 제외하고는 다른 엘프들과 전혀 구별이 가지 않는 가르모니와 이스루나가 적대적인 눈빛으로 인간들을 쏘아보았다. 말을 걸기가 꺼려질 정도로 쌀쌀맞은 얼굴이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루비어와 특별히 사이가 좋지 않거나, 싫어하는 엘프는 없었습니까”“ 파올이 불편한 얼굴로 물었다. “없다!” “원한을 살만한 엘프들은 없었습니까”“ “없다!” “그가 탐나는 물건을 가진 것은 없었습니까”“ “없다!” “그가 불만을 토로한 일이나 엘프들은 없었습니까”“ “없다!” “그럼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엘프들은 없었습니까”“ “없다!” “사귀는 엘프나 좋아하는 엘프도 없었습니까”“ “없다!” 엘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숫제 수사가 되지 않고 있었다. 무조건 없다는 엘프들을 상대로 무슨 탐문이 되고 무슨 수사가 되겠는가” 파올이 지쳐 뒤로 물러나자 하이론이 나서서 끈질기게 물었지만 빌어먹을 “없다”라는 말을 제외한 어떤 말도 엘프의 입에서 튀어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구경만하는 엘란까지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붉은 석양을 뒤로 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들의 등은 축 쳐져서 마치 소금을 친 채소 같았다. “범인 잡았어”“ 집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쟝은 그들이 오자마자 질문을 퍼부었다. “무슨 단서라도 잡았어”“ 하이론이 힘없이 고개를 흔들자 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이 때까지 뭐 한거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맥 빠진 엘란의 음성이 어둠과 함께 깔렸다. “이봐! 수사를 할 때는 말이지 돈과 여자를 따라가는 거야! 모든 범죄의 뒤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고, 거기에는 반드시 돈이 결부되어 있단 말이야!” 쟝은 지쳐서 축 늘어진 그들을 앞에 두고 일장 훈시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게....그렇게 쉬운 게 아니네.” 파올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자 하이론이 그 뒤를 이었다. “공동생산에 공동소비. 개인 재산은 거의 없고, 필요한 만큼 생산해서 쓸데가 있는 사람만이 소비하는 완벽한 공동체에다 사귀는 여자나 싫어하는 엘프가 전혀 없는 어린 엘프. 젠장! 의심스러운 점이 하나도 없다. 만약 있어도 적대적인 엘프들을 심문해서는 알아낼 것은 하나도 없어.”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하이론의 말대로라면 사회전체가 철저히 금욕적인 수행으로 유명한 해브림수도원 같지 않은가. “아니지”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하이론의 대답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쟝의 얼굴은 팔색조를 방불케 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쟝은 설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도 싫었고, 힘 빠진 그들의 얼굴을 보니 별달리 기대할 것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이어스가 오자, 쟝은 자신도 따라가야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그가 너무 쉽게 승낙하는 바람에 오히려 기운이 빠져버렸다. “이봐! 이렇게 쉽게 승낙할 거면 어제는 왜 못 따라오게 한 거야”“ “당신을 위해서다. 어제는 살해당한 엘프의 동료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불상사라도 날까봐 막은 것이다.” “쳇! 고양이 쥐 생각하네.” “빈정거리지 말고 오늘의 행선지나 말해주는 게 어떤가”“ “에......그러니까......음......가설라무네.......” 딱히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에 말하기를 우리가 갈 수 없는 금지된 곳이 있다는데, 가능하면 거기로 안내해 주시오.” 파올이 끼어들었다. “안 된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살펴만 볼 거요. 카이어스는 간략한 설명만 해 주면 됩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던 엘프는 꺼림칙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좋다. 데리고는 가겠다만 말썽은 부리지 마라! 거기서 일을 벌였다간 재판이고 뭐고 당장 끝장이 날 테니.” 그는 어제와 반대방향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세계수가 조밀해지고 그에 따라 도로처럼 우거진 가지를 따라 이동하는 엘프들의 숫자도 많아졌다. 위에서 쏟아지는 살벌한 눈초리가 하이론과 파올, 쟝의 어깨를 저절로 움츠리게 만들었다. 한 시간정도 걸어서 조밀한 세계수 사이를 지나치자 확 하고 시야가 트이는 널찍한 공지가 나타났다. 꽃이나 나무가 전혀 자라지 않아서 한 눈에 보기에도 중요한 티가 팍팍 풍기는 그러한 곳이었다. 일행을 안내한 카이어스의 얼굴은 사후강직이 일어난 시체의 얼굴보다 더 굳어 있어서 안으로 발을 들여다 놓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이 곳이 어딥니까”“ “어린 엘프들을 교육시키는 곳이다.” “그럼, 기본인성을 주입한다는 곳입니까”“ “맞다.” 엘란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따라와라!” “카이어스가 안으로 들어가기 꺼리는 것 같지”“ 보폭을 크게 해서 성큼 성큼 걷던 그의 걸음이 잔걸음으로 바뀌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하이론은 엘란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닥거렸다. “.......” “.......” 목적지에 당도한 일행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못 믿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공지의 중안은 깊은 구멍이 패여 있었는데 어찌나 넓은지 지름이 5키로는 넘을 것 같았고, 그 큰 구멍 안을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위에서 보기에는 짙푸른 바다 같았다. 수해의 바다! 그저 푸르게만 보이는 공동 안은 죽음의 공간처럼 일체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내려갑시다.” 파올이 제안하자 카이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왜 못 가는데”“ 한 참을 내려다보자 어지러워서 머리가 핑 돈 쟝은 뒤로 물러서며 따지고 들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곳은 어린 엘프들의 기본인성과 특성에 대해 입력을 하는 곳이다. 방어기제를 가지지 못한 엘프들은 주위의 것을 본능적으로 동화시키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갔다가는 큰 일이 벌어진다. 특히 인간들인 당신들이 들어가서 어린 엘프들이 당신들의 나쁜 요소를 동화시켰다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던 카이어스는 몸을 돌려 공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젠장! 다리품만 팔았지 건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쟝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일행들은 부지런히 카이어스의 뒤를 쫓았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가운데 시간은 쏘아놓은 화살같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재판일이 다가오자 안달이 난 쟝은 카이어스를 재촉해서 천지사방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엘프들의 적대적인 시선만 받았을 뿐 성과는 없었다. 워낙에 엘프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다가 건성으로 대하는 엘프들 탓이었다. 얻은 것이 있다면 엘프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한 것뿐이었으니 본질적인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었다. “똑똑똑!” 재판 당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기겁한 쟝이 숨을 곳을 찾았으나 단출한 집안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엘프의 땅에 끌려왔어도 생각보다 의연하게, 어떤 면에서는 뻔뻔하기까지 하더니 막상 일이 닥치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쟝의 운도 끝인가!” 재판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는 엘란도 마찬가지였다. “익익!” 겁을 집어먹은 쟝은 기를 쓰고 문고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문은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밖에서 고동색 부분을 누르면 자동으로 문고리가 풀리게 되어 있었다. 그 부분을 쟝이 꽉 누르자 밖에서 아무리 눌러대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덜컹! 쟝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엘프의 집은 문이 하나가 아니었다. 문의 반대쪽에 새로운 입구가 생긴 것이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지 뻑뻑하기는 했어도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놔! 놔! 엘란! 하이론! 파올!” 활을 매고 있는 엘프 둘이 쟝의 양팔을 움켜쥐고 당기자 사지를 뻗대며 버둥거리던 그는 맥없이 끌려 나가며 애절하게 일행들을 불렀다. “재판은 해가 꼭대기에 떠오를 때 시작된다.” “썅! 정오(正午) 더럽게 좋아 하네.” 하이론은 답답한 마음에 욕설이 저절로 나왔다. 재판이 벌어지는 곳은 공회당역할을 하는 건물이었는데 엘프들의 숲에서는 유일하게 인공적인 건물이라 했다. 쇠로 기초와 기둥을 세우고 죽은 나무를 목재로 사용해서 만들어졌다는 돔형의 건물은 거대한 돌기둥이 호위하듯 빙 둘러서 있어서 강렬한 위압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조화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엘프들의 속설을 떠올리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었지만 같이 부대끼며 느껴본 느낌에 의하면 아름답게 가꾼 숲이나 나무의 특성에 맞추어 자연스레 만들어진 엘프들의 집보다 훨씬 더 그들의 특성에 맞는 건물 같았다. 우윳빛 투명한 광택을 발하고 있으나 대리석은 아닌, 미지의 돌로 만든 기둥에는 엘프들의 문자가 아름답게 양각되어 있었는데 자연스레 풍화된 글자에서 그들의 긴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공회당의 주위에는 수백 명의 엘프들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파올은 대륙인들은 평생가야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전설속의 엘프들 수백 명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니, 일이 아니라 여행을 하다 구경 차 들린 길이었다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적대적인 시선을 뚫고 돌계단을 오르자 긴 회랑이 나타나고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자 검게 칠한 문이 불길한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릴 때, 듣기 싫은 소음을 발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한다면 엘프들 말대로 이런 재판은 몇 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 맞는 것 같았다. 안은 부채꼴의 널찍한 방이었는데 오백 석 가량 되는 방청석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통로에도 엘프들이 들어서서 그들을 헤치고 아래로 내려가자니 꽤 힘이 들었다. 울상을 짓고 앉아있는 쟝의 옆 이른바 변호석에는 카이어스가 앉아있었다. “당신은 왜 온 거요”“ 하이론이 불퉁하게 물었다. “당신들 안내인 자격으로 조언을 할 거다.” 하이론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탁자의 결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답하는 그의 음성에도 짙은 긴장이 묻어나고 있었다. “왜 이 엘프는 이렇게나 긴장하는 것일까”“ 엘란은 그의 무표정한 옆모습을 보다 재판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채꼴의 재판장 정점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엘프가 높다란 연단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열명의 엘프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는데, 가장 안쪽에는 이미 본 적이 있는 포르티걸장로와 더르터크장로가 차가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들이 배심원인 모양이었다. 왼쪽 벽에는 고발인을 담당한다는 아리아나가 두 명의 엘프들과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고 있었는데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중앙의 높은 단 뒤에 앉아 있는 심판장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팽팽한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굵게 잡힌 주름에는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고 있었고 하얗게 센 머리와 길게 늘어진 은염은 시간의 무상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간간이 번뜩이는 칼날 같은 눈빛만 아니라면 다 죽어가는 노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늙어 보였다. 진작에 끌려와 있던 쟝은 그답지 않게 주눅이 들어서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죄인을 포위한 듯한 내부 구조는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그루비어살해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다. 피고와 변호인을 생각해서 재판은 인간들의 언어로 이루어질 것이다. 고발인 시작 하시오.” “잠깐!” 아리아나가 일어나 목청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하이론이 제동을 걸었다. “듣기로는 배심원을 뽑을 때 변호인 측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던데 왜 절차를 빼먹는 거요”“ “당신들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장이 임으로 구성한 겁니다.”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주지 않았잖소!” 하이론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대로 재판이 흘러가다가는 유죄가 확정될 것이 뻔하니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시간을 끌면서 상황변화를 유도해야 했다. “보통 때였다면 묵살했을 내용이나 인간들이 우리 법에 대해 무지한 관계로 이번만은 변호인의 이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강하게 말을 끊은 심판장의 투명한 눈이 인간들을 훑는 순간 변호인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유리알 같이 투명한 그 눈은 가슴 깊숙한 곳에 묻혀있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던, 더러운 욕망까지 세세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다음부터 이런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일일이 가르치며 재판을 진행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시간이 없는 만큼 궁금한 것은 카이어스를 통해 알아보라. 그런 목적으로 카이어스를 당신들 옆에 부쳐준 만큼 그에 따를 불이익은 감수하도록.” “젠장! 왜 카이어스를 붙여줬나 했더니 꿍꿍이속이 다 있었군!” 하이론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심판장-아주르갈대장로-은 흔들림 없이 재판을 진행했다. “그럼 배심원 구성에 들어간다. 포르티걸과 더르터크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엘프들 중 거부권을 행사할 엘프를 골라라!” 심판장의 말이 떨어지자 장로들 옆에 앉아 있던 머리를 질끈 동여맨 엘프가 일어났다. 심판장의 눈이 아리아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 없습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배심원이 누가되든 상관이 없었다. 재판은 해보나 마나였다. 나뭇잎하나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고요한 침묵 속에서 천개도 넘는 많은 수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쏠리자 얼굴 두꺼운 하이론도 식은땀을 흘렸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배심원을 선택하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배심원을 정하는 것은 짚단 속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욱 더 어려웠다. 자신을 쳐다보는 좌중의 시선에서 따가운 짜증을 느끼며 도박하는 심정으로 가부를 결정하려는 데 잔뜩 움츠려 있던 쟝이 모기 날개 짓 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잔지 물어봐.” “하!” 기가 콱 막힌 파올이 허탈한 탄식을 발할 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하이론이 입을 열었다. “당신 여자요”“ “.......” “.......” “.......” 완벽한 침묵이 넓은 재판정 안을 유령처럼 배회했다. “무슨 소립니까”“ 아리아나가 평정을 잃고 소리치자 쟝이 고개를 숙인 채 퉁명스레 맞받았다. “똑같이 예쁘장하게 생겨서 눈으로 봐서는 엘프들 성별을 판별 못하겠소. 그러니 좀 가르쳐 주시오! 설마 성별이 국가기밀이라서 말할 수 없는 건 아니겠죠”“ 말을 할수록 기운이 나는지 마지막 단어가 입에서 떠날 때는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제일 밉살맞게 생각하던 포르티걸장로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게 재판과 무슨 상관입니까”“ 아리아나의 음성에는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거야 내 맘이지. 내 목이 걸린 일인데 그것도 마음대로 못하나” 애초에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배심원을 고르라는 당신들 처사가 불공평한 거요. 이런 간단한 정보도 가르쳐 주지 않겠다면 나는 이 재판을 승복할 수 없소. 엘프의 신 티그리아에 맹세코!” 일그러지는 엘프들의 얼굴에 통쾌한 감정이 든 쟝은 되는대로 주워 넘겼는데 그러는 가운데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고 말았다. 엘프의 신 티그리아는 인간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것도 살인자의 입에서는! 그의 입에서 티그리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숨 막히는 기운이 피어올랐고, 엘란마저 수백의 엘프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숨이 막혀왔다. 엘란이 이러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어서 눈을 까뒤집고 숨이 목에까지 넘어온 쟝은 물론 파올과 하이론마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만!” 엘란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지자 변호인석 앞의 텅 빈 공간에 회오리가 일더니 슈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리엘!” “슈리엘!” “천한 인간이 상급정령사라니!” “켁켁!” “휴!”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시뻘건 얼굴을 한 쟝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잔기침을 발했고, 하이론과 파올은 죽다 살아난 기분으로 한숨을 쉬었다. “재판도 없이 죽일 작정입니까”“ 엘란의 냉정한 음성이 재판정을 쩌렁쩌렁 울리자 슈리엘이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아리아나 오랜만이다. 어이! 괴짜 엘프 잘 있었어” 얼굴이 왜 그래 꼭 내일 죽을 사람 같네.” 아리아나와 카이어스에게 쾌활하게 지껄이던 슈리엘은 배심원석에 앉은 두 장로를 향해 눈을 찡긋 거렸다. “이봐! 얼음덩이, 웬만하면 얼굴 좀 풀지 그래, 그리고 너, 뻣뻣남 폼 좀 그만 잡아라! 어깨에 무슨 철심이라도 박았냐” 너처럼 뻣뻣한 놈은 내 보다보다 처음이다.” 얼음덩이라 불린 포르티걸과 불의의 일격을 받은 뻣뻣남 더르터크가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킥킥킥!” “하하하!” 죽겠다고 켁켁! 거리던 쟝은 그 자세 그대로 배를 잡고 웃었고, 하이론도 마음 놓고 웃은 반면에 파올은 침착하게 주변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탕탕탕! 웅성거림이 계속되자 심판장이 방망이를 두들겼고,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일사 분란한 그 모습에 잔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슈리엘을 돌려보낸 엘란은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별은 뭡니까”“ “.......” 다시 한 번 침묵이 주변을 감싸고돌았다. 이런 식의 정적은 질색이었다. “정말 비밀이라면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오른쪽으로 올라간 엘란의 입 꼬리에 비웃음이 담겼다. “대답하라.” 냉랭하게 명령하며 엘란을 노려보는 심판장의 눈에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가 엿보였다. 엘란의 머리 속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대는 동시에 척추를 타고 얼음장 같은 위험신호가 올라 왔다. “이 엘프는 위험하다!” 위험신호가 미친 듯이 전신을 달구었다. 특별한 위압감이나 특이한 기운은 없었고, 십존이나 시리우스, 배심원에 앉은 두 장로 같은 강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급정령사의 예민한 본능은 가장 위험한 자가 이 엘프라는 것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한겨울 얼음을 깨고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굴 때 보다 더 큰 한기가 전신을 떨리게 만들었다. 복수의 상급정령과 계약한 것으로 보이는 더르터크에게 느껴지는 음유로운 기운보다 투명한 유리눈 속에 깊숙이 가라앉은 대장로의 분노가 그를 더욱 더 떨리게 만들었다. 대장로의 눈을 보고, 한기에 몸을 떨던 그 찰나의 순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엘프의 음성으로 깨어졌다. “남성입니다.” “거부합니다!” “거부합니다!” 쟝과 하이론이 동시에 소리쳤다. 이럴 때는 죽이 척척 맞았다. 대사제 파올은 깍지 낀 두 손을 뒤통수에 대고 끊임없이 지고를 불렀다. 믿지도 않으면서. 쟝과 하이론이 거부의 말을 다섯 번 외친 끝에 두 장로를 제외한 모든 배심원이 여자로 교체되었다. 배심원의 미모를 평가하는 쟝의 눈은 흐뭇함 그 자체였다. 배심원단이 모두 구성되자 아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쟝이라는 인간을 그루비어의 살인범으로 고발합니다.” 아주르갈의 감정 없는 눈이 변호석을 쓸었다. “유죄를 인정하나”“ “우리는 무죄를 주장합니다.” 파올의 또박또박한 음성이 재판정을 울렸다. “그럼 고발인!” 가볍게 머리를 숙인 아리아나가 입을 뗐다. “그루비어의 동료 이스루나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이론이 팔을 휘휘 휘두르며 침을 튀겨댔다. “저희는 증인에 대한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습니다.” “기각한다. 아리아나 계속하라.” “완전히 짜고 치는구만.” 하이론이 불만에 가득 차서 인상을 그릴 때 이스루나가 심판장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몸을 앉혔다. “당신은 피해자와 무슨 사입니까”“ “교육을 같이 받았고, 동료로서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사건당일 그루비어가 왜 결계 밖으로 나갔습니까”“ “수목의 생장도 관찰할 겸 새로운 품종이 없나 살펴보려고 나간 것으로 압니다.” “허! 우리한테는 “없다”라는 말 밖에 하지 않더니 여기서는 말도 잘하는 군.” 파올이 빈정거렸다. “그가 가고자 하던 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스루나가 가늘고 긴 검지손가락을 뻗어 쟝의 미간을 가리켰다. “저 잡니다!” “오!” “아!” 가벼운 웅성거림이 잠시 일었다 사라졌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과 분노를 머금은 음성이 쟝의 뒤통수로 쏟아졌다. 아리아나는 그런 분위기를 음미라도 하듯 잠시 시간을 끈 후 자리에 앉았다. “이상입니다.” “......”“ 심판장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당황한 하이론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입을 뻥끗 거렸다. “나 말이오”“ 하는 뜻이었다. “반대심문.” “뭐”“ 탁자만 바라보며 미동도 않던 카이어스의 입에서 모기소리만한 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재판정에서 처음으로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고발인측 심문이 끝나면 변호인측에서 반대심문을 할 수 있다. 고발인측 논거를 깨는 거지.” 하이론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망할 놈의 심판장새끼! 말로 설명해 주면 될 것 가지고.” 하이론은 파올에게 눈짓을 보냈다. “당신이 할 거요”“ “아뇨, 하이론이 하십시오. 저는 배심원의 반응을 관찰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이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루비어는 왜 결계 밖으로 나간 겁니까”“ “아까도 말했습니다.” 엘프는 증인석에 앉아서 그런지 전과 다르게 존대를 했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수목의 생장도 관찰하고, 새로운 식물이 있으면 채집해 올 목적으로 나갔습니다.” “그가 결계 밖으로 자주 나갑니까” 보통 몇 번 정도 나갔습니까”“ “처음입니다.” 하이론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처음~.” 그가 묘한 뉘앙스로 말을 끌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평생 잘 살다가 난데없이 결계 밖으로는 왜 나간 겁니까” 혹시 다른 엘프가 결계 밖으로 끌어내서 죽인 게 아닐까요”“ 이스루나가 비웃음을 띠었다. “당신들에게 살 땅을 제공하면서 결계를 안으로 물려서 그렇지, 그루비어가 간 곳은 원래는 결계의 안이었고, 그가 담당하던 구역이었다.” 그의 어조에는 애초에 당신들을 우리 땅에 들여놓은 것이 잘못이라는 힐난의 뜻이 다분히 들어가 있었고, 방청석의 엘프들이 그의 말에 동조의 감탄사를 터트리자 배심원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던 파올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결정을 내리고 배심원석에 앉았으며 생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끝장이군.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 또 다시 살 곳을 찾아 대륙을 떠돌아야 한다. 파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뇌가 녹아날 정도로. “음...그러니까...” 심문거리는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뭘 물어야 한단 말인가” “일을 할 때 저희들은 보통 두세 명씩 어울려서 갑니다만, 엘프들은 원래 혼자서 다니는 겁니까”“ 엘란이 물었다. “우리도 보통은 두 명이 한 조로 움직입니다만 그날은 여러모로 바쁜 일이 많았습니다.” “그가 갈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 말 없었습니다.” “말도 없이 사라졌던 말입니까” 그럼 무슨 근거로 그가 결계 밖으로 나갔다고 증언한 겁니까”“ 하이론이 따지듯이 물었다. “며칠 전부터 언질이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결계 밖으로 나갔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전혀!” 증인은 단호하게 대답한 후 말을 이었다. “인간들 곁으로 가는 건, 구역질나는 일이고, 그가 혼자서 간 건 그런 고욕을 혼자서 짊어질 생각이었겠죠.” “맞아.” “그렇구만.” 다시 한 번 공감의 웅성거림이 떠돌았다. “그러니깐, 희생정신의 발로였다 이거구만! 맞소”“ “이의 있습니다. 심판장님, 변호인은 피해자와 증인을 동시에 비꼬고 있습니다.” 아리아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인정한다. 증인은 대답할 필요 없다. 변호인, 조심하라! 한 번만 더 그러면 퇴정시키겠다.” 재판정에서는 심판장이 왕이었다. 그의 야멸친 말투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분위기에 휩쓸린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질문 없습니다.” 동료에게 말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일어난 외출! 분명히 이상한 점이 많았는데도 따지고 들려니 너무 지엽적인 일 같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넘어가는 증인의 태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파올은 무가치하게 보낸 일주일이 아까워졌다. “다음 증인으로 시리우스를 신청합니다.” 시리우스는 여전했다. 약간은 오만하고 약간은 냉소적인, 전혀 곁을 주지 않는 냉담한 태도. “증인은 몇 년 전에 인간들의 땅을 여행한 적이 있죠”“ “예.” “그때 경험을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시리우스의 입에서 하이디스경매장을 비롯한 인간들의 온갖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엘란과 하이론도 뼈저리게 느꼈던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악랄한 사례들이 줄줄이 쏟아지자 엘프들의 경멸에 찬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뭔가 반박을 해야 하는데 사실이다 보니 할 말이 없었다. 하이론은 딴지라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의 있습니다. 증언 내용이 본 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처참한 비극을 낳은 만큼 그들의 기본적인 품성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아나는 또박또박 반박했다. “이의는 기각한다. 증인은 계속하라!” 그 뒤로도 인간들에 대한 험담은 계속되었다. 하이론은 반대심문을 포기했고, 시리우스는 여전히 오만한 얼굴로 증인석을 내려갔다. “다음 증인으로 카이어스를 부르겠습니다.” “뭐야!”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억!”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었다. 범인으로 의심까지 했었고, 지금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는 했지만 자신들과 같이 앉아있고, 안내인 겸 재판상담원으로 붙어 있는 이상, 자신들 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고발인측 증인으로 그가 나서자 당혹했고 어떤 면에서는 배신감이 들어 저절로 항의가 튀어나왔다. “지금은 재판 중이다.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라, 그런 감탄사는 바람직하지 않다.” 어쩐지 심판장의 말투가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열이 뻗쳐올랐다. “이의 있습니다.” 하이론이 일어섰다. “뭔가”“ “그가 증인으로 나서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뭐가”“ “.......” 심정적인 배신감일 뿐 정확하게 따지려 하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엄연한 엘프를 우리들 편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에게 너무 치명적인 증인이라 안 된다고 할 것인가” 안내인이라 증언대에 서면 안 된다고 할 것인가” 말도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는 하이론을 파올이 구제했다. “이의를 철회하겠습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하이론이 파올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딴 데 정신이 팔린 대사제는 대충 대답하고 카이어스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이름이 아리아나의 영롱한 음성에 실리는 순간 혹사당하던 뇌에 한 줄기 번개가 쳤다. 잘 될지 아니면 엉망이 될지는 전혀 예상 못할 미지수였지만 이대로 엘프들의 페이스에 끌려가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도출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고, 저들의 의도대로 질질 끌려가는 현재의 판을 뒤집고 혼란을 유도해야만 했다.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카이어스의 걸음은 흐느적흐느적 한 것이, 특유의 호탕함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꼭 처형되려고 끌려가는 사형수의 발걸음 같았다. “증인은 한 동안 인간들의 땅에서 산 적이 있었죠”“ “예.” “그때 쟝도 몇 번 만났습니까”“ “만나서 말도 주고받았고, 몰래 숨어서 관찰도 자주 했습니다.” “어떻던가요”“ “상당히 흥미로운 인간이었습니다.”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인간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사는 데다 매일 찾아오는 어린 아이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거짓말! 폴이 나를 못살게 굴었지 내가 못살게 군적은 한 번도 없었어.” 매일 찾아온 코찔찔이 폴이 화원을 엉망으로 망치는 통에 성가신 일을 많이 겪었던 쟝으로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피고!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 영혼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음성. 찔끔한 쟝은 얼른 입을 닫았지만 불만의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어떻게 못살게 굴던가요”“ “삽으로 위협하는 걸 봤습니다.” “아!” “더러운 인간!” “살인자!” 방청석에서 시끄럽게 터져 나온 음성에는 쟝에 대한 경멸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자신의 동족 어린이마저 삽으로 때리는 잔인한 위인이 엘프를 죽이지 못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너 정말 그랬냐”“ “겁주려고 몇 번 손에 든 건 사실이지만 맹세코 때린 적은 없어요.” 쟝의 음성에는 억울함이 한껏 묻어나고 있었다. 폴이 꽃을 뽑아댈 때마다 쥐고 있던 연장으로 겁만 주었을 뿐 맹세코 폴의 몸에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다. 만약 정말로 때렸다면 폴이 매일 화원에 왔을 리가 없었다. 아리아나가 앞으로 걸어 나와 쟝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분명히 살인자가 맞다는 확신을 교묘하게 심어주는 동작이었다. “피고에 대한 인간들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인간들은 그를 따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들에게 따돌림 당하며 동족의 어린이까지 흉기로 위협하는 폭력적인 인간이란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재판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파올은 끈질기게 반대심문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루비어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된 것은 어디입니까”“ 아리아나가 단어에 힘을 주어 강조를 할 때마다 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쟝의 화원입니다.” “그 주위에 쟝 말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쟝이라는 사람을 가리켜 주시겠습니까”“ 카이어스의 굵은 손가락이 쟝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켰다. “저 잡니다.” 그의 음성은 마치 사형선고 같아서 쟝의 심장을 거세게 두들겼다. “이상입니다.” 그녀는 승리자의 음성과 몸짓으로 고발인석으로 향했다. “끙!” 반대심문을 하려고 일어서는 하이론의 팔을 대사제가 잡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파올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냥꾼의 심정으로. “증인은 왜 모두가 멸시하는 인간들의 곁으로 다가 왔습니까”“ “흥미가 있었습니다.” “흥미보다는 엘프사회에 적응을 못해서 밖으로 돈 것 아닙니까”“ “.......” “대답하십시오.” “맞습니다.” 카이어스는 어딘지 부자연스럽던 이제까지와는 다른 담담한 태도로 대답했다. “모든 엘프들이 완벽한 공동체로 잘 들 사는 것 같던데, 왜 혼자만 적응을 못한 겁니까”“ “저한테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꽉 짜인 엘프사회가 저한테는 너무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파올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태도로 두 손을 내밀어 양 손바닥을 천정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군요. 모든 엘프들은 어려서부터 주입이라는 독특한 교육으로 완벽한 사회인의 기초를 닦는다고 하던데, 당신은 입력을 받지 못했습니까”“ “이의 있습니다. 심문내용이 본 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리아나가 당황한 기색으로 제동을 걸었다. 카이어스와 관련된 이 일은 수백 년 동안 금기시 되던 일이었다. “고발인도 인간의 품성을 알아야 한다면서 관련 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쟝을 살인자로 지목한 가장 큰 이유가 엘프들이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서로를 죽이지 못하도록 입력된다는 것을 논거로 든 이상 거기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저희들도 엘프들의 품성에 대해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어스! 대답하십시오!” 파올의 힘 있는 음성이 재판정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심판장이 끼어들 틈도 없이 단숨에 열변을 토해내고는 거친 숨을 골랐다. 엘란과 하이론은 물론 쟝까지도 파올의 돌연한 박력에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인자한 웃음을 띠며 묵묵히 자신의 맡은바 소임을 처리하던 성녀의 가장 큰 조언자 대사제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증인은...” 아주르갈대장로가 일이 고약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카이어스를 제지시키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침착한 태도로. “입력과정에 큰 사고가 생겼습니다. 저와 같이 입력을 받던 엘프들은 사고 이후 적응을 하지 못하고 모두 죽었고 저와 카다이어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음성에는 깊은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니까 당신과 카다이어는 엘프를 죽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파올은 기회를 잡고 폭풍처럼 몰아쳤다. 아주 야비하고 잔인하게. “그만! 더 이상 대답하지 마라!” 광룡 카나이폴런의 패악이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거론되자 심판장은 평정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아니! 저희들한테는 삶의 터전이 걸린 일입니다. 대답하십시오!” 당황한 엘프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카이어스의 면전에 얼굴을 갖다댄 파올이 계속해서 재촉했다. “교육과정에서의 사고로 제대로 된 입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간사회까지 기웃거렸으니 엘프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겠지요. 그 분노를 우연히 만난 그루비어에게 푼 것 아닙니까”“ “그만!” 대장로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파올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판을 뒤집을 때였다. “엘프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마지막 경고다! 그만하라 비천한 인간아!” 심판장 아주르갈의 투명한 유리눈이 파올을 쏘아보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진땀을 흘리면서도 파올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혀에 12,000여 교도들의 생사가 달린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야비하게 빈정거렸다. “이게 공정한 재판입니까” 저는 엘프들도 살인, 아니 살인이라는 단어도 웃기는 군요, 살!엘!프!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겁니다.” “본 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아뇨! 이제 상관이 있습니다.” 파올은 덜덜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자 한자 씹어 뱉듯이 내뱉는 말에 젖 먹던 힘까지 실어댔다. “저는 카이어스와 카다이어를 그루비어 살해범으로 정식으로 고발합니다!” “미친 소리!” “죽여라!” “비천한 것들!” 파올의 말은 재판정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심판장 아주르갈대장로의 방망이도 소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수많은 엘프들이 내뿜는 기세에 재판정안의 공기는 미친 듯이 요동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고 서있던 파올은 격한 기류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숙! 정숙하라!” 대장로의 날카로운 고함으로도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배심원석에 앉아있던 더르터크장로가 조용히 일어섰다. 툭툭툭! 진흙이 천정에서 떨어지며 기묘한 울림을 발하자, 난장판으로 변했던 재판정의 소란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삽시간에 바닥을 메운 진흙에서 두 개의 손이 튀어 나오고 연달아 머리와 상체가 나타났다. “클레임!” 하이론이 억눌린 음성을 발할 때 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고 슈리엘이 나타나 좌중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두 상급정령이 뿜어내는 위용은 대단해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소란은 어느덧 가라앉았다. “헉헉...슈리엘이 좀 달라 보이는데”“ 소란이 가라앉자 힘겹게 자리로 돌아온 파올의 몸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당연하죠. 제가 부른 게 아니니까요.” 심각한 어조로 대답하는 엘란의 눈은 더르터크장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도 샐라임과 계약을 하기는 했지만 그와 계약하며 사용한 마나는 통제할 수 있는 마나가 아닌데다가 필요할 때 소환할 수도 없어서, 제약이 많은 반면에 더르터크는 두 상급정령을 완벽하게 부리고 있었다. “그럼”“ 반문하는 하이론의 음성은 놀람으로 가득 찼다. 엘란이 부른 것이 아니라면 저 엘프가 상급정령 둘을 불렀단 말인가” “예, 상급정령 마스텁니다.” “......!” “.......” 쟝의 화원에서 슈리엘의 언급이 있기는 했지만 상황이 급박하기도 하고, 정령과 친화력이 높은 엘프이니 마스터가 있을 수도 있겠거니 하고 대충 넘어갔는데 막상 직접 보게 되자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분위기를 보건데 어쩌면 싸워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회를 선포한다! 다음 공판은 모레 같은 시간에 재계될 것이다.” 파올의 고발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재판은 끝이 났다. 잘했다고 파올의 어깨를 두들기며 히죽거리는 쟝과 달리 재판정을 나서는 엘란의 마음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상급정령마스터인 더르터크를 제외하더라고 재판정안의 상급정령사는 열명이 넘어보였다. 게다가 기운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대장로의 투명한 눈은 진저리쳐질 정도로 냉혹하게 보였다. 그들이 부당한 결정을 하더라도 무슨 수로 제어할 것인가” “미안합니다.” 파올은 같이 걸어가는 카이어스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재판정안에서는 야멸치게 몰아치다가-특히 살인범으로 고발까지 한 마당에-나오자마자 정중히 사과하는 모양새는 어떻게 보면 놀리는 것 같아 좋은 기분이들 리 없었을 텐데도 그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자네 괜찮나”“ 하이론이 물었다. 안 그래도 괴상하던 카이어스는 완전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 카이어스가 말없이 히죽거리자 정말 미친 것이 아닌지 겁이 덜컥 난 하이론과 파올 쟝이 기겁을 하며 떨어졌다. “나는 나다!” “......” “......”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무슨 말씀입니까”“ “동화가 잘못됐던 방어기제가 완전하지 않아도 나는 엘프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누가 엘프 아니랍니까”“ 엘란이 반문했다. 그의 모양새가 일반 엘프들 보다 근육질이고 우락부락한 것도 사실이지만 뾰족한 귀만 보더라도 엘프가 분명하다. “하하하하!” 목젖이 보이도록 통쾌하게 웃어젖힌 카이어스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당황한 인간들이 서로를 둘러보는 잠깐 사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저 놈 진짜 미친 거 아냐.” 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이어스는 가지를 디디고 달리며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매일 것 없는 자유로운 영혼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욕구를 북돋우고 있었다. 이런 영혼의 해방감은 그 저주받을 사고 이래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달리는 와중에도 엘프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났던 그 참혹한 사고가 떠오르자 몸을 떨었다. 입력이라는 교육과정은 보통 이십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스무 명의 엘프들-한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숙식을 해결하며 여러 엘프에게 기본적인 품성과 기초지식을 주입받는다. 그 예민한 과정 중에 교육을 맡았던 엘프가 돌연 죽어버렸다. 300살밖에 되지 않는 젊디 젋은 엘프가 그렇게 일찍 요절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가 교육중이 아니었다면 잠깐의 애도를 거쳐 잊혀질 일이었건만 마침 동화과정에 있었던 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젊은 엘프에게 닥친 갑작스런 돌연사는 그와 동화과정에 있던 어린 엘프들의 삶은 뒤흔들어 버렸다.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죽은 엘프와의 동화, 그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죽음에의 동화. 만약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동화를 마치고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같이 교육받던 스무 명의 엘프들은 심각한 자살충동과 혼돈을 느끼며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다. 성장할수록 자살충동은 더욱 강해졌고, 사고가 났을 때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떠올랐다. 그들도 괴로웠지만 완벽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엘프들에게도 이들의 존재는 재앙이었다.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 엘프사회에서 자살충동을 느끼는 엘프라니! 엘프의 신 티그리아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 반은 자살하고 반은 천천히 죽어간 가운데 극과 극의 성격을 보이던 두 명의 엘프, 시리우스와 카다이어만이 살아남았다. 자살! 이 일이 엘프사회에 던진 충격은 사고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자연스런 삶을 추구하는 엘프들의 가치체계를 전면적으로 뒤흔드는 일대 충격으로 생과 사를 티그리아에게 맡기는 그들의 인생관을 뿌리 채 흔드는 일이었다. 경악한 장로들이 혼란을 야기하는 스무 명의 엘프들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가운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은 성격을 보여준 시리우스와, 음침하고 파괴적이며 자살을 찬미하던 카다이어는 끝내 살아남았다. 왜 이들 둘만이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모든 엘프들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가운데 등을 떠밀린 카다이어는 북쪽에 집을 짓고 폐쇄적으로 살았으며 숲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카이어스는 인간들의 땅에까지 발을 디밀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사건에 휘말렸다. 겨우 눌러놓은 자살충동을 일으킬 만큼 충격적인. 혼란과 당혹에 휩싸인 그에게 재판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파올이 엘프를 죽이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언제나 살육의 충동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 강렬한 욕망을 억누른 반작용으로 자살충동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본성을 인정했다. “나는 살육의 욕구를 가진 엘프이다!” 언제나 부정하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타는 목마름이 사라지고 자살충동도 없어져 버렸다. 그가 새로운 자각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자, 새로운 문제가 부각되었다. 자신은 모든 엘프들과 다른 품성을 가진 별종의 존재이며 조화를 중시하는 이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다는 사실. 그의 고양된 정신이 삽시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순간 언제나 열망해 마지않던 엘프사회에의 편입은 영원히 불가능해 지는 것이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부닥쳤다. 자신의 본성을 부정하면 심각한 자살충동으로 고통 받아야 하고, 반대로 자신을 긍정하는 순간 그토록 열망하던 엘프 공동체로의 편입은 물 건너 갈 것이다. 새로운 문제에 씨름하며 머리를 드는 순간, 그는 보았다. 별다른 힘도 없는 미약한 노인이,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면서도 수백의 엘프들이 내뿜는 광폭한 기세를 필사적으로 견뎌내는 모습을. 겁에 질린 눈동자로 차가운 대장로의 호통을 견뎌내며 자신을 다그치는 모습을.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엘프사회에 편입되는 노력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혼자라도 좋다. 그들과 섞이지 않아도 나는 엘프다. 위대한 신 티그리아의 자랑스런 자식, 숲의 긍지 높은 아들, 나 카이어스는 엘프다! 뺨에 와 닿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머리로 쏟아지는 햇살과 살랑거리는 나뭇잎도 자신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우뚝! 숲이 자신의 것인 양 거침없이 질주하던 그의 신형이 멈춰 섰다. 새로운 자각이 그의 머리를 두들겼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모티브를 제공한 사건. 엘프들을 경악에 빠뜨린 살해사건의 범인은 누구인가” 만약 인간이 범인이 아니라면, 인간이 아니라면. 유일하게 엘프를 죽일 수 있는 엘프. 살육충동이 아니면 자살충동을 느끼는 엘프. 자신이 아니라면 유일하게 남는 용의자는....... “설마.......설마.......” --- 19장. 연쇄살인사건. 으스름 달빛이 숲을 밝혔다. 하늘의 반을 점령한 구름이 심술을 부리는 바람에 달은 고개를 내밀기 바쁘게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그 숨바꼭질 때문에 숲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하며 으스스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이 고개를 내밀어 밝아진 순간에도 인간들의 눈에는 컴컴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눈 밝은 엘프에게는 그 정도면 훌륭한 등불이었다. 톡톡.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다면 엘프들도 듣지 못할 미세한 소리가 숲 속에 깔렸다. 감탄할 만큼 조용하게 움직이는 밤의 불청객은 어두운 그늘만을 디디고 있었다. 그늘에 녹아들었다 튀어나오고 녹아들었다 튀어나오고 하는 모양새는 숲 속 동물들마저 속일 정도였다. 저토록 유려하게 움직이려면 근육을 미세하게 조종해야 했고, 그러자면 피곤이 쌓이기 마련인데 불청객은 먼 길을 가면서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시커먼 숲 사이로 밝은 빛이 보였다.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생나무를 찍어서 만든 커다란 저택을 십여 개의 등불이 밝히고 있었다. 공회당을 제외한다면 숲 속에서 가장 큰 건물이리라. “흐~” 집을 보는 불청객의 입가에 구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탁탁. 발에 밟힌 가지가 부러지며 정적을 깨뜨렸다. 극히 조심스럽게 숲을 가로지른 불청객은 괴이하게도 목적지에 도착하자 조심성을 버렸다. 몸을 숨기지도 않았고, 소음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음.” 등불을 본 한 밤의 방문자는 얕은 탄성을 질렀다. 처마에 걸려 흔들거리는 등잔 안에는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들이 빛을 발하며 날고 있었다. “누구냐!” 날선 목서리가 방문자를 맞았다. 똑똑똑 달밤의 방문자는 대답 없이 문을 두들겼다. 왈칵! 목소리만큼이나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걸 보면 집주인은 손님을 반기는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특히 한밤의 방문객을. “하! 웬일로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하셨나”“ 묘하게도 집주인의 목소리에는 적대감과 동시에 반가움이라는 상반되는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방문자는 앞으로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평생 이렇듯 환하게 웃은 것은 신에 맹세코 처음이었다. “어!” 방문자의 천진한 웃음은 차가운 집주인의 마음까지 녹여버렸다. “불편하지 않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지.” 오늘은 뭐가 씌였는지 그가 손님을 집안으로 청한 것도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탁.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방문객은 주인을 불러 세웠다.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손님은 품속에서 단도를 끄집어냈다. 날이 손바닥만한 단도는 시퍼런 예기를 뿌리고 있었다. “어디 보자.” 늦은 밤에 은밀히 찾아온 손님이 뜻밖에도 단도를 꺼내자 흥미가 동한 주인이 가까이 다가섰다. 푹! 방문객의 손은 무척이나 빨랐다. 마음을 놓고 있던 주인이 절대로 피하지 못할 급작스런 기습이었다. “왜.......왜.......” 천지가 개벽할 엄청난 사태에 주인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주인은 배에 칼을 꽂은 채 반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고, 또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집주인이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격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방문객은 날카로운 칼끝이 부드러운 피부와 피하층을 뚫고 창자를 쑤시자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멍청한 사냥물은 피하거나 반격할 생각도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인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자를 토막내며 올라간 칼은 억센 갈비뼈를 끊어버리고 폐를 가른 후 심장에서 멈춰 섰다. 저항하는 갈비뼈를 단숨에 잘라버리는 순간 뇌는 새로운 희열을 느끼며 천국을 경험했다. 신은 한 번도 준 적이 없던 마음의 천국을. 울컥! 폐가 뚫리는 순간 주인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경악한 눈빛으로. 잠시 여운을 음미하던 칼은 심장을 터트리고 가슴을 지나 빗장뼈를 가르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털썩! 벅찬 희열에 몸을 떨던 불청객은 주인이 쓰러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빨간 피는 바닥을 적시며 손님의 발로 몰려들었다. 마치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향기로운 피 냄새가 살인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새로운 광기가 불청객을 삼키자 날카로운 칼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석....... ********************************************** “대사제님 다시 봐야 겠는뎁쇼!” 어제의 재판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듯 쟝이 살랑거렸다. 자신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재판에 맞서 당당하게 반격하던 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목소리만 컸지 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누구랑 다르게.......” 쟝이 하이론을 곁눈질하며 싸움을 걸었다. 모두들 축 쳐져있자 무료했던 것이다. 하이론은 평상시였다면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어제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무죄를 가릴 배심원이나 형량을 선고할 대장로나 쟝을 그냥 둘리 만무한 것이다. 꼭 그가 유죄라서가 아니라 엘프사회의 분위기상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만약 그가 무죄라면 살인범은 엘프들 중의 하나라는 소리였으니.......과연 엘프들이 그것을 받아들일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쟝의 화원에 그루비어가 방문한 날, 공교롭게 교도들이 찾아가서 우연찮게 그를 죽였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쟝은 최선은 선택일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파올대사제의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 파올이 본 바로도 엘프들 중에서 살인자가 나온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완벽한 공동체인 엘프사회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데 나사 하나가 빠지면 기계전체가 멈춰 설 수도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추구할 엘프들로 보이지 않았다. 책 속의 낭만적인 엘프는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대장로와 장로들은 아주 완고하게 보여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란도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도 이제는 희망을 버려서 재판에서 이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 이후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교도들을 쫓아내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은 더르터크장로 하나만도 감당하기 벅찼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감당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열명도 넘는 것 같은 상급정령사들은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추수를 한다고 좋아하는 교도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생각의 종착지는 앞으로의 여정이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던 파올대사제가 전신에 힘을 빼고 축 처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제의 도발이 잘 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대로 재판을 뒤흔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괜히 화만 돋군 것은 아닌지. 그때 카이어스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쟝이 경계의 눈빛을 발했다. 아무리 봐도 이 엘프는 미친 것 같았다. “맞다.” “......”“ 뜬금없는 말이었다. 별안간 “맞다” 라니” “무슨 말입니까”“ 엘란이 시선을 모았다. “파올이 어제한 질문의 답이다. 맞다. 엘프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죽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아니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할 수 있다고 했지 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젠장! 엘프들이 우리를 속였군. 살”엘”프 할 수 없다는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었어.” 하이론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엘프들의 냉정함과 오만함을 뼛속 가득 느끼기는 했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토록 자부심 강한 종족이, 그토록 아름다운 그들이, 벌레처럼 멸시하는 인간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그건 아니다. 그 말은 모두 사실이다.” “그게 말이 되나! 너는 엘프를 죽일 수 있는데, 엘프들은 서로를 죽일 수 없다니. 완전히 모순 되는 말이잖아!” “모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통의 엘프와는 완전히 다른 별종이니까.” “그럼 니가 범인이잖아!” 쟝이 악을 썼다. “아니, 나는 죽이지 않았다.” “엘프를 죽일 수 있는 엘프는 당신이 유일한데.......그럼 범인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엘란이 물었다. “사고에서 살아남은 엘프는 나 혼자가 아니다.”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 카이어스를 선두로 한 인간들이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이 달리는 지역은 엘프들이 돌보지 않는 버려진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여기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었는지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수는 보이지 않고 침엽수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까, 사고에서 살아남은 카다이어가 범인이라 이거지”“ 쟝의 음성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지긋지긋한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이어스는 심사가 복잡한지 대꾸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엘란이 물었다. 숙소를 떠나온 지도 네 시간이 흘렀다. 일행들의 빠른 걸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거리를 지나쳐온 셈이다. “지나온 거리만큼 더 걸어야 한다.” “그 엘프는 왜 이렇게 멀리서 사는 겁니까”“ “공동체에 적응을 못해서 괴로웠겠지. 다른 엘프들도 원한 일이고.” “.......” 대화는 금세 끊겼다. 카이어스는 대화를 나눌만한 심정이 아니었고, 쟝과 파올은 너무 힘들어서 말할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헉헉!” 파올이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고령의 파올에게 긴 도보는 무리였다. 엘란은 일행들이 지치면 정령을 소환해 실어 날랐다. 그들은 급한 마음에 한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덧 숲에 어둠이 깔렸다. “부엉, 부엉.” 칠흑같이 어두운 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쟝은 으스스한 한기에 몸을 떨었다. 누명을 벗는다는 기쁨은 사라져 버리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억!” 꽈배기처럼 배배꼬인 이상한 나무들이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를 놀래키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어서 한 밤의 숲 속에는 놀랄만한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동물들의 먹이 찾는 소리와 난데없이 들리는 새소리, 컴컴한 밤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나무들과 바위들이 그를 겁먹게 했다. 하이론은 바쁘게 발을 놀리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해가 떨어지자 싸늘한 공기가 밀려들었고, 알 수 없는 초조감과 함께 오한이 들었다. “춥네.” 북쪽이라 그런지, 아니면 계절의 변화가 급격하게 찾아와서 그런지 날은 상당히 추웠다. 그런 와중에 멀리서 밝은 빛이 보이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발걸음이 빨라졌다. 음침하고 괴팍하다는 말을 듣고 상상했던 집과는 전혀 달랐다. 어둠을 밝히며 서 있는 집은 동화 속에서 나옴직한 그런 건물이었다. 급경사를 이루는 지붕은 특수한 도료를 발랐는지 빨갛게 빛이 나고 있었고 처마 밑에 달린 등에서도 노랗고 파란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이층에 보이는 덩굴무늬가 들어간 창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남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한 것인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은 모두 색깔이 달랐다. 도저히 살인자가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안팎으로 한기를 느끼던 쟝은 뛰어가기 시작했다. 불빛이 어찌나 따뜻하게 보이는지 어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으아악!” 문 앞까지 다가간 쟝은 무엇에 놀랐는지 뒷걸음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형형색색의 불빛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던 일행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러한 비명이었다. 탓! 카이어스가 땅을 박차고 바람처럼 달렸다. 잠시 후 조각상처럼 얼어붙어 있는 그의 뒤를 일행들이 둘러섰다. 등! 놀랍게도 반딧불이로 만들어진 등 사이에 길쭉한 창자가 걸려 있었다. 불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보이는 창자에는 점점이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엘프들도 고기를 먹나”“ 정신없이 뛰어들다 창자에 얼굴을 얻어맞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던 쟝은 얼굴을 붉혔다. 창자하나 때문에 좌중을 놀라게 해서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엘프가 고기도 먹나”“ 불길함에 사로잡힌 하이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엘프는 절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카이어스의 단호한 어조도 어떤 불길함을 담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누구의 창자라는.......” 의문을 표하던 엘란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고기를 먹지 않는 엘프의 처마에 걸려있는 창자, 누구의 것인가” “카다이어!” 파올이 고함을 지르고 한 참을 기다려도 집주인은 나오지 않았고, 어떠한 반응도 들을 수 없었다. “들어가자.” 전진하던 카다이어의 발길이 다시 멎었다. 고운 나무결을 볼 수 있도록 니스만 칠해진 문에 검붉은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간이로군.” 나무못으로 고정된 간은 좌중의 불안감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들어갑시다.” 카이어스가 손잡이만 잡고 미동도 하지 않자 파올이 재촉했다. 소리없이 문이 열리는 순간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그리고........검붉게 굳어버린 피 웅덩이 위에 잘려진 엘프의 머리가 보였다. “카다이어!” 비통한 신음성이 카이어스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저...저....저...저....” 전방으로 손을 뻗은 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거기에 살해당한 엘프의 몸통이 있었다. 팔려고 내다놓은 정육점의 고기처럼 벽에 걸린 채. 벽에 걸려 있는 시체의 양 손은 크게 벌어진 채 못 박혀 있었고, 길게 잘라져 옆으로 벌려놓은 배 안에는 내장들이 보이지 않았다. 창자나 간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것이다. “젠장! 도대체 누가 엘프들을 죽이고 다니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저절로 고함이 나왔다. 사건은 또 다시 원점이었다. “이제 우리하고 상관없잖아요. 또 다시 엘프가 죽었으니 이번에도 나한테 누명을 덮어씌우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쟝이 소리 지르는 하이론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동의를 바라면서. “과연 그럴까요”“ 파올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처음 시체를 발견한 것 같은데”““그들이 다시 우리에게 살인죄를 묻는다면”“““““.” “서”““서”““서”““설마!” 일이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로 봐서 우리한테 책임을 물을 것 같은데, 카이어스 생각은 어떠십니까”“ 파올이 물었다. “아마 그럴 거다. 인간들이 살기 시작한 후 역사상 처음으로 엘프가 살해됐고, 너희들이 결계 안으로 들어온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엘프가 살해됐다. 혐의를 벗기는 힘들 것 같구나!” “무슨!” 쟝은 기가 찼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제는 연쇄살인범으로 몰리게 생긴 것이다. “그럼 엘프가 죽는 이유는 자연사나 질병에 의한 죽음뿐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니다. 천년 전 광룡 카나이폴런이 숲을 태울 때도 죽은 엘프는 많았고, 오래전 인간들이 숲을 침범했을 때 죽은 엘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해된 엘프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내가 아는 한은!” “젠장!” 상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카이어스는 보고를 한다면서 떠나갔고, 일행들은 멍하니 서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내장들은 어디에 있을까”“ 파올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찾아봅시다.” 폐는 부엌의 찬장 속에 들어있었고, 위는 창이 열려있던 이층침실에서 발견되었다. 콩밭, 방광, 쓸개, 이자 같은 잡다한 장기들은 손님접대라도 하려는 것처럼 식탁위에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심장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장은 어떻게 했을까”“ 하이론이 물었다. “먹은 게 아닐까요”“ 엘란이 되물었다. “설마, 엘프가 육식을” 그것도 동족의 심장을”“ “그거야 모르지, 역사상 처음으로 나왔다는 살인자 엘픈데 심장정도 먹는 거야 뭐, 대수로울 것도 없지.” 쟝이 툴툴거리며 나선계단을 올라가자 엘란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가서 좀 자려고.” 아닌게아니라 모두들 피곤했다. 하루종일 빠르게 이동한 탓에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특히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깨지고 새로운 누명마저 뒤집어쓰게 생기자 정신적으로 너무 고달팠다. 쟝이 이층으로 올라가자 모두들 잘 만한 곳을 찾아 흩어졌다. 집이 커서 잘 곳은 많았다. 바닥에 잘려진 머리가 놓여있고, 벽에 시체가 걸려있는데다 내장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어서 찝찝하기는 했지만. 또다시 엘프가 살해당했다. 그것도 결계의 안에서. 정신없이 숲을 가로지르는 장로들의 심사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도 카다이어가 죽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의 존재가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하거니와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은폐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주르갈대장로는 포르티걸과 더르터크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같이 어울리기를 700백년 이들은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포르티걸과 더르터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카이어스와 장로들이 도착한 때는 해가 빼곰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할 때였다. 현장에 도착한 포르티걸은 치솟아 오르는 울화를 억지로 삼켜야 했다. 괘심한 인간들이 하품을 쩍쩍 해대며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엘프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비극의 현장에서 어떻게 잠을 퍼질러 잔다는 말인가. 해가 떠오르고 차츰 데워지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세 장로가 한기를 풀풀 날리는 바람에 불편해진 인간들은 한쪽으로 몰려서 두런거렸다. “분위기 살벌하네.” 쟝이 고개를 쭉 내밀고 집으로 들어가는 장로들을 힐끔거렸다. “그럴만도 하지. 동족들이 연이어서 죽어나자빠졌는데 기분이 좋다면 그게 미친놈이지.” 하이론도 집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어떻게 나올까요”“ 걱정스런 어조로 파올이 물었다. “글쎄요”“““““.” 엘란이 말을 흐렸다. 엘프들의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책으로 알려진 엘프들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라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이윽고, 장로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좌중은 긴장된 숨을 삼켰다. “심장을 찾았을 까요”“ 엘란은 보이지 않는 심장이 신경 쓰였다. “글쎄다. 어디 있겠지.” 하이론은 대장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 얼음덩어리가 어떻게 나올지 신경 쓰여서 뒷골이 다 당길 지경이었다. 휙! “““““““!” “““““““.” 대장로가 일별도 하지 않고 지나치는 바람에 일행들은 멍해졌다. 한발 한발 다가올 때마다 마음 졸이던 걸 생각하면 허탈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휙! 깐깐하게 굴던 포르티걸마저 아무 소리 없이 지나치자 오히려 겁이 덜컥 났다. 자신들을 살인자로 몰아붙여야 마음이 편안해 질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이놈들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인가” 이제 피살자의 집 앞에는 더르터크장로 한 명만이 남았다. “어!” “집이!” “아!” 좌중의 입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카다이어의 집이 고스란히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소음도 없이 매끄럽게 들어가는 집은 고요히 침몰하는 배를 연상시켰다. “어떻게 한 거냐”“ 놀란 어조로 하이론이 물었다. “땅의 상급정령 클레임입니다.” “저 엘프 상급정령마스터라고 했었지”“ 하이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새삼 상급정령마스터의 위용이 느껴졌다.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급정령을 불러 부리는 모양이 엘란보다는 훨씬 윗줄인 것 같았다. 엘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거 왜 슈리엘이 말한 비르발이라는 사람하고 비교하면 어때”“ “비르발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하고 싸우면”“ “시간문제죠.” “시간문제라니”“ “승패는 이미 결정 났죠. 다만 어느 정도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한 말입니다.” 둘이 소곤거리는 동안 일을 끝낸 더르터크는 앞서간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라져 갔다. “덮어버리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하이론이 말했다. “덮다뇨” 뭘”“ “카다이어의 죽음말이다. 또 다른 피살자로 인해 벌어질 사태가 두려웠나 보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카이어스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동족이 죽었는데 그냥 묻어버릴 수 있는가! 아무리 경원시 당하던 엘프라 하나 이런 식으로 감추어서는 안 된다. 평생을 쓸쓸히 살아간 카다이어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이다. “범인은 내가 잡는다.” 잘근잘근 씹어 뱉는 그의 음성에는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간간이 휴식을 취하는 바람에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다. “으악!” 안으로 들어간 쟝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 나왔다. “뭐야”“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하이론의 눈에 붉으죽죽한 덩어리가 잡혔다. “카다이어의 심장이군!” 인간의 심장보다 주먹하나 크기는 더 커 보이는 살덩어리는 카다이어의 심장이었다. “고약한 놈이로고.” 파올이 치를 떨었다. 범인은 잔인하고 약삭빠른데다 대담하기까지 했다. 그는 왜 심장을 갖다 두었을까” 누명을 덮어씌우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놀리려고 그랬을까” 일행들은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범인은 종횡무진 날뛰며 인간들을 궁지로 모는데 일행들은 어떤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해가 뜨자 저번처럼 엘프들이 쟝을 연행해 갔다. 엘란과 하이론 파올은 처음 재판이 있던 날처럼 적대감어린 시선들을 헤치고 재판정으로 나아갔다. 입추의 여지없이 빽빽이 들어선 방청석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오늘 평결을 내리겠다.” “무슨 소립니까!” “말도 안돼!” 아주르갈심판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재판정을 가르자 하이론과 파올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살해사건을 급하게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카다이어의 죽음이 판결을 재촉했으리라. “이의 있습니다. 아무런 언급도 없이 갑자기 평결을 내린다는 것은 공정치 못합니다.” 파올이 말했다. “공정치 못하다라.......그래 재판을 계속하면 부를 증인이라도 있나” 아니면 새로운 용의자를 찾아냈다거나.......” 심판장의 투명한 눈이 피고석을 훑었다. 그랬다. 불러낼만한 증인도 없었고, 의심할 만한 용의자도 없었다. 있다면 카이어스가 유일했는데 어제의 일로 미루어 보면 그가 범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를 알아내기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엘프사회에 대한 지식도 얕았다. 적대적인 엘프들의 반응도 그들에게는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배심원.” 대장로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의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안 돼!” 변호인들의 고함은 엘프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다.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띤 포르티걸장로가 천천히 일어서서 방청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장로들은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그가 기쁜 마음으로 평결을 낭독하던 그때. 쾅! 부서질 듯 문이 열리고, 창백한 안색의 이스루나가 구르듯이 재판정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분사분 우아하게 돌아다니는 엘프가 부서져라 문을 열고 엉금엉금 기는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 재판 와중에 이렇듯 거칠게 뛰어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웅성웅성 인간들이 일으키는 소란만이 있을 뿐 경건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엘프들이 난데없이 맞이하는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자...장...장로님! 가르모니....가르모니가..... 살해당했습니다.” 쾅! 침까지 질질 흘리는 이스루나의 입에서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엘프들은 할 말을 잊었다. 항의의 고함을 지르던 인간들마저 입을 닫자 좌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쿵...쿵...쿵 어찌나 조용한지 자리에서 일어선 채 굳어버린 포르티걸장로는 무겁게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까지 들릴 지경이다. 하이론과 파올은 연이은 사태진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평결을 내린다는 대장로의 기습공격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또 다시 터져 나온 살해사건에 내려앉은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잘됐다고 해야 하나.” 엘란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스루나가 재판정 안으로 뛰어든 덕분에 일단 평결은 저지된 셈이었다. “정회!” 침착한 대장로의 한 마디가 엘프들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다음 재판일정이고, 공고사항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썰물 빠지듯 모든 엘프들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텅 빈 재판정 안에는 인간들만이 온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장로들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가르모니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건현장에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카이어스가 이미 와 있었다. 피바다! 피살된 가르모니의 집은 온통 피범벅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 벽은 물론 천장까지 피를 발라 놓아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매끄럽게 잘려진 가르모니의 머리는 탁자위에 올려져 있었고, 절단된 사지는 네 귀퉁이에 놓여져 있었다. 몸통은 어디에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으~” 더르터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살인자가 미치광이처럼 날뛰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면 쟝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하더라도 혼란은 막을 수 없다. 아니, 인간이 엘프를 죽였다는 확고한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다. 카다이어의 죽음을 본 후부터. “이제 어쩌죠” 전처럼 파묻어버릴 수도 없고.” 카이어스가 비꼬기 시작했다. “나가라!” 얼음장같은 대장로의 일갈이 터졌다. “하하하!” 카이어스는 호탕한 웃음으로 장로들의 염장을 지른 후 천천히 물러갔다. 부릅뜬 가르모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 “아직도 여기 있었군.” 카이어스가 찾아갔을 때까지 인간들은 재판정에 있었다. “웬일이요”“ 퉁명스럽게 쟝이 물었다. “궁금해 할 것 같아서.”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빙글거리는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가르모니가 일터로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된 이스루나가 집으로 찾아갔다가 처음으로 현장을 목격했다. 불쌍한 이스루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더군. 별다른 단서는 없었다. 바닥, 벽, 천장에 피칠이 되어 있었고, 머리는 잘려진 채 탁자위에 놓여 있었다. 사지는 절단된 채 구석에 놓여 있었고,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간략한 설명이 카다이어의 시체를 연상시켰다. 쟝은 적출되어 흩어진 내장들이 떠오르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탁탁 끊어지는 말투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바람에 파올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 때문에 얼굴을 뒤덮은 주름이 굵게 잡혔고 십년은 더 늙어보였다. “계속해서 사건이 벌어진다면 쟝에게 유죄를 판결하는 것도 어렵겠군요.” 엘란이 중얼거렸다. 피살된 엘프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사태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엘프들의 땅을 쟝이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른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다이어의 시체가 발견된 이후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엄밀한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럼 나는 풀려나는 건가”“ 쟝의 얼굴이 기쁨으로 넘쳐났다. “글쎄.” 짤막하게 대꾸하는 카이어스의 말이 불길한 음영을 드리웠다. “글쎄라니”“ 이번에는 하이론이 물었다. “장로들의 최우선 임무는 사회를 혼란 없이 이끄는 일이다. 인간들이라는 좋은 희생양을 포기할 수 있을까”“ 카이어스가 되물었다. 좌중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쟝을 살해범으로 모는 것은 동족을 죽이지 못하는 그들의 특성상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설득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카다이어가 죽는 순간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카다이어의 집을 인간들이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살해범은 엘프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한 사실을 현명한 장로들이 모를 리 없었건만 그들은 판결을 서둘렀다. “시간을 번 것 이외에는 결국 원점이로군.” 하이론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살인자를 꼭 잡아야겠군요.” 엘란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발광석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검박한 방안에 세 명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장로들은 화분을 중간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에서 착생하는 것을 옮겨 심은 온시듐은 늦가을을 맞아 마지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이 시들어갈 때 꽃줄기를 밑동에서 잘라 쉬게 해야 하건만 정신이 없는 바람에 꽃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부자연스런 침묵을 더르터크가 깨트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잡아야지. 반드시!” 아주르갈대장로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잡은 후에는......”“ “처리를 해야겠지.” “어떻게......”“ 포르티걸의 목소리에서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잡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엘프들은 동족을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최선의 방안은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추방하게 되면 인간들이 알게 되고 이번 사건을 빌미로 몰아내려 했던 계획이 이지러지는 것이다. “죽여야지!” 대장로의 날카로운 음성이 포르티걸의 상념을 끊어버렸다. 죽이다니” 누가” 어떻게” “동족을 죽일 수 있는 엘프가 있다.” 두 장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자 아주르갈이 토를 달았다. “아!” 더르터크가 탄성을 질렀다. 있었다. 동족을 죽일 수 있는 엘프가. 카이어스! 저주받을 사고의 생존자.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을 상기하면 사형집행을 거부하지는 않으리라. “범인을 잡고, 그가 사형을 집행한다. 비밀리에.” “그 후에는”“ 아주르갈의 입술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쟝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인간들을 숲에서 몰아낸다!” 장로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을 즈음 인간들도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으악!” 쟝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벌써 세 번째였다. 조각난 신체의 일부분을 보고 놀라 나자빠진 것이. 어찌나 놀랐는지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여기 있었군.” 카이어스의 침착한 음성이 벽에 박힌 가르모니의 몸통을 휘감고 돌았다. “혹시 카다이어의 심장도 여기에 있었나”“ “예.” 엘란이 대답했다. “심장은 어디 있나”“ “태워버렸습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하이론이 입을 열었다. “이것도 태워버릴까”“ “감시하는 자에게 줘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시하는 자라니”“ 엘란의 말에 파올이 되물었다. “카다이어의 시체가 발견된 이후 계속 감시받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들도 우리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군.” “아마 그럴 겁니다.”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결과는 바뀌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상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헥헥!” 나탈리가 집으로 뛰어들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치맛단에 묻은 흙이 한 바가지는 될 것 같았다. “오빠 옷 만드는 거야”“ 어두운 등불 속에서 솜옷을 누비고 있던 에쉴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녀는 의자에 걸쳐진 수건을 들어 땀으로 범벅된 나탈리의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응, 아퍼 살살 문질러.” “좀 있으면 숙녀가 될 텐데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는 구나.” “헤헤!” 땀이 흙과 함께 닦여나가자 해맑은 얼굴을 한 나탈리가 베슬거렸다. “언니도 예전에는 개구지게 하고 다녔다던데.” “누가 그래”“ 반문하는 에쉴리의 얼굴에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에이! 성녀한테 다 들었는데 시치미 떼기야”“ “요런 개구쟁이!” 그녀가 나탈리의 코를 꼭 쥐고 놓았다. 에쉴리는 새삼스런 눈으로 아이에서 작은 소녀로 성장하는 나탈리를 살폈다. 아이들이 크는 것은 잠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엘란의 등 뒤에 숨어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작은 아이는 이제 제법 커서 좀 있으면 데이트를 시작할 것이다. “오빠는 언제와”“ 그가 엘프들의 숲으로 떠난 후로 여러 날이 흘렀다. “좀 있으면 오시겠지.” “올 때 신기한 거나 가져 왔음 좋겠다.” 그들이 왜 그곳으로 떠났는지 알지 못하는 나탈리는 엘란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잘난체하는 로이의 기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체! 오빠가 없다고 나한테 기어오르는 모양인데, 두고 봐라 넌 이제 죽었어!” 나탈리가 작은 손을 꼭 쥐고 결의를 다질 때 에쉴리는 지고를 불렀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깨지 못하도록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문 앞까지 다가간 후 깨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웠다. 평생을 살면서 이토록 컴컴한 밤은 처음이었다. 먹구름은 달을 완전히 삼켜 버렸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별들마저 그 빛을 잃었다. 습기가 코끝을 감도는 것이 한바탕 비라도 뿌릴 것 같았다. 스슥! 은밀하게 나무 뒤로 돌아간 그는 감시하던 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바닥에 착 붙어 천천히 움직였다. 스르륵. 그가 감시자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한 시간 동안이나 신경을 곤두세운 결과였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가 갖춰지자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런 그의 앞길을 누군가가 막았다. “엘란, 늦었군.” 앞을 막아선 자는 큰 덩치의 괴짜 엘프 카이어스였다.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감시자를 피하느라고..... 그 보다 무슨 일이죠”“ 카이어스는 그들의 집을 나서며 엘란에게 은밀하게 속삭였었다. 한 밤중에 은밀히 만나자고. 왜 이 엘프는 한 밤중에 은밀하게 보자고 했을 까! 그것도 비밀리에. “범인을 잡는 데 자네 도움이 필요해.” “.......!” 그는 의외의 말에 할 말을 잊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까”“ 크게 심호흡한 후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긴장과 흥분으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니!” “......” 잔뜩 기대를 가졌던 엘란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잡을 수는 있다.” “무슨 소립니까”“ 엘란은 괴짜 엘프가 한 밤중에 불러내서는 스무고개를 하자고 하는 것 같아 짜증이 왈칵 밀려왔다. 당연히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범인이 살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를 노릴 것이다.” “그래서요”“ “.......” 엘란이 되묻는데 카이어스는 말도 없이 미간만 찌푸리고 있다. 엘란은 더 이상 수수께끼 놀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 한바탕 쏘아붙여 주고 돌아가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잠복근무!” “예”“ 카다이어는 어디에서 이런 말을 주워들었을까. “범인을 잡으려고 연고지나 출현예상지에 숨어있는 것을 인간들의 언어로 잠복근무라고 하지. 맞지”“ “맞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이 엘프는 정상이 아니다. “범인이 나를 노릴테니 내 집에서 같이 잠복근무를 서자!” 엘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범인도 모른다면서 그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엘프들이 열댓 명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 사랑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나”“ 점입가경이다. 엘프는 점점 더 괴상하게 나왔고 그와 동시에 엘란의 기분도 점점 더 나빠졌다.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근육 엘프와 선문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잘 생각해 보게.” “애증, 시기.” 엘란은 어서 돌아갈 생각으로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겼다. “애증은 사랑이 변해서 된 것으로 밑바탕에는 사랑이 깔려있어. 시기는 자신이 가지지 않거나 가질 수 없는 어떤 것-물질이든 비물질이든-을 가진 자에 대해 샘내고 미워하는 거야.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자네 답은 틀렸어.” 엘란은 그와 사랑에 대해 대화하고 있자니 이 엘프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 답이 뭡니까”“ “무관심.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야.” “그래서요”“ “이해 안 되나” 하긴 자네가 이해할리 없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와 카다이어는 엘프들 사회에서 경원시 되는 존재들이야. 철저한 무관심의 대상이지. 무관심! 괴로운 일이지. 견디지 못한 카다이어는 북쪽 변두리에 숨어 살았고 나는 온 숲을 돌아다니며 외로움을 삭였다.” 그는 스스로 묻고 답하며 하소연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한 이야기를 길게 이어 나갔다. “왜 나와 카다이어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건 엘프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야. 장로들은 나와 그가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아무도 상대하지 못하도록 명령했지.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지. 왜 하고많은 엘프중에 카다이어가 죽었을까”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그를. 평소 아무도 찾아가지 않던 그를. 그건 살인자가 나와 카다이어를 미워했기 때문이야. 자 내 생각이 어떤가” 그 놈은 반드시 나를 죽이러 온다. 나와 같이 그 놈을 잡자!” 엘란은 한 동안 침묵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럴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의문도 생겨났다. “거...뭐야...그래 잠복근무! 왜 접니까” 엘프들도 많은데 왜 저와 함께 잠복근무를 서려고 하십니까” 엘프들은 인간들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카다이어의 죽음을 은폐하려 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인간을 멸시하는 엘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설적인 일이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는 인간들뿐이다. 어떻게 하겠나”“ “그래, 갑시다. 어차피 다시 잠들기도 글렀는데.” 대화를 끝낸 그들은 어둠속으로 조용히 녹아들었다. ***************************** “음~” 갈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타는 듯한 목마름이 정신까지 아득하게 만들었다. 피를 보면 볼수록 저 깊숙한 정신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살육의 욕구는 강해졌고 그와 동시에 솟구치는 분노가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우연이었다. 결계밖으로 나가는 엘프를 본 것은. 그날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던 한 줄기 이성의 끈도 끊어져 버렸다. 카다이어를 죽인 것은 어쩌면 잘한 일이다. 그는 사회를 좀 먹는 사회악 같은 자이니. 그러나 가르모니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며 희열에 몸부림치던 자신이 추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엘프의 주인 티그리아는 무엇이라 할 것인가” “음~” 살인자는 다시 한 번 신음을 흘렸다. 뜨거운 욕구가 솟구쳐 전신이 확확 달아올랐다. 꼭 발정기에 다다른 짐승같은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들었고 그에 비례해 광기도 솟아올랐다. 방안을 정신없이 서성거리는 살인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그를 친근하게 반겨 주었다. ******************************* 그의 집도 외따로이 서 있었다. 대충 흙을 이겨 만들어 놓은 그 곳은 롬바르드의 빈민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년에 사나흘 정도만 머무는 집이라 하나 너무 볼품이 없어서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다. 카이어스는 탁자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고 엘란은 그의 등 뒤에 숨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탁. 너무나 미세한 소리여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카이어스가 몸을 돌려 엘란을 쳐다보았다. 열기를 담은 눈은 너도 들었냐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엘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지손가락을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카이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아나갔다. 엄지손가락부터 차례로 굽히는 동시에 그의 왼손이 등에 둘러맨 작은 칼을 잡아갔다. 그의 손가락이 하나씩 구부려 질 때마다 엘란의 이마위에 솟구치는 땀방울도 하나씩 늘어갔다. 마지막 새끼손가락이 구부려지는 순간. 쾅! 커다란 카이어스의 몸이 천장을 뚫고 위로 솟구쳤고, 엘란도 슈리엘을 불러 하늘위로 날아 올랐다. 파앗!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엘프의 칼이 어둠을 가르며 쏘아졌다. 그 때 뒤집어진 바닥이 칼을 막아섰다. 퍽! 칼이 장벽을 뚫고 날아가려는 순간 주위의 흙이 뭉쳐지며 둥근 아가리를 만들더니 덥석 칼을 물어버렸다. 칼이 힘을 잃고 떨어질 때 하늘 높이 솟구친 엘란은 달아나는 자를 향해 바람을 창을 날렸다. 쐐액! 언제나 그렇듯 창은 공간을 가르며 빛살처럼 쏘아졌다. 칼을 막아섰던 것처럼 또 다시 일어선 땅이 창의 앞을 가로막았다. 쾅, 쾅, 쾅, 쾅 창이 장벽을 돌파하면 계속해서 땅이 솟구치는 바람에 연속적인 폭음이 터져 나왔다. “스피릿 컴파운드!” 어떻게든 도망치려하는 밤손님을 향해 배배꼬인 정령들이 날아들었다. 정령들이 의심스런 자를 강타하려는 순간 벌떡 일어선 땅이 입을 딱 벌렸다. 그 입속으로 정령들이 돌진하자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것 같았는데 이번 장벽은 앞의 것들과 달라서 뒤로 쭉쭉 늘어나는 바람에 정령들이 뚫을 수 없었다. 끄으~ 마치 트럼같은 소리와 함께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카사와 실피드는 분리된 채 땅에 잡혀버렸다. 탓. 엘란이 그를 잡아두는 사이 고무공같은 탄력으로 장벽을 넘어선 카이어스가 그의 지척까지 다가섰다. 쫘악! 푸르스름한 오러를 머금은 칼이 자신을 옭아매려는 진흙을 양단해 버렸다. 라이트! 적의 머리 위에 도착한 엘란이 마법을 시전했다. 빛의 광구가 적의 앞에 도달하자 엘란의 입에서 경악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너는!” --- 엘란(81) 21장. 의외의 범인.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었다. 특유의 오만이 극에 달하긴 했지만 이런 잔인한 짓들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물. 그 높은 자긍심과 긍지는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시리우스! 너였군!” 한자 한자 씹어 뱉는 카이어스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졌다. 광구가 얼굴을 비치자 잠깐 당황했던 시리우스는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카이어스를 노려보았다. “너라니” 무슨 소린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시치미를 떼겠다는 건가”“ “시치미라니”“ 계속적인 반문 속에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엘란도 긴장에 휩싸여 상황을 주시했다. “하! 지금 나하고 스무고개 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농담 따먹기라도 하고 싶은가” 내가 여기에 집을 지은 것은 삼백년 전이고, 그 이후 이집을 방문한 엘프는 너를 포함해서 한 명도 없었다. 설마 산책을 하다 우연히 내 집 위에 올라섰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점점 높아져가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칼에서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소드마스터였어!” 엘란의 입에서 경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강력한 존재감으로 미루어 소드마스터라고 짐작은 했으나 엘프라는 선입견 때문에 혹시나 했었다. 엘프는 정령사라는 기존의 등식이 워낙에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범인을 잡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 카이어스가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칼을 위협적으로 놀렸다. 칼끝이 자신을 향하자 슬쩍 한걸음 이동한 시리우스가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카다이어 다음에 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붕위에 숨어 있으려 했다.” 대화를 주의 깊게 경청하던 엘란의 얼굴에 얼핏 당혹이 스쳤다. 진짜인가, 거짓말인가”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든 안 믿든 그건 너의 자유다.” “그럼 왜 도망치려했습니까”“ 엘란이 끼어들었다. “갑자기 덮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상급정령사가 도망쳤단 말입니까”“ “너라면 어쩌겠나” 소드마스터와 상급정령사가 동시에 덤비는데 맞서서 싸우겠나” 게다가 난 엘프다. 동족은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어. 만약 나를 공격한 자가 살인자가 맞다면 나는 두 손을 묶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나”“ 시리우스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엘란도 만약 소르마스터와 상급정령사의 협공을 받는 다면 도망부터 치고 볼 것이다. “아니! 나는 네 말을 믿지 못하겠다.” 카이어스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한 걸음에 공간을 압축하는 모습은 막스를 연상시켰다. 씨잉! 기세 좋게 일렁이는 오러가 앞을 가리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의 칼이 시리우스의 면전에 다다르자 둘 사이에서 물의 중급정령 엔다이론이 나타났다. 삭~! 엔다이론 베어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정령을 베느라 칼이 멈칫하는 사이 바닥에 드러누운 시리우스의 몸이 땅 속으로 잠겨 버렸다. 퍽! 오러가 애꿎은 땅을 후려치자 바닥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휘이이. 한 줄기 바람이 카이어스의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컴컴한 밤, 오직 퍼렇게 일렁이는 칼끝에 맺힌 오러만이 암흑을 가르는 침묵의 공간에 길 잃은 들쥐 한 마리가 뛰어 들었다. 썩. 간단하게 두 조각난 들쥐가 양 옆구리를 바닥에 댈 때 진흙이 카이어스의 발을 타고 기어 올랐다. “하!” 시원한 기합성이 울리고 그의 칼이 바닥을 향하자 둥근 홈이 파이며 먼지가 풀풀 날렸다. 진흙이 맨땅으로 변해서 그를 구속하려하자 카이어스는 공중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20미터 상공까지 떠오른 그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질 때 발 디딜 만한 곳이 움푹움푹 꺼지며 날카로운 돌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노임이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을 내놓은 채 으르렁 거렸다. 카이어스가 밑으로 떨어지며 칼끝을 아래로 쫙 뻗자 오러가 옆으로 쭉 펴지며 아래로 쏘아졌다. 쾅!!! 구덩이의 돌창이 깨어지며 조각난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턱. 그가 구덩이에 발을 딛자 노임들이 그 속으로 뛰어든다. 퍽. 퍽. 퍽. 칼이 노임을 스칠 때마다 정령들은 진저리를 치며 정령계로 돌아갔다. 엘란은 카이어스를 도와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리우스 말이 사실일까”“ 엘란은 슈리엘에게 물었다. “글쎄다.” 슈리엘도 엘프에 대해 아는 것은 별반 없어서 판단을 내리기 곤란했다. “나와! 죽여 버리겠다.” 광기에 사로잡힌 카이어스는 한 달음에 구덩이를 빠져나와 바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3미터 길이로 늘어난 오러가 바닥을 스칠 때마다 땅이 쩍쩍 갈라지며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광기에 젖어 마구잡이로 바닥을 가르자 엘란은 뭔가가 생각날 듯 말듯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듯이 부르짖는 광소와 살기에 젖은 두 눈, 사방천지로 휘두르는 칼날..... 알 듯 말 듯 머릿속을 맴도는 무엇인가가 신경을 갉아대고 있었다. 어떤 중요한 단서가 떠오를 듯 하다 다시 가라앉자 가슴이 답답해지고 짜증이 몰려왔다. “뭐지” 뭐지” 뭐지”“ 동일한 단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한 동안 바닥을 들쑤시던 카이어스는 칼을 땅에 꽂아 넣고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파파파파! 칼을 중심으로 막대한 힘이 퍼져나가자 가뭄에 갈라지는 논바닥처럼 땅이 쩍쩍 갈라졌다. 팍!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힘을 견디지 못한 시리우스가 몸을 드러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카이어스가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르자 반원을 그리는 날을 따라 반달모양의 오러가 떨어져 나갔다. 쐐액! 떨어져나간 오러가 시리우스를 향해 쏘아졌다. 실피드를 불러 공중에 떠 있던 그는 신중한 모습으로 두 손을 모았다. 위로 산발한 머리카락과 오만한 표정은 조각같은 외모와 맞물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휘잉. 그의 앞으로 다양한 속성의 정령들이 몰려 나왔다. 정령들은 자신의 몸이 베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오러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쾅! 회심의 일격은 시리우스를 빗겨서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헉헉!” 카이어스가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를 몰아내는데 너무 과도한 힘을 쏟아 부은 탓이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돌멩이를 주워들고 상대를 향해 던졌다. 돌멩이도 소드마스터가 던지자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한 개라도 맞았다간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져나갈 것이다. 슉, 슉, 슉. 돌멩이가 연속적으로 하늘을 갈랐다. 시리우스가 돌을 피하면 그 자리를 향해 다시 던지고, 그래도 피하면, 피할 곳까지 계산해서 던졌다. 삽시간에 촘촘한 돌멩이 그물이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예상 진로까지 돌멩이가 날아들자 시리우스는 어쩔 수 없어 멈춰 섰다. 그런 그를 향해 카이어스의 칼이 시퍼런 광채를 빛내며 달려들었다. 긴 잔광을 남기고 날아가는 칼에서 필사의 의지가 묻어나고 있었다. “억!” 회심의 미소를 짓던 카이어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의 발치에서 솟구쳐 오른 진흙덩어리들이 그를 완벽하게 감싸며 올라와 목까지 묶어버렸다. 이겼다고 방심하던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따당! 따당! 실피드가 돌멩이를 쳐내며 급속하게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리우스를 감싼 채.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칼이 포물선을 그리며 시리우스를 쫓았다. 카이어스는 눈이 기대를 빛내며 칼을 쫓는다.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전세는 일거에 역전되는 것이다. 땅! 난데없이 날아 든 돌멩이가 칼의 옆면을 때렸다. 정령을 이용해서 하나 받아들고 있던 시리우스가 알맞은 시기에 돌을 날린 것이다. 그 때문에 방향이 틀어진 칼이 실피드를 훑고 시리우스의 옆구리를 길게 찢은 채 어둠을 밝히며 사라져 갔다. 턱! 바닥에 내려선 시리우스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익익!” 카이어스가 풀려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클레임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차가운 미소를 날린 시리우스가 바닥을 향해 손을 내밀자 카이어스가 처음으로 뽑아들었던 칼을 물고 놈이 다가왔다. 그것을 받아든 시리우스가 카이어스의 면전에 불쑥 칼을 디밀었다. “제법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엘란은 둘의 혈전을 보면서도 그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개가 잔뜩 낀 것 같아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전이 끝나는 순간 제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범인이 맞다면 널 죽였겠지” 그렇지 않나”“ 시리우스가 칼을 코앞에 들이대고 이죽거렸다. “더러운 놈!” “여전히 입이 험하군. 세월이 흘러도 너와 카다이어는 변할 줄 모르는 구나. 그런 면에서 본다면 너희 둘은 엘프공동체의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어. 사실 그가 살해됐을 때 놀라는 한편 잘 죽었다는 생각도 들었지.” “그래서 죽였나”“ 툭툭.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나는 죽이지 않았다.” 칼로 머리를 두들기며 훈계조로 말을 늘어놓던 시리우스가 별안간 칼을 내려 그의 뺨을 길게 그어 버렸다. 주륵, 주륵.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굵은 핏줄기가 엘란의 헝클어진 머릿속을 씻어 내렸다. 잡념이 쓸려 내려간 생각의 빈터에 하나하나 떠오르는 사실들이 교차되기 시작했다. 코르도바습지의 경험이 씨줄이 되고 엘프사회에서 얻어들은 지식이 날줄이 되어 튼튼하게 짜여지자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쐐액. 방관자처럼 떠 있던 슈리엘이 창을 날렸다. 돌연한 기습에 기겁을 한 시리우스가 뒤로 물러서자 창은 원래의 목적지인 클레임을 강타했다. 그를 감싸고 있던 클레임이 퍼석 부서지며 땅 속으로 기어들자 구속에서 풀려난 카이어스가 시리우스를 향해 매서운 눈을 빛냈다. “무슨 짓인가”“ 시리우스의 노기 띤 목소리가 점점이 울릴 때 엘란은 그의 뒤를 돌아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시리우스의 뒤통수를 향해 말을 쏘아댔다. “당신이 칼 놀리는 걸 보자니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죠, 아니 몇 년 전이니 옛날도 아니군요.” “그래서”“ 엘란은 공격해 들어가려는 카이어스를 눈빛으로 제지하고 말을 이었다. “동화라는 둥, 방어기제라는 둥, 동족을 죽이지 못한다는 둥,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의심스럽긴 했습니다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다른 종족이기도 한 데다 일견 그럴싸하기도 해서 말이죠. 그래서 엘프들의 말을 모두 옳다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면 범인이 될만한 사람은 저기 저 괴짜 엘프 카이어스 뿐이죠.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이미 죽었고.” “그래서”“ 다시 반문하는 시리우스의 말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래서, 곤혹스러웠죠. 유일하게 엘프를 죽일 수 있는 카이어스는 범인으로 보이지 않고 살인을 하지 못하게 동화된 엘프가 범인이니. 그런데, 방금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동족을 죽일 수 있는 광기 있는 엘프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나요” 카이어스”“ 어두운 밤하늘을 확신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코르도바습지에서 미친 듯이 거미를 절단 내던 그 광기에 찬 칼질이 떠오르는 군요.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엘프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겨우 그런 일로 나를 범인으로 모는 건가” 엘프는 동족을 제외한 다른 생물은 죽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저와 나탈리는 습지에서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동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미의 집에서도 그랬죠. 그리고 거미줄에 묶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당신도 그랬겠죠”“ 엘란의 음성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카이어스는 팔짱을 끼고 조금 전 엘란이 그랬던 것처럼 방관자적 자세로 들어가 돌아가는 사태를 조용히 주시했다. “당신은 무슨 꿈을 꿨습니까” 그 거미가 당신 내부의 어떤 공포를 들추던가요” 어쩌면 당신들이 어릴 때 눌러놨던 수많은 욕망을 자극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것이 당신의 방어기제를 뚫었죠” 거미전공이 남의 머릿속을 헤집는 거니 방어기제야 쉽게 뚫었겠죠. 자 말해 봐요 꿈속에서 무엇을 봤습니까”“ 계속적인 질문이 시리우스의 가슴을 두들겼다. 말이 이어질수록 일그러지는 시리우스의 얼굴은 카이어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방어기제를 뚫렸군. 그래 그 거미와 동화했나”“ 반대편에서 대답이 들렸다. “그래, 동화. 자칭 신이라는 그 대형 거미와 동화했을 수도 있겠군.” “헛소리! 우리의 방어기제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아니! 아무리 교육이 철저했다 하더라도 욕망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잔인성이나 살육, 폭력의 욕구는 모든 생물체의 기저에 깔린 본능입니다. 폭력! 생존의 필수 요건이죠. 악은 선보다 근원적이며 훨씬 더 생명력이 강합니다. 교육으로 눌러놓은 모든 욕망들을 거미가 일깨웠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조리 있게 말을 한 것도 처음 있는 일. 수많은 고난을 거치며 형성했던 그의 사상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으으하하하! 너의 개똥철학인가”“ 시리우스의 낭랑한 비웃음이 자욱이 깔릴 때 카이어스가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지....흠잡을 때 없는 말인 것 같은데...” 말을 길게 끌며 바닥을 박차자 금세 거리가 좁혀졌다. 슈리엘이 뒤에서 창을 움켜쥐고 기회를 노리는 가운데 무기를 잃은 카이어스가 주먹을 쥐고 그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 때. 팟! 카이어스의 앞으로 바닥이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휘둘러 장벽을 깨려하자 흙벽이 교묘하게 접히더니 그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으아!” 카이어스는 다시 한번 클레임에 잡히자 분노의 괴성을 질렀다. 쇄액! 슈리엘이 다시 창을 던졌다. 그러나 앞에서 뭉쳐진 운다인이 창을 빗겨 쳐 버렸다. 펑! 전광석화! 창을 빗겨 쳐낸 운다인의 팔이 길쭉하게 늘어나 슈리엘과 엘란을 동시에 두들겼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다. 카이어스가 클레임에 잡히고 엘란이 운다인에게 얻어맞아 바닥을 뒹구는데 걸린 시간은. 그가 생각하기에 이건 절대로 시리우스의 솜씨가 아니었다. 운다인과 클레임을 동시에 부리는 자는 엘란이 알기에는 한 명 뿐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그를 불러냈으리라. “더르터크!” 그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불러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더르터크가 땅 속에서 솟아올랐다. “젠장!” 분한 마음에 살이 떨렸다. 엘프의 장로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가자!” 더르터크는 엘란이나 카이어스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시리우스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허탈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둘을 내버려 둔 채. 툭, 툭. 흙을 부수고 나오는 카이어스가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모두들 사라지고 난 후에야 겨우 구름의 손을 벗어난 달이 고개를 디밀었다. “젠장! 망할 놈의 엘프새끼들.” 엘란의 이야기를 들은 하이론도 욕설을 내뱉었다. 천신만고 끝에 잡아낸 범인을 달랑 데려가 버린 것이다. “난 이제 풀려나는 건가”“ 쟝은 사태를 희망적으로 보고 싶었다. 범인이 잡혔으니 이제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럴 것 같지는 않소. 워낙에 음흉한 위인들이 되놔서....” 걱정이 된 파올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세상에 회자되는 소리-엘프는 고귀하고 정직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죄다 헛소리 같았다. 그가 본 엘프는 편협하고 의심많으며 음흉하고 부정직했다. “성질대로 하자면 바샤라의 돌을 받아서 다른 데로 떠나고 싶다.” 하이론이 넋두리 하듯 중얼거렸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더라도 만정이 떨어져서 엘프들과는 더 이상 같이 살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재수 없는 놈들! “그냥 돌아갑시다. 범인을 뻔히 아는 데 다시 잡으러 오지는 않겠죠!” 쟝이 불안한 얼굴로 제의하고 나섰다. 파올과 하이론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불안이 몰려와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가 없었다. 그냥 나간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탓이다. 마음이 복잡한 엘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쟝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교도들을 땅에서 내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장로의 유리알같이 투명한 눈과 더르터크의 뛰어난 정령술을 떠올리면 답답한 심정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들이 상념에 빠져 나름대로 해결책을 궁리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똑, 똑. “헉!” 쟝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요새 이리저리 놀랄 일이 많았던 그는 심장병이 걸릴 지경이었다. “누구야”“ 심사가 꼬일 데로 꼬여있던 하이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이어스다. 엘란 나 좀 보자.” 파올의 눈에 반가움이 어렸다. 범인으로 의심받던 카이어스는 이제 가장 믿음직한 엘프가 되었고, 신뢰받는 대상으로 떠올랐다. 인간들의 땅에 발을 디딜 때부터 괴짜로 의심받던 처지를 떠올리면 상전벽해라 할 수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하이론이 존대하며 들어오기를 청했다. 덜컹! 카이어스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들어갈 시간은 없다. 이봐! 엘란. 시리우스 잡으러 가자.” “......!” “.......” 좌중은 너무도 갑작스런 요청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일 분간의 침묵이 흐르고 엘란이 입을 열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짐작 가는 데가 있다.” “우리가 더르터크의 손에서 그를 빼낼 수 있을 까요”“ 일패도지 했던 어제 일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잡아선 어떻게 할 셈이요”“ 하이론이 물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잡는다 하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였다. 시리우스가 부인하고 장로들이 두둔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엘프들 앞에서 공개하고 처형해야지!” 카이어스는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 시원시원하게 대꾸했다. 어찌나 기운차던지 쟝이 다 후련할 정도였다. “뭐라도 해 봅시다. 이대로 앉아서 당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나을 듯하네요.” 엘란이 결심하고 일어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그의 등 뒤로 걱정스런 좌중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카이어스가 북쪽으로 안내한 지도 두 시간이 넘었다. 그와 엘란의 빠른 발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거리를 달린 터. 자연 의문이 솟았다.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둘러 가는 것이다.” “적”“ 엘란은 상당히 놀랐다. 이 괴짜 엘프는 서슴없이 동족을 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놀랐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엘프가 같은 엘프를 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쩐지.....괴상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그 정도도 많이 봐준 셈이다.” “우리라면”“ “나와 카다이어, 그리고 살해당한 열여덟 동료들.” 열여덟 동료라는 말은 같이 교육받다 사고를 당한 엘프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살해당했다는 소리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이 죽은 것은 자살이라고.....” “마찬가지다. 그들이 죽음으로 내몬 것이니.” 그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자신을 긍정한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치를 따졌고 그러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가자! 시간이 없다.” 그들은 삼십분 동안 더 이동한 후 발을 멈췄다. “이제부터 날아가자!” “......”“ “이대로 가다가는 들키니까 슈리엘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자는 말이다.” 엘란은 슈리엘을 불러 카다이어와 함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더 올라가자. 더르터크 그 늙은이는 눈치 빠르기가 카그스 더듬이 같은 놈이니.” 그들이 구름이 깔려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남동쪽으로!” “슈리엘을 불러내려고 일부러 북쪽으로 왔군요.” “그래. 뛰어난 정령사들이 많아서 정령을 불러내면 들키거든.” 카이어스가 목적지와 동떨어진 북쪽으로 향한 것은 아무도 모르게 정령을 불러내서 하늘로 잠입하려는 의도였다. 높은 위치에서 오랜 시간 슈리엘을 부리는 것은 상급정령사인 엘란으로서도 벅찬 일이었다. 카이어스의 존재도 힘겨움을 가중시켰다. “힘내라!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구름 사이로 짙은 녹음이 언뜻 언뜻 눈에 띄었다. “멈춰!” 하늘을 난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목적한 곳의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려가자!” 휘잉! 슈리엘은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급속히 떨어져 내렸다. 아래로 내려가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가 눈에 잡혔다. 높이도 높이지만 그 폭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넓었다. “저 나무는”“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워낙 거대한 나무라 어떤 나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계수다.” “저렇게 큰 세계수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 “최초의 세계수다. 너희들이 보았던 세계수는 모두 저기에서 나왔다. 바샤라의 돌을 품고 있는 나무이기도 하지.” “그럼”“ “그래, 이 숲을 유지하고 있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아라크네의 어미같은 존재군요.” 거대 거미가 코르도바습지를 만든 동력이라면 이 세계수는 엘프의 숲을 만든 모태이리라.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나무위로 사뿐하게 올라섰다. 엘란은 슈리엘을 돌려보내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시리우스가 여기에 있습니까”“ “아마도.” 엘란(82) “확실한 건 아니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기로 올 거다. 시리우스는 지도자로 예정된 자. 그러니 만큼 그에 관한 처리를 결정하는 것은 신성한 세계수 아래에서 해야 될 것이다.” “지도자로 예정된 자라.......죄를 묻기도 싶지 않겠군요”“ 엘란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엘프들은 어떨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워낙에 큰 죄를 저질러서 어떻게든 처벌은 받아야 할 거다. 내가 원하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카이어스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흘러나왔다. “눈에는 눈, 주먹에는 주먹!” “그럼...” “쉿! 조용해라. 숨어 있는 것을 들킬 수도 있다. 이제부터 최대한 기척을 죽여라!” 엘란이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제지한 그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살벌한 눈빛을 날리며 잎이 무성한 곳으로 몸을 옮겼다. 엘란도 적당한 곳을 찾아 몸을 감추고 기척을 감추었다. 긴장된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과연 여기로 올 것인가! 톡, 톡. 미세한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자연스럽고도 조용한 발걸음. 엘프들이었다. 카이어스와 엘란은 숨쉬는 것 마저 조심하며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곧추 세웠다. “시리우스, 사실대로 말하라. 정말 그대가 죽이지 않았는가”“ 부드럽게 말해도 그 안에는 언제나 냉기가 흐르는 자. 아주르갈이다. “신성한 세계수와 어머니 티그리아에 맹세코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더르터크는 곤혹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카이어스와 시리우스가 부딪치는 소리에 현장으로 향했고, 엘란의 소리를 모두 들었었다. 그 당시 그는 엘란의 말이 맞다고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시리우스를 잡아들였다. 그런데,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나섰었다. 그리고 지금. 신성한 세계수 아래에서 엘프의 신 티그리아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동족을 죽인 자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포르티걸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세계수와 티그리아! 엘프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것에 대한 맹세는 엄청난 무게를 지니기 마련. 그가 정말 범인인가” “아리아나, 코르도바습지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봐라.” 아주르갈이 물었다. 그녀는 습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을 중점적으로. 카이어스는 아리아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한걸음 움직이는 데 일분이 걸릴 정도였다. 아리아나의 얘기로도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괴물이 과연 방어기제를 뚫을 수 있었을까” “일단 시리우스는 구금하고 일의 진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누구 맘대로!” 어느새 밑동까지 내려간 카이어스가 고함과 함께 뛰어내렸다. 너무나 의외의 습격에 좌중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시리우스의 목에 칼날이 디밀어져 있었다. “음!” 카이어스가 시리우스의 팔을 꺾어 올리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움직이자 마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이 놈의 목을 바닥에 굴려 버릴 것이다.” 카이어스가 살벌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세계수 아래에는 아주르갈, 포르티걸, 더르터크, 아리아나가 있었을 뿐 다른 엘프들은 보이지 않았다. 엘란은 모두의 주목이 카이어스에 쏠리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는 카이어스가 이동하는 동안 조용히 있었었다. 소드마스터만큼 은밀하게 움직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큼. 아리아나는 카이어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가섰다. “움직이지 마!” “카이어스, 이러지 말아요. 그런다고 죽은 카다이어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요. 어리석은 짓 말고 칼을 내려놓으세요. 범인은 제가 꼭 잡아내겠습니다.” 아리아나의 목소리에는 어떤 절절함이 묻어 있었다. “하! 범인을 잡겠다고” 어떻게든 문제를 덮으려고 하는 저 늙은이들을 봐라! 제대로 된 판결이 가능할 것 같은가”“ “엘프의 신 티그라아와 신성한 세계수를 걸고 맹세합니다. 범인을 꼭 잡아서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니 칼을 놓으세요.”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카이어스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이런 따뜻한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 평생 처음 있는 일. 조용조용 다가간 아리아나가 그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칼을 주세요.” 따뜻하게 전해오는 온기. 생전 처음 접하는 따뜻한 체온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칼을 쥔 손을 늘어뜨렸다. 그 손을 아리아나가 따뜻하게 잡아갔다. “안돼!” 아리아나가 칼을 잡자 아래로 뛰어내린 엘란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그러나 때는 늦어서 이미 그 칼은 칼자루만 빼고는 모두 카이어스의 등에 박혀있었다. “컥!” 피거품을 뿜으며 카이어스가 무너져 내렸다. “이 년!” 엘란이 아리아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슈리엘을 불렀다. 슈리엘의 날카로운 창이 아리아나의 심장을 겨냥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범인은 너였어!” 아리아나가 카이어스의 칼을 잡는 순간 엘란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동굴에 잡힌 엘프는 둘이었다. 시리우스와 아리아나! 시리우스는 상급정령사였다. 자신이 이겨낸 꿈을 그가 이겨내지 못할 리 없었다. 방어기제가 흔들려 광기를 부리긴 했지만 그는 극복해냈다. 한 번의 발산으로 이미 정화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넘어갔던 아리아나의 상태는 심각했다. 중급정령사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방어기제는 거대거미에 의해 깨뜨려 졌고, 억지로 누를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첫 살인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고, 세계수와 티그리아를 걸고 거짓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치료해!” 엘란의 고함이 얼어붙은 엘프들을 일깨웠다. 질린 얼굴의 더르터크와 포르티걸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안 평상시의 신색을 회복한 아주르갈이 카이어스의 상처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팟! 상처부위에서 파란 광채가 피어오르고 피를 품어대던 환부는 이내 아물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그의 평온한 어조가 세계수를 휘감고 돌았다. “다행이라고”“ “이제야 범인을 잡았으니 다행이랄 밖에. 시리우스도 무사하고.”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그의 음성은 엘란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엘프가 셋이나 난도질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쫓겨날 위험에 처했다. 그런데 뭐! 다행이라고”“ “죽은 엘프는 죽은 엘프고 산 엘프는 살아야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도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냉정하게 번들거리는 투명한 눈알. 엘란은 그 눈알을 파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한 발 물러선 그가 더르터크와 포르티걸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앞으로 나섰다. “나를 죽이고, 우리들을 숲에서 쫓아낼 생각이군.” 엘란의 입매가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미래의 지도자 약속은 헌신짝인가” 그가 신을 걸고 한 맹세는 어떻게 할 거지”“ 시리우스와 아리아나는 인간들에게 땅을 떼어주겠다고 엘프의 신 티그리아를 걸고 맹세했으며 그들이 서명한 서류까지 신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지도자라니” 누이가 저런 꼴인데.....” 코르도바습지의 영향으로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모르는 그를 지도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의 누이처럼 언제 돌아버릴지 모르는 것이다. 엘란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저들의 행동을 보건데 아리아나의 목숨을 돌볼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녹슨 단검을 꺼내드는 순간, 슈리엘의 창끝이 장로들을 향했다. 상황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대지를 물들였다. 승산 없는 싸움이 시작되려는 찰나. 푹! 느닷없는 일격이 카이어스의 칼끝에서 시작되었다. 어느새 다가온 카어어스가 새로운 칼을 꺼내 아리아나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단숨에 잘려진 심장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칼등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의외의 사태에 엘란은 할 말을 잊었다. 아리아나의 입술이 열리며 처연한 미소가 입가에 매달렸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턱! 망연자실한 엘란이 손을 놓자, 그녀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구겨져 쓰러졌다. “그렇군! 그랬었어! 이 더러운 새끼! 자신들은 아리아나를 죽이지 못하니까 그녀를 죽이라고 카이어스를 치료했어!” 고성을 질러대는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랬다. 카이어스가 뻔히 예상하는 세계수 아래로 시리우스를 끌고 온 것도 다 죽어가는 그를 치료한 것도 모두 그의 손을 빌어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한 때문이었다. 쇄액! 슈리엘이 창을 날렸다. 쾅!!!!!!!!!! “......!” “.......” “......” 돌발적 사태에 장로들은 얼어버렸다. 자신들을 향해 날아와야 할 창이 반대편을 향해 쏘아져 세계수를 강타해 버린 것이다. “안돼!” 아주르갈의 뒤늦은 절규가 하늘을 찢어발겼다. 이 나무는 숲을 지탱하는 근원적 존재로 절대 보호해야 할 나무였다. 슈리엘이 전력을 기울여 던져버린 창에는 일 톤의 바위도 으스러트릴 거력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창에 얻어맞은 세계수의 밑동은 반이나 날아가 버렸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거대했기에 망정이지 대륙에서 하나 뿐인 고귀한 나무가 사라질 뻔했다. “움직이지 마!” 엘란이 경고하자 그의 뒤로 돌아간 슈리엘이 부서지지 않은 부분을 감싸고 장로들을 윽박질렀다. “보자보자 하니 너무하네! 이 새끼들 아주 싸가지 없는 놈들이잖아!” 엘프의 숲으로 들어온 후 별 말이 없었던 슈리엘이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카이어스!” 엘란이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분노를 듣고서 자신을 치료해준 이유가 살인집행자로 써먹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안 순간, 아니 아리아나가 따뜻한 목소리로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한 순간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갔었다. “카이어스 도와줘요!” “어떻게”“ “저기 장로들 찔러버려요. 정령을 부릴 수 없도록.” “그러지!” 키득거리며 다가서는 그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이제 어쩔 겁니까” 장로님들! 까딱 잘못하다간 숲이 절단나게 생겼지 않습니까”“ 푹! 푹! 푹! 실실 쪼개며 칼질하는 카이어스는 미치광이를 방불케 했다. “음!” 장로들의 배에 구멍이 뚫리고 붉은 피가 대지를 적셨다. “인간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그냥 살게 내버려 두지 괜히 긁어 부스럼 낸 꼴이네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언제나 냉정하던 아주르갈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이! 시리우스 미래의 지도자 양반! 저 치들이 당신 약속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데 당신 생각은 어때”“ 아리아나가 죽었을 때부터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기.” “입 닥쳐라! 시리우스!” “닥쳐!” 장로들의 고함이 대기를 흔들었다. 쩍! 슈리엘이 경고의 의미로 세계수를 조이자 당혹한 장로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시리우스, 동생이 죽어서 상심한 것은 안다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너도 알다시피 엘프가 셋이나 죽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경원시되던 카이어스를 이용했습니까” 바샤라의 돌을 구해오다 정신이 병들었던 제 동생을 죽이라고” 또 신에 걸고 한 제 맹세를 헌신짝처럼 취급하신 겁니까”“ 특유의 오만이 살아난 시리우스의 음성에 찬 바람이 날렸다. “그건......” 말을 더듬는 아주르갈을 뒤로하고 엘란에게 다가간 시리우스가 진심에서 우러난 충고를 건넸다. “나무를 자르지는 마라! 나무를 자르면 장로들이 너와 숲 속의 인간들을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뭐 숲이 완전히 망쳐져 버리면 손해난 장사는 아니다만 숲은 다시 복구할 수 있다.” “거짓말!” 엘란은 더 이상 엘프들을 신용할 수 없었다. “신에 맹세코.....하하하! 이젠 신에 맹세를 해도 믿지 않겠구나! 죽은 내 누이를 걸고 맹세하면 믿어줄 텐가”“ 엘란은 이 오만한 엘프가 누이를 들먹이며 눈물짓는 것을 보고는 해연히 놀라버렸다. 시리우스는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가슴이 부인하고 있어서 내버려 두었을 뿐. 자신도 방어기제가 뚫릴 뻔한 거미의 정신침범을 동생이 견뎌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카이어스의 집에서 동생을 기다린 것이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그녀를 저지하고 치료를 해 볼 작정이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너도 숲에서 세계수는 많이 봤을 것이다. 그 중 하나를 여기다 심어서 이 나무의 역할을 대체 시키면 된다. 온전한 바샤라의 돌이 여덟 개나 있으니까! 안다. 그럼 왜 장로들이 칼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는지 의문이 들겠지” 그건 최초의 나무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고 경외심이기도 하다. 게다가 숲을 살리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세계수가 죽고 다른 세계수를 심어서 역할을 대체시킬 때까지 족히 200년은 걸린다. 200년은 엘프의 긴 수명으로도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요”“ 엘란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내 약속은 이미 깨어졌으니 새로운 맹세를 시켜라!” “그들이 저번처럼 어기면”“ “신기에다 걸고 맹세하면 된다.” “카이어스!” 포르티걸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만두라!” 엘란은 어느새 평정을 회복하고 포르티걸을 만류하는 아주르갈에게 감탄해 버렸다. “)#%&*.” 그는 치료마법으로 자신과 장로들을 치료하고 시리우스, 카이어스, 엘란의 눈을 차례로 맞추었다. “시리우스 계속해라.” 또다시 평온한 어투. 엘란은 대장로란 자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었다. “신기는 티그리아가 자식들인 엘프들에게 내려준 신의 눈물이다. 그것을 들고 신을 부른 상태에서 한 약속은 절대로 깰 수 없다.” “정말이요”“ 엘란이 카이어스에게 물었다. “나는 잘 모른다.” 카이어스는 애석하게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아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시리우스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이제 협상만 하면 되겠군. 원하는 것을 말해라!” 마치 시장통에서 하잘 것 없는 물건을 흥정하는 것처럼 그의 음성은 여상했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계속 살기를 원한다. 물론 쟝도 풀어줘야겠지.” “우리의 땅이라.......” 그는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흥미 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띠고 말을 끌었다. “머저리 같은 놈이 되도 않은 약속을 하는 바람에 우리들만 나쁜 놈들이 되 버렸군.” 한탄조로 얘기하는 아주르갈의 말투에 애석하다는 기운은 전혀 섞여있지 않아서 듣고 있던 엘란과 카이어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삼년, 그 이상은 우리들의 땅에서 살 생각을 말아라. 물론 덤으로 그 얼간이는 풀어주지.” “이!.....” 발작을 일으키려는 엘란을 카이어스가 말렸다. “나무를 죽이고 모두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저 새끼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시리우스의 말대로 200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다만 칠팔백년 길면 천년을 사는 엘프들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다.” “아, 참 덤으로 카이어스도 데리고 같으면 좋겠는데.” 겨우 신색을 회복한 포르티걸이 빈정거렸다. “어떤 새끼가 고결한 엘프라고 했는지 보기만 하면 입을 찢어버릴 테다!” 엘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신기를 가져와라!” 그는 아주르갈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죽여서 장로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교도전체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엘란이 소리치고 아주르갈이 고개를 끄덕이자 더르터크가 조용히 사라졌다. 침묵의 대치상태가 한 시간가량 이어진 후. 더르터크가 검은 목곽을 가지고 다시 등장했다. 자연 상태에 저런 시커먼 나무가 있는지 아니면 무슨 칠을 한 것인지 목곽은 아주 검었다. 너무 검어서 무서울 정도였다. 딸깍. 더르터크가 목곽을 열자 오색의 영롱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아주르갈이 목곽 안에 손을 집어넣어 신기를 꺼내자 광채는 더욱 짙어졌다. 팟! 광채에 휩싸여 생긴 모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신기를 높이 쳐든 아주르갈이 주문과도 같은 이상한 소리를 암송하기 시작하자 오색의 광채는 더욱 짙어져서 종래는 그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나 아주르갈은 삼년동안 인간들을 보호할 것을 우리들의 어머니 티그리아 앞에 맹세합니다.” 촤악! 그의 맹세가 끝나는 순간 사방으로 뻗치던 광채가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광채가 사라진 그의 손안에 검은 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기한이 끝나는 삼년 후 신기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이제 떠나라!” 장로들은 상처 난 세계수를 향해 다가섰고 슈리엘을 돌려보낸 엘란은 그 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철썩! 또 다른 충격이 엘란을 덮쳤다. 아직도 온기를 간직한 따듯한 살덩이가 피로 뒤덮인 채 날아가 대장로의 뺨을 후려쳐 버렸다. 귀! 고결한 엘프의 상징이라는 귀. 그 귀가 대장로의 얼굴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굴렀다. 귀가 지나간 자리에 긴 혈선이 그어졌다. 놀란 엘란의 눈에 피를 철철 흘리는 카이어스의 얼굴이 잡혔다. “떠나는 길에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다.” 경악으로 물든 대장로의 얼굴. 엘란은 그토록 보기 원하던 장로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실컷 볼 수 있었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그들은 떠났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동행들이 있는 숙소로 향했고, 동생을 안아든 시리우스는 북쪽으로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겼다. 그 이후 시리우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범인을 정확하게 예측한 분들이 몇 분 계셨네요. ^^ 너무 뻔한가 싶어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제 한 단락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단락이 시작됩니다. 언제나 마무리와 시작은 어렵습니다. 앞으로 지루한 부분들이 좀 이어질 것 같습니다만 참고 읽어주세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엘란(84) $. 포두핌의 지도. 일행들이 엘프의 땅을 나섰을 때는 추수가 끝나고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딱히 풍년이라고 할 만큼 수확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세금을 낼 필요도 없고 아귀처럼 뜯어갈 귀족이나 무뢰배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교도들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광장에 불을 피우고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자 신이 난 아이들이 온통 휘젖고 다녔다. 이젠 제법 성장한 로이는 그 틈에 끼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서 점잖을 떨었고, 나탈리는 하이론 옆에 착 붙어서 잠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할아버지, 엘프들 집은 어땠어요”“ 그녀가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하이론은 흐물흐물 해졌다. “나무의 생장을 이용해서 집을 만들었더라. 가지가 벽이 되고 잎이 침대가 되는 식이지.” “이야! 멋지겠다. 나도 구경 갈 수 있을까요”“ “글쎄다. 엘프들이 워낙에 인간들을 꺼려해서 아마 불가능할 게야.”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마음은 쓰리다 못해 아렸다. 이런 파티도 삼년이 지나면 끝이다. 또 다시 정체를 숨기고 마음을 졸여야 할 것이다. “나탈리!”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땋은 소녀가 나탈리를 불렀다. “할아버지, 나중에 얘기 더 해줘야 해.” 그녀는 나풀거리며 또래의 소녀들과 섞여 들었다. 교도들이 춤추며 흥겹게 노는 동안, 사제들과 하이론형제들은 겉돌고 있었다. 눈치 빠른 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요근래의 안온한 생활에 젖어있기도 했거니와 사제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돌아온 하이론과 파올에게서 대충 일의 개요를 들은 성녀와 사제들은 대처방안을 찾아 머리를 싸매야 했다. “엘란은 어디 갔어”“ 쟝이 하이론의 옆구리를 찔렀다. 교도들과 별 왕래를 하지 않던 쟝은 돌아오자마자 화원을 절단 내더니-엘프들의 땅에서 완전히 질려 버렸는지 꽃이나 나무를 보면 이를 갈았다-웬일로 축제에 와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에쉴리와 회포라도 풀겠지.” “체!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회포는 무슨 회포야.” 쟝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또 헤매고 다녀야 되는 거야”“ “왜 떠나고 싶냐”“ 하이론이 되물었다. “아니. 나도 이제 돌아다니는 건 질색이야. 노는 것도 지겹고. 목이 달랑거리는 것도 영 사절이다.” 그는 정말 지겹다는 표정이다. 그의 경험도 파란만장했으니 이제는 편히 쉬고 싶기도 할 터. 쟝이 한참 투덜거릴 때 엘란이 왔다. “이봐! 뭐 하느라고 코빼기도 안 보였어” 자 한잔 하자!” 그가 대뜸 잡아끌더니 술잔부터 내밀었다. “뭐하고 있었냐”“ 하이론이 묻자 엘란은 얼굴을 붉혔다. 눈치를 때려잡은 쟝이 빙글거렸다. “재미보고 있었나 보네.” “재미라니”“ “에이! 영감 왜 이래, 다 알면서”“ “아~알겠다. 근데 너희들은 매일 작업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왜 애는 안 생기는 거냐”“ “글쎄요.” 엘란은 겸연쩍게 얼버무렸다. 엘프의 숲에 정착한 후부터 에쉴리는 애를 가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그는 밤마다 수고를(“) 해야 했는데 이상하게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 가만히 눈치를 보면 걱정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엘란의 노동강도도 세어졌다. 그는 내밀한 부부 간의 이야기가 화제로 떠도는 게 어색해서 말을 돌렸다. “카이어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쟝이 턱을 쭉 내밀며 신경질적으로 장작을 던졌다. 그의 턱이 향하는 곳에 붕대를 감은 카이어스가 열댓 명의 아가씨에 둘러싸인 채 담소를 꽃피우고 있었다. 간혹 까르르 자지러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로 봐서 무척 즐거운 모양이었다. “다행이군요. 적응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적응! 적응은 무슨! 완전히 제비족이 따로 없구만.” “제비족이라뇨”“ “그런 놈들이 있어, 여자들 등쳐먹고 사는 놈들!” 쟝은 불만이 대단했다. 자기는 뭐 보듯 피하는 여자들이 저 놈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이다. 이게다 하이론의 유언비어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울화가 치밀어 저 놈의 상판떼기를 긁어 버리고 싶었다. 그의 눈길이 사나워지자 하이론도 눈을 부라렸다. “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아! 너는 저 엘프가 불쌍하지도 않냐”“ “불쌍은 무슨 얼어 죽을 불쌍이야!” “동족들에게 쫓겨나고 귀까지 잘라버리지 않았느냐”“ 쟝은 그것도 불만이었다. 미운 놈이 미운 짓만 한다고, 멀쩡한 귀는 왜 자른단 말인가”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문을 여는 순간 귀가 떨어져 나간 피투성이가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그날 그는 완전히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저런 귀 떨어진 놈이 뭐가 좋다고 여자들이 몰려드는지. 하이론과 쟝이 투닥거리는 동안 축제를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사제 산티아고의 간략한 폐회사를 마지막으로 축제는 끝이 났다. 교도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피워놓은 불들마저 사그라들자 성녀와 사제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엘란과 하이론도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파올대사제의 침통한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 그의 물음에 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으~ 춥다. 불이라도 피우지 왜 추운데서 궁상들이슈”“ 집으로 향하는 처녀들을 붙잡고 수작을 걸다 여의치 않자 다시 돌아온 쟝이 몸을 떨었다. 그는 불이 꺼지고 숯이 된 나무위에 새 장작을 넣고 숨을 불어넣었다. 입김을 불어대자 숯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불이 붙었다. 탁탁! 그는 불티가 날리는 모닥불위에 장작을 다시 쌓았다. 쟝이 모닥불을 살리느라 부산을 떨어대는 동안에도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성녀도 불빛 받으니 참 곱네요.”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하이론 옆을 엉덩이로 밀고 들어가서 기어이 자리를 만들더니 너스레를 떤다. “거 하나 물어봅시다. 성녀는 원래 시집을 못 가게 되어 있소”“ “말조심 하라!” 우호법사 조르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찔끔한 쟝은 어깨를 움츠리고 하이론 뒤에 숨었다. “자식! 성질하고는.” 그의 투덜대는 소리를 들은 조르주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조르주가 참지 못하고 화를 터트리려는데 성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쟝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 “성녀가 결혼하지 못한다는 교리는 없습니다만 관례적으로는 독신을 지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성녀의 자리를 물러나는 것이 전통입니다.” “결혼한 성녀도 있습니까”“ 이번에는 하이론이 물었다. 그도 처음 듣는 소리여서 흥미가 일었던 것이다. “열다섯 분이 계신 걸로 압니다.” “이봐! 거기 합죽이 할아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지 말고 할말 있으면 해 보지”“ 카이어스 때문인지 수작에 실패해서인지 심사가 꼬인 쟝은 좌충우돌했다. 그러다 기어이 한 대 얻어맞는다. 탁! 하이론의 손바닥이 쟝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너 이제부터 입 열지마라!” “이 씨!” 쟝이 입을 삐죽거리는데 엘란이 부드럽게 권유한다. “할 말 있으면 해보세요”“ 아닌 게 아니라 산티아고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한참 전부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저.......제가.......생각하기에는 이런 식으로 떠돌아다닌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요”“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정착할 만한 곳이 없어서 모두들 고민하는 것 아닙니까”“ 다 아는 얘기를 무슨 대단한 의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모양새에 역정이 난 사제 마쟈르가 불퉁하게 반문했다.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머뭇거리던 산티아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포두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만.” “포두핌이라.......” “음!” “포두핌,” 그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마디 중얼거리고는 입을 닫았다. 처음 들어보는 생경한 이름에 엘란과 하이론은 더 설명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침묵 속에 시간의 화살이 지나가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하이론이 입을 열었다. “포두핌이 누굽니까”“ 또 다시 이어지는 침묵.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포두핌을 알고 있는 성녀와 사제들은 과연 산티아고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지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러니 자연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일. 자신의 말 때문에 일체의 대화가 끊어지자 불편하게 주위를 살피던 산티아고는 불만에 찬 하이론을 보고 멋쩍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포두핌은 1,5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탄압의 광풍이 몰아쳤는데 그는 교도들이 살 땅을 찾겠다고 전 대륙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그러다 삼십년 만에 나타났는데.......” 그는 목이 타는지 마른 침을 삼키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완벽한 신세계를 찾았다면서 지도를 한 장 건네주고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론이 재촉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가 말도 없이 죽는 바람에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해서 사실인가 의심스럽기도 한데다 희생도 많았던지라.......” “희생이라면.......”“ “사실 그의 말은 너무 유혹적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지도에 그려진 신세계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또 다시 사람들이 떠나고.......그들도 실종되고. 그런 속에서 지도는 잊혀졌습니다.” “그럼 당신은 그 지도가 사실이라고 보는 거요”“ “꼭 믿는 다기 보다는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것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엘란같이 강한 호교법사가 생긴 것도 근 천년만이니 한 번 해볼만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때 파올이 끼어들었다. “그 지도를 따라간 사람들 중에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위험하다.” 드디어 생각을 정리한 파올이 반대하고 나섰다. “저는 한 번 시도해 볼 만하다고 봅니다.” 마쟈르는 찬성표를 던졌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성녀는 어떤 쪽으로 결정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때, 새로운 인형이 모닥불로 다가왔다. “재밌겠는데 나도 끼워주라!” 빙글거리며 쌍칼을 놀리는 자. 카이어스였다. “상급정령사에 소드마스터. 그리고 대륙최고의 치료마법사. 이 정도면 해 볼만 하겠는데.” 하이론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쳇, 대륙최고의 치료마법사” 자기 얼굴에 스스로 금칠하는 거야” 영감! 부끄럽지도 않아”“ ***************************************** 대지가 약동하는 봄. 곧게 뚫린 도로를 따라 일단의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꽤 큰 덩치의 장한과 작은 사내, 그리고 머리가 어색한지 계속 만지고 있는 노인. 엘란과 하이론, 카이어스다. “머리가 이상합니까”“ “머리를 기른 게 삼십년 만이라서.” 하이론은 겨우 일센지 자라난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그들은 엘리오트는 물론 스트빌라이에서까지 수배가 되어 있는지라 변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란은 하이론이 만든 약으로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었고 하이론은 머리를 길렀다. 헤어스타일을 바꾼 것뿐인데도 효과는 놀란 만해서 인상이 확 달라져 버렸다. “그나저나 이 놈들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하이론은 걱정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누구 말인가”“ 카이어스가 물었다. “철딱서니 없는 놈들!” “그 놈들 말이군.” 아에게와 그린은 기어이 맥클레이용병대로 떠났다. 짝귀와 밤톨까지 데리고. 카이어스의 가르침을 받아 실력이 부쩍부쩍 향상된 것을 느낀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여정이 계획된 것이라면 짝귀와 밤톨이 따라나선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아마 귀 얇은 둘을 아에게가 충동질했으리라. “너는 왜 말리지 않았냐”“ 하이론이 엘란에게 물었다. 하이론이 펄쩍 뛰며 그들을 말릴 때에도 그는 별 참견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 인생이죠.” 그랬다. 어떻게 살든 그것은 자신들의 인생이다. 주위에서 충고와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결정은 자신이 내려야 한다. 한 번 뿐인 인생! 그 짧은 시간을 자신의 꿈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 나는 나고, 인생은 인생이지. 엘프는 엘프고.” 카이어스가 생뚱맞은 소리를 해댄다. 머리를 훼훼 저은 하이론은 또 다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어색한 모양이다. “에쉴리 생각 하냐”“ 스트빌라이에 들어선 후부터 엘란은 우울해 보였다. “예.” 외투를 건네던 한숨짓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시려왔다. 차라리 가지 말라고 말렸더라면 이렇듯 가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엘란의 물음에는 지도의 행방과 갈라져나간 지고교도들의 행방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글쎄다.” 포두핌의 발자취를 쫓기로 결정하고 나서 제일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지도와 관련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고교의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 수천 년의 탄압! 그런 상황 속에서 역사를 이어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도 한계가 있었다. 어려운 시절이 계속되자 생각이 다른 무리들이 생겨났고 나중에는 그들 간의 대립으로 교가 산산조각 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교는 셋으로 쪼개졌다. 엘리오트에 정착한 무리는 성녀와 사제들을 모셨고, 피요르드에 정착한 교도들은 재산을 가졌다. 그리고 스트빌라이의 교도들은 대대로 전해져 오는 서류를 차지했다. 그 속에는 포두핌의 지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란일행이 스트빌라이로 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스노우에 있어야 할 텐데......” 스노우는 스트빌라이의 수도였다. 그 쪽 교도들이 마지막으로 전해온 서신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스노우의 빈민촌에 모여 산다고 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마지막 서신이 온 후로 이백년이 지났으니. “그들이 스노우에 없다면 찾기가 어렵겠죠”“ “아마 그렇겠지.” 지고신자들은 그 특성상 자신들을 꽁꽁 숨기니 스노우에 없다면 찾기가 곤란해질 것이다. 하이론은 발길을 재촉하며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지금 추진하는 일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그는 실패, 그 이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두두두! 한 떼의 말이 지나가자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었다. “퉤퉤!” 하이론은 입에 흙이 들어가는 바람에 목이 칼칼해지자 연신 침을 뱉어댔다. “타겠나”“ 침을 뱉는 그의 옆에 다 떨어진 마차가 서더니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반백이 된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노인이 뚜껑도 없는 마차를 몰고 있었다. 160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달막한 키에 온통 쭈글쭈글한 얼굴, 누가 밟아 놓은 것 같이 움푹 들어간 면상, 얇은 입술. 이태까지 살면서 이렇게 못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털썩! 신세 지기 싫어하는 하이론이 뭐라 거절의 말을 하려는데 카이어스가 냉큼 올라타 버렸다. 엉거주춤하던 엘란도 타자 마지못한 듯 그도 마차에 올랐다. “고맙소.” “고맙기는 뭐!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예”“ 엘란이 반문했다. 이런 다 떨어진 마차를 태워주고 돈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이랴!” 그가 한마디 내뱉고 고삐를 채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마차는 생긴 값을 하려는지 승차감이 엉망이었다. 어찌나 덜컹거리는지 속이다 울렁거릴 정도였다. “스트빌라이에서는 마차 태워주고 돈도 받습니까”“ “승객을 실어 나르는 전문적인 마차상회가 있기는 하다만 이런 다 떨어진 마차로 영업을 한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하이론은 마부석에 다가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 팍팍하게 굴지 말게, 부업삼아 하는 일이야.” 마부가 겸연쩍게 웃었다. “요금은”“ “어디까지 가는데”“ “스노우.” “일인당 1실버 어때”“ “그렇게 합시다.” 한 시간 정도 말을 달리자 드문드문 집들이 나타나고 길도 포장되기 시작했다. 도로사정이 나아지자 흔들거리던 마차도 한결 나아졌다. “스노우에는 무슨 일로 가나”“ 길이 평탄해지자 무료했던지 마부가 말을 걸어왔다. “죽기 전에 친척 얼굴이나 보려고.” 하이론이 의뭉을 떨었다. “엘리오트태생인가”“ “그렇소.” “엘리오트태생인건 어떻게 알았나”“ 카이어스가 끼어들었다. 젋은 놈이 반말을 해대자 노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평생 싸라기밥만 쳐 먹었나 젊은 놈이 반말은.” 카이어스가 뭐라 대꾸하려는데 엘란이 막았다. 말을 하다보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여러모로 주목을 끌게 되어 불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숲 속에서 혼자만 살아서 그렇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따돌림을 받았던 카이어스는 죽 혼자서 살았었다. “말투.” “예”“ “엘리오트태생인건 말투를 보고 알았다고.” “아! 예.” “근데 이거 허가는 받은 거요”“ 하이론이 물었다. “말했잖소, 부업으로 한다고. 허가를 받았을 턱이 없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대신 요금이 싸잖아.” “허가라뇨” 이런 일도 허가를 받아야 합니까”“ 엘란이 물었다. “돈 되는 일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그러다 보면 이권이 생기지. 이권에는 힘 있는 자들이 달라붙게 마련이고. 그런 자들이 단체를 만들어서 이권을 관리하지. 그래서 이런 일도 다 조합의 허락을 받아야 해.” “그렇군요. 그럼......”“ “그래, 들키면 곤란해지지. 그보다 묶을 데는 있나”“ “없습니다만”“ “그럼, 우리 여관에 묵게.” “여관도 하십니까”“ “부업으로.” “본업은 뭐야”“ 카이어스가 물었다. 노인은 그가 계속해서 반말을 해대자 영 마땅찮은 표정이다. “학자.” 그는 기분이 상했는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엘란(84) 스노우와 가까워지자 대륙 최고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도로를 다니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조금 더 나아가자 길은 마차와 사람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도로가 혼잡해지자 마부는 마을 천천히 몰았다. 잠시 후 일행을 태운 마차는 스노우의 관문에 도착했다. 사람은 많고 관문은 작다보니 줄이 길게 늘어졌고, 그러다보니 검문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검문이 너무 허술한 것 아닙니까”“ 엘란이 물었다. “강서로 들어가는 곳은 원래 검문이 허술해.” 관문을 통과하며 마부가 대답했다. “강서라뇨”“ “말 그대로야. 스노우시를 관통하는 빌로린강의 서쪽을 강서(江西)라고 하고 동쪽을 강동이라고 해.” 뒤를 힐끗 돌아본 노인은 말을 이었다. “강서는 중류층이나 하층계급이 사는 곳이고 강동은 귀족이나 부자들이 사는 곳이야.” 엘란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엘리오트의 수도 롬바르드가 거주자들의 계급을 성벽으로 가르고 있다면 스노우는 강으로 가르는 게 다를 뿐 사정은 비슷했던 것이다. 강동으로 들어가려면 엄한 검문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마차는 관문을 벗어나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따라가다 샛길로 접어들었다.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집, 지저분한 골목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풍경이 일변했다. 더러운 길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인 마차는 퇴락한 이층목조건물 앞에 멈춰섰다. 그가 부업으로 한다는 여관인 모양인데 형편없는 마차에 걸맞게 건물도 낡아서 곧 무너질 것 같았다. 게다가 여관이름도 아주 독특했다. “현자의 집!” 하이론은 볼품없는 늙은이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다쓰러져 가는 퇴락한 여관이름이 현자의 집이라니. 엘리오트의 지고교가 외부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주점 “엘프의 숲” 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들어가시오.” 한마디 툭 내뱉은 노인은 마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들어가자.” 삐이익. 문이 열리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몇 개의 탁자와 카운터, 그 너머의 조리실. 숙박과 식사를 겸하는 전형적인 여관의 모습이었다. “어서오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삼십대 여인이 살갑게 반긴다. “맥주!” 카이어스가 자리를 잡고 술부터 시켰다. “엘프는 원래 그렇게 술을 잘 마시나” 아니면 자네만 특출나게 좋아하는 건가” 설마 그것도 사고의 후유증은 아니겠지”“ 하이론이 맞은편에 앉으며 연이어 물었다. “맥주가 어디 술 축에나 드나.” 간단히 대꾸한 카이어스는 맥주가 나오자마자 단 숨에 들이키고는 술맛이 맘에 드는 지 빙그레 웃었다. “한잔 더!” 쟁반가득 맥주를 담아오는 여급에게 엘란이 물었다. “빈민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마차를 창고에 몰아넣고 온 마부가 대신 대답을 한다. “길 따라 쭉 올라가면 빈민가가 나오네. 친척이 빈민가에 사는 모양이지”“ “예.” “그래서 친척 찾아왔다면서 방을 잡았구만.”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이는 노인을 향해 하이론이 물었다. 본업이 학자라고 하던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여관 이름이 현자의 집이던데 혹 댁이 현자요”“ “대륙전체는 몰라도 최소한 스트빌라이 안에서는 최고의 학자지.”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엘란과 하이론은 말을 잃고 술잔만 기울였다. 볼품없는 몰골은 도저히 현자로 보이지가 않았다. 문득 새로운 사실이 떠오른 엘란이 입을 열었다. “최고의 학자는 샤뮤엘대현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떤 새끼가 그 따위 헛소리를 해!” 말이 떨어지자마자 격렬한 반응이 따랐다. 시뻘겋게 얼굴을 붉힌 노인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 놈은 생긴 것만 빤지르르하지 머리에 든 건 하나도 없는 속물이다. 누가 뭐래도 스트빌라이 최고의 현자는 나다!” 어찌나 열을 내는지 잘못하다가는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하이론은 노인 하나 잡을 것 같아서 얼른 말을 돌렸다. “방은 큰 걸로 하나만 주시오.” “알겠소.” 아직도 분이 올라 씩씩거리던 노인이 방을 치우러 이층으로 올라가는데 카이어스가 불렀다. “어이! 스트빌라이 최고의 현자, 이름이 뭔가”“ 세상을 처음 여행하는 그는 노인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의 입장에서는 마치 놀리는 것으로 들렸다. 자신이 최고의 학자라고 말할 때마다 비웃음만 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프로스크.” 한 참을 씩씩거리던 그는 퉁명스레 이름을 말하고 더 이상 상종하기 싫다는 듯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프로스크, 프로스크, 프로스크.” 이름을 기억하려는 카이어스의 중얼거림만이 여관을 맴돌았다. 다음날부터 일행들은 하층민의 거주지와 그 위에 위치한 빈민촌의 큰길에 지고교만의 표식을 하고 다녔다. 만약 스트빌라이의 교도들이 본다면 현자의 집으로 찾아올 것이다.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하이론은 답답했다. 표식을 하고 다닌 지 이주일이 지났건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 아닐까요”“ 자신들이 엘프의 숲으로 이주했듯 그들도 이주할 수 있었다. “글쎄다. 우리야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게 됐다지만 그들이야 이주할 이유가 있었을 까”“ 아무래도 몸을 감추고 살기에는 인구가 많은 스노우가 유리했다. “그거야 그렇지만.......여기에 산다면 이미 연락이 왔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이론의 음성에도 힘은 실려 있지 않았다. 스트빌라이의 교도들과 연락이 끊긴 후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들이 보냈다는 서신의 내용도-위험하니 더 이상 연락을 말자던-께름칙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없었고, 포두핌의 단서를 쫓는 일행들은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 컬른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어떤 새끼가 자꾸 벽에다가 낙서야! 지워버려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나타나는 낙서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동네꼬마들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구나.” 작은 마당에 의자를 놓고 볕을 쬐던 노인이 검버섯 가득 핀 얼굴을 들었다. “할아버지 언제 나오셨어요”“ 컬른은 조부 앞에서 욕을 한 것이 겸연쩍어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에. 그래 낙서가 심하던”“ “심하진 않습니다만 그림이라고 그렸는지 글이라고 섰는지 닭발자국 같은걸 어지럽게 늘어놔서 아주 흉합니다. 내 오늘은 지키고 섰다가 붙잡아서 혼쭐을 내줄 생각입니다.” “닭발자국이라.......서...설마!” 노인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당황한 손자가 그를 부축했다. “낙서가 있는 곳까지 가보자!” 손자의 부축을 받아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 바이에도의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만약 예상이 맞다면 근 이백년만의 접촉이었고, 그것은 그가 절대로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담벼락에 다가가 낙서를 확인하는 그의 노안(老眼)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컬른, 좀 업어다오.” 바이에도는 손자의 등에 업혀 여관으로 향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들의 뿌리를 아는 것은 내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삐이익. 하이론은 문이 열리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깊게 패인 고랑과 가득 피어있는 검버섯으로 미루어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노인이 건장한 청년의 등에 업혀서 들어오고 있었다. “주인장, 엘리오트에서 온 손님들이 여기 묻고 있다고 들었소만......” 하이론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한 십년 되었나”“ 반가운 음성과 어울리지 않는 굳은 얼굴. 그들의 대화내용을 미루어 보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이인데, 분위기는 이상하게 어색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이처럼. “오코너가 죽은 후 처음이니 12년 됐네요.” “그렇구만. 오코너, 참 아까운 사람이지. 30살 젊은 나이에 가다니!” 이들은 담에 그려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시죠.”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자 장기투숙계약을 맺은 방으로 안내하는 하이론의 얼굴은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드디어 스트빌라이의 교도와 연결이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여전히 업힌 채로 뒤를 따르는 노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어서자 엘란이 반갑게 맞이한다. “반갑습니다. 사......” “잠깐!” 노인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컬른, 나는 여기서 볼 일이 있으니 너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두 시간 후에 다시 오너라!” 컬른은 할아버지를 내려놓고 머뭇거렸다. 낙서와 할아버지의 반응, 정체불명의 손님들, 이상한 분위기 등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혼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부의 음성에 서려있는 엄한 기운이 그가 남아있는 것을 막고 있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는 조부의 엄격한 눈빛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럼 두 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가 나가고 불안한 침묵이 주변을 감싸고돌았다. 반가워 할 줄 알았던 노인이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나오자 엘란과 하이론은 뭐라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저희는......” “그만!” 어렵게 입을 여는 엘란의 말을 노인이 막았다. “당신들 말은 듣고 싶지 않소. 내 담장에 쓰인 암호문을 무시하려다가 어떻게든 선은 그어야겠기에 나온 거요. 간단히 말하겠소. 우리는 지고를 버리고 바룬신을 모시고 있소.” “......!” “......!” 북해의 차가운 바다를 헤치고 긴 여정 끝에 도달한 스노우. 연락이 닿지 않을까 걱정은 했지만 이러한 소식을 접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엘리오트의 교도들이 지고를 모시듯 그들도 그럴 줄 알았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노인이 다시 못을 박았다. 바이에도. 마을의 촌장으로 스트빌라이에 살고 있는 지고교도의 후손들 중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 그는 촌장에게만 전해 내려오던 비밀을 자신의 대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지고를 버린 지 이백년. 이제 자신만 죽으면 이 비밀은 영원히 묻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엘리오트에서 사람들이 찾아온 것은 전혀 반갑지 않았고 오히려 화근덩어리란 생각만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불청객들이 자신들을 찾는답시고 사방을 들쑤실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물어 볼......” “듣고 싶지 않소.” 그는 일방적인 선언을 끝으로 대화를 거부했다. 꽉 다문 입술과 굳게 닫힌 눈꺼풀이 그의 심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침묵이 주변을 점령했다. 엘란과 하이론은 당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카이어스는 팔짱을 낀 채 돌아가는 형편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마주보고 섰던 엘란과 하이론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때까지 지고를 버리지 않은 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이해합니다. 수많은 탄압과 어려움을 겪는 동안 지고는 한 번도 교도들을 돌보지 않았지요. 새로운 신을 모신다고 비난하거나 추궁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도움을 청할 뿐입니다.” 하이론의 음성에는 절절한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닫혀 진 노인의 눈은 뜨일 줄을 몰랐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방법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도움을 주지 않겠다면 저희도 생각이 있습니다.” 은근한 위협이 섞인 말에 노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요”“ 노기 띤 음성에 칼날이 섰다. “설마 지고교도였다고 고발이야 하겠습니까”“ 묘한 어조! 여차하면 고발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이다. “이이!” 노인은 말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격하게 떠는지 저러다 풍을 맞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납니다. 포두핌의 지도!” 하이론도 걱정이 되는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만 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텐가”“ “약속합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노인이 다시 못을 박았다. 엘란은 그의 음성과 시선에서 묻어나는 적개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색한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덜컹. 문이 열리고 컬른이 들어오자 엘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숨 막히게 무겁던 분위기가 그의 등장으로 누그러졌기 때문이었다. “가자!” 손자에게 업힌 바이에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지도를 가지고 올까요”“ 엘란이 물었다. “가지고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될 테니 가지고 올게다.” 하이론은 조용히 대답했다. 컬른은 할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근질거리는 입을 참느라 주먹을 꽉 쥐었다. 의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힘 빠진 할아버지를 보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벼워진 몸무게도 그의 질문을 막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손자의 등에서 내린 바이에도는 방으로 들어간 즉시 문을 닫아걸었다. 쑤시는 육신을 움직여 문고리 밑에 의자를 받친 후 천천히 움직여 벽장문을 열었다. 어지럽게 널린 잡동사니 사이에 교묘히 가려진 고리를 찾아 당기자 부드러운 소음과 함께 벽이 열렸다. 등잔을 받치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살아생전 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는데.......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길게 뻗치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컬른!” 바이에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 시간이나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는 손자를 불렀다. “이걸 가지고 가서 그 사람들에게 전해 주거라.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도 해주고.” 뚤뚤 말린 종이뭉치를 내밀며 신신당부하는 그의 얼굴은 십년도 더 늙어보였다. 그는 으쓱거리며 여관으로 향하는 손자의 등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남아 있는 모든 물품들을 태워버려야겠다고. “이게 뭘까”“ 컬른은 손에 든 종이뭉치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오늘은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었다. 낙서와 할아버지의 행동, 그리고 손에 든 종이뭉치. 먼지가 소복이 쌓인 걸로 봐서 종이뭉치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이 분명했다. 말려진 종이 끝을 눈에 대고 그 사이를 살피던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묶인 끈을 풀었다. “뭐야”“ 그것은 일반종이가 아니라 양피지라는 특수 종이 같았는데 처음 보는 문자와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지도 같은데”“ 모양은 지도 같았는데 쓰여진 글자와 그려진 지형이 생소하다보니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쳇!” 잔뜩 기대하고 펼쳐 본 종이에 별 다른 것이 없자 실망한 컬른은 아무렇게나 뚤뚤 말아서 어깨에 걸쳤다. “보물지도는 아니겠지”“ 얼핏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리던 그는 피식 웃으며 지도로 머리를 두들겼다. “에이 설마!” 할아버지가 보물지도를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고 만약 보물지도가 맞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주지도 않을 것이다. 열적은 기분이 든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옛수!” 컬른은 초조하게 기다리던 엘란을 향해 지도를 내밀었다. 삭! 그가 지도를 받으려 하자 얼른 팔을 당긴 컬른은 지도를 빙빙 돌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누구야” 우리 할아버지하고는 무슨 사이야” 이건 또 뭐고”“ 연이어 질문을 해대던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거...설마....보물지도는 아니겠지”“ 엘란은 뻗어가던 손을 움츠리며 눈썹을 모았다. 지도를 가지고 온 청년에게 대답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이 지고교도였음을 아는 것은 그 뿐이고 자신을 마지막으로 비밀을 묻을 생각인 모양인데 청년에게 사실대로 말하기가 곤란했다. 그렇다고 꾸며대자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까불지 말고 내놔!”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어스가 두건을 벗으며 칼을 뽑아들었다. “억!” 두 귀가 잘려나간 거한이 시퍼런 칼을 들이대자 컬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그래야 착한 아이지!” 그는 겁에 질린 컬른의 손에서 지도를 빼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컬른에게는 더욱 무섭게 다가왔다. “가!” “예”“ “집에 가라고!” 후다닥! 쿵쾅! 겁에 질려 뛰쳐나가던 컬른은 기어이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굴렀다. 굴러서 일층까지 내려온 그는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카이어스는 황당해서 쳐다보는 일행을 향해 양피지를 활짝 펼쳤다. “자, 어디 한 번 볼까!” 엘란(85) 탁자에 모여 지도를 살피던 엘란과 하이론은 서로를 향해 당혹한 시선을 던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포두핌이 지도를 남긴 것은 발칸대제가 대륙을 통일한 것 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대제의 무수한 공과 중에 가장 큰 공으로 여겨지는 것은 대륙의 언어를 통일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 전에는 나라마다 혹은 같은 나라라도 지역에 따라 말과 글이 달랐다. 사정이 그랬으니 지도에 적힌 글과 기호도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엘란과 하이론은 지도에 적힌 글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이들을 당혹케 했다. 대륙전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 지역을 잘라서 만들어진 지도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엘란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일행들에게 물었다. “읽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하이론과 카이어스 둘 다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죠”“ “어쩌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 턱을 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하이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스노우아카데미에 가보자. 거기라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위험하진 않을까요”“ “뭐가”“ “혹시 지도에 지고에 관한 사항이라도 적혀 있으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의심받지 않도록 둘러대면 된다.” $. 대현자 샤뮤엘. 빌로린강은 스트빌라이를 가로지르는 많은 강이 그렇듯 파르미나고원에서 발원했다. 유량이 많은 강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휘어지며 흘러서 상당한 길이를 자랑하는 강이었다. 파르미나 고원에서 발원한 강은 낮은 지대를 따라 서쪽으로 길게 흐르다 멀로우산에 부딪쳐 방향을 바꾼다. 남쪽으로 꺾여진 강은 스노우를 관통, 도시를 동서로 가른 후 다시 방향을 바꿔 바다를 향해 치달렸다. 따뜻한 정오. 스노우를 관통하는 도로는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 도로의 중앙은 귀족이나 관리, 상류층들이 탄 마차가 빠르게 달렸고 가장자리에는 신분이 떨어지거나 처지가 빈한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각, 다각. 부업으로 여관도 운영하는 자칭 대학자 프로스크는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서 마차를 몰았다. 비수기에 상당한 수입을 올려주는 손님들이 마차를 빌렸던 것이다. 친척을 만나러 왔다는 이들은 매일 방에 처박혀 수군거리더니 드디어 볼일이 생긴 모양이다. “스노우아카데미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요”“ 프로스크는 붐비는 도로사이로 조심스레 마차를 몰며 질문을 던졌다. 스노우아카데미는 스트빌라이의 대표적인 학자집단으로 빈민촌의 친척을 만나러왔다는 이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어서 궁금증이 치밀었던 것이다. “고문(古文)을 좀 알아보고 싶어서요.” 엘란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대답했다. “호! 그렇소.” 고문이라는 말에 흥미가 동한 프로스크은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한 번 봅시다.” “됐소!” 하이론이 퉁명스레 말을 잘랐다. 그것은 아무한테나 보여줄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안해진 프로스크는 괜히 애꿎은 말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 놈의 말들이 왜 이렇게 비실거려!” 질책을 듣거나 말거나 말들은 일정한 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마차는 도로를 지나는 사람들 때문에 빨리 달릴 수 없었으므로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강서와 강동을 연결하는 빌로린대교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빌로린대교. 스트빌라이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그들의 미적의식이 여지없이 드러난 최고의 아치교였다. 압력을 떠받치는 아치형 교각들의 유려한 곡선과 난간에 조각된 각종 조각품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다리 입구는 강동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어 굉장히 혼잡했다. 삑삑! 병사들이 작은 나발을 불어대며 혼잡한 장내를 정리한다. 턱. 검문을 기다리는 프로스크의 마차위로 누군가가 올라섰다. 흔한 얼굴의 갈색머리 청년이었는데 따듯한 날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로브를 걸쳐서 땀을 꽤나 흘리고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손수건을 꺼내 땀을 훔친 청년은 열정적으로 물었다. “안녕하시오, 형제들! 신을 아십니까”“ “......” 코르도바습지에서 징그럽게 많이 듣던 말인지라 신이라는 단어를 대하자 엘란과 하이론은 얼굴부터 찡그렸다. “글쎄, 당신은 아는가”“ 카이어스가 물었다. 그는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청년은 물어주는 그가 고마운지 목례까지 하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알지요. 대륙의 사람들이 여러 신을 모시지만 누가 뭐래도 최고의 신은 바룬입니다. 헬레나신이나 킬트신은 바룬에 비한다면 태양과 달의 차이지요...” 한 번 열린 입은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경청하던 카이어스도 이십분이 넘어가자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다시 십분이 흐르자 짜증마저 몰려왔다. 이 놈을 마차 밖으로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하이론이 나섰다. “그래서 결론이 뭐요”“ “간단히 말하면 바룬신을 믿어야 한다는 얘기죠.” “알았으니 이제 그만 가시오.” 그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끈질겼다. “그러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바룬신은...” “잠깐. 이리 좀 와보시오.” 그는 말을 끊고 청년을 불렀다. “왜 그러시는지”“ 청년이 다가오자 하이론은 짐을 뒤지더니 헝겊으로 만든 예쁘장한 인형을 끄집어냈다. 나탈리에게 선물로 주려고 사두었던 것이다. “내 직업이 인형장산데 이거 하나 사주시오.” 하이론이 인형을 내밀자 오만상을 찌푸리던 청년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저런 놈들 쫓아내는 데는 뭐 하나 사달라는 게 최고다.” 청년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줄은 점점 짧아졌고 이윽고 검문이 시작되었다. “신분증!”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사무적인 병사의 말에는 짜증과 권태가 묻어나고 있었다. 병사는 데미가 위조해준 신분증을 들고 마차 안의 사람들을 일일이 살폈다. 뒤에서 감독하는 기사들 때문인지 지겹다는 표정과는 다르게 검문은 철저했다. “강동에는 무슨 일로 갑니까”“ “스노우아카데미에 볼일이 있소.” 머독이 대답했다. “당신들이”“ 말끝을 올리는 병사의 목소리에 의심이 들어갔다. 깨끗하게 세탁되긴 했으나 허름한 차림새는 그런 곳을 방문할 자들로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그를 향해 프로스크가 뭔가를 내밀었다. “아카데미회원이오.” 병사는 아카데미회원증을 들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온통 주름진 얼굴과 짜부러진 코, 쫙 째진 눈. 프로스크의 풍채는 일에 치어 팍삭 시들어가는 농노의 모습이지 도저히 학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최고의 학자들에게만 가입이 허락된다는 아카데미회원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검문이 지체되자 상관이 다가왔다. 긴장한 병사는 바짝 얼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 사람이 아카데미회원이라는데 미심쩍은 데가 있습니다.” “오! 허풍선이 프로스크아닙니까”“ 빌로린검문소 부대장 머독은 회원증을 들고 이죽거렸다. 심심한데 잘 걸렸다는 투로. 자연히 프로스크의 말도 퉁명스러워졌다. “신원확인 했으니 회원증은 돌려주시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들어 아카데미를 가시나” 아직 허풍떨게 남았나 보죠”“ 머독은 프로스크의 코앞에다 대고 회원증을 흔들었다. 얼굴을 붉힌 프로스크는 회원증을 낚아챈 후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 그런 그의 뒤통수로 빈정대는 소리가 꽂혀들었다. “오는 길에 무슨 허풍쳤는지 설명 좀 해주시오!” 빌로린강은 그다지 큰 강이 아니었으므로 자연 다리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다리가 가지는 사회적 길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대교는 사람들을 빈과 부, 높음과 낮음으로 양분해 버렸다. 스노우의 전 시민이 아니 스트빌라이의 전 국민이 건너고 싶어 했으나 이를 이루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맙소.” 하이론은 다리를 건너자 사의를 표했다. 그가 미심쩍어하는 병사에게 회원증을 건넨 덕에 검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에 그가 망신을 당했고,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돼소.” “근데 자네 허풍선인가”“ 카이어스가 물었다. “누구보고 허풍선이라는 거야”“ 귀까지 새빨개진 프로스크가 고함을 질렀다. “방금 전의 기사가 자네보고 허풍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되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반문하는 그의 말투가 프로스크의 부아를 더욱 돋우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했다가는 강에다가 처박아 버린다!” 뭐라 대꾸하려는 카이어스를 엘란이 막았다. “그만 하시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카이어스는 궁금한 것이 많은지 나중을 기약하며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같은 스노우였건만 강을 사이에 둔 두 지역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났다. 널찍한 도로와 호화로운 저택들, 잘 다듬어진 가로수, 거리를 오가는 호사스런 옷차림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삶에 찌든 사람들의 종종거림. “신경 써서 만들어진 도시구만.” “대륙최고의 도시니까.” 카이어스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하이론도 나직이 대꾸했다. 광장을 끼고 돌아 위로 올라간 마차가 멈춘 곳은 일미터도 되지 않는 야트막한 담장이 둘러싼 공원같은 곳이었다. “여기가 스노우아카데미네. 귀족이나 회원이 아니면 마차를 몰고 들어갈 수 없으니 걸어서 들어가게.” “당신도 회원이잖소”“ 카이어스가 물었다. “내가 방문하는 게 아니라 자네들이 방문하는 거잖나.” 손님들이 내리고 프로스크가 마차를 돌리려는데 누군가가 반가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군가! 오랜만일세.” 얇은 코트가 무릎을 덮고 있는 은발의 노신사. 한 눈에 보기에도 아카데미의 학자로 보이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마차를 돌리던 프로스크는 엉거주춤한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은발신사는 아주 반가워하는 반면에 프로스크는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는 여전히 빤지르르 하구만.” “자 들어가세!” 프로스크는 싫은 소리에도 불구하고 마차에 올라 팔을 잡아끄는 그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됐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린가”“ “내가 볼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을 태워주려고 온 거야!” 프로스크가 엘란일행을 가리키자 은발신사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 “고문해석을 의뢰하려고 합니다.” 하이론이 대답했다. “오! 그렇소. 프로스크도 해석 못하는 희귀문인 모양이지.” 그가 눈을 빛내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다. “내가 해석 못하는 고문이 어딨어!” 프로스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하이론이 급히 나섰다. “저희는 마부가.......아니, 프로스크께서 아카데미회원인줄 모르고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게 된 거로군.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어어!” 그는 안 가려고 버티는 프로스크를 끌고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일행들이 따랐다. 문을 통과하자 포기했는지 프로스크가 버티기를 중지하자 은발신사도 끌던 팔을 놓았다. “마차는”“ “내가 잘 끌어다 놓으라고 할 테니 걱정 말게.” 스노우아카데미는 그 뛰어난 명성만큼이나 넓고 화려했다. 기기묘묘하게 다듬어진 정원수와 다양한 모양의 수석들이 시선을 끌어 모았고, 잔디밭에 책을 펴놓고 앉은 채 대화를 나누는 청년들도 인상적이었다. “대현자님, 안녕하십니까”“ 미래가 보장된 젊은이의 밝은 목소리가 일행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대현자”“ 자신에게 인사하는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은발신사의 뒤를 하이론의 놀란 목소리가 따랐다. “저 사람 샤뮤엘대현잡니까”“ 엘란이 물었다. “대현자는 무슨 대현자! 도둑놈 샤뮤엘이라고 해라.” 프로스크는 맺힌 것이 많은지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샤뮤엘이 맞다는 소리군요.” 샤뮤엘대현자! 대륙최고의 지성이라 우러름 받는 스노우아카데미의 수장. “흥, 흥!” 청년들에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는 그를 일행들이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프로스크는 콧방귀를 뀐다. “뭐 맺힌 거라도 있습니까”“ “알 것 없다.”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그를 향해 카이어스가 질문을 한다. “뭐하나 물어 보자. 저기 대현자라는 사람은 나이도 있으니,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이해가 가는데 저 청년들은 왜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나” 스노우같은 대도시에 몬스터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여기 강동은 치안도 좋아서 필요가 없을 텐데” 설사 치안이 불안하다 해도 검을 가지고 다니는 게 낫지 왜 저런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폼이야!” “폼이라니”“ “말 그대로야. 저기 대현자라는 샤뮤엘이나 젊은 놈들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자신들의 부에 대한 과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 들어오면서 허름한 옷 입은 사람들 봤지” 그래, 그 사람들은 먹고 살려면 손을 한시도 놀리면 안 되지. 그러나 저기 저 놈들은 편하게 놀면서 책이나 읽으면 되지 일할 필요가 없어. 신분이 높고 재산이 많으니. 그러니 저러고 다니는 거야. 자신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자신들의 손을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것 이외에는 쓸 일이 없다!” 비꼬는 듯한 그의 말은 신랄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이론과 엘란은 그의 말을 들으며 내심 감탄했다. 그의 대답은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을 짚고 있었다. 확실히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유용한 면도 있지. 자신들의 야만성을 적절하게 드러낼 수도 있거든. 일하는 하인이나 신분 낮은 자를 후려갈김으로써.” “과시와 야만이라......” 카이어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고 중얼거릴 때 샤뮤엘이 청년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돌아왔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일이 생겼어.” “그거 잘 됐네.” 홱 하니 돌아서는 프로스크를 샤뮤엘이 잡았다. “허, 이 친구 성질은 여전하구만. 잠깐만 기다리게.” 프로스크를 잡은 그는 하이론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문해석을 의뢰하신다구요”“ “예.” 원본을 함부로 돌릴 수는 없는 일. 하이론은 지도를 베껴 쓴 종이를 내밀었다. “이렇게 합시다. 이것은 제가 해석을 해놓을 테니 글피에 이리로 오시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프로스크 자네도 그날 같이 오게.” 그는 당연히 올 거라는 식으로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프로스크를 남겨두고. 대문을 나서던 프로스크는 마차를 정문 앞에 세워뒀다고 문지기에게 질책을 들어야 했다. 호언장담하던 샤뮤엘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던 탓이다. “도시 구경 좀 하자.” 욕설을 늘어놓으며 마차를 빼는 그를 향해 카이어스가 말했다. “초과요금만 준다면야.” 강동의 풍광을 유심히 살펴보던 카이어스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갈 수 없는 곳도 많았던 데다 볼만한 집들은 담장이 너무 높아서 안을 구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담장이 왜 이렇게 높아”“ “자신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그런 가...... 난 나중에 따로 갈 테니 먼저들 가.” 휙! 대답을 들은 카이어스는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를 지켜보던 프로스크가 입을 딱 벌렸다. “저 친구 정체가 뭐야”“ “소드익스퍼텁니다.” 엘란은 그의 실력을 낮춰서 말했다. 대륙에서도 몇 안 되는 마스터라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엘프라고 말하기도 곤란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믿는 눈치다. “저건 왜 저렇지”“ “헉!” 나중에 따로 온다던 카이어스가 삼십분 만에 기척도 없이 나타나 어깨를 짚자 놀란 프로스크가 헛바람을 삼켰다. “언제 탄 거요”“ “방금. 저건 왜 저렇지”“ 카이어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뭐가 말이요”“ 그가 반문하자 카이어스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이런, 두서가 없었군. 몇 군데 집들을 몰래 둘러봤는데 이상한 점이 있어서 말이야. 저기 담장 높던 집에 들어가 보니 인간여자들과 남자들이 저마다 개를 끌고 다니면서 자랑을 하던데 뭐 하는 짓이지”“ 그의 얘기를 듣던 하이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드마스터의 실력으로 들킬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귀찮은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개 파티로군.” “개 파티라뇨”“ 이번에는 엘란이 물었다. 개 파티! 그로서는 생소한 단어였던 것이다. “설마 잡아먹는 건 아니겠지”“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프로스크의 음성이 들렸다. “말 그대로다. 개를 위한 파티!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려는 수작이지. 생일 파티니, 무도회니, 성인식이니.......이런 것들도 자주하면 식상하지. 그래서 나온 게 개파티야. 자신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개를 위해서까지 파티를 열어준다는 과시! 요 근래 아주 유행하는 짓거리다.” 엘란과 하이론은 기상천외한 일에 할 말을 잊었다. 인간사회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엘프만이 평온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인간들도 희한한 짓거리를 많이 하는 군.” 프로스크는 카이어스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잡아냈다. 그의 말에서 제삼자적 관점을 읽어냈던 것이다. “인간들이라니” 당신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당연히 인간이 아니지.” “허!” 프로스크는 혀를 찼다. 자신에게 반말을 찍찍 갈겨댈 때부터 알아본 일이지만 이 놈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이 미친놈이 무슨 대답을 할까 싶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아니면, 뭔데”“ “엘프!” “......”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한 프로스크는 그와 더 이상 대거리 하고 싶지 않았다. “이랴!” 손님들에게 신경을 끄기로 결심한 그는 고삐를 채며 말들을 독려했다. 덜컹, 덜컹. 너무 낡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마차는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엘란(86) “같이 갑시다.” “가기 싫다니까!” “샤뮤엘대현자가 꼭 같이 오라고 하지 않았소.” “내가 그 놈 종이냐! 시키는 대로 하게.” “그 때는 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언제 그랬어!” 하이론과 프로스크는 마주 보고 서서 서로에게 침을 튀겨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식당 안은 고성으로 메아리쳤다. 아침부터 시작한 실랑이는 정오가 넘도록 되풀이 되고 있었다. 샤뮤엘과 약속한 날이 되서 같이 가자고 청하는 것을 프로스크가 단호하게 거절해서 시작된 말싸움이었다. 나중에는 오기까지 개입되어 어느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하이론은 샤뮤엘에게 중요한 청탁을 한 입장에서 그의 당부를-꼭 같이 오라는 그의 말에서 하이론은 어떤 압력을 느꼈었다-들어주고 싶었고 프로스크는 그의 상판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팽팽한 대치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해소되어 버렸다. 제삼자에 의해서. “저....... 여기...가 프로스크님의 집...입니까”“ 여관으로 들어서는 십오륙 세의 소년은 살벌한 분위기에 밀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맞다.” 뚝뚝 부러지는 카이어스의 대꾸. “뭐야!” 험상궂은 하이론이 질러댄 고함. “꺼져!” 생긴 거라면 하이론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프로스크의 호통. 소년은 완전히 얼어버렸다. “저....저...저...저......” “괜찮다. 말해 보거라.” 엘란의 따뜻한 음성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거나 뒤돌아서 도망쳤으리라. “대...현자님의 전언입니다. 일이 있어 만날 수 없으니 일주일 후에 오랍니다.” 소년의 마지막 말은 문밖에서 들려왔다. 겁에 질린 소년이 일사천리로 말하며 밖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이윽고 일주일이 지나자 또 다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할 일도 없으면서 왜 안가겠다는 거요”“ “가고 안 가고는 내 맘이다. 왜 당신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이들의 말다툼은 지난번처럼 외부의 개입으로 멈추어졌다. 툭, 떼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뚤뚤 뭉쳐진 뭔가가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카이어스가 잽싸게 움직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쪽지를 돌멩이와 함께 뚤뚤 묶어놓은 것. 그는 끈을 풀어 천천히 읽어나갔다. “샤뮤엘대현자의 전언입니다. 일이 생겨서 만날 수 없으니 이주일 후에 오시랍니다.” 소식을 전하러온 소년이 안으로 들어오기 무서워 쪽지를 던졌던 것이다. “또야.” 실망한 하이론의 입에서 김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샜다.” 프로스크가 냉소적으로 말하자 엘란이 물었다. “날 새다뇨” 무슨 소립니까”“ “아무 이주일 뒤에도 만나주지 않을 걸.” “무슨 소리요”“ 하이론이 재촉하듯 물었다. “아마도 당신들이 의뢰한 고문을 해석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만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고.” “헛소리!” 하이론이 금세 반박하고 나섰다. 대륙최고의 고문해석자라는 그가 해석할 수 없다면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내가 헛소리를 늘어놓을 이유가 없다.” “당신은 그를 싫어하잖소”“ “나는 스트빌라이 최고의 학자다. 싫어한다고 남을 모략할 그런 천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말에는 자부심과 슬픔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이번에는 엘란이 물었다. “나는 그와 동문수학해서 그를 잘 안다. 만약 해석을 했다면 당신들을 즉시 불러들여 자기자랑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럼 그의 명성이 모두 헛것이란 말입니까”“ “그건 아니다. 만약 그가 멍청한 작자였다면 대현자라는 칭호를 받았겠는가” 똑똑하고 학식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 같은 위대한 지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아부하는 그런 보통의 학자에 불과하다. 남의 것을 잘 훔치는.” “그가 대륙최고의 고문학자라는 말은”“ “남의 논문을 훔쳐 발표한 덕분에 생긴 현상이다.” 프로스크의 말을 듣는 엘란과 하이론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의 말이 진실로 들린 탓이었다. 척 보기에 대현자라는 인상을 팍팍 풍기는 슈뮤엘이 남의 논문이나 훔쳐서 발표하는 양심불량 학자라니. 엘란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입니까”“ “사실이다. 당신들도 봐서 알겠지만 명성의 반은 그의 빼어난 얼굴과 언변에서 나온 것이다.” “당신은 대륙최고의 학자인데 못생겨서 허풍선이라 불리고”“ 흥미로워 하는 목소리. 카이어스다. “사실이다.” 프로스크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혹시 그가 훔친 논문이 당신 것인가”“ “그래.” 샤뮤엘이 명성을 날린 계기가 된 사건. 그것은 프로스크의 논문을 표절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둘은 절친한 친구였다. 그가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도둑질하기 전까지는. 프로스크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던 때였다. 오년 동안의 노고가 스며든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차디찬 조소와 멸시였다. 그의 연구성과는 이미 샤뮤엘이 훔쳐서 발표해 버렸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표절학자라는 더러운 이름뿐이었다. 더욱 원통한 것은 사실을 밝혀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샤뮤엘은 그의 연구물로 이미 확고한 명성을 쌓았고 그는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더구나 샤뮤엘의 빼어난 외모는 볼품없는 그의 외모와 비교되어 더욱더 돋보였고 자연 그의 주장은 오히려 샤뮤엘의 명성을 올려주는 반작용만 불러들였다. 그 후 샤뮤엘은 승승장구한 반면, 프로스크는 허풍선이라는 치욕적인 별칭만을 얻게 될 뿐이었다. 카이어스는 멍하니 과거를 반추하고 있는 프로스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이! 하이론, 이 친구한테 해석을 부탁하지 그래. 꽤 쓸만해 보이는데.” 그의 말을 들은 엘란과 하이론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스트빌라이 최고의 학자라는-고문을 해석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럴까”“ “밑져야 본전이죠.” 둘이 속닥거리는 데 프로스크가 고함을 빽 질렀다. “밑져야 본전이라니! 일없으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 팩하니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하이론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10골덴 어떻소”“ 날이 서 있던 프로스크의 음성이 부드럽게 잦아들었다. “어디, 고문 한 번 봅시다.” *************************** 작은 등불이 어둠을 밝히는 늦은 시간, 엘란과 하이론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걱정들이 머리를 점령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그가 해석할 수 있을까요”“ “밑져야 본전이다. 그의 말대로 샤뮤엘이 해석할 수 없고 그도 실패한다면 포두핌의 지도는 포기하고 다른 방안을 찾아보면 된다.” 별 일 아니라는 편안한 어조. 그는 원래 지도에 별 다른 기대를 가지지 있지 않았었다. 하이론 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마법사가 그런 요행수에 앞날을 걸 리 만무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1,500년 전의 지도가 해결책이 되는 것은 하늘이 돌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까”“ “몇 가지 생각해둔 방안은 있다만... 일단 샤뮤엘과 프로스크의 결과를 기다려보자꾸나.” 날이 밝았다. 여관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데이지-프로스크의 양녀라 했다-는 손님들의 식사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시장에 가서 신선한 과일과 빵을 사오고 스프를 끓이고 계란을 구웠다. 식사가 차려지자 카이어스가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아침!” “예, 좋은 아침입니다.” 데이지가 환하게 웃는다. 카이어스가 빵을 뜯어먹을 때 엘란과 하이론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났고 곧이어 프로스크도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들이 건네준 고문 말인데 혹시 지도에 쓰여 있던 글 아닌가”“ 프로스크가 눈을 비비며 건네는 말에 하이론이 반색한다. “그렇소. 해석이 된 모양이죠”“ “아니, 그건 아니고. 제대로 된 해석을 하려면 원본을 봐야만 할 것 같아서.” “그건......” 하이론은 명확하게 답하지 않고 말을 흐렸다. 지도를 보여줘도 될까” 그가 고민하자 잠시 기다리던 프로스크가 재촉을 한다. “제대로 된 해석을 하자면 지도를 반드시 봐야 하오.” “그렇게 합시다. 대신에 지도를 볼 때는 반드시 우리들 앞에서 보시오.”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프로스크는 허락을 받고도 별 다른 말이 없더니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로 건너왔다. 책과 서류를 한가득 안고서. “어디 지도 한 번 봅시다.” 지도를 받아든 그는 눈을 빛내며 지도에 몰입했다. “문자를 보면 최소한 1,30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오래된 지도치고는 상태가 좋구만.......아, 보존마법이 걸려 있었군.” 가져온 서류를 뒤적이며 알지 못할 단어를 중얼거리던 그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역시, 그랬어! 이러니 샤뮤엘이 해석을 못할 밖에.” 램프의 불빛을 바라본 채 반쯤 졸던 하이론이 눈을 치켜떴다. “오! 해석을 한 거요”“ “뭐, 대충은.” 어깨를 으쓱거린 프로스크는 손을 흔들어 지도가 놓인 탁자위로 손님들을 불렀다. “자 여기 지도 위쪽에 쓰인 글과 아래에 그려진 선들을 보시오. 처음에는 지명인 줄 알았는데 지명이 아니었소.” “지명이 아니라면”“ 지도에 쓰인 글들. 일행들은 그 글들이 당연히 지명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지도를 그린 사람이 왜 이런 식으로 표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틀림없이 별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거요.” “별자리”“ 하이론이 물었다. “그렇소. 별자리. 지금과 별자리 명칭이 달리진 것이 꽤 많아서 어려움을 겪기는 했었소만 지도 작성자가 별들 모양을 자세히 설명해 놓아서 대충 유추해 낼 수는 있었소.” 카이어스가 흥미롭다는 듯 손을 비볐다. “좋아! 그래 거기가 어디요”“ “아직 모르오.” “예”“ 엘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괴상한 어조로 물었다. 해석을 했다면서 어딘지 모른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말했잖소. 이 글들은 지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마음이 급한 하이론은 설명 중 끼어들었다.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요. 계절마다 별자리가 달라지는 건 다 알거고.” 불퉁하게 대답한 프로스크가 지도의 윗부분을 짚었다. “여름. 이 지도는 여름의 별자리를 기준으로 작성됐기 때문에 여름이 되지 않고서는 그곳으로 찾아갈 수 없소. 혹 뛰어난 천문학자라면 모를까.” “음, 알겠소.”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들 정체가 뭐요”“ “......” 그의 돌발적 질문. 프로스크같이 똑똑한 사람이 빈민촌의 친척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좌중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됐소.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되오. 이제 내 할일은 끝났으니 돈이나 주시오.” 그가 손을 내미는데 엘란이 돌연한 제의를 한다. “하는 김에 끝까지 맡아주시겠습니까”“ “끝까지 맡아달라니”“ “별자리를 보고 찾아갈 재주가 저희들한테는 없습니다.” “나더러 안내도 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난 스노우 인근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 지리는 잘 모르는데.”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길은 저희가 찾을 테니 별자리의 방향만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그가 생각에 잠기자 하이론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합시다. 이 기회에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소”“ 하이론의 말을 들은 프로스크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겸연쩍게 웃으며. “돈은 얼마나”“ “착수금조로 20골덴 드리고 일이 끝나면 30골덴 주겠소.” “좋소, 그렇게 합시다.” 엘란(87) $ 움직이는 세계. 이글거리는 태양이 온 세상을 찜통으로 만드는 정오. 길잡이로 프로스크를 고용한 엘란일행은 스트빌라이 최북단을 지나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덥구나.” 하이론은 푸념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의 말마따나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 “올해 농사는 잘 되겠어요.” 엘란이 말을 받았다. “별로 반갑지 않은 말이네.” 프로스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하이론이 물었다. “뭐가 말이요”“ “유난히 더운 여름이 지나고 풍년이 들면 종종 훈족이 쳐들어오고는 했지. 그래서 한 말이오.” “근 백년간은 조용하지 않았소”“ “그러니, 더 걱정이오. 훈족은 백법사 타클마칸의 영도아래 거진 통일을 이루었고 곧 무슨 방응이 있을 텐데 황궁에서는 평화에 젖어 연일 파티나 벌이고 있으니......” 그는 나라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엘란은 프로스크의 말을 들으며 훈족의 땅으로 넘어간 꼽추 부부를 생각했다. 잘 살고 있을까” 훈족이 스트빌라이의 천대받던 사람들을 받아 들인지도 꽤 지났으니 프로스크의 말마따나 부족을 통일하면 침략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왜 아직 통일이 안됐죠”“ 엘란이 물었다. 훗타부부를 만났을 당시 백법사는 한두 개 부족을 빼고는 모든 부족을 굴복시켰었다. 그래서 그는 곧 통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 보았고 지금쯤 전쟁이 벌어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엘란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건 백법사가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네. 싸워서 굴복시켰으면 예전에 끝났겠지만 그러면 피해가 심하겠지. 우리나라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다면 되도록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통일을 이뤄야 하거든. 어쨌거나 같은 민족. 동족의 피를 보고 싶지 않은 생각도 얼마쯤은 있었을 거네.” 프로스크가 대답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한 가지 더 묻죠. 외모로 보자면 스트빌라이인이나 훈족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어째서 그들을 별개의 민족으로 치는 겁니까” 훈족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그렇고.” “그건 고래(古來)의 전설에 의해서 붙여진 거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천년 전의 일 일거야. 이계에서 차원의 문을 넘어온 사람이 있었어. 검은 머리의 검은 눈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은 스스로를 훈이라 칭했고 나라의 개념도 없이 부족에 따라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힘으로 아우르고 나라를 세웠지. 그리고는 전 대륙을 휩쓸고 다녔어. 그 때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훈족이라 부르고 두려워했지.” “그럼 전설 속의 그 한사람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은 겁니까” 고작 한 사람 때문에.” “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는 꽤나 자식욕심이 많았던 모양이야. 부족을 굴복시키고 그 때마다 부족장의 딸들을 아내로 맡아 들였어. 거기서 본 자식들이 오백 명도 넘었다는군.” “오백 명! 그게 가능합니까”“ “기록에 따르면 그래. 그가 죽고 나라가 분열했어도 그의 자식들은 어머니 부족을 물려받았으니 모든 훈족의 족장들은 그의 후손인 셈이야. 한 번 생각해 보게. 오백 명! 그들이 퍼트린 자손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나” 지금은 훈 그 사람의 특징적 모습들이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훈족의 피 속에는 그들이 숭배하던 훈의 흔적이 깃들어 있어. 그래서 그들이나 다른 나라사람이나 모두들 훈족이라 불렀지. 지금은 이 얘기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명칭은 계속 내려왔어.” “그 전설 사실일까요”“ 엘란은 어쩐지 미심쩍어졌다. “아마 사실일거야. 훈족은 마나를 몸속에 저장한다거나 마나를 가공해서 소드에 뿜어내는 것도 다 그가 가르쳤다고 주장하고 있지.” “정말일까요”“ “이천 년 전의 일. 시간은 종종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고 또 거짓도 사실로 만들지.” 프로스크는 최고의 현자라는 자신의 주장답게 아는 것이 많았다. 모두 책상에서 공부한 것이라 현실과 유리되기는 했지만 학식만큼은 감탄할 정도였다. 하이론과 엘란은 그와 동행하는 동안 수많은 지식을 머리에 쌓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국경에 바짝 다가섰다. 창과 검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햇볕을 받아 번쩍거리는 갑옷과 방패. 이삼십 명 단위로 몰려다니는 용병들. 일행들은 최전방의 군사도시 아르고느에 들어서며 훈족과 대치하고 있는 스트빌라이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프로스크는 머리 속에서만 그리던 모습을 직접 보고는 얼마간 흥분한 눈치였다. 그의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감흥이 드러났다. “자네들 따라나서기를 잘했어. 잘하면 훈족과 맥클레이 용병단이 충돌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겠어.” “맥클레이 용병단! 왜 여기서 맥클레이 용병단이 나옵니까”“ 엘란이 깜짝 놀라 물었다. 맥클레이 용병단은 원래 스노우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 옮겨간 곳이 크리누스. 여기는 아니었다. “몰랐나 보군. 여기로 옮겨온 지 한 반년 되었다.” “그 용병단은 왜 자꾸 근거지를 옮기는 거요”“ 하이론이 물었다. 용병대는 청부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만 근거지는 일정한 곳에 두고 있었다. 그러는 편이 훈련이나 증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했다. “너무 강해져서 그렇지.” “강해져서 그렇다뇨”“ 이번에는 엘란이 물었다. “생각해 보게. 지금 맥클레이용병단의 숫자는 근 삼만을 헤아리고 있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전장을 구르고 구르며 단련한 일당백의 용사로 말일세. 자네 같으면 그런 용병들을 수도인 스노우나 자신의 영지에 들이고 싶겠나” 스트빌라이 안의 몬스터들이 거의 없어진 마당에.” “그렇군.” 하이론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신이라도 맥클레이용병대를 곁에 두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용병단은 필요할 때만 불러서 쓸 수 있는 먼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엘란은 반역의 뜻을 품고 있는 그들에게서 영입제의를 받았었다. 그래서 하이론 또한 그들의 야심을 눈치 채고 있었다. 스트빌라이가 평화에 젖어 나태해졌다고는 하나 대륙 최강의 국가. 부와 인재가 넘치고 넘쳤으니 그런 염려를 하는 이가 반드시 있었을 테고 그러니 수도에서 쫓겨났을 터. “그럼 차라리 해산시켜 버리지 왜 그냥 둡니까”“ 엘란이 물었다. 위험한 싹은 일찍이 잘라 버리는 것이 좋다. 용병단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면 차라리 없애 버리는 것이 귀족들의 성미에 맞을 터인데. 왜 그냥 뒀을까” “아직은 필요하니까! 훈족이 통일을 이루면 반드시 침략을 할 터. 그때 쓰려고 남겨둔 거지. 그들이 충돌해서 양패구상하면 스트빌라이로서는 손안대고 코풀고, 앓던 이를 빼는 격이 될 테니 지금 해산시킬 필요야 없지.” “그래서 용병단을 이리로 옮겼군요.” “그렇겠지.” “맥클레이가 순순히 따를까요”“ “따르지 않으면”“ 프로스크가 별 수 없을 것이라는 투로 반문을 했다. 그러나 엘란의 생각은 달랐다. 맥클레이! 맨손으로 대륙최고의 용병단을 키워낸 사람이다. 그의 야심을 접한 적이 있었던 엘란은 그가 순순히 스트빌라이의 의도대로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아르고느로 들어가자.” 하이론이 대화를 끊었다. 그가 고삐를 채자 말들이 힘껏 땅을 박찼다. 달리는 마차 뒤로 부옇게 먼지가 날렸다. 아르고느. 훈족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건설된 군사도시. 간단한 검문을 거치고 들어온 도시 안은 병사들과 용병들로 북적거렸다. 검문을 받느라 겨우 일어난 카이어스가 잠이 깨지 않는지 기지개를 편다. “자네는 밤에 뭐하고 낮에 자는가”“ 낮밤을 바꿔서 생활하는 카이어스가 신기한지 프로스크가 물었다. “밤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빠.” “뭘 하느라고 돌아다니는데”“ “인간들을 관찰하지. 동식물도 살펴보고.” “그건 낮에도 할 수 있잖아”“ “몰래 하려면 밤이 제격이지.” “......” 프로스크는 카이어스가 무슨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으로 판단했다. 도둑질이나 강도 같은. 인간이나 동식물을 관찰하러 밤에 나다닌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스크는 힐끗 일행들을 살폈다. 의심스런 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는 머리 속으로 이들의 정체를 추리해 보다 그만 포기해 버렸다. 알아낼 자료가 부족했고 이 여행이 꽤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보수도 그만하면 후하고. “오늘은 푹 쉬고 내일 국경을 넘는다.” 하이론은 적당한 여관으로 말을 몰았다. “말들 잘 보살펴주게.” 그가 종업원에게 마차를 맡기는 동안 일행들은 식사와 숙박을 겸하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거친 숨소리와 역한 땀 냄새. 안은 용병들 천지였다. 셋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키자 하이론이 들어왔다. “아에게가 여기에 있을까요”“ 엘란은 자리에 앉는 하이론에게 물었다. “글쎄다. 여기에 없었으면 좋겠는데......” 아르고느는 최전선이다. 여기에 배치 받았다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시험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전 실력이면 당연히 떨어졌겠지만 지금은......” 하이론은 말을 흐리며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카이어스를 가리켰다. 엘프의 숲에서 스트빌라이로 넘어오는 여정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카이어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소드마스터의 집중적인 조련과 그들의 가열 찬 노력이 어우러져 헤어질 때는 한 명의 용병으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맥클레이용병단의 시험이 어렵다고는 하나 통과할 수준은 될 것이다. 탁. 종업원이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내려놓을 때 함성이 울렸다. “와!” “이야!” “역시 보카르트 천부장님이 최곱니다.” “졌습니다.” 한 쪽 눈에 안대를 한 용병이 바닥에서 일어서며 오른 팔을 움켜잡았다. 찡그린 얼굴이 꽤나 저린 모양이다. “또 누가 덤빌 놈 없어”“ 강철같이 삐죽삐죽한 수염. 역삼각형의 상체. 근육으로 다져진 팔뚝. 웃통을 벗어 저친 삼십대 장한이 호기롭게 소리친다. “누구든 나와라. 팔씨름을 이기는 자에겐 일골덴을 주겠다.” 보카르트가 탁자위에 손을 얹고 새로운 도전자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주변의 용병들은 그의 우람한 근육을 보면서 고개를 저을 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머리를 요상하게 손질한 용병이 여관으로 들어섰다. “보카르트! 대장님이 찾으신다.” “기다려. 한 판만 더하고.”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어서 일어서.” 보카르트가 일어서지 않자 다시 재촉을 한다. 한편, 헤어스타일이 괴상한 용병이 들어서자 엘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식사에 열중하는 척 하는데 하이론은 반대로 고개를 꽂꽂하게 세웠다. 마치 보라는 듯이. 옆머리와 뒷머리를 밀어버리고 중간의 머리만 닭 벼슬처럼 세운 용병. 코르도바습지에서 손을 잡자고 요청한 인물. 들어온 사람은 맥클레이 용병단의 천인대장 체이스였다. 보카르트를 재촉하던 체이스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그를 쳐다보고 있는 하이론의 모습이 잡혔다. “어!”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인물. 저절로 감탄성이 터졌다.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는 척하는 자는 광술사 엘란이 분명했다. 손을 잡을 것을 제의한 후 아무런 소식도 없이 몇 년이 흘렀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놀람의 눈빛이 진정되자 푸른 눈동자에 얼마간의 기대가 어렸다. “오랜만입니다.” 무척이나 친근한 어조. “오랜만이군.” 하이론도 친근하게 맞받자 놀란 엘란이 고개를 들었다. 코르도바습지에서 차갑게 대하던 것을 떠올리면 놀랄만한 변화였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입니까”“ “보물찾기를 하고 있지.” “이봐, 누구야”“ 보카르트가 다가와 물었다. “예전에 알던 사람이야.” “그래.” 식탁을 훑어가던 보카르트의 시선이 카이어스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호~상당한 덩치로군. 팔씨름 한판 어떤가”“ 사과를 베어 물던 카이어스가 말없이 팔을 식탁위에 올렸다. “시원시원한 친구로군.” 얼씨구나 좋다하고 탁자에 앉은 보카르트가 카이어스의 팔을 굳게 잡았다. 그런 그를 보며 체이스는 이마를 짚었다. 이십년 지기라 할 수 있는 보카르트는 팔씨름 같이 힘을 겨루는 놀이를 광적으로 즐겼다. 복잡 미묘한 상황에 놓인 용병대의 입장에서 엘란같은 강자와의 연합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만남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광술사를 만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끌어들여야 했다. 그로서는 난데없는 팔씨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의 복잡한 심사와는 상관없이 팔씨름이 시작된다. “끙!” 보카르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손을 잡는 순간 위압감이 그를 짓누른 탓이다. 그것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근 삼만을 헤아리는 대륙최고 용병대에서도 힘으로 순서를 매겨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가 아니었던가. 이런 허우대만 멀쩡한 놈에게 질 수는 없는 일. “으랏차차.” 힘찬 고함과 함께 팔뚝에 핏줄이 돋았다. 툭툭 불거지는 시퍼런 핏줄과 단단하게 뭉쳐지는 근육들. 보카르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과 반대로 마주잡은 손은 하얗게 변해갔다. 손에 엄청난 힘이 들어간 탓이다. 그에 따라 별반 힘든 기색이 아니었던 카이어스의 얼굴도 점차 상기되어 갔다. “합!” 카이어스의 입에서 짧은 기합이 터져 나오는 순간. 쾅. 보카르트의 꺾인 손이 탁자에 부딪쳐 소음을 만들어냈다. “뭐야!” “보카르트님이 진거야.” “우와.” 잠시간의 정적 뒤, 왁자하게 퍼져나가는 용병들의 함성. 믿기 어렵다는 듯 일그러지는 보카르트의 얼굴위로 체이스의 침착한 음성이 그늘을 드리웠다. “대단한 동행을 얻었군요. 그 보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뭐야! 대장님이 부르신다며 어서 가 봐야지”“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뜸을 들이던 보카르트가 무안해져서 어서 가자고 재촉을 하는 반면에 재촉을 했던 체이스는 느긋하게 뜸을 들인다. “저희들은 별로 할 말이 없습......” 엘란의 거절을 하이론이 손짓으로 막았다. “올라가서 얘기하세.” 방을 빌려 올라가던 하이론은 체이스의 뒤를 따라오는 보카르트를 제지했다. “자네는 대장이 부르던 모양인데 가 보지 그러나.” “당신들이 뭔데 가라 오라 지랄......” “넌 그만 가봐.” 체이스가 퉁명스레 말을 끊는다. 거기다 그를 막아서는 카이어스. 팔씨름에 졌을 때부터 부아가 치밀었던 보카르트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치려는 찰라 체이스의 냉랭한 말이 쏟아졌다. “대장님이 부른다고 하지 않았나! 자꾸 미적거리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맥클레이용병단은 일반 용병대하고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용병들 수준도 수준이지만 엄정한 군기와 군율이 기사단 못지않았다. 군법까지 들먹거리는 데야 보카르트도 더 이상 뻗댈 수 없었다. “젠장! 가면 되잖아.”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거친 발걸음에서 불편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났다. 체이스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이론과 엘란 그리고 처음 보는 볼품없는 노인과 보카르트를 꺾은 덩치 큰 사내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반드시 이들을 잡아야 한다.” “미안한 일이지만 자리 좀 비켜주겠나.”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마자 프로스크가 축객령을 받는다. 체이스가 아는 체를 할 때부터 무슨 일인가 싶어 온 신경을 집중했던 프로스크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시간을 끌며 서 있던 그는 하이론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확실히 수상해. 맥클레이용병단하고는 또 어떻게 아는 사이지.” 프로스크는 복도를 서성이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원체 아는 것이 없었던 그로서는 무슨 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프르스크가 나가고 한 참이 지났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할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 조용히 있는 것이 당연했으나 대화를 원한 체이스나 그를 방으로 불러들인 하이론이나 둘 다 입을 조개처럼 꽉 닫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둘은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의 눈만을 바로보고 있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결국 체이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의를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코르도바습지에서의 제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지 이미 수삼 년. 이제는 대답을 들을 때도 된 것이다. “되겠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엘란과 카이어스는 무슨 뜻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체이스는 알아들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또한 인상 깊었다. 형형한 눈빛과 꽉 다문 입에서 믿으라는 강력한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무슨 수로”“ 또 다시 알 수 없는 질문.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그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한 배를 타기 전에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짧은 대화는 이내 끊어지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 침묵은 앞의 침묵보다 더 길어서 쉽게 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는 체이스도 입을 열지 않고 하이론의 눈만을 쏘아본다. 벌컥. 긴장된 분위기는 거칠게 문을 연 프로스크에 의해 깨어졌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나”“ “......” “......”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프로스크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디밀 때 하이론이 입을 뗐다. “구경이나 좀 시켜주겠나”“ “그러지요.” 체이스는 쾌히 대답하고 일어섰다. 하이론이 그를 따르자 할 수 없이 엘란과 카이어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따돌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진 프로스크는 한 동안 혼자 서 있다 끝내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바삐 그들을 쫓았다. 체이스는 공손히 길을 안내했다. 하이론은 그를 따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신경만 집중한다면 십미터 밖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식별할 수 있었으니 그의 말을 듣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프로스크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하이론은 먼저 코로도바습지에서 있었던 용병왕 맥클레이의 제안을 설명해 주었다. 카이어스가 그 때 일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이스와의 대화를 풀이해 주었다. “되겠냐”“ 고 물은 것은 나라를 세운다는 용병왕의 야심이 과연 실현가능한 것이냐를 물은 것이고 그에 대한 체이스의 대답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무슨 수로”“라는 질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회의적인 질문이었고 체이스의 대답은 손만 잡는다면 수단을 설명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구경해도 되겠냐”“는 질문은 과연 그럴 능력이 되는지 용병대를 직접 둘러보고 싶다는 뜻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긍정이었다. 체이스의 뒤를 따르며 엘란은 인상을 그렸다. 십존과는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속마음이었다. “정말 그와 손을 잡으실 겁니까”“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그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직한 질문과 나직한 대답. 체이스는 귀를 곤두세웠으나 엘란의 말만 단편적으로 들을 수 있었을 뿐 하이론의 음성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이론의 음성이 원체 작았던 탓이었다. “보험을 들었다고 생각하자. 이번 일이 잘 끝난다면 이들과 얽힐 이유가 없을 거다.” 그의 말을 들으며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두핌의 지도를 따라가는 일은 예감이 좋았다. 상급정령사가 된 이후 예감은 거의 맞아떨어졌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는 그러기를 다시 한 번 빌었다. “저 놈 정말 자신만만하게 보이던데 나라를 세우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나직한 목소리. 가만히 따라오던 카이어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쉽지 않지요. 대륙의 세력분포가 현재처럼 꽉 짜인 상태에서는.” “뭔가 믿는 게 있는 가 본데. 그게 뭘까”“ “글쎄......” 하이론도 저들이 숨기고 있는 패를 알 수가 없었다. “나라를 세운다면 어디다 세운단 말일까요”“ 엘란이 물었다. “글쎄다. 스트빌라이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는 힘들 테고 엘리오트나 피요르드를 공격할까” 아니야 그것도 어렵지. 아무리 강해도 일개 용병단. 그런 강대국과 맞붙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작은 공국이나 연합왕국을 친다는 뜻일까” 아니 이것도 어렵지. 소국들은 모두 삼대 강국의 보호 하에 있으니. 그럼 훈족들의 땅으로 쳐들어간다는 뜻일까” 이것도 어렵지. 타클마칸이 평원을 거의 통일한 지금에야. 어딜까”“ 하이론은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거다 하는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거대한 마사에 당도했다. 처마를 맞대고 이어지는 마사들의 행렬. 그리고 마사를 꽉 채우고 있는 수천마리의 말들. 용병대의 힘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하이론이 원하는 것은 마사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왜 여기로 데려온 건가”“ “저희들의 실력을 알고자 한다면 좀 멀리 나가야 합니다.” 두두두두. 팔두 마차가 군사용 도로를 질주했다. 의전용으로 만들어진 마차는 안락감에 주안점을 두어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창을 열어 바깥 풍경을 살피던 하이론이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는 건가”“ “이패이시스라인.” 체이스는 짧게 대답했다. “이패이스스라인이 뭐지”“ 카이어스가 물었다. “스트빌라이의 방어선이네.” “방어선”“ 그는 하이론의 짧은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 “이패이시스라인은 스트빌라이와 훈족의 땅을 가르는 국경선인 동시에 방어선입니다.” 체이스는 자신이 아는 대로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이패이시스라인. 그것은 훈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장벽이었다. 이천 전 전, 훈이라는 전사가 부족을 통일한 이후 그들은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확장을 시도했다. 거기에 맞서 싸우기를 이천 년. 훈족과 이른바 대륙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긴 성이 축조되었다. 훈족이 성을 부수면 대륙인이 다시 성을 쌓고 그걸 부수면 다시 쌓고. 계속되는 반복 끝에 결국은 3,000키로에 달하는 긴 장성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국경선이 모두 성으로 쌓인 것은 아니었고 일부는 낮은 구능이 일부는 목책이 일부는 내륙하천이 방어선을 이루었다. 지금 체이스가 안내하는 고스만지역도 목책이 방어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스트빌라이가 용병단을 이쪽으로 쫓은 것도 취약한 방어선을 보완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거기로 데려가는 이유가 뭡니까”“ 체이스의 상세한 설명을 관심 있게 들은 엘란이 물었다. “요사이 훈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저희 용병단과 고스만부족이 대치하고 있으니 가 보시면 저희 용병단의 능력을 대충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삼십분을 더 달려 목적지에 당도하자 시끄러운 함성이 그들을 맞이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아~자라 새끼처럼 숨어만 있지 말고 고개를 디밀어라! 내가 모가지를 뎅장 잘라줄 테니.” “겁쟁이!” “하하하!” 쩡렁쩌렁한 고함이 목책을 넘어 엘란일행들에게 까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고스만부족이 도발하는 소립니다.” 체이스는 엘란 일행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젋어 보이는 카이어스의 반말투 질문에도 최대한 정중히 대답했다. “고스만 부족”“ “이패이시스라인 아래쪽 사람들이 위쪽의 사람들을 훈족이라 통칭하지만 훈족도 내부적으로는 여러 부족으로 갈려 있습니다. 고스만 부족은 그 중 하납니다.” 체이스는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으며 초청자들을 목책위로 안내했다. 위로 올라오자 다양한 욕설들이 아주 생생하게 들린다. “맥클레이 밑에는 오합지졸만 있는 모양이지” 어째 한 놈도 코빼기를 내밀지 않는 거냐!” “얼간이들 겁이 나서 못 나오겠냐”“ 고스만부족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목책위의 용병들은 묵묵부답.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간편한 가죽갑옷을 걸친 100여명의 훈족 전사들은 날렵하게 빠진 말위에 앉아 눈들을 부라렸다. 한 동안 떠들어대던 그들도 아무런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인지 욕설이 점차로 잦아들었다. “수가 많아서 겁이 나나” 좋다 그럼 내가 혼자서 상대할 테니 일대일로 한 번 붙어보자!” 한 사내가 크게 휘어진 곡도를 휘두르며 호기롭게 외치자 주변의 전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떨어지는 해를 배경으로 평원에 홀로선 고스만 부족의 전사는 위풍당당하게 보인다. “덤벼라!” 짧게 내지른 한마디 도전장. 그 오만한 태도에 목책위의 용병들이 술렁거렸다. 하이론은 흥미로운 눈초리를 목책 아래로 보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사기가 떨어질 터. 어떻게 나올까”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의뢰인과 용병단이 어떤 관계일까 추리하느라 뇌를 혹사시킨 프로스크도 흥미로운 사태를 맞아 용병들의 반응을 살폈다. 끼이익. 드디어 목책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하는 모닝스타를 든 거한. 그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함성. “우와!” “건방진 놈들! 니들 이제 죽었어.” 용병들의 함성을 받으며 등장한 거한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말을 몰았다. 석양을 향해 달리는 사내와 동족의 전사를 등 뒤에 두고 홀로 맞선 전사. 그리고 충돌. 휭. 달리는 기세 그대로 쇠막대기에 매달린 철구가 공기를 갈랐다. 쾅. 어느새 방패를 뽑아든 전사가 철구를 쳐내며 옆으로 비꼈다. 그러나 말을 능숙하게 조정하는 용병은 어느새 말을 세워 다시 한번 철구를 날렸다. 우지끈. 다시 한 번 일격을 얻어맞은 방패가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이번에는 꽤 충격을 받은 듯 한 줄기 신음을 흘린 고스만 전사가 방패를 집어 던졌다. 의외의 공격. 그리고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던져진 방패. 거한이 다시 철구를 되돌리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급한 김에 용병은 철구와 연결된 막대기로 방패를 후려쳤다. 퍽. 방패와 막대가 충돌하며 강한 충격이 손목을 두들겼다. 겨우 쳐낸 방패가 바닥을 뒹굴 때, 고스만 전사가 곡도를 휘두른다. 훈족 전사는 철구를 다시 날리거나 막대기로 막아낼 시간적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빛을 산란시키며 날아드는 곡도에는 푸르스름한 예기가 맴돌았다. 차라락! 용병은 임기응변으로 철구와 쇠막대를 연결하는 쇠사슬로 칼을 감았다. “하!” 전사가 쇠사슬이 감긴 채 칼을 내리 눌렀다. “음!” 용병은 철구 밑 부분과 막대를 양손으로 나눠 쥐고 칼의 전진을 막아갔다. 그가 두 손으로 칼을 막아가자 고스만 전사도 양손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부르르. 중간에 끼인 칼이 몸살을 앓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치. 둘은 다리로 말의 몸통을 조이며 허리에 힘을 집중했다. 잠시간의 정적. 둘이 격돌하는 순간부터 함성을 질러대던 양쪽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누가 이길까”“ 하이론이 물었다. “운 좋은 자가 이길 거다.” “......” 땀에 젖은 손을 닦아대던 체이스는 대답하는 카이어스를 힐끗거렸다. 열 살짜리도 대답할 수 있는,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이 아닌가” “왜”“ 체이스가 황당한 눈길을 보내자 카이어스가 이유를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실력이 비슷하면 운 좋은 놈이 이기기 마련이지. 뭐가 이상한가”“ 당연하다는 반문. 그때, 전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히히힝.” 둘의 억센 힘을 견디지 못한 말들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어어.” 쿵. 그 바람에 전신의 힘을 앞으로 집중하던 둘은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부딪쳐 버렸다. 확실히 승부는 운에서 갈렸다. 힘에서는 비등했으나 훨씬 무거운 용병이 무게의 덕을 봤다. 둘 사이에 끼인 무기가 고스만 전사쪽으로 꺾인 것이다. 그에게 쏠린 칼이 주인의 옆구리를 찢었다. “흑!” 고통에 수반하는 짧은 신음. 그리고 한 순간의 머뭇거림. 그것이 승부를 갈라버렸다. 무기를 놓고 벌떡 일어선 용병이 전사의 얼굴을 발로 갈겼다. 퍽. 쇠징을 박아놓은 신발이 전사의 턱을 바수자 고스만족은 한바퀴 돌아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다시는 딱딱한 것을 씹지 못할 것이다. 츠르릉. 휭휭. 모닝스타를 풀어낸 용병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철구를 돌렸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자 그 존재를 또렷이 드러낸 달빛이 회전하는 철구를 비춘다. 그는 배경처럼 둘러서 있는 고스만전사를 오만하게 노려보며 시위하듯 소리쳤다. “내가 이겼다!” 등을 돌린 그가 철구로 적의 얼굴을 짓이겨 놓으려는 찰나. “러츠!” 체이스의 경고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재빨린 돌아선 러츠가 쏘아오는 물체를 향해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쾅. “젠장.” 대단한 힘이었다. 날아오는 도끼를 쳐낸 러츠가 저린 팔뚝을 풀려고 손을 휘저었다. 긴장된 시선을 앞으로 집중한 채. “비겁한 놈들 암습이냐!” “러츠님 죽여 버려요.” 뒤에서 날아온 도끼에 격분한 용병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고 날아오는 횃불들. 화르륵. 어두워지자 목책위의 용병들이 횃불을 아래로 집어던졌다. 여기 저기 떨어진 횃불들이 어둠을 몰아내자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이 시야에 잡혔다. “뭐야!” “여자잖아!” 결투의 현장으로 혼자서 다가오는 사람은 여자였다. 180은 될 것 같은 큰 키에 쭉 빠진 몸. 그리고 큼직한 이목구비가 시원스런 인상을 풍기는 전형적인 북방미인. 틀어 올린 금발머리와 짝 달라붙는 검은 가죽 갑옷이 불빛을 받아 요요롭게 보였다. “그만 돌아가면 죽이지는 않겠다.” 착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 그것이 또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네가 도끼를 던졌나”“ “그렇다면”“ “신세를 갚아야지.” 말이 끝나는 순간 철구가 허공을 가른다. 탁. 어느새 뒤로 물러난 여자가 등 뒤에서 바스타드소드를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한 발짝 앞으로 디디며 소드를 내리 그었다. 쾅. 터져 나오는 폭음과 함께 철구가 아래쪽으로 떨구어졌다. 철구를 쳐낸 소드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한바퀴 돌았다. “이런.” 어느새 다가오는 서릿발 같은 검날. 러츠는 철구와 막대를 잡고 쇠사슬로 소드를 막아간다.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싹.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잘라지는 쇠사슬. 그리고 쪼개지는 호버크. 여자는 러츠의 사슬셔츠만 찢어놓고는 비웃음을 던졌다. 너 정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지만 오늘은 봐주겠다는 비웃음. 몸을 움직이느라 풀려버린 머리를 천천히, 아주 여유 있는 동작으로 다시 묶은 그녀가 정신을 잃고 있는 부족전사를 일으켜 돌아섰다. “기다려!” 러츠의 분노한 고함이 횟불을 넘어 메아리 쳤으나 여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 “준비는”“ “완벽합니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지”“ “많이 늦은 편이죠.” “시작할까”“ 광활한 초원에 홀로 선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흥분이 점점이 묻어나고 있었다. 파오. 훈족의 이동성을 높여주는 천막이 시원한 평원위에 끝간데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 가죽으로 만들어진 대형 천막에는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왁자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인정할 수 없다.” 대형 천만 안쪽 깊숙한 곳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반백의 족장은 손사래를 쳤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린가”“ 위협하듯 얼러대는 목소리. 타클마칸을 섬기는 이베부족의 부족장 칼 이베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멍청한 늙은이! 그렇게 알아듣게 말했는데도...” 그의 비웃음을 느낀 것인가, 반백의 족장 휨비는 보료에 기댄 몸을 일으키며 노화를 터트린다. “당신을 섬기라면 섬길 수도 있고 족장의 지위를 물러나라면 물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르르 떨리는 수염과 쏟아지는 광망. 휨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자 한자 힘주어 내뱉었다. “전쟁은 안 된다.” 이베는 휨비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면 통일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베가 마주 고함치려는 순간, 장성이하에서는 백법사로 불리우는 타클마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같은 생각인가”“ 손자에게 건네는 듯한 자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음성에서 자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일어설 때부터 바짝 긴장해 있던 파오안의 부족장들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오년! 오년이나 그대들을 설득했다. 내 정성이 부족한가”“ 그의 음성에는 간절한 염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짙은 결단도 섞여 있었으니 타클마칸의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는 부족장들은 은근한 위협을 느껴야 했다. “별 수 없을 거다. 둘이서 어쩌려고.” 타클마칸 반대파의 수장역할을 하고 있는 휨비는 불안을 지그시 눌렀다. 그가 십존의 일인이라고는 하나 데려온 수하는 오직 하나. 파오 안의 이백병력과 밖의 삼천병력을 떠올리면 그로서도 섣부른 도발은 하지 못할 터. “정성문제가 아니지 않소. 스트빌라이를 침공하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하는 무모한 행위라는 것을 진정 모르겠소”“ 타클마칸의 위압감에 한풀 꺾인 휨비는 사정조로 반문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배를 곯을 참인가” 이패이시스라인만 넘으면 빵과 고기가 넘치는 땅이 있는데”“ 낮게 깔리는 음성에서 짜증과 염증이 느껴지자 십여 명의 부족장들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있다가는 그대로 목이 떨어질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실로 대단한 일. 그의 존재가 천막 안 수백 명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척. 척. 츠르륵. 개중에는 소드를 잡아가는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분위기에 쓸려 소드를 뽑아드는 자도 있었다. 족장들이 긴장하자 호위병들도 덩달아 무기를 움켜쥐었다. 제삼자가 본다면 비무장의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너무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고 비웃을 수도 있었으나 파오안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절박했다. 그들도 왜 풍요로운 아래로 쳐들어가고 싶지 않았겠나” 인구에 비해 땅은 척박하고 물은 귀했다. 자식을 낳으면 한 둘은 꼭 굶어죽는 자가 생기는 현실에서 풍요로운 스트빌라이에 유혹을 느끼지 않는 부족장은 없었다. 그러나 중부대륙을 석권하고 있는 스트빌라이는 너무 강했다. 전쟁이 터지면 한 둘이 아니라 자식들이 모두 죽을 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몇몇 부족장들은 타클마칸의 의중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기를 십 년. 이제 타클마칸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고 최후통첩을 하러 반대파의 심장부에 들어온 것이다. 수하를 하나만 데리고. 타클마칸. 타클마부족의 위대한 왕. 그의 빛나는 명성과 무용은 단신으로도 좌중을 휘어잡았다. 휨비와 족장들은 타클마칸이 눈을 감고 뒷짐을 진 사이 조심스레 눈짓을 나누었다. “계획대로 죽입시다!” 그들은 훈족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전사 백법사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주저 하던 몇 몇 부족장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휨비가 눈을 빛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찔끔. 타클마칸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뇌까리자 놀란 부족장들은 몸을 굳혔다. “그래 나를 죽이려고 얼마나 준비를 했소”“ “억!” “무슨 소리요”“ “딸꾹! 딸꾹!” 죽이려던 상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오자 놀란 부족장은 억눌린 경악성을 터트렸고 일부는 딱꾹질을 시작했다. “알고 있었소”“ 모두들 당황하는 가운데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 휨비였다. “나를 너무 무시하는 구려.” “그러고도 순순히 걸어들어 온 것인가”“ “사자가 양떼를 겁낼 것 같소”“ “이런! 방자한.” “감히!” 훈족의 전사를 양에 비유하는 것은 모욕이다. 긴장으로 혹은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있던 족장들과 전사들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잘 되었군.” 휨비는 주변의 반응을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삭였다. 적당한 분노가 긴장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적의가 백법사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다. “당신의 오만이 죽음을 재촉하는군.” “휴~당신들은 겁쟁이요. 스트빌라이의 강함을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겁에 질린 바보들의 핑계에 지나지 않소.” 성난 어조로 비난했으면 오히려 덜하련만, 어린아이 타일러 대듯 나직하게 내뱉는 백법사의 음성은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린 격이었다. “죽여!” “배에 칼이 들어가서도 그런 말하나 보자!” 둥둥둥. 온갖 저주, 악다구니와 함께 계획대로 북을 두들겼다. 족장들이 뒤로 슬쩍 물러나는 동시에 앞으로 쇄도하는 이백 전사들. 그때였다.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던 타클마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리고 쏟아지는 칼날 같은 눈빛. 그 순간 달려들던 전사들은 세상의 모든 공기가 그를 중심으로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백법사는 이베를 자기 앞으로 당기고 달려드는 전사들을 향해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손을 뻗었다. 짧은 주문과 함께. 아주 잠깐의 정적. 그리고 터져 나오는 폭음. 쾅!!! 그의 몸을 중심으로 폭사되는 화염이 공기를 찢고 전사들의 몸을 휘감았다. “으악!” “악!” 불길에 휩싸여 검게 탄 전사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절반이 몰살한 가운데 스러지는 화염을 뚫고 달려드는 전사들이 있었다. 옷에는 불이 붙고 머리카락과 눈썹이 온통 그을렸지만 눈은 분노로 타올랐다. “죽어!” 광기에 휩싸인 전사들은 괴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칼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데도 백법사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머리위에 올렸다. 슈앙. 그의 두 손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청색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너희들의 어리석은 족장들을 탓하라.” 여전히 타이르는 듯한 말투. 백법사는 한 마디 내뱉고는 두 팔을 내려 가슴 앞에 모았다. 그가 모은 손을 돌리는 순간 청색의 구체에서 스파크가 튀며 앞으로 다가오는 칼날에 부딪쳐 갔다. 지지직. “끄어억!” “끄륵끄륵.” 청색의 공에서 튀어나온 전기력은 칼날을 따라 흘러 전사들의 내부를 휘저어 버렸다. 쿵. 검게 그을린 채 하나 둘씩 쓰러지는 전사들의 몸에서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완전히 익어버린 것이다. “저.......저런!” 뒤로 물러나 대결을 지켜보던 족장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들도 200명으로 타클마칸을 죽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나 상처하나 내지 못하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몰살당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왜 당신들을 겁쟁이라고 부르는지 알겠지”“ 허옇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뚫고 백법사의 여상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냐”“ 휨비는 3,000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왜 짓쳐들지 않는지 의아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시키려면 직접 나서야지 뒤에 숨어서 부하들을 내보내는 것은 겁쟁이들이나 할 짓이다. 오늘 너희들을 죽임으로써 나약해진 훈족의 혼을 일깨울 것이다.” 점점 옅어지는 연기사이로 백법사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머리위에 둥둥 떠 있는 십여 개의 에어 에로우와 함께. “잠깐!” 휨비의 발작적인 고함은 이베의 음성에 의해 끊어진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라면 소용없다. 너희들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무......무.......무슨 뜻이냐”“ “만일을 대비한 것은 당신들만이 아니란 소리다.” 이베는 어리석은 족장들을 마음껏 비웃었다. 격한 폭음과 섬광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밖에서 사단이 났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족장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한껏 비웃음을 담아 저들의 망상을 깨뜨려 버린다. “너희들이 안배한 전사들은 모두 우리 수중으로 떨어질 것이다.” “거짓말! 그런 말에 속을 줄 알았나”“ 휨비는 격렬하게 부정했으나 당황과 공포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심리상태는 곧 나머지 족장들에게 전염됐고 그들은 패닉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털썩! 전의를 상실한 족장 한 명이 무릎을 꿇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털썩. 털썩. 제방이 자그마한 구멍 때문에 무너지듯이 하나 둘 씩 무릎을 꿇었다. 완벽한 굴종의 자세. 결국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백법사를 쏘아보는 휨비만이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황무지에 혼자 서 있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그의 마음속 한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법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퍽. 마법의 화살은 일체이 망설임도 없이 패배자들의 머리를 뚫어버렸다. 꿇어 앉아 머리를 조아리던 족장들은 어떻게 죽는 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왜”“ 홀로 남은 휨비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의문. 그는 완벽하게 항복하는 족장들을 죽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런 겁쟁이들은 필요 없다. 지금 공포에 휩싸여 강제로 합류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짐이 될 확률이 높아. 게다가 족장으로 내정된 전사들이 있으니 이쯤에서 사라지는 것이 부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렇군. 족장의 지위로 부하들을 회유했군.” “너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구나. 그런 자리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너희들이었다. 당신들의 작은 권리를 보호하려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당신 부하들이 기껏 자리를 탐했다면 설득에 오년이나 걸릴 리가 없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가족을 배불리 먹일 식량이었을 뿐.” 한 참에 열변을 토해내고 돌아서는 백법사의 등에 굳센 신념이 서려 있었다. 츠릉. 나가는 백법사와 검을 뽑아들고 다가서는 이베가 자리를 맞바꾼다. “잘 가시오. 고집불통 영감.” 이베의 검이 가슴을 헤집어 심장을 터트리는 데도 휨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타클마칸! 그대의 신념이 훈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정복욕이나 권력욕이 발로인지 내 지옥에서 지켜보리다.” 심장이 쪼개지면서도 또렷하게 말을 토해낸 휨비의 눈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쓱. 검을 뽑아내자 타클마칸 반대파의 수장 휨비의 몸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지겨운 늙은이.” 밖으로 향하는 이베의 입에서 혐오에 찬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마저 사라지자 대형 파오 안은 주검만이 남아 한 때나마 존재했던 자들의 서글픔을 묵묵히 대변하고 있었다. 한 여름의 거센 더위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이기지는 못한다. 낮의 열기가 사그라진 초원은 상쾌한 바람으로 가득했다. 엘리오트의 여름은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수고로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은 잠을 이룰 수 있었으나 한가한 사람들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북쪽지대라 그런지 훈대평원의 밤은 쾌적함을 선사해 준다. 맥클레이용병단의 러츠와 훈족 전사의 결투를 구경한 그날, 엘란일행은 바로 이패이시스라인을 넘어섰다. 어두운 밤인데다 지리에 밝은 용병단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별다른 마찰 없이 은밀히 숨어들 수 있었다. 등짐을 하나씩 울러 매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하이론은 용병단의 전력을 가늠하고 있었고 엘란은 포두핌이 발견한 신세계라는 곳을 상상하고 있었다. “당신들 정체가 뭐요”“ 한 참을 우물쭈물하던 프로스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듯 질문을 던졌다. “......”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 “거참, 무지하게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군.”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을 갈구해 봐도 누구하나 대답하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자도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질문을 터트리려 할 때 하이론의 음성이 바람에 따라 조용히 흘러들었다. “알려하지 마시오. 당신에게나 우리들에게나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 프르덴틀후작이 장남 에단의 머리를 찢어놓고 외딴 영지로 내친 서재에는 가빈백작이 방문해 있었다. 육중한 책장이 머리를 이고 늘어선 거대한 서재 안에 홀로 서 있는 가빈백작은 초조한 내심과는 다르게 꽤나 유유자적하게 보였다. 극심한 권력투쟁을 헤쳐 나오느라 내심을 숨기는 것이 천성이 된 탓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 해도 손등을 바쁘게 두들기는 손가락에서 어쩔 수 없는 불안이 묻어나고 있었다. 후작이 어떻게 나올까” 그의 심사는 온통 그 문제에 함몰되어 있었다. 내전이 끝나고 달콤한 기분도 잠시. 그는 항상 쫓기는 심정이 들었다. 그것은 딸과 황태자의 혼사를 차일피일 미루는 후작 탓이었다. 후작의 외손자인 황태자의 나이 이미 열다섯. 혼인이 늦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으나 황가의 관례에는 상당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보통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혹은 귀족의 기대 때문에 열 살 전후에 혼인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가빈백작이 삼황자와 손을 잡으며 내건 조건은 황태자와 딸의 혼사였고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후작과 삼황자는 당연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으며 열과 성을 다해 삼황자를 지지했다. 내전이 승리로 마무리되고 그는 과실을 따기를 원했으나 후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전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그의 요구를 미루는 후작의 작태에 분기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이미 반석위에 올라선 황제와 후작의 힘에 감히 대항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 가운데 덧없는 시간은 흘러만 갔고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다가서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물이 넘어가는 딸의 한숨과 짜증을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걸려든 은밀한 움직임. 정보를 총괄하는 검은 독수리의 수장도 눈치 채지 못할 뻔 했던 그 움직임은 그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밤을 틈타 후작가를 드나드는 스트빌라이의 사신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후작가를 감시하지 않았다면 낌새도 채지 못했을 터였다. 불길한 낌새를 느낀 그는 자신의 줄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트빌라이에 심어둔 세작과 사신들 중 하나를 매수해 알아낸 사실은 그를 경악에 빠뜨렸다. 황태자와 스트빌라이의 황녀 브론다 간의 혼사 타진. 이것이 사신 파견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오라는 후작의 돌연한 방문요구. 가빈백작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일. 지금 그의 영지와 레드드래곤 기사단, 그리고 검은 독수리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가 저녁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면 그들은 검을 뽑을 것이다. 저벅. 저벅. 조용한 발소리. 그 발소리가 백작의 귀를 사로잡았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신경은 칼날 같이 곤두서고 입술을 바짝 바짝 말라간다. 이윽고 드러나는 후작의 얼굴. 백작은 기다리던 후작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그 너머에 시선을 모았다. 자신을 죽이러 따라 들어오는 병력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다소 안심한 백작이 강렬한 시선을 던졌다. 빛나는 눈동자에는 후작의 속내를 읽어내려는 치열한 탐색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에 대한 비난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생각할 게 좀 많아서 말이지.” 의자에 먼저 앉은 후작은 가빈백작이 앉기까지 잠시 기다린 후 천천히 운을 떼었다. “검은 독수리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군.” “......” 상대방의 저의를 모를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 백작은 기습적인 후작의 지적에 대꾸를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내가 눈치 챈 걸 알고 있었던가” 나를 부른 의도가 뭐지”“ 꼬리를 물고 연이어 떠오르는 상념에 그의 심사가 점점 복잡해 질 때 후작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긴장할 것 없네. 자네를 비난 하거나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불러들인 것은 아니니까.” “그럼”“ 백작의 울대가 크게 움직거리며 나지막한 질문이 새어나왔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목이 칼칼한 듯 중간에 말을 끊고 침을 삼키자 긴장한 백작도 따라서 침을 삼킨다. “스트빌라이 사신이 혼사를 제의해 왔네.” 후작은 거두절미하고 혼사를 제의해 왔다고만 말하고 백작의 반응을 살폈다. 백작의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태도에 후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 후작은 그를 검은 독수리의 수장에 앉힌 것을 후회하며 사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느닷없이 방문한 사신의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의 황녀와 황태자와의 혼사제의. 대륙최강국으로서 콧대 높던 그들로서는 항상 촌놈으로 무시하던 엘리오트황가와 혼사를 제의한 것은 파격적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물론 훈족의 발호가 있었고 후작도 그 속내는 짐작하고 있었다. 훈족이 쳐들어오면 전력으로 그들을 막아야 하는데 후방에 적대국을 남겨두고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일. 황녀와의 혼사로 남방을 튼튼히 한 후 훈족을 처리할 심사였으리라. 그러나 이런 저들의 속셈을 감안하더라도 엘리오트가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북쪽으로 스트빌라이와 국경을 맞대고 동쪽으로 피요르드와 국경을 맞댄 엘리오트 입장에서도 북쪽을 안정시키는 것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가빈백작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어떻게 하다니” 당연히 거절했지.” 레드드래곤기사단과 검은 독수리의 불온한 움직임. 이제 겨우 내전의 상처를 치유한 마당에 또다시 군사적 소요를 격을 수는 없는 일. 단호히 말하는 후작의 마음은 상당히 쓰라렸다. 그에 비에 백작의 얼굴은 눈데 띄게 환해졌다. 백작은 기쁜 마음을 천천히 눌러 앉혔다. 어쩌면 안심시킨 후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것이다. “스트빌라이가 불쾌해 하지 않던 가요”“ “자신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불쾌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후작은 허리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게 결정이 되었고 몇 가지 인사안을 준비해 봤는데 한 번 보겠나”“ 부르르. 후작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은 백작의 손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말도......” 격한 반발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후작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대신 추수가 끝나면 혼사를 추진하지. 어떤가”“ 백작은 다시 한 번 서류를 살폈다. 후작은 딸과 황태자의 혼사를 미끼로 검은 독수리를 그의 휘하에서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 스트빌라이의 사신(使臣)건으로 정보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리라. “두고 보자.” 후작은 이미 약속한 사항을 그것도 뒤늦게 이행하면서 그의 눈을 가리려 하고 있었다. 가빈은 속으로 이를 갈며 거대한 도서관을 눈으로 훑었다. 오래된 책 특유의 쿰쿰한 냄새에서 후작가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감도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그래 지금은 네가 이겼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믿지는 말아라.” 백작은 내심과는 다르게 입가에는 미소를 걸었다. “그렇게 하지요. 대신 일정을 명확하게 밝혔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내일이라도 당장 공고를 하지요.” 두 마리 노회한 너구리의 거래 속에서 혼사는 이렇게 결정지어졌다. *********************** 북방지역이라도 해가 뜨자 괴로울 정도로 뜨거워 졌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풀들도 축축 늘어져서 피곤함을 가중시켰다. 프로스크는 책상물림이라 그런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휴우~좀 쉬었다 갑시다.” 오뉴월 개처럼 혀를 빼문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더 가야하오”“ 옆에 앉은 하이론이 수통을 건네며 물었다. “밤이 되어야 정확한 거리가 나오겠지만 아무래도 훈평원을 지나쳐 사막까지 가야만 할 것 같소.” “한바퀴 돌아 제자리군.” 카이어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프로스크가 눈을 빛냈다. “제자리라니” 사막에서 살았소”“ “사막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하이론은 대충 대답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 프로스크도 싫은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려 실질적인 것을 짚어 냈다. “이대로 가면 훈족의 거주지를 종단해야 되는데 들키지 않고 갈 수 있을까” 혹 교역권이라도 가지고 있소”“ 물자가 달리는 훈족은 스트빌라이와의 교역이 절실했고 스트빌라이도 교역을 하는 것이 정치 경제적으로 이득인지라 관의 입회하에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런 무역에는 철기 같은 제한된 품목이 많았고 당연히 훈족 입장에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이익이 난다면 지옥에 가서라도 장사를 하는 것이 상인의 특징. 필요와 공급이 만나 공공연한 밀거래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상인에게는 암암리에 교역권이 발급되었다. 훈족의 땅을 지날 수 있는 스트빌라이인은 이 교역권을 가진 자들뿐이었으며 다른 외부인이 들어갔다가는 간첩이나 범죄자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인간들은 별 희한한 것들을 다 만든단 말이야.” 또 괴상한 소리. 프로스크는 카이어스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데 진절머리가 쳐졌다. “안 만나면 됩니다.” 질문이 떨어지고 한 참이 지나서야 엘란이 대답했다. “훈대평원이 스트빌라이처럼 인구가 조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다. 어떻게 아무도 만나지 않고 갈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엘란은 한마디로 잘랐다. “그건 저와 카이어스가 알아서 합니다.” 프로스크는 여정이 길어질수록 대화의 단절을 느끼며 소외감에 휩싸였다. “가자. 사람들이 다가온다.” 카이어스가 벌떡 일어서서 한 소리 하고는 걸어가 버리자 프로스크는 혀를 차댔다. “또 헛소리. 사람이 다가온다고! 지가 무슨 소드마스터라도 되나.”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와는 달리 일행들은 짐을 들고 그를 따른다. 엘란은 힘들어하는 그의 짐까지 대신 짊어진 채다. “이봐! 같이 가.” 할 수 없이 따라 일어서는 프로스크의 얼굴에 긴 고랑이 파였다. 그가 의뢰를 받아들인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걷는 시간이 길어지자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고 다리도 팍팍해지는데 카이어스란 엉뚱한 놈은 또다시 헛소리를 해댄다. “사방에서 다가오는데 들키지 않고 벗어나기가 어렵겠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헛소리 좀 그만 둘 수 없겠나!” 프로스크는 제발 부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어스는 전방을 주시할 뿐이다. “할 수 없군요. 실피드.” 상급 정령사 중 바람의 상급 정령을 부리는 자는 광술사로 불리는 지고교의 좌호법사 밖에 없으니 슈리엘을 소환할 수는 없는 일. 엘란은 실피드를 불러 일행들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으아~” 실피드에 실려 공중으로 떠오르는 프로스크는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의외의 일이었던 것이다. “너......너......중급 정령사였어”“ “예, 맞습니다. 그리고 좀 조용히 해주십시오.” 상급 정령사라고 밝히는 것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 엘란은 프로스크의 질문에 긍정을 표함으로써 그를 속이고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 사방에서 수천 기, 아니 수만 기의 말들이 풀들을 밟아대며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강인하게 자라나던 풀들은 짓밟히고 짓밟혀서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공중에서 그 위용을 쳐다보고 있던 프로스크는 입을 딱 벌렸다. 일대 장관이기도 하거니와 겁이 덜컥 났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훈족의 전사들이 몰려드는 위치의 중앙에 일행들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창날. 온통 하얗게 번쩍이는 백색의 창날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였다. 그 창날이 일시에 움직인다. 말을 타고 있던 훈족의 전사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창을 움켜 쥔 채로. 그리고는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에 따라 창도 고개를 숙이고 당연히 날도 한꺼번에 눕혀졌는데 그 모양이 또한 장관이었다. 하늘의 별들이 모조리 땅으로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 창이 반사한 태양광이 프로스크의 눈을 아리게 만든다. 가뜩이나 졸아있던 그는 놀라서 허둥거리다 신발을 떨어뜨려 버렸다. 일행들의 시선을 일시에 붙잡아 버리는 신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프로스크와 하이론. 스으. 귀를 쫑끗 세워도 듣기 어려운 미세한 소음이 들리고 자연스레 나타난 실프가 신발을 잡았다. 들렸을까” 눈치 챘을까” 긴장으로 굳어진 엘란의 등을 타고 한 줄기 땀방울이 흘렀다. 푸르륵. 초원에 만 명도 넘는 인원이 모여 있건만 간혹 들리는 말들의 투레질 소리를 제외한다면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휴!” 엘란은 안도의 한 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때. “일어나라.”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의 입에서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떨어지고 만여 명의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일어서자 창들도 일시에 들려진다. 마치 거대한 산이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불시의 일격. 쾅! 실피드 아래쪽의 허공이 폭음을 동반한 채 폭발했다. 그 바람에 일어난 격렬한 공기의 유동이 실피드들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엘란이 겨우 실피드를 추스를 때 말 위에 탄 사람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글거리는 죽음의 불꽃이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 혼돈의 구슬을 따르라!” 주문이 끝나자마자 그의 머리위에 작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에서 다섯 개의 공이 튀어 나왔다. 아이 머리통만한 크기의 푸른 색 구슬에는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가라!” 그의 입에서 일갈이 터지자 슈앙! 하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난데없는 폭발이 일어날 때부터 일이 틀어졌다는 걸 직감한 엘란이 정령을 부려 빠져나가려 했으나 혼자도 아니고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까지 돌보며 도망간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마법을 시전하는 사람의 실력이 녹록치 않았던 탓이었다. 게다가 구슬은 너무나도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언뜻 언뜻 드러나는 붉은 색 잔광만이 눈에 남는 것 같았다. “카사!” 세 마리의 독수리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일행들 주위를 엄호하듯 맴돌았다. 그리고 격돌. 쾅. 카사는 날아오는 구슬을 날개로 후려쳐 버렸다. 튕겨져 날아가던 구슬은 이내 멈추더니 다시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쾅쾅. 연이어 폭음이 터졌다. 카사는 날개로, 부리로 혹은 발톱으로 구슬을 쳐내고 쪼아댔으나 구슬은 잠깐의 멈칫거림뿐 곧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일행들을 압박해 왔다. 정령을 조정해서 힘겹게 구슬을 쳐내던 엘란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흠칫했다. 말 위에 앉아서 마법을 시전하는 사람은 눈을 감은 채로 산책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여유만만 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전력을 기울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거기다 만 명이 넘는 전사들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활을 날려서 상대를 압박할 수도 있는데도 뒤로 물러나는 것 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은 그만큼 말 위의 사람을 믿는 다는 의미였다. 엘란은 구슬을 떨쳐내고 도망치거나 적을 꺾으려면 슈리엘을 소환하거나 일행을 내려서 몸을 가볍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둘 다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슈리엘을 소환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행동이었고 그렇다고 일행들을 내려놓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쾅쾅. 그가 딴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카사의 방어를 뚫으려는 구슬의 움직임과 막으려는 독수리의 움직임은 격렬했다. 그 바람에 하늘은 폭음과 불꽃으로 한바탕 소란을 겪어 대야 했다. 한 낮의 시끄러운 불꽃놀이는 말위에 탄자가 고개를 드는 그 한 순간에 멈추어 졌다. 구슬이 압박하기를 그치고 일행들을 둘러싼 채 정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 오각형의 중간에 위치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엘란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엘란(90) $ 백법사 타클마칸.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소매로 땀을 씻어내는 엘란의 움직임에 차가운 긴장이 서렸다. 한 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주는 더위도 지금은 전혀 위세를 부리지 못했다. 싸우는 상대의 신분을 짐작한 때문이었다. 슈리엘을 소환하지 않았고 혹이 달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는 하나 상급 정령사를 이렇듯 궁지에 빠뜨릴 만한 마법사는 대륙에서 몇 되지 않는다. 훈족 전사의 절대적인 복종을 받아내는 흰옷의 고위마법사. 타클마 부족의 위대한 왕. 백법사 타클마칸일 것이다. “설마 타클마칸은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며 질문을 던지던 하이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엘란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때문이었다. “타클마칸!” 프로스크의 경악에 찬 고함이 초원을 뒤흔들었다. 움찔! 위대한 왕을 함부로 부르는 순간, 초원을 가득매운 전사들의 몸이 짧은 시간 떨렸다 멎었다. 그와 함께 프로스크의 심장도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평정을 회복한 프로스크가 감격에 찬 눈을 빛냈다. 엘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십존이라는 절대 강자를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엘란은 실피드를 움직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구슬은 포위망을 형성한 채 그가 움직이는 거리만큼 같이 움직이며 틈을 주지 않았다. 그때 백법사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목소리. “음......광술사인가.” 백법사가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령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 그의 공격은 실력을 알아보려는 시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시험의 결과는 놀라웠다. 광술사로 의심되는 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땅에서. 백법사는 천천히 그러나 강한 의지를 담아 주문을 영창했다. 마지막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혼돈의 구슬이어 눈을 떠 적을 직시하라!” 파지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구슬의 화염이 더욱 거세어졌다. 지옥의 업화같이 타오르던 불길은 장막을 드리우는 것처럼 넓어지며 다른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섯 개의 구슬에서 퍼져나간 불의 장막이 서로의 손을 맞잡자 일행들을 가운데 두고 완벽한 그물망이 형성되었다. 위와 아래를 완전히 막아선 채 시뻘겋게 일렁거리는 불의 장막. 하늘과 땅이 온통 불길에 휩싸인 상황은 불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뜨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누구랄 것도 없이 비오듯 땀을 흘렸다. 애초에 구슬에 포위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소극적으로 피하며 달아날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직접 맞붙어 싸워야 했던 것이다. 일행을 가마솥에 든 닭처럼 구워대던 사방의 화염이 더욱 짙어지는 순간 오각형의 꼭지점을 점한 구슬들이 그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호두까기에 끼인 호두처럼 불의 막에 으스러질 위기에 처하자 프로스크의 붉게 달궈진 얼굴이 일순간 희게 변했다. “이봐! 어떻게 좀 해봐.” 이제는 땀도 모두 말라버린 것인지 소금기만 남아 번들거리는 얼굴로 프로스크가 애타가 재촉했다. 실피드로 구슬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사를 돌려보낸 엘란은 하는 수 없이 슈리엘을 소환했다. “슈리엘......” 설마......!”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움직여 비명 같은 말을 토해낸 프로스크가 다시 고함을 지르며 눈을 치떴다. 찢어질 듯 부릅뜬 그의 눈에 박히듯 들어오는 자. “광술사!” 대륙에서 가장 악명을 떨치는 자. 그의 이름을 대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대살성. 슈리엘을 부리는 지고교의 좌호법사. 경악한 그가 허둥거릴 때 바람의 상급 정령은 창을 날렸다. 쇄액! 쾅! 공간을 가르며 서릿발같이 날아간 창이 장막을 때렸다. 구슬이 만들어낸 불의 장막은 넓게 펼쳐있고 바람의 창은 한 점에 힘을 집중시켰으니 장막이 견뎌낼 리 없었다. 폭음과 함께 막이 찢어지며 창이 그 사이를 치달렸다. 창이 뚫어 놓은 그 구멍으로 카이어스가 몸을 날렸다. 계속되는 핍박으로 기분이 몹시 상했던 것이다. 싸우지 않고 가겠다는 데 왜 귀찮게 구는가” 웬만하면 참으려 했더니 해도 너무하잖은가. 한편 공중의 적들을 완전히 가둬놓은 백법사는 하늘에 시선을 모으며 부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일 것 같은가”“ 그제서야 몸을 푼 전사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스트빌라이에서 파견한 첩자가 아닐런지요.” 이베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평이한 답을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세오나는 위를 힐끗 쳐다보고 검을 만지작거렸다. 첩자가 아니면 보통 상인이었으나 저들은 상인으로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파티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모험가가 유일했다. “모험가들 같아 보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백법사의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긍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광술사라고 들어봤나”“ “코르도보습지에서 광법사 일레이저와 손을 섞은 것이 마지막 모습이라고 들었습니다. 양패구상 했다는 소문도 있고 그가 광법사를 쳐 죽이고 멀리 떠나갔다는 소문도 들은 듯 합니다만...... 낭설인 듯 합니다.” 이베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가 살아있다면”“ “글쎄요......전 회의적입니다. 그가 대단한 정령사이긴 하나 천하의 광법사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믿어지진 않습니다.” “그럼 광법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광술사를 집어넣는 세간의 평은 어떻게 보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광법사 제자의 말을 너무 믿은 탓이지요.” 홀로 살아남은 제자는 광법사의 광태에 질려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던 탓으로 그 때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엘프들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엘란의 동행이 같이 습격했다는 식으로 횡설수설 했고 그래서 이베 같이 신빙성을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그럼 자취를 감춘 광법사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마법을 연마하고 있겠지요.” 이베는 광법사가 광술사에게 당했다는 세간의 소문을 믿지 않았다. 습지에서 살아난 유일한 제자가 등에 그려진 저주의 힘이 없어진 것을 증거로 광법사의 죽음을 떠벌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자신보다 젊은 정령사가 십존의 일원을 죽였을 리 없다는 질투였다. 십분 양보해서 생각한 것이 둘의 양패구상. 아마 지금쯤 고온다습한 밀림에서 벌레에 뒤덮여 썩어가고 있을 터. 어쩌면 뼈까지 썩어 이미 흙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르는 일. “어쩌면......” 그의 말은 폭음에 의해 중단되어졌다. 일격에 막을 뚫은 바람의 창이 밖으로 이빨을 들이댄 것이었다. “아무래도 자네 의견은 틀린 것 같네.” 두 손을 활짝 핀 채 양 팔목을 맞댄 백법사가 손을 한 바퀴 돌려 하늘로 뻗었다. 그에 따라 푸른 색 기운이 일렁거리더니 창을 향해 폭사되었다. 쾅. 푸른 색 기운을 이기지 못한 창이 하늘로 튕겨졌다 그 기세를 잃고 바람으로 환원된다. 그 순간. 싹! 찢겨진 막을 통해 떨어져 내린 거구의 사내가 푸른 색 섬광을 일격에 잘라버렸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중력의 힘과 무거운 체중, 그리고 온 힘을 모은 그의 칼은 신기할 정도로 길게 늘어나며 백법사의 정수리를 노리고 번개처럼 짓쳐졌다. 그 찰나의 시간에도 백법사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보면 다급하지 않다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닌 듯 했다. 아마 천성인 듯. “에어 애로우!” 공격은 최선의 방어. 그의 머리 위에 백여 개의 화살이 떴다. 그 화살들은 하나씩 둘씩 혹은 십여 개씩 짝을 지어 시간차 공격을 감행한다. 십존이 부리는 마법은 하위 써클 마법이라도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화살의 숫자도 엄청나서 자칫 하나라도 맞으면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게 될 터. 카이어스는 짧은 시간 갈등했다. 몇 개를 몸으로 받고 흰둥이의 정수리를 쪼개 버리자니 마법의 화살이 만만찮아 보였고 화살을 일일이 쳐 내자니 기세를 잃을 것 같았다. 앞으로 뻗어가던 그의 칼이 궤도를 수정해서 앞을 휘저었다. 줄기줄기 피어오른 오러가 화살을 일일이 쳐내거나 튕겨냈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것. 모험을 걸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턱! 카이어스가 초원에 발을 디디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까불면 박살내 버리겠다는 오만한 태도. 쾅. 그가 백법사를 위시해 주변의 전사들에게 일일이 눈을 부라릴 때 불의 장막이 빵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조각조각 찢어져 버렸다. 투두둑. 힘을 잃은 구슬들이 바닥에 떨어져서 희미해지더니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슈리엘의 위용. “보아라 이베! 광술사의 모습이다.” 타클마칸의 말에 이베의 미간이 좁혀졌다.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백법사나 전사들은 엘란 일행이 바닥에 내려설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너희 따위는 아무런 위협도 못된다는 자신감의 발로인지 아니면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주는 것인지. 잠시의 침묵은 카이어스에 의해 깨어졌다. “호. 너는 그 천방지축 아가씨로군.” 카이어스의 눈길이 향하는 곳에 세오나가 있었다. “아는 잔가”“ 이제는 엘란에게서 눈을 돌려 카이어스를 쳐다보던 백법사가 물었다. “처음 보는 잡니다.” 타클마칸은 세오나가 부정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난데없이 등장한 소드마스터! 슈리엘을 미루어 짐작하면 저 자는 광술사 엘란이 분명한데 오러를 뿜어대는 저 자는 누구란 말인가” 모든 기득권층이 그렇듯 백법사도 꽉 잡힌 질서를 뒤흔드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는 한. 더더군다나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세오나를 아시오”“ 반공대(半供對).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는 놀라운 대우였다. “뭐, 딱히 안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고 아르고느에서 용병과 싸우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체이스의 안내를 받아 방문한 이패이시스라인에서 러츠라는 용병을 무참히 꺾어버린 훈족의 여전사였다. “이런 무례한 놈.” 이베의 눈꼬리가 거칠게 올라갔다. 시건방진 말투가 신경을 자극한 탓이다. 그가 분노하거나 말거나 카이어스는 이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힘만 센 그 무식한 놈은 무사한가” 턱이 완전히 부서진 것 같던데.” 이번에는 세오나가 그를 무시했다. 단지 고개를 숙여 신발코를 쳐다볼 뿐이다. 카이어스는 만 명의 적들에 둘러싸여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들거리는 것이 시중의 불량배를 보는 듯하다. 이에 비해 하이론과 프로스크는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몰살당하게 생긴 것이다. “턱이 부서진 애하고는 무슨 사인가” 제자인가”“ 카이어스는 나이나 신분에 구애되지 않았고 실력이 뛰어난 자가 뒤떨어지는 자를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세오나가 듣기에는 자신의 오빠를 비웃는 것으로 들려졌다. “하!” 돌연 검을 뽑아든 그녀가 바람처럼 내달렸다. 챙챙챙챙. 튀어 오르는 불똥과 번뜩이는 검광. 맹렬히 교환되는 검격에서 살기가 난무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상대하는 카이어스의 얼굴이 그녀의 심화에 불을 당겼다. “봐 주는 것이냐”“ 길게 끄는 고함과 함께 검이 사선으로 베어지며 왼쪽 어깨를 노린다. 챙. 가볍게 튕겨내며 똑같이 왼쪽 어깨를 노리는 카이어스의 칼날. 무서운 속도였다. 비껴져 흐르는 검을 되돌린 그녀가 급히 검을 당겨 칼을 막았다. 쾅. 병장기가 부딪쳐 만들어내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충돌음이 울렸다. 그리고 뒤로 휘청거린 세오나가 오른발을 빼 충격을 흘렀다. 그와 함께 틀어 묶은 머리칼이 흩어지며 금발이 수초처럼 일렁거렸다. 대단한 힘. 일순간 팔이 마비되며 검을 떨어뜨릴 뻔한 세오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마비된 팔을 풀었다. 그 틈을 노치지 않고 날아오는 칼이 그녀의 큰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그만!” 백법사의 일갈이 터지자 카이어스의 칼이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멈추어 졌다. “누구냐”“ “카이어스.” “카이어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당연하지 처음 나왔으니까.” “어느 나라 사람인가”“ “글쎄......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공국이나 속국 출신인가”“ “그런 건 아니다.” 백법사와 카이어스의 대화는 핀트가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어디서 살았는데”“ “엘프의 숲.” “거짓말! 어떻게 인간이 엘프의 숲에서 사는가”“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던 이베가 끼어들었다. “엘프가 엘프의 숲에서 살지 그럼 어디서 사는가”“ “......!” “......” 위험한 공격을 방어하면서도 여유만만 하던 백법사나 미동도 않고 있던 전사들이나 모두 놀라 움찔 거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베의 반박. “당신이 무슨 엘프인가” 차라리 산도적이라면 믿겠다.” 카이어스의 모습이 알려진 엘프의 모습과 많이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이베의 모멸적인 말에도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싸맨 두건을 풀었다. “몸이 근육덩어리건 정령을 부리지 못하건 귀가 없던 나는 티그리아의 자랑스런 아들 엘프다.” “억!” “......!” 억눌린 신음과 작은 웅성거림, 그리고 부자유스런 침묵. 엘프라는 말을 들을 때보다 이번의 반응이 더욱 격렬했다. 두건을 벗으며 드러난 머리에 귀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오관중 하나가 없어지면 참으로 괴상하게 보이며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귀가 없으니 당신의 말은 더욱 믿지 못하겠다.” 이베가 냉소적으로 지껄였다. 그 음성에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그는 엘프다!” 엘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정적인, 너무나 확고한 그 한마디가 일동을 굳어지게 했다.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광술사의 한 마디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바보이거나 미치광이일 것이다. “정말인가”“ 백법사가 다시 확인을 한다. “정말입니다.” 엘란은 공손히 대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을 적대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이쯤에서 물러났으면 합니다만......”“ “함부로 우리 땅을 침범해 놓고 그냥 물러나겠다.” “그럼 싸우실 겁니까”“ 반문하는 엘란의 음성에 약간의 경고가 섞였다. 싸우면 그 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경고. “대답여하에 따라서.” 타클마칸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어떤 점에서는 아주르갈 대장로를 떠올리게 하는 풍모였다. 훨씬 더 인간적이긴 했지만. “여기는 왜 들어왔나”“ “보물찾기.” 엘란은 프로스크에게 한 말 그대로 진실도 거짓도 아닌 대답을 했다. “남의 땅에서”“ “천년도 더 전의 보물이니 파내는 자가 임자겠지요.” “호~내 생각은 다른데. 땅주인 몰래 땅에 묻힌 보물을 파내는 것은 도둑질이 아닐까”“ “당신들 땅은 아닐 것이요.” 훈족의 땅을 북쪽으로 가로질러 가는 것뿐이지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그들의 땅이 아니다. “그럼 사막에 묻혀 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사막은 인간이 살기에는 너무나 환경이 척박했다. 게다가 교통로로서의 기능도 완전히 꽝이었다. 사막너머에는 엘프의 숲밖에 없으니 인간들이 힘들게 사막을 건널 메리트가 전혀 없는 것이다.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하이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믿는다고 해두지. 그 보다 광법사와의 일을 알고 싶은데.” “얘기해 주면 그냥 보내 줄 겁니까”“ “약속하지.” 하이론은 약속이란 말을 듣는 순간 인상을 그렸다. 이때까지 만나 본 십존을 떠올리면 별로 신용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일. 하이론은 천천히 그 때의 일을 설명해 나갔다. 지고교 아이를 광법사가 납치해서 그를 쫓아 습지로 들어섰고 그가 훔쳐간 물건을 찾으러 들어온 엘프들과 힘을 합쳐 그를 처치했다는 설명이었다. 모든 일을 사실대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바샤라의 돌이라던가 습지의 지배자인 괴물 거미, 괴상한 꿈, 광법사가 8써클에 발을 들인 것은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같이 싸운 엘프는”“ “상급 정령사와 다른 엘프가 있었습니다.” 백법사와 이베는 카이어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른 엘프를 카이어스로 오해한 것이었다. 상급 정령사 둘에 소드마스터 하나라면 광법사를 죽이기에는 차고 넘쳤다. 묻혀진 사실을 명확하게 알았다고 생각한 이베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가 동행하는 이유는”“ 이번에는 카이어스가 대답한다. “추방 되서 갈 데가 없었던 지라 이들과 일행이 되기로 했다.” “귀는”“ “장로에게 던져주고 나왔다.” 이베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건들거리며 함부로 말을 뱉어내는 카이어스는 완전히 범죄자로 비춰졌다. 범죄자들에게 신체를 훼손하는 벌을 내리는 것은 인간들 사회에서도 많이 행해지는 일이다. 보통은 이마에 낙인을 찍거나 코를 베지만 귀가 특징인 엘프는 귀를 잘라내는 것이 타당하다는 황당한 생각까지 떠올린 채였다. “죄를 지어 귀를 잘라내고 추방당했구만.” 죄를 지었다는 것이나 귀를 잘라낸 이유는 틀린 짐작이었으나 추방당한 것은 맞는 생각이었다. “보물찾기가 끝나면 한 번 찾아올 텐가” 살 땅을 떼어줄 수도 있다.” 백법사가 엘란을 보며 은근하게 말을 건넸다. 용병왕 맥클레이와 똑같은 제안이었다. 엘란은 그의 음성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귓가에 말발굽소리와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 “그러지요.” 그의 대답을 끝으로 백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들을 에워싸고 있던 전사들이 일시에 몸을 움직였다. 한 순간 갈라지는 인간들과 말들의 바다. 그 드러난 길을 따라 일행들이 움직였다. “잠깐!” 백법사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이 터지자 긴장한 일행들의 등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진다. “가져가라.” 팔랑. 한 장의 종이가 바람을 타고 천천히 날아들었다. “이것은”“ “통행증이다. 그것을 보여주면 부족민들이 편의를 최대한 살펴줄 것이다.” 내전을 대비해서 개축한 높다란 담장에는 삐죽삐죽한 쇠창이 박혀 있어서 미관을 크게 해치고 있었다. 에단은 육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문 앞에 멈춰 서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수도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담장이 마치 감옥 담벼락처럼 변한 데에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담쟁이덩굴이 고풍스럽게 자라던 외벽이 시뻘건 벽돌로 보강된 것은 지금 봐도 애석했다. 굳게 닫힌 대문 뒤에 서 있던 제삼 총관은 한숨짓는 그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저...... 공자님 후작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셨다가 다시 오시지요.” “아닐 세. 별일도 없으니 기다렸다 뵙고 가겠네.” 담담하게 대꾸하는 프르덴틀가의 장남을 보며 제삼 총관은 당혹한 심사를 숨기지 못했다. 벌써 두 시간 째 기다리는 에단이 보기 안쓰러웠으나 후작이 장남을 내치며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내린 엄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안절부절 못하며 바라볼 밖에. 이제는 떠나라는 권유를 그만둔 총관이 불편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는 가운데 태양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태양은 에단을 처량한 상념의 바다에 밀어 넣었다. 안부 편지를 인편으로 보내길 100여 차례. 쫓겨나듯 내려간 시골영지로 부친은 답장 한 번 보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조카의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정말 부자간의 연을 끊으려는가” 해를 지평선 밑으로 끌어내린 밤은 본격적으로 옷자락을 드리워 하늘과 땅을 장악했다. 어둠이 내린 대문 앞. 오갈 데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에단의 모습은 청승맞기가 한정 없었다. 이윽고. 두두두두. 불을 밝힌 사두마차가 어둠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워!” 말을 세운 마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비켜라! 감히 후작가의 마차를 가로막다니.” 개도 귀족가에서 한 달만 지내면 안하무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마차를 모는 마부는 오죽하겠는가. 정문 앞에 버티고 선 사내에게 오만하게 명령한 마부는 그가 비키지 않자 사정을 물을 생각도 않고 채찍부터 들어올렸다. 마부가 앞을 막은 놈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내려주려는 찰라 급히 문이 열리고 총관이 튀어나왔다. “후작님! 에단님께서 오셨습니다.” “......” 찔끔한 마부가 목을 움츠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마차 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마차의 침묵이 점점 길어질수록 에단의 몸도 눈에 띄게 떨렸다. “아버지!” 피 끓는 음성. 그러나 그의 음성에 스며있는 절절한 정도 마차의 침묵을 깨지는 못했다. “후작님!” 안타까운 총관의 음성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나한테 아들은 하나뿐이다.” 용암도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음성. 에단은 그 차가움에 한기를 느꼈다. “아버지!” 다시 터져 나온 절절한 목소리. 그러나 그의 말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었다. “이놈! 안가고 뭐 하느냐!” 느닷없이 날아오는 호통에 혼비백산한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짝. 히히힝. 난데없이 등을 얻어맞은 말이 한 줄기 울음을 토하고 땅을 박찼다. “아이고!” 깜짝 놀란 총관이 가만히 서 있다 말에 깔리게 된 에단의 옷자락을 끌어 바닥을 굴렀다. 곧 마차는 사라지고 문이 굳게 닫혔다. 그 순간 에단의 가슴에도 굵은 빗장이 쳐졌다. “에단님......” 총관은 바닥에 누워 일어날 줄 모르는 후작가의 장남을 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기를 이십분. 자신이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총관이 씁쓸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히 가십시오. 문을 열어라!” 여전히 누워있는 에단에게 고개를 숙인 그는 불편한 심사를 문지기에게 호통을 지르는 것으로 풀어버렸다. 총관도 떠나고 이제는 혼자가 된 에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인 눈물은 눈꼬리를 지나 관자놀이를 가로지른 후 머리카락을 적시고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아버지! 한 번도!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으시는 군요.” *********************************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서서히 기세를 잃어갔다. 아침저녁으로는 선득선득한 것이 가을은 비키고 겨울로 바로 들어설 것만 같은 날씨다. “북쪽이라 그런지 여름이 짧구만.” 프로스크는 확연히 줄어든 풀을 밟으며 옷을 여몄다. 굵은 모래가 밟히는 여기부터가 사막이었다. “폼 그만 제고 이제 떠나자.”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어떤 감격을 느끼는 프로스크의 기분을 카이어스가 한 마디로 깨어버렸다. “아무리 봐도 자네가 엘프라는 것을 못 믿겠소.” 프로스크는 훈족이 마련해준 낙타를 타며 투덜거렸다. “네가 믿든 말든 나는......” “알았소! 알았으니 제발 “나는 엘프다” 라는 소리는 그만 하시오. 귀에 딱지가 않겠소.” 그의 말에는 엘란이나 하이론도 같은 심정이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듣다보니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다. 어깨를 으쓱거린 카이어스는 낙타를 출발시켰다. 딸랑딸랑. 앞으로 나가자 안장에 달린 방울이 기분 좋은 소리를 발한다. “백법사라는 그 놈 말이야, 꽤 신사적이야.” 카이어스는 낙타의 율동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신사적이라뇨”“ 엘란이 물었다. “약속대로 편안하게 보내줬잖아. 이렇게 멋진 탈 것도 마련해 주고.” “글쎄요.” 엘란은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백법사가 내준 통행증의 효력은 대단해서 가는 길에 들른 부족에게 필요하다는 운만 떼면 뭐든지 마련해 주었다. 필요 없는 물건까지 안겨주는 통에 부담이 될 정도였다. 미안해서 사양할라 치면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타클마칸이 직접 하사한 통행증 소지자에게 대준 물품과 친절은 몇 곱으로 도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무 대가없이 준 통행증이라면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나 그의 속셈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그를 신사적이라 평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목적 때문에 준 것이니 신사라고 하기야 그렇지. 고마워할 필요도 없고.” 프로스크가 엘란대신 확실하게 대답했다. “목적이라니”“ 카이어스가 묻자 기다렸다는 듯 프로스크의 입이 열렸다. 일단 국제 정세부터 시작해서 용병대와 훈족의 처지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전쟁과 그 예상까지 일사천리로 말하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지고교의 역사와 엘리오트 탈출과정을 설명하고 뒤를 이어 광술사로 불리는 엘란에 대한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지막에는 맥클레이의 제안과 백법사의 속셈을 마치 직접 겪어 본 것처럼 짚어냈다. “당신이 어떻게 알았소”“ 엘란이 놀라서 물었다. “쯧쯧쯧.” 프로스크는 대답은 않고 혀부터 차대더니 정색을 했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스트빌라이 최고의 현자라고. 국제정세야 웬만큼 머리 있는 놈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고 나머지는 네가 광술사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면 체이스와 백법사의 반응을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하이론의 거두절미한 물음. 둘 중 누구와 손을 잡으면 낫겠냐는 소리였다. “내 생각에는 맥클레이와 손잡는 게 나을 것 같소.” “이유는”“ “맥클레이용병단이 대륙최고라고는 하나 백법사의 세력에 비한다면 많이 미흡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도박을 하더라도 확률이 작은 곳에 거는 게 대박을 터트릴 확률이 높소.” “당신 얘기는 세력이 약한 용병단과 손잡는 게 대가를 챙기기가 용이하다는 말이오”“ “그렇소. 약한 쪽을 도와야 생색도 나고 과실을 나눌 때도 큰 몫을 요구할 수 있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엘란이었다. 그가 프로스크의 말에 공감하는 것은 순전히 엘프들과의 일 때문이었다. 그들이 엘프의 숲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프들의 어거지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목적을 달성한 백법사가 오리발을 내밀면 그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엘란이 프로스크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을 때 묵묵히 앞으로 나가던 카이어스가 낙타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프로스크.” 갑작스런 부름에 프로스크의 얼굴에 물음표가 찍힌다. “부탁하나 하자.” “무슨 부탁이요”“ “앞으로 “나는 엘프다” 라는 소리는 안할 테니 자네도 “나는 스트빌라이 최고의 현자다” 라는 소리 하지 말게.” “......” 카이어스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자칭 스트빌라이 최고의 현자를 뒤로하고 낙타를 몰았다. 냉대사막의 밤은 정말로 추웠다. 가만히 있으면 뼈까지 시릴 정도였다. 어두워지자 발을 멈춘 일행들은 땅을 깊이파고 중간에 불을 피웠다. 훈족이 준비해준 땔감이 꽤나 넉넉했다. 고즈넉한 하늘.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떴다. 어찌나 밝고 가까워 보이는지 손만 뻗으면 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엘란이 누운 채로 별을 가리키는 데 프로스크가 말을 건넨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용병단이나 백법사를 찾아가지 않을 테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늙는다고 눈치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네. 이번 일 대단히 중요한 일 같은데 지도가 가리키는 게 뭔가” 단순한 보물은 아닐 테고...... 되었네.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시간이 가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니까. 이것만 말해주게 성공하면 용병왕이나 백법사의 제안은 거부하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던 엘란은 짤막하게 긍정했다. “예.” 프로스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그는 잠들어있는 카이어스를 겸연쩍게 곁눈질 하고 입을 열었다. “스트빌라이 최고의 현자가 그것도 모를까.” “......” “그렇구만. 혹시나 말일세 계획이 어긋나서 둘 중 하나와 손을 잡게 되면 나도 끼워주게.” 엘란의 얼굴에 당혹한 표정이 어렸다. “끼워달라는 것은”“ “나도 한 배를 타겠다는 소리네.” “어째서 그런......!” 엘란은 도무지 그의 심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야 절박한 처지였고 나라도 달랐지만 그는 아니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반역이나 침략에 일조를 하겠다는 것을 자신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아카데미회원으로 어떻게 보면 교육상 많은 혜택을 받은 자가 아닌가.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쓸쓸하게 내뱉는 프로스크의 말에는 짙은 회한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말일세. 이 머리 안에 대륙 전체가 들어가 있다네. 그런데, 그런데 신분이나 볼품없는 외모 탓에 비웃음만 받았지 그걸 써 볼 기회가 없단 말이야.” 마지막 말에는 어떤 분노까지 어려 있었다. 엘란은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원한 것은 넋두리 혹은 한탄을 들어줄 사람이지 대화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때문이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그가 말을 이었다. “난 내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네. 내 학식을 현실에 구현해 보고 싶다는 말일세.” “그래서 동족의 가슴에 칼을 겨루겠다는 말인가”“ 책망이 서린 목소리.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카이어스가 질문을 던졌다. “동족” 후후. 대륙인은 모두 한 핏줄이야. 스스로를 훈족이라 칭하는 자들도 알고 보면 모두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모두 다르다고 주장하지 않나”“ “그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나라를 통치하는 데 유리하니까 그런 거지. 스트빌라이인들이 엘리오트인을 더러운 촌놈이라 부르는 것과 그들이 우리를 거만한 돼지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야.” “그랬던가. 하여간 인간들은 단순한 사실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 좋아한단 말이야.” 잠시 둘의 문답을 듣던 엘란이 끼어들었다. “훈족의 기원은 훈이라는 이계의 전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명일세. 수천만 명 중에 한 명의 다른 피가 섞였다고 그들을 다른 종족이라고 할 수야 없지.” “그건 그렇고 정말 그들과 합류할 생각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엘란은 화제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그럴 생각이네. 자네들이 목적을 달성해서 떠난다면 나 혼자라도 찾아가겠네.” 힘주어 대답하는 그의 음성에 굳센 결의가 담겼다. “성공할 수 있을까요”“ 조심스레 입을 떼는 장발의 사나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불안한 심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왜 실패할 까봐 겁이 나나”“ 조롱하는 듯한 이죽거림. 불안하게 떨리던 장발사나이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언제 이런 수모를 겪어 보았던 가! 그 살 떨리는 공포이후 그의 빛나는 미래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런 수모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힘이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소매를 쳐다보던 장발 사나이의 눈에 악독함이 서렸다. “합시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살겠소.” 결의에 찬 눈동자가 옆으로 돌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헐렁한 소매가 핏발 선 눈에 아프게 박혀 든다. “형님은 어쩌실 겁니까”“ “당연히 해야지.” 바로 튀어나오는 단호한 대답. 서로의 손을 잡으며 결의를 다지는 둘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이제 시작이다.” 세 명의 사내와 함께 음모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다리가 유난히 긴 삼발이 위에 동글동글한 물체가 놓여졌다. 그 주둥이 부분에 눈을 대고 별들을 살피던 프로스크는 백지위에 그림을 그리고 줄을 이리저리 그었다. 그리고는 지도를 꺼내 맞춰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한 일주일 더 가면 될 것 같소.” “그런가.” 심상한 표정. 별로 기쁜 것 같은 반응이 아니다. 돈을 받고 용역을 제공하는 처지에 공치사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뚱한 반응에는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봐. 무슨 반응이 그래.” 고개를 돌려 목을 푼 하이론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아서.” 프로스크가 실소를 터트린다. “허~참, 오래 살다보니 별 노무 소리를 다 듣겠네. 일이 잘 풀리는 것도 불만이요”“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가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오.” 프로스크는 사람마다 생각이 가지각색이라고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오늘은 좀 더 움직여 봅시다.” 휘이이이~ 사막이 토해내는 모래의 울음소리. 바람이 불자 부드러운 모래가 사정없이 날렸다. 멀리서 보면 누런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것 같아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모래를 다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입안에서 저글거리고 코를 맵게 하는 모래는 끊임없이 괴로움을 선사했다. “앞 쪽에 누가 있는데.” “이런 오지에 누가”“ 카이어스와 엘란이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모래뿐인 것 같은 사막에도 구릉은 있었다. 둘의 귀에 잡힌 소음은 사구(砂丘) 너머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둘의 말을 들은 하이론과 프로스크의 얼굴에도 물음표가 그려졌다. 사막은 인간들을 끌어들일 메리트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거기다 북쪽에 버티고 있는 엘프들은 인간을 보는 족족 살상했으니 교통로의 기능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오지에 발을 디뎠을까. 먼저 움직인 것은 엘프였다. 그 동안의 긴 여정이 심심했던지 기꺼워하는 기색으로 낙타까지 버려두고 사막을 달린다.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10미터씩 멀어지는 것이 물수제비를 뜨는 연못의 조약돌 같다. “허, 물찬 제비가 따로 없군.” 프로스크가 감탄을 한다. 하이론도 흥미가 동하는지 주인을 떠나보내고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는 낙타의 고삐를 잡았다. “우리도 가 보자.” 신나게 달리는 그의 뒤를 일행들이 따랐다.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 거대한 사구를 넘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나는 카이어스의 칼날이다. 하늘 높이 떠오른 그가 칼을 내리그었다. 가드에서 시작된 푸른 기운이 칼날을 타고 쭉 밀려나와 땅을 두드린다. 펑! 누런 모래가 비산하며 한 줄기 긴 고랑이 파인다. 그 고랑에 안착한 카이어스가 다시 발을 굴렀다. 곰같이 장대한 덩치가 흡사 메뚜기처럼 튀어 올랐다. “저게 뭐야!” 뚫어져라 아래를 내려다보던 프로스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카이어스가 파 놓은 고랑. 그 고랑이 일순간에 메워지는데 모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저절로 입을 벌린 사막이 카이어스를 먹으려다 실패하고 도로 입을 닫는 모양새였다. “무슨 모래가 저절로 움직이지”“ 경악어린 질문에 엘란이 답했다. “모래가 아닙니다. 벌렙니다.” “벌레”“ “견문이 짧아서 무슨 벌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떨결에 물었던 프로스크는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 “이런 사막에 사는 벌레라면 카그스겠군.” 사막 같이 척박한 곳에도 살아가는 생물체는 의외로 많았다.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이 카그스였다. 카그스. 떼로 몰려다니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는 사막의 공포. 지금 그 카그스가 사막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귀찮게 되었군.”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하이론의 시선은 땅을 갈라 벌레를 짓이기고 다시 발구름을 하는 카이어스에게 닿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막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카그스에게 있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그 곳에 백발을 산발한 채 로브를 펄럭이는 자가 있었다. 부유마법으로 공중에 떠서는 지팡이를 휘두르는 데 그때마다 사막은 폭발로 몸살을 앓았다. 저 정도의 마법이라면 최소한 5써클은 넘을 터. “고위 마법사 같은데...누굴까”“ 츠츠츠츠 귀를 갉아대는 것 같은 거북한 소리. 그들이 사구에서 구경을 하는 사이 인기척을 감지한 카그스들이 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귀를 시끄럽게 하며 몰려드는 벌레의 바다. 엘란은 조용히 샐라멘더를 불러 주변을 둘러쌌다. 타다다닥 거리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만든다. 벌레는 자기 몸을 태우는 불길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고 있었다. 동료의 죽음도 전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벌레 타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끝이 없군.” 하이론의 말마따나 밀려드는 벌레는 끝이 없었다. 척박한 사막에 이렇듯 많은 벌레가 서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것 봐라.” 프로스크의 경탄성. 카그스들이 서로의 몸을 디딤돌로 일종의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불의 장벽을 넘기 위한. “집요한데다 영리하기까지 하군.” 등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끊임없이 몸을 태우던 카그스가 완벽한 다리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령들의 불길도 거세어 졌다. 불이 몸을 일으키자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카그스 고심의 작품이 일거에 불타올랐다. 활활 피어오르는 불꽃위로 매캐한 연기가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크기에 길게 뻗은 더듬이, 하얀 몸통을 가진 카그스는 포기를 몰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도 이것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후퇴를 모르는 벌레는 형제들의 시체를 넘어 오로지 전진뿐이다. 그 집요함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쌓이고, 쌓이고 쌓이는 벌레의 재가 기어이 불길을 넘어섰다. 일단 장벽이 무너지자 그 이후는 터진 둑이었다. 여섯 개의 다리를 움직여 삽시간에 일행을 에워싼 벌레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단한 턱을 들이밀었다. 반질반질한 머리에서 돌출한 두 개의 돌기는 끊임없이 맞부딪치며 기묘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레비테이션!” 낙타 등을 박찬 하이론이 부유마법을 시전 하늘 위로 솟구쳤다. 뒤를 이어 엘란의 음성이 어둠을 가른다. “슈리엘.” 낙타들과 프로스크를 동시에 들어올린 엘란이 언덕을 내려가 카이어스 쪽으로 향했다. 츠츠츠.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카그스가 이내 방향을 돌려 사구 아래로 달렸다. 훈련이 잘된 낙타는 샐라멘더나 벌레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더니 하늘을 날아가는 것에는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아-악! 아-악! 비명을 질러댄다. 낙타의 비명을 따라 하이론의 고함도 사막을 울렸다. “이제 그만 갑시다!” 신이나 칼질을 해대던 카이어스는 마지막 일격을 먹여주고는 껑충 뛰어 올라 낙타 등에 안착했다. “무슨 벌레가 이렇게 지독하냐”“ “드래곤도 십분 안에 먹어치운다는 사막의 공포. 카그스라는 벌레요.” “호! 드래곤도 먹었다고”“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설마 드래곤이 저런 벌레들한테 당하겠소.” 뚱하니 대답한 프로스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백발의 마법사를 가리켰다. “누굽니까”“ 카이어스는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간단히 자른다. “몰라.” “아니 같이 싸워놓고 이름도 모른단 말이오”“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됐소.” 무뚝뚝하게 말한 프로스크가 고개를 돌려 확연히 가까워진 의문의 마법사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찰라. 그가 오히려 의문을 쏘아댔다. “슈리엘! 당신 엘란이로군. 소문에 듣기로는 광법사와 싸워서 같이 죽었다던데 아니었소” 그럼 광법사는” 당신이 죽였소” 코르도바 습지에는 뭐 하러 간 거요”“ 속사포 같은 질문이 엘란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음성. 거기다 질문의 내용도 묘했다. “죽었다던데 아니었소”“ 마치 죽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와 내용이 아닌가. “보다시피 살아 있습니다. 그보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리고 여기엔 왜 왔습니까”“ 이번에는 엘란이 질문을 던졌다. “듀마. 광법사는 어떻게 됐소”“ 짤막한 대답에 이어 다시 질문이 날았다. “듀마! 엘리오트 왕실 수석 마법사 듀마” 내전에 끼어들어 이황자편에서 싸우다 죽었다던데”“ 그의 질문을 프로스크가 질문으로 받았다. “......” 듀마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엘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나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 “광법사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그 듀마요”“ “맞소 내가 그 듀마요. 당신이 죽였소”“ “나와 싸우다 죽은 건 사실이오.” 하나의 질문과 하나의 대답. 엘란은 프로스크를 가리켜 그의 질문에 답하라고 요구했다. “죽고 죽이고...... 허무한 마음이 들어 내전에서 몸을 뺐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세상을 방랑하고 있지요.” 대답에 이어지는 질문 “싸움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겠소”“ “저와 힘을 합친 상급정령사가 있었습니다.” 엘란은 자세하게는 설명하지 않았다. 세세하게 말해주자면 광법사가 8써클에 들어간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럼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사막에 고대유적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보려는 길이요. 화염의 길라드나 시드는 아닐테고 다른 상급정령사가 누구요”“ “엘픕니다.” “엘프”“ “맞습니다.” “엘프가 왜 광법사와 싸웠소”“ “광법사가 엘프의 물건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엘프가 그를 쫓았고 저도 그와 구원이 있는지라 함께 손을 잡고 싸운 겁니다.” 엘란은 이번에도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그랬구만. 아무리 광법사라도 상급 정령사 둘을 당해내지는 못했겠지.” 대충 둘러댄 대답에도 모든 의문이 풀렸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듀마가 다시 질문을 해댔다. “여기는 무슨 일이요”“ “저희도 고대유적을 찾아왔습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군.” 하이론은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듀마가 어떻게 나올지 상당히 걱정했으나 그의 여상한 반응을 보고 한시름 놓았다. 하긴 알아봤자 별 수야 없겠지만. 듀마도 처음에는 경악했었다. 오랜 기간 엘리오트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왕실 마법사로 많은 혜택을 받은 입장에서 나라의 원수나 다름없는 지고교의 잔당을 봤으니 그럴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곧 그런 마음을 접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인가. 70이라는 나이는 모든 은원을 녹진 녹진하게 녹일만한 그런 세월인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삶의 회의를 느끼고 세상을 등진 사람. 마법연구나 유적탐사에 바치기에도 남은 여생은 빠듯하다. 괜히 시비를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팟. 경쾌한 소리와 함께 카그스가 하늘로 쏘아졌다. 배가 터지며 반동강이 난 벌레는 그 추진력으로 먹이를 노리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집요한 벌레는 배를 터트리면서까지 먹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인가 아니면 자신의 목숨으로 형제의 배를 불리겠다는 희생정신의 발로인가. 그것이 시작이었다. 파파파팟. 거꾸로 내리는 벌레의 비. 연이어 소음이 터지고 수천마리의 벌레가 일시에 하늘로 쏘아졌다. 옆에서 봤다면 장관이라 할만한 장면이었으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절로 모골이 송연해 질 일이었다. 이런 모습에는 담대한 카이어스마저 혀를 내둘렀다. “어서 가자.” “플라이!” 두 명의 마법사는 마법을 시전 밤하늘을 갈랐고 엘란은 낙타들과 일행들을 데리고 그 뒤를 따랐다. 30분간 전속력으로 날아간 엘란은 녹초가 되어서 땅으로 내려섰고 사막을 밟자 힘이 난 낙타들이 긴 울음을 흘리며 미친 듯이 달렸다. 지겨운 카그스가 따라붙기 전에. ******************* 여름의 끝자락이 드리워진 오후. 펄럭거리는 깃발위로 서늘한 바람이 감겨들었다. 두 발을 든 사자가 포효하는 깃발을 든 병사 뒤로 기치창검 한 기사들이 위풍당당하게 행진한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노인의 머리는 아니고 타고난 머리색이 은발인 듯 했다. 마차를 호위하듯 앞서는 은발머리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백작님, 전쟁이 언제 터질 까요”“ 피요르드 광휘기사단의 단장 베니토백작은 싱글거리는 휴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풍성한 은발과 뚜렷한 이목구비.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미모였다. 남자에게 미모라는 말까지 생각나게 하는, 너무 잘생겨서 기분이 나쁘기까지 한 그런 외모. 저 얼굴에 미소라도 띨라치면 길 가던 여성들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요기까지 풍기는 얼굴이다. “타클마칸이 타 부족들을 모두 굴복시켰으니 곧 시작이 되겠지. 왜 아쉬운가”“ 아닌 게 아니라 휴고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아쉽기도 하고 몸이 근질거리기도 해서요.” “하긴 피요르드는 너무 심심하지.” 베니토백작 그 자신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트빌라이는 훈족과의 대치로 심심찮은 소요가 자주 발생했고 자신들이 사절로 방문하는 엘리오트는 극심한 내전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데 피요르드는 자신의 말마따나 너무 안정 되서 할 일이 없었다.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병사들 수를 줄이자고 주장할 정도였으니. “스트빌라이가 이번에 황녀를 사절로 보낸 것은 뒷문을 단속할 의도겠지요”“ “당연한 수순이지. 뒤에 화근을 안고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니.” “한동안 황녀와의 혼사문제도 거론됐던 것 같던데”“ “첩자가 그런 보고를 하기도 했었지. 황태자와 가빈백작가의 여식이 혼인을 맺는 걸 보면 결국은 헛소문이었나 봐.” “저희로서는 다행스런 일이군요.” 다행이라는 휴고의 표정은 애석하다는 빛을 띠고 있어서 전혀 다행인 기색이 아니었다. “다행이지, 스트빌라이와 엘리오트가 혈연으로 묶어지면 우리가 부대끼니.” 마찬가지로 웃으며 대꾸하는 베니토백작의 입가에도 애석함이 피어났다. 여덟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둘을 따르던 자말의 입가에 고소가 매달렸다. “뭐 몸이 근질거린다고” 철딱서니 없는 것들.” 광휘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인 베니토와 휴고의 실력은 직위에 걸맞게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실력과는 별개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위험해 보였다. 몸이 근질거리고 심심해서 평화가 싫다니” 황실의 안정과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광휘기사단의 지휘관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린가. 자신의 부하라면 드러내놓고 호통이라도 치련만, 상관이다 보니 속으로 삭일뿐이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휴고는 젊은 혈기에 그런 생각이 든다고 치자 알 것 다 알고 겪을 것 다 겪어서 이제는 속에 능구렁이 대여섯 마리는 키우는 베니토의 생각은 또 뭔가” “무슨 속셈이지” 내가 백작을 잘못 본 건가”“ 자말은 앞으로 백작을 주의해야겠다고 결심하며 휴고를 살폈다. 그리고 휴고의 빛나는 미소와 윤기 나는 은발을 보며 새삼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그와는 다르게 세월에 의해 서리가 내린 푸석푸석한 은발에는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나도 이제 늙은 것인가”“ 자말은 젊음의 활기가 넘치는 휴고를 보며 새삼 세월의 덧없음과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 헬레나의 신상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그 앞에 엘리오트의 다음 황제 카플리노가 섰다. 날렵한 하관으로 어딘지 신경질적인 인상을 주는 부친과는 달리 둥굴둥굴한 얼굴이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다. 그를 눈앞에 둔 대사제는 흐뭇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수많은 신중에서 헬레나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한다는 것은 국교로 공인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 기쁜 나머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러나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성기사 러셀은 입이 썼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국교로 우대하는 대가를 언젠가는 지불해야 할 것이다. “어라!” 신랑과 일직선의 통로를 남겨두고 주변에 둘러선 하객들 사이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신부의 미모가 기대 이하였던 것이다.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드레스가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신전 안 모든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휴고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도 그렇구만. 밤에 좀 괴롭겠어.” 베니토백작은 혀를 차대며 황태자에게 불쌍한 눈빛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저기 스트빌라이의 황녀는 기분이 언짢은 모양입니다.” 백작의 눈이 황태자에게서 귀빈석의 황녀에게로 옮아갔다. “시집을 못가서 그런가”“ 아닌 게 아니라 황족으로서 스물 둘이라는 나이는 지금 시집을 가더라도 만혼이었다. “왜 결혼을 안했답니까”“ “스트빌라이 황제가 막았다더군.” “황제가 왜”“ “권력을 두고 복잡한 사정이 얽혔다는 소리도 있고 전대 황제가 너무 끼고 살아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소리도 있다만 남의 나라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야 없지.” 항구적인 불가침 조약의 임무를 띠고 겸사겸사 사절로 파견된 스트빌라이의 황녀 브론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감히! 엘리오트의 황태자가 혼사를 거절해. 그것도 오크같은 계집년 때문에! 저 꼬라지를 보라. 난쟁이 똥자루만한 작달막한 키에 널찍한 이마, 위로 들린 코. 저런 계집 때문에 감히 나를 거절해!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질대로 하자면 식을 뒤집어엎어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요즘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참아야만 했다. 게다가 축하사절로 파견된 피요르드의 대공이란 작자는 요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브론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평생의 인내심을 모두 소모하는 기분이었다. 바룬신을 모시는 마커스사제의 심사도 황녀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하고많은 신 놔두고 왜 하필 헬레나신의 신전인가” 이 일이 장차 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자신이 엘리오트지단의 책임자로 부임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면목이 안서는 것은 둘째 치고 징계가 내려올 지도 몰랐다. 차라리 다른 신전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스트빌라이의 황녀를 호위하고 온 에릭슨백작은 스노우에서 안면이 있었던 마커스를 보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드레이크, 자네 마커스 아나”“ “모릅니다.” 에릭슨백작을 수행하고 온 드레이크남작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인상을 그렸다. 그의 눈은 기름통에서 쏙 빠져나온 것처럼 빤질빤질하게 생긴 피요르드의 사절 휴고에 닿아 있었다. “세끼 더럽게 잘 생겼네.” 자신도 스노우에서는 한 인물 했는데 저 놈과 비교하자니 손색이 많았다. “마커스는 바룬신의 사제라네. 왜 저렇게 기분이 나쁜지 자네는 알겠나”“ 에릭슨이 옆구리를 툭 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드레이크는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출세를 하자면 상관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하는데 딴 생각을 한 것이었다. “질문이 뭐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질문이 안 떠오르자 애꿎은 휴고만 욕하며 말을 흐렸다. “글쎄요......” “저 친구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그래도 그렇지 엘리오트의 황태자가 결혼하는데 뭐 씹은 얼굴로 있으면 곤란하잖아.” 드레이크는 백작의 혼잣말과 그의 시선을 좇다 대충 질문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하지요.” “당연하다니”“ “원래 헬레나교단과 바룬교단은 앙숙관계로 유명한데 헬레나신전에서 식이 거행되니 기분이 나쁠 밖에요.” “아! 그렇구만. 그런데 두 교단은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지”“ 에릭슨은 전형적인 무관으로 세상사에는 까막눈 수준이었다. 자연 질문이 많았고 드레이크는 지겨워하면서도 보비위(補脾胃) 하느라 정성껏 대답했다. “그건 서로 주장하는 신의 속성이 충돌한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바룬신은 태양과 전쟁신으로 알려졌고 헤레나신은 풍요와 대지의 신으로 인정받았는데 헬레나신전에서 빛의 여신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관계가 틀어진 거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에릭슨은 또다시 머리를 갸웃거렸다. “빛은 태양신의 관할이라는 게 바룬신전의 주장이고 헬레나신전은 대지에 생명을 주는 빛은 당연히 헬레나신의 관할이라는 거죠.” 평생 검밖에 모르고 살아온 에릭슨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참, 별 시덥지 않은 일로 다 다투네.” 높은 귀빈석에 앉아있는 샤뮤엘 대현자는 자신이 모셔온 황녀와는 반대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후작이상이거나 황가의 피가 닿아있는 자만이 올라오는 귀빈석에 자신이 올라온 것이다. 보라! 자신이 굽어보는 아래쪽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선망의 눈초리로 귀빈석을 힐끔거리는 모습을. 스노우아카데미의 수장으로 뽑힌 것보다 더 큰 희열이 몰려들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프르덴틀후작은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브론다황녀를 보고 있자니 새삼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인물이면 인물, 배경이면 배경 어느 것 하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의 자랑스런 아들 막스는 결혼식을 쳐다보지 않고 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엘란이라는 놈은 어디에 있을까”“ 코르도바습지에서 광법사를 습격했다고 소문이 난 광술사는 그 이후 소식이 묘연하다. 그건 광법사도 마찬가지여서 둘이 양패동사했다는 소문만이 무성하게 나돌았다. “정말로 죽었을까”“ 신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드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머저리 같은 자식들은 멍청한데다 욕심만 들끓는 돼지같은 놈들이지만 인물하나만큼은 지에미들을 닮아서 빼어났다. 못생긴 신부를 보고 있자니 기꺼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가빈백작은 상상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프르덴틀후작가를 딛고 일어서서 엘리오트 최고의 가문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 여정은 길었다. 보이느니 모래요 들리느니 바람소리. 카그스 때문에 낙타를 잃은 듀마에게 자신의 낙타를 내어준 카이어스는 발레하듯 우아한 동작으로 모래판을 가르고 있었다. “다와 갑니까”“ 하이론이 물었다. “이쯤해서 나와야 되는데.”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한 프로스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바심 내지 말게. 이 길이 맞으니 계속 가다보면 나올 거야.” 어느새 친해진 듀마가 조용히 충고한다. 그때 얼름판을 가르듯 매끈하게 움직이던 카이어스의 발이 멈추어 섰다. 휘이이! 한 줄기 바람이 누런 먼지를 날리는 그 너머에 삐죽한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너머로 자신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거대한 건축물은 사막을 지배하는 군주의 풍모를 가졌다. “도착했군!” 격정이 담긴 엘란의 음성이 날리는 모래와 어우러져 한바탕 춤을 춘다. “하!” 누구랄 것도 없이 박차를 가했다. 질주하는 낙타 뒤로 튀겨진 모래가 몸살을 앓았다. 오벨리스크!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방첨탑(方尖塔)이다. 네모반듯한 고대유적의 모퉁이마다 보호라도 하는 것처럼 둘러쳐진 방첨탑은 200미터도 넘어 보였다. 게다가 흑석으로 만들어져 어딘지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일행들은 사각형의 한 꼭짓점에 모여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올려다보며 자신들을 압도하는 어떤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사변형의 아랫단부터 천천히 훑고 올라가 급격히 오므라드는 끝부분까지 당도한 프로스크의 시선이 급격히 떨어져 내렸다. 날리는 모래가 들어간 데다 목이 아파온 탓이다. “기가 막힌 건축물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오지에 건축물을 남겨뒀을까”“ 그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받기로 한 수고비와 별도로 그 동안 쌓인 노독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인간의 솜씨는 아닌 것 같지”“ 하이론의 음성도 감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 규모도 규모지만 재료도 처음 보는 석재요.” “나도 처음 보는 석재다.” 카이어스는 흡사 애무라도 하는 것처럼 은은한 검은 광택이 도는 오벨리스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귀신같은 동작으로 등에 매달린 칼을 뽑아 말릴 새도 없이 방첨탑을 그었다. 가가각! 칼날을 따라 푸른색 섬광이 작렬하고 방첨탑의 몸체에서 새빨간 불똥이 튀어 올랐다. “......!” 소드마스터가 전력을 다해 내지른 일격에도 오벨리스크의 몸체는 다치지 않았다. 다만 한 줄기 가는 실금만이 카이어스의 칼날을 위로할 뿐. “확실히 인간의 솜씨가 아냐.” 세상에 못 끊을 것이 없다는 마스터의 오러로도 약간의 흠집만 날 돌을 사람이 이렇듯 깎아 놓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들어가 보자!” 하이론이 제의하고 나섰다. 안으로 들어가면 만든 이가 누군지 알게 되겠지. “내가 앞장서지.” 하나 남은 칼까지 꺼내 든 카이어스가 앞장을 섰다. 그리고 긴장된 안색으로 오벨리스크를 돌아 크게 한 발 디뎠다. 두 발, 세 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침을 꿀떡 삼켰다. 그만큼 그는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낙타를 묶어두고, 어미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유적지는 사람을 위압하는 어떤 힘이 서려 있었다. “휴~” 한참을 들어가도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자 프로스크가 안도의 숨을 내뿜었다. “의외로군.” 듀마의 작은 혼잣말도 엘란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긴장한 그가 온 정신을 눈과 귀로 집중한 때문이다. “무엇이 의외란 말입니까”“ “귀도 밝구만. 별건 아니고......보통 이런 유적지에는 뭔가를 지키는 가디언이 있기 마련인데 아무것도 없어서 말일세.” “아무도 발견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하이론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글쎄......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듀마는 하이론의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거창한 유적지에 가디언 하나 없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쉿!” 카이어스가 칼등을 입에 대고 경고음을 발했다. 그런 그의 어깨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프로스크! 제 뒤로 오세요!” 엘란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얼른 프로스크를 등 뒤로 숨겼다. 육써클 마스터 듀마는 물론 하이론도 자기 몸을 지킬 실력은 충분히 되었다. 설사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구해줄 시간적 여력을 만들어낼 재간은 있었지만 프로스크는 전혀 그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하이론의 질문에 답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솜털이 곤두서고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육감을 타고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하이론의 질문에 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불길한 음영을 드리우는 소리. 드드드득! 그것은 귀를 갉아대고 몸을 굳게 만드는 소리였다.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 것일까”“ 귀를 갉아대던 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그 순간 바닥에 깔린 모래가 부드럽게 솟아오르더니 허연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고운 모래는 동그스름한 반구형의 물체를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 동근 물체에 뚫린 검은 구멍에서 빛이 번뜩였다. 해골! 사막에서 솟아오른 것은 해골 같았다. 눈이라 짐작되는 두 개의 구멍에서 이글거리는 빨간 광채는 아주 불길해 보인다. 스슥!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골이 솟구치자 그 아래에 달린 몸통도 할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튼튼하게 보이는 굵직한 뼈대에는 살점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뭐야! 겨우 스켈레톤인가”“ 엘란의 등 뒤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민 프로스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알 수 없는 공포를 야기하던 것이 겨우 스켈레톤이라니! 자신 혼자였다면 기절초풍했을 일이나 동행한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이의 조력이 있었다고는 하나 광법사를 물리친 상급 정령사에다 있는 건 힘밖에 없어 보이는 소드마스터, 거기다 수석 왕실 마법사를 지낸 육써클 마스터, 또 듀마보다 마법이 떨어지기는 하나 치료마법으로 치면 대륙에서도 손꼽힌다는 이. 거기에 더해 스트빌라이 최고의 학자까지 붙어 있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파티가 아닌가. 모험가 집단으로서는 더할 수 없이 완벽한 구성원. 이런 상태에서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이 부끄럽기 까지 하다. 열적어진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올 때 엘란이 나직이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뼈대만 굵었지 별 볼일 없는 스켈레톤이라는 프로스크의 안이한 판단과는 달리 주변 공기에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짙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거 뭐죠”“ 엘란이 입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원초적인 공포를 조장하는 스켈레톤이라니. “용아병!” 듀마의 입에서 비명같은 해답이 튀어나왔다. 용아병! 드래곤의 이로 만들어진 죽음의 병사. 힘도 힘이지만 뼈에 올올이 새겨져 있는 드래곤 피어가 원초적인 공포를 선사해서 대처를 어렵게 만드는 마병이었다. “하이론은 프로스크를 보호하세요.” 용아병이라면 하이론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하이론은 얼른 뒤로 가서 프로스크와 함께 섰다. “실드.” 푸른색 방어구가 그와 프로스크를 함께 감쌌다. 그와 동시에 앞을 막아선 용아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위라도 하려는 것처럼 중간의 용아병을 기준으로 반원형으로 다가온다. 척,척,척,척.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절도 있는 동작. “열 명이로군. 내가 다섯을 맡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카이어스가 먼저 움직였다. 한 호흡으로 중간의 용아병에게 다가간 그가 사선으로 베어갔다. 오른손에 길쭉한 뼈를 들고 왼손에 평평한 뼈를 들고 있던 용아병이 왼손을 내밀었다. 쾅! 방패대용이라 생각되는 뼈와 칼이 부딪치며 폭음을 만들었다. 그때 용아병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발했고, 칼을 방패에 맞댄 채 밀어대던 카이어스의 몸이 잠깐 동안 움찔! 거렸다. 드래곤 피어! 원초적인 공포가 그를 멈칫거리게 만든 것이다. 그 잠깐의 순간도 용아병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휙! 방패를 옆으로 밀고 들어간 용아병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휘청거리던 카이어스가 왼손에 들린 칼로 용아병의 무기를 막아나갔다. 쩡! 날카로운 소음이 울리고 그가 바닥을 굴렀다.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라 칼에 충분한 힘을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번 비세를 드러내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 그는 일어설 사이도 없이 계속해서 굴러야 했다. 푹! 그가 지나간 자리에 뼈칼이 하나둘 박혀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용아병들이 그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뼈칼을 휘두른 것이다. “스피릿 컴파운드.” 번쩍! 섬광이 작렬하고 엘란이 소환한 정령들이 용아병을 강타했다. 카이어스를 사냥하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용아병들이 거센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셔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툭, 툭. 정통으로 얻어맞아 흩어진 용아병의 몸이 다시 모여들었다. “......!” 아무리 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골렘도 아니고 무슨 놈의 스켈레톤이 다시 모여든단 말인가. “생긴 건, 저래도 스켈레톤이란 생각은 버리게. 머리를 부셔야 해!” 공중에 뜬 채로 조언을 던진 듀마가 주문을 외웠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중력의 힘이여! 왜곡된 존재를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라!” 엘란 덕에 위기를 모면한 카이어스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듀마의 마법 때문에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을 느낀 탓이다. 따라서 몸을 날리던 용아병들도 주춤했다. 하늘에서 투명한 망치가 떨어져 내리는 듯한 압력을 받은 때문이었다. 중력을 비정상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막대한 마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계속 주문을 외우는 듀마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점점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 고통스런 기색이 스쳤다. 세배, 네배.......열배, 그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늘어갈수록 용아병들이 버틴 지역의 중력이 높아갔다. 뚜두둑!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 움직일 때에나 흘러나오는 부자연스런 관절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뿐, 그 자리에 묶인 용아병들은 고개만 숙여질 뿐 부셔지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 오기가 치민 듀마가 마지막 마력을 끌어올려 허공에서 지팡이를 휘젓자 압박이 점점 더 가중되었다. 그러자 용아병들의 몸이 점점 더 땅으로 박혀들기 시작했다. 정강이를 지나 넓적다리, 허리를 거쳐 가슴까지 박혀들었다. 그 때 용아병들이 칼을 위로 들어올렸다. 마음으로 통하는지 일사분란 한 동작이다. 찌지직!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듀마의 마법이 깨어져 나갔다. 바닥에 내려서는 듀마의 눈은 풀려있었다. 한 동안은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리라. “지금이다!” 뒤에서 구경하던 하이론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가슴까지 묻힌 용아병들이 몸을 일으키려 움찔 거렸던 것이다. 절호의 호기! 하이론도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카이어스와 엘란이 아니다. 한 걸음에 공간을 압축한 카이어스가 칼을 내질렀다. 그와 함께 서릿발 같은 오러가 천지를 갈랐다. 때로는 나비처럼 사뿐사뿐, 때로는 태풍이 불러 오는 광풍처럼 천지를 무너뜨리듯, 용아병 사이를 누비는 그의 칼에 온 사막이 쩌르르 울렸다. 퍽. 그의 칼이 거치는 족족 용아병의 머리가 쪼개졌다. 속전속결! 그가 이쪽저쪽 몸을 날리며 완급을 조절했다면 엘란은 사정없이 몰아쳤다. 쾅! 어느새 몸을 드러낸 슈리엘이 바람의 창을 날렸다. 미간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재수 없는 용아병의 머리가 쏜살같이 뒤로 날아갔다. 해골 전체에 금이 간 채. 머리가 부셔져 날아가자 천하의 용아병도 버틸 수 없었다. 모래에 파묻힌 그대로 흩어져 부셔졌다. 슈우! 창을 날린 슈리엘의 손에 다시 바람이 몰려들었다. 다시 형체를 드러내는 투명한 창. “가라!” 창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당성 할 수는 없었다. 전설의 병사가 계속 당한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 일. 반쯤 몸을 뽑아낸 용아병이 방패를 들어올렸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방패가 부셔지며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집어진 모래와 함께 뿌연 먼지가 날리고 그 사이에서 전설의 용아병이 몸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방패를 잃은 분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시 창을 만든 슈리엘이 달려드는 용아병을 행해 창대를 검처럼 휘둘렀다. 창대와 뼈칼이 부딪치자 쿠우웅! 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리고 힘이 밀린 용아병이 뒤로 날아가 쳐 박혔다. 슈리엘은 바닥에 구겨진 용아병을 향해 창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웬 용아병이냐”“ “유적을 지키는 가디언인 모양입니다.” “대단한 게 있는 모양이지.” 다시 창을 만들어낸 슈리엘은 창에 꽂혀 부셔지는 용아병의 머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카이어스는 용아병의 머리를 세 개째 가르는 중이었다. 뒤에서 입을 딱 벌린 채 구경하는 프로스크의 눈에는 쉽게, 쉽게 쪼개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이어스는 젖 먹던 힘까지 뽑아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첫 번째 머리를 가를 때는 삼미터도 넘던 오러가 지금은 일미터도 미치지 못했다. 퍽. 이마를 가르던 오러가 그대로 박혀들었다. 프로스크의 눈에는 입을 벌린 해골의 이마가 오러를 물어버린 것처럼 비춰졌다. “젠장!” 오른 손의 칼을 거두고 왼손의 칼로 다시 내려치는 엘프의 입에 자연스런 욕설이 담겼다. 파삭! 거리며 부서지는 머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그를 향해 용아병 셋이 다가왔다. 짧은 순간 막대한 힘을 끌어냈던 엘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풀어대며 입을 악물었다. 그리고 말을 씹어뱉듯 토해냈다. “드래곤도 아니고 기껏 도마뱀의 이빨 따위에나 당하려고 인간들의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니다!” 위기에 몰릴수록 치밀어 오르는 오기. 그가 먼저 용아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사이 엘란도 독아를 드러내는 용아병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었다. 용아병은 싸울수록 몸이 풀리는지 아니면 원래 실력이 드러나는 건지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점점 지쳐가서 그런지도. 가각! 선두의 용아병이 날아드는 바람의 창을 빗겨 쳐냈다. 서로 상의해서 대처방안을 찾아낸 것도 아닐 터인데 용아병들의 움직임은 이상하게 일사분란 했다. 방패로 맞서지 않고 하나가 창을 쳐내자 나머지도 따라서 빗겨 쳐내는 것도 그렇고, 카이어스를 중간에 몰아넣고 연수합격 하는 저들도 그렇고. “너희만 협동해서 싸우란 법은 없지.” 엘란은 조용히 뇌까리며 기회를 찾아 눈을 빛냈다. 바람의 창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막대한 마나를 필요로 했다. 자꾸 만들어서 날릴 수는 없는 일. 창을 움켜쥔 슈리엘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간다. 아갈리아산도 일격에 허물어뜨릴 것 같은 통렬한 일격. 그 벼락같은 일격이 용아병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당하는 용아병도 만만치 않았다. 다리를 넓게 벌린 채 뼈칼을 방패에 끼우더니 양손으로 방패를 잡고 하박을 밀착시켰다. 잠시 후 방패에 떨어지는 바람의 창. 쾅! 슈리엘의 힘을 버티지 못한 방패가 부서져 나갔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박혀들었다. 그 순간 부셔진 방패 사이에서 허연 뼈칼이 불길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칼은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을 가른 후 슈리엘의 가슴을 노렸다. 급히 옷자락을 오므리는 슈리엘의 상부를 향해 뻗어가는 칼이 달빛을 받아 요요로이 빛났다. 한편 중간에 포위된 카이어스는 거듭된 위기를 아슬아슬 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춤추듯 움직이는 쌍칼은 용아병들이 내지른 칼에 번번이 제지당했다. 번개처럼 교환되는 치열한 검격. 한 명을 향해 칼을 내지르면 동료가 같이 맞서고 뒤에 있던 용아병은 등을 향해 칼을 들이댔다. 할 수 없이 다른 칼로 뒤를 방비하면 힘을 모은 두 용아병이 칼을 퉁겨내고 위협한 일격을 날린다. 허리를 퉁겨 옆으로 쭉 빠진 그가 하나를 찍어대려면 어느새 용아병들이 다시 합세한다. 계속 반복되는 상황. 기계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지쳐가고 용아병은 그대로니 이대로 가다간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목숨을 거는 것은 언제나 불리한 자의 몫. “도박을 해야겠군.” 카이어스는 일단 하나를 찍어 그에게 칼을 뻗었다. 언제나 그렇듯 옆의 용아병이 가세해서 거들어 준다. “지금이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단내를 지그시 물어댄 그가 눈 깜빡할 사이에 몸을 돌렸다. 뒤에 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용아병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가드에서 시작된 푸른빛이 칼날을 따라 흘러 칼끝에 맺혔다. 그리고 용아병을 향해 뻗은 칼끝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영롱한 기운은 이내 칼을 떠나 빛살같이 쏘아졌다. 타는 듯한 붉은 눈을 향해. 퍽. 불길한 빛을 뿌리는 눈을 자른 기운이 그대로 뒤통수를 관통했다. 머리가 터져나간 용아병이 무릎을 꿇고 허물어졌다. 그때 헛손질을 한 용아병들이 그의 등을 향해 뼈칼을 휘두른다. 양옆구리를 파고드는 서늘한 기운. 한 손으로 하나씩 감당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떨리는 손으로 그 막대한 기운을 막아낼 힘이 지금은 없었다. “한쪽은 내주지.” 찰나지간에 결정을 내린 그가 오른쪽으로 돌아 양칼을 십자로 교차시켰다. 쨍! 교차하는 부분에 칼이 떨어지며 불똥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로 파고드는 다른 용아병의 뼈칼.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가 갈라지며 피를 토해낸다. 단단한 근육을 자른 칼은 내장까지 끊어놓았다. 쩍 벌어진 옆구리를 따라 기운이 썰물같이 빠져나갔다. 카이어스는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도 막아낸 하나의 칼은 결코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옆구리를 지진 칼은 허공을 선회 이번에는 그의 머리를 노렸다. 엘란은 싸움의 와중에도 계속해서 카이어스 쪽을 힐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을 상대하는 자신과는 달리 셋에 둘러싸인 그가 위태로워 보였던 것이다. 한 눈을 판 대가는 금세 다가왔다. 창을 잘라버린 용아병의 칼이 슈리엘의 상부에 들이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다급한 소리를 터트린 그의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갔다. 엘란의 의사가 마음으로 전해지자 옷자락을 오므려 가슴을 방비하던 슈리엘의 양손이 활짝 벌어졌다. 그리고 땅을 박찬 그녀가 공중제비를 시도한다. 비록 슈리엘의 몸놀림이 전광석화같이 빠르긴 했으나 용아병의 칼은 너무 가까웠고 행동 또한 민첩했다. 그의 칼은 위로 넘어가는 정령의 배를 길게 갈라버렸다. 엘란은 배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을 참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배에 일격을 맞고 용아병의 머리를 타넘는 슈리엘이 양손을 모아 용아병의 머리를 세차게 두들겼다. 쾅! 반쯤 부서진 채 날아가는 용아병의 머리가 카이어스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용아병의 머리에 작렬했다. 퍼석! 날아간 머리가 완전히 부셔져 나가는 동시에 뒤에서 날아오는 동료의 두개골에 얻어맞은 용아병도 휘청거렸다. 그때 투명한 공기가 일렁거리며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피드는 나타나자마자 카이어스를 안고 뒤로 내빼버렸다. 엘란과 대치하던 용아병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하나가 박살나 무력화되자 오히려 더 기세등등하게 날뛰었다. 그 용아병은 지치고 타격을 입을 슈리엘을 향해 방패를 던졌다. 가까운 데서 터진 공격은 절묘했다. 슈리엘이 옷자락으로 방패를 후려치자 그 사이에 다가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 방패를 쳐내고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슈리엘의 손을 납작 엎드리는 것으로 피해낸 그가 슈리엘의 양 다리를 끊어놓았다. 모래를 굳건하게 디디고 있는 투명한 다리만 남기고 뒤로 넘어가는 슈리엘은 하이론과 프로스크에게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선사했다. 잠시 후 막대한 타격을 입은 바람의 상급 정령이 강제로 돌아가 버리고 엘란의 입에서는 차가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음!” 뒤로 물러서는 엘란의 바짓단은 피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물러서는 그의 족적을 따라 빨간 피의 선이 길게 이어졌다. 쌔액! 어느새 다가붙은 용아병이 그를 베어왔다. “실피드.” 또 하나의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내 칼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억! 섬뜩한 소리가 울리고 두 동강난 실피드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싸우는 사이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밤인가”“ 엘란은 뒤로 물러서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스크가 엘란을 보며 손에 땀을 쥐는 가운데 하이론은 카이어스를 치료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심장이 쪼개진 것도 아니어서 혼신의 힘을 다하면 끊어진 내장을 잇는 것은 가능한 일일 텐데도 이상하게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 “힐링!” 상처에 스며드는 따뜻한 빛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것은 다 탄 장작처럼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최강의 마법생물인 드래곤의 뼈에 당한 상처! 치료마법이 잘 먹힐 리가 없지.” 처음 열명의 용아병을 묶어대느라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고 바닥에 앉아 헐떡거리던 듀마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두 명의 용아병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렇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사람이 다급하면 알던 것도 까먹어 버리는 데 지금은 오죽 하랴. 하이론은 크게 심호흡한 후 포션을 먹이고 실과 바늘을 꺼내들었다. “윽!” 옆구리로 그의 두 손이 들어가자 카이어스가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엘프의 창자를 누비는 하이론의 손은 능숙함을 넘어 신의 경지를 엿보고 있었다. 끊어진 창자와 혈관을 잇는 데는 채 삼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찢어진 피부마저 꿰매 놓은 하이론은 이제는 다물어진 옆구리에 포션을 퍼붓고 마법을 걸었다. “힐링!” 치료마법을 내리 일곱 번을 걸자 그제서야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카이어스의 안색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다. 포션을 한 병 더 먹은 카이어스가 일어서서 전방을 주시했다. 상황은 그가 손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 않은 탓이었다. 엘란은 자신을 노려보며 다가서는 용아병을 보며 희한한 생각을 떠올렸다. 슈리엘이 아닌 실피드의 방어막으로는 용아병의 칼을 막아낼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생각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카이어스를 실어 날랐던 실피드가 다가와 그의 앞에 떠있었다. 그녀의 두 발이 합쳐져서 가늘어지더니 엘란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키가 줄어드는 동시에 한없이 가늘어졌다. 뭉툭한 몽둥이는 판자를 뚫지 못하지만 첨단이 날카로워 지면 쉽게 뚫을 수 있는 법. 엘란의 손에 쥐어진 실피드가 완전한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검에서 하늘거리는 바람이 멋들어지게 보인다. 실피드가 변해서 만들어진 검과 용아병의 뼈칼이 대치한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 기묘하게 보였다. 쩡, 쩡, 쩡, 쩡. 거세게 부딪힌 무구들이 연속적인 소음을 만들어낸다. 쩡! 칼을 맞댄 용아병이 본격적으로 힘을 썼다. 엘란이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상급 정령사이긴 하나 검사는 아니다. 물론 기운이 세고 오감이 극도로 발달해서 웬만한 검사보다는 몸놀림이 훨씬 뛰어나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일. “끙!” 용아병의 힘에 밀린 엘란의 허리가 사정없이 뒤로 꺾여졌다. 그래도 엘란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치열한 힘겨루기! 그 순간 용아병의 다리가 엘란의 정강이를 거세게 부딪쳐 왔다. 그가 용아병의 억센 뼈대를 당해낼 순 없었다. 거기다 그 부위는 부상당한 부위가 아닌가! 빡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뒤로 넘어갔지만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다. 뒤로 나뒹굴어진 엘란의 얼굴로 용아병의 칼이 떨어졌다. 그는 내려오는 칼을 보며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막스 같이 뛰어난 검사와 실전을 거쳤고, 카이어스가 아에게를 가르치는 장면과 싸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눈동냥 귀동냥 했다고는 하나 몸으로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단점으로 상대의 장점을 상대하려 했으니....... “검은 보조적인 수단이고 정령술이 주가 되어야 했었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그러나 때늦은 후회도 종종 목숨을 살린다. 엘란은 양 손으로 실피드의 끝단을 잡아 떨어지는 칼을 막아갔다.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실피드가 끊어지면 자신의 목숨도 여기서 끊어진다. 떨어지는 기세까지 더한 뼈칼이 실피드를 두들겼다. 쾅! 폭음이 귀청을 때리는 동시에 양 손목이 부러지듯 아파왔다. 막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탈골이 된 것이다. 다행히 실피드가 만들어진 검은 부서질 듯 휘어지긴 했으나 끊어지진 않았다. “이제 내 차례다.” 어금니를 악무는 것으로 고통을 참아낸 그가 실피드를 변형시켰다. 기어이 실피드를 끊어놓으려 힘을 쓰는 칼을 교묘히 둘러싼 실피드가 칼을 붙잡아 버렸다. 엘란의 양손에 잡힌 실피드의 중간을 칼이 관통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실프의 군단. 쐐기 모양으로 날카롭게 변한 실프가 두개골의 한 점을 노리고 연속적으로 부딪쳐 왔다. 쾅, 쾅, 쾅, 쾅. 때리고 떠올랐다, 다시 내려와 두들기고. 스무 명의 실프가 한 지점을 계속해서 타격하자 그 단단한 용아병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쩍! 얻어맞은 부위에서 시작된 금이 전체적으로 확산되더니 수박 짜개지는 소리가 울리고 한순간 부셔져 버렸다.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쩡한 용아병이 아직 둘이나 남아있었던 것이다. 실프가 그런 그를 하이론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것 좀 놓게.” 그는 하이론의 고함을 듣고서야 여전히 실피드를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손을 놓는 즉시 바람의 중급 정령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으득! 하이론은 탈골된 손목뼈를 맞추고 포션을 발랐다. 응급처치는 끝났으나 손목은 퉁퉁 부어올랐다. 치료마법을 걸어줬으면 좋으련만 카이어스에게 다 걸어버려 더 이상 시전 할 수 없었다. 듀마가 있으면 손을 쓸 수 있으련만 그도 지금은 손을 뺄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손을 빼기는커녕 목숨까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두 명의 용아병을 그가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공격은 꿈도 못 꾸고 바인딩 마법을 걸어 용아병의 발길을 가까스로 막고 있는 듀마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리는 그의 몸에서 죽을힘을 다하는 그의 노고가 느껴졌다. “끝장을 보죠.” 엘란은 그들을 향해 다가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지.” 마찬가지로 조용히 대답한 카이어스가 엘란의 뒤를 따랐다. 엘란과 카이어스가 다가가자 반색을 한 듀마가 뒤로 물러섰다. 바인딩에서 풀려난 용아병들도 발을 몇 번 구른 후 눈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몸을 움찔거리게 만드는 드래곤 피어가 섬뜩하게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그뿐. 엘란과 카이어스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이미 익숙해진데다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눈에 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란은 양손으로 실피드를 꽉 움켜쥐었다. 손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견딜 만은 하다. 다시 검의 형태를 만드는 실피드.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검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하늘거리는 바람이 꽤나 멋있어 보인다. “자네 검 정말 이뿐데 그래. 나도 정령술이나 배울 걸.” “좀 가르쳐 드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나이에 무슨.” 둘의 대화는 곧 방해를 받았다. 사이좋게 다가온 용아병이 둘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던 것이다. 엘란은 조금 전처럼 검으로 맞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용아병을 맞이한 것은 일시에 몸을 드러낸 실프들이었다. 허공에 뜬 정령들은 용아병을 향해 동시에 몸을 날렸다. 희고 성결해 보이는 실프가 일시에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하늘에 박혀있던 뭇별들이 그 자리를 벗어나 용아병의 몸에 새로운 둥지를 틀려는 것처럼 보였다. 슈리엘의 일격을 막아내던 그 자세 그대로, 칼을 방패에 끼우고 하박을 밀착시킨 용아병이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파라라락! 그 바람에 주변의 공기가 몸살을 앓았다. 용아병의 전신은 돌수록 점점 가속도가 붙어 종래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끗희끗한 잔상뿐이다. 타라라락! 회전력을 이기지 못한 실프들이 부딪치는 족족 튕겨져 나갔다. 엘란은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어지러워서라도 계속 돌 수는 없을 터. 그는 공격에 실패한 실프를 공중에 띄워놓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렸다. 카이어스를 곁눈질 하면서. 카이어스는 몸이 무거웠다. 지친데다 옆구리의 상처가 극심했던 때문이었다. 다시 격렬하게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 옆구리의 상처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몸놀림에는 평소의 호쾌함 대신 신중함이 배어 나왔다. 용아병이 미간을 베어옴으로써 개전을 알렸고 그에 맞서는 카이어스의 반격도 적의 미간을 노리는 것이다. 쨍! 힘의 교환. 가장 정직한 일합이 터져 나왔다. 용아병이 살아있는 생물체였다면 숨소리 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칼을 맞대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힘겨루기. 둘은 밀리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칼을 맞댄 채 상대방을 밀어댔다. 엘프는 왼손에서 칼을 놓고 오른손의 칼을 같이 쥐었다. “하!” 기합성과 함께 카이어스의 팔뚝근육은 잘 숙성된 밀가루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손등에서 시작된 퍼런 핏줄은 하박을 지나 상박까지 치달렸다. 한창 힘을 쓰는 바로 그때 옆구리의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전신근육에 힘이 들어가자 갈라졌던 살이 다시 찢어졌던 것이다. 끊어졌던 내장이 무사한 것이 불행 중 다행. 카이어스는 점점 길이를 더해가는 상처를 무시하고 무식하게 밀어붙였다. 산도 들어올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힘에 용아병이 당하지 못했다. 휘청거리던 용아병의 허리가 점점 뒤로 꺾여졌다. 그 순간 병사의 눈에 붉은 빛이 번쩍하고 드래곤 피어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 “내가 두 번 당할 줄 알았나!” 카이어스는 오히려 악을 써대며 손아귀에 힘을 증가시켰다. 척. 버티지 못한 용아병이 왼발을 대각선으로 빼는 동시에 칼을 옆으로 흘렸다. 이번에는 카이어스가 휘청했다. 쏟아지는 힘을 제어하지 못한 탓이다. “이봐! 비겁하잖아!” 그의 입에서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상대하던 용아병이 회전을 멈추면 실프를 내려 보내 팽이처럼 계속 돌게 만들던 엘란이 실소를 터트렸다. 용아병을 상대로 싸우는 와중에 비겁한 게 어디 있나” 스스로 마음의 결정을 내려 정직한 힘겨루기로 승부를 결하려 한 것은 자기 판단이고 용아병이 마음은 당연히 다를 수 있는 일. 게다가 싸우기 전에 힘겨루기로 승부를 결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엘란은 팽이처럼 팽팽 도는 용아병을 보며 실프를 카이어스가 상대하던 용아병에게 쏘아 보냈다. 쌔애액! 실프가 날아가며 대기를 찢어발겼다. 혹시나 했는데 카이어스와 싸우던 용아병의 반응도 똑같았다. 방패를 들고 회전하는 것. 그러나 회전 멈추기를 기다리는 엘란과 달리 카이어스는 가만있지 않았다. 칼에 맺힌 푸른 색 오러가 시원하게 바닥을 쓸었다. 쾅! 그 오러가 원심력을 파고들어가 회전축의 역할을 하는 오른발을 끊어놓았다. “슈리엘의 복수다.” 축이 끊겨 넘어진 채 바닥에서 회전하는 용아병의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쾅! 폭음이 터지고 여전히 회전하던 용아병의 두개골이 산산 조각나 흩어진다. 마지막 남은 용아병의 운명도 곧 결정이 났다. 지치고 다쳤다고는 하나 상급 정령사와 소드마스터를 용아병 혼자서 상대하기는 역부족. 엘란이 정령술로 용아병의 움직임을 묶자 카이어스의 칼이 죽음의 병사를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완연한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기후는 상쾌했으나 스트빌라이의 황녀 브론다의 가슴은 여전히 휴화산이다. 혼사거절로 상한 감정이 오크같은 황태자비의 외모를 보는 순간 심화되었고 불리한 조약을 맺는 동안 고조되었으니 폭발 일보 직전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비상사태를 눈치 빠른 드레이크남작은 민감하고 느끼고 있었고 다른 기사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생 검만 휘두르며 살아온 에릭슨 백작은 벽창호 같은 데가 있어서 감도 못 잡고 있었다. “드레이크, 날씨 좋지”“ 수련만하다 오랜만에 여행을 하니 즐거운 듯 싱글거리며 말을 거는 그가 한심스러웠다. “예, 날씨 끝내 줍니다. 대련이라도 하면 딱 좋을 날씨네요.” 배배꼬인 음성. 그러나 백작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몸도 근질거리는데 대련 한번 할까”“ “하......!” 드레이크는 무의식중으로 비웃음을 날리려다 겨우 참았다. 눈치 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황녀의 기분도 기분이지만 요인을 경호하는 처지에 수련을 목적으로 검을 뽑아 휘두른다는 것은 불경한 짓이었다. 상관만 아니었다면 한 대 갈겨주는 건데. 그런 그의 반응을 오해한 에릭슨은 말을 뒤로 물려 대뜸 거리를 벌리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백작님!” 그의 발작적 고함도 에릭슨의 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목을 노리고 사정없이 짓쳐드는 검.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이라는 그의 좌우명에 걸맞게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날카로운 일격에 드레이크는 검을 뽑아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챙! 반쯤 뽑힌 검으로 겨우 막아낸 드레이크는 솟구치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집어 삼켰다. 조금만 멈칫거렸으면 큰 상처를 입을 뻔하지 않았나! “좋아! 이 검도 한 번 받아보게.” 흥이 오른 백작은 말을 할 새도 없이 다시 검을 찔러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치열한 검격이 교환되고 검이 부딪칠 때마다 챙챙! 거리는 쇳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나왔다. 드레이크는 검을 막아내는 순간마다 그만하자고 고함치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한 번 발동된 백작의 공세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아서 잠시의 짬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기어이 사단을 불렀다. 쾅! 체면이고 예절이고 모두 던져버린 황녀가 마차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이 새끼들 니들 뭐야!” 귀를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고함에는 터질 듯한 분노가 녹아 있었다. 바야흐로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하, 황녀님 날씨 좋지요”“ 슬그머니 검을 집어넣은 에릭슨이 바보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브론다의 부아를 더욱 돋우었다. “날씨 좋아서 검을 들고 설친 거야”“ “예, 몸도 근질......” 브론다의 고함이 백작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너 바보냐”“ “예”“ 멍하게 반문하는 에릭슨백작의 얼굴은 정말로 바보 같아 보였다. 드레이크는 그런 모양을 보며 제발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빌었다. “이 새끼 정말 바보 아냐! 누가 이런 놈을 사절단에 포함시킨 거야”“ 어느새 행렬은 멈춰 섰고 당황한 시녀들이 황녀에게 몰려들었다. 경험이 일천한 시녀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저 바보 아닙니다.” “바보 아닌 놈이, 호위 중에 검을 빼들고 설치는 거냐”“ “그럼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이 개새끼야! 황족 앞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검을 들고 설치는 것은 반역으로 다스린 다는 것도 몰랐어”“ 반역이라는 소리까지 나오자 백작의 얼굴은 백지처럼 하얗게 변했다. “당연히 몰랐겠지. 니 대가리에는 뭐가 들었냐” 똥이 들었냐”“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던 그녀가 백작의 검을 뺏어들고 그의 머리를 검면으로 두들겼다. “이걸 그냥 쪼개 봐!”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번 터진 황녀의 분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그녀의 입에서 용암처럼 뿜어지는 상스러운 욕설, 욕설, 욕설들. 그리고 저주의 악다구니.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게 낮지, 이런 유형의 공격을 처음으로 당해보는 백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너 같은 얼간이를 낳고도 부모는 좋아했겠지” 이 허우대만 멀쩡한 칠푼아! 나가 뒈져라!” 갑작스레 멈춘 행렬에 무슨 사단이 났나하고 다가오던 엘리오트의 기사들은 황녀의 욕설을 듣고 그 자리에 못 박히듯 멈춰 섰다. 스트빌라이의 사절단을 국경까지 보호할 목적으로 따라온 붉은 도끼단의 아테보로자작은 황녀의 작은 입에서 쏟아지는 욕설에 아연실색했다. “성질이 개차반이라 시집을 못 갔다는 정보가 사실이었구나!” 드레이크는 타국의 구경거리까지 되고 보니 더욱 애가 탔다. 백작의 검을 막아내느라 검을 뽑았으니 된통 걸린 셈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튀게 생긴 것이다. 불안하게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샤뮤엘 대현자의 모습이 잡혔다. 샤뮤엘 대현자. 고매한 인품으로 전 대륙인의 존경을 받는 이. 그라면 황녀의 불같은 성질을 진정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슬며시 다가간 드레이크는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었다. “좀 도와주십시오.” “흠, 그럴까요.” 얼굴 세울 기회라면 마다하지 않는 것이 샤뮤엘의 성격.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제는 퍼렇게 변해가는 에릭슨백작의 옆에 다가간 그는 저음의 성량을 마음껏 뽐냈다. “황녀님, 이제 그만 참으시지요. 사람.......” 그는 황녀의 성질을 몰랐다. “재수가 없으려니 늙다리까지 지랄이네. 넌 또 뭐야”“ 샤뮤엘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보았겠는가” 그는 금세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어.......” 당황한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릴 때 황녀의 일갈이 다시 터졌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새끼야!” 이제는 말릴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샤뮤엘 대현자까지 눈에 낀 눈곱대접을 받는 판국에 누가 있어 말을 걸 것이며 누가 있어 진정시킬 것인가. 제풀에 지쳐 그칠 때까지 기다릴 밖에. 그즈음 일단의 사람들이 사절단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프록코트를 입은 두 명의 사내가 앞장을 섰고 십여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뒤를 따른다. “웬 놈이냐”“ 드레이크가 호통을 내질렀다. 어떻게든 황녀의 관심을 돌려보려는 필사적인 행동. “감히 황녀의 행차를 방해하다니!” 아테보로는 그가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의도를 대번에 파악하고 맞장구를 쳤다. 사절단의 안전은 주재국이 책임지는 것이 국제적 관례. 그로서도 국경을 코앞에 두고 행렬이 지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쉬지 않고 욕설을 뱉어대던 황녀의 입이 멈추어 졌다. 황녀의 관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니들은 또 뭐야”“ 눈 깜빡할 새에 양국의 기사들에 포위된 프록코트사내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마너크백작가의 빈스이고 이 쪽은 제 친우 마크 길리건입니다.” 대답을 들은 황녀의 머리가 갸웃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귀에 익은데......누구지”“ 드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한 고비 넘긴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검을 뽑아든 불경한 행위를 무마시킬 논리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백작의 책임으로 몰아가야 한다. 사실 그가 한 짓이잖아.” 생각할수록 백작에 대한 적개심이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었다. 아테보로는 프록코트를 입은 두 놈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뿜어냈다. 저 둘은 메디치항구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양백작가의 장남으로 하이디스 경매장에서 광술사의 습격을 받아 팔이 잘려나간 놈들이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가문을 승계하지 못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더니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 황녀의 말문이 열렸다. “아~생각났다. 하이디스의 팔병신들!” 광술사 엘란에 의해 일어났던 하이디스 경매장의 난동은 한 동안 전 대륙인들이 즐겨 얘기하던 소재였고 음유시인들은 지금도 종종 노래하는 유명한 사건이었다. 황녀도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이름이 귀에 익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빈스와 마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황녀라고 하나 면전에서 대놓고 병신이라고 하자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마크는 흥분해서 몸을 떠는 빈스의 팔을 급히 잡았다. 한 순간의 기분으로 계획을 망칠 수는 없는 일. 침착하게 웃음을 머금은 그가 천천히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저희들은 어떻게 아십니까”“ “황궁에서도 한 동안 화제가 되었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냐”“ 이제야 평정을 회복한 브론다가 황녀다운 위엄을 뽐내며 턱을 치켜들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길에 위대한 스트빌라이의 사절단을 먼발치에서나마 보려고 한 겁니다만, 행렬이 멈춰서 움직이지를 않아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서 와 본 겁니다.” “지들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도 넓군.”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황녀님, 그만 가시지요.” 아테보로자작이 공손히 끼어들었다. 저런 변변찮은 인간들과 황녀가 말을 섞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니들, 팔은 어떻게 된 거냐”“ 가볍게 아테보로의 말을 씹은 황녀가 들고 있던 검으로 마크의 오른팔을 꾹꾹 누질렀다.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 등급을 결정하는 것처럼. 팅,팅,팅. 검과 의수가 부딪치며 가벼운 쇳소리를 만들어 낸다. 마크는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모멸감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일그러진 미소를 흘렸다. 뇌는 웃으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가슴은 차오르는 울분으로 거부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의수를 하고 다닙니다.” “그래.” 황녀는 마크의 표정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일그러진 미소에서 그의 심사를 충분히 짐작한 그녀는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 동안의 꼬인 심사가 일시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철모르던 시절에 장난삼아 개미를 밟아대던 기억을 떠올리며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푹! 그녀의 검이 빈스의 왼팔을 찌르고 들어갔다. “윽!” 불시에 팔을 찔린 빈스가 신음을 흘렸다. “너도 오른팔이 잘렸었냐”“ 짐짓 놀랐다는 표정이나 눈은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황녀님!” 풍경화 속의 수목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에릭슨백작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무리 황녀의 신분이 지고하고더라도 타국의 귀족을 이렇듯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마크와 빈스에게서 에릭슨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떠오르는 잔혹한 미소. “죽고 싶은 게로구나.” 평생 턱짓으로 남을 부린 위엄이 줄기줄기 쏟아졌다. 검과 평생을 보낸 에릭슨도 움찔할 정도의 위엄이었다. “죄는 나중에 받지요.” 슬쩍 시선을 외면한 그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스노우에 가서 보자. 말을 가져와라! 가면서 두 병신들 얘기나 좀 들어야겠다.” ****************** 잡담입니다. 용아병이 터무니없이 강하다는 분이 계시고 약하다는 분이 계신데 그냥 이 작품의 설정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용아병이 이렇게 강한 건 만든 드래곤이 대단한 드래곤이라 그렇습니다. 젊은 드래곤 이빨로 만든 용아병과, 고룡 그것도 대단히 강한 고룡의 이빨로 만든 용아병의 실력이 다른 건 당연하겠죠. 설명이 미흡하긴 했었는데 용아병이 뼈와 해골의 모양을 한 것도 만든 드래곤의 취향이 그래서 입니다. 용아병의 모양은 만든 드래곤 마음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주변이 모래뿐이라 살을 만들어 주기도 그렇고 아니면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살이 모두 썩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구요(너무 무책임한가) 발록 얘기도 있었는데 제가 발록을 처음으로 본 것은 반지전쟁에서 입니다. 아마 그게 시초일 겁니다.(서구신화에 발록이 등장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지식이 얕아서) 그 후 여러 작가들이 발록을 그렸는데 작가에 따라 그리는 게 약간씩은 다릅니다.(사실 깊게 생각해 보면 똑같이 그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작가의 몇몇 작품에서는 발록을 아주 대단한 존재로 그립니다만 엘란에서는 십존보다 약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용아병과 마찬가지로 엘란의 설정이 그러니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지, 라는 말씀도 계셨는데 발록이니 용아병이니 하는 존재를 쓰면 이미 잘 아는 존재들이라 독자들이 받아들이기도 쉽고 저도 쓰기가 편리합니다. 그냥 읽으면 머리에 그림이 떠오르죠. 또 생판 모르는 몬스터를 집어넣으면 거기에 대한 긴 설명과 묘사를 붙여야 하고 그럼 글이 늘어지겠죠. 글을 쓰면서 연재 중단을 생각한 적이 꽤 있습니다. 처음 연재중단을 생각한 건 라니안에 연재를 시작하던 시점입니다. 글을 안 올리면 괜히 빚진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서요. 그리고 댓글에 휘둘리는 것 같아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출판사에서 말렸습니다. 워낙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니 연재 중단하면 잊혀진다.(고만고만한 작품들은 특히 그렇겠죠^^) 뭐 이런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연재를 계속했죠. 두 번째로 생각한 게 하드가 나가서 일주일 손가락 다쳐서 열흘 글을 못 쓸 때 입니다. 사기 치지 마라, 글쓰기 싫으면 싫다고 그러지 치사하게 거짓말 하느냐, 그리고 이메일로 날아오는 욕설(이 부분은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어떻게 이메일 주소를 알았을까 의문이 듭니다. 전 이메일을 공개한 적이 없거든요.) 세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요즘입니다. 이유는........스토리가 꼬였습니다. 이야기 얼개를 다 잡고 시작한 글인데 중간 중간 마주치는 문제가 만만치 않네요. 생각 같아서는 한두 달, 혹은 연재중단까지 고려해봤습니다만 이왕 시작한 글 끝까지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쓰고 보니 정말 잡담이네요.^^ 올 한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무리 잘하시구요, 연말이라고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그리고 감기조심 하세요. 새해에는 바라는 바 모두 이루시기 바랍니다. 2003년 복 많이 받으세요. 그것으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황녀는 종아리가 기막히게 빠진 흑마위에 올라타고서 마크와 빈스를 불렀다. “이리 와서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보라.” 아테보로자작은 일단 둘을 따로 불러 황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강한 경고성 충고를 던진 후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윽고 사절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크와 빈스는 언짢은 기색으로 황녀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의 사건은 둘의 신체와 함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할 수만 있다면 도려내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애써 웃으며 털어놓는 경험담은 주변의 귀를 쫑긋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시중에서 소문으로만 접하던 사건의 진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때문이다. 그 만큼 엘란의 명성이 높았고 사건이 던진 파문도 컸다. 에릭슨백작은 마크와 빈스의 동행들을 맨 끝으로 보내버렸다. 마차에서 내린 황녀의 안전을 염려한 행위였다. 간간히 황녀의 호통이 터지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행렬은 대체로 평안했다. 행렬은 완만한 구릉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부근만 지나가면 산들은 급격히 높아져서 종내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웅장한 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나라의 국경을 형성하는 융커산맥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두에서 황가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버만은 폭포수같이 쏟아졌던 황녀의 욕설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욕설도 다양하고 신랄했다. 개중 태반은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독창성이 뛰어났으니, 궁중예절로 욕설을 가르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노점에서 빵을 파는 욕쟁이 할멈도 저기에 대면 어린아이 수준이리라. 황녀와 비교하자 다소곳한 자신의 아내가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인물이야 떨어지지만 푸근한 성품이 얼마나 편안함을 선사하는지. 아내와 두고 온 자식생각이 나자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박차를 가한 모양이었다. 별안간 히히힝! 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말이 푹 고꾸라졌다. “헉!” 기분 좋은 상념은 일순간 사라져 버리고 그의 몸은 타의에 의해 급격하게 이동했다. 말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히힝!” 구슬픈 말의 울음 뒤로 격렬한 통증이 따라왔다. 경악으로 부릅뜬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인지한 장면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50센지 가량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뒤를 떼밀린 기사들과 병사들이 줄줄이 함정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을 반기는 것은 독을 칠해 퍼렇게 번뜩이는 송곳. 에이단은 말이 고꾸라지는 순간 재빨리 움직였다. 안장을 꽉 움켜쥐고 머리를 뒤로 빼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후 발걸이의 발을 뽑아냈다. 푹! 말의 다리와 몸통을 송곳이 유린하는 동안 그는 안장위에 올라서서 겨우 중심을 잡았다. 머리가 삐죽 설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뒤에서 밀려 떨어진 뭔가가 말을 건드렸다. 삐끗 중심이 흐트러진 그가 안장에서 떨어지며 방패를 던졌다. 그리고는 방패위로 몸을 날렸다. 가가가! 송곳 다발위에 올려진 방패가 쇳소리를 울렸다. 다행히 방패는 튼튼해서 그의 몸무게를 지탱해냈다. “정지! 황녀를 보호하라!” 말의 울음과 선두의 소란을 느낀 순간, 에릭슨백작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양국의 기사들이 황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섰다. “드레이크!” 다신 터진 백작의 고함. 말이 엉키자 움직이기 힘들어진 드레이크는 잽싸게 뛰어내려 선두를 향해 달렸다. “이건 또 뭔가” 도대체 무슨 일이지”“ 황녀나 백작의 눈에 띄어 출세할 열망에 넘치던 그는 계속 이어지는 사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출세는커녕 현상유지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했다. “이게 다 얼간이 백작 때문이다.” 호위책임자가 저런 벽창호인줄 알았다면 절대로 따라오지 않았을 터. 원망이 사무쳐 살기까지 치솟았다. 차라리 이패이시스라인 쪽으로 가는 건데, 하는 때늦은 후회만이 가슴을 때렸다. 그런 생각은 이내 훈족에 대한 저주로 발전했다. 그들이 국경에 군대를 전진배치 하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고, 유능한 기사들이 전원출동대기에 들어가는 통에 에릭슨백작과 자신이 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단내가 날 정도로 빠르게 뛴 그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함정과 송곳, 그리고 꼬치 꿰이듯 꿰여있는 가시들과 병사들의 시신이었다. 함정에 떨어진 사람 중에 살아있는 것은 한 명 뿐. 방패에 올라서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기사. “지독하군.” 날카롭게 갈려있는 송곳의 독은 정말로 지독했다. 함정에 빠진 것은 사람이고 말이고 모조리 죽어있었다. “무슨 일이냐”“ 황녀의 찢어지는 호통이 그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함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대답한 그는 날듯이 돌아와 황녀의 앞을 막아섰다. 애초의 목적-황녀의 눈에 들어 출세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수색!” 아테보로의입에서 교본에 충실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 순간 붉은 도끼단의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검을 뽑아든 채 황녀를 중심으로 넓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퍼져나갔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자리를 잡은 그들은 검으로 땅을 찔렀다. 푹, 푹, 푹. 매복이나 함정 유무를 알아내려 땅바닥을 쑤시는 동작은 절도 있고 신속했다. 그 덕에 주변의 구릉은 순식간에 헤집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넓어지는 수색범위. 챙! 잠시 후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저릿한 느낌이 검을 타고 올라왔다. 사람의 뼈와 살을 가를 때 느껴지는 감각. “매복이 있습니다.” 고함과 더불어 기사들의 동작이 더욱 빨라졌고 내뻗는 검에도 힘이 실렸다. 동시에 아테보로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떤 미친놈들이 황녀일행을 공격한단 말인가”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이 짜증과 함께 신경을 건드린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죠.” 에릭슨백작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들어가기를 권유했으나 황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지 대꾸도 없이 말을 씹는다. 황녀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양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철통같이 방어하는 데 누가 뚫을 수 있을까”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까지 떠오른다. 바닥에 누워있던 닉은 천천히 손목을 움직였다. 몸을 풀어주지 않으면 움직임이 경직되어 싸울 때 힘들어진다. 그는 자신의 얼굴위로 내려오는 검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적의 검은 깊게 판 굴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의 반응. 대장의 계획은 한 치의 이지러짐도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신호를 기다렸다. 닉의 생각대로 계획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과 현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의 반응이 예상을 벗아 날 수도 있고, 계획을 세운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간의 호흡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후자였다. 검의 길이를 짐작해 굴을 깊게 파라는 명령은 몇몇 게으른 길드원들에게 무시되었고 그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했다. 자신의 목숨으로. 버드는 뼈와 살을 가르는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남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면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우쭐한 감정이 들었다. 검이 전해주는 짜릿한 느낌! “또 한 놈 죽었구나.” 앞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땅속에 숨은 놈들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데 대한 의문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서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싶었다. “정지! 방패!” 귓전을 때리는 경고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섬뜩한 통증이 느껴진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 급히 고개를 숙이자 가슴 밖으로 비쭉이 나와 있는 깃털이 보인다. 생소한 감정이 그를 찾아왔다. 죽음의 공포! 자신은 절대 느끼지 않을 줄 알았던 감정. 입에서 쏟아지는 피거품과 함께 겁에 질린 눈동자가 하늘을 찾았다.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가을하늘을 뻘건 불덩이가 가르고 있었다. 쾅! 불덩이는 기사들이 운집한 곳을 직격했다. 그러나 멀리서 날아오는 공격을 한다하는 기사들이 순순히 당해줄리 만무. 재빨리 몸을 날린 기사들이 즉시 대오를 정리하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괴한들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석궁!” 아테보로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석궁을 들고 쿼렐을 장전하는 병사의 손은 여유가 있었다. 고된 훈련의 결과였다. 두두두두! 말을 탄 괴한들은 질풍처럼 달렸다. 두 집단간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싹! 괴한들이 일사분란하게 바스타드소드를 꺼내들었다. 왼손으로 고삐를 채고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그들을 향해 에테보로자작의 냉정한 일갈이 터졌다. “쏴라!” 쐐애액~! 석궁을 떠난 쿼렐이 괴한을 향해 독니를 들이밀었다. 퍽! 동시에 날아오는 쿼렐을 다 피하지 못한 괴한이 한쪽 눈에 화살을 박고 축 늘어졌다. 옆으로 고꾸라지던 그의 몸이 바닥에 닿은 채 질질 끌려갔다. 발걸이에서 발이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말은 기수가 죽은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렸다. 흉흉한 살기가 말까지 미치게 만들었다. 십여 명의 괴한들을 꼬치 꿰듯 꿰어버린 사수병은 다시 한 번 쿼렐을 장전한다. 그리고는 명령을 받지 않고 곧바로 쏘아댔다. 다시 한 대 먹여준 병사들은 석궁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탓이다. 최초의 조우는 검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휘이잉! 커다란 불덩이가 사수병 밀집대형에 떨어졌다. “크아아!”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마법의 불은 잘 꺼지지 않았고 금방 초원에 옮겨 붙었다. 바싹 마른 풀은 곧바로 타올랐으나 듬성듬성 돋아난 바람에 곧 꺼지고 말았다. 폭풍처럼 밀어 닫친 괴한들은 달려온 기세 그대로 창을 세운 병사를 향해 밀려들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광폭한 기세였다. “히히힝!” 창에 찔린 말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간다. 말에서 몸을 날린 괴한들은 창의 숲에 관통되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어 자빠졌다. 그 뒤를 다른 괴한들이 메웠다. 창은 이내 꺾여지고 일차 저지선은 무너져버렸다. “죽어라!” 절규 같은 호통과 함께 바스타드소드가 창을 동강냈다. 그 여세를 몰아 휘둘러진 검에 어린 병사의 목이 걸렸다. 무정한 검은 겁에 질린 눈을 외면했다. 서걱! 목을 쳐 버린 검이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 휘둘러졌다. 치열한 백병전. 미쳐 날뛰는 괴한들의 검도 두터운 인의 장막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훈련 잘된 병사들은 뒤로 밀리면서도 길을 내어주진 않았다. 의외의 사태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아테보로자작은 오른손을 들어 힘껏 앞으로 뻗었다.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초원을 울리고 마차를 둘러쌌던 붉은 도끼단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밀려드는 파도처럼 혹은 은은한 바람처럼 말을 몰았다. 대형을 벌려 공간을 내주는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다. 이제 기사들이 적을 섬멸할 것이다. 적들에게 다가간 기사들의 검이 춤추듯 움직였다. 미려한 원을 그리는 검은 떨어져 내리는 순간 거력을 품었다. 쩡쩡쩡! 날카로운 금속음이 대기를 울렸다. 가가각! 바스타드소드를 훑어 내린 검은 팔목을 자르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입으로 박혀들었다.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뽑아 다시 휘두른다. 검 날에 묻은 피가 검 끝으로 몰리더니 허공으로 비산한다. 꽈직! 피를 흩뿌리는 검은 또 다른 적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무인지경. 붉은 도끼단은 양떼 속에 뛰어든 승냥이 마냥 적들을 도륙했다. 대열의 끝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로드리게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붉은 도끼단의 실력은 상상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 부하들은 대체가능한 소모품일 뿐. 그는 덧없이 죽어가는 부하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의지를 다졌다. 조용히 주문을 영창하며 수인을 맺자 그의 머리위에 둥실 불덩이가 떠올랐다. 아테보로자작은 거대한 파이어 볼을 만들어내는 적의 수괴를 찬찬히 쏘아보았다. 갈색머리의 사십대 장한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허리에 매달린 검을 보면 검사라는 얘긴데. “오랜만에 보는 마법검사군.” 검과 마법, 둘 중 한 가지만 익혀도 극의에 다다르기는 지난한 일. 적의 수괴는 특이하게도 마법과 검을 동시에 익힌 것으로 보였다. 자작이 노려보는 와중에도 불덩이는 점점 크기를 더했다. 자작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가라!” 로드리게의 입에서 고성이 터지고 불덩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불덩이는 차츰 속도를 더하더니 나중에는 빛살처럼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자작의 몸이 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먹이를 사냥하는 솔개처럼 급격히 상승한 그의 몸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콰직! 적병의 머리를 뭉개는 것으로 재차 도약한 그의 검에 푸르른 마나가 어렸다. 휭!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는 불덩이는 떨어지는 태양 같았다. 양손으로 그립을 꽉 움켜쥔 그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불덩이를 쪼개갔다. 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태양이 잘라졌다. 두 조각난 불덩이는 초원을 태워버릴 것 같던 기세를 잃고 스러져갔다. 그런 그를 향해 또 하나의 불덩이가 다가갔다. 그가 도약하는 순간 로드리게가 새로운 파이어볼을 준비한 것이다. 에릭슨백작은 감탄하는 시선으로 에테보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깔끔해서 군더더기 같은 동작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적병의 머리를 짓뭉개는 것으로 도약력을 얻는 동작은 단호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쓸데없이 대련을 벌이다 궁지에 몰린 처지도 잊어버리고 일이 끝나면 검을 섞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생각을 숨길 줄 몰랐다. 황녀를 등진 채 그의 옆에 붙어 있던 드레이크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리고 또 다시 대련을 하려 하다니. 에릭슨 백작의 얼굴을 쏘아본 드레이크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전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잠시 후면 한 낮의 막간극은 종막을 고할 터.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아테보로의 움직임을 쫓았다. 자작은 날아오는 불덩이를 상대하지 않았다. 마나를 밑으로 보내 중심점을 아래로 만들자 그의 몸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휘잉! 머리 위로 불덩이를 넘겨버린 그가 땅을 박찼다. 탁탁탁! 땅을 내지를 때마다 점점 빨라지는 신형이 쏘아진 화살 같다. 그런 아테보로의 눈에 놀란 로드리게의 얼굴이 잡혔다. 한편, 자작을 넘어간 불덩이는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좋아!” 에릭슨백작의 입에서 호기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도 말 등을 박찼다. 아테보로가 솔개 같다면 그는 한 마리 곰을 연상시켰다. 사납고 민첩한. 높이 떠오른 그의 장대한 체구가 아래로 떨어진다. 백작의 날카로운 눈이 발 디딜 곳을 찾아 앞을 훑었다. 병사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붉은 머리 괴한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병사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왜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서는 것일까” 그것도 유리한 싸움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적병의 눈을 노려보던 붉은 머리의 눈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적의 눈동자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장대한 체구의 기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이런!” 목표했던 붉은 머리가 갑자기 내빼버리자 백작의 몸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젠장!” 열이 받은 그의 검이 도망치는 붉은 머리의 뒤통수를 쪼갰다. 에릭슨을 지나친 불덩이는 황녀를 에워싼 스트빌라이 기사단의 앞에 떨어졌다. 쾅! 거대한 불덩이가 폭발하며 땅이 진동했다. 그 순간 땅 속에 숨어있던 길드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신호를 접한 닉의 손이 고리를 잡았다. 힘껏 당기자 교묘히 장치된 굴이 무너지고 발치에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을 따라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백작님!” 드레이크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이 발해졌다. “뭐야!” 돌아선 백작의 눈에 솟구치는 암살단이 잡혔다. 그에게는 악몽 같은 날이었다. 자신들의 발치에 암살단이 숨어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그의 미간에 다급함이 서렸다. 몸집이 작은 매복자들은 땅개같이 단단하고 재빨랐다. 퍽! 제일 가까운 곳에서 튀어나온 암살자가 드레이크가 탄 말의 다리를 찍어버렸다. 황녀에게로 가는 길을 열려는 의도였다. 말이 구슬픈 울음을 토하고 넘어가는 순간 드레이크가 몸을 날렸다. 콱! 떨어진 기세 그대로 암살단의 어깨를 짓밟아 버린 그가 검을 다리 밑으로 찔러 적의 등을 뚫어버렸다. 어깨를 박차고 한 바퀴 돌아 내려선 그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습격자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스트빌라이 가사들은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암습자를 막아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작고 재빠른 데다 목숨을 돌보지 않는 악착스러움이 있었다. 챙! 아테보로는 말 위에서 휘둘러지는 로드리게의 검을 막아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땅에서 솟구친 적들이 의외이긴 했으나, 스트빌라이나 엘리오트의 기사들이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황녀의 목전까지 암살자가 접근했다는 것은 외교적 결례는 물론 그들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다. 감정이 격해지자 찔러가는 그의 검이 매서워졌다. 그에 따라 로드리게의 검도 바빠졌다. 아테보로자작은 적장의 허벅지를 찔러갔다. 로드리게는 허벅지로 쇄도하는 검을 쳐내려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접전에서는 이 기사를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입을 앙다문 그가 허벅지를 노리는 검을 무시했다. 행선지는 적의 미간! 오른 팔에 질끈 힘이 들어가고 쭉 뻗은 검 끝에 마나가 맺혔다. 찔러볼 테면 찔러봐라! 아테보로는 미간으로 다가서는 서릿발 같은 기운을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온 힘을 실어 허벅지를 쳐버렸다. 퍽! 화끈한 통증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로드리게의 뇌를 뒤흔든다. 예상 이상의 고통. 저절로 벌어진 입에서 힘이 새어나갔다. 그 바람에 검에 실린 기세가 약해졌고 아테보로의 미간을 노린 검은 관자놀이를 찢어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명백한 손해! 다리를 절단해버린 아테보로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말의 옆구리 깊숙이 검이 박혔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이 옆으로 넘어가 버린다. 콰직! 로드리게의 성한 왼발마저 말에 깔려 버렸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놓았다. 함정에서 겨우 빠져나온 에이단은 몰려드는 땅개들을 향해 분노의 검을 날렸다. 독을 발라 시퍼렇게 빛나던 송곳은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고, 죽을 뻔한 위기가 그의 살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내지르는 검에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올올이 맺혔다. 암살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기사들을 물고 늘어졌고 그 바람에 기사들도 하나, 둘 죽어 나갔다. 닉은 동료들의 등 뒤에 묻혀 교묘하게 움직였다. 동료가 목숨을 담보로 기사의 검을 붙들고 늘어지면 어느 틈에 다가간 그가 기사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는 착실하게 황녀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에 필사의 의지가 묻어났다. 에릭슨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암살자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네다섯 명씩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황녀 곁으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엘리오트의 붉은 도끼단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습격한 자들의 목숨을 착실하게 끊어주다 보니 황녀와 멀어졌고 돌아가려니 그들이 발목을 잡았다. 앞길을 막는 땅개들도 한몫했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놈들이 땅 속에 있었던가! 드레이크는 이를 갈았다. 땅속에서 기어 나오는 놈들은 끝이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밀려드는 통에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얼씨구!” 드레이크는 뼈에 박힌 검을 억지로 빼내며 헛웃음을 날렸다. 작달막한 땅개들이 정리되어 가자 이제는 뚱보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하늘 높을 줄은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았는지 옆으로 퍼진 몸매가 하마를 연상시켰다. 닉은 마지막 승부수가 땅 속에서 나오자 옆구리에 검을 끼우고 죽은 것처럼 엎드렸다. 그러면서도 천천히 기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간혹 자신을 밟아대는 발도 무시한 채였다. 뚱보들이 다가오자 기사들이 대형을 밀집시켰다. 뚱보들 뒤로는 암살단의 저지를 돌파한 붉은 도끼단과 에릭슨백작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끝이군.” 가늘게 말려 올라간 드레이크의 눈에 옷을 벗는 뚱보들이 보였다. “......!” “뭐야”“ 다가오는 암습자들은 뚱보가 아니었다. 몸 전체에 매달린 연통이 그러한 오해를 불렀을 뿐. 선두의 뚱보가 옆구리에 달린 끈을 당겼다. 슝슝슝! 연통에서 강침이 튀어나왔다. 미처 대비 못한 기사는 얼굴에 강침을 꼽고 고슴도치처럼 변해갔다. 쐐액! 어떤 자에게서는 쿼렐이, 어떤 자에게서는 매캐한 독연이 뿜어졌다. 개 중 지독한 자는 기름을 뿜어대고 불을 붙여서는 그대로 돌진했다. 쾅! 그는 기사를 붙잡은 채 깍지를 끼었다. 열기에 몸부림치는 기사의 움직임이 잠잠 해 질 때 그도 숨을 거두었다. 온갖 암기와 독들이 인접한 거리에서 한꺼번에 쏟아지자 수십 명의 기사들이 죽어 나갔다. “포이즌 큐어!” 기사로 위장한 마법사가 정화 마법을 걸었다. 요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치료마법 같은 특수한 마법만 익힌 자였다. 독이 해결되자 기사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뚱보들의 일격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그 뿐. 최초의 혼란이 수습되자 연통속의 모든 것을 소진한 뚱보들은 기사들의 분풀이 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연이은 비명과 피가 초원을 물들였다. 닉은 한 번의 혼란으로 충분했다. 기사들의 대형을 은밀하게 돌파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위장 뚱보들의 등을 저며가던 에릭슨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정신을 잃은 적의 수괴를 질질 끌고 오던 아테보로의 눈도 마찬가지. 신나게 분풀이를 하던 드레이크와 에이단도 역시 그러했다. 최종 호위병의 검을 살짝 쳐내며 들어간 닉이 땅을 박차자 그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용수철같이 튀어 오른 닉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향하자 오만하던 황녀의 얼굴에도 공포가 서렸다. 바로 그때! 몸을 날린 빈스 마너크의 팔이 검을 막아냈다. 쩡! 금속음과 함께 팔을 절단한 닉의 얼굴에 배신감이 떠올랐다. “이 개자식.......컥!” 그의 고성은 등을 삐져나온 에릭슨백작의 검과 뿜어지는 피거품으로 인해 끊어졌다. 빈스가 쓸모없는 의수 한 쪽으로 황녀의 목숨을 구하자 마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이 되었다. 저 미련한 습격자들은 애초의 계획이 황녀를 죽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이제 자신들은 예전의 빛나던 미래를 되찼을 것이다. 스트빌라이 황녀의 생명의 은인이며 동시에 외교 분쟁을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엘리오트에서도 칭송을 받을 터. 영광스런 미래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털썩! 닉이 쓰러지자 겨우 정신을 차린 로드리게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배신자!” “이리 끌고 와!”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된 황녀는 적의 수괴를 끌고 오는 아테보로에게 새된 고함을 질렀다. 아테보로는 로드리게를 끌고 가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회심에 찬 마크의 얼굴, 그리고 그들을 쏘아보며 부르짖는 적장의 한 마디. 배신자! 상황은 명백했다. 저 두 녀석들이 예전의 영화를 찾으려고 꾸민 짓이 분명하다. 일행에 낀 것도 우연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일 터. 아테보로는 적의 수괴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은 자신을 원망했다. 에릭슨의 표정도 무섭게 굳어졌다. 황녀를 죽음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간, 암습자가 죽어가며 내지른 말. 개자식! 은 분명히 자신의 검을 막은 빈스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적의 우두머리가 둘을 쏘아보며 하는 말, 배신자! 황녀는 말에서 내려 자신의 발치에 넝마처럼 구겨진 로드리게의 부러진 다리를 짓이겼다. “으악!” 눈이 돌아가고 허연 거품을 물어댄 그가 또 다시 정신을 놓았다. “황녀님! 안됩니다.” 에릭슨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저들의 배후를 캐내려면 살려둬야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한 그의 눈이 빈스와 마크의 얼굴에 닿았다. 쇠붙이라도 녹여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길. 한 성격 하는 황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에릭슨의 행동이 암살자와 수괴의 말을 다시 곱씹게 만들었다. “너희들이 꾸민 짓인가”“ 실로 냉정한 음성. 밝은 앞날을 상상하던 마크와 빈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로드리게만 죽었으면 아무 문제없이 묻힐 일이 요상하게 꼬여 버린 것이다. 아테보로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렸다. “멍청한 새끼들.”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다. 습격자는 모두 죽었고, 다리가 잘려서 피를 너무 많이 쏟은 적의 수괴도 죽어가고 있다. 공포에 질린 저 얼간이들의 얼굴! 딱 잡아뗀다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내가 범인이요 하고 공고하는 격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테보로가 슬쩍 끼어들어 무마를 시도했다. 일이 이대로 마무리 된다면 엘리오트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금전으로든 목숨으로든. 마크와 빈스는 아테보로의 두둔으로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래, 증거는 없다. 혹 로드리게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잡아떼면 된다. 닉의 일격을 막아내서 앙심을 품었다고. 에릭슨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속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그도 바보는 아닌 것이다. “잡아라!” 에릭슨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마크와 빈스의 일행들이 줄줄이 꿇려졌다. 마크와 빈스까지 꿇어앉힌 것은 아니지만 빙 둘러싼 모양새가 범인으로 여기는 것 같다. “제리!” 드레이크가 기사로 위장한 마법사 제리를 불렀다. “힐링!” 치료마법을 걸자 로드리게의 다리에서 피가 그쳤다. “살 수 있을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운이 좋아도 살 확률은 삼할을 넘지 못합니다.” “깨워라!” 에릭슨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 깨우면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냥 두면 살 확률이 삼할도 안 된다면서” 그럼 지금 깨워서 진술을 듣는 것이 낫다. 아테보로 자작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아니냐” 안 그렇소 자작”“ 마지막 말이 자작의 가슴에 아프게 틀어 박혔다. “암살단의 말에 신빙성이 있을까요”“ 아테보로자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일의 수습을 위해 쥐가 날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거야 윗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지요.” 재촉의 눈짓을 받은 제리가 마법을 걸었다. “웨이크 업!” 로드리게는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파리한 입술과 부들거리는 손을 봤을 때 살아나기는 그른 것 같았다. 에릭슨의 억센 팔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느냐”“ 떨리는 손을 들어 빈스와 마크를 가리키는 로드리게의 눈동자에 원독이 가득했다. “마크!...... 빈스!...... 이 배신자들!” 말하기 힘든 듯 띄엄띄엄 끊어진 단어로도 배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좌중의 매서운 눈길을 한 몸에 끌어 모은 빈스와 마크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로드리게의 얼굴도 점차 식어갔다. “이런! 중요한 증인이 죽어버렸군!” 로드리게의 상태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있던 아테보로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아테보로의 다급한 눈짓을 받은 마크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짓말 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일을 저지를 이유도 없을뿐더러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딴은 맞는 말이네.”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의 얼굴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황녀의 말은 빈스와 마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냉소를 머금은 그녀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이유야 충분하지, 부귀영화를 잃었으니 어떤 수를 쓰던지 다시 찾고 싶었겠지.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거야! 가문에서 떨려났으니 이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할 힘이 없었을 것. 자, 말해봐! 니들을 충동질하고 뒤에서 물자를 대준 사람이 누구지”“ 황녀가 핵심을 짚어오자 놀란 마크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는.......억!” 빈스가 얼떨결에 대답하는 그의 옆구리를 황급히 찌르자 놀란 마크가 신음을 토했다. “이리 줘!” 황녀는 드레이크의 검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녀의 검이 마크의 눈앞에서 번뜩거렸다. 암살자를 죽이느라 온갖 살점과 피를 묻힌 채. 공포에 질린 마크의 얼굴이 몽롱해진다. 아테보로는 마크의 추태를 보며 황녀의 추리가 정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토록 많은 자들을 가차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자라면, 대단한 독심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극심한 고문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눈앞에서 검이 왔다 갔다 한다고 죽을 상으로 입을 달싹거린다는 것은 이들이 배후가 아니라 그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다는 의미. 저 두 놈들은 그저 욕심만 많은 팔푼이가 아닌가! “한심한 놈들.” 저런 놈들 때문에 나라가 곤경에 처함은 물론 자신까지 곤란하게 된 것이다. 겁에 질린 마크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자 빈스가 급하게 손짓을 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게 생긴 것이다. 황녀의 매서운 눈이 그런 빈스를 노려보았다. “매를 버는구나.” 그녀의 검은 성격만큼이나 매몰찼다. 윙! 크게 휘둘러진 검이 빈스의 왼팔에 틀어박혔다. “악!” 그가 죽는 다고 비명을 질렀다. 황녀가 검을 배웠을 리 없으니, 그녀가 휘두른 검은 근육을 자르고 뼈에서 멈추었다. 그것이 더욱 심한 고통을 가져다준다. 썩. 썩. 그녀는 톱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검을 당겼다 밀었다 하며 극한의 통증을 선사했다. 눈은 마크에게 고정시킨 채. 마크에게 그녀의 눈은 사신의 눈이었다. 생사를 함께하기를 맹세한, 절친한 친우의 팔을 장난처럼 자르고 있는 황녀가 마계의 마물처럼 느껴졌다. 뻑뻑. 움직이던 검이 뼈에 박혔는지 멈춰버린다. 발을 빈스의 배에다 대고 힘주어 뽑는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어렸다. “으아악!” 뻑! 하는 소음과 함께 검이 뽑히자 비명을 지른 그가 바닥을 굴렀다. 극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던 것. 그녀는 검 끝을 마크의 눈동자에 가져다 댔다. “누가 시켰느냐”“ “어......어......어.” 혼이 반쯤은 나간 마크가 오줌까지 지려대며 버벅 거렸다. “아직 모자랐나”“ 황녀의 성격이 모가 났다고는 하나 지고한 신분이다. 당연히 고문과는 거리가 멀 터. 심문을 처음 해보는 그녀는 완급조절을 할 줄 몰랐다. 조금의 시간을 주면 저절로 불일을 더욱 더 압력을 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황녀의 행동을 저지시키려다 말을 삼켰다. 오늘은 더럽게도 재수 없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 한참 열을 내는 그녀를 말렸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던 것이다. 싱긋 웃은 그녀의 검이 이번에는 빈스의 오른발을 노렸다. 입을 앙다물고 양손으로 그립을 움켜쥔 그녀가 숨을 골랐다. “이얍!” 이번에는 제법 기합까지 넣고서 힘껏 내려쳤다. 퍽! “으악!” 무정한 검이 정강이뼈를 절반이나 파고들자 기절한 빈스가 비명을 지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 순간 꿇어앉아있던 몇몇 수행원들의 눈에 긴장이 떠올랐다. 그 긴장은 눈을 끔뻑거리는 것으로 금세 없어져 버렸다. “어때, 이제 말할 기분이 나나”“ 검을 뽑은 그녀가 이번에는 배를 찔렀다. 푹! 창자를 절단하고 들어간 검이 척추 깊숙이 박혔다. “공자님!” 빈스와 마크의 수행원들이 비통한 울음을 토했다. 그 중 두 명이 벌떡 일어나 황녀에게로 달려들었다. 놀란 드레이크가 검집을 더듬다 아차 했다. 검은 황녀에게 넘겼던 것이다. 에릭슨은 몇 번의 실수로 경각심이 크게 높아져 있었다. 황녀의 손속에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그의 눈은 그녀의 주변을 시종일관 떠나지 않았다. 그가 달려드는 자를 향해 검을 던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에이단의 검을 빼앗아들고 다시 한 번 던졌다. 휭! 날을 꼿꼿이 세우고 날아간 검이 한 놈의 등짝에 박혀들었다. “컥!” 피거품을 토하며 한 놈이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터져 나온 비명. “으악!” 그러나 비명을 지른 자는 목표했던 자가 아니었다. 달려가던 한 놈이 돌연 진로를 수정 황녀를 돌아 마크의 앞을 막아 선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빗나간 검은 애꿎은 부하의 가슴을 헤집어 버렸다. 마크의 오른 팔을 치켜든 그가 고함을 질렀다. “제발 공자님을 살려주십시오.” “미친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연거푸 놀랄 일을 겪다보니 감정이 격앙된 황녀가 욕설을 내뱉었다. 애원하는 눈빛을 보낸 그에게 황녀가 돌려보낸 것은 경멸과 살기였다. “더러운 년!” 발작적인 고함을 지른 그가 황녀를 노려보았다. “같이 죽자!” 빈스의 수행원은 마크의 오른팔을 힘껏 비틀었다. “안돼!” “막아!” 에릭슨백작과 아테보로자작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졌다. 마크의 오른팔! 그 비틀린 의수에서 쿼렐과 강침, 온갖 종류의 표창들이 튀어나왔다. 너무 가까운 거리, 게다가 쏘아진 암기들의 속도도 무시무시했다. 쌔애액! 공기를 찢는 폭음은 에릭슨와 아테보로의 심정도 함께 찢었다. “악!”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가는 황녀! 에릭슨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황녀의 전신을 물들이고 있는 쿼렐과 표창이 승마복에 붙은 장신구 같이 느껴졌다. 강침은 끝까지 파고들어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시퍼렇게 변하는 혈색! 극독까지 발려진 듯하다. 이 상태라면 어떤 치료도 먹히지 않을 터. 공황상태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드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찬란한 미래는 사산이 부서지고 이제는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다. 이게다 저 개자식! 에릭슨 때문이다. 원망과 비통함이 그의 심장을 달구었다. 아테보로는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온갖 암기를 얻어맞고 피를 뿌리며 넘어가는 황녀의 움직임은 뭍에 올라온 거북이 보다 느려 보인다. 비현실적인 느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를 경악성이 건져 올린다. “악!” “헉!” “으아!”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경악에 찬 고함이 그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 느려진 시간은 갑자기 빨라졌다.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치료하라!”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제리였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치료마법을 걸었다. 그러나 절망에 물든 그의 얼굴에서 황녀의 상태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절명해 있었다. 그런데도 제리는 계속해서 마법을 걸었다. 지쳐서 죽을 것 같을 데도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에이단의 핏발선 눈이 황녀를 죽인 수행원과 마크에게 박혔다. 수행원도 느낀 모양! 그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공자님! 고문을 받다 비참하게 죽느니 지금 죽읍시다.” “막아!” 정신을 차린 에릭슨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신 나간 마크를 붙잡고 있는 수행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는 마크를 꼭 끌어안은 채 그의 경동맥을 물어뜯었다. 이날을 위해 한 달 동안 갈아놓은 송곳니는 주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한 웅큼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마크의 목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솟구쳤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맞으며 그는 독아를 깨물었다. 역겨운 독이 입안 가득 퍼지자 마크의 혈관 속으로 뿜어대며 그 일부를 자신도 마셨다. 그리고는 그를 깍지 낀 채 오른 손의 반지를 돌려 침을 뽑아내서는 힘껏 찔러버렸다. “됐다!” 검어지는 수행원의 얼굴에 해냈다는 성취감이 떠올랐다. “제리!” 쓰러지는 둘을 붙잡은 에릭슨이 마법사를 불렀다. 그러나 허사였다. 모든 힘을 황녀에게 소진한 제리는 어떤 의료행위도 불가능했다. 아테보로자작은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처럼 돌아가는 상황을 되새기며 머리를 짚었다. 그의 뇌리에 앞으로의 사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제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욕망을 실은 죽음의 수레바퀴가. 부상을 회복하고 어느 정도 거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나흘이었다. 그리고 싸울만한 몸을 만드는데 다시 나흘이 흘렀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유적에 들어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 용아병 때문에 치룬 곤욕이 경각심을 크게 높인 것이다. 듀마는 하이론의 치료마법과 의술을 보고 적이 감탄했다. 그 쪽 방면으로만 따진다면 6써클 마스터인 자신보다 훨씬 고명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이론! 이제야 생각나는군. 발자크의 제자였지”“ “그렇소.” 하이론은 스승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듣고 싶지도 않았다. 불퉁하게 대답한 그는 지평선 위로 떠오른 해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량도 떨어져가고. 이제 그만 움직입시다.” 카이어스도 한 자리에만 있자니 좀이 쑤셨다. “그게 좋겠다.” 짐을 챙겨 일어선 일행들은 천천히 전진했다. 밤의 기온저하로 뼈마디가 쑤신 프로스크는 팔을 비비며 햇살을 즐겼다. 유적지라고 별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입구라 짐작되는 대형 기둥을 제외한다면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모래뿐. 자연히 규모를 짐작할 수도 없었고, 가는 방향이 올바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을 움직여도 보이는 것이 모래밖에 없자 무슨 함정이라도 튀어나왔으면 하는 생각까지 떠오른다. “낙타를 끌고 올걸 그랬나”“ 하이론은 힘들어하는 프로스크를 보며 기둥에 묶어두고 들어온 낙타를 떠올렸다. “기둥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죽으면 귀로(歸路)가 힘들어 진다.” 카이어스가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난 괜찮소.” 프로스크는 왠지 짐이 되는 기분이라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이어스는 그런 그를 향해 말을 건넸다. “대륙최고의 현자, 하나 물어보자.” 프로스크는 대뜸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현자라는 말은 마법사, 그 중에서도 오랜 경륜으로 학식이 풍부한 노마법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최고의 치료마법을 자랑하는 하이론은 물론 엘리오트왕국 수석 마법사까지 지낸 듀마의 면전에서 듣기에는 거북살스러운 말이었다. 자신이 한 말이기는 하지만 카이어스의 입에서 나오자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카이어스가 질문을 한다. “사람들 이빨은 몇 개냐”“ 질문의 내용이 또한 엉뚱하다. 프로스크는 이 놈이 정말로 놀리는 것인가 하여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가만히 있자 카이어스가 재차 질문을 해댔다. “왜 모르나”“ “모르긴 왜 몰라! 워낙 엉뚱한 질문이라 그렇지.” 빽 고함을 지른 그가 말을 이었다. “보통 스물여덟 개에서 서른 두개 사이다.” “엘프들 보다 작군.” “엘프들은 몇 개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듀마가 무료하던 참이라 끼어들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보통 서른다섯 개에서 사십 개 사이다.” “왜 이빨 수가 차이가 나지”“ 하이론도 참견하고 나섰다. 인간하고 치아수가 차이 나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프로스크는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오자 적이 기뻤다. “엘프는 풀만 먹고 사니까 치아 수가 많은 걸 거요.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보다 이빨 수가 많거든. 아마 어금니 숫자가 인간들보다 많을 거요.” “그럴 수도 있겠군.” 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스크는 알았냐는 표정으로 카이어스를 봤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카이어스가 알고 싶은 것은 인간들의 치아 숫자가 아니었다. “드래곤은 어때”“ “무슨 소립니까”“ 난데없이 드래곤이 나오자 엘란이 되물었다. “인간들도 그렇고 엘프도 그렇고 이빨이 삼십 개는 되지. 다른 짐승이나 오크들도 그 정도는 될 테고.” “그래서요”“ “그럼 드래곤도 그럴 것 아닌가” 아니지, 입이 우리보다 백배, 천배를 클 테니 이빨 수도 엄청나겠지. 이백 개” 삼백 개” 오백 개”“ “묻고 싶은 게 뭡니까”“ 엘란이 말을 끊고 질문했다. “우리가 만난 용아병들 말이야, 왜 열 명이지” 그 많은 이빨은 어떻게 하고” 게다가 이빨이 있으면 뼈다귀도 있을 가능성이 높잖아” 안 그래”“ 주춤! 그의 질문이 모두의 발길을 붙잡아 버렸다. 짠 것처럼 한 순간 멈춰 서는 모양이 듀마가 바인딩 마법을 시전 한 것 같았다. “그렇구만.” 하이론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어스의 지적은 모두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열 명의 용아병으로도 죽을 고생을 했는데 나머지 이빨이 용아병으로 변한다면” 만약 드래곤 본까지 설친다면” “용아병을 만든 존재한테 이빨이 열개밖에 없었을 수도 있지. 안 그렇소”“ 프로스크는 그럴 리 없다는, 아니 없어야 한다는 표정이다. 하이론드 슬쩍 맞장구를 쳤다. “그럴 거야! 만약 드래곤 본체가 있다면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지. 이렇게나 깊숙이 들어왔는데. 그렇지”“ 모두에게 한 반문은 곧 대답을 받았다. 다른 존재에게서. 드드드드! 돌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 불길한 소리는 점차 커지고 또렷해진다.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뒤로 전진하는 게 어떨까”“ 프로스크는 반쯤 몸을 돌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도망가기를 권했다. 거절하면 자기 혼자라도 도망갈 태세였다. “늦은 것 같습니다.” 엘란은 뒤로 물러나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소리는 자신들의 발치, 그 밑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굵은 마찰음. 그 마찰음에 따라 자욱하게 일어나는 모래먼지. “일단 갈 때까지 가보자.” “어어!” 카이어스는 뒤로 물러나 프로스크의 목덜미를 납작 들어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헤이스트!” 하이론과 듀마도 두 다리에 마법을 걸어 달리기 시작했다. 트트트!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엘란은 천천히 물러나며 들썩거리는 모래를 주시했다. 용아병들이 나오기에는 들썩이는 모래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롬바르드에서 막일을 할 때 보았던 어느 귀족가의 연무장 보다 더 넓은 지역이 몸살을 앓았다. 모래의 들썩거림은 점차 심해지더니 종래에는 진동을 시작했다. 푸푸푸! 풀무질 소리가 들려오고 모래가 자욱하게 떠올랐다. 일미터 이미터를 넘어 삼미터에 육박하자 엘란도 시선을 앞에 둔 채 뒤로 달리기를 했다. 유적을 탐사하려면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물. 결국은 싸워야 할 상대이니 무엇이 튀어 나오는 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팡! 콱 막혔던 것이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솟구치던 모래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확산되는 모래의 습격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온통 바깥으로 밀려나는 모래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모래폭풍도 이렇게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밖으로 멀어질수록 모래의 길이가 높아져 나중에는 30미터도 넘는 것 같았다. 그 모래가 덮쳐오는 맹렬한 기세에 엘란의 몸이 금방이라도 삼켜질 듯 했다. 태풍에 휩싸인 일엽편주가 이러할까.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던 하이론은 궁금증이 치밀어 슬쩍 뒤돌아보고는 위태로운 엘란을 발견했다. 멈추어 선 그가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빨리 도망쳐!” 그의 고함은 카이어스와 듀마의 발길도 잡았다. 미치듯이 달리던 그들은 동시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모래가 왕관모양으로 솟구쳐 퍼지는 모양은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래 사이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는 하얀 물체. 모래에게 기어이 따라잡힌 엘란은 침착한 태도로 슈리엘을 불렀다. 바람의 정령은 덮쳐오는 모래에 대항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밀려나며 계약자를 보호한다. “대단한 폭풍이네”“ 엘란은 슈리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가라앉는 모래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오른 하얀 물체에 온통 정신을 뺏긴 때문이다. 보통 때였다면 질문을 무시했다고 타박을 했을 슈리엘도 오늘은 조용했다. 그녀도 본 것이다. 태양광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순백의 뼈!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스켈레톤. 어느새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밀려난 엘란이 신음을 내뱉었다. “드래곤이 나타난 것은 삼백년 만이군.” 비록 뼈뿐이긴 했으나 드래곤은 특유의 위압감은 뿜어냈다. “살아있었다면 윔급은 되겠어.” 듀마는 다급함도 잊어버리고 순수한 마법사적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이론과 프로스크도 그의 감정과 비슷했다. 다른 엘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이어스도 카나이폴런의 만행에는 타 엘프와 마찬가지로 치는 떨었고 당연히 드래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가 강한 적개심을 뿜어낼 때 엘란도 보조를 맞추어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듀마가 말했다. “용아병 만든 놈이 아니라 딴 놈이 만들었나보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카이어스가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넘어야할 장애물. 엘란의 생각은 한가지였다. 저 놈을 어떻게 처치하지” 쭉 뻗은 콧잔등부터 푹 퍼진 골반까지는 100미터도 넘었다. 길게 늘어진 꼬리뼈까지 친다면 150미터도 넘는 거대한 체구다. 척추뼈에서 아래로 늘어진 굵은 갈비뼈와 거대한 몸뚱이를 받치는 다리뼈들도 튼튼해 보인다. 척추에서 뻗은 삐쭉한 날개뼈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어디를 공격하죠”“ 엘란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카이어스에게 물었다. 가장 곤란한 부분이었다. 워낙 크다보니 어디를 공격해야 효과적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와 살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용아병들처럼 머리를 부수거나 목을 잘라버리면 되지 않을까”“ 내장도 없고 응당 심장도 없으니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근 50미터 위에 떠 있는 머리였다. 위치도 위치지만 투박한 두개골을 보자면 부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도 마찬가지. 자연계에 있는 것 중 가장 단단하다는 드래곤 본이다. 목의 굵기도 1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니 자르기도 만만찮을 것이다. 오러를 뿜어서 한 자리를 계속 찍어야 할 텐데 드래곤이 넋 놓고 앉아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그냥 드래곤을 잡는 게 쉽겠다.” 카이어스는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듀마가 반박했다. “그건 아니오. 드래곤은 마법생물! 저것이 살아있다면 무엇보다도 그 강대한 마법을 상대해야 하고 브레스라도 뿜어댄다면 대책이 없으니 지성이 없는 지금 상태가 그래도 할만하오.” 하이론과 프로스크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하긴 살아있다면 비늘 뚫기도 힘들겠지.” 카이어스도 답답해서 한 소리지 살아있는 것이 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 안 움직일까”“ 프로스크는 의문이 들었다. 사막을 뒤집으며 기세 좋게 등장하더니 가만히 앉아만 있다. 자신 같으면 그 소란이 부끄러워서라도 움직일 터. “너무 오래 되서 작동이 멈춘 건 아닐까”“ 하이론이 바램을 실어 말했다. “그건 아닐 거요. 용아병도 움직였는데 드래곤 본이 낡았을 리가 없지.” 듀마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가까이 가지 않는다면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뭔가를 지키는 모양이야.” 프로스크가 힘주어 말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이쯤에서 지도의 보물을 포기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포두핌의 지도는 프로스크가 생각하는 금은보화를 부장하고 있는 곳이 아니었고 살 곳이 필요했던 엘란과 하이론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여기는 카이어스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 뻔한 둘을 두고 혼자만 도망칠 순 없었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은 듀마를 향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 “드래곤이 뭘 지키는 지 궁금하군요.” 싸우겠다는 소리였다. “그럼 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카이어스가 먼저 뛰쳐나갔다. 보폭이 좁은 것이 보통 때 보다는 신중한 모습이다. “가요!” 엘란은 슈리엘을 허공에 띄운 채 자신의 다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카이어스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탄할 만한 빠르기였다. “싸우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피해가 날지 모르니 좀더 물러서는 게 좋겠소.” 하이론은 프로스크에게 더 떨어지기를 충고하고 드래곤을 향해 움직였다. 드래곤을 쳐다보고 있자면 용아병때와는 다르게 자신도 거들어야겠다고 생각이 무럭무럭 솟구친다. 듀마도 달려 나가자 혼자 남은 프로스크는 뒤로 물러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산이 없었다. 저들이 모두 죽으면 자신 혼자서는 이 삭막한 곳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모래에 묻히거나 카그스의 배속에 들어갈 터. 온 천지를 뒤덮던 벌레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젠장, 이런 데서 죽고 싶지는 않아, 아직 내 능력엘란(96) 그것으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황녀는 종아리가 기막히게 빠진 흑마위에 올라타고서 마크와 빈스를 불렀다. “이리 와서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보라.” 아테보로자작은 일단 둘을 따로 불러 황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강한 경고성 충고를 던진 후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윽고 사절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크와 빈스는 언짢은 기색으로 황녀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의 사건은 둘의 신체와 함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할 수만 있다면 도려내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애써 웃으며 털어놓는 경험담은 주변의 귀를 쫑긋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시중에서 소문으로만 접하던 사건의 진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때문이다. 그 만큼 엘란의 명성이 높았고 사건이 던진 파문도 컸다. 에릭슨백작은 마크와 빈스의 동행들을 맨 끝으로 보내버렸다. 마차에서 내린 황녀의 안전을 염려한 행위였다. 간간히 황녀의 호통이 터지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행렬은 대체로 평안했다. 행렬은 완만한 구릉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부근만 지나가면 산들은 급격히 높아져서 종내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웅장한 산들이 모습 을 드러낸다. 두 나라의 국경을 형성하는 융커산맥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두에서 황가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버만은 폭포수같이 쏟아졌던 황녀의 욕설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 지 욕설도 다양하고 신랄했다. 개중 태반은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독창성이 뛰어났으니, 궁중예절로 욕설을 가르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 정도였다. 노점에서 빵을 파는 욕쟁이 할멈도 저기에 대면 어린아이 수준이리라. 황녀와 비교하자 다소곳한 자신의 아내가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인물이야 떨어지지만 푸근한 성품이 얼마나 편안함을 선사하는지. 아내 와 두고 온 자식생각이 나자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박차를 가한 모양이었다. 별안간 히히힝! 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말이 푹 고꾸라졌다. “헉!” 기분 좋은 상념은 일순간 사라져 버리고 그의 몸은 타의에 의해 급격하게 이동했다. 말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히힝!” 구슬픈 말의 울음 뒤로 격렬한 통증이 따라왔다. 경악으로 부릅뜬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인지한 장면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50센지 가 량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뒤를 떼밀린 기사들과 병사들이 줄줄이 함정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을 반기는 것은 독을 칠해 퍼렇게 번뜩이는 송곳. 에이단은 말이 고꾸라지는 순간 재빨리 움직였다. 안장을 꽉 움켜쥐고 머리를 뒤로 빼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후 발걸이의 발을 뽑아냈다. 푹! 말의 다리와 몸통을 송곳이 유린하는 동안 그는 안장위에 올라서서 겨우 중심을 잡았다. 머리가 삐죽 설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뒤에서 밀려 떨어진 뭔가가 말을 건드렸다. 삐끗 중심이 흐트러진 그가 안장에서 떨어지며 방패를 던졌다. 그리고는 방패위로 몸을 날렸다. 가가가! 송곳 다발위에 올려진 방패가 쇳소리를 울렸다. 다행히 방패는 튼튼해서 그의 몸무게를 지탱해냈다. “정지! 황녀를 보호하라!” 말의 울음과 선두의 소란을 느낀 순간, 에릭슨백작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양국의 기사들이 황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섰다. “드레이크!” 다신 터진 백작의 고함. 말이 엉키자 움직이기 힘들어진 드레이크는 잽싸게 뛰어내려 선두를 향해 달렸다. “이건 또 뭔가” 도대체 무슨 일이지”“ 황녀나 백작의 눈에 띄어 출세할 열망에 넘치던 그는 계속 이어지는 사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출세는커녕 현상유지만 해도 다행이 라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했다. “이게 다 얼간이 백작 때문이다.” 호위책임자가 저런 벽창호인줄 알았다면 절대로 따라오지 않았을 터. 원망이 사무쳐 살기까지 치솟았다. 차라리 이패이시스라인 쪽으로 가는 건데, 하는 때늦은 후회만이 가슴을 때렸다. 그런 생각은 이내 훈족에 대한 저주로 발전했다. 그들이 국경에 군대를 전진배치 하는 바 람에 비상이 걸렸고, 유능한 기사들이 전원출동대기에 들어가는 통에 에릭슨백작과 자신이 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단내가 날 정도로 빠르게 뛴 그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함정과 송곳, 그리고 꼬치 꿰이듯 꿰여있는 가시들과 병사들의 시신이었다. 함정에 떨어진 사람 중에 살아있는 것은 한 명 뿐. 방패에 올라서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기사. “지독하군.” 날카롭게 갈려있는 송곳의 독은 정말로 지독했다. 함정에 빠진 것은 사람이고 말이고 모조리 죽어있었다. “무슨 일이냐”“ 황녀의 찢어지는 호통이 그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함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대답한 그는 날듯이 돌아와 황녀의 앞을 막아섰다. 애초의 목적-황녀의 눈에 들어 출세하는 것-을 이루 기 위해서. “수색!” 아테보로의입에서 교본에 충실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 순간 붉은 도끼단의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검을 뽑아든 채 황녀 를 중심으로 넓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퍼져나갔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자리를 잡은 그들은 검으로 땅을 찔렀다. 푹, 푹, 푹. 매복이나 함정 유무를 알아내려 땅바닥을 쑤시는 동작은 절도 있고 신속했다. 그 덕에 주변의 구릉은 순식간에 헤집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넓어지는 수색범위. 챙! 잠시 후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저릿한 느낌이 검을 타고 올라왔다. 사람의 뼈와 살을 가를 때 느껴지는 감각. “매복이 있습니다.” 고함과 더불어 기사들의 동작이 더욱 빨라졌고 내뻗는 검에도 힘이 실렸다. 동시에 아테보로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떤 미친놈들이 황녀일행을 공격한단 말인가”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이 짜증과 함께 신경을 건드린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죠.” 에릭슨백작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들어가기를 권유했으나 황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지 대꾸도 없이 말을 씹는다. 황녀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양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철통같이 방어하는 데 누가 뚫을 수 있을까”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까지 떠오른다. 바닥에 누워있던 닉은 천천히 손목을 움직였다. 몸을 풀어주지 않으면 움직임이 경직되어 싸울 때 힘들어진다. 그는 자신의 얼굴위로 내려오는 검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적의 검은 깊게 판 굴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의 반응. 대장의 계획 은 한 치의 이지러짐도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신호를 기다렸다. 닉의 생각대로 계획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과 현실이 완벽하게 맞아떨 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의 반응이 예상을 벗아 날 수도 있고, 계획을 세운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간의 호흡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후자였다. 검의 길이를 짐작해 굴을 깊게 파라는 명령은 몇몇 게으른 길드원들에게 무시되었고 그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했다. 자신의 목숨으로. 버드는 뼈와 살을 가르는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남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면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우쭐한 감정이 들었다. 검이 전해주는 짜릿한 느낌! “또 한 놈 죽었구나.” 앞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땅속에 숨은 놈들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데 대한 의문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서 한 놈이 라도 더 죽이고 싶었다. “정지! 방패!” 귓전을 때리는 경고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섬뜩한 통증이 느껴진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 급히 고개를 숙이자 가슴 밖으로 비쭉이 나와 있는 깃털이 보인다. 생소한 감정이 그를 찾아왔다. 죽음의 공포! 자신은 절대 느끼지 않을 줄 알았던 감정. 입에서 쏟아지는 피거품과 함께 겁에 질린 눈동자가 하늘을 찾았다.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가을 하늘을 뻘건 불덩이가 가르고 있었다. 쾅! 불덩이는 기사들이 운집한 곳을 직격했다. 그러나 멀리서 날아오는 공격을 한다하는 기사들이 순순히 당해줄리 만무. 재빨리 몸을 날린 기 사들이 즉시 대오를 정리하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괴한들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석궁!” 아테보로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석궁을 들고 쿼렐을 장전하는 병사의 손은 여유가 있었다. 고된 훈련의 결과였다. 두두두두! 말을 탄 괴한들은 질풍처럼 달렸다. 두 집단간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싹! 괴한들이 일사분란하게 바스타드소드를 꺼내들었다. 왼손으로 고삐를 채고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그들을 향해 에테보로자작의 냉정한 일갈이 터졌다. “쏴라!” 쐐애액~! 석궁을 떠난 쿼렐이 괴한을 향해 독니를 들이밀었다. 퍽! 동시에 날아오는 쿼렐을 다 피하지 못한 괴한이 한쪽 눈에 화살을 박고 축 늘어졌다. 옆으로 고꾸라지던 그의 몸이 바닥에 닿은 채 질질 끌 려갔다. 발걸이에서 발이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말은 기수가 죽은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렸다. 흉흉한 살기가 말까지 미치게 만들었다. 십여 명의 괴한들을 꼬치 꿰듯 꿰어버린 사수병은 다시 한 번 쿼렐을 장전한다. 그리고는 명령을 받지 않고 곧바로 쏘아댔다. 다시 한 대 먹여준 병사들은 석궁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탓이다. 최초의 조우는 검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휘이잉! 커다란 불덩이가 사수병 밀집대형에 떨어졌다. “크아아!”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마법의 불은 잘 꺼지지 않았고 금방 초원에 옮겨 붙었다. 바싹 마른 풀은 곧바로 타올랐으나 듬성듬성 돋아난 바람에 곧 꺼지고 말았다. 폭풍처럼 밀어 닫친 괴한들은 달려온 기세 그대로 창을 세운 병사를 향해 밀려들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광폭한 기세였다. “히히힝!” 창에 찔린 말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간다. 말에서 몸을 날린 괴한들은 창의 숲에 관통되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어 자빠졌다. 그 뒤를 다른 괴한들이 메웠다. 창은 이내 꺾여지고 일차 저지선은 무너져버렸다. “죽어라!” 절규 같은 호통과 함께 바스타드소드가 창을 동강냈다. 그 여세를 몰아 휘둘러진 검에 어린 병사의 목이 걸렸다. 무정한 검은 겁에 질린 눈 을 외면했다. 서걱! 목을 쳐 버린 검이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 휘둘러졌다. 치열한 백병전. 미쳐 날뛰는 괴한들의 검도 두터운 인의 장막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훈련 잘된 병사들은 뒤로 밀리면서도 길을 내어주 진 않았다. 의외의 사태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아테보로자작은 오른손을 들어 힘껏 앞으로 뻗었다.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초원을 울리고 마차를 둘러쌌던 붉은 도끼단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밀려드는 파도처럼 혹은 은은 한 바람처럼 말을 몰았다. 대형을 벌려 공간을 내주는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다. 이제 기사들이 적을 섬멸할 것이다. 적들에게 다가간 기사들의 검이 춤추듯 움직였다. 미려한 원을 그리는 검은 떨어져 내리는 순간 거력을 품었다. 쩡쩡쩡! 날카로운 금속음이 대기를 울렸다. 가가각! 바스타드소드를 훑어 내린 검은 팔목을 자르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입으로 박혀들었다.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뽑아 다시 휘두른다. 검 날에 묻은 피가 검 끝으로 몰리더니 허공으로 비산한다. 꽈직! 피를 흩뿌리는 검은 또 다른 적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무인지경. 붉은 도끼단은 양떼 속에 뛰어든 승냥이 마냥 적들을 도륙했다. 대열의 끝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로드리게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붉은 도끼단의 실력은 상상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 부하들은 대체가능한 소모품일 뿐. 그는 덧없이 죽어가는 부하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의지를 다졌다. 조용히 주문을 영창하며 수인을 맺자 그의 머리위에 둥실 불덩이가 떠 올랐다. 아테보로자작은 거대한 파이어 볼을 만들어내는 적의 수괴를 찬찬히 쏘아보았다. 갈색머리의 사십대 장한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 한 인상이었다. 허리에 매달린 검을 보면 검사라는 얘긴데. “오랜만에 보는 마법검사군.” 검과 마법, 둘 중 한 가지만 익혀도 극의에 다다르기는 지난한 일. 적의 수괴는 특이하게도 마법과 검을 동시에 익힌 것으로 보였다. 자작이 노려보는 와중에도 불덩이는 점점 크기를 더했다. 자작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가라!” 로드리게의 입에서 고성이 터지고 불덩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불덩이는 차츰 속도를 더하더니 나중에는 빛살처럼 빨 라졌다. 그와 동시에 자작의 몸이 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먹이를 사냥하는 솔개처럼 급격히 상승한 그의 몸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 고 아래로 떨어졌다. 콰직! 적병의 머리를 뭉개는 것으로 재차 도약한 그의 검에 푸르른 마나가 어렸다. 휭!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는 불덩이는 떨어지는 태양 같았다. 양손으로 그립을 꽉 움켜쥔 그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불덩이를 쪼개갔다. 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태양이 잘라졌다. 두 조각난 불덩이는 초원을 태워버릴 것 같던 기세를 잃고 스러져갔다. 그런 그를 향해 또 하나의 불덩이가 다가갔다. 그가 도약하는 순간 로드리게가 새로운 파이어볼을 준비한 것이다. 에릭슨백작은 감탄하는 시선으로 에테보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깔끔해서 군더더기 같은 동작은 하나도 없었다. 특 히 적병의 머리를 짓뭉개는 것으로 도약력을 얻는 동작은 단호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쓸데없이 대련을 벌이다 궁지에 몰린 처지도 잊어버리고 일이 끝나면 검을 섞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생각을 숨길 줄 몰랐다. 황녀를 등진 채 그의 옆에 붙어 있던 드레이크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리고 또 다시 대련을 하려 하다니. 에릭슨 백작의 얼굴을 쏘아본 드레이크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전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잠시 후면 한 낮의 막간극은 종막을 고할 터.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아테보로의 움직임을 쫓았다. 자작은 날아오는 불덩이를 상대하지 않았다. 마나를 밑으로 보내 중심점을 아래로 만들자 그의 몸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휘잉! 머리 위로 불덩이를 넘겨버린 그가 땅을 박찼다. 탁탁탁! 땅을 내지를 때마다 점점 빨라지는 신형이 쏘아진 화살 같다. 그런 아테보로의 눈에 놀란 로드리게의 얼굴이 잡혔다. 한편, 자작을 넘어간 불덩이는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좋아!” 에릭슨백작의 입에서 호기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도 말 등을 박찼다. 아테보로가 솔개 같다면 그는 한 마리 곰을 연상시 켰다. 사납고 민첩한. 높이 떠오른 그의 장대한 체구가 아래로 떨어진다. 백작의 날카로운 눈이 발 디딜 곳을 찾아 앞을 훑었다. 병사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붉은 머리 괴한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병사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왜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서는 것일까” 그것도 유리한 싸움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적병의 눈을 노려보던 붉은 머리의 눈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적의 눈동자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 다. 그것이 장대한 체구의 기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이런!” 목표했던 붉은 머리가 갑자기 내빼버리자 백작의 몸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젠장!” 열이 받은 그의 검이 도망치는 붉은 머리의 뒤통수를 쪼갰다. 에릭슨을 지나친 불덩이는 황녀를 에워싼 스트빌라이 기사단의 앞에 떨어졌다. 쾅! 거대한 불덩이가 폭발하며 땅이 진동했다. 그 순간 땅 속에 숨어있던 길드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신호를 접한 닉의 손이 고리를 잡았다. 힘껏 당기자 교묘히 장치된 굴이 무너지고 발치에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을 따라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백작님!” 드레이크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이 발해졌다. “뭐야!” 돌아선 백작의 눈에 솟구치는 암살단이 잡혔다. 그에게는 악몽 같은 날이었다. 자신들의 발치에 암살단이 숨어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그의 미간에 다급함이 서렸다. 몸집이 작은 매복자들은 땅개같이 단단하고 재빨랐다. 퍽! 제일 가까운 곳에서 튀어나온 암살자가 드레이크가 탄 말의 다리를 찍어버렸다. 황녀에게로 가는 길을 열려는 의도였다. 말이 구슬픈 울음 을 토하고 넘어가는 순간 드레이크가 몸을 날렸다. 콱! 떨어진 기세 그대로 암살단의 어깨를 짓밟아 버린 그가 검을 다리 밑으로 찔러 적의 등을 뚫어버렸다. 어깨를 박차고 한 바퀴 돌아 내려선 그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습격자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스트빌라이 가사들은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암습자를 막아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작고 재빠른 데다 목숨을 돌보지 않는 악착스러움이 있었다. 챙! 아테보로는 말 위에서 휘둘러지는 로드리게의 검을 막아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땅에서 솟구친 적들이 의외이긴 했으나, 스트빌라이나 엘리오트의 기사들이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황녀의 목전까지 암살자가 접근했다는 것은 외교적 결례는 물론 그들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다. 감정이 격해지자 찔러가는 그의 검이 매서워졌다. 그에 따라 로드리게의 검도 바빠졌다. 아테보로자작은 적장의 허벅지를 찔러갔다. 로드리게는 허벅지로 쇄도하는 검을 쳐내려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접전에서는 이 기사를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입을 앙다문 그가 허벅지를 노리는 검을 무시했다. 행선지는 적의 미간! 오른 팔에 질끈 힘이 들어가고 쭉 뻗은 검 끝에 마나가 맺혔다. 찔러볼 테면 찔러봐라! 아테보로는 미간으로 다가서는 서릿발 같은 기운을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온 힘을 실어 허벅지를 쳐버렸다. 퍽! 화끈한 통증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로드리게의 뇌를 뒤흔든다. 예상 이상의 고통. 저절로 벌어진 입에서 힘이 새어나갔다. 그 바람에 검 에 실린 기세가 약해졌고 아테보로의 미간을 노린 검은 관자놀이를 찢어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명백한 손해! 다리를 절단해버린 아테보로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말의 옆구리 깊숙이 검이 박혔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이 옆으로 넘어가 버린 다. 콰직! 로드리게의 성한 왼발마저 말에 깔려 버렸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놓았다. 함정에서 겨우 빠져나온 에이단은 몰려드는 땅개들을 향해 분노의 검을 날렸다. 독을 발라 시퍼렇게 빛나던 송곳은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 고, 죽을 뻔한 위기가 그의 살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내지르는 검에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올올이 맺혔다. 암살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기사들을 물고 늘어졌고 그 바람에 기사들도 하나, 둘 죽어 나갔다. 닉은 동료들의 등 뒤에 묻혀 교묘하게 움직였다. 동료가 목숨을 담보로 기사의 검을 붙들고 늘어지면 어느 틈에 다가간 그가 기사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는 착실하게 황녀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에 필사의 의지가 묻어났다. 에릭슨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암살자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네다섯 명씩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황녀 곁으로 다가갈 엄두가 나 지 않았다. 그것은 엘리오트의 붉은 도끼단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습격한 자들의 목숨을 착실하게 끊어주다 보니 황녀와 멀어졌고 돌 아가려니 그들이 발목을 잡았다. 앞길을 막는 땅개들도 한몫했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놈들이 땅 속에 있었던가! 드레이크는 이를 갈았다. 땅속에서 기어 나오는 놈들은 끝이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밀려드는 통에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얼씨구!” 드레이크는 뼈에 박힌 검을 억지로 빼내며 헛웃음을 날렸다. 작달막한 땅개들이 정리되어 가자 이제는 뚱보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하늘 높 을 줄은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았는지 옆으로 퍼진 몸매가 하마를 연상시켰다. 닉은 마지막 승부수가 땅 속에서 나오자 옆구리에 검을 끼우고 죽은 것처럼 엎드렸다. 그러면서도 천천히 기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간혹 자신을 밟아대는 발도 무시한 채였다. 뚱보들이 다가오자 기사들이 대형을 밀집시켰다. 뚱보들 뒤로는 암살단의 저지를 돌파한 붉은 도끼단과 에릭슨백작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끝이군.” 가늘게 말려 올라간 드레이크의 눈에 옷을 벗는 뚱보들이 보였다. “......!” “뭐야”“ 다가오는 암습자들은 뚱보가 아니었다. 몸 전체에 매달린 연통이 그러한 오해를 불렀을 뿐. 선두의 뚱보가 옆구리에 달린 끈을 당겼다. 슝슝슝! 연통에서 강침이 튀어나왔다. 미처 대비 못한 기사는 얼굴에 강침을 꼽고 고슴도치처럼 변해갔다. 쐐액! 어떤 자에게서는 쿼렐이, 어떤 자에게서는 매캐한 독연이 뿜어졌다. 개 중 지독한 자는 기름을 뿜어대고 불을 붙여서는 그대로 돌진했다. 쾅! 그는 기사를 붙잡은 채 깍지를 끼었다. 열기에 몸부림치는 기사의 움직임이 잠잠 해 질 때 그도 숨을 거두었다. 온갖 암기와 독들이 인접한 거리에서 한꺼번에 쏟아지자 수십 명의 기사들이 죽어 나갔다. “포이즌 큐어!” 기사로 위장한 마법사가 정화 마법을 걸었다. 요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치료마법 같은 특수한 마법만 익힌 자였다. 독이 해결되자 기사들 은 거칠 것이 없었다. 뚱보들의 일격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그 뿐. 최초의 혼란이 수습되자 연통속의 모든 것을 소진한 뚱보들은 기사들의 분풀이 감, 그 이 상은 아니었다. 연이은 비명과 피가 초원을 물들였다. 닉은 한 번의 혼란으로 충분했다. 기사들의 대형을 은밀하게 돌파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위장 뚱보들의 등을 저며가던 에릭슨의 눈에 경 악이 어렸다. 정신을 잃은 적의 수괴를 질질 끌고 오던 아테보로의 눈도 마찬가지. 신나게 분풀이를 하던 드레이크와 에이단도 역시 그러 했다. 최종 호위병의 검을 살짝 쳐내며 들어간 닉이 땅을 박차자 그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용수철같이 튀어 오른 닉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향 하자 오만하던 황녀의 얼굴에도 공포가 서렸다. 바로 그때! 몸을 날린 빈스 마너크의 팔이 검을 막아냈다. 쩡! 금속음과 함께 팔을 절단한 닉의 얼굴에 배신감이 떠올랐다. “이 개자식.......컥!” 그의 고성은 등을 삐져나온 에릭슨백작의 검과 뿜어지는 피거품으로 인해 끊어졌다. 빈스가 쓸모없는 의수 한 쪽으로 황녀의 목숨을 구하 자 마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이 되었다. 저 미련한 습격자들은 애초의 계획이 황녀를 죽이는 것 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이제 자신들은 예전의 빛나던 미래를 되찼을 것이다. 스트빌라이 황녀의 생명의 은인이며 동시에 외교 분쟁을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엘리 오트에서도 칭송을 받을 터. 영광스런 미래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털썩! 닉이 쓰러지자 겨우 정신을 차린 로드리게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배신자!” “이리 끌고 와!”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된 황녀는 적의 수괴를 끌고 오는 아테보로에게 새된 고함을 질렀다. 아테보로는 로드리게를 끌고 가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회심에 찬 마크의 얼굴, 그리고 그들을 쏘아보며 부르짖는 적장의 한 마디. 배신자! 상황은 명백했다. 저 두 녀석들이 예전의 영화를 찾으려고 꾸민 짓이 분명하다. 일행에 낀 것도 우연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일 터. 아테보로 는 적의 수괴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은 자신을 원망했다. 에릭슨의 표정도 무섭게 굳어졌다. 황녀를 죽음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간, 암습자가 죽어가며 내지른 말. 개자식! 은 분명히 자신의 검을 막은 빈스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적의 우두머리가 둘을 쏘아보며 하는 말, 배신자! 황녀는 말에서 내려 자신의 발치에 넝마처럼 구겨진 로드리게의 부러진 다리를 짓이겼다. “으악!” 눈이 돌아가고 허연 거품을 물어댄 그가 또 다시 정신을 놓았다. “황녀님! 안됩니다.” 에릭슨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저들의 배후를 캐내려면 살려둬야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한 그의 눈이 빈스와 마크의 얼굴에 닿았다. 쇠붙이라도 녹여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길. 한 성격 하는 황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에릭슨의 행동이 암살자와 수괴의 말을 다시 곱씹게 만들었다. “너희들이 꾸민 짓인가”“ 실로 냉정한 음성. 밝은 앞날을 상상하던 마크와 빈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로드리게만 죽었으면 아무 문제없이 묻힐 일이 요상하게 꼬여 버린 것이다. 아테보로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렸다. “멍청한 새끼들.”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다. 습격자는 모두 죽었고, 다리가 잘려서 피를 너무 많이 쏟은 적의 수괴도 죽어가고 있다. 공포에 질린 저 얼간이 들의 얼굴! 딱 잡아뗀다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내가 범인이요 하고 공고하는 격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테보로가 슬쩍 끼어들어 무마를 시도했다. 일이 이대로 마무리 된다면 엘리오트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금전으로든 목숨으로든. 마크와 빈스는 아테보로의 두둔으로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래, 증거는 없다. 혹 로드리게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잡아떼면 된다. 닉의 일격을 막아내서 앙심을 품었다고. 에릭슨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속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그도 바보는 아닌 것이다. “잡아라!” 에릭슨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마크와 빈스의 일행들이 줄줄이 꿇려졌다. 마크와 빈스까지 꿇어앉힌 것은 아니지만 빙 둘러싼 모양새 가 범인으로 여기는 것 같다. “제리!” 드레이크가 기사로 위장한 마법사 제리를 불렀다. “힐링!” 치료마법을 걸자 로드리게의 다리에서 피가 그쳤다. “살 수 있을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운이 좋아도 살 확률은 삼할을 넘지 못합니다.” “깨워라!” 에릭슨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 깨우면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냥 두면 살 확률이 삼할도 안 된다면서” 그럼 지금 깨워서 진술을 듣는 것이 낫다. 아테보로 자작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아니냐” 안 그렇 소 자작”“ 마지막 말이 자작의 가슴에 아프게 틀어 박혔다. “암살단의 말에 신빙성이 있을까요”“ 아테보로자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일의 수습을 위해 쥐가 날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거야 윗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지요.” 재촉의 눈짓을 받은 제리가 마법을 걸었다. “웨이크 업!” 엘란(97) 로드리게는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파리한 입술과 부들거리는 손을 봤을 때 살아나기는 그른 것 같았다. 에릭슨의 억센 팔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느냐”“ 떨리는 손을 들어 빈스와 마크를 가리키는 로드리게의 눈동자에 원독이 가득했다. “마크!...... 빈스!...... 이 배신자들!” 말하기 힘든 듯 띄엄띄엄 끊어진 단어로도 배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좌중의 매서운 눈길을 한 몸에 끌어 모은 빈스와 마크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로드리게의 얼굴도 점차 식어갔다. “이런! 중요한 증인이 죽어버렸군!” 로드리게의 상태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있던 아테보로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아테보로의 다급한 눈짓을 받은 마크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짓말 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일을 저지를 이유도 없을뿐더러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딴은 맞는 말이네.”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의 얼굴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황녀의 말은 빈스와 마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냉소를 머금은 그녀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이유야 충분하지, 부귀영화를 잃었으니 어떤 수를 쓰던지 다시 찾고 싶었겠지.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거야! 가문에서 떨려났으니 이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할 힘이 없었을 것. 자, 말해봐! 니들을 충동질하고 뒤에서 물자를 대준 사람이 누구지”“ 황녀가 핵심을 짚어오자 놀란 마크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는.......억!” 빈스가 얼떨결에 대답하는 그의 옆구리를 황급히 찌르자 놀란 마크가 신음을 토했다. “이리 줘!” 황녀는 드레이크의 검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녀의 검이 마크의 눈앞에서 번뜩거렸다. 암살자를 죽이느라 온갖 살점과 피를 묻힌 채. 공포에 질린 마크의 얼굴이 몽롱해진다. 아테보로는 마크의 추태를 보며 황녀의 추리가 정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토록 많은 자들을 가차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자라면, 대단한 독심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극심한 고문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눈앞에서 검이 왔다 갔다 한다고 죽을 상으로 입을 달싹거린다는 것은 이들이 배후가 아니라 그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다는 의미. 저 두 놈들은 그저 욕심만 많은 팔푼이가 아닌가! “한심한 놈들.” 저런 놈들 때문에 나라가 곤경에 처함은 물론 자신까지 곤란하게 된 것이다. 겁에 질린 마크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자 빈스가 급하게 손짓을 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게 생긴 것이다. 황녀의 매서운 눈이 그런 빈스를 노려보았다. “매를 버는구나.” 그녀의 검은 성격만큼이나 매몰찼다. 윙! 크게 휘둘러진 검이 빈스의 왼팔에 틀어박혔다. “악!” 그가 죽는 다고 비명을 질렀다. 황녀가 검을 배웠을 리 없으니, 그녀가 휘두른 검은 근육을 자르고 뼈에서 멈추었다. 그것이 더욱 심한 고통을 가져다준다. 썩. 썩. 그녀는 톱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검을 당겼다 밀었다 하며 극한의 통증을 선사했다. 눈은 마크에게 고정시킨 채. 마크에게 그녀의 눈은 사신의 눈이었다. 생사를 함께하기를 맹세한, 절친한 친우의 팔을 장난처럼 자르고 있는 황녀가 마계의 마물처럼 느껴졌다. 뻑뻑. 움직이던 검이 뼈에 박혔는지 멈춰버린다. 발을 빈스의 배에다 대고 힘주어 뽑는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어렸다. “으아악!” 뻑! 하는 소음과 함께 검이 뽑히자 비명을 지른 그가 바닥을 굴렀다. 극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던 것. 그녀는 검 끝을 마크의 눈동자에 가져다 댔다. “누가 시켰느냐”“ “어......어......어.” 혼이 반쯤은 나간 마크가 오줌까지 지려대며 버벅 거렸다. “아직 모자랐나”“ 황녀의 성격이 모가 났다고는 하나 지고한 신분이다. 당연히 고문과는 거리가 멀 터. 심문을 처음 해보는 그녀는 완급조절을 할 줄 몰랐다. 조금의 시간을 주면 저절로 불일을 더욱 더 압력을 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황녀의 행동을 저지시키려다 말을 삼켰다. 오늘은 더럽게도 재수 없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 한참 열을 내는 그녀를 말렸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던 것이다. 싱긋 웃은 그녀의 검이 이번에는 빈스의 오른발을 노렸다. 입을 앙다물고 양손으로 그립을 움켜쥔 그녀가 숨을 골랐다. “이얍!” 이번에는 제법 기합까지 넣고서 힘껏 내려쳤다. 퍽! “으악!” 무정한 검이 정강이뼈를 절반이나 파고들자 기절한 빈스가 비명을 지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 순간 꿇어앉아있던 몇몇 수행원들의 눈에 긴장이 떠올랐다. 그 긴장은 눈을 끔뻑거리는 것으로 금세 없어져 버렸다. “어때, 이제 말할 기분이 나나”“ 검을 뽑은 그녀가 이번에는 배를 찔렀다. 푹! 창자를 절단하고 들어간 검이 척추 깊숙이 박혔다. “공자님!” 빈스와 마크의 수행원들이 비통한 울음을 토했다. 그 중 두 명이 벌떡 일어나 황녀에게로 달려들었다. 놀란 드레이크가 검집을 더듬다 아차 했다. 검은 황녀에게 넘겼던 것이다. 에릭슨은 몇 번의 실수로 경각심이 크게 높아져 있었다. 황녀의 손속에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그의 눈은 그녀의 주변을 시종일관 떠나지 않았다. 그가 달려드는 자를 향해 검을 던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에이단의 검을 빼앗아들고 다시 한 번 던졌다. 휭! 날을 꼿꼿이 세우고 날아간 검이 한 놈의 등짝에 박혀들었다. “컥!” 피거품을 토하며 한 놈이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터져 나온 비명. “으악!” 그러나 비명을 지른 자는 목표했던 자가 아니었다. 달려가던 한 놈이 돌연 진로를 수정 황녀를 돌아 마크의 앞을 막아 선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빗나간 검은 애꿎은 부하의 가슴을 헤집어 버렸다. 마크의 오른 팔을 치켜든 그가 고함을 질렀다. “제발 공자님을 살려주십시오.” “미친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연거푸 놀랄 일을 겪다보니 감정이 격앙된 황녀가 욕설을 내뱉었다. 애원하는 눈빛을 보낸 그에게 황녀가 돌려보낸 것은 경멸과 살기였다. “더러운 년!” 발작적인 고함을 지른 그가 황녀를 노려보았다. “같이 죽자!” 빈스의 수행원은 마크의 오른팔을 힘껏 비틀었다. “안돼!” “막아!” 에릭슨백작과 아테보로자작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졌다. 마크의 오른팔! 그 비틀린 의수에서 쿼렐과 강침, 온갖 종류의 표창들이 튀어나왔다. 너무 가까운 거리, 게다가 쏘아진 암기들의 속도도 무시무시했다. 쌔애액! 공기를 찢는 폭음은 에릭슨와 아테보로의 심정도 함께 찢었다. “악!”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가는 황녀! 에릭슨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황녀의 전신을 물들이고 있는 쿼렐과 표창이 승마복에 붙은 장신구 같이 느껴졌다. 강침은 끝까지 파고들어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시퍼렇게 변하는 혈색! 극독까지 발려진 듯하다. 이 상태라면 어떤 치료도 먹히지 않을 터. 공황상태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드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찬란한 미래는 사산이 부서지고 이제는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다. 이게다 저 개자식! 에릭슨 때문이다. 원망과 비통함이 그의 심장을 달구었다. 아테보로는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온갖 암기를 얻어맞고 피를 뿌리며 넘어가는 황녀의 움직임은 뭍에 올라온 거북이 보다 느려 보인다. 비현실적인 느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를 경악성이 건져 올린다. “악!” “헉!” “으아!”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경악에 찬 고함이 그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 느려진 시간은 갑자기 빨라졌다.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치료하라!”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제리였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치료마법을 걸었다. 그러나 절망에 물든 그의 얼굴에서 황녀의 상태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절명해 있었다. 그런데도 제리는 계속해서 마법을 걸었다. 지쳐서 죽을 것 같을 데도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에이단의 핏발선 눈이 황녀를 죽인 수행원과 마크에게 박혔다. 수행원도 느낀 모양! 그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공자님! 고문을 받다 비참하게 죽느니 지금 죽읍시다.” “막아!” 정신을 차린 에릭슨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신 나간 마크를 붙잡고 있는 수행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는 마크를 꼭 끌어안은 채 그의 경동맥을 물어뜯었다. 이날을 위해 한 달 동안 갈아놓은 송곳니는 주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한 웅큼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마크의 목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솟구쳤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맞으며 그는 독아를 깨물었다. 역겨운 독이 입안 가득 퍼지자 마크의 혈관 속으로 뿜어대며 그 일부를 자신도 마셨다. 그리고는 그를 깍지 낀 채 오른 손의 반지를 돌려 침을 뽑아내서는 힘껏 찔러버렸다. “됐다!” 검어지는 수행원의 얼굴에 해냈다는 성취감이 떠올랐다. “제리!” 쓰러지는 둘을 붙잡은 에릭슨이 마법사를 불렀다. 그러나 허사였다. 모든 힘을 황녀에게 소진한 제리는 어떤 의료행위도 불가능했다. 아테보로자작은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처럼 돌아가는 상황을 되새기며 머리를 짚었다. 그의 뇌리에 앞으로의 사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제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욕망을 실은 죽음의 수레바퀴가 엘란(98) 부상을 회복하고 어느 정도 거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나흘이었다. 그리고 싸울만한 몸을 만드는데 다시 나흘이 흘렀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유적에 들어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 용아병 때문에 치룬 곤욕이 경각심을 크게 높인 것이다. 듀마는 하이론의 치료마법과 의술을 보고 적이 감탄했다. 그 쪽 방면으로만 따진다면 6써클 마스터인 자신보다 훨씬 고명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이론! 이제야 생각나는군. 발자크의 제자였지”“ “그렇소.” 하이론은 스승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듣고 싶지도 않았다. 불퉁하게 대답한 그는 지평선 위로 떠오른 해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량도 떨어져가고. 이제 그만 움직입시다.” 카이어스도 한 자리에만 있자니 좀이 쑤셨다. “그게 좋겠다.” 짐을 챙겨 일어선 일행들은 천천히 전진했다. 밤의 기온저하로 뼈마디가 쑤신 프로스크는 팔을 비비며 햇살을 즐겼다. 유적지라고 별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입구라 짐작되는 대형 기둥을 제외한다면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모래뿐. 자연히 규모를 짐작할 수도 없었고, 가는 방향이 올바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을 움직여도 보이는 것이 모래밖에 없자 무슨 함정이라도 튀어나왔으면 하는 생각까지 떠오른다. “낙타를 끌고 올걸 그랬나”“ 하이론은 힘들어하는 프로스크를 보며 기둥에 묶어두고 들어온 낙타를 떠올렸다. “기둥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죽으면 귀로(歸路)가 힘들어 진다.” 카이어스가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난 괜찮소.” 프로스크는 왠지 짐이 되는 기분이라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이어스는 그런 그를 향해 말을 건넸다. “대륙최고의 현자, 하나 물어보자.” 프로스크는 대뜸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현자라는 말은 마법사, 그 중에서도 오랜 경륜으로 학식이 풍부한 노마법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최고의 치료마법을 자랑하는 하이론은 물론 엘리오트왕국 수석 마법사까지 지낸 듀마의 면전에서 듣기에는 거북살스러운 말이었다. 자신이 한 말이기는 하지만 카이어스의 입에서 나오자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카이어스가 질문을 한다. “사람들 이빨은 몇 개냐”“ 질문의 내용이 또한 엉뚱하다. 프로스크는 이 놈이 정말로 놀리는 것인가 하여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가만히 있자 카이어스가 재차 질문을 해댔다. “왜 모르나”“ “모르긴 왜 몰라! 워낙 엉뚱한 질문이라 그렇지.” 빽 고함을 지른 그가 말을 이었다. “보통 스물여덟 개에서 서른 두개 사이다.” “엘프들 보다 작군.” “엘프들은 몇 개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듀마가 무료하던 참이라 끼어들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보통 서른다섯 개에서 사십 개 사이다.” “왜 이빨 수가 차이가 나지”“ 하이론도 참견하고 나섰다. 인간하고 치아수가 차이 나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프로스크는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오자 적이 기뻤다. “엘프는 풀만 먹고 사니까 치아 수가 많은 걸 거요.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보다 이빨 수가 많거든. 아마 어금니 숫자가 인간들보다 많을 거요.” “그럴 수도 있겠군.” 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스크는 알았냐는 표정으로 카이어스를 봤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카이어스가 알고 싶은 것은 인간들의 치아 숫자가 아니었다. “드래곤은 어때”“ “무슨 소립니까”“ 난데없이 드래곤이 나오자 엘란이 되물었다. “인간들도 그렇고 엘프도 그렇고 이빨이 삼십 개는 되지. 다른 짐승이나 오크들도 그 정도는 될 테고.” “그래서요”“ “그럼 드래곤도 그럴 것 아닌가” 아니지, 입이 우리보다 백배, 천배를 클 테니 이빨 수도 엄청나겠지. 이백 개” 삼백 개” 오백 개”“ “묻고 싶은 게 뭡니까”“ 엘란이 말을 끊고 질문했다. “우리가 만난 용아병들 말이야, 왜 열 명이지” 그 많은 이빨은 어떻게 하고” 게다가 이빨이 있으면 뼈다귀도 있을 가능성이 높잖아” 안 그래”“ 주춤! 그의 질문이 모두의 발길을 붙잡아 버렸다. 짠 것처럼 한 순간 멈춰 서는 모양이 듀마가 바인딩 마법을 시전 한 것 같았다. “그렇구만.” 하이론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어스의 지적은 모두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열 명의 용아병으로도 죽을 고생을 했는데 나머지 이빨이 용아병으로 변한다면” 만약 드래곤 본까지 설친다면” “용아병을 만든 존재한테 이빨이 열개밖에 없었을 수도 있지. 안 그렇소”“ 프로스크는 그럴 리 없다는, 아니 없어야 한다는 표정이다. 하이론드 슬쩍 맞장구를 쳤다. “그럴 거야! 만약 드래곤 본체가 있다면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지. 이렇게나 깊숙이 들어왔는데. 그렇지”“ 모두에게 한 반문은 곧 대답을 받았다. 다른 존재에게서. 드드드드! 돌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 불길한 소리는 점차 커지고 또렷해진다.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뒤로 전진하는 게 어떨까”“ 프로스크는 반쯤 몸을 돌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도망가기를 권했다. 거절하면 자기 혼자라도 도망갈 태세였다. “늦은 것 같습니다.” 엘란은 뒤로 물러나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소리는 자신들의 발치, 그 밑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굵은 마찰음. 그 마찰음에 따라 자욱하게 일어나는 모래먼지. “일단 갈 때까지 가보자.” “어어!” 카이어스는 뒤로 물러나 프로스크의 목덜미를 납작 들어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헤이스트!” 하이론과 듀마도 두 다리에 마법을 걸어 달리기 시작했다. 트트트!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엘란은 천천히 물러나며 들썩거리는 모래를 주시했다. 용아병들이 나오기에는 들썩이는 모래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롬바르드에서 막일을 할 때 보았던 어느 귀족가의 연무장 보다 더 넓은 지역이 몸살을 앓았다. 모래의 들썩거림은 점차 심해지더니 종래에는 진동을 시작했다. 푸푸푸! 풀무질 소리가 들려오고 모래가 자욱하게 떠올랐다. 일미터 이미터를 넘어 삼미터에 육박하자 엘란도 시선을 앞에 둔 채 뒤로 달리기를 했다. 유적을 탐사하려면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물. 결국은 싸워야 할 상대이니 무엇이 튀어 나오는 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팡! 콱 막혔던 것이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솟구치던 모래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확산되는 모래의 습격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온통 바깥으로 밀려나는 모래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모래폭풍도 이렇게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밖으로 멀어질수록 모래의 길이가 높아져 나중에는 30미터도 넘는 것 같았다. 그 모래가 덮쳐오는 맹렬한 기세에 엘란의 몸이 금방이라도 삼켜질 듯 했다. 태풍에 휩싸인 일엽편주가 이러할까.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던 하이론은 궁금증이 치밀어 슬쩍 뒤돌아보고는 위태로운 엘란을 발견했다. 멈추어 선 그가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빨리 도망쳐!” 그의 고함은 카이어스와 듀마의 발길도 잡았다. 미치듯이 달리던 그들은 동시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모래가 왕관모양으로 솟구쳐 퍼지는 모양은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래 사이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는 하얀 물체. 모래에게 기어이 따라잡힌 엘란은 침착한 태도로 슈리엘을 불렀다. 바람의 정령은 덮쳐오는 모래에 대항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밀려나며 계약자를 보호한다. “대단한 폭풍이네”“ 엘란은 슈리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가라앉는 모래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오른 하얀 물체에 온통 정신을 뺏긴 때문이다. 보통 때였다면 질문을 무시했다고 타박을 했을 슈리엘도 오늘은 조용했다. 그녀도 본 것이다. 태양광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순백의 뼈!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스켈레톤. 어느새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밀려난 엘란이 신음을 내뱉었다. “드래곤이 나타난 것은 삼백년 만이군.” 비록 뼈뿐이긴 했으나 드래곤은 특유의 위압감은 뿜어냈다. “살아있었다면 윔급은 되겠어.” 듀마는 다급함도 잊어버리고 순수한 마법사적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이론과 프로스크도 그의 감정과 비슷했다. 다른 엘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이어스도 카나이폴런의 만행에는 타 엘프와 마찬가지로 치는 떨었고 당연히 드래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가 강한 적개심을 뿜어낼 때 엘란도 보조를 맞추어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듀마가 말했다. “용아병 만든 놈이 아니라 딴 놈이 만들었나보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카이어스가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넘어야할 장애물. 엘란의 생각은 한가지였다. 저 놈을 어떻게 처치하지” 쭉 뻗은 콧잔등부터 푹 퍼진 골반까지는 100미터도 넘었다. 길게 늘어진 꼬리뼈까지 친다면 150미터도 넘는 거대한 체구다. 척추뼈에서 아래로 늘어진 굵은 갈비뼈와 거대한 몸뚱이를 받치는 다리뼈들도 튼튼해 보인다. 척추에서 뻗은 삐쭉한 날개뼈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어디를 공격하죠”“ 엘란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카이어스에게 물었다. 가장 곤란한 부분이었다. 워낙 크다보니 어디를 공격해야 효과적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와 살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용아병들처럼 머리를 부수거나 목을 잘라버리면 되지 않을까”“ 내장도 없고 응당 심장도 없으니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근 50미터 위에 떠 있는 머리였다. 위치도 위치지만 투박한 두개골을 보자면 부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도 마찬가지. 자연계에 있는 것 중 가장 단단하다는 드래곤 본이다. 목의 굵기도 1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니 자르기도 만만찮을 것이다. 오러를 뿜어서 한 자리를 계속 찍어야 할 텐데 드래곤이 넋 놓고 앉아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그냥 드래곤을 잡는 게 쉽겠다.” 카이어스는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듀마가 반박했다. “그건 아니오. 드래곤은 마법생물! 저것이 살아있다면 무엇보다도 그 강대한 마법을 상대해야 하고 브레스라도 뿜어댄다면 대책이 없으니 지성이 없는 지금 상태가 그래도 할만하오.” 하이론과 프로스크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하긴 살아있다면 비늘 뚫기도 힘들겠지.” 카이어스도 답답해서 한 소리지 살아있는 것이 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 안 움직일까”“ 프로스크는 의문이 들었다. 사막을 뒤집으며 기세 좋게 등장하더니 가만히 앉아만 있다. 자신 같으면 그 소란이 부끄러워서라도 움직일 터. “너무 오래 되서 작동이 멈춘 건 아닐까”“ 하이론이 바램을 실어 말했다. “그건 아닐 거요. 용아병도 움직였는데 드래곤 본이 낡았을 리가 없지.” 듀마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가까이 가지 않는다면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뭔가를 지키는 모양이야.” 프로스크가 힘주어 말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이쯤에서 지도의 보물을 포기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포두핌의 지도는 프로스크가 생각하는 금은보화를 부장하고 있는 곳이 아니었고 살 곳이 필요했던 엘란과 하이론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여기는 카이어스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 뻔한 둘을 두고 혼자만 도망칠 순 없었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은 듀마를 향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 “드래곤이 뭘 지키는 지 궁금하군요.” 싸우겠다는 소리였다. “그럼 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카이어스가 먼저 뛰쳐나갔다. 보폭이 좁은 것이 보통 때 보다는 신중한 모습이다. “가요!” 엘란은 슈리엘을 허공에 띄운 채 자신의 다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카이어스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탄할 만한 빠르기였다. “싸우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피해가 날지 모르니 좀더 물러서는 게 좋겠소.” 하이론은 프로스크에게 더 떨어지기를 충고하고 드래곤을 향해 움직였다. 드래곤을 쳐다보고 있자면 용아병때와는 다르게 자신도 거들어야겠다고 생각이 무럭무럭 솟구친다. 듀마도 달려 나가자 혼자 남은 프로스크는 뒤로 물러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산이 없었다. 저들이 모두 죽으면 자신 혼자서는 이 삭막한 곳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모래에 묻히거나 카그스의 배속에 들어갈 터. 온 천지를 뒤덮던 벌레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젠장, 이런 데서 죽고 싶지는 않아, 아직 내 능력을 펼쳐 보지도 못했는데.......” 엘란(99) 달려가는 카이어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목에서 시작된 긴장은 어깨를 타고 내려가 어느새 빼든 칼날에 맺혔다. 그 때 죽은 듯이 앉아있던 드래곤의 해골에 은은한 빛이 어렸다. 그 빛은 두개골의 표면을 타고 흘러, 두 개의 동공으로 스며들더니 어느새 붉게 변했다. 꺼져있던 드래곤의 눈에 흉광이 서리고 뚜둑, 뚜둑! 거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온다. 땅을 디딘 드래곤의 다리에서 시작된 소리는 굵은 뼈를 타고 척추뼈를 스치더니 목뼈까지 이르렀다. 부르르! 가늘게 뼈를 떤 드래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뒷다리로 뼈들을 지탱하고 꼬리로 중심을 잡은 드래곤이 날개뼈를 펄럭였다. 윙윙윙! 근육은커녕 거죽도 남아있지 않은 날개에서 거친 바람소리가 울리고 모래가 날렸다. 쿠오오! 드래곤의 거센 포효가 흩날리는 모래를 거쳐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드래곤피어가 카이어스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쌔애액! 그런 그를 지나쳐 바람의 창이 날았다. 뒤따라오는 엘란에게 씨익 웃어준 그가 다시 땅을 박찼다. 바람의 창이 지면에 바짝 붙어 날아가자 모래들이 거기에 말려 둥근 회오리를 일으켰다. 땅에 착 붙어 날아간 창은 드래곤에 접근하자 고개를 들어 45도 각도로 쏘아졌다. 날카로운 기운을 느낀 드래곤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진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광채가 점차 짙어지더니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창을 향해 앞 다리를 뻗었다. 쾅! 발뼈에 박혀드는 창이 폭음을 터트렸다. 드래곤의 발치까지 접근한 카이어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뒤꿈치, 발목, 발의 장심을 이루는 저 두터운 가운데발뼈에 박힌 창의 길이가 고작해야 20-30센지에 불과하다. 그것도 발을 흔들자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 카이어스는 뒷발의 발가락뼈를 박차고 올라 발목을 향해 칼을 그어갔다. 일단 발목을 잘라 눕혀놓고 목뼈를 자르던 두개골을 부수던 할 생각이었다. 시퍼렇게 일렁이는 오러 블레이드가 발목뼈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익!” 꾹 다문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덜그덕! 발목뼈가 점점 벌어지자 드래곤이 발뼈를 안으로 접어 카이어스를 으스러뜨리려 시도했다. 발목이 안으로 접히자 깜짝 놀란 카이어스가 발뼈에서 뛰어내리려다 생각을 변경, 오히려 아래다리뼈를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예전 엘프의 숲에서 나무를 타던 실력이 다시 발휘되었다. 휭! 드래곤이 다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아래다리뼈의 중단까지 올라갔던 카이어스는 바람 부는 날의 깃발처럼 흔들거렸다. 뼈에 칼을 박아 넣지 않았다면 벌써 튕겨나가 버렸을 것이다. 엘란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카이어스를 보며 실피드를 소환,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위에서 슈리엘이 옷자락을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래 살다보니 별 놈의 것을 다 보는구나! 드래곤 스켈레톤이라니!” “슈리엘도 처음 보는 모양이죠”“ “처음 보지. 누가 있어 드래곤을 죽이고 거기다 더해 마법 저항력이 엄청난 드래곤 본에다 저런 마법을 걸 수 있었겠느냐”“ “짐작가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없다.” “이런!” 엘란은 슈리엘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위태로운 카이어스를 잊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가볍게 머리를 두들겨 자책을 표하고는 다시 한 번 호흡을 골랐다. 슈리엘이 두 팔을 들어올리자 그녀의 머리위로 맹렬한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 사이에서 삐죽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때보다는 세 배는 큰 바람의 창이다. “가라!” 엘란이 두 손을 앞으로 뻗자 슈리엘도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바람의 창이 대기를 갈랐다. 엘란이 한 눈을 파는 그 짧은 순간에 카이어스는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었다. 사실 뛰어 내리더라도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것인데 왠지 오기가 치밀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흔들리던 다리가 멈추었다.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드래곤이 느낀 때문이다. 상상을 불허하는 드래곤의 거대한 체구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때문에 칼을 뽑고 기어오르던 카이어스가 기겁을 했다. 가랑잎처럼 흔들리던 그의 신형이 결국 바닥으로 추락한다. 몸을 돌린 드래곤의 꼬리뼈가 바람의 창을 맞이했다. 쾅! 저 멀리 떨어진 프로스크의 오금마저 저리게 만드는 폭음이 사막을 두들겼다. 창을 쳐내고 다시 돌아온 꼬리가 바닥을 뒹구는 카이어스의 머리를 노렸다. 손을 짚고 일어난 카이어스는 다리를 구부려 쪼그린 자세로 짓쳐드는 꼬리를 노려보았다. “타아~” 짧은 함성을 지른 그가 다리를 펼쳐 하늘로 뛰어 올랐다. 그가 있던 자리를 꼬리가 쓸었다. 마치 마당을 쓰는 싸리비처럼. 자욱한 먼지가 올라오는 가운데 엘란은 드래곤의 두개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슈리엘~” 길게 이어지는 고함이 엘란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슈리엘의 손이 그의 손을 맞잡는다.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자 슈리엘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던 옷자락이 몸에 착 달라붙는 동시에 그녀의 몸이 가늘어졌다. 10미터 길이의 굵은 몽둥이로 변하더니 다시 각이 선다.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뛰어 오른 카이어스는 대퇴골의 하단에 칼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는 대퇴골에 매달린 채 하늘을 종단해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바람의 검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펑! 펑! 카이어스와 엘란이 드래곤의 정신을 분산시키는 사이 드래곤에 접근한 두 마법사가 연신 파이어 볼을 날렸다. 하이론이 쏘아올린 불덩이는 드래곤의 발치에서 폭발했고 듀마가 날린 불덩이는 갈비뼈를 스치듯 지나쳐 척추뼈를 두들겼다. 드래곤의 미간을 쪼개오는 변신검에 서릿발 같은 예기가 서린다. 그리고 검 주위를 미친 듯이 맴도는 바람에 흉흉한 살기가 실렸다. 날개뼈를 쫘악! 펼친 드래곤이 날아오는 엘란을 쏘아보았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더욱 짙어지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두개골에 맺혔다. 그 두개골의 정 중앙, 미간을 향해 벼락같은 일검이 떨어졌다. 쾅!!! 사막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드래곤의 미간이 쩌억! 벌어졌다. 엘란은 벌어진 미간을 노려보며 검을 아래로 그어 내렸다. 두개골을 절단 내 버릴 심산이었다. 꺽! 귀청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검이 뼈에 박혔다. 뼈에 걸려버린 것인지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 않았다. “위험!” 카이어스의 경고음이 쩌렁쩌렁 울렸으나 해골을 가르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엘란은 듣지 못했다. 하늘로 뻗치던 날개뼈가 드래곤의 머리위로 드리웠다. 날개뼈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자 엘란의 고개가 위로 들려졌다. 씨잉~ 빠르게 떨어지는 날개가 그의 눈에 박혀든다. “젠장!” 슈리엘은 뼈에 끼여 버린 것인지 빠지지 않았고, 어떤 마력이 방해를 하는 것인지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빨을 깨문 엘란은 슈리엘을 놓아버리고 뛰어내렸다. 그런 그를 실피드가 붙잡았다. 쾅! 날개뼈가 검으로 변한 슈리엘을 때렸다. 슈리엘의 고통이 가슴가득 전해지자 망치로 맞은 것 같은 둔중한 통증이 가슴을 두들겼다. 엘란은 슈리엘을 돌려보내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으나 드래곤 본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지, 소용이 없었다. 슈리엘을 무자비하게 두들긴 날개뼈가 교묘하게 오므려지더니 정령의 하단을 잡고 쭈욱 끌어당겼다. 엘란이 용을 쓸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검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뽑혀졌다. 특유의 예기와 맴돌던 바람이 어디론가 사라진 검이 축 늘어져 흐느적거렸다. 엘란은 슈리엘이 소멸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헉!” 슈리엘을 든 날개뼈가 점점 오므려들자 엘란의 허리도 심하게 조여졌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차지하고라도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슈리엘이 느낄 고통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실프!” 그의 입에서 신음같은 소리가 흘러나오자 실프 스무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눈을.” 엘란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명령을 내렸다. 그때 카이어스는 골반까지 기어올라 있었다. 골반과 척추가 이어지는 미골에 다다른 그는 칼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지이잉! 칼날에 맺히는 오러가 점점 길어지고 선명해지더니 이내 미골을 파고든다. 카이어스는 칼자루까지 미골에 박은 채 죽을힘을 다해 오러를 밀어댔다. 엘란이 모래위에 몸을 눕히는 것과 동시에 하늘로 떠오른 실프는 드래곤의 붉은 눈을 노리고 빛살처럼 쏘아졌다. 드래곤은 한쪽 날개뼈로 귀찮은 파리를 쫓듯 실프를 물리치면서도 한쪽 날개뼈는 슈리엘 조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헉헉!” 엘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를 조이는 격통과 함께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부드득! 이를 갈았다. “힐링!” 엘란에게 뛰어 와 치료마법을 거는 하이론의 얼굴에 걱정이 넘실거렸다. 저대로 두면 슈리엘이 절단나는 동시에 엘란도 무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듀마는 드래곤이 마법생물이란 사실을 절감해야 했다. 온갖 공격마법을 퍼부어도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던 것이다. 드래곤이 꺼리는 것은 카이어스의 칼과 엘란의 정령 뿐. 자신의 마법으로는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보조역으로 한정했다. 자신이 드래곤의 신경을 잡아끄는 사이 카이어스나 엘란이 저 망할 놈의 뼈다귀를 절단 낼 것이다. “플라이!” 둥실 떠오른 듀마의 몸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갈랐다. 우선 슈리엘을 뽑아내 엘란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드래곤의 두개골 가까이 접근한 그는 지팡이를 꺼내들고 주문을 영창했다. “만남은 헤어짐을 위한 준비이며. 헤어짐은 만남의 준비이니, 서로 맞물리는 그대여 서로 헤어져 만남을 준비하라! 오픈!” 지팡이 끝에 달린 푸른 구슬에서 하얀 섬광이 작렬했다. 그 순간 슈리엘을 조이던 날개의 갈고리뼈가 뿌드득거리는 소음을 발하며 주춤거렸다. 거세게 조이던 압박이 사라지자 뼈의 감옥에서 풀려난 슈리엘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정령계의 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쾅! 슈리엘이 풀려나자 듀마가 마법을 풀었고, 폭음과 함께 뼈가 부딪쳤다. 푸슉! 그때 카이어스의 오러가 기어이 미골을 관통하고 바닥으로 쏘아졌다. 미골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렸으나 드래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지름이 10미터도 넘는 드래곤의 뼈에 그만한 구멍이 생겼다고 힘을 잃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통의 신음은커녕 아무런 몸짓도 없자 허탈감과 함께 다시금 오기가 치밀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쉰 카이어스가 다시 한번 칼을 움직였다. 구멍의 옆. 계속 뚫다보면 거대한 허리도 언젠가는 끊기겠지. 드래곤이 카이어스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엘란을 먼저 죽이려 시도했을 뿐이었다. 척추와 골반을 이어주는 미골이 빙글 회전을 한다. 한바퀴 회전한 미골이 다시금 180도를 움직여 정지하자 뼈가 바람개비처럼 돌 것이라 예상치 못한 카이어스가 당황해 버렸다. 뛰어난 반사 신경 덕에 겨우 떨어지는 것은 모면했으나, 뼈에 박힌 칼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가 무척 불안해 보였다. “메가 라이트닝 볼트!” 마법 저항력이 강한 드래곤의 뼈에 마법을 거느라 기진맥진한 듀마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전기가 드래곤의 뼈를 휩쓸었다. 정수리에서 시작한 스파크가 척추를 타고 내려오자 칼을 뽑아낸 카이어스가 밑으로 뛰어내렸다. 슈리엘이 마수에서 풀린 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엘란은 허공에서 주춤거리는 실프를 다시금 움직였다. 아직도 지직거리는 두개골로 날아간 실프가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두 눈을 노렸다. 드득, 드득! 계속해서 스파크가 튀자 드래곤은 전신을 떨었다. 물기에 젖은 개가 털을 말리려 몸을 떨 듯이 뼈들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스파크가 점점 잦아지는 그 때 최초의 실프가 미간의 틈사이로 스며들 듯 뛰어들었다. 타다다닥! 실프가 두개골 속을 온통 휘젓고 다녔다. 뒤통수를 때리다 정수리를 때리더니 하악골을 후려치고, 상악골을 갈겨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나가 뛰어들자 뒤이어 다른 실프가 눈을 후벼 팠다. 그 뒤를 줄줄이 다른 실프들이 따랐다. 다닥! 다닥! 펑! 쿵! 온갖 소음이 드래곤의 두개골 안을 휩쓸었다. 턱! 투르륵! 땅에 떨어진 즉시, 한바퀴 굴러 충격을 완화한 카이어스가 다시금 뛰어 올랐다. 뼈를 타고 오르자 저릿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이 듀마의 마법이 아직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다시 미골에 자리를 잡은 그가 칼을 휘둘렀다. 한편, 두개골 속에서는 콩 볶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오러로도 뚫기 힘든 드래곤의 뼈를 힘이 약한 실프로 부순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엘란은 실피드를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아릿하게 저려오는 마나홀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제 끝장을 볼 시간이다! 그런 기척을 드래곤도 느꼈는지 뼈에서 거센 기운이 일어났다. 일렁거리던 기운은 점차 또렷해지더니 결국은 칙칙한 검은 색을 띠었다. 뼈에서 일렁거리는 검은 색의 와류는 생전의 드래곤이 블랙 드래곤이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두개골 안을 온통 휘젓던 실프들은 자신들을 조이는 미지의 기운에 몸을 떨었다. 검은 기류가 점차 두개골 안으로 파고들었던 것. 엘란은 살갗을 저미는 따끔따끔한 감각에 공포를 느꼈다. 실프들이 슈리엘처럼 잡힌다면 이번에는 희생불능의 타격을 받을 것 같았다. “돌아 가!” 피 끓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검은 기류에 휩싸여 몸부림치던 실프들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슈리엘이나 실프는 당분간 부르지 못할 것이다. “웩!” 엘란은 한 줄기 피를 토해냈다. 안색이 밀납처럼 창백해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피를 토하니 울렁거리던 속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연속적인 타격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제 마나홀의 마나도 점차 고갈되고 있어서 잠시 후면 싸울 기력을 잃을 듯 했다. 그는 쓸 수 있는 마나를 끌어 모으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스피릿 컴파운드! 죽어라!” 악에 받친 고함이 하늘을 찢어버렸다. 엘란(100) 드래곤과 엘란의 중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불의 독수리가 나래를 펼쳤다. 그런 모습으로 쭉 날아가던 독수리가 날개를 접고 회전을 하자 그 사이를 실피드가 파고들었다. “스켈레톤에게 죽어라라” 흠......” 엘란의 고함은 듀마를 한가한 상념의 창고로 넣어버렸다. 그는 붉고 푸른 소용돌이가 드래곤의 미간으로 쏘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산자와 죽은 자 그리고 마법으로 움직이는 죽은 자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잠겼다. 마력이 바닥나 더 이상 마법을 시전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이 날개뼈를 들어 눈앞을 가리자 맞물린 정령들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뼈 사이를 통과한 스피릿 컴파운드가 드래곤의 미간에 벼락같이 떨어져 내렸다. 쾅! 미간을 때리고 안으로 들어간 정령이 후두골을 강타하자 드래곤의 거대한 해골이 뿌드득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뒤로 획 꺾였다. 후두골을 때리고 그 충격으로 둘로 나눠진 실피드와 카사가 드래곤의 두 눈으로 각각 튀어 나올 때 엘란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스피릿 컴파운드!” 경련을 일으키는 눈언저리를 눌러준 그는 새로이 나타난 카사와 실피드가 미간을 노리고 날아가는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정령들은 뒤로 꺾인 머리가 다시 내려오기 전에 또다시 미간을 노렸으나 드래곤도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날개를 퍼덕여 거센 바람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앞발을 쭉 내밀었다. 날개뼈의 움직임에 따라 윙윙! 거리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울렸다. 산이라도 날려버릴 것처럼 휘몰아지는 강풍을 뚫고 정령들이 날아들자 내민 발뼈를 힘껏 휘둘렀다. 이때까지의 굼뜬 동작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날렵한 동작이었다. 찌이익! 발뼈가 공기를 가르자 치맛단을 찢어내는 듯한 폭음이 천지를 울렸다. 휘두르는 발뼈에 스피릿 컴파운드가 걸렸다. 퍽! 둔탁한 굉음이 울리고, 힘을 잃은 정령들이 파리채에 얻어맞은 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분리되어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드래곤의 일격이 작렬하자 엘란의 몸은 눈에 띠게 휘청거렸다. 스켈레톤은 이제 끝을 보기로 결심을 했는지 꼬리뼈를 좌우로 흔들며 앞으로 움직였다. 쿵쿵쿵. 드래곤이 걸어오자 지축이 흔들리며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뼈들이 격하게 움직이자 미골을 부셔대던 카이어스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쿵쿵!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사막이 들썩거렸다. 보폭을 감안하면 지척까지 다가온 드래곤의 두터운 발뼈가 엘란을 뭉개버릴 기세로 떨어져 내린다. 거대한 발뼈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러서 더욱 서글퍼 보였다. 엘란의 눈에 떨어지는 발뼈와 함께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내려오는 실피드가 잡혔다. 쾅! 그가 있던 자리를 드래곤의 발이 후려쳤다. “윽.” 실피드를 불러 뒤로 쭉 밀려가는 엘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상이 심각한 상태에서 실피드를 조종한 것이 많은 부담을 안겨준 탓. 그가 뒤로 내빼자 하이론이 다가와 상태를 점검했으나 포션을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난 듀마도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런 눈빛을 보탰다. 잘못하면 여기서 뼈를 묻게 생긴 것이다. 카이어스는 거듭된 혹사로 비명을 질러대는 근육을 무시하고 죽어라 칼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튀어 오른 뼈가 뺨을 때리자 저절로 욕설이 나온다. “망할 놈의 드래곤 새끼! 완전히 통뼈네.” 발로 뭉개버리는 것을 포기했는지 가만히 서서 아래의 인간들을 내려보던 드래곤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 카이어스가 디디고 있던 미골이 다시 회전을 시작했다. “하~” 한 줄기 낭랑한 기합을 내지른 카이어스는 확연히 넓어진 구멍에 얼른 칼을 박아 넣고 두 팔에 힘을 넣었다. 혹사당한 팔에서 둔중한 고통이 느껴졌다. 찡그려지는 그의 얼굴위로 거센 소리가 덮쳐왔다. 새애액!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찡그린 그대로 굳어졌다. 전갈처럼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드래곤이 성가신 그를 향해 길쭉한 꼬리뼈를 휘두른 것이다. 마치 채찍처럼. “망할!” 카이어스는 장대한 체구를 이때까지 뚫어놓은 구멍에다 최대한 밀착시켰다. 이제까지 살면서 커다란 체구가 짐스러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등 쪽으로 마나를 보냈다. 밑에서 지켜보던 하이론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잘못하면 괴짜엘프가 피떡이 되게 생긴 것이다. 다급한 심정이 몸 상태를 무시하고 마법을 부리게 만들었다. “에어 버스터!” 드래곤의 두개골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동시에 꼬리가 미골을 때렸다. 쾅! 구멍에다 몸을 숨겼다고는 하나 충격은 대단했다. 드래곤의 뒷 다리뼈가 주저앉을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그가 무사할 수는 없었다. 등이 부셔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뇌를 뒤흔드는 동시에 내장이 욱신거렸다. “우왁!” 피를 토한 카이어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한편 주저앉은 드래곤은 한 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꼬리가 강타한 충격의 대부분은 자신이 받은 탓이었다. 미련하다면 미련할 공격법에 도망가기를 포기한 프로스크가 혀를 차댔다. 책상물림 학자가 혼자서 사막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아날 확률만큼이나 낮았다. 거기다 카그스를 떠올리면 살 가능성은 더욱 적어진다. 일행들이 여기서 죽는다면 자신도 죽으니 혼자서 도망가 봐야 헛일이었다. 엘란과 하이론, 듀마가 모여 있는 곳에 다가온 그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카이어스는 괜찮을까”“ “글쎄......” 대답을 흐리는 하이론의 음성에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카이어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짓이지”“ 드래곤을 노려보던 듀마가 물었다. 주저앉아 있던 드래곤은 아예 엎드려 버리더니 입을 딱 벌렸다. “혹시 브레스를 뿜어대는 게 아닐까”“ 하이론이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해골만 남은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아댄다는 소리는 처음 듣소.” 프로스크가 대꾸하자 하이론이 반박했다. “드래곤 스켈레톤도 처음 접하는 거잖소.” 셋은 서로의 눈을 보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실 용아병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였고, 드래곤 스켈레톤은 어떠한 기록에도 적혀있지 않은 일이었다. 드래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많지 않았다. 워낙 보기가 힘든데다가 가까이 다가가는 인간은 살려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광룡 카나이폴런이나 삼백년 전 스트빌라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드래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펑!펑!펑! 연속적인 폭음이 울리고 드래곤의 입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바닥을 뒹굴던 작은 바위가 천천히 굴러왔다. 일행들을 향해. “이빨이잖아!” “설마......용아병은 아니겠지!” 경악에 찬 음성이 하늘을 때릴 때 굴러오던 이에서 허연 팔, 다리가 튀어나왔다. 뚱뚱하던 이는 점차 가늘어지고 윗부분에서 해골이 튀어나왔다. 용아병! 누워버린 드래곤은 용아병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끝났군.” 저항하기를 포기한 하이론이 체념의 말을 토해낼 때 엘란의 눈에서는 핏발이 섰다. 카이어스가 죽었다. 동족에게서 내쳐진 가련한 엘프는 다른 이들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연민이 분노를 부르고 분노가 바샤라의 돌에서 나온 마나를 일깨웠다. 뜨거웠다! 몸을 태우는 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카이어스!” 피 끓는 고함을 터트린 그가 다가오는 용아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저런......!” “위험해!” 엘란의 무모한 돌진에 듀마가 말을 잃었고 하이론은 괴성을 질러댔다. 달리면 달리수록 몸은 뜨거워졌다. 종내는 혈관을 도는 피까지 끓는 것 같았다. 툭! 갈비뼈를 분질러 흉기로 삼은 다섯 명의 용아병이 그를 에워싸려 할 때 엘란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비켜라!” 그의 말을 용아병이 들어줄리 만무. 오히려 그를 압박하려는 듯 움직임이 빨라졌다. “샐라멘더!” 불의 도마뱀이 나타나 바닥을 기었다. 천천히 엘란 주위를 돌던 도마뱀의 몸에 불길이 솟았다. 그 불길이 엘란의 키만큼 솟구쳤을 때 도마뱀들이 땅을 박찼다. 용아병들은 자신을 향해 매섭게 쏘아지는 불의 도마뱀을 맞아 본능적으로 갈비뼈를 휘둘렀다. 샐라멘더는 갈비뼈와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뼈를 타고 올라 손을 점령하더니 목뼈를 감싼 채 불길을 토해냈다. 화르륵! 불길이 점점 선명해지자 용아병의 하얀 뼈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억!” 눈 깜빡 할 사이에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자 프로스크는 기쁨인지 놀람인지, 뜻 모를 비명을 질렀다.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정령사로군.” 듀마까지 감탄의 말을 내뱉을 때 하이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화근덩어리라 할 수 있는, 돌에서 나온 마나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었다. 그 마나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이 쌓은 마나를 완전히 소모했다는 뜻이었으니, 그의 몸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엘란이 용아병들을 스치듯 지나가자 샐라멘더가 목뼈를 끊어버렸다. 툭,툭,툭,툭,툭. 허무할 정도로 쉽게 떨어지는 해골들을 보며 프로스크는 의문을 발했다. “용아병들이 너무 약한 것 아니요”“ 아닌 게 아니라 처음 맞닥뜨린 용아병에 비해 너무 약했다. 엘란의 샐라멘더가 상상이상으로 강하긴 했지만. 듀마가 대답했다. “아마 재료가 달랐던 모양이요.” “재료라면”“ “처음 만났던 용아병은 에이션트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졌었던 것 같소. 저건 윔급이고.” “그런 것 같군.” 달려가는 엘란의 등을 시선으로 쫓아가며 하이론이 동의했다. 드래곤과 가까워질수록 엘란의 기세는 점증했고 그만큼이나 고통도 심해졌다. 그의 기세는 엎드려있는 드래곤이 움찔할 정도로 사나웠다. 위기감을 느낀 드래곤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는 카사를 불렀다. 허공에서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그 불꽃이 옆으로 벌어지며 불의 독수리를 토해냈다. 엘란은 달려가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뛰어올라 카사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펄럭! 독수리가 날개를 움직이자 불꽃의 깃털 하나하나가 일어났다. 드래곤은 여전히 자신의 미간을 노리는 카사를 향해 다시금 다리를 뻗었다. 휘이잉! 발뼈가 공기를 찢어발기자, 카사는 엘란을 매단 채 오른쪽으로 선회, 드래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날개뼈가 부딪쳐 왔다. 엘란은 급히 다리를 들어올렸다. 엉덩이 밑으로 세찬 바람이 지나가며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드래곤은 고개를 움츠리며 헛손질한 날개뼈를 다시 휘둘렀다. 두 개의 날깨뼈를 동시에 움직이자 엘란과 카사는 좌우 양쪽에서 협공 받는 처지에 빠졌다. 손뼉이 마부딪치는 것 같은 모습의 중간에 그들이 위치한 것이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던 하이론은 그가 아슬아슬한 위기에 직면하자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두 날개뼈가 엘란을 짓이기려는 순간 카사의 속도가 빨라졌다. 더하여 방향도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직각으로 방향이 꺾인 카사가 하늘로 솟구쳤다. 쾅!! 양쪽 날깨뼈가 목표물을 놓치고 서로 부딪쳤다. 꼬리뼈까지 진동이 내려올 정도의 기운찬 부딪침이었다. 하늘로 솟구친 카사는 다시 방향을 전환 계속된 타격으로 크게 벌어진 드래곤의 미간으로 온 몸을 던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의 독수리. 그것은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던져주며 긴 불꽃을 꼬리처럼 매달았다. 위기감을 느낀 드래곤의 두개골이 옆으로 비껴졌으나 그에 따라 카사의 궤적도 옆으로 선회했다. 미간가까이 다가간 독수리의 형체가 변모하기 시작했다. 날개가 몸통으로 들어가고 머리가 양쪽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엘란이 잡은 다리는 두개의 손잡이로 변해갔다. 엘란은 미간으로 뛰어들며 손잡이를 힘껏 벌렸다. 두 쪽으로 벌어진 카사의 앞부분이 해골의 갈라진 미간, 그 양쪽을 잡더니 마치 겸자처럼 틈을 벌렸다. 그 틈새로 뛰어든 엘란은 카사를 돌려보내고 샐라임을 불렀다. 계약 이후 처음으로 시도하는 소환이었으나 불의 상급정령은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엘란의 피부 바로 바깥쪽에서. 엘란의 전신을 보호하듯 감싼 샐라임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엘란의 팔도 자연스레 올라가며 불꽃을 토해냈다. “드래곤 본이군.” “......!” 엘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무 뜨거워서 입을 벌리면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죽여!” 그는 마음으로 부르짖었다. “원한다면!” 샐라임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두개골 안을 뒤흔들었다. 엘란은 샐라임을 두른 채 스피릿 컴파운드가 두들겼던 후두골로 이동했다. 후두골에는 패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후두골을 때렸다. 쿵쿵. 둔탁한 소리가 듀마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만!” 샐라임은 후두골을 때려가는 엘란을 제지시킨 후 제안을 했다. “그렇게 때리다간 네 손이 먼저 박살나겠다. 후두골에 몸을 밀착시킨 채 마나를 끌어올려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엘란은 그의 말대로 사지를 펼쳐 후두골에 밀착한 후 마나를 끌어올렸다. 전신을 휘도는 마나는 끊임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말단세포까지 타들어가는 느낌에 진저리가 쳐졌다. 엘란이 고통스러울수록 샐라임의 불꽃은 선명해지고 붉어졌다. 나중에는 퍼런색을 띠더니 흰빛까지 엿보인다. 후두골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두개골 전체로 열기가 확산될 때 드래곤 본에서 검은 연무가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연무는 눈을 통해 두개골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엘란을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검은 연무는 샐라임의 불길에 닿는 순간 치이익! 하는 소음과 함께 바싹 마른 삭정이처럼 타들어갔다. “꾸어어!” 괴성을 질러댄 드래곤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펄쩍펄쩍 뛰며 해골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격렬한 요동으로도 엘란을 떨구어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직 이를 악물어 댈 뿐이었다. 퉁퉁! 좌우로 부딪치는 감각이 카이어스의 정신을 되돌렸다. 뼈대가 강한 걸로 치면 엘프 중에서도 손꼽히는 그가 직격당한 것도 아니고, 빠른 속도로 떨어진 꼬리가 만들어낸 간접적인 충격파에 숨이 끊어질 리 없었다. 등이 찢겨지고 내장이 흔들리긴 했지만. 드래곤이 격하게 허리를 트는 바람에 오른쪽으로 처박힌 그가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춤이라도 추나, 왜 허리는 비틀고 지랄이야.” 구멍에서 튀어나와 미골에 버티고 서자 벌겋게 달아오른 해골의 두통수가 보였다. “어이쿠!” 드래곤이 꼬리뼈를 미친 듯이 휘두르자 미골도 요동을 쳤고 부상이 심한 그도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끈 떨어진 연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그가 위태롭게 보였다. 한바퀴 굴러 충격을 완화시킨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제는 숫제 땅바닥을 구르는 드래곤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가는 깔려 죽게 생긴 것이다. 쿵! 뒤쪽에서 갈비뼈가 그를 깔아뭉갤 것처럼 다가오자 죽어라 다리를 움직였다. 엘란은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를 핍박하던 검은 기류도 모조리 타버렸고 심하게 흔들리던 두개골의 움직임도 점차 잦아졌던 것이다.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가 울리고 붉게 달아오르던 후두골이 결국은 부셔지기 시작했다. 가는 실금이 후두골 전체를 뒤덮더니 종내에는 두개골 전체로 퍼져나갔다. 엘란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앞으로 밀어붙였다. 퍽! 두 조각의 뼈가 후두골에서 떨어져 나가고 엘란의 손이 먼저 바깥 공기를 접하자 제방이 무너지듯 후두골이 터져나갔다. 후두골이 산산이 조각난 자리에 거대한 문이 생기고 그의 몸이 밖으로 나왔다. 쿵! 엘란이 목뼈를 밟고 설 때 두개골의 정수리 부위가 아래로 함몰되고 곧이어 안면마저 무너져 내렸다. 곧이어 마나가 끊기고 샐라임이 정령계로 돌아가자 그는 목뼈를 부둥켜안고 긴 숨을 토해냈다. 고통의 숨을. 쾅! 드래곤의 거대한 뼈가 서서히 스러졌다. 지진이 일어나 산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이론은 거대한 모래 먼지를 날리며 스러지는 뼈의 드래곤을 보며 벅찬 감격을 느꼈다. 비록 스켈레톤이라고는 하나 저 위대한 존재! 드래곤을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카이어스가 흩날리는 모래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기쁨은 극에 달했다. “살아있었구나!” “그럼 죽은 줄 알았소”“ 잇몸까지 드러내는 카이어스의 웃음이 정겹게 느껴졌다. **************** 일회 올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0회군요. 나름대로 감회가 새롭다는^^ 친척결혼식이 있어서 내일 서울에 올라갑니다. 그래서 연재가 몇일 늦어질 수도 있으니 양해바랍니다 엘란(101) 기쁨도 잠시였다. 쾅 하는 폭음이 울리고 짙푸른 섬광이 작렬하더니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모래가 요동을 친다. 아니 사막전체가 들썩거렸다. 섬광이 잦아지자 일행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었다. 드래곤이 몸을 눕힌 자리, 그 곳에서 시작된 소용돌이가 점차 범위를 넓혔다. 먼저 모래가 딸려가고 나중에는 일행들까지 위협했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사람들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튀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카이어스가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먼저 프로스크의 몸이 회오리에 딸려 올라가고 하이론, 듀마까지 삼키더니 나중에는 카이어스까지 뽑아 올렸다. 사막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소용돌이에 갇힌 일행들은 그것의 결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며 차례차례 정신을 잃었다. “엘란은 어떻게 되었지”“ 정신을 잃기 직전에 하이론이 떠올린 상념이었다. * * * 길라드는 황궁의 복도를 걸으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훈족과의 긴장이 점차 파고를 높여가는 이 때에 사신으로 간 황녀가 엘리오트에서 죽어 버렸다. 그 바람에 양국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남북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스트빌라이는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아끼던 제자들이 대제의 무덤에서 죽은 이후 약간은 의기소침하게 지내던 그는 국가의 위기를 틈타 바라던 것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에게는 기쁨이 되기도 하지. 길라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를 안내하던 기사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의 호위병들이 문을 열었다. “길라드님께서 오셨습니다.” 황제의 집무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검박한 방안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를 보고 반색을 했다. 특히 귀족원주 리버스킨후작의 반응이 열렬했는데 직접 일어나 따뜻한 웃음으로 반겼다. “오! 결심을 굳히셨군요.” “길라드가 폐하를 뵙습니다.” 상급 정령사 화염의 길라드가 브론델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자 귀족원주는 직접 의자까지 밀어준다. 그가 착석하자 총리대신 데일후작이 말문을 열었다.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어떤......” “그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황제가 그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길라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이미 참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는 의미. 그에 따른 대가는 나중에 따로 할 얘기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눌 의제는 아닌 것이다. 그가 눈짓을 하자 빌로린기사단장 단칸백작은 보고를 이어나갔다. “이미 전술했다시피 황녀의 암살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가문에서 밀려난 빈스나 마크같은 자들이 그런 큰일을 저지르기에는 자금이나 조직이 뒷받침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암살에 가담했던 자들이 모두 죽은 것도 의심스런 일입니다.” “빈스의 수행원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몇 있는 걸로 아는데”“ 리버스킨후작이 물었다. “그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확실합니다.” 단칸백작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법심문을 포함한 혹독한 고문을 겪었을 생존자들이 아는 바를 토설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암살은 이중삼중의 덫이 있습니다. 황녀를 호위해간 기사들과 병사들의 진술, 그리고 암살자들의 시체를 미루어 파악하면, 먼저 함정을 파고 매복한 자들과 정면에서 쳐들어온 자들은 같은 조직이 아닙니다. 기마대는 대륙을 떠도는 용병들로 이름이 꽤나 알려진 자들이고 매복한 자들은 전문적인 암살훈련을 받은 자들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크의 의수를 이용 황녀를 살해하고 마크까지 물어뜯어 죽인 놈이 또 다른 조직의 일원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세 조직을 이용했다. 이건가”“ 황제직속의 무력집단, 친위대의 대장 루카스 레인 후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만 또 다른 조직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명쾌하게 대답하는 단칸백작의 음성에는 확신이 서려있었다. 그는 좌중을 둘러본 후 결론을 요약하기 시작했다. “일단 모든 음모의 주재자를 “에이”라고 가정하면 그는 엘리오트에 불만을 가진 적당한 자들-요컨대 팔을 잃고 가문에서 떨려난 후 실의에 젖어있는 빈스와 마크-을 포섭한 후 그들을 충동질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꾸미는 것처럼 만들었지만 사실은 뒤에서 자신이 여러 조직을 끌어들입니다. 기마대와 매복자들은 다른 조직이지만 서로를 알았고 목표도 황녀를 죽이는 것으로 고용되었을 겁니다. 빈스와 마크의 목적은 황녀의 암살을 막아 다시금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황녀의 목숨을 구했을 때 돌격대의 대장이 배신감을 토로했겠지요. 그리고 그때 암중의 주재자 “에이”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납니다. 마크의 수행원, 사실은 그가 심어놓은 자가 마지막 순간에 황녀를 암살하고 마크까지 죽여서 완전히 입을 막은 것이지요.”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꾸민 이유는”“ 황제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어 그의 기분이 바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트빌라이와 엘리오트 사이를 이간질 하자는 의도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빈스와 마크가 황녀를 암살한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결론이니, 자연히 두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에이”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네 생각은 “에이”가 훈족이라는 소리로군.” 루카스가 말했다. “제 판단을 그렇습니다. 이 일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자들이 그들이니까요.” 단칸백작은 소드마스터이자 십존의 일원인 루카스후작에게 존경의 염을 실어 공손히 대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데일후작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리버스킨후작이 입을 열었다. “훈족의 음모가 분명한 이상 엘리오트와의 긴장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과와 배상을 받아낸 후 일을 이쯤에서 덮는 것이......” 그의 말은 황제의 호통으로 중단되었다. “귀족원주!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황녀가 죽었다. 내 동생이 죽었단 말이다. 만약 사신이 죽었다면 사과와 배상을 받고 끝낼 수 있지만 황제의 동생이 죽은 일을 그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다.”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는 황제의 음성에는 격한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귀족원주와 총리대신은 황제의 분노를 진정시킬 계획을 짜내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들도 천박한 엘리오트놈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양쪽으로 전선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루카스후작에게 지원의 눈빛을 보냈다.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검술을 가르친 후로는 스승으로 깍듯한 대접까지 받는 그가 거들어준다면 사태가 이쯤에서 봉합될 수도 있는 일. 염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의 눈길을 무시한 그가 오히려 한술 더 뜨고 나왔다. “언젠가는 손봐야 할 자들이니 이 기회에 교훈을 내려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어......어......!” 그가 그렇게 나올 줄 몰랐던 귀족원주는 입만 딱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길라드는 일이 틀어지는 것이 아닌가 가슴을 졸이다 루카스후작의 말을 듣고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엘리오트와의 일이 흐지부지 끝나면 그가 나설 공간이 적어지고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도 작아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칸백작이 마지막으로 나섰다. “엘리오트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지금 상태에서는 벅찬 일입니다. 게다가 “에이”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잠시의 시간이 황제를 진정시켰는지 그는 목청을 낮춰 설득조로 말했다. “그건 그렇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의 의도야 백작의 말대로 뻔한 일이다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퇴로가 없는 계획을 짜낸 “에이”를 칭찬해야겠지.” 황제의 결심은 확고했다.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귀족원주와 총리대신을 난감하게 했다. “두개의 전쟁을 어떻게 치러내실 겁니까”“ 두 후작과는 다르게 설득을 포기하지 않은 단칸백작은 에둘러서 반대의사를 피력했다.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자신 휘하의 기사들이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음모를 짜내면 되지.” 루카스후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대답했다. “음모라면”“ 화염의 길라드가 물었다. “황녀암살 주재자가 한 일을 우리도 못할 리가 없지.”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훈족과 엘리오트 양 쪽의 협공을 받는 상황 아닌가”“ “그렇지요.” 귀족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요르드를 끌어들이세.” “피요르드! 어떻게”“ “우리나라와 엘리오트, 피요르드는 모두 사이가 나쁘지. 우리가 엘리오트와 전쟁상태에 빠지면 피요르드도 가만히 있지는 못할 거요.” “피요르드를 충동질해서 엘리오트를 침략하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단칸이 물었다. 루카스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피요르드가 참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유야 만들어주면 되지. 우리도 암살을 할 수 있고 뒷공작을 벌일 수도 있지. “에이”라는 놈처럼 뻔히 알면서도 당해야 하는 덫을 놓을 수도 있고.” 루카스의 말에 눈에 띠게 안색이 좋아진 데일총리대신이 구체적인 사항을 짚어왔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놓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요.” 허탈한 대답에 대번에 얼굴이 구겨진 그가 뭐라 대꾸하려는 데 황제가 대화를 중단시켰다. “오늘 회의는 엘리오트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매듭짓고, 이틀 후 다시 회의를 합시다. 그때까지 피요르드를 충동질할 좋은 수단을 생각해 보시오.” 말의 형식은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회의가 끝났음을 선포한 황제가 머뭇거리는 귀족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뜻. 주춤주춤 일어서는 리버스킨후작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리버스킨후작, 단칸백작, 데일후작이 나가자 황제가 길라드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불편하신 거라도 있소”“ 참전의 대가를 슬쩍 돌려 묻는 것이다. “피요르드에 있는 마법사의 탑이란 것 말입니다. 상당히 좋은 제도 같더이다. 체계적으로 후진을 양성하면 나라에도 많은 도움이 될 테고......”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이런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마법사의 탑. 적법사 아만이 수장으로 있는 피요르드의 마법사 길드를 일컫는 말이었다. 길라드도 그런 정령사들의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이른바 정령사의 탑! 나이가 들수록 성욕과 물욕 같은 단순한 욕망은 수그러드는 반면에 명예욕은 좀체 없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후원을 받아서 정령사의 탑을 만들면 차후 모든 정령사의 정점에 자신이 설 수 있을 터.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적당한 터만 확보되면 내일부터라도 당장 공사를 시작하지요.” 황제는 시원시원하게 허락했다. 그의 말대로 정령사들의 탑이 생기면 피요르드의 마법사 길드가 그렇듯 나라에 보탬이 될 것이다. 길라드는 기꺼운 표정으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황궁복도를 걷는 리버스킨후작은 입맛이 썼다. 쓸개라도 씹은 듯 텁텁하고 찝찝했다. 말이 좋아 이간질이지 피요르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참전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혹 전쟁에 참가하더라도 다른 나라들이 물고 물려서 지치기를 기다릴 터.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으시겠지요.” 그의 내심을 잃은 단칸백작이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도대체 루카스라는 작자의 내심을 모르겠다. 황제를 말려야 할 자가 오히려 부추기고 있으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데일후작도 그에게 불만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황제가 끼고도는 것이 고깝고 화가 났다. “어쩌면 그는 큰 그림을 그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칸백작이 지나가듯 흘리는 말이 리버스킨후작의 귀를 잡아챘다. “큰 그림이라면”“ “이 기회에 대륙의 통일을 노릴 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대륙통일!” 단칸의 대답을 들은 데일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가 그 내용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놀라버렸다. “그게 가능할까”“ “대제가 한 일을 못할 것도 없지요.” 브론델황제에게 드래곤은 없지만 대제같이 초라한 공국이 아니라 대륙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스트빌라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었다. 루카스후작의 뜻대로 피요르드가 전쟁에 끼어들고 운만 따라준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후끈 열기가 치밀어 오르고 입이 바싹 말라 왔다. 대제 이후,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대륙의 통일. 생각만 해도 짜릿한 기분이 발끝까지 적셔온다. 그런 단칸백작을 보며 데일후작은 팔짱을 꼈다. 백작이 보기 드물게 신중한 사람이긴 해도 역시 젊음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쓸데없는 이상에 사로잡혀 저렇듯 흥분하고 있으니. 그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복잡한 일로 머리를 아프게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보다 루카스 레인후작이 드디어 아버지가 될 모양입니다.” “오! 그런가”“ 리버스킨후작이 감탄성을 발했다. 루카스의 가문은 대대로 손이 짧아서 그의 대에 이르러 피붙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도 오년동안 소식이 없더니 이제야 후사가 들어선 모양이었다. “축하할 일이군요.” “축하할 일이지.” 그들은 잘된 일이라고 연방 축하를 입에 담으면서도 생각은 달랐다. 대대로 황제의 신임을 받아 최고의 귀족가로 꼽히는 레인후작가가, 그 명성에 비해 영향력이 작은 것은 가문의 구성원이 턱없이 적은 때문이었다. 리버스킨 자신의 가문만 해도 직계라 할만한 자 100명이 넘고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을 꼽으라면 500명도 넘는다. 그것이 다 권력의 바탕이 된다. 만약 레인가의 혈족이 50명만 넘더라도 스트빌라이의 권력은 그들이 쥐고 흔들 것이다. 그들은 루카스의 가문이 대대로 손이 짧기를 빌며, 축하 선물로 뭘 보낼까 하는 생각에 잠겨 걸음을 떼지 못했다. * * *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엘란이었다. 드래곤의 두개골이 부셔지고 샐라임도 돌아가자 혹사당한 신체가 그 대가를 요구했다. 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데가 없어서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쓰리고 아려왔다. 그 아픔을 곱씹고 있는데 퍼석거리던 드래곤의 뼈가 통째로 갈려 사라지더니 그의 발치에서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작은 바람은 곧 덩치를 불리더니 눈 깜빡할 새에 드래곤 만큼이나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커지고도 만족을 못한 바람은 곧 회오리를 일으켜서 천지를 집어삼킬 것처럼 으르렁 거렸다. 어어, 하는 사이에 회오리에 말린 엘란은 프로스크, 하이론, 듀마, 그리고 카이어스가 빨려드는 것을 차례로 지켜보며 정신을 놓았다. 카이어스가 살아남은 것을 반가워할 틈도 없이. 그리고 이제 놓아버렸던 정신을 찾았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극심한 근육통과 마나홀에서 느껴지는, 불로 달군 쇠꼬챙이가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활짝 펼쳐진 사지를 당겨 두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다리를 오므리자 그런대로 또렷한 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배는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울렁거린다. 거기다 묵직한 머리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퍼마신 후 찾아오는 숙취처럼 그를 괴롭혔다. 만사가 귀찮았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일행들의 안녕을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포근한 잠이 그를 반겨주었다. ****************** 새로운 십존이 등장했습니다. 소드마스터 레인후작. 연재본에서는 처음 등장하는 거지만 수정본에서는 이미 한차례 등장했습니다. 5권 뒤에 붙일 생각이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밀려 육권으로 넘어갔습니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장면인데 일단은 그냥 넘어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중에 필요하면 설명을 약간 붙이지요. 조금만 언급하면 그 부분에서 칸토나가 다시 나옵니다. 칸토나 기억나십니까” 지금 연재하는 부분은 7권 부분이구요 책은 5권까지 출간이 되었습니다. 6권 부분은 삭제되었구요. 6권은 2월 달에 나올 겁니다. 계획대로라면^^ 7권도 분량이 차면 삭제하겠습니다. 지금 연재속도라면 먼~언 훗날이 되겠지만^^ 100화 올렸을 때 라니안에 잠깐 동안 에러가 난건 제가 올렸다 바로 지워서 그럴 겁니다. 덧붙일 말이 있어 잠깐 지웠는데 라떼님이 그때 들어오셨나 보네요. 14일에 군대 간다는 분(뤠이님)이 있어서 부랴부랴 올렸습니다. 13시 입대라는 데 볼 시간이 있나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평탄한 군 생활이 되길. 건강하세요. 엘란(102) 꿈속에서 그는 붉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홀린 것처럼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고뇌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눈동자에 어려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파에 찌들어 주름진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어느새 흰 머리도 눈에 띠었다. 그는 갑자기 거대한 눈동자가 싫어졌다. 자신을 관조하는 듯한 눈빛이 그러했고 감춰진 속마음까지 읽고서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도 그러했다. 아니 그런 것은 핑계였고 붉은 눈동자에게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 피곤에 절고 세상살이에 지쳐서 어디론가 떠나버렸으면 하는, 깊게 감춰진 자신의 속마음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가!”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라고 외치고 보니 꺼림칙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저주받은 붉은 기운을 등에 이고 살아간다는 아구족 제사장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붉은 눈동자가 거북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는 이상한 마력이 서려있어서 싫다고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엘란! 엘란!” 아련한, 친숙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자신을 옭아매는 눈동자에서 그를 떼어냈다. “하이론!” 주름살마다 걱정을 담고 있는 하이론의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하이론을 와락 끌어안았다. “무사하셨군요.” “그깟 회오리바람이 나를 어찌할 수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이제는 제법자란 머리를 매만졌다. “어이, 엘란, 낯간지러운 짓은 그만하고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카이어스의 생생한 목소리가 또한 반가웠다. 엘란은 하이론에게서 떨어져 나와 소리부터 질렀다. “꼬리에 맞아서 죽으신 줄 알았습니다.” “내가 명이 좀 길지.” 카이어스는 잇몸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엘란은 듀마와 프로스크까지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해연히 놀라버렸다. 그가 딛고 선 바닥은, 사막이 무색하게도 모래한 톨 없었던 것이다. 네모반듯한 벽돌만이 그의 발의 받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회오리바람이 우리를 끌어들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에 내동댕이쳐져 있더군.” “드래곤의 잔해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사막 밖으로 날려 온 걸가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죠”“ 카이어스는 뒤로 손을 뻗어 눈에 익은, 그러나 불길한 느낌을 안겨주었던, 그 구조물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것은 유적지 초입에서 보았던 오벨리스크였다. “저걸 보면, 여긴 우리가 싸웠던 곳, 그곳이야.” “그럼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드래곤을 물리치면 건축물이 들어나도록 마법이 걸려있었나 봐.” 엘란은 오벨리스크 뒤로 펼쳐져있는 사막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발밑을 살폈다. 간혹 색깔이 다른 벽돌이 섞여 있었을 뿐, 이른바 포두핌의 유적지에는 어떠한 건축물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대단한 보물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런 허무한 곳을 상상한 것도 아니었다. 포두핌이 말한 신세계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 있기는 있을까” 그가 사막의 신기루를 보고 헛소리를 해댄 것은 아닐까” 그는 도시의 광장 같이 생긴 사막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해댔다. 카이어스의 음성이 그를 현실세계로 불러들였다. “이것 좀 보라니까.” 그제야 헛된 상념에서 빠져나온 그는 엘프가 내미는 소드를 건네받았다. 전체적으로는 노말소드 같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많은 검이었다. 곧게 뻗은 블레이드와 그에 비해 너무 긴 그립, 그리고 삐죽하게 튀어나와 블레이드와 마주보는(가드라기보다는 단검 두개가 검신의 양쪽을 보호하는 듯한)손을 보호하는 가드가 인상적이었다. 또 검신에 파인 홈(검에 묻은 피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는)풀러가 그립안쪽을 통해 있어 피가 손잡이 안을 따라 폼멜을 통해 배출되는 모양도 보통의 검과는 달랐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그립에 박혀있는 검은 색 돌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 돌은 검은색 기류까지 어른거려서 쳐다보고 있자면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요사함! 엘란이 받은 검에 대한 첫인상, 그것은 요사스러움이었다. “어디서 얻은 겁니까”“ “어디긴 어디야, 여기지. 자네도 가만히 보면 멍한 데가 있어. 계속 같이 다녔는데 얻을 데가 여기 밖에 더 있겠나”“ 엘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그가 들고 있던 검을 휙휙 휘두르자 카이어스가 설명일 이어 붙였다. “회오리바람이 우리를 내려주고......말해 놓고 보니 정말 그렇네. 그 회오리바람 말이야, 대륙최고의 현자 프로스크의 마차보다 훨씬 안락하더구만. 어어 하다 보니 모래를 싹 치우고 바닥에 내려주더만.” “그렇게 안락하셔서 정신을 잃으셨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주물럭거리던 프로스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빈정거렸다. “뭐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들 옆에 누워있더군. 자네까지.” “검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게 희한해. 용아병이나 드래곤 스켈레톤을 미루어 짐작하면 대단한 물건이 있어야 정상인데, 자네도 보다시피 텅 빈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는 이 검들 뿐이야, 그것도 고이 모셔져 있는 게 아니라 잡동사니처럼 뒹굴고 있었어.” “검들이라뇨”“ 카이어스는 듀마와 프로스크를 가리켰다. “검은 다섯 자루였어.” 프로스크가 주물럭거리는 것이 나머지 검들인 모양이었다. 철그렁. 무의식중에 검을 휘두르던 엘란은 흠칫하더니 검을 떨어뜨렸다. “느꼈는가”“ 카이어스가 사뭇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떨어뜨린 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엘란은 귀신이라도 본 듯 하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섬뜩한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계속 휘둘러보게.” 엘란은 검을 주워들고 다시 한 번 휘저었다. 또다시 팔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지만, 카이어스의 말대로 휘두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초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처럼 형체도 없이 올라온 기운이 그의 귀에다 나직이 속삭였다. 그 나직한 소리는 고막에 닿는 순간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기겁을 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검을 집어 던졌다. 챙. 챙. 바닥을 두 번 튀긴 검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비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엘란을 노려보았다. 검 끝으로. “피를 원하는 검이라.” “마법검이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벌떡 일어선 듀마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아를 가진 마법검, 게다가 사악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검. 이 정도로 강력한 마법검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그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그것은 프로스크나 카이어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엘란만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피를 달라는 데요.” 엘란의 말에는 피를 원하는 아주 불길한 검이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니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 생각은 다른 듯 했다. “아주 획기적이야!” “뭐가 그렇게 획기적인가”“ 카이어스가 물었다. “마법검은 마나로 움직이네. 당연히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자는 검에 담긴 마법을 끌어낼 수 없지. 하지만 이 검은, 피를 먹여주기만 하면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자라도 사용할 수 있어. 얼마나 획기적인가”“ 듀마의 음성에서 열기가 넘실거렸다. “피를 먹여줘야 한다는 게 섬뜩하지도 않으십니까”“ 엘란은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했다. 그의 말을 들은 듀마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대제의 무덤. 그 앞에서 벌어진 피의 제전. 피를 보기가 싫어서, 세상의 욕망에 휘둘리기 싫어서, 삶이 덧없어서 떠나온 길인데 어느새 그것을 잊고 다시금 흥분하다니. 부끄럽고 참람했다. “그렇구만. 아주 사악한 검이야.”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던져버렸다. 세 개의 검을 끌어안고 있던 프로스크도 겸연쩍게 웃으며 검을 내려놓았다. 자신은 고용인으로 유적지를 안내했을 뿐이니 검들의 주인은 엘란, 하이론, 카이어스였던 것이다. 같이 싸웠던 듀마 마저 검을 내려놓자 혼자만 들고 있기 곤란했던 그는 아쉬운 마음을 삭이며 만약 저들이 검을 포기한다면 자신에게 달라고 청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이번 여행은 완전히 실패로군.” 하이론이 말했다. “마법검이 생겼잖소”“ 프로스크가 반문하자 카이어스가 대답했다. “검 따위나 찾으러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다시 묻던 그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손을 잡으면 살 땅을 떼어주겠다는 용병왕과 백법사의 제안, 그리고 생각해 보겠다는 저들의 반응. 아마 저들이 찾는 것은 살만한 곳으로 안내할 어떤 이정표이거나 신세계로 가는 게이트......” 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리를 굴리며 입맛을 다시던 그는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돌들을 보고는 숨을 멈춰 버렸다. “이봐......!” 별로 기대하지 않던 여행이었다. 그러나 오는 동안의 고초는 그의 기대를 부풀려 놓았고 그 고초의 끝자락에 겨우 마법검이 걸리자 하이론은 맥이 빠져버렸다. 자연 프로스크의 부름에 대해 찜찜하게 대응했다. “왜”“ “나 좀 날려주게.” 무슨 소린가” 날려달라니. “뭐”“ “하늘로 좀 올려달라는 말일세.” “쯧쯧쯧. 애도 아니고 그 나이에 장난이나 칠......” 프로스크가 말을 끊으며 언성을 높였다. “그게 아니라니깐!” “실피드.” 피곤했던 엘란은 둘의 말싸움을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조용히 실피드를 불러낸 그는 프로스크의 원대로, 하늘 높이 그를 띄워 올렸다. 잠시 후, 감격한 프로스크의 음성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기가 막히는군.” 떨리는 그의 음성이 듀마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레비테이션.” 하늘 높이 솟구친 그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법진이다!” “어디.” 카이어스가 발을 굴러 30미터 쯤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이론, 엘란 올라와 봐.” 공중으로 떠오르는 그들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너무나 거대해서 높은 곳에서 조망하지 않는다면 알아채지도 못할 초대형의 이동 마법진이었다. 텅 빈 광장의 중앙, 동그란 돌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돌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마법진의 일부였다. 하이론은 벅찬 희열에 휩싸였다. 포두핌의 유언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땅으로 연결된 마법진이리라. “찾았다.” 그는 엘란을 어깨를 감싸 안고 기쁨에 겨워 부르짖었다. 그러나 기쁨에 들뜬 그의 음성은 곧 듀마에 의해 깨어졌다. “글쎄올시다. 찾기는 찾았습니다만......” “무슨 뜻입니까”“ 엘란이 물었다. 듀마는 조용히 손을 들어 이동 마법진의 네 귀퉁이를 점하고 있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가리키더니, 다시 손을 당겨 아래에 그려진-밑에 있을 때는 단순하게 보이더니 위에서 보니 대단히 정교한-문양을 가리켰다. “이 마법진 말입니다. 크기도 크기지만 저 복잡한 문양을 보아하니 상상도 안갈 정도의 원거리용 마법진 같습니다. 아니면 마계같이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통로이거나.” “그래서요”“ 엘란과 하이론이 긴장하자 프로스크까지 덩달아 긴장해서는 듀마를 재촉했다. “하이론도 마법사니 잘 아시겠지만, 마법사라고해서 모든 분야에 해박한 것은 아니지요. 댁이 치료마법에 중점을 뒀듯 저도 중점을 둔 분야가 있었지요.”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비슷한 말은 하이론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동생들의 목을 고칠 요량으로 치료마법에 매진했고 그것은 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몇몇 분야의 마법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강 아는 정도에 불과했다. 애석하게도 대강 아는 부분의 대표적인 경우가 이동마법분야였다. 포강에서 엘란의 목숨을 구한 텔레포트스크롤도 그가 제작한 것이 아니라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었고, 그것을 건네주면서 찜찜한 표정으로 경고한 것도 제대로 작동하는 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듀마가 깊이 있게 파고든 것은 이동마법진 분야일 것이다. 그것은 포강에서 엘리오트군에 쫓길 때 마르시앙이황자의 얘기에서 유추한 것이었다. 그가 이황자궁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지하의 비밀 방에 그려진 마법진 때문이었고, 그것을 만든 것은 듀마라 했었다. 엘란의 예상은 정확했다. “나는 공격마법과 방어 마법을 제외한다면 마법진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소. 내 이때까지 연구한 바를 바탕으로 단언하건데 저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마법사의 탑에 적을 둔 모든 마법사가 달라붙어야 할 거요.” “......” “.....!” 그의 말은 충격이었다. 얼어버린 하이론과 엘란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의하면, 죽을 고생을 하며 찾아낸 열매는 먹음직스럽기만 할 뿐 입에 댈 수조차 없는 그림 속의 열매인 것이다. 허탈하고 절망스러웠다. 벅찬 희열의 뒤끝이라 더 그런지 몰랐다. “정말이오”“ 듀마는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을 요청하는 하이론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정말이오.” 그는 실망으로 축 처진 하이론의 어깨가 안돼 보였는지 토를 달았다. “어쩌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 한 번 시도나 해 봅시다.” 그는 마법진의 중앙, 둥근 돌이 놓인 곳으로 내려갔다. “위험한 곳으로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르니, 당신들은 거기서 기다리시오.” 턱. 마법진의 중앙에 떡 버티고 선 그는 로브를 들추더니 이른바 마법사의 모자-아이들이나 갖고 놀 법한, 별이 그려져 있는 고깔모자-를 쓰고, 마법지팡이를 꺼내었다. 신에게 배알하는 것처럼 경건한 태도로 하늘을 올려다 본 그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굳게 잡았다. 비밀의 주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주문을 외워야 하는 것인지, 카이어스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이 주문을 영창한 그가 지팡이를 흔들었다. 푸른 빛. 인적이 닿지 않는 바다의 푸르른 빛, 그 쪽빛의 영롱한 광채가 그를 감싸더니 지팡이를 타고 올라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슈아앙! 마법진 위에서 장엄하게 피어오른 황금빛 광채는 곧 잦아들었다. 그리고 듀마의 머리 위에 알아보기 힘든 룬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으로 일렁거리는 룬문자는 제 자리에 잠시도 있지 않고 매이지 않은 야생마처럼 마법진 위를 치달렸다. 프로스크가 눈을 비비며 놀라워 할 때, 일순간에 룬문자는 사라지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정적을 깨트리는 듀마의 몸짓. 푸악! 그는 피를 뿜으며 뒤로 쓰러졌다. “힐링!” 그는 하이론이 세 번의 마법을 걸었을 때야 다 죽어가는 얼굴로 겨우 눈을 떴다. “봤소”“ 엘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육써클 마법사요. 십존에 속하는 이른바 사법사에 비한다면 손색이 많으나 그들을 제외한다면 나와 필적할 마법사는 대륙에서도 손꼽힐 거요. 아니, 이동마법진에 관한한 십존보다 우위에 있을 지도 모르오.” “고맙소, 그러니 말은 그만하시오.” 하이론은 듀마의 손을 잡으며 계속 일어나려는 그를 말렸다. 자신이 답답한 심정에 한 질문의 답을 보여주고자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큰 부상을 당한 것이다. “고마울 것 없소. 평생을 연구한 마법진. 사실 한 번은 시험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소.” 그는 만류하는 하이론의 손길을 뿌리치고 기어이 일어서 앉았다. “포션이나 한 병 주시구랴.” 포션을 마신 그가 한결 혈색 도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룬문자 봤지요” 일단 마법진을 발동시켜서 룬문자를 띄운 후 그 문자의 움직임을 고정시키고 다시 배열해야 하는데......인간의 마력과 정신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오.” “사법사가 전부 모여도”“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 안 될 거요.” 빙그레 웃은 그가 엘란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제는 사법사도 아니지 않소. 당신이 광법사를 죽였으니....... 앞으로는 삼법사라고 불러야 겠구만.” 기분 탓일까 치아에 묻은 피가 왠지 서글퍼보였다. 엘란(103) 사막의 밤은 티 없이 맑고 서늘했다. 기후 탓으로 구름이 끼는 날이 거의 없으니 하늘에 박힌 별은 선명한 빛을 뿌려댄다. 그러나 그 초롱초롱한 빛도 지치고 실망한 여행자의 마음까지 달래 줄 수는 없었다. 어둠, 엘란의 마음은 어둡게 가라앉아 붉게 타오르는 카사의 빛도 그늘지게 만들었다. 하이론은 카사를 중심에 두고, 잠에 취한 듀마와 프로스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해낼 수 있을까”“ 하이론이 물었다. 기력을 회복한 듀마는 뜻밖의 말을 끄집어냈다. 남은 여생을 이 사막에서 보내며 마법진을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바닥의 문양을 연구해보면, 적은 마력으로도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 하이론은 프로스크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그의 말에 찬성했다. 찬성한 것은 물론 그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품까지 공급해 주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막의 유적지와 엘프의 숲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생필품을 대어주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터. 손해나는 거래는 아닌 것이다. 그때는 꼭 성공할 거라고 격려까지 해주더니 지금은 회의적 어조로 묻고 있었다.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엘란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성공할 수도 있지...... 운이 좋다면.” “대단한 운이 따라야 할 겁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아.” 씩씩하게 말한 그는 자리에 누웠다. “이제 우리도 자야지.” 눈을 감은 그는, 잠을 청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일단 여기는 듀마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상황을 봐가면서 대처를 해야겠지. 용병왕과 백법사의 중 누구와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할까”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며 저울질을 계속하던 그는 우연히, 정말 우연히 눈을 떴다 다리를 쭉 편 채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는 엘란의 옆얼굴을 보게 되었다. 서리. 서른도 되지 않는 엘란의 옆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흰머리와 이어져 있는 이마와 눈 꼬리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싱그러운 젊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세파에 찌든 사, 오십대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무언가 콱 메인, 울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하이론의 가슴을 달구었다. 검을 다루는 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나를 다루는 자는 쉬 늙지 않는다. 유년시절 죽을 고생을 한 광법사를 제외한다면 아직도 정정한 물의 시드나 오십대의 젊음을 보이는 화염의 길라드를 보더라도 명백한 일이었다. 시들어가는 엘란의 얼굴. 언제 저렇게 나이 먹었던가. 무엇이 그를 늙게 만드는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엘란이 말을 걸어왔다. “포두핌은 이 마법진까지 어떻게 왔을까요” 카그스 떼와 마주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용아병과 드래곤은 처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그건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일행들의 막강한 파티로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서야 겨우 도착한 마법진에 포두핌이 왔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이론은 누운 채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내 생각에는 포두핌이 왔을 1,500년 전에는 이런 가디언이 없었을 것 같구나.”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네 말대로지. 우리 같이 강력한 파티도 죽을 뻔 했는데 그들에게 그런 힘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 그건 그의 유언에서도 알 수 있지. 그는 신세계를 발견했다고 기뻐하며 죽어갔다. 듀마같은 고위 마법사가 없어서 이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 미루어 짐작한다면-물론 이건 짐작일 뿐이라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지만-그가 다녀간 이후 누군가가 가디언을 배치시켰을 거야. 어쩌면 용아병을 만든 자와 드래곤 스켈레톤을 만든 자도, 각기 다른 자일 가능성도 있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라고”“ 긍정을 표한 엘란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하이론이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뭐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하이론은 동생들을 짐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엘란의 음성은 심각하게 들렸다. “젊었을 적에는 그런 적도 있었지.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왜 그런 질문을 한 거냐”“ 무거운 분위기에 놀란 하이론이 일어나 앉았지만 엘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시선을 카사에 둘 뿐. “엘란”“ “지겹다. 조금 전에 중얼거린 말은 지겹다는 말입니다.” 엘란의 음성은 무거웠다. 너무나 무거워서 땅을 뚫고 내려가 지옥까지 닿을 정도로 무거웠다. * * * 바룬교의 롬바르드교구장 마커스사제는 파리한 얼굴을 한 채 신전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특유의 사제복은-푸른색이라 특히 추워 보이는-맵시를 중시하다 보니, 상당히 얇게 만들어져 있어서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맞지가 않았지만 감사를 받는 자리에는 반드시 입게 되어 있는 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보통 때였으면 따뜻한 난로를 끼고 앉아 있을 시간에 그가 찬바람을 맞으며 종종거리는 이유는 모두 황태자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엘리오트의 황태자가 헬레나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그의 처지는 꽤나 난처해졌는데, 중앙교단에서 내려온 감사단의 보고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 감사단이 오늘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이나 어기고 있었다. 그 바람에 마커스사제만 추위에 떨어야 했다. 혼자서 감사단을 맞이해야 하는 것도 바룬교의 수많은 관례 중 하나였다. 복잡한 절차와 엄격한 격식이 신심을 높인다나 뭐라나. 숨을 내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은 처량한 그의 심사를 더욱 자극했다. 부임한지 일년 만에 감사라니. 통상 사년에 한 번 하는 감사가 벌써 나온 것은 문책의 의미였고 좋은 보고가 올라갈 리 없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춥게 만들었다. 그는 목에 두른 영대를 여미고 두 손을 겨드랑이에 끼웠지만 싸늘한 날씨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입술은 점차 파랗게 질려갔고 손은 점점 곱아갔다. 그는 운 좋은 전임자와 운수 사나운 자신을 비교하며 처지를 한탄했다. “감사단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통고된 시간을 어기는 감사단에게 내심 욕설을 퍼붓던 그는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얼어붙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사단이 늦게 오는 것은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적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 다시 한 시간이 흘러가자 그의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감사를 하기 전에 기를 꺾어 놓을 생각인 듯 했다. 문책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감사단이 이렇듯 야비하게 나오자 오기가 치밀었다. 어디 두고 보자. 그가 내심 이를 갈 때, 육중한 사두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마차에 그려진 태양문양. 바룬교단의 마차였다. 신전 안으로 마차가 들어갈 수는 있으나 사람이 타고 갈 수는 없는 것이 교단의 규칙. 재빨리 달려간 마커스는 깍듯한 자세로 마차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긴 여정에 노고가 많으셨습니......”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던 그는 마차를 내리는 자의 얼굴을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베트런 사제. 15살에 사제서품을 받고 20세에 고위 사제에 오른 자. 교하라고 불리는 대사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다음 대의 대사제로 예상되는 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마커스가 가장 재수 없어 하는 자. 마커스가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35살의 나이였다. 많이 늦은 편은 아니었으나 이른바 출세가도에는 상당히 비껴서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자격지심과 질투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시선과 옷에 묻은 먼지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베트런의 결벽증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그의 두루뭉술한 가치관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가뜩이나 키가 커서 밑에서 볼라치면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까지 착 내려 깔자 아주 오만하게 보였다. 그리고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내미는 손을 쌀쌀맞게 뿌리치는 데는 성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베트런사제를 안내하는 마커스사제는 형편없는 날이라는 소리를 반복해서 웅얼거렸다. 물론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복도에 도열한 하급사제들과 수습사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바룬신에 영광을.” “바룬신에 영광을.” 베트런은 마주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운 자는 목소리까지 밉다고, 마커스의 귀에는 그의 음성이 아주 쌀쌀맞게 들렸다. 먼저 바룬신상에 예를 갖춘 베트런은 쉴 생각도 하지 않고 재정장부부터 요구했다. 마커스는 그의 깐깐한 반응에 이마를 짚었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 중앙교단으로 소환되어 문책을 받고...... 마커스의 상념은 베트런에 의해 깨어졌다. “롬바르드교구라면 손꼽히는 대형 교구인데 재정상태가 왜 이렇게 부실한 겁니까”“ 베트런은 잔고를 짚으며 마커스를 힐난했다. 고개를 숙여 장부의 잔고를 확인한 마커스는 베트런사제의 푸른 눈을 보았다가 천장을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잔고를 보고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것이 말일세......아시다시피 요즘 사정이 좋지 않아. 내전의 영향도 얼마쯤은 있었고......롬바르드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은 모두 헬레나신을 섬기고 바룬신을 믿는 신자는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네. 그런데도 중앙에서는 자꾸 돈을 올려 보내라고 닦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마커스는 차가워지는 베트런의 눈빛을 보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변명을 주워섬기다 중앙교단을 비난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눈치를 살피던 그는 실점을 만회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롬바르드교구에서는 빈민구제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네, 그래서 요즘 교세가 아주 넓어지고......” 베트런의 차가운 음성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엘리오트의 황태자가 헬레나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린 겁니까”“ “종교란 게 뭔가” 위 보다는 아래를 살피는 것이 종교 본래의 기능 아니겠는가” 우리 교구는 높은 신분 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그의 말은 다시 한 번 잘렸다. “종교본래의 기능......” 일은 이따위로 해놓고, 지금 저를 가르치겠다는 겁니까”“ 인정머리가 손톱만치도 없는 말이 마커스의 심사를 건드렸다. 뭐라 쏘아붙이려던 그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의 보고서에 따라 자신의 처지가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빈민구제를 하느라고 재정이 좀 악화됐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죠.” 마커스는 참고 또 참았다. 어린놈이라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라고, 베트런은 탁자를 톡톡 두들기며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빈민구제라......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마커스는 또다시 참았다. 교단에서 서류를 만지작거리는 일 아니면, 지방교구 감사를 다니며 굽실거림만 받아서 저런 까다로운 성격이 되었을 거라며 억지로 마음을 위로했다. 암 성격이 저렇게 모나면 사회생활 하기도 힘들지. 그는 되지도 않은 이유를 끌어들여 억지로 위안을 삼았다. “당신 같은 자가 어떻게 롬바르드같이 중요한 교구를 맡게 됐는지 이유를 모르겠군. 집이 부자인 모양이지” 아니면 손금이 없어질 정도로 손을 비볐던가”“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들리자 마커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쪽 방면으로 치자면 베트런사제님을 당할 수가 없지요.” “무슨 소린가”“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래 교하님을 어떻게 구워삶아서 그 젊은 나이에 고위직에 오르신 겁니까” 입 속의 혀처럼 구는 모양이죠” 소문에 듣자니 밑까지 닦아준다면서요”“ “이런 무례한 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베트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례하기 누가 무례했다고 그래”“ 마커스도 지지 않고 맞고함을 질렀다.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놈! 잘 들어! 귀족들과 어울려 포도주나 마셔대니 세상 어려운 줄 모르는 모양인데, 니가 입고 있는 그 번드르르한 옷과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신자들의 주머니, 내세에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귀족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쥐어짜서 나온 것을, 귀족들이 바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항상 고맙고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특히 너처럼 빈자들 손도 한 번 안 잡아주고 다른 사제들이 힘들여 얻어온 것을 빈둥거리면서 받아 처먹는 주제는 더욱 더 그래야 하고. 그린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감사나 끝내고 꺼져.” 평생 처음 들어보는 통렬한 질책에 베트런은 할말을 잃었다. 그저 악독한 눈빛을 빛내며 콧김을 뿜어댈 뿐. “왜 노려보면 어쩔 건데” 스노우로 쪼르르 달려가서 교하님께 일러바치게”“ “당신.” 충격이 심한 듯, 한 마디 하고는 한참을 노려보던 베트런은 정신을 수습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상은 하고 하는 소린가” 그래 충분히 생각하고 한 말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조리 있게 말할 수가 없지. 그래 두고 봅시다. 성자양반. 앞으로 어떤 문책을 받게 될지.” 머커스는 찔끔했다. 주제도 모르고 나댄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 구름처럼 일었다. 그러나 내친걸음,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리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너무 높았다. 자신을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는 수습사제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도 그런 마음을 부추겼고. “그렇게 종이쪼가리나 들고 있지 말고 돈이 사용된 현장을 직접 가보지 그러나” 왜 싫은가” 당신은 너무 고매하신 분이라 어려운 사람들을 대하기 싫은 모양이지” 그러고도 성직자라 할 수 있나” 차라리 관리나 되지 그러나” 평생 거들먹거리고 살기에는 그것도 좋을 텐데.” “말 다했소”“ “물론......아직 덜했지. 규정에 의하면-난 복잡한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 꽤 싫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좋은 점도 있구만-고위사제에 오르려면 반드시 여행을 다니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데 자네는 그런 적이 없었지. 내 교단에다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네. 자네 같은 부적격자는 교단에서 떠나야 해.” “내가......” 베트런은 말문이 막혔다. 교단에는 확실히 그런 규칙이 있었고 고행을 목적으로 한 여행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제들은 지키고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사나워지자 등에 식은땀이 솟았다.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이번에 내가 감사단으로 온 것은 그런 목적도 있었소. 그러니 그런 부당한 오해는 하지 마시오.” 마커스는 베트런이 조금 전에 하던 그대로,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오해” 웃기고 있네.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으냐” 어디 고생 좀 해봐라.” “아~그러셨군요. 제가 하마터면 오해를 할 뻔 했군요. 잘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손이 바쁘던 참인데.” 그는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베트런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롬바르드의 교외.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을 바룬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거요”“ 마차의 의자에 등을 기댄 베트런은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호통이나 쳐주고 일장 훈시를 늘어놓으려던 감사길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이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베트런사제 말대로라면 재정을 축낸 곳,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갑니다.” “왜”“ 질문을 늘어놓으려던 베트런은 말문을 닫았다. 마커스의 의도가 짐작되었던 것이다. 그래, 나를 골탕 먹이겠다 이거지. 나중에 두고 보자. “병원은 왜 이렇게 먼 곳에 지었나”“ “그건 어쩔 수 없었소. 나도 가까운 곳에 짓고는 싶었소만, 아시다시피 있는 자들은 자신들 근처에 빈자들을 위한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오. 집값이 떨어진다고 그럽디다. 혐오스럽기도 하고.”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가 서는 반동에 앞으로 쏠렸다 제 자리로 돌아온 베트런은 밖으로 나서며 이를 갈았다. “내가 너를 그냥 두면 사람이 아니다.” 병원은 붐볐다. 무료로 치료를 하는 곳은 롬바르드전체, 아니 엘리오트 내에서도 두세 곳에 불과하니 붐비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버려진 귀족의 저택을 개조, 사개월전에 문을 연 이곳은 정성스레 치료를 하는 바람에 더욱 붐볐다. 정문을 통과하자 더러운 천을 깔고 땅바닥에 누워있는 병자들이 사제들을 맞았다. 그들은 사제들을 보자마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살갑게 반겼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이 분은 새로 오신 분인가 보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자가 베트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이거 놓게.” 그는 기겁한 태도로 손을 뿌리쳤다. 땀 냄새와 피고름 냄새가 아주 역하게 느껴졌다. “사제님 살려 주십시오.” 다른 병자 하나가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깨끗하게 세탁된 푸른 사제복에 시커먼 손자국이 남겨졌다. 평소 결벽증이 있었던 베트런은 치를 떨며 매달리는 환자를 걷어차 버렸다. “더러운 놈. 어디다 손을 대는 것이냐”“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배를 채인 환자는 붉은 피를 게워내며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사위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저 자식 뭐야”“ “사제가 사람을 죽였다.” “살인이다.” 베트런은 참을 수가 없었다. 시장통처럼 떠들썩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때에 찌들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병자들도 역겨웠다. 모조리 쓸어다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닥쳐라! 비천한 것들아.” “퉤.” 누군가가 뱉어낸 누런 가래침. 그 가래침이 베트런의 뺨을 타고 내려와 푸른 사제복을 물들였다. 엘란(104) $.철가면. 군사도시 아르고느. 이패이시스라인 중에서 취약한 곳 중 하나로 지목되는 아르고느에는 수많은 병력들이 증파되어 있었다. 고스만지역에 주둔한 훈족의 대병력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맥클레이용병대의 본부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해야 했다. 원래의 주인을 몰아낸 웨런백작은 못마땅한 기색을 전혀 숨기려하지 않았다. 용병왕 맥클레이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클레이는 어디 있나”“ “아버님은 전선을 시찰 중이십니다.” 맥클레이의 아들 페이더스도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패이시스라인의 총책임자 웨런백작은 아르고느에 당도하자마자 본부를 차지하더니 용병들을 하인처럼 부려대는 것이다. 위대한 아버지를 뉘 집 강아지처럼 불러대며.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새벽부터 불러대더니......, 자신은 전선 시찰중이시다.” 웨런백작은 찻잔을 집어 들며 빈정거렸다. “책임자가 솔선수범 해야지요.” “누가 책임자란 말인가”“ 웨런의 부관 폴라크자작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지휘관이 내려왔으면 용병들의 통솔권을 넘기는 것이 당연한 수순. 휘하용병들의 지휘권을 자신들이 직접 행사하겠다면 웨런백작의 지시라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고용인 주제에 지휘권을 틀어쥐고 내어놓지 않는 것은 물론 고분고분 명령도 따르지 않는 저들의 처사가 심히 못마땅했다. 거기다 원래 아르고느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까지 내어놓지 않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훈족의 발호가 없었다면 문제가 터져도 벌써 터졌을 터. “물론 웨런백작님이 책임자이시죠.”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굽실거리던 체이스는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토를 달았다. “그러나 용병대의 지휘는 저희들이 행사하는 것이 순리에 맞겠죠.” “순리라니”“ “저희 용병들은 거칩니다. 스트빌라이의 곱상하신 귀족님들이 통솔하기에는 무리가 많을 겁니다.” 체이스는 고개를 수그리며 슬쩍 맞은편을 가리켰다. 보르딕 루오. 안면이 있던 자였다. 예전에 그의 의뢰를 수행하다 못난 꼴을 많이 보았었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짧게 치켜 깎은 머리와 뺨에 난 흉터로도 곱상한 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맥클레이용병대의 천부장 보카르트가 겁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손가락을 꺾었다. 뚜둑, 뚜둑. 관절 꺾이는 소리가 본부 안을 감돌 때 곱상한 기사는 미소를 머금었다. “체이스천부장님 말을 들으니 그도 이해가 가는 군요.” 체이스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예상하던 반응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전에는 참을성이 없어서 약간의 도발에도 쉽게 흥분했고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던 멍청이였는데 지금은 별로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분한 것은 웨런백작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작이 잔을 집어던졌다.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신경을 자극하던 자를 향해서였다. 차를 쏟으며 날아간 잔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의 얼굴을 노렸다. 철가면. 오거의 모양을 본 딴 철가면은 양쪽 귀의 앞부분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챙그렁. 날아간 잔은 철가면에 부딪쳐 산산이 조각났다. “감히 뉘 앞에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냐”“ 폴라크자작이 대신 나서서 호통을 내질렀다. 맥클레이가 웨런백작을 상대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격이 맞지 않는 다는 것. 십존의 일인이 겨우 웨런백작 따위를 상대하며 굽실거리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패이시스라인의 책임자가 기껏 그의 수하에게 분풀이나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곤란하다. 폴라크자작이 대신 호통을 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흉이 심해 얼굴을 드러낼 수는 없군요. 이해를 바랍니다.” 억지로 꾸민 티가 역력한 음성이었다. 철가면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폴라크는 흉이 있다는 데 계속 벗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해서 대충 넘어갔다. 철가면이 극히 공경하는 자세라 웨런백작의 분도 얼마쯤은 풀렸고 아랫것들과 대거리하는 것도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페이더스의 얼굴을 보고는 의문에 휩싸여 버렸다. 일남 일녀를 슬하에 둔 용병왕 맥클레이의 장자로 이인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페어더스가 기대를 가지고 철가면을 보다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도 철가면의 정체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마 얼굴에 흉이 있다는 소리도 거짓말일 것이다. 폴라크자작이 새로운 의문으로 추궁을 하려 할 때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증원은 없는 겁니까”“ “더 이상의 증원은 없다.” 웨런백작이 대답했다. “지금 병력으로는 백법사를 상대하기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루오가 반문했다. 웨런백작과 폴라크자작은 보르딕 루오가 입술을 떼는 순간 뒤로 물러나 앉았다. 밑에 사람들은 밑에 사람들과 의논하라는 뜻이었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백법사가 움직이는 전사들은 용맹한 자들입니다. 어중이떠중이로는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루오는 깍지를 껴 뒤통수에 대고는 싱글거렸다. “그래서 당신들을 쓰는 것 아닙니까” 백법사야 용병왕께서 상대하시면 되고 그가 지휘하는 전사들도 당신들 용병이 상대하면 되지요. 그럼 나머지들은 저희 스트빌라이군에서 처리를 하지요.” “우리보고 선봉에 서라는 것이요”“ 러츠가 거칠게 탁자를 두들겼다. 거기에는 애송이 기사를 겁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었다. 그러나 루오는 여전히 빙글거렸다. “당신들도 귀가 있으니 사정은 아실 겁니다. 엘리오트와 국경을 이루는 융커산맥쪽에서도 조만간 전쟁이 벌어질 테니 이쪽에만 병력을 집중시킬 수는 없지요.” 폴라크는 노회한 용병들을 상대하면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보르딕을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스트빌라이에는 십존이 네 사람이나 있소. 황실친위대장 루카스레인후작, 화염의 길라드, 흑법사 로피드, 성기사 빌바오. 그런데 한 명도 이쪽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니오.” 체이스가 반박하고 나섰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루카스레인후작님이야 황제를 지켜야 하니 올 수 없고, 화염의 길라드님은 융커산맥 쪽으로 가셔서 올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기사 빌바오는 바룬신전에 소속되어 있으니 세속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구요. 그리고 흑법사님은 저희도 애석하게 생각하는 게 어디에 계신지 알 수가 없어서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보르딕은 조리있게 설명했다. 별 볼일 없는 애송이가 몇 년 사이에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체이스는 반박할 구멍을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손가락을 꺾거나 아니면 팔을 휘젓는 것으로 보르딕을 겁주려던 보카르트는 그가 겁먹은 기색은커녕 싱글거리기까지 하자 울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벌떡 일어선 그가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우리를 방패막이 삼아서 백법사를 막겠다 그거구만!”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깎지를 푼 보르딕이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아~그래서 지휘권을 놓지 않으시려는 거군요. 저희들이 용병대를 희생시킬까봐”“ 당황한 체이스가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 보르딕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한 몸으로 똘똘 뭉쳐 상대해도 벅찰 텐데 속으로 딴 생각을 품으시면 안 되죠. 지휘권이 둘로 나눠져 있으면 병력을 통솔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체이스는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터트렸다. “흠흠, 그건 전적으로 오햅니다. 이 친구가 원래 말을 막하는 성격이라서 종종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곤 하지요.” 너스레를 떨던 체이스는 질책을 담아 보카르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쫘악! 근육을 자랑하려고 얇은 옷만 걸치고 있던 보카르트의 어깨에 시뻘건 손자국이 생겼다. “제가 보기에는 진심으로 한 말 같습니다.” 보르딕은 추궁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아침부터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좀 들었으면 합니다.” 철가면이 말했다. 체이스는 철가면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네고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시켰다. “오늘 새벽 백법사 타클마칸을 봤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쿵. 웨런이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밀린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소음을 발했다. 그 이후로는 정적이었다. 그 정적을 폴라크가 깨트렸다. “전군에 비상을 걸어라!” 연락관이 뛰쳐나가고 새벽부터 시작된 신경전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긴장한 참모들 간에 한 동안 진지한 대화가 오고갔다. 페이더스는 본부를 나서며 보카르트를 쏘아보았다. 보카르트는 지은 죄가 있는 지라 어깨를 잔뜩 우그렸는데 덩치가 하도 크다보니 별 차이는 나지 않았다. “앞으로 말을 할 때는 속으로 다섯까지 센 후에 말 하시오.” “그렇게 하지요.” 보카르트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병왕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이인자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질책을 듣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특히 페이더스가 어릴 때,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켜보며 말썽을 부릴 때마다 엉덩이를 갈겨주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페이더스도 체이스, 보카르트, 러츠 같은 천부장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맥클레이용병대를 키운 공은 인정하지만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는 맘에 들지 않았다. 명령이 잘 먹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나중에 모두 물갈이하리라 마음먹은 그의 눈에 철가면이 들어왔다. 이 자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는 천부장의 지위에 오른 자였는데 가만히 보면 체이스를 제외한 다른 천부장들도 이 자의 정체를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상당히 조심스레 대하는 눈치고. 그것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용병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소한 것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자였다. 한 때는 궁금증이 치밀어 체이스에게 정체를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언젠가 알 게 되겠지.” 그들이 연병장을 가로질러 용병대를 나설 때 연병장에 엎드려 있던 드레이크는 치솟는 울화를 억지로 삼켜야 했다. 트립스라는 자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통에 흰머리가 다 생길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기합을 넣고 있는 것이다. 뒤에서 다가오는 자에게 어떻게 경례를 하는가”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이게 다 에릭슨 그 자식 때문이었다. 그 놈만 똘똘하게 처신했다면 황녀가 암살되지 않았을 테고 자신도 가문에서 쫓겨나 일반보병으로 참전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것도 무려 삼십년 동안이나. 드레이크의 옆에서 엎드리고 있는 에릭슨은 처형당하지 않고 전쟁터로 배치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처형되었어야 할 일이었으나 양쪽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스트빌라이의 입장에서는 한 명의 병사도 귀중했고, 특히 에릭슨같이 검에 능통한 기사는 쓸모가 많았다. 물론 전쟁터에서 죽으라는 뜻이 담겨 있는 30년 동안의 강제 군역이지만 혹시나 살아남아 공을 세운다면 자유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철가면은 여기저기 솟아있는 막사 사이를 천천히 이동했다. 삼십분 가량 지나자 다른 천막들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형천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거하는 곳이었다. 천을 걷어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엘란, 무슨 일로 불렀......” 그의 말은 누군가의 호통으로 끊어졌다. “이 멍청아!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 거냐” 이름을 부르지 말고 대장님으로 불러라. 아니면 천부장이나, 철가면이라고 부르던가.” “죄송합니다. 입에 박혀서 그만.” 자신의 입을 때리던 아에게는 곱살 맞게 웃으며 하이론에게 다가갔다. “저 하이론......” “하이론이라고도 부르지 말라니까.” “아~예, 백부장님, 저......그 검 있잖습니까”“ “그 검이라니”“ 옆에 있던 그린이 대신 대답했다. “귀신들린 검 말입니다.” “귀신들린 검이라니”“ “헤헤,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유적지에서 얻은 마법검 말입니다.” 짝귀가 경박하게 웃으며 말하자 하이론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로이!” 찔끔한 로이는 콜드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는 머리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꼬치꼬치 캐물어서 그만.” “안 된다.” 하이론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는 콜드가 가졌으니 네 개 남았잖아요” 성녀가 위험하다고 남은 검은 교도들이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니 우리한테 주세요”“ 하이론을 빙 둘러싼 아에게, 그린, 짝귀, 밤톨은 선물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졸라대고 있었다. 하이론은 난처해서 허허 하고 웃을 뿐, 허락을 하지는 않았다. 용병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발을 디딘 아르고느에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저들 네 명이었다. 아에게 등이 용병대에 가입을 할 때 가명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맥클레이용병대는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체이스가 신병들을 훈련시키다 저들을 알아봤다고 하였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먹어서 한 번 본 자들은 잊기도 싶지 않았으리라. “그냥 줘 버려라!” 카이어스가 역성을 들고 나섰다. “그 검들은 사악해서 주인을 헤칠 겁니다.” 엘란은 반대였다. “콜드도 가지고 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잖아”“ 밤톨이 콜드를 걸고 넘어졌다. 삼십 명의 지고교도들은 저들의 대치가 어떻게 끝날까 흥미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그들도 검을 가지고 싶었으나 성녀의 명이 워낙 지엄한지라 거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 피를 먹이고 주인이 된 콜드를 제외한 네 개의 검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죽을 지도 몰라.” 그린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거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냐”“ 하이론이 물었다. “검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저희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하신 때문이지요” 그럼 검을 주십시오. 전쟁터에서는 우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도 쉽게 죽습니다. 전쟁터에서 칼에 맞아 죽는 것 보다는 검을 받아서 얼마간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사는 게 훨씬 낫지 않습니까” 게다가 콜드를 보면 별 부작용도 없는 듯 하고요.” 하이론은 콜드를 힐끗 쳐다보고는 엘란의 얼굴을 보았다. 엘란에게서 마음대로 하시라는 표정을 읽은 하이론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마지못해 허락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나. 조심해서 사용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말을 하거라.” 하이론은 개운치 않은 기색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따라나서는 아에게를 떨쳐버리고. “쳇 어디 보물창고라도 만들어놨나 보네.” 괜히 따라붙었다 통박을 당한 아에게가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두건을 꺼내-시커먼 천에는 해골문양이 그려져 있었다-써 보고는 구시렁거렸다. “재수 없게 해골이 뭐야 해골이. 드래곤을 그려 넣던가 하다못해 엘란, 이크! 하이론한테는 비밀이다.” 목을 잔뜩 움츠린 그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영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가 않네. 드래곤이 안 되면 천부장처럼 오거라도 그려주지.” “망치보다는 낫지 않나”“ 카이어스가 농을 걸었다. 아에게용병대 표식이 망치였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지.” 짝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면을 썼다. “어때 무서워 보여”“ “무섭기는커녕 우스워 보입니다.” 로이가 말했다. “그런가.” 짝귀는 슬그머니 가면을 벗고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용병대에서는 왜 가면을 쓰라고 한 거지”“ “민심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콜드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민심이라니”“ 콜드는 막사 밖으로 나가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들어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용병왕은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어. 당연히 세평에 귀를 기울여야 할 입장이야. 생각해 보게, 악마교로 매도당하는 우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 드러나면 주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리고 타 신전에서도 가만있지 않을걸. 악마교척결의 기치를 내걸고 수천 명의 성기사들이 검을 휘두를 거야. 게다가 미신에 휘둘리는 용병들의 사기를 생각해서라도 비밀로 해야 하는 거야." 콜드는 아에게 등을 불러 모아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그러니, 우리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돼. 절대로! 새삼 당부하네만 입 조심하게.” 꿀꺽! 긴장한 밤톨이 크게 침을 삼켰다. “염려 마시오. 입에다 자물통을 채워놓으리다.” 아에게은 입에 자물통 채우는 시늉을 하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때, 하이론이 들어왔다. 흙투성이 보자기가 길쭉한 물건들을 감싸고 있었는데 검들을 땅에다 파묻어서 보관한 것 같았다. “여기 있다.” 철그렁. 천이 벗겨지자 땅에 떨어진 검들이 빛을 발했다. 자유를 얻은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또한 섬뜩하게 보였다. “잘하는 짓일까”“ 영원히 묻어 버리려던 검을 파낸 하이론은 착잡한 시선을 던졌다. 그렇거나 말거나 아에게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귀하다는 마법검을, 그것도 이고 소드를 얻게 된 것이다. 마나를 느낄 수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엘란(105) 가장 먼저 검을 집어 든 것은 짝귀였다. 검이 마치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꼭 움켜쥐자 손에 그립이 착 감겨드는 것이 오랫동안 사용한 물건 같았다. 쭉 뻗은 블레이드를 황홀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데 엘란이 느꼈던 그 섬뜩한 기운이 말을 걸어왔다. 힘! 짝귀가 언제나 갈망해마지 않았던 것. 힘만 있었다면 두려움에 떨며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 더불어 들창코, 아니 폴라리스도 비명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전신을 치달리며 심장을 두들겼다. 두근두근. 맥박의 움직임이 검과 함께 숨쉰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매혹적인 음성은 가슴을 적시고 손을 움직였다.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저절로 움직인 손, 아니 손을 끌고 저절로 움직인 마법검이 그의 왼쪽 팔목을 베었다. 피! 선홍색의 선연한 피가 날을 따라 풀러에 고였다. 그리고는 가드를 통해 그립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색 구슬. 그립 중앙에 박혀있는 검은 색 구슬에 한 줄기 붉은 선이 그어졌다. 구슬로 들어간 짝귀의 피는 원을 그리며 뭉쳐졌고 그 순간 검은 구슬은 붉은 구슬로 변화했다. 붉은 빛 광채가 찬연하게 뿜어지며 천막 안을 물들였다. 마치 석양처럼. 광채가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숨 막히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 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검을 주시하던 사람들이 뱉어낸 소리였다. 그 소리에 짝귀는 정신을 차렸다. “악!”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베어진 손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손목에는 아직도 검날이 대어져 있었는데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검을 치우는데 아쉬워하는 한숨 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하다. 그 순간 짝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쉬워하는 소리, 어쩐지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은 그 소리는 분명히 검에서 발해진 소리였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니들도 들었어”“ 그는 자신처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검을 검집에 넣는 아에게, 그린, 밤톨에게 동시에 물었다. “뭘 말이야”“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는 그린이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히 느꼈으면서도 모른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검을 도로 뺏어갈까 염려해서 하는 행동이리라. “잘못 들었나.” 그린의 의도를 파악한 짝귀가 재빨리 말을 바꾸며 의뭉을 떨었다. 위험하건 말건 그도 검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힘만 가질 수 있다면 약간의, 아니 상당한 위험까지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들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엘란과 하이론이었다. $.고스만 회전(會戰) 아에게가 검을 얻은 다음날 아침, 마침내 출전을 알리는 전령이 막사에 당도했다. 스트빌라이측의 증원이 모두 이루어졌고 백법사도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제 그만 결판을 낼 심산인 듯했다. 분분히 일어난 대원들이 두건을 꺼낼 쓸 때 마나수련을 하고 있던 엘란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얼굴을 가린 철가면을 매만졌다. 딱딱한 금속은 피부에 닿으면서 불쾌한 감각을 가져다주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위안도 가져다주었다. 가면은 자신과 세상을 단절시키는 동시에 마음을 보호하는 방어막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마치 의식이라도 치루는 사람처럼 가면을 머리에 고정시키는-이마와 귀, 그리고 턱 부근에 각기 달린 세 가닥의 끈-끈을 다시 한 뻔 꽉 매었다. 풀어지지 않게. * * * 기기긱.......쿵. 새로 보강된 목책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문을 통해 수천 명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달전부터 진을 치고 있던 훈족의 전사들은 스트빌라이군과 맥클레이용병대가 진영을 갖출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삼만이 넘는 스트빌라이군이 대오를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 정도였다. 그리고 이만여 용병이 도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 보다 훨씬 짧았다. 숨 막히는 긴장이 피어오를 때 흰옷의 마법사가 전면에 나섰다. 백법사! 좌중의 시선을 일시에 끌어 모은 그가 천천히 손을 올리고 개전을 알린다. “밤낮으로 감시를 했을 테니 매복을 깐다든가 하는 수작은 양쪽 다 부릴 수 없었을 거다. 이제 대치는 그만두고 승부를 결하자.” 소문으로만 접하던 백법사를 유심히 지켜보던 폴라크자작은 사령관 웨런백작에게 속닥거렸다. “용병들의 수가 너무 적습니다.” 웨런이 무슨 일인가 싶어 체이스를 부르려 할 때 보르딕이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이죠.” “당연하다니”“ “그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 우리들 계산을 훤히 꿰뚫고 있을 겁니다.” “우리들 계산이라니”“ 웨런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용병대와 백법사를 붙여 상잔시키겠단 의도 말입니다.” 웨런은 허를 찔린 것처럼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가”“ 너무 비대해진 맥클레이용병대와 훈족을 양패구상 시키려는 작전은 은밀히 하달된 것으로 자신과 폴라크자작만이 알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이 일이 새어나갔다가는 용병대의 격한 반발 뿐 아니라 그와 같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아군 삼만 명의 반발도 감수해야 할 터. 순간적으로 보르딕이 첩자 일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수를 보십시오.” “수라니”“ 폴라크가 물었다. “훈족은 십만이 넘습니다. 지휘관들도 우리에 비해 떨어질 것이 없죠. 솔직히 말한다면 저들이 훨씬 더 우수하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스트빌라이에서 준비한 병력은 고작 삼만 입니다. 이패이시스라인을 수비하던 병사들이라고는 하나 최정예는 아니죠. 자연 훈족의 전사를 당해내기는 역부족. 당연히 용병대에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고 용병을 빼돌린 거죠. 아마 저기 없는 자들이 진짜배기 일 겁니다.” “그럼”“ “예, 오늘 보니까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는 군요. 저들이 지휘권을 넘기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사태가 일어날까 염려한 때문일 겁니다.” “보카르트라는 자가 한 말이 우연히 한 말이 아니었군.” “그런 셈이죠.” 보르딕은 마지막 하려던 말. 당신들같이 모자라는 자들이 사령관으로 내려온 것도 다 그 같은 이유, 즉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이어서 일거라는 소리는 속으로 삼켰다. 전투가 코앞인데 지휘관들의 기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보리딕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인지라 평상시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일단 감각을 일깨우면 예민하다 못해 살인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하나인 엘란은 보르딕의 말을 하이론에게 들려주었다. 자신이 보르딕의 말을 엿듣듯 다른 이들도 엿듣지 못하게, 하이론형제가 만든 수화로써. “저 놈 그 얼빠진 놈 맞지”“ 하이론도 보르딕을 기억하고 있었다. 코르도바습지에서 십존 종식을 부르짖던 철부지. “맞습니다.” “많이 컸구나.” 하이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온실 속의 화초가 외풍을 맞으면 대개 죽어 버린다. 사람도 마찬가지. 고이고이 받들어지던 자가 고난을 겪으면 보통은 꺾이거나 의기소침하기 마련인데 보르딕은 그것을 훌륭히 뛰어넘었다. 시련을 기화로 자신을 갈고 닦아 빛나는 보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우측에서 백법사를 노려보던 은발의 장년인. 장년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칠십이 넘은 노인, 용병왕 맥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는 시원찮은 지휘관들 중, 개중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병왕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는 좌측에도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긴장과 공포로 잔뜩 흥분한 병사들 틈에서, 유일하게 침착을 잃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둘은 투구를 눌러쓰고 커다란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올려 쓰고 있어서 외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제법 똑똑한 자로군.” “그렇게 보이는 군요.” “저 자는 구해주는 게 좋겠군.”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백법사는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렸다. 양 진영이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고, 잠시 후 전쟁이 벌어질 것은 세살박이 코흘리개도 다 아는 사실인데 의향을 묻고 그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보르딕은 그가 침략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기 싫어서 스트빌라이군이 개전을 선포하도록 유도한다고 생각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저런다고 침략이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법사 타클마칸이 기다리는 신호는 따로 있었다. 모종의, 극히 은밀한 신호를 접한 그가 아직도 들고 있던 손을 힘주어 내렸다. “돌격.” 우렁찬 고함이 울리고 진군의 나발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웨렌은 가만히 있는 맥클레이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진격해!” 고함을 들은 것일까, 가볍게 고삐를 챈 용병왕이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두발을 번쩍 치켜든 말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함성이 질러대는 20,000여 용병들이 그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이에 호응한 스트빌라이군에서도 전투개시를 알리는 북을 울렸다. 둥둥둥둥! 보병들은 용병들에 뒤이어 달려 나가는 기병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북소리와 더불어 긴장이 고조되고 그에 따라 심장이 뛰었다. 둥둥둥, 두근두근두근. 북 두드리는 고수가 명령에 따라 템포를 조절한다. 맥박에 맞춰 천천히 울리던 소리는 이내 가팔라져 종래에는 연속적으로 귀를 두들겼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그에 따라 맥박도 빠르게 뛰었고 심장에서 뿜어진 피가 전신을 달구었다. 가벼운 긴장과 공포가 살기로 변하고 호흡이 점차 거칠어 질 때, 폴라크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보병 돌격.” 먼저 경장보병이 땅을 박찼고 뒤이어 중장보병이 뛰어나갔다. 30년 동안 군에 매여야 하는 에릭슨과 드레이크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후진에 남은 웨런과 폴라크는 적당한 시기에 목책 안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며 돌격하는 용병왕을 주시했다. 용병왕은 솔선수범을 하려는 것인지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이십년 만인가요”“ 폴라크는 소풍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 있게 물었다. “뭐가 말인가”“ “용병왕이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 말입니다.” “오~ 그렇구만.” 뒤늦게 깨달은 웨런이 탄성을 발했다. 오늘 전투는 여러모로 의미 깊은 것이었다. 훈족과의 개전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면서, 두 세력을 상잔시켜야 하는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 더불어 용병대가 반석위에 서면서, 직접적으로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용병왕의 무용을 직접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했다. 그것도 십존의 둘이 자웅을 결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십존 간의 대결! 아르고느에 파견된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보르딕도 이 부분만큼은 기꺼워했다. 늙어서 손자들을 앉혀두고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꺼리가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엘란은 다시 한 번 철가면을 만지며 달려드는 훈족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프로스크의 말마따나 대륙인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밑으로 내려온 그의 시선이 휘날리는 용병왕의 은발에 닿았다. 귀찮아서 투구를 쓰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선두에서 휘날리는 저 머리를 보며 용병들은 용기를 얻었고 적들은 전의를 잃었다. 하이론의 말마따나 통솔의 한 방편이리라. 철가면은 용병왕과의 첫 번째 만남을 떠올렸다. 강함. 그가 받은 느낌은 용병왕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강함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다. 용병왕에게서 느낀 강함은 영혼의 강함. 품성의 강함이었다. 엘란은 수많은 강자들을 만났고 직접 부딪치기도 했다. 물의 시드, 화염의 길라드, 광법사일레이저, 막스. 모두 쟁쟁한 실력자들이었다. 막스의 실력이 좀 처지기는 하지만 이들과 용병왕이 직접 겨룬다면 누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단련이 된 자는 단연 용병왕맥클레이였다. 그 굳센 의지와 신념은 싸움기술과는 또 다른 경지의 강함을 이루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백법사 타클마칸! 영혼의 강함을 따진자면 이도 용병왕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둘이 지금 마주 달려가고 있었다. ********* 작가잡담. 모종의 일로 요즘 조금(정말 조금) 바쁩니다. 요 근래 눈을 맞고 돌아다녔더니 몸 상태도 시원찮고. 모종의 일이란 게 별다른 일은 아니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른 작가분들은 모르겠지만 전 서로 다른 두 작품을 써나가는 게 좀 힘드네요. 나중에 익숙해지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전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는 판타지 시장이 이렇게 망가진 줄은 몰랐습니다. 뭐 나라 경제 전체가 좋지 않긴 합니다만(오늘도 주식이 폭락하는 군요. 망할 놈의 바이러스!) 이 정도까지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요새 잘나가는 건 로또복권하고 대를 이어 진정한 대박을 터트리는 재벌 2,3,4세들뿐인 것 같습니다. 엘란이 종반부에 다다른 지금 제가 급히 다음 작품을 써 나가는 이유는 망가진 시장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작품들 때문입니다. 출판사의 권유이기도 한 일인데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의 텀이 길면 하루에도 몇 권씩 쏟아지는 다른 작품들 때문에 잊혀져 버린다는 것이죠. 엘란이 많이 팔리거나 유명해져서 정구라고 쓴 책이 나오면 믿고 읽을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엘란이 완결된 후 천천히 쓰겠습니다만 5권이 나온 지금 그런 일은 없을 듯 하네요^^ 두 번째 작품은 저로서나 출판사로서나(판타지 시장을 살리기 위해서 후속작을 성공시켜야 한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계속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일을 찾을 것인가” 갈림길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처녀작이 은퇴작이 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두 번째 작품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엘란을 쓸 때와는 약간 각오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잡담을 이렇듯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는, 예 맞습니다. 연재주기가 늘어지더라도 이해해 주십사하는 그런 깊은(“) 뜻이^^ 6권이 삭제되어서 보내달라는 분이 계신데 죄송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연재본은 이미 제 하드에서도 삭제된지라 없어졌구요 출판사에 보낸 수정본만 남은 상텐데 그걸 보내기가 좀 그렇습니다. 출판사에 넘어간 원고와 똑 같은 글을 보내기 곤란한 점이 있다는 말이죠. 이해해 주십시오. 에고 소드로 고쳤습니다.(원고에서만) 마법검은 대단한 자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무시무시한 검이었는데 누가 약간의 제약을 걸어두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법검에 관한 설명은 나중에 나올 수도 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 타 작가님들 글을 보면 이야기를 이리저리 꼬고 풀리지 않은 문제를 여기저기 늘어놓아서 나중에 저걸 다 어떻게 수습하나 하고 걱정하면서 본 기억이 있는데, 제 글에서도 그걸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뭐 나중에 거진 해결이 될 겁니다. 물론 너무 장황해지거나 독자를 무시할 정도로 시시콜콜히 늘어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만 대강 해결은 봅니다. 독자님들 예상대로 앞에 나왔던 여러 가지 상황들과 소품들이 쓰이겠죠. 엘란(106) 마스크를 쓴 보병 둘은 제일 후미진 곳으로 처졌다.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속도를 늦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맨 후미에 처져서도 엘란처럼 돌격하는 용병왕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어중간한 속도로 달려 대열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눈치하나는 빠삭한지라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때문이었다. 원통한 점이 있다면 귀족출신이란 죄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트립스가 창으로 궁둥이를 꾹꾹 내지르는 바람에 맨 끝으로 이탈하지 못한다는 것. 더불어 옆에서 달리는 에릭슨의 음성도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실전은 처음이지” 긴장하지 마라! 내가 도와줄 테니.”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고, 저 입을 인두로 지저 버리고 싶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초원이 말들로 몸살을 앓는 가운데 드디어 용병왕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훈족과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웨런백작은 발걸이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 세웠다. 용병왕의 솜씨를 자세히 보고 싶었던 것이다. 훈족 전사의 선두에 선 것은 여자였다. 철가면도 익히 아는 얼굴. 러츠를 자존심을 무참히 꺾어버렸던 세오나였다. 용병왕이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인정이라고는 추호도 섞이지 않은 매서운 칼질이었다. 힘에서 밀리는 그녀는 맞상대를 하지 않고 안장 위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휘잉! 그녀의 등위로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검이 지나쳤다. 그리고 둘은 멀어져갔다. 여자는 용병왕을 지나치더니 용병들 사이도 그냥 헤집고 다녔다. 아무런 저지 없이. 그 뒤를 훈족의 전사들이 내달렸다. 그녀를 지나친 용병왕은 훈족 전사들 사이를 지나쳐 좁게 반원을 그렸다. 양측의 군사들은 헛손질만 한 채 허무하게 스쳐 지나갔다. “.....!” “.....!” 스트빌라이의 후진은 혼돈에 빠져버렸다. 양측이 움직임은 전투가 아니라 군사훈련 같았다. 얼이 빠진 웨런은 일어선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신체 중 움직이는 것은 경련을 일으키는 눈언저리뿐이다. “저......저......저......저런 죽일 놈! 배......배......배신을.” 그가 띄엄띄엄 경악의 말을 토해낼 때 훈족의 선봉이 보병을 앞지른 스트빌라이의 기병과 부딪쳐 갔다. 세오나가 바스타드소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달려드는 중장기병의 창을 후려치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창을 떨어뜨리는 기사의 목을 끊어놓았다. 뒤로 날아가는 머리. 전투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사자였고 웨런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두 번째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에어 애로우. 백법사가 친히 시전한 50발의 화살이 기병 오십을 간단하게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 순간 스트빌라이의 사기는 땅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 버렸다. “막아라! 물러서지 마라!” 웨런의 고함은 시끄러운 전장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보르딕이 이미 눈치 채고 있던 사실을. 버려진 것은 용병들과 삼만의 군사뿐이 아니라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고수가 미친 듯이 북을 두들겼지만 이미 식어버린 병사들의 사기를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기병을 손쉽게 흩어버린 훈족은 그 여세를 몰아 보병들을 도륙해 나갔다. 뒤이어 들어 닥친 용병들은 흩어진 기병들을 사냥하고 훈족의 사냥터에 끼어들었다. “틀렸다.” 절망에 찬 탄식이 폴라크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용병을 버릴 생각만 했지 저들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훈족에 붙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무......무......문......문을 열어라! 어서! 어서!” 공황에 빠진 웨런은 마구잡이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굳게 닫힌 목책문은 열리지 않았고 끊임없는 비명과 고함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목책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병사들의 시신. 불길한 예감이 폴라크를 지배했다. 목책을 장악하고 있다가 용병들이 훈족과 상잔하면 문을 열어 자신들을 받아들여야 할 병력이 모두 당한 것 같았다. 그는 굳게 닫힌 목책문과 그 위에 둘러선 용병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으며 퇴로도 이미 끊겼음을 확인했다. 퇴로가 끊기고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생의 욕구가 맹렬하게 솟구쳤다. 그러자 공포가 사라지고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그는 허둥거리며 도망가려는 웨런을 잡았다. “뒤로 가봐야 별 수 없을 겁니다.” 이제야 퇴로가 끊긴 것을 확인한 웨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살려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포위망을 뚫고 다른 곳에서 이패이시스라인을 넘으면 됩니다.” 보르딕이 희망을 던져주었다. 사령관이 등을 돌리고 도망치면 살아날 수 있는 실낱같은 가망성도 날아가 버린다. 어떻게든 그를 선두에 세워야 하는 것이다. 웨런은 선천적으로 귀가 얇았다. 조금의 가능성이 보이자 발작적인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돌격 앞으로.” 그를 따라 호위병들이 질주했다. 에릭슨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공을 세울 생각은 애저녁에 달아나 버렸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마나를 품은 검이 말의 발목을 찍었다. 구슬픈 비명을 토하며 나뒹구는 말을 쫓아 떨어진 훈족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실력 하나 만큼은 알아줘야겠군.” 드레이크는 혼자서 30명을 해치운 에릭슨의 솜씨에 감탄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는 자신을 향해 검을 내지르던 용병의 가슴을 저미며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에 튄 피를 떨쳐버리기 위해서였다. 세상에서 에릭슨을 가장 미워하는 드레이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반경 10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도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드레이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장대한 체구의 용병을 보며 슬쩍 몸을 비켰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놈을 처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미꾸라지처럼 빠져 버리자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던 러츠는 자신을 노려보는 트립스를 발견하고 입술을 핥았다. “이 새끼, 너 오늘 죽었어.” “누가 할 소릴! 곰 같은 새끼.” 트립스와 곰은 곧 격렬하게 맞부딪쳤고 곰이 쉽게 이겼다. 곁눈질로 트립스의 최후를 확인한 드레이크는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살려 둥굴둥굴한 용병 놈의 창자를 휘저어 주고는 부지런히 에릭슨의 뒤를 따라다녔다. 마스크를 쓴 병사 둘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여유 있게 대화까지 나누면서. “역시 용병왕은 배신을 계획하고 있었군요.” “순순히 당할 인물은 아니었지. 야심도 컸고.” “황녀도 저 놈이 시해했을까요”“ “용병왕과 훈족의 합작품이겠지. 아니면 엘리오트와 우리를 싸움 붙이려는 피요르드의 수작이거나.” “피요르드의 짓이라면 노리는 것은 엘리오트의 땅일까요”“ “뻔하지, 우리가 엘리오트의 진을 빼놓으면 그 틈을 노려 엘리오트를 침공할거야. 사실 피요르드가 그런 흉계를 부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유리하다네. 피요르드의 참전을 위해 뒷 공작을 벌일 필요가 없을 테니.” “피요르드 짓이 아니라고 보십니까”“ “피요르드의 짓일 가능성은 아주 낮아. 그들은 모험을 싫어하거든.” 그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상태에서 주변의 훈족과 용병들을 착실하게 격살하고 있었다. 칼질 한 번에 한 명의 적병이 정확하게 사라져갔다. 전장에서 가장 시선을 모으는 자들은 오거모양의 철가면을 쓴 자와 해골문양의 두건을 뒤집어 쓴 자들이었다. 카이어스는 말 그대로 광분하고 있었다. 그에게 걸리는 자들은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토막이 나거나 심장이 쪼개졌다. 그가 딛는 발걸음을 따라 피의 길이 이루어졌고 겁에 질린 적병들이 분분히 길을 터주었다. “하하하하!” 통쾌하게 웃어젖힌 그는 쌓이고 쌓였던 광기를 마음껏 발산했다. 사백년 동안 쌓였던 광기를. 카이어스가 광분한다면 아에게 등은 검이 광분하고 있었다. 짝귀는 처음 적의 목숨을 거두고는 겁에 질려 오줌을 지렸다. 오한이 들고 구역질이 올라와서 한시라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허리가 수그려지고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공황에 휩싸여 왝왝거리며 토악질을 하는 데 경장보병의 칼이 그의 머리를 노렸다. 겁에 질린 눈에 피로 얼룩진 칼이 보일 때 검이 저절로 움직였다. 챙! 칼을 물리친 에고소드는 적의 심장 깊숙이 박혀들었다. 짝귀는 생생하게 들었다. 검이 피를 마셔대는 소리를. 그것이 시작이었다. 짝귀는 첫 살인의 충격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검에 휘둘렸다. 검은 저절로 움직여 적의 피를 마시고는 불길까지 토해냈다. 마법검에 베인 살들은 거멓게 익어버렸다. 밤톨의 사정도 짝귀와 대동소이했다. 첫살인의 반응부터 검에 휘둘리는 과정까지. 아에게와 그린도 검에 휘둘리기는 했으나 짝귀와 밤톨만큼은 아니었다. 이미 살인의 경험이 있었던 데다 실력도 둘 보다 훨씬 윗줄이었던 것이다. 평정을 회복한 아에게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검이 저절로 움직이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짝귀와 밤톨은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 버렸고, 곧 압도적이 힘이 가져다주는 희열에 빠져들었다. 하이론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엘란의 뒤를 따르면 죽고 죽이는 인간군상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콜드도 싸움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처음 접하는 집단살육에 질려 덜덜 떠는 로이를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며 한숨을 삼킬 뿐. 엘란은 천천히 움직였다. 카이어스가 만들어 놓은 죽음의 길을 따라 간혹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킬 따름이었다. 그 행동이 스트빌라이측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쭉 뻗은 손을 따라 화염이 솟구쳐 나와 병사들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손짓 한번에 화염이 솟구치고 그에 따라 덧없는 목숨이 스러져갔다. 둥. 두둥. 둥. 두둥둥. 웨런이 진지를 박차고 나갈 때부터 북소리는 바뀌어져 있었다. 전투양상이 여의치 않으니 적의 포위를 뚫으라는 명령.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진 전투이니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목숨을 건지라는, 그래서 후방으로 다시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스트빌라이군도 마찬가지였다. 생로를 찾으려는 절박한 움직임이 훈족과 용병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런 반발의 중심에는 웨런과 폴라크, 보르딕이 있었다. 호위병을 몰고 온 그들이 혼전에 개입하자 사기가 오른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칼과 창을 휘둘렀다. “여어, 오랜만이구만.” 온통 피 칠을 한 러츠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고래의 격언그대로, 훈족과 손을 잡은 사실을 알리지 않는 바람에 생사를 도외시하고 싸우다 턱을 깨뜨려 놓은 훈족의 전사를 향해서였다. 세오나의 오라비, 스시악은 이를 갈아 부치다 시큰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타클마칸의 뛰어난 마법으로도 턱을 완치하는 것은 불가능해서 날이 굳거나 딱딱한 것을 씹으면 못 견딜 정도로 아려왔다. 저 우악스런 용병 놈을 요절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동맹을 맺은 처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번 노려본 후 외면하는 것이 다였다. 애석하게도. 보르딕은 말위에 탄 채, 폼멜의 끝으로 적병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꽉 막힌 비명이 기분 좋게 들렸다. 웨런과 폴라크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백법사는 용병왕의 옆에서 전장의 상태를 예의 주시했다. 적의 수는 벌써 반이나 줄어있었다. “저항이 의외로 끈질기군요.” 백법사가 말했다. “퇴로를 열어줄 걸 그랬습니다. 그럼 저렇듯 죽자 사자 달려들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용병왕이 말을 받았다. “다음에는 그렇게 합시다.”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강자의 여유가 한껏 묻어나고 있었다. 엘란은 피 냄새를 맡는 것이 지겨워졌다. 전투의 승패는 이미 결판이 났으니 이쯤에서 발을 빼고 싶었다. 노랗게 질린 로이의 얼굴과 카이어스나 아에게 등의 광태도 그런 마음을 부추겼다. 엘란은 말 등을 밟고 일어섰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철가면이 적들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왔다. 철가면은 조금 전처럼 가만히 손을 뻗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분분히 도망가는 가운데 붉은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폭죽처럼 비상한 불길은 포위망을 거의 와해시킨 적장들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졌다. 쾅! 웨런은 강대한 기운이 등을 강타하는 걸 느끼며 말에서 튕겨나갔다. 숨통이 콱 틀어 막히고 뜨거운 열기가 심장까지 침범했다. 그는 자신의 살타는 냄새를 맡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긴 잠에. “백작님!” 폴라크는 불덩이가 되어 날아가는 사령관을 보며 피 끓는 절규를 터트렸다. 그것이 그가 한 마지막 말이 되었다. 연이어 닥친 화염이 말까지 집어삼켰다. “억!” 보르딕은 누군가가 발을 당기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다. 혼비백산한 그가 호신을 위해 검을 당길 때 머리위로 불길이 지나가며 뜨거운 열기를 선사했다. 놀란 눈에 말과 함께 타들어가는 폴라크의 최후가 보였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만약 낙마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렇게 되었으리라. “따라와라!” 복장을 보면 경장보병이 분명한데 자신을 구한 자는 대뜸 하대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보르딕은 따지지 않았다. 쉽게 적들을 도살하며 길을 내는 저들의 동작에서 대항할 수 없는 위엄을 느낀 때문이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둘 중 한명이 입을 떼었다. “얼굴에 가면 뒤집어 쓴 저놈, 정령을 요상하게 부리는데요”“ “나도 정령을 파이어 볼 던지듯 하는 놈은 처음으로 보는군.” “누굴까요”“ “맥클레이의 비밀병기 쯤 되겠지.” 싱거운 대답을 한 마스크가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 가벼운 동작에 앞을 막은 세 명의 용병들이 반 토막이 되어 쓰러졌다. “볼 건 다 봤으니 이제 그만 떠나지.” 그는 포위망을 마치 자기 집 안방처럼 말하더니, 그 말대로 쉽게 포위를 풀었다. 검에서 오러가 뿜어지는 순간 앞을 막은 훈족의 전사들은 짚단처럼 베어졌다. 머리가 날아가고 절단된 사지가 허공을 수놓았다. 순식간에 30명이 죽어 넘어지자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고 경장보병 둘은 밖으로 이탈했다. 그 뒤를 보르딕이 이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줄줄이 따랐다. 그 병사들 중에는 에릭슨과 여전히 욕을 하면서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드레이크도 있었다. 전장은 참혹했다.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주인을 잃은 말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 엘란(107) 하이론은 주인 잃은 말과 무구를 챙기고, 더불어 시체를 뒤져 금전을 거두는 용병들을 공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두 시간 전만해도 팔팔하게 살아있던 생명들이 덧없이 스러졌다. 적의 삼만 병력 중 살아남은 것은 고작해서 일, 이천. 가히 몰살이라 할 수 있었다. 누렇게 뜬 얼굴로도 꼿꼿하게 버티던 로이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토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워낼 것도 없어서 쓴물만이 올라왔다. “왝왝!” “괜찮으냐”“ 하이론은 로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덩치는 이미 어른만큼 자라있었지만 앳된 이목구비와 보송보송한 솜털은 아직 여물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로이는 오물이 잔뜩 묻은 입술을 움직여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질린 안색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강한 척 할 필요 없다. 죽은 사람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고, 오히려 그런 자가 진정으로 강한 자라 할 수 있다.” 로이는 하이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보르딕은 안정을 되찾았고, 자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패이시스라인을 넘어서서 용병대의 본거지인 아르고느에 접어들어 보여준 둘의 솜씨가 워낙 고절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부리는 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거대한 불덩이를 만들어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사령관의 집무실 역할을 하던 용병대의 본부를 완전히 뭉개버렸다. 그리고 달려드는 용병들에게 마법의 화살을 먹여주었다. 편안하게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날아드는 화살을 비롯한 각종 공격을 막아준 것은 의문의 소드마스터였다. 그는 다가오는 용병들을 수월하게 도륙했다. 개 중에는 소드익스퍼터로 보여지는 자도 다수 있었으니, 이 둘에게 당한 손실이 고스만초원의 격돌로 인한 피해 보다 더 클 수도 있었다. 용병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후 셋은 말을 탈취해서 아르고느를 벗어났다. 그리고는 스트빌라이의 수도 스노우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보르딕은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보병복장을 한 마법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 십니까”“ “......” 마스크를 벗어던진 마법사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검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단칸백작이 막아낼 수 있을까요”“ “맥클레이용병대와 백법사의 훈족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지금쯤 화염의 길라드가 제자들을 데리고 도착해 있을 거요. 그대가 거기로 합류를 하면 얼추 비슷한 전력이 될 거요.”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들은 보르딕이 소리를 질렀다. “용병왕이 배신할 걸 알고 있었군요. 그러면서도 삼만 병력을 희생시킨 겁니까”“ 분노한 목소리가 평원을 울렸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나”“ 검사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반문했다. “마법사나 정령사, 그리고 지원부대가 전혀 없었습니다. 전 그래서 용병대와 훈족을 상잔시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용병왕이 배신할 걸 알고 준비를 갖추고 있었군요. 도대체 왜 삼만 명의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묵과하신 겁니까”“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그가 배신할 것은 우리도 몰랐다.” 마법사가 머리를 저었다. “빌로린 기사단을 대기시키고 길라드님을 부른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하실 겁니까”“ “세살을 살다보면 사람의 마음만큼 무서운 것도 없고 알기 어려운 것도 없지. 우리가 그의 가슴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의 마음을 알 수야 없지 않은가” 특히 용병왕 같은 자는 더욱 그러하지. 우리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따져보고 그에 따른 대비를 갖춘 것뿐이야.” “최소한 그를 의심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보르딕은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그건 맞다.” 검사가 선선히 시인했다. “도대......” 검사가 그의 말머리를 끊었다. “애초에 용병대를 이리저리 옮긴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맥클레이는 자신을 꺼리는 분위기를 알아챘을 것이고 께름칙했겠지. 그에 따른 대책도 생각을 했을 테고. 당연히 우리는 그를 더욱 의심하게 되고. 의심이 의심을 부른 거야. 서로를 믿지 못하니.” “의심이 가면 그를 고용하지 않았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것이 정답이네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야. 만약 그가 반역의 마음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상태에서 그를 내치면 그는 우리의 적이 될 거야. 생각해 보게,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이 어떻게 나오겠나” 다른 나라로 건너가 그들의 도구가 되겠지. 괜히 건드려 강력한 적만 만드는 꼴이야. 만약 반역을 뜻을 품고 있다면, 당연히 훈족과 손을 잡았을 테고, 오늘 전투에 참가한 자들도 모두 죽었겠지. 그래서 삼만 명의 병력만 투입한 거야. 이쪽저쪽 따져보고 피해를 최소화 한 거지. 보게 우리 예상대로 되지 않았나!” “죽은 삼만 병사들의 목숨 값은 누가 지불하는 겁니까”“ 보르딕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웃기는군. 누가 목숨 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 목숨 값은 얼만가” 우리가 백만 골덴을 내겠다면 자네는 생명을 팔겠는가”“ “......” “목숨은 하나뿐이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지. 누가 그 대가를 쳐주지는 않아.” “그런 궤변이......!” “헛소리는 그만두게. 처음 계획대로 되었어도 병사들은 죽게 되었을 거야 그렇지 않나”“ 마스크를 벗은 검사가 달리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보르딕을 주시했다. 호수처럼 가라앉은 눈동자는 아기사슴의 눈처럼 맑고 고요해서 장년인의 눈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보르딕은 왠지 섬뜩한 느낌에 시선을 외면했다. “그걸 보면 자네는 화낼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야. 자네 생각대로라면 어차피 죽어야 할 자들이 죽은 거니까. 자네 같은 사람은 남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던데, 왜 지금에서야 소리를 지르나” 자네가 화난 것은 자신이 죽을 뻔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 진실을 담은 신랄한 음성이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보르딕은 분하지만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용병들과 훈족이 서로를 죽이는 것을 고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애초에 웨런백작이 받은 명령대로라면-용병왕이 배신을 하던 하지 않았던-용병들과 같이 싸우던 병사들은 죽게 되어 있었다. 마법사는 외면하는 보르딕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만.” 미안하다는 마법사의 표정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는 자네들처럼-웨런과 폴라크 그 멍청이들까지 포함해서-비정하지 않아. 만약 맥클레이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병사들은 몰살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상처 난 자존심이 오기를 불렀다. 외면하던 고개를 돌린 보르딕은 도발적으로 소리쳤다. “자네의 처음 질문을 돌려주지,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모릅니다.” “짐작은 했을 텐데”“ “왜 십존이라도 되십니까”“ 보르딕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세상에 소드마스터가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의외의 말을 들은 보르딕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설마......!” “그래 맞다. 루카스레인후작님이시다.” “그...그....그럼 당신은”“ “흑법사.” 짤막한 대답이 보르딕의 가슴을 쳤다. 검사가 황실친위대장인 레인후작이라는 사실보다 마법사의 정체가 흑법사라는 사실이 더욱 충격을 주었다. 흑법사 로피르. 그는 십존 중 가장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다른 십존들의 신분은 명확히 드러나 있었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도 대충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피드의 내력은 아무도 몰랐고 거처도 일정치 않았다. 황제조차 만나기 힘들다는 그가 전쟁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하면서. 보르딕은 흑법사의 말에 동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용병왕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십존의 셋이 훈족을 상대하는 것이 되었을 테니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몰살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푹 수그린 그는 가끔 흑법사를 힐끔거렸다. 감정을 죽이지 못하고 둘에게 소리친 것을 후회하면서. 또한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른 것을 후회하면서. “난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인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코르도바습지에서의 경험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성숙시켰고 한 단계 올라선 능력을 가져다주었다는 자신감이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레인후작은 애송이를 몰아붙인 흑법사를 바라보며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거짓말도 잘한다는 눈짓이었다. 용병왕이 어느 쪽이든 병사들의 피해는 피할 수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귀족원에서 입안된 이 전투의 진정한 목적, 그것은 용병왕의 내심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배신할 것이 아니라면 자신과 흑법사가 나서 기진맥진한 백법사와 용병왕을 동시에 제거하고, 만약 배신했다면 피해 없이 병사들을 후퇴시키는 것이 자신과 흑법사가 귀족원에서 부탁받은 임무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황제 그리고 흑법사의 내심은 달랐다. 용병왕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귀족원의 의도대로 되었을 것이나 자신들은 그가 배신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고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했다. 맥클레이용병대를 몰아대면서. 모종의 이유로 이 전투는 반드시 졌어야 했고 병사들은 모두 죽어야 했다. 이제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이제는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다. 갈림길로 들어선 레인은 흑법사에게 말했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길라드와 함께 저들을 저지시키게. 계획한 대로.” “이 꼬마 친구는 어쩔까”“ 흑법사가 보르딕을 가리켰다. 꼬마라는 소리를 듣고 일그러지던 보르딕의 인상이 친구라는 소리를 듣고 활짝 펴졌다. “데리고 가서 단칸백작에게 주게.” 그리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루카스의 말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 * * 여세를 몰아 스트빌라이의 국토를 유린하고 스노우를 강타하려던 용병대와 훈족의 발길은 의외의 사태를 맞아 아르고느에 묶여 버렸다. 루카스와 흑법사로 의심되는 자가 아르고느를 휘저어 버렸고 수많은 용병들, 그 중에서도 핵심전력을 결딴내 버렸던 것이다. 그 의미는 컸다. 저들이 배신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 자연 대책도 세워놓았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기습의 의미도 전혀 없다. 당연히 용병대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고 행보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훈족이 친 대형 파오 안에 양측의 요인들이 모였다. 가장 깊숙한 곳에는 보료가 깔려 있었는데 백법사가 오연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자리에도 마찬가지로 보료가 깔렸는데 거기에는 용병왕 맥클레이가 눈을 반개한 채 앉아 있었다. 둘의 좌우에는 이른바 심복들이 둘러앉아 있어 전체적인 모양은 용병왕과 백법사를 정점으로 한 마름모꼴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에 놓여있는 화로만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워낼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서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적들이 고작 삼만 명의 병력과 멍청한 사령관을 파견했을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일입니다.” 프로스크가 먼저 운을 떼었다. 그 순간 맥클레이의 독자 페이더스가 눈을 부라렸다. 알면서 당했다는 말인가! “그럼 대책을 세웠어야 하지 않습니까”“ 페이더스가 소리를 빽 질렀고 그 순간 엘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면에 가려 드러나진 않았지만. “진정하시지요, 페이더스님. 십존의 둘이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너무 의외의 일이니까요.” 체이스가 맞은편에 앉은 훈족을 눈짓하며 말리고 나섰다. 같은 편끼리 다투는 모습을 백법사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십니까”“ 백법사 타클마칸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칼 이베가 용병왕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일단 진격에 제동을 걸었으니 차후의 행보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라는 뜻이었다. 맥클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가지런히 모은 프로스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떼었다. “적의 함정이 있나 싶어 전진을 막았습니다만,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퍼져있는 용병들의 보고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적의 주력은 크리누스로 집결한다고 합니다.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 최대한 빨리 크리누스를 점령하고 곧이어 스노우를 점령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일 겁니다.”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원론적인 얘기 아닙니까”“ 세오나가 무릎위에 올려놓은 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페이더스가 침을 삼켰다. 한 눈에 확 들어오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와 틀어 올린 머리, 그리고 하얀 목선이 대단한 자극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이런 딱딱한 자리만 아니라면 반드시 말을 건넸을 만큼 색다른 매력을 흘렸다. “원론적이라는 것은 가장 좋은 전술이라는 뜻도 됩니다.” 페이더스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자가 탁한 음성을 발했다. 그 때 백법사 만큼이나 하얀 로브를 두르고 있던 커리는 그와 엘란을 동시에 가리켰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당시들은 무슨 비밀이 그렇게나 많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은 꺼리는 것이 있다는 의미. 동맹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무시하는 것인가”“ 불쾌한 표정으로 쏘아붙이는 음성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나 차분한 그가 목청을 높이자 세오나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알겠다는 표정으로 검을 매만졌다. 분명한 신분을 확인하려고 짐짓 일부러 화내는 것이 분명했다. “내 신분은 백법사에게 물어보시오. 아니면 저 사람에게 묻던가.” 철가면은 이베를 가리켰다. 이베는 귓속말로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뜻을 커리에게 밝힌 후 검은 복면을 쓴 자를 손짓했다. “저 자의 신분은 나도 모르오.” 신분을 밝히던가 아니면 복면을 벗으라는 의미. 그러나 복면을 쓴 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복면을 벗지도 않았다. “웬만하면 벗지 그래.” 안 그래도 철가면과 검은 복면이 신분을 비밀로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페이더스는 훈족을 거들고 나섰고, 그 바람에 체이스의 눈짓을 다시 받았다. 그러지 말라는 뜻. 그러나 이번에는 페이더스도 그를 무시했다. 용병대에 자신이 모르는 일은 벌어져서도 안 되고 모르는 자가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지론. 천부장중 가장 선임이라 할만한-공식적으로는 페이더스가 용병대의 이인자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인자의 지위를 갖고 있는-모츠의 눈짓도 무시해 버렸다. “나는 스트빌라이의 귀족이오. 그래서 신분을 밝힐 수 없으니 그 점 양해해 주시오.” “......!” 잠깐의 침묵 끝에 냉소가 터졌다. “배신자로군!” 스시악이었다. 훈족의 땅은 거칠었다. 그 땅에서 살아야 하는 훈족들도 자연 성정이 거칠어 졌고, 이른바 이패이시스라인 아래쪽의 대륙인들에게는 야만인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훈족의 문화와 사상은 뛰어난 바가 있었고 신의, 우정 같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을 중요시했다. 당연히 배신자를 멸시했고 그런 자와는 상종도 하지 않는 것이 오랜 문화적 전통이었다. 스시악의 얼굴은 모욕당했다는 듯 붉게 달아올랐다. “나를 배신자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당신들도 여타 부족들을 굴복시킬 때 아랫사람들을 회유하지 않았습니까”“ “그것과는 다르다!” “뭐가 다릅니까”“ 검은 복면은 이죽거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프로스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며. “지금은 한시가 급한 때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분란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스시악이 뭐라 소리치려는데 백법사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스시악의 몸이 금세 뒤로 물러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정신을 환기한 프로스크는 말을 이어 나갔다. “기본적으로 훈족의 인구나 경제력은 스트빌라이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인원이 한정된 우리 용병대도 마찬가지구요. 적의 땅을 뺏는다 하더라도 그 땅을 지킬 병력이 모자랍니다. 게다가 늘어나는 보급선이 기동력과 병력을 소진할 겁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속전속결! 스노우를 점령하고 황제를 위협해서 조약을 맺어 타협하는 것입니다. 땅을 할양받는 조건으로.”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열기가 남실거렸다. “그리고 점령지의 영주들도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어서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합니다. 확고한 통치기반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이베가 딱하고 손뼉을 쳐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만 그런 것 보다는 어떻게 적의 주력을 섬멸하고 스노우를 점령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이 논의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의견에는 체이스도 동감이었다. “지금부터 실질적인 전술을 짜지요.” 용병왕과 백법사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의견들이 쏟아졌고 그 제안들은 양측의 두뇌에 의해 다듬어져 동이 터올 무렵 두세 개의 전술로 매듭지어졌다. 닭이 울고 긴 회의가 파하자 엘란은 얼른 일어서서 파오를 나섰다. 이런 논의는 질색이었던 것이다. 만약 하이론이 회의에 참석했거나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을 터. 자신이 책임자라는 사실이 그의 엉덩이를 땅바닥에 못 박아 버렸던 것이다. 나가자마자 그는 카이어스에 부닥쳤다. 해골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자신의 동료들 중 저만한 덩치는 카이어스 뿐이어서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특유의 기운 때문에 몸을 가려도 알아 볼 수 있었겠지만. “무슨 일입니까”“ “너한텐 볼일 없다.” 무안할 정도로 퉁명하게 대답한 그가 천막의 문을 노려보았다. 쭈뼛거리는 동작에서 그의 긴장을 읽어낸 엘란은 호기심이 동해 그의 옆에 버티고 섰다. 줄줄이 파오를 나서던 용병대의 간부들은 문 옆에 서 있는 둘을 보고 흠칫거렸다. 불의 정령을 요상하게 부려 적들을 통째로 구워대던 철가면과 적병을 미친 듯이 주살하던 저들은 자신들도 겁이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아들과 같이 나서던 용병왕이 이채를 발했다. “무슨 일인가”“ “별일 아니다.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 용병왕도 호기심이 동하는 듯 엘란의 옆에 서서 팔짱을 끼었다. 그 바람에 용병대의 간부들과 페이더스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엘란(108) 밖에서 계속 인기척이 들리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나오던 커리는 엉거주춤 섰다. 회의가 끝나고 인사까지 한 마당에 용병왕을 위시한 천부장들이 파오 입구를 빙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사람을 향해서지만 엘란, 용병왕과 동일한 내용의 질문이 다시 터져 나왔다. “내가 아닐세.” 용병왕은 자신에게 질문을 하자 번지수가 틀렸다며 카이어스를 가리켰다. 물론 커리는 해골가면을 뒤집어 쓴 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무슨 일이요”“ “세오나를 불러주겠소.” 괴상한 요구에 일순간 당황한 커리는 용병왕의 얼굴을 쳐다보고, 철가면을 쳐다보더니 빙 둘러싼 주위의 용병들을 둘러보고 의아한 기색을 띄었다. “당신이 세오나를 어찌 아시오”“ “몇 번 본적이 있다. 실력을 겨뤄 본 적도 있고.” 해골 복면이 세오나를 알고 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수작을 부리려고 일부러 아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로 잘 아는 것인지 일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 데 마침 세오나가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군.” 카이어스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세오나는 말을 걸어오는 해골 두건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광술사와 동행하며 엘프라고 주장하던 그 귀 짤린 소드마스터. 세오나는 그가 엘프라는 사실을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대꾸를 하려던 그녀는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주위의 뭇 용병들-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아주 인상들이 험악하고 성격도 더러워 보이는 시꺼먼 사내들의 무리-을 보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전장을 누비는 철혈의 여인이라고는 하나 저런 자들에게 둘러싸여서 평온할 수는 없었던 듯. “무슨 일이죠”“ 똑 같은 내용의 질문이 네 번째로 튀어 나왔고, 모두의 시선이 카이어스에게 집중되었다. 여기서 볼 일이 있는 자는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좌중의 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앞으로 숙여졌다. 그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궁금증이 치밀어 저절로 일어난 반응이었다. 카이어스가 뭐라 대꾸하려는 데 대여섯 명이 파오를 나섰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본다며 밖으로 나간 커리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엉거주춤한 그들이 동일한 질문 수를 다섯 번으로 늘리려는 찰나 손바닥을 바지에 썩썩 문질러 딱은 카이어스가 말문을 열었다. 진중한 태도로. “뭐 별건 아니고 데이트 신청하려고.” “......!” “......”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데이트 신청!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좌중의 반응은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졌다. 반은 이마를 치며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었고, 반은 잘 되길 바란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엘란은 당연히 후자였고 세오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비록 육체적 관심이지만, 페이더스는 전자였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페이더스의 얼굴에 불쾌감이 피어올랐다. 자신의 소유물을 누가 훔치려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고, 자신이 모르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감각을 더욱 부채질 했다. “전장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로맨스라! 좋지!” 머리를 빡빡 민데다 왼쪽 눈 아래에서 출발, 뺨을 가로지르고 턱까지 내려오는 굵은 흉터 때문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모츠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무슨 헛소리야!” 당황하기도 하고 주변의 남자들 때문에 부끄럽기도 한 세오나가 얼굴을 붉히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런 그녀의 앞을 오라비가 막아섰다. “감히 타클마칸의 파오 앞에서 고스만 부족의 공주를 희롱하는 것이냐”“ 카이어스는 스시악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홍조를 띠니까 더 예쁜데.” 챙.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시스악이 검을 뽑아들며 흉흉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렸다. 동료가 위협을 당하면 같이 싸우는 것이 맥클레이용병대의 오랜 전통. 그가 검을 뽑자 주위의 용병들도 모두 검을 뽑아들었다. 엘란과 용병왕, 그리고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페이더스를 제외하고. 용병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자리를 벌리자 훈족의 전사들도 살기를 뿌리며 무기를 챙겼다. 잠시 후 파오 앞은 삽시간에 긴장에 휩싸여 버렸다. “잠깐, 진정들 하시죠.” 프로스크가 양 진영 사이를 파고들어 두 팔을 벌렸다. “무슨 오해가 있나 본데 이 친구는 희롱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애를 하는 겁니다. 저......그러니까......음......” 뒷말이 궁한 프로스크가 말을 길게 끌더니 철가면을 쳐다보고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이 친구는 엘픈데 지금 발정깁니다.” “......!” 이번의 침묵은 아주 길었다. 카이어스의 말이 예상외였다면 프로스크의 말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홍조가 짙어져 홍시처럼 붉어진 세오나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파오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검을 뽑아든 사내들은 휘두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집어넣지도 못하고 서로의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탁. 엘란은 벌쭉하게 서 있는, 일장 소동의 원흉이랄 수 있는, 카이어스의 등을 정신이 번쩍 나도록 두들긴 후 그를 잡아 당겼다. “오늘은 그만 가죠.” 세오나가 들어가 버리고 엘란과 카이어스까지 사라지자 일의 원인이 된 연극의 주인공이 모두 사라진 셈이니 나머지 인원들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허허!” 용병왕이 낮은 웃음을 터트리자 주위의 사람들도 전염이 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어색하게. “하하하!” “껄껄껄!” 그것으로 긴장은 해소되었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거처를 찾아 헤어졌다. “반하신 겁니까”“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엘란이 물었다. “뭐, 그런 셈이지.” 가면 속의 카이어스는 겸연쩍게 웃었다. “좀 부드럽게 대하시죠, 다짜고짜 데이트하자면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말입니다.” “자네에게 이런 충고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제 말이 이상합니까”“ “그래, 이상하지. 자네도 이쪽 계통으로는 영 숙맥이라던데.” “누가”“ “누구긴 누구겠나! 하이론이지.” 엘란은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카이어스에게 조언을 한 것이 아마 그일 것이다. 분명히 자신과 에쉴리를 거명하면서 집적거려 보라는 둥, 꾹 눌러주라는 둥, 될 소리 안 될 소리 다 해댔을 것이다. “그쪽 방면에 대한 하이론의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왜” 자신 말로는 전문가라던데.” “전문가가 혼자서 살겠습니까” 무시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생각해 보지.”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헤치며 도착한 막사 앞에는 하이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꺼칠한 피부와 돋아난 수염을 보면 밤을 꼴딱 샌 모양이었다. “회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냐”“ 하이론이 물었다. 엘란이 간단하게 요약하자 카이어스가 간간이 끼어들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주로 세오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뭐, 별다른 것도 없구만. 그러니까 적이 막으면 까부시고 들어가서 두목을 잡는다는 것 아닌가”“ “그렇죠.” 엘란이 긍정하자 복면을 벗어던진 카이어스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하품을 해댔다. 그도 세오나를 기다리느라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난 그만 자야겠다.” “너도 눈 좀 붙여야지”“ 하이론도 피곤한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세오나를 찾아 가라고 충동질 한 게 하이론이죠”“ 잘 생각이 없었던 엘란은 꺼져가는 화톳불 주위에 앉아 장작으로 불씨를 헤쳤다. 작은 불똥들이 피어오르며 푸른 연기를 뿜어냈다. “당연히 내가 그랬지. 이 곳에서 연애 전문가가 나 말고 누가 있겠냐”“ 그는 꽤나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졌다는 투로 손을 들어올린 엘란은 그 자세 그대로 깍지를 꼈다. “프로스크는 자리를 잡은 것 같더군요.” “봤냐”“ “예, 용병왕 옆에 착 달라붙어서 회의를 주도 했습니다. 완전히 그의 책사가 된 것 같았습니다.” 철가면은 장작을 집어넣고 화톳불 위에 걸린 고리에 주전자를 걸쳤다. 그리고는 용병왕의 옆에서 열변을 토하던 그를 떠올렸다. 엘란의 소개로 용병왕을 면담한 그는 그날로 맥클레이의 심복이 되었다. 그로서는 능력을 발휘한 터전을 만든 것이지만 엘란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열망한 일이긴 했으나 괜히 엄한 사람을 전쟁에 휘말리게 한 것 같아서였다. 물이 끓자 주변에 뒹구는 적당한 컵을 골라 대충 쓱쓱 닦은 후 물을 부었다. 하얀 김이 철가면에 서렸다. 그는 컵을 든 채로 하이론을 불렀다. “하이론도 잘 생각이 없으면 여기 앉으세요. 오랜만에 얘기나 좀 하죠.” 내내 서 있던 하이론은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위기는 어떻든”“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인상을 묻는 듯했다. 하이론이 자지 않고 엘란을 기다린 것은 그것을 듣기 위해서였다. “백법사나 용병왕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하이론도 이미 만나봤고 또 회의석상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백법사 측에서는 이베부족의 족장이라는 칼 이베가 눈에 띄더군요. 아마도 그가 백법사의 조언자 구실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백법사에게서 마법을 배웠다는 커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꽤나 강해 보여서 듀마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베와 함께 전술운영에 해박한 것 같았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해보이긴 했지만 머리를 쓰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엘란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음성을 들리게 만든 턱 부위를 잡고 가면을 살짝 들어 물을 마셨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요즘은 능숙해져서 동작이 아주 부드러웠다. “용병대측 인사들은 하이론도 대충 알 테고, 처음 보는 사람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하이론이 말을 끊었다. “얼굴을 가린 자가 우리를 빼고도 또 있더냐”“ “있었습니다. 듣기로는 스트빌라이의 귀족이라더군요.” “정말일까”“ “거짓말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인 것 같더냐”“ “상당히 침착하고 두뇌회전이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로스크의 지식에다 냉철함을 더하면 그가 나올 것 같더군요.” 하이론은 주전자를 들고 투박한 나무잔에 물을 부어 양손으로 감쌌다. 싸늘한 아침, 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기분 좋은 온기를 전해준다. “프로스크에다 냉철함이라......위험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기분 나쁜 사람이 용병대 측에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물을 마시려던 하이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용병왕의 아들 말입니다. 시종일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저를 보더군요.” 하이론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물려받을 용병대의 일원을 기분나빠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놈이 기분 나빠할 이유가 뭐냐”“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얼굴이야 몇 번 봤지만 말을 나눠 본 적도 없고 같이 생활한 적도 없으니 초면이나 마찬가진데......하여간에 희한한 놈입니다. 오만하고 고집 세게 보여서 인상도 나쁘고. 어쩌면 앞으로 골칫거리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하이론은 물을 그냥 바닥에 부어버렸다. 용병대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자신들을 미워한다면 앞으로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 시간, 하이론과 엘란이 의아하게 여기던 복면을 쓴 남자와 골치 아프게 여기던 용병대의 후계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용병의 거처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꾸며진 응접실에서 페이더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허리를 쭉 빼고 비스듬히 걸쳐 있는 자세가 무례하게 보였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나”“ 얼굴에 뭔가를 뒤집어 쓴 놈들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던 그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퉁명스레 말했다. 허리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고 두 무릎을 맞댄 채 그 위에다 손을 가지런히 올린 흑면의 사내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불렀다. “페이더스님, 제 정체가 궁금하십니까”“ 페이더스는 흥미가 생기는 지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그를 주시했다. “정체가 뭔데”“ 흑면의 사내는 천천히, 감질 맛이 날 정도로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갈색의 모발을 가진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진 턱을 제외한다면 딱히 눈에 띄지 않을 그러한 외모였다. “쳇!” 비밀이란 숨길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막상 알고 나면 별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궁금하게 여기던 외모가 드러나자 오히려 심드렁한 심정이 되었다. 흥미도 반감되고. 페이더스는 상체를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며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라는 투다. “전 스트빌라이의 귀족이 아니라 엘리오트의 귀족입니다.” 페어더스의 상체가 다시 앞으로 쏠렸다. 흥미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보통 귀족이 아니라, 후작가의 장남입니다. 프르덴틀후작가의.” “뭐!” 페이더스는 정말로 놀랐다. 벌떡 일어선 그가 입을 딱 벌리고 에단을 노려보았다. 엘란(109) 그리고는 다짜고짜 검을 뽑아 에단의 목에 가져다 댔다. “무슨 흑심을 품고 우리 용병대에 잠입한 것이냐”“ 검날이 목에 드리워져 있는데도 에단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진정하십시오. 저의 정체는 페이더스님의 부친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버지가 알고 있다면 첩자는 아닐 터. 그는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일단 검부터 치웠다. “이때까지 신분을 숨기다 정체를 드러내는 이유가 뭐냐”“ “저를 팔려는 거지요.” “사람이 무슨 물건이냐 사고 파고하게.” “저의 능력을 사시라는 말입니다.” 페이더스는 진득한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오트 황제의 처남이 뭐가 아쉬워서 용병들 틈에서 뒹구는 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초기의 놀람이 가시자 이내 흥미가 사라졌고 곧 심드렁해 졌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네 능력이 뭐 대단하다고.” 그는 만사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엘리오트와 스트빌라이간의 분쟁을 야기한 것이 저라면 어떻습니까”“ “뭐!” 페이더스는 다시 놀라 일어섰다. 그리고는 분노해 버렸다. 저 놈의 말에 따르면 사절로 파견된 스트빌라이의 황녀가 죽은 것은 모두 다 용병대의 작품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신은 일언반구 들은 바가 없었다. 말로만 후계자이지 사실은 복면이나 뒤집어 쓴 저런 놈보다 훨씬 못하지 않은가. 따돌림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에단 데 프르덴틀의 눈에 반가움이 서렸다. 보기 보다 더 다루기 쉬운 상대군. 용병왕 보다는 이 놈이 훨씬 수월하겠어. “이제 저를 사실 마음이 생겼습니까”“ 분노를 터트릴 대상을 찾던 페어더스는 괜찮은 상대를 찾았다. 쾅! 탁자를 걷어차 버리고 달려든 그는 에단의 멱살을 움켜쥐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무슨 수작이냐” 자신을 팔려면 처음부터 왔었어야지 이제 와서......” 에단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부드럽게 감쌌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페이더스님의 됨됨이를 알지 못했지요.” 페어더스는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란 거냐”“ “사실대로 말하면 용병왕께 제 능력을 팔았습니다. 그 와중에 공도 세웠구요.” “공이라니”“ “황녀를 죽여서 분쟁을 야기하라는 계획에 살을 붙이고 집적 실행시킨 게 저니까요. 꽤나 힘들었습니다. 빈스와 마크를 끌어들이는 일 같은 건 특히 더 그랬죠. 뭐 그 와중에 체이스의 도움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래서”“ 페이더스는 여전히 멱살을 놓지 않았다. 힘을 늦추어 말하기 편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서 용병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체이스 역할을 일정 부분 대신할 수 있었죠. 일급참모 역할 말입니다.” 그는 페이더스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손목을 살짝 비틀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하고 말을 이었다. “전 제 그릇을 압니다. 조언을 하고 일을 마무리하는 타입이지,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일을 벌이는 타입은 아니죠. 전형적인 관료 타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지도자로 세울 인물이 필요합니다.” “왜 아버지로는 부족하던가”“ 많이 진정된 페이더스는 자리에 앉았다. “아니죠, 그분 정도면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렸습니다.” “음~프로스크말이군.” 이제는 에단이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참모는 하나면 족하다.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체이스도 있으니까. 아마 저 놈은 프로스크에게 밀려나 새로운 주인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네 뜻은 알겠다만 너 같은 자는 필요 없다. 기껏 프로스크같은 늙다리 하나 이기지 못하고 떨려난 주제에 어디 와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에단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프로스크의 호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친근한 웃음을 흘렸다. “그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하나만 물어 봅시다. 님의 곁에 심복이라 할만한 자가 있습니까” 아니면 조언을 구할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럼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은”“ 페이더스는 벌겋게 얼굴을 붉힌 채 대꾸를 못했다. “없죠. 그게 문젭니다. 내가 볼 때 한다하는 용병들은 페이더스님을 우습게봅니다. 아닙니까” 오,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용병대의 천부장들은 아버지 사람이지 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상태에서 아버님이 전사라도 하시면 용병대의 주인은 누가 될까요” 설마 자신이 물려받는 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요”“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져 에단을 쏘아보기만 했다. 에단은 다행이다 싶었다. 주인도 신하를 잘 만나야 하지만 신하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법. 자신이 조종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모자라야 하지만 완전히 모자라는 놈은 곤란하다. 천지에 쓸 모가 없는 것이다. “다행이군. 완전한 멍청이는 아니라서.” 에단은 한 동안 생각할 시간을 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래도 제가 필요 없으십니까”“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가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프로스크와 같습니다. 전 제 지식을 세상에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요.......전 그것이면 족합니다.” 페이더스는 이상이니 뭐니 하는 놈들은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대뜸 허락하고 나섰다. “좋다. 그럼 천부장들을 제거할 비책부터 만들어 봐라.” “그건 안 됩니다.” “안 된다고” 그래 처음 하는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페이더스는 화가 났다. 에단이란 놈의 말이 구구절절 옳아서 화가 났고, 처음 수하로 거둬들인 놈이 첫 명령부터 거부해서 화가 났다. “지금은 전십니다. 그들을 제거하면 절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사냥개는 사냥이 끝난 후에 잡는 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세워지면 그때 처리하면 됩니다.” “기다리란 말이지.” 페이더스는 엄지와 검지로 턱을 매만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왕의 자리에 올라 거만한 천부장놈들을 작살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 * *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 때문에 해골 용병대 혹은 오거용병대라 불리는 엘란의 돌격대는 아침을 먹은 후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교관으로 나선 카이어스는 아에게를 쳐다보며 정색을 했다. “그 검 집어넣어라.” 마법검을 들고 사랑스런 손길로 블레이드를 쓰다듬던 그는 입을 삐죽거렸다. “사용하는 검은 수련할 때는 물론이고, 잠잘 때도 항상 옆에 끼고 있으랄 때는 언제고.” “그 검은 위험하니까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마라!” 카이어스가 엄하게 소리치자 찔끔한 그가 목을 움츠렸다. “어서 집어넣어!” 카이어스가 다시 호통을 치자 아에게는 찜찜한 얼굴로 검을 집어넣었다. “아무 이상도 없는데 괜히 그러네.” “시작! 하나, 둘, 셋.......” 교관의 구령에 따라 막사 앞에 펼쳐져 있는 작은 공터에서 20명의 용병들이 일사분란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앞으로 혹은 옆으로. 그 중에는 오거의 문양을 새긴 철가면도 끼어 있었다. * * * 스트빌라이와 엘리오트의 국경을 이루는 융커산맥은 험준한 산들이 저마다의 위용을 뽐내는 곳으로 칼 같은 산들이 연이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산들이 높이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어서 야트막한 산도 간혹 있었고 낮은 구릉과 험하지 않은 협곡들도 있었다. 그런 곳들은 교역로의 구실을 했는데 지금 같이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군대의 이동로로도 각광을 받았다. 해가 중천에 떴다. 아침부터 짙게 깔려있던 안개는 천천히 스러져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개가 사라지자 긴 협곡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두 나라의 군대가 똑똑히 보였다. 스트빌라이군과 엘리오트군은 서로 눈치만 보며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서로들 내켜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참이지.” 쟝과 함께 대제의 무덤에 들어갔다가 그의 못난 행동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까발려서 결과적으로 그를 엘란일행에 붙게 만들었던 빈센트 위긴은 바닥에 있는 돌을 툭툭 건드렸다. 부츠에 박은 징이 돌을 만나 팅팅 거리는 쇳소리를 만든다. “왜 무료한가”“ 막스가 물었다. “아닙니다!” 축 늘어져 있던 위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늠름하게 대답했다. “하긴 지루하기도 하겠지. 벌써 보름이 지났으니.” 십존의 일인, 물의 시드는 기지개를 켜며 카톤협곡 바로 앞에 진을 친 스트빌라이군을 노려보았다. “쳐들어 올 것도 아니면서 군대는 왜 동원해 가지고.” 그는 혀까지 차대며 허리를 두들겼다. 이 나이에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마뜩찮았던 것이다. “차.” 그가 가볍게 말을 내뱉자 그의 제자 타오는 얼른 차를 따라 공손히 잔을 올렸다. 수고했다는 대꾸도 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가 이채를 발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적병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시작할 모양이지.” 그는 차도 마시지 않고 잔을 물리며 팔을 휘저었다. 뚝뚝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도 다 된 것 같아. 이제는 정말 은퇴를 해야겠어.” “제가 보기에는 정정하십니다. 앞으로 100년은 너끈히 사시겠는데요.” 엥겔스남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위긴 같이 긴장한 기사들을 풀어주려는 의도였다. 아울러 시드에게 아부도 좀 하고. “예끼, 이 사람아. 어서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 무서운 소리구만.” 시드는 통박을 주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지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그나저나 길라드는 왔을까”“ 심심하던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대제의 무덤 위에서 적법사, 광법사, 화염의 길라드가 다투던 당시 그는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큰 낭패를 봤었다. 특히 샐라임을 부리는 길라드에게 당한 타격이 컸었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오늘 그도 참전을 한다면 단단히 혼을 내주리라. 철혈기사단장 막스 프르덴틀의 오른팔 엥겔스남작이 양 손바닥을 관자놀이에 붙이고 적의 진지를 살폈다. “그가 온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뒤에 숨어있다 기습을 할지도 모르지. 음흉한 놈.” 그때도 그랬었다.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빌빌거리다 자신이 싸움에 끼어들자마자 본 실력을 드러내 자신을 몰아쳤었다. 그 미치광이 마법사새끼와 함께. 그러고 보니 그 미친 새끼는 벌써 뒈졌군. 멍청한 새끼. 온갖 미친 지랄은 다 떨고 다니더니 그따위 애송이한테 죽어버려. 십존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아까워. 광법사 생각을 하니 광술사 생각이 났고 문득 그의 행적이 궁금해졌다. 포강에서 죽였어야 했는데. “이봐 엥겔스, 광법사를 죽인 광술사란 놈 말이다. 그 놈 소식 들어온 것 있나”“ 엥겔스는 막스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이상하게 단장은 그 놈 얘기만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그 놈 소식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코르도바습지에서 광법사와 싸운 이후에 행방이 묘연합니다. 검은 독수리(엘리오트의 정보부)에서는 그가 광법사와 같이 죽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긴 광법사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그런 애송이한테 그냥 당했을 리가 없지.” 시드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만......이상하게 꼭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련한 눈으로 말하는 막스의 어투는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꼭 죽어야 한다는 투로도 들려서 이중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살아있었으면 무슨 소식이 있었겠지요.” 막스의 부관 시란자작이 투구를 바로하며 말했다. 투구 양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두 개의 뿔이 대단히 날카로워보였다. “적들이 진형을 갖추는 데요. 저희도 전투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교토벌의 공으로 종남작의 종자를 떼어낸 종군 마법사 라울남작이 말했다. “니들도 준비를 해라!” “예.” 시드가 명령을 하자 그의 제자 타오, 에주네, 미치가 길게 읍을 했다. 한편, 스트빌라이의 진지는 대단히 부산스러웠다. 드디어 공격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공격의 총책임자로 내려온 귀족원주 리버스킨후작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레인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기습을 해도 모자랄 판에 선전포고를 하고 정면에서 공격을 하라니.” 그는 말의 갈기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훈련이 잘된 말은 갈기를 당기는 데도 푸푸거리기만 할 뿐 얌전히 서 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 병력이면 충분할 겁니다.” 귀족원 직속의 노블기사단장 틸만백작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사령관은 리버스킨후작이지만 실질적인 전투지휘는 그가 할 것이었다. 그는 노블기사단과 칠만 병사, 그리고 흑법사의 제자들 정도면 충분히 해 볼만한 전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길을 차단하고 있는 철혈기사단을 박살내기에는 차고 넘친다고. 그러나 노회한 리버스킨은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적에게는 십존의 일인 시드가 있었고 최연소 소드마스터라는 막스도 있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조용히 다가온 6써클 마법사 크라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안배가 끝난 것이다.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리버스킨은 그의 말을 듣고도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지 비 맞은 개구리처럼 계속해서 꿍얼거렸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붉은 수실이 달린 나무봉을 꺼내 앞으로 내던졌다. “진군!” 틸만백작의 입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지자, 앞발을 들어 포효하는 날개달린 황금사자깃발아래 진군나팔이 요란하게 울렸다. 착착착. 창을 앞세운 창기병들은 천천히 절도 있는 동작으로 움직였고, 그 뒤를 궁수들이 따랐다. 방패로 앞을 가린 엘리오트군은 별다른 동요 없이 점점 거리를 좁히는 스트빌라이군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쏴라!” 노블기사단 뮬레인자작이 명령을 내리자 제자리에 멈춰선 궁수들은 잽싸게 화살을 재서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휘이익. 나선형의 홈이 파인 삼각화살촉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며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화살의 비.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촘촘한 화살은 솟구치던 그 기세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엘리오트군은 앞을 막던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가렸다. 탁탁, 타탁, 탁. 텅. 팅. 목재방패에 박히는 소리와 철제 방패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매미울음소리처럼 시끄럽게 울린다. “쏴라!” 엘리오트측의 궁수들도 지지 않고 응사했다. 서로를 노리며 쏘아대는 화살의 비는 먹장구름이 밀려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몰려드는 벌 떼처럼 보이기도 했다. 간간히 사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비를 철저히 한 때문에 양측 공히 별다른 타격은 입힐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전투는 자연스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돌격!” 그 소강상태는 틸만백작의 일갈로 열전으로 돌입했다. “와!” “죽여라!” 전의를 돋우는 함성과 함께 창기병과 기사들이 말을 달렸다. 엘란(110)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치달리는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정령들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운디네와 엔다이론들은 찔러오는 창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어떤 정령은 창을 넘어 창기병의 얼굴을 뭉개버렸고 어떤 정령은 창에 꽂혀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갔다. 쿵. 운디네에 얻어맞은 창기병이 뒤로 붕 떠서 날아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아군의 발굽에 밟혀 짓이겨졌으리라. 쾅! 하늘거리는 정령들의 중앙에 난데없는 폭발음이 일었다. 흑법사의 제자 푸워가 창기병의 뒤를 따르며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진격하라!” 둥둥둥. 막스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북이 울리고 기사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마상용 창을 곧추세운 기사들이 고삐를 채며 박차를 가했다. 달려가는 기사의 뒤로 정령사들과 병사들이 따랐다. 양측의 기병들이 충돌하려는 찰나, 공간이 일렁거리고 물의 상급정령 운다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스트빌라이의 창기병을 향해 옷자락을 휘둘렀다. 츄악! 물에 젖은 천이 펼쳐지는 소리가 나더니 선두의 창기병 열 명이 한꺼번에 얻어맞고 튀겨져 나갔다. 다시 휘두르려는 옷자락을 거대한 화이어 볼 두개가 방해를 한다. 쾅쾅! 운다인은 양쪽 옷자락을 동시에 휘둘러 파리 잡듯 파이어볼을 소멸시켰다. 그 때 기병들이 격돌했다. 쾅, 쿵, 끅. 기긱. 창과 창, 혹은 창과 방패가 격렬하게 부딪치며 온갖 소음이 협곡 앞을 휘저었다. 창에 가슴을 맞은 자는 몸이 뚫려 즉사하거나 아니면 뒤로 날아가 아군에게 짓밟혔다. 운이 좋아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횡액은 면할 수가 없었다. 방패로 빗겨 넘긴 자도 중심을 잃으면 말에서 떨어졌다. 그들은 뒤를 따라온 보병들에 둘러싸여 고전을 겪어야 했다. 기병들이 선두에서 뒤엉키자 달려들던 병사들은 멈추어 섰고 이내 백병전이 벌어졌다. 허공에서도 아래에 못지않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정령들과 마법들이 서로 뒤엉키며 연신 폭음을 자아냈다. 운다인이 육써클 마법사 셋에게 공격을 당하는 동안 시드는 대충 방어하면서 길라드의 모습을 열심히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고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 “엔다이론!” 중급 정령 둘을 불러낸 그는 운다인으로 마법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며 병사들을 죽여 나갔다. 심심풀이용으로. 일단 멈춰선 창기병들은 창을 버렸다. 안장에 매어두면 좋겠지만 적들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고 창을 버리기는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휘두르는 검에 힘이 실리고 검 끝에 치열한 살기가 맺혔다. 챙챙. 부딪친 무기에서 불똥이 튀겼다. 비명과 흐느낌이 뒤섞이고 호통과 기합이 난무했다. 맨 끝에서 출발한 막스는 어느새 선두에 서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시퍼런 오러가 언뜻언뜻 비췄고 그에 따라 적의 몸은 갑옷 채 절단이 났다. 그가 적진을 휘저으면 그 뒤를 따라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빈센트는 막스를 따라 다니며 쓰러진 적병의 갑옷 틈새로 검을 밀어 넣었다. 묵직한 감각이 올라오고 뒤이어 떨리는 적의 숨결이 느껴진다. 꽈직. 투구 밑을 파고 들어간 검이 적의 목젖을 갈랐다. 쿨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올라오고 적의 눈에서 빛이 꺼져갔다. 휘잉. 검을 빼는 순간 뒤통수를 향해 떨어지는 거센 기운이 머리털을 삐쭉 서게 만들었다. 빈센트는 피할 사이도 없이 몸을 날렸다. 쾅. 두꺼운 베틀엑스가 그가 죽인 적병의 얼굴을 투구 째 뭉개버렸다. 무시무시한 힘이고 실력이었다. 베틀엑스를 회수한 카리건은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도끼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혓바닥색깔이 원래 빨간 것인지 아니면 피를 머금어 빨갛게 변한 것인지 카리건의 혀는 빨갛다 못해 검붉어 보였다. 오싹 소름이 끼친 빈센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스트빌라이의 기사가 죽음의 사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기세에서 밀린 빈센트는 도저히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막스가 부상시킨 기사와 병사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과 흉포한 기세를 뿌리는 노련한 기사를 상대하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났다. 카리건은 전의를 상실한 애송이를 향해 베틀엑스를 휘둘렀다. 마나를 머금은 도끼가 빈센트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쾅 꽝! 묵직한 충돌음이 들리고 연이어 짧은 타격음이 울렸다. 빈센트는 투구에 뭔가 부딪는 순간 그 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엥겔스는 베틀엑스와 빈센트의 머리 사이에 노말소드를 밀어 넣으며 팔뚝에 힘을 넣었다. 안정된 자세로 도끼날에 충실한 힘을 실은 카리건의 베틀엑스와 불편한 자세에서 검만 밀어 넣은 엥겔스남작의 검은 위력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도끼와 검이 부딪치는 순간 손목에서 시작된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 어깨는 물론 반신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뒤로 밀린 검신이 빈센트의 투구를 때리고 그 바람에 빈센트는 기절해 버렸고 그 순간 엥겔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빈센트가 기절한 것은 머리를 맞은 충격 때문이 아니라 겁에 질린 때문임을 알아챈 것. 철혈기사 중에서 겁먹어 기절한 놈은 이때까지 한 명도 없었다. 견습 기사도 아니고 정식기사가 기절을 하다니!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둘 것 하는 후회가 가슴을 점령했지만 이왕 내친걸음 쓰러지는 그의 목덜미를 쥐고 뒤로 획 집어 던졌다. “시란, 이 자식 좀 맡아라.” 엥겔스는 시란이 그를 받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을 부라리는 카리건을 향해 검을 겨뤘다. “정식으로 붙어 보자!” “좋아!” 피가 섞인 침을 ““ 뱉어낸 카리건이 특유의 동작으로 베틀엑스를 핥았다. “간다.” 고함과 동시에 도끼가 움직였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공격. 마나를 품은 도끼가 빈센트의 정수리 대신 엥겔스의 정수리를 노리고 쐐도 했다. 카리건의 엄청난 힘을 맛봤던 엥겔스는 정면으로 맞설 생각을 하지 않고 도끼날의 옆면을 때리며 오른쪽으로 비껴 쳐 냈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치며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가가각! 갑옷을 긋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지만 그 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 재빨리 돌아선 엥겔스는 적의 공격을 예상하며 검을 앞으로 당기다 멍하니 서 버렸다. 갈라선 스트빌라이의 기사가 둔한 인상과는 다르게 스쳐 지나친 후 엘리오트군을 향해 달려가 버렸던 것이다. 카디건은 엥겔스와 엉겨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체적인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 이 상태로 조금만 더 흘러간다면 전황을 되돌리기는 힘들 듯했다. 엥겔스를 내버려둔 카리건은 적병의 머리를 사과 따 듯 따 버리며 전체적인 전황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폈다. 개미떼처럼 달라붙은 마법사들이 시드를 겨우 묶어 놓는 동안 그 휘하의 정령사들과 막스가 종횡무진으로 아군을 헤집었다. 특히 막스가 움직이는 통로를 따라 철혈기사들이 따라가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아군이 양단되게 생긴 것이다. “젠장!” 한바탕 욕설을 늘어놓은 그는 중장보병들을 절단 내며 기사들의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말을 탄 채 높은 지대에 올라 전황을 살피던 리버스킨후작은 목이 타는지 수통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신 그는 미간을 좁히며 신음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노블기사단으로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야, 역부족......황제는 무슨 생각으로 엘리오트를 공격하라고 하신건지......원......” 심각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그는 옆에 서 있는 게넛남작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협곡 앞쪽에 이정표처럼 돋아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저 선까지 적군이 들어오거든 별다른 언급이 없더라도 협곡 위의 궁수들에게 발사 명령을 하게.” 후작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명령을 내려놓았다. “알겠습니다.” 게넛은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후방에서 지휘를 하던 노블기사단장 틸만백작은 막스가 아군을 유린하자 참지 못하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직접 진두지휘에 나선 것이다. 그가 나서자 호위 기사들도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틸만백작을 대신해 지휘에 나선 뮬레인자작은 급히 양쪽의 군사들을 뒤로 물렸다. 그도 카리건과 같은 걱정을 한 것이다. 자작의 명에 따라 나팔을 불자 보병들이 먼저 뒤로 물러났고 기병들과 기사들은 그들을 보호하며 조금씩 뒤로 후퇴했다. 그러나 막스를 위시한 엘리오트의 기사들은 호락호락 보낼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들의 앞을 틸만백작과 호위 기사들이 막아섰다. “제법이구나.” 틸만백작의 부릅뜬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저 놈에게 잃은 기사만 4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노블 기사단이 이렇게 형편없을 줄은 몰랐소.” 막스는 검을 휘둘러 피를 뿌려대며 빈정거렸다. 방울 져 떨어지는 피가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덤벼라!” 틸만은 왼손으로 고삐를 움켜쥐고 그립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하지만 막스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왼손 주먹을 내밀더니 검지손가락을 펴 까딱거렸다. “볼 일이 있으면 네가 오지 그러나.” “이-놈!” 틸만은 열이 치밀어 올라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킥킥.” 막스를 따르던 정령사 미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틸만의 얼굴이 고구마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막스의 수하까지 비웃자 참지 못한 틸만의 호위기사 하나가 그를 향해 창을 집어 던졌다. 가까이서 던져진 육중한 창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자 혼비백산한 미치는 급히 운디네를 소환했다. 다급한 김에 가장 손쉬운 정령을 소환한 것이다. 티이잉. 정령이 창을 빗기는 순간, 그것을 신호로 틸만백작이 말을 움직였다. 꾹꾹 눌러 참았던 노기가 일시에 폭발한 것이다.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달린 마갑를 뒤집어쓴 틸만의 말은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하얀 백마여서 마치 유니콘처럼 보였다. 막스는 그 유니콘을 향해 소드를 뻗었다. 시퍼런 오러가 검을 따라 솟구치더니 검 끝을 떠난 오러탄이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빛살처럼 날아간 오러는 뿔을 가르고 들어가 말의 뇌를 부수어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말이 앞으로 푹 고꾸라지자 발걸이에서 발을 뺀 틸만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는 달려들던 탄력을 그대로 살려 막스의 말과 허벅지를 동시에 노렸다. 막스는 검을 늘어뜨려 장작 패듯 베어오는 그의 검을 걷어 올렸다. 시종일관 여유 있는 몸짓이었다. 틸만은 이를 악물었다. 막스의 간단한 동작에 하마터면 검을 놓쳐 버릴 뻔했다. 치욕이었다. 그 치욕이 그의 분노에 불을 댕겼다. 그는 기사들을 지휘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막스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휘관이 막스에게 달려들다 연신 목숨의 위협을 받자 호위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시란 같은 철혈기사들과 싸우면서 동시에 지휘관의 목숨을 돌봐야 했던 것이다. 막스는 날아드는 검을 쳐내며 검 끝으로 슬쩍슬쩍 틸만의 몸을 찔렀다.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에 죽일 수 있었지만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모조리 도륙할 생각으로 목숨을 붙여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를 죽여 버리면 기사들은 다른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몸을 뺄 것이고 그럼 나중에 피곤해 질 터였다. 전세가 유리할 때 최대한 많이 죽여 버려야 한다. “백작님 후퇴 하십시......컥......!” 그를 도와 막스의 검을 막아내던 호위기사 하나가 후퇴를 건의하다 피거품과 함께 넘어졌다. 막스가 최우선적으로 베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틸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막스의 심리전에 넘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탓이다. “단장님 후퇴하십시오.” 뒤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뮬레인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사령관 리버스킨후작의 명령은 전세가 불리하면 체면 차릴 필요 없이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노블기사단장 틸만백작은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아무 효과도 없는 공격을.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가 발이 묶이는 바람에 후퇴하던 병사들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리버스킨후작의 얼굴도 틸만백작의 얼굴만큼이나 달아올랐다. 지휘관이란 놈이 정신 못 차리고 개지랄을 떨고 있는 것이다. “후퇴시켜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반색을 한 게넛이 길게 소리를 질렀다. “후퇴하라!” 곧이어 후퇴를 뜻하는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게넛처럼 반색을 한 뮬레인자작은 틸만의 안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잠시 후 스트빌라이군이 빠른 속도로 후진하고 호위기사 마저 하나, 둘 전장을 이탈하자 틸만의 효용이 다한 것을 직감한 막스가 오러를 뿜어냈다. 가지고 놀던 틸만의 숨통을 끊어줄 생각이었던 것. 짙게 뻗친 오러가 틸만의 심장을 노렸다. 섬뜩해진 틸만이 요리조리 몸을 놀렸지만 심장을 향해 뻗어오는 막스의 검은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푸르게 빛나는 오러만이 눈에 들어올 뿐 다른 것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틸만은 부지불식간에 검을 뻗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고련을 거친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그런 검을 분질러버린 오러블레이드가 딱 달라붙은 풀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갑옷이 베이지고 살갗을 저미려는 순간 쇄액 하는 파공음과 함께 뭉툭한 덩어리가 그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카앙! 오러블레이드를 회수해 쳐내고 보니 단검처럼 던지는 손도끼였다. 그 소리에 들은 틸만은 냉수를 뒤집어 쓴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적진에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아니 저 멀리서 작은 손도끼를 들고 히죽거리는 카리건도 남아 있긴 했다. 그가 구원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 즉시 몸을 돌려 도망쳐 버리긴 했지만. 막스는 허리춤에서 작은 숏소드를 빼내더니 등을 보이며 내빼버리는 카리건을 향해 집어던졌다. 손도끼에 대한 보답으로. 카리건은 도망치다 이상한 감각이 들어 몸을 떨었다. 솜털이 곤두서고 등골이 선연해졌던 것이다. 도망치며 뒤를 슬쩍 쳐다 본 그는 자신의 뒤통수로 쏘아지는 숏소드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소리도 없이 날아드는 속도가 석궁에서 발사된 쿼렐 이상이었던 것.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왼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를 날렸다. 그리고는 등에 매달린 손도끼를 다시 뽑아 던졌다. 캉. 숏소드는 손도끼를 튕겨내고도 힘을 잃지 않고 여전히 날아들었다. 진로를 막아선 두 번째로 손도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옆으로 흘러버렸다. 다급한 마음에 겨냥을 잘못한 것이었다. 급해진 카리건은 밑에 널브러진 시체 중손에 잡히는 데로 들어 올렸다. 써엉. 섬뜩한 소리가 울리고 시체를 관통한 숏소드가 그의 갑옷까지 건드렸다. 그리고 두터운 갑옷마저 뚫은 숏소드가 그의 가슴팍을 치며 살갗을 찢어 놓았다. 거듭된 방해에 기세를 잃었길 망정이지 잘못하면 저승으로 직행할 뻔했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도망쳤다.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파르미나 고원산 말보다 더 빨라 보였다. 일단 숏소드를 던진 막스는 카리건에게 신경을 끊었다. 슬금슬금 물러나 도망치려는 틸만을 단박에 기절시킨 그는 쓰레기 던지듯 그를 던지고 말을 달렸다. 진군의 고함과 함께. “적을 섬멸하라!” *** 화요일에 군에 가시는 분이 계셔서 예정보다 빠르게 올립니다. 귀도님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다음 편은 수요일에 올릴 예정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란(111) 막스를 필두로 한 기사들이 달아나는 적병들을 쫓아 말을 달렸다. 그들을 향해 난사되는 파이어 볼과 매직 애로우는 바람의 정령들이 막아냈고, 기병의 발을 묶으려는 마법사들의 어쓰 웨이브(earth wave)는 땅의 정령들이 막아냈다. 그리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시드의 운다인이 무력화 시켰다. 나중에는 아군과 뒤섞이는 바람에 스트빌라이의 궁사들은 화살도 날리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틸만이 사고를 쳐서 시간이 지체된 탓에 피해가 속출했다. 후퇴가 훈련 때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병사들이 계속해서 죽자 리버스킨후작은 말끝마다 틸만 욕을 해대며 불같이 화를 냈다. 길길이 날뛰는 통에 그를 진정시키려는 견습기사들은 진땀을 흘렸다. 주인 잃은 말을 잡아 탄 카리건이 철혈기사들과 뒤섞여 커다란 바위를 통과하자 리버스킨후작은 잊고 있었지만 그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던 게넛은 즉시 고함을 질렀다. “발사~” 게넛의 명령이 긴 꼬리를 달자 날카로운 나팔소리가 짧게 들렸고 공기를 찢는 폭음이 뒤를 이었다. 쐐애액. 막스는 도망치는 기사의 머리를 쪼개 버리며 협곡 위에서 날아드는 가늘고 길쭉한 물체에 시선을 돌렸다. “으아악!” “악!”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기다란 철시에 꼬치 꿰이듯 꿰인 병사들이 줄줄이 넘어갔다. 한 번 날아든 길이 이미터 정도의 쇠화살은 두, 세 명의 병사들을 기본으로 꿰어버렸다. 막스는 자신을 노리며 쐐도하는 철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귀청을 찢을 것 같은 폭음이 터지고 번개처럼 떨어지던 화살은 오러에 의해 쪼개져 버렸다. “쉽지 않겠군.” 그는 조용히 뇌까렸다. 자신 정도나 되니까 철시를 부셔버리지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잠깐의 시간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방패를 뚫고 박혀드는 철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후군(後軍)한다.” 마나를 머금은 막스의 음성이 협곡을 무너뜨릴 것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병사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안장을 박차고 올라 오러블레이드를 내저었다. 둥글게 뭉친 마나막이 검의 궤적을 따라 넓게 퍼졌다. 철시를 막아낼 정도는 아니나 방패가 감내할 정도로 힘을 떨어뜨리는 것은 가능했다. 탕탕탕. 힘이 떨어진 철시는 방패에 부딪쳐 효용을 잃었다. 막스가 힘을 다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면 그 때는 시드가 나서 철시를 막아냈다. 이윽고 철시의 비가 멎었다. 협곡위의 스트빌라이 궁사들이 더 이상 화살을 날릴 수 없었던 것이다. 네 명의 병사들이 둘씩 짝을 지어 활의 양쪽을 붙들고 두 명의 병사가 살을 먹여 당기는 데는 막대한 힘이 드는 탓에 거대한 강궁을 조절하는 병사들이 녹초가 되어 버렸고 적이 이미 멀리 물러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난 때문이었다. 리버스킨후작은 몰려드는 패잔병을 보며 혀를 차댔다. 오천 기사와 칠만 병사 중 살아 돌아온 자는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가만히 따져보면 적병을 하나 죽이는데 아군은 세 명이 죽은 셈이었다. 협곡 위에 배치해 둔 궁수대가 아니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터. 목구멍을 타고 쓴 물이 올라왔다. $.아이언 오거. 타국은 전쟁 준비를 하느라 영일이 없었건만 전란에서 비껴서 있던 피요르드는 연일 무도회가 개최되는 등 꽤나 평화스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타국의 분쟁은 어른들 술자리의 흥미로운 안주거리는 될지언정 심각한 대화의 주제는 되지 못했다. 최소한 시중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황궁에서까지 필부들의 단순한 안주거리에 머물 수는 없는 일. 대륙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수도 있는 전쟁에서 눈을 뗀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짓이니, 최고위 귀족들과 마법사의 탑은 분쟁의 추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여서 스트빌라이가 엘리오트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날-훈족과 스트빌라이의 전쟁을 넘어 전 대륙적으로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공식화한 그날-황궁에는 비상이 걸렸고 연일 회의가 이어졌다. 갑론을박하기를 일주일. 그리고 중구난방을 피하기 위해 참석자를 대폭 줄인 회의를 시작한 지 삼일 째가 되는 날. 피요르드 최고의 재정통, 재무대신 실레아는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잡담을 피하고 회의를 스피디하게 전행시키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폭을 줄여서 마주보고 있는 자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좁은 탁자와 오래 앉아 있지 못하도록 특별히 딱딱하게 제작된 의자-탁자와 의자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혹독하게 신체를 단련하는 광휘기사단장 베니토백작은 한달을 앉아 있어도 끄덕 없을 강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갖고 있을지 몰라도, 책만 끼고 살아온 실레아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파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얼마나 아프냐면 자신 혼자만 푹신한 방석을 깐 황제가 부럽다 못해 얄미워질 정도였다. 그리고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궁정마법사 샤른에게 부탁해 마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엉덩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그러나! 코를 베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대공의 악취는 정말이지 감내해내기가 어려웠다. 실레아는 슬쩍 코를 만지며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물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예언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황제의 숙부 킬커 대공은 씻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항상 더러운 악취를 풍겼다. 하필 대공의 앞자리-앉고 싶어서 앉은 것이 아니라 모두 회피하다보니 서열에서 가장 밀리는 그가 할 수없이 앉은-에 앉고 보니 그의 입에서 풍기는 냄새는 정말 지독했다.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금도 그는 실레아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문을 열었다. 침까지 튀겨대며. “아시다시피 용병왕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오만 병사가 몰살을 당했고 훈족과 용병들은 크리누스까지 밀고 내려온 상탭니다. 지금 전력으로 스트빌라이는 엘리오트를 막아내지 못할 겁니다.” 대공은 상체를 일으켜 이의를 제기하려는 원로원주 호르스트후작을 손을 저어 제지한 후 열정적으로 외쳤다. “엘리오트가 스트빌라이를 삼키기 전에 우리가 엘리오트를 쳐야 합니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스트빌라이가 용병왕의 배신으로 약간 밀린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전상의 후퇴. 곧 반격해서 적을 밀어낼 겁니다.” 호르스트후작이 반박했다. “그건 엘리오트가 참전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지요. 그들이 참전하면 남북으로 강적을 맞이해야 하는 스트빌라이는 견디지 못할 겁니다.” 광휘기사단장 베니토백작이 대공의 편을 들어 재반박에 나섰다. “스트빌라이는 최강국입니다. 양쪽으로 협공을 당한다 하더라도 능히 버텨낼 겁니다.” 궁정마법사 샤른은 원로원주를 지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들을 하시오”“ 비정상적으로 폭이 좁은 길쭉한 탁자의 상석에 앉은 황제, 이제나우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주보고 앉은 채 참전과 반전을 번갈아 제기하며 팽팽하게 대치하는 양측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헛기침을 한 원로원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긴말하지 않고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스트빌라이에는 십존이 네 명이나 있습니다. 아직 전투에 발을 담그지 않고 있는 그들이 참전하는 순간 전세는 역전이 될 겁니다.” 과장이 섞이기는 했으나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훈족연합군에 백법사와 맥클레이가 있고, 엘리오트에 물의 시드와 카를 후작이 있다면 스트빌라이에는 화염의 길라드와 흑법사 로피드, 레인후작과 성기사 빌바오가 있었다. 황제는 참전 불가론을 주창하는 원로원주와 궁정마법사, 재무대신의 맞은편에 앉은 광휘기사단장과 숙부 킬커 드 피요르드대공을 쳐다보았다. 참전의 근거를 대라는 뜻이었다. “원로원주의 말이 일견 타당하게 들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흑법사는 행방이 묘연하고 성기사는 말 그대로 성기사, 신전에 매인 몸이니 특정 국가를 편들어 전쟁에 참가할 수는 없습니다.” 피요르드대공은 보르딕이 체이스에게 했던 변명과 유사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특히 용병대에는 아이언 오거라는 걸출한 정령사가 있고 그의 휘하에는 소드마스터에 필적하는 거구의 용병이 있습니다. 또한 엘리오트의 막스라는 자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이니 이 상태로 전쟁이 진행된다면 스트빌라이는 필경 멸망할 것이고, 그 땅을 나누어 차지한 엘리오트는 우리의 목을 조일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회의에서 처음 듣는 얘기가 나오자 황제는 흥미가 생겼다. “아이언 오거라니”“ “용병대 내의 돌격대를 지휘하는 자인에 항상 오거가 새겨진 철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합니다. 손을 뻗을 때마다 불의 정령이 튀어나와 적을 살상하는 바람에 스트빌라이군에서는 공포의 상징으로 통하는 자입니다.” “아이언 오거라......!” 황제가 흥미 있어 하자 대공은 자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듣기로는 불의 중급정령 카사를 자유자재로 부린다는데 그 실력이 중급정령마스터를 넘어서 상급정령사의 경지를 엿본다고 합니다.” “오! 그가 상급정령사인가”“ 호르스트후작은 대답하려는 대공의 말을 급하게 가로챘다. “그건 아닙니다. 상급정령을 소환하지 않는 걸 보면 중급정령사가 분명합니다.” 어떻게든 용병대와 훈족의 전력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후작이 끼어들자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공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직 상급정령을 소환한 것은 아니지만 중급정령사를 쉽게 처치하는 걸로 봐서 상급정령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그 밑에 있는 덩치 큰 사내도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거기다 요상한 검을 사용하는 대원들도 있다고 합니다.” “요상한 검이라니”“ 황제가 물었다. “그 검에 베인 자들은 살이 타서 죽는다고 합니다. 피를 뺏긴 채.” “맥클레이용병대가 듣던 것 이상으로 강하구만.” 이제나우 황제는 대공의 대답을 듣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대공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용병대의 강한 인상을 황제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킨 것이었다. “스트빌라이에는 좋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원로원주가 밀리는 듯하자 궁정마법사 샤른이 얼른 편을 들고 나섰다. “자네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데 의견을 말해보게.” 황제는 코를 막고 있는 실레아를 보며 말을 건넸다. 황제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망할 놈의 냄새 덕에(“) 얼굴이 누렇게 뜬 실레아는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직책의 특성상 재정을 고갈시키는 모든 일에 부정적이던,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빨아들이는 전쟁을 싫어하고, 당연히 부전론자였던 실레아는 악취덩어리 대공 때문에 참전이던 부전이든 빨리 결정을 내렸으면 싶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 자연 대답도 성의가 없었고 무례하게 들리기도 했다.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죠.” 평소의 행적으로 보면 당연히 반대했어야 할 재무대신이 중립을 지키자 원로원주는 당혹스러웠다. 삼대 이로 우세를 지키던 회의가 이대이로 팽팽해 져 버린 것이다. “훈족과 스트빌라이간의 전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샤른이 호르스트후작에게 물었다. “크리누스에서 막혀 꼼짝 달싹도 못한다고 합니다.” 호르스트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는 회의가 열리는 내내, 훈족과 맥클레이용병대는 될 수록 약하게 스트빌라이는 될 수록 강하게 말했다. 전쟁에 발을 들이는 행위는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은 의도에서였다. 타국보다 약한 국력도 국력이지만 무엇보다 국내의 정치상황이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외부와의 갈등은 황권의 강화와 귀족세력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쾅쾅. 굳게 닫힌 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듯 무례하게 문을 두들기는 것이냐!” 팩하니 소리를 지른 실레아는 벌떡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대공에게서 멀어지려는 의도였다. 호르스트후작은 재무대신의 평소 침착하던 행동에 비한다면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지라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회의실로 뛰어든 기사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스트빌라이군이 지휘관 틸만백작마저 생포당한 채 카톤협곡에서 대패를 당했다고 합니다.” “뭣이!” 베니토백작은 과장된 동작으로 펄떡 일어섰다. “엘리오트군이 협곡을 넘었다는 것이냐”“ 샤른이 침착하게 물었다. “엘리오트 황궁이 침공 명령을 내리지 않아 일단 대치는 하고 있습니다만 명령만 떨어지면 곧장 스트빌라이로 밀고 들어갈 거라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회의의 주제를 바꿔야겠군.” 황제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엘리오트공격 계획을 짜보세.” “예, 알겠습니다.” 호르스트와 샤른이 뭐라 말릴 사이도 없이 곧장 대답한 실레아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멀리서 소리쳤다. “내일까지 전쟁비용을 짜서 올리겠습니다.” 피요르드의 참전은 그것으로 결정이 되었으니 가공할 만한 입 냄새의 승리였다. 그날 이후 실레아는 두고두고 호르스트에게 시달렸다. 왜 열렬한 부전론자에서 참전론자로 전향했는지 그 이유를 추궁당한 것이었다. 답답한 것이 재무대신 실레아는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없었다. 나라의 운명을 바뀔 중대한 결정을 한 이유가 입냄새 때문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 * * 슈앙. 투석기가 쏘아올린 커다란 돌덩이가 성벽을 향해 날았다. 그러나 성벽을 일격에 허물어뜨릴 기세로 솟구친 돌은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마법사가 만들어낸 파이어 볼에 맞아 힘을 잃고 떨어졌다. 이십대의 투석기가 다양한 시간차 공격을 시도했지만 스트빌라이군의 견고한 방어막은 뚫을 수가 없었다. “쏴라!”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가을이 되면 찾아와서 농작물을 절단 내는 메뚜기 떼처럼 하늘을 뒤덮은 채 떨어졌다. 그에 맞선 마법사들은 실드를 치고 정령사들은 정령을 부렸다. 성벽에 늘어선 병사들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화살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어올렸다. 퉁, 탕, 팅. 방패에 튕겨지거나 꽂히는 화살들이 요란한 소리를 만들었다. 화살을 날리는 사이에 비죽비죽한 돌덩이와 날카로운 쇳덩이를 장착한 투석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살을 먹인 궁수들도 시위를 놓자 다양한 무기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돌격!” 이베와 모츠의 입에서 동시에 명령이 떨어졌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과, 돌을 배경으로 맥클레이용병대와 훈족은 전사들이 땅을 박찼다. “샐라임.” 전방을 주시하던 페이더스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성가퀴를 따라 시뻘건 화염이 일더니 불의 상급정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샐라임은 나타나자마자 성벽을 따라 달렸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화살과 쇳덩이가 튕겨져 나갔다. 쿵. 방어막을 피해 운 좋게 성벽에 부딪친 돌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튕겨졌다. 성벽에 방어마법이 걸려 있음이 분명했다. 화살이 다시 하늘을 뒤덮었다. 이번에는 훈족이 아니라 스트빌라이의 궁사들이 날리는 화살이었다. “프로덱션 오브 에어!” 백법사 휘하의 마법사들이 병사들의 머리위에 방어막을 쳤다. 운수 사나운 용병들은 방어막 사이로 떨어지는 화살을 막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주변의 마나가 미친 듯 요동을 쳤다. 공격마법과 방어마법이 난무하고 안티매직이 마법을 무력화시켰다. 성벽가까이 접근하는 용병들 뒤로 충차가 따랐다. 앞을 날카롭게 깎은 데다 미스릴을 섞은 강철을 덧대고 강도강화 마법까지 걸린 길이 십 미터 정도의 충차는 밑에 바퀴가 달렸고 옆에 길게 뻗은 손잡이 위에는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덮개가 달려 있었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가장 앞부분에서 충차를 밀었다. 마법과 정령 때문에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하고 떨어진 바위들에 의해 간혹 진로가 막히기는 했지만 충차는 무난하게 성벽까지 접근했다. *** 다음카페 같은데서 파일이 돌아다니는 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으아;; ㅈㅅ해요!!) 엘란(112) 해자가 없는 크리누스성의 성문까지는 지척이었다. 철가면을 뒤집어 쓴 엘란은 온 힘을 다해 충차를 밀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충차의 덮개로 주먹만한 돌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기름이 부어졌고 파이어 볼이 불을 댕겼다. 화르륵 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충차의 표면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가자!” 뒤에서 밀고 있는 아에게가 기합을 넣었다. 성벽 근방의 땅-마법결계가 쳐져있어서 대지계마법을 약화 시키고 땅의 정령을 속박하는-을 지나 성문에 당도한 충차는 잠시의 뜸도 없이 그대로 부딪쳐 갔다. 쾅! 폭음이 울리고, 전나무목재에다 철판을 덧댄 문이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충차를 뒤로 물린 돌격대는 다시금 부딪쳐 갔다. 쾅. 쾅 쾅. 충격완화 마법이 걸려있는 성문은 부서질 듯 흔들리면서도 충차의 공격을 잘 버텨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름은 계속해서 부어졌고 타오르는 충차는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목재로 된 부분은 벌써부터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고 철로 된 부분은 뜨겁게 달아올라 덮개 아래 부분의 공기를 사정없이 데웠다. 짝귀와 밤톨은 굵은 땀을 흘리며 헐떡거렸다. 뜨거운 공기가 허파까지 데웠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쑤셔댔다. 엘란은 가면까지 뒤집어쓴지라 더욱 답답했다. 철가면의 돌격대가 성문을 공략하는 동안 용병들과 훈족은 사다리를 걸친 채 개미처럼 성벽에 달라붙었다. 돌과 기름, 그리고 뜨거운 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그들을 향해 온갖 물건들이 떨어져 내렸다. 얼굴에 펄펄 끓는 물을 뒤집어 쓴 훈족의 전사는 벌겋게 익어 물집이 잡힌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스트빌라이군은 성벽에 걸친 사다리를 장대로 밀어댔다. 뒤로 넘어가는 사다리를 붙든 용병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다리를 붙잡았다. 마치 생명줄처럼. 콰직. 땅과 정면충돌한 용병이 게거품을 물어댔다. 허리가 직각으로 꺾어진 것이 부러진 것 같았다. 움직이는 공중 망루에 올라탄 마법사들이 돌격하는 훈족전사를 위해 엄호 마법을 갈겼다. 에어 애로우와 파이어 애로우가 무차별적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투석기들이 연신 바위와 쇳덩이를 날렸다. 훈족연합군이 총공세를 취하자 곳곳의 방어막이 무너지고 성벽위의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무기에는 눈이 없다. 흑법사의 제자가 쳐낸 바위가 밑에 있는 병사들을 깔아뭉개기도 하고 아군이 쏜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러대는 용병들도 속출했다. 드디어 성벽위에 발을 디딘 자들이 나타났다. 훈족의 전사들이었다. 스시악은 끓는 기름이 한 가득 담긴 단지를 들고 오는 병사의 배를 찔러버렸다. “으악!” 단발마의 비명을 지른 수비병은 단지를 떨어뜨렸다. 성벽 안쪽으로 떨어진 단지는 지원군의 얼굴을 덮쳐 버렸다. 또 다시 비명이 울리고 기름을 뒤집어 쓴 병사는 참혹하게 변한 얼굴을 움켜잡았다. 오빠의 뒤를 따라 성벽위에 올라온 세오나는 창을 겨눈 채 포위한 병사들을 향해 바스타드소드를 휘둘렀다. 원을 그리며 휘도는 소드에 따라 창들이 꺾여 나갔다. 그리고 병사들의 단발마가 뒤따랐다. 훈족에 뒤이어 용병들이 성벽위로 올라오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스트빌라이군은 성벽위의 적과 싸우면서도 성벽 아래로 돌을 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올라오는 수만큼의 병사들이 아래에서 죽어나갔다. 투석기의 공격을 방어하던 길라드는 성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려드는 훈족과 용병들을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성벽위로 올라오는 적들이 많아지면 곤란해 질 수도 있었다. 크게 심호흡한 그는 손날을 펴 좌에서 우로 길게 그었다. 고함과 함께. “가라!” 샐라임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좌측 성벽의 끝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우측 성벽의 끝에서 끝이 났다. 그가 성벽을 횡단하는 사이 중간에 걸린 사다리와 적병들은 그대로 양단되었다. 합세하는 아군이 끊기자 성벽위의 세오나는 곧 적병에게 휩싸여 버렸다. 쾅! 샐라임이 발을 빼는 사이 바위들이 성벽을 넘어 막사에 떨어졌다. 부상병을 치료하던 병동을 직격하는 바람에 바위에 깔린 병사들은 피떡이 되어버렸다. 엘란은 머리 위를 지나치는 섬뜩한 파공음에 솜털이 곤두섰다. 덮개 밖으로 고개를 빼고 보니 충차를 지나쳐 사다리와 용병을 절단하는 샐라임이 보였다. 그 샐라임이 우측 끝을 짚고 몸을 돌리더니 충차를 향해 돌진했다. 길라드는 이 참에 충차마저 처리하려 한 것이다. 철가면은 감히 맞서지 못했다. 중급정령 밖에 부리지 못하는 그의 처지 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물러나!” 그는 고함과 함께 충차를 뒤로 뺐다. 그리고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충차를 버려!” 엘란과 카이어스는 뒤의 대원들을 이끌고 재빨리 충차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 때 달려든 샐라임이 충차의 앞부분을 강타했다. 쾅! 나무 쪼가리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충차는 부러져 나갔다. 충차를 부수고 공중으로 떠오른 샐라임은 성벽을 넘어가는 바위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 샐라임에 막힌 바위는 그대로 떨어져 사다리를 가지고 접근하는 용병들을 뭉개버렸다. 엘란과 카이어스는 반 동강이 난 충차의 뒷부분을 가져와 콜드에게 맡겼다. “충차를 끌고 후퇴하세요.”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충차의 덮개로 막으라는 의도였다. 콜드는 머뭇거리는 아에게의 목덜미를 바짝 틀어쥐고 뒤로 당겼다. 카이어스는 충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동료들을 보고 성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라가자.” 대답도 듣지 않은 그가 성벽을 타기 시작했다. 언제나 보던 거지만 뭔가를 타고 오르는 카이어스의 실력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거미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엘란이 실피드를 불러 성벽의 중간쯤에 도달했을 때 카이어스는 벌써 성가퀴를 넘고 있었다. 턱. 그는 성벽 위에 발을 딛자마자 세오나를 찾았다. 혹시 성벽위에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세오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벽에 몸을 붙였다. 벽에 몸을 붙이면 뒤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검을 들어 앞을 겨누는 그녀를 향해 창병들이 창을 내질렀다. 챵, 챵. 몇 개의 창은 쳐낼 수 있었으나 중과부적.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아!” 그녀가 만든 바스타드소드의 그림자를 뚫고 두개의 창이 날아들어 옆구리와 허벅지를 찢어 놓았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피를 따라 썰물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저승길의 길동무를 하나라도 더 늘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휘청거리며 달려 나가는 그녀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세오나가 옆구리를 찌른 창병의 목을 쳐 버리는 순간 다른 창이 그녀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고 뒤로 물러섰다. 배에 꽂힌 창이 끌려 따라오며 쇳소리를 울렸다. “이제 끝인가.” 그녀가 삶을 포기할 때. 흐릿해지는 그녀의 눈에 해골 가면을 뒤집어 쓴 거한의 모습이 잡혔다. 카이어스였다. “전투 끝나거든 데이트 할 텐가”“ 그는 묵직한 저음을 날리며 적병의 처리했다. 왼손에는 그녀의 오빠,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있는 스시악까지 붙들고서. 카이어스의 칼에 따라 자욱한 피보라가 일었고 성벽은 이내 피로 범벅이 되었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세오나는 정신을 놓았다. 카이어스는 정신을 잃은 세오나를 오른쪽 옆구리에 꼈다. 양손이 묶인 그는 달려드는 스트빌라이 기사의 배를 발로 내갈긴 후 서슴없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엘란은 두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소리 없이 나타나 불덩이가 성벽 위를 달렸다. 쾅! 카사에 부딪친 병사들은 성벽 아래로 떠밀려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언 오거다!” 한 병사의 부르짖음은 포위된 용병을 죽이던 스트빌라이군의 움직임을 일순간 멈추어 놓았다. 병사들의 눈에 공포가 어리고 용병들의 눈에 희망이 솟구쳤다. 엘란은 달렸다. 그와 동시에 다섯 명의 카사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비명이 울리고 살타는 냄새가 성벽 위를 자욱하게 맴돌았다. 시노이남작은 검신만 이미터가 넘는 클레이모어를 힘주어 잡았다. 그는 악명 높은 아이언오거를 처단함으로서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싶었다. 전쟁영웅의 직함으로. “물러서지 마라!” 그는 병사들을 앞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출세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철가면은 창을 내밀며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카사를 날려 보냈다. 창이 꺾이고 정령에 떼밀린 적병이 성벽 밑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뒤에 버티고 선 지휘관은 용납하지 않았다. 물러서는 병사의 등을 클레이모어가 할퀴었다. 가가각. 클레이모어와 갑옷이 부딪치며 소음을 토했다. 물러서면 자신이 죽여 버리겠다는 뜻. 움찔한 병사들이 체념의 눈빛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몸을 쭉 빼고 창만 찔러대는 손길에 힘이 들어갈리 만무했다. 겁에 질린 표정이 애처롭게 보였다. 엘란은 카사를 옆으로 돌리고 실프를 소환 병사들의 머리를 두들겼다. 죽지 않고 기절할 정도로.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병사의 겨드랑이 사이를 뚫고 긴 검신이 들어왔다. 그 검은 쓰러지는 아군의 팔까지 끊어 놓고 엘란을 노렸다. 아이언오거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죽일 놈!”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고 실프가 클레이모어를 휘감아 당겼다. 엉거주춤 끌려나오는 시노이남작의 얼굴에 보였다. 철가면이 그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었다. 불길이 솟구치고 길게 늘어난 샐라멘더가 벌어진 시노이의 입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피거품과 함께 뒤통수를 뚫고 튀어나왔다. 그때 용병왕과 백법사가 동시에 움직였다. 공중망루에서 솟구친 백법사가 혼돈의 구슬을 불렀다. 다섯 개의 구슬은 파지직거리며 스파크를 튀겼다. 백법사가 플라이마법으로 날고 있다면 아래에는 용병왕이 말을 달렸다. 용병왕의 말은 무섭도록 빨라서 한달음에 바위를 넘어 단숨에 성벽까지 다다랐다. “타!” 한줄기 낭랑한 기합과 함께 안장을 박찬 용병왕의 몸이 성벽을 디뎠다. 검을 뽑아 성벽 틈 사이에 끼어 넣은 그는 검을 튕겨 그 반동으로 성벽 위에 올라섰다. 짙푸른 오러가 검신에 맺히고 그 오러가 적병의 몸에 틀어 박혔다. 그는 적병을 도륙하며 고함을 질렀다. “후퇴하라!” 성벽에 다시 사다리가 걸쳐지고 아직 살아남은 용병들과 훈족들이 사다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어딜!” 길라드는 둘러싼 기사 셋을 한 수에 죽여 버린 용병왕을 향해 샐라임을 보냈다. 용병왕이 원을 그려 오러막을 만든 순간 샐라임이 충돌했다. 쾅! 공기가 비명을 질러댔다. 혼돈의 구슬은 견고한 성벽을 향해 무리지어 날아갔다. 전기력을 뿜어대는 구슬이 성문을 두들기려는 찰나 지름 이미터의 투명한 원반이 앞을 막았다. 쿠우웅! 묵직한 소리가 울리고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은 물에 휩쓸린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흑법사”“ 타클마칸은 의문을 토해냈다. 잠시 후 바로 대답이 들렸다. “오랜만이군.” 성가퀴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있는 자였다. 그의 주위에서 끊임없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온갖 무기들이 난무했건만 그는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가 넘쳐흘렀다. “삼십년만인가”“ 백법사는 혼돈의 구슬을 머리위에 띄우고 공중에서 뒷짐을 진 채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삼십년하고 이개월만이지.” 흑법사는 싱긋 웃으며 성가퀴에서 뛰어 내렸다. “그때 못 다한 승부를 결정짓지.” “그러고 싶다만 보다시피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백법사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전사들을 가리켰다. “섭섭하게 벌써 내빼긴가”“ “거느린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 “당신 걱정이나 해!” 미소를 지우고 차갑게 외친 흑법사가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지팡이를 겨누고 주문을 영창하자 그의 머리위에서 거대한 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팡이의 수정이 번쩍거리는 순간 공이 백법사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그에 맞선 타클마칸은 몸을 뒤로 빼며 혼돈의 구슬을 날렸다. 이제는 화염을 뿜어대는 구슬은 오각형을 만들며 투명한, 그러나 엄청난 힘을 품고 있는 공을 사정없이 때렸다. 공이 구슬을 삼키는 순간 섬광이 작렬하고 온도가 치솟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찌이잉!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견디지 못한 성벽위의 병사들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 그들의 머리를 밟고 정령을 돌려보낸 엘란이 뛰었다. 힘껏 발을 굴러 성벽 밖으로 튀어나간 그는 실프를 소환 몸을 띄운 채 실피드를 불러냈다. 하늘거리는 실피드가 길게 변하더니 반원형으로 휘어졌다. 잠시 후 새로운 실피드가 나타나 반원형 실피드의 양 끝단을 끈처럼 묶었다. 철가면은 실피드의 끈을 힘껏 당겼다. 활대 역할을 하는 실피드가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거기에 화살처럼 샐라멘더가 재어졌다. 아이언오거가 시위를 놓았다. 날카로운 불화살이 철수하는 용병들을 폭풍처럼 몰아치는 스트빌라이군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졌다. 그 불화살은 용병의 등을 찔러가는 기사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빌로린기사단장 단칸백작은 바로 옆에 있는 기사의 목줄을 물어뜯는 샐라멘더화살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령을 저런 식으로 부리는 자는 살다 살다 처음이다. 철가면의 샐라멘더화살은 사다리 근처의 스트빌라이군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아이언오거의 철저한 엄호 속에 훈족연합군은 서서히 퇴각했다. 단칸백작은 오른쪽 허리에서 대롱거리는 숏소드를 꺼내어 아이언오거의 심장을 겨누었다. 마나를 끌어올려 숏소드에 밀어 넣고는 철가면을 향해 힘주어 뿌렸다. 엘란은 세 명의 샐라멘더를 동시에 재어 섬전처럼 뻗어오는 숏소드를 향해 쏘았다. 따당. 두 대의 화살은 날을 빗겨 가드의 양쪽을 때렸다. 숏소드가 허무하게 떨어져 내릴 때 나머지 화살이 단칸백작의 목을 노렸다. 백작은 수치스럽게도 바닥을 굴렀다. 화살이 지나가고 얼굴을 붉힌 그가 일어나며 아이언오거를 향해 독기서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샐라멘더화살은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던 것. 그를 지나친 샐라멘더는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여 백작의 등을 후려갈겼다. 쾅. 방심하고 있던 백작은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당해서, 기절한 채 바닥을 뒹굴었다. 흑법사가 직접 걸어 준 충격완화 마법이 아니었다면 갑옷을 뚫은 샐라멘더에게 목숨을 잃었으리라. “나중에 보자.” 백법사는 거의 철수한 전사들을 보며 천천히 물러났다. 흑법사는 비웃음을 띠긴 했으나 따라나서진 않았다. 용병왕은 간혹 불덩이를 던지기도 하고 직접 달려들기도 하는 샐라임을 견제하며 오러탄을 날렸다. 샐라임을 지나쳐 삼십도 각도로 치고 올라 온 오러탄은 사선으로 길게 날아가 길라드의 눈을 노렸다. 깜짝 놀란 길라드가 하늘로 솟구치며 카사를 날렸다. 찰나지간에 오러탄과 카사의 부리가 격하게 충돌했다. 오러탄은 부리를 가르며 올라가 기어이 카사의 몸을 관통했다. 그런 오러탄을 또 다른 카사가 쪼았다. 이번에는 오러탄이 산산이 흩어졌다. 용병왕은 가볍게 검을 뿌려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재수 없는 기사의 심장을 쪼개 놓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는 백법사처럼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길라드를 한 번 노려본 후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엘란(113) 피요르드의 광휘기사단을 이끄는 베니토백작은 휘파람을 불어대며 걸었다. 때맞춰 터져준 전쟁과 황제를 설득할 수 있도록 진행된 전황들. 모든 일이 생각대로 풀려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었다. 엘리오트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짜릿한 감각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붙여 경의를 표하는 기사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긴 회랑을 걸었다. 접견실을 통과하고 집무실에 들어가며 통신마법사를 부르도록 명령했다. 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대고 두 다리를 책상위에 올려놓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있자 잠시 후 마법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광휘기사단장은 말없이 열쇠를 꺼내 책상에 달린 금고를 열었다. 그는 금고 안에서 은은한 광택이 도는 통신구를 꺼내더니 마법사에게 건넸다. 마법사는 전에도 해봤던 것처럼 능숙하게 통신구를 건네받아 조심스레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솜을 꺼내 양귀를 틀어막더니 그 위에다 검은 색의 종이를 붙였다. 그러고도 행동을 멈추지 않은 그는 원래 그렇게 하도록 명령이 되어 있었는지 폭이 10센지 가량 되는 검은 천을 두어 개 꺼내 두 눈을 가리고 귀를 통과해 둘러 맺다. 마지막으로 귀마개를 끼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마법사는 손을 뻗어 통신구를 쥐고 마나를 주입했다. 수정구 위로 푸른 색 빛이 일렁이더니 또렷한 상이 맺혔다. “웃는 낯을 보니 좋은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요.” 통신구 속의 인물, 스트빌라이 황실친위대장 루카스 레인후작이 말했다. “좋은 성과라기보다는......당신 뜻대로 일이 진행되었다고 말하는 게 낫겠지.” 베니토백작은 자세를 바로하고 몸을 바짝 당겼다. “말 속에 뼈가 있군.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소”“ “당신 자체가 기분 나빠!” 백작은 싫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후작은 이마를 과장된 동작으로 짚었다. “이런, 이런. 같은 배를 탄 친구......” “누가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이요!” 백작은 말을 자르고 들어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후작과 협력한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잠깐 동안 손발을 맞춘 것뿐이다. 원하는 것을 얻은 지금 타국의 고위 인사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눈으로 보면 첩자로 오인될 수도 있었고 그 자신도 꺼림칙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좋겠지.” 레인후작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그것이 또한 백작의 심사를 긁어 놓았다. “당신도 참 악당이오. 우리를 전쟁터에 끌어들이려고 그 많은 병사들을 죽이다니.” 백작은 후작의 아픈 곳을 찔렀다. 훈족과 용병대에 의도적으로 밀리며 희생된 병사와 카톤협곡의 전투에서의 패배를 넌지시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실패해서 후작은 감정이 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저들의 세력이 예상외로 강했다. 연극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엘리오트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허술하게 상대하긴 했지.” 백작이 비난의 말을 더 던지려는 순간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당신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희생을 줄이는 길이다.” 백작이 보기에 그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베니토백작은 얼굴을 수정구에 바짝 붙이고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이제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맙시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긴 통신구는 부셔 버릴 테니 다시 연락할 수도 없겠지만.” 후작도 수정구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통신구를 부셔버리겠다는 그를 만류했다. “좀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지 그러나.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을 지도 모르잖나.” “일없소.” 퉁명스레 말한 그는 마법사의 손에서 수정구를 떼어냈다. 마나가 끊기자 후작의 재수 없는 얼굴이 금세 사라졌다. 마법사는 이목을 가리던 역순으로 귀마개를 떼고 천을 풀고, 종이를 제거한 후 솜을 빼냈다. “수고 했다. 나가 보게.” 마법사가 허리를 숙이고 나가자 백작은 수정구를 번쩍 들어올렸다. 특정 짝과 연결되도록 특별히 제작된 이 통신구만 파괴하면 다시는 후작과 접촉할 수 없다. 아니 접촉을 할 수 있어도 복잡한 절차와 일정 수준의 시간을 요할 것이다. 한 동안 망설이던 그는 결국 수정구를 파괴하지 못하고 도로 내려놓았다. “어쩌면 연락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 * * 레인후작은 베니토가 다시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통신구를 파괴하던 파괴하지 않았던.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므로. 그는 통신구를 가지고 나가는 집사를 불렀다. “자네가 처리할 일이 있네.” 이미 언질이 있었던 듯 집사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물었다. “누구를 데리고 갈까요”“ “알아서 데려가게. 지방영주들 병력도 필요하다면 뽑아 쓰게. 쓸 일은 없겠지만.” 후작은 황제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내어주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반드시 처리하게. 소문나지 않도록.” “염려하지 마십시오.” 스트빌라이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레인후작의 유일한 고용인 갤리스집사는 데려갈 기사들을-되도록 입이 무거운-떠올리며 밖으로 나갔다. 갤리스는 후작의 집무실을 나서다 이쪽으로 향하는 데이지후작부인과 마주쳤다. 임신한 배를 자랑스레 내밀고 걸어오는 그녀와. “남편이 안에 계신가요”“ “예, 들어가 보십시오.” 공손히 인사하며 스쳐 지나가는 집사의 입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아주 묘한. * * * 크리누스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양측의 피해만 쌓여가고 있었다. 수도에서 밀려나 한동안 본부로 주둔했으면서도 크리누스성에 그런 방어마법이 걸려있는지 몰랐던 용병대는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첩자라도 심어두는 건데.” 체이스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닭 벼슬머리라는 특유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무식하게 보이는 그의 외모와는 달리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가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크리누스성은 만만치 않았다. “너무 몸을 사린 탓입니다.” 프로스크가 짚고 나섰다. 총력을 기울였으면 이미 함락시킬 수도 있었을 일을 서로 몸을 사리다 보니 이렇듯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누가 몸을 사렸다고 그래!” 세 시간 동안 이어진 마라톤회의 때문에 몸이 뒤틀린 페이더스가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놈이군.” 이베는 맥클레이용병단의 후계자를 보며 한심스러움 반, 반가움 반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창업보다는 수성이 어렵다는 것이 역사의 진리. 나라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이대에서 망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용병왕이 나라를 세운다 하더라도 페이더스가 대통을 잇는다면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먹힐 것이 뻔했다. 아니면 우리가 먹어치우던가. 페이더스와 용병왕을 스친 그의 시선이 아이언오거에 닿았다. 자신과 타클마칸은 물론 훈족의 수뇌부는 모두 저 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용병단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아서 모른 척 할 뿐, 훈대평원에서 만났던 자 광술사가 분명했다. 그리고 세오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거한은 카이어스라는 자가 분명할 것이다. 엘프라는 말에는 아직도 반신반의 하지만. 아쉬운 일이었다. 저들이 우리와 손잡지 않고 용병단과 손잡은 것은. “서로들 몸을 사린 것은 사실이죠.”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자가 프로스크의 말을 지지하고 나섰다. 에단이었다. 자신의 심복되기를 자처한 자가 중인환시리에 반박을 하자 페이더스가 발끈했다. “우리 용병대는 절대 몸을 사리지 않았다!” “아니 저들의 말이 맞다.” 용병왕이 무겁게 입을 열어 프로스크의 말을 긍정하자 페이더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체통에 땅바닥에 떨어지게 생긴 것이다. “서로들 피해를 최소화 하고자 뛰어난 자들을 후방에 포진시킨 것은 사실이지.” 그랬다. 훈족과 용병단은 서로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상대편이 전력을 기울이기를 은연중 바라며 정예 투입하는 것을 꺼린 것이었다. 자신과 백법사가 직접 손을 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어서 크리누스를 돌파해서 스노우를 틀어쥐어야 한다. 자신과 백법사, 그리고 광술사와 엘프라고 우기는 괴상한 소드마스터라면 악전고투는 피할 수 없더라도 반드시 함락시킬 수 있었다. “내일 총력을 기울여서......” “잠깐.” 백법사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대로 공격을 한다면 피해가 클 겁니다.” “따로 복안이 있으십니까”“ 체이스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이곳까지 밀고 오는 동안 전 대륙의 용병들이 몰려들어 전력이 상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전황이 조금만 불리해져도 스트빌라이측에 붙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울려 실력도 떨어졌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전우애가 쌓인 실력 좋은 동료들은 최대한 아껴야 했다. 새로운 용병들을 교육시키고 한 가족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파르미나고원에는 질 좋은 미스릴 광산이 몇 군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그가 말을 끊고 빙그레 웃자 애가 달은 체이스가 재촉을 했다. “퓨어 미스릴 100키로그램만 있으면 성벽을 부셔버릴 수 있을 듯 합니다.” “......!” “......” 그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은백색을 띠는 미스릴은 극히 희소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최소한 대여섯 배는 더 비싸게 팔리는 것이 미스릴이었다. 그것도 지금 같은 전시가 되면 열배 스무 배까지 뛰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연 상태의 미스릴은 자신들만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광석 속에, 마치 소고기의 지방처럼 광석 표면에 서려 있다. 그것을 광석에서 뽑아내고 제련하는 것은 대단한 집중력과 기술을 요했다. 폭발을 일으키기도 하고 쓸 수 없게 바스러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미스릴 중에서도 귀한 것이 퓨어 미스릴이었다. 미스릴광석에서 뽑아낸 미스릴 중 순도 99%의 미스릴을 퓨어미스릴이라 불렀는데 광석에서 아주 소량이 나오는 만큼 구하기도 어려웠고 가격도 황금의 오십 배에 거래될 만큼 비쌌다. 지금같은 전시에는 더 가격이 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백법사는 그처럼 귀한 퓨어 미스릴을 100키로그램이나 원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시일 안에. “황금 일톤을 원한다면 당장 준비시킬 수도 있습니다만 퓨어 미스릴은......” 프로스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도 아니고 퓨어 미스릴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리도 없으니까요. 타클마칸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스트빌라이의 광산을 털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스릴 광산이라도 퓨어 미스릴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모츠가 말했다. “그러니 여러 군데를 털어야지요. 다 계획이 서 있으니 인원이나 좀 빌려 주십시오.”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듯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니 털만한 광산을 대충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자가 자원하자 페이더스가 대뜸 찬성하고 나섰다. 그가 탈취대에 끼면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다. “좋도록 하십시오.” 이베는 시원시원하게 허락하더니 아이언 오거를 가리켰다. “저 분도 같이 동행했으면 합니다. 실력 있는 정령사도 필요할 테니까요.” 훈족의 전력은 백법사를 위시한 마법사들과 검을 다루는 전사들이 대종을 이루었고 정령사는 극히 드물었다. 체이스는 이베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아 좀 찜찜하기는 했지만 흠잡을 데는 없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체이스가 긍정하자 몇 명의 인원이 선발되고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이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광술사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겸사겸사 그를 회유해서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나중을 대비해서. “아버지!” 머리를 길게 기른 아가씨가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서는 용병왕의 품에 뛰어들었다. 난초처럼 청초한 인상을 풍기는 처녀였다. “용병왕에게 딸이 있었소”“ 이베가 엘란을 붙들고 물었다. “나도 잘 모르오.” 철가면이 고개를 젓자 옆에 있던 체이스가 대신 대답했다. “용병왕께선 슬하에 일남 일녀를 두셨습니다.” * * * 침대 주변에 두개의 난로를 가져다 놓고 계속해서 장작을 넣는 바람에 파오 안은 바깥의 차가운 날씨와 관계없이 후덥지근했다. 카이어스는 수건을 들어 세오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세심한 동작으로. “왜 아직 깨어나지 않지”“ 바카루아스는 양 귀가 잘려나간 특이한 인간을 유심히 살폈다. 엘프라는 소문 때문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엘프로 보이지는 않았다. 한 번 더 살핀 그는 헛소문이라고 결론지어 버렸다. 하긴 아이언 오거의 정체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드워프라는 소문도 있으니. “이봐!” 대답을 하지 않자 카이어스가 그의 로브를 당겼다. “수면마법을 걸어놓아서 깨지 않을 뿐, 상처는 거의 다 나았소. 몸조리만 잘 한다면 일주일후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요.” 바카루아스는 친절히 대답해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소.” 그는 같이 나가자는 뜻으로 한 동안 카이어스의 옆에 서 있었다. 친척은커녕 같은 부족민도 아닌 남자가 여자 혼자만 있는 파오에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헛기침을 하고 눈치를 주는데도 카이어스는 일어설 줄 몰랐다. “그만 나갑시다.” 눈치주기를 포기하고 기어이 같이 나가기를 청하는데 세오나가 눈을 떴다. “깨어났소.” 카이어스가 한껏 멋을 담아 말했다. 닭살스런 느낌에 바카루아스는 팔뚝을 긁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죠”“ 카이어스를 본 세오나가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올리고 경계심어린 눈길을 보냈다. “당신을 구해준 사람입니다.” 바카루아스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던 카이어스의 모습을 떠올리면 말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간호를 했습니다.” 괜히 무안해진 바카루아스가 대신 대답을 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그만 나가보세요.” 사무적으로 말한 그녀는 이불을 이마 위까지 끌어 올렸다. “음......음......” 카이어스는 뭔가 멋진 말을 하려고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아주 인상 깊은 말을 해주고 싶은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한다는 소리가 아주 무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신들 부족 중에는 생명의 은인과 잠을 같이 자는......” 밤을 꼬박 새워 치료마법을 걸고 포션을 만들어 먹인 마법사 바카루아스는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듣지 못하고 살기어린 욕설을 들으며 쫓겨나야 했다. 카이어스 때문에. 엘란(114) $.용병왕의 딸. 거처로 돌아온 엘란은 하이론에게 회의의 결과를 설명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퓨어미스릴로 뭘 하려는 걸까요”“ 하이론도 백법사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글쎄다. 그걸로 성벽을 부술 마법을 부릴 모양인데......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하이론의 말대로 때가 되면 알게 될 일. 엘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문을 접었다. 그때 체이스가 들어왔다. 볼일이 있으면 부하를 보내 불러내던 그가 막사까지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파르미나고원으로 가는 일에 관해 몇 가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조용한 데 가서 말씀드리지요.” 그는 밖으로 나가기를 종용했다. “여기서 상의하면 되겠네.” 하이론이 말했다. 마침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카이어스는 청춘사업을 하느라 바빴고 나머지 대원들은 콜드와 아에게의 제안으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십니다.” 엘란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고원으로 파견될 사람들이 모여서 상견례를 하고 앞으로의 여정을 브리핑할 모양이었다. 막사를 나온 둘은 용병들의 숙영지를 지나 천부장들의 거처로 향했다. 체이스의 뒤를 따르는 철가면은 주변을 둘러보며 의문을 느꼈다. 천부장들의 거처가 목적지인줄 알았더니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꼭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엘란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대답에서 자신을 불러낸 것은 임무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엘란은 그만 돌아가려다 이왕 내친걸음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엘란은 주둔지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서야 자신을 부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주름이 겹겹이 쳐진, 그래서 천막이라기보다는 커튼처럼 보이는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 만난 사람은 정말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늘에서야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인물. 침대에 앉아 자신을 기다린 사람은 용병왕의 딸이었다. “만나고 싶었어요.” 그녀는 당황해서 멍하니 서있는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 당황에서 벗어난 엘란은 급히 일어나 거리를 벌렸다. “용건은”“ 극히 사무적인 태도에 용병왕의 딸, 크리스티가 입을 삐죽거렸다. 쟝이 보았다면 머리를 풀어 양쪽으로 늘어뜨린 모습이 아주 귀엽다고 침을 흘렸겠지만 엘란은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아이언 오거는 아주 유명하거든요. 그 가면 좀 벗어 볼 수 없나요”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꼭 보고 싶었어요. 시중에는 드워프라는 말도 있는데 정말인가요”“ 그녀는 사춘기 소녀처럼 재잘거리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뽀로통해졌다가는 헤실 거렸다. 엘란처럼 둔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그녀는 다시 엘란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리고는 머리를 기대왔다. 그녀의 머리에서 국화향기가 났다. “볼 일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일어서려는 엘란은 손을 급히 잡아당기더니 철가면을 문질렀다. 달뜬 음성을 발하며.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노골적인 유혹에 기가 막혔다. 어찌 보면 청순한 소녀 같고 어찌 보면 요부를 보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만 두시오.” 엘란은 차갑게, 아주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에게서 떨어진 그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 자식이 어디서 앙탈이야!” 화를 버럭 내던 그녀가 다시 배시시 웃으며 매달려왔다. 그런 급격한 성격변화에 기가 찼다. “거친 곳만 다녔더니 외로워서 그래요.” 철가면은 그녀의 손을 다시금 뿌리쳤다. “외로우면.......개를 키워보시오.”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엘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 “슬립!” 오랜만에 시전 하는 마법인데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에게 달려들던 크리스티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엘란은 그녀를 침대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 천막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체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공주님은 어릴 때부터 원하든 것은 모두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요.” 체이스는 용병왕의 아들 페이더스에게는 공자님 혹은 페이더스님이라고 부르더니 딸에게는 공주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었고, 태도도 깎듯 한 데다 정감이 흘렀다. “앞으로 이따위 짓은 벌이지 마시오.” 엘란은 불쾌감을 실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체이스가 어슬렁어슬렁 따랐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뭘 말인가”“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묻어났다. “용병왕이 나라를 세우면 그 나라는 누가 물려받을까요”“ 체이스가 반문했다. “듣기로는 페이더스가 후계자라고 하던데.” “그렇게 알려졌을 뿐, 확정된 것은 아니죠. 게다가 용병왕께서는 아들보다는 딸을 더 이뻐 하십니다. 원래 이쁨 받는 자식이 유산을 물려받는 법이죠.” 엘란은 걸음을 멈추고 체이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건 당신들 뜻 같군.” 엘란도 천부장들과 페이더스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있었다. 겉도는 듯한 분위기. “그렇게 얘기하시니 말을 건네기가 쉬워지는 군요. 잘 보셨습니다. 저희들, 아 여기서 저희들이란 건 용병왕을 모시고 용병대를 이만큼 키워온 천부장들을 말합니다.” 침을 삼킨 체이스는 주변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보셔서 아시다시피 페이더스는 재목이 아닙니다. 멍청하기만 한 것이 욕심만 많지요. 지도자로서는 최악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희들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용병왕의 후계자로 공주님의 부군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언오거와 우리 공주님이 묶여진다면......!” 가까이 다가온 그가 엘란의 귀에 속닥거렸다. “차기 국왕은 당신 몫입니다.” “나는 관심 없으니 다른 인물을 물색해 보시요. 그리고 그런 얘기는 나라가 세워지거든 하시오.” 발길을 멈춘 체이스가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요. 아이언 오거 말대로 나라가 세워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으니 그 때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엘란이 막사에 돌아오자 마침 카이어스도 돌아오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채. 그들을 보고 하이론이 혀를 찼다. “못 먹을 걸 먹었냐! 둘 다 인상이 왜 그래”“ 아닌 게 아니라 둘 다 오만상을 찡그린 것이 보는 사람이 다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카이어스를 힐끗 쳐다본 엘란이 말문을 열었다. “용병왕에게 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지나가는 소리로 한 번 들은 것 같다. 왜” 혹시 나가서 그녀를 만난 거냐”“ 엘란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일로”“ “저를 유혹하던데요.” “하하하하!” 하이론은 신기하다는 눈길로 엘란을 보더니 한 참을 웃었다. 그리고 말을 붙였다. “쟝이 없으니 니가 쟝 대신이냐”“ “그런 게 아닙니다.” 엘란은 체이스의 제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했다. “에쉴리에게 미안하다만 한 번 쯤은 생각해 볼만한 제안이구나.” “하이론!” 철가면은 그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금기도 잊고 “r 소리를 질렀다. 그만큼 하이론의 소리가 황당했던 것이다. “잘 생각해 보려무나. 엘프들이 그랬듯 용병왕도 약속을 깰 수 있고, 그가 약속을 지키더라도 후계자라는 그 한 성격하게 생긴 놈은 나라를 물려받으면-물론 스트빌라이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후가 되겠지만-약속이고 뭐고 모른 척할 가능성이 많은 놈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녀와의 결혼이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가 될 수 있지.” “다시는 그런 소리 마십시오.” 엘란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하이론은 기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한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네 생각이 옳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이어스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철가면이 여자한테 인기가 좋은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철가면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그가 다시 입을 떼었다. “여자 꼬시는 비법 있으면 좀 가르쳐 주게.” 엘란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간 그는 이불을 덮어 쓰고 잠을 청했다. 그런 그의 귀로 나지막한 대화가 들려왔다. “무슨 근거로 철가면이 인기가 좋다는 거야”“ “에쉴리도 그렇고 용병왕의 딸이라는 여자도 제가 좋다면서”“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다. 체이스라는 놈이 바람을 넣었겠지.” “그럴까”“ “당연히 그렇지. 너도 한 번 봐라! 저 놈에게 어디 성적 매력이 있나”“ “그건 그래. 음......아무래도 저 가면 때문에 혹한 거겠지”“ “그런 면도 있겠지.” “나도 천 쪼가리 말고 저런 철가면을 뒤집어쓰면 세오나가 좋아할까”“ “글쎄,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아니야, 나도 철가면을 써야겠어. 우선 강한 인상을 심어줘야 해.” 도저히 참지 못한 엘란이 소리를 질렀다. “잠 좀 잡시다!” 그 때 마침 야간훈련을 끝내고 부시럭거리며 들어오던 아에게가 놀라서 허둥거렸다.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조용히 다닐게.” 엘란을 결국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며 이베가 소집령을 내린 것이다. 소집처에 가보니 몇 명의 사람들이 벌써 모여 있었다. 안면이 있는 자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자도 있었다. 용병대 측에서는 러츠와 스트빌라이의 귀족이라는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자,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이 파견되었고 훈족 측에서는 이베를 포함 다섯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평민들이 입는 평범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코가 뭉툭하고 입술이 두툼한 자는 둔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백법사의 제자인 바카루아스라 했고, 눈매가 무섭게 올라가 사납게 보이는 자는 히로즈, 둥굴둥굴한 얼굴에 뺨에는 살이 도톰하게 올라와 부잣집 도련님 같이 생간 자는 웨스트니라 했다. 그리고 콧대가 쪽 서고 얼굴이 갸름한 자는 푸큐얀이라 했다. 대충 인사를 나눈 그들은 밤을 낮 삼아 길을 재촉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파르미나 고원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크리누스를 통과해서 볼든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훈족연합군은 크리누스에게 발이 묶였으므로 성을 크게 우회해서 멀리 돌아간 후 강에서 배를 타야했다. 날이 밝았다. 정체를 아는 이베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아이언오거가 가면을 벗었다. 나 의심스런 사람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니 더 이상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없었던 것. 끈을 풀고 철가면을 떼어내자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머리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여러 번 머리색을 바꾼 가운데 마지막으로 결정된 금발머리와 덥수룩하게 기른 턱수염이 그의 외모를 몰라보게 만들었다. 에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듯도 한 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디서 봤을까”“ 그의 정체를 궁리하던 그는 주변의 시선을 받고서야 생각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오”“ “당신도 두건을 벗어야죠.” “아, 이런.” 매일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만성이 되어서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가 두건을 벗자 이번에는 엘란과 이베까지 그를 자세히 살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단단해 보이는 턱이 인상적인 장년인이다. 이번에는 엘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트빌라이의 귀족이었다니 본 일이 없을 텐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꼭 본 것 같은 자였다. 에단과 엘란은 한 동안 서로의 정체를 상상하다 동시에 생각을 접었다. 에단은 용병대를 돌아다니다 한 번 본 것일 수 있다고 판단해 버렸고 엘란은 스트빌라이를 여행하는 동안 어디 시골영지에서 잠깐 스친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들은 잠깐 잠깐의 후식을 제외하고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만약 말이 지치지만 않았다면 잠도 말위에서 자며 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강으로 향하는 동안 계속해서 마주친 영주들의 증원군이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시간이 급박했다. 적들의 전력이 증강되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좁은 도로로 열을 지어 다가오는 병사들이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마주치는 증원군이었다. 가문을 알리는 깃발을 든 병사 뒤로 적당히 살집이 잡힌 지방영주가 그립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서라!” 이미 여러 번의 검문을 겪었던 일행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멈춰 서서 지방영주가 다가오도록 기다렸다. “무엇하는 놈들인데 전장근처에서 얼쩡거리느냐”“ “전장은 저 멀리 크리누스가 아니었습니까”“ 이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주 능청스런 태도였다. “저 야만인들과 더러운 배신자 놈들이 크리누스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스트빌라이 전 국토가 전장이다.” 영주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헤헤, 물론 그렇습죠.” 이베는 허리를 구십도로 꺾으며 비굴하게 웃었다. “다시 묻겠다. 무슨 일로 여기서 얼쩡거리느냐”“ “저희들은 상인입니다. 파르미나고원으로 가서 녹차를 살 예정입니다.” “녹차는 배로 거래되는 것이 아니었나”“ “큰 상인이야 그렇습죠, 하지만 저희같이 작은 보따리 상들에게는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저 다리품 팔아서 부지런히 다녀야 입에 풀칠이라도 합지요.” 침까지 튀겨가며 너스레를 떠는 이베는 정말로 상인 같아 보였다. “신분증”“ 영주의 옆으로 코가 납작하게 찌그러지고 눈매가 사나운 자가 튀어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이베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 밑에다 일골덴을 깔고. “이상 없습니다.” 꼼꼼히 살피는 척한 납작코가 신분증을 돌려준다. 마술사처럼 능란한 동작으로 돈을 왼손에 감춘 채. “아무 이상 없습니다.” 에단은 증원군을 지나치며 자신의 이상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저런 부패하고 무능한 지방영주들은 모조리 갈아 치워서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로 대체시킬 것이다. 엘란(115) 엘란이 별다른 언질도 주지 않고 떠난 다음날. 아에게를 위시한 아이언오거군단-엘란이 성벽 위에서 적들을 몰아붙인 이후,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용병들과 훈족들은 그들을 그렇게 일컬었다-열 명은 식량증발의 임무를 띠고 인근 마을로 파견되었다. 다른 용병들과 함께. 그것은 훈족도 마찬가지였는데 식량이 부족한 그들로서는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계획을 애초부터 세워두고 있었고, 거기다 더해 본국으로 보낼 식량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재수 없는 검이라는 하이론의 성화 덕에 검을 두고 온 아에게의 입은 퉁퉁 부어있었다. 잔뜩 골이 난 것이다. 하이론과 나란히 앉아 짐마차를 모는 그는 연신 투덜거렸다. “대장은 어디로 간 거요”“ “비밀 임무가 있다.” “나도 데리고 가지.” “헛소리 그만하고 마차나 잘 몰아.” “체, 이건 정말 체면 문제야. 당당한 아이언오거단의 부대장이 짐마차나 몰아야 하다니.” 아에게는 길을 온통 점령한 마차부대를 둘러보며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 스스로를 부대장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임명하지는 않았지만. “싸우지 않아도 되니 좋기만 하구만.” 하이론은 허리를 쭉 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다 불편한지 다시 몸을 바로 잡고는 아에게의 옆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아앗.” 고삐를 잡고 있던 아에게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요”“ 그가 목소리를 높일 때 하이론은 손에 쥔 흰 머리칼 대여섯 개를 눈앞에다 흔들었다. “““은 놈이 흰 머리가 왜 이렇게 많으냐”“ “에이, 무슨 소리에요” 내가 흰머리가 어디 있다고. 어랏”“ 거짓말 말라는 듯 짐짓 목청을 높이는 데 눈앞에 디밀어진 하이론의 손에는 분명히 흰머리 몇 가닥이 들려 있었다. “백부장님 머리 아니에요” 장난치는 거죠”“ “나한테 흰 머리가 어디 있냐”“ 하이론은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를 들이댔다. 변장을 위해 길게 기른 머리는 염색이 되어 있어서 흰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다. “어라!” 아에게는 확인을 하기 위해 귀밑머리에서 자신이 직접 뽑은 머리칼도 희게 나타나자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장가도 못 갔는데 벌써 늙는 거야 뭐야.” “너도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 하이론이 옆에서 염장을 질렀다. 아에게의 뒷 마차에는 짝귀와 밤톨이 타고 있었다. 검을 놓고 온 것이 못내 불안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누가 검을 훔쳐가지는 않았겠지”“ 짝귀가 입술을 핥았다. “감히 누가 우리 막사를 털겠어. 그래도 불안하니 빨리 일 끝내고 돌아가자.” 밤톨이 말했다. 100여 대의 마차는 한 시간 후, 카트라이트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무너진 성에는 그을린 자국들이 그득했고, 영지민들은 피난을 간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움직여라. 식량을 징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보카르트가 명령을 내렸다. 돌이나 나무등걸 같이 길을 막는 잡다한 것들을 치운 용병들은 성안으로 마차를 몰아 한 곳에다 세웠다. “식량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레나룻을 기른 용병이 쪼르르 달려와 보고했다. 확인차 가 본 영주의 식량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영주가 도망을 간 것인지 아니면 크리누스로 병력을 이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주와 병사들이 떠나자 주민들이 식량을 차지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도둑이 들었거나. “주민들을 끌어내라!” 보카르트는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젊은 적에는 조금 후 해야 하는 일을 즐긴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싫었다. 나이가 든 탓일지도. “어서 나와!” “끌어내” “악악!” 인기척이 전혀 없어서 유령마을을 방불케 하던 곳도 일일이 뒤지자 수많은 주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창대에 혹은 검집 째 두들겨 맞으며 나온 주민들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주민들은 피난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영지에 매인 몸이기도 하거니와 삶의 터전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도 없었던 탓이다. 기껏 떠나서 도시빈민가를 전전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고향이 나았던 것이다. 아에게는 불안한 눈길로 힐끔거리는 주민들을 보며 안심하라는 표시로 빙그레 웃었다. 그는 열심히 웃으며 우리는 나쁜 놈들이 아닙니다, 라는 뜻을 알렸다. 그러나 누구도 마주보고 웃어주는 자가 없었다. 보카르트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특별히 겁을 줄 목적으로 가지고 온 커다란 투핸드소드를 뽑아 들었다. “식량을 가져와라.” 가가각. 일갈을 터트린 그가 바닥을 그었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질린 얼굴로 눈치만 살피는 주민들을 향해 다시금 눈을 부라릴 때. 칠십 줄에 들어선 오종종한 늙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잔뜩 굽은 허리를 두들기며. “나으리, 영주님이 가족들과 부하들을 데리고 떠날 때 성을 무너뜨리고 식량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는 무너진 성과 온통 그을린 자국들을 가리켰다. “너무 많아서 가지고 가지 못한 식량은 불에 태워버려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좋은 말로 했더니 안 되겠군.” 터벅터벅 걸어간 보카르트가 양떼처럼 모여 있는 주민들 중에서 삐쩍 마른 청년을 끄집어 당겼다. 그리고는 목에다 투핸드소드를 가져다 댔다. 긴 검신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영주가 급히 떠나면서 모든 식량을 태웠다고 보지는 않는다. 너희들이 챙긴 식량이 분명히 있을 터. 가지고 와라.” 목을 파고든 검신에 핏방울이 맺혔다. “아이고, 기사님 하나 뿐인 자식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좁은 이마와 휘어진 코, 한 눈에 보기에도 삐쩍 마른 청년의 어미임이 분명한 여자가 보카르트의 발치에 매달렸다. 가뜩이나 주름진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보기 흉할 정도였다. 뻑. “헉.” 보카르트는 여자를 밀어내고 청년의 배를 갈겨 나뒹굴게 하고는 그의 머리를 밟았다. “식량을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 그의 눈짓을 받은 용병들이 검과 창을 꼬나들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나서려는 아에게의 소매를 하이론이 잡았다. “가만있어라.” “하지만......!” “이 철딱서니 없는 놈아! 전쟁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리고 용병은”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게 용병의 본 모습이고 전쟁의 본 모습이라고.” 그는 아에게의 고개를 당겨 자신의 눈에 맞추었다. 나직한 음성에는 박력이 넘쳐흘렀다. “식량이 없으면 굶을 텐가” 만약 그렇게 되면 배고픈 팔만 용병들이 무슨 짓을 하리라 생각하는 거냐”“ 용병대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전국에서 몰려든 용병들과 휘하에 포용된 영주군으로 맥클레이용병대의 병력은 어느새 팔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당연히 물자가 달렸고 식량도 부족했다. “전쟁의 낭만” 용병의 낭만” 이제 철이 들 때도 되었지 않느냐”“ 하이론은 그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보통 용병대라면 모두 죽여 버리고 약탈을 하거나 여자들에게 몹쓸 짓을 했겠지만 용병왕이 이끄는 용병대는 그러지 않을 거다.” 어린아이 훈계하듯 호되게 몰아치던 하이론은 방향을 바꿔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너무 한꺼번에 몰아치면 반발을 불러서 충고를 아니함 만 못하게 되는 수도 있었던 것이다. “왜요”“ “용병왕은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다. 자신의 다스려야할 땅의 주민들을 모두 죽여 버리거나 가혹하게 약탈을 하면 어떻게 되겠냐” 당연히 원성을 살 테고 다른 곳에서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일어설 거다. 아니면 주민들이 떠나거나. 이렇게 되면 건국을 하기도 힘들어지고 설혹 나라가 서더라도 곤란해진다. 너도 생각해 봐라 주민들이 모두 피난을 가버리면 농사는 누가 짓고 생산은 누가 하냐” 싸움질만 해대는 저런 용병놈들이 그런 일을 하겠느냐” 지금은 식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징발을 한다만 가급적 피를 보려고는 하지 않아. 지금은 주민들을 아낄 때야, 최소한 아끼는 척이라도 해야 할 시기인 거야. 그래서 이런 일에 보카르트 천부장이 파견된 거고 우리가 파견된 것이야.” “그럼 저들이 나라를 세우면 주민들을 아끼는 좋은 세상을 만들......” 하이론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에게의 말을 끊었다. “그건 아니다.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저 용병들이 논공행상을 통해 영지를 차지하겠지. 그래도 주민을 우대할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지금은 그런 척할 뿐이지. 그런 일은 나라가 선 다음에, 사회가 안정이 된 이후에나 할 일인 거다.” 퍽. 아에게와 하이론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기어이 피가 흘렀다. 용병 중 하나가 엉기는 주민을 베어 버린 것이다. “게일!” 후줄근한 장년인 하나가 목 없는 시신을 붙잡고 통곡했다. 그는 곧 시체를 버려두고 바닥에 널린 돌을 집어 들었다. 핏발선 눈에 원독이 서렸다. “이 놈!” 서걱. 팔을 베어버린 용병의 검이 다시 돌아와 장년인의 목을 쳤다. 따뜻한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보카르트는 하이론 말마따나 최대한 반발을 줄이면서 식량을 얻어야 했다. 목이 바닥을 굴러 주민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리는 이 때가 유인책을 제시할 때였다. “너희들도 살아야 할 테니, 반만 가져가겠다. 그리고 그것도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다 돌려줄 것이니 무의미한 반항은 하지 마라.”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제안이었다. 아무리 칼로 위협하더라도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식량을 내놓지 않는 법이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는데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저 용병들은 그래도 신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영주가 급히 떠나면서 흘린 식량을 챙겨 두었으니 반을 준다 해도 살아갈 수는 있었다. 굶주리기야 하겠지만. “알겠습니다.” 노인은 굽을 허리를 깊숙이 구부렸다. 그의 아미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자루를 들고 나오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식량의 반은 지켰고,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적개심어린 눈빛을 숨기지는 못했다. 아에게는 자루를 마차에 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몬스터를 퇴치해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아름다운 처자들이 보내는 선망의 눈초리와 아이들의 경탄성을 받는 모습. 자신이 원한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들을 죽이고 식량을 뺏으며 원망과 질시를 받는 이런 일은 아니었다. 절대로. * * * 이른 바 강도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철가면 일행은 사일 후 파르미나고원의 초입에 해당하는 쿠즈마노행 배를 탈 수 있었다. 선미가 날렵하게 빠진 두대박이 배였는데 전쟁을 피하려는 자들과 상인들, 그리고 그들의 고용인들로 배는 만원이었다. 배를 타고난 후의 여정은 대체로 평탄했다. 배를 탄 첫날부터 사나워 보이는 히로즈가 생긴 것과 다르게 멀미를 한 것을 제외한다면. 배는 정확히 삼일 후 정오 무렵에 쿠즈마노에 닿았다. 스노우를 관통하는 빌로린강과 크리누스의 뒤를 흐르는 볼든강이 갈라지는 수상교통의 요지로 파르미나고원의 특산물이 집결하는 곳이었다. 멀미 때문에 몰라보게 핼쑥해진 히로즈가 늦게 도착하고도 선착장을 먼저 차지한 배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왜 저 배에 탄자들을 먼저 하선시키는 거요”“ 널빤지를 들고 접안하기를 기다리던 선원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와인기사들의 뱁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귀족들을 먼저 하선시키는 게 당연하잖아요.” “쳇! 귀족나으리들이셨구만.” 가뜩이나 속이 좋지 않은 히로즈는 누런 가래침을 강에다 뱉었다. “와인기사가 뭐요”“ 바카루아스가 물었다. “고원에서 가장 유명한 생산품은 말, 녹차, 그리고 포도주요. 포도주를 생산하는 영주와 그 휘하 기사들을 따로 와인기사라고 합니다.” 에단이 대답했다. “와인기사라...... 상당히 운치 있는 말이구만.” 포도주를 운송하기도 하고 귀족들을 수송하기도 하는 화물선 겸 여객선에서 한 무더기의 승객들이 내렸다.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두 가닥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자였는데 작달막한 키에도 불구하고 제법 긴 망토를 둘러서 바닥을 쓸고 다니는 자였다. 그 뒤를 호위하듯 따르는 자는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장한 둘이었고 그 장한의 뒤로도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는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따르고 있었다. “전쟁터에나 어울릴 자들이로군.”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하선하는 자들을 지켜보던 이베의 평이었다. 에단은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아버지에게 내쳐지기 전, 롬바르드에서 살 때 자주 보던 철혈기사들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강한 자로군요.” 엘란이 조용히 뇌까리자 이베의 고개가 급격하게 돌았다. 십존의 일인, 광술사가 강하다고 할 정도면 보통내기가 아닐 터.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장 앞에 선자.” 이제는 멀어지고 뒷사람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자를 고개를 쑥 빼 쳐다본 에단은 장난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저 콧수염 기른 작달막한 자를 말하는 거요”“ “그렇소.”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 푸쿠얀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아이언오거의 정체를 모르는 일행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뭐, 다시 만날 일도 없는데 누가 강한지 알아서 뭐 하겠소.” 체이스의 은밀한 부탁을 받고 철가면을 감시할 목적으로 따라온 러츠가 난간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한 참을 더 기다려서야 겨우 하선한 일행들은 말을 사는 즉시 길을 떠났다. 파르미나고원의 말들은 명성 그대로 대단히 빨랐다. 지구력이 약한 흠이 있으나 일정이 촉박한 자들에게는 안성맞춤인 말이었다. 특히나 이베가 사람 수의 세배를 사는 바람에 지구력의 부족을 갈아타는 것으로 메울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밀려 왔다. 그래도 일행들은 쉬지 않았다. 달이 뜨고 별이 떴다. 그리고 그 달과 별이 스러질 때까지도 일행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광견병이 걸린 개처럼 허연 거품을 문 말들이 쓰러질 때에야 그들을 멈춰 섰다. 해가 뜬 이후의 일이었다. 아이언오거가 죽은 말들을 숲 속으로 치우자 살아남은 말들을 묶은 이베가 말했다. “이제 산길을 타야하니 말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밤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이베는 손가락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올 때까지 푹 쉬십시오.” * * * 코티즈는 파르미나고원산 와인 중에서도 최고급 명품으로 꼽히는 레종꾸드락을 쭉 들이켰다. 연서(戀書)라면 연서랄 수도 있고 이별의 서신이면 이별의 서신일수도 있는 쪽지를 왼손에 든 채로.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 게 벌써 두 달째군요.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만 상황이 저희를 갈라놓는 군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과묵한 그대의 연인, 릴리가.> 간략한, 정말 간략한 네 줄짜리 서신이었는데 과묵한 이라는 단어가 특히 인상 깊었다. 만약을 대비해 대필을 시킨 것이 분명한 삐뚤삐뚤한 글씨체에 가명을 서명한 것도 물론 다른 자일 터. “입을 다물라는 말이로군. 물론 입을 다물어야지. 감히 그대의 남편을 건드릴 담량이 나한테는 없으니까.” 데이지후작부인의 당부가 없더라도 당연히 입을 다물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서신을 잃고 레종꾸드락을 잔에다 부었다. 살맛이 났다. 정말 살맛이 났다. 대륙 최고의 검사로 꼽히는 루카스레인후작의 아들이 바로 자신의 씨였다. 스트빌라이 최고의 권력가가 자신의 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십존의 부인이 자신의 밑에 깔려 신음을 흘리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짜릿한 기분이 든다.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잔을 들어 코를 가져다 대자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감돌았다. 눈으로 마시고 코로 마시고 혀를 밀어 넣어 맛을 보고는 잔을 눈 위로 들어 올렸다. “그대와 나의 자식을 위해.”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신 그는 난로의 뚜껑을 열고 서신을 넣어버렸다. 편지는 금세 타버려 재로 변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포도주까지 마셔버린 그는 장부를 꺼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요즘은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스트빌라이와 조국 간의 긴장으로 칸토나상회의 스노우지부는 활동중단에 들어간 가운데 좌천의 성격으로 가레트광산에 파견된 그는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리고 있었다. 뇌물을 포장할 목적으로 사들인 가레트광산에서 대량의 미스릴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것도 양질의 미스릴이.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파낼 만큼 파내서 이제는 폐광할 일만 남은 철광석광산에서 미스릴이 나오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는 은밀하게 마법사들과 기술자를 불러들여 미스릴을 제련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신을 밀어낸 칸토나에 대한 복수로 그는 미스릴을 꿀꺽할 생각이었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칸토나상회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다 자신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은 쌍으로 오고 화는 겹쳐서 온다더니.” 그는 장부의 숫자를 일일이 대조하며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감사를 오더라도 미스릴이 나온 사실을 알 수는 없으리라. * * * 산등성이를 넘은 이베는 아래를 가리켰다. “저 광산입니다. 원래는 철광산이었는데, 요 근래 많은 미스릴을 파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곳입니다.” “내려가죠.” 에단이 말을 받았다. * * * 쾅! 난데없는 폭음이 알싸하게 술이 올라 꾸벅거리는 코티즈의 귀를 때렸다. 놀라서 벌떡 일어선 그가 잘 사용하지도 못하는 소드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려는 의도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음성에서 공포가 묻어났다. 누가 쳐들어 왔는지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올 사람들은 뻔했다. 자신이 딴 주머니 찬 것을 알아차린 칸토나가 하수인을 보낸 것이리라. 칸토나백작! 힘이 있는 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무골호인이었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였다. 그는 보았었다. 돈을 빼돌린 자를 그가 어떻게 대우하는 지를. 땅을 파고 독을 묻은 후 독에다 소금물을 붓고 회를 뜨는 것처럼 피부를 한 점 한 점 벗긴 횡령범을 그대로 빠뜨렸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마법사에게 치료를 시킨 때문에 독에 빠진 자는 고통에 시달리며 일주일을 버티고 죽었다. 코티즈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벌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검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자살할 목적으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왜 미스릴을 빼돌릴 생각을 했는지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소드마스터의 부인을 건드리다보니 간이 부었나 보다. “아.” 그의 입에서 실낱같은 비명이 세어 나왔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벽을 부수고 들어온 괴한들이 폭음에 놀라 뛰쳐나온 자들을 마구 죽이고 있었다. 호위병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무기를 휘두를 사이도 없이 죽어나갔다. 제련을 도울 목적으로 고용한 마법사들도 파이어 볼 한 번 시원하게 날리지 못하고 목을 떨구었다. 숫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코티즈의 귀로 끊임없이 비명이 들렸다. 으슬으슬 추워진 그는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잠깐 동안 멈칫거리던 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옷을 벗으며 갱도로 달려간 그는 인부들의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광산 깊숙이 들어갔다. 백년동안 이리저리 파내려간 광산에는 수백 개의 갱도가 개미굴처럼 뚫려 있으니 운 좋으면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발 눈에 뜨지 않기를. 그는 빌고 또 빌었다. 산의 중턱에 위치한 광산을 향해 내려가던 이베는 황당한 시선을 던졌다. “뭐야! 선수를 치는 놈들이 있잖아!” “세상이 어수선하다보니 강도들이 날뛰는구만.” 부잣집 도련님 같은 웨스트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도 강도잖아”“ 푸쿠얀이 말했다. “우린 강도가 아니다.” 히로즈도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뭔데”“ “산적이지.” 얼떨떨한 기분이 든 이들이 하릴없이 너스레를 떨며 내려오는 동안 광산의 인부들을 대충 정리한 침입자들이 갱도로 몰려가고 있었다. “강도가 아닙니다.” 아이언오거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오”“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에단이 물었다. “이미 본 자들입니다.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절대 강도는 아닐 겁니다.” “이미 본 자라면”“ 이베는 광술사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배에서 내리던 자들. 콧수염을 기른 작달막한 사나이와 그를 따르던 청장년들입니다.” 보름달이 뜬 밤. 일행들은 볼 수 없었지만 이목이 발달한 엘란의 눈에는 호위병과 마법사를 간단히 죽이던 자들의 모습이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똑똑하게 보였다. “그들이 왜”“ 에단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히 기사들로 보이던 자들이 어째서 자국민을 이렇듯 무자비하게 죽인단 말인가” 그것도 광산에서. 광산의 주인은 분명히 귀족일 텐데. ** 콧수염을 기른 작달막한 사내는 망토를 벗어던지며 이죽거렸다. “쥐새끼 같은 놈. 빠르기도 빠르군.” 그는 옷을 벗으며 광산 안으로 사라지는 코티즈의 등에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귀찮게 되었군요.” 그의 뒤를 따르던 장한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상당히 귀찮게 되어 버렸다. 오래된 광산은 광맥을 따라 파내려가다 보면 보통 미로처럼 꼬이기 마련이다. 입구를 틀어막고 있으면 배가 고파서라도 기어 나오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코티즈는 오판하고 있었다. 시간만 보내면 저들이 물러갈 줄 알았지만 이들은 성과 없이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설사 일년이 걸리더라도. 코티즈를 쫓는 자들이 갱내로 들어가자 엘란 일행은 가레트광산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미스릴만 가지고 가면......”“ 명령을 내리던 이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말을 멈추었다. 왜 저들은 굳이 광산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미스릴은 창고에 있을 텐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에단이 자신의 판단을 밝혔다. “아이언오거의 말대로 저들이 선착장에서 본 그자들이라면 미스릴을 노리고 온 게 아닐 지도 모르오. 인부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걸로 봐서 다른 목적이 있을 거요.”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호기심을 느끼던 이베는 생각을 접었다. 자신들은 미스릴만 가지고 가면 된다. 시간도 없는데 호기심을 충족한다고 얼쩡거릴 수는 없는 것이다. “빨리 움직입시다.” 산중턱의 작은 공터에 위치한 광산은 투박한 통나무집이 여기저기 솟아 있었고 잡다한 도구들이 난잡하게 널려있었다. 시체들과 함께. 일행들은 창고로 보이는 건물부터 꼼꼼히 뒤져나갔다. 그러나 철광석만 발견할 수 있었을 뿐 미스릴은 부스러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히로즈가 물었다. “정보가 잘못될 리는 없을 텐데......설마 미스릴을 광산 안에다!” 이베가 중얼거렸다. “그럼 앞뒤가 맞는군. 강도들이 광산 안으로 들어간 것도 다 그 때문이고.” 에단이 말을 받았다. “우리도 들어갑시다.” 아이언오거가 겅중겅중 걸어 나갔다. “헉헉!” 코티즈는 발바닥에 땀이 맺히도록 뛰고 또 뛰었다. 조금만 멈칫거려도 칸토나의 하수인들이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한 참이 지난 후 겨우 공포를 떨쳐낸 그는 난감한 듯 주저앉아 버렸다. 마구잡이로 달리다 보니 여기가 어딘지 감도 잡을 수 없었던 데다 숨어있겠다면서 식량 같은 필수품들을 하나도 가지고 들어오지 않은 때문이다. 목이 바짝바짝 말라오는 데도 입을 축일 물조차 없었다. 그는 조용히 움직여 벽에 등을 가져다 댔다. 싸늘한 감각이 정신을 일깨웠다. “어떻게 알았을까”“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마법사를 구하는 바람에 얘기가 흘러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인부 중에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있었던 것일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칸토나를 대면하는 일이었는데 절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피윳. 박쥐 한 마리가 날아가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으악!” 다시금 공포가 그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헛바람을 들이킨 그가 입을 움켜잡았지만 비명소리는 갱도 안을 웅웅 울리며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들었을까” 아냐 그럴 리 없어.” 미로같이 뚫린 굴에서 메아리처럼 울려대는 소리를 정확히 파악해서 찾아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러나....... “겨우 도망친 곳이 여기인가”“ 음산한, 마계의 마물이 을러대는 것처럼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사정없이 움켜잡았다. **** 다음 회까지가 7권 분량입니다. 오늘 밤부터 조금씩 삭제하겠습니다. 코티즈와 후작부인에 관한 예기는 연재에는 나오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깜빡하고 빼먹었지요. 윗글을 보시면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죠. 을 펼쳐 보지도 못했는데.......” -------------------------------------------------- 엘란117-137[8권].txt 엘란(117) 지하의 괴물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데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자 오랜만에 슈리엘을 불러낸 엘란은 밑으로,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저세계는 짙은 어둠에 안겨 그의 뛰어난 안력으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산전체가 뻥 뚫린 것처럼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은 나오지 않았고 황량한 느낌만이 가슴을 채웠다. “라이트!” 광구를 만든 엘란은 아래를 향해 빛의 구를 보냈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며 내려가자 추락하는 코티즈가 보였다. “실피드.” 바람의 정령이 나타나 코티즈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순간, 어둠을 가르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후작가의 집사 갤리스는 두 손에 들고 있던, 파란색 광구를 떨어지는 기세까지 실어 힘껏 뿌렸다. 같은 방향으로 쏘아지다 약간씩 방향을 틀어버린 두 개의 청구가 코티즈와 엘란을 노리고 빛살처럼 날아든다. 코티즈의 기척을 느끼는 순간, 슈리엘을 돌려보내고 실피드와 카사를 소환한 엘란은 실피드로 활대를 만들고 카사로 화살을 만들어 날아오는 청구를 겨냥했다. 그리고 집사를 향해 쏘아 보냈다. 늦게 출발한 화살이 청구보다 빨랐다. “실드!” 실드가 집사를 보호하는 순간 카사가 보호막을 때렸다. 즉시 폭음이 터지고 지하가 실로 오랜만에 소란스러워졌다. 카사를 쏘아 보낸 활은 즉시 변화를 시작, 방패처럼 엘란의 앞을 막아섰다. 푸른색 광구는 실피드에 부딪쳐 일 미터까지 파고들더니 뒤로 튕겨져 나갔다. 엘란과 집사의 시선이 동시에 코티즈를 향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엘란의 광구와 코티즈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낸 집사의 광구가 그를 비추자 애처로울 정도로 창백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인생의 절정에서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충격과 공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광구(光球)가 청구(靑球)를 막아서는 순간 드디어 바닥이 드러났다. 말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기능 이상을 하지 못하는 광구는 청구와 마주치는 순간 쉽게 흩어졌다. 길쭉하게 늘어난 실피드의 끝단이 광구를 견제하느라 코티즈를 바닥에 거칠게 내려놓는 순간 윗부분을 청구가 때렸다. 엘란을 막아선 실피드가 부드럽게 감싸 안아서 튕겨냈다면 코티즈를 내려놓은 실피드는 힘으로 맞섰다. 정령사와의 거리도 멀었고 코티즈를 내려놓느라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탓이다. 또 다시 지하가 소란스러워진 후 정적이 찾아왔다. 엘란은 공격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청구를 부숴버린 실피드를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대단한 정령사군.” 집사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강도를 자처하는 저 자는 중급정령을 아주 매끄럽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놀랄 정도로. “당신이야 말로 대단한 마법사요.” “계속 방해할 건가”” “전에도 말했듯이 난 코티즈에게서 미스릴의 행방만 알아내면 끝이오. 그 이후 당신이 저자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상관하지 않겠소.” “미스릴”” 집사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모르고 있었소” 요 근래 엄청난 규모의 미스릴을 파냈다고 하던데.” 집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청난 양의 미스릴 이라면 저 정도의 인물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좋소. 당신 말을 믿겠소.” 둘 사이에서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엘란이 그를 족쳐서 미스릴의 행방을 토설시키면 집사가 그를 처리하기로. 집사갤리스는 즉시 광구를 만들어냈고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바닥에 내려섰다. 둘 모두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사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바닥에 내려놓았던 코티즈의 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트!” 엘란도 광구를 만들어내며 바닥을 쓸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도망을 갔다는 말일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집사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더라도 그의 행적을 놓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집사가 광구를 만들어낼 때까지 사방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처음 온 지하세계에서 빛의 인도도 없이 도망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건!”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건축물! 암흑에 휩싸인 지저세계에 인공적인 손길이 닿아 있었다. 비록 낡고 퇴락해서 폐허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무너져가는 건물들은 보통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엘리오트의 수도 롬바르드나 스트빌라이의 수도 스노우도 이곳에 비한다면 천박하게 보일 정도로 지하세계의 건물들은 격조 높아 보였다. 집사의 눈도 휘둥그러졌다. 레인후작가가 소유하고 있던 광산에 난데없이 미스릴이 채굴되더니 지하에는 이런 고색창연한 건축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를 찾으면 당신에게 데려다 주겠소.” 그가 말했다. 자신이 먼저 찾으면 미스릴의 행방을 물을 수 있도록 데려다 주겠으니 당신도 그를 찾거든 자신에게 데려다 달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리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엘란은 순순히 응낙했다. 원래는 튼튼하게 포장되어 있었음이 분명한, 그러나 지금은 온통 파헤쳐진 길을 따라 집사가 움직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에서 주인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집사의 의지가 느껴졌다. 엘란이 잘못 느낀 걸 수도 있지만. 그때 엘란과 집사의 일행들은 온 광산을 뒤져서 밧줄을 구했다. 그리고는 둘러앉아 밧줄을 묶었다. “좀 짧은 것 같지 않습니까?” 웨스트니가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그런 것 같소. 구멍이 원체 깊어서.” 바카루아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슬쩍 이베의 옆구리를 찔렀다. 건너편을 곁눈질 하면서. 구멍의 반대편에는 집사일행이 둘러앉아, 밧줄을 묶어 길이를 늘이고 있었다. 이베는 그들이 줄을 모두 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말을 건넸다. “줄이 짧지 않소?” 그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모두 들었던 히키는 불편한 감정을 가까스로 접었다. 일단 임무가 우선이었다. 그와 이베 사이에서 엘란과 집사가 나눴던 것과 비슷한 얘기가 오고 갔고 곧 약속이 이루어졌다. 일단 이베가 코티즈를 심문하고 그 이후에 히키가 목숨을 갖기로. 잠시 후 줄이 늘어뜨려졌다. 그때 엘란이 구멍 속에서 올라왔다. “으악!” 구멍 속에 머리를 디밀고 있던 히로즈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밧줄을 본 엘란은 이베의 생각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모습을 감춘 코티즈와 집사와의 합의를 이야기 하고 이후의 대책을 물었다. “일단은 내려가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베가 자신의 뜻을 의문형으로 완곡하게 밝혔다.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에단이 말문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 합시다. 일단 내려가서 하루 정도만 그를 찾아보고 찾지 못하면 올라와서 광산을 뒤져 봅시다. 광산을 뒤지는 시간도 하루 이상은 곤란합니다. 못 찾으면 다른 광산을 둘러보고 즉시 떠납시다.” 그의 말대로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쟁 중에 무한정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엘란으로서도 두고 온 동료들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모닝스타를 둘러맨 러츠가 가장 먼저 줄을 타고 내려갔다. 그 다음은 히키였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베측에서 한 명이 줄을 타면 집사 측에서 한 명이 줄에 매달렸다. 그리고 줄을 사이에 두고 엘란과 바카루아스가 그들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조를 맞춰 내려갔다. 그들은 10미터 간격을 두고 줄줄이 줄에 매달렸다. 만약을 대비해 한두 명이 위에서 남을 예정이었으나 줄이 끊어져도 엘란과 집사, 그리고 바카루아스가 한두 명씩 안고 올라가면 되므로 모두 내려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결정된 것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포도주를 스노우로 수송하고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괴상한 일에 휘말린 와인기사 티토우즈는 기분 나쁜 예감에 전율하고 있었다. 황실친위대의 명이라 거절할 수도 없었고, 그들에게 잘 보이는 일이기도 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나선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었다. 광산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그렇고, 위에서 보면 꼭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는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랬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떠는 그 어벙한 놈이 그렇게나 중요한 놈이란 말인가? 또 그 죽일 놈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겁나는 곳으로 뛰어든 것이란 말인가? 그때 구멍위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저 놈이 후작부인과 사통했다고 했던가? 이런! 젠장.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추워졌다. 집사와 친위대 기사들이 하는 짓을 보아하니 코티즈를 반드시 죽이려는 모양이고 그런 모습에서 후작의 명예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목숨은? 저들이 우리 와인기사들을 살려주려 할 까? 젠장. 다시금 욕설이 치밀고 심사가 복잡해졌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어디 도망갈 데도 없고 설사 도망간다 하더라도 영지까지 찾아들 것 같았다. 방법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잘 보여서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체면 때문에 말은 못하지만 무서워하는 와인기사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밧줄을 마치 생명선처럼 꼭 붙들고 내려가는 푸칙도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구멍을 내려가자니 저절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리고 다리가 꼬이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러기를 일 분여, 아차 하는 순간에 손이 미끄러지고 심연 같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밑에 내려가는 웨스트니의 머리를 쳐버리고. 줄을 잘못 선 바람에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웨스트니도 푸칙과 같이 추락했다. 긴 비명을 지르며. 턱. 마구잡이로 사지를 휘두르며 떨어지는 푸칙의 덜미를 엘란이 낚아챘다. 엘란이 덜미를 당기자 푸칙은 떨어지는 힘 때문에 옷이 꽉 조여 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엘란은 웨스트니의 덜미마저 잡아챘다. 엘란은 둘의 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덜미를 잡힌 둘은 목이 꽉 조여 와 비명도 못 질렸고 숨이 턱턱 막혀 양손으로 목을 쥐고 버둥거렸다. 엘란은 그렇게 잡고 있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해서 그냥 계속 잡고 있었다. 물론 둘은 죽을 맛이었지만. 엘란이 추락하는 둘을 여유 있게 구해주고 옆에서 바카루아스까지 따라붙자 나머지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단련되어 있던 자들이었으니 마음이 안정되자 줄 타는 것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속도도 빨라졌다. 그들은 그렇게 40분을 더 내려와 드디어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일단 내려서자 모두들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매일 밟고 다니던 땅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바카루아스가 광구를 앞으로 죽 밀었다. 앉아서 호흡을 돌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광구를 쫓았고 서서히 드러나는 주변의 풍경을 보고는 눈을 떼지 못했다. 적어도 3톤은 나갈 것 같은 기둥들이 열을 지어 받치고 있는 석조 건물들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부조가 조각된 담벼락들. 그리고 금이 가고 무너진 집들과 파헤쳐진 도로. 광구에 의해 드러나는 전경들은 신들의 작품 같은 극치의 아름다움과 한순간 무너져 버린 낙원의 슬픔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갑시다.” 에단이 바카루아스의 어깨를 살짝 두들겼다. “아, 예.”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 화들짝 놀란 마법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바카루아스와 에단이 앞장을 서자 나머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쫓았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게 파인데다가 무너진 기둥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서 다니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주변의 어둠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갤리스님!” 히키가 집사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 임무의 주재자인 그가 있어야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울려 이 불편한 상황에 대한 책임도 떠넘기고 싶었다. “갤리스님!” 다시 이름을 불렀으나 조약돌을 삼킨 바다처럼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점점 불안이 몰려오며 코에 땀이 맺혔다. 그러는 사이 양 쪽의 사람들은 거대한, 마차 다섯 대가 동시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이 거대한 아치형 문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만든 것인지 두 개의 휘어진 돌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디밀고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조각된 드래곤들이 서로의 입을 물고 있었다.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망가진 다른 건축물처럼 부서져 없어진 것인지 그 아치형 문에는 대문이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런 모양이 불안한 느낌을 주어 안으로 들어가기 꺼려지게 만들었다. “드......들어갈까요?” 선두의 바카루아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들어가야죠.” 에단이 대답했다. 그런 그도 못내 들어가기 싫은 듯 발걸음을 떼지는 못한다. 그 때. 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섬광이 번쩍거렸다. “갤리스님.” 히키는 어려운 일이 닥쳐 쩔쩔 매고 있던 아이가 엄마를 본 것처럼 반가워했다. 히키가 뒤를 돌아 뛰자 다른 이들도 모두 그를 따라 뛰었다. 엘란만을 남겨두고. 문 앞에 선 그는 머뭇머뭇 거렸다. 딱히 꼬집어 말하기 힘든 어떤 존재가 그를 안으로 들어가라고 충동질 하고 있었다. 자신의 육감이 떠다미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존재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한 발 걸친 그가 표정을 굳히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시키는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뭔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원하는 데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결연히 외친 그가 확연히 멀어진 일행을 향해 달렸다. 그는 먼저 출발한 사람들을 금세 따라잡았다. 무너진 담을 통과해 뛰자 옛날에는 아름다웠을, 그러나 이제는 폐허가 된 장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집채만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아울려 양 손에서 두 개의 빛 덩이를 번갈아가며 뿌려대고 있는 갤리스도. 펑. 상부를 얻어맞은 존재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청색을 뿌리는 빛의 구가 미지의 존재를 때리는 순간 어둠이 물러나고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니 그것은 털이 성성이 돋아난 6미터도 넘는 괴물이었다. 앞서 보았던 아치형 문같이 안쪽으로 휘어진 두 개의 뿔이 돋아난 머리는 억센 털로 뒤덮여 있고, 물집이 뜨문뜨문 잡혀있는 이마는 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자는 노란 빛을 뿜어댔고 간혹 흰자만 드러낸 채 희번덕거렸다. 코는 거의 존재감이 없어서 두개의 뻐끔한 구멍만이 코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은 멧돼지의 엄니처럼 길게 앞으로 뻗친 송곳니였는데 일견하기에도 위험해 보여 걸리기만 하면 뭐든지 찢어댈 것 같았다. 괴물 같아 보이는, 아니 괴물은 미욱해 보이는 외모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날랬으며 상대하기 어렵도록 교활하기 까지 했다. 거기다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동반하는 베틀엑스와 상체를 완전히 가리고 있는 두터운 갑옷은 이것이 지성체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섯 괴물과 싸우면서 겨우 하나를 처치한 집사가 탁한 고함을 질렀다. “헉...... 헉...... 구경만 할 거냐!” 그제서야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들이 꺼림칙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카사!” 어둠을 떨치며 일어선 독수리가 탐색의 뜻으로 괴물의 가슴을 때렸다. 펑. 뒤로 나뒹군 괴물은 금세 일어서서 포악한 함성을 질렀다. “끼아악!” “좋은 갑옷이군.” 실력이 변변치 못한 데다 싸움에 가담할 뜻도 없었던 에단은 뒤로 물러나 대결을 구경했다. 간혹 비평을 해가며. 티토우즈, 푸칙, 그리고 또 다른 와인기사 둘은 하나의 괴물에 들러붙었다. 하지만 괴물을 죽이기는커녕 이리저리 휘둘리며 연신 죽을 고비를 맞아야 했다. 힘도 대단한데다 스피드까지 갖추자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신장이 원체 차이가 나다보니 가장 공격하게 편한 곳이 다리였는데 찔러도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자신들은 한 대만 맞아도 황천행은 예약해 놓은 것이라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푸칙은 괴물의 뒤로 돌아가 오금 깊숙이 검을 박았다. 검을 반이나 쑤셔 박자 괴물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뒤로 넘어졌다. 그것이 그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키 6미터 너비 1미터 50의 거체가 무너지자 빠른 시간 안에 물러설 수가 없었던 것. “억.” 그는 괴물의 팔에 깔려버렸다. 원체 크다 보니 팔에 깔려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캉. 넘어진 괴물의 심장부위를 노리던 티토우즈는 팔을 쥐고 물러섰다. 에단의 말마따나 끝내주는 갑옷이었다. 눈을 노리고 다가가던 기사의 다리가 괴물의 팔에 잡혔다. 괴물은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팔을 휘휘 젖더니 옆으로 던져 쳐 박아 버렸다. 머리가 쳐 박은 기사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퍽. 허리를 들어올리고 두 팔을 뒤로 돌려 땅을 짚는 김에 푸칙의 머리를 터트려버린 괴물은 가볍게 땅을 쳐 그 반동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춤주춤 물러서는 기사의 머리를 잡아 댕겼다. 티토우즈는 목이 뽑혀 척수까지 딸려 올라가는 와인기사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엘란은 실피드까지 불러내서 카사로 상체를 잡고 바람의 정령으로 자신이 상대하는 괴물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니들이 이 문명을 파괴한 것이냐?” 뿌드득거리며 목이 돌아간 괴물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뿌린 씨, 내가 거둘 수도 있는 것이지.” 베틀엑스를 내려놓은 괴물은 돌아간 머리를 잡고 천천히 돌려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 순간 싸움은 멈추어졌다. 암흑천지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흉악한 외모에 놀라 반사적으로 공격에 나선 집사는 억울한 심정에 빠졌다. 진즉 말을 걸어 볼 것을. 엘란(118) “당신들이 이 곳을 건설했다는 것인가?” 엘란이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물었다. “그렇다.” 괴물이 대답하자 이베가 검을 늘어뜨리며 나섰다. “당신들이 이곳을 건설했던 아니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하나만 물어봅시다. 가장 먼저 내려온 자를 당신들이 잡아갔소?” 괴물은 반이나 돌아갔던 머리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목을 주물렀다. “그래서?” “만일 당신들이 잡아갔다면 돌려줬으면 하는데.” “싫다면?” 괴물이 반문했다. 집사가 가만히 서서 괴물의 대답을 음미해보니 그 속에는 코티즈를 자신들이 잡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그가 말했다. “계속 데리고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소만 그의 목숨은 꼭 거둬들였으면 하는데. 그 큼직한 손으로 목을 비틀어 버리던 가 아니면 그 도끼로 콱.” 그가 왼손을 아래에 받친 후 그 위를 오른손으로 탁 내려쳐 머리를 잘라버리는 시늉을 하자 에단이 끼어들어 토를 달았다. “죽이기 전에 몇 가지 좀 물어보게 해 주시오.” 괴물은 갑옷이 깨어진 채 상체가 온통 함몰되어 죽은 동료를 가리켰다.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이 꼴로 만들어놓고서는 그런 요구가 가당키나 한가?” “싫으면 말고.” 눈 깜빡할 새에 팔짱을 푼 집사가 빛의 구를 뿌렸다. 목이 돌아갔던 괴물은 옆에서 날아온 청구를 맞고 관자놀이가 터져 버렸다. 그 괴물의 죽음을 시작으로 주변은 다시 열전으로 돌입했고 전의를 상실한 티토우즈를 대신해 이베가 바카루아스와 함께 하나를 떠맡았다. 이베의 등 뒤에 숨은 바카루아스가 먼저 광구를 날렸다. 광구. 집사의 것과는 다르게 빛을 내는 것이 다였지만 어둠 속에서만 생활한 괴물들에게는 충분히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닫는 순간 발을 굴러 뛰어오른 이베의 검이 괴물의 목에 틀어 박혔다. 너무나 쉬운 승리에 도취된 바카루아스가 다른 괴물의 눈에 광구를 들이댔다. 하지만 더 이상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괴물의 적응력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대단해서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적응을 해서는 눈이 부신 척 연기를 하며 똑 같은 공격패턴을 보인 이베의 검을 낚아채 버렸다. 휭. 베틀엑스가 이베의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훑었다. 재빨리 검을 놓고 물러난 덕에 옆구리가 찢겨지는 것에 그쳤지 자칫 했으면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집사는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림으로써 싸움을 붙였지만 더는 손을 쓸 생각이 없는지 뒤로 물러나 버렸다. 자신의 수하만 계속해서 죽고 있는 것이 못마땅해서였다. 어차피 나중에 다 죽여야 할 자들이지만 코티즈가 잡히지 않은 이상 아직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엘란은 카사를 길게 늘어뜨려 창처럼 만들어서는 중간을 움켜잡았다. 창, 창. 그는 왼팔을 당기고 오른쪽 팔을 쭉 뻗어 떨어지는 베틀엑스를 창대로 후려쳐서 기세를 죽이고, 팔을 반대로 움직여 왼쪽 창대로 한 번 더 후려쳤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며 사방팔방으로 카사를 휘둘렀다. 그것은 괴물도 마찬가지여서 베틀엑스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가 다시 옆으로 후려치고 창이 불쑥 끼어들면 사선으로 베어왔다. 챙, 챙, 챙. 요란한 소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엘란은 보폭을 넓게 해 앞으로 뛰며 오른손으로 창대를 훑듯이 당기며 왼손을 죽 밀었다. 디밀어진 창에서 불길이 솟았다. 괴물은 베틀엑스를 살짝 돌려 날의 옆면으로 창을 막았다. 그 때 도끼의 옆면을 때린 카사가 모습을 변형, 날의 양 옆으로 퍼져서 날개로 괴물의 목을 베어버렸다. 쿵 쿵. 집채 쓰러지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엘란이 하나를 처치하는 동안, 옆구리에 상처를 입어서 뒤로 빠진 이베의 자리를 대신한 훈족전사와 러츠가 나머지 하나를 처치한 것이다. “흩어져서 찾을까?” 괴물들을 모두 처치하자 에단이 말했다. 히로즈는 혼자만 벌줌이 서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싸움을 구경하던 그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나는 당신과는 같이 다니고 싶지 않소.” “나도 그렇소.” 푸쿠얀이 동감을 표시했다. “이런, 이런, 완전히 찍힌 모양이군.” 에단이 얄밉게 웃었다. “갑시다.” 엘란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어디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던 집사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엘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집사는 가장 먼저 내달렸다. “우리도 갑시다.” 엘란이 그들을 쫓아 달렸다. 그를 알고 있는 이베가 말없이 뒤를 따르자 허둥거리던 히키와 와인기사들도 뒤를 쫓았고 훈족전사들도 말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뭐야?” 뒤에 쳐진 러츠가 고함을 지르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안색이 변했다. 쿵, 쿵, 쿵, 쿵. 전쟁터에서 지축을 울리던 말발굽 소리가 저러할까? 멀리서 시작된 소리가 금방 가까워져서 지하세계를 뒤흔든다. 볼 것도 없었다. 죽은 괴물들의 가족, 동료, 혹은 같은 종족이 달려드는 소리이리라. 바닥을 뒹구는 괴물들이 떼거리로 몰려든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끼쳤다. 그는 미친 듯이 달리는 에단을 따라 방울 소리가 울리도록 죽어라 뛰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눈에도 띄지 않던 괴물은 일단 출현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끝에서 두 번째로 출발한 에단은 와인기사를 제치고 어느새 용병들마저 지나쳐 이베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설픈 검술실력에 비한다면 놀랄만한 빠르기라 할 수 있었다. 동생 덕분인가. 그는 조소를 흘렸다. 그가 이렇게 잘 뛰게 된 것은 어쩌면 미워하는 동생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과 성을 다해 수련했으나 동생의 천재적인 자질에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막스가 마나를 검에 주입하는 그 순간, 그의 검술 수련은 끝이 나버렸다. 검술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어서 포기해 버렸던 것. 그 이후 그는 틈만 나면 달렸다. 한바탕 뛰고 나면 쏟아지는 땀과 함께 울화도 배출되는 것 같았다. 그 덕을 지금 톡톡히 보고 있었다. 걸음이 늦은 와인기사 하나가 괴물에 들려 가랑이가 찢어졌다. 질펀하게 쏟아지는 내장과 함께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역겨운 피 냄새는 선두의 집사에게까지 끼쳐졌다. 그들을 데리고 온 집사로서도 부하들의 안전을 돌볼 틈이 없었다. 괴물은 뒤뿐만이 아니라 앞과 옆에서도 불쑥 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는 길을 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광구가 쏘아지고 앞을 막는 괴물의 머리가 분질러졌다. 그리고 옆의 괴물은 실피드에 의해 매끄럽게 잘려졌다. 엘란이었다. 엘란은 집사에 비해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안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가면 좋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구해준다던가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자신과는 별다른 연이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어쩌면 나중에 얼굴을 붉히는 사이로 변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집사일행들은 더욱 그러했고, 스트빌라이의 귀족이었다는 자와 러츠 천부장도 호감이 가지 않았다. 일행들 중에는 감정에 솔직한 훈족전사들이 개중 정이 갔으나 역시 마찬가지. 오는 도중 세오나를 치료했다는 바카루아스는 그녀를 좋아하는 카이어스의 얼굴도 있고 해서 구해줄 생각이었는데 자신의 안위를 도모할 정도의 실력은 되는 것 같았다. 아울러 백법사의 참모인 이베도 앞으로의 전쟁을 위해 꼭 데리고 나갈 자의 명단에 올랐으나 그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 위험하면 정령을 불러 밖으로 나가지.’ 집채만한 괴물들이 하늘까지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다급한 상황에 처하면 코티즈는 포기하고 그만 나가면 되겠다 싶었다. 거리가 먼데다 슈리엘을 부를 수 없으니 구해줄 사람들의 수는 한정이 되겠지만 집사 일행을 빼면 얼추 비슷할 것 같았다. “으악!” 게다가 숫자까지 줄어들고 있으니. 이런 저런 계산을 하며 달리던 엘란은 아치형 문으로 뛰어드는 집사를 보며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우악스럽게 보이는 괴물들이 자신들을 계획적으로 몰아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 자신들의 처지는 임무를 나눠, 사냥감을 몰아가는 사자들한테 쫒기는 영양 떼와 같았다. 안쪽으로 휘어진 거대한 돌기둥과 맞물린 곳에 조각된 두 마리의 드래곤. 집사가 만든 폭음과 섬광 때문에 뒤로 돌아가기 직전에 머물렀던 곳이었다. 엘란이 갑작스럽게 서버리자 그의 등에 부딪친 이베가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들이 우리를 이리 몰아왔소. 토끼몰이를 당했다는 말이죠.” 토끼몰이라는 말에 이베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왜?” “그거까지야 알 수 없죠.” 아치형 문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겁먹은 얼굴로 문 바로 밖에 서 있는 엘란과 이베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새까맣게 몰려와 있는 괴물들도. 엘란과 이베의 대화처럼 죽일 것처럼 쫓아오던 괴물들은 문을 막아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지남철에 붙은 쇠붙이처럼. 혹은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엘란이 뒤를 돌아 나아가자. “크아!” “우아~” 무기를 내밀며 포효를 터트렸다.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명백한 위협. 엘란은 정령들을 불러 하늘로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카루아스야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가면 될 테고 이베와 누구를 구할까 생각하는 데. “들어오라!” 백 개의 천둥이 동시에 울리는 것처럼 우렁찬 고함이 어둠을 저었다. 공기가 떨리고 무너진 건축물마저 숨을 삼켰다. 잠시 갈등하던 엘란은 다시 돌아섰다. 안으로 들어가라는 의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더욱 강렬하게 치솟았고 우렁우렁한 고함도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가 문 안으로 들어가고 이베마처 마뜩치 않은 동작으로 들어서자 괴물들은 얌전히 앉아 무기를 내려놓았다. 흡사 말 잘 듣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는 파헤쳐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당신들은 따라오지 마시오.” 겁먹은 표정으로 따라오는 훈족에게 엘란이 충고했다. 이상하게 자신은 죽지 않을 것 같았는데 따라오는 자들은 반드시 죽을 것 같았다.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렇게 하라.” 간절하게 쳐다보는 부하들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휴!” 살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훈족과 러츠, 에단과는 달리 집사는 기어이 엘란의 뒤를 쫓았다. 코티즈는 반드시 죽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안 건드렸으면 모르되 설 건드려 놓았으니 무슨 짓거리를 할 줄 몰랐다. 그가 움직이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히키는 어쩔 수 없이 따라붙었고 한 사람의 조력이라도 받고 싶었던 그가 와인기사들에게 가문 어쩌고 하면서 명령을 내리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들의 심정으로 기사들도 움직였다. 정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들의 등 뒤로 안됐다는 훈족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여차하면 정령을 불러낼 수 있도록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엘란은 부름에 몸을 맡기고 걸었다.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지금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파괴되기 전에는 신전이었을 것 같은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10미터 높이의 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길을 아는가?” 바짝 붙어 움직이던 집사가 물었다. “그런 것 같소.” 그렇다도 아니고 아니다도 아니고, 그런 것 같다? 그가 잔득 얼굴을 구길 때 엘란은 탑의 숲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서늘한 느낌. 한겨울의 계곡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발끝을 적시고 가슴까지 밀려왔다. 그와 함께 의문이 쌓여갔다. 도대체 뭐가 불러대는 것인가? 그리고 일행들 중에서 하필이면 나인가? 게다가 자신을 떠다미는 존재는 누구인가? “정말 알고 가는 거요?” 집사가 다시 물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처음 오는 것이 뻔할 텐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가자 묘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내가 길을 알 턱이 없지요. 다만 소리가 들리던 곳으로 가는 것뿐이오.”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그도 소리가 발해진 곳의 위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귀찮은 마음에 대충 둘러대는 것이었다. 누가 끌어당긴다느니 어떤 존재가 등을 민다느니 하는 소리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란이 거짓말을 하자 집사는 만족해했다. 신빙성 있게 들렸던 것이다. “억!” 한 덩어리로 뭉쳐 뒤를 따르던 와인기사들은 간혹 짧은 비명을 토했다. 곳곳에 솟아있는 탑이 괴물들처럼 보인 것이다. 드디어 탑의 숲이 끝났다. 탁 트인 공간의 안쪽,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지저세계에서 유일하게 밝은, 달이 뜨지 않은 밤 보다 더 어두웠지만, 암흑의 공간에서는 단연 밝은 곳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의 외형이 또렷하게 보였다. 투구같이 생긴 지붕위에 삐죽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니 지하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70톤은 족히 됨직한 둥근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엄청난 크기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네모반듯한 상자의 앞에 창살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감옥. 건물을 보고 떠올린 엘란의 첫 감상이었다. 그것은 집사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감옥? 호, 코티즈가 있을 만한 곳이군.” 말해 놓고 보니 더욱 그럴싸하게 보였다. 난데없이 떨어진 침입자를 괴물들이 끌고 올 만한 곳이었다. “끝까지 따라올 생각이오?” 엘란이 물었다. 불길한 곳이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뜻. 집사는 등에 따갑게 부딪치는 와인기사들의 기대를 단호하게 배신해버렸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생각이오.” 할 수 없다는 듯 손바닥을 펴 두 손을 들어올린 엘란이 기둥이 횡으로 늘어선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발바닥에 와 닿는 딱딱한 감촉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계단 끝에 다다른 그는 늘어선 기둥에 손을 가져갔다. 암흑이 아니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은은한 빛을 뿌리는 기둥은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따뜻하네.” 계단을 올라 선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둥을 만졌다. 따뜻한 감각이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갑시다.” 여기까지 안내를 했으니 앞장을 서라는 의미. 집사가 재촉을 했다. 기둥 사이를 통과한 엘란은 문까지의 짧은 거리를 한 걸음에 이동, 이상할 정도로 낮은, 6미터가 넘는 괴물들의 키를 감안하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낮은, 2미터도 채 되지 않는 문을 힘껏 밀었다. 어둠에 잠긴 곳이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검은 색이 칠해진 문은 손님들을 환영한다는 것인지 엘란이 가한 힘 이상으로 활짝 열렸다. 그리고 드러나는 빛. 암흑세상에서 뿌려지는 빛은 태양이 뿌리는 빛보다 더 밝고 따뜻해 보였다. 엘란(119) 어둠에 익은 눈에 환한 빛이 들어오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모두들 빛을 막기 위해 눈을 감고 손으로 앞을 가렸다. 불편하게 눈을 깜빡 거린지 10분, 어느새 적응한 사내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밝은 빛을 대하자 겁이 눈 녹듯 녹아버린 것이다. “어디, 뭐가 있나 볼까!” 엘란을 지나친 집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방으로 된 널찍한 공간은, 천장에서 빛을 뿌리는 백여 개의 둥근 돌을 제외한다면 어떠한 장식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담백한 순백의 공간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쿵. 제일 마지막에 히키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문이 닫혔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과 벽, 바닥을 세세히 살피며 움직였으나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60미터 쯤 되는 방의 끝에서 발견한 푸르죽죽한 반죽덩어리가 이 거대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와인기사 하나가 반죽을 꾹꾹 밟아대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반죽덩어리를 보니까 여기가 식당인 모양입니다. 그 괴물들을 배불리 먹이려면 반죽도 커야 되겠지요. 요리사가 빵을 만들다 볼일 보러 간......” 그는 말을 맺을 수 없었다. 푸르죽죽한 덩어리에서 몇 개의 구멍이 열리고 거기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반죽 중 일부가 채찍처럼 길게 뻗쳐 나왔다. 그리고 기사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경고를 발할 시간도 없었을 정도로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는......” 반죽에서 백여 개의 돌기가 다시 돋아나 뭐라 말하려는 또 다른 기사의 입으로 파고들어가 뒤통수로 빠져나왔다. 경악한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으나 무서운 속도로 반죽에서 튀어나온 삐죽삐죽한 것들을 모두 막아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죽에서 폭발하듯 뛰쳐나온 돌기가 히키까지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결국 커다란 대전 안에는 엘란과 집사만이 남게 되었다. 퍽, 퍽. 실드를 쳐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집사는 부하들을 끝장내고 이제는 자신을 집중 공격하는 반죽을 경악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런 괴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도 없었고 본 적도 없었다. 마물 도감에도 이런 괴물체는 실려 있지 않았다. “왜?” 놀란 그의 눈동자가 의문을 품은 채 엘란에 닿았다. 전대미문의 저 반죽은 실피드로 베리어를 친 엘란에게는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엘란은 의문에 싸인 집사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왜 저 괴물이 자신만은 공격하지 않는 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짐작은 갔다. 저 괴물이 자신을 불러댄 것이니 일단 볼 일을 볼 때까지는 공격하지 않을 듯했다. 퍽, 퍽. 반죽은 끊임없이 집사의 실드를 두들겼다. 촉수처럼 튀어나온 것들은 날카롭게 보이는 것도 있었고 뭉툭하게 보이는 것도 있는 등 모양이 실로 다양하지 그지없었으나 한 가지는 동일했다. 그것에는 바위라도 단번에 으스러뜨릴 힘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도와주시오.” 계속해서 가중되는 엄청난 압력을 견디다 못한 집사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 길래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엘란이 말했다.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요?” 그가 죽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할 까 잠시 생각하는 데 빛이 번뜩이는 구멍아래에서 주먹 두개를 뭉쳐놓은 것처럼 긴 틈이 벌어지더니 놀랍게도 말소리가 들려왔다. “상관하지 마라.” 아주 또렷하고 낭랑한 소리였다. “당신이 나를 부른 것이오?” “그래.” 반죽에서 입이 만들어지고 엘란과 대화를 하는 사이 촉수의 공격이 멈추어졌고 그제야 실드를 풀고 한 숨 돌린 집사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뒷짐 진 양손에 빛의 구가 만들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을 향해 시선을 두던 그가 고개를 들어올리는 동시에 손이 앞으로 나왔고 순식간에 광구가 손을 박차고 날았다. “흥.” 엘란은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 빛의 구가 날아가는 잠깐 동안 생각해 보니 명백한 코웃음 소리였다. 반죽의 하단부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을 가렸다. 마치 방패처럼. 푸식. 물을 뒤집어 쓴 모닥불이 꺼지는 소리가 나며 빛의 구가 삼키어졌다. 그리고 반죽을 치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되쏘아졌다. 펑! 공격을 하고 즉시 실드를 친 집사를 자신이 만든 빛의 구가 두들겼다. 빛의 구가 섬광과 함께 깨어질 때 방패모양으로 솟아난 반죽이 실드를 후려갈겼다. 쾅. 폭음이 터지고 실드가 깨져나갔다. 방패는 놀란 집사의 얼굴을 그대로 눌러 버렸다. 파리채로 파리를 때리는 것처럼. 집사의 머리는 반죽에 눌려 으깨어졌다. “이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 반죽은 돌기와 방패를 집어넣고 그걸 몸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가지만 어쨌건 몸을 추스른다. “왜 죽인 겁니까?” “내가 초대한 것은 너 뿐이다.” “그래도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너는 집을 침범한 무뢰배를 그냥 둘 수 있나?” 지하세계에 뛰어든 것을 힐난하는 것이다. “그럼 저는 왜......?” 반죽이 말을 끊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너는 내가 초대한 것이 아니냐? 손님을 초대해 놓고 죽이는 주인은 없다. 아니 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됐다. 이런 무의미한 대화는 그만 두자.” “정말 그 이유가 답니까?” 엘란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을 침범한 무뢰배는 자신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만 죽인 것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휴, 내 솔직히 말하마.” 한숨을 쉬는 반죽의 눈 아래가 약간 붉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부끄러워하는 새색시 같아 엘란은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내 모습이 어떠냐?” “예?” 엘란은 희한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일 때는 언제고 지금은 부끄럼쟁이 소년처럼 구는 것이다. “좀 보기 흉하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흉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흉하다...... 기 보다는 독특하군요.” “그런가?” 반죽의 음성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그 때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설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이들을 죽인 겁니까?” “그래.” 느닷없이 든 생각을 반죽이 긍정하자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이지.” 이제는 기가 찼다. 저 반죽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초대받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 자들을 죽인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원래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 아주 잘생겼었단 말이다.” 반죽은 토라진 것처럼 항변하더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체신 머리 없는 행동 같았는지 뒷머리를 긁었다. 어깨쯤이라 짐작되는 곳에서 튀어나온 손처럼 생긴 것으로. “절 어떻게, 왜 부르신 겁니까?” 엘란은 정말 궁금했다. 이 존재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자신을 떠다민 존재는 무엇인지. “마음으로 불렀다.” “마음?” “그래, 마음. 나정도 되면 생각만으로도 타 존재를 부를 수 있지.” 반죽은 이제 의기양양해 했다. 살의, 부끄러움, 민망함을 넘어 이제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존재는 성격변화가 어린아이 같았다. “당신이 어떤 존잰데요?” “나?” 손으로 자신을 가리킨 반죽의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웃는 것 같았다. “네 생각에는 내가 어떤 존재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누구 십니까?” 반문하는 엘란의 얼굴에 싫증이 떠올랐다. 저 존재가 자신을 뭐라 칭할지 뻔히 짐작이 갔던 것이다. 코르도바습지에서 지겹게 들었던 소리. 이제는 성직자만 봐도 신물이 나올 정도였다. ‘분명히 신이라고 말하겠지.’ 엘란은 확신하고 있었다. 반죽이 자신을 ‘신’이라 칭할 것이라고. 그러나 반죽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신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로 기상천외한 대답이어서 엘란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어야 했다. 반죽이 입이라 생각되는 것을 움직였다. “나는 드워프다.” “......!” 엘란은 말 그대로 일순간에 얼어버렸다. 그가 겨우 입을 움직인 것은 10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격한 반박이 터져 나왔다. 신장이 족히 10미터도 넘는 거대한 반죽 덩어리 어디에도 1미터 50을 겨우 넘기는 드워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네가 뭐라든 나는 드워프다.” 앵돌아져 퉁명스레 대꾸하는 반죽의 음성에서 짙은 슬픔이 느껴졌다. 그 느낌에는 이상하게도 망자의 슬픔이 섞여 있었다. 분명 살아있는 존재인데도. 엘란은 이상하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반죽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귀도 없고 울퉁불퉁한 근육에 덩치도 산만해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 카이어스가 엘프이듯이 저 반죽도 드워프일 수 있는 것이다. 정말 드워프로 보이지는 않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견식이 짧아서 드워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당신이 드워프라는 것을 믿는 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죽의 상한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견식이 짧은 탓이 아니다. 내 모습이 워낙에 괴상한 탓이겠지.” 엘란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는 감정만 상할 것 같아서 화제를 전환시켰다. “절 왜 부르신 겁니까?” “대화를 하고 싶어서.” “......” 엘란은 가만히 있었다. 대화를 하고 싶어서 불렀다니 뭔가 물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십 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도 반죽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엘란은 다시 십 분을 기다렸다.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한 뒤부터 왠지 분위기가 무거워져 쉬이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삼십분. 일행들도 기다리고 있어서 더는 시간을 줄 수 없었던 그가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겠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반죽이 말문을 열었다. 그 소리가 또한 묘했다. “됐다.” 되었다니? 뭐가 되었단 말인가? “무슨 말입니까?” “이제 가도 좋다.” 엘란은 어이가 없었다. “대화를 하자면서요?” “대화는 이미 나누었다.” “언제?” 반문하던 엘란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날 부른 게 아니군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렇지.” 반죽은 머리라 짐작되는 것을 수그리며 긍정했다. “혹시 저를 떠다민 존재를 부른 겁니까?” “호! 그가 자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가?” 흥미롭다는 듯 반문하는 반죽의 말투에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충동질하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친한 사이라는 뜻까지 담고 있었다. 엘란의 뇌리에 코르도바에서 만난 아구족의 제사장이 지껄이던 말과 사막의 유적지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만난 정체불명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게 뭡니까?” 그는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그만 가거라.”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반죽의 말에는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슬픔이 깔려 있었다. 그 음성은 너무나 슬퍼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의문의 존재를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엘란의 결심마저 흔들리게 만들었다. 반죽은 엘란이 가지 않고 머뭇거리자 다시 말했다. “너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곧 만날 수 있을 거다. 묻고 싶은 것은 그때 그에게 물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반죽은 처음 보았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빛을 발하던 구멍은 닫히고 입이라 생각되던 것도 메꾸어졌다. 추스른 몸도 스르르 풀려 바닥에 깔렸다. 엘란이 한 시간이나 지키고 섰으나 반죽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건물을 나서야 했다. 수많은 의문만을 안은 채. 그리고 반죽의 선물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지하세계로 들어왔으나 연이은 괴사로 잊혀졌던 자. 코티즈였다. 문을 열고 나서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코티즈가 보였다. 몸을 뒤척이는 것이 평온해 보였다. 그 혼자만이 이 소동에서 멀어져 아주 편안한 잠을 즐기는 듯 했다. * * * 엘리오트의 황궁. 널찍한 대전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모여 있어 썰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욀무트백작은 그래서 그런지 쌀쌀한 날씨가 더 춥게 느껴졌다. 이황자와 황권을 두고 다투며 갖가지 음모를 꾸미던 곳, 삼황자궁의 밀실이 그리울 정도였다. “크리누스는 언제쯤 함락이 될 것 같소?” 미카엘황제가 물었다. “요번 주 안으로 훈족의 손에 떨어질 듯 합니다.” 프르덴틀후작이 즐거워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놈들 요번에는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군.” 황제도 흡족한지 미소를 띄우며 손을 비볐다. “맥클레이용병대와 손을 잡은 것이 주효한 것 같습니다. 전국의 용병들이 모여들어 지금은 칠만도 넘는다고 합니다. 훈족도 지금은 거의 사십 만에 육박하구요.” 메테르니히공작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야 전황이 불리하면 배신할 놈들이니 감안을 하셔야죠.” 욀무트가 딴지를 걸었다. 후작과 공작의 생각이 뻔히 들어다 보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말하자 황제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황제도 결심을 굳혔구나.’ 욀무트는 이쯤에서 한 걸음 물러서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황제가 망설이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겠으나, 이미 내려진 결정에 토를 달아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백작은 막스의 건의에 반대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저도 당연히 찬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더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황제의 표정이 풀렸다. “니벨백작의 생각은?” “저는 언제나 거만한 돼지들에게 한 방 먹일 날이 오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가빈백작은?” “병력을 좀 더 보강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의 공이나 황태자의 장인인 신분을 감안한다면 후작의 위를 받았어야 했으나 프르덴틀의 견제로 여전히 백작에 머물러 있는 가빈도 찬성의 뜻을 밝혔다. “좋소. 모두들 찬성을 하는군.” 침을 삼키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만의 병사를 더 보내라.” 한자 한자 힘주어 말한 그가 대전 아래를 굽어보며 눈을 빛냈다. “막스에게 명령을 전달하라. 오늘부로 카톤협곡 넘는 것을 허락한다.” 엘란(120) 기다리다 지친 일행들이 아이언오거를 찾아 나서려던 참에 엘란이 코티즈를 업고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고 보니 아치형문을 막아서고 있던 괴물들은 흔적도 없었다. 시간을 따져보니 반죽이 가라고 말하던 즈음의 일이었다. 확실히 그 반죽은 마음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드워프라는 얘기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에단이 엘란의 등 뒤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죽었다는 얘기였다. “이 자는 어디서 발견한 겁니까?” “길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길에 버려져 있었다니......참으로 공교로운 일입니다.” “공교로운 일이죠.” 에단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함께 움직였던, 척 보기에도 대단한 마법사와 기사들은 모조리 죽었는데 자신은 상처하나 없이 나타나서는 광산의 책임자를 길에서 주웠다니! 말이 되는가? 엘란은 사실을 말하라고 종용하는 에단의 눈초리를 무시해버렸다. 반죽이 마음으로 자신을 불러들였고, 그 반죽에서 튀어나온 돌기가 그들을 모조리 해치웠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알지 못할 괴존재와 그 반죽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고, 그 반죽이 생긴 건 그래도 사실은 드워프라였다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을 해봐야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시치미 떼는 것이 나았다. 사실 거짓말을 한 것도 없지 않은가. 그들이 죽은 것은 사실이고 광산의 유일한 생존자를 길에서 주은 것도 사실이었다. “뭐가 그렇게 숨기는 것이 많소?” 에단이 비난조로 물었다.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려는 것도 그렇고 정체를 감추는 것도 그렇고 그는 여러모로 불만이 많았다. “당신 정체나 밝히시죠?” 엘란도 참지 않고 맞받아 쳤다. “흠흠.” 둘이 날선 신경전을 벌이자 거북살스러워진 웨스트니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만하고 이 자나 깨웁시다.” 이베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웨이크 업.” 바카루아스가 마법을 걸었다. 코티즈는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에 몸을 떨었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춥다보니 여기가 저승인가 싶었다. 그것도 얼음이 가득한 저승. “정신 차렸으면 그만 일어나시오.” 목소리.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다. 도저히 저승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죽은 것이 아닌가?’ 그는 조심스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치켜뜬 눈에 어둠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광구를 중심으로 자신을 빙 둘러싼 예닐곱 명의 장한들이 보였다. ‘잡혔구나.’ 코티즈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죽기를 열망했는데도 자신의 질근 목숨은 아직도 붙어 있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혀를 꽉 물어버리려는 데 알만한 사람의 얼굴이 시선에 잡혔다. 그는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절대로! 왜 그가 여기에 와 있는 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갱도 속에서 내린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저 사람은 칸토나 밑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특히 음습한 일을 처리하는 칸토나의 개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적어도 자신을 칸토나에게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이베는 칠면조처럼 시시각각 안색을 변하시키는 그의 얼굴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한 순간 휙휙 변하는 안색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엘란도 그를 유심히 살폈다. 그렇다고 이베처럼 안색을 보는 것은 아니었고 그런 변화를 유도하는 시선을 쫓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은 복면을 하고 있었던, 스트빌라이의 귀족이라는 자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정체를 아는군. 엘란은 죽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던 이 남자가 저 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미스릴은 어디 있나?” 러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스릴?” 코티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때 칸토나상회의 촉망받는 사원이었고 당연히 엘리오트귀족가의 가계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 각종 행사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안면도 익혔고 보지 못한 자들은 초상화를 통해서라도 얼굴만은 알아 두었다. 가장 권세 있는 가문의 하나인 프 르덴틀후작가의 장남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타국, 그것도 전쟁을 벌이고 있는 스트빌라이에 들어와서 미스릴을 찾는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으며 또 그가 온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머리만 복잡해졌다. 구멍에 뛰어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든 놈이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굴리고 있자 러츠는 짜증이 일어났다. 부츠에 들어있는 단검을 뽑아낸 그가 코티즈의 목에 가져다대며 으르렁 거렸다. “어서 말해?” “당신들 누구요?” “강도들이라고 해두지. 산적이라 알아도 무방하고.” 이베가 말했다. “강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작가의 장남이 뭐가 아쉬워서 강도질을 하는가? 거기다 눈치를 보아하니 두목이 아니라 일개 구성원 같았다. “이 자식이 그냥?” 연속적으로 자신의 말을 씹자 러츠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팔을 당기자 단검이 딸려오며 코티즈의 목에 생채기를 냈다. 피. 붉은 피가 목을 타고 흘렀다. 코티즈의 눈에 공포가 돌아왔다. 집사 일행이 아니든 칸토나의 하수인이 아니든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 엘란이 나섰다. “내가 하지.” 그는 러츠를 밀치고 들어가 코티즈의 멱살을 잡고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그리고는 공중으로 솟구쳤다. 코티즈는 작은 사내가 자신의 멱살을 잡는 순간 그의 얼굴을 살폈고 경악해 버렸다. “당신......!” 코티즈와 함께 위로 솟구친 엘란이 그의 귀에다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 의외로 발이 넓은 가봐! 나도 알아보고.” 그의 반응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코티즈 만큼은 아니지만 엘란도 상당히 놀라버렸다. 머리색을 바뀐 데다 수염도 길렀고 얼굴도 상당히 변해 있었다. 긴 세월은 아니지만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질 정도의 시간은 흘러갔다. 거기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도 대륙전체에 폭넓게 돌았으며 여기는 자신을 잡기 위해 광분했던 엘리오트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 스트빌라이의 한적한 광산에서 자신을 아는 자를 만난 것이다. 암흑. 광구와 멀리 떨어지자 코티즈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들려오는 광술사의 음성은 으스스함을 넘어 원초적인 공포를 일으켰다. “저......저......전단을......봐.....봤습......니다.” “전단이라니?” 엘란은 그가 너무 겁에 질려있자 목소리에서 힘을 뺐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는지 코티즈의 떨림도 점차 잦아들었다. “수배전단 말입니다.” 엘란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수배가 떨어진 지 꽤 시간이 지났고 내 모습도 많이 변해서 알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칸토나는 자신의 재산을 축낸 자를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칸토나? 그게 누군데?” “이 광산 주인입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게 당신이 내 모습을 기억하는 이유가 되나?”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당신은 그의 집을 털었으니까요.” “아!” 엘란은 그제야 칸토나가 생각났다. 엘리오트에서 사교척결의 기치를 내걸고 지고말살령을 내렸을 때 롬바르드를 탈출할 배편을 마련하려고 그의 집을 털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참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씩이나 그의 재산을 축내게 생긴 것이다.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라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할 천문학적인 거금을. “여기가 칸토나 소유인가?” “그렇소.” “나는 어떻게 알아 봤나?” 엘란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칸토나상회의 사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을 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칸토나는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를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용서하지도 않구요. 그는 당신의 수배전단을 각 지사로 내려 보냈고 모든 사원들에게 그 모습을 기억하도록 시켰습니다. 간간히 시험까지 하면서.” “시험이라니?” “당신과 비슷한 자를 지사로 보내서 신고를 하지 않으면 치도곤을 내곤 했죠. 당신 모습을 그려보라는 명령도 종종 내렸고.” “지독한 자로군.” 정말 지독한 자였다. 코티즈의 말에 의하면 그는 지금도 그런 시험을 한다고 했다. 아울러 승진을 하려면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독한 놈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하니깐 그런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감탄도 일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군. 그는 품속에 든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어 최대한 차갑게 말했다. “퓨어미스릴은 어디에 있나?” 겁에 질린 얼굴을 보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할 일은 해야지. “정말 강도였군요!” 코티즈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놀랐다. 프르덴틀후작가의 장남과 어떤 면에서 본다면 원수라 할 수 있는 광술사가 손을 잡고 광산을 털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라!” 엘란은 그의 멱살을 슬쩍 놓았다 다시 잡았다. 잠깐 동안이지만 코티즈의 몸은 아무런 보호장구 없이 허공에서 떠 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코티즈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폐쇄된 갱도에 보관해두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보이지는 않지만 이를 드러내며 웃은 엘란은 내쳐 물었다. “밑에서 누굴 보고 놀랐던 것 같던데, 그는 누구인가?” 코티즈의 얼굴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이건 또 뭔가? 광술사는 에단의 정체를 모르고 있지 않은가? 이 자들은 동료들끼리도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코티즈의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그때 엘란이 다시 그를 놓았다 잡았고 그 바람에 간이 쪼그라든 코티즈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입을 열었다. “프르덴틀후작가의 장남 에단입니다.” * * * 막스는 수정구를 통해 황제의 명령을 하달 받았다. 짙푸른 웃음을 베어 문 그는 막사를 나오자마자 참모회의를 소집했고 두 시간 동안 세부전술을 가다듬었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반달이 뜨고 어둠이 깔리자 그는 마법사 라울만 데리고 카톤협곡의 오른쪽을 오르기 시작했다. 갑옷에 검은 칠을 하고 얼굴에까지 검은 칠을 한 채로. 막스의 맞은편, 카톤협곡의 왼쪽 편에는 시드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 나이에 아직도 전장을 누벼야 하나’ 라는 푸념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막스는 협곡을 오르며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오늘밤 안으로 협곡을 장악하고 있는 스트빌라이의 궁수대를 사그리 처리할 생각이었다. 부유마법을 시전 막스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던 라울이 조용히 경고성을 발했다. “경보 마법입니다.” “안티 매직으로 해체할 수 없나?” “죄송합니다. 주문이 겹겹이 쳐져 있는 데다 서로 맞물려 있어서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할 수 없지.” 막스는 협곡 위까지의 거리를 재어보았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어서 경보가 울린 후, 적들이 태세를 갖추기 전까지 도달하기에는 버거운 거리였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 그가 눈짓을 보내자 라울이 막스에게 마법을 건다. “레비테이션.” 막스의 몸이 둥실 떠오르기를 일 분여, 왱왱거리는 요란한 소음이 협곡을 울렸다. “라울!” 그가 고함을 치자 마법사가 마법을 풀었다. 거의 수직으로 깎인 절벽에 검을 박아 넣은 막스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삐익. 불침번이 호각을 요란하게 불었다. 잠시 후 광구가 뜨고 주변이 환해졌다. “침입이다!” 고함이 터지고 그의 몸이 협곡 위로 드러나는 순간 번을 보던 궁수들이 미리 재어놓은 화살을 날렸다. 쐐애액. 가까이서 발사된 철시는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을 일으켰다. 막스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철시를 뒤로 넘겨 보내고 어느새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휘둘렀다. 연속적으로 떨어져 나온 오러탄이 진지까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가장 앞에서, 가장 먼저 거대한 철시를 날렸던 궁수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퍼석. 청록색 오러탄이 인체 중 가장 단단한 부분이 궁수들의 이마를 부드럽게 꿰뚫었다. 양쪽에서 활을 지지하던 두 명이 털썩 주저앉았다. 쐐애액! 그 사이 살을 먹인 불침번들이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잠에서 깬 궁수들도 하나둘 나타나 시위에 살을 먹여 발사준비를 마쳤다. 막스는 검으로 원을 그려 둥근 오러막을 만들었다. 그 순간 철시가 오러막을 때렸다. 쾅. 폭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협곡 아래의 고단한 병사들을 깨웠다. 근접거리에서 쏘아진 철시의 위력은 대단했다. 화살촉이 오러막에 박힌 것이다. “아직 미흡하군.” 막스는 오러막에 박혀 하얗게 빛나는 살촉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완벽한 오러막이었다면 화살은 튕겨져 나갔으리라. 그는 카를후작 같은 십존에 비한다면, 반수 정도 처지는 자신의 실력을 자각하며 결의를 다졌다. 언젠가는 그들을 꺾으리라. “발사.”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수십 발의 철시가 막스를 노렸다. 그의 심장, 그 한 점을 노린 집중사격이었다. 쾅쾅쾅쾅. 오러막에 박힌 철시 옆에 새로운 철시들이 날아와 박혔다. 이제 몇 초 후면 오러막이 깨어질 것이다. 탓. 부셔지는 오러막을 내버려둔 그가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아니 날아올랐다. 한 번의 도움닫기로 이십 미터까지 떠오르는 것이 날짐승이 이륙하는 것 같았다. “위로!” 지휘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이십 개의 활이 공중으로 겨누어졌다. 활이 방향을 바꾸는 그 짧은 시간동안 호흡을 고른 막스가 오러탄을 무차별적으로 날렸다. 시위를 당기는 궁수를 향해서였다. 이마, 목, 가슴, 배, 팔, 등등 다양한 곳으로 파고든 오러탄이 구멍을 내거나 신체 일부를 끊어 놓았다. 비명과 고함, 그리고 흩뿌리는 피를 뚫고 철시가 하늘을 수놓았다. 근 십여 발에 달하는 숫자였다. 막스의 신형이 밑에서 당기는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동작으로 반은 위로 흘려버렸으나 나머지 반은 여전히 그를 노렸다. 막스의 검이 다시 원형을 그렸다. 쾅쾅. 이번 충돌은 전의 충돌과 결과가 달랐다. 철시가 오러막을 뚫고 안으로 파고든 것이다. 밑을 받치는 지지대가 없어서 자세가 나빴던 데다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은 다음이라 마나의 유동도 순조롭지 않았던 탓이었다. 막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날아오는 화살의 순서를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오러막을 뚫고 그를 향해 쇄도하는 화살은 언뜻 보면 한 순간에 발사된 것 같지만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고, 시위를 당기고 놓는 자의 힘도 미세한 차이가 있어서 도착하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달랐다. 소드마스터만이 분별할 수 있는 차이였다. 막스의 검이 시간을 쪼개고 쪼갰다. 궁수들의 눈에는 그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다섯 번이나 휘둘러졌다. 가히 신의 경지라 할만했다. 화살을 튕기고, 부러뜨린 막스가 다시 오러탄을 쏘아 보냈다. 엘란(121) “프로덱션 오브 파이어!” “프로덱션 오브 에어!” 광구를 띄워 사수의 시야를 밝히던 마법사들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과 공기의 방어막을 쳤다. 퓽, 퓽. 겹겹이 쳐진 방해물을 뚫고 오러탄이 날았다. 부지런히 살을 재던 궁수들 몇이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대기조들. 그들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스들이 재빨리 시체를 치우고 자리를 대신한다. 턱. 땅에 발을 디딘 막스가 진지를 향해 달렸다. 선불 맞은 멧돼지를 연상시키는 저돌적인 돌격이었다. “에어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아이스 애로우.” 궁수들이 다시 화살을 잴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마법사들이 수십 발의 화살, 마법의 화살을 날렸다. 광구로 밝혀진 하늘에 푸른 줄, 흰 줄, 붉은 줄이 죽죽 그어졌다. 자신의 실드로 철시를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 라울은 멀리 쳐져 있었다. 그가 적시에 막스를 도왔다. “프로덱션 오브 에어!” 막스의 앞에 방어막이 쳐졌다. 멀리 떨어져 있던 라울의 거리만큼이나 위력은 떨어졌지만 불, 공기, 얼음 화살의 힘을 반감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막스는 그것으로 족했다. 위력은 훨씬 떨어지지만 질주하는 자세 그대로 만들 수 있는 마나막이 화살들을 무력화 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은빛으로 빛나는 그 마나막을 자신이 뚫고 튀어나왔다. 진지를 넘은 그가 좌에서 우로 검을 휘둘렀다. 검으로 공중에 선을 긋는 듯한 모양이었는데 그 선을 따라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갔다. 다섯 명의 궁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려졌다. 파악. 막스가 돌파한 사수들 바로 뒤에서 시위를 먹인 궁수가 활을 쏘는 그 순간, 막스가 막 시위를 떠나려는 화살을 잡았다. 촉 바로 아래였다. 살짝 몸을 떠는 것으로 화살에 담긴 여력을 흘려보낸 그가 화살을 밀었다. 신기하게도 뭉툭한 살대가 사수의 가슴을 단숨에 바수고 박혀들었다. 그것으로 사실상의 승부는 결정 났다. 궁수대 사이로 뛰어든 소드마스터를 궁수들이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려 하나 둘 몸을 드러낸 철혈기사들이 가세하자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처음 경보가 발동하고 호각을 부는 순간 협곡으로 돌진한 엘리오트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거칠게 스트빌라이군을 몰아 붙였다. 잠에서 깨어나 허둥거리며 나타난 리버스킨후작은 자신을 자책했다. 협곡으로 물러난 이후, 엘리오트군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감히 저들이 국경을 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협곡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곤혹으로 물들었다. 협곡의 왼쪽편에서는 철시들이 쉬지 않고 날아왔으나 오른쪽 진지에서는 철시가 날아들지 않았다. 가끔 터져 나오는 폭음으로 보건대 이미 절단이 난 모양이었다. 쿠우웅. 철시를 쏟아내 적들을 쓸어버리던 왼쪽 궁수대에서 하늘을 찢는 폭음이 울리자 그의 눈에 당황이 서렸다. 오른쪽 궁수에 이어 왼쪽 궁수까지 당한다면 철시의 힘에 의해 겨우 균형을 유지하던 아군이 열세에 처할 것이다.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번개처럼 떨어져 손쓸 사이도 없이 적병 두세 명을 한꺼번에 꿰어대던 철시의 비가 그치자 엘리오트군에서는 함성이, 반대로 스트빌리아군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전투가 벌어지고 철시에 의해 죽어간 엘리오트 기사와 병사들이 근 1,000을 헤아린다는 사실은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개전 초기, 일대일로 죽어가던 병력이 이제는 이대일로 불리하게 돌아갔다. 끝까지 싸운다면 부하들은 물론 자신까지 협곡에 몸을 뉘여야 할 것이다. “후작님 어렵겠습니다.” 틸만백작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이후, 실질적인 지휘관의 역할을 하던 뮬레인자작이 약한 소리를 했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비명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쳤다. 그는 후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원옥쇄 한다.’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후퇴시키게.” 입술을 깨문 후작이 말머리를 돌렸다. 자작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목이 온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안도한 이유는 부하들을 살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덧붙여 나중에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뮬레인자작은 눈물을 뿌려대며 병사들을 후퇴시켰다. “막스!” 비통한 고함과 함께 분기가 목까지 차올랐다. 한편, 맞은편 진지에서는 시드가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돌진하기 전 궁수들을 처리해야 했던 그가 여유를 부림으로써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그런 피해를 기꺼이 무릅쓰고서 그가 꾸물거린 이유는 명료했다. 그는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험을 한 막스와 같이 위험부담을 짊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철시가 자신의 어떻게 하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코앞에서 쏘아진 강궁은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고, 재수 없으면 대륙에 악명을 떨치던 광법사처럼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시간을 끈 바람에 개전 초기 수많은 인명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생에 대한 애착도 커져갔고 그에 비례해 전장에서 죽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강렬해졌다. 그는 막스가 시선을 잡아끌 때까지 기다렸고 협곡으로 돌격하는 아군을 향해 궁수들이 화살을 날림으로써 오후에 설치된 경보마법이 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날아간 화살 때문에 일단 주문이 깨어지자 그는 기척을 내지 않고 움직였다. “폭(爆).” 실피드로 날아오른 그는 궁수대의 머리 바로 위에다 운다인을 소환 정령을 작은 물방울로 나눠 폭발시켰다. 리버스킨 후작을 당황케 만들었던 왼쪽 진지의 폭음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시드의 비기(秘技). 그 한 번의 공격으로 궁수대는 한순간에 무력화 되었다. 그가 카톤협곡 왼쪽을 완전히 접수한 지 사십 분 후, 엘리오트군이 협곡을 돌파했다. *** 코티즈가 건네준 퓨어미스릴의 양은 이베가 전해 받은 정보 보다 훨씬 많았다. 근 300키로도 넘었으니 백법사가 원한 양을 채우고도 많이 남았다. 코티즈가 한 얘기에 의하면 미스릴광석을 제련했을 때 거의 반반의 비율로 퓨어미스릴이 산출되었다 했다. 모두들 신기해했지만 엘란은 전혀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저세계의 괴물들과 정체불명의 반죽을 만났던 데다가 이때까지 겪었던 파란만장한 경험이 웬만한 일 가지고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퓨어미스릴이 많이 나온 것을 드워프라 주장하던 반죽의 영향 때문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나머지 반은?” 덩치만큼이나 욕심이 많았던 러츠가 일행들이 흘려 넘겼던 부분을 짚고 나섰다. 광석을 제련해서 반반씩 뽑아냈다면 일반 미스릴 300키로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이 있고 코티즈는 그 격언을 알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보통의 미스릴을 다른 곳에 보관해 두었던 코티즈가 찔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지하세계를 나온 이후, 광술사에 대한 두려움은 가셨지만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댔던 러츠는 여전히 무서웠다. “스노우로 보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미스릴을 노리고 강도까지 출현한 마당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가진 칸토나가 미스릴이 채굴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시간문제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터. 그러면 자신은 끝장이다. 칸토나는 횡령범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칸토나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엘리오트에는 갈 수 없고 십존의 일인, 루카스 레인 후작이 목숨을 노리는 스트빌라이에서도 살 수 없었다. 피요르드나 훈족의 땅으로 도망쳐야 하는 자신에게 그 미스릴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가져 와!” 러츠가 코티즈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울상이 된 코티즈는 사정조로 말했다. “진짜 없습니다.” “말로해서는 안 되겠군.” 러츠가 성큼 다가서자 엘란이 입을 열었다. “그만 두시오.” 러츠는 다된 밥에 재를 뿌리며 갑자기 끼어드는 아이언오거 때문에 짜증이 확 솟구쳤지만 끙 하고 소리만 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체이스와 그를 존중하던 용병왕 때문이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엘란은 코티즈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냈다. 미스릴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그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에단의 정체에 대해 입을 가볍게 놀리지 말라는 경고요 당부였다. 갑자기 닥친 횡액 때문에 못난 꼴을 많이 보였지만, 원래는 머리도 좋고 판단도 빠른 그였으므로 엘란의 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가 굽실거리자 엘란이 말했다. “당신 몫도 충분히 떼어 줄 테니 미스릴을 가져 오시요.” 엘란이 다 안다는 눈빛으로 절충안을 제시했다. 집사의 얘기를 엿들은데다가 재물에 대해 편집증적인 집착력을 가진 칸토나에 대한 얘기도 대충 들었으므로 그의 처지가 충분히 짐작되었다. 광산이 털린 사실을 보고하면 칸토나는 심한 곤욕을 치룰 것 같았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몰랐다. 코티즈는 억울한 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라도 건진 것에 만족하며 나머지 미스릴이 있는 곳으로 침입자들을 안내했다. *** “끙끙.” 선착장에 걸린 판자를 통해 여객선으로 오르는 코티즈는 앓는 소리를 냈다.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는 엘란의 말에 한껏 욕심을 부린 결과, 근 80키로에 달하는 미스릴을 짊어졌으니 끙끙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달달 떨리는 다리와 휘청거리는 허리를 보면 잘못하다가는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았다. 쿵. 갑판위에 내려놓자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난간에 기대 앉아 굵은 땀을 닦았다. 허연 소금기가 말라가는 땀방울을 뚫고 손에 묻어났다. 잠시 후 배가 떠나자 선착장에 둘러선 환송객들이 손을 흔들었다. 엘란은 그들을 지켜보다 잔잔하게 일렁거리는 강물에 시선을 돌렸다. 강변 쪽에 얼어있는 살얼음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강물은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경변을 때렸고 그때마다 살얼음들이 조금씩 깨져나갔다. 그 장면이 어쩐지 애잔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배는 선착장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본격적으로 속력을 높였다. 쿠즈마노를 향하는 쾌속선 한 척이 엘란이 탄 배를 스치듯 지나갔다. 이물 앞에 달린 길쭉한 장식물이 위협적으로 보이는 배였다. 한숨 돌린 코티즈가 일어서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을 보고는 갑자기 주저앉았다. 이상한 기색을 느낀 엘란이 그를 물끄러미 살폈다. “무슨 일인가?” 엘란이 물었다. “칸토나가 부리는 자들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왜 숨는 가?” “그것이......” 쭈물거리던 그가 체념한 듯 입을 떼었다. 미스릴을 횡령하려 했다는 사실과 엇갈려 지나친 배에 탄자들은 자신을 잡아들이려 온 자들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상기된 얼굴로 털어놓았다. 엘란은 그의 사정을 듣고 참으로 갑갑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갈 건가?”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일단 스트빌라이는 떠나야겠죠.” “루카스를 피해서?” 깜짝 놀란 코티즈가 눈을 치떴다. “아셨습니까?” “집사가 한 얘기를 들었다.” “귀도 밝군요.” “보기와는 딴판이군.” “뭐가 말입니까?” “그런 강심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쩌자고 그런 여자를 건드릴 생각을 한건가?” 코티즈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게 말입니다. 제가 한 짓이 아니라......” “아니라?” “당한 겁니다.” “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엘란은 쓰게 웃었다. 광산으로 향하기 직전에 있었던, 맥클레이 딸의 노골적인 유혹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동정을 실어 말했다. “대충 이해가 되네.” *** 바룬교의 총본산. 스노우대교구에 황제의 특사가 부지런히 오갔고, 그 직후 이런 저런 소문들이 사제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돌았다. 교하실. 바룬교의 수장, 이비드의 집무실에 고위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대사제 렉터리트는 온통 주름이 잡혀 탄력을 잃은 손등을 한참 전부터 바라보았다. 불경한 시선으로 보면 노망이 들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손등에만 집착했다. 주위의 격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이비드교하는 최고령성직자 렉터리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이만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는 그가 한 마디라도 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사제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참다못한 그가 직접 물었다. 천천히,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그가 그만큼이나 천천히 입을 떼었다. “늙은이가 뭘 알겠소. 알아서 하시구랴.” 그 말을 끝으로 그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베트런은 그런 대사제를 한심스런 시선으로 훑었다. “이대로 신도들이 고통 받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는 가장 강경한 참전론자였다. 헬레나의 신도들에 의해 바룬의 성지가 더럽혀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맥크니츠 사제는 결사반대였다. “불가합니다. 성기사들이 세속의 전쟁에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시선에 허공에서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남북에서 협공을 당하는 스트빌라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곳곳에서 불리한 전황이 보고 되자 황제는 바룬신전에 특사를 보내 성기사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 이후 교단은 둘로 갈라졌다. 세속의 전쟁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쪽과 적극적으로 나서 스트빌라이를 도와야 한다는 쪽으로. “성직자들이 전쟁터에 나선 것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베트런이 목청을 높였다. 그에 따라 맥크니츠의 목소리도 점차 고조되어 갔다. “그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인도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성기사가 참가하여 인명을 살상한 적은 없었습니다.” 둘은 한 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엘리오트는 이미 헬레나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스트빌라이를 점령하면 우리 교단은 분명히 탄압을 받을 겁니다.” “엘리오트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롬바르드교구가 탄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에 참전을 한다면 정말로 탄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전쟁에 참가해서 그들을 살상한다면 엘리오트의 신도들은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겁니다.” “걱정들 하실까봐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미 롬바르드의 교도들은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베트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제가 롬바르드교구에 감사를 나갔다가 직접 당한 일입니다.” 베트런은 잊지 않고 있었다. 마커스사제에게 당한 수모를, 빈민을 치료하는 병원에 들렀다 당한 수모를. 그 더러운 가래침을.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가려웠다.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을 또박또박 말했다. 헬레나 신자가 바룬교의 사제복을 보고 욕을 늘어놓으며 침을 뱉고 행패를 부리는 데도 엘리오트의 기사들이 구경만 했다고. 빈민도, 병원도, 자신이 무고한 자를 죽였다는 사실도 모두 빼버리고. 그의 얘기는 거의 창작에 가까웠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주변의 사제들을 술렁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의 이야기가 형이상학적 공론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그냥 둘 수 없겠구만.” 교하가 심각하게 말했다. 대세는 점점 참전론으로 기울었다. 맥크니츠가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분위기를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역사는 필연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 개인이나 우발적 사건으로 역사가 바뀌지는 않는 다는 뜻으로, 개인이나 단체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고 그들은 마침 거기에 있어서 알맞은 역할을 수행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믿는 자들은 만약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른 누가 나서서 역사는 반드시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우발적 사건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가래침. 병자가 뱉은 누런 가래침이 베트런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것이 교단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엘란(122) 케이티는 통로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성기사들이 전원 대기상태에 돌입한 것을 보면 전쟁에 참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왜 보자는 것일까? 뇌 속을 부지런히 오가는 단편적인 정보들이 체계적으로 분류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자 하나의 그림이 오롯이 떠올랐다. “재미있군.”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교하실로 가는 길. 폭 5미터의 긴 회랑 곳곳에는 발광석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밑에 그려져 있는 성화와 어우러져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신녀 케이티는 그림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차분하게 지나쳤다. 곧 회랑이 끝나고 몇 번의 꺾어짐 끝에 그녀는 교하실에 당도했다. 똑똑. “들어오게.” 차분하게 문을 두드린 그녀는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교하는 책상전체에 서류를 깔아놓고 안경을 닦고 있었다. 코에 거는 조그마한 독서안경이었다. “이리와 앉게.” 교하는 자리를 권하면 부드럽게 웃었다. “요즘 오만가지 소문들이 신전을 떠돈다면서?” “......글쎄요......저는 잘......” 그녀는 모호하게 웃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네만 우리 바룬교단은 스트빌라이의 위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결정했네.” “그렇습니까?” 그녀는 두 손을 포개 무릎 위에 놓았다. “그렇게 되었지.” 애석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그는 화로위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준비된 잔에다 끓는 물을 부었다. 톡톡 하는 청량한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은은한 향기가 실내를 휘감았다. “먹어보게.” 잔을 민 그가 코 위에다 안경을 걸고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잔을 들어올린 그녀는 코에 가져다 대고 향기를 깊숙이 들이키더니 차는 마시지 않고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향기가 좋네요.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교하는 여전히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서류에다 둔 채 그가 말했다. “참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려운 때일수록 중지를 모아야 하는데......” 말을 흐린 그가 또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자네 요즘 신탁을 받은 일은 없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잘 생각해보게. 왜 자네가 출가를 하면서 꾼 꿈같은 것 말이야. 꿈을 꿀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자세히 생각해 보면 신탁이라 할만한 꿈을 꾸었을 수도 있지 않나?” “글쎄요.” 케이티는 교하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신탁을 받은 신녀로 유명했으니. 하지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꿈을 꾼 적이 없다면 앞으로 꿀 수는 있겠나?” 서류를 내려놓은 그가 시선을 돌렸다. 강렬한 눈빛에는 강한 요구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 지도......” 이번에는 케이티가 말을 흐렸다. 그녀의 눈도 교하만큼이나 강렬하게 빛났다. 잔에 손가락을 끼운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사제서품을 받는 다면 그런 꿈을 꿀 수도 있겠네요.” 교하도 잔을 들었다. “이번에 자네가 서품을 받으면 300년만의 여성 사제가 되는군. 여성사제가 나올 때도 되었지.” “오늘 밤 일찍 자야겠군요.” “사제서품은 출군하는 날이 좋겠어.” 둘은 마주 보며 잔을 비웠다. 향긋한 향기와 함께 만족의 미소가 떠돌았다. 같은 시각. 모든 꽃들과 잎이 떨어져 쓸쓸하게 보이는 정원에는 렉터리트대사제와 맥크니츠사제가 앉아 있었다.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셔서 얘기를 나누지요?” 맥크니츠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간간히 바깥바람도 쐬어야지 너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건강에 해롭다네.” 대사제가 합죽한 입을 우물거렸다. 틀니를 빼버려서 인지 아니면 추워서 입이 곱은 것인지 발음이 또렷하지는 않았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고생하십니다.” 맥크티츠는 겉옷을 벗어 그의 어깨위에 걸쳤다. 건드리면 삭아 부서질 것 같은 가녀린 어깨였다. “살만큼 살았으니 그것도 좋겠지.” 딱딱.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틀니를 장난스럽게 부딪치며 아이처럼 웃었다. “내가 왜 자네를 보자고 했는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맥크니츠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사제는 교내의 일에는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신앙생활만 했으며 운동을 한다면서 신전을 오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다였다. 그런 그가 할말이 있다면서 자신을 부른 것은 정말 의외였다. 그 전에는 말 한 마디 변변히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대사제가 됐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거야 신심이 깊으셔서......” 딱딱. 대사제는 틀니를 부딪쳐서 그의 말을 끊었다. “성직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아.” 틀니를 끼운다고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몇 번 입을 움직거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신심?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바룬신을 열렬히 모시는 편은 아니야. 그저 신전에서 사는 것이 좋아서 그런척할 뿐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대사제가 된 것은 순전히 나이 때문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성직에 나선 것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고아가 세파를 헤쳐 나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 맥크니츠는 기가 탁 막혔다. 교에 두 분밖에 없는 대사제 중의 한 분이 자신은 신심도 없고 성직자가 된 것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 그것도 까마득한 후배 성직자에게. “고아 출신이 사제의 직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보통 견습사제에서 머물기 마련이고 나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어. 편안히 살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이었지. 그렇게 한세상 가는 것도 괜찮다 싶었지.” 맥크니츠는 이런 넋두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쁜 일을 핑계로 자리를 뜨려할 때 대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욕심이 없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명이 길었어. 동기......이런 동기라고 하기도 웃기는군. 하여간에 동기 중에서 교하가 된 이도 신의 품으로 불려가고 다음 대 교하도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 바룬교 역사상 최장기 견습사제가 된 거야. 그러니 사제서품을 주더군. 여기저기 선전까지 해대면서. 그래서 사제가 되었지. 그 때가 내 나이 82살 때였고 신전에 들어온 지는 정확히 72년 만의 일이지.” 맥크니츠는 흥미가 생겼다. 자신이 코흘리개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 자세히 몰랐는데 렉터리트가 고위직에 오른 것은 정말 나이 덕인 모양이었다. “죽기 전에 선심 쓴 거지. 당연히 실권도 없었고 생활이 바꾼 것도 없었지.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죽을 날만 기다린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죽지를 않더군. 100살이 넘어가고 다시 십년이 지나자 기적이라면서 지금의 교하가 대사제직을 내렸지.” “저도 그 날은 기억합니다.” 그는 정원을 가리켰다. 마음이 푸근해져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늦봄의 일이었지요.” “자네는 성기사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대사제가 의외의 말을 꺼내놓았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급전직하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맥크니츠가 자세를 바로하고 풀린 마음을 다잡았다. “제 생각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대사제께서도 반대 하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네. 회의 때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맥크니츠는 곤혹스러워졌다. 그도 전쟁에 반대하나 싶었는데 잘 모르겠다니.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전쟁과는 상관없는, 아니 상관이 있나!” 한 동안 침묵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정원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구부정한 허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가 일어나 걷자 매크니츠도 별 수 없이 그를 따라가야 했다. “나는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참전도 부전도 다 일리 있는 주장이거든.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지. 베트런사제가 다음 대 교하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 “예?” 이야기가 자꾸 이상한 데로 튀고 있었다. 자기 인생을 얘기하더니, 전쟁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제는 다음대의 교하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맥크니츠는 대사제의 의도가 무엇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비드교하께서는 건강하십니다. 다음 대의 교하가 거론되려면 최소한 이십년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네.” “무엇이 곤란해진다는 말씀입니까?” “자연스럽게 교하가 교체되면 다음대의 교하는 반드시 베트런이 될 거야.” 맥크니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그가 꼭 교하가 된다고 보십니까?” 대사제는 맥크니츠의 옷깃을 당겼다. 다 죽어가는 노인의 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찼다. 맥크니츠가 엉거주춤 자세를 낮추자 대사제는 그의 귀에다 입을 가져다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는......이비드교하의 아들일세.” 귀를 곤두세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음성이 맥크니츠의 귀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의 안색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대추같이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대사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입니까?” “이 나이가 되도록 신전을 돌아다니면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알게 되지. 나처럼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늙은이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아서 더 알기가 쉽고.” “어떻게 그런 일이.” 대사제는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그의 귀를 잡은 대사제가 다시 속삭였다. “베트런의 어머니는 신녀였어. 사제와 신녀, 아주 부적절한 일이지.” 대사제는 그가 진정하도록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다고 생각되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인간은 약한 존재지. 나는 도덕적인 면에서나 종교적인 면에서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네. 베트런을 신전에 거둬서 사제로 만든 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반대하는 것은 교하가 베트런을 다음 대 교하로 키우고 있다는 점이야.” 맥크니츠의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자신이 충격 받은 것은 베트런부모의 부도덕과 교리위반 때문인데, 대사제는 그런 것을 전혀 문제 삼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베트런이 교하가 되는 것을 반대한단 말인가. “이 일은 그런 식으로 넘겨서는 안 됩니다. 사제단에 정식으로 고발해서......” “증거 있나?” “예?” “그를 고발할 증거가 있냐고?” “대사제께서 증언을 해주시면......” 대사제는 딱 잘라 거절했다. “난 그럴 생각이 없어.” “고발할 것도 아니라면서 도대체 저를 데리고 이런 지저분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맥크니츠가 목청을 높였다. “말했잖아. 베트런이 다음 대 교하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손가락을 입술에 세워 말을 막은 대사제가 내쳐 말했다. “지금 교하나 자네 같은 사람은 교하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네. 케이티 신녀처럼 야심만만한 처자도 괜찮지. 하지만 그는 안돼.” 허리를 쭉 편 그가 형형한 눈빛을 보냈다. “근 백년을 신전에서 보냈다. 야심만만한 자, 어리석은 자, 우유부단한 자, 등등 수많은 사제들을 겪었지. 그런 자들 중에서 어떤 자들이 가장 해악을 끼치는지 아는가? 바로 편협한 자일세. 내 이때까지 살면서 베트런 만큼 편협한 자는 보지 못했다. 아니 말을 정정해야겠군. 그 만큼 편협하면서도 똑똑한 자를 보지 못했다. 거기다 지금은 때도 좋지 않아. 들어 봐!” 대사제는 양 손을 귀 뒤에 붙이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무언가 듣는 시늉을 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나는 들린다네. 앞으로 대륙에는 큰 변화가 생길 거야. 대제가 대륙을 통일한지 천년 만에 사회가 변하는 거지. 그런 중차대한 시기에 그가 교하가 되면 바룬교는 큰 화를 당할 거야.” 대사제가 눈을 뜨고 맥크니츠의 손을 꼭 쥐었다. *“내 한평생 편안히 보낼 수 있게 만든 신전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당부일세. 베트런이 성기사 빌바오를 앞세워 전장에 나갈 테니 자네도 전쟁터에 나가게. 그리고 기회를 봐서 그의 약점을 잡게. 정 안되면 죽여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대사제의 마지막 말이 맥크니츠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끝으로 대사제는 입을 다물었다. 삭신이 쑤시는지 허리를 매만진 그는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그를 두고 정원을 떠났다. 무책임하게도. 정 안되면 죽여 버리라는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다음날 신전은 떠들썩해졌다. 신몽(神夢)을 꾸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케이티신녀가 다시 신몽을 꾼 것이었다. 바룬신에게서 검을 하사 받았다는 그녀의 꿈은 참전을 하라는 신탁으로 받아들여졌고 양분된 여론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교하는 대만족이었다.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맥크니츠마저 전장에 나가겠다고 청원을 한 것이다. 그날 저녁 케이티는 사제서품을 받았고, 더불어 눈부시게 빛나는 갑옷을 받았다. 그 다음날. 이제는 성녀로까지 추앙된 케이티와 베트런사제, 그리고 십존의 일인 빌바오성기사를 필두로 이교토벌대가 구성되었다. *** 하이론은 막사에서 빈둥거리는 밤톨의 머리를 유심히 살폈다. 혹시나 하던 생각이 옳았다. 아에게 뿐 아니라 밤톨의 옆머리도 하얗게 새어 있었다. 소복이 돋아난 새치가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있었다. 검. 피를 마시는 마법검이 계속 신경을 자극했다. 그가 물었다. “그린하고 짝귀는 어디에 간 거냐?” “갑옷을 손질한다면서 대장장이에게 갔어요.” 로이가 대답했다. “불러 올까요?” 누워있던 콜드가 일어나 앉았다. “아니, 됐네. 그보다 자네 에고소드는 사용하나?” “아뇨, 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잘 생각했네, 절대 사용하지 말게.” 하이론은 심각하게 충고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그 검, 단순한 에고소드가 아닌 것 같아.” “그거야 당연하죠. 마나도 없이 피로 작동하는 마법검인데 단순할 리가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 이봐 카이어스 이리와 보게.” 하이론은 마침 막사로 들어서는 카이어스를 불렀다. 엘란(123) 다가오는 카이어스의 손에는 꽃이 잔뜩 들려 있었다. “왜?” 그를 부른 하이론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카이어스의 얼굴을 보고 손에 든 꽃을 보고 다시 얼굴을 살폈다. “자네 돌았나?” “왜?” “엘프가 꽃을 꺾는다는 소리는 내 들어본 적이 없으이.” “지금 봤잖아.” “그러게 하는 말이야. 자네 정말 돌았나? 어떻게 엘프가 꽃을 다 꺾나?” “인간들하고 같이 살기로 했으면 인간들에게 맞춰 살아야지. 그리고 꽃을 꺾어도 엘프는 엘프야.” “별일이다. 별일이야.”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다시 물었다. “그 꽃 세오나 줄 건가?” “당연하지.” “지극정성이군.” 옆에 있던 콜드가 하이론의 옆구리를 찔렀다. “할 말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하이론이 이마를 탁 쳤다. “아! 그랬지.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이오?” “마법검 말일세. 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아에게와 밤톨의 옆머리가 하얗게 센 거하며 이마에 늘어난 주름살하며.” “검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것 같네.” 셋이 머리를 맞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 대화속의 주인공 아에게와 짝귀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봐, 엘프친구. 잠깐 나와 보지.” 아에게가 말했다. 언제나 아에게 옆에 붙어 다니는 그린 대신인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짝귀도 헤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밤톨, 너도 나와라.” “무슨 일이세요?” 로이가 물었다. “애들은 알 것 없다.” “그래 애들은 이런 데 신경 쓰면 안 되지.” 의미심장하게 마주 본 둘은 사춘기 소녀처럼 키득거렸다. 둘이 무슨 음모라도 꾸미는 것처럼 속닥거린다면 카이어스와 하이론, 콜드는 심각하게 소곤거렸다. “짝귀 머리도 새었어요. 주름도 는 것 같고.” 콜드의 말을 카이어스가 받았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군.” “그래, 생명력!” 하이론의 낮은, 그러나 확신에 찬 음성이 불길하게 들렸다. 자신들의 얘기를 하는 지도 모르는 아에게와 짝귀는 신이 나서 밤톨을 붙들었다. 양팔을 한쪽씩 잡은 그들은 안 그래도 작은 밤톨을 달랑 들어올려 밖으로 나갔다. “좋은데 데려가 주마.” 아에게의 목소리가 천막 밖에서 들려왔다. 양 무리를 슬금슬금 살피던 로이는 은근슬쩍 나가서 아에게일행을 쫓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장본인들이 사라지자 하이론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검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면 저 놈들 몇 년 안에 죽을 거야.” “일단 좀 더 두고 봅시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 카이어스는 좀 더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들이 워낙 검에 홀려 있어서 충고가 먹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차후에 명확한 징후가 나타나면 그때 가서 충고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검을 뺏어서 부러뜨려 버릴 작정이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자 하이론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 잠시 버둥거리던 밤톨은 풀려나기를 포기했는지 움직임을 멈추며 말했다. “따라갈 테니까 좀 내려줘. 주위에서 보잖아.” 아닌 게 아니라 주변의 용병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멋쩍게 웃은 아에게가 슬그머니 밤톨을 놓아주었다. 그들이 밤톨을 데리고 간 곳은 십여 대의 마차가 빙 둘러선 곳이었는데 그 마차의 주변에는 50개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천막 앞에는 수많은 용병들이 일렬로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줄은 마차 앞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삼십 분 꼴로 바지를 치켜세운 용병이 나오면 가장 앞줄에 서있던 용병이 안으로 들어갔다. 전장을 찾아다니는 매춘부들이 돈을 쫓아 나타난 모양이었다. 밤톨이 대번에 인상을 그렸다. “난 갈 거야.” 그런 그를 짝귀가 잡았다. “이봐, 부끄러워 할 것 없어.” “누가 부끄럽다고 그래.” 큰 소리로 시작하던 밤톨의 음성은 주변의 눈치 때문에 점차 잦아들어서 종래에는 모기소리처럼 가늘어졌다. 마찬가지 이유로 짝귀의 음성도 작아졌다. “여기는 전쟁터야. 재수 없으면 내일이라도 죽는단 말이야. 총각인 채로 죽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아?” “누가 총각이란 거야?” 밤톨의 얼굴이 시뻘개 졌다. 아에게는 그 반응을 보고 그가 숫총각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럼 아냐?” 짝귀가 은근하게 반문했다. 밤톨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이 나이 먹도록 여자근처에도 못 가본 것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그는 한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있더니 발딱 고개를 들고 눈을 부라렸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짝귀는 밤톨과 달리 당당하게 시인했다. “그래 나 총각이다. 그러니까 지금 딱지를 떼겠다 이거야.” 의미심장하게 웃은 그가 밤톨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보수 받은 거 그대로 갖고 있지?” “응.” 아이언오거의 돌격대는 보수로 2골덴의 주급을 받는데 그는 쓸데가 없었으므로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꽤 큰 돈이 되어 있었다. “가자.”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밤톨의 어깨를 탁탁 두드린 그는 앞장서서 마차로 향했다. 잔뜩 굳은 얼굴로 그를 따라가는 밤톨이 아에게에게 물었다. “그린은?” 이런 일은 동행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나는 법. 그린이 보이지 않자 그의 행방을 물은 것이다. “몰라. 마차에서 여자들이 내리는 걸 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던데.” 아에게는 다정하게 밤톨의 어깨를 안았다. 셋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다 마차 앞에서 흩어져 적당한 줄을 골라 그 끝에 섰다. 가장 오래된 직업의 하나가 매춘부라던가. 도시의 빈민가에도 창녀촌은 있었고 빈민가에서 잔뼈가 굵었던 로이는 마차촌을 보는 순간 저 것이 무엇 하는 곳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어서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했지만 이제는 청년으로 성장한 로이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탁. 그런 그의 등을 누군가가 때렸다. 무슨 큰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로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뭐 하냐?” 자신의 등을 때린 사람은 카이어스였다.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냥......” 할 말이 궁했던 그는 말을 흐렸다. “나머지 놈들은 어디에 갔냐?” 아에게 등의 행방을 묻는 것이다. “모릅니다.” 로이는 왠지 그들이 저 곳으로 갔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너 그놈들 따라간 것 아니었냐?” “아닙니다.” 로이는 절대 아니라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 크게 휘저었다. “그럼 왜 여기서 기웃거리는 거냐?” “누가 기웃거렸다고 그래요.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펴본 거지.” 그러고 보니 주위는 붐비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지 뭘 그러고 섰어.” 시원하게 말한 카이어스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는 그를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카이어스 어디 가나?” 세오나의 오라비 스시악이었다. 그의 뒤에는 부족민 둘과 세오나까지 서 있었다. “저기 가 보려고.” 카이어스는 반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러나 세오나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꽃을 내미는 그를 쏘아본 그녀가 말했다. “발정 난 수캐처럼 돌아다니는군.” 한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저는 이만 갈게요.” 안 그래도 불편했던 로이는 고개를 꾸뻑 숙이고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뛰어갔다. 꽃을 내민 자세로 한동안 가만히 있던 카이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내렸다. “꽃을 싫어하는가?” “당신을 싫어하지!” “흠흠, 이러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 스시악이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는 카이어스와 동생이 맺어지기를 은근하게 바랬다. 자신의 목숨을 빚진데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같은 전시에 저만한 처남감도 없다 싶었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다리를 놓아줄 생각은 충분히 있었고 그럴 목적으로 카이어스를 찾아 나섰는데 오늘은 자리가 좋지 않았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났을까. “일 없어요.” 팩 하니 돌아선 세오나는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겅중겅중 걸어가 버렸다. “허, 참 성질하고는.” 멋쩍게 웃으며 콧등을 매만진 스시악은 카이어스의 손에서 꽃다발을 받아들며 충고를 던졌다. “꽃은 내가 전해줌세. 웬만하면 이런 곳에는 발길을 들이지 말게. 최소한 세오나 눈에 띄지는 말던가.” 막사로 돌아온 카이어스는 하이론을 붙들고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의 말투는 하소연에 가까웠다. 그에 대한 하이론의 반응은 웃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싱글거리기만 했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걸까요?” 바람난 수캐 운운한 말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하이론은 보지 않아도 마차촌이 무엇하는 곳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죽음과 공포, 그리고 살육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그런 식으로 성욕을 풀어주지 않으면 큰 사고가 생길 수도 있었다. 특히 민심을 얻어야 하는 입장에서 양민들을 덮치기라도 한다면 큰일 인 것이다. 하이론은 차근차근 설명 해 주었다. 듣고 있는 카이어스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검어졌다. “로이! 이 자식, 너 알고 있었지?” 불똥이 결국은 로이에게까지 튀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는 냅다 뛰었지만 소드마스터의 날랜 몸놀림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단 두 걸음 만에 잡힌 로이는 꿀밤 두 대를 얻어맞고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엄살이 먹혔는지 카이어스는 그를 놓아 주었다. 굵은 팔에서 겨우 풀려난 로이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엄살이 섞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아팠던 것이다. “자네 왜 그렇게 세오나에게 집착하나?” 하이론이 물었다. “나도 가정을 가지고 싶어서.” “가정을 가지고 싶다.” 하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백년 동안 외롭게 살았으니 그렇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럼 꼭 세오나가 아니라도 되겠네?” “꼭, 그 여자일 필요는 없지만.” 카이어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다시 말했다. “여기 그 여자 말고 또 누가 있나?” 하긴 그랬다. 전쟁터의 특성상 순 남자들뿐이었으니 신부감을 찾기도 곤란하게 되었다. 거기다 카이어스의 덩치를 생각하면 세오나만큼 어울리는 여자도 찾기 힘들리라. 로이는 머리를 매만졌다. 꿀밤을 맞은 부위는 어느새 부어올라 주먹만한 혹이 생겼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말했다. “그 여자들 중에서 한 명 골라잡기 그래요?” “그 여자라니?” 혹이 생겨 퉁퉁 부어 있는 로이가 좋은 말을 할리 없었다. 그는 밖으로 뛰며 소리쳤다. “마차촌의 아가씨들 있잖아요!” 하이론은 어린놈이 별 소리 다한다고 호통을 치려는데 카이어스는 로이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정말 그럴까?” 밤톨은 로이가 권한 그 여자들 중 한 명과 마주 앉아 있었다. 잔뜩 굳어서는 한겨울의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가씨는 두껍게 바른 화장 때문에 창백하게 보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고 끝이 갈라지기는 했지만 세월에 찌든 얼굴에 비한다면 인상적이라 할만했다. “빨리 해요.” 그녀는 어서 끝내고 나가라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극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밤톨의 긴장은 높아갔다. “뭐하는 거예요?”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그냥......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요?” 붉은 머리가 피식 웃었다. “아저씨 처음이야?” 밤톨의 볼이 아가씨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졌다. 푹 숙인 그의 뒤통수로 그녀의 말이 떨어졌다. “내가 첫상대라 이거지. 이야, 이거 영광이네.” 그녀가 스스럼없이 옷을 벗었다. 직업상 겉옷 하나만을 입고 있었던 지라 그녀는 금세 알몸이 되었다. “이리 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밤톨의 귀를 간질였다. 그리고 아찔한 육향이 훅 하고 밀려왔다. *** 혼자 떨어져서 통신을 하고 온 이베는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는지 기쁜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말했다. “속도를 높여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엘란이 물었다. “내일 총공세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베가 공손히 대답하자 에단이 중얼거렸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자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뭔가 중요한 상황변화가 있는 듯 했다. “엘리오트가 카톤협곡에서 스트빌라이군을 격파하고 북상중이랍니다.” 이베의 입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이제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양쪽에서 방어선을 돌파당한 스트빌라이는 큰 위험에 빠졌고 전쟁은 성공적으로 끝날 듯 했다. 자신의 자식들은 배를 곯을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에단은 상층부의 생각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적들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이 참에 밀어버리려는 것이리라. 아울러 엘리오트가 몰려오기 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뜻도 있을 것이고. 엘란의 생각은 달랐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뇌리를 자극했다. “빨리 갑시다.” 엘란이 고삐를 챘다. 그가 탄 말이 두 발을 번쩍 들어올려 투레질을 하더니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우리도 갑시다.” 그를 따라 용병들과 훈족들도 달렸고 코티즈도 늦을세라 박차를 가했다. 그는 당분간 광술사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가 혼란해지고 기존의 체계가 뿌리채 흔들린다. 당연히 큰 돈을 벌 기회도 생길 것이다. 그의 의도는 그 기회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엘란(124) 이베가 기분 좋아하던 그 시간에 적법사 아만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무엇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중 가장 내키지 않은 일은 전쟁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스트빌라이가 이대로 무력하게 쓰러질 리가 없었다. 무언가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전황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 때에 포크를 들이밀어도 충분히 전리품을 챙길 수 있는 것을, 무엇 하러 진흙탕에 발을 담가서 같이 뒹굴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다 무능한 황제 때문이요 머릿속에 뇌세포는 없고 근육만 뭉쳐져 있는 기사들 때문이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하나의 계획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먼 훗날을 내다보는 계획이. 그가 문뜩 떠오른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 황실마법사 샤른이 헛기침을 했다. “황제는 마스터께서 참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얼간이! 바보 같은 놈!” 적법사가 직설적으로 욕을 늘어놓자 샤른은 민망한 나머지 시선을 돌렸다. 적법사는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황실로 들여보낸 그를 책망하듯 바라보았다. “자네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내 지금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누누이 일렀지 않은가?” “저도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만 대공과 베니토백작이 워낙 강경하게 설득을 하고 느닷없이 실레아가 저 쪽으로 붙은 데다, 엘리오트군이 카톤협곡에서 스트빌라이군을 박살내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젠장!” 눈치를 살피던 샤른은 조심스럽게 의중을 물었다. “어찌 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황제의 명령까지 내린 마당에.” 한숨을 푹 내쉰 적법사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전쟁에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샤른은 곤혹스런 얼굴로 말을 흐렸다. 황제가 마법사의 탑과 적법사를 직접 지정한 이상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황실의 눈에 반역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적당히 둘러대면 되네. 음......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그래, 8써클 마법을 연구하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게. 그러면 뭐라 그러지는 못할 게야.” “믿을까요?” “안 믿으면 어쩔 건가.” “그럼 누가 탑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갑니까?” “글쎄. 누가 좋을까.” 적법사는 턱을 매만지며 장고에 들어갔다. 샤른이 지루하게 적법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치켜 깎은 여자가 들어왔다. 목까지 꽉 채운 단추가 빈틈없는 성격을 보여주는 그녀는 적법사의 딸 레오니아였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마치 둘의 대화를 들은 듯한 말이었다. 적법사의 눈꼬리가 부자연스럽게 휘어졌다. “탑에 있거라.” 조금은 퉁명스런 말투였다. “아버님이 전투에 참가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나는 참가하지 않는다.” “그럼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버님이 안가면 저들이 싫어할 겁니다. 최소한 저라도 참가해야 뒷말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뒷공론은 신경 쓰지 않는다.” “제 생각에는 레오니아가 참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둘의 대화를 경청하던 황실마법사 샤른이 끼어들었다. “보내주십시오.” 그녀가 재차 청했다. 적법사는 딸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요번 일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주전론을 내세운 대공이나 광휘기사단장의 입을 인두로 지져버리고 싶을 만큼. “조심하거라.”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레오니아가 기쁜 얼굴로 돌아가자 샤른도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한 시름 덜은 기분이었다. 샤른을 보낸 적법사는 지그달로를 불렀다. 건들거리며 들어온 그는 불평부터 늘어놓았다. “전 싫습니다.” “싫다니?” “전 전투에 나가기 싫습니다.” “싫어도 가!” “싫다니까......” 적법사의 로브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자 지그달로는 끝말을 삼켜야만 했다. 한 달 전에도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가 팔이 부러졌었다. “전투가 벌어지거든 세 번, 네 번 생각해라. 절대 나서지 말고.” 적법사는 두 시간이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전투는 초반부터 전면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하늘에서 화살비가 내렸고 온갖 종류의 공격마법과 정령들이 저마다의 위용을 뽐내었다.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고 공중망루도 성벽에 맞대이자 치열한 전투가 성벽에서 벌어졌다. 올라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자와 기어이 성벽위에 발을 디디려는 자 사이의 백병전은 성벽전체를 피로 물들였다. “전투가 여의치 않으면 모든 병력을 뒤로 물리시오.” 흑법사가 명령투로 말하자 단칸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투와중에 무슨 재수 없는 소리요.” “레인후작의 명령이오.” 단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카스 레인후작이 미리 내려놓은 명령이라면 훈족이 이곳까지 밀고 내려오기 전에 그런 명을 내렸다는 것인데, 그것은 전투에서 진다는 것을 가정하고 한 명령이라 할 수 있었다. 십존의 둘과 그들의 제자. 거기다 빌로린기사단에다 지방영주들의 군사까지 징발을 했는데 그런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왜 후작은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아니 왜 전투에서 밀린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는 도저히 확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작은 이 전투에서 진다고 생각하고 계시오?” “쉬운 전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적들은 예상외로 강하오.” 묘한 웃음을 머금은 흑법사 로피드는 단칸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애초에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단칸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요소들이 이 전쟁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강한 인상과 함께 따돌림 받는 것 같은 소외감이 가슴을 맴돌았다. “애초의 목적이 뭐요?” “이 전투의 목적은 시간을 버는 것과 저들의 진을 최대한 빼서 가능한 한 많은 타격을 입히는 것이오.” “여기서 끝장을 보는 것이 낫지 않소?” 단칸은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자꾸 영토 속으로 전선을 물리는 것은 될 수록 피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판단이었다. 주민들의 동요뿐 아니라 지방영주들의 이탈도 감안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장이 수도와 가까워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조만간 대반격이 시작될 테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흑법사는 고개를 까딱거려 무성의한 인사를 남기고는 하늘로 솟구쳐 버렸다. 그가 가 버리자 심사가 뒤틀린 단칸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물러서지 마라. 전원 옥쇄할 각오로 적들을 막아라.” 그의 고함에 따라 절대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이 북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전투에나 집중하세요.” 세오나가 말했다. 그 말투가 그다지 차갑지만은 않았으므로 카이어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당신도 조심해.” 그의 말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말투가 너무 닭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한눈을 팔다 화살을 맞을 뻔한 그녀는 콧등을 찡그리며 카이어스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생전의 부친이 전사로 키우는 바람에 평생 검만 끼고 살아서 연애경험은커녕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은 남자도 없었다. 사정이 그랬으므로 그녀는 그가 불편했다. 저돌적인 접근이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도대체 어찌해야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카이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엘프의 숲에서도 외따로이 살았고 겉돌았던 그는 인간들의 사회도 쉬이 녹아들 수 없었다. 특히 맘에 맞는 여자를 찾아 가정을 꾸미려는 일은 영 진척이 없었다. 답답할 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의식하며 전투에 참가했고 자연히 신경이 분산되었다. 귀중한 소드마스터를 자신이 끌고 다니는 꼴이 된 세오나는 녹록치 않은 공성전을 살피며 그에게 소리쳤다. “돌파해요.” 그가 자신을 보며 머뭇거리자 그녀가 앞장서서 달렸다. 방패를 머리위에 씌운 채. “같이 갑시다.” 카이어스가 그녀를 따라 뛰자 아이언 오거의 돌격대도 함성을 지르며 성을 향해 질주했다. 달려가는 카이어스를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백법사였다. “자네가 흑법사 좀 맡아주게.” 대답도 듣지 않은 백법사는 카이어스를 지나쳐 성문 쪽으로 날아갔다. 카이어스는 고개를 들어 공중을 살폈다. 공중망루 위에서 길라드와 싸우고 있는 용병왕의 옆으로 시커먼 로브를 두른 자가 나타났다. 흑법사 로피드였다. “조심하시오.” 카이어스는 자신을 지나쳐가는 세오나와 돌격대의 대원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는 몸을 뽑아 올렸다. 한 번의 도움닫기로 30미터까지 솟구친 그가 쌍칼을 부딪쳐갔다. 오러를 머금은 두 칼이 마주치는 순간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두 개의 오러탄이 날았다. 흑법사는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노란 빛이 일렁이는 구(毬)를 성문에 다다른 백법사에게 막 던지려 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오런탄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터였군.” 짤막한 감상을 내뱉은 그가 공을 뿌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아간 공은 곧 오러탄과 마주쳤다. 폭음이 터지고 양쪽의 힘이 소멸하는 순간, 카이어스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이번에는 쐐기형이 아닌 반원의 길쭉한 오러탄이 날았다. 흑법사를 노리고. 카이어스가 흑법사의 발목을 잡는 사이 성문에 당도한 백법사는 즉시 혼돈의 구슬을 끄집어냈다. 다섯 개의 구슬은 모습을 드러낸 즉시 오각형의 모양을 만들더니 그 모습 그대로 날아가 성문을 강타했다. 쾅. 무시무시한 폭음이 천지를 갈랐지만 성문은 부서지지 않았다. 백법사는 한 번의 타격으로 성문이 부서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마나를 들이킨 그는 성문을 때린 후, 문에 몸체를 갖다대고 있는 구슬을 움직였다. 오각형을 이룬 구슬은 원형으로 대형을 바꾸더니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구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며 점점 속력을 더하자 구슬의 모습은 사라지고 한 줄기 붉은 선만이 원형을 이루었다. 붉은 선은 점차 푸른빛을 더해갔고 시간이 갈수록 문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백법사의 두 손이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갔다. 파이어 볼. 집채만 한 화염의 구가 그의 손짓에 따라 앞으로 치달렸다. 긴 불꽃을 토하며 날아간 파이어 볼은 구슬이 만든 원의 중앙을 두들겼다. 쿠우웅! 이번 폭음은 전과는 달랐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묵직하게 울려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백법사의 신형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의 앞에 푸른 색 막이 어른거렸다. 실드였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몸, 아니 푸른 색 막이 문과 마주치는 순간 촤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터져나갔다. 문에 걸린 온갖 마법은 깨어진 상태였고 문 자체의 견고함도 이미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문을 돌파하고 들어간 그를 향해 쿼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백법사는 쿼렐들을 무시하고 내쳐 달렸다. 푸른 막에 부딪힌 화살이 튕겨져 나갈 때 그가 부순 문을 따라 용병과 훈족이 밀려들어왔다. 실드를 푼 백법사 타클마칸은 문 주변을 겹겹이 막아선 병사들을 향해 구슬을 날렸다. 특히 쿼렐을 든 자들을 향해. 구슬이 궁병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데는 채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전사들에게 길을 내어준 그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성벽위로 날아갔다. 장대로 사다리를 밀치거나 끓는 기름으로 훈족의 머리를 태우는 스트빌라이군을 한 순간에 휩쓸어버린 그는 성가퀴를 박차고 올라 길라드를 향해 에어 애로우를 날렸다. 화염의 길라드는 용병왕을 상대하다 느닷없는 공격을 받고 적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십존의 일원. 곧 평상심을 회복한 그가 카사를 불러 에어 애로우 하나하나를 쳐냈다. 독한 마음을 먹은 백법사는 이 참에 길라드를 죽여 버리려 했다. 그가 그런 생각으로 새로운 마법을 준비할 때 날카로운 기운이 뒤를 찔러왔다. 백법사의 몸이 핑그르르 돌았다. 실드를 쳐서 날아오는 것을 쳐내고 보니 두 개의 단검이다. 성 밑에서 던져진 것이 분명한 데 누가 던졌는지 분간 할 수 없었다. 성벽 위고 아래고 아군과 적군이 뒤범벅되어 너무 혼잡했기 때문이었다. 백법사는 몸이 다시 돌았다. 카사와 샐라멘더가 그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길라드의 제자들이 스승의 위험을 보고 달려든 것이었다. 단검을 던진 자는 고스만회전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에릭슨이었다. 화염의 길라드가 당하는 순간이 전투에서 패하는 순간임을 직감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검을 뽑아 던졌고 길라드가 한숨 돌릴 시간을 마련해줬다. 그러나 막상 백법사가 돌아보자 간이 오그라들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그는 백법사가 자신을 색출하려 눈을 빛내자 겁에 질려 적병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놀라기는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는 드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백법사가 단검을 던진 자를 자신으로 오해하면 그 순간이 죽는 순간인 것이다. 드레이크는 감히 백법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열심히 싸우는 척을 했다. 그러한 사정은 드웨이츠도 같았다. 에릭슨과 같이 황녀를 호위했던 그는 동일한 죄목으로 30년 시한의 충군(充軍)을 받았고 여기 크리누스로 배치되었다. 그 후 패잔병 무리에 섞여 들어온 에릭슨을 만났고-살아남아 복권을 이룬다는-드레이크와 동일한 목적을 위해 그를 따라다녔다. 그도 백법사가 주시하는 순간 화들짝 놀라 적병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적의 검에 목을 들이댈 뻔했다. 뜨거운 기운에 목을 돌리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잘려나갔으리라. 드웨이츠는 목을 만지며 불길한 검에서 얼른 떨어졌다. 자신의 목을 자를 뻔한 그 검은 희한하게도 혈광(血光)을 띠고 있었다. 핏빛을 퍼뜨리는 검의 주인은 아에게였다. 그도 이제는 이상한 감을 느끼고 있었다.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기에 적을 벨 때만해도 그립에 박힌 검은 돌만이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베어내는 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혈광이 짙어졌고 나중에는 검신자체에서도 붉은 빛을 발했다. 아울려 검을 조정하기도 힘들어서 적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검의 의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멈출 수도 없었다. 검은 저절로 움직여 피를 찾았고 시간이 갈수록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그럴수록 아에게는 허해졌다. 극심한 허기와 함께 노곤함이 그를 방문했다. 그러면서도 검을 뻗는 손길은 멈출 수가 없었다. 드웨이츠는 자신의 심장을 찔러오는 검을 신중하게 쳐냈다. 괴상한 검을 다루는 자의 검술은 보잘것없었지만 그 기운만은 강렬해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쩡. 예상이 맞았다. 그 검과 마주치는 순간 뜨거운 열기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몰려들어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쩡. 드웨이츠는 한 번 더 검을 쳐낸 후 뒤로 물러섰다. 그의 옆으로 에릭슨이 다가왔다. 백법사가 정문을 부수고 난입한 뒤부터 점차 전세가 불리해지자 단칸백작은 흑법사를 욕했다. 그가 재수 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밀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크게 숨을 들이 킨 그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물러서지 마라! 곧 증원군이 당도할 것이다.” 증원군은 없었다. 사기를 돋우러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스트빌라이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는 겨우, 겨우 적들을 막아내었다. 아이언 오거가 등장하기 전까지. 엘란(125) 저 멀리서 날아오는 붉은 색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는 흑법사 로피드였다. 그도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해가 지평선 밑으로 떨어지며 온통 붉은 낙조를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그 붉은 색이 급격하게 가까워져서야 그는 그것이 불의 중급정령 카사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더하여 그 밑에 매달린 자도. 아이언 오거. 그의 발밑에는 실피드가 있어서 속력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흑법사는 그에게 신경을 쓰다 하마터면 심장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연신 오러탄을 날려대는 해골두건 때문이었다. 성가시고 귀찮았다. 오늘 전투를 꼭 이겨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니는 것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밤을 지배하는 어둠의 힘이여......” 그가 본때를 보이려 주문을 외울 때 아이언오거가 다가가고 있었다. 엘란은 흑법사의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색 기류를 보고 심상찮은 마법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발을 받치던 실피드가 떨어져 나갔다. 넓게 퍼져 날아간 실피드는 검은 색 기류를 흐트러뜨리고는 손을 뻗어 흑법사의 발을 잡아갔다. 정령의 방해로 주문을 완성시키지 못한 흑법사는 짜증을 내며 위로 솟구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지팡이 끝에서 화염이 쏟아져 실피드를 그대로 덮어갔다. 격하게 부딪친 마법과 정령은 반대방향으로 튕겨지며 사라졌다. 엘란은 흑법사에게 실피드를 보낸 후 더 이상 그와 대거리 하지 않았다. 중급정령만으로는 그를 어찌할 수 없었던 데다 다른 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언 오거는 카사 둘을 더 소환해 잡고 있는 정령 옆에 배치시켰다. 성벽위에 올라선 용병왕과 여전히 하늘에 떠있는 길라드는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으면서도 긴장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서로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서로를 적당히 견제하면서, 간간히 정령과 오러탄을 날려 적군 중에서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이는 자를 처단하는 데 주력했다. 비등한 실력 때문에 죽이기 힘든 서로를 상대하는 것보다 그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 했다. 로이는 콜드와 한 조로 해서 움직였다. 하이론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한 데다 콜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때문이다. 둘이 싸우는 방식은 로이가 놈을 불러 적병의 다리를 움켜잡으면 콜드가 다가가서 목줄을 끊는 식이었다. 로이는 뺨에 튄 피를 닦았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보면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는 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밤톨과 짝귀는 어느 틈엔가 포위가 되어 있었다. 미친 듯이 움직이는 검을 따라 병사들을 베고 또 베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병사들이 창을 내질러 다리를 할퀴었다. 검이 기운을 뽑아가는 데다 피까지 흘리고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검이 말을 걸어왔다. <나에게 맡겨!> 악마의 속삭임같이 달콤하고 매혹적인 소리였다. 그는 엉겁결에 ‘그래’ 하고 허락하려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와 동시에 하이론과 카이어스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는 급히 도리질을 쳤다. 그래 라고 대답하는 순간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에게는 처음부터 밀렸다. 적은 검의 위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소드익스퍼터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실력을 가진 것 같았다. 저런 자가 어떻게 말단 보병으로 참전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팟. 마법검이 급히 움직여 상체를 가렸지만 적은 어느새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에릭슨은 덩치 큰 용병의 옆구리를 찢어놓으며 찬 숨을 들이켰다. 원래는 용병의 상체를 양단해 버리려 했는데 혈검이 방해를 했다. 아무리 봐도 저 검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이때까지 적을 죽을 기회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 번이 넘었는데 그때마다 검이 교묘하게 움직여 진로를 차단했다. 아울러 검에서 솟구치는 핏빛 열기와 섬뜩한 기운도 뻗어가는 손을 오므리게 만들었다. “사악한 놈이로구나.” 적은 얼굴에 둘러쓴 해골문양 두건과 함께 마신의 추종자처럼 느껴졌다. 에릭슨은 저 놈을 반드시 처단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마나를 들이켰다. 힘차게 휘둘러가는 에릭슨의 검에 영롱한 마나가 맺혔다. 아에게의 눈에 짓쳐드는 검이 들어왔다. 그 검은 강한 힘으로 마법검마저 흘리고는 일직선으로 뻗어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리 속이 하예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직 죽는구나 하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린이었다. 그가 적의 검신을 때려 죽음의 손을 빗나가게 한 것이었다. “고맙다.” 진정으로 고마웠다. 자신은 평소에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당당하게 죽이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치자 이런 식으로 개죽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온통 뇌를 점령했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고 결심하며 그립을 단단히 잡았다. 일단 자신의 목을 원하는 적부터 처리해야했다. 아에게와 그린은 평상시 연습한 대로 양쪽으로 갈라섰다. 적의 실력이 대단하니 양쪽에서 협공을 가할 생각이었다. 에릭슨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요악스런 검이 둘이나 자신을 겨누자 께름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드레이크와 드웨이츠가 다가왔다. 둘의 생각은 비슷했다. 저 검들이 욕심나서 에릭슨의 옆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물색 어두운 에릭슨이 알리 없었다. 그저 옆에 나서준 동료들이 고마울 뿐이었다. “가자.” 전의를 북돋우는 에릭슨의 고함을 신호로 양쪽이 움직였다. 경과는 뻔했다. 에릭슨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아에게와 그린은 드레이크와 드웨이츠까지 가세하자 연방 죽음의 위기에 몰렸다. 마법검의 위력으로도 확연한 실력차이는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검이 말을 걸어왔다. <나에게 맡겨!> 체이스는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황을 보면서도 불만이 많았다. 백법사가 성문을 깨고 쳐들어가는 순간 환호성을 울렸으나 적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벌써 수많은 용병들이 죽어나갔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크리누스 공성전에서 너무나 많은 동료들이 죽고 다쳤다. “이대로는 곤란해.” 앞으로의 진로를 감안하면 병력을 아껴야 한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그로서는 뾰족한 수를 낼 수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아이언오거가 떨어져 내렸다. 수십 명의 정령을 데리고. 엘란의 눈이 한순간 전장을 훑었다. 동료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 연신 죽음의 위기에 몰린 동료들의 모습이 들려왔다. “우와아~” 그가 고함을 질렀다. 저 뒤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단칸백작마저 움찔하게 만드는 고함이었다. 단칸의 귀에는 저 소리가 마치 드래곤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엘란의 몸 뒤에 배경처럼 늘어서 있던 정령들이 하늘로 비산했다. 그리고는 융단처럼 바닥에 깔려왔다. 가까이 가지 않고 창으로 밤톨의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를 내던 창병들의 머리를 카사가 내리 눌렀다. 병사들의 목이 뒤로 꺾여 대롱거렸다. 에릭슨은 아이언오거가 나타나는 순간 한 번만 더 휘두르면 베어낼 수 있는 덩치의 목을 놓아두고 얼른 뒤로 도망쳤다. 고스만회전에서도 그랬지만 저 자와는 절대 맞서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빼자 드레이크와 드웨이츠도 내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콜드는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고개를 드는 실피드를 보며 검을 늘어뜨렸다.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짝귀는 자신의 몸을 돌아 달려드는 창을 물리치며 쭉 뻗어가는 실프를 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지쳐서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그만 늦었더라면 적의 창이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지쳐 죽었을 것만 같았다. 체이스의 입가에 만족한 웃음이 걸렸다. “똥줄이 타나보군.” 크리누스까지 밀고 내려오는 동안 계속해서 몸을 사리더니만 부하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비로소 본 실력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의 활약은 상급정령을 소환하지 않는 것이 애석할 정도로 대단했다. 엘란은 카사를 불러들였다. 세 명의 카사가 그의 머리 위에 몰려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손을 들자 카사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서로의 어깨를 발톱으로 단단히 잡았다. 아이언오가가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가 카사의 발목을 잡자 세 명의 카사가 거대한 몽둥이처럼 변했다. 엘란은 그 몽둥이를 적병이 밀집한 곳에다 대고 내리 눌렀다. 비명과 함께 조각난 갑옷이 튀고 살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단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언오거가 가세한 순간 전세는 확연하게 불리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자신들만 몰살할 것 같았다. “후퇴한다!” 그의 입이 벌어지고 신음 같은 명령이 흘러나왔다. 북이 울리고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후퇴하라는 뜻을 담은 소리가 울리자 스트빌라이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마지막 체력을 짜내 빠르게, 그러면서도 일사분란하게 퇴각을 시작했다. “놓아주지 마라!” 체이스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저들을 놓치면 나중에 반드시 다시 싸워야 한다. 전황이 유리할 때 최대한 죽여야 했던 것이다. 흑법사는 파이어볼 열 개를 일시에 만들어 카이어스를 쏘아보았다. “마지막 선물이다.” 그는 뒤로 몸을 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에 따라 화염구가 줄줄이 날아들었다. 카이어스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칼을 횡단시켰다. 서슬 시퍼런 기운이 일어나며 달려드는 화염구를 그대로 쪼개 버렸다. “응?” 그는 괴상한 소리를 발했다. 줄줄이 날아들던 화염구가 갑자기 진로를 변경 성문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던 용병들의 머리위에 떨어진 것이다. 폭발음과 함께 떨어져 날아가는 팔다리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잘 있게.” 허탈해 하는 카이어스를 보며 씽긋 윙크까지 날린 그는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만 가세.” 길라드를 불러 그까지 동반한 채. 그러나 백법사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길라드를 견제만 하던 용병왕도 마찬가지였는데, 전투는 이미 승리로 기울었으니 이 참에 저 둘을 반드시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흑법사는 달려드는 십존의 둘을 뒤로한 채 황급히 전장을 이탈하다 아래를 보고는 인상을 그렸다. 이미 후퇴했어야 할 아군이 용병과 훈족에 발목이 잡혀 쉽사리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잉. 쯧쯧쯧.” 혀를 차댄 그가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마나를 깊숙이 들이마셔 숨을 고른 그는 마치 선을 긋듯 땅을 향해 지팡이를 움직였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지팡이를 따라 바닥에 긴 선이 그어졌다. 움푹 파이며 폭발하는 땅은 주변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엉켜 싸우던 용병과 훈족은 물론 아군마저도 일시에 몰살시키는 무자비한 마법이었다. 짓이겨지고 갈가리 찢겨진 살들이 긴 고랑을 따라 줄줄이 이어졌다. 아군까지 무더기로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흑법사의 마법은 엉켜있던 양군을 풀어 놓기는 했다. “어서 후퇴하라!” 단칸의 독려 하에 스트빌라이군은 진저리를 치며 퇴각했다. “헉헉!” 일시에 마력을 폭발시킨 흑법사는 혀를 빼문 채 헐떡거렸다. 지친 그를 향해 용병왕이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 위로 솟구친 용병왕의 검에서 짙푸른 오러가 줄기줄기 쏟아졌다. 정제된 살기와 함께. 흑법사는 길라드의 도움을 청하려 주변을 둘러보다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그를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개자식, 빠르기도 하네.” 점점 고갈되어가는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린 흑법사는 지팡이를 날려버렸다. 그로서는 최후의 방어요 공격이었다. 더 이상은 마법을 시전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팡이는 용병왕 쪽으로 쏘아지며 점점 크기를 부풀렸다. 경험이 풍부한 용병왕으로서도 무슨 마법인지 짐작 못할 생소한 마법이었다. 고작 일미터가 겨우 넘는 작달막한 지팡이는 용병왕의 목전에 당도하는 순간 십미터도 넘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흥!” 한줄기 냉소를 날린 용병왕은 하늘과 땅을 동시에 갈라버릴 것처럼 검을 내리그었다. 쿠아앙! 성이 들썩거릴 정도의 폭음과 함께 지팡이는 양쪽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지팡이는 쪼개지는 순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작아져 버렸다. 백법사는 양손에 혼돈의 구슬을 들고 흑법사에게 다가갔다. 그가 구슬을 던지려는 찰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 흑법사가 놀리는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이런 식으로 꽁무니를 빼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네만......어쩌겠나 지금은 도저히 자네를 상대할 수 없으니.” 그는 품에서 꺼낸 종이를 찢었다. 텔레포트스크롤이었다. 백법사는 급히 구슬을 던졌다. 한 순간 빛에 휩싸이는 그의 몸을 구슬이 뚫고 지나갔다. “죽였소?” 밑에서 용병왕이 물었다. “도망친 것 같소.” 그것으로 크리누스 공성전은 끝이 났다. 성을 방어하던 스트빌라이군 삼십만 명 중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십만에 불과했지만 훈족연합군측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연이은 공성전 속에서 훈족의 전사와 용병들도 거의 십만은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엘란의 돌격대원 열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아앗! 한 줄기 섬광과 함께 시커먼 자가 지척에서 나타나자 길라드는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하마터면 충돌할 뻔한 것이다. 손을 쓰려다 보니 나타난 자는 흑법사 로피드였다.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바짝 들이댄 흑법사가 속삭였다. “다음번에는 같이 도망갑시다.” 그 소리가 힐난같이 들려 길라드는 얼굴을 붉혔다. $.확산되는 전쟁. 어두운 밤이었다. 별들마저 고개를 숙이게 만든 어둠은 피레넨산맥 전체를 휘감고 돌았다. 베니토백작은 하늘마저 자신을 돕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코끝을 감도는 싸한 한기도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똑같은 상황도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엘리오트와의 전쟁을 적극 주장한 베니토에게 좋은 예감을 심어준 짙은 어둠이 전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샤른에게는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누구의 예감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황제의 명령이 그러했으므로. 광휘기사단의 휴고부단장도 기분이 좋았다. 역사에 깊숙이 몸을 담는 느낌. 자신의 진격에 따라 이제 전쟁은 대륙전체로 확산되는 것이다. 전화를 피할 수 있는 자들은 저 멀리 북쪽끄트머리에 처박혀 사는 엘프들이나, 산맥 깊숙이 숨어들어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는 드워프들 정도일 것이다. 아니면 사막의 벌레들이나. 탑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온 적법사의 딸, 레오니아는 딱히 기분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팽팽한 긴장감은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긴장감은 점차 고조되었고 그에 따른 두근거림이 심신을 사로잡았다. 엘란(126) 최우선 목표는 산등성이와 산 정상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감시진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고 그들의 주둔지를 급습하는 것이었다. 레오니아는 뒤에서 지시를 내리고 결과만 보고받아도 되는 입장이었으나 자신이 직접 일선에 나섰다. 대제의 무덤을 방문한 이후, 수련에만 몰두했던 그녀로서는 오랜만의 외출이요, 처음 참가하는 전쟁이라 얼마간은 들떠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녀를 따라나서게 된 지그달로는 산정에서 부는 찬바람이 언짢기 그지없었다. “레오나아님, 수장이 이런 소소한 일까지 직접 나서면 체면도 체면이지만 효율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기사들 눈도 있구요.” “그건 저도 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받기는 싫어요.” 그녀의 음성은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흩어져 산 이곳저곳에 뿌려졌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디먼은 망루의 턱을 밟고 올라서서 바지춤을 끄르는 비텔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소피 좀 보려는 거야.” “비텔, 소변은 내려가서 보라고.” “디먼 좀 봐주게. 이 추운 날에 겨우 오줌 한 번 누자고 40미터를 기어내려 가야겠나?” “그래도......” 디먼은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느끼며 더는 말리지 못했다. 늦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산은 거의 꽁꽁 얼어있었고 40미터 위의 망루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어도 찬 기운에 사타구니가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그는 소변은 내려가서 보라는 상관의 엄한 명령을 상기하며 다시 말리려다가 곧 포기해버렸다. 위에서는 잠을 쫓을 요량으로 그런 명령을 내린 모양인데 그런 어줍지 않은 명령까지 지키기에는 너무 춥고 고달팠다. 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지낼 그들에게 화도 치밀었고. 비텔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건을 꺼내 찬바람에 노출시키자 온 몸의 체온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젠장! 오라지게 춥네.” 오줌이 누기 싫어 물도 마시지 않았건만 근무시간만 되면 꼭 소변이 마려웠다. “발사.” 왼손으로 망루의 기둥을 잡고 오른손으로 물건을 잡은 그가 배에 힘을 줬다. 소변은 나오는 즉시 얼어붙어 고드름처럼 떨어졌다. 바지춤을 치켜세운 그가 턱에서 내려오는 순간 이상하게 잠이 왔다. “어, 왜 이렇게 졸리지.” “나도 졸려.” 둘의 눈꺼풀이 동시에 닫혔다. “처리하고 오세요!” 레오니아의 말은 상당히 정중했으나 분명한 명령이었다. ‘이래서, 전쟁에 나오기 싫었다니깐.’ 지그달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앞으로도 레오니아의 뒤치다꺼리를 하려니 골치가 아파왔다. 지금도 그렇다. ‘자신이 마법을 걸었으면 자신이 끝까지 마무리를 해야지.’ 잠든 병사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지그달로의 차지였다. 살인마가 나이고서야 누가 다른 이를 죽이고 싶겠나? 그는 연신 투덜거리며 망루에 내려섰다. 6써클 마법사의 슬립마법을 일반 병사가 버텨낼 리 없었다. 레오니아 바로 면전에서 물건을 끄집어냈던 병사는 입맛까지 다시며 달게 자고 있었다. “미안하다.” 진심을 담아 사과한 그는 무슨 마법으로 이들을 죽일까 고민하다가 레오니아가 내려가 버리자 급히 숏소드를 꺼내 병사의 목을 찔렀다. 곧 비릿한 피 냄새가 망루 안을 떠돌았다. 병사가 바지를 내려 오줌을 누는 바람에 크게 당황한 레오니아는 급히 망루를 벗어나 감시 진지로 들어섰다. ‘지그달로가 봤을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녀는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그가 봤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 시각, 헤이안은 감시기지 하나를 처리하고 두 번째 망루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지그달로와 바대로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즐거웠다. 대량 살상마법에 심취해 있는 그는 실전경험을 쌓고 싶었고, 그런 경험을 쌓는 데는 전쟁터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레오니아처럼 슬립마법을 걸지 않았다. 사일런스 마법을 써서 소리를 죽이고 에어 애로우로 심장을 터트려 버렸다. 망루를 정리한 그는 새처럼 날아서 나머지 병사들이 기거하고 있는 통나무집으로 스며들었다. 집 안에는 한 진지에 근무하는 20명가량의 병사들이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헤이안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이들을 어떻게 죽일까하는 끔찍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소한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말 입에는 재갈을 물렸고 발굽에다가는 천을 둘러놓았다.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준비상태를 점검한 베니토백작은 조끼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시계는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자.” 약속된 시간이 되자 그는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은 잔도를 따라 엘리오트의 주둔지로 스며들었다. 소리 없이. 리슈더남작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났다. 물을 마시려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휘잉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는 창문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움직이기가 싫어졌다. 따뜻하고 포근한 양모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이 그렇게 귀찮아졌다. 그는 옆에 누운 여자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여자가 콧등을 찡그리며 싫은 소리를 냈다. 그는 이번에는 엉덩이를 꼬집었다. “아이, 왜?” 잠에 취한 목소리에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투가 강하게 묻어 나왔다. “물 좀 떠와라.” 헤더는 화가 났다. 두 걸음만 걸으면 붉은 천이 덮인 탁자가 나오고 그 위에 놓인 주전자가 보인다. 그런데 리슈더라는 이 멍청이는 고작 두 걸음이 걷기 귀찮아 자신을 깨웠다. 성질 같아서는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하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저 놈은 귀족이고 자신은 그의 노리개에 불과한 것을.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이불 밖으로 나가는데 선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불길한 기운이었다. 관자놀이가 쿵쾅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주전자가 만져졌다. 그녀는 주전자를 들어올려 가슴 앞으로 당겼다. 그 모습이 마치 방패로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주전자가 곤두선 가슴을 문질렀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누구 있어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 침묵이 반가웠다. ‘하긴 누가 있을 리가 없지.’ 안심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목주위로 휘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언뜻 번쩍였다. 꽝. 툭. 주전자가 떨어지고 곧이어 머리가 떨어졌다. 주전자의 열린 뚜껑으로 차가운 물이 흘러나와 뜨거운 피와 섞일 때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리슈더는 물을 가져오라고 시키고는 선잠에 빠졌다가 연이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추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그는 조금 전 헤더가 느끼던 불길함을 지금 느끼고 있었다. 마치 불안을 퍼트리고 다니는 요정이 망치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는 것만 같았다. 그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폭발음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기습? 누가? 그는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이불을 던졌다. 이불이 쫙 펼쳐져 날아가는 사이 그는 침대 위 벽에 걸린 검을 잡았다. 검을 잡자 마음이 안정되며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는 민첩하게 돌아섰다. 이불이 떨어지고 짙은 어둠 사이로 한 줄기 선이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리슈더는 그 선을 향해 검을 디밀었다. 그러나 그 선은 이내 두 개로 갈라지더니 리슈더의 배 깊숙이 박혀버렸다. 목이 탔다. 배에서 화끈한 통증이 올라와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젠장, 물이나 한 잔 마셨으면 좋겠네.’ 마른 침을 삼킨 그의 몸이 침대위로 무너져 내렸다. 침대에 피가 홍건이 고이기 시작했다. “원, 참 이렇게 쉬워서야.” 광휘기사단의 부단장 휴고는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서 적의 반발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오트군의 방심과 자신들의 완벽한 준비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 예의 그 가면을 쓴 엘란은 성벽위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았다. 족히 15만은 될 듯한 긴 행렬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빼앗을 땅을 관리할 훈족의 전사들과 크리누스를 지킬 주둔군들이었다. 그리고 저 어딘가에는 지고교의 사람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속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봄 냄새. 공기에는 미약하나마 봄의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곧 새싹이 돋고 잎이 나오며 꽃이 필 것이다. 그의 눈이 아래를 샅샅이 훑더니 잠깐 동안 반짝하고 빛이 났다. 가면 속에서 웃음을 띠운 그가 몸을 돌려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크리누스성 바깥쪽은 아직도 시체들이 즐비했다. 성 안에서 죽은 병사들까지 실어내서 쌓아두다 보니 여기저기에 시체들의 산이 생겨나 있었다. 워낙 시체들이 많다보니 묻어줄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그저 천으로 덮어둘 뿐이었다. 아직 날이 차가워 썩지는 않았으나 곧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부패할 것이 뻔했다. 시체가 일단 썩기 시작하면 악취와 함께 돌림병이 창궐할 것이다. 그래서 백법사는 시체를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 삼삼오오 모여 명령을 들은 전사들은 시체들의 뒤처리를 위해 기름과 장작을 들고 흩어졌다. 조르주는 도처에 쌓여있는 시체들과 그것들 위에 불을 붙이는 병사들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약하디 약한 코리나가 저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들었다. 굳이 편안한 마차 안을 마다하고 마부석 옆에 앉은 코리나는 그의 걱정을 살만큼 약하지 않았다. 고난을 겪으면서 심지가 굳어졌고 신에 의탁하면서 마음의 의지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솟았다. 기름과 장작에 의해 타오른 불은 시체들을 자양분삼아 계속해서 몸집을 불렸다. 연기가 하늘을 휘감고 살타는 냄새가 천지를 뒤덮었다. 드르륵, 들창문이 열리고 나탈리가 고개를 디밀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다 와 가니 들어가 있거라.” 밖을 핼금거리던 나탈리는 잘려진 팔다리를 불속에 던져 넣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핼쑥해 졌다. 지고교도들을 태운 마차들이 부러진 채로 방치된 성문을 통과했다. 조르주가 어수선한 길을 따라 마차를 모는데 누군가 마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입니다. 숲에는 별일 없지요?” 흉측한 가면이 면전에 다가오자 깜짝 놀랐던 조르주는 엘란임을 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면을 쓴다더니, 그거 였구만.” “네.” “숲에는 별일 없네. 다 잘들 있지. 이번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면서?” “열 명이 죽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아이언오거단은 열명이 전사했다. 용병과 훈족의 희생자는 십만 명이 넘었으니, 수적으로 따진다면 별거 아니었으나 비율로 따진다면 사망률이 높게 나온 셈이었다. 엘란의 부재와 세오나를 따라다닌 카이어스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돌격대중 핵심전력이라 할 수 있는 아에게 등이 검에 휘둘려 동료들을 돌보지 못한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엘란은 희생자가 자기 때문에 생긴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귀로 코리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마차에 에쉴리가 타고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왜 여기로 오신 겁니까?” 엘란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용병대와 손을 잡아 이루어진 돌격대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물론 저들이 손을 내민 이유는 엘란 때문이었고 그래서 전쟁에 가담하는 교도들이 적더라도 별 불만을 표시하지는 앓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대가를 요구하기에는 멋쩍은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엘프의 숲에서 새로이 200명의 교도들이 파견되었고 에쉴리와 나탈리는 이 참에 엘란을 만나러 온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상당 기간 못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교도들 중에 코리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떠한 언질이나 연락도 없었고 전쟁터와 그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문을 느낀 엘란이 이 마차에 오른 것이었다. 얼굴을 드러내면 소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외투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쓰기는 했지만 엘란이 그녀를 몰라 볼 리 없었다. 그녀가 한참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교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요.” “도움이라면?” “치료마법을 조금 배웠습니다. 포션 제조법도 배웠구요.” “그러셨군요.” 엘란은 원초적인 광기가 충돌하는 이런 험악한 전장에 그녀를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반대를 표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음성에서 확고한 결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엘란은 조용히 물러나 마차 문을 열었다. “오빠!” 단번에 알아 본 나탈리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안겨왔다. “잘 있었니?” “나야 물론 잘 있었지.” 포옹을 푼 그녀는 양 옆구리에 손을 착 올리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안 본 사이에 한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많이 컸구나?” “밥을 많이 먹었거든.” 그녀는 쑥스러운지 코밑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언니는 여기 있어.” 나탈리가 가리킨 곳에 에쉴리가 누워 있었다. 무척 피곤했는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깨우려는 나탈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더 자게 내버려 두자.” 엘란은 그녀의 머리를 안아 무릎위에 올렸다.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지자 애틋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녀의 입가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 덜컹. 마차바퀴가 돌을 밟았는지 마차가 흔들거렸다. 그때 에쉴리가 눈을 떴다. 그녀의 손이 올라와 가면을 풀었다. 눈을 따라 따뜻한 정감이 흐르고 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나탈리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쳇, 애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입술을 뗀 에쉴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나탈리도 애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어. 시집을 보내도 되겠는걸.” 나탈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마차가 막사에 도착하자 코리나 말고도 예정에 없던 사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왜 왔어?” 하이론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들유들한 사람. 쟝이었다. “영감, 나 보니까 반가워서 괜히 그러는 거지.” “반가운 사람이 다 얼어 죽은 모양이다. 진짜 왜 온 거냐?” “영감 보고 싶어서 왔어.” 하이론의 얼굴이 괴상망측하게 변했다.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나 싶었던 것이다. “진짜야. 매일 싸우던 영감이 없어지니까 괜히 심심하더라고. 밥을 먹어도 소화도 안 되는 것 같고. 그래서 따라 온 거야. 혹시 알아 이번에 본 게 마지막이 될지.” 약간은 감격한 것 같던 하이론의 얼굴이 마지막 말을 듣고 확 일그러졌다. 마지막이 되다니? 이건 전쟁터에서 죽을 지도 모르니 만나러 왔다는 말이 아닌가! 어찌 들으면 꼭 죽으라는 말 같았다. “너 이 자식 솔직히 말해봐라.” 큰 소리로 말하던 하이론의 음성이 점차 낮아지더니 나중에는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아졌다. “너 여자 만나러 왔지?” 하이론은 여자교도들이 아무 상대도 안 해주자 여기에 온 것이라 생각했다. “틀렸어. 이젠 나도 그런 쪽으로는 담을 쌓았어.” “하!” 하이론이 코웃음을 날렸다. 하늘에 해가 두개라는 말은 믿어도 쟝의 저러한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정말이라니까! 이제는 여자라면 나도 지겨워. 놀만큼 많이 놀았고 멀리하다보니까 이제는 심드렁하다니까. 영감도 생각해봐, 내가 여자와 못 지낸 게 몇 년 짼지?” “정말이냐?” “몇 번을 얘기해야 믿겠어. 정말 이라니깐.” “두고 보면 알겠지.” 하이론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엘란(127) 그가 계속 불신을 표하자 쟝은 관심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처가 초라하네.” “임시로 만든 거라 그래. 곧 밑으로 내려갈 거거든.” “연신 밀어대는 것 보면 전황이 유리한 모양이야. 근데 카이어스는 어디 간 거야?” 다른 사람은 다 보이는데 그만 보이지 않았다. “요새 그 친구 청춘사업 하느라고 바쁘다.” “엥? 청춘사업?” “그래.” “누구랑?” “세오나라고 고스만 부족의 공주라더군.” 쟝은 헤 하고 웃었다. “그 놈 참, 공주를 꼬시고 있다고? 그 여자도 카이어스 좋아해?” “아니, 아직은 그만 좋아하고 있어.” “어디 남는 공주 또 없어?” “왜 너도 꼬셔보게? 관심 없다면서?” 하이론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야. 어! 저 친구들 안 본 사이에 새치가 많이 생겼네.” 쟝은 아에게와 그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의 귀밑머리는 하얗게 세어서 아주 도드라져 보였다. 하이론은 걱정이 한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검 때문인 것 같아.” “검이라니? 무슨 검? 혹시 마법검?” 하이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쟝은 내처 물었다. “제들한테 그 마법검을 줬다는 말이야?” “전쟁터에서 죽는 것 보다는 검을 갖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줬다.” “검 때문에 흰머리가 생겼다는 건 무슨 소리야?” “검이 피를 빨아먹는 건 너도 콜드의 경우를 봐서 알 테고. 검은 피 말고도 주인의 생명력도 빨아들이는 것 같아.” 하이론의 심각한 어조에 오싹 한기가 든 쟝은 몸을 움츠렸다. “무서운 검이네. 근데 왜 아직도 검을 갖고 있는 거야?” 아에게와 그린은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누가 훔쳐갈까 봐 걱정이 되는 지 오른 손으로 검갑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타일러도 보고 겁도 줘 봤는데 안 먹히더라.” “이러다가 검이 저 놈들을 잡아먹는 거 아냐?” “잡아먹히기 전에 회수해야지, 좀 더 두고 보고 정 안내놓겠다면 강제로 빼앗아서 분질러 버려야겠다.” “그러는 게 좋겠다. 자, 심각한 얘기는 그만하고 거기에나 가보자.” “거기라니?” “카이어스가 작업하는 곳 좀 안내해줘.” “네가 뭐 하러 거길 가는데?” 쟝은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그가 말했다. “엘프의 숲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도와 줘야지.” 하이론은 정말인가 싶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공주에게 수작을 부리려는 걸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안내나 해 줘.” 하이론은 쟝에게 끌려서 숙소를 나섰다. 하이론은 복면을 덮어 쓰고 쟝에게도 하나 씌워주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그렇게 한 동안 걸어가더니 우뚝 멈춰 서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아주 키가 작아서 난쟁이라 불리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지 중 하나가 없는 불구, 얼굴이 얽은 곰보, 언청이들도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너 하고 같이 온 사람들이냐?” “맞아. 전쟁터에서 부릴 사람들이라고 들었어.” “어째서?” 하이론은 의문을 발했다. 저 사람들의 형편을 보면 도저히 전쟁에 참가할 수 없었다. 특히나 팔이나 다리 한 쪽이 없는 사람들을 왜 전쟁터로 끌어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인간적이란 생각이 그의 분노를 자아냈다. 쟝도 그런 의문이 들었었고 그래서 훈족에게 물어 저 사람들을 전장에 데려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너무 열 낼 것 없어. 싸우라고 데려온 것이 아니라 허드렛일을 시키려고 데려온 거야.” “허드렛일?” “그래, 전장에는 싸우는 일 말고도 많은 일들이 있잖아. 짐을 옮기고 식사를 준비 한다던가 장부를 정리한다던가 말을 돌본다던가 하는 일들 말이야. 병사들은 싸우는 데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일들은 저 사람들에게 맡는다고 그러는 것 같았어. 용병대 쪽하고도 얘기가 된 모양이던데. 곧 우리 부대에도 몇 명이 할당되어 내려올 거야.” 하이론은 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불만이 남았다. “그래도 위험한 곳에 저런 사람들을......” “저 쪽에서는 특별히 생각해서 뽑은 거라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봐서 알겠지만 저기에는 맹인도 있고 농아도 있어. 형편이 저러니 당연히 일자리를 잡을 수 없고 하루 걸어 하루 굶는 다더군. 그래서 일거리를 주려고 뽑은 거래. 위험한 전쟁터에 여자들을 데려와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 뭐 서로 서로 좋은 일이다 이거지.” “딴은 그렇구나.” “어!” 완전히 승복한 하이론이 걸음을 옮기려는 데 쟝이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래?” 하이론이 물었다. “저기, 아는 사람이 지나 간 것 같은데.” “누구?” “방금 저 마차 안으로 들어간 사람.” 쟝이 가리킨 마차에는 난쟁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잘못 봤겠지.” “그런가.” 어깨를 으쓱거린 쟝은 그 곳을 벗어났다. 전쟁이 터지고 이패이시스라인을 돌파한 훈족이 아래로 밀고 내려오자 크리누스에서 살던 귀족들은 모두 수도로 피난을 가버렸다. 그래서 귀족들의 대저택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오나는 고스만부족의 공주라는 신분에 걸맞게 어느 거창한 귀족가의 저택에 거처를 마련했다. 쟝은 높다란 담장 밑을 걸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지들은 이런 좋은 곳을 차지하고 우리들한테는 그런 천막에다 숙소를 만들어.”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담장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곧 떠날 건데 아무 숙소나 어떠냐.”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잖아.” 계속 투덜거리던 그는 정문 앞에 당도해서 입을 다물었다. 굵은 쇠창살로 만들어진 대문이 열리고 카이어스가 모습을 드러낸 때문이다. 그의 뒤에서 따라 나오는 키 큰 여자가 쟝의 시선을 붙들었다. 잠깐 그녀를 관찰하던 쟝이 입을 열었다. “매력적으로 생겼는데요.” “쌀쌀해서 그렇지. 이쁘긴 하지.” 쟝은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카이어스를 불렀다. “어이, 카이어스 오랜만이야.” 카이어스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온다는 소리는 못들은 것 같은데.” “숲에만 처박혀 있자니 답답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자네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나와 본거야. 나 보니까 반갑지?” 쟝이 느끼하게 웃자 카이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식. 부끄러워 하기는.” 쟝은 둘을 향해 걸어갔다. “이 아가씨가 요즘 작업 중이라는 훈족의 공준가?” 카이어스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아가씨 이름이 뭐지?” “세오나.” 하이론은 너스레를 떨려는 쟝의 등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질렀다. 세오나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읽어낸 때문이다. 그러나 쟝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뒤로 손을 둘려 하이론의 손등을 쌀쌀맞게 짤싹 때린 그는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이 친구가 귀가 없어서 그렇지 아주 멋진 남자야. 괜히 퉁기지 말고 잘 해보라구. 게다가 이 친구 보기엔 이래도 엘프야.” 쟝은 세오나에게 바짝 다가가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였다.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유일한 엘프지. 생각해봐! 엘프와의 잠자리. 짜릿하지 않아?” 세오나는 짜증이 나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찾아와 죽치고 앉아 있는 카이어스가 짜증났고 같이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등을 떠다미는 오라버니도 짜증났다. 그런 상태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 기름통에서 막 꺼내온 것처럼 느끼하고 번질거리는 이 남자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귀가 간지러워진 그녀는 기름덩어리의 얼굴을 살며시 밀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쟝은 흐뭇해졌다. 이 아가씨가 자신의 충고를 들을 것 같아서였다. 쟝은 그녀를 마주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 순간 코가 빠개지는 것 같은 아픔이 뇌를 흔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넘어가는 쟝의 코에서 피가 뿜어졌다. 주먹질 한 방으로 쟝을 혼절시켜 버린 세오나는 손을 탁탁 털며 돌아섰다. 코뼈가 주저앉아 헤롱거리는 쟝과 눈살을 찌푸리는 카이어스를 내버려두고. *** $.반격. 프르덴틀후작은 보고 있던 보고서를 와락 구겨버렸다. 나쁜 소식이었다. 아군이 승승장구하며 스트빌라이를 유린하는 지금, 그 기쁨을 일시에 날려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보고였다. 피레넨산맥을 돌파한 피요르드군이 엄리처지방을 장악하고 그 마수를 카르덴지방으로 뻗치고 있다는 급보는 연일 승전보를 보내는 아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개자식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이었다. 피요르드황제를 갈아 마시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젠장!”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곧장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두 시간 후 황궁에는 이른바 핵심권력자들이 모여들었다. 침통한 분위기였다. 후작이 이미 피요르드의 습격을 알린 때문이었다. 욀무트 백작은 붉으락푸르락하는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막스경과 시드경을 불러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는 스트빌라이로 쳐들어간 철혈기사들과 정령사들을 회군시키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불편한 공기가 회의실을 떠다녔다. “너무 아깝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마따나 너무 아까웠다. 스트빌라이를 집어삼킬 아주 절호의 기회인데 멍청한 피요르드놈들 때문에 천금같은 기회가 물거품이 되려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대륙을 제패할 수도 있는데......입맛이 썼다. 이런 절호의 기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것이라 천년 동안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거암(巨巖)처럼 언제나 진중하게 자리를 지키는 붉은 도끼단의 카를후작도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가장 안타까운 자는 물론 프르덴틀후작이었다. 연이은 승전의 주역이 막스였고, 따라서 전쟁이 승리로 막을 내릴 경우 가장 큰 상을 받을 자도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니벨백작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양쪽으로 전선이 생기면 전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오직 가빈백작만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잘나가던 프르덴틀가에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급제동이. 그는 세심하게 표정관리를 하며 애석하다는 뜻을 표현했다. “피요르드가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군요. 이 기회에 아예 본때를 보여 줍시다.” “본때라니 무슨 소리요?” 메테르니히대공이 물었다. 가빈백작은 힘주어 말했다. “걸핏하면 뒤통수를 때려대니 이 기회에 단단히 혼을 내주자는 말입니다.” “쳐들어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욀무트가 물었다. “저들이 먼저 쳐들어왔지 않습니까? 침략군을 작살내고 그 여세를 몰아 황궁을 접수하는 겁니다.” “말로는 뭔들 못하겠습니까만 지금 전력으로는 무립니다.” 프르덴틀이 침통하게 말을 받았다. “일단 외교적인 노력을 해 봅시다.” 카를이 말했다. “외교적인 노력으로 되겠소?” 황제는 카를의 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냈다. 이미 국경을 돌파한 마당에 좋은 말로 물러가라고 해서, 물러갈 놈들이 아닌 것이다. 저 음흉한 피요르드 놈들은. “일단 해볼 건 해봐야죠.” “그럼 막스쪽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더 이상 스트빌라이 안 쪽으로 파고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겁니다.” “카르덴쪽으로 향하는 피요르드군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카르덴을 지나면 롬바르다까지는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카를의 말에 회의장안은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그가 기사단을 이끌고 수도를 떠난다면, 언제나 황제 주위를 지키는 붉은 도끼단으로서는 근 200년 만의 외출이 되는 것이다. “그게 좋겠군요.” 프르덴틀후작이 찬성하고 나섰다. 카를이 피요르드를 막고 막스가 스트빌라이의 숨통을 끊으면 만사형통인 셈이었다. “나도 같이 가겠소.” 공작도 흥분해서 소리쳤다. 가빈이 떨떠름한 가운데 회의의 결과는 그렇게 매듭지어졌다. 일단 외교적인 노력을 경주해 보고 말이 먹히지 않으면 카를후작이 저들을 치는 것으로. 후작은 먼저 일어서서 자리를 떠났다. 교섭이 결렬되면 카르덴을 향하는 피요르드군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였다. 수도의 방위는 레드드래곤기사단을 이끄는 가빈과 검은 독수리의 수장 프르덴틀후작이 함께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삼십 분 후 막스는 피요르드의 침공과 회의의 결과를 보고받으며 탁자를 걷어찼다. 한달, 아니 삼주의 시간만 주어져도 스노우를 틀어쥘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서 발이 묶이다니. 원통하고 비통했다. 분이 치밀어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엥겔스!” 그의 목소리에서 열화가 치솟았다. *** 나탈리는 사냥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히히거리고 웃었다. 그녀의 앞에서 딴청을 부리던 로이는 그 소리를 듣고 한 순간 몸이 굳었다. 전장으로 괴상망측한 마차가 나타난 이후로 낯이 뜨거워서 여자들 얼굴 보기가 불편해졌다. 괜히 혼자서 이상반응을 보이자 나탈리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녀는 재미있는 놀림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되었다. “너어~” 그녀가 말을 길게 늘이자 로이는 찔끔했다. “외......왜?” “너 무슨 죄졌냐?” “무슨 헛소리야?” 로이는 엄한 사람 잡지 말라며 급하게 양 팔을 휘저었다. 저런 격한 반응이 나탈리에게는 더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다 안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누나한테 다 털어놔봐.” “누...누...누가 누나야? 쪼그만 게!” 나탈리는 말을 떨며 시선을 외면하는 그의 양귀를 잡고 빙빙 돌렸다. “이것 봐, 확실히 이상해. 너 여기에서 무슨 짓했어?” 로이는 죽을 맛이었다. 귀를 잡힌 것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녀가 바짝 다가와 귀를 잡는 바람에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그녀의 가슴은 그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얼굴 좀 들어봐.” 귀에서 손을 뗀 그녀가 손을 내려 그의 양쪽 뺨을 잡고 들어올렸다. 홍시처럼 붉어진 로이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놔!” 당황한 로이가 얼른 그녀를 밀어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꼭 뒤가 급한 사람 같았다. 나탈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자식, 똥마려우면 마렵다고 말을 하지.” 그녀의 뒤에서 콜드가 웃었다. 전장의 시름을 일시에 날려버린 듯한 웃음이었다. 엘란(128) 후속군이 당도한 후 지친 병사들의 휴식과 부상병의 후송, 그리고 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군대의 종합적인 재편성도 이루어져 죽은 병사들을 대체할 병사와 점령지로 갈 병사들이 가려지고 영주의 역할을 대체 할 지휘관들도 뽑혔다. 훈족과 용병대는 급하게 일들을 처리하고 이틀 후 크리누스를 출발 스노우로 향했다. 용병들과 훈족의 사기는 높았다. 크리누스를 점령했으니 한고비 넘긴 셈이고 저 밑에서는 엘리오트가 쳐들어오고 있으니 이 전쟁은 다 이겼다는 생각이 뇌리를 점령한 탓이다. 하지만 엘란은 불안했다. 저 가슴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경보가 울려대고 있었다. 전황이 유리해 질수록 그 경보는 뚜렷해졌는데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많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던 자신의 경험을 상기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불안이 느껴진 것일까. 에쉴리가 그의 손을 잡아왔다. “쳇,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이구만.” 세오나에게 불시에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쟝은 콧물을 쭉 들이마시다 오만상을 찡그렸다. 부러진 뼈에서 통증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코 양쪽에 댄 작은 부목은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머리 전체를 감은 굵은 철사로 고정이 되어 있었는데, 철사 주위가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쟝은 화살을 하이론에게 돌렸다. “이게 뭐야! 계속해서 쑤시잖아. 어떻게 좀 해봐!” 마차에 편안하게 기대앉아있던 하이론은 눈도 뜨지 않고 대꾸했다. “뼈를 맞춰 놨으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 거다.” “대륙 최고의 치료마법사니 뭐니 떠들어 댈 때 알아봤다. 겨우 부러진 뼈도 제대로 못 고치는 주제에.” 하이론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주저앉은 코뼈를 그렇게 세워준 것만 해도 다 이 마법사님의 실력이 뛰어난 탓이다.” “근데 왜 계속해서 아파?”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는 그런 거다.” “대륙최고의 마법사면 한 방에 붙여야지. 삼일이 지나도 계속 아픈 건 영감실력이 별 볼일 없어서 그런 거잖아?” 쟝은 ‘대륙최고의 마법사’라는 부분에서 음성을 심하게 꼼으로서 하이론을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쯧쯧쯧, 무식한 놈 같으니. 마법사가 무슨 신이냐! 한 번에 부러진 뼈를 당장 고치게. 그래도 내 마법 덕에 그만한 걸 다행으로 알아라.” “다행은 무슨!” “내가 마법을 안 걸었으면 네 작살난 코뼈는 완전히 붙는데 최소한 사주는 걸렸을 거다. 아니 나이도 있으니 오주는 걸릴 걸. 그걸 단 나흘로 단축시킨 건 이 몸의 위대한 마법덕이시다 이거야.” 쟝은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제발 코 좀 안 욱신거리게 해줘요. 아파서 미치겠다구요.” “진통제를 자꾸 쓰면 좋지 않아. 회복하는 속도도 느려지고.” “치료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도 좋으니 제발 통증 좀 없애줘요.” “자식이 엄살은.” 하이론은 할 수 없다는 듯 로브를 뒤져 붉은 기가 감도는 병을 끄집어냈다. 그는 아깝다는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안에 든 노란색의 걸쭉한 액체를 한 스푼 덜어냈다. “가만히 있어.” 그는 쟝의 코 부위에다 그 액체를 넓게 펴서 발랐다. 쟝은 열이 나던 코가 시원해지고 욱신거리던 통증이 금방 사라지자 배부른 고양이처럼 기분이 좋아져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하이론이 최고야.” 툴툴거릴 때는 언제고 쟝의 얼굴은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좋은 약이 있으면서 왜 안 발라준 거야?” “말했잖아. 진통제를 쓰면 낫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고마워.” 쟝은 하이론은 다정하게 안았다. 그런데 안긴 하이론의 표정이 좀 어색했다.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쟝이 그 얼굴을 봤으면 뭔가 의심을 품었겠지만 지금은 얼굴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라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하이론 표정이 왜 저래요?” 에쉴리가 나직이 속삭였다. 엘란도 그녀의 귀에다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거짓말을 해서 저럴 거야.” “거짓말이라뇨?” “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저 약 무지하게 비싸다고 그랬어요. 치료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발라주지 않은 게 아니라 아까워서 안 발라준 걸 겁니다.” “킥.”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자 둘의 대화내용을 대충 짐작한 하이론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모습이 꼭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그때 쟝이 포옹을 풀었다. “영감 복 받을 거야.” 같은 시각 엘리오트와 피요르드간에는 통신이 연결되었다. 사신이 오고갈 여유가 없을 정도로 급한 일이 생기면 연결하는 통신구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통신구는 스트빌라이와, 엘리오트, 피요르드 상호간의 분쟁을 방지할 목적으로 100년 전에 마련된 것이었다. 통신구 앞에 앉은 프르덴틀후작은 점잖게 말을 걸었다. “선전포고도 없이 야밤에 기습을 하는 것은 신사가 할 짓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 황녀를 암살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킬커대공은 엘리오트가 스트빌라이 황녀를 암습해서 죽인 것을 짚고 나섰다. 몰래 기습한 입장에서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아 그쪽을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너희들도 타국의 황녀를 암살했으니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후작이 당장 반박하고 나섰다. “저번에 사신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밝혔지만 그 일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요.” “글쎄올시다.” 대공은 목을 꼬아 딴청을 피웠다. 후작은 끓어오르는 노화를 억지로 삼켰다. “선전포고는 그렇다 치고 우리를 침략한 이유는 뭐요?” “허허, 정말 뻔뻔스럽구려. 그 이유를 정령 모른단 말이오?” 대공은 적반하장이라는 태도로 반문했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소.” “당신들 정말 못쓰겠군. 뻔히 알면서 모른 척을 하다니.” “아니, 나는 정말 모르겠소. 어디 그 이유나 한 번 들어봅시다.” “당신들은 스트빌라이의 황녀를 죽였소. 그런데도 반성은 하지 않고 적반하장 격으로 스트빌라이를 침략하고 있으니 정의감에 불타는 우리의 황제 이제나우 드 피요르드께서 참고 넘어갈 수 있었겠소?” “하!” 한 줄기 낭랑한 콧방귀를 날린 후작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함을 질렀다. 한참 동안 거친 말을 내뱉은 그는 그러고도 분을 참기 힘든지 한 참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우리나라를 치는 이유는 정의감의 발로라 이거요?” “그렇소. 우리의 국시가 ‘정의사회구현’이요.” 후작은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킬커 대공의 입을 가위로 찢어놓고 싶었다. 아쉬운 처지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 그를 열불 나게 만들었다. “그런 객쩍은 소릴랑 집어치웁시다.” “객쩍은 소리라니요? 아니 우리 황제의 정의심을 모욕하는 겁니까?” “호두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 하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보시오?” “원하는 거라뇨?” 대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자가 손자의 결혼식에 왔을 때 그 실체-목욕을 안 한지 하도 오래되어 10미터 근방만 가도 악취를 풍기던-를 똑똑히 보았던 후작으로서는 구역질이 날만한 일이었다. 그는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다잡았다. “어떻게 하면 군대를 물리겠소?” “당신들이 스트빌라이침공을 그만두면 우리도 군대를 물리리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시오?” 후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다 이긴 전쟁에서 물러나라는 소리를 눈도 깜빡하지 않고 해대자 참지 못한 것이었다. 후작의 맞은편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욀무트는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글러먹었다고 판단했다. 저들은 애초에 협상을 할 마음이 없었던 듯 했다. 대공은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우리 피요르드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지요.” 이때쯤은 후작도 외교적 노력으로 사태를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처음 저 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눈치 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떻게든 말로 풀어 보려고 노력한 것이 전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마지막 권유요, 좋은 말로 할 때 군대를 물리시오.” 대공은 희극적으로 상체를 흔들었다. 마치 어릿광대 같은 몸짓이었다. “아니, 지금 협박하는 것이오?” “그만!” 후작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예의를 지킬 수 가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욕설을 내뱉지 않은 것만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미카엘황제가 음성에 분기를 담아 내뱉었다. “카를에게 연락을 취하라.” 말을 끊은 황제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우리 땅을 밟은 피요르드의 머저리들이 다시는 숨을 쉬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그의 명령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카를에게 전해지는 동안 피요르드의 황제는 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포도주를 들이켰다. 이제나우황제도 미카엘황제처럼 통신이 연결되는 동안 근처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킥킥...그놈 열 많이 받은 모양이야.” 피요르드의 황제가 키득거렸다. 그의 음성에는 미카엘황제와 정반대되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저번의 일을 교훈삼아 대공과 멀찍한 곳에 자리를 잡은 재무대신 실레아가 말했다.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말도 없이 팔짱만 끼고 있던 호르스트후작이 물었다. “별 수 없이 막스를 회군시키겠지.” 대공이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실레아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 황제가 반문했다. “막스와 시드의 군대는 막강하다던데 광휘기사단이 상대할 수 있을 까요? 적법사도 없는 마당에.” 실레아가 이번 전쟁의 허점을 짚는 순간 좌중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적법사가 칭병하며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계획에 큰 구멍을 만들어 버렸다. 그 구멍이 지금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인 막스와 상급 정령사인 물의 시드를 누가 상대할 것인가? “적법사의 병이 그렇게 심한가?” 황제가 물었다. 주변에 있던 모든 귀족들은 대충 적법사의 심사를 알 수 있었다. 샤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줄기차게 반전을 주장한 마당에, 그의 의견이 묵살되고 참전이 결정되자 일종의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너희들끼리 잘해 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아무도 황제에게 꺼낼 수 없었다. 적법사의 내심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순간 마법사의 탑과 척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적법사가 정말 아픈 것이라면, 그를 모함하게 되는 것이어서 마법사들과 황제에게 동시에 미움을 사는 결과를 유발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가 가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실레아가 대답했다. “이렇게 합시다. 스트빌라이와 연락을 취해 막스의 군대를 좀 묶어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을 박살내면 더 좋구요. 그러면 우리는 롬바르드까지 밀고 들어가 엘리오트를 먹는 겁니다.” “호! 스트빌라이와 연합을 하자는 거로군.” 황제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좋은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국제 정세는 훈족과 맥클레이용병대가 엘리오트와 손을 잡고 스트빌라이를 집어삼키는 모양새였다. 진짜로 양쪽이 연합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모양새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피요르드가 스트빌라이와 연합을 하면 전세가 일시에 뒤집혀 질수도 있었다. 아니 일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그는 엘리오트 침공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엘리오트를 견제하자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스트빌라이와의 연합을 생각하는 순간, 큰 그림이 그려졌다. 대륙을 스트빌라이와 양분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스트빌라이는 훈족의 땅을 차지하고 자신은 엘리오트를 차지하고. “스트빌라이와 통신을 연결하라.” 엘란이 포함된 훈족연합군이 볼든강을 향해 진군하고 막스가 슈란평원에 발이 묶인 지금, 스트빌라이와 피요르드간에 밀담이 오고갔다. 양쪽의 이해관계는 쉽게 접점을 찾았으므로 동맹은 쉽게 맺어졌다. 그리고 그 시각 성벽경비대와 롬바르드수비대를 징발한 붉은 도끼단은 광휘기사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실레아가 적법사를 찾았을 때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을 핑계대고 있으니 병자 흉내라도 내어야 했던 것이다. 실레아는 하얀 잠옷을 입은 그를 보며 붉은 계통 이외의 옷을 입은 것은 처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울러 속옷까지 붉을 것이라는 세간의 속설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좀 어떠십니까?” “보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 나이는 못 속이는 법이지.” “스트빌라이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황궁에 수많은 눈과 귀를 심어두고 있는 적법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적법사가 말문을 열었다. “내 뭐 하나 물어봄세.” “그러시지요.” “자네 반전론에서 주전론으로 입장을 바꾼 이유가 뭔가?” “에...그게......” 그 이유라는 것이 대공의 가공할 입 냄새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실레아는 대답이 궁했다. “이미 대세가 그렇게 흘러가는 마당에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떨결에 말하고 보니 꽤나 훌륭한 대답이다. 그는 속으로 흐뭇한 기분이 들어 아직도 심심하면 그 이유를 물어대는 호르스트후작에게 이렇게 대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대답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외우고 있을 때 적법사가 말했다. “정말인가?” 그는 의심스런 눈빛을 보냈다. 실레아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황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게.” 실레아를 보내 안부를 물은 것에 대한 감사표시였고 아울러 그를 향한 축객령이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실레아는 방을 나서며 황제에게 할 보고를 정리했다. 어차피 적법사의 상태를 보기도 전에 결정되어 있던 터라 별달리 정리할 것도 없었다. 적법사의 몸 상태가 전쟁을 치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보고만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적법사는 그가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서랍에서 통신구를 꺼내 딸에게 연락을 취했다. “스트빌라이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느냐?”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만약 실레아가 옆에 있어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리라. 그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정이 넘쳐흘렀다. “들었어요.” 그에 반해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사무적이었다.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챙기는 아버지가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웠다. 사십이 다 되 가건만, 여전히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멍청한 놈들이 전쟁을 벌여서 일을 망치고 있어.” 그는 황제와 그 측근들을 향해 맹비난을 퍼붓더니 마지막에 당부의 말을 건넸다. “조심하거라. 전황이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후퇴하고.” “알아서할게요.”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다음에 또 연락하마.” 통신을 끊은 적법사는 침대에 누운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마법사의 탑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계획의 시작이었다. 엘란(129) 훈족과 용병대가 볼든강까지 내려오는 동안 이렇다할 충돌은 없었다. 스트빌라이군에서 삼차 저지선을 볼든강으로 정한 때문이었다. 진지를 구축한다고 강변이 온통 어수선한 가운데 엘란이 탄 마차가 강변에 도착했다. 그와 에쉴리는 마차에서 내려 강둑에 올라섰다. 강변에는 푸른 잎들이 고개를 디밀고 있었다. 봄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성큼 다가서 있었던 것이다. 갈수기를 맞아 수위가 현저하게 낮아진 볼든강의 건너편에는 스트빌라이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원래의 전쟁계획에 의하면 이 볼든강이 새로운 국경선이 될 터였다. 즉 훈족과 용병대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스트빌라이에 요구할 땅이 볼든강 위쪽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계획이 바뀌어 있었다. 전황이 유리했고 엘리오트가 치고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아예 스트빌라이를 반분해 버릴 생각이었다. 엘리오트와 분명한 얘기가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이심전심으로 느끼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동맹을 맺기 위한 사신이 이미 엘리오트로 출발한 상태였다. 엘란과 에쉴리는 말없이 강물만을 응시했다. 때에 따라서는 침묵이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애틋한 감정이 마주잡은 손을 따라 유장하게 흘렀다. “이제 가세요.” 엘란이 말했다. 에쉴리와 나탈리는 크리누스에 임시로 마련한 처소에 당분간 머물러 있을 예정이었다. 일단 별다른 위험이 없는데다가 볼든강을 돌파하면 전쟁이 조기에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쉴리는 말없이 강물만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엘란의 볼을 쓸었다. “고생만 시키는 군요.” 볼 때마다 늘어나는 주름살이 그녀의 가슴을 메어지게 만들었다. “옛날 얘기를 하며 웃을 때가 오겠죠. 언젠가는.” 에쉴리가 타고 왔던 마차를 돌려 크리누스로 떠날 때 쟝은 남았다. 카이어스의 연애전선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 그가 이곳에 남으며 주장한 이유였는데 하이론이 보기에는 단순하게 전쟁 구경이나 하고 싶어서 남은 것 같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던 셋은 그대로 강변에 서서 스트빌라이 진지를 구경하다 해가 떨어져서야 자신들에게 배당된 거처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이미 막사가 서 있었는데 증원군과 함께 온 훈족노동자들이 세웠다 했다.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많은지 교도들의 도움도 거절하고 자신들끼리만 만들었다 했다. 콜드는 꼭 하인을 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저 사람들 돌려보낼 수 없을까?” “돌려보내긴 왜 돌려보내.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부리면 돼.” 귀족으로 살았었던 쟝은 콜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다른 이를 부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가는 훈족이 다 지불하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만약 이들을 내치면 어디 가서 일자리를 찾겠나?” 쟝은 한 쪽 다리에 의족을 찬 채로 짐을 옮기는 일꾼을 가리켰다. “쟝 말대로 그냥 쓰는 게 좋겠다. 이 사람들한테도 그게 좋을 것 같구만.” 하이론이 결론을 지었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떴다. 달무리가 은은하게 강물을 비추자 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반짝 거렸다. 엘란은 말을 탄 채 그 위를 달렸다. 볼든강은 수심이 깊은 강이 아니었고 그가 건너는 곳이 특히 얕은 곳이라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갈수기라 더욱 더 그러했다. 물이 말목까지 차오르자 말이 불안한 듯 콧김을 뿜어댔지만 가볍게 갈기를 어루만지자 금세 진정이 되었다. 그는 강의 중간, 지대가 높아 물이 들지 않는, 작은 진흙 섬에 올랐다. 비가 내리면 잠길 것이 분명한, 섬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진흙덩어리위에서 쳐다본 반대편 스트빌라이 진지는 횃불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엘란은 말에서 내려 진흙 섬 아래로 내려갔다. 물에 발을 담그고 천천히 걸어가며 앞을 쓸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손에 걸렸다. 적들이 준비한 트랩이었다. 그는 엔다이론을 불러 하상(河床)을 뒤집어버렸다. 물의 정령은 위 아래로 분주히 움직이며 강바닥에 깔린 각종 암기들을 무력화 시켰다. 그는 한 동안 강 주위를 다니며 또 다른 함정이 있나 점검을 한 후 서서히 물러나 자신의 진지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진흙 섬 위에 새로운 손님이 방문했다. 이번에는 스트빌라이측 사람들이다. 그들 셋은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역시 유치한 수였습니다.” 흑법사가 말했다. “혹시나 해서 설치해 본 것일 뿐입니다.” 말과는 다르게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대답한 사람은 단칸백작이다. 연이은 격전으로 살이 빠진 그는 어딘지 초췌해 보였다. “내일은 끝장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음성에는 힐난의 빛이 엿보였다.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는 흑법사와 길라드가 단칸의 심사를 건드린 탓이다. “좀 더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소.” 흑법사가 토를 달았다. “더 이상 어떻게 기다립니까? 여기가 뚫리면 밑은 완전히 평야 지대고 그럼 스노우까지는 금방입니다.” “내일 빌바오가 올 거요.” “오! 빌바오님이.” 단칸의 목소리에 아연 활기가 넘쳤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던 빌바오가 드디어 도착할 모양이었다. ‘하긴 너무 늦었지.’ 출발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도착이었다. 이게 다 바룬교단의 사제들 때문이리라.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여기 까지 오는 동안 영지란 영지는 다 들러서 영주들의 찬사와 헌금을 받고 온갖 공치사를 늘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밥통 같은 것들.’ 단칸은 그러한 것들이 생각나자 반기는 마음과 별도로 울화가 치밀었다. “빌바오와 성기사가 도착하면 모조리 쓸어버립시다.” “글쎄요......?” 이번에는 길라드가 토를 달았다. “무슨 뜻입니까?” “조금 전에 하상을 정리하던 사람 말이오.” “아이언 오거 말씀입니까?” “그래, 그 사람. 내 이때까지 전투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사람 아무래도 상급 정령사 같아. 중급 정령사 따위가 바람, 불, 물의 중급정령을 저 정도로 자유자재로 부릴 수는 없어. 확실해.”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왜 상급정령을 사용하지 않았겠습니까?” 단칸은 길라드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연이은 격전으로 우리의 피해도 극심했지만 적들 또한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다. 만약 그가 상급 정령사라면 그런 손해를 보면서까지 상급 정령을 부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단칸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전쟁보다 더 급한 사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흑법사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진흙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고운 진흙이 빠져나가며 곤지라운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광술사.” “예?” 단칸이 물었다. “고스만전투에서부터 그를 자세히 관찰했지. 그는 상급 정령사가 맞아.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지. 신분을 감춰야 하는 상급 정령사? 그는 광술사가 분명해.” 단칸은 잔뜩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가 전쟁에 발을 담갔을까? 그러면 광법사는? “그가 광법사를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이겠군요.” 길라드는 침음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 보다 한 수 위라고 봐야 했다. 흑법사는 그대로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에 떨떠름한 길라드의 상이 맺혔다. “나는 그 자가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은 하지 않소. 아마 다른 조력자가 있었을 거요.” “조력자라면?” “아이언 오거 휘하의 덩치 큰 자.” 단칸은 흑법사가 누구를 지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실력이 대단해 보이긴 했으나 그가 광술사와 합세했다고 십존의 하나를 어찌할 수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건 무리한 억측 같습니다.” “아니 충분하지.” 단칸과 다르게 길라드는 흑법사의 말을 긍정적으로 파악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덩치가 소드마스터라면.” “소드마스터?” “사실일거야.” 흑법사가 말했다. “어떻게......어떻게......!” 단칸은 한참 동안을 어떻게 란 소리만 반복해 댔다. 끊임없이. 그런 그의 귀로 흑법사의 조용한 음성이 찾아 들었다. “너무 걱정 말게. 이 전쟁은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니까. 반드시!” 길라드는 흑법사의 저 확신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했다. 전황은 전혀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거를 물으려고 입을 움직거리던 그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흑법사가 새로운 사실을 꺼냈기 때문이다. “단칸경, 적들이 엘리오트와 연합하려고 사신을 보냈다고 하네. 중간에 차단하긴 했지만 또 보낼지 모르니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게. 그리고......” 잠시 말을 끊고 의미심장하게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피요르드가 엘리오트를 공격했네.” 그 시각, 훈족과 맥클레이용병대는 회의를 열고 있었다. “함정은 정리했습니다.” 아이언 오거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내일 쯤 빌바오와 성기사들이 도착할 겁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별다른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처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바룬신전이 속세의 전쟁에 개입하는 이유를 알고 계신 분 있습니까?” 이베가 물었다. 바룬교의 돌연한 전쟁 개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헬레나신전과의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프로스크가 대답했다. 그는 빛의 관할을 둘러싼 양 교단의 해묵은 설전과 그로인해 야기된 두 교단의 불편한 관계. 그리고 헬레나교가 성한 엘리오트와 바룬교가 융성한 스트빌라이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상황을 마치 본 것처럼 설명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요.” 긴장한 커리는 연신 두 귀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그의 귓불은 붉게 변해 버렸다. “빌바오와 일천 성기사라.” 복면인(에단)은 조용히 뇌까렸다. 그 소리는 천둥처럼 페이더스의 귀를 울렸다.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피요르드가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소문은 빠르다. 어떨 때는 번개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소문이고 지금 같은 전시에는 더욱 그러해서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 옥석을 골라내는 것은 고도의 판단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에 체이스는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했고 모든 정보를 걸러내는 깔때기의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풍문을 입에 담는 순간 긴가민가하던 그 소문은 사실로 확정되는 것이다. “뭐!” 깜짝 놀란 페이더스가 벌떡 일어서며 콧김을 뿜어댔다. 그러더니 얼굴을 붉히고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격한 몸놀림에 비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나 모두들 침착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겸연쩍어져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저희들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훈족도 나름의 정보망이 있었고 피요르드의 참전 소식은 이미 일주일 전에 귀에 들어왔었다. 사기를 고려해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그 대처 방안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왜 남의 잔치판에 더러운 발을 들이대는 것인가! 한 동안 씩씩거리던 러츠는 거칠게 말했다. “그 놈들이 왜 전쟁에 끼어들어?” “이가 망하면 잇몸이 시리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이베의 대답을 알아듣는데 러츠는 여전히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스트빌라이가 망하면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했겠죠.” “어떻게 하지?” 천부장 보카르트가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엘리오트의 저력을 믿어야죠. 그들이 시간만 끌어준다면 이번 전쟁은! 저희들의 승리로 끝날 겁니다.” 이베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전쟁의 날. 성기사 러셀은 새벽의 찬바람을 맞으며 말을 몰았다. 대사제 말부리트의 부름을 받아 헬레나 신전으로 향하며 그는 올게 왔다는 생각을 하였다. 바룬교단의 성기사들이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섰다는 풍문을 들었을 때부터 해왔던 생각이 들어맞았다. 아니 황태자가 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부터 가졌던 불길한 예감이 적중되었다. 고약한 일이었다. 세속에 전쟁에 성직자들이 발을 들이는 것은. 그것도 명분 없는 전쟁에! 삼십 분 후, 그는 결의에 찬 대사제를 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말했다. “재고해 주십시오.” 말부리트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톡톡 탁자를 두들겼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집무실 안을 거닐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세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어. 대제 사후 천년 동안의 정체(停滯)가 서서히 깨어지고 새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지. 세상을 보는 혜안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그 변화가 우리들, 신의 권속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쪽으로 바뀔 것 같네. 바룬교단의 전쟁에 참전한 일이나 우리가 황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말부리트는 집무실에 들어온 이후 석상처럼 서 있는 러셀을 부드럽게 당겨 의자에 앉히고는 그 앞에 또 다른 의자를 가져와 놓았다. 그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황실이 우리 교단을 국교로 삼은 것을 감격해서 내가 성기사들을 동원한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네. 이미 저울추가 기울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앞으로는 속(俗)이 성(聖)을 압도할 걸세. 삼국이 대륙을 분립한 이후, 서서히 시작된 일이 이제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일세. 알겠나?” 러셀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결혼식장에서 보여준 말부리트의 모습은 황실에 보여주는 한편의 연극이었던가? 한 숨을 몰아쉰 대사제가 다시 말했다. “만약 이번 전쟁으로 세 나라가 깨어져 산산이 조각난다면 성(聖)이 독립적인 지위를 갖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발칸대제가 한 일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네.” “대제가 한 일이라면?” “지고교를 국교로 내세워 다른 종교를 탄압한 일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일세.” 이번 전쟁이 그런 쪽으로도 비화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러셀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음성을 흘렀다. “이번 전쟁은 예감이 이상해.” 대사제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러셀은 그 심상찮은 목소리에 간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예감이 이상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번 전쟁은 단순한 영토확장전쟁이 아니라 그 이면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아.” 대사제는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 안을 뱅뱅 돌았다. 그가 방 안을 맴돌수록 러셀의 상념도 꼬여서 나중에는 골이 띵해질 정도였다. “프르덴틀후작에게 가게. 가서 명령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게.” 여전히 집무실을 돌며 대사제가 말했다. 러셀은 나중에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하고 일단은 대사제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하지요.” 대사제는 방을 나서는 그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항상 눈과 귀를 열어놓고 계시게, 그리고 행동을 결정할 때도 재삼재사 숙고해야 할 거네.” 러셀을 정점으로 한 헬레나교단의 성기사들은 그날부터 롬바르드 경비에 투입되었다. 붉은 도끼단과 그 휘하 병사들의 역할을 대신 한 것이었다. 엘란(130) 슈란 평원에 날이 밝았다. 봄의 전령이 대지로 스며들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날이었다. 공기에서 떠도는 향기로운 봄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그렇듯 아침의 시작은 고즈넉하고 목가적이었다. 하지만 나중은 육편이 튀고 피가 넘쳐흐를 것이다. 이 날은 후세 사가들이 전쟁의 날이라 이름붙일 만큼 참혹한 날이었으므로. 막스는 견습기사들이 받아놓은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 싸늘한 물로 세안을 하자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듯 했다. 갑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서자 척후병들이 차례로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스트빌라이 군이 두 시간 거리까지 다가왔습니다.” “숫자는?” “이만 명 정돕니다.” “미쳤구만. 겨우 이만 명 정도로 우리의 앞을 막겠다고!” 시란자작이 비웃음을 날렸다. “사는 게 싫증이 나는 모양인데 그럼 원하는 데로 해 줘야지.” 빈센트가 말하자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만.” 막스가 손을 들어 가볍게 제지하자 모든 웃음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시드경께도 보고를 올리고, 전투 준비를 하라.” 모였던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전열을 정비한 엘리오트군이 평원을 가득 메웠다. 1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시드와 나란히 서서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막스 쪽으로 엥겔스가 다가왔다. “뒤쪽에도 적이 나타났습니다.” 시드의 수염이 불쾌하게 움직였다. “뒤쪽?” “예, 다가오는 병력이 너무 적아서 뒤쪽에도 척후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 사만 명, 정도의 스트빌라이군이 뒤를 막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빙 둘러서 포위를 시도한 모양이군.” 막스는 장갑을 끼고 말 위에 올랐다. “웃기는군. 고작 6만 명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어떻게 할까요?” 엥겔스가 물었다. “오는 족족 죽여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말을 멈춘 막스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에 따라 목소리도 점차 열기를 띠었다. 듣는 사람들의 피부까지 데우는 숨 막히는 열기였다. “스노우까지 달린다.” 긴장된 시간이 서서히 흐르고 이윽고 스트빌라이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렬로 죽 늘어선 2만의 기병은 위풍당당해 보였다. 시드가 말했다. “보병은 하나도 없고 전부 기사들 같은데.” 시드의 제자 에주네가 말을 받았다. “괴상한 일이군요. 전원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 엥겔스는 일렬로 늘어선 적들을 보며 검집을 매만졌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버릇이었다. 기사단이라 부르지만 그 안에는 기사들만 포함된 것이 아니어서 창기병, 경장보병, 중장보병, 궁병 등 다양한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처럼 전원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은 극히 드물었다. 엘리오트에도 저런 기사단이 있기는 했다. 뛰어난 기사들만 모여 있는 기사단이. 엥겔스의 순이 겁집에서 떨어졌다.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황실친위대.” “황실친위대?” 막스가 물었다. “붉은 도끼단처럼 전원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황실친위대 뿐입니다.” 막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 스트빌라이군이 펼치고 있는 진형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적은 인원으로 대 병력을 상대하려면 보통은 뭉치기 마련이다. 저런 식으로 횡으로 늘어선 진형은 보통 병력 수가 월등히 많거나 아니면 병력이 적더라도 개개인의 기량이 월등해서 적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때 펼치는 진형이다. 스트빌라이 최강 기사단이라는 황실친위대 쯤 되니까 저런 진형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대단한 자신감이군.” 막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들은 언제나 엘리오트 기사들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저런 오만한 진형을 들고 나올 수 있었으리라. 막스는 오늘 저들의 오만함에 대한 교훈을 단단히 내려 주기로 결심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그와는 반대로 시드는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십존의 일원으로서 다른 십존에 대해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황실친위대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놓치고 있던 점을 짚어냈다. “저들이 황실친위대가 맞다면, 레인도 왔겠군.” 그 순간, 긴장이 수뇌부를 휘감았다. 붉은 도끼단에 카를후작이 있듯이 스트빌라이 황실친위대에는 루카스 레인후작이 있었다. 막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맹렬한 투지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솟구치는 투지의 뒤끝,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격렬한 떨림이 찾아왔다. 그 투지와 떨림은 어떤 유희로도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호승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광술사는 광법사를 죽이고 십존의 자리에 올라섰다. 다소간의 논란은 있었지만 세간의 평은 그러했다. 그것이 못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광술사에게 당해서 긴 시간동안 비참한 패배감을 곱씹기도 했지만, 한 때는 그도 엘란을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같은 전시가 아니면 십존의 일원과 자웅을 결한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전원 타국의 요인이라 싸움은커녕 만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기회가 찾아왔다. 십존의 일원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라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광술사가 이미 올라섰던 명예로운 땅에 자신도 발을 디디는 것이다. 엘란처럼 생사가 의문시되는 상황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상태로! 그가 투지에 휩싸여 가늘게 경련을 일으킬 때 레인후작은 유람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 있는 몸짓을 보였다. 보통의 안장보다 뒤가 높은 안장에 편안이 등을 기댄 그는 고삐를 대충 잡고 말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그와는 다르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전방을 주시하던 다니엘로백작은 걱정스런 어투로 질문했다. “수도 경비대가 버틸 수 있을까요?”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엘리오트의 붉은 도끼단이 피요르드군과 싸우러 가면서 성벽경비대와 롬바르드수비대를 징발했듯이 황실친위대도 출전하면서 수도수비대를 징발했었다. 루카스 이하 기사들은 이번 전투에서 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도망치는 엘리오트군의 퇴로를 끊기 위해 수비대를 이미 엘리오트군의 뒤쪽에 배치해 두었다. 이미 전투에서 이겼다고 가정하고 짠 계획이었으니 막스의 생각대로 대단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엘리오트군은 수비대 정도가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군대가 아니다. 수비대는 그저 약간의 시간만 끌어주면 된다.” 레인후작은 여전히 한가한 태도로 답했다. “초반에 쓸어버려야겠군요.” 다니엘로의 옆에서 말을 몰던 일스테인자작이 말했다. 보통의 기사들이 소드를 선호하는 것과는 다르게 스피어를 무기로 삼는 자였는데 특이한 병기만큼이나 급변하는 성격으로 유명한 자였다. 지금도 그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결의에 넘치던 표정은 간데없고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번슈타인과 히키는 어떻게 된 걸까요?” 집사가 일이 있다며 데리고 간 둘은 일스테인이 특별히 아끼던 부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없었다.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죽은 모양이다.” 후작은 별것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후작은 그들을 데리고 간 집사마저 소식이 없었는데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걱정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늘어져 보였다. “무슨 임무를 띠고 파견된 겁니까?” 자일즈남작이 물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에 비해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상체로 차돌 같은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곱상한 외모에 비해 일단 손을 쓰면 굉장히 잔인해져서 크레이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다니엘로도 궁금했던지 귀를 쫑긋 세웠다. 왜 집사가 그들을 차출했는지 그리고 왜 소식이 없는지? 그리고 레인경은 왜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것이 못내 궁금했던 것이다. 후작도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집사 정도의 인물이 소식도 없는 것을 보면 일을 망쳤다는 것이고, 그의 평소 성정을 떠올리면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대단한 변수가 개입되었음이 분명했다. 비슷한 시기에 코티즈를 잡으려한 엘리오트의 거부 칸토나의 보고에 의하면 광산에는 쥐새끼 한 마리 남아있지 않았고 코티즈의 행방도 묘연하다 하였다. 후작은 코티즈가 살았던 죽었던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서 이 일에서 신경을 끊었다. 다른 중요한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 쓸 것 없다.”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은 후작은 몸을 바로 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전신에 칼날 같은 기세가 어리고 두 눈에서 정광이 번뜩거렸다. 그가 거두절미하고 명령을 내렸다. “쓸어버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렬로 또박또박 걷던 말들의 보폭이 점점 커졌다. 박자를 맞춘 듯한 말발굽 소리가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그에 맞서는 엘리오트군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준비!” 엥겔스의 힘 있는 음성 뒤로 나팔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에 맞춰 궁수들이 살을 재었다. 발굽에 채인 돌이 사방으로 튀고 분분히 날린 흙먼지가 구름을 일으켰다. 짓이겨진 풀들이 비명을 질러댈 때 화살이 하늘을 갈랐다. 황실친위대는 빨랐다. 바람처럼 내달린 그들은 별다른 손실 없이 화살의 비를 통과했다. 화살을 날린 엘리오트 궁수들은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보병들과 함께 뒤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막아낼 것이다. “돌격!” 막스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보병과 궁수를 제외한 전 병력이 말을 달렸다. 막스의 눈은 사냥감을 찾는 매의 눈처럼 매섭게 빛났다. 그의 눈은 줄곧 레인후작의 모습을 찾았고 곧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대오의 중간, 그곳에 그가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벗겨진 이마와 입가에 걸린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 모습은 전투에 나선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골목대장이 아이들을 나눠 전쟁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개구쟁이 같다는 것이 막스가 받은 후작의 첫인상이었다. 그 순간 후작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입가에 가득한 천진한 웃음은 일순간에 뒤로 물러나고 살기 가득한 전사의 얼굴이 개구쟁이 가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막스의 이완된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레인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검이 뽑혀졌다. 그는 후작을 향해 말을 몰았다. 레인후작은 자신을 사냥하려는 막스의 의도를 똑똑하게 느꼈다. 피부로 스며드는 적장의 짙은 살기는 수십만이 뿜어대는 살기를 압도할 정도로 강렬했다. “막스로군.” 후작의 안광이 강렬해지더니 이내 가라앉아 사슴의 눈처럼 맑아졌다. 그의 말도 막스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양군의 거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오십 미터로 좁혀졌다. 그때 양군의 중간에서 커튼이 드리운 것처럼 공기가 일렁거렸다. 갑자기 끼어든 이물질에 놀라 하늘거리던 공기를 뚫고 수백의 정령이 튀어나왔다. 미약한 질감을 주며 흐느적거리던 정령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빳빳해 지더니 스트빌라이기사들을 향해 덮쳐갔다. 하지만 그 광폭한 기세에도 기사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그들을 태운 말도 전혀 놀라는 빛이 없었다. 레인후작의 검이 허공에 지그재그를 그리자 푸른 섬광이 검 끝에서 터지며 퍼져나갔다. 그를 덮친 정령들의 몸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동강난 정령의 몸을 뚫고 후작의 말이 머리를 내밀었다. 후작이 정령을 뚫고 뛰어나오자 막스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식도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갈증은 후작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갈망으로 변해갔다. 검에 오러가 맺히는 순간 그는 검을 휘둘렀다. 2미터 길이의 오러가 레인후작의 미간을 노렸다. 살을 에이는 기운이 미간에서 느껴지자 후작은 나지막한 감탄성을 발했다. 막스의 실력이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감탄성만 발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후작이 왼손을 뒤로 돌려 망토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막스를 향해 던져버렸다. 막스의 얼굴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붉어졌다. 후작이 자신을 상대로 저런 잔재주를 부린 다는 것이 그를 분노케 했다. 절제된 분노가 살기에 기름을 부었다. 막스를 향해 날아가던 망토는 오러에 휘말려 산산이 조각났다. 조각나 흩어진 천 쪼가리들 사이로 후작의 검이 디밀어졌다. 막스의 검처럼 오러블레이드로 변한 상태였다. 둘의 검이 상견례라도 나누는 것처럼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착 하는 소리가 없었다면 부딪친 것도 알 수 없을 만큼 검의 교환은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한 순간의 격돌로 탐색을 끝낸 막스는 자신감에 휩싸였다. 그의 검술이 자신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말을 돌려 다시 부딪친 순간 막스는 민활하게 움직이는 후작의 오러블레이드를 막아내는데 식은땀을 뿌려야 했다. 목을 노리던 검 끝은 숨을 들이키는 동안 심장을 노리더니 숨을 내뱉는 순간에는 방향을 바꿔 배를 노렸다. 서릿발 같은 기세와 함께 날아오는 검은 어찌나 빠르게 변화하는 지 후작이 세 개의 검을 동시에 놀리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랬다. 몸의 상체를 향해 짓쳐드는 검은 세 개로 분화되어 날아왔다. 푸른 잔광만이 눈에 어리는 듯했다. 분명 하나의 검이 변화해서 만들어진 세 개의 검은 어느 하나도 허상이 아니었다. 그것이 막스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하나라도 맞았다간 신체가 그대로 토막 날 듯 했다. 막스는 온 정신을 후작의 검에 집중했다. 태양이 뿌리는 빛이 자신의 주위에서 휘어져 나가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세 가닥 검의 시간차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느리게 흐르던 시간은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막스는 숨을 가다듬어 세 번의 칼질을 날렸다. 쾅, 쾅, 쾅. 응축된 세 번의 폭음이 초원을 흔들었다. 막스는 세 번째로 검이 부딪치는 순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첫 번째, 두 번째 격돌이 지난 후 세 번째 격돌을 대비할 때 앞서의 두 번과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힘을 배분한 것이 실책이었던 것이다. 후작의 세 번째 칼질에 담긴 힘은 놀랄만해서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막스는 손가락을 움직여 마비된 팔을 풀었다. 그때 후작의 그림자가 막스를 덮어갔다. 말을 버리고 날아오른 그가 막스의 정수리로 검을 내리그었다.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린 막스는 위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검이 충돌하는 순간 막스는 올라오는 핏물을 지그시 삼켜야 했다. 그만큼 후작의 검에 실린 힘이 대단했던 것이다. 막스의 검과 붙었다 떨어진 후작의 검은 아래로 내려오며 말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쏘아졌다. 막스의 말을 양단 내며 쏘아진 검이 막스의 몸까지 조각내려 했다. 막스는 이를 갈며 말을 버렸다. 완전히 쪼개진 말의 커다란 몸체가 초원에 깔렸다. 쏟아진 내장과 피가 바닥을 질펀하게 적셨다. 그 내장을 밟고 후작이 다가왔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재빠른 놀림이었다. 막스는 후작의 강함을 몸서리쳐지도록 절감했다. 카를후작과 대련하며 짐작한 십존의 수위를 완전히 뛰어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십존의 실력은 다들 엇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었고 자신의 판단도 그와 같았다. 그런데 레인후작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지금의 움직임도 그랬다. 그가 말의 뇌수를 밟고 섰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얼굴이 면전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서 섬전같이 느껴졌다. 흐릿한 잔광만이 느껴질 정도여서 눈의 시력이 아니라 전신의 감각, 나중에는 제 육의 감각이라는 육감마저 동원해야 했다. 여기다 느낀 순간 바로 검을 뻗어야 그의 검을 쳐낼 수 있지 여기로 오는 구나 생각하고 검을 뻗으면 이미 늦어서 몸 이곳저곳에 예리한 생채기를 내며 지나갔다. 막스는 보통의 기사들이 자신과 싸우며 느끼는 어려움을 후작에게서 뼈저리게 느꼈다. 시드는 스트빌라이기사들에 둘러싸여 집중 공격을 당하면서도 시선은 막스와 레인후작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안색은 심각해졌다. 막스가 전신에 피칠을 하며 느끼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저 새끼 왜 저렇게 강해!” 엔다이론으로 자신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기사의 목을 비틀어준 그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설마! 그랜드 마스터.” 운다인의 옷자락으로 다른 기사의 허리를 양단해 버린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랜드 마스터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검술의 최고봉이었다. 검술의 끝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 상상해서 만들어진 신화 같은 경지에 불과하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신천지인 것이다. “레인이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막스는 이미 죽었겠지.” 막스는 위태위태하면서도 곧잘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곧 죽을 것 같긴 했지만. 또 다른 기사의 목을 날리며 둘의 대결을 살피던 시드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엘란(131) 레인의 귀신같은 몸놀림을 본 것이다. 잔광만을 남기는 그의 동작은 마치 순간이동마법을 연속적으로 시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십존의 감각은 초인적이다. 그들의 눈은 일반인, 아니 단련된 자들도 보지 못하는 것을 생생히 볼 수 있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도 소드마스터 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잔광만이 남겨질 정도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십존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정도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동마법을 연속적으로 시전하지 않는 한, 백법사나 적법사 같은 마법사도 못할 일이었다. 십존은 서로 싸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백법사는 일국의 왕이고 적법사는 피요르드 마법사들의 수장이다. 다른 자들도 모두 비슷한 처지여서, 그에 준하는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만나기도 힘들었고 싸우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실력이 엇비슷하니 이길 자신도 없고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개망신인 그러한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적법사에게 원한이 있는 광법사 같은 미친놈이나 광술사처럼 대륙을 떠도는 자라면 몰라도. 시드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그는 길라드를 제외한 십존과 부딪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제의 무덤에서 광법사와 길라드, 적법사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당한 망신이 가슴에 앙금처럼 쌓여 있어서 길라드를 혼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다른 십존들과는 전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레인후작의 실력에 감탄을 넘어 경악하기 전까지는. “저 새끼 정말 강하네!” 시드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저 자를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십존에 속하는 자가 힘을 합쳐 다른 자를 공격했다는 오명 정도는 후작이 주는 위협감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은 자신의 위에 누군가가 올라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적병들을 죽이며 조금씩, 조금씩 후작 쪽으로 이동했다. 막스 쪽을 곁눈질하던 엥겔스는 눈알을 후벼 팔 것처럼 다가오는 창끝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보들이나 하던 실수를 범했던 그는 막스에게서 신경을 돌려 스피어를 마치 풍차처럼 돌리고 있는 적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적들은 강했다. 철혈기사들 둘 셋이 들러붙어야 겨우 평수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어서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창을 돌리던 일스테인은 갑자기 돌리던 짓을 멈추었다. 창의 중단을 잡고 서서 울상을 짓더니 돌연 스피어를 땅에 박아 버렸다. 일스테인이 사용하는 창은 창머리의 날만큼이나 날카로운 칼날이 끝에도 달려있어 창날이 무뎌질 때 거꾸로 돌려 사용할 수도 있었고 지금처럼 땅에 박아 넣어 세울 때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엥겔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눈알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부라리던 것은 언제고 돌연 울상을 지으니 그로서는 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울 것처럼 굴던 일스테인은 발끝으로 창을 가볍게 쳐 두 손으로 잡고 엥겔스의 가슴 쪽으로 뛰어들며 창두를 내밀었다. 창날은 살을 찢기 쉽도록 삐죽삐죽하게 만들어져 상당한 위압감을 가져다주었다. 엥겔스는 별 수작을 다 부린다고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창두를 피해 옆으로 돌아간 그의 검이 창대를 후려쳤다. 일스테인은 그 자리에서 창을 한바퀴 돌려 이번에는 창끝의 날로 그의 목 줄기를 노렸다. 엥겔스는 양손으로 그립을 잡은 채 버티고 서서 창끝의 한 점에다 검 끝을 밀어 넣었다. 쩡. 유리잔 깨어지는 소리가 나며 한 동안 움직임이 멈추었다. 창끝과 검끝이 한 점에서 만나 머리를 맞댄 채였다. 마치 두 자루 날이 회포를 푸는 것처럼 보였다. 창과 검이 부르르 떨렸다. 둘이 서로를 향해 날을 밀어댄 결과였다. 숨 막히는 팽팽한 대치는 창끝이 부러지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래도 창두와 달리 창끝은 약하게 만들어져 명장이 만든 엥겔스의 검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창끝의 날을 부러뜨려 버린 엥겔스의 검이 창대를 훑고 내려갔다. 일스테인은 환하게 웃었다. 모르는 자들이 그의 얼굴만 보았다면 날이 부러진 것은 그의 창날이 아니라 엥겔스의 검날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그는 창을 옆으로 돌리며 창두를 오른손으로 때렸다. 딱딱한 창이 물렁물렁한 물건처럼 휘어지며 검을 튕겨냈다. 엥겔스는 하마터면 놓칠 뻔한 검을 다시 다잡고 침착하게 찔러갔다. 이 미친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쨍, 쨍, 챙. 푸른 선만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연신 파열음이 터졌다. 막스와 후작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후작의 움직임은 생각할 시간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막스는 감각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막스를 은밀히 보호하라는 엥겔스의 명에 따라 그의 주위에 둘러 선 철혈기사들은 둘의 대결에 끼어둘 엄두를 내지 못했다. 푸른 오러가 온 천지를 갈라서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사지가 절단되어 버릴 것 같았고,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엉켜 돌아가는 둘을 구별해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팟. 섬전처럼 움직이던 두 사람이 갑자기 갈라섰다. 등을 마주한 둘은 빙글 몸을 돌려 다시 서로를 노려봤다. “헉, 헉.” 막스의 숨은 거칠었다. 헐떡거리는 소리가 주변의 기사들에게 똑똑하게 들렸고 입가에 흐르는 피는 턱을 지나 떨어져 내렸다. 이에 비해 레인후작은 안색이 조금 상기되었을 뿐 호흡은 가지런했다. 누가 보든 느낄 수 있는 막스의 비세였다. 막스는 숨을 조절하며 체내의 마나를 한 바퀴 돌렸다. 겨우 호흡을 다잡고 기세를 돋우는 데 후작의 검이 원형을 그렸다. 작은 오러막이 검의 궤적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가 검을 펴 앞으로 내뻗자 그 오러막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막스는 허둥지둥 오러막을 만들었다. 이 수밖에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쾅. 오러막과 오러막이 충돌하며 굉음을 만들었다. 물고 물리며, 서로를 죽여대던 양국의 기사들이 잠깐 동안 움직임을 멈출 정도로 거센 폭음이었다. 오러막들이 부딪쳐 산산이 깨어지자 후작은 검을 밀며 달려들었다. 검이 뻗어가는 진로 앞을 세 개의 검이 막아갔다. 겨우 기회를 잡아 끼어든 철혈기사들이 내지른 검이었다. 후작의 검이 세 개의 검을 산산이 부수고 지났다. 그리고 멈춰 서서 부르르 떨리더니 좌우로 흔들렸고, 그 끝에서 오러탄이 떨어져 날아갔다. 막스에게 잠시의 시간을 벌어줬던 엘리오트의 기사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붉은 핏물이 호두알만한 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막스는 분노와 살기를 실어 땅을 굴렀다. 그의 발길질에 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고 흙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흙덩이 사이를 뚫고 튀어나온 막스의 검이 후작의 심장을 노리며 짓쳐들었다. 후작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납작하게 누웠던 검이 치켜세워져 하늘을 찌르고 옆으로 휘돌아 바람을 일으켰다. 미려하게 움직이는 검 끝에서 흰 광채가 쏟아지자 주위는 삽시간에 눈보라에 휩싸이는 듯 했다. 눈보라는 우박으로 변해 막스를 덮쳤다. 막스는 그대로 검을 뻗어갈 수 없었다. 눈송이 하나에 맞기만 해도 근육이 잘리고 피가 뿜어질 터였다. 이를 악문 그의 검이 다시 원형을 그렸다. 쾅쾅쾅. 후작의 눈송이는 무자비하게 오러막을 두들겼다. 그리고 어느새 후작의 검이 다가왔다. 후작은 그냥 위에서 아래로 검을 그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으나 그에 따른 결과는 놀라웠다. 귀청을 때리는 불협화음과 함께 오러막이 잘려져 나갔다. 마치 종이 쪼가리가 잘려지는 것 같았다. 스러지는 오러막을 지나 후작이 나타났다. 막스의 눈에는 후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한 자루 오러블레이드 밖에는 없었다. 그것이 천지를 가득 메우고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려 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손발이 떨려왔다. 그는 아득한 가운데서도 검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온 힘을 담아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으니, 끊임없는 고련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인간의 오만을 징벌하려는 신이 뻗은 일검처럼 후작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후작의 오러블레이드는 막스의 검을 분질러 버리고 무방비 상태에 놓인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 후작의 뒤를 운다인이 덮쳤다. 시드는 후작이 막스를 내버려두고 오러막을 쳐 방어하리라 생각했다. 소드마스터의 통상적인 방어술을 사용하리라 본 것이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러지 않았다. 오른 발을 축으로 급히 몸을 돌린 그는 막스의 오러막을 절단해 버렸던 때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검을 내리그었다. 시드는 일순간 공간이 베어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의 끝자락에 잘려나간 운다인의 옷자락이 걸렸다. 아울러 섬뜩한 통증이 느껴졌다. 운다인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시드의 개입은 너무 늦었다. 완벽한 기회를 포착하려는 동안 막스는 너무 지쳐 버렸다. 한쪽 무릎을 끊고 검을 겨우 쥐고 있는 팔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는 후작이 아니라 보통 기사라도 그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 싶었다. 후작의 검이 시드를 향해 다섯 번 찔러갔다. 뚝뚝 거리는 소리가 다섯 번 울리고 다섯 발의 오러탄이 시드를 향해 쏘아졌다. 운다인이 양 손을 모으고 시드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손에서 주먹만한 물방울들이 뭉쳐지더니 오러탄을 향해 폭사되었다. 운다인이 오러탄을 상대하는 동안 후작은 막스의 멱살을 틀어쥘 수 있었다. 그가 승리의 포효를 터트렸다. “으아~” 흡사 드래곤의 부르짖음 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전장의 소음을 뚫고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그것을 신호삼아 보병과 궁수로 이루어진 엘리오트의 후군을 스트빌라이 수도 경비대가 강타했다. 후군을 이끌고 나타난 뮬레인자작은 이때까지의 패퇴를 설욕하려는 듯 너 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덤볐다. 그의 광기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스트빌라이 군은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둘렀다. 시드는 막스의 머리를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든 후 그를 50미터 뒤로 던져 버리는 후작을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막스와의 결투로 다쳤거나, 아니면 최소한 지쳤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처는커녕 피로한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시드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도저히 혼자서는 저 자를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발 한발 다가서는 후작의 존재감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보통의 키에도 불구하고 시드의 눈에는 마치 거신(巨神)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세에서 패한 시드는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름살 끝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손바닥에도 진땀이 흘렀다. 그런 상태로 서 있던 그는 시퍼런 오러를 뿜어대는 후작의 검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나는 물의 시드다! 십존의 일원이며 대륙 최고의 정령사다! 그는 억지로 전의를 북돋웠다. 악다문 입에서 결의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운다인.” 매끈하게 보이던 운다인의 외부가 올록볼록한 모양으로 변했다. 우툴두툴해진 옷은 비늘갑옷은 입혀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후작을 향해 움직였다. 걸음을 걷는 것이 아니라 빙판을 미끄러져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옷은 변화를 멈추지 않아서 비늘갑옷에서 허연 김이 피어오르며 얼어붙었다. 곧이어 그녀의 전신에 얼음의 장벽이 생겨났다. 후작의 볼이 비웃는 것처럼 실룩거렸다. 휘익.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러댄 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스를 상대하던 때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속도였다. “가라!” 시드의 입에서 격한 고성이 터지자 운다인의 외부를 감싼 얼음장벽이 그대로 위로 올라가 후작을 덮쳐갔다. “터져라.” 후작의 바로 위에서 운다인의 외형을 본 뜬 얼음갑옷이 폭발했다. 산산이 부서진 얼음알갱이들은 날카롭게 변해 후작을 노렸다. 후작은 팽이처럼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에 든 검으로 바닥을 쓸었다. 땅 바닥에 둥근 원이 그려지자 그의 몸이 그대로 아래로 꺼져 내렸다. 그가 들어간 자리위에 흙이 덮이고 그 위를 얼음조각이 강타했다. 타타타타탁. 후작이 파고 들어간 땅바닥은 순식간에 얼음으로 뒤덮였다. 시드는 엔다이론 다섯과 운디네 스무 명을 동시에 불렀다. 땅의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 후작은 숨이 막혀서라도 땅 속에 오래있을 수 없을 터. 언젠가는 나올 것이고 그가 나오면 정령들이 그를 절단 낼 것이다. 운디네가 작게 뭉쳐져 송곳처럼 변하더니 회전을 시작했다. 광술사가 실프 부리던 것을 흉내 낸 것이다. 쾅! 바닥이 뒤집어지며 후작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그런 후작의 정수리를 운디네가 눌러갔다. 물의 하급 정령은 스치기만 해도 머리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무섭게 회전하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던 후작의 몸이 아래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급속히 떨어졌다. 땅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닥에 발을 디딘 그는 고개를 슬쩍 들어 쏟아지는 운디네를 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재미있군.” 시선을 앞으로 한 채 검만 들어 올린 후작은 운디네의 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위를 찔러갔다. 시드는 자신을 계속 노려보며 정확하게 운디네를 쳐내는 그를 보며 움찔 거렸다. “해 보자 이거지.” 한 순간의 불안을 고함으로 날린 시드는 엔다이론을 후작에게 보냈다. 옷이 칼날처럼 변해 온통 삐쭉삐쭉하게 변한 엔다이론이 양팔을 활짝 벌려 후작을 안으려 했다. 레인후작은 뒤로 몸을 쭉 빼며 검을 붓처럼 놀렸다. 검의 움직임에 따라 한 송이 두 송이 꽃송이가 그려졌다. 장미처럼 생긴 꽃송이는 엔다이론의 양팔 사이로 뛰어들어 가슴에 틀어박혔다. 물의 중급 정령 가슴에 꽃 모양의 구멍이 생겼다. 곧이어 희미해진 엔다이론이 사라졌다. “운다인!” 물의 상급 정령이 하늘로 떠올라 몸을 부풀렸다. 20미터 정도로 커진 운다인은 물방울로 잘게 흩어져 폭발했다. 시드의 승부수였다. 거센 폭우가 후작에게만 내렸다. 맞는 순간 구멍이 뚫리는 죽음의 비였다. 운다인의 폭발공격은 후작도 감히 경시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전신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이야압!” 후작의 기합성이 슈란초원을 흔들었다. 수백 개의 종을 동시에 울리는 듯한 고성은 주변 기사들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시작한 움직임은 급격하게 빨라져 종래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검은 그의 전후좌우를 가릴 것 없이 종횡으로 그어졌다. 엄밀한 오러막이 이중 삼중으로 그를 에워쌌다. 그 순간 폭음이 터졌다. 작은 폭음이 찰나지간에 이어져 하나의 커다란 폭음을 만들었다. 쾅! 바닥이 뒤집어 지고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큭!” 그리고 작은 비명이 이어졌다. 후작의 검은 시드의 목 줄기를 가볍게 물고 있었다. 시드의 눈이 상처를 찾아 후작의 몸을 훑었다.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사로잡혔다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질 때 후작이 왼 손을 펴 그의 눈에 디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제 만족하오? 피곤할 텐데 그만 쉬시오.” 그의 왼손이 오므라들어 주먹을 만들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손이었다. 그 손이 후작의 머리와 배를 연타했다. “윽!”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던 비참한 신음을 흘리며 시드는 정신을 잃었다. 후작은 그를 조약돌 던지듯 뒤로 던지고 앞으로 쏘아졌다. 철혈기사들의 비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엘리오트군은 슈란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막스와 시드가 사로잡히고 철혈기사 삼백과 시드의 제자 다섯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슈란평원에 뼈를 묻었다. 검은 까마귀 떼가 소리 없이 나타나 살 속에 부리를 파묻었다. 전쟁의 날 제일막은 까마귀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까마귀들의 잔치는 시체들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계속해서. 전쟁의 날 제 이막은 볼든강에서 열렸다. 엘리오트의 궁수들이 스트빌라이 기사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던 때로부터 정확하게 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후세의 사가들이 정리한 것이 정확하다면. 아이언 오거는 사람들의 온갖 더러운 욕망과는 상관없이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복잡한 상념에 잠겼다. 하이론에게도 말하지 않은 지하세계의 반죽이 못내 마음에 걸렸고, 프르덴틀후작가의 장남이 신분을 속이고 용병단에 가담한 것도 개운치 않았다. 그는 무엇이 아쉬워서 편한 인생을 접어두고 거친 세파에 몸을 맡긴 것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니?” 하이론이 물었다. “저 자는 왜 용병대에 몸을 담았을까요?” 엘란이 에단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용병대에서는 알고 있을까요?” “아마 알고 있을 게다. 그렇지 않다면 복면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야 당연히 신분을 숨기려고 썼겠죠.”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다. 오히려 복면을 씀으로서 주목을 끌게 되고 철저한 뒷조사를 당하게 되지. 그러니 용병대에서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엘란의 어조가 심각해졌다. “그럼 제 정체도 드러날 수 있겠군요.” “언젠가는 드러나겠지. 그 날이 될 수록 멀었으면 한다만......” 얼굴이 가면에 덥혀있어서 긁어봤자 전혀 시원하지도 않을 텐데 엘란은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는 보고 있는 하이론까지 근지럽게 만들만큼 열심히 긁었다. “오늘은 전투에 참가하실 겁니까?” 엘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이론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가치관이 바뀐 것이지 불편한 얼굴로 전장을 지켜보기만 했다. 엘란도 그가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자신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잘 생각하셨어요.” 강물은 여전히 대지를 적시며 흘렀다. 양쪽 강변을 점령한 채 숨 막히는 살기를 뿌려대는 병사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 117, 118회 삭제했습니다. 앞으로도 조금씩 삭제해나갈 생각입니다. 8권은 117회부터 138회까지(정확한 건 아닙니다. 분량을 계산해 봐야 하니까요.) 입니다. 8권은 오월 초에 나올 겁니다. 그리고 6월이나 7월에 나올 9권을 마지막으로 엘란은 완결이 납니다. 곧이어 두 번째 작품도 나갈 겁니다. 지금 예정으로는 무협이 될 것 같습니다. 그때도 아낌없는 성원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엘란(132) 백법사가 하얀색 로브를 두르고 강변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난 순간, 이 시간에서 만나기로 미리 약조가 되어 있던 사람들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맞은 편 강변에 흑법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흑법사는 청색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다 푸른색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흑법사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푸른 색 옷을 입었을까요?” 엘란이 물었다. “모르고 있었냐?” 가볍게 반문한 하이론은 분위기를 바꿔 꽤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로피드가 흑법사라 불리는 이유는 적법사나 백법사처럼 입고 있는 옷 색깔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 소문을 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부리는 어떤 마법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더구나. 나도 그가 흑법사란 별칭을 얻게 된 마법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다.” “그랬군요.” “오늘은 저쪽도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오늘은 정면으로 붙을 것 같지요.” 엘란도 하이론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이패이시스 라인을 넘은 이래로 스트빌라이의 전술은 소극적인 방어전의 모양을 띠고 있었다. 어찌 보면 때를 기다리며 시간을 끄는 것도 같았고 다른 면에서 보면 무슨 노림수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저들이 받은 타격이 너무 나도 컸다. 정규 기사단과 정예병사들, 그리고 지방영주의 군사들까지 치면 죽은 숫자는 물경 40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시간을 끌었다고 보기에는 죽어간 병사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엘란은 말의 갈기를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도 흩어 버렸다. “성기사들을 믿고 저러는 걸까요?” 들리는 풍문에 정확하다면 성기사들은 코밑까지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것 밖에는 딱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구나.” 엘란과 하이론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 페이더스와 에단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언 오거란 놈이 코...코...뭐랬지?” “코티즈.” “그래 코티즈. 그 광산의 관리인이란 놈을 혼자서 잡아왔다 이거지?” “예.” 페이더스는 지하세계의 일장 활극을 곱씹고 있었다. “그래서 퓨어미스릴을 찾았고?” “예.” 에단은 고개를 돌렸다. 페이더스와의 대화가 슬슬 지겨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페이더스의 입은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왜!” 페이더스는 불퉁하게 외치더니 다시 입을 벌렸다. “결정적인 일은 우리 용병대의 아이언 오거가 다 했는데! 왜! 왜! 퓨어미스릴은 훈족의 떨거지들이 꿀꺽한 것이냐! 왜?” 복면 속의 얼굴이 오만상을 그렸다. 며칠 동안 구시렁거린 이유가 결국은 저것 때문이었다. 훈족에게 건너간 미스릴이 아까워서. 에단은 자신이 뭔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 아닌 가하는 회의에 빠졌다. 이제 곧 일국의 후계자가 될 몸이 그깟 미스릴이 아까워서 며칠을 끙끙거렸다는 것은 그의 그릇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물론 광산에서 가져온 퓨어미스릴이 엄청난 금액에 해당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훈족이 가져가서 쓰기로 애초에 약조가 되어 있는 것이었고 그 광산의 정보를 입수하고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인도한 것도 훈족이었다. 미스릴을 쓰지 않고 크리누스성을 함락시킨 만큼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퓨어미스릴을 훈족이 가진 대신 보통의 미스릴은 용병대가 가졌으니 손해나는 장사를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심해 하는 에단의 마음도 모르고 페이더스는 계속해서 불만을 터트렸다. “일은 우리가 다 했는데 미스릴은 저희가 다 챙겨! 욕심 많은 놈들.” 에단은 주변의 귀가 신경 쓰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사람들의 숫자가 족히 100만은 넘어서 소란스럽기는 했으나, 백법사같은 자가 페이더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듣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인간 같지 않은 십존의 능력을 떠올리면 족히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에단의 입을 막으려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크게 붙을 모양입니다.” “언제는 크게 안 붙었냐?” “자세히 보십시오. 언제나 뒤에 등장하던 흑법사나 길라드가 모두 선두에 나서 있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느라 양 진영을 살피지도 않았던 그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에단의 말대로였다. 모든 병력들이 강변에 둘러서 있어서 흑법사와 화염의 길라드가 딱히 선두랄 것도 없지만 툭 튀어나온 모래턱 위에 서 있어서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식들 똥줄이 탔구만.” 페이더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들이 초장부터 나서는 것은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다는 증거였고 바꾸어 말하면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제 일국의 왕이 되는 것도 멀지 않았다 생각하니 입이 저절로 벌어졌고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때 화살이 쏟아졌다. 멍하니 서 있던 페이더스는 하마터면 화살에 맞을 뻔 하고는 기겁을 해서 소리 질렀다. “뭐야? 공격! 공격해라!” 그는 분노에 젖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어쨌든 그의 고함을 신호로 전투가 막을 올렸다. 서로를 노린 화살들이 하늘을 메우고 정령과 마법들이 강을 뒤집는 가운데 기사들과 용병들, 그리고 훈족의 전사들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철가면은 말을 내버려두고 실피드를 불렀다. 정령을 타고 날아가던 그가 손가락을 펼치자 실프 열 명이 나타나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방사형으로 퍼져나간 실프들은 스트빌라이 기사들 사이로 파고들어 투구와 갑옷의 틈 사이를 스며들었다. 경동맥이 뜯긴 기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흑법사의 제자 크라트와 푸워는 간단하게 기사 열을 해치운 아이언 오거를 바라보았다. “저 자의 본 실력이 드러나도록 몰아붙이라는 말이지?” 푸워보다 이년 빠르게 흑법사의 제자가 된 크라트는 푸워를 향해 물었다. 같이 명령을 들었으니 모를 리 없었던 그가 이렇게 물은 것은 스승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다.” “네가 보기엔 실력을 숨기는 것 같더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네 생각도 그렇지? 전쟁터에서 실력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이 참에 아예 죽여 버리자.” 푸워도 아이언 오거가 못마땅했다. 별 것도 아닌 자가 대단한 명성을 쌓아가는 것이 눈꼴시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요.” 음흉한 웃음을 주고받은 둘은 아이언 오거를 향해 주문을 영창 했다. 6써클 마스터 둘이 엘란을 목표로 흉계를 꾸미는 동안 그는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었다. 화염과 바람이 그의 손짓에 따라 이동하며 적을 휘감고 부수고 태웠다. 한낮의 창백한 태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색의 철가면은 스트빌라이군의 뇌리에 공포로 각인되었다. 검은 기류. 흑색 와류가 여전히 날아다니는 그를 향해 마수를 뻗어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심상찮은 기운을 뿌리는 흑연(黑煙)은 크라트와 푸워의 마법이었다. 엘란은 실피드를 보내 기분 나쁜 연기를 흩어버렸다. 그러나 그 연기의 덩어리는 흩어지는 즉시 다시 뭉쳐서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아이언 오거를 노렸다. 엘란은 실피드 대신 카사를 보냈다. 무엇인가가 연소될 때 나오는 것이 연기인만큼 카사로 태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연기도 고온에서는 타들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만든 죽음의 연기는 카사를 맞아 더욱 더 기세가 등등해졌다. 검은 안개가 더욱 농밀해지며 그 덩치를 키웠다. 그리고는 속도를 높여 다가왔다. 엘란은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슈리엘이나 샐라임을 부른다면 충분히 흩어버리고 태워버릴 수 있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슈리엘을 부리면 당장 정체가 드러날 것이고 샐라임을 부리는 것은 어딘지 꺼림칙했다. 불의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그에게 상당한 위험부담을 씌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신의 감각을 열었다. 흑연의 뿌리. 그 존재의 근원이 감겨진 눈꺼풀 안에 또렷이 떠올랐다. “저기군.” 치켜뜬 눈에 두 명의 마법사가 잡혔다. 엘란은 실피드를 제외한 정령들을 돌려보내고 밑으로 뛰어 내렸다. 밑에는 뒤엉킨 병사들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어떤 재수 없는 기사의 양 어깨를 밟고 땅을 디뎠다. 창졸간에 어깨가 탈골된 기사는 신음을 흘리며 말에서 떨어졌고 곧 다른 말의 발굽에 밟혀 사지가 부러져 나갔다. 일단 스트빌라이 기사들 속으로 뛰어들자 검은 안개의 마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나 숨 돌릴 틈도 허락하지 않는 소드의 수렁에 빠져야 했다. 말 위에서 찍어오는 각종 무구들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왜 기병들이 보병들을 쉽게 요리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말은 덩치가 커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안겨주는 데다가, 그 위에 탄 적들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밑에 있는 보병들은 위를 올려다보는 불리한 처지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또 마갑을 입힌 말로 밀어 붙이는 공격을 하게 되면 그 엄청난 힘에 대항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엘란은 실피드로 방어막을 치고 또 다른 실피드를 불러 방어막의 앞을 막았다. 앞을 막은 실피드가 철판처럼 펴지더니 그 표면에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엘란은 그 상태로 달렸다. 날카로운 가시가 앞을 찔러오자 놀란 말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그것이 기병의 유리함을 불리함으로 전환시켰다. 엘란은 가까스로 말을 달래는 기사들 사이를 지나 자신을 공격한 마법사들에게로 다가갔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적이 가까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법을 시전 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몸이 날랜 자들과 상대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6써클 쯤 되면 눈 깜빡 할 새에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어서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기는 하나 그래도 뛰어난 검사를 만나면 접근전을 피하는 것이 유리했다. 아이언 오거처럼 정령사이면서도 움직임이 날래서 소드익스퍼터의 몸놀림을 방불케 하는 자는 특히 조심해야 했다. 카라트와 푸워의 시선이 잠깐 만났다 헤어졌다. 오랜 기간 같이 수련한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었다. 독을 품은 연기가 엘란을 덮쳐 왔다. 아이언 오거는 불쾌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피부과 귀로 느꼈다. 피부는 기류의 움직임을 감지했고 귀는 비명을 감지한 것이었다. 그는 의외의 사태에 잠깐 당황했다. 끊임없는 비명성은 스트빌라이 기사들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엘란이 스트빌라이 기사들 사이로 파고든 것은 그들을 인간방패로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저 검은 안개가 내려오면 자신들의 병사들이 큰 피해를 볼 터이니 감히 사용하지 못할 거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 두 마법사는 아군의 피해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아이언 오거를 공격해 버렸다. 주변을 둘러본 엘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개에 휩싸인 기사들과 병사들은 투구를 벗어던진 채 입과 코를 막으며 쓰러졌다. 손 틈 사이로 피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지독한 독연이었다. 잠깐 사이에 악독한 흑연이 엘란을 감쌌다. 실피드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며 조여 오는 흑연을 상대해 나갔다. 세오나와 멀리 떨어진 카이어스는 아이언 오거단의 선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따라다니던 세오나와 멀리 떨어진 것은 쟝의 충고-계속 따라다니면 콧대만 세어져서 더 힘든 법이다. 연애의 기초는 밀고 당기기다. 때에 따라서는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때문이기도 했고, 단원들을 보호하라는 엘란의 청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파리 목숨처럼 사라져가는 주변의 병사들에 비해 아이언 오거단의 사상자는 월등히 적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의 손이 어느 정도 묶여 버렸고 전체적으로는 전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대원을 보호하며 싸우는 일 이외에 그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었다. 쿵. 카이어스가 복면위에 쓴 짝귀의 투구를 칼등으로 두들겼다. 검에 휘둘려 뛰쳐나가려 한 것이었다. “정신 차리고 자리 지켜.” 검에 휘둘려 뛰쳐나가려던 짝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퉤 침을 뱉었다. 그러다 불쾌한 사실을 깨달았다. 복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바람에 축축한 침이 턱을 적셨다. “젠장!” 짝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뛰쳐나가려는 밤톨의 등을 어깨로 박았다. “정신 차려!” 밤톨이 황망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검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그도 불안했다. 늘어나는 흰머리와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는 소름끼치는 경고. 피를 마시고 광소를 터트리는 미치광이 검. 그는 다가오는 병사하나를 베어버리고 대원들 틈 사이로 끼어들었다. 더 이상 이 검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불안에 휩싸여 검을 검집에 밀어 넣으려는 찰나 그는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한 줄기 사이한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와 그의 의지를 저지하려 했다. 팔에서 시작된 경련은 어깨를 거쳐 머리까지 흔들어 댔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작달막한데다 복면을 하고 그 위에다 동그스름한 투구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이름 그대로 밤톨처럼 보이는 그의 머리가 계속해서 흔들렸다. 투구 끝에 매달린 붉은 수실이 이리 저리 흔들리며 해초처럼 일렁거렸다. 신경을 사방으로 분산하고 있던 카이어스는 밤톨의 괴상한 행태를 곧 발견했다. 그가 양쪽에 든 쌍칼을 교차 시키자 십자형의 푸른 섬광이 작렬하며 앞의 기사들을 오시해 버렸다. 잠시간의 짬을 낸 그는 바닥에 뒹구는 검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바람처럼 달렸다. 그의 장대한 덩치가 사람들의 밀집대형을 미꾸라지처럼 파고 들어갔다. 곧 밤톨 앞에 선 그는 자신의 칼로 밤톨의 마법검을 후려쳤다. 깡. 사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밤톨의 흔들리던 머리가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이어스는 마법검을 뺏어 검집에다 넣었다. 그리고 주워온 검을 밤톨의 손에 쥐어 주었다. “조심해라!” 한마디 걱정을 토해낸 그는 몸을 돌려 단원들 틈 사이를 헤집고 나갔다. 쾅쾅. 하늘에서 두 줄기 선이 마주칠 때마다 천지가 진동했다. 백법사와 흑법사의 결전은 화려하면서도 다채로워 마치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살점이 날고 피가 뿌려지는 생지옥에 갇혀 서로를 죽여 대는 인간군상들이 그 장관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유감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흑법사는 지팡이를 들지 않은 왼쪽 손가락을 구부려 술잔을 쥐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 가상의 잔에 든 가상의 술을 뿌리는 시늉을 하자 푸르스름한 연기가 백법사를 향해 달려갔다. “흥!” 타클마칸은 로피드의 잔재주에 비웃음을 날리며 혼돈의 구슬을 배열했다. 구슬 네 개는 허공에다 아랫변이 넓은 직사각형을 만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직사각형의 중간에 위치했다. 진을 짠 혼돈의 구슬은 몰려오는 연기를 손쉽게 태워버렸다. 흑법사는 타클마칸이 연기를 상대하는 동안 커다란 검은 공-엘란이 들어있는-을 향해 마법의 지팡이를 뻗었다. 그 순간 지팡이 끝에서 손톱만한 불꽃이 튀어나왔다. 그 손톱은 엘란을 향해 쏘아지며 스스로 덩치를 불렸다. 폭설이 쌓인 산 정상에서 주먹만하 게 뭉친 눈을 아래로 굴리면 그 눈은 산을 내려오면서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것처럼 불꽃은 그렇게 몸집을 불렸다. 흑무가 실피드를 감싸 안아 마치 검은 공에 갇혀있는 보이는 엘란은 강대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신체가 자유롭다면 능히 피할 수 있겠으나 이렇게 구속된 속에서는 대처 방법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크라트와 푸워의 입매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 차가운 비웃음은 아이언 오거의 최후를 기대하며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창백한 오후. 어지러운 전장의 한가운데로 집채 세 개는 합쳐놓은 듯한 거대한 화염구가 떨어져 내렸다. 화염구는 검은 연기마저 불살라 버리고 둥그런 물체에 부딪쳐갔다. 쾅. 주변에서 싸우던 기사들과 용병들이 폭발에 휩싸여 하늘로 떠올랐다가 조각조각 갈라져 떨어졌다. 그리고 내장과 피비가 주변에 흩뿌려졌다. 양광을 산란하는 핏방울과 조각난 시체들의 잔해를 뚫고 성결한 날개가 튀어나왔다. 슈리엘! 바람의 상급정령이 그 고귀한 자태를 드러내 전장의 소음을 일순간에 잠재우고 모든 시선들을 끌어당겼다. 엘란(133) “슈리엘!” “슈리엘이다.” 격렬한 부르짖음이 짧은 정적을 밀어내고 전쟁터를 집어삼켰다. 크라트와 푸워의 비틀려 올라간 입매가 삽시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충격과 경악을 담아 아래로 일그러졌다. 그런 그들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순결하게 보이는 날개가 펼쳐진 자리에 은색의 가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들을 밟고 선 아이언 오거의 당당한 모습은 마계의 제왕처럼 보였다. “광술사......” “광술사!!” 작은 속삭임은 천천히 퍼져나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소란도 잠시. 정지된 막이 다시 오르고 사람들은 다시금 자신의 직분을 자각했다. 그들은 몇몇 우두머리들이 짠 각본에 따라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다시 피의 강이 흘렀다. 딱딱한 가면만큼이나 속에 있는 엘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영원히 신분을 감출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훈족과 용병대의 연합군이 완전한 반석위에 오를 때까지는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최소한 이 전투에서 이길 때까지는. 날개가 슈리엘의 등속으로 파고들어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바람의 창이 나타났다. 두 개의 작은 창은 엘란을 핍박한 두 마법사에게 번개처럼 쏘아졌다. “실드!” 방어 마법을 걸어 자신을 보호하는 두 마법사의 창백한 이마위에 구슬땀이 맺혔다. 쾅, 쾅. 창두는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실드에 잠시 머리를 박았다가 이내 실드를 뚫고 들어갔다. 날아오는 창을 피하기 위해 피를 토하며 뒤로 쭉 밀려가는 두 마법사의 앞을 압축된 공기가 막아섰다. 흑법사가 적시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바람의 창이 압축된 공기를 찢고 들어갔다. 그 잠시의 시간에 한 숨 돌린 마법사들이 다시 방어막을 쳤다. “프로덱션 오브 윈드!” 그 위를 창이 두들겼다. 바람과 바람이 휘말려 돌아가며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자 강물과 함께 바닥에 깔린 시체들이 딸려 올라가며 그로데스크한 장면을 연출했다. 겨우 창을 처리한 크라트와 푸워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의외의 사태에 당황해 버려서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한 탓도 있지만 광술사의 정령술은 진저리가 쳐지도록 무시무시했다. 저승 문턱에 한 발을 걸쳤다가 겨우 살아난 두 사람은 더 이상 광술사와 맞서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좌우로 갈라져서 수많은 인파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전 초기의 격돌 때 말에서 떨어졌던 보르딕 루오는 용케 무사할 수 있었다. 피와 살점이 섞인 더러운 물을 마시기는 했지만, 강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병사와 말들 사이에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고 멀쩡하다는 사실은 가히 신의 돌보심이 있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슈리엘이 드러났을 때 그 근처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슈리엘을 똑똑히 볼 수 있었고, 맨 처음 광술사라고 부르짖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형체가 없는 공기가 뭉치고 찢겨지고 조각나는 광경을 바로 곁에서 목격한 그는 미친 듯이 몰아치는 강풍에 안면이 따끔거렸다. 피부가 쓸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는 방패로 얼굴을 가렸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바람에 의해 방패가 당겨졌다 밀려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그쳤다. 방패 밖으로 고개를 내민 그는 꽁무니를 빼는 두 마법사를 놓치고 대신 열 명의 병사들을 들어올려 목을 비틀어 버리는 광술사를 보며 마법사들처럼 옆으로 이동했다. 철없던 시절에 만났던 자. 나중에 코르도바습지에서의 대격돌을 노래하는 음유시인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아! 그때 만났던 자가 그였군.’ 하는 감탄사를 나오게 한 그 사람이 전장을 헤집고 있었다. 전쟁터가 아니라 어느 한가한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그 시절 얘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을 지도 모르나 여기는 아니었다. 근처에 갔다가는 십중팔구 죽을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그는 용병들을 죽이며 광술사에게서 멀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하상에 쌓여가는 시신들이 많아졌다. 수위가 얕은 곳은 수면을 뚫고 시체들이 튀어 나왔다. 발굽이 시체들 사이에 끼어 발목이 부러져 나가는 말들도 속출했다. 수면 아래가 온통 울퉁불퉁했고 수심이 깊어졌다 낮아졌다, 종잡을 수 없이 변했으므로 나중에는 모두 말에서 내려 싸워야 했다. 강을 따라 400미터에 달하는 긴 구역이 말과 사람들의 시체, 그리고 각종 무구들로 메워졌다. 잠깐 사이에 시체들의 제방이 물줄기를 막아 버렸다. 강물의 일부는 시체 위를 찰랑이며 흘러갔다. 그리고, 갈 길을 찾지 못한 강물들은 누천년을 흐르는 동안 자연스레 형성됐던 강둑 중 얕은 곳을 넘어 옆으로 퍼져나갔다. 강이 메워지자 물은 발바닥을 넘실거릴 뿐 별다른 제약을 주지 못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중장보병들이 시체를 넘어 진격했다. 시체들 위에 시체가 쌓이고, 단발마의 비명을 뚫고 새로운 비명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꽤나 자주 손을 섞었던 용병왕과 길라드의 격돌은 김이 빠진 면이 없지 않았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나서면 그도 똑같이 반격해 올 것이 자명하고 그러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인데, 둘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에는 이루어 놓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걸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둘은 적당한 선에서 공세를 자제하고 있었고 그 덕에 주변의 부하들만 죽어나갔다. 둘은 격돌하는 짬짬이 시간을 내 주변을 공격했고 그때마다 비명이 울렸다. 에릭슨의 실력은 백법사나 용병왕, 아이언 오거와 덩치 큰 복면만 조심하면 살아나는 데 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눈치 없기 없기로 유명한 그도 죽기는 싫었으므로 그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눈먼 화살에 맞지만 않는다면 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에릭슨의 실력은 전투가 거듭되는 동안 수많은 입에 오르내렸다. 전장에서는 실력 있는 자의 뒤에 서는 것이 가장 살 확률이 높기 때문에 에릭슨의 주변에는 많은 병사들이 몰려 있었다.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는 드레이크와 새로 합류한 드웨이츠도 그들 틈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움직임은 알게 모르게 보병들의 구심점이 되어 버렸다. 엘란은 실피드로 몸을 감싸고 카사를 앞세운 채 적진을 향해 전진했다. 카사는 전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지나갔다. 카사가 지나가면 시체위에 넘실거리던 강물은 부연 수증기를 뿜어대며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수증기에 휩싸인 채 언뜻 언뜻 드러나는 은색의 가면은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고 쭉 뻗은 손을 따라 튀어나오는 화염은 병사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거기다 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슈리엘이 날리는 창은 앞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날려 버렸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내주는 길을 따라 엘란이 강을 넘었다. 강둑에 올라선 그는 내쳐 달렸다. 그의 뒤를 따라 사기충천한 용병들이 도마뱀 꼬리처럼 이어졌다. 그들이 일차 방어선을 돌파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쿼렐이 날아왔다. 엘란의 신형이 못 박히듯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겹겹이 늘어선 정령들이 쿼렐을 손쉽게 튕겨냈다. “물러서지 마라!” 지휘자들의 독려에 따라 스피어를 꼬나든 병사들이 창날을 들이댔다. 엘란과 용병들을 향해서였다. 단칸백작은 임시로 만든 사령실 안에서 초조한 눈빛으로 전장을 주시했다. 크리누스에서 아이언 오거에 죽을 뻔한 이후로 그는 항상 뒤에서 지휘를 했다. 선두에서 지휘하는 것보다 길라드와 흑법사가 선봉을 서는 것이 사기면에서나 효율면에서나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아이언 오거가 광술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단칸백작이 경악할 새도 없이 그가 이차 방어선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툭툭. 부관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날선 긴장 때문에 하마터면 검을 뽑아 베어버릴 뻔한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 진정하자. 진정!’ 부관은 자칫 상관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한 것도 모른 채 뒤를 향해 손짓 했다. 너무 긴장한 상관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자 직접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뒤를 확인하는 단칸백작의 얼굴이 봄꽃처럼 피어났다. 전장을 향해 달려오는 은색 물결은 저들의 굼뜬 행군이 야기한 원망을 봄눈 녹듯 녹여버렸다. 잠시 후 그의 명령에 따라 깃발의 움직임이 변하고 짧게 끊어지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엘란은 앞을 막던 창병과 궁병들이 좌우로 쫙 갈라지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 까 한 줄기 강맹한 기운이 그를 향해 덮쳐갔다. 보이지도 않는 기운은 그를 둘러싼 실피드를 베어버렸다. 엘란은 무형의 기운을 피해 실프를 타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활처럼 휘어진 그의 등 아래쪽으로 날카로운 기운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기운은 땅바닥에 5미터 짜리 긴 고랑을 파 버렸다. 엘란은 누구의 솜씨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창을 뻗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산적들을 박살내던 그 잔인한 광경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빌바오!” 양쪽으로 갈라진 스트빌라이군 사이로 은빛 찬란한 갑주를 걸친 성기사들이 나타났다. 흉부에 새겨진 십자 문양을 지키는 독수리가 섬뜩하게 보였다. 교하의 명에 따라 전장에 나온 빌바오는 세속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이 흔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애타는 단칸의 독촉을 뿌리치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옆에서 재촉하는 베트런사제와 케이티사제만 아니었다면 굼벵이처럼 천천히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전의에 불타고 있었다. 사교의 대표격이라 할 지고교의 요인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는 애마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말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갔다. 아이언 오거와 빌바오의 주변은 텅빈 공동처럼 변해갔다. 두 마리 맹수처럼 서로를 노리는 절대자들이 서서히 기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용감한 용병들도 서로들 격려하며 그들을 막던 병사들도, 그리고 방금 당도한 성기사들도 감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주변에서 하늘하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둘의 신형은 몽환적으로 일그러졌다. 기운과 기운의 충돌로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진 탓이었다. “바룬신에 영광을!” 검을 치켜세워 가슴 앞에 댄 성기사들이 고함을 지르자 그들의 갑옷에서 밝은 빛이 뿌려졌다. 신의 가호가 내려앉은 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성기사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었으되 용병들에게는 효과 만점이었다. 아이언 오거와 빌바오에게 감히 다가서지 못한 성기사들은 그들 주변을 삥 돌아서 용병들에게 밀려갔다. 아이언 오거가 빠진 용병대는 열세에 몰려 조금씩 후퇴했다. 잠시 후 엘란은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버렸다. “성기사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엘란은 마지막 단어를 묘하게 비틀어 빌바오를 비웃었다. 그는 빌바오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성기사들은 교가 위협을 받거나, 아니면 종교 분쟁 시 검을 뽑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닥쳐라! 사교의 추종자. 사교 토벌은 성기사들의 의무이다.” 엘란은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 사교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전쟁의 목적은 땅따먹기 같습니다만?”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지고교의 좌호법사!” 빌바오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좋습니다. 정 그러시면 제가 회개를 하지요.” “무슨 뜻이냐?” “사교 토벌이 성기사들의 의무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지고를 보리고 바룬을 모실 테니 귀하께서는 세속의 다툼에서 손을 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빌바오는 한 걸음 성큼 다가서는 것으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었다. 그가 창두를 들어 엘란을 가리켰다. 무형의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 빛살처럼 뿌려졌다. 엘란은 강력한 힘이 밀려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애송이 시절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기운이었다. 그가 팔을 십자로 교차시키는 순간 슈리엘이 거대한 쐐기처럼 변해 진로를 막았다. 바로 그때, 쐐기의 첨단과 기운이 충돌했다. 지이잉. 빌바오가 일으킨 힘은 쐐기의 첨단에서 갈라져 좌우로 흘러갔다. 엘란은 십자로 교차된 팔을 풀어 강하게 밀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슈리엘이 움직였다. 정령은 여전히 쏟아지는 기운을 가닥가닥 풀어 헤치며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빌바오의 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어떤 열기로 일렁거리던 빌바오의 푸른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광술사의 실력이 예상을 웃돌고 있었다. 그는 약간이나마 경시하던 마음을 버리고 신중하게 창을 들어올렸다. 전진을 막던 기운이 없어지자 슈리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가히 전광석화 같았는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빌바오는 상급정령이 지척까지 다가왔는데도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지 전혀 동요가 없었다. 창두가 지면과 직각을 이뤄 하늘을 찌르는 순간 한 줄기 빛이 창두에서 창끝까지 관통했다. 그 순간 창이 몸을 뉘었다. 엘란은 창두에서 빛이 번뜩인 순간 슈리엘을 옆으로 밀고 자신도 옆으로 비켜섰다. 쾅! 창에서 시작된 푸른 번개가 지면을 갈랐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쩍쩍 갈라졌다. 일초, 아니 반초만 늦었어도 정수리부터 신체가 양단되었을 것이다. 언제 베였는지 슈리엘의 옷자락도 반은 떨어져 나갔다. “너 죽었어!” 빌바오는 상급정령이 말을 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정령이 창을 만들어 후려치는 것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미스릴과 은, 강철,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금속이 섞인 신의 무구가 투명하게 보이는 바람의 창과 연속적으로 부딪쳤다. 쾅. 쾅. 쾅. 빌바오는 그보다 족히 두 배는 큰 슈리엘에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슈리엘은 조그만 놈이 얄미울 정도로 쉽게 공격을 방어하자 점점 열이 뻗쳤다. 그럴수록 그녀의 몸은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마치 몸으로 그를 덮어버릴 것만 같았다. 구경꾼처럼 싸움을 구경하던 엘란은 왼손 손가락들을 동그랗게 말아 앞으로 내밀었다. 왼손 사이에서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내 활처럼 변해갔다. 다른 실피드가 시위를 만들자 그는 시위를 당겨 놓는 시늉을 했다. 슈리엘과 맞서면서도 한 가닥 신경을 분산해 광술사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던 그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직감 같은 것이었다. 바람의 창을 비껴 때리고 정령의 하체에 창을 세 번 찔러 넣은 빌바오는 오른쪽으로 돌아 정령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 카사의 화살이 나타났다. 불꽃의 화살은 표적이 움직인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다른 성기사의 눈에 틀어 박혔다. “꽤 오래전부터 연습한 건데 실전에서 사용한 것은 처음이야. 어때? 괜찮지 않나?” 엘란은 비아냥거리며 그의 부화를 돋구려하였다. 그러나 빌바오는 그런 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재미있는 재주구나.” 창을 한바퀴 돌린 그는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가 전신의 힘을 끌어올리자 흐릿한 잔상만이 남겨질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그의 움직임이 단선적으로 끊어졌다. 엘란은 달려오는 빌바오와의 거리를 재었다. 20미터 쯤 되던 그와의 거리는 슈리엘과 싸우는 동안 멀어져서 50미터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멀다면 멀다고 할 수 있는 거리이나 자신과 빌바오 같은 존재에게는 한 순간에 다가설 수 있는 거리였다. 엘란은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서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빌바오는 창의 중단을 양손으로 잡고 바람개비처럼 창을 돌렸다. 창의 궤적을 따라 은색의 막이 생겨났다. 엘란과 빌바오를 연결하는 직선상에서 카사가 나타나 은색막을 두들겼다. 캉. 카사의 화살이 직각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엘란은 연이어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다시 카사가 막에 부딪쳤고 역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카사가 막을 때렸다. 정령의 화살은 실로 다양했다. 때로는 실피드가 나타나기도 하고 실프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운디네도 모습을 드러내고 샐라멘더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불과 물과 바람의 정령이 차례로 막을 두들기고 허공으로 튕겨졌다 정령계로 돌아갔다. 빌바오는 정령이 날아오는 족족 날려버릴 수는 있었지만 섬전처럼 빠르던 속도는 어느덧 떨어져서 이제는 거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려졌다. 아울러 팔목이 끊어질 것처럼 쑤셔오고 풍차처럼 돌리던 창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다가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령의 화살을 튕겨내며 다가가다 보면 광술사가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그의 면상을 뭉개 놓을 것이다. 이 은빛 찬란한 신의 무구가. 둘의 거리는 착실하게 메워졌고 그럴수록 빌바오의 입술에 매달린 미소가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짙어졌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광술사를 죽일 수 있다. 엘란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있어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도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가 다시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엘란(134) 이번에는 전과는 달랐다. 정령이 자취도 없다가 목표물 근처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위를 놓는 즉시 모습을 드러냈다. 빌바오가 지친만큼 엘란도 지친 것이다. 땅. 창과 정령이 부딪쳐 만드는 소리가 확연히 달라졌다. 날카로운 맛이 무뎌지고 뭉툭하게 울리는 것이 지친 양쪽의 상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창이 만들어내는 은색의 막이 눈에 띠게 흐려졌다. 아울러 엘란이 당기는 시위도 초기의 팽팽함을 잃고 흐물흐물하게 늘어졌다. 엘란은 늘어진 시위를 힘껏 당겼다. 당겨진 시위에 샐라멘더 셋이 동시에 걸렸다. 둘은 마음속으로 동시에 외쳤다. 이제는 다섯 걸음이다. 빌바오가 다섯 걸음을 네 걸음으로 줄이는 순간 시위가 놓여지고 불꽃의 화살이 그의 목 줄기를 노리고 쏘아졌다. ‘이번만 막아내면 끝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빌바오님 어쩌고 하는 주변의 외침도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곤두선 신경이 온통 광술사와 정령의 화살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막았다! 세 번의 충격이 창대에 가해졌다. 동시에 날아오는 정령을 무난히 막아낸 것이다. 그는 입을 열어 마음껏 외치고 싶었다. 이제는 세 걸음이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미친 듯이 돌리던 창을 바로 해 광술사를 찔러갈 뿐이다. 아니 찔러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광술사를 찌르지 못했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광술사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주위의 소음이 일시에 몰려왔다. 그것은 막혔던 제방이 터져 홍수가 나는 것처럼 한순간에 귀를 통과해 뇌를 울렸다. 그의 몸이 바람처럼 돌았다. 그리고 뒤로 돌린 창의 끝으로 광술사를 밀어냈다. 엘란의 신형이 삼 미터쯤 뒤로 쭉 밀렸다 섰다. 그때 슈리엘이 날린 바람의 창이 빌바오의 창과 부딪쳤다. 쾅! 빌바오는 한모금의 피를 토해내고 창을 늘어뜨렸다. 잊고 있었다. 광술사와 상대하는 동안 뒤에 있던 슈리엘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의 대결은 자신의 패배였다. 광술사를 노리며 한발 한발 다가가는 동안 뒤에서는 슈리엘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광술사와 슈리엘에게 포위된 형세도 형세지만 팔십 평생 처음 당하는 패배가 그를 뼈아프게 했다. 엘란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슈리엘의 머리 위에서 창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의 시위에 엔다이론이 걸렸다. 그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사방에서 창이 날아왔다. 성기사들이 던진 창이었다. 엘란은 충분한 힘을 싣지 못하고 시위를 놓는 즉시 활을 변화시켜 하늘로 떠올랐고 그 순간 슈리엘도 창을 던지고 정령계로 돌아갔다. 빌바오는 뒤를 노리는 엔다이론을 쳐서 밀어낸 후 다시 몸을 돌려 창을 때렸다. 쾅.쾅. 두 번의 폭음이 울리고 다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쾅. 따당. 여섯 개의 창이 엘란이 있던 장소에서 부딪쳐 떨어졌다. 엘란은 하늘 위에서 자신을 암습한 성기사들을 쏘아보았다. 저들의 방해만 없었어도 빌바오를 노리던 창과 화살에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있었고 그렇다면 그를 죽이지는 못해도 최소한 중상을 입힐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해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자신은 지쳐버렸고 빌바오의 주변은 성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아쉬움을 삼키고 뒤로 물러섰다. 일천 성기사들이 가세한 이후로 전황이 조금씩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강으로 향했다. 그가 가세해자 전황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다. 조금씩 밀고 밀리기를 반복할 뿐 어느 쪽도 승세를 굳힐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백법사와 적법사, 용병왕과 길라드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의 대화가 오가고 잠시 후 전투가 중지되었다. 양쪽은 살기 띤 시선으로 적들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물러섰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제방 안은 시체로 가득 차서 물줄기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 병사들의 후퇴를 지켜보던 십존들 사이에서 또다시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백법사는 혼돈의 구슬을 움직여 강의 중간을 후려쳤다. 시체들이 솟구쳐 올라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 다음은 적법사가 나섰다. 그의 머리위에 솟구친 붉은 화염은 백법사가 갈라놓은 시체 들 사이로 떨어져 시체의 길을 더욱 넓히고 태웠다. 수증기가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용병왕은 시체들을 헤치고 내려가 검을 휘둘렀다. 검의 끝에서 막대한 기운이 흘러나와 시체들을 날리고 쪼개버렸다. 그 후에는 불의 상급 정령이 벌어진 길을 달리며 남아 있던 방해물을 모조리 태웠다. 이윽고 물길이 생겨났다. 시체의 장벽을 그대로 두면 강물이 범람해 홍수가 나므로 십존들이 나서서 물길을 틔운 것이다. 강물은 시체의 벽을 통과해 하류로, 하류로 흘러갔다. 피와 눈물을 담고서. “대단하군.” 단칸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듣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성기사들이 당도하고 이제는 되었다 싶었는데 그들 중 핵이라 할 수 있는 빌바오가 광술사에게 패한 것이었다. 성기사들을 앞세우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던 바룬교의 사제들도 그만 기가 죽어 버렸다. 단칸의 옆에서 상황을 살피던 베트런사제가 입을 열어 위로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빌바오님이 긴 여정동안 쌓인 여독이 풀리지 않아 실수를 한 것이니 다음번에는 저 간악한 사교도의 목을 베어 버릴 것입니다.” ‘기어와도 니들 보다는 빨리 왔겠다. 놀 거 다 놀고 쉴 거 다 쉬고 온 주제에 여독은 무슨 놈의 여독이 쌓인단 말인가!’ 그가 속으로 욕을 삼킬 때 검은 로브를 걸친 통신 마법사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섰다. “사령관님. 황실친위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무슨 소식이냐?” 마법사의 밝은 음색이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발해진 소리는 한여름의 소나기만큼이나 그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레인후작님이 엘리오트군을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전멸?” 너무 기쁜 나머지 반문하는 단칸의 목소리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갈라졌다. “시드와 막스, 그리고 서너 명의 정령사와 삼백여 철혈기사들을 제외한 모든 적병들이 슈란평원에 몸을 뉘였다고 합니다.” 한 숨에 보고를 올린 마법사는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말을 이었다. “레인후작님께서 막스와 시드를 연달아 패배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합니다.” “오!” “와!” 축 늘어져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일변했다. 주변 공기는 벅찬 희열을 담아 달아올랐다. 단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엘리오트군은 완전히 전멸했다. 이제 그들은 이빨 빠진 사자 신세로 전락했다. 발톱에 해당하는 카를후작과 그 휘하의 붉은 도끼단이 있지만 그들은 피요르드의 발호를 막아내는 것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이 전쟁은 이겼다! 훈족과 용병대뿐이라면 앞으로의 전투는 해보나 마나였다. 그의 머리에 장대한 그림이 그려졌다. 훈족과 용병대의 각을 뜨고 그들의 땅을 차지한다. 그리고 엘리오트를 정리한 후 피요르드까지 집어삼키면 대제 사후 천년 만에 새로운 통일 제국이 열리는 것이다. 여성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사제서품을 받은 케이티는 십존의 시대가 서서히 정리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꼈다. 십존의 지고한 신분을 감안하면 그들이 맞싸울 일이란 거의 없다. 그러나 대륙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고 그들끼리 부딪치자 실력의 고하(高下)가 분명하게 가려지고 있었다. 광술사가 빌바오를 무릎꿇림으로서 코르도바습지에서 광법사를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만천하에 입증했고 이제 레인후작이 시드와 막스를 사로잡음으로서 십존보다 우위에 있음을 대륙전체에 알렸다. 이제 십존 중 누가 다음 제물이 될 것인가? 전쟁의 날 제삼막은 도벡스지방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전투는 앞서의 두 전투보다 늦게 시작해서 먼저 끝났는데, 후세의 사가들은 광휘기사단장 베니토백작의 전술실패를 그 원인으로 꼽기도 했고 적법사의 딸 레오니아의 경험미숙을 이유로 꼽기도 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이틀 전 내린 봄비로 촉촉하게 녹아 있었다. 도벡스지방은 밀보다는 주로 벼를 재배했는데 지금은 논에 물을 대서 모내기 준비를 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논 어디에도 농부들은 보이지 않았고 흉흉한 병장기를 든 병사들만이 논두렁을 밟아대고 있었다. 해가 점차 높이를 더해갈 때 대형 천막들은 착착 개어져서 마차에 실리고 병사들은 행군준비를 갖추었다. 엘리오트토벌군의 요인들도 하나, 둘 말에 올라 행군을 준비했다. “큰일입니다.” 지그달로가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것이 상당히 경박하게 보였다. “뭐가 큰일이란 말입니까?” 휴고가 말을 받았다. “대충 휘젓다가 적당한 시기에 후퇴할 작정이었는데 카를후작이 붉은 도끼단을 끌고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큰일이지요.” “누가 대충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후퇴할 작정이라고 합디까?” 휴고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적당히 하는 전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그달로는 연신 침을 튀기며 경박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엘리오트가 스트빌라이에서 회군하면 우리도 군을 돌린다는 소리를 출전하기 전에 마법사의 탑에서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거하고 적당히 하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다른 소리 아니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그게 그 소립니다.” “어째서 그게 그 소리요?” 둘이 서로의 말꼬리를 계속 물고 늘어지자 대화가 한 군데서 빙빙 맴을 돌았다. 논의가 전혀 진전되지 않자 지겨워진 헤이안이 헛기침을 터트리며 대화에 뛰어들었다. “수도 방위를 등한시 하고 전면전으로 나오는 걸 보면 엘리오트가 독한 맘을 먹은 것 같습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게지.” 피요르드군의 사령관 베니토백작은 경멸을 담아 말했다. “그들의 욕심을 탓할 것도 없지요. 우리도 부화뇌동해서 덕 될 것 하나도 없는 이런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습니까?” 지그달로는 팔을 돌리고 가끔 다리도 떠는 것이 태도가 여전히 경박스러웠다. 6써클 마법사의 체면 같은 것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지라 헤이안이 괜히 무안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베니토는 속으로 열까지 수를 세어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지그달로란 마법사 놈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척, 경박한 척 하면서 피요르드가 참전한 일을 계속해서 비난하고 있었다. 그것도 빙빙 돌려서. 지그달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큰일입니다. 큰일! 붉은 도끼단 하면 스트빌라이의 황실친위대와 더불어 대륙의 이대 기사단으로 꼽히는 막강한 기사단인데 광휘기사단 정도로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는 계속해서 염장을 질렀다. “아휴~그것도 그렇지만 카를후작은 누가 상대할런지......베니토백작님은 그를 상대할 수 있습니까? 아니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그럼 휴고 기사님은? 아니 그것도 안 되지. 인물로 싸운다면야 몰라도 턱도 없는 일이지. 그럼 여기 백전노장 자말님께서? 아니지. 아니야!” 지그달로는 자신이 묻고 자신이 답하며 연신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연신 안 된다는 소리를 반복하며 희극적으로 고개를 흔들자 베니토와 휴고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베니토와 휴고가 카를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대놓고 떠벌리고, 종래에는 휴고의 인물까지 들먹이는 것은 과한 언행이었다. 자말은 베니토와 휴고에게서 심상치 않는 기색을 읽었다. 지그달로가 조금만 더 자극을 하면 베니토는 몰라도 휴고는 폭발할 것 같았다. 휴고가 여차하면 장갑을 벗어 던져 결투라도 신청할 것 같자 자말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인물로 싸우면 전 대륙에서 우리 휴고님을 따를 자가 없지요.” 사람 좋게 웃은 그가 일순간에 표정을 변화시켜 날카롭게 쏘았다. “지그달로님 저희 기사단에는 카를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마법사들께서 책임지고 저지하십시오. 물론 그를 죽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손발만 묶어 놓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요.” 지그달로가 반박할 사이도 없이 레오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그렇게 하겠다고 나서자 지그달로는 금방 울상이 되었다. ‘젠장! 혹 떼려다 혹 붙이게 생겼네.’ 지그달로가 성깔 있어 보이는 베니토와 휴고를 자극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발을 빼고 싶었고, 둘을 자극해 그 빌미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레오니아가 산통을 다 깨어 버렸다. “잠깐 나 좀 보죠.” 그를 부른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그달로. 수작 부리지 마세요.” 그녀는 그의 속마음을 낱낱이 읽고 있었다. “헤!” 그는 내가 뭘? 하는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배나온 오십대 중년이 그런 행동을 보이자 그녀는 속이 불편해졌다. “그런 엽기적인 행동 하지 마세요.” 지그달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귀여운 척도 하지 말구요.” 그녀는 등을 돌리며 한 마디 더 쏘아주었다. 지그달로는 혀를 날름 내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급히 혀를 집어넣고 딴청을 부렸다. “그런 유아스러운 행동도 하지 마세요.” ‘아이구! 내 신세야.’ 지그달로는 다시 울상이 되었다. 피요르드로 돌아간 황실마법사 샤른이 부러울 뿐이었다. 숙영지가 정리되자 척후를 보낸 피요르드군은 곧 진군을 개시했다. 그리고 엘리오트군과 맞닥뜨렸다. 피요르드의 12만 대군과 엘리오트의 10만 대군이 평야를 가득 메웠다. “약속대로 카를후작을 맡으십시오.” 자말은 검을 뽑아들며 침착하게 말했다. 지그달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친 놈! 내가 무슨 수로 후작을 막아.’ “우리가 후작을 물고 늘어지는 동안 적들을 섬멸하세요.” 탑에서 나온 마법사들의 지휘자 레오니아가 말했다. 고맙다는 표시로 깊숙이 머리를 숙인 자말은 베트런백작의 명령에 따라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피요르드의 전통이 담겨있는 삼각대형이었다. 마법사들도 그의 구령에 따라 위치를 바뀌었다. “또 삼각대형인가? 좀 고루하지 않아?” 꼭짓점의 선두에 위치한 것이 못마땅한지 지그달로는 지팡이를 꺼내들며 연신 투덜거렸다. “내가 보기엔 괜찮은 진형 같은데?” 마법을 발휘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헤이안은 이 진형이 만족스러웠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선두가 깨지면 사단이 날 텐데.” “선두가 깨어지지 않으면 되잖나?” “카를이 선두에서 밀고 내려오면 어지간히 안 깨지겠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가 막아야지.” 지그달로는 코웃음을 날렸다. “하! 우리가 십존을 막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십존도 인간이다. 우리가 몰려들면 그도 별 수 없을 걸.” 헤이안은 레오니아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카를이 혼자라면 우리가 우 몰려가서 막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야. 붉은 도끼단에는 사자 같은 자들이 우글거린단 말이야.” 헤이안과 대화하는 지그달로의 시선은 레오니아에 닿아 있었다. 그는 레오니아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헤이안과 말을 섞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쩔 수 없어요. 기사들보다 우리들이 강하니 그를 우리가 저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전투에서 집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후방에서 기사들을 지원하다가 불리하면 후퇴합시다.” 지그달로는 흉중에 담아두었던,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엘리오트의 국경을 넘은 이후 내내 생각하고 있던 바였고, 적법사가 특별히 당부한 말이기도 했다. “늦었어요.” 그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북소리도 없었고 나팔도 불지 않았다.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눈 엘리오트군은 저돌적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화살을 날리지도 않았고 마법사나 정령사의 엄호도 받지 않은 채 무조건 말을 달렸다. 보병들이 뒤쳐져 부대가 양분될 정도였지만 그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엘란(135) “발사!” 공성전을 대비해 가져온 투석기가 벌떡 일어나 몸을 세웠다. 바위와 돌멩이들이 달려드는 엘리오트군을 향해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위에 깔린 자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졌고 돌멩이에 맞은 자는 뼈가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공포를 모르는 전사들처럼 맹렬하게 돌진하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쏴라!” 투석기가 재장전을 위해 몸을 눕힐 동안 화살비가 퍼부어졌다. 투석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히 떨어지는 바위의 숫자도 많지 않았으므로 운수소관에 맡긴 채 별다른 방어책을 구상하지 않았던 엘리오트군도 하늘을 덮어오는 화살비는 부담스러웠다. 종군마법사들이 준비하고 있던 주문을 외우자 군데군데 투명한 막이 생겨 떨어지는 화살들을 막았다. 하늘 전체에 보호막을 칠 수는 없었으므로 막 사이를 통과해 내려오는 화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피해는 감수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전우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엘리오트군의 돌진은 무지막지 했다. 저런 식으로 무식하게 나올 줄 몰랐던 피요르드군의 병사들은 거리가 가까워오자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기세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금 엘리오트군은 점점 기세를 돋우며 달려오는 반면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피요르드군은 점차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두에 서 있는 지그달로에게 아주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는 피부를 찌르는 불쾌한 감각을 지팡이를 돌리는 것으로 해소하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은 위축되었고 그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이대로는 곤란할 것 같았다. “망할!” 지그달로는 욕설을 뱉으며 지팡이를 내밀었다. 지팡이 끝에 달린 붉은 수정이 은은한 광택을 발하자 삼각대형의 꼭짓점, 정면을 향해 치달리는 엘리오트기사들의 전면에 위치한 대지가 조용히 일어섰다. 분위기 반전을 노린 지그달로 회심의 시도였다. 길이 100미터 높이 1미터의 작은 방벽은 달려드는 엘리오트군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그때, 피요르드군의 돌격나팔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그달로를 위시한 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선두에서 달려야 했다. “저...저런...” 헤이안은 혀를 내둘렀다. 삼십 여 기사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벽을 넘어버린 것이다. 가벼운 복장이라면 일 미터 정도는 쉽게 넘을 수 있다. 하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게가 만만찮은 무구를 들고 거기다 더해 말에 마갑까지 입힌 채 장벽을 넘는 것은 고도의 승마술과 명마가 어우러지지 않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펑. 펑. 종군마법사의 마법에 의해 장벽은 쉽게 터져나갔고 그 틈 사이로 기사들이 다시 달렸다. 그리고 많은 수의 기병들이 장벽을 돌아 돌진했다. 지그달로가 지면을 뒤집은 것은 잠시의 시간을 노린 일이지 저들의 돌진을 저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돌파 당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파이어 볼.” 그는 선두의 기사를 노리고 화염구를 날렸다. 커다란 해바라기처럼 생긴 화염구의 테두리는 마치 활짝 핀 꽃잎처럼 불꽃이 이글거렸다. 선두의 기사는 마갑에 매달린 마상용 창을 꺼내 화염구를 향해 던졌다. 쐐애액. 창은 매서운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가 거대한 해바라기가 덮쳐오는 듯한 환상을 일으키는 화염구의 중앙을 관통했다. 그리고 흩어지는 불꽃을 배경으로 길게 날아가 여전히 삼각진형을 갖춘 채 돌진하는 피요르드군의 꼭짓점을 노렸다. 꼭짓점에 위치한 지그달로는 화들짝 놀라 부유마법을 시전 했다. 하늘로 솟구치는 그의 발밑으로 창이 스치듯 날았다. “으악!” 바로 뒤를 따르던 마법사 하나를 작살낸 창은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뒤의 기사마저 저세상으로 보내버렸다. 공중에 뜬 지그달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씻었다. “카를후작이군.”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카를후작이 분명했다. 그가 공중에 떠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동안 양군의 거리는 지척이라 할 만큼 가까워졌다. 한숨 돌린 그는 갑자기 깨달은 사실에 깜짝 놀라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레오니아!” 그가 빠진 피요르드의 선두에 레오니아가 있었고 마주 달리는 엘리오트군의 선두에 카를후작이 있었다. 그는 가장 빠른 시간에 시전 할 수 있는 마법을 걸었다. “파이어 애로우!” 스무 대의 마법화살이 카를후작을 노리는 동안 그는 플라이 마법을 걸어 부지런히 거리를 좁혔다. 파이어 애로우가 자신을 지나쳐 날아가자 레오니아도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뭉툭한 지팡이가 둥근 원을 그리자 붉은 섬광이 일어났다. 원형의 불길은 그 모양을 고스란히 가지고 날아가 마법화살을 쳐내는 카를후작을 덮쳤다. 후작의 검이 위와 아래 좌와 우를 동시에 찔렀다. 서릿발 같은 기운이 불의 링에 올라타 그 고리를 끊었다. 네 조각으로 나눠진 불길은 서서히 스러졌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온갖 마법이 선두에서 달리는 30여 기사들을 향해 퍼부어졌다. 화염이 평야를 태우고 바람이 대지를 갈랐다. 냉기와 열기가 번갈아 교차하며 땀과 소름을 만들었고 연신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소리없이 고꾸라지는 기사들을 배경으로 검광이 천지를 뒤덮었다. 모든 마법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오러탄이 날았고 태풍처럼 검기가 휘몰아쳤다. 푸른 색 오러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광폭하게 변했다. 그처럼 푹풍 같던 오러가 갑자기 순한 양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거리를 좁힌 카를의 검이 종횡으로 그어졌다. 겨우 일행들을 따라잡은 지그달로는 레오니아의 목덜미를 덥석 들어올려 위로 솟구쳤다. 퍽. 퍽. 퍽. 오러탄 틀어박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피요르드군에서 가장 앞서 달리는 말은 지그달로가 타고 있던 말이었다. 그 말은 지그달로가 없어져 무게가 가벼워지자 말 그대로 나는 듯이 달렸는데 카를후작의 서릿발 같은 검광에 놀랐는지 두 다리를 치켜들고 그 자리에서 서 버렸다. 후작의 신형이 자신이 탄 말에서 뛰어올라 지그달로 말의 머리로 이동했다. 그는 그 말을 짓밟아 죽이고는 다시 도약력을 얻어 피요르드군,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한 덩어리의 기사들이 삼각 진형의 꼭짓점으로 파고들었다. 레오니아는 무슨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마법사들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어 둥실둥실 떠오르고 그들의 몸이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며. “레오니아! 정신 차려.” 지그달로의 외침은 원하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도망가자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레오니아는 정신 차리고 공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를 밀쳐내고 마법을 걸었다. “메가 라이트닝 볼트.” 지팡이 끝에서 한 줄기 강력한 번개가 튀어나왔다. 지지직거리며 뻗쳐오는 푸른 섬광을 허공으로 뛰어올라 손쉽게 피한 후작은 방향을 바꿔 자신을 쫓아오는 번개의 근원 레오니아의 지팡이를 향해 검을 그어 올렸다. 반달처럼 휘어진 검기가 지팡이와 함께 레오니아를 양단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오러탄이 날았다. 후작이 저 둘을 죽여 버리려 독한 마음을 품은 것이다. ‘아이구 내 팔자야!’ 지그달로는 속으로 팔자타령을 하며 마나를 모조리 끌어올렸다. “엡솔루트 실드!” 7써클 절대방어 마법이 6써클 마스터에 의해 불완전한 상태로 펼쳐졌다. 후작의 독한 손속을 막으려면 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콰콰쾅. 그의 예상대로 푸른색의 방어구가 후작의 매서운 공격을 모조리 차단시켰지만 지그달로는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해파리처럼 축 늘어진 그의 사지는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고 입과 코에서는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지그달로!” 이번에는 레오니아가 그를 붙들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녀의 앙칼진 고함과 함께 지팡이가 들어올려질 때 떨리는 그의 손이 레오니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만 둬! 개죽음하고 싶지 않으면.” 그의 헬슥한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해갈 때 후작의 몸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듯 했다. “어이! 미스터 카를!” 지그달로는 카를후작을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 부르듯 격의 없이 불렀다. 카를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휘두르는 검을 멈춰 그의 미간에 검 끝을 맞추었다. 미간에 맺히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지그달로가 입을 열었다. 그때마다 피가 흘렀다. “항복! 항복이다!” 후작의 몸이 중력에 의해 밑으로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지만 포로를 일일이 돌봐줄 여유가 없다.” 카를후작의 검에 오러가 맺혔다. 지그달로의 입이 소리 없이 벙긋 거렸다. 이 여자가 적법사의 딸이니 죽이는 것보다는 포로로 삼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이익이 될 거라는 소리였다. 어느 재수 없는 피요르드병사의 머리를 짓밟아 다시 도약한 후작의 검이 둘의 전후좌우를 모조리 봉쇄했다. 잠시 후 레오니아는 지그달로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후작의 포로가 되었다. 전투의 승패에는 전혀 연연하지 말고 레오니아만 보호하라는 스승의 명령을 가까스로 이행한-결국 포로로 잡히긴 했지만-지그달로는 눈을 뒤집고 까무러쳐 버렸다. 그즈음 세 갈래로 나뉜 엘리오트군 중 두 무리가 삼각 진형의 양쪽 빗변과 충돌했다. 삼각 진형의 중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베니토백작은 휴고와 자말을 양쪽으로 보내고 휘하 기사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그의 독려도 무색하게 미치광이처럼 발광하는 카를의 검이 시체의 길을 만들며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이형(異形)!” 베니토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두 번의 짧은 나팔소리가 울렸고 삼각진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삼각형의 아래쪽 꼭짓점이 조금씩 오그라들며 뒤로 물러섰고, 중심에서 양변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어 휴고와 자말의 이동을 도왔다. 휴고는 한 떼의 인마를 이끌고 사정없이 치고 들어오는 엘리오트군의 기사와 맞섰다. 아테보로자작은 은발을 휘날리는 잘생긴 청년이 다가오자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광휘기사단의 부단장 휴고.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잘생긴 외모를 만천하에 공개, 엘리오트의 사교계를 오랫동안 떠들썩하게 만든 자였다. 아테보로는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휴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를 향해 팔을 뻗었다. 팔에 들린 검이 먹이를 노리는 뱀의 머리처럼 영활하게 움직였다. “제법이다.” 한 마디 말과 함께 아테보로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쨍. 독아를 들이미는 뱀의 머리를 학의 부리가 쪼았다. 휴고는 검이 저지되자 가볍게 손목을 튕겼다. 그 순간 곧게 뻗은 검이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구부러져서 학의 머리를 타고 올랐다. 가가각! 아테보로는 손목으로 재주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저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검에 주입할 뿐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휴고의 검이 그의 검에 짝 달라붙어 조금의 미동도 하지 못했다. 휴고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붉은 혈색은 태양광아래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발과 어우러져 강렬한 색감을 자아냈다. 그것이 묘한 색기를 불러일으켰다. 봄의 향기에 취한 처녀들이 봤다면 자지러졌을 광경이나 아테보로 같은 남자에게는 오히려 강렬한 살기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검이 떨어지지 않자 휴고는 고삐를 당겨 말을 밀어붙였다. 삐죽삐죽한 철가시가 달린 마갑이 아테보로 말의 마갑을 뚫고 들어가 부드러운 속살을 사정없이 찔렀다. 히히힝! 놀란 말이 뒷걸음질쳤고 그제서야 검이 떨어졌다. “죽어!” 휴고는 급히 말을 앞으로 몰아 아테보로의 말과 바짝 붙었다. 끼이익. 철가시가 다시 마갑을 뚫었다. 곧이어 마갑이 피로 물들고 거품을 문 아테보로의 말이 미친 듯 요동쳤다. 그 어수선한 상황을 뚫고 휴고의 검이 공간을 쪼개왔다. 아테보로는 왼팔로 고삐를 잡아챘다. 강력한 힘을 이기지 못한 말의 머리가 획하고 돌았다. 우악스런 방법으로 말을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뚝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말의 다리가 풀리자 그의 몸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때 휴고의 검이 심장을 노리고 찔러왔다. 그는 급한 김에 검면으로 휴고의 검면을 때렸다. 그리고 몸을 틀어 여전히 찔러오는 검을 옆으로 흘렀다. 갑옷이 베어지고 옆구리가 찢어졌다. 폭삭. 목이 90도로 꺾인 아테보로의 말이 완전히 무너지자 그는 말을 버렸다. 땅을 박차고 고무공처럼 튀어 오른 그가 검을 내질렀다. 검은 휴고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왼쪽 가슴까지를 목표로 삼아 오십도 각도로 움직였다. 땅. 사선을 그리는 검의 궤적은 곧 방패에 의해 차단되었다. 방패가 치워지고 위에서 휴고의 검이 떨어졌다. 아테보로는 양손으로 그립을 잡고 떨어지는 검을 밑에서 위로 후려쳤다. 쨍쨍쨍. 둘의 검이 연속적으로 부딪치며 격렬한 소음을 토해냈다. 휴고와 반대쪽 빗변으로 움직인 자말은 전세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전황은 불리했다. 초기에 마법사들이 몰살당한 것이 특히 치명적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헤이안이 분전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도 조만간에 마력이 바닥날 테고 그러면 끝장일 터였다. 처음에는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냉정하게 실력을 재어보았고, 그 결과 탑에서 고련을 쌓은 마법사들이 기사들보다는 실력이 윗줄인 것으로 판단되어졌다. 그래서 레오니아를 충동질했고 마법사들을 선두에 세웠다. 그러나 카를로 짐작되는 자에게 마법사들은 초반에 몰살당했다.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거기다 더해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왔다. ‘레오니아는 어떻게 되었지?’ 혼자 움직이는 헤이안을 보면 죽어 버린 것 같았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그의 안생이 백짓장처럼 희어졌다. 적법사가 이번 전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딸이 마법사들을 통솔하고 왔을 때 단순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싫으니 딸을 보낸 것으로. 그리고 이제 그의 외동딸이 죽었다. 적법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분노가 용암처럼 뿜어질 것이다. “젠장!” 이번 전쟁은 지그달로의 말대로 적당히 하고 적당히 빠졌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안위를 챙겼어야 했다. 그의 뇌가 수많은 걱정을 품고 회전할 때에도 그를 노린 병장기들은 끊임없이 쐐도 했다. 전쟁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자말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의 검은 주인의 목숨을 구하고자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쌔액! 자말은 살을 에이는 날카로운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친 놈!’ 그는 전장에서 딴 생각을 한 자신에게 스스로 욕설을 퍼붓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검. 적의 살기에 반응해서 적절로 움직이는 몸과 검.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쨍쨍쨍. 치열하게 부딪치는 병장기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 그는 그 소리에 몸을 싣고 그 음률에 검을 담아 적을 도륙했다. 붉은 도끼단의 니기어 남작은 멍청하게 검을 휘두르다 한 순간 놀라울 정도로 표변해서 신들린 듯 부하들을 베어 넘기는 자말을 보며 살기 띤 눈빛을 보냈다. 가까이 접근한 그는 차가운 살기를 실어 검을 휘둘렀다. 자말의 검과 그의 검이 무섭게 격돌했다. 쩌어엉! 검에서 엄청난 힘이 전해졌다. 그 힘의 여파로 자말은 무아지경과도 같았던 상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가늘게 이어진 한 가닥 깨달음의 끈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끊어졌다. 자말은 새로운 경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조용히 찾아왔다 말없이 떠난 것을 깨달았다. 진한 아쉬움이 가슴을 적셨다. 그 아쉬움은 뜨거운 갈망을 일으켰고 그 갈망은 곧 분노로 화했다. “개자식!” 켜켜이 쌓인 분노가 서릿발 같은 검기에 실려 니기어를 쓸어갔다. 니기어는 경악했다. 적의 검에 실린 힘과 살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찼기 때문이다. 자말의 검이 니기어의 검을 토막 내고 그의 심장을 터트렸다. 검을 뽑아 피를 뿌리며 자말은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적을 죽이는 순간 자신의 실력이 한 단계 도약했음을 깨달았고,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또 다른 경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도 뇌를 스쳐갔다. 그것이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엘란(136) 광휘기사단장 베니토백작은 조금씩 물러났다. 카를 후작과 그가 이끄는 기사들이 삼각 진형의 중심부에 거의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에서 물러서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오른 다리가 날아가 피를 쏟으며 추락하는 헤이안을 끝으로 마법사들이 모두 죽었다. 그로써 그들의 세력에 타격을 입혔고 엘리오트 깊숙이 쳐들어와 기사단의 실력도 충분히 피력했다. 점령한 땅도 만만치 않았고. 이제는 영광스럽게 후퇴할 때였다. 후군의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곧이어 삼각 진형의 중심부가 뒤로 쭉 빠지고 빗변이 서로를 향해 오므라들어 하나로 합쳐졌다. 일자대형을 이룬 피요르드군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후퇴했다. 카를은 손을 들어 쫓아가는 병사들을 저지시켰다. 기분 같아서는 쫓아가서 모조리 도륙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아군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스트빌라이와의 전쟁도 염두에 두어야 했으므로 더 이상의 피해는 볼 수 없었다. “이겼다!” 아테보로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고, 병사들이 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평야를 뒤흔들었다. “우와!” “와!” 엘리오트군 삼만과 피요르드군 오만,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들의 생명을 삼킨 도벡스 회전(會戰)을 끝으로 전쟁의 날은 일단 막을 내렸다. 새로운 개막을 기다리며. 7장. 역습. 그날 저녁 비가 내렸다. 초봄, 약간은 싸늘한 밤하늘아래 망혼가처럼 떠도는 비바람 소리는 끊임없이 대지를 두들겼다. 줄기차게 내리는 장대비에 강물은 삽시간에 불어났고, 십존이 뚫어놓은 수로를 따라 거칠게 흘렀다. 점점 살집을 불린 강은 전쟁의 잔해를 쓸어버렸다. 쟝은 강둑에 올라 강을 메운 시체들이 거센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광경을 구경했다. 다행이었다. 저 많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론의 생각은 달랐다. “어쩌면 돌림병이 돌겠구나.” “왜?” “저렇게 많은 시체가 강물에서 썩어 가면 물이 오염되고 그 물을 마신 주민들이 병에 걸린다.” “바다까지 내려가지 않을까?” 하이론은 우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일부는 가라앉고 일부는 강변에 쌓이겠지. 바다까지 내려가는 시체도 거기까지 닿기 전에 썩을 테고.” “쳇, 뭐 재밌는 일 없을까 싶어 나왔더니만......못 볼 것만 보네.” 쟝이 툴툴거렸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크리누스에 가서 있다가 나중에 에쉴리와 나탈리랑 숲으로 돌아가라. 가는 길에 코리나도 데려가고.” 쟝은 머리를 흔들었다. “코리나는 안 가려고 할 거야.” 하이론은 피곤한 표정으로 강둑에 돋아난 봄풀들을 발로 비볐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다 이긴 전쟁인데 다칠 일이 뭐가 있어?” “다 이긴 전쟁이라......! 그랬으면 좋겠다만......” 하이론의 음성이 불길한 음영을 드리웠다. 엘란은 부상병을 간호하는 코리나에게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이번 전투에서 죽은 교도들은 20명이 넘었고 부상을 입은 자도 그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하이론이 치료한 부상병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간간이 치료마법도 걸어주고 있었다. “마법은 언제 배운 겁니까?” 그는 옆에 앉아 서신을 긁적거리는 조르주에게 물었다. 조르주는 그녀를 곁눈질 하더니 서신을 곱게 접어 봉투 안에 넣고 단단히 밀봉했다. 그가 말했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듣기로는 자네가 포두핌의 지도를 찾아 떠날 때부터 배웠다고 하더군.” 조르주는 편지를 품안에 갈무리하고 다시 입술을 떼었다. “하이론 삼은 그녀가 마법에 상당한 재질이 있다고 하더라.” 은근히 그녀를 칭찬하는 조르주의 눈에는 순수한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연인을 혹은 자식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대롭니까?” 엘란이 물었다. 아직도 그녀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조르주는 직설적인 물음에 당황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빰을 매만지고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얼굴을 붉혔다. 엘란은 대답을 듣지 않고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코리나에게 고백은 해 봤습니까?” “......” 조르주는 묵묵부답이었다. 엘란은 점점 넓어져가는 그의 이마를 보면서 조금씩 심정이 복잡해졌다. 마르시앙 이황자는 자신에게 코리나를 돌봐달라고 부탁했었다. 적당한 남자를 물색해서 짝도 지어주라 했다. 엘프의 숲에 이주를 한 이후 엘란은 그녀의 마음을 떠 보았지만 그녀는 재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그 후 엘란은 그녀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계속적으로 일이 터지는 바람에 그런 생각을 할 여가가 없었던 것이다. 엘란은 붕대를 갈아주는 그녀에게 조르주가 어떠냐고 운을 떼어보려다 생각을 접었다. 엘리오트 최고 미녀로 불리던 그녀와 대머리의 중년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신발코만 바라보고 있던 조르주가 대화의 단절이 어색했던지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큰일이오. 정체가 드러났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요?” 엘란은 옆에 놓여있는 은색의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동안은 큰 문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대책도 세워놓았구요.” “대책이라면?” “하이론과 프로스크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인데, 지고교는 이미 망해서 없어졌고 저는 이제 지고교도가 아니라고 밝히는 겁니다.” “그런!” 조르주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생활과 신앙이 함께 뒤섞인 채 살아왔던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배교선언이라니! 뒤통수를 흉기로 맞은 듯한 초기의 경악은 부자연스러운 침묵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았다. 잊고 있었다. 좌호법사는 지고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놀라셨습니까?” 엘란이 물었다. “조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 자네는 지고신자가 아니니깐.” “예, 저는 지고를 믿지 않습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 신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지고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죠.” 엘란의 단호한 말에 조르주의 눈썹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신은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째서 지고를 부정하는 건가?” “신성마법 때문이죠. 다른 신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신성마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고교는 아니죠.” “그건.” 조르주는 뭐라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자에게 뜬구름잡기식의 교리문답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이지 증명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음날, 전군이 모인 자리에서 엘란은 가면을 벗었다. 하룻밤 새에 소문이 퍼졌는지 도열한 용병들은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임시로 만든 연단에 올라선 그는 엘리오토군의 사교척결령으로 성녀와 사제가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소수의 교도들도 사방으로 흩어져 행방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지고를 버리고 다른 신을 모신다고 선언한 후 지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용병들의 반응을 보니 다행히 거짓말이 먹혀드는 것 같았다. 병사들을 다독이는 한편의 연극을 끝낸 후 공사가 벌어졌다. 간밤의 비로 물이 불어나 어제처럼 도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은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다리를 놓는 데도 스트빌라이군이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다리가 다 놓일 때까지 기다릴 심산인지 병기를 풀어놓고 휴식을 취했다. 간간이 나선 바룬교의 사제들이 지고를 비난하고 광술사를 헐뜯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우호법사 조르주는 지고를 부정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지고교는 없어진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엘란의 말대로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트빌라이군은 훈족연합군이 편하게 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점령하고 있던 강둑을 포기하고 밑으로 군사들을 물렸다. 어찌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이틀 만에 공사가 끝났다. 투박하나 공들여 만들어진 다리는 임시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곧이어 전투가 벌어졌다. 페이더스는 광술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람과 화염을 몰고 다니며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솜씨는 감탄을 넘어 경탄을 자아냈다. “대단한데!” “확실히 대단하죠.” 에단이 말을 받았다. 그는 정말 놀랐었다. 아이언 오거의 정체가 광술사라니!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에단은 냉정한 눈으로 정장을 살폈다. 성기사들의 개입으로도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아서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유리해 졌다. 빌바오가 광술사에게 패하고 오늘 전투에 나서지 않은 것이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전쟁도 이제 막바지군요.” “그래, 막바지. 이제 천부장들을 정리할 때도 멀지 않았어.” 장장 3시간 동안 이루어진 전투는 결국 훈족과 용병단의 승리로 끝났고 스트빌라이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뒤로 후퇴했다. 그들이 남기고 떠난 식량과 임시 건물들은 고스란히 훈족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승리를 자축하는 술과 고기가 베풀어지고 병사들은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훈족은 사령실로 쓰이던 스트빌라이의 건물을 용병단에게 양보하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파오를 쳤다. 밤이 깊어지자 파오 안으로 훈족의 중요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도 에단이나 페이더스처럼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했으므로 분위기는 밝았다. “피해가 심합니다.” 흥겨운 분위기를 깨고 이베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죽은 전사들이 8만이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전사들도 1만이 넘습니다. 말은 만 오천 두가 죽었으나 스트빌라이군의 말을 노획해서 오천두를 채웠습니다.” 그의 보고가 들뜬 분위기를 한순간에 가라 앉혔다. “용병대쪽의 피해는 어떻답니까?” 백법사의 제자 커리가 물었다. 이베는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메모지를 꺼내 읽어나갔다. “사망 이만 삼천, 중상 이천, 경상 천 오백.” “그 쪽 피해도 만만찮군.” 곱슨 부족의 족장 아쳐가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양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모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속마음을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는데 가끔 핵심을 찌르는 말을 꺼내놓아 좌중을 놀라게 했다. 지금도 그랬다. “다음 전투가 고비겠군.” 백법사는 그의 말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가?” 아쳐는 특유의 모호한 표정으로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제 전쟁도 막바지죠. 스트빌라이는 다음 전투에서 숨겨진 모든 힘을 끌어낼 겁니다.” “숨겨진 힘?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습니까?” 스시악이 물었다. 전쟁에서 힘을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힘닿는 대로 싸워서 적을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아쳐는 술을 쭉 들이키고 입을 열었다. “루카스 레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황제를 지켜야 하니......” 아쳐가 술잔을 들어 이베의 말을 끊었다. “스트빌라이는 엘리오트와 다릅니다. 황권이 안정되어 있고 장자상속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어서 반란이 일어날 확률은 드물지요. 그가 꼭 황제를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백법사가 말했다. “그와 황실친위대의 참전이 전쟁의 중대한 고비가 되겠죠. 그리고 그들을 격파해야 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들은 엘리오트의 군대를 막으러 갈 수도 있잖은가?” “막스는 아직 덜 여물었고 시드는 많이 늙었죠. 그 휘하 기사들도 질이 떨어지는 편이고. 그들이 중점적으로 상대하려는 것은 역시 우리들일 겁니다.” 같은 시각, 흑법사가 그린 마법진이 열리고 레인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죽은 부친이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는 단칸백작이 다가오려 하자 후작은 손을 저어 말렸다. 그가 마법진을 나서자 다시 발동한 마법진이 다니엘로 백작을 토해냈다. 그 이후로도 마법진은 30명의 기사들을 줄줄이 토해내고 그 임무를 다했다. “피해상황.” 레인후작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그치듯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죽은 병력만 23만이 넘습니다.” 단칸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훈족이 이패이시스라인을 넘은 이후 전사한 병사들의 숫자가 거의 6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령관으로서 할말이 없었다. “적들의 수는?” “고스만회전 때 12만을 헤아리던 훈족의 수는 이후 계속 늘어나 지금은 대략 40만 정도 됩니다.” “점령지를 지키는 병력이 15만 정도 되니까 이번 전투에서 죽은 자들을 빼면 대략 45만 정도가 훈족전력의 최대치 겠군.” “영토를 침범당하면 더 기어 나올 테니 넉넉히 100만 정도로 잡지요.” 다니엘로가 말했다. “그게 좋겠군. 용병대는?” 고개를 끄덕인 공작은 황제의 명령서를 전해주며 짤막하게 물었다. 단칸백작은 황가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개봉해 황제의 명령서를 읽었다. 레인후작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삼는다는 명령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죽은 용병들을 제하면 육만 정도 될 겁니다.” “아이언 오거가 광술사라면서요?” 자일즈남작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그렇소.” 단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일스테인은 자일즈의 떡 벌어진 어깨를 쓸었다. “왜 싸우고 싶어?” “한번 붙어 봐야지.”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요. 빌바오경도 그에게 졌소.” 단칸이 진지하게 말렸다. 자일즈의 탄탄한 어깨가 잠시 움찔 거렸다. “정식으로 붙을 건 아니고......” 자일즈는 음흉하게 웃으며 일스테인의 등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기회를 봐서 암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런 암습에 당할 줄 알았느냐?” 투구로 얼굴을 가린 일스테인이 아이언 오거의 흉내를 내며 일갈했다. “그만!” 후작은 엄한 눈빛으로 시시덕거리는 둘을 제지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일! 적들을 몰아낸다.” *** 아침이 밝았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은 쏟아지는 태양빛을 자양분삼아 본격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연이은 격전에 지칠대로 지친 훈족의 전사들이나 용병들은 시체들을 묻어주거나 태워 줄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자연이 해결하도록 맡길 뿐이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코리나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교도들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용병들까지도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환자를 마치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그녀의 옆에는 혹시나 불상사가 생길까 싶어 염려한 조르주가 붙어 있었고 쟝도 거기에 꼽사리끼고 있었다. 쟝은 그녀에게 돌아가자고 끊임없이 권유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입이 닳도록 권유해도 그녀가 듣지 않자 쟝은 졌다고 소리치고는 병동을 나섰다. “뭐야?” 병동을 나서던 쟝은 훈족과 용병들의 부산스런 움직임에 발을 멈추었다. 엘란(137) 그는 바쁘게 움직이는 용병들 중에서 만만하게 생긴 중년인 하나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무슨 일 났습니까?” 그 용병은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손을 뿌리쳤다. 그래도 무난한 성격인지 물음에 대답은 해주었다. “스트빌라이군이 공격해 온다는군.” 쟝은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스트빌라이군이 쳐들어온데.” 엘란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엘란은 별다른 무장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카이어스와 교도들도 무기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자 막사 안에는 하이론과 쟝, 그리고 무슨 할말이 있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밤톨만이 남았다. 밤톨은 어색한 동작으로 검을 내밀었다. “하이론이 갖고 계세요. 부셔버리던가.” 검집을 쥔 하이론의 얼굴이 의문부호를 그렸다. 밤톨은 겸연쩍게 대답했다. “제 실력으로는 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설명했다. 피를 마시고 웃어대는 검과 전투가 끝난 후의 노곤함, 그리고 검을 거두려 하자 자신을 지배하려 하던 검의 마력. 만약 카이어스가 검을 후려쳐 떼어놓지 않았다면 검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닫았다. 하이론은 밤톨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검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져 아주 불쾌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맡아 두었다 나중에 부셔버리마.” 하이론은 낡은 로브를 꺼내 검을 칭칭 감았다. 쟝이 그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더니 넌지시 운을 떼었다. “그 검 나 주면 안 될까?” “뭐 하려고?” “팔아서 돈 좀 만들려고.” “돈?” “그래 돈. 언제까지나 빈대 붙어 살 수는 없잖아.” 쟝의 음성이 왠지 쓸쓸하게 들렸다. 하이론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숲을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인 듯싶었다. 계속 손님으로 얹혀사는 것이 불편하고 눈치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 불길한 검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이 검은 안 된다.” “알았어.” 다소 실망한 눈치였으나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그가 밤톨에게 말했다. “싸우러 안가?” 밤톨은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검을 버리니까...... 겁이 나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어.” “그렇겠지. 전장에 나가지 말고 나하고 같이 있자.” 하이론이 권유하자 밤톨의 얼굴이 환해졌다. 훈족과 용병들이 진형을 갖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트빌라이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평원에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묘한 기백이 느껴졌다. “의외로군.” 카이어스가 말했다. 복면을 하고 있던 그는 불편했던지 복면을 벗어 버렸다. “예, 확실히 의외군요.” 엘란은 그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큰 타격을 입은 스트빌라이군이 군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추스르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패잔병들을 끌고 와서 어쩌려고 저러지?” “뭔가 믿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요.” “수는 별로 늘어난 것 같지 않은데.” 엘란은 다가오는 스트빌라이군의 숫자를 대충 어림잡아 보았다. “한 삼십만 정도 되겠죠?” “그 정도 되어 보이는군.” 휘리리릭.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양군의 거리는 사정거리 안으로 좁혀졌고 이윽고 화살이 날았다. 엘란은 정령들을 불러 아이언 오거단의 머리 위에 베리어를 쳤다. “돌격 앞으로!” 이베와 체이스의 입에서 동시에 명령이 떨어졌다. “갈까?” “아뇨, 잠깐만!” 엘란은 막 튀어나가려는 카이어스의 말고삐를 잡았다. 카이어스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그놈의 예감 타령은.” 카이어스가 피식 웃었다. 전에도 종종 예감이 나쁘다더니만 또 그런다는 웃음이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세요.” 엘란의 눈이 아에게와 그린 짝귀와 콜드를 비롯한 교도들을 훑었다. 그 눈길에 이들의 안전을 부탁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눈빛이 워낙 진지하자 카이어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어느 정도 선을 그었다. “모든 이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어. 세오나도 돌봐야 하고.” “몰살당하지 않도록만 신경 좀 써주세요.” 당부의 말을 뱉어낸 엘란은 전장에서 노획했던 말에 가볍게 박차를 가해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그 말은 체구도 작달막하고 갈기도 듬성듬성 빠진 것이 곡 비루먹은 것처럼 보였는데, 겉보기와 달리 대단한 명마여서 잠시 후 선두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달리는 와중에 품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다 썼다. 오늘만 적들을 쳐부수면 이 전쟁도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대량 살육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지금, 가면은 그의 인간적인 내면을 감추는 보호막의 구실을 할 것이다. 슈리엘이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창을 날렸다. 적의 창기병들이 무더기로 죽어나자빠지고 거기에 걸려 다른 기병들도 넘어졌다. 그때 날카로운 한줄기 힘이 우직하게 밀려왔다. 슈리엘이 손을 내밀어 밀려오는 기운을 풀어헤쳐 옆으로 분산시켰다. 엘란의 옆을 따르던 용병들 몇이 그 기운에 쏘여서 말에서 떨어졌다. “빌바오.” 40미터 앞에서 기운을 쏘아댄 자는 빌바오였다. 패배의 감정을 수습했는지 약간 수척해진 것 말고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혼자서 되겠나?” 엘란이 비꼬듯이 물었다. 대결에 끼어들어 초를 친 성기사들을 빗댄 것이었다. 빌바오는 굳게 입을 닫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창을 들어 기운을 밀어낼 뿐이었다. 슈리엘이 다시 기운을 막아내자 엘란은 말을 버리고 실피드를 이용,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창두가 엘란을 따라 공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실어냈다. 엘란을 실피드를 손 앞에 두르고 세찬 무형의 기운에 맞서서 손을 내밀었다. 뚱뚱하게 부푼 실피드가 힘에서 밀려 팬케이크처럼 납작해지자 엘란은 손을 당겨 기운을 아래로 흘리고 공중제비를 돌아 빌바오의 뒤편으로 넘어갔다. 납작해진 실피드가 날카롭게 변해 성기사들을 덮었다. 비명이 귀를 찢고 피가 터져 나왔다. 그는 말을 돌려 뒤를 쫓는 빌바오를 꼬리처럼 달고, 달려드는 성기사들과 기사들을 차근차근 처리해 나갔다. 정령에 휘말려 하늘로 솟구친 기사들은 아군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뼈가 부러져 나가고 목이 꺾이는 자가 속출했다. 빌바오는 울화가 치밀었다. 명예를 회복하고자 재대결을 원했건만 광술사는 미꾸라지처럼 피해나가며 성기사들과 기사들만 죽여대고 있었다. “재능 있는 자로군.” 평범한 갑옷을 입고 있어서 시골 기사처럼 보이는 레인후작은 효과적으로 빌바오를 묶으면서도 착실하게 스트빌라이군에게 타격을 입히는 광술사를 유심히 살폈다. “재능이 있다기 보다는 감각이 있어 보이네요.” 다니엘로가 말했다. “그게 그거지.” 일스테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 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자일즈가 말했다. 어깨가 연방 움찔거리는 것이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기다려라.” 레인은 곧 달려 나갈 것처럼 보이는 자일즈를 제지했다. 그는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기는 좀체 다가오지 않았다. 팽팽한 가운데서도 점차 비세를 드러내자 그의 인내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길라드와 용병왕, 흑법사와 적법사의 대결을 지켜보며 결론을 내렸다. 용병왕을 먼저 치기로. 그의 손이 카이어스를 가리켰다. “너희들 셋은 저 놈을 맡아라.” “광술사는 어떻게 합니까?” 자일즈가 물었다. 말하는 폼이 광술사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빌바오에게 맡긴다.” 자일즈는 아직도 엘란의 뒤를 쫓는 빌바오를 가리키며 불만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 혼자서는 감당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는 감당할 수 있나?” “정면으로 붙을 건 아니고......기회를 봐서!” 자일즈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다니엘로와 일스테인에게 시선을 돌린 레인이 다시 카이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둘이서 저 자를 막을 수 있겠나?” 후작의 질문을 받은 다니엘로와 일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답의 내용은 몸짓과 달랐다. “저희 둘이 어떻게든 해보죠.” “그럼 그렇게 해.” 후작의 대답이 떨어지자 희색이 만연해진 자일즈가 광술사 쪽으로 달려갔다. “저희들도 가보겠습니다.” 다니엘로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산책이라도 가려는 것처럼 어슬렁거리며 멀어졌다. 일스테인과 함께. 후작은 한다하는 기사들이 모여 있는 황실친위대에서도 검술 실력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30여 명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저 쪽에 가담해라.” 기사들은 열세를 드러내는 오른쪽 전장을 향해 일제히 말을 달렸다. 빌바오는 이대로 가다가는 뒤만 쫓아다니다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광술사의 몸놀림은 뛰어난 기사를 방불케 해서 웬만해서는 잡기가 힘들었다. 거기다가 기사들 사이로 다니는 통에 함부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입술을 굳게 깨문 그는 신에게 용서를 빌며 창을 겨누었다. 은빛 찬란한 서기가 창에 맺히는 순간 창이 울었다. 드래곤의 포효를 연상케 하는 그 소리는 전장의 소음을 조금씩 먹어 들어가며 크기를 키웠고 절정에 이르는 순간 은빛 섬광과 함께 광술사에게 쏘아졌다. 엘란은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스트빌라이군에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잡고자 저런 기술을 걸어올 줄 몰랐던 것이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초승달 모양의 은빛광채가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스트빌라이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절단 내며. 급히 숨을 들이 킨 엘란은 빠르게 양팔을 저었다. 그에 의해서 주인을 잃은 말들이 실피드에 떼밀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 몸부림은 은빛광채에 의해 곧 멈추어졌다. 슈리엘이 노도같이 밀려오는 커다란 초승달을 행해 바람의 창을 쏘았다. 투명한 창은 곧 초승달의 볼록한 부분과 격렬하게 부딪쳤다. 쾅! 은빛 초승달은 바람의 창을 형체도 없이 짓이겨버리고 정령을 잡고 날아오르는 엘란의 뒤를 바짝 쫓았다. “스피릿 컴파운드!” 엘란의 절기가 따라오는 초승달에게 연속적으로 퍼부어졌다. 쾅쾅. 연이은 타격을 이기지 못한 초승달이 산산이 부서져나가고 엘란의 신형이 급격히 떨어졌다. 빌바오를 향해서였다. “실프!” 바람의 하급 정령 스무 명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 빌바오의 주변을 휘돌았다. 실프들이 호시탐탐 틈을 노리는 가운데 실피드를 잡고 있던 엘란은 빌바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길쭉하게 늘어난 실피드는 날카롭게 날이 서, 한 자루의 장검처럼 보였다. “이얍!” 한 줄기 낭랑한 기합과 함께 빌바오가 창을 치켜세웠다. 그의 신체 주변을 은빛 광채가 감싸고돌아 실프를 튕겨냈고 치켜세운 창끝이 실피드의 날을 때렸다. 쩽! 거울 깨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엘란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빌바오의 힘을 흘리기 위한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턱. 바닥에 내려선 엘란은 호흡을 조절하며 슈리엘을 제외한 모든 정령들을 돌려보냈다. 그는 여기서 빌바오와 끝장을 볼 작정이었다. 그는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발을 대지에 굳건히 붙였다. 그의 발아래 비벼진 풀들이 완전히 짓이겨져서 푸른 물을 뱉어냈다. 빌바오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짐승의 궁둥이를 후려쳤다. 앞발을 번쩍 든 말은 쏜살같이 달려서 엘란을 지나쳤다. 그와 말이 스치는 순간 빌바오가 창을 겨누며 달려들었다. 동시에 슈리엘도 땅을 박찼다. 빌바오의 창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흔들리던 창은 세 줄기 푸른 기운을 토해내고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움직였다. 세 가닥 오러가 슈리엘의 이마와 심장, 하복부를 노렸다. 그것에 맞선 그녀의 창은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단순한 움직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 그 한 수에 세 가닥 오러가 산산이 흩어졌다. 그때 빌바오의 창이 바람의 창대를 후려갈겼다. 펑! 바람의 창이 두 동강나 없어질 때 빌바오의 오른발이 그 보다 두 배나 큰 그녀의 발을 밟아왔다. 퍽! 순간적으로 그의 발이 그녀의 발을 통과해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뭉개진 발이 흐늘거릴 때 그녀의 몸에서 일진광풍이 쏟아졌다. 빌바오의 투구가 바람에 날려 날아가고 벗겨진 이마 주변에 애처롭게 자라던 주변머리가 뿌리째 뽑힐 듯 휘날렸다. 그가 창을 옆으로 누여 그녀를 밀었다. 뭉툭한 창대 주위로 날선 오러가 피어오르자 그녀는 옷자락을 둘러 오러를 막았다. 그녀가 밀렸다. 그녀의 반밖에 안 되는 빌바오의 힘은 슈리엘을 밀어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엘란은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슈리엘에게 보냈다. 밀리던 그녀의 몸이 땅에 고정되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신체가 조금씩 작아져서 나중에는 빌바오보다 머리하나 큰 정도로 까지 줄어들었다. 징징징. 옷자락과 오러가 부딪치는 곳에서 끊임없이 소음이 흘러나왔다. 짝! 엘란은 오른손과 왼손바닥을 맞부딪치더니 잠시 후 서서히 양 손바닥을 떼었다. 그에 따라 슈리엘의 옷자락이 옆으로 천천히 벌어졌다. 가가각. 쇠를 긁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옷자락이 창대를 훑고 옆으로 서서히 밀려났다. 일어선 옷자락을 창대에 맺힌 오러가 조금씩 갉아먹었다. 엘란의 양손바닥이 그의 어깨넓이만큼 벌어지자 이윽고 그녀의 옷자락도 그의 어깨너비만큼 벌어졌다. 엘란의 펼쳐진 손바닥이 찰나지간에 오므라들어 주먹을 만들었다. 그가 주먹을 내뻗자 옷자락 사이로 슈리엘의 주먹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주먹이 장대를 지나쳐 빌바오의 가슴을 후려쳤다. “끅!” 십존의 일인. 바룬교단의 자랑스런 성기사 빌바오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휘이잉! 빌바오를 갈기고 여전히 뻗쳐진 상태로 있던 그녀의 오른팔에 회오리바람이 몰려들고 바람의 창이 생겨났다. 엘란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가라!” --------------------------------------------------